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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도시철도 2호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전 도시철도 2호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전지하철 2호선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아직 개통되지 않은 철도 노선 또는 철도역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정확한 내용을 반영할 수 있도록 문서 수정을 도와주세요. 대전 도시철도 2호선 (스마트트램)기본 정보운행 국가 대한민국종류 도시 철도체계 대전 도시철도 (노면전차)상태 설계 중기점 동부네거리역 (A선) 충남대역 (B선) 서대전역 (본선) 종점 동부여성가족원역 (A선) 원골네거리역 (B선) 서대전역 (본선)개통일 2020년 (예정)소유자 대전광역시운영자 대전광역시 도시철도공사노선 제원영업 거리 37.4 km궤간 1,435 mm (표준궤)선로 수 2전철화 DC 750V신호 방식 노면전차용 지상신호 (도로교통 통합신호)v • d • e • h 대전 도시철도 2호선 (大田 都市鐵道 2號線)은 대전광역시가 계획 중인 도시철도 노선이다. 진잠 ~ 서대전역 ~ 동부네거리(대전복합터미널) ~ 정부청사 ~ KAIST ~ 충남대학교 ~ 유성온천 ~ 도안신도시 ~ 관저를 경유하는 36km의 순환형 노선으로 계획되고 있다. 그중 일부 노선은 스마트트램으로 먼저 착공될 예정이다. 목차 1 노선 개요 1.1 스마트트램 A선 1.2 스마트트램 B선 1.3 대전 도시철도 2호선 1.3.1 1단계 1.3.2 2단계 2 역 목록 2.1 본선 2.2 계족산 지선 2.3 진잠 지선 2.4 가수원 지선 3 연혁 4 논란 4.1 차종 선정 과정에 대한 논란 5 충청권 광역철도 6 각주 7 같이 보기 노선 개요[편집] 2012년 11월 21일 기획재정부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한 대전 도시철도 2호선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가 통과되어 대전광역시는 설계를 끝낸 뒤 착공해 2020년부터 2호선을 운행한다는 구상이었으나 기종이 노면전차로 변경되면서 착공시기가 늦춰지게 되었다. 이후 대전광역시는 2호선의 일부 구간을 시비를 부담하여 스마트트램으로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며 2018년 착공을 위해 실시 설계 중에 있다. 2019년 드디어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받고 2021년 착공해 2025년 완공 목표로 매우 긴 시간 착공되지 못하고있다. 스마트트램 A선[편집] 사업성격 : 신설 건설기관 : 대전광역시청 대중교통혁신단 차량시스템 : 노면전차 (스마트트램) 사업구간 : 동부네거리 (대전복합터미널) - 중리네거리 - 법동 - 동부여성가족원 2.7km 착공시기 : 2018년 (예정) 완공시기 : 2020년 (예정) 특징 : 추후 읍내동까지 연장할 것이며, 2호선 완공 시 지선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스마트트램 B선[편집] 사업성격 : 신설 건설기관 : 대전광역시청 대중교통혁신단 차량시스템 : 노면전차 (스마트트램) 사업구간 : 충남대 - 유성온천역 - 상대 - 원골네거리 2.4km 착공시기 : 2018년 (예정) 완공시기 : 2020년 (예정) 특징 : 정부 공모 시범노선 대비 대전 도시철도 2호선[편집] 사업성격 : 신설 건설기관 : 대전광역시청 대중교통혁신단 차량시스템 : 노면전차 (스마트트램) 완공시기 : 2025년 (예정) 노선길이 : 36km 1단계[편집] 사업구간 : 서대전역 - 서대전네거리 - 대사(충남대학교병원) - 대흥(한밭종합운동장) - 인동 - 대동 - 자양(우송대학교) - 가양 - 동부네거리(대전복합터미널) - 중리 - 오정(한남대학교) - 한밭대교(오정농수산물시장) - 둔산 - 정부청사 - 만년 - 엑스포과학공원(국립중앙과학관) - 유성구청(한국과학기술원) - 충남대학교 - 유성온천 - 원신흥 - 목원대학교 - 가수원역 - 진잠 2단계[편집] 사업구간 : 가수원역 - 정림 - 복수 - 도마네거리 - 유천 - 서대전역 역 목록[편집] 역명은 아직 미정으로, 환승역을 제외한 나머지 역명은 가칭이다. 본선[편집] 역 번호 역명 로마자 역명 한자 역명 역간거리 누적거리 접속 노선 소재지 비고 201 서대전 Seodaejeon 西大田 충청권 광역철도 대전광역시 중구 202 서대전네거리 Seodaejeon Negeori 西大田네거리 ■ 대전 도시철도 1호선 203 대사 Daesa 大寺 204 대흥 Daeheung 大興 205 인동 In-dong 仁洞 동구 206 대동 Dae-dong 大洞 ■ 대전 도시철도 1호선 207 자양 Jayang 紫陽 208 가양 Gayang 佳陽 209 대전복합터미널 Daejeon Terminal Complex 大田터미널 스마트트램A선 210 중리네거리 Jungninegeori 中里네거리 계족산 지선 대덕구 211 한남대 Hannam University 韓南大 212 오정 Ojeong 梧井 충청권 광역철도 213 오정농수산물시장 Ojeong Agro-Fishery Market 梧井農水産物市場 214 둔산 Dunsan 屯山 서구 215 정부청사 Government Complex Daejeon 政府廳舍 ■ 대전 도시철도 1호선 216 선사유적지 Dunsan Prehistoric Site 先史遺蹟地 217 만년 Mannyeon 萬年 218 엑스포과학공원 EXPO Science Park 엑스포科學公園 유성구 219 카이스트 KAIST 韓國科學技術院 220 유성구청 Yuseong-gu District Office 儒城區廳 221 충남대 Chungnam Nat'l Univ. 忠南大 스마트트램B선 222 유성온천 Yuseong Spa 儒城溫泉 ■ 대전 도시철도 1호선 223 상대 Sangdae 上垈 224 원골 Wongol 원골 225 목원대 Mokwon Univ. 牧園大 226 원앙네거리 Wonang Negeori 鴛鴦네거리 진잠 지선 서구 228 관저 Gwanjeo 關雎 229 가수원네거리 Gasuwonnegeori 佳水院네거리 가수원 지선 231 정림 Jeongnim 正林 232 복수 Boksu 福守 충청권 광역철도 233 도마 Doma 桃馬 234 유천 Yucheon 柳川 계족산 지선[편집] 역 번호 역명 로마자 역명 한자 역명 역간거리 누적거리 접속 노선 소재지 비고 210 중리네거리 Jungninegeori 中里네거리 본선 대전광역시 대덕구 스마트트램A선 210-1 법동 Beop-dong 法洞 210-2 동부여성가족원 Daejeon Institute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 東部女性家族院 진잠 지선[편집] 역 번호 역명 로마자 역명 한자 역명 역간거리 누적거리 접속 노선 소재지 비고 226 원앙네거리 Wonang Negeori 鴛鴦네거리 본선 대전광역시 서구 227 진잠 Jinjam 鎭岑 가수원 지선[편집] 역 번호 역명 로마자 역명 한자 역명 역간거리 누적거리 접속 노선 소재지 비고 229 가수원네거리 Gasuwonnegeori 佳水院네거리 본선 대전광역시 서구 230 가수원 Gasuwon 佳水院 충청권 광역철도 연혁[편집] 2001년 9월 : "제1차 대전권 광역교통 5개년 계획수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교통개발연구원이 연구용역에서 대전 2호선(순환선) 건설을 제안 2001년 12월 : 제1차 지방5대도시권 광역교통5개년계획(2001/12, 건설교통부)에 완공목표 미정으로 포함 2003년 12월 15일 : 교통개발 연구원의 의뢰에 따라 대전시청에서 대전도시철도 2호선 기본계획 및 노선 재검토가 결정 2003년 6월 22일 : 대한민국 건설교통부 고시에 의거, 2호선 경전철 건설사업 예비 타당성 조사 신청 2003년 11월 : 대한민국 기획예산처,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 사업선정 2003년 12월 : KDI의 의뢰에 따라 예비타당성 조사 착수 2006년 12월 : 기획예산처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에 따라, BC = 0.73, AHP = 0.312로 경제성이 낮게 평가 2011년 : 계획이 변경되어 1호선과 x축으로 건설하려 했던 2호선은 신탄진을 통과하는 충청권 광역철도망 구축사업이 확정됨에 따라 원안인 순환형을 재검토 2012년 11월 21일 : 한국개발연구원, 대전도시철도 2호선에 대한 예비타당성 분석 결과 B/C(비용대비편익) 0.91, AHP(종합분석) 0.508로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1] 2013년 : 민관정위원회에서 자기부상열차로 추진하기로 결정, 지상고가 방식과 노면 방식 모두 반대 의견이 있기에 여론 수렴 2014년 4월 16일 : 염홍철 시장, 자기부상열차로 기종 발표[2] 및 자양로 등 2호선 일부 난구간은 지하화로 확정 2014년 12월 4일 : 민선 6기 새로 취임한 권선택 시장의 공약에 따라 트램으로 기종 변경을 발표 2016년 4월 28일 : 대전광역시, 시범노선인 스마트트램의 건설 계획과 노선 계획 발표[3] 논란[편집] 차종 선정 과정에 대한 논란[편집] 대전시민들은 1호선처럼 지하철 방식으로 건설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지하철은 건설 비용이 많이 들고, 대전시가 충분한 국비를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상고가 방식으로 잠정 결정되어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를 받았고 통과되었다. 그러나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지상고가 방식이 도시 미관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노면 트램 방식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트램은 기존 도로를 2~3차로 잠식하고, 우선 신호(출ㆍ퇴근시간대 2~3분 간격 교차) 사용 등으로 교통 정체와 도로 교통 혼잡을 야기하며, 충돌로 인한 사고 위험성이 높다. 또한 트램이 노면과의 마찰로 마모에 따른 소음, 진동 및 분진 발생과 미세입자 등 대기 오염을 초래하고, 폭우ㆍ폭설ㆍ혹한기 등 기후변화 대응에 취약하며, 고가 방식에 비해 더 많은 유지 비용이 소요된다. 트램은 지상 교통신호 흐름의 적용을 받아 버스보다도 속도가 느려서 정시성을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에 시민들의 반대 의견이 높았다.[4] 하지만 권선택 시장이 2014년 12월 4일 기존 자기부상열차 계획 대신 트램으로 기종을 변경하겠다고 시민들에게 발표하였다. 노면 트램방식으로 변경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조사를 다시 통과해야 하며 이를 골자로 한 대전 도시철도 2호선 기본계획도 국토교통부 사업 승인까지 다시 통과되어야 한다. 충청권 광역철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충청권 광역철도입니다. 각주[편집] ↑ 대전도시철도 2호선 예타 통과, 한국일보, 2012년 11월 21일 ↑ 대전도시철도2호선 '고가 자기부상열차' 확정, 뉴스1, 2014년 4월 16일 ↑ 대전에 '노면전차' 놓인다…2개 시범노선 발표(종합), 연합뉴스, 2016년 4월 28일 ↑ 대전 도시철도 2호선 건설방식·기종 비교, 대전일보, 2014년 6월 11일 같이 보기[편집] 대전 도시철도 1호선 에코비 노면전차 무가선트램 vdeh 대한민국의 도시 철도수도권 전철 1기 ● 1호선 ● 2호선 ● 3호선 ● 4호선 2기 ● 5호선 ● 6호선 ● 7호선 ● 8호선 3기 ● 9호선 10호선 11호선 12호선 경전철 ● 우이신설선¹ ● 신림선¹ ○ 동북선¹ ○ 면목선¹등 부산 도시철도 ● 1호선 ● 2호선 ● 3호선 ● 4호선¹ ○ 사상-하단선¹ ○ 양산 도시철도¹ 대구 도시철도 ● 1호선 ● 2호선 ● 3호선¹ 인천 도시철도 ● 1호선 ● 2호선¹ 광주 도시철도 ● 1호선 ○ 2호선 대전 도시철도 ● 1호선 ○ 2호선² 기타 도시철도 ● 부산-김해 경전철¹ ● 의정부 경전철¹ ● 용인 경전철¹ ● 인천공항 자기부상철도¹ ○ 수원 도시철도² ● 김포 도시철도¹ ○ 창원 도시철도² ○ 판교 랜드마크 트램² 기울임 표시 : 미개통·공사중·계획중인 노선, ¹: 경전철, ²: 노면전차, 폐기된 계획 vdeh 대한민국의 노면전차 노선계획중서울특별시 위례선 목동선 경기도 수원 1호선 판교 랜드마크 트램 동탄 1호선 동탄 2호선 인천광역시 IN 트램 부산광역시 강서선 오륙도선 대전광역시 대전 2호선 스마트트램 A선 스마트트램 B선 폐선서울경성궤도 본선 화양지선(광장리선) 서울전차 서대문・마포선 을지로선 효자동선 왕십리선 신용산・구용산선 노량진・영등포선 의주로선 창경원・돈암동선 종로4가~을지로4가선 동대문~을지로6가선 부산부산전차 범일정선 목도선 장수선 대청정선 동래선 ¹: 수도권 통합운임제 체계 이외의 별도 운임 제도가 존재하는 노선. ²: 민간 자본 투자 노선(운임 부과 여부와 무관). vdeh 대전광역시의 교통공원 | 교통 | 도로 | 도서관 | 동굴 | 박물관 | 산 | 서원 | 섬 | 성 | 온천 | 저수지 | 종합병원 | 축제 | 하천 | 해수욕장철도일반철도 경부선 대전선 호남선 고속철도 경부고속철도 도시철도 1호선 2호선 역 대전역 서대전역 신탄진역 회덕역¹ 대전조차장역¹ 세천역¹ 가수원역¹ 흑석리역¹ ¹ : 여객취급을 하지 않는 역 도로고속도로 경부 (1) () 당진영덕 (30) 통영대전 (35) 호남지선 (251) 대전남부순환 (300) 나들목 분기점 계룡 나들목 남대전 나들목 남세종 나들목 회덕 나들목 대전 나들목 북대전 나들목 서대전 나들목 신탄진 나들목 안영 나들목 유성 나들목 판암 나들목 비룡 분기점 산내 분기점 서대전 분기점 유성 분기점 회덕 분기점 국도 1호 4호 17호 32호 국가지원지방도 32호 57호 도시고속도로 갑천도시고속도로 (천변도시고속화도로) 간선도로 대덕대로 도안대로 동서대로 둔산대로 북유성대로 유성대로 한밭대로 가장로 계룡로 계백로 계족로 구룡달전로 구즉세종로 금남구즉로 금산로 대둔산로 대전로 대청로 도산로 도솔로 도안동로 동대전로 배재로 벌곡로 보문산로 신탄진로 옥천로 우암로 중앙로 충무로 현충원로 버스시내버스 시내버스·마을버스 (노선 목록) 대전시티투어 고속·시외 대전복합 유성 대전청사 도룡동·대전도룡 대전서남부 유성시외 관저 대전도마동 부사동 신흥동 용두동 버스전용차로 대전~오송 버스전용차로 기타교통카드 티머니(한꿈이카드) 항공 청주국제공항 자전거 타슈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전_도시철도_2호선&oldid=24471520" 분류: 개발 중인 철도대전 도시철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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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서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영어: WAFF Championship, 아랍어: بطولة اتحاد غرب آسيا لكرة القدم, 페르시아어: قهرمانی فوتبال غرب آسیا)는 서아시아 축구 연맹(WAFF)에 가맹한 축구 협회(연맹)의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참가하는 국제 축구 대회이다. 대회는 2000년에 설립되었으며, 동일한 성격의 여자부 대회로 서아시아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가 있다. 목차 1 역대 대회 결과 2 국가별 참가 기록 3 국가별 통산 성적 4 같이 보기 5 외부 링크 역대 대회 결과[편집] 서아시아 선수권에서 정상에 오른 나라는 이란과 이라크, 쿠웨이트, 시리아, 카타르이다. 이란은 총 네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뒤이어 이라크, 쿠웨이트, 시리아, 카타르은 각각 한 번 서아시아 챔피언에 등극하였다. 연도/회차 개최국 우승 점수 준우승 3위 점수 4위 2000년(제1회) 요르단 이란 1 - 0 시리아 이라크 4 - 1 요르단 2002년(제2회) 시리아 이라크 3 - 2(a.e.t.) 요르단 이란 2 - 2(PSO 4 - 2) 시리아 2004년(제3회) 이란 이란 4 - 1 시리아 요르단 3 - 1 이라크 2007년(제4회) 요르단 이란 3 - 2(a.e.t.) 이라크 시리아 & 요르단공동 3위 2008년(제5회) 이란 이란 2 - 1 요르단 시리아 & 카타르공동 3위 2010년(제6회) 요르단 쿠웨이트 2 - 1 이란 예멘 & 이라크공동 3위 2012년(제7회) 쿠웨이트 시리아 1 - 0 이라크 오만 1 - 0 바레인 2014년(제8회) 카타르 카타르 2 - 0 요르단 바레인 0 - 0(PSO 3 - 2) 쿠웨이트 2019년(제9회) 이라크 ? - ? ? - ? 국가별 참가 기록[편집]      우승      준우승      3위      4위      개최국 † 초청국 대회국가 2000년 2002년 2004년 2007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4년 2019년 레바논 5위 6위 6위 6위 × × 9위 8위 ο 바레인 × × × × × 5위 4위 3위 ο 사우디아라비아 × × × × × × 7위 9위 ο 시리아 준우승 4위 준우승 =3위 =3위 7위 우승 × ο 아랍에미리트 × × × × × × × × ο 예멘 × × × × × =3위 11위 × ο 오만 × × × × 5위 8위 3위 =5위 ο 요르단 4위 준우승 3위 =3위 준우승 6위 10위 준우승 ο 이라크 3위 우승 4위 준우승 × =3위 준우승 =5위 ο 이란 우승 3위 우승 우승 우승 준우승 6위 × × 카자흐스탄† 6위 × × × × × × × × 카타르 × × × × =3위 × × 우승 × 쿠웨이트 × × × × × 우승 5위 4위 ο 키르기스스탄† 8위 × × × × × × × × 팔레스타인 7위 5위 5위 5위 6위 9위 8위 7위 ο 국가별 통산 성적[편집] 서아시아 선수권에서의 국가별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순위 기준: 승점 > 진출 횟수 > 최고 성적 > 골득실 > 다득점 > 승자승. 2014년 서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까지의 결과를 포함하며, 걸프컵의 결과는 포함하지 않는다. 순위 국가 진출 횟수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최고 성적 1 이란 7회 28 19 7 2 56 16 +40 64 우승 (4) 2 이라크 7회 26 13 7 6 35 19 +16 46 우승 (1) 3 요르단 8회 28 11 8 9 33 26 +7 41 준우승 (3) 4 시리아 7회 25 9 7 9 27 33 -6 34 우승 (1) 5 쿠웨이트 3회 11 5 3 3 14 14 0 18 우승 (1) 6 카타르 2회 7 5 0 2 12 10 +2 15 우승 (1) 7 바레인 3회 11 3 5 3 5 6 -1 14 3위 (1) 8 오만 4회 11 3 3 5 9 13 -4 12 3위 (1) 9 레바논 6회 14 2 2 10 6 21 -15 8 5위 (1) 10 팔레스타인 8회 18 1 3 14 10 30 -20 6 5위 (3) 11 사우디아라비아 2회 5 1 2 2 2 5 -3 5 7위 (1) 12 예멘 2회 6 1 1 4 6 8 -2 4 3위 (1) 13 카자흐스탄 1회 3 1 0 2 3 9 -6 3 6위 (1) 14 키르기스스탄 1회 3 0 0 3 0 8 -8 0 8위 (1) 같이 보기[편집] 아시아의 5대 지역 축구 선수권 대회 남아시아 축구 연맹(SAFF): 남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 남아시아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 동아시아 축구 연맹(EAFF): 다이너스티컵 — 동아시안컵 서아시아 축구 연맹(WAFF): 서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 서아시아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 아세안 축구 연맹(AFF): 아세안 축구 선수권 대회 / 아세안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 중앙아시아 축구 연맹(CAFA): 중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 중앙아시아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 외부 링크[편집] 서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기록(RSSSF)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서아시아_축구_선수권_대회&oldid=23227847" 분류: 서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아랍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페르시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مازِرونی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8일 (토) 23: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대한민국의 영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영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영화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한민국의 영화 스크린 수 2,424개 (2015년)[1]주요 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 22%쇼박스 17%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11%[1]제작된 장편 영화 (2015년)[1]총 편수 269 관객수 (2015년)[1]총 관객수 2억 1729만 명자국영화 관객수 1억 1293만 명 (52%)매출액 (2015년)[1]총 매출 1조 7154억 원자국영화 매출 8796억 원 대한민국의 영화(大韓民國- 映畵)는 대한민국 국적자 혹은 법인에 의해 제작된 영화로서 주로, 한국인 스탭과 배우로 구성된 영화를 지칭한다. 대한민국의 영화는 일제 강점기의 영화에 기원하며, 예술과 산업으로서 다양한 종류와 내용의 영화가 매년 제작되고 있다. 목차 1 역사 1.1 광복 이후 1.2 텔레비전 보급 이후 2 같이 보기 3 각주 4 참고 자료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일제강점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복 이후[편집] 일제강점기 후반부에는 검열과 동원으로 영화 제작이 어려웠다. 광복이 되자 영화인들은 거의 맨주먹으로 다시금 재기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이 당시의 영화는 광복의 감격을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최인규 감독이 전창근을 주연으로 해서 만든 《자유만세》, 윤봉춘 감독의 《안중근 사기(安重根史記)》,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을 비롯하여 《3·1혁명기》·《해방된 내 고향》 등이 1946년에 제작되었으며, 다음해에도 민족의 고난과 독립투쟁을 말하는 《윤봉길 의사》·《불멸의 밀사》·《민족의 절규》 등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그러나 한국의 영화가 그 예술적인 면에서 크게 진전을 본 것은 1960년 이후의 일이었다. 초창기로부터 해방 당시까지 그 의욕은 왕성했지만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아직도 미숙했었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영화인들은 민족의 고뇌와 분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영화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 예가 오히려 많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2] 텔레비전 보급 이후[편집] 영화를 제작하는 기업은 영세하고 시장은 협소하여 외화와 같이 영화제작에 충분한 시간과 경비를 투입할 수 없었고, 또한 자본주인 흥행사의 간섭 등으로 의욕있는 작품을 제작되기에는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에서도 영화산업의 보호 육성책으로 1971년 2월에 영화진흥조합을 발족시켜 방화제작비 융자, 시나리오 창작금 지원, 영화인 복지사업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에는 텔레비전 보급과 레저 산업의 성장에 의해 영화가 지녔던 대중 오락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감소되어 영화산업이 사양화하고 있었지만 1986년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자유화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9년 제작된 방화는 1980년대 들어 가장 많은 106편에 달했다. 실제로 1989년은 방화가 물량면에서는 1980년대 들어 최다제작이 이루어졌으나 외화직배문제로 외화수입물량이 폭증하여 방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관객의 방화외면, 외화의 선호현상이 더욱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외화는 방화보다도 많은 관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한국 영화계의 불황은 텔레비전 보급과 레저산업의 성장이라는 외적인 면보다는 내적인 면에 더 큰 원인이 있었고, 사회적·경제적·기술적인 제반 여건이 충족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출발이 한국 영화를 산업으로 성장시키지 못하고 소규모의 기업에 머물게 하였다.[3] 같이 보기[편집] 천만 영화 대한민국의 영화 흥행 기록 대한민국의 영화 상영 등급 한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영화진흥위원회 산업정책연구팀. “2015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2016년 6월 25일에 확인함.  ↑ '한국의 영화',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영화산업의 현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대한민국의 영화 vdeh세계의 영화아시아 한국 영화 대한민국 (목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목록) 일본 영화 중국 영화 홍콩 영화 타이완 영화 태국 영화 인도네시아 영화 인도 영화 발리우드 이란 영화 유럽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독일 영화 이탈리아 영화 스페인 영화 체코 영화 러시아 영화 아메리카 미국 영화 할리우드 캐나다 영화 멕시코 영화 브라질 영화 아르헨티나 영화 그 외 이집트 영화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국제 합작 영화 이 글은 영화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의_영화&oldid=24178364" 분류: 대한민국의 영화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영화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فارسیFrançais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日本語Português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13:4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대한민국의 영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영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영화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한민국의 영화 스크린 수 2,424개 (2015년)[1]주요 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 22%쇼박스 17%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11%[1]제작된 장편 영화 (2015년)[1]총 편수 269 관객수 (2015년)[1]총 관객수 2억 1729만 명자국영화 관객수 1억 1293만 명 (52%)매출액 (2015년)[1]총 매출 1조 7154억 원자국영화 매출 8796억 원 대한민국의 영화(大韓民國- 映畵)는 대한민국 국적자 혹은 법인에 의해 제작된 영화로서 주로, 한국인 스탭과 배우로 구성된 영화를 지칭한다. 대한민국의 영화는 일제 강점기의 영화에 기원하며, 예술과 산업으로서 다양한 종류와 내용의 영화가 매년 제작되고 있다. 목차 1 역사 1.1 광복 이후 1.2 텔레비전 보급 이후 2 같이 보기 3 각주 4 참고 자료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일제강점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복 이후[편집] 일제강점기 후반부에는 검열과 동원으로 영화 제작이 어려웠다. 광복이 되자 영화인들은 거의 맨주먹으로 다시금 재기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이 당시의 영화는 광복의 감격을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최인규 감독이 전창근을 주연으로 해서 만든 《자유만세》, 윤봉춘 감독의 《안중근 사기(安重根史記)》,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을 비롯하여 《3·1혁명기》·《해방된 내 고향》 등이 1946년에 제작되었으며, 다음해에도 민족의 고난과 독립투쟁을 말하는 《윤봉길 의사》·《불멸의 밀사》·《민족의 절규》 등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그러나 한국의 영화가 그 예술적인 면에서 크게 진전을 본 것은 1960년 이후의 일이었다. 초창기로부터 해방 당시까지 그 의욕은 왕성했지만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아직도 미숙했었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영화인들은 민족의 고뇌와 분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영화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 예가 오히려 많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2] 텔레비전 보급 이후[편집] 영화를 제작하는 기업은 영세하고 시장은 협소하여 외화와 같이 영화제작에 충분한 시간과 경비를 투입할 수 없었고, 또한 자본주인 흥행사의 간섭 등으로 의욕있는 작품을 제작되기에는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에서도 영화산업의 보호 육성책으로 1971년 2월에 영화진흥조합을 발족시켜 방화제작비 융자, 시나리오 창작금 지원, 영화인 복지사업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에는 텔레비전 보급과 레저 산업의 성장에 의해 영화가 지녔던 대중 오락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감소되어 영화산업이 사양화하고 있었지만 1986년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자유화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9년 제작된 방화는 1980년대 들어 가장 많은 106편에 달했다. 실제로 1989년은 방화가 물량면에서는 1980년대 들어 최다제작이 이루어졌으나 외화직배문제로 외화수입물량이 폭증하여 방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관객의 방화외면, 외화의 선호현상이 더욱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외화는 방화보다도 많은 관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한국 영화계의 불황은 텔레비전 보급과 레저산업의 성장이라는 외적인 면보다는 내적인 면에 더 큰 원인이 있었고, 사회적·경제적·기술적인 제반 여건이 충족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출발이 한국 영화를 산업으로 성장시키지 못하고 소규모의 기업에 머물게 하였다.[3] 같이 보기[편집] 천만 영화 대한민국의 영화 흥행 기록 대한민국의 영화 상영 등급 한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영화진흥위원회 산업정책연구팀. “2015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2016년 6월 25일에 확인함.  ↑ '한국의 영화',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영화산업의 현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대한민국의 영화 vdeh세계의 영화아시아 한국 영화 대한민국 (목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목록) 일본 영화 중국 영화 홍콩 영화 타이완 영화 태국 영화 인도네시아 영화 인도 영화 발리우드 이란 영화 유럽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독일 영화 이탈리아 영화 스페인 영화 체코 영화 러시아 영화 아메리카 미국 영화 할리우드 캐나다 영화 멕시코 영화 브라질 영화 아르헨티나 영화 그 외 이집트 영화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국제 합작 영화 이 글은 영화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의_영화&oldid=24178364" 분류: 대한민국의 영화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영화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فارسیFrançais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日本語Português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13:4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조문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문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45년 부민관 폭파 의거 직전, 왼쪽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조문기(趙文紀, 1926년[1] 5월 19일 ~ 2008년 2월 5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한국의 무장 의열독립운동의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폭파사건 주동자가운데 한 사람이다. 목차 1 생애 2 같이 보기 3 참고 자료 4 각주 생애[편집] 경기도 수원군 매송면(現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출신이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을 주도한 유만수와 함께 수배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피신하여 귀국한 뒤 1945년 5월 유만수의 주도로 경기도 안성 유씨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망 약 3주 전인 1945년 7월 24일 경성부의 부민관에서 박춘금이 주도해 열린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라는 어용 행사를 겨냥해 폭발물을 터뜨렸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마지막 의열 무장항일 독립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광복 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인민청년군 사건으로 복역했고 1959년에는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는 등 대한민국 역대 정권과의 불화로 독립유공자 서훈은 늦어졌다. 부민관 사건은 당대에는 일제의 보도통제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재조명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 중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을 1999년부터 맡아 친일파 청산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1994년의 문익환 목사 장례식에 이어 시민사회단체가 마련하는 겨레장 형식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저서로 《슬픈 조국의 노래》가 있다.[2] 같이 보기[편집] 대의당 박춘금 부민관 강윤국 유만수 대한애국청년당 참고 자료[편집] 조문기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조문기 민족문제연 이사장 별세”. 한겨레. 2008년 2월 5일. 2008년 2월 7일에 확인함.  “‘부민관 폭파 의거’ 조문기 의사 별세”. 경향신문. 2008년 2월 5일. 2008년 2월 7일에 확인함.  민족문제연구소 (2008년 2월 5일). “'부민관 폭파' 애국지사 조문기 선생 별세”. 오마이뉴스. 2008년 2월 7일에 확인함.  각주[편집] ↑ 호적상으로는 1927년이나, 『풍양조씨세보 』(豐壤趙氏世譜)에는 1926 병인(丙寅) 5월 19일생이라 기재되어있다. ↑ “'부민관 폭파의거' 조문기 선생 11일 '겨레장'”. 조선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8년 2월 10일. 2008년 2월 24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문기&oldid=24257740" 분류: 1926년 태어남2008년 죽음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화성시 출신친일 청산일제 강점기의 노동운동가건국동맹민족문제연구소풍양 조씨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1일 (화) 23: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올보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올보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알보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덴마크어 위키백과의 Aalborg 문서를 번역하여 문서의 내용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신뢰성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출처가 제시되도록 번역하여 주십시오. 번역을 완료한 후에는 {{번역된 문서}} 틀을 토론창에 표기하여 저작자를 표시하여 주십시오. 문맥상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문서를 같이 번역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번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는 다른 문서를 보고 싶으시다면 분류:번역 확장 필요 문서를 참고해주세요. 올보르 시 Aalborg 올보르 시가지 시기 휘장 올보르북위 57° 03′ 00″ 동경 09° 55′ 00″ / 북위 57.05000° 동경 9.91667°  / 57.05000; 9.91667좌표: 북위 57° 03′ 00″ 동경 09° 55′ 00″ / 북위 57.05000° 동경 9.91667°  / 57.05000; 9.91667 행정 나라 덴마크 행정구역 노르윌란 주 인구 인구 112,194 명 (2016년) 인구밀도 954 명/km2 지리 면적 139 km2 해발 5 m 기타 시간대 CET (UTC+1)CEST (UTC+2) 우편번호 9000, 9008, 9020, 9100, 9200, 9210, 9220, 9400 지역번호 (+45) 9 http://www.aalborg.dk/ 올보르(덴마크어: Aalborg 듣기 (도움말·정보))는 덴마크에서 4번째 도시로 인구는 121,540명(2006년)이다. 노르윌란 주의 주도이다. "북유럽의 파리"라는 별명이 있다. 윌란 반도를 가로지는 림 협만과 접하며 카테가트 해협에서 동쪽으로 약 3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중세 시대부터 항구 도시로 성장했으며 1342년 6월 16일에 발데마르 4세 국왕에 의해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 크리스티안 3세 국왕 시대였던 1550년에는 올보르 성이 건립되었고 1554년에는 올보르 루터교 주교구가 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0년에는 덴마크를 침공(베저위붕 작전)한 나치 독일의 낙하산 부대가 올보르를 점령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산업 시설이 들어섰다. 목차 1 문화 2 기후 3 자매 도시 4 각주 5 외부 링크 문화[편집] 프로 축구팀 올보르 BK 및 올보르 교향악단의 연고지이다. 도시의 북쪽에 바이킹 유적지인 린드홀름 구릉지가 있다. 기후[편집] 올보르 (1971–200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10.5 (50.9) 11.5 (52.7) 18.8 (65.8) 25.5 (77.9) 27.5 (81.5) 30.9 (87.6) 32.1 (89.8) 34.4 (93.9) 25.8 (78.4) 22.3 (72.1) 15.2 (59.4) 11.2 (52.2) 34.4 (93.9) 평균최고기온 °C (°F) 2.4 (36.3) 2.6 (36.7) 5.3 (41.5) 10.0 (50) 15.5 (59.9) 18.6 (65.5) 20.7 (69.3) 20.4 (68.7) 16.0 (60.8) 11.5 (52.7) 6.7 (44.1) 3.7 (38.7) 11.1 (52) 일평균기온 °C (°F) 0.2 (32.4) 0.3 (32.5) 2.3 (36.1) 5.9 (42.6) 10.9 (51.6) 14.0 (57.2) 16.0 (60.8) 15.7 (60.3) 12.2 (54) 8.5 (47.3) 4.2 (39.6) 1.6 (34.9) 7.6 (45.7) 평균최저기온 °C (°F) −2.4 (27.7) −2.3 (27.9) −0.7 (30.7) 1.9 (35.4) 6.3 (43.3) 9.8 (49.6) 11.9 (53.4) 11.4 (52.5) 8.5 (47.3) 5.1 (41.2) 1.5 (34.7) −1 (30) 4.2 (39.6) 최저기온기록 °C (°F) −25.2 (−13.4) −19.4 (−2.9) −25.6 (−14.1) −8.1 (17.4) −2.1 (28.2) 2.0 (35.6) 4.2 (39.6) 3.7 (38.7) −2.3 (27.9) −5.8 (21.6) −16.4 (2.5) −23.0 (−9.4) −25.6 (−14.1) 평균 강수량 mm (인치) 45.8 (1.8) 29.6 (1.17) 37.8 (1.49) 30.8 (1.21) 42.3 (1.67) 55.5 (2.19) 51.4 (2.02) 58.1 (2.29) 71.3 (2.81) 66.4 (2.61) 56.3 (2.22) 52.8 (2.08) 600.1 (23.63) 평균강수일수 (≥ 0.1 mm) 16.5 12.8 14.9 11.5 11.1 12.0 11.5 12.6 15.3 16.2 17.7 17.3 169.3 평균강설일수 7.0 5.2 4.3 1.3 0.0 0.0 0.0 0.0 0.0 0.1 2.0 4.8 24.6 평균 상대 습도 (%) 89 87 84 76 73 75 74 76 80 84 87 89 81 출처: Danish Meteorological Institute (humidity 1961–1990)[1][2] 자매 도시[편집] 네덜란드 알메러 프랑스 앙티브 독일 뷔데르스도르프 노르웨이 프레드릭스타드 영국 에든버러 페로 제도 Fuglafjørður 아일랜드 골웨이 폴란드 그디니아 이스라엘 하이파 중국 허페이 시 아이슬란드 후사비크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스웨덴 칼스코가 영국 랭커스터 그린란드 누크 러시아 푸시킨 미국 라신 스위스 Rapperswil-Jona 독일 렌츠부르크 라트비아 리가 핀란드 리히매키 그린란드 이토코르토르미우트 미국 솔뱅 루마니아 툴체아 불가리아 바르나 리투아니아 빌뉴스 독일 비스마르 각주[편집] ↑ “Danish Climatological Normals 1971–2000 for selected stations” (PDF). Danish Meteorological Institute. 2015년 11월 17일에 확인함.  ↑ “Observed Air Temperature, Humidity, Pressure, Cloud Cover and Weather in Denmark with Climatological Standard Normals, 1961–90” (PDF). Danish Meteorological Institute. 2015년 11월 1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올보르 올보르 날씨 정보 구글맵스 위성사진 vdeh북유럽 50대 대도시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올란드 제도 페로 제도 그린란드 1. 스톡홀름 1,372,565 2. 코펜하겐 1,263,698 3. 헬싱키 1,214,210 4. 오슬로 958,378 5. 예테보리 549,839 6. 탐페레 325,025 7. 말뫼 280,415 8. 오르후스 261,570 9. 투르쿠 260,367 10. 베르겐 250,420 11. 스타방에르 210,874 12. 레이캬비크 209,510 13. 오울루 193,817 14. 트론헤임 175,068 15. 오덴세 173,814 16. 웁살라 140,454 17. 올보르 132,578 18. 이위배스퀼래 120,306 19. 라흐티 117,424 20. 드람멘 113,534 21. 베스테로스 110,877 22. 프레드릭스타드-사릅스보르그 108,636 23. 외레브로 107,038 24. 린셰핑 104,232 25. 헬싱보리 97,122 26. 포르스그룬-시엔 91,737 27. 옌셰핑 89,396 28. 노르셰핑 87,247 29. 쿠오피오 86,034 30. 포리 84,509 31. 룬드 82,800 32. 우메오 79,594 33. 에스비에르 72,060 34. 예블레 71,033 35. 바사 66,911 36. 보로스 66,273 37. 요엔수 65,686 38. 에스킬스투나 64,679 39. 쇠데르텔리에 64,619 40. 칼스타드 61,685 41. 라네르스 61,664 42. 테뷔 61,272 43. 벡셰 60,887 44. 크리스티안산 60,583 45. 콜링 58,757 46. 할름스타드 58,577 47. 호르센스 56,536 48. 라펜란타 55,429 49. 바일레 53,975 50. 콧카 52,600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40725186 LCCN: n81018849 GND: 4128603-0 BNF: cb13611870f (데이터) 이 글은 덴마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올보르&oldid=24172793" 분류: 덴마크의 도시올보르덴마크의 항구 도시북해의 항구 도시숨은 분류: 번역 확장 필요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덴마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덴마크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CebuanoČeštinaKaszëbsczi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NordfriiskGaeilge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KalaallisutLatinaLumbaartLietuviųLatviešuMāori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Ирон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SvenskaKiswahili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VolapükWinaray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16: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악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악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악의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악의(惡意)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목차 1 일반 2 법률 3 각주 4 같이 보기 일반[편집] 일반적 의미는 "나쁜 마음", "남을 해(害)치려는 마음", "나쁜 뜻", "나쁘게 받아들이는 뜻", "나쁜 의도" 등을 뜻한다. 법률[편집] 법률 용어로서의 악의(惡意)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뜻하며 반면 선의(善意)는 어떤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1] 일상적 의미, 즉 "나쁜 뜻", "나쁜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선의와 악의는 법률사실에 관한 분류에 의할 때는 관념적 용태에 속한다.[2] 민법과 상법 등에서는 선의, 악의 여부에 따라 법률효과를 달리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대한민국 민법에서는 법률행위가 무효 혹은 취소되었을 경우 거래의 안전을 위해 선의의 제 3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규정, 즉 무효 혹은 취소의 효과를 주장할 수 없다는 규정을 다수 두고 있다. 이들 규정들을 반대해석하면 악의의 제 3자의 경우는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된다. 각주[편집] ↑ 김준호, 민법강의 (신정 4판), 법문사, 2003. 29쪽 ↑ 곽윤직, 민법총칙(7판), 박영사, 2003, 180쪽 같이 보기[편집] 대한민국 민법 제201조 이 글은 법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악의&oldid=23518969" 분류: 민법법률 용어숨은 분류: 법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HrvatskiIdoÍslenskaItaliano日本語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3일 (수) 10: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함태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함태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함태영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함태영咸台永 1949년의 함태영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 임기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대통령 이승만 전임 김성수 후임 장면 대한민국의 제2대 심계원장 임기 1949년 11월 24일 ~ 1952년 7월 22일 대통령 이승만 전임 명제세 후임 노진설 신상정보 국적 대한민국 출생일 1873년 10월 22일 출생지 조선 함경도 무산군 무산읍 사망일 1964년 10월 24일 (91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가 396번지 (고혈압과 노환의 합병증으로 병사) 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강릉 학력 한성법관양성소 졸업 주오 대학교 정치학과 1년 중퇴 평양신학교 졸업 경력 한국신학대학교 재단 이사장 독립촉성중앙회 최고위원 자유당 상임고문 심계원장 정당 무소속 부모 함우택(부), 원주 변씨(모) 배우자 밀양 손씨, 전주 최씨(재혼), 고숙원(삼혼) 자녀 아들 함병석, 함병승, 함병창, 함병서, 함병욱, 함병소, 함병춘, 딸 이름 미상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함태영(咸台永, 1873년 10월 22일[1] ~ 1964년 10월 24일)은 대한제국의 법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1952년 8월 15일부터 1956년 8월 14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경(子卿), 아호는 송암(松岩). 함경북도 무산군 출생이다. 1895년(고종 32년) 4월 16일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법관양성소 재학 중인 1896년 3월 5일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재직했다. 대한제국 때인 1898년 법관양성소[2] 를 수석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에서 검사로 법관 근무를 시작했다. 한성재판소 판사 당시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사건 수사 담당자였다. 그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체포된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관련자들에 대한 관대한 판결을 내렸으며, 이 인연으로 훗날 이승만의 지지를 받고 부통령이 되기도 했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형사국 서기관과 법률기초위원, 1908년(융희 2) 10월 8일 대심원판사 등을 역임했지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 이후 집권층의 의도를 반영하지 않아 파면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1910년(융희 4년)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로 사퇴했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담에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작성했고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19년 3·1 운동 거사 직전 비밀연락에 참여하였으며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만세선언서 등을 운반, 배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2년만에 가석방되었다. 이후 목회자, 선교 단체, 교육사업 등에 활동하다 해방 뒤, 이승만의 권고로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정부 수립 후 법무부장관에 추천되었으나 낙마하였다. 그러나 이후 1949년 제2대 심계원장과 심계관, 1951년 한신대학교 학장을 지냈으며, 1951년 5월 16일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2년의 정부통령 선거 때 제3대 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부통령 퇴임 후에는 한신대학교 이사장을 지냈고 1960년에는 이승만 환국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손자 함인섭은 강원대학교의 설립자이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유년기 1.1.2 소년 시절 1.2 법관 양성소 수학 1.3 법관 활동 1.3.1 법관 생활 초기 1.3.2 독립협회 사건 이후 1.3.3 일본 방문과 복귀 1.3.4 관료 생활과 법관 복귀 1.4 독립운동과 신앙 활동 1.4.1 신앙 생활 1.4.2 독립운동과 사회활동 1.4.3 3.1 만세 운동과 투옥 1.4.4 복역 생활과 재판 1.4.5 목사 안수 1.4.6 목회 활동 1.5 일제 강점기 후반 1.6 광복 이후 1.6.1 광복 직후 1.6.2 해방정국의 정치 활동 1.6.3 심계원장과 부통령 출마 1.6.4 제3대 부통령 1.7 생애 후반 1.7.1 부통령 퇴임 이후 1.7.2 만년 1.8 사망 직후 2 사후 3 저작 4 학력 5 기타 약력 6 상훈 경력 7 평가 8 가족 관계 9 기타 10 함께 보기 11 역대 선거 결과 12 함태영을 연기한 배우 13 참고자료 14 각주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유년기[편집] 함태영은 1873년(고종 9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읍내에서 무관을 지낸 함우택(咸遇澤)과 원주 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1872년생 설도 있다. 아버지 함우택은 서당의 훈장이었고 작명, 관상, 풍수지리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그의 직계 선조인 함흥달(咸興達)은 도시조(都始祖) 함규의 16대손으로서 1480년경 전라북도 김제 진봉면 정당리에 정착하였다. 함흥달의 손자인 함억수(咸億壽)는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함희현은 동몽교관, 함국녕은 선전관, 함헌징은 통정대부를 역임했지만 가세는 점차 몰락하여 한미해졌다. 함태영은 함흥달의 12대손이며 함억수의 10대손이었다. 아버지 함우택이 관직에 임명되어 떠나기 전까지 전라북도 김제 진봉에 거주하여, 그를 전북 김제 출신으로도 본다.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 야산 등성이에는 3백∼4백년간 거주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고 인근 김제시 성덕면 나시마을 동남방간 자그마한 야산등성이에는 그의 생모의 무덤이 있다.[3] 그가 고향을 떠난 뒤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 고향마을에는 생가터가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직계후손은 없고 6촌 친척만이 살고 있다. 아버지 함우택은 본부인 밀양 손씨를 잃고, 연이어 두번째 부인 동래 정씨도 잃고, 후에 맞이한 부인 원주 변씨에게서 함태영을 보았다. 함태영의 친형제 자매, 이복 형제자매가 몇 명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려서 그는 외가가 있는 함북 무산에서 성장하였다. 소년 시절[편집] 1884년(고종 21년) 잠시 한성에 거주하기도 했으나, 관료생활을 하면서 본격 한성에 거주하게 되었다. 아버지 함우택은 전라좌수영 도시 무과에 급제하여 1889년(고종 26년)에 선략장군 행용양위 부사과에 제수되어 한양으로 떠났으며 사헌부감찰, 통정대부 의관 등을 지냈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함태영도 기독교 신앙에 투신하였고, 장로가 되었다. 한편 어린 나이에 생모 변씨를 여의었다. 함태영은 11세까지 고향에 머물면서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4] 아버지 함우택은 이후 관직이 정3품 통정대부 중추원의관에 이르렀다. 무산군 무침다리(현 장초동 )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과거를 준비하던 그는 1894년(고종 31년) 6월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바람에 실의에 빠졌다.[5] 그러나 다음해 에을 미 개혁 이 단행 되면서 법관 양성소가 설치되자 제1기생 으로 입학하였다. 최초의 근대적 법학 교육기관인 법관 양성소의 교육 기간 은 6개월이었고, 졸업하면 성법학사(成法學士) 자격을 주었다.[5] 일찍이 그는 손백선(孫百善)의 딸 밀양 손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하고 다시 최영철(崔榮澈)의 딸 전주최씨와 재혼하였으나 역시 일찍 사별하였다. 생모 원주 변씨의 초장지였던 과천군 동작리(뒷날의 서울특별시 동작동) 산 서쪽 기슭 대성황사 미좌, 변씨 묘소 동쪽에 쌍분으로 마련했던 두 전처의 묘소는 후에 실전되었다. 법관 양성소 수학[편집] 함태영은 1895년(고종 32년) 4월 16일 '재판소 구성법' 공포에 따라 설치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교, 그해 11월 법관양성소 속성과(速成科)로 전과하였다. 법관양성소 재직 중 1896년 3월 5일 한성재판소검사시보(漢城裁判所檢事試補)겸 주임관6등 2급(奏任六等二級)에 보직되었다. 1896년 11월 법관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97년 11월 1일 경기재판소 판사시보(畿裁判所判事試補) 주임관 5등 1급(奏任五等一級)으로 발령되었다. 당시 졸업생 명단을 보면 함태영의 이름이 맨 위에 있는데, 그것은 그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서울법대 동창회 명부에 제1호 회원이 바로 함태영으로 나와 있다.[5] 1897년 한성재판소검사시보에 임명되고 6월 11일 수원군으로 파견되었다. 9월 29일 한성재판소 검사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다. 11월 1일 경기도재판소 판사(京畿道裁判所判事)에 임명되었다. 한성에 올라와 거주하던 그는 한일합방 이후에는 세브란스 병원 사택 근처에서 거주하였다. 법관 활동[편집] 법관 생활 초기[편집] 1898년(광무 1년) 1월 25일 한성부재판소 검사가 되고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法部) 법률기초위원, 대심원 판사 등을 지냈다. 1898년(광무 1년) 2월 경기도재판소가 폐지되면서 2월 25일 졸업와 동시에 한성부재판소로 발령, 한성부재판소 검사(檢事) 주임관 5등 1급(奏任五等一級)이 되었다. 1898년(광무 1년) 7월 26일 김홍륙이 황태자의 커피에 독을 타서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 되었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는데, 황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기절했다. 김홍륙에 대한 재판을 평리원 판사 함태영이 맡게 되었다. 7월 25일 고종 탄신 다음 날 에 발생한 것으로 김홍륙은 시베리아 에서 서양 요리사 김종호를 궁중 요리사 로 추천하여 고종 과 황태자의 수라상을 차리고 있었다. 수라상은 내 소주방에서 접시와 음식을 먼저 검사하고 맛보고 올리는데, 그 커피를 맛본 사람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함태영은 일단 김홍륙에게 증거 불충분 이란 이유로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로 끝내려 하였다. 민씨 가문에서는 극형 에 처하라고 계속 압력을 보냈다. 그러나 함태영은 민씨 정권의 요구를 거절했다. 훗날 김홍륙의 먼 일가 후손 인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만년의 함태영 에게이 사건의 진상을 물어보았다. 함태영은 이 사건 은 민씨네가 조작한 음모 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어떠한 밀지가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끝내 함구하였다.[6] 재판은 다른 판사에게 넘겨지고 김홍륙 등은 사형당했다. 독립협회 사건 이후[편집] 그해 8월 20일 법부검사 주임관 5등 1급(任法部檢事 奏任五等一級)이 되었다가 8월 22일 고등재판소검사(高等裁判所檢事)로 전임되었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기소된 이상재(李商在), 윤치호 등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상재를 비롯한 중심인물 17명에게 가벼운 벌을 내렸다. 독립협회에 모인 민중들 1898년 11월 공화정 을 만들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체포 된 독립협회 간부 들을 그가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17명의 독립협회 간부 들을 취조하면서 그들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는 점 에 놀랐다고 한다. [7] 함태영은 독립협회 간부들인 이승만,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등이 공화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물증이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함태영의 독립협회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그의 신변에도 여러번 위협이 있었다.[8] 함태영은 윤치호 대통령 추대설 또는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 이준용 대통령 추대설이나 공화정 수립 기도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함태영은 이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기 어려우므로 관대한 처분을 상주하였다가 오히려 곤란을 겪게 되었다. 1898년 11월 2일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으로 특별 서임되었다. 11월 16일 함태영은 한규설과 함께 상주를 올려 독립협회를 방해하던 조병식, 민종묵, 이기동, 김정근 등을 독립협회를 증거 없이 무고했다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의중임에도 소신껏 이상재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고 11월 22일 고등재판소에서 알아서 조사할 일을 관인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수시로 드나들면서 봤다는 이유로 파면당하였다. 그러나 5일만에 복관되어 11월 27일 법부검사가 되었다. 이후 법부 대심원(大審院)·복심법원(覆審法院)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함태영은 독립협회에 호의적인 판결을 내렸으나, 황국협회와 보부상은 독립협회가 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세우려 한다,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려 한다,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세우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고, 이후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양기탁, 남궁억, 안창호, 신채호, 신규식, 이갑, 박은식, 이동휘, 이동휘, 허위 등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회원 400여명이 체포, 투옥 되었다. 동시에 황국협회와 보부상단의 조병식, 이기동 등은 석방 되었다. 고종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해산령을 내린다. 함태영은 독립협회 등의 편의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1899년 3월 13일자로 법부 검사에서 다시 한성부재판소 검사 주임관 4등 1급(轉任漢城府裁判所檢事 奏任四等一級)으로 전출되고 일반 죄수와 민사를 담당하다가 4월 3일 면직되었다. 함태영은 여러가지로 상황을 판단하고 장래를 생각하다가 보름만에 사표를 던졌다.[9] 재임 중,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07년 공소원 검사로 부임하였으나 소신 판결로 집권층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일본 방문과 복귀[편집] 1899년(광무 2년) 5월 고종은 검사 사직서를 내고 두문불출 하고 있던 함태영에게 일본에 다녀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것은 일본 에 있는 망명 정객들의 동정을 살피고 오라는 밀령이었다.[9] 1899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며칠간 일본에 체류하며 함태영이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 어떤 인물들을 어떻게 감시하였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한편 당시 대한제국 정부 관비 일본유학생의 한 사람이던 박중양은 해방 이후 1950년대, 생애 후반까지도 함태영을 미워하고 조롱하였다. 1899년말 일본에서 돌아와 고종에게 복명한 다음 다시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9] 고종은 함태영의 솔직 하고도 의기있는 인품을 그대로 버려두기가 아까워 그를 고등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 검사 로 임명하였다.[9] 평리원 검사가 된 함태영은 김포 갈밭을 비롯한 황무지 개간권 사건을 다루게 되어 일본 상인과 송병준, 이용구 등의 책동 을 분쇄하고, 이준이 이끄는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 협동회(協同會)의 주장을 받아들였다.[10] 고종과 왕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이승만 등과 달리 함태영은 말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까지도 고종과 왕실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에 의하면 '고종은 명군 이었어. 다만 시운을 잘못 만나 불행한 국왕이지[8]" 라는 것이 함태영의 훗날까지의 신념이었다. 관료 생활과 법관 복귀[편집] 이후 1899년(광무 3년) 3월 30일 밝혀지지 않은 사유로 징계를 받고 해임, 1899년 10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효고현을 방문했는데, 당시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효고현 지사에게 보고되었다. 10월 14일 박영효 등을 방문하였다. 1902년 2월 14일 전라남도 관찰소주사 판임관 2등(全羅南道觀察所主事 敍判任二等)이 되고 5월 28일 정3품으로 승자되었으나 1903년 9월 2일 면직되었다가 9월 3일 6품으로 복직했다. 1904년 4월 30일 철도원주사(鐵道院主事)가 되었으나 5월 13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원면직하였다. 다시 1904년 6월 13일 철도원주사 판임관 3등(鐵道院主事 敍判任三等)에 임명되었다가 7월 3일 근무 중 직무유기로 징계, 7월 6일 면직되었다. 그 뒤 다시 법관으로 복직, 1905년(광무 8년) 2월 25일 평리원 검사, 같은 해 3월 30일 평리원 검사 주임관 4등 1급(平理院檢事 敍奏任四等一級)이 되고, 5월 2일 죄인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1905년 5월 21일 평리원 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같은 날 법부참서관에 임명되었다. 1905년(광무 8년) 6월 23일 법부참서관 주임관 4등(任法部參書官 奏任四等)에 임명된 뒤, 그해 7월 25일 겸임 법부 법률기초위원(法部法律起草委員)을 거쳐 10월 9일 정3품이 되었다. 1905년 11월 5일 경가전(慶嘉殿)의 개수 시, 감독관으로 공사에 참여한 공로로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1906년 6월 29일 주임관 4등 5급이 되고, 같은 해 12월 특별 상금으로 30환(三十圜)을 받았다. 1907년 6월 20일 법부서기관 주임관 3등(法部書記官 奏任三等), 6월 28일 주임관 2등 4급(奏任二等 四級)을 거쳐 1907년 5월 10일 법부서기관(法部書記官)이 되었다. 그러므로 법관양성소 1895년 11월 제1회 수석졸업생(47인 중)인 그는 법조직(관직)에 14년간 종사하고 이후 변호사 개업사실도 전혀 없었다(그는 일제 때인 1912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이에 불응하여 휴직하고 같은 해 7월 21일자로 퇴직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어 실제 재직한 바 없다).[11] 순종 즉위 후 1907년(융희 1년) 8월 27일 법부 형사국 서기관으로 재직 중 겸임 형법교정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융희 2년) 법부 형사국 서기관이 되었다가, 그해 9월 14일 판사에 임명되고 대심원판사(大審院判事)로 발령되고 10월 8일 판사 주임관 2등(判事 奏任官二等)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경성부 경성공소원 판사로 발령되었으나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 후 사직하였다. 독립운동과 신앙 활동[편집] 신앙 생활[편집] 관료 생활 중 그는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1907년 장로 장립을 앞두고 `양반대표'와 `천민대표'가 경합을 벌이게 됐고, 허랑방탕한 천민 출신의 이명혁과 점잖은 양반 출신의 이원긍이 장로직을 놓고 경합했다.[12] 그러나 천민계급이 계속 완승을 거두었다.그때마다 게일 선교사는 '교회는 신분의 위세를 부리는 곳이 아니다.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며 냉철히 대하였다.[12] 1908년(융희 2년) 그는 복부에 큰 종기가 생겨 와병하였다. 1909년 1월 연동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었다. 3대에 걸쳐 천민계급에서 장로가 선출되자 1909년(융희 3년) 연동교회는 양반과 상민 논쟁에 휩싸여 양반신자들은 연동교회를 떠나 묘동교회를 설립했다.이원긍, 오경선 등은 연동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고, '상놈들과 함께 지내면 망신스러워 안 되겠다.양반교회를 하나 세우자'며 교회를 떠났으며 아버지 함우택도 그들을 따라 연동교회를 떠났다.[12] 장로로 장립된 고찬익, 이명혁 등은 노름꾼 출신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고, 고찬익의 전도로 연동교회에 나온 임공진은 광대 출신이라 양반 신자들은 이들을 경멸했다. 1909년 6월 양반 신자 100여 명은 상놈들과 같이 한 자리에서 예배 드릴 수 없다며 묘동교회를 개척하고, 그의 아버지 함우택도 그 곳으로 나갔지만 함태영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연동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꾸짖었다.'신분의 차이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며 그는 연동교회에 남아 있었다.[12]1910년 공직에서 물러났다.[13] 한일 합방 이후 관직에서 사퇴했다. 교회 장로로 교회일에도 열심히 나서서 활동하였으며, 1906년 조종만 등과 함께 사재를 털어 봉익동 분동교회 헌당에 기부하였다. 독립운동과 사회활동[편집] 무오독립선언서 석판 인쇄본 김순애 한일 병합 조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일본과 대한제국 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그는 법관직에서 사퇴하였다. 한일 합병 조약 체결 이후 판사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918년 호서은행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14] 1911년 연동교회 집사로 임명되었다. 1915년 기독교장로회 경충노회 추천을 받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재학 중 191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법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1918년 4월 함태영은 남대문교회의 조사(助師, 대한민국 건국 후 전도사로 명칭변경)에 임명되었다. 1918년 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조선인 대표자를 파견할 것을 계획하는데 참여했다. 이어 그는 김규식 등과 함께 윌슨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성하였다. 1919년 2월 28일 파리강화회담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고, 이승훈과 함께, 상하이[上海]에 머물고 있는 현순(玄楯)에게 전하기 위해 김지환을 시켜 파견했으나 김지환은 만주 안동현(安東縣)의 목사 김병례(金炳禮) 돌아오는 길에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실패했다.[15] 국내에서 큰 소란을 일으켜 우리의 활동을 주목하게 해야 목적이 달성된다는 의사를 타전해 온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게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하였으나 함태영은 김순애가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 우사 김규식에게 심리적 부담감과 해외 독립운동 활동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설득하여 김순애를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게 하고 배웅해주었다. 3.1 만세 운동과 투옥[편집] 민족대표 33인 외 체포된 인물 사진 1938년 서대문 형무소 외곽 1919년 함태영, 송진우 등에게 만세 선동 혐의로 발부된 총독부 체포장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48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3·1 운동에는 이승훈의 권고로, 민족대표 48인 중 전필순(全弼淳), 현순(玄楯) 등과 함께 기독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1954년의 3.1절 기념 회고담에서는 그에게 3·1 만세 운동의 계획을 알려 준 또다른 인물은 이상재였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이갑성, 현순(玄楯),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1운동 전날인 2월 28일에는 독립선언서 900장을 인쇄, 목사 김창준에게 넘겨 이 중 600장을 이갑성(李甲成)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300장은 경성화상점 사무원 이계창(李桂昌)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가져가 분배하게 했다.[16] 2월 27일 오후 1시 인쇄된 초안을 이승훈, 박희도, 김창준, 박동완, 신석구 등에게 공개하였다. 취조 당시 이승훈의 진술서에 의하면, 이들 중 일부는 함태영에게 도장을 맡겼다. 2월 27일과 2월 28일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에서 계속 인쇄하였고 그는 900여 장을 챙겼다. 3·1 운동 당시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천도교와 연합하는 기획 과정부터 깊이 개입했으며,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와 운반, 포장과 배포를 맡았다. 그는 이갑성 등에게도 유인물을 전달하여 조선 각지로 배포하게 했다. 당시 3·1독립운동 선언서에 민족 대표자 서명을 받을 때 서명했지만 함태영의 서명은 제외했는데, 이는 서명한 민족대표자 중 기독교계 대표자 16명의 가정과 생계문제를 맡아야 될 인물로 지명되어 함태영의 서명은 제외시켰다. 그는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생활과 재판[편집]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당시 만세 운동에 서명하지 않았던 이상재도 관련자로 의심받고 체포되어 왔다. 만세 운동의 전개 과정을 접해서 알던 이상재는 고민했고, 함태영은 그에게 끝까지 모른다고 말하라고 부탁했다. 이상재는 함태영이 수감에서 풀려날 때까지 3.1 만세 운동 관련 수감자들 중 기독교계 참여자 가족들의 생계를 지원하였다. 6개월간 조사 받던 이상재는 혐의 없음으로 기소중지되었다. 수감 중에도 그는 간수들을 원망하거나 폭언을 하지 않고 조용히 타일렀으며, 오히려 간수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다른 만세참여자나 다른 죄수들을 설득시켰다. 함태영이 투옥된 실에는 일본인 간수들이 상주하였다. 함태영은 자신의 담당 간수 를 볼때 마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 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는 것 뿐이었다 " 라고 타이르곤 했다.[17] 그 간수는 그 뒤 비번 때 바깥에 다녀와서 는 사회 움직임 이라 든지 여러가지 새소식 을 적어주는 등 편의를 보아 주었다.[17] 또 사식을 차입할 때 밥 속에 쪽지를 넣어도 걸리지 않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한다.[17] 1919년 7월 서대문형무소 투옥 상태에서 2심 재판을 받고, 1919년 10월 30일 3심에서 출판물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목사 안수[편집] 1921년 12월 23일 투옥된지 2년 만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함태영은 수감, 복역중인 민족대표자 중 다른 기독교 대표자들의 가족들의 생계를 해당 당사자의 출옥 전까지 지원하였다. 1921년 12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얻었던 그는 출옥 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22년 12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경충노회에서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장로회 총회장, 조선신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신활동을 하였고 독립군 활동 자금을 모금 후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1922년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충청북도 청주부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9월 8일부터 9월 13일까지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열린 조선장로회 총회에서 제1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년 뒤 1924년 9월 13일에서 9월 18일 함북 신창리교회에서 이자익을 후임자로 선출할 때까지 총최장으로 재직했다. 목회 활동[편집] 1922년 12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청주교회(淸州敎會)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경남 마산의 마산교회의 목사 임명 문제를 놓고 분쟁이 발생하여 장로회총회가 개입하게 되자, 그는 기독교장로회 총회의 특별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마산으로 부임하여 협상에 참여하였다. 1925년 한국장로교총회 특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경남노회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926년 청주교회 담임목사 재직 중 충청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어 겸직하였다. 1926년 9월 10일부터 9월 19일에는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회총회에 참여하여, 일본 문부성의 종교법안 반대에 기독교 장로교회 측 진정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함태영은 1927년 12월에 마산 문창교회의 제6대 목사[18][19] 로 부임하여 교회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8년에는 경남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었고, 1929년 마산 문창교회 목사직을 사임하였다. 1929년 12월 경성 연동교회의 초빙을 받고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대한제국 시절 한성에서 처음 평신자로 다녔던 교회였다. 1929년 평양숭실전문학교 이사, 1930년 조선예수교회서회(書會) 이사 등을 거쳐 1932년에는 연동교회 담임목사 재직 중 경성노회(京城老會)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33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 회장을 지냈다. 1933년 6월 27일 정신여학교 후원발기회의 발기위원의 한사람이 되었다.[20] 일제 강점기 후반[편집] 한신대학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0년대 중반 그는 적극신앙단과도 관련되었다. 그는 장로교회 내부에서 기호파와 서북파가 갈등할 때, 장로교내 반서북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2월 10일 윤치호, 양주삼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찾아가 기독교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함태영은 기독교인들도 죄수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도록 허용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1935년 9월 19일 중앙 YMCA로 찾아가 윤치호에게 연동교회 재건축 비용 2만 5천엔을 기부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35년 11월 18일에는 경성에서 열린 장로회 경성노회에서 적극신앙단과 관련되어 함태영과 전필순, 권영식 등 목사 3명의 회원권 정지를 가결하였다. 1936년 5월 15일 경성부 수송정 116번지에서 기독교계 연합회 신문인 기독신보사(基督申報社) 창립에 참석하고, 기독신보사의 장로교측 이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 강정기 후반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長), 평양숭실전문학교(平壤崇實傳門學敎) 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37년의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서에 동지회, 흥업구락부의 관련 인사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1938년 10월 16일의 조선신궁 신사 참배 당시 소집에는 응하였으나 신사 참배는 거부하였다. 1940년 일제는 그에게 창씨 개명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학도병 권유문 및 각종 서명, 기고, 참여 요구를 거절하고, 목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39년 2월부터 조선신학교 설립을 추진, 송창근, 김대현, 김영주 등과 함께 조선신학원 설립기성회를 결성하고 신학교 설립기성준비위원이 되고, 1940년 4월 19일 경성부 종로구 인사정 승동교회 내에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 전신) 설립, 개강과 동시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설립 당시 조선신학교는 장로교와 감리교회 등 기독교 교파의 연합으로 운영하였으나 1943년 감리교측과 분리하여 장로교 위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1941년 연동교회 목사직에서 퇴직하고 원로목사에 추대되었으며, 1943년 6월 조선신학원 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밖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평양숭실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활동했다. 1943년 세번째 부인 고숙원이 사망했다. 이후 함태영은 재혼하지 않고 살아남은 두 아들을 혼자 양육하였다. 1945년 해방 직전 경성부 송파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고,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초동교회 초대 목사로 시무했다. 해방 직후, 혼란한 정국에서 기독교 조직을 재건하고 선교 지원 사업을 펼쳤다. 기독교 재건 및 선교 사업 활동 중 기독교 신앙을 비판,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하였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 직후[편집] 1945년 9월 2일 한국민주당의 창당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9월 8일 미군정 주둔 후, 그는 미군정의 적산불하 공고를 보고 영어 실력으로 미군정 관재국장에 임명된 남궁혁 목사를 찾아가 서울역 입구 근처(경성부 용산구 동자정 15번지)에 있던 일본 천리교 조선교구 본부 건물과 경성교구 본부 건물을 불하, 인수받았다. 그는 경북 김천의 송창근, 평안북도 신의주의 한경직, 최윤관 등을 불러들여 조선신학교에 즉시 합류하였다. 덕수교회 내에 있던 조선신학원장 김재준을 교장으로 선출하고 함태영은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10월, 35년만 에 귀국한 이승만은 곧장 경기도 광주의 둔전 마을로 차를 보내어 함태영을 조선호텔로 모셨다.[21] 함태영은 기독교 목회에 전념하려 하였지만 1946년 2월에 미군정 하에 입법의원이 구성될 때 이승만의 강력한 추천 으로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이 되었다.[21] 항간에 구구한 세론(世論)도 있었지만 함태영은 해방 정국에서 화려한 표면 무대보다는 스스로를 낮추어 주춧돌이 되기를 자원하였다.[22] 1945년 12월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귀국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이후 그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해방정국의 정치 활동[편집]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 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23]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3]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24] 그 뒤 남조선장로회총회부회장(南朝鮮長老會總會副會長)에 선출되고, 1946년에는 장로교 경기노회 노회장이 되었다.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좌측 두 번째 서있는 이가 함태영, 좌측 세 번째는 신익희, 네 번째 마이크 잡은 이(이름미상)) 1946년 2월 14일 이승만·김구 등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25][26] 이후 민족주의 우파를 지지하는 기독교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1946년 2월 14일 민주의원 결성대회가 열렸으나 그는 김창숙, 여운형,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27] 1947년 조선신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이단 교수 조사위원회 조사위원에 선출되었다.[28] 1948년 민족주의 우파 진영이 단독정부 수립론과, 단독정부 반대론으로 나뉘게 되자 그는 이승만, 이시영 등을 따라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기독교계에서는 조선신학원 설립위원, 이사를 거쳐 조선신학원 이사장을 지내고,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의 전신)의 제5대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6월 11일 경성 승동교회에서 장로회 총회 남부대회(제1회 남부대회)를 개회할 때 대회장은 배은희, 부대회장 함태영를 추대했다. 6월 11일부터 6월 14일까지 열린 제33차 장로회총회 대회 및 제1차 남부대회에서 그는 조선장로회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47년 4월 18일까지 재직했다. 이어 1946년 조선기독교총회에서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할 때 배은희를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기독교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기독교언론 기독공보사(基督公報社)의 사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이갑성, 김창숙, 윤치영 등과 함께 이준열사기념사업회의 조직, 창설 과정에 참여하고 그해 7월 14일 이준열사기념사업회를 창립, 1대 기념사업회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1월 서울 인현동에 기독교흥국형제단본부(基督敎興國兄弟團本部)와 함께 조선농민복음학교를 설립하였다. 농민복음학교는 그해 4월 7일에 개교하였다. 3월 10일 덕수교회 창립에 참석하고 창립 기념예배를 주관하였다. 1947년 4월 남부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심계원장과 부통령 출마[편집] 이승만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은 초대 내각 조각에 함태영을 참여시키려 하였지만 함태영이 고령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1948년 5월 의 총선거와 7월의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되었을 때 이승만은 정부 조직의 인선 구상 에서 함태영의 이름을 자주 거론 하였다.[21] 이승만은 대법원장 또는 법무부 장관 으로 함태영을 생각하였으나 여러가지 여건들로 인하여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다. 고령과 정치적 기반이 없다는 것도 복합적 여건 중의 한 요소였다.[21] 1948년 12월 5일 반민특위 특별재판장 후보로 추천되었으나[29], 국회 표결 결과 김병로가 85표, 함태영은 38표로 낙마하였다.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에 취임하였고[13][30]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신하였다. 이어 1950년 7월 조선신학대학장 임시서리에 임명되어 1951년 4월 27일까지 겸임 재직했다. 심계원장이던 그는 같은 동명이인의 목사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을 내무부 지방국장에 추천하였으나, 창현 함태영은 사양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손자 함의섭 내외 등 일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갔다. 한국 전쟁 직후 조선신학교는 무기휴학을 발표했고, 8월에 교장 송창근이 피랍,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조선신학원을 임시로 맡아 혼란을 수습하였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6일의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원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31] 그러나 같은 원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장택상과 경쟁해야 했다.[31] 선거 결과 낙선했다. 1차 지명전에서 17표를 받고, 2차 지명전에서는 10표를 받았다. 2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그는 다시 3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1952년 2월 한국신학대학교의 제5대 학장에 추대되었다.[32] 1953년 4월 10일 한신대 교지 코이노니아가 창간되고, 그가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었다. 그는 서울 수유리의 부지를 확보하는데 힘을 쏟았고, 수유리로 한신대를 이전하였다. 1952년 5월, 제2대 부통령인 김성수가 부통령직에서 사퇴하자, 무소속으로 제3대 부통령으로 출마하였다. 대통령 출마설, 부통령 출마설 등의 소문이 돌았으나 그는 처음에 출마설을 부인하고 출마 권유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이승만보다 나이가 많았고, 호인(好人)이었다.[33] 이미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도 낙선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거절했다. 정치적 기반도 없지만 국민들이 자신의 이름 조차 모르므로 출마는 당치 않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걱정 말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계속 권하므로 마음씨 좋은 함태영은 출마를 결정했다.[33] 이는 이범석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사전 포석이었고,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들의 존재를 우려하던 미국 역시 함태영을 지지하였다. 7월 24일까지도 출마의사를 보이지 않다가 7월 27일에 부통령 출마를 선언하였다. 52년 7월 심계원장에서 물러난 그는 심계원 심계관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제3대 부통령[편집] 당시 기독교인들은 함태영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개신교 교계는 이윤영을 지지하는 감리교와 함태영을 지원하는 한국신학대학 계열의 신민학파, 이갑성을 지지하는 정통보수신학파로 나뉘기도 했다.[34]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범석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지원으로 경쟁자인 이범석을 누르고 80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이 무소속의 함태영을 추천한 이유로는 이승만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대한제국 고종 때의 독립협회 사건 때 재판장으로 재직중이었던 함태영이 자신을 잘 보아주었다는 과거의 인연과 함태영의 특색 없는 성격과 정치경력이 고려되었다[35] 는 것이다. 함태영은 이범석을 112만표 차로 승리하였다. 부통령이 된 함태영은 기독교 운동계 인사를 내각에 장관, 차관 후보자로 천거, 추천하였는데 이 중 이자익 등은 함태영의 추천을 사양, 거절하기도 했다. 이자익은 1942년 분열되고 연락이 두절된 각지의 장로교회를 모아 장로교 총회를 재건했고, 함태영은 이자익의 능력에 감동받아 그를 이승만에게 장관으로 추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자익은 목사로 남겠다며 함태영의 제안을 거절했다. 1953년 하와이 한인이민 50주년 기념행사 참석 1953년 11월 15일의 하와이 한인이민 50주년 행사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 가지 못하게 되자, 11월 3일 함태영이 대신 다녀왔다. 11월 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행정사무관 김정극 등 수행원들을 데리고 출발할 예정이었다가 기상악화로 11월 14일 오후에 부산에서 민항기편으로 일본 도쿄에 도착한 뒤 도쿄에서 판아메리칸 항공으로 출국하여 하와이에 도착했다. 11월 14일부터 11월 24일 하와이 한인이민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차 미국 하와이주를 방문, 호놀룰루와 하와이를 순방하고 11월 15일 하와이 한인 이민 50주년 행사에 참석하였으며, 한인기독교회 등 하와이 한인교회, 교민 사회단체 등을 방문, 면담하고 귀국하였다. 1954년 4월 2일 CBS방송 후원회 이사에 선출되었다.[36] 4월 5일 식목일 기념행사에 참석하다. 1954년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이 되었다. 54년 4월 17일 서울 남산에서 '촛불예배'로 시작된 부활절 행사가 개최되자, 4월 18일 새벽 5시30분 테일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함께 행사에 참석하였다.[37] 1954년 다시 한국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하였고 1955년 2월 김성수가 병으로 죽자 김성수 국민장 장의위원장으로 김성수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1955년 3월 5일 인촌 김성수의 국민장이 끝난 뒤, 인촌 김성수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자,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38] 1955년 대한기독교장로회총회 제12대 회장(증경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55년 이승만의 제안으로 삼일정신선양회 조직에 착수, 참여 활동 삼일정신선양회 총재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이 부총재는 대법원장 김병로가 선출되었다. 삼일정신선양회는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함태영 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부통령으로 재임 중 그는 1955년 다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생애 후반[편집] 부통령 퇴임 이후[편집] 1956년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 현판을 썼다. 1956년 부통령 퇴임 직후 외교관 여권으로 출국하였다.[39] 1956년 8월 캐나다연합교회의 초청을 받고, 제3대 부통령 퇴임 직후 8월 17일부터 김정준 등과 함께 출국,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에 한국측 기독교 대표자로 참석한 뒤 미국, 네덜란드를 방문하고 귀국, 이후 그는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57년 6월 한국에 입국한 서독과 프랑스의 가톨릭 추기경 일행을 만났다. 1959년 2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을 사퇴하고, 1959년 3월 한신대학교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1960년 1월 20일 자유당 당무회의에서 자유당 제4대 정부통령 선거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이갑성과 공동)에 선출되었고, 1월 22일 자유당과 구 대한국민당계 등 범여권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이갑성과 공동)에 산출되었다. 1960년 4월 25일 자유당 정권 붕괴 후, 야당 정치인과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61년 1월 22일 오후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북아현동에서 자동차 고장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전치 1주의 부상을 당하였다. 제2공화국 출범 이후 그는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허정 등과 함께 이승만 박사 환국운동 본부를 조직하고 이승만 귀국 운동을 추진했다. 만년[편집] 제3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이승만의 환국운동을 추진하였고, 1963년 1월 이승만박사 환국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제3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국가원로로 예우받았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1964년 1월 22일 중앙대학교 명예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저서로는 히브리서를 해석한 히브리인셔 주셕(히브리서 주석)을 1913년 동양서원에서 출간하였다. 1964년 10월 24일 상오 8시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가 396번지 자택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 고혈압과 노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3세였다. 10월 25일 정부는 총무처장관 이석제(李錫濟)의 특별담화를 통해 조의를 표하였다. 사망 직후[편집] 사망 후,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는데, 10월 30일 국민장이 결정되었고, 장례기간은 7일이었다. 정신여고 학생들의 조가 "나라를 섬기려 법관되시고 정의를 세우려 매를 맞았네" 곡의 합창과 함께 정일권, 이갑성의 조사 낭독 및 해군 군악대의 진혼곡과 함께 11시 20분 서울시청 앞에서 국민장을 시작하여 노제를 지낸 후 세종로, 종로, 돈암동 등을 거쳐 경기도 의정부에 앞서 사망한 아들 함병석의 묘 위편에 안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산 3-2 함병석의 묘 위편에 있다가 2004년 11월 2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애국지사 묘역 3-116)되었다. 사후[편집] 1965년 3월 이갑성 목사, 김춘배(金春培), 이여진(李如眞) 등 함태영기념관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 66년 4월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구내 대지에 착공하였다. 그러나 함태영 기념관 설립 공사에 들어갔고, 그가 학장으로 있던 한국신학대학에서 대지 1천평을 기증하고, 공사비 1천만원은 사회인사들로부터 충당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백만원을 보내고 4백만원을 충당하여 1층 공사를 완공하였으나 2층 공사비 7백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예산부족으로 완공되지 못하였다. 1986년 3월 14일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에 있는 묘소가 의정부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뒤에 함태영의 묘소가 현충원으로 이전되면서 취소되었다. 1994년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에 함태영선생 출생지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2년 5월 서울대 법대 동창회로부터 제10회 자랑스런 서울 법대인상이 추서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40] 저작[편집] 히브리인셔주셕(히브리서 주석), 1913 학력[편집] 1898년 법관양성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前身)) 법학 학사 1921년 평양신학교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전신(前身)) 신학 학사 1956년 캐나다 마운트엘리슨 대학 명예법학박사 1964년 중앙대학교 명예법학박사 기타 약력[편집] 1898년 법관양성소 수석 졸업 1898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 이후 한성재판소 검사 1898년 독립협회사건 입회검사, 독립협회 사건에 대한 온건한 사건 처리로 파면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대심원 판사 역임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공직에서 물러남 191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장기초위원 1919년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 징역 3년형 선고 받음 1922년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 1923년 12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1933년 조선 기독교 연합공의회 회장 1949년 제2대 심계원장 195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1952년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 1955년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61년 이승만 박사 환국운동추진위원회 위원장 상훈 경력[편집]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단장, 국민장) 2002년 5월 24일 제10회 자랑스런 서울 법대인상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 평가[편집] 청렴결백하고 내유외강한 전형적인 한국인[41]이라는 평이 있다. 가족 관계[편집] 함태영은 3번 결혼했으나 3명의 부인 모두 상처하였고 14남매를 두었다. 4공화국에서 주미대사, 5공화국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다 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으로 사망한 함병춘은 함태영이 3번째로 결혼한 고숙원과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 아들이다. 손자인 함재봉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손자 함재학은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다.[42] 그는 세번의 결혼으로 많은 자녀를 낳고 그 중 14남매가 알려졌지만 홍역으로 1주일간 자녀 3남매를 연속으로 잃기도 했다. 생전에 그는 증손부, 증손녀사위 및 4대손을 보기도 했다. 일부 증손자, 증손녀들은 함태영 일가가 6.25 전쟁으로 피난했을 때 이미 학생이었다. 함인섭의 다섯 사위와 함인섭의 손자도 생전에 보았다. 할아버지 : 함두삼(咸斗三, 1792년 11월 3일 ~ 1860년 7월 16일) 할머니 : 나주임씨(1805년 3월 3일 ~ ?년 6월 5일) 큰아버지 : 함채권(咸彩權, 1823년 11월 10일 ~ 1867년 7월 23일) 큰어머니 : 광산김씨(1832년 3월 13일 ~ 1867년 7월 5일) 고모 : 강릉함씨 고모부 : 서세안(徐世晏, 본관은 이천) 아버지 : 함우택(咸遇澤, 1837년 12월 2일 ~ ?) 어머니(아버지의 본처) : 동래 정씨(1835년 8월 10일 ~ 1861년 11월 1일), 정진용(鄭進容)의 딸 어머니(아버지의 본처) : 밀양 손씨(1835년 ~ 1861년 12월 10일) 어머니 : 원주 변씨(1850년 12월 10일 ~ 1886년 9월 1일), 변동준(邊東俊)의 딸 첫 번째 부인 : 밀양 손씨(1871년 4월 7일 ~ 1904년 2월 1일) 아들 : 함병철(咸秉哲, 1889년 8월 4일 ~ ~ 1947년 2월 28일) 며느리 : 강리백가(姜利百加, 1890년 2월 10일 ~ 1947년 2월 28일), 강성흠(姜星欽 또는 강종근(姜種謹))의 딸 손자 : 함인섭(咸仁燮, 1907년 5월 3일 ~ 1986년 9월 15일, 다른 이름은 함재인(咸在仁), 춘천농대 학장, 농림부 장관 역임) 손자며느리 : 유순희(柳順嬉, 1907년 12월 16일 ~ 1949년 1월 23일), 문화 유기환(柳基桓)의 딸 증손자 : 함양호 증손자 : 함춘호 증손녀 : 함선호(咸仙鎬) 증손녀 : 함연호(咸蓮鎬) 손자며느리 : 유명숙(兪明淑, 1917년 5월 8일 ~ ?), 기계인 유권(兪權)의 딸, 함인섭의 두번째 부인 손자 : 함의섭(咸義燮, 1910년 4월 1일 ~ 1995년, 다른 이름은 함재의(咸在義)) 손자며느리 : 이차례(李次禮, 1912년 1월 4일 ~ ?), 신평 이동현(李東鉉)의 딸 증손녀 : 함혜란 증손자 : 함명호 증손자 : 함덕호 증손자 : 함성호 증손자 : 함준호(咸俊鎬), 이상 함태영 생전에 태어났고 함태영의 부고장에도 이름이 나타나 있다. 아들 : 함병승(咸秉昇, 1896년 8월 23일 ~ 1956년 1월 16일) 며느리 : 허경도(許景道, 1897년 2월 20일 ~ 1933년 9월 13일), 양천 허정정(許鼎丁)의 딸 손자 : 함재원(咸在元, 1919년 9월 17일 ~ ?) 손자며느리 : 이원희(李源姬, 1928년 5월 15일 ~ ), 양성인 이상용(李尙鎔)의 딸 아들 : ? 며느리 : 오숙자(吳淑子) 두 번째 부인 : 전주 최씨(1884년 9월 15일 ~ 1907년 10월 4일) 아들 : 함병창(咸秉昌, 1907년 1월 20일 ~ ?) 아들 : 함병서(咸秉曙) 세 번째 부인 : 고숙원(高淑媛, 1887년 11월 21일 ~ 1943년 1월 16일), 고군보(高君甫)의 딸 아들 : 함병욱(咸秉昱, 1911년 3월 18일 ~ 1930년 4월 6일) 아들 : 함병조(咸秉晁, 1913년 1월 29일 ~ 1978년 10월 31일) 아들 : 함병호(咸秉皓, 1923년 10월 6일 ~ 1940년 4월 22일) 아들 : 함병돈(咸秉暾, 1925년 6월 24일 ~ 1986년 9월 29일) 아들 : 함요한(요절, 대동강에서 익사) 아들 : 함병소 (咸秉照, 1928년 ~ , 공무원, 기업인, 상공부 공업제1국 중화확과장 역임) 며느리 : 김순회(金順會, 1935년 ~ ) 손자 : 함재경(咸在璟, 1960년 ~ ) 손녀 : 1명 아들 : 함병춘 (咸秉春, 1932년 2월 26일 ~ 1983년 10월 9일), 대통령 비서실장,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 며느리 :심효식([43] 沈孝植, 1928년 ~ , 화가) 손자 : 함재봉(咸在鳳, 1958년 9월 5일 ~ ),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손자 : 함재학(咸在鶴, 1963년 ~ ),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외할아버지 : 변동준(邊東俊) 기타[편집] 어린 나이에 생모 변씨를 여의었고, 결혼 생활도 불우하여 세 번 결혼하여 세 부인을 모두 잃었다. 그가 한성재판소 판사 당시 무죄를 선고한 피고인 중에는 이승만도 있었다. 그는 다른 판사들과는 달리 이승만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렸고, 이 일로 해방 이후 이승만을 다시 만났을 때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고숙원에게서 얻은 아들 함병욱(咸秉昱)은 1930년 4월 6일 사립숭실학교입학 시험을 보러 가는 학우 안수봉(安壽鳳), 최규룡(崔圭龍) 등과 함께 배로 대동강을 건너다가, 보트 충돌로 사망하였다.[44] 고숙원에게서 얻은 아들인 함병소의 아들인 손자 함재경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근무했다. 함태영은 생전 4대손 함영덕을 보기도 했다. 본처에게서 얻은 아들 함병철의 증손자이자, 함태영의 손자인 함인섭의 손자였다. 함께 보기[편집] 3·1 만세 운동 민족대표 48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촉성중앙회 제1공화국 제2공화국 대한민국의 부통령 이승만 김규식 김구 김순애 홍종우 민주의원 조만식 이시영 송진우 김성수 이범석 윤치영 윤치호 이기붕 장면 장택상 박정희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자유당 신익희 장건상 조봉암 함인섭 국민장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2대 부통령 보궐 선거 부통령 2대 - 11.4% 17표 3위 낙선 제2대 대통령, 3대 부통령 선거 부통령 3대 무소속 41.3% 2,943,813표 1위 당선 함태영을 연기한 배우[편집] 단역, 최명수 - 1981년 (제1공화국) MBC TV 드라마 참고자료[편집] 함태영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6) 정부 전복혐의 이승만… 사형 위기서 구해준 함태영 조선일보 2015.07.21. [법조인 열전 ④] 법관양성소 1회 수석졸업생 함태영의 생애 대한변협신문 2010.01.28. 신교회인물열전/(30)함태영목사 한국기독공보 2003.10.25. 각주[편집] ↑ 함태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전신 ↑ 처음에 경기도 과천 동작리에 대성황사 아래에 매장했다가 뒤에 김제로 이장한 것이다. ↑ 김수진 《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16페이지 ↑ 가 나 다 최종고,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51페이지 ↑ 최종고,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60페이지 ↑ 한국사 시민 강좌 43권 (일조각, 2008) 378페이지 ↑ 가 나 최종고,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61페이지 ↑ 가 나 다 라 최종고, 《근대사법 100년이 낳은 한국의 법률가像》 (길안사, 1995) 137페이지 ↑ 최종고,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63페이지 ↑ “[법조인 열전 ④] 법관양성소 1회 수석졸업생 함태영의 생애 - 대한변협신문”. 2016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Çѱ¹±âµ¶±³»ç[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네이버 백과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네이버 백과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네이버 백과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네이버 백과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다 서대문구청,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 (서대문구청, 2000) 54페이지 ↑ [한국의 역사교회―(17) 마산 문창교회] '복음 횃불' 밝혀 애국운동 국민일보 2009년 04월 24일자 기사 ↑ [한국교회 120년 (29)] 경남지역의 기독 유적지 Archived 2013년 12월 12일 - 웨이백 머신 국민일보 2003년 04월 09일자 기사 ↑ [1] ↑ 가 나 다 라 최종고,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67페이지 ↑ 최종고, 《근대사법 100년이 낳은 한국의 법률가像》 (길안사, 1995) 142페이지 ↑ 가 나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 ↑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6) 528페이지 ↑ 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국학자료원, 2006) 91페이지 ↑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62페이지 ↑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 생각나눔 2008) 389페이지 ↑ [2] ↑ 심계원은 후일 대한민국 감사원의 전신이기도 하다. ↑ 가 나 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6) 447페이지 ↑ 조선신학대학은 1951년 4월 28일부로 김재준을 학장서리로 임명함과 동시에 한신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 가 나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14페이지 ↑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431페이지 ↑ 함태영 - Daum 백과사전 ↑ 송건호, 《송건호 전집 09:민주언론 민족언론 2》 (한길사, 2002) 124페이지 ↑ [제784호] 서민들 애환 맺힌 ‘정치의 광장’ : 특집 : 뉴스 : 돌아온 산, 남산 : 한겨레21 ↑ "記念事業會 發足", 동아일보 1955년 03월 05일자 3면, 사회면 ↑ 그가 외교관 여권으로 여행을 다녀온 것을 근거로 허정은 1960년 4월 이승만에게 외교관 여권을 준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동아일보 2008년 8월 22일자 ↑ 고춘섭 엮음, 《연동교회 100년사》, (금명문화사, 1995) p.299 ↑ 워커 전 주한 미 대사 (2003년 5월 7일).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한국일보. 2013년 12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23일에 확인함. 실제로 우리 모두는 함대사의 장남인 함재봉 연세대 교수가 93년 10월 몇몇 학자들과 함께 부친의 유고를 모아 책을 발간하자 매우 기뻐했다. 「한국의 법, 정치 그리고 문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영문 유고는 이미 86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발간했었다. 이 책은 근대 한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인들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역저라고 생각한다. 둘째 아들 재학군도 부친의 위업을 따라 법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Archived 2013년 12월 12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03년 05월 07일자 ↑ "大同江流에 慘沒한 遠來의 受驗學生 두 학우와 뽀트타다 충돌되여 學校길이 黃泉길", 매일신보 1930년 04월 09일 2면, 4단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 전 임장택상(권한대행)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후 임장면 이시영 · 김성수 · 함태영 · 장면 전임명제세 제2대 심계원장1949년 11월 24일 ~ 1952년 7월 22일 후임노진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함태영&oldid=24390973" 분류: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1873년 태어남1964년 죽음강릉 함씨함경북도 출신법관양성소 출신한국의 기독교운동가대한민국의 장로교도조선의 유학자대한제국의 관료대한제국의 정치인일제 강점기의 목회자일제 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민족대표 48인한국의 군정기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대한민국의 교육인대한민국의 목회자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대한민국의 부통령대한민국의 심계원장한국독립당의 당원자유당대한민국 제1공화국대한민국 제3공화국한신대학교장로회신학대학교 동문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병사한 사람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日本語Simple Englishไทย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7일 (금) 04: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부다페스트 지하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부다페스트 지하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부다페스트 지하철 로고 1896년 개통 당시에 촬영한 부다페스트 지하철 전동차의 모습 Szent Gellért tér 2014 부다페스트 지하철(헝가리어: Budapesti metró 부더페슈티 메트로[*], 영어: Budapest Metro)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지하철이며, BKV (부다페스트 운송 회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4개 노선이 각각 노선 번호 및 라인 컬러로 구분되어 있다. 4호선이 2014년에 개통하였고, 또한 5호선 계획도 구체화되고 있다. 지하철 1호선은 세계에서 런던, 이스탄불에 이어 세 번째로 영업을 개시한 지하철이고, 전기로 운전되는 지하철로서는 세계 최초이다.[1] 지하철로는 세계 최초로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2002년) . 목차 1 역사 2 운행 노선 3 이용 방법 3.1 일반 정보 4 사진 5 각주 6 외부 링크 역사[편집] 시내의 교통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철도교통 수단의 건설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언드라시 거리의 노면 위에 이를 건설하는 것은 반대 의견에 부딪혀, 1870년에 국민의회에 의해 지하철로서 건설되는 계획이 통과되었다. 그 뒤, 1894년에 독일의 지멘스 사에 의해 건설이 개시되어, 최신의 기계와 2천명의 노동자에 의해, 2년이 채 안되어 1호선이 완성하였다. 그 부분은 완전하게 표면부터 개삭식(開削式)공법에 의해 건설되었다. 헝가리인의 판노니아 평원 정복·정착 1천년 기념 축제에 맞추어 1896년 5월 2일에 완성하였다. 노선은 언드라시 거리를 따라, 남서쪽의 뵈뢰슈머르치 광장부터 북동쪽의 버로슬리게트의 남서쪽까지 북동 방향으로 달린다. 종점은 동물원이었으나, 현재는 이전하였다. 당초의 역은 11개 있었고, 그 중 9개가 지하, 2개가 지상에 있었다. 노선의 길이는 3.7 km였다. 열차는 2분 간격으로 달렸고, 하루 수송능력은 3만5천명이었다. (현재는 평일 10만3천명) 그 후, 1895년에는 남북방향 및 동서방향으로 두 개의 지하철 노선이 계획되었다. 현재의 2호선의 최초의 계획은 1942년에 세워지고, 의회에 의해 1950년에 건설을 위한 법령이 제정되었다. 2호선은 당초 동역과 남역을 연결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1955년 개업할 예정이었으나, 재정 및 정치상의 이유로, 1954년부터 1963년까지 공사가 중단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970년 4월 4일 (당시 공산당의 휴일)에 7개의 역이 개업하였다. 이 노선은 동서 방향으로 달려, 현재까지도 도나우 강을 건너 부더 지구까지 도달하는 유일한 노선이다. 1호선과는 데아크페렌츠광장역(Deák Ferenc tér)에서 접속하고, 그 후 3호선도 같은 역에서 접속하는 것으로 되었다. 1호선은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운행 차량을 교체하는 등 완전히 탈바꿈하였다. 이때, 종래의 좌측통행에서 다른 노선과 마찬가지로 우측통행으로 변경되었다. 1973년에 2개의 노선이 연장되어(1호선은 1개역, 2호선은 4개역), 현재의 노선 길이(1호선 4.4 km, 2호선 10.3 km)에 달하였다. 1973년에는 부다페스트 교통회사 (BKV, Budapesti Közlekedési Zrt.)가 운영을 이어받아, 현재에도 지하철을 이를 계속 운영하고 있다. 1976년에, 3호선의 최초의 구간이 개업한 때에 호선별 색상이 도입되어, 1호선이 노랑, 2호선이 빨강, 3호선이 파랑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부다페스트 주변의 교외철도에 녹색이 사용되었다. 3호선에 관한 최초의 법령은 1963년에 제정되어, 1970년에 건설 개시, 1976년에 최초의 6개역 구간이 개업하였다. 그 뒤, 1980년에 남쪽의 5개역 구간, 1981년·1984년·1990년에 걸쳐 북쪽의 9개역 구간이 개업하여,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긴 현재의 20역, 17km가 완성되었다. 3호선은 남북 방향 (정확히는 북북동부터 남동 방향)을 잇는다.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1호서은 대폭적인 개수가 이루어졌다. 11개역 중 8개역이 옛 모습으로, 3개역이 재건되었다. 천년제(千年祭)시대가 연상되도록, 걸상·벤치·나무 창·조명이 설치되었다. 각 역은 사진과 정보를 제공하는 작은 박물관이 되도록 하였다. 데아크 페렌츠 광장(Deák Ferenc tér)의 지하 통로에 옛 자료를 볼 수 있는 지하철박물관이 있다. 2002년에는, 이미 세계유산이 된 바 있는 "부다페스트, 도나우 강안과 부다성"을 확대등록하는 형태로, "언드라시 거리와 그 지하"(Andrássy Avenue and the Underground, 세계유산 ID400-002)의 일부로서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2] 등록된 이유는, 그 장소가 인류의 기술적 진보의 우월성을 입증한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유산을 "산업"유산으로 분류하는 전문가도 있다.[3] 운행 노선[편집] 1호선 (노랑): 뵈뢰슈머르치 광장 역(Vörösmarty tér) ~ 멕시코 거리 역(Mexikói út), 4.2km (11개 역, 1896년 개통) 2호선 (빨강): 남부다페스트 역(Déli pályaudvar) ~ 외르시 베제르 광장 역(Örs vezér tere), 10.3km (11개 역, 1970년 개통) 3호선 (파랑): 우이페슈트쾨즈폰트 역(Újpest-Központ) ~ 쾨바녀키슈페슈트 역(Kőbánya-Kispest), 16.4km (20개 역, 1976년 개통) 4호선 (초록): 켈렌푈드 (Kelenföld) 역 ~ 동역(Keleti pályaudvar), 7.4km (10개역, 2014년 개통) 이용 방법[편집] 일반 정보[편집] 지하철 각호선은 1호선·2호선·3호선이 집중하는 데아크페렌츠광장역에서 접속하고 있는 것에 더해서, 4호선과 2호선이 동역에서, 4호선과 3호선이 칼빈광장역(Kálvin tér)에서 접속한다. 승차권은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기 전에 입구의 오렌지색의 각인기에 타각하여, 유효화할 필요가 있다. 그 승차권을 지하철역을 나올 때까지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타각기에 타각하면, 역 정보와 함께 날짜와 시간이 권면에 인쇄된다. 담당자가 승차권을 수시로 검사한다. 담당자는 역의 에스컬레이터 부근에 있는 경우가 많으나, 지하철 구내에서는 어디에서라도 검사를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승차권이나 정기권은 담당자의 요구가 있으면 제시할 필요가 있다. 담당자는 파랑 완장과 신분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 검사를 시작할 때까지 숨겨진 경우도 있다. 검사는 빈번하게 있고, 유효한 승차권을 소지하지 아니한 경우, 외국인도 벌금의 대상이 된다. 사진[편집] 부다페스트 지하철 1호선 전동차가 영웅 광장을 통과하는 전동차 언드라시 대로를 달리고 있는 전동차 각주[편집] ↑ 세계에서 두번째로 1875년에 개업한 이스탄불의 튀넬은 지하 케이블카라고 하는 특수한 방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주행거리도 짧기 때문에 부다페스트 지하철 1호선이 유라시아 대륙 최초의 지하철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많다. ↑ 유네스코 ↑ 후쿠다 하루히사(古田陽久) · 古田真美 『世界遺産ガイド 文化遺産編・2006年改訂版』シンクタンクせとうち総合研究機構、2006年、pp.40-4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부다페스트 지하철 부다페스트 지하철 vdeh 유럽 연합 회원국의 지하철   나폴리 · 로마 · 밀라노 · 브레시아 · 제노바 · 카타니아 · 토리노   렌 · 리옹 · 릴 · 마르세유 · 툴루즈 · 파리   글래스고 · 런던 · 타인 위어   로테르담 · 암스테르담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 발렌시아 · 말라가 · 빌바오 · 세비야 · 팔마   뉘른베르크 · 뮌헨 · 베를린 · 프랑크푸르트 · 함부르크   리스본   바르샤바   부다페스트   부쿠레슈티   브뤼셀   빈   소피아   스톡홀름   아테네   코펜하겐   프라하   헬싱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부다페스트_지하철&oldid=24374571" 분류: 부다페스트의 교통헝가리의 도시 철도1896년 개통한 철도 노선숨은 분류: 헝가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Чӑвашла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КыргызчаLatinaОлык марий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дмурт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4일 (화) 10: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985년 서울시내버스 노선번호 개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85년 서울시내버스 노선번호 개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음은 1985년 10월 1일 시행된 서울시내버스의 노선번호 개편 내용이다. 목차 1 시내버스 2 좌석버스 3 신설된 노선 4 폐지된 노선 5 참고문헌 6 함께 보기 시내버스[편집] 5번 정릉-혜화로타리-창경원(현 창경궁)-상암동 7번 오금동-반포-대방동 9번 역곡-신정동-오목교-전경련-순복음교회-63빌딩-신촌역 15번 (순환노선화)하계동-신설동-하계동 16번 과천-마장동-장위동-우이동 17번 개포동-동대문-청량리-신내동 18번 고덕아파트-강동구청-종로5가 19번 도봉산-동대문운동장-왕십리-면목동-청량리 20-2번 방학동-광산슈퍼-수유리-율곡로-퇴계로-서울역 21번 둔촌동-반포-흑석동 27번 수유리-공덕동-홍대앞-아현동 29번 번동-반포-가야병원-방배역-반포 31번 구로구청-신정-영등포시장-여의도 32번 장위동->미도파-종로2가<-종로1가-후암동 34번 염리동-장위동(굴곡노선 직선화) 34-1번 하계동-청계2가-중앙극장-염리동 38-2번 태릉서앞-용두동-한남동-도곡동 56-1번 오금동-강남역-고속터미널-대방동 62-1번 개포동-도곡네거리-진선여-신길동 63번 개포동-혜화동(굴곡노선 직선화) 63-1번 가락시장-삼성역-경기고등학교-혜화동 65번 가락동-영동교-청량리역-경동시장 67-1번 둔촌동-광장동-한양대-신세게 70번 신촌역-시흥동 차고지 연장 72번 서초동-서울역-사직터널-서울역 73-1번 서초동-고속터미널-성동구청 77번 사근동-서울역-만리동-여의도 78-1번 대치동-도곡네거리-선릉역-강남구청-신사동-원지동 80번 서초동-이태원-신당동-서울운동장 83번 중앙청-AID아파트-휘문고-은마아파트 85번 봉천동-서울역-종로-성북동 87번 중동고교-숙명여고-선릉역-고속터미널-방배동-말죽거리-중동고교 89-1번 사당동-장승백이-노량진-장승백이-사당동 92-2번 문래동-봉천동-교대-말죽거리 95번 서울대학교-서울역-혜화동 95-1번 구로공단-신림동-신세계 96번 난곡동-신정동-영등포역 97-1번 과천-흑석동-영등포시장-당산역 99번 안양-서울역-중앙청(경복궁)회차 101번 난곡-반포-고속터미널-노량잔-당산동 102번 발산동-봉천교-신림로타리-봉천동 105번 부천시-당산역회차 106번 공단오거리-2공단-개봉역-신정동-강서구청-칼아파트-개봉동 108번 시흥동-대방역-당산역-양평동-강변도로-당산역 108-1번 시흥동-구로구청-대림역 회차 110번 신정동-영등포시장-구로공단-구로역-고척동-신정동(순환) 113번 의정부-약수동고개-고속터미널 118번 철산리-영등포역-신촌(이대회차) 120번 구로동-세무서-영등포역-여의도 125번 부천내동-당산역-영등포역 129번 신정동-시청-서대문로타리 130번 김포-중앙청(경복궁)-새문안길~아현동 132번 망원동-종로구간-면목동 133-1번 북가좌동-종로구간-하월곡동 133-2번 북가좌동-마포대교-국회앞-시흥동 135번 평창동-남영동-동교로타리-봉원동 135-1번 평창동-남영동-동교로타리-성산동 137번 방이동-어린이대공원-신대방동 139번 면목동-퇴계로-신촌-양평동-문래 142번 수색-종근당-새문안길-서울역 147번 화전-독립문-중앙청(현 경복궁)-서울역-독립문 153번 갈현동-서대문로타리-서울역-퇴계로3가-비원-사직터널 154번 기자촌-녹번동-종로-신당동-옥수 155번 옥수동-을지로-광화문-불광동-기자촌 156-1번 구파발-반포-고속터미널-반포 158번 녹번동-홍제역 (홍제역 하차) 165번 금곡-청량리-경동시장 166번 도곡리-청량리역-경동시장 205번 어린이대공원-면목동-녹번동회차 211번 목동-왕십리회차 235번 상계동-청량라-마장동 터미널-압구정동-강남역-면허시험장-가락시장 235-1번 수유리-대지극장-길음역-삼양시장 239-1번 성남시-신사동-압구정동-국기원 240번 성남시-가락동(잠실역 잠실4단지)-면허시험장-고속터미널-여의도63빌딩 288번 개포동-반포-한강대교-신세계 회차 288-1번 대공원-말죽거리-은마아파트-면허시험장-잠실역-가락시장 311번 개포동-은마아파트-휘문고-종로5가 333번 우이동-종로3가-남대문-신림8동 388번 시흥-신정동-화곡아파트-신정동 541번 남가좌동-종로구간-신설동-중곡동 542번 남가좌동-청계구간-성동공-중곡동 569번 고덕동-천호동-잠실역-종합운동장 570-1번 성남동-암사동-길동-천호네거리 571번 반포-이수교-배나무골-사당역 571-1번 반포-이수교-배나무골-사당역 588번 화곡동-신촌-퇴계로-왕십리 710번 종로-서울역-개포동 811번 수유리-선릉역-개포동 좌석버스[편집] 2번 도봉산-종암동-종로-서울역 10번 상계동-삼선교-종로-서울역 12번 개포동-시청앞-신촌-상암동 13번 번동-행당동-고속터미널-반포 14번 개포동-압구정동-안국동-광화문 16번 정릉-고속터미널-삼성동-개포동 17번 서초동-고속터미널-광화문 22번 태릉-청량리-종로-서울역 23번 마천동-군자동(청량리~무교동) 30번 가락동-압구정동-여의도 33번 고덕동-잠실-고속터미널-영등포 34번 명일동-군자동-청량리 40번 대치동-광교-무교동 41번 개포동-고속터미널-광화문 45번 금광동-수서동-고속터미널-광화문 46번 가락동-개포동-고속터미널-미도파 47번 가락동-잠실역-강남역-동교동 50번 시흥동-노량진-서울역-종로1가 51번 서울대-이수교차로-미도파 52번 서울대-노량진-서울역-종로1가 53번 광명시-영등포역-서부역-미도파 55번 신월동-연대앞-광화문-시청앞 59번 고덕동-천호동-종로-광화문 60번 철산리-영등포역-여의도-광화문 61번 외발산동-영등포-여의도-시청앞 62번 화곡동-등촌동-연대앞-시청앞 63번 김포공항-마포-시청앞 64번 신월동-고속터미널-잠실-둔촌동 65번 봉천동-서초동-가락농수산물시장 66번 발산동-목동-광화문-시청앞 70번 홍은동-한양대학교-둔촌동-가락동 72번 역촌동-홍은동-독립문-미도파 81번 진관외동-동교동-고속터미널 567번 사당동-학동-영동교-망우동 631번 고척동-영등포시장-남영역-미도파 700번 방화동-영등포시장-여의도순환 725번 상도2동-서울역-정릉동 753번 시흥동(차고지연장)-공덕로타리 765번 금곡-청량리역-경동시장 신설된 노선[편집] 801번 신촌-삼각지-약수동-북악터널 802번 면목동-목동삼거리-월계동-위생병원-면목동 803번 태릉선수촌-월계동-돈암동-외국어대학교-석관동-월계동 804번 우이동-쌍문동-신창시장-연산묘 805번 기자촌-갈현동-은평구청-녹번동-불광시외버스터미널 806번 홍은동-녹번동-역촌동-북가좌동-모래내-연희동 807번 이화여자대학교-신촌-성산동-망원동-유수지-대흥동 808번 당산역-등촌동-강서구청-신정단지-신도림동-영등포 809번 영등포역-구로동-관악구청-대방역 810번 국립묘지-이수교-사당시장-사당네거리-과천 811번 신사동-교육대학교-말죽거리-삼성동 812번 길동네거리-태양금속-잠실역-석촌동-가락동-오금동 813번 명일동-길동-잠실역-송파-가락농수산물시장 814번 대방동-63빌딩-순복음교회-한국방송공사 폐지된 노선[편집] 시내버스 : 165-1, 522-1, 146-1, 118-1, 239, 25-1, 25-2, 47, 500-1, 15-1, 150-1, 150-2, 92-1, 139-1, 9-1, 26-2, 10번 좌석버스 : 569, 205번 참고문헌[편집] 경향신문 1985년 10월 1일자 10면 게재 함께 보기[편집] 1949년 서울시내버스 노선 1956년 서울시내버스 운행회사 1959년 서울시내버스 노선 1961년 서울시내버스 노선번호 개편 1964년 서울시내버스 노선번호 개편 1966년 서울시내버스 노선번호 개편 1970년 서울시내버스 노선번호 개편 1970년 서울시내버스 운행회사 1974년 서울시내버스 운행회사 2004년 서울특별시 버스 개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85년_서울시내버스_노선번호_개편&oldid=22962090" 분류: 서울특별시의 버스 교통1985년 대한민국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1월 9일 (금) 22: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걸프렌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걸프렌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girlfriend 목차 1 대중매체 1.1 영상 1.2 서적 2 음악 2.1 그룹 2.2 음반, 노래 3 같이 보기 걸프렌드(영어: girlfriend)는 여자친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이며, 다른 뜻으로는 다음이 있다. 대중매체[편집] 영상[편집] 영화와 텔레비전 《걸프렌드》는 1978년에 공개된 미국의 영화이다. 《걸프렌드》는 2009년에 공개된 인도의 영화이다. 《걸프렌드》는 2010년에 공개된 미국의 영화이다. 서적[편집] 《걸프렌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잡지이다. 《걸프렌드》는 일본의 만화이다. 음악[편집] 그룹[편집] 걸프렌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음악 그룹이다. 걸프렌드는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이다. 음반, 노래[편집] "Girlfriend" (B2K의 노래) "Girlfriend" (빌리 파이퍼의 노래) "Girlfriend" (바우 와우와 오마리온의 노래) "Girlfriend" (바비 브라운의 노래) "Girlfriend" (더 다크니스의 노래) "Girlfriend" (앨리샤 키스의 노래) "Girlfriend" (에이브릴 라빈의 노래) "Girlfriend" (타일러 메데이로스의 노래) "Girlfriend" (엔싱크의 노래) "Girl Friend" (박재범의 노래) "Girlfriend" (페블즈의 노래) "Girlfriend" (더 필로우즈의 노래) "Girlfriend" (매튜 스위트의 노래) "Girlfriend" (윙스의 노래) 같이 보기[편집] 보이프렌드 여자친구 이 문서는 명칭은 같지만 대상이 다를 때에 쓰이는 동음이의어 문서입니다.어떤 링크가 이 문서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링크를 알맞게 고쳐 주세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걸프렌드&oldid=18594262" 분류: 동음이의어 문서숨은 분류: 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모든 동음이의어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KiswahiliTürkçe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4월 12일 (수) 02:3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공군 ACE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군 ACE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공군 ACEAirforce Challenge E-sports 창단일 2007년 4월 해체일 2014년 3월 부문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위치 대한민국 외부 링크 공군 ACE(空軍 - , Airforce Challenge E-sports, 공군 에이스)는 대한민국의 前 프로게임단이다. 현존 당시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종목을 운영하였다. 2012년 11월 해체를 선언하여 2014년 3월 4일 공식 해체되었다. 목차 1 역사 1.1 게임단의 창설 1.2 공식전 18연패 1.3 첫 4연승과 두 자리 수 승리 1.4 최강 공군 ACE 1.5 해체 2 게임단 연혁 2.1 주요선수 입대, 전역기록 3 프로리그 결과 4 역대 팀 감독 5 역대 팀 코치 6 공군을 거쳐간 선수들 7 주요 종목 8 트리비아 9 함께 보기 10 각주 역사[편집] 게임단의 창설[편집] 대한민국 공군은 공군에 대한 이미지 제고와 사기 진작을 위해서 2007년 4월 3일 세계 최초로 군 e스포츠팀 공군 ACE(Airforce Challenges E-sports)를 창단했다. Ace로 팀명을 정한 것은 공군에서 전시에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에 붙여지는 명칭인 에이스로 정한것으로 밝혀졌다. 공군 ACE는 e스포츠계의 상무로 일컬어졌고, 군입대를 앞두고 활동이 제한된 선수들이 공군에 지원함으로써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e스포츠의 매개인 스타크래프트의 특성상, 단기간이라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크게 뒤처지기 때문에 병역 문제는 e스포츠계의 걸림돌로 작용해 왔었는데(현재까지 일반병사나 공익근무요원으로의 병역필 이후 복귀에 성공한 선수는 거의 없었다.), 공군의 팀창단으로 지속적인 연습을 가능케 하여 추후 제대 시 게임계로의 복귀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입대를 미루어왔던 임요환, 강도경, 최인규, 이재훈, 이주영, 김선기, 성학승, 김환중, 박대만 등 프로게이머 경력이 오래된 선수들이 입대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자 공군에 지원하였다. 이런 의도 외에도 공군팀은 올드 e스포츠 팬들에게도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세대교체와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는 e스포츠계에서, 과거의 유명 선수들은 신인들에 밀려 개인전은 물론 프로리그에도 출전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공군 팀의 창단으로, 그러한 올드 게이머들이 주전으로 기용되고, 그들의 모습을 그리워 하는 팬들을 e스포츠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실제로 공군 입대 후 노장들이 기대 이상의 기량으로 선전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특히 임요환은 군 복무 중이었던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 리그에서 11승 10패로 염보성과 함께 테란 다승 공동 1위로 건재함을 과시하였으며 수많은 명경기(vs 구성훈,윤용태,이영호,강민,마재윤,김택용 등 )를 만들어냈다. 또한 2007년 5월 6일 김택용(SK 텔레콤 T1)을 상대로 고스트의 락다운까지 사용하며 완벽한 모습을 선보인 최인규와 2009년 6월 20일 역시 김택용을 왕년의 폭풍으로 제압한 홍진호의 승리는 많은 e스포츠 팬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염보성과 이재호(이상 MBC게임 히어로)에게 팀내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젊은 나이임에도 공군행을 택한 민찬기의 입대 이후로는 공군 ACE에 올드 게이머들 외에도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후보 선수들이 합류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러한 부류의 선수들은 비록 상대적으로 높은 지명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감춰졌던 자신의 기량을 십분 발휘하며 팀의 유효한 전력으로 자리잡았다. 공식전 18연패[편집] 공군은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시즌에서 1라운드에서 7패를 거둔 후 2라운드 전패, 그리고 3라운드도 7전 전패행진을 해왔다. 특히 다른 프로게임단의 에이스가 아닌 선수(하이트 스파키즈의 이호준, 위메이드 폭스의 전태양 등)에게 올킬을 당하는 수모를 보였고 이 기록은 프로리그 사상 가장 많은 연패 기록이 되었다.(기존 최다 팀대항 연패는 이스트로와 STX SouL이 이룬 14연패였다.) 2010년 3월 1일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 화승 OZ vs 공군 전에서 화승은 프로리그 순위와 위너스 리그 순위가 낮았기 때문에 득실의 확보를 위해 선봉에 이제동을 내보냈으나, 이제동은 1킬 후 김성기의 교묘한 체제 교란(자신의 체제가 바이오닉인 것처럼 기만한 후 2팩토리에서 벌처를 생산, 메카닉 체제로 가는 척하다가 배럭스를 늘려서 바이오닉으로 다시 체제전환)에 속아넘어가며 스나이핑당하고 말았다. 그 후 화승은 차봉으로 구성훈을 내보냈고, 김성기를 잡아낸 구성훈은 공군의 중견 박정석에 의하여 또 스나이핑 당하였다. 박정석은 화승의 중견 김경모(현 공군 ACE)에게 패배했으나 대장으로 출격한 민찬기가 김경모와 박준오를 잡아냄으로써 공군은 4:3으로 7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화승을 제압하고 18연패의 사슬을 끊는 귀중한 1승을 거뒀다. 이 날 인터뷰와 해설진에 의하여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김성기는 연습 상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제동을 잡아내기 위해서 팀원들이 팀밀리(다수 유저가 한 종족을 컨트롤하는 경기방식)로 연습을 도와 줬다고 하여 감동을 안겼다. 또한, 3월 6일에는 SK텔레콤 T1(vs 최호선, 박재혁, 이승석, 정명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둠으로서 값진 2연승을 거둠과 더불어, 2007년 4월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참가 이래 프로리그에서 단 한 차례도 이겨 보지 못했던 SK텔레콤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를 기록했다. 아울러 공군은 이날 승리로 프로리그 참가 3년 만에 전 프로게임단을 상대로 승리하는 성과를 얻었다. [1] 첫 4연승과 두 자리 수 승리[편집] 공군은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시즌 중반 프로리그 역사상 최다 연패인 18연패를 기록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더불어 2010년 e스포츠의 판도를 크게 뒤흔든 승부조작 사건에 공군 소속 김성기가 연루되어 로스터에서 제외되면서 최악의 침체를 이어갔다. 이런 분위기는 5라운드에 들어서도 10연패를 기록하며 계속되는 듯 하였다. 그런데 2010년 6월 7일 1위팀 KT 롤스터 전에서 공군은 극적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1세트에서 홍진호는 우정호를 기습적인 2cm 드랍 작전을 통해 무너뜨렸다. 3경기에서는 박태민이 김재춘을 상대로 깔끔한 경기력으로 승리하였다. 하지만, 4세트에서는 공군의 에이스였던 민찬기가 '최종병기' 이영호에게 완패를 당하면서 승부는 에이스 결정전에서 판가름나게 되었고, 에이스 결정전의 대진이 민찬기와 이영호의 재대결로 결정되면서, 4라운드에서도 이영호에게 민찬기가 두 차례 패배하며 승리를 내준 바 있었던 공군의 승리는 불투명해 보였다. 그러나 민찬기는 4세트에서와는 확연히 달라진 엄청난 경기력으로 시종일관 이영호를 찍어누르며 압승을 거두며, 팀의 10연패를 끊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SK텔레콤 T1과 삼성전자 칸에게 패배한 공군은 2010년 6월 19일 인상적인 캐리어 운영으로 이재호를 제압한 박영민과 박태민, 민찬기의 활약으로 MBC게임 히어로를 3:1로 물리쳤다. 다음 경기인 하이트 스파키즈전에서는 상대팀의 에이스 신상문이 불참하는 행운 속에[2] 5개월만의 승리를 기록한 서지훈과 민찬기, 홍진호의 활약으로 3:1로 승리했다. 이어진 화승 OZ전에서는 대 저그전 최강자 이제동을 꺾는 기염을 토한 홍진호를 앞세워 또다시 3:1로 승리하며 3연승을 기록했으며, 결국 2010년 7월 4일 STX Soul과의 경기에서도 오영종의 프로리그 통산 100승에 이은 민찬기, 홍진호의 승리로 3:1로 승리함으로써 공군 창단 최초 4연승과 함께 프로리그 참가 이후 최초의 두 자리 승수 달성에 성공하게 되었다. 민찬기와 홍진호는 연승 기간 중 각각 3전 전승을 기록하며 4연승을 진두지휘했다. 공군은 남겨진 두 경기를 모두 패배하며 10승 45패로 09-10 시즌을 마감하였지만, 시즌 막판 인상적인 투혼을 보여 주며 차기 시즌에 대한 전망을 밝게 했다. 최강 공군 ACE[편집] 2기 공군 멤버의 최고참 박정석(전역후 KT 롤스터로 복귀)과 오영종(화승 오즈로 복귀), 한동욱(은퇴)이 전역하였고, 이 공백을 김경모와 안기효, 손석희, 이성은의 전입으로 메우며 공군은 새로운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시즌을 시작하였다. 프로게이머 경력이 미미하거나 기량이 매우 저하된 신병들의 유입으로 인해 공군에의 기대치는 이전보다도 낮았고, 예상대로 공군은 2승 7패를 기록하며 1라운드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주목받지 않았던 김경모가 1라운드부터 5할이 넘는 승률을 유지하며 김윤환(STX SouL), 염보성(MBC게임 히어로) 등을 꺾어내는 등의 가능성을 보여 주며 새로운 에이스로 등극, 팀체질 개선이 순조로움을 입증하였다. 이어진 2라운드는 공군 역사상 최고의 기세를 뽐낸 라운드였다. 지난 2년에 걸쳐 김택용, 이제동, 김윤환, 신상문 등의 에이스급 선수를 상대로 거짓말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홍진호가 2010년 12월 30일 KT 롤스터로 전역하였으나, 에이스 김경모는 2라운드까지 공군의 프로리그 전경기에 출전, 11승 8패의 고승률을 유지하며 전체 다승 순위 공동 12위를 유지, 공군 역사상 최초의 5할 이상의 승률을 가진 선수가 되었다. 김경모를 가리켜 과거 팀동료 이제동(화승 오즈)의 군대 버전이라는 뜻의 '군제동'이라 일컫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환골탈태한 프로토스전을 선보이며 김구현(당시 STX Soul/현 공군Ace)에게 역전승을 거두는 등 2라운드 전적 4승 3패를 기록한 이성은과 3승 1패를 기록한 손석희 역시 팀의 상승세를 이끈 한 축이었다. 2라운드 들어 전입한 변형태와 김태훈 역시 각각 공군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상승세에 날개를 얹어 주었다. 또한 이전까지 테란에게 저그가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던 맵 '벤젠'에서 강호 구성훈(화승 오즈)과 전태양(위메이드 폭스)에 이어 이재호(당시 MBC게임 히어로, 현 웅진 스타즈)까지 훌륭한 경기력으로 연파한 박태민(은퇴, 온게임넷 해설위원으로 전향)이 활약하였고, 3개월만에 출전한 서지훈 역시 탑클래스 게이머 정명훈(SK 텔레콤 T1)을 완벽하게 찍어누르는 등 선임병들도 제 몫을 해 줬다. 2연승과 3연승을 한 차례씩 기록하였고, 2연속 4:0 승리도 기록했던 공군의 2라운드 성적은 5승 4패로 팀 역사상 최초의 위닝 라운드가 달성되었고, 중간 순위는 7승 11패로 8위, 포스트시즌 진출권인 6위팀을 1경기 차이를 두고 추격하는 대파란을 연출했다. 특히 승패에 비해 매우 양호한 세트 득실(-3)을 보유하며, 포스트시즌행에 대한 희망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에이스 김경모의 패배에도 불구 나머지 세트를 싹쓸이하며 4:1로 STX SouL을 꺾는 등의 저력을 보여 줬던 2010년 말의 공군 에이스를 두고 사람들은 '역대 최강 공군'이라는 평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자연전 방식의 위너스 리그에 들어서며 공군의 예상치 못한 몰락이 시작되었다. 공군은 전 라운드 마지막 삼성전자 칸전의 패배를 더해 16연패를 기록하며 끝도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경기 내용은 더욱 처참했다. 공군은 3라운드 9경기 중 무려 5차례의 올킬 패배(대 KT 롤스터(김대엽), 폭스(전태양), SK 텔레콤 T1(김택용), MBC게임 히어로(박수범), 화승 오즈(구성훈)전)를 당했으며, 3:4 패배조차 한 번도 없을 정도의 무기력함으로 일관했다. 이는 멀티킬이 가능한 확실한 에이스가 부재한 팀 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14연패 시점까지의 개인 연승이 팀을 통틀어 김경모의 2연승 두 차례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선수들은 잘 풀려도 '1승 카드'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이 뼈아팠다. 전 라운드에서 안정적인 승수를 챙겨 주던 김경모도 이전 라운드에 보이지 않았던 대 저그전의 약세가 지속되면서 대 저그전 7연패를 기록, 스나이핑이 가능한 승자 연전 방식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며 연패 기간 성적 8승 14패에 머물며 팀을 구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또한 이성은은 연패 기간 위너스 리그 10전 전패와 프로리그 11연패를 기록하며 팀 몰락의 원흉으로 지목받았다. 위너스리그 전패가 유력해 보였던 공군은 개인리그 예선을 통해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2011년 3월 3일 펼쳐진 2010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예선전에서 공군의 주력 선수들인 민찬기,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이 예상을 뒤집고 예선 통과에 성공했다. 특히 민찬기는 오른팔에 깁스를 한 부상 중에도 예선을 통과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공군은 보다 끈질긴 모습을 보이며 연패 탈출에 사력을 다했다. 3월 5일 벌어진 웅진 스타즈와의 경기에서 공군은 선봉 이성은이 11연패를 끊어내고 2킬, 차봉 손석희가 웅진 중견 이재호를 잡아내며 위너스 리그 10-11 시즌 최초로 한 경기 3세트를 따 내는 데 성공했다. 3월 8일의 폭스와의 경기에선 폭스 선봉 신노열에게 3명이 무너지며 패색이 짙었으나, 대장으로 출격한 이성은이 역 3킬을 해내며 위너스 리그 10-11 시즌 최초로 개인 3킬 달성에 성공했다. 비록 이 두 경기는 각 팀의 에이스 김명운과 전태양을 극복하지 못한 공군이 패배했지만, 인상적인 경기들을 선보이며 두 경기 연속으로 매치포인트까지 상대를 몰아붙이며 공군의 의지를 팬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특히 두 경기의 역전승을 포함 3킬을 달성하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태양에게 항전한 이성은의 투혼은 e-스포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공군은 3월 12일 변형태의 선봉 승리와 차봉 손석희의 3킬에 힘입어 MBC게임 히어로를 4:1로 격파, 16연패를 마감하는 귀중한 승리를 달성했고, 위너스 리그 최종전에선 위너스 리그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하이트 엔투스를 4:2로 물리치며 2승 16패로 위너스 리그를 마감한다. 위너스 리그의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인해 10-11 시즌에도 공군은 사실상 포스트시즌 진출은 물론 최하위 탈출도 힘든 처지에 놓였으나, 위너스 리그의 마지막에 이르러 팀 분위기 쇄신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고 가장 좋은 페이스를 보였던 프로리그 방식이 다시 사용된다는 점에 희망을 걸어 볼 수 있겠다. 10-11리그도 순위는 10위를 하였으나 역대 최고인 17승을 기록하였고, 또한 선수층이 더욱 두터워져서 공군이 예전처럼 약체팀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게 되었다. 특히 이성은과 변형태, 김경모의 맹활약이 빛을 발했다. 다음 시즌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보로 갈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구현과 차명환이 다음 시즌부터 합류하게 되어 공군의 전력은 더 탄탄해질것으로 보였다. 2011-2012 SK Planet 프로리그 개막전에서 KT를 상대로 역스윕 (2:0 스코에서 3경기를 내리이겨서 3:2로 이기는) 파란을 일으켰으나, 그이후에 제8게임단과 CJ에게 2연패를 당해서 2011년 12월 11일 현재 프로리그 순위 6위를 기록중이다. 그 후 최강의 엔트리 카드를 구사하여 승을 챙겨 중위권 순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1라운드까지는 중위권 성적을 보였으나, 2,3라운드에서 계속되는 연패와 팀 내부의 문제 등 여러가지 악조건으로 인해 SK플래닛 프로리그에서도 꼴찌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해체[편집] 공군 ACE는 이미 2007년 말부터 국방부 종합감사에서 "프로게임단 '공군 ACE'가 원래 편제기능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후 2012년까지 5년동안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2년 7월 23일, 아시아경제는 공군 관계자가 "에이스팀은 군 입장에서 젊은 층을 상대로 이미지 개선을 효과를 거두었지만 게임시장의 변화에 따라 팀을 해체할 수 밖에 없다"라면서 현재 더 이상 신병을 모집하고 있지 않아 자연스럽게 해체될 전망이라 보도했으며[3], e스포츠 전문 매체 포모스도 사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도했다.[4] 실제로 2011년 11월에 열린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11-12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2012년 한 해 동안 신병을 3월 5일에 1명만 모집하고 이후로는 모집을 하지 않았다. 결국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12-13부터 불참을 선언하면서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기존 공군 ACE 소속의 프로게이머들은 보직을 변경 후 2013년 7월까지 군복무를 이어나갔고 3월 5일에 마지막으로 입단했던 김승현이 2014년 3월 4일에 제대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5] 게임단 연혁[편집] 주요선수 입대, 전역기록[편집] 2006년 6월 12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6년 7월 25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공군중앙전산소 e-sports팀으로 배속 2006년 10월 9일 임요환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6년 11월 13일 성학승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1월 27일 SuperFight 단체경기 공군팀 출전 2007년 2월 12일 이재훈, 김환중, 김선기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3월 9일 공군팀 제2회 KeSPA컵 출전 2007년 4월 3일 공군 ACE(Airforce Challenge E-sports)팀 창단 2007년 6월 25일 이주영, 박대만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12월 31일 제 2대 감독 김평강 중위 전역, 제 3대 감독 유성렬 중위 취임 2008년 3월 19일 2007 대한민국 e-SPORTS 대상 페어플레이상 2008년 8월 29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전역 2008년 9월 22일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8년 11월 24일 홍진호, 차재욱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8년 12월 12일 2008 신지식 최우수 단체상 2008년 12월 21일 임요환 전역 2009년 1월 23일 성학승 전역 2009년 2월 16일 박태민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3월 9일 서지훈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4월 17일 이재훈, 김환중, 김선기 전역 2009년 4월 21일 박정석 프로리그 최초 100승 기록 2009년 4월 22일 2009년판 '기네스 세계 기록 게이머편(Guinness World Records Gamer`s Edition) 등재 2009년 5월 25일 민찬기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8월 24일 이주영, 박대만 전역 2009년 10월 26일 박영민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12월 31일 제 3대 감독 유성렬 중위 전역, 제 4대 감독 박대경 중위 취임 2010년 5월 31일 김경모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6월 28일 안기효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7월 4일 오영종 프로리그 100승 기록, 창단 후 최초 프로리그 단일 시즌 두 자리 팀승수 기록 2010년 7월 26일 손석희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8월 30일 이성은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10월 25일 김태훈, 변형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10월 29일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전역 2010년 12월 30일 홍진호, 차재욱 전역 2011년 2월 28일 임진묵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3월 17일 박태민 전역 2011년 4월 1일 코치 김남기 하사 전입 2011년 4월 4일 고인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4월 9일 서지훈 전역 2011년 4월 25일 코치 오동수 중사 전출 2011년 4월 25일 권수현, 이정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6월 30일 제 4대 감독 박대경 중위 전역, 제 5대 감독 송동균 중위 취임 2011년 6월 21일 민찬기 전역 2011년 9월 26일 차명환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10월 24일 김구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11월 15일 박영민 전역 2012년 3월 5일 김승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2년 6월 9일 김경모 전역 2012년 7월 6일 안기효 전역 2012년 8월 2일 손석희 전역 2012년 9월 4일 이성은 전역 2012년 10월 27일 김태훈, 변형태 전역 2013년 2월 27일 임진묵 전역 2013년 4월 3일 고인규 전역 2013년 4월 24일 권수현, 이정현 전역 2013년 9월 25일 차명환 전역 2013년 10월 23일 김구현 전역 2014년 3월 4일 김승현 전역 및 게임단 해체 프로리그 결과[편집] 년도 리그 순위 경기 승 패 벌점 승점 포스트시즌 주요선수 감독 2007 신한은행 전기 12위 22 6 16 0 -28 진출실패 강도경, 최인규,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정철하 2007 신한은행 후기 12위 22 3 19 0 -27 진출실패 강도경,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박대만, 이주영 김평강 2008 신한은행 2008 11위 22 6 16 0 -22 진출실패 강도경,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박대만, 이주영 유성렬 2008-2009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8-09 12위 11 1 10 0 -18 진출실패 이주영,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유성렬 2008-2009 신한은행 08-09 12위 55 9 46 1 -79 진출실패 임요환, 이주영,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유성렬 2009-2010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 12위 11 2 9 0 -22 진출실패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박대경 2009-2010 신한은행 09-10 12위 55 10 45 1 -86 진출실패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박대경 2010-2011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10-11 12위 18 2 16 0 -35 진출실패 박영민,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박대경 2010-2011 신한은행 10-11 10위 54 17 37 0 -46 진출실패 박영민,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박대경 2011-2012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시즌 1 8위 21 6 15 0 -22 진출실패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차명환, 김구현 송동균 2012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Ⅱ 프로리그 시즌 2 8위 21 5 16 0 -33 진출실패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이정현, 차명환, 김구현, 김승현 송동균 역대 팀 감독[편집] 공군 ACE의 감독은 전부 장교로 재임중인 감독이며, 전부 중위가 맡는다. 1대 감독 : 정철하 중위 (재임 기간 : 2007년) 2대 감독 : 김평강 중위 (재임 기간 : 2007년 ~ 2008년) 3대 감독 : 유성렬 중위 (재임 기간 : 2008년 ~ 2009년) 4대 감독 : 박대경 중위 (재임 기간 : 2009년 ~ 2011년) 5대 감독 : 송동균 중위 (재임 기간 : 2011년 ~ 2012년) 역대 팀 코치[편집] 공군 ACE의 코치는 플레잉 코치를 제외하면 전부 부사관 출신이며, 전부 중사, 하사가 맡는다. 1대 코치 : 민태웅 중사, 강도경 플레잉코치(주장 겸임) 2대 코치 : 오동수 중사 3대 코치 : 김남기 하사, 안기효 플레잉코치 공군을 거쳐간 선수들[편집] 1기 2006년 - 강도경, 조형근, 최인규, 임요환, 성학승 - 모두 은퇴 2007년 - 이재훈, 김선기, 김환중, 이주영, 박대만 - 모두 은퇴 2기 2008년 - 박정석, 한동욱, 오영종, 홍진호, 차재욱 - 모두 은퇴 2009년 -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 모두 은퇴 3기 2010년 - 김경모, 안기효, 손석희, 이성은, 변형태, 김태훈 - 손석희 해외 스타2 팀 이적, 나머지 모두 은퇴. 4기 2011년 - 임진묵, 고인규, 권수현, 이정현, 차명환, 김구현 - 모두 은퇴 2012년 - 김승현 - 은퇴 주요 종목[편집] 스타크래프트 트리비아[편집] 공군 ACE의 ACE는 Airforce Challenge E-sports의 약어로, E-Sports에 도전하는 공군을 뜻한다. 창단 당시 ACE로 정한 것은 공군이 전시에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에게 붙여지는 명칭으로 최고가 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공군 ACE의 팀 로고는 공군 최신예 F-15K 전투기가 창공을 비상하는 형상으로 디자인됐고, 선수 유니폼은 공군 빨간마후라의 투혼을 의미하는 붉은색 옷깃과 함께 국산 초음속훈련기 T-50을 연상시키도록 디자인되었다. 세계 최초의 군 소속 프로 게임단(The first military pro-gaming team)으로 기네스북(2009 Guinness World Records Gamer's Edition)에 등재되었다. 최인규는 2007년 5월 6일, 전 시즌 MSL 우승자였던 김택용(당시 MBC게임 히어로, 현 SK 텔레콤 T1)을 제압하고 2003년 7월 5일 KTF 에버컵 프로리그에서 GO팀 소속으로 승리를 거둔 이래 1402일만의 프로리그 승리를 거두었다. 김선기는 2008년 5월 31일 신상문(당시 온게임넷 스파키즈, 현 하이트 엔투스)을 제압하고 2005년 11월 23일 이후 921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이주영은 2009년 5월 17일 하이트 스파키즈전에서 공군 저그 최초로 단일 경기에서 에이스 결정전까지 2승을 거두었다. 홍진호는 2009년 6월 20일 김택용(SK 텔레콤 T1)을 꺾고 2007년 6월 17일 신상문전 이후 735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민찬기는 공군 게이머 최초로 양대 메이저 개인리그(스타리그, MSL)에 동시 진출했다.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2라운드에서 프로리그 사상 최초로 단일 라운드 전패를 기록했다.[6] 박대만(당시 웅진 스타즈, 현 GSL 해설위원)은 2009년 9월 29일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예선전을 통과하며 공군 ACE 출신 최초의 개인리그 진출자가 되었다. 이 팀에 소속되어 있던 김성기는 2010년 5월 스타크래프트 승부 조작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군 검찰 회부와 더불어 KeSPA로부터도 영구제명 징계를 받음에 따라 팀에서도 방출되었다. 그리하여 김성기는 유일하게 전역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공군 ACE를 떠난 선수가 되었다. 김경모는 2010년 12월 19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2라운드 SK텔레콤 T1전에서의 승리로 10승(6패)을 기록하면서, 팀과 개인 공히 16번째 경기만에 10승을 따내어 프로리그 단일 시즌에서 가장 빠른 10승을 기록한 유일한 공군 선수가 되었다. 2010년 12월 25일, 공군은 STX 소울과의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2라운드 경기에서 4:1로 승리하며 라운드 전적 5승 3패를 기록, 2라운드 잔여 경기의 결과와 상관없이 창단 최초로 프로리그 위닝 라운드를 기록하였다. 안기효는 2011년 3월 20일 장윤철(하이트 엔투스)을 꺾고 2009년 1월 28일 이후 781일만의 공식전, 2007년 12월 12일 이후 1194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ABC마트 MSL 2011의 본선에 공군 소속의 민찬기, 김경모, 이성은이 진출하였는데, 공군 소속 3인의 개인리그 진출은 공군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공군 에이스에서 활동하였던 선수 중 전역 후 99%가 은퇴해서 은퇴 양성소로 악명이 높았으며 선수생활 연장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실제로 공군에이스 전역 후 성공적으로 프로게이머로 복귀한 사례가 1%에 불과하다.(박정석, 오영종이 그나마 전역이후 활동하였지만, 두 사람도 결국 은퇴하였다. 이외에도 복귀한 선수도 몇명 있었지만(임요환, 이재훈, 김환중, 홍진호, 민찬기, 임진묵, 김구현) 전부 출전을 하지 않다가 모두 반년도 못가서 은퇴하였다.) 현재는 손석희만이 전역 이후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임단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함께 보기[편집] 대한민국 공군 각주[편집] ↑ 공군 ACE 김성기, "연습 과정에서 스트레스 최고였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포모스》2010년 3월 1일 23시 12분 ↑ 이 날 오전, 신상문이 급성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이트는 신상문이 빠진 상태로 공군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 공군 e스포츠팀 '에이스' 해체된다 ↑ “해체설 도는 공군 에이스, 사실 가능성 높아”. 2013년 12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23일에 확인함.  ↑ 세계 최초의 軍프로게임단 공군 에이스,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Archived 2013년 12월 20일 - 웨이백 머신 《포모스》2012년 10월 27일 ↑ 공군 에이스, 프로리그 최초로 단일 라운드 전패 수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포모스》2010년 1월 18일 20시 34분 vdeh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리그리그개인전 스타리그 MBC게임 스타리그 곰TV 클래식 소닉 스타리그1 아프리카TV 스타리그1 SSL 시리즈1 단체전 프로리그 (1군) 드림리그 (2군) MBC게임 팀리그 위너스리그 경남 - STX컵 마스터즈 조직협회 한국e스포츠협회 게임 개발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게임 배급사 한빛소프트 방송국 OGN MBC 게임 곰TV 아프리카TV SPOTV GAMES 경기장 용산 e-Sports 스타디움 (온게임넷→OGN, 철거됨) 히어로센터 (MBC 게임, 철거됨) 곰TV 목동 스튜디오 (곰TV, 철거됨) ITV 랭킹전 iTV 스튜디오/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야외 특설무대(iTV 경인방송, 철거됨) 프릭 업 스튜디오 (아프리카TV) 넥슨 아레나 (SPOTV GAMES) 방송인OGN 정소림 엄재경 김정민 아프리카TV 박상현 이승원 임성춘 SPOTV GAMES 김철민 한승엽 이성은 과거 게임단 KT 롤스터 STX SouL 웅진 스타즈 SK텔레콤 T1 CJ 엔투스 삼성 칸 제8프로게임단 공군 ACE 이스트로 위메이드 폭스 온게임넷 스파키즈 MBC게임 히어로 화승 OZ 기타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명예의 전당 골든 마우스 MSL 금배지 KeSPA컵 1KeSPA 비공인 리그2012년 9월 22일부로 대한민국의 모든 KeSPA 공인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완전히 종료됨. 단, KeSPA 비공인 리그는 열리고 있음. vdeh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II 리그리그개인전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아프리카TV)) SSL 시리즈 (SPOTV 게임즈) 스타리그 (OGN, 폐지) 단체전 프로리그 (한국e스포츠협회, 폐지)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팀 리그 (e스포츠 연맹, 폐지) 기타 KeSPA컵 조직종목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관련 단체 한국e스포츠협회 e스포츠 연맹 (해체) 방송국 SPO TV 게임즈 아프리카TV(GSL 2016 시즌 1부터 주관중) OGN 곰eXP(GSL 2015 시즌 3까지 주관) 경기장 넥슨 아레나 프릭 업 스튜디오 신도림 TG e스타디움 게임단 진에어 그린윙스 MVP 아프리카 프릭스 ZeNEX oGs SlayerS 공군 ACE TSL NS호서 웅진 스타즈 fOu SouL AZUBU LongZhu 프라임 스베누 삼성 갤럭시 CJ 엔투스 KT 롤스터 SK텔레콤 T1 방송인SPOTV 게임즈 성승헌 채민준 김익근 유대현 고인규 안준영 정인호 아프리카TV 박상현 황영재 박진영 채정원 vdeh 대한민국 공군 본부 참모 총장 차장 구성군직할 기상단 헌병단 항공안전단 정보체계관리단 연구분석평가단 항공우주의료원 공군사관학교 35비행전대 52시험평가전대 53특수비행 91항공시설전대 작전사령부 작전정보통신단 항공우주작전본부 항공지원작전단 7 항공통신전대 37전술정보전대 공중기동정찰사령부 비행단 3훈련 5공중기동 15특수임무 전대 6 SAR 29 전술개발비행 39 전술정찰 공중전투사령부 전투비행단 1 8 10 11 16 17 18 19 20 비행전대 38 전투 방공관제사령부 방공통제전대 31 중앙 32 중앙 33 34 51항공통제비행전대 방공유도탄사령부 방공유도탄여단 1 2 3 군수사령부 군수관리단 군수전산소 종합보급창 정비창 81 항공 82 항공 83 정보통신 85 정밀표준 86 항공전자 60수송전대 교육사령부부대 기본군사훈련단 학생군사교육단 한국항공대학교 한서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영진전문대학 (부사관) 27예비단 학교 항공과학고등학교 공군방공포병학교 공군정보통신학교 군수 1 2 공군행정학교 시설 계룡대 공항 광주 군산 김해 대구 사천 서울 원주 청주 기지 수원 오산 비행장 강릉 서산 성무 예천 중원 그 외 역사 계급 장비 부대 조직 및 편성 목록 육군 해군 특수부대 해외 파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공군_ACE&oldid=24522198" 분류: 2007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2014년 폐지해체한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임단대한민국 공군공군 ACE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7월 4일 (목) 09: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공군 ACE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군 ACE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공군 ACEAirforce Challenge E-sports 창단일 2007년 4월 해체일 2014년 3월 부문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위치 대한민국 외부 링크 공군 ACE(空軍 - , Airforce Challenge E-sports, 공군 에이스)는 대한민국의 前 프로게임단이다. 현존 당시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종목을 운영하였다. 2012년 11월 해체를 선언하여 2014년 3월 4일 공식 해체되었다. 목차 1 역사 1.1 게임단의 창설 1.2 공식전 18연패 1.3 첫 4연승과 두 자리 수 승리 1.4 최강 공군 ACE 1.5 해체 2 게임단 연혁 2.1 주요선수 입대, 전역기록 3 프로리그 결과 4 역대 팀 감독 5 역대 팀 코치 6 공군을 거쳐간 선수들 7 주요 종목 8 트리비아 9 함께 보기 10 각주 역사[편집] 게임단의 창설[편집] 대한민국 공군은 공군에 대한 이미지 제고와 사기 진작을 위해서 2007년 4월 3일 세계 최초로 군 e스포츠팀 공군 ACE(Airforce Challenges E-sports)를 창단했다. Ace로 팀명을 정한 것은 공군에서 전시에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에 붙여지는 명칭인 에이스로 정한것으로 밝혀졌다. 공군 ACE는 e스포츠계의 상무로 일컬어졌고, 군입대를 앞두고 활동이 제한된 선수들이 공군에 지원함으로써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e스포츠의 매개인 스타크래프트의 특성상, 단기간이라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크게 뒤처지기 때문에 병역 문제는 e스포츠계의 걸림돌로 작용해 왔었는데(현재까지 일반병사나 공익근무요원으로의 병역필 이후 복귀에 성공한 선수는 거의 없었다.), 공군의 팀창단으로 지속적인 연습을 가능케 하여 추후 제대 시 게임계로의 복귀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입대를 미루어왔던 임요환, 강도경, 최인규, 이재훈, 이주영, 김선기, 성학승, 김환중, 박대만 등 프로게이머 경력이 오래된 선수들이 입대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자 공군에 지원하였다. 이런 의도 외에도 공군팀은 올드 e스포츠 팬들에게도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세대교체와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는 e스포츠계에서, 과거의 유명 선수들은 신인들에 밀려 개인전은 물론 프로리그에도 출전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공군 팀의 창단으로, 그러한 올드 게이머들이 주전으로 기용되고, 그들의 모습을 그리워 하는 팬들을 e스포츠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실제로 공군 입대 후 노장들이 기대 이상의 기량으로 선전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특히 임요환은 군 복무 중이었던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 리그에서 11승 10패로 염보성과 함께 테란 다승 공동 1위로 건재함을 과시하였으며 수많은 명경기(vs 구성훈,윤용태,이영호,강민,마재윤,김택용 등 )를 만들어냈다. 또한 2007년 5월 6일 김택용(SK 텔레콤 T1)을 상대로 고스트의 락다운까지 사용하며 완벽한 모습을 선보인 최인규와 2009년 6월 20일 역시 김택용을 왕년의 폭풍으로 제압한 홍진호의 승리는 많은 e스포츠 팬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염보성과 이재호(이상 MBC게임 히어로)에게 팀내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젊은 나이임에도 공군행을 택한 민찬기의 입대 이후로는 공군 ACE에 올드 게이머들 외에도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후보 선수들이 합류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러한 부류의 선수들은 비록 상대적으로 높은 지명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감춰졌던 자신의 기량을 십분 발휘하며 팀의 유효한 전력으로 자리잡았다. 공식전 18연패[편집] 공군은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시즌에서 1라운드에서 7패를 거둔 후 2라운드 전패, 그리고 3라운드도 7전 전패행진을 해왔다. 특히 다른 프로게임단의 에이스가 아닌 선수(하이트 스파키즈의 이호준, 위메이드 폭스의 전태양 등)에게 올킬을 당하는 수모를 보였고 이 기록은 프로리그 사상 가장 많은 연패 기록이 되었다.(기존 최다 팀대항 연패는 이스트로와 STX SouL이 이룬 14연패였다.) 2010년 3월 1일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 화승 OZ vs 공군 전에서 화승은 프로리그 순위와 위너스 리그 순위가 낮았기 때문에 득실의 확보를 위해 선봉에 이제동을 내보냈으나, 이제동은 1킬 후 김성기의 교묘한 체제 교란(자신의 체제가 바이오닉인 것처럼 기만한 후 2팩토리에서 벌처를 생산, 메카닉 체제로 가는 척하다가 배럭스를 늘려서 바이오닉으로 다시 체제전환)에 속아넘어가며 스나이핑당하고 말았다. 그 후 화승은 차봉으로 구성훈을 내보냈고, 김성기를 잡아낸 구성훈은 공군의 중견 박정석에 의하여 또 스나이핑 당하였다. 박정석은 화승의 중견 김경모(현 공군 ACE)에게 패배했으나 대장으로 출격한 민찬기가 김경모와 박준오를 잡아냄으로써 공군은 4:3으로 7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화승을 제압하고 18연패의 사슬을 끊는 귀중한 1승을 거뒀다. 이 날 인터뷰와 해설진에 의하여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김성기는 연습 상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제동을 잡아내기 위해서 팀원들이 팀밀리(다수 유저가 한 종족을 컨트롤하는 경기방식)로 연습을 도와 줬다고 하여 감동을 안겼다. 또한, 3월 6일에는 SK텔레콤 T1(vs 최호선, 박재혁, 이승석, 정명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둠으로서 값진 2연승을 거둠과 더불어, 2007년 4월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참가 이래 프로리그에서 단 한 차례도 이겨 보지 못했던 SK텔레콤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를 기록했다. 아울러 공군은 이날 승리로 프로리그 참가 3년 만에 전 프로게임단을 상대로 승리하는 성과를 얻었다. [1] 첫 4연승과 두 자리 수 승리[편집] 공군은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시즌 중반 프로리그 역사상 최다 연패인 18연패를 기록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더불어 2010년 e스포츠의 판도를 크게 뒤흔든 승부조작 사건에 공군 소속 김성기가 연루되어 로스터에서 제외되면서 최악의 침체를 이어갔다. 이런 분위기는 5라운드에 들어서도 10연패를 기록하며 계속되는 듯 하였다. 그런데 2010년 6월 7일 1위팀 KT 롤스터 전에서 공군은 극적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1세트에서 홍진호는 우정호를 기습적인 2cm 드랍 작전을 통해 무너뜨렸다. 3경기에서는 박태민이 김재춘을 상대로 깔끔한 경기력으로 승리하였다. 하지만, 4세트에서는 공군의 에이스였던 민찬기가 '최종병기' 이영호에게 완패를 당하면서 승부는 에이스 결정전에서 판가름나게 되었고, 에이스 결정전의 대진이 민찬기와 이영호의 재대결로 결정되면서, 4라운드에서도 이영호에게 민찬기가 두 차례 패배하며 승리를 내준 바 있었던 공군의 승리는 불투명해 보였다. 그러나 민찬기는 4세트에서와는 확연히 달라진 엄청난 경기력으로 시종일관 이영호를 찍어누르며 압승을 거두며, 팀의 10연패를 끊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SK텔레콤 T1과 삼성전자 칸에게 패배한 공군은 2010년 6월 19일 인상적인 캐리어 운영으로 이재호를 제압한 박영민과 박태민, 민찬기의 활약으로 MBC게임 히어로를 3:1로 물리쳤다. 다음 경기인 하이트 스파키즈전에서는 상대팀의 에이스 신상문이 불참하는 행운 속에[2] 5개월만의 승리를 기록한 서지훈과 민찬기, 홍진호의 활약으로 3:1로 승리했다. 이어진 화승 OZ전에서는 대 저그전 최강자 이제동을 꺾는 기염을 토한 홍진호를 앞세워 또다시 3:1로 승리하며 3연승을 기록했으며, 결국 2010년 7월 4일 STX Soul과의 경기에서도 오영종의 프로리그 통산 100승에 이은 민찬기, 홍진호의 승리로 3:1로 승리함으로써 공군 창단 최초 4연승과 함께 프로리그 참가 이후 최초의 두 자리 승수 달성에 성공하게 되었다. 민찬기와 홍진호는 연승 기간 중 각각 3전 전승을 기록하며 4연승을 진두지휘했다. 공군은 남겨진 두 경기를 모두 패배하며 10승 45패로 09-10 시즌을 마감하였지만, 시즌 막판 인상적인 투혼을 보여 주며 차기 시즌에 대한 전망을 밝게 했다. 최강 공군 ACE[편집] 2기 공군 멤버의 최고참 박정석(전역후 KT 롤스터로 복귀)과 오영종(화승 오즈로 복귀), 한동욱(은퇴)이 전역하였고, 이 공백을 김경모와 안기효, 손석희, 이성은의 전입으로 메우며 공군은 새로운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시즌을 시작하였다. 프로게이머 경력이 미미하거나 기량이 매우 저하된 신병들의 유입으로 인해 공군에의 기대치는 이전보다도 낮았고, 예상대로 공군은 2승 7패를 기록하며 1라운드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주목받지 않았던 김경모가 1라운드부터 5할이 넘는 승률을 유지하며 김윤환(STX SouL), 염보성(MBC게임 히어로) 등을 꺾어내는 등의 가능성을 보여 주며 새로운 에이스로 등극, 팀체질 개선이 순조로움을 입증하였다. 이어진 2라운드는 공군 역사상 최고의 기세를 뽐낸 라운드였다. 지난 2년에 걸쳐 김택용, 이제동, 김윤환, 신상문 등의 에이스급 선수를 상대로 거짓말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홍진호가 2010년 12월 30일 KT 롤스터로 전역하였으나, 에이스 김경모는 2라운드까지 공군의 프로리그 전경기에 출전, 11승 8패의 고승률을 유지하며 전체 다승 순위 공동 12위를 유지, 공군 역사상 최초의 5할 이상의 승률을 가진 선수가 되었다. 김경모를 가리켜 과거 팀동료 이제동(화승 오즈)의 군대 버전이라는 뜻의 '군제동'이라 일컫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환골탈태한 프로토스전을 선보이며 김구현(당시 STX Soul/현 공군Ace)에게 역전승을 거두는 등 2라운드 전적 4승 3패를 기록한 이성은과 3승 1패를 기록한 손석희 역시 팀의 상승세를 이끈 한 축이었다. 2라운드 들어 전입한 변형태와 김태훈 역시 각각 공군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상승세에 날개를 얹어 주었다. 또한 이전까지 테란에게 저그가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던 맵 '벤젠'에서 강호 구성훈(화승 오즈)과 전태양(위메이드 폭스)에 이어 이재호(당시 MBC게임 히어로, 현 웅진 스타즈)까지 훌륭한 경기력으로 연파한 박태민(은퇴, 온게임넷 해설위원으로 전향)이 활약하였고, 3개월만에 출전한 서지훈 역시 탑클래스 게이머 정명훈(SK 텔레콤 T1)을 완벽하게 찍어누르는 등 선임병들도 제 몫을 해 줬다. 2연승과 3연승을 한 차례씩 기록하였고, 2연속 4:0 승리도 기록했던 공군의 2라운드 성적은 5승 4패로 팀 역사상 최초의 위닝 라운드가 달성되었고, 중간 순위는 7승 11패로 8위, 포스트시즌 진출권인 6위팀을 1경기 차이를 두고 추격하는 대파란을 연출했다. 특히 승패에 비해 매우 양호한 세트 득실(-3)을 보유하며, 포스트시즌행에 대한 희망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에이스 김경모의 패배에도 불구 나머지 세트를 싹쓸이하며 4:1로 STX SouL을 꺾는 등의 저력을 보여 줬던 2010년 말의 공군 에이스를 두고 사람들은 '역대 최강 공군'이라는 평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자연전 방식의 위너스 리그에 들어서며 공군의 예상치 못한 몰락이 시작되었다. 공군은 전 라운드 마지막 삼성전자 칸전의 패배를 더해 16연패를 기록하며 끝도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경기 내용은 더욱 처참했다. 공군은 3라운드 9경기 중 무려 5차례의 올킬 패배(대 KT 롤스터(김대엽), 폭스(전태양), SK 텔레콤 T1(김택용), MBC게임 히어로(박수범), 화승 오즈(구성훈)전)를 당했으며, 3:4 패배조차 한 번도 없을 정도의 무기력함으로 일관했다. 이는 멀티킬이 가능한 확실한 에이스가 부재한 팀 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14연패 시점까지의 개인 연승이 팀을 통틀어 김경모의 2연승 두 차례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선수들은 잘 풀려도 '1승 카드'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이 뼈아팠다. 전 라운드에서 안정적인 승수를 챙겨 주던 김경모도 이전 라운드에 보이지 않았던 대 저그전의 약세가 지속되면서 대 저그전 7연패를 기록, 스나이핑이 가능한 승자 연전 방식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며 연패 기간 성적 8승 14패에 머물며 팀을 구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또한 이성은은 연패 기간 위너스 리그 10전 전패와 프로리그 11연패를 기록하며 팀 몰락의 원흉으로 지목받았다. 위너스리그 전패가 유력해 보였던 공군은 개인리그 예선을 통해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2011년 3월 3일 펼쳐진 2010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예선전에서 공군의 주력 선수들인 민찬기,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이 예상을 뒤집고 예선 통과에 성공했다. 특히 민찬기는 오른팔에 깁스를 한 부상 중에도 예선을 통과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공군은 보다 끈질긴 모습을 보이며 연패 탈출에 사력을 다했다. 3월 5일 벌어진 웅진 스타즈와의 경기에서 공군은 선봉 이성은이 11연패를 끊어내고 2킬, 차봉 손석희가 웅진 중견 이재호를 잡아내며 위너스 리그 10-11 시즌 최초로 한 경기 3세트를 따 내는 데 성공했다. 3월 8일의 폭스와의 경기에선 폭스 선봉 신노열에게 3명이 무너지며 패색이 짙었으나, 대장으로 출격한 이성은이 역 3킬을 해내며 위너스 리그 10-11 시즌 최초로 개인 3킬 달성에 성공했다. 비록 이 두 경기는 각 팀의 에이스 김명운과 전태양을 극복하지 못한 공군이 패배했지만, 인상적인 경기들을 선보이며 두 경기 연속으로 매치포인트까지 상대를 몰아붙이며 공군의 의지를 팬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특히 두 경기의 역전승을 포함 3킬을 달성하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태양에게 항전한 이성은의 투혼은 e-스포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공군은 3월 12일 변형태의 선봉 승리와 차봉 손석희의 3킬에 힘입어 MBC게임 히어로를 4:1로 격파, 16연패를 마감하는 귀중한 승리를 달성했고, 위너스 리그 최종전에선 위너스 리그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하이트 엔투스를 4:2로 물리치며 2승 16패로 위너스 리그를 마감한다. 위너스 리그의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인해 10-11 시즌에도 공군은 사실상 포스트시즌 진출은 물론 최하위 탈출도 힘든 처지에 놓였으나, 위너스 리그의 마지막에 이르러 팀 분위기 쇄신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고 가장 좋은 페이스를 보였던 프로리그 방식이 다시 사용된다는 점에 희망을 걸어 볼 수 있겠다. 10-11리그도 순위는 10위를 하였으나 역대 최고인 17승을 기록하였고, 또한 선수층이 더욱 두터워져서 공군이 예전처럼 약체팀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게 되었다. 특히 이성은과 변형태, 김경모의 맹활약이 빛을 발했다. 다음 시즌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보로 갈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구현과 차명환이 다음 시즌부터 합류하게 되어 공군의 전력은 더 탄탄해질것으로 보였다. 2011-2012 SK Planet 프로리그 개막전에서 KT를 상대로 역스윕 (2:0 스코에서 3경기를 내리이겨서 3:2로 이기는) 파란을 일으켰으나, 그이후에 제8게임단과 CJ에게 2연패를 당해서 2011년 12월 11일 현재 프로리그 순위 6위를 기록중이다. 그 후 최강의 엔트리 카드를 구사하여 승을 챙겨 중위권 순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1라운드까지는 중위권 성적을 보였으나, 2,3라운드에서 계속되는 연패와 팀 내부의 문제 등 여러가지 악조건으로 인해 SK플래닛 프로리그에서도 꼴찌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해체[편집] 공군 ACE는 이미 2007년 말부터 국방부 종합감사에서 "프로게임단 '공군 ACE'가 원래 편제기능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후 2012년까지 5년동안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2년 7월 23일, 아시아경제는 공군 관계자가 "에이스팀은 군 입장에서 젊은 층을 상대로 이미지 개선을 효과를 거두었지만 게임시장의 변화에 따라 팀을 해체할 수 밖에 없다"라면서 현재 더 이상 신병을 모집하고 있지 않아 자연스럽게 해체될 전망이라 보도했으며[3], e스포츠 전문 매체 포모스도 사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도했다.[4] 실제로 2011년 11월에 열린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11-12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2012년 한 해 동안 신병을 3월 5일에 1명만 모집하고 이후로는 모집을 하지 않았다. 결국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12-13부터 불참을 선언하면서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기존 공군 ACE 소속의 프로게이머들은 보직을 변경 후 2013년 7월까지 군복무를 이어나갔고 3월 5일에 마지막으로 입단했던 김승현이 2014년 3월 4일에 제대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5] 게임단 연혁[편집] 주요선수 입대, 전역기록[편집] 2006년 6월 12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6년 7월 25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공군중앙전산소 e-sports팀으로 배속 2006년 10월 9일 임요환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6년 11월 13일 성학승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1월 27일 SuperFight 단체경기 공군팀 출전 2007년 2월 12일 이재훈, 김환중, 김선기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3월 9일 공군팀 제2회 KeSPA컵 출전 2007년 4월 3일 공군 ACE(Airforce Challenge E-sports)팀 창단 2007년 6월 25일 이주영, 박대만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12월 31일 제 2대 감독 김평강 중위 전역, 제 3대 감독 유성렬 중위 취임 2008년 3월 19일 2007 대한민국 e-SPORTS 대상 페어플레이상 2008년 8월 29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전역 2008년 9월 22일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8년 11월 24일 홍진호, 차재욱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8년 12월 12일 2008 신지식 최우수 단체상 2008년 12월 21일 임요환 전역 2009년 1월 23일 성학승 전역 2009년 2월 16일 박태민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3월 9일 서지훈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4월 17일 이재훈, 김환중, 김선기 전역 2009년 4월 21일 박정석 프로리그 최초 100승 기록 2009년 4월 22일 2009년판 '기네스 세계 기록 게이머편(Guinness World Records Gamer`s Edition) 등재 2009년 5월 25일 민찬기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8월 24일 이주영, 박대만 전역 2009년 10월 26일 박영민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12월 31일 제 3대 감독 유성렬 중위 전역, 제 4대 감독 박대경 중위 취임 2010년 5월 31일 김경모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6월 28일 안기효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7월 4일 오영종 프로리그 100승 기록, 창단 후 최초 프로리그 단일 시즌 두 자리 팀승수 기록 2010년 7월 26일 손석희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8월 30일 이성은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10월 25일 김태훈, 변형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10월 29일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전역 2010년 12월 30일 홍진호, 차재욱 전역 2011년 2월 28일 임진묵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3월 17일 박태민 전역 2011년 4월 1일 코치 김남기 하사 전입 2011년 4월 4일 고인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4월 9일 서지훈 전역 2011년 4월 25일 코치 오동수 중사 전출 2011년 4월 25일 권수현, 이정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6월 30일 제 4대 감독 박대경 중위 전역, 제 5대 감독 송동균 중위 취임 2011년 6월 21일 민찬기 전역 2011년 9월 26일 차명환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10월 24일 김구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11월 15일 박영민 전역 2012년 3월 5일 김승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2년 6월 9일 김경모 전역 2012년 7월 6일 안기효 전역 2012년 8월 2일 손석희 전역 2012년 9월 4일 이성은 전역 2012년 10월 27일 김태훈, 변형태 전역 2013년 2월 27일 임진묵 전역 2013년 4월 3일 고인규 전역 2013년 4월 24일 권수현, 이정현 전역 2013년 9월 25일 차명환 전역 2013년 10월 23일 김구현 전역 2014년 3월 4일 김승현 전역 및 게임단 해체 프로리그 결과[편집] 년도 리그 순위 경기 승 패 벌점 승점 포스트시즌 주요선수 감독 2007 신한은행 전기 12위 22 6 16 0 -28 진출실패 강도경, 최인규,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정철하 2007 신한은행 후기 12위 22 3 19 0 -27 진출실패 강도경,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박대만, 이주영 김평강 2008 신한은행 2008 11위 22 6 16 0 -22 진출실패 강도경,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박대만, 이주영 유성렬 2008-2009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8-09 12위 11 1 10 0 -18 진출실패 이주영,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유성렬 2008-2009 신한은행 08-09 12위 55 9 46 1 -79 진출실패 임요환, 이주영,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유성렬 2009-2010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 12위 11 2 9 0 -22 진출실패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박대경 2009-2010 신한은행 09-10 12위 55 10 45 1 -86 진출실패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박대경 2010-2011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10-11 12위 18 2 16 0 -35 진출실패 박영민,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박대경 2010-2011 신한은행 10-11 10위 54 17 37 0 -46 진출실패 박영민,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박대경 2011-2012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시즌 1 8위 21 6 15 0 -22 진출실패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차명환, 김구현 송동균 2012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Ⅱ 프로리그 시즌 2 8위 21 5 16 0 -33 진출실패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이정현, 차명환, 김구현, 김승현 송동균 역대 팀 감독[편집] 공군 ACE의 감독은 전부 장교로 재임중인 감독이며, 전부 중위가 맡는다. 1대 감독 : 정철하 중위 (재임 기간 : 2007년) 2대 감독 : 김평강 중위 (재임 기간 : 2007년 ~ 2008년) 3대 감독 : 유성렬 중위 (재임 기간 : 2008년 ~ 2009년) 4대 감독 : 박대경 중위 (재임 기간 : 2009년 ~ 2011년) 5대 감독 : 송동균 중위 (재임 기간 : 2011년 ~ 2012년) 역대 팀 코치[편집] 공군 ACE의 코치는 플레잉 코치를 제외하면 전부 부사관 출신이며, 전부 중사, 하사가 맡는다. 1대 코치 : 민태웅 중사, 강도경 플레잉코치(주장 겸임) 2대 코치 : 오동수 중사 3대 코치 : 김남기 하사, 안기효 플레잉코치 공군을 거쳐간 선수들[편집] 1기 2006년 - 강도경, 조형근, 최인규, 임요환, 성학승 - 모두 은퇴 2007년 - 이재훈, 김선기, 김환중, 이주영, 박대만 - 모두 은퇴 2기 2008년 - 박정석, 한동욱, 오영종, 홍진호, 차재욱 - 모두 은퇴 2009년 -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 모두 은퇴 3기 2010년 - 김경모, 안기효, 손석희, 이성은, 변형태, 김태훈 - 손석희 해외 스타2 팀 이적, 나머지 모두 은퇴. 4기 2011년 - 임진묵, 고인규, 권수현, 이정현, 차명환, 김구현 - 모두 은퇴 2012년 - 김승현 - 은퇴 주요 종목[편집] 스타크래프트 트리비아[편집] 공군 ACE의 ACE는 Airforce Challenge E-sports의 약어로, E-Sports에 도전하는 공군을 뜻한다. 창단 당시 ACE로 정한 것은 공군이 전시에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에게 붙여지는 명칭으로 최고가 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공군 ACE의 팀 로고는 공군 최신예 F-15K 전투기가 창공을 비상하는 형상으로 디자인됐고, 선수 유니폼은 공군 빨간마후라의 투혼을 의미하는 붉은색 옷깃과 함께 국산 초음속훈련기 T-50을 연상시키도록 디자인되었다. 세계 최초의 군 소속 프로 게임단(The first military pro-gaming team)으로 기네스북(2009 Guinness World Records Gamer's Edition)에 등재되었다. 최인규는 2007년 5월 6일, 전 시즌 MSL 우승자였던 김택용(당시 MBC게임 히어로, 현 SK 텔레콤 T1)을 제압하고 2003년 7월 5일 KTF 에버컵 프로리그에서 GO팀 소속으로 승리를 거둔 이래 1402일만의 프로리그 승리를 거두었다. 김선기는 2008년 5월 31일 신상문(당시 온게임넷 스파키즈, 현 하이트 엔투스)을 제압하고 2005년 11월 23일 이후 921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이주영은 2009년 5월 17일 하이트 스파키즈전에서 공군 저그 최초로 단일 경기에서 에이스 결정전까지 2승을 거두었다. 홍진호는 2009년 6월 20일 김택용(SK 텔레콤 T1)을 꺾고 2007년 6월 17일 신상문전 이후 735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민찬기는 공군 게이머 최초로 양대 메이저 개인리그(스타리그, MSL)에 동시 진출했다.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2라운드에서 프로리그 사상 최초로 단일 라운드 전패를 기록했다.[6] 박대만(당시 웅진 스타즈, 현 GSL 해설위원)은 2009년 9월 29일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예선전을 통과하며 공군 ACE 출신 최초의 개인리그 진출자가 되었다. 이 팀에 소속되어 있던 김성기는 2010년 5월 스타크래프트 승부 조작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군 검찰 회부와 더불어 KeSPA로부터도 영구제명 징계를 받음에 따라 팀에서도 방출되었다. 그리하여 김성기는 유일하게 전역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공군 ACE를 떠난 선수가 되었다. 김경모는 2010년 12월 19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2라운드 SK텔레콤 T1전에서의 승리로 10승(6패)을 기록하면서, 팀과 개인 공히 16번째 경기만에 10승을 따내어 프로리그 단일 시즌에서 가장 빠른 10승을 기록한 유일한 공군 선수가 되었다. 2010년 12월 25일, 공군은 STX 소울과의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2라운드 경기에서 4:1로 승리하며 라운드 전적 5승 3패를 기록, 2라운드 잔여 경기의 결과와 상관없이 창단 최초로 프로리그 위닝 라운드를 기록하였다. 안기효는 2011년 3월 20일 장윤철(하이트 엔투스)을 꺾고 2009년 1월 28일 이후 781일만의 공식전, 2007년 12월 12일 이후 1194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ABC마트 MSL 2011의 본선에 공군 소속의 민찬기, 김경모, 이성은이 진출하였는데, 공군 소속 3인의 개인리그 진출은 공군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공군 에이스에서 활동하였던 선수 중 전역 후 99%가 은퇴해서 은퇴 양성소로 악명이 높았으며 선수생활 연장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실제로 공군에이스 전역 후 성공적으로 프로게이머로 복귀한 사례가 1%에 불과하다.(박정석, 오영종이 그나마 전역이후 활동하였지만, 두 사람도 결국 은퇴하였다. 이외에도 복귀한 선수도 몇명 있었지만(임요환, 이재훈, 김환중, 홍진호, 민찬기, 임진묵, 김구현) 전부 출전을 하지 않다가 모두 반년도 못가서 은퇴하였다.) 현재는 손석희만이 전역 이후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임단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함께 보기[편집] 대한민국 공군 각주[편집] ↑ 공군 ACE 김성기, "연습 과정에서 스트레스 최고였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포모스》2010년 3월 1일 23시 12분 ↑ 이 날 오전, 신상문이 급성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이트는 신상문이 빠진 상태로 공군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 공군 e스포츠팀 '에이스' 해체된다 ↑ “해체설 도는 공군 에이스, 사실 가능성 높아”. 2013년 12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23일에 확인함.  ↑ 세계 최초의 軍프로게임단 공군 에이스,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Archived 2013년 12월 20일 - 웨이백 머신 《포모스》2012년 10월 27일 ↑ 공군 에이스, 프로리그 최초로 단일 라운드 전패 수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포모스》2010년 1월 18일 20시 34분 vdeh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리그리그개인전 스타리그 MBC게임 스타리그 곰TV 클래식 소닉 스타리그1 아프리카TV 스타리그1 SSL 시리즈1 단체전 프로리그 (1군) 드림리그 (2군) MBC게임 팀리그 위너스리그 경남 - STX컵 마스터즈 조직협회 한국e스포츠협회 게임 개발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게임 배급사 한빛소프트 방송국 OGN MBC 게임 곰TV 아프리카TV SPOTV GAMES 경기장 용산 e-Sports 스타디움 (온게임넷→OGN, 철거됨) 히어로센터 (MBC 게임, 철거됨) 곰TV 목동 스튜디오 (곰TV, 철거됨) ITV 랭킹전 iTV 스튜디오/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야외 특설무대(iTV 경인방송, 철거됨) 프릭 업 스튜디오 (아프리카TV) 넥슨 아레나 (SPOTV GAMES) 방송인OGN 정소림 엄재경 김정민 아프리카TV 박상현 이승원 임성춘 SPOTV GAMES 김철민 한승엽 이성은 과거 게임단 KT 롤스터 STX SouL 웅진 스타즈 SK텔레콤 T1 CJ 엔투스 삼성 칸 제8프로게임단 공군 ACE 이스트로 위메이드 폭스 온게임넷 스파키즈 MBC게임 히어로 화승 OZ 기타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명예의 전당 골든 마우스 MSL 금배지 KeSPA컵 1KeSPA 비공인 리그2012년 9월 22일부로 대한민국의 모든 KeSPA 공인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완전히 종료됨. 단, KeSPA 비공인 리그는 열리고 있음. vdeh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II 리그리그개인전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아프리카TV)) SSL 시리즈 (SPOTV 게임즈) 스타리그 (OGN, 폐지) 단체전 프로리그 (한국e스포츠협회, 폐지)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팀 리그 (e스포츠 연맹, 폐지) 기타 KeSPA컵 조직종목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관련 단체 한국e스포츠협회 e스포츠 연맹 (해체) 방송국 SPO TV 게임즈 아프리카TV(GSL 2016 시즌 1부터 주관중) OGN 곰eXP(GSL 2015 시즌 3까지 주관) 경기장 넥슨 아레나 프릭 업 스튜디오 신도림 TG e스타디움 게임단 진에어 그린윙스 MVP 아프리카 프릭스 ZeNEX oGs SlayerS 공군 ACE TSL NS호서 웅진 스타즈 fOu SouL AZUBU LongZhu 프라임 스베누 삼성 갤럭시 CJ 엔투스 KT 롤스터 SK텔레콤 T1 방송인SPOTV 게임즈 성승헌 채민준 김익근 유대현 고인규 안준영 정인호 아프리카TV 박상현 황영재 박진영 채정원 vdeh 대한민국 공군 본부 참모 총장 차장 구성군직할 기상단 헌병단 항공안전단 정보체계관리단 연구분석평가단 항공우주의료원 공군사관학교 35비행전대 52시험평가전대 53특수비행 91항공시설전대 작전사령부 작전정보통신단 항공우주작전본부 항공지원작전단 7 항공통신전대 37전술정보전대 공중기동정찰사령부 비행단 3훈련 5공중기동 15특수임무 전대 6 SAR 29 전술개발비행 39 전술정찰 공중전투사령부 전투비행단 1 8 10 11 16 17 18 19 20 비행전대 38 전투 방공관제사령부 방공통제전대 31 중앙 32 중앙 33 34 51항공통제비행전대 방공유도탄사령부 방공유도탄여단 1 2 3 군수사령부 군수관리단 군수전산소 종합보급창 정비창 81 항공 82 항공 83 정보통신 85 정밀표준 86 항공전자 60수송전대 교육사령부부대 기본군사훈련단 학생군사교육단 한국항공대학교 한서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영진전문대학 (부사관) 27예비단 학교 항공과학고등학교 공군방공포병학교 공군정보통신학교 군수 1 2 공군행정학교 시설 계룡대 공항 광주 군산 김해 대구 사천 서울 원주 청주 기지 수원 오산 비행장 강릉 서산 성무 예천 중원 그 외 역사 계급 장비 부대 조직 및 편성 목록 육군 해군 특수부대 해외 파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공군_ACE&oldid=24522198" 분류: 2007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2014년 폐지해체한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임단대한민국 공군공군 ACE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7월 4일 (목) 09: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공군 ACE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군 ACE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공군 ACEAirforce Challenge E-sports 창단일 2007년 4월 해체일 2014년 3월 부문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위치 대한민국 외부 링크 공군 ACE(空軍 - , Airforce Challenge E-sports, 공군 에이스)는 대한민국의 前 프로게임단이다. 현존 당시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종목을 운영하였다. 2012년 11월 해체를 선언하여 2014년 3월 4일 공식 해체되었다. 목차 1 역사 1.1 게임단의 창설 1.2 공식전 18연패 1.3 첫 4연승과 두 자리 수 승리 1.4 최강 공군 ACE 1.5 해체 2 게임단 연혁 2.1 주요선수 입대, 전역기록 3 프로리그 결과 4 역대 팀 감독 5 역대 팀 코치 6 공군을 거쳐간 선수들 7 주요 종목 8 트리비아 9 함께 보기 10 각주 역사[편집] 게임단의 창설[편집] 대한민국 공군은 공군에 대한 이미지 제고와 사기 진작을 위해서 2007년 4월 3일 세계 최초로 군 e스포츠팀 공군 ACE(Airforce Challenges E-sports)를 창단했다. Ace로 팀명을 정한 것은 공군에서 전시에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에 붙여지는 명칭인 에이스로 정한것으로 밝혀졌다. 공군 ACE는 e스포츠계의 상무로 일컬어졌고, 군입대를 앞두고 활동이 제한된 선수들이 공군에 지원함으로써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e스포츠의 매개인 스타크래프트의 특성상, 단기간이라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크게 뒤처지기 때문에 병역 문제는 e스포츠계의 걸림돌로 작용해 왔었는데(현재까지 일반병사나 공익근무요원으로의 병역필 이후 복귀에 성공한 선수는 거의 없었다.), 공군의 팀창단으로 지속적인 연습을 가능케 하여 추후 제대 시 게임계로의 복귀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입대를 미루어왔던 임요환, 강도경, 최인규, 이재훈, 이주영, 김선기, 성학승, 김환중, 박대만 등 프로게이머 경력이 오래된 선수들이 입대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자 공군에 지원하였다. 이런 의도 외에도 공군팀은 올드 e스포츠 팬들에게도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세대교체와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는 e스포츠계에서, 과거의 유명 선수들은 신인들에 밀려 개인전은 물론 프로리그에도 출전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공군 팀의 창단으로, 그러한 올드 게이머들이 주전으로 기용되고, 그들의 모습을 그리워 하는 팬들을 e스포츠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실제로 공군 입대 후 노장들이 기대 이상의 기량으로 선전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특히 임요환은 군 복무 중이었던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 리그에서 11승 10패로 염보성과 함께 테란 다승 공동 1위로 건재함을 과시하였으며 수많은 명경기(vs 구성훈,윤용태,이영호,강민,마재윤,김택용 등 )를 만들어냈다. 또한 2007년 5월 6일 김택용(SK 텔레콤 T1)을 상대로 고스트의 락다운까지 사용하며 완벽한 모습을 선보인 최인규와 2009년 6월 20일 역시 김택용을 왕년의 폭풍으로 제압한 홍진호의 승리는 많은 e스포츠 팬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염보성과 이재호(이상 MBC게임 히어로)에게 팀내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젊은 나이임에도 공군행을 택한 민찬기의 입대 이후로는 공군 ACE에 올드 게이머들 외에도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후보 선수들이 합류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러한 부류의 선수들은 비록 상대적으로 높은 지명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감춰졌던 자신의 기량을 십분 발휘하며 팀의 유효한 전력으로 자리잡았다. 공식전 18연패[편집] 공군은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시즌에서 1라운드에서 7패를 거둔 후 2라운드 전패, 그리고 3라운드도 7전 전패행진을 해왔다. 특히 다른 프로게임단의 에이스가 아닌 선수(하이트 스파키즈의 이호준, 위메이드 폭스의 전태양 등)에게 올킬을 당하는 수모를 보였고 이 기록은 프로리그 사상 가장 많은 연패 기록이 되었다.(기존 최다 팀대항 연패는 이스트로와 STX SouL이 이룬 14연패였다.) 2010년 3월 1일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 화승 OZ vs 공군 전에서 화승은 프로리그 순위와 위너스 리그 순위가 낮았기 때문에 득실의 확보를 위해 선봉에 이제동을 내보냈으나, 이제동은 1킬 후 김성기의 교묘한 체제 교란(자신의 체제가 바이오닉인 것처럼 기만한 후 2팩토리에서 벌처를 생산, 메카닉 체제로 가는 척하다가 배럭스를 늘려서 바이오닉으로 다시 체제전환)에 속아넘어가며 스나이핑당하고 말았다. 그 후 화승은 차봉으로 구성훈을 내보냈고, 김성기를 잡아낸 구성훈은 공군의 중견 박정석에 의하여 또 스나이핑 당하였다. 박정석은 화승의 중견 김경모(현 공군 ACE)에게 패배했으나 대장으로 출격한 민찬기가 김경모와 박준오를 잡아냄으로써 공군은 4:3으로 7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화승을 제압하고 18연패의 사슬을 끊는 귀중한 1승을 거뒀다. 이 날 인터뷰와 해설진에 의하여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김성기는 연습 상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제동을 잡아내기 위해서 팀원들이 팀밀리(다수 유저가 한 종족을 컨트롤하는 경기방식)로 연습을 도와 줬다고 하여 감동을 안겼다. 또한, 3월 6일에는 SK텔레콤 T1(vs 최호선, 박재혁, 이승석, 정명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둠으로서 값진 2연승을 거둠과 더불어, 2007년 4월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참가 이래 프로리그에서 단 한 차례도 이겨 보지 못했던 SK텔레콤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를 기록했다. 아울러 공군은 이날 승리로 프로리그 참가 3년 만에 전 프로게임단을 상대로 승리하는 성과를 얻었다. [1] 첫 4연승과 두 자리 수 승리[편집] 공군은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시즌 중반 프로리그 역사상 최다 연패인 18연패를 기록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더불어 2010년 e스포츠의 판도를 크게 뒤흔든 승부조작 사건에 공군 소속 김성기가 연루되어 로스터에서 제외되면서 최악의 침체를 이어갔다. 이런 분위기는 5라운드에 들어서도 10연패를 기록하며 계속되는 듯 하였다. 그런데 2010년 6월 7일 1위팀 KT 롤스터 전에서 공군은 극적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1세트에서 홍진호는 우정호를 기습적인 2cm 드랍 작전을 통해 무너뜨렸다. 3경기에서는 박태민이 김재춘을 상대로 깔끔한 경기력으로 승리하였다. 하지만, 4세트에서는 공군의 에이스였던 민찬기가 '최종병기' 이영호에게 완패를 당하면서 승부는 에이스 결정전에서 판가름나게 되었고, 에이스 결정전의 대진이 민찬기와 이영호의 재대결로 결정되면서, 4라운드에서도 이영호에게 민찬기가 두 차례 패배하며 승리를 내준 바 있었던 공군의 승리는 불투명해 보였다. 그러나 민찬기는 4세트에서와는 확연히 달라진 엄청난 경기력으로 시종일관 이영호를 찍어누르며 압승을 거두며, 팀의 10연패를 끊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SK텔레콤 T1과 삼성전자 칸에게 패배한 공군은 2010년 6월 19일 인상적인 캐리어 운영으로 이재호를 제압한 박영민과 박태민, 민찬기의 활약으로 MBC게임 히어로를 3:1로 물리쳤다. 다음 경기인 하이트 스파키즈전에서는 상대팀의 에이스 신상문이 불참하는 행운 속에[2] 5개월만의 승리를 기록한 서지훈과 민찬기, 홍진호의 활약으로 3:1로 승리했다. 이어진 화승 OZ전에서는 대 저그전 최강자 이제동을 꺾는 기염을 토한 홍진호를 앞세워 또다시 3:1로 승리하며 3연승을 기록했으며, 결국 2010년 7월 4일 STX Soul과의 경기에서도 오영종의 프로리그 통산 100승에 이은 민찬기, 홍진호의 승리로 3:1로 승리함으로써 공군 창단 최초 4연승과 함께 프로리그 참가 이후 최초의 두 자리 승수 달성에 성공하게 되었다. 민찬기와 홍진호는 연승 기간 중 각각 3전 전승을 기록하며 4연승을 진두지휘했다. 공군은 남겨진 두 경기를 모두 패배하며 10승 45패로 09-10 시즌을 마감하였지만, 시즌 막판 인상적인 투혼을 보여 주며 차기 시즌에 대한 전망을 밝게 했다. 최강 공군 ACE[편집] 2기 공군 멤버의 최고참 박정석(전역후 KT 롤스터로 복귀)과 오영종(화승 오즈로 복귀), 한동욱(은퇴)이 전역하였고, 이 공백을 김경모와 안기효, 손석희, 이성은의 전입으로 메우며 공군은 새로운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시즌을 시작하였다. 프로게이머 경력이 미미하거나 기량이 매우 저하된 신병들의 유입으로 인해 공군에의 기대치는 이전보다도 낮았고, 예상대로 공군은 2승 7패를 기록하며 1라운드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주목받지 않았던 김경모가 1라운드부터 5할이 넘는 승률을 유지하며 김윤환(STX SouL), 염보성(MBC게임 히어로) 등을 꺾어내는 등의 가능성을 보여 주며 새로운 에이스로 등극, 팀체질 개선이 순조로움을 입증하였다. 이어진 2라운드는 공군 역사상 최고의 기세를 뽐낸 라운드였다. 지난 2년에 걸쳐 김택용, 이제동, 김윤환, 신상문 등의 에이스급 선수를 상대로 거짓말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홍진호가 2010년 12월 30일 KT 롤스터로 전역하였으나, 에이스 김경모는 2라운드까지 공군의 프로리그 전경기에 출전, 11승 8패의 고승률을 유지하며 전체 다승 순위 공동 12위를 유지, 공군 역사상 최초의 5할 이상의 승률을 가진 선수가 되었다. 김경모를 가리켜 과거 팀동료 이제동(화승 오즈)의 군대 버전이라는 뜻의 '군제동'이라 일컫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환골탈태한 프로토스전을 선보이며 김구현(당시 STX Soul/현 공군Ace)에게 역전승을 거두는 등 2라운드 전적 4승 3패를 기록한 이성은과 3승 1패를 기록한 손석희 역시 팀의 상승세를 이끈 한 축이었다. 2라운드 들어 전입한 변형태와 김태훈 역시 각각 공군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상승세에 날개를 얹어 주었다. 또한 이전까지 테란에게 저그가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던 맵 '벤젠'에서 강호 구성훈(화승 오즈)과 전태양(위메이드 폭스)에 이어 이재호(당시 MBC게임 히어로, 현 웅진 스타즈)까지 훌륭한 경기력으로 연파한 박태민(은퇴, 온게임넷 해설위원으로 전향)이 활약하였고, 3개월만에 출전한 서지훈 역시 탑클래스 게이머 정명훈(SK 텔레콤 T1)을 완벽하게 찍어누르는 등 선임병들도 제 몫을 해 줬다. 2연승과 3연승을 한 차례씩 기록하였고, 2연속 4:0 승리도 기록했던 공군의 2라운드 성적은 5승 4패로 팀 역사상 최초의 위닝 라운드가 달성되었고, 중간 순위는 7승 11패로 8위, 포스트시즌 진출권인 6위팀을 1경기 차이를 두고 추격하는 대파란을 연출했다. 특히 승패에 비해 매우 양호한 세트 득실(-3)을 보유하며, 포스트시즌행에 대한 희망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에이스 김경모의 패배에도 불구 나머지 세트를 싹쓸이하며 4:1로 STX SouL을 꺾는 등의 저력을 보여 줬던 2010년 말의 공군 에이스를 두고 사람들은 '역대 최강 공군'이라는 평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자연전 방식의 위너스 리그에 들어서며 공군의 예상치 못한 몰락이 시작되었다. 공군은 전 라운드 마지막 삼성전자 칸전의 패배를 더해 16연패를 기록하며 끝도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경기 내용은 더욱 처참했다. 공군은 3라운드 9경기 중 무려 5차례의 올킬 패배(대 KT 롤스터(김대엽), 폭스(전태양), SK 텔레콤 T1(김택용), MBC게임 히어로(박수범), 화승 오즈(구성훈)전)를 당했으며, 3:4 패배조차 한 번도 없을 정도의 무기력함으로 일관했다. 이는 멀티킬이 가능한 확실한 에이스가 부재한 팀 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14연패 시점까지의 개인 연승이 팀을 통틀어 김경모의 2연승 두 차례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선수들은 잘 풀려도 '1승 카드'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이 뼈아팠다. 전 라운드에서 안정적인 승수를 챙겨 주던 김경모도 이전 라운드에 보이지 않았던 대 저그전의 약세가 지속되면서 대 저그전 7연패를 기록, 스나이핑이 가능한 승자 연전 방식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며 연패 기간 성적 8승 14패에 머물며 팀을 구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또한 이성은은 연패 기간 위너스 리그 10전 전패와 프로리그 11연패를 기록하며 팀 몰락의 원흉으로 지목받았다. 위너스리그 전패가 유력해 보였던 공군은 개인리그 예선을 통해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2011년 3월 3일 펼쳐진 2010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예선전에서 공군의 주력 선수들인 민찬기,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이 예상을 뒤집고 예선 통과에 성공했다. 특히 민찬기는 오른팔에 깁스를 한 부상 중에도 예선을 통과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공군은 보다 끈질긴 모습을 보이며 연패 탈출에 사력을 다했다. 3월 5일 벌어진 웅진 스타즈와의 경기에서 공군은 선봉 이성은이 11연패를 끊어내고 2킬, 차봉 손석희가 웅진 중견 이재호를 잡아내며 위너스 리그 10-11 시즌 최초로 한 경기 3세트를 따 내는 데 성공했다. 3월 8일의 폭스와의 경기에선 폭스 선봉 신노열에게 3명이 무너지며 패색이 짙었으나, 대장으로 출격한 이성은이 역 3킬을 해내며 위너스 리그 10-11 시즌 최초로 개인 3킬 달성에 성공했다. 비록 이 두 경기는 각 팀의 에이스 김명운과 전태양을 극복하지 못한 공군이 패배했지만, 인상적인 경기들을 선보이며 두 경기 연속으로 매치포인트까지 상대를 몰아붙이며 공군의 의지를 팬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특히 두 경기의 역전승을 포함 3킬을 달성하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태양에게 항전한 이성은의 투혼은 e-스포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공군은 3월 12일 변형태의 선봉 승리와 차봉 손석희의 3킬에 힘입어 MBC게임 히어로를 4:1로 격파, 16연패를 마감하는 귀중한 승리를 달성했고, 위너스 리그 최종전에선 위너스 리그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하이트 엔투스를 4:2로 물리치며 2승 16패로 위너스 리그를 마감한다. 위너스 리그의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인해 10-11 시즌에도 공군은 사실상 포스트시즌 진출은 물론 최하위 탈출도 힘든 처지에 놓였으나, 위너스 리그의 마지막에 이르러 팀 분위기 쇄신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고 가장 좋은 페이스를 보였던 프로리그 방식이 다시 사용된다는 점에 희망을 걸어 볼 수 있겠다. 10-11리그도 순위는 10위를 하였으나 역대 최고인 17승을 기록하였고, 또한 선수층이 더욱 두터워져서 공군이 예전처럼 약체팀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게 되었다. 특히 이성은과 변형태, 김경모의 맹활약이 빛을 발했다. 다음 시즌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보로 갈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구현과 차명환이 다음 시즌부터 합류하게 되어 공군의 전력은 더 탄탄해질것으로 보였다. 2011-2012 SK Planet 프로리그 개막전에서 KT를 상대로 역스윕 (2:0 스코에서 3경기를 내리이겨서 3:2로 이기는) 파란을 일으켰으나, 그이후에 제8게임단과 CJ에게 2연패를 당해서 2011년 12월 11일 현재 프로리그 순위 6위를 기록중이다. 그 후 최강의 엔트리 카드를 구사하여 승을 챙겨 중위권 순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1라운드까지는 중위권 성적을 보였으나, 2,3라운드에서 계속되는 연패와 팀 내부의 문제 등 여러가지 악조건으로 인해 SK플래닛 프로리그에서도 꼴찌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해체[편집] 공군 ACE는 이미 2007년 말부터 국방부 종합감사에서 "프로게임단 '공군 ACE'가 원래 편제기능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후 2012년까지 5년동안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2년 7월 23일, 아시아경제는 공군 관계자가 "에이스팀은 군 입장에서 젊은 층을 상대로 이미지 개선을 효과를 거두었지만 게임시장의 변화에 따라 팀을 해체할 수 밖에 없다"라면서 현재 더 이상 신병을 모집하고 있지 않아 자연스럽게 해체될 전망이라 보도했으며[3], e스포츠 전문 매체 포모스도 사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도했다.[4] 실제로 2011년 11월에 열린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11-12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2012년 한 해 동안 신병을 3월 5일에 1명만 모집하고 이후로는 모집을 하지 않았다. 결국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12-13부터 불참을 선언하면서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기존 공군 ACE 소속의 프로게이머들은 보직을 변경 후 2013년 7월까지 군복무를 이어나갔고 3월 5일에 마지막으로 입단했던 김승현이 2014년 3월 4일에 제대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5] 게임단 연혁[편집] 주요선수 입대, 전역기록[편집] 2006년 6월 12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6년 7월 25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공군중앙전산소 e-sports팀으로 배속 2006년 10월 9일 임요환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6년 11월 13일 성학승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1월 27일 SuperFight 단체경기 공군팀 출전 2007년 2월 12일 이재훈, 김환중, 김선기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3월 9일 공군팀 제2회 KeSPA컵 출전 2007년 4월 3일 공군 ACE(Airforce Challenge E-sports)팀 창단 2007년 6월 25일 이주영, 박대만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7년 12월 31일 제 2대 감독 김평강 중위 전역, 제 3대 감독 유성렬 중위 취임 2008년 3월 19일 2007 대한민국 e-SPORTS 대상 페어플레이상 2008년 8월 29일 조형근, 강도경, 최인규 전역 2008년 9월 22일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8년 11월 24일 홍진호, 차재욱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8년 12월 12일 2008 신지식 최우수 단체상 2008년 12월 21일 임요환 전역 2009년 1월 23일 성학승 전역 2009년 2월 16일 박태민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3월 9일 서지훈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4월 17일 이재훈, 김환중, 김선기 전역 2009년 4월 21일 박정석 프로리그 최초 100승 기록 2009년 4월 22일 2009년판 '기네스 세계 기록 게이머편(Guinness World Records Gamer`s Edition) 등재 2009년 5월 25일 민찬기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8월 24일 이주영, 박대만 전역 2009년 10월 26일 박영민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09년 12월 31일 제 3대 감독 유성렬 중위 전역, 제 4대 감독 박대경 중위 취임 2010년 5월 31일 김경모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6월 28일 안기효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7월 4일 오영종 프로리그 100승 기록, 창단 후 최초 프로리그 단일 시즌 두 자리 팀승수 기록 2010년 7월 26일 손석희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8월 30일 이성은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10월 25일 김태훈, 변형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0년 10월 29일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전역 2010년 12월 30일 홍진호, 차재욱 전역 2011년 2월 28일 임진묵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3월 17일 박태민 전역 2011년 4월 1일 코치 김남기 하사 전입 2011년 4월 4일 고인규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4월 9일 서지훈 전역 2011년 4월 25일 코치 오동수 중사 전출 2011년 4월 25일 권수현, 이정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6월 30일 제 4대 감독 박대경 중위 전역, 제 5대 감독 송동균 중위 취임 2011년 6월 21일 민찬기 전역 2011년 9월 26일 차명환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10월 24일 김구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1년 11월 15일 박영민 전역 2012년 3월 5일 김승현 공군기본군사훈련단 입대 2012년 6월 9일 김경모 전역 2012년 7월 6일 안기효 전역 2012년 8월 2일 손석희 전역 2012년 9월 4일 이성은 전역 2012년 10월 27일 김태훈, 변형태 전역 2013년 2월 27일 임진묵 전역 2013년 4월 3일 고인규 전역 2013년 4월 24일 권수현, 이정현 전역 2013년 9월 25일 차명환 전역 2013년 10월 23일 김구현 전역 2014년 3월 4일 김승현 전역 및 게임단 해체 프로리그 결과[편집] 년도 리그 순위 경기 승 패 벌점 승점 포스트시즌 주요선수 감독 2007 신한은행 전기 12위 22 6 16 0 -28 진출실패 강도경, 최인규,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정철하 2007 신한은행 후기 12위 22 3 19 0 -27 진출실패 강도경,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박대만, 이주영 김평강 2008 신한은행 2008 11위 22 6 16 0 -22 진출실패 강도경, 조형근, 임요환, 성학승, 박대만, 이주영 유성렬 2008-2009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8-09 12위 11 1 10 0 -18 진출실패 이주영,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유성렬 2008-2009 신한은행 08-09 12위 55 9 46 1 -79 진출실패 임요환, 이주영,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유성렬 2009-2010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 12위 11 2 9 0 -22 진출실패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박대경 2009-2010 신한은행 09-10 12위 55 10 45 1 -86 진출실패 박정석, 오영종, 한동욱, 홍진호,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박대경 2010-2011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10-11 12위 18 2 16 0 -35 진출실패 박영민,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박대경 2010-2011 신한은행 10-11 10위 54 17 37 0 -46 진출실패 박영민,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박대경 2011-2012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시즌 1 8위 21 6 15 0 -22 진출실패 김경모, 손석희,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차명환, 김구현 송동균 2012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Ⅱ 프로리그 시즌 2 8위 21 5 16 0 -33 진출실패 이성은, 김태훈, 변형태, 임진묵, 고인규, 이정현, 차명환, 김구현, 김승현 송동균 역대 팀 감독[편집] 공군 ACE의 감독은 전부 장교로 재임중인 감독이며, 전부 중위가 맡는다. 1대 감독 : 정철하 중위 (재임 기간 : 2007년) 2대 감독 : 김평강 중위 (재임 기간 : 2007년 ~ 2008년) 3대 감독 : 유성렬 중위 (재임 기간 : 2008년 ~ 2009년) 4대 감독 : 박대경 중위 (재임 기간 : 2009년 ~ 2011년) 5대 감독 : 송동균 중위 (재임 기간 : 2011년 ~ 2012년) 역대 팀 코치[편집] 공군 ACE의 코치는 플레잉 코치를 제외하면 전부 부사관 출신이며, 전부 중사, 하사가 맡는다. 1대 코치 : 민태웅 중사, 강도경 플레잉코치(주장 겸임) 2대 코치 : 오동수 중사 3대 코치 : 김남기 하사, 안기효 플레잉코치 공군을 거쳐간 선수들[편집] 1기 2006년 - 강도경, 조형근, 최인규, 임요환, 성학승 - 모두 은퇴 2007년 - 이재훈, 김선기, 김환중, 이주영, 박대만 - 모두 은퇴 2기 2008년 - 박정석, 한동욱, 오영종, 홍진호, 차재욱 - 모두 은퇴 2009년 - 박태민, 서지훈, 민찬기, 박영민 - 모두 은퇴 3기 2010년 - 김경모, 안기효, 손석희, 이성은, 변형태, 김태훈 - 손석희 해외 스타2 팀 이적, 나머지 모두 은퇴. 4기 2011년 - 임진묵, 고인규, 권수현, 이정현, 차명환, 김구현 - 모두 은퇴 2012년 - 김승현 - 은퇴 주요 종목[편집] 스타크래프트 트리비아[편집] 공군 ACE의 ACE는 Airforce Challenge E-sports의 약어로, E-Sports에 도전하는 공군을 뜻한다. 창단 당시 ACE로 정한 것은 공군이 전시에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에게 붙여지는 명칭으로 최고가 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공군 ACE의 팀 로고는 공군 최신예 F-15K 전투기가 창공을 비상하는 형상으로 디자인됐고, 선수 유니폼은 공군 빨간마후라의 투혼을 의미하는 붉은색 옷깃과 함께 국산 초음속훈련기 T-50을 연상시키도록 디자인되었다. 세계 최초의 군 소속 프로 게임단(The first military pro-gaming team)으로 기네스북(2009 Guinness World Records Gamer's Edition)에 등재되었다. 최인규는 2007년 5월 6일, 전 시즌 MSL 우승자였던 김택용(당시 MBC게임 히어로, 현 SK 텔레콤 T1)을 제압하고 2003년 7월 5일 KTF 에버컵 프로리그에서 GO팀 소속으로 승리를 거둔 이래 1402일만의 프로리그 승리를 거두었다. 김선기는 2008년 5월 31일 신상문(당시 온게임넷 스파키즈, 현 하이트 엔투스)을 제압하고 2005년 11월 23일 이후 921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이주영은 2009년 5월 17일 하이트 스파키즈전에서 공군 저그 최초로 단일 경기에서 에이스 결정전까지 2승을 거두었다. 홍진호는 2009년 6월 20일 김택용(SK 텔레콤 T1)을 꺾고 2007년 6월 17일 신상문전 이후 735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민찬기는 공군 게이머 최초로 양대 메이저 개인리그(스타리그, MSL)에 동시 진출했다.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2라운드에서 프로리그 사상 최초로 단일 라운드 전패를 기록했다.[6] 박대만(당시 웅진 스타즈, 현 GSL 해설위원)은 2009년 9월 29일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예선전을 통과하며 공군 ACE 출신 최초의 개인리그 진출자가 되었다. 이 팀에 소속되어 있던 김성기는 2010년 5월 스타크래프트 승부 조작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군 검찰 회부와 더불어 KeSPA로부터도 영구제명 징계를 받음에 따라 팀에서도 방출되었다. 그리하여 김성기는 유일하게 전역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공군 ACE를 떠난 선수가 되었다. 김경모는 2010년 12월 19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2라운드 SK텔레콤 T1전에서의 승리로 10승(6패)을 기록하면서, 팀과 개인 공히 16번째 경기만에 10승을 따내어 프로리그 단일 시즌에서 가장 빠른 10승을 기록한 유일한 공군 선수가 되었다. 2010년 12월 25일, 공군은 STX 소울과의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2라운드 경기에서 4:1로 승리하며 라운드 전적 5승 3패를 기록, 2라운드 잔여 경기의 결과와 상관없이 창단 최초로 프로리그 위닝 라운드를 기록하였다. 안기효는 2011년 3월 20일 장윤철(하이트 엔투스)을 꺾고 2009년 1월 28일 이후 781일만의 공식전, 2007년 12월 12일 이후 1194일만의 프로리그 개인전 승리를 거두었다. ABC마트 MSL 2011의 본선에 공군 소속의 민찬기, 김경모, 이성은이 진출하였는데, 공군 소속 3인의 개인리그 진출은 공군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공군 에이스에서 활동하였던 선수 중 전역 후 99%가 은퇴해서 은퇴 양성소로 악명이 높았으며 선수생활 연장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실제로 공군에이스 전역 후 성공적으로 프로게이머로 복귀한 사례가 1%에 불과하다.(박정석, 오영종이 그나마 전역이후 활동하였지만, 두 사람도 결국 은퇴하였다. 이외에도 복귀한 선수도 몇명 있었지만(임요환, 이재훈, 김환중, 홍진호, 민찬기, 임진묵, 김구현) 전부 출전을 하지 않다가 모두 반년도 못가서 은퇴하였다.) 현재는 손석희만이 전역 이후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임단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함께 보기[편집] 대한민국 공군 각주[편집] ↑ 공군 ACE 김성기, "연습 과정에서 스트레스 최고였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포모스》2010년 3월 1일 23시 12분 ↑ 이 날 오전, 신상문이 급성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이트는 신상문이 빠진 상태로 공군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 공군 e스포츠팀 '에이스' 해체된다 ↑ “해체설 도는 공군 에이스, 사실 가능성 높아”. 2013년 12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23일에 확인함.  ↑ 세계 최초의 軍프로게임단 공군 에이스,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Archived 2013년 12월 20일 - 웨이백 머신 《포모스》2012년 10월 27일 ↑ 공군 에이스, 프로리그 최초로 단일 라운드 전패 수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포모스》2010년 1월 18일 20시 34분 vdeh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리그리그개인전 스타리그 MBC게임 스타리그 곰TV 클래식 소닉 스타리그1 아프리카TV 스타리그1 SSL 시리즈1 단체전 프로리그 (1군) 드림리그 (2군) MBC게임 팀리그 위너스리그 경남 - STX컵 마스터즈 조직협회 한국e스포츠협회 게임 개발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게임 배급사 한빛소프트 방송국 OGN MBC 게임 곰TV 아프리카TV SPOTV GAMES 경기장 용산 e-Sports 스타디움 (온게임넷→OGN, 철거됨) 히어로센터 (MBC 게임, 철거됨) 곰TV 목동 스튜디오 (곰TV, 철거됨) ITV 랭킹전 iTV 스튜디오/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야외 특설무대(iTV 경인방송, 철거됨) 프릭 업 스튜디오 (아프리카TV) 넥슨 아레나 (SPOTV GAMES) 방송인OGN 정소림 엄재경 김정민 아프리카TV 박상현 이승원 임성춘 SPOTV GAMES 김철민 한승엽 이성은 과거 게임단 KT 롤스터 STX SouL 웅진 스타즈 SK텔레콤 T1 CJ 엔투스 삼성 칸 제8프로게임단 공군 ACE 이스트로 위메이드 폭스 온게임넷 스파키즈 MBC게임 히어로 화승 OZ 기타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명예의 전당 골든 마우스 MSL 금배지 KeSPA컵 1KeSPA 비공인 리그2012년 9월 22일부로 대한민국의 모든 KeSPA 공인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완전히 종료됨. 단, KeSPA 비공인 리그는 열리고 있음. vdeh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II 리그리그개인전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아프리카TV)) SSL 시리즈 (SPOTV 게임즈) 스타리그 (OGN, 폐지) 단체전 프로리그 (한국e스포츠협회, 폐지)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팀 리그 (e스포츠 연맹, 폐지) 기타 KeSPA컵 조직종목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관련 단체 한국e스포츠협회 e스포츠 연맹 (해체) 방송국 SPO TV 게임즈 아프리카TV(GSL 2016 시즌 1부터 주관중) OGN 곰eXP(GSL 2015 시즌 3까지 주관) 경기장 넥슨 아레나 프릭 업 스튜디오 신도림 TG e스타디움 게임단 진에어 그린윙스 MVP 아프리카 프릭스 ZeNEX oGs SlayerS 공군 ACE TSL NS호서 웅진 스타즈 fOu SouL AZUBU LongZhu 프라임 스베누 삼성 갤럭시 CJ 엔투스 KT 롤스터 SK텔레콤 T1 방송인SPOTV 게임즈 성승헌 채민준 김익근 유대현 고인규 안준영 정인호 아프리카TV 박상현 황영재 박진영 채정원 vdeh 대한민국 공군 본부 참모 총장 차장 구성군직할 기상단 헌병단 항공안전단 정보체계관리단 연구분석평가단 항공우주의료원 공군사관학교 35비행전대 52시험평가전대 53특수비행 91항공시설전대 작전사령부 작전정보통신단 항공우주작전본부 항공지원작전단 7 항공통신전대 37전술정보전대 공중기동정찰사령부 비행단 3훈련 5공중기동 15특수임무 전대 6 SAR 29 전술개발비행 39 전술정찰 공중전투사령부 전투비행단 1 8 10 11 16 17 18 19 20 비행전대 38 전투 방공관제사령부 방공통제전대 31 중앙 32 중앙 33 34 51항공통제비행전대 방공유도탄사령부 방공유도탄여단 1 2 3 군수사령부 군수관리단 군수전산소 종합보급창 정비창 81 항공 82 항공 83 정보통신 85 정밀표준 86 항공전자 60수송전대 교육사령부부대 기본군사훈련단 학생군사교육단 한국항공대학교 한서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영진전문대학 (부사관) 27예비단 학교 항공과학고등학교 공군방공포병학교 공군정보통신학교 군수 1 2 공군행정학교 시설 계룡대 공항 광주 군산 김해 대구 사천 서울 원주 청주 기지 수원 오산 비행장 강릉 서산 성무 예천 중원 그 외 역사 계급 장비 부대 조직 및 편성 목록 육군 해군 특수부대 해외 파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공군_ACE&oldid=24522198" 분류: 2007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2014년 폐지해체한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임단대한민국 공군공군 ACE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7월 4일 (목) 09: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928년 동계 올림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28년 동계 올림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28년 동계 올림픽대회 제2회 동계 올림픽 경기 대회개최국 스위스개최 도시 장크트모리츠참가국 25개국참가 선수 464명(남자: 438명, 여자: 26명)경기 종목 6개 종목, 14개 세부 종목개막식 1928년 2월 11일폐막식 1928년 2월 19일 개회 선언 에드문트 슐테스 대통령선수 선서 한스 아이덴벤츠주경기장 장크트모리츠 올림픽 아이스링크겨울 <  샤모니 1924 레이크플래시드 1932  > 1928년 동계 올림픽(영어: 1928 Winter Olympics, II Olympic Winter Games, 독일어: Olympische Winterspiele 1928, 프랑스어: Jeux olympiques d'hiver de 1928, 이탈리아어: II Giochi olimpici invernali)은 1928년 2월 11일부터 1928년 2월 19일까지 스위스 장크트모리츠에서 개최된 동계 올림픽이다. 전 세계 25개국이 참가하였다. 목차 1 경기 장소 2 참가국 3 종목 3.1 시범 종목 4 메달 순위 5 외부 링크 경기 장소[편집] 장크트모리츠 주변의 산 크레스타 런 장크트모리츠 올림픽 스키 점프대 장크트모리츠 아이스링크 장크트모리츠-세레리나 올림픽 봅런 참가국[편집] 1928년 동계 올림픽에는 다음과 같은 국가가 참가하였다. 아르헨티나, 에스토니아, 독일, 일본,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 멕시코, 네덜란드, 루마니아 9개국이 처음으로 동계 올림픽에 참가했다. 참가국 목록 아르헨티나 (10) 오스트리아 (39) 벨기에 (25) 캐나다 (23) 에스토니아 (2) 핀란드 (18) 프랑스 (38) 영국 (32) 독일 (44) 헝가리 (13) 이탈리아 (13) 일본 (6) 라트비아 (1) 리투아니아 (1) 룩셈부르크 (5) 멕시코 (5) 네덜란드 (7) 노르웨이 (25) 폴란드 (26) 루마니아 (10) 스위스 (41) (개최국) 스웨덴 (24) 체코슬로바키아 (29) 미국 (24) 유고슬라비아 (6) 종목[편집] 봅슬레이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크로스컨트리 노르딕 복합 스키 점프 스피드 스케이팅 스켈레톤 시범 종목[편집] 밀리터리 패트롤 스키 저링 메달 순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28년 동계 올림픽 메달 집계입니다. 1928년 동계 올림픽 메달 집계 순위 국가         합계 1 노르웨이 6 4 5 15 2 미국 2 2 2 6 3 스웨덴 2 2 1 5 4 핀란드 2 1 1 4 5 캐나다 1 0 0 1 5 프랑스 1 0 0 1 7 오스트리아 0 3 1 4 8 벨기에 0 0 1 1 8 체코슬로바키아 0 0 1 1 8 독일 0 0 1 1 8 영국 0 0 1 1 8 스위스 0 0 1 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1928년 동계 올림픽 (영어) 1928년 동계 올림픽 프로그램 동계 올림픽 이전 대회 1928년 동계 올림픽장크트모리츠 1928 다음 대회 샤모니 1924 레이크플래시드 1932 vdeh올림픽 경기 종목 경기장 메달 메달 집계 메달리스트 의식 상징 개최지 선정 IOC IOC 총회 NOC 하계 올림픽 1896 1900 1904 (1906) 1908 1912 1916 1920 1924 1928 1932 1936 1940 1944 1948 1952 1956 1960 1964 1968 1972 1976 1980 1984 1988 1992 1996 2000 2004 2008 2012 2016 2020 2024 2028 2032 동계 올림픽 1924 1928 1932 1936 1940 1944 1948 1952 1956 1960 1964 1968 1972 1976 1980 1984 1988 1992 1994 1998 2002 2006 2010 2014 2018 2022 2026 2030 취소선 : 취소된 올림픽, () : 중간 올림픽 vdeh1928년 동계 올림픽 경기 종목 노르딕복합 밀리터리패트롤¹ 봅슬레이 스켈레톤 스키저링¹ 스키점프 스피드스케이팅 아이스하키 크로스컨트리 피겨스케이팅 ¹ 시범 종목 vdeh1928년 동계 올림픽 선수단아메리카 멕시코 미국 아르헨티나 캐나다 아시아일본유럽 네덜란드 노르웨이 독일 라트비아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에스토니아 영국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핀란드 프랑스 헝가리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32342401 LCCN: n95119729 GND: 10107265-X BNF: cb13511718w (데이터) NKC: xx009805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28년_동계_올림픽&oldid=23829308" 분류: 1928년 동계 올림픽스위스에서 개최된 스포츠 대회1928년 2월1928년 종합 스포츠 경기 대회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이탈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АҧсшәаAfrikaansAragonés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Олык марий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Саха тылаSicilianu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9일 (토) 10:4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파울루 프레이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파울루 프레이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파울루 프레이리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년 9월 21일 - 1997년 5월 2일)은 브라질의 교육학자이다. 목차 1 약력 2 주요활동 3 한국에 번역된 저서 4 각주 약력[편집] 1921년 브라질 페르남부쿠주 헤시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9년 대공황을 만나 빈곤 및 기아를 경험하게 되며, 빈민 문제와 대중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3년 헤시피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사건 하나만을 맡은 후 은퇴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농부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삶, 생활을 변화시키는 의식화의 수단으로 읽기/쓰기를 가르친다는 참신한 교육운동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둔다. 