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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과 김대중의 협력을 위해 이어주려 노력한 사람은?", "김영삼이 현충사를 찾아간 날 김대중이 방문한 곳은?", "김영삼은 김대중이 입당해야 된다고 주장한 당은?",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를 중재한 인물은?", "4월 28일 김대중이 방문한 곳은?", "김영삼, 김대중의 협력이 무산되자 1980년 8월, 정계 은퇴를 선언한 인물의 이름은?", "1980년 4월 29일, 김영삼이 대권과 관련해 신민당 당직자들과 함께 참배한 절의 이름은?" ]
한편 그는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월 7일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을 거부했다. 윤보선은 다시 중재에 섰다. 4월 7일 윤보선의 중재로 두 사람은 4월 12일 윤보선과 함께 3자 회동을 했지만 대권을 향한 두 사람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윤보선은 다시 한번 힘을 합치라고 권고했지만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4월 28일 김영삼이 신민당 당직자와 함께 대권과 관련해 현충사를 참배하자 같은 날 김대중은 신민당 내 동교동 의원들을 데리고 현충사 부근 윤봉길 생가를 방문한다. 양김이 협력하지 않자 윤보선도 단념하고 그해 8월 정계 은퇴를 선언해버린다. 한편 윤보선의 정계 은퇴로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 계열을 장악하게 된다.
korsquad
[ "1980년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대통령 후보로 경쟁한 사람은?", "5.17 쿠데타로 인해 김영삼이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 때는?", "1980년 당시 가장 이슈가 되었던 운동은?", "1980년 봄, 김영삼과 대권을 놓고 경쟁한 두 인물의 이름은?", "1980년, 전두환과 신군부가 일으킨 쿠테타의 이름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린 신군부를 규탄하기 위해 김영삼이 발표한 기자회견문의 제목은?" ]
1980년 봄, 그는 김대중, 김종필 등과 대권을 놓고 경쟁하였다. 그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쿠데타를 그리 걱정하지 않았고, 결국 5·17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오전 10시, 김영삼은 신군부 군인들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 김영삼은 5월 20일 상도동 자택에서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린 신군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오늘 계엄통치를 확대 강화한 5 ·17 사태를, 민주회복이라는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폭거로 규정한다. 계엄당국의 강압통치로 빚어진 유혈사태는 이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가고있다."면서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5·17 폭거'라는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5월 20일부터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korsquad
[ "1980년 김영삼이 은퇴를 하게 한 인물은?", "이민우를 회장으로 하여 김영삼이 출범시킨 정치기구는?", "김영삼은 누구의 강요로 1980년 10월 은퇴를 선언하였는가?", "연금에서 해제된 김영삼은 정치할동 규제에 묶여있던 정치 인사들과 출범시킨 것은?", "민주산악회를 바탕으로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이 흡수한 세력은?", "1980년 9월 출범한 전두환 정권을 일컫는 명칭은?", "1980년 10월 김영삼의 정계 은퇴를 강요한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의 이름은?", "1981년 5월, 연금이 해제된 김영삼이 정치활동이 규제된 재야 인사들과 함께 조직한 민주산악회의 이름은?" ]
1980년 9월 출범한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에서도 계속된 가택 연금과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며 장기간의 단식 투쟁을 단행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해 10월 김영삼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의 강요로 정계 은퇴 선언을 발표하였다. 1981년 5월 연금에서 해제된 김영삼은 이민우(李敏雨)·김동영(金東英)·최형우(崔炯佑)·김덕룡(金德龍) 등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있는 재야 인사들과 함께 등산모임을 조직하고 민주산악회를 출범시켰다. 민주산악회의 참가자가 증가하면서 김영삼은 1981년 6월 9일 공식기구로서 출범하는데 동참하였다. 공식 기구로 출범한 민주산악회는 이민우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김영삼을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 민주산악회는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방조직을 확대하는 등의 사실상의 정치적 활동을 하였으며 한편 김대중 계열 정치인들도 민주산악회의 활동에 가담하여 적극 협력하며 야권통합과 범국민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은 김대중 계열까지 흡수하여 재야정치인들의 통합조직을 준비, 민주산악회를 모체로 하는 통합협의체의 구성에 합의하였다.
