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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20%ED%81%B4%EB%A0%88%EB%A9%98%EC%8A%A4%2011%EC%84%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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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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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교황 클레멘스 11세은 무슨 내용인가요?
<|assistant|>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라틴어: Clemens PP. X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XI)는 제243대 교황(재위: 1700년 11월 23일 ~ 1721년 3월 19일)이다. 세속명은 조반니 프란체스코 알바니(이탈리아어: Giovanni Francesco Albani)이다. 신앙심은 깊었으나 정치적인 역량은 부족하였다. 동양의 조상 제사 문화를 금하는 조치를 내림으로 인해 중국 청나라는 강하게 반발하며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선교지도 폐쇄당했다. 천주교의 조상제사 거부라는 항목은 조선말기 집권세력에 의한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로 십분활용됨에 따라 병인박해를 비롯한 수차례의 박해사건에 의해 많은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1649년 7월 23일 이탈리아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고전학을 공부하였다. 스물여덟 살에 교황청에 입문하여 리에티, 사비나, 오르비에토등 교황령의 총독을 지사를 지낸 후 1690년 부제급 추기경이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12세가 선종한 후 46일간 지속된 콘클라베에서 덕성스럽고 행정 경험이 많은 알바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는 유럽에서 교회의 특권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유럽의 열강들은 서로 전쟁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교황청이 홀로 중립을 지키리란 쉽지 않았다. 어느 한 쪽을 지지하면 다른 한 쪽이 반발하였다. 교황이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앙주 공작 필리프를 에스파냐의 왕으로 인정하자 1709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교황령을 공격하여 에스파냐의 왕위에 대해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교황의 지위는 완전히 무시되었고 교황청의 지배 아래 있던 시칠리아는 사보이아 공국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클레멘스 11세는 프랑스의 얀센파와 갈리아주의에 대해서는 인내를 다해 투쟁하였다. 그는 1705년 칙서 Vineam Domini와 1713년 Unigenitus를 발표하여 얀센파를 단죄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공자 제례와 조선의 제사문화등 동양의 전례 문제가 유럽 기독교 신학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1715년에 3월 19일 교황은 단호하게 청나라의 전례를 금하는 회칙을 내렸다. 1656년에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이 인가한적이 있던 사안이었기에 크게 반발이 일어났다. 청나라 황제인 강희제는 칙령을 내려 선교사들의 다른 활동은 모두 허가하는 대신, 포교는 불법화시켰다. 천주교의 조상제사 거부라는 항목은 조선말기 집권세력에 의한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로 십분활용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사건으로 선교사와 천주교도 수만명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클레멘스 11세는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독일 북부와 필리핀에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또한 빈민 구제 사업에도 열성적이었다. 클레멘스 11세는 언제나 학자다운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바티칸 도서관의 장서를 늘이고 로마의 문화재 보존에도 힘썼으며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이 돈독하여 성무일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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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FC%20%EC%84%9C%EC%9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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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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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FC 서울이 궁금해요.
A: FC 서울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FC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하는 K리그1 소속 프로축구단이다. 구단 모토는 2007년 캐치프레이즈에서 유래한 'Soul of Seoul'이며, FC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혼과 정신, 서울시민의 열정을 담은, 서울의 중심이 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FC 서울은 K리그1에서 6회 우승을 달성하여 성남 FC와 전북 현대 모터스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FA컵에서도 2회, 리그컵에서도 2회, 슈퍼컵에서 1회 우승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관중 면에서도 한 시즌 최다 총관중 및 최다 평균관중 기록, 한 경기 최다 관중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12년 스포츠조선에서 최초로 실시한 K리그 16개 구단 운영능력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며, 같은 해 영국의 '브랜드 파이낸스'가 발표한 전 세계 축구 클럽 브랜드 가치 평가에서 대한민국 프로축구 클럽 중 최고 순위인 62위를 기록하였다. 2016년 1월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이 발표한 '2015 클럽 세계 랭킹'에서는 대한민국 클럽 중 가장 높은 81위를 차지하였다. FC 서울은 1983년 8월 18일 구단 공식 창단 발표 후 1983년 12월 22일 공식 창단식을 거행하고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으로 대한민국의 프로축구단 가운데 다섯 번째로 정식 출범하였다. 창단 연고지는 충청도를 배정받았으며 마스코트는 황소를 선정하였다. 당시 럭키금성그룹은 프로축구단을 창단하기 위해 기획조정실이 주축이 되어 1982년부터 면밀한 준비 작업을 했으며 서울특별시를 창단 연고지로 하여 출범할 계획이었지만, 당시 대한축구협회 수퍼리그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충청도를 연고지로 배정하였다. 창단 첫 시즌에는 리그 8개 구단 중 7위에 그쳤지만 이듬해 1985 시즌에는 박세학 감독의 지휘 아래 태국 출신 피아퐁 등의 활약에 힘입어 축구대제전 수퍼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구단 역사상 첫 번째 K리그 트로피를 얻게 되었다. 1988년 초부터 창단 당시 원했던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했고, 결국 1989년 10월 16일 프로축구 특별위원회에서 충청도에서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이 승인되었다. 1990년 도시지역연고제 시행과 함께 서울운동장 (현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해 한국프로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 특히 1990 시즌 우승은 대한민국 프로축구 역사상 최초의 서울 연고지 프로축구단의 우승으로 기록되었다. 1991년 모기업의 사명 변경과 함께 "LG 치타스"로 구단 공식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서울 연고지 정착을 위해 다양한 팬서비스와 경품 제공, 개략적인 구단 소식을 전해주는 구단 소식지 '치타스 가족' 발간, 당시 같은 서울 연고 구단이었던 일화·유공 구단들과 공동 마케팅, 서울 지역 축구동호회들과의 자매결연 사업을 추진하여 LG치타스배 축구대회 개최 등 많을 노력을 기울였다.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과 맞물려 서울 축구전용구장 건설과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한국프로축구연맹과 정부가 추진한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 의해 서울을 떠났다. 1995년 말까지 서울에 전용구장 건립계획 수립이라는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서울 잔류 조건을 내건 이 정책에 구단은 합의했으나, 그 후 구단이 번복한 후, 잔류시 연맹의 리그 제외 방침과 청와대의 이전지침 하달로 강제시행되었다.후일 FC 서울 단장은 서울을 연고로 하다 등 떠밀리듯 안양으로 옮겼다고 언급하였다. 구단은 당시 서울 연고 3개 구단 중 마지막까지 서울 연고 고수를 강력희 희망하였고 팬들 역시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지만 결국 서울 연고지에서 나와 1996년 4월 연고지를 서울의 위성 도시인 안양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구단 공식 명칭을 "안양 LG 치타스"로 변경했다. 그 후 2000 시즌 최용수 선수의 대활약으로 K리그에서 우승하여 구단 통산 세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2002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서는 조별 예선을 통과한 후 에스테글랄을 물리치고 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패하여 우승컵은 따내지 못했다. 2003년 2월 26일 창단 20주년 기념 행사의 의미로 숫자 '20'과 함께 역동적인 선수와 볼을 애니메이션으로 형상화한 창단 20주년 기념 엠블럼을 제작 발표했다. 1998년 11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주최한 프로축구 발전을 위한 공청회에서 프로스포츠 최대 시장인 서울 연고지 활용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1999년 11월 서울연고공동화정책을 철폐하고 앞으로 서울 연고 구단을 다시 만들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자 안양으로 연고를 옮긴지 4년만인 2000년부터 안양 LG 치타스는 서울 복귀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 후 2002년 FIFA 월드컵이 끝난 뒤 수도 서울을 연고로 한 프로축구단 없이는 한국 프로축구 발전은 요원하다는 것에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2002년 FIFA 월드컵을 통한 축구붐을 등에 업고 서울 연고 구단 창단에 관심을 기울인 kt, 금호그룹, 한화그룹, 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의 대기업을 유치하여 신규 서울 연고 구단을 만들기 위해 대한축구협회, 한국프로축구연맹, 서울시는 ‘서울 연고 프로축구팀 창단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다각도로 창단 설득작업을 하였지만 끝끝내 모두 실패했다. 이렇게 신규 대기업을 통한 신생 서울 연고 구단 창단이 연이어 실패하자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울월드컵경기장이 활용되지 못할 것을 우려한 서울시에서도 축구계와 별도로 시 차원에서 다시 한번 서울 연고 구단 창단을 희망하는 대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100억원 지원금이 포한된 모집 공고를 2004년 1월 15일 내고 28일까지 신청을 받으며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의만 있었을 뿐 실제 의향서를 제출한 대기업은 한 군데도 없었으며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1월 29일 기존 구단 중에서 연고지 이전을 통하여 서울 연고 구단을 만들기로 방침을 변경하였고 다시 기존 구단 중에서 연고지 이전으로 서울에 입성할 구단 공모에 나선다.한편 축구전용구장을 지어주고 훈련장과 숙소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안양시의 약속이 1996년 LG 치타스를 유치했던 이석용 안양시장이 물러나고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이러한 서울시의 방침 변경 후 곧바로 안양 LG 치타스는 2004년 2월 2일 서울로 연고지 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으며 축구인과 축구팬들의 찬반 논란이 이어졌다. 축구계 역시 2004년 2월 6일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서울 연고 구단을 신생 구단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진 상황에서 계속해서 무작정 서울을 비워둘 수 없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어 그동안 고수해 온 '선 창단, 후 이전'의 원칙을 파기하고 기존 구단의 연고지 이전을 허용하는 안이 승인되었다. 이에 따라 안양 LG 치타스와 부산 아이콘스가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 의향서를 마감일인 25일 제출하였으며 3월 10일 부산 아이콘스가 연고지 이전 신청을 철회함에 따라 2004년 3월 11일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서울 입성이 만장일치로 승인되어 과거 연고지였던 서울로 다시 복귀 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도 서울 연고 구단으로서의 이미지와 축구단 자립을 위한 장기적인 포석으로 구단명칭에서 기업명을 배제하기로 잠정 결정한 가운데 3월 19일 공모를 통해 응모한 후보작 중에서 31%(1809명)의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 "FC 서울"로 구단 공식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3월 29일에는 서울특별시와 연고지 협약을 체결하였다. 더불어, 2004년에 LG그룹과 GS그룹의 분리가 진행되면서 FC 서울을 운영하던 산하 계열사인 LG스포츠 또한 GS그룹으로 분리되어 6월 1일 스포츠 법인의 이름을 (주)GS스포츠로 변경, GS그룹이 운영하게 되었다. 2005 시즌부터는 제 6대 이장수 감독이 취임하였으며,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기대를 모아온 박주영이 서울에 입단하여 이른바 '박주영 신드롬'으로 불리는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한 시즌 최다 관중인 45만 8605명을 기록했다. 2006 시즌 FC 서울은 K리그와 FA컵 우승은 하지 못하였으나 K리그의 리그컵 대회인 삼성 하우젠컵 2006에서 우승하여 구단 역사상 첫 리그컵 우승 트로피를 얻었다. FC 서울은 2006 시즌에 통합순위 4위에 올라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원정 경기로 벌어진 성남 일화 천마와의 경기에서 0 대 1로 패배해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하였다. 귀네슈 감독 체제는 FC 서울이 2007 시즌을 앞두고 2년 동안 팀을 이끌어 온 이장수 감독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 그 후임으로 2002 FIFA 월드컵에서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3위를 달성한 셰놀 귀네슈 감독을 영입하면서 출범하였다. 그리고 4월 8일, FC 서울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홈 경기에서 K리그 25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관중 기록이자, 국내 프로 스포츠 전체를 통틀어서도 단일 경기 사상 최다인 55,397명의 입장 관중 기록을 수립하였다. 한편, 2007년 10월 14일에 벌어진 삼성하우젠 K리그 2007 최종 라운드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기만 해도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대구 FC에게 0-1로 패하여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2008 시즌에서는 기성용과 이청용 등 젊은 선수들의 도약에 힘입어 리그 후반기 18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달리는 등 리그에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서울은 1위 수원과 승점 54점으로 동률을 이루었지만 골득실에 밀려 K리그 정규시즌을 2위로 마감했고, 이어진 플레이오프에서 울산을 4-2로 대파하여 수원과의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였다. 1차전과 2차전 도합 90,000명 가까운 관중이 몰린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1차전 1-1 무승부,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 2-1 로 패하며 준우승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7년 만에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09년 1월 7일 AFC 챔피언스리그 2009 조 추첨 결과, 일본의 감바 오사카, 중국의 산둥 루넝, 인도네시아의 스리위자야와 함께 F조에 속했다. 2009 시즌 개막전, 전남 드래곤즈와 벌인 원정 경기에서 6-1로 승리했으나, 2라운드 홈에서 신생 팀 강원 FC에게 1-2로 패하며 강원 FC의 돌풍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서울은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감바 오사카에게 이기고 스리위자야가 최소한 산둥 루넝에게 무승부를 거둬야 16강에 진출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감바 오사카에게 2-1로 승리를 거두고, 스리위자야가 0-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4골을 몰아넣으며 산둥 루넝에 승리를 거두어 주는 덕분에 2위로 16강에 진출하였다. 16강전에선 J리그 디펜딩 챔피언 가시마 앤틀러스를 만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하여 8강전에 진출하였다. 이후 8강전에서 카타르 클럽 움 살랄과 대진하였지만 1차전에서 안태은의 골라인을 넘은 중거리슛이 골로 인정받지 못하는 등 불운 속에 결국 준결승 진출에 실패하였으며, 2009년 정규 리그 3위로 끝마쳤다. 플레이오프 6강 PO에서 패하고 최종 순위를 5위로 마감했으며 11월 24일 계약 기간이 종료된 귀네슈 감독이 팀을 떠났다. 귀네슈 감독은 FC 서울 홈페이지에 남긴 작별 편지를 통해 FC 서울팬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지지를 약속하였다. 귀네슈 감독은 비록 팀에 우승컵을 안기지는 못했지만 패스에 중점을 둔 매력적인 공격 축구를 구사해 언론과 팬들로부터 신선한 변화를 일으켰다고 평가받았다. 빙가다 감독 체제는 귀네슈 감독 사임 이후 FC 서울이 2009년 12월 14일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포르투갈 국적의 넬루 빙가다 감독의 선임을 발표하면서 출범하였다. 이후 김승용, 이상협, 김치곤, 심우연, 팀의 공수를 조율하던 기성용을 셀틱 FC로 이적시키고 현영민, 방승환, 최효진, 이현승, 이규로, 하대성, 김용대 등을 영입하며 대대적인 팀 리빌딩에 착수하였다. 개막전이었던 2010 K리그 1라운드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5-2로 승리하여 지난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개막전을 대승으로 장식하였다. 2010년 3월, 호주 국가대표팀 수비수 사이먼 콜로시모의 영입을 시도했으나 이적 시장 마감 기한이 지나면서 영입이 무산되었다. 2010년 5월 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남 일화 천마와의 쏘나타 K리그 2010 경기에서 60,747명의 관중이 입장하여 2007년에 FC 서울이 보유하고 있던 55,397명의 프로스포츠 사상 단일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을 3년 만에 경신하였다. 한편 포스코컵 2010 조별 예선 B조를 1위로 통과한 후 대구 FC와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각각 8강전과 4강전에서 물리치고 진출한 결승전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에 3-0 대승을 거두며 빙가다 감독 부임 후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K리그 정규시즌을 20승 2무 6패 승점 62점 1위로 마치며 팀별 홈 앤드 어웨이 2라운드 체제로 개편된 이후 역대 정규시즌 사상 가장 높은 승점을 기록하였고 단일 경기 최다 관중 신기록(60,747명), 단일 시즌(K리그 정규시즌, 포스트시즌-K리그 챔피언십, 리그컵) 최다 총 관중 신기록(546,397명), 단일 정규시즌+포스트시즌 최다 총관중 신기록(488,641명), 단일 정규시즌+포스트시즌 최다 평균 관중 신기록(32,576명), 단일 정규시즌 최다 평균 관중 신기록(30,849명) 등 많은 역대 관중 관련 기록들을 경신하며 각종 언론으로부터 성적과 인기면에서 K리그 최고의 구단으로 등극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0 K리그 챔피언십 챔피언결정전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를 1승 1무로 이기고 10년 만에 K리그 우승을 달성하였으며 시즌 총관중 50만명을 돌파하여 겹경사를 누렸다. 한편, 12월 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는 56,759명의 관중이 입장하여, K리그 역대 챔피언결정전 최다 관중 신기록 및 K리그 역대 단일경기 최다 관중 2위의 기록을 수립하였다. 2010년 12월 13일 빙가다 감독과의 재계약 협상이 연봉 조건 등의 의견 차이로 인해 최종 결렬되어 12월 14일 빙가다 감독이 포르투갈로 출국하면서 빙가다 시대는 불과 1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황보관 감독 체제는 FC 서울이 2010년 12월 28일 구단 웹사이트를 통해 넬로 빙가다 감독의 후임으로 황보관 감독의 선임을 발표하면서 출범하였다. 이후 우승의 주역이었던 정조국, 김진규 등이 이적하고 최효진, 김치우, 이종민 등이 군 입대를 하여 전력 공백이 우려되었으나 몰리나, 김동진, 그리고 임대 영입을 했던 제파로프를 완전 영입하면서 전력 보강을 착실히 진행하였고 의욕적으로 2011 시즌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초반 1승 3무 3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리그 순위가 한때 15위까지 떨어지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고,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황보관 감독이 2011년 4월 26일 자진 사퇴하였다. 최용수 감독 체제 1기는 황보관 감독의 사임과 동시에 최용수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2011년 4월 26일 부임하면서 출범하였다. 최용수 감독 대행은 데뷔전이 4월 30일 제주 유나이티드전을 역전승으로 장식하며 빠르게 팀을 수습하였고 그 후 시즌 중에 구단 최다 연승인 7연승 신기록을 달성하였으며, K리그 정규시즌을 3위로 마쳤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울산 현대에 패하면서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얻지 못하고 최종 순위 5위로 리그를 끝마쳤다. 하지만 구단으로부터 감독 대행 기간 동안 팀을 정상화하는 등 가능성을 보여준 것을 높게 평가받아 2011년 12월 9일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어 FC 서울의 제10대 감독이 되었다. 정식 감독 첫해인 2012 시즌 선배인 박태하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와 박희도, 김주영 등을 영입했고, 김진규가 1년만에 구단으로 돌아왔다. 구단 내부에서는 시즌 목표를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 확보권인 3위로 잡았고 시즌 전 네이버 스포츠가 실시한 축구 전문가 및 축구전문기자의 시즌 예상에서 역시 서울을 우승 후보로 단독 지목한 전문가는 1명 밖에 없었다. 시즌 개막 초 최용수 감독과 데얀과의 불화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는 등 좋지 않게 시즌 초반을 보냈으나 이를 원만히 해결하고 이후 시즌 내내 기복없는 전력을 발휘하며 29승 9무 6패, 승점 96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리그 종료 3경기를 앞두고 조기 우승을 확정하였고, 역대 최다 승점과 역대 최다승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구단 통산 5번째 우승을 달성하였다. 특히 이번 우승으로 최용수 감독은 K리그 역사에서 최초로 한 클럽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서 모두 우승을 경험한 첫 번째 축구인이 되었다. 또한 2012 시즌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데얀의 K리그 최우수선수상 및 최다 관중을 기록한 클럽에게 주는 풀 스타디움상 등 개인·구단 등 각종 부문에서 13개의 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최대 라이벌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로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옥에 티로 남았다. 2013 시즌 지난 시즌 우승의 후유증으로 리그 전반기 부진을 겪었지만 여름부터 구단 최다 연승 타이 기록인 리그 7연승을 기록하여 다시 선두권에 복귀 하였고 2001-02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서 결승전에 진출했던 것에 이어 11년 만인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결승전에 진출하며 다시 한 번 구단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정상 등극을 노렸지다. 결승전에서 광저우 헝다와 1,2차전 모두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접전을 벌였으나 원정팀 다득점 규칙으로 인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4 시즌을 앞두고 아디가 은퇴함과 동시에 데얀, 하대성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을 이적시켰다. 몰리나 역시 이적을 추진하였으나 협상이 지지부진하다 결렬되어 최종적으론 잔류하게 되었다. 떠난 선수들을 대체하기 위해 하파엘, 이웅희, 오스마르 등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여 대대적인 팀 리빌딩에 들어갔다. 전반기에는 하파엘 등 새로 영입된 선수들의 부진으로 강등권까지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으나, 여름 이적 시장 전후로 몰리나가 부상에서 돌아오고 에벨톤 등이 합류하는 등 호재가 나타나 성적이 반등하기 시작하였다.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는 제주를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극적으로 3위를 차지하여 AFC 챔피언스리그 3라운드 플레이오프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2014년 7월 3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된 바이엘 04 레버쿠젠과의 친선 경기에 앞서 창단 3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FC 서울의 역대 추억의 올드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여 KBS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우리동네 예체능의 예체능팀과 축구 맞대결을 펼치기도 하였다. 2015 시즌 첫 경기로 열린 2015 AFC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3라운드에서는 하노이 T&T를 7대0으로 대파하여 본선에 진출하였다. 이후 2013AFC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인 광저우 헝다, 가시마 앤틀러스, 그리고 2014AFC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인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와 한 조에 편성됐고,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전에서 오심으로 골이 취소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최종 라운드에서 가시마 앤틀러스를 꺾으며 죽음의 조에서 탈출하여 기적적으로 16강에 진출하였다. 2015년 3월 10일 알샤바브에서 뛰던 박주영이 2008년 이후 7년만에 친정팀에 복귀하게 되었다. FA컵 결승전에서 인천 유나이티드를 3대1로 제압하고 17년만의 FA컵 우승을 차지하였다. 32강전부터 90분 이내 5전 전승의 완벽한 우승이었으며 주장인 차두리 선수가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팀의 부주장인 오스마르는 K리그 외국인 필드 플레이어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전 경기(38경기)를 소화하였으며 이 기록으로 연말 리그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2016 시즌 중국 슈퍼리그에 진출하였던 데얀 다먀노비치가 복귀하며 과거 최용수, 김동진, 정조국, 박주영 등 팀에서 스타로 성장하여 해외 진출 후 다시 친정팀으로 복귀하는 클럽 전통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주세종, 유현 등 선수를 영입하여 리그에서 연승행진을 달렸다. 작년부터 장쑤 쑤닝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아온 최용수 감독은 장쑤의 끈질긴 구애에 2016년 6월 22일 안산 무궁화와의 2016년 FA컵 16강전에서 고별 경기를 가진 후 공식적으로 감독직을 내려놓고 장쑤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최용수 감독의 후임으로 선정된 황선홍 감독이 유럽에서 귀국하기 전에, 김성재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이 되어 2016년 6월 25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K리그 클래식 원정경기를 담당했다. 황선홍 감독 체제는 FC 서울이 2016년 6월 21일 최용수 감독의 후임이자 구단의 제11대 감독으로 황선홍 감독을 선임하면서 출범하였다. 황선홍 감독은 6월 27일에 공식 취임식을 가졌으며, FC 서울 감독으로서의 공식일정을 수행했고, 2016년 6월 29일 성남 FC와의 K리그 클래식 홈경기를 통해 지휘봉을 잡았다. 여름을 전후로 리그 1위에서 2위로 처지자 여름 이적 시장을 통해 곽태휘를 재영입하는 등 리그 반등을 노렸다. 그리고 리그 마지막 라운드 1위 전북과의 경기에서 후반전 박주영의 결승골에 힘입어 심판 매수 사건으로 승점 9점이 감점된 전북 현대 모터스를 꺾고, 극적으로 역전 우승하였다. 이로써 황선홍 감독은 2013 시즌에 포항 스틸러스를 극적인 역전 우승으로 이끈 데 이어 FC 서울의 사령탑으로서 두 번째 극적인 역전 우승을 이끌어냈다. 서울은 FA컵에서도 결승에 올라 더블 우승(K리그 클래식, FA컵 우승)을 노렸다. 서울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로 펼친 결승전에서 윤승원의 극적인 역전골로 1•2차전 합계 3-3 무승부를 기록하며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아 승부차기에 돌입했으나 유상훈의 승부차기 실축으로 아쉽게도 더블 우승 달성에는 실패하였다. 최용수 감독이 구성한 선수단과 전술에 적은 변화를 주었던 황선홍 체제의 2016 시즌과 달리, 2017 시즌은 포항 스틸러스 시절에 보여주었던 황선홍 축구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유상훈, 김남춘, 윤주태가 상주 상무로 입대하고, 이상협은 인천 유나이티드으로, 최현태는 제주 유나이티드로, 팀의 핵심이었던 아드리아노가 스자좡 융창으로 각각 이적했다. 2016년 12월 28일에 라이벌 팀인 수원에서 측면 공격수인 이상호를 영입하였으며,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었던 측면 수비수 신광훈과 수원 FC에서 활약한 중앙 수비수 김근환을 영입하였다. 그 후, 2017년 1월 18일에 지난 시즌 FC 도쿄에서 뛰었던 하대성을 다카하기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했고, 2017년 2월 1일에는 지난 시즌 전남 드래곤즈에서 뛰었던 마우링요를 영입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영입했던 선수들 중 몇몇이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황선홍 축구의 색깔은 보이지 않았으며 AFC 챔피언스리그는 조별리그와 FA컵 16강 탈락을 맞보았다. 마우링요와 2017년 6월 25일에 계약해지를 했고, 김근환과는 2017년 6월 30일에 계약해지를 했으며, 다카하기와 트레이드된 하대성은 장기 부상으로 경기에 거의 나오지 못했다. 후반기 반등을 위해, 2017년 6월 20일에는 알아인에서 뛰던 이명주, 2017년 6월 26일에는 트락토르 사지에서 뛰던 칼레드 샤피에이를 연이어 영입했으며, 여름 이적 시장의 막바지인 2017년 7월 26일에는 샤르자 FC에서 뛰던 송진형을 영입하며 전력 보강을 마쳤다. 그러나 황선홍 축구의 색깔과 재미는 보이지 않았고, 성적까지 안 나오면서 리그 5위로 시즌을 마감하여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하였다. 2018 시즌을 앞두고는 2017 시즌의 실패를 다시 맛보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급진적인 리빌딩을 내세우며 박동진, 조영욱, 에반드로, 정현철, 김성준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축 선수들이 많이 이탈했다. 데얀과는 재계약을 체결하지 않았고, 데얀이 구단의 라이벌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자 큰 화제를 모았고 일부 팬들은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항의글을 올렸으며, '데얀'이 마킹된 유니폼을 훼손하여 SNS에 올리는 등 분노와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또다른 주축인 김치우가 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하고, 윤일록이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했으며, 2018 시즌을 앞두고 1년 재계약을 했던 오스마르마저 세레소 오사카로 1년 임대를 보내면서, 축구팬과 언론의 걱정 속에 시즌을 시작했다. 동계훈련부터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했고 시즌 초반에 2017 시즌보다 더한 부진을 겪으면서 감독과 프런트를 향한 팬들의 신뢰는 깨졌고 황 감독과 프런트의 퇴진을 요구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박주영의 SNS 파동으로 감독과 선수의 불화설까지 불거지면서 리더십에까지 물음표가 붙었고, 2018년 4월 30일 황선홍 감독은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이을용 감독 대행 체제는 황선홍 감독의 2018년 4월 30일 자진 사퇴 이후 FC 서울이 이을용 2군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선임하면서 시작되었고, 2018년 5월 2일 K리그1 경남 FC 원정을 통해 지휘봉을 잡았다. FC 서울이 2018 시즌은 다른 감독을 물색하지 않겠다고 못 박으면서, 2018 시즌은 이을용 감독 대행 체제로 진행 중이다. 이을용 감독 대행은 데뷔전에서 경남을 상대로 0-0 무승부를 거둔 후 이어진 슈퍼매치에서 2-1 승리를 이끌며 분위기를 반등시키고 2018년 FIFA 월드컵 휴식기를 보냈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윤석영, 보얀 마티치 등을 영입한 서울은 후반기 시작과 동시에 4경기 무패를 달리고 K리그1 3연승에 성공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나 싶었지만, FA컵 (대한민국) 16강에서 제주에 져 탈락하고 리그에서도 8월 19일 전북전에서 0-2로 패한 후 7경기에서 2무 5패에 그치며 9위까지 수직 하락했다. 결국 9월 28일 이재하 단장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GS칼텍스 서울 KIXX 강명원 단장이 후임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여전히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고 급기야 32라운드에서 전남 드래곤즈에게 1:0 패배를 하면서 하위 스플릿 확정이 되었다. 결국 10월 11일 최용수 감독이 다시 선임되면서 이을용 감독 대행 체제는 6개월만에 그 막을 내렸다. 최용수 감독 체제 2기는 2018년 10월 11일 최용수 감독이 사임한 지 2년 만에 다시 제12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출범하였다. 비록 2018년 12월 1일 상주 상무와의 K리그1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내몰렸으나 1승 1무의 성적으로 K리그1 잔류를 확정지었다. K리그1 2019 시즌을 3위로 마무리하며 2020년 AFC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획득하였다. K리그1 2020 시즌 개막 후 3승 1무 9패의 부진한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7월 30일 자진사퇴하였다. 그후 김호영 감독 대행을 선임하였으나 구단과 마찰끝에 사임 하였고 그후 박혁순 감독대행을 선임하였다. 시즌 종료후 AFC 챔피언스리그 참가를 위해서는 P급 지도자 자격증이 있는 감독이 필요한데 외부 감독을 선임 하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당시 구단 스카우트였던 이원준 스카우트를 감독 대행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AFC 챔피언스리그는 조별리그 탈락을 하였고 이후 이원준 대행은 스카우트로 복귀하여 감독은 공석이 되었다. 지난 시즌 대행의 대행의 대행까지 나온더라 서울은 감독 선임을 중요 하게 생각하였다. 여러 후보들이 있었고 그중에 지난 시즌 광주 FC의 돌풍을 이끈 박진섭 감독을 초첨으로 맞추었다 하지만 박진섭 감독은 광주와의 계약이 남아 있어 위약금등의 문제가 발생 하는 문제가 있었다. 여러 논란 끝에 박진섭 감독은 광주와의 계약 해지후 FC 서울의 제13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시즌 중 들쑥 날쑥 성적으로 하위권 성적을 유지 하였으며 결국에는 12위로 추락을 하였다.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9월 6일 성적 부진으로 인해 자진 사퇴하였다. 2021년 9월 6일 박진섭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고 안익수 감독이 선입되었다. 2023 시즌 8월 19일 자진 사퇴를 발표하였고 8월 22일 구단에서 이를 수용하여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 2023년 8월 22일 김진규 감독 대행 체체가 출범하였다. FC 서울의 메인 서포터스 그룹은 2004년 3월에 만들어진 수호신이며 2009년 지지자연대 모임으로 변경되었다. 현재 서울아빠, 2006ASK, SEM, 레이피어, Gruppo THANATOS, ULTRAS GRITAR ,Nuestro Rossonero Fiesta ,Leader Crown 등의 소모임들이 연대를 구성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연대에 속하지 않거나 탈퇴한 소모임들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연대의 규모가 많이 축소된 상태이다. 한편 웨스트스토리, BP365, 서울사람들, 서울의 밤, 황족과 같은 수호신 연대에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소모임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1980년대 럭키금성 황소 시절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 LG 치타스의 동대문운동장 시절과 그 후 안양 LG 치타스 시절까지 다양한 올드팬층이 존재하며 디시인사이드 FC 서울 갤러리, FCSEOULITE 등 팬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 역시 활발하다. 한편 디시인사이드의 FC 서울 갤러리는 디시인사이드에 개설된 최초의 국내 프로축구단 갤러리이다. 1990년대 후반 서포터스 응원 문화가 들어오면서 사라졌던 치어리더 응원이 2010년 3월 FC 서울 구단 주도하에 V맨과 V걸스로 재탄생하여 동쪽 일반석(E석) 응원단상에서 응원을 리드하고 그 외 장내외에서 각종 공연 그리고 구단 행사 참석 등을 하였다. 2019 시즌부터는 동쪽 일반석(E석) 응원 리드는 중단되었고 장내외 공연과 구단 행사 참석에 주력하고 있다. FC 서울은 K리그에 지역연고제가 도입된 이후 과거 홈구장으로 대전공설운동장, 청주종합운동장, 천안오룡경기장 (1987–1989), 동대문운동장 (1990–1995), 안양종합운동장 (1996–2003), 목동운동장 (2001, 임시), 서울올림픽주경기장 (2021, 임시) 사용하였다. 2004년부터는 66,704석의 관중석을 갖춘 아시아 최대의 축구전용구장인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1988년 12월 천연잔디구장(3면)을 포함한 훈련장 시설을 완공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사계절 잔디구장을 포함한 천연잔디구장(3면), 인조잔디구장(1면) 그리고 웨이트트레이닝룸, 미팅룸, 물리치료실들을 갖춘 관리동으로 구성된 GS챔피언스파크를 조성해 클럽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월 2회 팬들에게 훈련장을 공개하고 선수들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럭키금성 황소 (1983–1990), LG 치타스 (1991–1995), 안양 LG 치타스 (1996–2003) 시절 각각의 고유 엠블럼이 존재하였으며 2003년 2월 26일 창단 20주년 기념 행사의 의미로 숫자 '20'과 함께 역동적인 선수와 볼을 애니메이션으로 형상화한 창단 20주년 기념 엠블럼을 제작 발표했다. 특히 치타 마스코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디자인했던 김현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2대 구단주였던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직접 마스코트 제작을 일일이 검토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현재의 엠블럼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도 서울 연고 구단으로서의 이미지와 축구단 자립을 위한 장기적인 포석으로 구단명칭에서 기업명을 배제하기로 잠정 결정한 가운데 공모를 통해 응모한 후보작 중에서 31%(1809명)의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 "FC 서울"로 2004년 3월 19일 구단 공식명칭이 변경되면서 함께 발표되었다. 기본 외형은 기존의 서구적 방패형 또는 원형 엠블럼들과는 달리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8각 방패연 지붕 이미지를 살려 다른 구단들과의 차별성과 함께 한국 전통에 대한 상징성을 부각하였으며, 그 안에 축구공과 함께 풍요와 정열을 상징하는 불타는 태양의 이미지를 한국적 문양으로 재구성, FC서울의 수호신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글로벌 명문구단으로의 도약을 위해 영문 구단명 ‘FC SEOUL’과 함께 방패연이 하늘 높이 떠 있는 모습을 시각적 라인으로 형상화하였으며 구단 창단연도인 1983년과 서울 연고지 복귀 원년인 2004년을 표현하여 한국 프로축구와 함께 해온 구단의 역사를 분명하게 나타내으며 엠블럼에 쓰인 3가지 색은 정열과 도전을 상징하는 적색과 풍요와 영광을 상징하는 금색, 세련미와 강인함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조화롭게 적응하여 한국적(전통적)이며 국제적 감각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마스코트 또한 럭키금성 황소 (1983–1990), LG 치타스 (1991–1995), 안양 LG 치타스 (1996–2003) 시절 각각의 황소, 치타를 형상화한 이미지의 마스코트가 존재하였으며 FC 서울의 현재 마스코트는 씨드(SSID)이며 Seoul & Sun In Dream의 약자이다. 생년월일은 2004년 4월 3일이고, 탄생지는 대한민국 서울월드컵경기장이다. FC 서울의 홈 경기 때마다 경기장에 나와 경기 중 익살스러운 행동과 적극적인 응원 유도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2009년까지 길게 찢어진 눈매를 가지고 있었으나 2010년부터 커다란 눈을 갖게 되었다. 과거 마스코트는 황소와 치타이며 이 마스코트들을 형상화한 깃발을 흔드는 팬들이 존재한다. 2018 시즌부터 새로운 마스코트로 서울이가 합류하였다. 아래 링크들은 FC 서울의 엠블럼과 마스코트에 관한 자료들이다. FC 서울 온라인 박물관 - FC 서울 엠블럼 변천사 FC 서울 온라인 박물관 - FC 서울 마스코트 변천사 FC 서울은 창단 후 K리그 참가 첫 시즌인 1984 시즌부터 1985 시즌까지는 제1유니폼과 제2유니폼 구분없이 빨간색 유니폼과 노란색 유니폼을 번갈아 착용하였으며, 1988 시즌부터 1994 시즌까지(제1기) 노란색 제1유니폼을 , 1995 시즌부터 2004 시즌까지(제2기) 주로 빨간색 제1유니폼을 착용하였다. 2005 시즌부터 현재까지는(제3기) 구단의 리그 참가 원년이었던 1984 시즌의 유니폼 색상에서 영감을 얻어 빨간색 바탕에 검은색 스트라이프를 조합한 이른바 '검빨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으며, 빨간색과 검은색은 현재 구단의 대표 색상으로 자리잡았다. 제1유니폼이 위와 같은 메인 컬러에 벗어난 경우는 1987 시즌 하얀색 유니폼 그리고 1999 시즌 7월 17일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부터 착용하기 시작하여2001 시즌까지 착용한 빨간색과 파란색 스트라이프 유니폼 등이 있다. 한편 2016 시즌에는 출시된 새 홈 유니폼이 두 번의 홈 경기만에 초도 물량 7000여 장이 완판된 기록이 있다. 동 시즌 6월에는 구단 역사상 창단 유니폼이자 첫 번째 K리그 우승(V1) 유니폼인 '1984–1985 레트로 유니폼'이 발매되었다. 다음의 링크들을 통해 FC 서울 유니폼 역사에 관한 상세한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다. FC 서울 온라인 박물관 - FC 서울 유니폼 변천사 FC 서울 비디오 아카이브 - FC 서울 유니폼 변천사 FC 서울 25년사 - 224 페이지 (1) 1984시즌과 1985시즌에서 홈팀으로 배정된 경기에서도 빨간색 유니폼과 노란색 유니폼을 교대로 착용하였으며,빨간색과 노란색 유니폼 중 명확하게 어느 색상의 유니폼이 제1유니폼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자료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참고로 홈팀으로 배정되어 1984년 3월 31일 당시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창단 후 첫 공식경기 K리그 할렐루야 축구단과의 경기에서도 빨간색 유니폼을 착용하였으며,역시 홈팀으로 배정되어 K리그 첫 우승을 최종 확정한 1985년 9월 22일 상무 축구단과의 경기에서도 빨간색 유니폼을 착용하였다. (2) 광역지역연고제가 도입되어 처음으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시행된 1987시즌에는 프로야구처럼 프로축구 모든 팀들이홈에서 하얀색 유니폼을 착용하였고 원정에서는 팀 고유의 색상이 들어간 유니폼을 착용하였다.1988시즌에 다시 홈팀이 고유 색상의 유니폼, 원정팀들이 하얀색 유니폼 착용으로 재변경되었다. 우승 (6): 1985, 1990, 2000, 2010, 2012, 2016 준우승 (5): 1986, 1989, 1993, 2001, 2008 준우승 (4): 1992, 1994, 1999, 2007 2010 시즌 — K리그1 우승 & 리그컵 우승 <div style="height:512px; overflow-y:auto; margin:0 auto; border:1px solid #BBB"> ※ K리그 경기 결과는 정규시즌 결과만 기재하며, 포스트시즌 (1986–2011: 챔피언십, 2013–현재: 승강 플레이오프) 결과는 별도로 기재한다. ※ 1993, 1998 1999, 2000 시즌은 무승부 시 승부차기가 시행되었으며, 승부차기를 무승부로 처리하는 규정에 근거한 승무패는 별도로 아래에 "( )" 안에 표기하였다. ※ 2004, 2005, 2006 시즌의 리그순위는 전후기리그 통합승점 순위표의 순위이다. ※ 아: 아디다스컵, 프: 프로스펙스컵, 필: 필립모리스코리아컵, 대: 대한화재컵, 삼: 삼성 하우젠컵, 피: 피스컵 코리아, 포: 포스코컵를 의미한다. 당시 공식 대회명칭은 프로축구선수권대회로 K리그에서 리그 이외 별도로 실시된 최초의 대회로 리그컵의 시초이다. 당시 공식 대회명칭은 전국축구선수권대회로 2001년 FA컵대회로 통합되었다. 당시 공식 대회명칭은 1999-2000 아시안 컵 위너스컵으로 아시안 컵 위너스컵은 2002-03 AFC 챔피언스리그에 통합되었다. 당시 공식 대회명칭은 2001-02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으로 2002-03 AFC 챔피언스리그로 대회명칭을 개명하고 확대 재출범하였다.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시즌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팀수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진출자격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최종순위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경기수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승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무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패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득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실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차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승부차기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감독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시즌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팀수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리그순위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최종결과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경기수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승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무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패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득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실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차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승부차기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감독 ※ 승부차기 결과는 무승부로 계산되었다. ※ 기권승과 기권패도 전적에 포함되었으며 득실은 고려하지 않고 승패만 계산되었다. ※ 한국프로축구연맹이 비공식 경기로 간주하고 있는 K리그 1986 시즌 챔피언결정전 2경기 (1무 1패, 1득점 2실점), 1992년 리그컵 1992 2경기 (1무 1패, 2득점 4실점) 이렇게 총 4경기의 전적은 기타로 구분하여 합산하였다. ※ 승률은 승리한 경기 수를 전체 경기 수로 나누어 계산하였다. 소수점 이하는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 하였다. ※ 시즌 총관중수는 K리그 정규시즌, K리그 포스트시즌(2004–2011: 챔피언십, 2013–현재: 승강 플레이오프), 리그컵, FA컵, AFC 챔피언스리그의 공식 홈경기 관중수의 총계이며 친선 경기 관중수는 포함하지 않는다. ※ K리그 시즌 총관중수는 K리그 정규시즌, K리그 포스트시즌(2004–2011: 챔피언십, 2013–현재: 승강 플레이오프), 리그컵의 공식 홈경기 관중수의 총계이다. ※ 객단가와 입장수입 자료는 K리그 홈경기만을 대상으로 산출되었다.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시즌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시즌총관중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K리그총관중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정규시즌평균관중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포스트시즌평균관중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리그컵평균관중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FA컵총관중 / 평균관중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ACL총관중 / 평균관중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친선경기관중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관중순위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객단가 및 입장수입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유료관중 비율 ! style="color:#000000; background:#E60000;"| 비고 | colspan="12"|공식 관중수 신뢰성 불확실로 미기재 | align=left|K리그 시즌 총관 1위정규시즌 평관 2위 | align=left|K리그 시즌 총관 2위정규시즌 평관 2위 | align=left|FA컵 8강 수원 삼성전 38,533명 역대 FA컵 최다 관중 기록FC 도쿄 친선경기 무료 관중 | align=left|K리그 시즌 총관 2위정규시즌 평관 2위 | 약 34,000(vs LA 갤럭시)약 41,500(vs FC 도쿄) | align=left|K리그 시즌 총관 2위정규시즌 평관 2위 | align=left|K리그 시즌 총관 2위정규시즌 평관 2위 | align=left|K리그 시즌 총관 1위정규시즌 평관 1위 | align=left|K리그 시즌 총관 1위정규시즌 평관 1위 | align=left|K리그 총관 1위K리그 평관 1위 | align=left| K리그 총관 2위K리그 평관 2위 | align=left| 객단가 6,452원 (1위)입장수입 약 20억원 (1위) | 46,722 (vs 바이어 04 레버쿠젠) | align=left| K리그 총관 2위K리그 평관 2위 | align=left| 객단가 6,322원 (1위)입장수입 약 20억원 (1위) | align=left| K리그 총관 2위K리그 평관 2위 | align=left| 9,485원 (1위)입장수입 약 31억원 (1위) | <div style="text-align: center;">86.5% | align=left| K리그 총관 1위K리그 평관 1위 | align=left| 10,287원 (1위)입장수입 3,519,507,978원 (1위) | <div style="text-align: center;">86.4% | align=left| K리그 총관 1위K리그 평관 1위한국 프로스포츠 평관 1위 | align=left| 10,182원 (2위)입장수입 3,156,949,999원 (1위) | 85.6% | align=left| K리그 총관 2위K리그 평관 2위 | align=left|포스트시즌: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1경기 평균관중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단일 경기 최다 관중 기록 TOP 10 K리그 최고 인기 구단이란 명성과 방송사가 많은 수도 서울을 연고지로 하며 동시에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전용구장인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홈구장으로 가지고 있는 이점 때문에 드라마와 영화 등등에서 축구를 소재로 하는 장면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드라마: 넌 어느 별에서 왔니(2006년), 맨땅에 헤딩(2009년), 천 번의 입맞춤(2011년~2012년) 영화: 참을 수 없는(2010년), 댄싱퀸(2012년), 런닝맨(2013년), 빅매치(2014년), 장수상회(2015년), 돈(2019년)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2008년 - 마르코와 손담비 에피소드), 슈퍼스타K 4(탑4 딕펑스, 로이킴, 정준영, 홍대광 공연), 우리동네 예체능(2014년 67회 - FC서울 올드스타와 경기), 세상을 바꾸는 퀴즈(2014년 253회 - FC서울 외국인 열혈팬 출연),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2017년 1회 - 멕시코 여행객 FC 서울 경기 관람, 2018년 14회 - 터키 여행객 서울월드컵경기장 투어) 2006년 FC 서울은 서울특별시에서의 지역 연고 정착을 공고히 하고 구단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약 1억원을 들여 J리그 컨설팅 경험이 있는 일본의 광고 회사 하쿠호도에 의뢰하여 ‘FC서울 2035 비전'이라는 장기 프로젝트를 세웠다. 즉 2035년까지 ‘진정한 NO.1’구단을 지향한다는 프로젝트의 기본 이념에 따라 지역 밀착을 통해 지역 사회에 공헌하고 미래의 잠재 팬 확보를 위한 다양한 마케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2006년 한국 최초로 경기장에 LED 광고보드를 도입하며 관중증대와 다양한 볼거리 제공을 위해 노력하였다. 2007시즌부터 FC 서울은 ‘Soul of Seoul, FC SEOUL’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마케팅 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유소년 축구클럽 ‘Future of FC서울’, 어린이 무료 축구교실 ‘두근두근 축구클리닉’과 ‘FC서울-맥도날드 어린이 축구교실’, 중학생 축구대회 ‘FC서울 주니어 챔피언십’소시오 ‘어린이 회원권 제도’등 다양한 축구 저변 확대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2009년 5월 16일에 서울도시철도공사와 공동 마케팅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으며 공동 마케팅의 일환으로 FC서울의 간판 스타인 기성용 선수와 이청용 선수가 서울도시철도공사의 홍보대사로 위촉되었고 월드컵 경기장내에 도시철도공사 홍보 광고물을 부착하고 전광판에 홍보 동영상을 방영하였다. 또한 공사 측에서는 월드컵경기장역 벽면에 FC서울 선수들의 랩핑사진을 부착하여 월드컵경기장역을 FC서울 테마역으로 지정하였고 역사 내에 FC서울의 홈 경기 홍보포스터 부착하여 상호 홍보하였다. 2010 시즌을 시작하며 그동안 응원 문화는 서포터스에 의한 응원 문화만 존재하던 축구장에 V걸스와 마스코트 씨드 등을 도입하여 새로운 축구 응원 문화를 개척하였으며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한 축구 도서 '볼수록 만만한 축구'를 출간하였으며 2011시즌에는 국내 프로스포츠 최초로 티켓북을 판매하였다. 2014 시즌에는 FAN기반 마케팅 활동을 기획, 매 홈경기마다 테마를 정해 팬과 소통하고 팬이 만드는 경기를 구현하는 'FAN이 일으키는 Sensation'인 FANsation을 마케팅 컨셉으로 수립하여 팬이 경기 운영에 참여하도록 하고, 팬 중심의 이벤트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또한 GS&Point 카드에도 FC 서울 멤버십 카드를 추가하여 더 큰 포인트 적립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2016 시즌에는 스카이 펍과 스카이 라운지를 선보이면서“기존에 딱딱한 의자에서 경기만 보던 관람 문화에서 벗어나 팬들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상설 구단 용품 매장으로 운영되고 있는 FC 서울 팬파크가 오픈하였고 '걱정 말아요 그대'를 전 관중이 하프타임에 부르는 이른바 하프타임 플래시 파티 그리고 야외 푸드 파크 등 경기장 곳곳에 숨어있는 작은 요소들을 찾아 FC 서울 만의 응원 문화를 특성화하고 있다. FC 서울 아카데미 - Future of FC 서울 공식 웹사이트 FC 서울 서포터즈 '수호신(守護神)' 공식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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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D%8F%89%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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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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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역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남평역(Nampyeong station, 南平驛)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에 있는 경전선의 철도역이다. 남평읍 내와 멀어서 이용객이 저조하였기 때문에 2011년 10월 5일부터 2013년 9월 26일까지 여객 취급을 중지하였고 약간의 화물취급만 하였으며, 2013년 9월 27일에 남도해양열차 정차와 함께 여객 취급이 재개되었으나, 2014년 6월 1일 경로 변경과 함께 여객 취급이 다시 중지되었다. 남평역사는 1950년대에 지어진 역사로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역사에서 플랫폼까지 짧은 거리지만 정원으로 꾸몄다. 정원 사이에 난 오솔길이 역사와 플랫폼을 잇는 길이다. 박수영 역무원은 "대합실에 다람쥐가 드나들고 벚나무엔 딱따구리가 구멍을 뚫었다"고 말했다. 1930년 12월 25일 :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1956년 7월 17일 : 역사 신축 1964년 9월 15일 : 앵남역 관리역지정취소 1977년 5월 16일 : 수소화물취급 중지 1994년 12월 1일 : 제 1기계연동장치 사용 개시 2006년 12월 4일 : 남평역사 등록문화재로 지정 2009년 10월 31일 : 화물취급 중지 2011년 10월 5일 : 여객 취급 일시 중지, 무배치간이역 격하 2013년 9월 27일 : 남도해양열차 정차 개시로 여객 취급 재개 2014년 6월 1일 : 남도해양열차 경로 변경으로 여객 취급 중지 2021년 1월 5일 : 시간표 개정으로 부산 ~ 보성간 운행노선을 광주송정까지 연장하였다 남평역은 남평읍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으며, 인근 노동리와 남평읍을 연결하는 시내버스가 1일 3회 운행한다. 역 광장에서 탈 수 있다. 남평역은 시인 곽재구의 작품 《사평역에서》에 등장하는 '사평역'의 실제 배경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사평역'의 실제 배경이 된 곳은 남광주역이다. 남평역은 서인국의 '부른다'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250m 구간의 레일바이크가 운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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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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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7%88%EC%9D%B4%20%EC%9C%A0%EC%B9%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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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이 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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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이마이 유카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ssistant|> 이마이 유카은 이마이 유카(, 1970년 9월 19일 ~ )는 일본의 성우이다. 시즈오카현 출신. 아토믹 몽키 소속. 세이버 마리오넷 J to X(마미야 오타루) 오! 나의 여신님 TV 시리즈 2기 : 각자의 날개 (후지미 치히로) 엔젤 블레이드 푸니시!(아야메 후도) 오! 나의 여신님 극장판 (후지미 치히로) 피아캐롯에 어서오세요 극장판~사야카의 사랑 이야기~(후유키 미하루) 이 세상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 (하타노 칸나) 무릎 위의 동거인 ~Kitty on your lap~ (레나) 미츠메테 나이트 (프리실라 돌판, 루시아 라이나놀) 계절을 안고서 (마유, 사쿠라이 마유, 사쿠라이 마미)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 PS판 (루티 커틀렛, 리리스 엘론) ONE ~빛나는 계절로~ PS판 (시미즈 나츠키) 러브히나 돌연의 언게이지 해프닝 (후지사와 미즈호) 가족계획 PC판 (타카야시키 쥰) : 杉沢淳子 명의 디지몬 테이머즈 배틀 에볼루션 (레나몬, 사쿠야몬) 테일즈 오브 팬덤Vol.1 (루티 커틀렛) 해피~프리~でぃんぐ PC판 (쵸코) : 杉沢結花 명의 테일즈 오브 더 월드 나리키리 던전3 (루티 커틀렛) 가족계획 ~마음의 상처~ PS2판 (타카야시키 쥰) NAMCO x CAPCOM (루티 커틀렛, 리리스) 프린세스 윗치즈 (신시아 루셀) : 杉沢結花 명의 록맨 젝스 (라이브메탈 모델L, 듀립, 레오날드)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 PS2판 (루티 커틀렛) 테일즈 오브 더 월드 레디언트 마이솔로지 (루티 커틀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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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4%94%EB%94%94%EC%97%90%20%EB%93%9C%EB%A1%9C%EA%B7%B8%EB%B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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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드로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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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디디에 드로그바은 무슨 내용인가요?
