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ry listlengths 1 38 | context stringlengths 46 3.52k | refs stringclass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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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년 영국은 자국의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디에 가입신청하는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반대한 나라는 어디인가?",
"영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거부한 나라는?",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정식 가입하게 된 년도는?",
"영국이 1961년부터 가입을 신청한 곳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거부한 나라는 어딘가?",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정식 가입한 것은 언제부터 인가?"
] | 이 나라는 다른 여러 나라에 앞서서 산업혁명을 성취하여 오랫동안 세계 경제에 군림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의 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1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에 있어서의 지위는 차차 저하했다. 해외 투자로부터의 수입으로 경제의 안정을 꾀했으나 2차대전에 의해 큰 타격을 받고 재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비롯한 계획경제의 도입으로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하여 복지 국가의 실현을 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경제 체제이다. 그러나 높은 고용수준을 유지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국제 수지의 악화, 대내적으로는 코스트 인플레이션에 의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1961년부터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신청했으나 프랑스의 거부로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1971년 6월 마침내 수출입정책 및 파운드화(貨) 문제에 매듭을 짓고 영·불 양국간에 최종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1973년 1월부터 정식 가입(경과기간 5년을 계산하면 실질적인 가입은 1978년부터가 됨)하게 되었다. | korsquad |
[
"북해와 아이리시 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산업은 무엇인가?",
"스코틀랜드의 주요 산업인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총 몇 명인가?",
"19세기 신대륙에서 식량 수입이 시작되면서 영국의 농산업은 무엇에 중점을 두게 되었는가?",
"스코틀랜드의 어업 종사자의 수는?",
"영국이 농산물을 자급자족했던 것은 언제까지인가?",
"1995년 기준 영국의 어획고는 얼마인가?",
"스코틀랜드의 어업 종사자 수는?"
] | 19세기 중반까지는 농산물을 자급자족했으나 신대륙에서 수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축산과 원예 작물에 중점을 두게 되어 식량의 절반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수확량(收穫量)으로는 감자·사탕무·귀리 등이 많으나 금액으로는 축산물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비율이 높은 지방은 동부의 앵글리아·켄트·링컨셔 등이고, 잉글랜드 중앙부와 북부,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는 목초지의 비율이 크다.수산업은 북해와 아이리시해(海)를 중심으로 한 근해 어업과 아일랜드, 그린란드, 노르웨이 북해안 등지의 원양어업으로 나뉜다. 1995년의 어획고는 242만 2,000 t에 달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주요 산업의 하나로 되어 어업 종사자는 2만 2,000명이며, 이 밖에 계절적으로 약 6,000명이 종사하고 있다. | korsquad |
[
"영국 내의 양모공업 중심지는 어디인가?",
"영국의 북해유전은 몇 년도에 발견되었는가?",
"2차대전 이후 기계,화학 공업의 발달에 따라 침체되기 시작한 전통공업은 무엇인가?",
"2차대전 이후 영국의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의 발전으로 인해 저하된 공업은 무엇인가?",
"기계공업이 발달한 영국의 지역은?",
"1967년 발견된 북해 유전의 매장량은 몇 톤으로 추정되는가?",
"2차대전 후 영국에서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의 발달로 인해 사양산업이 된 것은?",
"영국의 대표적 공업지역은 어디인가?",
"랭커셔 지역에서 발달한 산업은?"
] | 2차대전 후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이 발전하여 전통을 지닌 목면공업이 저하했다. 1955년에 철광생산은 449만 t, 선철 1,213만 t, 조강 2,150만 t 등이다. 대표적인 공업지역인 런던의 남동부지역은 기계(機械)·금속·보석·고무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랭커셔 지역은 면업 대신에 기계공업이 발달하였고, 요크셔 지역은 현재도 양모공업의 중심지이다. 남웨일스, 잉글랜드 북동, 스코틀랜드 중앙 지역은 철강·금속·조선 등이 발달했다. 석탄업이나 전력사업, 가스사업 등 에너지관리는 국유화되어 있다. 석유는 1990년 정제량이 6억7,900만 배럴이었다. 1967년 발견된 북해유전은 1975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을 개시하였는데, 매장량은 약 30억t 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천연가스의 매장량도 무시할 수 없어 자원이 부족한 영국의 에너지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korsquad |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EU국가 내에서 영국의 세계수출액 순위는?",
"영국의 주요 수입품목 중 전체 수입금액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품목은 무엇인가?",
"국내 자원은 결핍되었지만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높으므로 영국은 무엇에 의존하게 되는가?",
"2009년 영국은 세계 수출액에서 몇 위를 차지하였는가?",
"영국의 주요 수입품목 중 금액적으로 식료와 원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영국의 유럽 국가와의 무역 비중이 높아진 계기는 무엇인가?",
"2009년 기준 영국의 수출액은 세계 몇 위인가?",
"영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 | 국내 자원은 결핍되었으나 생활수준이 높으므로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종래 영연방 국가와의 교역이 많았으나, 1973년 EC 가입 후 유럽 국가와의 무역 비중이 높아졌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은 미국 다음 가는 수출국이었으나 전쟁 후 서독 등의 부상으로 영국이 세계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줄어들어 EU 국가 내에서도 독일·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에 이어 5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2009년에는 수출액이 세계 9위로까지 추락하였고, 계속해서 영국의 수출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저하되고 있다. 주요 수출품목은 기계·자동차·항공기이다. 수입액은 수출액을 훨씬 초과하여 무역적자가 계속되고 있으며, 금액에서 식료와 원료가 70%를 차지하고 밀·설탕·옥수수·육류·석유·알루미늄·목재·양모·면화 등이 중요한 수입품목이다. | korsquad |
[
"유럽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공항은 어디인가?",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러터널이 개통된 시기는?",
"영국의 간선도로를 직할 운영하는 기관은?",
"유럽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은?",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영국해협터널이 개통된 해는?",
"영국이 보유한 선박은?",
"영국 철도의 총연장은?",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해주는 터널의 이름은?"
] | 해운국으로서의 지위는 대전 전에 비하면 크게 후퇴했으나 보유 선박은 3,292만 t(1976)으로서 세계 제3위를 차지하며 세계 해운 시장의 일대 중심지로 되어 있다. 런던을 비롯하여 사우댐프턴·리버풀·맨체스터·글래스고 등이 대표적인 항구이며, 템스강 하구, 클라이드 강구, 맨체스터 운하에는 10만 t급 탱커를 넣는 터미널이 완성되어 있다. 철도의 총연장은 약 2만km로서 세계 제2의 밀도(密度)이다. 1947년 이후 국유화했으나, 철도 발상지인 만큼 낡은 시설이 많은 데다가 자동차의 보급으로 큰 결손이 누적되고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화 계획을 실시하였으나 해결되지 않거나 오히려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다. 도로 연장은 약 36만 6,000km로서 거의 포장이 되어 있다. 간선도로는 운수성(運輸省) 직할로 운영되며, 그 밖의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고 있다. 항공은 원월드의 주축 항공사 영국항공과, 저비용 항공사의 대표주자인 이지젯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버진 애틀랜틱 항공 등 유수의 항공사가 존재한다.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은 세계 3위이자 유럽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이기도 하다. 우편물의 항공수송 서비스도 발달되어 있다. 한편 다년간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왔던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러터널(영국해협터널)은 1994년 5월 개통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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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프로 야구의 재개로 오시타가 입단한 구단은 어디인가?",
"오시타가 20홈런을 기록한 해는 언제인가?",
"오시타가 일으킨 홈런 붐의 영향으로 타격 폼을 변경한 당시 대표타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오시타 히로시가 1946년 기록한 홈런 횟수는?",
"변화구에 약했던 오시타 히로시가 20홈런을 친 그 해에 당한 삼진의 횟수는?",
"오시타는 전후 프로 야구의 재개와 동시에 어디 구단에 입단하였는가?",
"1946년에 기록한 홈런의 갯수는?"
] | 전후 프로 야구의 재개와 동시에 신설 구단인 세네터스에 입단해 1945년 11월에 열린 동서 대항전에서 전후 최초로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기록했다. 1946년에는 20홈런을 기록했는데 당해 리그 홈런 수가 211개로 전체 홈런의 약 10%를 혼자 기록한 것이 되었다. 한편 20홈런 중 스무번 째를 제외한 모든 홈런이 우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으로 극단적인 풀 히터였다. 또한 변화구에 약해 속구만을 쳐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타석에 섰기 때문에 삼진도 80개나 기록했다. 20호 홈런이 가까워질 때마다 야구장에서 관중들과 보도진들이 목을 높여 20호 홈런의 달성을 기다리기도 했다. 오시타의 출현은 패전에 시달리고 있던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어 전무후무한 홈런 붐을 일으켰는데, 이 홈런 붐은 당시 리그를 대표하던 타자 가와카미 데쓰하루 조차 홈런을 노리는 타격 폼으로 변경할 정도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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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른바 '오시타 소동'으로 오시타가 이적한 구단은 어디인가?",
"오시타가 이적 이후 자신을 조롱하는 도큐 팬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던 구장은 어디인가?",
"오시타가 당시 폭행을 당했음에도 관중들을 제지하려 했던 점을 인정받아 연맹 표창을 받을 수 있었던 사건은 무엇인가?",
"오시타의 어머니가 앓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1952년 오시타가 트레이드 이적해 간 팀은?",
"1952년 당시 오시타의 트레이드 상대였으며 25개의 홈런을 쳐 홈런왕이 된 선수의 이름은?",
"오시타의 어머니는 무엇에 중독 되어 있었는가?",
... | 오시타의 어머니는 필로폰 중독을 앓고 있었으며 구단에서 가불한 금액이 상당 부분 어머니의 약값으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단과 금전 면에서 불화가 생겨 1952년에는 주변을 말려들게 한 퇴단 소동(이른바 '오시타 소동')으로 시즌 시작 이후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트레이드 이적했다. 이적 이후 고라쿠엔 구장의 도큐 팬들로부터 조롱을 받은 오시타는 출루한 1루에서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고 이에 도큐 팬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헤이와다이 사건 당시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관중들을 제지하려 했던 점을 인정받아 노구치 마사아키와 함께 연맹 표창을 수상했다. 덧붙여 오시타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후카미 야스히로는 2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해 홈런왕이 프로 야구 사상 유일하게 두 팀에 재적한 홈런왕이 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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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오시타가 감독으로 취임한 곳은 어디인가?",
"후에 '오시타는 감독이 되면 안 될 사람이었다' 고 저서를 낸 선수의 이름은 무엇인가?",
"오시타 히로시가 도에이의 감독으로 취임한 해는 몇년인가?",
"팀의 성적이 좋지 않아 시즌 도중에 해임된 오시타 히로시를 대신해 대행으로 들어간 2군 감독은 누구인가?",
"오시타는 1968년 어디의 감독으로 취임했는가?",
"오시타씨는 감독이 되면 안 될 사람이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사람은?"
] | 1968년 도큐의 후신인 도에이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감독 시절에는 '사인 없음. 벌금 없음. 통금 시간 없음'의 '삼무주의'를 내걸었으나(사실은 오너였던 오가와 히로시의 제안으로 실행한 방안이었다) 팀은 최하위에 머물며 시즌 도중에 해임되었고 이이지마 시게야 2군 감독이 감독 대행이 되었다. 당시에는 선수에게 "~씨"을 붙여 불렀고 기용하지 않은 선수에게 "면목 없다"고 사과하는 등 사람 좋은 점으로 애수의 길을 열은 존재로 여겨졌다. 주포인 하리모토 이사오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동조자로 지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리 씨, 협력해 달라"고 자주 호소했다. 그러나 "협력하지 않는 것은 오해다"라는 애매한 말 밖에 돌아오지 않아 하리모토의 눈 앞에서 와키자시를 꺼내고 자신의 팔의 동맥을 잘라내며 "내 기분이다! 알아줘!"라고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리모토는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오시타 씨는 순수무구해 깨끗함과 아름다움이 엄청났다. 말하자면 감독이 되면 안 될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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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가 최순실과 결혼한 년도는?",
"정윤회가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의 보좌진이 된 년도는?",
"2002년 당시 박근혜 의원이 한국 미래연합을 창당한 이후에 정윤회가 맡은 역할은?",
"1984년 태어난 정우식의 현재 직업은 무엇인가?",
"박근혜의 측근으로 최순실의 아버지 이름은 누구인가?",
"문고리 권력이라고 불리는 4인방을 천거한 사람은 누구인가?",
"정윤회는 1995년 누구와 결혼하였나요?",
"정윤회는 누구의 사위인가요?",
"정윤회는 국회활동 중 누구의 보좌진으로 활동했나요?"
] | 1984년에 아들 정우식이 태어났고 정우식은 현재 배우로 활동중이다. 석사를 마친 이후인 1995년에는 최태민의 5녀 최순실(1956년생)과 결혼하였다. 1996년 딸 정유연(정유라로 개명)이 태어났다.(이후 2014년에 이혼) 박근혜의 측근 최태민의 사위 경력 때문인지 1998년부터는 국회의원이 된 박근혜의 보좌진이 됐다. 당시 박근혜의 보좌진이자 훗날 문고리 권력 4인방으로 불리는 인물들(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고 이춘상)을 천거한 것 역시 정윤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박근혜 의원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후에는 총재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박근혜가 한나라당에 복당한 이후인 2004년 6월~2006년 6월 기간동안에는 박근혜의 입법보좌관을 지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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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타이거JK가 걸린 병은?",
"타이거JK가 척수염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하였으나 심한 부작용을 겪은 약은?",
"척수염은 몇 명 중 한 명에게 발생하는가?",
"타이거JK는 척수염 치료를 위해 복용했던 스테로이드제로 인해 2주만에 체중이 얼마나 늘었는가?",
"척수염에 걸린 타이거 JK를 옆에서 돌봐줬던 사람은 누구인가?",
"100만명 중에 1명에게 발생한다는 드렁큰타이거가 걸린 병은?",
"드렁큰타이거의 아내는?"
] | 2006년 2월, 타이거JK는 생애 엄청난 고비를 맞게 된다. 바로 100만명 중에 1명에게 발생한다고 하는 척수염에 걸린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허리디스크인 줄 알았지만,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려도 다리털을 뽑아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고, 체온도 갑자기 뜨거워졌으며, 끝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되자, 척수염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척수염으로 인하여 신경이 마비되었고, 당시 척수염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하였던 스테로이드제가 심한 부작용에 걸려서, 2주만에 무려 30~40kg나 체중이 불었다. 소속사는 물론, 가족까지도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는 마비로 인하여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무브먼트 공연 활동을 하였고, 움직이면 뼈가 약해지지만, 그는 물을 마시면서 의정부 시내를 걸어다니면서 병이 조금씩 쾌유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윤미래(당시 결혼 前)가 옆에 돌봐줘서 끝내 투병생활에 이겼다. 하지만 완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약을 먹고, 단어는 생각이 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 부작용이 있다고 한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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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넬로는 니콜로 3세와 누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는가?",
"레오넬로는 나중에 어느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는가?",
"1435년 레오넬로가 혼인한 상대의 이름은?",
"레오넬로가 교수로 임명된 학교의 이름은?",
"레오넬로가 결혼한 사람의 이름은?",
"마르게리타가 낳은 아이의 이름은?",
"레오넬로는 어떠한 신분으로 출생했는가?",
"레오넬로는 누구에게 적자로 인정받았는가?"
] | 레오넬로는 니콜로 3세 데스테와 스텔라 데 톨로메이(Stella de' Tolomei)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 세 명 중 하나였다. 그는 콘도티에로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서 군사 교육을 받았고, 구아리노 다 베로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그에게 바람직한 지도자와 어떻게 다스리는 지의 특성에 대한 교육을 배우게 한 페라라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의 형인 우고 알도브란디노가 파문을 받은 후 인 1425년에 그는 니콜로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1435년에 그는 2월 6일 마르게리타 곤차가(Margherita Gonzaga)와 혼인을 했고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적자로 인정받았다. 1439년에 사망한 마르게리타는 1438년에 니콜로(1476년 사망)라는 아이를 낳아주었다. 1441년 12월 말에 그는 아버지가 북부 이탈리아에서 사망한 후 자리를 이어받았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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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4년 마리아 다라고나와의 혼인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레오넬로는 내부적 정치적 안정성을 위해 누구와 누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나?",
"마르게리타 곤차의 사망 후 레오넬로는 누구의 힘을 통해 이웃 지역들과의 동맹을 이룰 기회를 갖게 되었는가?",
"레오넬로는 1444년 5월 누구와 결혼했는가?",
"레오넬로가 정치적 안정성 보장을 위해 중립을 유지한 두 지역은?"
] | 훌륭한 학풍적 배경으로, 레오넬로는 니콜로 3세 이후에 그가 자리를 잡은 후 페라라에 전례없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가져왔다. 1444년 5월, 레오넬로는 알폰소 5세 데 아라곤의 사생아 딸인 19살의 마리아 다라고나와 혼인하였다. 이 혼인은 정치적인 혼인이였다. 페라라 내부의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레오넬로는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의 정치적 균형에서 중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레오넬로는 권위와 힘을 키우는등 페라라의 청사진 또한 지니고 있었다. 마르게리타 곤차가 사망 후, 레오넬로는 친족으로 강화된 페라라의 힘을 통해 이웃 지역들과의 동맹을 이룰 기회를 포착했다. 나폴리에서 마리아 다라고나의 아버지인 알폰소 5세의 승리는 레오넬로에게 외교적 혼인과 페라라에게는 기회로서 촉매제로 작용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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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넬로는 페라라 최초로 어디에 관여를 하였는가?",
"레오넬로의 의뢰를 받아 건축론을 저술한 인물은?",
"경매에서 랑가톡 남작에게 판매된 레오넬로의 물건은?",
"레오넬로는 실력있는 정치가였고 페라라내 경제적 번영에 집중했는데 페라라 최초의 무엇을 건설하는데 관여했는가?",
"레오넬로는 스스로를 어떠한 자로 구분지었는가?"