주요활동[편집] 프레이리는 첫 교육 활동으로 1946년 페르남부르크 주 사회봉사기구인 SESI(Service Social da Industria)에서 시작하였고 1947년에는 도회지 공장노동자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성인들의 비문해 문제 및 민중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9년 프레이리는 헤시페 대학에서 「오늘날 브라질의 교육」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논문 통해서 그가 개진해 나가려는 교육 사상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1962년에는 헤시페 지역의 민중문화 운동을 위해 설립된 '신문화확장사업부(New Cultureal Extension Service)'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안지초스(Angicos) 지역에서 45일간의 문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농촌지역 농장 일꾼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하였다. 1964년 프레이리는 브라질 교육부의 ‘국가 문해 교육프로그램(National Literacy Program)'의 수반 직위를 담당하게 되어 브라질 200만 명의 비문해 노동자 들을 대상으로 문화 써클을 결정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것이 확장되어 같은 해 국민문해교육프로그램에 따라서 프레이리의 문해교육 방법이 전 국가 차원에서 500만 명에 이르는 비문해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1] 이처럼 프레이리는 문해 교육 캠페인과 교육 운동을 펼치고 여러 정치·교육사업에 관여함으로써 국제적인 규모에서 교육학의 의미·역사 형성과 교육학의 관계에 대한 대변혁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서 전 세계의 피억압 민중 스스로가 사회·정치적 자각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프레이리는 억압적 현실상황을 중심으로 한 교육적 메커니즘뿐만 아니라 개인이 사회, 문화, 제도적 맥락에서 자본에 봉사하는 합리적이고 명료한 의미를 지는 지배논리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비판적 사회 이론의 발전에 두드러지게 기여했다.[2] 한국에 번역된 저서[편집] 교육 포털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파울루 프레이리 페다고지 (Pedagogy of the Oppressed) 자유의 교육학 (Pedagogy of Freedom: Ethics, Democracy, and Civic Courage) 교육과 의식화 (Education For Critical Consciousness) 희망의 교육학 (Pedagogy Of Hope: Reliving Pedagogy Of The Oppressed) 망고나무 아래서 (Pedagogy of the Heart) 교육과 정치의식 (The Politics of Education: Culture, Power and Liberation) 프레이리의 교사론 (Teachers as cultural workers : Letters to those who dare teach) 각주[편집] ↑ 홍은광(2003).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교육사상의 수용과정과 한국 민중교육운동에 대한 영향」.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평생교육 전공 석사논문. p28~31. 인용 ↑ 모아시르가도치 지음, 백경숙·박내현 옮김 (2012). 「그의 삶과 사상-파울루프레이리 읽기」. 우리교육. p10~15. 인용 전거 통제 WorldCat VIAF: 90070192 LCCN: n79029767 ISNI: 0000 0001 2143 1625 GND: 118535242 SELIBR: 187428 SUDOC: 027685918 BNF: cb11903529p (데이터) NDL: 00440127 NKC: jn20000601625 BNE: XX88259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파울루_프레이리&oldid=22897807" 분류: 1921년 태어남1997년 죽음브라질의 교육학자캄피나스 출신비판이론가20세기 경제학자헤시피 출신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മലയാളം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hqip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10: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오야마 역 (니가타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오야마 역 (니가타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오야마 아오야마 역 개괄 관할 기관 동일본 여객철도 소재지 일본 니가타현 니가타 시 니시 구 좌표 북위 37° 53′ 55.54″ 동경 139° 0′ 5.97″ / 북위 37.8987611° 동경 139.0016583°  / 37.8987611; 139.0016583 개업일 1988년 3월 13일 승강장 구조 1면 1선 노선 ■ 에치고 선 가시와자키 기점 77.7km ← 고바리 (1.4 km) 세키야 →(1.5 km) 아오야마 역(일본어: 青山駅)은 일본 니가타현 니가타 시 니시 구에 위치한 동일본 여객철도 에치고 선의 철도역이다. 단선 승강장 1면 1선의 구조를 갖춘 지상역이다. 목차 1 이용 현황 2 역 주변 3 역사 4 인접 역 이용 현황[편집] 승차 인원 추이 연도 1일 평균 1991 1,503 2000 963 2001 935 2002 959 2003 948 2004 967 2005 1,040 2006 1,008 2007 998 2008 997 2009 976 2010 1,007 2011 1,007 2012 958 2013 1,176 2014 1,122 2015 1,112 역 주변[편집] 역 주변이 모두 주택지이다. 역사[편집] 1987년 12월 14일 : 준공. 1988년 3월 13일 : 에치고 선의 역으로서 개업. 2005년 2월 17일 : 자동 개찰기 도입. 2006년 1월 21일 : 니가타 도시권에서 IC 카드 Suica 서비스 개시. 인접 역[편집] 동일본 여객철도 에치고 선 고바리가시와자키 방면 ■ 에치고 선 세키야니가타 방면 vdeh 에치고 선가시와자키 - 히가시카시와자키 - 니시나카도리 - 아라하마 - 가리와 - 니시야마 - 라이하이 - 이시지 - 오기노조 - 이즈모자키 - 묘호지 - 오지마야 - 기리하라 - 데라도마리 - 분스이 - 아오즈 - 미나미요시다 - 요시다 - 기타요시다 - 이와무로 - 마키 - 에치고소네 - 에치고아카쓰카 - 우치노니시가오카 - 우치노 - 니가타다이가쿠마에 - 데라오 - 고바리 - 아오야마 - 세키야 - 하쿠산 - 니가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오야마_역_(니가타현)&oldid=22089550" 분류: 동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니가타현의 철도역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8월 23일 (목) 23: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송끄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끄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설날 축제, 로드남 담후아, 어른에게 존경을 표하는 의식 치앙마이의 송끄란 축제 송끄란(태국어: สงกรานต์, Songkran)은 매년 4월 13일에서 4월 15일까지 태국의 설날이다. 남부와 동남아시아의 많은 달력들이 이 날을 설날로 한다. 이 축제일은 원래 점성술에 따라 정해졌으며, 지금은 고정되어 있다. 또 송끄란의 전후 약 10일 간은 테이사칸 송끄란(송끄란 기간)으로 불리며 휴일은 아니지만 축제를 즐긴다. 원래는 순수하게 신년을 축하하는 행사이며 가족이 한 집에 겉아 모여 불상의 정화를 행하거나 어른들이 가족의 정화를 실시하는 기간이었지만, 후에 단순한 물의 정화로 발전했기 때문에, 현재는 설날이라는 개념보다는 축제라고 하는 색채가 강하다. 이러한 취지의 축제는 태국뿐만 아니라 미얀마나 라오스에도 존재한다. 목차 1 날짜 2 개요 3 관련 항목 4 외부 링크 날짜[편집] 로스엔젤레스 태국 사원의 송끄란 치앙마이의 송끄란 송끄란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Sankrandhi에서 왔으며, 변화, 이동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천문학적으로 태양이 양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날짜가 매년 바뀌게 되어 있지만, 현재 날짜는 고정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송끄란은 설날의 의미가 강했지만, 1888년 이후에 이 달력이 폐지되어 4월 1일을 신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설날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1940년에는 태양력을 도입하고, 불력을 수정하여 1월 1일을 설날로 삼았다. 한편 송끄란에 행해지고 있던 정화의 습관은 현재까지 존속하며, 또 하나의 설날이 되고 있다. 주말과 송끄란이 겹쳤을 경우는 다음 주에 대체 휴일이 오게 되어 있다. 불상의 정화 등 종교적인 의식도 행해지기는 하지만 불교 축제는 아니다. 개요[편집] 툭툭을 탄 사람들이 물을 맞고 있다 분필을 맞은 사람들, 보통 승려가 행한다 쏭크란 기간의 방콕 아이들 원래 설날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귀향의 시기라는 의미가 강하다. 또 연휴가 되어 도시에 나와 있던 가족이 모두 돌아와 한 가족이 모두 여행을 하는 일도 있다. 이 때문에 국내의 교통이나 관광지의 숙박 시설은 이 기간이 되면 포화 상태가 된다. 상점이나 사무실도 문을 닫기 때문에, 평일 활기찬 곳도 한산하게 바뀐다. 종교적으로는 불상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하며, 불상을 물을 씻고 먼지를 제거하는 등의 행위를 한다. 이날이 되면 불탑도 깨끗이 청소를 한다. 가족의 어른은 손에 물을 부어주고 정화를 하며, 상대에게 경의를 나타내는 행동도 하며, 집도 대청소를 한다. 송끄란이 일년 중 가장 더운 시기에 행해지기 때문에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단순한 물 을 뿌리는 축제로 발전하고 있다. 이 축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까지 물을 뿌리며 서로 즐긴다. 이 경우 특히 물을 끼얹는 곳은 손에만 한정하지 않고, 물을 끼얹는 행위 자체는 경의를 표한다라고 의미이다. 다만 승려에게는 물을 끼얹지 않는다. 물의 행위에는 물총 등도 사용된다. 집 앞에서는 물이 담은 물통을 두고, 또는 집 앞까지 호스를 연장하여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물을 뿌리거나 픽업 트럭에 물통을 싣고, 온 마을 사람들에게 물을 뿌리는 예도 있다. 방콕 등 전국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북부의 고도 치앙마이는 가장 화려한 것으로 알려진다. 송끄란 기간 중에는 사람들이 축제 기분에 싸여 음주 상태로 차나 오토바이 등을 운전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주행 중인 차나 오토바이에 물을 뿌리는 경우도 있어, 물을 맞고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태국에서는 송끄란 기간이 일년 중 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축제이기 때문에 법률로 보호되고 있어 이 기간 중 물로 인한 어떠한 피해를 당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이 문제는 정부도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어 매년 송끄란 기간 중 음주 운전을 경계해 임시의 검문소의 설치를 실시하거나 일반의 운전자에게는 졸음운전을 피하기 위해 속도를 완화해 운전하는 것을 호소하고 있다. 관련 항목[편집] 라오스의 설날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송끄란 송끄란 축제의 역사 송끄란 포토 갤러리 송끄란 축제 비디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송끄란&oldid=24414775" 분류: 태국의 문화4월의 기념일숨은 분류: 태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贛語ગુજરાતી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吴语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2일 (수) 10: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남베트남의 지도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남베트남의 지도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남베트남의 지도자는 1949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남부에 있었던 정권의 수장이다. 목차 1 베트남국 (1949년 - 1955년) 1.1 국가원수 1.2 총리 2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 1955년 - 1975년) 2.1 대통령 2.2 국가원수 2.3 총리 베트남국 (1949년 - 1955년)[편집] 국가원수[편집] 대수 이름 초상 임기 시작 임기 종료 정당 1 바오다이 (베트남어: Bảo Đại) 1949년 6월 13일 1955년 4월 30일 총리[편집] 대수 이름 초상 임기 시작 임기 종료 정당 (임시) 응우옌반쑤언(베트남어: Nguyễn Văn Xuân) 1948년 5월 27일 1949년 6월 14일 베트남국 임시 중앙정부 수반 1 응우옌판롱(베트남어: Nguyễn Phan Long) 1950년 1월 21일 1950년 4월 26일 2 쩐반흐우(베트남어: Trần Văn Hữu) 1950년 4월 27일 1952년 6월 6일 3 응우옌반떰(베트남어: Nguyễn Văn Tâm) 1952년 6월 6일 1953년 12월 17일 베트남국민당 4 응우옌푹브우록(베트남어: Nguyễn Phúc Bửu Lộc) 1954년 1월 11일 1954년 5월 16일 (대행) 판후이꾸앗(베트남어: Phan Huy Quát) 1954년 1월 12일 1954년 6월 16일 대월국민당 5 응오딘지엠 (베트남어: Ngô Ðình Diệm) 1954년 6월 16일 1955년 10월 26일 인위근로혁명당(人位勤勞革命黨)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 1955년 - 1975년)[편집] 대통령[편집] 대수 이름 초상 임기 시작 임기 종료 정당 1 응오딘지엠 (베트남어: Ngô Ðình Diệm) 1955년 10월 1963년 11월 인위근로혁명당(베트남어: Cần lao Nhân vị Cách mạng Đảng/ 人位勤勞革命黨) 2 응우옌반티에우(베트남어: Nguyễn Văn Thiêu) 1967년 1975년 민주당(베트남어: Đảng Dân chủ/ 民主黨) 3 쩐반흐엉(베트남어: Trần Văn Hương) 1975년 1975년 부흥당 4 즈엉반민(베트남어: Dương Văn Minh) 1975년 4월 28일 1975년 4월 30일 군인 국가원수[편집] 대수 이름 초상 임기 시작 임기 종료 정당 1 즈엉반민(베트남어: Dương Văn Minh) 1963년 11월 2일 1964년 1월 3일 혁명군인회동(베트남어: Hội đồng Quân nhân Cách mạng) 2 응우옌카인(베트남어: Nguyễn Khanh) 1964년 1964년 혁명군인회동(베트남어: Hội đồng Quân nhân Cách mạng) (임시) 임시영도위반 - 즈엉반민(베트남어: Dương Văn Minh) 1964년 2월 8일 1964년 3월 16일 임시영도위반(베트남어: Ủy ban Lãnh đạo lâm thời) 3 판칵스우(베트남어: Phan Khắc Sửu) 1964년 1965년 국가상회동(베트남어: Thượng Hội đồng Quốc gia) 4 응우옌반티에우(베트남어: Nguyễn Văn Thiêu) 1965년 1967년 국가영도위반(베트남어: Ủy ban Lãnh đạo Quốc gia) 총리[편집] 대수 이름 초상 임기 시작 임기 종료 정당 1 응우옌응옥터(베트남어: Nguyễn Ngọc Thơ) 1963년 1964년 무소속 2 응우옌카인(베트남어: Nguyên Khánh) 1964년 1964년 군인 응우옌쑤언오아인(베트남어: Nguyễn Xuân Oánh) 1964년 1964년 무소속 응우옌카인(베트남어: Nguyên Khánh) 1964년 1964년 군인 3 쩐반흐엉 (베트남어: Trân Văn Hương) 1964년 1965년 무소속 응우옌쑤언오아인 (베트남어: Nguyễn Xuân Oánh) 1965년 1965년 무소속 4 판후이꾸앗(베트남어: Phan Huy Quát) 1965년 1965년 대월국민당 5 응우옌까오끼 (베트남어: Nguyễn Cao Kỳ) 1965년 1967년 군인 6 응우옌반록 (베트남어: Nguyễn Văn Lộc) 1967년 1968년 군인 7 쩐반흐엉 (베트남어: Trân Văn Hương) 1968년 1969년 국가사회민주전선 8 쩐티엔키엠 (베트남어: Trần Thiện Khiêm) 1969년 1975년 국가사회민주전선 9 응우옌바껀(베트남어: Nguyễn Bá Cẩn) 1975년 1975년 민주당 10 부반머우 (베트남어: Vũ Văn Mẫu) 1975년 1975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남베트남의_지도자&oldid=23669851" 분류: 베트남의 정치인숨은 분류: 베트남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ไทย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9일 (토) 11: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PGP (소프트웨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PGP (소프트웨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PGP는 'Pretty Good Privacy'의 약자로서, 컴퓨터 파일을 암호화하고 복호화하는 프로그램이다. 1991년 필립 짐머만이 개발하였으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이메일 보안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목차 1 전자서명 2 AES256 3 GnuPG 4 각주 5 같이 보기 전자서명[편집] PGP로 전자서명을 할 수도 있다. 원본 파일을 작성하고, 그 파일에 대해 sig 파일을 생성하여 상대방에게 원본 파일과 sig 파일을 함께 배포하며, 상대방은 PGP를 이용해 sig 파일을 검증한다. sig 파일이 생성된 후에 원본 파일이 변경되었으면, sig 파일 검증시 Bad signature라고 출력된다. 1991년 개발된 PGP 프로그램을 이용한 전자서명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 되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만, 대한민국 전자서명법상의 보호를 받는 전자서명으로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공인인증서만이 대한민국 전자서명법에 의해 인정받고 있다. PGP 전자서명은 무료인 반면에, 공인인증서 전자서명은 2011년 현재 1년 4,400원을 지불해야 한다. AES256[편집]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는 미국의 외교기밀문서를 압축하여 AES 256 비트 암호화를 하여 전 세계에 배포해, 자신이 형사처벌을 받으면 그 암호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PGP 프로그램을 통해 AES 256 비트 암호화와 복호화가 가능하다. 고급 암호 표준(AES)는 미국 정부가 제정한 최신 암호화 기술이다. 미국 정부가 제정한 기존의 암호화 표준은 56비트 DES 암호 코드였다. 그러나 DES가 슈퍼컴퓨터를 사용하면 수시간내에 해독될 수 있게 되자, 256비트 키를 사용하는 차세대 표준 AES를 제정했다. 어산지가 배포한 파일 중 하나는 1.4기가바이트(GB) 용량인 insurance.aes256 인데, 영국 석유회사 BP와 관타나모 수용소 관련 기록 등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슈퍼컴퓨터로도 해독에 수십년 이상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1][2][3] GnuPG[편집] PGP는 GNU 프로젝트의 하나인 그누 프라이버시 가드로도 개발되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각주[편집]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15&aid=0002355621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5&aid=0002111116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81&aid=0002141892 같이 보기[편집] 지엔유 프라이버시 가드 트루크립트 프리넷 vdeh암호학 대칭 키 암호 블록 암호 스트림 암호 공개 키 암호 암호화 해시 함수 메시지 인증 코드 암호 해독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PGP_(소프트웨어)&oldid=23436666" 분류: 암호학1991년 소프트웨어인터넷 프라이버시 소프트웨어프라이버시 소프트웨어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umbaartLingálaLatvieš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cilianu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8일 (화) 16: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4대강 정비 사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4대강 정비 사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4대강 사업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4대강 정비 사업 지역 이명박 정부가 한국형 녹색 뉴딜을 내세워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고 이름 붙인 4대강 사업[1] 은 2008년 12월 29일 낙동강지구 착공식을 시작으로 2012년 4월 22일[2] 까지 22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추진한 대하천 정비 사업이다. 이 사업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4대강을 준설하고 친환경 보(洑)를 설치해 하천의 저수량을 대폭 늘려서 하천 생태계를 복원한다는 것을 주된 사업 명분으로 하고, 그 밖에 노후 제방 보강, 중소 규모 댐 및 홍수 조절지 건설, 하천 주변 자전거길 조성 등을 부수적 사업 내용으로 하였으나,[3] 실제로는 한반도 대운하 재추진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사업이었음이 감사원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4][5] 2015년 12월 대법원은 국민 소송단이 낸 소송 4건의 상고심에서 4대강 사업에 대한 적법판결을 내렸다.[6] 목차 1 사업 대상 지역 2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2.1 설립 근거 2.2 연혁 2.3 주요 업무 3 사업 추진 당시 여론 4 사업 찬성 측의 주장과 활동 5 비판 의견 5.1 비판 5.2 반대 운동 5.3 해외의 비판 5.4 비판에 대한 반론 5.5 찬성측 의견과 반대측 의견의 정리 6 4대강 정비 사업 이후 상황 7 사진 8 함께 보기 9 미디어 10 각주 사업 대상 지역[편집] 한강 : 이포보, 여주보, 강천보 낙동강 : 함안창녕보, 창녕합천보, 달성보, 강정고령보, 칠곡보, 구미보, 낙단보, 상주보 금강 : 백제보, 공주보, 세종보 영산강 : 죽산보, 승촌보 총16개 보[7] 4대강살리기추진본부[편집] 4대강살리기추진본부는 4대강의 홍수ㆍ가뭄 방지, 하천생태계 복원ㆍ활용과 지역균형발전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원활한 시행을 위하여 설립된 대한민국 국토해양부 소속의 한시조직으로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장은 공무원법상 직급을 부여받지 않는 차관급 전문계약직공무원으로 보한다.[8][9] 경기도 과천시 관문로 88(중앙동 정부과천청사 1동)에 위치하고 있다. 2012년 12월 31일자로 폐지되었다.[10] 설립 근거[편집]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정 연혁[편집] 2009년 02월 4대강살리기기획단(기획단장 - 2급 상당) 신설 2009년 04월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추진본부장 - 차관급)로 확대 개편 2012년 12월 31일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폐지 주요 업무[편집] 사업의 기본계획 및 그 실행계획의 수립에 관한 사항 사업의 추진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및 배분에 관한 사항 사업과 관련된 민간투자사업의 검토 및 진행에 관한 사항 4대강별 사업의 설계, 발주, 시공 등에 관한 지침의 마련 및 시행 4대강별 사업의 공정관리에 관한 사항 4대강별 사업의 안전관리 대책 마련 및 그 시행에 관한 사항 사업의 시행과 관련된 제도의 개선 및 연구 발전 4대강별 사업의 시행에 따른 관계기관의 인ㆍ허가 등과 관련한 협의, 조정 및 관리 사업의 홍보 및 관계 기관ㆍ단체와의 협력에 관한 사항 사업의 정보화에 관한 사항 사업과 관련된 학술 및 기술 지원에 관한 사항 다른 국가사업 등과의 협의 및 조정에 관한 사항 그 밖의 사업의 추진에 필요한 사항 사업 추진 당시 여론[편집] 2010년 3월 26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4대강사업에 대한 찬반 여론을 조사한 결과, 반대가 49.9%로 찬성 36.7%보다 13.2%p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별 여론으로는 대구경북 지역만 찬성(46.6%)이 반대(41.3%)에 비해 오차범위 내에서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고 그 외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보다 높게 조사됐다.(인용기사에서 지역별 구체적 수치를 전부 제시하진 않음) 이 조사는 지난 24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전화로 조사했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7%p다.[11] 반면, 4대강살리기추진본부가 발행하는 월간 ‘4강나래’ 7월호(2010년 7월 9일 발행)에 실린 인터뷰에서 홍형표 기획국장은 "정부 차원에서 별도의 여론조사를 실시하지 않았으나, 4대강사업이 시행되는 지역의 지자체와 지역 주민 대부분은 사업을 환영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 대구 경북 지역 언론 중 <매일신문>이 102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엔 찬성 51.5%, 반대 36.4%로 나타났다. ‘매우 반대’는 11.4%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찬성 51.5% 반대 47.8%) (인터뷰 본문에서 조사대상, 조사방법, 오차범위 등은 밝히지 않음)[12] 경기도 여주군 남한강 이포보에서는 환경단체 활동가 3명이 다리 기둥을 기습 점거하면서 사업 찬성 주민들이 '맞불집회'를 열고 이를 반대하는 환경단체와 몸싸움까지 불사하기도 했다. 찬성 주민들은 "환경단체와 종교단체가 들어와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을 방해하고 있다"며 "모두 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신면 이장협의회 신남교 회장은 "여주주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일"이라 주장하며 "환경단체 등 외지인이 와서 정치적인 논리를 앞세우며 무조건 반대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주민들이 나섰다"고 밝혔다.[13] 이와는 다르게 일부 다른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반대로 4대강 사업의 일환인 저수지 둑높이기 사업이 취소되기도 하였다.[14] 사업 찬성 측의 주장과 활동[편집] 새누리당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대업이 시작됐다”며 “4대강 사업은 홍수예방, 수질개선, 일자리 창출 등 1석7조의 친환경 경제사업으로 사업이 마무리되면 활기찬 대한민국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은 4대강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돼 국민이 환호하면 2012년 대선에서 불리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며 “민주당은 이런 정략적 판단으로 백년대계 사업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고 비판했다.[15] 4대강 사업에 진행되는 지역의 주민들이 찬성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충청남도 연기지역[16], 경상남도 창녕군[17] 등의 주민들은 기자회견, 결의대회 등을 열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4대강 사업을 적극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광선 대표회장은 “이 사업이 고질적인 물 문제 해결과 지역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하지만 정부는 우려하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인 소통과 친환경적인 공사 진행을 통해 국민적 신뢰를 확보한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정치계를 비롯한 시민단체는 이 사업이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즉각 중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18] 유엔환경계획은 "대한민국은 기후변화로 인한 빈번한 가뭄·홍수를 겪고 있는 여건상 추가적인 물관리 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하면서 "4대강 사업을 통해서 생태복원 시도를 한다면 칭찬할 만하며(commendable) 물문제 해결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도 있다"고 봤으나, 사업의 실행에 있어서 "4대강 유역이 환경적으로 민감한 지역이기 때문에 환경친화적인 복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였다.[19] 2011년 10월 27일 방한한 수라퐁 토비착차이쿨 태국 외무부 장관이 4대강 사업 현장을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을 단독 면담하고, 홍수 예방을 위한 4대강 정비 사업 기술을 공유하고 싶다는 내용의 잉락 친나왓 총리의 친서를 전달했다.[20][21] 그러나, 한국수자원공사는 태국의 관련 사업에 참여했다가 쿠데타 이후 사업이 중단되어 104억의 순손실을 떠안았다.[22] 비판 의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한 비판입니다. 비판[편집] 4대강 정비 사업의 환경 파괴를 경고하는 시민단체의 사진전시회 졸속 추진 : 정부가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4대강은 대운하와 더불어 천문학적 예산이 쓰이지만 몇 개월만에 결정하고 전문가들이 반대를 하는 와중에도 법 규정(친수법[23] 등)까지 바꾸어 가며 급히 시행한다는 점이다. 4대강도 임기 내 업적을 내려는 과욕이라는 비판이 많다. 6.2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 4대강 사업의 역풍으로 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는 가운데 조선일보의 김대중 고문도 칼럼을 통해 "민심이 소통 부재의 MB정치와 토목사업투성이인 MB정책에 NO를 선언했는데 MB는 고장 난 레코드처럼 '경제'만을 되뇌고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24] 정부의 4대강 사진 조작 : 국토부 산하 '4대강 살리기추진본부 공사3팀'은 '팔당유기농 경작지 보상을 위한 수용재결신청' 문서에서 "유기농도 일반경작지와 마찬가지로 하천을 오염시키고 있다"며 그 근거로 '하천부지 경작지의 퇴비 보관 장면'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실었다. 하지만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수소문 끝에 '팔당공대위'가 확인한 결과 국토해양부의 보도자료에 게시된 지역은 부산과 김해시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낙동강변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2009년 3월 제작한 '4대강 살리기 홍보 영상'에서 나온 물고기 떼죽음 영상도 미국의 사건임이 드러난적이 있으며, 같은해 10월 방송광고에서 "4대강 유역에 자연습지가 전무하다"며 갈라진 땅을 소개한 사진도 4대강 사업과 관련없는 경남 고성군 삼덕저수지로 드러나 비판을 받았다.[25] 한승수 국무총리는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했으나, 사건은 더욱 커져만 갔다. 홍보비: 민주당이 4대강 관련 정부부처의 2009년도 4대강 사업 홍보예산 사용내역을 분석한 결과 전용 등의 방법을 통해 국토해양부, 농림식품부, 환경부가 홍수 예방으로 책정된 예산 79억원을 4대강 홍보 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4대강 홍보와 무관한 용도의 예산을 홍보비로 사용한 것은 예산의 목적범위 안에서 재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국가재정법 제46조(예산의 전용)를 정면으로 어긴 것"이라고 비판했다.[26] 또한 4대강 사업의 홍보비는 2009년부터 2010년 8월까지 50억 4800만 원으로 참여정부의 중점 사업이었던 세종시보다 4배나 많아 과도한 홍보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민주당 김부겸 의원은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을수록 홍보에 더욱 혈안이 돼 광고비 집행이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고 비판했다.[27] 선상 카지노: 4대강 정비 사업 빚 갚기 위한 카지노 서비스 도입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28] 4대강 특별법: 이정희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는 강을 복원할가 위한 보를 없애는 '4대강 특별법'을 제정하는 의견을 발표하였다.[29] 건설회사의 혜택: 4대강 사업을 많이 비판하는 강기갑 의원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가장 많은 수혜를 받은 회사가 삼성물산이라고 발표하여[30] 대기업 건설회사의 지나친 혜택을 우려하였다. 일자리 문제: 4대강 사업에 창출된 일자리가 대부는 아르바이트 계열의 직종이다는 비판이 있다.[31] 이명박 정부는 홍보 당시, 34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하였지만, 이는 모두 거짓이며, 그마저도 대부분 알바라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는 비정규직으로 사실상 일자리로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군 선박 사고: 환경운동연합은 여주군 남한강 군용 선박 전복 사고의 원인을 4대강 사업의 하나인 이포댐 공사의 불안정한 물흐름을 지적하였다.[32]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이를 "급기야 4대강 사업으로 국군장병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가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33] 1조원 은닉 의혹: 민주당 김진애 의원은 "4대강 사업 170개 공구별 사업 공정 중 '기타 항목' 사업비는 당초 1조 337억원이었으나, 총사업비 변경절차를 통해 2조 244억원으로 무려 9천907억원이나 증가했다"며 "이는 정부가 총사업비 조정을 통해 공사비 감액분을 보상비 등으로 전용한 것 외에 기타 항목 사업비에 은닉시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4] 시행령 몰래 개정: 이명박 정부는 수자원공사법 시행령을 개정하였다.[35] 임금 문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정부가 지난해 4대강 사업을 수행하는 원청 대기업에 선급금 1조3천억원을 지급했지만, 노동자 임금으로 지급된 돈은 한 푼도 없었다"라고 밝혔다.[36] 근로자 사망: 2011년 3월 11일까지 근로자 12명이 사망하였다.[37] 반대 운동[편집]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은 주로 환경단체와, 진보성향의 시민단체 그리고 불교와, 천주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38] 2010년 6월 1일 문수 스님은 4대강을 반대하며 몸에 불을 질러 소신공양을 하였으며,[39] 불교 최대 종파인 조계종도 4대강 사업 반대입장을 밝혔다.[40] 조계종은 또한 2010년 12월 8일, 2011년 새해 예산안이 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이 발동된 상황에서 처리되어 4대강 예산이 포함되어 사업이 강행된다는 것에 대해 반발하며 정부·여당에 대해 전국 사찰의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조계종은 "(정부 여당 인사를)사적으로라도 만나거나 통화하면 사직서를 제출하라"며 투쟁 의지를 밝혔다.[41] 또한 천주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반대에 적극적이며,[42] 천주교연대도 4대강을 반대하는 시국 미사를 열기도 하였다.[43] 10월 27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4대강 사업을 "난개발"이라고 지적하였다.[44] 일부 개신교와 원불교에서도 '종교환경회의'를 구성하여 4대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45] 2010년 7월 8일에는 조계종 승려 13,000여명 가운데 1/3 가량의 스님 4,000여명이 4대강 사업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 이는 조계종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기록된다. 성웅 직지사 주지는 "편협한 이기심, 개발이익에 대한 욕망으로 우리의 문화유산과 정신을 묻어가면서, 어떻게 국민통합을 이뤄질수 있겠는가"라며 4대강 사업의 중단을 촉구했다.[46] 결국 2010년 12월 16일 불교, 개신교, 가톨릭, 원불교 등이 연합하여 '4대강 개발저지 4대종단 연대회의'를 구성하여 반대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47] 환경단체들은 처음 논의가 시작될때부터 꾸준히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48]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 12월, 한나라당은 3조 5천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국회 상임위에서 기습적으로 통과시키기도 했다.[49] 2010년 5월, 미시경제학의 저자로도 유명한 이준구 서울대학교 경제학 교수는 4대강 사업의 대표적인 반대론자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110여쪽에 달하는 장문의 글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경제학자로서의 모든 양심을 걸고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다"며 4대강 사업의 비합리성을 주장했다.[50] 2010년 10월 13일 민주당과 다른 야당들은 4대강 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단체에 4대강 반대 국민 투표를 실시하는 계획을 추진했다.[51] 이처럼 민주당을 중심으로 야당에서 4대강 사업 반대하는 가운데 2011년 예산안 처리가 박희태 국회의장에 의해 질서유지권이 발동된 가운데 강행처리되어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정부가 제시한 4대강 예산이 대부분 골격이 유지된채 5조 4600억원이 처리되었다.[52]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4대강 사업을 한반도 대운하 사업으로 규정하여 국민과 함께 본격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친다고 말하였다.[53] 이어 민주당은 다른 야당과 함께 서울광장에서 4대강 대운하 반대 범국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54] 이 과정에서 '4대강 사업은 대운하 계획'이라고 양심선언한 김이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양심선언을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번복하라고 종용받았다며 이를 따르지 않아 보복을 받았다고 폭로해 파문이 일었다. 김이태 연구원은 양심선언을 이유로 3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55] 해외의 비판[편집] 2010년 7월 11일 YWCA 강당에서 열린 4대강 사업 한·일 조사단 토론회장에서 '호리 료이치' 람사르 네트워크 일본대표는 "람사르 총회를 개최한 나라가 맞는가. 충격적이다. 4대강 사업은 목적이 불분명하고 람사르협약과 생물다양성협약에 위배되는 명백한 환경파괴 사업이다"라며 사업을 막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료이치는 "2008년 람사르협약 당사국 총회를 개최, 한국이 전 세계에 습지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이렇게 습지를 파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마모토 히로다케 교토대 명예교수도 “4대강 공사장을 둘러본 결과 ‘운하건설 사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며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56] 일본람사르네트워크와 한국습지NGO네트워크는 "4대강 사업 중단"과 함께 "치수·이수를 포함한 모든 사업들의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57] 맷 콘돌프 (Matt Kondolf)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는 4대강 사업을 비판하였다.[58]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4대강 홍보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 국내 일부 기자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59] 2017년 11월에 영국의 신문 가디언은 이 사업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류경호텔 등과 함께 세계 10대 '돈만 먹는 쓰레기' 건축물·시설로 꼽았다.[60] 비판에 대한 반론[편집] 국토해양부는 이 사업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다는 보도자료를 내었다.[61] 윤영선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사업이 38조5000억원의 생산유발과 35만7000여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며, 4대강 살리기사업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기와 장기로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62] 세계물위원회(World Water Council) 집행이사들이 기후변화 대응과 물 관리 기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강정보령보를 방문, 4대강살리기사업의 물기술 및 보별 관리에 대한 시찰을 하였다.[63] 찬성측 의견과 반대측 의견의 정리[편집] 〈찬성 측〉 4대강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ㄱ. 물부족 해결 ㄱ - 1. 맑고 깨끗한 풍부한 수량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적 과제이다. ㄱ - 2. 물길을 조성하고, 둑을 쌓아 물 그릇을 만들어 많은 물을 확보할 수 있다. ㄴ. 홍수피해 해결 ㄴ - 1. 중소규모 다목적댐 건설하고 기존 농업용저수지의 둑을 높임으로써 홍수를 예방할 수 있다. ㄷ. 수질의 향상 ㄷ - 1. 강바닥을 파내서 오염물질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하천 오염원 관리와 하천 바닥의 침전물을 제거해 종합적인 수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ㄹ. 다양한 생태하천 구역을 조성 ㄹ - 1. 습지공원, 생태공원, 하천 저류지등 다양한 생태하천 구역을 조성하여 생물종의 다양성을 지켜줄 것이다. ㅁ. 국민 여가문화 수준 및 삶의 질 향상 ㅁ - 1. 호수 주변정비, 수변접근성 개선 등 주민들의 문화‧휴식공간 제공, 수상레저 활성화, 자전거길 설치로 여가활동 기회 제공 ㅂ. 녹색뉴딜 사업으로 지역경제 활성화 견인 ㅂ - 1. 전국토의 70%를 차지하는 4대강 유역에 혜택이 골고루 돌아감으로써 지역발전 효과, 강을 중심으로 문화‧관광자원개발, 지역경제 활성화 등 국토를 재창조 ㅅ. 첨단IT기술을 동원한 체계적인 관리 ㅅ - 1. 광케이블을 매설하여 하천종합 정보센터를 중심으로 하천을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스마트 리버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어 하천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ㅇ. 물 관리 글로벌리더로서 국가위상 제고 ㅇ - 1. 4대강 살리기로 축적되는 경험과 기술을 세계에 전파하고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 지원, 물관련 국제기구 유치로 물관리 글로벌리더로 자리매김 ㅈ. 일자리 창출과 생산유발효과 ㅈ - 1.한국은행의 산업연관 분석에 따르면 34만개의 일자리 창출, 40조원의 생산유발효과가 기대됨 ㅊ. 녹색교통 수단인 자전거 이용 활성화 ㅊ - 1. 자전거 이용 문화 확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4대강 주변을 따라 1728km의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여 선진국 수준의 자전거 도로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이다. 〈반대 측〉 4대강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 a. 4대강 보다 지방 군소하천 정비가 더 시급 a - 1. 환경부가 2010년도 하천 수질개선 사업비의 75%를 4대강에 쏟아 붓느라 4대강을 제외한 다른 하천들에 대한 수질개선 투자는 대폭 삭감된 것으로 드러났다. a - 2. 과거 수십 년 동안의 하천정비가 본류 구간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본류에 유입되는 지류의 하천정비에 투자를 해야 할 시기다 b. 수질 오염 b - 1.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은 상당한 수질 정화 능력을 가지고 있음 b - 2. 하천에 둑을 쌓아올림으로써 물이 흐르는 속도가 느려지고 수질이 악화된다. c. 홍수예방은 거짓말 c - 1. 최근 대부분의 홍수 피해는 4대강 사업의 공사 대상이 아닌 상류나 지류에서 발생했다. d. 인공적인 친수공간 조성은 많은 예산을 낭비한다. d - 1. 호수주변 공원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것과 1297km라는 엄청난 규모의 자전거 길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시설을 사용할 사람들의 수에비해 너무나도 많은 돈이 든다. 4대강 정비 사업 이후 상황[편집] 2015년 2015년 9월 3일 KBS2 다큐멘터리 <흐르지 않는 강, 낙동강 어부의 증언> - 현상황: 물고기 집단 폐사, 4대강 호수화 진행 - 주장 1: 4대강의 상황이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다. (4대강 인근 어민, 주기재 부산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서동일 충남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 등) - 주장 2: 자원이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최소 2017년까지는 기다려봐야 한다. (부산지방국토관리청 하천계획과장 박성출, 환경부 물환경대책과장 이영기 등) 2016년 2016년 8월 15일 New1 이철우 기자 <폭염에 4대강 '녹조'로 신음…한강 상수원까지 위협> 2016년 8월 17일 폴리뉴스 정찬 기자 <이재오 “녹조는 옛날부터 있었다” 4대강사업과 무관 주장> -현상황: 2016년 기록적인 폭염으로 전국에 있는 강에서 녹조 현상 발생. -주장1: 4대강에서 녹조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4대강 정비 사업이 완전히 실패한 정책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관련자들을 엄중 처벌해야 한다. -주장2: 녹조는 예전부터 있었으며 2016년 들어 녹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후속 정비가 부족한 탓이다. 사진[편집] 금호강 지류 정비공사를 위해 중장비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 금호강 지류 정비공사 차량의 출입을 위해 임시로 물막이를 한 모습. 금호강 지류 정비공사 차량의 출입을 위해 임시로 물막이를 한 모습. 금호강 지류 정비공사가 일부 완료된 모습. 함께 보기[편집] 한반도 대운하 녹색 뉴딜 이자르 강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한 비판 2014-15 한국 가뭄 미디어[편집] KBS 《추적 60분》4대강 사업권 회수 논란 쟁점은? 2010년 12월 22일 MBC 《PD수첩》4대강 사업 수심 6m의 비밀 2010년 8월 24일 각주[편집] ↑ 4대강 사업 자료 깨알같이 제출했다' 경향닷컴, 2009년 11월 17일 ↑ 4대강 자전거길 22일 개통 서울신문, 2012년 4월 20일 ↑ 이홍표 (2008년 12월 23일). “정부, 지방 살리기에 '100조' 푼다”. 한경비지니스.  ↑ "감사원이 4대강 사업을 대운하 전초 사업으로 보는 까닭은 "水深 2~4m면 충분한데 6m까지 준설" 조선일보, 2013년 7월 11일 ↑ 감사원 "MB, 4대강 수심 6m 되게 파라 지시" 경향신문, 2013년 7월 10일 ↑ 4대강 사업은 적법판결, '1만'시민 소 제기한지 6년만.. 대법원 "논란종식" MBN, 2015.12.11. ↑ 4대강 16개 다기능보 명칭 확정[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뉴스핌 2011년 8월 9일 ↑ 국토부, 4대강살리기 추진본부로 격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이데일리》2009년 4월 15일 윤진섭 기자 ↑ 4대강사업 조직 ‘몸집 불리기’《한겨레》2009년 4월 8일 허종식 기자 ↑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31일 해체...환경단체 "자료 하나라도 폐기하면 안돼"《뉴스1》2012년 12월 24일 이은지 기자 ↑ '4대강 반대여론, 요지부동', 뷰스앤뉴스 ↑ “4대강사업 중단되면 그 피해는 지역주민들이 입습니다”[인터뷰] 홍형표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기획국장, 공감코리아 ↑ [1] ↑ 고형광 기자 (2010년 10월 4일). “4대강 '저수지 둑높이기' 취소, 전국으로 확산되나”. 아시아경제. 2010년 10월 5일에 확인함.  ↑ “한, `野 4대강 공세'에 반격”. 연합뉴스. 2009년 11월 11일. 2013년 10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4대강 찬성' 연기군민 모임 충남도 규탄 집회”. 연합뉴스. 2010년 11월 8일.  ↑ “창녕 주민 함안보서 4대강 살리기 찬성집회”. 뉴시스. 2010년 8월 3일.  ↑ “한기총,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입장 발표”. 국민일보. 2010년 5월 25일.  ↑ 유엔환경계획 보고서 P.11 [source: http://www.unep.org/PDF/PressReleases/201004_unep_national_strategy.pdf] ↑ “‘水難’ 태국 외교장관 ‘4대강’ 온 이유는…”. 문화일보. 2011년 10월 27일. 2011년 11월 3일에 확인함.  ↑ “ไทยสนใจโครงการบูรณะแม่น้ำของเกาหลี” (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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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정비 사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4대강 정비 사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4대강 사업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4대강 정비 사업 지역 이명박 정부가 한국형 녹색 뉴딜을 내세워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고 이름 붙인 4대강 사업[1] 은 2008년 12월 29일 낙동강지구 착공식을 시작으로 2012년 4월 22일[2] 까지 22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추진한 대하천 정비 사업이다. 이 사업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4대강을 준설하고 친환경 보(洑)를 설치해 하천의 저수량을 대폭 늘려서 하천 생태계를 복원한다는 것을 주된 사업 명분으로 하고, 그 밖에 노후 제방 보강, 중소 규모 댐 및 홍수 조절지 건설, 하천 주변 자전거길 조성 등을 부수적 사업 내용으로 하였으나,[3] 실제로는 한반도 대운하 재추진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사업이었음이 감사원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4][5] 2015년 12월 대법원은 국민 소송단이 낸 소송 4건의 상고심에서 4대강 사업에 대한 적법판결을 내렸다.[6] 목차 1 사업 대상 지역 2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2.1 설립 근거 2.2 연혁 2.3 주요 업무 3 사업 추진 당시 여론 4 사업 찬성 측의 주장과 활동 5 비판 의견 5.1 비판 5.2 반대 운동 5.3 해외의 비판 5.4 비판에 대한 반론 5.5 찬성측 의견과 반대측 의견의 정리 6 4대강 정비 사업 이후 상황 7 사진 8 함께 보기 9 미디어 10 각주 사업 대상 지역[편집] 한강 : 이포보, 여주보, 강천보 낙동강 : 함안창녕보, 창녕합천보, 달성보, 강정고령보, 칠곡보, 구미보, 낙단보, 상주보 금강 : 백제보, 공주보, 세종보 영산강 : 죽산보, 승촌보 총16개 보[7] 4대강살리기추진본부[편집] 4대강살리기추진본부는 4대강의 홍수ㆍ가뭄 방지, 하천생태계 복원ㆍ활용과 지역균형발전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원활한 시행을 위하여 설립된 대한민국 국토해양부 소속의 한시조직으로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장은 공무원법상 직급을 부여받지 않는 차관급 전문계약직공무원으로 보한다.[8][9] 경기도 과천시 관문로 88(중앙동 정부과천청사 1동)에 위치하고 있다. 2012년 12월 31일자로 폐지되었다.[10] 설립 근거[편집]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정 연혁[편집] 2009년 02월 4대강살리기기획단(기획단장 - 2급 상당) 신설 2009년 04월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추진본부장 - 차관급)로 확대 개편 2012년 12월 31일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폐지 주요 업무[편집] 사업의 기본계획 및 그 실행계획의 수립에 관한 사항 사업의 추진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및 배분에 관한 사항 사업과 관련된 민간투자사업의 검토 및 진행에 관한 사항 4대강별 사업의 설계, 발주, 시공 등에 관한 지침의 마련 및 시행 4대강별 사업의 공정관리에 관한 사항 4대강별 사업의 안전관리 대책 마련 및 그 시행에 관한 사항 사업의 시행과 관련된 제도의 개선 및 연구 발전 4대강별 사업의 시행에 따른 관계기관의 인ㆍ허가 등과 관련한 협의, 조정 및 관리 사업의 홍보 및 관계 기관ㆍ단체와의 협력에 관한 사항 사업의 정보화에 관한 사항 사업과 관련된 학술 및 기술 지원에 관한 사항 다른 국가사업 등과의 협의 및 조정에 관한 사항 그 밖의 사업의 추진에 필요한 사항 사업 추진 당시 여론[편집] 2010년 3월 26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4대강사업에 대한 찬반 여론을 조사한 결과, 반대가 49.9%로 찬성 36.7%보다 13.2%p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별 여론으로는 대구경북 지역만 찬성(46.6%)이 반대(41.3%)에 비해 오차범위 내에서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고 그 외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보다 높게 조사됐다.(인용기사에서 지역별 구체적 수치를 전부 제시하진 않음) 이 조사는 지난 24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전화로 조사했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7%p다.[11] 반면, 4대강살리기추진본부가 발행하는 월간 ‘4강나래’ 7월호(2010년 7월 9일 발행)에 실린 인터뷰에서 홍형표 기획국장은 "정부 차원에서 별도의 여론조사를 실시하지 않았으나, 4대강사업이 시행되는 지역의 지자체와 지역 주민 대부분은 사업을 환영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 대구 경북 지역 언론 중 <매일신문>이 102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엔 찬성 51.5%, 반대 36.4%로 나타났다. ‘매우 반대’는 11.4%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찬성 51.5% 반대 47.8%) (인터뷰 본문에서 조사대상, 조사방법, 오차범위 등은 밝히지 않음)[12] 경기도 여주군 남한강 이포보에서는 환경단체 활동가 3명이 다리 기둥을 기습 점거하면서 사업 찬성 주민들이 '맞불집회'를 열고 이를 반대하는 환경단체와 몸싸움까지 불사하기도 했다. 찬성 주민들은 "환경단체와 종교단체가 들어와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을 방해하고 있다"며 "모두 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신면 이장협의회 신남교 회장은 "여주주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일"이라 주장하며 "환경단체 등 외지인이 와서 정치적인 논리를 앞세우며 무조건 반대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주민들이 나섰다"고 밝혔다.[13] 이와는 다르게 일부 다른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반대로 4대강 사업의 일환인 저수지 둑높이기 사업이 취소되기도 하였다.[14] 사업 찬성 측의 주장과 활동[편집] 새누리당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대업이 시작됐다”며 “4대강 사업은 홍수예방, 수질개선, 일자리 창출 등 1석7조의 친환경 경제사업으로 사업이 마무리되면 활기찬 대한민국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은 4대강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돼 국민이 환호하면 2012년 대선에서 불리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며 “민주당은 이런 정략적 판단으로 백년대계 사업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고 비판했다.[15] 4대강 사업에 진행되는 지역의 주민들이 찬성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충청남도 연기지역[16], 경상남도 창녕군[17] 등의 주민들은 기자회견, 결의대회 등을 열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4대강 사업을 적극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광선 대표회장은 “이 사업이 고질적인 물 문제 해결과 지역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하지만 정부는 우려하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인 소통과 친환경적인 공사 진행을 통해 국민적 신뢰를 확보한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정치계를 비롯한 시민단체는 이 사업이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즉각 중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18] 유엔환경계획은 "대한민국은 기후변화로 인한 빈번한 가뭄·홍수를 겪고 있는 여건상 추가적인 물관리 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하면서 "4대강 사업을 통해서 생태복원 시도를 한다면 칭찬할 만하며(commendable) 물문제 해결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도 있다"고 봤으나, 사업의 실행에 있어서 "4대강 유역이 환경적으로 민감한 지역이기 때문에 환경친화적인 복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였다.[19] 2011년 10월 27일 방한한 수라퐁 토비착차이쿨 태국 외무부 장관이 4대강 사업 현장을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을 단독 면담하고, 홍수 예방을 위한 4대강 정비 사업 기술을 공유하고 싶다는 내용의 잉락 친나왓 총리의 친서를 전달했다.[20][21] 그러나, 한국수자원공사는 태국의 관련 사업에 참여했다가 쿠데타 이후 사업이 중단되어 104억의 순손실을 떠안았다.[22] 비판 의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한 비판입니다. 비판[편집] 4대강 정비 사업의 환경 파괴를 경고하는 시민단체의 사진전시회 졸속 추진 : 정부가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4대강은 대운하와 더불어 천문학적 예산이 쓰이지만 몇 개월만에 결정하고 전문가들이 반대를 하는 와중에도 법 규정(친수법[23] 등)까지 바꾸어 가며 급히 시행한다는 점이다. 4대강도 임기 내 업적을 내려는 과욕이라는 비판이 많다. 6.2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 4대강 사업의 역풍으로 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는 가운데 조선일보의 김대중 고문도 칼럼을 통해 "민심이 소통 부재의 MB정치와 토목사업투성이인 MB정책에 NO를 선언했는데 MB는 고장 난 레코드처럼 '경제'만을 되뇌고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24] 정부의 4대강 사진 조작 : 국토부 산하 '4대강 살리기추진본부 공사3팀'은 '팔당유기농 경작지 보상을 위한 수용재결신청' 문서에서 "유기농도 일반경작지와 마찬가지로 하천을 오염시키고 있다"며 그 근거로 '하천부지 경작지의 퇴비 보관 장면'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실었다. 하지만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수소문 끝에 '팔당공대위'가 확인한 결과 국토해양부의 보도자료에 게시된 지역은 부산과 김해시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낙동강변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2009년 3월 제작한 '4대강 살리기 홍보 영상'에서 나온 물고기 떼죽음 영상도 미국의 사건임이 드러난적이 있으며, 같은해 10월 방송광고에서 "4대강 유역에 자연습지가 전무하다"며 갈라진 땅을 소개한 사진도 4대강 사업과 관련없는 경남 고성군 삼덕저수지로 드러나 비판을 받았다.[25] 한승수 국무총리는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했으나, 사건은 더욱 커져만 갔다. 홍보비: 민주당이 4대강 관련 정부부처의 2009년도 4대강 사업 홍보예산 사용내역을 분석한 결과 전용 등의 방법을 통해 국토해양부, 농림식품부, 환경부가 홍수 예방으로 책정된 예산 79억원을 4대강 홍보 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4대강 홍보와 무관한 용도의 예산을 홍보비로 사용한 것은 예산의 목적범위 안에서 재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국가재정법 제46조(예산의 전용)를 정면으로 어긴 것"이라고 비판했다.[26] 또한 4대강 사업의 홍보비는 2009년부터 2010년 8월까지 50억 4800만 원으로 참여정부의 중점 사업이었던 세종시보다 4배나 많아 과도한 홍보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민주당 김부겸 의원은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을수록 홍보에 더욱 혈안이 돼 광고비 집행이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고 비판했다.[27] 선상 카지노: 4대강 정비 사업 빚 갚기 위한 카지노 서비스 도입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28] 4대강 특별법: 이정희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는 강을 복원할가 위한 보를 없애는 '4대강 특별법'을 제정하는 의견을 발표하였다.[29] 건설회사의 혜택: 4대강 사업을 많이 비판하는 강기갑 의원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가장 많은 수혜를 받은 회사가 삼성물산이라고 발표하여[30] 대기업 건설회사의 지나친 혜택을 우려하였다. 일자리 문제: 4대강 사업에 창출된 일자리가 대부는 아르바이트 계열의 직종이다는 비판이 있다.[31] 이명박 정부는 홍보 당시, 34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하였지만, 이는 모두 거짓이며, 그마저도 대부분 알바라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는 비정규직으로 사실상 일자리로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군 선박 사고: 환경운동연합은 여주군 남한강 군용 선박 전복 사고의 원인을 4대강 사업의 하나인 이포댐 공사의 불안정한 물흐름을 지적하였다.[32]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이를 "급기야 4대강 사업으로 국군장병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가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33] 1조원 은닉 의혹: 민주당 김진애 의원은 "4대강 사업 170개 공구별 사업 공정 중 '기타 항목' 사업비는 당초 1조 337억원이었으나, 총사업비 변경절차를 통해 2조 244억원으로 무려 9천907억원이나 증가했다"며 "이는 정부가 총사업비 조정을 통해 공사비 감액분을 보상비 등으로 전용한 것 외에 기타 항목 사업비에 은닉시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4] 시행령 몰래 개정: 이명박 정부는 수자원공사법 시행령을 개정하였다.[35] 임금 문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정부가 지난해 4대강 사업을 수행하는 원청 대기업에 선급금 1조3천억원을 지급했지만, 노동자 임금으로 지급된 돈은 한 푼도 없었다"라고 밝혔다.[36] 근로자 사망: 2011년 3월 11일까지 근로자 12명이 사망하였다.[37] 반대 운동[편집]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은 주로 환경단체와, 진보성향의 시민단체 그리고 불교와, 천주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38] 2010년 6월 1일 문수 스님은 4대강을 반대하며 몸에 불을 질러 소신공양을 하였으며,[39] 불교 최대 종파인 조계종도 4대강 사업 반대입장을 밝혔다.[40] 조계종은 또한 2010년 12월 8일, 2011년 새해 예산안이 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이 발동된 상황에서 처리되어 4대강 예산이 포함되어 사업이 강행된다는 것에 대해 반발하며 정부·여당에 대해 전국 사찰의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조계종은 "(정부 여당 인사를)사적으로라도 만나거나 통화하면 사직서를 제출하라"며 투쟁 의지를 밝혔다.[41] 또한 천주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반대에 적극적이며,[42] 천주교연대도 4대강을 반대하는 시국 미사를 열기도 하였다.[43] 10월 27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4대강 사업을 "난개발"이라고 지적하였다.[44] 일부 개신교와 원불교에서도 '종교환경회의'를 구성하여 4대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45] 2010년 7월 8일에는 조계종 승려 13,000여명 가운데 1/3 가량의 스님 4,000여명이 4대강 사업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 이는 조계종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기록된다. 성웅 직지사 주지는 "편협한 이기심, 개발이익에 대한 욕망으로 우리의 문화유산과 정신을 묻어가면서, 어떻게 국민통합을 이뤄질수 있겠는가"라며 4대강 사업의 중단을 촉구했다.[46] 결국 2010년 12월 16일 불교, 개신교, 가톨릭, 원불교 등이 연합하여 '4대강 개발저지 4대종단 연대회의'를 구성하여 반대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47] 환경단체들은 처음 논의가 시작될때부터 꾸준히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48]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 12월, 한나라당은 3조 5천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국회 상임위에서 기습적으로 통과시키기도 했다.[49] 2010년 5월, 미시경제학의 저자로도 유명한 이준구 서울대학교 경제학 교수는 4대강 사업의 대표적인 반대론자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110여쪽에 달하는 장문의 글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경제학자로서의 모든 양심을 걸고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다"며 4대강 사업의 비합리성을 주장했다.[50] 2010년 10월 13일 민주당과 다른 야당들은 4대강 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단체에 4대강 반대 국민 투표를 실시하는 계획을 추진했다.[51] 이처럼 민주당을 중심으로 야당에서 4대강 사업 반대하는 가운데 2011년 예산안 처리가 박희태 국회의장에 의해 질서유지권이 발동된 가운데 강행처리되어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정부가 제시한 4대강 예산이 대부분 골격이 유지된채 5조 4600억원이 처리되었다.[52]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4대강 사업을 한반도 대운하 사업으로 규정하여 국민과 함께 본격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친다고 말하였다.[53] 이어 민주당은 다른 야당과 함께 서울광장에서 4대강 대운하 반대 범국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54] 이 과정에서 '4대강 사업은 대운하 계획'이라고 양심선언한 김이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양심선언을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번복하라고 종용받았다며 이를 따르지 않아 보복을 받았다고 폭로해 파문이 일었다. 김이태 연구원은 양심선언을 이유로 3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55] 해외의 비판[편집] 2010년 7월 11일 YWCA 강당에서 열린 4대강 사업 한·일 조사단 토론회장에서 '호리 료이치' 람사르 네트워크 일본대표는 "람사르 총회를 개최한 나라가 맞는가. 충격적이다. 4대강 사업은 목적이 불분명하고 람사르협약과 생물다양성협약에 위배되는 명백한 환경파괴 사업이다"라며 사업을 막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료이치는 "2008년 람사르협약 당사국 총회를 개최, 한국이 전 세계에 습지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이렇게 습지를 파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마모토 히로다케 교토대 명예교수도 “4대강 공사장을 둘러본 결과 ‘운하건설 사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며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56] 일본람사르네트워크와 한국습지NGO네트워크는 "4대강 사업 중단"과 함께 "치수·이수를 포함한 모든 사업들의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57] 맷 콘돌프 (Matt Kondolf)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는 4대강 사업을 비판하였다.[58]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4대강 홍보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 국내 일부 기자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59] 2017년 11월에 영국의 신문 가디언은 이 사업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류경호텔 등과 함께 세계 10대 '돈만 먹는 쓰레기' 건축물·시설로 꼽았다.[60] 비판에 대한 반론[편집] 국토해양부는 이 사업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다는 보도자료를 내었다.[61] 윤영선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사업이 38조5000억원의 생산유발과 35만7000여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며, 4대강 살리기사업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기와 장기로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62] 세계물위원회(World Water Council) 집행이사들이 기후변화 대응과 물 관리 기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강정보령보를 방문, 4대강살리기사업의 물기술 및 보별 관리에 대한 시찰을 하였다.[63] 찬성측 의견과 반대측 의견의 정리[편집] 〈찬성 측〉 4대강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ㄱ. 물부족 해결 ㄱ - 1. 맑고 깨끗한 풍부한 수량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적 과제이다. ㄱ - 2. 물길을 조성하고, 둑을 쌓아 물 그릇을 만들어 많은 물을 확보할 수 있다. ㄴ. 홍수피해 해결 ㄴ - 1. 중소규모 다목적댐 건설하고 기존 농업용저수지의 둑을 높임으로써 홍수를 예방할 수 있다. ㄷ. 수질의 향상 ㄷ - 1. 강바닥을 파내서 오염물질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하천 오염원 관리와 하천 바닥의 침전물을 제거해 종합적인 수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ㄹ. 다양한 생태하천 구역을 조성 ㄹ - 1. 습지공원, 생태공원, 하천 저류지등 다양한 생태하천 구역을 조성하여 생물종의 다양성을 지켜줄 것이다. ㅁ. 국민 여가문화 수준 및 삶의 질 향상 ㅁ - 1. 호수 주변정비, 수변접근성 개선 등 주민들의 문화‧휴식공간 제공, 수상레저 활성화, 자전거길 설치로 여가활동 기회 제공 ㅂ. 녹색뉴딜 사업으로 지역경제 활성화 견인 ㅂ - 1. 전국토의 70%를 차지하는 4대강 유역에 혜택이 골고루 돌아감으로써 지역발전 효과, 강을 중심으로 문화‧관광자원개발, 지역경제 활성화 등 국토를 재창조 ㅅ. 첨단IT기술을 동원한 체계적인 관리 ㅅ - 1. 광케이블을 매설하여 하천종합 정보센터를 중심으로 하천을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스마트 리버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어 하천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ㅇ. 물 관리 글로벌리더로서 국가위상 제고 ㅇ - 1. 4대강 살리기로 축적되는 경험과 기술을 세계에 전파하고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 지원, 물관련 국제기구 유치로 물관리 글로벌리더로 자리매김 ㅈ. 일자리 창출과 생산유발효과 ㅈ - 1.한국은행의 산업연관 분석에 따르면 34만개의 일자리 창출, 40조원의 생산유발효과가 기대됨 ㅊ. 녹색교통 수단인 자전거 이용 활성화 ㅊ - 1. 자전거 이용 문화 확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4대강 주변을 따라 1728km의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여 선진국 수준의 자전거 도로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이다. 〈반대 측〉 4대강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 a. 4대강 보다 지방 군소하천 정비가 더 시급 a - 1. 환경부가 2010년도 하천 수질개선 사업비의 75%를 4대강에 쏟아 붓느라 4대강을 제외한 다른 하천들에 대한 수질개선 투자는 대폭 삭감된 것으로 드러났다. a - 2. 과거 수십 년 동안의 하천정비가 본류 구간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본류에 유입되는 지류의 하천정비에 투자를 해야 할 시기다 b. 수질 오염 b - 1.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은 상당한 수질 정화 능력을 가지고 있음 b - 2. 하천에 둑을 쌓아올림으로써 물이 흐르는 속도가 느려지고 수질이 악화된다. c. 홍수예방은 거짓말 c - 1. 최근 대부분의 홍수 피해는 4대강 사업의 공사 대상이 아닌 상류나 지류에서 발생했다. d. 인공적인 친수공간 조성은 많은 예산을 낭비한다. d - 1. 호수주변 공원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것과 1297km라는 엄청난 규모의 자전거 길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시설을 사용할 사람들의 수에비해 너무나도 많은 돈이 든다. 4대강 정비 사업 이후 상황[편집] 2015년 2015년 9월 3일 KBS2 다큐멘터리 <흐르지 않는 강, 낙동강 어부의 증언> - 현상황: 물고기 집단 폐사, 4대강 호수화 진행 - 주장 1: 4대강의 상황이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다. (4대강 인근 어민, 주기재 부산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서동일 충남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 등) - 주장 2: 자원이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최소 2017년까지는 기다려봐야 한다. (부산지방국토관리청 하천계획과장 박성출, 환경부 물환경대책과장 이영기 등) 2016년 2016년 8월 15일 New1 이철우 기자 <폭염에 4대강 '녹조'로 신음…한강 상수원까지 위협> 2016년 8월 17일 폴리뉴스 정찬 기자 <이재오 “녹조는 옛날부터 있었다” 4대강사업과 무관 주장> -현상황: 2016년 기록적인 폭염으로 전국에 있는 강에서 녹조 현상 발생. -주장1: 4대강에서 녹조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4대강 정비 사업이 완전히 실패한 정책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관련자들을 엄중 처벌해야 한다. -주장2: 녹조는 예전부터 있었으며 2016년 들어 녹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후속 정비가 부족한 탓이다. 사진[편집] 금호강 지류 정비공사를 위해 중장비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 금호강 지류 정비공사 차량의 출입을 위해 임시로 물막이를 한 모습. 금호강 지류 정비공사 차량의 출입을 위해 임시로 물막이를 한 모습. 금호강 지류 정비공사가 일부 완료된 모습. 함께 보기[편집] 한반도 대운하 녹색 뉴딜 이자르 강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한 비판 2014-15 한국 가뭄 미디어[편집] KBS 《추적 60분》4대강 사업권 회수 논란 쟁점은? 2010년 12월 22일 MBC 《PD수첩》4대강 사업 수심 6m의 비밀 2010년 8월 24일 각주[편집] ↑ 4대강 사업 자료 깨알같이 제출했다' 경향닷컴, 2009년 11월 17일 ↑ 4대강 자전거길 22일 개통 서울신문, 2012년 4월 20일 ↑ 이홍표 (2008년 12월 23일). “정부, 지방 살리기에 '100조' 푼다”. 한경비지니스.  ↑ "감사원이 4대강 사업을 대운하 전초 사업으로 보는 까닭은 "水深 2~4m면 충분한데 6m까지 준설" 조선일보, 2013년 7월 11일 ↑ 감사원 "MB, 4대강 수심 6m 되게 파라 지시" 경향신문, 2013년 7월 10일 ↑ 4대강 사업은 적법판결, '1만'시민 소 제기한지 6년만.. 대법원 "논란종식" MBN, 2015.12.11. ↑ 4대강 16개 다기능보 명칭 확정[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뉴스핌 2011년 8월 9일 ↑ 국토부, 4대강살리기 추진본부로 격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이데일리》2009년 4월 15일 윤진섭 기자 ↑ 4대강사업 조직 ‘몸집 불리기’《한겨레》2009년 4월 8일 허종식 기자 ↑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31일 해체...환경단체 "자료 하나라도 폐기하면 안돼"《뉴스1》2012년 12월 24일 이은지 기자 ↑ '4대강 반대여론, 요지부동', 뷰스앤뉴스 ↑ “4대강사업 중단되면 그 피해는 지역주민들이 입습니다”[인터뷰] 홍형표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기획국장, 공감코리아 ↑ [1] ↑ 고형광 기자 (2010년 10월 4일). “4대강 '저수지 둑높이기' 취소, 전국으로 확산되나”. 아시아경제. 2010년 10월 5일에 확인함.  ↑ “한, `野 4대강 공세'에 반격”. 연합뉴스. 2009년 11월 11일. 2013년 10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4대강 찬성' 연기군민 모임 충남도 규탄 집회”. 연합뉴스. 2010년 11월 8일.  ↑ “창녕 주민 함안보서 4대강 살리기 찬성집회”. 뉴시스. 2010년 8월 3일.  ↑ “한기총,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입장 발표”. 국민일보. 2010년 5월 25일.  ↑ 유엔환경계획 보고서 P.11 [source: http://www.unep.org/PDF/PressReleases/201004_unep_national_strategy.pdf] ↑ “‘水難’ 태국 외교장관 ‘4대강’ 온 이유는…”. 문화일보. 2011년 10월 27일. 2011년 11월 3일에 확인함.  ↑ “ไทยสนใจโครงการบูรณะแม่น้ำของเกาหลี” (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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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포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드래곤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드래곤포스 (DragonForce) 2013년 인도네시아 공연 모습 (왼쪽부터 프레드릭 레클러크, 데이브 매킨토시, 허먼 리, 샘 토트먼, 마크 허드슨, 바딤 프루차노브) 기본 정보 국가 영국 결성 지역 런던, 잉글랜드 다른 이름 드래곤하트 (DragonHeart, 1999-2002) 장르 파워 메탈, 스피드 메탈 활동 시기 1999년 ~ 현재 레이블 로드러너, 유니버설, 생추어리, 스파인팜, 노이즈 관련 활동 데모니악, 파워 퀘스트 웹사이트 www.dragonforce.com 구성원 허먼 리샘 토트먼바딤 프루차노브프레데릭 레클러크마크 허드슨지 안젤론 이전 구성원 ZP 더트에이드리언 램버트디디에 알모즈니디콘 하퍼스티브 윌리엄즈스티브 스콧데이브 매킨토시마테즈 세팅크 드래곤포스(DragonForce)는 1999년에 결성된 영국, 런던의 파워 메탈 밴드이다. 그들은 빠른 기타 솔로와 비디오게임에서 영향을 받은 전자음을 음악에 포함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목차 1 역사 1.1 결성 (1999 - 2002) 1.2 Valley of the Damned (1999- 2003) 1.3 Sonic Firestorm (2004 ~ 2005) 1.4 Inhuman Rampage (2006 ~ 2007) 1.5 Ultra Beatdown (2008 ~ 2009) 1.6 새로운 음반 (2010년 이후) 2 음악적 스타일 3 논란 4 밴드 구성원 5 드래곤포스의 음반 6 각주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결성 (1999 - 2002)[편집] 드래곤포스는 (드래곤하트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알려짐) 1999년에 기타리스트 허먼 리와 샘 토트먼에 의해서 결성되었다. 둘은 후에 광고를 통해 보컬 ZP 더트, 드러머 마테즈 세팅크,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콧, 키보디스트 스티브 윌리엄즈를 찾아냈다.[1] 샘 토트먼과 허먼 리는 데모니악이라는 밴드로 경험이 있었다. 최초로 밴드는 "드래곤하트"라는 이름으로 데모음반을 내고, 핼포드와 스트라토바리우스와 함께 투어공연을 했다. 밴드는 후에 또 다른 메탈 밴드와 이름이 겹친다는 것을 발견하고, 2002년에 '드래곤포스'로 밴드의 이름을 바꿨다. 드러머 마테즈 세팅크는 1999년 12월에 슬로베니아에서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해서 밴드를 떠났고, 디디에 알모즈니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2000년 11월에 스티브 스콧과, 2000년 초에 스티브 윌리엄즈는 밴드를 떠났다 베이시스트 디콘 하퍼는 2000년 11월에 밴드에 가입했고, 2001년 1월에 키보디스트 바딤 프루차노브가 첫 음반의 구성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가입했다. 디콘 하퍼는 2002년에 밴드를 떠났지만 드래곤포스의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의 세션 연주자로 활동했다. Valley of the Damned (1999- 2003)[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Valley of the Damned입니다. 드래곤포스는 2000년에 그들의 첫 데모음반을 녹음했다. 그것은 독립적인 발매였지만, 음반은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 파워 메탈 밴드중 하나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그들의 곡 "Valley of the Damned"는 그들이 밴드의 이름은 드래곤포스로 바꾼 직후에 발매한 최초의 싱글 음반이었다. 곡은 MP3.com에서도 2주일 동안 '가장 많이 내려받은 곡'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성공이었다. 데모가 발표된 직후 키보디스트 스티브 윌리엄즈와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콧이 밴드를 떠났고, 그 자리에 우크라니아 출신 키보디스트 바딤 프루차노브와 영국 출신 베이시스트 디콘 하퍼가 들어왔다. 2003년에 밴드는 노이즈 레코드와 계약을 했고, 그들의 첫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음반을 발표한 뒤, 밴드는 2004년까지 투어를 계속했다. 투어는 일본의 도쿄에서 끝이 났다. Sonic Firestorm (2004 ~ 2005)[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Sonic Firestorm입니다. 밴드의 두 번째 음반, Sonic Firestorm은 싱글 음반 "Fury of the Storm"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다. Sonic Firestorm은 에이드리언 램버트가 베이스를 맡고 데이브 매킨토시가 드럼을 맡은 최초의 음반이었다. 2004년에 데이브 매킨토시가 밴드에 가입할 때, 그들은 그들의 음악 스타일을 강력한 비트와 더블 베이스 리듬으로 인해 "익스트림 파워 메탈"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밴드가 국제적으로 유명해 지고 "빠른 본 조비"나 "저니가 슬레이어를 만남"이란 별명을 얻은 때가 이 쯤이었다. 투어는 Valley of the Damned때의 투어보다 더 길었다. 밴드는 W.A.S.P이나 아이언 메이든처럼 잘 알려진 메탈 밴드와 함께 투어를 했다. Inhuman Rampage (2006 ~ 2007)[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Inhuman Rampage입니다. 밴드는 ZP 더트를 포함한 6명의 구성원을 완성하기까지 다양한 구성원 변화가 있었다.밴드는 2006년에 영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의 로드러너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뒤 그들의 세 번째 음반인 Inhuman Rampage를 발매했다. "Through the Fire and Flames" 라는 곡은 기타 히어로3 : 레전드 오브 락과 기타 히어로 : 스매쉬 히트같은 게임에 포함된 유명한 곡 중 하나가 되었다. 허먼 리와 샘 토트먼의 이전 밴드인 데모니악의 구성원인 린제이 도슨은 이 음반에 백 보컬로 참여했다. 음반을 발매하기 전, 베이시스트인 아드리안 램버트가 2005년 11월에 태어난 아들을 돌보기 위해 밴드를 떠났다. 그 자리에 Sonic Firestorm 투어를 끝마치기 위해서 프레데릭 레클러크가 들어왔다. 프레데릭은 2006년 1월에 밴드의 공식 구성원가 되었다. 그는 밴드의 두 번째 싱글음반인 Operation Ground and Pound의 뮤직 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싱글 음반 Through the Fire and Flames는 미국과 캐나다의 골드 디스크에 올랐다. Ultra Beatdown (2008 ~ 2009)[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Ultra Beatdown입니다. 밴드는 디스터브드와 슬립낫과 함께 2008년의 여름동안 락스타 에너지 메탈 메이험 페스티벌(Rockstar Energy Metal Mayhem Festival)에서 투어공연을 펼쳤다. 밴드는 가을에 네 번째 정규 음반인 Ultra Beatdown으로 되돌아 왔다. 첫 번째 트랙이면서 첫 번째 싱글인 "Heroes of Our Time"은 2008년 12월 3일에 메탈리카의 "My Apocalypse"를 누르고 그래미 어워드의 '베스트 메탈 퍼포먼스' 부문에서 수상을 하게 되었다.[2] "Heroes of Our Time"의 짧은 버전은 비디오게임 스케이트 2[3] 와 NHL 10[4] 에 삽입되기도 했다. 2009년 1월 22일에 "The Last Journey Home"의 뮤직비디오가 온라인으로 공개되기 일주일 전에 엑스박스 라이브에 공개되었다.[5] 새로운 음반 (2010년 이후)[편집] 허먼 리는 드래곤포스가 2009년 12월에 투어를 멈추고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낸 뒤 2011년에 발매될 새로운 정규 음반을 작곡하고 녹음한다고 밝혔다.[6] 2010년 2월 22일에 밴드는 그들의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와 Sonic Firestorm을 재발매했다. Valley of the Damned는 새로 녹음되었고, 두 음반 모두에 보너스 트랙, 라이브 공연과 해설이 담겨있는 DVD가 포함되어 있다. 두 음반은 티셔츠, 기타 픽과 바람을 넣는 기타가 포함되어 있는 박스형태로도 발매되었다. 2010년 3월 8일에, 드래곤포스는 로드러너 레코드를 통해 드래곤포스가 보컬 ZP 더트와 갈라섰고 새로운 보컬을 찾는다고 밝혔다.[7] "드래곤포스가 ZP 더트와 갈라선다고 발표한 것을 후회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음악적인 의견의 차이였지만, 나머지 밴드 멤버들은 ZP 더트가 미래의 작업에서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머지 다섯명이 다섯 번째 앨범을 작곡하는 동안, 우리는 전 세계에서 새로운 보컬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드래곤포스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강력하고 멜로딕한 보컬을 찾고 있습니다." - 허먼 리 이 내용은 그 날 삭제되었지만, 다음날 공식적으로 밴드에 의해서 오디션에 참가하는 링크가 담겨있는 공식적인 발표가 게시되었다.[8] 음악적 스타일[편집] 밴드는 그들의 음악 스타일을 자주 단지 파워 메탈이 아닌 익스트림 파워 메탈이라고 불러왔다. 허먼 리는 기타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밴드의 음악 스타일에 대한 평가에 이렇게 말했다. "'닌텐도 메탈', '익스트림 파워 메탈', '저니가 슬레이어를 만났을때' ...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상한 꼬리표를 붙이고는 하죠."[9] 밴드는 가끔 곡에 들어가 있는 빠른 템포 때문에 메탈 평론가들에게 보충적으로 스피드 메탈 밴드라고 잘못 이름 붙여지기도 한다.[9][10][11][12] 논란[편집] 2006년 후반 Inhuman Rampage 투어가 최대 활동에 도달했을때 논란이 일어났다. 밴드는 악기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처음으로 악기의 튜닝을 반음 낮춰 Eb튜닝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또한 품질이 좋지 않은 라이브 공연 동연상이 인터넷에 게시되면서, 라이브에서 똑같은 속도를 낼 수 없어서 스튜디오 음반을 제작할때 속도를 올린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나머지 공연에서 음반의 곡와 같은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으로 루머를 해결했지만 여전히 루머는 퍼지고 있었다. "2006년 그래스팝 메탈 미팅(Graspop Metal Meeting)은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우리가 데려온 기술자들은 기타 튜닝도 하지 않았고, 모니터링할 장비도 갖춰지지 않아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 허먼 리 그는 또한 Inhuman Rampage 투어의 대부분의 공연은 기술적 문제에 의해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6] 밴드 구성원[편집] 현재 구성원 허먼 리 – 기타, 백 보컬 (1999 ~ 현재) 샘 토트먼 – 기타, 백 보컬 (1999 ~ 현재) 프레데릭 레클러크 – 베이스, 기타, 백 보컬 (2006 ~ 현재) 바딤 프루차자노 – 키보드, 백 보컬, 테레민 (2001 ~ 현재) 지 안젤론 – 드럼, 백 보컬 (2014 ~ 현재) 마크 허드슨 - 리드 보컬 (2011 ~ 현재) 전 구성원 ZP 더트 – 리드 보컬 (1999 ~ 2010) 에이드리안 램버트 – 베이스 (2004 ~ 2005) 디디에 알모즈니 – 드럼 (1999 ~ 2003) 디콘 하퍼 – 베이스, 백 보컬 (2001 ~ 2003) 스티브 윌리엄즈 – 키보드, 백 보컬 (1999 ~ 2000) 스티브 스콧 – 베이스, 백 보컬 (1999 ~ 2000) 데이브 매킨토시 - 드럼, 퍼커션, 백 보컬 (2003-2014) 마테즈 세팅크 - 드럼, 퍼커션 (1999) 드래곤포스의 음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드래곤포스의 음반 목록입니다. 정규 음반 Valley of the Damned (2003) Sonic Firestorm (2004) Inhuman Rampage (2006) Ultra Beatdown (2008) The Power Within (2012) Maximum Overload (2014) Reaching into Infinity (2017) 각주[편집] ↑ “interview dragonforce”. 2018년 3월 27일에 확인함.  ↑ “The 51st Annual Grammy Awards Winner List”. 《GRAMMY.com》. The Recording Academy. 2010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Orry, James (2008년 10월 23일). “Skate 2 and Skate It soundtracks revealed”. 《VideoGamer.com》. Pro-G Media Ltd. 2010년 1월 24일에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The Official NHL 10 Soundtrack - EA Trax”. 《EA.com》. Electronic Arts Inc.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DragonForce Video World Premier on Xbox Live”. DragonForce.com. 2010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가 나 “DragonForce: Live Playing 'Through The Roof' Since Having In-Ear Monitors”. 2012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 Updated: Dragonforce part ways with singer | EspyRock ↑ “BLABBERMOUTH.NET - DRAGONFORCE Confirms Singer's Departure”. 2012년 2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Guitar World, Holiday 2006, pg 72 "Hotter Than Hell" ↑ Entertainment | PE.com | Southern California News | News for Inland Southern California ↑ Entertainment - Juan Gabriel to play the Pond ↑ “Friday 07/07/06 Ozzfest 2006, Main Stage @ The Cricket Pavilion, Phoenix Arizona - GIGWISE”. 2006년 7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드래곤포스 공식 웹사이트 vdeh드래곤포스 허먼 리 샘 토트만 바딤 프루즈하노브 프레드릭 리클러크 마크 허드슨 지 안젤론ZP 더트 에이드리언 램버트 디디에 알모즈니 디콘 하퍼 스티브 스콧 스티브 윌리엄즈 마테즈 세팅크 데이브 매킨토시 정규 음반 Valley of the Damned Sonic Firestorm Inhuman Rampage Ultra Beatdown The Power Within Maximum Overload Reaching into Infinity 싱글 "Fury of the Storm" "Through the Fire and Flames" "Operation Ground and Pound" "Revolution Deathsquad" "Heroes of Our Time" "The Last Journey Home" "The Game" "Ring of Fire" 컴필레이션 음반 Killer Elite: The Hits, The Highs, The Vids 라이브 음반 Twilight Dementia In the Line of Fire... Larger Than Live 관련 문서 디스코그래피 전거 통제 WorldCat LCCN: no2006048641 ISNI: 0000 0001 0656 5940 GND: 10339103-4 BNF: cb14479323h (데이터) 뮤직브레인즈: ef58d4c9-0d40-42ba-bfab-9186c1483edd NKC: xx016452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드래곤포스&oldid=22278583" 분류: 영국의 헤비 메탈 밴드1999년 결성된 음악 그룹드래곤포스런던 출신 음악 그룹파워 메탈 밴드스피드 메탈 밴드숨은 분류: 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8일 (토) 15: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드래곤포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드래곤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드래곤포스 (DragonForce) 2013년 인도네시아 공연 모습 (왼쪽부터 프레드릭 레클러크, 데이브 매킨토시, 허먼 리, 샘 토트먼, 마크 허드슨, 바딤 프루차노브) 기본 정보 국가 영국 결성 지역 런던, 잉글랜드 다른 이름 드래곤하트 (DragonHeart, 1999-2002) 장르 파워 메탈, 스피드 메탈 활동 시기 1999년 ~ 현재 레이블 로드러너, 유니버설, 생추어리, 스파인팜, 노이즈 관련 활동 데모니악, 파워 퀘스트 웹사이트 www.dragonforce.com 구성원 허먼 리샘 토트먼바딤 프루차노브프레데릭 레클러크마크 허드슨지 안젤론 이전 구성원 ZP 더트에이드리언 램버트디디에 알모즈니디콘 하퍼스티브 윌리엄즈스티브 스콧데이브 매킨토시마테즈 세팅크 드래곤포스(DragonForce)는 1999년에 결성된 영국, 런던의 파워 메탈 밴드이다. 그들은 빠른 기타 솔로와 비디오게임에서 영향을 받은 전자음을 음악에 포함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목차 1 역사 1.1 결성 (1999 - 2002) 1.2 Valley of the Damned (1999- 2003) 1.3 Sonic Firestorm (2004 ~ 2005) 1.4 Inhuman Rampage (2006 ~ 2007) 1.5 Ultra Beatdown (2008 ~ 2009) 1.6 새로운 음반 (2010년 이후) 2 음악적 스타일 3 논란 4 밴드 구성원 5 드래곤포스의 음반 6 각주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결성 (1999 - 2002)[편집] 드래곤포스는 (드래곤하트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알려짐) 1999년에 기타리스트 허먼 리와 샘 토트먼에 의해서 결성되었다. 둘은 후에 광고를 통해 보컬 ZP 더트, 드러머 마테즈 세팅크,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콧, 키보디스트 스티브 윌리엄즈를 찾아냈다.[1] 샘 토트먼과 허먼 리는 데모니악이라는 밴드로 경험이 있었다. 최초로 밴드는 "드래곤하트"라는 이름으로 데모음반을 내고, 핼포드와 스트라토바리우스와 함께 투어공연을 했다. 밴드는 후에 또 다른 메탈 밴드와 이름이 겹친다는 것을 발견하고, 2002년에 '드래곤포스'로 밴드의 이름을 바꿨다. 드러머 마테즈 세팅크는 1999년 12월에 슬로베니아에서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해서 밴드를 떠났고, 디디에 알모즈니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2000년 11월에 스티브 스콧과, 2000년 초에 스티브 윌리엄즈는 밴드를 떠났다 베이시스트 디콘 하퍼는 2000년 11월에 밴드에 가입했고, 2001년 1월에 키보디스트 바딤 프루차노브가 첫 음반의 구성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가입했다. 디콘 하퍼는 2002년에 밴드를 떠났지만 드래곤포스의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의 세션 연주자로 활동했다. Valley of the Damned (1999- 2003)[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Valley of the Damned입니다. 드래곤포스는 2000년에 그들의 첫 데모음반을 녹음했다. 그것은 독립적인 발매였지만, 음반은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 파워 메탈 밴드중 하나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그들의 곡 "Valley of the Damned"는 그들이 밴드의 이름은 드래곤포스로 바꾼 직후에 발매한 최초의 싱글 음반이었다. 곡은 MP3.com에서도 2주일 동안 '가장 많이 내려받은 곡'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성공이었다. 데모가 발표된 직후 키보디스트 스티브 윌리엄즈와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콧이 밴드를 떠났고, 그 자리에 우크라니아 출신 키보디스트 바딤 프루차노브와 영국 출신 베이시스트 디콘 하퍼가 들어왔다. 2003년에 밴드는 노이즈 레코드와 계약을 했고, 그들의 첫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음반을 발표한 뒤, 밴드는 2004년까지 투어를 계속했다. 투어는 일본의 도쿄에서 끝이 났다. Sonic Firestorm (2004 ~ 2005)[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Sonic Firestorm입니다. 밴드의 두 번째 음반, Sonic Firestorm은 싱글 음반 "Fury of the Storm"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다. Sonic Firestorm은 에이드리언 램버트가 베이스를 맡고 데이브 매킨토시가 드럼을 맡은 최초의 음반이었다. 2004년에 데이브 매킨토시가 밴드에 가입할 때, 그들은 그들의 음악 스타일을 강력한 비트와 더블 베이스 리듬으로 인해 "익스트림 파워 메탈"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밴드가 국제적으로 유명해 지고 "빠른 본 조비"나 "저니가 슬레이어를 만남"이란 별명을 얻은 때가 이 쯤이었다. 투어는 Valley of the Damned때의 투어보다 더 길었다. 밴드는 W.A.S.P이나 아이언 메이든처럼 잘 알려진 메탈 밴드와 함께 투어를 했다. Inhuman Rampage (2006 ~ 2007)[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Inhuman Rampage입니다. 밴드는 ZP 더트를 포함한 6명의 구성원을 완성하기까지 다양한 구성원 변화가 있었다.밴드는 2006년에 영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의 로드러너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뒤 그들의 세 번째 음반인 Inhuman Rampage를 발매했다. "Through the Fire and Flames" 라는 곡은 기타 히어로3 : 레전드 오브 락과 기타 히어로 : 스매쉬 히트같은 게임에 포함된 유명한 곡 중 하나가 되었다. 허먼 리와 샘 토트먼의 이전 밴드인 데모니악의 구성원인 린제이 도슨은 이 음반에 백 보컬로 참여했다. 음반을 발매하기 전, 베이시스트인 아드리안 램버트가 2005년 11월에 태어난 아들을 돌보기 위해 밴드를 떠났다. 그 자리에 Sonic Firestorm 투어를 끝마치기 위해서 프레데릭 레클러크가 들어왔다. 프레데릭은 2006년 1월에 밴드의 공식 구성원가 되었다. 그는 밴드의 두 번째 싱글음반인 Operation Ground and Pound의 뮤직 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싱글 음반 Through the Fire and Flames는 미국과 캐나다의 골드 디스크에 올랐다. Ultra Beatdown (2008 ~ 2009)[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Ultra Beatdown입니다. 밴드는 디스터브드와 슬립낫과 함께 2008년의 여름동안 락스타 에너지 메탈 메이험 페스티벌(Rockstar Energy Metal Mayhem Festival)에서 투어공연을 펼쳤다. 밴드는 가을에 네 번째 정규 음반인 Ultra Beatdown으로 되돌아 왔다. 첫 번째 트랙이면서 첫 번째 싱글인 "Heroes of Our Time"은 2008년 12월 3일에 메탈리카의 "My Apocalypse"를 누르고 그래미 어워드의 '베스트 메탈 퍼포먼스' 부문에서 수상을 하게 되었다.[2] "Heroes of Our Time"의 짧은 버전은 비디오게임 스케이트 2[3] 와 NHL 10[4] 에 삽입되기도 했다. 2009년 1월 22일에 "The Last Journey Home"의 뮤직비디오가 온라인으로 공개되기 일주일 전에 엑스박스 라이브에 공개되었다.[5] 새로운 음반 (2010년 이후)[편집] 허먼 리는 드래곤포스가 2009년 12월에 투어를 멈추고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낸 뒤 2011년에 발매될 새로운 정규 음반을 작곡하고 녹음한다고 밝혔다.[6] 2010년 2월 22일에 밴드는 그들의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와 Sonic Firestorm을 재발매했다. Valley of the Damned는 새로 녹음되었고, 두 음반 모두에 보너스 트랙, 라이브 공연과 해설이 담겨있는 DVD가 포함되어 있다. 두 음반은 티셔츠, 기타 픽과 바람을 넣는 기타가 포함되어 있는 박스형태로도 발매되었다. 2010년 3월 8일에, 드래곤포스는 로드러너 레코드를 통해 드래곤포스가 보컬 ZP 더트와 갈라섰고 새로운 보컬을 찾는다고 밝혔다.[7] "드래곤포스가 ZP 더트와 갈라선다고 발표한 것을 후회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음악적인 의견의 차이였지만, 나머지 밴드 멤버들은 ZP 더트가 미래의 작업에서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머지 다섯명이 다섯 번째 앨범을 작곡하는 동안, 우리는 전 세계에서 새로운 보컬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드래곤포스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강력하고 멜로딕한 보컬을 찾고 있습니다." - 허먼 리 이 내용은 그 날 삭제되었지만, 다음날 공식적으로 밴드에 의해서 오디션에 참가하는 링크가 담겨있는 공식적인 발표가 게시되었다.[8] 음악적 스타일[편집] 밴드는 그들의 음악 스타일을 자주 단지 파워 메탈이 아닌 익스트림 파워 메탈이라고 불러왔다. 허먼 리는 기타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밴드의 음악 스타일에 대한 평가에 이렇게 말했다. "'닌텐도 메탈', '익스트림 파워 메탈', '저니가 슬레이어를 만났을때' ...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상한 꼬리표를 붙이고는 하죠."[9] 밴드는 가끔 곡에 들어가 있는 빠른 템포 때문에 메탈 평론가들에게 보충적으로 스피드 메탈 밴드라고 잘못 이름 붙여지기도 한다.[9][10][11][12] 논란[편집] 2006년 후반 Inhuman Rampage 투어가 최대 활동에 도달했을때 논란이 일어났다. 밴드는 악기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처음으로 악기의 튜닝을 반음 낮춰 Eb튜닝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또한 품질이 좋지 않은 라이브 공연 동연상이 인터넷에 게시되면서, 라이브에서 똑같은 속도를 낼 수 없어서 스튜디오 음반을 제작할때 속도를 올린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나머지 공연에서 음반의 곡와 같은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으로 루머를 해결했지만 여전히 루머는 퍼지고 있었다. "2006년 그래스팝 메탈 미팅(Graspop Metal Meeting)은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우리가 데려온 기술자들은 기타 튜닝도 하지 않았고, 모니터링할 장비도 갖춰지지 않아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 허먼 리 그는 또한 Inhuman Rampage 투어의 대부분의 공연은 기술적 문제에 의해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6] 밴드 구성원[편집] 현재 구성원 허먼 리 – 기타, 백 보컬 (1999 ~ 현재) 샘 토트먼 – 기타, 백 보컬 (1999 ~ 현재) 프레데릭 레클러크 – 베이스, 기타, 백 보컬 (2006 ~ 현재) 바딤 프루차자노 – 키보드, 백 보컬, 테레민 (2001 ~ 현재) 지 안젤론 – 드럼, 백 보컬 (2014 ~ 현재) 마크 허드슨 - 리드 보컬 (2011 ~ 현재) 전 구성원 ZP 더트 – 리드 보컬 (1999 ~ 2010) 에이드리안 램버트 – 베이스 (2004 ~ 2005) 디디에 알모즈니 – 드럼 (1999 ~ 2003) 디콘 하퍼 – 베이스, 백 보컬 (2001 ~ 2003) 스티브 윌리엄즈 – 키보드, 백 보컬 (1999 ~ 2000) 스티브 스콧 – 베이스, 백 보컬 (1999 ~ 2000) 데이브 매킨토시 - 드럼, 퍼커션, 백 보컬 (2003-2014) 마테즈 세팅크 - 드럼, 퍼커션 (1999) 드래곤포스의 음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드래곤포스의 음반 목록입니다. 정규 음반 Valley of the Damned (2003) Sonic Firestorm (2004) Inhuman Rampage (2006) Ultra Beatdown (2008) The Power Within (2012) Maximum Overload (2014) Reaching into Infinity (2017) 각주[편집] ↑ “interview dragonforce”. 2018년 3월 27일에 확인함.  ↑ “The 51st Annual Grammy Awards Winner List”. 《GRAMMY.com》. The Recording Academy. 2010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Orry, James (2008년 10월 23일). “Skate 2 and Skate It soundtracks revealed”. 《VideoGamer.com》. Pro-G Media Ltd. 2010년 1월 24일에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The Official NHL 10 Soundtrack - EA Trax”. 《EA.com》. Electronic Arts Inc.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DragonForce Video World Premier on Xbox Live”. DragonForce.com. 2010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가 나 “DragonForce: Live Playing 'Through The Roof' Since Having In-Ear Monitors”. 2012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 Updated: Dragonforce part ways with singer | EspyRock ↑ “BLABBERMOUTH.NET - DRAGONFORCE Confirms Singer's Departure”. 2012년 2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Guitar World, Holiday 2006, pg 72 "Hotter Than Hell" ↑ Entertainment | PE.com | Southern California News | News for Inland Southern California ↑ Entertainment - Juan Gabriel to play the Pond ↑ “Friday 07/07/06 Ozzfest 2006, Main Stage @ The Cricket Pavilion, Phoenix Arizona - GIGWISE”. 2006년 7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드래곤포스 공식 웹사이트 vdeh드래곤포스 허먼 리 샘 토트만 바딤 프루즈하노브 프레드릭 리클러크 마크 허드슨 지 안젤론ZP 더트 에이드리언 램버트 디디에 알모즈니 디콘 하퍼 스티브 스콧 스티브 윌리엄즈 마테즈 세팅크 데이브 매킨토시 정규 음반 Valley of the Damned Sonic Firestorm Inhuman Rampage Ultra Beatdown The Power Within Maximum Overload Reaching into Infinity 싱글 "Fury of the Storm" "Through the Fire and Flames" "Operation Ground and Pound" "Revolution Deathsquad" "Heroes of Our Time" "The Last Journey Home" "The Game" "Ring of Fire" 컴필레이션 음반 Killer Elite: The Hits, The Highs, The Vids 라이브 음반 Twilight Dementia In the Line of Fire... Larger Than Live 관련 문서 디스코그래피 전거 통제 WorldCat LCCN: no2006048641 ISNI: 0000 0001 0656 5940 GND: 10339103-4 BNF: cb14479323h (데이터) 뮤직브레인즈: ef58d4c9-0d40-42ba-bfab-9186c1483edd NKC: xx016452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드래곤포스&oldid=22278583" 분류: 영국의 헤비 메탈 밴드1999년 결성된 음악 그룹드래곤포스런던 출신 음악 그룹파워 메탈 밴드스피드 메탈 밴드숨은 분류: 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8일 (토) 15: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드래곤포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드래곤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드래곤포스 (DragonForce) 2013년 인도네시아 공연 모습 (왼쪽부터 프레드릭 레클러크, 데이브 매킨토시, 허먼 리, 샘 토트먼, 마크 허드슨, 바딤 프루차노브) 기본 정보 국가 영국 결성 지역 런던, 잉글랜드 다른 이름 드래곤하트 (DragonHeart, 1999-2002) 장르 파워 메탈, 스피드 메탈 활동 시기 1999년 ~ 현재 레이블 로드러너, 유니버설, 생추어리, 스파인팜, 노이즈 관련 활동 데모니악, 파워 퀘스트 웹사이트 www.dragonforce.com 구성원 허먼 리샘 토트먼바딤 프루차노브프레데릭 레클러크마크 허드슨지 안젤론 이전 구성원 ZP 더트에이드리언 램버트디디에 알모즈니디콘 하퍼스티브 윌리엄즈스티브 스콧데이브 매킨토시마테즈 세팅크 드래곤포스(DragonForce)는 1999년에 결성된 영국, 런던의 파워 메탈 밴드이다. 그들은 빠른 기타 솔로와 비디오게임에서 영향을 받은 전자음을 음악에 포함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목차 1 역사 1.1 결성 (1999 - 2002) 1.2 Valley of the Damned (1999- 2003) 1.3 Sonic Firestorm (2004 ~ 2005) 1.4 Inhuman Rampage (2006 ~ 2007) 1.5 Ultra Beatdown (2008 ~ 2009) 1.6 새로운 음반 (2010년 이후) 2 음악적 스타일 3 논란 4 밴드 구성원 5 드래곤포스의 음반 6 각주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결성 (1999 - 2002)[편집] 드래곤포스는 (드래곤하트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알려짐) 1999년에 기타리스트 허먼 리와 샘 토트먼에 의해서 결성되었다. 둘은 후에 광고를 통해 보컬 ZP 더트, 드러머 마테즈 세팅크,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콧, 키보디스트 스티브 윌리엄즈를 찾아냈다.[1] 샘 토트먼과 허먼 리는 데모니악이라는 밴드로 경험이 있었다. 최초로 밴드는 "드래곤하트"라는 이름으로 데모음반을 내고, 핼포드와 스트라토바리우스와 함께 투어공연을 했다. 밴드는 후에 또 다른 메탈 밴드와 이름이 겹친다는 것을 발견하고, 2002년에 '드래곤포스'로 밴드의 이름을 바꿨다. 드러머 마테즈 세팅크는 1999년 12월에 슬로베니아에서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해서 밴드를 떠났고, 디디에 알모즈니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2000년 11월에 스티브 스콧과, 2000년 초에 스티브 윌리엄즈는 밴드를 떠났다 베이시스트 디콘 하퍼는 2000년 11월에 밴드에 가입했고, 2001년 1월에 키보디스트 바딤 프루차노브가 첫 음반의 구성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가입했다. 디콘 하퍼는 2002년에 밴드를 떠났지만 드래곤포스의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의 세션 연주자로 활동했다. Valley of the Damned (1999- 2003)[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Valley of the Damned입니다. 드래곤포스는 2000년에 그들의 첫 데모음반을 녹음했다. 그것은 독립적인 발매였지만, 음반은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 파워 메탈 밴드중 하나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그들의 곡 "Valley of the Damned"는 그들이 밴드의 이름은 드래곤포스로 바꾼 직후에 발매한 최초의 싱글 음반이었다. 곡은 MP3.com에서도 2주일 동안 '가장 많이 내려받은 곡'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성공이었다. 데모가 발표된 직후 키보디스트 스티브 윌리엄즈와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콧이 밴드를 떠났고, 그 자리에 우크라니아 출신 키보디스트 바딤 프루차노브와 영국 출신 베이시스트 디콘 하퍼가 들어왔다. 2003년에 밴드는 노이즈 레코드와 계약을 했고, 그들의 첫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음반을 발표한 뒤, 밴드는 2004년까지 투어를 계속했다. 투어는 일본의 도쿄에서 끝이 났다. Sonic Firestorm (2004 ~ 2005)[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Sonic Firestorm입니다. 밴드의 두 번째 음반, Sonic Firestorm은 싱글 음반 "Fury of the Storm"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다. Sonic Firestorm은 에이드리언 램버트가 베이스를 맡고 데이브 매킨토시가 드럼을 맡은 최초의 음반이었다. 2004년에 데이브 매킨토시가 밴드에 가입할 때, 그들은 그들의 음악 스타일을 강력한 비트와 더블 베이스 리듬으로 인해 "익스트림 파워 메탈"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밴드가 국제적으로 유명해 지고 "빠른 본 조비"나 "저니가 슬레이어를 만남"이란 별명을 얻은 때가 이 쯤이었다. 투어는 Valley of the Damned때의 투어보다 더 길었다. 밴드는 W.A.S.P이나 아이언 메이든처럼 잘 알려진 메탈 밴드와 함께 투어를 했다. Inhuman Rampage (2006 ~ 2007)[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Inhuman Rampage입니다. 밴드는 ZP 더트를 포함한 6명의 구성원을 완성하기까지 다양한 구성원 변화가 있었다.밴드는 2006년에 영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의 로드러너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뒤 그들의 세 번째 음반인 Inhuman Rampage를 발매했다. "Through the Fire and Flames" 라는 곡은 기타 히어로3 : 레전드 오브 락과 기타 히어로 : 스매쉬 히트같은 게임에 포함된 유명한 곡 중 하나가 되었다. 허먼 리와 샘 토트먼의 이전 밴드인 데모니악의 구성원인 린제이 도슨은 이 음반에 백 보컬로 참여했다. 음반을 발매하기 전, 베이시스트인 아드리안 램버트가 2005년 11월에 태어난 아들을 돌보기 위해 밴드를 떠났다. 그 자리에 Sonic Firestorm 투어를 끝마치기 위해서 프레데릭 레클러크가 들어왔다. 프레데릭은 2006년 1월에 밴드의 공식 구성원가 되었다. 그는 밴드의 두 번째 싱글음반인 Operation Ground and Pound의 뮤직 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싱글 음반 Through the Fire and Flames는 미국과 캐나다의 골드 디스크에 올랐다. Ultra Beatdown (2008 ~ 2009)[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Ultra Beatdown입니다. 밴드는 디스터브드와 슬립낫과 함께 2008년의 여름동안 락스타 에너지 메탈 메이험 페스티벌(Rockstar Energy Metal Mayhem Festival)에서 투어공연을 펼쳤다. 밴드는 가을에 네 번째 정규 음반인 Ultra Beatdown으로 되돌아 왔다. 첫 번째 트랙이면서 첫 번째 싱글인 "Heroes of Our Time"은 2008년 12월 3일에 메탈리카의 "My Apocalypse"를 누르고 그래미 어워드의 '베스트 메탈 퍼포먼스' 부문에서 수상을 하게 되었다.[2] "Heroes of Our Time"의 짧은 버전은 비디오게임 스케이트 2[3] 와 NHL 10[4] 에 삽입되기도 했다. 2009년 1월 22일에 "The Last Journey Home"의 뮤직비디오가 온라인으로 공개되기 일주일 전에 엑스박스 라이브에 공개되었다.[5] 새로운 음반 (2010년 이후)[편집] 허먼 리는 드래곤포스가 2009년 12월에 투어를 멈추고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낸 뒤 2011년에 발매될 새로운 정규 음반을 작곡하고 녹음한다고 밝혔다.[6] 2010년 2월 22일에 밴드는 그들의 음반인 Valley of the Damned와 Sonic Firestorm을 재발매했다. Valley of the Damned는 새로 녹음되었고, 두 음반 모두에 보너스 트랙, 라이브 공연과 해설이 담겨있는 DVD가 포함되어 있다. 두 음반은 티셔츠, 기타 픽과 바람을 넣는 기타가 포함되어 있는 박스형태로도 발매되었다. 2010년 3월 8일에, 드래곤포스는 로드러너 레코드를 통해 드래곤포스가 보컬 ZP 더트와 갈라섰고 새로운 보컬을 찾는다고 밝혔다.[7] "드래곤포스가 ZP 더트와 갈라선다고 발표한 것을 후회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음악적인 의견의 차이였지만, 나머지 밴드 멤버들은 ZP 더트가 미래의 작업에서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머지 다섯명이 다섯 번째 앨범을 작곡하는 동안, 우리는 전 세계에서 새로운 보컬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드래곤포스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강력하고 멜로딕한 보컬을 찾고 있습니다." - 허먼 리 이 내용은 그 날 삭제되었지만, 다음날 공식적으로 밴드에 의해서 오디션에 참가하는 링크가 담겨있는 공식적인 발표가 게시되었다.[8] 음악적 스타일[편집] 밴드는 그들의 음악 스타일을 자주 단지 파워 메탈이 아닌 익스트림 파워 메탈이라고 불러왔다. 허먼 리는 기타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밴드의 음악 스타일에 대한 평가에 이렇게 말했다. "'닌텐도 메탈', '익스트림 파워 메탈', '저니가 슬레이어를 만났을때' ...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상한 꼬리표를 붙이고는 하죠."[9] 밴드는 가끔 곡에 들어가 있는 빠른 템포 때문에 메탈 평론가들에게 보충적으로 스피드 메탈 밴드라고 잘못 이름 붙여지기도 한다.[9][10][11][12] 논란[편집] 2006년 후반 Inhuman Rampage 투어가 최대 활동에 도달했을때 논란이 일어났다. 밴드는 악기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처음으로 악기의 튜닝을 반음 낮춰 Eb튜닝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또한 품질이 좋지 않은 라이브 공연 동연상이 인터넷에 게시되면서, 라이브에서 똑같은 속도를 낼 수 없어서 스튜디오 음반을 제작할때 속도를 올린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나머지 공연에서 음반의 곡와 같은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으로 루머를 해결했지만 여전히 루머는 퍼지고 있었다. "2006년 그래스팝 메탈 미팅(Graspop Metal Meeting)은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우리가 데려온 기술자들은 기타 튜닝도 하지 않았고, 모니터링할 장비도 갖춰지지 않아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 허먼 리 그는 또한 Inhuman Rampage 투어의 대부분의 공연은 기술적 문제에 의해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6] 밴드 구성원[편집] 현재 구성원 허먼 리 – 기타, 백 보컬 (1999 ~ 현재) 샘 토트먼 – 기타, 백 보컬 (1999 ~ 현재) 프레데릭 레클러크 – 베이스, 기타, 백 보컬 (2006 ~ 현재) 바딤 프루차자노 – 키보드, 백 보컬, 테레민 (2001 ~ 현재) 지 안젤론 – 드럼, 백 보컬 (2014 ~ 현재) 마크 허드슨 - 리드 보컬 (2011 ~ 현재) 전 구성원 ZP 더트 – 리드 보컬 (1999 ~ 2010) 에이드리안 램버트 – 베이스 (2004 ~ 2005) 디디에 알모즈니 – 드럼 (1999 ~ 2003) 디콘 하퍼 – 베이스, 백 보컬 (2001 ~ 2003) 스티브 윌리엄즈 – 키보드, 백 보컬 (1999 ~ 2000) 스티브 스콧 – 베이스, 백 보컬 (1999 ~ 2000) 데이브 매킨토시 - 드럼, 퍼커션, 백 보컬 (2003-2014) 마테즈 세팅크 - 드럼, 퍼커션 (1999) 드래곤포스의 음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드래곤포스의 음반 목록입니다. 정규 음반 Valley of the Damned (2003) Sonic Firestorm (2004) Inhuman Rampage (2006) Ultra Beatdown (2008) The Power Within (2012) Maximum Overload (2014) Reaching into Infinity (2017) 각주[편집] ↑ “interview dragonforce”. 2018년 3월 27일에 확인함.  ↑ “The 51st Annual Grammy Awards Winner List”. 《GRAMMY.com》. The Recording Academy. 2010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Orry, James (2008년 10월 23일). “Skate 2 and Skate It soundtracks revealed”. 《VideoGamer.com》. Pro-G Media Ltd. 2010년 1월 24일에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The Official NHL 10 Soundtrack - EA Trax”. 《EA.com》. Electronic Arts Inc.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DragonForce Video World Premier on Xbox Live”. DragonForce.com. 2010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 가 나 “DragonForce: Live Playing 'Through The Roof' Since Having In-Ear Monitors”. 2012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 Updated: Dragonforce part ways with singer | EspyRock ↑ “BLABBERMOUTH.NET - DRAGONFORCE Confirms Singer's Departure”. 2012년 2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Guitar World, Holiday 2006, pg 72 "Hotter Than Hell" ↑ Entertainment | PE.com | Southern California News | News for Inland Southern California ↑ Entertainment - Juan Gabriel to play the Pond ↑ “Friday 07/07/06 Ozzfest 2006, Main Stage @ The Cricket Pavilion, Phoenix Arizona - GIGWISE”. 2006년 7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7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드래곤포스 공식 웹사이트 vdeh드래곤포스 허먼 리 샘 토트만 바딤 프루즈하노브 프레드릭 리클러크 마크 허드슨 지 안젤론ZP 더트 에이드리언 램버트 디디에 알모즈니 디콘 하퍼 스티브 스콧 스티브 윌리엄즈 마테즈 세팅크 데이브 매킨토시 정규 음반 Valley of the Damned Sonic Firestorm Inhuman Rampage Ultra Beatdown The Power Within Maximum Overload Reaching into Infinity 싱글 "Fury of the Storm" "Through the Fire and Flames" "Operation Ground and Pound" "Revolution Deathsquad" "Heroes of Our Time" "The Last Journey Home" "The Game" "Ring of Fire" 컴필레이션 음반 Killer Elite: The Hits, The Highs, The Vids 라이브 음반 Twilight Dementia In the Line of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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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타워팰리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성 타워팰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성 타워팰리스 Samsung Tower Palace 왼쪽의 건물이 1차 앞의 두 흰색 건물이 2차이다.3차인 G동은 지상 73층, 263m로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았다. 정보 위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 30길 지리 좌표계 북위 37° 29′ 18.96″ 동경 127° 03′ 10.67″ / 북위 37.4886000° 동경 127.0529639°  / 37.4886000; 127.0529639좌표: 북위 37° 29′ 18.96″ 동경 127° 03′ 10.67″ / 북위 37.4886000° 동경 127.0529639°  / 37.4886000; 127.0529639 상태 완공 기공식 1999년 건축 2000년 ~ 2004년 착공 1999년 완공 2002년(A동, B동, C동, D동)2003년(E동, F동)2004년(G동) 개장 2004년 용도 주거 높이 최상층 G동: 263mB동: 234mA동, C동: 209mE동, F동: 191mD동: 153m 기술적 상세 내용 층수 G동: 지상 69층 지하 6층B동: 지상 65층 지하 5층A동, C동: 지상 59층 지하 5층E동, F동: 지상 55층 지하 5층D동: 42층 지하 4층 연면적 100,000m2 엘리베이터 대수 101 회사 건축가/건축회사 삼성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 구조 엔지니어 삼우토건 스키드모어, 오윙스 앤드 메릴 계약자 삼성물산 개발사 삼성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 소유주 삼성물산 웹사이트 http://www.towerpalace1.co.kr 삼성 타워팰리스(영어: Samsung Tower Palace)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분당선과 서울 지하철 3호선의 환승역인 도곡역 앞에 위치한 7개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이며, 초고층 건물로 마천루 이다. 설계는 미국의 건설업체 스키드모어, 오윙스 앤드 메릴이 맡았고, 삼성물산이 개발하였으며 A, B, C, D, E, F, G로 구성된 7개의 초고층 아파트들로 구성되어 있다.[1] 타워는 탑을 가리키고 팰리스는 궁전을 가리킨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건설된 초고층 주상복합 단지다. 타워팰리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삼성 타워팰리스 3차 G동(73층, 265m)이며 타워팰리스에서 가장 낮은 건물은 삼성 타워팰리스 1차 D동(42층, 153m)이다. 면적의 공급은 69평이고 전용은 49평, 구조는 3룸, 2욕실, 1297세대 규모의 단지이다. 목차 1 역사 1.1 계획 1.2 건설 2 계획 3 구성 4 특징 및 구조 4.1 서비스 4.2 구조 개요와 특성 4.2.1 프레임 시스템 4.2.2 평판 시스템 4.3 구조형식 4.3.1 코어월 4.3.2 아웃트리거, 벨트 트러스 4.3.3 기둥 4.3.4 바닥 4.3.5 기초 4.3.6 고충부 및 기초부 설계 4.4 건축시공 4.4.1 공사스케줄 및 공정관리 4.4.2 1차 주공정선 4.4.3 2차 주공정선 4.4.4 3차 주공정선 4.5 엘리베이터 5 사건 및 사고 5.1 2015년 10월 2일 타워팰리스 쓰레기장 1억원 수표 사건 6 대중문화 7 평가 8 갤러리 9 같이 보기 9.1 건물 목록 9.2 참조 항목 10 주해 11 각주 12 외부 링크 역사[편집] 계획[편집] 초기 이 곳은 공군사관학교 소속 부지였다. 그러나 1994년 무렵부터 삼성그룹이 이 곳에 신사옥을 지을 계획을 세우면서 이 부지를 사들였다. 신사옥 계획은 2002년까지 강남구 도곡동 일원에 지상 103층, 380m짜리 초고층 건물을 지어 상업, 업무, 쇼핑, 거주 복합 단지로 세우자는 계획이었고, 이 때 가칭 '삼성 타운'이라는 계획을 세웠다.[2][3] 이렇게 하여 세워진 계획이 삼성 시너지 타워였다. 그러나 1996년 10월부터 본격 공사를 진행하려 하였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과 이듬해인 1997년에 불어닥친 IMF 외환 위기 등으로 인하여 사실상 신사옥 건설은 무산되었다. 이후 1998년 어느 정도 그룹의 상황이 나아지자, 삼성그룹은 이 곳에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를 계획하게 되었다. 지상 93층, 323m의 초고층 아파트를 지어 고급화된 아파트를 제공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42층부터 93층까지 약 7개의 다양한 건물들을 짓기로 하고 허가를 기다렸으나, 막상 서울특별시가 93층 아파트를 짓는 데에 매우 부정적이었고, 우선 1999년 42층~65층짜리 A, B, C, D 4개 동을 우선 착공하였다. 건설[편집] 이후 2000년 55층짜리 E, F동이 착공되었을 때도 G동의 규모에 대해서 서울시와 삼성그룹이 극심한 반목을 거듭하였고, 결국 지상 69층 규모로 건설하는 데에 합의하고 가장 높은 G동은 2001년 착공하여 2004년 완공되었다. 계획[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삼성 타워팰리스의 계획입니다. 구성[편집] 타워팰리스는 한 개의 마천루가 아니라, 42층 1동, 55층 2동, 59층 2동, 65층 1동, 73층 1동 등 총 7개의 마천루 단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1년에서 2004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모두가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로 사용되며 대부분의 유명한 한국인들의 거주지로 알려져 있다. 외국인들도 거주할 수 있으며 부유층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이다. 아파트 1채에 수십억을 호가하며 1가구당 월 관리비만 150만원 정도이다. 그리고 매우 비싼 아파트이며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다. 2010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였으며, 현재도 삼성동 아이파크와 더불어 대한민국 대표 고가(高價) 아파트로 꼽힌다. 2003년에 완공된 타워팰리스 2차의 가격은 2015년 기준으로 50억 6500만원이다.[4] 타워팰리스의 모습은 1차(A,B,C,D)와 2차(E,F), 3차(G)가 각기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데 3차(G)의 경우 가장 높고 3개의 둥근 타원형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형상이다. 타워펠리스 3차는 Q1 빌딩(323m), 해운대 위브 더 제니스 타워(301m), 해운대 아이파크 타워(292m), 유레카 타워(298m), 21세기 타워(267m)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초고층 아파트이다. 헬기장은 모든 건물의 지붕에 위치해 있다. 건물 명칭 사진 착공 완공 설명 층수 높이 상태 삼성 타워팰리스 1차 1999년 2002년 타워 팰리스 1차(영어: Tower Palace One)는 전체 7개 동 중 A, B, C, D동 등 4개 마천루를 일컫는다. 타워 팰리스 7개 동 중 가장 먼저인 1999년 착공하였으며, 2002년 전체적으로 완공되었다. A동에서 C동까지는 지하주차장, 로비, 아파트가 있고 D동에는 A동에서 C동까지를 포함한 시설과 오피스텔이 있다. A동 59층 B동 65층[나] C동 59층 D동 42층 A동 209m B동 234m C동 209m D동 153m[다] 완공 삼성 타워팰리스 2차 2000년 2003년 타워 팰리스 2차(영어: Tower Palace Two) 건물은 2000년 착공하여 2003년 완공된 두 개의 건물로 E, F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 다 지상 55층, 191m의 쌍둥이 건물이다. E동에서 F동까지는 지하주차장, 로비, 아파트, 오피스텔이 있다. E동, F동 55층 E동, F동 191m 완공 삼성 타워팰리스 3차 2001년 2004년 타워 팰리스 3차(영어: Tower Palace Three) 건물은 가장 나중인 2001년 착공하여 2004년 완공되었다. G동이 유일하게 3차에 해당하며,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타원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G동이며 지하주차장, 로비, 아파트, 오피스텔이 있다.타워팰리스 G동은 69층인 610세대 규모에 264m(866피트) 높이로 지상 264m, 73층 건물로 완공 당시 하이페리온 타워 A동(69층, 256m)을 제치고 완공 당시부터 2011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마린시티에 80층, 301m높이의 해운대 위브 더 제니스 타워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고 약 7년 간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이었다.[5][가]보통 좁은 의미에서의 '타워 팰리스'는 이 건물을 주로 가리킨다. G동 69층 G동 265m 완공 특징 및 구조[편집] 서비스[편집] 타워 팰리스는 2002년 최초 입주 당시부터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유비쿼터스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최초로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 모든 엘리베이터나 정문, 출입문에 '카드 키 보안 시스템'(Card-Key Security System)이 설치되어 있다.[라] 정문, 출입문에 '카드 키' 혹은 '지문 인식'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조명, 커튼, 홈 네트워크(Home Network), 세탁기 등을 집주인의 휴대전화 등으로 제어하여 미리 예약할 수 있다. 구조 개요와 특성[편집] 프레임 시스템[편집] 타워부 : R.C Core + Outrigger + Belt Truss + SRC 기둥의 합성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부 : Column, Beam & Girder, 평판 등이 P.C구조(일부 R.C)로 형성되어 있다. 평판 시스템[편집] 타워부 : 두께 135mm 상하현 철근 복합 데크플레이트 평판로 구성되어 있다. (Non Support 시공) 지하부 : 두께 70mm(Half P.C) + 100mm 콘크리트 덧치기로 총두께 170mm로 중력 및 횡력(토압 + 수압)에 저항하는 구조이다. 구조형식[편집] 코어월[편집] 코어월은 THK500mm로 층에 따라두께를 효율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콘크리트 강도는 500 ~ 300 kg/cm2로 변화시켰다. 코어월 오픈 부분에는 Lintel Beam(연결보)을 설치하여 코어의 횡력 저항에 극대화 했으며, 작업의 반복성 등을 고려하여 코어 월은 클라이밍 폼을 사용하여 시공성을 향상시켰다. 아웃트리거, 벨트 트러스[편집] 타워팰리스 1차는 R.C 코어와 아웃트리거 및 벨트 트러스가 중력 및 횡력에 저항하는 주요 구조체로서 R.C 코어는 전 층에 설치하였으며(B동 기준), 지상 3층, 4층 기계실과 6층, 2층 바닥에 아웃트리거 및 벨트 트러스를 설치하여 R.C 코어의 횡변형을 억제하고 구조물 상부의 모멘트를 감소시켰다. 이와 같이 구조물은 하부 뿐만 아니라 상부에서 구속되기 때문에그 처짐 형상이 순수 캔틸레버 기둥이 아닌 변곡점을 가진 S형 곡선 형상을 보인다. 이러한 합성 작용으로 코어의 휨 모멘트와 구조물의 처짐을 줄이게 되었다. 기둥[편집] 기둥의 주 간격은 8.4m × 8.4m 모듈을 유지하며, 기둥의 형태는 공간활용성을 고려하여 사각형의 합성기둥(S.R.C)으로 설계하였으며, 합성기둥의 설계는 SSRC(Structural Stability Research Council)로 설계하며, 단면의 크기는 R.C: 850 × 850 + STEEL: 내경 3, 5, 8의 H형강의 크기를 유지하며, 층수에 따라서 철골 두께를 조정하였다. 합성 기둥의 콘크리트 강도는 500 ~ 240 kg/m2까지 사용하였으며, 철골은 두께 40mm 초과시 SM520 TMCP 강(Fy = 3,600 kg/m2)을 사용하여 중력하중 및 횡하중에 저항하도록 설계하였다. 바닥[편집] 바닥 평판은 두께 135mm의 상하현 철근 복합데크 평판을 사용하여 시공성을 높였으며, 바닥 평판이 다이아프램(diaphragm) 역할을 충분히 하여 코어부로 횡력을 전달시킬 수 있도록 코어부와 만나는 평판에는 철근을 보강설계했다. A, B, C동의 모든 내부의 단순보(Shear Connection)는 합성보(Composite Beam)로 설계하여 물량절감 및 층고를 최소화했다(보 최대 크기는 H - 400임 : 기준층 바닥). 보 및 평판에 대해서는 진동 등 사용성에 관련하여 검토설계하였다. D동의 경우 동내부의 다이아프램 결손부(중정)와 편심 코어 등으로 야기되는 건물의 불규칙 변형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자 기둥과 내부 보의 연결을 강접(Moment Connection)으로 설계하여 건물의 전체 강성을 향상시켰다. 기초[편집] 설계지내력 : 고층부의 기초는 경암층(Fresh Sound Rock) 위에 놓이도록 하였다. 파쇄대를 고려한, 지반의 정확한 Rock 용수철을 구하여 기초해석에 적용하였다(설계지내력은 200t/m2 이상으로설계). 저층부의 기초는 경암층 위 또는 연암층(Partly Weathered Rock)위에 놓이도록 계획하였다(정확한 지질조사에 근거하여 지반상태에 따라 200t/m2, 90t/m2, 50t/m2으로 계획). 기초의 최대 침하는 30mm 이내로 하고, 부동침하는 20mm 이내로 유지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기초 시스템의 기초 평판 하부에는 Pubic Drain Board Type의 영구배수장치 (Dewatering System)를 설치하여 기초 평판에 어떤 양압(Buoyancy)도 작용하지 않도록 설계에 적용하였다. 고충부 및 기초부 설계[편집] 고층부 기둥은 온통기초(Mat Foundation)고 고층부 코어는 온통기초(Mat Foundation)고 기초부 설계는 중력하중 및 횡하중에 의해서 생기는 압축 및 인장력의 가능한 모든 하중조합을 통하여 기초의 안정성을 검토하였다. 관입 면에서 타워팰리스 1차의 변형형으로 조합되어 전혀 다른 현재와 미래의 이미지를 가진다. 건축시공[편집] 타워팰리스 1차는 그 규모가 65층 1개동과 59층 2개동, 42층 1개동의 총연면적 13만 8천평에 이르는 도심형 초고층 빌딩으로 3일에 1개층씩 골조공사를 진행하였으며, 39개월만에 완공해야 했다. 분당 90m를 운행하는 초고속 호이스트, 13기의 대형 타워크래인, 초고압 콘크리트 펌프 등의 하드웨어적인 방안과 함께 인터넷을 이용한 인원 관리, 자재관리, 도면관리 등의 물류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여 초고층 공사의 최단기간 달성을 지원하였다. 공사스케줄 및 공정관리[편집] 국내 초고층 주거형 건물은 일반적인 초고층 건축공사와 달리 방바닥 미장공사라는 습식공사가 마감공사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부동 침하로 인한 벽체와 바닥과의 레벨 차이, 추가 처짐을 고려한 공사일정 계획 수립이 요구된다. 따라서 초고층 주거형 건물의 주공정선은 다음과 같이 수립한다. 1차 주공정선[편집] 토공사 → 기초공사 → 코어 골조공사 → 바닥 골조공사 → 외벽 커튼월 공사 → 천정배관공사 → 기반마감공사 → 방바닥 미장공사 → 인테리어 기반공사 →최종 인테리어공사 → 준공 준비 → 준공 2차 주공정선[편집] 골조공사 → 고층부 엘리베이터 설치 → 호이스트 해체 → 호이스트 자리 마무리공사 → 부대토목 및 조경공사 → 준공 준비 → 준공 타워팰리스 현장은 2차 동절기 기간(2001년 12월~ 2002년 2월)에 최종 인테리어 공사의 주작업인도장 및 도배공사, 온돌마루공사가 진행되었으며, 동절기 습식공사 진행 및 화재위험 등을 고려하여 지역난방을 이용한 동절기 난방을 하도록 결정하였다. 고층부는 2001년 11월경 방바닥 타설이 가능하도록 부동침하량이 계산되었다. 이에 따라 방바닥 미장양생 및 건조를 위한 별도의 보온시설이 필요하게 되나, 열풍기 등을 이용할 경우 화재의 위험성이 있고, 사면이 커튼월로 막혀있는 초고층 건물의 특성상 자연 화기에 의한 제습이 불가능하여 방바닥 미장 건조기간이 최소한 4개월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자연 건조시 후속공사인 도배/도장 등의 최종 인테리어 공사가 실내의 고습도로 인한 하자 발생이 예상되었다. 이에 따라 2차 동절기 공사 진행을 위하여 지역난방을 조기인입을 검토하게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난방 주배관이 통과하는 2단계 구간 주차장 골조공사를 3차 주공정선으로 정하여 일정계획을 하게 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지역난방공사의 발전소 증설기간 및 예산 확보를 위하여 2000년 10월부터 지역난방공사와 협의하여 2001년 11월 지역난방을 인입하게 되었다. 3차 주공정선[편집] 1차 토공사 → 1차 주차장 골조공사 → 2차 토공사→ 2차 주차장 골조공사 → 설비난방 주배관공사 → 최종 인테리어공사 → 준공 준비 → 준공 초고층 건물의 시공방법으로서 필연적이라고 할 수있는 단결된 커튼 월 시스템(Curtain Wall System) 을 적용하였다. 이 시스템을 적용함으로써 커튼월의 고품질 및 층당 3일의 주기가 시공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Open Joint 시스템이 적용됨으로써 커튼월이 수밀성을 향상시켰다. 커튼월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형태의 유닛은 Opening, Fixed, Louver, 패널 유닛 등이 있다. Opening 유닛은 개폐창의 설계풍압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그 폭을915mm 정도로 최소화하였으며, Fixed 유닛은 입주자의 조망을 고려하여 그 폭을 최대한 넓게(1,830mm) 설계하였다. 또한 Louver 유닛은 에어컨 실외기실에 적용하였으며, 패널 유닛은 기둥이 있는 부위에 설치되었다. 타워팰리스 1차의 코어 골조는 코어골조공법(Automatic Climbing System)으로 이루어져 있다. 코어골조공법은 유압 유닛와 양중용 윤곽을 이용하여 1개 층 높이로 제작된 폼을 1개층씩 상승시키며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공법이다. 공기단축: 3day/fl. (실제 시간) 공정: 슬립 폼에 비해 공정이 다소 복잡함. 품질관리 : 콘크리트면의 평활도 및 골조품질이 양호함. 안전관리 : 안전시설물 일체화로 추락/낙하사고 예방함. 철골설치공법(N공법)은 절단위로 설치되는 기존 공법과는 달리 층 단위로 설치되는 공법으로서 기중의 이음 위치를 층별로 분산하여 용접, 수직도 조정 등의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공법이다. 작업량 분산을 통한 출력인원이 저감되고 순환 공정의 진행을 통한 연속 작업이 가능하고 1층 이상의 작업을 없앰으로써 안전성이 향상되며, 후속 공정의 조기 착수로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장 유약 시스템(Factory Glazing System)은 커튼월 유닛에 유리 끼우는 작업을 유닛 제작공장에서 완료 후 현장에 반입시킴으로써 커튼월의 품질 향상 및 설치 일정 단축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커튼월 유닛의 Joint 폭은 설치 전후 유닛에 가해지는 각종 변위를 흡수할 수 있도록 수직 8mm, 수평 20mm 폭으로 설계되었다. 수평 joint : 20mm, 수직 : 8mm 온도 편차에 의한 변위: 9mm, 수직 : 5mm 열 단축 : 3mm 평판 처짐: 5mm 가공, 조립오차: 1mm (수평, 수직) 설치오차: 2mm (수평, 수직) 엘리베이터[편집] 타워팰리스 1차에는 동양엘리베이터(현 티센크루프), 2차에는 LG-오티스엘리베이터(현 오티스), 3차에는 한국미쓰비시엘리베이터의 제품이 설치되었으며 저층용, 고층용, 비상용, 상가 및 주차장 셔틀용으로 구분된다. 모든 세대용 엘리베이터는 카드리더기가 있으며 카드키를 태그해야 작동된다. 사건 및 사고[편집] 2015년 10월 2일 타워팰리스 쓰레기장 1억원 수표 사건[편집] 타워팰리스의 쓰레기집하장에 버려진 여행용 가방에서 100만원짜리 수표 100장인 1억원어치 수표가 든 봉투가 2015년 10월 3일 오전 11시 55분쯤 아파트에 근무하는 청소부인 김모(63)씨가 쓰레기집하장에서 100만원짜리 수표 100장이 든 봉투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해서 수표가 발견이 되었다. 언론보도가 되고 10월 5일 주인이라며 50대 사업가 A씨가 나타났고 경찰 조사결과 주인으로 확인되어 발견자에게 유실물 법에 따라 5~20% 사이의 보상금을 발견자에게 지불하고 원주인이 돈을 찾아갔다. 보상금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양측 모두 밝히지 않았다. 대중문화[편집]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 삼성 타워팰리스 1차와 삼성 타워팰리스 3차 G동이 나온다. 2012년에 개봉한 영화 R2B: 리턴투베이스에 삼성 타워팰리스의 단지들이 나온다. 2018년에 개봉한 영화 독전에 삼성 타워팰리스의 단지들이 나온다. 평가[편집] 2013년 동아일보와 건축전문잡지 SPACE가 건축가 100명을 조사한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 랭킹 9위에 올랐다. 갤러리[편집] 양재천에서 본 타워팰리스 단지 전경. 타워 팰리스 단지 전경. (2006년) 도곡동 방향의 양재천 야경. 구룡산 국수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타워팰리스. 구룡산 국수봉 전망대에서 본 서울전경. 구룡산 국수봉에서 본 서울전경과 북악산이라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건물 목록[편집] 마천루 목록 아시아의 마천루 목록 대한민국의 마천루 목록 서울특별시의 마천루 목록 참조 항목[편집] 해운대 엘시티 더샵 Q1 타워 유레카 타워 래미안 해운대 두산위브더제니스 해운대 I'PARK 메타폴리스 더 샾 퍼스트 월드 서울국제금융센터 주해[편집] 가. ^ 동북아무역타워는 2012년에 골조공사가 완공되었기 때문에 2011년 ~ 2012년에는 해운대 두산 위브 더 제니스가 가장 높았다. 나. ^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63빌딩의 층수인 '61층'을 넘긴 건물이다. 하지만 63빌딩(249m)보다 높이는 낮다. 다. ^ 타워 팰리스 단지 중 가장 높이가 낮은 건물이다. 그러나 7개동 중 가장 대지면적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다. 라. ^ 지금은 주상복합아파트가 많아졌고 고급 오피스도 많아져서 이는 매우 흔했지만, 당시 '아파트'에 적용했다는 점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이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한 건물은 1985년 개장한 '63시티'이다. 각주[편집] ↑ “<타워팰리스10년> 타워팰리스는?”. 해럴드경제. 2012년 5월 18일. 2017년 3월 21일에 확인함.  ↑ 삼성 百2층빌딩 건축 추진, 1996년 4월 13일 <동아일보> ↑ 江南 도곡동에 102층 빌딩, 1996년 4월 8일 <경향신문> ↑ 박태진 (2015년 3월 25일). “[부자들의 집] <1>도곡동 타워팰리스, 대한민국 성공인생의 상징”. 《이투데이》. 2017년 3월 21일에 확인함.  ↑ “경제매거진 0100 세계의 마천루, 대한민국”. 한국경제TV. 2009년 2월 13일. 2009년 12월 2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타워팰리스 1차 - 공식 웹사이트 타워팰리스 자연환기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 vdeh타워팰리스마천루 타워팰리스 삼성 타워팰리스 1차 삼성 타워팰리스 2차 삼성 타워팰리스 3차 계획 타워팰리스의 계획 vdeh 대한민국의 마천루서울특별시 31빌딩 63빌딩 정부서울청사 서울스퀘어 롯데호텔 서울 KAL 빌딩 종로타워 광화문 D타워 서울국제금융센터 서울 제1국제금융센터 서울 제2국제금융센터 서울 제3국제금융센터 콘래드 서울 호텔 한기련회관 롯데월드타워 롯데호텔월드 트레이드 타워 뉴 트레이드 타워 아셈타워 파르나스 타워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두산타워 삼성 타워팰리스 삼성 타워팰리스 1차 삼성 타워팰리스 2차 삼성 타워팰리스 3차 목동 하이페리온 목동 트라팰리스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현대차 컨벤션 호텔 강남 파이낸스 센터 큰길타워 삼성동 아이파크 서초 삼성타운 서초동 대림 아크로비스타 LG트윈타워 파크원 타워 여의도 페어몬트 호텔 에스트레뉴 타워 래미안 첼리투스 래미안 강동 팰리스 이스트 센트럴 타워 래미안 용산 더 센트럴 용산시티파크 용산파크타워 용산파크자이 대우월드마크 용산 한강트럼프월드3차 용산 벽산메가트리움 LG유플러스 용산 사옥 KY빌딩 센트레빌 아스테리움 서울 DB금융센터 KDB생명타워 서울드래곤시티 한화 갤러리아포레 상봉 프레미어스 엠코 SBS 방송 센터 GS타워 GT타워 부띠크모나코 서울숲 트리마제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뚝섬 부영아파트 뚝섬 부영호텔 용산 푸르지오 써밋 LS용산타워 더클래식500 더샵스타시티 디큐브시티 디큐브시티 아파트 강변 테크노마트 신도림 테크노마트 메세나폴리스 메세나폴리스 레지던스 세아타워 마포한강푸르지오 덕수궁 롯데캐슬 반포자이 반포 디에이치 클래스트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 반포 아크로리버파크 여의도 대우트럼프월드 잠실 롯데캐슬골드 잠실 엘스 잠실 리센츠 잠실 트리지움 잠실 레이크팰리스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 랜드마크 타워 청량리 동부청과 한양수자인 동일하이빌 뉴시티 코업 스타클래스 보라매 쉐르빌 현대 41 타워 아카데미 스위트 대림 아크로빌 현대 슈퍼빌 SK서린빌딩 상봉 듀오트리스 브라운스톤 서울 여의도 리첸시아 타워 용산 KCC 웰츠타워 갤러리아 팰리스 삼성SDS타워 향군타워 청계천 두산위브더제니스 잠실 푸르지오 월드마크 남산 트라팰리스 T타워 서울 시티타워 강동 헤르셔 타워 트윈시티 남산타워 육군호텔 G스퀘어 상암카이저팰리스클래식 서울숲 더샵 LSK플러스 용산 오피스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 가산 센트럴 푸르지오시티 국제전자센터 여의도우체국 사학연금회관 테헤란로 237 JW 메리어트 서울 오크우드 프리미어 코엑스센터 롯데호텔 L7 강남 용산 아모레퍼시픽 여의도 브라이튼 부산광역시 롯데호텔 부산 협성 마리나 G7 해운대 두산 위브 더 제니스 해운대 아이파크 파크 하얏트 부산 부산국제금융센터 해운대 엘시티 더샵 롯데타운타워 KNN 타워 W LG메트로시티 GS하이츠자이 해운대 더샵 센텀스타 해운대 더샵 센텀파크 해운대 더샵 아델리스 해운대센텀엘카사 서면 더샵 센트럴스타 더 게이트 센텀 WBC 더 팰리스 해운대 힐스테이트 위브 SK 허브 스카이 센텀 리더스 마크 이진 베이시티 센텀스카이비즈 해운대 대우 아라트리움 경동 제이드 비아이시티 비아이시티 호텔동 비아이시티 오피스텔동 마린시티자이 해운대 엑소디움 타워 범일 마제스 타워 오션브릿지 해운대 시타딘호텔 해운대 한신휴플러스 구포동 동원 로얄듀크 비스타 동래 한화 꿈에그린 남천 엑슬루 타워 영광골든타워 광안 쌍용예가 디오션 남천 코오롱 하늘채 골든비치 대연 롯데캐슬 레전드 대연 힐스테이트푸르지오 명지 더샵 퍼스트월드 오륙도 SK뷰 화명 롯데캐슬 카이저 해운대 SK뷰 국제신문빌딩 한화리조트 해운대 씨클라우드 호텔 동래 효성해링턴 플레이스 대구광역시 수성 SK 리더스 뷰 수성 두산 위브 더 제니스 두류역 제타시티 마크팰리스 범어 브라운스톤 범어 범어네거리 서한이다음 대구역 센트럴 자이 범어역 우방유쉘 두산 대우트럼프월드 경남 센트로팰리스 경남 센트로팰리스 오피스텔 월드마크 웨스트엔드 SK 허브 스카이 용산동 롯데캐슬 그랜드 대구 월배 아이파크 범어 화성파크드림 범어 센트럴 푸르지오 테크노 폴리스 중흥S클래스 월성 협성휴포레 인천광역시 포스코타워-송도 송도 더샵 센트럴파크 송도 센트럴파크 푸르지오 송도 센트럴파크 호텔 송도 더샵 퍼스트월드 청라 대우 푸르지오 송도 아트윈 푸르지오 G타워 청라 시티타워 송도 캠퍼스타운 청라 더샵 레이크 파크 송도 IBS타워 용현 엑슬루 타워 청라 엑슬루 타워 에코메트로 포스코 E&C 타워 부영송도타워 송도 센트로드 송도 아메리칸타운 아이파크 연수 푸르지오 학익 엑슬루 타워 청라 롯데캐슬 송도 푸르지오 하버뷰 송도 자이하버뷰 인천 더샵 스카이타워 갯벌타워 미추홀타워 베니키아 프리미어 송도 브릿지 호텔 쉐라톤 그랜드 인천 호텔 홀리데이 인 인천 송도호텔 다인 로얄팰리스 테라스 송도 롯데몰 송도 캐슬파크 로봇타워 송도 AT센터 힐스테이트 송도 더테라스 송도 랜드마크시티 센트럴 더샵 광주광역시 광주 호반 써밋플레이스 금호생명 본사 빌딩 중흥S클래스 스카이31 화정동 유니버시아드 힐스테이트 상무광명메이루즈 봉선동 남양휴튼 2차 아파트 첨단대우이안 벽산 블루밍 메가시티 아파트 첨단 힐스테이트 리버파크 각화 서희스타힐스 상무 유탑 유블레스 트윈시티 무등산 아이파크 아파트 대우디오빌 광주은행 본점 빌딩 각화 휴먼파크 서희스타힐스 대전광역시 대전 사이언스 콤플렉스 금강 엑슬루 타워 철도기관 공동사옥 서대전역 우방 아이유쉘 스카이팰리스 유성자이 아파트 대전 스마트 시티 정부대전청사 동아벤처타워 울산광역시 울산 이안 태화강 엑소디움 울산 롯데캐슬스카이 한양립스 더 스카이 신정 두산 위브 더 제니스 태화강 풍림 엑슬루 타워 우정동 마제스 타워 삼산동 대성 스카이렉스 울산 코오롱 파크폴리스 울산 삼환아르누보 롯데호텔 울산 세종특별자치시 세종 한신더휴 리저브 힐스테이트 세종 리버파크 도램마을 20단지 한양수자인 에듀파크 범지기마을 10단지 푸르지오 가재마을 세종현대엠코타운 5단지 아파트 세종 지웰 푸르지오 경기도 일산 두산위브더제니스 일산 요진 와이시티 힐스테이트 일산 일산 더샵 그라비스타 일산 킨텍스 꿈에그린 브로멕스 타워 일산 킨텍스 원시티 일산 대방디엠시티 메타폴리스 리첸시아 타워 흥덕IT밸리 네이버 그린팩토리 광교SK뷰레이크타워 광교SK뷰레이크타워 오피스동 광교SK뷰레이크타워 오피스텔동 평택용이1차푸르지오 평택용이2차푸르지오 남양주 부영 e그린타운 수지 래미안 이스트팰리스 평촌 아크로타워 하남 벨리체 힐스테이트 광교 금강펜테리움 IX타워 삼성디지털시티 현대성우오스타 코아루 광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그랑시티자이 안산 레이크타운 푸르지오 시흥 센트럴 푸르지오 평촌 오비즈타워 안양금융센터 광명역 센트럴 자이 G스퀘어 분당스퀘어 강원도 온의동 롯데캐슬 스카이클래스 보광휘닉스파크 블루동 하이원 그랜드 호텔 메인타워 하이원 그랜드 호텔 컨벤션타워 충청북도 신영 지웰시티 청주 두산위브더제니스 오창 서청주센트럴파크 충청남도 펜타포트 전라북도 우석대학교 대학본부 건지산 이지움 전주 라마다 호텔 전라남도 E편한세상 광양 엠블호텔 여수 한국농어촌공사 나주 본사 한국전력공사 나주 본사 남교트윈스타 에메랄드퀸 경상북도 장성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용황 협성휴포레 도량 롯데캐슬 골드파크 경상남도 창원 메트로시티 1차 창원 메트로시티 2차 더 시티7 자이 무학자이 거제 장평 유림 노르웨이숲 아파트 스타디메르 제주특별자치도 롯데시티호텔 제주 제주 칼호텔 메종글래드 제주 제주 드림타워 vdeh 서울특별시의 마천루영등포구의 마천루 63빌딩 서울국제금융센터 서울 제1국제금융센터 서울 제2국제금융센터 서울 제3국제금융센터 콘래드 서울 호텔 한기련회관 LG트윈타워 파크원 타워 여의도 페어몬트 호텔 에스트레뉴 타워 여의도 리첸시아 타워 여의도 대우트럼프월드 여의도우체국 사학연금회관 여의도 브라이튼 강남구의 마천루 트레이드 타워 뉴 트레이드 타워 아셈타워 파르나스 타워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삼성 타워팰리스 삼성 타워팰리스 1차 삼성 타워팰리스 2차 삼성 타워팰리스 3차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현대차 컨벤션 호텔 강남 파이낸스 센터 큰길타워 GS타워 GT타워 삼성동 아이파크 아카데미 스위트 대림 아크로빌 DB금융센터 테헤란로 237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오크우드 프리미어 코엑스센터 롯데호텔 L7 강남 서초구의 마천루 서초 삼성타운 서초동 대림 아크로비스타 국제전자센터 부띠크모나코 현대 슈퍼빌 반포자이 반포 디에이치 클래스트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 반포 아크로리버파크 JW 메리어트 서울 송파구의 마천루 롯데월드타워 롯데호텔월드 갤러리아 팰리스 삼성SDS타워 향군타워 잠실 롯데캐슬골드 잠실 푸르지오 월드마크 잠실 엘스 잠실 리센츠 잠실 트리지움 잠실 레이크팰리스 중구의 마천루 서울스퀘어 두산타워 롯데호텔 서울 KAL 빌딩 브라운스톤 서울 남산 트라팰리스 T타워 서울 시티타워 청계천 두산위브더제니스 덕수궁 롯데캐슬 종로구의 마천루 31빌딩 종로타워 SK서린빌딩 정부서울청사 광화문 D타워 양천구의 마천루 목동 하이페리온 목동 트라팰리스 SBS 방송 센터 현대 41 타워 용산구의 마천루 래미안 첼리투스 래미안 용산 더 센트럴 센트레빌 아스테리움 서울 용산 푸르지오 써밋 서울드래곤시티 용산 KCC 웰츠타워 KDB생명타워 트윈시티 남산타워 육군호텔 LS용산타워 용산시티파크 용산파크타워 용산파크자이 대우월드마크 용산 한강트럼프월드3차 용산 벽산메가트리움 LG유플러스 용산 사옥 KY빌딩 LSK플러스 용산 오피스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 용산 아모레퍼시픽 성동구의 마천루 한화 갤러리아포레 서울숲 더샵 서울숲 트리마제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뚝섬 부영아파트 뚝섬 부영호텔 성북구의 마천루 코업 스타클래스 동일하이빌 뉴시티 강동구의 마천루 래미안 강동 팰리스 이스트 센트럴 타워 강동 헤르셔 타워 중랑구의 마천루 상봉 프레미어스 엠코 상봉 듀오트리스 마포구의 마천루 메세나폴리스 메세나폴리스 레지던스 세아타워 마포한강푸르지오 상암카이저팰리스클래식 광진구의 마천루 더클래식500 더샵스타시티 강변 테크노마트 구로구의 마천루 디큐브시티 디큐브시티 아파트 신도림 테크노마트 G스퀘어 동대문구의 마천루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 랜드마크 타워 청량리 동부청과 한양수자인 동작구의 마천루 보라매 쉐르빌 금천구의 마천루 가산 센트럴 푸르지오시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삼성_타워팰리스&oldid=23757584" 분류: 삼성물산서울특별시의 오피스텔서울특별시의 아파트서울 강남구의 건축물서울특별시의 마천루2002년 완공된 건축물2004년 완공된 건축물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에 없는 공식 웹사이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日本語Portuguêsไทย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3일 (토) 15: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삼성 타워팰리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성 타워팰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성 타워팰리스 Samsung Tower Palace 왼쪽의 건물이 1차 앞의 두 흰색 건물이 2차이다.3차인 G동은 지상 73층, 263m로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았다. 정보 위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 30길 지리 좌표계 북위 37° 29′ 18.96″ 동경 127° 03′ 10.67″ / 북위 37.4886000° 동경 127.0529639°  / 37.4886000; 127.0529639좌표: 북위 37° 29′ 18.96″ 동경 127° 03′ 10.67″ / 북위 37.4886000° 동경 127.0529639°  / 37.4886000; 127.0529639 상태 완공 기공식 1999년 건축 2000년 ~ 2004년 착공 1999년 완공 2002년(A동, B동, C동, D동)2003년(E동, F동)2004년(G동) 개장 2004년 용도 주거 높이 최상층 G동: 263mB동: 234mA동, C동: 209mE동, F동: 191mD동: 153m 기술적 상세 내용 층수 G동: 지상 69층 지하 6층B동: 지상 65층 지하 5층A동, C동: 지상 59층 지하 5층E동, F동: 지상 55층 지하 5층D동: 42층 지하 4층 연면적 100,000m2 엘리베이터 대수 101 회사 건축가/건축회사 삼성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 구조 엔지니어 삼우토건 스키드모어, 오윙스 앤드 메릴 계약자 삼성물산 개발사 삼성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 소유주 삼성물산 웹사이트 http://www.towerpalace1.co.kr 삼성 타워팰리스(영어: Samsung Tower Palace)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분당선과 서울 지하철 3호선의 환승역인 도곡역 앞에 위치한 7개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이며, 초고층 건물로 마천루 이다. 설계는 미국의 건설업체 스키드모어, 오윙스 앤드 메릴이 맡았고, 삼성물산이 개발하였으며 A, B, C, D, E, F, G로 구성된 7개의 초고층 아파트들로 구성되어 있다.[1] 타워는 탑을 가리키고 팰리스는 궁전을 가리킨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건설된 초고층 주상복합 단지다. 타워팰리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삼성 타워팰리스 3차 G동(73층, 265m)이며 타워팰리스에서 가장 낮은 건물은 삼성 타워팰리스 1차 D동(42층, 153m)이다. 면적의 공급은 69평이고 전용은 49평, 구조는 3룸, 2욕실, 1297세대 규모의 단지이다. 목차 1 역사 1.1 계획 1.2 건설 2 계획 3 구성 4 특징 및 구조 4.1 서비스 4.2 구조 개요와 특성 4.2.1 프레임 시스템 4.2.2 평판 시스템 4.3 구조형식 4.3.1 코어월 4.3.2 아웃트리거, 벨트 트러스 4.3.3 기둥 4.3.4 바닥 4.3.5 기초 4.3.6 고충부 및 기초부 설계 4.4 건축시공 4.4.1 공사스케줄 및 공정관리 4.4.2 1차 주공정선 4.4.3 2차 주공정선 4.4.4 3차 주공정선 4.5 엘리베이터 5 사건 및 사고 5.1 2015년 10월 2일 타워팰리스 쓰레기장 1억원 수표 사건 6 대중문화 7 평가 8 갤러리 9 같이 보기 9.1 건물 목록 9.2 참조 항목 10 주해 11 각주 12 외부 링크 역사[편집] 계획[편집] 초기 이 곳은 공군사관학교 소속 부지였다. 그러나 1994년 무렵부터 삼성그룹이 이 곳에 신사옥을 지을 계획을 세우면서 이 부지를 사들였다. 신사옥 계획은 2002년까지 강남구 도곡동 일원에 지상 103층, 380m짜리 초고층 건물을 지어 상업, 업무, 쇼핑, 거주 복합 단지로 세우자는 계획이었고, 이 때 가칭 '삼성 타운'이라는 계획을 세웠다.[2][3] 이렇게 하여 세워진 계획이 삼성 시너지 타워였다. 그러나 1996년 10월부터 본격 공사를 진행하려 하였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과 이듬해인 1997년에 불어닥친 IMF 외환 위기 등으로 인하여 사실상 신사옥 건설은 무산되었다. 이후 1998년 어느 정도 그룹의 상황이 나아지자, 삼성그룹은 이 곳에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를 계획하게 되었다. 지상 93층, 323m의 초고층 아파트를 지어 고급화된 아파트를 제공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42층부터 93층까지 약 7개의 다양한 건물들을 짓기로 하고 허가를 기다렸으나, 막상 서울특별시가 93층 아파트를 짓는 데에 매우 부정적이었고, 우선 1999년 42층~65층짜리 A, B, C, D 4개 동을 우선 착공하였다. 건설[편집] 이후 2000년 55층짜리 E, F동이 착공되었을 때도 G동의 규모에 대해서 서울시와 삼성그룹이 극심한 반목을 거듭하였고, 결국 지상 69층 규모로 건설하는 데에 합의하고 가장 높은 G동은 2001년 착공하여 2004년 완공되었다. 계획[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삼성 타워팰리스의 계획입니다. 구성[편집] 타워팰리스는 한 개의 마천루가 아니라, 42층 1동, 55층 2동, 59층 2동, 65층 1동, 73층 1동 등 총 7개의 마천루 단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1년에서 2004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모두가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로 사용되며 대부분의 유명한 한국인들의 거주지로 알려져 있다. 외국인들도 거주할 수 있으며 부유층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이다. 아파트 1채에 수십억을 호가하며 1가구당 월 관리비만 150만원 정도이다. 그리고 매우 비싼 아파트이며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다. 2010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였으며, 현재도 삼성동 아이파크와 더불어 대한민국 대표 고가(高價) 아파트로 꼽힌다. 2003년에 완공된 타워팰리스 2차의 가격은 2015년 기준으로 50억 6500만원이다.[4] 타워팰리스의 모습은 1차(A,B,C,D)와 2차(E,F), 3차(G)가 각기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데 3차(G)의 경우 가장 높고 3개의 둥근 타원형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형상이다. 타워펠리스 3차는 Q1 빌딩(323m), 해운대 위브 더 제니스 타워(301m), 해운대 아이파크 타워(292m), 유레카 타워(298m), 21세기 타워(267m)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초고층 아파트이다. 헬기장은 모든 건물의 지붕에 위치해 있다. 건물 명칭 사진 착공 완공 설명 층수 높이 상태 삼성 타워팰리스 1차 1999년 2002년 타워 팰리스 1차(영어: Tower Palace One)는 전체 7개 동 중 A, B, C, D동 등 4개 마천루를 일컫는다. 타워 팰리스 7개 동 중 가장 먼저인 1999년 착공하였으며, 2002년 전체적으로 완공되었다. A동에서 C동까지는 지하주차장, 로비, 아파트가 있고 D동에는 A동에서 C동까지를 포함한 시설과 오피스텔이 있다. A동 59층 B동 65층[나] C동 59층 D동 42층 A동 209m B동 234m C동 209m D동 153m[다] 완공 삼성 타워팰리스 2차 2000년 2003년 타워 팰리스 2차(영어: Tower Palace Two) 건물은 2000년 착공하여 2003년 완공된 두 개의 건물로 E, F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 다 지상 55층, 191m의 쌍둥이 건물이다. E동에서 F동까지는 지하주차장, 로비, 아파트, 오피스텔이 있다. E동, F동 55층 E동, F동 191m 완공 삼성 타워팰리스 3차 2001년 2004년 타워 팰리스 3차(영어: Tower Palace Three) 건물은 가장 나중인 2001년 착공하여 2004년 완공되었다. G동이 유일하게 3차에 해당하며,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타원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G동이며 지하주차장, 로비, 아파트, 오피스텔이 있다.타워팰리스 G동은 69층인 610세대 규모에 264m(866피트) 높이로 지상 264m, 73층 건물로 완공 당시 하이페리온 타워 A동(69층, 256m)을 제치고 완공 당시부터 2011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마린시티에 80층, 301m높이의 해운대 위브 더 제니스 타워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고 약 7년 간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이었다.[5][가]보통 좁은 의미에서의 '타워 팰리스'는 이 건물을 주로 가리킨다. G동 69층 G동 265m 완공 특징 및 구조[편집] 서비스[편집] 타워 팰리스는 2002년 최초 입주 당시부터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유비쿼터스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최초로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 모든 엘리베이터나 정문, 출입문에 '카드 키 보안 시스템'(Card-Key Security System)이 설치되어 있다.[라] 정문, 출입문에 '카드 키' 혹은 '지문 인식'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조명, 커튼, 홈 네트워크(Home Network), 세탁기 등을 집주인의 휴대전화 등으로 제어하여 미리 예약할 수 있다. 구조 개요와 특성[편집] 프레임 시스템[편집] 타워부 : R.C Core + Outrigger + Belt Truss + SRC 기둥의 합성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부 : Column, Beam & Girder, 평판 등이 P.C구조(일부 R.C)로 형성되어 있다. 평판 시스템[편집] 타워부 : 두께 135mm 상하현 철근 복합 데크플레이트 평판로 구성되어 있다. (Non Support 시공) 지하부 : 두께 70mm(Half P.C) + 100mm 콘크리트 덧치기로 총두께 170mm로 중력 및 횡력(토압 + 수압)에 저항하는 구조이다. 구조형식[편집] 코어월[편집] 코어월은 THK500mm로 층에 따라두께를 효율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콘크리트 강도는 500 ~ 300 kg/cm2로 변화시켰다. 코어월 오픈 부분에는 Lintel Beam(연결보)을 설치하여 코어의 횡력 저항에 극대화 했으며, 작업의 반복성 등을 고려하여 코어 월은 클라이밍 폼을 사용하여 시공성을 향상시켰다. 아웃트리거, 벨트 트러스[편집] 타워팰리스 1차는 R.C 코어와 아웃트리거 및 벨트 트러스가 중력 및 횡력에 저항하는 주요 구조체로서 R.C 코어는 전 층에 설치하였으며(B동 기준), 지상 3층, 4층 기계실과 6층, 2층 바닥에 아웃트리거 및 벨트 트러스를 설치하여 R.C 코어의 횡변형을 억제하고 구조물 상부의 모멘트를 감소시켰다. 이와 같이 구조물은 하부 뿐만 아니라 상부에서 구속되기 때문에그 처짐 형상이 순수 캔틸레버 기둥이 아닌 변곡점을 가진 S형 곡선 형상을 보인다. 이러한 합성 작용으로 코어의 휨 모멘트와 구조물의 처짐을 줄이게 되었다. 기둥[편집] 기둥의 주 간격은 8.4m × 8.4m 모듈을 유지하며, 기둥의 형태는 공간활용성을 고려하여 사각형의 합성기둥(S.R.C)으로 설계하였으며, 합성기둥의 설계는 SSRC(Structural Stability Research Council)로 설계하며, 단면의 크기는 R.C: 850 × 850 + STEEL: 내경 3, 5, 8의 H형강의 크기를 유지하며, 층수에 따라서 철골 두께를 조정하였다. 합성 기둥의 콘크리트 강도는 500 ~ 240 kg/m2까지 사용하였으며, 철골은 두께 40mm 초과시 SM520 TMCP 강(Fy = 3,600 kg/m2)을 사용하여 중력하중 및 횡하중에 저항하도록 설계하였다. 바닥[편집] 바닥 평판은 두께 135mm의 상하현 철근 복합데크 평판을 사용하여 시공성을 높였으며, 바닥 평판이 다이아프램(diaphragm) 역할을 충분히 하여 코어부로 횡력을 전달시킬 수 있도록 코어부와 만나는 평판에는 철근을 보강설계했다. A, B, C동의 모든 내부의 단순보(Shear Connection)는 합성보(Composite Beam)로 설계하여 물량절감 및 층고를 최소화했다(보 최대 크기는 H - 400임 : 기준층 바닥). 보 및 평판에 대해서는 진동 등 사용성에 관련하여 검토설계하였다. D동의 경우 동내부의 다이아프램 결손부(중정)와 편심 코어 등으로 야기되는 건물의 불규칙 변형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자 기둥과 내부 보의 연결을 강접(Moment Connection)으로 설계하여 건물의 전체 강성을 향상시켰다. 기초[편집] 설계지내력 : 고층부의 기초는 경암층(Fresh Sound Rock) 위에 놓이도록 하였다. 파쇄대를 고려한, 지반의 정확한 Rock 용수철을 구하여 기초해석에 적용하였다(설계지내력은 200t/m2 이상으로설계). 저층부의 기초는 경암층 위 또는 연암층(Partly Weathered Rock)위에 놓이도록 계획하였다(정확한 지질조사에 근거하여 지반상태에 따라 200t/m2, 90t/m2, 50t/m2으로 계획). 기초의 최대 침하는 30mm 이내로 하고, 부동침하는 20mm 이내로 유지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기초 시스템의 기초 평판 하부에는 Pubic Drain Board Type의 영구배수장치 (Dewatering System)를 설치하여 기초 평판에 어떤 양압(Buoyancy)도 작용하지 않도록 설계에 적용하였다. 고충부 및 기초부 설계[편집] 고층부 기둥은 온통기초(Mat Foundation)고 고층부 코어는 온통기초(Mat Foundation)고 기초부 설계는 중력하중 및 횡하중에 의해서 생기는 압축 및 인장력의 가능한 모든 하중조합을 통하여 기초의 안정성을 검토하였다. 관입 면에서 타워팰리스 1차의 변형형으로 조합되어 전혀 다른 현재와 미래의 이미지를 가진다. 건축시공[편집] 타워팰리스 1차는 그 규모가 65층 1개동과 59층 2개동, 42층 1개동의 총연면적 13만 8천평에 이르는 도심형 초고층 빌딩으로 3일에 1개층씩 골조공사를 진행하였으며, 39개월만에 완공해야 했다. 분당 90m를 운행하는 초고속 호이스트, 13기의 대형 타워크래인, 초고압 콘크리트 펌프 등의 하드웨어적인 방안과 함께 인터넷을 이용한 인원 관리, 자재관리, 도면관리 등의 물류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여 초고층 공사의 최단기간 달성을 지원하였다. 공사스케줄 및 공정관리[편집] 국내 초고층 주거형 건물은 일반적인 초고층 건축공사와 달리 방바닥 미장공사라는 습식공사가 마감공사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부동 침하로 인한 벽체와 바닥과의 레벨 차이, 추가 처짐을 고려한 공사일정 계획 수립이 요구된다. 따라서 초고층 주거형 건물의 주공정선은 다음과 같이 수립한다. 1차 주공정선[편집] 토공사 → 기초공사 → 코어 골조공사 → 바닥 골조공사 → 외벽 커튼월 공사 → 천정배관공사 → 기반마감공사 → 방바닥 미장공사 → 인테리어 기반공사 →최종 인테리어공사 → 준공 준비 → 준공 2차 주공정선[편집] 골조공사 → 고층부 엘리베이터 설치 → 호이스트 해체 → 호이스트 자리 마무리공사 → 부대토목 및 조경공사 → 준공 준비 → 준공 타워팰리스 현장은 2차 동절기 기간(2001년 12월~ 2002년 2월)에 최종 인테리어 공사의 주작업인도장 및 도배공사, 온돌마루공사가 진행되었으며, 동절기 습식공사 진행 및 화재위험 등을 고려하여 지역난방을 이용한 동절기 난방을 하도록 결정하였다. 고층부는 2001년 11월경 방바닥 타설이 가능하도록 부동침하량이 계산되었다. 이에 따라 방바닥 미장양생 및 건조를 위한 별도의 보온시설이 필요하게 되나, 열풍기 등을 이용할 경우 화재의 위험성이 있고, 사면이 커튼월로 막혀있는 초고층 건물의 특성상 자연 화기에 의한 제습이 불가능하여 방바닥 미장 건조기간이 최소한 4개월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자연 건조시 후속공사인 도배/도장 등의 최종 인테리어 공사가 실내의 고습도로 인한 하자 발생이 예상되었다. 이에 따라 2차 동절기 공사 진행을 위하여 지역난방을 조기인입을 검토하게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난방 주배관이 통과하는 2단계 구간 주차장 골조공사를 3차 주공정선으로 정하여 일정계획을 하게 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지역난방공사의 발전소 증설기간 및 예산 확보를 위하여 2000년 10월부터 지역난방공사와 협의하여 2001년 11월 지역난방을 인입하게 되었다. 3차 주공정선[편집] 1차 토공사 → 1차 주차장 골조공사 → 2차 토공사→ 2차 주차장 골조공사 → 설비난방 주배관공사 → 최종 인테리어공사 → 준공 준비 → 준공 초고층 건물의 시공방법으로서 필연적이라고 할 수있는 단결된 커튼 월 시스템(Curtain Wall System) 을 적용하였다. 이 시스템을 적용함으로써 커튼월의 고품질 및 층당 3일의 주기가 시공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Open Joint 시스템이 적용됨으로써 커튼월이 수밀성을 향상시켰다. 커튼월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형태의 유닛은 Opening, Fixed, Louver, 패널 유닛 등이 있다. Opening 유닛은 개폐창의 설계풍압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그 폭을915mm 정도로 최소화하였으며, Fixed 유닛은 입주자의 조망을 고려하여 그 폭을 최대한 넓게(1,830mm) 설계하였다. 또한 Louver 유닛은 에어컨 실외기실에 적용하였으며, 패널 유닛은 기둥이 있는 부위에 설치되었다. 타워팰리스 1차의 코어 골조는 코어골조공법(Automatic Climbing System)으로 이루어져 있다. 코어골조공법은 유압 유닛와 양중용 윤곽을 이용하여 1개 층 높이로 제작된 폼을 1개층씩 상승시키며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공법이다. 공기단축: 3day/fl. (실제 시간) 공정: 슬립 폼에 비해 공정이 다소 복잡함. 품질관리 : 콘크리트면의 평활도 및 골조품질이 양호함. 안전관리 : 안전시설물 일체화로 추락/낙하사고 예방함. 철골설치공법(N공법)은 절단위로 설치되는 기존 공법과는 달리 층 단위로 설치되는 공법으로서 기중의 이음 위치를 층별로 분산하여 용접, 수직도 조정 등의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공법이다. 작업량 분산을 통한 출력인원이 저감되고 순환 공정의 진행을 통한 연속 작업이 가능하고 1층 이상의 작업을 없앰으로써 안전성이 향상되며, 후속 공정의 조기 착수로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장 유약 시스템(Factory Glazing System)은 커튼월 유닛에 유리 끼우는 작업을 유닛 제작공장에서 완료 후 현장에 반입시킴으로써 커튼월의 품질 향상 및 설치 일정 단축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커튼월 유닛의 Joint 폭은 설치 전후 유닛에 가해지는 각종 변위를 흡수할 수 있도록 수직 8mm, 수평 20mm 폭으로 설계되었다. 수평 joint : 20mm, 수직 : 8mm 온도 편차에 의한 변위: 9mm, 수직 : 5mm 열 단축 : 3mm 평판 처짐: 5mm 가공, 조립오차: 1mm (수평, 수직) 설치오차: 2mm (수평, 수직) 엘리베이터[편집] 타워팰리스 1차에는 동양엘리베이터(현 티센크루프), 2차에는 LG-오티스엘리베이터(현 오티스), 3차에는 한국미쓰비시엘리베이터의 제품이 설치되었으며 저층용, 고층용, 비상용, 상가 및 주차장 셔틀용으로 구분된다. 모든 세대용 엘리베이터는 카드리더기가 있으며 카드키를 태그해야 작동된다. 사건 및 사고[편집] 2015년 10월 2일 타워팰리스 쓰레기장 1억원 수표 사건[편집] 타워팰리스의 쓰레기집하장에 버려진 여행용 가방에서 100만원짜리 수표 100장인 1억원어치 수표가 든 봉투가 2015년 10월 3일 오전 11시 55분쯤 아파트에 근무하는 청소부인 김모(63)씨가 쓰레기집하장에서 100만원짜리 수표 100장이 든 봉투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해서 수표가 발견이 되었다. 언론보도가 되고 10월 5일 주인이라며 50대 사업가 A씨가 나타났고 경찰 조사결과 주인으로 확인되어 발견자에게 유실물 법에 따라 5~20% 사이의 보상금을 발견자에게 지불하고 원주인이 돈을 찾아갔다. 보상금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양측 모두 밝히지 않았다. 대중문화[편집]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 삼성 타워팰리스 1차와 삼성 타워팰리스 3차 G동이 나온다. 2012년에 개봉한 영화 R2B: 리턴투베이스에 삼성 타워팰리스의 단지들이 나온다. 2018년에 개봉한 영화 독전에 삼성 타워팰리스의 단지들이 나온다. 평가[편집] 2013년 동아일보와 건축전문잡지 SPACE가 건축가 100명을 조사한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 랭킹 9위에 올랐다. 갤러리[편집] 양재천에서 본 타워팰리스 단지 전경. 타워 팰리스 단지 전경. (2006년) 도곡동 방향의 양재천 야경. 구룡산 국수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타워팰리스. 구룡산 국수봉 전망대에서 본 서울전경. 구룡산 국수봉에서 본 서울전경과 북악산이라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건물 목록[편집] 마천루 목록 아시아의 마천루 목록 대한민국의 마천루 목록 서울특별시의 마천루 목록 참조 항목[편집] 해운대 엘시티 더샵 Q1 타워 유레카 타워 래미안 해운대 두산위브더제니스 해운대 I'PARK 메타폴리스 더 샾 퍼스트 월드 서울국제금융센터 주해[편집] 가. ^ 동북아무역타워는 2012년에 골조공사가 완공되었기 때문에 2011년 ~ 2012년에는 해운대 두산 위브 더 제니스가 가장 높았다. 나. ^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63빌딩의 층수인 '61층'을 넘긴 건물이다. 하지만 63빌딩(249m)보다 높이는 낮다. 다. ^ 타워 팰리스 단지 중 가장 높이가 낮은 건물이다. 그러나 7개동 중 가장 대지면적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다. 라. ^ 지금은 주상복합아파트가 많아졌고 고급 오피스도 많아져서 이는 매우 흔했지만, 당시 '아파트'에 적용했다는 점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이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한 건물은 1985년 개장한 '63시티'이다. 각주[편집] ↑ “<타워팰리스10년> 타워팰리스는?”. 해럴드경제. 2012년 5월 18일. 2017년 3월 21일에 확인함.  ↑ 삼성 百2층빌딩 건축 추진, 1996년 4월 13일 <동아일보> ↑ 江南 도곡동에 102층 빌딩, 1996년 4월 8일 <경향신문> ↑ 박태진 (2015년 3월 25일). “[부자들의 집] <1>도곡동 타워팰리스, 대한민국 성공인생의 상징”. 《이투데이》. 2017년 3월 21일에 확인함.  ↑ “경제매거진 0100 세계의 마천루, 대한민국”. 한국경제TV. 2009년 2월 13일. 2009년 12월 2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타워팰리스 1차 - 공식 웹사이트 타워팰리스 자연환기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 vdeh타워팰리스마천루 타워팰리스 삼성 타워팰리스 1차 삼성 타워팰리스 2차 삼성 타워팰리스 3차 계획 타워팰리스의 계획 vdeh 대한민국의 마천루서울특별시 31빌딩 63빌딩 정부서울청사 서울스퀘어 롯데호텔 서울 KAL 빌딩 종로타워 광화문 D타워 서울국제금융센터 서울 제1국제금융센터 서울 제2국제금융센터 서울 제3국제금융센터 콘래드 서울 호텔 한기련회관 롯데월드타워 롯데호텔월드 트레이드 타워 뉴 트레이드 타워 아셈타워 파르나스 타워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두산타워 삼성 타워팰리스 삼성 타워팰리스 1차 삼성 타워팰리스 2차 삼성 타워팰리스 3차 목동 하이페리온 목동 트라팰리스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현대차 컨벤션 호텔 강남 파이낸스 센터 큰길타워 삼성동 아이파크 서초 삼성타운 서초동 대림 아크로비스타 LG트윈타워 파크원 타워 여의도 페어몬트 호텔 에스트레뉴 타워 래미안 첼리투스 래미안 강동 팰리스 이스트 센트럴 타워 래미안 용산 더 센트럴 용산시티파크 용산파크타워 용산파크자이 대우월드마크 용산 한강트럼프월드3차 용산 벽산메가트리움 LG유플러스 용산 사옥 KY빌딩 센트레빌 아스테리움 서울 DB금융센터 KDB생명타워 서울드래곤시티 한화 갤러리아포레 상봉 프레미어스 엠코 SBS 방송 센터 GS타워 GT타워 부띠크모나코 서울숲 트리마제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뚝섬 부영아파트 뚝섬 부영호텔 용산 푸르지오 써밋 LS용산타워 더클래식500 더샵스타시티 디큐브시티 디큐브시티 아파트 강변 테크노마트 신도림 테크노마트 메세나폴리스 메세나폴리스 레지던스 세아타워 마포한강푸르지오 덕수궁 롯데캐슬 반포자이 반포 디에이치 클래스트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 반포 아크로리버파크 여의도 대우트럼프월드 잠실 롯데캐슬골드 잠실 엘스 잠실 리센츠 잠실 트리지움 잠실 레이크팰리스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 랜드마크 타워 청량리 동부청과 한양수자인 동일하이빌 뉴시티 코업 스타클래스 보라매 쉐르빌 현대 41 타워 아카데미 스위트 대림 아크로빌 현대 슈퍼빌 SK서린빌딩 상봉 듀오트리스 브라운스톤 서울 여의도 리첸시아 타워 용산 KCC 웰츠타워 갤러리아 팰리스 삼성SDS타워 향군타워 청계천 두산위브더제니스 잠실 푸르지오 월드마크 남산 트라팰리스 T타워 서울 시티타워 강동 헤르셔 타워 트윈시티 남산타워 육군호텔 G스퀘어 상암카이저팰리스클래식 서울숲 더샵 LSK플러스 용산 오피스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 가산 센트럴 푸르지오시티 국제전자센터 여의도우체국 사학연금회관 테헤란로 237 JW 메리어트 서울 오크우드 프리미어 코엑스센터 롯데호텔 L7 강남 용산 아모레퍼시픽 여의도 브라이튼 부산광역시 롯데호텔 부산 협성 마리나 G7 해운대 두산 위브 더 제니스 해운대 아이파크 파크 하얏트 부산 부산국제금융센터 해운대 엘시티 더샵 롯데타운타워 KNN 타워 W LG메트로시티 GS하이츠자이 해운대 더샵 센텀스타 해운대 더샵 센텀파크 해운대 더샵 아델리스 해운대센텀엘카사 서면 더샵 센트럴스타 더 게이트 센텀 WBC 더 팰리스 해운대 힐스테이트 위브 SK 허브 스카이 센텀 리더스 마크 이진 베이시티 센텀스카이비즈 해운대 대우 아라트리움 경동 제이드 비아이시티 비아이시티 호텔동 비아이시티 오피스텔동 마린시티자이 해운대 엑소디움 타워 범일 마제스 타워 오션브릿지 해운대 시타딘호텔 해운대 한신휴플러스 구포동 동원 로얄듀크 비스타 동래 한화 꿈에그린 남천 엑슬루 타워 영광골든타워 광안 쌍용예가 디오션 남천 코오롱 하늘채 골든비치 대연 롯데캐슬 레전드 대연 힐스테이트푸르지오 명지 더샵 퍼스트월드 오륙도 SK뷰 화명 롯데캐슬 카이저 해운대 SK뷰 국제신문빌딩 한화리조트 해운대 씨클라우드 호텔 동래 효성해링턴 플레이스 대구광역시 수성 SK 리더스 뷰 수성 두산 위브 더 제니스 두류역 제타시티 마크팰리스 범어 브라운스톤 범어 범어네거리 서한이다음 대구역 센트럴 자이 범어역 우방유쉘 두산 대우트럼프월드 경남 센트로팰리스 경남 센트로팰리스 오피스텔 월드마크 웨스트엔드 SK 허브 스카이 용산동 롯데캐슬 그랜드 대구 월배 아이파크 범어 화성파크드림 범어 센트럴 푸르지오 테크노 폴리스 중흥S클래스 월성 협성휴포레 인천광역시 포스코타워-송도 송도 더샵 센트럴파크 송도 센트럴파크 푸르지오 송도 센트럴파크 호텔 송도 더샵 퍼스트월드 청라 대우 푸르지오 송도 아트윈 푸르지오 G타워 청라 시티타워 송도 캠퍼스타운 청라 더샵 레이크 파크 송도 IBS타워 용현 엑슬루 타워 청라 엑슬루 타워 에코메트로 포스코 E&C 타워 부영송도타워 송도 센트로드 송도 아메리칸타운 아이파크 연수 푸르지오 학익 엑슬루 타워 청라 롯데캐슬 송도 푸르지오 하버뷰 송도 자이하버뷰 인천 더샵 스카이타워 갯벌타워 미추홀타워 베니키아 프리미어 송도 브릿지 호텔 쉐라톤 그랜드 인천 호텔 홀리데이 인 인천 송도호텔 다인 로얄팰리스 테라스 송도 롯데몰 송도 캐슬파크 로봇타워 송도 AT센터 힐스테이트 송도 더테라스 송도 랜드마크시티 센트럴 더샵 광주광역시 광주 호반 써밋플레이스 금호생명 본사 빌딩 중흥S클래스 스카이31 화정동 유니버시아드 힐스테이트 상무광명메이루즈 봉선동 남양휴튼 2차 아파트 첨단대우이안 벽산 블루밍 메가시티 아파트 첨단 힐스테이트 리버파크 각화 서희스타힐스 상무 유탑 유블레스 트윈시티 무등산 아이파크 아파트 대우디오빌 광주은행 본점 빌딩 각화 휴먼파크 서희스타힐스 대전광역시 대전 사이언스 콤플렉스 금강 엑슬루 타워 철도기관 공동사옥 서대전역 우방 아이유쉘 스카이팰리스 유성자이 아파트 대전 스마트 시티 정부대전청사 동아벤처타워 울산광역시 울산 이안 태화강 엑소디움 울산 롯데캐슬스카이 한양립스 더 스카이 신정 두산 위브 더 제니스 태화강 풍림 엑슬루 타워 우정동 마제스 타워 삼산동 대성 스카이렉스 울산 코오롱 파크폴리스 울산 삼환아르누보 롯데호텔 울산 세종특별자치시 세종 한신더휴 리저브 힐스테이트 세종 리버파크 도램마을 20단지 한양수자인 에듀파크 범지기마을 10단지 푸르지오 가재마을 세종현대엠코타운 5단지 아파트 세종 지웰 푸르지오 경기도 일산 두산위브더제니스 일산 요진 와이시티 힐스테이트 일산 일산 더샵 그라비스타 일산 킨텍스 꿈에그린 브로멕스 타워 일산 킨텍스 원시티 일산 대방디엠시티 메타폴리스 리첸시아 타워 흥덕IT밸리 네이버 그린팩토리 광교SK뷰레이크타워 광교SK뷰레이크타워 오피스동 광교SK뷰레이크타워 오피스텔동 평택용이1차푸르지오 평택용이2차푸르지오 남양주 부영 e그린타운 수지 래미안 이스트팰리스 평촌 아크로타워 하남 벨리체 힐스테이트 광교 금강펜테리움 IX타워 삼성디지털시티 현대성우오스타 코아루 광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그랑시티자이 안산 레이크타운 푸르지오 시흥 센트럴 푸르지오 평촌 오비즈타워 안양금융센터 광명역 센트럴 자이 G스퀘어 분당스퀘어 강원도 온의동 롯데캐슬 스카이클래스 보광휘닉스파크 블루동 하이원 그랜드 호텔 메인타워 하이원 그랜드 호텔 컨벤션타워 충청북도 신영 지웰시티 청주 두산위브더제니스 오창 서청주센트럴파크 충청남도 펜타포트 전라북도 우석대학교 대학본부 건지산 이지움 전주 라마다 호텔 전라남도 E편한세상 광양 엠블호텔 여수 한국농어촌공사 나주 본사 한국전력공사 나주 본사 남교트윈스타 에메랄드퀸 경상북도 장성 두산 위브 더 제니스 용황 협성휴포레 도량 롯데캐슬 골드파크 경상남도 창원 메트로시티 1차 창원 메트로시티 2차 더 시티7 자이 무학자이 거제 장평 유림 노르웨이숲 아파트 스타디메르 제주특별자치도 롯데시티호텔 제주 제주 칼호텔 메종글래드 제주 제주 드림타워 vdeh 서울특별시의 마천루영등포구의 마천루 63빌딩 서울국제금융센터 서울 제1국제금융센터 서울 제2국제금융센터 서울 제3국제금융센터 콘래드 서울 호텔 한기련회관 LG트윈타워 파크원 타워 여의도 페어몬트 호텔 에스트레뉴 타워 여의도 리첸시아 타워 여의도 대우트럼프월드 여의도우체국 사학연금회관 여의도 브라이튼 강남구의 마천루 트레이드 타워 뉴 트레이드 타워 아셈타워 파르나스 타워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삼성 타워팰리스 삼성 타워팰리스 1차 삼성 타워팰리스 2차 삼성 타워팰리스 3차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현대차 컨벤션 호텔 강남 파이낸스 센터 큰길타워 GS타워 GT타워 삼성동 아이파크 아카데미 스위트 대림 아크로빌 DB금융센터 테헤란로 237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오크우드 프리미어 코엑스센터 롯데호텔 L7 강남 서초구의 마천루 서초 삼성타운 서초동 대림 아크로비스타 국제전자센터 부띠크모나코 현대 슈퍼빌 반포자이 반포 디에이치 클래스트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 반포 아크로리버파크 JW 메리어트 서울 송파구의 마천루 롯데월드타워 롯데호텔월드 갤러리아 팰리스 삼성SDS타워 향군타워 잠실 롯데캐슬골드 잠실 푸르지오 월드마크 잠실 엘스 잠실 리센츠 잠실 트리지움 잠실 레이크팰리스 중구의 마천루 서울스퀘어 두산타워 롯데호텔 서울 KAL 빌딩 브라운스톤 서울 남산 트라팰리스 T타워 서울 시티타워 청계천 두산위브더제니스 덕수궁 롯데캐슬 종로구의 마천루 31빌딩 종로타워 SK서린빌딩 정부서울청사 광화문 D타워 양천구의 마천루 목동 하이페리온 목동 트라팰리스 SBS 방송 센터 현대 41 타워 용산구의 마천루 래미안 첼리투스 래미안 용산 더 센트럴 센트레빌 아스테리움 서울 용산 푸르지오 써밋 서울드래곤시티 용산 KCC 웰츠타워 KDB생명타워 트윈시티 남산타워 육군호텔 LS용산타워 용산시티파크 용산파크타워 용산파크자이 대우월드마크 용산 한강트럼프월드3차 용산 벽산메가트리움 LG유플러스 용산 사옥 KY빌딩 LSK플러스 용산 오피스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 용산 아모레퍼시픽 성동구의 마천루 한화 갤러리아포레 서울숲 더샵 서울숲 트리마제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뚝섬 부영아파트 뚝섬 부영호텔 성북구의 마천루 코업 스타클래스 동일하이빌 뉴시티 강동구의 마천루 래미안 강동 팰리스 이스트 센트럴 타워 강동 헤르셔 타워 중랑구의 마천루 상봉 프레미어스 엠코 상봉 듀오트리스 마포구의 마천루 메세나폴리스 메세나폴리스 레지던스 세아타워 마포한강푸르지오 상암카이저팰리스클래식 광진구의 마천루 더클래식500 더샵스타시티 강변 테크노마트 구로구의 마천루 디큐브시티 디큐브시티 아파트 신도림 테크노마트 G스퀘어 동대문구의 마천루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 랜드마크 타워 청량리 동부청과 한양수자인 동작구의 마천루 보라매 쉐르빌 금천구의 마천루 가산 센트럴 푸르지오시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삼성_타워팰리스&oldid=23757584" 분류: 삼성물산서울특별시의 오피스텔서울특별시의 아파트서울 강남구의 건축물서울특별시의 마천루2002년 완공된 건축물2004년 완공된 건축물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에 없는 공식 웹사이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日本語Portuguêsไทย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3일 (토) 15: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사운드 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운드 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지금은 출시되지 않고 있는 사운드 블라스터 라이브 벨류 카드 - 2000년 경의 PCI 사운드 카드. 사운드 카드(영어: sound card), 또는 오디오 카드(영어: audio card)는 내부 확장 카드의 하나로, 소리를 저장하고 출력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내부 확장 카드(internal expansion card) 형태의 장치(칩셋)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제어를 통해 컴퓨터를 경유한 오디오 신호의 입출력을 담당한다. "사운드 카드"라는 용어 그 자체는 프로페셔널 오디오 응용 프로그램에 사용되는 외장형 오디오 인터페이스에만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사운드 카드를 이용할 때에는 멀티미디어 응용 프로그램들을 위해 영상/소리 편집, 프레젠테이션/교육,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오락)와 같은 오디오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사운드 기능은 플러그인 카드와 비슷한 부품을 사용하여 메인보드에 내장된 경우도 있다. 내장형 사운드 시스템 또한 종종 "사운드 카드"로 부르기도 한다. 사운드 처리 하드웨어 또한 소리 출력을 위해 영상 기능이 있는 HDMI를 갖춘 현대의 비디오 카드에도 존재한다. 그 이전에는 메인보드나 사운드 카드에 SPDIF 연결을 사용했다. 목차 1 일반적인 특징 1.1 사운드 채널과 폴리포니 2 사운드 카드 표준 목록 3 색 코드 4 IBM PC 아키텍처의 사운드 카드의 역사 4.1 하드웨어 제조업체 5 확장 카드 이외의 사운드 장치 5.1 PC 메인보드에 포함된 통합형 사운드 하드웨어 5.2 다른 플랫폼 위의 통합형 사운드 5.3 다른 플랫폼 위의 사운드 카드 5.4 외장형 사운드 장치 6 드라이버 구조 7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 목록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일반적인 특징[편집] 사운드 카드 PCB의 확대 모습. 전해 축전기, SMT 축전기, 저항기, YAC512 2채널 16비트 DAC가 보인다. 대부분의 사운드 카드들은 디지털-아날로그 변환회로(DAC)를 사용하여 녹음되거나 발생되는 디지털 데이터를 아날로그 형식으로 변환한다. 출력 신호는 TRS 폰 커넥터나 RCA 단자와 같은 표준 상호 연결을 사용하여 증폭기, 헤드폰, 또는 외부 장치에 연결된다. 단자의 수와 크기가 공간에 비해 너무 클 경우, 케이스 밖에서 사용되는 상자형 형태 또는 케이스 전면에 마운트되는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진보된 카드들은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사운드 칩을 포함하고 있어서 더 높은 데이터 속도와 여러 동시성 기능을 지원하는데,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최소화된 데이터와 CPU 시간을 사용하면서 실시간 음악 및 음향 효과에 쓰이는 합성된 소리의 디지털 출력을 들 수 있다. 디지털 소리 출력은 일반적으로 다채널 DAC를 통해 이루어지며 다른 높이와 볼륨으로 동시의 디지털 샘플을 기능할 수 있으며, 필터링이나 의도적인 왜곡과 같은 실시간 효과를 응용할 수 있다. 다채널 디지털 사운드 재생은 음악 합성에도 사용할 수 있는데, 컴플라이언스,[1] 심지어는 다채널 에뮬레이션을 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러한 접근은 제조업체들이 더 단순하고 비용이 더 낮은 사운드 카드를 강구하면서 일반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운드 카드들은 카세트 테이프 및 그 밖의 마이크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전압이 있는 음원으로부터 입력 신호를 받기 위해 라인 인 단자를 갖추고 있다. 사운드 카드는 신호를 디지털화한다. DMAC는 샘플들을 메인 메모리에 전송하며, 여기에서 저장, 편집, 추가 가공을 위해 녹음 소프트웨어가 하드 디스크에 이를 기록한다. 일반화된 다른 외부 단자로는 마이크 단자가 있으며, 마이크로폰이나 기타 낮은 수준의 입력 장치로부터 신호를 받을 때 사용된다. 이를테면, 음성 인식이나 VoIP 응용 프로그램을 통해 마이크로폰 잭을 통한 입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운드 채널과 폴리포니[편집] 8채널 DAC 시러스 로직 CS4382가 사운드 블라스터 X-Fi Fatal1ty에 위치해 있다. 중요한 사운드 카드의 특징으로는 폴리포니가 있으며, 이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음성이나 소리를 "동시에" 처리하고 출력할 수 있는 기능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구별된 "채널"들은 오디오 출력의 수로 간주되며, 2.0 (스테레오), 2.1 (스테레오와 서브우퍼), 5.1 (서라운드) 등의 구성과 같이 스피커 구성과 일치시킬 수 있다. 가끔은 출력 스피커 구성이 아닌 폴리포니의 수준을 언급할 때 "보이스"와 "채널"이라는 용어가 번갈아 사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오래된 사운드 칩들은 3개의 음성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오직 하나의 오디오 채널만을 출력에 쓸 수 있었기에, 모든 음성이 함께 혼합되어야 했다. 나중에 애드립 사운드 카드와 같은 카드들이 하나의 모노 출력 채널에 9개 음성의 폴리포니를 병합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대부분의 PC 사운드 카드들은 다중 FM 합성 보이스(일반적으로 9 또는 16)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MIDI 음악에 흔히 사용되었다. 고급 카드들의 온전한 기능들은 완전하게 사용되는 일은 드물었다. 오직 하나(모노) 또는 두 개(스테레오)의 보이스와 채널이 일반적으로 디지털 사운드 샘플의 재생에 사용되었고 하나 이상의 디지털 사운드 샘플을 재생하려면 고정 샘플링 레이트의 소프트웨어 다운믹스가 필요했다. AC'97 표준 등의 오디오 코덱과 같이 가격이 낮은 현대의 내장 사운드 카드들(메인보드에 내장된)과 심지어는 일부 저가형 확장 사운드 카드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동작했다. 이러한 장치들은 둘 이상의 사운드 출력 채널(일반적으로 5.1 또는 7.1 서라운드 사운드)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음향이든 MIDI 출력이든 간에 실제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갖추지는 못했다. 이러한 작업들은 전적으로 소프트웨어에서 수행되었다. 이는 비싸지 않은 소프트모뎀들이 하드웨어 대신 소프트웨어에서 현대의 작업을 수행한 것과 비슷하다. 또, 웨이브테이블 샘플 기반 합성 초기 시절에 일부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들은 MIDI 기능에만 폴리포니를 단독으로 광고하였다. 이 경우, 카드의 출력 채널은 적절하지 않은데, 일반적으로 카드는 오직 2채널의 디지털 소리만 구현한 것이다. 즉, 폴리포니 측정 시 주어진 시간 안에 사운드 카드가 재생할 수 있는 MIDI 기기의 수에만 적용된 것이다. 오늘날, 출력 채널의 수에 관계 없이 실제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제공하는 사운드 카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 오디오 가속기"르 부르지만, 실제 보이스 폴리포니는 중요시되는 3차원 사운드의 하드웨어 가속, 포지셔널 오디오, 실시간 DSP 효과 등의 다른 요소와 더불어 필수 사항이 아니다. 디지털 사운드 재생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합성 시 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이자,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갖춘 현대의 사운드 카드들은 보이스의 수 많음의 채널을 가지고 실제로 DAC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드웨어에서 보이스 믹싱과 효과음 처리를 수행하며, 전용 DSP 안에서 특정한 효과를 적용하기 위해 주파수 도메인을 통한 디지털 필터링 및 변환을 수행하게 된다. 최종 재생 단계는 보이스 (이를테면 7.1 오디오의 경우 8채널의 경우 즉 32, 64, 또 128 보이스 안에서 구별됨) 보다 상당히 적은 수의 채널을 가지고 외부 (DSP 칩을 의미) DAC에 의해 수행된다. 사운드 카드 표준 목록[편집] 사운드 카드 표준 이름 연도 정확도 주파수 채널 PC 스피커 1981 6 비트 1 펄스 폭 변조 탠디 1984 16 볼륨 설정 122 Hz ~ 125 kHz 3 방형파 톤, 1 화이트 노이즈 MPU-401 1984 MIDI Covox 1986 8 비트 1 DAC 애드립 1987 64 볼륨 설정 ~49.716 kHz 6-보이스 FM 신시사이저, 5개 타악기 롤랜드 MT-32 1987 16 비트 32 kHz 8개 멜로디 채널, 1개 리듬 채널 사운드 블라스터 1989 8 비트 22 kHz 1 DAC; 11-보이스 FM 신시사이저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1991 16 비트 32 kHz 24개 보이스 그레비스 울트라사운드 1992 16 비트 44.1 kHz 16개 스테레오 채널 AC97 1997 20 비트 96 kHz 6개 독립 출력 채널 환경 음향 확장 2001 8개 동시 3차원 보이스 인텔 고선명 오디오 2004 32 비트 192 kHz 최대 15개의 독립 출력 채널 색 코드[편집] 사운드 카드의 단자들은 PC 시스템 디자인 가이드에 의거하여 색으로 부호화된다.[2] 각각의 잭 위치와 관련하여 화살표, 구멍, 사운드웨이브가 있는 기호를 갖춘 경우도 있으며, 각각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색 기능 단자 기호   분홍 아날로그 마이크로폰 오디오 입력. 3.5 mm TRS 마이크로폰   밝은 파랑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입력. 3.5 mm TRS 원으로 향하는 화살표   라임 초록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메인 스테레오 신호, 프론트 스피커나 헤드폰) 3.5 mm TRS 원의 한쪽에서 소리로 나가는 화살표   갈색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특수 패닝, "Right-to-left 스피커") 3.5 mm TRS   검정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서라운드 스피커, 일반적으로 후면 스테레오) 3.5 mm TRS   주황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중앙 채널 스피커, 서브우퍼) 3.5 mm TRS   은색/회색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양쪽 스피커) 3.5 mm TRS   금색/회색 게임 포트 / 미디 15 핀 D 두 면에서 소리로 나가는 화살표 IBM PC 아키텍처의 사운드 카드의 역사[편집] 애드립 뮤직 신시사이저 카드는 1990년 경 최초의 사운드 카드들 가운데 하나였다. 수동 볼륨 손잡이가 보인다. ISA-8 버스. ISA-16 버스용 사운드 카드 모자르트 16. 터틀 비치 사운드 카드. PCI 버스. 에코 디지털 오디오의 인디고 IO — PCMCIA 카드 24비트 96 kHz 스테레오 입출력 사운드 카드. PC용 비아 테크놀로지스 엔비 사운드 카드. PCI 슬롯 5.1 채널 IBM PC 호환 컴퓨터용 사운드 카드들은 1988년까지 그리 흔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내부 PC 스피커를 통해 초기의 PC 소프트웨어가 소리와 음악을 출력할 수 있었다.[3] 이 스피커 하드웨어는 일반적으로 방형파에 제한되어 "비퍼"(beeper)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출력되는 소리는 일반적으로 비프(beep)나 부프(boop)로 기술되었다. 액세스 소프트웨어와 같은 일부 기업들은 PC 스피커를 넘어선 디지털 소리 출력을 위한 기술들을 개발했다. (리얼사운드 참고) 기능만 겨우 지원되는 수준의 출력음은 왜곡된 출력과 낮은 음량의 문제가 있었고 소리 재생을 하는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모든 출력이 중단되어야 했다. 1980년대의 다른 가정용 컴퓨터 모델들에는 디지털 소리 재생의 하드웨어 지원, 음악 합성을 포함하였고, 음악 합성이나 게이밍과 같은 멀티미디어 응용 분야에서는 IBM PC에 불이익을 안겨주었다. IBM PC 플랫폼용 사운드 카드의 초기 디자인과 마케팅은 주로 게이밍에 기반하지 않았고 음악 합성(애드립 퍼스널 뮤직 시스템), IBM 뮤직 피처 카드, 크리에이티브 뮤직 시스템)이나 음성 합성 (디지스피치 DS201, Covox Speech Thing, 스트리트 일렉트로넥스 '에코')에 초점을 두었다. 1988년,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컴퓨터 게임 CEO 패널은 PC의 제한된 소리 기능이 주도적인 가정용 컴퓨터에 방해가 되고 있고, 현재의 제품 보다 더 나은 기능을 갖춘 $49~79 사운드 카드가 필요하며 하드웨어가 널리 보급된다면 기업들이 이를 지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EGA, VGA 비디오, 3 1/2" 디스크 지원에 앞장선 시에라 온라인은 그 해에 게임에 애드립, IBM 뮤직 피처, 롤랜드 MT-32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카드들은 $195~$600대에 가격이 형성되었다.[4] 1989년 컴퓨터 게이밍 월드 조사에 따르면 25개 게임 회사 중 18곳이 애드립, 6개의 롤랜드 / 코복스, 7개의 크리에이티브 뮤직 시스템/게임 블라스터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5] 하드웨어 제조업체[편집] IBM PC용 사운드 카드의 최초 제조업체들 중 하나는 애드립이었으며, OPL2라는 야마하 YM3812 사운드 칩 기반의 카드를 생산하였다.[3] 크리에이티브 랩스 또한 크레에이티브 뮤직 시스템이라는 사운드 카드를 상품화하였다. 크리에이티브 랩스가 사운드 블라스터 카드를 선보였을 당시 IBM PC 호환 사운드 카드 시장에 큰 변화를 주었다.[3] 1980년대 말 롤랜드 또한 사운드 카드를 만들었으며, 다수가 MT-32, LAP-I와 같은 고품질 프로슈머 카드였다.[3] 확장 카드 이외의 사운드 장치[편집] PC 메인보드에 포함된 통합형 사운드 하드웨어[편집] 1984년, 최초의 IBM PCjr은 여러 진폭으로 3 방형파 톤을 만들 수 있는 매우 기본적인 3 보이스 사운드 합성 칩 (SNS6489)를 갖추었으며, 의사 화이트 노이즈 채널은 원시적인 타악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처음 PCjr의 복제품인 탠디 1000은 이 기능을 복제하였고 여기서 탠디 TL/SL/RL 모델은 디지털 사운드 녹음 및 재생 기능을 갖추었다. PCjr의 비디오 표준을 지원하였던 1980년대 동안 수많은 게임들(탠디 호환, 탠디 그래픽스, TGA로 기술됨) 또한 PCjr/탠디 1000 오디오를 지원하였다. 1990년대 말 수많은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플러그인 사운드카드를 메인보드에 통합되는 코덱 칩(실제로는 하나의 통합된 오디오 AD/DA 컨버터)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중 다수는 인텔의 AC'97 사양을 사용하였다. 그 밖의 것들은 값비싼 ACR 슬롯 액세서리 카드들을 사용했다. 2001년 즈음부터 수많은 메인보드들은 내장형 "실제"(코덱이 아닌) 사운드 카드들을 통합했으며 이는 보통 완전한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성과 유사한 것을 제공하는 커스텀 칩셋의 일종이었고 상대적으로 고품질의 소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기능들은 AC'97이 2004년 출시되어 천천히 수용 범위를 넓혀나간, 코덱 칩의 사용을 다시 규정한 인텔의 HD 오디오 표준에 의해 대체되면서 지원이 중단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대부분의 메인보드들은 코덱 칩, 즉 HD 오디오 호환, 그리고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을 사용하는 것으로 귀환하고 있다. 다른 플랫폼 위의 통합형 사운드[편집] 다양한 IBM PC 비호환 컴퓨터들, 이를테면 코모도어 64(1982년)와 아미가(1985년), NEC의 PC-88, PC-98, 후지쯔의 FM-7, FM 타운스, MSX,[6] 애플의 매킨토시, 워크스테이션 (썬과 같은 제조업체) 등의 초기 가정용 컴퓨터들은 자신들만의 메인보드 내장 사운드 장치들을 보유하였다. 일부의 경우, 특히 아미가, C64, PC-88, PC-98, MSX, FM-7, FM 타운스는 제조 당시 매우 진보한 기능들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기능만 제공했다. 이들 플랫폼 중 일부는 자신들의 버스 구조들에 맞추어 설계뙨 사운드 카드들도 있었고 표준 PC에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C-88, PC-98, MSX, FM-7 등 여러 일본의 컴퓨터 플랫폼들은 1980년대 중반 야마하의 내장 FM 합성 사운드를 갖추었다. 1989년, FM 타운스 컴퓨터 플랫폼은 내장형 PCM 샘플 기반 사운드를 제공하였고 CD-ROM 포맷을 지원하였다.[6] 아미가의 커스텀 사운드 칩 Paula는 4개의 디지털 사운드 채널(2개는 왼쪽 스피커, 2개는 오른쪽)을 갖추었고 한 채널마다 8비트 해상력(단, 패치를 하면 CPU 사용률을 높이는 대가로 14/15비트 지원 가능)을, 채널 당 6비트 볼륨 제어가 가능하였다. 아미가의 사운드 재생은 메인 CPU를 사용하지 않고 칩 RAM으로부터 직접 읽어들임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들은 사운드 칩들을 내장하였으며,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샘플링된 오디오 및 음향 효과를 위해 다양한 DAC와 결합한 야마하 OPL 칩을 들 수 있다. 다른 플랫폼 위의 사운드 카드[편집] 컴퓨터에 사용된 최초의 사운드 카드는 PLATO 터미널용 음악 장치 Gooch Synthetic Woodwind였으며 사운드 카드와 MIDI의 선구자격으로서 묘사된다. 1972년 발명되었다. 특정한 초기 아케이드 기계들은 온보드 오디오에 이미 장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운드 카드들을 사용하여 복잡한 오디오 파형과 디지털 음악 재생을 수행하였다. 아케이드 기계에 사용된 사운드 카드의 한 예로는 디지털 컴프레션 시스템 카드를 들 수 있으며 이는 미드웨이의 게임에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미드웨이 T 유닛 하드웨어의 모탈 컴뱃 II가 그것이다. T-유닛 하드웨어는 이미 OKI 6295 DAC와 결합된 온보드 YM2151 OPL 칩을 갖추고 있지만 게임은 DCS 카드를 대신 사용한다.[7] 이 카드는 또한 복잡한 반복 BGM과 음성 재생(레볼루션 X는 게임 출시 당시 인상깊은 기능의 하나로서 투명하게 반복되는 밴드의 음반에서 비롯된 완전히 샘플링된 노래를 사용했다)을 위해 아케이드 버전의 미드웨이와 에어로스미스의 레볼루션 X에도 사용되었다. 내장 사운드 기능과 함께 장비된 MSX 컴퓨터들은 사운드 카드에 의존하여 더 나은 품질의 소리를 냈다. 문사운드라는 이름의 카드는 야마하 OPL4 사운드 칩을 사용한다. 문사운드 이전까지는 MSX 뮤직, MSX 오디오라는 사운드카드가 있었으며 이것들은 시스템 상에 OPL2, OPL3 칩셋을 사용한다. IIGS까지 비프음 이외에 사운드 키능이 없던 애플 II 시리즈의 컴퓨터들은 다양한 제조업체의 플러그인 사운드 카드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 비퍼(beeper)만 있던 싱클레어 ZX 스펙트럼은 일부 사운드 카드를 갖추고 있었다. 한 예로 터보사운드를 들 수 있다.[8] 다른 예로는 풀러 박스(Fuller Box),[9][10] Melodik for the Didaktik Gamma, AY-Magic 등이 있다. ZX81용 Zon X-81[11][12]은 어댑터를 사용하여 ZX 스펙트럼에 사용이 가능하였다. 외장형 사운드 장치[편집] 코복스 스피치 띵과 같은 장치들은 IBM PC의 병렬 포트에 부착할 수 있었으며 6, 8비트의 PCM 샘플 데이터를 주입하여 소리를 출력할 수 있다. 또, 수많은 종류의 전문가용 사운드카드(오디오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편리, 그리고 개선된 정확도를 위해 외장 파이어와이어나 USB 장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PCMCIA 카드버스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사운드 카드는 노트북 컴퓨터가 온보드 사운드를 갖추기 이전에 구매할 수 있었다. 카드버스 오디오는 온보드 사운드의 품질이 떨어질 경우 지금도 사용이 가능하다. 카드버스 인터페이스들은 약 2005년 이후로 제조업체들이 컴퓨터 상에 추구하였던 익스프레스카드에 의해 퇴출되었다. 이 장치들 가운데 대부분은 모바일 DJ를 위해 한 시스템에서 재생과 모니터링을 허용하기 위해 별도의 출력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일부는 모바일 게이머를 대상으로 게이밍 노트북에 하이엔드 사운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드라이버 구조[편집] 사운드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운영 체제는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를 요구한다. 일부 운영 체제는 사용할 수 있는 일부 사운드 카드들의 드라이버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사운드 카드를 구매하면 드라이버 CD 등으로 배포되거나, 인터넷에서 내려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IBM PC를 위한 도스 프로그램들은 공통의 미들웨어 드라이버 라이브러리(HMI 사운드 운영 체제, 미들 오디오 인터페이스 라이브러리 (ALI), 마일즈 사운드 시스템 등)를 사용해야 했다. 이러한 라이브러리들은 도스가 자체적으로 사운드 카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통 사운드 카드들에 동작하는 드라이버를 포함하였다. 몇몇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들은 미들웨어 TSR 기반의 드라이버를 제공하였으며, 일부 프로그램들은 프로그램 자체에서 사운드 카드를 지원하게끔 소스 코드를 단순히 프로그램에 통합하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는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가 만든 드라이버를 사용한다. 많은 메이커들은 마이크로소프트에 드라이버를 제공하여 윈도 설치본에 포함시킨다. 윈도 CD는 웹이나 FTP 사이트와 같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버그 수정과 다른 개선 사항들은 드라이버를 내려 받아 설치하여 얻을 수 있다. 비스타는 UAA를 사용한다. 수많은 유닉스 버전들은 포팅할 수 있는 오픈 사운드 시스템 (OSS)을 사용한다. 드라이버들은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들이 거의 만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현대 리눅스 기반의 배포판들은 ALSA를 사용한다.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 목록[편집] AIM ASUS 어드밴스트 그래비스 컴퓨터 테크놀로지 (파산) 애드립 (파산) Aureal Semiconductor (파산) Auzentech (파산) Aztech Labs Behavior Tech Computer Behringer C-Media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 E-mu Systems (크리에이티브가 인수) 엔소닉 (크리에이티브가 인수) ESI HT 오메가 MARIAN 디지털 오디오 일렉트로닉스 M-오디오 온쿄 리얼텍 세미컨덕터 RME 오디오 롤랜드 트라이던트 마이크로시스템스 (파산) 터틀 비치 시스템스 비아 테크놀로지스 야마하 같이 보기[편집] 리얼텍 크리에이티브 랩스 C-Media 각주[편집] ↑ “Studio Recording Techniques - Recording Devices”. 《joelezekielconfetti》. 2016년 1월 20일에 확인함.  ↑ PC 99 System Design Guide, Intel Corporation and Microsoft Corporation, 14 July 1999. Chapter 3: PC 99 basic requirements (PC 99 System Design Guide (Self-extracting .exe archive). Requirement 3.18.3: Systems use a color-coding scheme for connectors and ports. Accessed 2012-11-26 ↑ 가 나 다 라 “보관 된 사본” (PDF). 2014년 9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6월 24일에 확인함.  ↑ “Winds of Progress Unleashed in "Windy City"”. 《Computer Gaming World》. July 1988. 8면. 2013년 11월 3일에 확인함.  ↑ “The Gamer's Guide to Sound Boards”. 《Computer Gaming World》. September 1989. 18면. 2013년 11월 4일에 확인함.  ↑ 가 나 John Szczepaniak. “Retro Japanese Computers: Gaming's Final Frontier Retro Japanese Computers”. Hardcore Gaming 101. 2011년 3월 29일에 확인함.  Reprinted from 《Retro Gamer》 (67), 2009  ↑ System 16 - Midway T Unit Hardware ↑ VeleSoft ↑ WoS: Fuller Box ↑ “Crash Issue 01, February 1984”. 2017년 4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3월 24일에 확인함.  ↑ ZON X-81 Programmable Sound Generator ↑ Sinclair User, issue 8, page 2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사운드 카드 PC 사운드 하드웨어의 역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사운드카드 박물관 사운드 카드의 동작 원리 vdehPC 사운드 카드IBM 호환 표준 PC 스피커 (1981) MPU-401 (1984) 코복스 (1986) 애드립 (1987) IBM 뮤직 피처 카드 (1987) 롤랜드 MT-32 (1987) 롤랜드 LAPC-I (1989) 사운드 블라스터 (1989) 일반 MIDI (1991) 롤랜드 GS (1991)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1991) 롤랜드 SC-55 (1991) 그레비스 울트라사운드 (1992) 야마하 XG (1994) AC'97 (1997) 일반 MIDI 레벨 2 (1999) 환경 음향 확장 (2001) 인텔 고선명 오디오 (2004) 기타 표준 MML (1978) SFG-01 (1983) MSX-오디오 (1984) SFG-02 (1984) 탠디 (1984) MSX-뮤직 (1987) 관련 항목 MIDI 표준 비교 MIDI vdeh기본 컴퓨터 부품컴퓨터 입력 장치 키보드 이미지 스캐너 마이크로폰 포인팅 장치 그래픽 태블릿 조이스틱 라이트 펜 마우스 광 포인팅 스틱 터치패드 터치스크린 트랙볼 재생 가능 점자 디스플레이 사운드 카드 웹캠 소프트캠 그래픽 카드 컴퓨터 출력 장치 모니터 재생 가능 점자 디스플레이 프린터 스피커 플로터 사운드 카드 그래픽 카드 이동식 매체 광 디스크 CD DVD 블루레이 디스크 디스크 팩 플로피 디스크 메모리 카드 USB 플래시 드라이브 컴퓨터 케이스 중앙 처리 장치 (CPU) HDD / SSD / SSHD 메인보드 네트워크 인터페이스 컨트롤러 전원 공급 장치 랜덤 액세스 메모리 (RAM) 팩스 모뎀 확장 카드 포트 이더넷 파이어와이어 (IEEE 1394) 병렬 포트 직렬 포트 PS/2 단자 USB 선더볼트 디스플레이포트 / HDMI / DVI / VGA eSATA 오디오 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운드_카드&oldid=24284474" 분류: 사운드 카드컴퓨터 주변기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ҚазақшаКомиLatinaLumbaartLatviešuОлык марий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18: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사운드 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운드 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지금은 출시되지 않고 있는 사운드 블라스터 라이브 벨류 카드 - 2000년 경의 PCI 사운드 카드. 사운드 카드(영어: sound card), 또는 오디오 카드(영어: audio card)는 내부 확장 카드의 하나로, 소리를 저장하고 출력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내부 확장 카드(internal expansion card) 형태의 장치(칩셋)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제어를 통해 컴퓨터를 경유한 오디오 신호의 입출력을 담당한다. "사운드 카드"라는 용어 그 자체는 프로페셔널 오디오 응용 프로그램에 사용되는 외장형 오디오 인터페이스에만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사운드 카드를 이용할 때에는 멀티미디어 응용 프로그램들을 위해 영상/소리 편집, 프레젠테이션/교육,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오락)와 같은 오디오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사운드 기능은 플러그인 카드와 비슷한 부품을 사용하여 메인보드에 내장된 경우도 있다. 내장형 사운드 시스템 또한 종종 "사운드 카드"로 부르기도 한다. 사운드 처리 하드웨어 또한 소리 출력을 위해 영상 기능이 있는 HDMI를 갖춘 현대의 비디오 카드에도 존재한다. 그 이전에는 메인보드나 사운드 카드에 SPDIF 연결을 사용했다. 목차 1 일반적인 특징 1.1 사운드 채널과 폴리포니 2 사운드 카드 표준 목록 3 색 코드 4 IBM PC 아키텍처의 사운드 카드의 역사 4.1 하드웨어 제조업체 5 확장 카드 이외의 사운드 장치 5.1 PC 메인보드에 포함된 통합형 사운드 하드웨어 5.2 다른 플랫폼 위의 통합형 사운드 5.3 다른 플랫폼 위의 사운드 카드 5.4 외장형 사운드 장치 6 드라이버 구조 7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 목록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일반적인 특징[편집] 사운드 카드 PCB의 확대 모습. 전해 축전기, SMT 축전기, 저항기, YAC512 2채널 16비트 DAC가 보인다. 대부분의 사운드 카드들은 디지털-아날로그 변환회로(DAC)를 사용하여 녹음되거나 발생되는 디지털 데이터를 아날로그 형식으로 변환한다. 출력 신호는 TRS 폰 커넥터나 RCA 단자와 같은 표준 상호 연결을 사용하여 증폭기, 헤드폰, 또는 외부 장치에 연결된다. 단자의 수와 크기가 공간에 비해 너무 클 경우, 케이스 밖에서 사용되는 상자형 형태 또는 케이스 전면에 마운트되는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진보된 카드들은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사운드 칩을 포함하고 있어서 더 높은 데이터 속도와 여러 동시성 기능을 지원하는데,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최소화된 데이터와 CPU 시간을 사용하면서 실시간 음악 및 음향 효과에 쓰이는 합성된 소리의 디지털 출력을 들 수 있다. 디지털 소리 출력은 일반적으로 다채널 DAC를 통해 이루어지며 다른 높이와 볼륨으로 동시의 디지털 샘플을 기능할 수 있으며, 필터링이나 의도적인 왜곡과 같은 실시간 효과를 응용할 수 있다. 다채널 디지털 사운드 재생은 음악 합성에도 사용할 수 있는데, 컴플라이언스,[1] 심지어는 다채널 에뮬레이션을 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러한 접근은 제조업체들이 더 단순하고 비용이 더 낮은 사운드 카드를 강구하면서 일반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운드 카드들은 카세트 테이프 및 그 밖의 마이크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전압이 있는 음원으로부터 입력 신호를 받기 위해 라인 인 단자를 갖추고 있다. 사운드 카드는 신호를 디지털화한다. DMAC는 샘플들을 메인 메모리에 전송하며, 여기에서 저장, 편집, 추가 가공을 위해 녹음 소프트웨어가 하드 디스크에 이를 기록한다. 일반화된 다른 외부 단자로는 마이크 단자가 있으며, 마이크로폰이나 기타 낮은 수준의 입력 장치로부터 신호를 받을 때 사용된다. 이를테면, 음성 인식이나 VoIP 응용 프로그램을 통해 마이크로폰 잭을 통한 입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운드 채널과 폴리포니[편집] 8채널 DAC 시러스 로직 CS4382가 사운드 블라스터 X-Fi Fatal1ty에 위치해 있다. 중요한 사운드 카드의 특징으로는 폴리포니가 있으며, 이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음성이나 소리를 "동시에" 처리하고 출력할 수 있는 기능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구별된 "채널"들은 오디오 출력의 수로 간주되며, 2.0 (스테레오), 2.1 (스테레오와 서브우퍼), 5.1 (서라운드) 등의 구성과 같이 스피커 구성과 일치시킬 수 있다. 가끔은 출력 스피커 구성이 아닌 폴리포니의 수준을 언급할 때 "보이스"와 "채널"이라는 용어가 번갈아 사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오래된 사운드 칩들은 3개의 음성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오직 하나의 오디오 채널만을 출력에 쓸 수 있었기에, 모든 음성이 함께 혼합되어야 했다. 나중에 애드립 사운드 카드와 같은 카드들이 하나의 모노 출력 채널에 9개 음성의 폴리포니를 병합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대부분의 PC 사운드 카드들은 다중 FM 합성 보이스(일반적으로 9 또는 16)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MIDI 음악에 흔히 사용되었다. 고급 카드들의 온전한 기능들은 완전하게 사용되는 일은 드물었다. 오직 하나(모노) 또는 두 개(스테레오)의 보이스와 채널이 일반적으로 디지털 사운드 샘플의 재생에 사용되었고 하나 이상의 디지털 사운드 샘플을 재생하려면 고정 샘플링 레이트의 소프트웨어 다운믹스가 필요했다. AC'97 표준 등의 오디오 코덱과 같이 가격이 낮은 현대의 내장 사운드 카드들(메인보드에 내장된)과 심지어는 일부 저가형 확장 사운드 카드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동작했다. 이러한 장치들은 둘 이상의 사운드 출력 채널(일반적으로 5.1 또는 7.1 서라운드 사운드)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음향이든 MIDI 출력이든 간에 실제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갖추지는 못했다. 이러한 작업들은 전적으로 소프트웨어에서 수행되었다. 이는 비싸지 않은 소프트모뎀들이 하드웨어 대신 소프트웨어에서 현대의 작업을 수행한 것과 비슷하다. 또, 웨이브테이블 샘플 기반 합성 초기 시절에 일부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들은 MIDI 기능에만 폴리포니를 단독으로 광고하였다. 이 경우, 카드의 출력 채널은 적절하지 않은데, 일반적으로 카드는 오직 2채널의 디지털 소리만 구현한 것이다. 즉, 폴리포니 측정 시 주어진 시간 안에 사운드 카드가 재생할 수 있는 MIDI 기기의 수에만 적용된 것이다. 오늘날, 출력 채널의 수에 관계 없이 실제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제공하는 사운드 카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 오디오 가속기"르 부르지만, 실제 보이스 폴리포니는 중요시되는 3차원 사운드의 하드웨어 가속, 포지셔널 오디오, 실시간 DSP 효과 등의 다른 요소와 더불어 필수 사항이 아니다. 디지털 사운드 재생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합성 시 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이자,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갖춘 현대의 사운드 카드들은 보이스의 수 많음의 채널을 가지고 실제로 DAC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드웨어에서 보이스 믹싱과 효과음 처리를 수행하며, 전용 DSP 안에서 특정한 효과를 적용하기 위해 주파수 도메인을 통한 디지털 필터링 및 변환을 수행하게 된다. 최종 재생 단계는 보이스 (이를테면 7.1 오디오의 경우 8채널의 경우 즉 32, 64, 또 128 보이스 안에서 구별됨) 보다 상당히 적은 수의 채널을 가지고 외부 (DSP 칩을 의미) DAC에 의해 수행된다. 사운드 카드 표준 목록[편집] 사운드 카드 표준 이름 연도 정확도 주파수 채널 PC 스피커 1981 6 비트 1 펄스 폭 변조 탠디 1984 16 볼륨 설정 122 Hz ~ 125 kHz 3 방형파 톤, 1 화이트 노이즈 MPU-401 1984 MIDI Covox 1986 8 비트 1 DAC 애드립 1987 64 볼륨 설정 ~49.716 kHz 6-보이스 FM 신시사이저, 5개 타악기 롤랜드 MT-32 1987 16 비트 32 kHz 8개 멜로디 채널, 1개 리듬 채널 사운드 블라스터 1989 8 비트 22 kHz 1 DAC; 11-보이스 FM 신시사이저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1991 16 비트 32 kHz 24개 보이스 그레비스 울트라사운드 1992 16 비트 44.1 kHz 16개 스테레오 채널 AC97 1997 20 비트 96 kHz 6개 독립 출력 채널 환경 음향 확장 2001 8개 동시 3차원 보이스 인텔 고선명 오디오 2004 32 비트 192 kHz 최대 15개의 독립 출력 채널 색 코드[편집] 사운드 카드의 단자들은 PC 시스템 디자인 가이드에 의거하여 색으로 부호화된다.[2] 각각의 잭 위치와 관련하여 화살표, 구멍, 사운드웨이브가 있는 기호를 갖춘 경우도 있으며, 각각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색 기능 단자 기호   분홍 아날로그 마이크로폰 오디오 입력. 3.5 mm TRS 마이크로폰   밝은 파랑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입력. 3.5 mm TRS 원으로 향하는 화살표   라임 초록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메인 스테레오 신호, 프론트 스피커나 헤드폰) 3.5 mm TRS 원의 한쪽에서 소리로 나가는 화살표   갈색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특수 패닝, "Right-to-left 스피커") 3.5 mm TRS   검정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서라운드 스피커, 일반적으로 후면 스테레오) 3.5 mm TRS   주황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중앙 채널 스피커, 서브우퍼) 3.5 mm TRS   은색/회색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양쪽 스피커) 3.5 mm TRS   금색/회색 게임 포트 / 미디 15 핀 D 두 면에서 소리로 나가는 화살표 IBM PC 아키텍처의 사운드 카드의 역사[편집] 애드립 뮤직 신시사이저 카드는 1990년 경 최초의 사운드 카드들 가운데 하나였다. 수동 볼륨 손잡이가 보인다. ISA-8 버스. ISA-16 버스용 사운드 카드 모자르트 16. 터틀 비치 사운드 카드. PCI 버스. 에코 디지털 오디오의 인디고 IO — PCMCIA 카드 24비트 96 kHz 스테레오 입출력 사운드 카드. PC용 비아 테크놀로지스 엔비 사운드 카드. PCI 슬롯 5.1 채널 IBM PC 호환 컴퓨터용 사운드 카드들은 1988년까지 그리 흔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내부 PC 스피커를 통해 초기의 PC 소프트웨어가 소리와 음악을 출력할 수 있었다.[3] 이 스피커 하드웨어는 일반적으로 방형파에 제한되어 "비퍼"(beeper)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출력되는 소리는 일반적으로 비프(beep)나 부프(boop)로 기술되었다. 액세스 소프트웨어와 같은 일부 기업들은 PC 스피커를 넘어선 디지털 소리 출력을 위한 기술들을 개발했다. (리얼사운드 참고) 기능만 겨우 지원되는 수준의 출력음은 왜곡된 출력과 낮은 음량의 문제가 있었고 소리 재생을 하는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모든 출력이 중단되어야 했다. 1980년대의 다른 가정용 컴퓨터 모델들에는 디지털 소리 재생의 하드웨어 지원, 음악 합성을 포함하였고, 음악 합성이나 게이밍과 같은 멀티미디어 응용 분야에서는 IBM PC에 불이익을 안겨주었다. IBM PC 플랫폼용 사운드 카드의 초기 디자인과 마케팅은 주로 게이밍에 기반하지 않았고 음악 합성(애드립 퍼스널 뮤직 시스템), IBM 뮤직 피처 카드, 크리에이티브 뮤직 시스템)이나 음성 합성 (디지스피치 DS201, Covox Speech Thing, 스트리트 일렉트로넥스 '에코')에 초점을 두었다. 1988년,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컴퓨터 게임 CEO 패널은 PC의 제한된 소리 기능이 주도적인 가정용 컴퓨터에 방해가 되고 있고, 현재의 제품 보다 더 나은 기능을 갖춘 $49~79 사운드 카드가 필요하며 하드웨어가 널리 보급된다면 기업들이 이를 지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EGA, VGA 비디오, 3 1/2" 디스크 지원에 앞장선 시에라 온라인은 그 해에 게임에 애드립, IBM 뮤직 피처, 롤랜드 MT-32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카드들은 $195~$600대에 가격이 형성되었다.[4] 1989년 컴퓨터 게이밍 월드 조사에 따르면 25개 게임 회사 중 18곳이 애드립, 6개의 롤랜드 / 코복스, 7개의 크리에이티브 뮤직 시스템/게임 블라스터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5] 하드웨어 제조업체[편집] IBM PC용 사운드 카드의 최초 제조업체들 중 하나는 애드립이었으며, OPL2라는 야마하 YM3812 사운드 칩 기반의 카드를 생산하였다.[3] 크리에이티브 랩스 또한 크레에이티브 뮤직 시스템이라는 사운드 카드를 상품화하였다. 크리에이티브 랩스가 사운드 블라스터 카드를 선보였을 당시 IBM PC 호환 사운드 카드 시장에 큰 변화를 주었다.[3] 1980년대 말 롤랜드 또한 사운드 카드를 만들었으며, 다수가 MT-32, LAP-I와 같은 고품질 프로슈머 카드였다.[3] 확장 카드 이외의 사운드 장치[편집] PC 메인보드에 포함된 통합형 사운드 하드웨어[편집] 1984년, 최초의 IBM PCjr은 여러 진폭으로 3 방형파 톤을 만들 수 있는 매우 기본적인 3 보이스 사운드 합성 칩 (SNS6489)를 갖추었으며, 의사 화이트 노이즈 채널은 원시적인 타악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처음 PCjr의 복제품인 탠디 1000은 이 기능을 복제하였고 여기서 탠디 TL/SL/RL 모델은 디지털 사운드 녹음 및 재생 기능을 갖추었다. PCjr의 비디오 표준을 지원하였던 1980년대 동안 수많은 게임들(탠디 호환, 탠디 그래픽스, TGA로 기술됨) 또한 PCjr/탠디 1000 오디오를 지원하였다. 1990년대 말 수많은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플러그인 사운드카드를 메인보드에 통합되는 코덱 칩(실제로는 하나의 통합된 오디오 AD/DA 컨버터)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중 다수는 인텔의 AC'97 사양을 사용하였다. 그 밖의 것들은 값비싼 ACR 슬롯 액세서리 카드들을 사용했다. 2001년 즈음부터 수많은 메인보드들은 내장형 "실제"(코덱이 아닌) 사운드 카드들을 통합했으며 이는 보통 완전한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성과 유사한 것을 제공하는 커스텀 칩셋의 일종이었고 상대적으로 고품질의 소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기능들은 AC'97이 2004년 출시되어 천천히 수용 범위를 넓혀나간, 코덱 칩의 사용을 다시 규정한 인텔의 HD 오디오 표준에 의해 대체되면서 지원이 중단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대부분의 메인보드들은 코덱 칩, 즉 HD 오디오 호환, 그리고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을 사용하는 것으로 귀환하고 있다. 다른 플랫폼 위의 통합형 사운드[편집] 다양한 IBM PC 비호환 컴퓨터들, 이를테면 코모도어 64(1982년)와 아미가(1985년), NEC의 PC-88, PC-98, 후지쯔의 FM-7, FM 타운스, MSX,[6] 애플의 매킨토시, 워크스테이션 (썬과 같은 제조업체) 등의 초기 가정용 컴퓨터들은 자신들만의 메인보드 내장 사운드 장치들을 보유하였다. 일부의 경우, 특히 아미가, C64, PC-88, PC-98, MSX, FM-7, FM 타운스는 제조 당시 매우 진보한 기능들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기능만 제공했다. 이들 플랫폼 중 일부는 자신들의 버스 구조들에 맞추어 설계뙨 사운드 카드들도 있었고 표준 PC에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C-88, PC-98, MSX, FM-7 등 여러 일본의 컴퓨터 플랫폼들은 1980년대 중반 야마하의 내장 FM 합성 사운드를 갖추었다. 1989년, FM 타운스 컴퓨터 플랫폼은 내장형 PCM 샘플 기반 사운드를 제공하였고 CD-ROM 포맷을 지원하였다.[6] 아미가의 커스텀 사운드 칩 Paula는 4개의 디지털 사운드 채널(2개는 왼쪽 스피커, 2개는 오른쪽)을 갖추었고 한 채널마다 8비트 해상력(단, 패치를 하면 CPU 사용률을 높이는 대가로 14/15비트 지원 가능)을, 채널 당 6비트 볼륨 제어가 가능하였다. 아미가의 사운드 재생은 메인 CPU를 사용하지 않고 칩 RAM으로부터 직접 읽어들임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들은 사운드 칩들을 내장하였으며,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샘플링된 오디오 및 음향 효과를 위해 다양한 DAC와 결합한 야마하 OPL 칩을 들 수 있다. 다른 플랫폼 위의 사운드 카드[편집] 컴퓨터에 사용된 최초의 사운드 카드는 PLATO 터미널용 음악 장치 Gooch Synthetic Woodwind였으며 사운드 카드와 MIDI의 선구자격으로서 묘사된다. 1972년 발명되었다. 특정한 초기 아케이드 기계들은 온보드 오디오에 이미 장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운드 카드들을 사용하여 복잡한 오디오 파형과 디지털 음악 재생을 수행하였다. 아케이드 기계에 사용된 사운드 카드의 한 예로는 디지털 컴프레션 시스템 카드를 들 수 있으며 이는 미드웨이의 게임에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미드웨이 T 유닛 하드웨어의 모탈 컴뱃 II가 그것이다. T-유닛 하드웨어는 이미 OKI 6295 DAC와 결합된 온보드 YM2151 OPL 칩을 갖추고 있지만 게임은 DCS 카드를 대신 사용한다.[7] 이 카드는 또한 복잡한 반복 BGM과 음성 재생(레볼루션 X는 게임 출시 당시 인상깊은 기능의 하나로서 투명하게 반복되는 밴드의 음반에서 비롯된 완전히 샘플링된 노래를 사용했다)을 위해 아케이드 버전의 미드웨이와 에어로스미스의 레볼루션 X에도 사용되었다. 내장 사운드 기능과 함께 장비된 MSX 컴퓨터들은 사운드 카드에 의존하여 더 나은 품질의 소리를 냈다. 문사운드라는 이름의 카드는 야마하 OPL4 사운드 칩을 사용한다. 문사운드 이전까지는 MSX 뮤직, MSX 오디오라는 사운드카드가 있었으며 이것들은 시스템 상에 OPL2, OPL3 칩셋을 사용한다. IIGS까지 비프음 이외에 사운드 키능이 없던 애플 II 시리즈의 컴퓨터들은 다양한 제조업체의 플러그인 사운드 카드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 비퍼(beeper)만 있던 싱클레어 ZX 스펙트럼은 일부 사운드 카드를 갖추고 있었다. 한 예로 터보사운드를 들 수 있다.[8] 다른 예로는 풀러 박스(Fuller Box),[9][10] Melodik for the Didaktik Gamma, AY-Magic 등이 있다. ZX81용 Zon X-81[11][12]은 어댑터를 사용하여 ZX 스펙트럼에 사용이 가능하였다. 외장형 사운드 장치[편집] 코복스 스피치 띵과 같은 장치들은 IBM PC의 병렬 포트에 부착할 수 있었으며 6, 8비트의 PCM 샘플 데이터를 주입하여 소리를 출력할 수 있다. 또, 수많은 종류의 전문가용 사운드카드(오디오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편리, 그리고 개선된 정확도를 위해 외장 파이어와이어나 USB 장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PCMCIA 카드버스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사운드 카드는 노트북 컴퓨터가 온보드 사운드를 갖추기 이전에 구매할 수 있었다. 카드버스 오디오는 온보드 사운드의 품질이 떨어질 경우 지금도 사용이 가능하다. 카드버스 인터페이스들은 약 2005년 이후로 제조업체들이 컴퓨터 상에 추구하였던 익스프레스카드에 의해 퇴출되었다. 이 장치들 가운데 대부분은 모바일 DJ를 위해 한 시스템에서 재생과 모니터링을 허용하기 위해 별도의 출력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일부는 모바일 게이머를 대상으로 게이밍 노트북에 하이엔드 사운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드라이버 구조[편집] 사운드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운영 체제는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를 요구한다. 일부 운영 체제는 사용할 수 있는 일부 사운드 카드들의 드라이버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사운드 카드를 구매하면 드라이버 CD 등으로 배포되거나, 인터넷에서 내려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IBM PC를 위한 도스 프로그램들은 공통의 미들웨어 드라이버 라이브러리(HMI 사운드 운영 체제, 미들 오디오 인터페이스 라이브러리 (ALI), 마일즈 사운드 시스템 등)를 사용해야 했다. 이러한 라이브러리들은 도스가 자체적으로 사운드 카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통 사운드 카드들에 동작하는 드라이버를 포함하였다. 몇몇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들은 미들웨어 TSR 기반의 드라이버를 제공하였으며, 일부 프로그램들은 프로그램 자체에서 사운드 카드를 지원하게끔 소스 코드를 단순히 프로그램에 통합하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는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가 만든 드라이버를 사용한다. 많은 메이커들은 마이크로소프트에 드라이버를 제공하여 윈도 설치본에 포함시킨다. 윈도 CD는 웹이나 FTP 사이트와 같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버그 수정과 다른 개선 사항들은 드라이버를 내려 받아 설치하여 얻을 수 있다. 비스타는 UAA를 사용한다. 수많은 유닉스 버전들은 포팅할 수 있는 오픈 사운드 시스템 (OSS)을 사용한다. 드라이버들은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들이 거의 만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현대 리눅스 기반의 배포판들은 ALSA를 사용한다.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 목록[편집] AIM ASUS 어드밴스트 그래비스 컴퓨터 테크놀로지 (파산) 애드립 (파산) Aureal Semiconductor (파산) Auzentech (파산) Aztech Labs Behavior Tech Computer Behringer C-Media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 E-mu Systems (크리에이티브가 인수) 엔소닉 (크리에이티브가 인수) ESI HT 오메가 MARIAN 디지털 오디오 일렉트로닉스 M-오디오 온쿄 리얼텍 세미컨덕터 RME 오디오 롤랜드 트라이던트 마이크로시스템스 (파산) 터틀 비치 시스템스 비아 테크놀로지스 야마하 같이 보기[편집] 리얼텍 크리에이티브 랩스 C-Media 각주[편집] ↑ “Studio Recording Techniques - Recording Devices”. 《joelezekielconfetti》. 2016년 1월 20일에 확인함.  ↑ PC 99 System Design Guide, Intel Corporation and Microsoft Corporation, 14 July 1999. Chapter 3: PC 99 basic requirements (PC 99 System Design Guide (Self-extracting .exe archive). Requirement 3.18.3: Systems use a color-coding scheme for connectors and ports. Accessed 2012-11-26 ↑ 가 나 다 라 “보관 된 사본” (PDF). 2014년 9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6월 24일에 확인함.  ↑ “Winds of Progress Unleashed in "Windy City"”. 《Computer Gaming World》. July 1988. 8면. 2013년 11월 3일에 확인함.  ↑ “The Gamer's Guide to Sound Boards”. 《Computer Gaming World》. September 1989. 18면. 2013년 11월 4일에 확인함.  ↑ 가 나 John Szczepaniak. “Retro Japanese Computers: Gaming's Final Frontier Retro Japanese Computers”. Hardcore Gaming 101. 2011년 3월 29일에 확인함.  Reprinted from 《Retro Gamer》 (67), 2009  ↑ System 16 - Midway T Unit Hardware ↑ VeleSoft ↑ WoS: Fuller Box ↑ “Crash Issue 01, February 1984”. 2017년 4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3월 24일에 확인함.  ↑ ZON X-81 Programmable Sound Generator ↑ Sinclair User, issue 8, page 2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사운드 카드 PC 사운드 하드웨어의 역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사운드카드 박물관 사운드 카드의 동작 원리 vdehPC 사운드 카드IBM 호환 표준 PC 스피커 (1981) MPU-401 (1984) 코복스 (1986) 애드립 (1987) IBM 뮤직 피처 카드 (1987) 롤랜드 MT-32 (1987) 롤랜드 LAPC-I (1989) 사운드 블라스터 (1989) 일반 MIDI (1991) 롤랜드 GS (1991)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1991) 롤랜드 SC-55 (1991) 그레비스 울트라사운드 (1992) 야마하 XG (1994) AC'97 (1997) 일반 MIDI 레벨 2 (1999) 환경 음향 확장 (2001) 인텔 고선명 오디오 (2004) 기타 표준 MML (1978) SFG-01 (1983) MSX-오디오 (1984) SFG-02 (1984) 탠디 (1984) MSX-뮤직 (1987) 관련 항목 MIDI 표준 비교 MIDI vdeh기본 컴퓨터 부품컴퓨터 입력 장치 키보드 이미지 스캐너 마이크로폰 포인팅 장치 그래픽 태블릿 조이스틱 라이트 펜 마우스 광 포인팅 스틱 터치패드 터치스크린 트랙볼 재생 가능 점자 디스플레이 사운드 카드 웹캠 소프트캠 그래픽 카드 컴퓨터 출력 장치 모니터 재생 가능 점자 디스플레이 프린터 스피커 플로터 사운드 카드 그래픽 카드 이동식 매체 광 디스크 CD DVD 블루레이 디스크 디스크 팩 플로피 디스크 메모리 카드 USB 플래시 드라이브 컴퓨터 케이스 중앙 처리 장치 (CPU) HDD / SSD / SSHD 메인보드 네트워크 인터페이스 컨트롤러 전원 공급 장치 랜덤 액세스 메모리 (RAM) 팩스 모뎀 확장 카드 포트 이더넷 파이어와이어 (IEEE 1394) 병렬 포트 직렬 포트 PS/2 단자 USB 선더볼트 디스플레이포트 / HDMI / DVI / VGA eSATA 오디오 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운드_카드&oldid=24284474" 분류: 사운드 카드컴퓨터 주변기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ҚазақшаКомиLatinaLumbaartLatviešuОлык марий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18: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사운드 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운드 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지금은 출시되지 않고 있는 사운드 블라스터 라이브 벨류 카드 - 2000년 경의 PCI 사운드 카드. 