<|assistant|> 다음은 디디에 드로그바에 대한 설명입니다.
디디에 이브 드로그바 태빌리(, ; 1978년 3월 11일~)는 코트디부아르의 전 축구 선수로, 현재 미국 유나이티드 사커 리그의 피닉스 라이징의 공동 구단주이다. 드로그바는 코트디부아르가 낳은 최고의 축구 선수로 평가되고 있으며 코트디부아르를 3회 연속 FIFA 월드컵 본선 진출로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드로그바는 1978년 3월 11일 코트디부아르의 최대 도시인 아비장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코트디부아르에서 지냈으나, 곧 프랑스에 양자로 보내졌다. 5살 때 처음으로 태어난 나라를 벗어나 프랑스로 왔다. 그의 삼촌이자 축구 선수였던 미셸 고바가 있던 브르타뉴 지역에 위치한 브레스트로 향했다. 그는 삼촌과 함께 브레스트, 앙굴레움, 둔케르 등지에서 3년을 보낸 뒤, 코트디부아르로 돌아갔다. 이후 르망, 갱강, 올랭피크 마르세유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올랭피크 마르세유를 2003-04 시즌 UEFA컵 결승전에 올려 놓으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UEFA컵 결승전에서 드로그바의 능력을 알아본 조제 모리뉴는 첼시의 감독으로 선임된 이후 곧바로 드로그바를 영입하였다. 드로그바는 2005년에 에르난 크레스포가 첼시에 임대 영입 형식으로 들어오자, 크레스포와 포지션이 같은 탓에 매우 치열한 주전 경쟁을 해야 했다. 하지만 크레스포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등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 끝내 첼시를 떠나자 첼시 부동의 주전이 되었다. 드로그바는 탁월한 골결정력으로 짧은 시간 내 첼시의 없어서는 안될 공격 자원으로 등극하였으며, 2005-06 시즌에는 11개의 어시스트를 하면서 프리미어리그 도움왕에 올랐다. 프리미어리그 2006-07에서는 20골을 넣으며 아프리카인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2008-09 시즌 초반에는 부상 및 경기력 기복 등으로 인해 인테르나치오날레 이적이 거론되었으나, 거스 히딩크가 첼시 지휘봉을 잡으며 급속도로 경기력을 회복하였다. 안첼로티 감독 부임 이후인 2009-10 시즌에는 웨인 루니(26골)의 부상을 틈타 29골을 기록하며 다시 득점왕을 거머쥘 만큼 절정의 결정력을 보여주였다. (그 중 페널티킥에 의한 득점은 1골에 불과했다.) 2011-12 시즌 초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과의 마찰로 출전 기회가 적어지고 부진도 겹쳐 선수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으나, 로베르토 디 마테오 대행 체제 이후 FC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에 선발 출장하여 전반 추가 시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득점을 기록하였다. 2012년 5월 19일 드로그바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 패색이 짙던 88분에 동점골을 넣었고, 승부차기에서 첼시의 5번째 키커로 나와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챔피언스리그 첫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2년 첼시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첼시를 떠나 중국의 상하이 선화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2년 6개월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적응 실패 및 팀과의 갈등으로 인해 상하이 선화에서 이탈하였다. 2013년 1월 28일 드로그바는 튀르키예의 갈라타사라이로 이적하였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이었으며 주급 40만 유로를 지급하는 조건 외에 출전 수당으로 1만 5천 유로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 선화는 드로그바의 이적을 방해하려고 항의서를 제출했지만, FIFA는 갈라타사라이 이적을 승인했다. 갈라타사라이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2013-14년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종료되었다. 2014년 7월 25일 첼시 FC와 1년 계약을 맺었고 2년만에 첼시로 복귀했다. 2014-15 시즌, 총 7골을 넣었고,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였다. 시즌 종료와 함께 첼시에서의 계약도 종료되었다. 드로그바는 첫 출전한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비록 고국 팀이 탈락했지만,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코트디부아르 대표 공격수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경고 누적으로 마지막 경기였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전에서는 결장했고, 그 경기에서 코트디부아르는 보나방튀르 칼루와 아뤼나 댕단의 멀티골로 FIFA 월드컵 첫 승리를 신고했다. 그는 2010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과의 친선 경기에서 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와의 몸싸움 도중 부상을 입어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는 듯 하였으나,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그는 조별 리그에서 1득점 1도움을 기록하였으나, 팀은 16강전에 오르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북한과의 최종전에서 무득점에도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었다. 2014년 FIFA 월드컵 일본과의 조별리그 1번째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였고, 그의 출장과 함께 팀은 2-1로 역전승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같은 조에 속한 콜롬비아,그리스와의 대결에서 분전 끝에 패하며 팀은 조3위로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2014년 FIFA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프리미어리그: 우승 (2004-05, 2005-06, 2009-10, 2014-15) FA컵: 우승 (2006-07, 2008-09, 2009-10, 2011-12) 커뮤니티 실드: 우승 (2005, 2009), 준우승 (2006, 2007, 2010, 2012, 2015) 풋볼 리그 컵: 우승 (2004-05, 2006-07)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011-12), 준우승 (2007-08) 커뮤니티 실드 커뮤니티 실드 MVP 1회 첼시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1회 2010년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vs. 북한 (조별리그)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100명 선정 1회 2005년 10월, 드로그바의 조국 코트디부아르에서는 2002년부터 장기적인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쥔 뒤 드로그바는 TV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조국 여러분, 적어도 1주일 동안 만이라도 전쟁을 멈춥시다." 라고 호소하였다. 실제로 이후 1주일 동안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2년 후인 2007년에는 5년간 계속되어 왔던 내전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 후 2011년 코트디부아르에 또다시 내전이 발생하자 드로그바는 "코트디부아르에는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다" 고 말해 코트디부아르의 평화를 바라는 발언을 한다. 또는 그는 유엔에서 만든 위원회에서 활동한다. "드로그바, 코트디부아르 화합 촉구" 드로그바는 2008-09 시즌UEFA 챔피언스리그 FC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 2차전에서 첼시가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탈락하자 격분하며 톰 헨닝 외브레뵈 주심에게 욕설을 퍼붓고, TV 중계 카메라를 향해서도 욕설을 하여 UEFA로부터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조별 리그전에서 3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2010년 5월, 드로그바는 2010년 FIFA 월드컵을 대비한 일본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가졌는데, 일본 대표팀의 월드컵 16강 전망을 묻는 질문에 "일본에게 기회는 없다", "일본은 물소 등 위의 작은 새" 라 혹평하며 일본 대표팀을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평가전에서 일본 수비수 툴리오와 공을 두고 경합을 벌이던 도중 강한 태클에 심각한 팔 골절상을 입어 FIFA 월드컵 출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그의 걸출한 기량과 해결사적 면모에 감탄하며 마치 신(神)과 같다는 뜻으로 그에게 "드록신"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드로그바 본인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듣고 그에 대해 굉장한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 2011-12 시즌 28R 스토크 시티와의 홈 경기에서 첼시에서의 득점을 하며 프리미어리그 통산 100골을 기록하는 겹경사를 이루었다. 이 경기에서는 첼시가 스토크 시티에게 1-0으로 이겼다. Didier Drogba's official website – available in English and French BBC World Service: African Footballer of the Year 2008 코트디부아르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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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A5%B4%ED%97%A4%20%EB%A3%A8%EC%9D%B4%EC%8A%A4%20%EB%B3%B4%EB%A5%B4%ED%97%A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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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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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은 무엇인가요?
<|assistant|>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 1899년 8월 2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1986년 6월 14일 스위스 제네바)은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이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의 관장직을 맡았다. 연작 형태의 짤막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독특한 소설 《픽션들》로 유명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1920년대에 ‘도시의 아방가르드(남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모더니즘 운동)’를 주도하였다. 1930년대에는 단편 소설을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등 주로 산문을 쓰면서 문학 세계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작품집 《픽션들》(1940)과 《알레프》(1949)로 결실을 맺었다. 그는 시와 논픽션, 이야기체 수필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후기 작품 가운데 《칼잡이들의 이야기》(1970)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는 1899년 8월 24일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편안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서 살 정도로 부유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당시 더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살던 팔레르모에 거주했다. 보르헤스 어머니 레오노르 아세베도 수아레스는 우루과이 크리올로 출신이다. 보르헤스 외가는 남미에 유럽 이주민들이 정착할 때 같이 섞여들어가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에도 관여했는데, 어머니는 종종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르헤스 아버지 호르헤 기예르모 보르헤스 아슬람(1874년 2월 24일 ~ 1938년 2월 14일)은 변호사였고 1921년에 소설 《엘카우딜로》를 썼다. 보르헤스 아슬람은 엔트레리오스주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인의 후손인 대령 프란시스코 보르헤스 라피누르와 영국 여성인 프란체스 앤 아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르헤스 아슬람은 집에서 영어를 말하면서 자랐고, 유럽으로도 자주 여행을 다녔다. 아슬람은 1898년 레오노르 아세베도 수아레스와 결혼했으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뿐 아니라 후에 화가가 된 여동생 노라 보르헤스도 낳았다. 보르헤스는 9살 되던 때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한다. 이 책은 지역 잡지에 실렸지만 보르헤스의 친구들은 그의 아버지가 번역해준 것이라고 믿었다. 보르헤스 아슬람은 문학적인 포부를 품은 변호사이자 심리학 교사였다. 보르헤스는 그의 아버지가 "작가가 되려 했지만 시도에서 실패했다"고 말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또한 "우리 국민 대부분은 군인이었고 나는 결코 군인이 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행동적인 사람이 아닌 책을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으로서 꽤 일찍부터 창피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11살까지 집에서 배웠고 스페인어와 영어로 2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12살 때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천 권이 넘는 영어 도서관이 있는 큰 집에서 살았는데, 보르헤스는 나중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대라고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도서관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회상한다. 그의 아버지는 시력 저하로 변호사 일을 포기하는데, 이 시력 저하는 결국 나중에 보르헤스도 괴롭힌다. 1914년 보르헤스의 가족은 스위스 제네바로 이사했고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을 유럽에서 보낸다. 제네바에서 아슬람은 아들과 딸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안과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았다. 보르헤스는 여기서 불어를 배웠고 토머스 칼라일을 영어로 읽었으며 독일어로 철학을 읽기 시작했다. 1917년, 그가 18살이었을 때, 그는 앞으로 평생의 문학 친구가 될 작가 모리스 아브라모비치Maurice Abramowicz를 만난다. 보르헤스는 1918년 제네바 칼빈 컬리지에서 바칼로레아를 받았다. 이후 보르헤스의 가족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전쟁 동안 스위스에 남기로 결정한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가족은 루가노, 바르셀로나, 마요르카, 세비야, 마드리드의 다양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3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그들은 1921년까지 유럽에 머물렀다. 보르헤스가 그의 작품에 영향을 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구스타프 마이링크의 《골렘》(1915)을 발견한 것도 이 때 쯤이다. 스페인에서 보르헤스는 기욤 아폴리네르와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에게 영감을 받아 아방가르드적이고 반 모데르니스모의 울트라이즘적인 문학 운동의 일원이 된다. 보르헤스는 이 때 월트 휘트먼의 스타일로 첫 번째 시 "바다에의 찬양Hymn to the Sea"을 써 《그레시아Grecia》지에 싣는다. 스페인에서 라몬 고메스 데 라 세르나 등 유명한 스페인 작가들과도 만남을 갖는다. 1921년, 보르헤스는 가족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그는 정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고 특별한 자격도 없었고 친구도 거의 없었다. 그는 울트라이즘의 교리를 가지고 문학지에 초현실적인 시와 에세이를 출판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보르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Fervor de Buenos Aires》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처음으로 출판했고 아방가르드 성향의 《마르틴 피에로》지에 참여했다. 보르헤스는 잡지 《프로아》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벽에 주로 복사본을 붙여 배포하는 잡지인 《프리스마》를 공동으로 창간했다. 보르헤스는 말년이 이 때의 냈던 출판물 중 일부를 부끄러워하며 확실히 파괴하기 위해 복사본들까지 모두 찾아 구입하려고 하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 그는 실존적 질문과 허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르헤스의 작풍을 두고 아르헨티나 평론가 아나 마리아 바레네체아Ana María Barrenechea는 '비현실'이라 평가한다. 후안 룰포, 후안 호세 아레올라, 알레호 카펜티에르와 같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은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영향을 받아 이러한 주제들을 조사하고 있던 때였다. 보르헤스는 1931년 빅토리아 오캄포에 의해 설립된 문예지 《남쪽Sur》의 첫 호부터 정기 기고자로 참여한다. 이는 보르헤스가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오캄포는 보르헤스를 아르헨티나 문학의 또 다른 유명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에게 소개해준다. 그들은 함께 많은 작품을 썼는데, 필명으로 패러디 탐정 시리즈와 판타지 소설을 쓰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아버지의 친구인 마케도니아니오 페르난데스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카페나 시골 휴양지, 발바네라에 있는 페르난데스의 작은 아파트에서 만남을 가졌다. 페르난데스는 보르헤스가 쓴 두 사람이 영혼의 불멸에 대해 대화하는 내용인 소설 《대화에 대한 대화》에 이름으로 등장한다. 1933년, 보르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칼럼을 기고했고, 1935년에 마침내 《불한당들의 세계사A Universal History of Infamy》를 펴낸다. 이 책에는 서로 다른 양식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비소설 에세이와 단편 소설 사이에 놓여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실화를 전달하기 위한 허구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두 번째는 문학적인 위작들로 구성되는데, 유명하지만 거의 읽지 않는 작품들의 구절들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출판사 에메에 에디토르Emecé Editores의 문학 고문으로 일했고 1936년부터 39년까지 《엘 호가》의 주간 칼럼을 썼다. 1938년, 보르헤스는 미겔 카네 시립 도서관에서 수석 보조원 자리를 구한다. 노동자 계층이었고 책이 너무 적어서, 그는 하루에 100권의 책을 분류하기만 해도 다른 직원들에게 할 일이 거의 남지 않을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 일에 매일 한 시간 정도를 썼고, 남는 시간에는 도서관 지하실에서 책을 쓰고 번역하며 보냈다. 보르헤스 아버지는 1938년 64세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보르헤스는 계단을 오르다 열어놓은 창문을 보지 못하고 머리를 부딪친 후유증으로 한 달 가까이 앓아눕는데, 그 와중에 패혈증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다. 사고에서 회복하는 동안, 보르헤스는 새로운 작풍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사고 이후 쓴 첫 번째 이야기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1939년 5월에 출판되었다. 보르헤스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메나르》는 작가와 그의 역사적 맥락 사이 관계뿐만 아니라 저자의 본질을 조사한다. 이때까지 쓴 단편 소설 모음집들을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라는 제목으로 엮어 1941년에 출판했는데, 대부분은 과거 《남쪽》에서 출판한 작품들로 구성했었다. 1944년에 출판한 《픽션들》은 이 작품의 증보판이다. 6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로 구성한 이 책은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긴 했지만, 그의 많은 동료가 기대했던 바와 다르게 문학상을 받는 데 실패했다. 빅토리아 오캄포는 《남쪽》의 1942년 7월호 상당 부분을 "보르헤스를 위한 보상"에 관한 내용을 쓰는데 할애했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주요 작가와 비평가가 이 보상 프로젝트에 글을 기고했다. 1946년에 도서관 사서였던 30대 초반 보르헤스에게 가축 검사관으로 발령이 내려오고, 이에 승복할 수 없었던 보르헤스는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30대 초반이 된 보르헤스는 비전이 사라지고 작가로서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하는 대신, 공공 강연자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이러한 활동은 아르헨티나 작가 협회 회장과 아르헨티나 영어 문화 협회의 영미 문학 교수로 임명되면서 점점 더 대중화되었다. 그의 단편소설 《엠마 준즈》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맘때, 보르헤스는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보르헤스는 1955년에 새로운 정권 배려로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 보르헤스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보르헤스는 시력이 나빠질수록 어머니에게 점점 더 많이 의지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읽거나 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지자 어머니는 그의 비서직을 맡는다. 후안 도밍고 페론이 1973년 망 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자, 보르헤스는 곧바로 국립도서관장직을 사임한다. 1967년, 보르헤스는 과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인과 결혼한다. 친구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를 병간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결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결혼은 3년도 채 되지 않아 깨진다. 이혼 후 보르헤스는 어머니에게 돌아가 어머니가 99세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의탁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어머니와 살던 작은 아파트를 물려받아 거기서 홀로 산다. 1975년부터 보르헤스는 전 세계를 여행한다. 종종 개인 조수인 마리아 코다마와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1986년 4월 11일, 숨을 거두기 불과 몇 달 전 이 둘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이혼 관련 법률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그러하듯 파라과이의 변호사를 통해 결혼한다. 보르헤스는 개신교도 할머니의 밑에서 자랐으며 어머니와 약속대로 매일 밤 기도하고 잠들었지만, 불가지론자로 죽었다. 그가 숨을 거둘 때 곁에는 신부가 있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년 《칼잡이들의 이야기》(El informe de Brodie), 1970년 《셰익스피어의 기억》(Veinticinco de Agosto de 1983 y otros cuentos),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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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The%20War%20in%20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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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r i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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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r in Life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The War in Life》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이승환의 6번째 정규 앨범이다. 《Human》과 비슷한 구성으로서, 앨범을 절반으로 나눠 1번부터 8번 트랙은 정상, 9번 트랙 이후는 비정상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 앨범부터 동양적 색채가 들어간 곡이 수록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이례적으로 앨범 발매 전에 TV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판매량은 53만2천장이다. 앨범 디자인은 붉은색과 초록색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타이틀곡인 〈그대는 모릅니다〉는 〈천일동안〉을 뛰어넘는 발라드를 위해 만든 곡으로, 동양적인 멜로디에 곡이 진행될수록 웅장해지는 구성이 더욱 정교해졌지만, 〈천일동안〉만큼의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오히려 〈세 가지 소원〉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후 영상미와 작품성이 뛰어난 오리엔탈 발라드 〈당부〉 뮤직비디오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16번 트랙 〈& the Future〉가 끝난 뒤 잠시 후 히든트랙이 나온다. 정확한 제목과 가사는 3년 뒤에 발매된 앨범인 《Serious Day》에 공개되었다. 주인공이 마네킹과 사랑을 나누며 수중 촬영을 시도하는 등 파격적이고 극단적인 영상이 돋보인 작품이다. 이승환 자신이 말썽꾸러기 천사 역할을 맡아 자신의 잘못으로 하늘에서 떨어져 소매치기가 되어있는 천사를 도와주고 다시 승천하는 내용이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삽입해 눈길을 끌었다. 음악채널 PD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뮤직비디오는 물론, 이승환 특유의 무지막지한 투자의 결과물이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실질적인 첫 작품이다. 뛰어난 작품성, 아름다운 영상과 세심한 소품이 돋보이는 이 작품으로 차은택 감독은 1999년 Mnet 영상음악대상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신민아가 이 작품으로 데뷔했다. Co-produced by David Campbell, Steve Dady, Brian Matheson Coordinated by Eddie Jun, 백영진 (LA), 신배호 (Nashville), 김한구 (San Francisco), 박병준 (Taipei) Stylist & Make Up by 장혜민 Promotion & Management 금병근, 김혁경, 김동범 Mastered by Chris Bellman for Bernie Grundman Mastering Assistant Engineers John Tyree, Darren Mora, Katie Teasdale, Alex Chan, Cam Stone, Brian McConkey, Steven Crowder, Ben Conrad Recorded by Joe Chiccarelli, Michael Rosen, Ronnie Brookshire, 고현정, 김한구, 이동녘, 류재경 Mixed by Brant Biles, 임창덕, 노양수, 고현정 Recorded at DreamFactory, Ocean Way, Starstruck, Javellina, Promise, Sound Kitchen, Sunset Blvd, Quad, Fantasy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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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4%9C%EB%A6%AC%EC%85%94%EC%8A%A4%20%28%EC%9B%B9%EC%82%AC%EC%9D%B4%ED%8A%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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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셔스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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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음 텍스트는 딜리셔스 (웹사이트)에 관한 것입니다.
A: 딜리셔스 (웹사이트)은 딜리셔스(delicious)는 소셜 북마킹으로 유명한 웹사이트로 즐겨찾기를 저장하고, 다른 사용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다른 사용자들의 즐겨찾기를 볼 수 있는 웹사이트이다. 2003년 후반 조슈아 샤흐터(Joshua Schachter)에 의해 만들어졌다. 2005년 야후!가 인수하면서 야후!의 한 부분이 되었다. 2011년 4월 AVOS 시스템즈가 재인수하여 야후!에서 독립하여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소셜 북마크(Social Bookmark)는 사용자들이 웹서핑 중에 북마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이트 또는 포스트, 웹페이지를 발견하면 웹 브라우저의 즐겨찾기에 추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Social Bookmark는 브라우저에 즐겨찾기를 추가하는 대신에 웹에 추가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 영역에 북마크할 수 있도록 하고, 몇 명이 북마크를 추가했는지를 통해 해당 사이트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즉, 즐겨찾기 추가라는 이기적 행위를 통해 사이트의 가치를 평가하고, 이에 공감하는 다른 사람이 다시 북마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기적 행위로 이타성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북마크 행위가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용자가 북마크할 경우에는 자신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의 기준에는 다른 사람이 공유한 북마크의 URL을 방문하여 판단할 수도 있고, 몇 명이 북마크를 했는지를 보고도 판단할 수 있다. 1명이 북마크한 사이트보다 100명이 북마크한 사이트가 더 유용한 사이트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딜리셔스가 미국에서 각광을 받은 것도 이때문이다. 딜리셔스에서는 폴더나 카테고리 대신 태그로 즐겨찾기를 관리한다. 모든 사용자들의 태그가 딸려있는 즐겨찾기를 같이 보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https://web.archive.org/web/20130928145440/http://delicious.com/tag/wiki"에서는 최근에 저장된 "wiki" 태그가 붙여져 있는 즐겨찾기를 보여준다. 이처럼 서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용자들이 추가한 즐겨찾기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 딜리셔스는 메인 페이지에 "핫리스트(hotlist)"와 "인기있는"(popular), 그리고 "최근에 추가된(recent) 페이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은 인터넷 문화와 트렌드를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웹사이트는 간단한 HTML로 읽을 수 있으며 사람이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는 URL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페이지마다 RSS 피드가 제공되며, 다른 개발자들이 비슷한 종류의 서비스를 제작할 수 있도록 API가 공개되어 있다. 딜리셔스를 사용하는 것은 무료이며, 이 사이트의 전체적인 소스 코드는 공개되어 있지 않지만, 사용자의 데이터를 API를 통해 XML이나 JSON 포맷으로 받을 수 있다. 또한 넷스케이프의 즐겨찾기 표준 포맷으로도 내보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딜리셔스에 포스팅되는 것은 모든 이에게 공개되지만, 사용자가 공개를 원하지 않는 경우 private 기능을 이용해 공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추가된 즐겨찾기들은 오직 그 사용자에게만 'not shared'라는 글씨로 해당 즐겨찾기는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해준다. 다른 곳에서 가져온 즐겨찾기는 기본적으로 비공개 상태로 저장된다. 딜리셔스에 저장한 링크 모음이나 태그 모음 등은 자신의 블로그에 내보낼 수 있다. 적은 수이긴 하지만 딜리셔스의 오픈 소스 클론, 또는 유사 한글 사이트가 있는데, mar.gar.in이 대표적인 예이다. 2005년 12월 9일 금요일, 야후!에 인수 합병되었다. 2008년 7월 31일, 새 디자인과 기존 이름(del.icio.us)에서 마침표를 뺀 새 이름과 도메인이 적용되어, del.icio.us와 delicio.us로 접속했을 경우 새 도메인인 delicious.com으로 자동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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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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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파 제국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무타파 제국(, )은 1250년부터 1629년까지 남아프리카 인근에 현재의 짐바브웨와 모잠비크의 영역을 차지하던 중세 제국이다. 현재까지도 대제국의 영광이 유산으로 남아 수많은 관광객을 모으고 있기도 하다. 무타파(Mutapa)라는 단어는 정복한 대지라는 뜻이며 토착어로 왕은 mwene로 불리면서 정복왕 혹은 신이 내린 자라는 뜻으로 불렸다. 때문에 무타파 제국의 또다른 이름은 Mwene Mutapa이다. 여러 제국 역사서에는 이러한 명칭에 대해 설명한 문구가 발견되고 있다. 제국은 로즈비(Rozvi)라는 사람이 건국했다고 여겨지는데 현대의 쇼나족 선조가 된다. 통치 왕조의 선대는 므비르 왕조라고 불렸으며 13세기에 영향력을 떨쳤다. 그 대의 훨씬 아래 후손인 니아심바(Nyatsimba)가 무타파 제국의 기본적인 기틀을 닦은 사람으로서 쇼나족의 조상 중에서도 영웅 중 영웅으로 손꼽힌다. 도자기나 천이 해안을 따라 금의 교역물로 쓰였다. 1400년까지도 세력을 유지했지만 머잖아 국가 기반이 흔들리면서 350km 북쪽으로 천도하게 됐다. 포르투갈인들이 쇼나족의 왕국을 정복하려 했지만 수년동안 정복에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에 무타파 제국은 포르투갈의 교란 작전에 의해 많은 영토를 잃고 주변국에 복속 혹은 포르투갈인의 금 약탈에 이용됐다. 당시 주변 강대국은 잔지바르와 키와 제국이었다. 후에 줄루족이 남하하면서 남아프리카 일대와 잠베지 강 이북 지대로 유입되자 다시 국력에 타격을 입는다. 심각한 가뭄에 시달리면서 많은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고 마침내는 1629년 포르투갈 세력에 의해 멸망했다. 무타파 제국의 풍부한 금광 보유는 포르투갈인의 입소문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성경에 명시돼 있는 솔로몬 왕의 금광에 대한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성경 구절에 적혀 있는 전설적인 금광은 솔로몬 왕이 오필이라는 지방에서 찾았다고 전하는데 유럽인들이 무타파 제국의 영토 일대를 그곳으로 믿게 된 것이다. 때문에 1500년대 포르투갈 함대와 여러 사람들이 남아프리카 일대를 파헤치고 다닌 것은 전혀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무타파 제국을 통해 엘도라도를 꿈꿨다고도 하며 초기 식민 개척자들은 분명 그러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금광의 자원이 고갈되고 제국 내 영토에서 더 이상의 금이 채굴되지 못하게 되면서 금광 무역의 영화는 곧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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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1%B8%EC%97%90%EB%A5%B4%ED%86%A0%EB%A6%AC%EC%BD%94%20%EC%B6%95%EA%B5%AC%20%EA%B5%AD%EA%B0%80%EB%8C%80%ED%91%9C%ED%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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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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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푸에르토리코 축구 국가대표팀이 궁금해요.
A: 푸에르토리코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푸에르토리코 축구 국가대표팀()은 푸에르토리코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푸에르토리코 축구 연맹에서 관리한다. 북중미 축구 최약체팀으로 평가받는 팀들 가운데 하나로 1940년 11월 12일 1938년 FIFA 월드컵 8강 진출팀인 쿠바를 상대로 국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파란 허리케인'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으며 홈 구장은 후안 라몬 루브리엘 스타디움이다. 현재까지도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적은 단 한번도 없으며 그나마 2014년 FIFA 월드컵 북중미카리브 지역 2차 예선 C조 6경기에서 2승 3무 1패·D조 2위로 푸에르토리코 축구 역사상 월드컵 지역 예선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2019-20 CONCACAF 네이션스리그 예선 33위로 리그 C에 편입된 푸에르토리코는 조 추첨 결과 과테말라, 앵귈라와 함께 C조에 배정되었다. 이후 과테말라와의 1차전과 3차전에서 모두 0-5로 대패를 당했고 앵귈라와의 2차전과 최종전에서는 각각 3-2, 3-0의 승리를 거두면서 2승 2패·조 2위로 네이션스리그 첫 시즌을 마쳤다. 2022-23 시즌에도 리그 C에 편입되어 케이맨 제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함께 D조에 배정받은 뒤 4경기에서 전승·조 1위로 모든 국제 대회를 통틀어 역대 최고 성적을 달성하며 차기 시즌 리그 B 승격 티켓을 거머쥐었다. 카리브컵 본선 출전은 1993년 대회가 유일하며 그나마도 1무 2패·A조 3위로 조별리그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이후 마지막 대회인 2017년 대회까지 단 한번도 카리브컵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현재까지도 푸에르토리코의 팬아메리칸 게임 출전은 자국에서 열린 1979년 대회가 유일하며 이 대회에서 2라운드에 진출했고 최종 순위에서도 1승 3패로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985년 ~ 1993년 - 예선 탈락 1998년 ~ 2005년 - 예선 탈락 2011년 ~ 2021년 - 예선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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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5%B4%ED%81%AC%20%ED%8C%90%20%EB%B3%B4%EB%A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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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판 보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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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마르크 판 보멀이 궁금해요.
A: 다음은 마르크 판 보멀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르크 판 보멀(, 1977년 4월 22일, 네덜란드 마스브라흐트 ~ )는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이다. 판 보멀은 1992년, 후에 장인이 되는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가 감독으로 있었던 포르튀나 시타르트에 입단하였다. 팀에 입단한 다음 시즌에는 두각을 나타내면서 팀의 중심 선수로서 당시 2부 리그 소속팀이었던 팀을 에레디비시 1부로 승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99-2000 시즌에는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해 리그 우승에 공헌함과 동시에 2000년 10월 7일, 키프로스와의 경기에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의 첫 경기를 치렀다. 에레디비시 2000-01 시즌에는 PSV 에인트호번의 주장으로서 공수에 걸쳐 활약해 리그 우승에 기여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네덜란드 대표팀의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 유로 2004 직전 자신의 부상 등으로 인해 두 대회 출전이 좌절된 바 있다. 2004-05 시즌에는 14골을 넣어 리그 득점 순위 8위에 올랐고, 동시에 UEFA 챔피언스리그 2004-05에선 팀의 4강 진출에 기여하였다. 2005-06 시즌부터 뛰어난 활약을 주목받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으나, 당시 FC 바르셀로나를 구성하고 있던 사뮈엘 에토와 호나우지뉴 등의 쟁쟁한 공격수들에 밀려 주전 자리를 차지하는 데 실패하였다. 2006년에는 독일의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여 그 해 9월 23일, 아헨을 상대로 분데스리가 첫 골을 넣었고, 같은 해 첼시로 이적한 미하엘 발라크의 대체자로서 팀의 핵심을 담당하였다. 2006년 FIFA 월드컵 이후에는 대표팀의 스텝이 총 사퇴하지 않는 한, 대표팀에서 뛰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유로 2008 후 첫 친선 경기에서 대표팀에 복귀하였다. 2008-2009 시즌에는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처음으로 비독일인 주장이 되었다. 그는 아내 안드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의 주전으로서 팀의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그렇지만 2년 뒤 유로 2012에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팀의 조별 예선 탈락의 책임을 안고 그의 장인이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대표팀을 은퇴하였다. 2013년 5월 13일(한국시간) 2012-13 에레디비시 34라운드 트벤테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는 과거 페예노르트 감독을 지낸 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의 사위이다. 마르코 판 바스턴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 판 바스턴 감독과의 불화로 대표팀 소집을 거부하였던 그는, 장인인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 감독이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된 후 대표팀으로 복귀하였다. 에레디비시 우승: 2000, 2001, 2003, 2005 요한 크라위프 실드 우승: 2000, 2001, 2003, 2005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2005, 2006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2001, 2005 네덜란드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네덜란드 남자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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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BC%EB%A6%AC%20%EB%A6%AC%ED%8A%B8%EB%A7%88%EB%84%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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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리 리트마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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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야리 리트마넨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세요.
<|assistant|> 야리 리트마넨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야리 올라비 리트마넨(, 1971년 2월 20일~)은 핀란드의 은퇴한 축구 선수이다. 그의 조국인 핀란드에서는 그를 "리티" 또는 "더 킹" (또는 "킹 리트마넨")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핀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주장 역할을 맡았다. 그가 거친 핀란드 클럽으로는 레이파스 HJK, 뮈파, FC 라흐티가 있으며 외국 클럽으로는 AFC 아약스, FC 바르셀로나, 리버풀 그리고 한자 로스토크가 있다. 2003년 11월에 열린 유럽 축구 연맹(UEFA)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핀란드 축구 협회에 의해 UEFA 주빌리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100명의 위대한 핀란드인 명단에 뽑히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축구 통계 연맹(AFS)에 의해 53번째로 뛰어난 축구 선수로 선정된 적이 있다. 야리 리트마넨 - National Football Teams 핀란드 남자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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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C%9B%90%EC%A0%84%20157%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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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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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기원전 157년은 무슨 내용인가요?
<|assistant|> 기원전 157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전한 문제 문제 후7년 (1월 ~ 9월) 전한 경제 전원년 (10월 ~ 12월) 전한, 유일한 이성 제후국 장사나라를 폐함. 7월 6일 - 전한 5대 황제 문제.<|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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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FC%20%EC%82%B0%ED%83%80%EC%BD%9C%EB%A1%9C%EB%A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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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산타콜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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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FC 산타콜로마을 다룹니다. FC 산타콜로마는 안도라의 축구 클럽으로 안도라라벨랴의 산타콜로마를 연고지로 삼고 있다. 산타콜로마는 2007-08시즌의 안도라 프리메라디비지오 우승을 하면서 현재 안도라 챔피언이다. 통산 4회 우승으로 안도라 리그 최다 우승을 한 팀이다. 유럽 대회에는 UEFA컵에 4회, UEFA 챔피언스리그에 1회 출전하여 통산 다섯 번 출전하였는데, 단 한번도 1차 라운드를 통과한 적이 없었다. UEFA컵 2007-08에는 홈에서 마카비 텔아비브 FC를 1-0으로 이기면서 유럽 대회에서의 첫 승을 달성하였다. 지금까지 5회 출전에 총 10경기를 치렀는데 1승 9패 5득점 32실점을 기록중이다. UEFA.COM에서의 산타콜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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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A0%EB%84%B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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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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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엠넷은 어떤 대상인가요?
A: 엠넷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엠넷()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허가된 대한민국의 CJ ENM의 자사 음악 & 엔터테인먼트 채널이다. 1995년 3월 1일 한국 케이블 TV 서비스 개시와 동시에 개국하였으며, 개국 당시 초창기엔, 음악 방송 전문 채널 만을 고집하였으나, 쉴 새없이 급변한 방송 시장 변화와 케이블 TV 시장의 소비 시장 확대와 맞물려, 현재 음악 전문 채널에서 연예 오락 채널로 거듭나기 위하여 기존의 음악 전문 프로그램 외에 다양한 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신설하여, 현재 국내외 가수들의 콘서트 및 버라이어티 쇼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있다. 1999년 이후 매년 11월에는 아시아의 대표 음악 시상식을 표방하는 MAMA가 개최되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매년 8월 20대에 의한 시상식을 표방하는 20's Choice를 개최한다. 그리고, 2009년에 기수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를 방영하고, 2016년부터 기수별 국민 프로듀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PRODUCE 101 시리즈를 개최하여, 아이오아이, 워너원, 아이즈원, 엑스원을 배출하는 국민 프로듀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2019년 이를 둘러싼 투표 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2020년 3월 1일에는 개국 25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디자인 변경이 이루어졌으며, 1995년형 초창기 로고 변경하였다가, 2개월만에 2005년형 로고가 다시 돌아갔다. 1993년: 뮤직 네트워크(Music Network) 케이블 사업 진출. 1994년: MTV 프로그램 방영 계약 (개국과 동시 3시간 방영) 1994년: 한국 최초 제1회 VJ 콘테스트 실시 1995년 3월 1일: 케이블 TV 등장으로 인한 Mnet 방송 개시 (1일 16시간) 1998년: 국내 음악 방송 최초로 인터넷 실시간 방송 개시. 1999년 11월 27일: 제1회 Mnet 영상음악대상 개최 2001년: MTV 계약 만료로 Mnet 프로그램 24시간 방송 2004년 7월 29일: 종합 차트쇼 '엠 카운트다운 (M! Countdown)' 방영 시작 (현재 Mnet의 가장 현존하는 장수 프로그램) 2004년: Mnet 뮤직 비디오 페스티벌, KMTV와 공동 개최 결정 2005년: 위성 DMB 본방송 개시, MY Mnet 개국 2005년: 음악 채널 최초로 5.1 서라운드 서비스 실시 2005년 7월 21일 오후 5시: Mnet 론칭 및 10주년 기념 BI 변경 2006년 4월 15일: 한국음악 전문 일본 방송 Mnet Japan 개국 2006년 10월 23일: 온라인 음원 사이트 Maxmp3 사이트 흡수 통합 2006년 11월 25일: Mnet·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에서 Mnet KM 뮤직 페스티벌로 변경 개최 2007년 8월 21일: 제1회 20's Choice 개최 2009년 11월 21일: 제1회 M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 개최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2009년: 온라인 음원 사이트 뮤직온 흡수 통합 2010년: Mnet 아이폰 애플리케이션 및 스마트폰 전용 홈페이지 오픈 2011년: 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 IPTV를 통해 본방송 개시. 2014년 7월 24일: M Countdown 10주년 2015년 3월 1일: Mnet 개국 20주년 2018년 7월 25일: 엠넷 운영사인 CJ디지털뮤직의 100% 지분 전부를 지니뮤직이 인수하였다. 2018년 10월 10일: 지니뮤직과 CJ디지털뮤직이 흡수합병하여 통합법인 지니뮤직이 되었다. 2020년 3월 1일: Mnet 개국 25주년 2022년 1월 8일 : Mnet 목요일 엠카운트다운 2002년 당시 Mnet의 모기업인 CJ가 소유하고 있는 일부 지역 SO에서 구 KMTV (구KM)의 송출이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KMTV (KM)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연예 기획사들이 집단으로 반발해 소속 가수의 Mnet 모든 프로그램 출연 거부 및 뮤직 비디오를 제공하지 않는 사태가 터졌다. 당시 출연 거부를 선언한 기획사는 예당 엔터테인먼트, GM 기획 (현 MBK 엔터테인먼트), 대영 AV (현 포이보스), 제이엔터컴, 아이스타 뮤직 등으로 소속된 연예인이었던 신승훈, 엄정화, 박지윤, 이정현, 왁스, jtL 등이 Mnet의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았다. 이 사태는 2002년 후반 지역 SO들이 다시 KMTV를 방영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위성 방송 송출 중단 및 통신 3사 IPTV 서비스 채널 본방송 개시 지난 2003년 홈 CGV (현 채널CGV)의 위성방송 채널인 스카이라이프 송출 중단을 시작으로 CJ미디어(현 CJ ENM)는 1400만 케이블TV 시장에 주력하기 위해 '케이블 온리' 정책을 강화해 나간다. 이에 따라 CJ 미디어는 위성방송 서비스인 스카이라이프 SD 채널 604번에서 방송 중이던 Mnet을 구 XTM과 함께 2005년 1월 1일부터 방송 중단하였다. 이후구 CJ 미디어는 자사 계열의구 KMTV에서 엠넷의 프로그램을 일부 방송하였으나, 경영난 악화로 유료 방송 시장에서 광고 수익이 급감함에 따라 수신료 수익의 증대와 방송 시장 다변화의 일환으로, 위성방송 서비스인 스카이라이프 재공급을 결정하였다. 2009년 5월 말부터 KT스카이라이프의 위성방송 서비스를 통해 송출을 재개하였고, 2011년 3월부터 기존의구 CJ미디어가 CJ ENM으로 변경된 이후에, KT의 지니TV를 비롯한, SK브로드밴드의 Btv 등 통신 3사 IPTV 사업자와 협의 후, HD 채널로 본방송을 개시하였다. 구 KM과 엠넷으로 나뉘어 있던 시절에는 공중파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기획이나 참신한 무대 등을 선보이며, 기존의 딱딱하고 형식적인 공중파 연말 가수 시상식에 식상했던 시청자들로부터 호감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나, 양사의 통합 후 출범하기 시작한 MKMF 시상식에서는 규모만 커졌을 뿐 오히려 기존의 공중파 시상식보다 못하다는 평도 들리고 있으며, 특히 2009년 열린 Mnet Asian Music Award 초대 대회에서는 그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며, 소녀시대, 슈퍼주니어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 장윤정, 박현빈의 소속사인 인우기획과 손담비, 애프터스쿨의 소속사인 플레디스의 소속가수들이 집단 보이콧하였다. 하지만 2011년에 SM과 플레디스 소속사 가수들이 MAMA, 20's Chioce 시상식에 참여하게 된다. SM 엔터테인먼트의 음원 공급 중단 사태 2010년 3월 2일, SM 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엠넷미디어가 운영하는 ASP사이트에서 자사의 음원들이 무단으로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엠넷미디어가 운영하는 음악전문포털 사이트인 엠넷에 음원 공급을 중단했다. 2011년 1월 동방신기부터 다시 음원 공급하였다. (소녀시대 등 제외) 2011년 2월 21일부터 SM 전곡 음원을 공급 · 재개하였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SM 엔터테인먼트와 엠넷과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못해서, SM 소속 가수들은 엠카운트다운 및 MAMA에 출연하지 않고 있다. 다만 2019 MAMA에는 WayV가 나오며 모처럼 SM 소속 보이그룹이 모습을 드러냈다. SM 엔터테인먼트 및 YG 엔터테인먼트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따라서 두 기획사 소속 가수들은 엠카운트다운 및 MAMA에 출연하지 않고 있다. 다만 자료화면 등에는 양사 소속 가수의 뮤직비디오가 나가고 있으며, 엠넷 제작 서바이벌 경연곡에도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YG 계열의 더블랙레이블로 이적한 후 2019년 6월에 솔로로 데뷔한 전소미는 SIXTEEN 및 PRODUCE 101 등 예전의 인연도 있어서인지 한 차례 엠카운트다운에 출연했고, 그 날 1위 후보에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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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83%89%20%EA%B9%83%EB%B0%9C%EC%9D%84%20%EC%98%AC%EB%A0%A4%EB%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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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깃발을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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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황색 깃발을 올려라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세요.