] | 니콜로 3세 통치 시기에 이러한 과정들이 없었던 것들을 레오넬로는 정치적 일들과 페라라내 경제적 번영에 한층 더 집중하였다. 레오넬로는 실력있는 정치가였고 페라라 최초의 병원 건설에 관여를 했었다. 하지만 그는 주로 스스로를 문화인으로서 구분지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레오넬로의 의뢰에 의해 건축론을 저술하였으며, 페라라의 궁전에는 피사넬로, 야코포 벨리니, 조반니 다 오리올로, 안드레아 만테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네덜란드 출신의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등이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의 개인 성무일과서는 분할된 상태로 195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랑가톡(Llangattock) 남작에게 판매되기도 하였다. 이후로 이 서적은 랑가톡 성무일과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조르조 달레마냐(Giorgio d´Alemagna)의 예술적 방향하에서 만들어졌고 마테오 데 파스티(Matteo De Pasti)와 야코포 마냐니모(Jacopo Magnanimo) 같은 화가들도 여기에 기여를 하였다. 파리의 루브르, 덴마크 국립 도서관, 일부 개인 수집가들에게 흩어져있는 상황이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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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찬이 주미대사를 언제부터 맡았나요?",
"제7차 국제 연합 총회를 연 시기는 언제인가요?",
"1952년에 열린 국제 연합 총회는 몇 차인가요?",
"양유찬이 주미대사를 처음 맡은 년도는?",
"양유찬은 주미대사를 몇 년도까지 맡았는가?",
"양유찬이 제7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한 년도는?",
"양유찬이 주미대사로 직무한 해는 1951년부터 언제까지인가?",
"양유찬이 주미대사로 가기 전 병원을 경영하던 나라는?",
"양유찬에게 찾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보라는 전갈을 한 사람은?"
] |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주미대사를 맡았다. 주미 대사가 되기 전, 양유찬은 하와이에서 의사로 기반을 착실히 닦아 중국인 의사 2명까지 고용, 큰 병원을 경영하는 등 명성과 재물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1951년 2월 어느날, 호놀룰루 총영사 김용식이 돌연 양유찬을 찾아가 "부산에 가서 이대통령을 좀 만나보라"는 전갈을 했다. 양유찬은 그래서 이대통령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주미대사로 가달라"는 말을 들었다. 돌연한 이 말에 양유찬은 외교를 전혀 모를 뿐아니라 한창 번창하고 있는 병원사업에서 손을 떼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네가 후손에게 백만큼의 재산을 물려주고 죽는게 나으냐, 우리 3천만백성을 살리는게 좋으냐"면서 24시간의 말미를 주었다. 당시 초량(草梁)에 있던 양성봉(梁聖奉) 경남지사 집에서 하룻밤 묵은 후 이튼날 아침 이승만에게 "제가 꼭 도움이 되겠다면 가겠습니다"고 하자 이승만은 "여기 가까이 앉으라"고 하면서 "내가 젊을 적에 너를 가르쳤다.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네가 자라서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서 일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기회는 왔다. 너는 가서 전쟁으로 먹고입을 것을 다 잃은 3천만 민족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1952년 제7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서, 변영태(단장), 임병직, 한표욱, 이재항, 서재식, 전상진과 함께 참석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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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정치회의는 몇 년도에 열렸나요?",
"양유찬이 친선사절로서 서독을 방문한 날짜는 언제인가요?",
"한국전쟁의 휴전 연도는?",
"양유찬은 몇 년도까지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일본과 교섭했나?",
"양유찬이 콘라트 아데나워와 회담하고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한 년도는?",
"양유찬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 해는?",
"1957년 양유찬이 친선사절로 서독을 방문해 회담을 나눈 사람은?"
] | 1953년 4월 21일 현 상태에서 한국전쟁의 휴전이 이루어진다면 한국군은 유엔군사령부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비망록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기여하며 1953년까지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일본과의 교섭에 앞장선 적도 있다.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56년 3월경, 한 담화 기사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제거하면 누가 이 난국을 극복해 나가겠는가. ... 한국의 투표자들은 만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신 경우 미국은 대한원조를 중단하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양 대사를 소환하라〉, 《조선일보》는 〈규명되어야 할 양 대사의 발언〉, 《경향신문》은 〈발언의 진부(眞否)를 규명하라〉, 《한국일보》는 〈교만과 억설을 삼가라〉등의 사설을 통해 비판하였다. 1957년 6월 5일, 양유찬은 친선사절로서 서독을 방문하여 콘라트 아데나워와 회담하고 조만간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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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이 냉전협상을 가지기로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결정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양유찬이 소련 타스 통신의 보도는 허위조작된것이라고 말한 년도는?",
"양유찬이 아이젠하워의 극동 방문에 관하여 미국무성 관리들과 회담한 년도는?",
"1960년 양유찬이 미국무성 관리들과 회담한 안건은?",
"양유찬이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의 극동 방문에 대하여 미국무성 관리들과 회담을 나눈 날은 언제인가?"
] | 1959년 12월 31일, 양유찬 대사는 소련 타스 통신의 "한국 해역 밖에서 비무장한 소련의 측량선에 대해 한국 전함이 공격을 가했다"는 보도는 허위조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양 대사는 성명을 통해, "소련은 순전히 대한민국에 대한 육지 및 공중공격을 위한 구실을 조작하고 있다"고 언명하였다. 그는 이어 "우리 정부와 해군은 타스 통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공격을 한 바도 없으며 또한 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이어 "나는 대한민국 해군을 손상시키기 위한 이러한 허위무근(虛僞無根)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큰 위험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1960년 1월 21일 하오, 양유찬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극동 방문에 관하여 미국무성 관리들과 회담하였다. 양 대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방문 여부는 백악관에서만 결정할 수 있으되 국무성에서는 그의 요망을 백악관에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양 대사는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커다란 자신을 갖고 있다. 문호는 닫히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어서 "수많은 미국 청년이 희생된 한국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양유찬은 1960년 1월 30일, 서방측이 앞으로 소련과 가지게 될 정상회담과 군축협상은 헛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양대사는 협상에 의한 냉전완화의 희망을 "가장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국가안보여성토론회에서 행하기 위하여 준비된 연설중에서 양대사는 소련수상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냉전협상을 가지기로 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서방동맹국들의 결정에 대하여 특정의 언급은 하지 않았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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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찬이 사직한 날은 언제인가요?",
"4·19 혁명 이후 대리대사로 지명된 사람은 누구인가요?",
"양유찬이 워싱턴에서 개인사업을 하려고 생각한다 말한 년도는?",
"양유찬이 자신과 한 공사가 이승만의 돈을 스위스 은행에 예금했다는 모 신문기사에 사실무근이라 반박한 년도는?",
"양유찬이 주미대사로 사직한 때는 언제인가?",
"양유찬은 주미대사를 사직 후 생각한 진로는?",
"양유찬의 후임으로 대리대사로 지명된 사람은?"
] | 4·19 혁명 직후에 양유찬은 사직하였다. 과도 국무원은 4월 29일 상오 10시부터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사표를 낸 양유찬 대사를 면직하기로 정식의결하였다. 1960년 4월 29일, 양유찬은 워싱턴에서 개인사업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양유찬은 아직 한국 임시정부로부터 누가 그의 후임이 될 것인가에 관하여 아무런 시사도 받지 않았다. 그는 아직 명확한 계획은 없으나 한국 정계에 투신하거나 의업을 재계할 생각은 없다고 말하였다. 5월 2일, 양유찬은 새로운 한국정부가 이날 그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양유찬은 "나는 그들이 나의 사표를 수리해서 기쁘며 짐이 가벼워졌다"고 말하였다. 한편 한국 대사관의 제2자(第二者)이며 노련한 외교관인 한표욱 공사가 대리대사로 지명되었다. 이와 같은 변경에 관한 정식 통고문이 2일 미국 국무성과 외교단에 전달되었다. 양유찬의 외교활동은 외무본부의 체계를 무시한 경무대 직통 외교로 비난을 받았다. 외교 옵써버들은 양유찬이 한결같이 이승만 정권의 독선적인 외교를 합리화시키는 데 전력을 경주하였으며 지난 3∙ 15 정∙ 부통령선거에 대하여도 자유세계에 모범이 된 공정한 선거였다는 것을 우방 제국에 왜곡 선전하는 한편 마산에서의 국민의거는 공산오열(五列)의 개입 운운으로 이승만 정권의 부패상을 묵인, 국제여론을 오도케 하였음을 상기시켰다. 양유찬은 조용한 주택지인 메이플밀가(街)에 있는 자택에서 자기와 한(韓) 공사가 이승만의 돈을 스위스 은행에 예금하였다는 모 신문기사에 관하여 펄펄뛰면서 이것은 사실무근이라고 1960년 7월 13일 반박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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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가져간 한국 선박의 무게는 얼마인가요?",
"양유찬이 언제 일본 공동 통신기자와의 회견에 참석했나요?",
"양유찬이 일본 공동 통신기자와 회견한 년도는?",
"한국과 일본이 억류자를 상호석방하기로 한 합의는 몇 년도인가?",
"양유찬이 일본 공동 통신기자와 한일간의 문제에 대해 인터뷰한 때는?",
"양유찬은 1960년 3월 9일 일본 공동 통신기자와의 회견에서 이야기 한 내용은?"
] | 1960년 3월 19일, 양유찬은 일본 공동(共同) 통신기자와의 회견에서 한일간의 여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한일문제 : 양유찬은 한국과 일본이 1960년 3월에 억류자를 상호석방하기로 한 합의는 양국간의 주요한 여러가지 문제해결에 더한층의 진전을 약속해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양유찬은 기타 모든 조건에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논쟁 중인 한일간의 어로문제의 만족할만한 조정이 회담석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양유찬은 어로선문제가 토의되기 전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1. 제2차세계대전 전 또는 대전중에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문제 2. 한국으로 송환되는 재일한교(韓僑)들이 재산을 반출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 3. 일본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한교들에게 강제송환의 공포를 없애기 위한 정당한 거주권의 인정 4. 한국국보의 반환 5. 일본에 있는 한국재산권의 해결 6. 일본에 가져간 한국 선박 7만5천톤의 반환 7. 한일간의 해저전신에 관한 문제의 해결 △ 영해문제 : 이상의 조건 수락으로 평화선 문제는 해결되나 평화선문제와 영해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 해양법 회의 : 한국정보는 해양법회의에서 미국안을 지지하도록 대표들에게 훈령하였다. 그러나 평화선문제는 영해문제와는 별도로 한일양국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양유찬은 이상 조건을 일본이 수락한다면 한일관계는 정상화되고 평화선문제와 어로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어 허터 미국 국무장관과의 회담은 시종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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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2세이자 미국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중고 객차 조사를 고의적으로 방해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충주비료공장은 몇 년대에 건설되었나?",
"양유찬은 몇 년도에 미국산 중고객차 도입에 개입하였다는 의혹을 받았나?",
"양유찬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외자도입으로 건설된 곳은?",
"충주비료공장이 세워진 해는 언제인가?"
] | 1950년대 외자도입으로 건설된 충주비료공장은 양유찬의 압력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양유찬이 1960년 미국산 중고객차 도입에 개입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 양유찬은 미국에 있는 한국인 2세 헨리 송이라는 업자의 청탁을 받아 경무대 비서로 하여금 압력을 가하게 하여 당초의 외자청장 안희경(安喜慶)씨에 의해 미원(美源)상사에 낙찰시키게끔 하기 위한 일련의 각본이 꾸며져 있었다. 헨리 송이라는 한국인업자는 그가 경영하는 트레이드 메이카 소개의 객차를 팔아먹기 위해 동 객차구매계획을 입안할 당시부터 양유찬을 앞장에 세워 암약했다. 이래서 객차규격을 미국산규격으로 제한하는 성공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아이젠버그 회사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태에 이르자 외자청 주미 구매관 신태언씨를 앞장세워 1960년 2월초순 동 객차구입에 따르는 현황조사차 방미 출장을 간 당시의 교통부 공전국장(工電局長) 정두길씨가 아이젠버그 회사가 추천한 중고 객차 조사를 고의적으로 방해해왔으며 이는 특히 당시의 안 외자청장이 전문(電文)으로 이러한 방해공작을 신 구매관에게 지시한데 자신을 얻어 공공연히 헨리 송씨의 앞장을 섰다. 양유찬은 419 후에도 5월 초에 외자청장 김영원(金英源)씨에 대하여 전문으로 "이왕이면 재미교포의 물건을 사는 것이 좋겠으며 국제검정기관에서 너무 까다로운 검사를 하니 이를 완화토록 조치해달라"는 청탁을 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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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대사 겸 브라질대사를 겸임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양유찬이 김상도 의원에게 꾸어준 돈은 얼마인가요?",
"양유찬은 어디에 소속되었나요?",
"양유찬이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가 된 년도는?",
"양유찬이 주미대사 겸 브라질대사를 지낸 년도는?",
"양유찬의 저서 Our common task는 몇 년도 작인가?",
"1960년 양유찬은 주미대사와 겸하여 맡은 직분은?",
"1965년 국무회의에서 특명전권순환대사로 임용하기로 한 인물은?"
] | 1951년∼1958년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 1960년 주미대사 겸 브라질대사를 지냈다. 1965년 9월 7일, 대한민국 국무회의는 양유찬을 특명전권순환대사에 임용키로 의결했다. 양유찬은 유엔대표부에 소속토록 되었다. 이때부터 1972년에 걸쳐 순회대사로 각국 순방의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1972년 외무부 대기대사를 지냈다. 저서로 《Our common task》(1953년), 《The aspirations of Korea》(1954년), 《Korea Against Communism》(1966년) 이 있다. 1960년 6월 28일, 양유찬은 자유당의 김상도 의원에게 꾸어준 돈 200달러를 좀 받아달라는 편지를 외무부로 보냈다. 편지 내용은 "김의원이 작년에 미국을 들렸을 때 여비가 모자란다기에 200달러를 꾸어준 일이 있는데 아직도 갚을 생각을 안하니 꼭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1960년 2월 19일, 양유찬 대사의 부인이 워싱턴에서 열린 홈쇼에서 미세스 가정주부(워싱턴에 주재하는 외국외교관 부인 가운데서 선출된다)로 지명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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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가 개발되기 전에 사라왁 북부지역의 행정구 역할을 한 것은?",
"미리는 어느나라의 도시인가?",
"미리지역의 유정 탐사를 이끈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회사는?",
"미리 개발 전 사라왁 북부지역의 행정구 역할을한곳은?",
"언제 미리는 말레이시아에서 10번째 도시로 승격되었나?",
"페트로나스가 미리지역의 유정탐사를 이끈건 언제부터였나?",
"미리가 개발되기 전에 사라왁 북부지역의 행정구 역할을 한 곳은?",
"1910년 미리에서 첫 번째 유정을 발견한 기업은?",
"미리는 2005년에 말레이시에서 몇 번째 도시로 승격되었나?"... | 미리가 개발되기 전에는 마루디가 사라왁 북부지역의 행정구 역할을 했으나 1910년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에 의해 첫 번째 유정이 발견되고 석유매립지역이 연달아 발견되며 급속도로 미리타운개발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29년 사라왁 북부지역의 행정구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미리는 일본군의 보르네오섬 첫 번째 상륙지점이었고 브룩 정권은 일본군에 의해 유정이 유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불을 질러 파괴하였다. 일본군의 점령은 곧 미리를 정유시설을 파괴하기 위한 연합군의 공습 목표로 만들게 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석유산업기업들은 이 도시 경제의 주를 이루었다. 1950년대 이후 유정 탐사는 해양으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1989~2011년에 걸쳐 새로운 육지상의 석유매립지가 발견되었고 1972년부터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나스(Petronas)는 페트로나스와 쉘의 공조로 미리지역의 유정 탐사를 이끌었다. 2005년에 미리는 말레이시아에서 10번째 도시로 승격되었다. 이는 주도인 도시 외의 첫 번째로 도시 지위가 수여된 사례이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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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스컬이라 불리는 호모사피엔스 해골은 누구에 의해 발견되었나?",
"딥스컬의 주인은?",
"니아케이브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은 인류가 언제 이곳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니아케이브의 구석기시대 유적 중 딥 스컬이라는 해골을 발견한 사람은?",
"딥 스컬이 발견된 해는?"
] | 5만년전 보르네오 섬이 동남아시아 부근 육지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 최초의 약탈자들이 니아케이브 서쪽 입구로 이주해왔다. 당시는 지금보다 더 건조하고 더 개방되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니아케이브는 덤불과 초원, 늪, 강들로 고립된 숲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이주민들은 열대우림에서 사냥과 어로, 채집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니아케이브에는 기원전 4만년에 인류가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는 딥 스컬이라고 명명된 호모사피엔스 해골이 톰 해리슨에 의해 1958년에 발견되었다. 이는 동남아에서는 가장 오래된 현 인류 해골이다. 해골의 주인은 16~17세쯤 되는 소녀의 것이며 가까운 곳에서 기원전 3만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시아 큰 천산갑의 뼈가 같이 발견되었으며, 중석기, 신석기 시대의 매장지 또한 니아케이브 안에서 발견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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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브는 몇년에 걸쳐 석유매장지대 지도를 만들었는가?",
"미리 힐의 현재 명칭은?",
"미리힐은 해발 몇미터인가?",
"1868년 제임스 브룩으로부터 사라왁의 왕의 지위를 승계받은 사람은?",
"11세기 보르네오 지역에서 녹나무와 석유수입에 관해 언급된 중국 송나라의 문헌은?",
"찰스 호스는 사라왁 행정관직에서 은퇴한 후 어느 나라로 갔나?"