사운드 카드(영어: sound card), 또는 오디오 카드(영어: audio card)는 내부 확장 카드의 하나로, 소리를 저장하고 출력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내부 확장 카드(internal expansion card) 형태의 장치(칩셋)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제어를 통해 컴퓨터를 경유한 오디오 신호의 입출력을 담당한다. "사운드 카드"라는 용어 그 자체는 프로페셔널 오디오 응용 프로그램에 사용되는 외장형 오디오 인터페이스에만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사운드 카드를 이용할 때에는 멀티미디어 응용 프로그램들을 위해 영상/소리 편집, 프레젠테이션/교육,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오락)와 같은 오디오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사운드 기능은 플러그인 카드와 비슷한 부품을 사용하여 메인보드에 내장된 경우도 있다. 내장형 사운드 시스템 또한 종종 "사운드 카드"로 부르기도 한다. 사운드 처리 하드웨어 또한 소리 출력을 위해 영상 기능이 있는 HDMI를 갖춘 현대의 비디오 카드에도 존재한다. 그 이전에는 메인보드나 사운드 카드에 SPDIF 연결을 사용했다. 목차 1 일반적인 특징 1.1 사운드 채널과 폴리포니 2 사운드 카드 표준 목록 3 색 코드 4 IBM PC 아키텍처의 사운드 카드의 역사 4.1 하드웨어 제조업체 5 확장 카드 이외의 사운드 장치 5.1 PC 메인보드에 포함된 통합형 사운드 하드웨어 5.2 다른 플랫폼 위의 통합형 사운드 5.3 다른 플랫폼 위의 사운드 카드 5.4 외장형 사운드 장치 6 드라이버 구조 7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 목록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일반적인 특징[편집] 사운드 카드 PCB의 확대 모습. 전해 축전기, SMT 축전기, 저항기, YAC512 2채널 16비트 DAC가 보인다. 대부분의 사운드 카드들은 디지털-아날로그 변환회로(DAC)를 사용하여 녹음되거나 발생되는 디지털 데이터를 아날로그 형식으로 변환한다. 출력 신호는 TRS 폰 커넥터나 RCA 단자와 같은 표준 상호 연결을 사용하여 증폭기, 헤드폰, 또는 외부 장치에 연결된다. 단자의 수와 크기가 공간에 비해 너무 클 경우, 케이스 밖에서 사용되는 상자형 형태 또는 케이스 전면에 마운트되는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진보된 카드들은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사운드 칩을 포함하고 있어서 더 높은 데이터 속도와 여러 동시성 기능을 지원하는데,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최소화된 데이터와 CPU 시간을 사용하면서 실시간 음악 및 음향 효과에 쓰이는 합성된 소리의 디지털 출력을 들 수 있다. 디지털 소리 출력은 일반적으로 다채널 DAC를 통해 이루어지며 다른 높이와 볼륨으로 동시의 디지털 샘플을 기능할 수 있으며, 필터링이나 의도적인 왜곡과 같은 실시간 효과를 응용할 수 있다. 다채널 디지털 사운드 재생은 음악 합성에도 사용할 수 있는데, 컴플라이언스,[1] 심지어는 다채널 에뮬레이션을 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러한 접근은 제조업체들이 더 단순하고 비용이 더 낮은 사운드 카드를 강구하면서 일반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운드 카드들은 카세트 테이프 및 그 밖의 마이크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전압이 있는 음원으로부터 입력 신호를 받기 위해 라인 인 단자를 갖추고 있다. 사운드 카드는 신호를 디지털화한다. DMAC는 샘플들을 메인 메모리에 전송하며, 여기에서 저장, 편집, 추가 가공을 위해 녹음 소프트웨어가 하드 디스크에 이를 기록한다. 일반화된 다른 외부 단자로는 마이크 단자가 있으며, 마이크로폰이나 기타 낮은 수준의 입력 장치로부터 신호를 받을 때 사용된다. 이를테면, 음성 인식이나 VoIP 응용 프로그램을 통해 마이크로폰 잭을 통한 입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운드 채널과 폴리포니[편집] 8채널 DAC 시러스 로직 CS4382가 사운드 블라스터 X-Fi Fatal1ty에 위치해 있다. 중요한 사운드 카드의 특징으로는 폴리포니가 있으며, 이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음성이나 소리를 "동시에" 처리하고 출력할 수 있는 기능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구별된 "채널"들은 오디오 출력의 수로 간주되며, 2.0 (스테레오), 2.1 (스테레오와 서브우퍼), 5.1 (서라운드) 등의 구성과 같이 스피커 구성과 일치시킬 수 있다. 가끔은 출력 스피커 구성이 아닌 폴리포니의 수준을 언급할 때 "보이스"와 "채널"이라는 용어가 번갈아 사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오래된 사운드 칩들은 3개의 음성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오직 하나의 오디오 채널만을 출력에 쓸 수 있었기에, 모든 음성이 함께 혼합되어야 했다. 나중에 애드립 사운드 카드와 같은 카드들이 하나의 모노 출력 채널에 9개 음성의 폴리포니를 병합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대부분의 PC 사운드 카드들은 다중 FM 합성 보이스(일반적으로 9 또는 16)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MIDI 음악에 흔히 사용되었다. 고급 카드들의 온전한 기능들은 완전하게 사용되는 일은 드물었다. 오직 하나(모노) 또는 두 개(스테레오)의 보이스와 채널이 일반적으로 디지털 사운드 샘플의 재생에 사용되었고 하나 이상의 디지털 사운드 샘플을 재생하려면 고정 샘플링 레이트의 소프트웨어 다운믹스가 필요했다. AC'97 표준 등의 오디오 코덱과 같이 가격이 낮은 현대의 내장 사운드 카드들(메인보드에 내장된)과 심지어는 일부 저가형 확장 사운드 카드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동작했다. 이러한 장치들은 둘 이상의 사운드 출력 채널(일반적으로 5.1 또는 7.1 서라운드 사운드)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음향이든 MIDI 출력이든 간에 실제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갖추지는 못했다. 이러한 작업들은 전적으로 소프트웨어에서 수행되었다. 이는 비싸지 않은 소프트모뎀들이 하드웨어 대신 소프트웨어에서 현대의 작업을 수행한 것과 비슷하다. 또, 웨이브테이블 샘플 기반 합성 초기 시절에 일부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들은 MIDI 기능에만 폴리포니를 단독으로 광고하였다. 이 경우, 카드의 출력 채널은 적절하지 않은데, 일반적으로 카드는 오직 2채널의 디지털 소리만 구현한 것이다. 즉, 폴리포니 측정 시 주어진 시간 안에 사운드 카드가 재생할 수 있는 MIDI 기기의 수에만 적용된 것이다. 오늘날, 출력 채널의 수에 관계 없이 실제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제공하는 사운드 카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 오디오 가속기"르 부르지만, 실제 보이스 폴리포니는 중요시되는 3차원 사운드의 하드웨어 가속, 포지셔널 오디오, 실시간 DSP 효과 등의 다른 요소와 더불어 필수 사항이 아니다. 디지털 사운드 재생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합성 시 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이자,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갖춘 현대의 사운드 카드들은 보이스의 수 많음의 채널을 가지고 실제로 DAC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드웨어에서 보이스 믹싱과 효과음 처리를 수행하며, 전용 DSP 안에서 특정한 효과를 적용하기 위해 주파수 도메인을 통한 디지털 필터링 및 변환을 수행하게 된다. 최종 재생 단계는 보이스 (이를테면 7.1 오디오의 경우 8채널의 경우 즉 32, 64, 또 128 보이스 안에서 구별됨) 보다 상당히 적은 수의 채널을 가지고 외부 (DSP 칩을 의미) DAC에 의해 수행된다. 사운드 카드 표준 목록[편집] 사운드 카드 표준 이름 연도 정확도 주파수 채널 PC 스피커 1981 6 비트 1 펄스 폭 변조 탠디 1984 16 볼륨 설정 122 Hz ~ 125 kHz 3 방형파 톤, 1 화이트 노이즈 MPU-401 1984 MIDI Covox 1986 8 비트 1 DAC 애드립 1987 64 볼륨 설정 ~49.716 kHz 6-보이스 FM 신시사이저, 5개 타악기 롤랜드 MT-32 1987 16 비트 32 kHz 8개 멜로디 채널, 1개 리듬 채널 사운드 블라스터 1989 8 비트 22 kHz 1 DAC; 11-보이스 FM 신시사이저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1991 16 비트 32 kHz 24개 보이스 그레비스 울트라사운드 1992 16 비트 44.1 kHz 16개 스테레오 채널 AC97 1997 20 비트 96 kHz 6개 독립 출력 채널 환경 음향 확장 2001 8개 동시 3차원 보이스 인텔 고선명 오디오 2004 32 비트 192 kHz 최대 15개의 독립 출력 채널 색 코드[편집] 사운드 카드의 단자들은 PC 시스템 디자인 가이드에 의거하여 색으로 부호화된다.[2] 각각의 잭 위치와 관련하여 화살표, 구멍, 사운드웨이브가 있는 기호를 갖춘 경우도 있으며, 각각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색 기능 단자 기호   분홍 아날로그 마이크로폰 오디오 입력. 3.5 mm TRS 마이크로폰   밝은 파랑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입력. 3.5 mm TRS 원으로 향하는 화살표   라임 초록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메인 스테레오 신호, 프론트 스피커나 헤드폰) 3.5 mm TRS 원의 한쪽에서 소리로 나가는 화살표   갈색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특수 패닝, "Right-to-left 스피커") 3.5 mm TRS   검정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서라운드 스피커, 일반적으로 후면 스테레오) 3.5 mm TRS   주황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중앙 채널 스피커, 서브우퍼) 3.5 mm TRS   은색/회색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양쪽 스피커) 3.5 mm TRS   금색/회색 게임 포트 / 미디 15 핀 D 두 면에서 소리로 나가는 화살표 IBM PC 아키텍처의 사운드 카드의 역사[편집] 애드립 뮤직 신시사이저 카드는 1990년 경 최초의 사운드 카드들 가운데 하나였다. 수동 볼륨 손잡이가 보인다. ISA-8 버스. ISA-16 버스용 사운드 카드 모자르트 16. 터틀 비치 사운드 카드. PCI 버스. 에코 디지털 오디오의 인디고 IO — PCMCIA 카드 24비트 96 kHz 스테레오 입출력 사운드 카드. PC용 비아 테크놀로지스 엔비 사운드 카드. PCI 슬롯 5.1 채널 IBM PC 호환 컴퓨터용 사운드 카드들은 1988년까지 그리 흔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내부 PC 스피커를 통해 초기의 PC 소프트웨어가 소리와 음악을 출력할 수 있었다.[3] 이 스피커 하드웨어는 일반적으로 방형파에 제한되어 "비퍼"(beeper)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출력되는 소리는 일반적으로 비프(beep)나 부프(boop)로 기술되었다. 액세스 소프트웨어와 같은 일부 기업들은 PC 스피커를 넘어선 디지털 소리 출력을 위한 기술들을 개발했다. (리얼사운드 참고) 기능만 겨우 지원되는 수준의 출력음은 왜곡된 출력과 낮은 음량의 문제가 있었고 소리 재생을 하는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모든 출력이 중단되어야 했다. 1980년대의 다른 가정용 컴퓨터 모델들에는 디지털 소리 재생의 하드웨어 지원, 음악 합성을 포함하였고, 음악 합성이나 게이밍과 같은 멀티미디어 응용 분야에서는 IBM PC에 불이익을 안겨주었다. IBM PC 플랫폼용 사운드 카드의 초기 디자인과 마케팅은 주로 게이밍에 기반하지 않았고 음악 합성(애드립 퍼스널 뮤직 시스템), IBM 뮤직 피처 카드, 크리에이티브 뮤직 시스템)이나 음성 합성 (디지스피치 DS201, Covox Speech Thing, 스트리트 일렉트로넥스 '에코')에 초점을 두었다. 1988년,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컴퓨터 게임 CEO 패널은 PC의 제한된 소리 기능이 주도적인 가정용 컴퓨터에 방해가 되고 있고, 현재의 제품 보다 더 나은 기능을 갖춘 $49~79 사운드 카드가 필요하며 하드웨어가 널리 보급된다면 기업들이 이를 지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EGA, VGA 비디오, 3 1/2" 디스크 지원에 앞장선 시에라 온라인은 그 해에 게임에 애드립, IBM 뮤직 피처, 롤랜드 MT-32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카드들은 $195~$600대에 가격이 형성되었다.[4] 1989년 컴퓨터 게이밍 월드 조사에 따르면 25개 게임 회사 중 18곳이 애드립, 6개의 롤랜드 / 코복스, 7개의 크리에이티브 뮤직 시스템/게임 블라스터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5] 하드웨어 제조업체[편집] IBM PC용 사운드 카드의 최초 제조업체들 중 하나는 애드립이었으며, OPL2라는 야마하 YM3812 사운드 칩 기반의 카드를 생산하였다.[3] 크리에이티브 랩스 또한 크레에이티브 뮤직 시스템이라는 사운드 카드를 상품화하였다. 크리에이티브 랩스가 사운드 블라스터 카드를 선보였을 당시 IBM PC 호환 사운드 카드 시장에 큰 변화를 주었다.[3] 1980년대 말 롤랜드 또한 사운드 카드를 만들었으며, 다수가 MT-32, LAP-I와 같은 고품질 프로슈머 카드였다.[3] 확장 카드 이외의 사운드 장치[편집] PC 메인보드에 포함된 통합형 사운드 하드웨어[편집] 1984년, 최초의 IBM PCjr은 여러 진폭으로 3 방형파 톤을 만들 수 있는 매우 기본적인 3 보이스 사운드 합성 칩 (SNS6489)를 갖추었으며, 의사 화이트 노이즈 채널은 원시적인 타악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처음 PCjr의 복제품인 탠디 1000은 이 기능을 복제하였고 여기서 탠디 TL/SL/RL 모델은 디지털 사운드 녹음 및 재생 기능을 갖추었다. PCjr의 비디오 표준을 지원하였던 1980년대 동안 수많은 게임들(탠디 호환, 탠디 그래픽스, TGA로 기술됨) 또한 PCjr/탠디 1000 오디오를 지원하였다. 1990년대 말 수많은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플러그인 사운드카드를 메인보드에 통합되는 코덱 칩(실제로는 하나의 통합된 오디오 AD/DA 컨버터)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중 다수는 인텔의 AC'97 사양을 사용하였다. 그 밖의 것들은 값비싼 ACR 슬롯 액세서리 카드들을 사용했다. 2001년 즈음부터 수많은 메인보드들은 내장형 "실제"(코덱이 아닌) 사운드 카드들을 통합했으며 이는 보통 완전한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성과 유사한 것을 제공하는 커스텀 칩셋의 일종이었고 상대적으로 고품질의 소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기능들은 AC'97이 2004년 출시되어 천천히 수용 범위를 넓혀나간, 코덱 칩의 사용을 다시 규정한 인텔의 HD 오디오 표준에 의해 대체되면서 지원이 중단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대부분의 메인보드들은 코덱 칩, 즉 HD 오디오 호환, 그리고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을 사용하는 것으로 귀환하고 있다. 다른 플랫폼 위의 통합형 사운드[편집] 다양한 IBM PC 비호환 컴퓨터들, 이를테면 코모도어 64(1982년)와 아미가(1985년), NEC의 PC-88, PC-98, 후지쯔의 FM-7, FM 타운스, MSX,[6] 애플의 매킨토시, 워크스테이션 (썬과 같은 제조업체) 등의 초기 가정용 컴퓨터들은 자신들만의 메인보드 내장 사운드 장치들을 보유하였다. 일부의 경우, 특히 아미가, C64, PC-88, PC-98, MSX, FM-7, FM 타운스는 제조 당시 매우 진보한 기능들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기능만 제공했다. 이들 플랫폼 중 일부는 자신들의 버스 구조들에 맞추어 설계뙨 사운드 카드들도 있었고 표준 PC에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C-88, PC-98, MSX, FM-7 등 여러 일본의 컴퓨터 플랫폼들은 1980년대 중반 야마하의 내장 FM 합성 사운드를 갖추었다. 1989년, FM 타운스 컴퓨터 플랫폼은 내장형 PCM 샘플 기반 사운드를 제공하였고 CD-ROM 포맷을 지원하였다.[6] 아미가의 커스텀 사운드 칩 Paula는 4개의 디지털 사운드 채널(2개는 왼쪽 스피커, 2개는 오른쪽)을 갖추었고 한 채널마다 8비트 해상력(단, 패치를 하면 CPU 사용률을 높이는 대가로 14/15비트 지원 가능)을, 채널 당 6비트 볼륨 제어가 가능하였다. 아미가의 사운드 재생은 메인 CPU를 사용하지 않고 칩 RAM으로부터 직접 읽어들임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들은 사운드 칩들을 내장하였으며,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샘플링된 오디오 및 음향 효과를 위해 다양한 DAC와 결합한 야마하 OPL 칩을 들 수 있다. 다른 플랫폼 위의 사운드 카드[편집] 컴퓨터에 사용된 최초의 사운드 카드는 PLATO 터미널용 음악 장치 Gooch Synthetic Woodwind였으며 사운드 카드와 MIDI의 선구자격으로서 묘사된다. 1972년 발명되었다. 특정한 초기 아케이드 기계들은 온보드 오디오에 이미 장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운드 카드들을 사용하여 복잡한 오디오 파형과 디지털 음악 재생을 수행하였다. 아케이드 기계에 사용된 사운드 카드의 한 예로는 디지털 컴프레션 시스템 카드를 들 수 있으며 이는 미드웨이의 게임에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미드웨이 T 유닛 하드웨어의 모탈 컴뱃 II가 그것이다. T-유닛 하드웨어는 이미 OKI 6295 DAC와 결합된 온보드 YM2151 OPL 칩을 갖추고 있지만 게임은 DCS 카드를 대신 사용한다.[7] 이 카드는 또한 복잡한 반복 BGM과 음성 재생(레볼루션 X는 게임 출시 당시 인상깊은 기능의 하나로서 투명하게 반복되는 밴드의 음반에서 비롯된 완전히 샘플링된 노래를 사용했다)을 위해 아케이드 버전의 미드웨이와 에어로스미스의 레볼루션 X에도 사용되었다. 내장 사운드 기능과 함께 장비된 MSX 컴퓨터들은 사운드 카드에 의존하여 더 나은 품질의 소리를 냈다. 문사운드라는 이름의 카드는 야마하 OPL4 사운드 칩을 사용한다. 문사운드 이전까지는 MSX 뮤직, MSX 오디오라는 사운드카드가 있었으며 이것들은 시스템 상에 OPL2, OPL3 칩셋을 사용한다. IIGS까지 비프음 이외에 사운드 키능이 없던 애플 II 시리즈의 컴퓨터들은 다양한 제조업체의 플러그인 사운드 카드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 비퍼(beeper)만 있던 싱클레어 ZX 스펙트럼은 일부 사운드 카드를 갖추고 있었다. 한 예로 터보사운드를 들 수 있다.[8] 다른 예로는 풀러 박스(Fuller Box),[9][10] Melodik for the Didaktik Gamma, AY-Magic 등이 있다. ZX81용 Zon X-81[11][12]은 어댑터를 사용하여 ZX 스펙트럼에 사용이 가능하였다. 외장형 사운드 장치[편집] 코복스 스피치 띵과 같은 장치들은 IBM PC의 병렬 포트에 부착할 수 있었으며 6, 8비트의 PCM 샘플 데이터를 주입하여 소리를 출력할 수 있다. 또, 수많은 종류의 전문가용 사운드카드(오디오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편리, 그리고 개선된 정확도를 위해 외장 파이어와이어나 USB 장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PCMCIA 카드버스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사운드 카드는 노트북 컴퓨터가 온보드 사운드를 갖추기 이전에 구매할 수 있었다. 카드버스 오디오는 온보드 사운드의 품질이 떨어질 경우 지금도 사용이 가능하다. 카드버스 인터페이스들은 약 2005년 이후로 제조업체들이 컴퓨터 상에 추구하였던 익스프레스카드에 의해 퇴출되었다. 이 장치들 가운데 대부분은 모바일 DJ를 위해 한 시스템에서 재생과 모니터링을 허용하기 위해 별도의 출력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일부는 모바일 게이머를 대상으로 게이밍 노트북에 하이엔드 사운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드라이버 구조[편집] 사운드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운영 체제는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를 요구한다. 일부 운영 체제는 사용할 수 있는 일부 사운드 카드들의 드라이버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사운드 카드를 구매하면 드라이버 CD 등으로 배포되거나, 인터넷에서 내려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IBM PC를 위한 도스 프로그램들은 공통의 미들웨어 드라이버 라이브러리(HMI 사운드 운영 체제, 미들 오디오 인터페이스 라이브러리 (ALI), 마일즈 사운드 시스템 등)를 사용해야 했다. 이러한 라이브러리들은 도스가 자체적으로 사운드 카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통 사운드 카드들에 동작하는 드라이버를 포함하였다. 몇몇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들은 미들웨어 TSR 기반의 드라이버를 제공하였으며, 일부 프로그램들은 프로그램 자체에서 사운드 카드를 지원하게끔 소스 코드를 단순히 프로그램에 통합하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는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가 만든 드라이버를 사용한다. 많은 메이커들은 마이크로소프트에 드라이버를 제공하여 윈도 설치본에 포함시킨다. 윈도 CD는 웹이나 FTP 사이트와 같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버그 수정과 다른 개선 사항들은 드라이버를 내려 받아 설치하여 얻을 수 있다. 비스타는 UAA를 사용한다. 수많은 유닉스 버전들은 포팅할 수 있는 오픈 사운드 시스템 (OSS)을 사용한다. 드라이버들은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들이 거의 만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현대 리눅스 기반의 배포판들은 ALSA를 사용한다.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 목록[편집] AIM ASUS 어드밴스트 그래비스 컴퓨터 테크놀로지 (파산) 애드립 (파산) Aureal Semiconductor (파산) Auzentech (파산) Aztech Labs Behavior Tech Computer Behringer C-Media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 E-mu Systems (크리에이티브가 인수) 엔소닉 (크리에이티브가 인수) ESI HT 오메가 MARIAN 디지털 오디오 일렉트로닉스 M-오디오 온쿄 리얼텍 세미컨덕터 RME 오디오 롤랜드 트라이던트 마이크로시스템스 (파산) 터틀 비치 시스템스 비아 테크놀로지스 야마하 같이 보기[편집] 리얼텍 크리에이티브 랩스 C-Media 각주[편집] ↑ “Studio Recording Techniques - Recording Devices”. 《joelezekielconfetti》. 2016년 1월 20일에 확인함.  ↑ PC 99 System Design Guide, Intel Corporation and Microsoft Corporation, 14 July 1999. Chapter 3: PC 99 basic requirements (PC 99 System Design Guide (Self-extracting .exe archive). Requirement 3.18.3: Systems use a color-coding scheme for connectors and ports. Accessed 2012-11-26 ↑ 가 나 다 라 “보관 된 사본” (PDF). 2014년 9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6월 24일에 확인함.  ↑ “Winds of Progress Unleashed in "Windy City"”. 《Computer Gaming World》. July 1988. 8면. 2013년 11월 3일에 확인함.  ↑ “The Gamer's Guide to Sound Boards”. 《Computer Gaming World》. September 1989. 18면. 2013년 11월 4일에 확인함.  ↑ 가 나 John Szczepaniak. “Retro Japanese Computers: Gaming's Final Frontier Retro Japanese Computers”. Hardcore Gaming 101. 2011년 3월 29일에 확인함.  Reprinted from 《Retro Gamer》 (67), 2009  ↑ System 16 - Midway T Unit Hardware ↑ VeleSoft ↑ WoS: Fuller Box ↑ “Crash Issue 01, February 1984”. 2017년 4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3월 24일에 확인함.  ↑ ZON X-81 Programmable Sound Generator ↑ Sinclair User, issue 8, page 2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사운드 카드 PC 사운드 하드웨어의 역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사운드카드 박물관 사운드 카드의 동작 원리 vdehPC 사운드 카드IBM 호환 표준 PC 스피커 (1981) MPU-401 (1984) 코복스 (1986) 애드립 (1987) IBM 뮤직 피처 카드 (1987) 롤랜드 MT-32 (1987) 롤랜드 LAPC-I (1989) 사운드 블라스터 (1989) 일반 MIDI (1991) 롤랜드 GS (1991)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1991) 롤랜드 SC-55 (1991) 그레비스 울트라사운드 (1992) 야마하 XG (1994) AC'97 (1997) 일반 MIDI 레벨 2 (1999) 환경 음향 확장 (2001) 인텔 고선명 오디오 (2004) 기타 표준 MML (1978) SFG-01 (1983) MSX-오디오 (1984) SFG-02 (1984) 탠디 (1984) MSX-뮤직 (1987) 관련 항목 MIDI 표준 비교 MIDI vdeh기본 컴퓨터 부품컴퓨터 입력 장치 키보드 이미지 스캐너 마이크로폰 포인팅 장치 그래픽 태블릿 조이스틱 라이트 펜 마우스 광 포인팅 스틱 터치패드 터치스크린 트랙볼 재생 가능 점자 디스플레이 사운드 카드 웹캠 소프트캠 그래픽 카드 컴퓨터 출력 장치 모니터 재생 가능 점자 디스플레이 프린터 스피커 플로터 사운드 카드 그래픽 카드 이동식 매체 광 디스크 CD DVD 블루레이 디스크 디스크 팩 플로피 디스크 메모리 카드 USB 플래시 드라이브 컴퓨터 케이스 중앙 처리 장치 (CPU) HDD / SSD / SSHD 메인보드 네트워크 인터페이스 컨트롤러 전원 공급 장치 랜덤 액세스 메모리 (RAM) 팩스 모뎀 확장 카드 포트 이더넷 파이어와이어 (IEEE 1394) 병렬 포트 직렬 포트 PS/2 단자 USB 선더볼트 디스플레이포트 / HDMI / DVI / VGA eSATA 오디오 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운드_카드&oldid=24284474" 분류: 사운드 카드컴퓨터 주변기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ҚазақшаКомиLatinaLumbaartLatviešuОлык марий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18: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사운드 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운드 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지금은 출시되지 않고 있는 사운드 블라스터 라이브 벨류 카드 - 2000년 경의 PCI 사운드 카드. 사운드 카드(영어: sound card), 또는 오디오 카드(영어: audio card)는 내부 확장 카드의 하나로, 소리를 저장하고 출력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내부 확장 카드(internal expansion card) 형태의 장치(칩셋)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제어를 통해 컴퓨터를 경유한 오디오 신호의 입출력을 담당한다. "사운드 카드"라는 용어 그 자체는 프로페셔널 오디오 응용 프로그램에 사용되는 외장형 오디오 인터페이스에만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사운드 카드를 이용할 때에는 멀티미디어 응용 프로그램들을 위해 영상/소리 편집, 프레젠테이션/교육,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오락)와 같은 오디오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사운드 기능은 플러그인 카드와 비슷한 부품을 사용하여 메인보드에 내장된 경우도 있다. 내장형 사운드 시스템 또한 종종 "사운드 카드"로 부르기도 한다. 사운드 처리 하드웨어 또한 소리 출력을 위해 영상 기능이 있는 HDMI를 갖춘 현대의 비디오 카드에도 존재한다. 그 이전에는 메인보드나 사운드 카드에 SPDIF 연결을 사용했다. 목차 1 일반적인 특징 1.1 사운드 채널과 폴리포니 2 사운드 카드 표준 목록 3 색 코드 4 IBM PC 아키텍처의 사운드 카드의 역사 4.1 하드웨어 제조업체 5 확장 카드 이외의 사운드 장치 5.1 PC 메인보드에 포함된 통합형 사운드 하드웨어 5.2 다른 플랫폼 위의 통합형 사운드 5.3 다른 플랫폼 위의 사운드 카드 5.4 외장형 사운드 장치 6 드라이버 구조 7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 목록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일반적인 특징[편집] 사운드 카드 PCB의 확대 모습. 전해 축전기, SMT 축전기, 저항기, YAC512 2채널 16비트 DAC가 보인다. 대부분의 사운드 카드들은 디지털-아날로그 변환회로(DAC)를 사용하여 녹음되거나 발생되는 디지털 데이터를 아날로그 형식으로 변환한다. 출력 신호는 TRS 폰 커넥터나 RCA 단자와 같은 표준 상호 연결을 사용하여 증폭기, 헤드폰, 또는 외부 장치에 연결된다. 단자의 수와 크기가 공간에 비해 너무 클 경우, 케이스 밖에서 사용되는 상자형 형태 또는 케이스 전면에 마운트되는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진보된 카드들은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사운드 칩을 포함하고 있어서 더 높은 데이터 속도와 여러 동시성 기능을 지원하는데,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최소화된 데이터와 CPU 시간을 사용하면서 실시간 음악 및 음향 효과에 쓰이는 합성된 소리의 디지털 출력을 들 수 있다. 디지털 소리 출력은 일반적으로 다채널 DAC를 통해 이루어지며 다른 높이와 볼륨으로 동시의 디지털 샘플을 기능할 수 있으며, 필터링이나 의도적인 왜곡과 같은 실시간 효과를 응용할 수 있다. 다채널 디지털 사운드 재생은 음악 합성에도 사용할 수 있는데, 컴플라이언스,[1] 심지어는 다채널 에뮬레이션을 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러한 접근은 제조업체들이 더 단순하고 비용이 더 낮은 사운드 카드를 강구하면서 일반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운드 카드들은 카세트 테이프 및 그 밖의 마이크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전압이 있는 음원으로부터 입력 신호를 받기 위해 라인 인 단자를 갖추고 있다. 사운드 카드는 신호를 디지털화한다. DMAC는 샘플들을 메인 메모리에 전송하며, 여기에서 저장, 편집, 추가 가공을 위해 녹음 소프트웨어가 하드 디스크에 이를 기록한다. 일반화된 다른 외부 단자로는 마이크 단자가 있으며, 마이크로폰이나 기타 낮은 수준의 입력 장치로부터 신호를 받을 때 사용된다. 이를테면, 음성 인식이나 VoIP 응용 프로그램을 통해 마이크로폰 잭을 통한 입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운드 채널과 폴리포니[편집] 8채널 DAC 시러스 로직 CS4382가 사운드 블라스터 X-Fi Fatal1ty에 위치해 있다. 중요한 사운드 카드의 특징으로는 폴리포니가 있으며, 이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음성이나 소리를 "동시에" 처리하고 출력할 수 있는 기능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구별된 "채널"들은 오디오 출력의 수로 간주되며, 2.0 (스테레오), 2.1 (스테레오와 서브우퍼), 5.1 (서라운드) 등의 구성과 같이 스피커 구성과 일치시킬 수 있다. 가끔은 출력 스피커 구성이 아닌 폴리포니의 수준을 언급할 때 "보이스"와 "채널"이라는 용어가 번갈아 사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오래된 사운드 칩들은 3개의 음성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오직 하나의 오디오 채널만을 출력에 쓸 수 있었기에, 모든 음성이 함께 혼합되어야 했다. 나중에 애드립 사운드 카드와 같은 카드들이 하나의 모노 출력 채널에 9개 음성의 폴리포니를 병합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대부분의 PC 사운드 카드들은 다중 FM 합성 보이스(일반적으로 9 또는 16)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MIDI 음악에 흔히 사용되었다. 고급 카드들의 온전한 기능들은 완전하게 사용되는 일은 드물었다. 오직 하나(모노) 또는 두 개(스테레오)의 보이스와 채널이 일반적으로 디지털 사운드 샘플의 재생에 사용되었고 하나 이상의 디지털 사운드 샘플을 재생하려면 고정 샘플링 레이트의 소프트웨어 다운믹스가 필요했다. AC'97 표준 등의 오디오 코덱과 같이 가격이 낮은 현대의 내장 사운드 카드들(메인보드에 내장된)과 심지어는 일부 저가형 확장 사운드 카드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동작했다. 이러한 장치들은 둘 이상의 사운드 출력 채널(일반적으로 5.1 또는 7.1 서라운드 사운드)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음향이든 MIDI 출력이든 간에 실제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갖추지는 못했다. 이러한 작업들은 전적으로 소프트웨어에서 수행되었다. 이는 비싸지 않은 소프트모뎀들이 하드웨어 대신 소프트웨어에서 현대의 작업을 수행한 것과 비슷하다. 또, 웨이브테이블 샘플 기반 합성 초기 시절에 일부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들은 MIDI 기능에만 폴리포니를 단독으로 광고하였다. 이 경우, 카드의 출력 채널은 적절하지 않은데, 일반적으로 카드는 오직 2채널의 디지털 소리만 구현한 것이다. 즉, 폴리포니 측정 시 주어진 시간 안에 사운드 카드가 재생할 수 있는 MIDI 기기의 수에만 적용된 것이다. 오늘날, 출력 채널의 수에 관계 없이 실제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제공하는 사운드 카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 오디오 가속기"르 부르지만, 실제 보이스 폴리포니는 중요시되는 3차원 사운드의 하드웨어 가속, 포지셔널 오디오, 실시간 DSP 효과 등의 다른 요소와 더불어 필수 사항이 아니다. 디지털 사운드 재생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합성 시 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이자, 하드웨어 폴리포니를 갖춘 현대의 사운드 카드들은 보이스의 수 많음의 채널을 가지고 실제로 DAC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드웨어에서 보이스 믹싱과 효과음 처리를 수행하며, 전용 DSP 안에서 특정한 효과를 적용하기 위해 주파수 도메인을 통한 디지털 필터링 및 변환을 수행하게 된다. 최종 재생 단계는 보이스 (이를테면 7.1 오디오의 경우 8채널의 경우 즉 32, 64, 또 128 보이스 안에서 구별됨) 보다 상당히 적은 수의 채널을 가지고 외부 (DSP 칩을 의미) DAC에 의해 수행된다. 사운드 카드 표준 목록[편집] 사운드 카드 표준 이름 연도 정확도 주파수 채널 PC 스피커 1981 6 비트 1 펄스 폭 변조 탠디 1984 16 볼륨 설정 122 Hz ~ 125 kHz 3 방형파 톤, 1 화이트 노이즈 MPU-401 1984 MIDI Covox 1986 8 비트 1 DAC 애드립 1987 64 볼륨 설정 ~49.716 kHz 6-보이스 FM 신시사이저, 5개 타악기 롤랜드 MT-32 1987 16 비트 32 kHz 8개 멜로디 채널, 1개 리듬 채널 사운드 블라스터 1989 8 비트 22 kHz 1 DAC; 11-보이스 FM 신시사이저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1991 16 비트 32 kHz 24개 보이스 그레비스 울트라사운드 1992 16 비트 44.1 kHz 16개 스테레오 채널 AC97 1997 20 비트 96 kHz 6개 독립 출력 채널 환경 음향 확장 2001 8개 동시 3차원 보이스 인텔 고선명 오디오 2004 32 비트 192 kHz 최대 15개의 독립 출력 채널 색 코드[편집] 사운드 카드의 단자들은 PC 시스템 디자인 가이드에 의거하여 색으로 부호화된다.[2] 각각의 잭 위치와 관련하여 화살표, 구멍, 사운드웨이브가 있는 기호를 갖춘 경우도 있으며, 각각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색 기능 단자 기호   분홍 아날로그 마이크로폰 오디오 입력. 3.5 mm TRS 마이크로폰   밝은 파랑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입력. 3.5 mm TRS 원으로 향하는 화살표   라임 초록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메인 스테레오 신호, 프론트 스피커나 헤드폰) 3.5 mm TRS 원의 한쪽에서 소리로 나가는 화살표   갈색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특수 패닝, "Right-to-left 스피커") 3.5 mm TRS   검정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서라운드 스피커, 일반적으로 후면 스테레오) 3.5 mm TRS   주황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중앙 채널 스피커, 서브우퍼) 3.5 mm TRS   은색/회색 아날로그 라인 레벨 오디오 출력 (양쪽 스피커) 3.5 mm TRS   금색/회색 게임 포트 / 미디 15 핀 D 두 면에서 소리로 나가는 화살표 IBM PC 아키텍처의 사운드 카드의 역사[편집] 애드립 뮤직 신시사이저 카드는 1990년 경 최초의 사운드 카드들 가운데 하나였다. 수동 볼륨 손잡이가 보인다. ISA-8 버스. ISA-16 버스용 사운드 카드 모자르트 16. 터틀 비치 사운드 카드. PCI 버스. 에코 디지털 오디오의 인디고 IO — PCMCIA 카드 24비트 96 kHz 스테레오 입출력 사운드 카드. PC용 비아 테크놀로지스 엔비 사운드 카드. PCI 슬롯 5.1 채널 IBM PC 호환 컴퓨터용 사운드 카드들은 1988년까지 그리 흔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내부 PC 스피커를 통해 초기의 PC 소프트웨어가 소리와 음악을 출력할 수 있었다.[3] 이 스피커 하드웨어는 일반적으로 방형파에 제한되어 "비퍼"(beeper)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출력되는 소리는 일반적으로 비프(beep)나 부프(boop)로 기술되었다. 액세스 소프트웨어와 같은 일부 기업들은 PC 스피커를 넘어선 디지털 소리 출력을 위한 기술들을 개발했다. (리얼사운드 참고) 기능만 겨우 지원되는 수준의 출력음은 왜곡된 출력과 낮은 음량의 문제가 있었고 소리 재생을 하는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모든 출력이 중단되어야 했다. 1980년대의 다른 가정용 컴퓨터 모델들에는 디지털 소리 재생의 하드웨어 지원, 음악 합성을 포함하였고, 음악 합성이나 게이밍과 같은 멀티미디어 응용 분야에서는 IBM PC에 불이익을 안겨주었다. IBM PC 플랫폼용 사운드 카드의 초기 디자인과 마케팅은 주로 게이밍에 기반하지 않았고 음악 합성(애드립 퍼스널 뮤직 시스템), IBM 뮤직 피처 카드, 크리에이티브 뮤직 시스템)이나 음성 합성 (디지스피치 DS201, Covox Speech Thing, 스트리트 일렉트로넥스 '에코')에 초점을 두었다. 1988년,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컴퓨터 게임 CEO 패널은 PC의 제한된 소리 기능이 주도적인 가정용 컴퓨터에 방해가 되고 있고, 현재의 제품 보다 더 나은 기능을 갖춘 $49~79 사운드 카드가 필요하며 하드웨어가 널리 보급된다면 기업들이 이를 지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EGA, VGA 비디오, 3 1/2" 디스크 지원에 앞장선 시에라 온라인은 그 해에 게임에 애드립, IBM 뮤직 피처, 롤랜드 MT-32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카드들은 $195~$600대에 가격이 형성되었다.[4] 1989년 컴퓨터 게이밍 월드 조사에 따르면 25개 게임 회사 중 18곳이 애드립, 6개의 롤랜드 / 코복스, 7개의 크리에이티브 뮤직 시스템/게임 블라스터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5] 하드웨어 제조업체[편집] IBM PC용 사운드 카드의 최초 제조업체들 중 하나는 애드립이었으며, OPL2라는 야마하 YM3812 사운드 칩 기반의 카드를 생산하였다.[3] 크리에이티브 랩스 또한 크레에이티브 뮤직 시스템이라는 사운드 카드를 상품화하였다. 크리에이티브 랩스가 사운드 블라스터 카드를 선보였을 당시 IBM PC 호환 사운드 카드 시장에 큰 변화를 주었다.[3] 1980년대 말 롤랜드 또한 사운드 카드를 만들었으며, 다수가 MT-32, LAP-I와 같은 고품질 프로슈머 카드였다.[3] 확장 카드 이외의 사운드 장치[편집] PC 메인보드에 포함된 통합형 사운드 하드웨어[편집] 1984년, 최초의 IBM PCjr은 여러 진폭으로 3 방형파 톤을 만들 수 있는 매우 기본적인 3 보이스 사운드 합성 칩 (SNS6489)를 갖추었으며, 의사 화이트 노이즈 채널은 원시적인 타악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처음 PCjr의 복제품인 탠디 1000은 이 기능을 복제하였고 여기서 탠디 TL/SL/RL 모델은 디지털 사운드 녹음 및 재생 기능을 갖추었다. PCjr의 비디오 표준을 지원하였던 1980년대 동안 수많은 게임들(탠디 호환, 탠디 그래픽스, TGA로 기술됨) 또한 PCjr/탠디 1000 오디오를 지원하였다. 1990년대 말 수많은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플러그인 사운드카드를 메인보드에 통합되는 코덱 칩(실제로는 하나의 통합된 오디오 AD/DA 컨버터)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중 다수는 인텔의 AC'97 사양을 사용하였다. 그 밖의 것들은 값비싼 ACR 슬롯 액세서리 카드들을 사용했다. 2001년 즈음부터 수많은 메인보드들은 내장형 "실제"(코덱이 아닌) 사운드 카드들을 통합했으며 이는 보통 완전한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성과 유사한 것을 제공하는 커스텀 칩셋의 일종이었고 상대적으로 고품질의 소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기능들은 AC'97이 2004년 출시되어 천천히 수용 범위를 넓혀나간, 코덱 칩의 사용을 다시 규정한 인텔의 HD 오디오 표준에 의해 대체되면서 지원이 중단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대부분의 메인보드들은 코덱 칩, 즉 HD 오디오 호환, 그리고 사운드 블라스터 호환을 사용하는 것으로 귀환하고 있다. 다른 플랫폼 위의 통합형 사운드[편집] 다양한 IBM PC 비호환 컴퓨터들, 이를테면 코모도어 64(1982년)와 아미가(1985년), NEC의 PC-88, PC-98, 후지쯔의 FM-7, FM 타운스, MSX,[6] 애플의 매킨토시, 워크스테이션 (썬과 같은 제조업체) 등의 초기 가정용 컴퓨터들은 자신들만의 메인보드 내장 사운드 장치들을 보유하였다. 일부의 경우, 특히 아미가, C64, PC-88, PC-98, MSX, FM-7, FM 타운스는 제조 당시 매우 진보한 기능들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기능만 제공했다. 이들 플랫폼 중 일부는 자신들의 버스 구조들에 맞추어 설계뙨 사운드 카드들도 있었고 표준 PC에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C-88, PC-98, MSX, FM-7 등 여러 일본의 컴퓨터 플랫폼들은 1980년대 중반 야마하의 내장 FM 합성 사운드를 갖추었다. 1989년, FM 타운스 컴퓨터 플랫폼은 내장형 PCM 샘플 기반 사운드를 제공하였고 CD-ROM 포맷을 지원하였다.[6] 아미가의 커스텀 사운드 칩 Paula는 4개의 디지털 사운드 채널(2개는 왼쪽 스피커, 2개는 오른쪽)을 갖추었고 한 채널마다 8비트 해상력(단, 패치를 하면 CPU 사용률을 높이는 대가로 14/15비트 지원 가능)을, 채널 당 6비트 볼륨 제어가 가능하였다. 아미가의 사운드 재생은 메인 CPU를 사용하지 않고 칩 RAM으로부터 직접 읽어들임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들은 사운드 칩들을 내장하였으며,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샘플링된 오디오 및 음향 효과를 위해 다양한 DAC와 결합한 야마하 OPL 칩을 들 수 있다. 다른 플랫폼 위의 사운드 카드[편집] 컴퓨터에 사용된 최초의 사운드 카드는 PLATO 터미널용 음악 장치 Gooch Synthetic Woodwind였으며 사운드 카드와 MIDI의 선구자격으로서 묘사된다. 1972년 발명되었다. 특정한 초기 아케이드 기계들은 온보드 오디오에 이미 장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운드 카드들을 사용하여 복잡한 오디오 파형과 디지털 음악 재생을 수행하였다. 아케이드 기계에 사용된 사운드 카드의 한 예로는 디지털 컴프레션 시스템 카드를 들 수 있으며 이는 미드웨이의 게임에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미드웨이 T 유닛 하드웨어의 모탈 컴뱃 II가 그것이다. T-유닛 하드웨어는 이미 OKI 6295 DAC와 결합된 온보드 YM2151 OPL 칩을 갖추고 있지만 게임은 DCS 카드를 대신 사용한다.[7] 이 카드는 또한 복잡한 반복 BGM과 음성 재생(레볼루션 X는 게임 출시 당시 인상깊은 기능의 하나로서 투명하게 반복되는 밴드의 음반에서 비롯된 완전히 샘플링된 노래를 사용했다)을 위해 아케이드 버전의 미드웨이와 에어로스미스의 레볼루션 X에도 사용되었다. 내장 사운드 기능과 함께 장비된 MSX 컴퓨터들은 사운드 카드에 의존하여 더 나은 품질의 소리를 냈다. 문사운드라는 이름의 카드는 야마하 OPL4 사운드 칩을 사용한다. 문사운드 이전까지는 MSX 뮤직, MSX 오디오라는 사운드카드가 있었으며 이것들은 시스템 상에 OPL2, OPL3 칩셋을 사용한다. IIGS까지 비프음 이외에 사운드 키능이 없던 애플 II 시리즈의 컴퓨터들은 다양한 제조업체의 플러그인 사운드 카드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 비퍼(beeper)만 있던 싱클레어 ZX 스펙트럼은 일부 사운드 카드를 갖추고 있었다. 한 예로 터보사운드를 들 수 있다.[8] 다른 예로는 풀러 박스(Fuller Box),[9][10] Melodik for the Didaktik Gamma, AY-Magic 등이 있다. ZX81용 Zon X-81[11][12]은 어댑터를 사용하여 ZX 스펙트럼에 사용이 가능하였다. 외장형 사운드 장치[편집] 코복스 스피치 띵과 같은 장치들은 IBM PC의 병렬 포트에 부착할 수 있었으며 6, 8비트의 PCM 샘플 데이터를 주입하여 소리를 출력할 수 있다. 또, 수많은 종류의 전문가용 사운드카드(오디오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편리, 그리고 개선된 정확도를 위해 외장 파이어와이어나 USB 장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PCMCIA 카드버스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사운드 카드는 노트북 컴퓨터가 온보드 사운드를 갖추기 이전에 구매할 수 있었다. 카드버스 오디오는 온보드 사운드의 품질이 떨어질 경우 지금도 사용이 가능하다. 카드버스 인터페이스들은 약 2005년 이후로 제조업체들이 컴퓨터 상에 추구하였던 익스프레스카드에 의해 퇴출되었다. 이 장치들 가운데 대부분은 모바일 DJ를 위해 한 시스템에서 재생과 모니터링을 허용하기 위해 별도의 출력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일부는 모바일 게이머를 대상으로 게이밍 노트북에 하이엔드 사운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드라이버 구조[편집] 사운드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운영 체제는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를 요구한다. 일부 운영 체제는 사용할 수 있는 일부 사운드 카드들의 드라이버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사운드 카드를 구매하면 드라이버 CD 등으로 배포되거나, 인터넷에서 내려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IBM PC를 위한 도스 프로그램들은 공통의 미들웨어 드라이버 라이브러리(HMI 사운드 운영 체제, 미들 오디오 인터페이스 라이브러리 (ALI), 마일즈 사운드 시스템 등)를 사용해야 했다. 이러한 라이브러리들은 도스가 자체적으로 사운드 카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통 사운드 카드들에 동작하는 드라이버를 포함하였다. 몇몇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들은 미들웨어 TSR 기반의 드라이버를 제공하였으며, 일부 프로그램들은 프로그램 자체에서 사운드 카드를 지원하게끔 소스 코드를 단순히 프로그램에 통합하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는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가 만든 드라이버를 사용한다. 많은 메이커들은 마이크로소프트에 드라이버를 제공하여 윈도 설치본에 포함시킨다. 윈도 CD는 웹이나 FTP 사이트와 같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버그 수정과 다른 개선 사항들은 드라이버를 내려 받아 설치하여 얻을 수 있다. 비스타는 UAA를 사용한다. 수많은 유닉스 버전들은 포팅할 수 있는 오픈 사운드 시스템 (OSS)을 사용한다. 드라이버들은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들이 거의 만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현대 리눅스 기반의 배포판들은 ALSA를 사용한다. 사운드 카드 제조업체 목록[편집] AIM ASUS 어드밴스트 그래비스 컴퓨터 테크놀로지 (파산) 애드립 (파산) Aureal Semiconductor (파산) Auzentech (파산) Aztech Labs Behavior Tech Computer Behringer C-Media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 E-mu Systems (크리에이티브가 인수) 엔소닉 (크리에이티브가 인수) ESI HT 오메가 MARIAN 디지털 오디오 일렉트로닉스 M-오디오 온쿄 리얼텍 세미컨덕터 RME 오디오 롤랜드 트라이던트 마이크로시스템스 (파산) 터틀 비치 시스템스 비아 테크놀로지스 야마하 같이 보기[편집] 리얼텍 크리에이티브 랩스 C-Media 각주[편집] ↑ “Studio Recording Techniques - Recording Devices”. 《joelezekielconfetti》. 2016년 1월 20일에 확인함.  ↑ PC 99 System Design Guide, Intel Corporation and Microsoft Corporation, 14 July 1999. Chapter 3: PC 99 basic requirements (PC 99 System Design Guide (Self-extracting .exe archive). Requirement 3.18.3: Systems use a color-coding scheme for connectors and ports. Accessed 2012-11-26 ↑ 가 나 다 라 “보관 된 사본” (PDF). 2014년 9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6월 24일에 확인함.  ↑ “Winds of Progress Unleashed in "Windy City"”. 《Computer Gaming World》. July 1988. 8면. 2013년 11월 3일에 확인함.  ↑ “The Gamer's Guide to Sound Boards”. 《Computer Gaming World》. September 1989. 18면. 2013년 11월 4일에 확인함.  ↑ 가 나 John Szczepaniak. “Retro Japanese Computers: Gaming's Final Frontier Retro Japanese Computers”. Hardcore Gaming 101. 2011년 3월 29일에 확인함.  Reprinted from 《Retro Gamer》 (67), 2009  ↑ System 16 - Midway T Unit Hardware ↑ VeleSoft ↑ WoS: Fuller Box ↑ “Crash Issue 01, February 1984”. 2017년 4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3월 24일에 확인함.  ↑ ZON X-81 Programmable Sound Generator ↑ Sinclair User, issue 8, page 2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사운드 카드 PC 사운드 하드웨어의 역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사운드카드 박물관 사운드 카드의 동작 원리 vdehPC 사운드 카드IBM 호환 표준 PC 스피커 (1981) MPU-401 (1984) 코복스 (1986) 애드립 (1987) IBM 뮤직 피처 카드 (1987) 롤랜드 MT-32 (1987) 롤랜드 LAPC-I (1989) 사운드 블라스터 (1989) 일반 MIDI (1991) 롤랜드 GS (1991)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 (1991) 롤랜드 SC-55 (1991) 그레비스 울트라사운드 (1992) 야마하 XG (1994) AC'97 (1997) 일반 MIDI 레벨 2 (1999) 환경 음향 확장 (2001) 인텔 고선명 오디오 (2004) 기타 표준 MML (1978) SFG-01 (1983) MSX-오디오 (1984) SFG-02 (1984) 탠디 (1984) MSX-뮤직 (1987) 관련 항목 MIDI 표준 비교 MIDI vdeh기본 컴퓨터 부품컴퓨터 입력 장치 키보드 이미지 스캐너 마이크로폰 포인팅 장치 그래픽 태블릿 조이스틱 라이트 펜 마우스 광 포인팅 스틱 터치패드 터치스크린 트랙볼 재생 가능 점자 디스플레이 사운드 카드 웹캠 소프트캠 그래픽 카드 컴퓨터 출력 장치 모니터 재생 가능 점자 디스플레이 프린터 스피커 플로터 사운드 카드 그래픽 카드 이동식 매체 광 디스크 CD DVD 블루레이 디스크 디스크 팩 플로피 디스크 메모리 카드 USB 플래시 드라이브 컴퓨터 케이스 중앙 처리 장치 (CPU) HDD / SSD / SSHD 메인보드 네트워크 인터페이스 컨트롤러 전원 공급 장치 랜덤 액세스 메모리 (RAM) 팩스 모뎀 확장 카드 포트 이더넷 파이어와이어 (IEEE 1394) 병렬 포트 직렬 포트 PS/2 단자 USB 선더볼트 디스플레이포트 / HDMI / DVI / VGA eSATA 오디오 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운드_카드&oldid=24284474" 분류: 사운드 카드컴퓨터 주변기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ҚазақшаКомиLatinaLumbaartLatviešuОлык марий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18: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박중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중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원근 (1874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길게 쓰여 있습니다.문서의 본 주제에 맞도록 해당 부분들을 요약 정리하거나, 필요하다면 문서를 분할해주세요. 문서에 대한 의견은 토론란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6년 1월 18일에 문서의 요약이 요청되었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박중양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박중양朴重陽 거옥 박중양의 초상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황해도 도지사 임기 1921년 2월 12일 ~ 1923년 2월 24일 군주 요시히토 섭정 히로히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신상정보 출생일 1872년 5월 3일 출생지 조선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사망일 1959년 4월 23일 (86세) 사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침산1동 1652번지에서 노환, 폐질환, 과로 등의 합병증으로 인한 병사 학력 일본 도쿄 중학교 수료 일본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 졸업 일본 도쿄 부기학교 전문학사 경력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조선총독부 충청북도 도지사 정당 무소속 부모 박정호(부), 전주 이씨 부인(모) 형제 박원양(형), 박계양(남동생) 배우자 본부인 전주 이씨 첩실 이름 미상(일본 여자) 자녀 아들 박문웅, 아들 박무웅, 아들 이름 미상, 딸 박정자 별명 자 원근(源根)호 해악(海岳), 일소(一笑), 거옥(車玉)박원근(朴源根), 박작대기, 朴忠重陽 종교 유교(성리학) 박중양(朴重陽, 일본식 이름: 朴忠重陽 호추 시게요,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관료이다. 본관은 반남(潘南)[1]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닌 고문이자 백작이며,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까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일제시대의 신념적 친일파이다. 1897년(건양 1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후 1903년(광무 6년)부터 1년간 일본의 관료로 생활하다가 귀국, 대한제국의 관료가 되었다. 일·러 전쟁에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종군하였고, 그 뒤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언변으로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1905년에는 농상공부 주사로 대구에 파견나왔다가 진주 판관을 겸하였으며, 진주 판관 재직 중 진주성곽을 일부 철거하였다. 1906년에는 대구 군수로 있으면서 대구읍성을 철거, 해체를 주관하였다. 1908년(융희 2년)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융희 4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경북관찰사 재직 중 단발령을 강제로 감행하였다. 1910년(융희 4년) 10월 韓日倂合이후에도 계속 관직에 있었고, 191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거쳐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1927년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고 1928년 황해도지사가 되었다가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고,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41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943년 10월 중추원 부의장을 거쳐 1945년 4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이 되었다. 독립 후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았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49년 1월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체포되어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만년에는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은거하며 이완용에 대한 변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을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이승만과 이시영, 함태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무능함을 수시로 조롱, 비방하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였으며, 한번에 일본 맥주 60병을 마셨고 소주는 40병까지 마신 일도 있으며,[2] '박태백', '보리술 지사'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2] 1907년에는 박중양이 맥주를 대음한 것이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었다.[2]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문인이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반 1.1.1 출생과 가계 1.1.2 소년기 1.1.3 일본 유학 생활 1.1.3.1 도일과 중학교 재학 1.1.3.2 자객의 침입과 신변 위협 1.1.3.3 도쿄부기학교 재학 시절 1.1.4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1.2 대한제국기 활동 1.2.1 귀국과 일·러 전쟁 1.2.2 관료 생활 1.2.2.1 관료 생활 초반 1.2.2.2 일본 관병식 참석 1.2.2.3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 1.2.2.4 대구읍성 해체 작업 1.2.2.5 대구읍성 해체 직후 1.2.2.6 평안남도 관찰사 재직 시절 1.2.3 고종 퇴위 전후 1.2.4 개혁 정책과 단발령 강행 1.2.5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 1.2.6 들개 사냥 대 작전 1.2.7 순종 남행길 수행 1.2.8 대구 십자도로 개통과 일본인 관료 응징 1.3 일제 시대 활동 1.3.1 韓日倂合 직전 1.3.2 일제 시대 초반 1.3.2.1 韓日倂合 전후 1.3.2.2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 1.3.2.3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 1.3.2.4 일본인 관리 응징 1.3.2.5 사회 단체 활동 1.3.3 일제 시대 전반기의 혼란 수습 1.3.3.1 3.1 운동 비판과 진압 가담 1.3.3.2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내사 1.3.3.3 황해도지사 재직, 수해 사태 수습 1.3.3.4 충북지사 재직과 관동대지진 수습 1.3.3.5 속리산 도로 개통 1.3.3.6 속리산 성추문 사건과 퇴직 1.3.4 밀주 단속 무마와 고미술품 수집 1.3.5 복직과 일제 시대 중반 1.3.6 조선인 참정권 운동 1.3.7 도지사 퇴직 이후 1.3.8 일제 시대 후반 1.3.8.1 중추원 활동 1.3.8.2 日·中전쟁 전후 1.3.8.3 태평양 전쟁 초반 1.3.8.4 전시 체제기 활동 1.3.9 참정권 허용 감사사절 파견과 귀국 1.4 독립 이후 1.4.1 독립 직후 1.4.2 친일파 청산론에 대한 비판 1.4.3 반민특위 기소와 석방 1.4.3.1 반민특위 제소와 재판 1.4.3.2 수감 생활 1.4.3.3 재판과 가석방 1.4.4 삼일절에 대한 조롱 1.5 생애 후반 1.5.1 오봉산 은거와 정부 비판 1.5.2 출판물 사건과 최후 1.6 사후 2 풍류 생활 3 약력 4 저서 4.1 작품 5 화랑 6 논란과 의혹 6.1 출신 성분 논란 6.2 박작대기와 백작댁 6.3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 논란 6.4 땅 투기 의혹 6.5 친일파론에 대한 반론 6.6 발언 파문 6.7 침산 토지에 대한 의혹 7 박작대기 혹은 박짝대기 8 사상과 신념 8.1 양의, 의학교 설립론 8.2 단발령에 대한 확신 8.3 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 8.4 개화파 애국자론 8.5 국가와 국민관 8.5.1 교육, 언론활동 지원 8.6 대구읍성 철거 8.7 진주성 철거의 시발점 8.8 이완용 희생자론 8.9 친일에 대한 소신 8.10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긍정론 8.11 조선의 일본화 8.12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 8.13 한국인 韓日倂合 기여론 8.14 현실주의 8.15 성실성 9 가족 관계 10 외모 11 평가와 비판 11.1 긍정적 평가 11.2 부정적 평가 12 기타 12.1 성품 12.2 선화당 측우기 12.3 대구 선교박물관의 기초 12.4 기타 13 박중양을 연기한 배우 14 관련 항목 15 각주 16 참고 자료 17 관련 서적 18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박중양 해악 박중양은 1874년 또는 1872년 5월 3일 경기도 양주군 주내에서 박정호(朴鼎鎬)와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박원근이었고, 성인이 된 뒤 중양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출생 년대는 정확하지 않아 1872년생 설과 1874년생 설이 있다. 만년에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년도는 다소 정확하지 않다. 자는 원근이고 별명은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인데, 이는 그가 나중에 작대기를 짚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의 가계와 선대(先代) 역시 불확실한데, 반남 박씨라는 설과 밀양 박씨라는 설이 있다. 만년에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가계 역시 전하지 않고 있다. 대구 오봉산 근처에는 그의 선조의 묘소 2기와 그의 내외 묘소, 아들 내외 묘소, 양주군에서 이장해 온 부모의 묘소가 20세기 말 무렵까지 존재했다 한다. 대구 오봉산 정상에는 그가 세운 '일소대'라는 기념비가 있었으나 독립 직후 파괴된다. 그의 가계는 오래 전에 몰락하여 그의 아버지의 대에 와서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 와서 마름 노릇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양주군 덕거리에 쌍분으로 있다 하는 그의 할아버지 박기숙(朴基肅+心)의 묘소 역시 불분명하며, 그 이상의 선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버지 박정호에게 내려진 가선대부 규장각제학 벼슬은, 사후 그가 가선대부로 승진하면서 추증된 것이었다. 나중에 출세하면서 그는 다시 본적을 선대의 고향 근처인 달성군 북면 침산동(達城郡 北面 砧山洞)으로 옮기게 된다. 그는 선조들의 고향인 대구에 정착했다. 후일 그가 대구에 정착한 것에 대해 대구의 일부 지역사학자들은 "경기도가 고향인 박중양이 대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일본 정계실력자들과의 교분을 강화화기 위해 일본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인 대구가 적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3] 소년기[편집] 불우했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후일 자신이 쓴 자서전 《술회》에 일부 언급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집안은 가난하였고, 그는 과거 시험에 응시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의 신문물을 시찰할 유학생을 선발하게 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첫 일본 시찰 유학생 선발에 응시하였으나 몇 번 낙방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日·淸전쟁을 전후하여 경성에 있던 일본인과 긴밀하게 교제하였다.[4] 日·淸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였는데, 그의 예상대로 일본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을 존경하던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보고 분노하였다. 특히 그는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5][6] 연좌 제도와 악형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과 같은 나라는 문명국으로 보기 어렵다고 규정했다. 개화파 인사들을 선각자로 보고 존경했지만 그들 가족들의 비참한 최후와 능지처참, 연좌제 등의 악형을 목격하면서 그는 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에 일찍부터 의문을 품게 되었다. 1896년(고종 33년) 7월 한성부로 올라가 윤치호, 서재필, 이상재 등이 만든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 1896년(고종 33년) 10월 11일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도쿄로 유학하였다.[7] 10월 11일 상선 아카시마루(明石丸) 편으로 일본에 도착, 10월 12일 도쿄로 올라갔다.[7] 일본 효고현 지사 스후 고헤이(周布公平)는 이들을 면담, 일본 입국 목적을 파악하여 10월 13일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보고하였다. 박중양은 일본에 온 이유를 "게이오기주쿠 입학을 위해서[7]"고 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박원근(朴源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8] 일본 유학 생활[편집] 도일과 중학교 재학[편집] 1897년(고종 34년) 관비유학생 자격으로 약 7년간 일본에서 유학하였는데, 그해 도쿄 중학교를 수료하였다. 유학생활하면서 기독교 목사 혼다 요이치(일본어: 本多庸一)를 만나 혼다 요이치의 식객으로 생활하다가, 그가 경영하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서 수학하였다.[9] 이 무렵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이토는 일본을 배우겠다는 그에게 사람들의 의식 수준과 치안, 행정 관서들을 잘 보라고 충고해주었고, 그의 권고로 경찰과 행정 쪽을 유심히 보게 된다. 국비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간 그는 생활비를 자신이 직접 아르바이트로 조달했다. 그는 오랫동안 일기를 남겼는데 후일 그의 가택을 조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한 반민특위의 한 조사관은 '일자무식, 돈 한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박중양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10]'고 평하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산 소식을 접한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체과정을 지켜본 그는 협회를 해산시킨 '무지한 애국자'들을 조롱하였다. 그는 "애국심을 핑계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애국심만 있으면 뭐든 용서된다고 믿는 얼간이들이 많다"며 조소했다. 황제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무지한 수준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며 그런 수준으로는 독립을 달성하더라도 이내 다른 외세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연좌제도 적용, 이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까지 강제 해산당하자 그는 분개한다. 중학생 재학 때부터 그는 하교시간, 방과후를 이용해 이토 히로부미의 서실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퇴청 후 별도의 서실을 열고 학교 진학 형편이 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후에 정치, 사상, 철학 등을 강의하였다. 우연히 이토의 문하에 찾아가게 된 그는 가난한 조선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젊은이들의 멸시와 무시를 당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그가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점을 차등대우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서실에 오도록 받아들였다. 그는 이토가 편견없이 자신을 문하에 받아준 것에 깊이 감격하였다. 자객의 침입과 신변 위협[편집] 아오야마학원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그는 대한제국 정부가 파견한 자객의 미행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1900년(광무 3년)에 도일 유학을 했던 한 유학생의 회고록에 의해서 당시 일본의 정황을 살피면, 동경역 부근 은 잡초가 우거진 허허 벌판이었고 , 철도 마차가 똥 오줌을 갈기며 현재 일류 번화가인 은좌 거리를 질주하던 시대였다고 한다.[11] 그 유학생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 유학생 들은 조성근, 노백린, 박중양, 장도, 이갑, 류동렬 등 선배 동급생을 합쳐서 50 명 내외 였다'고 한다.[11] 이들은 박영효가 국사범 으로 망명해 오자 전원이 박영효의 졸도(卒徒)인 양 오해를 받아서 한때는 구 조선 정부가 밀파한 자객의 미행을 받기도 하였다. 박영효의 거처를 탐지해 내기 위해서 인데, 그 자객의 행위를 경계하기 위해서 일인 형사가 으레 미행을 하기 마련이었다.[11] 중학생이던 박중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익명의 유학생에 의하면 그러니까 한인 유학생 하나가 나타났다 하면 험상 궂은 자객과 일인 형사가 마치 쥐가 서로 꼬리를 물듯 미행하면서 자못 살풍경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들 초기 유학생 들은 누구나가 신 국가 건설의 역군을 자부하면서 여간 기개가 드높지 않았다.[11] 박중양은 자신에게 장학금을 주어 관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파견해놓고, 오히려 간첩 취급하여 자객을 보낸 대한제국 정부에 다시 한번 실망하게 되며 조선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도쿄부기학교 재학 시절[편집] 1900년(광무 3년) 야오야마 학원 보통중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부기학교(東京簿記學校)에 입학하였다. 도쿄부기학교에서는 은행업무를 배우고 1903년 졸업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 이름 대신 야마모토 신(山本信)이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했다. 도쿄부기학교 재학 중인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도쿄 경시청에 경찰 제도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 사무와 감옥 제도를 연구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일본의 문물과 정치 제도를 유심히 시찰했다. “ 나는 일본 정권을 파악하고 동양의 평화를 계략하고자 연구하였다. 일본 제국 정권이 정당 수중으로 집중된 이래 정권쟁탈이 당 간에 격심하여 지나인 군벌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 정당 정치가 된 연후의 정치 운행이 의원 다수가 포위하면 승리이다. 따라서 비열한 행동이 적지 않고 정치가 점차 부패해졌다.동경에 저택을 두고 경도 등지의 별장생활을 하면서 일본의 정당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생활 비용을 원조하며 그들의 심저를 섭취하면서 다수 의원을 포섭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고, 나의 이상적 대업을 능히 이루리라 자부 기대하였다. 요컨대 군비다.금(金)은 많고 적음의 문제다. 봉건시대 일본인들은 황금으로 교섭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의 일본 정당은 황금 만능 시대로 변성하였다. 일본 제국 정권을 파악하고 동양 대책을 위해 능히 이루리라 내심 자부, 연구하였다.[12] ” 금(金)은 많고 적음의 문제라며 재물을 모으는 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모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장차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조선에 의회 제도를 도입하며, 중립 외교를 견지하며 신생독립국들과 협력하는 중립국을 장차 조선의 이상적인 모델로 내다봤다. '평양 도시로 천도하고, 조선을 정치 중심으로 신생국가와 협력하여 동양평화를 보지하고 동양을 동양인의 실력으로 보전하기를 염원하였다.[12]' 그는 야마모토라는 일본식 이름과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가 있었다. 후일 경기도 도장관이 된 히가키(檜垣直右)나 충청북도 장관이 된 스즈키(鈴木隆)도 이때 사귀었던 인물들이다.[13]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편집] 도쿄에 관비 유학생으로 간 박중양은 다른 유학생들과는 달리 유흥에 빠지지 않고, 경찰 제도와 행정 제도, 기계시설 작동 등을 견학했다. 또한 방과시간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사설 서실과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 등을 방문하여 요시다 쇼인의 사상과 학문을 접하기도 했다. 도쿄 체류 중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진 위급한 찰나에 하늘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뛰어들어 여자를 구한 일은 이토 히로부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14]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져 몹시 위급해졌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다.[15]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을 구하였지만 박중양은 어떠한 대가도 사양하고, 값진 선물을 주었지만 사양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부인을 구한 박중양을 각별히 신뢰하였다. 한편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자객들 등의 미행 때문에 수시로 이바라키현지사(茨城縣知事) 히로나카 타마미쓰(河野忠三), 경시총감 아다치 츠나유키(安立綱之) 등은 외무대신에게 실시간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하였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토는 그를 비롯하여 자신의 문하를 찾아온 조선인 유학생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처지를 탓하거나 문제삼지 않았다. 이토의 인품에 감화된 박중양은 평생 이토 히로부미나 이등박문이라 하지 않고, 이등 공(公), 춘보 공(公), 이토 공이라고 꼬박 존칭을 붙여서 불렀다. 1904년 귀국 이후 한국통감으로 부임해온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나면서, 그의 관료생활의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1904년(광무 7년) 3월 15일 러일전쟁에 종군하겠다고 일본 외무성에 밝히고, 4월 배편으로 부산항을 거쳐 경성으로 상경하였다. 귀국 후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한국의 행정에 서서히 적용하려 하였으나 반대에 부딛쳐 실패하고 만다. 귀국 직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평양도시로 천도하고, 조선을 정치 중심으로 신생국가와 협력해야 된다[14]'며 조선을 영세 중립국화할 것을 건의했지만 묵살당했다. 일본 체류 중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등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들은 조선인에게 필요한 것은 서구 문물의 유입 이전에 공공정신과 질서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여 그를 사사하였다. 대한제국기 활동[편집] 귀국과 일·러 전쟁[편집]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러일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에서 귀국 후, 1903년(광무 6년) 6월 16일 관리서 주사(管理署主事) 판임관8등(判任官八等)에 임용되었다.[16] 6월 17일 관리서 주사직을 의원면직 신청하였으나 사직서가 반려되었다. 바로 수구파를 내치고 애국적인 세력을 등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상소는 올라가지도 않았고, 그해 말 관리서주사직을 그만두었다. 1904년 2월 일·러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고등통역관 대우로 임명되어 일본군에 종군하여 인천, 황해남도 진남포, 용암포와 중국 청나라 안둥현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었으나 그의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부른다. 한편 그는 일본인을 잘 섬겨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국에서 가장 좋은 관리는 오직 박중양 이다." 는 말을 듣기도 했다.[17] 일본인과의 교제, 일본 생활, 종군 생활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을 신뢰, 일본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우수성을 높게샀으며 그들의 친절에 감탄하였고, 일본인 기녀에 대해 좋은 추억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국정 개선을 위해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자원하는 일본인의 의협심을 가슴에 담게 되었다. 한편 박중양은 이와 반대로 조선인들은 '야만적'이라고 봤다. 그가 조선인들을 야만적으로 본 이유는 '사기에 능하고, 도벽이 있고, 또한 파괴성이 있다'고 봤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비교하며 조선인이 공공 정신이 없고, 사기와 거짓말에 능하며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것과 도벽과 허세가 심한 점을 보면서 실망하게 된다. 관료 생활[편집] 관료 생활 초반[편집] 1900년대 초의 박중양 농상공부, 진주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같은 해 11월 농상공부 주사(農商工部主事)가 되어 바른 인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외면당했다. 바로 대구 파견을 자청하여 1년간 대구에서 체류하였으며, 이 때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통역을 하면서 관찰사와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조절했다. 당시 대구에서는 경부선 개통 이후 이곳에 몰려든 일본인과 경북 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관찰사의 일을 방해했고,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연유로 박중양이 대구에 있던 1년 사이에도 장승원, 이용익, 이근호, 신태휴 등으로 관찰사가 빈번하게 바뀌었다. 이때 박중양은 이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일본인의 편에서 또 때로는 중간적인 입장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05년(광무 8년) 2월 6품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2월 10일 진주군수 이용교(李瑢敎)가 뇌물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자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 2월 20일까지 진주 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晋州判官兼晋州郡守署理)를 겸하였다. 이때 박중양은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였다.[18] 임진왜란 당시 왜병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아먹는 바람에 나중에는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18] 성곽의 일부는 성 북방에 있던 대사지(大寺池)등 세못과 해자를 메웠다. 그해 3월 다시 일본으로 유학, 도쿄에서 고등과를 다녔다.[19] 이듬해 5월 귀국한다. 일본 관병식 참석[편집] 1906년(광무 8년) 1월 일본 체류 중 경상북도 대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4월 17일 군부기사(軍部技師)로 일본군 관병식(觀兵式) 시찰차 육군부장 이근호(李根澔), 부령 조성근(趙性根), 어담(魚潭), 참령 윤치성(尹致晟), 정위 김기원(金基元), 임재덕(林在德)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20] 1906년 5월 5일 군부기사(軍部技師)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으로 발령되었다가, 다시 군부 군기창 주사(軍器廠主事)로 전보되었다. 5월 20일에는 주전원 경위국 경무관(主殿院警衛局警務官)으로 발령되었다.[21] 그러나 6월 6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원면직하였다.[22][23] 1906년(광무 9년) 6월 군부 특별 파견원에 임명되고, 그해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이 대한제국 정부 특파대사로 일본 도쿄를 방문할 때, 박중양은 현지에서 통역관 자격으로 수행원의 한사람이 되어 의친왕을 수행하여 도쿄로 갔다.[24] 바로 6월 6일 도쿄에서 열린 관병식(觀兵式)에 대한제국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한국 사회에 대해 설명하고 희망이 없다며, '조선에는 희망이 없어 미국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자신의 미국 유학을 도와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 유학 대신 관직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충고해주었다. 6월 26일 의친왕 일행이 귀국하자 수행원에서 면직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편집] 1906년 7월 일본 도쿄에서 고등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선택되었다.[19] 1906년 7월 12일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6품으로 승진, 주전원(主殿院) 경위국 경무관(警衛局警務官) 주임관4등(奏任官四等)이 되었다. 이토 통감의 총애를 받은 박중양은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통역을 도맡았다. 뿐만 아니라 의친왕이 일본에 행차할 때는 통역 수행원으로 따르기도 하였다.[13] 1905년(광무 8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될 무렵 그는 이를 저지하지 않는 조정 대신들을 무책임하다며 성토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사실상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간주하고 체념하였다. 1906년 일본에 사절로 갔던 의친왕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 수행한 공로로 일본정부가 보내준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 무렵,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그는 조선통감부의 신임을 받았다.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함께 논리적인 언변과 처신 등으로 일본인들도 함부로 다루지 못했고 이때 '일본인들도 칭송한 야마모토 군수'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1906년(광무 9년) 7월 중순 박중양은 다시 대구판관으로 나갔다가, 그해 7월 19일 통정대부 대구 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주임관 4등으로 승진했다. 대구군수가 되자마자 새롭게 대구군청을 건립하였다. 이때 그는 대구의 지역 유지와 기업인들을 모아서, 이들의 자금을 헌납받아 대구군청을 건립했다. 이를 두고 '권력을 악용해 몇몇 유지들을 동원해 사사로이 시청(市廳)을 만들어 대구 지방민에 대해 탐학을 저질렀다[25]'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알려지기도 했던 박중양은 유학시절에 쌓은 일본인 인맥과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1906년 경북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로 부임했다.[26] 7월부터 경상북도 이사청 설치의 준비, 감독을 맡은 그는 9월 15일 경상북도 관찰사부에 부속된 선화당(宣化堂) 건물에 대구이사청을 설치하였다. 대구읍성 해체 작업[편집] 1906년 10월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대구읍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1906년(광무 9년) 10월 1일 대구군수 재직 중 주임관 3등(奏任官三等)으로 승급했다.[27] 1906년 대구 이사청의 오카모토 부이사관(副理事官)과 가게야마(景山) 민단장대리 등이 대구성곽을 철거하고 그 터를 도로로 할 것을 경상북도관찰사서리 대구군수 박중양에게 강권했다.[28] 대구군수로 재직하며 대구읍성을 허물고 도로를 만들어 지식인들의 원성을 사는가 하면 동시에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하도록 협조했다. 이때 내무부의 허가를 받지않고 일을 처리하여 징계를 받을 상황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으로 오히려 영전[29]했다. 박중양은 조정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던 것이다.[30]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속에 가능했다.[30] 통감정치를 하고 있을 무렵, 그는 '대구성을 헐어도 되는가'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불가(不可)의 명령이 내려왔다.[31] 그러나 박중양은 읍성 해체를 강행한다. 1906년 당시 그는 조정의 승인도 없이 일본 거류민단의 주장을 받아들여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32] 일본인들은 대구역 근처에 매입해둔 도원동 일대 수만평의 땅을 개발하기 위해 대구읍성의 철거를 요구했던 것이다.[32] 철거를 시작한지 10일이 경과한 10월 1일에 철거해도 되느냐는 장계를 보냈다. “ 대구부의 성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부청이 이를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1906년 10월 1일 경상북도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33] ” 당시 대구군수였던 박중양은‘혁구개신(革舊改新·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이라는 명분 아래 대구읍성 해체를 시작했다.[34] 박중양은 일본인 이와세, 니타에, 사이토, 이토 네 사람과 극비리에 모의하고 韓·日 인부 60명을 부산에서 고용하여 읍성 해체를 시작하였다. “ 박중양 관찰사 서리의 뜻을 받은 이와세, 나카에, 사이토, 이토모토 네 사람은 극비리에 인부 60명쯤을 부산에서 데려와 하룻밤 사이에 성벽의 이곳저곳을 파괴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치기영 치기영 치기영’ 하면서, 목도꾼으로 부르는 인부들이 큰 돌, 작은 돌을 운반하고 있었다. 한국사람은 원래 어깨로 물건을 메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물건을 져 나른다. 박 관찰사는 이때 처음으로 목도꾼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그 운반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무거운 물건을 두 사람 이상이 나를 때, 일본사람들은 ‘영치기 영치기’라고 소리를 질러 호흡을 맞춘다. 한국사람들이 듣기를 ‘치기영’이라고 울렸는지 지금도 조선인은 첫 소리매김이 ‘치기영 치기영’이라고 나온다 하니까 우습다. 착각이라는 것이 재미있다.[35] ” 박중양이 비밀리에 부산에서 데리고 온 인부 60명이 대구 읍성을 허무는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흰옷을 입은 조선인 무리에서 선비 한 명이 분을 못 이긴 채 앞으로 나섰지만, 주위의 만류로 물러났다.[14] 박중양은 물러서는 조선인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무력한 조선인이 기껏 덤비는 꼴이라니….’ 그리고 인부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시작하라! 동트기 전 지시한 바를 차질없이 수행하라!” 박중양의 벽력같은 호령과 함께 성벽이 파괴되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곡괭이질 한 번에 남자들이 울었고, 그 울음소리에 아녀자가 뛰어나와 울었다. 울음소리는 성벽에 붙어 우는 가을벌레의 소리처럼 측은하고 가여웠다. 박중양은 조선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울음 속에 서식하고 있는 무력함이 지긋지긋했다.[14] 박중양은 조정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던 것이다.[36]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속에 가능했다[36]는 시각도 있다. 대구읍성 해체 직후[편집] 박중양을 풍자한 중양타령, 대한매일신보 대구읍성 해체 직전 대구시가도 대구읍성을 대한제국 내부의 지시 없이 해체한 일로 내부에서는 그에 대한 추궁이 들어왔다. 이때 이 성벽 파괴작업은 오직 박중양 의 독단으로 감행한 일로 목이 달아날 각오로 대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런 경우를 생각 하고 두 아들(文雄, 武雄)을 일본으로 망명 시킬 준비도 하였다는 것이다.[37] 박중양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비위를 규명하기 위한 칙서를 받고 신변이 위태해졌으나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징계를 면할 수 있었다. 대구읍성을 해체한 박중양은 경상북도 감영의 객사였던 태평관을 없애려하자 기생 염농산 등은 주민들과 합세하여 태평관 앞에서 농성하였다. 강제로 해산하려 하였으나 해산하지 않자 그는 사연이 있을 것이라 보고 태평관 해체를 포기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박중양이 성벽을 허물고 나온 성돌을 1개에 1냥씩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38] 이 때 일부 선교사들이 성돌을 옮겨다 집을 지었고, 선교사 주택뿐만 아니라 신명학교·계성학교, 동산의료원 및 약전골목, 일반 고택 등으로 흩어졌다.[39] 이때 그의 덕택에 상권을 확보한 일본인들은 박중양이 전라남도관찰사로 부임해갈 때 석별의 기념으로 시계를 선물했을 만큼 그를 고맙게 생각했다.[40] 대구군수 재직 중 그는 대구객사를 매각하였으며, 공자묘를 헐어버리기도 했다. 또한 대구의 공공건물에 있던 이승만, 서재필의 후원을 받던 협성학교를 내쫓아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여러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성벽해체 소식을 재빨리 들은 사람들은 눈먼 땅을 사재기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31] 성 밖에 땅값은 평당 10원이었으나 오히려 성안의 땅 값은 2원이었다는 것이다.[31] 1907년 5월 박중양 관찰사는 대구 약령시를 구 경상감영 옆의 객사에서 구 대구읍성 남문 밖 약전골목(남성로와 동성로 일부)으로 이전케 하였다. 대구읍성을 해체한 뒤 일인들은 헐값에 사들인 도원동 일대 저습지를 헐어낸 성토와 석재로 매립해 큰돈을 벌었다.[36] 훗날 “박중양이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해 갈 때 일본인들은 석별의 기념으로 시계를 선물했을 만큼 그를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32] 평안남도 관찰사 재직 시절[편집] 대구읍성 철거 이후 대구시가지는 확장되었다. 그가 대구 시가지를 확장시켰다는 여론도 나타나면서 그를 처벌하려던 시도는 사라진다. 1907년(광무 10년) 초에는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칙임관 4등(勅任官四等)이 되었으며, 평안남도 관찰사로 영전했다가 그해 5월 20일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잠시 재직하였지만, 조정에 흉년을 이유로 농민들의 빚과 토지세를 탕감해주었으므로 수전라남도 관찰사에서 이임할 때 전남의 지역 유지들은 그에게 황금 시계를 선물해 주었다. 1907년 6월 1일 평안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취소되고 다시 대구군수가 되었다. 다시 6월 7일 가선대부가 되어 다시 평안남도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로 부임하고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으로 승급했으며 6월 10일 이시영이 평안남도 세무감(平安南道稅務監)에서 해임되자 평안남도세무감을 겸직하였다. 이어 1907년(광무 10년) 6월 13일 평안남도재판소 판사, 평안남도 관립 일어학교 교장(平安南道官立日語學校長)에 임명되어 평안남도 관찰사로 평안남도세무감과 재판소판사, 관립일어학교 교장 등을 겸임했다. 이때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특혜 없는 판결로 명성을 쌓았고, 위생 사업과 도로 정비, 단발령 강행, 병원 유치 등에 힘썼다. 1807년 평안남도 선유사(宣諭使)를 겸임하였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다. 주로 밀주와 보리술, 막걸리 등 술을 잘 마셨다. 술을 좋아하던 관료들에서도 유명한 사람은 '보릿술 지사(知事)' 라는 별명 을 듣던 박중양이었다.[2] 1907년 박중양 이 맥주를 대음 (大飮)하는 한 대목이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었다.[2] “ 평남 관찰사 박중양 씨는 성질 이 이상 하야 1 홉으로 매일 1호 에 다음제발(多飮諸拔)하야 한나절 에 일본 맥주 60병 을 능음무여(能飮無餘)하고 소주는 40병을 근음(僅飮)하얏으니 음주거량(飮酒巨量)은 박중양이라 말고 박태백(朴太白)이라 위할지오. ...(이하 중략)...[2] ” 한번은 소주를 40병 까지 마셨다고 한다. 언론인 겸 작가 이용선은 '불과 한나절 동안에 맥주 60병을 혼자서 거뜬히 먹고 나섰으니 과연 '박태백'이요, '보리술 관찰사'라고 불려도 화낼 일은 아닐 것이다.[2]'라고 하였다. 박중양은 술에 취하면 말수가 적었으며 좋고 나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량의 술을 마셨지만 그는 술주정을 하지 않기로도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종종 홀로 창가를 바라보며 흡연과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평안남도에 있을 당시 근무 성적이 나빠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민중에 대한 무관심과 경멸, 냉정한 태도 역시 백성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박중양의 횡포는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13] 그의 친일행각과 학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원성을 담은 ‘중양타령’이라는 노래까지 나왔을 지경이었다.[36] 이는 대한매일신보 '제2의 박중양'에서 평안남도관찰사 이진호를 겨냥하여 "박중양의 횡포로 인민의 고통은 말도 못할 지경인데, 박중양이 둘이나 되니 인민이 어떻게 살아갈지 민정(民情)을 슬퍼한다"는 기사에서도 묘사되었다.[13] 고종 퇴위 전후[편집] 1907년(광무 10년) 7월 고종이 퇴위를 선언하자 그는 고종의 퇴위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양위 철회 상소에 상관없이 고종은 양위하고 말았다. 1907년(융희 1년) 8월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항일의병전쟁이 전국토를 뒤흔들자, 그는 의병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그들의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 보고하였다.[13] 8월 12일에는 삼화부 주사 안양준(安養駿)이 뇌물을 각 면의 면장들에게 불법적으로 받은 일로 징계하여 파면시켰다. 그해 10월 30일 우편사무 취급 권한을 이용하여 백성의 편지를 함부로 열람해본 영원군 군수 김제민(金濟民)을 내부에 보고하여 월권행위를 적발하여 파면시켰다. 1907년 10월 2일에는 성천군의 나서성(羅瑞成)이 민심을 선동한다고 보고하였다. 1907년 10월 23일 평안남도선유사에 임명되어 순시하였다. 이때부터 평안남도재판소 판사는 참서관이 서리가 되었다. 11월 7일에는 내무부에 상소를 올려 지방 판임관은 해당 도관찰사가 임명하게 해달라고 상소하였다.[41] 그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1908년 1월 1일부터는 판임관급 이하의 관리들은 해당 도의 관찰사가 직접 임명케 하였다. 그해 11월 11일 근무중에 임지를 이탈하여 한성부에 사사로이 올라왔다가 내부로부터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12월 1일 선유사 직무를 마치고 관찰사직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각 지방관에게 부여한 우편취급 사무에 대해 지방관들이 우편을 함부로 열람하지 못하게 할 대책 마련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1908년(융희 2년) 2월 통역관으로 일·러전쟁에 종군,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5등 서보장을 전달받았다. 그해 6월 6일 각 관립외국어학교 졸업생 중 내부대신이 임의로 인재를 채용하려 하자, 박중양은 정식 채용시험을 보지 않은 인물을 내부대신이 임의로 채용, 인사를 단행함은 월권행위, 권력남용이니 옳지 못하다 하여 무산시켰다. 1908년 6월 11일 경상북도 관찰사 겸 경상북도재판소 판사 칙임관 3등에 임명되어 바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1907년(광무 10년) 2월부터 대구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는 등 일본에 대한 저항이 강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는 곧 부임해온 경북관찰사였던 박중양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42] 그해 7월 1일 겸임 평안남도관립일어학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08년 박중양은 본적지를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경상북도 달성군 북면 침산리로 옮겼다. 개혁 정책과 단발령 강행[편집] 단발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는 일찍부터 단발령의 효율성을 알리고, 이를 보급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발령에 호응하지 않았다. 경상북도관찰사가 된 박중양은 영해(寧海) 지방에 들어가 한 고을의 수천 백성들의 상투를 꾀를 써서 잘라 버린 사건이 있었다.[43]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로 새로 부임한 박중양은 영해군으로 초도순시를 간 뒤, 그 잘하는 연설로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고 나서 선언했다.[43] “ 나에게 따로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 연설회가 끝난 뒤 군청 내아(內衙)로 들어오시오.[43] ” 도백(道伯)이 자기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 인사를 받겠다고 하는데 감지덕지한 유지 기관장급들은 좋아라 하고 내아로 줄을 지어서 들어갔다. 그런데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이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 한꺼번에 수백 명의 상투가 잘려 나갔으니 내아는 금세 통곡바다를 이루었다.[43] 이후 그는 위생의 편리함을 이유로 단발령을 권고했고, 호응이 적은 곳은 직접 찾아가 순사들을 매복시킨 뒤 단발을 강행하였다. 1907년 평안남도관찰사 재직 중에도 그는 단발의 필요성과 위생상 편리성을 역설하고 단발령을 강행하였다. 단발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으면 면담을 신청한 뒤 도청에 출입할때, 도청사 정문 또는 관찰사 집무실 입구에 가위를 든 관리들을 숨겨두고 출입자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게 했다. 또한 평안남도관찰사로 재직 중 평양과 남포에 병원 유치와 의학교 유치를 추진하였다. 그는 신문을 보고 국내외 정세를 알 필요가 있다 하여 1907년 10월부터는 자비를 들여 신문을 구매, 평안남도의 지역 유지들에게 발송하여 읽게 하였다. 황성신문과 매일신문 등 박중양의 정책과 평안남도에서의 근무 실적이 저조함을 비판, 지탄하는 신문들이 많았으나 박중양은 이에 개의치 않고 신문들을 구입하여 유지들에게 보냈다. 그는 이들이 신문을 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신문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가려내 지역 유지들에게 질문하였다. 이후 자연스럽게 평안남도 지역에 신문을 읽는 풍습이 정착되었다.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편집] 1907년 6월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무렵 1908년 6월 11일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대구객사를 허물었다. 경북관찰사로 부임한 그가 대구객사를 허물면서 금학루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여 '누백년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데갔노'라는 가요[44]를 불렀다.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래 그는 예산 집행 내역을 일일이 기록으로 작성한 뒤 조정에 상신하였다. 그는 스스로도 장부를 가지고 다니면서 참여관, 각 국장, 과장, 실무자들에게 영수증을 받아서 보고서로 묶어서 작성, 보고하게 했다. 취임 초반 그는 대구 지역 내의 각 언론사들 사이의 중재에 나섰다. 일본거류민단 일부에서 1908년 7월에 대구일일신문의 논조에 불만을 품고, 그해 9월에 대구시보(大丘時報)를 창간하였다.[45] 이때 박중양 등의 중재로 대구일일신문과 대구시보가 합자해서 그해 10월 1일에 대구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하기 시작했다.[45] 10월 무렵 박중양은 대구 지역의 유지들의 기금을 모아 또다른 신문 발행을 기획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 그는 대대적으로 도로 정비와 주택 정비 작업을 추진한다. 초가집 대신 기와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대적으로 도시 정비를 추진한다. 이때 토지수용을 거부하는 일본인 상인과 지주들을 설득하여 도시계획, 정비를 추진한다. 일부 일본인의 토지를 수용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으니 일본인들이 많은 양의 보상금을 바라므로 토지 수용이 힘들었다. 그는 일본인 지주들을 초청하여 여러 차례 설득하였다. 당시 박중양은 일본 거류민단과의 간친회에 있었던 연설문을 일본인 '카와이 아사오'가 지은 "대구물어 (大邱物語)"에 실려 있다.[31] “ 한일 양국의 의사를 소통하고 양자 공통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개최된 이 모임이 공전의 성황을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소생이 이 곳 대구와는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은 여러분이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군수시대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인이 많아 늘 고견을 듣고[31] 적잖게 행정상의 편익을 받았음을 감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소생은 일신을 던져 끝까지 이 땅을 위해 진력코저 하니 청컨대 일본인 여러분의 지도 편달을 바라며, 혹 여러분의 노여움을 살지 모르나 가일층의 편달을 바랄 뿐이다. 원래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 한국인에 대해서 귀국인은 사부된 책임을 깨닫고 교유함과 알선의 노고를 사양치 말 것을 간절히 바란다.[46] 사실대로 말한다면 정부로부터 2만원의 교부금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 토지 소유자가 토지 수용의 교섭에 응하지 않고 과도한 고가를 주장하는 까닭으로 결행할 수 없어서 다시 정부에 교부금을 반환하는 상태가 되었다. 한인 가옥은 명령에 따라 정리할 수 있었으나 일본인 토지는 밭이거나 황무지라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없었다. 원래 대구라는 토지는 한국 정부로부터 도외시 당하고 있다는 감이 없지 않다. 관인(官人)의 안중에는 이제껏 대구를 무시하였고 경성은 별도로 하더라도 대구와 흡사한 평양은 수십만원의 국고 보조가 있었다. 오직 일본인 여러분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분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원컨대 이 뜻을 살피셔서 장래 더욱 우리들을 편달해 주기를 바란다.[46] ” 일부 일본인들은 "우리가 스스로 개혁을 거부한 너희들을 왜 지도 편달을 해야 되느냐"는 항의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빈정거리는 사람과 솔직하다는 의견이 팽배하였다.[46] 그는 일본인과 미국인 상인, 선교사 등 외국인에게 조선에 보다 개화된 문명 전파와 교류의 필요성을 누차 역설하였다. 1908년 8월 10일 서병오가 신녕군수에 임명되었으나 10일만에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박중양은 이를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렸다.[47] “ 즉 該員이 赴任十餘日에 稱病辭職은 詐欺取官이오니 相當勘處하심을 伏望等因此를 査온즉 該員을 專爲圖官하야 欺騙上部하고 倖得任用하야 不拘初無就職○底意하고 一朝赴任未幾에 忽至規避하오니 究其情跡하면 極爲駭妄이라. 似此郡守직 不可仍置이기是以로 免本官(以上十月八日內閣)[47] ” 이는 관보에 그대로 게시되었다.[47] 서예가였던 박중양은 역시 서예가인 서병오에게 친필 글씨를 부탁했지만 서병오는 거절하였다. 그밖에도 청송군수 심택수(沈澤洙)의 사직서[48] 등 군수, 부윤, 현감 등의 사직서를 받으면 즉시 보고서로 작성하여 조정에 상신하였다. 1908년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은 신돌석의 활약상에 대하여 보고서를 올렸다.[49] 들개 사냥 대 작전[편집] 들개 1908년 10월 박중양은 또 다시 개소탕 작전을 펼쳤다.[50] 194마리의 개가 비명횡사했다.[50] 동시에 들고양이도 전염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대부분 잡아서 소탕했다. 1907년(융희 1년) 10월 그가 경북관찰사로 부임해오기 전에 일본인이 들개에게 물린 이후 들개 소탕작전을 실시했으나 계속 거리에 개가 많이 다녔으므로 다시 개 소탕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대구에 주둔하던 일본군 한 사람 이 개에 물려 죽었다. 그래서 마침내 백성들에게 개를 모두 죽이라고 명을 내리고 듣지않는 자는 처벌한다고 하였다[51]"고 하였다. 한편 1934년의 잡지 별건곤에 의하면 박중양이 야밤에 기생집에 출입하고 오다가 들개들에게 물려 봉변을 당하고 그 분풀이로 들개들을 소탕했다고 한다. “ 박중양과 야견박살(野犬撲殺)지금에는 사견휘체규측(飼犬取締規則)이 잇서서 그 규측에 의하야 기르는 개가 안이면 소위 야견(野犬)으로 취급하야 경찰서 가튼대서 박살을 식히는 일이 잇지안은 그 규측이 생기기 이전에 대구(大邱)에서 벌서 야견박살이란 불문의 법을 내여 만흔 개를 박살한 사람은 대구 관찰사(觀察使)로 문제만흔 박중양(朴重陽)이다. 그가 그러케 야견박살을 만히하야 일시 개백정 관찰사란 별명까지 엇게 된 것은 무슨 일반 공익에 필요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의레의 화류계에 명물남인 그는 대구에서도 공무여가에는 긔회 잇는대로 기생집 출입을 만히 하얏는데 하루밤에는 대구에서 기생촌(妓生村)으로 유명한 말방아골(洞名)을 비밀이 놀너가다가 사나운 개떼를 만나서 살을 물리고 옷을 찌기여서 그야말로 개코 대망신을 하고 도라와서는 그 이른 날로 대구경찰서에다 야견박살의 긴급명령을 나려서 일시 수천마리의 개를 박살시켰다고 한다. 말하자면 박중양은 야견박살의 선도자요, 원훈이다. 개사회에서는 영구히 잇처지지 못할 인물이다. ”   — "萬華鏡", 별건곤 1934년 제69호(1934년 1월호) 중에서 황현에 의하면 대구시내에 "열흘 사이에 개의 종자가 없어지고 말았다.[51]"고 한다. 들개를 대대적으로 소탕한 덕에 그의 별명은 '개백정 관찰사, 야견 투살대감'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 충북 도지사 박중양군은 遞任된 丸山警務局長이 조선을 떠날 때에 秋風嶺까지 餞送하고 山狸 1필을 기념품으로 주더니 금번 행정정리 바람에 朴군도 또한 馘首를 당하게 된단다. 忠北에 만일 朴군처럼 의리 잇는 친구가 잇다하면 들개라도 1필 주어 野犬 撲殺大監의 미역국 먹은 기념품을 삼을터이다. 그러나 조선 습관상에 산에 개고기는 원래 大忌物이니 奈何. ”   — "京城雜話", 개벽 제54호(1924년 12월호) 별건곤의 보도에 의하면 기생촌에 들렸다가 취해 돌아오는 그를 개떼들이 물어뜯어서 살과 옷이 다 찢겼다고 한다. 한편 그의 들개 박멸 작전은 1930년대까지도 조롱거리가 되었다. 1908년 10월의 들개 소탕 작전으로 이후 대구시내의 들개와 들고양이 수가 절반 이상으로 감소하였다. 1908년(융희 2년) 11월 러·일 전쟁에 통역으로 참전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의 서보장을 받게 된다. 그는 평소 일본인이나 기타 양이가 되었더라도 오랑캐라 배척할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된다는 뜻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해로운 발언쯤으로 치부되었다. 1908년 12월 일한민간친회(日韓民懇親會) 평양지회에 참석, 여기서 그는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들의 지도편달에 달려 있습니다.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일본인들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는 취치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순종 남행길 수행[편집] 1909년(융희 3년) 1월 12일 대구행재소에서 경기도관찰사 김사묵, 전라북도관찰사 신응희, 충청남도관찰사 최정덕, 충청북도관찰사 권봉수 등과 관내외 군수, 부사들과 함께 순종을 인견하였다. 대구역사에 임시로 마련된 편전에 들어선 순종 황제는 박중양 대구군수 겸 경상도관찰사 등 대구지역 고위인사들의 인사를 받고는 가마에 올랐다.[52] 인견이 끝난 후 평안남도 관찰사 이진호, 평안북도 관찰사 유혁로, 경상남도 관찰사 황철 등과 함께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의 서남부 순시를 수행하여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지역을 함께 순회하였다. 1909년(융희 3년) 1월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경상남북도를 순시할 때 대구 수창학교(현 수창초등학교의 전신)에서 일본 국기를 게양하지 않은 일로 수창학교를 폐지할 것을 학부(學部)에 건의했다. 순종의 갑작스러운 시찰을 두고 항간에서는 남쪽지방 시찰이 끝나면 부산에서 군함을 타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갈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53] 당시 수창학교 학생 30여명은 경부선 철로에 누워 함께 죽어버리자면서 대구역으로 출발했다. "임금이 볼모로 잡혀가는 것은 절대 볼 수 없다"는 어린 학생들의 충정심이었다. 그 중에는 서른을 넘은 중년의 초등학생도 끼어 있었다. 교사들의 만류로 불발되긴 했지만, 이 때문에 박중양의 요청으로 학교가 폐쇄될 뻔하기도 했다.[53] 그러나 순종은 유언비어로 어린 학생들이 움직였지만 충성심이 가상하다며 넘겼다. 이를 두고 성균관 대학교 강사,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김일수는“박중양은 아마도 순종의 방문을 통해 한국통감부 내 자신의 영향력을 대구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대구 출신이 아니었던 박중양이 대구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정치적 행동 때문이었을 것[54]”이라고 보았다. 김일수 박사(성균관대학교 강사,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위원회 위원)는 “당시 왕을 알현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왕이 직접 대구를 찾았다는 것은 박중양이 일제로부터 무한대의 신임을 받고 있음을 대구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아마도 박중양은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식민지화 할 경우 조선의 정치적 대안세력이 자신임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라고 보았다.[42] 일설에는 경상북도감영에서 달성공원까지 길을 순종이 오기 전 날 박중양이 만들었다고 한다.[42] 1909년 5월 대구 협성학교를 폐하려 하였으나 학부에서 불허하였다. 대신 그는 협성학교를 제2공립보통학교로 변경하려 하였으나 역시 학부가 거절하였다. 대구 십자도로 개통과 일본인 관료 응징[편집] 일본인을 지팡이로 내려치는 박중양을 풍자한 만화 (1930년대) 1909년(융희 3년) 대구에 십자도로를 개통하였다.[55] 대구 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를 말하는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 이 도로가 개통될 무렵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다.[55] 대구 시가지를 정비하고 십자도로를 개설함으로써 대구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순종의 남행을 수행하고 돌아온 뒤 칙임관 2등(勅任官二等)으로 승급하였다. 같은 해 7월 재조선 일본인 농업관계자와 유지들이 만든 조선중앙농회의 경상북도지회장에 선임되었다. 한편으로 조선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들을 발견하면 자신이 들고 있던 작대기로 무례한 일본인을 두들겨 패고 그 일본인이 저지른 횡포를 경찰에 따졌으므로 일본인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밉게 보인 순사 몇명 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이나 옷을 벗겨서 거리로 내쫓기도 했다. 그는 일본 순사 때리기를 예사로 하였다 한다.[56] 한번은 일본인 순사들이 노점행상으로 떡을 팔고 있는 어느 노파에게 교통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장사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말을 못알아들은 이 노파가 그 다음날에도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자, 화가 난 순사들은 떡함지를 발로 걷어차 떡이 죄다 쏟아져 소동이 발생했다. 이를 본 박중양은 바로 관할 경찰서장을 호출하고, 해당 순사에게 땅바닥에 떨어진 떡을 입에 물리고 떡함지를 머리에 이게 하여 장터거리에 조리를 돌려 민심을 수습하게 했다. 그의 위세는 막강하여 '작대기를 휘두르면 기차가 섰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56] 그러나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각별히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인들도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그는 밀주와 탁주 등 술을 즐겼다. 한편 마땅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들을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취직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소문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가 술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밀주 항아리를 갖다주고 그 대가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일제 시대 활동[편집] 韓日倂合 직전[편집] 관료생활 중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싫어하던 이들 조차도 그를 쉽게 다루지 못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 여러 대소 관료들이 온갖 뇌물을 가지고 아부를 해 왔다.[57]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 물리쳤다.[58] 평소 사람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사사로운 대접, 접대도 최대한 회피하였다. 순종의 대구 방문 이후 박중양은 일제로부터 투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42] 곧 가의대부로 가자되었다가, 1909년(융희 3년) 10월 23일에는 그해 초 순종의 서남부 시찰에 수행한 경기도관찰사 김사묵, 평안남도관찰사 이진호 등 세 관찰사와 이하 관료들을 포상할 때 가자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0월말 한때 타지로 전임이 예상되었으나 결국 유임되었다. 1910년(융희 4년) 3월 경상북도 내 각 군수들과 지역 명문가, 유지들에게 기부를 호소하여 수만금을 모아 경북일보를 창간하였다. 1910년(융희 4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박중양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영전이 되었을 때 대구부민은 사은의 뜻으로 금줄이 달린 시계를 선물하였는데 시계 뒤 뚜껑 안 쪽에 이중 십자형을 새겨 넣었으니 이는 성벽파괴의 공적과 십자로 개통의 배려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31] 그해 韓日倂合을 보았다. 韓日倂合조약이 체결되었으나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를 위해 국민이 충성할 이유가 없다'며 韓日倂合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1910년 9월에는 경상북도에서 각 면민들을 대상으로 특별 강연을 했는데, 연사의 한사람으로 초빙되었다. 여기서 그는 韓日倂合 조약의 이유, 합병 조건을 설명한 후 새 정부의 통치에 적극 협력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후 그는 "폭풍과 홍수를 방어할 지력이 없고, 대세를 저항할 실력이 없다. ... 요로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일제 시대 초반[편집] 韓日倂合 전후[편집] 박중양, 1910년 무렵 한일 병합 조약, 조선총독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등관(高等官) 3등에 임명되고, 다시 충청남도 도장관(도지사)에 보직되었다. 韓日倂合 이후 종5위 훈5등(從五位 勳五等)의 품계를 받았으나 남작 작위는 거절하였다. 1910년 10월 1일부터 1912년 3월 31일까지 충청남도 장관직을 지냈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뒤 전체 13도의 도장관 중에 조선인은 전북의 이두황, 충남의 박중양, 강원도의 이규완 등 3명 뿐이었다.[59] 도청 청사는 옛 관찰사가 있던 감영을 그대로 쓰기로 했고 도장관실 역시 관찰사가 집무하던 72평짜리 선화당(宣化堂)을 사용했다. 그리고 도장관을 부를 때는 '각하'라는 칭호를 사용하도록 했다.[60] 박중양은 충남도장관 집무를 시작하자마자 첫 군수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서 부여 임천군수 이종열(李宗烈)이 계속 되는 총독부의 토지조사로 "민심이 흉흉하니 이것을 중단해 줄 것과 농지의 단위를 종래의 ‘마지기’에서 ‘평(坪)’으로 바꾸면 혼란이 온다"는 발언을 했다.[60] 그때 농민들은 순사의 호위아래 살벌한 분위기 속에 농지측량을 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도장관은 버럭 화를 내며,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하고 퇴장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종열 임천군수는 해임되었다.[60] 1912년 8월 1일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韓國併合記念章)을 특별히 수여받고, 11월 4일 조선총독부 고등관 2등, 1913년 1월 30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 1913년 7월 1일 훈4등 서보장(勳四等 瑞寶章)을 수여받았다. 충청남도도지사인 그는 도내의 소학교, 중학교 학생들 중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손수 시상하였다. 1912년 당시 예산소학교 2학년이던 화학자 이태규는 성적이 우수하다 하여 그에게 상을 받았다 한다. '예산소학교 2학년인 이태규의 재주가 널리 알려져 박중양 도지사가 손수 이태규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또 우등생에게 주는 상품으로 사과나무를 받아와 집 앞마당에 심기도 했다.[61]'는 것이다.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편집] 1911년 4월 따스한 봄이 시작되면서 데라우찌 조선 총독은 각 도장관들에게 구형 포드 자동차를 한대씩 사서 보냈다. 그러나 차를 움직일 운전사가 없어 박중양 도장관은 차를 가져다 놓고도 그대로 묵혀두었다가 공주에 살고있던 崔모라는 사람을 서울까지 보내 운전교육을 받게 한 다음 비로소 차를 타기 시작했다.[62] 후일 대전상공회의소장을 지낸 문갑동(文甲童)도 이무렵 함께 운전을 배웠는데 崔모씨는 도장관차를 끌기 위해 면허도 따기전에 공주로 내려왔다. 최모는 면허증도 없이 도장관차를 운전한 셈이다.[62] 그러나 박중양은 도장관의 직권으로 최모의 무면허 운전을 승인하였다. 1911년 3월부터 박중양은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을 추진하였다. 1910년대 초 까지도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인 공주와 신흥도시로 발돋움을 시작한 대전 사이에 도로가 없었다.[62] 당시 공주에서 금강을 배로 건너 종촌과 대평리를 거쳐야 하는 불편한 길 밖에 없었고 지금 처럼 대전 - 동학사 입구 - 마티고개로 통하는 직통도로는 생각도 못했다. 물론 예산이 제일 문제였다. 그 당시 화폐단위로 최소한 87만원이 필요했었는데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옮길 때 현도청 신축비가 35만원이었다.[62] 조선총독부 건설국에서는 87만원의 비용은 무리라고 통고하였으나 박중양은 도로 건설을 고집하였다. 그래서 박중양 도장관은 총독부에 여러번 찾아가 교섭을 벌였으며 그래도 결말이 나지않자 데라우찌총독과 만나 결국은 87만원 전액을 타내는데 성공했다.[62] 이렇게하여 1912년 3월 대전 - 유성 - 반포 - 공주간 신작로 공사가 착공을 보게 되었다.[62] 큰 하천이 없어 공사는 쉽게 진행된 편이었으나 말티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는 길을 뚫는 것이 가장 난공사였으며 그 무렵 이 산에는 많은 화전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반발이 자주 말썽을 일으켰다.[62] 특히 말티고개 중턱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잘못 터뜨려 화전민 5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까지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화전민의 감정을 크게 자극했으며 이 때문에 공사가 1개월 동안이나 중단되기도 했었다.[62] 일각에서는 천지신명이 노한 것이라는 입소문이 돌았고, 즉시 도로 개통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지만 박중양은 도로 건설을 강행하였다. 1913년 9월 17일 공주 - 반포 - 대전간의 새 도로가 탄생했고 이 도로의 개통은 대전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으며 신비 속에 가린 계룡산개발에 크게 공헌했다.[62]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편집] 군청 통폐합작업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논산군 은진면 유지들이 도장관 면담을 요청했다. 당시는 군청이 은진면에 있었는데 논산, 강경, 연무 일대를 통합하여 논산으로 군청을 이전키로 하여 시끄러울 때였다.[60] 그런데 은진에서 찾아온 유지들 가운데 한 노인이 상투머리에 갓을쓴 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발령이 내린지 언제인데 지금 까지 상투를 하다니... 에잇! 다들 나가시요.' 그리고는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60] 이후 상투 노인들 대신 마을 청년 지도자들이 찾아오자 면담을 하였다. 예산농업학교의 교장인 이부스키 다케기치(指宿武吉))는 1910년 8월 10일부터 1915년 3월 31일까지 5년간과 1920년 4월 1일부터 1924년 3월 31일까지 5년간 제 3대 교장으로 두번에걸쳐 10년간을 근무하였다. 1915년 당시 충청남도장관(현 도지사) 박중양(朴重陽)과의 사이가 좋지못해 황해도 농무과 기사로 전임 되었다.[63] 그후 박중양은 황해도지사로 부임하려 했다. 1920년 황해도지사로 부임하려는 박중양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자 1920년 4월 1일자로 다시 예산농업학교로 부임하였다.[63]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 그는 대종교 포교를 금지하였다. 충청남도 장관 박중양이 조선총독부 내무부 장관 우좌미 승부(宇佐美 勝夫)에게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 에서도 대종교를 불허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64] 또한 충청남도 내 대종교 포교 사실을 적발하여 조선총독부 내무부에 보고하였다. 박중양이 보낸 '학도 에 대한 대종교 권유 상황 보고에 관한 건'이란 보고에서, 당시 대종교의 중요 문건 이었던 '단군교 포명서' 와 '단군교 오대종지 포명서'를 통하여 지역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총독부 는 '본건 에 대한 의견' 을 통하여 대종교를 기성 종교인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 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어 종교 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64] 1914년 9월 10일 조선총독부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충청남도지부 평의원에 선출되었다.[65] 1914년 11월 7일 매일신보사를 시찰하였다.[66] 1914년 11월 8일 조선총독부에서 소집한 전국 도지사 회의에 참석하다. 11월 21일 조선농회 충남지회 주최 충남 물산품평회에 참석하다. 공주군 물산품평회가 심사에서 우승을 하여, 우수농가인 논산의 이기승(李基升) 외 3인에게 은배를 시상하였다. 일본인 관리 응징[편집] 1914년 충청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충청남도도장관으로 재직 중 김갑순(金甲淳)의 회유와 위협에 쉽게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갑순은 희귀한 수석과 보물, 여자 등으로 그를 회유했지만 박중양은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김갑순을 호통쳐서 되돌려보냈다. 반민특위의 김갑순 재판 기록에는 '김갑순의 관청 교제는 참으로 능하였다. 박중양(朴重陽) 외 어느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판검사 쳐놓고 김갑순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하기도 했다. 1915년 3월 31일 충청남도 도장관에서 의원면직하고 바로 3월 31일 당일부로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충남도장관에서 물러난 뒤 대구 침산동에서 영농을 시작하였다.[67] 그해 11월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차 제물포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열린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15년 11월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4년 3월에는 자신의 소유 달성공원 일대를 1905년 4월에 건립된 대구신사의 이전 부지로 기부하기도 했다. 대구신사는 지금의 코끼리사육사가 있는 장소 근처에 건축되었으나, 부제가 실시되기 직전인 1914년 3월에 달성공원 중앙부 서단(현재의 물새사육장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전, 신축되었다.[68] 건축위원장은 부이사관인 오까모또가, 회계는 이와세가, 그리고 신사부지를 제공한 박중양등 세 사람에 의해 대구신사가 건립을 보게 되었다고 『대구일반』은 기록하고 있다.[68] 일제 시대 당시 그는 조선 내에서 일본인이 함부로 다룰 수 없던 몇 안되는 인사였다. 한번은 일본인 형사가 '조선놈은 배대지가 커서 밥을 대야로 먹는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한번은 박중양이 그 형사에게 이르기를 대구 도덕산에 일찍이 오를테니 새벽 4시 전에 오게 하였다. 이어 머슴에게 시켜 꽁보리밥 열 되를 준비하고, 다른 보에는 된장을 담되, 된장 한 바가지에는 매운 청양고추 한푼은 매달고 도덕산에 올랐다. 이 일본 형사는 새벽 3시부터 나타나 박작대기를 데리고 앞장서 산행을 하였다. 이어 대구 국우동 뒷산에서 아침을 먹는데 보니 꽁보리밥에 청양고추는 매워서 먹지 못하여 된장을 먹는데 된장도 맵고 심하게 짜서 먹는둥 마는둥 하고 다시 도덕산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못가 배가 꺼저 어찌나 배고팠지만 고픈 기색을 못하였다. 체면상 배고픔을 내색할 수 없어 그럭저럭 도덕산 꼭때기에 이르렀다. 정상에 다다라서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양푼에 밥 1그릇을 수북히 담아줘도 다 먹고, 또 1양푼을 더 먹었다. 순사가 밥을 더 먹는꼴을 보던 박중양은 '이놈의 순사 배가 함지박보다도 큰가보다. 혼자 밥을 반통이나 처먹는구나 하고 조롱하였다. 사회 단체 활동[편집] 1916년 7월 23일 호전당선화회(戶田塘仙畵會) 의 조직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입회하여 7월 23일 대구 동문 상무회도장에 작품을 출품하였다.[69] 그는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일본 유학 중에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이 무렵 그는 안동과 대구간 경철 노선 유치에 나선다. 1918년 4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8년 5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大邱商業會議所 特別評議員)에 선출되고 경상북도 제2회 물산공진회에 참여하여 물산공진회 경상북도지회 평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8년 8월 28일 대구와 안동간의 철도 개통 후원조직인 구안간 경철기성회(丘安間輕鐵期成會)의 창립에 참여하고, 바로 구안간 경철기성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대구부청 회의실에서 후원회를 개최하였다.[70] 대구와 안동간의 철도 개통 운동에 동참하였고, 그밖에 대구와 경주, 대구와 대전 지역 철도 유치도 추진하였지만 실패한다. 대구 침산에 별장을 마련한 그는 훗날 침산에서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작대기를 짚고 대구 침산을 오르내리던 박중양이 조선사람을 괴롭히는 일본 관헌을 혼내곤했다는 '박작대기'의 일화가 최근까지 이곳 주변을 맴돌았다.[71] 韓日倂合 전후로 기세등등한 일본인 관헌들을 부정적으로 보던 그는 일본인 관헌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끌어내려 호통치기도 했고, 일본인 또는 조선인 관헌에게 밉보여 억울하게 구속수감된 사연을 듣고 풀어주기도 했다. 그밖에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뢰를 배경으로 실직자와 무직자를 취직시켜주기도 했다. 그가 실직자와 무직자 몇 인을 취직시킨 소문이 확산되어 각지에서 젊은이들이 찾아오자, 그는 각자 재능을 살펴보거나 사정이 딱한 이를 가려서 취직시키거나 업체, 관공서 등에 천거하였다. 1918년 9월에는 쌀값이 비싸져 품귀현상이 발생하자 9월 4일 주민구제를 목적로 조직된 미곡임시구제회에 참여, 임시구제회 위원 겸 상담역이 되었다. 일제 시대 전반기의 혼란 수습[편집] 3.1 운동 비판과 진압 가담[편집] 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3.1운동 진압 자제단 발족 신문 기사 3·1 운동, 자제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라며 이를 냉소적으로 평가하였다.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박중양은 이를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과 윤치호 등의 회의주의자들이 3·1 운동의 무모성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독립은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직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러고는 3·1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진압을 지휘하였다. 이어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귀가시키기 위한 단체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였다. 4월 6일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회'가 조직될 때 그는 단장이 되었다.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소요 사태(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불응하는 자와 과격분자는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한다는 서약까지도 했다. 바로 그는칠곡, 선산의 자제단 조직을 직접 주관하였다. 이 이후 경북도 참여관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독립 불가 의견에 내심 동조하던 윤치호, 서재필 등은 그의 3.1 운동에 대한 자발적인 진압참여를 계기로 그와 교제를 끊고 등을 돌리게 된다. 그는 만세 운동에 앞장서는 학생들이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이끌려갔다고 주장했다. 조선 학생들을 구금한 일본인 헌병대장에게 학생들의 석방을 탄원하였으나 이 헌병대장이 거절하면서 고압적으로 나오자 헌병대장을 혼내고 학생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그해 4월 13일 그의 자제회 설치 활동에 분개한, 대구 계성중학교 중퇴생 이영식(李永植)이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 경고장을 보내기도 했다.[72] 같은 날 4월 13일 김천의 독립운동가 김수길(金壽吉)은 대구에서 박중양이 자제단을 만들어 만세 시위를 저지하려는 행동에 대해 규탄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암살 위협'을 담은 경고문을 박중양 등에게 발송하였다.[73][74] 한편 박중양은 3.1 운동에 참여한 일부 학생들의 신원 보증을 서주고, 이들의 석방, 일본 유학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1919년 9월 3.1 운동 진압, 해산에 참여한한 공로로 그는 총독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내사[편집] 자제단의 발족과 3.1 만세 운동 진압으로 그는 심한 비난, 성토를 당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진압 이후 다시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으며 1920년 2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재선되었고, 그해 5월 대구청년회 발전 기금으로 5원을 기부하였다.[75] 그러나 1920년 무렵 그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감시, 내사를 당하게 되었다. 1920년초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은 조선인 관리를 개인별로 심사하여 인사 이동을 대폭 단행하였다. 이때 많은 조선인 관료 가 면직 되고 친일성을 인정받은 자들이 대폭 승진 하였다. 또 아첨과 충성심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자 들도 많았다. 그리고 조선인 관리에 대한 감시가 강화 되었다.[76] 그러나 아첨과 말재주가 없던 박중양은 오히려 총독부로부터 감시를 당하게 된다. 1920년초, 당시 조선인 관리는 하급자는 물론 웬만한 상급의 친일 관료 마저도 끊임없는 감시아래 놓여 있었다. 예컨대 조선인 도지사 중에는 박중양도 그 감시 대상이었다 한다.[76] 그해 5월 12일 중추원 참의직을 사직하고 대구 침산동으로 낙향했다. 중추원 찬의,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토지를 매입해 농사를 짓던 그는 사과 과수원과 옥수수, 감자 농사에 전념하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한 퇴비와 방재약을 주어 농사를 지어 수확이 좋았고, 그는 자신이 농사지은 작물을 걸인(거지)과 부랑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공짜로 더 달라고 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11월 12일 중추원의 중추원 일본 시찰단원 17명의 한 사람에 선발[77], 일본을 방문하였다. 1920년 12월 일본 내각총리 하라 다카시(原敬)에 의해 소환되었다. 총리 하라 다카시는 박중양을 만나 말하기를 "일본은 조선인을 관리로 삼아 등용할 뿐만 아니라 장차 조선인으로 하여금 내각의 임원으로 참여시켜 조금이라도 경계의 구분을 없애려는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해 잡지 천고(天鼓)는 "조선인이 분투하고 소망하는 것은 즉 독립인데 한낱 내각의 일원으로써 조선인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황해도지사 재직, 수해 사태 수습[편집] 1922년 황해도지사 재직 시절 일본 간토 대지진 현장 간토 대지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만세 운동을 진압하거나 자제할 것을 촉구하여 사태의 확산을 방지하였는데도 그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끊임없는 의심과 감시를 당했다. 그는 은인자중하며 외부 활동을 삼가고 농업에 전념하였다. 1920년부터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후원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다시 관직에 나가 1921년 2월 12일 고등관1등(高等官一等)에 올랐으며, 황해도지사(黃海道知事)로 부임하였다. 그해 9월 황해도에 수해가 발생했으나, 피해상황을 바로 확보하고 조선총독부에 구호물자를 요청하는 한편, 수재민 구제를 신속히 처리하여 바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황해도지사가 되자 황해도 해주에 학교와 병원, 폐병과 내과, 결핵을 치료하는 전문병원 유치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황해도에 문맹자를 구제하기 위한 신식 학교 설치를 도와줄 것과 황해도가 개성의 예성강포구와 가깝고 철도의 개통으로 2,3시간 안에 서울에 근접할 수 있는 지역임을 들어 황해도에 병원을 유치하는데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충북지사 재직과 관동대지진 수습[편집] 1925년 무렵 1923년 2월 24일 충청북도지사(忠淸北道知事)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 해 7월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 평의원에 추대되었다. 충청북도지사로 부임한 직후 그는 충주와 청주에 신식 병원을 유치할 계획을 세우지만, 중도에 사퇴하여 병원 유치 계획은 중단되고 만다. 1923년 6월 그는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로 휴양을 나갔다가, 박석고개에 이르러 비가 와서 자동차가 산을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도지사의 신분으로 "어찌 차에서 내려서 진흙을 밟느냐"며 하차를 거부하고 군수 김재호에게 인근 농촌에서 소를 동원하여 차를 끌게 하였다. 그러나 차가 움직이지 않자 바로 '명승지로 가는 길에 자동차 하나 자유로이 통행하지 못하여서는 일도의 수치이라'하며 바로 공사를 명했고, 군수 김재호는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부역령을 동원해 공사를 시행했다. 그러나 농번기에 있던 농민들은 강제부역에 동원되면서 생계를 보장하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부역에 동원되어 불만이 쌓였고, 6월 중순 3백여 명의 보은군민들은 현장감독인 군청 기수(토목직 공무원)와 보은경찰청 순사를 난타하여 충청북도경찰청에 증원, 현장에서 40여 명의 농민을 체포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78] 그러자 동아일보 등 소수의 언론은 이를 보도하여 문제삼았다. 농민과 소를 강제로 동원한 일과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그는 지식인들로부터도 비토를 당하게 된다. 1923년부터 충청북도도지사 박중양이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휴양을 다녀온 뒤 계속 자신의 휴양지, 유흥지로 사적으로 남용하였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비난하고 기사화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때 윤치호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조선총독부 당국에 사실대로 보도한 민족의 정론인 동아일보를 처벌해서는 안된다며 동아일보를 비호하였다. 1923년 청주의 독지가 김원근의 대성학교 설립을 후원하였다. 훗날 김원근의 반민특위 진술에 의하면'1923년 당시 집 옆에 영정보통학교(塋町普通學校)가 건너편에 있었는데, 입학 시기가 되면 불과 100여 명 수용에 지원자는 1,000여 명 되어 보기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으므로 지사 박중양(朴重陽)을 방문하고 학령아동으로 미취학자를 구제키 위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원하였더니 기본금 조성할 것을 묻기에 시설 일체를 본인이 부담할 것을 거하고, 우선 청주 교동에 있는 천도교회당 약 12평을 후에 양옥으로 축조해 준다는 조건부로 빌려 신입생 150명을 수용하여 2부 수업을 실시하며 일방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 200평 교사를 이듬해까지 완성시켜 정식 인가를 받았다'고 하였다. 김원근은 사립학교였음에도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거나 학부모에게 돈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교육, 계몽을 통해 실력을 쌓는 것이 우선이라 본 그는 김원근의 학교 설립을 가상히 여겨 박중양은 그 자신의 월급을 10분의 1할씩 떼어서 1924년 김원근에게 매달 보냈다. 1923년 10월에는 관동대지진으로 재일 조선인이 큰 피해를 입자 조선인들에 대해 일본인들이 뭐라 하거나 말거나 '유언비언에 현혹되지 말라'는 유고(諭告)를 발표했다. 이어 그는 관동대지진 등에 대한 위문 단체에 기부금을 납부하고, 일본인들에게도 조선인들과 관동 대지진은 무관하며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묵살되었고 일부 조선인들은 관동대지진의 배후로 몰려 처형당한다. 1923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문관보통징계위원회 위원장와 내무국 보통시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속리산 도로 개통[편집]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의 속리산 말티고개 말티고개, 속리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말티고개는 일제 시대인 1923년까지만 해도 우마차 정도만이 통행할 수 있는 작은 길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충청북도 지사인 박중양이 법주사를 방문하기 위해 말티고개를 넘으면서 불편함을 느끼자 보은군수인 김재호에게 확장보수 공사를 지시하게 되면서 처음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79] 김재호는 당시 농번기임을 들었지만 그는 도로 개통을 지시했고, 이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 임농부역에 분개한 농민 기수와 순사를 난타급하지 아니한 산길을 닥고자임농시에 치도를 명령한 지사 사건의 전도는 매우 험악충청북도 보은군에서는 도댱관 박중양씨로 인하야 큰 분란이 이러낫다 이제로부터 약 일개월 전에 풍류를 즐기는 충청북도 지사 박중양씨는 자동차를 모라 보은군 속리산 속에 잇는 명찰 법주사를 유람차로 나섯섯다 먼저 보은읍내에 이르러 관민의 환영을 밧고 군수 김재호씨의 안내를 밧아 속리산을 향하얏셧다 본시 보은읍에서 속리산 사히에는 “박석틔”라하는 큰 고개가 잇서서 도저히 자동차로는 넘어가지 못 할 곳이엇섯다 그러나 당대의 일도 댱관으로서 엇지 차에서 나려 흙을 발브랴하는 생각이 드럿든지 박중양씨는 긔어코 차에서 나리지를 안코 촌가에 가서 소를 꺼러다가 자동차를 꺽러넘기게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직히게 되얏섯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이 덜 풀닌 박지사는 김군수를 보고 명승디로 가는 길에 자동차 하나히 자유로 통행 하지 못하야서는 일도의 수치이라 하며 불일내로 공사를 시작하야 곳 자동차가 통행을 하게하라고 엄명을 하엿다 지사의 명령이라 일개 군수로서 억이는 수 업스닛가 김군수는 즉시 금월 초순부터 부역을 푸러 공사를 시작하얏는대 본시 이 고개는 비록 자동차는 통행치 못하나 인마는 임의로 통행되는 곳이며 그 고개는 다만 속리산 법주사 외에는 다시 통한 곳이 없는 중요치 안은 길이었다. 그러나 지사의 분부임으로 전군 만여호의 부역을 풀게 되는 때는 마츰 첫여름임으로 농가의 뎨일 밧분때이다. 일반인민들은 백성의 생명을 보장하는 농사를 못 짓게하고 이길을 닥글 지급한 필요가 어대잇는가하야 매우 울분히 역이든 중 덕욱히 가튼 군에서도 회남면, 회북면 가튼곳은 부역장까지 왕복이 근백여리나 되니 인민의 피해와 관란은 이르르길이 업섯다 과연 지난 십일일에 군청 토목기수 모 일본인은 원악 돌연히 시작한일임으로 예정이 스지 못하야서 인민에게 일정한 지뎜에 일을 식히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변덕을 피움으로 갓득이나 울분히 역이든 삼백여명 인민들은 마참내 그 기수에게 몰녀드러 란타를 하고 그 싸홈을 말니랴하든 순사 세사람까지 란타를 하야 중상을 당하게 하얏다 이 급보를 들은 충북 보은경찰서는 충청북도경찰부의 응원까지 청하야 전원 총출동으로 현장에 급행하야 임의 사십여 명을 검속하고 목하계속 거거중이니 사건의 전도는 매오 위험하다더라. ”   — 동아일보 1923일 6월 16일자[79] 바로 공사에 들어가 그해 7월 속리산으로 오르는 현대식 2차선 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길이 구불구불한데다가 산사태 등으로 계속 문제가 발생하였고, 개보수가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공사는 1931년에 끝났으나 여전히 자동차가 손쉽게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확장 공사 완공 후 시승을 하던 박중양이 처음 공사를 지시했을 때처럼 결국, 소를 자동차에 대어 끌고 올라갔고, 대부분 사람들도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80] 속리산 도로 포장공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가에서 소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자동차를 끌게 한 것과 농번기인데도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한 일로 폭동이 터질 위기에까지 직면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충주에 국도를 건설하기 위해 농민들을 징발하여 도로를 닦았다. 그런데 농번기에 농민들을 징집하고 임금을 주지 않자, 충주의 지역 유지 예남 홍승대(蘂南 洪承大)는 박중양을 상대로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 소송을 제기, 승소판결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속리산 성추문 사건과 퇴직[편집] 속리산 여승 변사 사건 보도 1924년 11월초에는 속리산 속리사에서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감방주사, 각 부장과 신문기자 등을 대동하고 속리산에서 주연을 개최했는데, 총독 내외와 수행원들이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여승 양순재(梁順在, 20세)를 데려가 성관계를 하였다. 그러나 양순재 여승은 그 날로부터 실종되었다가 어느 구석 승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물의를 빚었다.[81] 그러나 아무도 이 일을 언급하지 못했고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5년 3월 동아일보 등 소수 언론만이 이 내용을 그대로 폭로했고, 이는 곧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다. 여승 변사사건이 문제가 되면서 3월 31일 도지사직에서 인책 사퇴한다. “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사이에는 제2금강이라고도 일컬을만치 물맑고 산맑은 속리산이 있는데 그 중에는 승방으로 이름높은 속리사로부터 이래 5백년 동안에 여러 명사의 발가죽을 멈추게 되어 깨끗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속리사는 총독부 관리 충북도지사 박중양이가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된 이후로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나는 동시에 여러가지 아름답지 못한 풍설이 세상에 왁자하게 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기는 작년 11월 26일 사이토 총독 부처가 박지사의 안내로 송기 감방주사와 서강, 산본 등 각 부장, 기타 몇 사람의 신문기자와 함께 일행 열여섯 명이 보은읍을 지나 오후 다섯시 삼십분경 속리사에 도착하여가지고 그날밤 마침 달밝음을 기회로 하여 큰 법당을 치워놓고 주연을 여는 동시에 2백여 명의 여승 중에서 가장 젊고 여어쁜 여승 여섯 사람을 뽑아서 잔질을 시키어가면서 밤이 새는 줄을 모르고 질탕하게 노는 중 총독 부처는 얼마 후 침실로 돌아가고 그 후 거듭 박지사는 자리를 고치여 다시 주연을 펴기 시작하여가지고 여러 수행원 신문 기자들과 함께 끊일 사이 없이 술잔을 바꾸고 있던 중 박지사는 취기가 점점 더하여감을 따라, 놀란 양과도 같이 아무 소리 없이 한 구석에 꿇어앉아 있는 여승 양순재(20)의 고운 얼굴에 자주 날카로운 추파를 보내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옆으로 같이 끌어다가 앉히고 부드러운 손목을 힘있게 움켜잡고 앉았다가 새벽 네시경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은 모두 피곤과 취기를 못이겨 모로가로 쓰러져버린 틈을 타서 박지사는 양순재의 손목을 잡은 채로 일어서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이십칠일 아침에 시치미를 떼고 일행과 함께 속리사를 나와버리고 말았다.양순재는 그때 박지사에게 끌려 나간 후로 도무지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하여 일행이 떠나는 그 때에도 많은 여승 중에 그 얼굴을 얻어볼 수가 없었으며 그 후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히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마침 내닷새 쯤 되던 날 아늑한 승방 한구석에서 시체가 되어가지고 나타나게 되었다. 젊은 여승의 죽음!! 그때 박지사의 그 일 그로부터 여러가지 풍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는데 자태의 어여쁨이 원수가 되어가지고 몸을 더럽히고 최후사지를 밟기에 이른 양순재의 생애! 어제까지 맑고도 그 맑은 부처의 여자로 멀고도 고생된 앞길을 걸어가려다가 한번 발을 그릇 옮기어 놓은 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 끝에 그와같은 길을 밟고야 말게 되었다. 여승과의 관계로 문제중에 들어있는 박지사는 재작일밤 총독과 함께 입성하여 작일 아침 열시차로 돌아갔다는데 가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풍설이 세상에 왁자하게 된 이상 어쨌던 한 도의 장관으로서 책임상 그 직에 그대로 있는것도 어렵고 겸하여 그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음으로 총독부의 처치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사임하기로 결심한 모양이라는데 이에 대하여 대총 내무국장은 아래와 같이 말하더라. "임의 그와 같은 일이 신문지상에까지 발표된 이상 직무상 어디까지 조사는 하여볼 작정이나 그 개인관계로 보아서는 누년의 교제도 있고 친밀한 사이일 뿐만 아니라 조선총치상 적지 않은 공로가 있음으로 너무 그것을 힐책하여 앞길을 그릇틔어주고는 싶지 아니합니다. 어쨌든 자기로서도 그 직을 사임하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고 할 것이올시다" ”   — 동아일보 1925년 03월 06일자 당시 충북지사였던 박중양이 속리산으로 순시를 나와 법주사에서 주연(酒筵)을 열고 한 비구니에게 추문을 걸어 결국, 비구니가 자살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는 기사이다.[82] 이는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법당에서 여승과 성추문을 벌인 것과, 여승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고 조선총독부 내무국장과 경무국장은 이를 수습하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곧 시말서를 제출한 뒤, 1925년 3월 31일 도지사직을 사퇴한 뒤 휴직계를 내고 문관분한령 제11조 제1항 제4호에 따라 휴직했다. 1927년 2월 15일 그는 3월 1일부로 경성부부부윤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여승 변사사건이 계속 문제가 되자 1927년 2월 18일 사퇴의사를 밝히고 사직서를 제출,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밀주 단속 무마와 고미술품 수집[편집] 박중양의 호신 불상(그의 선조 대대로 전해오던 것이었다 한다.) 1927년 1월 남선여행객의 방문을 받은 박중양 1925년 5월 불교계의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불교단 대구지부 고문과 독립사상과 사회주의 배척을 기치로 발족한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의 경상북도 지부 상담역을 밭았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박중양은 순종의 죽음을 사실상 조선이 영원히 멸망한 것으로 보았다. 1927년 2월 중추원 칙임참의([83]中樞院勅任參議)로 임명된 뒤 1941년 5월까지 네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25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속리산 여승 변사 문제로 지탄받았지만 조선총독부로부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던 인물이지만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고, 일본인들까지도 그를 함부로 괄시하지 못하였다.[84] 1927년 11월 9일 대구상공협회의 조직에 참여하고, 대구상공협회 고문이 되었다.[85] 한편 그는 가정에서 밀주를 만들다가 적발된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또한 담배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세금 면제를 적극 도와주기도 했다. 그가 애주가, 애연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치하에서도 밀주는 엄벌에 처할 정도로 단속이 심하였다. 그러나 단속 때면 사람들은 박작대기 집에 밀주 항아리를 갖다주곤 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84] 술을 좋아했던 그에게 밀주를 갖다주면 그는 밀주 단속이 나온 순사들을 붙잡고 시간을 끌어주었다. 골동품과 고미술품을 감정할 줄 알았던 그는 고미술품의 해외 반출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사들이기도 했다. 이는 6.25 전쟁 와중에도 박중양이 각별하게 숨기고 아껴서 1950년대 고서 감정가 석진수가 방문할 때까지도 대부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후일 그가 수집한 고미술품은 아들에 의해 석진수 등에게 판매되었다. 석진수는 '이런 물건을 보려고 꿈에 용을 봤구나 하는 생각에 서화, 고서, 나전칠기 등 수집점을 값을 깎지도 않고 일괄해서 구입했다. 화폐개혁 전 값으로만 쳐서 수백만원이었다.[84]'고 한다. 1927년 겨울에는 약초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와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순례하기도 하였으며, 경성부의 고미술품상을 찾아가 서화를 구입하였다. 복직과 일제 시대 중반[편집] 1928년 다시 황해도지사가 되었으며, 다시 황해도지사가 되자 황해도 해주에 폐병과 내과, 결핵을 치료하는 전문병원 유치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 1928년 10월 27일 해주의 감리교 폐병요양원이 설립되자 황해도지사로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했다.[86] 개원식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이던 오긍선(吳兢善)과 황해도지사 박중양, 그리고 황해도 경찰부장 겸 위생과장 사카키의 축사가 있었다.[86] 바로 그 날 세브란스병원에서는 항결핵학회가 조직되고 있었다.[86] 세브란스 병원에서 항결핵학회가 조직되자 10월 28일 박중양은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하여 항결핵학회의 목적과 연구 내용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해 11월 쇼와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 11월 8일부터 11월 13일, 14일, 21일에는 조선민보사에서 개최한 임업정책 토론회에 참석, 조선의 임정(林政)을 강연하였다. 1929년 1월 다시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고,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朝鮮博覽會評議員)에 선임되었다. 그해 대구남문 철거작업 기공식에 참석하였다. 박중양은 늘 조선인들에게는 "대소관원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질서의식, 시민윤리 등 공공정신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요령과 패거리 문화, 속임수가 횡행하는 금일의 수준으로는 독립은 커녕 인간답게 사는 것도 힘든 일이라며 한탄했다. 그는 여러 차례 총독부에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거둘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일본인에게만 우대혜택을 주고 조선인들은 차별하느냐"며, "조선 백성이 일본의 신민이 되기를 바란다면 조선인에게도 내지인과 같은 기회를 부여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총독부가 "조선인들을 차별대우, 무시하는 정책을 계속한다면 조선인들은 자연스럽게 독립 운동에 동참할 것"이라 하였다. 그밖에 그는 황민생활사의 장로(고문)직을 역임하였다.[87] 조선인 참정권 운동[편집] 1920년대 초부터 그는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을 허용해 줄 것과 자치권을 허용해 줄 것을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에서는 그를 면종복배하는 인물로 보고 경계하였다. 1925년 경성일보 사장인 소에지마 미쓰마사(副島道正)는 "경성일보"를 빌려 '조선의 자치론'을 제기했다.[88] 이에 박중양은 현명한 결단이라며 환영하였다. 소에지마 미쓰마사는 조선인 2천만 명을 대표해서 100명의 식민지 출신 의회 의원을 일본의회에 보낸다면 의회가 민족적 색체를 띠게 될 것이므로 참정권은 반대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조선에 식민지 의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88] 즉 그는 "자포자기 상태인 조선인에게 건전한 희망과 내실 있는 사상을 주며, 합리적인 수단으로 그 민족주의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88] 도지사를 지낸 박중양은 사이토에게 편지를 보내, 대의사(代議士 : 일본 중의원 의원[89])를 몇 명 만이라도 보내도 좋으나 조선의회를 설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밀었다.[90] 그는 조선인도 일본의 국민이라며, 이규완, 민원식, 김명준 등이 요구한 조선인 참정권 허용이 정당하다고 총독부와 일본인 지식인들을 상대로 설득하였다. 도지사 퇴직 이후[편집] 1928년 12월 도지사직을 퇴직한 이후 그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어 수당을 받았지만 그는 선조의 묘소가 있던 대구부 동중면 침산동의 오봉산을 매입한 뒤, 대구 침산동 침산 주변의 토지와 경기도 양주군의 땅을 매입하였으며, 토지 매입 후 남은 수당들은 자선단체에 기부하였다. 그는 중추원 참의 수당에 의존하지 않고 대구 침산에서 직접 과수원과 옥수수, 감자 농사를 지었다. 양주의 땅 외에 대구 근교의 땅은 직접 다니면서 부인과 일본인 첩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었다. 1930년 2월 22일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칙임참의에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일본인 여자를 후취로 들였는데, 삼천리지 1940년 제12권 3호(1940년 3월호)에 내지인 여자를 취처한 고등관급 이상 명단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32년 1월에는 그를 후원하자는 뜻에서 특별히 침산친목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91] 1932년 2월에는 침산계를 조직하여 친목단체로 활용하였다.[92] 박중양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북구 침산동 산16-1 임야 등 37필지 총 8만 2,082m₂(총 2만 4,829.805평)은 2007년 8월 13일부로 국가 귀속결정 처분을 받고 강제 압수되었다.[93] 압수될 당시 토지들의 평가액은 21억 8565만 3천원 정도였다.[93] 일제 시대 후반[편집] 중추원 활동[편집] 박중양의 친필 휘호 박중양, 1932년 3월 1931년 9월 조선총독부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1933년 6월 13일 다시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칙임참의에 임명되고, 1933년 7월 중추원의 시정연구회 제도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8월 3일 정오 12시부터 안동군 봉옥읍(蜂屋邑)의 수해현장을 위문하였다. 군수와 경찰서장에게서 수해현황을 청취한 뒤 봉옥읍의 수해현장을 위문하였다.[94] 수해현장 위문 후 안동시민의 사활문제인 낙동강제방을 긴급히 완축하여 1일이라도 급속히 일반백성의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위정자의 제1최대급선무라고 소감을 밝히다.[94] 1934년 11월 시중회(時中會) 평의원을 맡았다. 시중회는 1934년 8월 '내선일체를 근간으로 신생활을 통해 신흥조선을 건설'한다는 취지하에 최린 등 천도교 신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자치운동단체다. 이듬 해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95][96]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에 면직된 일이 있었지만 조선총독부는 그의 재능을 각별히 신뢰하였다.《조선공로자명감》에서 "이토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 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는 박중양이다."라는 평가를 받았고[97],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술을 좋아하였지만 일체의 뇌물을 받지 않은 탓에 조선총독부는 그를 각별히 신뢰하였다. 日·中전쟁 전후[편집] 1936년 중추원 고문이 되고, 1936년 5월 결핵예방협회 경상북도지부에 가입, 평의원이 되었다. 1937년 7월 日·中전쟁이 발발하자, 박중양은 1938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日·中전쟁을 두고 일본의 중국 진출이 가능 여부가 시중의 화제가 되자 그는 몽골이라고 중국을 지배하고 백년을 다스렸고, 여진족이라고 중국을 지배하고 금나라가 백년, 청나라가 3백년을 다스렸거늘 일본이라고 대륙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고 하여 좌중을 압도하였다. 1938년 8월 칙령 관제로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가 재개편되었다. 박중양은 1938년 8월 27일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위원[98]으로 재위촉되었다. 이 때는 김연수, 박흥식, 윤덕영, 최린, 현준호, 한상룡 11명의 위원이 조선인이었는데 박중양은 그 중 한명이었다. 그해 9월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가 총독의 자문사항 18항목의 심의, 자문 목적으로 3개 분과로 나뉘자, 박중양은 문화, 사회분야 와 일반사항을 다루는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제1분과 상임위원을 겸임하여 내선일체의 강화와 철저화, 조선, 만주, 북지(北支)간의 사회적 연계 촉진, 재중국 조선인의 보호, 지도, 반도 민중의 체위 향상과 생활 쇄신, 농·산·어촌 진흥운동의 확충·강화, 사회시설의 확충, 노무의 조정 및 실업의 방지·구제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12월 19일 경상북도 체위개선위원회 고문이 되고, 그해 12월 19일 경상북도 체위개선위원회 산하 달성군 체위개선지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5월 미나미 지로 총독이 창씨개명을 계획하자 시중의 반발을 우려하여 시간을 두고 서서히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다. 6월 4일 다시 중추원 참의에 재임명되었다. 8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가정내 분쟁사건을 비밀리, 원만히 해결할 목적으로 인사조정령을 공포하고,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을 위촉할 때 장직상 등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으로 위촉되었다.[99] 1940년 2월 11일 일본 기원절 행사를 도쿄와 경성(현 서울)에서 개최할 때 조선인 유지의 한사람으로 초청되었다.[100] 이는 2002년 3월 10일 MBC-TV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은 일본에서 일본의 건국 2600년 기념행사 초청인사 명단을 수록한‘광영록’이라는 책자를 최초로 입수하여 밝혀냈으며[101], 박중양 외에도 당시 보성전문학교교장 김성수,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김활란,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등 조선인 초청대상자 300명의 명단이 실려있었다.[101] 태평양 전쟁 초반[편집] 태평양 전쟁 1945년 6월 17일자 매일신보. 창씨개명, 태평양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0년 초 그는 조선총독부에 조선인의 참정권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고, 조선총독부는 그의 건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940년 5월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해 8월 31일 박충(朴忠, 호추)으로 창씨개명하였다. 이어 호추 시게요(朴忠重陽[102])라 이름하였다. 그는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한다. “ 언젠가 무슨 회의든가에 보니 총독, 총감도 다 열석한 석상인데 박중양이 당당합데다. 예전 도지사 당시에도 내무부장, 경찰부장이 쩔쩔 매였다는 소문이 있느니만치 철저하게 이야기 하더군요. 말에 질서 있고 사리를 잘 분변하는 말이고, 만좌가 경청하더군요. ”   — "총독부 기자 좌담회", 《삼천리》 제12권 제3호 (1940년 03월 01일자) 1940년 당시 총독부 출입기자 좌담회에서 매일신보 기자 김인이(金麟伊)는 그가 총독과 정무총감이 열석했는데도 당당했으며 말을 조리있게 잘 했고, 착석한 이들이 그의 말은 경청했더라고 하였다.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이 되었다. 1941년 1월 8일자 경성일보에 "이론이 훌륭해도 실행이 없으면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지금의 "시국은 백 가지 이론보다 하나의 실행을 요구"한다는 신년 소감을 밝혔다. 1941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내정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일본 귀족원에는 이미 1932년 12월 박영효가 칙임된 예가 있었고, 1941년에 윤덕영(尹德榮)과 박중양이[103] 내정되었지만, 박중양은 귀족원 의원직을 사양했다. 그 해 5월 12일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943년 10월까지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41년 5월 17일 오전 10시부터 개최된 영일군 포항읍 두호리에서 열린 경상북도 수산시험장(慶尙北道水産試驗場) 신축 낙성식에 참여하였다.[104] 9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해, 중추원 부여신궁공사 근로봉사 노역에 참여하였다. 전시 체제기 활동[편집] 박중양, 1930년대 후반 무렵 조선임전보국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105]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가 조직되자 경북지부 위원이 되었다. 그날 결성된 임전보국단 대구지부 고문으로도 선임되었다. 1942년 11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3년 4월 천황의 만세무궁을 기원하기 위해 조선신궁에서 열린 천장절제(天長節際)에 참석했다. 같은 해 9월 전시 최대 관변 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여(參與)를 맡았다. 또한 싱가포르까지 가서 일본군을 위문하는 조선인 위문단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때의 여비는 충청남도 공주의 김갑순(金甲淳)이 여비 일체를 부담하였다. 1943년 1월에는 국민정신총력연맹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했고, 그해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직접 싱가포르를 다녀왔다. 1943년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순회하였다.[3] 1943년 10월 20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피선되었다. 11월에는 《매일신보》 등의 언론 매체에 임시특별지원병제도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기고하여 조선총독부의 징병제를 지지하고 적극 협력할 것을 선전하였다. 1943년 11월 학병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중추원에서 격려대를 구성할 때, 중추원 격려대원으로서 박두영(朴斗榮) 등과 함께 경상남도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1943년 8월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부모의 묘를 대구 오봉산으로 이장하였다. 이 합장묘는 박중양이 1943년 8월 경기도 양주의 선영에서 대구 침산으로 이장해 온 것으로 90년대 중반 북구청에서 오봉산 등산로를 만들 때 개장을 권유했으나 후손들이 거부, 옆으로 등산로가 나기도 했다.[106] 이 묘는 침산공원내 오봉산 산 16의 28[106], 오봉산 다섯 봉우리 중 1봉과 2봉 사이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왼쪽편 100m 정도 지점에 있었다.[106] 1943년 10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1945년 8월 광복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3500~4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그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을 듣고, 당연한 결과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같은 해 11월 학병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중추원 격려대원으로 경상남도에 파견되어 홍보 등의 활동을 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이를 일축했다. 동시에 조선이 독립하더라도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며 냉소적으로 보기도 했다. 1944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다.[10] 1944년 훈1등의 서훈(敍勳)을 수여받았으며 다시 중추원 부의장에 재선출되었다. 1944년 6월 국민총력조선연맹 고문으로 추대됐다. 같은 해 8월 박흥식 등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朝鮮飛行機工業株式會) 설립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대주주의 한 사람이 되었다.[107][108] 그러나 그는 대주주 중에서는 소액이었는데 박흥식의 1949년 2월 23일의 반민특위 재판 당시 박흥식의 진술에 의하면 김연수, 방규환, 박춘금 3인은 각각 1만 주씩 소지하였고, 백낙승은 5천 주를 소지하였고, 장직상은 4천 주를 소지하였고, 민규식, 김정호, 방의석, 한상룡은 각각 3천 주를 소지하였고, 박중양은 1천 주를 소지하였다 한다. 참정권 허용 감사사절 파견과 귀국[편집] 귀족원 (일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5년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1945년 4월 3일 박중양은 일본 정부가 귀족원령을 개정하여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7명을 조선인으로 칙선할 때, 박중양은 조선인 몫의 귀족원 의원의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귀족원의 칙선의원 7명은 1945년 4월 3일에 선임되었는데 김명준(金明濬), 박상준(朴相駿), 박중양, 송종헌(宋鍾憲), 윤치호(尹致昊), 이진용(李珍鎔), 한상룡(韓相龍) 등이었다.[109] 한편 조선인 몫의 하원격인 중의원 의원 23명은 의회가 만기되면 선거에 의해서 선출될 예정이었다.[109] 조선인 참정권이 시행되자 그는 환영의사를 표명하였다. 1945년 4월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110] 이어 박중양은 윤치호를 수행하여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서울을 출발, 일본으로 갔으며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110]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은 일본 황족, 화족 의원과 천황이 직접 선임하는 칙선 및 일정액 이상 국세 납부자로 구성되었다. 조선인 출신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은 1945년 4월 이전에 선임된 3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에 그칠 정도로 특별한 예우를 받는 존재였다.[111] 그러나 곧 이탈리아 왕국의 두체(Duce, 최고통치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과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는 당연한 결과로 봤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연이은 몰락을 보면서 일본 제국 역시 머지않아 몰락할 것이라고 내다보게 되었다. 1945년 6월 국민의용대 결성식에 참석한 뒤 7월 국민의용대 고문을 맡았다. 6월 17일 귀족원 회의에 참석차 도쿄를 다녀왔다. 그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추진을 무리수라고 봤고, 군국주의 정치인들의 오판이라 지적했다. 1953년의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오판하여 천황을 잘못 보필했다는 내용의 일기 사본을 편지로 보냈다. 이는 1997년 대구 출신 사학자 강태원이 일본 체류 중 입수하였다. 8월 10일 집안의 하인과 일꾼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어 내보냈다. 1945년 8월 14일 니시히로 다다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초대로 총독부를 방문,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패전 직후 조선반도의 치안 수습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8월 15일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경성부의 집과 재산을 처분하고, 남은 재산은 가방에 싸서 경성부 근처 보육원과 양로원에 각각 무기명으로 전달한 뒤 대구 침산동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독립 이후[편집] 독립 직후[편집] 독립이 되자 그는 시중의 성토를 당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56]"라고 항변하였다. 일본의 항복을 예감했던 그는 시중의 비난에 무덤덤하게 대응했다. 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시대 변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하였고, 또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말보다 일제시기가 훨씬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였고, 이완용에 대해서도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시중에서는 그에게 비난과 투석, 멱살잡이를 가했지만 그는 의연히 대응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심 불쾌하게 여겨, 대구 부윤 허억(許億)에게 보낸 편지들 중, 한통에서는 시중의 평가가 가소롭고 불쾌하다는 뜻을 드러냈다. 1945년 8월 독립 직후의 이념대립을 보고 그는 "조선이 과연 독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냐"며 조롱하였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고 9월 23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면서 중추원 부의장직에서 파면되었다.[112]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잘나서 독립이 된것이 아니라 미군이 일본을 쳐서 우연히 독립된 것이며, 미국과 일본이 전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독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을 향해 조롱하였다. 이후 그를 영입하려는 제의가 좌, 우 양쪽 진영에서 있었으나 자신은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모두 거절하였다. 독립 직후 시중에는 그를 지탄하거나 멱살을 잡거나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란 나같은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을 처단하면 된다.'라고 외쳤다.[57] 또한 '나도 표리부동한 위선자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니 시원하게 죽여라'하고 항변하였다. 친일파 청산론에 대한 비판[편집]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고 12월 18일 아서 러치(Archer L. Lerch)가 미군정청 군정장관으로 부임하였다. 1945년 12월 20일 박중양은 이들을 찾아 면담을 요청한 뒤 따졌다. “ 좁은 조선이 남북으로 갈려 있고 특히 이런 과도기에, 숨은 인재를 찾기도 어려운데, 왜 있는 인재를 없애려 하느냐? 그러니 친일파를 처단한다고 떠들기보다 그 사람들을 잘 이용해 주시오. 그 사람들을 두고 누구를 데리고 일을 하겠소. ... 나같은 것은 친일파의 대표자이니 연령으로 봐도 그렇고 행적으로 봐도 그러니 어떠한 처단을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감수하겠다.[57] ” 후일 이를 듣고 찾아온 기자에게 그는 '친일파를 죽이라는 소리가 하도 높으니까, 그래서 내가 군정청의 하지와 러취, 또 이승만(李承晩)을 보고 말한 것이 있다.[57]'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일부 정객들이 "독립운동자연, 자칭 애국자연 하면서 허장성세를 부린다며 독립은 우연한 기회에 주어진 것이며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중에서는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고 그는 비난을 무시하고 오봉산 근처로 낙향하였다. 또한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아버지 박정호 내외의 묘를 선조 묘소가 있던 오봉산 능선으로 이장했다.[113] 이후 대구시 침산동 침산초등학교 뒤편 야산의 침산장에서 은거하였다. 1948년초 남북협상론과 단독 정부 수립론이 나오자 "북위 38도 이남 지역이라도 단독 정부를 우선 수립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6]"고 하였다. 그러나 건국 후,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6]'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미국의 공, 미국의 노력에 의해서라고 혹평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반민특위 기소와 석방[편집] 반민특위 제소와 재판[편집]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출두차 서울역에서 내리는 모습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공판 모습.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해방 이후, 그는 대한민국 건국 후까지 생존해 있어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수사관에 의해 체포된다.[114] 이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월 말 박중양 외에도 여러 지방 거주 거물급 인사들이 체포되었다.[114] 49년 반민특위 특경대원들이 반민족 부일행위의 죄목으로 박중양을 연행하러 갔을때 박중양은 그때까지도 히로히토 천황의 사진을 안방에 모셔놓고 있었다고 한다.[3] 당시 그는 최고위직을 지낸 고령자의 한 사람이었다. 체포되자 그는 '나는 구치소에서 죽을 것이며 죽어서 내가 결백했음을 밝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사적으로 축재한 적이 없음은 하늘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를 태운 자동차가 특위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6척 거구의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모습이었다. 그는 특위의 정문을 보더니 "아, 고꼬가무까시노 다이이치긴꼬다네. 소! 소!(아, 이곳이 옛날의 제일은행이구나. 그래! 그래!)". 그는 말이고 행동이고 완전히 일본인 그 자체였다. 일본식 생활문화가 몸에 밴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백작 영감, 이마모 무까시가 나쓰가신데스까?”(지금도 옛날이 그립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우물쭈물거리다 2층 검찰부로 올라갔다.[10] 1948년 10월, 반민특위 투서함. 반민특위에 체포된 일제 시대 당시의 정객과 기업인들 중에는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이에 박중양은 '그만큼 영화를 누렸으면 됐지 뭐가 무서워서 떠느냐'며 일갈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해 '시대 변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하였고, 또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말보다 일제시기가 훨씬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였고, 이완용에 대해서도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 하였다. 수감과 심문 중 그는 초연한 자세로 심문에 응하였다. 반민특위의 조사관들은 그가 반성을 모른다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반성해야 될 이유가 없다며 응수했다. 반민특위가 압수한 자료들 중에는 1900년대 초부터 쓴 20권이 넘는 일기장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10]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당시 그는 당당하게 '전 국민이 친일활동을 할수밖에 없지 않았느냐?'라며 강변하기도 했다. 수감 생활[편집] 박중양 초상화 서대문형무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9년 1월초 박중양은 불구속 상태에서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었다.[115] 이어 정식 체포절차를 거쳐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9년 1월 그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재판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그는 반민족성을 지적하는 반민특위 판사들에게 호통을 쳐서 위압을 가했다. 그는 자신이 반민법에 의해 잡힌 것은 "시대 변혁의 희생이라, 역사는 윤환(輪環)하고 인사는 변천한다. 고금왕래(古今往來)로 크게 본다면 일소(一笑)에 불과한 희비극(喜悲劇)이다"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는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에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改新)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라고까지 했으며,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 하였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도중 그는 비단 이불 또는 참새 털로 된 이불을 덮고 자서 다른 수감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월 29일 대구에서 상경한 일본인 첩은 매일같이 수사관들에게 와서 이불을 차입시켜달라고 아우성쳤다.[116] 이불 속에 흉한 것이 들어있으리라고 의심한 반민특위 수사관들은 처음에 이불 반입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부인이 형무소 앞에서 간수들을 붙잡고 며칠을 울며 호소하는 읍소작전끝에 비단이불을 차입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117] 일본인 첩이 여러번 눈물로 호소한 끝에 비단 이불은 특별히 반입이 허용되었다. 1949년 2월 3일 박중양은 이승만 대통령, 김구에게 나는 반역자가 아니라는 편지 서한을 보내려다가 반민특위 조사관에게 적발되었다.[118] 재판과 가석방[편집] 공판 중 그는 '국민의 신변과 안전,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그러한 정부에 왜 충성해야 하느냐?'며 항변하는 한편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파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아가 이완용은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며, 이완용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희생된 역사의 희생자라고 강변하여 논란을 야기하였고, 방청석에서는 비난과 소란이 벌어졌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활하였으며, 며칠 후 재판을 받던 도중 폐렴이 발생해,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통원, 형무소와 서울대를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수감 중에도 일기를 쓰거나 자신은 반성할 것이 없다는 취지의 서한을 작성하다 교도관에게 발각되어 압수당했다. 박중양은 반민특위에 의해 구금되면서까지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신(改新)'을 주장했으며,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등 전혀 개전의 빛이 없었다.[71]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시간이 흐르자, 언론에서조차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탁월한 수완을 지녔던 희대의 걸물'로 박중양을 묘사하는 촌극이 벌어졌다.[71] 2월 9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 1949년 2월 14일 반민특위에 보석을 신청, 보석금을 내고 일시 석방되었다.[119] 그가 보석을 신청하자 다른 피의자들도 보석을 신청하여 특검과 반민특위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일본어 외에도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약간의 영어로도 대화할 수 있었다. 가출소 직후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5월 9일 다시 재기소되자 그는 다시 병보석을 신청했다. 1949년 6월 다시 반민특위에 소환되어 조사받았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해산되었을 때, 그는 별다른 처벌받지 않고 최종 병보석으로 풀려났다.[120] 그의 보석 신청은 여러차례 계속되어 받아들여졌고 그는 곧 풀려난다. 이후 그에게는 친일파라는 야유와 비아냥이 쏟아졌지만 그는 오히려 "일제 당시 살기 위해서 협력한 자들이 누구냐"며 항변하였다. 삼일절에 대한 조롱[편집] 만년의 박중양 한편 그는 3.1절을 기념하는 것을 위선적이라며 조롱하였다. '금일은 삼일절이다. 비 오는 가운데 식이 거행되어 시장, 도지사 등의 식사, 축사, 강연 등이 있었다. 참석자 중에 일정 시대에 관공서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큰 소리로) 호언한 것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시세 변천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활계희극의 광경이다.[121]'라며 비웃었다. 독립 직후부터 이완용의 묘소와 그 자녀들의 묘소에 가해지는 테러와 분묘훼손 행위를 보고도 '조선인의 민족성과 수준을 알수 있는 행위'들이라며 조롱하였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조롱했다. '해외에 망명했다가 한국이 독립된 후 귀국한 인사들 외에 3.1 운동 당시의 일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는 것이다. 또한 소수의 독립운동가들만의 노력으로 독립되었다는 시각은 허구이며 미국의 덕에 독립되었다며 반박하였다. 이어 '오늘날에 당하여 국가건설에 노력하는 것은 독립운동자이거나 아니거나 불문하고 차별은 없지만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자들이 3.1절 의식에서 떠들고 있는 것이 가소롭게 보인다.[121]'며 조소했다. 그는 일제 시대 후반 거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창씨 개명을 한 점도 지적, 일갈하였다. '일정 당시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 안한 자가 없다.[121]'는 것이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조선총독부에 부역하거나 협력, 협조하며 그 치하에서 살던 사람들이 독립 후 합심하여 일제에 저항한 애국자 행세를 하는 것'을 대놓고 조롱, 조소하였다. 3.1 절에 대한 조롱은 사회적인 분노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박중양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협박과 비난을 모두 위선이라며 외면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오봉산 은거와 정부 비판[편집] 박중양 재소환 보도, 대중일보 1949년 7월 30일자 2면 일소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석방 후 요양중이던 그는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122] 일기장이 반민특위에 의해 압수당한 후 그는 1946년부터 일기, 회고 비슷하게 써온 일부 글을 모아 술회라는 자서전으로 엮었다.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녔다 하여 주민들로부터 '박 작대기 영감'이라 불렸다. 또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던 오봉산 근처 땅을 사들여서 한때 오봉산을 박작대기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대구 오봉산 제일봉에 일소대(一笑臺)라는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 여생을 보냈다. 일소대는 후일 1996년 11월에 그의 후손들이 자진 철거하였다. 또한 바위에 일소대 라고 새겨둔 그의 친필 휘호는 파괴, 유실되었다.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1957년 1월에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이승만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 대구지검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에 의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았다.[123] 그는 신년사라는 책자를 발간, 경무대에까지 전달한 바 있었다.[124] 신년사에서 그는 이승만을 조롱했는데 뒤에 '행정수반인 이대통령을 모욕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124]'는 이유로 기소당했다. 9월 16일 검찰출두명령이 떨어졌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25] 그러나 그는 계속 이승만,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했고 결국 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중양 역시 피신하거나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텼다. 출판물 사건과 최후[편집] 해악 박중양 영정 1957년 1월 1일 그는 "미국인이 퇴거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봇짐을 싸느라고 분망할 것이다"라는 조롱섞인 신년소감을 경무대에 송부하였다.[126] “ ...(이하 중략)... 소련이 우세하고 미국인이 퇴거하게 되면 이승만 씨는 복짐 싸느라고 분망할 것이라. 위인걸사가 어디있으며 범용무위자가 수일까? 호언장어하는 자는 얼마나 잘하였으며 범용무위한척 하는 자는 얼마나 못하였을까?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장단은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하 중략)... ”   — 1957년 신년소감 중에서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함태영 등의 젊은 시절에 관해 비방,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기도 했었다.[127] 그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에 그는 '명예훼손이란 반대 세력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만든 괴상한 법'이라며 조소하였다. 또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력을 조롱하며 비꼬다가 경찰에 불려가기도 했으나 혐의없음 또는 고령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결국 1957년 10월 20일 박중양은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끌려가 심문, 한옥신 부장검사는 그가 고령인 관계로 정신이상이 온것이 아닌가 보고 소정신병원장에게 보내 그의 정신감정을 의뢰하였다.[128] 1957년 12월 4일 부장검사 한옥신은 대구정신병원에서 보내온 정신감정서를 접수하고 12월 5일자로 기소유예 판정을 내렸다.[129] 그러나 다시 그는 대구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감정을 받았다. 12월 8일 대구시내 소주영(蘇柱永) 정신병원장은 "심신 모약으로 노쇠상태[126]"라 진단하였다. 이는 대통령 이승만에게까지 직접 보고되었다. 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구인하여 정신병원에 넣으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산을 타고 피신하였다. 1958년 3월 3일과 3월 4일 강제로 서울경찰에 구인되어 성신대학 부속 성모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원에서도 완강하게 버텼고 결국 풀려나왔다. 그는 만년에 폐렴, 기관지염 등의 질환으로 고생하였다. 저서로는 회고록인《술회 (述懷)》와 그가 평생 쓰던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그밖에 문집이 있었지만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는 바람에 대부분 인멸, 유실되었다. 현재 박중양의 유저로는 《술회 (述懷)》,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박중양 선생 문서 (朴重陽先生文書)》 등이 전한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일기형식으로 쓴 회고록 〈술회〉에서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강변하며 자신의 행위를 굽히지 않았다. 대구 오봉산의 산장에서 은거하다가 1959년 4월 23일 경상북도 대구시 북구 침산1동 1652번지 원대부락 침산장 자택(현,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1동 1652)에서 폐질환과 과로 등으로 사망했다. 8월 23일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한때 그가 1955년경 또는 1958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사후[편집] 그가 경기도 양주군에서 이장해온 부모의 합장묘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산16-28에 소재하였음), 2004년 그의 종손자에 의해 화장되었다. 시신은 부모 내외의 합장묘와 선조들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대구 북구 침산동 산16번지 오봉산 제2봉에 묻혔고, 부인의 묘소와 합장으로 조성되었다. 사후 친일파의 거두나 수괴 쯤으로 비판받고, 독립 이후에도 반성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지식인들은 그를 지탄하였다. 그러나 대구 지역에서는 그가 지팡이로 일본인들을 혼낸 일, 도지사와 경찰서장까지도 함부로 다루지 못한 것, 일본인 순사들을 혼낸 일 등이 오래도록 회자화되었다. 1991년 대구 주간 매일신문에 언론인 김용진 옹 은 '김용진의 대구이야기' 를 투고 하면서, '조선의 고등학생을 잡아 넣은 일본 헌병 대장 을 혼내 어 준 이야기' . '지나가는 허름한 동족 젊은이들에게 직업을 소개 시켜 준 이야기'[130]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언론인 박용진은 동시에 일인에게 상권을 넘겨 주기 위해 성곽을 허문 것을 , '신작로를 내기 위함'이라는 것, 박중양의 일본 유학 경력 중에 습득한 것을 '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려 함'이라[130]고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그의 묘소는 2004년까지 대구 침산1동 오봉산 제2봉에 있다가 화장되었고, 그의 생전에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그의 부모 묘소가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이장, 합장되었으나 2004년 3월 30일 그의 종손자에 의해 화장되었다. 대구 북구청에 따르면 박중양의 종손(당시 71세, 서울 강남구 도곡동 거주)이 "서울에 거주하는 바람에 묘지를 돌볼 수 없어 화장하겠다"며 지난달 23일 개장을 신청, 침산공원내 오봉산 산 16의 28에 위치한 증조부모 합장묘를 지난달 30일 개장했다고 밝혔다.[106] 또한 3월 30일 같은 날, 합장묘 앞에 '아들 중양이 울면서 세웠다(子重陽泣建)'는 문구와 고(故)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연호인 소화(昭和)가 새겨진 비문도 철거되었다.[106] 또한 오봉산에 있던 그의 아들 박문웅 내외의 묘소와 박무웅 내외의 묘소, 일본인 첩의 묘소 역시 후손들에 의해 이장됐다. 오봉산 근처에 있다는 그의 다른 선조들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고, 2004년 대구 침산동에 있던 박중양 기념비가 철거되었다. 2007년 8월 13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박중양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려[131]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박중양이 남긴 36억 7110만원 정도의 토지 8만 2082m2를 국가에 환수한다고 발표했다. 그 토지는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소재 '침산공원' 일대이다.[132] 그해 8월 대구시 북구 침산동 산16-1에 있던 또다른 그의 토지에 대해서도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졌다. 8월 13일 박중양의 36억 7,110만원(8만 2천82m2) 유산이 대한민국 국고로 귀속조치되었다.[133]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대구 침산동 와우산에 본부인 이주열과 합장된 박중양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양주읍으로 이장되었다. 풍류 생활[편집] 술을 좋아하는 그는 풍류를 즐기기로도 유명하였다. 박중양은 평소 대구 군방각(群芳閣, 구 대구 종로호텔 자리)에 자주 출입하였다.[134] 군방각 외에도 그는 경성부에 있는 중국집과 양식집에 가끔씩 찾아가기도 했다. 대구읍성을 허물어뜨리는데 앞장 섰고 경상감사를 지낸 박중양은 군방각에서 주로 실세 일본인들을 만나 기생들과 풍류를 즐겼다. 박중양은 늘 인력거와 제비 모양의 양복 차림에 실크 모자와 지팡이[134] 차림이었고, 금빛 회중시계 줄이 조끼 주머니 밖으로 스며나와 길을 걸을 때마다 철렁거렸다.[134] 서민들한테는 그 모습은 위압적일 수 밖에 없었다.[134] 의외로 일본 경찰들은 대구 군방각에 대해서만은 빡빡하게 감시하지 않았다.[134] 그는 중국집과 일식집에도 종종 출입하는 미식가이기도 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1925년 이후 대구 각지에 흩어진 농토에 따로 하인이나 소작농을 두지 않고 과수원과 감자밭, 옥수수밭을 부인, 일본인 첩과 함께 직접 농사지었다. 시민들은 손수 농사짓는 검소한 그가 고급 술집, 고급 양식집 출입을 이상하게 여겨, 그가 고급 술집과 양식집에 가는 이유를 묻자, 그는 '조선과 같이 요령과 술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하지 못하는 놈, 해보지 못하는 놈이 바보가 된다'고 답하였다. 약력[편집] 1903년 : 관리서 주사 1904년 : 일·러 전쟁 때 고등통역관이 되어 전쟁에 참전하다. 1904년 : 농상공부 주사 1905년 : 진주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 1905년 : 일본 유학 1906년 : 대구판관 1906년 : 군부 주사 1906년 : 군부 군기창 기사 1906년 : 경상북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1907년 : 전라남도 관찰사(도지사에 해당) 1907년 : 평안북도 관찰사 1907년 - 1908년 : 평안남도 관찰사 1908년 - 1910년 :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 : 충청남도 도장관(도지사에 해당) 1915년 : 중추원 찬의 1916년 : 중추원 참의 1919년 : 3.1 만세 운동의 격화를 자제하기 위해 자제단을 조직하여 만세시위자 설득과 귀가 운동을 하다. 1920년 5월 : 중추원 참의직에서 사퇴하다. 1921년 : 황해도 지사 1923년 : 충청북도 지사 1923년 10월 : 간토 대지진에 조선인 관련성을 부정하고 일본인 내지인들에게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1927년 2월 18일 : 의원면직 1927년 :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1928년 : 황해도 지사 1929년 : 중추원 참의 1933년 :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1938년 :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1939년 :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1941년 : 중추원 고문 1941년 : 칙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941년 10월 :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943년 : 중추원 부의장 1945년 4월 : 칙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 1945년 9월 : 미군정 주둔 후 귀족원 의원, 중추원 부의장에서 파면 1949년 1월 : 반민특위 조사관에 의해 체포, 서울로 이송 1949년 :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반민특위 재판을 받았으나 직접 항거, 변론하다. 1949년 2월 : 폐렴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병보석이 허가되다. 저서[편집] 그의 저작과 일기는 대부분 압수되어 인멸, 소각되었다. 단 자서전 술회의 사본을 손자 중 1명이 소장하고 있다가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에 기증한 바 있다. 회고록, 《술회 (述懷)》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신년소감 (新年所感)》(1957년) 《박중양 선생 문서 (朴重陽先生文書)》 작품[편집] 친필 휘호 일소대 기념비 전각 흥천지무궁 (1932년 3월) 화랑[편집] 그의 친필 글씨와 그림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지인에게 보낸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한때 그의 육성녹음이 일본의 한 지인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후에 실전되었다. 자제단 조직 뉴스 기사 박중양 친필 휘호 (1924년 11월 30일)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1906년 10월) 신돌석 사망 사건 보고서 (1908년 11월 1일) 친필 휘호 흥천지무궁 (1932년 3월 1일) 논란과 의혹[편집] 출신 성분 논란[편집] 박중양의 선대는 불확실하다. 박중양 자신은 아버지가 양주군 주내면에서 머슴으로 살았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본관에 대해 1907년에 간행된 《대한제국관원이력서》 에서는 밀양박씨라 하였고,[135] 1913년에 발간된 《조선신사대동보 (朝鮮紳士大同譜)》 (조선신사대동보발행사무소편, 1913)에서는 반남박씨라고 밝혔다. 그의 가문은 아전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7]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6일자 2면 보도에 의하면 본시 양주군퇴리(本以楊州郡退吏)라고 하여 그의 선대가 양주군에서 아전노릇을 했다고 한다. 가계가 불확실한 탓에 보통 그의 가계는 선대에 중인 출신이었다가 몰락한 것으로 본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경기도 양주군에 와서 마름 노릇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였다. 아버지 박정호에게 내려진 가선대부 규장각제학 벼슬은 사후 박중양의 출세로 추증된 증직 벼슬이었다.[136] 박작대기와 백작댁[편집] 한때 그의 별명인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가 백작댁의 와전인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백작댁의 와전이 박짝댁이 되고 박작대기가 된 것이라는 설이다. 와전된 별칭은 '백짝때기[137]'라고도 불렸다 한다. 그러나 백작 작위는 그가 만년에 받은 것으로, 박작대기나 박짝대기라는 별명이 붙여진 뒤에 받은 것이다. 침산의 별명은 박작대기산이다. 일제시대 박중양이 대구 침산을 매수한 이래로 박중양이 매일 작대기를 짚고 다니는 것을 비아냥거려 박작대기산이라고 불렀다.[138] 한편 그의 묘소에 대해서 박짝대기 묘가 아니라 백작댁 묘라고 불렀다는 전승도 전한다. '박짝때기미가 아니라 백작댁 묘다, "백작댁묘" 일제 때 백작 벼슬을 한 박씨의 묘라서 박 백작댁 묘[137]'라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 논란[편집] 그는 오랫동안 이토 히로부미(伊藝博文)의 양아들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박중양은 양자설은 거짓말이라며 부인하고, 이토가 자신의 은사(恩師)라고 밝혔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139]' 또는 이토 히로부미를 의부(義父)로 삼았다[140]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호가호위하던 자[141]'였을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반민특위의 수사관들도 그를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알고 있었다.[10] 임관 얼마 뒤 이등박문을 만나게 되면서 친일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대담하게도 스스로 ‘이등’을 찾아가, “조선엔 희망이 없어 미국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도와 달라” 했더니, “당신 같은 기백 있는 조선청년은 처음이다”며 주선해준 자리가 대구군수 감투였다는 것이다.[127] 그가 “이등의 양자였다”는 소문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양자는 아니고 은사였지”함으로써, ‘이등’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간접으로 시인한 바 있었다.[127] 1949년 3월 1일 기자들과의 면담에서 건국공론사의 모 기자가 이등박문과의 관계를 물었다.[57] 건국공론사 모 기자가 그에게 "이등박문 하고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처음에는 나의 은사 라고 했다가, 기자들이 "항간에서는 양자관계라고들 하는데?"라고 파고 들자, 박중양은 "그건 거짓말이다."하고 얼버무렸다.[57]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 양자설에 대해 시중에서 확장된 소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그러고나서 그는 "그래 내가 이등공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니, 대관(大官)들이 온갖 뇌물을 가지고 아부를 해 왔지만[57] 나는 그것을 다 물리치고 내가 의도하던 개혁을 실시했을 따름이다.[142]"라고 했다. 땅 투기 의혹[편집] 대구읍성과 진주성 철거 시 그는 이때 철거한 성돌 일부를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받기도 했다. 진주성의 성첩을 일부 팔았다.[18] 1905년 진주에 있을 때 그는 진주성의 성곽을 일부 헐어서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벌기도 했다. '군수 노릇할 때는 성첩 헐어 매식하고, 관찰사가 된 뒤에는 객사까지 훼손하니 황상 폐하 남순(南巡) 시에 일기불현(日旗不縣)하였다고 수창학교 폐지코자 학무대신에게 보고하니 포악하고 돈 잘 먹기 박중양이 날개로다.[18]'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춘불춘(春不春)'이라는 노래가 전하는 박중양의 행각이다.[18] 박중양이 대구 성첩을 헐어내고 돌멩이를 일본인들에게 팔면서 대구의 부동산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통감부가 설치된 1904년 당시에 대구에 들어와 있던 일본상인들은 약 120명이었다.[143] 경부선 공사 현장이 부산에서 대구 쪽으로 뻗어 가면서 일본 상인들은 공사 현장을 따라 등짐을 짊어지고 내륙도시로 흘러들었다.[143] 일본인들은 달서문 밖에 판잣집을 띄엄 띄엄 짓고 살았다. 1906년 일본 이사청 부이사 오카모토(岡本)와 대구의 일본 거류민단 대표격인 카게야마(影山)는 박중양을 구워 삶았다. 박중양도 대구역을 어디에 지을지 알지 못했다. 철도역이 들어서면 역을 중심으로 도로를 새로 내야 하고 도로 변에는 반드시 신흥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땅값도 달라진다. 카게야마 등은 대구역 건설에 편승하여 성을 헐고 떼돈을 벌어보라고 충동질했다.[143] 대구읍성 성 안과 성 밖은 성 둘레 한 칸을 놓고 땅값이 4배나 차이가 난다. 성 밖 특히 일본상인들과 경부선 철도공사 인부로 온 일본 노동자들의 숙소 근처인 진동문 밖에다가 엄청난 땅을 사두고 성을 헐어낸다.[143] 그러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박중양은 혹했다. 카게야마의 제의대로 박중양은 성을 헐어 버리기로 결심한다.[144] 경부선 철도역이 남문 밖으로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돈 있는 사람들은 남문 밖 빈터를 사두기 시작했다. 정거장 바람은 남문 밖으로 휘몰아쳤으며 진동문 쪽의 땅값은 거꾸로 헐값으로 떨어졌다. 소문을 퍼뜨려 놓고 일본인들과 박중양은 비밀리에 동문 밖의 잡초밭을 마구 사들이면서 성곽을 헐어 버리는 비밀 작전에 들어간다.[144] 1906년 3월부터 성곽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성을 허무는 작업은 1908년까지 3년이나 계속되었다.[144] - 라고 주장하는데 일제 행정부가 박중양을 신임하는 이유가 스승이었던 이토의 이름을 팔아 사욕을 탐하지 않은 청빈함, 그리고 국가를 운영해야할 지도층으로서의 덕목을 지닌 자로 판단하고 있어서였기 때문에 이와같은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김옥균 시해사건이후 사실상 하등민족, 또는 2등민족으로 분류되는 마당에 이토의 제자, 양자소리 듣던 이가 사욕을 채웠다면 이토의 정치적 입지도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될 뿐더러, 총독부에서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도시의 확장 건설 및 상업인프라 구축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었던 자본력과 인사이트를 지닌 집단은 일본인들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쓸모 없어져버린 성을 없애버림으로 인해서 상공업의 발전과 토지의 밸류에이션이 리레이팅 되는 효과를 누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로 인해서 많은 일자리들이 창출되었을 것이고 당시 상당수 능력있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고용되었을 것이다. 싱가포르 나 동남아 화교들도 구미 열강 백인들에게 고용된 회계집단이 주축이되어서 경제건설, 또는 부의 축적을 이룩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가 추진했던 건설사업 중에 파생된 여러가지 잡음은 500년 묵은 썩어버린 구 이념과 신 이념이 충돌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일로 보아야 한다. 일본인 거류민단에서는 성이 뚧린 동문 밖으로 도로를 놓아 달라고 박중양에게 5000원을 희사했으며 성을 헌 돌과 흙은 일본인 거류지역의 유곽 시설이나 건설 예정지를 메우고 집을 짓는데 쓰였다.[144] 일부는 선교사들에게 공짜로 나눠주기도 했다. 비만 오면 물이 괴던 대구읍성 동부의 저지대에 자리잡았던 일본인 거류지역은 일등 대지가 되었다. 성 안은 평당 23원, 성 밖은 평당 6원씩 부르던 대지값은 같아졌다. 성내의 땅값은 떨어지고 철도 정거장이 들어 온 동문 밖 대지는 최고 60원까지 뛰었다. 박중양이 사들인 땅값은 순식간에 10배나 뛰어올랐다.[144] 이를 두고 박중양의 일화는 그가 시대를 앞선 땅 투기꾼이었음을 보여준다[18]는 평도 있다. 친일파론에 대한 반론[편집] 박중양은 일반적인 친일파와는 다르다는 견해가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다[84]'는 시각도 있다. 또한 조지훈은 "그를 변절자로 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지훈은 '박중양 등은 변절자가 아니며 반역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수필 지조론에서도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되기는 하였지만[145] 변절자는 아니다[146]"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 조지훈은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146]'고 하였다. 발언 파문[편집] 고령임에도 일본 여자인 48세의 제2부인과 은거해 살던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의 젊은 시절에 관해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야만 했다.[127] 또한 그는 평소 이승만은 '미국과 주한미군만 퇴거하면 즉시 보따리를 싸서 도망칠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다녀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침산 토지에 대한 의혹[편집] 그가 은거하던 침산이 그가 매입한 것이 아니라 대구읍성을 철거한 대가로 받은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의 후반생 은거지가 되었던 대구시 침산동의 침산(砧山·일명 박짝때기산·현 침산공원) 한 덩어리 전체도, 이때의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인들이 주선해 준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었다. [147] 박작대기 혹은 박짝대기[편집]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녀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148] 벼슬이 높아진 박중양도 중년 이후 이 개화장을 애용하며 뽐내고 다녀, 사람들이 비꼬는 뜻에서 가져다 붙인 별명이 ‘박짝때기’였다. 뒤따르는 하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朴’이란 큰 글자가 쓰인 전용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관가를 누비던 박짝때기였다.[127] 박중양은 단장을 항상 휴대하고 다녔기 때문에 항간에서는 '박 작대기'로 통했다.[149] 그는 개화장(開化杖)이라고 부르는 작대기를 짚고 다녔다.[148]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관료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작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었고, 칙임관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으므로 관료들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한다. 1940년 당시 총독부 출입기자 좌담회에서 매일신보 기자 김인이(金麟伊)는 그가 총독과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기술하였다. “ 언젠가 무슨 회의든가에 보니 총독, 총감도 다 열석한 석상인데 박중양이 당당합데다. 예전 도지사 당시에도 내무부장, 경찰부장이 쩔쩔 매였다는 소문이 있느니만치 철저하게 이야기 하더군요. 말에 질서 있고 사리를 잘 분변하는 말이고, 만좌가 경청하더군요. ”   — "총독부 기자 좌담회", 《삼천리》 제12권 제3호 (1940년 03월 01일자)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했나 하면,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 특출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127] 일본인 순사를 잡아다 집안 사설감옥에 가두던 그를 두고 '일본인을 혼낸 통쾌한 조선인 이야기'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148], 이는 이후에도 널리 회자화되었다. 각 도지사와 시장, 지방법원장 등이 부임하면 부임인사를 다녔고, 매년 그의 집으로 세배를 갔다. 사상과 신념[편집] 그는 '평양으로 천도'하는 것과 '조선에 의회 제도를 도입하며 신생독립국들과 협력하는 중립국[12]'을 장차 조선의 이상적인 모델로 내다봤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추원은 형식적인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韓日倂合 이전까지도 의회 설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양의, 의학교 설립론[편집] 일·러전쟁에서 군의관이 부상장병을 신속하게 응급처치하는 것을 목격한 박중양은 1906년(광무 9년) 1월 조정에 지역에도 신식 병원을 설립할 것과,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묵살당했다. 신식 병원과 의사 양성기관의 설립 상소가 묵살당하자 그는 실망하게 된다. 그는 1906년 가을부터 평양동인의원의 개원을 후원하였다. 1906년 12월 평양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개교에 참석하고 이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1907년 대구동인의원 개원과 1907년 2월 대구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개교에도 참석, 동인의원과 부속의학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1907년 6월 14일 동인회 평양지부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907년(융희 1년) 7윌 20일 평안남도관찰사로 동인회 평양 지부장에 선출되었다.[150] 평안남도관찰사로 재직 중 평양에 신식 병원의 유치를 적극 추진하였으나 실패했다. 평안남도관찰사 재직 중 박중양은 동인의원과 부속의학교의 운영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1908년(융희 2년) 5월 5일 동인의원 부속의학교 제2학년에 진급하게 된 14명 에 대한 진급식이 열렸다. 이 날 진급식 에는 지부장 평양 이사관 기쿠치 , 평의원인 평안남도 관찰사 박중양, 평양위술병원장 3등 군의정 키타야마, 평양 거류민단장 시부야, 그리고 강사 마에지마 일본 육군 1등 군의관, 하시모토 약제관 등 평양 의 주요 일본인 들이 참석 했다.[151] 단발령에 대한 확신[편집] 1935년 9월 4일 방문한 조선민보사 기자와 함께(우측 앉은이가 박중양, 좌측 조선민보 기자) 박중양은 제사 문화와 허례허식 문화 등 조선의 구습에 반감을 품었다. 그에 의하면 어떤 소신이나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하기에 그냥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의미없는 행동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단발령에 대해서도 확신을 품었다. 단발을 하면 상투를 틀 때보다 머리 관리 시간도 절약되고, 머리 감기도 편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에 따라 1906년 경상북도관찰사 재직 중에는 영해 초도 순시 후 강제로 단발을 강행하였다. 그는 영해초도 순시 직후, 관찰사실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을 시켜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43] 1907년 평안남도관찰사 부임 직후에도 신임 관찰사를 찾아오는 지역 유지들을 강제로 삭발시켰다. 1912년에는 군청 통폐합작업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논산군 은진면 유지들이 도장관 면담을 요청했다.[60] 이때 은진에서 찾아온 유지들 가운데 한 노인이 상투머리에 갓을 쓴 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발령이 내린지 언제인데 지금 까지 상투를 하다니... 에잇! 다들 나가시요.' 그리고는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60] 그는 단발령을 비롯한 제사 문화와 허례허식 문화, 관혼상제 문화에 대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인습들로 규정하였다. 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편집] 그는 '한국인들이 아는 척, 잘난 척 하기를 좋아한다'고 비꼬았다.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6]'라는 것이다. 이어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6]'라고 지적하였다. 이어 박중양은 '조선인들은 애국심만 있다면 범죄행위를 해도 허용되거나 묵인하는 습성이 있다'고 질타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의 악벽'이라 하여 조선인들에게 존재하는 악질적인 버릇을 지목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악질적인 버릇으로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152]'를 들었다. 이러한 악질적인 습관을 가진 덕에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며, 일본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신뢰를 가볍기 여기고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악습을 갖고 있다고도 지적하였다. 박중양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할 자신도 없으면서 누군가 나서서 악습을 타파하고 개신하려 들면 방해하고 험담하여 좌절, 무산시킨다'고 비판했다.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으면서, 하려는 사람들을 (뒤에서)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6]라며, 이것이 조선인 최대의 결점이라 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부터 독립 이후의 반탁 테러꾼들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많다며 그들은 부끄러움과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일갈하였다. 박중양은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놈 치고 사기꾼, 협잡배가 아닌 놈 없으며, 정의로운 척 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숨기지 않는 놈이 없다'며 말보다 그 사람의 행동을 먼저 살펴볼 것을 주문하였다. 또한 '타인의 말을 듣기 보다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고 판단할 것이며, 타인의 말은 참고사항 정도로만 여기면 된다'하였다. 그는 '편협성, 배타성, 폐쇄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가 조선인들의 악벽이다. 형제숙질에게[152] 의존하는 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들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기생하여 사는 것)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인 속담도 있다.[153]'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가족끼리 서로 봐 줄 수 있다고 보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인간으로 몰리게 됐다. 1945년 독립 직후에는 조선인의 근성에 대한 성토와 규탄을 하였지만 결국 그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괴짜, 정신질환자로 몰려 무시당하기에 이르렀다. 개화파 애국자론[편집] 효수되어 한성부 저잣거리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그는 김옥균과 개화파의 비참한 최후를 슬퍼하였다.) 그는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고종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며 195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일각에서는 역적 취급을 받던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도 매국노가 아니라 선각자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역적이라 조선 상하가 흉언하였지만 이조 말년의 선각자이고 애국지사다[4]'라는 것이다. '(그들은) 국정유신을 약모(계획)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당시 뜻대로 성사하였으면 분명 우리가 일본과 비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옥균 등 개신파가 실패하고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박영효 일인이 귀국하고 대개는 객사하였다. 그들의 유가족을 생각하면 동정하는 눈물이 없을 수 없다.[6]'고 하였다. 이어 그는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 김옥균의 최후를 두고도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6]'라며 분개하였다. 이어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6]'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던 제1공화국의 관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김옥균, 서재필 등이 역적이 아니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안경수, 윤치호, 권영진, 조의형, 장박, 유길준 등이 국사를 범한 죄인들이 아니다. 이완용 등이 매국노가 아니다.[6]'라며 항변했다. 그는 '애국자를 박해하다 못해 처참하게 죽이는 그런 국가, 그런 정부에는 애국을 할 필요가 없다'며 역설하였다. 이어 그는 조선이 최초로 독립한 것을 日·淸전쟁 이후 때로 보기도 했다. 그는 단군 조선 이후 기자 조선. 신라, 고려,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고, 중국에 사대를 하였으며, 조선왕조에 와서는 중국의 속국 노릇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며, '선인들의 애국심이 금일에 기고만장 떠들고 있는 사람들만 못한 것이 아니고 충의가 금일의 큰 소리를 장담하는 자들만 못한 것도 아니다. 불가항력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소이다. 조선이 청국의 예속을 면하고 독립하는 것이 조선인의 실력이 아니고 日·淸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결과 일본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6]'란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구느냐'며 항변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에 공녀와 인삼, 금은 등의 조공을 바친 것은 왜 아무도 비판하지 않느냐'며 계속 되물었다. 국가와 국민관[편집] 그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신의 일기나 독립 후에 쓴 술회, 반민특위 공판장에서 그는 한결같이 '국가는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민을 배려하지 않는 국가, 정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인민을 살피지 않는 국가와 정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였다. 방청석에서 반발이 나오자 그는 '조선 조정이 백성들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냐'고 항변하였다. 그는 재판 중 반성하지 않는 것[10]으로도 회자화되었다. 그가 공판을 받는 동안 방청석과 재판장 내·외부에서는 반역자, 매국노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되풀이하였다. 교육, 언론활동 지원[편집] 평안남도관찰사와 경상북도관찰사로 재직 당시 그는 도내 신문 발간을 지원하고 적극 장려하였다. 또한 이들 신문사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대폭 부여하여 관찰사, 기업인, 지역 유지 등에 대한 비판을 최대한 허용하였다. 그는 언로를 열고 언론을 보급하는 길이 사람들의 눈을 깨이는 길이라 확신했다. 지역 유지들과 지식층이 신문을 잘 읽지 않자, 그는 숙제로 내주어 신문을 읽게 하고, 주말 저녁의 모임에서는 정치, 시사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후일 전북대학교 교수 강준만은 '신문 발간을 주도한 관찰사인 박중양 이나 황철 은 친일파로, 또는 부패관료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과 같은 신문에서 크게 비난 받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박중양이나 황철은 신문을 실어 하던 관리들이었을텐데, 이들이 신문의 창간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154]'라며 이를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다. 평안남도에 관립일본어학교의 설립을 지원하였고, 경성의 기독교청년회의 영어학당에도 후원금을 보냈으며, 대구에도 관립일본어학교의 건립을 추진, 후원하였다. 대구읍성 철거[편집] 대구군수 재직 시 그는 일본인들이 칭송한 야마모토 군수 라고 하여 유명하였다. 경부선 개통으로 대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때문에 일본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생겨났다. 이때 대구군수 박중양은 주로 일본인들의 편에서 일하였다. 따라서 일본거류민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13] 성벽 파괴작업은 오직 박중양의 독단으로 감행한 일로 목이 달라날 각오를 갖고 임했다.[56] 박중양은 성을 헐어버릴 계획을 오카모토와 카게야마 그리고 몇몇 일본 사람들과 함께 짜고, 1906년 10월, '대구 도시계획 상 방해가 되니 성첩을 헐겠다.'는 건의서를 조정에 올렸다.[144] 건의서에 대한 조정의 회신은 '불가'였다.[144] 그러나 중앙에서 회신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성첩을 허물은 뒤였다. 박중양은 건의서를 올리기 열흘 전부터 카케야마 등이 부산에서 데려온 60여 명의 일급 노동자를 배불리 먹이고 밤새 성에 구멍을 뚧기 시작했던 것이다.[144]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는 두 아들인 박문웅과 박무웅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계획도 세웠다 한다. 불상사를 대비해 두 아들(文雄, 武雄)을 일본으로 망명 시킬 준비도 하였다는 것이다.[37] 박중양은 당시 대구읍성이 대구읍내를 관통하여 시내 왕래가 불편한가 여부를 검토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고 보고 대구읍성 철거를 지시한다. 당시 일본거류민들이 가장 소원했던 바는 바로 대구읍성의 철거 문제였다. 그런데 1906년 6월 그가 경북관찰사 서리를 겸하게 되면서, 곧바로 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결국 성을 철거함으로써 성내 상권까지도 일본 상인들이 침투하게 되었다.[13] 일본인이 기록한 대구물어에도 그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두 아들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준비도 하였다.[56]'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읍성 철거를 두고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야마모토 군수의 '과감한 조치'라고 극찬하였다.[13] 그러나 그는 일본인들의 칭찬을 외면하였다. 진주성 철거의 시발점[편집] 그는 진주성의 일부를 철거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와 진주의 수백 년이나 된 성돌을 파내어 일본인들에게 팔아 먹은 돌군수였다.[18] 진주성과 대구읍성을 돈주고 팔았다 하여 돌군수[18] 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그 돌을 집을 짓는 데 사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았다.[18] 헐린 진주성곽 일부의 돌은 돈을 받고 일본인에게 판매하였다. 훗날 1930년대에는 진주성 내성까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면서 촉석루만 남게 되었다. 박중양은 진주성 돌의 일부를 성곽 북방에 있던 대사지(大寺池)등 세못과 해자를 메우는데 활용하였다. 진주성은 결국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18] 진주성은 1960년대부터 복구되기 시작했다. 이완용 희생자론[편집] 이완용(박중양은 그가 어쩔수 없이 모든 책임을 지고 희생했다고 봤다.) 그는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사람들이 흔히 '이완용을 매국노라 매도하여 말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쉽고,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당면한 지도자가 되어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6] 1945년 독립 직후부터 그는 이완용을 변호했고 그는 어쩔수 없는 희생자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외면당했다. 독립 후 조선총독부에 협력하거나 부역하던 당시의 국민들이 모든 책임을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 등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만 모든 공격이 쏟아지는 것에 분노하며 이완용 애국자론을 펼쳐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이완용 피해자론, 이완용이 희생자라는 견해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는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국가의 위급이 존망한 때의 당면한 책임자를 선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이다.[6]'라며 이완용이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대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또한 韓日倂合 때나 을사 보호 조약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들을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6]' 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을사 조약 때나 韓日倂合 이후 관직을 버렸던 일부 인사들, 그들을 양심적인 선비로 보고 존경하던 사람들과 언쟁꺼리가 되었다. 친일에 대한 소신[편집] 그는 자신이 민족 반역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독립 직후 그는 자신을 성토하는 여론에 대해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56]"라고 반박하였다. 일제 시대의 조선에 살던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본 제국의 신민이고 조선총독부의 국민일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고 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처벌을 당했더라도 그는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처벌받은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1953년경 박중양이 자신의 일기 일부를를 지인에게 보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천황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일본이 미국, 영국 등 연합국에 패배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나 미국과의 전쟁을 일본 정객들의 오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충성심만은 변치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1997년부터 1998년 일본 체류한 대구 출신 사학자 강태원에 의해 가쿠슈인 대학 우방문고에서 발견되었다.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긍정론[편집] 박중양은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비교적 공정했다고 봤다. 일제 시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은 일본인에 대한 편견이라는 점과, 지역차별을 없앤 것을 내심 높이 평가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통치하는 과정에서 평안도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앴다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조선 왕조를 조선총독부 통치기와 비교하여 암흑기로도 평가했다. 그는 '정치의 개선과 인재 등용을 세인이 모두 아는 바이다. 정령에 이론에 편중하고 민중 생활에 불합리한 점은 없었으되, 대체 정치의 목표가 민생의 복리를 계획하는데 있고, 관공리 등은 일일이 시무가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이외에 한 것이 전혀 없다.[155]'며, 일제에 대한 비판은 일본인들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음을 지적했다. '암흑시대 조선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된 것은 세인이 모두 아는 바다. 조선인의 고혈을 흡취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만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155]'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제 통치에 대해 증오감이나 편견이 없이 평가해야 된다고 봤다. '염두의 증오지심이 있어서는 공정한 평론이 아니되는 것이다.[155]' 그는 조선총독부 통치의 공정한 이유로 지역감정을 없앴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일정시대에 인재 등용이 실시되어 이조시대의 차별을 받고 있던 평안도 출신도 도지사, 참여관 등에 등용되었다.[155]'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나 일제 통치기라고 해도 무조건 실력없는 인사를 채용해서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여러 총독 가운데서도 특히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긍정적으로 봤다. 데라우치가 '조선인을 본위로 정치를 행하여 조선 말기의 암흑시대를 비교적 명랑하게 만들었고, 특히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넘쳐났던 지역감정이나 출신지 차별, 출신성분 차별을 배제하고 공개채용시험으로 인재를 등용한 점, 문벌과 학맥 등을 가리지 않고 선발한 점을 예로 들어 조선총독부 통치가 편파적인 통치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조선의 일본화[편집] 그는 '조선이 선진국 내지는 문명인으로 발전하려면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하였듯 조선인들도 일본의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13] "중양가절 말 말아라. 전무후무 비기수단(肥己手段) 대구성곽 구공해를 일시간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 (대한매일신보, 1909. 1. 16. '중양 타령'[13]) 그는 '비문명화된 조선의 문명 개화를 위해 일본인들이 협조, 지원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1908년 무렵 일본인들과의 한 모임에서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들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항상 일본인들의 우월성을 앞세웠다.[13] 그리고 '조선인들도 일본인을 본받아 문명화와 개척 정신, 자립 정신, 호전성을 지녀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들의 '형식적인 위선과 무능력함'을 열등감처럼 여겼다. 박중양은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우러러보지는 않았다. 작대기를 들고 다니던 그는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을 석방시키는가 하면 횡포를 부리던 일본인 관헌들을 작대기로 끌어내리거나 내리쳐서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도지사와 중추원 참의와 칙임관대우였고,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뢰를 얻고 있었으므로 일본인 관헌들도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편집] 스승 이토 히로부미 박중양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독립 이후에도 기억하면서 존경하였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심과 욕심이 없는 점'을 들었다. '관직이나 부귀에 대한 애착이 없고, 자신의 관직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점과 신설한 관직은 1차 시험 후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것[155]'이 그 이유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부를 때 항상 '이등 공, 이등 선생님, 선생님'이라 칭하였다. 이토 부부는 일본과 조선을 내왕할 때는 어김없이 박중양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이토 부인이 바다에 빠져 몹시 위급해졌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다고 한다.[13] 따라서 이토가 박중양을 더욱 각별히 아끼게 되었다.[13]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가까이서 봤다. '이등박문은 세계적 위인이다. 공의 연구가 후진들에게 교훈이고 술자리 환담 때에도 쓸데없는 말이 없다. 이등박문은 일본에만 전유할 정치가가 아니다. 각국 역사책의 기록이 있을 것이다.[155]'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술에 취해서도 '실수나 실언을 하지 않는 점'을 높이 보고 그를 인격자로 존경하게 되었다. “ 메이지 유신 초기 폐번치현(번을 폐하고 현을 설치) 때 27세의 나이에 병거현령이 되고 국회 개설 초의 귀족원 의장, 궁내부 신설과 동시에 궁내대신, 내각 제도가 제정되면서 초대 총리 대신, 추밀원 설치 초의 추밀원 의장이고, 초대 한국통감이었다. 