<|assistant|> 황색 깃발을 올려라은 《황색 깃발을 올려라》(원제 《Go for Broke!》)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계 2세들로 편성된 100대대와 442 연대전투단을 배경으로 제작된 1951년 영화다. 영화는 벤 존슨이 맡은 미국인 신참 소위가 하와이의 100대대에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이 영화에는 실제 100대대와 442연대투단으로 참전했던 일본계 2세들이 몇 명 출연하여 사실감을 높였으며, 부대의 훈련부터 시작하여 전쟁 중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역에서 부대의 활약상과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Abbie Salyers Grubb, "Go for Broke!" Densho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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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84%EB%A1%9C%EC%9A%B0%EC%A6%88-%ED%9C%A0%EB%9F%AC%20%EB%B3%80%ED%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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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로우즈-휠러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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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다음 텍스트는 버로우즈-휠러 변환에 관한 것입니다.
<|assistant|> 버로우즈-휠러 변환은 버로우즈-휠러 변환() 또는 블록 정렬 알고리즘은 데이터 압축에 관련된 알고리즘으로, 1994년에 마이클 버로우즈와 데이비드 휠러가 개발하였다. 버로우즈-휠러 변환은 직접적으로 압축을 수행하는 알고리즘은 아니며, 변환을 거친 데이터의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본 데이터에 중복되는 글자가 많이 있다면, 변환 과정을 거친 결과물에는 중복되는 글자가 비슷한 위치에 몰리게 된다. 버로우즈-휠러 변환은 가역 변환이기 때문에 주로 실제 압축 알고리즘을 적용하기 전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알고리즘을 쓰는 대표적인 압축 포맷으로 bzip2가 있다. 입력된 문자열을 가능한 모든 회전 이동(cyclic shift)을 한 뒤, 이것들을 사전순으로 정렬한다. 이 결과를 나열한 행렬에서 가장 마지막 글자가 출력 문자열이 된다. 해제 과정은 조금 복잡한데, 변환되었던 열을 추가하고 정렬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최초에 제안된 변환에서는 원래의 코드워드가 어느 행에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전송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알고리즘으로서 입력 문자열에 메시지 시작과 끝 문자를 추가하여 해결할 수 있다. 메시지 시작 문자로 시작하는 행이 해당 부가 정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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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9D%BC%EA%B3%A0%EB%93%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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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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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고등학교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대일고등학교(大一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1972년 9월 26일 : 학교법인 성한학원 설립 인가 1972년 12월 26일 : 대일고등학교 설립 인가 1972년 12월 26일 : 학년당 10학급 1973년 2월 24일 : 초대 윤덕현 교장 취임 1976년 1월 8일 : 제1회 졸업식 1988년 3월 4일 :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전 2020년 9월 1일 : 제13대 이수정 교장 취임 2022년 2월 4일 : 제47회 졸업식 2022년 3월 2일 : 제50회 신입생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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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AC%EB%9F%AC%EA%B1%B0%20%28%EC%98%A8%EB%9D%BC%EC%9D%B8%20%EA%B2%8C%EC%9E%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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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러거 (온라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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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슬러거 (온라인 게임)을 다룹니다. 슬러거(Slugger)는 한국의 와이즈캣이 개발하고 네오위즈게임즈가 배급한 야구 온라인 게임이다. 2006년 1월 19일부터 2007년 2월 1일까지 4차에 거친 클로즈드 베타 서비스를 거쳐 그 해 2월 6일부터 오픈 베타 서비스를 실시하고, 3월 13일부터는 부분 유료화를 실시했다. 2008년에는 한국e스포츠협회의 2008년 상반기 등록위원회 심사를 통해 신규 e스포츠 공인종목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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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9%80%ED%85%8C%20%EC%95%84%EC%82%AC%ED%9E%88%20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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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테 아사히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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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테 아사히 TV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이와테 아사히 TV는 1996년 10월 1일 이와테현에서 4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개국한 민영방송국으로 약칭은 IAT, 콜사인은 JOIY-DTV이다. 이 방송국의 개국에 따라 도호쿠지역 6개현 전체에 아사히계열 방송국이 설치되었고 그와 동시에 ANN네트워크가 완성되었다. 버블경제 붕괴 후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초기 투자를 억제한 상태로 개국하게 되어 스튜디오는 필요한 만큼만 설치하였으며 지사·지국망이 적은데다 중계소도 특히 연안부에 있어 난시청 지역이 많은 상태로 개국을 해서 난시청지역이 많았으나 이 상황은 디지털 텔레비전 중계국을 설치하면서 해결되었다. 1995년 6월 19일: 표준 텔레비전 방송 예비 면허 교부(호출 부호 JOIY-TV). 1995년 7월 21일: 주식회사 이와테 아사히 TV 설립. 1996년 9월 24일: 서비스 방송을 개시. 1996년 10월 1일: 이와테현 4번째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으로서 방송 개시. 2005년 7월 29일: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의 면허를 신청. 2005년 11월 15일: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예비 면허 교부(호출 부호 JOIY-DTV). 2006년 6월 6일: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의 시험 방송을 개시. 2006년 8월 18일: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데이터 방송시험 개시. 2006년 9월 25일: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의 본면허 교부. 2006년 10월 1일: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개시. 동시에 개국 10주년을 맞이한다. 2012년 3월 31일: 지상파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 종료. 이와테 현에서 ANN 계열 방송은 1969년 개국한 니혼TV 계열 방송국인 TV 이와테(이하 TVI)가 담당했으며 TVI에는 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이 자본을 투자해 자연스레 니혼TV 계열(요미우리신문 계열)과 TV아사히 계열(아사히신문계) 크로스 네트워크 방송국이 되었다. TVI는 당시 프로그램 시청률이 좋았던 니혼TV로 편성의 비중을 옮겨 가게 되고 결국에는 아사히 신문의 자본을 남겨두고서 1980년에 TV아사히 계열을 탈퇴하면서 니혼TV의 완전 가맹국이 되었고 그 결과 그 당시 민영 방송국이 2~3개밖에 없었던 많은 지역에서 크로스 네트워크 방송국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와테 현에서는 크로스 네트워크 방송국이 소멸하게 되었다. TVI는 그 후 TV아사히 계열의 프로그램을 한개씩 구입해 방송하게 되었지만 네트워크를 탈퇴한 영향이 있어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의 수는 더욱 격감해 ABC이 제작한 인기 시대극이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등만 방송했다. 그 결과, 현내에서 TV아사히 계열의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도쿄 방송계열국인 이와테 방송(현 IBC 이와테 방송)이 방송하는 형태가 되어, 도라에몽, 슈퍼 전대 시리즈 등의 인기 프로그램이 IBC에서 방송되었다. 이렇게 아사히 계열 동시 방송 프로그램이 없었던 이와테 현의 방송국에서는 점차 아사히 계열 프로그램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한 경향 가운데 90년대 와카노하나 붐으로 스모의 인기가 증가하자 TVI는 TV 아사히에서 제작한 스모 프로그램을 방송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여러 TV 아사히 프로그램도 방송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이와테 현에 4번째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을 설치할 수 있게 되자 아사히 측은 IAT를 세울 준비를 시작한다. 이로 인해 IAT개국전 이와테 현에서는 또다시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한 TV 아사히 계열 프로그램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1996년 10월 1일 개국하면서 IBC 이와테 방송과 TV 이와테에서 방송되어 온 TV 아사히 계열의 프로그램도 민간방송 교육협회 공동 제작 프로그램(IBC가 가맹)을 제외하면, 완전히 IAT로 이행되었고 TV 아사히 계열의 아침 와이드쇼 프로그램 모닝 쇼도 이와테현에서 방송이 재개되었다.그리고 여름 고교야구 시합 중계권이 IAT로 이행되면서 이와테 현 시청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와테 현에서는 인지도가 없었던 TV 아사히를 네트워크 중심 방송국으로 삼았기 때문에 불리한 점도 있었지만 동시방송 프로그램 시청률 상승, IAT 자체 제작 능력의 향상, 계열국의 서포트 등이 있어, 현재는 비교적 비용이 많이 드는 프로그램도 만들고 있다. IBC 이와테 방송(IBC)(TV는 도쿄 방송 계열, 라디오는 JRN&NRN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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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A0%EB%8B%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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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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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은 애니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애니 레녹스: 영국의 가수, 작곡가이자 사회운동가 피어 스트리트 파트 2: 1978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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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C%84%A4%20%EB%B9%84%EC%9B%90%EC%88%9C%20%EC%A4%91%EA%B3%A0%EB%AA%A8%EC%9D%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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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설 비원순 중고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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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설 비원순 중고모음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중설 비원순 중고모음(中舌 非圓脣 中高母音) 또는 중설 평순 중폐모음(中舌 平脣 中閉母音)은 모음의 하나이다. 이 모음은 혀의 위치를 전설모음일 때와 후설모음일 때의 중간 정도로 해서 발음하는 중설모음이다. 이 모음은 입술을 둥글게 하지 않고 발음하는 비원순모음이다. 이 모음은 혀의 위치를 고모음과 중모음의 중간 위치로 해서 발음하는 중고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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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B%B6%81%EA%B5%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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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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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강북구에 대해 알려주세요.
<|assistant|> 강북구은 강북구(江北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북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1995년 도봉구에서 분리). 구 전체 면적은 23.60km2(서울시 면적의 약 3.90%)로 그 중 공원녹지 지역이 12.922km2로 구 전체면적의 54.8%를 차지한다. 북동쪽으로는 도봉구, 동쪽으로는 노원구, 남쪽으로는 성북구, 서쪽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북쪽으로는 경기도 양주시와 접한다. 한강 이북에 위치해서 강북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한강과 접해 있지는 않다. 1995년 3월 1일 도봉구 중 미아동, 번동, 수유동, 우이동 지역을 관할하는 18개 행정동으로 강북구 설치. 1998년 9월 28일 미아6동과 미아7동을 통합, 미아6·7동이 되어 17개의 행정동이 됨. 2008년 6월 30일 미아1~9동, 수유4~6동의 지역을 삼양동(미아1,2동), 송천동(미아5,8동), 송중동(미아4,9동), 삼각산동(미아6,7동), 미아동(미아3동), 인수동(수유5,6동), 우이동(수유4동)으로 통합, 변경하여 13개의 행정동이 됨. 강북구 면적은 23.61km2로서 서울시 면적 605.52km2의 3.9%를 차지한다. 13개 동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관할하는 동은 우이동으로 10.95km2(구 전체면적의 46.4%)이며 가장 작은 동은 번 제1동으로 면적은 0.55km2(구 전체면적의 1.3%)이다. 강북구는 서울특별시의 동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노원구, 도봉구,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남쪽은 성북구, 북쪽은 경기도 양주시, 도봉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울의 외곽 지역이다. 지형적으로는 서부산지, 중앙저지, 동부산지로 구분되며 서부의 산지는 태백산맥 철령 부근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달리는 광주산맥 지맥의 일부로 이 광주산맥은 서울 부근에 이르러 웅장한 산세를 이루게 된다. 지질은 중생대 말에 관입한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지표에 노출된 후 절리와 표면의 풍화작용으로 지금의 모습과 같이 산세가 험준하고 경사가 심한 암벽 봉우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인근에 북한산이 있고 시 외곽에 위치해 있으며 1990년 이후 강수량이 감소하면서 맑은 날씨의 일수가 증가하고 있다. 하절기에 강수량이 많고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몬순 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산지가 많은 강북구는 도심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서리와 눈을 많이 볼 수 있어 도심과 비교하여도 계절의 변화를 뚜렷이 느낄 수 있다. 강북구의 행정 구역은 미아동, 번동, 수유동, 우이동 4개의 법정동과 13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북구의 면적은 23.60km2로서 서울시 면적 605.21km2의 3.90%에 해당하며,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42,150세대, 346,493명이다. (도봉구) ← 수유역 - 미아역 - 미아사거리역 → (성북구) 북한산우이역 - 솔밭공원역 - 4.19민주묘지역 - 가오리역 - 화계역 - 삼양역 - 삼양사거리역 - 솔샘역 → (성북구) 도선사 마애불입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호 도선사 석 독성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2호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 - 등록문화재 제40호 서울 이준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4호 서울 손병희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5호 서울 이시영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6호 서울 김창숙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8호 서울 신익희 묘소 - 등록문화재 제520호 서울 여운형 묘소 - 등록문화재 제5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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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C%B9%B4%EC%95%BC%EB%A7%88%20%EB%AF%B8%EB%A3%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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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야마 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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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야마 미루은 타카야마 미루(,1981년 2월 16일 -)는 일본 도쿄도 출신의 가수로, 본명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레코드 회사는 워너뮤직 재팬(WARNER MUSIC JAPAN) 사무소는 리틀스테이션(Little Station) 소속이다. 애칭은 미루양(), 미루미루(), 미루쨩())이다. 타카야마 미나미()의 사촌동생이라는 관계로 1997년경부터 TWO-MIX의 스튜디오를 견학하게 된다. 동시에 아르바이트 하면서 보컬 레슨을 받기 시작해, TWO-MIX 신곡 데모 테이프 녹음 때 타카야마 미나미의 대역으로서 나가노 시이나()로부터 가노래를 부탁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TWO-MIX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었다.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타이업의 프레젠테이션에 그녀 스스로가 사용하기 위해 쓴 곡이 훌륭하다고 판단받자 갑작스런 데뷔가 정해졌다. 1999년에 〈엔터테인먼트 노선〉의 실현이라는 이름 아래 사무소 〈Little Station〉에 소속하면서, 5월에 워너뮤직재팬으로부터 《타카야마 미루 with TWO-MIX》명의로 데뷔했다. 무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곡 발매의 공지 포스터를 작성하는 등 선전 활동을 대대적으로 행한 결과, 오리콘 차트 최고순위 20위를 기록하였다. 데뷔 당초의 캐치 카피문구는 〈디지털리스트 download(태어나다)〉였으나 어디까지나 TWO-MIX의 음악 활동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TWO-MIX 팬들에게는 많은 호평을 받지 못했다. 제공된 악곡의 대부분은 본래 TWO-MIX 명의로서 발매해야 할 악곡, 혹은 과거의 TWO-MIX의 커버였기 때문에 “타카야마 미루의 특색이 나타나지 않는다”, “TWO-MIX와 똑같이 들린다” 등의 비판이 있었다. 또 TWO-MIX의 음악성의 흐름 안에서 충분한 육성기간을 거치지 않고 급거 데뷔했기 때문에 가창력 자체에 대해서도 “서투른 아이돌 가수보다도 떨어진다”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2000년에는 타카야마 미나미와 기간 한정 유닛 〈M★TWO-MinaMiru-〉를 결성하여, 싱글 1장, 앨범 1장을 발표하였다. 이것에 대한 팬으로부터 어려운 의견을 받아 Little station의 홈페이지 상에서 프로듀서인 나가노 시이나가 “TWO-MIX는 미루에게 차갑다고 하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왔다. 자신이 왔던 것이 역량 부족이라고 말해지면 슬프다” 라고 자신의 역량 부족을 정면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새로운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유닛 활동을 종료한 후, 스스로의 희망으로 미국으로 유학가기 위해 가수 활동을 중단하고 현재 재개의 목표는 서지 않아서, 팬도 이것을 사실상의 은퇴라고 인식하고 있다. 2000년에 결성된 타카야마 미나미(TWO-MIX)와 타카야마 미루의 여성 2인조 기간한정 유닛. JUSTICE~Future Mystery~ (1999년 5월 12일,WPD7-10006,wea/WARNER MUSIC) ※요미우리TV,일본TV계 애니메이션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오프닝 테마. RHYTHMIC YOUTH (1999년 11월 10일,WPC7-10038,wea/WARNER MUSIC) ※TV 도쿄계 퀴즈 프로그램 「퀴즈 홍치청치」엔딩 테마. ※TV 도쿄계 애니메이션 「자폭군」엔딩 테마. Single&Single (2000년 3월 23일, WPC7-10043, wea/WARNER MUSIC) ※M★TWO-MinaMiru- 명의이지만, 실질상 타카야마 미루 명의의 앨범이다. 타카야마 미루의 가마쿠라·쇼난 데이트 장소 홀로 여행 (NACK5 /1999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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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아브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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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르아브르 (영화)이 궁금해요.
<|assistant|> 르아브르 (영화)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르 아브르》(Le Havre)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각본, 감독을 맡은 2011년에 개봉한 코미디 드라마 영화로, 앙드레 빌름스와 카티 오우티넨, 장피에르 다루생, 블롱댕 미겔이 주연을 맡았다. 프랑스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이민자 소년을 구하려는 구두닦이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핀란드 회사인 스푸트니크와 프랑스, 독일에 공동 제작사들과 함께 제작되었다. 1992년에 개봉한 《보헤미안의 삶》 이후로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두 번째 프랑스어 영화이다. 2011년 칸 영화제 경쟁작으로 출품되어 첫 상영을 하였고, 국제 영화 비평가 협회 상을 받았다. 카우리스마키는 이 영화로 항구 도시의 삶을 다루는 트릴로리 세 편 중 첫 번째 작품으로 시작하였다. 그의 다음 소망으로는 스페인과 독일에서 각각의 지역 언어로 촬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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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선진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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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천선진리성에 대해 알려주세요.
A: 사천선진리성은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일제강점기때 1936년 5월에는 고적 제81호로 지정됐으며, 그 후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으나 왜성이라는 이유로 1998년 9월 8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격하되었다. 사천선진리성은 사천읍에서 약 7km 서남쪽에 위치한 평산성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조창이 설치되어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창 터에 왜성을 쌓아 주둔하였고, 뒤이어 정유재란 때 성주변에서 일본군과 조명연합군의 큰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성 주변은 선진공원으로 정비되었고, 일부는 농지로 변해있다. 두 차례의 시·발굴조사에서 왜성의 성벽(석원)이 확인되었으며, 500×600cm의 북곽이 딸린 ‘ㄱ’자 형태의 천수각과 폭 150cm의 문설주가 설치된 왜성 문지(호구), 주거지 2기, 수혈 70여기가 조사되었는데 목책열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와편이 주류를 이루고 문양은 무문양, 사격자문, 복합문, 어골문 등이 시문되어 있다. 고려 시대 초기 남도수군의 조창중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있어 이 지역은 통양포 또는 통조포로 불렸으며 조창을 방어하기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통조포로 지명이 굳어졌고, 조창은 통양창(通洋倉)으로 개명되었다. 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가 출몰하자 조세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으며 통양창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는 토성 주변에 왜성을 쌓았고, 요시히로, 다다쓰네 부자가 성의 수비를 맡았다. 이 사천선진리성 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조 25년(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적선 13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하나는 선조 31년(1598년) 동일원이 이끄는 3만의 조명연합군이 전시 중 오발로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연합군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틈을 노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8천의 일본군이 성을 나와 역습하였고,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내며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7,8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조명연합군의 병력이 3만여 명임을 들어 아마 이전까지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수를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숙종 때에 진보가 설치되어 수군이 주둔하였고, 해안을 방어하였다. 또, 영조 36년(1760년) 진주에 설치된 가산창의 방어 임무와 호위를 맡은 능노군, 포수, 화포수, 사궁으로 이루어진 군이 주둔하였다. 구한말인 1895년 통제영을 비롯한 모든 군영이 해체될 때 선진리성에 설치된 진보도 해체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18년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성을 매수 또는 기부받아 공원으로 정비하고 그 위에 조상을 기리는 석비를 세웠다. 하지만, 해방후 석비는 마을 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 1978년 공원 내에는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가 세워졌으며 현재 시마즈 가문이 세웠던 비석 터에는 한국전쟁중 순국한 공군장병의 위령비인 충령비가 세워져 있다. 1936년 고적 81호에 지정된 뒤, 1963년 사적 50호로 지정되었고, 끝으로 1998년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사천 조명군총 - 경상남도 기념물 제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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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9D%B4%EC%9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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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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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파이어을 다룹니다. 파이어는 다음을 의미한다. 파이어(fire)는 불, 발사 등을 뜻하는 영어 낱말이다. 파이어(pyre)는 장작더미를 의미한다. 위 의미 외에 다른 뜻으로는 다음이 있다. 아케이드 파이어: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출신 인디 록 밴드 랩소디 오브 파이어: 이탈리아의 메탈 밴드 《Fire》 - 리오나 루이스의 2015년 노래 파이어 OS: 아마존의 안드로이드 기반 운영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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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3%B0%EB%8B%A4%EC%9D%B4%EB%9D%BC%20%EC%9A%94%EC%8B%9C%EB%A7%88%EC%82%AC%20%281651%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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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요시마사 (16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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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마쓰다이라 요시마사 (1651년)은 무엇인가요?
<|assistant|> 다음은 마쓰다이라 요시마사 (1651년)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쓰다이라 요시마사(, 1651년 ~ 1713년 7월 12일)는 무쓰 야나가와 번의 초대 번주이다. 어릴적 이름은 지로타()이며, 초명은 요시노리()이다. 관위는 종5위하, 이즈모노카미()에서 종4위하, 사쇼쇼()이다. 오와리번 제2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토모의 서장자로 태어났다. 태생이 측실의 자식이었으므로 나중에 정실로부터 태어난 동생들 도쿠가와 쓰나노부, 마쓰다이라 요시유키에 밀려 셋째 아들이 되었다. 1683년, 아버지로부터 3만 석 영지를 분봉받아 오와리 번의 지번인 야나가와 번을 세워, 조카마치 건설과 관리 제도 정비, 개간 사업, 토지 조사 등을 시행하며 번 통치에 힘썼다. 1713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요시카타가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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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9%BC%EB%A0%88%EB%B0%9C%EC%8A%A4%ED%82%A4%20%EB%82%98%EC%B9%98%EC%98%A4%EB%82%A0%EB%8B%88%20%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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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발스키 나치오날니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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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발스키 나치오날니 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칼레발스키 나치오날니 군()은 카렐리야 공화국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로우흐스키 군, 켐스키 군, 무예제르스키 군에 접해 있고, 코스토묵스키 시소베트와 핀란드에 접해 있다. 면적은 13,3km2이다. 이 지역의 특색은 풍부한 저수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 합치면 그 수는 수천에 달한다. 저수지들이 6분의 1을 차지하고 그 중 50개의 큰 호수와 13개의 강이 포함되어 있다. 배가 통행할 수 있는 수로들의 길이는 총 185km이며, 지역 영토의 30%는 습지이다. 본 지역은 몰레브덴, 철광석, 규암, 구리, 이탄등의 자원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지역의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숲이다. 몰리브덴, 철광석, 규암, 구리, 이탄 등의 자원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숲이다. 이 지역의 인구는 11만3,000명이다. 그 중 도시권 인구는 5만3,000명이고, 시골 인구는 6,000명이다. 인구 밀도는 1km2당 0.8명이다. 가장 큰 주거지는 중심지인 칼레발라와 보로보이, 노보예 유시코제로이다. 칼레발스키 행정부에서 보고한 2005년초 인구는 다음과 같다. 인구의 민족 분포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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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B%AF%B8%EA%B3%A1%EC%84%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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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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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장미곡선은 무슨 내용인가요?
<|assistant|> 다음은 장미곡선에 대한 설명입니다.
장미곡선이란 수학에서 극좌표에 그려진 사인곡선을 말한다. 극좌표 등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가 정수일 때는 다음과 같은 상황으로 나뉜다. 짝수일 때는 개의 꽃잎이 생긴다. 홀수일 때는 개의 꽃잎이 생긴다. 가 짝수일 때는 의 값이 0에서 까지 변하면 전체 곡선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 홀수일 때는 의 값이 0에서 까지 변할 때 전체 곡선이 그려진다. 가 유리수일 때는 곡선은 유한의 길이에 의해 닫힌다. 가 무리수일 때는 닫히지 않으며 길이가 무한이다. 곡선은 극좌표 등식이 정의한다. 는 바퀴를 제외하고는 동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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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D%95%98%EB%A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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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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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바하마에 대해 알려주세요.
<|assistant|> 바하마은 바하마 연방(), 줄여서 바하마()는 북대서양 루케이언 제도에 있는 섬나라이다. 영어가 공용어이며, 29개의 주요 섬과 661개의 작은 섬(cays), 2,389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총 면적은 14,000 km2이며, 인구는 33만 명이다. 영국 연방 왕국의 구성원이며,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 찰스 3세이고 수도는 나소(Nassau)이다. 미국, 쿠바와 가까운 편이며 국토의 대부분이 버뮤다 삼각지대 안에 위치한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때 산살바도르섬에 정착한 것이 기원이다. 그해에 스페인인들이 섬을 자기 땅이라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착하는 대신, 그곳에 살고 있던 루카요 인디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영국인들이 1600년대에 정착하였는데, 그 후반에 스페인이 정착지를 공격하였다. 1717년 영국이 바하마를 식민지로 삼았다. 1800년대 중반에 해운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바하마는 북군의 미국 남부 항구 봉쇄를 파괴하는 배들을 위한 기지로 쓰였다. 전쟁이 끝나자, 바하마의 경제가 쇠퇴하였으나 100년 후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섬들에 오기 시작하면서 다시 번창하였다. 1973년 7월 10일 325년간의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하였다. 바하마는 미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비미니는 미국과 가장 가까운 섬이며 미국에서 바하마로 가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아바코 제도는 그랜드바하마섬의 동쪽에 있다. 남동부의 끝에는 바하마 제도가 있다. 그 외에 유명한 섬으로는 안드로스섬, 캣섬, 롱섬, 산살바도르섬 등이 있다. 이 중 산살바도르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최초로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바하마의 수도인 나소는 뉴프로비던스섬에 위치해 있으며 바하마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섬은 안드로스섬이다. 바하마의 기후는 아열대 기후 혹은 열대 기후로 볼 수 있는데 멕시코만의 해류로 인해 겨울에도 따뜻한 편이다. 해발고도는 10m 정도이다. 반대로 섬 근처로 허리케인이 접근하기 때문에 여름과 가을에는 매우 위험하다. 1992년에는 허리케인 앤드루가 바하마 북부를 강타했으며 2004년에는 허리캐인 프랜시스가 바하마 전체에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허리케인이 올 때 강한 파도가 일면서 해일을 일으켜 그랜드바하마섬에서는 집과 학교가 파괴되었고 묘지가 침수되는 등 피해가 났다. 바하마 서부에 거주하던 1,000명 이상의 사람이 집을 잃었다. 인종 구성은 바하마 인구의 대부분인 흑인이 85%, 백인이 12%, 혼혈 및 기타 인종이 3%이다. 종교는 침례교 32%, 성공회 20%, 로마 가톨릭교회 19%, 다른 개신교 12%, 기타 2%, 무종교 또는 무신론이 3%이다. 사용 언어는 공용어인 영어 외에도 아이티로부터 오는 이민자들 사이에서 크리올어가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도 사용되고 있으며, 쿠바출신의 이주민들 사이에서는 스페인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거의 80%가 영국의 영향을 받아 영어로 정식 공용어 로 사용하고있다. 수도는 나소이다. 20여개 이상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광업과 농업이 주요 산업이며, 많은 바하마인들은 관광에 관련된 비지니스에 종사하고있다. 그 외 15% 가량이 금융업에 종사하며, 2% 이하의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감귤류, 바나나, 파인애플 등을 재배한다. 바하마의 문화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바하마는 미국이나 쿠바 등지의 문화도 섞여있기도 하다. 이 나라는 영국 연방 입헌군주제이며, 총리의 실권은 강력하다. 모병제를 실시 하고있다. 대한민국과는 1985년 수교하였으며 주미국 대한민국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1991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수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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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E%91%EC%97%94%EC%83%A4%EC%9D%B4%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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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엔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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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랑엔샤이트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ssistant|> 랑엔샤이트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랑엔샤이트 출판그룹(Die Langenscheidt Verlagsgruppe)은 1856년 독일에서 시작한 국제적 출판 기업으로서, 외국어 사전이 주요 품목이다. 지금은 지식, 여행 등으로 기반을 넓혔다. 랑엔샤이트는 1956년부터, 노란 바탕에 파란색 대문자 "L"로 이루어진 상표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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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B%A1%9C%EB%8B%A4%20%EB%82%98%EA%B0%80%EB%A7%88%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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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나가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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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구로다 나가마사에 대해 알려주세요.
A: 다음은 구로다 나가마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구로다 나가마사(, 1568년 12월 21일 ~ 1623년 8월 4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 다이묘이다. 1568년 12월 21일 하리마국 히메지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로다 요시타카이며, 어머니는 하리마국 시카타 성의 영주 구시하시 분고노카미 고레사다()의 딸 데루이다. 요시타카는 하리마 국 중에서 단지 히메지 성만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 하리마 국 동쪽에서는 노부나가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노부나가의 정적인 아키(安芸)의 모리 데루모토가 자리잡고 있었다. 요시타카는 하리마 국의 대리인으로서 노부나가에게 신종하였는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1577년 10세의 나가마사를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냈다. 인질이 된 나가마사는 기노시타 도키치로에게 맡겨져 오미 나가하마성에서 성장하였다. 1580년 아버지 요시타카가 셋쓰국의 아라키 무라시게의 꾀임에 넘어갔다가 내통죄로 몰려 감금당하자, 노부나가는 요시타카를 죽일 것을 명령하지만 살해를 맡았던 다케나카 시게하루는 노부나가를 속이고 나가마사를 자신의 영지인 미노국 내에 숨겨주었다. 나가마사는 1582년 히데요시의 편에 서서 처음으로 전투에 출진하였는데, 공을 세워 가와치국에서 첫 영지를 받았다. 다음 해에는 시즈가타케 전투, 1584년에는 네고로·사이카의 난 등에서 승리하여 영지가 2천석 증가하였고, 1587년에 있었던 규슈 공격에서는 아버지 요시타카와 함께 분고·휴가 방면을 공격하였다. 그 공으로 요시타카 부자는 부젠국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나가마사는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 지금의 기장군 일대에 《기장 죽성리왜성》을 축조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토히메와 이혼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에이히메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였고, 그 공으로 지쿠젠국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 등 도요토미 씨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고 있다가 오사카 전투에서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혐의를 받아 에도에 억류되었다. 결국 나가마사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여러 아들들을 에도에 인질로 보내야만 했다. 그 후에는 막부의 다양한 관리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였는데, 혼다 마사노부, 혼다 마사즈미, 안도 나오쓰구, 도이 도시카쓰, 도도 다카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1623년 8월 4일 56세의 나이로 숨졌다. 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한 이후 다이묘들은 휴가를 얻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지만 나가마사와 가토 요시아키는 에도에 계속 머물렀다. 나가마사는 도이 도시카쓰와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에도에서 여러 노력을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안도 시게노부의 불신을 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이를 빗대어 "이번에는 꼬리가 보이는군" 하며 빈정대었다. 1619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히로시마성을 무단으로 수축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금이야말로 행동을 조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이므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미 후미히코 씀, 한은미 옮김, 《2천년 일본사를 만든 일본인 이야기》 (2003년), 이손사, 《군사 칸베에》 (NHK, 2014년, 배우:마츠자카 토리) 호시나 마사사다 - 나가마사의 계실 에이히메의 친동생으로 나가마사의 처남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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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7%BC%ED%8C%BD%20%EA%B5%AD%EC%A0%9C%20%ED%94%BC%EC%95%84%EB%85%B8%20%EC%BD%A9%EC%BF%A0%EB%A5%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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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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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ssistant|>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은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는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인 프레데리크 쇼팽을 기념하여 1927년에 제1회가 개최된 피아노 경연 대회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대회의 하나로,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등용문이라 일컬어진다. 쇼팽의 고향인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5년에 한 번씩, 쇼팽의 기일인 10월 17일 전후 3주에 걸쳐 개최되며 과거의 입상자 명단을 보면 세계의 거장과 이름이 겹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개최가 중단되었다. 연주 곡목은 쇼팽의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 연령 제한은 17~28세이다. 참가 피아니스트들의 취향에 따라 스타인웨이, 뵈젠도르퍼, 파지올리, 야마하, 가와이 중에서 선택하여 연주할 수 있다. 제5회까지의 우승자는 소련, 폴란드 출신자로만 점철되었으나, 1960년에 이탈리아의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심사위원장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에게서 “(기술 면으로는) 우리 (심사위원)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뛰어난 실력으로 우승한 이후, 서양 각국의 나라에서도 우승자가 나오게 되면서 현재의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세계에서 정점에 설 만한 재능을 세상에 펼쳐보이고 있다. 제1회 콩쿠르 당시에는 소련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참여했다. 그가 2위로 입상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4위까지의 공식 입상자 리스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그는 명예상을 받았다. 이 콩쿠르는 주목도가 높은 만큼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제5회 때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2위를 한 것에 분개한 미켈란젤리가 심사위원을 사임하겠다고 하는 소동이 있었다. 제10회에서는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를 두고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나뉘어, 제1차 예선을 통과한 것에 항의하며 루이스 켄트너가 심사위원을 사임하고, 그 이후 3차 예선에서 포고렐리치가 떨어진 것에 반발한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화가 나 심사위원을 사임하는 대소동이 일어났다. 개릭 올슨과 제프리 스완이 경쟁하게 된 제8회에서는 스완이 의도적으로 제3차 예선에서 낙선당하고 회장 앞에서 항의 전단을 돌리는 사태까지 전개되었다. 1942년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으며, 7년후인 1949년에 개최하게 되었다. 2005년의 제15회 콩쿠르에서는 응모자 333명 전원의 신청을 접수하여 바르샤바에서 예선전이 펼쳐졌다. 80명의 본선 진출자 중 20명이 폴란드인, 20명이 일본인이었다. 한국의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본선에서 연주 도중 피아노 안에 조율 도구가 그대로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1악장을 끝낸 후 일단 연주를 멈추고, 점검 후에 다시 연주를 재개했다. 2010년의 제 16회 콩쿠르에서는 심사위원 중 한 명이 특정 참가자에게 점수를 많이 주는 등 편파 심사를 하여 점수표를 공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2015년 제 17회 콩쿠르에서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우승. 제 9회 콩쿠르 우승자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그의 연주를 듣고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듣지도 않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조성진이 우승할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필리프 앙트르몽이 우승자 조성진에게 결선에서 10점 만점에 1점을 준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동아닷컴 “임동민-동혁 형제 폴란드 쇼팽콩쿠르서 ‘2위없는 공동3위’” 천지일보 "‘한국인 최초 우승’ 피아니스트 조성진, 국제 대회 쇼팽 콩쿠르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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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AD%ED%81%B4%EB%A6%B0%20%ED%94%BC%EC%96%B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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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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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프랭클린 피어스은 어떤 대상인가요?
A: 다음은 프랭클린 피어스에 대한 설명입니다.
프랭클린 피어스(, 1804년 11월 23일 ~ 1869년 10월 8일)는 미국의 14번째 대통령(1853~57)이다. "친남부적인 북부인"으로 알려진 그는 미국의 하원·상원 의원을 지냈고, 멕시코 전쟁에서 준장으로 복무하였다. 대통령 재임 중에 노예 제도에 대한 북부와 남부의 분쟁을 말리지 못하여 후에 남북전쟁의 원인을 가져왔다. 뉴햄프셔주의 힐스보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벤저민 피어스는 미국 독립 전쟁에 복무하였고, 후에 국민군의 준장이 되었다. 또한 두번이나 뉴햄프셔주 지사를 지냈다. 어린 프랭클린 피어스는 6명의 형들, 2명의 동생들과 누이들과 함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세 때에 소년으로서 핸콕 근처에 있는 학당에 보내졌다. 1년 후에는 프랜스타운에 있는 학당으로 옮겼다가, 후에 필립스 엑스터 학당으로 전학을 갔다. 1820년 보든 대학교에 입학하여 나다니엘 호손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대학의 생활을 사회 운동들에서 보냈다. 2년째의 해 말기에 프랭클린의 점수가 자신의 반에서 가장 낮았다. 그러고나서 공부하기로 결심하였고, 반에서 3등을 하여 1824년 졸업하였다. 피어스는 뉴햄프셔주 지사 리바이 우드버리의 아래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재판관 새뮤얼 호와 에드먼드 파커 아래에서 공부하였다. 1827년 피어스는 콩고드에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피어스는 앤드루 잭슨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지지하였다. 1829년에는 뉴햄프셔 주의 하원 의원이 되었다. 2년 후 재선되었고, 하원의 연설자가 되었다. 1833년 피어스는 미국 하원 의원 석을 얻었고, 2번의 임기를 재낸 후에 미국 상원에 선출되었다. 32세 때에 그는 연소자 상원이 되었다. 그는 의회 생활을 불행하게 보냈다. 1834년 조합 교회의 목사를 지낸 보든 대학교 학장의 딸 제인 애플턴과 결혼하였다. 제인 여사는 결핵에 걸렸고, 워싱턴 D.C.를 싫어하여 거기에 가는 것이 드물었다. 결국 프랭클린 피어스는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희망에 동의하여 1842년 상원직을 사임하였다. 1846년 멕시코 전쟁이 시작되자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피어스를 미국 육군의 대령으로 임관하였다. 1달 일찍이 피어스는 포크 내각에서 법무 장관으로 지내는 것을 거절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지 몇달 후에 피어스는 준장으로 진급되었다. 멕시코시티 원정에서 윈필드 스콧 장군 아래에서 복부하였다. 그는 추루부스코 공격에서 여단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신의 말에서 던져질 때 자신의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다음 날의 돌격에 돌아왔고, 적의 선에 가까이 오면서 자신의 부상당한 다리를 비틀어 아픔으로부터 활기를 잃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불 아래에 무력해지고 말았다. 정치적 반대자들은 후에 그를 겁에 고발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피어스는 콩코드에서 자신의 변호사 실습을 다시 시작하였다. 1852년에 열린 자신의 당 집회에 의하여 그는 뉴햄프셔 주의 지도력있는 민주당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절단들은 당의 모든 당파들에 받아들일 만한 대통령을 위한 후보를 선택하는 데 어려움과 마주쳤다. 4명의 가장 강한 후보들은 일리노이주 상원 스티븐 더글라스와 3명의 내각 장관들 - 제임스 뷰캐넌, 윌리엄 L. 마시와 루이스 캐스였다. 34회의 결정자 후보 선거 후에 호의적인 후보들이 지명에 이길 것이 아니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버지니아주에서 온 사절단들은 그러고나서 피어스를 후보로 지명하였다. 뉴잉글랜드 사람인 그는 북부의 어떤 성원을 기대하였고, 남부는 그가 1850년 타협을 성원하고 도망 노예법의 엄한 집행을 뒷받침한 이유로 그를 신임하였다. 결정자 후보 선거가 지속되면서 몇명의 뷰캐넌 사절단들은 피어스에게 방향을 바꾸어 그는 49번째 선거를 우승하였다. 집회는 앨라배마주의 상원 윌리엄 R. 킹을 부통령으로 선택하였다. 휘그당은 대통령에 윈필드 스콧 장군을 대통령, 해군 윌리엄 A. 그레이엄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1850년의 타협은 임시로 노예 제도 문제를 정착시키고, 두 개의 파로 나뉘고 말았다. 그러나 선거 운동은 스콧이 정말로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남부에서 그를 반대하는 원인이 생긴다는 폭로를 하였다. 피어스는 인기있는 투표로 다수를 얻어 대통령에 당성되었다. 피어스는 자신의 내각을 위하여 모든 당파들로부터 남자들을 선택하여 민주당에서 조화를 촉진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임명은 2명의 보수적 남부인 제임스 거스리(재무 장관)와 제임스 C. 도빈(해군 장관), 2명의 보수적 북부인 윌리엄 L. 마시(국무 장관)와 제임스 캠벨(우정 장관), 1명의 노예 제도 반대자 북부인 로버트 매클럴랜드(내무 장관), 국가 권리적 남부인 제퍼슨 데이비스(전쟁 장관)와 뉴잉글랜드 휘그당원 캘립 커싱(법무 장관)이었다. 킹 부통령은 몇달 동안 병을 앓아 사무실에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1853년 4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피어스의 백악관 생활은 부부의 비극적 분위기와 슬픔으로 시작되었다. 피어스 부부는 프랭클린의 취임식이 열리기 2달 전에 11세의 아들 벤저민이 철도 사고로 사망하는 것을 보았다. 제인 여사는 슬픔으로부터 쓰러지고 남편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임기 절반에 그녀는 윗층의 방에서 은둔하였다고 한다. 제인 여사의 이모 애비 켄트 민즈가 피어스의 대통령 임기의 첫 2년동안 백악관의 여주인 노릇을 하였다. 제인 여사는 결국 1855년 1월 1일에 열린 백악관 행사에 나타났고, 그 후로부터 국립 만찬에 자주 참석하였다고 한다. 1854년 1월 더글러스 상원은 자신이 희망한 경계 지방의 정착의 촉진 청구서를 소개하였다. 그 청구서는 2개의 영토들 - 캔자스와 네브래스카를 서부에 있는 인디언들의 땅으로부터 개척하는 데 제의하였다. 청구서는 새 영토들의 정착자들이 노예 제도를 찬성하느냐에 결정하는 데 마련되었다. 더글러스의 청구서는 1820년과 1850년의 타협에 의하여 설립된 쉽지 않은 노예 제도 휴전을 뒤집히는 데 위협하였다. 현명한 정치인들은 법률 따위에서 위험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당수들의 조언에 활약한 피어스는 청구서를 지지하였다. 그것은 1854년 5월 30일에 법이 되었다. 노예 제도 지지자와 반대자들이 영토를 통제하는 노력으로 캔자스에 쏟아들어왔다. 그들의 경쟁은 곧 무장 충돌로 나타나고 말았다. 캔자스 - 네브래스카 법령은 정당들의 폭력적인 재편성을 창조하였다. 민주당은 노예 제도에 존재적인 법률을 지켰다. 이미 지방주의에 의하여 약해진 휘그당은 분열되었다. 이 일은 공화당과 아메리카당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1853년 피어스는 하와이 제도를 합병하는 데 주창하였다. 이 계획은 국왕 카메하메하 3세가 사망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해의 개즈던 매입은 국가에 남부의 철도가 태평양 해안으로 향하는 길을 주었고 멕시코와 함께 경계적 의문을 정착시켰다. 피어스의 주장에 상원은 1854년 일본과 통상 조약을 승인하여 일본을 미국 무역 이익을 열었다. 피어스의 노예 제도 분쟁의 조종은 자신의 정치적 유용을 파괴시키고 말았다. 뷰캐넌의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후, 피어스 부부는 제인 야사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데 효과없는 시도로 국외에 나갔다. 부부는 마데이라 제도에서 2년을 보내고 유럽을 방분하고 나서 귀국하였다. 제인 여사는 1863년 12월 2일에 사망하였다. 피어스는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격심한 비평가였다. 그는 링컨이 똑바른 지도력에 의하여 분쟁을 피할 수 있었다는 데 과하였다. 1869년 10월 8일 콩코드에서 향년 65세로 사망하여 올드 노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Allen, Felicity. Jefferson Davis, Unconquerable Heart. St. Louis, Missouri: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99. . Bergen, Anthony. (2010) "Pierce and the Consequences of Ambition" Boulard, Garry, "The Expatriation of Franklin Pierce—The Story of a President and the Civil War". (iUniverse, 2006) Brinkley, A. and Dyer, D. The American Presidency. 2004. Houghton Mifflin Company. DiConsiglio, John. Franklin Pierce. Vol. 14. New York: Children's Press-Scholastic, 2004. Gara, Larry, The Presidency of Franklin Pierce (1991), standard history of his administration Nichols; Roy Franklin. Franklin Pierce, Young Hickory of the Granite Hills (1931), standard biography Nichols; Roy Franklin.The Democratic Machine, 1850–1854. Columbia University Press, 1923. online version Potter, David M, The Impending Crisis, 1848–1861. New York, New York: Harper & Row, 1976. . Taylor; Michael J.C. "Governing the Devil in Hell: 'Bleeding Kansas' and the Destruction of the Franklin Pierce Presidency (1854–1856)" White House Studies, Vol. 1, 2001, pp 185–205 Franklin Pierce: A Resource Guide from the Library of Congress The Life of Franklin Pierce By Nathaniel Hawthorne State of the Union: 1853, 1854, 1855, 1856 Franklin Pierce and His Services in the Valley of Mexico The Health and Medical History of President: Franklin Pierce Essays on Pierce and each member of his cabinet and First Lady The life of Gen. Frank. Pierce, of New Hampshire, the Democratic candidate for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by D.W. Barlett Franklin Pierce at C-SPAN's American Presidents: Life Portraits Booknotes interview with Peter Wallner on Franklin Pierce: New Hampshire's Favorite Son, November 2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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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6%A1%20%EC%8A%A4%ED%8A%9C%EB%94%94%EC%98%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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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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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송 스튜디오이 궁금해요.
<|assistant|> 이 텍스트는 송 스튜디오을 다룹니다. 송 스튜디오는 프로듀서이자 베이시스트인 송홍섭이 1991년에 만든, 음반제작을 겸하는 녹음스튜디오이다. 지금은 이름만 남아 음반기획, 공연기획 을 하고 있다. 주요실적은 유앤미 블루 1,2집, 신윤철 2,3집, 삐삐밴드1,2,3 & 리메이크 등이다. 정식 명칭은 (주)송홍섭스튜디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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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2%AD%EA%B0%95%EB%AC%B8%ED%99%94%EC%82%B0%EC%97%85%EB%8C%80%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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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문화산업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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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이 궁금해요.
