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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자의 자격을 |
주기적인 선박 검사로 승선자 정원 준수, 구명 |
제한하거나 악천후 운항 |
선박 안전관리를 체계적으로 장비 상태 점검 등 |
금지 등 강력한 |
점검해야 한다. 평소 안전사고에 |
법적 제재가 필요하다. |
철저한 대비 필요 |
•인양된 희생자 임시안치소에서 오열하는 유가족 |
190 | 재난 씨, 우리 헤어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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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
지 않 았 다 . 또한 많은 승객들은 배의 구명조끼 보관대가 잠겨 있어 구명조끼를 착 |
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
당시 여객선의 선원들은 안전 및 해난방지교육, 연안선 직무교육, 여객선 안 업 |
무 지침에 의한 교육 4가지, 여객선 안전운항 업무 지침에 의한 승무원 훈련 4가 |
지 등 모두 10가지의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 양과 종류만 본다면 부족하지 않다 |
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해운조합의 1993년도 교육 실적은 매우 부실 |
했다. 서해훼리호 직원에 대한 교육도 실시되지 않았다. |
한발 늦은 해상 사고 대응 |
침몰 당시 서해훼리호는 선박 내 침수로 인해 사고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
10시 15분경,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한 민간어선이 서해훼리호의 침몰을 목격했 |
다. 그 어선에서 곧바로 무전기로 곰소 어업무선국에 신고했고 그 즉시 군산 해경 |
상황실로 사건이 접수되었다. 그러나 경찰 헬기는 사고 발생 50분 후에나 현장에 |
도착했고, 소속 경비함정은 사고 발생 1시간 후에 도착했다. |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구조에 나선 이들은 근처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 |
들이었다. 이들은 서둘러 조난 승객들을 구조했다. 경찰 헬기와 구조선은 단 4명 |
의 인원만 구조했을 뿐, 출동이 지연된 탓에 사체 인양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육지에서는 사고수습대책본부가 꾸려졌다. 하지만 당시 대형 해상사고에 |
대한 대응수습 처리 매뉴얼이 없어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응에 어려움이 있었다. |
특히 상황보고 체계에서는 각 기관마다 별도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
유관기관(지방경찰청, 군부대, 지방항만청, 해양경찰 등) 간 지원체계가 원활하지 |
못해 대응이 늦어졌다. |
제11장·해양선박사고 | 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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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여객선 침몰 사고 |
계속되는 오보와 유언비어 |
서해훼리호의 침몰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내용의 오보가 |
잇따랐다. 특정부처와 언론기관은 초기 침몰 당시 승선 인원을 140명이라고 밝혔 |
다가 오보를 확인한 후 211명으로 번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차 수정발표에도 |
불구하고 위도의 주민들과 관계자들은 300명이 넘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국 |
정부는 사건 발생 8일 만에 승선 인원 362명을 최종 확인했다. 이처럼 승선 인원 |
이 오락가락했던 것은 승객 명부를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선박은 출 |
항 전에 여객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적은 승객 명부를 작성해 1부를 매 |
표소에 보관해야 한다. 그러나 서해훼리호는 평소 군산해운항만청에 승객자 수만 |
무전으로 보고하고 승선자 명단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사후 보고해 온 것으로 드러 |
났다. |
정확하지 않은 발표도 문제였지만 언론의 무분별한 취재와 방송도 문제가 되 |
었다. 당시 언론기관에서는 현장 확인 없이 무분별하게 주민 인터뷰를 실시했고 |
유언비어성 루머를 취재해 방송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선장이 도망쳤고 승무원들 |
이 살아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선체 인양 후 선장은 선박 2층 통신실에서 |
정부 차원에서 |
언론 창구를 일원화하여 확인된 사실을 |
유언비어와 허위 보도를 보도하는 책임 있는 |
예방할 수 있어야 한다. 자세가 필요하다. |
192 | 재난 씨, 우리 헤어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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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이러한 오보들로 인해 검찰이 실제 수사에 착수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 |
는데, 낚시하러 온 공무원이 출근해야 한다며 출항을 강요했다는 등 전혀 검증되 |
지 않은 유언비어가 여과 없이 보도되기도 했다. |
악조건 속에서 진행된 수색과 인양 작업 |
육지에서 오보와 유언비어가 계속되는 가운데 해상에서는 실종자 수색 작업이 |
진행되었다.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위도 앞 해상은 육지와 도서를 잇는 도랑과 같 |
은 해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조석 간만의 차는 |
4~7m에 이르고, 조류는 최고 1~3노트(시속 2~6km)를 기록하였으며, 특히 삼각 |
파도가 높기로 유명하였다. 삼각파도는 서로 다른 방향의 물결이 부딪치면서 파 |
도의 꼭대기가 극단적으로 뾰족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삼각파도 안에서 |
는 선박의 조종이 어려워 종종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해상 상 |
태는 계절의 영향으로 계속 불안했고 이 때문에 실종자 수색은 많은 어려움에 직 |
면했다. 게다가 전문적인 수색 인력과 장비도 확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
사고수습대책본부는 선체 인양을 위한 장비를 설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 |
므로 ‘선 사체 인양, 후 선체 인양’이라는 구조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이 지역의 바 |
다 수심은 약 14~18m이고, 정조시간(바다에서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과정에서 |
조류가 정지한 것처럼 느려지는 때)에도 물의 흐름이 빨랐다. 또한 가라앉은 서해 |
훼리호는 두꺼운 뻘에 선체의 3분의 1정도가 파묻힌 채 90도로 기울어져 있어 잠 |
수부를 들여보내기가 위험했다. |
실제 선체 수색은 계속된 기상 악화로 사고 발생 3일 후에나 실시될 수 있었다. |
당시 잠수 수색은 다양한 악조건으로 하루 2시간 정도만 가능했다. |
수중에서는 전혀 앞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더듬어 가며 사체 인양 |
제11장·해양선박사고 | 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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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여객선 침몰 사고 |
작업을 진행했다. 게다가 구조수색장비도 부족하여 도끼로 유리창과 문을 부숴가 |
면서 이동통로를 확보해야 했다. |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는 국민들이 관심이 집중된 중요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
관계 기관과 잠수부들은 야간 작업을 병행하면서까지 사체 인양 작업에 속도를 |
냈다. 하지만 야간 잠수 시 잠수사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많은 위 |
험이 뒤따랐다. |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난 10월 17일 오전 10시 40분경, 서해훼리호의 인양작업 |
이 시작되었다. 가라앉은 여객선은 인양 작업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수면 위로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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