그는 현직에의 애착심이 없고 신설 관직을 1차 시험 후에 타인에게 전수한 것이 이등박문공의 방식이었다.[155] ”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존경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관직이나 부귀에 연연하지 않는 점'을 높이 샀다. '나는 이등공을 표본으로 하고 한국의 중흥을 이상으로 하였다. 국세가 주마적으로 급변하므로 내 사상이 수포로 돌아갔다. 대세를 역행할 수 없는 환경을 따라서 내 심상도 역시 변동하였다.[155]'며 일본식 정책 추진의 실패를 아쉬워했다. 그는 한국이 독립된 뒤에도 오래도록 이토 히로부미를 인격자로 회상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 행동은 이토 히로부미를 을사 조약의 원흉으로 보던 당시 한국 사람들과 갈등하는 요인이 됐다. 한국인 韓日倂合 기여론[편집] 그는 독립 직후부터 韓日倂合이나 을사 조약의 원인이 '일제, 일본만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인들 역시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원인 중에는 '왕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과 '당시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 모두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민생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악랄함에 의해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본 독립운동가 및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견해를 정면 부정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술회에도 그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정치의 부패와 국민들의 고통을 지금 70세 이상 되는 연로자는 모두 다 아는 바이다. 행락 매관이 공공연히 이를 행하였고, 대소 관리들의 민재 탐취가 강도와 다르지 않았다.[155]'며 당시의 부패상을 지적했다. 그는 韓日倂合의 원인을 '무조건 일본인들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피해망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임금에게 직신(直臣)이 없고 궁중의 난잡은 백귀야행(百鬼夜行)이었다. 집정자는 자기 영달에만 몰두, 탐욕했고, 국정일비를 무관심하였다. 고위 고관자는 자기의 이해득실에만 타등하고, 백성들은 죽든지 살든지 아불관어(무관심)하였다.[155]'는 점도 지적했다. 박중양은 '韓日倂合의 책임을 외부에서만 찾는 것은 일시적인 자기 위안'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한국의 쇠망은 그 원인이 적년요정(積年要政, 매년 쌓은 정치의 잘못)에 있었지 일조일석에 있지 않았다. 한국을 쇠망케 한 자는 한국인 누구누구였겠는가.[155]'라며 한국 내부의 잘못도 존재함을 역설하였다. 현실주의[편집]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조선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황국신민이라고 규정했다. 일제 시대 당시 '국내에 있던 국민들은 모두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 국적자였고,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구차한 변명'이라며 조롱했다. 그는 '해외에 망명했다가 한국이 독립된 후 귀국한 인사들 외에 3.1 운동 당시의 일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121]'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고 하였다. 비록 독립운동을 하다 처벌을 받았지만 일본 영토 내에서 일본의 신민 자격으로 처벌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일본 치하에 있던 사람들이 일본 국적, 일본의 백성임을 부정한다 해서 일본 국적자였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그는 3.1절 기념행사 참석자 중에 '일정 시대에 관공서 공무원이었던 사람의 연설'을 보고 조롱하였다. 상황 따라 변신하고 변절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이를 두고 '시세 변천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활계희극의 광경[121]'이라고 조롱하였다. 성실성[편집] 1949년 그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그가 대한제국 말기 부터 당시까지 써온 일기장들이 발견되었다. 반민특위의 조사관들도 압수한 물건들 중 그의 일기를 보고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한 가지 감탄한 것은 그의 집에서 압수해 온 증거품 중에 일기장이 무려 20여 상자나 되었다.[10] 반민특위 수사관들은 이를 전부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들추어 보았는데 그 속엔 일자무식, 돈 한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박중양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10]'고 한다. 1949년 1월초 반민특위 대구지부에 연행되어 온 전날까지 그는 '수십 년 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두 정자로. 나는 그가 비록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10]'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 유학중이던 어느 때부터 반민특위에 검거되기 전날 까지 일기를 썼다. 가족 관계[편집] 그는 시인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의 가문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의 큰아버지인 이일우 집안과 사돈관계였기 때문이다. 증조부 : 박행묵(朴行默, 1769년 1월 3일 - 1847년 5월 24일) 증조모 : 청송심씨(靑松沈氏, 1768년 10월 23일 - 1841년 10월 21일) 할아버지 : 박기숙(朴基肅+心, 1800년 3월 7일 - 1909년 8월 11일) 할머니 : 무안김씨(務安金氏, 1804년 5월 12일 - 1911년 3월 11일) 백부 : 박주호(朴周鎬) 아버지 : 박정호(朴鼎鎬, 1840년 - 1892년 9월 22일) 어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1845년 4월 21일 - 1929년 7월 12일) 형 : 박원양(朴元陽, 생몰년 미상) 동생 : 박수양(朴秀陽, 1876년 - 1913년 5월 5일, 단오일에 경성부에 갔다가 적리병에 감염되어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156]) 동생 : 박계양(朴季陽, 1877년 - 1925년 5월 10일) 제수 : 홍씨(洪氏, 1875년 - 1962년 4월 29일) 조카 : 이름 미상, 요절 조카 : 박정웅(朴正雄, 다른 이름은 순정(淳正), 정순(正純), 1910년 3월 25일 - ?) 질부 : 김해김씨(金海金氏, 1911년 8월 26일 - ?), 김병주(金炳柱)의 딸 종손 : 박인정(朴仁楨, 1933년 12월 18일 - ) 종손녀 : 박씨(朴氏) 종손녀사위 : 허보근(許寶瑾, 본관은 김해(金海)) 종손녀 : 박씨(朴氏) 종손녀사위 : 이팔영(李八榮, 본관은 전주(全州)) 사돈 : 양재형(梁在亨) 사돈 : 이일우(李一雨, 호는 소남(小南), 1870년 ~ 1936년), 독립운동가 이상정, 시인 겸 작가 이상화, 독립운동가 겸 체육인 이상백의 큰아버지, 독립운동가 권기옥의 시백부, 군인 박창암의 처조부 부인 : 이주열(李主悅, 다른 이름은 이주열(李柱烈),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아들 : 박문웅(朴文雄, 다른 이름은 순성(淳聖), 1890년 12월 7일 - 1959년 8월 14일) 며느리 : 이름 미상 며느리 : 남원양씨(南原梁氏, 1907년 8월 11일 - ?), 양재형(梁在亨)의 딸 손녀 : 박씨(朴氏) 손녀사위 : 노영달(盧榮達, 본관은 상주(尙州)) 손녀 : 박부남(朴富南, 1932년 ~ 2018년 1월 11일), 소아과 의사 손녀사위 : 이열희(李烈熙, 본관은 경주(慶州)), 치과의사 손자 : 박승효(朴勝孝, 다른 이름은 세정(世楨), 1933년 8월 1일 - ) 손자며느리 : 양근함씨(陽根咸氏, 1937년 11월 11일 - ), 함승호(咸升鎬)의 딸 증손자 : 박영목(朴永睦, 다른 이름은 병훈(炳薰), 1964년 12월 1일 - ) 증손사 : 박정목(朴正睦, 다른 이름은 병준(炳俊), 1967년 3월 17일 - ) 아들 : 박무웅(朴武雄, 생몰년 미상) 아들 : 이름 미상 손녀 : 박두순(朴斗順) 아들 : 이름 미상 딸 : 박씨(朴氏) 딸 : 박씨(朴氏) 딸 : 박OO, 경명여자고등학교에서 가정과목 교사를 역임했다. 대구의 모 메리야스기계 회사 사장 이모와 결혼했다. 부인 : 일본 여자, 이름 미상(1909년 - ?) 딸 : 박정자(朴政子, 1936년[157] - ) 외모[편집] 그는 화려한 경력의 관리로 출세하였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13] 평가와 비판[편집] 그는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던 인물로 일본인들까지도 그를 함부로 괄시하지 못하였다.[84] 또한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다[84]'는 시각도 있다. 객기가 넘치는 사나이로 거리낌 없이 할말은 하였다[46]는 평도 있다. 긍정적 평가[편집] 대구물어에 의하면 그는 '사람됨됨이가 솔직하다[46]'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의인 또는 일본 경찰을 혼내준 기개 또는 배경을 높이 평가받았다. 한편 "대구를 근대도시의 공간구조로 발전시킨 선각자[40]"라는 시각도 있다. 일제 시대 당시 그의 근무성적 평가표에 의하면 "예민하고 호방해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음. 퇴관한 후에도 후배의 지도에 진력하고 혹은 공공적인 방면에도 공헌함. 부근 사람으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이 존경받고 있음.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와 기타 총독부 대관들로부터도 역량과 수완, 탁월한 식견을 인정받아 중요시되어 “비상한 시기에 즈음해서 진실로 믿어서 보람있는 인물은 지사급으로는 朴重陽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의 조선공로자연감 427페이지에 수록된 인물평에도 박중양은 "예민하고 호방해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음. 퇴관한 후에도 후배의 지도에 진력하고 혹은 공공적인 방면에도 공헌함. 부근 사람으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이 존경받고 있음. 일찍이 伊藤와 기타 총독부 대관들로부터도 역량과 수완, 탁월한 식견을 인정받아 중요시되어 "비상한 시기에 즈음해서 진실로 믿어서 보람있는 인물은 지사급으로는 朴重陽이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서 수학한 점, 대구 읍성을 철거하여 일본 상권의 대구 진출을 도와주는 격이 되었던 점 등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3.1 운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만세만 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발언 때문에 비난받아왔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시인 조지훈은 '그가 친일파로 지목되었지만 변절자가 아니라'고 했다. 조지훈은 자신의 글 지조론에서 "최명길은 변절의 사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158]"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부정적 평가[편집] 이 문단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한 반민특위 조사관은 그를 완벽한 일본인이라고 하였다. 그는 '박중양은 몸은 비록 한국인이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개과천선이고, 반성이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10]'라고 평하였다. 한편 사사로이 탐욕을 부렸다는 비판도 있다. 대구 군수 겸 경북 관찰사서리가 된 그가 대구성 및 객사를 철거하여 일본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권력을 악용해 몇몇 지역유지들을 동원해 사사로이 군청을 만들어 대구 지방민에 대한 탐학을 저질렀[159]다는 것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며칠간 감옥살이를 했을 뿐 곧 풀려나 잘 먹고 잘 살다간 친일파의 전형이었다[36]'는 비판도 있다. 기타[편집]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박중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저자:박중양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급 인사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하고 거침없이 지적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영남제일관은 1906년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과 도로개설을 빌미로 박중양의 주도로 대구읍성을 헐어버리면서 동문이었던 동성로의 진동문, 북성로의 공북문, 서성로의 달서문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160] - 도대체 500년동안 뻘짓거리 한 민족이 정기라는게 있는건지 그 정기라는게 무엇인지 알수가 없다. 성균관대학교 강사 김일수는 박중양이 대한제국 내무부의 명을 어기면서 대구읍성을 해체한 배경에 대해 “박중양은 대구군수로 부임했을 당시 대구 읍성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 상인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며 “이 같은 일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라는 뒷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았다.[54] 박중양은 난초 그리기와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을 취미로 삼기도 했다. 한말의 문필가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 박중양이 그림 한 폭을 청하자, 서병오는 "당신 같이 지체 높은 분은 일본 화가들에게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텐데 하필이면 나한테 받으려 하느냐"면서 거절했다고 한다.[13] 1949년 무렵의 그의 집에는 기자조선시대의 정전법을 그린 병풍과 충무공의 거북선을 그린 병풍이 있었다.[161] 그는 자신의 어머니 초상화를 그리러 온 대구의 중학교 미술교사 김진용에게 최제우가 참형당하던 광경을 증언하기도 했다. 김진용에 의하면 "박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남문 밖 관덕정 건물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1864년 3월 10일에 최수운 선생의 참형을 당하시던 광경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경상감사 서헌순의 지시 아래 형집행하는 과정에서 선생의 영적에 의하여 곡절이 계속되다가 선생께서 청수를 뫼셔오라 하시고 묵념하시고 나서 형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박중양에게서 들었던 것입니다.[162]"라고 하였다. 박중양은 김진용에게 관덕당 사진을 가리키며 그곳이 수운 최제우의 처형지라고 지목하였다. 선조들의 묘소 일부는 동생 박계양 내외의 묘가 있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아미타불고개(현 의정부시 금오동 아미타불모퉁이 부락)와 양주군 주내면 남방리(현 양주시 남방동)으로 분산 이장되었다. 성품[편집] 1949년 3월 1일 그를 인터뷰한 건국공론사의 한 기자에 의하면 당시 '70이 훨씬 넘은 노인인데도 언조에나 눈매에는 아직도 정기가 흐른다'고 했다.[163] 독립 후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나 사람됨이 솔직하였다 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고 사제(師弟)의 입장으로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사저(師姐)로 섬겼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조선인의 미개성'을 수시로 지적, 질타하였다. 선화당 측우기[편집] 대구 선화당에 있던 선화당 측우기 그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대구 선화당(宣化堂) 앞뜰에 있던 선화당측우기와 측우대를 인천관측소에 인계하였다. 그러나 그가 일본인 와다 유지에게 주고, 와다 유지가 조선총독부 인천관측소로 옮겼다고도 한다. 박중양으로부터 와다 유지가 받은 것으로서[164], 와다는 이것을 조선총독부 인천관측소의 뜰에 한 동안 두었다[164] 한다. 대구 선교박물관의 기초[편집] 그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대구읍성을 헐어 냈는데, 선교사들이 이 돌들 중 일부를 옮겨와 집짓는 데에 활용했다.[165] 박중양은 선교사들에게는 무료로 돌을 가져가되 1인당 10개 이상은 가져갈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다. 선교사들은 대구읍성에서 해체된 석재와 목재들을 가져다가 선교사 사택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대구 선교사 사택은 지붕은 한식기와를 이은 박공지붕이었으나 함석으로 개조되었다 다시 한식기와로 보수했다.[165] 동산의료원 근처에 세워 191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기독교선교사 사택으로 이용되다가 후일 선교박물관이 되었다. 기타[편집] 동리 청년 30여명이 동리에서 무섭다고 소문난 박작대기(박중양)의 사과 과수원에서 박중양에게 잡히지 않고 사과 많이 따오기를 내기로 걸었다. 또 가장 많이 따온 사람을 평생 청년회비를 면제해 준다는 조건도 내세웠다. 청년들은 매일 밤, 새벽에 몰래 박중양의 사과 비닐 하우스에 들어가 사과를 서리하였다. 청년회원 중 한 명이 박중양의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 한개를 따다가 들켰다. 박중양은 여태 사라진 사과가 1백 박스 정도 되는데 모두 네가 한 짓인가. 이놈 잘 잡혔다고 타박했다. 다른 청년들은 사과 1포대에서 6포대 이상을 훔쳤는데 자신은 1개 따고 1백 박스 값을 물어내게 되자 항변하였다. 다른 애들은 사과 20~30박스 정도 훔친 애들도 있는데 왜 사과 1개만 딴 나를 잡느냐 하자, 박중양은 청년이 사냥을 하는가 여부를 물었다. “ 너 사냥 할줄 알지? 그럼 너는 산에 있는 짐승을 전부 잡을 수 있냐? 잡힌 짐승만 불쌍한 거야. ” 사냥을 잘 할것 같았던 청년은 실제 포수였다. 박중양을 연기한 배우[편집] 정진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 - 1984년 《독립문》KBS 드라마 채문호 - 2015년《기적소리》 뮤지컬 관련 항목[편집] 3·1 운동 독립협회 자제단 사회 계약론 경술국적 정미칠적 을사오적 반민특위 대구읍성 이완용 박제순 윤치호 서재필 박정양 이상재 이승만 함태영 배정자 윤치오 김옥균 안경수 최린 김윤정 김홍집 이시영 이진호 러일전쟁 만민 공동회 을사 보호 조약 이토 히로부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안경수 김규식 나혜석 박정양 박원양 양기탁 윤웅렬 윤필오 이상재 이시영 이동녕 윤치영 허정숙 홍영식 김윤식 박영교 서재창 일소대 이노우에 가오루 영친왕 박문웅 박영교 이완용 안창호 유길준 이광수 이동녕 이동휘 장덕수 이준용 김성수 송진우 허정 각주[편집] ↑ 그의 아버지의 대에는 마름 노릇을 할 정도로 가세는 몰락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본관을 알기 어렵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42페이지 ↑ 가 나 다 박중양의 친일행각...일본에 지역상권 넘겨주려해 영남일보 1996.08.13 ↑ 가 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4페이지 ↑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라며 분개하였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5페이지 ↑ 가 나 다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0》 (국사편찬위원회, 1994), (61) [朝鮮人 動靜報告 件] ↑ 1908년 7월 의정부찬정 겸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의정부찬정 겸 학부대신 김규홍(金奎弘)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차일본공사관 임시대리공사 박용화(朴鏞和)가 보낸 편지에 의거하여 유학생들의 생활비 중 박원근의 약값 50전을 청한 공문이 "照會 第二十七號"라는 제목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박중양 : 3.1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김도형)〉.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239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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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8일에 문서의 요약이 요청되었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박중양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박중양朴重陽 거옥 박중양의 초상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황해도 도지사 임기 1921년 2월 12일 ~ 1923년 2월 24일 군주 요시히토 섭정 히로히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신상정보 출생일 1872년 5월 3일 출생지 조선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사망일 1959년 4월 23일 (86세) 사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침산1동 1652번지에서 노환, 폐질환, 과로 등의 합병증으로 인한 병사 학력 일본 도쿄 중학교 수료 일본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 졸업 일본 도쿄 부기학교 전문학사 경력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조선총독부 충청북도 도지사 정당 무소속 부모 박정호(부), 전주 이씨 부인(모) 형제 박원양(형), 박계양(남동생) 배우자 본부인 전주 이씨 첩실 이름 미상(일본 여자) 자녀 아들 박문웅, 아들 박무웅, 아들 이름 미상, 딸 박정자 별명 자 원근(源根)호 해악(海岳), 일소(一笑), 거옥(車玉)박원근(朴源根), 박작대기, 朴忠重陽 종교 유교(성리학) 박중양(朴重陽, 일본식 이름: 朴忠重陽 호추 시게요,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관료이다. 본관은 반남(潘南)[1]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닌 고문이자 백작이며,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까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일제시대의 신념적 친일파이다. 1897년(건양 1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후 1903년(광무 6년)부터 1년간 일본의 관료로 생활하다가 귀국, 대한제국의 관료가 되었다. 일·러 전쟁에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종군하였고, 그 뒤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언변으로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1905년에는 농상공부 주사로 대구에 파견나왔다가 진주 판관을 겸하였으며, 진주 판관 재직 중 진주성곽을 일부 철거하였다. 1906년에는 대구 군수로 있으면서 대구읍성을 철거, 해체를 주관하였다. 1908년(융희 2년)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융희 4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경북관찰사 재직 중 단발령을 강제로 감행하였다. 1910년(융희 4년) 10월 韓日倂合이후에도 계속 관직에 있었고, 191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거쳐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1927년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고 1928년 황해도지사가 되었다가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고,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41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943년 10월 중추원 부의장을 거쳐 1945년 4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이 되었다. 독립 후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았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49년 1월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체포되어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만년에는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은거하며 이완용에 대한 변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을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이승만과 이시영, 함태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무능함을 수시로 조롱, 비방하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였으며, 한번에 일본 맥주 60병을 마셨고 소주는 40병까지 마신 일도 있으며,[2] '박태백', '보리술 지사'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2] 1907년에는 박중양이 맥주를 대음한 것이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었다.[2]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문인이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반 1.1.1 출생과 가계 1.1.2 소년기 1.1.3 일본 유학 생활 1.1.3.1 도일과 중학교 재학 1.1.3.2 자객의 침입과 신변 위협 1.1.3.3 도쿄부기학교 재학 시절 1.1.4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1.2 대한제국기 활동 1.2.1 귀국과 일·러 전쟁 1.2.2 관료 생활 1.2.2.1 관료 생활 초반 1.2.2.2 일본 관병식 참석 1.2.2.3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 1.2.2.4 대구읍성 해체 작업 1.2.2.5 대구읍성 해체 직후 1.2.2.6 평안남도 관찰사 재직 시절 1.2.3 고종 퇴위 전후 1.2.4 개혁 정책과 단발령 강행 1.2.5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 1.2.6 들개 사냥 대 작전 1.2.7 순종 남행길 수행 1.2.8 대구 십자도로 개통과 일본인 관료 응징 1.3 일제 시대 활동 1.3.1 韓日倂合 직전 1.3.2 일제 시대 초반 1.3.2.1 韓日倂合 전후 1.3.2.2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 1.3.2.3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 1.3.2.4 일본인 관리 응징 1.3.2.5 사회 단체 활동 1.3.3 일제 시대 전반기의 혼란 수습 1.3.3.1 3.1 운동 비판과 진압 가담 1.3.3.2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내사 1.3.3.3 황해도지사 재직, 수해 사태 수습 1.3.3.4 충북지사 재직과 관동대지진 수습 1.3.3.5 속리산 도로 개통 1.3.3.6 속리산 성추문 사건과 퇴직 1.3.4 밀주 단속 무마와 고미술품 수집 1.3.5 복직과 일제 시대 중반 1.3.6 조선인 참정권 운동 1.3.7 도지사 퇴직 이후 1.3.8 일제 시대 후반 1.3.8.1 중추원 활동 1.3.8.2 日·中전쟁 전후 1.3.8.3 태평양 전쟁 초반 1.3.8.4 전시 체제기 활동 1.3.9 참정권 허용 감사사절 파견과 귀국 1.4 독립 이후 1.4.1 독립 직후 1.4.2 친일파 청산론에 대한 비판 1.4.3 반민특위 기소와 석방 1.4.3.1 반민특위 제소와 재판 1.4.3.2 수감 생활 1.4.3.3 재판과 가석방 1.4.4 삼일절에 대한 조롱 1.5 생애 후반 1.5.1 오봉산 은거와 정부 비판 1.5.2 출판물 사건과 최후 1.6 사후 2 풍류 생활 3 약력 4 저서 4.1 작품 5 화랑 6 논란과 의혹 6.1 출신 성분 논란 6.2 박작대기와 백작댁 6.3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 논란 6.4 땅 투기 의혹 6.5 친일파론에 대한 반론 6.6 발언 파문 6.7 침산 토지에 대한 의혹 7 박작대기 혹은 박짝대기 8 사상과 신념 8.1 양의, 의학교 설립론 8.2 단발령에 대한 확신 8.3 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 8.4 개화파 애국자론 8.5 국가와 국민관 8.5.1 교육, 언론활동 지원 8.6 대구읍성 철거 8.7 진주성 철거의 시발점 8.8 이완용 희생자론 8.9 친일에 대한 소신 8.10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긍정론 8.11 조선의 일본화 8.12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 8.13 한국인 韓日倂合 기여론 8.14 현실주의 8.15 성실성 9 가족 관계 10 외모 11 평가와 비판 11.1 긍정적 평가 11.2 부정적 평가 12 기타 12.1 성품 12.2 선화당 측우기 12.3 대구 선교박물관의 기초 12.4 기타 13 박중양을 연기한 배우 14 관련 항목 15 각주 16 참고 자료 17 관련 서적 18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박중양 해악 박중양은 1874년 또는 1872년 5월 3일 경기도 양주군 주내에서 박정호(朴鼎鎬)와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박원근이었고, 성인이 된 뒤 중양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출생 년대는 정확하지 않아 1872년생 설과 1874년생 설이 있다. 만년에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년도는 다소 정확하지 않다. 자는 원근이고 별명은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인데, 이는 그가 나중에 작대기를 짚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의 가계와 선대(先代) 역시 불확실한데, 반남 박씨라는 설과 밀양 박씨라는 설이 있다. 만년에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가계 역시 전하지 않고 있다. 대구 오봉산 근처에는 그의 선조의 묘소 2기와 그의 내외 묘소, 아들 내외 묘소, 양주군에서 이장해 온 부모의 묘소가 20세기 말 무렵까지 존재했다 한다. 대구 오봉산 정상에는 그가 세운 '일소대'라는 기념비가 있었으나 독립 직후 파괴된다. 그의 가계는 오래 전에 몰락하여 그의 아버지의 대에 와서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 와서 마름 노릇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양주군 덕거리에 쌍분으로 있다 하는 그의 할아버지 박기숙(朴基肅+心)의 묘소 역시 불분명하며, 그 이상의 선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버지 박정호에게 내려진 가선대부 규장각제학 벼슬은, 사후 그가 가선대부로 승진하면서 추증된 것이었다. 나중에 출세하면서 그는 다시 본적을 선대의 고향 근처인 달성군 북면 침산동(達城郡 北面 砧山洞)으로 옮기게 된다. 그는 선조들의 고향인 대구에 정착했다. 후일 그가 대구에 정착한 것에 대해 대구의 일부 지역사학자들은 "경기도가 고향인 박중양이 대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일본 정계실력자들과의 교분을 강화화기 위해 일본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인 대구가 적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3] 소년기[편집] 불우했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후일 자신이 쓴 자서전 《술회》에 일부 언급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집안은 가난하였고, 그는 과거 시험에 응시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의 신문물을 시찰할 유학생을 선발하게 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첫 일본 시찰 유학생 선발에 응시하였으나 몇 번 낙방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日·淸전쟁을 전후하여 경성에 있던 일본인과 긴밀하게 교제하였다.[4] 日·淸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였는데, 그의 예상대로 일본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을 존경하던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보고 분노하였다. 특히 그는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5][6] 연좌 제도와 악형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과 같은 나라는 문명국으로 보기 어렵다고 규정했다. 개화파 인사들을 선각자로 보고 존경했지만 그들 가족들의 비참한 최후와 능지처참, 연좌제 등의 악형을 목격하면서 그는 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에 일찍부터 의문을 품게 되었다. 1896년(고종 33년) 7월 한성부로 올라가 윤치호, 서재필, 이상재 등이 만든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 1896년(고종 33년) 10월 11일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도쿄로 유학하였다.[7] 10월 11일 상선 아카시마루(明石丸) 편으로 일본에 도착, 10월 12일 도쿄로 올라갔다.[7] 일본 효고현 지사 스후 고헤이(周布公平)는 이들을 면담, 일본 입국 목적을 파악하여 10월 13일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보고하였다. 박중양은 일본에 온 이유를 "게이오기주쿠 입학을 위해서[7]"고 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박원근(朴源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8] 일본 유학 생활[편집] 도일과 중학교 재학[편집] 1897년(고종 34년) 관비유학생 자격으로 약 7년간 일본에서 유학하였는데, 그해 도쿄 중학교를 수료하였다. 유학생활하면서 기독교 목사 혼다 요이치(일본어: 本多庸一)를 만나 혼다 요이치의 식객으로 생활하다가, 그가 경영하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서 수학하였다.[9] 이 무렵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이토는 일본을 배우겠다는 그에게 사람들의 의식 수준과 치안, 행정 관서들을 잘 보라고 충고해주었고, 그의 권고로 경찰과 행정 쪽을 유심히 보게 된다. 국비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간 그는 생활비를 자신이 직접 아르바이트로 조달했다. 그는 오랫동안 일기를 남겼는데 후일 그의 가택을 조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한 반민특위의 한 조사관은 '일자무식, 돈 한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박중양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10]'고 평하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산 소식을 접한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체과정을 지켜본 그는 협회를 해산시킨 '무지한 애국자'들을 조롱하였다. 그는 "애국심을 핑계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애국심만 있으면 뭐든 용서된다고 믿는 얼간이들이 많다"며 조소했다. 황제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무지한 수준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며 그런 수준으로는 독립을 달성하더라도 이내 다른 외세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연좌제도 적용, 이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까지 강제 해산당하자 그는 분개한다. 중학생 재학 때부터 그는 하교시간, 방과후를 이용해 이토 히로부미의 서실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퇴청 후 별도의 서실을 열고 학교 진학 형편이 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후에 정치, 사상, 철학 등을 강의하였다. 우연히 이토의 문하에 찾아가게 된 그는 가난한 조선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젊은이들의 멸시와 무시를 당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그가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점을 차등대우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서실에 오도록 받아들였다. 그는 이토가 편견없이 자신을 문하에 받아준 것에 깊이 감격하였다. 자객의 침입과 신변 위협[편집] 아오야마학원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그는 대한제국 정부가 파견한 자객의 미행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1900년(광무 3년)에 도일 유학을 했던 한 유학생의 회고록에 의해서 당시 일본의 정황을 살피면, 동경역 부근 은 잡초가 우거진 허허 벌판이었고 , 철도 마차가 똥 오줌을 갈기며 현재 일류 번화가인 은좌 거리를 질주하던 시대였다고 한다.[11] 그 유학생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 유학생 들은 조성근, 노백린, 박중양, 장도, 이갑, 류동렬 등 선배 동급생을 합쳐서 50 명 내외 였다'고 한다.[11] 이들은 박영효가 국사범 으로 망명해 오자 전원이 박영효의 졸도(卒徒)인 양 오해를 받아서 한때는 구 조선 정부가 밀파한 자객의 미행을 받기도 하였다. 박영효의 거처를 탐지해 내기 위해서 인데, 그 자객의 행위를 경계하기 위해서 일인 형사가 으레 미행을 하기 마련이었다.[11] 중학생이던 박중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익명의 유학생에 의하면 그러니까 한인 유학생 하나가 나타났다 하면 험상 궂은 자객과 일인 형사가 마치 쥐가 서로 꼬리를 물듯 미행하면서 자못 살풍경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들 초기 유학생 들은 누구나가 신 국가 건설의 역군을 자부하면서 여간 기개가 드높지 않았다.[11] 박중양은 자신에게 장학금을 주어 관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파견해놓고, 오히려 간첩 취급하여 자객을 보낸 대한제국 정부에 다시 한번 실망하게 되며 조선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도쿄부기학교 재학 시절[편집] 1900년(광무 3년) 야오야마 학원 보통중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부기학교(東京簿記學校)에 입학하였다. 도쿄부기학교에서는 은행업무를 배우고 1903년 졸업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 이름 대신 야마모토 신(山本信)이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했다. 도쿄부기학교 재학 중인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도쿄 경시청에 경찰 제도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 사무와 감옥 제도를 연구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일본의 문물과 정치 제도를 유심히 시찰했다. “ 나는 일본 정권을 파악하고 동양의 평화를 계략하고자 연구하였다. 일본 제국 정권이 정당 수중으로 집중된 이래 정권쟁탈이 당 간에 격심하여 지나인 군벌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 정당 정치가 된 연후의 정치 운행이 의원 다수가 포위하면 승리이다. 따라서 비열한 행동이 적지 않고 정치가 점차 부패해졌다.동경에 저택을 두고 경도 등지의 별장생활을 하면서 일본의 정당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생활 비용을 원조하며 그들의 심저를 섭취하면서 다수 의원을 포섭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고, 나의 이상적 대업을 능히 이루리라 자부 기대하였다. 요컨대 군비다.금(金)은 많고 적음의 문제다. 봉건시대 일본인들은 황금으로 교섭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의 일본 정당은 황금 만능 시대로 변성하였다. 일본 제국 정권을 파악하고 동양 대책을 위해 능히 이루리라 내심 자부, 연구하였다.[12] ” 금(金)은 많고 적음의 문제라며 재물을 모으는 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모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장차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조선에 의회 제도를 도입하며, 중립 외교를 견지하며 신생독립국들과 협력하는 중립국을 장차 조선의 이상적인 모델로 내다봤다. '평양 도시로 천도하고, 조선을 정치 중심으로 신생국가와 협력하여 동양평화를 보지하고 동양을 동양인의 실력으로 보전하기를 염원하였다.[12]' 그는 야마모토라는 일본식 이름과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가 있었다. 후일 경기도 도장관이 된 히가키(檜垣直右)나 충청북도 장관이 된 스즈키(鈴木隆)도 이때 사귀었던 인물들이다.[13]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편집] 도쿄에 관비 유학생으로 간 박중양은 다른 유학생들과는 달리 유흥에 빠지지 않고, 경찰 제도와 행정 제도, 기계시설 작동 등을 견학했다. 또한 방과시간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사설 서실과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 등을 방문하여 요시다 쇼인의 사상과 학문을 접하기도 했다. 도쿄 체류 중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진 위급한 찰나에 하늘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뛰어들어 여자를 구한 일은 이토 히로부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14]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져 몹시 위급해졌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다.[15]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을 구하였지만 박중양은 어떠한 대가도 사양하고, 값진 선물을 주었지만 사양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부인을 구한 박중양을 각별히 신뢰하였다. 한편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자객들 등의 미행 때문에 수시로 이바라키현지사(茨城縣知事) 히로나카 타마미쓰(河野忠三), 경시총감 아다치 츠나유키(安立綱之) 등은 외무대신에게 실시간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하였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토는 그를 비롯하여 자신의 문하를 찾아온 조선인 유학생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처지를 탓하거나 문제삼지 않았다. 이토의 인품에 감화된 박중양은 평생 이토 히로부미나 이등박문이라 하지 않고, 이등 공(公), 춘보 공(公), 이토 공이라고 꼬박 존칭을 붙여서 불렀다. 1904년 귀국 이후 한국통감으로 부임해온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나면서, 그의 관료생활의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1904년(광무 7년) 3월 15일 러일전쟁에 종군하겠다고 일본 외무성에 밝히고, 4월 배편으로 부산항을 거쳐 경성으로 상경하였다. 귀국 후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한국의 행정에 서서히 적용하려 하였으나 반대에 부딛쳐 실패하고 만다. 귀국 직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평양도시로 천도하고, 조선을 정치 중심으로 신생국가와 협력해야 된다[14]'며 조선을 영세 중립국화할 것을 건의했지만 묵살당했다. 일본 체류 중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등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들은 조선인에게 필요한 것은 서구 문물의 유입 이전에 공공정신과 질서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여 그를 사사하였다. 대한제국기 활동[편집] 귀국과 일·러 전쟁[편집]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러일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에서 귀국 후, 1903년(광무 6년) 6월 16일 관리서 주사(管理署主事) 판임관8등(判任官八等)에 임용되었다.[16] 6월 17일 관리서 주사직을 의원면직 신청하였으나 사직서가 반려되었다. 바로 수구파를 내치고 애국적인 세력을 등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상소는 올라가지도 않았고, 그해 말 관리서주사직을 그만두었다. 1904년 2월 일·러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고등통역관 대우로 임명되어 일본군에 종군하여 인천, 황해남도 진남포, 용암포와 중국 청나라 안둥현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었으나 그의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부른다. 한편 그는 일본인을 잘 섬겨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국에서 가장 좋은 관리는 오직 박중양 이다." 는 말을 듣기도 했다.[17] 일본인과의 교제, 일본 생활, 종군 생활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을 신뢰, 일본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우수성을 높게샀으며 그들의 친절에 감탄하였고, 일본인 기녀에 대해 좋은 추억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국정 개선을 위해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자원하는 일본인의 의협심을 가슴에 담게 되었다. 한편 박중양은 이와 반대로 조선인들은 '야만적'이라고 봤다. 그가 조선인들을 야만적으로 본 이유는 '사기에 능하고, 도벽이 있고, 또한 파괴성이 있다'고 봤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비교하며 조선인이 공공 정신이 없고, 사기와 거짓말에 능하며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것과 도벽과 허세가 심한 점을 보면서 실망하게 된다. 관료 생활[편집] 관료 생활 초반[편집] 1900년대 초의 박중양 농상공부, 진주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같은 해 11월 농상공부 주사(農商工部主事)가 되어 바른 인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외면당했다. 바로 대구 파견을 자청하여 1년간 대구에서 체류하였으며, 이 때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통역을 하면서 관찰사와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조절했다. 당시 대구에서는 경부선 개통 이후 이곳에 몰려든 일본인과 경북 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관찰사의 일을 방해했고,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연유로 박중양이 대구에 있던 1년 사이에도 장승원, 이용익, 이근호, 신태휴 등으로 관찰사가 빈번하게 바뀌었다. 이때 박중양은 이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일본인의 편에서 또 때로는 중간적인 입장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05년(광무 8년) 2월 6품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2월 10일 진주군수 이용교(李瑢敎)가 뇌물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자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 2월 20일까지 진주 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晋州判官兼晋州郡守署理)를 겸하였다. 이때 박중양은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였다.[18] 임진왜란 당시 왜병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아먹는 바람에 나중에는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18] 성곽의 일부는 성 북방에 있던 대사지(大寺池)등 세못과 해자를 메웠다. 그해 3월 다시 일본으로 유학, 도쿄에서 고등과를 다녔다.[19] 이듬해 5월 귀국한다. 일본 관병식 참석[편집] 1906년(광무 8년) 1월 일본 체류 중 경상북도 대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4월 17일 군부기사(軍部技師)로 일본군 관병식(觀兵式) 시찰차 육군부장 이근호(李根澔), 부령 조성근(趙性根), 어담(魚潭), 참령 윤치성(尹致晟), 정위 김기원(金基元), 임재덕(林在德)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20] 1906년 5월 5일 군부기사(軍部技師)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으로 발령되었다가, 다시 군부 군기창 주사(軍器廠主事)로 전보되었다. 5월 20일에는 주전원 경위국 경무관(主殿院警衛局警務官)으로 발령되었다.[21] 그러나 6월 6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원면직하였다.[22][23] 1906년(광무 9년) 6월 군부 특별 파견원에 임명되고, 그해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이 대한제국 정부 특파대사로 일본 도쿄를 방문할 때, 박중양은 현지에서 통역관 자격으로 수행원의 한사람이 되어 의친왕을 수행하여 도쿄로 갔다.[24] 바로 6월 6일 도쿄에서 열린 관병식(觀兵式)에 대한제국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한국 사회에 대해 설명하고 희망이 없다며, '조선에는 희망이 없어 미국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자신의 미국 유학을 도와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 유학 대신 관직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충고해주었다. 6월 26일 의친왕 일행이 귀국하자 수행원에서 면직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편집] 1906년 7월 일본 도쿄에서 고등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선택되었다.[19] 1906년 7월 12일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6품으로 승진, 주전원(主殿院) 경위국 경무관(警衛局警務官) 주임관4등(奏任官四等)이 되었다. 이토 통감의 총애를 받은 박중양은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통역을 도맡았다. 뿐만 아니라 의친왕이 일본에 행차할 때는 통역 수행원으로 따르기도 하였다.[13] 1905년(광무 8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될 무렵 그는 이를 저지하지 않는 조정 대신들을 무책임하다며 성토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사실상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간주하고 체념하였다. 1906년 일본에 사절로 갔던 의친왕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 수행한 공로로 일본정부가 보내준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 무렵,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그는 조선통감부의 신임을 받았다.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함께 논리적인 언변과 처신 등으로 일본인들도 함부로 다루지 못했고 이때 '일본인들도 칭송한 야마모토 군수'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1906년(광무 9년) 7월 중순 박중양은 다시 대구판관으로 나갔다가, 그해 7월 19일 통정대부 대구 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주임관 4등으로 승진했다. 대구군수가 되자마자 새롭게 대구군청을 건립하였다. 이때 그는 대구의 지역 유지와 기업인들을 모아서, 이들의 자금을 헌납받아 대구군청을 건립했다. 이를 두고 '권력을 악용해 몇몇 유지들을 동원해 사사로이 시청(市廳)을 만들어 대구 지방민에 대해 탐학을 저질렀다[25]'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알려지기도 했던 박중양은 유학시절에 쌓은 일본인 인맥과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1906년 경북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로 부임했다.[26] 7월부터 경상북도 이사청 설치의 준비, 감독을 맡은 그는 9월 15일 경상북도 관찰사부에 부속된 선화당(宣化堂) 건물에 대구이사청을 설치하였다. 대구읍성 해체 작업[편집] 1906년 10월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대구읍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1906년(광무 9년) 10월 1일 대구군수 재직 중 주임관 3등(奏任官三等)으로 승급했다.[27] 1906년 대구 이사청의 오카모토 부이사관(副理事官)과 가게야마(景山) 민단장대리 등이 대구성곽을 철거하고 그 터를 도로로 할 것을 경상북도관찰사서리 대구군수 박중양에게 강권했다.[28] 대구군수로 재직하며 대구읍성을 허물고 도로를 만들어 지식인들의 원성을 사는가 하면 동시에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하도록 협조했다. 이때 내무부의 허가를 받지않고 일을 처리하여 징계를 받을 상황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으로 오히려 영전[29]했다. 박중양은 조정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던 것이다.[30]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속에 가능했다.[30] 통감정치를 하고 있을 무렵, 그는 '대구성을 헐어도 되는가'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불가(不可)의 명령이 내려왔다.[31] 그러나 박중양은 읍성 해체를 강행한다. 1906년 당시 그는 조정의 승인도 없이 일본 거류민단의 주장을 받아들여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32] 일본인들은 대구역 근처에 매입해둔 도원동 일대 수만평의 땅을 개발하기 위해 대구읍성의 철거를 요구했던 것이다.[32] 철거를 시작한지 10일이 경과한 10월 1일에 철거해도 되느냐는 장계를 보냈다. “ 대구부의 성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부청이 이를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1906년 10월 1일 경상북도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33] ” 당시 대구군수였던 박중양은‘혁구개신(革舊改新·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이라는 명분 아래 대구읍성 해체를 시작했다.[34] 박중양은 일본인 이와세, 니타에, 사이토, 이토 네 사람과 극비리에 모의하고 韓·日 인부 60명을 부산에서 고용하여 읍성 해체를 시작하였다. “ 박중양 관찰사 서리의 뜻을 받은 이와세, 나카에, 사이토, 이토모토 네 사람은 극비리에 인부 60명쯤을 부산에서 데려와 하룻밤 사이에 성벽의 이곳저곳을 파괴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치기영 치기영 치기영’ 하면서, 목도꾼으로 부르는 인부들이 큰 돌, 작은 돌을 운반하고 있었다. 한국사람은 원래 어깨로 물건을 메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물건을 져 나른다. 박 관찰사는 이때 처음으로 목도꾼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그 운반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무거운 물건을 두 사람 이상이 나를 때, 일본사람들은 ‘영치기 영치기’라고 소리를 질러 호흡을 맞춘다. 한국사람들이 듣기를 ‘치기영’이라고 울렸는지 지금도 조선인은 첫 소리매김이 ‘치기영 치기영’이라고 나온다 하니까 우습다. 착각이라는 것이 재미있다.[35] ” 박중양이 비밀리에 부산에서 데리고 온 인부 60명이 대구 읍성을 허무는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흰옷을 입은 조선인 무리에서 선비 한 명이 분을 못 이긴 채 앞으로 나섰지만, 주위의 만류로 물러났다.[14] 박중양은 물러서는 조선인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무력한 조선인이 기껏 덤비는 꼴이라니….’ 그리고 인부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시작하라! 동트기 전 지시한 바를 차질없이 수행하라!” 박중양의 벽력같은 호령과 함께 성벽이 파괴되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곡괭이질 한 번에 남자들이 울었고, 그 울음소리에 아녀자가 뛰어나와 울었다. 울음소리는 성벽에 붙어 우는 가을벌레의 소리처럼 측은하고 가여웠다. 박중양은 조선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울음 속에 서식하고 있는 무력함이 지긋지긋했다.[14] 박중양은 조정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던 것이다.[36]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속에 가능했다[36]는 시각도 있다. 대구읍성 해체 직후[편집] 박중양을 풍자한 중양타령, 대한매일신보 대구읍성 해체 직전 대구시가도 대구읍성을 대한제국 내부의 지시 없이 해체한 일로 내부에서는 그에 대한 추궁이 들어왔다. 이때 이 성벽 파괴작업은 오직 박중양 의 독단으로 감행한 일로 목이 달아날 각오로 대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런 경우를 생각 하고 두 아들(文雄, 武雄)을 일본으로 망명 시킬 준비도 하였다는 것이다.[37] 박중양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비위를 규명하기 위한 칙서를 받고 신변이 위태해졌으나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징계를 면할 수 있었다. 대구읍성을 해체한 박중양은 경상북도 감영의 객사였던 태평관을 없애려하자 기생 염농산 등은 주민들과 합세하여 태평관 앞에서 농성하였다. 강제로 해산하려 하였으나 해산하지 않자 그는 사연이 있을 것이라 보고 태평관 해체를 포기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박중양이 성벽을 허물고 나온 성돌을 1개에 1냥씩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38] 이 때 일부 선교사들이 성돌을 옮겨다 집을 지었고, 선교사 주택뿐만 아니라 신명학교·계성학교, 동산의료원 및 약전골목, 일반 고택 등으로 흩어졌다.[39] 이때 그의 덕택에 상권을 확보한 일본인들은 박중양이 전라남도관찰사로 부임해갈 때 석별의 기념으로 시계를 선물했을 만큼 그를 고맙게 생각했다.[40] 대구군수 재직 중 그는 대구객사를 매각하였으며, 공자묘를 헐어버리기도 했다. 또한 대구의 공공건물에 있던 이승만, 서재필의 후원을 받던 협성학교를 내쫓아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여러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성벽해체 소식을 재빨리 들은 사람들은 눈먼 땅을 사재기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31] 성 밖에 땅값은 평당 10원이었으나 오히려 성안의 땅 값은 2원이었다는 것이다.[31] 1907년 5월 박중양 관찰사는 대구 약령시를 구 경상감영 옆의 객사에서 구 대구읍성 남문 밖 약전골목(남성로와 동성로 일부)으로 이전케 하였다. 대구읍성을 해체한 뒤 일인들은 헐값에 사들인 도원동 일대 저습지를 헐어낸 성토와 석재로 매립해 큰돈을 벌었다.[36] 훗날 “박중양이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해 갈 때 일본인들은 석별의 기념으로 시계를 선물했을 만큼 그를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32] 평안남도 관찰사 재직 시절[편집] 대구읍성 철거 이후 대구시가지는 확장되었다. 그가 대구 시가지를 확장시켰다는 여론도 나타나면서 그를 처벌하려던 시도는 사라진다. 1907년(광무 10년) 초에는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칙임관 4등(勅任官四等)이 되었으며, 평안남도 관찰사로 영전했다가 그해 5월 20일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잠시 재직하였지만, 조정에 흉년을 이유로 농민들의 빚과 토지세를 탕감해주었으므로 수전라남도 관찰사에서 이임할 때 전남의 지역 유지들은 그에게 황금 시계를 선물해 주었다. 1907년 6월 1일 평안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취소되고 다시 대구군수가 되었다. 다시 6월 7일 가선대부가 되어 다시 평안남도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로 부임하고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으로 승급했으며 6월 10일 이시영이 평안남도 세무감(平安南道稅務監)에서 해임되자 평안남도세무감을 겸직하였다. 이어 1907년(광무 10년) 6월 13일 평안남도재판소 판사, 평안남도 관립 일어학교 교장(平安南道官立日語學校長)에 임명되어 평안남도 관찰사로 평안남도세무감과 재판소판사, 관립일어학교 교장 등을 겸임했다. 이때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특혜 없는 판결로 명성을 쌓았고, 위생 사업과 도로 정비, 단발령 강행, 병원 유치 등에 힘썼다. 1807년 평안남도 선유사(宣諭使)를 겸임하였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다. 주로 밀주와 보리술, 막걸리 등 술을 잘 마셨다. 술을 좋아하던 관료들에서도 유명한 사람은 '보릿술 지사(知事)' 라는 별명 을 듣던 박중양이었다.[2] 1907년 박중양 이 맥주를 대음 (大飮)하는 한 대목이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었다.[2] “ 평남 관찰사 박중양 씨는 성질 이 이상 하야 1 홉으로 매일 1호 에 다음제발(多飮諸拔)하야 한나절 에 일본 맥주 60병 을 능음무여(能飮無餘)하고 소주는 40병을 근음(僅飮)하얏으니 음주거량(飮酒巨量)은 박중양이라 말고 박태백(朴太白)이라 위할지오. ...(이하 중략)...[2] ” 한번은 소주를 40병 까지 마셨다고 한다. 언론인 겸 작가 이용선은 '불과 한나절 동안에 맥주 60병을 혼자서 거뜬히 먹고 나섰으니 과연 '박태백'이요, '보리술 관찰사'라고 불려도 화낼 일은 아닐 것이다.[2]'라고 하였다. 박중양은 술에 취하면 말수가 적었으며 좋고 나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량의 술을 마셨지만 그는 술주정을 하지 않기로도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종종 홀로 창가를 바라보며 흡연과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평안남도에 있을 당시 근무 성적이 나빠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민중에 대한 무관심과 경멸, 냉정한 태도 역시 백성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박중양의 횡포는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13] 그의 친일행각과 학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원성을 담은 ‘중양타령’이라는 노래까지 나왔을 지경이었다.[36] 이는 대한매일신보 '제2의 박중양'에서 평안남도관찰사 이진호를 겨냥하여 "박중양의 횡포로 인민의 고통은 말도 못할 지경인데, 박중양이 둘이나 되니 인민이 어떻게 살아갈지 민정(民情)을 슬퍼한다"는 기사에서도 묘사되었다.[13] 고종 퇴위 전후[편집] 1907년(광무 10년) 7월 고종이 퇴위를 선언하자 그는 고종의 퇴위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양위 철회 상소에 상관없이 고종은 양위하고 말았다. 1907년(융희 1년) 8월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항일의병전쟁이 전국토를 뒤흔들자, 그는 의병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그들의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 보고하였다.[13] 8월 12일에는 삼화부 주사 안양준(安養駿)이 뇌물을 각 면의 면장들에게 불법적으로 받은 일로 징계하여 파면시켰다. 그해 10월 30일 우편사무 취급 권한을 이용하여 백성의 편지를 함부로 열람해본 영원군 군수 김제민(金濟民)을 내부에 보고하여 월권행위를 적발하여 파면시켰다. 1907년 10월 2일에는 성천군의 나서성(羅瑞成)이 민심을 선동한다고 보고하였다. 1907년 10월 23일 평안남도선유사에 임명되어 순시하였다. 이때부터 평안남도재판소 판사는 참서관이 서리가 되었다. 11월 7일에는 내무부에 상소를 올려 지방 판임관은 해당 도관찰사가 임명하게 해달라고 상소하였다.[41] 그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1908년 1월 1일부터는 판임관급 이하의 관리들은 해당 도의 관찰사가 직접 임명케 하였다. 그해 11월 11일 근무중에 임지를 이탈하여 한성부에 사사로이 올라왔다가 내부로부터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12월 1일 선유사 직무를 마치고 관찰사직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각 지방관에게 부여한 우편취급 사무에 대해 지방관들이 우편을 함부로 열람하지 못하게 할 대책 마련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1908년(융희 2년) 2월 통역관으로 일·러전쟁에 종군,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5등 서보장을 전달받았다. 그해 6월 6일 각 관립외국어학교 졸업생 중 내부대신이 임의로 인재를 채용하려 하자, 박중양은 정식 채용시험을 보지 않은 인물을 내부대신이 임의로 채용, 인사를 단행함은 월권행위, 권력남용이니 옳지 못하다 하여 무산시켰다. 1908년 6월 11일 경상북도 관찰사 겸 경상북도재판소 판사 칙임관 3등에 임명되어 바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1907년(광무 10년) 2월부터 대구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는 등 일본에 대한 저항이 강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는 곧 부임해온 경북관찰사였던 박중양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42] 그해 7월 1일 겸임 평안남도관립일어학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08년 박중양은 본적지를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경상북도 달성군 북면 침산리로 옮겼다. 개혁 정책과 단발령 강행[편집] 단발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는 일찍부터 단발령의 효율성을 알리고, 이를 보급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발령에 호응하지 않았다. 경상북도관찰사가 된 박중양은 영해(寧海) 지방에 들어가 한 고을의 수천 백성들의 상투를 꾀를 써서 잘라 버린 사건이 있었다.[43]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로 새로 부임한 박중양은 영해군으로 초도순시를 간 뒤, 그 잘하는 연설로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고 나서 선언했다.[43] “ 나에게 따로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 연설회가 끝난 뒤 군청 내아(內衙)로 들어오시오.[43] ” 도백(道伯)이 자기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 인사를 받겠다고 하는데 감지덕지한 유지 기관장급들은 좋아라 하고 내아로 줄을 지어서 들어갔다. 그런데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이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 한꺼번에 수백 명의 상투가 잘려 나갔으니 내아는 금세 통곡바다를 이루었다.[43] 이후 그는 위생의 편리함을 이유로 단발령을 권고했고, 호응이 적은 곳은 직접 찾아가 순사들을 매복시킨 뒤 단발을 강행하였다. 1907년 평안남도관찰사 재직 중에도 그는 단발의 필요성과 위생상 편리성을 역설하고 단발령을 강행하였다. 단발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으면 면담을 신청한 뒤 도청에 출입할때, 도청사 정문 또는 관찰사 집무실 입구에 가위를 든 관리들을 숨겨두고 출입자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게 했다. 또한 평안남도관찰사로 재직 중 평양과 남포에 병원 유치와 의학교 유치를 추진하였다. 그는 신문을 보고 국내외 정세를 알 필요가 있다 하여 1907년 10월부터는 자비를 들여 신문을 구매, 평안남도의 지역 유지들에게 발송하여 읽게 하였다. 황성신문과 매일신문 등 박중양의 정책과 평안남도에서의 근무 실적이 저조함을 비판, 지탄하는 신문들이 많았으나 박중양은 이에 개의치 않고 신문들을 구입하여 유지들에게 보냈다. 그는 이들이 신문을 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신문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가려내 지역 유지들에게 질문하였다. 이후 자연스럽게 평안남도 지역에 신문을 읽는 풍습이 정착되었다.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편집] 1907년 6월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무렵 1908년 6월 11일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대구객사를 허물었다. 경북관찰사로 부임한 그가 대구객사를 허물면서 금학루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여 '누백년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데갔노'라는 가요[44]를 불렀다.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래 그는 예산 집행 내역을 일일이 기록으로 작성한 뒤 조정에 상신하였다. 그는 스스로도 장부를 가지고 다니면서 참여관, 각 국장, 과장, 실무자들에게 영수증을 받아서 보고서로 묶어서 작성, 보고하게 했다. 취임 초반 그는 대구 지역 내의 각 언론사들 사이의 중재에 나섰다. 일본거류민단 일부에서 1908년 7월에 대구일일신문의 논조에 불만을 품고, 그해 9월에 대구시보(大丘時報)를 창간하였다.[45] 이때 박중양 등의 중재로 대구일일신문과 대구시보가 합자해서 그해 10월 1일에 대구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하기 시작했다.[45] 10월 무렵 박중양은 대구 지역의 유지들의 기금을 모아 또다른 신문 발행을 기획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 그는 대대적으로 도로 정비와 주택 정비 작업을 추진한다. 초가집 대신 기와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대적으로 도시 정비를 추진한다. 이때 토지수용을 거부하는 일본인 상인과 지주들을 설득하여 도시계획, 정비를 추진한다. 일부 일본인의 토지를 수용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으니 일본인들이 많은 양의 보상금을 바라므로 토지 수용이 힘들었다. 그는 일본인 지주들을 초청하여 여러 차례 설득하였다. 당시 박중양은 일본 거류민단과의 간친회에 있었던 연설문을 일본인 '카와이 아사오'가 지은 "대구물어 (大邱物語)"에 실려 있다.[31] “ 한일 양국의 의사를 소통하고 양자 공통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개최된 이 모임이 공전의 성황을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소생이 이 곳 대구와는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은 여러분이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군수시대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인이 많아 늘 고견을 듣고[31] 적잖게 행정상의 편익을 받았음을 감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소생은 일신을 던져 끝까지 이 땅을 위해 진력코저 하니 청컨대 일본인 여러분의 지도 편달을 바라며, 혹 여러분의 노여움을 살지 모르나 가일층의 편달을 바랄 뿐이다. 원래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 한국인에 대해서 귀국인은 사부된 책임을 깨닫고 교유함과 알선의 노고를 사양치 말 것을 간절히 바란다.[46] 사실대로 말한다면 정부로부터 2만원의 교부금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 토지 소유자가 토지 수용의 교섭에 응하지 않고 과도한 고가를 주장하는 까닭으로 결행할 수 없어서 다시 정부에 교부금을 반환하는 상태가 되었다. 한인 가옥은 명령에 따라 정리할 수 있었으나 일본인 토지는 밭이거나 황무지라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없었다. 원래 대구라는 토지는 한국 정부로부터 도외시 당하고 있다는 감이 없지 않다. 관인(官人)의 안중에는 이제껏 대구를 무시하였고 경성은 별도로 하더라도 대구와 흡사한 평양은 수십만원의 국고 보조가 있었다. 오직 일본인 여러분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분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원컨대 이 뜻을 살피셔서 장래 더욱 우리들을 편달해 주기를 바란다.[46] ” 일부 일본인들은 "우리가 스스로 개혁을 거부한 너희들을 왜 지도 편달을 해야 되느냐"는 항의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빈정거리는 사람과 솔직하다는 의견이 팽배하였다.[46] 그는 일본인과 미국인 상인, 선교사 등 외국인에게 조선에 보다 개화된 문명 전파와 교류의 필요성을 누차 역설하였다. 1908년 8월 10일 서병오가 신녕군수에 임명되었으나 10일만에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박중양은 이를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렸다.[47] “ 즉 該員이 赴任十餘日에 稱病辭職은 詐欺取官이오니 相當勘處하심을 伏望等因此를 査온즉 該員을 專爲圖官하야 欺騙上部하고 倖得任用하야 不拘初無就職○底意하고 一朝赴任未幾에 忽至規避하오니 究其情跡하면 極爲駭妄이라. 似此郡守직 不可仍置이기是以로 免本官(以上十月八日內閣)[47] ” 이는 관보에 그대로 게시되었다.[47] 서예가였던 박중양은 역시 서예가인 서병오에게 친필 글씨를 부탁했지만 서병오는 거절하였다. 그밖에도 청송군수 심택수(沈澤洙)의 사직서[48] 등 군수, 부윤, 현감 등의 사직서를 받으면 즉시 보고서로 작성하여 조정에 상신하였다. 1908년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은 신돌석의 활약상에 대하여 보고서를 올렸다.[49] 들개 사냥 대 작전[편집] 들개 1908년 10월 박중양은 또 다시 개소탕 작전을 펼쳤다.[50] 194마리의 개가 비명횡사했다.[50] 동시에 들고양이도 전염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대부분 잡아서 소탕했다. 1907년(융희 1년) 10월 그가 경북관찰사로 부임해오기 전에 일본인이 들개에게 물린 이후 들개 소탕작전을 실시했으나 계속 거리에 개가 많이 다녔으므로 다시 개 소탕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대구에 주둔하던 일본군 한 사람 이 개에 물려 죽었다. 그래서 마침내 백성들에게 개를 모두 죽이라고 명을 내리고 듣지않는 자는 처벌한다고 하였다[51]"고 하였다. 한편 1934년의 잡지 별건곤에 의하면 박중양이 야밤에 기생집에 출입하고 오다가 들개들에게 물려 봉변을 당하고 그 분풀이로 들개들을 소탕했다고 한다. “ 박중양과 야견박살(野犬撲殺)지금에는 사견휘체규측(飼犬取締規則)이 잇서서 그 규측에 의하야 기르는 개가 안이면 소위 야견(野犬)으로 취급하야 경찰서 가튼대서 박살을 식히는 일이 잇지안은 그 규측이 생기기 이전에 대구(大邱)에서 벌서 야견박살이란 불문의 법을 내여 만흔 개를 박살한 사람은 대구 관찰사(觀察使)로 문제만흔 박중양(朴重陽)이다. 그가 그러케 야견박살을 만히하야 일시 개백정 관찰사란 별명까지 엇게 된 것은 무슨 일반 공익에 필요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의레의 화류계에 명물남인 그는 대구에서도 공무여가에는 긔회 잇는대로 기생집 출입을 만히 하얏는데 하루밤에는 대구에서 기생촌(妓生村)으로 유명한 말방아골(洞名)을 비밀이 놀너가다가 사나운 개떼를 만나서 살을 물리고 옷을 찌기여서 그야말로 개코 대망신을 하고 도라와서는 그 이른 날로 대구경찰서에다 야견박살의 긴급명령을 나려서 일시 수천마리의 개를 박살시켰다고 한다. 말하자면 박중양은 야견박살의 선도자요, 원훈이다. 개사회에서는 영구히 잇처지지 못할 인물이다. ”   — "萬華鏡", 별건곤 1934년 제69호(1934년 1월호) 중에서 황현에 의하면 대구시내에 "열흘 사이에 개의 종자가 없어지고 말았다.[51]"고 한다. 들개를 대대적으로 소탕한 덕에 그의 별명은 '개백정 관찰사, 야견 투살대감'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 충북 도지사 박중양군은 遞任된 丸山警務局長이 조선을 떠날 때에 秋風嶺까지 餞送하고 山狸 1필을 기념품으로 주더니 금번 행정정리 바람에 朴군도 또한 馘首를 당하게 된단다. 忠北에 만일 朴군처럼 의리 잇는 친구가 잇다하면 들개라도 1필 주어 野犬 撲殺大監의 미역국 먹은 기념품을 삼을터이다. 그러나 조선 습관상에 산에 개고기는 원래 大忌物이니 奈何. ”   — "京城雜話", 개벽 제54호(1924년 12월호) 별건곤의 보도에 의하면 기생촌에 들렸다가 취해 돌아오는 그를 개떼들이 물어뜯어서 살과 옷이 다 찢겼다고 한다. 한편 그의 들개 박멸 작전은 1930년대까지도 조롱거리가 되었다. 1908년 10월의 들개 소탕 작전으로 이후 대구시내의 들개와 들고양이 수가 절반 이상으로 감소하였다. 1908년(융희 2년) 11월 러·일 전쟁에 통역으로 참전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의 서보장을 받게 된다. 그는 평소 일본인이나 기타 양이가 되었더라도 오랑캐라 배척할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된다는 뜻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해로운 발언쯤으로 치부되었다. 1908년 12월 일한민간친회(日韓民懇親會) 평양지회에 참석, 여기서 그는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들의 지도편달에 달려 있습니다.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일본인들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는 취치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순종 남행길 수행[편집] 1909년(융희 3년) 1월 12일 대구행재소에서 경기도관찰사 김사묵, 전라북도관찰사 신응희, 충청남도관찰사 최정덕, 충청북도관찰사 권봉수 등과 관내외 군수, 부사들과 함께 순종을 인견하였다. 대구역사에 임시로 마련된 편전에 들어선 순종 황제는 박중양 대구군수 겸 경상도관찰사 등 대구지역 고위인사들의 인사를 받고는 가마에 올랐다.[52] 인견이 끝난 후 평안남도 관찰사 이진호, 평안북도 관찰사 유혁로, 경상남도 관찰사 황철 등과 함께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의 서남부 순시를 수행하여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지역을 함께 순회하였다. 1909년(융희 3년) 1월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경상남북도를 순시할 때 대구 수창학교(현 수창초등학교의 전신)에서 일본 국기를 게양하지 않은 일로 수창학교를 폐지할 것을 학부(學部)에 건의했다. 순종의 갑작스러운 시찰을 두고 항간에서는 남쪽지방 시찰이 끝나면 부산에서 군함을 타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갈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53] 당시 수창학교 학생 30여명은 경부선 철로에 누워 함께 죽어버리자면서 대구역으로 출발했다. "임금이 볼모로 잡혀가는 것은 절대 볼 수 없다"는 어린 학생들의 충정심이었다. 그 중에는 서른을 넘은 중년의 초등학생도 끼어 있었다. 교사들의 만류로 불발되긴 했지만, 이 때문에 박중양의 요청으로 학교가 폐쇄될 뻔하기도 했다.[53] 그러나 순종은 유언비어로 어린 학생들이 움직였지만 충성심이 가상하다며 넘겼다. 이를 두고 성균관 대학교 강사,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김일수는“박중양은 아마도 순종의 방문을 통해 한국통감부 내 자신의 영향력을 대구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대구 출신이 아니었던 박중양이 대구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정치적 행동 때문이었을 것[54]”이라고 보았다. 김일수 박사(성균관대학교 강사,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위원회 위원)는 “당시 왕을 알현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왕이 직접 대구를 찾았다는 것은 박중양이 일제로부터 무한대의 신임을 받고 있음을 대구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아마도 박중양은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식민지화 할 경우 조선의 정치적 대안세력이 자신임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라고 보았다.[42] 일설에는 경상북도감영에서 달성공원까지 길을 순종이 오기 전 날 박중양이 만들었다고 한다.[42] 1909년 5월 대구 협성학교를 폐하려 하였으나 학부에서 불허하였다. 대신 그는 협성학교를 제2공립보통학교로 변경하려 하였으나 역시 학부가 거절하였다. 대구 십자도로 개통과 일본인 관료 응징[편집] 일본인을 지팡이로 내려치는 박중양을 풍자한 만화 (1930년대) 1909년(융희 3년) 대구에 십자도로를 개통하였다.[55] 대구 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를 말하는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 이 도로가 개통될 무렵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다.[55] 대구 시가지를 정비하고 십자도로를 개설함으로써 대구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순종의 남행을 수행하고 돌아온 뒤 칙임관 2등(勅任官二等)으로 승급하였다. 같은 해 7월 재조선 일본인 농업관계자와 유지들이 만든 조선중앙농회의 경상북도지회장에 선임되었다. 한편으로 조선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들을 발견하면 자신이 들고 있던 작대기로 무례한 일본인을 두들겨 패고 그 일본인이 저지른 횡포를 경찰에 따졌으므로 일본인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밉게 보인 순사 몇명 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이나 옷을 벗겨서 거리로 내쫓기도 했다. 그는 일본 순사 때리기를 예사로 하였다 한다.[56] 한번은 일본인 순사들이 노점행상으로 떡을 팔고 있는 어느 노파에게 교통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장사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말을 못알아들은 이 노파가 그 다음날에도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자, 화가 난 순사들은 떡함지를 발로 걷어차 떡이 죄다 쏟아져 소동이 발생했다. 이를 본 박중양은 바로 관할 경찰서장을 호출하고, 해당 순사에게 땅바닥에 떨어진 떡을 입에 물리고 떡함지를 머리에 이게 하여 장터거리에 조리를 돌려 민심을 수습하게 했다. 그의 위세는 막강하여 '작대기를 휘두르면 기차가 섰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56] 그러나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각별히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인들도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그는 밀주와 탁주 등 술을 즐겼다. 한편 마땅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들을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취직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소문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가 술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밀주 항아리를 갖다주고 그 대가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일제 시대 활동[편집] 韓日倂合 직전[편집] 관료생활 중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싫어하던 이들 조차도 그를 쉽게 다루지 못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 여러 대소 관료들이 온갖 뇌물을 가지고 아부를 해 왔다.[57]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 물리쳤다.[58] 평소 사람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사사로운 대접, 접대도 최대한 회피하였다. 순종의 대구 방문 이후 박중양은 일제로부터 투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42] 곧 가의대부로 가자되었다가, 1909년(융희 3년) 10월 23일에는 그해 초 순종의 서남부 시찰에 수행한 경기도관찰사 김사묵, 평안남도관찰사 이진호 등 세 관찰사와 이하 관료들을 포상할 때 가자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0월말 한때 타지로 전임이 예상되었으나 결국 유임되었다. 1910년(융희 4년) 3월 경상북도 내 각 군수들과 지역 명문가, 유지들에게 기부를 호소하여 수만금을 모아 경북일보를 창간하였다. 1910년(융희 4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박중양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영전이 되었을 때 대구부민은 사은의 뜻으로 금줄이 달린 시계를 선물하였는데 시계 뒤 뚜껑 안 쪽에 이중 십자형을 새겨 넣었으니 이는 성벽파괴의 공적과 십자로 개통의 배려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31] 그해 韓日倂合을 보았다. 韓日倂合조약이 체결되었으나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를 위해 국민이 충성할 이유가 없다'며 韓日倂合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1910년 9월에는 경상북도에서 각 면민들을 대상으로 특별 강연을 했는데, 연사의 한사람으로 초빙되었다. 여기서 그는 韓日倂合 조약의 이유, 합병 조건을 설명한 후 새 정부의 통치에 적극 협력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후 그는 "폭풍과 홍수를 방어할 지력이 없고, 대세를 저항할 실력이 없다. ... 요로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일제 시대 초반[편집] 韓日倂合 전후[편집] 박중양, 1910년 무렵 한일 병합 조약, 조선총독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등관(高等官) 3등에 임명되고, 다시 충청남도 도장관(도지사)에 보직되었다. 韓日倂合 이후 종5위 훈5등(從五位 勳五等)의 품계를 받았으나 남작 작위는 거절하였다. 1910년 10월 1일부터 1912년 3월 31일까지 충청남도 장관직을 지냈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뒤 전체 13도의 도장관 중에 조선인은 전북의 이두황, 충남의 박중양, 강원도의 이규완 등 3명 뿐이었다.[59] 도청 청사는 옛 관찰사가 있던 감영을 그대로 쓰기로 했고 도장관실 역시 관찰사가 집무하던 72평짜리 선화당(宣化堂)을 사용했다. 그리고 도장관을 부를 때는 '각하'라는 칭호를 사용하도록 했다.[60] 박중양은 충남도장관 집무를 시작하자마자 첫 군수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서 부여 임천군수 이종열(李宗烈)이 계속 되는 총독부의 토지조사로 "민심이 흉흉하니 이것을 중단해 줄 것과 농지의 단위를 종래의 ‘마지기’에서 ‘평(坪)’으로 바꾸면 혼란이 온다"는 발언을 했다.[60] 그때 농민들은 순사의 호위아래 살벌한 분위기 속에 농지측량을 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도장관은 버럭 화를 내며,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하고 퇴장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종열 임천군수는 해임되었다.[60] 1912년 8월 1일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韓國併合記念章)을 특별히 수여받고, 11월 4일 조선총독부 고등관 2등, 1913년 1월 30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 1913년 7월 1일 훈4등 서보장(勳四等 瑞寶章)을 수여받았다. 충청남도도지사인 그는 도내의 소학교, 중학교 학생들 중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손수 시상하였다. 1912년 당시 예산소학교 2학년이던 화학자 이태규는 성적이 우수하다 하여 그에게 상을 받았다 한다. '예산소학교 2학년인 이태규의 재주가 널리 알려져 박중양 도지사가 손수 이태규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또 우등생에게 주는 상품으로 사과나무를 받아와 집 앞마당에 심기도 했다.[61]'는 것이다.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편집] 1911년 4월 따스한 봄이 시작되면서 데라우찌 조선 총독은 각 도장관들에게 구형 포드 자동차를 한대씩 사서 보냈다. 그러나 차를 움직일 운전사가 없어 박중양 도장관은 차를 가져다 놓고도 그대로 묵혀두었다가 공주에 살고있던 崔모라는 사람을 서울까지 보내 운전교육을 받게 한 다음 비로소 차를 타기 시작했다.[62] 후일 대전상공회의소장을 지낸 문갑동(文甲童)도 이무렵 함께 운전을 배웠는데 崔모씨는 도장관차를 끌기 위해 면허도 따기전에 공주로 내려왔다. 최모는 면허증도 없이 도장관차를 운전한 셈이다.[62] 그러나 박중양은 도장관의 직권으로 최모의 무면허 운전을 승인하였다. 1911년 3월부터 박중양은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을 추진하였다. 1910년대 초 까지도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인 공주와 신흥도시로 발돋움을 시작한 대전 사이에 도로가 없었다.[62] 당시 공주에서 금강을 배로 건너 종촌과 대평리를 거쳐야 하는 불편한 길 밖에 없었고 지금 처럼 대전 - 동학사 입구 - 마티고개로 통하는 직통도로는 생각도 못했다. 물론 예산이 제일 문제였다. 그 당시 화폐단위로 최소한 87만원이 필요했었는데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옮길 때 현도청 신축비가 35만원이었다.[62] 조선총독부 건설국에서는 87만원의 비용은 무리라고 통고하였으나 박중양은 도로 건설을 고집하였다. 그래서 박중양 도장관은 총독부에 여러번 찾아가 교섭을 벌였으며 그래도 결말이 나지않자 데라우찌총독과 만나 결국은 87만원 전액을 타내는데 성공했다.[62] 이렇게하여 1912년 3월 대전 - 유성 - 반포 - 공주간 신작로 공사가 착공을 보게 되었다.[62] 큰 하천이 없어 공사는 쉽게 진행된 편이었으나 말티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는 길을 뚫는 것이 가장 난공사였으며 그 무렵 이 산에는 많은 화전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반발이 자주 말썽을 일으켰다.[62] 특히 말티고개 중턱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잘못 터뜨려 화전민 5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까지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화전민의 감정을 크게 자극했으며 이 때문에 공사가 1개월 동안이나 중단되기도 했었다.[62] 일각에서는 천지신명이 노한 것이라는 입소문이 돌았고, 즉시 도로 개통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지만 박중양은 도로 건설을 강행하였다. 1913년 9월 17일 공주 - 반포 - 대전간의 새 도로가 탄생했고 이 도로의 개통은 대전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으며 신비 속에 가린 계룡산개발에 크게 공헌했다.[62]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편집] 군청 통폐합작업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논산군 은진면 유지들이 도장관 면담을 요청했다. 당시는 군청이 은진면에 있었는데 논산, 강경, 연무 일대를 통합하여 논산으로 군청을 이전키로 하여 시끄러울 때였다.[60] 그런데 은진에서 찾아온 유지들 가운데 한 노인이 상투머리에 갓을쓴 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발령이 내린지 언제인데 지금 까지 상투를 하다니... 에잇! 다들 나가시요.' 그리고는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60] 이후 상투 노인들 대신 마을 청년 지도자들이 찾아오자 면담을 하였다. 예산농업학교의 교장인 이부스키 다케기치(指宿武吉))는 1910년 8월 10일부터 1915년 3월 31일까지 5년간과 1920년 4월 1일부터 1924년 3월 31일까지 5년간 제 3대 교장으로 두번에걸쳐 10년간을 근무하였다. 1915년 당시 충청남도장관(현 도지사) 박중양(朴重陽)과의 사이가 좋지못해 황해도 농무과 기사로 전임 되었다.[63] 그후 박중양은 황해도지사로 부임하려 했다. 1920년 황해도지사로 부임하려는 박중양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자 1920년 4월 1일자로 다시 예산농업학교로 부임하였다.[63]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 그는 대종교 포교를 금지하였다. 충청남도 장관 박중양이 조선총독부 내무부 장관 우좌미 승부(宇佐美 勝夫)에게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 에서도 대종교를 불허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64] 또한 충청남도 내 대종교 포교 사실을 적발하여 조선총독부 내무부에 보고하였다. 박중양이 보낸 '학도 에 대한 대종교 권유 상황 보고에 관한 건'이란 보고에서, 당시 대종교의 중요 문건 이었던 '단군교 포명서' 와 '단군교 오대종지 포명서'를 통하여 지역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총독부 는 '본건 에 대한 의견' 을 통하여 대종교를 기성 종교인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 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어 종교 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64] 1914년 9월 10일 조선총독부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충청남도지부 평의원에 선출되었다.[65] 1914년 11월 7일 매일신보사를 시찰하였다.[66] 1914년 11월 8일 조선총독부에서 소집한 전국 도지사 회의에 참석하다. 11월 21일 조선농회 충남지회 주최 충남 물산품평회에 참석하다. 공주군 물산품평회가 심사에서 우승을 하여, 우수농가인 논산의 이기승(李基升) 외 3인에게 은배를 시상하였다. 일본인 관리 응징[편집] 1914년 충청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충청남도도장관으로 재직 중 김갑순(金甲淳)의 회유와 위협에 쉽게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갑순은 희귀한 수석과 보물, 여자 등으로 그를 회유했지만 박중양은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김갑순을 호통쳐서 되돌려보냈다. 반민특위의 김갑순 재판 기록에는 '김갑순의 관청 교제는 참으로 능하였다. 박중양(朴重陽) 외 어느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판검사 쳐놓고 김갑순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하기도 했다. 1915년 3월 31일 충청남도 도장관에서 의원면직하고 바로 3월 31일 당일부로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충남도장관에서 물러난 뒤 대구 침산동에서 영농을 시작하였다.[67] 그해 11월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차 제물포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열린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15년 11월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4년 3월에는 자신의 소유 달성공원 일대를 1905년 4월에 건립된 대구신사의 이전 부지로 기부하기도 했다. 대구신사는 지금의 코끼리사육사가 있는 장소 근처에 건축되었으나, 부제가 실시되기 직전인 1914년 3월에 달성공원 중앙부 서단(현재의 물새사육장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전, 신축되었다.[68] 건축위원장은 부이사관인 오까모또가, 회계는 이와세가, 그리고 신사부지를 제공한 박중양등 세 사람에 의해 대구신사가 건립을 보게 되었다고 『대구일반』은 기록하고 있다.[68] 일제 시대 당시 그는 조선 내에서 일본인이 함부로 다룰 수 없던 몇 안되는 인사였다. 한번은 일본인 형사가 '조선놈은 배대지가 커서 밥을 대야로 먹는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한번은 박중양이 그 형사에게 이르기를 대구 도덕산에 일찍이 오를테니 새벽 4시 전에 오게 하였다. 이어 머슴에게 시켜 꽁보리밥 열 되를 준비하고, 다른 보에는 된장을 담되, 된장 한 바가지에는 매운 청양고추 한푼은 매달고 도덕산에 올랐다. 이 일본 형사는 새벽 3시부터 나타나 박작대기를 데리고 앞장서 산행을 하였다. 이어 대구 국우동 뒷산에서 아침을 먹는데 보니 꽁보리밥에 청양고추는 매워서 먹지 못하여 된장을 먹는데 된장도 맵고 심하게 짜서 먹는둥 마는둥 하고 다시 도덕산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못가 배가 꺼저 어찌나 배고팠지만 고픈 기색을 못하였다. 체면상 배고픔을 내색할 수 없어 그럭저럭 도덕산 꼭때기에 이르렀다. 정상에 다다라서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양푼에 밥 1그릇을 수북히 담아줘도 다 먹고, 또 1양푼을 더 먹었다. 순사가 밥을 더 먹는꼴을 보던 박중양은 '이놈의 순사 배가 함지박보다도 큰가보다. 혼자 밥을 반통이나 처먹는구나 하고 조롱하였다. 사회 단체 활동[편집] 1916년 7월 23일 호전당선화회(戶田塘仙畵會) 의 조직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입회하여 7월 23일 대구 동문 상무회도장에 작품을 출품하였다.[69] 그는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일본 유학 중에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이 무렵 그는 안동과 대구간 경철 노선 유치에 나선다. 1918년 4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8년 5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大邱商業會議所 特別評議員)에 선출되고 경상북도 제2회 물산공진회에 참여하여 물산공진회 경상북도지회 평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8년 8월 28일 대구와 안동간의 철도 개통 후원조직인 구안간 경철기성회(丘安間輕鐵期成會)의 창립에 참여하고, 바로 구안간 경철기성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대구부청 회의실에서 후원회를 개최하였다.[70] 대구와 안동간의 철도 개통 운동에 동참하였고, 그밖에 대구와 경주, 대구와 대전 지역 철도 유치도 추진하였지만 실패한다. 대구 침산에 별장을 마련한 그는 훗날 침산에서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작대기를 짚고 대구 침산을 오르내리던 박중양이 조선사람을 괴롭히는 일본 관헌을 혼내곤했다는 '박작대기'의 일화가 최근까지 이곳 주변을 맴돌았다.[71] 韓日倂合 전후로 기세등등한 일본인 관헌들을 부정적으로 보던 그는 일본인 관헌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끌어내려 호통치기도 했고, 일본인 또는 조선인 관헌에게 밉보여 억울하게 구속수감된 사연을 듣고 풀어주기도 했다. 그밖에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뢰를 배경으로 실직자와 무직자를 취직시켜주기도 했다. 그가 실직자와 무직자 몇 인을 취직시킨 소문이 확산되어 각지에서 젊은이들이 찾아오자, 그는 각자 재능을 살펴보거나 사정이 딱한 이를 가려서 취직시키거나 업체, 관공서 등에 천거하였다. 1918년 9월에는 쌀값이 비싸져 품귀현상이 발생하자 9월 4일 주민구제를 목적로 조직된 미곡임시구제회에 참여, 임시구제회 위원 겸 상담역이 되었다. 일제 시대 전반기의 혼란 수습[편집] 3.1 운동 비판과 진압 가담[편집] 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3.1운동 진압 자제단 발족 신문 기사 3·1 운동, 자제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라며 이를 냉소적으로 평가하였다.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박중양은 이를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과 윤치호 등의 회의주의자들이 3·1 운동의 무모성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독립은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직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러고는 3·1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진압을 지휘하였다. 이어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귀가시키기 위한 단체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였다. 4월 6일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회'가 조직될 때 그는 단장이 되었다.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소요 사태(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불응하는 자와 과격분자는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한다는 서약까지도 했다. 바로 그는칠곡, 선산의 자제단 조직을 직접 주관하였다. 이 이후 경북도 참여관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독립 불가 의견에 내심 동조하던 윤치호, 서재필 등은 그의 3.1 운동에 대한 자발적인 진압참여를 계기로 그와 교제를 끊고 등을 돌리게 된다. 그는 만세 운동에 앞장서는 학생들이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이끌려갔다고 주장했다. 조선 학생들을 구금한 일본인 헌병대장에게 학생들의 석방을 탄원하였으나 이 헌병대장이 거절하면서 고압적으로 나오자 헌병대장을 혼내고 학생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그해 4월 13일 그의 자제회 설치 활동에 분개한, 대구 계성중학교 중퇴생 이영식(李永植)이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 경고장을 보내기도 했다.[72] 같은 날 4월 13일 김천의 독립운동가 김수길(金壽吉)은 대구에서 박중양이 자제단을 만들어 만세 시위를 저지하려는 행동에 대해 규탄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암살 위협'을 담은 경고문을 박중양 등에게 발송하였다.[73][74] 한편 박중양은 3.1 운동에 참여한 일부 학생들의 신원 보증을 서주고, 이들의 석방, 일본 유학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1919년 9월 3.1 운동 진압, 해산에 참여한한 공로로 그는 총독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내사[편집] 자제단의 발족과 3.1 만세 운동 진압으로 그는 심한 비난, 성토를 당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진압 이후 다시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으며 1920년 2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재선되었고, 그해 5월 대구청년회 발전 기금으로 5원을 기부하였다.[75] 그러나 1920년 무렵 그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감시, 내사를 당하게 되었다. 1920년초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은 조선인 관리를 개인별로 심사하여 인사 이동을 대폭 단행하였다. 이때 많은 조선인 관료 가 면직 되고 친일성을 인정받은 자들이 대폭 승진 하였다. 또 아첨과 충성심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자 들도 많았다. 그리고 조선인 관리에 대한 감시가 강화 되었다.[76] 그러나 아첨과 말재주가 없던 박중양은 오히려 총독부로부터 감시를 당하게 된다. 1920년초, 당시 조선인 관리는 하급자는 물론 웬만한 상급의 친일 관료 마저도 끊임없는 감시아래 놓여 있었다. 예컨대 조선인 도지사 중에는 박중양도 그 감시 대상이었다 한다.[76] 그해 5월 12일 중추원 참의직을 사직하고 대구 침산동으로 낙향했다. 중추원 찬의,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토지를 매입해 농사를 짓던 그는 사과 과수원과 옥수수, 감자 농사에 전념하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한 퇴비와 방재약을 주어 농사를 지어 수확이 좋았고, 그는 자신이 농사지은 작물을 걸인(거지)과 부랑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공짜로 더 달라고 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11월 12일 중추원의 중추원 일본 시찰단원 17명의 한 사람에 선발[77], 일본을 방문하였다. 1920년 12월 일본 내각총리 하라 다카시(原敬)에 의해 소환되었다. 총리 하라 다카시는 박중양을 만나 말하기를 "일본은 조선인을 관리로 삼아 등용할 뿐만 아니라 장차 조선인으로 하여금 내각의 임원으로 참여시켜 조금이라도 경계의 구분을 없애려는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해 잡지 천고(天鼓)는 "조선인이 분투하고 소망하는 것은 즉 독립인데 한낱 내각의 일원으로써 조선인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황해도지사 재직, 수해 사태 수습[편집] 1922년 황해도지사 재직 시절 일본 간토 대지진 현장 간토 대지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만세 운동을 진압하거나 자제할 것을 촉구하여 사태의 확산을 방지하였는데도 그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끊임없는 의심과 감시를 당했다. 그는 은인자중하며 외부 활동을 삼가고 농업에 전념하였다. 1920년부터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후원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다시 관직에 나가 1921년 2월 12일 고등관1등(高等官一等)에 올랐으며, 황해도지사(黃海道知事)로 부임하였다. 그해 9월 황해도에 수해가 발생했으나, 피해상황을 바로 확보하고 조선총독부에 구호물자를 요청하는 한편, 수재민 구제를 신속히 처리하여 바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황해도지사가 되자 황해도 해주에 학교와 병원, 폐병과 내과, 결핵을 치료하는 전문병원 유치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황해도에 문맹자를 구제하기 위한 신식 학교 설치를 도와줄 것과 황해도가 개성의 예성강포구와 가깝고 철도의 개통으로 2,3시간 안에 서울에 근접할 수 있는 지역임을 들어 황해도에 병원을 유치하는데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충북지사 재직과 관동대지진 수습[편집] 1925년 무렵 1923년 2월 24일 충청북도지사(忠淸北道知事)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 해 7월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 평의원에 추대되었다. 충청북도지사로 부임한 직후 그는 충주와 청주에 신식 병원을 유치할 계획을 세우지만, 중도에 사퇴하여 병원 유치 계획은 중단되고 만다. 1923년 6월 그는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로 휴양을 나갔다가, 박석고개에 이르러 비가 와서 자동차가 산을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도지사의 신분으로 "어찌 차에서 내려서 진흙을 밟느냐"며 하차를 거부하고 군수 김재호에게 인근 농촌에서 소를 동원하여 차를 끌게 하였다. 그러나 차가 움직이지 않자 바로 '명승지로 가는 길에 자동차 하나 자유로이 통행하지 못하여서는 일도의 수치이라'하며 바로 공사를 명했고, 군수 김재호는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부역령을 동원해 공사를 시행했다. 그러나 농번기에 있던 농민들은 강제부역에 동원되면서 생계를 보장하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부역에 동원되어 불만이 쌓였고, 6월 중순 3백여 명의 보은군민들은 현장감독인 군청 기수(토목직 공무원)와 보은경찰청 순사를 난타하여 충청북도경찰청에 증원, 현장에서 40여 명의 농민을 체포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78] 그러자 동아일보 등 소수의 언론은 이를 보도하여 문제삼았다. 농민과 소를 강제로 동원한 일과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그는 지식인들로부터도 비토를 당하게 된다. 1923년부터 충청북도도지사 박중양이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휴양을 다녀온 뒤 계속 자신의 휴양지, 유흥지로 사적으로 남용하였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비난하고 기사화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때 윤치호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조선총독부 당국에 사실대로 보도한 민족의 정론인 동아일보를 처벌해서는 안된다며 동아일보를 비호하였다. 1923년 청주의 독지가 김원근의 대성학교 설립을 후원하였다. 훗날 김원근의 반민특위 진술에 의하면'1923년 당시 집 옆에 영정보통학교(塋町普通學校)가 건너편에 있었는데, 입학 시기가 되면 불과 100여 명 수용에 지원자는 1,000여 명 되어 보기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으므로 지사 박중양(朴重陽)을 방문하고 학령아동으로 미취학자를 구제키 위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원하였더니 기본금 조성할 것을 묻기에 시설 일체를 본인이 부담할 것을 거하고, 우선 청주 교동에 있는 천도교회당 약 12평을 후에 양옥으로 축조해 준다는 조건부로 빌려 신입생 150명을 수용하여 2부 수업을 실시하며 일방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 200평 교사를 이듬해까지 완성시켜 정식 인가를 받았다'고 하였다. 김원근은 사립학교였음에도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거나 학부모에게 돈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교육, 계몽을 통해 실력을 쌓는 것이 우선이라 본 그는 김원근의 학교 설립을 가상히 여겨 박중양은 그 자신의 월급을 10분의 1할씩 떼어서 1924년 김원근에게 매달 보냈다. 1923년 10월에는 관동대지진으로 재일 조선인이 큰 피해를 입자 조선인들에 대해 일본인들이 뭐라 하거나 말거나 '유언비언에 현혹되지 말라'는 유고(諭告)를 발표했다. 이어 그는 관동대지진 등에 대한 위문 단체에 기부금을 납부하고, 일본인들에게도 조선인들과 관동 대지진은 무관하며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묵살되었고 일부 조선인들은 관동대지진의 배후로 몰려 처형당한다. 1923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문관보통징계위원회 위원장와 내무국 보통시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속리산 도로 개통[편집]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의 속리산 말티고개 말티고개, 속리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말티고개는 일제 시대인 1923년까지만 해도 우마차 정도만이 통행할 수 있는 작은 길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충청북도 지사인 박중양이 법주사를 방문하기 위해 말티고개를 넘으면서 불편함을 느끼자 보은군수인 김재호에게 확장보수 공사를 지시하게 되면서 처음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79] 김재호는 당시 농번기임을 들었지만 그는 도로 개통을 지시했고, 이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 임농부역에 분개한 농민 기수와 순사를 난타급하지 아니한 산길을 닥고자임농시에 치도를 명령한 지사 사건의 전도는 매우 험악충청북도 보은군에서는 도댱관 박중양씨로 인하야 큰 분란이 이러낫다 이제로부터 약 일개월 전에 풍류를 즐기는 충청북도 지사 박중양씨는 자동차를 모라 보은군 속리산 속에 잇는 명찰 법주사를 유람차로 나섯섯다 먼저 보은읍내에 이르러 관민의 환영을 밧고 군수 김재호씨의 안내를 밧아 속리산을 향하얏셧다 본시 보은읍에서 속리산 사히에는 “박석틔”라하는 큰 고개가 잇서서 도저히 자동차로는 넘어가지 못 할 곳이엇섯다 그러나 당대의 일도 댱관으로서 엇지 차에서 나려 흙을 발브랴하는 생각이 드럿든지 박중양씨는 긔어코 차에서 나리지를 안코 촌가에 가서 소를 꺼러다가 자동차를 꺽러넘기게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직히게 되얏섯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이 덜 풀닌 박지사는 김군수를 보고 명승디로 가는 길에 자동차 하나히 자유로 통행 하지 못하야서는 일도의 수치이라 하며 불일내로 공사를 시작하야 곳 자동차가 통행을 하게하라고 엄명을 하엿다 지사의 명령이라 일개 군수로서 억이는 수 업스닛가 김군수는 즉시 금월 초순부터 부역을 푸러 공사를 시작하얏는대 본시 이 고개는 비록 자동차는 통행치 못하나 인마는 임의로 통행되는 곳이며 그 고개는 다만 속리산 법주사 외에는 다시 통한 곳이 없는 중요치 안은 길이었다. 그러나 지사의 분부임으로 전군 만여호의 부역을 풀게 되는 때는 마츰 첫여름임으로 농가의 뎨일 밧분때이다. 일반인민들은 백성의 생명을 보장하는 농사를 못 짓게하고 이길을 닥글 지급한 필요가 어대잇는가하야 매우 울분히 역이든 중 덕욱히 가튼 군에서도 회남면, 회북면 가튼곳은 부역장까지 왕복이 근백여리나 되니 인민의 피해와 관란은 이르르길이 업섯다 과연 지난 십일일에 군청 토목기수 모 일본인은 원악 돌연히 시작한일임으로 예정이 스지 못하야서 인민에게 일정한 지뎜에 일을 식히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변덕을 피움으로 갓득이나 울분히 역이든 삼백여명 인민들은 마참내 그 기수에게 몰녀드러 란타를 하고 그 싸홈을 말니랴하든 순사 세사람까지 란타를 하야 중상을 당하게 하얏다 이 급보를 들은 충북 보은경찰서는 충청북도경찰부의 응원까지 청하야 전원 총출동으로 현장에 급행하야 임의 사십여 명을 검속하고 목하계속 거거중이니 사건의 전도는 매오 위험하다더라. ”   — 동아일보 1923일 6월 16일자[79] 바로 공사에 들어가 그해 7월 속리산으로 오르는 현대식 2차선 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길이 구불구불한데다가 산사태 등으로 계속 문제가 발생하였고, 개보수가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공사는 1931년에 끝났으나 여전히 자동차가 손쉽게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확장 공사 완공 후 시승을 하던 박중양이 처음 공사를 지시했을 때처럼 결국, 소를 자동차에 대어 끌고 올라갔고, 대부분 사람들도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80] 속리산 도로 포장공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가에서 소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자동차를 끌게 한 것과 농번기인데도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한 일로 폭동이 터질 위기에까지 직면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충주에 국도를 건설하기 위해 농민들을 징발하여 도로를 닦았다. 그런데 농번기에 농민들을 징집하고 임금을 주지 않자, 충주의 지역 유지 예남 홍승대(蘂南 洪承大)는 박중양을 상대로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 소송을 제기, 승소판결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속리산 성추문 사건과 퇴직[편집] 속리산 여승 변사 사건 보도 1924년 11월초에는 속리산 속리사에서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감방주사, 각 부장과 신문기자 등을 대동하고 속리산에서 주연을 개최했는데, 총독 내외와 수행원들이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여승 양순재(梁順在, 20세)를 데려가 성관계를 하였다. 그러나 양순재 여승은 그 날로부터 실종되었다가 어느 구석 승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물의를 빚었다.[81] 그러나 아무도 이 일을 언급하지 못했고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5년 3월 동아일보 등 소수 언론만이 이 내용을 그대로 폭로했고, 이는 곧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다. 여승 변사사건이 문제가 되면서 3월 31일 도지사직에서 인책 사퇴한다. “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사이에는 제2금강이라고도 일컬을만치 물맑고 산맑은 속리산이 있는데 그 중에는 승방으로 이름높은 속리사로부터 이래 5백년 동안에 여러 명사의 발가죽을 멈추게 되어 깨끗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속리사는 총독부 관리 충북도지사 박중양이가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된 이후로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나는 동시에 여러가지 아름답지 못한 풍설이 세상에 왁자하게 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기는 작년 11월 26일 사이토 총독 부처가 박지사의 안내로 송기 감방주사와 서강, 산본 등 각 부장, 기타 몇 사람의 신문기자와 함께 일행 열여섯 명이 보은읍을 지나 오후 다섯시 삼십분경 속리사에 도착하여가지고 그날밤 마침 달밝음을 기회로 하여 큰 법당을 치워놓고 주연을 여는 동시에 2백여 명의 여승 중에서 가장 젊고 여어쁜 여승 여섯 사람을 뽑아서 잔질을 시키어가면서 밤이 새는 줄을 모르고 질탕하게 노는 중 총독 부처는 얼마 후 침실로 돌아가고 그 후 거듭 박지사는 자리를 고치여 다시 주연을 펴기 시작하여가지고 여러 수행원 신문 기자들과 함께 끊일 사이 없이 술잔을 바꾸고 있던 중 박지사는 취기가 점점 더하여감을 따라, 놀란 양과도 같이 아무 소리 없이 한 구석에 꿇어앉아 있는 여승 양순재(20)의 고운 얼굴에 자주 날카로운 추파를 보내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옆으로 같이 끌어다가 앉히고 부드러운 손목을 힘있게 움켜잡고 앉았다가 새벽 네시경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은 모두 피곤과 취기를 못이겨 모로가로 쓰러져버린 틈을 타서 박지사는 양순재의 손목을 잡은 채로 일어서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이십칠일 아침에 시치미를 떼고 일행과 함께 속리사를 나와버리고 말았다.양순재는 그때 박지사에게 끌려 나간 후로 도무지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하여 일행이 떠나는 그 때에도 많은 여승 중에 그 얼굴을 얻어볼 수가 없었으며 그 후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히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마침 내닷새 쯤 되던 날 아늑한 승방 한구석에서 시체가 되어가지고 나타나게 되었다. 젊은 여승의 죽음!! 그때 박지사의 그 일 그로부터 여러가지 풍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는데 자태의 어여쁨이 원수가 되어가지고 몸을 더럽히고 최후사지를 밟기에 이른 양순재의 생애! 어제까지 맑고도 그 맑은 부처의 여자로 멀고도 고생된 앞길을 걸어가려다가 한번 발을 그릇 옮기어 놓은 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 끝에 그와같은 길을 밟고야 말게 되었다. 여승과의 관계로 문제중에 들어있는 박지사는 재작일밤 총독과 함께 입성하여 작일 아침 열시차로 돌아갔다는데 가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풍설이 세상에 왁자하게 된 이상 어쨌던 한 도의 장관으로서 책임상 그 직에 그대로 있는것도 어렵고 겸하여 그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음으로 총독부의 처치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사임하기로 결심한 모양이라는데 이에 대하여 대총 내무국장은 아래와 같이 말하더라. "임의 그와 같은 일이 신문지상에까지 발표된 이상 직무상 어디까지 조사는 하여볼 작정이나 그 개인관계로 보아서는 누년의 교제도 있고 친밀한 사이일 뿐만 아니라 조선총치상 적지 않은 공로가 있음으로 너무 그것을 힐책하여 앞길을 그릇틔어주고는 싶지 아니합니다. 어쨌든 자기로서도 그 직을 사임하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고 할 것이올시다" ”   — 동아일보 1925년 03월 06일자 당시 충북지사였던 박중양이 속리산으로 순시를 나와 법주사에서 주연(酒筵)을 열고 한 비구니에게 추문을 걸어 결국, 비구니가 자살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는 기사이다.[82] 이는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법당에서 여승과 성추문을 벌인 것과, 여승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고 조선총독부 내무국장과 경무국장은 이를 수습하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곧 시말서를 제출한 뒤, 1925년 3월 31일 도지사직을 사퇴한 뒤 휴직계를 내고 문관분한령 제11조 제1항 제4호에 따라 휴직했다. 1927년 2월 15일 그는 3월 1일부로 경성부부부윤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여승 변사사건이 계속 문제가 되자 1927년 2월 18일 사퇴의사를 밝히고 사직서를 제출,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밀주 단속 무마와 고미술품 수집[편집] 박중양의 호신 불상(그의 선조 대대로 전해오던 것이었다 한다.) 1927년 1월 남선여행객의 방문을 받은 박중양 1925년 5월 불교계의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불교단 대구지부 고문과 독립사상과 사회주의 배척을 기치로 발족한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의 경상북도 지부 상담역을 밭았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박중양은 순종의 죽음을 사실상 조선이 영원히 멸망한 것으로 보았다. 1927년 2월 중추원 칙임참의([83]中樞院勅任參議)로 임명된 뒤 1941년 5월까지 네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25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속리산 여승 변사 문제로 지탄받았지만 조선총독부로부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던 인물이지만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고, 일본인들까지도 그를 함부로 괄시하지 못하였다.[84] 1927년 11월 9일 대구상공협회의 조직에 참여하고, 대구상공협회 고문이 되었다.[85] 한편 그는 가정에서 밀주를 만들다가 적발된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또한 담배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세금 면제를 적극 도와주기도 했다. 그가 애주가, 애연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치하에서도 밀주는 엄벌에 처할 정도로 단속이 심하였다. 그러나 단속 때면 사람들은 박작대기 집에 밀주 항아리를 갖다주곤 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84] 술을 좋아했던 그에게 밀주를 갖다주면 그는 밀주 단속이 나온 순사들을 붙잡고 시간을 끌어주었다. 골동품과 고미술품을 감정할 줄 알았던 그는 고미술품의 해외 반출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사들이기도 했다. 이는 6.25 전쟁 와중에도 박중양이 각별하게 숨기고 아껴서 1950년대 고서 감정가 석진수가 방문할 때까지도 대부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후일 그가 수집한 고미술품은 아들에 의해 석진수 등에게 판매되었다. 석진수는 '이런 물건을 보려고 꿈에 용을 봤구나 하는 생각에 서화, 고서, 나전칠기 등 수집점을 값을 깎지도 않고 일괄해서 구입했다. 화폐개혁 전 값으로만 쳐서 수백만원이었다.[84]'고 한다. 1927년 겨울에는 약초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와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순례하기도 하였으며, 경성부의 고미술품상을 찾아가 서화를 구입하였다. 복직과 일제 시대 중반[편집] 1928년 다시 황해도지사가 되었으며, 다시 황해도지사가 되자 황해도 해주에 폐병과 내과, 결핵을 치료하는 전문병원 유치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 1928년 10월 27일 해주의 감리교 폐병요양원이 설립되자 황해도지사로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했다.[86] 개원식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이던 오긍선(吳兢善)과 황해도지사 박중양, 그리고 황해도 경찰부장 겸 위생과장 사카키의 축사가 있었다.[86] 바로 그 날 세브란스병원에서는 항결핵학회가 조직되고 있었다.[86] 세브란스 병원에서 항결핵학회가 조직되자 10월 28일 박중양은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하여 항결핵학회의 목적과 연구 내용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해 11월 쇼와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 11월 8일부터 11월 13일, 14일, 21일에는 조선민보사에서 개최한 임업정책 토론회에 참석, 조선의 임정(林政)을 강연하였다. 1929년 1월 다시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고,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朝鮮博覽會評議員)에 선임되었다. 그해 대구남문 철거작업 기공식에 참석하였다. 박중양은 늘 조선인들에게는 "대소관원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질서의식, 시민윤리 등 공공정신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요령과 패거리 문화, 속임수가 횡행하는 금일의 수준으로는 독립은 커녕 인간답게 사는 것도 힘든 일이라며 한탄했다. 그는 여러 차례 총독부에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거둘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일본인에게만 우대혜택을 주고 조선인들은 차별하느냐"며, "조선 백성이 일본의 신민이 되기를 바란다면 조선인에게도 내지인과 같은 기회를 부여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총독부가 "조선인들을 차별대우, 무시하는 정책을 계속한다면 조선인들은 자연스럽게 독립 운동에 동참할 것"이라 하였다. 그밖에 그는 황민생활사의 장로(고문)직을 역임하였다.[87] 조선인 참정권 운동[편집] 1920년대 초부터 그는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을 허용해 줄 것과 자치권을 허용해 줄 것을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에서는 그를 면종복배하는 인물로 보고 경계하였다. 1925년 경성일보 사장인 소에지마 미쓰마사(副島道正)는 "경성일보"를 빌려 '조선의 자치론'을 제기했다.[88] 이에 박중양은 현명한 결단이라며 환영하였다. 소에지마 미쓰마사는 조선인 2천만 명을 대표해서 100명의 식민지 출신 의회 의원을 일본의회에 보낸다면 의회가 민족적 색체를 띠게 될 것이므로 참정권은 반대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조선에 식민지 의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88] 즉 그는 "자포자기 상태인 조선인에게 건전한 희망과 내실 있는 사상을 주며, 합리적인 수단으로 그 민족주의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88] 도지사를 지낸 박중양은 사이토에게 편지를 보내, 대의사(代議士 : 일본 중의원 의원[89])를 몇 명 만이라도 보내도 좋으나 조선의회를 설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밀었다.[90] 그는 조선인도 일본의 국민이라며, 이규완, 민원식, 김명준 등이 요구한 조선인 참정권 허용이 정당하다고 총독부와 일본인 지식인들을 상대로 설득하였다. 도지사 퇴직 이후[편집] 1928년 12월 도지사직을 퇴직한 이후 그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어 수당을 받았지만 그는 선조의 묘소가 있던 대구부 동중면 침산동의 오봉산을 매입한 뒤, 대구 침산동 침산 주변의 토지와 경기도 양주군의 땅을 매입하였으며, 토지 매입 후 남은 수당들은 자선단체에 기부하였다. 그는 중추원 참의 수당에 의존하지 않고 대구 침산에서 직접 과수원과 옥수수, 감자 농사를 지었다. 양주의 땅 외에 대구 근교의 땅은 직접 다니면서 부인과 일본인 첩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었다. 1930년 2월 22일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칙임참의에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일본인 여자를 후취로 들였는데, 삼천리지 1940년 제12권 3호(1940년 3월호)에 내지인 여자를 취처한 고등관급 이상 명단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32년 1월에는 그를 후원하자는 뜻에서 특별히 침산친목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91] 1932년 2월에는 침산계를 조직하여 친목단체로 활용하였다.[92] 박중양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북구 침산동 산16-1 임야 등 37필지 총 8만 2,082m₂(총 2만 4,829.805평)은 2007년 8월 13일부로 국가 귀속결정 처분을 받고 강제 압수되었다.[93] 압수될 당시 토지들의 평가액은 21억 8565만 3천원 정도였다.[93] 일제 시대 후반[편집] 중추원 활동[편집] 박중양의 친필 휘호 박중양, 1932년 3월 1931년 9월 조선총독부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1933년 6월 13일 다시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칙임참의에 임명되고, 1933년 7월 중추원의 시정연구회 제도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8월 3일 정오 12시부터 안동군 봉옥읍(蜂屋邑)의 수해현장을 위문하였다. 군수와 경찰서장에게서 수해현황을 청취한 뒤 봉옥읍의 수해현장을 위문하였다.[94] 수해현장 위문 후 안동시민의 사활문제인 낙동강제방을 긴급히 완축하여 1일이라도 급속히 일반백성의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위정자의 제1최대급선무라고 소감을 밝히다.[94] 1934년 11월 시중회(時中會) 평의원을 맡았다. 시중회는 1934년 8월 '내선일체를 근간으로 신생활을 통해 신흥조선을 건설'한다는 취지하에 최린 등 천도교 신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자치운동단체다. 이듬 해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95][96]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에 면직된 일이 있었지만 조선총독부는 그의 재능을 각별히 신뢰하였다.《조선공로자명감》에서 "이토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 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는 박중양이다."라는 평가를 받았고[97],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술을 좋아하였지만 일체의 뇌물을 받지 않은 탓에 조선총독부는 그를 각별히 신뢰하였다. 日·中전쟁 전후[편집] 1936년 중추원 고문이 되고, 1936년 5월 결핵예방협회 경상북도지부에 가입, 평의원이 되었다. 1937년 7월 日·中전쟁이 발발하자, 박중양은 1938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日·中전쟁을 두고 일본의 중국 진출이 가능 여부가 시중의 화제가 되자 그는 몽골이라고 중국을 지배하고 백년을 다스렸고, 여진족이라고 중국을 지배하고 금나라가 백년, 청나라가 3백년을 다스렸거늘 일본이라고 대륙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고 하여 좌중을 압도하였다. 1938년 8월 칙령 관제로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가 재개편되었다. 박중양은 1938년 8월 27일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위원[98]으로 재위촉되었다. 이 때는 김연수, 박흥식, 윤덕영, 최린, 현준호, 한상룡 11명의 위원이 조선인이었는데 박중양은 그 중 한명이었다. 그해 9월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가 총독의 자문사항 18항목의 심의, 자문 목적으로 3개 분과로 나뉘자, 박중양은 문화, 사회분야 와 일반사항을 다루는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제1분과 상임위원을 겸임하여 내선일체의 강화와 철저화, 조선, 만주, 북지(北支)간의 사회적 연계 촉진, 재중국 조선인의 보호, 지도, 반도 민중의 체위 향상과 생활 쇄신, 농·산·어촌 진흥운동의 확충·강화, 사회시설의 확충, 노무의 조정 및 실업의 방지·구제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12월 19일 경상북도 체위개선위원회 고문이 되고, 그해 12월 19일 경상북도 체위개선위원회 산하 달성군 체위개선지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5월 미나미 지로 총독이 창씨개명을 계획하자 시중의 반발을 우려하여 시간을 두고 서서히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다. 6월 4일 다시 중추원 참의에 재임명되었다. 8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가정내 분쟁사건을 비밀리, 원만히 해결할 목적으로 인사조정령을 공포하고,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을 위촉할 때 장직상 등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으로 위촉되었다.[99] 1940년 2월 11일 일본 기원절 행사를 도쿄와 경성(현 서울)에서 개최할 때 조선인 유지의 한사람으로 초청되었다.[100] 이는 2002년 3월 10일 MBC-TV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은 일본에서 일본의 건국 2600년 기념행사 초청인사 명단을 수록한‘광영록’이라는 책자를 최초로 입수하여 밝혀냈으며[101], 박중양 외에도 당시 보성전문학교교장 김성수,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김활란,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등 조선인 초청대상자 300명의 명단이 실려있었다.[101] 태평양 전쟁 초반[편집] 태평양 전쟁 1945년 6월 17일자 매일신보. 창씨개명, 태평양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0년 초 그는 조선총독부에 조선인의 참정권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고, 조선총독부는 그의 건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940년 5월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해 8월 31일 박충(朴忠, 호추)으로 창씨개명하였다. 이어 호추 시게요(朴忠重陽[102])라 이름하였다. 그는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한다. “ 언젠가 무슨 회의든가에 보니 총독, 총감도 다 열석한 석상인데 박중양이 당당합데다. 예전 도지사 당시에도 내무부장, 경찰부장이 쩔쩔 매였다는 소문이 있느니만치 철저하게 이야기 하더군요. 말에 질서 있고 사리를 잘 분변하는 말이고, 만좌가 경청하더군요. ”   — "총독부 기자 좌담회", 《삼천리》 제12권 제3호 (1940년 03월 01일자) 1940년 당시 총독부 출입기자 좌담회에서 매일신보 기자 김인이(金麟伊)는 그가 총독과 정무총감이 열석했는데도 당당했으며 말을 조리있게 잘 했고, 착석한 이들이 그의 말은 경청했더라고 하였다.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이 되었다. 1941년 1월 8일자 경성일보에 "이론이 훌륭해도 실행이 없으면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지금의 "시국은 백 가지 이론보다 하나의 실행을 요구"한다는 신년 소감을 밝혔다. 1941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내정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일본 귀족원에는 이미 1932년 12월 박영효가 칙임된 예가 있었고, 1941년에 윤덕영(尹德榮)과 박중양이[103] 내정되었지만, 박중양은 귀족원 의원직을 사양했다. 그 해 5월 12일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943년 10월까지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41년 5월 17일 오전 10시부터 개최된 영일군 포항읍 두호리에서 열린 경상북도 수산시험장(慶尙北道水産試驗場) 신축 낙성식에 참여하였다.[104] 9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해, 중추원 부여신궁공사 근로봉사 노역에 참여하였다. 전시 체제기 활동[편집] 박중양, 1930년대 후반 무렵 조선임전보국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105]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가 조직되자 경북지부 위원이 되었다. 그날 결성된 임전보국단 대구지부 고문으로도 선임되었다. 1942년 11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3년 4월 천황의 만세무궁을 기원하기 위해 조선신궁에서 열린 천장절제(天長節際)에 참석했다. 같은 해 9월 전시 최대 관변 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여(參與)를 맡았다. 또한 싱가포르까지 가서 일본군을 위문하는 조선인 위문단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때의 여비는 충청남도 공주의 김갑순(金甲淳)이 여비 일체를 부담하였다. 1943년 1월에는 국민정신총력연맹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했고, 그해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직접 싱가포르를 다녀왔다. 1943년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순회하였다.[3] 1943년 10월 20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피선되었다. 11월에는 《매일신보》 등의 언론 매체에 임시특별지원병제도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기고하여 조선총독부의 징병제를 지지하고 적극 협력할 것을 선전하였다. 1943년 11월 학병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중추원에서 격려대를 구성할 때, 중추원 격려대원으로서 박두영(朴斗榮) 등과 함께 경상남도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1943년 8월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부모의 묘를 대구 오봉산으로 이장하였다. 이 합장묘는 박중양이 1943년 8월 경기도 양주의 선영에서 대구 침산으로 이장해 온 것으로 90년대 중반 북구청에서 오봉산 등산로를 만들 때 개장을 권유했으나 후손들이 거부, 옆으로 등산로가 나기도 했다.[106] 이 묘는 침산공원내 오봉산 산 16의 28[106], 오봉산 다섯 봉우리 중 1봉과 2봉 사이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왼쪽편 100m 정도 지점에 있었다.[106] 1943년 10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1945년 8월 광복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3500~4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그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을 듣고, 당연한 결과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같은 해 11월 학병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중추원 격려대원으로 경상남도에 파견되어 홍보 등의 활동을 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이를 일축했다. 동시에 조선이 독립하더라도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며 냉소적으로 보기도 했다. 1944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다.[10] 1944년 훈1등의 서훈(敍勳)을 수여받았으며 다시 중추원 부의장에 재선출되었다. 1944년 6월 국민총력조선연맹 고문으로 추대됐다. 같은 해 8월 박흥식 등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朝鮮飛行機工業株式會) 설립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대주주의 한 사람이 되었다.[107][108] 그러나 그는 대주주 중에서는 소액이었는데 박흥식의 1949년 2월 23일의 반민특위 재판 당시 박흥식의 진술에 의하면 김연수, 방규환, 박춘금 3인은 각각 1만 주씩 소지하였고, 백낙승은 5천 주를 소지하였고, 장직상은 4천 주를 소지하였고, 민규식, 김정호, 방의석, 한상룡은 각각 3천 주를 소지하였고, 박중양은 1천 주를 소지하였다 한다. 참정권 허용 감사사절 파견과 귀국[편집] 귀족원 (일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5년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1945년 4월 3일 박중양은 일본 정부가 귀족원령을 개정하여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7명을 조선인으로 칙선할 때, 박중양은 조선인 몫의 귀족원 의원의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귀족원의 칙선의원 7명은 1945년 4월 3일에 선임되었는데 김명준(金明濬), 박상준(朴相駿), 박중양, 송종헌(宋鍾憲), 윤치호(尹致昊), 이진용(李珍鎔), 한상룡(韓相龍) 등이었다.[109] 한편 조선인 몫의 하원격인 중의원 의원 23명은 의회가 만기되면 선거에 의해서 선출될 예정이었다.[109] 조선인 참정권이 시행되자 그는 환영의사를 표명하였다. 1945년 4월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110] 이어 박중양은 윤치호를 수행하여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서울을 출발, 일본으로 갔으며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110]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은 일본 황족, 화족 의원과 천황이 직접 선임하는 칙선 및 일정액 이상 국세 납부자로 구성되었다. 조선인 출신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은 1945년 4월 이전에 선임된 3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에 그칠 정도로 특별한 예우를 받는 존재였다.[111] 그러나 곧 이탈리아 왕국의 두체(Duce, 최고통치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과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는 당연한 결과로 봤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연이은 몰락을 보면서 일본 제국 역시 머지않아 몰락할 것이라고 내다보게 되었다. 1945년 6월 국민의용대 결성식에 참석한 뒤 7월 국민의용대 고문을 맡았다. 6월 17일 귀족원 회의에 참석차 도쿄를 다녀왔다. 그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추진을 무리수라고 봤고, 군국주의 정치인들의 오판이라 지적했다. 1953년의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오판하여 천황을 잘못 보필했다는 내용의 일기 사본을 편지로 보냈다. 이는 1997년 대구 출신 사학자 강태원이 일본 체류 중 입수하였다. 8월 10일 집안의 하인과 일꾼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어 내보냈다. 1945년 8월 14일 니시히로 다다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초대로 총독부를 방문,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패전 직후 조선반도의 치안 수습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8월 15일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경성부의 집과 재산을 처분하고, 남은 재산은 가방에 싸서 경성부 근처 보육원과 양로원에 각각 무기명으로 전달한 뒤 대구 침산동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독립 이후[편집] 독립 직후[편집] 독립이 되자 그는 시중의 성토를 당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56]"라고 항변하였다. 일본의 항복을 예감했던 그는 시중의 비난에 무덤덤하게 대응했다. 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시대 변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하였고, 또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말보다 일제시기가 훨씬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였고, 이완용에 대해서도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시중에서는 그에게 비난과 투석, 멱살잡이를 가했지만 그는 의연히 대응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심 불쾌하게 여겨, 대구 부윤 허억(許億)에게 보낸 편지들 중, 한통에서는 시중의 평가가 가소롭고 불쾌하다는 뜻을 드러냈다. 1945년 8월 독립 직후의 이념대립을 보고 그는 "조선이 과연 독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냐"며 조롱하였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고 9월 23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면서 중추원 부의장직에서 파면되었다.[112]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잘나서 독립이 된것이 아니라 미군이 일본을 쳐서 우연히 독립된 것이며, 미국과 일본이 전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독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을 향해 조롱하였다. 이후 그를 영입하려는 제의가 좌, 우 양쪽 진영에서 있었으나 자신은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모두 거절하였다. 독립 직후 시중에는 그를 지탄하거나 멱살을 잡거나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란 나같은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을 처단하면 된다.'라고 외쳤다.[57] 또한 '나도 표리부동한 위선자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니 시원하게 죽여라'하고 항변하였다. 친일파 청산론에 대한 비판[편집]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고 12월 18일 아서 러치(Archer L. Lerch)가 미군정청 군정장관으로 부임하였다. 1945년 12월 20일 박중양은 이들을 찾아 면담을 요청한 뒤 따졌다. “ 좁은 조선이 남북으로 갈려 있고 특히 이런 과도기에, 숨은 인재를 찾기도 어려운데, 왜 있는 인재를 없애려 하느냐? 그러니 친일파를 처단한다고 떠들기보다 그 사람들을 잘 이용해 주시오. 그 사람들을 두고 누구를 데리고 일을 하겠소. ... 나같은 것은 친일파의 대표자이니 연령으로 봐도 그렇고 행적으로 봐도 그러니 어떠한 처단을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감수하겠다.[57] ” 후일 이를 듣고 찾아온 기자에게 그는 '친일파를 죽이라는 소리가 하도 높으니까, 그래서 내가 군정청의 하지와 러취, 또 이승만(李承晩)을 보고 말한 것이 있다.[57]'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일부 정객들이 "독립운동자연, 자칭 애국자연 하면서 허장성세를 부린다며 독립은 우연한 기회에 주어진 것이며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중에서는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고 그는 비난을 무시하고 오봉산 근처로 낙향하였다. 또한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아버지 박정호 내외의 묘를 선조 묘소가 있던 오봉산 능선으로 이장했다.[113] 이후 대구시 침산동 침산초등학교 뒤편 야산의 침산장에서 은거하였다. 1948년초 남북협상론과 단독 정부 수립론이 나오자 "북위 38도 이남 지역이라도 단독 정부를 우선 수립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6]"고 하였다. 그러나 건국 후,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6]'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미국의 공, 미국의 노력에 의해서라고 혹평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반민특위 기소와 석방[편집] 반민특위 제소와 재판[편집]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출두차 서울역에서 내리는 모습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공판 모습.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해방 이후, 그는 대한민국 건국 후까지 생존해 있어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수사관에 의해 체포된다.[114] 이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월 말 박중양 외에도 여러 지방 거주 거물급 인사들이 체포되었다.[114] 49년 반민특위 특경대원들이 반민족 부일행위의 죄목으로 박중양을 연행하러 갔을때 박중양은 그때까지도 히로히토 천황의 사진을 안방에 모셔놓고 있었다고 한다.[3] 당시 그는 최고위직을 지낸 고령자의 한 사람이었다. 체포되자 그는 '나는 구치소에서 죽을 것이며 죽어서 내가 결백했음을 밝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사적으로 축재한 적이 없음은 하늘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를 태운 자동차가 특위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6척 거구의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모습이었다. 그는 특위의 정문을 보더니 "아, 고꼬가무까시노 다이이치긴꼬다네. 소! 소!(아, 이곳이 옛날의 제일은행이구나. 그래! 그래!)". 그는 말이고 행동이고 완전히 일본인 그 자체였다. 일본식 생활문화가 몸에 밴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백작 영감, 이마모 무까시가 나쓰가신데스까?”(지금도 옛날이 그립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우물쭈물거리다 2층 검찰부로 올라갔다.[10] 1948년 10월, 반민특위 투서함. 반민특위에 체포된 일제 시대 당시의 정객과 기업인들 중에는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이에 박중양은 '그만큼 영화를 누렸으면 됐지 뭐가 무서워서 떠느냐'며 일갈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해 '시대 변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하였고, 또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말보다 일제시기가 훨씬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였고, 이완용에 대해서도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 하였다. 수감과 심문 중 그는 초연한 자세로 심문에 응하였다. 반민특위의 조사관들은 그가 반성을 모른다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반성해야 될 이유가 없다며 응수했다. 반민특위가 압수한 자료들 중에는 1900년대 초부터 쓴 20권이 넘는 일기장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10]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당시 그는 당당하게 '전 국민이 친일활동을 할수밖에 없지 않았느냐?'라며 강변하기도 했다. 수감 생활[편집] 박중양 초상화 서대문형무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9년 1월초 박중양은 불구속 상태에서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었다.[115] 이어 정식 체포절차를 거쳐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9년 1월 그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재판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그는 반민족성을 지적하는 반민특위 판사들에게 호통을 쳐서 위압을 가했다. 그는 자신이 반민법에 의해 잡힌 것은 "시대 변혁의 희생이라, 역사는 윤환(輪環)하고 인사는 변천한다. 고금왕래(古今往來)로 크게 본다면 일소(一笑)에 불과한 희비극(喜悲劇)이다"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는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에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改新)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라고까지 했으며,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 하였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도중 그는 비단 이불 또는 참새 털로 된 이불을 덮고 자서 다른 수감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월 29일 대구에서 상경한 일본인 첩은 매일같이 수사관들에게 와서 이불을 차입시켜달라고 아우성쳤다.[116] 이불 속에 흉한 것이 들어있으리라고 의심한 반민특위 수사관들은 처음에 이불 반입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부인이 형무소 앞에서 간수들을 붙잡고 며칠을 울며 호소하는 읍소작전끝에 비단이불을 차입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117] 일본인 첩이 여러번 눈물로 호소한 끝에 비단 이불은 특별히 반입이 허용되었다. 1949년 2월 3일 박중양은 이승만 대통령, 김구에게 나는 반역자가 아니라는 편지 서한을 보내려다가 반민특위 조사관에게 적발되었다.[118] 재판과 가석방[편집] 공판 중 그는 '국민의 신변과 안전,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그러한 정부에 왜 충성해야 하느냐?'며 항변하는 한편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파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아가 이완용은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며, 이완용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희생된 역사의 희생자라고 강변하여 논란을 야기하였고, 방청석에서는 비난과 소란이 벌어졌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활하였으며, 며칠 후 재판을 받던 도중 폐렴이 발생해,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통원, 형무소와 서울대를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수감 중에도 일기를 쓰거나 자신은 반성할 것이 없다는 취지의 서한을 작성하다 교도관에게 발각되어 압수당했다. 박중양은 반민특위에 의해 구금되면서까지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신(改新)'을 주장했으며,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등 전혀 개전의 빛이 없었다.[71]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시간이 흐르자, 언론에서조차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탁월한 수완을 지녔던 희대의 걸물'로 박중양을 묘사하는 촌극이 벌어졌다.[71] 2월 9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 1949년 2월 14일 반민특위에 보석을 신청, 보석금을 내고 일시 석방되었다.[119] 그가 보석을 신청하자 다른 피의자들도 보석을 신청하여 특검과 반민특위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일본어 외에도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약간의 영어로도 대화할 수 있었다. 가출소 직후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5월 9일 다시 재기소되자 그는 다시 병보석을 신청했다. 1949년 6월 다시 반민특위에 소환되어 조사받았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해산되었을 때, 그는 별다른 처벌받지 않고 최종 병보석으로 풀려났다.[120] 그의 보석 신청은 여러차례 계속되어 받아들여졌고 그는 곧 풀려난다. 이후 그에게는 친일파라는 야유와 비아냥이 쏟아졌지만 그는 오히려 "일제 당시 살기 위해서 협력한 자들이 누구냐"며 항변하였다. 삼일절에 대한 조롱[편집] 만년의 박중양 한편 그는 3.1절을 기념하는 것을 위선적이라며 조롱하였다. '금일은 삼일절이다. 비 오는 가운데 식이 거행되어 시장, 도지사 등의 식사, 축사, 강연 등이 있었다. 참석자 중에 일정 시대에 관공서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큰 소리로) 호언한 것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시세 변천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활계희극의 광경이다.[121]'라며 비웃었다. 독립 직후부터 이완용의 묘소와 그 자녀들의 묘소에 가해지는 테러와 분묘훼손 행위를 보고도 '조선인의 민족성과 수준을 알수 있는 행위'들이라며 조롱하였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조롱했다. '해외에 망명했다가 한국이 독립된 후 귀국한 인사들 외에 3.1 운동 당시의 일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는 것이다. 또한 소수의 독립운동가들만의 노력으로 독립되었다는 시각은 허구이며 미국의 덕에 독립되었다며 반박하였다. 이어 '오늘날에 당하여 국가건설에 노력하는 것은 독립운동자이거나 아니거나 불문하고 차별은 없지만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자들이 3.1절 의식에서 떠들고 있는 것이 가소롭게 보인다.[121]'며 조소했다. 그는 일제 시대 후반 거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창씨 개명을 한 점도 지적, 일갈하였다. '일정 당시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 안한 자가 없다.[121]'는 것이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조선총독부에 부역하거나 협력, 협조하며 그 치하에서 살던 사람들이 독립 후 합심하여 일제에 저항한 애국자 행세를 하는 것'을 대놓고 조롱, 조소하였다. 3.1 절에 대한 조롱은 사회적인 분노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박중양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협박과 비난을 모두 위선이라며 외면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오봉산 은거와 정부 비판[편집] 박중양 재소환 보도, 대중일보 1949년 7월 30일자 2면 일소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석방 후 요양중이던 그는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122] 일기장이 반민특위에 의해 압수당한 후 그는 1946년부터 일기, 회고 비슷하게 써온 일부 글을 모아 술회라는 자서전으로 엮었다.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녔다 하여 주민들로부터 '박 작대기 영감'이라 불렸다. 또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던 오봉산 근처 땅을 사들여서 한때 오봉산을 박작대기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대구 오봉산 제일봉에 일소대(一笑臺)라는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 여생을 보냈다. 일소대는 후일 1996년 11월에 그의 후손들이 자진 철거하였다. 또한 바위에 일소대 라고 새겨둔 그의 친필 휘호는 파괴, 유실되었다.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1957년 1월에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이승만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 대구지검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에 의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았다.[123] 그는 신년사라는 책자를 발간, 경무대에까지 전달한 바 있었다.[124] 신년사에서 그는 이승만을 조롱했는데 뒤에 '행정수반인 이대통령을 모욕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124]'는 이유로 기소당했다. 9월 16일 검찰출두명령이 떨어졌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25] 그러나 그는 계속 이승만,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했고 결국 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중양 역시 피신하거나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텼다. 출판물 사건과 최후[편집] 해악 박중양 영정 1957년 1월 1일 그는 "미국인이 퇴거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봇짐을 싸느라고 분망할 것이다"라는 조롱섞인 신년소감을 경무대에 송부하였다.[126] “ ...(이하 중략)... 소련이 우세하고 미국인이 퇴거하게 되면 이승만 씨는 복짐 싸느라고 분망할 것이라. 위인걸사가 어디있으며 범용무위자가 수일까? 호언장어하는 자는 얼마나 잘하였으며 범용무위한척 하는 자는 얼마나 못하였을까?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장단은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하 중략)... ”   — 1957년 신년소감 중에서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함태영 등의 젊은 시절에 관해 비방,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기도 했었다.[127] 그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에 그는 '명예훼손이란 반대 세력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만든 괴상한 법'이라며 조소하였다. 또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력을 조롱하며 비꼬다가 경찰에 불려가기도 했으나 혐의없음 또는 고령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결국 1957년 10월 20일 박중양은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끌려가 심문, 한옥신 부장검사는 그가 고령인 관계로 정신이상이 온것이 아닌가 보고 소정신병원장에게 보내 그의 정신감정을 의뢰하였다.[128] 1957년 12월 4일 부장검사 한옥신은 대구정신병원에서 보내온 정신감정서를 접수하고 12월 5일자로 기소유예 판정을 내렸다.[129] 그러나 다시 그는 대구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감정을 받았다. 12월 8일 대구시내 소주영(蘇柱永) 정신병원장은 "심신 모약으로 노쇠상태[126]"라 진단하였다. 이는 대통령 이승만에게까지 직접 보고되었다. 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구인하여 정신병원에 넣으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산을 타고 피신하였다. 1958년 3월 3일과 3월 4일 강제로 서울경찰에 구인되어 성신대학 부속 성모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원에서도 완강하게 버텼고 결국 풀려나왔다. 그는 만년에 폐렴, 기관지염 등의 질환으로 고생하였다. 저서로는 회고록인《술회 (述懷)》와 그가 평생 쓰던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그밖에 문집이 있었지만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는 바람에 대부분 인멸, 유실되었다. 현재 박중양의 유저로는 《술회 (述懷)》,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박중양 선생 문서 (朴重陽先生文書)》 등이 전한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일기형식으로 쓴 회고록 〈술회〉에서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강변하며 자신의 행위를 굽히지 않았다. 대구 오봉산의 산장에서 은거하다가 1959년 4월 23일 경상북도 대구시 북구 침산1동 1652번지 원대부락 침산장 자택(현,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1동 1652)에서 폐질환과 과로 등으로 사망했다. 8월 23일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한때 그가 1955년경 또는 1958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사후[편집] 그가 경기도 양주군에서 이장해온 부모의 합장묘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산16-28에 소재하였음), 2004년 그의 종손자에 의해 화장되었다. 시신은 부모 내외의 합장묘와 선조들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대구 북구 침산동 산16번지 오봉산 제2봉에 묻혔고, 부인의 묘소와 합장으로 조성되었다. 사후 친일파의 거두나 수괴 쯤으로 비판받고, 독립 이후에도 반성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지식인들은 그를 지탄하였다. 그러나 대구 지역에서는 그가 지팡이로 일본인들을 혼낸 일, 도지사와 경찰서장까지도 함부로 다루지 못한 것, 일본인 순사들을 혼낸 일 등이 오래도록 회자화되었다. 1991년 대구 주간 매일신문에 언론인 김용진 옹 은 '김용진의 대구이야기' 를 투고 하면서, '조선의 고등학생을 잡아 넣은 일본 헌병 대장 을 혼내 어 준 이야기' . '지나가는 허름한 동족 젊은이들에게 직업을 소개 시켜 준 이야기'[130]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언론인 박용진은 동시에 일인에게 상권을 넘겨 주기 위해 성곽을 허문 것을 , '신작로를 내기 위함'이라는 것, 박중양의 일본 유학 경력 중에 습득한 것을 '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려 함'이라[130]고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그의 묘소는 2004년까지 대구 침산1동 오봉산 제2봉에 있다가 화장되었고, 그의 생전에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그의 부모 묘소가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이장, 합장되었으나 2004년 3월 30일 그의 종손자에 의해 화장되었다. 대구 북구청에 따르면 박중양의 종손(당시 71세, 서울 강남구 도곡동 거주)이 "서울에 거주하는 바람에 묘지를 돌볼 수 없어 화장하겠다"며 지난달 23일 개장을 신청, 침산공원내 오봉산 산 16의 28에 위치한 증조부모 합장묘를 지난달 30일 개장했다고 밝혔다.[106] 또한 3월 30일 같은 날, 합장묘 앞에 '아들 중양이 울면서 세웠다(子重陽泣建)'는 문구와 고(故)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연호인 소화(昭和)가 새겨진 비문도 철거되었다.[106] 또한 오봉산에 있던 그의 아들 박문웅 내외의 묘소와 박무웅 내외의 묘소, 일본인 첩의 묘소 역시 후손들에 의해 이장됐다. 오봉산 근처에 있다는 그의 다른 선조들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고, 2004년 대구 침산동에 있던 박중양 기념비가 철거되었다. 2007년 8월 13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박중양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려[131]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박중양이 남긴 36억 7110만원 정도의 토지 8만 2082m2를 국가에 환수한다고 발표했다. 그 토지는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소재 '침산공원' 일대이다.[132] 그해 8월 대구시 북구 침산동 산16-1에 있던 또다른 그의 토지에 대해서도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졌다. 8월 13일 박중양의 36억 7,110만원(8만 2천82m2) 유산이 대한민국 국고로 귀속조치되었다.[133]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대구 침산동 와우산에 본부인 이주열과 합장된 박중양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양주읍으로 이장되었다. 풍류 생활[편집] 술을 좋아하는 그는 풍류를 즐기기로도 유명하였다. 박중양은 평소 대구 군방각(群芳閣, 구 대구 종로호텔 자리)에 자주 출입하였다.[134] 군방각 외에도 그는 경성부에 있는 중국집과 양식집에 가끔씩 찾아가기도 했다. 대구읍성을 허물어뜨리는데 앞장 섰고 경상감사를 지낸 박중양은 군방각에서 주로 실세 일본인들을 만나 기생들과 풍류를 즐겼다. 박중양은 늘 인력거와 제비 모양의 양복 차림에 실크 모자와 지팡이[134] 차림이었고, 금빛 회중시계 줄이 조끼 주머니 밖으로 스며나와 길을 걸을 때마다 철렁거렸다.[134] 서민들한테는 그 모습은 위압적일 수 밖에 없었다.[134] 의외로 일본 경찰들은 대구 군방각에 대해서만은 빡빡하게 감시하지 않았다.[134] 그는 중국집과 일식집에도 종종 출입하는 미식가이기도 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1925년 이후 대구 각지에 흩어진 농토에 따로 하인이나 소작농을 두지 않고 과수원과 감자밭, 옥수수밭을 부인, 일본인 첩과 함께 직접 농사지었다. 시민들은 손수 농사짓는 검소한 그가 고급 술집, 고급 양식집 출입을 이상하게 여겨, 그가 고급 술집과 양식집에 가는 이유를 묻자, 그는 '조선과 같이 요령과 술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하지 못하는 놈, 해보지 못하는 놈이 바보가 된다'고 답하였다. 약력[편집] 1903년 : 관리서 주사 1904년 : 일·러 전쟁 때 고등통역관이 되어 전쟁에 참전하다. 1904년 : 농상공부 주사 1905년 : 진주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 1905년 : 일본 유학 1906년 : 대구판관 1906년 : 군부 주사 1906년 : 군부 군기창 기사 1906년 : 경상북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1907년 : 전라남도 관찰사(도지사에 해당) 1907년 : 평안북도 관찰사 1907년 - 1908년 : 평안남도 관찰사 1908년 - 1910년 :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 : 충청남도 도장관(도지사에 해당) 1915년 : 중추원 찬의 1916년 : 중추원 참의 1919년 : 3.1 만세 운동의 격화를 자제하기 위해 자제단을 조직하여 만세시위자 설득과 귀가 운동을 하다. 1920년 5월 : 중추원 참의직에서 사퇴하다. 1921년 : 황해도 지사 1923년 : 충청북도 지사 1923년 10월 : 간토 대지진에 조선인 관련성을 부정하고 일본인 내지인들에게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1927년 2월 18일 : 의원면직 1927년 :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1928년 : 황해도 지사 1929년 : 중추원 참의 1933년 :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1938년 :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1939년 :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1941년 : 중추원 고문 1941년 : 칙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941년 10월 :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943년 : 중추원 부의장 1945년 4월 : 칙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 1945년 9월 : 미군정 주둔 후 귀족원 의원, 중추원 부의장에서 파면 1949년 1월 : 반민특위 조사관에 의해 체포, 서울로 이송 1949년 :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반민특위 재판을 받았으나 직접 항거, 변론하다. 1949년 2월 : 폐렴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병보석이 허가되다. 저서[편집] 그의 저작과 일기는 대부분 압수되어 인멸, 소각되었다. 단 자서전 술회의 사본을 손자 중 1명이 소장하고 있다가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에 기증한 바 있다. 회고록, 《술회 (述懷)》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신년소감 (新年所感)》(1957년) 《박중양 선생 문서 (朴重陽先生文書)》 작품[편집] 친필 휘호 일소대 기념비 전각 흥천지무궁 (1932년 3월) 화랑[편집] 그의 친필 글씨와 그림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지인에게 보낸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한때 그의 육성녹음이 일본의 한 지인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후에 실전되었다. 자제단 조직 뉴스 기사 박중양 친필 휘호 (1924년 11월 30일)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1906년 10월) 신돌석 사망 사건 보고서 (1908년 11월 1일) 친필 휘호 흥천지무궁 (1932년 3월 1일) 논란과 의혹[편집] 출신 성분 논란[편집] 박중양의 선대는 불확실하다. 박중양 자신은 아버지가 양주군 주내면에서 머슴으로 살았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본관에 대해 1907년에 간행된 《대한제국관원이력서》 에서는 밀양박씨라 하였고,[135] 1913년에 발간된 《조선신사대동보 (朝鮮紳士大同譜)》 (조선신사대동보발행사무소편, 1913)에서는 반남박씨라고 밝혔다. 그의 가문은 아전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7]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6일자 2면 보도에 의하면 본시 양주군퇴리(本以楊州郡退吏)라고 하여 그의 선대가 양주군에서 아전노릇을 했다고 한다. 가계가 불확실한 탓에 보통 그의 가계는 선대에 중인 출신이었다가 몰락한 것으로 본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경기도 양주군에 와서 마름 노릇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였다. 아버지 박정호에게 내려진 가선대부 규장각제학 벼슬은 사후 박중양의 출세로 추증된 증직 벼슬이었다.[136] 박작대기와 백작댁[편집] 한때 그의 별명인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가 백작댁의 와전인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백작댁의 와전이 박짝댁이 되고 박작대기가 된 것이라는 설이다. 와전된 별칭은 '백짝때기[137]'라고도 불렸다 한다. 그러나 백작 작위는 그가 만년에 받은 것으로, 박작대기나 박짝대기라는 별명이 붙여진 뒤에 받은 것이다. 침산의 별명은 박작대기산이다. 일제시대 박중양이 대구 침산을 매수한 이래로 박중양이 매일 작대기를 짚고 다니는 것을 비아냥거려 박작대기산이라고 불렀다.[138] 한편 그의 묘소에 대해서 박짝대기 묘가 아니라 백작댁 묘라고 불렀다는 전승도 전한다. '박짝때기미가 아니라 백작댁 묘다, "백작댁묘" 일제 때 백작 벼슬을 한 박씨의 묘라서 박 백작댁 묘[137]'라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 논란[편집] 그는 오랫동안 이토 히로부미(伊藝博文)의 양아들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박중양은 양자설은 거짓말이라며 부인하고, 이토가 자신의 은사(恩師)라고 밝혔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139]' 또는 이토 히로부미를 의부(義父)로 삼았다[140]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호가호위하던 자[141]'였을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반민특위의 수사관들도 그를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알고 있었다.[10] 임관 얼마 뒤 이등박문을 만나게 되면서 친일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대담하게도 스스로 ‘이등’을 찾아가, “조선엔 희망이 없어 미국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도와 달라” 했더니, “당신 같은 기백 있는 조선청년은 처음이다”며 주선해준 자리가 대구군수 감투였다는 것이다.[127] 그가 “이등의 양자였다”는 소문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양자는 아니고 은사였지”함으로써, ‘이등’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간접으로 시인한 바 있었다.[127] 1949년 3월 1일 기자들과의 면담에서 건국공론사의 모 기자가 이등박문과의 관계를 물었다.[57] 건국공론사 모 기자가 그에게 "이등박문 하고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처음에는 나의 은사 라고 했다가, 기자들이 "항간에서는 양자관계라고들 하는데?"라고 파고 들자, 박중양은 "그건 거짓말이다."하고 얼버무렸다.[57]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 양자설에 대해 시중에서 확장된 소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그러고나서 그는 "그래 내가 이등공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니, 대관(大官)들이 온갖 뇌물을 가지고 아부를 해 왔지만[57] 나는 그것을 다 물리치고 내가 의도하던 개혁을 실시했을 따름이다.[142]"라고 했다. 땅 투기 의혹[편집] 대구읍성과 진주성 철거 시 그는 이때 철거한 성돌 일부를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받기도 했다. 진주성의 성첩을 일부 팔았다.[18] 1905년 진주에 있을 때 그는 진주성의 성곽을 일부 헐어서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벌기도 했다. '군수 노릇할 때는 성첩 헐어 매식하고, 관찰사가 된 뒤에는 객사까지 훼손하니 황상 폐하 남순(南巡) 시에 일기불현(日旗不縣)하였다고 수창학교 폐지코자 학무대신에게 보고하니 포악하고 돈 잘 먹기 박중양이 날개로다.[18]'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춘불춘(春不春)'이라는 노래가 전하는 박중양의 행각이다.[18] 박중양이 대구 성첩을 헐어내고 돌멩이를 일본인들에게 팔면서 대구의 부동산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통감부가 설치된 1904년 당시에 대구에 들어와 있던 일본상인들은 약 120명이었다.[143] 경부선 공사 현장이 부산에서 대구 쪽으로 뻗어 가면서 일본 상인들은 공사 현장을 따라 등짐을 짊어지고 내륙도시로 흘러들었다.[143] 일본인들은 달서문 밖에 판잣집을 띄엄 띄엄 짓고 살았다. 1906년 일본 이사청 부이사 오카모토(岡本)와 대구의 일본 거류민단 대표격인 카게야마(影山)는 박중양을 구워 삶았다. 박중양도 대구역을 어디에 지을지 알지 못했다. 철도역이 들어서면 역을 중심으로 도로를 새로 내야 하고 도로 변에는 반드시 신흥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땅값도 달라진다. 카게야마 등은 대구역 건설에 편승하여 성을 헐고 떼돈을 벌어보라고 충동질했다.[143] 대구읍성 성 안과 성 밖은 성 둘레 한 칸을 놓고 땅값이 4배나 차이가 난다. 성 밖 특히 일본상인들과 경부선 철도공사 인부로 온 일본 노동자들의 숙소 근처인 진동문 밖에다가 엄청난 땅을 사두고 성을 헐어낸다.[143] 그러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박중양은 혹했다. 카게야마의 제의대로 박중양은 성을 헐어 버리기로 결심한다.[144] 경부선 철도역이 남문 밖으로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돈 있는 사람들은 남문 밖 빈터를 사두기 시작했다. 정거장 바람은 남문 밖으로 휘몰아쳤으며 진동문 쪽의 땅값은 거꾸로 헐값으로 떨어졌다. 소문을 퍼뜨려 놓고 일본인들과 박중양은 비밀리에 동문 밖의 잡초밭을 마구 사들이면서 성곽을 헐어 버리는 비밀 작전에 들어간다.[144] 1906년 3월부터 성곽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성을 허무는 작업은 1908년까지 3년이나 계속되었다.[144] - 라고 주장하는데 일제 행정부가 박중양을 신임하는 이유가 스승이었던 이토의 이름을 팔아 사욕을 탐하지 않은 청빈함, 그리고 국가를 운영해야할 지도층으로서의 덕목을 지닌 자로 판단하고 있어서였기 때문에 이와같은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김옥균 시해사건이후 사실상 하등민족, 또는 2등민족으로 분류되는 마당에 이토의 제자, 양자소리 듣던 이가 사욕을 채웠다면 이토의 정치적 입지도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될 뿐더러, 총독부에서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도시의 확장 건설 및 상업인프라 구축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었던 자본력과 인사이트를 지닌 집단은 일본인들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쓸모 없어져버린 성을 없애버림으로 인해서 상공업의 발전과 토지의 밸류에이션이 리레이팅 되는 효과를 누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로 인해서 많은 일자리들이 창출되었을 것이고 당시 상당수 능력있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고용되었을 것이다. 싱가포르 나 동남아 화교들도 구미 열강 백인들에게 고용된 회계집단이 주축이되어서 경제건설, 또는 부의 축적을 이룩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가 추진했던 건설사업 중에 파생된 여러가지 잡음은 500년 묵은 썩어버린 구 이념과 신 이념이 충돌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일로 보아야 한다. 일본인 거류민단에서는 성이 뚧린 동문 밖으로 도로를 놓아 달라고 박중양에게 5000원을 희사했으며 성을 헌 돌과 흙은 일본인 거류지역의 유곽 시설이나 건설 예정지를 메우고 집을 짓는데 쓰였다.[144] 일부는 선교사들에게 공짜로 나눠주기도 했다. 비만 오면 물이 괴던 대구읍성 동부의 저지대에 자리잡았던 일본인 거류지역은 일등 대지가 되었다. 성 안은 평당 23원, 성 밖은 평당 6원씩 부르던 대지값은 같아졌다. 성내의 땅값은 떨어지고 철도 정거장이 들어 온 동문 밖 대지는 최고 60원까지 뛰었다. 박중양이 사들인 땅값은 순식간에 10배나 뛰어올랐다.[144] 이를 두고 박중양의 일화는 그가 시대를 앞선 땅 투기꾼이었음을 보여준다[18]는 평도 있다. 친일파론에 대한 반론[편집] 박중양은 일반적인 친일파와는 다르다는 견해가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다[84]'는 시각도 있다. 또한 조지훈은 "그를 변절자로 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지훈은 '박중양 등은 변절자가 아니며 반역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수필 지조론에서도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되기는 하였지만[145] 변절자는 아니다[146]"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 조지훈은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146]'고 하였다. 발언 파문[편집] 고령임에도 일본 여자인 48세의 제2부인과 은거해 살던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의 젊은 시절에 관해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야만 했다.[127] 또한 그는 평소 이승만은 '미국과 주한미군만 퇴거하면 즉시 보따리를 싸서 도망칠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다녀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침산 토지에 대한 의혹[편집] 그가 은거하던 침산이 그가 매입한 것이 아니라 대구읍성을 철거한 대가로 받은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의 후반생 은거지가 되었던 대구시 침산동의 침산(砧山·일명 박짝때기산·현 침산공원) 한 덩어리 전체도, 이때의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인들이 주선해 준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었다. [147] 박작대기 혹은 박짝대기[편집]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녀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148] 벼슬이 높아진 박중양도 중년 이후 이 개화장을 애용하며 뽐내고 다녀, 사람들이 비꼬는 뜻에서 가져다 붙인 별명이 ‘박짝때기’였다. 뒤따르는 하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朴’이란 큰 글자가 쓰인 전용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관가를 누비던 박짝때기였다.[127] 박중양은 단장을 항상 휴대하고 다녔기 때문에 항간에서는 '박 작대기'로 통했다.[149] 그는 개화장(開化杖)이라고 부르는 작대기를 짚고 다녔다.[148]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관료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작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었고, 칙임관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으므로 관료들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한다. 1940년 당시 총독부 출입기자 좌담회에서 매일신보 기자 김인이(金麟伊)는 그가 총독과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기술하였다. “ 언젠가 무슨 회의든가에 보니 총독, 총감도 다 열석한 석상인데 박중양이 당당합데다. 예전 도지사 당시에도 내무부장, 경찰부장이 쩔쩔 매였다는 소문이 있느니만치 철저하게 이야기 하더군요. 말에 질서 있고 사리를 잘 분변하는 말이고, 만좌가 경청하더군요. ”   — "총독부 기자 좌담회", 《삼천리》 제12권 제3호 (1940년 03월 01일자)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했나 하면,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 특출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127] 일본인 순사를 잡아다 집안 사설감옥에 가두던 그를 두고 '일본인을 혼낸 통쾌한 조선인 이야기'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148], 이는 이후에도 널리 회자화되었다. 각 도지사와 시장, 지방법원장 등이 부임하면 부임인사를 다녔고, 매년 그의 집으로 세배를 갔다. 사상과 신념[편집] 그는 '평양으로 천도'하는 것과 '조선에 의회 제도를 도입하며 신생독립국들과 협력하는 중립국[12]'을 장차 조선의 이상적인 모델로 내다봤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추원은 형식적인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韓日倂合 이전까지도 의회 설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양의, 의학교 설립론[편집] 일·러전쟁에서 군의관이 부상장병을 신속하게 응급처치하는 것을 목격한 박중양은 1906년(광무 9년) 1월 조정에 지역에도 신식 병원을 설립할 것과,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묵살당했다. 신식 병원과 의사 양성기관의 설립 상소가 묵살당하자 그는 실망하게 된다. 그는 1906년 가을부터 평양동인의원의 개원을 후원하였다. 1906년 12월 평양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개교에 참석하고 이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1907년 대구동인의원 개원과 1907년 2월 대구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개교에도 참석, 동인의원과 부속의학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1907년 6월 14일 동인회 평양지부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907년(융희 1년) 7윌 20일 평안남도관찰사로 동인회 평양 지부장에 선출되었다.[150] 평안남도관찰사로 재직 중 평양에 신식 병원의 유치를 적극 추진하였으나 실패했다. 평안남도관찰사 재직 중 박중양은 동인의원과 부속의학교의 운영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1908년(융희 2년) 5월 5일 동인의원 부속의학교 제2학년에 진급하게 된 14명 에 대한 진급식이 열렸다. 이 날 진급식 에는 지부장 평양 이사관 기쿠치 , 평의원인 평안남도 관찰사 박중양, 평양위술병원장 3등 군의정 키타야마, 평양 거류민단장 시부야, 그리고 강사 마에지마 일본 육군 1등 군의관, 하시모토 약제관 등 평양 의 주요 일본인 들이 참석 했다.[151] 단발령에 대한 확신[편집] 1935년 9월 4일 방문한 조선민보사 기자와 함께(우측 앉은이가 박중양, 좌측 조선민보 기자) 박중양은 제사 문화와 허례허식 문화 등 조선의 구습에 반감을 품었다. 그에 의하면 어떤 소신이나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하기에 그냥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의미없는 행동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단발령에 대해서도 확신을 품었다. 단발을 하면 상투를 틀 때보다 머리 관리 시간도 절약되고, 머리 감기도 편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에 따라 1906년 경상북도관찰사 재직 중에는 영해 초도 순시 후 강제로 단발을 강행하였다. 그는 영해초도 순시 직후, 관찰사실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을 시켜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43] 1907년 평안남도관찰사 부임 직후에도 신임 관찰사를 찾아오는 지역 유지들을 강제로 삭발시켰다. 1912년에는 군청 통폐합작업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논산군 은진면 유지들이 도장관 면담을 요청했다.[60] 이때 은진에서 찾아온 유지들 가운데 한 노인이 상투머리에 갓을 쓴 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발령이 내린지 언제인데 지금 까지 상투를 하다니... 에잇! 다들 나가시요.' 그리고는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60] 그는 단발령을 비롯한 제사 문화와 허례허식 문화, 관혼상제 문화에 대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인습들로 규정하였다. 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편집] 그는 '한국인들이 아는 척, 잘난 척 하기를 좋아한다'고 비꼬았다.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6]'라는 것이다. 이어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6]'라고 지적하였다. 이어 박중양은 '조선인들은 애국심만 있다면 범죄행위를 해도 허용되거나 묵인하는 습성이 있다'고 질타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의 악벽'이라 하여 조선인들에게 존재하는 악질적인 버릇을 지목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악질적인 버릇으로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152]'를 들었다. 이러한 악질적인 습관을 가진 덕에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며, 일본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신뢰를 가볍기 여기고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악습을 갖고 있다고도 지적하였다. 박중양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할 자신도 없으면서 누군가 나서서 악습을 타파하고 개신하려 들면 방해하고 험담하여 좌절, 무산시킨다'고 비판했다.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으면서, 하려는 사람들을 (뒤에서)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6]라며, 이것이 조선인 최대의 결점이라 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부터 독립 이후의 반탁 테러꾼들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많다며 그들은 부끄러움과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일갈하였다. 박중양은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놈 치고 사기꾼, 협잡배가 아닌 놈 없으며, 정의로운 척 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숨기지 않는 놈이 없다'며 말보다 그 사람의 행동을 먼저 살펴볼 것을 주문하였다. 또한 '타인의 말을 듣기 보다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고 판단할 것이며, 타인의 말은 참고사항 정도로만 여기면 된다'하였다. 그는 '편협성, 배타성, 폐쇄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가 조선인들의 악벽이다. 형제숙질에게[152] 의존하는 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들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기생하여 사는 것)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인 속담도 있다.[153]'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가족끼리 서로 봐 줄 수 있다고 보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인간으로 몰리게 됐다. 1945년 독립 직후에는 조선인의 근성에 대한 성토와 규탄을 하였지만 결국 그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괴짜, 정신질환자로 몰려 무시당하기에 이르렀다. 개화파 애국자론[편집] 효수되어 한성부 저잣거리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그는 김옥균과 개화파의 비참한 최후를 슬퍼하였다.) 그는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고종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며 195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일각에서는 역적 취급을 받던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도 매국노가 아니라 선각자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역적이라 조선 상하가 흉언하였지만 이조 말년의 선각자이고 애국지사다[4]'라는 것이다. '(그들은) 국정유신을 약모(계획)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당시 뜻대로 성사하였으면 분명 우리가 일본과 비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옥균 등 개신파가 실패하고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박영효 일인이 귀국하고 대개는 객사하였다. 그들의 유가족을 생각하면 동정하는 눈물이 없을 수 없다.[6]'고 하였다. 이어 그는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 김옥균의 최후를 두고도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6]'라며 분개하였다. 이어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6]'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던 제1공화국의 관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김옥균, 서재필 등이 역적이 아니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안경수, 윤치호, 권영진, 조의형, 장박, 유길준 등이 국사를 범한 죄인들이 아니다. 이완용 등이 매국노가 아니다.[6]'라며 항변했다. 그는 '애국자를 박해하다 못해 처참하게 죽이는 그런 국가, 그런 정부에는 애국을 할 필요가 없다'며 역설하였다. 이어 그는 조선이 최초로 독립한 것을 日·淸전쟁 이후 때로 보기도 했다. 그는 단군 조선 이후 기자 조선. 신라, 고려,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고, 중국에 사대를 하였으며, 조선왕조에 와서는 중국의 속국 노릇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며, '선인들의 애국심이 금일에 기고만장 떠들고 있는 사람들만 못한 것이 아니고 충의가 금일의 큰 소리를 장담하는 자들만 못한 것도 아니다. 불가항력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소이다. 조선이 청국의 예속을 면하고 독립하는 것이 조선인의 실력이 아니고 日·淸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결과 일본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6]'란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구느냐'며 항변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에 공녀와 인삼, 금은 등의 조공을 바친 것은 왜 아무도 비판하지 않느냐'며 계속 되물었다. 국가와 국민관[편집] 그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신의 일기나 독립 후에 쓴 술회, 반민특위 공판장에서 그는 한결같이 '국가는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민을 배려하지 않는 국가, 정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인민을 살피지 않는 국가와 정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였다. 방청석에서 반발이 나오자 그는 '조선 조정이 백성들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냐'고 항변하였다. 그는 재판 중 반성하지 않는 것[10]으로도 회자화되었다. 그가 공판을 받는 동안 방청석과 재판장 내·외부에서는 반역자, 매국노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되풀이하였다. 교육, 언론활동 지원[편집] 평안남도관찰사와 경상북도관찰사로 재직 당시 그는 도내 신문 발간을 지원하고 적극 장려하였다. 또한 이들 신문사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대폭 부여하여 관찰사, 기업인, 지역 유지 등에 대한 비판을 최대한 허용하였다. 그는 언로를 열고 언론을 보급하는 길이 사람들의 눈을 깨이는 길이라 확신했다. 지역 유지들과 지식층이 신문을 잘 읽지 않자, 그는 숙제로 내주어 신문을 읽게 하고, 주말 저녁의 모임에서는 정치, 시사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후일 전북대학교 교수 강준만은 '신문 발간을 주도한 관찰사인 박중양 이나 황철 은 친일파로, 또는 부패관료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과 같은 신문에서 크게 비난 받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박중양이나 황철은 신문을 실어 하던 관리들이었을텐데, 이들이 신문의 창간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154]'라며 이를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다. 평안남도에 관립일본어학교의 설립을 지원하였고, 경성의 기독교청년회의 영어학당에도 후원금을 보냈으며, 대구에도 관립일본어학교의 건립을 추진, 후원하였다. 대구읍성 철거[편집] 대구군수 재직 시 그는 일본인들이 칭송한 야마모토 군수 라고 하여 유명하였다. 경부선 개통으로 대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때문에 일본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생겨났다. 이때 대구군수 박중양은 주로 일본인들의 편에서 일하였다. 따라서 일본거류민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13] 성벽 파괴작업은 오직 박중양의 독단으로 감행한 일로 목이 달라날 각오를 갖고 임했다.[56] 박중양은 성을 헐어버릴 계획을 오카모토와 카게야마 그리고 몇몇 일본 사람들과 함께 짜고, 1906년 10월, '대구 도시계획 상 방해가 되니 성첩을 헐겠다.'는 건의서를 조정에 올렸다.[144] 건의서에 대한 조정의 회신은 '불가'였다.[144] 그러나 중앙에서 회신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성첩을 허물은 뒤였다. 박중양은 건의서를 올리기 열흘 전부터 카케야마 등이 부산에서 데려온 60여 명의 일급 노동자를 배불리 먹이고 밤새 성에 구멍을 뚧기 시작했던 것이다.[144]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는 두 아들인 박문웅과 박무웅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계획도 세웠다 한다. 불상사를 대비해 두 아들(文雄, 武雄)을 일본으로 망명 시킬 준비도 하였다는 것이다.[37] 박중양은 당시 대구읍성이 대구읍내를 관통하여 시내 왕래가 불편한가 여부를 검토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고 보고 대구읍성 철거를 지시한다. 당시 일본거류민들이 가장 소원했던 바는 바로 대구읍성의 철거 문제였다. 그런데 1906년 6월 그가 경북관찰사 서리를 겸하게 되면서, 곧바로 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결국 성을 철거함으로써 성내 상권까지도 일본 상인들이 침투하게 되었다.[13] 일본인이 기록한 대구물어에도 그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두 아들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준비도 하였다.[56]'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읍성 철거를 두고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야마모토 군수의 '과감한 조치'라고 극찬하였다.[13] 그러나 그는 일본인들의 칭찬을 외면하였다. 진주성 철거의 시발점[편집] 그는 진주성의 일부를 철거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와 진주의 수백 년이나 된 성돌을 파내어 일본인들에게 팔아 먹은 돌군수였다.[18] 진주성과 대구읍성을 돈주고 팔았다 하여 돌군수[18] 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그 돌을 집을 짓는 데 사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았다.[18] 헐린 진주성곽 일부의 돌은 돈을 받고 일본인에게 판매하였다. 훗날 1930년대에는 진주성 내성까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면서 촉석루만 남게 되었다. 박중양은 진주성 돌의 일부를 성곽 북방에 있던 대사지(大寺池)등 세못과 해자를 메우는데 활용하였다. 진주성은 결국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18] 진주성은 1960년대부터 복구되기 시작했다. 이완용 희생자론[편집] 이완용(박중양은 그가 어쩔수 없이 모든 책임을 지고 희생했다고 봤다.) 그는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사람들이 흔히 '이완용을 매국노라 매도하여 말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쉽고,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당면한 지도자가 되어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6] 1945년 독립 직후부터 그는 이완용을 변호했고 그는 어쩔수 없는 희생자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외면당했다. 독립 후 조선총독부에 협력하거나 부역하던 당시의 국민들이 모든 책임을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 등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만 모든 공격이 쏟아지는 것에 분노하며 이완용 애국자론을 펼쳐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이완용 피해자론, 이완용이 희생자라는 견해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는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국가의 위급이 존망한 때의 당면한 책임자를 선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이다.[6]'라며 이완용이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대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또한 韓日倂合 때나 을사 보호 조약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들을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6]' 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을사 조약 때나 韓日倂合 이후 관직을 버렸던 일부 인사들, 그들을 양심적인 선비로 보고 존경하던 사람들과 언쟁꺼리가 되었다. 친일에 대한 소신[편집] 그는 자신이 민족 반역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독립 직후 그는 자신을 성토하는 여론에 대해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56]"라고 반박하였다. 일제 시대의 조선에 살던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본 제국의 신민이고 조선총독부의 국민일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고 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처벌을 당했더라도 그는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처벌받은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1953년경 박중양이 자신의 일기 일부를를 지인에게 보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천황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일본이 미국, 영국 등 연합국에 패배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나 미국과의 전쟁을 일본 정객들의 오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충성심만은 변치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1997년부터 1998년 일본 체류한 대구 출신 사학자 강태원에 의해 가쿠슈인 대학 우방문고에서 발견되었다.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긍정론[편집] 박중양은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비교적 공정했다고 봤다. 일제 시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은 일본인에 대한 편견이라는 점과, 지역차별을 없앤 것을 내심 높이 평가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통치하는 과정에서 평안도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앴다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조선 왕조를 조선총독부 통치기와 비교하여 암흑기로도 평가했다. 그는 '정치의 개선과 인재 등용을 세인이 모두 아는 바이다. 정령에 이론에 편중하고 민중 생활에 불합리한 점은 없었으되, 대체 정치의 목표가 민생의 복리를 계획하는데 있고, 관공리 등은 일일이 시무가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이외에 한 것이 전혀 없다.[155]'며, 일제에 대한 비판은 일본인들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음을 지적했다. '암흑시대 조선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된 것은 세인이 모두 아는 바다. 조선인의 고혈을 흡취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만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155]'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제 통치에 대해 증오감이나 편견이 없이 평가해야 된다고 봤다. '염두의 증오지심이 있어서는 공정한 평론이 아니되는 것이다.[155]' 그는 조선총독부 통치의 공정한 이유로 지역감정을 없앴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일정시대에 인재 등용이 실시되어 이조시대의 차별을 받고 있던 평안도 출신도 도지사, 참여관 등에 등용되었다.[155]'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나 일제 통치기라고 해도 무조건 실력없는 인사를 채용해서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여러 총독 가운데서도 특히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긍정적으로 봤다. 데라우치가 '조선인을 본위로 정치를 행하여 조선 말기의 암흑시대를 비교적 명랑하게 만들었고, 특히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넘쳐났던 지역감정이나 출신지 차별, 출신성분 차별을 배제하고 공개채용시험으로 인재를 등용한 점, 문벌과 학맥 등을 가리지 않고 선발한 점을 예로 들어 조선총독부 통치가 편파적인 통치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조선의 일본화[편집] 그는 '조선이 선진국 내지는 문명인으로 발전하려면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하였듯 조선인들도 일본의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13] "중양가절 말 말아라. 전무후무 비기수단(肥己手段) 대구성곽 구공해를 일시간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 (대한매일신보, 1909. 1. 16. '중양 타령'[13]) 그는 '비문명화된 조선의 문명 개화를 위해 일본인들이 협조, 지원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1908년 무렵 일본인들과의 한 모임에서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들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항상 일본인들의 우월성을 앞세웠다.[13] 그리고 '조선인들도 일본인을 본받아 문명화와 개척 정신, 자립 정신, 호전성을 지녀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들의 '형식적인 위선과 무능력함'을 열등감처럼 여겼다. 박중양은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우러러보지는 않았다. 작대기를 들고 다니던 그는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을 석방시키는가 하면 횡포를 부리던 일본인 관헌들을 작대기로 끌어내리거나 내리쳐서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도지사와 중추원 참의와 칙임관대우였고,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뢰를 얻고 있었으므로 일본인 관헌들도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편집] 스승 이토 히로부미 박중양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독립 이후에도 기억하면서 존경하였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심과 욕심이 없는 점'을 들었다. '관직이나 부귀에 대한 애착이 없고, 자신의 관직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점과 신설한 관직은 1차 시험 후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것[155]'이 그 이유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부를 때 항상 '이등 공, 이등 선생님, 선생님'이라 칭하였다. 이토 부부는 일본과 조선을 내왕할 때는 어김없이 박중양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이토 부인이 바다에 빠져 몹시 위급해졌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다고 한다.[13] 따라서 이토가 박중양을 더욱 각별히 아끼게 되었다.[13]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가까이서 봤다. '이등박문은 세계적 위인이다. 공의 연구가 후진들에게 교훈이고 술자리 환담 때에도 쓸데없는 말이 없다. 이등박문은 일본에만 전유할 정치가가 아니다. 각국 역사책의 기록이 있을 것이다.[155]'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술에 취해서도 '실수나 실언을 하지 않는 점'을 높이 보고 그를 인격자로 존경하게 되었다. “ 메이지 유신 초기 폐번치현(번을 폐하고 현을 설치) 때 27세의 나이에 병거현령이 되고 국회 개설 초의 귀족원 의장, 궁내부 신설과 동시에 궁내대신, 내각 제도가 제정되면서 초대 총리 대신, 추밀원 설치 초의 추밀원 의장이고, 초대 한국통감이었다. 그는 현직에의 애착심이 없고 신설 관직을 1차 시험 후에 타인에게 전수한 것이 이등박문공의 방식이었다.[155] ”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존경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관직이나 부귀에 연연하지 않는 점'을 높이 샀다. '나는 이등공을 표본으로 하고 한국의 중흥을 이상으로 하였다. 국세가 주마적으로 급변하므로 내 사상이 수포로 돌아갔다. 대세를 역행할 수 없는 환경을 따라서 내 심상도 역시 변동하였다.[155]'며 일본식 정책 추진의 실패를 아쉬워했다. 그는 한국이 독립된 뒤에도 오래도록 이토 히로부미를 인격자로 회상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 행동은 이토 히로부미를 을사 조약의 원흉으로 보던 당시 한국 사람들과 갈등하는 요인이 됐다. 한국인 韓日倂合 기여론[편집] 그는 독립 직후부터 韓日倂合이나 을사 조약의 원인이 '일제, 일본만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인들 역시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원인 중에는 '왕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과 '당시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 모두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민생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악랄함에 의해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본 독립운동가 및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견해를 정면 부정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술회에도 그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정치의 부패와 국민들의 고통을 지금 70세 이상 되는 연로자는 모두 다 아는 바이다. 행락 매관이 공공연히 이를 행하였고, 대소 관리들의 민재 탐취가 강도와 다르지 않았다.[155]'며 당시의 부패상을 지적했다. 그는 韓日倂合의 원인을 '무조건 일본인들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피해망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임금에게 직신(直臣)이 없고 궁중의 난잡은 백귀야행(百鬼夜行)이었다. 집정자는 자기 영달에만 몰두, 탐욕했고, 국정일비를 무관심하였다. 고위 고관자는 자기의 이해득실에만 타등하고, 백성들은 죽든지 살든지 아불관어(무관심)하였다.[155]'는 점도 지적했다. 박중양은 '韓日倂合의 책임을 외부에서만 찾는 것은 일시적인 자기 위안'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한국의 쇠망은 그 원인이 적년요정(積年要政, 매년 쌓은 정치의 잘못)에 있었지 일조일석에 있지 않았다. 한국을 쇠망케 한 자는 한국인 누구누구였겠는가.[155]'라며 한국 내부의 잘못도 존재함을 역설하였다. 현실주의[편집]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조선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황국신민이라고 규정했다. 일제 시대 당시 '국내에 있던 국민들은 모두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 국적자였고,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구차한 변명'이라며 조롱했다. 그는 '해외에 망명했다가 한국이 독립된 후 귀국한 인사들 외에 3.1 운동 당시의 일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121]'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고 하였다. 비록 독립운동을 하다 처벌을 받았지만 일본 영토 내에서 일본의 신민 자격으로 처벌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일본 치하에 있던 사람들이 일본 국적, 일본의 백성임을 부정한다 해서 일본 국적자였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그는 3.1절 기념행사 참석자 중에 '일정 시대에 관공서 공무원이었던 사람의 연설'을 보고 조롱하였다. 상황 따라 변신하고 변절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이를 두고 '시세 변천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활계희극의 광경[121]'이라고 조롱하였다. 성실성[편집] 1949년 그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그가 대한제국 말기 부터 당시까지 써온 일기장들이 발견되었다. 반민특위의 조사관들도 압수한 물건들 중 그의 일기를 보고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한 가지 감탄한 것은 그의 집에서 압수해 온 증거품 중에 일기장이 무려 20여 상자나 되었다.[10] 반민특위 수사관들은 이를 전부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들추어 보았는데 그 속엔 일자무식, 돈 한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박중양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10]'고 한다. 1949년 1월초 반민특위 대구지부에 연행되어 온 전날까지 그는 '수십 년 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두 정자로. 나는 그가 비록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10]'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 유학중이던 어느 때부터 반민특위에 검거되기 전날 까지 일기를 썼다. 가족 관계[편집] 그는 시인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의 가문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의 큰아버지인 이일우 집안과 사돈관계였기 때문이다. 증조부 : 박행묵(朴行默, 1769년 1월 3일 - 1847년 5월 24일) 증조모 : 청송심씨(靑松沈氏, 1768년 10월 23일 - 1841년 10월 21일) 할아버지 : 박기숙(朴基肅+心, 1800년 3월 7일 - 1909년 8월 11일) 할머니 : 무안김씨(務安金氏, 1804년 5월 12일 - 1911년 3월 11일) 백부 : 박주호(朴周鎬) 아버지 : 박정호(朴鼎鎬, 1840년 - 1892년 9월 22일) 어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1845년 4월 21일 - 1929년 7월 12일) 형 : 박원양(朴元陽, 생몰년 미상) 동생 : 박수양(朴秀陽, 1876년 - 1913년 5월 5일, 단오일에 경성부에 갔다가 적리병에 감염되어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156]) 동생 : 박계양(朴季陽, 1877년 - 1925년 5월 10일) 제수 : 홍씨(洪氏, 1875년 - 1962년 4월 29일) 조카 : 이름 미상, 요절 조카 : 박정웅(朴正雄, 다른 이름은 순정(淳正), 정순(正純), 1910년 3월 25일 - ?) 질부 : 김해김씨(金海金氏, 1911년 8월 26일 - ?), 김병주(金炳柱)의 딸 종손 : 박인정(朴仁楨, 1933년 12월 18일 - ) 종손녀 : 박씨(朴氏) 종손녀사위 : 허보근(許寶瑾, 본관은 김해(金海)) 종손녀 : 박씨(朴氏) 종손녀사위 : 이팔영(李八榮, 본관은 전주(全州)) 사돈 : 양재형(梁在亨) 사돈 : 이일우(李一雨, 호는 소남(小南), 1870년 ~ 1936년), 독립운동가 이상정, 시인 겸 작가 이상화, 독립운동가 겸 체육인 이상백의 큰아버지, 독립운동가 권기옥의 시백부, 군인 박창암의 처조부 부인 : 이주열(李主悅, 다른 이름은 이주열(李柱烈),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아들 : 박문웅(朴文雄, 다른 이름은 순성(淳聖), 1890년 12월 7일 - 1959년 8월 14일) 며느리 : 이름 미상 며느리 : 남원양씨(南原梁氏, 1907년 8월 11일 - ?), 양재형(梁在亨)의 딸 손녀 : 박씨(朴氏) 손녀사위 : 노영달(盧榮達, 본관은 상주(尙州)) 손녀 : 박부남(朴富南, 1932년 ~ 2018년 1월 11일), 소아과 의사 손녀사위 : 이열희(李烈熙, 본관은 경주(慶州)), 치과의사 손자 : 박승효(朴勝孝, 다른 이름은 세정(世楨), 1933년 8월 1일 - ) 손자며느리 : 양근함씨(陽根咸氏, 1937년 11월 11일 - ), 함승호(咸升鎬)의 딸 증손자 : 박영목(朴永睦, 다른 이름은 병훈(炳薰), 1964년 12월 1일 - ) 증손사 : 박정목(朴正睦, 다른 이름은 병준(炳俊), 1967년 3월 17일 - ) 아들 : 박무웅(朴武雄, 생몰년 미상) 아들 : 이름 미상 손녀 : 박두순(朴斗順) 아들 : 이름 미상 딸 : 박씨(朴氏) 딸 : 박씨(朴氏) 딸 : 박OO, 경명여자고등학교에서 가정과목 교사를 역임했다. 대구의 모 메리야스기계 회사 사장 이모와 결혼했다. 부인 : 일본 여자, 이름 미상(1909년 - ?) 딸 : 박정자(朴政子, 1936년[157] - ) 외모[편집] 그는 화려한 경력의 관리로 출세하였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13] 평가와 비판[편집] 그는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던 인물로 일본인들까지도 그를 함부로 괄시하지 못하였다.[84] 또한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다[84]'는 시각도 있다. 객기가 넘치는 사나이로 거리낌 없이 할말은 하였다[46]는 평도 있다. 긍정적 평가[편집] 대구물어에 의하면 그는 '사람됨됨이가 솔직하다[46]'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의인 또는 일본 경찰을 혼내준 기개 또는 배경을 높이 평가받았다. 한편 "대구를 근대도시의 공간구조로 발전시킨 선각자[40]"라는 시각도 있다. 일제 시대 당시 그의 근무성적 평가표에 의하면 "예민하고 호방해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음. 퇴관한 후에도 후배의 지도에 진력하고 혹은 공공적인 방면에도 공헌함. 부근 사람으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이 존경받고 있음.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와 기타 총독부 대관들로부터도 역량과 수완, 탁월한 식견을 인정받아 중요시되어 “비상한 시기에 즈음해서 진실로 믿어서 보람있는 인물은 지사급으로는 朴重陽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의 조선공로자연감 427페이지에 수록된 인물평에도 박중양은 "예민하고 호방해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음. 퇴관한 후에도 후배의 지도에 진력하고 혹은 공공적인 방면에도 공헌함. 부근 사람으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이 존경받고 있음. 일찍이 伊藤와 기타 총독부 대관들로부터도 역량과 수완, 탁월한 식견을 인정받아 중요시되어 "비상한 시기에 즈음해서 진실로 믿어서 보람있는 인물은 지사급으로는 朴重陽이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서 수학한 점, 대구 읍성을 철거하여 일본 상권의 대구 진출을 도와주는 격이 되었던 점 등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3.1 운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만세만 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발언 때문에 비난받아왔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시인 조지훈은 '그가 친일파로 지목되었지만 변절자가 아니라'고 했다. 조지훈은 자신의 글 지조론에서 "최명길은 변절의 사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158]"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부정적 평가[편집] 이 문단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한 반민특위 조사관은 그를 완벽한 일본인이라고 하였다. 그는 '박중양은 몸은 비록 한국인이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개과천선이고, 반성이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10]'라고 평하였다. 한편 사사로이 탐욕을 부렸다는 비판도 있다. 대구 군수 겸 경북 관찰사서리가 된 그가 대구성 및 객사를 철거하여 일본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권력을 악용해 몇몇 지역유지들을 동원해 사사로이 군청을 만들어 대구 지방민에 대한 탐학을 저질렀[159]다는 것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며칠간 감옥살이를 했을 뿐 곧 풀려나 잘 먹고 잘 살다간 친일파의 전형이었다[36]'는 비판도 있다. 기타[편집]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박중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저자:박중양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급 인사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하고 거침없이 지적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영남제일관은 1906년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과 도로개설을 빌미로 박중양의 주도로 대구읍성을 헐어버리면서 동문이었던 동성로의 진동문, 북성로의 공북문, 서성로의 달서문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160] - 도대체 500년동안 뻘짓거리 한 민족이 정기라는게 있는건지 그 정기라는게 무엇인지 알수가 없다. 성균관대학교 강사 김일수는 박중양이 대한제국 내무부의 명을 어기면서 대구읍성을 해체한 배경에 대해 “박중양은 대구군수로 부임했을 당시 대구 읍성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 상인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며 “이 같은 일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라는 뒷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았다.[54] 박중양은 난초 그리기와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을 취미로 삼기도 했다. 한말의 문필가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 박중양이 그림 한 폭을 청하자, 서병오는 "당신 같이 지체 높은 분은 일본 화가들에게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텐데 하필이면 나한테 받으려 하느냐"면서 거절했다고 한다.[13] 1949년 무렵의 그의 집에는 기자조선시대의 정전법을 그린 병풍과 충무공의 거북선을 그린 병풍이 있었다.[161] 그는 자신의 어머니 초상화를 그리러 온 대구의 중학교 미술교사 김진용에게 최제우가 참형당하던 광경을 증언하기도 했다. 김진용에 의하면 "박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남문 밖 관덕정 건물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1864년 3월 10일에 최수운 선생의 참형을 당하시던 광경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경상감사 서헌순의 지시 아래 형집행하는 과정에서 선생의 영적에 의하여 곡절이 계속되다가 선생께서 청수를 뫼셔오라 하시고 묵념하시고 나서 형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박중양에게서 들었던 것입니다.[162]"라고 하였다. 박중양은 김진용에게 관덕당 사진을 가리키며 그곳이 수운 최제우의 처형지라고 지목하였다. 선조들의 묘소 일부는 동생 박계양 내외의 묘가 있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아미타불고개(현 의정부시 금오동 아미타불모퉁이 부락)와 양주군 주내면 남방리(현 양주시 남방동)으로 분산 이장되었다. 성품[편집] 1949년 3월 1일 그를 인터뷰한 건국공론사의 한 기자에 의하면 당시 '70이 훨씬 넘은 노인인데도 언조에나 눈매에는 아직도 정기가 흐른다'고 했다.[163] 독립 후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나 사람됨이 솔직하였다 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고 사제(師弟)의 입장으로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사저(師姐)로 섬겼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조선인의 미개성'을 수시로 지적, 질타하였다. 선화당 측우기[편집] 대구 선화당에 있던 선화당 측우기 그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대구 선화당(宣化堂) 앞뜰에 있던 선화당측우기와 측우대를 인천관측소에 인계하였다. 그러나 그가 일본인 와다 유지에게 주고, 와다 유지가 조선총독부 인천관측소로 옮겼다고도 한다. 박중양으로부터 와다 유지가 받은 것으로서[164], 와다는 이것을 조선총독부 인천관측소의 뜰에 한 동안 두었다[164] 한다. 대구 선교박물관의 기초[편집] 그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대구읍성을 헐어 냈는데, 선교사들이 이 돌들 중 일부를 옮겨와 집짓는 데에 활용했다.[165] 박중양은 선교사들에게는 무료로 돌을 가져가되 1인당 10개 이상은 가져갈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다. 선교사들은 대구읍성에서 해체된 석재와 목재들을 가져다가 선교사 사택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대구 선교사 사택은 지붕은 한식기와를 이은 박공지붕이었으나 함석으로 개조되었다 다시 한식기와로 보수했다.[165] 동산의료원 근처에 세워 191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기독교선교사 사택으로 이용되다가 후일 선교박물관이 되었다. 기타[편집] 동리 청년 30여명이 동리에서 무섭다고 소문난 박작대기(박중양)의 사과 과수원에서 박중양에게 잡히지 않고 사과 많이 따오기를 내기로 걸었다. 또 가장 많이 따온 사람을 평생 청년회비를 면제해 준다는 조건도 내세웠다. 청년들은 매일 밤, 새벽에 몰래 박중양의 사과 비닐 하우스에 들어가 사과를 서리하였다. 청년회원 중 한 명이 박중양의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 한개를 따다가 들켰다. 박중양은 여태 사라진 사과가 1백 박스 정도 되는데 모두 네가 한 짓인가. 이놈 잘 잡혔다고 타박했다. 다른 청년들은 사과 1포대에서 6포대 이상을 훔쳤는데 자신은 1개 따고 1백 박스 값을 물어내게 되자 항변하였다. 다른 애들은 사과 20~30박스 정도 훔친 애들도 있는데 왜 사과 1개만 딴 나를 잡느냐 하자, 박중양은 청년이 사냥을 하는가 여부를 물었다. “ 너 사냥 할줄 알지? 그럼 너는 산에 있는 짐승을 전부 잡을 수 있냐? 잡힌 짐승만 불쌍한 거야. ” 사냥을 잘 할것 같았던 청년은 실제 포수였다. 박중양을 연기한 배우[편집] 정진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 - 1984년 《독립문》KBS 드라마 채문호 - 2015년《기적소리》 뮤지컬 관련 항목[편집] 3·1 운동 독립협회 자제단 사회 계약론 경술국적 정미칠적 을사오적 반민특위 대구읍성 이완용 박제순 윤치호 서재필 박정양 이상재 이승만 함태영 배정자 윤치오 김옥균 안경수 최린 김윤정 김홍집 이시영 이진호 러일전쟁 만민 공동회 을사 보호 조약 이토 히로부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안경수 김규식 나혜석 박정양 박원양 양기탁 윤웅렬 윤필오 이상재 이시영 이동녕 윤치영 허정숙 홍영식 김윤식 박영교 서재창 일소대 이노우에 가오루 영친왕 박문웅 박영교 이완용 안창호 유길준 이광수 이동녕 이동휘 장덕수 이준용 김성수 송진우 허정 각주[편집] ↑ 그의 아버지의 대에는 마름 노릇을 할 정도로 가세는 몰락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본관을 알기 어렵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42페이지 ↑ 가 나 다 박중양의 친일행각...일본에 지역상권 넘겨주려해 영남일보 1996.08.13 ↑ 가 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4페이지 ↑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라며 분개하였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5페이지 ↑ 가 나 다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0》 (국사편찬위원회, 1994), (61) [朝鮮人 動靜報告 件] ↑ 1908년 7월 의정부찬정 겸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의정부찬정 겸 학부대신 김규홍(金奎弘)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차일본공사관 임시대리공사 박용화(朴鏞和)가 보낸 편지에 의거하여 유학생들의 생활비 중 박원근의 약값 50전을 청한 공문이 "照會 第二十七號"라는 제목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박중양 : 3.1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김도형)〉.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239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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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8일에 문서의 요약이 요청되었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박중양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박중양朴重陽 거옥 박중양의 초상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황해도 도지사 임기 1921년 2월 12일 ~ 1923년 2월 24일 군주 요시히토 섭정 히로히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신상정보 출생일 1872년 5월 3일 출생지 조선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사망일 1959년 4월 23일 (86세) 사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침산1동 1652번지에서 노환, 폐질환, 과로 등의 합병증으로 인한 병사 학력 일본 도쿄 중학교 수료 일본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 졸업 일본 도쿄 부기학교 전문학사 경력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조선총독부 충청북도 도지사 정당 무소속 부모 박정호(부), 전주 이씨 부인(모) 형제 박원양(형), 박계양(남동생) 배우자 본부인 전주 이씨 첩실 이름 미상(일본 여자) 자녀 아들 박문웅, 아들 박무웅, 아들 이름 미상, 딸 박정자 별명 자 원근(源根)호 해악(海岳), 일소(一笑), 거옥(車玉)박원근(朴源根), 박작대기, 朴忠重陽 종교 유교(성리학) 박중양(朴重陽, 일본식 이름: 朴忠重陽 호추 시게요,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관료이다. 본관은 반남(潘南)[1]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닌 고문이자 백작이며,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까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일제시대의 신념적 친일파이다. 1897년(건양 1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후 1903년(광무 6년)부터 1년간 일본의 관료로 생활하다가 귀국, 대한제국의 관료가 되었다. 일·러 전쟁에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종군하였고, 그 뒤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언변으로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1905년에는 농상공부 주사로 대구에 파견나왔다가 진주 판관을 겸하였으며, 진주 판관 재직 중 진주성곽을 일부 철거하였다. 1906년에는 대구 군수로 있으면서 대구읍성을 철거, 해체를 주관하였다. 1908년(융희 2년)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융희 4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경북관찰사 재직 중 단발령을 강제로 감행하였다. 1910년(융희 4년) 10월 韓日倂合이후에도 계속 관직에 있었고, 191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거쳐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1927년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고 1928년 황해도지사가 되었다가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고,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41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943년 10월 중추원 부의장을 거쳐 1945년 4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이 되었다. 독립 후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았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49년 1월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체포되어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만년에는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은거하며 이완용에 대한 변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을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이승만과 이시영, 함태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무능함을 수시로 조롱, 비방하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였으며, 한번에 일본 맥주 60병을 마셨고 소주는 40병까지 마신 일도 있으며,[2] '박태백', '보리술 지사'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2] 1907년에는 박중양이 맥주를 대음한 것이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었다.[2]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문인이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반 1.1.1 출생과 가계 1.1.2 소년기 1.1.3 일본 유학 생활 1.1.3.1 도일과 중학교 재학 1.1.3.2 자객의 침입과 신변 위협 1.1.3.3 도쿄부기학교 재학 시절 1.1.4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1.2 대한제국기 활동 1.2.1 귀국과 일·러 전쟁 1.2.2 관료 생활 1.2.2.1 관료 생활 초반 1.2.2.2 일본 관병식 참석 1.2.2.3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 1.2.2.4 대구읍성 해체 작업 1.2.2.5 대구읍성 해체 직후 1.2.2.6 평안남도 관찰사 재직 시절 1.2.3 고종 퇴위 전후 1.2.4 개혁 정책과 단발령 강행 1.2.5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 1.2.6 들개 사냥 대 작전 1.2.7 순종 남행길 수행 1.2.8 대구 십자도로 개통과 일본인 관료 응징 1.3 일제 시대 활동 1.3.1 韓日倂合 직전 1.3.2 일제 시대 초반 1.3.2.1 韓日倂合 전후 1.3.2.2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 1.3.2.3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 1.3.2.4 일본인 관리 응징 1.3.2.5 사회 단체 활동 1.3.3 일제 시대 전반기의 혼란 수습 1.3.3.1 3.1 운동 비판과 진압 가담 1.3.3.2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내사 1.3.3.3 황해도지사 재직, 수해 사태 수습 1.3.3.4 충북지사 재직과 관동대지진 수습 1.3.3.5 속리산 도로 개통 1.3.3.6 속리산 성추문 사건과 퇴직 1.3.4 밀주 단속 무마와 고미술품 수집 1.3.5 복직과 일제 시대 중반 1.3.6 조선인 참정권 운동 1.3.7 도지사 퇴직 이후 1.3.8 일제 시대 후반 1.3.8.1 중추원 활동 1.3.8.2 日·中전쟁 전후 1.3.8.3 태평양 전쟁 초반 1.3.8.4 전시 체제기 활동 1.3.9 참정권 허용 감사사절 파견과 귀국 1.4 독립 이후 1.4.1 독립 직후 1.4.2 친일파 청산론에 대한 비판 1.4.3 반민특위 기소와 석방 1.4.3.1 반민특위 제소와 재판 1.4.3.2 수감 생활 1.4.3.3 재판과 가석방 1.4.4 삼일절에 대한 조롱 1.5 생애 후반 1.5.1 오봉산 은거와 정부 비판 1.5.2 출판물 사건과 최후 1.6 사후 2 풍류 생활 3 약력 4 저서 4.1 작품 5 화랑 6 논란과 의혹 6.1 출신 성분 논란 6.2 박작대기와 백작댁 6.3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 논란 6.4 땅 투기 의혹 6.5 친일파론에 대한 반론 6.6 발언 파문 6.7 침산 토지에 대한 의혹 7 박작대기 혹은 박짝대기 8 사상과 신념 8.1 양의, 의학교 설립론 8.2 단발령에 대한 확신 8.3 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 8.4 개화파 애국자론 8.5 국가와 국민관 8.5.1 교육, 언론활동 지원 8.6 대구읍성 철거 8.7 진주성 철거의 시발점 8.8 이완용 희생자론 8.9 친일에 대한 소신 8.10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긍정론 8.11 조선의 일본화 8.12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 8.13 한국인 韓日倂合 기여론 8.14 현실주의 8.15 성실성 9 가족 관계 10 외모 11 평가와 비판 11.1 긍정적 평가 11.2 부정적 평가 12 기타 12.1 성품 12.2 선화당 측우기 12.3 대구 선교박물관의 기초 12.4 기타 13 박중양을 연기한 배우 14 관련 항목 15 각주 16 참고 자료 17 관련 서적 18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박중양 해악 박중양은 1874년 또는 1872년 5월 3일 경기도 양주군 주내에서 박정호(朴鼎鎬)와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박원근이었고, 성인이 된 뒤 중양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출생 년대는 정확하지 않아 1872년생 설과 1874년생 설이 있다. 만년에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년도는 다소 정확하지 않다. 자는 원근이고 별명은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인데, 이는 그가 나중에 작대기를 짚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의 가계와 선대(先代) 역시 불확실한데, 반남 박씨라는 설과 밀양 박씨라는 설이 있다. 만년에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가계 역시 전하지 않고 있다. 대구 오봉산 근처에는 그의 선조의 묘소 2기와 그의 내외 묘소, 아들 내외 묘소, 양주군에서 이장해 온 부모의 묘소가 20세기 말 무렵까지 존재했다 한다. 대구 오봉산 정상에는 그가 세운 '일소대'라는 기념비가 있었으나 독립 직후 파괴된다. 그의 가계는 오래 전에 몰락하여 그의 아버지의 대에 와서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 와서 마름 노릇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양주군 덕거리에 쌍분으로 있다 하는 그의 할아버지 박기숙(朴基肅+心)의 묘소 역시 불분명하며, 그 이상의 선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버지 박정호에게 내려진 가선대부 규장각제학 벼슬은, 사후 그가 가선대부로 승진하면서 추증된 것이었다. 나중에 출세하면서 그는 다시 본적을 선대의 고향 근처인 달성군 북면 침산동(達城郡 北面 砧山洞)으로 옮기게 된다. 그는 선조들의 고향인 대구에 정착했다. 후일 그가 대구에 정착한 것에 대해 대구의 일부 지역사학자들은 "경기도가 고향인 박중양이 대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일본 정계실력자들과의 교분을 강화화기 위해 일본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인 대구가 적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3] 소년기[편집] 불우했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후일 자신이 쓴 자서전 《술회》에 일부 언급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집안은 가난하였고, 그는 과거 시험에 응시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의 신문물을 시찰할 유학생을 선발하게 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첫 일본 시찰 유학생 선발에 응시하였으나 몇 번 낙방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日·淸전쟁을 전후하여 경성에 있던 일본인과 긴밀하게 교제하였다.[4] 日·淸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였는데, 그의 예상대로 일본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을 존경하던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보고 분노하였다. 특히 그는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5][6] 연좌 제도와 악형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과 같은 나라는 문명국으로 보기 어렵다고 규정했다. 