<|assistant|>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靑江文化産業大學校, )는 1995년 문화산업 특성화의 일환으로 설립된 대한민국 경기도 이천시의 전문대학이다. 국문 약칭으로 청강대(靑江大)로 표기하기도 한다. 교명은 학교 설립자인 이연호 회장의 호 청강(靑江)에서 교명이 유래되었다. 1998년 5월 : 청강문화산업대학으로 교명 변경 2009년 8월 : 학교기업 쿨투라 설립 2011년 12월 : 청강문화산업대학교로 교명 변경 2018년 : 교육부 대학기본역량진단평가 결과 역량강화대학 선정 및 조건부 일반재정지원 2018년 기준, 청강산업문화대학교의 학과 일람이다. 7개의 스쿨과 유아교육과로 편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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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PEACH-P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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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H-P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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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H-PIT은 PEACH-PIT은 센도우 반리()와 에바라 시부코() 이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여성 만화가 콤비로, 둘 모두 지바현 출신으로, 초등학교 때 만났다고 한다. 이 콤비는 남성향, 여성향, 소녀향 등 넓은 장르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참고로 콤비 이름인 PEACH-PIT은 복숭아 씨앗이라는 뜻으로, 캐릭캐릭 체인지 단행본의 Q&A 코너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질문의 답변으로 써넣었다. 전작품의 시나리오를 당담. 작화는 날카로운 느낌의 그림이 특징. 생일은 6월 7일. 단 것을 좋아한다. 이전의 펜네임으로〈브랜든박사(ブランドン博士)〉가 있다. 《DearS》《ZOMBIE-LOAN》의 메인 캐릭터를 작화, 《로젠메이든》의 일부 작화와 표지 디자인을 했다. 《캐릭캐릭 체인지》에서는 타다세,쿠카이,이쿠토,우타우 등을 담당. PEACH-PIT(복숭아 씨앗)의 PEACH(복숭아). 전작품의 이름을 담당. 작화는 부드러운 느낌이 특징. 생일은 6월 21일. 매운 것을 좋아한다. 이전의 팬네임으로〈딜런교수(ディラン教授)〉가 있다. 《로젠메이든》의 메인 캐릭터를 작화, 《ZOMBIE-LOAN》에서는 일부 캐릭터를 작화,《캐릭캐릭 체인지》에서는 아무, 나데시코, 야야, 수호캐릭터들 등을 담당. PEACH-PIT(복숭아 씨앗)의 PIT(씨앗). 복숭아 씨앗(もものたね) - PEACH-PIT on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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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9B%90%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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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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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로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윤원로(尹元老, 1502년? ~ 1547년 12월 26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이자 척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아들이자 윤원형의 형, 윤원량과 윤원필, 문정왕후의 동생이다. 대윤의 영수 윤임은 그의 아버지 윤지임과 8촌형제 간이 된다. 정치적으로 대립한 김안로와도 사돈간이 되는데, 김안로의 아들 김희와 중종과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의 장녀 김선옥은 그의 아들 윤백원과 결혼했다. 또한 그의 형 윤원량의 딸 숙빈 윤씨는 인종의 후궁이었다. 김안로의 사돈이면서 중종과는 처남매부간이자 인종의 처숙부이고 명종의 외숙부이자 중종의 딸 효혜공주의 사돈으로, 중종과는 이중 삼중 인척관계에 있었다. 1515년 장경왕후가 원자(훗날의 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1517년 윤원로의 누나가 왕비로 간택되었다. 1536년 감역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6품으로 승진, 갑작스러운 승진으로 대간의 논박을 받고 체직되었다. 1537년 좌사어로 근무할 때 사돈인 희락당 김안로(金安老)와 다투다가 파직, 여러번 대간의 논박을 받고 문외출송되었다가 유배되었다. 그 뒤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출하려다가 실패하자 관직에 복귀했다. 44년 윤임과 다투다가 파직·유배되었다. 중종이 죽고 1544년(인종 1년) 인종이 즉위해 윤임의 대윤이 득세하자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이후 그는 동생인 윤원형, 조카 윤춘년 등과 짜고 윤임을 축출할 계획을 세운다. 그해 군기시 첨정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풀려나 군기감첨정이 되었다. 국왕의 장례는 5월장이 원칙이었으나 문정왕후·윤원형·이기(李芑) 등과 함께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인종의 장례를 박하게 치르게 했다. 그해 7월 앞서 다시 윤임 등 대윤(大尹) 일파를 축출하려고 대윤 일파가 경원대군을 해치려 했다고 무고(誣告)했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柳灌)이 망언(妄言)을 조작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전라남도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풀려났다. 대윤의 윤임은 그와 9촌 숙질간이 된다. 그 뒤 을사사화로 윤임, 유관(柳灌), 유인숙 일파가 제거, 사사되자 석방됐다. 그 뒤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돈녕부도정에 이르렀으나 공신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1546년 동생 윤원형과의 정쟁에서 패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고, 배소에서 사사당하였다. 바로 상구와 관곽이 내려졌으나 사헌부 등이 이를 문제삼기도 했다. 이 일로 그의 아들 윤백원은 윤원형의 정적인 이량과 결탁하게 되었다. 정적인 김안로(金安老)와 사돈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김안로의 사촌 형 김안수의 딸이 동생 윤원형의 본부인이다.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은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 ? ~ 1531년)의 딸 김선옥(金善玉, 1531년 ~ ?)과 결혼했다. 며느리 김선옥은 김안로의 손녀였다. 조부 : 윤욱(尹頊, 1459 ~ 1485) 아버지 : 파산부원군 윤지임(坡山府院君 尹之任, 1475 ~ 1534) 어머니 : 전성부부인 전의 이씨(全城府夫人 全義 李氏, 1475 ~ 1511) - 이덕숭(李德崇)의 딸 형 : 윤원량(尹元亮, 1495 ~ 1569) 형 : 윤원필(尹元弼, 1496 ~ 1547) 작은누나 :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 ~ 1565) 남동생 : 윤원형(尹元衡, 1503 ~ 1565) 정부인 : 평창 이씨 이량(李亮)의 딸 장남 : 윤백원(尹百源, 1528 ~ 1589) 며느리 : 김선옥(金善玉, 1531 ~ ?) - 효혜공주와 김희(金禧)의 딸 손녀 : 윤개미치(尹介未致, ? ~ 1589) 장녀 : 윤애현(尹愛賢, 1534 ~ ?) 차남 : 윤천원(尹千源, 1539 ~ ?) 차녀 - 윤중현(尹仲賢, 1541 ~ ?) 3남 : 윤만원(尹萬源, 1545 ~ ?) 1985 MBC 조선왕조 500년 제4화 풍란 : 강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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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4%B5%EC%8A%A4%ED%82%A4%20%EB%8C%80%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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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스키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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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넵스키 대로이 궁금해요.
<|assistant|> 넵스키 대로은 네프스키 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번화가로, 네바강에 위치해 있다. 명칭은 '네바 강의 거리'란뜻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길들은 넵스키 대로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해군성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5km로 뻗어 있는 이 거리에는 호텔,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습한 늪지대였던 이곳은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거리에는 19세기에 건축된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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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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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F%AC%EC%9A%94%EC%8B%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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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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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러요시이 궁금해요.
<|assistant|> 러요시은 러요시(Lajos)는 헝가리어 이름이다. 러요시 1세(1326-1382)는 헝가리와 폴란드 왕국의 왕이다. 러요시 2세(1506-1526)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의 헝가리 왕국와 보헤미아 왕국의 왕이다. 모하치 전투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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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RT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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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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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RTVideo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ssistant|> RTVideo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RTVideo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커뮤니케이션즈 서버 2007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커뮤니케이터 2007 클라이언트의 기본 비디오 코덱이다. RTVideo는 비표준-독자적 코덱이다. RTAudio와 마찬가지로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야 한다. 패킷 손실을 감안하여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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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C%EB%8C%80%EC%9D%98%20%EC%84%9C%EC%96%91%20%EA%B3%A0%EC%A0%84%20%EC%9D%8C%EC%9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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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서양 고전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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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근대의 서양 고전 음악은 무엇인가요?
<|assistant|> 다음은 근대의 서양 고전 음악에 대한 설명입니다.
근대의 서양 고전 음악이란 대체로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과 20세기 초의 20년 동안 합계 30년에 이르는 동안의 음악을 가리켜 말한다. 이 기간의 음악에서 두드러진 두 가지 경향만을 살펴보면, 19세기 후반의 유럽 음악은 바그너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고 있었으나, 여기에서 탈피하려는 시도가 작곡기법의 면에서는 종전의 조성음악(調性音樂)으로부터 비조성음악을 출현시킨다는 근본적 전환을 가져왔다. 독일의 작곡가보다는 바그너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드뷔시의 개혁, 인상주의의 창시는 특히 뛰어났으며 영향력도 컸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반(反)낭만주의 운동으로서의 베리스모도 주목할 대상이다. 낭만파에서 현대로 연결되도록 하는 과도적인 음악을 살펴볼 때 특징적인 것은 민족주의의 나타남이다. 민족적 요소를 중시하는 사상은 원래 낭만파의 발상 중의 하나이나, 음악사에서는 후진제국, 아메리카,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슬라브계 각국 음악의 자각을 전제로 하여 갑자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계의 작곡가로서 근대음악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동시에 후기낭만파 최후의 대표자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볼프, 말러, 피츠너, R.슈트라우스, 레거 등을 들 수 있다. 그들로부터 쇤베르크에 이르는 길은 유럽 음악사의 한 주류로 볼 수 있다. 즉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적 기능화성의 체계가 최고점에 이른 뒤 붕괴하고, 기능화성법이라는 근본을 12음의 기법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을 말하며, 이 흐름이 순수기악보다도 오히려 오페라나 가곡 등 타율적 음악에 의하여 이끌려 왔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그들이 공통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바그너의 <트리스탄>의 반음계인데, 각 작곡가의 자질에 따라 볼프는 리트에, 말러는 칸타타풍의 오케스트라 반주가 있는 가곡으로, 레거는 바로크의 구성원리로 복귀하면서 주로 기악곡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보이고 있다. 빈 출신인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볼프, 레거와 함께 현대에의 과도기 속에서 진보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과도기에서 흔히 있을 수 있듯이, 특히 세대적으로 젊은 레거 등은 아직 충분한 검토롤 받지 못하고 있다. 말러는 주로 가창이 수반되는 교향곡과 가곡의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낭만파시대의 관현악곡은 리스트, 바그너, 브루크너를 따라 발전하면서 형식의 면에서는 대규모로 팽창하였지만, 브루크너의 제자인 말러의 작품에도 마치 전인류의 이상을 포함이라도 하듯이 퍼져 있다. 그러나 <제8교향곡>과 같은 방대하고 기념비적인 것이 되면 작곡가의 의지와 연주법이라는 실제적인 면 사이에 우선 모순이 나타난다. 그리고 낭만주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커짐에 따라 리스트나 브람스, 바그너 등의 작품에 깃들이고 있던 염세적 경향이 개인적 사정과 아울러 말러에게도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완전히 낭만파적 내용의 것이며, 형식은 보수적이나 세부의 텍스처(書法)나 관현악법은 매우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역시 빈 출신인 볼프(Hugo Philipp Jacob Wolf, 1860-1903)는 청년기에 직접 바그너의 음악을 체험한 뒤 평생을 두고 바그너를 존경하였다. 1888년 이후 유명한 '영감(靈感)의 연출'이라는 상태로 급격히 많은 가곡을 작곡하였고, 오늘날 그것들은 모두 높이 평가되고 있다. <메리케 가곡집>, <아이헤레돌프 가곡집>, <괴테 가곡집>, <스페인 가곡집>, <이탈리아 가곡집>, <미켈란젤로 가곡집>의 곡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는 한 시인의 시를 집중적으로 작곡하는 특징이 있다. 기법으로는 시의 내용이나 언어에 깊이 결부된 낭창법과 반음계법, 화성법 등에 매우 진보된 방법이 제시되었으며, 독일 리트나 바그너의 과거 스타일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한편 레거(Max Reger, 1873-1916)는 볼프나 말러보다 젊은 세대, 즉 쇤베르크나 스크랴빈의 세대에 속하여 브람스와 힌데미트를 잇는 작곡가이다. 그는 스승인 음악학자 후고 리만의 영향으로 절대 음악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정신적으로는 바흐를 통하여 바로크 음악에 접근하였다. 화성을 다성적으로 다루는 브람스의 기법을 계승하였으며, 또한 거기에 반음계적인 선을 우선적으로 나타내도록 하고 있다. 레거에 의하여 절대음악의 기법은 표제 음악이 개척한 분야에 매우 접근하였다. 불과 43세의 짧은 일생을 산 그는 후기에는 브루크너의 형이상학적 세계나 모차르트의 이상적인 음악세계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도 의미가 깊다. 17세기의 헨리 퍼셀 이후, 영국에는 특출한 대작곡가가 없었다. 18세기에는 헨델이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등이 중심이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유럽 대륙의 음악가들의 유력한 시장으로서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엽부터 서서히 영국 출신 작곡가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에드워드 엘가에 의하여 영국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하나의 정점에 이르렀다. 그는 영국에서 퍼셀 이후의 작곡가로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으나, 공정한 입장에서 볼 때 외국에서는 그토록 좋은 평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영국음악의 르네상라는 시기에 후기낭만파의 관현악법을 반영시키면서 크게 공헌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주요 작품은 교향곡, 서곡, 오라토리오, 변주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영국 음악의 대륙과의 교류는 우선 M.W.발프(1808-1870)나 W.워레스(1813-1865)와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작곡과 연주의 두 면에서 이루어졌으나, 여기에 계속해서 C.H.퍼리(1848-1918)는 옥스퍼드 대학 교수, 왕립음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또한 <그로브 음악사전>의 편찬에도 관여하여 영국의 음악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 퍼리와 같은 시기의 A.S.설리번(1843-1900)도 그로브에 협력한 한 사람으로, 작곡면에서는 대본작가 W.S.길버트와 협력하여 이른바 길버트 설리번 오페라를 많이 발표하여 영국 오페레타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작품으로는 <배심재판>, <군함 피나포어>, <미카도> 등이 있다. 베를리오즈에 의하여 프랑스에서 진정한 낭만파 음악이 수립된 데 자극받아 점차 프랑스의 독자적인 음악을 이룩하려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 하나의 흐름으로서 구노(1818-1893) 등에 의한 새로운 오페라 활동이 활발해졌고 독일 태생의 오펜바흐(1819-1880)는 <천국과 지옥> 등의 오페레타로 경쾌하고 절묘한 음악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한편 이탈리아와 독일의 오페라 붐의 영향을 받아 오래도록 지하에서 잠자던 가곡이나 기악곡의 작곡이 부활하였고, 동시에 그것들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 실내악단 등도 잇달아 창설되어 연주활동이 매우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그때까지 이탈리아 또는 독일음악에 거의 전면적으로 지배받았던 프랑스에서 프랑스 독자의 음악에 각성하게 되고, 마침내는 짙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바그너이즘을 불식하고 드뷔시가 인상주의 음악을 수립한다는 큰 흐름의 원천이 되었다. 더구나 드뷔시의 음악은 음악사에서의 '현대'의 개막으로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구노가 준 영향은 경시할 수 없다. 특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비제를 비롯해서 그 후의 많은 작곡가의 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다. 또 프랑크(1822-1890)와 그의 제자들은 독일의 영향을 받고는 있었으나 매우 밀도가 높은 음악적 구축물을 창조하였고, 랄로(1823-1892), 생상스(1835-1921) 등은 간결하고 알기 쉬운 표현 속에 프랑스적인 감각을 풍부히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활동내용은 생상스에 의하여 1871년에 설립되고 훗날 프랑크가 계승한 국민음악협회가 구호로 삼은 '아르스 가리카', 즉 '프랑스 예술'이라는 말 가운데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프랑크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듀파르크(1848-1933))나 쇼송(1855-1899)처럼 가곡의 작가로서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도 있으나, 대부분이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의 고전적 형식을 써서 작곡하였다. 샤브리에(1841-1894)는 랄로와 함께 색채적인 화성과 관현악법에 의하여 인상주의 음악의 선구를 이루었고 계속하여 비제(1838-1875)는 오페라 <카르멘>으로 프랑스의 독자성과 그의 개성을 명백히 하였다. 프랑스적인 표현을 위한 형식의 개척과 그 달성에서 공적이 있었던 사람들로는 가브리엘 포레(1845-1924)와 댕디(1851-1931)를 들 수 있다. 생상스의 가르침을 받은 포레는 단선성가와 16세기 교회 다성악의 수법을 써 독일 낭만파적 음악어법에 신선한 프랑스적 색채를 더하였다. 그의 가곡에 넘쳐흐르는 멜로디와 펼침화음이 수놓인 피아노곡은 그 고도의 시적 서정성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프랑크의 우수한 제자였던 댕디는 대구성의 교향시적 작품에 걸출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수많은 제자를 육성한 탁월한 교사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사람들이 개척하고 서서히 풍부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지니게 한 프랑스 음악이라는 토양 속에 훌륭한 꽃을 피우게 하여 독일, 오스트리아의 음악과 함께 세계의 높은 봉우리를 쌓아올린 사람은 포레의 제자이기도 한 드뷔시이며, 또한 수십 년 뒤의 라벨이라 하겠다. 19세기 전반에서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만네리즘과 저속화는 세계에서 이탈리아 음악의 명성을 실추시키고 확고한 힘으로써 대두한 독일 낭만파 음악에 그 왕좌를 물려줄 처지에 빠졌으나,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베르디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의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는 레퍼토리로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베르디(Giussepe Fortunio Francesco Verdi, 1813-1901)의 초기에 발표된 애국적인 오페라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정 아래 고생하며 독립을 갈망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의 오페라에서 중심인물은 주로 남성이며, 더구나 바리톤이 주역 성격을 띠는 수가 많다. 이것은 애국적인 테마를 지님과 동시에 그때까지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이라 하겠다. 그 뒤로 점차 대중의 요망인 애국적 테마에 중점을 두는 입장에서 벗어나 이른바 중기(中期)의 성숙된 작품,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운명의 힘>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1869년에는 카이로의 가극장 위촉으로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는 대가극 <아이다>를 발표하였다. 베르디는 바그너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바그너의 악극론은 극히 본질적인 문제로서 베르디의 오페라관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극과 음악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개의 등장인물의 성격을 리얼하게 그리고 전체의 앙상블을 중시하며, 종래의 이탈리아 오페라처럼 오케스트라를 단순한 화성적 반주로 다루지 않고 바로 극적 진행을 내용적으로 돕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수법으로서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인 그는 어디까지나 그침없이 이어 흐르는 멜로디를 소중히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이 잘 전달되어 성공한 작품으로 <오셀로>(1887)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셰익스피어, 실러, 뒤마, 위고 등 대작가의 작품을 수없이 오페라화하고 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것은 <오셀로> 이전에도 <맥베스>를 비롯하여 <헨리 4세>,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등 매우 많다. 이것은 거친 줄거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물의 심리에 깃든 뉘앙스나 극의 진행에 리얼리틱한 깊이가 있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이 오페라로서 성공한 중요한 원인으로는 그가 대작가의 작품까지도 반드시 무대작품의 경험이 풍부한 각색가에 의하여 개서된 오페라 대본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하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는 베르디 이후의 이탈리아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다. 베르디, 바그너와 함께 오페라의 3명인(名人)으로 불린다. 그의 음악은 가련한 선율로 청중을 유도, 관능에 호소하여 취하게 만든다. 대대로 음악가 집안이어서 푸치니는 5대째다. 그의 작품 중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이 자주 상연되고 있다. 입센이나 졸라에 의한 문학상의 리얼리즘 영향 아래 반(反)낭만주의를 내세워 '베리스모'라 칭하는 작곡가들이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레온카발로(1858-1919)의 <팔리아치>, 마스카니(1863-1945)의 <카바레리아 루스티카나>, 푸치니(1858-1924)의 <나비부인>, 조르다노(1867-1948)의 <안드레아 세니에>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작품으로는 베르디 등의 대가극에 비하여 약간 규모가 작으며 나약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낭만파 오페라에서 현대 오페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시도로서 그 문제의식과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일 낭만파와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에서는 기악이 부흥하였다. 즈간바티(1843-1914), 봇시(1861-1925), 마르투치(1856-1905) 등이 주요한 작곡가로서, 그들은 오래도록 잊혀져 있던 이탈리아의 전통을 재현하여 순음악으로 복귀한다는 목표를 지님으로써 그 활동을 두고 이탈리아 음악상의 르네상스라고도 했으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로의 달성은 20세기 초엽이 되어 레스피기나 그 밖의 사람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제로 창조한 음악은 이탈리아의 전통과는 상반하는 독일 낭만파 음악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근대에서 현대로 발전시킨 사람들이라 하겠다. 아메리카 합중국, 즉 미국은 역사가 짧기 때문에 유럽에서와 같은 통일적 낭만주의 운동은 없다. 적어도 19세기에는 작곡가는 물론 연주의 면에서도 유럽 음악가들에 압도되어 국민양식을 창조하는 거장은 없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노래는 점차 하인리히 등에 의하여 유럽풍의 작품소재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원주민은 아니나 역시 배타적인 사회에 대항해야만 했던 흑인들의 생활 속에 뿌리박고 있는 이른바 흑인영가(黑人靈歌)의 존재와 그 영향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스티븐 포스터(1826-1864)는 흑인영가를 소재로 뛰어난 가곡을 작곡하여 성공한 최초의 작곡가라 하겠다. 소박하면서도 외우기 쉬운 멜로디와 쉽고 서정성 풍부한 가사로 된 그의 노래들은 누구에게나 친근하여 세계 어디에서나 불린다. 포스터와 같은 시대의 고트샤룩(1829-1869)은 살롱 작곡가로서 유럽문화 우선의 풍조를 높였다. 그는 스페인풍의 화려한 작품 외에 남아메리카의 슬랭에서 음악적으로 자극을 받은 작품(반브라, 하바네라, 탱고 등)을 썼다. 오랜 기간을 두고 영국의 영향이 강하였던 아메리카 북동부 출신의 메이슨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선율을 써서 찬송가집을 만들었고, 또 출판활동에서는 독일음악을 우선시켰다. 그의 뒤에는 페인(1839-1906), 차드빅이 있다. 맥도웰(1861-1908)은 또 스코틀랜드계의 작곡가·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와 알게 되어 우선 파리와 독일에서 연마했으며 1888년 이후는 미국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작인 관현악곡 <인디언 모음곡>이나 피아노곡 <숲의 스케치>는 유럽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반영시키고 있다. 그 밖에도 레플러(1861-1935), 허들레이(1871-1937) 등이 후기낭만파의 작풍을 보이는 작곡가로 손꼽을 수 있다. 유럽의 시민혁명기에 있어서 봉건성을 타파하고 각 민족이 통일적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을 때 봉건적인 것과의 투쟁으로서 자유주의가, 또 개인의 감정이나 감각의 해방을 표현하는 낭만주의가 태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각 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유대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음악상의 국민주의가 강력한 사조로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국민주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중세 말에 이미 국민주의를 형성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등 이른바 선진국에 비하여 독일이나 동유럽 여러 나라의 후진국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각 민족이 전통적으로 자라온 민요나 춤곡 등을 중시하는 것이 그 주요한 특색이다.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도입하는 경우도 많으나 그것이 지니는 에너지의 바탕이 되어 있는 음악형식이나 여러 음악어법을 쓰기도 하고, 또 민요의 가사나 문학, 혹은 전설, 고담, 역사, 자연풍토, 민중생활 등을 소재로 하기도 하며 그 시대의 국민주의적인 새로운 문학을 제재로 자국어로 된 성악곡이나 오페라, 교향시, 모음곡 등의 표제음악을 작곡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융성은 그 때까지 음악문화의 번영이 중앙 유럽 중심이었음에 대해 주변의 각 민족 가운데에서 작곡가의 출현을 촉진시키고 바로 그것이 이른바 '국민악파'의 활약시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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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9A%EB%82%98%EB%AC%B4%20%28%EC%A2%8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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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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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벚나무 (종)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 벚나무 (종)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벚나무()는 장미목 장미과의 식물이다. 히말라야 지역이 원산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높이는 20m 정도이며 나무껍질은 자갈색으로 옆으로 벗겨진다. 수명은 60년 정도로, 짧은 편이다. 열매는 핵과(核果)로서 길이 6-8mm의 구형이며 6-7월에 적색에서 흑색으로 익는데, 이것을 버찌라고 한다. 잎은 어긋나며 길이 6-12cm의 난형 또는 난상(卵狀) 피침형으로 끝이 길고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양면에 털이 없으나 어릴 때에는 표면에 약간의 털이 있기도 하다. 봄에는 신록빛을 띄지만 여름이 될수록 푸르러지다가 가을에는 붉은색, 노란색, 갈색 등으로 색이 변한다. 4-5월에 연분홍색 또는 백색의 벚꽃이 피며 지름은 3cm 정도이고, 2-5개가 잎겨드랑이에 달려 산방 또는 총상꽃차례를 이룬다. 꽃자루는 길이 3-3.5cm로서 가늘고 털이 없으며 밑부분에 포(苞)가 있다. 꽃잎과 꽃받침 조각은 각각 5개이고 수술은 40개 내외이다. 그리고 꽃은 비교적 빨리 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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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E%AC%EA%B7%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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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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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다음 텍스트는 서재극에 관한 것입니다.
<|assistant|> 이 텍스트는 서재극을 다룹니다. 서재극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서재극(書齋劇)은 연극 용어이다. 서재극(徐載克, 1878 ~ ?)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유림이다. 서재극(徐在克)은 대한민국의 국문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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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2%85%EC%9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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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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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박종원을 다룹니다. 박종원은 다음 사람 등을 가리킨다. 박종원(1960~):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교육자 박종원(1969~): 대한민국의 공무원. 제2대 경상남도 경제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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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4%A4%EC%9D%B4%EB%A6%AC%EC%A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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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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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네이리즈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 이 텍스트는 네이리즈을 다룹니다. 네이리즈 (페르시아어:نیریز, Neyriz) 또는 니리즈 또는 나이리즈는 이란 남부 파르스주의 도시이다. 이름은 바크테간 호수와 그 구역에 대해 사용된다. 도시는 그 호수 연안에 위치하였지만 염호의 축소로 인해 이제는 남서쪽에 있다. 19세기에는 네이리즈의 사람들은 바비스였고, 1850년과 1852년 정부에 반란하였고 재앙의 결과를 낳았다. 이 도시의 첫이름은 나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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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5%B4%ED%88%AC%EB%A1%9C%20%ED%86%A0%EC%8A%A4%EC%B9%B4%EB%8B%88%EB%8B%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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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로 토스카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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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음 텍스트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 관한 것입니다.
A: 이 텍스트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을 다룹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1867년 3월 25일 ~ 1957년 1월 16일)는 이탈리아의 지휘자, 첼리스트, 작곡가이다. 20세기 최고의 클래식 음악 지휘자로 평가받고 있다. 188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19세 나이로 첼리스트 첫 데뷔하여 이탈리아 청년 고전 음악가의 위용을 뽐낸 그는 이후 1898년 이탈리아 밀라노 스칼라 음악극장 수석 지휘자, 190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지휘자, 1926년 뉴욕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거쳐, 1937년 NBC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지휘자이다. 심한 근시안인 그는 악보 전부를 정확하게 암기하기도 하였다. 명쾌한 리듬과 강렬한 음량 증감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현대적인 연주 양식을 확립시켰다. 독일의 푸르트뱅글러와 함께 지휘자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그는 극히 정확한 템포와 치밀한 합주, 박력있고 신선한 연주로 칸텔리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리카르도 무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등 후대 지휘자들의 해석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태어나, 9살 때 파르마 왕립음악원에서 첼로와 작곡을 공부하고, 1885년 순회 가극단의 첼로 연주자가 되었다. 오페라단 첼리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하였는데, 1886년 리우데자네이루 가극장의 첼로 연주자였을 때, 《아이다》를 대신 지휘하여 지휘자의 대타로 잠시 지휘봉을 잡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지휘자가 되었다. 토리노 오페라 극장, 파르마 오페라 극장 등을 거쳐 30대의 나이로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 '밀라노 라 스칼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이 극장에 있으면서 토스카니니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음악회의 악습과 페단을 모두 철폐하는 개혁을 하는 한편, 공연의 질을 높이고 신인 가수들을 발굴하는 일에도 열성을 쏟았다. 특히 작곡가 푸치니와의 오랜 친구 사이로 《투란도트》를 비롯한 그의 많은 걸작들을 초연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도 있으면서 엔리코 카루소, 안토니오 스코티, 넬리 멜바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과 공연을 하였으며, 1930년대에 들어서는 파쇼정권이 이탈리아에 들어서며 토스카니니는 무솔리니와 대립하게 된다. 공연을 보러 온 베니토 무솔리니가 토스카니니에게 파시스트 찬가를 요청하자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결국 무솔리니가 고집을 꺾었다는 일화도 있다. 파쇼로부터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미국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특히 NBC는 1937년에 그를 위해 각 악기들의 비르투오소들만 모인 올스타 오케스트라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일반 연주회는 물론, 라디오와 TV를 통한 폭넓은 방송공연까지도 하였다. 토스카니니는 NBC 심포니와 정열적인 활동을 펼쳐나가던 중 1954년 여름의 공연에서 가벼운 실신을 일으키고 은퇴하였다. 이후 그 해 10월에 레코딩 녹음을 끝낸 후 공식 활동을 그만두었다. 1957년 1월 16일 만 89세로 뉴욕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임종 직전 그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갑자기 허공에 지휘를 하기도 했다 한다. 그의 사후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년간 지휘자 없이 그를 추모하는 추모음악회를 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틀린 음이나 어설픈 음을 발견하면 '노! 노!'라고 불같이 호령을 하여 그의 목소리는 늘 쉬어 있었다 한다.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연주 중 화가 나면 시계나 집기를 던지는 일이 있었으므로 토스카니니의 한 팬은 그에게 연습때 차는 시계와 연주때 차는 금시계를 함께 선물하면서 연습용과 연주용이라는 표시를 했다 한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그에게 파시스트 찬가를 작곡해달라고 부탁하자 공연하다 말고 중간에 공연장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이런 토스카니니를 말리려고 사람들이 진땀을 흘렸다. 1926년에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을 연습하면서 "어떤 사람은 이 곡이 나폴레옹을 가리킨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히틀러, 또 어떤 사람은 무솔리니를 연상한다고 하는데, 내게 있어 이 곡은 단지 '알레그로 콘브리오'일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오로지 악보에만 충실할 뿐 그 밖의 낭만적 해석은 사양하겠다는 그의 음악 철학이 잘 드러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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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C%EC%B8%A0%EB%A7%8C%20%EC%9D%B8%EC%9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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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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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볼츠만 인자은 무슨 내용인가요?
A: 다음은 볼츠만 인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통계역학에서 볼츠만 인자(Boltzmann factor)는 온도 T에서 열역학적 평형상태일 때 여러 상태를 가지는 시스템에서 i-상태의 상대적인 확률결정된 가중 인자이다. 는 볼츠만 상수이고, 는 i번째 상태의 에너지이다. 두 상태 사이의 확률비는 볼츠만 인자의 비로 주어진다. 볼츠만 인자는 표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가 확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볼츠만 인자를 표준화시켜 확률로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한 상태에서 가지는 볼츠만 인자의 합 Z로 구하고자 하는 상태의 볼츠만 인자를 나누어준다.이 Z는 분배 함수라고 하며, 이 결과는 볼츠만 분포를 나타낸다. 볼츠만 인자로부터 각각 고전 입자에 적용되는 맥스웰-볼츠만 통계, 양자역학에서 보손에 적용되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페르미온에 적용되는 페르미-디랙 통계를 유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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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5%EB%AA%A8%EC%B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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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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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다음 텍스트는 익모초에 관한 것입니다.
<|assistant|> 익모초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익모초(益母草, )는 꿀풀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이다. 여름, 가을에 싹을 틔워 어느 정도 자라다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봄부터 급속히 성장한다. 물이 잘 빠지고 통풍이 잘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잘 자란다. 익모초는 어머니에게 이로운 풀이라는 뜻으로 어머니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이로운 풀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 원산이며 일본, 대만, 중국에도 서식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익명(益明), 충위자(茺蔚子) 등이 있다. 밭둑이나 길가의 빈터 등 전국 어디서나 절로 자란다. 키는 50~100 센티미터쯤 되는데 1 미터 넘게 자라는 것도 있다. 줄기는 네모지고 흰색 털이 난다. 뿌리에서 나는 잎은 달걀꼴인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거나 결각이 지며 꽃이 필 때는 없어진다. 줄기에서 나는 잎은 마주나며 세 개로 깊게 갈라진다. 갈라진 잎은 또 2~3개로 갈라지며 마지막으로 갈라진 한 잎은 선 모양이다. 7~8월에 자주색 꽃이 줄기 위쪽의 잎겨드랑이에서 핀다. 줄기를 둘러싸며 층층으로 달린다. 열매는 까맣다. 익모초는 체내 염증으로 인한 열을 식히고 어혈을 풀어주어 혈액 순환에 좋은 풀이다. 그래서 여성들의 생리통이나 생리불순에 효과가 있다. 생리불순으로 임신이 잘 안 되는 경우에 효과가 있고, 또 출산을 한 후에는 자궁 수축을 도와주어 약으로 쓴다. 여름 더위병 치료나 식욕 증진에도 효과가 있다. 또, 꽃에 꿀이 많아서 양봉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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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C%9E%84%EC%8A%A4%20%EC%9B%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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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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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제임스 웡은 무엇인가요?
<|assistant|> 제임스 웡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제임스 웡 (황예유)(James Wong)은 미국의 영화 제작자다. 1959년 4월 20일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10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로 거주지를 옮겼다. 엘카존밸리고등학교(El Cajon Valley High School)에서 글렌 모르간(Glen Morgan)을 처음 만났으며 이후 제임스 왕은 로욜라마리모운트 대학교(Loyola Marymount University)에 진학했으며 코미디 진흥 동아리에도 가입했다. 원래 제임스 왕은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있었으나 시네라마 돔(Cinerama Dome)에서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을 본 뒤부터 전공을 영화로 바꾸었다. 졸업한 뒤에는 샌디 하워드(Sandy Howard)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제임스 웡은 글렌 모르간과 함께 영화 각본을 만들었다. 제임스 왕은 글렌 모르간과 함께 반항(The Boys Next Door)의 각본을 만들었으며 그 뒤 제임스 왕은 ABC(American Broadcasting Company)의 범죄 드라마 Knightwatch의 스토리를 담당했다. 또 그 뒤 제임스 왕은 글렌 모르간과 함께 와이즈가이(Wiseguy), 커미쉬(The Commish), 21 Jump Street, Booker(21 Jump Street의 스핀오프) 등 스테펜 J. 칸넬(Stephen J. Cannell)의 많은 작품들에 참여하기도 했다. 제임스 웡과 글렌 모르간은 크리스 카르테르(Chris Carter)와 함께 공상과학드라마 X파일(The X-Files)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1995년. 제임스 왕과 글렌 모르간은 20th Century Fox Television에서 800,0000달러를 받고 4년간 TV 드라마의 줄거리와 프로듀싱을 담당했는데 이 기간 동안 둘은 Space: Above and Beyond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둘은 잠시 X파일(당시 4기) 제작에 다시 참여해 에피소드 Home(4기 2화)의 각본을 만들었다. 제임스 우옹은 글렌 모르간이 각본을 만든 에피소드 Musings of a Cigarette Smoking Man(4기 7화)을 통해 감독 경력도 시작했으며 둘은 크리스 카르테르의 새 드라마 Millennium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얼마 뒤 둘은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의 초자연 현상 드라마 The Others의 진행 프로듀싱을 담당하게 되었다. 2000년. 제임스 왕은 데스티네이션(Final Destination)의 감독을 맡았으며 글렌 모르간과 함께 각본도 만들었다. 그 뒤에는 리롄지(李连杰)가 출연한 더 원(The One), 글렌 모르간이 감독하고 크리스핀 글로베르(Crispin Glover)가 출연한 윌러드(Willard)(2003년판), 그리고 파이널 데스티네이션(Final Destination 3) 등의 총지휘를 담당하기도 했다. 2006년 하반기에는 글렌 모르간이 감독하고 제임스 우옹과 글렌 모르간이 함께 줄거리를 쓴 블랙 크리스마스(Black Christmas)(2006년판)가 나왔다. 그리고 제임스 왕은 테나 왕(Teena Wong)과 결혼했으며 3명의 아이가 있고 캘리포니아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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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3%84%ED%95%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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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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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이계한이 궁금해요.
<|assistant|> 이 텍스트는 이계한을 다룹니다. 이계한(李啓漢, 일본식 이름: 松本啓三마쓰모토 게이조, 1895년 3월 12일 ~ 1968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경찰 출신 관료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충청남도 당진군 출신이다. 1915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견습을 마치고 1916년부터 강원도 영월군에서 군서기로 일하다가 이듬해에는 경찰이 되어 경무총감부에서 경부로 근무했다. 함흥경찰서와 경무국 등을 거쳐 1921년에 도경부가 되었다. 1926년에는 도경시로 승진하여 평안남도 보안과장으로 발령받았다. 사상범을 취급하는 평남 보안과장으로 3년 동안 재직한 뒤 관계로 전직했다. 1929년에 평안북도 덕천군 군수가 된 것을 시작으로 총독부 군수로 근무했다. 평원군 군수와 1940년 강원도, 1942년 경기도의 참여관을 거쳐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중추원 참의에 올랐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임원을 맡기도 했다. 1934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1935년 기준으로 정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검거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노덕술과 함께 공소기각 판결을 받아 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도 참여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경시의 4개 부문과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중추원, 관료, 경찰 3개 부문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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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4%91%EB%A6%BC%20%28%EC%8B%9C%EC%9D%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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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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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김광림 (시인)은 무엇인가요?
<|assistant|> 이 텍스트는 김광림 (시인)을 다룹니다. 김광림(金光林, 1929년 9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아버지 김창응과 어머니 김윤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忠男’이다. 필명 광림은 김광균의 '光'과 김기림의 '林'을 따서 지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원산과 개성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1948년 월남하여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징집되어 복무하였다. 1948년 이후 신문과 문학지 등에 시를 발표 하면서 등단하였고, 1957년에는 전봉건 김종삼 등과 3인 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발표한 바 있다. 〈풍경〉, 〈갈등〉, 〈0〉, 〈壬子〉, 〈乞人〉 등의 작품으로 1973년 제5회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바로 설 때 팽이는 운다》(서문당,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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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0%B0%EB%A6%AC%20%ED%97%A4%EC%9D%B4%EB%93%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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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헤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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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찰리 헤이든이 궁금해요.
<|assistant|> 찰리 헤이든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찰스 에드워드 "찰리" 헤이든(Charles Edward "Charlie" Haden, 1937년 8월 6일 - 2014년 7월 11일)은 색소포니스트 오넷 콜먼과의 오랜 협연으로 유명한 재즈 더블베이시스트이다. 찰리 헤이든은 그의 특징인 시적인 베이스 연주와 함께, 현재 가장 존경받는 재즈 베이스 연주자이자 재즈 작곡가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딸인 Petra와 Rachel은 That Dog이라는 그룹에 속해있었던 뮤지션이며, Petra는 현재 That Dog을 나와 인디 락 그룹인 The Decemberists에 속해있다. 헤이든은 미국 미주리주에서 태어나, 가끔 라디오에 출연해 컨트리 음악이나 미국 민요를 연주하곤 할만큼 음악적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헤이든은 두살 때 이미 전문적인 가수로 데뷔를 했고, 14살에 가벼운 소아마비를 앓을 때까지 계속 가족과 함께 노래를 했다. 소아마비는 그의 목 근육과 성대에 상처를 남겨 그 결과로 헤이든은 노래를 부르면서 음 높이를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소아마비를 앓기 몇 년 전 헤이든은 재즈에 흥미를 보여 형의 더블 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보컬 대신 베이스 연주자가 되었고, 1950년대 중반에 LA로 자리를 옮겨 피아니스트 Hampton Hawes나 색소포니스트 Art pepper와 협연하는등, 빠른 속도로 전문 연주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헤이든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앨범 ‘The Shape of Jazz To Come(앞으로 다가올 재즈의 모양)’으로 정점을 이룬 오넷 콜먼과의 실험적인 공연을 함께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 앨범은 당시 많은 비평적인 찬사와 비판을 받았었다. 헤이든은 하모로딕(오넷 콜먼이 그당시 새로 주창했던 재즈 음악의 이론) 스타일의 연주가 처음에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냥 묵묵히 콜먼의 진행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적이 있다. 그가 공연때 스스로만의 연주를 시작할만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오넷 콜먼과의 협연 말고도 헤이든은 Keith Jarret의 트리오에 속해 있었으며 Paul Motian과 Dewey Redman과 함께 “American Quartet”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Old and New Dreams’라는 그룹에 참가했다. 그는 1970년대에 Carla Bley에 의해 대규모로 편성된 Liberation Music Orchestra(LMO)를 이끌었다. 그들의 음악은 매우 실험적이었고, 재즈와 정치적 음악활동의 영역을 동시에 개척하는 참신한 시도였다.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다룬 LMO의 첫 앨범을 비롯하여 일반적인 재즈 스탠다드로는 여겨지지 않는, 색다른 주제를 가진 장르의 음악을 개척하는 것은 그의 Quartet West와 함께 찰리 헤이든 음악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1987년에 결성된 찰리 헤이든의 쿼텟 웨스트는 색소폰의 Ernie Watts, 피아노의 Alan Broadbent, 드럼의 Larance Marable로 구성되었다. 이 그룹은 Broadbent의 푸릇푸릇하고 현악을 동원하기도 하는 로맨틱한 편곡과 많은 어워드의 수상자로 인기를 얻었다. 헤이든은 프로듀서 Hank Jones와, 그룹의 동료들과 함께 ‘American Hymns’에서의 미국 전통 음악, ‘Always Say Goodbye’에서의 필름 누아르 음악, ‘Nocturne’에서와 같은 쿠바 전통 음악등의 발견을 통해 새로운 종료의 영가를 개척하였다. 1997년 후반에 그는 기타리스트Pat Metheny와 함께, 그들이 미주리에서 겪었던 유년 시절에 영향을 받았던 음악들, 그들이 ‘미국적인 음악’이라 부르는 음악들을 재발견 했다. 이 협연은 그들의 앨범 ‘Beyond the Missouri Skies (Short Stories)’와 그들이 함께한 세계 순회 공연을 통해 결실을 맺었다. https://music.naver.com/todayMusic/index.nhn?startDate=201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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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6%80%EC%82%B0%EC%97%AD%20%28%EB%8F%84%EC%8B%9C%EC%B2%A0%EB%8F%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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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도시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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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부산역 (도시철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 부산역 (도시철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부산역(Busan station, 釜山驛)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의 전철역이다. 인근에 경부선의 부산역, 초량 외국인 상가, 부산 시티 투어 승강장이 있다. 2012년 1월 말 경부터 서면 방면으로 버스 환승 센터가 개통되었다. 1987년 5월 15일 : 부산 도시철도 1호선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 2면 2선의 상대식 승강장이 있는 지하역이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출구는 7개다. 반대편 승강장으로 이동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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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C%ED%95%98%EC%9E%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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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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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만하임은 무슨 내용인가요?