] | 1868년, 찰스 브룩(Charles Brooke)은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으로부터 새로운 사라왁의 왕(the Rajah of Sarawak, White Rajah)지위를 승계받았다. 브루나이의 술탄 압둘 모민(Sultan Abdul Momin)은 바람지역(Baram region, 미리를 포함한)을 1883년까지 찰스 브룩에게 양도했고 클로드 챔피언 데 크레스피그니를 사라왁 네 번째 지구의 첫 번째 총독대리로 임명했다. 그때까지 미리는 여전히 중국인과 외딴 아랍인 무역상에 의해 운영되는 몇몇 작은 목재상과 20여개 정도 드문드문 있는 주거지역으로 구성된 맹그로브와 니파 팜 정글로 둘러쌓인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보루는 1883년 클로드타운(오늘날의 마루디, 미리에서 동쪽으로 43km 떨어져있다.)에 지어졌다. 클로드타운은 이 지구의 행정수도가 되었고 클로드의 정부는 두명의 행정관과 30명의 수색병, 소수의 원주민 경찰관에 의해 지원받았다. 1891년 찰스 호스(Charles Hose)는 클로드에게 새로운 총독대리로 임명했고 마루디 보루는 포트 호스(Fort Hose)로 새로 명명되었다. 바람지역내의 수많은 부족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1899년 4월 찰스 호스는 보루 내에서 평화회의주최를 결정했다. 이 평화회의에서 첫 번째 바람 레가타(롱보트 경기)가 탄생했다. 바람레가타는 현재도 원주민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미리의 지역주민들은 사실 수세기간 핸드더그유정에서 석유추출을 해왔다. 송회요집고(중국 송시대의 문헌)은 11세기 보르네오 지역에서 녹나무와 석유수입이 언급되어 있다. 1882년 클로드는 브룩정권에 미리지역 18개의 핸드더그유정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또한 미리 강변 지역을 철저히 탐사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유는 무시되었다. 하지만 1891년 찰스 호스가 총독대리에 임명된 후로 클로드의 아이디어에 관심갖게 되었고 브룩 정권은 클로드에게 협력하였다. 클로드는 미리 지역에 석유가 스민 곳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 지질학 자문관은 미리지역으로부터 불리한 운송조건때문에 유정 탐사를 기각시켰다. 찰스 호스가 사라왁 행정관직에서 은퇴한 후 영국으로 돌아가 앵글로-색슨 석유회사(Anglo-Saxon Petroleum Company, 1907년에 로얄 더치 쉘의 일부분이 된다.)와 미리지역 유정 탐사에 관한 건을 논의했다. 석유회사의 지부장인 H.N.벤쟈민은 이 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1909년 찰스 브룩 왕은 첫 번째 사라왁 유전 채굴 리스계약을 맻기 위해 런던에 방문했다. 로얄 더치 쉘은 수석 지질학자 조세프 테오도어 어브와 찰스 호스를 미리로 되돌려 보냈다. 어브는 1909년 8월부터 1910년 7월까지 2년에 걸쳐 석유매장지대 지도를 만들었고 그는 미리 힐(Miri Hill, 해발 150m로 현재는 캐나다 힐"Canada Hill"로 불린다.)로 알려진 장소를 확인했다. 이곳은 배사 습곡으로 석유시추작업에 알맞은 지반이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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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기업들이 해양으로 눈을 돌린 와중에 사라왁에서 유일하게 육상에서 석유를 매장하는 곳은?",
"미리가 바람지역의 중심관할구가 된 해는?",
"사라왁에서 유일한 육상 석유매장지는?",
"그랜드올드레이디는 1972년10월31일까지 총 몇배럴의 석유를 생산하였나?",
"회전 굴착기에 의한 유정굴착 방법이 소개된때는?",
"미리에서 로얄 더치 쉘이 석유시추작업을 시작하여 몇 미터를 파고난 후 석유가 발견되었나?",
"로얄 더치 쉘이 미리에서 석유시추를 시작한 이후로 1972년까지 미리 주변에서 몇 개의 육상 유정이 시추됐나?",
"미리와 ... | 마침내, 1910년 9월 10일 첫 번째 석유시추작업이 시작되었다. 나무 기중기들과 시추용 케이블 툴로 만들어진 A형 30미터높이의 리그(그랜드올드레이디란 별명으로 불리는)는 로얄 더치 쉘에 의해 운영되었다. 1910년 11월 22일 130미터를 파고난 후 석유가 발견되었다. 로얄 더치 쉘은 또한 자회사를 설립, 사라왁 오일 필드 유한회사(Sarawak Oil Field Ltd, 현재의 Sarawak Shell Berhad)로 이름붙였다. 그 이래로 1972년까지 미리 주변에서 또다른 624개 육상 유정이 시추되었으며 미리필드로 이름날렸다. 미리필드는 사라왁에서 유일한 육상 석유매장지이다. 왜냐하면 1950년대 후반부터 석유기업들이 해양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유정인 그랜드올드레이디(Grand Old Lady)는 1972년 10월 31일까지 총 650,000배럴의 석유를 생산해냈다. 그리고 첫번째 정유시설과 해저파이프라인은 1914년에 건설되었다. 정유시설은 1916년 루통(Lutong, 미리에서 북쪽으로 11km 떨어져있다.)으로 재배치되었다. 총독대리 집무실은 1912년 마루디에서 미리로 이전되었다. 미리는 쉘에 의한 석유생산비율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1920년, 도로가 건설되었고 자전거와 이륜차가 구매되었고, 1921년에는 40개의 상가들과 영국인 학교와 중국인 학교가 생겼으며 1924년, 미리와 루통을 잇는 대로가 건설되었다. 1925년까지 회전 굴착기에 의한 유정 굴착 방법이 소개되었으며, 석유생산량은 계속 증가하여 1929년 하루당 15,211배럴에 달하는 최고점을 기록했다. 식수공급도 개선되었다. 정글이 제거 되고, 더 많은 도로가 건설되었다. 1929년 미리는 바람지역의 중심관할구가 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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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영연방 왕실해군과 공군이 사라왁에서 철수하고 어느 나라로 귀환했나?",
"1941년 8월에 미리의 석유산출량을 몇 % 감소시켰나?",
"일본이 미리에서 자국의 석유회사 넨료하이큐로 하여금 시추, 정유작업을 하도록 해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해낸 석유량은?"
] | 브룩 정부는 영연방정부가 전쟁 틈에서 사라왁을 영연방의 보호령 중 하나로 수락하도록 활발히 로비활동을 벌였다. 영연방은 결국 사라왁에 대한 보호를 보장하는 방안에 동의했다. 1930년대 영연방은 사라왁의 방어를 위해 소수의 병력을 파견했다. 1938년 찰스 브룩 왕의 지배하에 일촉즉발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미리와 쿠칭, 오야, 무카에 활주로를 건설했다. 그러나 1941년 영연방 왕실해군과 공군은 사라왁에서 철수하여 싱가폴로 귀환했다. 그러므로 영연방정부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한 브룩 정부의 그을린 지구 정책을 지지했고 데니얼 스킴은 미리와 루통의 석유설비를 파괴할 것을 공식화했다. 병력의 부족으로 30마일이나 되는 루통으로부터 미리까지의 해안선을 일본군의 상륙에 대해 방어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41년 5월 2/15 펀자브연대 예속 1보병중대와 6인치 홍콩-싱가폴 왕실 포병중대, 왕실공병대 1소대가 석유시설 파괴작업을 감독하기 위해 미리에 배치되었다. 1941년 8월 미리의 석유산출량을 70% 감소시켰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군 항공기들이 미리 상공에서 정찰비행하는 것을 목격되었다. 브룩 정부는 미리의 석유시설과 항공시설 모두 파괴할 것을 결정했다. 쉘 컴퍼니 사무실은 데이널 스킴을 1941년 11월 8일 탈출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저녁, 작업이 완료되었고, 모든 생산 유정이 봉인되었다. 활성화를 위한 부품과, 봉인해제기계를 모두 싱가폴로 선적하고 숙련기술자와 중요한 기업문서 또한 장비와 함께 싱가폴로 보내버렸다. 펀자브 중대와 몇몇의 사무원들은 쿠칭방어선으로 보냈다. 1941 11월 16일 진주만 폭격 9일 이후에 일만의 일본군은 딴정 로방 비치(Tanjung Lobang Beach) 쉽게 상륙하였다. 하지만 1941년 11월 19일 따라깐 섬(Kota Tarakan)으로부터의 네덜란드 플라잉보트(flying boat)가 공격하여 시노노메(Shinonome, 히로시 사사가와가 지휘한)를 격침, 전체 선원 228명을 수장시켰으며 또 다른 플라잉보트 X-33이 일본군 수송선 또한 타격하였다. 1942년 1월 15일 싱가폴 함락 후, 일본군은 숨겨두었던 숙련기술자들과 장비들을 미리로 가져와 자국의 석유회사 넨료하이큐로 하여 시추, 정유작업을 하여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총 750,000배럴을 생산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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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나스가 결성된 해는?",
"페트로나스가 착수한 가스의 채집과 압축을 연구하는 프로젝트 이름은?",
"페트로나스와 쉘이 2014년 결성한 것은?"
] |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나스(Petronas)는 1974년 결성되었다. 결과적으로 특권체계(Concession System)가 쉘과 페트로나스 간의 생산공유계약체계(Production Sharing Contract System; PSC)로 변화되었다. 쉘을 포함한 모든 외국계 석유기업들은 페트로나스로부터의 면허자격을 획득해야 한다. 첫 번째 두 PSCs는 1976년 11월 30일 체결되었다. 외국계 석유기업들은 그들의 비용들을 복구할때까지 생산된 석유가 41%가 넘지 않게 유지해야 한다. 그들의 투자분을 복구한 후, 모든 운영비와 석유 로얄티를 상계한 후 기업의 수익을 30%로 유지한다. 페트로나스 또한 국내의 유정을 탐사, 개발, 생산할 기업 Petronas Carigali Sdn Bhd를 결성했다. 페트로나스는 가스의 채집과 압축을 연구하는 바람 델타 가스 게더링(Bardegg)프로젝트를 미리 10~45km인근 해역 5개 지역 베티(Betty), 베코르(Bekor), 바람(Baram), 바로니아(Baronia), 루통 서부(West Lutong)에서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는 석유 산출동안 가스손실을 최소화를 보증한다. 페트로나스와 쉘은 또한 불우한 학생에게 장학금 수여와 같은 교육적 복지활동에 관여한다. 두 기업은 또한 Malaysian first rig-to-reef offshore platform 프로젝트로 미리의 해양생태계를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하여 버려진 오프쇼어 플랫폼을 산호초 서식지로 만든다. 또한 이 두 기업은 피사우 자연예비군을 2014년에 결성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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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공습은 몇 년에 일어났는가?",
"일본은 여러 지역에 미군 폭격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무엇을 조성하였는가?",
"일제시대 경성부에는 소개공지대가 모두 몇 곳이 있었는가?",
"일제의 제2차 소개공지 사업이 미완성으로 끝난 이유는 무엇인가?",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아무런 건물도 짓지 않고 공터로 남겨두는 조성 사업을 뭐라고 하는가?",
"경성부내의 소개공지대는 모두 몇 군데였나?"
] | 1945년 3월 10일에 있었던 도쿄 대공습은 일본에 충격을 주었다. 전선에서 일본이 불리한 상황이었고, 미국에 의한 폭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자명했으므로, 일본의 각 지역에서는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아무런 건물도 짓지 않고 공터로 남겨두는 소개공지 조성 사업에 착수하였다. 이 사업은 당시 식민지인 한반도에도 시행되었는데,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경성, 부산, 평양, 대전, 대구 등의 주요 도시에 각각 소개공지 또는 소개공지대라는 것을 지정했다. 경성부내의 소개공지대는 모두 19곳이었으며, 제1차 소개작업은 5월 11일부터 시작되어 6월 말에 끝났다. 그 중 한 곳이 종묘 앞에서 필동까지의 너비 50 m, 길이 1180 m의 현 세운상가 지대였다. 곧바로 제2차 소개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소개작업은 미완으로 끝났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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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서울특별시장이 된 사람은 누구인가?",
"김현옥 서울시장이 종로구와 중구에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라고 지시한 것은 몇 년인가?",
"1966년 취임한 서울특별시장으로 세운상가 사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의미를 지닌 상가의 이름은 무엇인가?",
"1966년 4월 4일 부임한 서울특별시장의 이름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의 상가 이름은?"
] | 1966년 4월 4일 서울특별시장으로 김현옥이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하기 앞서 중구청 산업과 상공계장으로서 이을삼이 있었다. 그는 이 지역을 처음 봤을 때 이 곳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구청장 장지을이 이 계장을 대동해 김 시장에게 이것을 보고했다. 김 시장은 실태가 심각한 수준임을 인식해 도시계획과에 이 지구 정리방안을 작성하도록 하였고 이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종래에 종로구와 중구에 각각 분담되어 있었던 이 지역의 정비사업이 시청 소관으로 이전되어 김 시장이 진두지휘하였다. 김 시장은 1966년 7월 초 종로구·중구 양 구청장에게 이 지대 무허가건물 철거를 지시했고, 8월까지 이 지역에 대한 철거작업을 마쳤다. 서울시는 이 지역에 대규모의 상가 건물을 짓기로 계획했지만, 정부는 당초 이 지역을 도로용지로 지정한 것을 들어 상가 건설을 거부하려고 했지만, 청계천에 인접하고 있던 현재의 아세아전자상가 위치에 9월 8일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기공식에 참석한 김현옥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 라는 뜻을 담아 이 지역의 상가 이름을 세운(世運) 상가로 결정했다. 결국 정부도 이 지역을 재개발지구로 고시하게 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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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상가가 준공된 것은 몇 년인가?",
"세운상가를 재개발하자는 계획은 언제 처음 추진되었는가?",
"현대상가가 준공된 것은 언제인가?",
"세운상가의 재개발 계획이 추진된 것은 몇 년도의 일인가?",
"세운상가 중 1967년 7월 26일 최초로 준공된 상가는?",
"세운상가의 재개발 계획이 처음 추진된 연도는?"
] | 세운상가 중에서는 현대상가가 1967년 7월 26일 최초로 준공되었다. 서울시는 점포 2천개, 호텔 915개를 수용하는 맘모스 상가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동양 최대규모인 시멘트 87만부태, 목재 143만사이, 철근 7천t의 자재가 들어갔다고 자랑하면서, 서울의 상가 중심지가 종로 - 명동 - 소공동 - 무교동에 이어 이 곳으로 옮겨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상층부에 건설된 아파트의 인기도 대단해서, 사회 저명인사들이 다투어 입주해 있었고, 시공 때부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1971년 한강맨션이 건설되기 전까지 세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강남이 개발되고 서울 곳곳에 새로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세운상가 아파트 입주자들은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 시작했다. 상가를 찾는 발길도 뜸해지면서 1979년에는 재개발 계획이 처음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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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서부청과물시장은 어디로 이전되었는가?",
"세운상가는 무엇을 주로 파는 상가였는가?",
"용산역에 있던 서부청과물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전한 것은 몇 년도의 일인가?",
"우리나라에 저작권법이 도입된 것은 몇 년도의 일인가?",
"세운상가가 개인용 컴퓨터의 발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시기는?",
"1987년 세운상가의 많은 전자상들이 이전하게 된 곳은?"
] | 세운상가는 서울의 유일무이한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도 발전했다. 특히 8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의 발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한국의 8비트와 이후 16비트 컴퓨터, 그리고 소프트웨어 대부분이 세운상가에서 거래되었다. 1987년 저작권법이 도입되기 전 한동안 소프트웨어를 카피하는 카피점이 성행했다. 세운상가 사람들이 모이면 미사일이나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이후 1987년 정부가 용산역 서부청과물시장을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용산전자상가를 조성해 세운상가의 전자상을 이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도 많은 수가 이전하였고, 일부는 이에 반발하고 그 자리를 지켰지만 세운상가를 찾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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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를 설계한 것은 누구인가?",
"세운상가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상가 이름은?",
"세운상가를 설계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운상가 일대의 개발에는 몇 개의 기업체가 참여하였는가?",
"세운상가의 설계를 이룬 사람은?",
"세운상가 지역의 개발이 활성화되었을 때 몇 개의 기업체가 \n개발에 참여했나?"
] | 세운상가의 설계는 김수근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물의 지상 1층은 자동차 통로와 주차공간으로 하고, 3층에 인공데크를 건설하여 주변에 상가를 배치, 보행자 전용의 통로로 하여 철저한 보차도 분리를 적용하고, 종묘에서 필동 사이 1km에 이르는 공간은 보행자통로를 연결하여 입체화하도록 했다. 또한 상가의 윗층 아파트 부분에는 건물을 유리로 덮는 아트리움 공간을 도입하는 등의 설계가 진행되었다. 이에 이 지역의 개발이 활성화되었고 현대건설·대림산업·삼풍건설산업·풍전산업·신성공업·진양종합건설 등 6개 기업체가 참여, 북쪽부터 차례대로 현대상가(현 종로세운상가), 아세아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현 삼풍넥서스), 풍전호텔(현 HOTEL PJ), 신성상가, 진양상가라는 이름을 붙여 건설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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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의 공중보행도로는 어느 길에서 끊어졌는가?",
"1994년 세운상가에 대해 회고한 설계자 이름은?",
"설계자 중 한 명으로 1994년의 회고에서 자신들은 세운상가의 세부 설계는 담당하지 않았다고 밝힌 사람은 누구인가?",
"세운상가의 3층에 계획되어 있던 공중보행도로는 어디에서 끊어진 채로 완공되었는가?",
"계획이 10년만 더 늦게 착수되었어도 이상이 실현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당시 세운상가 설계자 중 한 명의 이름은?",
"세운상가 3층 공중보행도로가 끊어진 위치는?"
] | 하지만 상가 건설 결과는 설계와 많이 달랐다. 3층에 있다던 공중보행도로는 동서 두 줄로 가다가 을지로를 건널 때 잠깐 한 줄이 되고, 을지로를 건넌 뒤 다시 두 줄이 되었다가 마른내길에서 끊어졌다. 마른내길이 이어지지 못하자 1km에 이르는 공중보도도 중간에 끊겨 버린 것이다. 건물에 유리덮개를 설치하는 것도 실현되지 않아 서울시내에서 투박하고 위압감을 주는 건물로 변해 버렸다. 철저히 보차도 분리를 하겠다던 당초의 계획과 달리 지상 1층에도 보행자가 다니게 되어 3층의 보행자 도로는 그 의미를 상실했고, 상가 내에 공공시설을 설치하고 옥상에는 인공정원을 두겠다는 계획도 무산되었다. 설계자 중 한 명이었던 윤승중은 1994년에 밝힌 회고에서 자신들은 상가의 기본설계만 하고 세부 설계는 담당하지 않았으며, 시공주체가 서울시여야 했는데 8개의 기업군으로 분할되어 기업의 논리에 의해 계획이 변경되었고, 당시 시대가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오지 못했다는 점을 들었다. 윤승중은 이 회고에서 계획이 10년만 더 늦게 착수되었어도 이상이 실현되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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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설정 이론은 누구에 의해 시작된 동기 이론인가?",
"목표의 개념은 무엇과 비슷한가?",
"개인이 의식적으로 얻으려고 설정한 목표가 동기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은 무엇인가?",
"Edwin Locke에 의해 시작된 동기이론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얻고자 하는 사물이나 상태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 | 목표 설정 이론(영어: goal setting theory)은 Edwin A. Locke에 의해 시작된 동기 이론으로,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기본적인 가정에 기초하여, 개인이 의식적으로 얻으려고 설정한 목표가 동기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목표는 개인이 의식적으로 얻고자 하는 사물이나 혹은 상태를 말하며, 장래 어떤 시점에 달성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즉 성과와 관련된 작업행동의 가장 직접적인 선행조건으로 목표를 들고 있다. 목표는 개인이 달성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서 행위의 목적, 또는 계획이며 뜻이 있어 그 개념은 목적, 의도와 비슷하다. 이러한 의식적인 생각이 사람의 행동을 조절하기 때문에,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동기와 수행 모두에서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목표가 동기의 기초를 제공하며, 행동의 지표가 되기 때문에 설정된 목표는 관심과 행동의 지표를 제공하며, 노력을 동원하고, 노력을 지속케 하며, 목표달성을 위한 관련전략을 개발하도록 개인의 동기를 유발시켜 개인의 활동을 직접 조절하는 동기를 갖는다.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목표 구체성이나 목표 난이도 등의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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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ke는 몇 년도에 목표설정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는가?",
"Locke는 몇 년 동안 목표설정이론을 연구하였는가?",
"Locke는 어느 시기부터 목표설정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는가?",
"Locke는 목표설정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인간 행동이 무엇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는가?",
"Locke가 주장한 이론은?",
"Locke가 목표설정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한 때는?"