개화파 인사들을 선각자로 보고 존경했지만 그들 가족들의 비참한 최후와 능지처참, 연좌제 등의 악형을 목격하면서 그는 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에 일찍부터 의문을 품게 되었다. 1896년(고종 33년) 7월 한성부로 올라가 윤치호, 서재필, 이상재 등이 만든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 1896년(고종 33년) 10월 11일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도쿄로 유학하였다.[7] 10월 11일 상선 아카시마루(明石丸) 편으로 일본에 도착, 10월 12일 도쿄로 올라갔다.[7] 일본 효고현 지사 스후 고헤이(周布公平)는 이들을 면담, 일본 입국 목적을 파악하여 10월 13일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보고하였다. 박중양은 일본에 온 이유를 "게이오기주쿠 입학을 위해서[7]"고 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박원근(朴源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8] 일본 유학 생활[편집] 도일과 중학교 재학[편집] 1897년(고종 34년) 관비유학생 자격으로 약 7년간 일본에서 유학하였는데, 그해 도쿄 중학교를 수료하였다. 유학생활하면서 기독교 목사 혼다 요이치(일본어: 本多庸一)를 만나 혼다 요이치의 식객으로 생활하다가, 그가 경영하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서 수학하였다.[9] 이 무렵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이토는 일본을 배우겠다는 그에게 사람들의 의식 수준과 치안, 행정 관서들을 잘 보라고 충고해주었고, 그의 권고로 경찰과 행정 쪽을 유심히 보게 된다. 국비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간 그는 생활비를 자신이 직접 아르바이트로 조달했다. 그는 오랫동안 일기를 남겼는데 후일 그의 가택을 조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한 반민특위의 한 조사관은 '일자무식, 돈 한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박중양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10]'고 평하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산 소식을 접한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체과정을 지켜본 그는 협회를 해산시킨 '무지한 애국자'들을 조롱하였다. 그는 "애국심을 핑계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애국심만 있으면 뭐든 용서된다고 믿는 얼간이들이 많다"며 조소했다. 황제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무지한 수준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며 그런 수준으로는 독립을 달성하더라도 이내 다른 외세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연좌제도 적용, 이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까지 강제 해산당하자 그는 분개한다. 중학생 재학 때부터 그는 하교시간, 방과후를 이용해 이토 히로부미의 서실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퇴청 후 별도의 서실을 열고 학교 진학 형편이 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후에 정치, 사상, 철학 등을 강의하였다. 우연히 이토의 문하에 찾아가게 된 그는 가난한 조선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젊은이들의 멸시와 무시를 당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그가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점을 차등대우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서실에 오도록 받아들였다. 그는 이토가 편견없이 자신을 문하에 받아준 것에 깊이 감격하였다. 자객의 침입과 신변 위협[편집] 아오야마학원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그는 대한제국 정부가 파견한 자객의 미행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1900년(광무 3년)에 도일 유학을 했던 한 유학생의 회고록에 의해서 당시 일본의 정황을 살피면, 동경역 부근 은 잡초가 우거진 허허 벌판이었고 , 철도 마차가 똥 오줌을 갈기며 현재 일류 번화가인 은좌 거리를 질주하던 시대였다고 한다.[11] 그 유학생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 유학생 들은 조성근, 노백린, 박중양, 장도, 이갑, 류동렬 등 선배 동급생을 합쳐서 50 명 내외 였다'고 한다.[11] 이들은 박영효가 국사범 으로 망명해 오자 전원이 박영효의 졸도(卒徒)인 양 오해를 받아서 한때는 구 조선 정부가 밀파한 자객의 미행을 받기도 하였다. 박영효의 거처를 탐지해 내기 위해서 인데, 그 자객의 행위를 경계하기 위해서 일인 형사가 으레 미행을 하기 마련이었다.[11] 중학생이던 박중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익명의 유학생에 의하면 그러니까 한인 유학생 하나가 나타났다 하면 험상 궂은 자객과 일인 형사가 마치 쥐가 서로 꼬리를 물듯 미행하면서 자못 살풍경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들 초기 유학생 들은 누구나가 신 국가 건설의 역군을 자부하면서 여간 기개가 드높지 않았다.[11] 박중양은 자신에게 장학금을 주어 관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파견해놓고, 오히려 간첩 취급하여 자객을 보낸 대한제국 정부에 다시 한번 실망하게 되며 조선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도쿄부기학교 재학 시절[편집] 1900년(광무 3년) 야오야마 학원 보통중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부기학교(東京簿記學校)에 입학하였다. 도쿄부기학교에서는 은행업무를 배우고 1903년 졸업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 이름 대신 야마모토 신(山本信)이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했다. 도쿄부기학교 재학 중인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도쿄 경시청에 경찰 제도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 사무와 감옥 제도를 연구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일본의 문물과 정치 제도를 유심히 시찰했다. “ 나는 일본 정권을 파악하고 동양의 평화를 계략하고자 연구하였다. 일본 제국 정권이 정당 수중으로 집중된 이래 정권쟁탈이 당 간에 격심하여 지나인 군벌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 정당 정치가 된 연후의 정치 운행이 의원 다수가 포위하면 승리이다. 따라서 비열한 행동이 적지 않고 정치가 점차 부패해졌다.동경에 저택을 두고 경도 등지의 별장생활을 하면서 일본의 정당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생활 비용을 원조하며 그들의 심저를 섭취하면서 다수 의원을 포섭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고, 나의 이상적 대업을 능히 이루리라 자부 기대하였다. 요컨대 군비다.금(金)은 많고 적음의 문제다. 봉건시대 일본인들은 황금으로 교섭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의 일본 정당은 황금 만능 시대로 변성하였다. 일본 제국 정권을 파악하고 동양 대책을 위해 능히 이루리라 내심 자부, 연구하였다.[12] ” 금(金)은 많고 적음의 문제라며 재물을 모으는 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모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장차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조선에 의회 제도를 도입하며, 중립 외교를 견지하며 신생독립국들과 협력하는 중립국을 장차 조선의 이상적인 모델로 내다봤다. '평양 도시로 천도하고, 조선을 정치 중심으로 신생국가와 협력하여 동양평화를 보지하고 동양을 동양인의 실력으로 보전하기를 염원하였다.[12]' 그는 야마모토라는 일본식 이름과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가 있었다. 후일 경기도 도장관이 된 히가키(檜垣直右)나 충청북도 장관이 된 스즈키(鈴木隆)도 이때 사귀었던 인물들이다.[13]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편집] 도쿄에 관비 유학생으로 간 박중양은 다른 유학생들과는 달리 유흥에 빠지지 않고, 경찰 제도와 행정 제도, 기계시설 작동 등을 견학했다. 또한 방과시간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사설 서실과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 등을 방문하여 요시다 쇼인의 사상과 학문을 접하기도 했다. 도쿄 체류 중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진 위급한 찰나에 하늘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뛰어들어 여자를 구한 일은 이토 히로부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14]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져 몹시 위급해졌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다.[15]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을 구하였지만 박중양은 어떠한 대가도 사양하고, 값진 선물을 주었지만 사양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부인을 구한 박중양을 각별히 신뢰하였다. 한편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자객들 등의 미행 때문에 수시로 이바라키현지사(茨城縣知事) 히로나카 타마미쓰(河野忠三), 경시총감 아다치 츠나유키(安立綱之) 등은 외무대신에게 실시간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하였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토는 그를 비롯하여 자신의 문하를 찾아온 조선인 유학생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처지를 탓하거나 문제삼지 않았다. 이토의 인품에 감화된 박중양은 평생 이토 히로부미나 이등박문이라 하지 않고, 이등 공(公), 춘보 공(公), 이토 공이라고 꼬박 존칭을 붙여서 불렀다. 1904년 귀국 이후 한국통감으로 부임해온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나면서, 그의 관료생활의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1904년(광무 7년) 3월 15일 러일전쟁에 종군하겠다고 일본 외무성에 밝히고, 4월 배편으로 부산항을 거쳐 경성으로 상경하였다. 귀국 후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한국의 행정에 서서히 적용하려 하였으나 반대에 부딛쳐 실패하고 만다. 귀국 직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평양도시로 천도하고, 조선을 정치 중심으로 신생국가와 협력해야 된다[14]'며 조선을 영세 중립국화할 것을 건의했지만 묵살당했다. 일본 체류 중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등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들은 조선인에게 필요한 것은 서구 문물의 유입 이전에 공공정신과 질서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여 그를 사사하였다. 대한제국기 활동[편집] 귀국과 일·러 전쟁[편집]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러일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에서 귀국 후, 1903년(광무 6년) 6월 16일 관리서 주사(管理署主事) 판임관8등(判任官八等)에 임용되었다.[16] 6월 17일 관리서 주사직을 의원면직 신청하였으나 사직서가 반려되었다. 바로 수구파를 내치고 애국적인 세력을 등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상소는 올라가지도 않았고, 그해 말 관리서주사직을 그만두었다. 1904년 2월 일·러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고등통역관 대우로 임명되어 일본군에 종군하여 인천, 황해남도 진남포, 용암포와 중국 청나라 안둥현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었으나 그의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부른다. 한편 그는 일본인을 잘 섬겨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국에서 가장 좋은 관리는 오직 박중양 이다." 는 말을 듣기도 했다.[17] 일본인과의 교제, 일본 생활, 종군 생활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을 신뢰, 일본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우수성을 높게샀으며 그들의 친절에 감탄하였고, 일본인 기녀에 대해 좋은 추억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국정 개선을 위해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자원하는 일본인의 의협심을 가슴에 담게 되었다. 한편 박중양은 이와 반대로 조선인들은 '야만적'이라고 봤다. 그가 조선인들을 야만적으로 본 이유는 '사기에 능하고, 도벽이 있고, 또한 파괴성이 있다'고 봤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비교하며 조선인이 공공 정신이 없고, 사기와 거짓말에 능하며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것과 도벽과 허세가 심한 점을 보면서 실망하게 된다. 관료 생활[편집] 관료 생활 초반[편집] 1900년대 초의 박중양 농상공부, 진주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같은 해 11월 농상공부 주사(農商工部主事)가 되어 바른 인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외면당했다. 바로 대구 파견을 자청하여 1년간 대구에서 체류하였으며, 이 때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통역을 하면서 관찰사와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조절했다. 당시 대구에서는 경부선 개통 이후 이곳에 몰려든 일본인과 경북 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관찰사의 일을 방해했고,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연유로 박중양이 대구에 있던 1년 사이에도 장승원, 이용익, 이근호, 신태휴 등으로 관찰사가 빈번하게 바뀌었다. 이때 박중양은 이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일본인의 편에서 또 때로는 중간적인 입장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05년(광무 8년) 2월 6품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2월 10일 진주군수 이용교(李瑢敎)가 뇌물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자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 2월 20일까지 진주 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晋州判官兼晋州郡守署理)를 겸하였다. 이때 박중양은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였다.[18] 임진왜란 당시 왜병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아먹는 바람에 나중에는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18] 성곽의 일부는 성 북방에 있던 대사지(大寺池)등 세못과 해자를 메웠다. 그해 3월 다시 일본으로 유학, 도쿄에서 고등과를 다녔다.[19] 이듬해 5월 귀국한다. 일본 관병식 참석[편집] 1906년(광무 8년) 1월 일본 체류 중 경상북도 대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4월 17일 군부기사(軍部技師)로 일본군 관병식(觀兵式) 시찰차 육군부장 이근호(李根澔), 부령 조성근(趙性根), 어담(魚潭), 참령 윤치성(尹致晟), 정위 김기원(金基元), 임재덕(林在德)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20] 1906년 5월 5일 군부기사(軍部技師)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으로 발령되었다가, 다시 군부 군기창 주사(軍器廠主事)로 전보되었다. 5월 20일에는 주전원 경위국 경무관(主殿院警衛局警務官)으로 발령되었다.[21] 그러나 6월 6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원면직하였다.[22][23] 1906년(광무 9년) 6월 군부 특별 파견원에 임명되고, 그해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이 대한제국 정부 특파대사로 일본 도쿄를 방문할 때, 박중양은 현지에서 통역관 자격으로 수행원의 한사람이 되어 의친왕을 수행하여 도쿄로 갔다.[24] 바로 6월 6일 도쿄에서 열린 관병식(觀兵式)에 대한제국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한국 사회에 대해 설명하고 희망이 없다며, '조선에는 희망이 없어 미국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자신의 미국 유학을 도와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 유학 대신 관직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충고해주었다. 6월 26일 의친왕 일행이 귀국하자 수행원에서 면직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편집] 1906년 7월 일본 도쿄에서 고등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선택되었다.[19] 1906년 7월 12일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6품으로 승진, 주전원(主殿院) 경위국 경무관(警衛局警務官) 주임관4등(奏任官四等)이 되었다. 이토 통감의 총애를 받은 박중양은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통역을 도맡았다. 뿐만 아니라 의친왕이 일본에 행차할 때는 통역 수행원으로 따르기도 하였다.[13] 1905년(광무 8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될 무렵 그는 이를 저지하지 않는 조정 대신들을 무책임하다며 성토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사실상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간주하고 체념하였다. 1906년 일본에 사절로 갔던 의친왕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 수행한 공로로 일본정부가 보내준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 무렵,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그는 조선통감부의 신임을 받았다.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함께 논리적인 언변과 처신 등으로 일본인들도 함부로 다루지 못했고 이때 '일본인들도 칭송한 야마모토 군수'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1906년(광무 9년) 7월 중순 박중양은 다시 대구판관으로 나갔다가, 그해 7월 19일 통정대부 대구 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주임관 4등으로 승진했다. 대구군수가 되자마자 새롭게 대구군청을 건립하였다. 이때 그는 대구의 지역 유지와 기업인들을 모아서, 이들의 자금을 헌납받아 대구군청을 건립했다. 이를 두고 '권력을 악용해 몇몇 유지들을 동원해 사사로이 시청(市廳)을 만들어 대구 지방민에 대해 탐학을 저질렀다[25]'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알려지기도 했던 박중양은 유학시절에 쌓은 일본인 인맥과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1906년 경북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로 부임했다.[26] 7월부터 경상북도 이사청 설치의 준비, 감독을 맡은 그는 9월 15일 경상북도 관찰사부에 부속된 선화당(宣化堂) 건물에 대구이사청을 설치하였다. 대구읍성 해체 작업[편집] 1906년 10월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대구읍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1906년(광무 9년) 10월 1일 대구군수 재직 중 주임관 3등(奏任官三等)으로 승급했다.[27] 1906년 대구 이사청의 오카모토 부이사관(副理事官)과 가게야마(景山) 민단장대리 등이 대구성곽을 철거하고 그 터를 도로로 할 것을 경상북도관찰사서리 대구군수 박중양에게 강권했다.[28] 대구군수로 재직하며 대구읍성을 허물고 도로를 만들어 지식인들의 원성을 사는가 하면 동시에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하도록 협조했다. 이때 내무부의 허가를 받지않고 일을 처리하여 징계를 받을 상황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으로 오히려 영전[29]했다. 박중양은 조정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던 것이다.[30]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속에 가능했다.[30] 통감정치를 하고 있을 무렵, 그는 '대구성을 헐어도 되는가'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불가(不可)의 명령이 내려왔다.[31] 그러나 박중양은 읍성 해체를 강행한다. 1906년 당시 그는 조정의 승인도 없이 일본 거류민단의 주장을 받아들여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32] 일본인들은 대구역 근처에 매입해둔 도원동 일대 수만평의 땅을 개발하기 위해 대구읍성의 철거를 요구했던 것이다.[32] 철거를 시작한지 10일이 경과한 10월 1일에 철거해도 되느냐는 장계를 보냈다. “ 대구부의 성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부청이 이를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1906년 10월 1일 경상북도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33] ” 당시 대구군수였던 박중양은‘혁구개신(革舊改新·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이라는 명분 아래 대구읍성 해체를 시작했다.[34] 박중양은 일본인 이와세, 니타에, 사이토, 이토 네 사람과 극비리에 모의하고 韓·日 인부 60명을 부산에서 고용하여 읍성 해체를 시작하였다. “ 박중양 관찰사 서리의 뜻을 받은 이와세, 나카에, 사이토, 이토모토 네 사람은 극비리에 인부 60명쯤을 부산에서 데려와 하룻밤 사이에 성벽의 이곳저곳을 파괴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치기영 치기영 치기영’ 하면서, 목도꾼으로 부르는 인부들이 큰 돌, 작은 돌을 운반하고 있었다. 한국사람은 원래 어깨로 물건을 메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물건을 져 나른다. 박 관찰사는 이때 처음으로 목도꾼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그 운반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무거운 물건을 두 사람 이상이 나를 때, 일본사람들은 ‘영치기 영치기’라고 소리를 질러 호흡을 맞춘다. 한국사람들이 듣기를 ‘치기영’이라고 울렸는지 지금도 조선인은 첫 소리매김이 ‘치기영 치기영’이라고 나온다 하니까 우습다. 착각이라는 것이 재미있다.[35] ” 박중양이 비밀리에 부산에서 데리고 온 인부 60명이 대구 읍성을 허무는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흰옷을 입은 조선인 무리에서 선비 한 명이 분을 못 이긴 채 앞으로 나섰지만, 주위의 만류로 물러났다.[14] 박중양은 물러서는 조선인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무력한 조선인이 기껏 덤비는 꼴이라니….’ 그리고 인부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시작하라! 동트기 전 지시한 바를 차질없이 수행하라!” 박중양의 벽력같은 호령과 함께 성벽이 파괴되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곡괭이질 한 번에 남자들이 울었고, 그 울음소리에 아녀자가 뛰어나와 울었다. 울음소리는 성벽에 붙어 우는 가을벌레의 소리처럼 측은하고 가여웠다. 박중양은 조선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울음 속에 서식하고 있는 무력함이 지긋지긋했다.[14] 박중양은 조정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던 것이다.[36]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속에 가능했다[36]는 시각도 있다. 대구읍성 해체 직후[편집] 박중양을 풍자한 중양타령, 대한매일신보 대구읍성 해체 직전 대구시가도 대구읍성을 대한제국 내부의 지시 없이 해체한 일로 내부에서는 그에 대한 추궁이 들어왔다. 이때 이 성벽 파괴작업은 오직 박중양 의 독단으로 감행한 일로 목이 달아날 각오로 대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런 경우를 생각 하고 두 아들(文雄, 武雄)을 일본으로 망명 시킬 준비도 하였다는 것이다.[37] 박중양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비위를 규명하기 위한 칙서를 받고 신변이 위태해졌으나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징계를 면할 수 있었다. 대구읍성을 해체한 박중양은 경상북도 감영의 객사였던 태평관을 없애려하자 기생 염농산 등은 주민들과 합세하여 태평관 앞에서 농성하였다. 강제로 해산하려 하였으나 해산하지 않자 그는 사연이 있을 것이라 보고 태평관 해체를 포기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박중양이 성벽을 허물고 나온 성돌을 1개에 1냥씩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38] 이 때 일부 선교사들이 성돌을 옮겨다 집을 지었고, 선교사 주택뿐만 아니라 신명학교·계성학교, 동산의료원 및 약전골목, 일반 고택 등으로 흩어졌다.[39] 이때 그의 덕택에 상권을 확보한 일본인들은 박중양이 전라남도관찰사로 부임해갈 때 석별의 기념으로 시계를 선물했을 만큼 그를 고맙게 생각했다.[40] 대구군수 재직 중 그는 대구객사를 매각하였으며, 공자묘를 헐어버리기도 했다. 또한 대구의 공공건물에 있던 이승만, 서재필의 후원을 받던 협성학교를 내쫓아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여러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성벽해체 소식을 재빨리 들은 사람들은 눈먼 땅을 사재기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31] 성 밖에 땅값은 평당 10원이었으나 오히려 성안의 땅 값은 2원이었다는 것이다.[31] 1907년 5월 박중양 관찰사는 대구 약령시를 구 경상감영 옆의 객사에서 구 대구읍성 남문 밖 약전골목(남성로와 동성로 일부)으로 이전케 하였다. 대구읍성을 해체한 뒤 일인들은 헐값에 사들인 도원동 일대 저습지를 헐어낸 성토와 석재로 매립해 큰돈을 벌었다.[36] 훗날 “박중양이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해 갈 때 일본인들은 석별의 기념으로 시계를 선물했을 만큼 그를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32] 평안남도 관찰사 재직 시절[편집] 대구읍성 철거 이후 대구시가지는 확장되었다. 그가 대구 시가지를 확장시켰다는 여론도 나타나면서 그를 처벌하려던 시도는 사라진다. 1907년(광무 10년) 초에는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칙임관 4등(勅任官四等)이 되었으며, 평안남도 관찰사로 영전했다가 그해 5월 20일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잠시 재직하였지만, 조정에 흉년을 이유로 농민들의 빚과 토지세를 탕감해주었으므로 수전라남도 관찰사에서 이임할 때 전남의 지역 유지들은 그에게 황금 시계를 선물해 주었다. 1907년 6월 1일 평안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취소되고 다시 대구군수가 되었다. 다시 6월 7일 가선대부가 되어 다시 평안남도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로 부임하고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으로 승급했으며 6월 10일 이시영이 평안남도 세무감(平安南道稅務監)에서 해임되자 평안남도세무감을 겸직하였다. 이어 1907년(광무 10년) 6월 13일 평안남도재판소 판사, 평안남도 관립 일어학교 교장(平安南道官立日語學校長)에 임명되어 평안남도 관찰사로 평안남도세무감과 재판소판사, 관립일어학교 교장 등을 겸임했다. 이때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특혜 없는 판결로 명성을 쌓았고, 위생 사업과 도로 정비, 단발령 강행, 병원 유치 등에 힘썼다. 1807년 평안남도 선유사(宣諭使)를 겸임하였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다. 주로 밀주와 보리술, 막걸리 등 술을 잘 마셨다. 술을 좋아하던 관료들에서도 유명한 사람은 '보릿술 지사(知事)' 라는 별명 을 듣던 박중양이었다.[2] 1907년 박중양 이 맥주를 대음 (大飮)하는 한 대목이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었다.[2] “ 평남 관찰사 박중양 씨는 성질 이 이상 하야 1 홉으로 매일 1호 에 다음제발(多飮諸拔)하야 한나절 에 일본 맥주 60병 을 능음무여(能飮無餘)하고 소주는 40병을 근음(僅飮)하얏으니 음주거량(飮酒巨量)은 박중양이라 말고 박태백(朴太白)이라 위할지오. ...(이하 중략)...[2] ” 한번은 소주를 40병 까지 마셨다고 한다. 언론인 겸 작가 이용선은 '불과 한나절 동안에 맥주 60병을 혼자서 거뜬히 먹고 나섰으니 과연 '박태백'이요, '보리술 관찰사'라고 불려도 화낼 일은 아닐 것이다.[2]'라고 하였다. 박중양은 술에 취하면 말수가 적었으며 좋고 나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량의 술을 마셨지만 그는 술주정을 하지 않기로도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종종 홀로 창가를 바라보며 흡연과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평안남도에 있을 당시 근무 성적이 나빠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민중에 대한 무관심과 경멸, 냉정한 태도 역시 백성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박중양의 횡포는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13] 그의 친일행각과 학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원성을 담은 ‘중양타령’이라는 노래까지 나왔을 지경이었다.[36] 이는 대한매일신보 '제2의 박중양'에서 평안남도관찰사 이진호를 겨냥하여 "박중양의 횡포로 인민의 고통은 말도 못할 지경인데, 박중양이 둘이나 되니 인민이 어떻게 살아갈지 민정(民情)을 슬퍼한다"는 기사에서도 묘사되었다.[13] 고종 퇴위 전후[편집] 1907년(광무 10년) 7월 고종이 퇴위를 선언하자 그는 고종의 퇴위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양위 철회 상소에 상관없이 고종은 양위하고 말았다. 1907년(융희 1년) 8월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항일의병전쟁이 전국토를 뒤흔들자, 그는 의병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그들의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 보고하였다.[13] 8월 12일에는 삼화부 주사 안양준(安養駿)이 뇌물을 각 면의 면장들에게 불법적으로 받은 일로 징계하여 파면시켰다. 그해 10월 30일 우편사무 취급 권한을 이용하여 백성의 편지를 함부로 열람해본 영원군 군수 김제민(金濟民)을 내부에 보고하여 월권행위를 적발하여 파면시켰다. 1907년 10월 2일에는 성천군의 나서성(羅瑞成)이 민심을 선동한다고 보고하였다. 1907년 10월 23일 평안남도선유사에 임명되어 순시하였다. 이때부터 평안남도재판소 판사는 참서관이 서리가 되었다. 11월 7일에는 내무부에 상소를 올려 지방 판임관은 해당 도관찰사가 임명하게 해달라고 상소하였다.[41] 그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1908년 1월 1일부터는 판임관급 이하의 관리들은 해당 도의 관찰사가 직접 임명케 하였다. 그해 11월 11일 근무중에 임지를 이탈하여 한성부에 사사로이 올라왔다가 내부로부터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12월 1일 선유사 직무를 마치고 관찰사직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각 지방관에게 부여한 우편취급 사무에 대해 지방관들이 우편을 함부로 열람하지 못하게 할 대책 마련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1908년(융희 2년) 2월 통역관으로 일·러전쟁에 종군,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5등 서보장을 전달받았다. 그해 6월 6일 각 관립외국어학교 졸업생 중 내부대신이 임의로 인재를 채용하려 하자, 박중양은 정식 채용시험을 보지 않은 인물을 내부대신이 임의로 채용, 인사를 단행함은 월권행위, 권력남용이니 옳지 못하다 하여 무산시켰다. 1908년 6월 11일 경상북도 관찰사 겸 경상북도재판소 판사 칙임관 3등에 임명되어 바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1907년(광무 10년) 2월부터 대구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는 등 일본에 대한 저항이 강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는 곧 부임해온 경북관찰사였던 박중양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42] 그해 7월 1일 겸임 평안남도관립일어학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08년 박중양은 본적지를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경상북도 달성군 북면 침산리로 옮겼다. 개혁 정책과 단발령 강행[편집] 단발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는 일찍부터 단발령의 효율성을 알리고, 이를 보급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발령에 호응하지 않았다. 경상북도관찰사가 된 박중양은 영해(寧海) 지방에 들어가 한 고을의 수천 백성들의 상투를 꾀를 써서 잘라 버린 사건이 있었다.[43]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로 새로 부임한 박중양은 영해군으로 초도순시를 간 뒤, 그 잘하는 연설로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고 나서 선언했다.[43] “ 나에게 따로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 연설회가 끝난 뒤 군청 내아(內衙)로 들어오시오.[43] ” 도백(道伯)이 자기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 인사를 받겠다고 하는데 감지덕지한 유지 기관장급들은 좋아라 하고 내아로 줄을 지어서 들어갔다. 그런데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이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 한꺼번에 수백 명의 상투가 잘려 나갔으니 내아는 금세 통곡바다를 이루었다.[43] 이후 그는 위생의 편리함을 이유로 단발령을 권고했고, 호응이 적은 곳은 직접 찾아가 순사들을 매복시킨 뒤 단발을 강행하였다. 1907년 평안남도관찰사 재직 중에도 그는 단발의 필요성과 위생상 편리성을 역설하고 단발령을 강행하였다. 단발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으면 면담을 신청한 뒤 도청에 출입할때, 도청사 정문 또는 관찰사 집무실 입구에 가위를 든 관리들을 숨겨두고 출입자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게 했다. 또한 평안남도관찰사로 재직 중 평양과 남포에 병원 유치와 의학교 유치를 추진하였다. 그는 신문을 보고 국내외 정세를 알 필요가 있다 하여 1907년 10월부터는 자비를 들여 신문을 구매, 평안남도의 지역 유지들에게 발송하여 읽게 하였다. 황성신문과 매일신문 등 박중양의 정책과 평안남도에서의 근무 실적이 저조함을 비판, 지탄하는 신문들이 많았으나 박중양은 이에 개의치 않고 신문들을 구입하여 유지들에게 보냈다. 그는 이들이 신문을 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신문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가려내 지역 유지들에게 질문하였다. 이후 자연스럽게 평안남도 지역에 신문을 읽는 풍습이 정착되었다.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편집] 1907년 6월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무렵 1908년 6월 11일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대구객사를 허물었다. 경북관찰사로 부임한 그가 대구객사를 허물면서 금학루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여 '누백년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데갔노'라는 가요[44]를 불렀다.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래 그는 예산 집행 내역을 일일이 기록으로 작성한 뒤 조정에 상신하였다. 그는 스스로도 장부를 가지고 다니면서 참여관, 각 국장, 과장, 실무자들에게 영수증을 받아서 보고서로 묶어서 작성, 보고하게 했다. 취임 초반 그는 대구 지역 내의 각 언론사들 사이의 중재에 나섰다. 일본거류민단 일부에서 1908년 7월에 대구일일신문의 논조에 불만을 품고, 그해 9월에 대구시보(大丘時報)를 창간하였다.[45] 이때 박중양 등의 중재로 대구일일신문과 대구시보가 합자해서 그해 10월 1일에 대구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하기 시작했다.[45] 10월 무렵 박중양은 대구 지역의 유지들의 기금을 모아 또다른 신문 발행을 기획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 그는 대대적으로 도로 정비와 주택 정비 작업을 추진한다. 초가집 대신 기와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대적으로 도시 정비를 추진한다. 이때 토지수용을 거부하는 일본인 상인과 지주들을 설득하여 도시계획, 정비를 추진한다. 일부 일본인의 토지를 수용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으니 일본인들이 많은 양의 보상금을 바라므로 토지 수용이 힘들었다. 그는 일본인 지주들을 초청하여 여러 차례 설득하였다. 당시 박중양은 일본 거류민단과의 간친회에 있었던 연설문을 일본인 '카와이 아사오'가 지은 "대구물어 (大邱物語)"에 실려 있다.[31] “ 한일 양국의 의사를 소통하고 양자 공통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개최된 이 모임이 공전의 성황을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소생이 이 곳 대구와는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은 여러분이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군수시대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인이 많아 늘 고견을 듣고[31] 적잖게 행정상의 편익을 받았음을 감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소생은 일신을 던져 끝까지 이 땅을 위해 진력코저 하니 청컨대 일본인 여러분의 지도 편달을 바라며, 혹 여러분의 노여움을 살지 모르나 가일층의 편달을 바랄 뿐이다. 원래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 한국인에 대해서 귀국인은 사부된 책임을 깨닫고 교유함과 알선의 노고를 사양치 말 것을 간절히 바란다.[46] 사실대로 말한다면 정부로부터 2만원의 교부금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 토지 소유자가 토지 수용의 교섭에 응하지 않고 과도한 고가를 주장하는 까닭으로 결행할 수 없어서 다시 정부에 교부금을 반환하는 상태가 되었다. 한인 가옥은 명령에 따라 정리할 수 있었으나 일본인 토지는 밭이거나 황무지라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없었다. 원래 대구라는 토지는 한국 정부로부터 도외시 당하고 있다는 감이 없지 않다. 관인(官人)의 안중에는 이제껏 대구를 무시하였고 경성은 별도로 하더라도 대구와 흡사한 평양은 수십만원의 국고 보조가 있었다. 오직 일본인 여러분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분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원컨대 이 뜻을 살피셔서 장래 더욱 우리들을 편달해 주기를 바란다.[46] ” 일부 일본인들은 "우리가 스스로 개혁을 거부한 너희들을 왜 지도 편달을 해야 되느냐"는 항의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빈정거리는 사람과 솔직하다는 의견이 팽배하였다.[46] 그는 일본인과 미국인 상인, 선교사 등 외국인에게 조선에 보다 개화된 문명 전파와 교류의 필요성을 누차 역설하였다. 1908년 8월 10일 서병오가 신녕군수에 임명되었으나 10일만에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박중양은 이를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렸다.[47] “ 즉 該員이 赴任十餘日에 稱病辭職은 詐欺取官이오니 相當勘處하심을 伏望等因此를 査온즉 該員을 專爲圖官하야 欺騙上部하고 倖得任用하야 不拘初無就職○底意하고 一朝赴任未幾에 忽至規避하오니 究其情跡하면 極爲駭妄이라. 似此郡守직 不可仍置이기是以로 免本官(以上十月八日內閣)[47] ” 이는 관보에 그대로 게시되었다.[47] 서예가였던 박중양은 역시 서예가인 서병오에게 친필 글씨를 부탁했지만 서병오는 거절하였다. 그밖에도 청송군수 심택수(沈澤洙)의 사직서[48] 등 군수, 부윤, 현감 등의 사직서를 받으면 즉시 보고서로 작성하여 조정에 상신하였다. 1908년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은 신돌석의 활약상에 대하여 보고서를 올렸다.[49] 들개 사냥 대 작전[편집] 들개 1908년 10월 박중양은 또 다시 개소탕 작전을 펼쳤다.[50] 194마리의 개가 비명횡사했다.[50] 동시에 들고양이도 전염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대부분 잡아서 소탕했다. 1907년(융희 1년) 10월 그가 경북관찰사로 부임해오기 전에 일본인이 들개에게 물린 이후 들개 소탕작전을 실시했으나 계속 거리에 개가 많이 다녔으므로 다시 개 소탕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대구에 주둔하던 일본군 한 사람 이 개에 물려 죽었다. 그래서 마침내 백성들에게 개를 모두 죽이라고 명을 내리고 듣지않는 자는 처벌한다고 하였다[51]"고 하였다. 한편 1934년의 잡지 별건곤에 의하면 박중양이 야밤에 기생집에 출입하고 오다가 들개들에게 물려 봉변을 당하고 그 분풀이로 들개들을 소탕했다고 한다. “ 박중양과 야견박살(野犬撲殺)지금에는 사견휘체규측(飼犬取締規則)이 잇서서 그 규측에 의하야 기르는 개가 안이면 소위 야견(野犬)으로 취급하야 경찰서 가튼대서 박살을 식히는 일이 잇지안은 그 규측이 생기기 이전에 대구(大邱)에서 벌서 야견박살이란 불문의 법을 내여 만흔 개를 박살한 사람은 대구 관찰사(觀察使)로 문제만흔 박중양(朴重陽)이다. 그가 그러케 야견박살을 만히하야 일시 개백정 관찰사란 별명까지 엇게 된 것은 무슨 일반 공익에 필요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의레의 화류계에 명물남인 그는 대구에서도 공무여가에는 긔회 잇는대로 기생집 출입을 만히 하얏는데 하루밤에는 대구에서 기생촌(妓生村)으로 유명한 말방아골(洞名)을 비밀이 놀너가다가 사나운 개떼를 만나서 살을 물리고 옷을 찌기여서 그야말로 개코 대망신을 하고 도라와서는 그 이른 날로 대구경찰서에다 야견박살의 긴급명령을 나려서 일시 수천마리의 개를 박살시켰다고 한다. 말하자면 박중양은 야견박살의 선도자요, 원훈이다. 개사회에서는 영구히 잇처지지 못할 인물이다. ”   — "萬華鏡", 별건곤 1934년 제69호(1934년 1월호) 중에서 황현에 의하면 대구시내에 "열흘 사이에 개의 종자가 없어지고 말았다.[51]"고 한다. 들개를 대대적으로 소탕한 덕에 그의 별명은 '개백정 관찰사, 야견 투살대감'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 충북 도지사 박중양군은 遞任된 丸山警務局長이 조선을 떠날 때에 秋風嶺까지 餞送하고 山狸 1필을 기념품으로 주더니 금번 행정정리 바람에 朴군도 또한 馘首를 당하게 된단다. 忠北에 만일 朴군처럼 의리 잇는 친구가 잇다하면 들개라도 1필 주어 野犬 撲殺大監의 미역국 먹은 기념품을 삼을터이다. 그러나 조선 습관상에 산에 개고기는 원래 大忌物이니 奈何. ”   — "京城雜話", 개벽 제54호(1924년 12월호) 별건곤의 보도에 의하면 기생촌에 들렸다가 취해 돌아오는 그를 개떼들이 물어뜯어서 살과 옷이 다 찢겼다고 한다. 한편 그의 들개 박멸 작전은 1930년대까지도 조롱거리가 되었다. 1908년 10월의 들개 소탕 작전으로 이후 대구시내의 들개와 들고양이 수가 절반 이상으로 감소하였다. 1908년(융희 2년) 11월 러·일 전쟁에 통역으로 참전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의 서보장을 받게 된다. 그는 평소 일본인이나 기타 양이가 되었더라도 오랑캐라 배척할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된다는 뜻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해로운 발언쯤으로 치부되었다. 1908년 12월 일한민간친회(日韓民懇親會) 평양지회에 참석, 여기서 그는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들의 지도편달에 달려 있습니다.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일본인들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는 취치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순종 남행길 수행[편집] 1909년(융희 3년) 1월 12일 대구행재소에서 경기도관찰사 김사묵, 전라북도관찰사 신응희, 충청남도관찰사 최정덕, 충청북도관찰사 권봉수 등과 관내외 군수, 부사들과 함께 순종을 인견하였다. 대구역사에 임시로 마련된 편전에 들어선 순종 황제는 박중양 대구군수 겸 경상도관찰사 등 대구지역 고위인사들의 인사를 받고는 가마에 올랐다.[52] 인견이 끝난 후 평안남도 관찰사 이진호, 평안북도 관찰사 유혁로, 경상남도 관찰사 황철 등과 함께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의 서남부 순시를 수행하여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지역을 함께 순회하였다. 1909년(융희 3년) 1월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경상남북도를 순시할 때 대구 수창학교(현 수창초등학교의 전신)에서 일본 국기를 게양하지 않은 일로 수창학교를 폐지할 것을 학부(學部)에 건의했다. 순종의 갑작스러운 시찰을 두고 항간에서는 남쪽지방 시찰이 끝나면 부산에서 군함을 타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갈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53] 당시 수창학교 학생 30여명은 경부선 철로에 누워 함께 죽어버리자면서 대구역으로 출발했다. "임금이 볼모로 잡혀가는 것은 절대 볼 수 없다"는 어린 학생들의 충정심이었다. 그 중에는 서른을 넘은 중년의 초등학생도 끼어 있었다. 교사들의 만류로 불발되긴 했지만, 이 때문에 박중양의 요청으로 학교가 폐쇄될 뻔하기도 했다.[53] 그러나 순종은 유언비어로 어린 학생들이 움직였지만 충성심이 가상하다며 넘겼다. 이를 두고 성균관 대학교 강사,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김일수는“박중양은 아마도 순종의 방문을 통해 한국통감부 내 자신의 영향력을 대구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대구 출신이 아니었던 박중양이 대구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정치적 행동 때문이었을 것[54]”이라고 보았다. 김일수 박사(성균관대학교 강사,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위원회 위원)는 “당시 왕을 알현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왕이 직접 대구를 찾았다는 것은 박중양이 일제로부터 무한대의 신임을 받고 있음을 대구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아마도 박중양은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식민지화 할 경우 조선의 정치적 대안세력이 자신임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라고 보았다.[42] 일설에는 경상북도감영에서 달성공원까지 길을 순종이 오기 전 날 박중양이 만들었다고 한다.[42] 1909년 5월 대구 협성학교를 폐하려 하였으나 학부에서 불허하였다. 대신 그는 협성학교를 제2공립보통학교로 변경하려 하였으나 역시 학부가 거절하였다. 대구 십자도로 개통과 일본인 관료 응징[편집] 일본인을 지팡이로 내려치는 박중양을 풍자한 만화 (1930년대) 1909년(융희 3년) 대구에 십자도로를 개통하였다.[55] 대구 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를 말하는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 이 도로가 개통될 무렵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다.[55] 대구 시가지를 정비하고 십자도로를 개설함으로써 대구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순종의 남행을 수행하고 돌아온 뒤 칙임관 2등(勅任官二等)으로 승급하였다. 같은 해 7월 재조선 일본인 농업관계자와 유지들이 만든 조선중앙농회의 경상북도지회장에 선임되었다. 한편으로 조선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들을 발견하면 자신이 들고 있던 작대기로 무례한 일본인을 두들겨 패고 그 일본인이 저지른 횡포를 경찰에 따졌으므로 일본인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밉게 보인 순사 몇명 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이나 옷을 벗겨서 거리로 내쫓기도 했다. 그는 일본 순사 때리기를 예사로 하였다 한다.[56] 한번은 일본인 순사들이 노점행상으로 떡을 팔고 있는 어느 노파에게 교통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장사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말을 못알아들은 이 노파가 그 다음날에도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자, 화가 난 순사들은 떡함지를 발로 걷어차 떡이 죄다 쏟아져 소동이 발생했다. 이를 본 박중양은 바로 관할 경찰서장을 호출하고, 해당 순사에게 땅바닥에 떨어진 떡을 입에 물리고 떡함지를 머리에 이게 하여 장터거리에 조리를 돌려 민심을 수습하게 했다. 그의 위세는 막강하여 '작대기를 휘두르면 기차가 섰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56] 그러나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각별히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인들도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그는 밀주와 탁주 등 술을 즐겼다. 한편 마땅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들을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취직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소문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가 술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밀주 항아리를 갖다주고 그 대가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일제 시대 활동[편집] 韓日倂合 직전[편집] 관료생활 중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싫어하던 이들 조차도 그를 쉽게 다루지 못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 여러 대소 관료들이 온갖 뇌물을 가지고 아부를 해 왔다.[57]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 물리쳤다.[58] 평소 사람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사사로운 대접, 접대도 최대한 회피하였다. 순종의 대구 방문 이후 박중양은 일제로부터 투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42] 곧 가의대부로 가자되었다가, 1909년(융희 3년) 10월 23일에는 그해 초 순종의 서남부 시찰에 수행한 경기도관찰사 김사묵, 평안남도관찰사 이진호 등 세 관찰사와 이하 관료들을 포상할 때 가자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0월말 한때 타지로 전임이 예상되었으나 결국 유임되었다. 1910년(융희 4년) 3월 경상북도 내 각 군수들과 지역 명문가, 유지들에게 기부를 호소하여 수만금을 모아 경북일보를 창간하였다. 1910년(융희 4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박중양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영전이 되었을 때 대구부민은 사은의 뜻으로 금줄이 달린 시계를 선물하였는데 시계 뒤 뚜껑 안 쪽에 이중 십자형을 새겨 넣었으니 이는 성벽파괴의 공적과 십자로 개통의 배려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31] 그해 韓日倂合을 보았다. 韓日倂合조약이 체결되었으나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를 위해 국민이 충성할 이유가 없다'며 韓日倂合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1910년 9월에는 경상북도에서 각 면민들을 대상으로 특별 강연을 했는데, 연사의 한사람으로 초빙되었다. 여기서 그는 韓日倂合 조약의 이유, 합병 조건을 설명한 후 새 정부의 통치에 적극 협력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후 그는 "폭풍과 홍수를 방어할 지력이 없고, 대세를 저항할 실력이 없다. ... 요로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일제 시대 초반[편집] 韓日倂合 전후[편집] 박중양, 1910년 무렵 한일 병합 조약, 조선총독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등관(高等官) 3등에 임명되고, 다시 충청남도 도장관(도지사)에 보직되었다. 韓日倂合 이후 종5위 훈5등(從五位 勳五等)의 품계를 받았으나 남작 작위는 거절하였다. 1910년 10월 1일부터 1912년 3월 31일까지 충청남도 장관직을 지냈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뒤 전체 13도의 도장관 중에 조선인은 전북의 이두황, 충남의 박중양, 강원도의 이규완 등 3명 뿐이었다.[59] 도청 청사는 옛 관찰사가 있던 감영을 그대로 쓰기로 했고 도장관실 역시 관찰사가 집무하던 72평짜리 선화당(宣化堂)을 사용했다. 그리고 도장관을 부를 때는 '각하'라는 칭호를 사용하도록 했다.[60] 박중양은 충남도장관 집무를 시작하자마자 첫 군수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서 부여 임천군수 이종열(李宗烈)이 계속 되는 총독부의 토지조사로 "민심이 흉흉하니 이것을 중단해 줄 것과 농지의 단위를 종래의 ‘마지기’에서 ‘평(坪)’으로 바꾸면 혼란이 온다"는 발언을 했다.[60] 그때 농민들은 순사의 호위아래 살벌한 분위기 속에 농지측량을 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도장관은 버럭 화를 내며,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하고 퇴장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종열 임천군수는 해임되었다.[60] 1912년 8월 1일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韓國併合記念章)을 특별히 수여받고, 11월 4일 조선총독부 고등관 2등, 1913년 1월 30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 1913년 7월 1일 훈4등 서보장(勳四等 瑞寶章)을 수여받았다. 충청남도도지사인 그는 도내의 소학교, 중학교 학생들 중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손수 시상하였다. 1912년 당시 예산소학교 2학년이던 화학자 이태규는 성적이 우수하다 하여 그에게 상을 받았다 한다. '예산소학교 2학년인 이태규의 재주가 널리 알려져 박중양 도지사가 손수 이태규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또 우등생에게 주는 상품으로 사과나무를 받아와 집 앞마당에 심기도 했다.[61]'는 것이다.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편집] 1911년 4월 따스한 봄이 시작되면서 데라우찌 조선 총독은 각 도장관들에게 구형 포드 자동차를 한대씩 사서 보냈다. 그러나 차를 움직일 운전사가 없어 박중양 도장관은 차를 가져다 놓고도 그대로 묵혀두었다가 공주에 살고있던 崔모라는 사람을 서울까지 보내 운전교육을 받게 한 다음 비로소 차를 타기 시작했다.[62] 후일 대전상공회의소장을 지낸 문갑동(文甲童)도 이무렵 함께 운전을 배웠는데 崔모씨는 도장관차를 끌기 위해 면허도 따기전에 공주로 내려왔다. 최모는 면허증도 없이 도장관차를 운전한 셈이다.[62] 그러나 박중양은 도장관의 직권으로 최모의 무면허 운전을 승인하였다. 1911년 3월부터 박중양은 공주-대전간 도로 건설을 추진하였다. 1910년대 초 까지도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인 공주와 신흥도시로 발돋움을 시작한 대전 사이에 도로가 없었다.[62] 당시 공주에서 금강을 배로 건너 종촌과 대평리를 거쳐야 하는 불편한 길 밖에 없었고 지금 처럼 대전 - 동학사 입구 - 마티고개로 통하는 직통도로는 생각도 못했다. 물론 예산이 제일 문제였다. 그 당시 화폐단위로 최소한 87만원이 필요했었는데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옮길 때 현도청 신축비가 35만원이었다.[62] 조선총독부 건설국에서는 87만원의 비용은 무리라고 통고하였으나 박중양은 도로 건설을 고집하였다. 그래서 박중양 도장관은 총독부에 여러번 찾아가 교섭을 벌였으며 그래도 결말이 나지않자 데라우찌총독과 만나 결국은 87만원 전액을 타내는데 성공했다.[62] 이렇게하여 1912년 3월 대전 - 유성 - 반포 - 공주간 신작로 공사가 착공을 보게 되었다.[62] 큰 하천이 없어 공사는 쉽게 진행된 편이었으나 말티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는 길을 뚫는 것이 가장 난공사였으며 그 무렵 이 산에는 많은 화전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반발이 자주 말썽을 일으켰다.[62] 특히 말티고개 중턱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잘못 터뜨려 화전민 5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까지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화전민의 감정을 크게 자극했으며 이 때문에 공사가 1개월 동안이나 중단되기도 했었다.[62] 일각에서는 천지신명이 노한 것이라는 입소문이 돌았고, 즉시 도로 개통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지만 박중양은 도로 건설을 강행하였다. 1913년 9월 17일 공주 - 반포 - 대전간의 새 도로가 탄생했고 이 도로의 개통은 대전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으며 신비 속에 가린 계룡산개발에 크게 공헌했다.[62]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편집] 군청 통폐합작업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논산군 은진면 유지들이 도장관 면담을 요청했다. 당시는 군청이 은진면에 있었는데 논산, 강경, 연무 일대를 통합하여 논산으로 군청을 이전키로 하여 시끄러울 때였다.[60] 그런데 은진에서 찾아온 유지들 가운데 한 노인이 상투머리에 갓을쓴 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발령이 내린지 언제인데 지금 까지 상투를 하다니... 에잇! 다들 나가시요.' 그리고는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60] 이후 상투 노인들 대신 마을 청년 지도자들이 찾아오자 면담을 하였다. 예산농업학교의 교장인 이부스키 다케기치(指宿武吉))는 1910년 8월 10일부터 1915년 3월 31일까지 5년간과 1920년 4월 1일부터 1924년 3월 31일까지 5년간 제 3대 교장으로 두번에걸쳐 10년간을 근무하였다. 1915년 당시 충청남도장관(현 도지사) 박중양(朴重陽)과의 사이가 좋지못해 황해도 농무과 기사로 전임 되었다.[63] 그후 박중양은 황해도지사로 부임하려 했다. 1920년 황해도지사로 부임하려는 박중양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자 1920년 4월 1일자로 다시 예산농업학교로 부임하였다.[63] 충청남도 도장관 재직 시절 그는 대종교 포교를 금지하였다. 충청남도 장관 박중양이 조선총독부 내무부 장관 우좌미 승부(宇佐美 勝夫)에게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 에서도 대종교를 불허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64] 또한 충청남도 내 대종교 포교 사실을 적발하여 조선총독부 내무부에 보고하였다. 박중양이 보낸 '학도 에 대한 대종교 권유 상황 보고에 관한 건'이란 보고에서, 당시 대종교의 중요 문건 이었던 '단군교 포명서' 와 '단군교 오대종지 포명서'를 통하여 지역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총독부 는 '본건 에 대한 의견' 을 통하여 대종교를 기성 종교인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 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어 종교 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64] 1914년 9월 10일 조선총독부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충청남도지부 평의원에 선출되었다.[65] 1914년 11월 7일 매일신보사를 시찰하였다.[66] 1914년 11월 8일 조선총독부에서 소집한 전국 도지사 회의에 참석하다. 11월 21일 조선농회 충남지회 주최 충남 물산품평회에 참석하다. 공주군 물산품평회가 심사에서 우승을 하여, 우수농가인 논산의 이기승(李基升) 외 3인에게 은배를 시상하였다. 일본인 관리 응징[편집] 1914년 충청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충청남도도장관으로 재직 중 김갑순(金甲淳)의 회유와 위협에 쉽게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갑순은 희귀한 수석과 보물, 여자 등으로 그를 회유했지만 박중양은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김갑순을 호통쳐서 되돌려보냈다. 반민특위의 김갑순 재판 기록에는 '김갑순의 관청 교제는 참으로 능하였다. 박중양(朴重陽) 외 어느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판검사 쳐놓고 김갑순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하기도 했다. 1915년 3월 31일 충청남도 도장관에서 의원면직하고 바로 3월 31일 당일부로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충남도장관에서 물러난 뒤 대구 침산동에서 영농을 시작하였다.[67] 그해 11월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차 제물포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열린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15년 11월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4년 3월에는 자신의 소유 달성공원 일대를 1905년 4월에 건립된 대구신사의 이전 부지로 기부하기도 했다. 대구신사는 지금의 코끼리사육사가 있는 장소 근처에 건축되었으나, 부제가 실시되기 직전인 1914년 3월에 달성공원 중앙부 서단(현재의 물새사육장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전, 신축되었다.[68] 건축위원장은 부이사관인 오까모또가, 회계는 이와세가, 그리고 신사부지를 제공한 박중양등 세 사람에 의해 대구신사가 건립을 보게 되었다고 『대구일반』은 기록하고 있다.[68] 일제 시대 당시 그는 조선 내에서 일본인이 함부로 다룰 수 없던 몇 안되는 인사였다. 한번은 일본인 형사가 '조선놈은 배대지가 커서 밥을 대야로 먹는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한번은 박중양이 그 형사에게 이르기를 대구 도덕산에 일찍이 오를테니 새벽 4시 전에 오게 하였다. 이어 머슴에게 시켜 꽁보리밥 열 되를 준비하고, 다른 보에는 된장을 담되, 된장 한 바가지에는 매운 청양고추 한푼은 매달고 도덕산에 올랐다. 이 일본 형사는 새벽 3시부터 나타나 박작대기를 데리고 앞장서 산행을 하였다. 이어 대구 국우동 뒷산에서 아침을 먹는데 보니 꽁보리밥에 청양고추는 매워서 먹지 못하여 된장을 먹는데 된장도 맵고 심하게 짜서 먹는둥 마는둥 하고 다시 도덕산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못가 배가 꺼저 어찌나 배고팠지만 고픈 기색을 못하였다. 체면상 배고픔을 내색할 수 없어 그럭저럭 도덕산 꼭때기에 이르렀다. 정상에 다다라서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양푼에 밥 1그릇을 수북히 담아줘도 다 먹고, 또 1양푼을 더 먹었다. 순사가 밥을 더 먹는꼴을 보던 박중양은 '이놈의 순사 배가 함지박보다도 큰가보다. 혼자 밥을 반통이나 처먹는구나 하고 조롱하였다. 사회 단체 활동[편집] 1916년 7월 23일 호전당선화회(戶田塘仙畵會) 의 조직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입회하여 7월 23일 대구 동문 상무회도장에 작품을 출품하였다.[69] 그는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일본 유학 중에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이 무렵 그는 안동과 대구간 경철 노선 유치에 나선다. 1918년 4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8년 5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大邱商業會議所 特別評議員)에 선출되고 경상북도 제2회 물산공진회에 참여하여 물산공진회 경상북도지회 평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8년 8월 28일 대구와 안동간의 철도 개통 후원조직인 구안간 경철기성회(丘安間輕鐵期成會)의 창립에 참여하고, 바로 구안간 경철기성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대구부청 회의실에서 후원회를 개최하였다.[70] 대구와 안동간의 철도 개통 운동에 동참하였고, 그밖에 대구와 경주, 대구와 대전 지역 철도 유치도 추진하였지만 실패한다. 대구 침산에 별장을 마련한 그는 훗날 침산에서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작대기를 짚고 대구 침산을 오르내리던 박중양이 조선사람을 괴롭히는 일본 관헌을 혼내곤했다는 '박작대기'의 일화가 최근까지 이곳 주변을 맴돌았다.[71] 韓日倂合 전후로 기세등등한 일본인 관헌들을 부정적으로 보던 그는 일본인 관헌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끌어내려 호통치기도 했고, 일본인 또는 조선인 관헌에게 밉보여 억울하게 구속수감된 사연을 듣고 풀어주기도 했다. 그밖에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뢰를 배경으로 실직자와 무직자를 취직시켜주기도 했다. 그가 실직자와 무직자 몇 인을 취직시킨 소문이 확산되어 각지에서 젊은이들이 찾아오자, 그는 각자 재능을 살펴보거나 사정이 딱한 이를 가려서 취직시키거나 업체, 관공서 등에 천거하였다. 1918년 9월에는 쌀값이 비싸져 품귀현상이 발생하자 9월 4일 주민구제를 목적로 조직된 미곡임시구제회에 참여, 임시구제회 위원 겸 상담역이 되었다. 일제 시대 전반기의 혼란 수습[편집] 3.1 운동 비판과 진압 가담[편집] 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3.1운동 진압 자제단 발족 신문 기사 3·1 운동, 자제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라며 이를 냉소적으로 평가하였다.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박중양은 이를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과 윤치호 등의 회의주의자들이 3·1 운동의 무모성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독립은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직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러고는 3·1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진압을 지휘하였다. 이어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귀가시키기 위한 단체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였다. 4월 6일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회'가 조직될 때 그는 단장이 되었다.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소요 사태(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불응하는 자와 과격분자는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한다는 서약까지도 했다. 바로 그는칠곡, 선산의 자제단 조직을 직접 주관하였다. 이 이후 경북도 참여관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독립 불가 의견에 내심 동조하던 윤치호, 서재필 등은 그의 3.1 운동에 대한 자발적인 진압참여를 계기로 그와 교제를 끊고 등을 돌리게 된다. 그는 만세 운동에 앞장서는 학생들이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이끌려갔다고 주장했다. 조선 학생들을 구금한 일본인 헌병대장에게 학생들의 석방을 탄원하였으나 이 헌병대장이 거절하면서 고압적으로 나오자 헌병대장을 혼내고 학생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그해 4월 13일 그의 자제회 설치 활동에 분개한, 대구 계성중학교 중퇴생 이영식(李永植)이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 경고장을 보내기도 했다.[72] 같은 날 4월 13일 김천의 독립운동가 김수길(金壽吉)은 대구에서 박중양이 자제단을 만들어 만세 시위를 저지하려는 행동에 대해 규탄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암살 위협'을 담은 경고문을 박중양 등에게 발송하였다.[73][74] 한편 박중양은 3.1 운동에 참여한 일부 학생들의 신원 보증을 서주고, 이들의 석방, 일본 유학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1919년 9월 3.1 운동 진압, 해산에 참여한한 공로로 그는 총독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내사[편집] 자제단의 발족과 3.1 만세 운동 진압으로 그는 심한 비난, 성토를 당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진압 이후 다시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으며 1920년 2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재선되었고, 그해 5월 대구청년회 발전 기금으로 5원을 기부하였다.[75] 그러나 1920년 무렵 그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감시, 내사를 당하게 되었다. 1920년초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은 조선인 관리를 개인별로 심사하여 인사 이동을 대폭 단행하였다. 이때 많은 조선인 관료 가 면직 되고 친일성을 인정받은 자들이 대폭 승진 하였다. 또 아첨과 충성심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자 들도 많았다. 그리고 조선인 관리에 대한 감시가 강화 되었다.[76] 그러나 아첨과 말재주가 없던 박중양은 오히려 총독부로부터 감시를 당하게 된다. 1920년초, 당시 조선인 관리는 하급자는 물론 웬만한 상급의 친일 관료 마저도 끊임없는 감시아래 놓여 있었다. 예컨대 조선인 도지사 중에는 박중양도 그 감시 대상이었다 한다.[76] 그해 5월 12일 중추원 참의직을 사직하고 대구 침산동으로 낙향했다. 중추원 찬의,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토지를 매입해 농사를 짓던 그는 사과 과수원과 옥수수, 감자 농사에 전념하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한 퇴비와 방재약을 주어 농사를 지어 수확이 좋았고, 그는 자신이 농사지은 작물을 걸인(거지)과 부랑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공짜로 더 달라고 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11월 12일 중추원의 중추원 일본 시찰단원 17명의 한 사람에 선발[77], 일본을 방문하였다. 1920년 12월 일본 내각총리 하라 다카시(原敬)에 의해 소환되었다. 총리 하라 다카시는 박중양을 만나 말하기를 "일본은 조선인을 관리로 삼아 등용할 뿐만 아니라 장차 조선인으로 하여금 내각의 임원으로 참여시켜 조금이라도 경계의 구분을 없애려는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해 잡지 천고(天鼓)는 "조선인이 분투하고 소망하는 것은 즉 독립인데 한낱 내각의 일원으로써 조선인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황해도지사 재직, 수해 사태 수습[편집] 1922년 황해도지사 재직 시절 일본 간토 대지진 현장 간토 대지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만세 운동을 진압하거나 자제할 것을 촉구하여 사태의 확산을 방지하였는데도 그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끊임없는 의심과 감시를 당했다. 그는 은인자중하며 외부 활동을 삼가고 농업에 전념하였다. 1920년부터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후원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다시 관직에 나가 1921년 2월 12일 고등관1등(高等官一等)에 올랐으며, 황해도지사(黃海道知事)로 부임하였다. 그해 9월 황해도에 수해가 발생했으나, 피해상황을 바로 확보하고 조선총독부에 구호물자를 요청하는 한편, 수재민 구제를 신속히 처리하여 바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황해도지사가 되자 황해도 해주에 학교와 병원, 폐병과 내과, 결핵을 치료하는 전문병원 유치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황해도에 문맹자를 구제하기 위한 신식 학교 설치를 도와줄 것과 황해도가 개성의 예성강포구와 가깝고 철도의 개통으로 2,3시간 안에 서울에 근접할 수 있는 지역임을 들어 황해도에 병원을 유치하는데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충북지사 재직과 관동대지진 수습[편집] 1925년 무렵 1923년 2월 24일 충청북도지사(忠淸北道知事)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 해 7월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 평의원에 추대되었다. 충청북도지사로 부임한 직후 그는 충주와 청주에 신식 병원을 유치할 계획을 세우지만, 중도에 사퇴하여 병원 유치 계획은 중단되고 만다. 1923년 6월 그는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로 휴양을 나갔다가, 박석고개에 이르러 비가 와서 자동차가 산을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도지사의 신분으로 "어찌 차에서 내려서 진흙을 밟느냐"며 하차를 거부하고 군수 김재호에게 인근 농촌에서 소를 동원하여 차를 끌게 하였다. 그러나 차가 움직이지 않자 바로 '명승지로 가는 길에 자동차 하나 자유로이 통행하지 못하여서는 일도의 수치이라'하며 바로 공사를 명했고, 군수 김재호는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부역령을 동원해 공사를 시행했다. 그러나 농번기에 있던 농민들은 강제부역에 동원되면서 생계를 보장하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부역에 동원되어 불만이 쌓였고, 6월 중순 3백여 명의 보은군민들은 현장감독인 군청 기수(토목직 공무원)와 보은경찰청 순사를 난타하여 충청북도경찰청에 증원, 현장에서 40여 명의 농민을 체포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78] 그러자 동아일보 등 소수의 언론은 이를 보도하여 문제삼았다. 농민과 소를 강제로 동원한 일과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그는 지식인들로부터도 비토를 당하게 된다. 1923년부터 충청북도도지사 박중양이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휴양을 다녀온 뒤 계속 자신의 휴양지, 유흥지로 사적으로 남용하였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비난하고 기사화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때 윤치호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조선총독부 당국에 사실대로 보도한 민족의 정론인 동아일보를 처벌해서는 안된다며 동아일보를 비호하였다. 1923년 청주의 독지가 김원근의 대성학교 설립을 후원하였다. 훗날 김원근의 반민특위 진술에 의하면'1923년 당시 집 옆에 영정보통학교(塋町普通學校)가 건너편에 있었는데, 입학 시기가 되면 불과 100여 명 수용에 지원자는 1,000여 명 되어 보기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으므로 지사 박중양(朴重陽)을 방문하고 학령아동으로 미취학자를 구제키 위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원하였더니 기본금 조성할 것을 묻기에 시설 일체를 본인이 부담할 것을 거하고, 우선 청주 교동에 있는 천도교회당 약 12평을 후에 양옥으로 축조해 준다는 조건부로 빌려 신입생 150명을 수용하여 2부 수업을 실시하며 일방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 200평 교사를 이듬해까지 완성시켜 정식 인가를 받았다'고 하였다. 김원근은 사립학교였음에도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거나 학부모에게 돈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교육, 계몽을 통해 실력을 쌓는 것이 우선이라 본 그는 김원근의 학교 설립을 가상히 여겨 박중양은 그 자신의 월급을 10분의 1할씩 떼어서 1924년 김원근에게 매달 보냈다. 1923년 10월에는 관동대지진으로 재일 조선인이 큰 피해를 입자 조선인들에 대해 일본인들이 뭐라 하거나 말거나 '유언비언에 현혹되지 말라'는 유고(諭告)를 발표했다. 이어 그는 관동대지진 등에 대한 위문 단체에 기부금을 납부하고, 일본인들에게도 조선인들과 관동 대지진은 무관하며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묵살되었고 일부 조선인들은 관동대지진의 배후로 몰려 처형당한다. 1923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문관보통징계위원회 위원장와 내무국 보통시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속리산 도로 개통[편집]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의 속리산 말티고개 말티고개, 속리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말티고개는 일제 시대인 1923년까지만 해도 우마차 정도만이 통행할 수 있는 작은 길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충청북도 지사인 박중양이 법주사를 방문하기 위해 말티고개를 넘으면서 불편함을 느끼자 보은군수인 김재호에게 확장보수 공사를 지시하게 되면서 처음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79] 김재호는 당시 농번기임을 들었지만 그는 도로 개통을 지시했고, 이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 임농부역에 분개한 농민 기수와 순사를 난타급하지 아니한 산길을 닥고자임농시에 치도를 명령한 지사 사건의 전도는 매우 험악충청북도 보은군에서는 도댱관 박중양씨로 인하야 큰 분란이 이러낫다 이제로부터 약 일개월 전에 풍류를 즐기는 충청북도 지사 박중양씨는 자동차를 모라 보은군 속리산 속에 잇는 명찰 법주사를 유람차로 나섯섯다 먼저 보은읍내에 이르러 관민의 환영을 밧고 군수 김재호씨의 안내를 밧아 속리산을 향하얏셧다 본시 보은읍에서 속리산 사히에는 “박석틔”라하는 큰 고개가 잇서서 도저히 자동차로는 넘어가지 못 할 곳이엇섯다 그러나 당대의 일도 댱관으로서 엇지 차에서 나려 흙을 발브랴하는 생각이 드럿든지 박중양씨는 긔어코 차에서 나리지를 안코 촌가에 가서 소를 꺼러다가 자동차를 꺽러넘기게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직히게 되얏섯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이 덜 풀닌 박지사는 김군수를 보고 명승디로 가는 길에 자동차 하나히 자유로 통행 하지 못하야서는 일도의 수치이라 하며 불일내로 공사를 시작하야 곳 자동차가 통행을 하게하라고 엄명을 하엿다 지사의 명령이라 일개 군수로서 억이는 수 업스닛가 김군수는 즉시 금월 초순부터 부역을 푸러 공사를 시작하얏는대 본시 이 고개는 비록 자동차는 통행치 못하나 인마는 임의로 통행되는 곳이며 그 고개는 다만 속리산 법주사 외에는 다시 통한 곳이 없는 중요치 안은 길이었다. 그러나 지사의 분부임으로 전군 만여호의 부역을 풀게 되는 때는 마츰 첫여름임으로 농가의 뎨일 밧분때이다. 일반인민들은 백성의 생명을 보장하는 농사를 못 짓게하고 이길을 닥글 지급한 필요가 어대잇는가하야 매우 울분히 역이든 중 덕욱히 가튼 군에서도 회남면, 회북면 가튼곳은 부역장까지 왕복이 근백여리나 되니 인민의 피해와 관란은 이르르길이 업섯다 과연 지난 십일일에 군청 토목기수 모 일본인은 원악 돌연히 시작한일임으로 예정이 스지 못하야서 인민에게 일정한 지뎜에 일을 식히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변덕을 피움으로 갓득이나 울분히 역이든 삼백여명 인민들은 마참내 그 기수에게 몰녀드러 란타를 하고 그 싸홈을 말니랴하든 순사 세사람까지 란타를 하야 중상을 당하게 하얏다 이 급보를 들은 충북 보은경찰서는 충청북도경찰부의 응원까지 청하야 전원 총출동으로 현장에 급행하야 임의 사십여 명을 검속하고 목하계속 거거중이니 사건의 전도는 매오 위험하다더라. ”   — 동아일보 1923일 6월 16일자[79] 바로 공사에 들어가 그해 7월 속리산으로 오르는 현대식 2차선 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길이 구불구불한데다가 산사태 등으로 계속 문제가 발생하였고, 개보수가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공사는 1931년에 끝났으나 여전히 자동차가 손쉽게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확장 공사 완공 후 시승을 하던 박중양이 처음 공사를 지시했을 때처럼 결국, 소를 자동차에 대어 끌고 올라갔고, 대부분 사람들도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80] 속리산 도로 포장공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가에서 소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자동차를 끌게 한 것과 농번기인데도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한 일로 폭동이 터질 위기에까지 직면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충주에 국도를 건설하기 위해 농민들을 징발하여 도로를 닦았다. 그런데 농번기에 농민들을 징집하고 임금을 주지 않자, 충주의 지역 유지 예남 홍승대(蘂南 洪承大)는 박중양을 상대로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 소송을 제기, 승소판결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속리산 성추문 사건과 퇴직[편집] 속리산 여승 변사 사건 보도 1924년 11월초에는 속리산 속리사에서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감방주사, 각 부장과 신문기자 등을 대동하고 속리산에서 주연을 개최했는데, 총독 내외와 수행원들이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여승 양순재(梁順在, 20세)를 데려가 성관계를 하였다. 그러나 양순재 여승은 그 날로부터 실종되었다가 어느 구석 승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물의를 빚었다.[81] 그러나 아무도 이 일을 언급하지 못했고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5년 3월 동아일보 등 소수 언론만이 이 내용을 그대로 폭로했고, 이는 곧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다. 여승 변사사건이 문제가 되면서 3월 31일 도지사직에서 인책 사퇴한다. “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사이에는 제2금강이라고도 일컬을만치 물맑고 산맑은 속리산이 있는데 그 중에는 승방으로 이름높은 속리사로부터 이래 5백년 동안에 여러 명사의 발가죽을 멈추게 되어 깨끗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속리사는 총독부 관리 충북도지사 박중양이가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된 이후로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나는 동시에 여러가지 아름답지 못한 풍설이 세상에 왁자하게 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기는 작년 11월 26일 사이토 총독 부처가 박지사의 안내로 송기 감방주사와 서강, 산본 등 각 부장, 기타 몇 사람의 신문기자와 함께 일행 열여섯 명이 보은읍을 지나 오후 다섯시 삼십분경 속리사에 도착하여가지고 그날밤 마침 달밝음을 기회로 하여 큰 법당을 치워놓고 주연을 여는 동시에 2백여 명의 여승 중에서 가장 젊고 여어쁜 여승 여섯 사람을 뽑아서 잔질을 시키어가면서 밤이 새는 줄을 모르고 질탕하게 노는 중 총독 부처는 얼마 후 침실로 돌아가고 그 후 거듭 박지사는 자리를 고치여 다시 주연을 펴기 시작하여가지고 여러 수행원 신문 기자들과 함께 끊일 사이 없이 술잔을 바꾸고 있던 중 박지사는 취기가 점점 더하여감을 따라, 놀란 양과도 같이 아무 소리 없이 한 구석에 꿇어앉아 있는 여승 양순재(20)의 고운 얼굴에 자주 날카로운 추파를 보내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옆으로 같이 끌어다가 앉히고 부드러운 손목을 힘있게 움켜잡고 앉았다가 새벽 네시경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은 모두 피곤과 취기를 못이겨 모로가로 쓰러져버린 틈을 타서 박지사는 양순재의 손목을 잡은 채로 일어서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이십칠일 아침에 시치미를 떼고 일행과 함께 속리사를 나와버리고 말았다.양순재는 그때 박지사에게 끌려 나간 후로 도무지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하여 일행이 떠나는 그 때에도 많은 여승 중에 그 얼굴을 얻어볼 수가 없었으며 그 후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히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마침 내닷새 쯤 되던 날 아늑한 승방 한구석에서 시체가 되어가지고 나타나게 되었다. 젊은 여승의 죽음!! 그때 박지사의 그 일 그로부터 여러가지 풍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는데 자태의 어여쁨이 원수가 되어가지고 몸을 더럽히고 최후사지를 밟기에 이른 양순재의 생애! 어제까지 맑고도 그 맑은 부처의 여자로 멀고도 고생된 앞길을 걸어가려다가 한번 발을 그릇 옮기어 놓은 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 끝에 그와같은 길을 밟고야 말게 되었다. 여승과의 관계로 문제중에 들어있는 박지사는 재작일밤 총독과 함께 입성하여 작일 아침 열시차로 돌아갔다는데 가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풍설이 세상에 왁자하게 된 이상 어쨌던 한 도의 장관으로서 책임상 그 직에 그대로 있는것도 어렵고 겸하여 그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음으로 총독부의 처치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사임하기로 결심한 모양이라는데 이에 대하여 대총 내무국장은 아래와 같이 말하더라. "임의 그와 같은 일이 신문지상에까지 발표된 이상 직무상 어디까지 조사는 하여볼 작정이나 그 개인관계로 보아서는 누년의 교제도 있고 친밀한 사이일 뿐만 아니라 조선총치상 적지 않은 공로가 있음으로 너무 그것을 힐책하여 앞길을 그릇틔어주고는 싶지 아니합니다. 어쨌든 자기로서도 그 직을 사임하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고 할 것이올시다" ”   — 동아일보 1925년 03월 06일자 당시 충북지사였던 박중양이 속리산으로 순시를 나와 법주사에서 주연(酒筵)을 열고 한 비구니에게 추문을 걸어 결국, 비구니가 자살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는 기사이다.[82] 이는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법당에서 여승과 성추문을 벌인 것과, 여승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고 조선총독부 내무국장과 경무국장은 이를 수습하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곧 시말서를 제출한 뒤, 1925년 3월 31일 도지사직을 사퇴한 뒤 휴직계를 내고 문관분한령 제11조 제1항 제4호에 따라 휴직했다. 1927년 2월 15일 그는 3월 1일부로 경성부부부윤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여승 변사사건이 계속 문제가 되자 1927년 2월 18일 사퇴의사를 밝히고 사직서를 제출,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밀주 단속 무마와 고미술품 수집[편집] 박중양의 호신 불상(그의 선조 대대로 전해오던 것이었다 한다.) 1927년 1월 남선여행객의 방문을 받은 박중양 1925년 5월 불교계의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불교단 대구지부 고문과 독립사상과 사회주의 배척을 기치로 발족한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의 경상북도 지부 상담역을 밭았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박중양은 순종의 죽음을 사실상 조선이 영원히 멸망한 것으로 보았다. 1927년 2월 중추원 칙임참의([83]中樞院勅任參議)로 임명된 뒤 1941년 5월까지 네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25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속리산 여승 변사 문제로 지탄받았지만 조선총독부로부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던 인물이지만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고, 일본인들까지도 그를 함부로 괄시하지 못하였다.[84] 1927년 11월 9일 대구상공협회의 조직에 참여하고, 대구상공협회 고문이 되었다.[85] 한편 그는 가정에서 밀주를 만들다가 적발된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또한 담배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세금 면제를 적극 도와주기도 했다. 그가 애주가, 애연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치하에서도 밀주는 엄벌에 처할 정도로 단속이 심하였다. 그러나 단속 때면 사람들은 박작대기 집에 밀주 항아리를 갖다주곤 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84] 술을 좋아했던 그에게 밀주를 갖다주면 그는 밀주 단속이 나온 순사들을 붙잡고 시간을 끌어주었다. 골동품과 고미술품을 감정할 줄 알았던 그는 고미술품의 해외 반출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사들이기도 했다. 이는 6.25 전쟁 와중에도 박중양이 각별하게 숨기고 아껴서 1950년대 고서 감정가 석진수가 방문할 때까지도 대부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후일 그가 수집한 고미술품은 아들에 의해 석진수 등에게 판매되었다. 석진수는 '이런 물건을 보려고 꿈에 용을 봤구나 하는 생각에 서화, 고서, 나전칠기 등 수집점을 값을 깎지도 않고 일괄해서 구입했다. 화폐개혁 전 값으로만 쳐서 수백만원이었다.[84]'고 한다. 1927년 겨울에는 약초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와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순례하기도 하였으며, 경성부의 고미술품상을 찾아가 서화를 구입하였다. 복직과 일제 시대 중반[편집] 1928년 다시 황해도지사가 되었으며, 다시 황해도지사가 되자 황해도 해주에 폐병과 내과, 결핵을 치료하는 전문병원 유치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 1928년 10월 27일 해주의 감리교 폐병요양원이 설립되자 황해도지사로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했다.[86] 개원식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이던 오긍선(吳兢善)과 황해도지사 박중양, 그리고 황해도 경찰부장 겸 위생과장 사카키의 축사가 있었다.[86] 바로 그 날 세브란스병원에서는 항결핵학회가 조직되고 있었다.[86] 세브란스 병원에서 항결핵학회가 조직되자 10월 28일 박중양은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하여 항결핵학회의 목적과 연구 내용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해 11월 쇼와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 11월 8일부터 11월 13일, 14일, 21일에는 조선민보사에서 개최한 임업정책 토론회에 참석, 조선의 임정(林政)을 강연하였다. 1929년 1월 다시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고,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朝鮮博覽會評議員)에 선임되었다. 그해 대구남문 철거작업 기공식에 참석하였다. 박중양은 늘 조선인들에게는 "대소관원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질서의식, 시민윤리 등 공공정신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요령과 패거리 문화, 속임수가 횡행하는 금일의 수준으로는 독립은 커녕 인간답게 사는 것도 힘든 일이라며 한탄했다. 그는 여러 차례 총독부에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거둘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일본인에게만 우대혜택을 주고 조선인들은 차별하느냐"며, "조선 백성이 일본의 신민이 되기를 바란다면 조선인에게도 내지인과 같은 기회를 부여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총독부가 "조선인들을 차별대우, 무시하는 정책을 계속한다면 조선인들은 자연스럽게 독립 운동에 동참할 것"이라 하였다. 그밖에 그는 황민생활사의 장로(고문)직을 역임하였다.[87] 조선인 참정권 운동[편집] 1920년대 초부터 그는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을 허용해 줄 것과 자치권을 허용해 줄 것을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에서는 그를 면종복배하는 인물로 보고 경계하였다. 1925년 경성일보 사장인 소에지마 미쓰마사(副島道正)는 "경성일보"를 빌려 '조선의 자치론'을 제기했다.[88] 이에 박중양은 현명한 결단이라며 환영하였다. 소에지마 미쓰마사는 조선인 2천만 명을 대표해서 100명의 식민지 출신 의회 의원을 일본의회에 보낸다면 의회가 민족적 색체를 띠게 될 것이므로 참정권은 반대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조선에 식민지 의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88] 즉 그는 "자포자기 상태인 조선인에게 건전한 희망과 내실 있는 사상을 주며, 합리적인 수단으로 그 민족주의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88] 도지사를 지낸 박중양은 사이토에게 편지를 보내, 대의사(代議士 : 일본 중의원 의원[89])를 몇 명 만이라도 보내도 좋으나 조선의회를 설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밀었다.[90] 그는 조선인도 일본의 국민이라며, 이규완, 민원식, 김명준 등이 요구한 조선인 참정권 허용이 정당하다고 총독부와 일본인 지식인들을 상대로 설득하였다. 도지사 퇴직 이후[편집] 1928년 12월 도지사직을 퇴직한 이후 그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어 수당을 받았지만 그는 선조의 묘소가 있던 대구부 동중면 침산동의 오봉산을 매입한 뒤, 대구 침산동 침산 주변의 토지와 경기도 양주군의 땅을 매입하였으며, 토지 매입 후 남은 수당들은 자선단체에 기부하였다. 그는 중추원 참의 수당에 의존하지 않고 대구 침산에서 직접 과수원과 옥수수, 감자 농사를 지었다. 양주의 땅 외에 대구 근교의 땅은 직접 다니면서 부인과 일본인 첩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었다. 1930년 2월 22일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칙임참의에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일본인 여자를 후취로 들였는데, 삼천리지 1940년 제12권 3호(1940년 3월호)에 내지인 여자를 취처한 고등관급 이상 명단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32년 1월에는 그를 후원하자는 뜻에서 특별히 침산친목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91] 1932년 2월에는 침산계를 조직하여 친목단체로 활용하였다.[92] 박중양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북구 침산동 산16-1 임야 등 37필지 총 8만 2,082m₂(총 2만 4,829.805평)은 2007년 8월 13일부로 국가 귀속결정 처분을 받고 강제 압수되었다.[93] 압수될 당시 토지들의 평가액은 21억 8565만 3천원 정도였다.[93] 일제 시대 후반[편집] 중추원 활동[편집] 박중양의 친필 휘호 박중양, 1932년 3월 1931년 9월 조선총독부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1933년 6월 13일 다시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칙임참의에 임명되고, 1933년 7월 중추원의 시정연구회 제도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8월 3일 정오 12시부터 안동군 봉옥읍(蜂屋邑)의 수해현장을 위문하였다. 군수와 경찰서장에게서 수해현황을 청취한 뒤 봉옥읍의 수해현장을 위문하였다.[94] 수해현장 위문 후 안동시민의 사활문제인 낙동강제방을 긴급히 완축하여 1일이라도 급속히 일반백성의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위정자의 제1최대급선무라고 소감을 밝히다.[94] 1934년 11월 시중회(時中會) 평의원을 맡았다. 시중회는 1934년 8월 '내선일체를 근간으로 신생활을 통해 신흥조선을 건설'한다는 취지하에 최린 등 천도교 신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자치운동단체다. 이듬 해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95][96]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에 면직된 일이 있었지만 조선총독부는 그의 재능을 각별히 신뢰하였다.《조선공로자명감》에서 "이토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 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는 박중양이다."라는 평가를 받았고[97],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술을 좋아하였지만 일체의 뇌물을 받지 않은 탓에 조선총독부는 그를 각별히 신뢰하였다. 日·中전쟁 전후[편집] 1936년 중추원 고문이 되고, 1936년 5월 결핵예방협회 경상북도지부에 가입, 평의원이 되었다. 1937년 7월 日·中전쟁이 발발하자, 박중양은 1938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日·中전쟁을 두고 일본의 중국 진출이 가능 여부가 시중의 화제가 되자 그는 몽골이라고 중국을 지배하고 백년을 다스렸고, 여진족이라고 중국을 지배하고 금나라가 백년, 청나라가 3백년을 다스렸거늘 일본이라고 대륙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고 하여 좌중을 압도하였다. 1938년 8월 칙령 관제로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가 재개편되었다. 박중양은 1938년 8월 27일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위원[98]으로 재위촉되었다. 이 때는 김연수, 박흥식, 윤덕영, 최린, 현준호, 한상룡 11명의 위원이 조선인이었는데 박중양은 그 중 한명이었다. 그해 9월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가 총독의 자문사항 18항목의 심의, 자문 목적으로 3개 분과로 나뉘자, 박중양은 문화, 사회분야 와 일반사항을 다루는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제1분과 상임위원을 겸임하여 내선일체의 강화와 철저화, 조선, 만주, 북지(北支)간의 사회적 연계 촉진, 재중국 조선인의 보호, 지도, 반도 민중의 체위 향상과 생활 쇄신, 농·산·어촌 진흥운동의 확충·강화, 사회시설의 확충, 노무의 조정 및 실업의 방지·구제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12월 19일 경상북도 체위개선위원회 고문이 되고, 그해 12월 19일 경상북도 체위개선위원회 산하 달성군 체위개선지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5월 미나미 지로 총독이 창씨개명을 계획하자 시중의 반발을 우려하여 시간을 두고 서서히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다. 6월 4일 다시 중추원 참의에 재임명되었다. 8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가정내 분쟁사건을 비밀리, 원만히 해결할 목적으로 인사조정령을 공포하고,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을 위촉할 때 장직상 등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으로 위촉되었다.[99] 1940년 2월 11일 일본 기원절 행사를 도쿄와 경성(현 서울)에서 개최할 때 조선인 유지의 한사람으로 초청되었다.[100] 이는 2002년 3월 10일 MBC-TV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은 일본에서 일본의 건국 2600년 기념행사 초청인사 명단을 수록한‘광영록’이라는 책자를 최초로 입수하여 밝혀냈으며[101], 박중양 외에도 당시 보성전문학교교장 김성수,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김활란,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등 조선인 초청대상자 300명의 명단이 실려있었다.[101] 태평양 전쟁 초반[편집] 태평양 전쟁 1945년 6월 17일자 매일신보. 창씨개명, 태평양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0년 초 그는 조선총독부에 조선인의 참정권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고, 조선총독부는 그의 건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940년 5월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해 8월 31일 박충(朴忠, 호추)으로 창씨개명하였다. 이어 호추 시게요(朴忠重陽[102])라 이름하였다. 그는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한다. “ 언젠가 무슨 회의든가에 보니 총독, 총감도 다 열석한 석상인데 박중양이 당당합데다. 예전 도지사 당시에도 내무부장, 경찰부장이 쩔쩔 매였다는 소문이 있느니만치 철저하게 이야기 하더군요. 말에 질서 있고 사리를 잘 분변하는 말이고, 만좌가 경청하더군요. ”   — "총독부 기자 좌담회", 《삼천리》 제12권 제3호 (1940년 03월 01일자) 1940년 당시 총독부 출입기자 좌담회에서 매일신보 기자 김인이(金麟伊)는 그가 총독과 정무총감이 열석했는데도 당당했으며 말을 조리있게 잘 했고, 착석한 이들이 그의 말은 경청했더라고 하였다.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이 되었다. 1941년 1월 8일자 경성일보에 "이론이 훌륭해도 실행이 없으면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지금의 "시국은 백 가지 이론보다 하나의 실행을 요구"한다는 신년 소감을 밝혔다. 1941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내정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일본 귀족원에는 이미 1932년 12월 박영효가 칙임된 예가 있었고, 1941년에 윤덕영(尹德榮)과 박중양이[103] 내정되었지만, 박중양은 귀족원 의원직을 사양했다. 그 해 5월 12일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943년 10월까지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41년 5월 17일 오전 10시부터 개최된 영일군 포항읍 두호리에서 열린 경상북도 수산시험장(慶尙北道水産試驗場) 신축 낙성식에 참여하였다.[104] 9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해, 중추원 부여신궁공사 근로봉사 노역에 참여하였다. 전시 체제기 활동[편집] 박중양, 1930년대 후반 무렵 조선임전보국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105]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가 조직되자 경북지부 위원이 되었다. 그날 결성된 임전보국단 대구지부 고문으로도 선임되었다. 1942년 11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3년 4월 천황의 만세무궁을 기원하기 위해 조선신궁에서 열린 천장절제(天長節際)에 참석했다. 같은 해 9월 전시 최대 관변 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여(參與)를 맡았다. 또한 싱가포르까지 가서 일본군을 위문하는 조선인 위문단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때의 여비는 충청남도 공주의 김갑순(金甲淳)이 여비 일체를 부담하였다. 1943년 1월에는 국민정신총력연맹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했고, 그해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직접 싱가포르를 다녀왔다. 1943년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순회하였다.[3] 1943년 10월 20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피선되었다. 11월에는 《매일신보》 등의 언론 매체에 임시특별지원병제도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기고하여 조선총독부의 징병제를 지지하고 적극 협력할 것을 선전하였다. 1943년 11월 학병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중추원에서 격려대를 구성할 때, 중추원 격려대원으로서 박두영(朴斗榮) 등과 함께 경상남도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1943년 8월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부모의 묘를 대구 오봉산으로 이장하였다. 이 합장묘는 박중양이 1943년 8월 경기도 양주의 선영에서 대구 침산으로 이장해 온 것으로 90년대 중반 북구청에서 오봉산 등산로를 만들 때 개장을 권유했으나 후손들이 거부, 옆으로 등산로가 나기도 했다.[106] 이 묘는 침산공원내 오봉산 산 16의 28[106], 오봉산 다섯 봉우리 중 1봉과 2봉 사이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왼쪽편 100m 정도 지점에 있었다.[106] 1943년 10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1945년 8월 광복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3500~4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그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을 듣고, 당연한 결과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같은 해 11월 학병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중추원 격려대원으로 경상남도에 파견되어 홍보 등의 활동을 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이를 일축했다. 동시에 조선이 독립하더라도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며 냉소적으로 보기도 했다. 1944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다.[10] 1944년 훈1등의 서훈(敍勳)을 수여받았으며 다시 중추원 부의장에 재선출되었다. 1944년 6월 국민총력조선연맹 고문으로 추대됐다. 같은 해 8월 박흥식 등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朝鮮飛行機工業株式會) 설립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대주주의 한 사람이 되었다.[107][108] 그러나 그는 대주주 중에서는 소액이었는데 박흥식의 1949년 2월 23일의 반민특위 재판 당시 박흥식의 진술에 의하면 김연수, 방규환, 박춘금 3인은 각각 1만 주씩 소지하였고, 백낙승은 5천 주를 소지하였고, 장직상은 4천 주를 소지하였고, 민규식, 김정호, 방의석, 한상룡은 각각 3천 주를 소지하였고, 박중양은 1천 주를 소지하였다 한다. 참정권 허용 감사사절 파견과 귀국[편집] 귀족원 (일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5년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1945년 4월 3일 박중양은 일본 정부가 귀족원령을 개정하여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7명을 조선인으로 칙선할 때, 박중양은 조선인 몫의 귀족원 의원의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귀족원의 칙선의원 7명은 1945년 4월 3일에 선임되었는데 김명준(金明濬), 박상준(朴相駿), 박중양, 송종헌(宋鍾憲), 윤치호(尹致昊), 이진용(李珍鎔), 한상룡(韓相龍) 등이었다.[109] 한편 조선인 몫의 하원격인 중의원 의원 23명은 의회가 만기되면 선거에 의해서 선출될 예정이었다.[109] 조선인 참정권이 시행되자 그는 환영의사를 표명하였다. 1945년 4월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110] 이어 박중양은 윤치호를 수행하여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서울을 출발, 일본으로 갔으며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110]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은 일본 황족, 화족 의원과 천황이 직접 선임하는 칙선 및 일정액 이상 국세 납부자로 구성되었다. 조선인 출신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은 1945년 4월 이전에 선임된 3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에 그칠 정도로 특별한 예우를 받는 존재였다.[111] 그러나 곧 이탈리아 왕국의 두체(Duce, 최고통치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과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는 당연한 결과로 봤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연이은 몰락을 보면서 일본 제국 역시 머지않아 몰락할 것이라고 내다보게 되었다. 1945년 6월 국민의용대 결성식에 참석한 뒤 7월 국민의용대 고문을 맡았다. 6월 17일 귀족원 회의에 참석차 도쿄를 다녀왔다. 그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추진을 무리수라고 봤고, 군국주의 정치인들의 오판이라 지적했다. 1953년의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오판하여 천황을 잘못 보필했다는 내용의 일기 사본을 편지로 보냈다. 이는 1997년 대구 출신 사학자 강태원이 일본 체류 중 입수하였다. 8월 10일 집안의 하인과 일꾼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어 내보냈다. 1945년 8월 14일 니시히로 다다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초대로 총독부를 방문,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패전 직후 조선반도의 치안 수습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8월 15일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경성부의 집과 재산을 처분하고, 남은 재산은 가방에 싸서 경성부 근처 보육원과 양로원에 각각 무기명으로 전달한 뒤 대구 침산동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독립 이후[편집] 독립 직후[편집] 독립이 되자 그는 시중의 성토를 당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56]"라고 항변하였다. 일본의 항복을 예감했던 그는 시중의 비난에 무덤덤하게 대응했다. 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시대 변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하였고, 또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말보다 일제시기가 훨씬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였고, 이완용에 대해서도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시중에서는 그에게 비난과 투석, 멱살잡이를 가했지만 그는 의연히 대응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심 불쾌하게 여겨, 대구 부윤 허억(許億)에게 보낸 편지들 중, 한통에서는 시중의 평가가 가소롭고 불쾌하다는 뜻을 드러냈다. 1945년 8월 독립 직후의 이념대립을 보고 그는 "조선이 과연 독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냐"며 조롱하였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고 9월 23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면서 중추원 부의장직에서 파면되었다.[112]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잘나서 독립이 된것이 아니라 미군이 일본을 쳐서 우연히 독립된 것이며, 미국과 일본이 전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독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을 향해 조롱하였다. 이후 그를 영입하려는 제의가 좌, 우 양쪽 진영에서 있었으나 자신은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모두 거절하였다. 독립 직후 시중에는 그를 지탄하거나 멱살을 잡거나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란 나같은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을 처단하면 된다.'라고 외쳤다.[57] 또한 '나도 표리부동한 위선자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니 시원하게 죽여라'하고 항변하였다. 친일파 청산론에 대한 비판[편집]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고 12월 18일 아서 러치(Archer L. Lerch)가 미군정청 군정장관으로 부임하였다. 1945년 12월 20일 박중양은 이들을 찾아 면담을 요청한 뒤 따졌다. “ 좁은 조선이 남북으로 갈려 있고 특히 이런 과도기에, 숨은 인재를 찾기도 어려운데, 왜 있는 인재를 없애려 하느냐? 그러니 친일파를 처단한다고 떠들기보다 그 사람들을 잘 이용해 주시오. 그 사람들을 두고 누구를 데리고 일을 하겠소. ... 나같은 것은 친일파의 대표자이니 연령으로 봐도 그렇고 행적으로 봐도 그러니 어떠한 처단을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감수하겠다.[57] ” 후일 이를 듣고 찾아온 기자에게 그는 '친일파를 죽이라는 소리가 하도 높으니까, 그래서 내가 군정청의 하지와 러취, 또 이승만(李承晩)을 보고 말한 것이 있다.[57]'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일부 정객들이 "독립운동자연, 자칭 애국자연 하면서 허장성세를 부린다며 독립은 우연한 기회에 주어진 것이며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중에서는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고 그는 비난을 무시하고 오봉산 근처로 낙향하였다. 또한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아버지 박정호 내외의 묘를 선조 묘소가 있던 오봉산 능선으로 이장했다.[113] 이후 대구시 침산동 침산초등학교 뒤편 야산의 침산장에서 은거하였다. 1948년초 남북협상론과 단독 정부 수립론이 나오자 "북위 38도 이남 지역이라도 단독 정부를 우선 수립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6]"고 하였다. 그러나 건국 후,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6]'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미국의 공, 미국의 노력에 의해서라고 혹평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반민특위 기소와 석방[편집] 반민특위 제소와 재판[편집]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출두차 서울역에서 내리는 모습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공판 모습.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해방 이후, 그는 대한민국 건국 후까지 생존해 있어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수사관에 의해 체포된다.[114] 이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월 말 박중양 외에도 여러 지방 거주 거물급 인사들이 체포되었다.[114] 49년 반민특위 특경대원들이 반민족 부일행위의 죄목으로 박중양을 연행하러 갔을때 박중양은 그때까지도 히로히토 천황의 사진을 안방에 모셔놓고 있었다고 한다.[3] 당시 그는 최고위직을 지낸 고령자의 한 사람이었다. 체포되자 그는 '나는 구치소에서 죽을 것이며 죽어서 내가 결백했음을 밝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사적으로 축재한 적이 없음은 하늘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를 태운 자동차가 특위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6척 거구의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모습이었다. 그는 특위의 정문을 보더니 "아, 고꼬가무까시노 다이이치긴꼬다네. 소! 소!(아, 이곳이 옛날의 제일은행이구나. 그래! 그래!)". 그는 말이고 행동이고 완전히 일본인 그 자체였다. 일본식 생활문화가 몸에 밴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백작 영감, 이마모 무까시가 나쓰가신데스까?”(지금도 옛날이 그립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우물쭈물거리다 2층 검찰부로 올라갔다.[10] 1948년 10월, 반민특위 투서함. 반민특위에 체포된 일제 시대 당시의 정객과 기업인들 중에는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이에 박중양은 '그만큼 영화를 누렸으면 됐지 뭐가 무서워서 떠느냐'며 일갈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해 '시대 변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하였고, 또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말보다 일제시기가 훨씬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였고, 이완용에 대해서도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 하였다. 수감과 심문 중 그는 초연한 자세로 심문에 응하였다. 반민특위의 조사관들은 그가 반성을 모른다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반성해야 될 이유가 없다며 응수했다. 반민특위가 압수한 자료들 중에는 1900년대 초부터 쓴 20권이 넘는 일기장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10]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당시 그는 당당하게 '전 국민이 친일활동을 할수밖에 없지 않았느냐?'라며 강변하기도 했다. 수감 생활[편집] 박중양 초상화 서대문형무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9년 1월초 박중양은 불구속 상태에서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었다.[115] 이어 정식 체포절차를 거쳐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9년 1월 그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재판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그는 반민족성을 지적하는 반민특위 판사들에게 호통을 쳐서 위압을 가했다. 그는 자신이 반민법에 의해 잡힌 것은 "시대 변혁의 희생이라, 역사는 윤환(輪環)하고 인사는 변천한다. 고금왕래(古今往來)로 크게 본다면 일소(一笑)에 불과한 희비극(喜悲劇)이다"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는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에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改新)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라고까지 했으며,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 하였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도중 그는 비단 이불 또는 참새 털로 된 이불을 덮고 자서 다른 수감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월 29일 대구에서 상경한 일본인 첩은 매일같이 수사관들에게 와서 이불을 차입시켜달라고 아우성쳤다.[116] 이불 속에 흉한 것이 들어있으리라고 의심한 반민특위 수사관들은 처음에 이불 반입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부인이 형무소 앞에서 간수들을 붙잡고 며칠을 울며 호소하는 읍소작전끝에 비단이불을 차입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117] 일본인 첩이 여러번 눈물로 호소한 끝에 비단 이불은 특별히 반입이 허용되었다. 1949년 2월 3일 박중양은 이승만 대통령, 김구에게 나는 반역자가 아니라는 편지 서한을 보내려다가 반민특위 조사관에게 적발되었다.[118] 재판과 가석방[편집] 공판 중 그는 '국민의 신변과 안전,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그러한 정부에 왜 충성해야 하느냐?'며 항변하는 한편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파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아가 이완용은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라며, 이완용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희생된 역사의 희생자라고 강변하여 논란을 야기하였고, 방청석에서는 비난과 소란이 벌어졌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활하였으며, 며칠 후 재판을 받던 도중 폐렴이 발생해,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통원, 형무소와 서울대를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수감 중에도 일기를 쓰거나 자신은 반성할 것이 없다는 취지의 서한을 작성하다 교도관에게 발각되어 압수당했다. 박중양은 반민특위에 의해 구금되면서까지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신(改新)'을 주장했으며,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등 전혀 개전의 빛이 없었다.[71]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시간이 흐르자, 언론에서조차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탁월한 수완을 지녔던 희대의 걸물'로 박중양을 묘사하는 촌극이 벌어졌다.[71] 2월 9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 1949년 2월 14일 반민특위에 보석을 신청, 보석금을 내고 일시 석방되었다.[119] 그가 보석을 신청하자 다른 피의자들도 보석을 신청하여 특검과 반민특위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일본어 외에도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약간의 영어로도 대화할 수 있었다. 가출소 직후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5월 9일 다시 재기소되자 그는 다시 병보석을 신청했다. 1949년 6월 다시 반민특위에 소환되어 조사받았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해산되었을 때, 그는 별다른 처벌받지 않고 최종 병보석으로 풀려났다.[120] 그의 보석 신청은 여러차례 계속되어 받아들여졌고 그는 곧 풀려난다. 이후 그에게는 친일파라는 야유와 비아냥이 쏟아졌지만 그는 오히려 "일제 당시 살기 위해서 협력한 자들이 누구냐"며 항변하였다. 삼일절에 대한 조롱[편집] 만년의 박중양 한편 그는 3.1절을 기념하는 것을 위선적이라며 조롱하였다. '금일은 삼일절이다. 비 오는 가운데 식이 거행되어 시장, 도지사 등의 식사, 축사, 강연 등이 있었다. 참석자 중에 일정 시대에 관공서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큰 소리로) 호언한 것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시세 변천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활계희극의 광경이다.[121]'라며 비웃었다. 독립 직후부터 이완용의 묘소와 그 자녀들의 묘소에 가해지는 테러와 분묘훼손 행위를 보고도 '조선인의 민족성과 수준을 알수 있는 행위'들이라며 조롱하였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조롱했다. '해외에 망명했다가 한국이 독립된 후 귀국한 인사들 외에 3.1 운동 당시의 일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는 것이다. 또한 소수의 독립운동가들만의 노력으로 독립되었다는 시각은 허구이며 미국의 덕에 독립되었다며 반박하였다. 이어 '오늘날에 당하여 국가건설에 노력하는 것은 독립운동자이거나 아니거나 불문하고 차별은 없지만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자들이 3.1절 의식에서 떠들고 있는 것이 가소롭게 보인다.[121]'며 조소했다. 그는 일제 시대 후반 거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창씨 개명을 한 점도 지적, 일갈하였다. '일정 당시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 안한 자가 없다.[121]'는 것이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조선총독부에 부역하거나 협력, 협조하며 그 치하에서 살던 사람들이 독립 후 합심하여 일제에 저항한 애국자 행세를 하는 것'을 대놓고 조롱, 조소하였다. 3.1 절에 대한 조롱은 사회적인 분노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박중양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협박과 비난을 모두 위선이라며 외면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오봉산 은거와 정부 비판[편집] 박중양 재소환 보도, 대중일보 1949년 7월 30일자 2면 일소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석방 후 요양중이던 그는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122] 일기장이 반민특위에 의해 압수당한 후 그는 1946년부터 일기, 회고 비슷하게 써온 일부 글을 모아 술회라는 자서전으로 엮었다.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녔다 하여 주민들로부터 '박 작대기 영감'이라 불렸다. 또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던 오봉산 근처 땅을 사들여서 한때 오봉산을 박작대기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대구 오봉산 제일봉에 일소대(一笑臺)라는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 여생을 보냈다. 일소대는 후일 1996년 11월에 그의 후손들이 자진 철거하였다. 또한 바위에 일소대 라고 새겨둔 그의 친필 휘호는 파괴, 유실되었다.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1957년 1월에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이승만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 대구지검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에 의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았다.[123] 그는 신년사라는 책자를 발간, 경무대에까지 전달한 바 있었다.[124] 신년사에서 그는 이승만을 조롱했는데 뒤에 '행정수반인 이대통령을 모욕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124]'는 이유로 기소당했다. 9월 16일 검찰출두명령이 떨어졌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25] 그러나 그는 계속 이승만,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했고 결국 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중양 역시 피신하거나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텼다. 출판물 사건과 최후[편집] 해악 박중양 영정 1957년 1월 1일 그는 "미국인이 퇴거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봇짐을 싸느라고 분망할 것이다"라는 조롱섞인 신년소감을 경무대에 송부하였다.[126] “ ...(이하 중략)... 소련이 우세하고 미국인이 퇴거하게 되면 이승만 씨는 복짐 싸느라고 분망할 것이라. 위인걸사가 어디있으며 범용무위자가 수일까? 호언장어하는 자는 얼마나 잘하였으며 범용무위한척 하는 자는 얼마나 못하였을까?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장단은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하 중략)... ”   — 1957년 신년소감 중에서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함태영 등의 젊은 시절에 관해 비방,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기도 했었다.[127] 그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에 그는 '명예훼손이란 반대 세력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만든 괴상한 법'이라며 조소하였다. 또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력을 조롱하며 비꼬다가 경찰에 불려가기도 했으나 혐의없음 또는 고령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결국 1957년 10월 20일 박중양은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끌려가 심문, 한옥신 부장검사는 그가 고령인 관계로 정신이상이 온것이 아닌가 보고 소정신병원장에게 보내 그의 정신감정을 의뢰하였다.[128] 1957년 12월 4일 부장검사 한옥신은 대구정신병원에서 보내온 정신감정서를 접수하고 12월 5일자로 기소유예 판정을 내렸다.[129] 그러나 다시 그는 대구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감정을 받았다. 12월 8일 대구시내 소주영(蘇柱永) 정신병원장은 "심신 모약으로 노쇠상태[126]"라 진단하였다. 이는 대통령 이승만에게까지 직접 보고되었다. 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구인하여 정신병원에 넣으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산을 타고 피신하였다. 1958년 3월 3일과 3월 4일 강제로 서울경찰에 구인되어 성신대학 부속 성모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원에서도 완강하게 버텼고 결국 풀려나왔다. 그는 만년에 폐렴, 기관지염 등의 질환으로 고생하였다. 저서로는 회고록인《술회 (述懷)》와 그가 평생 쓰던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그밖에 문집이 있었지만 친일파로 몰려 단죄되는 바람에 대부분 인멸, 유실되었다. 현재 박중양의 유저로는 《술회 (述懷)》,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박중양 선생 문서 (朴重陽先生文書)》 등이 전한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일기형식으로 쓴 회고록 〈술회〉에서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강변하며 자신의 행위를 굽히지 않았다. 대구 오봉산의 산장에서 은거하다가 1959년 4월 23일 경상북도 대구시 북구 침산1동 1652번지 원대부락 침산장 자택(현,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1동 1652)에서 폐질환과 과로 등으로 사망했다. 8월 23일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한때 그가 1955년경 또는 1958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사후[편집] 그가 경기도 양주군에서 이장해온 부모의 합장묘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산16-28에 소재하였음), 2004년 그의 종손자에 의해 화장되었다. 시신은 부모 내외의 합장묘와 선조들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대구 북구 침산동 산16번지 오봉산 제2봉에 묻혔고, 부인의 묘소와 합장으로 조성되었다. 사후 친일파의 거두나 수괴 쯤으로 비판받고, 독립 이후에도 반성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지식인들은 그를 지탄하였다. 그러나 대구 지역에서는 그가 지팡이로 일본인들을 혼낸 일, 도지사와 경찰서장까지도 함부로 다루지 못한 것, 일본인 순사들을 혼낸 일 등이 오래도록 회자화되었다. 1991년 대구 주간 매일신문에 언론인 김용진 옹 은 '김용진의 대구이야기' 를 투고 하면서, '조선의 고등학생을 잡아 넣은 일본 헌병 대장 을 혼내 어 준 이야기' . '지나가는 허름한 동족 젊은이들에게 직업을 소개 시켜 준 이야기'[130]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언론인 박용진은 동시에 일인에게 상권을 넘겨 주기 위해 성곽을 허문 것을 , '신작로를 내기 위함'이라는 것, 박중양의 일본 유학 경력 중에 습득한 것을 '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려 함'이라[130]고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그의 묘소는 2004년까지 대구 침산1동 오봉산 제2봉에 있다가 화장되었고, 그의 생전에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그의 부모 묘소가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이장, 합장되었으나 2004년 3월 30일 그의 종손자에 의해 화장되었다. 대구 북구청에 따르면 박중양의 종손(당시 71세, 서울 강남구 도곡동 거주)이 "서울에 거주하는 바람에 묘지를 돌볼 수 없어 화장하겠다"며 지난달 23일 개장을 신청, 침산공원내 오봉산 산 16의 28에 위치한 증조부모 합장묘를 지난달 30일 개장했다고 밝혔다.[106] 또한 3월 30일 같은 날, 합장묘 앞에 '아들 중양이 울면서 세웠다(子重陽泣建)'는 문구와 고(故)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연호인 소화(昭和)가 새겨진 비문도 철거되었다.[106] 또한 오봉산에 있던 그의 아들 박문웅 내외의 묘소와 박무웅 내외의 묘소, 일본인 첩의 묘소 역시 후손들에 의해 이장됐다. 오봉산 근처에 있다는 그의 다른 선조들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고, 2004년 대구 침산동에 있던 박중양 기념비가 철거되었다. 2007년 8월 13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박중양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려[131]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박중양이 남긴 36억 7110만원 정도의 토지 8만 2082m2를 국가에 환수한다고 발표했다. 그 토지는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소재 '침산공원' 일대이다.[132] 그해 8월 대구시 북구 침산동 산16-1에 있던 또다른 그의 토지에 대해서도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졌다. 8월 13일 박중양의 36억 7,110만원(8만 2천82m2) 유산이 대한민국 국고로 귀속조치되었다.[133]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대구 침산동 와우산에 본부인 이주열과 합장된 박중양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양주읍으로 이장되었다. 풍류 생활[편집] 술을 좋아하는 그는 풍류를 즐기기로도 유명하였다. 박중양은 평소 대구 군방각(群芳閣, 구 대구 종로호텔 자리)에 자주 출입하였다.[134] 군방각 외에도 그는 경성부에 있는 중국집과 양식집에 가끔씩 찾아가기도 했다. 대구읍성을 허물어뜨리는데 앞장 섰고 경상감사를 지낸 박중양은 군방각에서 주로 실세 일본인들을 만나 기생들과 풍류를 즐겼다. 박중양은 늘 인력거와 제비 모양의 양복 차림에 실크 모자와 지팡이[134] 차림이었고, 금빛 회중시계 줄이 조끼 주머니 밖으로 스며나와 길을 걸을 때마다 철렁거렸다.[134] 서민들한테는 그 모습은 위압적일 수 밖에 없었다.[134] 의외로 일본 경찰들은 대구 군방각에 대해서만은 빡빡하게 감시하지 않았다.[134] 그는 중국집과 일식집에도 종종 출입하는 미식가이기도 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1925년 이후 대구 각지에 흩어진 농토에 따로 하인이나 소작농을 두지 않고 과수원과 감자밭, 옥수수밭을 부인, 일본인 첩과 함께 직접 농사지었다. 시민들은 손수 농사짓는 검소한 그가 고급 술집, 고급 양식집 출입을 이상하게 여겨, 그가 고급 술집과 양식집에 가는 이유를 묻자, 그는 '조선과 같이 요령과 술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하지 못하는 놈, 해보지 못하는 놈이 바보가 된다'고 답하였다. 약력[편집] 1903년 : 관리서 주사 1904년 : 일·러 전쟁 때 고등통역관이 되어 전쟁에 참전하다. 1904년 : 농상공부 주사 1905년 : 진주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 1905년 : 일본 유학 1906년 : 대구판관 1906년 : 군부 주사 1906년 : 군부 군기창 기사 1906년 : 경상북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1907년 : 전라남도 관찰사(도지사에 해당) 1907년 : 평안북도 관찰사 1907년 - 1908년 : 평안남도 관찰사 1908년 - 1910년 :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 : 충청남도 도장관(도지사에 해당) 1915년 : 중추원 찬의 1916년 : 중추원 참의 1919년 : 3.1 만세 운동의 격화를 자제하기 위해 자제단을 조직하여 만세시위자 설득과 귀가 운동을 하다. 1920년 5월 : 중추원 참의직에서 사퇴하다. 1921년 : 황해도 지사 1923년 : 충청북도 지사 1923년 10월 : 간토 대지진에 조선인 관련성을 부정하고 일본인 내지인들에게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1927년 2월 18일 : 의원면직 1927년 :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1928년 : 황해도 지사 1929년 : 중추원 참의 1933년 :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1938년 :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1939년 :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1941년 : 중추원 고문 1941년 : 칙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941년 10월 :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943년 : 중추원 부의장 1945년 4월 : 칙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 1945년 9월 : 미군정 주둔 후 귀족원 의원, 중추원 부의장에서 파면 1949년 1월 : 반민특위 조사관에 의해 체포, 서울로 이송 1949년 :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반민특위 재판을 받았으나 직접 항거, 변론하다. 1949년 2월 : 폐렴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병보석이 허가되다. 저서[편집] 그의 저작과 일기는 대부분 압수되어 인멸, 소각되었다. 단 자서전 술회의 사본을 손자 중 1명이 소장하고 있다가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에 기증한 바 있다. 회고록, 《술회 (述懷)》 《박중양 일기 (朴重陽日記)》 《신년소감 (新年所感)》(1957년) 《박중양 선생 문서 (朴重陽先生文書)》 작품[편집] 친필 휘호 일소대 기념비 전각 흥천지무궁 (1932년 3월) 화랑[편집] 그의 친필 글씨와 그림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지인에게 보낸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한때 그의 육성녹음이 일본의 한 지인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후에 실전되었다. 자제단 조직 뉴스 기사 박중양 친필 휘호 (1924년 11월 30일)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1906년 10월) 신돌석 사망 사건 보고서 (1908년 11월 1일) 친필 휘호 흥천지무궁 (1932년 3월 1일) 논란과 의혹[편집] 출신 성분 논란[편집] 박중양의 선대는 불확실하다. 박중양 자신은 아버지가 양주군 주내면에서 머슴으로 살았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본관에 대해 1907년에 간행된 《대한제국관원이력서》 에서는 밀양박씨라 하였고,[135] 1913년에 발간된 《조선신사대동보 (朝鮮紳士大同譜)》 (조선신사대동보발행사무소편, 1913)에서는 반남박씨라고 밝혔다. 그의 가문은 아전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7]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6일자 2면 보도에 의하면 본시 양주군퇴리(本以楊州郡退吏)라고 하여 그의 선대가 양주군에서 아전노릇을 했다고 한다. 가계가 불확실한 탓에 보통 그의 가계는 선대에 중인 출신이었다가 몰락한 것으로 본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경기도 양주군에 와서 마름 노릇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였다. 아버지 박정호에게 내려진 가선대부 규장각제학 벼슬은 사후 박중양의 출세로 추증된 증직 벼슬이었다.[136] 박작대기와 백작댁[편집] 한때 그의 별명인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가 백작댁의 와전인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백작댁의 와전이 박짝댁이 되고 박작대기가 된 것이라는 설이다. 와전된 별칭은 '백짝때기[137]'라고도 불렸다 한다. 그러나 백작 작위는 그가 만년에 받은 것으로, 박작대기나 박짝대기라는 별명이 붙여진 뒤에 받은 것이다. 침산의 별명은 박작대기산이다. 일제시대 박중양이 대구 침산을 매수한 이래로 박중양이 매일 작대기를 짚고 다니는 것을 비아냥거려 박작대기산이라고 불렀다.[138] 한편 그의 묘소에 대해서 박짝대기 묘가 아니라 백작댁 묘라고 불렀다는 전승도 전한다. '박짝때기미가 아니라 백작댁 묘다, "백작댁묘" 일제 때 백작 벼슬을 한 박씨의 묘라서 박 백작댁 묘[137]'라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 논란[편집] 그는 오랫동안 이토 히로부미(伊藝博文)의 양아들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박중양은 양자설은 거짓말이라며 부인하고, 이토가 자신의 은사(恩師)라고 밝혔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139]' 또는 이토 히로부미를 의부(義父)로 삼았다[140]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호가호위하던 자[141]'였을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반민특위의 수사관들도 그를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알고 있었다.[10] 임관 얼마 뒤 이등박문을 만나게 되면서 친일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대담하게도 스스로 ‘이등’을 찾아가, “조선엔 희망이 없어 미국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도와 달라” 했더니, “당신 같은 기백 있는 조선청년은 처음이다”며 주선해준 자리가 대구군수 감투였다는 것이다.[127] 그가 “이등의 양자였다”는 소문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양자는 아니고 은사였지”함으로써, ‘이등’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간접으로 시인한 바 있었다.[127] 1949년 3월 1일 기자들과의 면담에서 건국공론사의 모 기자가 이등박문과의 관계를 물었다.[57] 건국공론사 모 기자가 그에게 "이등박문 하고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처음에는 나의 은사 라고 했다가, 기자들이 "항간에서는 양자관계라고들 하는데?"라고 파고 들자, 박중양은 "그건 거짓말이다."하고 얼버무렸다.[57]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 양자설에 대해 시중에서 확장된 소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그러고나서 그는 "그래 내가 이등공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니, 대관(大官)들이 온갖 뇌물을 가지고 아부를 해 왔지만[57] 나는 그것을 다 물리치고 내가 의도하던 개혁을 실시했을 따름이다.[142]"라고 했다. 땅 투기 의혹[편집] 대구읍성과 진주성 철거 시 그는 이때 철거한 성돌 일부를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받기도 했다. 진주성의 성첩을 일부 팔았다.[18] 1905년 진주에 있을 때 그는 진주성의 성곽을 일부 헐어서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벌기도 했다. '군수 노릇할 때는 성첩 헐어 매식하고, 관찰사가 된 뒤에는 객사까지 훼손하니 황상 폐하 남순(南巡) 시에 일기불현(日旗不縣)하였다고 수창학교 폐지코자 학무대신에게 보고하니 포악하고 돈 잘 먹기 박중양이 날개로다.[18]'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춘불춘(春不春)'이라는 노래가 전하는 박중양의 행각이다.[18] 박중양이 대구 성첩을 헐어내고 돌멩이를 일본인들에게 팔면서 대구의 부동산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통감부가 설치된 1904년 당시에 대구에 들어와 있던 일본상인들은 약 120명이었다.[143] 경부선 공사 현장이 부산에서 대구 쪽으로 뻗어 가면서 일본 상인들은 공사 현장을 따라 등짐을 짊어지고 내륙도시로 흘러들었다.[143] 일본인들은 달서문 밖에 판잣집을 띄엄 띄엄 짓고 살았다. 1906년 일본 이사청 부이사 오카모토(岡本)와 대구의 일본 거류민단 대표격인 카게야마(影山)는 박중양을 구워 삶았다. 박중양도 대구역을 어디에 지을지 알지 못했다. 철도역이 들어서면 역을 중심으로 도로를 새로 내야 하고 도로 변에는 반드시 신흥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땅값도 달라진다. 카게야마 등은 대구역 건설에 편승하여 성을 헐고 떼돈을 벌어보라고 충동질했다.[143] 대구읍성 성 안과 성 밖은 성 둘레 한 칸을 놓고 땅값이 4배나 차이가 난다. 성 밖 특히 일본상인들과 경부선 철도공사 인부로 온 일본 노동자들의 숙소 근처인 진동문 밖에다가 엄청난 땅을 사두고 성을 헐어낸다.[143] 그러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박중양은 혹했다. 카게야마의 제의대로 박중양은 성을 헐어 버리기로 결심한다.[144] 경부선 철도역이 남문 밖으로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돈 있는 사람들은 남문 밖 빈터를 사두기 시작했다. 정거장 바람은 남문 밖으로 휘몰아쳤으며 진동문 쪽의 땅값은 거꾸로 헐값으로 떨어졌다. 소문을 퍼뜨려 놓고 일본인들과 박중양은 비밀리에 동문 밖의 잡초밭을 마구 사들이면서 성곽을 헐어 버리는 비밀 작전에 들어간다.[144] 1906년 3월부터 성곽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성을 허무는 작업은 1908년까지 3년이나 계속되었다.[144] - 라고 주장하는데 일제 행정부가 박중양을 신임하는 이유가 스승이었던 이토의 이름을 팔아 사욕을 탐하지 않은 청빈함, 그리고 국가를 운영해야할 지도층으로서의 덕목을 지닌 자로 판단하고 있어서였기 때문에 이와같은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김옥균 시해사건이후 사실상 하등민족, 또는 2등민족으로 분류되는 마당에 이토의 제자, 양자소리 듣던 이가 사욕을 채웠다면 이토의 정치적 입지도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될 뿐더러, 총독부에서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도시의 확장 건설 및 상업인프라 구축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었던 자본력과 인사이트를 지닌 집단은 일본인들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쓸모 없어져버린 성을 없애버림으로 인해서 상공업의 발전과 토지의 밸류에이션이 리레이팅 되는 효과를 누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로 인해서 많은 일자리들이 창출되었을 것이고 당시 상당수 능력있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고용되었을 것이다. 싱가포르 나 동남아 화교들도 구미 열강 백인들에게 고용된 회계집단이 주축이되어서 경제건설, 또는 부의 축적을 이룩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가 추진했던 건설사업 중에 파생된 여러가지 잡음은 500년 묵은 썩어버린 구 이념과 신 이념이 충돌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일로 보아야 한다. 일본인 거류민단에서는 성이 뚧린 동문 밖으로 도로를 놓아 달라고 박중양에게 5000원을 희사했으며 성을 헌 돌과 흙은 일본인 거류지역의 유곽 시설이나 건설 예정지를 메우고 집을 짓는데 쓰였다.[144] 일부는 선교사들에게 공짜로 나눠주기도 했다. 비만 오면 물이 괴던 대구읍성 동부의 저지대에 자리잡았던 일본인 거류지역은 일등 대지가 되었다. 성 안은 평당 23원, 성 밖은 평당 6원씩 부르던 대지값은 같아졌다. 성내의 땅값은 떨어지고 철도 정거장이 들어 온 동문 밖 대지는 최고 60원까지 뛰었다. 박중양이 사들인 땅값은 순식간에 10배나 뛰어올랐다.[144] 이를 두고 박중양의 일화는 그가 시대를 앞선 땅 투기꾼이었음을 보여준다[18]는 평도 있다. 친일파론에 대한 반론[편집] 박중양은 일반적인 친일파와는 다르다는 견해가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다[84]'는 시각도 있다. 또한 조지훈은 "그를 변절자로 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지훈은 '박중양 등은 변절자가 아니며 반역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수필 지조론에서도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되기는 하였지만[145] 변절자는 아니다[146]"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 조지훈은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146]'고 하였다. 발언 파문[편집] 고령임에도 일본 여자인 48세의 제2부인과 은거해 살던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의 젊은 시절에 관해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야만 했다.[127] 또한 그는 평소 이승만은 '미국과 주한미군만 퇴거하면 즉시 보따리를 싸서 도망칠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다녀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침산 토지에 대한 의혹[편집] 그가 은거하던 침산이 그가 매입한 것이 아니라 대구읍성을 철거한 대가로 받은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의 후반생 은거지가 되었던 대구시 침산동의 침산(砧山·일명 박짝때기산·현 침산공원) 한 덩어리 전체도, 이때의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인들이 주선해 준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었다. [147] 박작대기 혹은 박짝대기[편집]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녀 박작대기 또는 박짝대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148] 벼슬이 높아진 박중양도 중년 이후 이 개화장을 애용하며 뽐내고 다녀, 사람들이 비꼬는 뜻에서 가져다 붙인 별명이 ‘박짝때기’였다. 뒤따르는 하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朴’이란 큰 글자가 쓰인 전용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관가를 누비던 박짝때기였다.[127] 박중양은 단장을 항상 휴대하고 다녔기 때문에 항간에서는 '박 작대기'로 통했다.[149] 그는 개화장(開化杖)이라고 부르는 작대기를 짚고 다녔다.[148]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관료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작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었고, 칙임관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으므로 관료들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한다. 1940년 당시 총독부 출입기자 좌담회에서 매일신보 기자 김인이(金麟伊)는 그가 총독과 정무총감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기술하였다. “ 언젠가 무슨 회의든가에 보니 총독, 총감도 다 열석한 석상인데 박중양이 당당합데다. 예전 도지사 당시에도 내무부장, 경찰부장이 쩔쩔 매였다는 소문이 있느니만치 철저하게 이야기 하더군요. 말에 질서 있고 사리를 잘 분변하는 말이고, 만좌가 경청하더군요. ”   — "총독부 기자 좌담회", 《삼천리》 제12권 제3호 (1940년 03월 01일자)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했나 하면,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 특출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127] 일본인 순사를 잡아다 집안 사설감옥에 가두던 그를 두고 '일본인을 혼낸 통쾌한 조선인 이야기'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148], 이는 이후에도 널리 회자화되었다. 각 도지사와 시장, 지방법원장 등이 부임하면 부임인사를 다녔고, 매년 그의 집으로 세배를 갔다. 사상과 신념[편집] 그는 '평양으로 천도'하는 것과 '조선에 의회 제도를 도입하며 신생독립국들과 협력하는 중립국[12]'을 장차 조선의 이상적인 모델로 내다봤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추원은 형식적인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韓日倂合 이전까지도 의회 설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양의, 의학교 설립론[편집] 일·러전쟁에서 군의관이 부상장병을 신속하게 응급처치하는 것을 목격한 박중양은 1906년(광무 9년) 1월 조정에 지역에도 신식 병원을 설립할 것과,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묵살당했다. 신식 병원과 의사 양성기관의 설립 상소가 묵살당하자 그는 실망하게 된다. 그는 1906년 가을부터 평양동인의원의 개원을 후원하였다. 1906년 12월 평양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개교에 참석하고 이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1907년 대구동인의원 개원과 1907년 2월 대구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개교에도 참석, 동인의원과 부속의학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1907년 6월 14일 동인회 평양지부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907년(융희 1년) 7윌 20일 평안남도관찰사로 동인회 평양 지부장에 선출되었다.[150] 평안남도관찰사로 재직 중 평양에 신식 병원의 유치를 적극 추진하였으나 실패했다. 평안남도관찰사 재직 중 박중양은 동인의원과 부속의학교의 운영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1908년(융희 2년) 5월 5일 동인의원 부속의학교 제2학년에 진급하게 된 14명 에 대한 진급식이 열렸다. 이 날 진급식 에는 지부장 평양 이사관 기쿠치 , 평의원인 평안남도 관찰사 박중양, 평양위술병원장 3등 군의정 키타야마, 평양 거류민단장 시부야, 그리고 강사 마에지마 일본 육군 1등 군의관, 하시모토 약제관 등 평양 의 주요 일본인 들이 참석 했다.[151] 단발령에 대한 확신[편집] 1935년 9월 4일 방문한 조선민보사 기자와 함께(우측 앉은이가 박중양, 좌측 조선민보 기자) 박중양은 제사 문화와 허례허식 문화 등 조선의 구습에 반감을 품었다. 그에 의하면 어떤 소신이나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하기에 그냥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의미없는 행동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단발령에 대해서도 확신을 품었다. 단발을 하면 상투를 틀 때보다 머리 관리 시간도 절약되고, 머리 감기도 편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에 따라 1906년 경상북도관찰사 재직 중에는 영해 초도 순시 후 강제로 단발을 강행하였다. 그는 영해초도 순시 직후, 관찰사실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을 시켜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43] 1907년 평안남도관찰사 부임 직후에도 신임 관찰사를 찾아오는 지역 유지들을 강제로 삭발시켰다. 1912년에는 군청 통폐합작업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논산군 은진면 유지들이 도장관 면담을 요청했다.[60] 이때 은진에서 찾아온 유지들 가운데 한 노인이 상투머리에 갓을 쓴 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발령이 내린지 언제인데 지금 까지 상투를 하다니... 에잇! 다들 나가시요.' 그리고는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60] 그는 단발령을 비롯한 제사 문화와 허례허식 문화, 관혼상제 문화에 대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인습들로 규정하였다. 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편집] 그는 '한국인들이 아는 척, 잘난 척 하기를 좋아한다'고 비꼬았다.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6]'라는 것이다. 이어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6]'라고 지적하였다. 이어 박중양은 '조선인들은 애국심만 있다면 범죄행위를 해도 허용되거나 묵인하는 습성이 있다'고 질타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의 악벽'이라 하여 조선인들에게 존재하는 악질적인 버릇을 지목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악질적인 버릇으로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152]'를 들었다. 이러한 악질적인 습관을 가진 덕에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며, 일본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신뢰를 가볍기 여기고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악습을 갖고 있다고도 지적하였다. 박중양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할 자신도 없으면서 누군가 나서서 악습을 타파하고 개신하려 들면 방해하고 험담하여 좌절, 무산시킨다'고 비판했다.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으면서, 하려는 사람들을 (뒤에서)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6]라며, 이것이 조선인 최대의 결점이라 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부터 독립 이후의 반탁 테러꾼들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많다며 그들은 부끄러움과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일갈하였다. 박중양은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놈 치고 사기꾼, 협잡배가 아닌 놈 없으며, 정의로운 척 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숨기지 않는 놈이 없다'며 말보다 그 사람의 행동을 먼저 살펴볼 것을 주문하였다. 또한 '타인의 말을 듣기 보다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고 판단할 것이며, 타인의 말은 참고사항 정도로만 여기면 된다'하였다. 그는 '편협성, 배타성, 폐쇄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가 조선인들의 악벽이다. 형제숙질에게[152] 의존하는 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들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기생하여 사는 것)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인 속담도 있다.[153]'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가족끼리 서로 봐 줄 수 있다고 보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인간으로 몰리게 됐다. 1945년 독립 직후에는 조선인의 근성에 대한 성토와 규탄을 하였지만 결국 그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괴짜, 정신질환자로 몰려 무시당하기에 이르렀다. 개화파 애국자론[편집] 효수되어 한성부 저잣거리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그는 김옥균과 개화파의 비참한 최후를 슬퍼하였다.) 그는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고종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며 195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일각에서는 역적 취급을 받던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도 매국노가 아니라 선각자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역적이라 조선 상하가 흉언하였지만 이조 말년의 선각자이고 애국지사다[4]'라는 것이다. '(그들은) 국정유신을 약모(계획)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당시 뜻대로 성사하였으면 분명 우리가 일본과 비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옥균 등 개신파가 실패하고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박영효 일인이 귀국하고 대개는 객사하였다. 그들의 유가족을 생각하면 동정하는 눈물이 없을 수 없다.[6]'고 하였다. 이어 그는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 김옥균의 최후를 두고도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6]'라며 분개하였다. 이어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6]'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던 제1공화국의 관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김옥균, 서재필 등이 역적이 아니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안경수, 윤치호, 권영진, 조의형, 장박, 유길준 등이 국사를 범한 죄인들이 아니다. 이완용 등이 매국노가 아니다.[6]'라며 항변했다. 그는 '애국자를 박해하다 못해 처참하게 죽이는 그런 국가, 그런 정부에는 애국을 할 필요가 없다'며 역설하였다. 이어 그는 조선이 최초로 독립한 것을 日·淸전쟁 이후 때로 보기도 했다. 그는 단군 조선 이후 기자 조선. 신라, 고려,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고, 중국에 사대를 하였으며, 조선왕조에 와서는 중국의 속국 노릇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며, '선인들의 애국심이 금일에 기고만장 떠들고 있는 사람들만 못한 것이 아니고 충의가 금일의 큰 소리를 장담하는 자들만 못한 것도 아니다. 불가항력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소이다. 조선이 청국의 예속을 면하고 독립하는 것이 조선인의 실력이 아니고 日·淸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결과 일본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6]'란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구느냐'며 항변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에 공녀와 인삼, 금은 등의 조공을 바친 것은 왜 아무도 비판하지 않느냐'며 계속 되물었다. 국가와 국민관[편집] 그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신의 일기나 독립 후에 쓴 술회, 반민특위 공판장에서 그는 한결같이 '국가는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민을 배려하지 않는 국가, 정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인민을 살피지 않는 국가와 정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였다. 방청석에서 반발이 나오자 그는 '조선 조정이 백성들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냐'고 항변하였다. 그는 재판 중 반성하지 않는 것[10]으로도 회자화되었다. 그가 공판을 받는 동안 방청석과 재판장 내·외부에서는 반역자, 매국노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되풀이하였다. 교육, 언론활동 지원[편집] 평안남도관찰사와 경상북도관찰사로 재직 당시 그는 도내 신문 발간을 지원하고 적극 장려하였다. 또한 이들 신문사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대폭 부여하여 관찰사, 기업인, 지역 유지 등에 대한 비판을 최대한 허용하였다. 그는 언로를 열고 언론을 보급하는 길이 사람들의 눈을 깨이는 길이라 확신했다. 지역 유지들과 지식층이 신문을 잘 읽지 않자, 그는 숙제로 내주어 신문을 읽게 하고, 주말 저녁의 모임에서는 정치, 시사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후일 전북대학교 교수 강준만은 '신문 발간을 주도한 관찰사인 박중양 이나 황철 은 친일파로, 또는 부패관료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과 같은 신문에서 크게 비난 받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박중양이나 황철은 신문을 실어 하던 관리들이었을텐데, 이들이 신문의 창간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154]'라며 이를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다. 평안남도에 관립일본어학교의 설립을 지원하였고, 경성의 기독교청년회의 영어학당에도 후원금을 보냈으며, 대구에도 관립일본어학교의 건립을 추진, 후원하였다. 대구읍성 철거[편집] 대구군수 재직 시 그는 일본인들이 칭송한 야마모토 군수 라고 하여 유명하였다. 경부선 개통으로 대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때문에 일본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생겨났다. 이때 대구군수 박중양은 주로 일본인들의 편에서 일하였다. 따라서 일본거류민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13] 성벽 파괴작업은 오직 박중양의 독단으로 감행한 일로 목이 달라날 각오를 갖고 임했다.[56] 박중양은 성을 헐어버릴 계획을 오카모토와 카게야마 그리고 몇몇 일본 사람들과 함께 짜고, 1906년 10월, '대구 도시계획 상 방해가 되니 성첩을 헐겠다.'는 건의서를 조정에 올렸다.[144] 건의서에 대한 조정의 회신은 '불가'였다.[144] 그러나 중앙에서 회신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성첩을 허물은 뒤였다. 박중양은 건의서를 올리기 열흘 전부터 카케야마 등이 부산에서 데려온 60여 명의 일급 노동자를 배불리 먹이고 밤새 성에 구멍을 뚧기 시작했던 것이다.[144]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는 두 아들인 박문웅과 박무웅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계획도 세웠다 한다. 불상사를 대비해 두 아들(文雄, 武雄)을 일본으로 망명 시킬 준비도 하였다는 것이다.[37] 박중양은 당시 대구읍성이 대구읍내를 관통하여 시내 왕래가 불편한가 여부를 검토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고 보고 대구읍성 철거를 지시한다. 당시 일본거류민들이 가장 소원했던 바는 바로 대구읍성의 철거 문제였다. 그런데 1906년 6월 그가 경북관찰사 서리를 겸하게 되면서, 곧바로 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결국 성을 철거함으로써 성내 상권까지도 일본 상인들이 침투하게 되었다.[13] 일본인이 기록한 대구물어에도 그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두 아들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준비도 하였다.[56]'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읍성 철거를 두고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야마모토 군수의 '과감한 조치'라고 극찬하였다.[13] 그러나 그는 일본인들의 칭찬을 외면하였다. 진주성 철거의 시발점[편집] 그는 진주성의 일부를 철거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와 진주의 수백 년이나 된 성돌을 파내어 일본인들에게 팔아 먹은 돌군수였다.[18] 진주성과 대구읍성을 돈주고 팔았다 하여 돌군수[18] 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그 돌을 집을 짓는 데 사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았다.[18] 헐린 진주성곽 일부의 돌은 돈을 받고 일본인에게 판매하였다. 훗날 1930년대에는 진주성 내성까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면서 촉석루만 남게 되었다. 박중양은 진주성 돌의 일부를 성곽 북방에 있던 대사지(大寺池)등 세못과 해자를 메우는데 활용하였다. 진주성은 결국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18] 진주성은 1960년대부터 복구되기 시작했다. 이완용 희생자론[편집] 이완용(박중양은 그가 어쩔수 없이 모든 책임을 지고 희생했다고 봤다.) 그는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사람들이 흔히 '이완용을 매국노라 매도하여 말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쉽고,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당면한 지도자가 되어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6] 1945년 독립 직후부터 그는 이완용을 변호했고 그는 어쩔수 없는 희생자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외면당했다. 독립 후 조선총독부에 협력하거나 부역하던 당시의 국민들이 모든 책임을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 등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만 모든 공격이 쏟아지는 것에 분노하며 이완용 애국자론을 펼쳐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이완용 피해자론, 이완용이 희생자라는 견해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는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국가의 위급이 존망한 때의 당면한 책임자를 선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이다.[6]'라며 이완용이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대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또한 韓日倂合 때나 을사 보호 조약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들을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6]' 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을사 조약 때나 韓日倂合 이후 관직을 버렸던 일부 인사들, 그들을 양심적인 선비로 보고 존경하던 사람들과 언쟁꺼리가 되었다. 친일에 대한 소신[편집] 그는 자신이 민족 반역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독립 직후 그는 자신을 성토하는 여론에 대해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56]"라고 반박하였다. 일제 시대의 조선에 살던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본 제국의 신민이고 조선총독부의 국민일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고 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처벌을 당했더라도 그는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처벌받은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1953년경 박중양이 자신의 일기 일부를를 지인에게 보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천황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일본이 미국, 영국 등 연합국에 패배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나 미국과의 전쟁을 일본 정객들의 오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충성심만은 변치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1997년부터 1998년 일본 체류한 대구 출신 사학자 강태원에 의해 가쿠슈인 대학 우방문고에서 발견되었다.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긍정론[편집] 박중양은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비교적 공정했다고 봤다. 일제 시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은 일본인에 대한 편견이라는 점과, 지역차별을 없앤 것을 내심 높이 평가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통치하는 과정에서 평안도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앴다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조선 왕조를 조선총독부 통치기와 비교하여 암흑기로도 평가했다. 그는 '정치의 개선과 인재 등용을 세인이 모두 아는 바이다. 정령에 이론에 편중하고 민중 생활에 불합리한 점은 없었으되, 대체 정치의 목표가 민생의 복리를 계획하는데 있고, 관공리 등은 일일이 시무가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이외에 한 것이 전혀 없다.[155]'며, 일제에 대한 비판은 일본인들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음을 지적했다. '암흑시대 조선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된 것은 세인이 모두 아는 바다. 조선인의 고혈을 흡취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만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155]'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제 통치에 대해 증오감이나 편견이 없이 평가해야 된다고 봤다. '염두의 증오지심이 있어서는 공정한 평론이 아니되는 것이다.[155]' 그는 조선총독부 통치의 공정한 이유로 지역감정을 없앴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일정시대에 인재 등용이 실시되어 이조시대의 차별을 받고 있던 평안도 출신도 도지사, 참여관 등에 등용되었다.[155]'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나 일제 통치기라고 해도 무조건 실력없는 인사를 채용해서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여러 총독 가운데서도 특히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긍정적으로 봤다. 데라우치가 '조선인을 본위로 정치를 행하여 조선 말기의 암흑시대를 비교적 명랑하게 만들었고, 특히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넘쳐났던 지역감정이나 출신지 차별, 출신성분 차별을 배제하고 공개채용시험으로 인재를 등용한 점, 문벌과 학맥 등을 가리지 않고 선발한 점을 예로 들어 조선총독부 통치가 편파적인 통치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조선의 일본화[편집] 그는 '조선이 선진국 내지는 문명인으로 발전하려면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하였듯 조선인들도 일본의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13] "중양가절 말 말아라. 전무후무 비기수단(肥己手段) 대구성곽 구공해를 일시간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 (대한매일신보, 1909. 1. 16. '중양 타령'[13]) 그는 '비문명화된 조선의 문명 개화를 위해 일본인들이 협조, 지원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1908년 무렵 일본인들과의 한 모임에서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들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항상 일본인들의 우월성을 앞세웠다.[13] 그리고 '조선인들도 일본인을 본받아 문명화와 개척 정신, 자립 정신, 호전성을 지녀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들의 '형식적인 위선과 무능력함'을 열등감처럼 여겼다. 박중양은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우러러보지는 않았다. 작대기를 들고 다니던 그는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을 석방시키는가 하면 횡포를 부리던 일본인 관헌들을 작대기로 끌어내리거나 내리쳐서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도지사와 중추원 참의와 칙임관대우였고, 조선총독부의 각별한 신뢰를 얻고 있었으므로 일본인 관헌들도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편집] 스승 이토 히로부미 박중양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독립 이후에도 기억하면서 존경하였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심과 욕심이 없는 점'을 들었다. '관직이나 부귀에 대한 애착이 없고, 자신의 관직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점과 신설한 관직은 1차 시험 후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것[155]'이 그 이유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부를 때 항상 '이등 공, 이등 선생님, 선생님'이라 칭하였다. 이토 부부는 일본과 조선을 내왕할 때는 어김없이 박중양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이토 부인이 바다에 빠져 몹시 위급해졌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다고 한다.[13] 따라서 이토가 박중양을 더욱 각별히 아끼게 되었다.[13]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가까이서 봤다. '이등박문은 세계적 위인이다. 공의 연구가 후진들에게 교훈이고 술자리 환담 때에도 쓸데없는 말이 없다. 이등박문은 일본에만 전유할 정치가가 아니다. 각국 역사책의 기록이 있을 것이다.[155]'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술에 취해서도 '실수나 실언을 하지 않는 점'을 높이 보고 그를 인격자로 존경하게 되었다. “ 메이지 유신 초기 폐번치현(번을 폐하고 현을 설치) 때 27세의 나이에 병거현령이 되고 국회 개설 초의 귀족원 의장, 궁내부 신설과 동시에 궁내대신, 내각 제도가 제정되면서 초대 총리 대신, 추밀원 설치 초의 추밀원 의장이고, 초대 한국통감이었다. 그는 현직에의 애착심이 없고 신설 관직을 1차 시험 후에 타인에게 전수한 것이 이등박문공의 방식이었다.[155] ”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존경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관직이나 부귀에 연연하지 않는 점'을 높이 샀다. '나는 이등공을 표본으로 하고 한국의 중흥을 이상으로 하였다. 국세가 주마적으로 급변하므로 내 사상이 수포로 돌아갔다. 대세를 역행할 수 없는 환경을 따라서 내 심상도 역시 변동하였다.[155]'며 일본식 정책 추진의 실패를 아쉬워했다. 그는 한국이 독립된 뒤에도 오래도록 이토 히로부미를 인격자로 회상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 행동은 이토 히로부미를 을사 조약의 원흉으로 보던 당시 한국 사람들과 갈등하는 요인이 됐다. 한국인 韓日倂合 기여론[편집] 그는 독립 직후부터 韓日倂合이나 을사 조약의 원인이 '일제, 일본만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인들 역시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원인 중에는 '왕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과 '당시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 모두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민생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악랄함에 의해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본 독립운동가 및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견해를 정면 부정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술회에도 그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정치의 부패와 국민들의 고통을 지금 70세 이상 되는 연로자는 모두 다 아는 바이다. 행락 매관이 공공연히 이를 행하였고, 대소 관리들의 민재 탐취가 강도와 다르지 않았다.[155]'며 당시의 부패상을 지적했다. 그는 韓日倂合의 원인을 '무조건 일본인들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피해망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임금에게 직신(直臣)이 없고 궁중의 난잡은 백귀야행(百鬼夜行)이었다. 집정자는 자기 영달에만 몰두, 탐욕했고, 국정일비를 무관심하였다. 고위 고관자는 자기의 이해득실에만 타등하고, 백성들은 죽든지 살든지 아불관어(무관심)하였다.[155]'는 점도 지적했다. 박중양은 '韓日倂合의 책임을 외부에서만 찾는 것은 일시적인 자기 위안'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한국의 쇠망은 그 원인이 적년요정(積年要政, 매년 쌓은 정치의 잘못)에 있었지 일조일석에 있지 않았다. 한국을 쇠망케 한 자는 한국인 누구누구였겠는가.[155]'라며 한국 내부의 잘못도 존재함을 역설하였다. 현실주의[편집]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조선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황국신민이라고 규정했다. 일제 시대 당시 '국내에 있던 국민들은 모두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 국적자였고,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구차한 변명'이라며 조롱했다. 그는 '해외에 망명했다가 한국이 독립된 후 귀국한 인사들 외에 3.1 운동 당시의 일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121]'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영어의 고초를 당한 자라고 해도 영어생활을 조선 내에서 체험한 자는 대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121]'고 하였다. 비록 독립운동을 하다 처벌을 받았지만 일본 영토 내에서 일본의 신민 자격으로 처벌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제 시대 당시 일본 치하에 있던 사람들이 일본 국적, 일본의 백성임을 부정한다 해서 일본 국적자였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그는 3.1절 기념행사 참석자 중에 '일정 시대에 관공서 공무원이었던 사람의 연설'을 보고 조롱하였다. 상황 따라 변신하고 변절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이를 두고 '시세 변천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활계희극의 광경[121]'이라고 조롱하였다. 성실성[편집] 1949년 그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그가 대한제국 말기 부터 당시까지 써온 일기장들이 발견되었다. 반민특위의 조사관들도 압수한 물건들 중 그의 일기를 보고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한 가지 감탄한 것은 그의 집에서 압수해 온 증거품 중에 일기장이 무려 20여 상자나 되었다.[10] 반민특위 수사관들은 이를 전부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들추어 보았는데 그 속엔 일자무식, 돈 한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박중양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10]'고 한다. 1949년 1월초 반민특위 대구지부에 연행되어 온 전날까지 그는 '수십 년 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두 정자로. 나는 그가 비록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10]'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 유학중이던 어느 때부터 반민특위에 검거되기 전날 까지 일기를 썼다. 가족 관계[편집] 그는 시인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의 가문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의 큰아버지인 이일우 집안과 사돈관계였기 때문이다. 증조부 : 박행묵(朴行默, 1769년 1월 3일 - 1847년 5월 24일) 증조모 : 청송심씨(靑松沈氏, 1768년 10월 23일 - 1841년 10월 21일) 할아버지 : 박기숙(朴基肅+心, 1800년 3월 7일 - 1909년 8월 11일) 할머니 : 무안김씨(務安金氏, 1804년 5월 12일 - 1911년 3월 11일) 백부 : 박주호(朴周鎬) 아버지 : 박정호(朴鼎鎬, 1840년 - 1892년 9월 22일) 어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1845년 4월 21일 - 1929년 7월 12일) 형 : 박원양(朴元陽, 생몰년 미상) 동생 : 박수양(朴秀陽, 1876년 - 1913년 5월 5일, 단오일에 경성부에 갔다가 적리병에 감염되어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156]) 동생 : 박계양(朴季陽, 1877년 - 1925년 5월 10일) 제수 : 홍씨(洪氏, 1875년 - 1962년 4월 29일) 조카 : 이름 미상, 요절 조카 : 박정웅(朴正雄, 다른 이름은 순정(淳正), 정순(正純), 1910년 3월 25일 - ?) 질부 : 김해김씨(金海金氏, 1911년 8월 26일 - ?), 김병주(金炳柱)의 딸 종손 : 박인정(朴仁楨, 1933년 12월 18일 - ) 종손녀 : 박씨(朴氏) 종손녀사위 : 허보근(許寶瑾, 본관은 김해(金海)) 종손녀 : 박씨(朴氏) 종손녀사위 : 이팔영(李八榮, 본관은 전주(全州)) 사돈 : 양재형(梁在亨) 사돈 : 이일우(李一雨, 호는 소남(小南), 1870년 ~ 1936년), 독립운동가 이상정, 시인 겸 작가 이상화, 독립운동가 겸 체육인 이상백의 큰아버지, 독립운동가 권기옥의 시백부, 군인 박창암의 처조부 부인 : 이주열(李主悅, 다른 이름은 이주열(李柱烈),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아들 : 박문웅(朴文雄, 다른 이름은 순성(淳聖), 1890년 12월 7일 - 1959년 8월 14일) 며느리 : 이름 미상 며느리 : 남원양씨(南原梁氏, 1907년 8월 11일 - ?), 양재형(梁在亨)의 딸 손녀 : 박씨(朴氏) 손녀사위 : 노영달(盧榮達, 본관은 상주(尙州)) 손녀 : 박부남(朴富南, 1932년 ~ 2018년 1월 11일), 소아과 의사 손녀사위 : 이열희(李烈熙, 본관은 경주(慶州)), 치과의사 손자 : 박승효(朴勝孝, 다른 이름은 세정(世楨), 1933년 8월 1일 - ) 손자며느리 : 양근함씨(陽根咸氏, 1937년 11월 11일 - ), 함승호(咸升鎬)의 딸 증손자 : 박영목(朴永睦, 다른 이름은 병훈(炳薰), 1964년 12월 1일 - ) 증손사 : 박정목(朴正睦, 다른 이름은 병준(炳俊), 1967년 3월 17일 - ) 아들 : 박무웅(朴武雄, 생몰년 미상) 아들 : 이름 미상 손녀 : 박두순(朴斗順) 아들 : 이름 미상 딸 : 박씨(朴氏) 딸 : 박씨(朴氏) 딸 : 박OO, 경명여자고등학교에서 가정과목 교사를 역임했다. 대구의 모 메리야스기계 회사 사장 이모와 결혼했다. 부인 : 일본 여자, 이름 미상(1909년 - ?) 딸 : 박정자(朴政子, 1936년[157] - ) 외모[편집] 그는 화려한 경력의 관리로 출세하였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13] 평가와 비판[편집] 그는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던 인물로 일본인들까지도 그를 함부로 괄시하지 못하였다.[84] 또한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었다[84]'는 시각도 있다. 객기가 넘치는 사나이로 거리낌 없이 할말은 하였다[46]는 평도 있다. 긍정적 평가[편집] 대구물어에 의하면 그는 '사람됨됨이가 솔직하다[46]'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의인 또는 일본 경찰을 혼내준 기개 또는 배경을 높이 평가받았다. 한편 "대구를 근대도시의 공간구조로 발전시킨 선각자[40]"라는 시각도 있다. 일제 시대 당시 그의 근무성적 평가표에 의하면 "예민하고 호방해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음. 퇴관한 후에도 후배의 지도에 진력하고 혹은 공공적인 방면에도 공헌함. 부근 사람으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이 존경받고 있음.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와 기타 총독부 대관들로부터도 역량과 수완, 탁월한 식견을 인정받아 중요시되어 “비상한 시기에 즈음해서 진실로 믿어서 보람있는 인물은 지사급으로는 朴重陽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의 조선공로자연감 427페이지에 수록된 인물평에도 박중양은 "예민하고 호방해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음. 퇴관한 후에도 후배의 지도에 진력하고 혹은 공공적인 방면에도 공헌함. 부근 사람으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이 존경받고 있음. 일찍이 伊藤와 기타 총독부 대관들로부터도 역량과 수완, 탁월한 식견을 인정받아 중요시되어 "비상한 시기에 즈음해서 진실로 믿어서 보람있는 인물은 지사급으로는 朴重陽이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서 수학한 점, 대구 읍성을 철거하여 일본 상권의 대구 진출을 도와주는 격이 되었던 점 등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3.1 운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만세만 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발언 때문에 비난받아왔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시인 조지훈은 '그가 친일파로 지목되었지만 변절자가 아니라'고 했다. 조지훈은 자신의 글 지조론에서 "최명길은 변절의 사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158]"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부정적 평가[편집] 이 문단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한 반민특위 조사관은 그를 완벽한 일본인이라고 하였다. 그는 '박중양은 몸은 비록 한국인이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개과천선이고, 반성이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10]'라고 평하였다. 한편 사사로이 탐욕을 부렸다는 비판도 있다. 대구 군수 겸 경북 관찰사서리가 된 그가 대구성 및 객사를 철거하여 일본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권력을 악용해 몇몇 지역유지들을 동원해 사사로이 군청을 만들어 대구 지방민에 대한 탐학을 저질렀[159]다는 것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며칠간 감옥살이를 했을 뿐 곧 풀려나 잘 먹고 잘 살다간 친일파의 전형이었다[36]'는 비판도 있다. 기타[편집]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박중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저자:박중양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급 인사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하고 거침없이 지적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영남제일관은 1906년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과 도로개설을 빌미로 박중양의 주도로 대구읍성을 헐어버리면서 동문이었던 동성로의 진동문, 북성로의 공북문, 서성로의 달서문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160] - 도대체 500년동안 뻘짓거리 한 민족이 정기라는게 있는건지 그 정기라는게 무엇인지 알수가 없다. 성균관대학교 강사 김일수는 박중양이 대한제국 내무부의 명을 어기면서 대구읍성을 해체한 배경에 대해 “박중양은 대구군수로 부임했을 당시 대구 읍성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 상인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며 “이 같은 일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라는 뒷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았다.[54] 박중양은 난초 그리기와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을 취미로 삼기도 했다. 한말의 문필가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 박중양이 그림 한 폭을 청하자, 서병오는 "당신 같이 지체 높은 분은 일본 화가들에게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텐데 하필이면 나한테 받으려 하느냐"면서 거절했다고 한다.[13] 1949년 무렵의 그의 집에는 기자조선시대의 정전법을 그린 병풍과 충무공의 거북선을 그린 병풍이 있었다.[161] 그는 자신의 어머니 초상화를 그리러 온 대구의 중학교 미술교사 김진용에게 최제우가 참형당하던 광경을 증언하기도 했다. 김진용에 의하면 "박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남문 밖 관덕정 건물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1864년 3월 10일에 최수운 선생의 참형을 당하시던 광경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경상감사 서헌순의 지시 아래 형집행하는 과정에서 선생의 영적에 의하여 곡절이 계속되다가 선생께서 청수를 뫼셔오라 하시고 묵념하시고 나서 형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박중양에게서 들었던 것입니다.[162]"라고 하였다. 박중양은 김진용에게 관덕당 사진을 가리키며 그곳이 수운 최제우의 처형지라고 지목하였다. 선조들의 묘소 일부는 동생 박계양 내외의 묘가 있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아미타불고개(현 의정부시 금오동 아미타불모퉁이 부락)와 양주군 주내면 남방리(현 양주시 남방동)으로 분산 이장되었다. 성품[편집] 1949년 3월 1일 그를 인터뷰한 건국공론사의 한 기자에 의하면 당시 '70이 훨씬 넘은 노인인데도 언조에나 눈매에는 아직도 정기가 흐른다'고 했다.[163] 독립 후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나 사람됨이 솔직하였다 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고 사제(師弟)의 입장으로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사저(師姐)로 섬겼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조선인의 미개성'을 수시로 지적, 질타하였다. 선화당 측우기[편집] 대구 선화당에 있던 선화당 측우기 그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대구 선화당(宣化堂) 앞뜰에 있던 선화당측우기와 측우대를 인천관측소에 인계하였다. 그러나 그가 일본인 와다 유지에게 주고, 와다 유지가 조선총독부 인천관측소로 옮겼다고도 한다. 박중양으로부터 와다 유지가 받은 것으로서[164], 와다는 이것을 조선총독부 인천관측소의 뜰에 한 동안 두었다[164] 한다. 대구 선교박물관의 기초[편집] 그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대구읍성을 헐어 냈는데, 선교사들이 이 돌들 중 일부를 옮겨와 집짓는 데에 활용했다.[165] 박중양은 선교사들에게는 무료로 돌을 가져가되 1인당 10개 이상은 가져갈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다. 선교사들은 대구읍성에서 해체된 석재와 목재들을 가져다가 선교사 사택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대구 선교사 사택은 지붕은 한식기와를 이은 박공지붕이었으나 함석으로 개조되었다 다시 한식기와로 보수했다.[165] 동산의료원 근처에 세워 191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기독교선교사 사택으로 이용되다가 후일 선교박물관이 되었다. 기타[편집] 동리 청년 30여명이 동리에서 무섭다고 소문난 박작대기(박중양)의 사과 과수원에서 박중양에게 잡히지 않고 사과 많이 따오기를 내기로 걸었다. 또 가장 많이 따온 사람을 평생 청년회비를 면제해 준다는 조건도 내세웠다. 청년들은 매일 밤, 새벽에 몰래 박중양의 사과 비닐 하우스에 들어가 사과를 서리하였다. 청년회원 중 한 명이 박중양의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 한개를 따다가 들켰다. 박중양은 여태 사라진 사과가 1백 박스 정도 되는데 모두 네가 한 짓인가. 이놈 잘 잡혔다고 타박했다. 다른 청년들은 사과 1포대에서 6포대 이상을 훔쳤는데 자신은 1개 따고 1백 박스 값을 물어내게 되자 항변하였다. 다른 애들은 사과 20~30박스 정도 훔친 애들도 있는데 왜 사과 1개만 딴 나를 잡느냐 하자, 박중양은 청년이 사냥을 하는가 여부를 물었다. “ 너 사냥 할줄 알지? 그럼 너는 산에 있는 짐승을 전부 잡을 수 있냐? 잡힌 짐승만 불쌍한 거야. ” 사냥을 잘 할것 같았던 청년은 실제 포수였다. 박중양을 연기한 배우[편집] 정진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 - 1984년 《독립문》KBS 드라마 채문호 - 2015년《기적소리》 뮤지컬 관련 항목[편집] 3·1 운동 독립협회 자제단 사회 계약론 경술국적 정미칠적 을사오적 반민특위 대구읍성 이완용 박제순 윤치호 서재필 박정양 이상재 이승만 함태영 배정자 윤치오 김옥균 안경수 최린 김윤정 김홍집 이시영 이진호 러일전쟁 만민 공동회 을사 보호 조약 이토 히로부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안경수 김규식 나혜석 박정양 박원양 양기탁 윤웅렬 윤필오 이상재 이시영 이동녕 윤치영 허정숙 홍영식 김윤식 박영교 서재창 일소대 이노우에 가오루 영친왕 박문웅 박영교 이완용 안창호 유길준 이광수 이동녕 이동휘 장덕수 이준용 김성수 송진우 허정 각주[편집] ↑ 그의 아버지의 대에는 마름 노릇을 할 정도로 가세는 몰락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본관을 알기 어렵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42페이지 ↑ 가 나 다 박중양의 친일행각...일본에 지역상권 넘겨주려해 영남일보 1996.08.13 ↑ 가 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4페이지 ↑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라며 분개하였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5페이지 ↑ 가 나 다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0》 (국사편찬위원회, 1994), (61) [朝鮮人 動靜報告 件] ↑ 1908년 7월 의정부찬정 겸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의정부찬정 겸 학부대신 김규홍(金奎弘)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차일본공사관 임시대리공사 박용화(朴鏞和)가 보낸 편지에 의거하여 유학생들의 생활비 중 박원근의 약값 50전을 청한 공문이 "照會 第二十七號"라는 제목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박중양 : 3.1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김도형)〉.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239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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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추미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추미애 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58년 10월 23일(1958-10-23) (60세)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본관 추계학력 한양대학교 법학 학사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경력 광주고등법원 판사새정치국민회의 인권특별위원회 부위원장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한양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민주통합당 최고위원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더불어민주당 당대표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형제 2남 2녀 중 차녀 배우자 서성환자녀 1남 2녀(아들 서재휘, 딸 서재현,서재영)종교 불교소속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의원 선수 5의원 대수 15·16·18·19·20정당 더불어민주당지역구 서울 광진구 을당내 직책 상임고문웹사이트 추미애 홈페이지 추미애(秋美愛, 1958년 10월 23일 ~ )는 대한민국의 판사 출신 정치인이다. 헌정 사상 최초의 지역구 5선 여성 국회의원이며, 2016년 8월부터 2018년 8월까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지냈다. 목차 1 생애 2 논란 및 비판 2.1 공직선거법 위반 2.2 문재앙 댓글은 범죄 발언 2.3 계엄령 발언 2.4 상임위 불출석 3 학력 3.1 비학위 수료 4 경력 5 수상 6 역대 선거 결과 7 각주 8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58년 대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2남 2녀 중 셋째(차녀)로 태어났다.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남편은 대학 동기인 서성환 변호사다. 두 사람은 캠퍼스 커플이었으며, 결혼 전까지 7년간 연애하였다. 서성환은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데, 당시 영남에서 호남 사위를 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서성환은 다리에 장애가 있다.[1] 이러한 까닭에 추미애의 집안에선 서성환과의 결혼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추미애는 이러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85년 서성환과 결혼하였다. 한편 훗날 추미애를 정계에 입문시킨 김대중은 추미애에게 "호남 사람인 제가 대구(출신)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2]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언론에선 추미애를 '대구의 딸이자 호남의 며느리'로 부른다.[3][4] 사법연수원 수료 후인 1985년부터 춘천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인천지방법원, 전주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등에서 판사직을 역임했다. 1995년 광주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정계 입문 권유를 받고, 같은 해 8월 27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고, 당 부대변인으로 정당 생활을 시작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듬해인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광진구 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어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판사 출신 국회의원, 판사 출신 야당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서울 지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다. 초선이던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 캠프의 유세단장으로 활동할 당시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서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는 지역감정이 심하던 때였다. 직전 대통령 선거인 제14대 대선 때는 야당이던 평민당 운동원들이 대구 유세를 하다 돌을 맞기도 하던 때였다.[5] 그러나 추미애는 “지역감정의 악령으로부터 대구를 구하는 잔다르크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유세단 이름을 ‘잔다르크 유세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대구에서 지역감정과 맞서 저돌적으로 선전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때 언론으로부터 ‘추다르크’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선를 앞두고 펼쳐진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그가 지지율이 낮을 때부터 지지하였다. 그리고 노무현이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결정되고 난 후, 노무현의 지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민주당내에서 대선 후보 교체를 위한 움직임(이른바 후단협 사태)이 일어났을 때도 후보 교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또한 대통령 선거에 임해서는 노무현 후보 캠프의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으로 활동하며 노무현의 당선에 일조하였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희망돼지' 저금통 사업을 이끌며 선거운동을 위한 국민성금을 모아 '돼지엄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이던 시절에는 당선자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후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 분당사태 때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하며 노무현과 정치적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한편 2004년 3월,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같은 당 의원이었던 추미애는 "① 탄핵 대신 개혁으로 지지층의 동요를 막아야 한다. ② 탄핵 찬성은 한나라당 지지층이 주도하고 있으니 현혹되면 안 된다. ③ 그래도 탄핵을 강행하면 역풍을 맞아 총선에 참패할 것이다."라는 ‘3불가론’을 내세우며 탄핵에 반대하였는데, 당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탄핵에 반대한 2인 중 한 명이었다.[6] 하지만 민주당 지도부는 탄핵에 반대하는 추미애에게 “당내 2인자가 당론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너 혼자 잘났냐” 등 비난을 하였고, 결국 민주당의 당론은 탄핵 찬성으로 결정되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당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소속 의원 2명의 서명까지 받아 탄핵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자 추미애는 "감옥 간 분들 표까지 긁어모아 탄핵을 한다면 말이 안 된다. 숯댕이(범죄혐의로 수감된 의원)가 검댕이(노무현 대통령)를 나무랄 순 없다. 민주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내가 기꺼이 표를 드리겠다." 며 결국 당론에 따라 탄핵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7] 이후 국회에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개시되었다. 한편 곧이어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추미애에게 맡겼는데, 추미애는 탄핵 반대의 압도적 여론을 체감하고선 민주당이 탄핵에 동참한 것에 대해 당의 선대위원장으로서 당을 대표하여 사과하였다. 그리고 사과의 의미에서 3보1배를 하였다. 그러나 탄핵반대 여론의 역풍을 맞은 민주당은 9석의 의석을 얻는데 그쳤다. 그리고 이때 추미애 본인도 낙선하였다. 훗날 추미애는“내 정치 인생 중 가장 큰 실수이자 과오가 탄핵에 찬성한 것”이라고 했다.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다음 해 실시된 18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복귀하였다.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실시된 제18대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 국민통합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2015년에는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의해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같은 해 말에 벌어진 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사태 때는 탈당파를 강력히 비판하며, 당에 잔류하였다. 2016년 4월에 실시된 제20대 총선에서 당선됨으로써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지역구 5선 여성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16년 8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어,[8] 민주당 역사상 최초의 대구·경북 출신 당 대표가 되었다.[9] 2017년 5월 실시된 제19대 대선에서 당 대표로서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아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이로써 헌정 사상 첫 여성 집권 여당 대표가 되었다. 2018년 제7회 지방선거에서도 당 대표로서 선거를 진두지휘해 당의 압도적 승리를 이루어냈다. 같은 해 8월 임기가 만료되어 역대 민주당계 정당 대표 중 최초로 임기를 채운 대표라는 영예를 안으며 퇴임하였다.[10] 홍콩에서 발간되는 시사주간지 《ASIAWEEK》에 의해 ‘아시아 정치 지도자 20인’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세기를 빛내고 21세기를 빛낼 여성 정치분야' 여론조사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여성 10인으로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통해 선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유권자연맹으로부터 ‘국회의정활동 최우수상’과 전국 NGO단체연대로부터 '올해의 닮고 싶은 인물상’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 당시 드러난 삼성의 내부 문건에 '돈을 받지 않는 정치인'으로 추미애가 적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11] 논란 및 비판[편집] 공직선거법 위반[편집] 2016년 12월 23일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11부(이상윤 부장판사)는 공직선거법위반(허위사실공표) 혐의로 추미애에게 벌금 80만원을 선고했다. 추미애는 총선을 앞둔 2016년 3월 기자 간담회에서 "16대 의원 시절 당시 법원행정처장에게 서울동부지법 존치를 약속받았다"고 허위사실을 알렸으며, 총선 공보물에 '법원행정처장에게 동부지법 존치 약속을 받아낸 추미애 의원' 등의 허위사실을 기재하였다.[12] 2017년 3월 21일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이상주 부장판사)도 추미애에게 원심 판결과 같이 벌금 80만원을 선고했다.[13] 문재앙 댓글은 범죄 발언[편집] "익명의 그늘에 숨어 대통령을 ‘재앙’으로 부르고 (문 대통령) 지지자를 농락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라며 "대표적인 포털 네이버의 댓글이 인신공격, 비하와 혐오, 욕설의 난장판이 됐다"고 지적했다.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가 생산, 유포되고 있다", "준비된 듯한 댓글 조작단이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악의적 프로세스도 진행된다"면서 "네이버는 이런 행위가 범람하고 있지만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데 묵인과 방조도 공범"이라며 포털의 책임을 지적했다.[14] 그러나 공인을 향한 ‘명예훼손’의 경우 표현의 자유가 비교적 폭 넓게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게 학계의 보편적 견해이자 과거 민주당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모순적이라는 견해가 있다.[15] 그리고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 때 쥐박이라 하고, 박근혜 대통령 때 닭근혜라 했지만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과거 한나라당 시절 이회창 총재에 대해서도 이회충을 비롯한 온갖 인신공격성 댓글이 오갔다. 10년간 그런 댓글은 방치해 놓고 이제 와 최고존엄을 모독한다고 고소·고발 한다는 걸 보고 이 나라가 자유대한민국인지 북한을 따라가는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비판하였다.[16] 계엄령 발언[편집]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하야하시라.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으면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된 권한을 정지시키는 조치에 착착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계엄령까지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도 돈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17] 이에 대해서 정진석 당시 새누리당 의원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권한이 있다면 국회는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헌법은 국회의원 과반수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해제해야 한다고 77조에 못 박고 있다"라면서 "여소야대 국면에서 계엄해제권은 추미애 대표가 쥐고 있다. 계엄선포권은 박 대통령에게 있지만, 계엄해제권은 추 대표에게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18]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 당시 국방부가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군 병력을 출동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요건을 검토한 것은 물론 무기사용이 가능한 경우까지 따져본 정황이 확인되자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당시 ‘계엄령’ 발언이 재조명되었다.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JTBC에서 "국방부가 한민구 장관의 지시로 위수령을 검토했다"는 보도를 내면서, 추 대표의 발언이 재조명받게 된 것이다.[19] 그러나 SBS는 이에 대해 "국방부는 이철희 의원의 요청에 따라 위수령이라는 제도를 들여다봤던 것"이라면서 중요한 맥락이 빠졌다고 지적했다. 위수령 검토에 대해서 보도한 JTBC와 이를 반박한 SBS 간에 공방이 발생하면서 이 사건은 언론중재위원회로 가게 되었고, 중재위는 불성립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SBS는 'JTBC의 보도가 맞았다'는 정정 보도는 물론, JTBC의 입장을 담은 반론 보도를 할 필요도 없다.[20] 이로 인해 추 대표의 발언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준비 사건이 보도되면서 추 대표의 발언에 다시 힘이 실리게 되었다. 추 대표는 "필요하다면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와 청문회도 열어 반드시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를 끝까지 밝혀내도록 하겠다"고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였다.[21] 상임위 불출석[편집] 지난 1년 국회 상임위원회(추 대표의 소속 위원회는 외교통일위원회)에 추 대표는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단체 법률소비자연맹이 발표한 국회 상임위원회 전체회의 전수조사 결과, 역대 여야 당대표들의 출석률은 다 저조하지만, 추 대표처럼 0%인 경우는 단 한번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당 대표들은 일정도 많고, 특히 추 대표처럼 지난 1년 동안 대선, 지방선거 등을 준비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정의당 이정미 대표의 상임위 출석률인 66%와 비교된다고 JTBC 정치부 회의가 지적했다.[22] 학력[편집] 1974년 구남여자중학교 졸업 1977년 경북여자고등학교 졸업 1981년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학사 1983년 한양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과정 수료 2001년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경제학 석사 비학위 수료[편집] 2005년 세종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2007년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 수료 경력[편집]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 합격 1985년 춘천지방법원 판사 1989년 인천지방법원 판사 199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 1995년 광주고등법원 판사 1996년 ~ 2000년 제15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을, 새정치국민회의) 1997년 제15대 대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유세단장 1998년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 2000년 ~ 2004년 제16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을, 새천년민주당) 2001년 새천년민주당 지방자치위원회 위원장 2001년 새천년민주당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2002년 제16대 대선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미국 · 일본 특사 2004년 ~ 2006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방문 교수[23] 2006년 한양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 교수 2007년 제17대 대선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 2008년 ~ 2012년 제18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통합민주당→민주당→민주통합당) 2008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2012년 ~ 2016년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2012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2012년 제18대 대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국민통합위원장 2015년 2월 ~ 2015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경제정의노동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 2015년 12월 ~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2016년 더불어민주당 경제정의노동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 2016년 더불어민주당 소녀상의 눈물 운동본부 위원장 2016년 ~ 제20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더불어민주당) 2016년 제20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 2016년 6월 ~ 2016년 9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2016년 9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2018년 7월 ~ 제20대 국회 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 의원외교협의회 회장(러시아), 의원외교친선협회 부회장(파라과이) · 이사(독일) 제20대 국회 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미주소위원회 위원장 2016년 8월 ~ 2018년 8월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2017년 제19대 대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국민주권선거대책위원회 상임선대위원장 2018년 2월 ~ 더불어민주당 혁신성장추진위원회 위원장 2018년 ~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수상[편집] 1997년 ‘여성권익디딤돌'수상 <한국여성단체연합> (남녀평등실현과 여성권익 향상에 디딤돌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1999년 새천년을 이끌 ‘아시아 밀레니엄 정치지도자’로 선정 <시사주간지 (ASIAWEEK)> (홍콩에서 발간되는 <시사주간지 [ASIAWEEK]>) 1999년 국회의정활동 행정자치위원회 최우수상 <한국유권자운동연합> 2000년 ‘국민화합상'수상 <국민화합운동연합> 2000년 ‘20세기를 빛낸 여성 21세기를 빛낼 여성선정 <한국여성유권자연맹> 2000년 새천년 밝은정치인상 <바른사회 밝은정치 시민연합> 2003년 차세대 지도자감 1위 <시사저널> (시민단체 활동가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2004년 국민이 뽑은 정당의 최고 정치지도자 1위 <월간중앙-ANR공동 여론조사> 2009년 백봉신사상 수상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2012년 전자도서관 이용 최우수상 <국회도서관> 2013년 안중근 평화대상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2014년 국정감사 우수의원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2014년 국정감사 과학기술 최우수 의정상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2015년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 2015년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국정감사 우수의원 2015년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총선 15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새정치국민회의 36,570 표 43.77% 1위 초선 총선 16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새천년민주당 42,787 표 57.35% 1위 재선 총선 17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새천년민주당 26,973 표 30.08% 2위 낙선 총선 18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민주당 34,854 표 51.29% 1위 3선 총선 19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민주통합당 45,980 표 55.19% 1위 4선 총선 20대 국회의원 서울 광진구 을 더불어민주당 43,980 표 48.53% 1위 5선 각주[편집] ↑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해 스무 번의 수술 끝에 생명을 건졌고, 그 후유증으로 다리에 장애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 추미애가 사랑한 남자는?…'앨범' 엿보기, TF, 2014년 9월 26일 ↑ “'대구의 딸·호남 며느리' 秋다르크, 제1야당 '중심추'로”. 《연합뉴스》. 2016년 8월 27일.  ↑ 조한규. 추미애, 전사 ‘추다르크`는 더이상 길이 아냐. 매일경제. 기사입력 2016년 8월 29일. 최종수정 2016년 8월 30일. ↑ “‘친문’이 선택한 추미애 ‘친노’와의 14년 애증사”. 2016년 9월 5일에 확인함.  ↑ [1] YTN, 민주당, "조건부 탄핵 발의" 결정, 2004-03-05 ↑ 중앙일보, 서소문포럼, 2016-08-29 ↑ “더민주 새 당 대표에 추미애”. 《KBS 뉴스》. 2016년 8월 27일.  ↑ “더민주 새 대표 추미애…민주당史 첫 TK 출신 당수”. 《연합뉴스》. 2016년 8월 27일.  ↑ “마지막 최고위 주재 추미애 "J노믹스 성공 위해 신발 끈 동여매야"”. 《한국일보》. 2018년 8월 24일.  ↑ 경향신문, 2007-11-02 03:27 ↑ 이효석 (2016년 12월 23일). “'선거법 위반' 추미애 대표 벌금 80만원…의원직 유지(종합)”. 연합뉴스.  ↑ 황재하 (2017년 3월 21일). “'선거법 위반' 추미애 대표 2심도 벌금 80만원…의원직 유지”. 연합뉴스.  ↑ “추미애, ‘문재앙·문슬람’ 악성댓글에 발끈”. 2018년 7월 2일에 확인함.  ↑ 미디어오늘 (2018년 1월 21일). “‘문재앙’ 비난 잡겠다는 추미애 대표가 더 위험하다”. 《미디어오늘》. 2018년 7월 2일에 확인함.  ↑ “홍준표 “문재앙 고소? 그럼 쥐박이 닭근혜는?” 발끈”.  ↑ “추미애 “박 대통령 계엄령까지 준비 정보…퇴진 안하면 권한정지 조치””. 2016년 11월 18일. 2018년 7월 2일에 확인함.  ↑ “정진석 “박근혜 대통령에 계엄령 선포권있지만 계엄해제권은 추미애 대표에게””. 《news.donga.com》. 2016년 11월 18일. 2018년 7월 2일에 확인함.  ↑ “軍 위수령 검토 문건 나오자 재조명받는 추미애 ‘계엄령’ 발언”. 《중앙일보》. 2018년 3월 21일. 2018년 7월 2일에 확인함.  ↑ 김태훈 (2018년 6월 6일). “[취재파일] SBS·JTBC 위수령 공방…언중위 '불성립' 결론”. 《SBS NEWS》. 2018년 7월 2일에 확인함.  ↑ 김용태 (2018년 7월 9일). “추미애 "기무사 계엄령 문건, 필요하면 국정조사·청문회"”. 《SBS NEWS》.  ↑ 기자, 양원보 (2018년 7월 3일). “[국회] "추미애 대표, 지난 1년간 상임위 출석률 0%"”. 2018년 7월 3일에 확인함.  ↑ 노조법 개정안 통과시킨 추미애 환노위원장 동아일보 2010-01-11 2016-08-31 확인 외부 링크[편집] 추미애 홈페이지 추미애 블로그 추미애 트위터 추미애 페이스북 추미애TV - 유튜브 추미애 - 대한민국헌정회 전임문재인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제2대 더불어민주당 대표2016년 8월 27일 ~ 2018년 8월 25일 후임이해찬 전 임 (성동구 갑)이세기(성동구 을)조세형(성동구 병)강수림(신설) 제15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을)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광진구 갑)김상우 후 임 (광진구 갑)김영춘(광진구 을)추미애 전 임 (광진구 갑)김상우(광진구 을)추미애 제16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을)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새천년민주당 (광진구 갑)김영춘 후 임 (광진구 갑)김영춘(광진구 을)김형주 전 임 (광진구 갑)김영춘(광진구 을)김형주 제18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을)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통합민주당 → 민주당 → 민주통합당 (광진구 갑)권택기 후 임 (광진구 갑)김한길(광진구 을)추미애 전 임 (광진구 갑)권택기(광진구 을)추미애 제19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을)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민주통합당 →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광진구 갑)김한길 후 임 (광진구 갑)전혜숙(광진구 을)추미애 전 임 (광진구 갑)김한길(광진구 을)추미애 제20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을) 2016년 5월 30일 ~ 더불어민주당 (광진구 갑)전혜숙 후 임 (현직) 전거 통제 VIAF: 691144928061754341491 ISNI: 0000 0004 6325 980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추미애&oldid=24511030" 분류: 대한민국의 제15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6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8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195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추계 추씨대구광역시 출신대구남산초등학교 동문구남중학교 (대구) 동문경북여자고등학교 동문한양대학교 동문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동문대한민국의 판사대한민국의 여자 법조인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의 대학 교수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당원열린우리당 당원대통합민주신당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더불어민주당 당원대한민국의 불교 신자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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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종합버스터미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순천종합버스터미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순천종합버스터미널 터미널 건물 모습 공식명칭 순천종합버스터미널 종류 터미널 국가 대한민국 주소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3길 13(장천동) 개장 1975년 이전 2008년 8월 20일 운영기관 금호홀딩스 터미널코드 고속 : 515시외 : 516 행선지표기 순천 고속버스 운행 운행 시외버스 운행 운행 시내버스 운행 미운행 웹사이트 금호터미널 순천종합버스터미널(順天綜合버스터미널)은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3길 13 (장천동 18-22)에 위치한 고속버스·시외버스 터미널이다. 고속버스 전산망상의 터미널 번호는 515이다. 시외버스 노선은 516 번호를 사용한다. 또한 이 터미널의 관리 주체는 금호고속이며 금호터미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차 1 역사 2 운행 노선 2.1 고속버스 2.2 시외버스 3 외부 링크 4 각주 역사[편집] 1975년에 전라남도 순천시 매곡동 475-1번지에 개장한 순천고속버스터미널이 이용객 증가와 시설 노후, 노선 확충으로 인하여 장소가 협소해짐에 따라, 순천시 장천동에 종합버스터미널을 새로 건립하여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2008년 8월 20일에 명칭을 '순천종합버스터미널'로 하기로 하고 시외버스터미널과 통합하여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1] 운행 노선[편집] 고속버스[편집] 2017년 1월 1일부터 당진행 노선 운행이 중단되었다. 운행노선 운행업체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 시간표 순천 ↔ 서울호남 금호고속천일고속 순천 ↔ 서울호남 순천북부[2], 정안휴게소 30~40분 첫차:05:40(순천 기준)막차:24:30(순천 기준) 순천 ↔ 대구 한일고속 순천 ↔ 동대구 순천북부[2], 서대구 4회 07:30, 11:30, 15:30, 19:30 순천 ↔ 부산 천일고속 순천 ↔ 부산 순천북부[2], 섬진강휴게소 8회 07:30, 09:00, 11:00, 13:00, 15:00, 17:00, 19:30, 21:00 순천 ↔ 부산서부[3] 금호고속 순천 ↔ 부산서부 순천북부[2], 섬진강휴게소 10회 08:00, 10:10, 11:00, 12:20, 13:50, 14:30, 15:20, 16:30, 18:00, 21:00 순천 ↔ 수원[4] 경기고속금호고속동양고속 순천 ↔ 수원 신갈, 영통입구 6회 07:15, 09:45, 12:15, 14:45, 17:15, 19:45 순천 ↔ 울산[5][6] 금호고속 순천 ↔ 울산 광양, 동광양, 김해, 신복 2회 10:00, 17:40 순천 ↔ 인천 금호고속삼화고속천일고속한일고속 순천 ↔ 인천 순천북부[2], 정안휴게소 5회 08:10, 11:10, 14:00, 16:00, 18:30 순천 ↔ 인천국제공항 금호고속 순천 ↔ 인천국제공항 송도국제도시 3회 00:00, 09:45, 12:00 순천 ↔ 통영 금호고속 순천 ↔ 통영 광양, 동광양, 섬진강휴게소 5회 08:10, 11:10, 14:40, 16:30, 18:10 시외버스[편집] 부천행 노선이 2012년 5월 29일 부로 폐선되었다가 2014년 8월 2일에 재개통되었다. 2015년 8월 14일부터 김해국제공항 노선이 신설되었다.[7] 2016년 5월 1일 : 춘천시외버스터미널로 운행하는 노선이 신설되었다.[8] 2018년 1월 1일부터 동래 경유 부산행 완행 노선이 운행 중단되었다. 방면 행선지 수도권 방면 고양, 동서울, 부천[9], 성남, 안산[10] 강원권 방면 원주[11], 춘천[11], 홍천[11] 충청권 방면 남청주, 청주 호남권 방면 강진, 고흥, 과역, 광양, 광양제철, 광영, 광주, 괴목, 구례, 금호교, 나로도, 남악, 남창, 남원, 녹동, 덕양, 독천, 동광양, 목포, 문화동, 배산, 백양, 벌교, 보성, 삼호, 섬진강휴게소, 성전, 성황, 여수, 여천, 예당, 완도, 운암동, 원동, 월송, 장흥, 전주, 조성, 태인교, 해남 영남권 방면 경주[12], 김해국제공항[13], 남해, 대교, 대사, 마산, 부산서부, 서대구, 전도, 진교, 진주, 창원, 포항[12] 매표소 개찰구 외부 링크[편집] 순천종합버스터미널 홈페이지 코버스 홈페이지 (순천발 고속버스 노선 예매) 버스타고 홈페이지 (순천발 시외버스 노선 예매) 각주[편집] ↑ 순천, 종합버스터미널 34년만에 통합 운영, 뉴시스, 2008년 8월 20일 작성. ↑ 가 나 다 라 마 하차만 가능하다. ↑ 2014년 11월 18일 신설. ↑ 고속으로 운행했다가 시외로 전환된 노선이다. ↑ 시외노선으로 인가받았지만 전산망은 고속버스 전산망을 사용한다. ↑ 2013년 7월 18일 부로 신규 개통. ↑ 광주~순천~광양~동광양~김해공항 노선 개통 안내, 금호고속 공지사항, 2015년 8월 13일. ↑ 춘천-전라도 순천 노선 증설, 강원고속 공지사항, 2016년 4월 29일. ↑ 2014년 8월 4일 운행 재개. ↑ 2014년 8월 8일 신설. ↑ 가 나 다 2016년 5월 1일 신설. ↑ 가 나 2015년 5월 8일 신설. ↑ 2015년 8월 14일 신설. vdeh대한민국의 시외·고속버스터미널서울특별시 서울경부 서울호남 동서울 서울서부 서울남부 상봉 가락시장 김포공항 동대문 마장동 수유리 신촌 잠실 장지역 인천광역시 강화 외포리 화도 인천 인천공항 부평역 송도 용현동 경기도 가평 목동 설악 청평 현리 고양 고양화정 광명 철산 광주 곤지암 구리 군포 김포 도농 · 금곡 · 평내 · 마석 동두천 부천 송내역 부천역·소사동·송내사거리 수원 광교중앙역 서수원 수원역 아주대 영통입구 우만동 성남 가천대 시흥 하늘휴게소 안산 상록수역 안성 공도 대림동산 양성 일죽 주은풍림 죽산 중앙대입구 안양역 · 안양 · 범계 · 호계동 · 비산동 양주역 양평 용문 여주 능서 대신 태평 전곡 오산 용인 백암 신갈 양지 유방동 의정부 의왕고천 의왕TG 이천 장호원 문산 금촌 운정 파주적성 평택 평택시외 송탄 안중 서정리·용이동·청북 평택대 해군기지 포천 송우 신북 운천 일동 하남 서신 동탄 조암 향남 강원도 강릉 강릉시외 주문진 간성 거진 대진 동해 동해시외 삼척 삼척시외 도계 임원 호산 속초 속초시외 양구 남면 양양 낙산 영월 상동 원주 원주시외 문막 인제 백담입구 신남 원통 현리 정선 고한사북 북평 임계 동송 신철원 와수 육단 춘천 춘천시외 강촌 태백 평창 대화 장평 진부 횡계 홍천 내면 서석 양덕원 화천 사창리 횡성 둔내 충청북도 괴산 연풍 단양 매포 보은 보은고속 속리산 영동 추풍령 황간 옥천 안내 청산 음성 감곡 대소 무극 삼성 생극 충북혁신도시 제천 제천시외 백운 증평 진천 광혜원 이월 청주 청주시외 청주공항 북청주 남청주 미원 오창 충주 목계 수안보 주덕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충청남도 대전 서대전 유성 유성시외 대전청사 대전도룡 관저·건양대병원 용두동 도마동 부사동 신흥동 북대전 자운대 조치원 세종 세종청사 고대홍대 전의 금암 · 신도안 · 양정 · 엄사 공주 공암 동학사 산성 유구 금산 논산 논산시외 강경 연무 연무시외 당진 기지시 삽교천 신평 합덕 보령 대천해수욕장 부여 홍산 서산 고북 해미 서천 장항 아산 아산시외 신창 예산 신례원 천안 병천 성환 쌍용 한기대 청양 정산 태안 만리포 안면도 홍성 광천 내포 전라북도 고창 대산공용 무장 상하 선운사 해리 흥덕 군산 군산시외 대야 김제 만경 원평 남원 남원시외 덕과 반선 인월 무주 구천동 안성 부안 격포 줄포 순창 적성 고산 대둔산 봉동 삼례 운주 익산 익산시외 금마 여산 함열 임실 관촌 강진공용 오수 장수 번암 장계 전주 전주시외 정읍 신태인 태인 진안 백운 안천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주 문화동 소태역 송정역 진월동 강진 마량 성전 고흥 과역 나로도 녹동 곡성 옥과 광양 광영 동광양 태인 구례 나주 영산포 영삼거리 다시 담양 목포 남악 무안 보성 벌교 예당 조성 순천 순북 점암 지도 여수 여천 영광 법성포 홍농 영암 독천 삼호 신북 완도 고금 당목 장성 장성사거리 장흥 노력항 회진 진도 녹진 함평 문장 학교 해남 땅끝 화순 능주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동대구 서대구 대구북부 · 대구서부 · 현풍 용계 경산 영남대 자인 하양 경주 경주시외 건천 산내 아화 안강 입실 고령 구미 구미공단 선산 군위 우보 김천 문경 점촌 가은 봉화 춘양 상주 함창 성주 안동 경북도청 안동역 길안 풍산 영덕 강구 병곡 영해 장사 영양 영주 풍기 풍기IC 꽃동산 영천 임포 예천 용궁 울진 기성 부구 온정 죽변 평해 후포 의성 단촌 도리원 안계 탑리 청도 운문사 청송 월정 주왕산 진보 왜관 약목 포항 포항시외 송라 청하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 부산서부 김해공항 동래 신평 하단 해운대 울산 울산시외 신복 방어진 언양 봉계·공업탑·남창·무거·옥동·웅촌·태화·호계·효문 고현 장승포 거창 고성 배둔 김해 장유 진영 남해 밀양 유천 표충사 사천 곤양 삼천포 산청 생초 원지 양산 통도사 의령 신반 진주 진주시외 개양 반성 창녕 남지 부곡 영산 창원 내서 남산 창원역 마산 마산시외 남마산 진해 통영 하동 진교 화개 함안 함양 백무동 서상 안의 합천 가야 삼가 초계 해인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 · 서귀포 고속도로 환승정류장 낙동강휴게소 선산휴게소 섬진강휴게소 인삼랜드휴게소 정안알밤휴게소 횡성휴게소  :현재 시외버스 노선이 운행하지 않거나 없어진 터미널 굵은 글씨는 고속버스가 운행하는 터미널 vdeh순천시의 교통철도노선 전라선 경전선 역 구례구역 봉덕역¹ 괴목역¹ 개운역¹ 동운역¹ 순천역 성산역¹ 원창역¹ 구룡역¹ 평화역¹ ¹ : 여객취급을 하지 않는 역 고속도로노선 남해 (10) 호남 (25) 순천완주 (27) 나들목·분기점 주암 나들목 승주 나들목 서순천 나들목 황전 나들목 동순천 나들목 순천 나들목 순천만 나들목 도롱 나들목 해룡 나들목 순천 분기점 일반도로국도 2호 15호 17호 18호 22호 27호 국지도 15호 22호 58호 지방도 840호 857호 863호 주요 간선도로간선도로 엑스포대로 녹색로 봉덕로 섬진강로 여순로 조계산로 충의공로 버스시내 순천 시내버스 고속·시외 순천 광천 괴목 송광 송광사 순북 순천역 승주 기타시내 마이비카드 캐시비 한페이 티머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순천종합버스터미널&oldid=24099452" 분류: 1975년 설립2008년 설립전라남도의 버스 교통대한민국의 버스 터미널순천시 (전라남도)의 교통순천시 (전라남도)의 건축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25일 (목) 11: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순천종합버스터미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순천종합버스터미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순천종합버스터미널 터미널 건물 모습 공식명칭 순천종합버스터미널 종류 터미널 국가 대한민국 주소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3길 13(장천동) 개장 1975년 이전 2008년 8월 20일 운영기관 금호홀딩스 터미널코드 고속 : 515시외 : 516 행선지표기 순천 고속버스 운행 운행 시외버스 운행 운행 시내버스 운행 미운행 웹사이트 금호터미널 순천종합버스터미널(順天綜合버스터미널)은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3길 13 (장천동 18-22)에 위치한 고속버스·시외버스 터미널이다. 고속버스 전산망상의 터미널 번호는 515이다. 시외버스 노선은 516 번호를 사용한다. 또한 이 터미널의 관리 주체는 금호고속이며 금호터미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차 1 역사 2 운행 노선 2.1 고속버스 2.2 시외버스 3 외부 링크 4 각주 역사[편집] 1975년에 전라남도 순천시 매곡동 475-1번지에 개장한 순천고속버스터미널이 이용객 증가와 시설 노후, 노선 확충으로 인하여 장소가 협소해짐에 따라, 순천시 장천동에 종합버스터미널을 새로 건립하여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2008년 8월 20일에 명칭을 '순천종합버스터미널'로 하기로 하고 시외버스터미널과 통합하여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1] 운행 노선[편집] 고속버스[편집] 2017년 1월 1일부터 당진행 노선 운행이 중단되었다. 운행노선 운행업체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 시간표 순천 ↔ 서울호남 금호고속천일고속 순천 ↔ 서울호남 순천북부[2], 정안휴게소 30~40분 첫차:05:40(순천 기준)막차:24:30(순천 기준) 순천 ↔ 대구 한일고속 순천 ↔ 동대구 순천북부[2], 서대구 4회 07:30, 11:30, 15:30, 19:30 순천 ↔ 부산 천일고속 순천 ↔ 부산 순천북부[2], 섬진강휴게소 8회 07:30, 09:00, 11:00, 13:00, 15:00, 17:00, 19:30, 21:00 순천 ↔ 부산서부[3] 금호고속 순천 ↔ 부산서부 순천북부[2], 섬진강휴게소 10회 08:00, 10:10, 11:00, 12:20, 13:50, 14:30, 15:20, 16:30, 18:00, 21:00 순천 ↔ 수원[4] 경기고속금호고속동양고속 순천 ↔ 수원 신갈, 영통입구 6회 07:15, 09:45, 12:15, 14:45, 17:15, 19:45 순천 ↔ 울산[5][6] 금호고속 순천 ↔ 울산 광양, 동광양, 김해, 신복 2회 10:00, 17:40 순천 ↔ 인천 금호고속삼화고속천일고속한일고속 순천 ↔ 인천 순천북부[2], 정안휴게소 5회 08:10, 11:10, 14:00, 16:00, 18:30 순천 ↔ 인천국제공항 금호고속 순천 ↔ 인천국제공항 송도국제도시 3회 00:00, 09:45, 12:00 순천 ↔ 통영 금호고속 순천 ↔ 통영 광양, 동광양, 섬진강휴게소 5회 08:10, 11:10, 14:40, 16:30, 18:10 시외버스[편집] 부천행 노선이 2012년 5월 29일 부로 폐선되었다가 2014년 8월 2일에 재개통되었다. 2015년 8월 14일부터 김해국제공항 노선이 신설되었다.[7] 2016년 5월 1일 : 춘천시외버스터미널로 운행하는 노선이 신설되었다.[8] 2018년 1월 1일부터 동래 경유 부산행 완행 노선이 운행 중단되었다. 