<|assistant|> 만하임은 만하임(Mannheim)은 인구 32만으로 슈투트가르트에 이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쿠어팔츠의 옛 수도였던 이 도시는 오늘날에도 라인-넥카 메트로폴에서 경제,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라인란트팔츠주의 도시인 루드비히스하펜과는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 1900년 이래 만하임은 중요한 산업과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내 두 번째로 큰 열차편성역(Rangier-Bahnhof)과 유럽의 중요한 연결 항구들이 그 토대가 되고 있다. 또한 만하임은 독일어 연구원(Institut für Deutsche Sprache)과 두덴(Duden) 출판사가 소재한 독일어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만하임은 중요한 근대 발명품의 고향이기도 하다. 최초의 자전거를 1817년 카를 드라이아스(Karl Drais)가 만들었고, 1886년 카를 벤츠(Carl Benz)가 자동차 첫 도로주행을 했으며, 1921년에는 트랙터가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활발한 음악공연이 명성을 얻고 있다. 만하임에는 만하임 대학교, 만하임 음대 등 많은 대학들이 있다. 만하임은 라인 강 중상류, 라인 강과 네카 강 합류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만하임은 라인-넥카 메트로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라인넥카군(Rhein-Neckar-Kreises), 헤센주와 라인란트팔츠주와 접하고 있다. 가까운 대도시로는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가 있고, 남동쪽 약 95km 지점에 슈투트가르트(Stuttgart)가 있다. 만하임 마을은 766년 역사서 로르셔 코덱스(Lorscher Codex)에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오랫동안 중요하지 않은 어촌이었던 만하임은 1284년 팔츠 영주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1349년 라인강 통행료를 징수하기 위한 성인 아이헬하임이 들어 섰다. 1415년에 지기스문트 황제의 명령에 따라 폐위된 교황 요한 23세를 이곳에 감금하기도 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폰 데어 팔츠가 1462년 제켄하임 전투에서 뷔르텐베르크 영주와 바덴 영주 그리고 메츠 주교의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오베르라인의 주인이 되었다. 1566년 만하임은 인구 700으로 하이델베르크 행정구역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1607년 만하임은 도시특권을 인정받았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Friedrich IV. von der Pfalz)에 의해 프리드리히스부르크(Friedrichsburg) 요새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도로망이 직각으로 계획되어 요새와 성을 연결하면서 현재의 정방형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622년 30년 전쟁 중에 가톨릭 측의 틸리(Tilly)에 의해 처음으로 파괴되었고, 1689년 팔츠 상속전쟁때에 프랑스군에게 다시 한번 희생되었다가 재건되었다. 1720년 선제후 카를 필립은 수도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하임으로 변경하고 만하임 성을 짓기 시작했다. (1760년 예수교회와 함께 완성됨). 만하임은 쿠어팔츠의 수도가 되면서 짧지만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인구는 2만5천명에 이르렀다. 쿠어팔츠는 영주는 미술과 음악, 학문과 상업에 많은 후원을 해서 괴테와 실러, 레싱, 모차르트 등이 만하임에 머물렀다. 1778년 영주 카를 테오도르가 바이에른을 상속 받게 됨에 따라 수도가 뮌헨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문화적, 학문적 출현을 겪게 된다. 1795년 프랑스 군이 점령하고 또 오스트리아 군이 재 점령하게 된다. 1803년 최종적으로 정치적 위치를 잃게 된다. 쿠어팔츠는 제국대표단회의에서 해체되고 만하임은 바덴에 속하게 된다. 지리적으로 바덴의 북쪽 변방에 위치하게 되어 변경도시로 변하게 된다. 경제적 번성에 따라 만하임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828년 라인항이 개항하고, 1840년에는 바덴의 최초의 철로인 만하임-하이델베르크 철도가 개통된다. 만하임은 1848년 혁명의 중심적 역할을 한다. 1865년 프리드리히 엥겔호른(Friedlich Engelhorn)에 의해 BASF(Badische Anilin- und Soda-Fabrik)가 창설된다. 이 회사는 염색공장에 시작한 회사로 현재 세계 최대의 화학회사이다. 현재는 라인강 건너 편인 루드비히스하펜으로 옮겨갔다. 1886년에는 카를 벤츠가 „가솔린 기관“ 자동차 특허를 받았다. 1차대전 후 하인리히 란츠 주식회사는 „불독“이라는 트랙터를 최초로 생산했다. 1922년에는 만하임 발전소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만하임어 라인샨체에서 함께 출발한 자매도시 루드비히스하펜과 함께 인구 38.5만명에 이르게 됐다. 제3제국하에서 약 2000명의 만하임의 유대인이 추방되었고, 공중폭격으로 도시는 거의 다 파괴되었으며 1945년에는 미군이 점령하였다. 많은 노력끝에 도시가 재건되는 과정에 만하임성과, 급수탑(Wasserturm)은 복원되고 국립국장은 자리를 옮겨 신축되었다. 1967년에 만하임에 대학이 들어 섰고1975년에는 루이젠 공원과 헤르쪼겐리트 공원에서 연방 정원쇼를 개최하였다. 이 과정에 방송송신탑과 제2 라인강 다리가 만들어졌고, 플란켄이 보행자 전용구역으로 변경되었고, 로젠가른텐을 준공했다. 1980-90년대에도 플라네타리움, 예술관 확장, 유대교사원, 이슬람사원, 기술 노동박물관, 칼 벤츠 스타디온이 만들어졌다. 최근 만하임은 산업분야의 일자리가 감소하고 있다. 이에 시당국은 공업지구와 서비스기업부지 설정을 통해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그 예가 만하임 최고층 건물인 빅토리아 빌딩(Victoria-Hochhaus, 2001)의 건축이다. 2007년 도시 400주년을 기념해서 2000년부터 많은 건물들이 만들어지고 수리되고 있다. 만하임의 인구는 1896년 10만을 넘어서 대도시가 되었다. 1905년에는 16만이 넘었고 1961년에는 인구가 배로 증가했다. 1970년에 인구 33.3만으로 최고인구수를 기록했다. 2005년 3월말 현재 관청에 주거지로 등록하고 있는 인구는 307,583명이다. 시의회는 의석은 48석으로 5년마다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2차 대전이래 사민당이 다수를 차지해오다가 1999년부터 기민련이 원내1당이 되었었다. 하지만 최근에 실시된 선거(2009년 6월 7일)에서 사민당이 다시 1당으로 올라섰다. 2009년 6월 7일 시의회 선거 결과: 시의 행정기관과 시의회(Gemeinderat)의 수장은 시장(Oberbürgermeister)이다. 시장은 주민 직선으로 선출되며 임기는 8년이다. 2007년 실시된 선거에서 쿠르츠(Dr. Peter Kurz, SPD)가 당선되어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명의 수석 부시장과 4명의 부시장이 시의회에서 선출된다. 그래서 선거당시의 정당간 의석분포를 반영한다. 이 부시장들은 시행정에서 한 분야를 맡아 이끌게 된다.(예. 문화, 재정, 사회등.) 24000명의 학생이 10개의 대학에 등록되어 있다. 만하임대학교(Universität Mannheim): 1907년에 상대로 개교했으며 1967년 종합대학(Universität)으로 승격했다. 이 대학은 경제학, 사회과학분야의 대학 평가에서 상위를 랭크되고 있다. 현재 11500명이 등록되어있다. 만하임 의학부 (Fakultät für klinische Medizin Mannheim. 하이델베르크 대학 소속):약 800명 등록 연방 공공행정 전문대학 (Fachhochschule des Bundes für öffentliche Verwaltung): 1978년 개교했으면 연방군행정 전공이 만하임에 있고 1200명이 등록되어 있다. 군행정,군기술 연방학교(Bundesakademie für Wehrverwaltung und Wehrtechnik): 1961년 개교했으며 연방 군행정 최고 교육기관이고, 군기술 분야의 주무교육기관이다. 연방군행정학교 1 (기술)(Bundeswehrverwaltungsschule I (Technik)): 연방군 기술자의 교육기관 연방노동청 대학(Hochschule der Bundesagentur für Arbeit): 2006년 개교했으며 노동관련 전문가를 양성한다. 900명 정원의 학사과정 만하임 대학 (Hochschule Mannheim): 1898년에 생긴 기술학교에 기원을 두며 1971년 기술 전문대학이 1995년 건축전문대학, 2006년에 사회사업전문대학과 통합하여 생긴 대학. 현재 4100의 학생이 있음. 만하임 음대(Staatliche Hochschule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Mannheim): 1761년 세워진 Académie de Danse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재 600명이 재학 중. 만하임 직업학교 (Berufsakademie Mannheim):1974년 세워졌으며 4500명 재학 중. 바덴뷔르텐베르크 팝아카데미():2003년 세워졌으며 독일에서 유일한 음악비지니스와 팝음악 디자인에 관한 학교다. 인간학적 교육학을 위한 자유대학(Freie Hochschule für anthroposophische Pädagogik Mannheim): 발도르프학교 교사양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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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3%9D%EB%AC%BC%EB%B0%9C%EA%B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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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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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생물발광은 무슨 내용인가요?
<|assistant|> 이 텍스트는 생물발광을 다룹니다. 생물 발광은 생물이 화학적 작용을 거쳐 빛을 내는 현상을 말한다. 루시페린이 루시페레이스를 통해 산화되면서 빛을 낸다. 발광 효율이 90%에 달하기 때문에 인공광과는 다르게 열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물 발광의 빛을 냉광(冷光, cold light)이라고도 부른다.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는 생물을 발광 생물이라고 한다. 반딧불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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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C%9D%8C%EC%B2%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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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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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음체이 궁금해요.
A: 다음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다음체는 다음커뮤니케이션이 2008년 9월 17일 공개한 완성형 2350자 제목형 서체로 'Daum Regular.ttf' 와 'Daum SemiBold.ttf' 2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폰트 디자인은 좋은글씨가 한글 서체에 참여했으며, 영문 서체는 네덜란드 디자인회사 토털아이덴티티가 담당하였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2015년경 배포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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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B%9D%BC%EB%A9%94%EB%A6%AC%EC%95%84%EC%86%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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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메리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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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크라메리아속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ssistant|> 크라메리아속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크라메리아속은 크라메리아과의 유일한 속으로 약 17종의 식물을 포함하고 있다. Simpson, B. B. (1982). Krameria (Krameriaceae) flowers: Orientation and elaiophore morphology. Taxon 31:3 517-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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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B0%80%EB%A3%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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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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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카밀루이 궁금해요.
A: 다음은 카밀루에 대한 설명입니다.
카밀루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카밀루 다 시우바 산베주: 브라질의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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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B%88%EB%AF%B8%EB%8B%88%ED%8E%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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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미니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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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유니미니펫은 어떤 대상인가요?
<|assistant|> 유니미니펫은 《유니미니펫》(Uniminipet)은 대한민국의 동우애니메이션과 SBS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2001년 6월 15일부터 12월 7일까지 SBS에서 방송되었다. 이후 2007년까지는 투니버스에서 2008년부터는 재능TV에서 방영하다가 2012년 2월 20일 현재는 종영된 상태이다. 2001년에 첫 방송 되었을 때 평균 9.5%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당시 최고 인기작인 《포켓몬스터》와 《파워디지몬》을 간발의 차로 추격하는 저력을 발휘한 바 있다. 특히 2001년 12월에 종영하고 난 직후의 시청률 순위에서는 《포켓몬스터》 9.8%, 《유니미니펫》 10.1%로 《파워디지몬》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대이변을 연출해냈다. 이와 같은 인기에 고무된 동우애니메이션에서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2002년 여름방학에 개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으나, 자금 부족 등의 여러 복합적인 요인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2004년 매주 금요일에 재방송되었을 당시에는 2편씩 묶어서 방송하였다. 2014년에는 제작사 동우A&E에서 방영 13주년 기념 블로그를 개설하고 네이버 tvcast를 통해 본편 영상 전편을 공개하였으며 본편 내용의 후속편 격인 웹툰을 연재하였다. 웹툰은 네이버와 다음에서도 연재되었다. 유니랜드에서 범죄를 일으킨 혐의로 수배된 버그펫들이 인간세계로 달아나 로보펫 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이에 유니랜드의 수사관 고양과 햄이 인간 세계에 파견되는데, 하필이면 초등학생 원동우의 방 안 옷장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로 인해 원동우까지 버그펫 소탕 작전에 나서게 된다. 작중의 주인공. 평범한 초등학생으로 로봇펫샵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3년 전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엄마를 도와 집안 일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엄마가 워낙 트러블 메이커인 탓에 실질적으로는 동우가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어느 날, 자신의 방에 있는 옷장의 문을 열어, 유니랜드에서 범죄를 저지른 버그펫들이 인간 세계로 도망치게 된다. 또한 그러한 버그펫들을 쫓아온 유니랜드 수사관인 고양과 햄이 인간 세계로 와버리게 된다. 사실 그 옷장의 문은 유니랜드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문이였던 것. 그리고 동우는 유니랜드와 인간 세계가 연결된 문을 열 수 있는 자였다.(문을 열 수 있는 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옷장의 문을 열었을 경우, 일반적인 옷장과 다를 바 없다.) 이후 고양과 햄을 만난 이후로는 버그펫 소탕 작전에 적극 협력하게 된다. 작중의 히로인, 안우수의 사촌으로 역시 부자집 딸이다. 동우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동우와 관련된 일이라면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작정 뛰어들고 본다. 작중의 단짝 친구로 버그펫 소탕 작전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이다. 그 덕분에 동우에게 큰 도움이 되곤 한다. 작중의 또 한명의 주인공이며 동우의 파트너이다. 유니랜드에서는 자신이 늘씬한 미녀였다고 말하지만 전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자신이 고양이 로봇펫으로 들어간 것에 적잖은 불만을 품고 있다. 매사에 제멋대로인 햄을 통제하느라 꽤나 고생하는 듯. 언제나 정반대의 성격 때문에 햄과 사소한 일로 자주 다툰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뉴스 같은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보아서는 햄과는 다르게 맡은 일에 대해 성실한 면모가 보인다. 작중의 또 한명의 주인공이며 동우의 파트너이다. 매사에 천하태평,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고양과 사사건건 입씨름을 한다. 유니랜드에 있을 때부터 먹을 것을 좋아한 탓에 로봇펫 모습을 하고서도 먹을 것을 찾는다. 하지만 음식을 먹었다가는 로봇펫이 망가지기 때문에 고양과 이상해 박사로부터 언제나 잔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음식을 찾으며, 먹는다. 그 이외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그래도 유니랜드 수사관인지, 나름 버그펫 사건에 대해서는 활약을 하는 편. 다만 너무 방심하고, 잘난체하는 것이 탈이다. 원동우의 엄마로, 32살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미인이다. 원래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지만 고아였던 동우의 아빠와 함께 결혼하는 바람에 집으로부터 의절을 당한 아픈 과거도 있다. 그러나 워낙 낙천적인 성격탓에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동우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괴짜 과학자.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정신이 강해 가끔은 사고를 치지만, 버그펫 소탕 작전에 필요한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어주고 유니스톤을 업그레이드하는 등, 고양과 햄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원래 마술사였으나 자신의 로봇펫을 교통사고로부터 구하려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버그펫의 영혼이 들어가게 되는데, 인간의 몸에 완전히 정착을 못하고 절반만 정착하게 된다. 고양과 햄에게 체포된 이후로는 동우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고은비에게 첫눈에 반해버린다. 덧붙여서 매직이라는 이름은 버그펫의 이름이라고 한다.(마지막 화에서 고은비가 버그펫의 영혼이 빠진 이 사람을 향해 매직이라고 부르자, 흔히 생활에 쓰이는 매직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동우의 같은 반 친구로 부자집 아들이다. 매번 동우를 깔보며 무시하지만 뒷끝이 좋지 않다. 경찰 수사 반장의 딸. 동우와 고양, 햄, 상현이 버그펫을 잡는 데에 여러 가지 큰 도움을 준 적이 있다. 후에 동우가 사유리와 성진아에게 유니랜드와 버그펫, 고양과 햄에 대한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사실을 듣는다. 작품 후반부에 동우와 같은 초등학교로 전학오는 말 숫자가 적고, 친구 없어 쓸쓸한 소녀. 안우수보다 더 큰 부자집에 살고 있다. 부모님은 외국에서 로봇펫에 관한 일을 하고 있기에 어렸을 적부터 키웠던 로봇펫인 존과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동우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과 똑같은 팬던트를 목에 걸고 다닌다. 이는 어렸을 때, 유니랜드를 조사하던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것. 그 팬던트를 받았을 때, 유니스톤 중 최강이라는 '유니스톤 크리스탈'을 할아버지와 함께 국립 우주 연구소 근처의 숲에다가 봉인시켰다. 동우가 유니랜드에서 인간 세계로 연결되는 문을 열 수 있는 자라면, 사유리는 그것과는 정반대로 인간 세계와 유니랜드가 연결된 문을 닫는 자이다. 애니메이션 감독: 고성운, 신기철, 성원용, 정진우, 신중덕, 박봉일, 유제하, 유재명, 팽유원, 송근식, 이현찬, 박병순, 이승일 원화: 서진원, 명가영, 허귀연, 신성민, 김종용, 심영희, 유승희, 최지훈, 민경희, 육성수, 지동재 원화작감: 이강태, 권희재, 오현화, 정재연, 정혜선 동화: 주옥윤, 이원재, 김경환, 오용운, 신혜란, 최형석, 김현미, 김양인, 최선아, 박선영 파이널 체크: 윤석번, 서연숙, 남궁진, 최선호, 조영라 배경: 이가영, 채수희, 정유미, 이상민, 박민경, 이정환, 김상운, 이원구, 임지영, 김은경, 염윤숙 스캔: 전미옥, 이윤혜, 정문선, 정창택, 백경선, 윤신혜 칼라: 양인숙, 김현희, 김경숙, 한명선, 민영신, 오원숙, 김현주, 이정수, 김기민 촬영: 허태희, 박주은, 김강옥, 구동필, 백승필, 강희창, 변혜영, 김정률, 김언식, 유재형, 이진영, 정하영, 최은주 주제가 작사: 박범준, 박정은, 김희진, 오혜승 제작: 김지현, 김명수, 이지화, 김도영, 이승열 차명화 : 햄, 유미란, TV 리포터 역 임은정 : 고은비, 박상현, 안우수 엄마, 미란이 엄마 역 이선주 : 프로그, 더지두, 로빈, 성진아, 스네이크 딩동, 피스 역 손정아 : 사유리, 뿔쥐, 페어리, 나방뎅 역 오인성 : 럭키볼 해설자 1, 이상해, 치킨통, 하운드 역 김관진 : 럭키볼 해설자 2, 매직, 미란이 아빠, 도깨도깨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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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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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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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몸을 다룹니다. 몸 또는 신체(身體)는 생물의 한 개체를 일컫는 말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팔다리와 머리를 제외한 신체기관을 몸이라고 한다. 몸은 여러 개의 세포 또는 한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몸에 대해서는 인체 문서를 참고하자. 일반적으로 무생물이나 추상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인 것을 나타낼 때 몸이라는 말을 쓸 때가 있다. 사람의 몸은 다음과 같은 부위와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꼬리(사람에게는 꼬리가 퇴화한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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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A0%95%EA%B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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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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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서정갑은 무엇인가요?
<|assistant|> 서정갑은 서정갑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서정갑(1914 ~ 1992?)은 한국의 대학교수이며 전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교수이다. 서정갑(1940 ~ )은 한국의 육군 대령을 예편한 군인이며 국민행동본부 본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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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N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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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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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NNN은 무슨 내용인가요?
A: 이 텍스트는 NNN을 다룹니다. NNN은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닛폰 뉴스 네트워크(NNN)은 닛폰TV(NTV)를 중심방송국, 요미우리 TV 방송(ytv)을 준중심방송국으로 하는 일본의 텔레비전 뉴스 네트워크로 1966년 4월에 발족한 일본에서 두 번째로 생긴 뉴스 네트워크이다. 노스웨스턴 뉴스 네트워크(NNN)은 미국 일리노이주의 에번스턴 소재 지역 방송국이자 뉴스 네트워크이다. 나오미 나리 남은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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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8C%EA%B7%B9%EC%84%A0%EA%B4%80%20%ED%94%84%EB%A1%9C%EC%A0%9D%ED%84%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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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극선관 프로젝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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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음극선관 프로젝터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세요.
A: 이 텍스트는 음극선관 프로젝터을 다룹니다. 음극선관 프로젝터 또는 CRT 프로젝터는 작고 매우 밝은 음극선관을 영상을 만들어 내는 데에 쓰이는 영상 프로젝터이다. 영상은 렌즈를 사용하여 CRT 표면 앞에서 화면이 확대되어 초점이 맞춰진다. 꽤 현대의 음극 선관 프로젝터는 들어오는 비디오 신호의 3 개의 빨강, 초록, 파랑의 색을 처리하여 영상이 렌즈에 초점이 맞춰되는 각 CRT로 보내면서 화면에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낸다. 다양한 설계가 있는데, "다이렉트" CRT 렌즈 디자인, Schmidt-CRT 등을 들 수 있다. 기본적으로 브라운관의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긴 CRT 수명 - 보통, 일반 텔레비전 수명과 같다. 양호한 밝기를 최대 10,000시간까지 보장. 매우 좋은 색 해상도, 밝기, 그림 크기를 지원한다. 정확한 색 표현에 최대 1920x1200 지원. 한 번 설정하면, 램프를 사용하는 다른 프로젝터와는 달리 유지 보수가 거의 필요 없다. 뛰어난 검정 수준 - 검정은 실제로 검정이고 어두운 회색이 아니다. (역자 주: LCD는 백라이트 때문에 검정 부분을 잘 표현하지 못 한다.) CRT 모니터로서, 이미지 해상도와 주파수가 고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약간의 제한 속에서 다양화되어 있다. 인터레이스로 비롯되는 영상은 완전하지 못한 디인터레이스 방식 보다 직접적으로 재생할 수 있다. 반응속도가 매우 빠르며, 프레임이 많은 영상을 자연스럽게 재생할 수 있다. 음극선관이기 때문에 부피가 크며, 무겁고(휴대성이 없음) 육중하다는 경향이 있다. 최대 밝기 수준이 낮다. - 방은 완전히 어두워야 하고, 햇빛 환경에서 들어오는 시야는 어두움에 적응하기 위해 1~2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영상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특히 1관식에서 이런 현상이 심하다. 3관식의 경우 고르지 못한 색 혼합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화면 위로 각 선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완하려면 섬세한 회로가 필요하다. 3관식의 경우 초점이 잘 맞지 않을 수 있다. 완전한 영상을 위해서는 조정과 설정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섬세한 회로와 최적 화질의 동기화 때문에 다른 종류의 프로젝터보다 상대적으로 고가이다. (다른 종류의 프로젝터보다 중고 장비로 싸게 구입하기엔 알맞다) 같은 화면을 오랫동안 틀어놓으면 번인(영구적인 잔상)현상이 일어난다. 1프레임당 한 번씩 깜빡이는 브라운관의 특성 상 다른 프로젝터에 비해 눈이 더 피로하다. 전력소모량이 크며, 이로 인해 발열이 많다. 자기장에 의해 화면이 왜곡될 수 있다. https://web.archive.org/web/20110710173721/http://www.eisemann-theater.com/index.php?option=displaypage&Itemid=73&op=page] CRT Projector and Mod Speci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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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D%95%B4%EC%9D%98%20%EC%9D%B4%EB%A6%84%EC%97%90%20%EB%8C%80%ED%95%9C%20%EB%85%BC%EC%9F%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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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이름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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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동해의 이름에 대한 논쟁은 어떤 대상인가요?
<|assistant|> 다음은 동해의 이름에 대한 논쟁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연해주 및 사할린섬에 둘러싸인 바다는 그 호칭 및 명명(命名)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이 바다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러시아 등 4개국의 주권과 관할권이 미치는 해역으로, 이들 연안국의 영해와 배타적 경제 수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동해"(東海),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동해"(朝鮮東海), 일본에서는 "니혼카이"(), 러시아에서는 "야폰스코예 모레"(Японское море, 일본해)로 부르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 양측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 분쟁은 양측이 국내에서 사용하는 명칭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명칭에 관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동해가 역사적으로 '동양해(Oriental Sea)' 또는 '한국해(Sea of Korea)'로 불려 왔으므로 '동해(East Sea)'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은 '일본해(Sea of Japan)'가 19세기부터 국제적으로 통용된 이름이며 이를 그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동해(East Sea of Korea)'로 표기하기를 주장한다. 이 해역이 일본해로 굳어진 계기는 1929년 국제 수로 기구(IHO)의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제1판에서 국제수로기구 창립 회원국이었던 일본의 주장에 따라 일본해로 표기하면서부터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국권을 피탈 당한 상태였다. 가장 최근에 나온 『해양과 바다의 경계』는 1953년 발간된 제3판이며, 여기에도 일본해로 단독 표기되어 있다. 한국은 1957년 국제수로기구에 가입하였고, 1992년부터 일본해 명칭에 이의를 제기했다. 1974년 국제수로기구는 특정 바다의 인접국 간에 명칭 합의가 없는 경우, 당사국 모두의 명칭을 병기하도록 하는 기술적인 권고를 하였으나, 일본은 이것은 만이나 해협 등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동해와 같은 공해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국은 1991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유엔 동시 가입한 후인 1992년 제6차 유엔 지명 표준화 회의(UNCSGN)에서 최초로 동해의 국제적 통용 명칭인 'Sea of Japan'에 대하여 정부 차원에서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명칭 시정을 공식 요구했다. 이후 유엔의 관련 회의와 국제수로기구 회의 등 국제회의에서 이 문제를 재차 제기하고 있다. 1998년의 제7차 유엔 지명 표준화 회의에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 목소리로 일본에 공동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고, 일본은 이 문제를 쟁점화하는 것을 꺼려, 대한민국 측의 협상 요구를 번번이 거절하였다. 2002년 제8차 유엔지명표준화회의에서는 남한과 북한 대표단이 과도기적 조치로서 일본해와 동해(북한은 조선동해)의 명칭 병기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일축하며 한국 측 요구를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로비를 벌여 자국의 입장을 관철시켰다. 현재 국제 수로 기구는 『해양과 바다의 경계』 제4판을 발간 준비 중이다. 2002년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동해 명칭 문제를 의제 상정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로비로 무산되었고, 2007년 총회에서는 총회 의장에 의해 동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우선 발간이 제안되었다. 2012년 총회에서도 동해와 일본해의 병기 문제는 끝내 결정되지 못하였으며, 이 논제는 2017년 총회로 다시 연기되었다. 다만 2012년 총회에서 일본해 단독 표기 방안은 일본을 제외한 어떠한 회원국의 찬성표도 받아내지 못했다. 2017년 4월 모나코 IHO 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선 《해양과 바다의 경계》를 개정해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자는 한국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사무국이 참여하는 가운데 일본이 개정을 요구하는 한국과 북한 등 관련국과 협의를 하고 그 결과를 사무국이 정리해 3년 뒤인 2020년 총회에 보고한다는 방침이 결정됐다. 2018년 가을,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IHO 사무국이 ‘협의에 응하지 않으면 개정이 아니라 아예 폐기도 검토하겠다‘는 강력한 입장을 전달했다. 이에 2019년 1월 18일 오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정례브리핑에서 "IHO의 책임있는 멤버로서 비공식협의에 건설적으로 공헌해 나가겠다"면서도 "'일본해'표기가 세계적으로 확립된 유일한 호칭으로, 그것을 변경할 필요성도 근거도 없다고 여러 기회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특정 시점에서 보는 방위를 갖고 이름을 붙이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예컨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동중국해를 "동해"()로 부르고 독일과 스웨덴, 덴마크에서는 발트해를 "동해"(, , )로 부르며 베트남에서는 남중국해를 "동해"(, )라고 부른다. 따라서 동해라는 말을 이 해양에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은 동해의 명칭이 여러 언어에서 명칭 충돌(name collisions)이 일어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동해"가 『해양과 바다의 경계』의 해도집 안 50번 영역인 동중국해에 "동해"(Tung Hai)로 등록되어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어, 같은 뜻을 가진 명칭의 중복 등록은 혼란을 야기하므로 IHO의 지도제작의 목적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한민국에서는 특정 국가의 이름으로 해양의 명칭을 정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 것이며, 유럽에 위치한 북해 (North Sea)의 예를 들어 방위에 근거한 명칭 지정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동해라는 이름도 본래 각국의 이름으로 불리던 북해가 방위 기준으로 이름을 고치기로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불릴 수 있으며, 동해라는 명칭은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방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대륙의 동쪽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일부 한국측 견해로는 국내용으로는 "동해", 국제용으로는 "한국해"(Sea of Korea)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연원과 바다의 특성을 고려해서 여러 학자들은 "청해"(靑海, Blue Sea), "녹해"(綠海, Green Sea), "창해"(滄海, Navy Sea), "경해"(鯨海, Sea of Whale), "태평해"(太平海, Pacific Sea) 같은 중립적인 이름을 거명하기도 한다. 16세기 초, 동양을 탐험하기 시작한 서양인들이 지도를 제작하면서부터 동해 지역이 세계지도 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6세기에서 18세기 말까지 만들어진 서양지도에는 조선해, 한국해, 동양해, 중국해, 일본해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이 시기에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은 한국해(Sea of Korea)라는 표기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인 라페루즈(Jean-François de La Pérouse), 영국인 브로턴(William R. Broughton), 러시아인 크루젠슈테른(Adam J. von Krusenstern) 등이 동해 주변을 탐험하며 동해 형성과 연안지형이 확실해졌다. 이 시기 이후, 유럽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는 '일본해' 의 사용 빈도가 급격히 증가하며, 국제적으로 정착되어 갔다. 한편, 일본은 예부터 넓은 해역에 명칭을 붙이는 습관이 없었다. 일본이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보다 오히려 늦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세계적으로 지명에 대한 표준화 작업이 진행된 20세기 초에 주권을 상실한 한국이 지명 결정에 관여할 방법은 없었으며, 19세기 말부터 신장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서양 지도 제작자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일본해가 널리 사용되었다 주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 "東海" 『여지도(輿地圖)』 중 『아국총도(我國總圖)』 - "東海", 18세기 말 2007년, 동해의 원래 명칭이 '창해'(滄海)였다는 고지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 "日本海",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1602년에 중국에서 작성된 세계지도에 서양제 지도를 한역(漢譯)한 것 1794년 가쓰라가와(桂川甫周)가 제작한 『아세아전도(亞細亞全圖)』 - "朝鮮海" 1809년 다카하시(高橋景保)가 제작한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일본 정부의 공식 지도) - "朝鮮海" 1810년 다카하시(高橋景保)가 제작한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일본 정부의 공식 지도) - "朝鮮海" 1847년 기사쿠(箕作省吾)가 제작한 『신제여지전도(新製輿地全圖)』 - "朝鮮海" 1871년 무라카미(村上義茂)가 제작한 『지구만국방도(地球萬國方圖)』 - "朝鮮海" 아래의 순서는 연도별 순서이다. 1615년, 마누엘 고디뉴(Manoel Godinho de Heredia)의 아시아지도 - "MAR CORIA" 1647년,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의 아시아지도 - "MARE DI CORAI" 1679년, 장바티스트 타베르니에(Jean-Baptiste Tavernier)의 일본열도지도 - "MER DE COREER" 1705년, 기욤 드릴(Guillaume Delisle)의 인도ㆍ중국지도 - "MER ORIENTALE OU MER DE CORÉE" 1715년, 헤르만 몰(Herman Moll)의 아시아지도 - "SEA OF COREA" 1745년, 자크 니콜라스 벨랭(Jacques-Nicolas Bellin)의 한국지도 - "MER DE CORÉE", "MEER VON KOREA" 1750년, 로베르 드 보공디(Gilles Robert de Vaugondy)의 아시아지도 - "MER DE CORÉE" 1762년, 리고베르 본(Rigobert Bonne)의 아시아지도 - "MER DE CORÉE" 1771년, 영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ædia Britannica)』 초판본의 아시아지도 - "SEA OF COREA" 1794년, 장바티스트 부르기뇽 당빌(Jean Baptiste Bourguignon d'Anville)의 아시아지도 - "COREAN SEA" 1797년, 『라페루즈의 세계 여행기(Voyage de la Pérouse autour du monde)』의 부도 - "MER DU JAPON" 2개 국가 이상이 연관되는 지역에 대해 관련국이 서로 다른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지명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적용할 수 있는 국제 규범으로는 유엔과 국제수로기구의 결의가 있다. 2개국 이상이 공유하고 있는 지형에 대해 상이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을 경우에는 우선 당사국 간 동일 명칭에 합의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며,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에는 서로 다른 명칭을 병기할 것을 권고 2개국 이상의 주권 하에 있거나, 2개국 이상에 분할되어 있는 지형물에 대하여 당사국 간 단일 지명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각 당사국에 의해 사용되는 지명을 모두 수용하는 것을 국제 지도 제작의 일반 원칙으로 권고 일본해 단독 표기에서, 점차 동해ㆍ일본해 병기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의 저명한 지도 제작 업체, 출판물, 교과서 및 언론 등에서 대한민국 측의 의견을 반영하는 추세다. 이러한 변화에는 대한민국의 민간 단체인 반크 등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지도가 일본해를 단독 표기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이 2000년 60개국의 지도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한 지도는 392점의 지도 중에 2.8%인 11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2005년 일본 외무성이 같은 방식으로 행한 67개국 331점의 지도 조사에서는 10.8%에 이르는 지도가 병기를 채택하고 있다. 이 중 61개국 116개의 상업용 지도 중 '동해ㆍ일본해' 병기 비율은 18.1%에 달한다. 2007년 상반기, 대한민국 외교통상부가 세계 75개국에서 발간된 353개 지도를 분석해 동해 수역 표기 현황을 조사한 결과, 353개 지도 중 '동해'를 단독 표기한 지도는 단 한 개도 없었고, 일본해로 단독 표기한 경우가 전체의 74.2%, 동해ㆍ일본해를 동시에 표기한 경우는 23.8%, 무표기가 2%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해를 단독으로 표기한 지도는 대한민국 지도뿐이었다. 그러나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한 지도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며, 2011년에는 그 비율이 28.2%까지 올라갔다. 이들 일련의 조사를 종합해 보면, 세계지도 제작사의 동해ㆍ일본해 병기 비율이 2.8%(2000)에서 18.1%(2005)로, 그리고 23.8%(2007)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요 세계지도의 대부분을 제작하고 있는 G7 국가 (일본 제외) 대상 조사에서는 '동해ㆍ일본해' 병기 비율이 절반을 넘어서는 50.4%에 달한다. 한국의 동해 표기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 문제를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끌어가지 않고 학술적 논리와 근거에 의해 각 국가의 지명전문가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그 설득의 과정에서 세계적인 지명 논의의 흐름을 파악하게 되었고 어떤 부분을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관련된 지명연구의 주제를 확인하였고 이는 다시 지리학적 지명 연구의 촉발을 가져왔다. 일본 해상보안청 해양정보부 (일본해 호칭 문제) Limits of Oceans and Seas (1953) (S-23, 3rd Edition) United Nations Conferences on the Standardization of Geographical Names (UNCS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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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2%88%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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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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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ssistant|> 이 텍스트는 ∞을 다룹니다. ∞는 무한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숫자 8을 90도 회전한 것처럼 보인다. 로마 숫자의 1000인 ↀ (CIƆ)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존 월리스는 1655년 저서 De sectionibus conicis에서 무한대에 기호를 사용하였다. 그리스 문자의 마지막 문자인 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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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A%B4%80%EB%8B%A8%EC%B4%9D%20%EB%AA%A9%EB%A1%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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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단총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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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단총 목록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기관단총 목록은 지금까지 개발되고 사용된 기관단총의 목록이다. 4.6 × 30mm 5.56 × 45mm NATO(소총탄) 자스타바 M85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5.7 × 28mm 칼 구스타프 M45 (스웨디시K) - 스웨덴 FAMAE P.A.F. - 칠레 FAMAE S.A.F. -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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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C%ED%94%84%ED%95%98%EB%A5%B4%ED%8A%B8%20%ED%8C%90%EB%84%A8%EB%B2%A0%EB%A5%B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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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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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이 궁금해요.
<|assistant|>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년 10월 2일 ~ 2014년 9월 5일)은 독일의 개신교 공교회주의인 루터교회 신학자이다. 현대 기독론 연구의 새로운 접근으로 아래로부터 그리스도론을 체계화하였다. 대우재단의 초청으로 국내에도 방문하였다. 판넨베르크는 슈체친에서 세관원이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루터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아버지의 세관원 직업 특성상 잦은 이사로 인해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다. 1942년에 베를린으로 왔고, 16살 되던 해인 1944년에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1945년에는 영국군의 전쟁포로였다가 독일로 귀국해 학업을 계속하였다. 1944년에 나중에 "빛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는 강렬한 종교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하여 위대한 철학자와 종교 사상가들을 공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백교회 신자였던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이 판넨베르크에게 기독교에 대해 연구하라고 권했다. 이를 계기로 "지적 회심"을 하게 된 판넨베르크는 기독교가 현재 최선의 종교적인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를 계기로 그는 개신교 신학자가 된다. 판넨베르크는 베를린, 괴팅겐, 바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바젤 대학교에서 칼 바르트의 제자로 신학을 연구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에드문트 슐링크 교수 지도로 둔스 스코투스의 예정론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해 1956년 하이델베르크의 루터교 교회인 성베드로 교회에 목사로 파송받아 사역하였다. 판넨베르크는 1958년부터 부페르탈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근무하였고, 1961년부터는 마인츠대학교에서 개신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7년부터 은퇴하는 1994년까지 뮌헨 대학교에서 개신교 신학부 조직신학교수로 활동하였다. 뮌헨대학교 재직시에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의 교류를 위해 기초신학과 교회일치 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하였다. 특히 개신교회인 루터교와 천주교 사이의 신학적 교류에 공헌하였다. 판넨베르크는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독일 개신교회 대표로 참여하였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경력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신학을 학문으로 볼 수 있다는 옹호이며, 이는 철학, 역사, 자연과학과 교류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대표작은 "예수: 신이자 인간"일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그리스도론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구축한다. 나사렛 예수의 생애에서부터 교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칼케돈 공의회의 두 본성론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자 참된 인간인데, 그분의 인성과 신성의 일치 문제에 관하여 그리스도를 부활의 맥락에서 본다. 그는 부활을 그리스도의 자기정체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그는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뿐만 아니라 비 기독교 사상가들이 널리 토론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 중심에 계시의 한 형태로서 역사에 대한 그의 개념을 포함하여 현대 신학에 많은 공헌을 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카를 바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한 바르트를 넘어선 신학자이다. 바르트가 제시한 신론 체계 안에서 신학을 세워나갔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공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완전한 포괄성과 보편성을 추구하였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바르트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유기도 부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보편성도 주장하였다. 1968. Jesus: God and Man.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Basic Questions in Theology. Westminster Press 1969.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Westminster Press. 1970. What Is Ma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2. The Apostles' Creed in Light of Today's Questions. Westminster Press. 1977. Faith and Reality. Westminster Press. 1988-1994. Systematic Theology. T & T Clark 일부 저작은 판넨베르크 연구자 정용섭 박사에 의해 《믿음의 기쁨》(), 《사도신경 해설》 등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일부 설교는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 2, 3.(양장본) 새물결플러스 아래 글은 개신교 신학자인 정용섭 목사가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에 연재하는 판넨베르크 신학묵상글을 발췌한 글이다. Bradshaw, Timothy, 1988. Trinity and ontology: a comparative study of the theologies of Karl Barth and Wolfhart Pannenberg. Edinburgh: Rutherford House Books. Case, Jonathan P., 2004, "The Death of Jesus and the Truth of the Triune God in Wolfhart Pannenberg and Eberhard Jüngel," Journal for Christian Theological Research 9: 1–13. Fukai, Tomoaki, 1996. Paradox und Prolepsis: Geschichtstheologie bei Reinhold Niebuhr und Wolfhart Pannenberg. Marburg Grenz, S. J., 1990. Reason for Hope: The Systematic Theology of Wolfhart Pannenberg. New York: Oxford. --------, "Pannenberg on Marxism: Insights and Generalizations," The Christian Century (30 September 1987): 824–26. --------, "Wolfhart Pannenberg's Quest for Ultimate Truth," The Christian Century (14–21 September 1988): 795–98. Lischer, Richard, "An Old/New Theology of History," The Christian Century (13 March 1974): 288–90. Don H. Olive, 1973. Wolfhart Pannenberg-Makers of the Modern Mind. Word Incorporated, Waco, Texas. Page, James S., 2003, "Critical Realism and the Theological Science of Wolfhart Pannenberg: Exploring the Commonalities," Bridges: An Interdisciplinary Journal of Philosophy, Theology, History and Science 10(1/2): 71–84. Shults, F. LeRon, 1999. The Postfoundationalist Task of Theology: Wolfhart Pannenberg and the New Theological Rationality. Grand Rapids, MI: Eerdmans. Tipler, F. J., 1989, "The Omega Point as Eschaton: Answers to Pannenberg's Questions for Scientists," Zygon 24: 217–53. Followed by Pannenberg's comments, 255-71. --------, 1994. The Physics of Immortality: Modern Cosmology, God and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New York: Doubleday. --------, 2007. The Physics of Christianity. New York: Doubleday. Tupper, E. F., 1973. The Theology of Wolfhart Pannenberg.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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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4%A4%EC%9D%B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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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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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네이스은 어떤 대상인가요?
<|assistant|> 이 텍스트는 네이스을 다룹니다. 네이스(, )는 아일랜드 킬데어주의 주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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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C%8B%A0%EC%A0%95%EC%9A%B0%ED%9A%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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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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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유신정우회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 다음은 유신정우회에 대한 설명입니다.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는 1972년 10월 유신에 따라 대한민국에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한민국 국회 전국선거구 의원들이 구성한 원내교섭단체로, 준정당 조직이다. 약칭으로 유정회라고도 한다. 유신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 선거를 맡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의 추천을 받은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찬반 투표를 거쳐서 전국선거구 국회의원(전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들의 임기는 일반 국회의원 임기의 절반인 3년이었다. 1973년 이 헌법에 따라 최초로 대통령 박정희의 추천을 받아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형식적인 찬반 투표를 통과하여 선출된 전국구 국회의원 73인은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지 않고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의원총회와 원내총무단, 대변인 등의 조직을 설치하여 정당과 유사한 기능을 갖추었다. 1973년 3월 10일 백두진을 회장으로 추대하면서 결성되었으며, 1976년과 1979년에 각각 다음 임기의 국회의원이 새로 선출됨에 따라 개편되었다. 사실상 박정희 1인의 입법부 장악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자 민주공화당의 위성정당 역할을 했던 유정회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이후 활동 정지 상태에 들어갔고,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의 발효 시점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와 함께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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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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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B%85%B8%EB%B2%84E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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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노버E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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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레노버EMC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세요.
<|assistant|> 레노버EMC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레노버EMC(LenovoEMC, 이전 이름: 아이오메가/Iomega)는 휴대용 기억장치와 기억 매체를 제공하는 회사이다. 이 회사는 1980년에 세워졌으며 208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다. 아이오메가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다른 사무소는 스위스, 싱가포르, 유타에 두고 있다. 잘 알려진 제품으로는 집 드라이브와 재즈 드라이브가 있다. 2008년에 레노보와 합병되었다. 클릭! 드라이브 (40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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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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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325%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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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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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로마 제국 니케아에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개최. 왕맹 -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의 명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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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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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D%86%A0%20%EB%A7%88%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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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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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토 마이이 궁금해요.
A: 고토 마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고토 마이()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고토 마이 (성우)(1982~) - 일본의 여자 성우. 고토 마이 (배우)(1977~) - 일본의 여자 배우. 그라비아 아이돌.<|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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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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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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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메가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ssistant|> 메가은 메가(mega)는 SI 단위계에서 100만을 나타내는 접두어이다. 이는 그리스어의 '크다'를 뜻하는 μεγας(메가스)에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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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A%B3%A8%EB%A5%98%EB%B3%B4%EB%B3%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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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골류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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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보골류보보이 궁금해요.
A: 보골류보보은 보골류보보()는 블라디미르주에 위치한 도시로, 블라디미르에서 북동쪽으로 1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보골류보보라는 도시명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안드레이 돌고루키(안드레이 보골륩스키) 대공에서 유래되었다. 1158년에서 1165년사이에 네를 강(클랴즈마 강의 지류)에 가까운 강변에 세워졌다. 1230년에는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Н. Н. Воронин. Владимир, Боголюбово, Суздаль, Юрьев-Польской. Книга-спутник по древним городам Владимирской земли — М.:"Искусство", 1974 − 4-е из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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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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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C%9E%90%EC%84%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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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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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성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반자성(反磁性, diamagnetism)은 자기장에 대한 물질의 약한 반발력이다. 그것은 자성의 형태로 외부자기장이 인가되어있을 때만 확인되는 것이다. 모든 물질은 인가된 자기장에 대해 반자성 응답을 보인다. 사실 반자성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이 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은 항상 약한 반자성을 띠지만 다른 자성(강자성, 상자성등)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특정한 물질에서만 반자성 효과가 나타난다. 반자성 물질은 외부 자기장의 반대 자기장을 형성한다. 반자성은 모든 물질에 작용하는 양자역학적인 효과이며 반자성을 띠는 물질을 반자성체라고 한다. 반자성체에는 물, 수은, 에탄올, 비스무트, 구리, 금, 은 등이 있다. 강자성체와는 다르게 반자성체는 영구자석이 아니다. 반자성체는 투자율이 1보다 작거나 같고, 자화율은 0이하다. 대부분 물질의 반자성은 작은 효과이다. 그러나 초전도체는 자기장을 완전히 밀어낸다. 반자성체는 자기장내에서 안정된 균형을 지니며 전력 소비 없이 공중부양될 수 있다. 언쇼 정리는 정자기 부양의 가능성을 제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언쇼의 정리는 단지 강자성체와 같은 영구 모멘트를 지닌 물체에만 적용된다. 그 자기 에너지는 m·B로 주어진다. 강자성체는 장의 극대에 끌린다. 그것은 자유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자성은 자기장의 유도된 형태이다. 그리하여 자기 모멘트는 인가된 자기장 B에 비례한다. 이것은 반자성체의 자기에너지가 B에 비례한다는 의미이다. 반자성체는 또 자기장의 극소에도 끌린다. 그리고 자유 공간에 최소점이 있을 수 있다. (사실 ). 열분해 흑연(pyrolitic graphite)의 얇은 판이 대개 강한 반자성 물질이며 희토류 영구 자석과 같은 자석의 자기장내에 안정적으로 부유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상온에서 모든 성분으로 될 수 있다. 반자성의 유효한 전시를 할 수 있다. 반자성(反磁性,diamagnetism)은 물리학등에서 물체를 자기장에 놓을 때 자기장과 반대 방향으로 자성을 띠는 성질. 궤도 전자의 전자 유도 때문에 일어난다. 란다우 반자성(Landau反磁性)은 자기장 속에 놓인 전자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반자성. 자기장이 그 속에서 움직이는 전자를 원운동하도록 만들 때, 그 원운동으로 유도된 자기장이 외부에서 주어진 자기장을 감소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Journal of Korean Powder Metallurgy Institute Vol.20 No.2 pp.142-147, DOI : https://doi.org/10.4150/KPMI.2013.20.2.142, Synthesis of YBa₂Cu₃O7-y Powder using a Powder Reaction Method and Fabrication of the Bulk Superconductors , Chan-Joong Kima, *, Young Ju Jeona,b, Seung Yeon Parka,c, Byung Youn Youa, Soon-Dong Parka ,(a)Neutron Science Division, 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Daejeon 305-353, Korea,(b)Department of Nanomaterials Engineering, Chungnam University, Daejeon 305-764, Korea (c)Schools of Advanced Materials Science and Engineering, Sungkunkwan University, Suwon 440-746, Korea (Received April 3, 2013; Accepted April 15, 2013) [참고](사이언스온-신규초전도물질 탐색과 전망)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Report.do?cn=KAR2011051655 "Anti" Magnetic water and Levitating Graphite by Diamagnetism Nave, Carl L "Magnetic Properties of Solids" Hyper Physics. Retrieved 200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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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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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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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CSE에 대해 알려주세요.
A: CSE은 CSE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컴퓨터 과학&컴퓨터 공학(Computer Science & Engineering) Customized Search Engine(맞춤 검색 엔진)의 약자로 구글이 하고 있는 주요 서비스 중 하나이다.<|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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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A0%95%EC%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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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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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황정일을 다룹니다. 황정일(1953년 ~ 2007년 7월 29일)은 주중한국대사관 정무공사다. 2003년에 주중한국 대사관 정무공사상을 수상했다. 2007년 7월 28일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배탈이 나 다음날인 29일 베이징의 비스타클리닉병원을 찾았고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던 중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10여분만에 사망했다. 2007년 8월7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중국정부는 같은해 2월 긴급통지문을 통해 항생제 로세핀과 칼슘을 동시투약하지 말라는 주의통보를 전국병원에 내렸으며 황정무공사는 당일 병원에서 칼슘과 레시핀 항생제를 맞은것으로 밝혀졌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1722261?sid=104)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질병으로 인한 (심근경색) 사망이라고 중국측은 발표하였으나 많은 의혹들이 있다. 향년 5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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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B0%EA%B3%A8%EC%96%B4%EB%A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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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골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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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연골어류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세요.