] | 목표설정이론은 Edwin A. Locke에 의해서 제시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기이론 중 가장 많이 연구되었으며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이론으로 다른 동기이론과는 달리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연구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Locke가 주장한 목표 설정 이론은 인간 행동이 본능과 욕구에 따라 가장 쾌락적인 방향으로 동기화된다는 기존 이론들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Locke는 1960년대 중반에 목표설정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30년 동안 연구를 해왔다. Locke는 그때부터 목표가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0년대에 자신의 목표설정이론을 발전시키고 재정의 해나갔고, 이때 이 주제에 대해 처음으로 글을 썼고 이 글은 확실한 목표(clearly identified goals)와 행동(performance) 간의 긍정적인 연관성을 보여주었다. Locke는 그렇게 인간 행동이 목표 혹은 의도(intention)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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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의 목표설정이론의 최근연구의 추세는 무엇을 접목하여 이루어지고 있는가?",
"목표설정을 통한 직무만족은 조직의 경쟁력을 높이는 연결 고리가 되어 궁극적으로 무엇의 향상을 이어나가게 하는가?",
"목표설정을 통한 직무만족은 무엇으로 연결되나?",
"최근까지도 연구가 지속되고 있는 로크의 이론은?"
] | 로크의 목표설정이론에 대해 최근까지도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최근연구의 추세는 이론적인 연구보다도 실제사례에 접목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목표 난이도와 목표몰입, 목표설정방법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목표설정에 따른 효과를 사례검증을 통하여 연구하고 있다. 목표설정이 직무태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직무만족에 주안점을 두어 목표설정과 직무태도의 상관성을 분석하고 있다. 목표설정을 통한 직무만족은 조직동일시와 조직몰입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조직의 경쟁력을 높이는 연결 고리가 되어 궁극적으로는 조직의 유효성을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기업에서는 어떻게 해야 조직과 사람의 성과를 향상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며, 조직 내에서 링겔만 효과를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목표몰입을 중점으로 제약회사를 표본 삼아 실증분석을 했다. 참여적 목표설정이 직무태도에 미치는 영향과 참여적 목표설정이 조직몰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한 결과, 제약회사 영업 및 영업관련 직원들에게 목표설정과 직무태도에 미치는 영향은 목표의 명확성과 난이도, 참여적 목표설정과 목표의 피드백이 제약회사 직원들의 직무태도를 높이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목표의 구체성과 인센티브가 과업성과 및 노력정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에선 로크의 목표설정이론에 대한 선행연구를 귀납적으로 분석해 목표의 구체성과 목표의 난이도가 성과를 좌우지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그에 목표가 구체적일수록 과업성과 및 노력정도에 정(+)의 영향을 미친다는 가정을 제시하고 1차, 2차실험과 설문지에 있는 조작점검항목의 체크여부에 따라 목표의 구체성을 측정하였다. 실증결과 구체적이고 도전적인 목표가 주어질 경우 목표가 주어지지 않거나 모호한 목표가 주어질 때 보다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더 높은 과업성과를 내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연구의 표본의 크키가 상대적으로 작아 한계점을 갖기도 하지만, 반드시 구체적인 목표가 모호한 목표보다 항상 정(+)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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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O는 1954년 누구에 의해 그 이론적 기초가 처음 제시 되었는가?",
"1954년 Peter F. Drucker는 MBO를 조직전체의 무엇을 위해 각 직무를 지휘하는 과정이라고 정의 하였는가?",
"Peter F. Crucker가 MBO의 이론적 기초를 처음 제시한 때는?",
"피드백이 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주축으로 관리를 해나가는 현대적 관리기법으로 정의한 제도는?"
] | MBO는 1954년 Peter F. Drucker에 의하여 이론적 기초가 처음 제시되었고,관리를 의도적인 것으로 보고 목표의 달성 즉 성취결과를 강조하면서 모든 경영활동 분야에서 반드시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MBO를 조직전체의 목표달성을 위해 각 직무를 지휘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전략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구체적이고 도전감을 유발하며 직무담당자에 의해 수락되고 피드백이 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주축으로 관리를 해나가는 현대적 관리기법을 MBO제도라고 정의하였다.학자에 따라 목표관리제를 성과관리, 동기부여, 경쟁을 통한 생산성 향상, 전략적 계획과 직원만족, 시스템 관리 등 여러 가지 초점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MBO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면 조직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 하고자 하는 접근 방법 (systematic management approach of organization) 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MBO는 계획과 통제의 과정이면서 직원들의 자발적인 조직몰입을 유도하는 참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 성취를 추구하는 업무평가체제이면서 조직전략체제이기도 하다. 이는 기업목표와 개인목표를 합치시키고, 조직구성원의 근로의욕 향상을 꾀하며, 나아가서 기업의 목표달성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경우 관리자는 명령하지 않으며, 종업원의 자주적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종업원 상호간의 조정만을 관리하며, 결과성취에 초점을 두는 결과중심(result-oriented)의 관리체계라고 할 수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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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이라는 책자를 발간한 사람은?",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이라는 책자에서 순양함을 이용해 해야 한다고 한 것은?",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이 걷은 승리가 가능성을 입증한 것은?",
"해군 전쟁과 프랑스 군함이라는 책은 몇페이지 분량인가?",
"청불전쟁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벌어졌나?",
"해군 전쟁과 프랑스 군항의 저자는 누구인가?",
"무엇을 발명하여 이론을 더 정교하게 다듬었나요?",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이라는 제목의 책은 몇 페이지인가요?",
"청불 전쟁은 몇년부터 몇년까지 ... | 이미 어뢰나 외장 어뢰정은 실현되고 있었으며, 자주식 어뢰를 발명하여 이론은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오브 제독은 1882년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La guerre maritime et les ports militaires de la France)이라는 제목의 38 페이지의 분량의 책자를 발간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 예를 들어 어뢰를 이용하여 적의 해상 봉쇄를 해제할 수 있다. 따라서,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함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어뢰정, 연안경비함, 충각함 등의 작은 함정이 있어야 한다. 공격에 관해서는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를 실시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고속의 함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883년에서 1885년까지 벌어진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기존 해군에 대한 어뢰정의 가능성을 실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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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가 스스로의 사상을 실현하려 했을 때 그의 직위는?",
"툴롱에서 실시한 연습으로 대형함이 할 수 없다고 입증된 것은?",
"청년학파는 정치인과 누가 말려들며 논란을 불러왔나?",
"오브가 해군 장교에 임명된 날은 언제인가?",
"오브는 해군장관이 된 후 무엇을 실현하려 하였나?",
"오브는 언제 해군 장관에 임명되었나요?",
"1861년 2월 오브는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어디까지 어뢰정을 항해시켰나요?",
"공격측이 툴롱을 함포 사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이 어떤 판정을 받았나요?"
] | 곧 청년학파는 정치인과 언론도 말려들며 논란을 불러왔다. 1886년 1월 7일에 오브는 해군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이것은 오브의 사상을 인정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해군장관이 된 오브는 재빠르게 그의 사상의 실현하려 했다. 1861년 2월에는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툴롱까지 어뢰정을 항해시켰는데, 길이 33m 정도의 어뢰정으로 공해를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다. 같은 해 5월과 6월에는 8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공격측을 20척 남짓의 어뢰정(순양함 3척과 해방전함 1척이 지원)으로 저지하는 연습을 했다. 공격측은 툴롱을 함포 사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이 격침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대형함에 의한 근접 봉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 12월, 오브는 다음과 같이 전략을 변경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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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파에 근거한 프랑스 해군이 무기력함을 드러낸 사건은?",
"카미유 뻬르당이 건조와 설계에 참여한 함선이 활약한 전쟁은?",
"러일 전쟁에서 유용성이 확인된 것은?",
"파쇼다 사건이 일어난 해는?",
"카미유 빠르당이 해군 장관에 취임한 해는?",
"19세기 말까지 누가 이 전투 시스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나요?",
"1902년 누가 해군 장관에 취임했나요?",
"전함 보빗을 기뢰로 유실한 것 등을 근거로 다시 무엇이 부활했나요?"
] | 19세기 말까지 프랑스 해군은 이 전투 시스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1898년 파쇼다 사건에서 청년학파에 근거한 프랑스 해군은 무기력함을 드러냈고, 따라서 1900년에는 새로운 전함의 건조를 포함한 기존의 함대 건설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02년 카미유 뻬르땅(Camille Pelletan)이 해군 장관에 취임하면서 카미유 뻬르땅이 건조와 설계에 참여한 일본 제국 해군과 함정이 청일 전쟁에서 활약한 것이나, 전함 보빗을 기뢰로 유실한 것 등을 근거로 다시 청년학파가 부활했다. 이 사상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은 러일 전쟁에서 전함의 유용성이 확인된 훨씬 이후의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해군은 전함 수에 있어서 독일보다 뒤떨어져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대부분 활약하지 못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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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마 섬의 또 다른 명칭은?",
"일본이 유네스코에 하시마섬을 등재 신청을 하였으나 한국에 반대를 당한 이유는?",
"하시마섬에 살던 섬주민들이 이주하게 된 이유는?",
"무인도 하시마 섬은 그 모습이 무엇과 비슷하게 생겼나?",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석탄 노동을 시킨 하시마 섬의 우리나라 명칭은?"
] | 하시마 섬(일본어: 端島)은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무인도이다. 섬의 모습이 마치 군함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군칸지마(軍艦島 (ぐんかんじま),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석탄 노동을 시킨 곳이기도 하며 또한 1960년대까지 탄광 도시로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폐산 이후 주민들이 이주하였으며, 섬에는 당시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였으나, 한국의 반대로 지정에 난항을 겪었다. 그후 강제 노역에 대해 명시를 하겠다는 조건을 통해 간신히 등재하였으나, 직후 태도를 바꾸어 강제 노동의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 korsquad |
[
"강제 징용에 조선인이 부족하여 인력과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공포한 법을 무엇이라 하는가?",
"조선인들이 강제적으로 하루 군칸지마에 일하게 된 시간은?",
"대일본제국이 조선인들을 징용하기 위해 1938년 4월 제정하여 공포한 법은?",
"군칸지마의 열악한 해저 탄광에서 조선인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채굴 노역에 동원되었나?"
] | 태평양전쟁 이후 군간지마는, 국무총리 산하 기관인 對日항쟁期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等지원위원회의 「사망 기록을 통해 본 端島 탄광 강제 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 실태 기초 조사」(2012)를 보면, 추정하건대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조선인 연인원 약 500명에서 800명이 이곳에 징용되어 노역에 동원됐다. 석탄을 생산할 인구 수가 부족하자 대일본제국 행정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1938년 4월에 대일본제국이 사람에 관한 자원과 물질에 관련된 자원을 총동원하려고 제정해 공포한 전시 경제 통제의 기본법인 「국가총동원법」을 이용해 조선인들을 징용했다. '지옥섬’ 혹은 ‘감옥섬’이라 불린 군칸지마는 가스 폭발 사고에 노출됐고 노역하는 장소가 비좁아 노역하는 사람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듯이 노역 환경이 열악한 해저 탄광에 징용된 조선인들은 하루 12시간씩 채굴 노역에 동원됐다. 이 중 일부는 부적합한 채굴 조건 탓에 병에 탄광 사고나 영양실조나 병에 걸려 죽었고 도망하려고 하다가 바다에 빠져 비참하게 죽기도 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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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하시마섬이 양도 된 곳은?",
"하시마섬이 곳곳이 촬영되어 본격적으로 보도 되었던 년도는?",
"하시마섬의 위험도가 괜찮아지고, 관광과 견학이 가능하였던 년도는?",
"하시마 섬이 나가사키 시의 소유지가 된 것은 일본 연호로 몇 년인가?",
"하시마 섬의 관광객 상륙과 견학이 가능해진 것은 일본 연호로 몇 년인가?"
] | 섬은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소유했지만, 2001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13년에 다카시마 정에 무상으로 양도돼 현재는 나가사키 시의 소유지가 되었다. 건물의 노후화와 폐허화에 따라 위험한 곳이 많아서 섬 안으로의 출입은 오랫동안 금지되었다. 2005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17년 8월 23일, 보도 관계자에 한해 특별히 상륙이 허가돼 황폐화가 진행되는 섬 안 각소의 모습이 각 매체에 소개되었다. 섬 안의 건축물은 아직 정비되지 않은 곳이 많지만 어느 정도는 한전면에서의 문제가 해결돼 2008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20년 나가사키 시에서 '나가사키 시 하시마 견학 시설 조례'와 '하시마에의 출입의 제한에 관한 조례'가 성립됐다. 이로써 섬의 남부에 정비된 견학 통로에 한해 2009년, 일본 연호려는 헤세이 21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의 상륙과 견학이 가능해졌다. 이후 1개월간 4,601여 명, 1년간 59,000여 명이 상륙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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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고의 최종 목적은 무었인가?",
"포켓몬 고에서 포켓몬을 진화시키는데 필요한 재료는?",
"포켓몬 고의 통화 중 하나로 포켓몬을 진화시키는데 사용되는 것은?",
"포켓몬 고의 최종 목표는 무엇을 완성하는 것인가?",
"게임내의 톻화인캔디는 어디에 사용하나요?",
"Pokemon GO 게임의 목적은 무엇인가?"
] | 다른 포켓몬스터 시리즈와는 달리 Pokémon GO의 플레이어는 야생 포켓몬을 잡기 위해 포켓몬과 싸움을 하지는 않는다. 포켓몬을 발견하면 플레이어는 포켓몬을 향해 포켓볼을 던진다. 포켓몬이 성공적으로 잡히면 포켓몬은 플레이어의 소유가 된다. 포획 성공률의 요소는 적절한 힘과 시간, 사용된 포켓볼의 타입에 달려있다. 야생 포켓몬을 포획한 후에는 플레이어는 게임 내의 통화인 캔디와 스타더스트(별빛모래)를 보상으로 받는다. 포획 성공으로 받는 캔디는 포켓몬을 강화하고 진화시키는 데에 사용된다. 포켓몬의 전투력(combat power; CP)을 올리기 위해서는 스타더스트와 캔디가 필요하지만,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캔디만이 필요하다. 이 게임의 궁극적 목적은 포켓몬을 포획하고 진화시켜 포켓몬 도감을 완성하는 것이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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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고를 하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로 몰렸는가?",
"일본에서 포켓몬 고의 정식 서비스가 시작된 후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 사용이 가능해졌는가?",
"대한민국에서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아 사람들이 포켓몬 고를 하려 몰려든 곳은?",
"어느 나라에서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자 울산 간절곶에서 포켓몬 고를 할 수 있게 되었는가?",
"pokemon GO가 정식으로 출시 되지 않았을때 우리나라에서 실행이가능했던 지역은?",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Pokemon GO의 실행이 추가된 곳은?"
] | Pokémon GO가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았던 대한민국에서는, iOS 해외 우회 계정이나 안드로이드 설치파일(APK) 다운로드 또는 Google Play 해외 우회 계정으로 실행한 Pokémon GO가 유일하게 강원도 속초와 양양, 고성군, 울릉도, 독도에서 사용이 가능하였다. 이 사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자, Pokémon GO를 하려고 속초로 몰려가는 사람들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 평일 속초행 고속버스 표가 매진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Pokémon GO를 플레이 하기 위해 속초로 집결한 사람들은 장맛비 속에서도 포켓몬 잡이에 몰두하여 Pokémon GO 열풍을 보여주었다. 이후 일본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자 추가로 울산 간절곶에서 사용 가능하게 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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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포하신 율법과 계명 사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주 예수께서 은혜시대에 하신 구속 사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시대에 발표한 인류를 정결케하고 구원하는 모든 진리가 기록되어 있는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율법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포하신 율법, 계명, 사역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진정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하신 말씀인가?"
] | 기독교의 교리는 ≪성경≫에서 시작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교리가 하나님께서 창세 후에 역사하신 율법시대와 은혜시대, 그리고 하나님나라시대까지 포함한 3 단계에서 발표하신 모든 진리에서 나온 것이라며,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기본적인 신앙 교리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그리고 말세에 다시 오신 예수,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하나님나라시대의 성경인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는 율법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포하신 율법과 계명, 그리고 인류의 생활을 이끌어 주신 사역이 기록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는 주 예수께서 은혜시대에 하신 구속 사역이 기록되어 있으며,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시대에 발표하신 인류를 정결케하고 구원하는 모든 진리가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3단계 사역에서 하신 모든 말씀이 진정한 성경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가 기본적으로 신앙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3단계 사역을 하시면서 발표하신 모든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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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시대와 신약 은혜시대에 한 사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이 예언된 책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이 예언되어 있는 책은?",
"전능하신 하나님 교인들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율법, 계명을 주고 인류 생활을 이끈 사역을 한 것은 어느 시대인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교인들에 따르면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무엇으로 정죄받는가?"