방면 행선지 수도권 방면 고양, 동서울, 부천[9], 성남, 안산[10] 강원권 방면 원주[11], 춘천[11], 홍천[11] 충청권 방면 남청주, 청주 호남권 방면 강진, 고흥, 과역, 광양, 광양제철, 광영, 광주, 괴목, 구례, 금호교, 나로도, 남악, 남창, 남원, 녹동, 덕양, 독천, 동광양, 목포, 문화동, 배산, 백양, 벌교, 보성, 삼호, 섬진강휴게소, 성전, 성황, 여수, 여천, 예당, 완도, 운암동, 원동, 월송, 장흥, 전주, 조성, 태인교, 해남 영남권 방면 경주[12], 김해국제공항[13], 남해, 대교, 대사, 마산, 부산서부, 서대구, 전도, 진교, 진주, 창원, 포항[12] 매표소 개찰구 외부 링크[편집] 순천종합버스터미널 홈페이지 코버스 홈페이지 (순천발 고속버스 노선 예매) 버스타고 홈페이지 (순천발 시외버스 노선 예매) 각주[편집] ↑ 순천, 종합버스터미널 34년만에 통합 운영, 뉴시스, 2008년 8월 20일 작성. ↑ 가 나 다 라 마 하차만 가능하다. ↑ 2014년 11월 18일 신설. ↑ 고속으로 운행했다가 시외로 전환된 노선이다. ↑ 시외노선으로 인가받았지만 전산망은 고속버스 전산망을 사용한다. ↑ 2013년 7월 18일 부로 신규 개통. ↑ 광주~순천~광양~동광양~김해공항 노선 개통 안내, 금호고속 공지사항, 2015년 8월 13일. ↑ 춘천-전라도 순천 노선 증설, 강원고속 공지사항, 2016년 4월 29일. ↑ 2014년 8월 4일 운행 재개. ↑ 2014년 8월 8일 신설. ↑ 가 나 다 2016년 5월 1일 신설. ↑ 가 나 2015년 5월 8일 신설. ↑ 2015년 8월 14일 신설. vdeh대한민국의 시외·고속버스터미널서울특별시 서울경부 서울호남 동서울 서울서부 서울남부 상봉 가락시장 김포공항 동대문 마장동 수유리 신촌 잠실 장지역 인천광역시 강화 외포리 화도 인천 인천공항 부평역 송도 용현동 경기도 가평 목동 설악 청평 현리 고양 고양화정 광명 철산 광주 곤지암 구리 군포 김포 도농 · 금곡 · 평내 · 마석 동두천 부천 송내역 부천역·소사동·송내사거리 수원 광교중앙역 서수원 수원역 아주대 영통입구 우만동 성남 가천대 시흥 하늘휴게소 안산 상록수역 안성 공도 대림동산 양성 일죽 주은풍림 죽산 중앙대입구 안양역 · 안양 · 범계 · 호계동 · 비산동 양주역 양평 용문 여주 능서 대신 태평 전곡 오산 용인 백암 신갈 양지 유방동 의정부 의왕고천 의왕TG 이천 장호원 문산 금촌 운정 파주적성 평택 평택시외 송탄 안중 서정리·용이동·청북 평택대 해군기지 포천 송우 신북 운천 일동 하남 서신 동탄 조암 향남 강원도 강릉 강릉시외 주문진 간성 거진 대진 동해 동해시외 삼척 삼척시외 도계 임원 호산 속초 속초시외 양구 남면 양양 낙산 영월 상동 원주 원주시외 문막 인제 백담입구 신남 원통 현리 정선 고한사북 북평 임계 동송 신철원 와수 육단 춘천 춘천시외 강촌 태백 평창 대화 장평 진부 횡계 홍천 내면 서석 양덕원 화천 사창리 횡성 둔내 충청북도 괴산 연풍 단양 매포 보은 보은고속 속리산 영동 추풍령 황간 옥천 안내 청산 음성 감곡 대소 무극 삼성 생극 충북혁신도시 제천 제천시외 백운 증평 진천 광혜원 이월 청주 청주시외 청주공항 북청주 남청주 미원 오창 충주 목계 수안보 주덕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충청남도 대전 서대전 유성 유성시외 대전청사 대전도룡 관저·건양대병원 용두동 도마동 부사동 신흥동 북대전 자운대 조치원 세종 세종청사 고대홍대 전의 금암 · 신도안 · 양정 · 엄사 공주 공암 동학사 산성 유구 금산 논산 논산시외 강경 연무 연무시외 당진 기지시 삽교천 신평 합덕 보령 대천해수욕장 부여 홍산 서산 고북 해미 서천 장항 아산 아산시외 신창 예산 신례원 천안 병천 성환 쌍용 한기대 청양 정산 태안 만리포 안면도 홍성 광천 내포 전라북도 고창 대산공용 무장 상하 선운사 해리 흥덕 군산 군산시외 대야 김제 만경 원평 남원 남원시외 덕과 반선 인월 무주 구천동 안성 부안 격포 줄포 순창 적성 고산 대둔산 봉동 삼례 운주 익산 익산시외 금마 여산 함열 임실 관촌 강진공용 오수 장수 번암 장계 전주 전주시외 정읍 신태인 태인 진안 백운 안천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주 문화동 소태역 송정역 진월동 강진 마량 성전 고흥 과역 나로도 녹동 곡성 옥과 광양 광영 동광양 태인 구례 나주 영산포 영삼거리 다시 담양 목포 남악 무안 보성 벌교 예당 조성 순천 순북 점암 지도 여수 여천 영광 법성포 홍농 영암 독천 삼호 신북 완도 고금 당목 장성 장성사거리 장흥 노력항 회진 진도 녹진 함평 문장 학교 해남 땅끝 화순 능주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동대구 서대구 대구북부 · 대구서부 · 현풍 용계 경산 영남대 자인 하양 경주 경주시외 건천 산내 아화 안강 입실 고령 구미 구미공단 선산 군위 우보 김천 문경 점촌 가은 봉화 춘양 상주 함창 성주 안동 경북도청 안동역 길안 풍산 영덕 강구 병곡 영해 장사 영양 영주 풍기 풍기IC 꽃동산 영천 임포 예천 용궁 울진 기성 부구 온정 죽변 평해 후포 의성 단촌 도리원 안계 탑리 청도 운문사 청송 월정 주왕산 진보 왜관 약목 포항 포항시외 송라 청하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 부산서부 김해공항 동래 신평 하단 해운대 울산 울산시외 신복 방어진 언양 봉계·공업탑·남창·무거·옥동·웅촌·태화·호계·효문 고현 장승포 거창 고성 배둔 김해 장유 진영 남해 밀양 유천 표충사 사천 곤양 삼천포 산청 생초 원지 양산 통도사 의령 신반 진주 진주시외 개양 반성 창녕 남지 부곡 영산 창원 내서 남산 창원역 마산 마산시외 남마산 진해 통영 하동 진교 화개 함안 함양 백무동 서상 안의 합천 가야 삼가 초계 해인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 · 서귀포 고속도로 환승정류장 낙동강휴게소 선산휴게소 섬진강휴게소 인삼랜드휴게소 정안알밤휴게소 횡성휴게소  :현재 시외버스 노선이 운행하지 않거나 없어진 터미널 굵은 글씨는 고속버스가 운행하는 터미널 vdeh순천시의 교통철도노선 전라선 경전선 역 구례구역 봉덕역¹ 괴목역¹ 개운역¹ 동운역¹ 순천역 성산역¹ 원창역¹ 구룡역¹ 평화역¹ ¹ : 여객취급을 하지 않는 역 고속도로노선 남해 (10) 호남 (25) 순천완주 (27) 나들목·분기점 주암 나들목 승주 나들목 서순천 나들목 황전 나들목 동순천 나들목 순천 나들목 순천만 나들목 도롱 나들목 해룡 나들목 순천 분기점 일반도로국도 2호 15호 17호 18호 22호 27호 국지도 15호 22호 58호 지방도 840호 857호 863호 주요 간선도로간선도로 엑스포대로 녹색로 봉덕로 섬진강로 여순로 조계산로 충의공로 버스시내 순천 시내버스 고속·시외 순천 광천 괴목 송광 송광사 순북 순천역 승주 기타시내 마이비카드 캐시비 한페이 티머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순천종합버스터미널&oldid=24099452" 분류: 1975년 설립2008년 설립전라남도의 버스 교통대한민국의 버스 터미널순천시 (전라남도)의 교통순천시 (전라남도)의 건축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25일 (목) 11: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비교종교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교종교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교종교학(Comparative religion)이란 세계 종교들의 교리와 실천을 조직적으로 비교하는 종교 연구의 한 분야이다. 일반적으로 비교 종교학 연구는 윤리학, 형이상학 그리고 구원의 본질과 형태와 같은 종교의 근본적이며 철학적 관심을 깊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은 거룩, 초자연적 것, 영적 존재, 그리고 신과 관련된 인간의 믿음과 실천을 넓고 더 세밀하게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1] 비교 종교학 분야에서 일반적인 주된 세계 종교의 지리적 분류 는 중동종교, 인디언 종교, 동 아시아 종교, 아프리카의 종교, 아메리카 종교, 태평양 종교, 그리고 고대 헬레니즘 종교들이다.[2] 목차 1 역사  2 전통에 대한 비교 2.1 바하이 신앙 2.2 불교 2.3 기독교 2.4 유교 2.5 힌두교 2.6 이슬람 2.7 자이나교 2.8 유대교 2.9 이교 2.10 시크교 2.11 도교 2.12 조로아스터교 3 각주 역사 [편집] 19세기의 사회학자들은 비교종교와 원시종교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다음과 같은 학자들의 작품을 통하여 영향을 받았다. 막스 뮐러, 에드워드 테일러 버넷, 로버트슨 윌리엄 스미스, 제임스 프레이저 조지,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 루돌프 오토였다.[3] 도교의 중심개념인 타오, 전통에 대한 비교[편집] 바하이 신앙[편집] 바하이 신앙과 화합의 종교 바하이 신앙과 불교 바하이 신앙고 힌두교 바하이 신앙과 조로아스터교 불교[편집] 불교 및 기독교 불교와 동방 종교들 불교와 영지주의 불교와 힌두교 불교와 자이나교 불교와 Theosophy 불교와 이슬람 의 비교 불교와 기독교 기독교[편집]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불교 및 기독교 의 비교 불교와 기독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와 유대교 기독교 Neopaganism 기독교와 이교 기독교는 부두 몰몬교 몰몬교 및 기독교 몰몬교와 이슬람 몰몬교와 유대교 유교[편집] 유교와 동방 종교들 유교이고 서양 종교 힌두교[편집] 힌두교 및 기타 종교 Ayyavazhi 힌두교 불교와 힌두교 힌두교는 이슬람의 관계 이슬람[편집] 이슬람교와 다른 종교들 기독교와 이슬람교 힌두교는 이슬람의 관계 이슬람교와 자이나교 이슬람이 유대인의 관계 아흐 마디 야 유대인의 관계 이슬람교 몰몬교와 이슬람 자이나교[편집] 불교와 자이나교 이슬람교와 자이나교 자이나교하고 시크교 유대교[편집]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이 유대인의 관계 아흐 마디 야 유대인의 관계 힌두교와 유대교 이교[편집] 기독교와 이교 기독교 Neopaganism 시크교[편집]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하고 시크교 도교[편집] 도교 및 기타 종교 조로아스터교[편집] 조로아스터교와 다른 종교들 각주[편집] ↑ "Human beings' relation to that which they regard as holy, sacred, spiritual, and divine"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2006), cited after “Definitions of Religion”. 《Religion facts》.  ↑ Charles Joseph Adams, Classification of religions: geographical, Encyclopædia Britannica ↑ Hans Kippenberg, Discovering Religious History in the Modern Age (200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교종교학&oldid=24080394" 분류: 비교종교학종교학신학철학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MagyarBahasa Indonesia日本語മലയാളംBahasa MelayuNorskPortuguêsРусский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1일 (일) 18: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송영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영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송영무宋永武 2017년 8월 대한민국의 제45대 국방부 장관 임기 2017년 7월 13일 ~ 2018년 9월 21일 대통령 문재인 총리 이낙연 전임 한민구 후임 정경두 대한민국의 제26대 해군참모총장 임기 2006년 11월 17일 ~ 2008년 3월 20일 전임 남해일 후임 정옥근 신상정보 국적 대한민국 출생일 1949년 2월 24일(1949-02-24) (70세) 출생지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 본관 은진(恩津) 학력 경남대학교 대학원 산업경영학 석사 정당 더불어민주당 배우자 구자정 자녀 슬하2녀 종교 천주교(세례명: 체사리오) 군사 경력 군복무 대한민국 해군 복무기간 1973년 ~ 2008년 최종계급 대장 송영무(宋永武, 1949년 2월 24일 ~ )는 대한민국의 제45대 국방부 장관이다. 본관은 은진(충청남도 논산)이며, 송시열의 13대손이다. 2007년 해군참모총장 시절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송시열의 서예 작품 16점을 공개했다.[1] 목차 1 생애 2 학력 3 진급 4 경력 5 가족 관계 6 논란 6.1 음주운전 6.2 동료 음주운전 무마의혹 6.3 위장전입 6.4 계룡대 군납비리 축소의혹 6.5 '미니스커트' 발언 6.6 '여성 행동거지 조심해야' 발언 6.7 '의전 문제로 짜증' 발언 6.8 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준비 사건 관련 7 서훈 8 각주 9 참고 자료 10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49년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학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해군 2함대 제2전투전단장 재직시 남북한 함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해역에서 충돌한 제1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2] 노무현 정부에서 제26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안보연구소 연구위원, 국방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017년 6월 11일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되었으나, 1991년 음주운전 경력, '계룡대 군납비리 사건' 수사 축소 등으로 인사청문회 시 난항 끝에 청문보고서 채택이 무산되었으나, 7월 13일 임명되었다.[3][4] 해군 출신이 국방부 장관이 된 것은 역대 3번째이다.[2] 문재인 정부 1기 내각중 지명부터 임명까지 가장 오랜 기간이 걸렸다.[5] 국방부 장관으로서 본인들도 가고 싶고 부모들도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병영 문화 창조, 한미동맹 발전, 여군 인력 확대 및 근무 여건 개선, 방위산업 육성, 국가 재난 등 비군사적 위협에 대비한 포괄적 안보체제 구축 등을 국방개혁 과제로 제시했다.[6][7] 학력[편집] 동산초등학교 → 대전삼성초등학교 한밭중학교 대전고등학교 해군사관학교 27기 학사 육군보병학교 수료 해군대학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29기(1984년) 경남대학교 대학원 산업경영학과 석사 진급[편집] 1973년 해군 소위 임관 1997년 해군 준장 진급 2000년 해군 소장 진급 2005년 해군 중장 진급 2006년 해군 대장 진급 경력[편집] 1985년 1월 ~ 1985년 11월 : 해군대학 정규과정교육 수료 1985년 12월 ~ 1986년 2월 : 해군대학 교수부 교관 1986년 2월 ~ 1987년 5월 : 해군 제2함대사령부 덕봉함장 1987년 6월 ~ 1990년 7월 : 해군 제5전단 작전참모실 요트지원정작참모, 작전참모 1990년 7월 ~ 1991년 7월 : 해군작전사령부 작전참모처 계획과장 1991년 7월 ~ 1992년 8월 : 해군본부 작전종합상황실장 1992년 8월 ~ 1993년 12월 : 해군 제2함대사령부 청주함장 1993년 12월 ~ 1997년 12월 : 합동참모본부 해상작전과장 1997년 12월 ~ 1999년 1월 : 합동참모본부 시험평가부장 1999년 1월 ~ 2000년 11월 : 해군 제2함대사령부 2전투전단장 2000년 11월 ~ 2002년 1월 : 해군 제1함대사령관 2002년 1월 ~ 2003년 4월 : 해군본부 조함단장 2003년 4월 ~ 2004년 4월 :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2005년 4월 ~ 2005년 10월 : 합동참모본부 인사군수참모본부장 (해군 중장) 2005년 10월 ~ 2006년 11월 :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본부장 2006년 11월 ~ 2008년 3월 : 제26대 해군참모총장[8] (해군 대장) 2008년 3월 ~ 2010년 3월 : 국방과학연구소 정책위원 2009년 1월 ~ 2011년 9월 : 법무법인 율촌 상임고문 2012년 5월 ~ 2016년 6월 :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자문위원 2013년 5월 ~ 2017년 6월 :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석좌교수 2015년 11월 ~ 2017년 7월 : 더불어민주당 안보연구소 연구위원 2016년 10월 ~ 2017년 7월 : 더불어민주당 국방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 2017년 7월 13일 ~ 2018년 9월 21일 : 제45대 국방부 장관 2018년 11월 ~ 현재 : 더불어민주당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안보자문위원 가족 관계[편집] 고조부는 구한말 을사늑약 이후 자결한 애국지사 송병선이다. 배우자 구자정과의 사이에 현재 1녀가 있다. 1995년 암으로 투병하던 차녀가 세상을 떠났다. 논란[편집] 음주운전[편집] 2017년 6월 28일 인사청문회에서 중령으로 진해 해군작전사령부에 근무하던 시절인 1991년 3월 25일 새벽,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된 사실이 드러났으나 처벌을 받지 않아 논란이 있었다. 음주 적발 후 헌병대 및 법무실의 조사 없이 바로 사건 종결 처리됐으며, 이로 인해 그해 7월 무난히 대령으로 승진[9]했다. 음주운전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경찰에 금품을 제공하였다는 의혹[10]도 있다. 송영무 장관은 인사청문회 당시 입장문을 통해 "후보자로서 다시 한 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음주운전 사실을 인정[11]하였다. 동료 음주운전 무마의혹[편집] 1991년 7월 송영무 장관이 해군본부 종합실장이던 시절, 회식하고 늦은 시간에 노량진 경찰서에서 대령 두 명과 동기생과 함께 음주 운전에 적발되었다는 의혹[12]이 있다. 송영무 장관은 인사청문회 당시 소명서에서 “내가 운전한게 아니라 동기인 박 모 대령이 운전했고 동석했다”며 음주 운전 차량에 동석했음을 인정[13]하였다. 위장전입[편집] 문재인 대통령이 '5대 공직 배제 기준'으로 정한 사유 중 하나인 위장전입 사실[14]이 있다. 1989년 해군 제5전단 작전참모로 재직할 당시 경남 진해의 군인관사에 살면서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대전의 아버지 집으로 위장전입한 사실을 장관 지명 당시 밝혔다.[15] 하지만, 그외 1991년 11월에도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충무아파트에 거주하던 송 장관이 신규 분양 받은 대전 한신아파트의 담보 대출 조건 때문에 본인의 주민등록을 이전한 사실과 1994년 10월과 1997년 8월에도 실제로는 충무아파트에 실제 거주하면서 주소지만 각각 형의 자택과 고조부의 기념사당(문충사)으로 옮기는 등 총 네 차례 위장전입이 추가로 드러나, 위장전입 사실을 축소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16] 계룡대 군납비리 축소의혹[편집] 계룡대 군납비리를 밝힌 김영수 전 해군소령으로부터 "국방 개혁 적임자라 일컬어지는 송영무 씨 주변 인물들이 사실 개혁과 거리가 먼 비리 카르텔의 당사자들"이라는 비판[17]을 받았다. 2007년 8월 송영무 당시 해군총장이 계룡대 군납비리에 대한 수사를 축소시키려고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으며, 이 사건은 2년 뒤인 2009년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재조사를 받고 부실수사로 판명되었다.[18] 계룡대 군납비리 내부고발자인 김영수 전 소령이 전직하기 전의 면담에 대해 송영무 장관이 미화 왜곡해 퍼뜨린 것을 김 전 소령이 사실을 밝혔고, 장관 임명 전에도 불리한 내용이 나오지 않도록 미리 입단속하고자 "언론에 좋은 말 해달라"며 전화했다가 녹취록이 공개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19] '미니스커트' 발언[편집] 2017년 11월 27일 북한군 병사가 탈북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해 사건 현장을 둘러본 뒤 경비대대 식당에서 병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원래 식사 자리에서 얘기하면 재미가 없는 건데 식사 전 얘기와 미니스커트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한다”고 말했다.[20] '여성 행동거지 조심해야' 발언[편집] 2018년 7월 9일 용산 육군회관에서 열린 성고충전문상담관 간담회에서 "여성들이 행동거지라든가 말하는 것 조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오늘 간담회에서 이야기한 것이 본의 아니게 오해가 된 것이 있다"며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국무위원인 장관으로서 유감을 표한다"고 사과하였다.[21] '의전 문제로 짜증' 발언[편집] 5명의 장병이 사망한 해병대 상륙기동헬기 '마린온' 추락사고와 관련하여, 김도읍 자유한국당 의원이 "마린온 유족들이 상당히 분노해 있는 것을 알고 있나"라고 묻자 "유족들께서 의전 문제에 있어 흡족하지 못해 짜증이 나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답변했다.[22] 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준비 사건 관련[편집] 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준비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민병삼 100기무부대장 대령은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송영무 장관이 7월 9일 간담회에서 '위수령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폭로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송 장관은 "완벽한 거짓말이다"라고 부인했고, 두 사람 중 누구의 말이 맞는지 사실관계를 둘러싼 공방이 있었다. 그런데 국군기무사령부 보고서에 의하면, "위수령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법조계에 문의해보니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계획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장관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다만 직권남용에 해당되는지 검토하기 바란다"라는 송 장관의 발언이 적혀 있었다. 이는 "완벽히 거짓말"이라는 송 장관의 발언과 배치된다.[23] 국방장관의 발언을 현역 대령이 반박하는 것이 상당히 이례적이며, 사실관계 여부를 떠나 송 장관의 리더십에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가 있다.[24] '하극상' 논란 이후 청와대의 송 장관 경질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청와대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25] 서훈[편집] 1980년 : 대통령표창 1988년 : 국무총리표창 1999년 : 충무무공훈장 2004년 : 보국훈장 천수장 2008년 : 보국훈장 통일장[26] 각주[편집] ↑ “[Who Is ?] 송영무 국방부 장관”. 《비즈니스포스트》. 2017년 6월 19일.  ↑ 가 나 “역대 세번째 해군출신, 송영무 국방장관 후보자는 누구?”. 2018년 7월 9일에 확인함.  ↑ “[속보]文, 송영무 국방장관 임명, 조대엽은 노동장관 후보는 사퇴…청와대와 여야 '빅딜' 성사”. 2018년 1월 3일에 확인함.  ↑ “[300랭킹]임명장 수여까지 32일?…우여곡절 장관 베스트7”. 2018년 1월 3일에 확인함.  ↑ “[300랭킹]임명장 수여까지 32일?…우여곡절 장관 베스트7”. 2018년 1월 3일에 확인함.  ↑ 이영재. 송영무, 취임 일성 "새로운 국군 건설"…고강도 국방개혁 예고. 연합뉴스. 2017년 7월 14일. ↑ 조규희. (전문)송영무 국방부장관 취임사 "국방개혁 넘어 새 국군 건설". 뉴스1. 2017년 7월 14일. ↑ 대한민국해군 (n.d.). “역대참모총장-26대 해군참모총장 대장 송영무”. 《대한민국해군》. 2017년 7월 16일에 보존된 문서. 2017년 7월 17일에 확인함.  ↑ “[종합]송영무, 음주운전 은폐 의혹에 "은폐 시도 없었지만 송구하다"”.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김학용 "송영무 동기 음주운전 무마 과정서 금품 오갔다"”.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종합]송영무, 음주운전 은폐 의혹에 "은폐 시도 없었지만 송구하다"”.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송영무, 이번엔 동료 음주운전 무마 의혹”.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김학용, 음주운전 추가 폭로…송영무 "운전자는 동기 대령"”.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일문일답]靑 “조대엽 고용 음주운전·송영무 국방 ‘위장전입’ 확인””.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4차례 위장전입 있었다"…송영무, 위장전입 축소 의혹”.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한 번이라더니… 송영무 후보자, 4차례 위장전입”.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단독] “송영무가 군납비리 수사 막았다고 들어…비리 카르텔 우려””.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송영무, '계룡대 군납비리' 솜방망이 처분 지시 정황 포착”.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송영무, 군납비리 내부고발자에 부적절한 전화”. 2017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미니스커트는 짧을수록 좋아” 송영무 국방장관 또 구설”. 2018년 1월 3일에 확인함.  ↑ 김호준 (2018년 7월 9일). “송영무, 여성 행동거지 언급 '설화'후 공식사과…"부적절했다"(종합)”. 《연합뉴스》. 2018년 7월 9일에 확인함.  ↑ “송영무 "마린온 유족, 의전 문제로 짜증 나신게 아닌가"”. 《중앙일보》. 2018년 7월 20일.  ↑ 한지훈 (2018년 7월 25일). “"위수령 잘못된 것 아니다" 송영무 발언 적힌 보고서 확인(종합)”. 《연합뉴스》.  ↑ 기자, 유선의 (2018년 7월 25일). “'하극상' 논란, 송영무-기무사 진실공방…한민구 출금 배경은”.  ↑ 임형섭 (2018년 8월 1일). “靑, '송영무 경질 가닥' 보도에 "확인해 드릴 게 없다"”. 《연합뉴스》.  ↑ 임헌정. 나란히 서 있는 전임.신임 해참총장. 연합뉴스. 2008년 3월 21일. 참고 자료[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송영무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송영무 - 네이버 인물검색 송영무 - 다음 인물백과 외부 링크[편집] 전임한민구 제45대 국방부 장관2017년 7월 13일 ~ 2018년 9월 21일 후임정경두 전임남해일 제26대 해군참모총장2006년 11월 17일 ~ 2008년 3월 20일 후임정옥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송영무&oldid=24229586" 분류: 194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은진 송씨논산시 출신대전삼성초등학교 동문한밭중학교 동문대전고등학교 동문해군사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육군보병학교 동문해군대학교 동문국방대학교 동문경남대학교 대학원 동문대한민국 해군 대장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건양대학교 교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문재인 정부의 국무위원친문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더불어민주당 당원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日本語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6일 (목) 11: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신효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효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효섭이 본명인 가수에 대해서는 크러쉬 (음악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신효섭출생 1982년 7월 30일(1982-07-30) (36세)서울특별시국적 대한민국 별칭 신군직업 요리사 & 요리 연구가소속 (前) 에이셰프컴퍼니 인스키친배우자 김민지웹사이트 신효섭 네이버 블로그 신효섭(1982년 7월 30일 ~ )은 대한민국의 요리사이다. 목차 1 경력 2 퍼포먼스 3 방송 출연 4 외부 링크 경력[편집] 신군의 쿠킹 클래스 & 동양매직 오븐 클래스 강의 INS Kitchen 대표이사 퍼포먼스[편집] GS Professional 심사위원 중앙일보 셰프배틀 심사위원 미국 유제품 수출 협의회 홍보대사 미국 육류협회 홍보대사 중국 상하이 RC 푸드박람회 한국김치요리 강연 방송 출연[편집] 《찾아라! 맛있는 TV》 (MBC) 《초건방》 (SBS E!TV) 《독립생활백서》 (올리브 TV) 《한식대탐험》 (KBS2) 《놀라운 대회 스타킹》 (SBS) 《무한걸스》 (MBC Every1) 《커플쇼! 결혼해도 될까요?》 (KBS Joy) 《공감! 특별한 세상》 (MBC) 《양희은의 오색오미》 (MBC) 《출발! 모닝와이드》 (SBS) 《신군네 반찬가게》 (Story On) 《쉘라쉘라 영어로 쿠킹》 (올리브 TV) 《1 대 100》 (KBS2) 《아침마당》 (KBS) 《리빙쇼》 (KBS2) 《브런치》 (tvN) 《생생 정보통》 (KBS2) 《최고의 요리비결》 (EBS) 《이승연과 100인의 여자》 (Story On) 《퀴즈쇼 사총사》 (KBS2)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 아침》 (SBS) 《놀러와》 (MBC) 《여자들의 고민을 풀어주는 식당》 (KBS W) 《자연愛죽》 (올리브 TV) 《新 대동여지도》 (채널A) 《자기야 - 백년손님》 (SBS) 《보양밥상》 (쿠키건강TV) 《그대가 꽃》 (KBS1) 외부 링크[편집] 인스키친 이 글은 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효섭&oldid=23985858" 분류: 1982년 태어남한국 요리 연구가대한민국의 요리사살아있는 사람서울특별시 출신숨은 분류: 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7일 (일) 18: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크라브 마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크라브 마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크라브 마가 (1955년) 크라브 마가(히브리어: קרב מגע, 영어: Krav Maga)는 이스라엘 방위군(IDF)과 이스라엘 안전보장군(샤바크, 모사드)를 위해 개발된 군사 자기방어 체계의 하나로서[1][2], 실질적인 전투 훈련과 더불어 복싱, 레슬링, 아이키도, 유도, 공수도를 기원으로 하는 기법들을 절충하였다.[3][4] 크라브 마가는 실제 상황과 극대의 효율성[5][6], 잔인한 정도의 역습[7]에 초점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라브 마가는 헝가리계 유대인 무술가 이미 리치텐필드(Imi Lichtenfeld)의 길거리 싸움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는 1930년대 중후반 브라티슬라바의 파시스트 그룹을 상대로 유대인을 보호할 수단으로서 복싱 선수이자 레슬링 선수였던 자신의 훈련을 활용하였다.[8] 1940년대 말에 그는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IDF 예정자에게 전투 훈련 수업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 때부터 크라브 마가의 원래 개념은 다른 전투 스타일의 가장 단순하고 실용적인 기법들(원래는 유럽 복싱, 레슬링, 길거리 싸움)을 취하고 군사 징집병들에게 조속히 교육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9] 그 결과 크라브 마가는 서양 권투, 레슬링, 길거리 싸움의 원초적 기반 위에 개발되었다. 크라브 마가는 철학에 중점을 둔 공격[10] 및 방어, 공격을 동시에 취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11] 크라브 마가는 이스라엘 방위군의 특수부대, 안보 기관, 정규 보병부대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12] 밀접하게 관련된 여러 종류의 크라브 마가가 개발되어 이스라엘의 법 집행 기관과 정보 기관에 채택되었다. 영국 SAS, 미국 해병대와 같이 여러 종류의 크라브 마가를 국제적으로 교육하는 단체들이 몇 군데 있다.[13][14][15] 목차 1 용어 2 현황 3 같이 보기 4 각주 5 외부 링크 용어[편집] 크라브 마가는 히브리어의 이름으로, 접촉 전투(contact combat)로 번역할 수 있다. 크라브(קרב)는 "전투", 마가(מגע)는 "접촉"을 의미한다. 현황[편집] 크라브 마가의 벨트와 패치 화이트 옐로 오렌지 그린 블루 브라운 블랙 이스라엘리 크라브 마가 협회(Israeli krav maga association, IKMA)는 크라브 마가의 창시자인 이미 리치텐필드와 그의 제자인 하임 기드온이 1978년에 세계 최초로 설립한 크라브 마가 교육기관이며, 크라브 마가의 벨트는 화이트부터 옐로우, 오렌지, 그린, 블루, 브라운, 블랙벨트까지 있으며, 각 벨트마다 수련기간이 1년에서 길게는 3년으로 블랙벨트까지 오랜 기간의 수련을 요구한다. 창시자가 1996년 사망한 뒤에 창시자로부터 블랙 10단을 승인받은 하임 기드온이 현재 협회장으로 있다. 하임 기드온은 이스라엘 윈게이트에서 크라브마가 부분 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 하임은 그랜드 마스터라는 칭호로 불리는데, 통산 블랙 7단 이상부터 부여 받는 것이다. 지도자 교육은 매년 이스라엘에서 협회장 하임 기드온의 지도하에 정기적으로 진행된다. 같이 보기[편집] 무예 이스라엘리 크라브마가 코만도 크라브 마가 각주[편집] ↑ When Things Seem Odd: Polly and the Internal Guardian, FriesenPress, 12 January 2016, By Michael Joseph Legare ISBN 978-1-4602-7751-5 ↑ Green, Thomas A. 《Martial Arts of the World: En Encyclopedia》 (영어). ABC-CLIO. ISBN 9781576071502. 2017년 4월 13일에 확인함.  ↑ “Pure Krav Maga - Self Defense Mastery(TM): Eli Avikzar the Second in Israeli Defense Force Krav Maga Chief Instructor”. 《kravmaganewyork.blogspot.com》.  ↑ “Krav Maga Federation - Israeli Martial Arts and Self-Defense”. 《kravmagainc.com》.  ↑ Levine, Darren; Whitman, John (2009년 4월 1일). 《Complete Krav Maga: The Ultimate Guide to Over 200 Self-Defense and Combative Techniques》. ISBN 9781569751794. 2015년 4월 3일에 확인함.  ↑ RAJMOHAN, SOORAJ (2013년 4월 4일). “The tactics of Krav Maga”. The Hindu. 2015년 4월 3일에 확인함.  ↑ Poulomi Banerjee (2009년 1월 28일). “Contact combat: Self-Defence classes to stay safe”. 《The Telegraph》. 2017년 11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5일에 확인함.  ↑ Hodsdon, Amelia (2005년 2월 8일). “Get your kicks with Israeli tricks”. 《The Guardian》. 2013년 3월 5일에 확인함.  ↑ Black Belt, Nov 2002, Vol. 40, No. 11, page 68 ↑ Black Belt, July 2000, July 2000, Vol. 38, No. 7, page 37 ↑ “All change on the buses”. 《BBC News》. 1998년 1월 15일. 2013년 3월 5일에 확인함.  ↑ “Elite soldiers fight it out in IDF's first-ever Krav Maga tournament”. 《IDF Blog》. 2014년 8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9월 18일에 확인함.  ↑ Jim Wagner and Maj. Avi Nardia. “Inside Israel”. 《Black Belt Magazine》. 2010년 5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2월 31일에 확인함.  ↑ Judy Ellis (1998년 5월 4일). “Choke! Gouge! Smash!”. 《Time》. 2010년 1월 1일에 확인함.  ↑ Ryan, Rosalind (2002년 8월 23일). “J.Lo's fitness fad and Salma's 'sweaty' hobby”. 《Daily Mail》. 2013년 3월 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이스라엘리 크라브마가 협회 전거 통제 LCCN: sh2004005517 GND: 4739540-0 SUDOC: 12149814X BNF: cb15601546t (데이터) BNE: XX516059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크라브_마가&oldid=24119711" 분류: 히브리어 낱말이스라엘의 무술크라브 마가숨은 분류: CS1 - 영어 인용 (en)히브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ܐܪܡܝܐAsturianu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FryskHawaiʻiעברית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ភាសាខ្មែរKurdîLadinoLietuviųMāori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PolskiPiemontèis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ייִדיש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9일 (월) 14: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시체들의 새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체들의 새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2 - 시체들의 새벽George A. Romero's Dawn Of The Dead 감독 조지 로메로 제작 질라 클린턴도나 시겔리처드 P. 루빈스타인클라우디오 아르젠토알프레도 커오모 각본 조지 로메로다리오 아르젠토 촬영 마이클 고닉 편집 조지 로메로 음악 고블린아고스티노 마랑골로마시모 모란트다리오 아르젠토클라우디오 시모네티아고스티노 마랑골로파비오 피그너텔리조지 로메로 개봉일 1978년 9월 (1978-09) (이탈리아)1979년 (1979) (미국) 시간 116분 국가 언어 영어 제작비 $500,000 $55,000,000 《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은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호러영화 작품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년)에 이어 1978년에 공개되었다. 당시 무명이었던 조지 A. 로메로는, 이 작품을 계기로 ‘마스터 오브 호러’로서 일약 유명한 감독이 되었다. 흥행 성공에는 이탈리아 호러 영화 감독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도움이 있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제작 일부와 음향효과와 유럽 공개판을 감수하는 작업도 했다. 그가 이 작품의 유럽시장의 교두보 역할을 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이다. 인간이었을 때의 습관으로 거대한 쇼핑몰에 빨려 들어가듯 모이는 좀비들로 미국의 거대소비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한 로메로 감독 본인은, 이 작품엔 일종의 블랙 코메디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목차 1 줄거리 2 캐스팅 3 잡다한 이야기 3.1 버전의 차이 3.1.1 미국 극장 공개판 3.1.2 다리오 아르젠또 감수판 3.1.3 디렉터스 컷 3.1.4 진정한 완전판 줄거리[편집] 전미 각지에서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 산 사람들을 덮치며 공격하기 시작한다. 좀비들에게 공격당해 사망한 사람들도 좀비로서 다시 살아나 좀비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만 갔다. 방송국에 근무하는 프랑은 좀비가 야기한 대혼란으로 인해 점점 방송 기능이 마비되자 방송국을 버리고 애인인 스티븐과 그의 헬기로 탈출할 것을 결의한다. 그와 동시에, 필라델피아 시경 특수기동대(SWAT)의 대원인 로저는 이민족인 주민들이 사체의 인도를 거부하며 대립하고 있는 아파트에 부대원들과 침투, 좀비가 산 사람을 먹는 지옥같은 장면을 목격하며, 세상의 종말을 실감한다. 무차별적인 살인을 범하던 기동대 대원 울리를 사살한 피터에게 친구인 스티븐은 헬기로 도시에서 탈출할 것을 제안한다. 수상경찰은 기지를 포기하고 보트로 탈출하고, 고층빌딩의 불빛도 잇달아 꺼져가는 상황과 혼란을 뒤로 하여 날아오른 4명은, 들판에 죽은 자들이 왔다갔다하며 그들을 사냥하는 헌터들과 군인들이 그들을 사살하는 광경 등을 목격한다. 그들은 식료품을 얻기 위해 대형쇼핑몰 옥상에 헬기를 착륙시킨다. 쇼핑몰 안에는 살아있었을 때의 습관으로 좀비가 다수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최상층의 일부만을 점거하며 잠시나마 안전하게 되지만, 로저와 피터는 쇼핑몰 전체를 점거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4명은 대형 트럭으로 쇼핑몰의 출입구를 가로막는 데 성공하지만, 도중에 좀비에게 습격당해 궁지에 몰린 로저가 부주의로 인해 좀비에게 팔과 다리를 물리고 만다. 그 후 4명은 쇼핑몰 안의 모든 좀비를 전부 죽이기로 하고, 쇼핑몰은 그들의 소유가 된다. 그러나, 로저는 점점 좀비로 변해갔고, 피터는 로저의 바램대로 좀비로 되살아난 로저를 사살한다. 남아도는 식료품, 옷, 무기를 손에 넣은 그들은 한순간 평온한 나날을 보내지만, 로저를 잃고 갈 곳도 없으며, 쇼핑센터 안에만 갇혀있는 폐쇄감과 조바심이 남아있던 3명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 조차도 오래가진 못했다. 어느날 무기로 무장해 약탈자로 변한 살아있던 폭주족 단원들이 쇼핑센터를 습격해 그들과 함께 좀비들도 대량으로 쇼핑센터에 난입해 왔다. 프란을 최상층에 남겨두고 피터와 스티븐은 결전을 결심하지만... 캐스팅[편집] 스티븐 앤드류스 : 데이빗 엠게-정승욱 피터 워싱턴 : 켄 포리-최석필 로저 데 마르코 : 스콧 H. 라이니거-안용욱 프란신파커 : 게일런 로스-엄상현 로이(SWAT대원): 롯드 스토퍼 -김기흥 울리(SWAT대원) : 존 파피시코 -박만영 TV 디렉터 : 죠지 A. 로메로 - 이철용 방송국 여성 스텝 :크리스틴 로메로(감독의 부인) -박인선 폭주족 단원 : 톱 사비니(특수촬영 메이크업 담당) -최한 배가 찢겨지는 폭주족 : 탄 N. 스테브러키스 (ED 크레딧에서는 탄 스테브러키스) -오인성 부둣가의 위장경관 : 조셉 필라토 (후에 "시체들의 새벽"에서 라스트 클라이막스 씬에서 좀비들에게 무참히 찢겨지는 로즈대위로 열연)-방성준 트럭에 치이는 좀비 : 톰 사비니(특수촬영 메이크업 담당) -안장혁 손도끼에 머리를 찍히는 좀비 : 레너드 라이스-정재헌 M-16 좀비 : 제이 스토버 -정영웅 스님좀비 : 마이클 버호스키 -홍승표 반다나를 두른 소녀좀비 : 낸시 프리드먼 -이소영 간호원 좀비 : 샤론 세커티 -윤여진 뚱보 좀비 : 리 커밍스 -손종환 잡다한 이야기[편집] 조지 A. 로메로의 시체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은 《나이트 오브 더 리빙데드(Night of the Living Dead)》, 세 번째 작품은 《시체들의 날(Day of the Dead)》이다. 또한 로메로는, 네 번째 작품인 《랜드 오브 더 데드(Land of the Dead)》, 다섯 번째 작품인 《다이어리 오브 더 데드(Dairy of the Dead)》도 제작했으며 여섯 번째 작품인 《아일랜드 오브 더 데드(Island of the Dead)》도 제작 중이다. 이 작품은 2004년 같은 제목으로 잭 슈나이더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리메이크판의 좀비들은 재빠르게 뛰어다니며 죽일 듯이 쫓아오는 설정이지만, 로메로감독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뛰어다니는 좀비는 마음에 들지않는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S. 스패로우에 의해 소설화 된 《시체들의 새벽》에서는 주인공들이 권총자살한 쇼핑센터의 경영자를 발견한다.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폭주족들의 개개인의 이름들이 쓰여있는 등 본편엔 없는 장면이 몇 가지 더 묘사되어 있다. 트레일러를 조달하는 장면에선 로저가 좀비를 치어 튕겨내 날려버리지만, 슬로모션으로 재생하면 트램펄린이 옥의 티로 비쳐진다. 튕겨 날아갔던 좀비는 후반에 폭주족 단원으로도 또 다시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특수촬영 메이크업 담당의 톰 사비니다. 이 작품의 열광적인 팬의 한 사람으로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있다. 무명시절 그는 이력서에 ‘폭주족 단원 역할로 출연’했다고 허위 경력을 써낸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황혼에서 새벽까지(From Dusk till Dawn)》의 제작 총지휘를 맡았을 때, 톰 사비니의 폭주족 스타일의 남자 「섹스 머신」역으로 출연을 요청했다고도 한다. 펜실바니아주 피츠버그 교외에 위치한 쇼핑몰 「몬로 빌 몰」에서 촬영되었다. 쇼핑몰은 현재도 성업 중이어서 인터넷사이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출연자들이 좀비팬들을 위한 투어를 만들어 관광 상품으로 만들었다. 2007년 현재 몬로빌 몰에는 스케이트 링크는 없으며, 식당가로 변해 있다. 또한 이 영화가 촬영된 당시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점포는 「J.C.페니」라는 점포뿐이다. 영화에 나왔던 무기점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근교의 무기점을 빌려 로케 촬영한 것을 쇼핑몰 안에 존재하고 있는 듯이 편집한 것이다. 영화에서 쇼핑몰 옥상은 주차장에서부터 들어갈 수 없는 설정이지만 실제로는 주차장 뒤에서부터 옥상으로 이어지는 경사로가 있어 간단하게 걸어서 오를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쇼핑몰 안의 좀비들을 죽인 후 주인공들이 진열된 상품들을 물색하는 몇몇 장면의 후반, 스콧트 H. 라이니거가 분하는 로저는 병에 담긴 동그란 과일 같은 것을 먹는 장면이 있으나, 안에 있었던 건 올리브였고, 그 자신은 에드리브였다는 후문이 있다. 촬영에 사용한 쇼핑몰은 낮에는 정상영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촬영은 영업 종료 후 새벽까지 촬영되었다. 은행 장면에서 사용된 지폐와 점포 등에 있던 귀금속류 등은 전부 진짜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촬영은 항상 점포 관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촬영되었다 한다. 대낮에 쇼핑몰의 주차장을 좀비가 배회하는 장면들은 전부 이른 아침에 촬영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 주변은 아침이 되면 인근의 노인들이 산책하는 경우가 있어, 좀비들을 목격한 노인들이 충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고 경찰들에게 체포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촬영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신중하게 촬영되었다고 한다. 톰 사비니가 연기한 폭주족에게 손도끼로 머리를 찍히는 좀비역의 레너드 라이스는, 미국에서 개최되고 있는 호러영화 집회의 단골손님이다. 자신의 부스 앞에선 촬영에 사용됐던 손도끼와 같은 모양의 모형과 자기가 연기한 머리를 찍힌 장면이 프린트된 T-셔츠등을 판매함으로써 팬들을 기쁘게 한다는 후문이 있다. 호러 계열의 컨벤션에는 주인공 4명도 자주 참가하고 있고, 특히 켄 포리의 부스엔 팬들로 장사진을 이룰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제작자 중 한 사람이던 다리오 아르젠토에 의하면, 이 영화가 히트를 한 후 로메로와 공동으로 바로 속편 제작을 구상했지만 그 후 《상게리아(ZOMBI2)》를 시작으로 속편격인 아류작품이 많이 쏟아져 나와, 제작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만다. 결국 1980년대에 들어서는 유럽에서 미국 달러화가 상승함으로써 아르젠토는 영화제작에서 손을 놓게 되고, 명감독끼리 콤비를 이룬 영화제작은 무산되고 만다. 좀비 떼들로 들끓는 길에 쇼핑몰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것 같은 내용으로 캡콤에서 제작하여 발매한 게임 〈데드 라이징〉에 대하여 작품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영화회사 「MKR Group」이 작품의 저작권 침해라는 이유로 2008년 2월 27일 소송을 거는 소동도 있었다. 버전의 차이[편집] 이 영화는 크게 3종류의 다른 버전이 있다. 각각의 버전을 일본에선 「미국극장 공개판」 「다리오 아르젠또 감수판」 「디렉터스컷 완전판」로 부르고 있다. 3종류는 비디오, DVD 발매되었다. 「다리오 아르젠또 감수판」「디렉터스 컷 완전판」의 DVD는 오랫동안 절판된 상태이므로, 인터넷 옥션 등에서 가격이 뛰어올랐지만, 2007년 12월 21일에 3가지 버전과 함께 《나이트 오브 더 리빙 데드》, 《데이 오브 더 데드》가 염가로 재발매되었다. 미국 극장 공개판[편집] 북미에서 극장공개된 버전에선 본편 러닝타임이 127분이다. 소프트화할 때 다소 수정을 하여 현재「미국 극장 공개판」으로 발매된 소프트는 엄밀히 따지면 미국 극장 공개판은 아니다. 로메로 감독만의 어두운 맛을 낸 것이 특징. 일본에선「다리오 아르젠또 감수판」을 기초로 한 버전이 극장에 공개되기도 했지만 최초로 CIC 빅터에서 비디오 발매된 「미국 극장 공개판」이 오리지날이라 할 수 있다. 다리오 아르젠또 감수판[편집] 아시아와 유럽 등에서 극장공개된 버전으로 본편 러닝타임이 119분이다. 사운드트랙에는 고블린의 곡이 전면에 흐르고, 음향효과 일부가 바뀌어 있다. 액션영화같은 편집이 특징. 일본에서 극장공개된 것은, 이 버전에선 잔혹한 장면을 가위질했고 화면을 정지시켜 처리했으며, 오프닝에 혹성 폭발 장면(같은 헤럴드 배합한[모호한 표현] 공포영화 《메테오》에서 유용한 듯한 장면)(상세하진 않음) 또 그것으로 인한 좀비의 등장의 설명을 더해 엔딩크레딧을 삭제한 115분 버전이다. TV 방영 당시엔 더욱 심해져, 잔혹한 장면과 헬기의 이동 장면 등을 삭제, 혹성 폭발 장면을 TV용으로 편집해서 약 90분 정도로 단축한 도쿄 12채널 방영 버전, 2종류가 존재하고 있다.(다음 내용 참조) 디렉터스 컷[편집] 로메로가 칸느 국제 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 만든 버전으로 본래의 완전판은 아니다. 본편의 러닝타임은 139분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디렉터스 컷의 정의와는 다소 다른 제작 경과(미국 극장공개판보다 전에 만들어져 있던)때문에 ‘Cannes Version’과‘Rough Cut Version’으로 불리기도 한다. 촬영 종료부터 영화제 개최까지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제대로 편집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나중에 로메로 감독의 인터뷰에선 「불만족스런 작품이다」라고 공언했다. 쇼핑센터 안 생활 묘사와 경찰서에서 경관들과의 뜻하지 않은 조우 장면이 길게 편집되어 있고 그외 다른 장면에서도 약간씩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버전들을 기초로 독일의 팬이 멋대로 모든 장면을 이어서 만든 편집판「파이널 컷 판」으로 불리는 버전이 있다. 러닝타임은 156분이다. 디렉터스 컷 판과 아르젠또 판에 밖에 없는 장면을 넣었고, 음악은 고블린. 음성은 독일어만 수록. 독일에선DVD 가 발매되어 있지만 해적판이기 때문에 일본 국내에선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고 있다. 물론 이 버전에도 혹성 폭발장면은 수록되어있지 않다. 진정한 완전판[편집] 진정한 《Dawn Of The Dead》 오리지널 완전판(올 러쉬판)은 약 3시간이란 소문이 있다. 발매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vdeh조지 A. 로메로 감독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1968) 그곳엔 항상 바닐라가 있다 (1971) 마녀의 시즌 (1973) 분노의 대결투 (1973) 마틴 (1978) 시체들의 새벽 (1978) 모터싸이클의 기사들 (1981) 크립쇼 (1982) 시체들의 날 (1985) 어둠의 사투 (1988) 에드가 알란 포우의 검은 고양이 (1990) 다크 하프 (1993) 브루저 (2000) 랜드 오브 데드 (2005) 다이어리 오브 데드 (2007) 서바이벌 오브 더 데드 (200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시체들의_새벽&oldid=23683812" 분류: 1978년 영화1979년 영화영어 영화 작품조지 A. 로메로 감독 영화좀비 영화미국의 SF 영화미국의 공포 영화미국의 액션 영화미국의 풍자 영화미국의 스릴러 영화이탈리아의 SF 영화이탈리아의 공포 영화이탈리아의 스릴러 영화마네킹을 소재로 한 영화펜실베이니아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펜실베이니아주에서 촬영한 영화세계 종말 이후를 배경으로 한 영화숨은 분류: 모호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지적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DeutschEmiliàn e rumagnòlEnglish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1일 (월) 17: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응급남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응급남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응급남녀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tvN 방송 기간 2014년 1월 24일 ~ 2014년 4월 5일 방송 시간 금요일, 토요일 밤 8시 40분 방송 횟수 21부작 기획 최진희, 박지영 책임프로듀서 이찬호 프로듀서 윤현기 편집 선한샘 촬영 한동화 제작사 콘텐츠K 제작자 황창우, 김진이 연출 김철규 조연출 조은솔, 정홍용 극본 최윤정 출연자 송지효, 최진혁, 이필모, 최여진, 클라라 외 음악 김태성 외부 링크  응급남녀 홈페이지 《응급남녀》는 2014년 1월 24일부터 2014년 4월 5일까지 방영된 tvN 금토드라마이다. 목차 1 등장 인물 1.1 주요 인물 1.2 진희의 주변 인물 1.3 창민의 주변 인물 1.4 병원 식구들 1.5 그 외 인물 1.6 특별출연 2 사운드트랙 3 시청률 4 연장 5 각주 6 외부 링크 등장 인물[편집] 주요 인물[편집] 송지효 : 오진희(33세) 역 - 인턴 최진혁 : 오창민(30세) 역 - 인턴 이필모 : 국천수(35세) 역 - 응급의학과 치프 최여진 : 심지혜(34세) 역 - 외과 조교수 클라라 : 한아름(26세) 역 - 인턴 진희의 주변 인물[편집] 이미영 : 조양자(58세) 역 - 진희의 어머니 전수진 : 오진애(29세) 역 - 진희의 여동생 박두식 : 김광수(29세) 역 - 진애의 남편, 인디가수 창민의 주변 인물[편집] 박준금 : 윤성숙(58세) 역 - 창민의 어머니 강신일 : 오태석(62세) 역 - 창민의 아버지, 의사, 생태계 연구원 박지일 : 윤성길 역 - 창민의 외삼촌, 윤병원 병원장 박리디아 : 윤성미 역 - 창민의 첫째 이모 홍성숙 : 윤성자 역 - 창민의 둘째 이모 병원 식구들[편집] 윤종훈 : 임용규(27세) 역 - 인턴 임현성 : 박상혁(27세) 역 - 인턴 천민희 : 이영애(26세) 역 - 인턴, 상혁의 아내 최범호 : 고중훈(50대 후반) 역 - 응급의학과 과장 박성근 : 안영필(38세) 역 - 외과 전문의 허재호 : 장대일 역 - 레지던트 3년차 권민 : 김민기 역 - 레지던트 1년차 김현숙 : 최미정(40세) 역 - 응급실 수간호사 이선아 : 허영지(25세) 역 - 응급실 간호사 최유라 : 손예슬(23세) 역 - 응급실 간호사 그 외 인물[편집] 경인선 한은선 송유현 김봉수 이두석 김송하 김설경 황규인 김준우 : 창민의 학교후배, 의사 역 김추월 : 신애 역 유옥주 : 진희 엄마의 친구 역 서민경 : 진희 엄마의 친구 역 한상규 박진수 안성헌 강서렬 이대승 신동훈 신우철 원승묵 김연수 신현호 정세형 : 정 교수 역 주현진 박진성 김기범 임채선 김미선 김미량 김영철 한여울 박용 김종태 임지영 김지나 박성준 한길주 천소라 서병덕 이정주 이진권 특별출연[편집] 윤주상 : 신부 역 - 창민의 스승, 결혼식 주례 전수경 : 병원장 역 - 창민이 영업하려는 병원 원장 (1화) 이한위 : 전형석 역 - 내과전문의, 진희와 창민의 주치의 (1화) 윤봉길 : 취객 환자 역 (2화, 3화) 정주리 : 창민의 맞선녀 역 (3화) 인교진 : 기관지 절개환자 수술한 의사 역 (4화, 5화) 개리 : 대리운전 기사 역 (6화) 딕펑스(DICKPUNKS) : 본인들 역 - 진애가 소속된 밴드 (6화) 박지우 : 댄스스포츠 강사 역 - 지혜가 춤 배우는 강습소 강사 (8화) 이은결 : 본인 역 - 창민이 진희에게 프로포즈할 때 이벤트를 진행해 준 마술사 (13화) 나르샤 : 환자 역 - 창민을 성추행범으로 오해하는 여자 (19화) 김강현 : 환자 역 (19화) 사운드트랙[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4년 회차 방송일자 AGB 전국 시청률[1] AGB 수도권 시청률[1] 평균 시청률 최고 시청률 평균 시청률 최고 시청률 제1회 1월 24일 2.328% 3.7% 2.626% % 제2회 1월 25일 2.748% 3.8% 2.741% 4.0% 제3회 1월 31일 1.887% % 1.844% % 제4회 2월 1일 2.572% 3.7% 1.994% % 제5회 2월 7일 3.338% 4.6% 3.496% % 제6회 2월 8일 2.793% 4.3% 3.142% 4.9% 제7회 2월 14일 3.800% 5.1% 4.520% 6.0% 제8회 2월 21일 3.641% 4.7% 3.731% 5.0% 제9회 2월 22일 3.771% 4.7% 4.204% 5.5% 제10회 2월 28일 3.421% 4.3% 3.645% 4.8% 제11회 3월 1일 3.912% 4.8% 4.591% 5.9% 제12회 3월 7일 3.867% 5.4% 4.445% 6.6% 제13회 3월 8일 4.144% 5.0% 5.281% 6.3% 제14회 3월 14일 3.825% 5.5% 4.863% 6.7% 제15회 3월 15일 3.934% 4.9% 4.031% % 제16회 3월 21일 4.020% 5.2% 4.710% 6.2% 제17회 3월 22일 4.802% 5.9% 5.756% 7.3% 제18회 3월 28일 4.143% 5.2% 4.872% % 제19회 3월 29일 4.526% 5.6% 5.469% % 제20회 4월 4일 3.893% 5.7% 5.351% % 제21회 4월 5일 5.083% 5.9% 6.264% 7.3% 연장[편집] 2014년 3월 21일 : 응급남녀 방영 분량이 20부작에서 1회 연장되어 21부작으로 변경.확정되었다. 각주[편집] ↑ 가 나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 외부 링크[편집] 응급남녀 공식 홈페이지 tvN 금토드라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응답하라 1994(2013년 10월 18일 ~ 2013년 12월 28일) 응급남녀(2014년 1월 24일 ~ 2014년 4월 5일) 갑동이(2014년 4월 11일 ~ 2014년 6월 21일) vdeh 금토드라마2000년대 후반2007년금요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2》 2008년금요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3》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4》 《맞짱》 2009년금요 《미스터리 형사》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5》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6》 2010년대 전반2010년금요 《위기일발 풍년빌라》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7》 《조선X파일 기찰비록》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8》 《원스 어폰어타임 인 생초리》 2011년금요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9》 2012년금요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0》 2013년금토 《응답하라 1994》 2014년금요 《꽃할배 수사대》 금토 《응급남녀》 《갑동이》 《연애 말고 결혼》 《아홉수 소년》 《미생》 2010년대 후반2015년금요 《미생물》 《초인시대》 금토 《하트 투 하트》 《슈퍼대디 열》 《구여친클럽》 《오 나의 귀신님》 《두번째 스무살》 《응답하라 1988》 2016년금토 《시그널》 《기억》 《디어 마이 프렌즈》 《굿 와이프》 《THE K2》 《도깨비》 2017년금토 《내일 그대와》 《시카고 타자기》 아침 | 월화 | 수목 | 금토 | 토일 | 불금불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응급남녀&oldid=23833835" 분류: TvN 금토드라마2014년 드라마201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병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직장 연애를 다룬 작품최윤정 (1971년) 시나리오 작품TvN의 의학 드라마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Bahasa MelayuPolskiPortuguêsதமிழ்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0일 (일) 00: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수영 배영 200m 세계 기록 추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영 배영 200m 세계 기록 추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영배영200m세계기록추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수영 세계 기록은 국제 수영 연맹(FINA)이 공인하고 관리한다. 기록은 롱 코스(50m)와 쇼트 코스(25m)별로 남여로 나뉘어 집계된다. 쇼트 코스의 세계 기록은 1991년 3월 3일부터 공인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배영 200m 세계 기록 추이이다. 목차 1 남자 1.1 롱 코스 1.2 쇼트 코스 2 여자 2.1 롱 코스 2.2 쇼트 코스 3 함께 보기 4 각주 남자[편집] 롱 코스[편집] # 시간 차이 선수 나라 날짜 대회명 개최지 경기장 주석 및 기타 동영상 1 3분 04초 4 Oskar Schiele 독일 1909. 06. 27 독일 베를린 2 2분 59초 8 George Arnold 독일 1910. 01. 03 독일 마그데부르크 3 2분 56초 4 Maurice Wechesser 벨기에 1910. 10. 18 벨기에 Schaerbeek 4 2분 50초 6 헤르만 펜츠 틀:DEU-1871 1911. 03. 11 독일 마그데부르크 5 2분 48초 4 오토 파어 틀:DEU-1871 1912. 04. 03 독일 마그데부르크 6 2분 47초 1 Walter Laufer 미국 1926. 06. 24 독일 브레멘 7 2분 44초 9 Walter Laufer 미국 1926. 06. 11 뉘른베르크 8 2분 38초 8 Walter Laufer 미국 1926. 07. 13 독일 마그데부르크 9 2분 37초 8 이레이 도시오 일본 1928. 10. 14 일본 다마가와 10 2분 32초 2 George Kojac 미국 1930. 06. 16 미국 뉴헤이번 11 2분 27초 8 앨버트 밴더웨이 미국 1934. 08. 30 호놀룰루 12 2분 24초 0 아돌프 키퍼 미국 1935. 04. 11 미국 시카고 13 2분 23초 0 아돌프 키퍼 미국 1941. 5. 23 호놀룰루 14 2분 22초 9 해리 홀리데이 미국 1943. 03. 18 미국 디트로이트 15 2분 19초 3 아돌프 키퍼 미국 1944. 03. 04 아나폴리스 16 2분 18초 5 앨런 스택 미국 1949. 05. 04 뉴헤이번 17 2분 18초 3 질베르 보종 프랑스 1953. 6. 26 ? 알제 규정 변경[1] 18 2분 18초 8 존 멍크턴 오스트레일리아 1958. 01. 15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19 2분 18초 4 존 멍크턴 오스트레일리아 1958. 2. 18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20 2분 17초 9 프랭크 매키니 미국 1959. 7. 12 미국 로스앨터스 21 2분 17초 8 프랭크 매키니 미국 1959. 07. 25 오사카 22 2분 17초 6 찰스 비틱 미국 1960. 06. 26 로스앤젤레스 23 2분 16초 0 톰 스톡 미국 1960. 7. 24 털리도 24 2분 13초 2 톰 스톡 미국 1961. 02. 07 미국 시카고 25 2분 11초 5 톰 스톡 미국 1961. 08. 20 로스앤젤레스 26 2분 10초 9 톰 스톡 미국 1962. 08. 10 쿠야호가폴스 27 2분 10초 3 Jed Graef 미국 1964. 10. 13 제18회 하계 올림픽 일본 도쿄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28 2분 09초 4 Charles Hickcox 미국 1967. 8. 29 일본 도쿄 29 2분 07초 9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67. 11. 18 라이프치히 30 2분 07초 5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68. 8. 14 라이프치히 31 2분 07초 4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69. 7. 12 샌타글래라 32 2분 06초 6 게리 홀 시니어 미국 1969. 8. 14 루이빌 33 2분 06초 4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69. 08. 29 Ost-Berlin 34 2분 06초 3 마이크 스탬 미국 1970. 08. 20 미국 로스앤젤레스 35 2분 06초 1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0. 09. 11 스페인 바르셀로나 36 2분 05초 6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1. 9. 13 라이프치히 37 2분 02초 8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2. 7. 10 동독 라이프치히 38 2분 02초 82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2. 9. 2 서독 뮌헨 2 2분 01초 87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3. 9. 6 제1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Tašmajdan Sports Centre 3 2분 00초 64 존 네이버 미국 1976. 06. 19 미국 롱비치 4 1분 59초 19 - 1.45초 존 네이버 미국 1976. 07. 27 제21회 하계 올림픽 캐나다 몬트리올 5 1분 58초 93 릭 캐리 미국 1983. 08. 03 미국 클로비스 6 1분 58초 86 릭 캐리 미국 1984. 6. 27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7 1분 58초 41 Sergei Zabolotnov 소련 1984. 8. 21 소련 모스크바 1분 58초 14 이고리 폴랸스키 소련 1985. 3. 3 동독 에르푸르트 1분 57초 30 마르틴 로페스수베로 스페인 1991. 8. 13 미국 포트로더데일 1분 56초 57 마르틴 로페스수베로 스페인 1991. 11. 23 앨라배마 주 수영 롱코스 초청 대회 미국 터스컬루사 [2] 1분 55초 87 레니 크레이젤버그 미국 1999. 08. 27 제8회 범태평양 수영 선수권 대회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1분 55초 15 에런 피어솔 미국 2002. 03. 20 미국 춘계 수영 선수권 대회 미국 미니애폴리스 [3] 1분 54초 74 - 0.41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4. 07. 12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 미국 롱비치 1분 54초 66 - 0.08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5. 07. 29 제11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캐나다 몬트리올 1분 54초 44 - 0.22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6. 08. 19 제10회 범태평양 수영 선수권 대회 캐나다 빅토리아 1분 54초 32 - 0.12초 라이언 록티 미국 2007. 03. 30 제12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 1분 54초 32 = 에런 피어솔 미국 2008. 07. 04 미국 올림픽 수영 대표 선발전 미국 오마하 퀘스트 센터 오마하 [4] 1분 53초 94 라이언 록티 미국 2008. 08. 15 제29회 하계 올림픽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1분 53초 08 - 0.86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9. 07. 11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1분 51초 92 - 1.16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9. 07. 31 제13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이탈리아 로마 포로 이탈리코 수영장 쇼트 코스[편집] # 시간 차이 선수 나라 날짜 대회명 장소 주석 및 기타 동영상 1분 52초 47 레니 크레이젤버그 미국 1999. 11. 18 미국 칼리지파크 1분 52초 43 레니 크레이젤버그 미국 2000. 2. 6 독일 베를린 1분 51초 62 맷 웰시 오스트레일리아 2000. 10. 13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1분 51초 62 = Gordan Kožulj 크로아티아 2001. 1. 21 독일 베를린 1분 51초 17 에런 피어솔 미국 2002. 4. 7 소련 모스크바 1분 50초 52 에런 피어솔 미국 2004. 10. 11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1분 50초 43 마르쿠스 로간 오스트리아 2005. 12. 8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1분 49초 05 라이언 록티 미국 2006. 4. 9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1분 47초 84 마르쿠스 로간 오스트리아 2008. 4. 13 맨체스터 1분 47초 08 George Du Rand 남아프리카 공화국 2009. 11. 7 러시아 모스크바 1분 46초 11 아르카디 뱌차닌 러시아 2009. 11. 15 독일 베를린 여자[편집] 롱 코스[편집] # 시간 차이 선수 나라 날짜 대회명 개최지 경기장 주석 및 기타 동영상 1 3분 06초 8 시빌 바워 미국 1922. 6. 4 브라이턴비치 2 3분 03초 8 시빌 바워 미국 1924. 2. 9 미국 마이애미 3 2분 59초 2 마리 브라운 네덜란드 1928. 11. 24 벨기에 브뤼셀 4 2분 58초 8 엘리너 홈 미국 1930. 2. 1 Buffalo 5 2분 58초 2 엘리너 홈 미국 1930. 3. 1 미국 뉴욕 시 6 2분 50초 4 필리스 하딩 영국 1932. 9. 19 월러시 7 2분 49초 6 리 마스텐브룩 네덜란드 1935. 1. 20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8 2분 48초 7 엘리너 홈 미국 1936. 3. 3 미국 털리도 9 2분 44초 6 니다 센프 네덜란드 1937. 02. 02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0 2분 41초 3 Ragnhild Hveger 덴마크 1937. 2. 14 ? Aarhus 11 2분 41초 0 코르 킨트 네덜란드 1938. 04. 17 ? 오르후스 12 2분 40초 6 잇 판페헬런 네덜란드 1938. 10. 26 뒤셀도르프 13 2분 39초 0 잇 판페헬런 네덜란드 1938. 12. 18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4 2분 38초 8 코르 킨트 네덜란드 1939. 11. 29 네덜란드 로테르담 15 2분 35초 3 헤이르티어 빌레마 네덜란드 1950. 4. 2 ? 힐베르쉼 규정 변경[1] 1 2분 39초 9 필리파 굴드 뉴질랜드 1957. 1. 6 뉴질랜드 오클랜드 2분 38초 5 레니 더네이스 네덜란드 1957. 5. 17 영국 블랙풀 2분 37초 4 크리스티 본 살차 미국 1958. 8. 1 미국 토피카 2분 37초 1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59. 7. 12 일본 도쿄 2분 34초 8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0. 4. 2 일본 도쿄 2분 33초 5 린 버크 미국 1960. 7. 15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2분 33초 3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0. 7. 23 일본 도쿄 2분 33초 2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1. 7. 30 일본 도쿄 2분 32초 1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2. 6. 3 일본 벳푸 2분 31초 6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2. 7. 29 일본 오사카 2분 29초 6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3. 2. 10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2분 28초 9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3. 2. 18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2분 28초 5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3. 2. 21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2분 28초 2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3. 8. 4 일본 도쿄 2분 27초 4 캐시 퍼거슨 미국 1964. 9. 28 미국 로스앤젤레스 2분 27초 1 캐런 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1966. 7. 25 프랑스 베지에 2분 26초 4 캐런 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1966. 8. 18 미국 링컨 2분 24초 4 일레인 태너 캐나다 1967. 7. 26 캐나다 위니펙 2분 24초 1 캐런 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1968. 1. 6 남아프리카 공화국 킴벌리 2분 23초 8 캐런 뮤어 1968. 7. 21 미국 로스앤젤레스 2분 21초 5 수전 애투드 미국 1969. 8. 14 미국 루이빌 2분 20초 64 멀리사 벨로트 미국 1972. 8. 5 미국 시카고 2분 20초 58 멀리사 벨로트 미국 1972. 9. 4 서독 뮌헨 2분 19초 19 멀리사 벨로트 미국 1972. 9. 4 서독 뮌헨 2분 18초 41 울리케 리히터 동독 1974. 7. 7 동독 로슈토크 2분 17초 35 울리케 리히터 동독 1974. 8. 25 오스트리아 빈 2분 16초 33 낸시 개러픽 캐나다 1975. 4. 27 캐나다 브랜트퍼드 2분 16초 10 비르기트 트라이버 동독 1975. 6. 6 동독 비텐베르크 2분 15초 46 비르기트 트라이버 동독 1975. 7. 27 콜롬비아 Cali 2분 14초 41 안톄 슈틸레 동독 1976. 2. 29 동독 동베를린 2분 13초 50 안톄 슈틸레 동독 1976. 3. 13 소련 탈린 2분 12초 47 비르기트 트라이버 동독 1976. 06. 04 동독 동베를린 2분 11초 93 - 0.54초 Linda Jezek 미국 1978. 08. 28 제3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서독 서베를린 2분 11초 77 - 0.16초 리카 라이니슈 동독 1980. 7. 27 제22회 하계 올림픽 소련 모스크바 2분 09초 91 코르넬리아 지르히 동독 1982. 8. 8 에콰도르 과야킬리 2분 08초 60 벳시 미첼 미국 1986. 06. 27 미국 올랜도 규정 변경[5] 2분 06초 62 에게르세기 크리스티너 헝가리 1991. 08. 25 그리스 아테네 2분 06초 39 - 0.23초 커스티 코번트리 뉴질랜드 2008. 02. 16 미국 수영 그랑프리 대회 미국 컬럼비아 2분 06초 09 - 0.30초 마거릿 홀저 미국 2008. 07. 05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 미국 오마하 [6] 2분 05초 24 - 0.85초 커스티 코번트리 짐바브웨 2008. 08. 16 제29회 하계 올림픽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베이징 국가 수영 센터 [7] 2분 04초 81 - 0.43초 커스티 코번트리 짐바브웨 2009. 08. 01 제13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이탈리아 로마 포로 이탈리코 수영장 2분 04초 06 - 0.75초 미시 프랭클린 미국 2012. 08. 03 제30회 하계 올림픽 영국 런던 아쿠아틱스 센터 [8] 쇼트 코스[편집] # 시간 차이 선수 나라 날짜 대회명 장소 주석 및 기타 동영상 2분 03초 62 내털리 코글린 미국 2001. 11. 27 미국 뉴욕 2분 03초 24 나카무라 레이코 일본 2008. 2. 23 일본 도쿄 2분 00초 91 커스티 코번트리 짐바브웨 2008. 4. 11 영국 맨체스터 2분 00초 18 사카이 시호 일본 2009. 11. 14 독일 베를린 함께 보기[편집] 수영 배영 200m 대한민국 기록 추이 각주[편집] ↑ 가 나 Kluge, Volker: „Olympische Sommerspiele” – Die Chronik II (London 1948 – Tokio 1964), Sportverlag Berlin 1998, ISBN 3-328-00740-7, S. 462 ff.: Aufgrund der Zeitvorteile beim Wenden stammte der Großteil der bisherigen Bestmarken von Wettkämpfen in einem 25-m-Becken. Auf dem im Rahmen der Olympischen Spiele 1956 durchgeführten FINA-Kongress wurde schließlich festgelegt, dass Rekorde ab 1. Mai 1957 ausschließlich auf der Langbahn (50 Meter bzw. 55 Yards) offizielle Anerkennung finden. Davor datierte (Langbahn-)Bestmarken - vorrangig im Melbourner Olympiabecken erzielt - wurden nachträglich als erster offizieller 50-m-Bahn-Weltrekord anerkannt, wenn diese bis zum besagten Stichtag nicht mehr auf der Kurzbahn unterboten wurden. ↑ 200-meter Backstroke Record Falls To Former Uf Swimmer ↑ “World Record Falls At National Meet”. 《The New York Times》. 2002년 3월 21일. 2011년 2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2월 3일에 확인함.  ↑ 2008 U.S. Olympic Team Trials Omaha, NE - Men's 200m Backstroke Finals RESULTS[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Kluge, Volker: Olympische Sommerspiele. Die Chronik IV. Seoul 1988 – Atlanta 1996. Sportverlag Berlin, Berlin 2002, ISBN 3-328-00830-6, S. 301 u. 632 ↑ “2008 U.S. Olympic Team Trials Omaha, NE - Women's 200m Backstroke Finals RESULTS” (PDF). 2010년 10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8월 14일에 확인함.  ↑ “Women's 200m Backstroke: Coventry finally wins gold”. Beijing 2008. 2008년 8월 16일. 2008년 8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8월 16일에 확인함.  ↑ “Womens 200m Backstroke Results”. www.london2012.com. 2012년 8월 3일. 2013년 1월 3일에 보존된 문서. 2012년 9월 12일에 확인함.  vdeh수영 세계 최고 기록 추이자유형 50m 100m 200m 400m 800m 1500m 배영 50m 100m 200m 평영 50m 100m 200m 접영 50m 100m 200m 개인혼영 100m 200m 400m 계영 계영 400m 계영 800m 혼계영 400m vdeh스포츠 관련 세계 기록올림픽 종목 사격 수영 스피드 스케이팅 육상 역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수영_배영_200m_세계_기록_추이&oldid=23363539" 분류: 수영 기록배영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ISBN 매직 링크를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ItalianoNederlands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27일 (목) 14: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수영 배영 200m 세계 기록 추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영 배영 200m 세계 기록 추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영배영200m세계기록추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수영 세계 기록은 국제 수영 연맹(FINA)이 공인하고 관리한다. 기록은 롱 코스(50m)와 쇼트 코스(25m)별로 남여로 나뉘어 집계된다. 쇼트 코스의 세계 기록은 1991년 3월 3일부터 공인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배영 200m 세계 기록 추이이다. 목차 1 남자 1.1 롱 코스 1.2 쇼트 코스 2 여자 2.1 롱 코스 2.2 쇼트 코스 3 함께 보기 4 각주 남자[편집] 롱 코스[편집] # 시간 차이 선수 나라 날짜 대회명 개최지 경기장 주석 및 기타 동영상 1 3분 04초 4 Oskar Schiele 독일 1909. 06. 27 독일 베를린 2 2분 59초 8 George Arnold 독일 1910. 01. 03 독일 마그데부르크 3 2분 56초 4 Maurice Wechesser 벨기에 1910. 10. 18 벨기에 Schaerbeek 4 2분 50초 6 헤르만 펜츠 틀:DEU-1871 1911. 03. 11 독일 마그데부르크 5 2분 48초 4 오토 파어 틀:DEU-1871 1912. 04. 03 독일 마그데부르크 6 2분 47초 1 Walter Laufer 미국 1926. 06. 24 독일 브레멘 7 2분 44초 9 Walter Laufer 미국 1926. 06. 11 뉘른베르크 8 2분 38초 8 Walter Laufer 미국 1926. 07. 13 독일 마그데부르크 9 2분 37초 8 이레이 도시오 일본 1928. 10. 14 일본 다마가와 10 2분 32초 2 George Kojac 미국 1930. 06. 16 미국 뉴헤이번 11 2분 27초 8 앨버트 밴더웨이 미국 1934. 08. 30 호놀룰루 12 2분 24초 0 아돌프 키퍼 미국 1935. 04. 11 미국 시카고 13 2분 23초 0 아돌프 키퍼 미국 1941. 5. 23 호놀룰루 14 2분 22초 9 해리 홀리데이 미국 1943. 03. 18 미국 디트로이트 15 2분 19초 3 아돌프 키퍼 미국 1944. 03. 04 아나폴리스 16 2분 18초 5 앨런 스택 미국 1949. 05. 04 뉴헤이번 17 2분 18초 3 질베르 보종 프랑스 1953. 6. 26 ? 알제 규정 변경[1] 18 2분 18초 8 존 멍크턴 오스트레일리아 1958. 01. 15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19 2분 18초 4 존 멍크턴 오스트레일리아 1958. 2. 18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20 2분 17초 9 프랭크 매키니 미국 1959. 7. 12 미국 로스앨터스 21 2분 17초 8 프랭크 매키니 미국 1959. 07. 25 오사카 22 2분 17초 6 찰스 비틱 미국 1960. 06. 26 로스앤젤레스 23 2분 16초 0 톰 스톡 미국 1960. 7. 24 털리도 24 2분 13초 2 톰 스톡 미국 1961. 02. 07 미국 시카고 25 2분 11초 5 톰 스톡 미국 1961. 08. 20 로스앤젤레스 26 2분 10초 9 톰 스톡 미국 1962. 08. 10 쿠야호가폴스 27 2분 10초 3 Jed Graef 미국 1964. 10. 13 제18회 하계 올림픽 일본 도쿄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28 2분 09초 4 Charles Hickcox 미국 1967. 8. 29 일본 도쿄 29 2분 07초 9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67. 11. 18 라이프치히 30 2분 07초 5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68. 8. 14 라이프치히 31 2분 07초 4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69. 7. 12 샌타글래라 32 2분 06초 6 게리 홀 시니어 미국 1969. 8. 14 루이빌 33 2분 06초 4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69. 08. 29 Ost-Berlin 34 2분 06초 3 마이크 스탬 미국 1970. 08. 20 미국 로스앤젤레스 35 2분 06초 1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0. 09. 11 스페인 바르셀로나 36 2분 05초 6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1. 9. 13 라이프치히 37 2분 02초 8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2. 7. 10 동독 라이프치히 38 2분 02초 82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2. 9. 2 서독 뮌헨 2 2분 01초 87 롤란트 마테스 동독 1973. 9. 6 제1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Tašmajdan Sports Centre 3 2분 00초 64 존 네이버 미국 1976. 06. 19 미국 롱비치 4 1분 59초 19 - 1.45초 존 네이버 미국 1976. 07. 27 제21회 하계 올림픽 캐나다 몬트리올 5 1분 58초 93 릭 캐리 미국 1983. 08. 03 미국 클로비스 6 1분 58초 86 릭 캐리 미국 1984. 6. 27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7 1분 58초 41 Sergei Zabolotnov 소련 1984. 8. 21 소련 모스크바 1분 58초 14 이고리 폴랸스키 소련 1985. 3. 3 동독 에르푸르트 1분 57초 30 마르틴 로페스수베로 스페인 1991. 8. 13 미국 포트로더데일 1분 56초 57 마르틴 로페스수베로 스페인 1991. 11. 23 앨라배마 주 수영 롱코스 초청 대회 미국 터스컬루사 [2] 1분 55초 87 레니 크레이젤버그 미국 1999. 08. 27 제8회 범태평양 수영 선수권 대회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1분 55초 15 에런 피어솔 미국 2002. 03. 20 미국 춘계 수영 선수권 대회 미국 미니애폴리스 [3] 1분 54초 74 - 0.41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4. 07. 12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 미국 롱비치 1분 54초 66 - 0.08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5. 07. 29 제11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캐나다 몬트리올 1분 54초 44 - 0.22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6. 08. 19 제10회 범태평양 수영 선수권 대회 캐나다 빅토리아 1분 54초 32 - 0.12초 라이언 록티 미국 2007. 03. 30 제12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 1분 54초 32 = 에런 피어솔 미국 2008. 07. 04 미국 올림픽 수영 대표 선발전 미국 오마하 퀘스트 센터 오마하 [4] 1분 53초 94 라이언 록티 미국 2008. 08. 15 제29회 하계 올림픽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1분 53초 08 - 0.86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9. 07. 11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1분 51초 92 - 1.16초 에런 피어솔 미국 2009. 07. 31 제13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이탈리아 로마 포로 이탈리코 수영장 쇼트 코스[편집] # 시간 차이 선수 나라 날짜 대회명 장소 주석 및 기타 동영상 1분 52초 47 레니 크레이젤버그 미국 1999. 11. 18 미국 칼리지파크 1분 52초 43 레니 크레이젤버그 미국 2000. 2. 6 독일 베를린 1분 51초 62 맷 웰시 오스트레일리아 2000. 10. 13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1분 51초 62 = Gordan Kožulj 크로아티아 2001. 1. 21 독일 베를린 1분 51초 17 에런 피어솔 미국 2002. 4. 7 소련 모스크바 1분 50초 52 에런 피어솔 미국 2004. 10. 11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1분 50초 43 마르쿠스 로간 오스트리아 2005. 12. 8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1분 49초 05 라이언 록티 미국 2006. 4. 9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1분 47초 84 마르쿠스 로간 오스트리아 2008. 4. 13 맨체스터 1분 47초 08 George Du Rand 남아프리카 공화국 2009. 11. 7 러시아 모스크바 1분 46초 11 아르카디 뱌차닌 러시아 2009. 11. 15 독일 베를린 여자[편집] 롱 코스[편집] # 시간 차이 선수 나라 날짜 대회명 개최지 경기장 주석 및 기타 동영상 1 3분 06초 8 시빌 바워 미국 1922. 6. 4 브라이턴비치 2 3분 03초 8 시빌 바워 미국 1924. 2. 9 미국 마이애미 3 2분 59초 2 마리 브라운 네덜란드 1928. 11. 24 벨기에 브뤼셀 4 2분 58초 8 엘리너 홈 미국 1930. 2. 1 Buffalo 5 2분 58초 2 엘리너 홈 미국 1930. 3. 1 미국 뉴욕 시 6 2분 50초 4 필리스 하딩 영국 1932. 9. 19 월러시 7 2분 49초 6 리 마스텐브룩 네덜란드 1935. 1. 20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8 2분 48초 7 엘리너 홈 미국 1936. 3. 3 미국 털리도 9 2분 44초 6 니다 센프 네덜란드 1937. 02. 02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0 2분 41초 3 Ragnhild Hveger 덴마크 1937. 2. 14 ? Aarhus 11 2분 41초 0 코르 킨트 네덜란드 1938. 04. 17 ? 오르후스 12 2분 40초 6 잇 판페헬런 네덜란드 1938. 10. 26 뒤셀도르프 13 2분 39초 0 잇 판페헬런 네덜란드 1938. 12. 18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4 2분 38초 8 코르 킨트 네덜란드 1939. 11. 29 네덜란드 로테르담 15 2분 35초 3 헤이르티어 빌레마 네덜란드 1950. 4. 2 ? 힐베르쉼 규정 변경[1] 1 2분 39초 9 필리파 굴드 뉴질랜드 1957. 1. 6 뉴질랜드 오클랜드 2분 38초 5 레니 더네이스 네덜란드 1957. 5. 17 영국 블랙풀 2분 37초 4 크리스티 본 살차 미국 1958. 8. 1 미국 토피카 2분 37초 1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59. 7. 12 일본 도쿄 2분 34초 8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0. 4. 2 일본 도쿄 2분 33초 5 린 버크 미국 1960. 7. 15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2분 33초 3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0. 7. 23 일본 도쿄 2분 33초 2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1. 7. 30 일본 도쿄 2분 32초 1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2. 6. 3 일본 벳푸 2분 31초 6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2. 7. 29 일본 오사카 2분 29초 6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3. 2. 10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2분 28초 9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3. 2. 18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2분 28초 5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3. 2. 21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2분 28초 2 다나카 사토코 일본 1963. 8. 4 일본 도쿄 2분 27초 4 캐시 퍼거슨 미국 1964. 9. 28 미국 로스앤젤레스 2분 27초 1 캐런 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1966. 7. 25 프랑스 베지에 2분 26초 4 캐런 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1966. 8. 18 미국 링컨 2분 24초 4 일레인 태너 캐나다 1967. 7. 26 캐나다 위니펙 2분 24초 1 캐런 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1968. 1. 6 남아프리카 공화국 킴벌리 2분 23초 8 캐런 뮤어 1968. 7. 21 미국 로스앤젤레스 2분 21초 5 수전 애투드 미국 1969. 8. 14 미국 루이빌 2분 20초 64 멀리사 벨로트 미국 1972. 8. 5 미국 시카고 2분 20초 58 멀리사 벨로트 미국 1972. 9. 4 서독 뮌헨 2분 19초 19 멀리사 벨로트 미국 1972. 9. 4 서독 뮌헨 2분 18초 41 울리케 리히터 동독 1974. 7. 7 동독 로슈토크 2분 17초 35 울리케 리히터 동독 1974. 8. 25 오스트리아 빈 2분 16초 33 낸시 개러픽 캐나다 1975. 4. 27 캐나다 브랜트퍼드 2분 16초 10 비르기트 트라이버 동독 1975. 6. 6 동독 비텐베르크 2분 15초 46 비르기트 트라이버 동독 1975. 7. 27 콜롬비아 Cali 2분 14초 41 안톄 슈틸레 동독 1976. 2. 29 동독 동베를린 2분 13초 50 안톄 슈틸레 동독 1976. 3. 13 소련 탈린 2분 12초 47 비르기트 트라이버 동독 1976. 06. 04 동독 동베를린 2분 11초 93 - 0.54초 Linda Jezek 미국 1978. 08. 28 제3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서독 서베를린 2분 11초 77 - 0.16초 리카 라이니슈 동독 1980. 7. 27 제22회 하계 올림픽 소련 모스크바 2분 09초 91 코르넬리아 지르히 동독 1982. 8. 8 에콰도르 과야킬리 2분 08초 60 벳시 미첼 미국 1986. 06. 27 미국 올랜도 규정 변경[5] 2분 06초 62 에게르세기 크리스티너 헝가리 1991. 08. 25 그리스 아테네 2분 06초 39 - 0.23초 커스티 코번트리 뉴질랜드 2008. 02. 16 미국 수영 그랑프리 대회 미국 컬럼비아 2분 06초 09 - 0.30초 마거릿 홀저 미국 2008. 07. 05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 미국 오마하 [6] 2분 05초 24 - 0.85초 커스티 코번트리 짐바브웨 2008. 08. 16 제29회 하계 올림픽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베이징 국가 수영 센터 [7] 2분 04초 81 - 0.43초 커스티 코번트리 짐바브웨 2009. 08. 01 제13회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이탈리아 로마 포로 이탈리코 수영장 2분 04초 06 - 0.75초 미시 프랭클린 미국 2012. 08. 03 제30회 하계 올림픽 영국 런던 아쿠아틱스 센터 [8] 쇼트 코스[편집] # 시간 차이 선수 나라 날짜 대회명 장소 주석 및 기타 동영상 2분 03초 62 내털리 코글린 미국 2001. 11. 27 미국 뉴욕 2분 03초 24 나카무라 레이코 일본 2008. 2. 23 일본 도쿄 2분 00초 91 커스티 코번트리 짐바브웨 2008. 4. 11 영국 맨체스터 2분 00초 18 사카이 시호 일본 2009. 11. 14 독일 베를린 함께 보기[편집] 수영 배영 200m 대한민국 기록 추이 각주[편집] ↑ 가 나 Kluge, Volker: „Olympische Sommerspiele” – Die Chronik II (London 1948 – Tokio 1964), Sportverlag Berlin 1998, ISBN 3-328-00740-7, S. 462 ff.: Aufgrund der Zeitvorteile beim Wenden stammte der Großteil der bisherigen Bestmarken von Wettkämpfen in einem 25-m-Becken. Auf dem im Rahmen der Olympischen Spiele 1956 durchgeführten FINA-Kongress wurde schließlich festgelegt, dass Rekorde ab 1. Mai 1957 ausschließlich auf der Langbahn (50 Meter bzw. 55 Yards) offizielle Anerkennung finden. Davor datierte (Langbahn-)Bestmarken - vorrangig im Melbourner Olympiabecken erzielt - wurden nachträglich als erster offizieller 50-m-Bahn-Weltrekord anerkannt, wenn diese bis zum besagten Stichtag nicht mehr auf der Kurzbahn unterboten wurden. ↑ 200-meter Backstroke Record Falls To Former Uf Swimmer ↑ “World Record Falls At National Meet”. 《The New York Times》. 2002년 3월 21일. 2011년 2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2월 3일에 확인함.  ↑ 2008 U.S. Olympic Team Trials Omaha, NE - Men's 200m Backstroke Finals RESULTS[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Kluge, Volker: Olympische Sommerspiele. Die Chronik IV. Seoul 1988 – Atlanta 1996. Sportverlag Berlin, Berlin 2002, ISBN 3-328-00830-6, S. 301 u. 632 ↑ “2008 U.S. Olympic Team Trials Omaha, NE - Women's 200m Backstroke Finals RESULTS” (PDF). 2010년 10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8월 14일에 확인함.  ↑ “Women's 200m Backstroke: Coventry finally wins gold”. Beijing 2008. 2008년 8월 16일. 2008년 8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8월 16일에 확인함.  ↑ “Womens 200m Backstroke Results”. www.london2012.com. 2012년 8월 3일. 2013년 1월 3일에 보존된 문서. 2012년 9월 12일에 확인함.  vdeh수영 세계 최고 기록 추이자유형 50m 100m 200m 400m 800m 1500m 배영 50m 100m 200m 평영 50m 100m 200m 접영 50m 100m 200m 개인혼영 100m 200m 400m 계영 계영 400m 계영 800m 혼계영 400m vdeh스포츠 관련 세계 기록올림픽 종목 사격 수영 스피드 스케이팅 육상 역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수영_배영_200m_세계_기록_추이&oldid=23363539" 분류: 수영 기록배영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ISBN 매직 링크를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ItalianoNederlands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27일 (목) 14: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우는밭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는밭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우는밭쥐 우는밭쥐 보전 상태 관심대상(LC), IUCN 3.1[1]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포유강 목: 쥐목 아목: 쥐아목 상과: 쥐상과 과: 비단털쥐과 아과: 물밭쥐아과 족: 물밭쥐족 속: 밭쥐속 종: 우는밭쥐(M. miurus) 학명 Microtus miurusOsgood, 1901 우는밭쥐의 분포 지역 우는밭쥐(Microtus miurus)는 밭쥐속에 속하는 설치류의 일종이다.[2] 미국 알래스카주와 캐나다 북서부 지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 북서부 지역에서 발견된다.[1] 목차 1 특징 2 분포 및 서식지 3 습성 4 번식 5 진화 6 각주 특징[편집] 우는밭쥐는 긴 털에 감춰질 정도로 귀가 짧고, 꼬리가 짧다. 털은 부드럽고 촘촘하며, 특히 겨울에 무성하다. 몸의 털은 연한 황갈색부터 연한 갈색까지 다양하고, 담황색 반점이 귀 뒤쪽부터 옆구리를 따라 엉덩이까지 이어지며, 배 쪽 털은 엷은 황갈색 또는 황토색을 띤다. 털은 검은 조모와 함께 밝은 얼룩 무늬를 띠지만, 너무 듬성 듬성 나 있어서 눈에 보이는 효과는 거의 없다. 겨울이 되면 털이 점점 회색빛을 띤다. 발은 날카롭고 좁은 발톱이 나 있으며 대부분 털에 가려진다.[3] 어른 우는밭쥐의 몸길이는 1.5~4cm의 짧은 꼬리를 제외하고 9~16cm로 다양하다. 몸무게는 11~60g으로 나이와 최근에 먹은 먹이에 따라 다르다. 암수 사이에 크기와 털 색이 크게 다르지 않다. 수컷 우는밭쥐는 옆구리 쪽에 변형된 피지 분비선을 갖고 있어서 이를 냄새 표지로 사용한다. 이 분비선은 수유중인 암컷에게도 나타난다. 음경은 비교적 길고 좁으며, 음경골이 복잡하다.[3] 우는밭쥐는 짧은 꼬리와 배 쪽의 털 색을 통해 인근 지역에 서식하는 밭쥐류(같은 지역의 다른 밭쥐는 배 쪽이 회색을 띤다.)와 구별할 수 있다. 분포 및 서식지[편집] 우는밭쥐는 미국 알래스카 주와 캐나다 북서부 지역의 토착종이다. 알래스카 서부 해안가 지역부터 남부와 북부 지역에 걸쳐 분포하지만 알래스카반도와 알래스카 중부 지역, 북부 해안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동쪽으로 매킨지 산맥처럼 먼 곳까지 분포하며 북부 해안가를 제외한 유콘 준주 전역, 인근 주의 경계 지역에서 발견된다.[3] 4종의 아종이 알려져 있다. Microtus miurus miurus - 케나이 반도 Microtus miurus cantator - 알래스카 주 남부-동부, 유콘 준주 남부 Microtus miurus miuriei - 알래스카 주 남부-서부 Microtus miurus oreas - 알래스카 주 북부와 유콘 준주 우는밭쥐는 삼림한계선 위의 툰드라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 지역 안의 아주 극단적인 환경을 피하고, 앞이 트이고 배수가 잘되며 관목과 사초속 식물이 풍부한 경사면과 바위층을 좋아한다. 가는잎미선콩속 식물과 마디풀, 사초속 식물, 속새류, 버드나무류와 같은 북극 식물을 먹는다. 주요 포식자는 울버린과 북극여우, 북방족제비, 도둑갈매기류, 수리매, 올빼미 등이다.[3] 습성[편집] 우는밭쥐는 적어도 가족 단위로 굴을 공유하는 준-군거 동물이다. 낮이나 밤 시간에 대한 명확한 선호가 없이 하루 종일 활동적이다. 땅 위 식물 사이에 통로를 만들고 서식지를 굴 입구로 연결하지만 일부 다른 밭쥐류 종이 만든 굴을 사용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키가 작은 덤불 속에서 먹이를 찾기도 한다. 굴은 수많은 방으로 이루아져 있으며, 대다수는 겨울에 먹이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아주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통로는 폭이 대개 약 2.5cm로 밭쥐보다 큰 다른 동물이 통과하기 어렵게 만들어 족제비와 같은 포식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굴은 땅 아래 20cm 이내에서 수평적으로 이어지며, 굴 입구에서 최대 1m까지 이어진다.[3] 밭쥐류 중에서 비정상적인 밭쥐로 땅에 뿌리와 뿌리줄기같은 먹이를 저장할 뿐만 아니라 풀 더미를 말리기 위해 바위 위에 올려 두기도 한다. 이런 풀더미는 낮게 누운 가지 또는 노출된 나무 뿌리 위에 대신 두어 건조한 상태가 유지되도록 하기도 한다. 풀 더미는 천천히 건조되어 건초가 되며, 풀 더미에 속새류나 루핀과 같은 다른 식물을 포함될 수도 있다. 8월경에 풀더미를 쌓기 시작하며 겨울철에 최대 50cm 높이로 상당한 크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풀더미는 겨울철에 영양가가 높은 먹이의 원천이 되지만 다른 동물의 습격을 받기 쉽다.[3] "우는밭쥐"라는 일반명은 보통 굴 입구에서 들리는 높고 날카롭게 떨리는 경고 소리에서 유래했다.[4] 번식[편집] 우는밭쥐는 5월과 9월 사이에 번식을 하고 암컷은 번식기에 최대 3번 새끼를 낳는다. 임신 기간은 21일간 지속되고, 보통 8마리의 새끼를 낳고 6~14마리의 새끼가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3] 다른 밭쥐류와 마찬가지로 암컷이 단지 8개의 젖꼭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8마리 이상의 새끼는 생존 확률이 떨어진다. 생후 2~2.8g의 새끼 몸무게는 젖을 먹는 첫 3주 동안에 급속히 증가한다. 약 4주 동안 젖을 먹인 후에 어미는 새로운 번식을 준비한다. 암컷은 일반적으로 2살까지 번식을 하지 않지만 수컷은 태어난 후 한 달 이내에 성적으로 활동적인 상태가 된다.[3] 야생에서 많은 우는밭쥐가 첫 겨울 동안에 살아남지 못한다. 포획 상태에서는 최대 112주까지 생존하는 것으로 보고되지만 평균 수명은 겨우 43주에 불과하다.[5] 진화[편집] 가장 오랜 우는밭쥐 화석은 약 30만년 전의 플라이스토세 중기(이오니아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페어뱅크스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플라이스토세(홍적세) 후기의 빙하기 동안에 우는밭쥐는 현재보다 좀더 널리 분포했고, 화석은 아이오와주와 같은 먼 남쪽 지역까지 보고되고 있으며 현재 알래스카 주 기후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 우는밭쥐와 가장 가까운 종은 알래스카 주 서부 연안의 2개의 작은 섬에서만 서식하는 섬밭쥐로 해수면 상승으로 베링 육교가 끊어지면서 갈라진 것으로 추정된다.[3]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우는밭쥐 위키생물종에 관련된분류 및 자료가 있습니다. 우는밭쥐 ↑ 가 나 “Microtus miurus”. 《멸종 위기 종의 IUCN 적색 목록. 2008판》 (영어). 국제 자연 보전 연맹. 2008. 2009년 6월 22일에 확인함.  Database entry includes a brief justification of why this species is of least concern. ↑ Musser, G.G.; Carleton, M.D. (2005). 〈Superfamily Muroidea〉 [쥐상과]. Wilson, D.E.; Reeder, D.M. 《Mammal Species of the World: A Taxonomic and Geographic Reference》 (영어) 3판. 존스 홉킨스 대학교 출판사. 894–1531쪽. ISBN 978-0-8018-8221-0. OCLC 62265494.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F.R. Cole & D.E. Wilson (2010). “Microtus miurus (Rodentia: Cricetidae)”. 《Mammalian Species》 42: 75–89. doi:10.1644/855.1.  [깨진 링크] ↑ Bee J.W., Hall E.R. 1956. Mammals of northern Alaska on the Arctic Slope. Miscellaneous Publications of the Museum of Natural History, University of Kansas. 8:1–309. ↑ Morrison P., Dieterich R., Preston D. 1977b. Longevity and mortality in 15 rodent species and subspecies maintained in laboratory colonies. Acta Theriologica. 22:317–335 vdeh현존하는 물밭쥐아과의 종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포유강 목: 쥐목 아목: 쥐아목 과: 비단털쥐과 물밭쥐족물밭쥐속 유럽물밭쥐 남서부물밭쥐 고산물밭쥐 부하라밭쥐속 아프간밭쥐 부하라밭쥐 눈밭쥐속 캅카스눈밭쥐 유럽눈밭쥐 로버트눈밭쥐 쇠갈밭쥐속 브란트밭쥐 평원밭쥐 쇠갈밭쥐 산쑥밭쥐속 산쑥밭쥐 밭쥐속 섬밭쥐 짧은꼬리밭쥐 아나톨리아밭쥐 유라시아밭쥐 바바리아소나무밭쥐 칼라브리아소나무밭쥐 해변밭쥐 카브레라밭쥐 캘리포니아밭쥐 회색꼬리밭쥐 바위밭쥐 클라크밭쥐 다게스탄소나무밭쥐 도그라마시밭쥐 지중해소나무밭쥐 에보르스크밭쥐 펠튼밭쥐 갈밭쥐 제르베밭쥐 좁은머리밭쥐 과테말라밭쥐 귄터밭쥐 톈산밭쥐 페르시아밭쥐 타이완밭쥐 남부밭쥐 리히텐슈타인소나무밭쥐 호수밭쥐 긴꼬리밭쥐 루시타니아소나무밭쥐 메이저소나무밭쥐 막시모비치밭쥐 멕시코밭쥐 미덴도르프밭쥐 우는밭쥐 몽골밭쥐 저산대밭쥐 일본밭쥐 무이스크밭쥐 고산소나무밭쥐 타라분디밭쥐 프레리들쥐 툰드라밭쥐 오레곤초원쥐 코페트다그소나무밭쥐 아메리카밭쥐 삼림밭쥐 카즈빈밭쥐 할라파소나무밭쥐 북아메리카물밭쥐 사할린밭쥐 사비소나무밭쥐 스켈코프니코프소나무밭쥐 쉬들로프스키밭쥐 군거밭쥐 유럽소나무밭쥐 타트리소나무밭쥐 토마스소나무밭쥐 타운센드밭쥐 카스피해횡단밭쥐 젬포알테펙밭쥐 타이가밭쥐 고산밭쥐속 포레스트고산밭쥐 아이린고산밭쥐 파미르고산밭쥐 닝치고산밭쥐 메도그고산밭쥐 냐람고산밭쥐 시킴고산밭쥐 블라이스밭쥐속 블라이스밭쥐 베드퍼드공작밭쥐속 베드퍼드공작밭쥐 량산산악밭쥐 마리밭쥐속 쓰촨밭쥐 마리밭쥐 목걸이레밍족목걸이레밍속 북부목걸이레밍 엉게이버목걸이레밍 넬슨목걸이레밍 오길비산맥목걸이레밍 리처드슨목걸이레밍 북극레밍 어널래스카목걸이레밍 브란겔랴레밍 두더지들쥐족두더지들쥐속 알라이두더지들쥐 남부두더지들쥐 남캅카스두더지들쥐 북부두더지들쥐 자이산두더지들쥐 스텝레밍족아시아스텝레밍속 노랑스텝레밍 프르제발스키레밍 스텝레밍속 스텝레밍 레밍족레밍속 아무르레밍 노르웨이레밍 우랑겔섬레밍 시베리아갈색레밍 북아메리카갈색레밍 숲레밍속 숲레밍 늪레밍속 북부늪레밍 남부늪레밍 대륙밭쥐족알티콜라속 흰꼬리고산밭쥐 은색고산밭쥐 고비알타이고산밭쥐 레밍밭쥐 큰귀밭쥐 중앙카슈미르밭쥐 바이칼호고산밭쥐 로얄고산밭쥐 몽골은색밭쥐 스톨리츠카고산밭쥐 납작머리밭쥐 투바은색밭쥐 콜란밭쥐속 간쑤밭쥐 콜란밭쥐 데이빗밭쥐속 카친붉은등밭쥐 프랫밭쥐 시난밭쥐 페레다비드밭쥐 윈난붉은등밭쥐 자오퉁밭쥐 위롱샨밭쥐 워드붉은등밭쥐 카슈미르밭쥐속 트루밭쥐 무리밭쥐 대륙밭쥐속 일본붉은등밭쥐 서부붉은등밭쥐 톈산붉은등밭쥐 남부붉은등밭쥐 유럽대륙밭쥐 이마이즈미붉은등밭쥐 비단털들쥐 홋카이도붉은등밭쥐 대륙밭쥐 숲들쥐 산시밭쥐 스미스밭쥐 둥근꼬리사향쥐족둥근꼬리사향쥐속 둥근꼬리사향쥐 사향쥐족사향쥐속 사향쥐 발칸눈밭쥐족발칸눈밭쥐속 발칸눈밭쥐 긴발톱두더지들쥐족긴발톱두더지들쥐속 긴발톱두더지들쥐 incertae sedis나무밭쥐속 흰발밭쥐 붉은나무밭쥐 캘리포니아붉은나무쥐 히스밭쥐속 서부히스밭쥐 동부히스밭쥐 생물 분류 식별자 Wd: Q1761683 ADW: Microtus_miurus EoL: 310273 화석연구데이터베이스: 48594 GBIF: 2438632 iNaturalist: 44316 IRMNG: 11440929 ITIS: 180309 IUCN: 42629 MSW: 13000279 NCBI: 11183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우는밭쥐&oldid=24368056" 분류: IUCN 적색 목록 관심대상종물밭쥐아과1901년 기재된 동물숨은 분류: CS1 - 영어 인용 (en)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БългарскиCatalàCebuanoEnglishEspañolEuskaraFrançaisNederlandsPol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5: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우는밭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는밭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우는밭쥐 우는밭쥐 보전 상태 관심대상(LC), IUCN 3.1[1]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포유강 목: 쥐목 아목: 쥐아목 상과: 쥐상과 과: 비단털쥐과 아과: 물밭쥐아과 족: 물밭쥐족 속: 밭쥐속 종: 우는밭쥐(M. miurus) 학명 Microtus miurusOsgood, 1901 우는밭쥐의 분포 지역 우는밭쥐(Microtus miurus)는 밭쥐속에 속하는 설치류의 일종이다.[2] 미국 알래스카주와 캐나다 북서부 지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 북서부 지역에서 발견된다.[1] 목차 1 특징 2 분포 및 서식지 3 습성 4 번식 5 진화 6 각주 특징[편집] 우는밭쥐는 긴 털에 감춰질 정도로 귀가 짧고, 꼬리가 짧다. 털은 부드럽고 촘촘하며, 특히 겨울에 무성하다. 몸의 털은 연한 황갈색부터 연한 갈색까지 다양하고, 담황색 반점이 귀 뒤쪽부터 옆구리를 따라 엉덩이까지 이어지며, 배 쪽 털은 엷은 황갈색 또는 황토색을 띤다. 털은 검은 조모와 함께 밝은 얼룩 무늬를 띠지만, 너무 듬성 듬성 나 있어서 눈에 보이는 효과는 거의 없다. 겨울이 되면 털이 점점 회색빛을 띤다. 발은 날카롭고 좁은 발톱이 나 있으며 대부분 털에 가려진다.[3] 어른 우는밭쥐의 몸길이는 1.5~4cm의 짧은 꼬리를 제외하고 9~16cm로 다양하다. 몸무게는 11~60g으로 나이와 최근에 먹은 먹이에 따라 다르다. 암수 사이에 크기와 털 색이 크게 다르지 않다. 수컷 우는밭쥐는 옆구리 쪽에 변형된 피지 분비선을 갖고 있어서 이를 냄새 표지로 사용한다. 이 분비선은 수유중인 암컷에게도 나타난다. 음경은 비교적 길고 좁으며, 음경골이 복잡하다.[3] 우는밭쥐는 짧은 꼬리와 배 쪽의 털 색을 통해 인근 지역에 서식하는 밭쥐류(같은 지역의 다른 밭쥐는 배 쪽이 회색을 띤다.)와 구별할 수 있다. 분포 및 서식지[편집] 우는밭쥐는 미국 알래스카 주와 캐나다 북서부 지역의 토착종이다. 알래스카 서부 해안가 지역부터 남부와 북부 지역에 걸쳐 분포하지만 알래스카반도와 알래스카 중부 지역, 북부 해안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동쪽으로 매킨지 산맥처럼 먼 곳까지 분포하며 북부 해안가를 제외한 유콘 준주 전역, 인근 주의 경계 지역에서 발견된다.[3] 4종의 아종이 알려져 있다. Microtus miurus miurus - 케나이 반도 Microtus miurus cantator - 알래스카 주 남부-동부, 유콘 준주 남부 Microtus miurus miuriei - 알래스카 주 남부-서부 Microtus miurus oreas - 알래스카 주 북부와 유콘 준주 우는밭쥐는 삼림한계선 위의 툰드라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 지역 안의 아주 극단적인 환경을 피하고, 앞이 트이고 배수가 잘되며 관목과 사초속 식물이 풍부한 경사면과 바위층을 좋아한다. 가는잎미선콩속 식물과 마디풀, 사초속 식물, 속새류, 버드나무류와 같은 북극 식물을 먹는다. 주요 포식자는 울버린과 북극여우, 북방족제비, 도둑갈매기류, 수리매, 올빼미 등이다.[3] 습성[편집] 우는밭쥐는 적어도 가족 단위로 굴을 공유하는 준-군거 동물이다. 낮이나 밤 시간에 대한 명확한 선호가 없이 하루 종일 활동적이다. 땅 위 식물 사이에 통로를 만들고 서식지를 굴 입구로 연결하지만 일부 다른 밭쥐류 종이 만든 굴을 사용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키가 작은 덤불 속에서 먹이를 찾기도 한다. 굴은 수많은 방으로 이루아져 있으며, 대다수는 겨울에 먹이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아주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통로는 폭이 대개 약 2.5cm로 밭쥐보다 큰 다른 동물이 통과하기 어렵게 만들어 족제비와 같은 포식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굴은 땅 아래 20cm 이내에서 수평적으로 이어지며, 굴 입구에서 최대 1m까지 이어진다.[3] 밭쥐류 중에서 비정상적인 밭쥐로 땅에 뿌리와 뿌리줄기같은 먹이를 저장할 뿐만 아니라 풀 더미를 말리기 위해 바위 위에 올려 두기도 한다. 이런 풀더미는 낮게 누운 가지 또는 노출된 나무 뿌리 위에 대신 두어 건조한 상태가 유지되도록 하기도 한다. 풀 더미는 천천히 건조되어 건초가 되며, 풀 더미에 속새류나 루핀과 같은 다른 식물을 포함될 수도 있다. 8월경에 풀더미를 쌓기 시작하며 겨울철에 최대 50cm 높이로 상당한 크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풀더미는 겨울철에 영양가가 높은 먹이의 원천이 되지만 다른 동물의 습격을 받기 쉽다.[3] "우는밭쥐"라는 일반명은 보통 굴 입구에서 들리는 높고 날카롭게 떨리는 경고 소리에서 유래했다.[4] 번식[편집] 우는밭쥐는 5월과 9월 사이에 번식을 하고 암컷은 번식기에 최대 3번 새끼를 낳는다. 임신 기간은 21일간 지속되고, 보통 8마리의 새끼를 낳고 6~14마리의 새끼가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3] 다른 밭쥐류와 마찬가지로 암컷이 단지 8개의 젖꼭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8마리 이상의 새끼는 생존 확률이 떨어진다. 생후 2~2.8g의 새끼 몸무게는 젖을 먹는 첫 3주 동안에 급속히 증가한다. 약 4주 동안 젖을 먹인 후에 어미는 새로운 번식을 준비한다. 암컷은 일반적으로 2살까지 번식을 하지 않지만 수컷은 태어난 후 한 달 이내에 성적으로 활동적인 상태가 된다.[3] 야생에서 많은 우는밭쥐가 첫 겨울 동안에 살아남지 못한다. 포획 상태에서는 최대 112주까지 생존하는 것으로 보고되지만 평균 수명은 겨우 43주에 불과하다.[5] 진화[편집] 가장 오랜 우는밭쥐 화석은 약 30만년 전의 플라이스토세 중기(이오니아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페어뱅크스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플라이스토세(홍적세) 후기의 빙하기 동안에 우는밭쥐는 현재보다 좀더 널리 분포했고, 화석은 아이오와주와 같은 먼 남쪽 지역까지 보고되고 있으며 현재 알래스카 주 기후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 우는밭쥐와 가장 가까운 종은 알래스카 주 서부 연안의 2개의 작은 섬에서만 서식하는 섬밭쥐로 해수면 상승으로 베링 육교가 끊어지면서 갈라진 것으로 추정된다.[3]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우는밭쥐 위키생물종에 관련된분류 및 자료가 있습니다. 우는밭쥐 ↑ 가 나 “Microtus miurus”. 《멸종 위기 종의 IUCN 적색 목록. 2008판》 (영어). 국제 자연 보전 연맹. 2008. 2009년 6월 22일에 확인함.  Database entry includes a brief justification of why this species is of least concern. ↑ Musser, G.G.; Carleton, M.D. (2005). 〈Superfamily Muroidea〉 [쥐상과]. Wilson, D.E.; Reeder, D.M. 《Mammal Species of the World: A Taxonomic and Geographic Reference》 (영어) 3판. 존스 홉킨스 대학교 출판사. 894–1531쪽. ISBN 978-0-8018-8221-0. OCLC 62265494.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F.R. Cole & D.E. Wilson (2010). “Microtus miurus (Rodentia: Cricetidae)”. 《Mammalian Species》 42: 75–89. doi:10.1644/855.1.  [깨진 링크] ↑ Bee J.W., Hall E.R. 1956. Mammals of northern Alaska on the Arctic Slope. Miscellaneous Publications of the Museum of Natural History, University of Kansas. 8:1–309. ↑ Morrison P., Dieterich R., Preston D. 1977b. Longevity and mortality in 15 rodent species and subspecies maintained in laboratory colonies. Acta Theriologica. 22:317–335 vdeh현존하는 물밭쥐아과의 종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포유강 목: 쥐목 아목: 쥐아목 과: 비단털쥐과 물밭쥐족물밭쥐속 유럽물밭쥐 남서부물밭쥐 고산물밭쥐 부하라밭쥐속 아프간밭쥐 부하라밭쥐 눈밭쥐속 캅카스눈밭쥐 유럽눈밭쥐 로버트눈밭쥐 쇠갈밭쥐속 브란트밭쥐 평원밭쥐 쇠갈밭쥐 산쑥밭쥐속 산쑥밭쥐 밭쥐속 섬밭쥐 짧은꼬리밭쥐 아나톨리아밭쥐 유라시아밭쥐 바바리아소나무밭쥐 칼라브리아소나무밭쥐 해변밭쥐 카브레라밭쥐 캘리포니아밭쥐 회색꼬리밭쥐 바위밭쥐 클라크밭쥐 다게스탄소나무밭쥐 도그라마시밭쥐 지중해소나무밭쥐 에보르스크밭쥐 펠튼밭쥐 갈밭쥐 제르베밭쥐 좁은머리밭쥐 과테말라밭쥐 귄터밭쥐 톈산밭쥐 페르시아밭쥐 타이완밭쥐 남부밭쥐 리히텐슈타인소나무밭쥐 호수밭쥐 긴꼬리밭쥐 루시타니아소나무밭쥐 메이저소나무밭쥐 막시모비치밭쥐 멕시코밭쥐 미덴도르프밭쥐 우는밭쥐 몽골밭쥐 저산대밭쥐 일본밭쥐 무이스크밭쥐 고산소나무밭쥐 타라분디밭쥐 프레리들쥐 툰드라밭쥐 오레곤초원쥐 코페트다그소나무밭쥐 아메리카밭쥐 삼림밭쥐 카즈빈밭쥐 할라파소나무밭쥐 북아메리카물밭쥐 사할린밭쥐 사비소나무밭쥐 스켈코프니코프소나무밭쥐 쉬들로프스키밭쥐 군거밭쥐 유럽소나무밭쥐 타트리소나무밭쥐 토마스소나무밭쥐 타운센드밭쥐 카스피해횡단밭쥐 젬포알테펙밭쥐 타이가밭쥐 고산밭쥐속 포레스트고산밭쥐 아이린고산밭쥐 파미르고산밭쥐 닝치고산밭쥐 메도그고산밭쥐 냐람고산밭쥐 시킴고산밭쥐 블라이스밭쥐속 블라이스밭쥐 베드퍼드공작밭쥐속 베드퍼드공작밭쥐 량산산악밭쥐 마리밭쥐속 쓰촨밭쥐 마리밭쥐 목걸이레밍족목걸이레밍속 북부목걸이레밍 엉게이버목걸이레밍 넬슨목걸이레밍 오길비산맥목걸이레밍 리처드슨목걸이레밍 북극레밍 어널래스카목걸이레밍 브란겔랴레밍 두더지들쥐족두더지들쥐속 알라이두더지들쥐 남부두더지들쥐 남캅카스두더지들쥐 북부두더지들쥐 자이산두더지들쥐 스텝레밍족아시아스텝레밍속 노랑스텝레밍 프르제발스키레밍 스텝레밍속 스텝레밍 레밍족레밍속 아무르레밍 노르웨이레밍 우랑겔섬레밍 시베리아갈색레밍 북아메리카갈색레밍 숲레밍속 숲레밍 늪레밍속 북부늪레밍 남부늪레밍 대륙밭쥐족알티콜라속 흰꼬리고산밭쥐 은색고산밭쥐 고비알타이고산밭쥐 레밍밭쥐 큰귀밭쥐 중앙카슈미르밭쥐 바이칼호고산밭쥐 로얄고산밭쥐 몽골은색밭쥐 스톨리츠카고산밭쥐 납작머리밭쥐 투바은색밭쥐 콜란밭쥐속 간쑤밭쥐 콜란밭쥐 데이빗밭쥐속 카친붉은등밭쥐 프랫밭쥐 시난밭쥐 페레다비드밭쥐 윈난붉은등밭쥐 자오퉁밭쥐 위롱샨밭쥐 워드붉은등밭쥐 카슈미르밭쥐속 트루밭쥐 무리밭쥐 대륙밭쥐속 일본붉은등밭쥐 서부붉은등밭쥐 톈산붉은등밭쥐 남부붉은등밭쥐 유럽대륙밭쥐 이마이즈미붉은등밭쥐 비단털들쥐 홋카이도붉은등밭쥐 대륙밭쥐 숲들쥐 산시밭쥐 스미스밭쥐 둥근꼬리사향쥐족둥근꼬리사향쥐속 둥근꼬리사향쥐 사향쥐족사향쥐속 사향쥐 발칸눈밭쥐족발칸눈밭쥐속 발칸눈밭쥐 긴발톱두더지들쥐족긴발톱두더지들쥐속 긴발톱두더지들쥐 incertae sedis나무밭쥐속 흰발밭쥐 붉은나무밭쥐 캘리포니아붉은나무쥐 히스밭쥐속 서부히스밭쥐 동부히스밭쥐 생물 분류 식별자 Wd: Q1761683 ADW: Microtus_miurus EoL: 310273 화석연구데이터베이스: 48594 GBIF: 2438632 iNaturalist: 44316 IRMNG: 11440929 ITIS: 180309 IUCN: 42629 MSW: 13000279 NCBI: 11183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우는밭쥐&oldid=24368056" 분류: IUCN 적색 목록 관심대상종물밭쥐아과1901년 기재된 동물숨은 분류: CS1 - 영어 인용 (en)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БългарскиCatalàCebuanoEnglishEspañolEuskaraFrançaisNederlandsPol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5: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우는밭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는밭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우는밭쥐 우는밭쥐 보전 상태 관심대상(LC), IUCN 3.1[1]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포유강 목: 쥐목 아목: 쥐아목 상과: 쥐상과 과: 비단털쥐과 아과: 물밭쥐아과 족: 물밭쥐족 속: 밭쥐속 종: 우는밭쥐(M. miurus) 학명 Microtus miurusOsgood, 1901 우는밭쥐의 분포 지역 우는밭쥐(Microtus miurus)는 밭쥐속에 속하는 설치류의 일종이다.[2] 미국 알래스카주와 캐나다 북서부 지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 북서부 지역에서 발견된다.[1] 목차 1 특징 2 분포 및 서식지 3 습성 4 번식 5 진화 6 각주 특징[편집] 우는밭쥐는 긴 털에 감춰질 정도로 귀가 짧고, 꼬리가 짧다. 털은 부드럽고 촘촘하며, 특히 겨울에 무성하다. 몸의 털은 연한 황갈색부터 연한 갈색까지 다양하고, 담황색 반점이 귀 뒤쪽부터 옆구리를 따라 엉덩이까지 이어지며, 배 쪽 털은 엷은 황갈색 또는 황토색을 띤다. 털은 검은 조모와 함께 밝은 얼룩 무늬를 띠지만, 너무 듬성 듬성 나 있어서 눈에 보이는 효과는 거의 없다. 겨울이 되면 털이 점점 회색빛을 띤다. 발은 날카롭고 좁은 발톱이 나 있으며 대부분 털에 가려진다.[3] 어른 우는밭쥐의 몸길이는 1.5~4cm의 짧은 꼬리를 제외하고 9~16cm로 다양하다. 몸무게는 11~60g으로 나이와 최근에 먹은 먹이에 따라 다르다. 암수 사이에 크기와 털 색이 크게 다르지 않다. 수컷 우는밭쥐는 옆구리 쪽에 변형된 피지 분비선을 갖고 있어서 이를 냄새 표지로 사용한다. 이 분비선은 수유중인 암컷에게도 나타난다. 음경은 비교적 길고 좁으며, 음경골이 복잡하다.[3] 우는밭쥐는 짧은 꼬리와 배 쪽의 털 색을 통해 인근 지역에 서식하는 밭쥐류(같은 지역의 다른 밭쥐는 배 쪽이 회색을 띤다.)와 구별할 수 있다. 분포 및 서식지[편집] 우는밭쥐는 미국 알래스카 주와 캐나다 북서부 지역의 토착종이다. 알래스카 서부 해안가 지역부터 남부와 북부 지역에 걸쳐 분포하지만 알래스카반도와 알래스카 중부 지역, 북부 해안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동쪽으로 매킨지 산맥처럼 먼 곳까지 분포하며 북부 해안가를 제외한 유콘 준주 전역, 인근 주의 경계 지역에서 발견된다.[3] 4종의 아종이 알려져 있다. Microtus miurus miurus - 케나이 반도 Microtus miurus cantator - 알래스카 주 남부-동부, 유콘 준주 남부 Microtus miurus miuriei - 알래스카 주 남부-서부 Microtus miurus oreas - 알래스카 주 북부와 유콘 준주 우는밭쥐는 삼림한계선 위의 툰드라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 지역 안의 아주 극단적인 환경을 피하고, 앞이 트이고 배수가 잘되며 관목과 사초속 식물이 풍부한 경사면과 바위층을 좋아한다. 가는잎미선콩속 식물과 마디풀, 사초속 식물, 속새류, 버드나무류와 같은 북극 식물을 먹는다. 주요 포식자는 울버린과 북극여우, 북방족제비, 도둑갈매기류, 수리매, 올빼미 등이다.[3] 습성[편집] 우는밭쥐는 적어도 가족 단위로 굴을 공유하는 준-군거 동물이다. 낮이나 밤 시간에 대한 명확한 선호가 없이 하루 종일 활동적이다. 땅 위 식물 사이에 통로를 만들고 서식지를 굴 입구로 연결하지만 일부 다른 밭쥐류 종이 만든 굴을 사용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키가 작은 덤불 속에서 먹이를 찾기도 한다. 굴은 수많은 방으로 이루아져 있으며, 대다수는 겨울에 먹이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아주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통로는 폭이 대개 약 2.5cm로 밭쥐보다 큰 다른 동물이 통과하기 어렵게 만들어 족제비와 같은 포식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굴은 땅 아래 20cm 이내에서 수평적으로 이어지며, 굴 입구에서 최대 1m까지 이어진다.[3] 밭쥐류 중에서 비정상적인 밭쥐로 땅에 뿌리와 뿌리줄기같은 먹이를 저장할 뿐만 아니라 풀 더미를 말리기 위해 바위 위에 올려 두기도 한다. 이런 풀더미는 낮게 누운 가지 또는 노출된 나무 뿌리 위에 대신 두어 건조한 상태가 유지되도록 하기도 한다. 풀 더미는 천천히 건조되어 건초가 되며, 풀 더미에 속새류나 루핀과 같은 다른 식물을 포함될 수도 있다. 8월경에 풀더미를 쌓기 시작하며 겨울철에 최대 50cm 높이로 상당한 크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풀더미는 겨울철에 영양가가 높은 먹이의 원천이 되지만 다른 동물의 습격을 받기 쉽다.[3] "우는밭쥐"라는 일반명은 보통 굴 입구에서 들리는 높고 날카롭게 떨리는 경고 소리에서 유래했다.[4] 번식[편집] 우는밭쥐는 5월과 9월 사이에 번식을 하고 암컷은 번식기에 최대 3번 새끼를 낳는다. 임신 기간은 21일간 지속되고, 보통 8마리의 새끼를 낳고 6~14마리의 새끼가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3] 다른 밭쥐류와 마찬가지로 암컷이 단지 8개의 젖꼭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8마리 이상의 새끼는 생존 확률이 떨어진다. 생후 2~2.8g의 새끼 몸무게는 젖을 먹는 첫 3주 동안에 급속히 증가한다. 약 4주 동안 젖을 먹인 후에 어미는 새로운 번식을 준비한다. 암컷은 일반적으로 2살까지 번식을 하지 않지만 수컷은 태어난 후 한 달 이내에 성적으로 활동적인 상태가 된다.[3] 야생에서 많은 우는밭쥐가 첫 겨울 동안에 살아남지 못한다. 포획 상태에서는 최대 112주까지 생존하는 것으로 보고되지만 평균 수명은 겨우 43주에 불과하다.[5] 진화[편집] 가장 오랜 우는밭쥐 화석은 약 30만년 전의 플라이스토세 중기(이오니아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페어뱅크스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플라이스토세(홍적세) 후기의 빙하기 동안에 우는밭쥐는 현재보다 좀더 널리 분포했고, 화석은 아이오와주와 같은 먼 남쪽 지역까지 보고되고 있으며 현재 알래스카 주 기후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 우는밭쥐와 가장 가까운 종은 알래스카 주 서부 연안의 2개의 작은 섬에서만 서식하는 섬밭쥐로 해수면 상승으로 베링 육교가 끊어지면서 갈라진 것으로 추정된다.[3]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우는밭쥐 위키생물종에 관련된분류 및 자료가 있습니다. 우는밭쥐 ↑ 가 나 “Microtus miurus”. 《멸종 위기 종의 IUCN 적색 목록. 2008판》 (영어). 국제 자연 보전 연맹. 2008. 2009년 6월 22일에 확인함.  Database entry includes a brief justification of why this species is of least concern. ↑ Musser, G.G.; Carleton, M.D. (2005). 〈Superfamily Muroidea〉 [쥐상과]. Wilson, D.E.; Reeder, D.M. 《Mammal Species of the World: A Taxonomic and Geographic Reference》 (영어) 3판. 존스 홉킨스 대학교 출판사. 894–1531쪽. ISBN 978-0-8018-8221-0. OCLC 62265494.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F.R. Cole & D.E. Wilson (2010). “Microtus miurus (Rodentia: Cricetidae)”. 《Mammalian Species》 42: 75–89. doi:10.1644/855.1.  [깨진 링크] ↑ Bee J.W., Hall E.R. 1956. Mammals of northern Alaska on the Arctic Slope. Miscellaneous Publications of the Museum of Natural History, University of Kansas. 8:1–309. ↑ Morrison P., Dieterich R., Preston D. 1977b. Longevity and mortality in 15 rodent species and subspecies maintained in laboratory colonies. Acta Theriologica. 22:317–335 vdeh현존하는 물밭쥐아과의 종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포유강 목: 쥐목 아목: 쥐아목 과: 비단털쥐과 물밭쥐족물밭쥐속 유럽물밭쥐 남서부물밭쥐 고산물밭쥐 부하라밭쥐속 아프간밭쥐 부하라밭쥐 눈밭쥐속 캅카스눈밭쥐 유럽눈밭쥐 로버트눈밭쥐 쇠갈밭쥐속 브란트밭쥐 평원밭쥐 쇠갈밭쥐 산쑥밭쥐속 산쑥밭쥐 밭쥐속 섬밭쥐 짧은꼬리밭쥐 아나톨리아밭쥐 유라시아밭쥐 바바리아소나무밭쥐 칼라브리아소나무밭쥐 해변밭쥐 카브레라밭쥐 캘리포니아밭쥐 회색꼬리밭쥐 바위밭쥐 클라크밭쥐 다게스탄소나무밭쥐 도그라마시밭쥐 지중해소나무밭쥐 에보르스크밭쥐 펠튼밭쥐 갈밭쥐 제르베밭쥐 좁은머리밭쥐 과테말라밭쥐 귄터밭쥐 톈산밭쥐 페르시아밭쥐 타이완밭쥐 남부밭쥐 리히텐슈타인소나무밭쥐 호수밭쥐 긴꼬리밭쥐 루시타니아소나무밭쥐 메이저소나무밭쥐 막시모비치밭쥐 멕시코밭쥐 미덴도르프밭쥐 우는밭쥐 몽골밭쥐 저산대밭쥐 일본밭쥐 무이스크밭쥐 고산소나무밭쥐 타라분디밭쥐 프레리들쥐 툰드라밭쥐 오레곤초원쥐 코페트다그소나무밭쥐 아메리카밭쥐 삼림밭쥐 카즈빈밭쥐 할라파소나무밭쥐 북아메리카물밭쥐 사할린밭쥐 사비소나무밭쥐 스켈코프니코프소나무밭쥐 쉬들로프스키밭쥐 군거밭쥐 유럽소나무밭쥐 타트리소나무밭쥐 토마스소나무밭쥐 타운센드밭쥐 카스피해횡단밭쥐 젬포알테펙밭쥐 타이가밭쥐 고산밭쥐속 포레스트고산밭쥐 아이린고산밭쥐 파미르고산밭쥐 닝치고산밭쥐 메도그고산밭쥐 냐람고산밭쥐 시킴고산밭쥐 블라이스밭쥐속 블라이스밭쥐 베드퍼드공작밭쥐속 베드퍼드공작밭쥐 량산산악밭쥐 마리밭쥐속 쓰촨밭쥐 마리밭쥐 목걸이레밍족목걸이레밍속 북부목걸이레밍 엉게이버목걸이레밍 넬슨목걸이레밍 오길비산맥목걸이레밍 리처드슨목걸이레밍 북극레밍 어널래스카목걸이레밍 브란겔랴레밍 두더지들쥐족두더지들쥐속 알라이두더지들쥐 남부두더지들쥐 남캅카스두더지들쥐 북부두더지들쥐 자이산두더지들쥐 스텝레밍족아시아스텝레밍속 노랑스텝레밍 프르제발스키레밍 스텝레밍속 스텝레밍 레밍족레밍속 아무르레밍 노르웨이레밍 우랑겔섬레밍 시베리아갈색레밍 북아메리카갈색레밍 숲레밍속 숲레밍 늪레밍속 북부늪레밍 남부늪레밍 대륙밭쥐족알티콜라속 흰꼬리고산밭쥐 은색고산밭쥐 고비알타이고산밭쥐 레밍밭쥐 큰귀밭쥐 중앙카슈미르밭쥐 바이칼호고산밭쥐 로얄고산밭쥐 몽골은색밭쥐 스톨리츠카고산밭쥐 납작머리밭쥐 투바은색밭쥐 콜란밭쥐속 간쑤밭쥐 콜란밭쥐 데이빗밭쥐속 카친붉은등밭쥐 프랫밭쥐 시난밭쥐 페레다비드밭쥐 윈난붉은등밭쥐 자오퉁밭쥐 위롱샨밭쥐 워드붉은등밭쥐 카슈미르밭쥐속 트루밭쥐 무리밭쥐 대륙밭쥐속 일본붉은등밭쥐 서부붉은등밭쥐 톈산붉은등밭쥐 남부붉은등밭쥐 유럽대륙밭쥐 이마이즈미붉은등밭쥐 비단털들쥐 홋카이도붉은등밭쥐 대륙밭쥐 숲들쥐 산시밭쥐 스미스밭쥐 둥근꼬리사향쥐족둥근꼬리사향쥐속 둥근꼬리사향쥐 사향쥐족사향쥐속 사향쥐 발칸눈밭쥐족발칸눈밭쥐속 발칸눈밭쥐 긴발톱두더지들쥐족긴발톱두더지들쥐속 긴발톱두더지들쥐 incertae sedis나무밭쥐속 흰발밭쥐 붉은나무밭쥐 캘리포니아붉은나무쥐 히스밭쥐속 서부히스밭쥐 동부히스밭쥐 생물 분류 식별자 Wd: Q1761683 ADW: Microtus_miurus EoL: 310273 화석연구데이터베이스: 48594 GBIF: 2438632 iNaturalist: 44316 IRMNG: 11440929 ITIS: 180309 IUCN: 42629 MSW: 13000279 NCBI: 11183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우는밭쥐&oldid=24368056" 분류: IUCN 적색 목록 관심대상종물밭쥐아과1901년 기재된 동물숨은 분류: CS1 - 영어 인용 (en)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БългарскиCatalàCebuanoEnglishEspañolEuskaraFrançaisNederlandsPol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5: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유송 무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송 무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유송 고조 무제 유유 송 고조 무황제 유유(宋 高祖 武皇帝 劉裕, 363년 ~ 422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유송의 초대 황제로, 자는 덕여(德輿)이다. 다른 송나라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서, 유유의 건국한 송나라는 후세의 역사가에 의해 유송(劉宋)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목차 1 생애 2 가계도 2.1 부모 2.2 후비 2.3 황자 2.4 황녀 생애[편집]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彭城)의 하급군인 이었던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황제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다. 이때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 등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 유랑자의 신분증명서를 말한다.)의 구별 철폐를 추진했다. 이로써 토착민과 유랑자 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목표로 하였다. 무제는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 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그는 후사를 한문(寒門) 출신의 서희지(徐羲之), 전량(傳亮), 단도성(檀道成),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를 즉위시켰다. 가계도[편집] 부모[편집] 부 : 현종효황제 (顯宗孝皇帝) 유교(劉翹) 모 : 효목황후(孝穆皇后) 조안종(趙安宗) 계모 : 효의황후(孝懿皇后) 소문수(蕭文壽) 후비[편집] 무경황후(武敬皇后) 장애친(臧愛親, 360년 ~ 408년) - 유송 건국 후 추존. 문장황태후(文章皇太后) 호도안(胡道安, 368년~ 409년) - 문제 즉위 후 추존. 영양국태비(營陽國太妃) 장궐(張闕) - 생전 작위는 부인(夫人). 수화 손씨(修華 孫氏) 수용 왕씨(修容 王氏, ? ~ 432년) 미인 원씨(美人 袁氏) 미인 여씨(美人 呂氏) 미인 손씨(美人 孫氏) 수의 부씨(修儀 符氏) 요씨(姚氏) 황자[편집] 황태자 유의부(劉義符) - 영양국태비 소생. 제2대 소제(少帝) 여릉효헌왕(廬陵孝獻王) 유의진(劉義眞, 407년 ~ 424년) - 수화 손씨 소생. 의도왕(宜都王) 유의륭(劉義隆) - 문장황태후 소생. 제3대 황제 문제(文帝).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년 ~ 451년) - 수용 왕씨 소생. 역모의 연루되어 처형당함. 강하문헌왕(江夏文獻王) 유의공(劉義恭, 413년 ~ 465년) - 미인 원씨 소생. 남군왕(南郡王) 유의선(劉義宣, 415년 ~ 454년) - 미인 손씨 소생. 역모의 연루되어 처형당함. 형양문왕(衡陽文王) 유의계(劉義季, 415년 ~ 447년) - 미인 여씨 소생. 황녀[편집] 회계선공주(會稽宣公主) 유흥제(劉興弟, ? ~ 444년) - 무경황후 소생. 오흥소공주(吳興昭公主) 유영남(劉榮男) 광덕공주(廣德公主) - 수의 부씨 소생. 선성덕공주(宣城德公主) 신안공주(新安公主) 오군선공주(吳郡宣公主, ? ~ 476년) 시안애공주(始安哀公主) 의흥공공주(義興恭公主) 유혜원(劉惠媛) - 영양국태비 소생. 예장강공주(豫章康公主) 유흔남(劉欣男, ? ~ 464년) 전 임동진 공제 제1대 유송 황제420년 ~ 422년 후 임소제 유의부 vdeh오호십육국통사 오호난화 영가의 난 후조 양국 전투 위-선비 전쟁 전연 전진 부견의 남정 비수 대전 유유의 북벌 십육국흉노 전조(304년-329년) 북량(397년-439년) 하(407년-431년) 저 성한(304년-347년) 전진(351년-394년) 후량(386년-403년) 갈 후조(319년-351년) 선비 전연(337년-370년) 후연(384년-407년) 서진(385년-431년) 남량(397년-414년) 남연(398년-410년) 강 후진(384년-417년) 한 전량(301년-376년) 서량(400년-421년) 북연(407년-436년) 그 외 국가단명국가 염민(350년-352년) 단제(350년-356년) 서연(384년-394년) 적위(388년-392년) 환초(401년-404년) 서수(405년-413년) 군장국가 우문 단부 지방정권 구지국(296년-580년) 대국(310년-376년) 인물 유연 석륵 사마월 염민 환온 부건 사현 유유 사료 『십육국춘추』 『진서』  « 진조 남북조 »  304년-439년 vdeh중국 남조의 황제유송(劉宋)추숭 효제 통치 무제 소제 문제 효무제 전폐제 명제 후폐제 순제 자립 진안왕 찬탈 원흉 남제(南齊)추숭 선제 문제 경황 통치 고제 무제 전폐제 후폐제 명제 동혼후 화제 자립 파양왕 양(梁)추숭 문제 소명제 안제 남량 무제 간문제 폐제 원제 민제 경제 후량 선제 명제 정제 자립 임하왕 무릉정헌왕 영가왕 한(漢)추숭 원제 통치 후경 진(陳)추숭 경제 통치 무제 문제 폐제 선제 후주 삼황오제 → 하나라 → 상나라 → 주나라 → 진(秦)나라 → 한나라 → 삼국시대 → 진(晉)나라 / 오호 십육국 → 남조 / 원위 - 북주 - 북제 → 수나라 → 당나라 → 오대 / 십국 → 송나라 / 요나라 / 서하 / 금나라 → 원나라 → 명나라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이 글은 군주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유송_무제&oldid=23673138" 분류: 363년 태어남422년 죽음송 (남조)의 황제진나라 (위진)의 섭정동진의 태위동진의 상서령동진의 장군장쑤성 출신창업군주숨은 분류: 군주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日本語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9일 (토) 21:0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유송 무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송 무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유송 고조 무제 유유 송 고조 무황제 유유(宋 高祖 武皇帝 劉裕, 363년 ~ 422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유송의 초대 황제로, 자는 덕여(德輿)이다. 다른 송나라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서, 유유의 건국한 송나라는 후세의 역사가에 의해 유송(劉宋)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목차 1 생애 2 가계도 2.1 부모 2.2 후비 2.3 황자 2.4 황녀 생애[편집]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彭城)의 하급군인 이었던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황제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다. 이때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 등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 유랑자의 신분증명서를 말한다.)의 구별 철폐를 추진했다. 이로써 토착민과 유랑자 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목표로 하였다. 무제는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 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그는 후사를 한문(寒門) 출신의 서희지(徐羲之), 전량(傳亮), 단도성(檀道成),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를 즉위시켰다. 가계도[편집] 부모[편집] 부 : 현종효황제 (顯宗孝皇帝) 유교(劉翹) 모 : 효목황후(孝穆皇后) 조안종(趙安宗) 계모 : 효의황후(孝懿皇后) 소문수(蕭文壽) 후비[편집] 무경황후(武敬皇后) 장애친(臧愛親, 360년 ~ 408년) - 유송 건국 후 추존. 문장황태후(文章皇太后) 호도안(胡道安, 368년~ 409년) - 문제 즉위 후 추존. 영양국태비(營陽國太妃) 장궐(張闕) - 생전 작위는 부인(夫人). 수화 손씨(修華 孫氏) 수용 왕씨(修容 王氏, ? ~ 432년) 미인 원씨(美人 袁氏) 미인 여씨(美人 呂氏) 미인 손씨(美人 孫氏) 수의 부씨(修儀 符氏) 요씨(姚氏) 황자[편집] 황태자 유의부(劉義符) - 영양국태비 소생. 제2대 소제(少帝) 여릉효헌왕(廬陵孝獻王) 유의진(劉義眞, 407년 ~ 424년) - 수화 손씨 소생. 의도왕(宜都王) 유의륭(劉義隆) - 문장황태후 소생. 제3대 황제 문제(文帝).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년 ~ 451년) - 수용 왕씨 소생. 역모의 연루되어 처형당함. 강하문헌왕(江夏文獻王) 유의공(劉義恭, 413년 ~ 465년) - 미인 원씨 소생. 남군왕(南郡王) 유의선(劉義宣, 415년 ~ 454년) - 미인 손씨 소생. 역모의 연루되어 처형당함. 형양문왕(衡陽文王) 유의계(劉義季, 415년 ~ 447년) - 미인 여씨 소생. 황녀[편집] 회계선공주(會稽宣公主) 유흥제(劉興弟, ? ~ 444년) - 무경황후 소생. 오흥소공주(吳興昭公主) 유영남(劉榮男) 광덕공주(廣德公主) - 수의 부씨 소생. 선성덕공주(宣城德公主) 신안공주(新安公主) 오군선공주(吳郡宣公主, ? ~ 476년) 시안애공주(始安哀公主) 의흥공공주(義興恭公主) 유혜원(劉惠媛) - 영양국태비 소생. 예장강공주(豫章康公主) 유흔남(劉欣男, ? ~ 464년) 전 임동진 공제 제1대 유송 황제420년 ~ 422년 후 임소제 유의부 vdeh오호십육국통사 오호난화 영가의 난 후조 양국 전투 위-선비 전쟁 전연 전진 부견의 남정 비수 대전 유유의 북벌 십육국흉노 전조(304년-329년) 북량(397년-439년) 하(407년-431년) 저 성한(304년-347년) 전진(351년-394년) 후량(386년-403년) 갈 후조(319년-351년) 선비 전연(337년-370년) 후연(384년-407년) 서진(385년-431년) 남량(397년-414년) 남연(398년-410년) 강 후진(384년-417년) 한 전량(301년-376년) 서량(400년-421년) 북연(407년-436년) 그 외 국가단명국가 염민(350년-352년) 단제(350년-356년) 서연(384년-394년) 적위(388년-392년) 환초(401년-404년) 서수(405년-413년) 군장국가 우문 단부 지방정권 구지국(296년-580년) 대국(310년-376년) 인물 유연 석륵 사마월 염민 환온 부건 사현 유유 사료 『십육국춘추』 『진서』  « 진조 남북조 »  304년-439년 vdeh중국 남조의 황제유송(劉宋)추숭 효제 통치 무제 소제 문제 효무제 전폐제 명제 후폐제 순제 자립 진안왕 찬탈 원흉 남제(南齊)추숭 선제 문제 경황 통치 고제 무제 전폐제 후폐제 명제 동혼후 화제 자립 파양왕 양(梁)추숭 문제 소명제 안제 남량 무제 간문제 폐제 원제 민제 경제 후량 선제 명제 정제 자립 임하왕 무릉정헌왕 영가왕 한(漢)추숭 원제 통치 후경 진(陳)추숭 경제 통치 무제 문제 폐제 선제 후주 삼황오제 → 하나라 → 상나라 → 주나라 → 진(秦)나라 → 한나라 → 삼국시대 → 진(晉)나라 / 오호 십육국 → 남조 / 원위 - 북주 - 북제 → 수나라 → 당나라 → 오대 / 십국 → 송나라 / 요나라 / 서하 / 금나라 → 원나라 → 명나라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이 글은 군주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유송_무제&oldid=23673138" 분류: 363년 태어남422년 죽음송 (남조)의 황제진나라 (위진)의 섭정동진의 태위동진의 상서령동진의 장군장쑤성 출신창업군주숨은 분류: 군주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日本語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9일 (토) 21:0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수호이 Su-37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호이 Su-37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Su-37은 쿨비트기동이 가능하다. 수호이 Su-37 또는 Flanker-F는 러시아의 시제형 다목적 전투기이다. Su-35 시제기에 추력편향 엔진을 장착한 1인승 전투기이다.[1] 목차 1 개발 2 설계 2.1 조종석 3 운영국가 4 제원 (Su-37)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개발[편집] 소련은 세계최강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F-15에 대응하기 위해 Su-27(나토명 플랭커)을 개발했다. 그러나 Su-27은 전자조종장치가 아니라 기계식조종장치인데, 이것을 F-15와 같은 전자조종장치로 개조한 것이 Su-35이다. Su-35에 추력편향 엔진을 장착한 것이 Su-37(나토명 플랭커-F)이다. 전투기는 공중전에서 매우 빠른 360도 회전이 필요하다. 추력편향 엔진을 장착하면, 360도 회전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Su-35는 처음에 Su-27M 이라고 불렸다.[2] Su-27M 시제기 (T-10S-70)는 1988년에 최초로 비행했다. Su-27에서 바뀐 점은 카나드 날개 장착, 엔진 업그레이드, 새로운 레이다, 디지털 FCS 채택이다.[3] Sukhoi changed the Su-27M's designation to Su-35 in 1993. Later Su-35 prototypes added a glass cockpit and modified tailfins.[2] Su-35에 2차원 추력편향 노즐을 장착하여 Su-37 가 되었다.[3] Su-37 시제기는 1996년 4월에 초도비행했다.[4] Su-37는 1996 Farnborough 에어쇼에 모습을 드러냈다.[2] Yevgeny Frolov가 조종했다. Su-37 2호기는 1998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5] 수호이사는 Su-27 시리즈들, 예를들어 Su-30MKI, Su-35BM등 에도 이러한 개조, 즉 디지털화, 레이다 개량, 추력편향 엔진을 추가 등을 할 것이라고 했다. 설계[편집] Su-37은 1인승, 전천후 다목적 전투기이다. Su-27에서 여러가지 개조를 했다. MESA 레이다를 장착했고, 지형맵핑, 후미에 접근경보레이다도 장착했다. 메탈소재인 Su-27와 달리, 복합소재를 사용했다. 2차원 추력편향이 가능한 AL-37FU 엔진을 사용하여 코브라 기동이 가능하다. 조종석[편집] 러시아 전투기 최초로 조종석에 HOTAS를 채택했다. 플라이 바이 와이어 기능이 있다. 운영국가[편집] 러시아 러시아 공군 제원 (Su-37)[편집] 정보의 출처: Gordon and Davison[6]일반 특성 승무원: 1, pilot 길이: 22.183 m (72 ft 9 in) 날개폭: 14.7 m (48 ft 3 in) 높이: 6.43 m (21 ft 1 in) 날개면적: 62.0 m² (667 ft²) 공허중량: 18,500 kg (40,790 lb) 최대이륙중량: 35,000 kg (77,160 lb) 엔진: 2× Lyulka AL-37FU turbofans 최대추력: 7,600 kgf (74.5 kN, 16,750 lbf) 각각 재연소시추력: 145 kN (32,000 lbf) 각각 성능 최대속도: Mach 2.30 (1,550 mph[7]) 항속거리: 3,700 km (2,230 mi) 상승한도: 18,000 m (59,100 ft) Maximum G loading: 9/-3 g무장 1 × 30 mm GSh-30 cannon with 150 rounds 12 × wing and fuselage stations for up to 8,200 kg (18,080 lb) of ordnance 같이 보기[편집] 코브라 기동 관련 개발 수호이 Su-27 수호이 Su-30 수호이 Su-33 수호이 Su-35 수호이 Su-47 유사 항공기 F-15S/MTD F/A-18 HARV F-16 VISTA Mikoyan MiG-35 각주[편집] ↑ Gordon and Davison 2006, pp. 34-35. ↑ 가 나 다 Eden, Paul. "Sukhoi Su-27 'Flanker'". Encyclopedia of Modern Military Aircraft. Amber Books, 2004. ISBN 1-904687-84-9. ↑ 가 나 Frawley, Gerald. "Sukhoi Su-35 & Su-37". The International Directory of Military Aircraft, 2002/2003. Aerospace Publications, 2002. ISBN 1-875671-55-2. ↑ "Su-37 shows its thrust", Flight International, 28 August 1996. ↑ Gordon & Davison 2006, 34–37.쪽 ↑ Gordon and Davison 2006, pp. 92, 95-96. ↑ “Sukhoi Su-37”. 2002년 3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17일에 확인함.  Gordon, Yefim and Peter Davison. Sukhoi Su-27 Flanker. Specialty Press, 2006. ISBN 978-1-58007-091-1. 외부 링크[편집] Su-37 image Su-37 at Globalsecurity.org Su-37 at EnemyForces.com Su-37 at Fighter Tactics Academy Su-37 at Russian Military Analysis Su-37 at airforce-technology.com "Sukhoi flies latest Su-37 demonstrator", Flight International, 9 September 1998. "Sukhoi demonstrator crashes during testing", Flight International, 31 December 2002. vdeh수호이 항공기전투기 / 요격기 Su-9 (II) Su-11 (II) Su-15 (II) Su-27 Su-30 Su-30MKK Su-30MKI Su-33 Su-35 Su-35BM Su-37 Su-57 폭격기 / 전폭기 Su-2 Su-4 Su-7 (II) Su-17 (II) Su-20 Su-22 Su-24 Su-25 Su-32 Su-34 Su-39 정찰기Su-12훈련기 UTB Su-26 Su-28 Su-29 Su-31 수송기 Su-38 Su-80 S-21 KR-860 수퍼젯 100 실험기 Su-1 Su-3 Su-5 Su-6 Su-7 (I) Su-8 Su-9 (I) Su-10 Su-11 (I) Su-13 Su-15 (I) Su-17 (I) Su-47 P-1 T-3 T-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수호이_Su-37&oldid=23528166" 분류: 선미익기소련 및 러시아의 전투기수호이 항공기1996년 첫 비행한 항공기쌍발 제트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עבריתहिन्दी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پښتو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4일 (목) 11: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수호이 Su-37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호이 Su-37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Su-37은 쿨비트기동이 가능하다. 수호이 Su-37 또는 Flanker-F는 러시아의 시제형 다목적 전투기이다. Su-35 시제기에 추력편향 엔진을 장착한 1인승 전투기이다.[1] 목차 1 개발 2 설계 2.1 조종석 3 운영국가 4 제원 (Su-37)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개발[편집] 소련은 세계최강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F-15에 대응하기 위해 Su-27(나토명 플랭커)을 개발했다. 그러나 Su-27은 전자조종장치가 아니라 기계식조종장치인데, 이것을 F-15와 같은 전자조종장치로 개조한 것이 Su-35이다. Su-35에 추력편향 엔진을 장착한 것이 Su-37(나토명 플랭커-F)이다. 전투기는 공중전에서 매우 빠른 360도 회전이 필요하다. 추력편향 엔진을 장착하면, 360도 회전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Su-35는 처음에 Su-27M 이라고 불렸다.[2] Su-27M 시제기 (T-10S-70)는 1988년에 최초로 비행했다. Su-27에서 바뀐 점은 카나드 날개 장착, 엔진 업그레이드, 새로운 레이다, 디지털 FCS 채택이다.[3] Sukhoi changed the Su-27M's designation to Su-35 in 1993. Later Su-35 prototypes added a glass cockpit and modified tailfins.[2] Su-35에 2차원 추력편향 노즐을 장착하여 Su-37 가 되었다.[3] Su-37 시제기는 1996년 4월에 초도비행했다.[4] Su-37는 1996 Farnborough 에어쇼에 모습을 드러냈다.[2] Yevgeny Frolov가 조종했다. Su-37 2호기는 1998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5] 수호이사는 Su-27 시리즈들, 예를들어 Su-30MKI, Su-35BM등 에도 이러한 개조, 즉 디지털화, 레이다 개량, 추력편향 엔진을 추가 등을 할 것이라고 했다. 설계[편집] Su-37은 1인승, 전천후 다목적 전투기이다. Su-27에서 여러가지 개조를 했다. MESA 레이다를 장착했고, 지형맵핑, 후미에 접근경보레이다도 장착했다. 메탈소재인 Su-27와 달리, 복합소재를 사용했다. 2차원 추력편향이 가능한 AL-37FU 엔진을 사용하여 코브라 기동이 가능하다. 조종석[편집] 러시아 전투기 최초로 조종석에 HOTAS를 채택했다. 플라이 바이 와이어 기능이 있다. 운영국가[편집] 러시아 러시아 공군 제원 (Su-37)[편집] 정보의 출처: Gordon and Davison[6]일반 특성 승무원: 1, pilot 길이: 22.183 m (72 ft 9 in) 날개폭: 14.7 m (48 ft 3 in) 높이: 6.43 m (21 ft 1 in) 날개면적: 62.0 m² (667 ft²) 공허중량: 18,500 kg (40,790 lb) 최대이륙중량: 35,000 kg (77,160 lb) 엔진: 2× Lyulka AL-37FU turbofans 최대추력: 7,600 kgf (74.5 kN, 16,750 lbf) 각각 재연소시추력: 145 kN (32,000 lbf) 각각 성능 최대속도: Mach 2.30 (1,550 mph[7]) 항속거리: 3,700 km (2,230 mi) 상승한도: 18,000 m (59,100 ft) Maximum G loading: 9/-3 g무장 1 × 30 mm GSh-30 cannon with 150 rounds 12 × wing and fuselage stations for up to 8,200 kg (18,080 lb) of ordnance 같이 보기[편집] 코브라 기동 관련 개발 수호이 Su-27 수호이 Su-30 수호이 Su-33 수호이 Su-35 수호이 Su-47 유사 항공기 F-15S/MTD F/A-18 HARV F-16 VISTA Mikoyan MiG-35 각주[편집] ↑ Gordon and Davison 2006, pp. 34-35. ↑ 가 나 다 Eden, Paul. "Sukhoi Su-27 'Flanker'". Encyclopedia of Modern Military Aircraft. Amber Books, 2004. ISBN 1-904687-84-9. ↑ 가 나 Frawley, Gerald. "Sukhoi Su-35 & Su-37". The International Directory of Military Aircraft, 2002/2003. Aerospace Publications, 2002. ISBN 1-875671-55-2. ↑ "Su-37 shows its thrust", Flight International, 28 August 1996. ↑ Gordon & Davison 2006, 34–37.쪽 ↑ Gordon and Davison 2006, pp. 92, 95-96. ↑ “Sukhoi Su-37”. 2002년 3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17일에 확인함.  Gordon, Yefim and Peter Davison. Sukhoi Su-27 Flanker. Specialty Press, 2006. ISBN 978-1-58007-091-1. 외부 링크[편집] Su-37 image Su-37 at Globalsecurity.org Su-37 at EnemyForces.com Su-37 at Fighter Tactics Academy Su-37 at Russian Military Analysis Su-37 at airforce-technology.com "Sukhoi flies latest Su-37 demonstrator", Flight International, 9 September 1998. "Sukhoi demonstrator crashes during testing", Flight International, 31 December 2002. vdeh수호이 항공기전투기 / 요격기 Su-9 (II) Su-11 (II) Su-15 (II) Su-27 Su-30 Su-30MKK Su-30MKI Su-33 Su-35 Su-35BM Su-37 Su-57 폭격기 / 전폭기 Su-2 Su-4 Su-7 (II) Su-17 (II) Su-20 Su-22 Su-24 Su-25 Su-32 Su-34 Su-39 정찰기Su-12훈련기 UTB Su-26 Su-28 Su-29 Su-31 수송기 Su-38 Su-80 S-21 KR-860 수퍼젯 100 실험기 Su-1 Su-3 Su-5 Su-6 Su-7 (I) Su-8 Su-9 (I) Su-10 Su-11 (I) Su-13 Su-15 (I) Su-17 (I) Su-47 P-1 T-3 T-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수호이_Su-37&oldid=23528166" 분류: 선미익기소련 및 러시아의 전투기수호이 항공기1996년 첫 비행한 항공기쌍발 제트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עבריתहिन्दी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پښتو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4일 (목) 11: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최순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순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최순호 개인 정보로마자 표기 Choi Soon-Ho출생일 1962년 1월 10일(1962-01-10) (57세)출생지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키 185cm포지션 은퇴 (과거 스트라이커)클럽 정보현 소속팀 포항 스틸러스청소년 클럽 기록1981-1982 광운대학교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80-19821983-19871988-199019911992-1993 포항제철 축구단 (실업)포항제철 아톰즈럭키금성 황소포항제철 아톰즈 로데스 AF 00? 0(?)055 (21)028 0(2)016 0(0)018 0(2)국가대표팀 기록‡1979-19811980-1991 대한민국 U-20대한민국 010 0(6)097 (30)지도자 기록1992-19931999-20002000-20042006-20082009-20112012-20132016-2019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 포항 스틸러스 (코치) 포항 스틸러스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강원 FC FC 서울 미래기획단 (단장)포항 스틸러스 메달 기록 대한민국의 선수 남자 축구 아시안 게임 금 1986 서울 축구 동 1990 베이징 축구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4년 9월 23일 기준이다.‡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14년 9월 23일 기준이다. 최순호 (崔淳鎬, 1962년 1월 10일 ~ ,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및 지도자이다. 전 포항 스틸러스의 11대 감독이다. 목차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팀 경력 4 지도자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그 외 7 경력 통계 7.1 국가대표팀 득점 8 경력 목록 8.1 클럽 경력 8.2 국가대표팀 경력 8.3 지도자 경력 9 수상 경력 9.1 선수 9.1.1 포항제철 아톰즈 9.1.2 럭키금성 황소 9.2 국가대표팀 9.3 감독 9.3.1 포항 스틸러스 9.3.2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9.4 개인 10 역대 선거 결과 11 각주 12 외부 링크 개요[편집] 충청북도 청주시 출생으로 청주상업고등학교, 광운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등의 국제 대회에서 좋은 기량을 선보여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선배 축구선수 정해원이 본인(최순호)의 아내를 소개시켜줬는데[1] 최순호의 아내 박귀주씨는 정해원 아내의 같은 과 후배다. 클럽 경력[편집] 1980년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하였고[2] 그 후 광운대에 진학하였다가 1983년부터 프로축구 출범 후 프로 경력을 시작하였으며 , 1988년 2월 당시 최순호의 고향인 충청 지역을 연고로 하는 럭키금성 황소로 이적하였다.[3][4] 1991년 친정팀 포항제철 아톰즈로 복귀하였는데 당시 본인의 트레이드 상대였던[5] 황영우는 1987년 포철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K리그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 뒤, 1992년 7월, 프랑스 리그 2의 로데스 AF로 이적하여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1992-1993 한 시즌 동안 활약하였다.[6]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최순호가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 대회는 1979년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였다. 그는 2년 후에 열린 1981년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이탈리아 U-20 대표팀을 상대로 2골을 득점하였다. 1980년 8월 23일,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에서 말레이시아와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1980년대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1980년 AFC 아시안컵에서 7골로 이란의 베타시 파리바와 함께 공동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1986년 FIFA 월드컵과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뛰었으며, 1986년 FIFA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을 상대로 멋진 골을 성공, 이 골을 포함해 FIFA 월드컵에서 총 1골 3도움을 기록했다. 1991년 7월 27일, 일본과의 A매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 은퇴한 직후에 잠시 포항제철 아톰즈에서 코치로 지냈다. 1999년에 다시 포항 스틸러스의 코치로 활동하다가, 2000년 8월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박성화 감독이 팀을 떠나자, 감독 대행을 맡았다.[7] 2001년, 감독 대행을 하면서 자신의 코치 계약기간을 채운 뒤 능력을 평가 받고 포항 스틸러스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였다.[8] 2004년, 팀을 K리그 준우승으로 이끈 뒤[9] 팀을 떠났다.[10] 2005년 11월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감독에 선임되어 축구계에 복귀하였으며 2006 시즌부터 팀을 이끌었다.[11] 2007년 팀을 내셔널리그 우승으로 이끈 뒤, 당시 논의되고 있던 K리그와의 승강제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었으나[12],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13] 2008년 12월 팀의 내셔널리그 2연패를 이룩한 뒤,[14] 새롭게 창단된 강원 FC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어[15] 울산 현대미포조선의 주전 선수들을 드래프트로 영입하여 전 소속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승격의 꿈을 대신하였다. 2011년 4월 4일 강원 FC가 리그 개막 후 4연패하자 자진사퇴하였다.[16] 2012년 2월 20일 FC 서울의 유소년 시스템인 미래기획단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17] 그리고 2013년 3월 허정무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과 나란히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2016년 9월 26일에는 친정팀인 포항 스틸러스 제 11대 감독으로 재취임하면서 12년 만에 포항으로 돌아왔다.[18] 그러나 2019년 4월 22일에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였고, 후임으로는 김기동이 선임되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최순호는 공격수 겸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1980년대의 한국 축구를 채워준 손꼽히는 공격수이다. 185cm의 장신이면서도 볼 터치가 유연했고, 섬세한 드리블, 정확한 슈팅이 장기였다. 그의 패스는 상대 수비의 허를 찔렀고, 시야도 넓었다. 그 외[편집] 최순호의 아들인 최원우 또한 축구선수로서 K-리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2006년 12월에 시행된 드래프트에서 6순위로 자신의 아버지의 동료인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경남 FC에 입단하게 되어,[19] 박상인 · 박혁순 부자와 오세권 · 오범석 부자에 이어 세 번째로 부자가 모두 K-리그에서 뛰게 되는 기록을 세웠다.[20] 경력 통계[편집] 국가대표팀 득점[편집] 득점 일자 장소 상대팀 최종결과 대회 1 1980년 8월 25일 대한민국 춘천 인도네시아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 1980년 8월 27일 대한민국 대전 태국 3 - 2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3 1980년 9월 16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말레이시아 1 - 1 1980년 AFC 아시안컵 4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카타르 2 - 0 1980년 AFC 아시안컵 5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쿠웨이트 3 - 0 1980년 AFC 아시안컵 6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쿠웨이트 3 - 0 1980년 AFC 아시안컵 9 1980년 9월 21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아랍에미리트 4 - 1 1980년 AFC 아시안컵 10 1981년 4월 24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태국 5 - 1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 11 1981년 4월 24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태국 5 - 1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 12 1982년 3월 21일 대한민국 서울 일본 3 - 0 한일 정기전 13 1982년 5월 10일 태국 방콕 인도네시아 2 - 0 킹스컵 14 1982년 6월 11일 대한민국 광양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5 1982년 11월 21일 인도 뉴델리 남예멘 3 - 0 1982년 아시안 게임 16 1982년 11월 21일 인도 뉴델리 남예멘 3 - 0 1982년 아시안 게임 17 1985년 6월 6일 대한민국 대전 태국 3 - 2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8 1985년 6월 8일 대한민국 광주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9 1985년 6월 8일 대한민국 광주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0 1985년 6월 15일 대한민국 서울 이라크 2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1 1985년 6월 15일 대한민국 서울 이라크 2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2 1985년 7월 3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4 - 1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23 1985년 12월 14일 멕시코 시우다드네사우알코요틀 알제리 2 - 0 1985년 멕시코 토너먼트 24 1986년 6월 10일 멕시코 푸에블라 이탈리아 2 - 3 1986년 FIFA 월드컵 25 1986년 9월 20일 대한민국 부산 인도 3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6 1986년 10월 3일 대한민국 서울 인도네시아 4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7 1986년 10월 3일 대한민국 서울 인도네시아 4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8 1988년 6월 19일 대한민국 수원 잠비아 4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9 1988년 10월 26일 일본 도쿄 일본 1 - 0 한일 정기전 30 1989년 5월 27일 대한민국 서울 말레이시아 3 - 0 199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경력 목록[편집] 클럽 경력[편집] 1980년 ~ 1982년 포항제철 축구단 (실업) 1983년 ~ 1987년 포항제철 아톰즈 1988년 ~ 1990년 럭키금성 황소 1991년 포항제철 아톰즈 1992년 ~ 1993년 로데스 AF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1980년 AFC 아시안컵 대표 1986년 FIFA 월드컵 대표 1988년 하계 올림픽 대표 1990년 FIFA 월드컵 대표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 ~ 1993년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 1999년 ~ 2000년 포항 스틸러스 코치 2000년 ~ 2004년 포항 스틸러스 감독 2005년 ~ 2008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 2009년 ~ 2011년 강원 FC 감독 2016년 ~ 현재 포항스틸러스 감독 수상 경력[편집] 선수[편집] 포항제철 아톰즈[편집] K리그 우승 1회 (1986년) K리그 준우승 2회 (1985년, 1987년) 럭키금성 황소[편집] K리그 우승 1회 (1990년) K리그 준우승 1회 (1989년) 국가대표팀[편집] 1980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감독[편집] 포항 스틸러스[편집] K리그 준우승 1회 (2004년) FA컵 준우승 2회 (2001년, 2002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편집] 내셔널리그 우승 2회 (2007년, 2008년) FA컵 준우승 1회 (2005년) 개인[편집] 1979년 대한축구협회 고등학교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0년 체육훈장 백마장 1980년 AFC 아시안컵 최다득점선수 1981년 AFC 청소년 선수권 대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4년 대한축구협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4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1986년 체육훈장 거상장 1989년 충북문화상 체육부문 수상 2007년 내셔널리그 지도자상 수상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회 지방 선거 충청북도의원(청주시 제6선거구) 5대 민주자유당 26.9% 12,325표 2위 낙선 각주[편집] ↑ 송대근 (1991년 1월 18일). “"남편은 완벽주의자"”. 동아일보. 2019년 6월 5일에 확인함.  ↑ “겨울을 깨고 나온 힘과기 얼마나 달라졌나 실업축구”. 경향신문. 1980년 3월 4일.  ↑ “최순호 럭키금성으로”. 동아일보. 1988년 2월 29일.  ↑ “김덕기의 프로축구 30년 - 최순호, 9년 함께 한 포철 떠나 럭키금성行”. 스포탈코리아. 2013년 7월 21일.  ↑ “프로축구 崔淳鎬(최순호) 浦鐵(포철)로 3년만에「친정귀환」”. 동아일보. 1991년 1월 12일. 2019년 3월 5일에 확인함.  ↑ “최순호씨 불 프로축구팀 입단”. 경향신문. 1992년 7월 26일.  ↑ 최순호, 감독으로 '새출발' ↑ 최순호 포항 사령탑 2년 더 ↑ 최순호 감독 "후반 코난 슛 불발 가장 아쉬워"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포항 스틸러스 최순호 감독 은퇴한다 ↑ 현대미포조선 전기 우승..최순호 감독 활짝 웃었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최순호 감독, 4년 만에 K리그 '금의환향'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울산미포조선, 내셔널리그 연맹에 승격 유보 공식 전달 ↑ 내셔널리그 우승 최순호 감독 "울산미포에서의 경험, 소중한 자산 될 것"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강원 FC, 최순호 현 울산미포조선 감독 초대 사령탑 선임 ↑ '성적부진' 강원FC 최순호 감독 자진사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제2의 이청용 기성용을 키운다…FC서울 미래기획단 조직신설”. FC 서울 공식 웹사이트. 2012년 2월 20일.  ↑ 포항, ‘레전드’ 최순호 사령탑 선임… 12년 만에 컴백 ↑ 최순호 아들 최원우, 드래프트 6순위로 경남행 ↑ “최순호-원우, 세 번째 K리그 선수 부자 등록”. 2007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1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최순호 K리그 기록 - 한국프로축구연맹 최순호 국가대표팀 기록 - 대한축구협회 최순호 FIFA 주관 대회 기록 - 국제축구연맹 (영어) 이 전 나세르 누라에이 골람 호세인 마즐루미 파테히 카밀 제7대 AFC 아시안컵 득점왕 1980년공동 득점왕 베타시 파리바 다 음   자슈취안 나세르 모함마드카니 샤로흐 바이아니  전임박성화 제6대 포항 스틸러스 감독2000 (감독 대행) 2001 -2004 후임 세르지우 파리아스 전임조동현 제2대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2006 - 2008 후임조민국 전임초대 제1대 강원 FC 감독2009 - 2011 후임김상호 전임최진철 제11대 포항 스틸러스 감독2016-2019 후임김기동 vdehAFC 아시안컵 최다 득점자 1956: 스텔마흐 1960: 조윤옥 1964: 슈피글레르, 싱 1968: 베자디, 슈피겔, 로마노 1972: 칼라니 1976: 누레이, 마즐루미, 카멜 1980: 최순호, 파리바 1984: 자슈취안, 모하메드카니, 바이아니 1988: 이태호 1992 알비시 1996: 다에이 2000: 이동국 2004: 후바일, 카리미 2007: 다카하라, 마무드, 알카타니 2011: 구자철 2015: 맙쿠트 2019: 알리 vdeh1984 K리그 베스트 11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GK 오연교 DF 정용환 박경훈 박성화 정종수 MF 박창선 허정무 조영증 FW 최순호 이태호 백종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79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GK: 오연교 • 서석범 • FP: 김명관 • 김영철 • 송영석 • 박복준 • 정용환 • 전차식 • 이태호 • 이길용 • 김학철 • 황석근 • 김석원 • 이상용 • 박윤기 • 김만수 • 김용세 • 최순호 • 감독: 김찬기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0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1 김황호 2 김종필 3 홍성호 4 조광래 5 권오손 6 박성화 7 N/A 8 조영증 9 이영무 10 신현호 11 이정일 12 최종덕 13 장외룡 14 이태엽 15 이강조 16 정해원 18 황석근 19 윤인선 20 이태호 21 조병득 22 최순호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1 최인영 2 김만길 3 최종학 4 전종선 5 윤용승 6 김성기 7 이주한 8 강용국 9 김경호 10 전광운 11 강득수 12 김삼수 13 최순호 14 김석원 15 백치수 16 최철희 17 이경남 18 곽성호 감독: 박종환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6년 FIFA 월드컵 1 조병득 2 박경훈 3 정종수 4 조광래 5 정용환 6 이태호 7 김종부 8 조영증 9 최순호 10 박창선 (주장) 11 차범근 12 김평석 13 노수진 14 조민국 15 유병옥 16 김주성 17 허정무 18 김삼수 19 변병주 20 김용세 21 오연교 22 강득수 감독: 김정남 vde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6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 조병득 2 박경훈 3 정종수 4 조광래 5 정용환 6 이태호 7 강득수 8 조영증 9 최순호 10 박창선 11 변병주 12 김평석 13 노수진 14 조민국 15 유병옥 16 김주성 17 허정무 18 김삼수 19 이문영 20 김용세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8년 하계 올림픽 1 조병득 2 박경훈 3 최강희 4 조민국 5 정용환 6 이태호 7 노수진 8 정해원 9 김용세 10 최상국 11 변병주 12 김판근 13 남기영 14 최순호 15 김종건 16 김주성 17 구상범 18 최윤겸 19 여범규 20 김풍주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90년 FIFA 월드컵 1 김풍주 2 박경훈 3 최강희 4 윤덕여 5 정용환 (주장) 6 이태호 7 노수진 8 정해원 9 황보관 10 이상윤 11 변병주 12 이흥실 13 정종수 14 최순호 15 조민국 16 김주성 17 구상범 18 황선홍 19 정기동 20 홍명보 21 최인영 22 이영진 감독: 이회택 vde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90년 아시안 게임 동메달 1 최인영 2 박경훈 3 정종수 4 윤덕여 5 정용환 6 김상호 7 이영진 8 김판근 9 황보관 10 김주성 11 변병주 12 구상범 13 정광석 14 최순호 15 김풍주 16 고정운 17 노정윤 18 황선홍 19 서정원 20 홍명보 감독: 박종환 감독vdeh포항 스틸러스 감독 한홍기 (1973-84) 최은택 (1985-86) 이회택 (1987-92) 허정무 (1993-95) 박성화 (1996-2000) 최순호 C (2000) 최순호 (2001-04) 세르지우 (2005-09) 레무스 (2010) 박창현C (2010) 황선홍 (2011-15) 최진철 (2016) 최순호 (2016-19) 김기동 (2019-) C: 감독 대행 vdeh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 조동현 (1999–2005) 최순호 (2006-08) 조민국 (2009-13) 김창겸 (2014-) vdeh강원 FC 감독 최순호 (2009-11) 김상호 (2011-12) 김학범 (2012-13) 김용갑 (2013) 아르투르 (2014) 박효진C (2014) 최윤겸 (2015-17) 박효진C (2017) 송경섭 (2017-18) 김병수 (2018~) C: 감독 대행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최순호&oldid=24494711" 분류: 196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청주시 출신축구 공격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대한민국의 축구 감독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선수FC 서울의 축구 선수K리그1의 축구 선수FC 서울의 코칭스태프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감독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축구 감독강원 FC의 축구 감독로데스 AF의 축구 선수1980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198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86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1988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199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90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1986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1990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한벌초등학교 동문대성중학교 (충북) 동문청주상업고등학교 동문광운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개신교도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대한민국의 프랑스 진출 축구 선수프랑스의 외국인 축구 선수포항 스틸러스의 코칭스태프강원 FC의 코칭스태프198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민주자유당 당원신한국당 당원대한민국의 기업인K리그1의 축구 감독내셔널리그의 축구 감독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코칭스태프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프랑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리그 2의 축구 선수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8일 (금) 14: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최순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순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최순호 개인 정보로마자 표기 Choi Soon-Ho출생일 1962년 1월 10일(1962-01-10) (57세)출생지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키 185cm포지션 은퇴 (과거 스트라이커)클럽 정보현 소속팀 포항 스틸러스청소년 클럽 기록1981-1982 광운대학교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80-19821983-19871988-199019911992-1993 포항제철 축구단 (실업)포항제철 아톰즈럭키금성 황소포항제철 아톰즈 로데스 AF 00? 0(?)055 (21)028 0(2)016 0(0)018 0(2)국가대표팀 기록‡1979-19811980-1991 대한민국 U-20대한민국 010 0(6)097 (30)지도자 기록1992-19931999-20002000-20042006-20082009-20112012-20132016-2019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 포항 스틸러스 (코치) 포항 스틸러스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강원 FC FC 서울 미래기획단 (단장)포항 스틸러스 메달 기록 대한민국의 선수 남자 축구 아시안 게임 금 1986 서울 축구 동 1990 베이징 축구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4년 9월 23일 기준이다.‡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14년 9월 23일 기준이다. 최순호 (崔淳鎬, 1962년 1월 10일 ~ ,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및 지도자이다. 전 포항 스틸러스의 11대 감독이다. 목차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팀 경력 4 지도자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그 외 7 경력 통계 7.1 국가대표팀 득점 8 경력 목록 8.1 클럽 경력 8.2 국가대표팀 경력 8.3 지도자 경력 9 수상 경력 9.1 선수 9.1.1 포항제철 아톰즈 9.1.2 럭키금성 황소 9.2 국가대표팀 9.3 감독 9.3.1 포항 스틸러스 9.3.2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9.4 개인 10 역대 선거 결과 11 각주 12 외부 링크 개요[편집] 충청북도 청주시 출생으로 청주상업고등학교, 광운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등의 국제 대회에서 좋은 기량을 선보여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선배 축구선수 정해원이 본인(최순호)의 아내를 소개시켜줬는데[1] 최순호의 아내 박귀주씨는 정해원 아내의 같은 과 후배다. 클럽 경력[편집] 1980년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하였고[2] 그 후 광운대에 진학하였다가 1983년부터 프로축구 출범 후 프로 경력을 시작하였으며 , 1988년 2월 당시 최순호의 고향인 충청 지역을 연고로 하는 럭키금성 황소로 이적하였다.[3][4] 1991년 친정팀 포항제철 아톰즈로 복귀하였는데 당시 본인의 트레이드 상대였던[5] 황영우는 1987년 포철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K리그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 뒤, 1992년 7월, 프랑스 리그 2의 로데스 AF로 이적하여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1992-1993 한 시즌 동안 활약하였다.[6]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최순호가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 대회는 1979년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였다. 그는 2년 후에 열린 1981년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이탈리아 U-20 대표팀을 상대로 2골을 득점하였다. 1980년 8월 23일,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에서 말레이시아와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1980년대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1980년 AFC 아시안컵에서 7골로 이란의 베타시 파리바와 함께 공동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1986년 FIFA 월드컵과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뛰었으며, 1986년 FIFA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을 상대로 멋진 골을 성공, 이 골을 포함해 FIFA 월드컵에서 총 1골 3도움을 기록했다. 1991년 7월 27일, 일본과의 A매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 은퇴한 직후에 잠시 포항제철 아톰즈에서 코치로 지냈다. 1999년에 다시 포항 스틸러스의 코치로 활동하다가, 2000년 8월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박성화 감독이 팀을 떠나자, 감독 대행을 맡았다.[7] 2001년, 감독 대행을 하면서 자신의 코치 계약기간을 채운 뒤 능력을 평가 받고 포항 스틸러스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였다.[8] 2004년, 팀을 K리그 준우승으로 이끈 뒤[9] 팀을 떠났다.[10] 2005년 11월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감독에 선임되어 축구계에 복귀하였으며 2006 시즌부터 팀을 이끌었다.[11] 2007년 팀을 내셔널리그 우승으로 이끈 뒤, 당시 논의되고 있던 K리그와의 승강제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었으나[12],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13] 2008년 12월 팀의 내셔널리그 2연패를 이룩한 뒤,[14] 새롭게 창단된 강원 FC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어[15] 울산 현대미포조선의 주전 선수들을 드래프트로 영입하여 전 소속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승격의 꿈을 대신하였다. 2011년 4월 4일 강원 FC가 리그 개막 후 4연패하자 자진사퇴하였다.[16] 2012년 2월 20일 FC 서울의 유소년 시스템인 미래기획단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17] 그리고 2013년 3월 허정무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과 나란히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2016년 9월 26일에는 친정팀인 포항 스틸러스 제 11대 감독으로 재취임하면서 12년 만에 포항으로 돌아왔다.[18] 그러나 2019년 4월 22일에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였고, 후임으로는 김기동이 선임되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최순호는 공격수 겸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1980년대의 한국 축구를 채워준 손꼽히는 공격수이다. 185cm의 장신이면서도 볼 터치가 유연했고, 섬세한 드리블, 정확한 슈팅이 장기였다. 그의 패스는 상대 수비의 허를 찔렀고, 시야도 넓었다. 그 외[편집] 최순호의 아들인 최원우 또한 축구선수로서 K-리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2006년 12월에 시행된 드래프트에서 6순위로 자신의 아버지의 동료인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경남 FC에 입단하게 되어,[19] 박상인 · 박혁순 부자와 오세권 · 오범석 부자에 이어 세 번째로 부자가 모두 K-리그에서 뛰게 되는 기록을 세웠다.[20] 경력 통계[편집] 국가대표팀 득점[편집] 득점 일자 장소 상대팀 최종결과 대회 1 1980년 8월 25일 대한민국 춘천 인도네시아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 1980년 8월 27일 대한민국 대전 태국 3 - 2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3 1980년 9월 16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말레이시아 1 - 1 1980년 AFC 아시안컵 4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카타르 2 - 0 1980년 AFC 아시안컵 5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쿠웨이트 3 - 0 1980년 AFC 아시안컵 6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쿠웨이트 3 - 0 1980년 AFC 아시안컵 9 1980년 9월 21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아랍에미리트 4 - 1 1980년 AFC 아시안컵 10 1981년 4월 24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태국 5 - 1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 11 1981년 4월 24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태국 5 - 1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 12 1982년 3월 21일 대한민국 서울 일본 3 - 0 한일 정기전 13 1982년 5월 10일 태국 방콕 인도네시아 2 - 0 킹스컵 14 1982년 6월 11일 대한민국 광양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5 1982년 11월 21일 인도 뉴델리 남예멘 3 - 0 1982년 아시안 게임 16 1982년 11월 21일 인도 뉴델리 남예멘 3 - 0 1982년 아시안 게임 17 1985년 6월 6일 대한민국 대전 태국 3 - 2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8 1985년 6월 8일 대한민국 광주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9 1985년 6월 8일 대한민국 광주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0 1985년 6월 15일 대한민국 서울 이라크 2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1 1985년 6월 15일 대한민국 서울 이라크 2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2 1985년 7월 3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4 - 1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23 1985년 12월 14일 멕시코 시우다드네사우알코요틀 알제리 2 - 0 1985년 멕시코 토너먼트 24 1986년 6월 10일 멕시코 푸에블라 이탈리아 2 - 3 1986년 FIFA 월드컵 25 1986년 9월 20일 대한민국 부산 인도 3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6 1986년 10월 3일 대한민국 서울 인도네시아 4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7 1986년 10월 3일 대한민국 서울 인도네시아 4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8 1988년 6월 19일 대한민국 수원 잠비아 4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9 1988년 10월 26일 일본 도쿄 일본 1 - 0 한일 정기전 30 1989년 5월 27일 대한민국 서울 말레이시아 3 - 0 199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경력 목록[편집] 클럽 경력[편집] 1980년 ~ 1982년 포항제철 축구단 (실업) 1983년 ~ 1987년 포항제철 아톰즈 1988년 ~ 1990년 럭키금성 황소 1991년 포항제철 아톰즈 1992년 ~ 1993년 로데스 AF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1980년 AFC 아시안컵 대표 1986년 FIFA 월드컵 대표 1988년 하계 올림픽 대표 1990년 FIFA 월드컵 대표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 ~ 1993년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 1999년 ~ 2000년 포항 스틸러스 코치 2000년 ~ 2004년 포항 스틸러스 감독 2005년 ~ 2008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 2009년 ~ 2011년 강원 FC 감독 2016년 ~ 현재 포항스틸러스 감독 수상 경력[편집] 선수[편집] 포항제철 아톰즈[편집] K리그 우승 1회 (1986년) K리그 준우승 2회 (1985년, 1987년) 럭키금성 황소[편집] K리그 우승 1회 (1990년) K리그 준우승 1회 (1989년) 국가대표팀[편집] 1980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감독[편집] 포항 스틸러스[편집] K리그 준우승 1회 (2004년) FA컵 준우승 2회 (2001년, 2002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편집] 내셔널리그 우승 2회 (2007년, 2008년) FA컵 준우승 1회 (2005년) 개인[편집] 1979년 대한축구협회 고등학교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0년 체육훈장 백마장 1980년 AFC 아시안컵 최다득점선수 1981년 AFC 청소년 선수권 대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4년 대한축구협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4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1986년 체육훈장 거상장 1989년 충북문화상 체육부문 수상 2007년 내셔널리그 지도자상 수상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회 지방 선거 충청북도의원(청주시 제6선거구) 5대 민주자유당 26.9% 12,325표 2위 낙선 각주[편집] ↑ 송대근 (1991년 1월 18일). “"남편은 완벽주의자"”. 동아일보. 2019년 6월 5일에 확인함.  ↑ “겨울을 깨고 나온 힘과기 얼마나 달라졌나 실업축구”. 경향신문. 1980년 3월 4일.  ↑ “최순호 럭키금성으로”. 동아일보. 1988년 2월 29일.  ↑ “김덕기의 프로축구 30년 - 최순호, 9년 함께 한 포철 떠나 럭키금성行”. 스포탈코리아. 2013년 7월 21일.  ↑ “프로축구 崔淳鎬(최순호) 浦鐵(포철)로 3년만에「친정귀환」”. 동아일보. 1991년 1월 12일. 2019년 3월 5일에 확인함.  ↑ “최순호씨 불 프로축구팀 입단”. 경향신문. 1992년 7월 26일.  ↑ 최순호, 감독으로 '새출발' ↑ 최순호 포항 사령탑 2년 더 ↑ 최순호 감독 "후반 코난 슛 불발 가장 아쉬워"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포항 스틸러스 최순호 감독 은퇴한다 ↑ 현대미포조선 전기 우승..최순호 감독 활짝 웃었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최순호 감독, 4년 만에 K리그 '금의환향'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울산미포조선, 내셔널리그 연맹에 승격 유보 공식 전달 ↑ 내셔널리그 우승 최순호 감독 "울산미포에서의 경험, 소중한 자산 될 것"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강원 FC, 최순호 현 울산미포조선 감독 초대 사령탑 선임 ↑ '성적부진' 강원FC 최순호 감독 자진사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제2의 이청용 기성용을 키운다…FC서울 미래기획단 조직신설”. FC 서울 공식 웹사이트. 2012년 2월 20일.  ↑ 포항, ‘레전드’ 최순호 사령탑 선임… 12년 만에 컴백 ↑ 최순호 아들 최원우, 드래프트 6순위로 경남행 ↑ “최순호-원우, 세 번째 K리그 선수 부자 등록”. 2007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1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최순호 K리그 기록 - 한국프로축구연맹 최순호 국가대표팀 기록 - 대한축구협회 최순호 FIFA 주관 대회 기록 - 국제축구연맹 (영어) 이 전 나세르 누라에이 골람 호세인 마즐루미 파테히 카밀 제7대 AFC 아시안컵 득점왕 1980년공동 득점왕 베타시 파리바 다 음   자슈취안 나세르 모함마드카니 샤로흐 바이아니  전임박성화 제6대 포항 스틸러스 감독2000 (감독 대행) 2001 -2004 후임 세르지우 파리아스 전임조동현 제2대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2006 - 2008 후임조민국 전임초대 제1대 강원 FC 감독2009 - 2011 후임김상호 전임최진철 제11대 포항 스틸러스 감독2016-2019 후임김기동 vdehAFC 아시안컵 최다 득점자 1956: 스텔마흐 1960: 조윤옥 1964: 슈피글레르, 싱 1968: 베자디, 슈피겔, 로마노 1972: 칼라니 1976: 누레이, 마즐루미, 카멜 1980: 최순호, 파리바 1984: 자슈취안, 모하메드카니, 바이아니 1988: 이태호 1992 알비시 1996: 다에이 2000: 이동국 2004: 후바일, 카리미 2007: 다카하라, 마무드, 알카타니 2011: 구자철 2015: 맙쿠트 2019: 알리 vdeh1984 K리그 베스트 11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GK 오연교 DF 정용환 박경훈 박성화 정종수 MF 박창선 허정무 조영증 FW 최순호 이태호 백종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79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GK: 오연교 • 서석범 • FP: 김명관 • 김영철 • 송영석 • 박복준 • 정용환 • 전차식 • 이태호 • 이길용 • 김학철 • 황석근 • 김석원 • 이상용 • 박윤기 • 김만수 • 김용세 • 최순호 • 감독: 김찬기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0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1 김황호 2 김종필 3 홍성호 4 조광래 5 권오손 6 박성화 7 N/A 8 조영증 9 이영무 10 신현호 11 이정일 12 최종덕 13 장외룡 14 이태엽 15 이강조 16 정해원 18 황석근 19 윤인선 20 이태호 21 조병득 22 최순호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1 최인영 2 김만길 3 최종학 4 전종선 5 윤용승 6 김성기 7 이주한 8 강용국 9 김경호 10 전광운 11 강득수 12 김삼수 13 최순호 14 김석원 15 백치수 16 최철희 17 이경남 18 곽성호 감독: 박종환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6년 FIFA 월드컵 1 조병득 2 박경훈 3 정종수 4 조광래 5 정용환 6 이태호 7 김종부 8 조영증 9 최순호 10 박창선 (주장) 11 차범근 12 김평석 13 노수진 14 조민국 15 유병옥 16 김주성 17 허정무 18 김삼수 19 변병주 20 김용세 21 오연교 22 강득수 감독: 김정남 vde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6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 조병득 2 박경훈 3 정종수 4 조광래 5 정용환 6 이태호 7 강득수 8 조영증 9 최순호 10 박창선 11 변병주 12 김평석 13 노수진 14 조민국 15 유병옥 16 김주성 17 허정무 18 김삼수 19 이문영 20 김용세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8년 하계 올림픽 1 조병득 2 박경훈 3 최강희 4 조민국 5 정용환 6 이태호 7 노수진 8 정해원 9 김용세 10 최상국 11 변병주 12 김판근 13 남기영 14 최순호 15 김종건 16 김주성 17 구상범 18 최윤겸 19 여범규 20 김풍주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90년 FIFA 월드컵 1 김풍주 2 박경훈 3 최강희 4 윤덕여 5 정용환 (주장) 6 이태호 7 노수진 8 정해원 9 황보관 10 이상윤 11 변병주 12 이흥실 13 정종수 14 최순호 15 조민국 16 김주성 17 구상범 18 황선홍 19 정기동 20 홍명보 21 최인영 22 이영진 감독: 이회택 vde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90년 아시안 게임 동메달 1 최인영 2 박경훈 3 정종수 4 윤덕여 5 정용환 6 김상호 7 이영진 8 김판근 9 황보관 10 김주성 11 변병주 12 구상범 13 정광석 14 최순호 15 김풍주 16 고정운 17 노정윤 18 황선홍 19 서정원 20 홍명보 감독: 박종환 감독vdeh포항 스틸러스 감독 한홍기 (1973-84) 최은택 (1985-86) 이회택 (1987-92) 허정무 (1993-95) 박성화 (1996-2000) 최순호 C (2000) 최순호 (2001-04) 세르지우 (2005-09) 레무스 (2010) 박창현C (2010) 황선홍 (2011-15) 최진철 (2016) 최순호 (2016-19) 김기동 (2019-) C: 감독 대행 vdeh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 조동현 (1999–2005) 최순호 (2006-08) 조민국 (2009-13) 김창겸 (2014-) vdeh강원 FC 감독 최순호 (2009-11) 김상호 (2011-12) 김학범 (2012-13) 김용갑 (2013) 아르투르 (2014) 박효진C (2014) 최윤겸 (2015-17) 박효진C (2017) 송경섭 (2017-18) 김병수 (2018~) C: 감독 대행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최순호&oldid=24494711" 분류: 196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청주시 출신축구 공격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대한민국의 축구 감독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선수FC 서울의 축구 선수K리그1의 축구 선수FC 서울의 코칭스태프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감독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축구 감독강원 FC의 축구 감독로데스 AF의 축구 선수1980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198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86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1988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199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90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1986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1990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한벌초등학교 동문대성중학교 (충북) 동문청주상업고등학교 동문광운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개신교도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대한민국의 프랑스 진출 축구 선수프랑스의 외국인 축구 선수포항 스틸러스의 코칭스태프강원 FC의 코칭스태프198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민주자유당 당원신한국당 당원대한민국의 기업인K리그1의 축구 감독내셔널리그의 축구 감독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코칭스태프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프랑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리그 2의 축구 선수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8일 (금) 14: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최순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순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최순호 개인 정보로마자 표기 Choi Soon-Ho출생일 1962년 1월 10일(1962-01-10) (57세)출생지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키 185cm포지션 은퇴 (과거 스트라이커)클럽 정보현 소속팀 포항 스틸러스청소년 클럽 기록1981-1982 광운대학교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80-19821983-19871988-199019911992-1993 포항제철 축구단 (실업)포항제철 아톰즈럭키금성 황소포항제철 아톰즈 로데스 AF 00? 0(?)055 (21)028 0(2)016 0(0)018 0(2)국가대표팀 기록‡1979-19811980-1991 대한민국 U-20대한민국 010 0(6)097 (30)지도자 기록1992-19931999-20002000-20042006-20082009-20112012-20132016-2019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 포항 스틸러스 (코치) 포항 스틸러스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강원 FC FC 서울 미래기획단 (단장)포항 스틸러스 메달 기록 대한민국의 선수 남자 축구 아시안 게임 금 1986 서울 축구 동 1990 베이징 축구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4년 9월 23일 기준이다.‡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14년 9월 23일 기준이다. 최순호 (崔淳鎬, 1962년 1월 10일 ~ ,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및 지도자이다. 전 포항 스틸러스의 11대 감독이다. 목차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팀 경력 4 지도자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그 외 7 경력 통계 7.1 국가대표팀 득점 8 경력 목록 8.1 클럽 경력 8.2 국가대표팀 경력 8.3 지도자 경력 9 수상 경력 9.1 선수 9.1.1 포항제철 아톰즈 9.1.2 럭키금성 황소 9.2 국가대표팀 9.3 감독 9.3.1 포항 스틸러스 9.3.2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9.4 개인 10 역대 선거 결과 11 각주 12 외부 링크 개요[편집] 충청북도 청주시 출생으로 청주상업고등학교, 광운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등의 국제 대회에서 좋은 기량을 선보여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선배 축구선수 정해원이 본인(최순호)의 아내를 소개시켜줬는데[1] 최순호의 아내 박귀주씨는 정해원 아내의 같은 과 후배다. 클럽 경력[편집] 1980년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하였고[2] 그 후 광운대에 진학하였다가 1983년부터 프로축구 출범 후 프로 경력을 시작하였으며 , 1988년 2월 당시 최순호의 고향인 충청 지역을 연고로 하는 럭키금성 황소로 이적하였다.[3][4] 1991년 친정팀 포항제철 아톰즈로 복귀하였는데 당시 본인의 트레이드 상대였던[5] 황영우는 1987년 포철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K리그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 뒤, 1992년 7월, 프랑스 리그 2의 로데스 AF로 이적하여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1992-1993 한 시즌 동안 활약하였다.[6]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최순호가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 대회는 1979년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였다. 그는 2년 후에 열린 1981년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이탈리아 U-20 대표팀을 상대로 2골을 득점하였다. 1980년 8월 23일,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에서 말레이시아와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1980년대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1980년 AFC 아시안컵에서 7골로 이란의 베타시 파리바와 함께 공동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1986년 FIFA 월드컵과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뛰었으며, 1986년 FIFA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을 상대로 멋진 골을 성공, 이 골을 포함해 FIFA 월드컵에서 총 1골 3도움을 기록했다. 1991년 7월 27일, 일본과의 A매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 은퇴한 직후에 잠시 포항제철 아톰즈에서 코치로 지냈다. 1999년에 다시 포항 스틸러스의 코치로 활동하다가, 2000년 8월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박성화 감독이 팀을 떠나자, 감독 대행을 맡았다.[7] 2001년, 감독 대행을 하면서 자신의 코치 계약기간을 채운 뒤 능력을 평가 받고 포항 스틸러스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였다.[8] 2004년, 팀을 K리그 준우승으로 이끈 뒤[9] 팀을 떠났다.[10] 2005년 11월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감독에 선임되어 축구계에 복귀하였으며 2006 시즌부터 팀을 이끌었다.[11] 2007년 팀을 내셔널리그 우승으로 이끈 뒤, 당시 논의되고 있던 K리그와의 승강제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었으나[12],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13] 2008년 12월 팀의 내셔널리그 2연패를 이룩한 뒤,[14] 새롭게 창단된 강원 FC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어[15] 울산 현대미포조선의 주전 선수들을 드래프트로 영입하여 전 소속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승격의 꿈을 대신하였다. 2011년 4월 4일 강원 FC가 리그 개막 후 4연패하자 자진사퇴하였다.[16] 2012년 2월 20일 FC 서울의 유소년 시스템인 미래기획단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17] 그리고 2013년 3월 허정무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과 나란히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2016년 9월 26일에는 친정팀인 포항 스틸러스 제 11대 감독으로 재취임하면서 12년 만에 포항으로 돌아왔다.[18] 그러나 2019년 4월 22일에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였고, 후임으로는 김기동이 선임되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최순호는 공격수 겸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1980년대의 한국 축구를 채워준 손꼽히는 공격수이다. 185cm의 장신이면서도 볼 터치가 유연했고, 섬세한 드리블, 정확한 슈팅이 장기였다. 그의 패스는 상대 수비의 허를 찔렀고, 시야도 넓었다. 그 외[편집] 최순호의 아들인 최원우 또한 축구선수로서 K-리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2006년 12월에 시행된 드래프트에서 6순위로 자신의 아버지의 동료인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경남 FC에 입단하게 되어,[19] 박상인 · 박혁순 부자와 오세권 · 오범석 부자에 이어 세 번째로 부자가 모두 K-리그에서 뛰게 되는 기록을 세웠다.[20] 경력 통계[편집] 국가대표팀 득점[편집] 득점 일자 장소 상대팀 최종결과 대회 1 1980년 8월 25일 대한민국 춘천 인도네시아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 1980년 8월 27일 대한민국 대전 태국 3 - 2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3 1980년 9월 16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말레이시아 1 - 1 1980년 AFC 아시안컵 4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카타르 2 - 0 1980년 AFC 아시안컵 5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쿠웨이트 3 - 0 1980년 AFC 아시안컵 6 1980년 9월 19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쿠웨이트 3 - 0 1980년 AFC 아시안컵 9 1980년 9월 21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아랍에미리트 4 - 1 1980년 AFC 아시안컵 10 1981년 4월 24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태국 5 - 1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 11 1981년 4월 24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태국 5 - 1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 12 1982년 3월 21일 대한민국 서울 일본 3 - 0 한일 정기전 13 1982년 5월 10일 태국 방콕 인도네시아 2 - 0 킹스컵 14 1982년 6월 11일 대한민국 광양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5 1982년 11월 21일 인도 뉴델리 남예멘 3 - 0 1982년 아시안 게임 16 1982년 11월 21일 인도 뉴델리 남예멘 3 - 0 1982년 아시안 게임 17 1985년 6월 6일 대한민국 대전 태국 3 - 2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8 1985년 6월 8일 대한민국 광주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9 1985년 6월 8일 대한민국 광주 바레인 3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0 1985년 6월 15일 대한민국 서울 이라크 2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1 1985년 6월 15일 대한민국 서울 이라크 2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2 1985년 7월 3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4 - 1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23 1985년 12월 14일 멕시코 시우다드네사우알코요틀 알제리 2 - 0 1985년 멕시코 토너먼트 24 1986년 6월 10일 멕시코 푸에블라 이탈리아 2 - 3 1986년 FIFA 월드컵 25 1986년 9월 20일 대한민국 부산 인도 3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6 1986년 10월 3일 대한민국 서울 인도네시아 4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7 1986년 10월 3일 대한민국 서울 인도네시아 4 - 0 1986년 아시안 게임 28 1988년 6월 19일 대한민국 수원 잠비아 4 - 0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29 1988년 10월 26일 일본 도쿄 일본 1 - 0 한일 정기전 30 1989년 5월 27일 대한민국 서울 말레이시아 3 - 0 199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경력 목록[편집] 클럽 경력[편집] 1980년 ~ 1982년 포항제철 축구단 (실업) 1983년 ~ 1987년 포항제철 아톰즈 1988년 ~ 1990년 럭키금성 황소 1991년 포항제철 아톰즈 1992년 ~ 1993년 로데스 AF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1980년 AFC 아시안컵 대표 1986년 FIFA 월드컵 대표 1988년 하계 올림픽 대표 1990년 FIFA 월드컵 대표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 ~ 1993년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 1999년 ~ 2000년 포항 스틸러스 코치 2000년 ~ 2004년 포항 스틸러스 감독 2005년 ~ 2008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 2009년 ~ 2011년 강원 FC 감독 2016년 ~ 현재 포항스틸러스 감독 수상 경력[편집] 선수[편집] 포항제철 아톰즈[편집] K리그 우승 1회 (1986년) K리그 준우승 2회 (1985년, 1987년) 럭키금성 황소[편집] K리그 우승 1회 (1990년) K리그 준우승 1회 (1989년) 국가대표팀[편집] 1980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감독[편집] 포항 스틸러스[편집] K리그 준우승 1회 (2004년) FA컵 준우승 2회 (2001년, 2002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편집] 내셔널리그 우승 2회 (2007년, 2008년) FA컵 준우승 1회 (2005년) 개인[편집] 1979년 대한축구협회 고등학교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0년 체육훈장 백마장 1980년 AFC 아시안컵 최다득점선수 1981년 AFC 청소년 선수권 대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4년 대한축구협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4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1986년 체육훈장 거상장 1989년 충북문화상 체육부문 수상 2007년 내셔널리그 지도자상 수상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회 지방 선거 충청북도의원(청주시 제6선거구) 5대 민주자유당 26.9% 12,325표 2위 낙선 각주[편집] ↑ 송대근 (1991년 1월 18일). “"남편은 완벽주의자"”. 동아일보. 2019년 6월 5일에 확인함.  ↑ “겨울을 깨고 나온 힘과기 얼마나 달라졌나 실업축구”. 경향신문. 1980년 3월 4일.  ↑ “최순호 럭키금성으로”. 동아일보. 1988년 2월 29일.  ↑ “김덕기의 프로축구 30년 - 최순호, 9년 함께 한 포철 떠나 럭키금성行”. 스포탈코리아. 2013년 7월 21일.  ↑ “프로축구 崔淳鎬(최순호) 浦鐵(포철)로 3년만에「친정귀환」”. 동아일보. 1991년 1월 12일. 2019년 3월 5일에 확인함.  ↑ “최순호씨 불 프로축구팀 입단”. 경향신문. 1992년 7월 26일.  ↑ 최순호, 감독으로 '새출발' ↑ 최순호 포항 사령탑 2년 더 ↑ 최순호 감독 "후반 코난 슛 불발 가장 아쉬워"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포항 스틸러스 최순호 감독 은퇴한다 ↑ 현대미포조선 전기 우승..최순호 감독 활짝 웃었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최순호 감독, 4년 만에 K리그 '금의환향'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울산미포조선, 내셔널리그 연맹에 승격 유보 공식 전달 ↑ 내셔널리그 우승 최순호 감독 "울산미포에서의 경험, 소중한 자산 될 것"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강원 FC, 최순호 현 울산미포조선 감독 초대 사령탑 선임 ↑ '성적부진' 강원FC 최순호 감독 자진사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제2의 이청용 기성용을 키운다…FC서울 미래기획단 조직신설”. FC 서울 공식 웹사이트. 2012년 2월 20일.  ↑ 포항, ‘레전드’ 최순호 사령탑 선임… 12년 만에 컴백 ↑ 최순호 아들 최원우, 드래프트 6순위로 경남행 ↑ “최순호-원우, 세 번째 K리그 선수 부자 등록”. 2007년 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1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최순호 K리그 기록 - 한국프로축구연맹 최순호 국가대표팀 기록 - 대한축구협회 최순호 FIFA 주관 대회 기록 - 국제축구연맹 (영어) 이 전 나세르 누라에이 골람 호세인 마즐루미 파테히 카밀 제7대 AFC 아시안컵 득점왕 1980년공동 득점왕 베타시 파리바 다 음   자슈취안 나세르 모함마드카니 샤로흐 바이아니  전임박성화 제6대 포항 스틸러스 감독2000 (감독 대행) 2001 -2004 후임 세르지우 파리아스 전임조동현 제2대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2006 - 2008 후임조민국 전임초대 제1대 강원 FC 감독2009 - 2011 후임김상호 전임최진철 제11대 포항 스틸러스 감독2016-2019 후임김기동 vdehAFC 아시안컵 최다 득점자 1956: 스텔마흐 1960: 조윤옥 1964: 슈피글레르, 싱 1968: 베자디, 슈피겔, 로마노 1972: 칼라니 1976: 누레이, 마즐루미, 카멜 1980: 최순호, 파리바 1984: 자슈취안, 모하메드카니, 바이아니 1988: 이태호 1992 알비시 1996: 다에이 2000: 이동국 2004: 후바일, 카리미 2007: 다카하라, 마무드, 알카타니 2011: 구자철 2015: 맙쿠트 2019: 알리 vdeh1984 K리그 베스트 11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GK 오연교 DF 정용환 박경훈 박성화 정종수 MF 박창선 허정무 조영증 FW 최순호 이태호 백종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79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GK: 오연교 • 서석범 • FP: 김명관 • 김영철 • 송영석 • 박복준 • 정용환 • 전차식 • 이태호 • 이길용 • 김학철 • 황석근 • 김석원 • 이상용 • 박윤기 • 김만수 • 김용세 • 최순호 • 감독: 김찬기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0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1 김황호 2 김종필 3 홍성호 4 조광래 5 권오손 6 박성화 7 N/A 8 조영증 9 이영무 10 신현호 11 이정일 12 최종덕 13 장외룡 14 이태엽 15 이강조 16 정해원 18 황석근 19 윤인선 20 이태호 21 조병득 22 최순호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1 최인영 2 김만길 3 최종학 4 전종선 5 윤용승 6 김성기 7 이주한 8 강용국 9 김경호 10 전광운 11 강득수 12 김삼수 13 최순호 14 김석원 15 백치수 16 최철희 17 이경남 18 곽성호 감독: 박종환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6년 FIFA 월드컵 1 조병득 2 박경훈 3 정종수 4 조광래 5 정용환 6 이태호 7 김종부 8 조영증 9 최순호 10 박창선 (주장) 11 차범근 12 김평석 13 노수진 14 조민국 15 유병옥 16 김주성 17 허정무 18 김삼수 19 변병주 20 김용세 21 오연교 22 강득수 감독: 김정남 vde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6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 조병득 2 박경훈 3 정종수 4 조광래 5 정용환 6 이태호 7 강득수 8 조영증 9 최순호 10 박창선 11 변병주 12 김평석 13 노수진 14 조민국 15 유병옥 16 김주성 17 허정무 18 김삼수 19 이문영 20 김용세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88년 하계 올림픽 1 조병득 2 박경훈 3 최강희 4 조민국 5 정용환 6 이태호 7 노수진 8 정해원 9 김용세 10 최상국 11 변병주 12 김판근 13 남기영 14 최순호 15 김종건 16 김주성 17 구상범 18 최윤겸 19 여범규 20 김풍주 감독: 김정남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90년 FIFA 월드컵 1 김풍주 2 박경훈 3 최강희 4 윤덕여 5 정용환 (주장) 6 이태호 7 노수진 8 정해원 9 황보관 10 이상윤 11 변병주 12 이흥실 13 정종수 14 최순호 15 조민국 16 김주성 17 구상범 18 황선홍 19 정기동 20 홍명보 21 최인영 22 이영진 감독: 이회택 vde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90년 아시안 게임 동메달 1 최인영 2 박경훈 3 정종수 4 윤덕여 5 정용환 6 김상호 7 이영진 8 김판근 9 황보관 10 김주성 11 변병주 12 구상범 13 정광석 14 최순호 15 김풍주 16 고정운 17 노정윤 18 황선홍 19 서정원 20 홍명보 감독: 박종환 감독vdeh포항 스틸러스 감독 한홍기 (1973-84) 최은택 (1985-86) 이회택 (1987-92) 허정무 (1993-95) 박성화 (1996-2000) 최순호 C (2000) 최순호 (2001-04) 세르지우 (2005-09) 레무스 (2010) 박창현C (2010) 황선홍 (2011-15) 최진철 (2016) 최순호 (2016-19) 김기동 (2019-) C: 감독 대행 vdeh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 조동현 (1999–2005) 최순호 (2006-08) 조민국 (2009-13) 김창겸 (2014-) vdeh강원 FC 감독 최순호 (2009-11) 김상호 (2011-12) 김학범 (2012-13) 김용갑 (2013) 아르투르 (2014) 박효진C (2014) 최윤겸 (2015-17) 박효진C (2017) 송경섭 (2017-18) 김병수 (2018~) C: 감독 대행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최순호&oldid=24494711" 분류: 196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청주시 출신축구 공격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대한민국의 축구 감독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선수FC 서울의 축구 선수K리그1의 축구 선수FC 서울의 코칭스태프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감독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축구 감독강원 FC의 축구 감독로데스 AF의 축구 선수1980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198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86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1988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199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90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1986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1990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한벌초등학교 동문대성중학교 (충북) 동문청주상업고등학교 동문광운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개신교도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대한민국의 프랑스 진출 축구 선수프랑스의 외국인 축구 선수포항 스틸러스의 코칭스태프강원 FC의 코칭스태프198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민주자유당 당원신한국당 당원대한민국의 기업인K리그1의 축구 감독내셔널리그의 축구 감독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코칭스태프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프랑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리그 2의 축구 선수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8일 (금) 14: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선화공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선화공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선화공주 (창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선화공주 지위 왕비 전임자 사택왕후 후임자 은고 부왕 진평왕 이름 휘 김선화 신상정보 출생지 신라 사망지 백제 왕조 신라 부친 진평왕 모친 마야부인 배우자 무왕 종교 불교 선화공주(善花公主, ?~?)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후이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왕후는 사택왕후로 기록되었기에 그 실존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다. 목차 1 생애 2 논란 3 가계 4 관련 작품 4.1 창극 4.2 드라마 5 함께 보기 6 각주 생애[편집]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이자 선덕여왕과 천명공주의 동생이며 화랑세기에서 등장하는 천화공주의 언니이다. 고려시대 신라계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의 설화에 따르면, 미모가 매우 뛰어나 백제의 서동(후에 무왕)이 사모하여, 두 사람이 남 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금성(지금의 경주)에 퍼뜨렸다고 한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던 중 서동에게 구출되어 결혼하고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미륵사의 창건을 무왕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이것은 의자왕과 선화공주 간의 갈등 관계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이유를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1] 일설에는 무왕이 아니고 모대(동성왕)라고도 하며,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도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공주, 귀족, 지방 호족의 딸 등 다양한 가설이 있다. 논란[편집] 사택왕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미륵사 창건의 주체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가 무왕의 왕후라 기록하고 있어 선화공주의 존재를 뿌리부터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대립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자는 설화가 어느 정도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륵사를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은 선화공주나, 선화공주가 죽은 뒤 백제 출신 왕비가 절을 완성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같은 맥락에서 학자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이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의 비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말하고 있다. 가계[편집] 조부 : 동륜태자(銅輪太子, ? ~572) 조모 : 만호부인(萬呼夫人) 부왕 : 진평왕(眞平王, 567~632, 재위:579~632) 모후 : 마야부인(摩耶夫人) 언니 :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 재위:632~647) 언니 : 천명공주(天明公主, 文貞太后) 조카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4~661, 재위:654~661) 조카 며느리: 문명왕후 김씨, 영창부인 김씨 동생 : 천화공주(天花公主) - 등장이 《화랑세기》에 한함 (화랑세기가 위서로 판정되면서 그 존재의 진위여부가 불분명) 남편 : 백제 제30대 왕 무왕(武王, ? ~641, 재위:600~641) 아들 : 백제 제31대 왕 의자왕(義慈王, ? ~660, 재위:641~660) 관련 작품[편집] 창극[편집] 《선화공주》(1948년) 드라마[편집] 《서동요》(SBS, 2005년~2006년, 배우:이보영, 설리) 《계백》(MBC, 2011년, 배우:신은정) 함께 보기[편집] 서동요 서동요 (드라마) 삼국유사 백제 무왕 사택왕후 각주[편집] ↑ 이덕일 (2003).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193쪽. ISBN 8934912375. ‘국왕의 어머니’, 즉 선화공주가 죽자마자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이는 의자왕이 왜 무왕 재위 33년째에야 태자로 책봉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주는 구절이다. 의자왕이 모후 선화공주와 상당한 갈등관계에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선화공주&oldid=24456959" 분류: 생년 미상몰년 미상신라의 왕족신라 사람신라의 왕녀백제의 왕비의자왕백제 무왕선덕여왕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فارسی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0일 (목) 22: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하이디 클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이디 클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하이디 클룸Heidi Klum 출생 1973년 6월 1일(1973-06-01) (46세)서독 베르기슈글라트바흐국적 독일직업 모델, 배우, 쇼 호스트, 프로듀서키 177cm 배우자 릭 피피노 (1997–2002) 실 (2005–2012)자녀 2남 2녀웹사이트 www.heidiklum.com 하이디 클룸(독일어: Heidi Klum, 1973년 6월 1일[1] ~ )은 독일의 모델로 베르기슈글라트바흐 출신이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간판 모델로 유명하다. 은퇴 이후 현재 쇼호스트, 배우, 프로듀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1 경력 1.1 모델 1.2 배우 활동 1.3 쇼 호스트 2 사회 활동 2.1 속옷 기부 2.2 경제적 능력 3 사생활 3.1 가족관계 3.2 결혼과 결별 3.3 재혼 4 출연 작품 4.1 텔레비전 프로그램 4.2 영화 5 수상 경력 6 기타 7 참조 8 외부 링크 경력[편집] 모델[편집] 신장은 177cm로 1991년 겨울 친구인 카린의 권유로 독일의 전국적인 슈퍼모델 선발대회인 모델92(Model 92)에 참가하게 되고, 25,000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1992년 4월 15일 마지막 대회를 통해 우승함으로써 모델계에 데뷔하게 된다.[1][2] 우승 후에 독일의 모델에이전시인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으로부터 연봉 300,000달러의 계약 제안을 받고 1992년 6월 졸업 후 제안을 받아들여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공부를 그만두고 모델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1][2] 처음에는 유럽의 파리, 밀라노 등에서 활동하다가 1993년 여름 마이애미를 거쳐 뉴욕으로 진출하여 더욱 영향력있는 모델로 성장하게 된다.[1][3] '피네스' 샴푸 선전을 시작으로 지방시 향수 모델을 거쳐 빅토리아 시크릿의 간판 모델로 발탁되었으며 빅토리아 시크릿과의 만남이 그녀를 성공의 정점에 도달하게 만들었다.[2][3]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잡지인 보그, 엘르, 마리 끌레르 등에서 표지모델로도 활동하였다[4]. 1998년 독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Sports Illustrated Swimsuit Issue"의 표지모델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1] 타이라 뱅크스와 함께 모델계의 보석으로 불리였지만 현재 모델은 은퇴한 상태이다. 배우 활동[편집] 하이디 클룸은 1995년 《이야기 도시》에 카메오 역할로 출연함으로써 연기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5] 처음에는 연예 주간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서 그 해의 최악의 TV 게스트들 중 하나라고 비판받았지만 그녀의 첫 영화인 2001년에 개봉된 코미디 영화 《블로우 드라이》와 2004년 개봉된 영화인 《엘라 인챈티드》가 크게 성공하면서 이러한 비평은 수그러 들었다.[6] 이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년), 《퍼펙트 스트레인저》(2007년)의 영화에 카메오로서 출연하였다.[5] 쇼 호스트[편집] MTV의 프로그램 중 밀라노의 "Fashionably Loud Europe 2001"와 "Teenage Dirtbag"의 진행자로 발탁되었지만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못하였다.[5] 하지만 2004년 12월 미국 케이블 채널인 브라보의 리얼리티 쇼인 프로젝트 런웨이(Project Runway)에서 클룸은 진행자, 심사위원, 제작자였는데 이 프로그램이 첫 시즌부터 큰 인기를 끌면서 하이디 클룸도 대중에게 좀 더 알려지게 되었다.[4][6]또한 2005년과 2006년에 리얼리티 쇼의 뛰어난 진행자로 평가되어 에미상을 수상하였고 뉴욕 타임스는 2005년 2월에 이 프로그램을 리얼리티 쇼의 프라다(Prada)라고 평가하였다.[6][1] 이외에도 클룸은 Germany's Next Topmodel이라는 슈퍼모델끼리의 경쟁을 다룬 리얼리티 TV쇼의 공동 프로듀서이며 진행을 맡고 있다.[4] 사회 활동[편집] 속옷 기부[편집] 2011년 3월 2일 아카데미 시상식 파티와 함께 진행된 엘튼존 후원의 에이즈 기금 행사에서 즉흥기부제안을 받고 가지고 있는 물건이 없다며 고민하다가 즉석에서 입고있던 속옷을 기부해 화제가 되었다.[7][8] 경제적 능력[편집] 클룸은 2007년 7월까지 12달 동안 약 8백만 달러를 벌어들여 포브스지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벌어들인 15명의 슈퍼모델 중 3위로 선정되었다. 또한 2008년에는 그녀의 수입이 약 1400만달러로 예측되어 케이트 모스의 750만 달러를 훨씬 능가하며 2위로 올라섰다.[4] 2011년 현재 그녀의 수입은 1600만 달러로 추측되고 있으며 수입, 영향력, 사회적 순위가 각각 87, 86, 49위로 세계의 유명인사 100인(The Celebrity 100)에 선정되었다.[9] 사생활[편집] 가족관계[편집] 배우자 실(Seal), 딸 레니(Leni Samuel)(2004년 5월 4일), 아들 헨리(Henry Gunther Ademola Dashtu Samuel)(2005년 9월 12일), 아들 요한(Johan Riley Fydor Taiwo Samuel)(2006년 11월 22일), 딸 루(Lou Sulola Samuel)(2009년 10월 9일)[10][11] 결혼과 결별[편집]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헤어디자이너인 릭 피피노(Ric Pipino)의 청혼을 받아들인 후 하이디 클룸은 1997년 여름에 그와 결혼하게 된다.[5][12] 그들은 전통적인 결혼식을 하였는데 독일의 전통에 따라 클룸은 이 결혼식에서 요들송을 불렀고, 남편인 릭 피피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무 황새로부터 인형을 되찾아왔다.[6]그러나 이 둘의 결혼생활은 서로 바쁜사이에 소홀해져 결국 결혼 후 5년 만인 2002년 11월 25일 이혼하게 되었다.[13][6] 피피노와의 결별 직후 클룸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보컬인 앤서니 키에디스(Anthony Kiedis)와 잠시 사귀는 듯 하더니 카레이서 팀의 매니저로 있는 이탈리아인 억만장자 플라비오 브리아토레(Flavio Briatore)와 사랑에 빠졌다.[4] 사귄 지 9개월이 지난 후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하게 되지만 바람둥이였던 브리아토레는 이를 부정하였고 그렇게 둘은 결별하게 된다.[13] 재혼[편집] 두 번의 사랑에 대한 안 좋은 경험으로 상처입은 클룸은 마침내 영국 출신의 R&B 가수인 실을 만나게 된다. 그는 클룸이 플라비오 브리아토레의 아이를 임신 있는 중에 그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핏줄이 아닌 딸 레니의 출산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며 마치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레니를 아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레니의 나이가 만 5세이었던 해의 크리스마스전에 정식으로 레니를 입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4].[13] 실은 헬기를 빌려 자연적으로 생긴 얼음굴에 하이디 클룸을 데려가 무릎을 꿇고 청혼하였다. 실과 클룸은 2005년 5월 10일 멕시코의 해안에서 결혼했다.[6] 결혼 후 이들 부부는 아들 헨리, 요한과 딸 루를 출산하게 된다. 두 사람은 클룸이 브리아토레로부터 아기를 임신한 채 버림받았을 때 실이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면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또한 그들은 백인과 흑인의 연애라는 주변의 냉담한 시선을 극복하고 결혼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으며 이로 인해 피플지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커플 1위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짐비오에 의한 100 Hotest Celebrity Couples of 2011중 16위에 올랐다[15][16]. 이 커플은 매년 결혼기념일에 맞춰 혼인서약식을 가져 부부금슬을 매년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있으며 올해로 6번째 결혼을 하였다.[15] 2010년 발매된 실의 음반중 〈Secret〉이란 곡의 뮤직비디오에 하이디 클룸이 남편을 위해 기꺼이 알몸의 모습으로 출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17] 하지만 결혼 7년 만에 두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합의하고 결국 이혼을 발표하였다. 또한 실은 아내의 하이디 클룸이 이혼 전 보디가드와의 부적절한 관계임을 폭로하며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클룸은 현재 자신의 보디가드인 마틴 크리스틴과 교제중임을 밝혔다.[18] 출연 작품[편집] 텔레비전 프로그램[편집] 이야기 도시(Spin City)(1996-2002)의 카메오 출연 섹스 앤 더 시티 (Sex and the City)(2001)의 카메오 출연 예스, 디어(Yes, Dear)(2000-2006)의 Jimmy Saves the Day에피소드에 출연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2007) The Yips에피소드에 출연 프로젝트 런웨이(Project Runway) season1-6,8(미국 Bravo) 영화[편집] 블로우 드라이(Blow Dry)(2001)의 조연 Jasmine 역 엘라 인챈티드(Ella Enchanted)(2004)의 Brumhilda 역 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Peter Sellers)(2004)의 우르줄라 안드레스 역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2006), 퍼펙트 스트레인저(Perfect Stranger)(2007), 빨간모자의 진실(Hoodwinked Too! Hood vs. Evil)(2011)의 카메오 출연 수상 경력[편집] 2005년 2006년 에미상 2008년 피보디상 기타[편집] 하이디 클룸은 여행할 때 행운의 부적으로써 그녀의 유치를 주머니에 담아다닌다.[6] 2002년 8월 16일 카리브 해에 위치한 그레나다에서는 그녀의 사진이 실린 우표를 만들어 판매했다.[6] 참조[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Heidi Klum GmbH ↑ 가 나 다 IMDb, The Internet Movie Database ↑ 가 나 Vogue.com ↑ 가 나 다 라 마 “Biography: Heidi Klum Online”. 2011년 8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11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Heidi Klum GmbH, Today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Heidi Klum people.com ↑ 헤럴드 경제: 입던 속옷 벗어서…하이디 클룸 엽기 기부 ↑ “한국일보: 하이디 클룸, 입고 있던 속옷 벗어 기부”. 2011년 7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13일에 확인함.  ↑ (영어)Forbes.com ↑ 뉴스엔: "프로젝트 런웨이"의 하이디 클룸, 4번째 자녀 임신 ↑ 유코피아 뉴스: '슈퍼모델' 하이디 클룸 넷째 딸 출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일요신문: 하이디 클룸 이혼발표 4일 만에 다른남자와 염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다 서울신문: 하이디 클룸의 임신패션이 더 아름다운 이유 ↑ Report: Seal To Adopt Heidi Klum’s Daughter Leni ↑ 가 나 조선일보:'수퍼모델' 하이디 클룸, 한 남자와 '6번째 결혼' 세계가 감동 ↑ Zimbio's 100 Hottest Celebrity Couples of 2011 List ↑ 스포츠경향: 슈퍼모델 하이디 클룸, 남편 위해 옷벗다 ↑ 엑스포츠뉴스: 씰, 아내 하이디 클룸의 "이혼 전 경호원과 불륜" 폭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하이디 클룸 하이디 클룸 - 공식 웹사이트 (영어) 하이디 클룸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하이디 클룸 - 패션 모델 디렉터리 하이디 클룸 - Models.com 하이디 클룸 - 인스타그램 하이디 클룸 - 트위터 하이디 클룸 - 페이스북 vdeh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 스윔수트 커버 모델1960년대 바베트 마치 슈 피터슨 써니 빕퍼스 마릴린 틴달 투리아 마우 재미 베커 1970년대 셰릴 티그스 타니아 루니아노 셸리아 로스코 데일 헤이든 앤 사이먼턴 셰릴 티그스 이베뜨 & 이본 실밴더 레나 캔스보드 마리아 주앙 크리스티 브링클리 1980년대 크리스티 브링클리 크리스티 브링클리 캐롤 앨트 셰릴 티그스 폴리나 포리스코바 폴리나 포리스코바 엘 맥퍼슨 엘 맥퍼슨 엘 맥퍼슨 캐시 아일랜드 1990년대 주딧 마스코 애슐리 리차드슨 캐시 아일랜드 벤델라 커시봄 캐시 아일랜드, 레이첼 헌터 & 엘 맥퍼슨 다니엘라 페스토바 발레리아 마자 & 타이라 뱅크스 타이라 뱅크스 하이디 클룸 레베카 로미즌 2000년대 다니엘라 페스토바 엘사 베니테즈 야밀라 디아즈 페트라 넴코바 베로니카 바레코바 캐롤린 머피 베로니카 바레코바, 엘 맥퍼슨, 레베카 로미즌, 레이첼 헌터, 다니엘라 페스토바, 엘사 베니테즈, 캐롤린 머피 & 야밀라 디아즈 비욘세 마리사 밀러 바 라파엘리 2010년대 브루클린 데커 이리나 샤크 케이트 업튼 케이트 업튼 니나 아그달, 릴리 앨드리지 & 크리시 타이겐 한나 제터 론다 라우시/애슐리 그레이엄/헤일리 클라우슨 케이트 업튼 대니엘 헤링턴 vdeh빅토리아 시크릿 엔젤스현재의 엔젤스 릴리 앨드리지 레오미 앤더슨 알렉시나 그레이엄 테일러 힐 엘사 호스크 그레이스 엘리자베스 마사 헌트 스텔라 맥스웰 펄빈 버르버러 베하티 프린슬루 라이스 히베이루 사라 삼파이우 조세핀 스크리베르 로메이 스트레이트 캔디스 스워너풀 재스민 툭스 과거의 엔젤스 아드리아나 리마 알레산드라 암브로지우 찬드라 노스 샤넬 이만 다니엘라 페스토바 다우천 크루스 에린 헤더턴 지젤 번천 하이디 클룸 헬레나 크리스텐센 이네스 리베로 이자베우 굴라르 카런 뮐더르 칼리 클로스 카롤리나 쿠르코바 케이트 그리고리예바 레티시아 카스타 린지 엘링슨 머리사 밀러 미란다 커 모니카 야가치아크 로지 헌팅턴화이틀리 셀리타 이뱅크스 스테퍼니 시모어 타이라 뱅크스 야스민 가우리 관련 항목 에드워드 라젝 리미티드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 목록 PINK 빅토리아 시크릿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 쇼 빅토리아 시크릿 스윔 스폐셜 전거 통제 WorldCat VIAF: 85619301 LCCN: n2004091450 ISNI: 0000 0000 7872 1263 GND: 129797219 SUDOC: 091574897 BNF: cb161677648 (데이터) 뮤직브레인즈: 93e1e8ed-db71-4f33-a5e0-3e3a18752133 NKC: xx005003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하이디_클룸&oldid=24263078" 분류: 197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독일의 여자 모델독일의 여자 영화 배우독일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독일의 패션 디자이너독일의 텔레비전 프로듀서미국의 여자 모델미국의 여자 영화 배우미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미국의 패션 디자이너미국의 텔레비전 토크 쇼 진행자미국의 텔레비전 프로듀서베르기슈글라트바흐 출신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ryskગુજરાતી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Ripoari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తెలుగు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3일 (목) 11: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나를 더 사랑하는 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를 더 사랑하는 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나를 더 사랑하는 법(Learning to love you more)은 월드 와이드 웹 상에서 이루어진 크라우드 소싱 예술 프로젝트이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모티프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며, 복잡한 절차 없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프로젝트의 참가자들은 나를 더 사랑하는 법 공식 홈페이지 ([1])에 적혀있는 과제 목록을 보고, 간단하지만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과제를 수행하여 그 결과물을 사진, 텍스트, 비디오 등의 매체로 만들어 보낸다. 이러한 작업물들은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모두에게 공유된다. 나를 더 사랑하는 법 프로젝트는 2002년 미란다 줄라이과 해럴 플래쳐에 의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나를 더 사랑하는 법 Learning To Love You More' 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고, 자기 자신과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과제들을 하나 둘 올리기 시작했다. 2009년 5월 미란다 줄라이와 해럴 플래쳐가 “작별 인사하기(Say Goodbye)” 라는 마지막 과제를 게시하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 전까지 , 국적, 나이, 성별, 직업을 초월한 사람들이 5,000여 개의 답변을 보내왔다.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월드 와이드 웹의 속성상 프로젝트 이야기가 퍼지면서 끊임없이 과제 결과물들이 올라왔다. 이러한 과제들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예술활동인 동시에 참여자가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신을돌아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웹공간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재연되는 모습을 보면서 일상이 예술로 승화되는 초현실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마음껏 사랑하는 법을 하나 둘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장치는 '과제'라는 형식을 통해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스스로의 생각과 일상을 솔직하게 공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1] 사람들의 호응과 공감에 힘입어 과제 결과물들을 모아 뉴욕 휘트니 미술관, 휴스턴의 오로라 픽처 쇼 등에 전시를 하기도 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책으로 출간하였다. 