<|assistant|> 연골어류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연골어류(軟骨魚類)는 연골어강(軟骨魚綱, Chondrichthyes)에 속하는 물고기로 딱딱한 뼈 대신에 질긴 피부와 가벼운 물렁뼈를 가지고 있다. 뼈가 단단한 경골어류는 기체로 채워진 부레(풍선모양의 주머니)로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가라앉거나 하지만, 연골어류는 부레가 없다. 때문에 연골어류는 가벼운 지방을 축적하여 약간의 부력을 얻고, 계속 물에 떠 있기 위해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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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C%BF%84%20%ED%85%94%EB%A0%88%ED%8F%AC%ED%8A%B8%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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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텔레포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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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텔레포트역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도쿄 텔레포트역()()은 일본 도쿄도 고토구 아오미에 있는 철도역이다. 1996년 3월 30일 - 영업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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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6%AC%EB%AF%B8%EC%96%B4%EB%A6%AC%EA%B7%B8%2019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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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 19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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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 1993-94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FA 프리미어리그 1993-94 시즌은 프리미어리그의 두 번째 시즌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2회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준우승 :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플레이오프 우승 팀 : 스윈던 타운 FC 1: 아스널은 전년도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팀 자격으로 UEFA 컵 위너스컵에 참가하였다. 2: 애스턴 빌라는 UEFA 페어 플레이 랭킹에 선정되어 UEFA컵에 참가하였다. 3: 첼시는 FA컵 우승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준우승 팀 자격으로 UEFA 컵 위너스컵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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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872%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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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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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1872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1월 9일 - 1872년 보스턴 대화재 발생. 콰가 멸종. 1월 23일 - 폴 랑주뱅, 프랑스의 물리학자 3월 7일 - 피트 몬드리안, 네덜란드의 화가 3월 15일 - 해리 홀먼, 미국의 배우 4월 30일 - 루이지 바를라시나,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신부 5월 2일 - 히구치 이치요, 일본의 작가 5월 18일 - 버트런드 러셀, 영국의 철학자 7월 4일 - 캘빈 쿨리지, 미국 제30대 대통령 8월 21일 - 오브리 비어즐리, 영국의 화가 9월 5일 - 카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 독일의 정치인, 기업인 9월 20일 - 모리스 가믈랭, 프랑스의 군인 9월 23일 -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우크라이나의 오페라 가수 10월 16일 - 안톤 데니킨, 러시아 제국의 장군 10월 20일 - 순명효황후, 대한제국 순종의 첫 번째 황후 3월 10일 - 이탈리아 통일 운동가 주세페 마치니 11월 6일 - 미국의 군인 조지 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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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C%9C%A4%EA%B8%B0%20%28%EC%B2%A0%ED%95%99%EC%9E%9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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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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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홍윤기 (철학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홍윤기(1957년 1월 28일 ~ )는 대한민국의 철학자 및 교수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과정,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지냈다. 2014년을 기준으로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다. 윤리학, 경제와 철학, 법과 사회와 철학, 문화와 역사의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D.맥렐란,《청년헤겔운동》(학민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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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EB%8C%80%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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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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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울대학교에 대해 알려주세요.
A: 이 텍스트는 서울대학교을 다룹니다.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국립 대학이다. 1946년에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한 여러 관·공·사립 전문학교가 통합되면서 국립종합대학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948년에 ‘서울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2011년에는 국립대학법인으로 변경되었다. 법인의 명칭은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이다. 현재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의 거점국립대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2020년 기준으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 제1항 제4호에 따라 주된 사무소를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소재한 관악캠퍼스에 설치하고, 그밖에 서울 종로구,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경기 시흥시에 멀티캠퍼스를 두고 있다. 15개 단과대학 82개 학과(부), 1개 자유전공학부, 1개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5계열 72학과(부) 31개 협동과정, 박사과정 5계열 73학과(부) 32개 협동과정, 12개의 전문대학원 15개 학과(부)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고종 광무 태황제는 자력 근대화를 위한 교육 사업을 추진하면서 처음으로 여러 근대식 고등 교육 기관을 설치했다. 1895년 4월 19일, 칙령을 통해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설립됐고, 그해 5월 6일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고 다음해 이준을 포함한 47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법학교(1909년) - 경성전수학교(1911년) - 경성법학전문학교(1922년) -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2018년 2월까지 존속하고 문을 닫는다. 2018년 3월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과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법과대학 석사과정과 박사과정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1895년 5월 10일 소학교 설립 준비의 일환으로 소학교 교사 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됐다. 일곱 차례에 걸쳐 졸업생 19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한성사범학교는 이후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년) -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더욱 적극적으로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1899년 고종은 “우리나라에 각종 학교를 대략 설치했으나 의학교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며 의학교관제를 반포하고 전문 의료인을 양성했다. 의학교는 이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의학전문학교-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계승됐다. 대한의원은 1901년 최초로 교육부 산하에 산파 및 간호부양성과를 신설하는데 이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의 시작이었다. 1904년에는 농업과 상업을 가르치는 농상공학교가 개교했고, 이후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면서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이어졌다.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청 문화교육부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대학교에 따르면, 조선교육심의회에서 현대적 국립대학을 건립할 때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 공립 및 사립의 전문학교를 통합하자는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으로써 서울대학교는 공식적으로 설립됐다. 이 법령의 내용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 공 · 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가 1946년 10월에 개교하였다. 초대 총장으로 해리 엔스테드 미국 해군 대위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에 있던 교수, 직원, 학생들은 반대 운동을 강렬히 전개했으며, 이를 국대안 파동이라 부른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1951년부터는 부산으로 옮겨가 전시연합대학의 형태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듬해 5월에 전시 연합대학은 해체됐으며, 그 다음 해인 1953년 9월 18일이 돼서야 본부와 문리과 대학이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1960년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으로 서울대학교 재학생 7명이 사망했으며, 그 해 11월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됐다. 4·19 혁명이 끝나고 대학에는 학생회 조직과 같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잠시 조성됐으나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탄압이 다시 이어졌다. 1960년대는 이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지는 시기였다. 한편 1961년에는 정부의 ‘국립대학 정비절차’에 따라 많은 사범대 학과가 폐지되고 문리대로 합쳐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범대 교수와 학생들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듬해 정부는 없어진 학과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은 서울특별시 동숭동(문리과대학), 연건동(의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음악대학), 공릉동(공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 경기도 수원시(농과대학) 등 곳곳에 나뉘어 있었다. 이에 서울대학교는 종합화 계획을 세우고 1975년에 공과대학, 농과대학(현재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과 의과대학 본과만을 제외하고 단과대학들을 모두 새로 세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고, 1980년에는 노원구 공릉동의 공과대학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현재 공릉동 캠퍼스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수원에 남아 있던 단과대학도 2003년에 관악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현재와 같이 관악과 연건캠퍼스만 남게 됐다. 한편 10월 유신 이후 계속 억눌려 있던 대학에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1991년에 총장 선출 방식도 직선제로 변경됐다. 첫 직선제 총장인 김종운을 시작으로 이수성, 선우중호, 이기준, 정운찬, 이장무, 오연천 등이 총장으로 선출됐다. 2011년 12월 28일에는 새로 시행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46년 이래 65년 동안 유지해왔던 국립대학교 체제로부터 독립법인 체제로 전환하였다. 2014년 6월에는 평창캠퍼스가 준공됐으며 같은 해 7월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에 치러진 첫 간선제 총장 선거에서 성낙인이 제26대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2018년 7월까지 맡았다. 서울대학교 총장은 대한민국 내에서의 서울대학교의 위상으로 인해 대한민국 고등교육 및 학문 분야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지위는 장관급이다. 1946년 개교 이후 총 26명의 총장이 배출되었으며 이들 중 3명이 국무총리, 6명이 장관을 지냈다. 개교 초기부터는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제였으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제19대 총장부터 직선제로 바뀌었으며, 2011년에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 간선제로 다시 바뀌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문이과대학, 법과대학이 설치된 곳은 과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京城帝國大學法文學部)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한 때에 공산군의 병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우에노(上野)가 대학의 경관조성을 위해 지중해 지역에서 선박편으로 마로니에 나무 3그루를 실어와 심었는데 마로니에 이외에도 10여 그루의 은행나무, 느티나무, 그 외에 차츰 자작나무, 개나리, 라일락 등도 심어져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을 이루게 됐다. 당시 교정은 아름답기가 서울의 10대 정원(庭園)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었다. 도서관 건물은 1927년 8월에 경성제대 법문학부 연구실을 겸해 세워진 건물로, 4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당시 총건평 1,491평 중에 도서관은 사무실 및 열람실 519평, 서고 392평이었는데 해방 후 1층을 더 올려 5층이 됐다. 1975년 당시 열람실은 154평에 불과해 4백여 명을 수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직전의 장서 수는 55만권에 달하였으나 해방 후 30년 동안 늘어난 장서의 양은 10만 권 미만이었다고 한다. 문리대 운동장 쪽에 있었던 빨간 벽돌조 3층 건물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강의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의실의 수는 16개로, 원래 경기도립상업전문학교 건물이었던 것을 1926년 경성제대가 인수를 해 사용하였다. 경성제대는 그 후 2년에 걸쳐 이 건물 주변에 도서관, 본관 등을 지어 대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1964년 과학관 건물이 지어지자 그 뒤에 가려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게 됐고 상대적으로 초라한 모습이 됐다. 1931년 9월 완공된 건물로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진 서울대학교 본부로 쓰였다. 본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됐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마로니에 공원이 들어서게 됐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다. 1920년대 경성여자사범학교로 지어진 것을 서울 수복 후 옮겨온 것으로, 캠퍼스 뒤에는 선농단이 있었다. 한편 상과대학은 성북구 종암동 19번지(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며, 원래 경성고등상업학교 건물이었다. 벽돌 건물 안에 연구실 35곳, 강의실 16곳이 있었다. 송림에 감싸여 황성(荒城)의 숲으로 통했으며, 인근에 고려대학교가 있었다.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이들 건물은 현재 모두 철거됐다. 노원구 공릉2동에 있던 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건물을 이어받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자리잡았으며, 다른 단과대보다 조금 늦은 1980년에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으며 계속 관리되고 있다. 과거 서울대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가 사용하던 서울 중구 을지로의 땅은 현재 국방부와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해당 토지의 크기는 약 4만m2 정도로 현재 미군 극동사령부 공병단이 점유하고 있다. 대학 본부가 있는 관악캠퍼스는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에 따라 조성됐다. 원래는 관악골프장이 있던 자리였다. 1970년대 1만 4천여 명이었던 학생 수가 1980년대에는 2만 4천여 명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학교 식당 등의 생활 지원 시설 및 연구 시설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1987년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캠퍼스부문계획’이 수립돼 시설 면적이 기존에 비해 2배가량 늘어났다. 현재 관악캠퍼스에 있는 약 200개의 건물 중 절반은 199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캠퍼스를 감싸고 있는 순환도로의 길이는 약 5킬로미터이다. 서울대학교의 로고는 ‘서울’, ‘국립’, ‘대학교’의 머리글자인 'ㅅ', 'ㄱ', 'ㄷ'을 따서 만들어졌으며, 개교 60주년을 맞아 은회색을 입혔다. 정문 디자인을 새롭게 구상한 디자인학부의 백명진 교수에 따르면, 중립적인 색상인 은회색을 통해 공적인 교육 공간의 느낌을 표현하였고 조명을 설치해 24시간 열려 있는 서울대의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대 정문은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는 서울 지하철에서 대학 이름을 역명으로 사용하는 역 중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것이다. 정문 근처에는 대운동장을 끼고 제일 가까이 체육관과 미술관, 경영대학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체육관은 세계 최초의 올림픽 탁구 경기장으로서 1988년 서울 올림픽 탁구 경기가 이 곳에서 열렸다. 그 뒤로 산 쪽으로 사회과학대학, 법과대학, 음악대학, 미술대학, 인문대학, 사범대학 등의 순서로 인문 계통의 단과대학이 있으며 중앙도서관의 터널을 경계로 반대편에는 약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등 이과 계통의 단과대학이 있다. 정문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오르면 후문으로 가는 갈림길(속칭 ‘기숙사삼거리’)이 나오는데, 왼쪽 길로 내려가면 낙성대역에 이르게 되며 오른쪽 길로 내려갈 경우 버들골, 노천강당, 교수회관, 학군단, 신공학관 등으로 갈 수 있다. 낙성대역을 향하는 길에는 서울대학교 기숙사인 ‘관악사’와 교수 회관인 ‘호암교수회관’이 있다. 한편 경영대-법대백주년기념관-문화관-중앙도서관-공대 폭포로 캠퍼스를 관통하는 길은 ‘걷고 싶은 거리’로 조성돼 있다. 걷고 싶은 거리는 주위 조경과 보도를 정비하였으며 밤에는 은은한 조명 시설이 걷고 싶은 거리를 비춘다. 학교가 관악산을 끼고 있기 때문에 학내 각종 도로들은 등산객들에게 관악산 정상 등반을 위한 등산로로도 애용된다. 신공학관 부근에서 ‘자운암’이라고 쓰인 표지판 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관악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봄에는 캠퍼스 내 벚꽃, 진달래, 개나리의 만개로 상춘객의 발길이 빈번하다. 2008년 4월 25일, 서울대학교는 캠퍼스 안에 있는 규장각, 미술관, 박물관, 문화관, 중앙도서관 등 5개 거점 문화시설을 활용해 ‘문화 캠퍼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그 첫 프로그램으로 다음날인 26일에 학부모 3천여 명을 초청해 문화 행사를 개최했다. 옛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자리에 터를 잡은 연건캠퍼스에는 의과대학, 치의학대학원, 간호대학이 있으며, 서울대학교병원도 이곳에 있다. 대학로와 창경궁로 사이에 있으며, 수도권 전철 4호선 혜화역에서 가깝다. 캠퍼스의 중심에 서울대학교병원 본관이 있으며, 의대본관, 함춘회관 등이 대학로 쪽에, 치과대학이 창경궁로 쪽에 자리 잡고 있다. 2025년까지 간호대학은 관악으로 이전하기로 하였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대화면 신리에 위치하며, 2014년 6월 12일 정식으로 준공식이 열렸다. 국제농업기술대학원이 평창캠퍼스 내의 유일한 교육기관이며 현재 약 100명 이상의 석사 박사과정생들이 수업 및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캠퍼스 전체가 농업 및 바이오 집중 기관이다 보니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 방문하기 위해선 KTX 평창역에서 하루 5회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택시를 타야한다. 택시비는 가장 가까운 문으로 진입 시 5500원이다. 과거에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이 있던 수원캠퍼스는 이들 단과대학이 2003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매각이 추진 중이지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울대 법인화 이후 동쪽 부지는 서울대학교 소유로 남았지만 서쪽 부지는 기획재정부 소유가 되었다. 서울대학교는 서울대 소유인 구 농학도서관을 리모델링해서 중앙도서관의 오래된 책들을 보존하기 위한 보존도서관을 만들었다. 기획재정부와 경기도가 구 수원캠퍼스의 정부 소유 부지를 경기도 소유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 부지와 교환함에 따라 정부 소유 부지는 모두 경기도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경기상상캠퍼스가 되었다. 수원캠퍼스의 서울대 소유부지 기숙사(상록사)는 경기도 수원 소재 대학생들을 위해 경기도에 임대를 주었다. 2008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광교신도시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을 세웠으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은 본부는 관악에 있지만 수업과 연구는 광교의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건물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시스템면역의학연구소는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화촌면에 조성됐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청라지구에 한국과학기술원과 함께 국제 과학 복합 연구 단지를조성할 계획이 있었으나 무산됐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에 그린바이오 첨단 연구 단지인 평창캠퍼스를 조성했다. 평창캠퍼스는 평창역 인근에 있다. 서울대학교는 또한 전라남도 구례군과 광양시 등지에 200km2에 가까운 연습림을 소유하고 있다.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의 교육조직은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ㆍ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서울대법') 제4조 제1항 제6호,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정관(이하 '서울대정관') 제30조에 따라 서울대학교 이사회에 제·개정 권한이 있는 학칙으로 위임되어 있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 학칙(이하 '학칙') 제2장 제2절 제14조 내지 제22조가 '교육조직'이라는 제목으로 대학, 대학원의 편제를 규정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학칙 제14조 제1항, 제3항 별표 1에 따라 2022년 기준 15개 단과대학에 83개 학과(부)가 설치되어 있다. 각 학과별 정원은 학칙 제16조 제1항 별표2가 규정하고 있다. 단과대학별 개설 학과의 연혁을 개요하면 다음과 같다. 치의예과 및 치의학과는 2002년 학번 50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학부 신입생을 받지 않다가 ‘치의학전문대학원’ 제도로서 대학원에 통합된 후에 2014년 입시에서부터 다시 치의학과 학석사 통합과정 모집단위를 운영하며 이 단위로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다. 또한 2009학년도부터는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의 개원으로 법학부의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 2008학년도 신입생부터는 주전공 외에 설계전공, 복수전공, 부전공, 연합전공, 연계전공 등 다른 학과의 학점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제2전공제(규범화 되지는 않음)가 사실상 의무적으로 실시됐다. 2017학년도 신입생부터 광역으로 모집하던 사회과학대학을 학부 별로 모집한다. 서울대학교 학부 과정 학과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자유전공학부: 자유전공학부. 서울대학교 학칙 제14조 제2항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고등교육법 제29조의2 제1항 제1호에 해당하는 1개의 일반대학원과 제2호에 해당하는 12개의 전문대학원을 두고 있다. 서울대학교 일반대학원은 고등교육법 제35조 제2항, 제6항 및 같은 법 시행령 제43조 제2항에 따른 학술학위로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단일기관이다. 일반대학원이 하나만 설치되어 있으나, 하나의 일반대학원에서 모든 학위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학칙 제10조 제2항에 따라 일반대학원장이 각 대학장(대학 학장) 및 전문대학원장(대학원 원장)에게 위임하여 운영하는 구조이다. 다만 학칙 제10조 제2항에 의하여 일반대학원 학생들의 소속까지 개별 대학 및 전문대학원에 위임되는 것은 아니므로, 일반대학원 학생들은 학칙 제15조에 따라 교육과정이 위임된 각 대학·전문대학원 소속이 아닌 일반대학원 산하의 학과·전공·협동과정 중 1곳의 소속이 된다. 일반대학원에 석사과정은 5계열, 72학과(부), 31협동과정이, 박사과정은 5계열, 73학과(부), 32협동과정이 설치되어 있으며 각 과정별 정원은 학칙 제17조 제1항 별표3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 서울대학교에 속한 전문대학원은 총 12곳으로, 이들은 학칙 제90조 제2항에 따라 원칙적으로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43조 제2항의 전문학위가 수여되나 예외적으로 학술학위를 수여받을 수 있다. 다만 법학전문대학원의 경우 다른 전문대학원과 달리 고등교육법 제29조의2 제3항에 따라 법학전문대학원 설치ㆍ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추가적인 규율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또한 2008년에 법과대학 신입생을 더 이상 뽑지 못하게 되었고 전문대학원인 법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되어 매년 정원의 1/3 이상을 타대학 출신으로 선발해야만 하게 되었다. 한편 2016년에는 공학전문대학원이, 2020년에는 데이터사이언스전문대학원이 개원하였다. 경영전문대학원: Global MBA, SNU MBA, Executive MBA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나노융합학과, 디지털정보융합학과, 지능형융합시스템학과, 분자의학 및 바이오제약학과 중앙도서관: 1946년 개교하면서 경성대학의 건물과 서적을 이어받아 개관하였다. 1949년 도서관 명칭을 ‘국립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변경하였으며 1975년 1월 본관을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도서관 명칭을 ‘서울대학교도서관’으로 변경하였고, 1992년 다시 ‘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으로 변경하였다. 수원캠퍼스에 있던 농업생명과학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2005년 농학도서관도 수원캠퍼스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2006년 기준으로 분관으로는 사회과학도서관, 경영학도서관, 농학도서관, 법학도서관, 의학도서관, 치의학도서관, 국제학도서관 등 총 7개가 있다. 중앙도서관은 관악캠퍼스 62동으로 대학본부 뒤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2009년 기준으로 분관을 포함한 총 장서량은 약 4백만 권이다. 도서관 내 열람실은 재학생 전용 열람실과 일반인도 사용 가능한 열람실로 나뉜다. 그동안 국립 대학교라는 성격에 비추어 지역 주민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전 열람실이 일반인에게도 개방되면서 운영돼 왔는데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열람실 부족으로 인해 학내에서 개방 여부에 따라 토론이 계속 있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람실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현재는 일부 열람실의 일반인 출입은 제한하게 됐다. 관정관: 기존 중앙도서관에 이어 별설된 제2의 중앙도서관이다. 기존 중앙도서관의 시설 노후와 학업 공간의 수요를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2012년부터 별관 신설이 계획되어 공모전을 통한 디자인이 입안되었으며 12년 3월부터 신축 기금 1000억 원 모금행사를 펼친 결과, 불과 2개월 만에 이종환 장학재단의 이종환 이사장이 단일 최대 기부 액수인 600억을 지원키로 하였고, 이어 수많은 교원과 각계각층의 동문 및 본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뜻 있는 일반인까지 약 700여 명이 모금에 동참하면서 약 100억 원을 마련했다. 2013년 5월 29일에 기공식이 있었고 당초 예정보다 완공이 지연되다가 2015년 2월 5일, 마침내 준공식을 가진 후 2월 23일 개관했다. 제2도서관의 이름은 관정관이라 하였는데 크게 기부한 이종환 명예이사장을 기려 그의 아호 관정(冠庭)을 딴 것이다.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구성되어 총넓이 약 2만 7천320m2이며 열람실 4천석, 공동학습실, 멀티미디어실, 스터디가든, 콘퍼런스룸, 실내정원 등이 시설되어 있고 건설에 기부한 유지자들을 기려 도서관 내부 서가와 의자, 기타 시설 등에는 100만 원 이상 기부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 통로로 연결된 기존 중앙도서관 (3만 500m2)과 합하여 국내 대학교 중 명실상부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갖추었다. 그 완공과 함께 각종 상업 시설이 더불어 들어서는 것과, 교외 일반인 및 본교 졸업자의 출입을 제한하는 문제로 하여 논란을 빚기도 하였다. 1962년 5월에 서울대학교 부속중앙도서관 안에 ‘규장각 도서위원회’가 설치됐다. 1990년 6월에 규장각 전용 건물이 준공돼 교내 G1 게이트 우측편,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됐다. 한국학연구에 기초자료가 되어온 규장각 도서 이외에 17만 5천여 책의 고도서, 5만 여점의 고문서, 1만 8천여 점의 책판 등 총 30만 여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2006년 2월 1일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가 통합되면서 현재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86년부터 고문서 간행사업을 시작한 ‘규장각 자료조사 사업’이 진행돼 오고 있으며 2001년부터 ‘한국학장기기초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한국학 관련 연구 과제를 지원하고 있다. 한국학에 대한 워크숍/심포지엄, 콜로퀴엄, 학술세미나 등의 학술행사 열고 있으며 시민강좌, 초서강좌 등 일반인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 학술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무료로 자료를 열람하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현재 원장은 국사학과 교수 김인걸이다. 서울대학교의 연구 기관으로는 주관대학연구소, 본부직할연구소, 국가지원연구센터, BK21플러스 사업단, 그리고 HK 사업단이 있다. 본부직할연구소로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소들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 기구인 국제 백신 연구소도 위치해 있다. 1995년 미술대학 동양화과 이종상 교수가 미술관의 건립 건의안을 냈으며 삼성문화재단의 기증으로 만들어졌다. 설계는 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콜하스가 맡았으며, 지상 3층, 지하 3층, 연면적 1357평의 규모로 삼성물산에서 시공을 맡았다. 2003년 관악 캠퍼스 정문 옆에 착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5년에 완공, 2006년 6월 8일에 개관하였다. 건물의 절반이 지면에서 떨어져 떠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 내에 기둥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나선형 계단으로 각 층이 연결돼 있는 독특한 구조로 국내 미술계와 건축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현재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권영걸 교수가 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2007년 10월 9일에는 마르그레테 2세 덴마크 여왕이 방문하기도 했다. 외부인은 유료 관람비를 지불해야 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관악캠퍼스에 있는 부속박물관이며, 1946년 대학의 설립과 함께 ‘서울대학교부속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이는 1941년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진열관의 동숭동 건물과 유물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975년 중앙도서관 6층으로 옮겨졌으며 이름도 ‘서울대학교 박물관’으로 변경됐다. 1993년 동원관 옆에 있는 현재의 신축 건물로 이전됐다. 1층에는 고고역사와 현대미술 및 기획물을, 2층에는 인류민속과 전통미술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상설 전시물로는 발해 소조불상, 근역화휘, 김홍도와 장승업의 작품을 비롯하여 각종 고고유적 출토물과 자연사 표본 등이 있다. 현재 박물관장은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이선복이다. 언어교육원은 1963년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에서 어학연구소로 발족하여 2001년 언어교육원으로 승격하였다. 언어교육원은 서울대학교 구성원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며, 외국인에게 한국어 및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이 밖에도 국가공인 영어능력 인증시험인 ‘TEPS’, ‘TEPS- Speaking & Writing’, ‘u-TEPS’ 등과 중국어, 일본어를 포함한 6개의 외국어 능력을 측정하는 ‘SNULT’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언어학 학술지 《어학연구》를 발행한다. 현 원장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전영철이다. 산하에 외국어교육센터, 한국어교육센터, TEPS 측정 센터, SNULT 센터가 있다. 언어교육원은 관악 캠퍼스 수의대와 행정대학원 옆에 있으며, 연건 캠퍼스에서도 분원을 두어 교육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관악사는 학부생활관, 대학원생활관, 그리고 가족생활관으로 구성돼 있다. 1975년 8월 서울대학교 설치령 제 14조에 의거, 관악사 5개동과 후생동 1개동을 개사하였으며, 당시 수용인원은 남학생 970명이었다. 여학생 거주동은 1983년 3월에 개사됐고, 수용인원은 288명이었다. 1996년 8월에는 기혼 대학원생들을 위한 가족생활관을 개사하였고, 수용세대는 200세대이었다. 1999년 9월에는 918동 1인실 대학원생활관을 개사하였고, 수용인원은 304명이었다. 2004년 3월에는 919동 아파트형 기숙사를 개사하였고, 수용인원은 990명이었다. 2010년 9월에 BTL생활관을 개사하였고, 7개동으로 수용인원은 2,500명이었다. 2014년 6월을 기준으로 학부생활관 8개동, 대학원생활관 7개동, 가족생활관 5개동으로 총 5,010명의 수용규모를 갖추고 있고, 여기에는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유학을 온 1,000여 명의 외국인 학생들도 포함돼 있다. 현재 사감은 수의과대학 수의학과 김대용 교수이다. 다른 학교들과 달리 특별히 제한된 출입 시간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더 상세한 사항들은 ‘관악사 가이드 북’(안내책자) 에 기술돼 있다. 관악사에서는 해마다 관악사 가이드 북을 발간하여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서 영문판 도 제공하고 있다. 관악사는 숙박 외에도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운영하여 학생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있다. 2012년 12월부터 서울대학생을 대상으로 소통·봉사·팀웍의 민주시민의 역량을 갖춘 사회적 리더 양성하기 위한 반복 트레이닝 토론 프로그램인 아크로폴리스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2014년 6월부터 관악사 거주 사생이 자신이 준비한 학업 관련 컨텐츠를 영상매체를 통해 다른 관악사 구성원과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지식나눔프로그램, 서울대학교 관악사 지식실천공유프로그램(GKNet)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연건사는 의과대학 등이 있는 연건캠퍼스에 있는 기숙사로 일반 사생동은 553명, 가족 생활동은 17세대의 수용 규모를 갖추고 있다. 함춘사는 130명, 국제회관은 51명이 그 수용 규모이다. 기록관 은 1997년 7월 서울대학교 기록 및 역사 보존을 위해 설치된 대학 사료실에서 출발하였으며, 2001년 9월에 현재의 명칭인 기록관으로 개칭됐다. 서울대학교와 관련된 역사 기록 및 행정 문서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다. 기록관에 소장된 기록물은 서울대학교의 역사적 발전과 변천을 보여주는 학교사 자료를 포함해 학생 운동 관련 자료, 교수 및 동문 등이 기증한 개인 컬렉션 등이다. 일반인도 열람 및 복사가 가능하며(단, 개인 정보가 포함된 자료는 부분열람만 가능) 현재 약 5만여 건의 서울대 관련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 기록관 홈페이지를 통해 기록물을 기증할 수도 있다. 기초교육원 은 2002년 대학생들의 기본 소양과 각 전공의 기초 지식을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치됐다. 서울대학교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TEPS 평가), 수학, 물리 성취도 평가를 담당하고 있으며 성적에 따라 수준에 맞는 기초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핵심교양의 지정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주제와 수업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제공하고 있다. 현 원장은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허남진이다. 대학생활문화원 은 학생들의 심리검사 및 상담을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962년 2월 ‘학생지도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는데 1964년 의과대학 함춘회관에 있다가 1975년 관악캠퍼스 학생회관으로 장소를 옮겼으며, 2001년에 현재의 명칭을 대학생활문화원으로 변경하였다. 현 원장은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혜란이다. 평생교육원 은 온/오프라인 평생교육을 통해 동반자 사회의 지식나눔을 실천하는 기관으로 2010년 5월 개원하였다. 다양한 시민교양교육 프로그램과 원격교육을 활용한 전문자격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 중 서울대학교 온라인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은 2013년 1월 기준으로 33개국 80여개 지역의 학습자에게 서비스되고 있다. 현 원장은 국어국문학과 교수 장소원이다. 서울대학교 산하에는 총 4개의 부설학교가 존재한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여자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가 그것으로, 서울대학교 법인화 이후에도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법인 소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완전히 편입되었으며, 국립대학법인이 부설한 학교는 국립학교로 간주한다는 관련 법조항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국립이지만, 운영은 사립학교에 가까운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서울대학교 부설학교의 교직원들 중에는 아직 국공립학교 교사들이 남아있으나, 그들이 수 년 후 정기 인사이동을 하고 법인에서 빈 자리를 채울 교직원을 새로 뽑으면, 신임 교직원들은 국공립학교 교사가 아니라 법인 소속 직원이 되므로 사립학교 교직원의 신분에 가까우며 그 외 운영 전반이 사립학교와 유사하게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정부가 시행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수석들이 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생들이 대한민국 학계·정계·재계에 대거 포진돼 있다. 많은 인재를 배출해내고 있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혹은 '대한민국의 최고 지성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서울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초기에 수능·서울대학교 폐지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타임스가 발표한 세계 대학 평가와 전문 대학평가 기관인 QS가 발표한 QS 세계 대학 평가 등의 세계 대학 평가에서 서울대학교의 순위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2005년 93위로 처음 100위권에 진입한데 이어 2006년 63위, 2007년 51위, 2008년 50위, 2009년 47위, 2010년 50위, 2011년 42위, 2012년 37위, 2013년 35위, 2014년 31위 로 아시아 최고의 명문이자 일본 최고의 명문이라고 하는 도쿄대와 동위에 자리하는 등 매년 순위가 올랐으며, 이렇듯 국외 종합 평가에서도 국내 대학 가운데 최고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2015년까지 세계 30대 대학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으며 2025년 이내에는 세계 순위에서 무려 10위권 대학 가운데 들겠다는 포부를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QS 평가는 학술적, 혹은 연구성과 보다는 평판도가 대학 순위에 큰 비중을 차지해서 신뢰성의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2015년에 타임스 등 여러 대학 평가기관에서 평가대학을 확대하고, 채점기준을 바꾸면서 QS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대학 평가기관 순위가 하락했다. 2015년 타임스 기준 순위는 85위, ARWU 기준 순위 100위권 이하, 2018 US News&World Report 기준 순위 129위이다. 한편, 2009년 서울대학교는 프랑스 파리 국립광업학교가 실시한 《최고경영자배출능력에 따른 대학평가》에서 세계 500대 기업 CEO 중 9명을 배출해 세계 5위에 올랐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군부독재 정권 시대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끈 주요 대학 학생회 가운데 하나이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주화의 달성과정에서 서울대학교 학생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2007년을 기점으로 50대를 맞았으며, 3.8 여성의 날 행사, 4.19혁명 기념 대행진, 4.30 메이데이 행사, 봄 대동제(5월), 가을 대동제(10월), 총학생회 선거(11월) 등을 기획한다. 2006년 황라열 총학생회장의 탄핵과, 송동길 부총학생회장의 사퇴로 한동안 단대 회장단 회의 체제로 운영됐다. 선거는 매년 11월에 열리지만 2006년 선거 당시 투표율이 낮아 2007년 4월에 재선거가 있었으며, 학생행진(운동권 좌파) 계열인 한성실 후보가 회장으로 당선됐다. 2007년 선거에서는 비 운동권 계열인 실천 가능 선거운동본부의 전창열 후보가 당선됐고 이듬해 선거에서도 같은 선본의 박진혁 후보가 당선됐다. 이후 이른바 ‘식권파동’,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도청 사건’ 등을 겪으며 2009년 11월, 2010년 4월 두 차례의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되며 2010년은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로 운영됐다. 2010년 11월, 학생행진 계열로 사회대 학생회장 출신인 지윤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으며 이후 2012년 3월에 선출된 사노위 계열로 법대 학생회장 출신의 오준규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현재 2013년 4월에 당선된 산림환경학과 소속 김형래가 총학생회장을 맡고 있다. 학생 동아리는 본부에 소속된 중앙 동아리와 단과대학에 소속된 단과대학 동아리로 나뉘어 있으며 본부 동아리의 수는 2006년 기준으로 103개이다. 본부 동아리에 가입한 학생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들의 취미와 특기를 연마한다. 서울대학교에는 체육 특기생이 없지만 야구를 비롯한 축구, 농구부 등이 존재한다. 1977년 창단한 야구부는 199패 1무 뒤에 2004년 첫 승을 거뒀으며, 축구부도 역시 같은 해인 2004년에야 18년 만에 승리를 맛보았다. 농구부도 기록은 좋지 않아, 2001년 이후로 무승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서울대학교 복싱부는 2001년부터 대학 복싱 동아리연합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네 번이나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대학신문: 주간지 《대학신문》(大學新聞)은 1952년 2월 4일 한국 전쟁 피난 중에 창간돼 1953년 서울 동숭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58년부터 고교판을 발행한 적도 있다. 1960년 재정난으로 한때 발간이 중지되기도 하였지만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발행해오고 있다. 창간 당시에는 유료(500원)였고 한때 주 2회 찍어내던 적도 있으나 현재는 매주 월요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방학이나 시험기간에는 발행하지 않는다. 서울대저널: 월간지 《서울대저널》은 1995년 총학생회에서 《우리세대》란 이름으로 창간했다. 1997년 총학생회에서 벗어났으며, 2001년 《서울대저널》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육저널: 2007년 사범대 학생회에서 준비호를 발행하였으며 이후 연 4회 혹은 3회 발간되고 있다. 준비호 발행 이후에는 사범대 학생회 소속이 아닌 독립적인 자치언론으로 운영되고 있다. 교지 관악: 1990년에 창간, 2014년까지 매학기 말(연 2회)에 발행되었다. 본래 총학생회 산하에 있었으나 2006년 총학생회회칙에서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2014년에는 신입 기자 부족으로 폐간을 발표하였다. 쥬이쌍스: 여성주의 자치언론 《쥬이쌍스》는 2002년 시작하여 꾸준히 발행되고 있다. 스누나우: 2001년 문을 연 인터넷 뉴스 ‘스누나우’는 2007년 종간하였다. 스누라이프(SNULife): 1999년에 개설됐으며 학내 뉴스, 선거 소식과 역사, 교수들과의 대화 등의 내용을 제공하는 등 언론으로서의 기능도 일부 담당하고 있다. 스누라이프는 비공식적인 사이트이고, 일부 학생들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사이트로써 기능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서울대학교는 설립과 개교 이래로 학계, 법조계, 정계, 재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의료계 등 사회 다방면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33만 동문을 보유하였다. 서울대학교 총동창회는 시기별로 단독활동기(1946년 ~ 1968년 12월)와 연립활동기(1968년 12월 ~ 1976년 2월)와 종합활동기(1976년 2월 ~ 1979년 12월) 그리고 발전구축기(1980년 1월 ~ 현재)로 나눌 수 있다. '샤' 모양을 한 정문은 1978년 완공된 것으로 서울대학교의 랜드마크이다. 국립 서울대학교의 초성(ㄱㅅㄷ)을 표현한 조형물로 서울대학교의 교훈인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의 '진리'를 찾는 열쇠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로부터 이어지는 관악로 14길은 여기서 이름을 본따 '샤로수길'이라 불린다. 샤로수길은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곳으로 기실 관악구에 위치한 커다란 상권 가운데 하나이다. 2006년에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기존 노란색에서 밝은 은회색으로 새로이 도색하고 정문 주변에 밤새 점등되는 조명을 설치했다. 이는 공적인 교육 공간의 이미지를 강화함과 동시에 24시간 깨어 있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서울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2022년에는 정문 환경 개선 사업이 실시되어 정문 광장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조형물 바로 아래를 지났던 기존의 4차선 도로는 관악산 계곡 방향으로 옮겨졌고 정문 광장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서현 교수의 설계 아래 4월 25일 착공하여 동년 8월 24일에 완공되었다. 광장 바닥에는 서울대학교의 정장이 새겨졌고, 그 위에는 '지식의 계단'이라는 이름의 삼각형 모양의 수경 시설이 설치되었다. '샤' 조형물 앞에는 '지식인의 의자'가 설치되어 재학생 및 졸업생, 방문객 등이 기념 사진을 남기기에 용이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구 공과대학 본관과 교사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과 창학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12호 서울대학교 구 공과대학 광산학과 교사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륙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369호 서울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대학교 40년사》, 서울대학교출판사, 1986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대학교 50년사》, 서울대학교출판사, 199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2014년 3월 18일에 확인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50년사 편집위원회 저,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50년 (1961-2011)》,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인류학과, 2011, 서울대교수민주화운동50년사발간 저, 《서울대학교 교수민주화운동 50년사》, 서울대학교출판사, 1997 차배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사 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최종고, 《서울법대시대. 내가 본 서울대 반세기》,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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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D%83%80%20%EC%8A%8C%EB%A1%9C%EC%BF%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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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 슌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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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 슌로쿠은 하타 슌로쿠(, 1879년 7월 26일 ~ 1962년 5월 10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원수이자 육군 대장이었다. 그는 가이코샤(偕行社)의 회장이었으며, 그의 형인 하타 에이타로(畑英太郎)는 육군 대장, 육군성 군무 국장, 관동군 사령관 등을 역임한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이었다. 하타 슌로쿠는 구 아이즈번 무사의 자식으로 태어나, 12세 때에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하코다테로 이사를 갔고, 1900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2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러일 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으며, 1910년에는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군인이 된 이후에는 작전에 관계되어 있는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고 1936년에는 타이완 주둔 일본군 사령관, 1937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승진해 군사 참의관과 육군 교육 총감을 겸임하였다. 하타는 1937년,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을 때, 책임자인 마쓰이 이와네 대장의 경질을 건의하였다. 같은 해에는 하야시 센주로 등과 함께 일본 수반 지명 후보에 헤아려졌다. 1938년에는 마쓰이 대신에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에 임명돼 쉬저우에서 벌어진 우한 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하였다. 1939년에는 그 해 8월에 성립된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육군 대신에 올랐고, 이후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에서도 유임하였다. 하타는 1941년 3월,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이 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약 25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학살당한 저장 장시 작전()과 창자오 대학살( 당시, 군의 주 지휘관이었다. 1944년 하타는 원수로 승진하였으며, 1945년 4월에는 본토 결전에 대비해 히로시마시에 사령부를 둔 제2총군이 조직되면서 그 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 시에 투하된 원자 폭탄이 히로시마역 부근에서 피폭되었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 14일 오전 10시, 히로히토는 최고 회의의 개최에 앞서 원수 회의를 소집해 하타 슌로쿠, 스기야마 하지메, 나가노 오사미 세 원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스기야마와 나가노는 전쟁을 할 것을 주장했지만, 하타만은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8월 18일 관동군 시찰차 만주를 방문하였던 하타 슌로쿠는 붉은군대의 공세로 하얼빈에 발이 묶였다.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보다 상급자라는 이유로 소련은 항복문서 조인을 하타에게 요구하였고, 하타는 8월 19일 바실렙스키와 회동하여 항복 절차를 밟았다.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일본 육군을 구성하는 중요인사 중 하나였으나,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 판결을 받는 데 그쳤다. 6년간의 복역 후, 1954년에 가석방 허가를 받아 출소하였다. 1962년, 후쿠시마현의 전몰자 위령비 제막식 참석 중 갑작스럽게 쓰러져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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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A6%88%EC%8B%9C%EB%A7%88%20%ED%83%80%EC%B9%B4%ED%9E%88%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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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시마 타카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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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미즈시마 타카히로을 다룹니다. 미즈시마 타카히로(, 1976년 6월 14일 ~ )는 일본의 성우이다. 