] | ≪성경≫에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시대와 신약 은혜시대에 하신 사역이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말세 사역이 예언되어 있다고 한다. 이 교회의 신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하나님의 말세 사역(또는 국대시대의 사역)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교회의 교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은 타락된 인류의 필요에 따라 율법시대, 은혜시대, 하나님나라시대, 이렇게 세 시대를 통해 인류의 구원 사역을 하신다고 주장한다. 율법시대에는 여호화께서 율법과 계명을 주시고 인류의 생활을 이끄신 사역을 하셨고, 그 사역을 통해 사람에게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만 지키지 못하면 율법으로 정죄받는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으며,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셨고, 율법의 규정대로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게 하셨다고 주장한다. 은혜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성육신하셨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율법시대 사역을 기초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하셨으며, 인간이 주 예수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사함받아 더 이상 율법에 정죄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나라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성육신하셨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은혜시대에 예수께서 하신 구속 사역의 기초에서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사역을 시작하셨고, 인류를 정결케하고 구원하는 모든 진리를 발표하셨다고 한다. 그것은 인류의 죄짓는 본성을 철저히 해결하여 죄악을 벗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3단계 사역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6천년 경영 계획 사역의 전부라고 믿고 있으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그것을 친히 완성하셨다고 주장한다. 3단계 사역은 밀접하게 이어져 있어 하나도 빠질 수 없고, 한 단계씩 발전하고 깊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마지막 사역은 추수하고 타작하는 것이고, 가라지와 알곡, 염소와 양, 착한 종과 악한 종을 가려내어 상선벌악 하는 것이며, 각기 부류에 따라 나누는 사역인데, 이에 따라 온 시대를 마친다고 주장한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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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하나님의 이름이었던 시대는?",
"예수라는 이름이 하나님을 대표했던 시대는?",
"이 교회의 교인들에 의하면 은혜시대에 하나님을 대표하던 이름은 무엇인가?",
"이 교회의 교인들에 의하면 율법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 | 이 교회의 교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시대 별로 다르기 때문에 취하신 이름도 다르다고 믿는다. 여호와, 예수,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 세 이름은 율법시대, 은혜시대, 하나님나라시대에 취하신 이름이라고 말한다. 이 교회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이 이름은 구속 사역을 위해 불렸던 이름인데, 말세에 예수가 재림해서도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느냐? 또 구속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왜 여호와와 예수는 하나인데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이름으로 불렸겠느냐? 다 사역의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냐?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전부를 다 대표할 수 있겠느냐?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대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이름으로 시대를 바꾸고 이름으로 시대를 대체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대표할 수 있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대성을 갖춘 성품만 대표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사역을 대표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적합한 이름을 하나 택하여 시대 전체를 대표한다. ”, “그러므로 율법시대에는 여호와가 하나님의 이름이었고, 은혜시대에는 예수, 이 이름이 하나님을 대표하였으며, 말세에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곧 전능자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고, 정복하고, 사람을 얻으며, 맨 마지막에 이르러 시대를 끝마친다.”(<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역사이상(3)>에서 발췌)라는 이 내용을 증거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라는 예언이 이루어 진 것이라고 한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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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최고의 경전으로 삼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신앙하는 것은?",
"기독교는 누구를 신앙하는가?",
"전통 기독교 단체의 관계자들은 주님을 믿으면 무슨 경전만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 |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성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은 매일 ≪성경≫을 보며, 성경을 가장 귀하게 보고 있고, 예수의 말씀과 예언을 인생의 준칙으로 삼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돌아와 말씀으로 심판, 형벌하는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증거하며,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을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성경≫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을 증거하고 있다. 이에 전통 기독교 단체의 관계자들 중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심판 사역이 성경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주님을 믿으면 성경만 믿어야지 성경을 벗어난 것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 대해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육신으로 돌아오신 예수께서 성경에 기록된 앞 두 단계의 기초에서 새로운 사역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셨던 사역을 보면, 먼저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그 뒤에 성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하실 때마다 성경에 근거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초월해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고, 여호와께서 율법시대의 사역을 하실 때에도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을 하실 때에도 신약 성경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약 성경은 예수께서 사역을 마치신 300년 후에 생겼으며, 구약 성경에는 예수께서 하신 구속 사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을 근거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며 ‘성경을 벗어났다'는 말은 논할 것이 못된다고 주장한다. 또 사람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믿어야 한다며,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없었던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여호와를 경배하고, 예수를 경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나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고, 주님을 믿으려면 성경만 믿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교회에서는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시는 말씀이고 사역이기 때문에 사전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은밀하게 강림하셨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전통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므로 예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서 증거하는 예수의 재림을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분에 대해 이 교회에서는 “...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 44),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이라는 구절을 예로 들며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방식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방식은 다르지만 크게 보면 은밀하게 오시는 것과 공개적으로 오시는 것으로 나뉜다고 한다. 성경에서 주께서 아무도 모르게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신 것은 은밀하게 오시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고, 또 구름을 타고 오실 때 모든 족속이 본다고 한 것은 공개적으로 강림하시는 부분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 교회에서는 주 예수의 예언은 틀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오시는 방식에는 절차가 있다고 한다. 우선, 예언에 도적같이 오리라고 한 것처럼 은밀하게 강림하시는데, 그 기간에는 이긴 자들을 만드신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형상을 바꾸어 시온으로 돌아가 대재난으로 상선벌악을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또 대재난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는데, 그때가 계시록에 예언된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계 1:7)라는 내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강림하여 심판하고 정결케하는 사역을 하는 기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때에는 상선벌악하고 각기 부류대로 나누어 결말을 정하는 때이므로 그때는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일만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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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예언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님 자신 재림하신 예수님이신 마지막 때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서 계시록은 누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예언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서 신약 성경은 예수의 어느 시대 사역을 기록한 것인가?"
] | 이 교회에서는 구약 성경은 여호와의 율법시대 사역을 기록한 것이고, 신약 성경은 예수의 은혜시대 사역을 기록한 것이며,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예언한 내용이 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보면 먼저 사역을 한 다음, 그 후에 그것에 따른 성경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또 예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 교회에서는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 자신, 재림하신 예수님이신 마지막 때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의 길을 줄 수 있다고 한다. | korsquad |
[
"교회에서 신도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배 방식은?",
"이 교회에서는 신도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이 교회의 교인들이 매일 보는 경전은 무엇인가?"
] | 이 교회에서는 신도들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부른다. 이 교회의 교인들은 매일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을 보고, 정기적으로(매주 2~3번 정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정해진 인원 수는 없다고 한다. 이 교회는 개인 수양이나 단체 수양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읽는 것을 중시한다고 한다. 이들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을 예배 방식으로 서로 공유한다고 한다.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정직한 사람이 되고, 충성으로 본분하고, 사탄의 타락 성정을 해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진리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준수하고 실천한다고 말한다. 이 교회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선민의 삶의 지침이 되었고, 정상 인성의 모습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길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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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에 따르면 천지 만물을 창조한 유일하신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 교회에 가입 제한이 없으나 정식 구성원으로 등록될 수는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 |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천지 만물을 창조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시인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 진리임을 인정하고, 참된 길을 찾으려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자여야 가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무신론자, 악인, 중범죄 이력이나 정치적 의도가 있는 사람, 정신 질환이나 성격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은 가입할 수 없다고 한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수의 재림으로 시인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세 현현으로 시인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가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일단 이성(理性)방면에 장애가 있거나 수준이 낮거나 지적 장애가 있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 해당되면 교회에서 가입을 거부한다고 한다. 청소년은 제한이 없지만 교회의 정식 구성원으로 등록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친인척 관계로 가입했지만 본인이 원해서 가입한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믿는 자가 아니면 교회에서 가입을 거부한다고 한다. | korsquad |
[
"이 교회에서 사역을 방해하거나 이익에 손해를 주는 악인은 교인 몇 퍼센트 이상의 동의하에 출교시킬 수 있는가?",
"중국 정부에 체포되었을 때 주와 동료를 배신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 | 교회의 사역을 심하게 방해하거나 교회의 이익에 손해를 주어 공분을 사는 악인에 해당되는 자는 교인 80% 이상의 동의하에 출교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성격 장애나 정신 질환 혹은 귀신에 들린 자는 출교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항상 그릇된 논리로 사람을 미혹하며, 원망이 섞인 말, 하나님을 논단하고 대적하는 말을 하는 악령과 적그리스도에 해당되는 자는 출교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 정부에 체포되었을 때, 주와 동료를 팔아 먹는 유다가 되어 하나님을 배신한 자는 출교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나 교회의 재물을 훔치거나 횡령하거나 혹은 사취하고도 배상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출교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 korsquad |
[
"납치 고문 감금 신체 자유 통제 등의 조치를 취하려던 나라는?",
"2011년에서 2013년동안 잡혀간 교인 수는?",
"2011년에서 2013년 사이 중국 정부에 잡혀간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교인은 몇 명인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가 중국에서 박해받은 사실을 2017년 3월 국제 인권 활동 행사에서 발표한 사람은?",
"중국 공산당은 카톨릭과 개신교를 무엇으로 지정하고 있는가?"
] |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중국 정부의 중점 퇴치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중국 정부 당국은 납치, 고문, 감금, 신체 자유 통제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신도들이 잡혀가 구금되고, 심지어 살해된 사례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공개된 사례는 중국 안후이(安徽)성 수이시(濉溪)현 우거우(五溝)진의 크리스천 쎄융쟝(謝永江, 남, 43세), 그는 1997년 4월 30일 새벽, 현지 파출소에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5월 10일, 화장터에서 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한 결과 온몸에 상처와 멍이 가득했으며, 머리 부분에서 치명상이 여러 군데 발견되었다고 한다. 쟝수(江蘇)성 수양(沭陽)현의 크리스천 예아이중(業愛中, 남, 42세), 그는 2012년 3월 26일, 교회의 물품을 구매하던 중 공안 당국에 잡혀 3일 만에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허난(河南)성 핑위(平與)현 칭허(清河)구 크리스천 쟝꾸이즈(姜桂枝, 여, 46세, 이 교회의 상부 책임자였다고 함), 그녀는 2013년 1월 4일, 허난(河南)성 신미(新密)시 공안에 잡혀 투옥되고, 불법 고문에 시달리다 2월 12일 새벽에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공산당 당국에 잡혀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에는 약물 투하로 정신 분열증이 생기거나 고문으로 심한 불구가 되어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거나 강제 구금당하거나 만기 석방된 뒤에도 감시를 받는 등 자유가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2011년에서 2013년의 짧은 2년 사이에 잡혀간 이 교회의 교인만 해도 38만 380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에 43,640명이 불법 고문을 당했으며, 111,740명이 누명을 쓰고 벌금이나 공갈 협박으로 금품을 갈취 당했는데, 그 금액은 243,613,000위안(한화 약 405억 5천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또 35,330명의 집이 강제 압수 수색을 당해 적어도 10억 위안(한화 약 1,665억, 교회 헌금과 개인 재산 포함)이 공안 기관 및 관련 부서, 혹은 공안 개인의 소유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 통계는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가 박해받은 전체에서 빙산의 일각이라고 한다. 2017년 3월, Linda Wang 이라는 신도가 국제 인권 활동 행사에서 중국에서 박해받은 사실을 발표했다. 중국의 종교 박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공산당은 카톨릭과 개신교를 사교(邪教,사악한 종교)로 지정하고 있으며, ≪성경≫을 사교 서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중국 정부 당국은 일부 카톨릭과 개신교를 강제로 폐쇄시키고 삼자교회(공산당 애국 운동 위원회의 통제를 받음) 가입을 강요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박해받고, 구금되고, 목숨을 잃은 크리스천은 부지기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중국 정부 당국이 ‘3 재건축 1 철거(三改一拆)' 정책을 실시하면서 저쟝(浙江)성 지역에서는 불법 건축물이라며 2천 개 가량의 십자가를 철거하였으며, 철거 반대 의사를 표명한 성직자들은 사후에 체포 및 판결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6월,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圳), 광저우(廣州) 둥관(東莞) 지역 등의 가정 교회(지하교회)들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삼자교회’에 가입을 강요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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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던 분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성육신하시어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사해주실 때 매달려 있던 것은?",
"이 교회의 교인들이 신앙하는 모든 것은 누구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는가?",
"이 교회에서는 예수가 처음으로 성육신하여 인간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왔다고 하는가?"
] | 이 교회는 자신들이 신앙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눅 12:17)라고 하셨고,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나님은 인류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고, 이 세계를 주재하고 있으며, 전 우주를 주재하고 있다. 인류의 운명은 하나님의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나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다. 인류의 운명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와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고 경배하는 인류를 번창하게 할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저버리는 인류를 쇠퇴하고 멸망하게 할 것이다.”(<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하나님이 전 인류의 운명을 주관하고 있다>에서 발췌)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에 교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말세에 나타나신 창조주라고 믿고 있으며, 하나님은 단순히 어느 국가나 행성만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와 온 인류의 운명을 주관하신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의 정치에 참여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권의 통치를 도와주려는 것도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성육신하시어 유대인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오셔서 구속 사역을 하셨는데, 십자가에 달리시어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사해 주셨지만 인류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신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성육신으로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도 인간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주시는 것은 인류를 정결케 하고, 인간의 타락한 성정을 제거하며, 사탄의 권세에서 철저히 구원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지 인류의 정치에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교회 신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어떤 정치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어떤 정치 세력을 의지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추구한다고 한다. 또한 국가의 제도, 정책(법률, 납세)을 준수하며, 자원 봉사 활동에는 참여한다고 한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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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등 자오위안의 맥도날드 매장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전국적으로 탄압 작전이면서 2년 사이에 38만명의 교인을 체포했던 작전은?",
"중국 정부가 5.28 자오위안 사건을 빌미삼아 전국적으로 펼친 탄압 작전은?",
"중국 정부가 백일전을 펼쳐 2년 사이에 체포한 교인은 몇 명인가?"
] | 2014년 5월 28일, 중국 산둥 자오위안의 맥도날드 매장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 공안측은 피의자 장리둥, 뤼잉춘, 장판, 장챠오렌, 장항 등을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신자라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이 교회에서는 그 피의자들을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산둥성 옌타이시 중급인민법원의 법정 심문 과정에서 피의자 장리둥 및 관련 피의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교리와 신도의 기본적인 생활 상식조차도 알지 못했으며, 피의자들의 진술에는 모순되는 부분이 너무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피의자 장판은 “나는 지금까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와 접촉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은 너무 은밀하여 나도 찾을 수 없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판의 진술에서도 피의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신도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어 피의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신도라는 중국 정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피의자가 전도 활동 중에 피해자가 믿지 않아 살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입장은 다르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는 복음 전도에 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며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의 “10. 믿지 않는 가족(자녀, 남편, 아내 혹은 형제나 부모 등등)을 억지로 끌어당기지 말라. 하나님의 집에는 사람이 부족하지 않으니 쓸모없는 사람으로 숫자를 채울 필요가 없다. 믿고 싶어 하는 자가 아니라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라. 이 조항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니 너희는 마땅히 서로 제약하고, 서로 감독하고, 서로 일깨워 주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범해서는 안 된다. 설사 믿지 않는 가족이 마지못해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도 책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되고, 새 이름을 지어 주어서도 안 된다. 그런 자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이 부류의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한다. 만일 마귀가 침입해 교회에 누를 끼친다면, 그 자를 데려온 너를 출교시키거나 규제할 것이다. 어쨌든 이 일에서는 사람마다 시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함부로 하지 말고 앙갚음해서는 안 된다.”(<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하나님 선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10가지 행정>에서 발췌)라는 이 내용을 근거로 피의자들은 이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5.28 맥도날드 살인 사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다. 어떤 매체는 이 사건을 중국 정부 당국이 지하교회를 근절시키기 위해 조작한 살인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 수 개월 동안 중국 정부가 지하교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원저우 등의 지역에서 교회 건물과 십자가를 강제 철거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인 것이 유력한 증거라며, 중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살인 사건의 시발점이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라고 한 것은 신뢰성이 없다고 보도했다. 2017년 7월, <국경없는 인권>에서도 ‘중국 정부는 5.28 자오위안 사건을 빌미로 이 교회를 강력하게 탄압하고 있다. 또한 전국적으로 ‘백일전’이라는 탄압 작전을 펼쳐 2년 사이에 38만 명에 이르는 교인을 체포하였고, 이에 수 많은 교인들이 해외로 도피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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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보를 인수한 해는?",
"썬테크노로지스의 대표이사가 된 해는?",
"최규선은 2015년 (주)루보를 인수하여, 사명을 (주)썬코어로 변경하며 얻은 직위는?",
"(주)썬테크놀노지스는 어떤 산업에 필요한 부품을 생산하였나요?",
"최규선은 2015년 어떤 회사를 인수하였는가?",
"최규선은 (주)루보를 2015년도에 인수하여 사명을 무엇으로 변경하고 대표이사 및 회장이 되었는가?"
] | 2015년에는 코스닥 상장회사인 (주)루보를 인수하였으며 사명을 (주)썬코어로 변경하고 대표이사, 회장이 되었다. (주)썬코어의 사업으로는 자동차 부품 제조 및 판매와 전기자동차 및 ESS 이차 전지 생산 및 판매, 그리고 무인경비 시스템 개발 및 판매 등을 영위하고 있다. 아울러 2016년에는 (주)썬테크놀로지스의 대표이사가 되었으며 (주)썬테크놀로지스는 철강 산업에 필요한 압연 제조 공정의 핵심 부품인 주조 압연롤 전문 생산 업체로 일부 대형롤뿐만 아니라 중, 소형롤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제품군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포스코와 현대종합제철등에 제품을 판매하는등 국내 압연롤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동남아, 중동, 인도, 유럽 등 해외 20여개국에도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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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은 구속된지 몇일만에 석방됬는가?",
"이재용이 선고받은 형은 얼마인가?",
"2018년 2월 5일 열린 선고공판의 재판장은 누구인가?",
"2018년 2월 5일에 열린 이재용 선고공판의 재판장 이름은?",
"이재용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받은 형량은?",
"기업인 이재용의 항소심에서 선고공판 날짜는?",
"기업인 이재용의 항소심 선고공판을 담당한 재판장의 이름은?"
] |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선대(先代)가 남긴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아닌 성공한 기업인이 되고 싶다"며 "삼성에 실망한 국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취지의 진술을 한 가운데 2018년 2월 5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 부장판사)는 이재용이 최순실에게 소극적으로 지원해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을 근거로 하여 경영권 승계 등 대가성 뇌물이 아닌 박근혜와 최순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건넨 것으로 판단하여 최순실 측에 준 용역대금 일부만 죄를 인정하고 나머지 혐의는 대부분 무죄로 보면서 1심 재판에서의 원심을 깨고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구속된지 353일만에 석방됐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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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의 비디오들의 총합 조회수는 몇회 이상인가?",
"나탈리는 어떤 것을 변호하는 비디오로 오스트레일리아의 TV에 소개되었는가?",
"나탈리가 올린 비디오들의 총 조회수는?",
"나탈리가 유튜브에 비디오를 올려 변호한 것은?",
"나탈리는 얼마 이상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나?",
"나탈리의 비디오들의 총합 조회수는?",
"나탈리의 최고 조회수 기록 비디오의 조회수는?"