목차 1 과제 목록 2 도서 3 한국 프로젝트 3.1 한국 프로젝트 과제 목록 4 각주 5 외부 링크 과제 목록[편집] 과제 1: 유아복을 성인 사이즈로 만들어보기 과제 2: 이웃 사람들의 노래나 연주를 녹취해보기 과제 3: 어린 아이에 대한 다큐멘터리 만들어보기 과제 4: 연속강의 시작해보기 과제 5: 누군가 옛날에 사용했던 물건 만들어보기 과제 6: 그림자를 이용해 포스터 만들어보기 과제 7: 3분짜리 <프레시 에어> 인터뷰 재연해보기 과제 8: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공공장소에 전시해보기 과제 9: 누군가의 주근깨나 점을 연결해 별자리 그리기 과제 10: 자신의 하루를 전단지로 만들어보기 과제 11: 상처를 사진으로 찍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해보기 과제 12: 모건 로재키의 이웃 사람 중 한 명을 골라 일회용 문신 그려보기 과제 13: 범죄가 일어난 후의 순간 재연해보기 과제 14: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써보기 과제 15: 주차장에 있는 나무에 풍경 달아보기 과제 16: 종이로 침대 모형 만들어보기 과제 17: 자신만의 명상법을 오디오 가이드로 만들어보기 과제 18: 십대 시절 간직했던 포스터 다시 만들어보기 과제 19: 폴 아렌스마이어의 인생 이야기에 나오는 한 장면이나 물건 중 하나를 골라 그려보기 과제 20: 두 가족의 합동가족사진 찍어보기 과제 21: 스티브의 흉상 만들어보기 과제 22: 로라 라크의 인생 이야기 중 한 장면을 재연해보기 과제 23: 이 스냅사진을 그대로 따라 해보기 과제 24: 따라 불러보기 과제 25: 누군가 춤추는 모습을 촬영해보기 과제 26: 모나가 크로셰 뜨개질로 만들 수 있는 옷 디자인해보기 과제 27: 태양을 사진에 담기 과제 28: 사진 앨범 편집해보기 과제 29: 합창곡 녹음해보기 과제 30: 낯선 사람들에게 손을 잡게 한 뒤 그 모습을 사진에 담기 과제 31: 죽음을 앞둔 사람과 시간 보내기 과제 32: 나를 울렸던 영화의 한 장면 그려보기 과제 33: 다른 사람 머리 땋아주기 과제 34: 항의 팻말을 만들고 시위하기 과제 35: 내가 뭘 하고 다니는 것 같은지 가족에게 물어보기 과제 36: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장소에 정원 만들어보기 과제 37: 최근에 했던 말다툼 적어보기 과제 38: 누군가 말다툼하는 모습을 연기해보기 과제 39: 부모님이 키스하는 모습 사진 찍기 과제 40: 자가 처방전 만들어보기 과제 41: 머리카락이 빠진 부분 사진 찍기 과제 42: 1984년에 일어난 5대 사건 기록해보기 과제 43: 부모님 댁에 있는 작품들로 전시회 해보기 과제 44: <나를 더 사랑하는 법> 과제 만들어보기 과제 45: 5학년 때 가장 좋아했던 책 다시 읽어보기 과제 46: 레이몬드 카버의「성당」그려보기 과제 47: 누군가를 울렸던 영화의 한 장면 재연해보기 과제 48: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만들어보기 과제 49: 친구의 친구 그려보기 과제 50: 플래시를 터뜨린 채 침대 아래 사진 찍기 과제 51: 죽은 뒤 자신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지 설명해보기 과제 52: 하고 싶은 전화 통화 내용 써보기 과제 53: 과거의 자신에게 충고하기 과제 54: 뉴스를 그림으로 그려보기 과제 55: 중요한 날 입었던 옷을 사진으로 찍어보기 과제 56: 친구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 목록 만들어보기 과제 57: 수줍음 많은 이웃이 부른 가스 브룩스의 노래 립싱크하기 과제 58: 잠을 방해하는 소음 녹음해보기 과제 59: 전쟁을 겪은 사람과 인터뷰해보기 과제 60: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도자료처럼 써보기 과제 61: 당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정부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과제 62: 교육적인 내용의 공공 게시물 만들어보기 과제 63: 응원의 게시물 만들기 도서[편집] 대중이 수행한 과제를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2007년 9월 PrestelPub 출판사에서 《Learning to Love You More》 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는 프로젝트의 과제를 소개하고, 홈페이지에 게시된 예술 프로젝트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엮은 것이다. 63개의 과제 목록 중 41개의 과제 결과물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2009년 《Learning to Love You More》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를 더 사랑하는 법-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일상의 재발견》 이라는 제목으로 앨리스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김지은 아나운서에 의해 번역되었다. 김지은은 원서를 번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에서도 나를 더 사랑하는 법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물을 책에 담았다. 한국 프로젝트[편집] 《Learning to Love You More》의 한국 프로젝트는 김지은 아나운서에 의해 《나를 더 사랑하는 법》 이라는 이름으로 2009년 시작되었다. 원서에서 제시된 63개의 과제 외에 15개의 과제를 추가하였으며, 30일 동안 600여개의 답변이 올라왔다. 한국 프로젝트 과제 목록[편집] 과제 1: 휴대폰에 늘 간직하고 있는 문자 메시지나 사진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과제 2: 요즘 빠져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과제 3: 해보고 싶은 가상의 메신저 대화나, 인상적인 대화명 떠올려보기 과제 4: 응원의 말을 담은 게시물을 만들어 공공장소에 설치해보기 과제 5: 주변에서 빨간색을 찾아 사진으로 찍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과제 6: 소중한 사람에게 만들어주었던 도시락, 또는 잊을 수 없는 도시락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기 과제 7: 늘 다니는, 나만의 길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기 과제 8: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보고, 그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해보기 과제 9: 일상의 작은 변화 전후를 비교해보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설명해보기 과제 10: 좋아하는 예술작품을 따라 해보거나, 경의를 표현해보기 과제 11: 중요한 날 입었던 옷이나 기억 떠올려보기 과제 12: 어제의 나, 버리고 싶은 습관에 작별 인사해보기 과제 13: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말 다시 해보기 과제 14: 오늘 하루도 애쓴 나의 몸과 옛 상처에 말 걸어보기 과제 15: 세상을 떠날 때 남기고 싶은 사진이나 말 생각해보기 각주[편집] ↑ “예스24<<나를 더 사랑하는 법>>”. 《예스24》.  외부 링크[편집] 나를 더 사랑하는 법 - 공식 웹사이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나를_더_사랑하는_법&oldid=20105226" 분류: 크라우드소싱예술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공식 웹사이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11월 20일 (월) 10: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세종우체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종우체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6° 36′ 09″ 동경 127° 17′ 54″ / 북위 36.602380° 동경 127.298213°  / 36.602380; 127.298213 세종우체국기본 정보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시청대로 180 (보람동)관할지역 세종특별자치시현황 홈페이지 http://www.koreapost.go.kr/cc/339/ 세종우체국(世宗郵遞局)은 세종특별자치시 일대의 우편·금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대한민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 충청지방우정청 소속기관으로 세종우체국장(4급)은 서기관에 보한다.[1] 종전 연기우체국에서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에 따라 세종우체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 2017년 11월 조치원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이전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 시청대로 180 (보람동)에 있다. 목차 1 연혁 2 관할 우체국 3 조직 3.1 세종우체국장 4 외부 링크 5 각주 연혁[편집] 1904년 1월 20일: 조치원우편수취소 1950년 1월 12일: 조치원우체국으로 명칭 변경 1953년 9월 16일: 사무관국으로 승격 1983년 9월 28일: 우체국사 개축 (연기군 조치원읍 교리 24-3) 2008년 2월 1일: 연기우체국으로 명칭 변경 2011년 12월 26일: 세종첫마을우체국 개국[3] 2012년 7월 1일: 연기우체국에서 세종우체국으로 명칭 변경, 관할 세종첫마을우체국이 세종한솔동우체국으로 명칭 변경, 부강우체국과 장기우체국을 편입해 세종부강우체국과 장군우체국으로 명칭 변경[4] 2014년 7월 4일: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우체국 폐국[5] 2015년 1월 5일: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우편취급국 개국[6] 2015년 7월 1일: 서기관국으로 승격 2015년 7월 20일: 우편구역을 다음과 같이 고시[7] 세종우체국 관할 우편구역 배달국 배달구역 구역번호 세종우체국 조치원읍 · 연서면 · 전의면 · 전동면 · 소정면 30000 ~ 30049 세종우체국 물류센터 한솔동 · 가람동 · 아름동 · 고운동 · 종촌동 · 도담동 · 어진동 · 나성동 · 다정동 · 새롬동 · 대평동 · 보람동 · 소담동 · 반곡동 · 연동면 · 장군면 · 부강면 · 연기면 · 금남면 30050 ~ 30089 2015년 10월 30일: 세종연기우체국 폐국[8] 2017년 11월 13일: 청사 신축 이전(세종시 시청대로 180), 구 세종우체국 자리에 조치원우체국 신설[9] 2018년 10월 1일: 연기우편취급국 폐국 관할 우체국[편집] 우체국명 사진 주소 비고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세종로 2511 2014년 7월 4일 폐국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우편취급국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세종로 2511 (서창리) 2015년 1월 5일 신설 세종금남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용포로 56 (용포리) 세종부강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촌길 42 (부강리) 2012년 7월 1일 부강우체국에서 명칭 변경 세종소정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소정구길 110 (소정리) 세종아름동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보듬3로 111 (아름동) 세종연기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서부길 2 (연기리) 2015년 10월 30일 폐국 세종연동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청연로 602 (내판리) 세종연서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당산로 342 (봉암리) 세종전동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전동로 3 (노장리) 세종전의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운주산로 1208-1 (읍내리) 조치원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새내12길 3 (교리) 2017년 11월 13일 신설 세종한솔동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노을3로 93 (한솔동) 2011년 12월 26일 신설2012년 7월 1일 세종첫마을우체국에서 명칭 변경 연기우편취급국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당산로 118-1(연기리) 2018년 10월 1일 폐국 장군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장척로 408-4 (도계리) 2012년 7월 1일 장기우체국에서 명칭 변경 정부세종청사2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대로 482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13-2동 산업통상자원부 1층) 정부세종청사우체국 세종특별자치시 도움6로 11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6-1동 국토교통부 1층) 조직[편집] 세종우체국장[편집] 영업과 우편영업실 금융영업실 우편물류과 물류실 집배실 지원과 소포영업과 경영지도실 외부 링크[편집] 세종우체국 홈페이지 각주[편집] ↑ 연기우체국, 추석 비상근무 체제 운영《충청신문》2011년 8월 29일 김덕용 기자 ↑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12개 우체국 명칭 변경《뉴시스》2012-06-29 ↑ 충청지방우정청고시 제2011-7호, 2011년 12월 23일. ↑ 연기우체국, ‘세종우체국’으로 새 출발, 세종매일, 2012년 6월 25일 작성. ↑ 충청지방우정청공고 제2014-85호, 2014년 6월 20일. ↑ 충청지방우정청공고 제2014-216호, 2014년 12월 26일. ↑ 충청지방우정청고시 제2015-2호, 2015년 7월 21일. ↑ 충청지방우정청공고 제2015-164호, 2015년 10월 7일. ↑ 충청지방우정청공고 제2017-141호, 2017년 10월 19일. vdeh 우정사업본부본부 직속 우정공무원교육원 우정사업정보센터 우정사업조달센터 지방우정청서울지방우정청국제우편물류센터 우체국 서울중앙 서울강남 서울광진 서울강서 광화문 서대문 동대문 서울마포 서울관악 서울은평 여의도 서울금천 서울성북 서울강동 서울송파 서울양천 서울동작 서울서초 서울용산 서울노원 서울중랑 서울도봉 서울구로 우편집중국 동서울 경인지방우정청안양우편물류센터 우체국 부천 인천 서인천 인천계양 남인천 인천남동 의정부 수원 동수원 군포 안양 성남 성남분당 안산 고양일산 고양덕양 남양주 시흥 광명 용인수지 평택 용인 화성 화성동탄 부평 서수원 이천 안성 포천 경기광주 파주 김포 구리 강화 가평 양평 여주 동두천 연천 백령 오산 하남 우편집중국 부천 의정부 안양 고양 성남 수원 부산지방우정청부산국제우체국 우체국 부산 동래 남부산 부산사상 부산금정 부산사하 해운대 북부산 부산연제 울산 남울산 마산 창원 진주 김해 부산진 양산 동부산 부산영도 통영 진해 거제 거창 기장 부산강서 동울산 거창 고성 남해 마산합포 밀양 사천 산청 의령 창녕 하동 함안 함양 합천 우편집중국 부산 진주 울산 창원 충청지방우정청우체국 대전 서대전 대전유성 대전대덕 대전둔산 천안 공주 청주 서청주 충주 제천 아산 동천안 세종 서산 논산 금산 홍성 예산 서천 당진 청양 부여 보령 태안 단양 괴산 진천 옥천 음성 영동 보은 우편집중국 대전 청주 천안 전남지방우정청우체국 광주 북광주 서광주 광주광산 목포 여수 순천 광양 나주 해남 강진 고흥 곡성 구례 담양 무안 보성 영광 영암 완도 장성 장흥 진도 함평 화순 우편집중국 광주 영암 경북지방우정청우체국 대구 동대구 서대구 북대구 대구달서 대구수성 포항 경주 안동 구미 경산 영주 상주 달성 김천 영천 의성 문경 울진 예천 영덕 봉화 칠곡 청도 청송 성주 군위 영양 고령 울릉 우편집중국 대구 안동 포항 전북지방우정청우체국 전주 동전주 군산 익산 정읍 김제 완주 남원 부안 무주 임실 진안 순창 고창 장수 우편집중국 전주 강원지방우정청우체국 춘천 원주 강릉 삼척 동해 속초 양구 양양 영월 인제 정선 철원 태백 평창 홍천 화천 횡성 우편집중국 원주 강릉 제주지방우정청우체국 제주 서귀포 우편집중국 제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세종우체국&oldid=23798421" 분류: 1904년 설립세종특별자치시 소재의 관공서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3월 3일 (일) 03: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투자신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투자신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유가증권 채권 주식 투자신탁 파생상품 구조화 금융 정부기관 증권 금융 시장 상품 시장 선물 시장 외환 시장 장외거래 주식 시장 채권 시장 현물 시장 채권 이자 지급 방법에 의한 분류 고정 금리 채권 변동 금리 채권 할인채 인플레이션 연계 채권 기업어음 영구채 발행 주체에 의한 분류 국채 지방채 회사채 주식 공매도 기업공개 (IPO) 주식 투자신탁 뮤추얼 펀드 인덱스 펀드 상장지수 펀드 (ETF) 폐쇄형 펀드 원금보장형 펀드 (세그 펀드) 헤지 펀드 구조화 금융 증권화 자산 유동화 증권 (ABS) 주택 저당 증권 (MBS) 상업용 부동산 저당 증권 트량슈 부채 담보부 증권 (CDO) 펀드 담보부 증권 (CFO) 다계층 증권 (CMO) 신용 연계 채권 무담보채 정부기관 증권 파생상품 선도 계약 선물 신용 파생상품 옵션 워런트 통화 스와프 혼합 증권 v • d • e • h 투자신탁이란 여러 투자자의 자금을 모아 펀드를 만들어 투자를 행하는 소위 집합투자조직(Collective Investment Scheme)을 의미한다. 펀드(Fund) 또는 기금(基金)은 원래 투자 신탁의 신탁 재산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요즈음은 자산 보유자 대신에 투자를 대행해 주는 투자신탁 금융상품을 일컫는 말로서, 자산관리 전문가가 국내 또는 해외의 자산(채권, 주식, 부동산 등)에 분산 투자하여 발생된 이익금을 되돌려 주는 상품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상품으로는 단기금융상품에 투자하고 그 수익을 고객에게 돌려주는 펀드인 MMF(Money Market Fund)와 주식시장에 투자한 후 그 수익을 배분하는 뮤추얼 펀드(Mutual Fund) 등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의 법률 용어로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상 "간접투자"라고 한다.(제1조) 목차 1 주식 도매및 펀드 2 주식투자의 종류 3 역사 4 투자 대상에 따른 분류 5 같이 보기 주식 도매및 펀드[편집] 주식도매 주식 도매란 주식의 가치를 평가한뒤 주식의 성장성 경제성을 고려해 구매 하는 것이다. 주식을 도매한뒤에 주식의 가치가 올라가고, 주식이 성장을하면, 투자를 한 사람의 재산은 늘어난다. 하지만, 주식의 가치가 떨어지고, -성장(마이너스 성장)을 하면 투자를 한 사람의 재산은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펀드의 법칙이다. 그래서 주식투자의 거장 워렌 버핏등은 주식이 떨어질 위기라면, 주식을 팔아 버린다. 그럼 재산은 지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펀드 펀드는 주식투자를 뜻하는 말이다. 펀드를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바탕지식과 사고개념이 뛰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성공적인 투자를 할 수 있고, 재산을 불릴 수있다. 주식은 단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없고, 7명 이상의 투자자가 있어야 한다. 투자금을 통해 주식은 일을 하고, 벌은 금액의 일부를 투자자들에게 보낸다. 투자자들은 이 금액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금액을 가질 수는 없다. 금액이 늘어나면 소유한금액이 느는 것이고, 금액이 줄어들면, 소유한금액이 줄는 것이다. 이 금액을 가지기 위해서는 주식을 팔아야 한다. 그러면 안전히 금액을 보유할 수 있다. 주식투자의 종류[편집] 주식투자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바로 가치투자와 성장투자이다. 가치투자 가치투자는 주식의 가치만 보고 주식을 도매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이점은 profit 즉 이익 늘릴 수있다는 점 이다. 주식의 가치가 높다는 것은 성공률 이 높다는 뜻이고, 팔았을때 이익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투자자들의 방법이다. 하지만 요점은 위험하다는 점이다. 주식투자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가치가 오르락 내리라 하는 것 이다. 가치가 높다면, 가치가 다른 주식보다 많이 내릴수가 있기때문이다. 성장투자 성장투자는 더 멀게 보고 성장할 것같은 주식을 도매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의 이점은 safety 즉 안전성이 보장된다. 낮은 가치의 주식이 천천히오른다면 내려도 큰 손실이 없기 때문에 오랫동안 주식을 보유할 수 있기때문에 안전성과 여유를 보유할 수 있다. 하지만 요점은 느리다는 점이다. 지금당장 금액이 필요한데, 가치가 낮다면, 더 기다리며 잊어버리고 다른 주식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다. 어짜피 주식은 알아서 내리고, 오르기 때문이다. 역사[편집] 투자신탁의 기원으로 불리는 세계 최초의 펀드는 1868년 영국에서 생겨난 ‘해외 식민지·정부 신탁’(The Foreign Colonial & Government Trust)이었다고 한다. 이 펀드는 설립 취지서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외국 및 식민지 정부 증권에 분산 투자해 투자 위험을 감소시킴으로써 대자본가와 마찬가지의 이익을 일반 투자자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목적을 밝히고 있다. 한국 최초의 펀드는 1968년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설립된 한국투자공사(하나대투증권의 전신)가 1970년 5월 20일 수익증권 형태로 1억 원 규모로 발행한 '증권투자신탁'이다. 투자 대상에 따른 분류[편집] 펀드는 투자 비중에 따라 아래와 같이 분류한다. (한국펀드평가 기준) 주식 펀드: 주식 및 주식 관련 파생상품에 60% 이상 투자하는 펀드 채권 펀드: 채권 및 채권 관련 파생상품에 60% 이상 투자하는 펀드 혼합 펀드: 주식과 채권을 함께 섞어 투자하는 펀드 주식 혼합 펀드: 주식의 비율이 50~60%인 펀드 채권 혼합 펀드: 주식의 비율이 50% 이하인 펀드 머니 마켓 펀드(MMF): 단기 채권에 투자하는 펀드 부동산 펀드: 부동산에 관하여 투자하는 펀드 실물 펀드: 실물 경제(금, 은 등)에 투자하는 펀드 재간접 펀드: 다른 펀드에 투자하는 펀드 특별 자산 펀드: 특수 자산(선박, 도로 등)에 투자하는 펀드 같이 보기[편집] 좀비 펀드(en:Zombie fund) 전거 통제 NDL: 00573361 이 글은 경제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투자신탁&oldid=22111944" 분류: 투자숨은 분류: 경제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हिन्दीHrvatskiItaliano日本語Lietuvių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8월 25일 (토) 15: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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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st Japan Arena Tour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The 1st Japan Arena Tour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he 1st Japan Arena Tour소녀시대의 투어지역 일본시작일 2011년 5월 31일종료일 2011년 7월 18일공연횟수 14회 소녀시대 투어 연표 Into The New World(2009 ~ 2010) The 1st Japan Arena Tour GIRLS’ GENERATION TOUR(2011 ~ 2012) The 1st Japan Arena Tour는 GIRLS’ GENERATION TOUR의 일환으로 열린, 소녀시대의 첫 번째 단독 일본 아레나 투어 공연 프로그램이다. 이 콘서트는 일본 데뷔 9개월만에 펼쳐진 아레나 투어로 당초 7회 목표와 달리 총 45만명의 티켓 응모자가 몰려 14회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목차 1 개요 2 투어 일정 3 세트 리스트 4 각주 및 인용 개요[편집] 일본 데뷔 이후 소녀시대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소녀시대의 아레나 투어 콘서트가 기획되었다. 2011년 5월 19일 오사카에서 첫 공연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총 45만명의 티켓 응모자가 몰려 목표 관객동원수가 당초의 2배로 늘어났고, 공연내내 전석 매진이었다. 일본 아레나투어는 성황리에 2011년 7월 18일 폐막했고, 순수 티켓판매 수입만 180억원으로 추정된다.(현장판매 기념품 판매를 포함할 경우 200억원 넘는 수입을 거두었다.)[1] 투어 일정[편집] 날짜 도시 장소 관객 동원 2011년 5월 31일 대판 오사카 성 홀 통산 22,000명 2011년 6월 1일 2011년 6월 4일 기옥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통산 44,000명 2011년 6월 5일 2011년 6월 17일 동경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통산 52,000명 2011년 6월 18일 2011년 6월 28일 2011년 6월 29일 2011년 7월 2일 광도 그린 아레나 통산 22,000명 2011년 7월 3일 2011년 7월 6일 나고야 시 니혼 가이시 홀 통산 20,000명 2011년 7월 7일 2011년 7월 17일 복강 마린 멧세 후쿠오카 통산 30,000명 2011년 7월 18일 세트 리스트[편집] JP는 일본어, KR은 한국어, EN은 영어로 곡을 불렀음을 말한다. 보기 - Opening VCR (Girl's Carnival) - - Entrance Show - Genie (JP) You-aholic (JP) MR.TAXI (JP) I'm In Love With The HERO (JP) - VCR #2 - Let It Rain (JP) - Ment - 첫눈에... (Snowy Wish) (KR) Etude (KR) Kissing You_Rearranged (KR) Oh! (KR) - VCR #3 - Don't Stop The Music[2](EN/효연) Almost[3](EN/제시카) 3[4](EN/써니) Lady Marmalade[5](EN/태연, 티파니) - VCR #4 - The Great Escape (JP) Bad Girl (JP) - VCR #5 - Devil's Cry (KR/태연) Run Devil Run (JP) Beautiful Stranger (JP) Hoot_Rock Tronnic Remix Ver. (JP) - VCR #6 - If[6](EN/유리) 4 Minutes[7](EN/윤아) Stuff Like That There[8](EN/서현) Sway[9](EN/수영) - VCR #7 - Danny Boy (EN/태연, 티파니, 써니, 제시카, 서현) Complete (KR) - Encore 1 - 동화 (My Child) (KR) - VCR #8 - 냉면 (차가운 니 얼굴) (KR) 하하하송 (HaHaHaSong) (KR) Gee (JP) Born To Be A Lady (JP) - Encore 2 - 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 (KR) 힘 내! (Way To Go) (KR) Baby Baby (KR) - Ment - It's Fantastic (JP) - Special Encore (7월 18일 한정) - Genie (JP) Bad Girl (JP) - Ending - 각주 및 인용[편집] ↑ 김성한 기자 (2011년 7월 19일). “소녀시대, 일본 아레나 투어 성황… 6개도시 14만명 열광”. 스포츠한국. 2015년 3월 2일에 확인함.  ↑ 원곡자 : 리한나 ↑ 원곡자 : 타미아 ↑ 원곡자 : 브리트니 스피어스 ↑ 원곡자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원곡자 : 자넷 잭슨 ↑ 원곡자 : 마돈나 ↑ 원곡자 : 켈리 클락슨 ↑ 원곡자 : 푸시캣 돌스 vdeh소녀시대 현재 구성원 태연 써니 효연 유리 윤아 티파니 수영 서현 정규 음반대한민국 《소녀시대》 《Oh!》 《The Boys》 《I Got a Boy》 《Lion Heart》 《Holiday Night》 일본 《GIRLS' GENERATION》 《GIRLS' GENERATION II 〜Girls & Peace〜》 《LOVE & PEACE》 리패키지대한민국 《Baby Baby》 《Run Devil Run》 일본 《Re:Package Album "GIRLS' GENERATION" ~The Boys~》 컴필레이션 음반 《BEST SELECTION NON STOP MIX》 《THE BEST》 EP 《Gee》 《소원을 말해봐 (Genie)》 《훗 (Hoot)》 《Mr.Mr.》 라이브 음반 《Into The New World (The 1st Asia Tour Concert)》 《2011 Girls Generation Tour》 콘서트세계 Into The New World 2011 GIRLS’ GENERATION TOUR Girls' Generation World Tour - Girls & Peace SMTOWN WEEK - Marchen Fantasy GIRLS' GENERATION 4th TOUR "Phantasia" 일본 The 1st Japan Arena Tour Girls' Generation II ~Girls&Peace~ Japan 2nd Tour ~LOVE&PEACE~ Japan 3rd Tour GIRLS' GENERATION 'THE BEST LIVE' at TOKYO DOME 리얼리티 TV 쇼 《소녀 학교에 가다》 《MTV 소녀시대》 《팩토리 걸》 《공포영화 제작소》 《헬로 베이비》 《위험한 소년들》 《채널 소시》 관련 문서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Oh!GG 싱글 목록 음반 목록 음반외 활동 목록 콘서트 투어 목록 수상 목록   분류   위키공용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The_1st_Japan_Arena_Tour&oldid=24190125" 분류: 소녀시대의 콘서트 투어2011년 콘서트 투어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Bahasa IndonesiaPortuguês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3: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보량궁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보량궁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보량궁주 설씨(寶良宮主 薛氏, 604년~670년)는 신라의 제16대 풍월주 보종전군의 딸로, 김춘추의 아내 보라궁주와는 자매지간이다. 본래 진평왕의 후비였으나, 진평왕의 계비인 승만부인이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출궁하였다고 한다.[1] 이후, 이부(異父) 남매이자 사촌간인 김양도에 재가하였다. 김양도는 동복누이와의 혼인을 내켜하지 않았으나 보량궁주가 그로 인해 병이 들고 어머니 양명공주가 이를 꾸짖자 어쩔 수 없이 혼인하였다.[1] 신라 30대 문무왕 10년(670년), 남편 김양도가 사신사로 당나라에 갔다 그곳에서 옥사하자 따라 죽었다 전해진다. 목차 1 가계 2 관련 작품 2.1 드라마 3 각주 가계[편집] 조모 : 미실궁주(美室) 조부 : 제7대 풍월주 설원랑(薛原郞) 부친 : 보종전군(宝宗) 모친 : 양명공주(良明公主, 진평과 보명궁주의 딸) 자매 : 태종 무열왕의 비 보라궁주(宝羅宮主) 남편&외조부 : 신라 26대 왕 진평왕(眞平王) 아들 : 보로전군(寶路殿君) - 김유신(金庾信)의 딸 작광(酌光)과 혼인 남편&남매 : 김양도(金良圖, 모종과 양명공주의 아들) 아들 : 양효(良孝) 딸 : 양시(良時)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선덕여왕》 (MBC, 2009년, 배우:박은빈) 《대왕의 꿈》(KBS, 2012년~2013년, 배우:이시원) 각주[편집] ↑ 가 나 각훈, 김대문 (2008년 10월 15일). 《화랑세기 해동고승전》. 지만지고전천줄. 180(70면)쪽. ISBN 978896228155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보량궁주&oldid=21291771" 분류: 604년 태어남670년 죽음신라의 왕비순창 설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5월 18일 (금) 07:4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트리파라디소스협의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또는 트리파라디소스의 분할(Partition of Triparadisus)로 불리며, 기원전 321년에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근처의 도시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열린 알렉산더 대왕의 디아도코이(후계 장군)의 권력 분할 협정이다. 기원전 323년에 대왕의 사후에 열린 바빌론 회의에서의 결정을 수정한 것이었다. 목차 1 배경 2 내용 2.1 새 직책 2.2 신임자 2.3 유임 3 같이 보기 배경[편집]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사하자, 왕위는 대왕의 이복동생 필리포스 3세와 대왕의 유복자 알렉산더 4세가 이어 받았다. 그러나 필리포스 3세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왕의 사후에 태어난 어린 알렉산더 4세는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 취임했다. 실질적인 제국의 일인자가 된 페르디카스와 그를 경계했던 안티파트로스, 프톨레마이오스, 크라테로스 등의 여러 장군은 권력 다툼을 벌였고, 곧 디아도코이 전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321년에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징벌하기 위해 이집트로 쳐들어 갔다. 그러나 길 위에서 부하 장군들(페이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리고 페르디카스의 사후 제국의 체제를 결정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권력 분배를 결정하기 위해 같은 해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상류에 있었던 트리파라디소스에서 디아도코이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내용[편집] 여기에서는 바빌론 회의에서 결정된 지위와 태수령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공석이 된 섭정 정도 페이톤과 아리다이오스를 붙이려 했지만 필리포스 3세의 왕비 에우리디케 2세(필리포스 2세의 조카 아민타스 4세와 필리포스 2세의 딸 키나네의 딸)의 강한 반대로 섭정의 자리에는 안티파트로스가 취임했다. 에우리디케 2세는 안티파트로스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했고, 자신이 실권 장악을 노리고 있었지만, 여러 장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결정 사항에 관하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 대주교 포티오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리아노스의 설명과 디오도로스의 묘사도 남아 있다. 바빌론 회의의 경우와 달리 양자 사료의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새 직책[편집] 바빌론 회의에서 수정된 직책은 아래와 같다. 섭정은 안티파트로스가 취임. 천부장(전체 기병대장)은 카산드로스 취임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이 인사는 안티고노스가 야망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감시역으로 한다). 전권 장군(전군 총사령관)은 안티고노스가 취임 이전 페르디카스 잔당 토벌을 명했다. 측근 호위는 아가토크레스의 아들 아우토루코스, 페우케스타스의 동생 아민타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폴리페르콘의 아들 알렉산더가 취임했다. 신임자[편집] 새로 태수령을 얻었던 또는 변경된 인물과 지역은 아래와 같다. 헬레스폰투스, 프리기아는 아리다이오스로 한다. 리디아는 크레토스로 한다. 카파도키아는 니카노르로 한다.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는 스타사노르로 한다. 아레이아와 드란기아나는 스타산드로스로 한다. 킬리키아는 필로크세노스로 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베라 지방은 암피마코스로 한다. 스시아나는 은방패 병단의 지휘관 안티게네스로 한다. 바빌로니아는 셀레우코스로 한다. 페르시스는 페우케스타스로 한다. 인도의 파로파미소스 산 부근( 간다라) 령이 페이톤에 추가되었다. 파로파미소스는 록사네 아버지 옥시아르테스에게 추가되었다. 파르티아는 필리포스로 한다. 유임[편집] 바빌론 회의에서 속주령에 거의 변화가 없었는 사람은 아래와 같다. 이집트 일대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통치한다. 시리아는 라오메돈이 통치한다. 카르마니아는 토레포레모스이 통치한다. 메디아는 페이톤이 통치한다. 아라코시아와 게도로시아는 시비루티오스로 한다. 카리아는 아산드로스가 통치한다. 프리기아, 리카오니아, 팜필리아, 리키아는 안티고노스 파타라를 포함한 인더스 강 이후 국가의 통치자는 포로스가, 히다스페스 강 당은 타크실레스가 계속 유임시켰다. 이것은 알렉산더에 의해 안심하고 영토를 늘렸던 포로스와 타크실레스를 쫓아내기 쉽지 않는 문제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같이 보기[편집] 바빌론 회의 디아도코이 전쟁 디아도코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트리파라디소스_협의&oldid=24063620" 분류: 고대 그리스의 조약헬레니즘 왕조마케도니아 왕국디아도코이 전쟁분할기원전 321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Françaisעברית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9: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트리파라디소스협의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또는 트리파라디소스의 분할(Partition of Triparadisus)로 불리며, 기원전 321년에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근처의 도시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열린 알렉산더 대왕의 디아도코이(후계 장군)의 권력 분할 협정이다. 기원전 323년에 대왕의 사후에 열린 바빌론 회의에서의 결정을 수정한 것이었다. 목차 1 배경 2 내용 2.1 새 직책 2.2 신임자 2.3 유임 3 같이 보기 배경[편집]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사하자, 왕위는 대왕의 이복동생 필리포스 3세와 대왕의 유복자 알렉산더 4세가 이어 받았다. 그러나 필리포스 3세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왕의 사후에 태어난 어린 알렉산더 4세는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 취임했다. 실질적인 제국의 일인자가 된 페르디카스와 그를 경계했던 안티파트로스, 프톨레마이오스, 크라테로스 등의 여러 장군은 권력 다툼을 벌였고, 곧 디아도코이 전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321년에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징벌하기 위해 이집트로 쳐들어 갔다. 그러나 길 위에서 부하 장군들(페이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리고 페르디카스의 사후 제국의 체제를 결정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권력 분배를 결정하기 위해 같은 해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상류에 있었던 트리파라디소스에서 디아도코이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내용[편집] 여기에서는 바빌론 회의에서 결정된 지위와 태수령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공석이 된 섭정 정도 페이톤과 아리다이오스를 붙이려 했지만 필리포스 3세의 왕비 에우리디케 2세(필리포스 2세의 조카 아민타스 4세와 필리포스 2세의 딸 키나네의 딸)의 강한 반대로 섭정의 자리에는 안티파트로스가 취임했다. 에우리디케 2세는 안티파트로스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했고, 자신이 실권 장악을 노리고 있었지만, 여러 장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결정 사항에 관하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 대주교 포티오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리아노스의 설명과 디오도로스의 묘사도 남아 있다. 바빌론 회의의 경우와 달리 양자 사료의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새 직책[편집] 바빌론 회의에서 수정된 직책은 아래와 같다. 섭정은 안티파트로스가 취임. 천부장(전체 기병대장)은 카산드로스 취임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이 인사는 안티고노스가 야망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감시역으로 한다). 전권 장군(전군 총사령관)은 안티고노스가 취임 이전 페르디카스 잔당 토벌을 명했다. 측근 호위는 아가토크레스의 아들 아우토루코스, 페우케스타스의 동생 아민타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폴리페르콘의 아들 알렉산더가 취임했다. 신임자[편집] 새로 태수령을 얻었던 또는 변경된 인물과 지역은 아래와 같다. 헬레스폰투스, 프리기아는 아리다이오스로 한다. 리디아는 크레토스로 한다. 카파도키아는 니카노르로 한다.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는 스타사노르로 한다. 아레이아와 드란기아나는 스타산드로스로 한다. 킬리키아는 필로크세노스로 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베라 지방은 암피마코스로 한다. 스시아나는 은방패 병단의 지휘관 안티게네스로 한다. 바빌로니아는 셀레우코스로 한다. 페르시스는 페우케스타스로 한다. 인도의 파로파미소스 산 부근( 간다라) 령이 페이톤에 추가되었다. 파로파미소스는 록사네 아버지 옥시아르테스에게 추가되었다. 파르티아는 필리포스로 한다. 유임[편집] 바빌론 회의에서 속주령에 거의 변화가 없었는 사람은 아래와 같다. 이집트 일대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통치한다. 시리아는 라오메돈이 통치한다. 카르마니아는 토레포레모스이 통치한다. 메디아는 페이톤이 통치한다. 아라코시아와 게도로시아는 시비루티오스로 한다. 카리아는 아산드로스가 통치한다. 프리기아, 리카오니아, 팜필리아, 리키아는 안티고노스 파타라를 포함한 인더스 강 이후 국가의 통치자는 포로스가, 히다스페스 강 당은 타크실레스가 계속 유임시켰다. 이것은 알렉산더에 의해 안심하고 영토를 늘렸던 포로스와 타크실레스를 쫓아내기 쉽지 않는 문제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같이 보기[편집] 바빌론 회의 디아도코이 전쟁 디아도코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트리파라디소스_협의&oldid=24063620" 분류: 고대 그리스의 조약헬레니즘 왕조마케도니아 왕국디아도코이 전쟁분할기원전 321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Françaisעברית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9: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트리파라디소스협의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트리파라디소스 협의 또는 트리파라디소스의 분할(Partition of Triparadisus)로 불리며, 기원전 321년에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근처의 도시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열린 알렉산더 대왕의 디아도코이(후계 장군)의 권력 분할 협정이다. 기원전 323년에 대왕의 사후에 열린 바빌론 회의에서의 결정을 수정한 것이었다. 목차 1 배경 2 내용 2.1 새 직책 2.2 신임자 2.3 유임 3 같이 보기 배경[편집]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사하자, 왕위는 대왕의 이복동생 필리포스 3세와 대왕의 유복자 알렉산더 4세가 이어 받았다. 그러나 필리포스 3세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왕의 사후에 태어난 어린 알렉산더 4세는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 취임했다. 실질적인 제국의 일인자가 된 페르디카스와 그를 경계했던 안티파트로스, 프톨레마이오스, 크라테로스 등의 여러 장군은 권력 다툼을 벌였고, 곧 디아도코이 전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321년에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징벌하기 위해 이집트로 쳐들어 갔다. 그러나 길 위에서 부하 장군들(페이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리고 페르디카스의 사후 제국의 체제를 결정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권력 분배를 결정하기 위해 같은 해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상류에 있었던 트리파라디소스에서 디아도코이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내용[편집] 여기에서는 바빌론 회의에서 결정된 지위와 태수령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공석이 된 섭정 정도 페이톤과 아리다이오스를 붙이려 했지만 필리포스 3세의 왕비 에우리디케 2세(필리포스 2세의 조카 아민타스 4세와 필리포스 2세의 딸 키나네의 딸)의 강한 반대로 섭정의 자리에는 안티파트로스가 취임했다. 에우리디케 2세는 안티파트로스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했고, 자신이 실권 장악을 노리고 있었지만, 여러 장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결정 사항에 관하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 대주교 포티오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리아노스의 설명과 디오도로스의 묘사도 남아 있다. 바빌론 회의의 경우와 달리 양자 사료의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새 직책[편집] 바빌론 회의에서 수정된 직책은 아래와 같다. 섭정은 안티파트로스가 취임. 천부장(전체 기병대장)은 카산드로스 취임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이 인사는 안티고노스가 야망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감시역으로 한다). 전권 장군(전군 총사령관)은 안티고노스가 취임 이전 페르디카스 잔당 토벌을 명했다. 측근 호위는 아가토크레스의 아들 아우토루코스, 페우케스타스의 동생 아민타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폴리페르콘의 아들 알렉산더가 취임했다. 신임자[편집] 새로 태수령을 얻었던 또는 변경된 인물과 지역은 아래와 같다. 헬레스폰투스, 프리기아는 아리다이오스로 한다. 리디아는 크레토스로 한다. 카파도키아는 니카노르로 한다.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는 스타사노르로 한다. 아레이아와 드란기아나는 스타산드로스로 한다. 킬리키아는 필로크세노스로 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베라 지방은 암피마코스로 한다. 스시아나는 은방패 병단의 지휘관 안티게네스로 한다. 바빌로니아는 셀레우코스로 한다. 페르시스는 페우케스타스로 한다. 인도의 파로파미소스 산 부근( 간다라) 령이 페이톤에 추가되었다. 파로파미소스는 록사네 아버지 옥시아르테스에게 추가되었다. 파르티아는 필리포스로 한다. 유임[편집] 바빌론 회의에서 속주령에 거의 변화가 없었는 사람은 아래와 같다. 이집트 일대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통치한다. 시리아는 라오메돈이 통치한다. 카르마니아는 토레포레모스이 통치한다. 메디아는 페이톤이 통치한다. 아라코시아와 게도로시아는 시비루티오스로 한다. 카리아는 아산드로스가 통치한다. 프리기아, 리카오니아, 팜필리아, 리키아는 안티고노스 파타라를 포함한 인더스 강 이후 국가의 통치자는 포로스가, 히다스페스 강 당은 타크실레스가 계속 유임시켰다. 이것은 알렉산더에 의해 안심하고 영토를 늘렸던 포로스와 타크실레스를 쫓아내기 쉽지 않는 문제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같이 보기[편집] 바빌론 회의 디아도코이 전쟁 디아도코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트리파라디소스_협의&oldid=24063620" 분류: 고대 그리스의 조약헬레니즘 왕조마케도니아 왕국디아도코이 전쟁분할기원전 321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Françaisעברית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9: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CJB 장학퀴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CJB 장학퀴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CJB 장학퀴즈 장르 퀴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CJB 방송 기간 1기: 2012년 6월 2일 ~ 2013년 1월 5일2기: 2013년 3월 2일 ~ 2013년 12월 28일3기: 2014년 3월 1일 ~ 2014년 12월 27일 방송 시간 토 오전 10시 55분 (본방송)목 오후 2시 10분 (재방송) 방송 분량 55분~60분 방송 시즌 3 방송 횟수 119부작[1] 기획 이한목 연출 이상대 조연출 박용진 작가 김원일, 김형인 출연자 안정은[2] 《CJB 장학퀴즈》는 CJB에서 충청북도 지역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으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 프로그램이다. 방영시간은 매주 토요일 오전 10:55 ~ 11:50이다. 목차 1 역대 진행자 2 방송시간 3 진행방식 3.1 1라운드 3.2 2라운드 3.3 3라운드 4 1기 연장원전 진행방식 5 2기 진행방식 6 2기 연장원전 진행방식 6.1 연장원 진출전 6.1.1 1라운드 6.1.2 2라운드 6.1.3 3라운드 7 3기 진행방식 7.1 1라운드 7.2 2-1라운드 - 1+1 주관식 8 역대 우승자 목록 8.1 1기 8.2 2기 8.3 3기 9 함께 보기 10 각주 11 외부 링크 역대 진행자[편집] 진행자 진행 기간 최지현 2012년 6월 2일 ~ 2012년 9월 8일 안정은 2012년 9월 15일 ~ 2014년 12월 27일 황수동 2013년 1월 5일 , 2013년 12월 28일 방송시간[편집] 방송기간 방송시간 2012년 6월 2일 ~ 2014년 12월 27일(본방송) 토요일 오전 10시 55분 ~ 12시 2012년 6월 20일 ~ 2014년 12월 27일(재방송) 목요일 오후 2시 10분 ~ 3시 15분 진행방식[편집] CJB 장학퀴즈 3000은 4명의 학생이 100점의 기본 점수를 갖고 3라운드 방식으로 진행하며 주장원과 월장원을 거쳐 연장원으로 올라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월장원전은 방송 회차가 1기는 5배수일 때, 2기는 2 또는 7로 끝날 때, 3기는 1 또는 6으로 끝날 때에 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방송사 측의 사정으로 인해 변경될 수 있다. 주장원의 장학금은 100만원, 월장원의 장학금은 200만원, 연장원의 장학금은 3000만원(2기에서는 2000만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1라운드[편집] OX 퀴즈와 객관식 퀴즈가 각 5문제 출제된다.[3] 문제당 10점이며 모니터에 정답을 적는 형식을 취한다. 중간에 이심전심 퀴즈 라고 하는 보너스 퀴즈가 1문제 출제되며 2인 1팀으로 각각 2음절을 적어 4음절의 정답을 완성한다. 이 때 2인이 모두 답을 맞히면 보너스 점수와 상품을 받을 수 있으나 2인중 1명이라도 맞히지 못하면 맞힌 1인도 점수를 받을 수 없다. 2라운드[편집] 주관식 퀴즈 5문제와 스피드 퀴즈 7문제가 출제된다.[4] 문제당 20점이며 주관식 퀴즈는 1라운드와 마찬가지로 모니터에 정답을 적으며 스피드 퀴즈는 버저를 눌러 정답을 직접 말한다. 스피드 퀴즈에서는 1인 1회 더블 찬스를 사용할 수 있으며 이 때 더블 찬스를 사용하는 학생부터 먼저 정답을 말할 수 있다. 더블 찬스 성공 시 40점을 얻을 수 있으나 더블 찬스 실패 시 20점이 감점된다. 2라운드 종료 후 점수가 높은 2인이 결승에 진출하며 출연한 4인이 모두 답을 맞히지 못할 경우 해당 문제는 시청자 퀴즈로 전환한다. 3라운드[편집] 2라운드를 통과한 2인이 장원의 자리를 놓고 연상 퀴즈 대결을 벌인다. 각각의 제시어를 듣고 4문제를 먼저 맞히는 학생이 장원의 자리에 등극한다. 2라운드까지 획득한 점수는 3라운드로 이어지지 않는다. 1기 연장원전 진행방식[편집] 역대 월장원전에 등극한 6명이 a,b조 각각 3명 씩 나누어 대결을 펼쳐서 각조 1위가 결승에 진출하며, 결승전에 진출한 2학생이 대결을 펼쳐 우승자를 가린다.[5] 예선전은 a,b조에 있는 3명이 대결을 펼쳐서 각조 1위가 결승에 진출한다.[6] 결승전은 1기 3라운드 형식과 동일하며, 제시어에 따라 40,30,20,10점 순으로 차등 배점된다. 문제를 계속 풀다가 먼저 100점 이상을 획득한 학생이 연장원으로 등극한다. 2기 진행방식[편집] 2013년 3월 2일 33회차 부터 방영을 개시한 2기는 1기 형식과 유사하게 진행되며, 중간중간에 새로운 규칙을 적용하였다. 통통(通通)퀴즈 : 두 참가자가 짝을 이뤄 60초 간 스피드 퀴즈를 풀어서 많이 맞힌 팀에게 20점 씩 부여된다. 더블찬스는 해당 학생이 친구와 같이 문제를 풀 수 있으며, 더블찬스에 성공하면 문제를 같이 푼 친구에게는 선물이 돌아간다. 결승전 연상퀴즈는 1기 연장원 형식과 동일하다. 2기 연장원전 진행방식[편집] 연장원 진출전[편집] 1라운드[편집] 첫 번째 유형 : 있다 없다 퀴즈(개인별로 3문제 부여, 한 문제 당 10점) 그 뒤 형식은 예전 1라운드 형식과 동일하다.(예전처럼 기본점수 100점 없이 시작) 2라운드[편집] 첫 번째 유형 : 주관식 퀴즈로 전과 동일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두 번째 유형 : what's up? 퀴즈 - 시민들의 반응을 본 뒤 정답을 유추하는 형식으로, 역시 공통문제로 주어진다(배점 20점) 세 번째 유형 : 사다리 퀴즈 - 출연학생은 장,학,퀴,즈 네 개의 제시어 중 하나를 선택해서 개인전으로 문제를 풀며, 선택한 제시어가 도달된 유형을 푸는 형식. 힌트로는 초성, 연상, 영상으로 주어진다(꽝도 있음, 단 꽝이더라도 문제를 풀 기회는 주어진다) 3라운드[편집] 첫 번째 유형 : 주관식 스피드 퀴즈로 전과 동일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두 번째 유형 : 더블더블 퀴즈 - 출연학생이 미리 지정한 분야를 1단계,2단계로 나누어 푸는 대결, 1단계 성공시 20점 획득과 2단계에서 30점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도전학생이 해당 문제를 맞히지 못할 경우, 기회는 다른 세 학생에게 넘어가게 된다. 문제를 다 풀고, 상위 2명이 연장원전에 진출한다. 연장원은 있다 없다 퀴즈가 진행된 다음 2기 예전 형식으로 진행된다.(단, 통통퀴즈는 생략됨) 3기 진행방식[편집] 1라운드[편집] 예전 진행방식과 동일하다. 2-1라운드 - 1+1 주관식[편집] C,J,B,장,학,퀴,즈,S,3 아홉개의 글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해당하는 키워드를 푼다. 문제 푸는 순서는 점수가 높은 사람부터 진행한다. 배점은 20점,30점으로 최대 60점까지 획득가능, 성공하면 문제를 계속 풀 수 있으나 실패하면 문제 풀 기회가 상실된다. 그 뒤 형식은 전과 동일하다.(더블찬스는 예전처럼 혼자 푸는 형식으로 바뀌며, 2라운드에서 단독 1위로 올라온 학생에게는 기본점수 10점이 주어진다.) 역대 우승자 목록[편집] 1기[편집]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회차 방송일 이름 출신학교 등급 비고 1회 2012년 6월 2일 권오찬 충북과학고등학교 주장원 2회 2012년 6월 9일 김준형 충주고등학교 3회 2012년 6월 16일 장지영 청주여자고등학교 4회 2012년 6월 23일 강대건 세광고등학교 5회 2012년 6월 30일 권오찬 충북과학고등학교 월장원 6회 2012년 7월 7일 박대호 한국바이오마이스터고등학교 주장원 7회 2012년 7월 14일 이병진 진천고등학교 8회 2012년 7월 21일 이상찬 청주고등학교 9회 2012년 7월 28일 이예찬 충북고등학교 10회 2012년 8월 4일 이예찬 충북고등학교 월장원 11회 2012년 8월 11일 김선 충북여자고등학교 주장원 12회 2012년 8월 18일 박상원 충북과학고등학교 13회 2012년 8월 25일 김상필 보은고등학교 14회 2012년 9월 1일 허범안 제천고등학교 15회 2012년 9월 8일 김상필 보은고등학교 월장원 16회 2012년 9월 15일 김유신 청원고등학교 주장원 개편: mc는 안정은 아나운서, 방송시간은 am 11~12시로 변경 17회 2012년 9월 22일 민병길 청석고등학교 첫 패자부활전 18회 2012년 9월 29일 김혁준 양업고등학교 19회 2012년 10월 6일 유영태 청주신흥고등학교 20회 2012년 10월 13일 유영태 청주신흥고등학교 월장원 21회 2012년 10월 20일 최민혜 세명고등학교 주장원 22회 2012년 10월 27일 이재인 충북 청주 청석고등학교 23회 2012년 11월 3일 오수진 청주대성고등학교 24회 2012년 11월 10일 이소현 제천여자고등학교 25회 2012년 11월 17일 이소현 제천여자고등학교 월장원 26회 2012년 11월 24일 홍경원 금천고등학교 주장원 27회 2012년 12월 1일 함윤수 산남고등학교 28회 2012년 12월 8일 손동준 제천고등학교 29회 2012년 12월 15일 신동욱 세광고등학교 두 번째 패자부활전, 1기 마지막 주장원전 30회 2012년 12월 22일 홍경원 금천고등학교 월장원 1기 마지막 월장원전 31회 2012년 12월 29일 권오찬 충북과학고등학교 연장원 1기 연장원전, 준우승자 김상필에게는 노트북 부여[7] 2기[편집]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회차 방송일 이름 출신학교 등급 비고 33회 2013년 3월 2일 장민지 일신여자고등학교 주장원 2기 첫방송 34회 2013년 3월 9일 조정수 청원고등학교 35회 2013년 3월 16일 이기수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36회 2013년 3월 23일 유민주 청원고등학교 37회 2013년 3월 30일 조정수 청원고등학교 월장원 38회 2013년 4월 6일 강혜윤 중산고등학교 주장원 39회 2013년 4월 13일 신지환 한국교원대학교 부설고등학교 40회 2013년 4월 20일 오현근 운호고등학교 41회 2013년 4월 27일 이하경 상당고등학교 42회 2013년 5월 4일 신지환 한국교원대학교 부설고등학교 월장원 43회 2013년 5월 11일 연승하 서원고등학교 주장원 44회 2013년 5월 18일 강창현 옥천고등학교 45회 2013년 5월 25일 엄호영 충주대원고등학교 46회 2013년 6월 1일 김영창 충주고등학교 47회 2013년 6월 8일 김영창 충주고등학교 월장원 48회 2013년 6월 15일 김수민 양업고등학교 주장원 49회 2013년 6월 22일 정성훈 청주대성고등학교 50회 2013년 6월 29일 박금정 보은여자고등학교 51회 2013년 7월 6일 정의광 한국교원대학교 부설고등학교 52회 2013년 7월 13일 정의광 한국교원대학교 부설고등학교 월장원 53회 2013년 7월 20일 강희창 오송고등학교 주장원 54회 2013년 7월 27일 유병서 청주외국어고등학교 55회 2013년 8월 3일 지석천 제천고등학교 56회 2013년 8월 10일 정지현 청석고등학교 상반기 패자부활전 57회 2013년 8월 17일 정지현 청석고등학교 월장원 58회 2013년 8월 24일 박세연 양청고등학교 주장원 59회 2013년 8월 31일 황재현 형석고등학교 60회 2013년 9월 7일 김석현 충주고등학교 61회 2013년 9월 14일 홍지수 중앙여자고등학교 62회 2013년 9월 21일 김석현 충주고등학교 월장원 63회 2013년 9월 28일 이성철 세광고등학교 주장원 64회 2013년 10월 5일 이승욱 한국교원대학교부설고등학교 65회 2013년 10월 12일 정도영 단양고등학교 66회 2013년 10월 19일 조윤성 청주 대성고등학교 67회 2013년 10월 26일 정도영 단양고등학교 월장원 68회 2013년 11월 2일 김종현 진천고등학교 주장원 69회 2013년 11월 9일 이연수 봉명고등학교 70회 2013년 11월 16일 황서경 제천여자고등학교 71회 2013년 11월 23일 구본호 음성 매괴고등학교 하반기 패자부활전, 2기 마지막 주장원전 72회 2013년 11월 30일 황서경 제천여자고등학교 월장원 2기 마지막 월장원전[8] 75회 2013년 12월 21일 조정수 청원고등학교 연장원 준우승자 김석현에게는 500만원 상금 부여[9] 3기[편집]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회차 방송일 이름 출신학교 등급 비고 77회 2014년 3월 1일 신예성 청원 오송고등학교 주장원 3기 첫방송 78회 2014년 3월 8일 고현석 충주 중산고등학교 79회 2014년 3월 15일 김대환 한국 교원대부고등학교 80회 2014년 3월 22일 이희진 대성고등학교 81회 2014년 3월 29일 김대환 한국 교원대부고등학교 월장원 82회 2014년 4월 5일 조원기 운호고등학교 주장원 83회 2014년 4월 12일 김선아 보은고등학교 84회 2014년 4월 26일 유지인 청원고등학교 진도 여객선 침몰 사고 편성으로 한 주 연기 85회 2014년 5월 3일 황인제 흥덕고등학교 86회 2014년 5월 10일 김선아 보은고등학교 월장원 87회 2014년 5월 17일 류기쁨 청석고등학교 주장원 88회 2014년 5월 24일 김은채 제천여자고등학교 89회 2014년 5월 31일 허웅배 제천고등학교 90회 2014년 6월 7일 이제헌 세광고등학교 91회 2014년 6월 14일 이제헌 세광고등학교 월장원 92회 2014년 6월 21일 황경주 청원고등학교 주장원 93회 2014년 6월 28일 민예란 청주 중앙여자고등학교 94회 2014년 7월 5일 김민정 청주 주성고등학교 95회 2014년 7월 12일 윤교범 청주 세광고등학교 96회 2014년 7월 19일 황경주 청원고등학교 월장원 97회 2014년 7월 26일 김재혁 충주 중산고등학교 주장원 상반기 패자부활전 98회 2014년 8월 2일 이진희 충북 과학고등학교 99회 2014년 8월 9일 심현섭 오송고등학교 100회 2014년 8월 16일 이규연 상당고등학교 101회 2014년 8월 23일 이진희 충북 과학고등학교 월장원 102회 2014년 8월 30일 차보금 한국교원대부고 주장원 103회 2014년 9월 6일 정태훈 제천고등학교 104회 2014년 9월 13일 성준호 청석고등학교 105회 2014년 9월 20일 송은혜 보은여자고등학교 106회 2014년 9월 27일 차보금 한국교원대부고 월장원 107회 2014년 10월 4일 민정원 제천여자고등학교 주장원 108회 2014년 10월 11일 이세훈 청주 세광고등학교 109회 2014년 10월 18일 윤지수 청주 흥덕고등학교 110회 2014년 10월 25일 김장원 청주 외국어고등학교 111회 2014년 11월 1일 이세훈 청주 세광고등학교 월장원 112회 2014년 11월 8일 김향온 충북여자고등학교 주장원 113회 2014년 11월 15일 박해나 보은고등학교 114회 2014년 11월 22일 김지욱 제천고등학교 115회 2014년 11월 29일 이주희 충주여자고등학교 하반기 패자부활전 116회 2014년 12월 6일 박해나 보은고등학교 월장원 [10] 119회 2014년 12월 27일 이세훈 세광고등학교 연장원 준우승자 이제헌 함께 보기[편집] 도전! 골든벨 장학퀴즈 각주[편집] ↑ 1,2기 마지막회는 스페셜 방송으로 꾸며짐. ↑ 초창기에는 최지현이 진행하였으며 스페셜 방송에서는 황수동과 같이 방송을 진행한다. ↑ 4회차까지는 OX 퀴즈와 객관식 퀴즈가 각 7문제 출제되었다. ↑ 4회차까지는 주관식 퀴즈와 스피드 퀴즈가 각 5문제 출제되었다. ↑ 1기 연장원전은 스튜디오가 아닌 한국교통대학교 국제회의장에서 공개녹화로 진행되었다. ↑ 형식은 예전 1-2라운드와 동일, 다만 이심전심 퀴즈는 세 도전자가 각자 한 음절씩, 세 음절의 답을 적는 것만 다를 뿐이다. ↑ 32회는 스페셜 방송으로 꾸며졌다.(출연자:권오찬,김상필,이예찬,홍경원) ↑ 73회와 74회는 연장원 진출자전으로 꾸며졌다.(진출자 : 조정수,김영창,김석현,정지현) ↑ 76회는 스페셜 방송으로 꾸며졌다.(출연자:조정수, 김석현, 김영창) ↑ 117,118회는 연장원 진출전으로 꾸며졌다.(진출자: 이제헌, 황경주, 박해나, 이세훈) 외부 링크[편집] CJB 공식 홈페이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CJB_장학퀴즈&oldid=24203043" 분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퀴즈 쇼청주방송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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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B 장학퀴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CJB 장학퀴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CJB 장학퀴즈 장르 퀴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CJB 방송 기간 1기: 2012년 6월 2일 ~ 2013년 1월 5일2기: 2013년 3월 2일 ~ 2013년 12월 28일3기: 2014년 3월 1일 ~ 2014년 12월 27일 방송 시간 토 오전 10시 55분 (본방송)목 오후 2시 10분 (재방송) 방송 분량 55분~60분 방송 시즌 3 방송 횟수 119부작[1] 기획 이한목 연출 이상대 조연출 박용진 작가 김원일, 김형인 출연자 안정은[2] 《CJB 장학퀴즈》는 CJB에서 충청북도 지역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으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 프로그램이다. 방영시간은 매주 토요일 오전 10:55 ~ 11:50이다. 목차 1 역대 진행자 2 방송시간 3 진행방식 3.1 1라운드 3.2 2라운드 3.3 3라운드 4 1기 연장원전 진행방식 5 2기 진행방식 6 2기 연장원전 진행방식 6.1 연장원 진출전 6.1.1 1라운드 6.1.2 2라운드 6.1.3 3라운드 7 3기 진행방식 7.1 1라운드 7.2 2-1라운드 - 1+1 주관식 8 역대 우승자 목록 8.1 1기 8.2 2기 8.3 3기 9 함께 보기 10 각주 11 외부 링크 역대 진행자[편집] 진행자 진행 기간 최지현 2012년 6월 2일 ~ 2012년 9월 8일 안정은 2012년 9월 15일 ~ 2014년 12월 27일 황수동 2013년 1월 5일 , 2013년 12월 28일 방송시간[편집] 방송기간 방송시간 2012년 6월 2일 ~ 2014년 12월 27일(본방송) 토요일 오전 10시 55분 ~ 12시 2012년 6월 20일 ~ 2014년 12월 27일(재방송) 목요일 오후 2시 10분 ~ 3시 15분 진행방식[편집] CJB 장학퀴즈 3000은 4명의 학생이 100점의 기본 점수를 갖고 3라운드 방식으로 진행하며 주장원과 월장원을 거쳐 연장원으로 올라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월장원전은 방송 회차가 1기는 5배수일 때, 2기는 2 또는 7로 끝날 때, 3기는 1 또는 6으로 끝날 때에 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방송사 측의 사정으로 인해 변경될 수 있다. 주장원의 장학금은 100만원, 월장원의 장학금은 200만원, 연장원의 장학금은 3000만원(2기에서는 2000만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1라운드[편집] OX 퀴즈와 객관식 퀴즈가 각 5문제 출제된다.[3] 문제당 10점이며 모니터에 정답을 적는 형식을 취한다. 중간에 이심전심 퀴즈 라고 하는 보너스 퀴즈가 1문제 출제되며 2인 1팀으로 각각 2음절을 적어 4음절의 정답을 완성한다. 이 때 2인이 모두 답을 맞히면 보너스 점수와 상품을 받을 수 있으나 2인중 1명이라도 맞히지 못하면 맞힌 1인도 점수를 받을 수 없다. 2라운드[편집] 주관식 퀴즈 5문제와 스피드 퀴즈 7문제가 출제된다.[4] 문제당 20점이며 주관식 퀴즈는 1라운드와 마찬가지로 모니터에 정답을 적으며 스피드 퀴즈는 버저를 눌러 정답을 직접 말한다. 스피드 퀴즈에서는 1인 1회 더블 찬스를 사용할 수 있으며 이 때 더블 찬스를 사용하는 학생부터 먼저 정답을 말할 수 있다. 더블 찬스 성공 시 40점을 얻을 수 있으나 더블 찬스 실패 시 20점이 감점된다. 2라운드 종료 후 점수가 높은 2인이 결승에 진출하며 출연한 4인이 모두 답을 맞히지 못할 경우 해당 문제는 시청자 퀴즈로 전환한다. 3라운드[편집] 2라운드를 통과한 2인이 장원의 자리를 놓고 연상 퀴즈 대결을 벌인다. 각각의 제시어를 듣고 4문제를 먼저 맞히는 학생이 장원의 자리에 등극한다. 2라운드까지 획득한 점수는 3라운드로 이어지지 않는다. 1기 연장원전 진행방식[편집] 역대 월장원전에 등극한 6명이 a,b조 각각 3명 씩 나누어 대결을 펼쳐서 각조 1위가 결승에 진출하며, 결승전에 진출한 2학생이 대결을 펼쳐 우승자를 가린다.[5] 예선전은 a,b조에 있는 3명이 대결을 펼쳐서 각조 1위가 결승에 진출한다.[6] 결승전은 1기 3라운드 형식과 동일하며, 제시어에 따라 40,30,20,10점 순으로 차등 배점된다. 문제를 계속 풀다가 먼저 100점 이상을 획득한 학생이 연장원으로 등극한다. 2기 진행방식[편집] 2013년 3월 2일 33회차 부터 방영을 개시한 2기는 1기 형식과 유사하게 진행되며, 중간중간에 새로운 규칙을 적용하였다. 통통(通通)퀴즈 : 두 참가자가 짝을 이뤄 60초 간 스피드 퀴즈를 풀어서 많이 맞힌 팀에게 20점 씩 부여된다. 더블찬스는 해당 학생이 친구와 같이 문제를 풀 수 있으며, 더블찬스에 성공하면 문제를 같이 푼 친구에게는 선물이 돌아간다. 결승전 연상퀴즈는 1기 연장원 형식과 동일하다. 2기 연장원전 진행방식[편집] 연장원 진출전[편집] 1라운드[편집] 첫 번째 유형 : 있다 없다 퀴즈(개인별로 3문제 부여, 한 문제 당 10점) 그 뒤 형식은 예전 1라운드 형식과 동일하다.(예전처럼 기본점수 100점 없이 시작) 2라운드[편집] 첫 번째 유형 : 주관식 퀴즈로 전과 동일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두 번째 유형 : what's up? 퀴즈 - 시민들의 반응을 본 뒤 정답을 유추하는 형식으로, 역시 공통문제로 주어진다(배점 20점) 세 번째 유형 : 사다리 퀴즈 - 출연학생은 장,학,퀴,즈 네 개의 제시어 중 하나를 선택해서 개인전으로 문제를 풀며, 선택한 제시어가 도달된 유형을 푸는 형식. 힌트로는 초성, 연상, 영상으로 주어진다(꽝도 있음, 단 꽝이더라도 문제를 풀 기회는 주어진다) 3라운드[편집] 첫 번째 유형 : 주관식 스피드 퀴즈로 전과 동일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두 번째 유형 : 더블더블 퀴즈 - 출연학생이 미리 지정한 분야를 1단계,2단계로 나누어 푸는 대결, 1단계 성공시 20점 획득과 2단계에서 30점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도전학생이 해당 문제를 맞히지 못할 경우, 기회는 다른 세 학생에게 넘어가게 된다. 문제를 다 풀고, 상위 2명이 연장원전에 진출한다. 연장원은 있다 없다 퀴즈가 진행된 다음 2기 예전 형식으로 진행된다.(단, 통통퀴즈는 생략됨) 3기 진행방식[편집] 1라운드[편집] 예전 진행방식과 동일하다. 2-1라운드 - 1+1 주관식[편집] C,J,B,장,학,퀴,즈,S,3 아홉개의 글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해당하는 키워드를 푼다. 문제 푸는 순서는 점수가 높은 사람부터 진행한다. 배점은 20점,30점으로 최대 60점까지 획득가능, 성공하면 문제를 계속 풀 수 있으나 실패하면 문제 풀 기회가 상실된다. 그 뒤 형식은 전과 동일하다.(더블찬스는 예전처럼 혼자 푸는 형식으로 바뀌며, 2라운드에서 단독 1위로 올라온 학생에게는 기본점수 10점이 주어진다.) 역대 우승자 목록[편집] 1기[편집]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회차 방송일 이름 출신학교 등급 비고 1회 2012년 6월 2일 권오찬 충북과학고등학교 주장원 2회 2012년 6월 9일 김준형 충주고등학교 3회 2012년 6월 16일 장지영 청주여자고등학교 4회 2012년 6월 23일 강대건 세광고등학교 5회 2012년 6월 30일 권오찬 충북과학고등학교 월장원 6회 2012년 7월 7일 박대호 한국바이오마이스터고등학교 주장원 7회 2012년 7월 14일 이병진 진천고등학교 8회 2012년 7월 21일 이상찬 청주고등학교 9회 2012년 7월 28일 이예찬 충북고등학교 10회 2012년 8월 4일 이예찬 충북고등학교 월장원 11회 2012년 8월 11일 김선 충북여자고등학교 주장원 12회 2012년 8월 18일 박상원 충북과학고등학교 13회 2012년 8월 25일 김상필 보은고등학교 14회 2012년 9월 1일 허범안 제천고등학교 15회 2012년 9월 8일 김상필 보은고등학교 월장원 16회 2012년 9월 15일 김유신 청원고등학교 주장원 개편: mc는 안정은 아나운서, 방송시간은 am 11~12시로 변경 17회 2012년 9월 22일 민병길 청석고등학교 첫 패자부활전 18회 2012년 9월 29일 김혁준 양업고등학교 19회 2012년 10월 6일 유영태 청주신흥고등학교 20회 2012년 10월 13일 유영태 청주신흥고등학교 월장원 21회 2012년 10월 20일 최민혜 세명고등학교 주장원 22회 2012년 10월 27일 이재인 충북 청주 청석고등학교 23회 2012년 11월 3일 오수진 청주대성고등학교 24회 2012년 11월 10일 이소현 제천여자고등학교 25회 2012년 11월 17일 이소현 제천여자고등학교 월장원 26회 2012년 11월 24일 홍경원 금천고등학교 주장원 27회 2012년 12월 1일 함윤수 산남고등학교 28회 2012년 12월 8일 손동준 제천고등학교 29회 2012년 12월 15일 신동욱 세광고등학교 두 번째 패자부활전, 1기 마지막 주장원전 30회 2012년 12월 22일 홍경원 금천고등학교 월장원 1기 마지막 월장원전 31회 2012년 12월 29일 권오찬 충북과학고등학교 연장원 1기 연장원전, 준우승자 김상필에게는 노트북 부여[7] 2기[편집]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회차 방송일 이름 출신학교 등급 비고 33회 2013년 3월 2일 장민지 일신여자고등학교 주장원 2기 첫방송 34회 2013년 3월 9일 조정수 청원고등학교 35회 2013년 3월 16일 이기수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36회 2013년 3월 23일 유민주 청원고등학교 37회 2013년 3월 30일 조정수 청원고등학교 월장원 38회 2013년 4월 6일 강혜윤 중산고등학교 주장원 39회 2013년 4월 13일 신지환 한국교원대학교 부설고등학교 40회 2013년 4월 20일 오현근 운호고등학교 41회 2013년 4월 27일 이하경 상당고등학교 42회 2013년 5월 4일 신지환 한국교원대학교 부설고등학교 월장원 43회 2013년 5월 11일 연승하 서원고등학교 주장원 44회 2013년 5월 18일 강창현 옥천고등학교 45회 2013년 5월 25일 엄호영 충주대원고등학교 46회 2013년 6월 1일 김영창 충주고등학교 47회 2013년 6월 8일 김영창 충주고등학교 월장원 48회 2013년 6월 15일 김수민 양업고등학교 주장원 49회 2013년 6월 22일 정성훈 청주대성고등학교 50회 2013년 6월 29일 박금정 보은여자고등학교 51회 2013년 7월 6일 정의광 한국교원대학교 부설고등학교 52회 2013년 7월 13일 정의광 한국교원대학교 부설고등학교 월장원 53회 2013년 7월 20일 강희창 오송고등학교 주장원 54회 2013년 7월 27일 유병서 청주외국어고등학교 55회 2013년 8월 3일 지석천 제천고등학교 56회 2013년 8월 10일 정지현 청석고등학교 상반기 패자부활전 57회 2013년 8월 17일 정지현 청석고등학교 월장원 58회 2013년 8월 24일 박세연 양청고등학교 주장원 59회 2013년 8월 31일 황재현 형석고등학교 60회 2013년 9월 7일 김석현 충주고등학교 61회 2013년 9월 14일 홍지수 중앙여자고등학교 62회 2013년 9월 21일 김석현 충주고등학교 월장원 63회 2013년 9월 28일 이성철 세광고등학교 주장원 64회 2013년 10월 5일 이승욱 한국교원대학교부설고등학교 65회 2013년 10월 12일 정도영 단양고등학교 66회 2013년 10월 19일 조윤성 청주 대성고등학교 67회 2013년 10월 26일 정도영 단양고등학교 월장원 68회 2013년 11월 2일 김종현 진천고등학교 주장원 69회 2013년 11월 9일 이연수 봉명고등학교 70회 2013년 11월 16일 황서경 제천여자고등학교 71회 2013년 11월 23일 구본호 음성 매괴고등학교 하반기 패자부활전, 2기 마지막 주장원전 72회 2013년 11월 30일 황서경 제천여자고등학교 월장원 2기 마지막 월장원전[8] 75회 2013년 12월 21일 조정수 청원고등학교 연장원 준우승자 김석현에게는 500만원 상금 부여[9] 3기[편집]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회차 방송일 이름 출신학교 등급 비고 77회 2014년 3월 1일 신예성 청원 오송고등학교 주장원 3기 첫방송 78회 2014년 3월 8일 고현석 충주 중산고등학교 79회 2014년 3월 15일 김대환 한국 교원대부고등학교 80회 2014년 3월 22일 이희진 대성고등학교 81회 2014년 3월 29일 김대환 한국 교원대부고등학교 월장원 82회 2014년 4월 5일 조원기 운호고등학교 주장원 83회 2014년 4월 12일 김선아 보은고등학교 84회 2014년 4월 26일 유지인 청원고등학교 진도 여객선 침몰 사고 편성으로 한 주 연기 85회 2014년 5월 3일 황인제 흥덕고등학교 86회 2014년 5월 10일 김선아 보은고등학교 월장원 87회 2014년 5월 17일 류기쁨 청석고등학교 주장원 88회 2014년 5월 24일 김은채 제천여자고등학교 89회 2014년 5월 31일 허웅배 제천고등학교 90회 2014년 6월 7일 이제헌 세광고등학교 91회 2014년 6월 14일 이제헌 세광고등학교 월장원 92회 2014년 6월 21일 황경주 청원고등학교 주장원 93회 2014년 6월 28일 민예란 청주 중앙여자고등학교 94회 2014년 7월 5일 김민정 청주 주성고등학교 95회 2014년 7월 12일 윤교범 청주 세광고등학교 96회 2014년 7월 19일 황경주 청원고등학교 월장원 97회 2014년 7월 26일 김재혁 충주 중산고등학교 주장원 상반기 패자부활전 98회 2014년 8월 2일 이진희 충북 과학고등학교 99회 2014년 8월 9일 심현섭 오송고등학교 100회 2014년 8월 16일 이규연 상당고등학교 101회 2014년 8월 23일 이진희 충북 과학고등학교 월장원 102회 2014년 8월 30일 차보금 한국교원대부고 주장원 103회 2014년 9월 6일 정태훈 제천고등학교 104회 2014년 9월 13일 성준호 청석고등학교 105회 2014년 9월 20일 송은혜 보은여자고등학교 106회 2014년 9월 27일 차보금 한국교원대부고 월장원 107회 2014년 10월 4일 민정원 제천여자고등학교 주장원 108회 2014년 10월 11일 이세훈 청주 세광고등학교 109회 2014년 10월 18일 윤지수 청주 흥덕고등학교 110회 2014년 10월 25일 김장원 청주 외국어고등학교 111회 2014년 11월 1일 이세훈 청주 세광고등학교 월장원 112회 2014년 11월 8일 김향온 충북여자고등학교 주장원 113회 2014년 11월 15일 박해나 보은고등학교 114회 2014년 11월 22일 김지욱 제천고등학교 115회 2014년 11월 29일 이주희 충주여자고등학교 하반기 패자부활전 116회 2014년 12월 6일 박해나 보은고등학교 월장원 [10] 119회 2014년 12월 27일 이세훈 세광고등학교 연장원 준우승자 이제헌 함께 보기[편집] 도전! 골든벨 장학퀴즈 각주[편집] ↑ 1,2기 마지막회는 스페셜 방송으로 꾸며짐. ↑ 초창기에는 최지현이 진행하였으며 스페셜 방송에서는 황수동과 같이 방송을 진행한다. ↑ 4회차까지는 OX 퀴즈와 객관식 퀴즈가 각 7문제 출제되었다. ↑ 4회차까지는 주관식 퀴즈와 스피드 퀴즈가 각 5문제 출제되었다. ↑ 1기 연장원전은 스튜디오가 아닌 한국교통대학교 국제회의장에서 공개녹화로 진행되었다. ↑ 형식은 예전 1-2라운드와 동일, 다만 이심전심 퀴즈는 세 도전자가 각자 한 음절씩, 세 음절의 답을 적는 것만 다를 뿐이다. ↑ 32회는 스페셜 방송으로 꾸며졌다.(출연자:권오찬,김상필,이예찬,홍경원) ↑ 73회와 74회는 연장원 진출자전으로 꾸며졌다.(진출자 : 조정수,김영창,김석현,정지현) ↑ 76회는 스페셜 방송으로 꾸며졌다.(출연자:조정수, 김석현, 김영창) ↑ 117,118회는 연장원 진출전으로 꾸며졌다.(진출자: 이제헌, 황경주, 박해나, 이세훈) 외부 링크[편집] CJB 공식 홈페이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CJB_장학퀴즈&oldid=24203043" 분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퀴즈 쇼청주방송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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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영성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영성군 이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영성군(寧城君) 지위 군(君) 이름 휘 이계(李㻑) 시호 효경(孝景) 신상정보 출생일 1606년 음력 12월 24일 출생지 조선 사망일 1649년 사망지 조선 매장지 영성군 이계 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왕조 조선 부친 선조 모친 온빈 한씨 배우자 회산군부인 황씨 자녀 회원군 영성군(寧城君, 1606년 음력 12월 24일 ~ 1649년)은 조선의 왕족이다. 선조의 13번째 아들이자 온빈 한씨의 셋째 아들이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3 출처 4 외부 링크 생애[편집] 1606년(선조 39년) 음력 12월 24일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와 온빈 한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성은 이, 이름은 계(㻑), 본관은 전주이다. 흥안군, 경평군, 정화옹주의 친동생이며. 광해군, 정원군과는 이복 형제이다. 1632년(인조 10년) 음력 6월 15일 영성군의 종이 무단으로 감옥에 들어가 갇혀있던 죄수들을 시켜 관원들을 욕보이게 하여 물의를 빚었다. 당시 대간들은 영성군의 종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인조는 별다른 처벌 없이 지나갔다.[2] 또 이듬해 열린 인목왕후 연제[3] 에는 경평군과 함께 병을 핑계로 불참하여 또 탄핵을 받았으나, 이때에도 인조의 배려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4] 이후 1649년(인조 27년) 향년 4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있다.[5] 사후 효경(孝景)의 시호를 받았다.[1] 가족 관계[편집] 영성군은 창원 황씨 황이중(黃履中)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회원군을 낳았으며,[6] 황씨는 회산군부인(檜山郡夫人)에 봉해졌다. 회원군은 효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살며 사옹원, 종친부, 도총부 등에서 관직을 두루 지냈다.[1] 1724년(영조 즉위년) 회원군의 나이가 90에 가까워 영조로부터 그 손자들이 가자되었고,[7] 1731년(영조 7년) 음력 8월 6일 향년 96세로 사망하여 조정에서 관으로 쓸 재료와 3년분의 녹미를 지급하였다.[6][8] 회원군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요절하는 바람에 세종의 7남 광평대군의 7대손을 양자로 들여 함평군(咸平君)에 봉하여 후사를 이었다. 함평군은 아들을 6명이나 두었으나, 현재의 영성군파는 총 200세대 미만으로 그 수가 적은 편이라고 한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재항 등이 영성군의 후손이다.[1] 아버지 : 제14대 선조(宣祖, 1552~1608, 재위:1567~1608) 어머니 : 온빈 한씨(溫嬪 韓氏, 1581~1604) 형 :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瑅, ?~1624) 형 : 경평군 이륵(慶平君 李玏, 1600~1673) 누나 : 정화옹주(貞和翁主, 1604~1667) 부인 : 회산군부인 창원 황씨(檜山郡夫人 昌原 黃氏) 아들 : 회원군 이윤(檜原君 李倫, 1636~1731) 출처[편집] ↑ 가 나 다 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영성군 약사 ↑ 《조선왕조실록》인조 26권, 10년(1632 임신 / 명 숭정 5년) 6월 15일(신사) 1번째기사 ↑ 練祭. 사후 1년이 되는 날 지내는 제사인 소상이 끝나는 때의 의식이다. 《한국고전용어사전》〈변제〉 항목 참고 ↑ 《조선왕조실록》인조 28권, 11년(1633 계유 / 명 숭정 6년) 7월 6일(병신) 2번째기사 ↑ 영성군이계묘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가 나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이륜〉항목 ↑ 《조선왕조실록》영조 2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 2년) 11월 21일(신유) 2번째기사 ↑ 《조선왕조실록》영조 30권, 7년(1731 신해 / 청 옹정 9년) 8월 6일(병신) 2번째기사 외부 링크[편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vdeh조선과 대한제국의 왕자/황자 목록추존왕 목조 소생 안천대군 어선 안원대군 진 안풍대군 정 익조 행리 안창대군 매불 안흥대군 구수 추존왕 익조 소생 함녕대군 안 함창대군 장 함원대군 송 도조 춘 함천대군 원 함릉대군 고태 함양대군 전 함성대군 응거 추존왕 도조 소생 완창대군 자흥 환조 자춘 완원대군 자선 완천대군 평 완성대군 종 이완자불화 이나해 추존왕 환조 소생 태조 성계 완풍대군 원계 영성대군 천계 의안대군 화 태조 소생 진안대군 방우 영안대군 방과 → 정종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정안대군 방원 → 태종 덕안대군 방연 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정종 소생 의평군 원생 순평군 군생 금평군 의생 선성군 무생 종의군 귀생 진남군 종생 수도군 덕생 임언군 녹생 석보군 복생 덕천군 후생 임성군 호생 도평군 말생 장천군 보생 정석군 융생 무림군 선생 태종 소생 양녕대군 제 효령대군 보 충녕대군 도 → 세종 성녕대군 종 경녕군 비 함녕군 인 온녕군 정 익녕군 치 근녕군 농 희령군 타 후령군 간 혜령군 지 세종 소생 왕세자 향 → 문종 수양대군 유 → 세조 안평대군 용 임영대군 구 광평대군 여 금성대군 유 평원대군 임 영응대군 염 화의군 영 계양군 증 의창군 공 밀성군 침 익현군 연 영해군 당 담양군 거 한남군 어 수춘군 현 영풍군 전 문종 소생 왕세자 홍위 → 단종 단종 소생세조 소생 의경세자 장 → 추존왕 덕종 해양대군 황 → 예종 덕원군 서 창원군 성 추존왕 덕종 소생 월산대군 정 잘산대군 혈 → 성종 예종 소생 인성대군 분 제안대군 현 성종 소생 왕세자 융 → 연산군 진성대군 역 → 중종 무산군 종 안양군 항 봉안군 봉 전성군 변 계성군 순 완원군 수 회산군 념 견성군 돈 익양군 회 경명군 침 운천군 인 양원군 희 이성군 관 영산군 전 연산군 소생 폐세자 황 창녕대군 성 이인수 이영수 이총수 양평군 인 이돈수 중종 소생 왕세자 호 → 인종 경원대군 환 → 명종 복성군 미 금원군 영 봉성군 완 영양군 거 덕흥군 초 → 덕흥대원군 해안군 희 덕양군 기 인종 소생명종 소생 순회세자 부 선조(양자) 선조 소생 영창대군 의 임해군 진 광해군 혼 의안군 성 신성군 후 정원군 부 → 추존왕 원종 의창군 광 순화군 보 인성군 공 인흥군 영 경창군 주 흥안군 제 경평군 늑 영성군 계 광해군 소생 폐세자 지 추존왕 원종 소생 능양대군 종 → 인조 능원대군 보 능창대군 전 능풍군 명 인조 소생 소현세자 왕 봉림대군 호 → 효종 인평대군 요 용성대군 곤 숭선군 징 낙선군 숙 효종 소생 왕세자 연 → 현종 현종 소생 왕세자 순 → 숙종 숙종 소생 왕세자 균 → 경종 성수 영수 연잉군 금 → 영조 연령군 훤 경종 소생영조 소생 효장세자 행 → 추존왕 진종 장헌세자 선 → 추존왕 장조 추존왕 진종 소생 정조(양자) 추존왕 장조 소생 의소세손 정 왕세손 산 → 정조 은언군 인 은신군 진 은전군 찬 정조 소생 문효세자 순 왕세자 공 → 순조 상계군 담(양자) 순조 소생 효명세자 영 → 추존왕 문조 철종(양자) 추존왕 문조 소생 왕세손 환 → 헌종 고종(양자) 헌종 소생철종 소생 원자 융준 고종 소생 왕세자 척 → 순종 완친왕 선 의친왕 강 의민황태자 은 순종 소생의민황태자 소생 원손 진 왕세자 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영성군&oldid=21618697" 분류: 1606년 태어남1649년 죽음조선의 왕족조선의 왕자조선 선조전주 이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6월 22일 (금) 20:3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부소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부소산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비성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사비성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고구려의 성에 대해서는 비사성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부여 부소산성 (扶餘 扶蘇山城) 대한민국의 사적 부소산성 정문종목 사적 제5호 (1963년 1월 21일 지정)면적 983,598m2시대 삼국 시대소유 국유위치 부소산성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좌표 북위 36° 17′ 15″ 동경 126° 54′ 55″ / 북위 36.28750° 동경 126.91528°  / 36.28750; 126.91528좌표: 북위 36° 17′ 15″ 동경 126° 54′ 55″ / 북위 36.28750° 동경 126.91528°  / 36.28750; 126.91528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 백제 시대에는 사비성(泗沘城)이라 불렸다. 부여군 부여읍의 서쪽에 금강을 낀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레는 대략 2.2km, 면적은 약 74만m2에 달한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부소산성은 부소산 정상에 테뫼식 산성을 쌓은 후, 주변을 포곡식으로 쌓은 복합 산성이다. 부소산성 주변에는 다시 청산성과 청마산성 등의 보조 성이 있으며, 남쪽에는 성흥산성의 지원을 받았다. 과거의 군수품 창고 터 등이 남아 있으며, 그 외에도 낙화암과 고란사 등이 있다. 목차 1 개요 2 세계문화유산 지정 3 같이 보기 4 각주 5 참고 문헌 개요[편집]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편집]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총 8개의 유적지들 중 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가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되었다.[1] 같이 보기[편집] 백제 의자왕 성흥산성 낙화암 고란사 청산성 청마산성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 각주[편집] ↑ 충청·백제 유적 최초로 세계반열 올라…공주 2곳, 부여 4곳 참고 문헌[편집] 부여 부소산성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 충청남도의 성(城)공원 | 교통 | 도로 | 도서관 | 동굴 | 박물관 | 산 | 서원 | 섬 | 성 | 온천 | 저수지 | 종합병원 | 축제 | 하천 | 해수욕장공주시 공산성 광정리 산성 단지리 토성 만수리 산성 무성산성 봉곡산성 상성 송곡리산성 수촌리성 신풍산성 양화산성 오인리산성 옥녀봉성 옥성리성 용성 율정리산성 이인산성 중장리산성 한산성 금산군 묵산리산성 백령성 자지성 진산읍성 추정리산성 논산시 노성산성 모촌리산성 불암산성 산직리산성 신흥리산성 외성산성 의성리산성 청동리산성 황산성 황화산성 당진시 당산성 면천읍성 몽산성 성상리산성 성동리산성 운정리산성 당진포진성 보령시 고남산성 남포읍성 대봉산성 보령읍성 삼곡리산성 소송리내송성 아현산성 진당산성 창암리성 충청수영성 황율리성 부여군 가림성 구룡산성 금성산성 나성 논치산성 누르개산성 미녀봉산성 반산성 봉황산성 부산성 부소산성 부장산성 북고리증산성 북촌리산성 사자봉산성 석성산성 시랭이산성 외리산성 울성산성 은산당산성 이목치산성 이중산성 점상리산성 증산성 청마산성 토성산성 토정산성 학동산성 서산시 고구산성 공림산성 금굴산성 달산리성 대미산성 반양리산성 부성산성 북방산성 북주산성 서방산성 성왕산성 신송리산성 양잠리성 연암산성 웅소리산성 진장리석성 해미읍성 서천군 건지산성 남산성 둔덕리산성 만덕리산성 비인읍성 산천리산성 서천읍성 성북리산성 월명산성 장구리산성 장암진성 장포리산성 지원리산성 한산읍성 한성리산성 아산시 군덕리산성 기산산성 배방산성 백암리산성 성내리산성 수한산성 신창학성 영인산성 천덕산성 학성산성 예산군 금후산성 대천태산성 사동리산성 상장리성 상중리성 소천태산성 신속리성 예산산성 임존성 천안시 광덕산성 구룡리산성 국사봉산성 대성산성 도원산성 동성산성 두남리산성 동림산성 망경산성 목천성 백석동토성 사산성 세성산성 서리산성 성거산성 성산산성 용와산성 위례성 일봉산성 작성산성 청당동산성 하장성 화계리산성 흑성산성 청양군 갓골토성 계봉산성 군량리산성 두률성 두릉산성 방한리산성 백곡리산성 별초막토성 우산성 제미재토성 태봉산성 테뫼산성 태안군 두야리산성 백화산성 서방현성 소근진성 수룡리산성 안흥성 양잠리산성 태안읍성 토성산성 한의산성 홍성군 결성읍성 석성산성 소구니산성 신금성 장곡산성 태봉산성 학성산성 홍주읍성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부소산성&oldid=23505291" 분류: 백제의 성한국의 옛 수도부여군의 사적충청남도의 성금강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Françai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1일 (월) 02: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창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창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매춘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창가(唱歌)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에 신시(新詩)로 된 최초의 양식의 시가를 말한다. 시조나 재래의 가사 및 찬송가의 영향으로 4·4조가 주된 것이었으나, 그 후에는 7·5조, 8·5조 등으로 변하여 자유시로 발전하면서 뒤의 신체시(新體詩)에 연결되게 된다. 여하튼 창가는 신문학 태동기에 있어서 새로운 시문학(詩文學)의 발전을 유도하는 계기로서의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한편 이 창가에는 음악적 요소가 있어, 이 창가의 가사에 음곡(音曲)을 붙여 부르면 노래로서의 창가가 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신식 노래를 부르라는 뜻으로 창가를 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목차 1 예 1.1 4·4조 1.2 8·5조 2 같이 보기 3 각주 예[편집] 4·4조[편집] 동심가 : 경양 원년 이중원 작 잠을 깨세 잠을 깨세, 사천년이 꿈속이라, 만국이 회동하야, 사해가 일가로다. 구구세절 다 버리고, 상하동심 동덕하세, 남의 부강 부러하고, 근본없이 회빈하랴. 범을 보고 개 그리고 봉을 보고 닭 그린다. 문명개화 하랴하면 실상일이 제일이라. 못에 고기 부러말고, 그물매자 잡아보세, 그물맺기 어려우랴 동심결로 맺아보세. 자주독립가: 건양 원년 이필균 작 아세아의 대조선이, 자주독립 분명하다. 에야에야 애국하세, 나라 위해 죽어보세. 깊은 잠을 어서 깨어, 부국 강병 진보하세, 남의 천대 받게 되니, 후회 막급 없이 하세, 남녀 없이 입학하야, 세계 학식 배와 보자. 교육해야 개화되고, 개화해야 사람되네. 8·5조[편집] 경부철도가 : 1908년 최남선 작 이십사번 화신풍(花信風) 불어올 때에, 때좋다고 꽃피난 금성산(錦城山)인데, 정든 손을 나누기 어렵다 하야, 꽃다운 혼(魂) 스러진 낙화대(落花臺)로다. 미륵(彌勒) 황간(黃澗) 두 역을 바삐 지나서 추풍령의 이마에 올라 타도다. 경부선 중 최고지(最高地) 이 고개인데, 예서부터 남편은 영남(嶺南)이라오. 동심가의 4·4조의 형식과 그 내용에 담겨진 자주독립·부국강병·남녀교육 등의 열렬한 외침은 그대로 당시의 시대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4·4조의 형식은 7·5조, 8·5조 등의 새로운 형식으로 변천해 갔는데, (2)의 8·5조 형식과 비교해 보면 그 변천 경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창가는 형식의 변천 과정을 통해 일부는 신체시에 넘기고 일부는 학교 창가와 사회적으로는 가요 형식으로 분립해 창가는 문학사적으로 신체시의 선행적인 의미를 지닌다.[1] 같이 보기[편집] 한국 전통 음악 신체시 각주[편집]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창가의 의미와 형식〉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창가&oldid=19617404" 분류: 한국 문학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9월 17일 (일) 17:3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문창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문창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문창범(文昌範, 1870년 ~ 1938년 10월 1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함북 경원 출신. 1919년 2월 1일 동삼성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자 39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부 총장에 피선되었다. 목차 1 생애 1.1 노령에서의 국권회복운동 1.2 최후 1.3 사후 2 함께 보기 3 참고자료 4 각주 생애[편집] 함북 경원군 유덕면 죽기동(慶源郡 有德面 竹基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나 초기 행적에 대한 자료는 미상이다. 1877년(고종 14) 경 부친을 따라 노령(露領)으로 이주하였다. 1908년(융희 2) 민족교육을 위하여 노령 니콜리스크의 타레스 부락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1916년까지 운영하였다. 노령에서의 국권회복운동[편집] 1911년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배일선전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발송하고 국권회복을 기도하면서 국내에 무력진공을 계획하는 한편 노령과 중국 동삼성(東三省)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자 그는 권업회의 우수리스크지회 대표에 임명되었다. 1918년 6월 쌍성(雙城)에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각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자치기관으로 육성하였다. 1919년 2월 1일 동삼성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자 39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미주의 안창호 등과 연락하여 1919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기반으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라는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대한국민의회장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노령 해삼위(海蔘威)에 있는 일제 영사관과 기타 11개국 영사관에 배부한 후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가지고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하도록 독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 구성에서, 같은 연해주 지역으로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과 함께 교통총장에 선임되었다.[1] 동년 4월 23일 국내 13도 대표 이만직(李晩稙)외 23명이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교통부총장으로 내각 조직에 선임되었다. 1919년 9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단체들과 각 당파를 망라하여 대통령제로 개편할 때 다시 교통부 총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현순의 거듭된 상하이 방문 요청으로 상하이로 일단 내려왔다. 1920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동년 4월 대한국민의회를 해삼위에서 무시(武市)로 이전한 뒤 흑룡강주(黑龍江州)에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 본부를 설치하여 러시아 공산당 정부의 원조를 받아 군대를 편성하였으며, 〈자유보(自由報)〉,〈신세계(新世界)〉등 홍보물을 발행하면서 대표를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그는 장령자 국가무역부(長嶺子 國家貿易部)에 입사, 취직하여 출장소 주임으로서 근무함과 동시에 고려공산당 연추지부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가 국가무역부 출장소의 직원으로 취직한 것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용의조선인 현황에 등제되어 있다. 1921년 2월 22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연추(煙秋)지부의 책임을 담당하여 중국 동삼성 및 노령에 거주하는 교민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치타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노령 내 귀화 교민들에게 입교를 권유하여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동년 6월 노령 하바로브스크 소재 소련 공산군 제2군단과 교섭하여 간도지역 독립군의 노령 자유시(自由市)로의 이주를 성사시켰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후인 1922년 6월 노령 무시(武市)에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고 이동휘와 함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한때 그가 피살되었다는 피살설이 돌아 동아일보 등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으로 옮겨가 김광서와 함께 독립단을 조직하여 무장활동을 하였다. 당시 신한민보에는 그의 죽음은 헛소리라는 기사를 보내기도 했다.[2] 1923년 6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소집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 참가하였다. 이후 1925년 1월 15일자 신한민보 기사에 미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삼위의 독립운동가들을 방문하여 회의를 한 기사에 등장한다.[3]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최후[편집]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8년 10월 일제가 보낸 첩자에게 상하이 혹은 러시아에서 독살당하였다.. 일설에는 1934년경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도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어 불확실하다. 한때 1945년 해방 직후 9월 2일 한민당에서 그를 공동 영수로 추대하기도 했다. 사후[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함께 보기[편집] 대한국민의회 최재형 이동휘 이동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받은 사람 참고자료[편집] 문창범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 공훈록 각주[편집]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5~26쪽 ↑ "문창범씨가 죽었다는 것은 헛소리", 신한민보 1923.02.22. 1면, 1단 ↑ "遠東消息", 신한민보 1925.01.15. 3면 1단 vdeh무오 독립선언 민족대표 39인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류동렬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규식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여준 윤세복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시영 이탁 이승만 이종탁 임방 정재관 조용은 조욱 최병학 한흥 허혁 황상규 vdeh2015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황상규 2월 이수흥 3월 박인호 4월 조지 쇼 5월 안경신 6월 류인식 7월 송헌주 8월 연기우 9월 이준식 10월 이탁 11월 이설 12월 문창범 vdeh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강기동 권동진 권병덕 김동삼 김상옥 김성수 김완규 김익상 김지섭 나석주 나용환 나인협 남상덕 남자현 노백린 민긍호 민종식 박동완 박승환 박은식 박준승 백용성 신규식 신돌석 신채호 신홍식 양기탁 양전백 양한묵 연기우 오세창 유여대 유인석 이갑성 이동녕 이명룡 이범윤 이봉창 이상설 이상재 이위종 이은찬 이인영 이재명 이종일 이종훈 이필주 임예환 장인환 전명운 전해산 조성환 지청천 최성모 편강렬 홍기조 홍범도 홍병기 문태수 신석구 이범석 정환직 진성 당계요 배설 송교인 여천민 임삼 호한민 황흥 우빈 손과 주가화 이승희 주시경 김하락 장건상 김붕준 박열 안재홍 오화영 유동열 윤기섭 조완구 김병조 문창범 박용만 이동휘 채상덕 최석순 구춘선 김경천 여운형 이 글은 정치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문창범&oldid=24288858" 분류: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1870년 태어남1938년 죽음함경북도 출신무오독립선언 연서자한성 임시 정부한국독립당의 당원대한국민의회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람숨은 분류: 정치인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7일 (월) 16: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구디슨 파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디슨 파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구디슨 파크 원어 이름 Goodison Park 이전 이름 미어 그린 별칭 디 그랜드 올드 레이디 (The Grand Old Lady) 소재지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구디슨 로드 좌표 북위 53° 26′ 19.81″ 서경 2° 57′ 58.71″ / 북위 53.4388361° 서경 2.9663083°  / 53.4388361; -2.9663083 개장 1892년 8월 24일 소유 Goodison Park Stadium, Limited is owned by The Everton Football Club Company, Limited 운영 에버턴 FC 표면 잔디 건설 비용 £3,000[1] 설계 Kelly Brothers 사용처 에버턴 (1892년~현재) 수용인원 39,572 규모 102.4 x 71.3 m 구디슨 파크(Goodison Park)는 영국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에 위치한 축구 경기장으로, 에버턴(Everton FC)의 홈구장이다. 이 구장은 1892년에 지어졌으며, 총 수용인원은 40,569명이다. 목차 1 역사 2 스탠드 3 각주 4 참고 자료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1892년에 지어진 구디슨 파크는 처음에는 미어 그린(Mere Green)으로 불려왔다. 이 경기장은 오래되고 역사적인 축구 경기장 중의 하나이며, 잉글랜드 최초의 메이저 축구 경기장이다. 구디슨 파크는 잉글랜드에서 최초로 축구 경기장을 목적으로 지어진 경기장이다. 미어 그린은 자유 대출의 이자 1,000파운드를 포함하여 8,090파운드가 들었다. 경기장은 공식적으로 1892년 8월 24일에 개장하였다. 1904-05시즌에 대출금액의 상환이 완료되었다. 켈리 형제는 4,000명 규모의 지붕 없는 스탠드 두 개와 3,000명 규모의 지붕 있는 스탠드 하나를 1,640 파운드에 세웠다. 12개의 개찰구는 93파운드가 들었다. 이 경기장은 네 개의 스탠드 모두 2층으로 영국 최초의 스포츠 경기장이었고, 3층을 가진 최초의 경기장이었다. 또한 그라운드 바닥에 온열시스템을 갖춘 최초의 잉글랜드 리그 경기장이었다. 1913년에 최초로 왕이 방문한 잉글랜드 축구 경기장이 되었는데, 그 당시의 군주는 조지 5세였다. 경기장은 1966년 FIFA 월드컵 당시에 준결승전을 포함하여 5경기가 열렸다. 그리고 1894년의 FA컵 결승전과 1910년의 결승 재경기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에버턴은 다른 잉글랜드 클럽보다 국제경기를 많이 개최하였다. 1895년 4월 6일에 구디슨 파크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의 경기가 열렸는데, 이로써 에버턴은 이전의 홈구장이었던 앤필드와 구디슨 파크에서 모두 잉글랜드 A매치를 가진 첫 번째 팀이 되었다. 1949년에 구디슨 파크에서 아일랜드와의 경기가 열렸는데, 이 경기는 잉글랜드가 영국 국가가 아닌 국가에게 홈경기에서 처음으로 패배한 경기였다. 에버턴의 웹사이트에 의하면, 가장 큰 경기는 1985년의 UEFA 컵위너스컵 준결승전으로 에버턴 대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였다. 뮌헨은 전반전에 앞서가다가 후반전에 3점을 실점하며 에버턴에게 패하였다. 1962-63시즌과 1963-64시즌의 리그 경기의 관중 수가 백만명을 넘었다. 스탠드[편집] 경기장은 네 개의 스탠드로 구성되어 있다. 파크 엔드(The Park End) - 6,000명 수용. 단층으로 캔틸레버가 1994년에 설치되었다. 경기장의 남쪽에 위치해 있고, 골대 뒤를 차지하고 있다. 파크 엔드는 1995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60년대와 70년대에 리버풀의 스탠리 파크의 월튼 레인와 더불어 골대 뒤에 큰 반원형 스탠드가 특징이었다. 이것은 1906년에 지어진 2층 형태로 원정팬들이 자리하는 장소였다. 불린스 로드(Bullens Road) - 8,067명 수용. 유명한 축구 경기장 건축가인 아치볼드 리치에 의해 2층으로 지어져 1926년에 완공되었다. 경기장 동쪽에 위치해 있는 이 스탠드는 어퍼 불린스, 로워 불린스와 패덕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원래 스탠드는 2층으로 지어졌는데, 위층의 좌석 스탠드와 아래층의 패덕으로 되어 있었다. 1963년, 패덕의 뒤 부분에 좌석이 설치되면서 3층의 형태가 되었다. 글라디스 스트리트 엔드(Gwladys Street End) - 10,155명 수용. 아치볼드 리치가 지은 또다른 2층 스탠드로 어퍼 글라디스와 로워 글라디스로 나뉜다. 골대 뒤쪽에 위치해 있으며 구디슨 파크의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로워 글라디스는 가장 시끄럽고 난폭한 에버턴 팬들이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에버턴이 킥오프 전의 동전 던지기에서 이길 경우, 후반전에 로워 글라디스쪽으로 공격하게 된다. 로워 글라디스는 1992년에 전좌석 설치가 완료되었다. 메인 스탠드(Main Stand) - 16,347명 수용. 3층으로 되어 있는 스탠드로, 1909년에 아치볼드가 2층 형태로 지은 것에 백만 파운드를 들여 1971년에 현재의 스탠드를 완공하였다. 메인 스탠드는 선수들의 락커룸이 있고, 선수 입장 터널이 위치해 있다. 각주[편집] ↑ 최초의 금액. 나중에 보수할 때의 금액은 제외 참고 자료[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구디슨 파크 Roberts, John (1978). Everton: The Official Centenary History. Grenada Publishing Limited. ISBN 0-583-12832-7. Jacobs, Barbara (2004). The Dick, Kerr's Ladies. Constable & Robinson Ltd. ISBN 1-84119-828-5. 외부 링크[편집] (영어) 구디슨 파크의 역사 vdeh 프리미어리그 경기장 (2018-19) 구디슨 파크 더 호손스 딘 코트 리버티 스타디움 브리타니아 스타디움 비커리지 로드 세인트 메리스 스타디움 세인트 제임스 파크 셀허스트 파크 스탬퍼드 브리지 안필드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올드 트래퍼드 올림픽 스타디움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에티하드 스타디움 커클리즈 스타디움 킹 파워 스타디움 터프 무어 팔머 스타디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구디슨_파크&oldid=22888916" 분류: 1892년 설립잉글랜드의 축구 경기 시설리버풀의 건축물리버풀의 스포츠에버턴 FC1966년 FIFA 월드컵 경기장1892년 완공된 스포츠 시설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भोजपुरी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ગુજરાતીעבריתFiji Hindi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मैथिलीBahasa Melayu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31일 (수) 17: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요코가와 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요코가와 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요코가와 역 (히로시마 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군마 현의 철도역에 대해서는 요코카와 역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요코가와横川駅 개괄 관할 기관 서일본 여객철도히로시마 전철 소재지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 시 니시 구 요코가와초 3초메 요코가와 역(일본어: 横川駅 요코가와에키[*])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 시 니시 구 요코가와 정 3정목에 있는 JR서일본과 히로시마 전철의 역이다. 승차권에는 신에쓰 본선에 있는 요코카와 역과 한자 표기가 같아 구별하기 위해 "(陽)横川"로 표기하고 있다. 목차 1 이용 가능한 철도 노선 2 역 구조 2.1 JR 요코가와 역 2.2 히로시마 전철 요코가와 역 2.3 운행 노선 3 이용 상황 4 역 주변 4.1 남쪽 출입구 4.2 북쪽 출입구 4.3 버스 정류장 5 역사 5.1 JR요코가와 역 5.2 히로시마 전철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 6 근처의 역 7 외부 링크 이용 가능한 철도 노선[편집] 서일본 여객철도 산요 본선 가베 선※선로 명칭상은 당역이 기점역이지만, 운전 계통상은 근처의 히로시마 역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히로시마 전철 요코가와 선※계통상 7호선·8호선도 운행한다. 역 구조[편집] JR 요코가와 역[편집] JR 요코가와 역JR 横川駅 북쪽 출입구 개괄 관할 기관 서일본 여객철도 소재지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 시 니시 구 요코가와초 3초메 2-30 좌표 북위 34° 24′ 36″ 동경 132° 27′ 01″ / 북위 34.409902° 동경 132.450145°  / 34.409902; 132.450145 (JR 요코가와 역) 개업일 1897년 9월 25일 비고 녹색 창구 있음히로시마 시내에 있는 역 *모든 열차가 히로시마 역까지 운행. 노선 ■산요 본선 고베 기점 307.7km ← 신하쿠시마 (1.2 km) 니시히로시마 →(2.5 km) ■가베 선 (기점)히로시마 기점 3.0km ← *히로시마 (*- km) 미타키 →(1.1 km) 섬식 승강장 2면 4선과 단식 승강장 1면 1선을 합해 3면 5선을 가지는 지상역이다. 역사는 남쪽과 북측에 있다. 2003년 완공된 남쪽 출입구의 역사는 지상에, 1949년에 완공된 뒤 2003년에 재개장한 북쪽 출입구의 역사는 고가 밑에 있다. 중앙 광장에는 개찰구와 녹색 창구가 남쪽 출입구(5:30 - 23:00)·북쪽 출입구(5:30 - 23:50)에 있다. 또, 데일리 인(철도 역사 내의 편의점)도 있다. 중앙 광장으로부터 각 승강장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ICOCA가 이용 가능하다. JR의 시내 제도에 있어서의 「히로시마 시내」의 역이다. 승강장 1 ■산요 본선(하행) 미야지마구치・이와구니・도쿠야마 방면 2 ■산요 본선 (다이어 이상시의 예비 승강장) 3 ■산요 본선(상행) 히로시마・사이조・미하라 방면(구레 선 직통)구레 방면 (이와구니방면에서) 4 ■가베 선(하행) 오마치・미도리이・가베 방면 5 ■가베 선(상행) 히로시마・사이조・미하라 방면(구레 선 직통)구레 방면 (가베방면에서) 역 구내에는 일본 최초의 버스(재현차)와 거기에 관한 전시가 있다. 이전에는 2·3 번선 승장장과 4·5 번선 승강장 사이에 요코가와 전철구의 선로가 있었지만 현재는 철거되었다. 히로시마 전철 요코가와 역[편집]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横川駅電停 2008년 10월 촬영 개괄 관할 기관 히로시마 전철 소재지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 시 니시 구 요코가와초 3초메 좌표 북위 34° 24′ 35″ 동경 132° 27′ 02″ / 북위 34.409632° 동경 132.450536°  / 34.409632; 132.450536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 개업일 1917년 11월 1일 역 번호 Y5 노선 요코가와 선 1.4km(도카이치 정 기점) ← (종점) 요코가와 1초메 →(0.2 km) JR요코가와 역 광장 내 동쪽에 있다. 비오는 날이라도 젖지 않고 JR요코가와 역에 환승을 할 수 있도록 이쪽도 지붕이 있다. 양 승강장 모두 7호선 히로덴 본사 앞행 및 8호선 에바행 전철이 정차한다. 이것은 1개의 열차가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을 경계로 7호선과 8호선을 교대로 운전하는 것(일반적으로 삼각 운용으로 불리고 있다)이기 때문이다(일부 시간대 제외). 또한 평일의 아침의 1편만 7호선이 히로덴 본사 앞행을 연장해 히로시마 항행이 된다. 히로시마 항발 요코가와 역행은 없다.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에는 대부분의 경우 1차량만이 노선 연장하고 있지만, 전술의 히로시마 항행 등 출퇴근 시간에는 연접차의 노선연장도 설정되어 있다. 출근시간에는 관계자가 안내를 하지만, 히로시마 역처럼 이동식 운임상자로의 집찰 업무는 없다. 단, 히로시마 플라워 페스티벌 개최시에는 집찰원이 나와 있다. 운행 노선[편집] ■7호선 히로덴 본사 앞 방면 ■8호선 에바 방면 이용 상황[편집] 2007년도의 승차 인원은 1일 평균 17,168명(히로시마 시 통계). 이것은 히로시마현에서는 제 3위, 주고쿠 지방 전체에서도 신칸센 「노조미(=희망)」 정차역인 히로시마 역, 오카야마 역, 후쿠야마 역에 뒤잇는 제 4위이며, 구라시키 시, 구레 시, 시모노세키 시 등 40만 - 20만명 규모의 도시의 대표역보다 많다. 히로시마 현 통계연감에 의하면, 2002 - 2005년도의 승차 인원은 밑과 같다. JR의 역으로서는 히로시마 시의 중심인 가미야초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원래 통근객의 이용이 많았지만, 2003년의 히로시마 전철 7호선 운행 개시 이래 현저하게 증가의 추세가 보인다. 또, 여기가 가까운 JR역인 학교도 많다. 14,283명(2002년) 15,001명(2003년) 15,875명(2004년) 16,499명(2005년) 역 주변[편집] 남쪽 출입구[편집] 후레스타모르카질 요코가와 프레스타 요코가와점 요코가와 상가 후타바 도서 요코가와점(제 1호 점포) 니시 구 구민 문화 센터 히로시마 시립 니시 구 도서관 요코가와 시네마!! 히로시마 은행 요코가와 지점 히로시마 신용금고 요코가와 지점 산인고도은행 요코가와 지점 요코가와 우체국 북쪽 출입구[편집] 히로시마 시립 미사사 소학교 나가사키 병원:원폭 투하시 기적적으로 경미한 손해로 끝나, 피폭자의 구호 거점으로서 기능한 것으로 알려진다. 모미지 은행 미사사 지점 버스 정류장[편집] 히로시마 지구의 버스 노선은 기본적으로 시내선(주로 구 시내(나카 구·니시 구·미나미 구 3구와 히가시 구의 일부)만을 달리는 노선)와 교외선(히로시마 버스 센터 또는 히로시마 역·핫초보리와 구 시내의 밖을 묶는 노선)으로 대별되어 이것들은 버스 정류장도 따로따로 되어 있다. 요코가와 역에 있어서도 시내선은 남쪽 출입구 로터리 내, 교외선은 국도 183호에 설치되어 있다. 다만, 히로시마 역이나 니시히로시마 역과 달리, 요코가와 역에서는 시내선·교외선의 별도이지 않고, 「가배 가도(국도 183호의 요코가와 이북)를 지날까 통하지 않는가」로 구별되고 있다. 즉, 가배 가도를 통하지 않는 교외선 버스는 로터리에 들어가고, 가배 가도를 지나는 시내선 버스는 로터리에 들어가지 않고 국도변에 정차 한다. 덧붙여 교외선 버스 정류장의 시내선 정류장으로서의 명칭은 상행이「요코가와 3정목」, 하행이「요코가와 1정목」이 되어 있다. 로터리 내 버스 정류장 히로시마 전철(시내선과 교외선 중 히로시마 고속국도 4호선을 경유하는 노선) 히로시마 버스(시내선) 주고쿠 JR버스(교외선 중 고요 뉴타운 방면 및 동부 방면) ※상기 외 J리그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히로시마 빅 아치행 셔틀 버스가 발착하고 있어, 2008년 현재 빅 아치행 셔틀 버스의 유일한 발착장이 되고 있다. 교외 선상버스 정류장(역 동쪽, 히로시마 신용금고 요코가와 지점 정면) 히로시마 버스 히로시마 전철 히로시마 교통 교외선 하행 버스 정류장(역 남쪽, 미사시 요코가와점 앞) 히로시마 버스 히로시마 전철 히로시마 교통 역사[편집] JR요코가와 역[편집] 1897년 9월 25일 - 산요 철도 히로시마 - 도쿠야마간 개통시에 개업. 일반역. 1906년 12월 1일 - 산요 철도가 국유화되어 일본 국철의 역이 된다. 1909년 12월 19일 - 대일본 궤도 히로시마 시샤 선(후의 히로하마 철도선)의 요코가와 정류장이 개업. 1933년 4월 20일 - 히로하마 철도의 요코가와 정류장이 역으로 승격, 요코가와마치 역으로 개칭. 1936년 9월 1일 - 히로하마 철도가 국유화되어 일본 국철 가베 선이 된다. 요코가와마치 역을 요코가와 역에 통합. 1945년 8월 6일 - :원폭 투하에 의해 역사 전괴 등 큰 피해를 받는다. 1962년 10월 1일 - 경로 변경에 수반해 가베 선 승강장이 현재 위치에 개업. 이전 전까지는 산요 본선과 가베 선을 묶는 과선교는 없고, 환승은 개찰구를 나와 가베 선 전용 개찰구로부터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1980년 9월 24일 - 차급화물의 취급을 폐지(여객역이 된다). 역 서쪽 산요 본선과 가베 선에 사이에 유개차용의 차급화물 홈이 존재했다. 1986년 - 녹색 창구 영업 개시 1987년 4월 1일 - 일본 국철 분할 민영화에 의해 서일본 여객철도의 역이 된다. 2003년 8월 23일 - 신역사 완공. 2006년 4월 1일 - 북쪽 출입구를 JR니시니혼 히로시마 멘텍크에 업무 위탁. 2007년 5월 23일 - ICOCA 대응의 자동 개찰기 설치. 2007년 8월 9일 - AED(자동제세동기)를 남쪽 출입구와 북쪽 출입구에 각각 설치. 2007년 9월 1일 - ICOCA 도입. 2007년 12월 29일 - 남쪽 출입구에 녹색 매표기 설치. 히로시마 전철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편집] 1917년 11월 1일 - 히로시마 가스전궤(히로시마 전철의 전신) 요코가와 선 개통. 현재의 요코가와 역 부근에 요코가와역 전차 정류장, 그 앞에 미사사 전차 정류장이 설치된다. 1926년경 - 미사사 전차 정류장이 요코가와 전차 정류장으로 개칭. 1941년 7월 28일 -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 폐지. 1951년 7월 19일 - 궤도를 70m 단축해 요코가와 전차 정류장을 이전. 2001년 11월 1일 - 요코가와 전차 정류장을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으로 개칭. 2003년 3월 27일 - 현재 위치로 이전. 근처의 역[편집] 서일본 여객철도 ■산요 본선 ■쾌속 「시티 라이너」・■보통 히로시마 역 - 요코가와 역 - 니시히로시마 역 ■가베 선(히로시마 - 요코가와간은 산요 본선) ■쾌속「통근 라이너」 히로시마 역→요코가와 역→아키나가쓰카 역 ■보통 히로시마 역 - 요코가와 역 - 미타키 역 히로시마 전철 요코가와 선 ■7호선・■8호선 요코가와 1정목 전차 정류장 - 요코가와 역 전차 정류장 외부 링크[편집] JR서일본(요코가와 역) vdeh 산요 본선(미하라 - 토쿠야마)(오카야마 방면<<) 미하라 - 혼고 - 고치 - 뉴노 - 시라이치 - 니시타카야 - 사이조 - 하치혼마쓰 - 세노 - 나카노히가시 - 아키나카노 - 가이타이치 - 무카이나다 - 덴진가와 - (히로시마 화물터미널) - 히로시마 - 신하쿠시마 - 요코가와 - 니시히로시마 - 신이노구치 - 이쓰카이치 - 하쓰카이치 - 미야우치쿠시도 - 아지나 - 미야지마구치 - 마에조라 - 오노우라 - 구바 - 오타케 - 와키 - 이와쿠니 - 미나미이와쿠니 - 후주 - 쓰즈 - 유우 - 고지로 - 오바타케 - 야나이미나토- 야나이 - 다부세 - 이와타 - 시마타 - 히카리 - 구다마쓰- 구시가하마 - 도쿠야마 (>>시모노세키 방면) 미야지마 연락선:미야지마구치 - 미야지마 vdeh 가베 선(히로시마 - 신하쿠시마 - ) 요코가와 - 미타키 - 아키나가쓰카 - 시모기온 - 후루이치바시 - 오마치 - 미도리이 - 시치켄자야 - 바이린 - 가미야기 - 나카시마 - 가베 vdeh히로시마 전철 요코가와 선도카이치마치 - 데라마치 - 출장소 앞 - 요코가와 1초메 - 요코가와 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요코가와_역&oldid=22894222" 분류: 서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히로시마 전철의 철도역일본의 노면 전차 정류장히로시마시의 철도역1897년 개업한 철도역1917년 개업한 철도역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erantoItaliano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01:1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MSL 1차 마이너리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MSL 1차 마이너리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TG삼보 MSL - 메이저진출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MSL 1차 마이너리그(MSL 1st Minorleague)는 TG삼보 MSL - 메이저진출전으로 개최되었고, MSL 예선전 폐지로, 메이저 리그인 MBC게임 스타리그로 진출하기 위한 리그였다. 이후, MSL 마이너리그로 변경되면서, 마이너결정전으로 바뀌었다. 목차 1 리그방식 2 리그기간 3 결과 4 진출자 리그방식[편집] 예선 통과자 12명과 지난시즌 5~16위 12명으로 구성 예선 통과자와 지난시즌 4강미만 탈락자끼리 3판 2선승제로 승자는 본선 진출, 패자는 다음시즌 마이너리그 직행 리그기간[편집] 8월 14일 ~ 8월 25일 회차 일정 1 8월 14일 2 8월 18일 3 8월 21일 4 8월 25일 결과[편집] 메이저진출전 Match1 Match2 Match3 1주차 홍진호 2 김현진 0 한승엽 2 주진철 0 김성제 1 베르트랑 2 2주차 김정민 1 나도현 2 변은종 2 서지훈 0 이병민 2 변길섭 0 3주차 심소명 2 오상봉 1 최연성 2 박성준 0 김환중 2 조병호 0 4주차 박용욱 2 나경보 0 이재항1 2 최인규 0 장진수 2 강도경 0 이재항의 기권으로 상대였던, 최인규가 진출하였다. 진출자[편집] 테란: 한승엽, 베르트랑, 나도현, 이병민, 최연성 저그: 홍진호, 변은종, 심소명, 이재항, 장진수 프로토스: 김환중, 박용욱 vdeh역대 MSL 하부리그2003년 ~ 2004년 MSL 1차 마이너리그 MSL 2차 마이너리그 MSL 3차 마이너리그 MSL 4차 마이너리그 MSL 5차 마이너리그 2005년 ATI배 6차 MSL 서바이버리그 MBC MOVIES배 7차 MSL 서바이버리그 2006년 MBC MOVIES배 8차 MSL 서바이버리그 MBC MOVIES배 9차 MSL 서바이버리그 MBC MOVIES배 10차 MSL 서바이버리그 2007년 곰TV MSL 시즌2 서바이버 토너먼트 곰TV MSL 시즌3 서바이버 토너먼트 곰TV MSL 시즌4 서바이버 토너먼트 2008년 14차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15차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16차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2009년 2009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시즌1 2009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시즌2 2010년 2010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시즌1 2010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시즌2 2010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시즌3 2011년 2011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시즌1 2011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시즌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MSL_1차_마이너리그&oldid=19935002" 분류: MSL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11월 7일 (화) 11: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서서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서평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서서평(徐舒平, 1880년 9월 26일 ~ 1934년)은 독일 출신의 선교사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또는 Johanna Elisabeth Schepping)이다. 쉐핑(Schepping)은 이디시아어로 샘에서 무엇을 끌어내다(Shep), 그로부터 큰 기쁨을 얻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가 있다. 목차 1 생애 1.1 어린 시절 1.2 선교사 생활 2 관련 작품 2.1 영화 2.2 책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독일 비스바덴 프랑켄 거리(Frankenstrase) 정원 막사(Gartenhause)이다. 어머니는 안나 쉐핑(Anna Schepping, 혼인명 Schepping Schneider)이다. 3세일 때 어머니가 미국 뉴욕으로 홀로 이민가고, 조부모에게 맡겨진다. 할아버지는 안드레아스 쉐핑(Andreas Schepping), 할머니는 엘리자베스 화버(Elisabeth Faber 혼인명 Elisabeth Schepping)이다. 9세에 할머니를 잃고, 주소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엄마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다. 뉴욕시립병원 실습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개신교로의 전향을 결심한다.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후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한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Bible Teacher Training School)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간 봉사하였다. 1911년 졸업하고, 동료 선교사로부터 조선에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질 정도라서 의료 봉사가 절실하다는 말을 듣고, 한국 선교를 지원한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모집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어머니의 신앙인 가톨릭을 따르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집에서 쫒겨났다. 3세 때, 10대 때, 마지막으로 40대에 어머니에게 모두 세 차례 버림당한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지만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빗 속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선교사 생활[편집] 1912년 2월 20일 한국으로 파송된다. 여객선 S.S.Korea호를 타고 20여 일 여행 끝에 한국에 도착한다. 광주선교부 제중원(원장 우월순)의 간호사로서 병원과 주일학교를 돕는다.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생 가족처럼 지낸 입양아로 박해라, 문안식, 문천식이 있다.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다. ‘나환자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였다. 임금 대부분을 빈민과 병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다.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14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38명이다. 광주 양림동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했다. 뽕나무를 더 심고 시설을 세우기 위해 미국에 기금을 요청했다. 제주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고사리 채취를 도왔다. 임종 때에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하였다. 장례에 자신의 세운 이일학교의 학생이 운구 행렬을 이루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련 작품[편집] 영화[편집]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2017년 | 다큐멘터리 | 2017.04.26 개봉 | 78분 | 전체 관람가 | 감독 홍주연, 홍현정 | 출연 하정우, 윤안나, 안은새 책[편집] 《조선의 작은 예수 서서평(천천히 평온하게)》 백춘성 저 《조선을 섬긴 행복 (서서평의 사랑과 인생)》 양창삼 저 《그대 행복한가요? (행복을 잃고 살아가는 바보들에게 주는 서서평의 편지)》 (양국주 저 《조선을 섬긴 행복 (서서평의 사랑과 인생)》 양창삼(대학교수) 저 《천국에서 만납시다 (선교사 서서평 일대기)》 백춘성 저 | 대한간호협회 《목포 기독교 이야기 (목포 기독교 120년사 초기)》 김양호 저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엘리제 쉐핑 이야기)》 양국주 저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눈물이고저》 임형태 저 《행복한 만남 (믿음의 다음 세대를 세우고자 하는 꿈과 비전)》 김호진 저 《자작나무 (김상배 세번째 시집)》 김상배 저 《생명봉사적 통전선교》 임희모 저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폴 스티븐스 저 《본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한일장신대학교 정년퇴임기념논문집 발간위원회 저 《시온의 빛고을 광주》 백춘성 저 《빛과 소금(2017년 4월호)》 두란노 편집부 저 《광주 1백년 1 (개화기 이후 광주의 삶과 풍속)》 박선홍 저 《호남사람 이야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역사인물 150)》 남성숙 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서서평&oldid=24170370" 분류: 1880년 태어남1934년 죽음비스바덴 출신미국의 기독교 선교사한국에서 활동한 기독교 선교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01: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서서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서평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서서평(徐舒平, 1880년 9월 26일 ~ 1934년)은 독일 출신의 선교사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또는 Johanna Elisabeth Schepping)이다. 쉐핑(Schepping)은 이디시아어로 샘에서 무엇을 끌어내다(Shep), 그로부터 큰 기쁨을 얻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가 있다. 목차 1 생애 1.1 어린 시절 1.2 선교사 생활 2 관련 작품 2.1 영화 2.2 책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독일 비스바덴 프랑켄 거리(Frankenstrase) 정원 막사(Gartenhause)이다. 어머니는 안나 쉐핑(Anna Schepping, 혼인명 Schepping Schneider)이다. 3세일 때 어머니가 미국 뉴욕으로 홀로 이민가고, 조부모에게 맡겨진다. 할아버지는 안드레아스 쉐핑(Andreas Schepping), 할머니는 엘리자베스 화버(Elisabeth Faber 혼인명 Elisabeth Schepping)이다. 9세에 할머니를 잃고, 주소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엄마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다. 뉴욕시립병원 실습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개신교로의 전향을 결심한다.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후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한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Bible Teacher Training School)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간 봉사하였다. 1911년 졸업하고, 동료 선교사로부터 조선에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질 정도라서 의료 봉사가 절실하다는 말을 듣고, 한국 선교를 지원한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모집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어머니의 신앙인 가톨릭을 따르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집에서 쫒겨났다. 3세 때, 10대 때, 마지막으로 40대에 어머니에게 모두 세 차례 버림당한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지만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빗 속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선교사 생활[편집] 1912년 2월 20일 한국으로 파송된다. 여객선 S.S.Korea호를 타고 20여 일 여행 끝에 한국에 도착한다. 광주선교부 제중원(원장 우월순)의 간호사로서 병원과 주일학교를 돕는다.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생 가족처럼 지낸 입양아로 박해라, 문안식, 문천식이 있다.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다. ‘나환자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였다. 임금 대부분을 빈민과 병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다.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14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38명이다. 광주 양림동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했다. 뽕나무를 더 심고 시설을 세우기 위해 미국에 기금을 요청했다. 제주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고사리 채취를 도왔다. 임종 때에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하였다. 장례에 자신의 세운 이일학교의 학생이 운구 행렬을 이루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련 작품[편집] 영화[편집]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2017년 | 다큐멘터리 | 2017.04.26 개봉 | 78분 | 전체 관람가 | 감독 홍주연, 홍현정 | 출연 하정우, 윤안나, 안은새 책[편집] 《조선의 작은 예수 서서평(천천히 평온하게)》 백춘성 저 《조선을 섬긴 행복 (서서평의 사랑과 인생)》 양창삼 저 《그대 행복한가요? (행복을 잃고 살아가는 바보들에게 주는 서서평의 편지)》 (양국주 저 《조선을 섬긴 행복 (서서평의 사랑과 인생)》 양창삼(대학교수) 저 《천국에서 만납시다 (선교사 서서평 일대기)》 백춘성 저 | 대한간호협회 《목포 기독교 이야기 (목포 기독교 120년사 초기)》 김양호 저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엘리제 쉐핑 이야기)》 양국주 저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눈물이고저》 임형태 저 《행복한 만남 (믿음의 다음 세대를 세우고자 하는 꿈과 비전)》 김호진 저 《자작나무 (김상배 세번째 시집)》 김상배 저 《생명봉사적 통전선교》 임희모 저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폴 스티븐스 저 《본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한일장신대학교 정년퇴임기념논문집 발간위원회 저 《시온의 빛고을 광주》 백춘성 저 《빛과 소금(2017년 4월호)》 두란노 편집부 저 《광주 1백년 1 (개화기 이후 광주의 삶과 풍속)》 박선홍 저 《호남사람 이야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역사인물 150)》 남성숙 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서서평&oldid=24170370" 분류: 1880년 태어남1934년 죽음비스바덴 출신미국의 기독교 선교사한국에서 활동한 기독교 선교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01: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나운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운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나운규羅雲奎 출생 1902년 5월 4일(1902-05-04)대한제국 함경북도 회령사망 1937년 8월 9일 (35세)일제 강점기 경성부국적 대한제국다른 이름 호(號)는 춘사(春史)직업 영화인 영화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독립운동가 영화 기획가 영화연출가 영화 각본가 영화 편집감독 영화 각색가활동 기간 1924년 ~ 1937년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학력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룽징 명동중학교 중퇴부모 나형권(부)형제자매 누나 3명 형 2명 둘째형 나시규(연희전문학교 중퇴)배우자 조정옥 여사자녀 나종익(장남) 나신자(딸) 나봉한(차남)수상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나운규(羅雲奎, 1902년 5월 4일 - 1937년 8월 9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영화인이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호는 춘사(春史)이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3 학력 4 상훈 5 주요 작품 6 기타 7 각주 8 외부 링크 생애[원본 편집]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1여년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했다. 이때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회선터널 폭파미수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되어 청진교도소에서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뒤 1923년에 출감하였다.[1] 1920년에는 독립군 지도자 중 한 명인 홍범도 장군 산하의 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 1924년 일본인 관리 하의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하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가마꾼으로 출연하였다. 《농중조》라는 작품에 출연하여 배우로서 명성을 떨쳤다. 1926년에는 무성 영화인 《아리랑》을 제작함으로써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나운규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겸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영화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작품을 내고 대한민국 영화의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여 공헌하였다. 작품으로 《금붕어》, 《들쥐》, 《벙어리 삼룡》, 《오몽녀》 등이 있다. 1937년 8월 9일, 안타깝게도 향년 36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차남 나봉한도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활동한 바가 있다. 그가 고인이 된 후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가족 관계[원본 편집] 아버지 : 나형권(羅衡權) 둘째형 : 나시규(羅始奎) 부인 : 조정옥(趙貞玉) (1898~1968) 장남 : 나종익(羅鍾益) 딸 : 나신자(羅信慈) 차남 : 나봉한(羅奉漢, 1934년 4월 15일 ~ , 연극배우로 첫 데뷔한 영화감독으로 서울 출생이며 아버지 나운규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유아기를 보냄.) 학력[원본 편집] 함경북도 회령보통학교 졸업 함경북도 회령 신흥학교 고등과 전학 중국 만주 지린 성 룽징 명동중학교 중퇴 상훈[원본 편집]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주요 작품[원본 편집] 감독 《아리랑》(1926년) 《철인도》(鐵人都, 1930년) - 《아리랑》 후편으로 제작되었다. 《오몽녀》(五夢女, 1936년) - 《아리랑》 3편으로, 유성영화로 제작되었다.[3] 《풍운아》(風雲兒, 1926년) 《옥녀》(玉女, 1928년) 《벙어리 삼룡이》(1929년) 《개화당 이문》(開化黨 異聞, 1932년) 《칠번통 소사건》(七番通 小事件, 1934년) 《무화과》(無花果, 1935년) 출연작 《아리랑》(1926년) - 원작, 감독, 주연 《임자 없는 나룻배》(1932년) 《심청전》- 주연 《개척자》- 주연 《장한몽(長恨夢)》- 주연 기타[원본 편집] 1991년 MBC에서 해당 인물의 삶을 다룬 특집극 <춘사 나운규>가 방영되었는데 이덕화가 주인공 춘사 나운규 역을 맡았다[4]. 각주[원본 편집] ↑ “나운규(羅雲奎)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8년 4월 13일에 확인함.  ↑ 강현식 기자 <아리랑> 지워지지 않는 '춘사'의 기억, 《오마이뉴스》, 2003년 5월 27일 작성 ↑ 나운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운규의 삶과 예술 드라마로 제작”. 동아일보. 1991년 7월 5일. 2017년 6월 16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원본 편집] 춘사 대상영화제 나운규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vdeh1991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vdeh2016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조희제 2월 한시대 3월 프랭크 스코필드 4월 오영선 5월 문창학 6월 안승우 7월 이신애 8월 채광묵·채규대 9월 나중소 10월 나운규 11월 이한응 12월 최수봉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나운규&oldid=24199661" 분류: 1902년 태어남1937년 죽음일제 강점기의 영화 감독1924년 데뷔일제 강점기의 영화 배우일제 강점기의 연출가일제 강점기의 장로교도일제 강점기의 작가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군인반일 감정투자가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회령시 출신나주 나씨한국의 남자 영화 배우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2: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나운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운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나운규羅雲奎 출생 1902년 5월 4일(1902-05-04)대한제국 함경북도 회령사망 1937년 8월 9일 (35세)일제 강점기 경성부국적 대한제국다른 이름 호(號)는 춘사(春史)직업 영화인 영화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독립운동가 영화 기획가 영화연출가 영화 각본가 영화 편집감독 영화 각색가활동 기간 1924년 ~ 1937년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학력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룽징 명동중학교 중퇴부모 나형권(부)형제자매 누나 3명 형 2명 둘째형 나시규(연희전문학교 중퇴)배우자 조정옥 여사자녀 나종익(장남) 나신자(딸) 나봉한(차남)수상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나운규(羅雲奎, 1902년 5월 4일 - 1937년 8월 9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영화인이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호는 춘사(春史)이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3 학력 4 상훈 5 주요 작품 6 기타 7 각주 8 외부 링크 생애[원본 편집]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1여년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했다. 이때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회선터널 폭파미수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되어 청진교도소에서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뒤 1923년에 출감하였다.[1] 1920년에는 독립군 지도자 중 한 명인 홍범도 장군 산하의 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 1924년 일본인 관리 하의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하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가마꾼으로 출연하였다. 《농중조》라는 작품에 출연하여 배우로서 명성을 떨쳤다. 1926년에는 무성 영화인 《아리랑》을 제작함으로써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나운규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겸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영화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작품을 내고 대한민국 영화의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여 공헌하였다. 작품으로 《금붕어》, 《들쥐》, 《벙어리 삼룡》, 《오몽녀》 등이 있다. 1937년 8월 9일, 안타깝게도 향년 36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차남 나봉한도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활동한 바가 있다. 그가 고인이 된 후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가족 관계[원본 편집] 아버지 : 나형권(羅衡權) 둘째형 : 나시규(羅始奎) 부인 : 조정옥(趙貞玉) (1898~1968) 장남 : 나종익(羅鍾益) 딸 : 나신자(羅信慈) 차남 : 나봉한(羅奉漢, 1934년 4월 15일 ~ , 연극배우로 첫 데뷔한 영화감독으로 서울 출생이며 아버지 나운규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유아기를 보냄.) 학력[원본 편집] 함경북도 회령보통학교 졸업 함경북도 회령 신흥학교 고등과 전학 중국 만주 지린 성 룽징 명동중학교 중퇴 상훈[원본 편집]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주요 작품[원본 편집] 감독 《아리랑》(1926년) 《철인도》(鐵人都, 1930년) - 《아리랑》 후편으로 제작되었다. 《오몽녀》(五夢女, 1936년) - 《아리랑》 3편으로, 유성영화로 제작되었다.[3] 《풍운아》(風雲兒, 1926년) 《옥녀》(玉女, 1928년) 《벙어리 삼룡이》(1929년) 《개화당 이문》(開化黨 異聞, 1932년) 《칠번통 소사건》(七番通 小事件, 1934년) 《무화과》(無花果, 1935년) 출연작 《아리랑》(1926년) - 원작, 감독, 주연 《임자 없는 나룻배》(1932년) 《심청전》- 주연 《개척자》- 주연 《장한몽(長恨夢)》- 주연 기타[원본 편집] 1991년 MBC에서 해당 인물의 삶을 다룬 특집극 <춘사 나운규>가 방영되었는데 이덕화가 주인공 춘사 나운규 역을 맡았다[4]. 각주[원본 편집] ↑ “나운규(羅雲奎)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8년 4월 13일에 확인함.  ↑ 강현식 기자 <아리랑> 지워지지 않는 '춘사'의 기억, 《오마이뉴스》, 2003년 5월 27일 작성 ↑ 나운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운규의 삶과 예술 드라마로 제작”. 동아일보. 1991년 7월 5일. 2017년 6월 16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원본 편집] 춘사 대상영화제 나운규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vdeh1991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vdeh2016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조희제 2월 한시대 3월 프랭크 스코필드 4월 오영선 5월 문창학 6월 안승우 7월 이신애 8월 채광묵·채규대 9월 나중소 10월 나운규 11월 이한응 12월 최수봉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나운규&oldid=24199661" 분류: 1902년 태어남1937년 죽음일제 강점기의 영화 감독1924년 데뷔일제 강점기의 영화 배우일제 강점기의 연출가일제 강점기의 장로교도일제 강점기의 작가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군인반일 감정투자가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회령시 출신나주 나씨한국의 남자 영화 배우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2: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명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명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음악가에 대해서는 김명곤 (음악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명곤출생 1952년 12월 3일(1952-12-03) (66세)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직업 배우, 연극연출가, 前정치인활동 기간 1975년 ~ 현재종교 개신교(침례회) 학력 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언론학 석사 김명곤(金明坤, 1952년 12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 성우, 연극연출가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목차 1 학력 2 생애 3 경력 4 영화 5 뮤지컬 6 TV 드라마 7 더빙 7.1 TV 프로그램 7.2 라디오 프로그램 7.3 연극 8 수상 경력 9 함께 보기 10 외부 링크 학력[편집] 전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독어교육학과 학사 졸업 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신문방송 전공 석사과정 졸업, 언론학석사 (학위논문명 - 극장의 대(對)고객 커뮤니케이션 활성화에 관한 연구 : 국립극장의 사례를 중심으로) 생애[편집] 1975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후 잠시 배우 활동을 단념하며 신문 기자와 고등학교 교사 등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배우 분야에 복귀하여 1983년작 영화 《바보 선언》으로 영화배우 스타덤에 올라 서편제, 태백산맥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특히 서편제에서는 각본을 쓰기도 했다. 서편제로 1993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6년 극단《아리랑》을 창단하였으며, 2000년에는 국립중앙극장장을 맡았다. 2006년 문화관광부 장관에 취임하여 재직한 적이 있다. 경력[편집] 2009.03~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2006.03~2007.05 제42대 문화관광부 장관 2000.01~2005.12 국립중앙극장 극장장 2000.07 통일문화학회 창립준비위원회 고문 2000 문화관광부 2001 지역문화의 해 추진위원회 지역문화일반 추진위원 1999.09~1999.12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객원교수 1998.03~1999.12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의장 1986~1999 극단 아리랑 창단대표 1997~1998 우석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임강사 1978~1979 배화여자고등학교 교사 ~1977 뿌리깊은나무 기자 영화[편집] 1983년 《일송정 푸른 솔은》 1983년 《바보 선언》 1984년 《과부춤》 1985년 《어우동》 - 천가 역 1986년 《서울황제》 - 예수 역 1986년 《꽃지》 - 동진 역 1987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1987년 《박철수의 헬로 임꺽정》 1990년 《꼭지딴》 1991년 《개벽》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 1993년 《서편제》 1994년 《한줌의 시간속에서》 1994년 《증발》 1994년 《태백산맥》 1995년 《천재 선언》 1995년 《48+1》 1995년 《영원한 제국》 1998년 《미끼》 1999년 《A+삶》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 - 박충서 역 2013년 《연애의 기술》 - 아버지 역 2014년 《명량》 - 토도 타카토라 역 2016년 《무수단》 - 참모장 역 2017년 《대립군》 - 정판서 역 2017년 《강철비》 - 리 선생 역 2018년 《신과함께: 인과 연》 - 강림 부 역 2018년 《만세전》 2019년 《우상》 - 최 의원 역 뮤지컬[편집] 1995년 《아가씨와 건달들》 2000년 《라이온 킹》 TV 드라마[편집] 2008년 《대왕 세종》 (KBS2) - 옥환 역 2012년 《각시탈》 (KBS) - 양백 역 2014년 《왕의 얼굴》 (KBS) - 송 내관 역 2015년 《밤을 걷는 선비》 (MBC) - 노창선 역 2015년 《KBS 드라마 스페셜 - 붉은달》 (KBS) - 영조 역 2017년 《명불허전》 (tvN) - 마성태 역 2018년 《미스티》 (JTBC) - 정대한 역 2018년 《친애하는 판사님께》 (SBS) - 오대양 역 더빙[편집] 《알라딘》 - 지니 《돌아온 자파》 - 지니 《알라딘과 도적의 왕》 - 지니 디즈니 만화동산 《알라딘》 (KBS) - 지니 TV 프로그램[편집] 1996년 《추적 사건과 사람들》 (SBS) 2014년 《다큐프라임-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이야기》 (EBS1) - 전기수 역 라디오 프로그램[편집] 《라디오 북클럽, 방현주입니다》 (MBC FM) 《EBS 책 읽는 라디오 낭독 시리즈》 (2015년, EBS FM) 연극[편집] 1975년 《상록수》 ... 갑산이 역(단역) 수상 경력[편집] 1992년 제1회 어린이연극제 연출상 1992년 제1회 어린이연극제 최우수작품상 1993년 제1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연기상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1995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1995년 제1회 현대연극상 연출상 함께 보기[편집] 김희라 한진희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이보희 외부 링크[편집] 김명곤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전임정동채 제12대 문화관광부 장관2006년 3월 27일 ~ 2007년 5월 7일 후임김종민 vdeh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1980년대 최불암 (1980) 전무송 (1981) 안성기 (1983) 안성기 (1984) 하명중 (1985) 이대근 (1986) 신성일 (1987) 유인촌 (1988) 박중훈 (1989) 1990년대 박중훈 (1990) 이영하 (1991) 문성근 (1992) 김명곤 (1993) 안성기 (1994) 안성기 (1995) 안성기 (1996) 한석규 (1997) 송강호 (1998) 이정재 (1999) 2000년대 박중훈 (2000) 최민식 (2001) 설경구 (2002) 송강호 (2003) 최민식 (2004) 이병헌 (2005) 안성기 (2006) 송강호 (2007) 소지섭 (2008) 이범수 (2009) 2010년대 강동원 (2010) 하정우 (2011) 안성기 (2012) 송강호 (2013) 최민식 (2014) 정재영 (2015) 이병헌 (2016) 설경구 (2017) 이성민 (2018) 최우수작품 | 감독 | 남우주연 | 여우주연 | 남우조연 | 여우조연 | 신인감독 | 신인남우 | 신인여우 vdeh청룡영화상 남우주연1960년대 김승호 (1963) 김진규 (1964) 최무룡 (1965) 신영균 (1966) 김승호 (1967) 신영균 (1969) 1970년대 박노식 (1970) 최무룡 (1971) 박노식 (1972) 신영균 (1973) 1990년대 안성기 (1990) 임성민 (1991) 문성근 (1992) 김명곤 (1993) 문성근, 박중훈 (1994) 최민수 (1995) 문성근 (1996) 한석규 (1997) 박신양 (1998) 이정재 (1999) 2000년대 설경구 (2000) 최민식 (2001) 설경구 (2002) 최민식 (2003) 장동건 (2004) 황정민 (2005) 안성기, 박중훈 (2006) 송강호 (2007) 김윤석 (2008) 김명민 (2009) 2010년대 정재영 (2010) 박해일 (2011) 최민식 (2012) 황정민 (2013) 송강호 (2014) 유아인 (2015) 이병헌 (2016) 송강호 (2017) 김윤석 (2018) 최우수작품 | 감독 | 남우주연 | 여우주연 | 남우조연 | 여우조연 | 신인감독 | 신인남우 | 신인여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명곤&oldid=23905903" 분류: 195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연극인대한민국의 영화인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1975년 데뷔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창극 배우대한민국의 연출가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대한민국의 문화관광부 장관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전주고등학교 동문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동국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교사서울예술대학교 교수동국대학교 교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20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21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전주시 출신김해 김씨대한민국의 침례교도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수상자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3일 (토) 23: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독일계 미국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독일계 미국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독일계 미국인German AmericansDeutschamerikaner 총인구 50,764,352 명[1][2]미국 인구에서 17.1%를 차지함. (2009) 언어 영어, 독일어 종교 기독교 (개신교 51%, 로마 가톨릭교 26% 등), 유대교 1%, 기타 16%[3] 민족계통 근연민족 독일인,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스위스계 미국인, 네덜란드계 미국인, 펜실베이니아 더치, 독일계 캐나다인 독일계 미국인(German American, 독일어: Deutschamerikaner)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인구에서 약 5천만 명, 곧 약 17%를 차지하며 미국에서 가장 큰 자기 보고된 조상 전래의 민족단이다.[4] 오하이오주, 아이오와주, 미네소타주, 위스콘신주, 네브래스카주와 다코타 지방을 포함한 중서부 지방 상류 주들이 3분의 1 이상의 가장 높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비율을 가지고 있어도 캘리포니아주, 텍사스주와 펜실베이니아주가 독일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편이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국에 의하면 독일계 미국인이 총 미국 인구의 17.1%를 차지하며, 아일랜드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잉글랜드계 미국인을 앞서 가장 큰 조상 전래의 민족 단체를 형성하였다. 역사적인 독일의 주들이 해외 식민지들을 가지지 않았고, 1680년대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에 첫 현저한 독일인 이민들이 도착하여 펜실베이니아와 뉴욕 지역에 주로 정착하였다. 독일인들의 이민은 19세기 동안에 8백만 명의 가장 큰 수로서 지속하였다. 그들은 대지의 인력과 종교적 자유에 의하여 당겨졌고, 대지의 부족과 종교적 및 정치적 압박에 의하여 유럽의 외부로 밀려났다. 미국에 도착한 많은 이들은 종교적 밑 정치적 자유를, 어떤 이들은 유럽보다 더 나은 경제적 기회들을, 다른이들은 신대륙에서 간단히 깨끗하게 시작되는 기회를 위한 길을 찾았다. 1850년 이전에 도착한 이민들은 자신들의 강한 농장 기술들이 지불할 만한 가장 생산적 대지를 찾은 농부들이었다. 1840년 후에 많은 이민들은 독일어 사용 구역 "게르마니아"가 곧 생긴 대도시들에 왔다.[5][6][7]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첫 유치원을 설립하였고,[8] 크리스마스 트리 전통을 소개하였으며,[9][10] 핫도그와 햄버거 같은 인기있는 미국식 음식들을 창설하였다.[11] 독일계 미국인들의 축하식은 전국을 통하여 열리고, 뉴욕에서 매 9월마다 세 번째 토요일에 열리는 독일계 미국인 슈토이벤 행렬식이 가장 잘 알려진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시카고, 신시내티, 밀워키, 세인트루이스와 다른 도시들에서 해마다 열리는 주요 이벤트들이 있다. 미국에 온 다른 이민들처럼 압도적인 독일인 혹은 독일계 주민들은 본질적으로 미국화되었다. 목차 1 초기 역사 1.1 식민지 시기 1.2 팔츠인들 1.3 루이지애나 1.4 남부 1.5 뉴잉글랜드 1.6 펜실베이니아 2 19세기 2.1 도시들 2.2 텍사스 2.3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 2.3.1 전통 2.3.2 양심적 병역거부 2.4 남북 전쟁 2.5 농장들 2.6 정치 2.6.1 노동운동 2.6.2 선거 3 20세기 3.1 제1차 세계 대전과 반독 감정 3.2 제2차 세계 대전 3.3 전쟁 이후의 세월들 4 독일계 미국인의 영향 5 두드러진 독일계 미국인들 5.1 독일계 미국인 대통령들 6 관련 항목 7 참조 초기 역사[편집] 식민지 시기[편집] 존 제이컵 애스터는 미국에서 첫 애스터 가문 왕조와 첫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모피 무역과 뉴욕의 부동산 업계에서 부를 쌓았다. 1607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도착한 첫 영국인 정착자들은 첫 독일계 미국인 요하네스 플라이셔 박사에 의하여 동행되었다. 플라이셔 박사는 1608년 5명의 유리 제조업자들과 3명의 목공인들 혹은 가옥 건축가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12] 미국이 된 첫 영구적 독일인 정착은 펜실베이니아주 저먼타운이었으며, 1683년 10월 6일 필라델피아 근처에서 창립되었다. 독일인들의 큰 수들이 1680년대부터 1760년대까지 펜실베이니아가 호의적 목적지로 되면서 이주하였다. 그들은 여러 이유들로 아메리카에 이주하였는데, 그 예를 들면, 추천 도매상들이 중유럽에서 농장 소유를 위한 악화된 기회들에 연루, 어떤 종교 단체들의 박해와 군사적 징병제, 인력 도매상들이 더 나은 경제적 상태(특히 소유적 대지에 기회와 종교적 자유)이다. 가끔 이민자들은 계약적 하인들로서 세월들의 기간을 위하여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면서 자신들의 통행을 위하여 돈을 냈다.[13] 펜실베이니아의 큰 구역들과 뉴욕의 상부는 독일인들을 끌어들였다. 대부분은 루터교와 독일 개혁 교회 신자들이었으며, 많은 이들은 모라비아 교도들과 메노나이트 교도들 같은 작은 종교적 종파에 속하였다. 독일의 로마 가톨릭교회 교도들은 1812년 전쟁 이후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14] 팔츠인들[편집] 1709년 독일의 팔츠 지방에서 온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이 곤란의 상태들을 탈출하여 처음에 로테르담으로 갔다가, 그러고나서 런던으로 갔다. 영국의 앤 여왕은 그들에게 그녀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음식의 나쁜 품질과 전염되기 쉬운 발딘티푸스 병 등의 이유로 여행은 생존하는 데 길고 어려웠다. 많은 이민자들, 특히 어린이들이 1710년 6월 아메리카에 도달하기 전에 사망하였다.[15] 생존한 대략 2,100명의 팔츠인 이민은 식민지 시대에 아메리카로 가장 큰 단 하나의 이민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허드슨 강 유역의 봉사 캠프들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통행을 청산하였다. 1711년 안으로 7개의 마을들이 로버트 리빙스턴 영대 차지에 뉴욕 주에서 설립되었다. 1723년 독일인들은 리틀 폭포들 서부의 모호크 계곡에서 대지를 살 수 있던 첫 유럽인들이 되었다. 100개의 농가들은 버니츠필드 특허권에서 배치되었다. 1750년 안으로 독일은 모호크 강 양쪽에 12 마일(19 킬로미터)의 제거를 차지하였다. 흙이 가장 좋았으며, 거의 돌과 함께 500척의 집들이 지어졌고 그 지방은 인디언 습격의 원한에서 번영하였다. 허키머는 오랫동안 "저먼플랫츠"라고 알려지면서 지방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독일인의 정착지들이었다.[15] 초기 독일 팔츠 이민들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미국에서 발행의 자유를 위하여 식민주의적 뉴욕에서 싸움을 이끈 편집자 존 피터 젱거였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에 바덴에서 건너온 후기의 이민 존 제이컵 애스터는 뉴욕에서 자신의 모피 무역과 부동산 투자들로부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루이지애나[편집] 미시시피 회사는 1721년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 수천명의 독일인 개척자들을 정착시켰다. 정착은 독일인들, 최근에 프랑스의 규칙 아래에 떨어진 알자스 지방의 독일인들과 스위스인들을 이민가는 데 용기를 주었다. 알자스 지방은 30년 전쟁의 더 위대한 문맥 안으로 프랑스에 팔렸다. 예수회의 샤를르부아는 캐나다에서 루이지애나로 갔다. 그의 편지는 "팔츠 선제후국에서 자라온 이 9,000명의 독일인들은 아칸소에 있었다. 통틀어서 독일인들은 아칸소를 떠났다. 그들은 뉴올리언스로 가서 유럽에 통행을 요청하였다. 미시시피 회사는 뉴올리언스에서 위로 약 25 마일(40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미시시피 강의 오른쪽 둑에 있는 부유한 대지들을 독일인들에게 주었다. 지역은 이제 '저먼 코스트'로 알려졌다."라고 써졌다. 독일인들의 번영하는 인구가 저먼 코스트로 알려진 뉴올리언스로부터 강 상류에 살았다. 그들은 J. 하노 다일러의 "루이지애나:독일인 정착자들을 위한 집" 같은 팜플렛들을 통하여 끌어당겨졌다.[16] 남부[편집] 1714년과 1717년 독일 식민주의자들의 2개의 방향들은 현재 버지니아주 컬페퍼 근처에 자리잡은 저매너라 불리는 버지니아의 큰 식민지를 설립하였다.[17]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독일의 모라비아 교도들은 1753년 노스캐롤라이나의 피드먼트에서 그랜빌 경으로부터 10만 에이커(400 제곱 킬로미터) 가까운 펜실베이니아 주 베들레헴 주위에 살았다. 그들은 특히 현재 윈스턴-세일럼 주위에 있는 지역에서 그 지대에 독일인 정착지들을 설립하였다. 그들을 또한 1759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처음으로 계획된 모라비아 교도 공동체인 "통행의 집"으로 해석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베서버라의 과도적인 정착지를 창립하였다. 곧 후로 1766년에 독일의 모라비아 교도들은 세일럼의 타운과 1772년 초기의 여성 대학 세일럼 칼리지를 세웠다. 독일 이민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14]의 더치 포크 지역과 텍사스주, 특히 오스틴 지역을 포함한 미국 남부의 다른 지역들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독일의 유대인, 즉 유대계 독일인들은 19세기를 통하여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남부에 이민을 갔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이 가끔 지방적 상인, 가축 거래인, 농업적 상품 교역인, 은행업자와 비지니스 소유인들로 일하였던 도시들과 타운들을 포함한 남부의 많은 지역들에서 작은 유대계 독일인 공동체들을 형성하였다. 앨라배마주에서 자신의 동생과 함께 리먼 브라더스를 창립한 핸리 리먼은 부분적으로 유대계 독일인 이민들 중의 두드러진 예이다. 유대계 독일인들은 미국에서 첫 개혁적인 시나고그를 설립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같은 도시들에 정착하였다. 유대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시나고그들을 지은 다른 남부의 도시들 등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뉴잉글랜드[편집] 1742년과 1753년 사이에 거칠게 1천명의 독일인들이 매사추세츠주 브로드 베이(현재의 메인주 월도보로)에 정착하였다. 그들의 집들이 불타고 그들의 이웃들이 인디언들에 의하여 살인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간 후에 많은 식민주의자들이 보스턴, 노바스코샤와 노스캐롤라이나로 도망갔다. 남아있던 독일인들은 농사에 생존하기 힘든 것을 찾아냈고 결국 해운업과 어업으로 돌려졌다.[18] 펜실베이니아[편집] 1725년과 1775년 사이에 무임 도항 이주자들과 개약적 하인들로서 도착한 이민들과 함께 펜실베이니아로 독일인 이민의 형세가 팽창하였다. 1775년 안으로 독일인들은 펜실베이니아 주의 대략 3분의 1을 구성하였다. 독일인 농부들은 그들의 높은 생산적 동물 경자과 농업적 실습들로 명성을 얻었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후에 미국 독립 혁명을 지지한 입법부의 통제를 가진 퀘이커 교도들이 이끄는 연합에 가입한 1740년까지 정통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이럼에 불구하고, 많은 독일인 정착자들은 아마 그들이 자신들의 왕립 대지 양도가 새로운 공화국 정부에 의하여 가져갈 것이라는 이유 혹은 영국인들에게 충성이 자유적 사회에 사는 기회를 마련한 독일 군주 정체라는 이유로 독립 혁명 동안에 영국당원들이었다.[19] 루터교, 개혁 교회, 메노나이트, 아미시파와 다른 종파들을 포함한 독일인들은 강한 음악적 문화와 함께 부유한 종교적 생활을 개발하였다. 수집적으로 그들은 펜실베이니아 더치로 알려지게 되었다.[20][21] 1810년대 이전에는 펜실베이니아에 약간의 독일인 가톨릭 교도들이 있었다. 자동차와 수레 제조업자들의 조상들 스튜드베이커 형제가 1736년 단검으로 유명한 졸링겐으로부터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하였다. 그들의 실력들과 함께 그들은 서부로 향하는 변경 개척자들을 싣는 수레들을 만들었고, 그들의 대포들은 남북 전쟁에서 포병들과 함께 한 북군들에게 마련되었으며 그들의 자동차 회사는 미국에서 가장 큰 회사들 중에 하나가 되어 육군의 전쟁 노력과 산업적 창립에서 요소였다. 미국 독립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식민지군에 대항하는 데 어떤 헤센군들을 모집하는 데 독일의 왕자들과 함께 협정들을 만들었다. 대다수는 헤센 대공국에서 왔다. 많은이들은 영구적으로 미국에 정착한 어떤이들의 농장들에서 포로들이 되었다. 1790년 미국 인구 조사로 봐서, 역사가들은 독일인들이 미국 백인 인구들의 9% 가까이 차지한다고 견적하였다. 19세기[편집] 1820년과 제1차 세계 대전 사이에 6백만 명 가까이 되는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시기 동안에 들어오는 독일 이민들의 가장 큰 흐름이 생겼다. 1840년부터 1880년까지 그들은 이민 집단 중에 가장 컸다. 독일의 주들에서 일어난 1848년 혁명에 이어서 포티에이터스라고 알려진 정치적 난민들의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저널리스트, 정치인, 전문 직업인들을 포함한다. 현명한 포티에이터스는 헨리 빌라드와 카를 슈르츠를 포함한다. 도시들[편집] 1872년 독일인의 인구 분포를 보이는 미국의 지도 밀워키,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뉴욕과 볼티모어 같은 도시들은 독일인 이민들의 호의적인 목적지들이었다. 1900년 안으로 클리블랜드, 밀워키, 호보컨과 신시내티의 인구들은 모두 40% 이상이 독일계 미국인들이었다. 1910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독일계 미국인의 비율이 57%를 차지하면서 아이오와주의 듀부크와 대번포트는 더 큰 비율을 가졌다. 인디애나주 포트 웨인 같은 다른 북부 도시들은 독일계 미국인들이 인구의 30% 이하를 차지한다. 1850년경에 미시간주 앤아버와 그 주위에는 슈바벤 이민들이 정착하였다. 신시내티의 "오버 더 라인" 구역, 세인트루이스 남부의 "더치타운"과 콜럼버스의 "저먼 빌리지" 같이 많은 그들의 인구 집중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암시한 특유의 이름들을 취득하였다. 가장 좋아하는 목적지는 "독일인들의 아테네"로 알려진 밀워키였다. 이전 국가에서 정치 훈련을 받은 근본적인 독일인들이 이 도시의 사회주의 정치들을 지배하였다. 많은 중개업자들이 맥주 양조업을 창립하는 동안에 능력있는 근로자들은 많은 기능들을 지배하였다. 도시들에 정착한 독일인 이민들의 절반에 반하여, 다른 절반들은 중서부에 농장들을 설립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오하이오주에서 평원 주들까지 시골 지역들에 무거운 존재들이 지속되었다. 어떤 독일인들은 뉴올리언스에서 떨어진 최남부 지방에 정착하였다. 텍사스[편집] 독일계 미국인 학교로 쓰였던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워렌버거 하우스 텍사스주는 갤버스턴과 인디애놀라를 통하여 들어와 양 타운의 농장으로 오고, 후의 더 많은 이민들이 휴스턴 같은 도시들에서 빠르게 공업적 직업들을 가진 많은 독일인들을 끌어들였다. 밀워키에서 같이 휴스턴의 독일인들은 양조업을 지었다. 1920년대 안으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첫 세대는 화학과 석유 산업으로 이동해 들어갔다. 1850년대에 텍사스는 약 2만명의 독일계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니폼 블록을 형성하지 않았으나, 아주 몇몇 안되는 귀족들이나 상중류 클래스의 비지니스맨들을 제외하고는 지리적 지역들과 유럽인 사회의 모든 부문들로부터 높게 다양하고 비겼다.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편집] 전통[편집] 러시아에서 온 독일인들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착자들의 가장 전통적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제국을 통하여 많은 세대들을 살아온 독일인들이었으나 특히 볼가 강 유역과 현재 우크라이나에 속하는 크림 반도 근처에 살았다. 그들의 조상들은 1762년과 1763년 예카테리나 대제에 의하여 초대를 받아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세계에서 왔으며, 러시아의 시골 지역에 정착하여 더 진보한 독일식 농업 방법들을 소개하였다. 양심적 병역거부[편집]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인 메노나이트들은 19세기에 러시아 정부의 양심적 병역거부 탄압때문에1900년에 대략 10만 명이 이민을 떠나 주로 다코타 지방,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에 정착하였다. 노스다코타주의 남부중앙부는 "독일-러시아의 삼각형"으로 알려졌다. 작은 수들은 서부로 멀리 이주하여 카우보이와 목장주같은 직업을 찾았다. 부정적으로 차르에 의하여 그들의 권리들의 폭력과 문화적 박해에 의한 영향으로 미국 중서부의 북부에 정착한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은 러시아계 미국인들로부터 갈라진 학대받는 민족으로 자신을 보았고, 독일 땅으로부터 이민을 온 독일계 미국인으로부터 아주 다른 경험을 겪어 자신들의 독일어와 문화를 유지한 빈틈없는 공동체들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큰 가족들을 키웠고, 독일식 교회들을 지어 자신들의 시체를 특유의 묘지들에 안장하는 데 주형의 철 무덤 묘석을 이용하였으며 독일 교회 찬송가를 부르는 합창단을 창조하였다. 많은 농부들은 아직도 대평원 상부에서 나는 주요 농작물 사탕무에 전문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들의 신분은 반독 감정에 의하여 도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공공적과 공식적 일들에서 영어와 함께 쓰이던 독일어가 심각한 거절에 놓였다. 오늘날 독일어는 영어를 우세하게 사용한 대평원 주들의 북부에 사는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과 함께 주로 노래부르는 단체들과 방법들을 통하여 보존되었다. 독일어는 다코타 지방에서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로 남아있다. 자신들의 언어 손해에 불구하고 그들은 뚜렷하게 남아 미국 서부에 오래가는 감독을 남겼다. 남북 전쟁[편집] 독일계 미국인들 사이에 감정은 특히 포티에이터들 사이에 반노예주의였다. 수십만명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남북 전쟁에서 북군을 위하여 싸우는 데 지원되었다. 독일인들은 남북 전쟁에 참전하는 데 가장 큰 이민 단체들이었으며, 17만 6천명 이상의 미국 군인들이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인들 사이에 인기있던 북군 사령관 프란츠 지겔 소령은 "지겔과 함께 싸움"에 입대하는 데 주장된 많은 독일 이민들과 함께 북군의 최고 계급 독일인 사령관이었다. 4명의 독일인들 중에 1명이 전 독일인 연대에서 싸웠어도 그들은 독일 군인의 공동적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펜실베이니아주는 5개, 뉴욕주는 11개, 오하이오주는 6개의 독일인 연대들을 주둔하였다. 농장들[편집] 많은 농부들을 끌어들이는 데 유용한 큰 토지 승인들과 함께 서부 철도들은 함부르크와 다른 독일의 도시들에 대리인들을 세워 값이 싼 교통과 쉬운 기간들에 농장지의 판매들을 약속하였다. 예를 들어 샌타페이 철도는 이민을 위하여 자신들의 감독관을 기용하였고 30만 에이커(1,200 제곱 킬로미터) 이상을 독일어 사용자 농부들에게 팔았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독일계 미국인들은 농부들이 되는 데 높은 흥미를 보였고 대지에 자신들의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을 지켰다. 그들이 운영하는 데 이득들이 필요하였을 때에 그들은 이득들을 가족의 지속을 유지하는 데 연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위험을 반대하는 전략들을 사용하여 조심스럽게 가족에서 대지를 지키는 데 자신들의 상속을 계획세웠다. 그들의 공동체들은 더 작은 평균의 농장 크기, 더 위대한 동등권, 적은 부재 소유권과 더 위대한 지리적 인내력을 보였다. 정치[편집] 노동운동[편집] 19세기 후반의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한 시카고 총파업이 있었다. 당시 경찰에서는 노동자들을 살상함에 항의하려고 노동자들이 헤이마켓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때 폭탄테러가 일어나 경찰과 노동자들사이의 싸움이 일어나자 자본가들과 결탁한 지배 계급들은 노동자들이 경찰을 살해했다고 조작하여 8명의 노동운동가들을 사법살인한 헤이마켓 사건이 일어났다.[22]이때 8명의 피고인들 중에 6명이 독일인이었고, 독일인들은 초기 미국 노동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선거[편집] 상대적으로 몇몇의 독일계 미국인들이 사무실을 보유하였으나 남자들이 한번 시민들이 되는 데 투표하였다. 정통으로서 프로테스탄트와 유대인들은 공화당 편에 들었고 가톨릭 교도들은 강하게 민주당을 성원하였다. 비밀 투표에서 금지령이 있을 때에 독일인들은 그것에 대항하는 데 고체적으로 투표하였다. 그들은 강하게 금주 개혁자들과 많은 인기당원들을 포함한 도덕적 개혁 운동가들을 불신임하였다. 독일인 공동체는 강하게 은화의 자유 주조를 반대하였고 1896년 개혁 운동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 무겁게 대항하며 투표하였다. 1900년 많은 독일계 민주당원들이 자신들의 당에 복귀하여 브라이언을 위하여 투표하였는데, 아마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외교 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20세기[편집] 제1차 세계 대전과 반독 감정[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독일계 미국인들은 어쩌다 독일 제국에 너무 동정심을 가져 고발을 당하였다.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은 "외국계 미국인주의"를 비난하여 이중의 충성들이 전쟁 시기에 불가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독일을 위한 작은 소수파가 나오거나 영국인들을 비웃기 마련이었다. 비슷하게 하버드 대학교의 정신과 교수 휴고 뮨스터버그는 미국과 독일 사이의 중재에 자신의 노력들을 떨어뜨려 독일의 이유 뒤로 던져버렸다. 법무부는 모든 독일 외국인들의 명단을 준비하는 데 시도하여 그들의 대략 48만 명을 세워 4천 명 이상은 1917~18년 사이에 투옥되었다. 변증은 독일을 위한 스파이와 독일의 전쟁 수고를 보증함을 포함하였다. 수천명은 자신들의 충성을 보이는 데 전쟁 보증금을 사는 데 강요되었다. 적십자는 파괴행위의 위협에 가입으로부터 독일인의 성을 가진 개인들을 제외하였다. 한명은 반란자에 의하여 살인되었는 데, 일리노이주 콜린스빌에서 독일 출신의 로버트 프라거가 간첩으로서 감옥으로부터 끌려나와 린치당하였다. 시카고에서 프레더릭 스톡은 그가 자신의 귀화 문서들을 최종적으로 완성할 때까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임시적으로 사임하였다. 오케스트라단들은 바그너와 베를리오즈에 의한 음악을 되돌렸다. 신시내티에서는 공공 도서관이 자신들의 책꽂이들로부터 독일어 책들을 거두어 들이는 데 요구되었다. 독일어 이름을 진 거리들이 다시 이름을 지었다. 미시간주의 베를린은 마네(마네의 전투에서 싸운 군사들을 기념)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이오와 주에서는 1918년의 바벨 포고에서 주지사가 학교들과 공공 장소들에서 외국어들을 금지시켰다. 네브래스카 주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들에서 지시를 금지시켰으나 미국 대법원은 1923년 금지를 불법으로 규칙을 내렸다. 독일계 미국인들의 이런 전술들에 책임에서 가끔 이름들을 미국화("슈미트"에서 "스미스"로, "뮐러"에서 "밀러"로)하고, 공동 장소들, 특히 교회에서 독일어 사용을 제한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31년부터 1940년까지 11만 4천명의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는 데 노벨상 수상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그들은 유대계 독일인들이나 나치주의의 반대자들이었다. 대략 2만 5천명은 전쟁 이전의 세월 동안에 친나치 독일계 미국인 동맹의 회원들이 되었다. 독일 외국인들은 편견과 빗나간 수가 일본계 미국인들보다 정통적으로 적은 단체로서 고통을 겪은 의미였어도 전쟁 동안에 혐의와 차별의 주제였다. 1940년 외국인 등록 법령은 연방 정부와 함께 독일 시민권을 등록한 독일 출신 외국인들을 요구하여 그들의 여행과 재산 소유권을 제한시켰다. 아직도 활동적인 1798년의 외국인 적령 아래에서 미국 정부는 1940년과 1948년 사이에 1만 1천명 가까이 되는 독일 시민들을 구금하였다. "지원적 구금인"들의 알 수 없는 수는 수용소들에서 자신들의 배우자들과 부모들에게 가입하여 떠나는 데 허락되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체스터 니미츠 해군 대장과 칼 앤드루 스파츠를 포함한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정상적인 전쟁 직업을 찾았다. 그는 공화당원 웬델 윌키를 개인적 대표로 임명하였다. 독일어에 능통한 독일계 미국인들은 전쟁 시기의 지능으로 중요한 감성이었고 들은 미국을 위한 번역자와 스파이로서 근무하였다. 예로 헨리 키신저가 종군 당시에 통역관을 맡았다. 전쟁은 당시 본국에 친척들과 연락한 몇몇의 독일계 미국인 사이에 강한 친미주의 애국적 감정을 일깨웠다. 전쟁 이후의 세월들[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다시 그어진 동유럽의 경계들 안에서 100만명의 독일인들이 추방당하였다. 대부분은 독일에 재정착하였으나 다른이들은 1940년대 후반에 미국에 난민들로 들어와 자신들의 새로운 고향들에 문화적 중심지들을 설립하였다. 후에 유고슬라비아 땅(현재의 세르비아)이 된 헝가리의 도나우 강 유역에 정착 후에 언어와 풍습들을 유지해 온 독일인들, 이를테면 어떤 도나우 강의 슈바벤인들이 전쟁 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70년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에 의하여 자극된 반독 감정이 사라져갔다. 오늘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민온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다른 서유럽 이민 단체만큼 같은 특성을 나누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이유들로 온 전문인들과 학회원들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독일의 재통일 이래 독일은 오히려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보다 이민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1990년 미국 인구 조사에서 5천 8백만의 미국인들이 단독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독일계라고 주장되었다. 2005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5천만의 미국인들이 독일 계통을 가졌다고 한다. 독일계 미국인은 총 미국 인구의 17%, 히스패닉이 아닌 백인 인구의 26%를 차지한다. 독일계 미국인의 영향[편집] 뉴욕에서 열리는 슈토이벤 축제 행렬 밀워키에 있는 밀러 맥주 양조 단지 독일인들은 미국의 막대한 문화와 기술 지역들에 공헌하였다. 전 프로이센의 장교 슈토이벤 남작은 미국 독립 전쟁 동안에 미국 육군의 재결성을 이끌어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스타인웨이 앤드 선즈 피아노 제조 상사는 1853년 이민자 헨리 E. 스타인웨이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독일인 정착자들은 미국에 크리스마스 트리 전통을 가져왔다. 서부로 이동 동안에 스튜드베이커 형제는 대량의 수레들을 지었는 데, 듀센버그 형제처럼 후에 중요한 초기 자동차 제조업자가 되었다. 첫 실패적 1848년 독일 혁명으로부터 난민으로 들어온 카를 슈르츠는 영향적인 정치인이 되어 처음에 공화당에서, 후에 민주당으로 옮겨 내무 장관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베르너 폰 브라운과 페네뮌데에 있는 전 독일 V-2 로케트 기지에서 온 대부분의 일류 공학자들이 미국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미국 항공 우주국의 프로그램을 위한 로케트들은 물론 미국 군사 로케트들의 개발에 중대하게 공헌하였다. 독일 음식의 영향은 전국에 걸쳐 미국의 음식에 보였는 데, 특히 패스트리, 육류, 소시지와 맥주로 여겨진다. 햄버거, 자우어크라우트, 슈트루델(과일, 치즈 등을 밀가루 반죽으로 얇게 싸서 화덕에 구운 과자) 등이 공동적 요리이다. 독일의 빵 굽는 사람들이 비스킷의 일종인 프레첼을 소개하였다. 1850년 이래 독일인들은 맥주 양조업에 지배적인 민족으로 지내왔다. 밀워키는 한번 세계에서 가장 큰 독일 양조사들 중에 4개의 고향이었다 - 쉴리츠, 블라츠, 팝스트와 밀러. 그리고 수많은 세월에 세계에서 최고 맥주 생산 도시였다. 미국에서 현재 팔리고 있는 맥주의 절반이 A. 팝스트와 1860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버드와이저를 창립한 에베르하르트 안호이저와 아돌푸스 부슈 같은 독일 이민들에 귀착시켰다. 옥토버페스트, 독일계 미국인의 날과 슈토이벤 남작의 날 같은 독일계 미국인의 축제들이 전국을 통하여 정규적으로 열린다. 가장 큰 축제들 중의 하나는 뉴욕에서 열리는 슈토이벤 행렬이며 9월마다 매일 세 번째 토요일에 열린다. 시카고의 링컨 광장 이웃에서도 주요 해마다의 이벤트들이 열리고, 독일인 인구의 전통적 중심지 신시내티에서는 독일 외부에서 가장 큰 옥토버페스트인 "옥토버페스트 친치나티(독일어: Oktoberfest Zinzinati)"가 열린다. 밀워키에서는 해마다 열리는 독일인 축제와 함께 도시의 독일인 유산을 축제벌이는 편이다. 펜실베이니아주에 온 독일과 다른 독일어 사용 국가들에서 많은 이민들이 "앨러게니 시티"(지금의 피츠버그 시의 노스 사이드)로 알려진 지역에 정착하였다. 많은 독일인들이 도착하면서 지역이 "도이치타운"으로 알려졌다. 도이치타운 안에서와 1854년 이래 튜토니아 맨너호르는 독일 문화 전통들을 진흥과 촉진을 해왔다.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카드 게임 스카트는 위스콘신주와 텍사스주 같은 큰 독일 인구와 함께 한 미국의 지역들에서 행하고 있다. 독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도시와 타운들은 중서부에서 마저 극단적으로 흔한 편이다. 그러나 독일식 이름의 두가지 예로는 아이오와주의 베텐도프와 일리노이주의 샤움버그를 들 수 있다. 두드러진 독일계 미국인들[편집] 독일계 미국인들은 과학, 건축, 산업, 스포츠, 연예계, 신학, 정부와 군사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영향적이었다. 독일계 미국인 장군들 - 슈토이벤 남작,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존 퍼싱,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노먼 슈워츠코프는 미국 독립 전쟁, 남북 전쟁, 인디언 학살,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과 걸프 전쟁에서 미국 육군의 사령관들이었다. 닐 암스트롱 같은 다른 이들은 달에 착륙하였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프리드리히 헤커, 프레더릭 뮬렌버그, 카를 슈르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헨리 키신저 등을 포함한 유명한 정치인들이었다.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산업과 비지니스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으며, 존 D. 록펠러(스탠다드 석유 회사), 윌리엄 보잉(보잉사), 월터 크라이슬러(크라이슬러 주식회사), 프레더릭과 오거스트 듀센버그(듀센버그 자동차 주식회사), 스튜드베이커 형제(스튜드베이커 자동차 주식회사), 조지 웨스팅하우스(웨스팅하우스 전기 주식회사), 리바이 스트라우스(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 헨리 J. 하인즈(H. J. 하인즈 컴퍼니), 찰스 거스(펩시코), 제임스 L. 크래프트(크래프트 푸즈), 헨리 E. 스타인웨이(스타인웨이 앤드 선즈), 찰스 파이저(파이저 제약), 찰스 디볼드 (디볼드 닉스도프), 버나드 크로거 (크로거), 도널드 트럼프(트럼프 기업), 존 제이컵 애스터(월도프 애스터리아 호텔 앤드 리조트), 콘래드 힐튼(힐튼 호텔 앤드 리조트), 구겐하임 가(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 마커스 골드만과 새뮤얼 삭스(골드만삭스), 리먼 형제(리먼 브라더스), 허먼 홀러리스(IBM), 스티브 잡스(애플)와 에릭 슈미트(구글) 등을 포함한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 역사의 거의로 봐서 맥주 양조업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트 셸(아우구스트 셸 양조 회사), 에베르하르트 안호이저와 아돌푸스 부슈(안호이저-부슈 합동사), 아돌프 쿠어스(몬슨 쿠어스 양조 회사), 프레더릭 밀러(밀러 양조 회사), 프레더릭 팝스트(팝스트 양조 회사), 베른하르트 슈트로(슈트로 양조 회사)와 조지프 쉴리츠(조지프 쉴리츠 양조 회사) 등의 19세기 독일인 이민들에 의하여 창립된 양조사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떤 분야에서는 브루클린 교의 공학자 존 로블링과 발터 그로피우스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건축가들은 볼 수 있는 경계표들 뒤에 남겨졌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베르너 폰 브라운, 존 피터 젱거, 존 스타인벡, 조지프 와이젠바움을 포함한 다른이들은 지력의 경계표들을 세웠다. 아직도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잭 니클로스, 도리스 데이, 마를레네 디트리히, 존 덴버, 킴 베이싱어, 메릴 스트립, 샌드라 불럭, 데이비드 하셀호프 같은 다른 이들은 두드러진 선수, 배우 등이 되었다.[23] 독일계 미국인 대통령들[편집] 2명의 대통령들이 독일계 아버지를 두었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원래 독일식 철자로는 Eisenhauer이며, 어머니 쪽은 독일/스위스)와 허버트 후버(원래 독일식 철자로는 Huber인데 영어식으로 Hoover로 바꾸었다). 어머니 쪽이 독일인 혈통을 둔 대통령들로는 버락 오바마와 리처드 닉슨(그의 중앙 이름 밀하우스(Milhous)는 독일식 철자로 멜하우젠(Melhausen)이었다)이다.[24] 관련 항목[편집]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유럽계 미국인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스위스계 미국인 참조[편집] ↑ Census 2009 ACS Ancestry estimates ↑ “Regular Session 2009-2010 Senate Resolution 141 P.N. 1216”. 2015년 3월 17일에 확인함.  ↑ One Nation Under God: Religion in Contemporary American Society, p. 120. ↑ From Census Bureau, "S0201. Selected Population Profile in the United State" 2006-2008 data ↑ Zane L. Miller, "Cincinnati Germans and the Invention of an Ethnic Group", Queen City Heritage: The Journal of the Cincinnati Historical Society 42 (Fall 1984): 13-22 ↑ Bayrd Still, Milwaukee, the History of a City (1948) pp. 260-63, 299 ↑ On Illinois see, Raymond Lohne, "Team of Friends: A New Lincoln Theory and Legacy", Journal of the Illinois State Historical Society Fall/Winter2008, Vol. 101 Issue 3/4, pp 285-314 ↑ Schurz, Margarethe [Meyer] (Mrs. Carl Schurz) 1833 - 1876 ↑ “The History of Christmas”, 《Gareth Marples》, 2006년 12월 2일에 확인함  ↑ Professor Brought Christmas Tree to New England ↑ See newspaper accounts Archived 2009년 8월 5일 - 웨이백 머신 ↑ Grassl, Gary Carl (June/July 2008), “Tour of German-American Sites at James Fort, Historic Jamestown” (PDF), 《German-American Journal》 56 (3): 10, About 1% of the more than 700,000 objects catalogued by archaeologists at Jamestown so far bear words. More than 90% of these words are in German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Where it All Began - Celebrating 400 Years of Germans in America》, German Information Center, 2009년 5월 26일에 확인함 ; 《Celebration of the 400th Anniversary of the First Germans in America, April 18》, Reuters, 2008년 3월 25일, 2009년 5월 26일에 확인함 ;Jabs, Albert E. (June/July 2008), “400 Years of Germans In Jamestown” (PDF), 《German-American Journal》 56 (3): 1, 11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Gottlieb Mittleberger on Indentured Servitude Archived 2009년 2월 1일 - 웨이백 머신, Faulkner University ↑ 가 나 Conzen, Kathleen (1980), 〈Germans〉, Stephan Thernstrom, 《Harvard Encyclopedia of American Ethnic Groups》, Belknap Press, 407쪽  ↑ 가 나 Knittle, Walter Allen (1937), 《Early Eighteenth Century Palatine Emigration》, Philadelphia: Dorrance  ↑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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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bose Nixon chapter 1 (1987) 전거 통제 GND: 1027976557 BNF: cb119798805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독일계_미국인&oldid=24529852" 분류: 독일계 미국인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বাংলাCymraeg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Bahasa MelayuNederlandsNorskDeitsch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5일 (금) 20: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독일계 미국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독일계 미국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독일계 미국인German AmericansDeutschamerikaner 총인구 50,764,352 명[1][2]미국 인구에서 17.1%를 차지함. (2009) 언어 영어, 독일어 종교 기독교 (개신교 51%, 로마 가톨릭교 26% 등), 유대교 1%, 기타 16%[3] 민족계통 근연민족 독일인,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스위스계 미국인, 네덜란드계 미국인, 펜실베이니아 더치, 독일계 캐나다인 독일계 미국인(German American, 독일어: Deutschamerikaner)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인구에서 약 5천만 명, 곧 약 17%를 차지하며 미국에서 가장 큰 자기 보고된 조상 전래의 민족단이다.[4] 오하이오주, 아이오와주, 미네소타주, 위스콘신주, 네브래스카주와 다코타 지방을 포함한 중서부 지방 상류 주들이 3분의 1 이상의 가장 높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비율을 가지고 있어도 캘리포니아주, 텍사스주와 펜실베이니아주가 독일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편이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국에 의하면 독일계 미국인이 총 미국 인구의 17.1%를 차지하며, 아일랜드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잉글랜드계 미국인을 앞서 가장 큰 조상 전래의 민족 단체를 형성하였다. 역사적인 독일의 주들이 해외 식민지들을 가지지 않았고, 1680년대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에 첫 현저한 독일인 이민들이 도착하여 펜실베이니아와 뉴욕 지역에 주로 정착하였다. 독일인들의 이민은 19세기 동안에 8백만 명의 가장 큰 수로서 지속하였다. 그들은 대지의 인력과 종교적 자유에 의하여 당겨졌고, 대지의 부족과 종교적 및 정치적 압박에 의하여 유럽의 외부로 밀려났다. 미국에 도착한 많은 이들은 종교적 밑 정치적 자유를, 어떤 이들은 유럽보다 더 나은 경제적 기회들을, 다른이들은 신대륙에서 간단히 깨끗하게 시작되는 기회를 위한 길을 찾았다. 1850년 이전에 도착한 이민들은 자신들의 강한 농장 기술들이 지불할 만한 가장 생산적 대지를 찾은 농부들이었다. 1840년 후에 많은 이민들은 독일어 사용 구역 "게르마니아"가 곧 생긴 대도시들에 왔다.[5][6][7]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첫 유치원을 설립하였고,[8] 크리스마스 트리 전통을 소개하였으며,[9][10] 핫도그와 햄버거 같은 인기있는 미국식 음식들을 창설하였다.[11] 독일계 미국인들의 축하식은 전국을 통하여 열리고, 뉴욕에서 매 9월마다 세 번째 토요일에 열리는 독일계 미국인 슈토이벤 행렬식이 가장 잘 알려진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시카고, 신시내티, 밀워키, 세인트루이스와 다른 도시들에서 해마다 열리는 주요 이벤트들이 있다. 미국에 온 다른 이민들처럼 압도적인 독일인 혹은 독일계 주민들은 본질적으로 미국화되었다. 목차 1 초기 역사 1.1 식민지 시기 1.2 팔츠인들 1.3 루이지애나 1.4 남부 1.5 뉴잉글랜드 1.6 펜실베이니아 2 19세기 2.1 도시들 2.2 텍사스 2.3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 2.3.1 전통 2.3.2 양심적 병역거부 2.4 남북 전쟁 2.5 농장들 2.6 정치 2.6.1 노동운동 2.6.2 선거 3 20세기 3.1 제1차 세계 대전과 반독 감정 3.2 제2차 세계 대전 3.3 전쟁 이후의 세월들 4 독일계 미국인의 영향 5 두드러진 독일계 미국인들 5.1 독일계 미국인 대통령들 6 관련 항목 7 참조 초기 역사[편집] 식민지 시기[편집] 존 제이컵 애스터는 미국에서 첫 애스터 가문 왕조와 첫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모피 무역과 뉴욕의 부동산 업계에서 부를 쌓았다. 1607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도착한 첫 영국인 정착자들은 첫 독일계 미국인 요하네스 플라이셔 박사에 의하여 동행되었다. 플라이셔 박사는 1608년 5명의 유리 제조업자들과 3명의 목공인들 혹은 가옥 건축가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12] 미국이 된 첫 영구적 독일인 정착은 펜실베이니아주 저먼타운이었으며, 1683년 10월 6일 필라델피아 근처에서 창립되었다. 독일인들의 큰 수들이 1680년대부터 1760년대까지 펜실베이니아가 호의적 목적지로 되면서 이주하였다. 그들은 여러 이유들로 아메리카에 이주하였는데, 그 예를 들면, 추천 도매상들이 중유럽에서 농장 소유를 위한 악화된 기회들에 연루, 어떤 종교 단체들의 박해와 군사적 징병제, 인력 도매상들이 더 나은 경제적 상태(특히 소유적 대지에 기회와 종교적 자유)이다. 가끔 이민자들은 계약적 하인들로서 세월들의 기간을 위하여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면서 자신들의 통행을 위하여 돈을 냈다.[13] 펜실베이니아의 큰 구역들과 뉴욕의 상부는 독일인들을 끌어들였다. 대부분은 루터교와 독일 개혁 교회 신자들이었으며, 많은 이들은 모라비아 교도들과 메노나이트 교도들 같은 작은 종교적 종파에 속하였다. 독일의 로마 가톨릭교회 교도들은 1812년 전쟁 이후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14] 팔츠인들[편집] 1709년 독일의 팔츠 지방에서 온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이 곤란의 상태들을 탈출하여 처음에 로테르담으로 갔다가, 그러고나서 런던으로 갔다. 영국의 앤 여왕은 그들에게 그녀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음식의 나쁜 품질과 전염되기 쉬운 발딘티푸스 병 등의 이유로 여행은 생존하는 데 길고 어려웠다. 많은 이민자들, 특히 어린이들이 1710년 6월 아메리카에 도달하기 전에 사망하였다.[15] 생존한 대략 2,100명의 팔츠인 이민은 식민지 시대에 아메리카로 가장 큰 단 하나의 이민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허드슨 강 유역의 봉사 캠프들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통행을 청산하였다. 1711년 안으로 7개의 마을들이 로버트 리빙스턴 영대 차지에 뉴욕 주에서 설립되었다. 1723년 독일인들은 리틀 폭포들 서부의 모호크 계곡에서 대지를 살 수 있던 첫 유럽인들이 되었다. 100개의 농가들은 버니츠필드 특허권에서 배치되었다. 1750년 안으로 독일은 모호크 강 양쪽에 12 마일(19 킬로미터)의 제거를 차지하였다. 흙이 가장 좋았으며, 거의 돌과 함께 500척의 집들이 지어졌고 그 지방은 인디언 습격의 원한에서 번영하였다. 허키머는 오랫동안 "저먼플랫츠"라고 알려지면서 지방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독일인의 정착지들이었다.[15] 초기 독일 팔츠 이민들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미국에서 발행의 자유를 위하여 식민주의적 뉴욕에서 싸움을 이끈 편집자 존 피터 젱거였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에 바덴에서 건너온 후기의 이민 존 제이컵 애스터는 뉴욕에서 자신의 모피 무역과 부동산 투자들로부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루이지애나[편집] 미시시피 회사는 1721년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 수천명의 독일인 개척자들을 정착시켰다. 정착은 독일인들, 최근에 프랑스의 규칙 아래에 떨어진 알자스 지방의 독일인들과 스위스인들을 이민가는 데 용기를 주었다. 알자스 지방은 30년 전쟁의 더 위대한 문맥 안으로 프랑스에 팔렸다. 예수회의 샤를르부아는 캐나다에서 루이지애나로 갔다. 그의 편지는 "팔츠 선제후국에서 자라온 이 9,000명의 독일인들은 아칸소에 있었다. 통틀어서 독일인들은 아칸소를 떠났다. 그들은 뉴올리언스로 가서 유럽에 통행을 요청하였다. 미시시피 회사는 뉴올리언스에서 위로 약 25 마일(40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미시시피 강의 오른쪽 둑에 있는 부유한 대지들을 독일인들에게 주었다. 지역은 이제 '저먼 코스트'로 알려졌다."라고 써졌다. 독일인들의 번영하는 인구가 저먼 코스트로 알려진 뉴올리언스로부터 강 상류에 살았다. 그들은 J. 하노 다일러의 "루이지애나:독일인 정착자들을 위한 집" 같은 팜플렛들을 통하여 끌어당겨졌다.[16] 남부[편집] 1714년과 1717년 독일 식민주의자들의 2개의 방향들은 현재 버지니아주 컬페퍼 근처에 자리잡은 저매너라 불리는 버지니아의 큰 식민지를 설립하였다.[17]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독일의 모라비아 교도들은 1753년 노스캐롤라이나의 피드먼트에서 그랜빌 경으로부터 10만 에이커(400 제곱 킬로미터) 가까운 펜실베이니아 주 베들레헴 주위에 살았다. 그들은 특히 현재 윈스턴-세일럼 주위에 있는 지역에서 그 지대에 독일인 정착지들을 설립하였다. 그들을 또한 1759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처음으로 계획된 모라비아 교도 공동체인 "통행의 집"으로 해석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베서버라의 과도적인 정착지를 창립하였다. 곧 후로 1766년에 독일의 모라비아 교도들은 세일럼의 타운과 1772년 초기의 여성 대학 세일럼 칼리지를 세웠다. 독일 이민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14]의 더치 포크 지역과 텍사스주, 특히 오스틴 지역을 포함한 미국 남부의 다른 지역들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독일의 유대인, 즉 유대계 독일인들은 19세기를 통하여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남부에 이민을 갔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이 가끔 지방적 상인, 가축 거래인, 농업적 상품 교역인, 은행업자와 비지니스 소유인들로 일하였던 도시들과 타운들을 포함한 남부의 많은 지역들에서 작은 유대계 독일인 공동체들을 형성하였다. 앨라배마주에서 자신의 동생과 함께 리먼 브라더스를 창립한 핸리 리먼은 부분적으로 유대계 독일인 이민들 중의 두드러진 예이다. 유대계 독일인들은 미국에서 첫 개혁적인 시나고그를 설립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같은 도시들에 정착하였다. 유대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시나고그들을 지은 다른 남부의 도시들 등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뉴잉글랜드[편집] 1742년과 1753년 사이에 거칠게 1천명의 독일인들이 매사추세츠주 브로드 베이(현재의 메인주 월도보로)에 정착하였다. 그들의 집들이 불타고 그들의 이웃들이 인디언들에 의하여 살인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간 후에 많은 식민주의자들이 보스턴, 노바스코샤와 노스캐롤라이나로 도망갔다. 남아있던 독일인들은 농사에 생존하기 힘든 것을 찾아냈고 결국 해운업과 어업으로 돌려졌다.[18] 펜실베이니아[편집] 1725년과 1775년 사이에 무임 도항 이주자들과 개약적 하인들로서 도착한 이민들과 함께 펜실베이니아로 독일인 이민의 형세가 팽창하였다. 1775년 안으로 독일인들은 펜실베이니아 주의 대략 3분의 1을 구성하였다. 독일인 농부들은 그들의 높은 생산적 동물 경자과 농업적 실습들로 명성을 얻었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후에 미국 독립 혁명을 지지한 입법부의 통제를 가진 퀘이커 교도들이 이끄는 연합에 가입한 1740년까지 정통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이럼에 불구하고, 많은 독일인 정착자들은 아마 그들이 자신들의 왕립 대지 양도가 새로운 공화국 정부에 의하여 가져갈 것이라는 이유 혹은 영국인들에게 충성이 자유적 사회에 사는 기회를 마련한 독일 군주 정체라는 이유로 독립 혁명 동안에 영국당원들이었다.[19] 루터교, 개혁 교회, 메노나이트, 아미시파와 다른 종파들을 포함한 독일인들은 강한 음악적 문화와 함께 부유한 종교적 생활을 개발하였다. 수집적으로 그들은 펜실베이니아 더치로 알려지게 되었다.[20][21] 1810년대 이전에는 펜실베이니아에 약간의 독일인 가톨릭 교도들이 있었다. 자동차와 수레 제조업자들의 조상들 스튜드베이커 형제가 1736년 단검으로 유명한 졸링겐으로부터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하였다. 그들의 실력들과 함께 그들은 서부로 향하는 변경 개척자들을 싣는 수레들을 만들었고, 그들의 대포들은 남북 전쟁에서 포병들과 함께 한 북군들에게 마련되었으며 그들의 자동차 회사는 미국에서 가장 큰 회사들 중에 하나가 되어 육군의 전쟁 노력과 산업적 창립에서 요소였다. 미국 독립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식민지군에 대항하는 데 어떤 헤센군들을 모집하는 데 독일의 왕자들과 함께 협정들을 만들었다. 대다수는 헤센 대공국에서 왔다. 많은이들은 영구적으로 미국에 정착한 어떤이들의 농장들에서 포로들이 되었다. 1790년 미국 인구 조사로 봐서, 역사가들은 독일인들이 미국 백인 인구들의 9% 가까이 차지한다고 견적하였다. 19세기[편집] 1820년과 제1차 세계 대전 사이에 6백만 명 가까이 되는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시기 동안에 들어오는 독일 이민들의 가장 큰 흐름이 생겼다. 1840년부터 1880년까지 그들은 이민 집단 중에 가장 컸다. 독일의 주들에서 일어난 1848년 혁명에 이어서 포티에이터스라고 알려진 정치적 난민들의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저널리스트, 정치인, 전문 직업인들을 포함한다. 현명한 포티에이터스는 헨리 빌라드와 카를 슈르츠를 포함한다. 도시들[편집] 1872년 독일인의 인구 분포를 보이는 미국의 지도 밀워키,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뉴욕과 볼티모어 같은 도시들은 독일인 이민들의 호의적인 목적지들이었다. 1900년 안으로 클리블랜드, 밀워키, 호보컨과 신시내티의 인구들은 모두 40% 이상이 독일계 미국인들이었다. 1910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독일계 미국인의 비율이 57%를 차지하면서 아이오와주의 듀부크와 대번포트는 더 큰 비율을 가졌다. 인디애나주 포트 웨인 같은 다른 북부 도시들은 독일계 미국인들이 인구의 30% 이하를 차지한다. 1850년경에 미시간주 앤아버와 그 주위에는 슈바벤 이민들이 정착하였다. 신시내티의 "오버 더 라인" 구역, 세인트루이스 남부의 "더치타운"과 콜럼버스의 "저먼 빌리지" 같이 많은 그들의 인구 집중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암시한 특유의 이름들을 취득하였다. 가장 좋아하는 목적지는 "독일인들의 아테네"로 알려진 밀워키였다. 이전 국가에서 정치 훈련을 받은 근본적인 독일인들이 이 도시의 사회주의 정치들을 지배하였다. 많은 중개업자들이 맥주 양조업을 창립하는 동안에 능력있는 근로자들은 많은 기능들을 지배하였다. 도시들에 정착한 독일인 이민들의 절반에 반하여, 다른 절반들은 중서부에 농장들을 설립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오하이오주에서 평원 주들까지 시골 지역들에 무거운 존재들이 지속되었다. 어떤 독일인들은 뉴올리언스에서 떨어진 최남부 지방에 정착하였다. 텍사스[편집] 독일계 미국인 학교로 쓰였던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워렌버거 하우스 텍사스주는 갤버스턴과 인디애놀라를 통하여 들어와 양 타운의 농장으로 오고, 후의 더 많은 이민들이 휴스턴 같은 도시들에서 빠르게 공업적 직업들을 가진 많은 독일인들을 끌어들였다. 밀워키에서 같이 휴스턴의 독일인들은 양조업을 지었다. 1920년대 안으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첫 세대는 화학과 석유 산업으로 이동해 들어갔다. 1850년대에 텍사스는 약 2만명의 독일계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니폼 블록을 형성하지 않았으나, 아주 몇몇 안되는 귀족들이나 상중류 클래스의 비지니스맨들을 제외하고는 지리적 지역들과 유럽인 사회의 모든 부문들로부터 높게 다양하고 비겼다.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편집] 전통[편집] 러시아에서 온 독일인들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착자들의 가장 전통적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제국을 통하여 많은 세대들을 살아온 독일인들이었으나 특히 볼가 강 유역과 현재 우크라이나에 속하는 크림 반도 근처에 살았다. 그들의 조상들은 1762년과 1763년 예카테리나 대제에 의하여 초대를 받아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세계에서 왔으며, 러시아의 시골 지역에 정착하여 더 진보한 독일식 농업 방법들을 소개하였다. 양심적 병역거부[편집]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인 메노나이트들은 19세기에 러시아 정부의 양심적 병역거부 탄압때문에1900년에 대략 10만 명이 이민을 떠나 주로 다코타 지방,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에 정착하였다. 노스다코타주의 남부중앙부는 "독일-러시아의 삼각형"으로 알려졌다. 작은 수들은 서부로 멀리 이주하여 카우보이와 목장주같은 직업을 찾았다. 부정적으로 차르에 의하여 그들의 권리들의 폭력과 문화적 박해에 의한 영향으로 미국 중서부의 북부에 정착한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은 러시아계 미국인들로부터 갈라진 학대받는 민족으로 자신을 보았고, 독일 땅으로부터 이민을 온 독일계 미국인으로부터 아주 다른 경험을 겪어 자신들의 독일어와 문화를 유지한 빈틈없는 공동체들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큰 가족들을 키웠고, 독일식 교회들을 지어 자신들의 시체를 특유의 묘지들에 안장하는 데 주형의 철 무덤 묘석을 이용하였으며 독일 교회 찬송가를 부르는 합창단을 창조하였다. 많은 농부들은 아직도 대평원 상부에서 나는 주요 농작물 사탕무에 전문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들의 신분은 반독 감정에 의하여 도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공공적과 공식적 일들에서 영어와 함께 쓰이던 독일어가 심각한 거절에 놓였다. 오늘날 독일어는 영어를 우세하게 사용한 대평원 주들의 북부에 사는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과 함께 주로 노래부르는 단체들과 방법들을 통하여 보존되었다. 독일어는 다코타 지방에서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로 남아있다. 자신들의 언어 손해에 불구하고 그들은 뚜렷하게 남아 미국 서부에 오래가는 감독을 남겼다. 남북 전쟁[편집] 독일계 미국인들 사이에 감정은 특히 포티에이터들 사이에 반노예주의였다. 수십만명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남북 전쟁에서 북군을 위하여 싸우는 데 지원되었다. 독일인들은 남북 전쟁에 참전하는 데 가장 큰 이민 단체들이었으며, 17만 6천명 이상의 미국 군인들이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인들 사이에 인기있던 북군 사령관 프란츠 지겔 소령은 "지겔과 함께 싸움"에 입대하는 데 주장된 많은 독일 이민들과 함께 북군의 최고 계급 독일인 사령관이었다. 4명의 독일인들 중에 1명이 전 독일인 연대에서 싸웠어도 그들은 독일 군인의 공동적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펜실베이니아주는 5개, 뉴욕주는 11개, 오하이오주는 6개의 독일인 연대들을 주둔하였다. 농장들[편집] 많은 농부들을 끌어들이는 데 유용한 큰 토지 승인들과 함께 서부 철도들은 함부르크와 다른 독일의 도시들에 대리인들을 세워 값이 싼 교통과 쉬운 기간들에 농장지의 판매들을 약속하였다. 예를 들어 샌타페이 철도는 이민을 위하여 자신들의 감독관을 기용하였고 30만 에이커(1,200 제곱 킬로미터) 이상을 독일어 사용자 농부들에게 팔았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독일계 미국인들은 농부들이 되는 데 높은 흥미를 보였고 대지에 자신들의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을 지켰다. 그들이 운영하는 데 이득들이 필요하였을 때에 그들은 이득들을 가족의 지속을 유지하는 데 연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위험을 반대하는 전략들을 사용하여 조심스럽게 가족에서 대지를 지키는 데 자신들의 상속을 계획세웠다. 그들의 공동체들은 더 작은 평균의 농장 크기, 더 위대한 동등권, 적은 부재 소유권과 더 위대한 지리적 인내력을 보였다. 정치[편집] 노동운동[편집] 19세기 후반의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한 시카고 총파업이 있었다. 당시 경찰에서는 노동자들을 살상함에 항의하려고 노동자들이 헤이마켓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때 폭탄테러가 일어나 경찰과 노동자들사이의 싸움이 일어나자 자본가들과 결탁한 지배 계급들은 노동자들이 경찰을 살해했다고 조작하여 8명의 노동운동가들을 사법살인한 헤이마켓 사건이 일어났다.[22]이때 8명의 피고인들 중에 6명이 독일인이었고, 독일인들은 초기 미국 노동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선거[편집] 상대적으로 몇몇의 독일계 미국인들이 사무실을 보유하였으나 남자들이 한번 시민들이 되는 데 투표하였다. 정통으로서 프로테스탄트와 유대인들은 공화당 편에 들었고 가톨릭 교도들은 강하게 민주당을 성원하였다. 비밀 투표에서 금지령이 있을 때에 독일인들은 그것에 대항하는 데 고체적으로 투표하였다. 그들은 강하게 금주 개혁자들과 많은 인기당원들을 포함한 도덕적 개혁 운동가들을 불신임하였다. 독일인 공동체는 강하게 은화의 자유 주조를 반대하였고 1896년 개혁 운동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 무겁게 대항하며 투표하였다. 1900년 많은 독일계 민주당원들이 자신들의 당에 복귀하여 브라이언을 위하여 투표하였는데, 아마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외교 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20세기[편집] 제1차 세계 대전과 반독 감정[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독일계 미국인들은 어쩌다 독일 제국에 너무 동정심을 가져 고발을 당하였다.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은 "외국계 미국인주의"를 비난하여 이중의 충성들이 전쟁 시기에 불가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독일을 위한 작은 소수파가 나오거나 영국인들을 비웃기 마련이었다. 비슷하게 하버드 대학교의 정신과 교수 휴고 뮨스터버그는 미국과 독일 사이의 중재에 자신의 노력들을 떨어뜨려 독일의 이유 뒤로 던져버렸다. 법무부는 모든 독일 외국인들의 명단을 준비하는 데 시도하여 그들의 대략 48만 명을 세워 4천 명 이상은 1917~18년 사이에 투옥되었다. 변증은 독일을 위한 스파이와 독일의 전쟁 수고를 보증함을 포함하였다. 수천명은 자신들의 충성을 보이는 데 전쟁 보증금을 사는 데 강요되었다. 적십자는 파괴행위의 위협에 가입으로부터 독일인의 성을 가진 개인들을 제외하였다. 한명은 반란자에 의하여 살인되었는 데, 일리노이주 콜린스빌에서 독일 출신의 로버트 프라거가 간첩으로서 감옥으로부터 끌려나와 린치당하였다. 시카고에서 프레더릭 스톡은 그가 자신의 귀화 문서들을 최종적으로 완성할 때까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임시적으로 사임하였다. 오케스트라단들은 바그너와 베를리오즈에 의한 음악을 되돌렸다. 신시내티에서는 공공 도서관이 자신들의 책꽂이들로부터 독일어 책들을 거두어 들이는 데 요구되었다. 독일어 이름을 진 거리들이 다시 이름을 지었다. 미시간주의 베를린은 마네(마네의 전투에서 싸운 군사들을 기념)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이오와 주에서는 1918년의 바벨 포고에서 주지사가 학교들과 공공 장소들에서 외국어들을 금지시켰다. 네브래스카 주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들에서 지시를 금지시켰으나 미국 대법원은 1923년 금지를 불법으로 규칙을 내렸다. 독일계 미국인들의 이런 전술들에 책임에서 가끔 이름들을 미국화("슈미트"에서 "스미스"로, "뮐러"에서 "밀러"로)하고, 공동 장소들, 특히 교회에서 독일어 사용을 제한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31년부터 1940년까지 11만 4천명의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는 데 노벨상 수상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그들은 유대계 독일인들이나 나치주의의 반대자들이었다. 대략 2만 5천명은 전쟁 이전의 세월 동안에 친나치 독일계 미국인 동맹의 회원들이 되었다. 독일 외국인들은 편견과 빗나간 수가 일본계 미국인들보다 정통적으로 적은 단체로서 고통을 겪은 의미였어도 전쟁 동안에 혐의와 차별의 주제였다. 1940년 외국인 등록 법령은 연방 정부와 함께 독일 시민권을 등록한 독일 출신 외국인들을 요구하여 그들의 여행과 재산 소유권을 제한시켰다. 아직도 활동적인 1798년의 외국인 적령 아래에서 미국 정부는 1940년과 1948년 사이에 1만 1천명 가까이 되는 독일 시민들을 구금하였다. "지원적 구금인"들의 알 수 없는 수는 수용소들에서 자신들의 배우자들과 부모들에게 가입하여 떠나는 데 허락되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체스터 니미츠 해군 대장과 칼 앤드루 스파츠를 포함한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정상적인 전쟁 직업을 찾았다. 그는 공화당원 웬델 윌키를 개인적 대표로 임명하였다. 독일어에 능통한 독일계 미국인들은 전쟁 시기의 지능으로 중요한 감성이었고 들은 미국을 위한 번역자와 스파이로서 근무하였다. 예로 헨리 키신저가 종군 당시에 통역관을 맡았다. 전쟁은 당시 본국에 친척들과 연락한 몇몇의 독일계 미국인 사이에 강한 친미주의 애국적 감정을 일깨웠다. 전쟁 이후의 세월들[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다시 그어진 동유럽의 경계들 안에서 100만명의 독일인들이 추방당하였다. 대부분은 독일에 재정착하였으나 다른이들은 1940년대 후반에 미국에 난민들로 들어와 자신들의 새로운 고향들에 문화적 중심지들을 설립하였다. 후에 유고슬라비아 땅(현재의 세르비아)이 된 헝가리의 도나우 강 유역에 정착 후에 언어와 풍습들을 유지해 온 독일인들, 이를테면 어떤 도나우 강의 슈바벤인들이 전쟁 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70년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에 의하여 자극된 반독 감정이 사라져갔다. 오늘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민온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다른 서유럽 이민 단체만큼 같은 특성을 나누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이유들로 온 전문인들과 학회원들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독일의 재통일 이래 독일은 오히려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보다 이민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1990년 미국 인구 조사에서 5천 8백만의 미국인들이 단독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독일계라고 주장되었다. 2005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5천만의 미국인들이 독일 계통을 가졌다고 한다. 독일계 미국인은 총 미국 인구의 17%, 히스패닉이 아닌 백인 인구의 26%를 차지한다. 독일계 미국인의 영향[편집] 뉴욕에서 열리는 슈토이벤 축제 행렬 밀워키에 있는 밀러 맥주 양조 단지 독일인들은 미국의 막대한 문화와 기술 지역들에 공헌하였다. 전 프로이센의 장교 슈토이벤 남작은 미국 독립 전쟁 동안에 미국 육군의 재결성을 이끌어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스타인웨이 앤드 선즈 피아노 제조 상사는 1853년 이민자 헨리 E. 스타인웨이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독일인 정착자들은 미국에 크리스마스 트리 전통을 가져왔다. 서부로 이동 동안에 스튜드베이커 형제는 대량의 수레들을 지었는 데, 듀센버그 형제처럼 후에 중요한 초기 자동차 제조업자가 되었다. 첫 실패적 1848년 독일 혁명으로부터 난민으로 들어온 카를 슈르츠는 영향적인 정치인이 되어 처음에 공화당에서, 후에 민주당으로 옮겨 내무 장관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베르너 폰 브라운과 페네뮌데에 있는 전 독일 V-2 로케트 기지에서 온 대부분의 일류 공학자들이 미국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미국 항공 우주국의 프로그램을 위한 로케트들은 물론 미국 군사 로케트들의 개발에 중대하게 공헌하였다. 독일 음식의 영향은 전국에 걸쳐 미국의 음식에 보였는 데, 특히 패스트리, 육류, 소시지와 맥주로 여겨진다. 햄버거, 자우어크라우트, 슈트루델(과일, 치즈 등을 밀가루 반죽으로 얇게 싸서 화덕에 구운 과자) 등이 공동적 요리이다. 독일의 빵 굽는 사람들이 비스킷의 일종인 프레첼을 소개하였다. 1850년 이래 독일인들은 맥주 양조업에 지배적인 민족으로 지내왔다. 밀워키는 한번 세계에서 가장 큰 독일 양조사들 중에 4개의 고향이었다 - 쉴리츠, 블라츠, 팝스트와 밀러. 그리고 수많은 세월에 세계에서 최고 맥주 생산 도시였다. 미국에서 현재 팔리고 있는 맥주의 절반이 A. 팝스트와 1860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버드와이저를 창립한 에베르하르트 안호이저와 아돌푸스 부슈 같은 독일 이민들에 귀착시켰다. 옥토버페스트, 독일계 미국인의 날과 슈토이벤 남작의 날 같은 독일계 미국인의 축제들이 전국을 통하여 정규적으로 열린다. 가장 큰 축제들 중의 하나는 뉴욕에서 열리는 슈토이벤 행렬이며 9월마다 매일 세 번째 토요일에 열린다. 시카고의 링컨 광장 이웃에서도 주요 해마다의 이벤트들이 열리고, 독일인 인구의 전통적 중심지 신시내티에서는 독일 외부에서 가장 큰 옥토버페스트인 "옥토버페스트 친치나티(독일어: Oktoberfest Zinzinati)"가 열린다. 밀워키에서는 해마다 열리는 독일인 축제와 함께 도시의 독일인 유산을 축제벌이는 편이다. 펜실베이니아주에 온 독일과 다른 독일어 사용 국가들에서 많은 이민들이 "앨러게니 시티"(지금의 피츠버그 시의 노스 사이드)로 알려진 지역에 정착하였다. 많은 독일인들이 도착하면서 지역이 "도이치타운"으로 알려졌다. 도이치타운 안에서와 1854년 이래 튜토니아 맨너호르는 독일 문화 전통들을 진흥과 촉진을 해왔다.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카드 게임 스카트는 위스콘신주와 텍사스주 같은 큰 독일 인구와 함께 한 미국의 지역들에서 행하고 있다. 독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도시와 타운들은 중서부에서 마저 극단적으로 흔한 편이다. 그러나 독일식 이름의 두가지 예로는 아이오와주의 베텐도프와 일리노이주의 샤움버그를 들 수 있다. 두드러진 독일계 미국인들[편집] 독일계 미국인들은 과학, 건축, 산업, 스포츠, 연예계, 신학, 정부와 군사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영향적이었다. 독일계 미국인 장군들 - 슈토이벤 남작,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존 퍼싱,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노먼 슈워츠코프는 미국 독립 전쟁, 남북 전쟁, 인디언 학살,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과 걸프 전쟁에서 미국 육군의 사령관들이었다. 닐 암스트롱 같은 다른 이들은 달에 착륙하였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프리드리히 헤커, 프레더릭 뮬렌버그, 카를 슈르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헨리 키신저 등을 포함한 유명한 정치인들이었다.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산업과 비지니스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으며, 존 D. 록펠러(스탠다드 석유 회사), 윌리엄 보잉(보잉사), 월터 크라이슬러(크라이슬러 주식회사), 프레더릭과 오거스트 듀센버그(듀센버그 자동차 주식회사), 스튜드베이커 형제(스튜드베이커 자동차 주식회사), 조지 웨스팅하우스(웨스팅하우스 전기 주식회사), 리바이 스트라우스(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 헨리 J. 하인즈(H. J. 하인즈 컴퍼니), 찰스 거스(펩시코), 제임스 L. 크래프트(크래프트 푸즈), 헨리 E. 스타인웨이(스타인웨이 앤드 선즈), 찰스 파이저(파이저 제약), 찰스 디볼드 (디볼드 닉스도프), 버나드 크로거 (크로거), 도널드 트럼프(트럼프 기업), 존 제이컵 애스터(월도프 애스터리아 호텔 앤드 리조트), 콘래드 힐튼(힐튼 호텔 앤드 리조트), 구겐하임 가(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 마커스 골드만과 새뮤얼 삭스(골드만삭스), 리먼 형제(리먼 브라더스), 허먼 홀러리스(IBM), 스티브 잡스(애플)와 에릭 슈미트(구글) 등을 포함한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 역사의 거의로 봐서 맥주 양조업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트 셸(아우구스트 셸 양조 회사), 에베르하르트 안호이저와 아돌푸스 부슈(안호이저-부슈 합동사), 아돌프 쿠어스(몬슨 쿠어스 양조 회사), 프레더릭 밀러(밀러 양조 회사), 프레더릭 팝스트(팝스트 양조 회사), 베른하르트 슈트로(슈트로 양조 회사)와 조지프 쉴리츠(조지프 쉴리츠 양조 회사) 등의 19세기 독일인 이민들에 의하여 창립된 양조사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떤 분야에서는 브루클린 교의 공학자 존 로블링과 발터 그로피우스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건축가들은 볼 수 있는 경계표들 뒤에 남겨졌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베르너 폰 브라운, 존 피터 젱거, 존 스타인벡, 조지프 와이젠바움을 포함한 다른이들은 지력의 경계표들을 세웠다. 아직도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잭 니클로스, 도리스 데이, 마를레네 디트리히, 존 덴버, 킴 베이싱어, 메릴 스트립, 샌드라 불럭, 데이비드 하셀호프 같은 다른 이들은 두드러진 선수, 배우 등이 되었다.[23] 독일계 미국인 대통령들[편집] 2명의 대통령들이 독일계 아버지를 두었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원래 독일식 철자로는 Eisenhauer이며, 어머니 쪽은 독일/스위스)와 허버트 후버(원래 독일식 철자로는 Huber인데 영어식으로 Hoover로 바꾸었다). 어머니 쪽이 독일인 혈통을 둔 대통령들로는 버락 오바마와 리처드 닉슨(그의 중앙 이름 밀하우스(Milhous)는 독일식 철자로 멜하우젠(Melhausen)이었다)이다.[24] 관련 항목[편집]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유럽계 미국인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스위스계 미국인 참조[편집] ↑ Census 2009 ACS Ancestry estimates ↑ “Regular Session 2009-2010 Senate Resolution 141 P.N. 1216”. 2015년 3월 17일에 확인함.  ↑ One Nation Under God: Religion in Contemporary American Society, p. 120. ↑ From Census Bureau, "S0201. Selected Population Profile in the United State" 2006-2008 data ↑ Zane L. Miller, "Cincinnati Germans and the Invention of an Ethnic Group", Queen City Heritage: The Journal of the Cincinnati Historical Society 42 (Fall 1984): 13-22 ↑ Bayrd Still, Milwaukee, the History of a City (1948) pp. 260-63, 299 ↑ On Illinois see, Raymond Lohne, "Team of Friends: A New Lincoln Theory and Legacy", Journal of the Illinois State Historical Society Fall/Winter2008, Vol. 101 Issue 3/4, pp 285-314 ↑ Schurz, Margarethe [Meyer] (Mrs. Carl Schurz) 1833 - 1876 ↑ “The History of Christmas”, 《Gareth Marples》, 2006년 12월 2일에 확인함  ↑ Professor Brought Christmas Tree to New England ↑ See newspaper accounts Archived 2009년 8월 5일 - 웨이백 머신 ↑ Grassl, Gary Carl (June/July 2008), “Tour of German-American Sites at James Fort, Historic Jamestown” (PDF), 《German-American Journal》 56 (3): 10, About 1% of the more than 700,000 objects catalogued by archaeologists at Jamestown so far bear words. More than 90% of these words are in German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Where it All Began - Celebrating 400 Years of Germans in America》, German Information Center, 2009년 5월 26일에 확인함 ; 《Celebration of the 400th Anniversary of the First Germans in America, April 18》, Reuters, 2008년 3월 25일, 2009년 5월 26일에 확인함 ;Jabs, Albert E. (June/July 2008), “400 Years of Germans In Jamestown” (PDF), 《German-American Journal》 56 (3): 1, 11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Gottlieb Mittleberger on Indentured Servitude Archived 2009년 2월 1일 - 웨이백 머신, Faulkner University ↑ 가 나 Conzen, Kathleen (1980), 〈Germans〉, Stephan Thernstrom, 《Harvard Encyclopedia of American Ethnic Groups》, Belknap Press, 407쪽  ↑ 가 나 Knittle, Walter Allen (1937), 《Early Eighteenth Century Palatine Emigration》, Philadelphia: Dorrance  ↑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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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bose Nixon chapter 1 (1987) 전거 통제 GND: 1027976557 BNF: cb119798805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독일계_미국인&oldid=24529852" 분류: 독일계 미국인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বাংলাCymraeg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Bahasa MelayuNederlandsNorskDeitsch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5일 (금) 20: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독일계 미국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독일계 미국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독일계 미국인German AmericansDeutschamerikaner 총인구 50,764,352 명[1][2]미국 인구에서 17.1%를 차지함. (2009) 언어 영어, 독일어 종교 기독교 (개신교 51%, 로마 가톨릭교 26% 등), 유대교 1%, 기타 16%[3] 민족계통 근연민족 독일인,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스위스계 미국인, 네덜란드계 미국인, 펜실베이니아 더치, 독일계 캐나다인 독일계 미국인(German American, 독일어: Deutschamerikaner)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인구에서 약 5천만 명, 곧 약 17%를 차지하며 미국에서 가장 큰 자기 보고된 조상 전래의 민족단이다.[4] 오하이오주, 아이오와주, 미네소타주, 위스콘신주, 네브래스카주와 다코타 지방을 포함한 중서부 지방 상류 주들이 3분의 1 이상의 가장 높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비율을 가지고 있어도 캘리포니아주, 텍사스주와 펜실베이니아주가 독일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편이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국에 의하면 독일계 미국인이 총 미국 인구의 17.1%를 차지하며, 아일랜드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잉글랜드계 미국인을 앞서 가장 큰 조상 전래의 민족 단체를 형성하였다. 역사적인 독일의 주들이 해외 식민지들을 가지지 않았고, 1680년대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에 첫 현저한 독일인 이민들이 도착하여 펜실베이니아와 뉴욕 지역에 주로 정착하였다. 독일인들의 이민은 19세기 동안에 8백만 명의 가장 큰 수로서 지속하였다. 그들은 대지의 인력과 종교적 자유에 의하여 당겨졌고, 대지의 부족과 종교적 및 정치적 압박에 의하여 유럽의 외부로 밀려났다. 미국에 도착한 많은 이들은 종교적 밑 정치적 자유를, 어떤 이들은 유럽보다 더 나은 경제적 기회들을, 다른이들은 신대륙에서 간단히 깨끗하게 시작되는 기회를 위한 길을 찾았다. 1850년 이전에 도착한 이민들은 자신들의 강한 농장 기술들이 지불할 만한 가장 생산적 대지를 찾은 농부들이었다. 1840년 후에 많은 이민들은 독일어 사용 구역 "게르마니아"가 곧 생긴 대도시들에 왔다.[5][6][7]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첫 유치원을 설립하였고,[8] 크리스마스 트리 전통을 소개하였으며,[9][10] 핫도그와 햄버거 같은 인기있는 미국식 음식들을 창설하였다.[11] 독일계 미국인들의 축하식은 전국을 통하여 열리고, 뉴욕에서 매 9월마다 세 번째 토요일에 열리는 독일계 미국인 슈토이벤 행렬식이 가장 잘 알려진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시카고, 신시내티, 밀워키, 세인트루이스와 다른 도시들에서 해마다 열리는 주요 이벤트들이 있다. 미국에 온 다른 이민들처럼 압도적인 독일인 혹은 독일계 주민들은 본질적으로 미국화되었다. 목차 1 초기 역사 1.1 식민지 시기 1.2 팔츠인들 1.3 루이지애나 1.4 남부 1.5 뉴잉글랜드 1.6 펜실베이니아 2 19세기 2.1 도시들 2.2 텍사스 2.3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 2.3.1 전통 2.3.2 양심적 병역거부 2.4 남북 전쟁 2.5 농장들 2.6 정치 2.6.1 노동운동 2.6.2 선거 3 20세기 3.1 제1차 세계 대전과 반독 감정 3.2 제2차 세계 대전 3.3 전쟁 이후의 세월들 4 독일계 미국인의 영향 5 두드러진 독일계 미국인들 5.1 독일계 미국인 대통령들 6 관련 항목 7 참조 초기 역사[편집] 식민지 시기[편집] 존 제이컵 애스터는 미국에서 첫 애스터 가문 왕조와 첫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모피 무역과 뉴욕의 부동산 업계에서 부를 쌓았다. 1607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도착한 첫 영국인 정착자들은 첫 독일계 미국인 요하네스 플라이셔 박사에 의하여 동행되었다. 플라이셔 박사는 1608년 5명의 유리 제조업자들과 3명의 목공인들 혹은 가옥 건축가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12] 미국이 된 첫 영구적 독일인 정착은 펜실베이니아주 저먼타운이었으며, 1683년 10월 6일 필라델피아 근처에서 창립되었다. 독일인들의 큰 수들이 1680년대부터 1760년대까지 펜실베이니아가 호의적 목적지로 되면서 이주하였다. 그들은 여러 이유들로 아메리카에 이주하였는데, 그 예를 들면, 추천 도매상들이 중유럽에서 농장 소유를 위한 악화된 기회들에 연루, 어떤 종교 단체들의 박해와 군사적 징병제, 인력 도매상들이 더 나은 경제적 상태(특히 소유적 대지에 기회와 종교적 자유)이다. 가끔 이민자들은 계약적 하인들로서 세월들의 기간을 위하여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면서 자신들의 통행을 위하여 돈을 냈다.[13] 펜실베이니아의 큰 구역들과 뉴욕의 상부는 독일인들을 끌어들였다. 대부분은 루터교와 독일 개혁 교회 신자들이었으며, 많은 이들은 모라비아 교도들과 메노나이트 교도들 같은 작은 종교적 종파에 속하였다. 독일의 로마 가톨릭교회 교도들은 1812년 전쟁 이후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14] 팔츠인들[편집] 1709년 독일의 팔츠 지방에서 온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이 곤란의 상태들을 탈출하여 처음에 로테르담으로 갔다가, 그러고나서 런던으로 갔다. 영국의 앤 여왕은 그들에게 그녀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음식의 나쁜 품질과 전염되기 쉬운 발딘티푸스 병 등의 이유로 여행은 생존하는 데 길고 어려웠다. 많은 이민자들, 특히 어린이들이 1710년 6월 아메리카에 도달하기 전에 사망하였다.[15] 생존한 대략 2,100명의 팔츠인 이민은 식민지 시대에 아메리카로 가장 큰 단 하나의 이민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허드슨 강 유역의 봉사 캠프들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통행을 청산하였다. 1711년 안으로 7개의 마을들이 로버트 리빙스턴 영대 차지에 뉴욕 주에서 설립되었다. 1723년 독일인들은 리틀 폭포들 서부의 모호크 계곡에서 대지를 살 수 있던 첫 유럽인들이 되었다. 100개의 농가들은 버니츠필드 특허권에서 배치되었다. 1750년 안으로 독일은 모호크 강 양쪽에 12 마일(19 킬로미터)의 제거를 차지하였다. 흙이 가장 좋았으며, 거의 돌과 함께 500척의 집들이 지어졌고 그 지방은 인디언 습격의 원한에서 번영하였다. 허키머는 오랫동안 "저먼플랫츠"라고 알려지면서 지방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독일인의 정착지들이었다.[15] 초기 독일 팔츠 이민들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미국에서 발행의 자유를 위하여 식민주의적 뉴욕에서 싸움을 이끈 편집자 존 피터 젱거였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에 바덴에서 건너온 후기의 이민 존 제이컵 애스터는 뉴욕에서 자신의 모피 무역과 부동산 투자들로부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루이지애나[편집] 미시시피 회사는 1721년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 수천명의 독일인 개척자들을 정착시켰다. 정착은 독일인들, 최근에 프랑스의 규칙 아래에 떨어진 알자스 지방의 독일인들과 스위스인들을 이민가는 데 용기를 주었다. 알자스 지방은 30년 전쟁의 더 위대한 문맥 안으로 프랑스에 팔렸다. 예수회의 샤를르부아는 캐나다에서 루이지애나로 갔다. 그의 편지는 "팔츠 선제후국에서 자라온 이 9,000명의 독일인들은 아칸소에 있었다. 통틀어서 독일인들은 아칸소를 떠났다. 그들은 뉴올리언스로 가서 유럽에 통행을 요청하였다. 미시시피 회사는 뉴올리언스에서 위로 약 25 마일(40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미시시피 강의 오른쪽 둑에 있는 부유한 대지들을 독일인들에게 주었다. 지역은 이제 '저먼 코스트'로 알려졌다."라고 써졌다. 독일인들의 번영하는 인구가 저먼 코스트로 알려진 뉴올리언스로부터 강 상류에 살았다. 그들은 J. 하노 다일러의 "루이지애나:독일인 정착자들을 위한 집" 같은 팜플렛들을 통하여 끌어당겨졌다.[16] 남부[편집] 1714년과 1717년 독일 식민주의자들의 2개의 방향들은 현재 버지니아주 컬페퍼 근처에 자리잡은 저매너라 불리는 버지니아의 큰 식민지를 설립하였다.[17]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독일의 모라비아 교도들은 1753년 노스캐롤라이나의 피드먼트에서 그랜빌 경으로부터 10만 에이커(400 제곱 킬로미터) 가까운 펜실베이니아 주 베들레헴 주위에 살았다. 그들은 특히 현재 윈스턴-세일럼 주위에 있는 지역에서 그 지대에 독일인 정착지들을 설립하였다. 그들을 또한 1759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처음으로 계획된 모라비아 교도 공동체인 "통행의 집"으로 해석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베서버라의 과도적인 정착지를 창립하였다. 곧 후로 1766년에 독일의 모라비아 교도들은 세일럼의 타운과 1772년 초기의 여성 대학 세일럼 칼리지를 세웠다. 독일 이민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14]의 더치 포크 지역과 텍사스주, 특히 오스틴 지역을 포함한 미국 남부의 다른 지역들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독일의 유대인, 즉 유대계 독일인들은 19세기를 통하여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남부에 이민을 갔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이 가끔 지방적 상인, 가축 거래인, 농업적 상품 교역인, 은행업자와 비지니스 소유인들로 일하였던 도시들과 타운들을 포함한 남부의 많은 지역들에서 작은 유대계 독일인 공동체들을 형성하였다. 앨라배마주에서 자신의 동생과 함께 리먼 브라더스를 창립한 핸리 리먼은 부분적으로 유대계 독일인 이민들 중의 두드러진 예이다. 유대계 독일인들은 미국에서 첫 개혁적인 시나고그를 설립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같은 도시들에 정착하였다. 유대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시나고그들을 지은 다른 남부의 도시들 등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뉴잉글랜드[편집] 1742년과 1753년 사이에 거칠게 1천명의 독일인들이 매사추세츠주 브로드 베이(현재의 메인주 월도보로)에 정착하였다. 그들의 집들이 불타고 그들의 이웃들이 인디언들에 의하여 살인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간 후에 많은 식민주의자들이 보스턴, 노바스코샤와 노스캐롤라이나로 도망갔다. 남아있던 독일인들은 농사에 생존하기 힘든 것을 찾아냈고 결국 해운업과 어업으로 돌려졌다.[18] 펜실베이니아[편집] 1725년과 1775년 사이에 무임 도항 이주자들과 개약적 하인들로서 도착한 이민들과 함께 펜실베이니아로 독일인 이민의 형세가 팽창하였다. 1775년 안으로 독일인들은 펜실베이니아 주의 대략 3분의 1을 구성하였다. 독일인 농부들은 그들의 높은 생산적 동물 경자과 농업적 실습들로 명성을 얻었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후에 미국 독립 혁명을 지지한 입법부의 통제를 가진 퀘이커 교도들이 이끄는 연합에 가입한 1740년까지 정통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이럼에 불구하고, 많은 독일인 정착자들은 아마 그들이 자신들의 왕립 대지 양도가 새로운 공화국 정부에 의하여 가져갈 것이라는 이유 혹은 영국인들에게 충성이 자유적 사회에 사는 기회를 마련한 독일 군주 정체라는 이유로 독립 혁명 동안에 영국당원들이었다.[19] 루터교, 개혁 교회, 메노나이트, 아미시파와 다른 종파들을 포함한 독일인들은 강한 음악적 문화와 함께 부유한 종교적 생활을 개발하였다. 수집적으로 그들은 펜실베이니아 더치로 알려지게 되었다.[20][21] 1810년대 이전에는 펜실베이니아에 약간의 독일인 가톨릭 교도들이 있었다. 자동차와 수레 제조업자들의 조상들 스튜드베이커 형제가 1736년 단검으로 유명한 졸링겐으로부터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하였다. 그들의 실력들과 함께 그들은 서부로 향하는 변경 개척자들을 싣는 수레들을 만들었고, 그들의 대포들은 남북 전쟁에서 포병들과 함께 한 북군들에게 마련되었으며 그들의 자동차 회사는 미국에서 가장 큰 회사들 중에 하나가 되어 육군의 전쟁 노력과 산업적 창립에서 요소였다. 