악셀원 소속. 가나가와현 출신. 애칭은 다이츄(). 안녕, 절망선생 (쿠도 준, 타카시 등) 속 안녕, 절망선생 (쿠도 준, 타카시, 하가 등)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R2 (로로 람페르지) 참 안녕, 절망선생 (쿠도 준, 타카시, 하가 등) Angel Beats! (타카마츠) 다마고치! 미라클 프렌즈(스마트치) 미남고교 지구방위부 love!-(세쌍둥이) 베르세르크 천년제국의 매편 성마전기의 장 (세르피코) WHITE ALBUM 2~introductory chapter~ (키타하라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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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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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델마와 루이스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 델마와 루이스은 《델마와 루이스》()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제작하고 수전 서랜던과 지나 데이비스가 주연한 1991년작 미국 영화이다. 로드 무비의 전형으로, 평범한 두 여성이 겪는 사건들을 통하여 여성주의적인 요소를 표현하여 이후 여성주의 영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1991년 칸 영화제의 폐막 초대작으로 상영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델마와 루이스》를 여성주의 로드무비라고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영화를 특정 장르로 구분짓게 되면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관객층을 제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남편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는 가정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루이스(수전 서랜던)가 여행을 떠났다가 강간미수범을 살해하게 되면서 현행범으로 몰리게 된다. 그들이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신세가 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성별과 인종, 계층의 구분을 넘어 다양한 범주의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델마와 루이스》는 이전까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장르를 여성의 지속적인 반향을 보여줌으로써 여성화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영화를 본 수많은 관객들이 델마와 루이스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의 여정에서 표현되는 감정을 공감하며 느낄 수 있었다. 두 주인공 델마와 루이스를 통해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수한 장애물을 부딪히는 평범한 미국 여성들을 보여주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 영화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상징적인 요소들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가정주부인 델마는 덜렁대는 성격에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지만, 남편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여 외출도 매번 허락을 받아야 하는 답답한 현실에 불만이다. 루이즈는 웨이트레스로 꼼꼼하고 이성적이지만, 식탁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주말에 별장을 빌려 함께 지내기로 하고 각자 간단한 메모만을 남긴 채 신나게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고속도로변 휴게실에 차를 세웠을 때 평범한 두 여인들의 여행길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의 긴 여로에 오른다. 남편으로부터의 해방감에 들뜬 델마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을 마시고 휴게실에서 만난 할런 퍼케트와 춤을 추나, 퍼케트가 주차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강간하려 하자 루이스가 권총을 가져와 그를 제지하고 델마를 구해준다. 그때 남자가 성적인 모욕을 가하자 루이스는 그를 쏴 살해한다. 즐거움으로 가득찬 여행길은 이제 공포의 도주로 바뀌고 델마와 루이스는 극한 상황에 빠져든다. 더구나 루이스의 돈을 제이디라는 건달 청년이 훔쳐가는 바람에 델마는 솜씨 좋은 강도로 변신한다. 두 사람은 강력범으로 수배되나 형사 할 슬로컴브만이 두 여자의 어쩔 수 없는 여정을 알고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들이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유조차 트레일러가 그녀들의 차를 쫓아온다. 그 운전사는 끊임없이 성적 희롱으로 추근댄다. 고속도로변에서 몇번 그와 마주친 루이스는 그 운전사와 차를 나란히 달리게 됐을 때 뭘 원하느냐고 묻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러자 운전사는 신이 나 차에서 내려 그녀들의 차가 있는 곳으로 온다. 그때 루이스가 묻는다. "만약에 당신의 아내나 딸에게 누가 당신처럼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운전사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험한 욕을 해대기 시작한다. 그때 델마가 총을 꺼내 트레일러의 차 바퀴를 쏴 버린다. 그리고 유조차의 탱크를 쏴 폭파시켜 버린다. 경찰의 추격 끝에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에 몰리게 된 두 여인. 델마가 루이스에게 그냥 앞으로만 달리자고 소리친다. 서로의 눈빛을 확인한 두사람은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을 질주한다. 영화 초반에 집에서 주부로만 지내는 델마와 달리 루이스는 식당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직업과 관련한 여성의 지위가 변화하고 있는 시기였다. 윌리엄 대리티와 패트릭 메이슨에 따르면, 1990년 미국에서 성별에 기반하여 대규모 수평적 직업 분할이 있었다. 그 당시 직업에 관련한 상이지수는 53%였으며, 이는 여성의 53% 혹은 남성의 47%가 모든 직업에서 평등적인 성별 구성을 위해 다른 직업 필드로 옮겼음을 의미한다. 여성은 이전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직업 군에 진입하기 시작하였지만, 남성이 여성 중심의 직업에 진입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이러한 수평적 직업 분리는 성별에 관한 임금 차이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소였다. 미국 내 성별간 임금 격차는 동일임금법(Equal Pay Act)이 지정된 이래로 좁혀지고 있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와 임금 격차의 수렴은 주춤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1980년대 이래로 중상층 임금의 직업이 커짐에 따라 고임금 직업과 저임금 직업의 비중이 줄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양극화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전반적인 임금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80년대 후반에 남성이 한 가정의 유일한 수입원이어야 한다는 인식은 32%에서 21%로 감소하였다. 당시 15%의 가정만이 남성의 수입에만 의존한다는 결과를 보면 그 당시 많은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사회적 노동참여는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남성의 실질임금은 하락하였으며, 실업률은 높아졌다. 불투명한 미래에 불편함을 느낀 남성들은 보수주의로 회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여성의 취업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어머니의 취업이 어머니와 자녀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아이의 발달을 저하시킨다고 믿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여성의 전통적 가치가 강조되었으며, 직장 일을 하더라도 가정에 충실하기를 원하는 문화적, 도덕적 보수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그 당시 여성과 남성, 또 전업주부와 취업여성 간의 대립적 구도가 강화되었다. 영화의 주인공 델마와 그녀의 남편인 데럴을 통해 그 시대의 가부장적인 사회 모습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녀차별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전문직과 고위직에 여성의 비중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위직의 95%는 남성이 차지하고 있었다. 남성들은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여성이 취업을 하기보다는 집에서 전업주부로 지내기를 원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여성의 전통적 가치가 중요시되었으며,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문화적인 보수주의가 성행하였다. 1950년대부터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이름없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가정주부들은 원인을 알 수 없어 정의내리지 못하는 심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교외에서 남편과 자녀와 함께 집을 가지고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녀들은 심리적으로 불만족과 공허함을 느꼈다. 그들의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델마와 데럴의 관계를 이러한 시대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델마는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도 그의 폭력에 반항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참고 버틴다. 여성을 평등한 관계라고 인식하기 보다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성폭력에 기여하는 사회적 관습이나 사고방식 등을 일컫는 '강간 문화(rape culture)'는 1970년대 제2물결 여성주의자들에 의해서 식별된 사회현상으로서 1975년 동일한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려진 개념이다. 강간 문화와 흔히 연결되는 품행에는 피해자책임주의,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경시, 성폭력의 만연함 또는 피해에 대한 부정 등등이 있다. 강간 문화에는 성폭력을 평범한 삶의 일부로 여기거나 더 나아가서는 남성의 특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부추기고 여성에게 성적 행동에 관한 사전정의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적 메시지인 강간통념(rape myth)들을 영속시키기도 한다. 강간통념의 종류에는 성폭력을 그저 거친 섹스 정도로 취급한다든가 피해자에게 성폭행을 불러들인 책임을 지운다든가 등등이 있는데, 이러한 강간통념들에서 왜 델마와 루이스가 합법적으로 할란 퍼케트를 처벌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증거라곤 델마 얼굴의 피와 친구의 증언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소가 가능하다 해도 경찰서와 재판소에서 가부장제적 사고방식에 희생되었을게 뻔한 것이다. 비록 델마가 폭행을 당했지만 퍼케트와 춤을 추었고, 주차장으로 같이 나갔다는 사실이 델마를 궁지에 빠뜨릴 것이고, 그 사실에 대해서 '네가 먼저 꼬리를 쳤다,' '성관계를 바라던게 아니었다면 왜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춰서 흥분시켰냐,' '주차장까지 따라갔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만 하지 않았냐'등의 비난만 쏟아졌을 거란 뜻이다. 의법 처단은 물론, 재판소까지 가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델마와 루이스에게 퍼케트를 처벌할 수 있는 수단은 직접적인 자경주의밖에 안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진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퍼케트의 죽음을 '살인'보다는 '처형'이라 해석하게 되고, 델마와 루이스의 도주에도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성적 해방주의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서양, 특히 미국에서 성생활과 대인관계에 관한 사회적 규범들에 도전장을 내민 사회운동을 일컫는다. 결혼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이성애적 관계 이외의 다양한 성관계의 종류에 대한 수용이 증가하면서 피임과 경구 피임약, 알몸의 공개적 노출,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의 정상화, 동성애와 대안적 성생활, 낙태의 합법화 등의 주제들에 대한 수용도 따라서 증가했다. 여성주의 제2의 물결과 동시에 발생한 성적 해방주의는 여성적 및 퀴어 성생활을 옭아매는 고정관념들에 대한 공통적인 의문을 제기했으며, 여성주의자들에게도 주요 관심이었던 성적 해방주의의 주된 목표 중 남성에 대한 우호적 편견과 여성의 성적 대상화로부터의 배제, 그리고 여성이 외부의 간섭이나 비판 없이 성적 파트너를 고를 수 있는 권리의 취득에 협조를 받았다. 많은 여성주의 사상가들은 성적 수위(首位)의 주장이 궁극적 목적인 여성의 해방을 향한 중요한 움직임이라 믿었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에게 자진해서 먼저 성적 구애를 하고, 성교를 즐기며, 새로운 유형의 성행위를 시도해 보길 권고했다. 억압적인 남편을 떠난 델마의 혼외정사도 자유롭고 달달한 하룻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성적 해방주의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델마와 루이스는 미국의 영화 평론 사이트 메타크리틱에서 100점 만점 중 88점을 기록하고, IMDB에서 10점 만점 중 7.4점을 기록한 성공적인 영화이다. 또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대표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여성 친구들의 가벼운 모습을 담은 영화라고 광고하기도 한 버디 영화이다. 또한 평범한 여성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로드 무비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석양이 지는 가운데 외로이 달리는 자동차나 시골적인 풍경, 컨트리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로드무비의 클리셰를 따른다. 뉴욕 타임스의 기자 자넷 매슬린은 그녀의 평론에서 ‘이 영화는 원작자 칼리 코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적인 장면과 다른 요소들이 매우 놀랍다. 스콧 감독은 이전의 장엄하고 우울한 영화들과는 다르게 활기찬 코미디와 미국적인 요소를 사용해 시도하지 않았던 영화를 만들어냈다. 신선하고 활기찬 버디 영화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수잔 서랜던과 지나 데이비스의 기대하지 않았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는 평을 남겼다.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타이틀 시작 전의 장면을 지적했다. ‘하얗게 변하는 멈춰있는 장면은 좋지만 한편으로는 부적절한 망설임처럼 보인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이들의 범죄 행각을 직접적으로 합리화하기 보다는 이어지는 장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흥미로운 반영웅들이라는 긍정적인 평이 있다. 반면, 강도와 살인, 음주운전을 미화하고, 남성을 지나치게 악인으로 규정한다는 측면, 또 성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다루면서도 에이즈나 콘돔에 관해 다루지 않는 점 등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91년 칸느 영화제에서 상영 되었다. 이후, 싱어송라이터 토리 에이모스는 6년 전 자신이 강간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Me and a Gun이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가수 피토 파에즈는 이 영화를 본 뒤 Dos dias en la vida(일생의 이틀)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의 가사는 델마 역에 파비아나 칸틸로, 루이스 역에 셀레스테 카발로가 맡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 노래는 1992년 그가 발매한 El amor despues del amor 앨범에서 가장 성공적인 싱글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의 성격의 변화와 자유, 흥분 등을 의상이나 헤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었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델마와 루이스가 서로 끌어안고 절벽으로 차를 모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많은 극찬과 만화, 비디오 게임, 뮤직 비디오 등의 패러디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 패러디들은 비극적인 결말 대신 다른 엔딩을 제시하기도 한다.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주의 영화의 대표적 작품인만큼 이와 관련된 반응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영화가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복수라는 줄거리로 인해 주로 여성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한편, 이러한 내용을 담고있는 영화가 인기를 얻는 것에 반발하는 남성 관객들도 있었다. 특히, 개봉년도인 1991년에는 영화 속 여성들이 너무 폭력적이며, 남성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는 반응이 대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더불어,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평가 역시 단순히 여성 관객들의 만족과 선호에서 나아가 여성주의적 가치에 관련하여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B. 루비 리치는 ‘델마와 루이즈’는 “여성들의 경험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인정”이라 평했으며, 케네스 터랜은 이 영화를 신여성주의 로드무비라 칭했다. 또한 제시카 엔블드는 ‘델마와 루이스의 딸들’이라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 영화를 “남성 우월주의적인 기존 패턴을 향한 공격”이라 주장했고,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기존의 남성과 여성의 정형화된 관계를 폭로해냈다고 하였다.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평론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레이나 립시츠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 가운데‘델마와 루이스’를 포함시키면서,“여성을 그린 위대한 영화 중 마지막 작품”이라 평했다. 하지만 그녀는 ‘델마와 루이스’ 이후로 여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한편 영화 평론가인 쉴라 벤슨은 2011년 LA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주의적 가치보다는 폭력과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며 이 영화를 여성주의 영화로 구분짓는 것에 반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역시 델마와 루이스가 가진 여성주의적 영향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 바 있다. 국내 개봉 당시 쓰여진 기사에서는, 비슷한 시기 개봉한 조이 럭 클럽이나 올란도 등의 여성주의 영화와 비견하여, "비록 흥행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자아를 획득한 여성의 가치와 사회적 위치를 극적이면서도 설득력있게 제시,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는 셈"이라 평하였다. 또한 김호기 교수는 "델마와 루이스는, 비록 20여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들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이 영화가 성평등적 관점에서 가진 의의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해석 중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남성주의적 입장도 존재한다. 남성주의적 입장은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남자 배우들이 무시당하는 것에 주목한다. 뉴욕 데일리 뉴스의 정기 기고가인 리처드 존슨은 “‘델마와 루이스’가 남성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살인과 강도 그리고 의식 고취를 위한 만성적인 음주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델마와 루이스는 남성에게 속하는 물건이나 행위를 자연스럽게 잘 소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남자 배우들은 여성적인 환경에 적응을 잘 못 하는 모습을 보인다. 델마와 루이스는 번갈아가면서 리더의 입장에 서는데, 그녀들을 제외한 남자 배우들은 누가 리더일 것인지 정하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한다. 또한, 남성주의적 입장은 통찰력이 강한 델마와 루이스에게 당하는 남성 배우들에 대한 영화적 묘사가,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남자 배우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게 하는 틀로 이 영화가 제작되어 었다고 주장한다. 첫 장면에, 루이스는 자신에 남편 데릴에게 뭐 먹고 싶냐고 묻자 그는 바쁘다며 안 먹겠다고 답한다. 루이스는 데릴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며 남편에게 풍자적으로 답변한다. 이후에 데릴은 의자에서 떨어진다. 남성주의적 입장은 데릴의 초라한 모습을 보는 시청자들이 루이스에 편을 들수 밖에 없으며 함께 데릴을 비웃게 된다고 주장한다.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남자들이 무례하고 버릇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델마와 루이스가 클럽에 가는 장면에서 그녀들은 할런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는 델마와 루이스에게 무례하고 시시덕거리는 표현을 한다. 그러한 장면들은, 또한 시청자들이 남성들에 대한 안 좋은 평을 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델마와 루이스’는 “여자들은 옆에 남자가 있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끝 장면에 델마와 루이스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경찰에게 체포되기 보단 죽음을 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또한 남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가 남성을 필요없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의 엔딩은 그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얼마 전 발표된 '할리우드 최고의 엔딩 20편'은 마지막 장면이 뛰어난 영화가 작품성 또한 높다는 사실을 입증해줬다. 이 중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작품이 ‘델마와 루이스’다.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털어버리고 훌쩍 차에 올라탄 후, 그들은 살인, 강도의 경험을 겪으며 결국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속 ‘델마와 루이스’는 그랜드 캐년의 절벽 끝에 차를 세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미소를 뿌리는 두 사람. 허공에 뜬 차 안에서 손을 꼭 맞잡은 둘의 여행은 그렇게 끝난다. 맨 처음으로 자신들의 의지대로 선택한 자유다. 또한 영화의 엔딩은 정치권에서도 흔히 인용된다. 2년 전 갓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의료보험개혁을 밀어붙이며 '델마와 루이스' 얘기를 꺼냈다. "지금 두 여성이 벼랑 끝으로 차를 몰고 가고 있다.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는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멈춰선 그대로, 정지 상태로 끝난다. 가장 비극적일 수 있는 장면에 ‘멈춤’ 버튼을 눌러 비극을 아름다운 해피엔딩처럼 마무리 지은 것이다. 그 자동차는 포드의 1966년형 썬더버드다. 미국차답게 엄청나게 길고 커다란 오픈카로, 당시 미국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였던 쉐보레 콜벳의 인기와 함께 만들어진 차량이었다. 리들리 스콧이 얘기하는 것처럼 ‘델마와 루이스’의 이야기는 사실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이 결국 자신들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은 세상을 등지고 떠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당시 관객들도 그렇고 지금까지 이 영화를 기억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결코 비극으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희망을 그린 작품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야말고 비극으로서 희망을 이야기한 진정한 로드 무비이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도 강한 인상을 남긴 마지막 장면은 마치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콤비의 버디무비의 명작, ’내일을 향해 쏴라’의 부치와 선댄스의 마지막 장면과도 같은 깊은 여운을 남기면서, 이 비극을 비극아닌 희망으로 받아 들이도록 하는 영화적 경험을 가능케 했다. 칼리 코우리는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리들리 스콧, 지나 데이비스, 수잔 서랜던, 영화 촬영 감독인 아드리안 비들, 편집자 톰 노블은 오스카시상식에서 후보로 올랐다. AFI's 100주년...100대 영화 – 노미네이트 AFI's 100주년...100대 스릴영화 – #76 AFI's 100주년...100대 영웅과 악당: 델마 디킨슨 & 루이스 소여 – #24 영웅 AFI's 100주년...100대 환호 – #78 AFI's 100주년...100대 영화 (10주년 기념 에디션) – 노미네이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1967)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 단 한번뿐인 삶 (You Only Live Once, 1937)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 1985)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Fried Green Tomatoes, 1991)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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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C%9D%B4%EC%A6%88%20%EC%9D%8C%EB%AA%A8%EB%A1%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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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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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음모론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에이즈 음모론은 HIV나 에이즈의 근원과 성질에 대해 주류 과학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에이즈의 원인은 HIV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한 가지이고, 다른 하나는 에이즈 바이러스는 고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 두 가지 이론에서 서로 모순되는 면이 있기도 하다. 일부 사람들은 에이즈가 사람이 만들어낸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특정 지역의 인종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일부 과학자가 만들어낸 것이거나, 생물학전 연구 중에 만든 질병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원인으로 에이즈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타보 음베키는 에이즈는 HIV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만성적 질병, 영양실조 등과 같은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비논리적인 음모론을 주장했다. 에드워드 후퍼는 그의 저서 《강: HIV와 에이즈의 기원을 찾아서 (The River: A Journey to the Source of HIV and AIDS)》에서 침팬지에서 발견되는 SIV(Simian Immunodeficiency Virus, 유인원 면역결핍 바이러스)가 변형되어 HIV가 나타난 것이라는 음모론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 필라델피아 위스타 연구소의 폴란드 출신 바이러스학 박사 Hilary Koprowski가 SIV에 감염된 침팬지의 조직으로 만든 경구 소아마비 백신을 벨기에 연구소 2곳을 통해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벨기에령 콩고지역 주민 약 백만명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후퍼는 이 지역이 에이즈 초기 발병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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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9E%98%EC%9D%98%20%EB%85%B8%EB%9E%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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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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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노래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래의 노래는 고래가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뜻한다. 소리에 반복적인 패턴이 나타나기 때문에 "노래"라고 부른다. 소리를 내는 방법은 고래의 집단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육상보다 어둡고, 냄새도 잘 퍼지지 않는 물 속에서 고래를 비롯한 돌고래들은 의사소통을 위해 소리에 가장 많이 의존한다. 생태학자들은 고깃배들이 바다에서 잡음을 내는 것이 이런 의사소통을 망칠 수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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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84%9D%ED%98%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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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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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윤석호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 이 텍스트는 윤석호을 다룹니다. 윤석호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윤석호(尹錫祜, 1865 ~ ?)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윤석호(1939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윤석호(1957 ~ )는 대한민국의 드라마 연출자이다. 윤석호(2001 ~ )는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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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B%AA%85%EC%84%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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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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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윤명선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ssistant|> 윤명선은 윤명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윤명선(尹明善, 1547 ~ 160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파평이다. 윤명선(尹明善, 1900 ~ 1946)은 일제 강점기와 만주국의 관료, 문인이다. 윤일선의 동생이고 윤보선의 사촌동생이다. 본관은 해평이다. 윤명선은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윤명선(尹明善, 1940 ~ )은 중국의 재벌로 리판그룹 (力帆集团) 총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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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F%B8%EC%95%BC%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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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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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야역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미야역()은 일본 도쿄도 하치오지시에 있는 동일본 여객철도(JR동일본) 하치코 선의 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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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8C%EC%A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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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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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음정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 음정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음정(音程, interval)은 음악이론에서 두 음의 높이 차이, 즉 두 음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두 음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울리는 것을 선율적 음정, 동시에 울리는 것을 화성적 음정이라고 한다. 음이름에 준하여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에 따라서 도수가 결정되고, 같은 도수 안에서도 실제 음과 음의 간격에 따라서 도수 앞에 성질을 표기한다. 즉, 완벽한 음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 성질 + 도수 " 로 표기되어야 하며, 한글로는 완전5도, 장3도, 증4도, 단2도 와 같이 표기, 영어로는 Perfect 5th, Major 3rd, Augmented 4th, minor 2nd 와 같이 표기한다. (영문의 앞글자를 따서 P5, M3, A4, m2 등으로 축약하여 쓰기도 한다.) 보통 음악가들간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이는 음악이론의 기초이며, 대개 화성학에서 초반부에 다룬다. 12음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악보(오선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음이름과 계이름,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음 사이의 간격에 대한 도수는 음이름에 따라 결정되는데, C D E F G A B C, E F G A B C D E의 순번에 준한다. C, E를 기준으로 했을 때, C, E는 첫번째 순번이자 같은 음이므로 C - C, E - E의 도수는 1도, C, E를 기준으로 했을 때, D, F는 두번째 순번이므로 C - D, E - F의 도수는 2도, C, E를 기준으로 했을 때, E, G는 세번째 순번이므로 C - E, E - G의 도수는 3도, C, E를 기준으로 했을 때, F, A는 네번째 순번이므로 C - F, E - A의 도수는 4도, C, E를 기준으로 했을 때, G, B는 다섯번째 순번이므로 C - G, E - B의 도수는 5도, C, E를 기준으로 했을 때, A, C는 여섯번째 순번이므로 C - A, E - C의 도수는 6도, C, E를 기준으로 했을 때, B, D는 일곱번째 순번이므로 C - B, E - D의 도수는 7도, C, E를 기준으로 했을 때, (한 옥타브 위) C, (한 옥타브 위) E는 여덟번째 순번이므로 C - (한 옥타브 위) C, E - (한 옥타브 위) E의 도수는 8도이다. 이렇게 음과 음 사이의 도수가 정해졌을 때, 그 정해진 도수를 기반으로 정확한 간격을 나타내기 위해 도수 앞에 성질을 표시해야 하는데, 장음계의 계이름을 기준으로 두 음 모두 샵(♯)이나 플랫(♭)이 붙지 않았을 경우, 2, 3, 6, 7도 간격의 경우에는 장(Major) 성질을 붙여서 표기하며, 1, 4, 5, 8도 간격의 경우에는 완전(Perfect) 성질을 붙여서 표기한다. 여기서 기준음, 혹은 비교대상으로 하는 음에 샵(♯) 이나 플랫(♭) 이 붙게되어 음 사이의 간격이 더 넓어지거나 좁아지면, 도수는 변하지 않으나, 장(Major) 성질이었던 음정은 단(minor), 감(diminished), 증(Augmented) 과 같은 성질로 변화하게 되고, 완전(Perfect) 성질이었던 음정은 감(diminished), 증(Augmented) 과 같은 성질로 변화하게 된다. 도 - 미의 도수는 3도이며 샵(♯) 이나 플랫(♭) 이 없으므로 성질은 장(Major)이다. (장3도) 도 - 미♭는 장3도였던 도 - 미에서 반음만큼 간격이 좁아졌으므로 성질이 단(minor) 이 된다. (단3도) 도♯ - 미b는 단3도였던 도 - 미♭에서 반음만큼 간격이 더 좁아졌으므로 성질이 감(diminished) 이 된다. (감3도) 도 - 솔의 도수는 5도이며 샵(♯) 이나 플랫(♭) 이 없으므로 성질은 완전(Perfect)이다. (완전5도) 도 - 솔♯ 은 완전5도였던 도 - 솔에서 반음만큼 간격이 넓어졌으므로 성질이 증(Augmented) 이 된다. (증5도) 도♭ - 솔♯ 은 증5도였던 도 - 솔♯에서 반음만큼 간격이 더 넓어졌으므로 성질이 겹증(Doubly Augmented) 이 된다. (겹증5도) 이와같은 음정의 성질변화는, 위와같은 그림을 통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설명하곤 한다. 음정을 계산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3가지 계산법이 많이 사용되며, 계산하는 사람이 상대음감이냐, 절대음감이냐에 따라 어떤 계산법을 선호하는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상대음감의 경우 음정을 계산할 때 계이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어떤 음과 어떤 다른 음의 음정을 계산해야 한다면, 기준음을 '도', '미' 로 보고 음정을 계산한다. 장음계는 도 - 레 - (미 - 파) - 솔 - 라 - (시 - 도) 1-2음과 5-6음 사이가 반음이고 나머지는 온음일 경우 (미 - 파) - 솔 - 라 - (시 - 도) - 레 - 미 절대음감의 경우 음정을 계산할 때 음이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로 음을 치면서 "도~", "미~" 라고 노래하면, 귀에서는 음이 들리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도", "미" 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은 음정을 계산할 때도 기준음을 계이름 '도', '미' 로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보다 음이름 그대로 계산한다. C - E를 기준으로 할 때 : C Major Key (다장조)는 C - D - E - F - G - A - B - C 이므로 E - F - G - A - B - C - D - E D♭ - F를 기준으로 할 때 : D♭ Major Key (내림라장조)는 D♭ - E♭ - F - G♭ - A♭ - B♭ - C - D♭ 이므로 F - G♭ - A♭ - B♭ - C - D♭ - E♭ - F D - F♯를 기준으로 할 때 : D Major Key (라장조)는 D - E - F♯ - G - A - B - C♯ - D 이므로 F♯ - G - A - B - C♯ - D - E - F♯ E♭ - G를 기준으로 할 때 : E♭ Major Key (내림마장조)는 E♭ - F - G - A♭ - B♭ - C - D - E♭ 이므로 G - A♭ - B♭ - C - D - E♭ - F - G E - G♯를 기준으로 할 때 : E Major Key (마장조)는 E - F♯ - G♯ - A - B - C♯ - D♯ - E 이므로 G♯ - A - B - C♯ - D♯ - E - F♯ - G♯ F - A를 기준으로 할 때: F Major Key (바장조)는 F - G - A - B♭ - C - D - E - F 이므로 A - B♭ - C - D - E - F - G - A F♯ - A♯를 기준으로 할 때: F♯ Major Key (올림바장조)는 F♯ - G♯ - A♯ - B - C♯ - D♯ - E♯ - F♯ 이므로 A♯ - B - C♯ - D♯ - E♯ - F♯ - G♯ - A♯ G♭ - B♭를 기준으로 할 때: G♭ Major Key (내림사장조)는 G♭ - A♭ - B♭ - C♭ - D♭ - E♭ - F - G♭ 이므로 B♭ - C♭ - D♭ - E♭ - F - G♭ - A♭ - B♭ G - B를 기준으로 할 때: G Major Key (사장조)는 G - A - B - C - D - E - F♯ - G 이므로 B - C - D - E - F♯ - G - A - B A♭ - C를 기준으로 할 때 : A♭ Major Key (내림가장조)는 A♭ - B♭ - C - D♭ - E♭ - F - G - A♭ 이므로 C - D♭ - E♭ - F - G - A♭ - B♭ - C A - C♯를 기준으로 할 때 : A Major Key (가장조)는 A - B - C♯ - D - E - F♯ - G♯ - A 이므로 C♯ - D - E - F♯ - G♯ - A - B - C♯ B♭ - D를 기준으로 할 때 : B♭ Major Key (내림나장조)는 B♭ - C - D - E♭ - F - G - A - B♭ 이므로 D - E♭ - F - G - A - B♭ - C - D B - D♯를 기준으로 할 때 : B Major Key (나장조)는 B - C♯ - D♯ - E - F♯ - G♯ - A♯ - B 이므로 D♯ - E - F♯ - G♯ - A♯ - B - C♯ - D♯ C - E를 기준으로 할 때 : C Major Key (다장조)는 C - D - E - F - G - A - B - C 이므로 E - F - G - A - B - C - D - E 장음계의 계이름을 떠올리는 것, 또는 기준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Diatonic Scale (Major Scale) 을 떠올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암기능력과 속셈에 자신있는 사람들은 음정을 계산할 때 기준음과 비교대상으로 하는 음 사이에 반음이 몇개 들어있는지를 계산해서 암기해놓은 음정을 도출해내는 계산법을 쓰기도 한다. 반음 개수가 6개일 때 : 증4도, 감5도 반음 개수가 12개일 때 : 완전8도 하지만 이렇게 계산해 낸 것이 꼭 정확한 값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피아노 건반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C♯ - D♯ 은 반음 개수가 2개이므로 장2도가 맞지만, 만약 악보(오선지) 에 표기되어있는 음들을 비교할 때 C♯ 과 E♭ 이라고 적혀있는 경우에는 장2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C♯ 과 E♭ 을 피아노로 쳐보면 반음 개수가 2개이므로 장2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C♯ 과 E♭ 은 도수를 3도로 해석해야하기 때문에 장2도가 아니라 감3도가 맞다. 때문에 반음 개수 계산법이 사실 정확한 계산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음정을 공부하는 목적이 문제풀이에서 정답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들끼리 음정단위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언어학적 목적인 경우에는 이런 계산법을 사용하는 것이 꼭 틀렸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1cm 와 10mm는 표기법이 다르지만 같은 간격을 나타내듯이 장2도와 감3도는 표기법이 다르지만 사실 같은 음을 지칭하므로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계이름 계산법이나 음이름 계산법으로 계산할 때 계이름과 음이름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음정을 계산하면, 음정의 성질을 잘못 계산할 수 있다. 계이름이라는 것은 원래 조성에 따라 음이름이 달라진다. C Major Key (다장조)에서 계이름 '도'는 실제 음이름도 마찬가지로 C이지만, G Major Key (사장조)에서 계이름 '도'는 실제 음이름이 G이다. 이렇듯 조성 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계이름은 으뜸음을 '도'부터 시작해서 부르는 것이 권장된다. 예를 들어, F Major Key (바장조) 에서의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F G A B♭ C D E F 가 되므로 F Major Key (바장조)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릴 때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F G♭ A♭, B♭ C D♭ E♭ F 가 되며 B Major Key (나장조) 에서의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B C♯ D♯ E F♯ G♯ A♯ B 가 되므로 B Major Key (나장조)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릴 때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B C D E F♯ G A B 가 된다. 따라서 F - B 가 도수만 놓고 봤을 때는 4도가 맞지만, 완전4도는 아니다. 실제로 F 와 B 가 완전4도 이려면 B 가 B♭ 로 또는 F 가 F♯ 로 바뀌어야만 F - B♭ 또는 F♯ - B 가 되어 완전4도가 되며 B - F 가 도수만 놓고 봤을 때 5도가 맞지만, 완전5도는 아니다. 실제로 B 와 F 가 완전5도 이려면 F 가 F♯ 로 또는 B 가 B♭ 로 바뀌어야만 B - F♯ 또는 B♭ - F 가 되어 완전5도가 된다. 음이름 기준 F - F는 계이름 기준 도 - 도, 미 - 미 이므로 완전1도이다. 음이름 기준 F - G는 계이름 기준 도 - 레, 미 - 파♯ 이므로 장2도이다. 음이름 기준 F - A는 계이름 기준 도 - 미, 미 - 솔♯ 이므로 장3도이다. 음이름 기준 F - B는 계이름 기준 도 - 파♯, 미 - 라♯ 이므로 증4도이다. 음이름 기준 F - C는 계이름 기준 도 - 솔, 미 - 시 이므로 완전5도이다. 음이름 기준 F - B♭는 계이름 기준 도 - 파, 미 - 라 이므로 완전4도이다. 음이름 기준 F - D는 계이름 기준 도 - 라, 미 - 도♯ 이므로 장6도이다. 음이름 기준 F - E는 계이름 기준 도 - 시, 미 - 레♯ 이므로 장7도이다. 음이름 기준 B - B는 계이름 기준 도 - 도, 미 - 미 이므로 완전1도이다. 음이름 기준 B - C는 계이름 기준 도 - 레♭, 미 - 파 이므로 단2도이다. 음이름 기준 B - D는 계이름 기준 도 - 미♭, 미 - 솔 이므로 단3도이다. 음이름 기준 B - E는 계이름 기준 도 - 파, 미 - 라 이므로 완전4도이다. 음이름 기준 B - F는 계이름 기준 도 - 솔♭, 미 - 시♭ 이므로 감5도이다. 음이름 기준 B - F♯는 계이름 기준 도 - 솔, 미 - 시 이므로 완전5도이다. 음이름 기준 B - G는 계이름 기준 도 - 라♭, 미 - 도 이므로 단6도이다. 음이름 기준 B - A는 계이름 기준 도 - 시♭, 미 - 레 이므로 단7도이다. 1, 4, 5, 8도 음정의 경우에는 "장/단" 표기를 절대 사용하지 않고, 2, 3, 6, 7도 음정의 경우에는 "완전" 표기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음 과 음 사이의 조화로운 울림에 영향을 끼치는 배음과 관계가 있다. 사인파를 제외한 모든 음(音)은 실제로 하나의 음이 아닌 여러개의 음이 같이 울리는데, 이와 같이 함께 울리는 음들을 배음이라고 부르며, 인간은 그 배음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잘 들리는 1배음을 주로 듣기 때문에 음을 하나로 느끼는 것이다. 이 배음들을 근음인 1배음부터 12배음까지 나열해봤을 때, 각각의 배음들의 음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근음 C2 와 1배음 C2는 완전1도이다. 1배음 C2 와 2배음 C3는 완전8도이다. 2배음 C3 와 3배음 G3는 완전5도이다. (실제로 정확한 3배음은 G3에서 +2 센트만큼 높은 음이다.) 3배음 G3 와 4배음 C4는 완전4도이다. 4배음 C4 와 5배음 E4는 장3도이다. (실제로 정확한 5배음은 E4에서 -14 센트만큼 낮은 음이다.) 5배음 E4 와 6배음 G4는 단3도이다. (실제로 정확한 6배음은 E4에서 +2 센트만큼 높은 음이다.) 6배음 G4 와 7배음 Bb4는 단3도이다. (실제로 정확한 7배음은 Bb4에서 -31 센트만큼 낮은 음이다.) 7배음 Bb4 와 8배음 C5는 장2도이다. 8배음 C5 와 9배음 D5는 장2도이다. (실제로 정확한 9배음은 D5에서 +4 센트만큼 높은 음이다.) 9배음 D5 와 10배음 E5는 장2도이다. (실제로 정확한 10배음은 E5에서 -14 센트만큼 낮은 음이다.) 10배음 E5 와 11배음 F#5는 장2도이다. (실제로 정확한 11배음은 F#5에서 -49 센트만큼 낮은 음이다.) 11배음 F#5 와 12배음 G5는 단2도이다. (실제로 정확한 12배음은 G5에서 +2 센트만큼 높은 음이다. 음정에는 센트 (음악)라는 단위가 있는데, 이것은 음정에서 유니즌을 제외한 가장 낮은 음정단위인 단2도 보다 더 좁은 간격, 즉 12음계를 벗어난 그 사이사이의 미세한 간격을 측정할 때 쓰는 단위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5센트까지의 차이는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4배음까지의 울림에서는 부조화를 느끼지 못해서 완전한 울림이라고 불리었고, 5배음부터는 울림의 부조화를 느꼈기 때문에 완전 대신 장/단 을 쓰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몇가지 음정의 경우에는 " 성질 + 도수 "의 표기법을 벗어나 하나의 단어로 바꿔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5가지 경우가 있다. 완전1도 (Perfect 1st)의 경우에는 유니즌(Unison) 이라고 부른다. 단2도 (minor 2nd)의 경우에는 반음(Semitone, half tone, half step) 이라고 부른다. 장2도 (Major 2nd)의 경우에는 온음(Tone, whole tone, whole step) 이라고 부른다. 증4도 (Augmented 4th) 와 감5도 (diminished 5th)는 도수의 해석은 다르나 음과 음 사이의 실제 간격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음정을 셋온음(Tritone) 이라고 부른다. 완전8도 (Perfect 8th)의 경우에는 옥타브(Octave) 라고 부른다. 다음의 음악은 해당 음정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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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8%A0%ED%95%99%20%EC%B9%B4%EB%91%90%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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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학 카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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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다음 텍스트는 이츠학 카두리에 관한 것입니다.
<|assistant|> 이츠학 카두리은 이츠학 카두리(Yitzchak Kaduri, ?~2006년 1월 28일)는 나할랏 이츠학 예쉬바(유대교 신학교)에서 교사 및 석학이었다. 랍비 수장들은 그를 챠딕(Tsadik) 즉 성인으로 받들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유대교 경전인 토라의 연구와 자신과 유대인을 위한 기도하는 일에 바쳤다. 많은 병든 사람들과 불임환자들이 그가 설교하는 중이나 그들을 위해 병 낫기를 기도하는 중에 낳았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재앙들을 예언했다(G. Baruch, 2005). 그의 생년이 불확실해서 죽었을 당시 그의 나이는 106세에서 117세로 추정하고 있다. G. Baruch. (21st Sep 2005). Kabbalist Urges Jews to Israel Ahead of Upcoming Disasters. Arutz Sheva 7, Israel National News. http://www.israelntionalnews.com/News/News.aspx/89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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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94%A8%EB%82%A8%EC%A0%95%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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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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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사씨남정기에 대해 알려주세요.
<|assistant|> 사씨남정기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의 한글 소설이다. 유연수 : 한림학사로, 작중 유한림으로도 불린다. 본성은 어질지만, 교씨의 모함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교씨의 계략에 넘어가 어진 아내 사씨를 내쫓고 만다. 사정옥 : 유연수의 제1 부인으로, 성품이 곱고 후덕한 인물이다. 그러나 교씨의 모함을 받아 남편 유연수에게 내쫓김을 당한다. 교채란 : 유연수의 제2 부인으로, 교활하고 간악하다. 유연수와의 사이에서 아들 장주를 낳은 후, 제1 부인이 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며 사씨를 몰아내려 한다. 동청 : 교씨의 사통남으로 교씨와 모의해 유연수 집안의 재물을 탈취하고, 유연수를 유배시킨다. 이후 유연수의 무죄가 밝혀진 뒤 처형당한다. 유인아 : 유연수와 사씨 사이의 아들이다. 유장주 : 유연수와 교씨 사이의 첫째 아들이다. 어머니 교씨의 계략의 희생양이 되어 살해당한다. 유봉추 : 유연수와 교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교씨가 동청과 계림으로 도망쳤을 때 데려갔으나 병으로 요절한다. 두 부인 : 유연수의 고모로, 현명하여 교씨의 간악함을 보자마자 알아보고 당장 내칠 것을 권고했으나 순진하고 후덕한 사씨가 거부했다. 결국 사씨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려 노력한다. 임취영 : 쫓겨난 사씨가 물에 빠져 죽으려 했을 때 구해준 여승 묘혜의 질녀로 사씨의 책사가 되어 교씨를 함정에 빠트리고 결국 간악함을 세상에 밝혀낸다. 이후 사씨의 중개로 유연수의 제2 부인이 되어 3형제를 낳았다. 소설은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그리고 소설 끝에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 구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내용은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구성이라기보다는 당시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총애했던 숙종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궁녀가 이 소설을 숙종에게 읽어 준 뒤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하게 했다는 일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본래 한글로 지어진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은 한문으로 번역했으며 이를 궁궐에 들어갈 기회가 생기자 궁녀들에게 공짜로 나눠주었다. 김만중은 성리학의 도그마(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교리)에 갇혀지내지 않고 다양한 종교사상을 받아들였다. 실제 소설에서는 사씨가 시부모를 공경하는 유교사상, 사씨가 결혼 전 묘혜 승려의 부탁으로 관음 보살을 찬미하는 관음찬을 지어 올리는 불교사상, 교씨가 대를 잇기 위해 자신을 첩(妾)으로 들인 유한림의 뜻에 어긋날 것을 걱정하여 무속인의 힘으로 임신한 아이의 성(性)을 바꾸는 주술이 공존한다. 김만중은 두씨 부인이 조카며느리가 첩을 들이려는 것을 알고 반대하는 설정과 첩 교씨가 온갖 악행을 벌인다는 설정으로 일부다처제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사씨남정기》는 다수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고, 2002년 11월 6일 실시된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서 고전소설 지문으로 처음 출제된 데 이어, 2007년 11월 15일 실시된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 다시 출제되었다. 2017년 11월 23일 실시된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에서도 다시금 출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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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9%80%EC%84%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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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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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와서에 대해 알려주세요.
A: 와서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와서(瓦署)는 조선시대 기와와 벽돌의 제작을 맡던 관청이다. 설치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개국 초에 설치된 동서요(東西窯)를 시초로 본다. 일반에게 기와를 매매하기도 하였다. 1882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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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84%EC%A6%88%20%28%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B%B0%B4%EB%93%9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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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 (대한민국의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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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버즈 (대한민국의 밴드)에 관해 알려 주시겠어요?