] | 나탈리는 100만명 이상의 구독자수를 가지고있으며, 나탈리의 비디오들은 총합 4억 60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 이러한 인기로 인하여 나탈리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The Sydney Morning Herald, Western Australia Today, B&T Magazine, Venus Zine. Der Spiegel, Báo Viêt Luận Online, Việt Tribune, VnExpress, Triple J, Hot30 Countdown, mk 뉴스. 미국인 유튜브 비디오 블로거인 Ben Going의 베지마이트를 비하하는 비디오에 대한 응답으로 나탈리가 올린 베지마이트 변호비디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A Current Affair 에 베지마이트 전쟁의 한 부분으로 2007년 2월에 소개되었다. 나탈리의 최고 조회수 기록 비디오는 2012년 4월 기준으로 3천 4백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였으며 그 후에도 조회수는 상당한 속도로 증가하고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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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는 토론토에서 열린 ideaCity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
"TubeMogul에서 나탈리를 유투브 최고 수익자 몇 위로 선정하였는가?",
"2010년 11월 나탈리는 어디에서 후원하는 전세계 대장정을 떠났는가?",
"유튜브 광고부문 최고 수익자 상위 10명 중 나탈리의 순위는?",
"나탈리의 전세계 대장정을 후원한 곳은?",
"나탈리가 가장 재미있는 유튜브 채널 분야의 후보로 지명된 시상식은?",
"나탈리가 시드니현대미술관에서 진행자를 맡은 때는?",
"나탈리는 유튜브 광고부문에서 최고 수익자 상위 10명중에 몇위로 선정... | 나탈리는 창의성과 인터넷에서의 인기로인해 여러경로로 인식되었다. 나탈리는 오스트레일리아판 유튜브가 2007년에 공개되었을때 초대받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유튜브 유명인사중 하나였다. 나탈리는 현재 The Sydney Morning Herald지의 기술에 대한 비디오 블로그인 Digital Life에 토론자와 실생활 기자로서 메인진행자이자 저널리스트인 Séamus Byrne의 보조를 받으며 참여하고있다. Digital Life에서의 나탈리의 풍자물은 특별히 이를 위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탈리의 유튜브 영상물과 거의 동일한 방식과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나탈리는 2009년 5월 시드니현대미술관에서 "Creative Sydney"의 진행자를 맡은 경력이 있다. 나탈리는 Mashable지의 2009년 Open Web Awards에서 "최고의 유튜브 채널 또는 성격"과 "가장 재미있는 유튜브 채널"분야에 후보로 지명되었다. 나탈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열린 2010 Entertainment Gathering (EG) 컨벤션의 발표자중 하나였다. 같은 해 나탈리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ideaCity의 발표자를 맡기도 하였다. 2010년, 동영상 분석업체인 TubeMogul에서는 나탈리를 유튜브 광고부문에서 최고 수익자 상위 10명중에서 10위로 선정하였다. 나탈리는 101,000달러의 수익과 138,871,829회의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특이한 인기와 높은 수익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언론에도 잠시 소개된바가 있다. 유튜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나탈리의 채널은 2011년 3월의 한주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다수 유명 텔레비전쇼보다 많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고한다. 2010년 11월, 나탈리는 론리 플래닛에서 후원하는 전세계 대장정을 떠났다. 나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토크쇼인 The Project의 멜버른, 퍼스, 애들레이드, 시드니, 브리즈번의 주말 이벤트를 소개하는 Metro Whip Segment 코너의 시드니 주재원이다. 나탈리는 2011년 9월 4일에 오스트레일리아의 게임쇼인 Talkin' 'Bout Your Generation의 시리즈 3에 게스트로 출연한적이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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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나탈리는 다른 유투브에 대한 어떤 영상을 올리는가?",
"나탈리의 가장 유명하여 최고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비디오가 패러디한 영상의 제목은?",
"나탈리가 다룬 진지한 소재로 2009년 2월 일어난 사건은?",
"나탈리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는 무엇에 대한 패러디인가?",
"나탈리의 비디오는 나탈리가 카메라앞에서 무엇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나?"
] | 나탈리의 비디오는 전형적으로 나탈리가 카메라앞에서 풍자를 곁들인 독백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일반적인 주제로는 친구의 선물에 얼마만큼의 돈을 써야하는지나 적절한 전화 예절 등에 대한 사회적 딜레마에 대한 의식의 흐름을 사용한 해설뿐 아니라 관찰적 유머와 자기비하 유머가 있다. 이 주제들에대한 예를 들자면 광고주들의 이상하고 판에박힌 관행을 조롱하거나 초음파의사의 장난이 있다. 종종 나탈리는 다른 유튜브 비디오의 패러디영상을 올리기도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비디오는 "식스팩 복근을 만드는법"에대한 패러디가 있다. 이 비디오는 나탈리의 비디오중 최고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 조금 더 진지한 소재의 경우에는 나탈리의 2009년 2월 빅토리아주 산불에 대한 응답이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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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누구에 의하여 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는가?",
"1955년 종합 대학으로 승격되어 초대 총장으로 누가 취임 하였는가?",
"1912년 경선궁과 영친왕이 하사한 토지의 수익금으로 무엇이 설립되었는가?",
"재단법인 숙명학원은 몇 년도에 설립되었는가?",
"숙명여자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누구인가?",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종합 대학으로 승격된 해는 몇년인가?",
"경선궁와 영친왕이 하사한 토지의 수익금으로 설립된 재단법인은?",
"숙명학원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로 바뀐 해는?",
"숙명여자전... | 1912년 경선궁과 영친왕이 하사한 토지의 수익금으로 숙명여자보통학교를 운영하는 재단법인 숙명학원이 설립되었다. 1938년 숙명학원에서 현재의 부지에 숙명여자전문학교(淑明女子專門學校)를 설립하여 다음 해인 1939년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이던 오다 쇼고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11월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재개교하여 숙명여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임숙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5월 미군 군정청에 의하여 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에 부산으로 피난하여 동대신동에서 가교사를 짓고 수업을 계속하였으며, 서울 지역이 다시 수복되자 1953년에 서울로 복귀하였다. 1955년 종합 대학으로 승격되어 초대 총장으로 임숙재가 취임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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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한영실 총장은 새로운 학교 비전으로 무엇을 선포하였는가?",
"2008년 이경숙 총장이 정년 퇴임하자, 누가 제 17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는가?",
"2010년 9월 14일 여성 학군사관 후보생 시범 대학으로 선정되어 같은해 12월 10일 어떤 창설식이 거행 되었는가?",
"2010년 한영실 총장이 선포한 숙명여자대학교의 새로운 비전은 무엇이었는가?",
"2010년 숙명여자대학교는 무슨 시범 대학으로 선정되었나?",
"2008년 정년 퇴임한 숙명여자대학교의 총장은?",
"제17대 총장으로 취임한 한영실 총장이 2010년 선포한 ... | 2008년 이경숙 총장이 정년 퇴임하자 이학 박사 한영실이 교수 직선으로 당선되어 제17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0년 한영실 총장은 새로운 학교 비전인 ‘숙명 블루 리본 프로젝트’(Blue Ribbon Project)를 선포하였다. 같은 해 학제 개편의 일환으로 경상대학에 소속된 경영학부와 경제학부를 분리하고 경영학부를 3개의 학과로 분할하여 경영대학에 소속시키고 경제학부를 사회과학대학으로 이전하는 방안이 발표되었으나, 소속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자 한영실 총장은 경상대학의 현재 체제를 유지한다고 발표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2010년 9월 14일 여성 학군사관 후보생 시범 대학으로 선정되어 같은 해 12월 10일 학생 군사 교육단(학군단) 창설식이 거행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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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가 숙명학원 이사 5명과 감사 1명에 대한 승인을 취소한 날은 며칠인가?",
"8월 16일 교과부의 승인 취소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린 곳은 어디인가?",
"숙명학원이 대학의 기부금을 재단의 계좌로 이체하여 다시 대학으로 보낸 이유로 숙명여대 이사장과 감사를 승인 취소한 곳은?",
"대학의 기부금을 재단으로 보내 후 다시 대학으로 교부하여 승인이 취소된 숙명학원 이사장은?",
"숙명학원이 대학의 기부금을 재단의 계좌로 보낸 후 다시 대학교로 보낸 일을 언론 매체에 유출하여 이사회로부터 해임을 의결 받은 사람은?"
] | 2012년 3월 15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숙명학원이 대학의 기부금을 재단의 계좌로 이체하여 다시 대학에 교부한 것을 이유로 이용태 숙명학원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5명과 감사 1명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였다. 이사회는 한영실 총장이 언론 매체에 해당 사실을 유출하여 이사회의 업무를 방해했다며 한영실 총장의 해임을 의결하였다. 3월 30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숙명여대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한영실 총장을 해임한 이사회 결의의 효력을 임시로 정지하였고, 한영실 총장은 업무에 복귀하였다. 한편 4월 4일 교과부는 최종적으로 이들의 승인을 취소하였다. 승인이 취소된 이사들은 서울행정법원에 교과부의 취소 처분에 대한 집행 정지를 신청하였고 법원이 4월 25일 이들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승인이 취소된 이사들은 이사회로 복귀하였다. 8월 16일 서울행정법원은 교과부의 승인 취소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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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국제언어문화교육원은 1967년 어디에 처음 설립 되었는가?",
"2000년에 신축된 사회교육관에 입주하면서 무엇으로 확대 개편되었는가?",
"숙명여자대학교 국제언어문화교육원이 처음 설립된 연도는?",
"국제언어문화교육원이 처음 설립되었을 당시의 목적은?",
"2000년 국제언어센터가 대학원관에서 자리를 옮겨 입주한 곳은 어디인가?",
"숙명여자대학교의 1999년 개칭된 어학학습실의 명칭은?",
"숙명여자대학교의 국제언어문화교육원이 설립된 해는?",
"국제언어교육센터가 2000년에 입주한 곳은?"
] | 숙명여자대학교 국제언어문화교육원(The International Institute of Language Education, LinguaExpress)은 1967년 대학원관 2층에 어학실습실로 처음 설립되었다. 어학 교육의 실습을 보조하던 어학실습실은 1999년에 국제언어교육센터(The International Center for Language Education; ICLE)로 개칭되면서 자체적으로 어학 강좌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게 되었다. 2000년에는 신축된 사회교육관에 입주하면서 국제언어교육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국제언어교육원은 외국어 과정과 한국어 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외국어 과정에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과정이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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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문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목적으로 개관된 박물관은?",
"문신 미술관에서 기획전이나 공모전을 통하여 발굴한 신인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갤러리는?",
"문신 미술관에서 문신의 작업장을 찍은 사진이나 실제 작업 도구 등이 전시되는 갤러리는?",
"문신 미술관이 완공된 년도는?",
"창원시립문신미술관 관장이자 조각가 문신의 부인이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문신 미술관의 갤러리 중 주로 사진 전시와 신인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갤러리는?",
"조각가 문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목적을 둔 숙명여자대학교에 있는 박물관 명칭은?",
... | 문신 미술관은 조각가 문신(文信)의 작품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목적으로 개관한 박물관이다. 문신미술관은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은 문신의 부인이자 창원시립문신미술관 관장인 최성숙을 만나 1999년 6월 9일 청파동 일본식 주택에 설립한 문신 미술 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 2002년 숙명여대 미술대학으로 연구소가 이전하였고 2003년 10월 문신 미술관이 완공되었다. 2004년 5월 10일에 르네상스 플라자 B1, B2층에 문신 미술관이 개관하였고 문신 미술 연구소는 폐지되었다. 문신미술관은 빛 갤러리, 문 갤러리, 은하수 갤러리 , 무지개 갤러리, 영상실로 구성되어 있다. 빛 갤러리에는 주로 사진이 전시되며, 기획전이나 공모전을 통하여 발굴한 신인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문 갤리리에는 문신의 유화, 도자기, 판화, 미발표 드로잉, 그리고 그와 연계되는 소형 조각이 전시된다. 무지개 갤러리는 문신의 작업장을 찍은 사진이나 실제 작업 도구 등이 전시된다. 은하수 갤러리에는 문신의 중, 대형 조각(브론즈, 스테인리스), 석고 원형이 전시되며, 천장에는 원형의 창이 뚫려 있어 빛이 들어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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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에 관련된 중대한 기구를 의결하는 기구는?",
"총학생회를 대표하여 운영위원회와 집행부의 장이되는 사람을 무엇이라 하나?",
"숙명여대의 재학생 모임을 뜻하는 단체는 무엇인가?",
"숙명여대의 학과,학부,전공 학회장과 부학회장으로 구성되는 기구는?",
"숙명여대에서 요구가 있을 때 학생 총회를 소집 하는 사람은?",
"총학생회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의결하는 기구는?",
"숙명여자대학교의 학과와 학부, 전공 학회장과 부학회장으로 구성된 기구의 명칭은?",
"총학생회를 대표로 운영위원회와 집행부의 장의 역할을 맡는 직책은?"
] | 총학생회는 숙명여대의 재학생 모임이며 학생총회, 대의원회,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단과 대학 학생회, 학과∙학부∙전공 학생회, 기타 학생 문화 활동 단체로 구성된다. 학생총회는 총학생회에 관련된 중대한 사항을 의결하는 기구로서 대의원회의 요구 또는 총학생회 회원 10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총학생회장이 소집한다. 대의원회는 숙명여대의 학과∙학부∙전공 학회장과 부학회장로 구성되는 기구로서 학생총회의 소집을 요구할 권한 뿐만 아나라 총학생회 회칙의 개정과 발의를 확정할 권한, 총학생회의 업무를 감사할 권한, 총학생회장단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할 권한 등을 가진다. 총학생회장은 총학생회를 대표하며 운영위원회와 집행부의 장이 된다. 총학생회장은 총학생회의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편성된 예산과 결산을 대의원회에 제출한다. 또한 총학생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에 관하여 학교와 관계 기관에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다. 운영 위원회는 총학생회의 심의, 자문 기구로서 총학생회장, 부학생회장, 단과 대학 학생회장, 총학생회 집행부의 부장으로 구성되며, 총학생회가 운영하는 제반 사업, 총학생회장이 대의원회에 제출할 예산과 결산, 총학생회장의 대의원회에 대한 소집 요구 등을 심의, 자문한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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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는 재가처세를 교시로 삶아 무엇을 배출하는 대학으로 평가 받아왔는가?",
"2001년 교육부에 의해 어떤 대학으로 선정 되었는가?",
"한영실 총장은 교양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하고 2010년 한국언론인연합회에서 수여하는 참교육 대상에서 어떤 부분을 수상하였는가?",
"이경숙 총장 취임 전까지 숙명여대가 교시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나?",
"2004년, 2005년 숙명여자대학교는 무엇에 선정되었나?",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는 숙명여대를 무엇으로 선정하였나?",
"숙명여자대학교에 이경숙 총장이 취임한 후 학교에 제시한 새로운 ... | 숙명여대는 재가처세(在家處世)를 교시로 삼아 현모양처를 배출하는 대학으로 평가받아 왔으나, 이경숙 총장이 취임한 이후 제2 창학을 선언하고 리더 양성을 학교의 새로운 목표로 제시하였다. (#역사 참조) 1998년, 1999년, 2001년 교육부에 의해 ‘교육 개혁 추진 우수 대학’으로 선정되었고, 2004년과 2005년에 ‘리더십 특성화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새로운 학생 선발 제도인 입학 사정관 제도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에 의해 ‘입학 사정관 제도 선도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이경숙 총장의 후임으로 취임한 한영실 총장은 교양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하였고, 2010년 한국언론인연합회에서 수여하는 참교육 대상에서 인재 부분을 수상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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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의 건물 외관의 색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5층 취조실로 바로 연결되는 계단의 모양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취조실은 몇개인가?",
"취조실의 개수는?",
"건물의 외관을 이루고 있던 것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물 벽의 색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취조실 숫자는?"
] | 건물의 외관은 검은색 벽돌로 이루어져 있고, 5층 취조실의 창문이 매우 좁은 것이 특징이다. 좁은 창문 때문에 안밖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무자비한 고문과 취조가 자행되던 흔적을 감추고, 외부와의 단절을 시도하려는 당국의 구상이 반영됐다. 피의자는 건물 후면에 따로 만들어진 작은 뒷문을 지나 5층 취조실로 곧바로 연결되는 나선 계단으로 올라갔다. 취조실은 모두 15개로 밖에서 전등을 끄고 켤 수 있으며 문마다 안을 감시할 수 있는 렌즈가 달려 있다. 취조실 안에는 욕조와 수세식 변기, 침대, 고정된 의자와 책상이 갖춰져 있었고, CCTV도 갖추었다. 또한 취조실의 문들을 서로 마주 보지 않게 설계하여 문을 열어 두어도 서로 볼 수 없도록 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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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날짜는?",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 사망한 조사실의 호수는?",
"군사독재 시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행되었던 것은?",
"김근태가 고문을 당한 일을 소재로한 영화 제목은?",
"1987년 5.18 민주화 항쟁 기념미사가 일어난 장소는?",
"1985년 9월 김근태에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가한 이의 이름은?",
"1987년 1월 14일 509호 조사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져 남영동 대공분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 인물의 이름은?",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기자에게 알린... | 군사독재 시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민주화 운동 인사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취조실의 구조 자체가 24 시간 내내 피의자를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고, 변호인 접견권과 같은 기본적인 인권도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1985년 9월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의장이었던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 511호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하였다. 김근태가 고문을 당한 일을 소재로한 영화 《남영동1985》가 2012년 개봉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이던 박종철이 참고인 진술을 명목으로 연행되어 고문을 받고 사망한 사건 때문이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509호 조사실에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다 숨졌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변명을 내놓아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였다. 이 사건은 부검의였던 오연상이 물고문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사인을 기자에게 알리면서 진상이 들어나기 시작하였고, 이후 당국이 축소 은폐를 시도하여 수사관 둘만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로 몰아가려고 하자 서울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 안유가 당시 구치소에 있던 재야인사에게 폭로하였다. 안유의 폭로는 우여곡절을 거쳐 정의구현사제단에게 전달되었고,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미사에서 〈고문 경찰 축소 조작〉을 폭로하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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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토스카의 태생은 어디인가?",
"토스카는 누구와 짝짓기를 했는가?",
"크누트가 태어난 동물원은?",
"토스카와 짝짓기를 한 수컷곰은?",
"크누트를 담당한 사육사는?",
"크누트는 어느 동물원에서 태어났나요?",
"크누트의 엄마 토스카는 몇살 때 크누트를 낳았나요?",
"크누트가 태어났을 당시의 체중은?"
] | 크누트는 베를린 동물원의 스무 살 된 어미 토스카에게서 태어났다. 토스카는 캐나다 태생으로 동독에서 서커스 공연을 하였던 곰이었으며 뮌헨 티어파르크 헬라브룬 출신의 13세의 수컷곰 라르스와 짝짓기를 하여 2006년 12월 5일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러나, 토스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두 새끼를 우리 안 바위 위에 놓아두고 방치하였다. 사육사들은 그물을 이용해 새끼들을 구출하였지만 한 마리는 4일 뒤 죽었다. 살아남은 새끼곰 크누트는 당시 기니피그 정도의 크기였으며 태어났을 당시 체중은 810g으로 44일간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했다. 인큐베이터를 나온 크누트를 담당한 사육사는 토마스 되르플라인(Thomas Dörflein)이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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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권익 운동가로서 설문조사를 게재한 사람의 이름은?",
"크누트를 안락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은 어떤 신문에 게재되었는가?",
"크누트를 안락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동물 권익 운동가는?",
"알브레히트의 의견에 동조한 볼프람 그라프 루돌포는 어느 동물원의 책임자인가?",
"보수 성향을 가진 독일의 타블로이드 신문은?",
"2007년 프랑크 알브레히트가 설문조사를 게제한 신문의 이름은?",
"아헨 동물원의 책임자이며 알브레히트의 의견에 동조한 사람의 이름은?"