미국 독립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식민지군에 대항하는 데 어떤 헤센군들을 모집하는 데 독일의 왕자들과 함께 협정들을 만들었다. 대다수는 헤센 대공국에서 왔다. 많은이들은 영구적으로 미국에 정착한 어떤이들의 농장들에서 포로들이 되었다. 1790년 미국 인구 조사로 봐서, 역사가들은 독일인들이 미국 백인 인구들의 9% 가까이 차지한다고 견적하였다. 19세기[편집] 1820년과 제1차 세계 대전 사이에 6백만 명 가까이 되는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시기 동안에 들어오는 독일 이민들의 가장 큰 흐름이 생겼다. 1840년부터 1880년까지 그들은 이민 집단 중에 가장 컸다. 독일의 주들에서 일어난 1848년 혁명에 이어서 포티에이터스라고 알려진 정치적 난민들의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저널리스트, 정치인, 전문 직업인들을 포함한다. 현명한 포티에이터스는 헨리 빌라드와 카를 슈르츠를 포함한다. 도시들[편집] 1872년 독일인의 인구 분포를 보이는 미국의 지도 밀워키,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뉴욕과 볼티모어 같은 도시들은 독일인 이민들의 호의적인 목적지들이었다. 1900년 안으로 클리블랜드, 밀워키, 호보컨과 신시내티의 인구들은 모두 40% 이상이 독일계 미국인들이었다. 1910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독일계 미국인의 비율이 57%를 차지하면서 아이오와주의 듀부크와 대번포트는 더 큰 비율을 가졌다. 인디애나주 포트 웨인 같은 다른 북부 도시들은 독일계 미국인들이 인구의 30% 이하를 차지한다. 1850년경에 미시간주 앤아버와 그 주위에는 슈바벤 이민들이 정착하였다. 신시내티의 "오버 더 라인" 구역, 세인트루이스 남부의 "더치타운"과 콜럼버스의 "저먼 빌리지" 같이 많은 그들의 인구 집중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암시한 특유의 이름들을 취득하였다. 가장 좋아하는 목적지는 "독일인들의 아테네"로 알려진 밀워키였다. 이전 국가에서 정치 훈련을 받은 근본적인 독일인들이 이 도시의 사회주의 정치들을 지배하였다. 많은 중개업자들이 맥주 양조업을 창립하는 동안에 능력있는 근로자들은 많은 기능들을 지배하였다. 도시들에 정착한 독일인 이민들의 절반에 반하여, 다른 절반들은 중서부에 농장들을 설립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오하이오주에서 평원 주들까지 시골 지역들에 무거운 존재들이 지속되었다. 어떤 독일인들은 뉴올리언스에서 떨어진 최남부 지방에 정착하였다. 텍사스[편집] 독일계 미국인 학교로 쓰였던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워렌버거 하우스 텍사스주는 갤버스턴과 인디애놀라를 통하여 들어와 양 타운의 농장으로 오고, 후의 더 많은 이민들이 휴스턴 같은 도시들에서 빠르게 공업적 직업들을 가진 많은 독일인들을 끌어들였다. 밀워키에서 같이 휴스턴의 독일인들은 양조업을 지었다. 1920년대 안으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첫 세대는 화학과 석유 산업으로 이동해 들어갔다. 1850년대에 텍사스는 약 2만명의 독일계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니폼 블록을 형성하지 않았으나, 아주 몇몇 안되는 귀족들이나 상중류 클래스의 비지니스맨들을 제외하고는 지리적 지역들과 유럽인 사회의 모든 부문들로부터 높게 다양하고 비겼다.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편집] 전통[편집] 러시아에서 온 독일인들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착자들의 가장 전통적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제국을 통하여 많은 세대들을 살아온 독일인들이었으나 특히 볼가 강 유역과 현재 우크라이나에 속하는 크림 반도 근처에 살았다. 그들의 조상들은 1762년과 1763년 예카테리나 대제에 의하여 초대를 받아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세계에서 왔으며, 러시아의 시골 지역에 정착하여 더 진보한 독일식 농업 방법들을 소개하였다. 양심적 병역거부[편집]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인 메노나이트들은 19세기에 러시아 정부의 양심적 병역거부 탄압때문에1900년에 대략 10만 명이 이민을 떠나 주로 다코타 지방,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에 정착하였다. 노스다코타주의 남부중앙부는 "독일-러시아의 삼각형"으로 알려졌다. 작은 수들은 서부로 멀리 이주하여 카우보이와 목장주같은 직업을 찾았다. 부정적으로 차르에 의하여 그들의 권리들의 폭력과 문화적 박해에 의한 영향으로 미국 중서부의 북부에 정착한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은 러시아계 미국인들로부터 갈라진 학대받는 민족으로 자신을 보았고, 독일 땅으로부터 이민을 온 독일계 미국인으로부터 아주 다른 경험을 겪어 자신들의 독일어와 문화를 유지한 빈틈없는 공동체들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큰 가족들을 키웠고, 독일식 교회들을 지어 자신들의 시체를 특유의 묘지들에 안장하는 데 주형의 철 무덤 묘석을 이용하였으며 독일 교회 찬송가를 부르는 합창단을 창조하였다. 많은 농부들은 아직도 대평원 상부에서 나는 주요 농작물 사탕무에 전문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들의 신분은 반독 감정에 의하여 도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공공적과 공식적 일들에서 영어와 함께 쓰이던 독일어가 심각한 거절에 놓였다. 오늘날 독일어는 영어를 우세하게 사용한 대평원 주들의 북부에 사는 러시아에서 건너온 독일인들과 함께 주로 노래부르는 단체들과 방법들을 통하여 보존되었다. 독일어는 다코타 지방에서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로 남아있다. 자신들의 언어 손해에 불구하고 그들은 뚜렷하게 남아 미국 서부에 오래가는 감독을 남겼다. 남북 전쟁[편집] 독일계 미국인들 사이에 감정은 특히 포티에이터들 사이에 반노예주의였다. 수십만명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남북 전쟁에서 북군을 위하여 싸우는 데 지원되었다. 독일인들은 남북 전쟁에 참전하는 데 가장 큰 이민 단체들이었으며, 17만 6천명 이상의 미국 군인들이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인들 사이에 인기있던 북군 사령관 프란츠 지겔 소령은 "지겔과 함께 싸움"에 입대하는 데 주장된 많은 독일 이민들과 함께 북군의 최고 계급 독일인 사령관이었다. 4명의 독일인들 중에 1명이 전 독일인 연대에서 싸웠어도 그들은 독일 군인의 공동적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펜실베이니아주는 5개, 뉴욕주는 11개, 오하이오주는 6개의 독일인 연대들을 주둔하였다. 농장들[편집] 많은 농부들을 끌어들이는 데 유용한 큰 토지 승인들과 함께 서부 철도들은 함부르크와 다른 독일의 도시들에 대리인들을 세워 값이 싼 교통과 쉬운 기간들에 농장지의 판매들을 약속하였다. 예를 들어 샌타페이 철도는 이민을 위하여 자신들의 감독관을 기용하였고 30만 에이커(1,200 제곱 킬로미터) 이상을 독일어 사용자 농부들에게 팔았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독일계 미국인들은 농부들이 되는 데 높은 흥미를 보였고 대지에 자신들의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을 지켰다. 그들이 운영하는 데 이득들이 필요하였을 때에 그들은 이득들을 가족의 지속을 유지하는 데 연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위험을 반대하는 전략들을 사용하여 조심스럽게 가족에서 대지를 지키는 데 자신들의 상속을 계획세웠다. 그들의 공동체들은 더 작은 평균의 농장 크기, 더 위대한 동등권, 적은 부재 소유권과 더 위대한 지리적 인내력을 보였다. 정치[편집] 노동운동[편집] 19세기 후반의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한 시카고 총파업이 있었다. 당시 경찰에서는 노동자들을 살상함에 항의하려고 노동자들이 헤이마켓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때 폭탄테러가 일어나 경찰과 노동자들사이의 싸움이 일어나자 자본가들과 결탁한 지배 계급들은 노동자들이 경찰을 살해했다고 조작하여 8명의 노동운동가들을 사법살인한 헤이마켓 사건이 일어났다.[22]이때 8명의 피고인들 중에 6명이 독일인이었고, 독일인들은 초기 미국 노동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선거[편집] 상대적으로 몇몇의 독일계 미국인들이 사무실을 보유하였으나 남자들이 한번 시민들이 되는 데 투표하였다. 정통으로서 프로테스탄트와 유대인들은 공화당 편에 들었고 가톨릭 교도들은 강하게 민주당을 성원하였다. 비밀 투표에서 금지령이 있을 때에 독일인들은 그것에 대항하는 데 고체적으로 투표하였다. 그들은 강하게 금주 개혁자들과 많은 인기당원들을 포함한 도덕적 개혁 운동가들을 불신임하였다. 독일인 공동체는 강하게 은화의 자유 주조를 반대하였고 1896년 개혁 운동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 무겁게 대항하며 투표하였다. 1900년 많은 독일계 민주당원들이 자신들의 당에 복귀하여 브라이언을 위하여 투표하였는데, 아마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외교 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20세기[편집] 제1차 세계 대전과 반독 감정[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독일계 미국인들은 어쩌다 독일 제국에 너무 동정심을 가져 고발을 당하였다.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은 "외국계 미국인주의"를 비난하여 이중의 충성들이 전쟁 시기에 불가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독일을 위한 작은 소수파가 나오거나 영국인들을 비웃기 마련이었다. 비슷하게 하버드 대학교의 정신과 교수 휴고 뮨스터버그는 미국과 독일 사이의 중재에 자신의 노력들을 떨어뜨려 독일의 이유 뒤로 던져버렸다. 법무부는 모든 독일 외국인들의 명단을 준비하는 데 시도하여 그들의 대략 48만 명을 세워 4천 명 이상은 1917~18년 사이에 투옥되었다. 변증은 독일을 위한 스파이와 독일의 전쟁 수고를 보증함을 포함하였다. 수천명은 자신들의 충성을 보이는 데 전쟁 보증금을 사는 데 강요되었다. 적십자는 파괴행위의 위협에 가입으로부터 독일인의 성을 가진 개인들을 제외하였다. 한명은 반란자에 의하여 살인되었는 데, 일리노이주 콜린스빌에서 독일 출신의 로버트 프라거가 간첩으로서 감옥으로부터 끌려나와 린치당하였다. 시카고에서 프레더릭 스톡은 그가 자신의 귀화 문서들을 최종적으로 완성할 때까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임시적으로 사임하였다. 오케스트라단들은 바그너와 베를리오즈에 의한 음악을 되돌렸다. 신시내티에서는 공공 도서관이 자신들의 책꽂이들로부터 독일어 책들을 거두어 들이는 데 요구되었다. 독일어 이름을 진 거리들이 다시 이름을 지었다. 미시간주의 베를린은 마네(마네의 전투에서 싸운 군사들을 기념)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이오와 주에서는 1918년의 바벨 포고에서 주지사가 학교들과 공공 장소들에서 외국어들을 금지시켰다. 네브래스카 주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들에서 지시를 금지시켰으나 미국 대법원은 1923년 금지를 불법으로 규칙을 내렸다. 독일계 미국인들의 이런 전술들에 책임에서 가끔 이름들을 미국화("슈미트"에서 "스미스"로, "뮐러"에서 "밀러"로)하고, 공동 장소들, 특히 교회에서 독일어 사용을 제한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31년부터 1940년까지 11만 4천명의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는 데 노벨상 수상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그들은 유대계 독일인들이나 나치주의의 반대자들이었다. 대략 2만 5천명은 전쟁 이전의 세월 동안에 친나치 독일계 미국인 동맹의 회원들이 되었다. 독일 외국인들은 편견과 빗나간 수가 일본계 미국인들보다 정통적으로 적은 단체로서 고통을 겪은 의미였어도 전쟁 동안에 혐의와 차별의 주제였다. 1940년 외국인 등록 법령은 연방 정부와 함께 독일 시민권을 등록한 독일 출신 외국인들을 요구하여 그들의 여행과 재산 소유권을 제한시켰다. 아직도 활동적인 1798년의 외국인 적령 아래에서 미국 정부는 1940년과 1948년 사이에 1만 1천명 가까이 되는 독일 시민들을 구금하였다. "지원적 구금인"들의 알 수 없는 수는 수용소들에서 자신들의 배우자들과 부모들에게 가입하여 떠나는 데 허락되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체스터 니미츠 해군 대장과 칼 앤드루 스파츠를 포함한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정상적인 전쟁 직업을 찾았다. 그는 공화당원 웬델 윌키를 개인적 대표로 임명하였다. 독일어에 능통한 독일계 미국인들은 전쟁 시기의 지능으로 중요한 감성이었고 들은 미국을 위한 번역자와 스파이로서 근무하였다. 예로 헨리 키신저가 종군 당시에 통역관을 맡았다. 전쟁은 당시 본국에 친척들과 연락한 몇몇의 독일계 미국인 사이에 강한 친미주의 애국적 감정을 일깨웠다. 전쟁 이후의 세월들[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다시 그어진 동유럽의 경계들 안에서 100만명의 독일인들이 추방당하였다. 대부분은 독일에 재정착하였으나 다른이들은 1940년대 후반에 미국에 난민들로 들어와 자신들의 새로운 고향들에 문화적 중심지들을 설립하였다. 후에 유고슬라비아 땅(현재의 세르비아)이 된 헝가리의 도나우 강 유역에 정착 후에 언어와 풍습들을 유지해 온 독일인들, 이를테면 어떤 도나우 강의 슈바벤인들이 전쟁 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70년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에 의하여 자극된 반독 감정이 사라져갔다. 오늘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민온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다른 서유럽 이민 단체만큼 같은 특성을 나누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이유들로 온 전문인들과 학회원들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독일의 재통일 이래 독일은 오히려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보다 이민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1990년 미국 인구 조사에서 5천 8백만의 미국인들이 단독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독일계라고 주장되었다. 2005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5천만의 미국인들이 독일 계통을 가졌다고 한다. 독일계 미국인은 총 미국 인구의 17%, 히스패닉이 아닌 백인 인구의 26%를 차지한다. 독일계 미국인의 영향[편집] 뉴욕에서 열리는 슈토이벤 축제 행렬 밀워키에 있는 밀러 맥주 양조 단지 독일인들은 미국의 막대한 문화와 기술 지역들에 공헌하였다. 전 프로이센의 장교 슈토이벤 남작은 미국 독립 전쟁 동안에 미국 육군의 재결성을 이끌어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스타인웨이 앤드 선즈 피아노 제조 상사는 1853년 이민자 헨리 E. 스타인웨이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독일인 정착자들은 미국에 크리스마스 트리 전통을 가져왔다. 서부로 이동 동안에 스튜드베이커 형제는 대량의 수레들을 지었는 데, 듀센버그 형제처럼 후에 중요한 초기 자동차 제조업자가 되었다. 첫 실패적 1848년 독일 혁명으로부터 난민으로 들어온 카를 슈르츠는 영향적인 정치인이 되어 처음에 공화당에서, 후에 민주당으로 옮겨 내무 장관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베르너 폰 브라운과 페네뮌데에 있는 전 독일 V-2 로케트 기지에서 온 대부분의 일류 공학자들이 미국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미국 항공 우주국의 프로그램을 위한 로케트들은 물론 미국 군사 로케트들의 개발에 중대하게 공헌하였다. 독일 음식의 영향은 전국에 걸쳐 미국의 음식에 보였는 데, 특히 패스트리, 육류, 소시지와 맥주로 여겨진다. 햄버거, 자우어크라우트, 슈트루델(과일, 치즈 등을 밀가루 반죽으로 얇게 싸서 화덕에 구운 과자) 등이 공동적 요리이다. 독일의 빵 굽는 사람들이 비스킷의 일종인 프레첼을 소개하였다. 1850년 이래 독일인들은 맥주 양조업에 지배적인 민족으로 지내왔다. 밀워키는 한번 세계에서 가장 큰 독일 양조사들 중에 4개의 고향이었다 - 쉴리츠, 블라츠, 팝스트와 밀러. 그리고 수많은 세월에 세계에서 최고 맥주 생산 도시였다. 미국에서 현재 팔리고 있는 맥주의 절반이 A. 팝스트와 1860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버드와이저를 창립한 에베르하르트 안호이저와 아돌푸스 부슈 같은 독일 이민들에 귀착시켰다. 옥토버페스트, 독일계 미국인의 날과 슈토이벤 남작의 날 같은 독일계 미국인의 축제들이 전국을 통하여 정규적으로 열린다. 가장 큰 축제들 중의 하나는 뉴욕에서 열리는 슈토이벤 행렬이며 9월마다 매일 세 번째 토요일에 열린다. 시카고의 링컨 광장 이웃에서도 주요 해마다의 이벤트들이 열리고, 독일인 인구의 전통적 중심지 신시내티에서는 독일 외부에서 가장 큰 옥토버페스트인 "옥토버페스트 친치나티(독일어: Oktoberfest Zinzinati)"가 열린다. 밀워키에서는 해마다 열리는 독일인 축제와 함께 도시의 독일인 유산을 축제벌이는 편이다. 펜실베이니아주에 온 독일과 다른 독일어 사용 국가들에서 많은 이민들이 "앨러게니 시티"(지금의 피츠버그 시의 노스 사이드)로 알려진 지역에 정착하였다. 많은 독일인들이 도착하면서 지역이 "도이치타운"으로 알려졌다. 도이치타운 안에서와 1854년 이래 튜토니아 맨너호르는 독일 문화 전통들을 진흥과 촉진을 해왔다.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카드 게임 스카트는 위스콘신주와 텍사스주 같은 큰 독일 인구와 함께 한 미국의 지역들에서 행하고 있다. 독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도시와 타운들은 중서부에서 마저 극단적으로 흔한 편이다. 그러나 독일식 이름의 두가지 예로는 아이오와주의 베텐도프와 일리노이주의 샤움버그를 들 수 있다. 두드러진 독일계 미국인들[편집] 독일계 미국인들은 과학, 건축, 산업, 스포츠, 연예계, 신학, 정부와 군사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영향적이었다. 독일계 미국인 장군들 - 슈토이벤 남작,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존 퍼싱,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노먼 슈워츠코프는 미국 독립 전쟁, 남북 전쟁, 인디언 학살,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과 걸프 전쟁에서 미국 육군의 사령관들이었다. 닐 암스트롱 같은 다른 이들은 달에 착륙하였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프리드리히 헤커, 프레더릭 뮬렌버그, 카를 슈르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헨리 키신저 등을 포함한 유명한 정치인들이었다.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산업과 비지니스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으며, 존 D. 록펠러(스탠다드 석유 회사), 윌리엄 보잉(보잉사), 월터 크라이슬러(크라이슬러 주식회사), 프레더릭과 오거스트 듀센버그(듀센버그 자동차 주식회사), 스튜드베이커 형제(스튜드베이커 자동차 주식회사), 조지 웨스팅하우스(웨스팅하우스 전기 주식회사), 리바이 스트라우스(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 헨리 J. 하인즈(H. J. 하인즈 컴퍼니), 찰스 거스(펩시코), 제임스 L. 크래프트(크래프트 푸즈), 헨리 E. 스타인웨이(스타인웨이 앤드 선즈), 찰스 파이저(파이저 제약), 찰스 디볼드 (디볼드 닉스도프), 버나드 크로거 (크로거), 도널드 트럼프(트럼프 기업), 존 제이컵 애스터(월도프 애스터리아 호텔 앤드 리조트), 콘래드 힐튼(힐튼 호텔 앤드 리조트), 구겐하임 가(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 마커스 골드만과 새뮤얼 삭스(골드만삭스), 리먼 형제(리먼 브라더스), 허먼 홀러리스(IBM), 스티브 잡스(애플)와 에릭 슈미트(구글) 등을 포함한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 역사의 거의로 봐서 맥주 양조업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트 셸(아우구스트 셸 양조 회사), 에베르하르트 안호이저와 아돌푸스 부슈(안호이저-부슈 합동사), 아돌프 쿠어스(몬슨 쿠어스 양조 회사), 프레더릭 밀러(밀러 양조 회사), 프레더릭 팝스트(팝스트 양조 회사), 베른하르트 슈트로(슈트로 양조 회사)와 조지프 쉴리츠(조지프 쉴리츠 양조 회사) 등의 19세기 독일인 이민들에 의하여 창립된 양조사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떤 분야에서는 브루클린 교의 공학자 존 로블링과 발터 그로피우스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건축가들은 볼 수 있는 경계표들 뒤에 남겨졌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베르너 폰 브라운, 존 피터 젱거, 존 스타인벡, 조지프 와이젠바움을 포함한 다른이들은 지력의 경계표들을 세웠다. 아직도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잭 니클로스, 도리스 데이, 마를레네 디트리히, 존 덴버, 킴 베이싱어, 메릴 스트립, 샌드라 불럭, 데이비드 하셀호프 같은 다른 이들은 두드러진 선수, 배우 등이 되었다.[23] 독일계 미국인 대통령들[편집] 2명의 대통령들이 독일계 아버지를 두었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원래 독일식 철자로는 Eisenhauer이며, 어머니 쪽은 독일/스위스)와 허버트 후버(원래 독일식 철자로는 Huber인데 영어식으로 Hoover로 바꾸었다). 어머니 쪽이 독일인 혈통을 둔 대통령들로는 버락 오바마와 리처드 닉슨(그의 중앙 이름 밀하우스(Milhous)는 독일식 철자로 멜하우젠(Melhausen)이었다)이다.[24] 관련 항목[편집]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유럽계 미국인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스위스계 미국인 참조[편집] ↑ Census 2009 ACS Ancestry estimates ↑ “Regular Session 2009-2010 Senate Resolution 141 P.N. 1216”. 2015년 3월 17일에 확인함.  ↑ One Nation Under God: Religion in Contemporary American Society, p. 120. ↑ From Census Bureau, "S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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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than 90% of these words are in German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Where it All Began - Celebrating 400 Years of Germans in America》, German Information Center, 2009년 5월 26일에 확인함 ; 《Celebration of the 400th Anniversary of the First Germans in America, April 18》, Reuters, 2008년 3월 25일, 2009년 5월 26일에 확인함 ;Jabs, Albert E. (June/July 2008), “400 Years of Germans In Jamestown” (PDF), 《German-American Journal》 56 (3): 1, 11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Gottlieb Mittleberger on Indentured Servitude Archived 2009년 2월 1일 - 웨이백 머신, Faulkner University ↑ 가 나 Conzen, Kathleen (1980), 〈Germans〉, Stephan Thernstrom, 《Harvard Encyclopedia of American Ethnic Groups》, Belknap Press, 407쪽  ↑ 가 나 Knittle, Walter Allen (1937), 《Early Eighteenth Century Palatine Emigration》, Philadelphia: Dorrance  ↑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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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테르플라테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침공의 일부전투 이후 베스테르플라테의 독일군. 일부 폴란드인은 전투동안 일어난 엄청난 포격 때문에 "폴란드의 베르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날짜1939년 9월 1일 ~ 9월 7일장소단치히 자유시 베스테르플라테결과 독일군의 승리교전국 폴란드 제2공화국 나치 독일지휘관 헨리크 수하르스키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 구스타프 클라이캄프병력 205-225명[2] 3,400명피해 규모 15~20명 사망53명 부상나머지 포로 200~300명 사망 및 부상 vdeh폴란드 침공 폴란드 국경 전투 호이니체 크로얀티 라시 크룰레프스키 모크라 프쉬치나 그루지옹츠 므와바 요르다누프 프라우차트 벵기에르스카구르카 투홀라 숲 쳉스토호바 미코우프 부코비체 슬로바키아의 침공 발트 해안 베스테르플라테 단치히 국경 전투 단치히 해안 그디니아 헬 켕파오크시브스카 9월 4일~10일 토마슈프마조비에츠키 비츠나 우치 보로바구라 피오트르쿠프트리부날스키 루잔 푸우투스크 라돔 웜자 바라크 볼라치루소바 북부 전선 바르샤바 브주라 카우쉰 벵그루프 빌노 모들린 코브린 브제시치리테브스키 2차 토마슈프루벨스키 불카벵글로바 캄피노스 숲 크라스니스타프 워미안키 크라스노브루드 코츠크 남부 전선 프제미실 야로스와프 1차 토마슈프루벨스키 야보루프 야누프 숲 체시니키 르부프 소련의 폴란드 침공 사르니 빌노 후시네 그로드노 브와디폴 샤츠크 비티츠노 파르체프-야브원-밀라누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폴란드어: Oblężenie Westerplatte, 영어: Battle of Westerplatte)는 폴란드 침공 당시에 이루어진 전투로 제2차 세계 대전 최초의 전투이다. 이 전투는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 해군과 육군 병사가 단치히 자유시 부두인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의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폴란드어: Wojskowa Składnica Tranzytowa, WST)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창고는 약 200명 미만의 군인들만 경계하고 있었지만 7일 동안 급강하폭격기 폭격과 같은 대포격을 방어해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의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폴란드군은 15명~20명 가량이 사망한 데 비해 독일군은 200명이 사망하는 등 높은 교전비를 이루었다. 여기에 베스테르플라테에서 독일군을 7일동안 막아냈으며 그 이후에도 헬 전투가 끝난 10월 2일까지 폴란드 회랑 지역의 저항이 이어졌다.[3]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은 성공적으로 독일군의 공세가 진행된 지역의 폴란드 육군에게 감흥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폴란드 침공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지구는 폴란드의 역사기념물 중 하나로 2003년 9월 1일 폴란드 국립문화유산위원회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목차 1 배경 2 전조 3 전투 4 여파 5 전투 서열 5.1 독일군 5.2 폴란드군 6 관련 영화 7 더 보기 8 각주 9 서지 10 외부 링크 배경[편집] 국제 연맹 고등판무관은 단치히의 베스테르플라테에 폴란드군 82명을 주둔할 수 있게 허가했고, 이 폴란드군은 1921년 단치히 자유시 상원의 동의 하에 설치한 해군 탄약 저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1933년 3월 6일에는 폴란드가 비밀리에 주둔군에 120명의 추가 군대를 파견할려고 했으나 이 비밀작업이 드러나 스캔들로 번저 폴란드는 추가로 파견하고자 했던 계획을 취소했다.[4]:315–316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는 본토와는 얇은 돌제부두로만 연결된 단치히 자유시 신항구의 항만 해협에 위치해 있었다. 베스테르플라테에서 폴란드군이 주둔한 지역은 벽돌벽으로 단치히 영토와 구분되어 있었다. 베스테르플라테에 건설된 방어시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그렇게 문제시되진 않았다. 실제 벙커나 지하 터널이 없었으며 반도 숲에 숨겨 위장된 5개의 소규모 콘크리트 전초기지와 방어전을 위한 대형 병영, 요새화 지원을 위한 참호와 바리케이드 네트워크가 있었다.[5] 또한 베스테르플라테의 건물 일부는 콘크리트로 보강했는데, 이 건물들이 7일동안 방어전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1]:54 전조[편집] 베스테르플라테 앞 항구에 정박한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 8월 말, 폴란드는 주둔군을 82명에서 210명으로 늘리고, 3인치 야포와 1.5인치 대전차포 2개, 박격포 4개, 기관총 여러대를 두는 등 군사력을 늘렸다. 또한, 소초 (Placówka) 7곳을 세우고 막사와 NCO 빌라 지하에 있는 콘크리트 대피소를 보강했다.[6]:11–12 1939년 8월 말에는 독일의 전드레트노트급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친선 방문을 이유로 단치히에 도착하여 베스테르플라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해협에 정박했다. 선박 갑판에는 8월 26일에 베스테르플라테 공격을 시작하기 위한 충격군(Stoßtruppen) 중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선 직전에 공격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8월 25일 영국-폴란드 군사 동맹이 맺어지고 이탈리아가 강철 조약의 준수를 미루겠다고 말하자 아돌프 히틀러가 적대 행위 시작을 연기하기로 한 결과였다.[7] 독일군은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 장군이 이끄는 1,500명의 SS 향토방위군(SS-Heimwehr)과 중위 빌헬름 헤닝센이 이끄는 해병대 225명이 창고를 공격했다. 총지휘관은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타 있던 제독 구스타프 클라이캄프가 맡았다. 그는 8월 26일 상류 지역 멀리로 배를 옮겼다. 폴란드군 장군 헨리크 수하르스키는 주둔군에게 경보를 발령했다.[6]:12 전투[편집] 1939년 9월 1일 현지 시간 4시 48분,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폴란드 주둔군 182명과 예비군 27명이 머무르는 병영을 향해 일제포격을 시작하면서 폴란드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수하르스키 장군은 급하게 헬 반도로 "SOS. 지금 포격을 받고 있다"라는 전신을 보냈다.[6]:12 경계벽에 포탄이 맞아 구멍이 생기고 남동부 지역의 기름창고에는 불이 붙어 폭발했다. 8분 후, 슐례스비히-홀슈타인 전함에서 중위 빌헬름 헤닝센이 이끄는 해병대가 급습하고 독일 국방군의 공병 3개 소대가 공세를 펼치면서 폴란드 본토와 이어진 철교를 폭파시켰다. 이런 상황에 독일군은 기습을 받아 놀란 폴란드군을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다.[8] 폴란드군 하사 보이시에흐 나이사레크가 기관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과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의 최초 사망자가 되었다. 그러나, 포격으로 파괴된 벽돌 벽을 넘은 후에는 독일군이 갑작스런 매복 공격을 당했다. 독일군은 얽히섥힌 유자철선으로 인해 재빠른 기동을 하지 못하면서 은폐한 폴란드군의 일제사격 살상지대에 걸려들게 되었다(일부는 나무에 숨은 저격수도 있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없었다). 폴란드군은 보안경찰의 기관총좌를 제압했고, 폴란드군 중위 레온 파예크가 전진하는 독일군에게 강력한 곡사포 포격을 하면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항구 건너편 창고 위에 있던 7.62mm 기관총 1개가 배치된 기관총좌도 제압했으나, 독일군 전함이 28번의 포격을 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6]:12[9] "독일군을 포화 속으로 끌어들이자는 전초기지 지휘관의 전술 덕택으로 독일군이 사격 범위 내로 들어오면서 많은 손실을 입히게 했다. 돌출부의 정찰병이 정확하게 좌표를 말하면서 폴란드군이 박격포 포격을 하며 손실을 더 높였다. 1989년 봄~여름에 비밀리에 만들어진 이 방어벽 시스템은 독일군이 한때는 유명한 스파였던 베스테르플라테 공원 근처 진군을 어렵게 만들었다."[10]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지도. 빨강색은 독일군의 공격도/방어선이며, 남청색은 폴란드군의 방어선 / 방어지점이다. 6시 22분, 해병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한다고 배에게 통신을 보냈고, 단치히 경찰은 베스테르플라테 반대편 항구를 장악하러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1] 이때까지의 사상자는 독일군 50명, 폴란드군 8명이었다. 독일군은 8시 55분 다시 전진을 시도했지만 지뢰, 쓰러진 나무, 철조망, 강력한 포화 등을 만나 격전을 벌였다.[11] 정오에 SS 군인이 탈영했으며, 헤닝센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11][12] 초기 공격이 실패한 이후 아침에 다시 시작한 두 번째 공격(280mm 포탄 90발, 170mm 포탄 407발, 88mm 포탄 366발의 포격이 이루어진 이후)은 독일군이 예기치 않게 큰 손실을 입으면서 격퇴당했다. 하지만 결국 폴란드군은 바우 지역(Wał)과 전초 기지의 프롬으로 후퇴했으며, 반도 중앙의 새로운 병영 주변에 방어 기지를 건설했다. 전투 첫날 이후, 폴란드군은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독일군이 포로로 잡고 병원으로 후송된 2명을 포함하여 3명이 나중에 사망했다). 한편, 독일 해군 보병은 16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을 입어 전체 225명 중 대부분이 부상을 입었다.[13] 독일군의 손실은 만약 폴란드 사령관 헨리크 수하르스키가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박격포 사격을 중지시키고 일제사격 후 포격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늘어났을 것이다(이 때문에 다음 날 박격포가 파괴되었을때 박격포탄 860개 중 104개만 쓰이고 나머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베스테르플라테를 포격하는 모습. 다음 날, 반도에 210mm 곡사포를 포함한 독일 해군의 중포병이 포격을 시작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식의 전투 스타일로 바뀌었다. 에버하르트는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에게 지상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9월 2일 융커스 Ju-87 스튜카 급강하폭격기 60기가 폴란드 박격포에 대해 2번의 공습을 펼치면서 포대 5개가 500kg 포탄에 명중하여 파괴되었고 적어도 폴란드군 8명 이상이 사망했다. 또한, 이 공습으로 인한 연기가 베스테르플라테 전 영역에 뒤덮이게 되었고, 유일한 라디오 방송국과 식량 보급 기지를 파괴했다.[11] 독일 관측병들은 이러한 폭격에서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9] 9월 3일부터 4일까지 밤동안 펼친 독일군의 공세가 격퇴되었다. 9월 4일, 독일 어뢰정 T-196(G196의 이름이 바뀜)이 해변에서 기습공격을 했다.[14] 폴란드군은 바우 지역은 포기했고, 오직 항구 지역만 북쪽에서 오는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11] 9월 5일, 수하르스키가 전투피로증에 걸리면서 베스테르플라테에서 항복을 촉구하는 위원회를 열었다. 하지만, 항복에 반대했던 그의 부지휘관인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가 명령권을 이어받았고 항복은 무산되었다.[14] 독일 해군 보병, 단치히 SS, 경찰, 국방군으로 이루어진 몇번의 신중한 공격이 다시 폴란드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9월 6일 03시, 독일군은 불타는 열차를 다리를 통해 보냈지만, 겁먹은 기관사가 불붙은 열차를 너무 일찍 분리시키는 바람에 기름탱크에 도달시켜서 엄폐역할을 해주는 숲을 태워버리려던 계획은 실패했다.[14] 오히려 불타는 기차는 완벽한 방어선이 되었고 독일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15] 오후에 행해진 두 번째 기차 공격 역시 실패했다. 한편, 폴스키에 라디오는 지속적으로 "베스트플라테 지역은 여전히 전투중"이라는 메시지를 방송했다.[16] 2차 전쟁협의회가 열렸고 장군은 항복하기로 정했다. 이때 쯤 되면 독일군은 바르샤바 외곽까지 진출했고 부상자들 가운데서는 괴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15] 9월 7일 0430시 독일군은 강한 포격을 시작했고 이는 0700시까지 계속되었다. 화염방사기는 위병소 2개를 파괴했고 1~4개를 손상시켰다.[15] 포위된 수비대는 충분한 물과 의약품이 부족했다. WST의 의무관인 미에치스와프 스와비(Mieczysław Słaby)는 부상병에 대한 기본적인 치료를 할 수 없었다. 9시 45분에는 백기가 나타났다. 폴란드의 수비는 많은 독일군을 감동시켜서 독일군 사령관인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는 수하르스키가 사블라(szabla, 폴란드 사브르)를 착용하고 항복할 수 있게 했다(나중에는 이 군도를 압수했다).[15] 동시에 폴란드 통신병 카지미에슈 라신스키(Kazimierz Rasiński)는 항복한 이후 독일군이 살해했다. 그는 잔인한 심문까지 받았는데도 독일군에게 라디오 코드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다가 끝내 살해당했다.[17] 여파[편집] 베스테르플라테에 계양된 나치 독일 깃발. 독일군의 사상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00~300명 정도가 사상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처음 목표에 너무 가까이 정박한 전함에서 발포한 아군 사격으로 인한 사상자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폴란드군의 사상자는 이에 비해 매우 낮아서 15~20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18] 1940년에 발견된, 탈영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동료들에 의해 처형된 듯한 신원미상의 폴란드인 시신 5구가 매장된 곳에 대한 논란이 있다. 전쟁 포로 중 8명은 고문을 당하다 살아남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또한, 폴란드 사령관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부사령관이자 제독인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에 대한 논란이 있다.[20] 전후까지 살아남아 1946년에 사망한 수하르스키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폴란드에서 가장 높은 훈장인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을 받은 것에 대해, 1990년대에 발견한 전투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알 수 없는 판단으로 최근 매우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동브로프스키의 사망 이후 다른 폴란드 장교들은 이름뿐인 지휘관이 전투 기간 대부분 동안 셸 쇼크 상태였다는 것을 그들의 명예를 위해 숨기기로 맹세했다고 진술했다). 베스테르플라테는 이후 박사 야누쉬 마르샬레츠(Janusz Marszalec)은 폴란드 국립 추모 연구소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5]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의 지휘관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에 대한 의문 (또는 분쟁)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 논란은 학술적인 논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는다. 보통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이 논쟁은 다양한 미확인 출처 및 점진적이고 일정한 분위기 속에서 열정적인 중심지가 되가고 있다. 그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상태에 빠져서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 분쟁은 인터넷의 좁은 문에서,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에 관한 새로운 "진리"를 알려주겠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영화 스크립트를 통해 공식적으로 매스 미디어로 펼쳐지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상세한 분석 없이, 1939년 9월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에 관한 역사에 대한 지식을 확인했을 때, 공통점이 없음을 강조할 수 있다 ... 분쟁에 관계 없이,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WST의 200명 병사는 그들이 마지막 총알로 방어하기를 원하든지 아닌지 여부에 상관없이, 또는 1939년 9월 1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포격 12시간 이후 이미 무기를 내려놓았는지 아닌지 고려 여부 없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5] 전투 서열[편집] 1939년 9월 7일, 단치히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에서 항복한 이후 포로가 된 폴란드군. 독일군[편집] 크릭스마리네 선박 전드레트노트급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어뢰정 T-196, T-963 에버하르트 군 3. Marine-Stoßtrupp-Kompanie(엘리트 해군 보병 중대, 이후 Marine-Artillerie-Abteilung 531로 개명) 및 데사우로슬라우 지역 공병 소대 곡사포 독립대대(Haubitzen-Abt.) 단치히 해안 보호 경찰(단치히 경찰의 해안경비대) 및 질서경찰의 주 경찰 연대 SS Wachsturmbann Eimann(이 때 이미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가 이미 편성)을 포함한 SS 하임리히 단치히 지역 SS 민병 기타 군 루프트바페 II & III Gruppe StG 2 Immelmann (Sturzkampfgeschwader 2) 4.(St)/TrGr 186 총 합쳐서,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동안 대략 40~60기의 융커스 Ju 87 수튜카 폭격기와 기타 하인켈 He 51, 융커스 Ju 52 폭격기 7기가 이 전투에 참여했다. 독일 지상군은 ADGZ 중장갑차 수대, 2 cm Flak 30 대공포, 3.7 cm PaK 36 대전차포, 10.5 cm leFH 18 경곡사포, 21 cm Mörser 18 중곡사포 등 포 65문, 기관총 100문 이상, 박격포 수십개, 플라멘베르퍼 35 화염방사기 수십 개를 가지고 있었다.[21] 폴란드군[편집] 1939년 8월, 베스테르플라테의 수비대는 전쟁 직전 징집된 군인 182명과 예비군 민간인 27명, 총 20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는 76 mm divisional gun M1902 야포 1문,[22] Bofors 37 mm 대전차포 2문, Brandt Mle 27/31 중박격포 4문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수비군들은 불균형하게 무장되어 있었는데, 가장 무장이 잘 된 쪽은 기관총 41개, 중기관총16개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2] 또한, 소총 140개, 권총 40개 이상, 수류탄 1,000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23] 관련 영화[편집] 1967년 영화 1939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2013년 영화 1939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폴란드어: Tajemnica Westerplatte)[24] 더 보기[편집] 헬 전투 비엘룬 폭격 비즈나 전투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헨리크 수하르스키 - 당시 베스테르플라테 주둔 폴란드군 사령관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 - 당시 베스테르플라테 주둔 폴란드군 부사령관 각주[편집] ↑ 가 나 Zaloga, S.J., 2002, Poland 1939, Oxford: Osprey Publishing Ltd., ISBN 9781841764085 ↑ 가 나 다 (폴란드어) B. Kubisz, Wojsko Polskie – II wojna światowa nr 9..., s. 7. ↑ J. E. Kaufmann, Robert M. Jurga, Fortress Europe: European Fortifications of World War II, De Capo Press, 2002, ISBN 0-306-81174-X Google Print, p.272. ↑ Watt, R.M., 1979, Bitter Glory, Barnes & Noble, Inc., ISBN 0760709971 ↑ 가 나 다 “(English)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p. 4” (PDF). 2013년 4월 1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Mann, C, 2008,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rragon Books, ISBN 978-1407525136 ↑ Piekałkiewicz, Janusz. Sea War: 1939–1945. Blandford Press, London - New York, 1987, pg. 18, ISBN 0-7137-1665-7 ↑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Gdańsk: Muzeum II Wojny Światowej, 2008, p. 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폴란드어) Melchior Wańkowicz, Westerplatte. Warszawa: Instytut Wydawniczy "Pax", 1959. ↑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p. 2” (PDF). 2013년 4월 1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3. Parragon Books, 2008. ↑ (폴란드어) Mariusz Borowiak, Westerplatte. W obronie prawdy., Gdańsk: GDW, 2001 ↑ (폴란드어) The only consolation for the Germans was the massacred defenders of the post office in Danzig city. Kompania szturmowa ↑ 가 나 다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4. Parragon Books, 2008. ↑ 가 나 다 라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5. Parragon Books, 2008. ↑ (폴란드어) Mariusz Borowiak, Westerplatte. W obronie prawdy, Gdańsk: GDW, 2001. ↑ Robert Jackson, Battle of the Baltic: The Wars 1918–1945 (p. 55) ↑ W. Tym, Przygotowanie obrony i lądowa obrona polskiego wybrzeża morskiego 1-19 września 1939 r., cz. III, "Wojskowy Przegląd Historyczny" (dalej WPH) 1957, z. 4. s. 229–230. ↑ Rasiński Kazimierz (1902–1939) – urzędnik cywilny ↑ Aldona Rogulska, Paweł Chochlew (2013년 2월). 《Tajemnica Westerplatte》. Kraków: Znak. ISBN 978-83-240-1508-5.  ↑ HIAG: Wenn alle Brüder schweigen, grosser Bildband über die Waffen-SS (ISBN 3-921242-21-5), 1973 ↑ (폴란드어) Rozdżestwieński, Paweł. Armata wz. 1902/26 w pułkach piechoty II Rzeczypospolitej, Militaria XX Wieku Nr. 1(46)/2012 (in Polish) ↑ (폴란드어) PSZ, t. I, cz. 5, nie podają dokładnie stanu załogi Westerplatte. Z. Flisowski określa ją na 205-210 ludzi (Westerplatte, Warszawa 1974, s. 26). ↑ (영어)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서지[편집] Bogusław Kubisz (2008). 《Wojsko Polskie – II wojna światowa nr 9: Westerplatte 1939》 (폴란드어). Warszawa: Hachete Livre Polska sp. z o.o. ISBN 978-83-7575-041-6.  《Encyklopedia II wojny światowej nr 2: Wybuch wojny IX 1939 – V 1940. Plany wojenne Polski i Niemiec – Wojna obronna Polski》. Oxford Educational sp. z o.o. ISBN 83-7425-267-7.  Mariusz Wójtowicz-Podhorski, Westerplatte 1939. Prawdziwa historia, Gdańsk 2009, ISBN 978-83-7237-208-6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홈페이지 Westerplatte ruins today Map of events concerning Battle of Westerplatte (폴란드어) Vortal Westerplatte (폴란드어) Westerplatte broni się jeszcze (폴란드어) Strona Stowarzyszenia Rekonstrukcji Historycznej Wojskowej Składnicy Tranzytowej na Westerplatte (폴란드어) Muzeum Westerplatte Stowarzyszenia Rekonstrukcji Historycznej Wojskowej Składnicy Tranzytowej na Westerplatte (폴란드어) Obrona Westerplatte (폴란드어) Wojskowa Składnica Tranzytowa i jej obrona w Gedanopedii 좌표: 북위 54° 24′ 27″ 동경 18° 40′ 17″ / 북위 54.40750° 동경 18.67139°  / 54.40750; 18.6713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베스테르플라테_전투&oldid=24194047" 분류: 1939년 분쟁1939년 폴란드폴란드 9월 전역그단스크의 역사공성전1939년 9월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좋은 글폴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CS1 - 폴란드어 인용 (pl)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ItalianoLatina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8: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침공의 일부전투 이후 베스테르플라테의 독일군. 일부 폴란드인은 전투동안 일어난 엄청난 포격 때문에 "폴란드의 베르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날짜1939년 9월 1일 ~ 9월 7일장소단치히 자유시 베스테르플라테결과 독일군의 승리교전국 폴란드 제2공화국 나치 독일지휘관 헨리크 수하르스키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 구스타프 클라이캄프병력 205-225명[2] 3,400명피해 규모 15~20명 사망53명 부상나머지 포로 200~300명 사망 및 부상 vdeh폴란드 침공 폴란드 국경 전투 호이니체 크로얀티 라시 크룰레프스키 모크라 프쉬치나 그루지옹츠 므와바 요르다누프 프라우차트 벵기에르스카구르카 투홀라 숲 쳉스토호바 미코우프 부코비체 슬로바키아의 침공 발트 해안 베스테르플라테 단치히 국경 전투 단치히 해안 그디니아 헬 켕파오크시브스카 9월 4일~10일 토마슈프마조비에츠키 비츠나 우치 보로바구라 피오트르쿠프트리부날스키 루잔 푸우투스크 라돔 웜자 바라크 볼라치루소바 북부 전선 바르샤바 브주라 카우쉰 벵그루프 빌노 모들린 코브린 브제시치리테브스키 2차 토마슈프루벨스키 불카벵글로바 캄피노스 숲 크라스니스타프 워미안키 크라스노브루드 코츠크 남부 전선 프제미실 야로스와프 1차 토마슈프루벨스키 야보루프 야누프 숲 체시니키 르부프 소련의 폴란드 침공 사르니 빌노 후시네 그로드노 브와디폴 샤츠크 비티츠노 파르체프-야브원-밀라누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폴란드어: Oblężenie Westerplatte, 영어: Battle of Westerplatte)는 폴란드 침공 당시에 이루어진 전투로 제2차 세계 대전 최초의 전투이다. 이 전투는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 해군과 육군 병사가 단치히 자유시 부두인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의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폴란드어: Wojskowa Składnica Tranzytowa, WST)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창고는 약 200명 미만의 군인들만 경계하고 있었지만 7일 동안 급강하폭격기 폭격과 같은 대포격을 방어해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의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폴란드군은 15명~20명 가량이 사망한 데 비해 독일군은 200명이 사망하는 등 높은 교전비를 이루었다. 여기에 베스테르플라테에서 독일군을 7일동안 막아냈으며 그 이후에도 헬 전투가 끝난 10월 2일까지 폴란드 회랑 지역의 저항이 이어졌다.[3]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은 성공적으로 독일군의 공세가 진행된 지역의 폴란드 육군에게 감흥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폴란드 침공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지구는 폴란드의 역사기념물 중 하나로 2003년 9월 1일 폴란드 국립문화유산위원회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목차 1 배경 2 전조 3 전투 4 여파 5 전투 서열 5.1 독일군 5.2 폴란드군 6 관련 영화 7 더 보기 8 각주 9 서지 10 외부 링크 배경[편집] 국제 연맹 고등판무관은 단치히의 베스테르플라테에 폴란드군 82명을 주둔할 수 있게 허가했고, 이 폴란드군은 1921년 단치히 자유시 상원의 동의 하에 설치한 해군 탄약 저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1933년 3월 6일에는 폴란드가 비밀리에 주둔군에 120명의 추가 군대를 파견할려고 했으나 이 비밀작업이 드러나 스캔들로 번저 폴란드는 추가로 파견하고자 했던 계획을 취소했다.[4]:315–316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는 본토와는 얇은 돌제부두로만 연결된 단치히 자유시 신항구의 항만 해협에 위치해 있었다. 베스테르플라테에서 폴란드군이 주둔한 지역은 벽돌벽으로 단치히 영토와 구분되어 있었다. 베스테르플라테에 건설된 방어시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그렇게 문제시되진 않았다. 실제 벙커나 지하 터널이 없었으며 반도 숲에 숨겨 위장된 5개의 소규모 콘크리트 전초기지와 방어전을 위한 대형 병영, 요새화 지원을 위한 참호와 바리케이드 네트워크가 있었다.[5] 또한 베스테르플라테의 건물 일부는 콘크리트로 보강했는데, 이 건물들이 7일동안 방어전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1]:54 전조[편집] 베스테르플라테 앞 항구에 정박한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 8월 말, 폴란드는 주둔군을 82명에서 210명으로 늘리고, 3인치 야포와 1.5인치 대전차포 2개, 박격포 4개, 기관총 여러대를 두는 등 군사력을 늘렸다. 또한, 소초 (Placówka) 7곳을 세우고 막사와 NCO 빌라 지하에 있는 콘크리트 대피소를 보강했다.[6]:11–12 1939년 8월 말에는 독일의 전드레트노트급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친선 방문을 이유로 단치히에 도착하여 베스테르플라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해협에 정박했다. 선박 갑판에는 8월 26일에 베스테르플라테 공격을 시작하기 위한 충격군(Stoßtruppen) 중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선 직전에 공격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8월 25일 영국-폴란드 군사 동맹이 맺어지고 이탈리아가 강철 조약의 준수를 미루겠다고 말하자 아돌프 히틀러가 적대 행위 시작을 연기하기로 한 결과였다.[7] 독일군은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 장군이 이끄는 1,500명의 SS 향토방위군(SS-Heimwehr)과 중위 빌헬름 헤닝센이 이끄는 해병대 225명이 창고를 공격했다. 총지휘관은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타 있던 제독 구스타프 클라이캄프가 맡았다. 그는 8월 26일 상류 지역 멀리로 배를 옮겼다. 폴란드군 장군 헨리크 수하르스키는 주둔군에게 경보를 발령했다.[6]:12 전투[편집] 1939년 9월 1일 현지 시간 4시 48분,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폴란드 주둔군 182명과 예비군 27명이 머무르는 병영을 향해 일제포격을 시작하면서 폴란드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수하르스키 장군은 급하게 헬 반도로 "SOS. 지금 포격을 받고 있다"라는 전신을 보냈다.[6]:12 경계벽에 포탄이 맞아 구멍이 생기고 남동부 지역의 기름창고에는 불이 붙어 폭발했다. 8분 후, 슐례스비히-홀슈타인 전함에서 중위 빌헬름 헤닝센이 이끄는 해병대가 급습하고 독일 국방군의 공병 3개 소대가 공세를 펼치면서 폴란드 본토와 이어진 철교를 폭파시켰다. 이런 상황에 독일군은 기습을 받아 놀란 폴란드군을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다.[8] 폴란드군 하사 보이시에흐 나이사레크가 기관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과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의 최초 사망자가 되었다. 그러나, 포격으로 파괴된 벽돌 벽을 넘은 후에는 독일군이 갑작스런 매복 공격을 당했다. 독일군은 얽히섥힌 유자철선으로 인해 재빠른 기동을 하지 못하면서 은폐한 폴란드군의 일제사격 살상지대에 걸려들게 되었다(일부는 나무에 숨은 저격수도 있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없었다). 폴란드군은 보안경찰의 기관총좌를 제압했고, 폴란드군 중위 레온 파예크가 전진하는 독일군에게 강력한 곡사포 포격을 하면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항구 건너편 창고 위에 있던 7.62mm 기관총 1개가 배치된 기관총좌도 제압했으나, 독일군 전함이 28번의 포격을 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6]:12[9] "독일군을 포화 속으로 끌어들이자는 전초기지 지휘관의 전술 덕택으로 독일군이 사격 범위 내로 들어오면서 많은 손실을 입히게 했다. 돌출부의 정찰병이 정확하게 좌표를 말하면서 폴란드군이 박격포 포격을 하며 손실을 더 높였다. 1989년 봄~여름에 비밀리에 만들어진 이 방어벽 시스템은 독일군이 한때는 유명한 스파였던 베스테르플라테 공원 근처 진군을 어렵게 만들었다."[10]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지도. 빨강색은 독일군의 공격도/방어선이며, 남청색은 폴란드군의 방어선 / 방어지점이다. 6시 22분, 해병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한다고 배에게 통신을 보냈고, 단치히 경찰은 베스테르플라테 반대편 항구를 장악하러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1] 이때까지의 사상자는 독일군 50명, 폴란드군 8명이었다. 독일군은 8시 55분 다시 전진을 시도했지만 지뢰, 쓰러진 나무, 철조망, 강력한 포화 등을 만나 격전을 벌였다.[11] 정오에 SS 군인이 탈영했으며, 헤닝센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11][12] 초기 공격이 실패한 이후 아침에 다시 시작한 두 번째 공격(280mm 포탄 90발, 170mm 포탄 407발, 88mm 포탄 366발의 포격이 이루어진 이후)은 독일군이 예기치 않게 큰 손실을 입으면서 격퇴당했다. 하지만 결국 폴란드군은 바우 지역(Wał)과 전초 기지의 프롬으로 후퇴했으며, 반도 중앙의 새로운 병영 주변에 방어 기지를 건설했다. 전투 첫날 이후, 폴란드군은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독일군이 포로로 잡고 병원으로 후송된 2명을 포함하여 3명이 나중에 사망했다). 한편, 독일 해군 보병은 16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을 입어 전체 225명 중 대부분이 부상을 입었다.[13] 독일군의 손실은 만약 폴란드 사령관 헨리크 수하르스키가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박격포 사격을 중지시키고 일제사격 후 포격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늘어났을 것이다(이 때문에 다음 날 박격포가 파괴되었을때 박격포탄 860개 중 104개만 쓰이고 나머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베스테르플라테를 포격하는 모습. 다음 날, 반도에 210mm 곡사포를 포함한 독일 해군의 중포병이 포격을 시작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식의 전투 스타일로 바뀌었다. 에버하르트는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에게 지상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9월 2일 융커스 Ju-87 스튜카 급강하폭격기 60기가 폴란드 박격포에 대해 2번의 공습을 펼치면서 포대 5개가 500kg 포탄에 명중하여 파괴되었고 적어도 폴란드군 8명 이상이 사망했다. 또한, 이 공습으로 인한 연기가 베스테르플라테 전 영역에 뒤덮이게 되었고, 유일한 라디오 방송국과 식량 보급 기지를 파괴했다.[11] 독일 관측병들은 이러한 폭격에서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9] 9월 3일부터 4일까지 밤동안 펼친 독일군의 공세가 격퇴되었다. 9월 4일, 독일 어뢰정 T-196(G196의 이름이 바뀜)이 해변에서 기습공격을 했다.[14] 폴란드군은 바우 지역은 포기했고, 오직 항구 지역만 북쪽에서 오는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11] 9월 5일, 수하르스키가 전투피로증에 걸리면서 베스테르플라테에서 항복을 촉구하는 위원회를 열었다. 하지만, 항복에 반대했던 그의 부지휘관인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가 명령권을 이어받았고 항복은 무산되었다.[14] 독일 해군 보병, 단치히 SS, 경찰, 국방군으로 이루어진 몇번의 신중한 공격이 다시 폴란드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9월 6일 03시, 독일군은 불타는 열차를 다리를 통해 보냈지만, 겁먹은 기관사가 불붙은 열차를 너무 일찍 분리시키는 바람에 기름탱크에 도달시켜서 엄폐역할을 해주는 숲을 태워버리려던 계획은 실패했다.[14] 오히려 불타는 기차는 완벽한 방어선이 되었고 독일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15] 오후에 행해진 두 번째 기차 공격 역시 실패했다. 한편, 폴스키에 라디오는 지속적으로 "베스트플라테 지역은 여전히 전투중"이라는 메시지를 방송했다.[16] 2차 전쟁협의회가 열렸고 장군은 항복하기로 정했다. 이때 쯤 되면 독일군은 바르샤바 외곽까지 진출했고 부상자들 가운데서는 괴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15] 9월 7일 0430시 독일군은 강한 포격을 시작했고 이는 0700시까지 계속되었다. 화염방사기는 위병소 2개를 파괴했고 1~4개를 손상시켰다.[15] 포위된 수비대는 충분한 물과 의약품이 부족했다. WST의 의무관인 미에치스와프 스와비(Mieczysław Słaby)는 부상병에 대한 기본적인 치료를 할 수 없었다. 9시 45분에는 백기가 나타났다. 폴란드의 수비는 많은 독일군을 감동시켜서 독일군 사령관인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는 수하르스키가 사블라(szabla, 폴란드 사브르)를 착용하고 항복할 수 있게 했다(나중에는 이 군도를 압수했다).[15] 동시에 폴란드 통신병 카지미에슈 라신스키(Kazimierz Rasiński)는 항복한 이후 독일군이 살해했다. 그는 잔인한 심문까지 받았는데도 독일군에게 라디오 코드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다가 끝내 살해당했다.[17] 여파[편집] 베스테르플라테에 계양된 나치 독일 깃발. 독일군의 사상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00~300명 정도가 사상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처음 목표에 너무 가까이 정박한 전함에서 발포한 아군 사격으로 인한 사상자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폴란드군의 사상자는 이에 비해 매우 낮아서 15~20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18] 1940년에 발견된, 탈영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동료들에 의해 처형된 듯한 신원미상의 폴란드인 시신 5구가 매장된 곳에 대한 논란이 있다. 전쟁 포로 중 8명은 고문을 당하다 살아남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또한, 폴란드 사령관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부사령관이자 제독인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에 대한 논란이 있다.[20] 전후까지 살아남아 1946년에 사망한 수하르스키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폴란드에서 가장 높은 훈장인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을 받은 것에 대해, 1990년대에 발견한 전투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알 수 없는 판단으로 최근 매우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동브로프스키의 사망 이후 다른 폴란드 장교들은 이름뿐인 지휘관이 전투 기간 대부분 동안 셸 쇼크 상태였다는 것을 그들의 명예를 위해 숨기기로 맹세했다고 진술했다). 베스테르플라테는 이후 박사 야누쉬 마르샬레츠(Janusz Marszalec)은 폴란드 국립 추모 연구소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5]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의 지휘관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에 대한 의문 (또는 분쟁)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 논란은 학술적인 논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는다. 보통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이 논쟁은 다양한 미확인 출처 및 점진적이고 일정한 분위기 속에서 열정적인 중심지가 되가고 있다. 그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상태에 빠져서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 분쟁은 인터넷의 좁은 문에서,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에 관한 새로운 "진리"를 알려주겠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영화 스크립트를 통해 공식적으로 매스 미디어로 펼쳐지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상세한 분석 없이, 1939년 9월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에 관한 역사에 대한 지식을 확인했을 때, 공통점이 없음을 강조할 수 있다 ... 분쟁에 관계 없이,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WST의 200명 병사는 그들이 마지막 총알로 방어하기를 원하든지 아닌지 여부에 상관없이, 또는 1939년 9월 1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포격 12시간 이후 이미 무기를 내려놓았는지 아닌지 고려 여부 없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5] 전투 서열[편집] 1939년 9월 7일, 단치히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에서 항복한 이후 포로가 된 폴란드군. 독일군[편집] 크릭스마리네 선박 전드레트노트급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어뢰정 T-196, T-963 에버하르트 군 3. Marine-Stoßtrupp-Kompanie(엘리트 해군 보병 중대, 이후 Marine-Artillerie-Abteilung 531로 개명) 및 데사우로슬라우 지역 공병 소대 곡사포 독립대대(Haubitzen-Abt.) 단치히 해안 보호 경찰(단치히 경찰의 해안경비대) 및 질서경찰의 주 경찰 연대 SS Wachsturmbann Eimann(이 때 이미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가 이미 편성)을 포함한 SS 하임리히 단치히 지역 SS 민병 기타 군 루프트바페 II & III Gruppe StG 2 Immelmann (Sturzkampfgeschwader 2) 4.(St)/TrGr 186 총 합쳐서,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동안 대략 40~60기의 융커스 Ju 87 수튜카 폭격기와 기타 하인켈 He 51, 융커스 Ju 52 폭격기 7기가 이 전투에 참여했다. 독일 지상군은 ADGZ 중장갑차 수대, 2 cm Flak 30 대공포, 3.7 cm PaK 36 대전차포, 10.5 cm leFH 18 경곡사포, 21 cm Mörser 18 중곡사포 등 포 65문, 기관총 100문 이상, 박격포 수십개, 플라멘베르퍼 35 화염방사기 수십 개를 가지고 있었다.[21] 폴란드군[편집] 1939년 8월, 베스테르플라테의 수비대는 전쟁 직전 징집된 군인 182명과 예비군 민간인 27명, 총 20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는 76 mm divisional gun M1902 야포 1문,[22] Bofors 37 mm 대전차포 2문, Brandt Mle 27/31 중박격포 4문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수비군들은 불균형하게 무장되어 있었는데, 가장 무장이 잘 된 쪽은 기관총 41개, 중기관총16개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2] 또한, 소총 140개, 권총 40개 이상, 수류탄 1,000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23] 관련 영화[편집] 1967년 영화 1939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2013년 영화 1939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폴란드어: Tajemnica Westerplatte)[24] 더 보기[편집] 헬 전투 비엘룬 폭격 비즈나 전투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헨리크 수하르스키 - 당시 베스테르플라테 주둔 폴란드군 사령관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 - 당시 베스테르플라테 주둔 폴란드군 부사령관 각주[편집] ↑ 가 나 Zaloga, S.J., 2002, Poland 1939, Oxford: Osprey Publishing Ltd., ISBN 9781841764085 ↑ 가 나 다 (폴란드어) B. Kubisz, Wojsko Polskie – II wojna światowa nr 9..., s. 7. ↑ J. E. Kaufmann, Robert M. Jurga, Fortress Europe: European Fortifications of World War II, De Capo Press, 2002, ISBN 0-306-81174-X Google Print, p.272. ↑ Watt, R.M., 1979, Bitter Glory, Barnes & Noble, Inc., ISBN 0760709971 ↑ 가 나 다 “(English)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p. 4” (PDF). 2013년 4월 1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Mann, C, 2008,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rragon Books, ISBN 978-1407525136 ↑ Piekałkiewicz, Janusz. Sea War: 1939–1945. Blandford Press, London - New York, 1987, pg. 18, ISBN 0-7137-1665-7 ↑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Gdańsk: Muzeum II Wojny Światowej, 2008, p. 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폴란드어) Melchior Wańkowicz, Westerplatte. Warszawa: Instytut Wydawniczy "Pax", 1959. ↑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p. 2” (PDF). 2013년 4월 1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3. Parragon Books, 2008. ↑ (폴란드어) Mariusz Borowiak, Westerplatte. W obronie prawdy., Gdańsk: GDW, 2001 ↑ (폴란드어) The only consolation for the Germans was the massacred defenders of the post office in Danzig city. Kompania szturmowa ↑ 가 나 다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4. Parragon Books, 2008. ↑ 가 나 다 라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5. Parragon Books, 2008. ↑ (폴란드어) Mariusz Borowiak, Westerplatte. W obronie prawdy, Gdańsk: GDW, 2001. ↑ Robert Jackson, Battle of the Baltic: The Wars 1918–1945 (p. 55) ↑ W. Tym, Przygotowanie obrony i lądowa obrona polskiego wybrzeża morskiego 1-19 września 1939 r., cz. III, "Wojskowy Przegląd Historyczny" (dalej WPH) 1957, z. 4. s. 229–230. ↑ Rasiński Kazimierz (1902–1939) – urzędnik cywilny ↑ Aldona Rogulska, Paweł Chochlew (2013년 2월). 《Tajemnica Westerplatte》. Kraków: Znak. ISBN 978-83-240-1508-5.  ↑ HIAG: Wenn alle Brüder schweigen, grosser Bildband über die Waffen-SS (ISBN 3-921242-21-5), 1973 ↑ (폴란드어) Rozdżestwieński, Paweł. Armata wz. 1902/26 w pułkach piechoty II Rzeczypospolitej, Militaria XX Wieku Nr. 1(46)/2012 (in Polish) ↑ (폴란드어) PSZ, t. I, cz. 5, nie podają dokładnie stanu załogi Westerplatte. Z. Flisowski określa ją na 205-210 ludzi (Westerplatte, Warszawa 1974, s. 26). ↑ (영어)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서지[편집] Bogusław Kubisz (2008). 《Wojsko Polskie – II wojna światowa nr 9: Westerplatte 1939》 (폴란드어). Warszawa: Hachete Livre Polska sp. z o.o. ISBN 978-83-7575-041-6.  《Encyklopedia II wojny światowej nr 2: Wybuch wojny IX 1939 – V 1940. Plany wojenne Polski i Niemiec – Wojna obronna Polski》. Oxford Educational sp. z o.o. ISBN 83-7425-267-7.  Mariusz Wójtowicz-Podhorski, Westerplatte 1939. Prawdziwa historia, Gdańsk 2009, ISBN 978-83-7237-208-6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홈페이지 Westerplatte ruins today Map of events concerning Battle of Westerplatte (폴란드어) Vortal Westerplatte (폴란드어) Westerplatte broni się jeszcze (폴란드어) Strona Stowarzyszenia Rekonstrukcji Historycznej Wojskowej Składnicy Tranzytowej na Westerplatte (폴란드어) Muzeum Westerplatte Stowarzyszenia Rekonstrukcji Historycznej Wojskowej Składnicy Tranzytowej na Westerplatte (폴란드어) Obrona Westerplatte (폴란드어) Wojskowa Składnica Tranzytowa i jej obrona w Gedanopedii 좌표: 북위 54° 24′ 27″ 동경 18° 40′ 17″ / 북위 54.40750° 동경 18.67139°  / 54.40750; 18.6713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베스테르플라테_전투&oldid=24194047" 분류: 1939년 분쟁1939년 폴란드폴란드 9월 전역그단스크의 역사공성전1939년 9월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좋은 글폴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CS1 - 폴란드어 인용 (pl)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ItalianoLatina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8: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침공의 일부전투 이후 베스테르플라테의 독일군. 일부 폴란드인은 전투동안 일어난 엄청난 포격 때문에 "폴란드의 베르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날짜1939년 9월 1일 ~ 9월 7일장소단치히 자유시 베스테르플라테결과 독일군의 승리교전국 폴란드 제2공화국 나치 독일지휘관 헨리크 수하르스키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 구스타프 클라이캄프병력 205-225명[2] 3,400명피해 규모 15~20명 사망53명 부상나머지 포로 200~300명 사망 및 부상 vdeh폴란드 침공 폴란드 국경 전투 호이니체 크로얀티 라시 크룰레프스키 모크라 프쉬치나 그루지옹츠 므와바 요르다누프 프라우차트 벵기에르스카구르카 투홀라 숲 쳉스토호바 미코우프 부코비체 슬로바키아의 침공 발트 해안 베스테르플라테 단치히 국경 전투 단치히 해안 그디니아 헬 켕파오크시브스카 9월 4일~10일 토마슈프마조비에츠키 비츠나 우치 보로바구라 피오트르쿠프트리부날스키 루잔 푸우투스크 라돔 웜자 바라크 볼라치루소바 북부 전선 바르샤바 브주라 카우쉰 벵그루프 빌노 모들린 코브린 브제시치리테브스키 2차 토마슈프루벨스키 불카벵글로바 캄피노스 숲 크라스니스타프 워미안키 크라스노브루드 코츠크 남부 전선 프제미실 야로스와프 1차 토마슈프루벨스키 야보루프 야누프 숲 체시니키 르부프 소련의 폴란드 침공 사르니 빌노 후시네 그로드노 브와디폴 샤츠크 비티츠노 파르체프-야브원-밀라누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폴란드어: Oblężenie Westerplatte, 영어: Battle of Westerplatte)는 폴란드 침공 당시에 이루어진 전투로 제2차 세계 대전 최초의 전투이다. 이 전투는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 해군과 육군 병사가 단치히 자유시 부두인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의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폴란드어: Wojskowa Składnica Tranzytowa, WST)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창고는 약 200명 미만의 군인들만 경계하고 있었지만 7일 동안 급강하폭격기 폭격과 같은 대포격을 방어해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의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폴란드군은 15명~20명 가량이 사망한 데 비해 독일군은 200명이 사망하는 등 높은 교전비를 이루었다. 여기에 베스테르플라테에서 독일군을 7일동안 막아냈으며 그 이후에도 헬 전투가 끝난 10월 2일까지 폴란드 회랑 지역의 저항이 이어졌다.[3]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은 성공적으로 독일군의 공세가 진행된 지역의 폴란드 육군에게 감흥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폴란드 침공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지구는 폴란드의 역사기념물 중 하나로 2003년 9월 1일 폴란드 국립문화유산위원회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목차 1 배경 2 전조 3 전투 4 여파 5 전투 서열 5.1 독일군 5.2 폴란드군 6 관련 영화 7 더 보기 8 각주 9 서지 10 외부 링크 배경[편집] 국제 연맹 고등판무관은 단치히의 베스테르플라테에 폴란드군 82명을 주둔할 수 있게 허가했고, 이 폴란드군은 1921년 단치히 자유시 상원의 동의 하에 설치한 해군 탄약 저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1933년 3월 6일에는 폴란드가 비밀리에 주둔군에 120명의 추가 군대를 파견할려고 했으나 이 비밀작업이 드러나 스캔들로 번저 폴란드는 추가로 파견하고자 했던 계획을 취소했다.[4]:315–316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는 본토와는 얇은 돌제부두로만 연결된 단치히 자유시 신항구의 항만 해협에 위치해 있었다. 베스테르플라테에서 폴란드군이 주둔한 지역은 벽돌벽으로 단치히 영토와 구분되어 있었다. 베스테르플라테에 건설된 방어시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그렇게 문제시되진 않았다. 실제 벙커나 지하 터널이 없었으며 반도 숲에 숨겨 위장된 5개의 소규모 콘크리트 전초기지와 방어전을 위한 대형 병영, 요새화 지원을 위한 참호와 바리케이드 네트워크가 있었다.[5] 또한 베스테르플라테의 건물 일부는 콘크리트로 보강했는데, 이 건물들이 7일동안 방어전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1]:54 전조[편집] 베스테르플라테 앞 항구에 정박한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 8월 말, 폴란드는 주둔군을 82명에서 210명으로 늘리고, 3인치 야포와 1.5인치 대전차포 2개, 박격포 4개, 기관총 여러대를 두는 등 군사력을 늘렸다. 또한, 소초 (Placówka) 7곳을 세우고 막사와 NCO 빌라 지하에 있는 콘크리트 대피소를 보강했다.[6]:11–12 1939년 8월 말에는 독일의 전드레트노트급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친선 방문을 이유로 단치히에 도착하여 베스테르플라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해협에 정박했다. 선박 갑판에는 8월 26일에 베스테르플라테 공격을 시작하기 위한 충격군(Stoßtruppen) 중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선 직전에 공격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8월 25일 영국-폴란드 군사 동맹이 맺어지고 이탈리아가 강철 조약의 준수를 미루겠다고 말하자 아돌프 히틀러가 적대 행위 시작을 연기하기로 한 결과였다.[7] 독일군은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 장군이 이끄는 1,500명의 SS 향토방위군(SS-Heimwehr)과 중위 빌헬름 헤닝센이 이끄는 해병대 225명이 창고를 공격했다. 총지휘관은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타 있던 제독 구스타프 클라이캄프가 맡았다. 그는 8월 26일 상류 지역 멀리로 배를 옮겼다. 폴란드군 장군 헨리크 수하르스키는 주둔군에게 경보를 발령했다.[6]:12 전투[편집] 1939년 9월 1일 현지 시간 4시 48분,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폴란드 주둔군 182명과 예비군 27명이 머무르는 병영을 향해 일제포격을 시작하면서 폴란드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수하르스키 장군은 급하게 헬 반도로 "SOS. 지금 포격을 받고 있다"라는 전신을 보냈다.[6]:12 경계벽에 포탄이 맞아 구멍이 생기고 남동부 지역의 기름창고에는 불이 붙어 폭발했다. 8분 후, 슐례스비히-홀슈타인 전함에서 중위 빌헬름 헤닝센이 이끄는 해병대가 급습하고 독일 국방군의 공병 3개 소대가 공세를 펼치면서 폴란드 본토와 이어진 철교를 폭파시켰다. 이런 상황에 독일군은 기습을 받아 놀란 폴란드군을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다.[8] 폴란드군 하사 보이시에흐 나이사레크가 기관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과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의 최초 사망자가 되었다. 그러나, 포격으로 파괴된 벽돌 벽을 넘은 후에는 독일군이 갑작스런 매복 공격을 당했다. 독일군은 얽히섥힌 유자철선으로 인해 재빠른 기동을 하지 못하면서 은폐한 폴란드군의 일제사격 살상지대에 걸려들게 되었다(일부는 나무에 숨은 저격수도 있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없었다). 폴란드군은 보안경찰의 기관총좌를 제압했고, 폴란드군 중위 레온 파예크가 전진하는 독일군에게 강력한 곡사포 포격을 하면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항구 건너편 창고 위에 있던 7.62mm 기관총 1개가 배치된 기관총좌도 제압했으나, 독일군 전함이 28번의 포격을 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6]:12[9] "독일군을 포화 속으로 끌어들이자는 전초기지 지휘관의 전술 덕택으로 독일군이 사격 범위 내로 들어오면서 많은 손실을 입히게 했다. 돌출부의 정찰병이 정확하게 좌표를 말하면서 폴란드군이 박격포 포격을 하며 손실을 더 높였다. 1989년 봄~여름에 비밀리에 만들어진 이 방어벽 시스템은 독일군이 한때는 유명한 스파였던 베스테르플라테 공원 근처 진군을 어렵게 만들었다."[10]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지도. 빨강색은 독일군의 공격도/방어선이며, 남청색은 폴란드군의 방어선 / 방어지점이다. 6시 22분, 해병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한다고 배에게 통신을 보냈고, 단치히 경찰은 베스테르플라테 반대편 항구를 장악하러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1] 이때까지의 사상자는 독일군 50명, 폴란드군 8명이었다. 독일군은 8시 55분 다시 전진을 시도했지만 지뢰, 쓰러진 나무, 철조망, 강력한 포화 등을 만나 격전을 벌였다.[11] 정오에 SS 군인이 탈영했으며, 헤닝센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11][12] 초기 공격이 실패한 이후 아침에 다시 시작한 두 번째 공격(280mm 포탄 90발, 170mm 포탄 407발, 88mm 포탄 366발의 포격이 이루어진 이후)은 독일군이 예기치 않게 큰 손실을 입으면서 격퇴당했다. 하지만 결국 폴란드군은 바우 지역(Wał)과 전초 기지의 프롬으로 후퇴했으며, 반도 중앙의 새로운 병영 주변에 방어 기지를 건설했다. 전투 첫날 이후, 폴란드군은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독일군이 포로로 잡고 병원으로 후송된 2명을 포함하여 3명이 나중에 사망했다). 한편, 독일 해군 보병은 16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을 입어 전체 225명 중 대부분이 부상을 입었다.[13] 독일군의 손실은 만약 폴란드 사령관 헨리크 수하르스키가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박격포 사격을 중지시키고 일제사격 후 포격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늘어났을 것이다(이 때문에 다음 날 박격포가 파괴되었을때 박격포탄 860개 중 104개만 쓰이고 나머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베스테르플라테를 포격하는 모습. 다음 날, 반도에 210mm 곡사포를 포함한 독일 해군의 중포병이 포격을 시작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식의 전투 스타일로 바뀌었다. 에버하르트는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에게 지상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9월 2일 융커스 Ju-87 스튜카 급강하폭격기 60기가 폴란드 박격포에 대해 2번의 공습을 펼치면서 포대 5개가 500kg 포탄에 명중하여 파괴되었고 적어도 폴란드군 8명 이상이 사망했다. 또한, 이 공습으로 인한 연기가 베스테르플라테 전 영역에 뒤덮이게 되었고, 유일한 라디오 방송국과 식량 보급 기지를 파괴했다.[11] 독일 관측병들은 이러한 폭격에서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9] 9월 3일부터 4일까지 밤동안 펼친 독일군의 공세가 격퇴되었다. 9월 4일, 독일 어뢰정 T-196(G196의 이름이 바뀜)이 해변에서 기습공격을 했다.[14] 폴란드군은 바우 지역은 포기했고, 오직 항구 지역만 북쪽에서 오는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11] 9월 5일, 수하르스키가 전투피로증에 걸리면서 베스테르플라테에서 항복을 촉구하는 위원회를 열었다. 하지만, 항복에 반대했던 그의 부지휘관인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가 명령권을 이어받았고 항복은 무산되었다.[14] 독일 해군 보병, 단치히 SS, 경찰, 국방군으로 이루어진 몇번의 신중한 공격이 다시 폴란드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9월 6일 03시, 독일군은 불타는 열차를 다리를 통해 보냈지만, 겁먹은 기관사가 불붙은 열차를 너무 일찍 분리시키는 바람에 기름탱크에 도달시켜서 엄폐역할을 해주는 숲을 태워버리려던 계획은 실패했다.[14] 오히려 불타는 기차는 완벽한 방어선이 되었고 독일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15] 오후에 행해진 두 번째 기차 공격 역시 실패했다. 한편, 폴스키에 라디오는 지속적으로 "베스트플라테 지역은 여전히 전투중"이라는 메시지를 방송했다.[16] 2차 전쟁협의회가 열렸고 장군은 항복하기로 정했다. 이때 쯤 되면 독일군은 바르샤바 외곽까지 진출했고 부상자들 가운데서는 괴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15] 9월 7일 0430시 독일군은 강한 포격을 시작했고 이는 0700시까지 계속되었다. 화염방사기는 위병소 2개를 파괴했고 1~4개를 손상시켰다.[15] 포위된 수비대는 충분한 물과 의약품이 부족했다. WST의 의무관인 미에치스와프 스와비(Mieczysław Słaby)는 부상병에 대한 기본적인 치료를 할 수 없었다. 9시 45분에는 백기가 나타났다. 폴란드의 수비는 많은 독일군을 감동시켜서 독일군 사령관인 프리드리히게오르그 에버하르트는 수하르스키가 사블라(szabla, 폴란드 사브르)를 착용하고 항복할 수 있게 했다(나중에는 이 군도를 압수했다).[15] 동시에 폴란드 통신병 카지미에슈 라신스키(Kazimierz Rasiński)는 항복한 이후 독일군이 살해했다. 그는 잔인한 심문까지 받았는데도 독일군에게 라디오 코드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다가 끝내 살해당했다.[17] 여파[편집] 베스테르플라테에 계양된 나치 독일 깃발. 독일군의 사상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00~300명 정도가 사상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처음 목표에 너무 가까이 정박한 전함에서 발포한 아군 사격으로 인한 사상자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폴란드군의 사상자는 이에 비해 매우 낮아서 15~20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18] 1940년에 발견된, 탈영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동료들에 의해 처형된 듯한 신원미상의 폴란드인 시신 5구가 매장된 곳에 대한 논란이 있다. 전쟁 포로 중 8명은 고문을 당하다 살아남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또한, 폴란드 사령관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부사령관이자 제독인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에 대한 논란이 있다.[20] 전후까지 살아남아 1946년에 사망한 수하르스키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폴란드에서 가장 높은 훈장인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을 받은 것에 대해, 1990년대에 발견한 전투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알 수 없는 판단으로 최근 매우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동브로프스키의 사망 이후 다른 폴란드 장교들은 이름뿐인 지휘관이 전투 기간 대부분 동안 셸 쇼크 상태였다는 것을 그들의 명예를 위해 숨기기로 맹세했다고 진술했다). 베스테르플라테는 이후 박사 야누쉬 마르샬레츠(Janusz Marszalec)은 폴란드 국립 추모 연구소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5]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의 지휘관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에 대한 의문 (또는 분쟁)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 논란은 학술적인 논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는다. 보통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이 논쟁은 다양한 미확인 출처 및 점진적이고 일정한 분위기 속에서 열정적인 중심지가 되가고 있다. 그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상태에 빠져서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 분쟁은 인터넷의 좁은 문에서,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에 관한 새로운 "진리"를 알려주겠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영화 스크립트를 통해 공식적으로 매스 미디어로 펼쳐지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상세한 분석 없이, 1939년 9월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에 관한 역사에 대한 지식을 확인했을 때, 공통점이 없음을 강조할 수 있다 ... 분쟁에 관계 없이, 헨리크 수하르스키와 WST의 200명 병사는 그들이 마지막 총알로 방어하기를 원하든지 아닌지 여부에 상관없이, 또는 1939년 9월 1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포격 12시간 이후 이미 무기를 내려놓았는지 아닌지 고려 여부 없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5] 전투 서열[편집] 1939년 9월 7일, 단치히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에서 항복한 이후 포로가 된 폴란드군. 독일군[편집] 크릭스마리네 선박 전드레트노트급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어뢰정 T-196, T-963 에버하르트 군 3. Marine-Stoßtrupp-Kompanie(엘리트 해군 보병 중대, 이후 Marine-Artillerie-Abteilung 531로 개명) 및 데사우로슬라우 지역 공병 소대 곡사포 독립대대(Haubitzen-Abt.) 단치히 해안 보호 경찰(단치히 경찰의 해안경비대) 및 질서경찰의 주 경찰 연대 SS Wachsturmbann Eimann(이 때 이미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가 이미 편성)을 포함한 SS 하임리히 단치히 지역 SS 민병 기타 군 루프트바페 II & III Gruppe StG 2 Immelmann (Sturzkampfgeschwader 2) 4.(St)/TrGr 186 총 합쳐서,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동안 대략 40~60기의 융커스 Ju 87 수튜카 폭격기와 기타 하인켈 He 51, 융커스 Ju 52 폭격기 7기가 이 전투에 참여했다. 독일 지상군은 ADGZ 중장갑차 수대, 2 cm Flak 30 대공포, 3.7 cm PaK 36 대전차포, 10.5 cm leFH 18 경곡사포, 21 cm Mörser 18 중곡사포 등 포 65문, 기관총 100문 이상, 박격포 수십개, 플라멘베르퍼 35 화염방사기 수십 개를 가지고 있었다.[21] 폴란드군[편집] 1939년 8월, 베스테르플라테의 수비대는 전쟁 직전 징집된 군인 182명과 예비군 민간인 27명, 총 20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 폴란드군 보급품 창고는 76 mm divisional gun M1902 야포 1문,[22] Bofors 37 mm 대전차포 2문, Brandt Mle 27/31 중박격포 4문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수비군들은 불균형하게 무장되어 있었는데, 가장 무장이 잘 된 쪽은 기관총 41개, 중기관총16개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2] 또한, 소총 140개, 권총 40개 이상, 수류탄 1,000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23] 관련 영화[편집] 1967년 영화 1939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2013년 영화 1939년 베스테르플라테 전투(폴란드어: Tajemnica Westerplatte)[24] 더 보기[편집] 헬 전투 비엘룬 폭격 비즈나 전투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헨리크 수하르스키 - 당시 베스테르플라테 주둔 폴란드군 사령관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 - 당시 베스테르플라테 주둔 폴란드군 부사령관 각주[편집] ↑ 가 나 Zaloga, S.J., 2002, Poland 1939, Oxford: Osprey Publishing Ltd., ISBN 9781841764085 ↑ 가 나 다 (폴란드어) B. Kubisz, Wojsko Polskie – II wojna światowa nr 9..., s. 7. ↑ J. E. Kaufmann, Robert M. Jurga, Fortress Europe: European Fortifications of World War II, De Capo Press, 2002, ISBN 0-306-81174-X Google Print, p.272. ↑ Watt, R.M., 1979, Bitter Glory, Barnes & Noble, Inc., ISBN 0760709971 ↑ 가 나 다 “(English)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p. 4” (PDF). 2013년 4월 1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Mann, C, 2008,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rragon Books, ISBN 978-1407525136 ↑ Piekałkiewicz, Janusz. Sea War: 1939–1945. Blandford Press, London - New York, 1987, pg. 18, ISBN 0-7137-1665-7 ↑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Gdańsk: Muzeum II Wojny Światowej, 2008, p. 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폴란드어) Melchior Wańkowicz, Westerplatte. Warszawa: Instytut Wydawniczy "Pax", 1959. ↑ “Janusz Marszalec, Westerplatte, p. 2” (PDF). 2013년 4월 1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3. Parragon Books, 2008. ↑ (폴란드어) Mariusz Borowiak, Westerplatte. W obronie prawdy., Gdańsk: GDW, 2001 ↑ (폴란드어) The only consolation for the Germans was the massacred defenders of the post office in Danzig city. Kompania szturmowa ↑ 가 나 다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4. Parragon Books, 2008. ↑ 가 나 다 라 Mann, C: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page 15. Parragon Books, 2008. ↑ (폴란드어) Mariusz Borowiak, Westerplatte. W obronie prawdy, Gdańsk: GDW, 2001. ↑ Robert Jackson, Battle of the Baltic: The Wars 1918–1945 (p. 55) ↑ W. Tym, Przygotowanie obrony i lądowa obrona polskiego wybrzeża morskiego 1-19 września 1939 r., cz. III, "Wojskowy Przegląd Historyczny" (dalej WPH) 1957, z. 4. s. 229–230. ↑ Rasiński Kazimierz (1902–1939) – urzędnik cywilny ↑ Aldona Rogulska, Paweł Chochlew (2013년 2월). 《Tajemnica Westerplatte》. Kraków: Znak. ISBN 978-83-240-1508-5.  ↑ HIAG: Wenn alle Brüder schweigen, grosser Bildband über die Waffen-SS (ISBN 3-921242-21-5), 1973 ↑ (폴란드어) Rozdżestwieński, Paweł. Armata wz. 1902/26 w pułkach piechoty II Rzeczypospolitej, Militaria XX Wieku Nr. 1(46)/2012 (in Polish) ↑ (폴란드어) PSZ, t. I, cz. 5, nie podają dokładnie stanu załogi Westerplatte. Z. Flisowski określa ją na 205-210 ludzi (Westerplatte, Warszawa 1974, s. 26). ↑ (영어)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서지[편집] Bogusław Kubisz (2008). 《Wojsko Polskie – II wojna światowa nr 9: Westerplatte 1939》 (폴란드어). Warszawa: Hachete Livre Polska sp. z o.o. ISBN 978-83-7575-041-6.  《Encyklopedia II wojny światowej nr 2: Wybuch wojny IX 1939 – V 1940. Plany wojenne Polski i Niemiec – Wojna obronna Polski》. Oxford Educational sp. z o.o. ISBN 83-7425-267-7.  Mariusz Wójtowicz-Podhorski, Westerplatte 1939. Prawdziwa historia, Gdańsk 2009, ISBN 978-83-7237-208-6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홈페이지 Westerplatte ruins today Map of events concerning Battle of Westerplatte (폴란드어) Vortal Westerplatte (폴란드어) Westerplatte broni się jeszcze (폴란드어) Strona Stowarzyszenia Rekonstrukcji Historycznej Wojskowej Składnicy Tranzytowej na Westerplatte (폴란드어) Muzeum Westerplatte Stowarzyszenia Rekonstrukcji Historycznej Wojskowej Składnicy Tranzytowej na Westerplatte (폴란드어) Obrona Westerplatte (폴란드어) Wojskowa Składnica Tranzytowa i jej obrona w Gedanopedii 좌표: 북위 54° 24′ 27″ 동경 18° 40′ 17″ / 북위 54.40750° 동경 18.67139°  / 54.40750; 18.6713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베스테르플라테_전투&oldid=24194047" 분류: 1939년 분쟁1939년 폴란드폴란드 9월 전역그단스크의 역사공성전1939년 9월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좋은 글폴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CS1 - 폴란드어 인용 (pl)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ItalianoLatina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8: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국철도공사 381000호대 전동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철도공사 381000호대 전동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7년 1월) 한국철도공사 381000호대 전동차 거제역으로 진입하고 있는 38104편성 제작 및 운영 주 용도 통근형 전동차 제작사 현대로템 운영 회사 한국철도공사 제작 연도 2016년, 2018년 생산량 17편성 68량 사용량 17편성 68량 제원 차량 정원 (제어차) 148명(구동차/부수차) 160명 편성 정원 2736명 전장 19500 mm 전폭 3120 mm 전고 3750 mm 차량 중량 259.8 t 편성 중량 2078.4 t 궤간 1,435 mm 성능 동력 방식 동력분산식 전기 방식 교류 25,000 V 60 Hz 제어 방식 VVVF-IGBT(도시바) 2레벨 1C4M제어 기동가속도 3.0 km/h/s 영업 최고 속도 110 km/h 설계 최고 속도 120 km/h 감속도 3.5 km/h/s(비상시) 4.5 km/h/s 제동 방식 회생제동 병용 전기지령식 공기제동 보안 장치 ATS (수동운전) 한국철도공사 381000호대 전동차는 동해선 광역철도 개통과 함께 도입된 한국철도공사의 통근형 전동차이다. 현재 총 4량 13개 편성(52량)은 광역전철 동해선 부전 ~ 일광 구간에 운행하고 있으며, 4량 4개 편성(16량)은 2019년 7월부터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문산 ~ 서울역 구간과 문산 ~ 용산 구간에 운행 예정이다. 목차 1 기술적 사양 1.1 제어기기 1.2 실내 설비 1.3 운전 설비 1.4 편성 2 배속 3 현재 운행구간 4 현황 4.1 1세대분 4.2 2세대분 5 각주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기술적 사양[편집] 제어기기[편집] 한국철도공사 311000호대 전동차 후기형에서 사용된 우진산전, 도시바제 COVO52-A0형 주제어장치를 사용한다. 실내 설비[편집] 한국철도공사 371000호대 전동차와 좌석시트색을 제외한 모든것이 동일하다. 운전 설비[편집] 기존 차량들의 전면부보다 운전실 창을 넓히고, 형태를 살짝 바꾸어 시야를 개선하였으며, 1인 승무에 대응하도록 운전기기가 구성되어 있다. 편성[편집] 편성은 팬터그래프와 주변압기, 제어기기, 전동기가 탑재된 M'차, 보조전원장치와 공기압축기, 축전지, 제어실 등을 갖춘 Tc차로 구성되어 있다. 객차번호 설치된 전장품 3810XX Tc(SIV, 공기압축기, 축전지) 3811XX M'(팬터그래프, 주변압기, 주변환장치) 3812XX M'(팬터그래프, 주변압기, 주변환장치) 3819XX Tc(SIV, 공기압축기, 축전지) 배속[편집] 38101~38104편성 : 문산차량사업소, 4량 38105~38117편성 : 부산철도차량정비단 소속, 4량 덕하차량사업소 완공 이전까지는 부산철도차량정비단에서 임시로 검수 및 관리한다. 현재 운행구간[편집] ■ 동해선 : 부전 - 일광 ■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경의선 : 서울 - 문산 (38101~38104편성만 2019년 7월 이후로부터 운행 예정) 용산선 : 용산 - 가좌 (38101~38104편성만 2019년 7월 이후로부터 운행 예정) 현황[편집]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1세대분[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38101 편성 2016년 운행 중 2019년 7월부터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문산~서울역 구간과 문산~용산 구간에 운행 예정이다. 38102 편성 운행 중 38103 편성 운행 중 38104 편성 운행 중 38105 편성 운행 중 38106 편성 운행 중 38107 편성 운행 중 38108 편성 운행 중 38109 편성 운행 중 38110 편성 운행 중 2세대분[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38111 편성 2018년 운행 중 38112 편성 운행 중 38113 편성 운행 중 38114 편성 운행 중 38115 편성 운행 중 38116 편성 운행 중 38117 편성 운행 중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한국철도공사 동해선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한국철도공사 381000호대 전동차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vdeh 대한민국의 철도 차량증기 기관차 모가 4륜 푸러 아메 터우 발틱 고로 사타 소리 마터 파시 혀기³ 미카 630³ 660³ 700³ 810³ 900³ 901 디젤 기관차 2000 2100 3000 3100 3200 4000 4100 4200 4300 4400 5000 6000 6100 6200 6300 7000 7100 7200 7300 7400 7500 7600 9100 전기 기관차 데로 8000 8100 8200 8500 증기 동차 시그 디젤 동차 게하 나게하³ 3등 디젤 DC 협궤 DC³ DEC DHC NDC CDC · RDC 특별 동차² Roger-1000k 전기 동차고속형 KTX-I KTX-산천 KTX-DD HEMU-430X HSR-350x EMU-250¹ EMU-300¹ 특별 동차² 일반 간선형 EEC TTX 한국형 표준전동차 AUTS TEC 200000 210000 ITX-청춘 368000 인천국제공항철도 1000 특별 동차² 광역전철/도시철도형 서울 지하철·수도권 전철 D000 1000 3000 311000 319000 321000 331000 341000 351000 361000 371000 391000 인천국제공항철도 2000 인천 도시철도 부산 도시철도/동해선 381000 대구 도시철도 광주 도시철도 대전 도시철도 부산-김해경전철 K-AGT 무가선 저상 트램 객차 및 화차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 3등 객차 대용 객차 귀빈 객차² 협궤 객차³ 발전차 난방차 수화물차 우편차 화차† 자기부상열차 KOMAG-01 HML-01 HML-02 DMV-92 HML-03 UTM-01 UTM-02 에코비 SUMA550 가로줄 : 운행 중단. 1 : 도입 예정. 2 : 귀빈 전용. 3 : 협궤 전용. 기울임 : 기술 개발용. † : 화차는 객차가 아니지만, 분류의 편의상 포함함. vdeh부산 도시철도 차량부산교통공사 1000호대 2000호대 3000호대 4000호대🚈 한국철도공사 381000호대 부산-김해경전철주식회사 1000호대🚈 🚈 : 경전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철도공사_381000호대_전동차&oldid=24526530" 분류: 대한민국의 철도 차량동해선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7년 1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5일 (금) 08: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자유로 귀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자유로 귀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자유로 귀신은 대한민국의 도시전설로 2004년에서 2005년 경 부터 대한민국 인터넷에서 목격담이 나온 이후 TV 프로그램인 SBS 김용만 신동엽의 즐겨찾기에서 개그우먼 박희진이 처음으로 자유로 귀신 괴담을 언급하였다.[1][2] 이어 탁재훈, 박신혜가 이어 2007년 KBS 상상플러스에서 언급한 뒤 여러 연예인들이 언급한 도시괴담이다.[1][3] 이로 인해 2007년 한동안 유행하던 도시괴담으로 이후 목격자도 줄었지만 2011년 문화방송 서프라이즈에서 목격자의 말을 재구성해 이야기를 방영해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4] 목차 1 내용 2 인상착의 3 관련 방송 내용 4 같이 보기 5 참조 내용[편집] 한밤중 자유로에 가면 20대 묘령의 여인이 히치하이킹을 해달라는 손짓으로 서있다. 그 여인의 인상착의는 바바리 코트에 큰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그것은 선글라스가 아니고 눈 부분이 검게 뚫려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경기도 고양시 행주대교 북단에서 파주시 문산읍 자유의 다리에 이르는 고속화도로인 자유로는 주변에 임진강과 한강이 있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일어난다. 이외에도 목격자마다 경험한 것이 다 달라 내용이 점차 달라지는데 문화방송 서프라이즈에서 2011년 1월 9일 방영한 방송분에서의 내용은 이렇다. 목격자가 회식 후 운전을 하고 자유로를 달리던 중이었는데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한 여성을 칠 뻔 했다. 가까스로 사고를 피했고 20대 즈음 되보이는 여성은 운전자에게 다가와 "집까지 태워주실 수 있어요?"라는 부탁에 남자는 응했다. 남자는 내비게이션에 여성의 목적지를 찍고 출발했고 얼마 가지 않아 음주 단속에 걸리게 된다. 이에 남자는 여성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뒷자석을 봤지만 여성은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이후 그는 아내를 불러 운전을 시키고는 골아 떨어진다. 운전이 서툰 그녀는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운전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주위를 살피던 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목적지는 바로 공동묘지였다.[4] TvN 프로그램위험한 취재에서는 김세환 법사가 출연해 자유로에서 직접 접신을 시도하여 자유로 귀신의 정체가 2002년 자유로에서 목 졸라 살해당한 20대 묘령의 여인으로 시신이 부패되어 눈이 없는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범인은 2005년에 검거되었다고 주장하였다.[3] 사실 자유로는 임진강과 한강이 주변에 있어 안개가 자주 일어나 교통사고에 취약한 구역이며, 교통량 또한 많은 편[5]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운전자의 피로에 의한 환각이라는 의견 또한 있다. 인상착의[편집] 목격자마다 공통적인 것은 20대 묘령의 여인이라는 것과 눈 부분이 뚫려있다는 점이다. 관련 방송 내용[편집] 2007년 자유로 귀신이 크게 유행하자 TvN 위험한 취재에서 김세환 법사가 나와 자유로 귀신과 접신하는 장면을 보인 적이 있다. 이어 그는 2002년 일어난 자유로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자유로 귀신이며, 시신이 부패하여 이러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문화방송 서프라이즈에서 2011년 1월 9일 방송분에서는 2007년 제보자의 남편이 겪은 자유로에서 겪은 귀신 체험담을 재구성하여 방영하였다. 이 경험담은 미국의 유명한 도시괴담 중 하나인 사라진 히치하이커를 연상케 한다.[4] 한국방송 1박 2일에서 2011년 4월 3일부터 4월 17일 까지 방송분에서 김종민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오자 이에 이수근이 자유로 귀신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TvN SNL 코리아에서 2013년 7월 23일 <토요미스테리 자유로 귀신 : AN SNL DIGITAL SHORT>이라는 에피소드로 자유로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적이 있다. 같이 보기[편집] 자유로 도시괴담 히치하이커 사라진 히치하이커 크리피파스타 참조[편집] ↑ 가 나 “'자유로 귀신' 섬뜩한 경험담에 경악 ::: 한국일보 2007년 7월 11일자”. 2008년 4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2월 13일에 확인함.  ↑ 박희진 - 자유로 선글라스 여인 , 김용만 신동엽의 즐겨찾기 ::: 내일을 봅니다. SBS ↑ 가 나 [납량특집]자유로 귀신 믿어? 말아? ::: 스포츠경향 네이버 뉴스 ↑ 가 나 다 서프라이즈, ‘자유로 귀신’ 목격담 재구성…네티즌 관심 집중 ::: 강원일보 ↑ 고양시, 자유로 차선 등 노면표시 정비 ::: 아주경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자유로_귀신&oldid=24200693" 분류: 도시전설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3: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페르시아 제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페르시아 제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0년 10월)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티그리스 제국과 도시 수메르 우루크 우르 에리두 키시 라가시 니푸르 아카드 제국 아카드 바빌론 이신 수사 아시리아 아수르 니네베 두르샤루킨 님루드 바빌로니아 칼데아 엘람 아모리 후르리 미탄니 카시트 우라르투 연대기 수메르의 왕 엘람의 왕 아시리아의 왕 바빌론의 왕 언어 아람어 수메르어 아카드어 엘람어 후르리어 신화 에누마 엘리시 길가메시 마르두크 v • d • e • h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의 영토에 근거한 여러 개의 제국을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를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넓은 의미로는 1979년까지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여러 개의 제국들을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본래 남부 이란의 한 주(州)인 파르스에서 유래했는데 그 곳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왕조를 그 지역 이름으로 불렀으며, 오늘날의 유럽 언어도 그것을 따랐다. 그래서 영어를 비롯한 유럽 어에서는 이 나라를 페르시아라 통칭했다. 목차 1 역사 1.1 메디아(기원전 728년 - 기원전 550년) 1.2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1.3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기원전 330년 – 기원전 250년) 1.4 파르티아(기원전 250년 – 226년) 1.5 사산 왕조(226년 – 651년) 1.6 이슬람 제국(650년 – 1037년) 1.7 셀주크 제국(1037년 – 1194년) 1.8 몽골 제국 점령 시대(1219년 – 1478년) 1.9 사파비 왕조(1507년 – 1722년) 1.10 분열 기간 1.10.1 호타키 길자이 왕조(Hotaki Ghilzai dynasty: 1722년 – 1729년) 1.10.2 아프샤르 왕조(1736년 – 1796년) 1.10.3 잔드 왕조(Zand dynasty: 1750년 – 1794년) 1.11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1781년 – 1925년) 1.12 팔레비 왕조(Pahlavi dynasty: 1925년 – 1979년) 역사[편집] 메디아(기원전 728년 - 기원전 550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메디아입니다.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케메네스 왕조입니다. 키루스 대왕은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창시한다.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바빌로니아 제국을 물리침으로써 최고로 강한 나라에 이르게 된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키루스 원통이라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1879년에 발견되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노예제를 금지하며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은 급여를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한다. 제국의 영토는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 최고의 영토가 된다. 아케메네스의 영토는 인더스강에서부터 유럽에 이르렀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통일하였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때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가 격돌하는데 이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으로 부른다. 잘 알려진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와 스파르타 300명이 나라를 지켜냈던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은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전쟁이야기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기원전 330년 – 기원전 250년)[편집]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르고 아케메니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 받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쉽게 큰 땅을 복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케메니아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제는 자신들을 페르시아의 계승자로 부르면서 다리우스 3세에게 장엄한 장례식을 해주었다. 또한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딸 스타데이라와 결혼하였다. 파르티아(기원전 250년 – 226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파르티아입니다. 사산 왕조(226년 – 651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사산 왕조입니다. 사산제국은 로마제국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유지하여 서로 뺏고 뺏기는 영토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훗날 비잔티움 제국에게 크게 패하고 새롭게 일어나는 이슬람 제국에 의하여 사산제국은 멸망의 길로 가게된다. 사산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야즈데게르드 3세가 이슬람 제국에게 패하여 제국은 무너지고 만다. 이슬람 제국(650년 – 1037년)[편집] 이 문단을 이란의 역사 문서로 합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토론에서 의견을 나누어 주십시오. 이슬람 제국은 그때까지 있었던 가장 큰 나라를 만들게 되는데 지금의 스페인 땅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의 인더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셀주크 제국(1037년 – 1194년)[편집] 이 문단을 이란의 역사 문서로 합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토론에서 의견을 나누어 주십시오. 이 부분의 본문은 셀주크 제국입니다. 북동쪽에 있던 셀주크 투르크족이 침공하여 이슬람 제국은 흔들리게 된다. 이 투르크 족은 셀주크 제국을 만들게 된다. 1194년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술탄이 죽은 이후 25년간은 공백기로 남아있게 된다. 몽골 제국 점령 시대(1219년 – 1478년)[편집] 이 문단을 이란의 역사 문서로 합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토론에서 의견을 나누어 주십시오.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 제국입니다. 사파비 왕조(1507년 – 1722년)[편집] 이 문단을 이란의 역사 문서로 합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토론에서 의견을 나누어 주십시오. 이 부분의 본문은 사파비 왕조입니다. 사파비 왕조는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을 포함하며 점차 성장해 가다가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으로 인해 더 이상 확장하지 못했다.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종교로 받아들임으로써 가장 큰 시아파의 나라가 되며 오늘날 이란의 시아파로 이어지고 있다. 분열 기간[편집] 이 문단을 이란의 역사 문서로 합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토론에서 의견을 나누어 주십시오. 호타키 길자이 왕조(Hotaki Ghilzai dynasty: 1722년 – 1729년)[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아프샤르 왕조(1736년 – 1796년)[편집] 아프샤르 왕조는 나디르 샤가 시작한 왕조이다. 그 이름은 그가 속하고 있던 투르크계 아프샤르 족에 유래한다. 나디르 샤가 죽은 후 호라산 지방에 모여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796년에 카자르 왕조의 공격을 받아 4대로서 멸망했다. 잔드 왕조(Zand dynasty: 1750년 – 1794년)[편집]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가 암살된 후 잔드 부족의 카림 칸은 여러 지방에 할거하는 군웅을 제거하고 이란 전토를 통일하였다. 그는 선정을 베풀고 수도의 미화(美化)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1779), 동족 중에 왕위 쟁탈전이 격화되자 1794년 카자르 왕조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1781년 – 1925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카자르 왕조입니다.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계 카자르 족의 아가 모하마드가 잔드 왕조의 카림 칸이 죽은 후 독립하여 창건한 왕조이다. 테헤란에 수도를 두었다. 왕조 초기에는 러시아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국위(國威)를 해외에 떨쳤으나 러시아와의 두 번째 싸움에 패하여 치외법권을 인정하고(투르크만차이 조약:1828년), 이것이 열강들에게도 적용되어 이란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하여 바브교(敎)나 아프가니에 의한 민족 해방 운동이 일어나, 1906년에는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영국·러시아의 식민주의 팽창이 계속되어 동남부를 영국이, 북부를 러시아가 장악하였다. 1912년에는 정식으로 영국·러시아의 이란 분할 협정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반(半)식민지화 되었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혼란을 수습할 수가 없어 1925년 국민 의회에 의해서 폐위되었다. 팔레비 왕조(Pahlavi dynasty: 1925년 – 1979년)[편집] 이 문단을 이란의 역사 문서로 합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토론에서 의견을 나누어 주십시오. 이 부분의 본문은 팔레비 왕조입니다. 팔레비 왕조는 팔레비가 건국하여 이란의 이권을 회수하여 근대화 운동을 펼쳤지만 팔레비 왕조의 왕실은 지나친 사치와 친서방의 진보적인 나라였다. 이것을 반대한 이슬람계 보수파는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란·이슬람혁명을 일으켰는데 그 결과 팔레비 왕조가 멸망하고 신정제가 확립되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페르시아_제국&oldid=23495063" 분류: 이란의 역사아시아의 옛 나라페르시아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0년 10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합쳐야 할 문단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Na Vosa Vakaviti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日本語Patois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ngua Franca NovaLietuviųLatviešuMalagasyമലയാളം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ଓଡ଼ିଆPolskiپښتوPortuguêsRumantschRomână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Gagana Samo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ייִדיש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0일 (일) 12:4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리랑 5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리랑 5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계획되었거나 개발 중, 최근 공개한 우주선 또는 우주 계획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정확한 내용을 반영할 수 있도록 문서 수정을 도와주세요. 아리랑 5호 (KOMPSAT-5) 임무 정보 COSPAR ID 2013-042A 발사일 2013년 8월 22일 오후 11시 39분 (한국시간) 발사체 드네프르 발사 장소 러시아 야스니 발사장 임무 기간 5년 우주선 정보 개발 비용 2,480억원[1] 발사 비용 300억원 중량 1,400kg 내외 크기 3.7m x 2.6m x 9.1m 궤도 정보 궤도 550km 태양동기궤도 탑재체 탑재체 합성개구레이다 해상도 레이다 영상 (1/3/20m) 아리랑 5호는 한국 KARI에서 2013년 8월 22일 발사된 관측위성이다. 다목적실용위성 5호(KOMPSAT-5)라고도 부른다. 아리랑 1호와 아리랑 2호와는 달리 SAR가 부착되어 있어 날씨에 상관없이 전천후로 지구 관측이 가능하다. 해양 유류사고, 화산 폭발 같은 재난 감시와 지리정보시스템(GIS) 구축 등에 활용될 예정이다. 아리랑 시리즈들은 기본적으로 한국군대에 정보와 통신을 제공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목차 1 해상도 2 발사 3 수명 4 더 보기 5 각주 해상도[편집] 아리랑 5 호 해상도는 1m이다.[2] SAR 제작기술은 국내에 확보되어 있지 않아, 공동개발사인 유럽의 위성개발업체 탈레스 알레니아 스페이스 이탈리아(TASI)가 국내에 들어와 제작한다.[2] 탈레스 알레니아 스페이스 이탈리아는 독일의 해상도 50 cm급 SAR 정찰위성 시스템인 SAR-Lupe에도 SAR 장비를 납품한 회사이다. 한편 한국은 2008년 해상도 40cm인 항공기용 SAR KPU-STC를 개발했다. 발사[편집] 당초 2011년 4월에 개발이 완료되어 2011년 8월 말에 발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러시아 정부 측의 사정으로 한 차례 연기되었다가 2012년 하반기 발사를 목표로 재추진해왔지만, 러시아 연방 우주국은 발사체를 제공하는 국방부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정확한 일정을 확정해 주지 않아 2013년으로 또 다시 연기되었다.[3] 2010년 개발을 완료하였으나 2년 넘게 발사가 지연되다가, 2013년 8월 22일 오후 8시 39분(한국시간 오후 11시 39분)을 기점으로 러시아 야스니 발사장에서 우주로 쏘아 올려졌다. 다목적실용위성 5호는 발사 약 32분 후에 남극에 위치한 트롤 지상국과 첫 교신에 성공했으며, 이어서 발사 1시간 27분후 노르웨이 스발바르드 지상국과의 교신을 성공한데 이어, 5시간 56분 후(한국시각 23일 오전 5시 36분)에는 대전 항공우주연구원에 위치한 위성정보연구센터 지상국과 첫 교신에 성공하였고 발사성공이 최종 확인되었다. 수명[편집] 한국 최초의 SAR 관측위성인 아리랑 5호는, 원래 임무수명기간 5년으로 2013년에 발사했는데, 2018년 8월 2년 연장했다. 원래 인공위성은 사고나 긴급한 경우를 대비해서, 임무수명 보다 훨씬 많은 양의 연료를 탑재한다. 운용하면서 별 비상사태가 없으면 임무기간이 늘어난다. 더 보기[편집] 돔바로프스키 공군 기지 각주[편집] ↑ [1]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262&aid=0000005725 ↑ 아리랑 5호·과학위성 3호 발사 또 미뤄져연합뉴스 2012년 10월 11일 vdeh대한민국의 우주 개발개발기관 KARI SaTReC KASI KAI 대한항공 쎄트렉아이 우주센터나로우주센터로켓 엔진 나로호 2단 KRE-030 KRE-075 KRE-007 KRE-010 KRE-090 로켓 KSR-I(과학로켓) KSR-II(중형과학로켓) KSR-III(액체추진과학로켓) 나로호(KSLV-I) 누리호(KSLV-II)/시험발사체 중궤도 정지궤도 발사체(KSLV-III) 대형 정지궤도 발사체(KSLV-IV) 소형위성 우리별 1호 우리별 2호 우리별 3호 과학기술위성 1호 과학기술위성 2A·2B호 나로과학위성 과학기술위성 3호 차세대소형위성 1호 차세대소형위성 2호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 1호 아리랑 2호 아리랑 3호 아리랑 3A호 아리랑 5호 아리랑 6호 아리랑 7호(계획) 차세대중형위성 차세대중형위성 군용정찰위성 425사업 방송통신위성 무궁화 1호 무궁화 2호 무궁화 3호 무궁화 5호 올레 1호(무궁화 6호) 무궁화 7호 무궁화 5A호 정지궤도위성 천리안 천리안 2A·2B 기타 한국 우주인 배출 사업 대한민국의 인공위성 목록 대한민국의 로켓 개발 대한민국의 달탐사 계획 우주과학관 OSSI-1 vdeh세계의 정찰위성 대한민국 IMINT 아리랑 1호 아리랑 2호 아리랑 3호 아리랑 3A호 아리랑 5호 아리랑 6호 아리랑 7호 일본 IMINT IGS 1A IGS 1B IGS 3A IGS 4A IGS 4B IGS 5A IGS 6A IGS 7A IGS 8A IGS 8B 중국 IMINT JSSW FSW-0 FSW-1 FSW-2 FSW-3 JianBing CBERS-2 SIGINT JSSW-3 SJ-2 DQ-1 COMM Feng Huo-1 ShenTong-1 미국 KH-11 KH-12 KH-13 GEO2 러시아 페르소나 프랑스 IMINT 헬리오스 1B 헬리오스 2A 플레이아데스1 플레이아데스2 SIGINT Cerise Clementine 이스라엘 IMINT 오페크 7호 오페크 9호 COMM AMOS 1 AMOS 2 AMOS 3 AMOS 4 기타 Eros TecSAR 인도 IMINT RISAT-2 독일 IMINT SAR-Lupe 이탈리아 IMINT COSMO-SkyMed 상업용 IMINT (EO) 월드뷰1 퀵버드 이코노스 지오아이1 지오아이2 스팟 EO1-ALI 플레이아데스1 플레이아데스2 아스터 랜드셋 아리랑 2호 IMINT (SAR) RADARSAT-1 RADARSAT-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리랑_5호&oldid=23412951" 분류: 미래 우주 계획대한민국의 인공위성정찰위성한국항공우주연구원2013년 우주 개발2013년 8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Français日本語Latviešu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4일 (금) 15: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인천해송고등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천해송고등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22′ 57″ 동경 126° 38′ 46″ / 북위 37.3825672° 동경 126.6460025°  / 37.3825672; 126.6460025 인천해송고등학교仁川海松高等學校Incheon Haesong High School 교훈 세계인, 문화인, 창조인 개교 2010년 설립형태 공립 교장 안화식 교감 김태분 국가 대한민국 위치 인천광역시 연수구 해송로 20 (송도동) 학생 수 864명 (2018년 5월 1일 기준) 교직원 수 69명 (2018년 5월 1일 기준) 상징 교목: 향나무 / 교화: 목련 관할관청 인천광역시교육청 웹사이트 http://www.ihs.icehs.kr 인천해송고등학교(仁川海松高等學校)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1] 목차 1 학교 연혁 2 학교 동문 3 참고 자료 4 각주 5 외부 링크 학교 연혁[편집] 2010년 2월 14일 : 인천해송고등학교 설립 인가(11학급) 2010년 3월 1일 : 제1대 양재영 교장 취임 2010년 3월 2일 : 인천해송고등학교 개교 2010년 3월 2일 : 인천해송고등학교 제1회 입학식(398명) 2013년 2월 7일 : 인천해송고등학교 제1회 졸업식(396명) 2014년 9월 1일 : 제3대 이원우 교장 취임 2016년 2월 16일 : 인천해송고등학교 제4회 졸업식(299명) 2016년 3월 2일 : 인천해송고등학교 제7회 입학식(312명) 2017년 2월 8일 : 인천해송고등학교 제5회졸업식(277명) 2017년 3월 2일 제 5회입학식 (296명) 이 목록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이 편집하여 채워 주세요. 학교 동문[편집] 분류:인천해송고등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참고 자료[편집] 인천해송고등학교 - 한국교육학술정보원 학교알리미 각주[편집] ↑ 인천광역시의회 (2016년 1월 4일). “인천광역시립학교 설치조례 별표1”.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 법제처. 2016년 7월 3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인천해송고등학교 홈페이지 vdeh 인천광역시의 고등학교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강화군 강남영상미디어고 강화고 강화여고 교동고 덕신고 산마을고 삼량고 서도고 계양구 계산고 계산공고 계산여고 계양고 서운고 안남고 인천세원고 인천예일고 인천효성고 작전고 작전여고 남동구 도림고 동인천고 문일여고 미추홀외고 석정여고 숭덕여고 신명여고 인제고 인천고잔고 인천금융고 인천남고 인천남동고 인천논현고 인천만수고 인천송천고 인천예고 동구 동산고 영화관광경영고 재능고 미추홀구 도화기계공고 문학정보고 선인고 인명여고 인천고 인천기계공고 인천비즈니스고 인천전자마이스터고 인천하이텍고 인하사대부고 인항고 인화여고 정석항공과학고 학익고 학익여고 부평구 명신여고 부개고 부개여고 부광고 부광여고 부평고 부평공고 부평여고 삼산고 세일고 인천미래생활고 인천부흥고 인천산곡고 인천상정고 인천영선고 인천외고 인천진산과고 인평자동차고 제일고 서구 가림고 가정고 가좌고 검단고 대인고 백석고 서인천고 인천디자인고 인천마전고 인천보건고 인천세무고 인천신현고 인천원당고 인천청라고 인천체고 인천초은고 인천해원고 한국주얼리고 연수구 박문여고 송도고 신송고 연수고 연수여고 옥련여고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 인천대건고 인천뷰티예술고 인천생활과학고 인천여고 인천연송고 인천포스코고 인천해송고 인천해양과학고 청학공고 옹진군 대청고 덕적고 백령고 연평고 인천영흥고 중구 광성고 영종국제물류고 인성여고 인일여고 인천공항고 인천과고 인천국제고 인천여상 인천영종고 인천정보산업고 인천중앙여상 인천하늘고 인천해사고 제물포고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인천해송고등학교&oldid=24396875" 분류: 인천 연수구의 고등학교대한민국의 여자 고등학교2010년 개교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11: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호위사령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위사령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위 사령부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호위사령부/제963군부대 활동 기간 ? ~ 현재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종류 친위대 사령부 역할 국가 원수와 가족, 요인 호위 및 주요 시설 경비 명령 체계 인민무력부 본부 평양직할시 호위사령부(護衛司令部)는 평양직할시의 방어와 경비, 그리고 국가 원수를 호위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령부이다. 목차 1 개요 2 역사 3 조직 4 구성원 5 같이 보기 6 참고 개요[편집] 호위사나 호위총국으로 부르며 남한의 대통령경호실에 해당하는 국가 기관으로서 인민무력부 예하에 편성되어 있으나, 국방위원회의 지휘를 받고 있는데, 국방위원장을 겸한 국가 원수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김일성이 통치하던 1994년에는 약 5만명이었고, 대외적으로 움직일 때는 경호원 이외에도 독립 여단 예하의 4개 대대, 1600명의 병력이 호위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병력의 신분은 전원 군관이며 병력의 신장은 전원 180cm 이상이다. 또한 병력 전원 사격실력이 뛰어나며 병력 전원 무술 고단자인데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아서 엄선된다. 역사[편집] 한반도로 진격한 소련 극동 전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을 호위하기 위해 창설된 경위연대가 시초였다. 연대는 한국 전쟁이 휴전된 후, 1958년 김일성 독재체1960년대 후반 주체사상이 등장하고 1970년대 들어서 사회주의 헌법 6차 개정을 통해서 주석제를 도입하고, 김일성 1인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유일적 영도 체계를 구축하면서 호위사업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제를 구축하기 위해 반대파 세력을 숙청하고 호위사업이 시작면서 당 보위의 명분을 위해 호위국으로 개편되었다. 1965년 중앙당 경호처년에 195 호위사령부국을[2] 1980년대에는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유일영도체계가 확고해지자, 평양이라는 범위까지 호위개념을 넓히면서 기존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호위국과 평양방어사령부(평방사), 평양경비사령부를 합쳐 호위총국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1990년 이후(김일성 사후)에는 조직과 기능의 일부를 보완하여 다시 호위사령부 체제로 개편했다. 1994년에 김일성이 죽은 이후에는 조직과 기능이 보완, 수정되면서 호위사령부 체제로 개편되었다. 2008년 12월부터 2009년 8월까지 호위사령부가 전체적으로 개편되었다. 제1호위부의 임무가 김일성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을 경비하는 임무로 축소되었다. 호위사령관과 정치위원의 지위가 1계급씩 승격되었다.[3] 2014년 1월 2일 외화벌이를 위해 호위사령부가 주도하여 제조한 마약을 남한,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주변국에 밀매하고 있다고 옛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이었던 40세의 망명자가 제보하였다.[4] 조직[편집] 3개 대대로 구성된 다수의 독립 여단이 호위사령부의 예하에 편성되어 있다.[5] 12만이란 숫자는 평양방어사령부와 평양경비사령부 인원이 포함된 추정치로 호위사령부 1개 여단은 5000명 정도로 북한군 정규여단보다 1500명 정도 많다. 경보병여단 등 특수여단도 6개 대대인 데 비해 호위사령부 1개 여단은 8~11개 대대로 편성돼 있다. 호위총국 제1국 제1호위부 - 금수산 기념궁전과 국사 원수의 저택 경비 및 가족 호위.[5] 제2호위부 - 국가 원수 호위 및 중앙당 청사 경비.[5] 제3호위부 - 국제친선관람관과 만수대의사당 경비 및 정치국 위원 호위.[5] 제4호위부 행사안전부 열차호위부 경비운수부 제2국 - 국가 원수의 개인 물자 관리. 아미산 대표부 - 아미산에 거점을 두고 국외의 식량을 조달한다. 검정부 - 물자 검사. 제3국 - 물자 수송/공급/관리. 제4국 - 국가 원수와 가족의 별장 관리. 평양경비사령부 평양방어사령부 확인되지 않은 다수의 독립 여단 구성원[편집] 보위부와 마찬가지로 하전사와 사관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전원 군관만 존재한다. 또한 이들은 다른 부대와는 달리 평균신장 180cm, 최소신장 175c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최하계급은 소위로 전원 장교로만 구성되어 있다. 같이 보기[편집] 친위대 보위사령부 참고[편집] vdeh조선인민군(KPA)지휘부 주석 최고사령관 총참모부 기관 국방위원회 국무위원회 인민무력성 인민정치국 고위사령부 보위사령부 호위사령부 전력군종 륙군 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전략군 특수부대 예비군 교도대 로농적위군 붉은 청년근위대 청년돌격대 인민내무군 인민보안부 그 외 대량 살상 무기 한반도 분단 원수 군단 해군 장비 ↑ 정동영 (1994년 7월 8일). “북한 김일성주석, "호위총국"”.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 “제17부 김정일 호위사령부”. 자유조선방송. 2011년 8월 7일. 2016년 3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 이윤거 (2011년 8월 12일). “김정은의 공식등장 1-김정은, 호위사령부 2009년 8월 전면 개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2014년 9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 오현우 (2014년 1월 2일). “북한産 마약 국내 다량 유입…김정은 호위사령부 주도”. 데일리.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디지털 북한 백과사전: 호위사령부”. 코리아콘텐츠랩,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호위사령부&oldid=24058447" 분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령부평양직할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فارسیItaliano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8일 (목) 22: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호위사령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위사령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위 사령부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호위사령부/제963군부대 활동 기간 ? ~ 현재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종류 친위대 사령부 역할 국가 원수와 가족, 요인 호위 및 주요 시설 경비 명령 체계 인민무력부 본부 평양직할시 호위사령부(護衛司令部)는 평양직할시의 방어와 경비, 그리고 국가 원수를 호위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령부이다. 목차 1 개요 2 역사 3 조직 4 구성원 5 같이 보기 6 참고 개요[편집] 호위사나 호위총국으로 부르며 남한의 대통령경호실에 해당하는 국가 기관으로서 인민무력부 예하에 편성되어 있으나, 국방위원회의 지휘를 받고 있는데, 국방위원장을 겸한 국가 원수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김일성이 통치하던 1994년에는 약 5만명이었고, 대외적으로 움직일 때는 경호원 이외에도 독립 여단 예하의 4개 대대, 1600명의 병력이 호위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병력의 신분은 전원 군관이며 병력의 신장은 전원 180cm 이상이다. 또한 병력 전원 사격실력이 뛰어나며 병력 전원 무술 고단자인데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아서 엄선된다. 역사[편집] 한반도로 진격한 소련 극동 전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을 호위하기 위해 창설된 경위연대가 시초였다. 연대는 한국 전쟁이 휴전된 후, 1958년 김일성 독재체1960년대 후반 주체사상이 등장하고 1970년대 들어서 사회주의 헌법 6차 개정을 통해서 주석제를 도입하고, 김일성 1인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유일적 영도 체계를 구축하면서 호위사업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제를 구축하기 위해 반대파 세력을 숙청하고 호위사업이 시작면서 당 보위의 명분을 위해 호위국으로 개편되었다. 1965년 중앙당 경호처년에 195 호위사령부국을[2] 1980년대에는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유일영도체계가 확고해지자, 평양이라는 범위까지 호위개념을 넓히면서 기존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호위국과 평양방어사령부(평방사), 평양경비사령부를 합쳐 호위총국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1990년 이후(김일성 사후)에는 조직과 기능의 일부를 보완하여 다시 호위사령부 체제로 개편했다. 1994년에 김일성이 죽은 이후에는 조직과 기능이 보완, 수정되면서 호위사령부 체제로 개편되었다. 2008년 12월부터 2009년 8월까지 호위사령부가 전체적으로 개편되었다. 제1호위부의 임무가 김일성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을 경비하는 임무로 축소되었다. 호위사령관과 정치위원의 지위가 1계급씩 승격되었다.[3] 2014년 1월 2일 외화벌이를 위해 호위사령부가 주도하여 제조한 마약을 남한,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주변국에 밀매하고 있다고 옛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이었던 40세의 망명자가 제보하였다.[4] 조직[편집] 3개 대대로 구성된 다수의 독립 여단이 호위사령부의 예하에 편성되어 있다.[5] 12만이란 숫자는 평양방어사령부와 평양경비사령부 인원이 포함된 추정치로 호위사령부 1개 여단은 5000명 정도로 북한군 정규여단보다 1500명 정도 많다. 경보병여단 등 특수여단도 6개 대대인 데 비해 호위사령부 1개 여단은 8~11개 대대로 편성돼 있다. 호위총국 제1국 제1호위부 - 금수산 기념궁전과 국사 원수의 저택 경비 및 가족 호위.[5] 제2호위부 - 국가 원수 호위 및 중앙당 청사 경비.[5] 제3호위부 - 국제친선관람관과 만수대의사당 경비 및 정치국 위원 호위.[5] 제4호위부 행사안전부 열차호위부 경비운수부 제2국 - 국가 원수의 개인 물자 관리. 아미산 대표부 - 아미산에 거점을 두고 국외의 식량을 조달한다. 검정부 - 물자 검사. 제3국 - 물자 수송/공급/관리. 제4국 - 국가 원수와 가족의 별장 관리. 평양경비사령부 평양방어사령부 확인되지 않은 다수의 독립 여단 구성원[편집] 보위부와 마찬가지로 하전사와 사관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전원 군관만 존재한다. 또한 이들은 다른 부대와는 달리 평균신장 180cm, 최소신장 175c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최하계급은 소위로 전원 장교로만 구성되어 있다. 같이 보기[편집] 친위대 보위사령부 참고[편집] vdeh조선인민군(KPA)지휘부 주석 최고사령관 총참모부 기관 국방위원회 국무위원회 인민무력성 인민정치국 고위사령부 보위사령부 호위사령부 전력군종 륙군 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전략군 특수부대 예비군 교도대 로농적위군 붉은 청년근위대 청년돌격대 인민내무군 인민보안부 그 외 대량 살상 무기 한반도 분단 원수 군단 해군 장비 ↑ 정동영 (1994년 7월 8일). “북한 김일성주석, "호위총국"”.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 “제17부 김정일 호위사령부”. 자유조선방송. 2011년 8월 7일. 2016년 3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 이윤거 (2011년 8월 12일). “김정은의 공식등장 1-김정은, 호위사령부 2009년 8월 전면 개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2014년 9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 오현우 (2014년 1월 2일). “북한産 마약 국내 다량 유입…김정은 호위사령부 주도”. 데일리.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디지털 북한 백과사전: 호위사령부”. 코리아콘텐츠랩,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2014년 9월 9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호위사령부&oldid=24058447" 분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령부평양직할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فارسیItaliano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8일 (목) 22: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흑사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흑사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346년-1353년 사이 흑사병의 전파 현황.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범유행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유럽 지역에서는 1346년–1353년 사이 범유행이 절정에 달했으며, 이 범유행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최소 7500만, 최고 2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1][2][3] 흑사병 병원균에 관한 많은 이설이 있었으나 2010년-2011년 남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DNA 분석 결과 페스트의 병원균인 페스트균이 병원균으로 밝혀졌다.[4][5]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1343년경 크림 반도에 닿았다.[6] 거기서부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쥐들에 기생하던 동양쥐벼룩을 기주로 하여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흑사병으로 유럽의 총 인구의 30-60%가 죽었다.[7]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 5천만 명-3억 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이 줄었다.[8] 흑사병으로 인해 줄어든 세계 인구가 흑사병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기까지 시간이 걸렸다.[9] 그 뒤로도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산발적으로 유행했는데(런던 대역병 등), 흑사병의 병원체를 페스트균으로 확정한다면 흑사병이란 1345년에서 1840년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계속된 제2차 페스트 범유행의 일부로서 14세기 유럽의 범유행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 페스트 유행은 유럽사에서 종교사, 사회사,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목차 1 개요 2 역사 2.1 흑사병 전염경로에 대한 가설 2.2 흑사병의 전염경로 2.2.1 아시아 2.2.2 유럽 2.3 서아시아 2.4 계속되는 재발 3 감염의 원인과 증상 3.1 서혜임파선종 흑사병 이론 4 종류 5 흑사병 창궐의 결과 5.1 인구 감소 5.1.1 유럽 5.1.2 아시아 5.2 그 외의 영향 6 문학 속의 흑사병 7 같이 보기 8 각주 8.1 내용주 8.2 참고주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유럽에서는 1347년 처음 창궐한 이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공포의 대상이었다. 1340년대 흑사병으로 약 2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다.[10] 이 때의 흑사병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발원하여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1]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숫자이다.[12] 최초의 흑사병 확산이후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의 흑사병 발생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13] 14세기 중세 유럽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대흑사병"이라 불린다.[14]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자들로 몰려서 집단폭력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물론 사회학적으로 비평했을 때 흑사병 기간동안 일어난 학살들은 마녀사냥처럼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전가한 희생양적인 폭력이었다. 한편, 흑사병의 창궐은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신조를 낳았고, 이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에 반영되었다. 흑사병은 유럽인들의 종교적인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이 흑사병으로 심판하니 고행을 함으로써 죄를 씻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흑사병 유행기간동안 벌어진 유럽인들의 유대인 학살.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1883년에 붙여졌는데, 피부의 혈소 침전에 의해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증상이 더욱 진행되면 검게 변색된 부위에 괴저가 발생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15] 흑사병은 임상병리학에서 서혜 임파선종 중 가장 위험한 종류로 다루어진다. 흑사병은 박테리아의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가 원인균으로 이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을 옮기게 된다. 19세기까지 흑사병은 쥐에 의해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흑사병이 쥐와 사람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이기는 하나,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은 쥐가 아닌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역사[편집] 영국 웨이머스의 흑사병 기념 동판인구의 30 ~ 50%가 희생되었다 흑사병 전염경로에 대한 가설[편집] 14세기에 유럽에 전파된 대흑사병의 전염 경로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것이며, 그 외에도 인도에서 기원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역사학자 마이클 W 돌스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비잔틴 제국의 흑사병 유행에 주목하면서 흑사병의 전염 경로를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16] 흑사병의 전염경로[편집] 이러 저러한 가설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이 유럽에 들어온 데에는 비단길과 몽골 제국이 관련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몽골 제국은 비단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하였으며, 1347년 몽골의 포위 공격이 있었던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야에서 흑사병이 처음으로 창궐하였기 때문이다. 페오도시야를 포위 공격했던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은 흑사병에 걸려 죽은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도시의 성벽 너머로 던져 넣음으로써 흑사병을 생물학 무기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도시에 흑사병이 퍼지게 되었다. 당시 페오도시야에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교역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교역소 사람들중 일부가 시칠리아로 흑사병을 옮겼다. 그 후 흑사병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17] 14세기 초 유럽의 기후는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연 평균 기온이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겨울 추위는 매서워지고 여름 기후도 좋지 않아 1315년에서 1317년 사이에 대 기근이 발생하였고 특히 북유럽의 피해가 심각하였다.[18]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흑사병에 의한 피해는 더욱 악화되었다. 아시아[편집] 몽골에 의한 전파가 흑사병 확산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지라도 전쟁과 기아, 그리고 기후의 변화 등이 흑사병 창궐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3세기 몽골의 중국 점령 시기에 농업과 상업은 심하게 붕괴되었고 기아가 만연했다. 이로 인해 13세기 후반에 중국의 인구는 대략 1억 2천만명에서 6천만명으로 급감하였다.[19] 14세기에는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번졌던 시기로 이로 인해 중국의 인구 중 약 3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0] 흑사병이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는 가설은 중국의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1330년대 초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으며 1334년 허베이에서 흑사병이 번졌으며, 유럽에서도 흑사병의 위세가 한창이던 1348년 – 1354년 동안 중국 각지에서도 흑사병 확산이 있었다. 당시 흑사병이 심했던 지역으로는 허베이 이외에 장시 성, 산시 성, 후난 성, 광둥 성, 광시, 허난 성, 쓰이위엔[21] 등이었다. 이 시기 중국의 역사 역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시대였으며 몽골과 비단길을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흑사병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347년에 처음 발생한 트라브존과 콘스탄티노플의 흑사병 역시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유럽[편집] 1347년 상선 함대 하나가 시칠리아의 메시나항에 당도했다. 이 배의 선원들은 이상한 전염병에 걸려 있었으며 당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사망하였다. 이것이 유럽에 흑사병이 전파된 첫 계기였다. 1347년 - 1348년 사이 제노바와 베니스에 흑사병이 퍼졌다.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된 흑사병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1348년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잉글랜드 지역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1349년 - 1350년 사이 흑사병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노르웨이에서 처음으로 흑사병이 발생한 것은 1349년으로 아스퀴 항에 당도한 선박에서부터 전염된 것이었다. 이 흑사병은 베르겐에까지 번져나갔다. 1351년이 되자 흑사병은 러시아에서도 확산되었다. 결국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이 창궐하였으나 벨기에와 같은 몇몇 지역은 화를 면했다. 당시 시에나의 아뇰로 디 투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22] 매일 밤낮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머지 않아 온 땅이 묘지로 덮이리라. 나, 아뇰로 디 투라 또한 다섯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 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서아시아[편집] 흑사병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발생하였다. 이 지역 역시 상당한 인구 감소와 이로 인한 사회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동 지역의 흑사병 전파는 러시아 남부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 1347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의 흑사병이 확산된 결과로 여겨진다. 이 후 흑해 연안의 여러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1348년이 되자 흑사병은 가자,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확산되었다. 1348년 - 1349년 동안 흑사병은 안티오키아까지 번져 나갔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염료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이 때문에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흑사병 확산 목록에 추가되었다. 메카 역시 1349년 흑사병이 퍼졌으며 같은 해에 모술에서도 발생하였다. 1351년 이집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예멘 국왕 일행은 흑사병에 걸려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예멘에도 흑사병이 번졌다. 이븐 바투타는 그의 여행기에서 1348년 4월 무렵 흑사병의 창궐로 다마스쿠스에서는 매일 2천명이 죽었고, 같은 시기 카이로와 이집트 전역의 사망자는 2만 4천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사병에 맞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에게 간구하는 것 뿐이었다.[23] “ 그들은 금요일 밤을 예배와 염송, 기도 속에서 지새웠다. 아침 예배를 근행하고 나서는 저마다가 손에 꾸란을 들고 걸어서 사원을 나왔다. 아미르들마저도 맨발이었다. 전 시민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약성서를,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를 제각기 들고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데리고 떨쳐나섰다. 모두들 경전과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알라[주해 1] 께 구원을 청하면서 방성대곡 하는 것이었다.[23] ” 계속되는 재발[편집] 14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과 지중해 연안에서는 흑사병이 지속적으로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는 여러 차례의 흑사병 창궐로 인해 적게는 4백만 명에서 많게는 7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구가 희생되었다.[24] 이 중 널리 알려진 전염은 런던 대흑사병(1665년–1666년), 베니스 대흑사병(1679년), 이탈리아 흑사병 (1629년-1631년) 등이 있다. 계속되는 흑사병의 재발 원인 중 하나로는 30년 전쟁 당시 군대의 잦은 이동이 지목되기도 한다.[25] 1738년 대흑사병은 튀니지의 상선에 의해 전파되어 아드리아 해와 우크라이나로 번져 나갔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티미쇼아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940년 중국 북동부 눙안 현과 장춘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여 731 부대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26] 2017년에는 마다가스카르에서 페스트가 발병되어 2017년 10월 13일 기준 561명이 감염되었고 50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국제적십자사와 적신월사 연맹(IFRC)이 마다가스카르에 페스트 센터를 세우고 응급 환자 치료에 나서기에 이르렀다.[27] 감염의 원인과 증상[편집] 서혜임파선종 흑사병 이론[편집]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보통의 경우 토양 속에 서식하며 간혹 설치류와 인간의 체내에 들어와 기생하면서 전파되어 흑사병을 일으킨다. 미셀 드란코르가 흑사병의 발생 모델을 정립한 바 있다.[28] 야생화된 개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개들은 벼룩에 의해 감염되거나 감염된 시체를 먹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흑사병에 걸렸다. 유럽에서 있었던 흑사병의 출현, 전파, 소멸 과정에 대한 역학(疫學)의 가설 중 흥미로운 것으로는 비록 다른 종의 설치류라 하더라도 벼룩에 의해 원인균이 전파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곰쥐 뿐 아니라 원래부터 유럽에 있던 시궁쥐에 의해서도 흑사병이 전파될 수 있었다. 특히 시궁쥐는 다른 설치류와 달리 인간의 거주지에서 서식하는 생태학적 특성으로 인해 흑사병 전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29] 흑사병의 확산과 소강, 재확산 및 갑작스런 소멸에 대한 원인으로는 설치류와 인간의 집단 면역 형성이 지목되고 있다. 종류[편집] 흑사병에는 증상에 따라 패혈성 흑사병, 폐 흑사병, 림프절 흑사병의 세 종류가 있다. 가장 흔히 발병하는 흑사병은 림프절 흑사병으로 전체 발병율의 75%에 달한다. 림프절 흑사병은 원인균이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 등에 있는 림프절을 공격하여 부종을 일으키며, 초기 증상은 38 - 41 °C의 고열과 함께 구토, 두통 을 보여 말라리아로 오인되기도 한다. 증상이 진행됨에 따라 흑사병 특유의 검은 반점, 부종이 나타난다. 림프절 흑사병은 사람간의 직접 전염은 일어나지 않으며 벼룩을 매개로 전파된다.[30] 폐 흑사병은 두 번째로 발병률이 높은 흑사병으로 원인균이 폐를 공격하여 폐부종을 일으키며 사망률이 95%에 달하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발병 후 8일 이내에 80%이상이 사망한다. 패혈성 흑사병은 원인균이 혈액에 직접 침투하여 일어나며 극히 드문 경우에만 나타나나 발병할 경우 단 시간안에 사망하게 된다.[31] 흑사병 창궐의 결과[편집] 유럽,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등의 지역에서 창궐한 흑사병으로 발생한 희생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망율을 기록하였다. 흑사병에 의해 빚어진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구 감소[편집] 유럽[편집] 유럽 지역의 인구는 흑사병으로 인해 지역에 따라 1/3 ~ 1/2 규모로 감소하였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32] 유럽 중세사를 연구하는 사학자 필립 데이리더는 2007년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33]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초기 4년간의 희생자는 통상 인구의 45% ~ 50% 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는 총괄적인 수준의 기록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망률을 보였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80%가 희생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한편 북부 독일, 잉글랜드 등지에서 초기 4년 동안의 사망률은 20% 정도였다" 아시아[편집] 중국의 원나라 시기인 1334년 허베이에서 창궐하여 인구의 90%가 사망하였으며 1353–54년 동안 중국과 몽골지역에서 2천5백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34] 그 외의 영향[편집] 죽음의 무도에 그려진 흑사병 흑사병을 몰고다니는 닥터 쉬나벨, 파울 페르스트 1656년 작 1350년대 유럽의 문화는 흑사병의 영향으로 매우 음울하였다. 문화의 곳곳에서 염세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당시 사람들은 역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흑사병 의사인 닥터 쉬나벨 폰 롬(독일어 Doktor Schnabel von Rom , 로마 출신의 부리 가면 박사)이 흑사병 환자의 집을 방문하면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속설이 퍼졌다. 닥터 쉬나벨은 새부리 가면을 쓰고 긴 검은 겉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였다.[35] 문학 속의 흑사병[편집] 데카메론Decameron(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51, 이탈리아) 페스트La pest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42, 프랑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1975, 독일 같이 보기[편집] 블랙 데스 CCR5, 페스트와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 유전자 죽음의 무도 죽음의 신 네 명의 절도범 식초; 흑사병에 면역을 갖는 조리법을 전하는 프랑스 전설 가이슬러리더 세계화와 질병 흑사병 의사 흑사병 의사 복장 Ring a Ring o' Roses 《제7의 봉인》, 잉마르 베리만 감독 영화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이슬람의 알라와 유대교, 기독교의 여호와또는 야훼는 모두 같은 신을 대상으로 하는 호칭이다. 참고주[편집] ↑ ABC/Reuters (2008년 1월 29일). “Black death 'discriminated' between victims (ABC News in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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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흑사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346년-1353년 사이 흑사병의 전파 현황.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범유행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유럽 지역에서는 1346년–1353년 사이 범유행이 절정에 달했으며, 이 범유행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최소 7500만, 최고 2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1][2][3] 흑사병 병원균에 관한 많은 이설이 있었으나 2010년-2011년 남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DNA 분석 결과 페스트의 병원균인 페스트균이 병원균으로 밝혀졌다.[4][5]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1343년경 크림 반도에 닿았다.[6] 거기서부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쥐들에 기생하던 동양쥐벼룩을 기주로 하여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흑사병으로 유럽의 총 인구의 30-60%가 죽었다.[7]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 5천만 명-3억 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이 줄었다.[8] 흑사병으로 인해 줄어든 세계 인구가 흑사병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기까지 시간이 걸렸다.[9] 그 뒤로도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산발적으로 유행했는데(런던 대역병 등), 흑사병의 병원체를 페스트균으로 확정한다면 흑사병이란 1345년에서 1840년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계속된 제2차 페스트 범유행의 일부로서 14세기 유럽의 범유행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 페스트 유행은 유럽사에서 종교사, 사회사,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목차 1 개요 2 역사 2.1 흑사병 전염경로에 대한 가설 2.2 흑사병의 전염경로 2.2.1 아시아 2.2.2 유럽 2.3 서아시아 2.4 계속되는 재발 3 감염의 원인과 증상 3.1 서혜임파선종 흑사병 이론 4 종류 5 흑사병 창궐의 결과 5.1 인구 감소 5.1.1 유럽 5.1.2 아시아 5.2 그 외의 영향 6 문학 속의 흑사병 7 같이 보기 8 각주 8.1 내용주 8.2 참고주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유럽에서는 1347년 처음 창궐한 이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공포의 대상이었다. 1340년대 흑사병으로 약 2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다.[10] 이 때의 흑사병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발원하여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1]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숫자이다.[12] 최초의 흑사병 확산이후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의 흑사병 발생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13] 14세기 중세 유럽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대흑사병"이라 불린다.[14]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자들로 몰려서 집단폭력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물론 사회학적으로 비평했을 때 흑사병 기간동안 일어난 학살들은 마녀사냥처럼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전가한 희생양적인 폭력이었다. 한편, 흑사병의 창궐은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신조를 낳았고, 이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에 반영되었다. 흑사병은 유럽인들의 종교적인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이 흑사병으로 심판하니 고행을 함으로써 죄를 씻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흑사병 유행기간동안 벌어진 유럽인들의 유대인 학살.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1883년에 붙여졌는데, 피부의 혈소 침전에 의해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증상이 더욱 진행되면 검게 변색된 부위에 괴저가 발생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15] 흑사병은 임상병리학에서 서혜 임파선종 중 가장 위험한 종류로 다루어진다. 흑사병은 박테리아의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가 원인균으로 이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을 옮기게 된다. 19세기까지 흑사병은 쥐에 의해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흑사병이 쥐와 사람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이기는 하나,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은 쥐가 아닌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역사[편집] 영국 웨이머스의 흑사병 기념 동판인구의 30 ~ 50%가 희생되었다 흑사병 전염경로에 대한 가설[편집] 14세기에 유럽에 전파된 대흑사병의 전염 경로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것이며, 그 외에도 인도에서 기원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역사학자 마이클 W 돌스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비잔틴 제국의 흑사병 유행에 주목하면서 흑사병의 전염 경로를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16] 흑사병의 전염경로[편집] 이러 저러한 가설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이 유럽에 들어온 데에는 비단길과 몽골 제국이 관련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몽골 제국은 비단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하였으며, 1347년 몽골의 포위 공격이 있었던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야에서 흑사병이 처음으로 창궐하였기 때문이다. 페오도시야를 포위 공격했던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은 흑사병에 걸려 죽은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도시의 성벽 너머로 던져 넣음으로써 흑사병을 생물학 무기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도시에 흑사병이 퍼지게 되었다. 당시 페오도시야에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교역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교역소 사람들중 일부가 시칠리아로 흑사병을 옮겼다. 그 후 흑사병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17] 14세기 초 유럽의 기후는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연 평균 기온이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겨울 추위는 매서워지고 여름 기후도 좋지 않아 1315년에서 1317년 사이에 대 기근이 발생하였고 특히 북유럽의 피해가 심각하였다.[18]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흑사병에 의한 피해는 더욱 악화되었다. 아시아[편집] 몽골에 의한 전파가 흑사병 확산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지라도 전쟁과 기아, 그리고 기후의 변화 등이 흑사병 창궐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3세기 몽골의 중국 점령 시기에 농업과 상업은 심하게 붕괴되었고 기아가 만연했다. 이로 인해 13세기 후반에 중국의 인구는 대략 1억 2천만명에서 6천만명으로 급감하였다.[19] 14세기에는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번졌던 시기로 이로 인해 중국의 인구 중 약 3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0] 흑사병이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는 가설은 중국의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1330년대 초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으며 1334년 허베이에서 흑사병이 번졌으며, 유럽에서도 흑사병의 위세가 한창이던 1348년 – 1354년 동안 중국 각지에서도 흑사병 확산이 있었다. 당시 흑사병이 심했던 지역으로는 허베이 이외에 장시 성, 산시 성, 후난 성, 광둥 성, 광시, 허난 성, 쓰이위엔[21] 등이었다. 이 시기 중국의 역사 역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시대였으며 몽골과 비단길을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흑사병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347년에 처음 발생한 트라브존과 콘스탄티노플의 흑사병 역시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유럽[편집] 1347년 상선 함대 하나가 시칠리아의 메시나항에 당도했다. 이 배의 선원들은 이상한 전염병에 걸려 있었으며 당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사망하였다. 이것이 유럽에 흑사병이 전파된 첫 계기였다. 1347년 - 1348년 사이 제노바와 베니스에 흑사병이 퍼졌다.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된 흑사병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1348년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잉글랜드 지역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1349년 - 1350년 사이 흑사병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노르웨이에서 처음으로 흑사병이 발생한 것은 1349년으로 아스퀴 항에 당도한 선박에서부터 전염된 것이었다. 이 흑사병은 베르겐에까지 번져나갔다. 1351년이 되자 흑사병은 러시아에서도 확산되었다. 결국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이 창궐하였으나 벨기에와 같은 몇몇 지역은 화를 면했다. 당시 시에나의 아뇰로 디 투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22] 매일 밤낮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머지 않아 온 땅이 묘지로 덮이리라. 나, 아뇰로 디 투라 또한 다섯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 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서아시아[편집] 흑사병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발생하였다. 이 지역 역시 상당한 인구 감소와 이로 인한 사회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동 지역의 흑사병 전파는 러시아 남부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 1347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의 흑사병이 확산된 결과로 여겨진다. 이 후 흑해 연안의 여러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1348년이 되자 흑사병은 가자,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확산되었다. 1348년 - 1349년 동안 흑사병은 안티오키아까지 번져 나갔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염료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이 때문에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흑사병 확산 목록에 추가되었다. 메카 역시 1349년 흑사병이 퍼졌으며 같은 해에 모술에서도 발생하였다. 1351년 이집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예멘 국왕 일행은 흑사병에 걸려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예멘에도 흑사병이 번졌다. 이븐 바투타는 그의 여행기에서 1348년 4월 무렵 흑사병의 창궐로 다마스쿠스에서는 매일 2천명이 죽었고, 같은 시기 카이로와 이집트 전역의 사망자는 2만 4천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사병에 맞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에게 간구하는 것 뿐이었다.[23] “ 그들은 금요일 밤을 예배와 염송, 기도 속에서 지새웠다. 아침 예배를 근행하고 나서는 저마다가 손에 꾸란을 들고 걸어서 사원을 나왔다. 아미르들마저도 맨발이었다. 전 시민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약성서를,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를 제각기 들고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데리고 떨쳐나섰다. 모두들 경전과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알라[주해 1] 께 구원을 청하면서 방성대곡 하는 것이었다.[23] ” 계속되는 재발[편집] 14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과 지중해 연안에서는 흑사병이 지속적으로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는 여러 차례의 흑사병 창궐로 인해 적게는 4백만 명에서 많게는 7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구가 희생되었다.[24] 이 중 널리 알려진 전염은 런던 대흑사병(1665년–1666년), 베니스 대흑사병(1679년), 이탈리아 흑사병 (1629년-1631년) 등이 있다. 계속되는 흑사병의 재발 원인 중 하나로는 30년 전쟁 당시 군대의 잦은 이동이 지목되기도 한다.[25] 1738년 대흑사병은 튀니지의 상선에 의해 전파되어 아드리아 해와 우크라이나로 번져 나갔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티미쇼아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940년 중국 북동부 눙안 현과 장춘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여 731 부대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26] 2017년에는 마다가스카르에서 페스트가 발병되어 2017년 10월 13일 기준 561명이 감염되었고 50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국제적십자사와 적신월사 연맹(IFRC)이 마다가스카르에 페스트 센터를 세우고 응급 환자 치료에 나서기에 이르렀다.[27] 감염의 원인과 증상[편집] 서혜임파선종 흑사병 이론[편집]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보통의 경우 토양 속에 서식하며 간혹 설치류와 인간의 체내에 들어와 기생하면서 전파되어 흑사병을 일으킨다. 미셀 드란코르가 흑사병의 발생 모델을 정립한 바 있다.[28] 야생화된 개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개들은 벼룩에 의해 감염되거나 감염된 시체를 먹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흑사병에 걸렸다. 유럽에서 있었던 흑사병의 출현, 전파, 소멸 과정에 대한 역학(疫學)의 가설 중 흥미로운 것으로는 비록 다른 종의 설치류라 하더라도 벼룩에 의해 원인균이 전파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곰쥐 뿐 아니라 원래부터 유럽에 있던 시궁쥐에 의해서도 흑사병이 전파될 수 있었다. 특히 시궁쥐는 다른 설치류와 달리 인간의 거주지에서 서식하는 생태학적 특성으로 인해 흑사병 전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29] 흑사병의 확산과 소강, 재확산 및 갑작스런 소멸에 대한 원인으로는 설치류와 인간의 집단 면역 형성이 지목되고 있다. 종류[편집] 흑사병에는 증상에 따라 패혈성 흑사병, 폐 흑사병, 림프절 흑사병의 세 종류가 있다. 가장 흔히 발병하는 흑사병은 림프절 흑사병으로 전체 발병율의 75%에 달한다. 림프절 흑사병은 원인균이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 등에 있는 림프절을 공격하여 부종을 일으키며, 초기 증상은 38 - 41 °C의 고열과 함께 구토, 두통 을 보여 말라리아로 오인되기도 한다. 증상이 진행됨에 따라 흑사병 특유의 검은 반점, 부종이 나타난다. 림프절 흑사병은 사람간의 직접 전염은 일어나지 않으며 벼룩을 매개로 전파된다.[30] 폐 흑사병은 두 번째로 발병률이 높은 흑사병으로 원인균이 폐를 공격하여 폐부종을 일으키며 사망률이 95%에 달하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발병 후 8일 이내에 80%이상이 사망한다. 패혈성 흑사병은 원인균이 혈액에 직접 침투하여 일어나며 극히 드문 경우에만 나타나나 발병할 경우 단 시간안에 사망하게 된다.[31] 흑사병 창궐의 결과[편집] 유럽,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등의 지역에서 창궐한 흑사병으로 발생한 희생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망율을 기록하였다. 흑사병에 의해 빚어진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구 감소[편집] 유럽[편집] 유럽 지역의 인구는 흑사병으로 인해 지역에 따라 1/3 ~ 1/2 규모로 감소하였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32] 유럽 중세사를 연구하는 사학자 필립 데이리더는 2007년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33]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초기 4년간의 희생자는 통상 인구의 45% ~ 50% 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는 총괄적인 수준의 기록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망률을 보였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80%가 희생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한편 북부 독일, 잉글랜드 등지에서 초기 4년 동안의 사망률은 20% 정도였다" 아시아[편집] 중국의 원나라 시기인 1334년 허베이에서 창궐하여 인구의 90%가 사망하였으며 1353–54년 동안 중국과 몽골지역에서 2천5백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34] 그 외의 영향[편집] 죽음의 무도에 그려진 흑사병 흑사병을 몰고다니는 닥터 쉬나벨, 파울 페르스트 1656년 작 1350년대 유럽의 문화는 흑사병의 영향으로 매우 음울하였다. 문화의 곳곳에서 염세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당시 사람들은 역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흑사병 의사인 닥터 쉬나벨 폰 롬(독일어 Doktor Schnabel von Rom , 로마 출신의 부리 가면 박사)이 흑사병 환자의 집을 방문하면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속설이 퍼졌다. 닥터 쉬나벨은 새부리 가면을 쓰고 긴 검은 겉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였다.[35] 문학 속의 흑사병[편집] 데카메론Decameron(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51, 이탈리아) 페스트La pest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42, 프랑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1975, 독일 같이 보기[편집] 블랙 데스 CCR5, 페스트와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 유전자 죽음의 무도 죽음의 신 네 명의 절도범 식초; 흑사병에 면역을 갖는 조리법을 전하는 프랑스 전설 가이슬러리더 세계화와 질병 흑사병 의사 흑사병 의사 복장 Ring a Ring o' Roses 《제7의 봉인》, 잉마르 베리만 감독 영화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이슬람의 알라와 유대교, 기독교의 여호와또는 야훼는 모두 같은 신을 대상으로 하는 호칭이다. 참고주[편집] ↑ ABC/Reuters (2008년 1월 29일). “Black death 'discriminated' between victims (ABC News in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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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흑사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346년-1353년 사이 흑사병의 전파 현황.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범유행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유럽 지역에서는 1346년–1353년 사이 범유행이 절정에 달했으며, 이 범유행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최소 7500만, 최고 2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1][2][3] 흑사병 병원균에 관한 많은 이설이 있었으나 2010년-2011년 남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DNA 분석 결과 페스트의 병원균인 페스트균이 병원균으로 밝혀졌다.[4][5]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1343년경 크림 반도에 닿았다.[6] 거기서부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쥐들에 기생하던 동양쥐벼룩을 기주로 하여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흑사병으로 유럽의 총 인구의 30-60%가 죽었다.[7]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 5천만 명-3억 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이 줄었다.[8] 흑사병으로 인해 줄어든 세계 인구가 흑사병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기까지 시간이 걸렸다.[9] 그 뒤로도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산발적으로 유행했는데(런던 대역병 등), 흑사병의 병원체를 페스트균으로 확정한다면 흑사병이란 1345년에서 1840년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계속된 제2차 페스트 범유행의 일부로서 14세기 유럽의 범유행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 페스트 유행은 유럽사에서 종교사, 사회사,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목차 1 개요 2 역사 2.1 흑사병 전염경로에 대한 가설 2.2 흑사병의 전염경로 2.2.1 아시아 2.2.2 유럽 2.3 서아시아 2.4 계속되는 재발 3 감염의 원인과 증상 3.1 서혜임파선종 흑사병 이론 4 종류 5 흑사병 창궐의 결과 5.1 인구 감소 5.1.1 유럽 5.1.2 아시아 5.2 그 외의 영향 6 문학 속의 흑사병 7 같이 보기 8 각주 8.1 내용주 8.2 참고주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유럽에서는 1347년 처음 창궐한 이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공포의 대상이었다. 1340년대 흑사병으로 약 2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다.[10] 이 때의 흑사병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발원하여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1]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숫자이다.[12] 최초의 흑사병 확산이후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의 흑사병 발생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13] 14세기 중세 유럽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대흑사병"이라 불린다.[14]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자들로 몰려서 집단폭력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물론 사회학적으로 비평했을 때 흑사병 기간동안 일어난 학살들은 마녀사냥처럼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전가한 희생양적인 폭력이었다. 한편, 흑사병의 창궐은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신조를 낳았고, 이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에 반영되었다. 흑사병은 유럽인들의 종교적인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이 흑사병으로 심판하니 고행을 함으로써 죄를 씻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흑사병 유행기간동안 벌어진 유럽인들의 유대인 학살.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1883년에 붙여졌는데, 피부의 혈소 침전에 의해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증상이 더욱 진행되면 검게 변색된 부위에 괴저가 발생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15] 흑사병은 임상병리학에서 서혜 임파선종 중 가장 위험한 종류로 다루어진다. 흑사병은 박테리아의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가 원인균으로 이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을 옮기게 된다. 19세기까지 흑사병은 쥐에 의해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흑사병이 쥐와 사람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이기는 하나,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은 쥐가 아닌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역사[편집] 영국 웨이머스의 흑사병 기념 동판인구의 30 ~ 50%가 희생되었다 흑사병 전염경로에 대한 가설[편집] 14세기에 유럽에 전파된 대흑사병의 전염 경로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것이며, 그 외에도 인도에서 기원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역사학자 마이클 W 돌스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비잔틴 제국의 흑사병 유행에 주목하면서 흑사병의 전염 경로를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16] 흑사병의 전염경로[편집] 이러 저러한 가설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이 유럽에 들어온 데에는 비단길과 몽골 제국이 관련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몽골 제국은 비단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하였으며, 1347년 몽골의 포위 공격이 있었던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야에서 흑사병이 처음으로 창궐하였기 때문이다. 페오도시야를 포위 공격했던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은 흑사병에 걸려 죽은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도시의 성벽 너머로 던져 넣음으로써 흑사병을 생물학 무기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도시에 흑사병이 퍼지게 되었다. 당시 페오도시야에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교역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교역소 사람들중 일부가 시칠리아로 흑사병을 옮겼다. 그 후 흑사병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17] 14세기 초 유럽의 기후는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연 평균 기온이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겨울 추위는 매서워지고 여름 기후도 좋지 않아 1315년에서 1317년 사이에 대 기근이 발생하였고 특히 북유럽의 피해가 심각하였다.[18]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흑사병에 의한 피해는 더욱 악화되었다. 아시아[편집] 몽골에 의한 전파가 흑사병 확산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지라도 전쟁과 기아, 그리고 기후의 변화 등이 흑사병 창궐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3세기 몽골의 중국 점령 시기에 농업과 상업은 심하게 붕괴되었고 기아가 만연했다. 이로 인해 13세기 후반에 중국의 인구는 대략 1억 2천만명에서 6천만명으로 급감하였다.[19] 14세기에는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번졌던 시기로 이로 인해 중국의 인구 중 약 3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0] 흑사병이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는 가설은 중국의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1330년대 초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으며 1334년 허베이에서 흑사병이 번졌으며, 유럽에서도 흑사병의 위세가 한창이던 1348년 – 1354년 동안 중국 각지에서도 흑사병 확산이 있었다. 당시 흑사병이 심했던 지역으로는 허베이 이외에 장시 성, 산시 성, 후난 성, 광둥 성, 광시, 허난 성, 쓰이위엔[21] 등이었다. 이 시기 중국의 역사 역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시대였으며 몽골과 비단길을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흑사병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347년에 처음 발생한 트라브존과 콘스탄티노플의 흑사병 역시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유럽[편집] 1347년 상선 함대 하나가 시칠리아의 메시나항에 당도했다. 이 배의 선원들은 이상한 전염병에 걸려 있었으며 당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사망하였다. 이것이 유럽에 흑사병이 전파된 첫 계기였다. 1347년 - 1348년 사이 제노바와 베니스에 흑사병이 퍼졌다.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된 흑사병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1348년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잉글랜드 지역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1349년 - 1350년 사이 흑사병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노르웨이에서 처음으로 흑사병이 발생한 것은 1349년으로 아스퀴 항에 당도한 선박에서부터 전염된 것이었다. 이 흑사병은 베르겐에까지 번져나갔다. 1351년이 되자 흑사병은 러시아에서도 확산되었다. 결국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이 창궐하였으나 벨기에와 같은 몇몇 지역은 화를 면했다. 당시 시에나의 아뇰로 디 투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22] 매일 밤낮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머지 않아 온 땅이 묘지로 덮이리라. 나, 아뇰로 디 투라 또한 다섯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 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서아시아[편집] 흑사병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발생하였다. 이 지역 역시 상당한 인구 감소와 이로 인한 사회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동 지역의 흑사병 전파는 러시아 남부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 1347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의 흑사병이 확산된 결과로 여겨진다. 이 후 흑해 연안의 여러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1348년이 되자 흑사병은 가자,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확산되었다. 1348년 - 1349년 동안 흑사병은 안티오키아까지 번져 나갔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염료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이 때문에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흑사병 확산 목록에 추가되었다. 메카 역시 1349년 흑사병이 퍼졌으며 같은 해에 모술에서도 발생하였다. 1351년 이집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예멘 국왕 일행은 흑사병에 걸려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예멘에도 흑사병이 번졌다. 이븐 바투타는 그의 여행기에서 1348년 4월 무렵 흑사병의 창궐로 다마스쿠스에서는 매일 2천명이 죽었고, 같은 시기 카이로와 이집트 전역의 사망자는 2만 4천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사병에 맞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에게 간구하는 것 뿐이었다.[23] “ 그들은 금요일 밤을 예배와 염송, 기도 속에서 지새웠다. 아침 예배를 근행하고 나서는 저마다가 손에 꾸란을 들고 걸어서 사원을 나왔다. 아미르들마저도 맨발이었다. 전 시민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약성서를,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를 제각기 들고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데리고 떨쳐나섰다. 모두들 경전과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알라[주해 1] 께 구원을 청하면서 방성대곡 하는 것이었다.[23] ” 계속되는 재발[편집] 14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과 지중해 연안에서는 흑사병이 지속적으로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는 여러 차례의 흑사병 창궐로 인해 적게는 4백만 명에서 많게는 7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구가 희생되었다.[24] 이 중 널리 알려진 전염은 런던 대흑사병(1665년–1666년), 베니스 대흑사병(1679년), 이탈리아 흑사병 (1629년-1631년) 등이 있다. 계속되는 흑사병의 재발 원인 중 하나로는 30년 전쟁 당시 군대의 잦은 이동이 지목되기도 한다.[25] 1738년 대흑사병은 튀니지의 상선에 의해 전파되어 아드리아 해와 우크라이나로 번져 나갔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티미쇼아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940년 중국 북동부 눙안 현과 장춘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여 731 부대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26] 2017년에는 마다가스카르에서 페스트가 발병되어 2017년 10월 13일 기준 561명이 감염되었고 50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국제적십자사와 적신월사 연맹(IFRC)이 마다가스카르에 페스트 센터를 세우고 응급 환자 치료에 나서기에 이르렀다.[27] 감염의 원인과 증상[편집] 서혜임파선종 흑사병 이론[편집]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보통의 경우 토양 속에 서식하며 간혹 설치류와 인간의 체내에 들어와 기생하면서 전파되어 흑사병을 일으킨다. 미셀 드란코르가 흑사병의 발생 모델을 정립한 바 있다.[28] 야생화된 개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개들은 벼룩에 의해 감염되거나 감염된 시체를 먹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흑사병에 걸렸다. 유럽에서 있었던 흑사병의 출현, 전파, 소멸 과정에 대한 역학(疫學)의 가설 중 흥미로운 것으로는 비록 다른 종의 설치류라 하더라도 벼룩에 의해 원인균이 전파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곰쥐 뿐 아니라 원래부터 유럽에 있던 시궁쥐에 의해서도 흑사병이 전파될 수 있었다. 특히 시궁쥐는 다른 설치류와 달리 인간의 거주지에서 서식하는 생태학적 특성으로 인해 흑사병 전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29] 흑사병의 확산과 소강, 재확산 및 갑작스런 소멸에 대한 원인으로는 설치류와 인간의 집단 면역 형성이 지목되고 있다. 종류[편집] 흑사병에는 증상에 따라 패혈성 흑사병, 폐 흑사병, 림프절 흑사병의 세 종류가 있다. 가장 흔히 발병하는 흑사병은 림프절 흑사병으로 전체 발병율의 75%에 달한다. 림프절 흑사병은 원인균이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 등에 있는 림프절을 공격하여 부종을 일으키며, 초기 증상은 38 - 41 °C의 고열과 함께 구토, 두통 을 보여 말라리아로 오인되기도 한다. 증상이 진행됨에 따라 흑사병 특유의 검은 반점, 부종이 나타난다. 림프절 흑사병은 사람간의 직접 전염은 일어나지 않으며 벼룩을 매개로 전파된다.[30] 폐 흑사병은 두 번째로 발병률이 높은 흑사병으로 원인균이 폐를 공격하여 폐부종을 일으키며 사망률이 95%에 달하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발병 후 8일 이내에 80%이상이 사망한다. 패혈성 흑사병은 원인균이 혈액에 직접 침투하여 일어나며 극히 드문 경우에만 나타나나 발병할 경우 단 시간안에 사망하게 된다.[31] 흑사병 창궐의 결과[편집] 유럽,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등의 지역에서 창궐한 흑사병으로 발생한 희생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망율을 기록하였다. 흑사병에 의해 빚어진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구 감소[편집] 유럽[편집] 유럽 지역의 인구는 흑사병으로 인해 지역에 따라 1/3 ~ 1/2 규모로 감소하였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32] 유럽 중세사를 연구하는 사학자 필립 데이리더는 2007년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33]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초기 4년간의 희생자는 통상 인구의 45% ~ 50% 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는 총괄적인 수준의 기록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망률을 보였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80%가 희생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한편 북부 독일, 잉글랜드 등지에서 초기 4년 동안의 사망률은 20% 정도였다" 아시아[편집] 중국의 원나라 시기인 1334년 허베이에서 창궐하여 인구의 90%가 사망하였으며 1353–54년 동안 중국과 몽골지역에서 2천5백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34] 그 외의 영향[편집] 죽음의 무도에 그려진 흑사병 흑사병을 몰고다니는 닥터 쉬나벨, 파울 페르스트 1656년 작 1350년대 유럽의 문화는 흑사병의 영향으로 매우 음울하였다. 문화의 곳곳에서 염세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당시 사람들은 역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흑사병 의사인 닥터 쉬나벨 폰 롬(독일어 Doktor Schnabel von Rom , 로마 출신의 부리 가면 박사)이 흑사병 환자의 집을 방문하면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속설이 퍼졌다. 닥터 쉬나벨은 새부리 가면을 쓰고 긴 검은 겉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였다.[35] 문학 속의 흑사병[편집] 데카메론Decameron(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51, 이탈리아) 페스트La pest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42, 프랑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1975, 독일 같이 보기[편집] 블랙 데스 CCR5, 페스트와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 유전자 죽음의 무도 죽음의 신 네 명의 절도범 식초; 흑사병에 면역을 갖는 조리법을 전하는 프랑스 전설 가이슬러리더 세계화와 질병 흑사병 의사 흑사병 의사 복장 Ring a Ring o' Roses 《제7의 봉인》, 잉마르 베리만 감독 영화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이슬람의 알라와 유대교, 기독교의 여호와또는 야훼는 모두 같은 신을 대상으로 하는 호칭이다. 참고주[편집] ↑ ABC/Reuters (2008년 1월 29일). “Black death 'discriminated' between victims (ABC News in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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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1-59803-345-8 ↑ “흑사병의 결과,experiencefestival.com”. 2009년 2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8월 22일에 확인함.  ↑ David Herlihy, The Black Death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West,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72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흑사병 흑사병과 비슷한 전염병 유행성 출혈열 또는,한타바이러스 - 감염경로 쥐의 대변,쥐의 분비물 호흡기 전염 -증상 제재채,기침,고열,단기간 이후 피부,장기에서 과다출열 장기간 이내 사망하는 매우 치명적인 병원체 이다. 흑사병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흑사병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다음백과 미러) vdeh서양 중세사중세 전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의 쇠퇴 고대 후기 그리스-로마 다신교의 쇠퇴 기독교화 이슬람의 흥기 불가리아 제1제국 프랑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바이킹 시대 카롤링거 제국 고대 교회 슬라브어 슈이네스게국 키예프 루스 동로마 제국의 중흥 중세 성기 신성로마제국 불가리아 제2제국 조지아 제국 폴란드 왕국 봉건제 동서 대분열 서임권 투쟁 십자군 스콜라주의 수도주의 자치도시 장원제 중세 온난기 몽골의 유럽 침공 중세 후기 백년 전쟁 흑사병 장미 전쟁 후스 전쟁 부르고뉴 공국 합스부르크 가 서방 교회의 분열 콘스탄티노플 함락 오스만 제국의 흥기 스위스 용병 기사도 르네상스 인문주의 대학 중세 후기의 위기 소빙기 문화사 건축 미술 교회와 국가 관계 요리 인구 가정 문학 의약 음악 철학 시문학 과학 노예제 기술 전쟁 참조 사항 암흑 시대 중세와 장애인 중세주의 중세 재현 중세학 신중세주의 연표 고전후 시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흑사병&oldid=24396274" 분류: 흑사병14세기 아시아14세기 유럽중세 후기제2차 페스트 범유행유럽의 보건재해아시아의 보건재해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ČeštinaCymraegDanskDeutschZazaki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VõroFøroysktFrançaisFurlanFryskGaeilgeGàidhligGalego𐌲𐌿𐍄𐌹𐍃𐌺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PatoisქართულიTaqbaylitАдыгэбзэKabɩyɛҚазақшаLatinaLadinoLimburgs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Bahasa MelayuMaltiMirandésမြန်မာဘာသာNāhuatlPlattdüütschनेपाली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Ирон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oomaalig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alon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07: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이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데올로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09년 8월) 이념(理念, 독일어: ideologie 이데올로기[*], 영어: ideology, 문화어: 리념)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규정짓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를 가리킨다. 또한 정치경제학적으로는 상부구조의 하나를 의미한다. 이념의 현대적 의미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반대자들을 이데롤로그(idéologues), 즉 "관념학파"로 부르면서 탄생하였다. 카를 만하임은 이 용어의 부정적인 의미를 채택하여 그의 작품에 사용하였다.[1] 목차 1 이념에 대한 분석 1.1 마르크스주의의 이념분석 1.2 현대의 이념분석 2 각주 이념에 대한 분석[편집] 이념이라는 용어는 관념의 기원이 선천적인 것인가 후천적인 것인가를 중심적인 문제로 하는 학의 명칭으로서, 이 용법은 데스튀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의 "이데올로기 원론"(1804년~1815년)에 처음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념분석[편집]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념이란 관념 그 자체가 아니라 생산양식 등의 사회의 하부구조와의 관계성에 있어서 파악되는 상부구조로서의 관념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최초로 헤겔과 그 후계자들에 있어서 보이는 관념의 형태들에 관하여 사회의 기초로부터 발생하면서도 흡사 보편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듯 행동한다고 비판하면서 이념의 계급성에 관하여 논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저 "독일 이데올로기"(1845년)에서 처음으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계급사회에 있어서 이념의 당파성이 분석되었다. 즉 계급사회에서는 특정의 계급이 이익을 얻기 위해 특정 이념이 우세하게 되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상호작용이 발생하여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념의 이러한 성질을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념이라 부르고 계급적인 이해에 기하여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분석에 따르면 계급제도는 반드시 이념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념을 비판하는 것은 계급투쟁 중에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현대의 이념분석[편집] 그러나 냉전의 종결 후 이념의 종언이 더욱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적인 중도, 복지정당이 세계의 대세를 점하여 이전의 이념을 내세움 없이 직업적, 전문적인 정치가, 관료에 의하여 순수하게 생활향상이 목표로 되는 것이 현대의 대세라는 분석이다. 사회과학적 입장으로는, 상부구조를 단순히 하부구조의 반영이나 영상으로 보는 전래의 기계론적 관점은 널리 배격되고 있다. 특히, 국가와 언어에 관한 기계론적 결정론은 타당하지 못한 것으로 인정되며, 기계론적 - 환원론적 입장에서 상부구조의 문제들을 보기보다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상부구조 내의 특유한 재생산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하려는 전략이 지배적이다. 각주[편집] ↑ De Tracy, Destutt (1801) Les Éléments d'idéologie, 3rd ed. (1817), p. 4, cited by: Mannheim, Karl (1929) Ideologie und Utopie, 2nd footnote in the chapter The problem of "false consciousness" vdeh정치 이념내셔널리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 국수주의 쇼비니즘 민족중심주의 보수주의 문화보수주의 재정보수주의 녹색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전통보수주의 자본주의 자유방임주의 수정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초자본주의 아나코자본주의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개인주의 무정부주의(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 사회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민주주의 직접 민주제 간접 민주제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 종교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사회적 무정부주의) 혁명적 조합주의 자주관리사회주의 아랍 사회주의 시장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쩌둥주의 호치민사상 주체사상 권위주의 독재 정치 전제 정치 절대왕정 전체주의 나치즘 파시즘 천황제 파시즘 팔랑헤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쩌둥주의 호치민사상 주체사상 이슬람 원리주의 군국주의 환경주의 생태주의 녹색 정치 녹색자유주의 녹색보수주의 개량주의 자유사회주의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제3의 길 집단주의 국가주의 지역주의 내셔널리즘 민족주의 공동체주의 협동조합주의 집산주의 통합주의 이슬람주의 이슬람 원리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반이슬람주의 힌두 내셔널리즘 정치 스펙트럼혁신 극좌 좌익 사회개량주의 권위주의 좌파 진보주의 급진주의 평등주의 합리주의 자유주의 좌파 중도 중도좌파 중도주의 중도우파 보수 극우 우익 사회보수주의 권위주의 우파 보수주의 점진주의 자유주의 경험주의 자유주의 우파 그 외 제3의 위치 혼합 정치 통치 체제정당제 일당 독재제 일당제 헤게모니 정당제 다당제 일당 우위 정당제 양당제 분절적 다당제 분극적 다당제 무당제 무소속 지배자 군주제 귀족제 신권 정치 공화주의 권력자 과두 정치 능력주의 다두 정치 국가 상태 단일 국가 연방제 국가 연합 국제주의 초국가주의 세계주의 그 외 계몽주의 혼합 경제 현실주의 엘리트이론 포퓰리즘 교조주의 원리주의 페미니즘 다원주의 책임 마키아벨리즘 제자백가 제국주의 봉건주의 정치 사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념&oldid=19751274" 분류: 이념사회정치철학독일어계 외래어사회학 용어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09년 8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CymraegDanskDeutschZazaki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हिन्दीFiji Hindi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QaraqalpaqshaҚазақшаКъарачай-малкъарKurdîКыргызчаLatinaLingua Franca NovaLimburgs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Bahasa MelayuMaltiမြန်မာဘာသာمازِرونی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ਪੰਜਾਬੀPolskiPiemontèisپنجابیپښتو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Саха тылаScotsسنڌي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oomaalig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ไทยTürkmençe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ئۇيغۇرچە / Uyghurche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Winaray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0월 8일 (일) 01: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마이크로아키텍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이크로아키텍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텔 코어 마이크로아키텍처. 마이크로아키텍처(microarchitecture) 또는 CPU 아키텍처는 컴퓨터 공학에서 컴퓨터의 중앙 처리 장치(CPU) 또는 이와 관련하여디지털 신호 처리기의 전자 회로에 대한 설명으로 이의 하드웨어의 운영에 대해 세세하게 기술이 되어 있다. 학술 모임에서는 컴퓨터 시스템이라는 용어가 쓰이는 반면, 컴퓨터 산업에서는 마이크로아키텍처라는 용어가 더 자주 쓰인다. 마이크로아키텍처와 명령어 집합 구조 (ISA)는 함께 컴퓨터 아키텍처의 분야를 구성하고 있다. 목차 1 용어의 역사 2 마이크로아키텍처의 측면 3 마이크로아키텍처의 개념 4 CPU 아키텍처의 종류 5 같이 보기 6 참고 문헌 용어의 역사[편집]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많은 컴퓨터들이 마이크로프로그래밍을 사용하여 프로그램 함수를 디코딩하여 실행하는 제어 논리를 도입하였다. 마이크로프로그램의 언어들 안의 비트는 실제로 컴퓨터 계산을 했던 장치들을 제어했던 전기적 신호였다. 마이크로아키텍처라는 용어는 마이크로프로그램의 언어들이 통제하는 장치를 일컫는 데에 쓰인다. 마이크로아키텍처의 측면[편집] 칩 영역/비용 전력 소비 논리의 복잡함 연결의 쉬움 제조할 수 있음 오류 정정의 쉬움 시험할 수 있음 마이크로아키텍처의 개념[편집] 일반적으로 모든 CPU들, 곧 단일 칩 멀티프로세서나 다중 칩 프로세서들은 다음의 단계를 수행하며 프로그램들을 실행한다: 함수를 읽어서, 읽은 함수를 디코딩한다. 함수를 처리해야 하는 연결 데이터를 찾는다. 함수를 처리한다. 결과 출력을 기록한다. CPU 아키텍처의 종류[편집] 일반적인 운영 체제(OS)를 참고하여 PC 및 서버 환경을 기준으로 하는 마이크로아키텍처의 대중적인 CPU 종류는 다음과 같다.[1][2][3] CPU 지원 OS 성능 인텔 윈도우,리눅스,맥,유닉스계열 ,솔라리스등 PC급,서버급,워크스테이션급 AMD 윈도우,리눅스,맥,유닉스계열 ,솔라리스등 PC급,서버급,워크스테이션급 스팍 솔라리스,유닉스계열 PC급,서버급 ARM 리눅스 계열 등 스마트폰, 저전력 PC 같이 보기[편집] 마이크로프로세서 마이크로컨트롤러 디지털 신호 처리기 CPU 설계 하드웨어 아키텍처 참고 문헌[편집] ↑ (오라클)https://www.oracle.com/technetwork/java/javase/certconfig-2095354.html ↑ (페도라)https://fedoramagazine.org/announcing-fedora-29/ ↑ (Download the Arduino IDE)https://www.arduino.cc/en/Main/Software D. Patterson and J. Hennessy (2004년 8월 2일). 《Computer Organization and Design: The Hardware/Software Interface》. Morgan Kaufmann Publishers, Inc. ISBN 1558606041.  V. C. Hamacher, Z. G. Vrasenic, and S. G. Zaky (2001년 8월 2일). 《Computer Organization》. McGraw-Hill. ISBN 0072320869.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William Stallings (2002년 7월 15일). 《Computer Organization and Architecture》. Prentice Hall. ISBN 0130351199.  J. P. Hayes (2002년 9월 3일). 《Computer Architecture and Organization》. McGraw-Hill. ISBN 0072861983.  Gary Michael Schneider (1985). 《The Principles of Computer Organization》. Wiley. 6–7쪽. ISBN 0471885525.  M. Morris Mano (1992년 10월 19일). 《Computer System Architecture》. Prentice Hall. 3쪽. ISBN 0131755633.  Mostafa Abd-El-Barr and Hesham El-Rewini (2004년 12월 3일). 《Fundamentals of Computer Organization and Architecture》. Wiley-Interscience. 1쪽. ISBN 0471467413.  vdeh컴퓨터 과학의 주요 분야수학적 기초 수리논리학 집합론 정수론 그래프 이론 형 이론 범주론 수치해석학 이산수학 계산 이론 오토마타 이론 계산 가능성 이론 계산 복잡도 이론 양자 계산 이론 알고리즘 & 자료 구조 알고리즘 알고리즘 설계 알고리즘 해석 자료 구조 계산기하학 프로그래밍 언어 & 컴파일러 구문 분석 컴파일러 인터프리터 프로그래밍 언어 구조적 프로그래밍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병렬 & 분산 시스템 병렬 컴퓨팅 컴퓨터 클러스터 분산 컴퓨팅 그리드 컴퓨팅 클라우드 컴퓨팅 IaaS PaaS SaaS 소프트웨어 공학 요구 분석 소프트웨어 설계 컴퓨터 프로그래밍 정형 기법 소프트웨어 테스트 소프트웨어 개발 시스템 아키텍처 컴퓨터 아키텍처 마이크로아키텍처 운영 체제 통신 & 네트워크 컴퓨터 오디오 라우팅 네트워크 토폴로지 암호학 차세대 통신망 데이터베이스 데이터 마이닝 RDBMS SQL NoSQL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인공 지능 자동추론 전산언어학 컴퓨터 비전 진화 연산 기계 학습 자연 언어 처리 로봇학 컴퓨터 그래픽 시각화 영상 처리 인간과 컴퓨터 상호 작용 컴퓨터 접근성 사용자 인터페이스 착용 컴퓨터 유비쿼터스 컴퓨팅 가상현실 계산과학 인공생명 생물정보학 인지과학 계산화학 계산론적 신경과학 계산물리학 수치해석학 기호계산 정보보호 암호학 물리 보안 애플리케이션 보안 인터넷 보안 네트워크 보안 해킹 크래킹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마이크로아키텍처&oldid=23418343" 분류: 마이크로아키텍처마이크로프로세서중앙 처리 장치명령어 처리숨은 분류: CS1 관리 - 여러 이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atviešuBahasa Melayu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5일 (토) 16: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프리깃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깃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위함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항해 중인 프리깃함 USS 에식스 (1799년) 노르웨이 해군의 프리깃함인 프리드쇼프 난센함 (2006년) 프리깃(Frigate)은 한국에서는 호위함이라고 부르며, 미해군에서는 FF라는 번호를 붙인다. 울산급 호위함이 대한민국 해군의 프리깃이다. 그러나, 군함 분류에 대한 명칭은 통일된 어떤 규칙이 없고, 나라마다 자체적인 기준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는 구축함보다 큰 순양함도 호위함이라고 부른다. 목차 1 기원 2 현대 프리깃의 기준 2.1 순양함 2.2 구축함 2.3 프리깃(호위함) 3 세계의 호위함들 4 국가별 호위함 보유수 5 대한민국의 호위함 6 크기별 함정 구분 7 외부 링크 기원[편집] 대항해 시대 말기에 쓰인 대형 목조 범선의 하나이다. 이 용어가 쓰인 것은 몇 세기 전 군함의 다양한 크기와 배의 역할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18세기에 이 용어는 포 74문 이상을 갖춘 전열함이고 3개의 돛대에 가로돛 방식인 배로, 순찰과 호위에 유용하게 빠르고 가벼운 무장을 했다는 의미로 쓰였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포열 갑판과 여러 개의 포열 갑판들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말(시초는 대략 1858년 영국과 프랑스 해군에서 건조하기 시작하면서이다.) 철갑함 형태의 강력한 화력을 가진 장갑 프리깃함이 등장했다. 현대에는 전함의 호위, 상선의 승무원을 태우거나 특히 대잠수함전에 사용하거나 육지로 전투원을 수송하고 항해 중 보급, 상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프리깃은 코르벳함, 구축함, 순양함, 그리고 전함의 역할까지 하는 배로 분류한다. 프리깃은 그 배의 타입에 의해 등급이 결정된다. 현대 프리깃의 기준[편집] 프리깃은 곧 호위함으로도 사용되는 용어다. 규모는 구축함보다 아래. 고속정보다 높다. 구축함이 3,000톤에서 10,000톤까지의 범위를 갖는데 10,000톤 이상 넘어가면 순양함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4,000톤에서 1,000톤 정도가 호위함의 범위다. 1,000톤 이하로 내려가면 그때부터는 고속정. 실제로 7,000톤급 타카나미급은 구축함이고 4,000톤급인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은 호위함. 1만톤이 넘는 슬라바급은 순양함이다. 물론 이 기준에 구속받지 않는 예외의 경우도 있다. 줌왈트급은 1만톤을 아득히 상회하지만 구축함으로 분류된다. 순양함[편집] 최소10,000톤~ 러시아 - 슬라바급 미사일 순양함 구축함[편집] 3,000톤~7,000톤 러시아 - 소브레메니급 방공구축함 프리깃(호위함)[편집] 3,000톤~4,000톤 한국 - 대구급 한국 - 인천급 세계의 호위함들[편집] 미국 -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4,100톤 일본 - 아부쿠마급 3,500톤 중국 - 054A급 호위함 4,100톤 프랑스 - 라파예트급 3,600톤 한국 - 대구급 차기호위함 3,800톤 한국 - 인천급 차기호위함 3,600톤 국가별 호위함 보유수[편집] 중화인민공화국 - 20척 대한민국 - 16척 오스트레일리아 - 14척 중화민국 - 12척 미국 - 10척 파키스탄 - 10척 브라질 - 8척 싱가포르 - 6척 사우디아라비아 - 3척 이스라엘 - 3척 대한민국의 호위함[편집] 대한민국 - 대구급 1척 대한민국 - 인천급 6척 대한민국 - 울산급 9척 울산급은 구형 호위함이고 인천급, 대구급이 차기 호위함이다. 점차 울산급을 대체하게 된다. 크기별 함정 구분[편집] 경비정 < 고속정 < 초계함 < 호위함 < 구축함 < 순양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프리깃 (영어) Frigates from battleships-cruisers.co.uk - history and pictures of United Kingdom frigates since World War II (영어) Frigates from Destroyers OnLine - pictures, history, crews of United States frigates since 1963 (영어) The Development of the Full-Rigged Ship From the Carrack to the Full-Rigger vdeh범선범장 종범장 (버뮤다형 • 개프 • 라틴형) 횡범장 정크형 범장도 바크 브리그 브리간틴 바컨틴 캣보트 커터 쉽 케치 미스틱 스쿠너 스노우 욜 슬루프 다선체선 쌍동선 드루아 프로아 삼동선 군함 및 상선(시대순)고대 보이타 다우 갤리 (펜테콘테로, 삼단노선) 정크 트라이림 우루 중세 발링거 비를린 보선 코그 드로몬 헐크 크노르 코즈 랑스킵 시티크 15세기 캐럭 캐러벨 호이 트라바콜로 16세기 크롬스티븐 갤리엇 갤리온 갤리어스 플라이보트 플라이트 피네스 러르쳐 맨오브워 파타슈 지벡 17세기 버뮤다 슬루프 코르벳 이스트 인디아맨 프리깃 갤리어스 Koff 피니시 폴라카 전열함 18세기 빌런더 클리퍼 (볼티모어 클리퍼) 건달로우 74포문 전열함 슬루프형 군함 19세기 블랙월 프리깃 네덜란드 클리퍼 윈드재머 어선 바르카롱가 팔쿠샤 펠루카 피피 가벨바트 헤링 버스 항가다 루거 마술라 노르드란드스바트 섹스링 Sgoth 스맥 타렛테 웰 스맥 요얼 오락선 딩기 Mast aft rig 포켓크루저 수중익 범선 트레일러 세일러 Wharrams 윈드서퍼 요트 특수 용어 러지 톨 십 그 외 브리스틀 채널 파일럿 커터 푸스타 머지 플랫 노퍽 펀트 노퍽 훼리 파우자크 페크 너벅선 스카우 템스 세일링 바지 레파레파 훼리 vdeh근대(1801년-1945년)의 함종 운용 중인 잠수함정 보조함정 작전구역 대양해군(청색수역) 연안해군(갈색수역) 지역해군(녹색수역) 함포 배치법 현측포 중앙주포 포곽 포탑 항공모함 정규항모 강습상륙함 대잠항모 기구모함 캐터펄트 무장상선 호위항모 전투기 캐터펄트함 중형항모 헬리콥터 모함 경항모 상선항모 수상기모함 잠수항모 대형항모 전함 해방전함 노급전함 전노급함 초노급함 표준전함 고속전함 조약전함 순양함 장갑순양함 전투순양함 비행갑판순양함 중순양함 포켓전함 경순양함 가장순양함 방호순양함 타격순양함 어뢰순양함 비방호순양함 호위함 통보함 호송구조함 구축함 구축호위함 선도구축함 호위구축함 호송함 프리깃 방공구축함 해방함 슬루프 수송함 상륙수송선거함 수륙양용함 공격수송함 선거상륙함 상륙함 육군특수선 상륙지원함 중상륙함 보병상륙함 중형상륙함 전차상륙함 차량상륙함 병력수송선 초계·경비함정 무장승선증기선 무장요트 연안감시정 코르벳 포함 항만방어발동기정 발동기정 징발유망어선 징발저인망어선 해양승선선박 경비정 Q선 증기포함 구잠정 어뢰정 고속공격정 에스보트 어뢰무장발동기정 발동기포함 유도탄정 발동기어뢰정 MT 폭발물발동기정 MTSM 발동기어뢰정 경비어뢰정 신요 기뢰정 Danlayer 구축소해정 기뢰대응함정 기뢰매설정 기뢰제거정 기뢰부설함 소해정 보조·특무함 오락함 탄약함 보조수리선거함 보조함 석탄선 전투저장함 사령함 해상기중기 잠수함모선 구축함모선 송달쾌속선 고속전투지원함 General stores issue ship 병원선 군용예인선 그물전개함 공작함 보급함 잠수함정 공격잠수함 탄도유도탄 잠수함 연안잠수함 순항유도탄 잠수함 순양잠수함 심해잠수정 심해잠수구난정 함대잠수함 군용잠수정 유보트 기타 아스널쉽 병영함 흉장모니터함 주력함 기함 경비함 연안전투함 철갑함 모니터함 강상모니터함 연습선 이 글은 선박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리깃&oldid=23517232" 분류: 호위함대항해시대의 범선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선박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ahasa BanjarBrezhonegBosanskiCatalàČeštinaЧӑвашла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Avañe'ẽ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3일 (수) 02: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프리깃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깃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위함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항해 중인 프리깃함 USS 에식스 (1799년) 노르웨이 해군의 프리깃함인 프리드쇼프 난센함 (2006년) 프리깃(Frigate)은 한국에서는 호위함이라고 부르며, 미해군에서는 FF라는 번호를 붙인다. 울산급 호위함이 대한민국 해군의 프리깃이다. 그러나, 군함 분류에 대한 명칭은 통일된 어떤 규칙이 없고, 나라마다 자체적인 기준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는 구축함보다 큰 순양함도 호위함이라고 부른다. 목차 1 기원 2 현대 프리깃의 기준 2.1 순양함 2.2 구축함 2.3 프리깃(호위함) 3 세계의 호위함들 4 국가별 호위함 보유수 5 대한민국의 호위함 6 크기별 함정 구분 7 외부 링크 기원[편집] 대항해 시대 말기에 쓰인 대형 목조 범선의 하나이다. 이 용어가 쓰인 것은 몇 세기 전 군함의 다양한 크기와 배의 역할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18세기에 이 용어는 포 74문 이상을 갖춘 전열함이고 3개의 돛대에 가로돛 방식인 배로, 순찰과 호위에 유용하게 빠르고 가벼운 무장을 했다는 의미로 쓰였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포열 갑판과 여러 개의 포열 갑판들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말(시초는 대략 1858년 영국과 프랑스 해군에서 건조하기 시작하면서이다.) 철갑함 형태의 강력한 화력을 가진 장갑 프리깃함이 등장했다. 현대에는 전함의 호위, 상선의 승무원을 태우거나 특히 대잠수함전에 사용하거나 육지로 전투원을 수송하고 항해 중 보급, 상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프리깃은 코르벳함, 구축함, 순양함, 그리고 전함의 역할까지 하는 배로 분류한다. 프리깃은 그 배의 타입에 의해 등급이 결정된다. 현대 프리깃의 기준[편집] 프리깃은 곧 호위함으로도 사용되는 용어다. 규모는 구축함보다 아래. 고속정보다 높다. 구축함이 3,000톤에서 10,000톤까지의 범위를 갖는데 10,000톤 이상 넘어가면 순양함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4,000톤에서 1,000톤 정도가 호위함의 범위다. 1,000톤 이하로 내려가면 그때부터는 고속정. 실제로 7,000톤급 타카나미급은 구축함이고 4,000톤급인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은 호위함. 1만톤이 넘는 슬라바급은 순양함이다. 물론 이 기준에 구속받지 않는 예외의 경우도 있다. 줌왈트급은 1만톤을 아득히 상회하지만 구축함으로 분류된다. 순양함[편집] 최소10,000톤~ 러시아 - 슬라바급 미사일 순양함 구축함[편집] 3,000톤~7,000톤 러시아 - 소브레메니급 방공구축함 프리깃(호위함)[편집] 3,000톤~4,000톤 한국 - 대구급 한국 - 인천급 세계의 호위함들[편집] 미국 -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4,100톤 일본 - 아부쿠마급 3,500톤 중국 - 054A급 호위함 4,100톤 프랑스 - 라파예트급 3,600톤 한국 - 대구급 차기호위함 3,800톤 한국 - 인천급 차기호위함 3,600톤 국가별 호위함 보유수[편집] 중화인민공화국 - 20척 대한민국 - 16척 오스트레일리아 - 14척 중화민국 - 12척 미국 - 10척 파키스탄 - 10척 브라질 - 8척 싱가포르 - 6척 사우디아라비아 - 3척 이스라엘 - 3척 대한민국의 호위함[편집] 대한민국 - 대구급 1척 대한민국 - 인천급 6척 대한민국 - 울산급 9척 울산급은 구형 호위함이고 인천급, 대구급이 차기 호위함이다. 점차 울산급을 대체하게 된다. 크기별 함정 구분[편집] 경비정 < 고속정 < 초계함 < 호위함 < 구축함 < 순양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프리깃 (영어) Frigates from battleships-cruisers.co.uk - history and pictures of United Kingdom frigates since World War II (영어) Frigates from Destroyers OnLine - pictures, history, crews of United States frigates since 1963 (영어) The Development of the Full-Rigged Ship From the Carrack to the Full-Rigger vdeh범선범장 종범장 (버뮤다형 • 개프 • 라틴형) 횡범장 정크형 범장도 바크 브리그 브리간틴 바컨틴 캣보트 커터 쉽 케치 미스틱 스쿠너 스노우 욜 슬루프 다선체선 쌍동선 드루아 프로아 삼동선 군함 및 상선(시대순)고대 보이타 다우 갤리 (펜테콘테로, 삼단노선) 정크 트라이림 우루 중세 발링거 비를린 보선 코그 드로몬 헐크 크노르 코즈 랑스킵 시티크 15세기 캐럭 캐러벨 호이 트라바콜로 16세기 크롬스티븐 갤리엇 갤리온 갤리어스 플라이보트 플라이트 피네스 러르쳐 맨오브워 파타슈 지벡 17세기 버뮤다 슬루프 코르벳 이스트 인디아맨 프리깃 갤리어스 Koff 피니시 폴라카 전열함 18세기 빌런더 클리퍼 (볼티모어 클리퍼) 건달로우 74포문 전열함 슬루프형 군함 19세기 블랙월 프리깃 네덜란드 클리퍼 윈드재머 어선 바르카롱가 팔쿠샤 펠루카 피피 가벨바트 헤링 버스 항가다 루거 마술라 노르드란드스바트 섹스링 Sgoth 스맥 타렛테 웰 스맥 요얼 오락선 딩기 Mast aft rig 포켓크루저 수중익 범선 트레일러 세일러 Wharrams 윈드서퍼 요트 특수 용어 러지 톨 십 그 외 브리스틀 채널 파일럿 커터 푸스타 머지 플랫 노퍽 펀트 노퍽 훼리 파우자크 페크 너벅선 스카우 템스 세일링 바지 레파레파 훼리 vdeh근대(1801년-1945년)의 함종 운용 중인 잠수함정 보조함정 작전구역 대양해군(청색수역) 연안해군(갈색수역) 지역해군(녹색수역) 함포 배치법 현측포 중앙주포 포곽 포탑 항공모함 정규항모 강습상륙함 대잠항모 기구모함 캐터펄트 무장상선 호위항모 전투기 캐터펄트함 중형항모 헬리콥터 모함 경항모 상선항모 수상기모함 잠수항모 대형항모 전함 해방전함 노급전함 전노급함 초노급함 표준전함 고속전함 조약전함 순양함 장갑순양함 전투순양함 비행갑판순양함 중순양함 포켓전함 경순양함 가장순양함 방호순양함 타격순양함 어뢰순양함 비방호순양함 호위함 통보함 호송구조함 구축함 구축호위함 선도구축함 호위구축함 호송함 프리깃 방공구축함 해방함 슬루프 수송함 상륙수송선거함 수륙양용함 공격수송함 선거상륙함 상륙함 육군특수선 상륙지원함 중상륙함 보병상륙함 중형상륙함 전차상륙함 차량상륙함 병력수송선 초계·경비함정 무장승선증기선 무장요트 연안감시정 코르벳 포함 항만방어발동기정 발동기정 징발유망어선 징발저인망어선 해양승선선박 경비정 Q선 증기포함 구잠정 어뢰정 고속공격정 에스보트 어뢰무장발동기정 발동기포함 유도탄정 발동기어뢰정 MT 폭발물발동기정 MTSM 발동기어뢰정 경비어뢰정 신요 기뢰정 Danlayer 구축소해정 기뢰대응함정 기뢰매설정 기뢰제거정 기뢰부설함 소해정 보조·특무함 오락함 탄약함 보조수리선거함 보조함 석탄선 전투저장함 사령함 해상기중기 잠수함모선 구축함모선 송달쾌속선 고속전투지원함 General stores issue ship 병원선 군용예인선 그물전개함 공작함 보급함 잠수함정 공격잠수함 탄도유도탄 잠수함 연안잠수함 순항유도탄 잠수함 순양잠수함 심해잠수정 심해잠수구난정 함대잠수함 군용잠수정 유보트 기타 아스널쉽 병영함 흉장모니터함 주력함 기함 경비함 연안전투함 철갑함 모니터함 강상모니터함 연습선 이 글은 선박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리깃&oldid=23517232" 분류: 호위함대항해시대의 범선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선박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ahasa BanjarBrezhonegBosanskiCatalàČeštinaЧӑвашла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Avañe'ẽ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3일 (수) 02: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