A: 버즈 (대한민국의 밴드)은 대한민국의 5인조 남성 밴드그룹이다. 버즈는 2000년 1월에 결성되어 인디에서 활동했던 록 밴드이다. 2002년 민경훈으로 보컬이 교체되고 2003년 Morning of Buzz를 발매하며 메이저 시장 데뷔를 이뤘고, 발라드 형식과 대중적 멜로디 라인을 앞세운 이들의 음악은 록이라는 신선한 테두리를 바탕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멤버는 김예준(드럼), 윤우현(기타), 신준기(베이스), 손성희(기타),민경훈(보컬)으로 구성되어 있다. 멤버들의 군입대 문제로 2007년 잠정 해체를 한 이후 2010년 11월 기존 멤버 윤우현(기타)과 새로운 보컬 나율로 구성된 2인조로 버즈 2기가 구성되기도 했다. 2014년 기존 멤버들이 재결합하며 선공개 싱글 '8년만의 여름', 'Train'을 발표했으며 이후 정규 4집 앨범 Memorize로 컴백해 재결합을 알렸다. 버즈는 록 발라드 계열의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한 앨범에서 1위곡이 3개가 연달아 나오는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는 등 신드롬과 같은 인기를 누렸다. 최전성기였던 2005년과 2006년에는 히트곡들이 전국 노래방에서 순위권을 차지했으며 현재까지도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즈의 기타리스트인 손성희는 중학교때부터 기타를 쳐왔고 밴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음악계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1998년 당시까지 댄스음악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위엔 온통 춤을 추는 사람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손성희가 다니던 반포고에 기타를 치는 사람이 손성희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손성희는 근처 학교였던 상문고에 드럼을 엄청 잘친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후에 버즈의 드러머가 되는 김예준의 이야기를 듣고 김예준을 찾아가서 같이 음악을 하자고 제안했고 둘은 친해진다. 하지만 기타와 드럼만 가지고 밴드를 만들 순 없었기에 그렇게 1년을 보내다 둘은 우연히, 당시 소속가수라곤 없는 작은 무명 기획사였던 에이원엔터테인먼트 (현 에이원피플, 네끼엔터테인먼트. 당시 대표는 박봉성)에서 밴드를 시켜준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에이원은 손성희와 김예준의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을 채워줄테니 같이 일하길 제안했다. 결국 얼마 후 손성희와 김예준은 에이원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기로 했고, 두 사람보다 먼저 에이원과 계약한 윤우현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오랫동안 언더그러운드에서 활동해온 신준기와 박정훈이라는 멤버를 영입하게 된다. 이렇게 2000년 팝/록 밴드인 버즈가 결성되었다. 즉 이들은 소속사에 의해서 탄생된 밴드가 아니라 밴드를 너무 하고 싶어 했던, 언더그라운드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청년들이 모여 스스로 결성시킨 밴드이다. 그 후 이대 앞 라이브 퀸과 그외 여러 클럽, 행사, 공연을 다니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롯데월드 락 페스티벌에서 2위를 했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팬카페까지 생기게 됐다. 하지만 2001년 말 혹은 2002년 초에 보컬이었던 박정훈이 개인사정으로 팀을 나가고 버즈는 새 보컬을 필요로 하게 됐다. 결국 당시 버즈 관계자 중, SM엔터테인먼트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고 그 관계자는 당시 SM엔터테인먼트 소속가수였던 신비의 한 멤버에게 보컬을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한다. 당시 그 멤버는 대원여고를 다녔고 그 멤버는 옆학교였던 대원고에서 노래 좀 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던, 하지만 연예계엔 전혀 관심없고 오직 게임만 좋아하던 소년이었던 민경훈을 에이원 엔터테인먼트에 소개시켜줬다. 그렇게 2002년 6월, 연예계엔 관심없는 게임소년이었던 민경훈은 버즈의 멤버가 되었고 버즈는 당시 민경훈의 부족한 무대경험을 채우기위해 2002년 8월부터 엄청난 양의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결성된지 2년 밖에 안된 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300여회를 공연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공연으로 버즈는 윤도현밴드 콘서트 오프닝 게스트에 참여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렇게 인지도는 급상승했고 공식 팬카페 <이 시대 최고의 밴드 BUZZ>는 회원수가 2003년 5월에 1700명을 돌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 후 버즈는 1집 《Morning Of Buzz》로 데뷔하게 된다. 1집 《Morning Of Buzz》 및 후속활동 버즈는 2003년 10월 11일 정규 1집 《Morning Of Buzz》의 <어쩌면>으로 MBC 《음악캠프》를 통해 데뷔하는데, '무서운 신인밴드'라는 소리를 들으며 등장하였다. 당시엔 밴드음악의 암흑기였고 버즈는 대중적인 음악을 지향하는 밴드였기에 자작곡 체제로 가자는 원래 계획과는 달리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작곡가의 곡을 썼다. <어쩌면...>이 온라인차트 상위권에 진입하였고, 후속곡 <Monologue>도 상위권 진입에 성공하였다. 1집의 앨범 판매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연말에는 SBS가요대전 록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록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함을 인정받았다. 2004년에는 버즈의 첫 번째 디지털 싱글 《가난한 사랑》을 발표하였다. 2005년에는 정규 2집 Buzz Effect를 발매하여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2집 《Buzz Effect》의 타이틀곡 <겁쟁이>는 발매 1주일만에 각종 온라인차트 1위를 하면서 차트를 휩쓸었고, 멜론, 맥스MP3, 쥬크온 등에서 2~5주 정도 1위를 차지하였다. 이후 후속곡 <가시> 또한 정상에 올라섰다. 특히 가시는 대한민국 국민 애창곡 5위로 노래방에서 약 1128만여 회 불렸다고 한다. 그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다른 후속곡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으로도 1위를 달성하였다. 타이틀곡 <겁쟁이>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MBC 생방송 음악캠프 5주 연속 1위, SBS 인기가요 3주 뮤티즌 송 트리플 크라운, Mnet 엠카운트다운 3주 연속 1위 트리플 크라운, KMTV 쇼 뮤직탱크 5주 연속 1위 최강자, KBS 뮤직뱅크 상반기 결산 1위 총 17관왕을 달성하며 가요 프로그램 1위를 모두 휩쓸었다. Mnet의 엠카운트다운에서는 <겁쟁이>, <가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총 3곡이 1위를 달성하면서 엠카운트다운 방송 최초로 한 앨범에서 3곡이 1위를 달성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이후 디지털 싱글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를 발표하였고, 단 한 차례의 방송활동도 없이 CF송 KTF 전용 음원사이트 도시락 차트에서 9주 연속 1위 기록을 세웠다. 음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둔 시기이지만, 버즈 멤버들은 많은 일정들을 소화해내야 하는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후에 민경훈과 손성희는 밝히길 2집 때가 버즈의 큰 위기였다고 했다. 민경훈은 "내 길이 아니구나"라고 생각까지 했고, 손성희는 전국투어 후 만들어진 2집을 보고 "남의 옷을 껴입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를 보아 소속사의 무리하고 일방적인 활동 계획, 음반 기획 등으로 멤버들이 혹사당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민경훈은 무리한 음악방송(특히 민경훈은 립싱크로 부르는 무대보다 라이브로 부르는 무대가 훨씬 많았다)과 콘서트 스케줄로 인해 성대에 무리가 갔고 2005년 당시에 불렀던 무대를 모아 보면 노래하는 목소리의 변화가 느껴진다. 2006년 3집 《Perfect》를 발표하였다. 이후 높아지는 인기에 소속사인 에이원 엔터테인먼트는 버즈의 음악에 대중성을 더욱 더 입히기 시작하였고 3집부턴 록발라드라고조차 보기 힘든 완전 대중적인 발라드음악을 하게 했고, 대부분의 녹음을 세션맨을 쓰기 시작했다. 회사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던 멤버들은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일부에선 언더그라운드 생활만 7년이 넘을 정도로 베테랑의 연주실력과 현재까지 노래방 애창곡 5위에 꼽힐 정도의 히트곡을 쓰는 작곡능력을 가진 버즈멤버들이 세션맨을 고용하고 자작곡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비난 혹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한편 원래 타이틀곡은 <My Darling (End)>이었으나 앨범이 출시된 후 상당수의 팬들에게 <My Darling (End)>은 2집 타이틀곡 겁쟁이와 곡 구성이 비슷하다는 지적을 들었고, 후속곡으로 내정되었던 My Love (And)보다도 못하다는 혹평을 들었으며 7번 트랙인 <남자를 몰라>가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기획사는 3집 출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타이틀곡을 <남자를 몰라>로 바꾸었다. <남자를 몰라>는 하위권에 있다가 버즈가 방송활동을 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하여 타이틀곡 교체 1~2주만에 정상에 올랐다. 2~4주간 정상에 올라 인기를 누리고, 후속곡 <My Love>로 활동하여 역시 상위권에 진입하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남자를 몰라>는 버즈에 명성에 걸맞은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으나, 3집 앨범 전반적으로는 이전만큼 큰 인기를 모으지 못했다. 수록곡들의 수준의 영향도 있지만, 2006년 3월 민경훈과의 열애설이 났던 남호정 사건이 한 몫 하기도 했다. 민경훈이 팬들에게 약속하기를 여자친구가 생기면 팬들에게 꼭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남호정과 연애하는 사실을 숨기다가 알려져버렸다. 뿐만아니라 민경훈이 남호정이 하는 쇼핑몰을 도와주는데 팬들은 그것이 민경훈의 쇼핑몰인 줄 알고 돈을 쓰다가 그것이 남호정의 쇼핑몰임을 알고는 배신감에 많은 팬들이 이탈했다. 이 시기에 소속사의 혹사와 갑자기 생긴 천식으로 인해 점점 보컬 민경훈이 지쳐가고 있었다. 무리하게 스케줄을 소화하던 민경훈은 3집 후반으로 갈수록 무대에서 떨어진 기량의 공연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디지털 싱글 《'떠나' 그리고 '울지마'》를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울지마>, <떠나> 두 곡이 수록 되어있다. <떠나>는 버즈의 기타리스트 손성희가 불렀다. 버즈 노래중에 처음으로 랩이 들어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울지마>라는 곡 또한 방송활동 없이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지만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붉은악마 공식응원가 <Reds Go Together>를 부르면서 국민밴드로서의 인기를 자랑했다. <활주>와 <투지>는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의 한국어 오프닝곡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투지>는 2006 투니 초이스 어워드에서 최고의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2007년 5월 17일 소속사와의 계약기간이 남아있던 민경훈을 제외한 멤버들의 군입대 등을 이유로 잠정 해체를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2007년 6월, 버즈의 마지막 디지털 싱글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 2》를 발표하였다.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 2>는 활동 한 번 없이 온라인차트 최대 3위까지 드는 인기를 누렸다. <꿈을 찾아서>라는 게임 <브리스톨 탐험대>의 OST를 공개했다. 2007년 12월부터 보컬 민경훈이 《Impressive》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군입대 문제로 잠정 해체한다고 했지만, 군입대 문제뿐만 아니라 소속사와의 갈등이라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군입대 문제 : 멤버들은 각자 계약기간이 달랐고, 군입대 시기 또한 달랐다. 민경훈은 계약기간이 더 남아있어서 솔로활동을 한 후 군대를 가게 되었다. 윤우현은 2007년 5월 21일 ~ 2009년 4월 25일, 손성희는 2007년 7월 10일 ~ 2009년 6월 12일, 신준기는 2007년 12월 10일 ~ 2010년 1월 3일, 김예준은 2008년 2월 25일 ~ 2010년 4월 (추정), 민경훈은 2012년 3월 6일 ~ 2013년 12월 5일 군생활을 하였다. 소속사와의 갈등 : 소속사였던 에이원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멤버들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사는 버즈가 큰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자 무리한 일정들을 잡았고, 멤버들은 각종 방송 녹화와 공연 무대, 콘서트를 수행했다. 민경훈은 3집 때 천식에 걸리고도 많은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또한 소속사는 음악적으로도 인기가 있고 돈벌이가 될만한 장르와 컨셉의 노래로 활동하도록 했다. 4집 발매 기념 쇼케이스와 이후 방송 등에서 멤버 신준기와 윤우현, 민경훈은 해체이유로 군입대에 대한 압박과 수용해야만 했던 제도적인 환경을 이야기했다. 민경훈의 경우 라디오스타에서 "멤버들간의 갈등이 있긴 했지만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본인이 가졌던 불만들이 없지는 않았음을 언급했다. 그 예로 다른 멤버들에 비해 자신은 주목을 받아 사생활에 제약이 많았는데 다른 멤버들은 편하게 지냈고, 활동은 자신이 가장 많이 했지만 돈은 똑같이 나누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자신은 메인코디가 챙겨주고 다른 사람은 보조코디가 챙겨주는 것도 서로 마음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멤버들 간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소속사의 지나친 욕심과 버즈 멤버들 (특히 민경훈)을 돈벌이 대상으로 삼았던 태도로 인해 생긴 갈등으로 보인다. 신준기는 다른 밴드의 베이스로 활동했고, 손성희는 전역 후 4th floor의 멤버로 활동했다. 윤우현은 전역 후 버즈 2기 (윤우현, 나율)를 만들어 2010년 《Fuzz·Buzz》라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객원보컬로 민경훈이 부른 곡(이별수집가, 사랑이 멈춘 시간)들도 수록되어 있다. 음원순위는 높지 못하였고 활동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보컬인 나율이 집먼지 알레르기에 걸려서 활동을 중단했다.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윤우현은 그때 버즈 2기를 만들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버즈로 활동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버즈 2기로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를 두고 민경훈은 버즈라는 자리가 언제든 채워질 수 있는 자리구나 싶어서 기분이 묘했다고 언급했다. 여기에 손성희는 "그게(버즈 2기가) 만약 대박이 났으면... (지금의 버즈는 없었을 것)"이라는 농담을 던져서 라디오 녹음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민경훈은 버즈 2기를 보며 씁쓸함을 느꼈을 수 있겠지만, 민경훈이 없는 버즈 2기를 완전한 버즈로 인정한 팬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2012년 버즈의 보컬이 나율에서 민대홍으로 교체되어 디지털 싱글 《Buzz Return》을 냈고, 타이틀곡 <가슴이 운다>를 공개해 온라인차트 5위에 올랐다. 버즈가 해체할 때 멤버들은 서른 넘어서 다시 뭉치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며, 멤버들간 서로의 행사에 종종 참여하는 등 재결합에 관해서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를 보여왔다. 더욱이 민경훈은 솔로활동 시절 힘든 시간을 거치며 재결합에 더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민경훈의 전역 후 원년멤버(김예준, 윤우현, 신준기, 손성희, 민경훈)들은 2014년 4월 새 소속사인 산타뮤직과 계약을 맺고, 8년만에 재결합하였다. 신준기는 컴백 쇼케이스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게 싫어서 따로 활동을 했는데 나와 보니 버즈와 함께 할 때가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멤버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어서 다시 뭉치게 됐다"고 재결합 계기를 밝혔다. 한편 '버즈'라는 이름의 권한을 전 소속사에서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멤버들은 다른 밴드의 이름으로 활동해야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버즈의 새 소속사인 산타뮤직은 전 소속사와 버즈 첫 번째 공연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함께 만들며 오랜 기간 인연이 있던 회사였다. 자연스럽게 ‘버즈’ 이름에 대한 멤버들과 팬들의 요청을 전달했고 전 소속사에서 다행히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버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2014년 8월 8일, 디지털 싱글 《8년만의 여름》을 발표하였다. 2014년 9월 22일, 디지털 싱글 《Train》을 발표하였다. 2014년 11월 26일, 정규 4집 《Memorize》를 발표하였다. 2015년 4월 29일, 디지털 싱글 《남자라면》을 발표하였다. 2015년 10월 20일, 디지털 싱글 《Forever Love》를 발표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디지털 싱글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3》를 발표하였다. 2016년 10월 30일, 디지털 싱글 《넌 살아있다》를 발표하였다. 2017년 7월 28일, 미니 앨범 《Be One》를 발표하였다. 2018년 12월 14일, 미니 앨범 《15》를 발표하였다. 2021년 3월 10일, 미니 앨범 《잃어버린 시간》을 발표하였다. 2021년 4월 13일, 디지털 싱글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버즈 멤버 모두 팬과 팬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팬클럽 창단에 반대하였으나 팬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버즈樂人이라고 칭하기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그 명칭은 버즈 팬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이며 명칭에 불과하다. 공식 팬클럽은 없다. 팬카페는 2001년 3월 11일 '이 시대 최고의 밴드'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었다.(http://cafe.daum.net/bandBUZZ/) 버즈樂人은 풍선을 쓰지 않고, 파란색 야광봉을 사용하였다(풍선색은 파랑). 민경훈 팬들 사이에서도 쓰이고 있다. 공식 팬카페 회원수는 40만명이 넘었고, 비공식으로 50만명이 넘었다. 특히 여자 팬과 남자 팬을 동시에 보유한 드문 케이스에 속해있는 밴드였다. 디시인사이드에서는 팬들이 버즈 갤러리 신설을 위해 모여 케세라세라 갤러리(종영한 MBC 드라마갤러리)를 임시 버즈 갤러리로 삼아 활동하였으며, 2015년 12월 14일에는 디시인사이드 버즈 갤러리가 개설 되었다. 2016년 8월 15일 버즈 팬페이지가 개설 되었다. (https://web.archive.org/web/20161112081107/http://www.buzz612.com/) 록 음악을 대중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멤버들이 직접 연주하고 작사, 작곡하는 실력파 밴드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씨엔블루와 FT아일랜드 등 많은 밴드에 영향을 미쳤다. <2003년 혜성처럼 등장한 이 시대 최고의 밴드> 2003년 데뷔와 동시에 독보적인 창법으로 주목받은 원조 꽃미남 밴드이다. 김종국, SG워너비 등과 함께 2000년대 초중반 인기몰이를 한 밴드그룹이며, 2000년대 중반 버즈의 전성기를 경험한 세대들은 버즈에 대해 특별한 향수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세 곡이 연달아 1위를 차지해 트리플 크라운 달성> 《겁쟁이》, 《가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3곡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2005년 8월 18일 Mnet 엠카운트다운이 생긴 이래 최초로 한 앨범에서 3개의 수록곡이 1위를 달성하는 역대 7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가수가 되었다. <2000년대를 통틀어 단일곡으로 음악 방송 최다 1위 횟수 달성> <겁쟁이》는 활동 첫 주에 순위제를 실시하는 모든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수상하면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였다. 《겁쟁이》 활동기간 당시 음악 방송은 KBS 뮤직뱅크, MBC 생방송 음악캠프, SBS 인기가요, Mnet 엠카운트다운, KMTV 쇼! 뮤직탱크로 총 5개의 프로그램이 존재했으며 KBS 뮤직뱅크는 '상반기 및 연말 결산'만 존재하였다. 버즈의 지상파 3사 음악방송 1위는 총 10회, 케이블 및 종합편성채널 포함 총 17회 수상으로 통산 총 27회 수상했으며, 그 중 <겁쟁이》가 총 17관왕을 수상하면서 김종국의 《제자리 걸음》과 함께 2000년대 단일곡 기준 최다 1위를 달성한 곡이 되었다. <방송 활동 없이 음원 사이트에서 11주 연속 1위> KTF의 음원 서비스 '도시락(現 지니뮤직)'과 광고모델 계약을 맺은 버즈는 도시락의 TV 광고 음악으로 2005년 11월 11일 디지털 싱글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를 발매하였다. 이 곡은 도시락에서 방송 활동 없이 11주 연속 1위를 달성하였다.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는 하루 온라인과 모바일 매출 집계가 평균 1억원에 달했으며 2위곡과는 다운로드 수가 두 배가량 차이가 났다.[20] 이에, 당시 음반 시장에서 음원 시장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디지털 싱글의 가능성과 더불어 노래가 좋으면 활동하지 않고도 히트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성공 사례를 제시하였다. <2000년대 중반 청소년들의 워너비 스타> 당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나루토의 OST 《활주》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투지》라는 후속곡이 만들어졌다. 현재까지도 코요태의 《우리의 꿈》, 유정석의 《질풍가도》와 함께 역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OST로 손에 꼽히는 인기를 자랑한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의 붉은 악마 공식응원가 《Reds Go Together》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4강 신화 이후 높아져있던 국민적 관심과 더불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YB의 《오 필승 코리아》와 함께 대표적인 응원가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코미디언 이수근이 개그콘서트의 고음불가에서 개그소재로 활용하면서 큰 웃음을 선사했다. <군입대 후에도 군통령으로 등극> 유독 남성 팬들의 충성심이 강하다. 2012년 8월 24일 위문열차 육군 학생군사학교 편에서 무대에 선 적이 있다. 버즈가 활동하던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10대들이 군입대를 한 뒤에 민경훈이 위문공연을 오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노래방 차트 올킬의 신화> 2005년 《겁쟁이》와 2006년 《남자를 몰라》를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2년 연속 노래방 차트 연간 순위 1위를 차지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금영노래방와 TJ미디어에서 발표한 노래방 최고의 애창곡 TOP 10에 2곡을 올린 유일한 가수되었다. 2016년에는 KBS 방송문화연구소 설문조사 한국인이 사랑하는 노래방 애창곡에서 《겁쟁이》가 15위, 《가시》가 35위를 차지하였다. 2018년에는 국방일보 설문조사 병영노래방 애창곡에서 《가시》가 8위를 차지하였다. 2019년에는 한국갤럽조사 한국인의 애창곡에서 겁쟁이가 20대 남자들의 애창곡 3위, 《가시》가 30대 남자들의 애창곡 1위를 차지하였다. 2021년에는 이십세기 힛-트쏭 91회 시청자 PICK 노래방에서 꼭 부르고 싶은 애창곡 힛-트쏭에서 《가시》가 금영노래방와 TJ미디어에서 각각 누적순위 5위와 6위를 차지하였다. 버즈는 현재까지 금영노래방 주간차트에 총 23곡을 랭크시켰다. <해체 그리고 8년 만에 재결합> 사람들이 버즈를 떠올리며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전성기가 길고 굵었을 거란 착각이다. 버즈 이름으로 남아있는 명곡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버즈는 한 앨범에서 3곡이나 1위에 오른 곡을 배출했을 정도로 앨범 하나 당 임팩트가 컸다. 게다가 정규 앨범말고도 앨범과 앨범 사이에 디지털 싱글 형태로 내놓은 곡도 많았다. 하지만 버즈의 전성기는 굵었을지언정 길지는 않았다. 멤버들의 군 입대, 소속사와 멤버들 간의 마찰로 인해 결국 2007년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2》라는 곡을 마지막으로 버즈는 잠정 해체하였다. 이후 민경훈은 솔로 활동에 나서지만 버즈 때만큼의 생동감 있는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다른 멤버들이 제대하고 민경훈이 아닌 다른 보컬을 내세워 버즈라는 이름으로 기존 멤버들이 활동하기도 했으나 사람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그러다 2013년 말, 민경훈이 제대를 하고 이듬해 버즈는 원년 멤버가 모여 재결합 음원을 내게 된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버즈였다> 당시 10~20대에겐 버즈의 인기가 폭발적이었지만 기성세대들에게는 다소 낯선 밴드였다. 그럼에도 히트곡의 연령대와 성비를 나타낸 지표를 보면 다양한 연령대에서 버즈의 노래를 즐겨들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버즈의 노래가 꾸준히 회자되고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으면서 전세대를 아우르는 밴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버즈였다'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JTBC 히든싱어4에 출연하면서 과거 히트곡이 재조명되었다. 방송 이후 멜론 실시간 검색어와 실시간 인기차트 줄세우기에 성공하면서 2015 버즈 전국 투어 콘서트는 엄청난 예매율를 자랑함과 동시에 앵콜 콘서트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JTBC 아는형님의 CP 여운혁에 따르면 JTBC 히든싱어4 출연이 민경훈의 캐스팅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017년 7월 28일 버즈는 처음으로 미니앨범을 선보였다. 타이틀곡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은 버즈 멤버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으로 공개하자마자 각종 음원사이트 1위에 오르며 오랜만에 버즈가 돌아왔다는 평을 받았다. 인디 시절과 1집땐 J-ROCK 스타일의 록 음악을 했으며 소재도 꿈, 우정, 동화, 환경 등 다양했다. 윤도현도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버즈를 팝 밴드가 아닌 신인 록 밴드라 칭하였었다. 1집때까진 대중적인 성향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인디음악이라는 느낌이 강한 편이었다. 인디 시절엔 자작곡을 많이 불렀지만 데뷔후엔 그런 모습이 줄었고 당시 버즈가 인디였을때부터 팬이었던 사람들은 발라드로 도배된 2집과 3집을 보고 '버즈의 색깔을 잃었다'며 버즈를 떠났다. 인디 시절엔 록음악을 했지만 메이저 데뷔 이후엔 팝에 가까운 음악을 많이 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자신들을 록밴드라 칭한 적이 없었고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팝밴드라고 말하기도 했다. 버즈는 실력으로 승부한다며 CF를 거절하고 얼굴 말고 실력으로 봐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은 상업성에 찌들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는데 실제로 이들이 음악 외적으로 활동을 했던 건 2집때 잠시 동안 활발히 했던 예능활동과 CF 3편이 전부이고 이름이 알려졌던것도 신인 때 출연했던 윤도현의 러브레터(2003.11.21)에서 불렀던 최선원의 <슬퍼지려 하기 전에>의 커버곡이 좋은 반응을 얻어서였다. <어쩌면...>을 민경훈이 부를 때 처음 몇번은 원음으로 라이브를 했는데, 최고음이 매번 라이브를 하기엔 너무 높아서 반음 내리고 라이브를 한다. 이후로도 계속 반음 내리고 부른다. <Monologue>의 뮤직 비디오와 1집 음원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다른데, 이유는 음원의 목소리가 맘에 들지 않아서 민경훈이 재녹음을 제안해서 그렇다고 한다. 민경훈은 1집때,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당시 20세였던 2003년)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해서 녹음했으며 후엔 얇은 목소리로 다시 불러 재녹음했다. 버즈 1집에 담긴 〈To.Fan〉의 일부 (1절의 "아무 약속 없는~ 비틀대는 나에게로"와 2절의 "너를 지킬거란 ~ 꿈을 꾸잖아")를 드러머인 김예준이 불렀다. 수록곡 <벌>은 육각수 <마지막 기도>를 리메이크한 곡이다. 수록곡 <1st>는 1집과 2집에 두 음반에 수록된 곡이다. 1집, 2집 모두 3번 트랙에 속해 있는데 2집에 다시 수록된 이유는 멤버들이 애착을 가진 곡이고 민경훈의 그동안 바뀐 창법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넣었다고 한다. 현재는 1집의 연주 방식으로 곡을 연주하며 노래방 반주기에 등록된 곡은 1집의 수록곡이다. 수록곡 <거짓말>은 후속곡으로 논의되었지만 윤우현의 자작곡인 <가시>에게 밀려 활동하지 않았다. 수록곡 <Funny Rock>은 GLAY의 <More Than Love>의 표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버즈의 언더그라운드 활동 시절 GLAY곡을 카피하여 활동했다는 점이 있지만 멜로디의 진행과 유사한 부분의 코드가 달라 의혹에 그쳤다. 수록곡 <일기>는 작사가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쓰여진 곡이다. 버즈 3집 Mnet 컴백무대에서 <약자의 눈물>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41단 바이브레이션을 보여줘 기교적으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줬다. 이후 지나치게 힘든 스케줄과 공연으로 천식에 걸렸지만 3집 후속곡 <My Love> MR제거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면서 녹슬지 않는 가창력을 대중에게 알렸다. 11번 트랙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KTF사에서 내세웠던 응원가인 <Reds go together>이다. 곡이 처음 발표됐을 때 대중의 반응은 냉담하여 좋은 반응을 얻는 데는 실패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네티즌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 응원가 1위로도 꼽히기도 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임진모는 이 곡이 버즈의 기본 인지도와 월드컵 분위기가 맞아떨어져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평했다. <Reds go together>를 쓴 고석영 작곡가는 월드컵 기간 동안 1억여 원의 저작권 수익을 얻었고, 한국 축구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했다면 그것의 10~20배는 가능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곡은 육군 훈련소에서 정훈교육 중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동영상에 사용되기도 했고, 육군 모 사단에서는 월드컵 기간동안 기상나팔을 이 곡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 4집의 수록곡 <Star>의 마지막 영어 파트를 김예준이 불렀다. 버즈의 라이벌로는 유명한 3인조 발라드 그룹 SG워너비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각각 <어쩌면> 과 <Timeless>로 데뷔하였으며, 2005년엔 같은 시기에 각각 <겁쟁이> 와 <죄와 벌> 로 맞붙었다. 2006년에도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각각 <내 사람> & <사랑했어요>와 <My love> & <남자를 몰라>로 맞붙었다. 민경훈은 버즈 데뷔전에 많은 도움을 준 PD가 맡고있는 '연애편지'라는 프로그램에 보답 차원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2회 출현했을 때, 시청률이 43.1%가 나오기까지 했다. (2005) 민경훈을 영입하기 이전에 여러 보컬 후보가 있었는데, 그 후보 중에는 훗날 배우로서 대성하게 되는 현빈도 있었다고 한다. 히든싱어4에 출연했을 때 게스트였던 현미는 윤우현을 '멕시칸 아저씨'라고 불러 새로운 별명을 얻게 했다. (2015) (타이틀곡) 어쩌면... The... 가버려! To. Fan 내가 아니죠... Go Away! 일 년쯤이면... 우리 이별 앞에 지지말아요 (세상에 한 사람) 나무 (Original Ver.)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 2 (2007) 스파이 OST Code No.3 (2015)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 3 (2015) OST 나루토 2기 OST (2005) - 《활주》 나루토 3기 OST (2006) - 《투지》 브리스톨 탐험대 OST (2008) - 《꿈을 찾아서》 스파이 OST (2015) - 《Hero》 타 아티스트 앨범 참여 2004 Christmas Story (2004) - 《Jingle Bell Rock》 KTF & 붉은악마 월드컵 응원 앨범 (2006) - 《Reds, Go Together》 SG워너비 (2006) - 《Ordinary People》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신년특집) (2015) - 《그대에게》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이장희 2편) (2015) - 《그건 너》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사랑과 이별의 찬가, 작곡가 故 길옥윤 편) (2015) -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김지애 & 문희옥편) (2015) - 《몰래한 사랑》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남성 보컬리스트 특집) (2015) - 《사랑한 후에 + 행진》 《어쩌면...》 (CoolFM)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2004.01.14 / 2004.01.28 / 2004.02.04 / 2004.04.14 / 2004.04.21) (2FM) 자두의 라디오가 좋아요 (2004.01.31) (2FM) 밤을 잊은 그대에게 (2004.05.08) (2FM) 데니의 키스더라디오 (2004.07.10 / 2005.03.15 / 2005.05.07 / 2005.06.14) (2FM) 김구라의 가요광장 (2005.03.17 / 2006.05.10) (2FM) 박준형의 FM인기가요 (2005.03.19 / 2005.07.05 / 2005.11.25 / 2006.05.10 / 2006.07.11 / 2006.08.07 / 2006.08.08) (2FM) 이금희의 가요산책 (2005.04.09 / 2006.05.24) (3Radio) 윤선아의 노래선물 (2005.05.21) (2FM) 봄여름가을겨울의 Bravo My Life (2005.07.08 / 2006.05.11 / 2006.05.20) (CoolFM) 최강희의 볼륨을 높여요 (2005.08.11 / 2006.05.02) (FM) 강수정의 뮤직쇼 (2006.05.15) (표준FM) 모두가 사랑이에요 (2005.03.19) (FM4U) 조정린, 김상혁의 친한친구 (2005.03.26) (표준FM) 최정원의 감성시대 (2005.04.14) (표준FM)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 (2005.05.07 / 2005.08.11 / 2006.05.17) (춘천MBC) 별이 빛나는 밤에 (2005.06.07) (표준FM) 박경림의 심심타파 (2005.06.17 / 2005.07.24 / 2005.08.13 / 2005.08.20 / 2005.08.27 / 2005.09.03 / 2005.09.10 / 2005.09.24 / 2005.10.01 / 2005.10.15 / 2005.10.22 / 2006.05.17 / 2006.06.15) (FM4U) 여름음악페스테벌 (2005.08.06 / 2006.08.03) (FM4U) 박명수의 펀펀라디오 (2006.05.07) (FM4U) 정선희 정오의 희망곡 (2006.05.19) (FM4U) 김원희의 오후의 발견 (2006.06.01) (FM4U) 김성주의 굿모닝FM (2006.06.13) (FM) 플라이투더스카이(FTTS)의 텐텐클럽 (2003.11.28 / 2004.01.30 / 2004.02.06 / 2004.04.16 / 2004.04.23 / 2004.04.30) (파워FM) 하하 몽의 영스트리트 (2004.01.06 공개방송/ 2004.02.01 녹음방송/ 2004.03.11) (FM) 박용하의 텐텐클럽 (2005.03.26 / 2005.04.16 / 2005.04.22 / 2005.05.14 / 2005.05.21 / 2005.05.28 / 2005.06.01 / 2005.06.04) (파워FM) 장근석의 영스트리트 (2005.04.17 / 2005.05.18 / 2005.06.21 / 2005.07.04 / 2005.07.11 / 2005.07.12 / 2005.07.13 / 2005.07.14 / 2005.07.15 / 2005.07.25 / 2005.08.02 / 2005.10.13) (러브FM) 서민정의 기쁜우리젊은날 (2005.06.02 / 2005.06.13 / 2005.07.16 / 2005.07.22 / 2005.07.24 / 2005.07.29 / 2005.08.05 / 2005.08.12 / 2005.08.19 / 2005.08.26 / 2005.09.02 / 2005.09.09 / 2005.09.16 / 2005.09.23 / 2005.09.30 / 2005.10.07 / 2005.10.14 / 2005.10.21 / 2005.10.28 / 2005.11.04 / 2005.11.11 / 2005.11.18 / 2005.11.25) (파워FM) 최화정의 파워타임 (2005.06.07 / 2005.06.18 / 2005.09.06 / 2005.11.06 / 2005.11.13 / 2005.11.20 / 2005.11.27 / 2005.12.04 / 2006.05.09) (FM) 박소현의 러브게임 (2005.08.19 / 2006.06.12) (파워FM) 하하의 텐텐클럽 (2005.11.08 / 2006.05.24) (파워FM) 김희철 박희본의 영스트리트 (2005.11.03) (파워FM) SS501의 영스트리트 (2006.05.06) (러브FM) 노홍철의 기쁜 우리 젊은 날 (2006.05.10 / 2006.06.02) (러브FM) 남궁연의 고릴라디오 (2006.05.24 / 2006.05.31 / 2006.06.07 / 2006.06.28 / 2006.07.05 / 2006.07.12) TJB 대전민방라디오 (2003.12.13) iFM 빈우의 러브 플러스 (2004.01.14 / 2004.01.28) BBS 백팔가요 (2004.04.04) WBS 원음방송 FM 아하데이페스티벌 (2005.04.28) PBC 평화방송 한낮의 가요선물 (2005.07.13) CBS FM 설수현의 12시에 만납시다 (2005.08.17) (파워FM) 김창렬의 올드스쿨 (2014.12.01) (파워FM) 최화정의 파워타임 (2014.12.02) (파워FM) 두시탈출 컬투쇼 (2014.12.04 / 2015.10.22) (파워FM) 이국주의 영스트리트 (2015.02.14~2016.03.26) 손성희, 민경훈 출연 / (2015.05.13) 멤버 전원 출연 (2015.10.04) 라디오 공개방송 / (2016.04.02 / 2016.04.09) 김예준, 손성희 출연 / (2016.04.16 / 2016.04.23 / 2016.04.30) 손성희 출연 (CoolFM) 이금희의 사랑하기 좋은날 (2014.12.07 / 2014.12.14 / 2014.12.21 / 2014.12.28) (CoolFM) 레이디제인의 2시 (2015.05.05) (CoolFM) 김성주 가요광장 (2015.11.06) (FM4U) 김신영 정오의 희망곡 (2014.12.11 / 2015.11.03) (FM4U) 써니의 FM데이트 (2014.12.11) (FM4U) 테이의 꿈꾸는 라디오 (2015.11.16) (표준FM) 박준형, 정경미의 두시만세 (2015.05.08 / 2015.10.30) (표준FM) 허경환 별이 빛나는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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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4%80%EC%84%B8%EC%9D%8C%EB%B3%B4%EC%82%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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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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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관세음보살은 무엇인가요?
<|assistant|> 이 텍스트는 관세음보살을 다룹니다. 관세음보살은 불교의 보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보살이다. 관자재보살로도 부른다. 중생들의 소리를 듣고 괴로움을 없애주거나,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이다. 그래서인지 영험담(기도를 해서 좋아졌다는 이야기)이 특히 많은 보살이다. 관련 경전은 천수경과 반야심경,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이다. 특히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관음경이라고 불릴 정도로 관세음보살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 보통 사찰의 대웅전에서 석가모니불을 마주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하며 부처가 그려진 보관을 쓰고 있다. 그 부처는 아미타불이다. 극락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미타불을 마주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한다. 대한민국의 4대 관음성지는 경남 남해 보리암,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 전남 여수 향일암이다.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기본 뜻은 세상 중생을 보고 도와준다는 의미이다. 세상의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는 뜻이다. 중생들이 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소리를 보고 소원을 들어주거나 어려움으로부터 구해주는 보살이다.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관세음보살과 의미가 같다. 산스크리트어에서 관세음보살을 뜻하는 avalokiteśvara(아발로키테슈바라)와 가장 가까운 의미이다. 아발로키테는 '지켜본다'는 뜻이고, 슈바라(스바라)는 '자유자재'라는 뜻이다. 처음 걷는 아이를 어머니가 뒤에서 지켜봐주듯이, 중생들을 자유자재하게 지켜보시다가 도와주시는 보살이라는 뜻이다. 또는 진리를 어떠한 장애없이 자유롭게 본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고 한다("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 보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다. 관자재보살의 뜻을 세상을 자유자재하고 본다로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관세음보살과 음이 비슷한 한자를 이용한 것으로 빛나는 세상의 소리 보살님이라는 뜻이다. 지혜의 빛으로 이 세상을 비춘다는 대세지보살과 비슷한 의미이기도 하다. 관세음보살은 세상 중생들의 소리를 듣고 원래 모습으로 나투시기도 하지만, 보통 그 중생의 근기에 맞게 여러 모습으로 변해서 나타난다. 때론 아이의 모습, 또 때론 노인의 모습 아니면 여러 다른 보살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아래는 관세음보살의 다른 모습들을 나열한 것이다. 얼굴이 11개를 가진 보살로 관세음보살님의 다른 모습이다. 때로는 웃는 얼굴로, 아니면 자비로운 얼굴로 이게 아니면 화난 얼굴로 중생들을 깨닫게 하시거나 도와주신다. 주변 사람의 따끔한 충고로 인생이 변했다면, 그 사람에게 순간 관세음보살님이 나투셔서 보살님의 목소리를 들려주신 것일 수도 있다. 천수보살 또는 천수관음이라고도 한다. 천개의 팔과 손을 가지고 있고, 손바닥 중간에는 눈이 달려 있다. 그래서 눈과 손을 1,000개를 가지고 있다. 이를 한자로 옮긴 단어이다. 관세음보살은 세상 모든 소리를 듣고 보고 도와주셔야 하므로, 눈과 손이 2개로는 부족하다. 수많은 눈과 손이 있다는 것을 1,000개라는 숫자로 상징하고 있다.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라는 향가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경덕왕시대에 있던 일을 알려주고 있다. 눈이 먼 자식을 가진 여인이 분황사 천수관음에게 "눈이 1,000개나 되시니, 저의 아이에게 눈을 1개만 주십시오."라고 열심히 기도해서 아이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의주를 가진 용이 소원을 들어주듯이(만화 드래곤볼처럼), 중생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보살이다. 이 역시 관세음보살님이 모습을 바꾼 것이다. 화난 말의 얼굴을 가진 보살이다. 중생을 꾸짖어 교화하신다. 중생을 건져 제도하시는 보살이다. 사찰 전각인 극락전에서 삼존불을 구성하는 보살이다. 보통 아미타불이 중앙에, 왼쪽은 대세지보살이, 오른쪽은 관세음보살이 있다. 중생들에게 지혜광명의 빛을 비추어 힘을 주는 보살이다. 아이에게 젖을 주듯, 불보살을 키우는 어머니 보살이다. 여덟개의 손이 있으며, 깨끗한 모성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천수경에서는 "나무 칠구지불모 대준제보살"이라고 하는데, 과거 칠불에게 젖을 먹여주신 크신 준제보살이라는 의미이다. 과거 경주에 중요한 7개의 절이 있었는데, 이를 칠처가람이라고 한다. 과거 석가모니부처 이전에 일곱 부처님이 설법을 하신 자리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보배병을 들고 중생들의 고통을 제도하고 자비를 펴는 보살이다. 별나라마다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를 무찌르고, 선을 지킨다. 이런 이미지로 닭을 군다리보살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달이 호수나 연못에 떠있고, 호숫가나 연못가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보살이다. 가득찬 달, 즉 보름달을 의미하는 보살이다. 바른 깨달음을 빨리 성취시켜준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즉, 중생을 빨리 깨닫게 해주는 지혜를 주는 보살이다. 중생을 깨닫게 도와주는 승려의 역할을 한다.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다. 목이 푸른 관세음보살이다. 청경(靑頸)이 목이 푸르다는 뜻이다. 자살충동을 극복시켜주는 관세음보살이다. <천수경>이라는 경전에 <신묘장구대다라니>라는 다라니가 있는데, 여기에 관세음보살의 여러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청경관음의 모습도 언급되어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에 적힌 "니라간타"라는 말이 "푸른 목을 가지신 청경관음"이라는 의미이다. <천수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관세음보살이 천광왕정주여래 앞에서 서원한 발원문이다 일체법을 어서속히 알아지이다. 지혜의눈 어서어서 얻어지이다. 모든중생 어서속히 건네지이다. 좋은방편 어서어서 얻어지이다. 지혜의배 어서속히 올라지이다. 고통바다 어서어서 건너지이다. 계정혜를 어서속히 얻어지이다. 열반언덕 어서어서 올라지이다. 무위집에 어서속히 들어지이다. 진리의몸 어서어서 이뤄지이다. <천수경>에 나오는 6가지 서원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이 부른다면 어느 곳이든 가서 도와주겠다는 내용이다. 또는 내가 어떤 곳에 갔을 때, 관세음보살의 힘으로 벗어날 것이라는 확신이다. 칼산지옥 내가 가면, 칼산이 저절로 부러지고 화탕지옥 내가 가면, 화탕지옥이 저절로 말라버리고 지옥에 내가 가면, 지옥이 저절로 소멸되고 아귀세계 내가 가면, 아귀가 저절로 배부르고 아수라세계 내가 가면, 나쁜 마음 저절로 항복 받고 축생세계 내가 가면, 큰 지혜를 저절로 얻게 되리라 주의: 본 내용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과학적인 내용은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관세음보살 기도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생기거나, 나쁜 일이 없어진다는 소문이 많다. 서점에 가도 1~2권 정도는 꼭 관세음보살 영험담 책이 있다. 이야기의 구조는 비슷하다. 병이 낫거나, 헛것이 더 이상 보이지 않거나,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되거나, 소원이 이루어 지거나, 사업이나 일이 잘 되게 되었다는 종류의 이야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관세음보살이 어머니를 구해준 이야기, 관세음보살 가피를 온 몸으로 체험한 모녀이야기, 매일 관세음보살 염송으로 입은 가피이야기(기사에 귀신 그림 주의!) 등을 외부 웹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단, 영험을 보려면 관세음보살을 하루에 1만 번 정도로 많이 외워야 한다고 한다. TV조선 미스트롯2에 출연했던 가수 은가은은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한 것이 방송을 타서 화제가 됐었다. 은가은은 16년 무명생활을 했는데, 특히 어려웠던 2018년에 사찰을 찾아 4박 5일 동안 관세음보살 기도를 했다고 한다. 평소 은가은의 어머니는 관세음보살 2만번을 외우면 안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루에 매일 100번 또는 1천번, 1만번 암송하거나 아니면 시간을 정해놓고 30분, 1시간 정도를 암송한다. 좀 더 격식을 갖추려면 관세음보살 정근을 한다. 아니면 천수경을 매일 1번~10번 정도 암송한다던가 하는 방법도 있다. 『관세음보살』<small>(여러 번)(최대한 많이 하면 좋지만, 보통 108번, 1000번, 1만번 정도로 한다.)</small> 다음은 한글 관세음보살 보문품이다. 그때에 무진의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무슨 까닭으로 관세음이라 하나이까? 부처님이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만약 한량없는 백천만억 모든 이들이 많은 괴로움을 받을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송하면 곧 그 음성을 들으시고 다 해탈케 하느니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이는 설사 큰 불에 들어가도 불이 능히 그를 태우지 못하나니 이는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또한 큰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송하면 곧 얕은 곳을 얻게 되며 만일 백천만억 모든 이들이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산호, 호박, 진주 등 보배를 구하려고 큰 바다에 들어갔다가 배가 폭풍에 밀려 그들이 나찰들에게 잡혔을 때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송하는 이가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나찰의 화를 면하게 되나니 이런 까닭으로 관세음보살이라 하느니라. 또한 어떤 사람이 해를 입게 되었을 때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송하면 그들이 가진 칼과 무기가 조각조각 부서져서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에게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야차와 나찰들이 와서 괴롭히려 하다가도 그 사람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성으로 염송하면 악귀들이 흉악한 눈으로 보지도 못하거늘 하물며 해할 수가 있겠느냐. 또한 어떤 사람이 죄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수갑과 쇠고랑과 사슬에 몸이 묶였더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송하면 모두 부서지고 끊어져서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느니라. 만일 삼천대천세계에 도적이 가득 찼는데, 어느 날 주인이 귀중한 보물을 가진 장사꾼들을 데리고 험난한 길을 지나갈 때에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선남자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그대들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송하라. 이 보살은 능히 모든 이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나니, 그대들이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염송하면 이 도적들의 난을 벗어나게 되리라"라고 하자 여러 장사꾼들이 함께 소리를 내어 "관세음보살"하고 그 이름을 염송한 까닭으로 도적들의 화에서 벗어났느니라. 무진의여. 관세음보살마하살의 위신력이 이렇게 크나니라. 어떤 사람이 음욕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공경하면 문득 음욕을 여의게 되고 만일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공경하면 문득 성내는 마음이 없어지고 만일 어리석은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공경하면 문득 어리석음이 없어지게 되느니라. 무진의여. 관세음보살은 이러한 큰 위신력이 있어 모든 이들을 이익케 하나니, 그러므로 모든 이들은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항상 염송할 지니라. 어떤 여인이 아들 낳기를 원하여, 관세음보살에게 예배하고 공양하면 문득 복덕 많고 지혜 있는 아들을 낳게 되고, 딸 낳기를 원하면 문득 단정하고 어여쁜 딸을 낳으리니, 이는 전생에 공덕의 근본을 심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니라. 무진의여. 관세음보살은 이와 같은 힘이 있느니라. 만일 어떤 이가 관세음보살에게 공경하고 예배하면 공덕이 헛되지 않으리니, 그러므로 모든 이들은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아 지닐 것이니라. 무진의여. 어떤 사람이 육십이억 항하사처럼 많은 보살들의 이름을 받아 지니고, 또 몸이 다하도록 음식과 의복과 침구와 의약으로 공양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의 공덕이 많지 않겠느냐? 무진의보살이 말하였다. 매우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아지니고, 한 때 만이라도 예배하고 공양하면 이 두 사람의 공덕이 다름이 없어서 백천만억겁에 이르더라도 다하지 아니하리라. 무진의여.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아 지니면, 이와 같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복덕의 이익을 얻느니라. 무진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이 사바세게에 다시며 어떻게 모든 이들을 위하여 법을 말하며 방편의 힘을 어떠하나이까? 부처님이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시었다. 착하도다, 무진의여.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벽지불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벽지불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성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성문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범천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범천왕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제석천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제석천왕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자재천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자재천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대자재천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대자재천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하늘대장군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하늘대장군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비사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비사문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소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소왕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장자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장자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거사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거사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재관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재관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바라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장자, 거사, 재관, 바라문의 부인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다 그 부인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동남, 동녀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동남, 동녀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 사람 아닌 이들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다 그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 집금강신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집금강신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느니라. 무진의여. 관세음보살이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고 가지가지 형상으로 여러 국토에 다니면서 모든 이들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나니, 그러므로 그대들은 마땅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에게 예배하고 공양해야 하느니라. 관세음보살마하살은 무섭고 급한 재난 가운데서도 두려움을 없게 하나니, 그러므로 이 사바세계에서 모두 그를 이름하여 두려움을 없애주는 분이라 하느니라. 무진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관세음보살에게 공양하겠나이다. 그리고 목에 장식하였던 백천금이나 되는 영락을 관세음보살에게 드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관세음보살이시여. 법으로 보시하는 보배 영락을 받으소서. 이때에 관세음보살은 받지 않으려 하거늘, 무진의보살이 다시 관세음보살에게 받기를 청하였다. 관세음보살이시여.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어 이 영락을 받으소서. 이때 부처님이 관세음보살에게 말씀하시었다. 마땅히 이 무진의보살과 사부대중과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 사람 아닌 이들을 어여삐 여겨 영락을 받으라. 그때에 관세음보살이 사부대중과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 사람 아닌 이들을 어여삐 여겨 그 영락을 받아 두 몫으로 나누어 한 몫은 석가모니부처님께 공양하고 한 몫은 다보부처님 탑에 공양하였다. 무진의여.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자유자재한 신통력이 있어 사바세계에 다니느니라. 이때에 무진의보살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묘한상을 갖추신 세존이시여. 이제 다시 저희들이 여쭈옵니다. 불자들이 어떤 까닭으로서 관세음보살이라 하시나이까. 묘한 상을 갖추신 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시되 관음보살 거룩하온 덕을 베풂이 곳곳에 나타남을 네가 들으라. 큰 서원은 바다같이 넓고 깊으며 한량없는 세월토록 살아오면서, 천만억의 부처님을 믿고 섬기어 거룩한 청정원력 이루었도다. 너희들이 알기 쉽게 말해주리라. 이름이라도 듣거나 친견하거나 마음 모아 섬겨서 지성 다하면, 이 세상에 모든 고통 멸해주리라. 가령 나를 어떤 이가 해치고자하여 불구덩이에 떠밀어서 떨어진다 해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불구덩이가 문득 변해 연못이 되리라. 어쩌다가 바다에서 풍파에 밀려 사나운 용 고기떼며 아귀난에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거센 파도 잔잔해져 구원 얻으리 만길 높은 험한 산에 올라섰을 때, 웬 사람이 별안간 떠밀어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햇빛처럼 허공 중에 떠있게 되고 뜻밖에도 악한 이에 쫓긴 바 되어 금강산의 골짜기에 떨어질 때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털끝 하나 그대로 상하지 않네 난데없이 원수들과 도적떼들이 제 각기의 흉기 들고 협박할 때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도리어 자비심을 일으키리라. 혹시라도 억울하게 죄목 받아서 사형대에 끌려 나온 마지막 순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모진 흉기 저절로 조각이 나네 불행히도 큰칼 쓰고 감옥에 갇히어 손과 발에 쇠고랑 차고 묶여 있어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저절로 풀려서 벗어나리라. 독한 약과 주술로써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해치려고 덤벼들 때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도리어 본심으로 돌아가리라. 어쩌다가 악한 나찰 만나게 되고 독룡들과 아귀떼들 만날지라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그 사람을 해치고자 못할지니라. 사나운 맹수들이 에워싸고서 이빨과 발톱으로 위협하여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깜짝할 사이 맹수들이 흩어지리라. 살모사 등 독을 쏘는 독충 무리가 불꽃 같은 독을 뿜어 위협한데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저마다 앞다투어 사라지리라. 구름 일고 천둥 쳐서 번개를 치며 우박이나 소나기가 쏟아질 때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이내 곧 구름 걷혀 활짝 개이리라. 모든 이들 때때로 곤액을 당해 한량없는 고통들이 핍박하여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모든 고통 건져주리라. 신통력을 갖추신 관세음보살 지혜와 온갖 방편 널리 닦으사, 시방세계 그리고 모든 국토에 빠짐없이 두루두루 나타나시며 여러 가지 생겨 나온 육취중생들 지옥이며 아귀도며 축생도까지, 나고 늙고 병이 들고 죽는 고통을 참답게 모두 모두 없애주시네. 진실다운 관찰이며 해맑은 관찰 높고 크며 넓은 지혜의 관찰, 가엾고도 사랑하는 자비의 관찰 한결 같이 우러르며 염원하리라. 티끌없이 밝고 맑은 거룩한 광명 햇살 같은 지혜의 빛 번뇌 부수어 불꽃 바람 재앙들도 항복받아서 세간 속을 두루 밝게 비치시니라. 가엾은 이 건질 때 몸 우뢰와 같고 사랑을 베푼 마음 구름 같아라. 시원한 감로수로 법비 내려서 불꽃 같은 번뇌들을 없애주리라. 송사와 다툼으로 관청갈 때나 목숨을 걸고 나선 전쟁터라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염송한다면 많고 많은 원수들도 물러가리라. 중생 관찰 관음보살 자재하신 음성 설법하신 관음보살 바다와 같고, 세간 음성 모두 보다 으뜸이실새 그러므로 우리들이 의지하리라. 의심하는 생각일랑 아예 버리고 관음보살 청정세계 의지하여서, 번뇌로 인한 죽을 고통 당할 때에도 의지되어 모든 고통 감싸주시네. 일체의 모든 공덕 구족하시고 자비하신 안광으로 중생 살피사, 바다 같은 공덕이 한량없을 새 마땅히 머리 숙여 예배하리라. 그때에 지지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일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자재하신 법문과 넓은 문으로 나타내시는 신통한 힘을 듣는 이가 있으면 이 사람의 공덕이 적지 아니함을 알겠나이다. 부처님이 이 모든 보문품을 설하실 대에 팔만사천이나 되는 이들이 위없이 높고 평등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때의 일이다. 한기리(漢岐里)에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아이가 태어난지 5년이 지나자 눈이 멀어버렸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분황사로 갔다. 왼쪽에 있는 전각 북쪽 벽에는 천수관음이 있었는데, 다음 노래를 불렀다. 아이도 노래를 부르며 빌게 하였더니, 마침내 눈이 밝아졌다고 한다. 일본에 어떤 승려가 자신은 기도를 많이 해서, 관세음보살이 모습을 보여준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어떤 사냥꾼이 나도 관세음보살을 볼 수 있냐고 했더니, 승려가 관세음보살이 매일 나타나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니 정말로 사냥꾼에 눈에도 관세음보살이 보였다. 사냥꾼이 말하길,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보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살생을 많이 한 나한테도 관세음보살이 보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화살로 관세음보살을 쏴버렸다. 승려는 관세음보살이 이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달려갔는데, 화살에 맞은 건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여우였다는 전설이 있다. 일본 기업 캐논(Canon)의 이름을 관세음보살에서 따왔다. 창업주 요시다는 관음신앙에 심취했었다. 관세음보살의 덕으로 세계 최고 카메라를 만들려고 '관세음보살 카메라(Kwanon Camera)'로 이름지었다.(카메라는 세상을 보고(観 : 볼 관) 찍는 것이고, 관음보살도 세상의 소리를 보는(観 : 볼 관) 보살이니 연관이 있다.) 관음(観音)을 일본어 발음으로 콴온(Kwanon), 칸논(Kanon)이라고 하는데, 이걸 서양에서 익숙한 대포(Canon)를 연상시키는 단어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카메라'가 '대포 카메라'로 바뀌어 버렸다. Alexander Studholme: The Origins of Om Manipadme Hum.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2 Kuan-Yin: The Chinese Transformation of Avalokitesvara (2001) by Chün-fang Yü, ISBN-13: 978-0231120296, Columbia University Press Buddha in the Crown: Avalokitesvara in the Buddhist Traditions of Sri Lanka (1999) by James P. McDermott,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19 (1): 195- The Origin of Avalokiteshvara of Potala Avalokiteshvara - The Buddha of Compassion An Explanation of the Name Avalokiteshvara The Bodhisattva Ideal - Buddhism and the Aesthetics of Selflessness The Bodhisattva of Compassion and Spiritual Emanation of Amitabha - from Buddhanature.com Depictions at the Bayon in Cambodia of Avalokiteshvara as the Khmer King Jayavarman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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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G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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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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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GBA이 궁금해요.
A: GBA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GBA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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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sets and Spl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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