] | 2007년 3월 초, 독일의 보수 성향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 차이퉁》은 동물 권익 운동가 프랑크 알브레히트가 주도한 설문조사를 게재하였는데 그는 '크누트를 인간이 길러서는 안되며 안락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물원이 동물보호법을 어기고 크누트를 살려두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아헨 동물원 책임자 볼프람 그라프 루돌프(Wolfram Graf-Rudolf)는 알브레히트의 의견에 동조하며, '어미가 버린 새끼는 죽도록 두는 것이 옳고, 베를린 동물원측도 강단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군의 어린이들은 동물원 앞에서 '크누트를 살려야 한다'고 항의하였고, 크누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서신과 이메일이 쇄도하였다. 심지어 알브레히트에게는 협박 편지까지 수차례 받았다고 한다. 베를린 동물원은 많은 사람들의 안락사 반대 의견과 성원에 힘입어 크누트를 계속 보호하기로 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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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의 날 행사에 모인 언론 기자들의 수는?",
"크누트가 대중에 처음으로 공개된 날짜는?",
"크누트가 대중에서 처음 공개된 해는?",
"크누트가 처음 공개된 날 모여든 기자들은 몇 명인가?",
"크누트가 처음 대중에게 공개된 년도는?",
"크누트의 날 행사에 모여든 언론 기자는 총 몇명이었나요?"
] | 크누트는 2007년 3월 23일 대중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를 보도하기 위해 '크누트의 날' 행사에 모여든 언론 기자들은 400명에 달하였다. 크누트가 워낙 어린 시절부터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덕분에 곰의 건강 상태를 두고 한해 동안 수많은 억측이 난무하였는데, 예를 들어 2007년 4월 16일에 치과 진료를 받기 위해 크누트가 자리를 비운 동안 크누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항생제 치료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크누트를 죽이겠다는 협박도 있어서 팩스로 들어온 살해협박문을 접수한 경찰은 크누트 우리의 보안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협박자가 예고한 시간 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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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7개월이 된 크누트의 무게는 얼마였는가?",
"동물원 대변인이었던 사람의 이름은?",
"생후 7개월 당시 크누트의 몸무게는?",
"진보성향을 가진 독일의 언론 잡지는?",
"크누트가 동족 곰들과 관계 형성의 시기를 발표한 동물원 대변인은?",
"생후 7개월이 된 크누트의 무게는?",
"쿠누트가 사람이 아닌 동족들과 관계를 형성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 사람의 이름은?"
] | 2007년 4월 30일, 독일의 진보성향 언론 잡지 《슈피겔》은 "크누트가 커가면서 자연스레 귀여움을 잃고 있다"고 보도하였지만, 크누트는 그 해 여름에도 수많은 방문자들을 맞이했다. 2007년 7월, 생후 7개월이 된 크누트는 무게가 50kg이 되었다. 하루 두 번씩 크누트를 공개하던 동물원측의 원 계획은 사육사의 크누트 관리를 목적으로 취소되었다. 동물원 대변인 레기네 담(Regine Damm)은 크누트가 사람이 아닌 동족 곰들과 관계를 형성할 때가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크누트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아시아흑곰인 에른스트 모자와 한동안 함께 우리에서 생활했으나 크누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의 우리를 배정 받게 된다. 동물원 방문자 수는 3월에서 4월 가는 동안 평년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2007년 한해 동안 크누트는 여전히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2007년 8월에는 방문자 수가 400,000명에 달하면서 베를린 동물원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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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 공개된 지 1년 후 크누트의 무게는 얼마였는가?",
"배를린 동물원의 곰 전문가의 이름은?",
"크누트가 130kg이 되었을 때는 대중에게 공개된 지 몇년 후가 흘렀을 때인가?",
"2008년 크누트를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육사는 누구인가?",
"베를린 동물원 안의 곰 전문가는 누구인가?",
"크누트가 대중에 공개된지 1년이후의 몸무게는?",
"크누트와 관객 사이에 몇인치의 유리판이 설치되었나요?"
] | 크누트는 대중에 공개된 지 1년이 후 130kg이 되었다. 크누트와 관객 사이에는 박격포 폭발에도 끄떡 없는 두께 6인치짜리 유리판이 설치되었다. 크누트가 많이 성장하게 되자 2008년 3월 말 크누트의 사육사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뢰브케는 "크누트의 자립 생활, 독립을 위해 가급적 빨리 크누트를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뢰브케는 또한 크누트가 전임 사육사였던 토마스 되르플라인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울음소리를 내 주목을 받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보아주기를 바라는 크누트의 성향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 바 있다. 한편, 4월 초 동물보호단체는 크누트가 우리 안에서 열 마리의 잉어를 죽여 잡아먹었으며 이는 독일 동물 보호법 위반이라고 비난하였다. 베를린 동물원의 곰 전문가 하이너 클뢰스는 이에 대하여 북극곰의 습성일 뿐이라고 일축했고 비난에 대해 반박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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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브룬 동물원에 있던 크누트와 비슷한 나이의 북극곰의 이름은?",
"조반나가 대중에 공개된 날짜는?",
"PETA 대변인의 이름은?",
"북극곡 암컷 조반나가 베를린 동물원으로 옮겨진 해는?",
"크누트와 조반사의 짝짓기는 독일 북극곰 유전형질을 위협한다고 주장한 PETA 대변인은?",
"조반나가 원래 머물던 헬라브룬 동물공원으로 돌아간 때는 2010년 몇 월인가?",
"크누트와 비슷한 나이의 북극곰 '조반나'가 베를린 동물원으로 이전된 년도는?",
"조반나가 대중에 공개된 날은?"
] | 2009년 9월, 뮌헨의 헬라브룬 동물공원에 있던 크누트와 비슷한 나이의 북극곰 암컷 '조반나'가 베를린 동물원으로 이전되었다. 조반나는 9월 23일 대중에 공개되었고 헬라브룬 동물공원이 수리를 마칠때까지 크누트의 우리를 잠시 공유하였다. 조반나의 도착은 국제적 관심을 촉발하였다. 당시 크누트와 조반나 모두 성년이 아니었음에도 매체들은 두 곰이 짝짓기를 할 것인가의 여부가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 3월, 동물을 윤리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의 모임 독일 지부는 크누트와 조반나의 할아버지가 같으니 "크누트의 근친교배를 막기 위해서는 크누트를 거세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PETA 대변인 프랑크 알브레히트는 "크누트와 조반나 사이에 새끼가 태어난다면 이는 독일 북극곰 유전형질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 베를린 동물원은 이에 대하여 어떠한 성명이나 발표도 내지 않았고 조반나의 베를린 동물원 체류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만 밝혔다. 후에 2010년 8월 조반나는 수리가 끝난 본래 동물원으로 돌아가면서 사태는 진정되기에 이른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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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는 몇 살에 숨을 거두게 되었는가?",
"당시 몇 명의 관람객들이 크누트의 죽음을 목격하었는가?",
"크누트가 숨을 거둔 해는?",
"크누트가 연못에 떨어져 죽을 당시 나이는?",
"크누트가 숨을 거둔 년도는?",
"2011년 크누트는 몇살이었나요?"
] | 네 살이던 2011년 3월 19일 크누트는 우리 안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목격자들은 크누트가 왼쪽 뒷다리를 떨며 동요된 상태로 경련하다가 연못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당시 약 600~700명 가량의 관객들이 크누트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3월 22일 성명에서 크누트의 뇌에 이상이 생겨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수 있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독일내 동물 보호 단체들은 크누트의 죽음을 베를린 동물원 탓으로 돌리며 동물원이 암곰들과 크누트를 합사해 스트레스를 유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베를린 동물원 측은 이를 부정하였고, 곰 전문가 하이너 클뢰스(Heiner Klös)는 "동물원 측이 크누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으며, 동물원에서 북극곰을 합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크누트의 사회성 및 기술 교육을 위해서도 나이 많은 곰과 합사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 밝혔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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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시 천으로 완구를 만그은 회사의 이름은?",
"재품들을 베를린 동물원에 독점공급하여 몇 일만에 완판되었는가?",
"쿠디 키누트는 어떤 맛의 구미 질리 재품을 출시하였는가?",
"3가지 크기의 크누트 기획 상품으로 큰 성공을 거든 완구 회사는?",
"쿠디 키누트라는 젤리를 출시한 사탕 제조 회사는?",
"플러시 천으로 완구를 만드는 회사의 이름은?",
"2400개 제품의 크누트 완구들은 베를린 동물원에서 며칠만에 완판되었나요?"
] | 동물원 외에도 여러 업체들은 전화벨이나 곰인형 등 크누트 관련 테마 상품들을 기획하여 수익을 올렸다. 플러시 천으로 완구를 만드는 회사인 스타이프(Steiff)는 크누트 기획 상품으로 3가지 크기-앉은 모습, 선 모습, 누운 모습- 크누트 완구들을 제작하였는데, 첫 2400개 제품들은 베를린 동물원에 독점공급하여 4일만에 완판하였다. 스타이프는 이 수익 일부를 베를린 동물원 북극곰 축사 개량비용으로 제공한 바 있다. 사탕을 만드는 회사인 하리보 사는 2007년 4월 '쿠디 키누트'라는 산딸기맛 구미 젤리 제품을 출시하여 판매가 10%를 동물원에 기부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 제품 또한 소비자의 좋은 반응을 얻어 수익을 토대로 하리보 사는 두 번째 공장을 신축할 수 있게 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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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를 주제로 한 여러 노래가 등장한 나라 이름은?",
"매주 방송되는 크누트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던 나라 이름은?",
"크누트는 귀여워를 불러 크게 인기를 끈 9살 어린이의 출신지는?",
"BBC 라디오 4방송에서 크누트를 풍자하여 4곡의 노래를 부른 희극인은?",
"크누트는 2007년 독일판 무슨 잡지에 등장하였는가?",
"독일에서 크누트는 귀여워와 크누트 작은 북극곰을 부른 어린이의 나이는?",
"독일에서 크누트는 귀여워와 크누트 작은 북극곰을 부른 어린이의 출신은?"
] | 독일에서는 크누트를 주제로 한 여러 노래들도 등장하였다. 이중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쾨페닉(Köpenick) 출신의 9살 어린이가 부른 〈크누트는 귀여워〉(Knut is Cute)와 〈크누트, 작은 북극곰〉(Knut, der kleine Eisbär)이었다. 영국에서는 뮤지컬 희극인 미치 벤(Mitch Benn)이 BBC 라디오 4 방송에서 풍자적으로 다루는 The Now Show이란 프로그램에서 크누트를 위한 노래 4곡을 불렀는데, 〈아기곰은 죽어야해〉(The Baby Bear Must DIE!), 〈크누트는 더이상 귀엽지 않아〉(Knut Isn't Cute Anymore), 〈잘가 크누트〉(Goodbye Knut) 그리고 〈베를린의 팬더〉(Panda in Berlin) 였다. 이외에도 독일의 RBB(Rundfunk Berlin-Brandenburg) 방송국에서 제공하는 크누트의 근황을 알리는 블로그가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로 제공되었으며, 독일 내에서 매주 방송되는 크누트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있었다. 크누트는 《크누트-북극곰 유아실 이야기》 등의 여러 DVD에 등장하였고, 2007년 3월 29일 독일판 《배니티 페어》 잡지의 표지에 나왔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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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출판사 이름은?",
"대한민국에서는 영어판이 몇 년도에 출판되었는가?",
"'작은 북극곰 크누트'라는 책을 낸 두 딸의 아버지는?",
"'작은 북극곰 크누트'의 미국 출판사는?",
"'작은 북극곰 크누트'가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해는?",
"2007년에 베를린 동물원과 계약을 맺은 출판사는?",
"터틀 폰드 출판사는 미국 어디에 본사를 두었나요?",
"크레이히 하트코프가 써낸 작은 북극곰 크누트라는 책은 몇페이지 분량의 책인가요?"
] | 2007년 5월 1일,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터틀 폰드 출판사(Turtle Pond Publications)는 베를린 동물원과 계약을 맺고 전 세계에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는 출판물에 크누트를 사용하는 권리를 얻었다. 크레이히 하트코프(Craig Hatkoff)는 두 딸 율리아나 및 이사벨라와 함께 《작은 북극곰 크누트》(Knut, der kleine Eisbärenjunge)라는 44페이지 분량의 책을 냈으며 크누트의 생애 및 미공개 화보를 수록하고 있다. 크누트에 대한 책은 이미 독일 내에서 많이 출판되었지만, 베를린 동물원의 허가를 받은 실례는 이 책이 처음이었다. 독일 라벤스부르거에서 2007년 7월 출판된 후 미국 출판사 스콜라스틱에서 영어판을 11월에 출판하였다. 저작권은 이후 일본, 영국, 멕시코,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이탈리아에도 팔렸으며, 대한민국에서는 2009년 4월에 출판되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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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는 어느 왕을 위해 지은 책인가?",
"율곡이 성학집요를 지어 올리면서 함께 바친 것은?",
"선조가 철두철미하게 개혁을 시행할 수 있는 군주이기를 바라며 성학집요를 지은 사람은?",
"율곡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무엇이 필요한 시대라고 진단했을까요?",
"율곡이 개혁을 추진해야 할 주체라고 생각한 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선조 시절에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한 인물은?",
"율곡은 개혁을 추진할 주체인 무슨 파가 스스로 분열되느 상황을 보았는가?"
] | 이 책은 직접 왕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흔치 않은 형식인데, 당시의 왕은 선조였으므로 선조를 위해 지은 책인 셈이다. 그만큼 선조가 좀 더 철두철미하게 개혁을 시행할 수 있는 군주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책을 지어 올리면서 함께 바친 차자(箚子)를 보면 선조의 성격과 장단점을 자세히 지적하고 개선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위정〉(爲政) 편에서는 창업(創業), 수성(守成),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를 구분하고는 가장 어려운 것이 경장이라고 하면서 자세히 논했다. 율곡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했던 것이다. 선조의 등극과 사림의 정계 진출로 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기를 희망했던 율곡은 기대와 달리 기존의 세력이나 관행은 청산되지 못한 채, 개혁을 추진해야 할 주체인 사림파 스스로가 동·서로 분열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중심에 있는 임금이 확고하지 않고서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감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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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 선조에게 성학집요를 쓰면서 위정편에서 가장 길게 논한 부분은?",
"율곡이 성학집요에서 인재 등용에 대해 길게 논한 편으로 훌륭한 임금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은?",
"율곡이 인재 등용에 관해 길게 논한 편의 이름은?",
"성학집요의 위정편에서 임금이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고 맡기기에 필요한 것은?",
"율곡은 무슨 편에서 인재 등용에 대해 길게 논의했는가?",
"율곡은 위정편에서 최고 인사권자는 누구라고 칭했는가?",
"율곡은 위정편에서 정치의 향방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를 뭐라고 보았는가?"
] | 율곡은 선조에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가진 듯하다. 율곡은 선조에 대해 “총명한 자질을 갖고 있지만 도량이 넓지 못해 남이 단점을 지적하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더 잘하라고 충고하면 거꾸로 방향을 선회해 버리는 객기를 부리며, 유능한 사람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잘못된 사람도 과감하게 청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위정〉 편에서는 인재 등용에 관해 길게 논했는데, 인재 등용이야말로 정치의 향방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종 인사권자인 임금은 직접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적합한 사람을 등용해 맡겨두면 된다. 제대로 된 사람을 쓸 수 있는 임금이 훌륭한 임금인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고 맡기려면 그만한 인격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 임금은 욕심이 적어야 하며, 또 자기주장을 접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성학집요》뿐만 아니라 유학에서 거론되는 최고의 왕은 훌륭한 신하들에 둘러싸인 채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 korsquad |
[
"성학집요에 대한 선조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율곡이 성학집요 서문에 밝히고 있는 설정된 독자는?",
"성학집요는 선조가 높이 평가한 저술로서 어느 왕 이후로 경연의 텍스트로 쓰였을까요?",
"성학집요에서 지은이의 내심에 설정된 독자층은?",
"성학집요를 직접 받은 임금은?",
"성학집요를 경연의 텍스트로 사용하기 시작한 임금은?"
] | 이 책에 대한 종전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는 실록의 관련 기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직접 책을 받은 선조가 높이 평가한 것은 물론이고, 숙종 이후부터는 경연의 텍스트로 쓰일 만큼 비중 있는 저술이었다. 경연은 왕의 학습이 행해지던 장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왕을 독자로 설정한 이 책을 텍스트로 사용했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왕을 대상으로 했다는 특징을 넘어 이 책은 보다 넓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었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지은이의 내심에 설정된 독자는 학문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수기·치인으로 대치할 수 있고, 왕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또 책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기〉는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다. | korsquad |
[
"선거제도의 파벌의 폐해를 반대하는 주장을 편 매디슨의 수필은?",
"메디슨이 다른 시민의 권리나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사심에 부추김을 받는 사람들로 정의한 것은?",
"인구 수와 공화국이 커질수록 파벌의 조직화는 더 어려워질거라고 가정한 메디슨의 저서는?",
"연방주의자 10번을 쓴 사람은?",
"메디슨은 단결하고 어떤 공통적인 열정의 충동 또는 다른 시민의 권리나 공동체의 영구적 총제적 이익에 반하는 사심에 부추김을 받은 다수 혹은 소수의 시민들을 무엇이라고 정의했나?"
] | 또한 매디슨은 자신의 수필 '연방주의자 논문 제10호'(Federalist No.10)에서 선거제도에서 나타나는 "사심 가득하고 거만한 다수"와 "파벌의 폐해"를 반대하는 주장을 폈다. 매디슨은 파벌을 "단결해 있으며 어떤 공통적인 열정의 충동 또는 다른 시민의 권리나 공동체의 영구적, 총체적 이익에 반하는 사심에 부추김을 받은 다수 혹은 소수의 시민들"로 정의했다. 직접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연방주의(공화국)와 선거권자의 권리와 힘을 배분하는 연방주의의 다양한 방식은 파벌을 무효화할 것 이다. 나아가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10번'에서 인구 수가 늘어나고 공화국이 팽창할수록 파벌들이 조직화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으로 가정했다. | korsquad |
[
"미국 연방 대법원이 맹세를 거부하는 선기인을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주법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한 해는?",
"불성실한 투표 자체를 무효화시킨 주는?",
"불성실한 선거인을 처벌할 법조항을 두고 있는 미국의 주는 몇개인가?",
"투표하기로 맹세한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고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거나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은?",
"미국에서 불성실한 선거인을 처벌하는 법조항을 두고있는 주는 몇 개인가?",
"미국의 몇개 주에서 불성실한 선거인을 처벌할 법조항을 두고 있는가?",
"불성실한 투표 자체를 무효화 시켰던 미국의 주... | 불성실한 선거인이란 투표하기로 맹세한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고 다른 후보에게 투표했거나 누구에게도 투표하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24개 주에서 불성실한 선거인을 처벌할 법조항을 두고 있다. 1952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한 판결에서 선거인단에 선거 결과에 따라 투표할 것을 맹세시키고, 맹세를 거부하는 선거인을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주법(state law)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했다. 이후 각 주는 선거인단의 행동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게 됐다. 불성실한 투표를 한 선거인을 처벌하는 법의 합헌성 여부에 대해서 대법원이 판결한 바는 아직 없다. 많은 주는 불성실한 선거인을 처벌하는 것에 그치지만, 미시간 주의 경우 불성실한 투표 자체를 무효화시키기도 한다. | korsquad |
[
"일반 투표에서 더 적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미국의 어떤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가?",
"미국은 각 주별 선거인단을 각 주의 무엇에 비례하게 할당하였는가?",
"일각에서 주장하는 정치적 평등의 원칙을 위협한다는 제도는 무엇인가?",
"일반 투표에서 더 적은 표를 얻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상황과 관련있는 미국의 성격은?",
"정치적 평등의 원칙을 위협한다는 측면이 있는 제도는 무엇인가?",
"미국의 각 주별로 선거인단을 구성할 때 고려하는 것은?"
] | 선거인단 제도의 반대자들은 대통령 당선자가 일반 투표 결과에서는 패하는 상황이 민주주의 체계가 작동하는 일반적인 개념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인1표제가 아닌 선거인단 제도가 정치적 평등의 원칙을 위협한다는 일각의 견해도 있다. 일반 투표에서 더 적은 표를 얻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상황은 미국의 연방주의적 성격과 관련이 있다. 연방주의 하에서 선거인단 제도의 지지자들과 대통령 후보들은 투표자들의 다양한 관심사와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는 대중적 기반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특성의 논리적 결과는 대통령 직선제가 아니라 선거인단 승자독식제로 귀결된다. 각 주별 선거인단을 각 주의 인구 수에 비례하여 할당함으로써 선거인단 제도의 비민주성이 어느정도는 상쇄될 수 있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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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대선 선거인단 승자독식제를 채택하고 있는 주는 몇개인가?",
"1위를 하는 후보자가 해당 주의 선거인단 전체를 차지하는 제도는 무엇인가?",
"주 1위를 하는 후보자가 해당 주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가는 제도는?",
"캘리포니아와 뉴욕 사람들이 주로 지지하는 정당은?",
"텍사스 사람들이 주로 지지하는 정당은?",
"대선 선거인단 승자독식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주는 모두 몇개인가?",
"미국의 주는 모두 몇개인가?",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우세한 정당은?"
] | 미국의 50개 중에서 48개 주는 대선 선거인단 승자독식제를 채택하고 있다. 승자독식제는 해당 주의 1위를 하는 후보자가 해당 주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가는 제도다. 이 제도 때문에 후보들은 특정 정당 선호가 불명확한 주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2004년 2008년 미국 대선에서 펜실베이니아 주, 오하이오 주, 플로리다 주가 그랬다. 승자독식제의 논리적 근거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최근 대선 경향을 보면, 후보들이 선거인단 수가 많은 경합주에 선거운동을 집중하는 경향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 텍사스 주, 뉴욕 주 역시 많은 선거인단 숫자를 가지고 있긴 하나, 캘리포니아와 뉴욕은 민주당(청색주), 텍사스는 공화당(적색주) 성향으로 분류된 안전주(safe state)이기 때문에 이들 주는 상대적으로 후보들의 관심을 덜 받았다. 적색주와 청색주로 불린 지역에서 후보들은 더 적은 시간과 돈을 소비했다. | korsquad |
[
"남부 주에서 투표권을 가지지 못했던 노예의 수는?",
"선거인단 제도 도입이 합의된 것은 투표권 박탈과 관려이 있다고 지적한 학자는 아킬 아마르와 누구인가?",
"남부 주의 노예들에게 3/5의 투표권을 준다는 조약의 이름은?",
"대통령 직선제를 제안한 지역은?",
"아킬 아마르와 비크람 아마르는 어떤 학자인가?",
"미국의 남부 주에 존재 했던 노예들의 수는?"
] | 법학자인 아킬 아마르(Akhil Amar)와 비크람 아마르(Vikram Amar)는 애초 선거인단 제도 도입이 합의된 것은 투표권 박탈이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애초 펜실베이니아 주의 대표자가 대통령 직선제를 제안했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북부의 주들이 남부의 주들에 비해 더 많은 투표권을 가지게 될 터였다. 남부 주에 존재하고 있었던 50만 명 가량의 노예들은 투표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부 주의 노예들에게 3/5의 투표권을 주는(5분의 3 조약) 선거인단 제도가 나타나게 됐다. 선거인단 제도하에서 각 주가 가진 영향력은 투표율과 무관했기 때문에 각 주들이 많은 수의 시민들로부터 투표권을 박탈하는 일이 허용됐다. 아킬과 비크람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korsquad |
[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인 왕조는?",
"유언장에서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한 인물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자살하기 전 패배한 전투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날짜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후계자가 된 해는?",
"제2차 삼두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명으로 유배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가 초대황제였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로마제국의 몇 번째 황조인가?",
"아우구스투스를 양자로 입적한 사람은 누구인가?",
"옥티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밀리우스... |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ÆSAR DIVI FILIVS AVGVSTV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라틴어: CAIVS IVLIVS CÆSAR OCTAVIANVS)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속주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죽은 뒤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 korsquad |
[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가 대외적으로 부활시킨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부여받았지만 거절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복종하게 한 기관은?",
"제2차 삼두 정치가 붕괴되고 옥타비아누스가 대외적으로 부활시킨 정치체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주어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의 뜻은?",
"옥타비아누스는 언제까지 집정관을 역임했나?",
"옥티비아누스가 제2차 삼두정치 붕괴 이후 정부에 관한 권한을 부여한 곳은 어디인가?",
"로마제국에서 로마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 및 ... |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 korsquad |
[
"아우구스투스가 평화 협정을 체결한 나라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자신의 업적을 남긴 기록물의 이름은?",
"아우구스투스의 황위를 물려 받은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이후 찾아온 태평성대를 일컫는 말은?",
"아우구스투스가 파발을 위해 구축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황제의 친위대는?",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로 두 세기가 넘게 평화가 지속된 지역은 어디인가?",
"로마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과 관련하여 남아있는 기록은 무엇인가?",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던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시기는 언제... |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 내전(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 korsquad |
[
"옥타비아누스가 국가 사제단에 선출된 해는?",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을 세운 사람은?",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유는?",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은 해는?",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 되고 무엇에 선출되었나?",
"카이사르의 오랜 숙적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이름은?",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된 옥티비아누스가 그해 선출된 곳은 어디인가?",
"기원전 4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으나 병이 들어 참여 할 수 없게 된 원정은 무엇인가?"
] | 기원전 51년,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이때부터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단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옥타비아누스는 4년 뒤인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 되었고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선출되었다. 다음 해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세운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에서 행해지는 그리스 경기를 관장하였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6년, 아티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오랜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병이 들어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 korsquad |
[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장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피신하라고 한 곳은?",
"카이사르에게 적자녀가 없어서 아들로 입양된 인물은?",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성적으로 총해해서 입양했다고 주장한 인물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짜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장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어디로 피신하라고 조언했나?",
"옥타비아누스는 어디에 상륙하여 카이사르의 유서에 적힌 내용을 들었나?",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때 장교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피신하라고 조언하였던 나라는 어디인가?",
"옥티비아누스가 양부의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공부와 군사 훈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군사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장교들의 조언을 거절하고 이탈리아로 가 자신의 잠재적인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 브룬디시움 근처에 있는 루피아이라는 곳에 상륙하고 난 뒤, 카이사르의 유서에 적힌 내용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재산의 2/3를 상속받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치적인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로 하였다. 당시 카이사르에게는 살아 있는 적자녀가 없었기에 그의 이손(離孫, 누이의 친손 및 외손)인 옥타비아누스가 제1 상속자이자 아들로 입양되었다. 카이사르가 죽고 난 뒤 정식 입양된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의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를 쓰게 되었다. 로마 전통에 따라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에 ‘투리누스’ 대신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는 가명을 붙여 자신의 출신 가문을 나타내었다. 아직 옥타비아누스가 당시 이 이름을 썼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이름은 그의 출신을 명백하게 드러내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성적으로 총애했기 때문에 입양한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하였지만, 이는 중상모략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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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와 싸우기 위해 카이사르가 충당했던 자금의 액수는?",
"옥타비아누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치기 위해 공금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자 수사를 중지한 기관은?",
"동방속주에서 이탈리아로 보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가로챈 것은?",
"브룬디시움에 보관된 카이사르의 자금은 얼마였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자금으로 원로원의 가장 큰 적인 누구를 치는데 사용하려 했나?",
"옥타비아누스는 어디에 주둔했던 카이사르를 숭상한 노병을 얻을 수 있었나?",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병사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곳으로 7억 세스테르티우... |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국에 성공적으로 입문하려면 자신의 빈약한 재산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브룬디시움에서 카이사르의 병사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후,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 싸우려고 카이사르가 충당했던 일부 자금을 요구하였다. 이 돈은 브룬디시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무려 7억 세스테르티우스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 돈으로 원로원의 가장 큰 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치려고 쓰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라진 공금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원로원은 이내 수사를 중단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그해에 다시 큰일을 벌였는데, 동방 속주에서 이탈리아로 보낸 조공을 공식적인 허가도 받지 않고 가로챘다.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카이사르가 이끌던 정예병과 파르티아를 치려고 모은 군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특히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며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 그가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로마로 이동할 때, 소문난 인품과 그가 새로 얻은 자금 덕분에 캄파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를 숭상한 옛 노병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기원전 44년 6월까지 그는 3천 명의 충성스러운 노련한 병사들을 얻었고 봉급으로 5백 데나리우스를 주었다. | korsquad |
[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로마에서 몰아낸 인물은?",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연설한 인물은?",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과 원로원의 공격때문에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떠나 향한 곳은?",
"로마에 도착한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휴전 협정을 맺은 날짜는?",
"기원전 44년 9월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의 가장 큰 위험 인물이라고 역설한 웅변가는?",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과 원로원의 공격에 위험을 느낀 안토니우스가 도피한 곳은?",
"인토니우스를 극단적으로 공격하며, 원로원의 가장 큰 위험인물이라고 역설한 사람은 누구인... | 기원전 44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그리고 독재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쉽지 않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해 3월 17일에 원로원은 이미 암살자들에게 특사령을 내렸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들 대부분을 로마에서 몰아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 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외친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어 암살자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많은 로마 시민과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가 카이사르의 신격화 운동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카이사르의 재산을 안토니우스에게 양도하겠다고 하였으나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여름 동안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해 9월 귀족파 출신의 웅변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연설에서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의 가장 큰 위험한 인물이라고 역설하며 극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에서 인기가 떨어진 데다가 집정관 임기도 거의 끝나가자 안토니우스는 원래 카이사르의 암살범 가운데 한 명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다스리다가 안토니우스에게 편입된 갈리아 키살피나를 통제할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일임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다. 그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전임 병사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있었고, 11월 28일에는 안토니우스 휘하 두 개의 군단을 돈으로 현혹하여 쉽게 격파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막강한 군사력과 원로원으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로마에 있는 것에 위험을 느낀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떠났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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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키살피나를 포기하기를 거부한 인물은?",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한 해는?",
"갈리아 키살피나의 포기를 거부하자 안토니우스가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포위한 곳은?",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한 날짜는?",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되고 추가로 부여받은 것은?",
"기원전 43년 4월 옥타비아누스의 군에 패배한 안토니우스군이 퇴각한 지역은 어디인가?",
"안토니우스군과의 전투에서 함게 나갔던 두 집정관이 전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손에 넣은 권력은 무엇인가?"
] |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갈리아 키살피나를 포기하기를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그를 완전 포위하였다.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행동을 각하하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는데 원로원에는 그에게 대적할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출신에 관하여 조롱하는 것을 비호해 주기도 하였는데 키케로는 “요즘의 젊은이들 중 가장 전통적인 공경심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하였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대는 그대의 이름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라고 한 말을 들려주었듯이 이것은 안토니우스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의견의 정면 반박이었다. 과거 대표적인 반(反)카이사르파 원로원 의원인 키케로가 조작화한 이 동맹으로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1월 1일을 기해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여 그는 전직 집정관들과 같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추가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의 사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령을 합법적으로 만들었고 곧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히르티우스, 판사와 함께 무티나의 포위를 풀러 출병하였다.기원전 43년 4월, 안토니우스군은 포룸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집정관이 전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의 군대까지 지휘할 수 있는 대군의 단독 사령권을 손에 넣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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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이 집정관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주려고 한 인물은?",
"요구한 사항이 거절되자 옥타비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향한 곳은?",
"안토니우스가 동맹을 체결한 사람은?",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누구에게 사례금을 주었나?",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이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는 것에 협조하지 않고 어디에 주둔하였나?",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으로 임명될 때 공동 집정관이 된 친척의 이름은?",
"원로원이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에 사례금과 집정관 직속군단의 사령권을 주려고 한 인물은 누구인가?",
"옥타... |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엄청난 사례금을 준 후, 원로원은 집정관의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주려고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협조하지 않기로 하였다.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포 계곡(Po Valley)에 주둔하면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모든 공격적인 대응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해 7월, 옥타비아누스 휘하 백인대의 사절이 로마로 들어왔고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남긴 집정관의 권한을 자신이 전부 받아야 함을 요구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공공의 적으로 천명한 것을 무효화하는 포고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4만8천 명의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행진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아무런 군사적 반대 세력을 만나지 않았고 기원전 43년 8월 19일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친(親)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동맹을 구축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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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것은?",
"2차 삼두 정치가 1차 삼두 정치와 달리 지지를 받은 계층은?",
"키케로를 지키기 위해 추방 명령법을 반대한 인물은?",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게 된 회담이 열린 해는?",
"제2차 삼두 정치는 통과된 법안에 따라 누구에게 크게 지지를 받았나?",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한 3명의 집정관이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명령을 내린 원로원 의원의 수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외에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한 인물은 누구인가?",
"옥타비아누스가 추방 명령법... | 기원전 43년 10월, 볼로냐 근처에서 열린 회담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 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 이 5년간의 명백한 월권 행위는 비공식적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 정치와 달리 평민들에게 통과된 법안에 따라 크게 지지받았다.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세 집정관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곧 싸우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에 크게 자극받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 3명의 집정관이 암살자들의 유산과 재산을 몰수하는 동안 암살자들에게 내건 현상금은 로마 시민을 크게 고무시켰다. 세 집정관의 이러한 수단은 암살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숙청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추방 명령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추방 명령을 받은 자신의 새 조력자, 키케로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키케로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커서 결국 키케로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 의원이 죽었고, 3명의 집정관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20세기의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이를 로마 혁명(Roman revolu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이 구세대 원로원 의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여 뒷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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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2년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세력을 모르고 있던 곳은?",
"로마군에 패배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한 행동은?",
"옥타비아누스가 전투 지휘권을 넘겨 준 사람은?",
"로마 원로원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한 날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몇 개의 군단을 파견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전투를 하려 했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어디에서 두 번의 전투를 치뤘나?",
"로마 원로원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한 이후에 옥티비아누스가 본인을 지칭한 말은 무엇인가?... | 기원전 42년 1월 1일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고 ‘신성한 율리우스’(Divus Iulius)라 부르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임을 강조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의 군단을 해로로 보내어 그리스에 세력을 모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다.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로마군을 승리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뒷날 이 전투들의 성과를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 보이게 하려 하였는데 두 번의 필리피 전투 모두 안토니우스군이 로마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추가로, 두 번의 승리의 전과를 따지는데, 안토니우스는 아그리파에게 직속 지휘권을 넘겨준 옥타비아누스를 겁쟁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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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 여행 간 안토니우스가 동맹을 맺은 사람은?",
"옥타비아누스가 마케도니아 원정 이후 제대할 병사들을 위해 남은 곳은?",
"로마 병사를 위한 새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도시의 숫자는?",
"필리피 전투 후 안토니우스가 관장하게 된 영토는?",
"필리피 전투 후 옥타비아누스가 관장하게 된 영토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가서 동맹을 맺은 사람은?",
"필리피 전투 이후 맺어진 새로운 영토 협정에서 옥타비아누스가 관장하게 된 지역은 어디인가?",
"옥티비아누스가 과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공화파 쪽에서 싸운 병사들을 회... | 필리피 전투 이후,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 사이에서 새로운 영토 협정이 맺어졌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의 이집트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상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옛 정부이자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속주로 가게 되었는데 원래 히스파니아로 가게 되었으나 안토니우스가 방해하고 옥타비아누스를 히스파니아로 가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 원정 이후 곧 제대할 많은 병사를 정착시키기 위해 일단 이탈리아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이 많은 병사는 과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공화파 쪽에서 서서 싸운 병사들로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달래지 않았으면 쉽게 그의 정적들과 연합할 수 있었으나 그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 더 이상 병사들의 정착지를 위해 분배해줄 국유지가 없자 옥타비아누스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로마 시민의 땅을 몰수하여 시민들을 멀리하는 것 또는 로마의 심장부에서 그에게 대적할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수 있는 많은 로마 병사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전자를 택하였다. 새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 18개의 도시가 그 땅으로 사용되었는데 도시에 살고 있던 모든 시민들이나 일부 시민들을 쫓아내 버렸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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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의 지지를 받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가 이혼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풀비아가 유배된 곳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남동생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가 이혼하기로 결심한 아내이자 풀비아의 딸의 이름은?",
"페루시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한 후 풀비아는 어디로 유배되었나?",
"옥타비아누스의 옛 장모 풀비아 유배된 장소는 어디인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인생을 더럽힌 사건으로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의 인사를 처형한 이유는 무엇인가?"
] | 옥타비아누스가 추진했던 퇴역병의 정착 계획에 대한 많은 불만으로 인해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당파는 결집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남동생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풀비아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인 클로디아 풀케라와 이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옥타비아누스와 클로디아의 부부 관계는 진전이 없었고 그는 클로디아를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된 장모 풀비아에게 보냈다. 풀비아는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병사들을 길러 옥타비아누스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세 집정관이 로마 병사들의 월급을 마음대로 나눠줄 수 있는 권한이 생기자, 루키우스와 풀비아는 옥타비아누스를 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도박을 걸었다. 기원전 40년 초, 루키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응징에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지아)에서의 농성을 끝내고 항복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루키우스와 그의 군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편 풀비아는 그리스의 시키온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지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기원전 40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일을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의 인사를 루키우스와 공조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페루시아도 다른 장군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약탈하고 도시에 불을 질렀다. 이 잔인한 사건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인생을 더럽혔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 등은 이를 두고두고 비난하였다. | kors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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