korsquad
[ "3당합당을 통해 김영삼이 대표로 자리잡은 정당은?", "3당합당이 이루어지던 시기의 대통령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무엇에 위기감을 느꼈는가?", "1990년 1월에 새로 만든 당의 이름은?", "김영삼의 집권여당 관리자 임명을 반대한 세력은?",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의 합당으로 1990년 1월 창당된 신당의 이름은?",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이 통합되어 창당된 민주자유당의 대표로 취임한 인물은?" ]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위기감을 느끼던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제2야당의 지위에 불만족을 느끼던 중 측근인 서석재의 구속으로 마음을 굳힌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내각제 개헌을 노리고 있던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물밑 협상하였다. 3당합당에 참여하게 된 원인으로는 '분열된 야당으로는 집권의 소망이 보이지 않았고 3당 통합을 계기로 기득권세력이 누리는 기본적인 고정 지지표와 충분한 정치자금을 확보하게 된다면 차기집권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협상 끝에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고, 김영삼은 민주자유당의 대표로 취임하였다. 한편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그는 구국적 결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집권여당의 관리자가 됨과 동시에 노태우 대통령 다음가는 당내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나 구 군사정권 출신자들은 반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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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이 노태우와의 협상 실패 후 이동한 곳은?",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낙향 이후 사태 수습을 위해 당대표 권한보장과 함께 약속한 것은?", "당시 민정당계 중진들의 반발에 당대표인 김영삼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요구한 반응이 없자 김영삼이 낙향한 곳은?", "김영삼의 낙향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은 누구인가?", "내각제 완전 포기, 당 대표의 실질적 권한 보장을 조건으로 요구한 노태우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이 결렬되자 김영삼이 낙향한 곳은?", "민주자유당의 당대표로서 당무를 거부하고 낙향한 김영삼의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위원은?" ]
당시 민정당계 중진들은 내각제 합의는 사실이라고 거듭 확인했으나 당대표인 김영삼은 이것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음해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당무를 거부하고, 내각제의 완전 포기와 당 대표의 실질적 권한보장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단독면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반응이 없고, 사태 해결이 그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자 마산으로 낙향해 버렸고, 김종필 최고위원은 김영삼 대표의 이러한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러나 여권 내의 분열과 정국의 파행을 우려한 나머지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대표가 요구한 내각제 포기와, 대표최고위원을 중심으로 대북한정책에 당의 결속 등을 약속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김영삼 대표최고의원의 의도대로 수습되었다.
korsquad
[ "김영삼이 노태우 정부로부터 사찰당했다는 것을 알린 사람은?", "민간인 사찰 사건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사람은?", "당시 노태우 정부의 감시 사실을 밝힌 인물의 이름은?", "윤석영은 탈영 당시 보안사에서 갖고 나온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한 통로는?", "10월 11일 단식 중이었던 김대중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1990년 10월 4일, 양심선언을 통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탈영병의 이름은?", "탈영병 윤석양의 양심선언이 일으킨 민간인 사찰 파장으로 경질된 당시 국방부장관은?" ]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 것이 밝혀졌다. 윤석양은 탈영 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민자당사에서 이상훈 국방부장관을 면담, 항의하기도 했다. 사찰 파장으로 국방부장관은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 평민당사를 방문해 단식 중인 김대중 총재를 면회하였다.
korsquad
[ "김영삼에 대한 군사정권 세력의 반대를 누르고 그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지역 표심을 얻게 해준 사람은?", "김영삼의 어머니가 살해당한 시기는?",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이 속해 있던 당은?", "김영삼의 지도권 반발에 그를 지지하여 옹호해준 인물은 누구인가?", "정호용의 지지에 의해 군사 정권 세력 및 반공주의 세력들이 지지하던 세력들을 등에 엎고 김영삼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은?", "김영삼의 지도권에 반발한 민자당내 군사정권 출신 세력을 봉합시킨 의원은?", "1960년 북한의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김영삼의 어머니 이름은?" ]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출현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반공주의 세력과 군사 정권 세력은 야당 출신 인사들이 북한과 거래한다는 투의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1960년 자신의 어머니 박부련이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점을 들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한편 민자당내 군사정권 출신 세력은 김영삼의 지도권에 반발하였으나, 대구 경북출신의 군사정권 인사 정호용이 그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여 일시적으로 봉합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정호용의 ‘우리는 남이가, 같은 경상도이니 지지하자’ 는 만류에 의해 군사 정권 세력과 반공주의 세력은 김영삼 지지층과 김종필 지지로 나뉘었고, 그는 구 민주당계 인사와 경상남도, 부산 지역의 표심을 장악하여 대통령에 무난히 당선될 수 있었다.
korsquad
[ "김영삼의 후보 시절 지역표심을 겨냥한 발언을 문제삼은 후보는?",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든 문구는?", "14대 대선 당시 몇 년도였는가?", "정주영 후보측이 공격받은 이유는?", "초원복집 사건 이후 집결된 지역표는?", "1992년 14대 대선 당시 3파전으로 격돌했던 후보 3인의 이름은?", "김영삼측 선거대책회의 참석자들의 지역감정 조장 발언과, 이를 폭로한 정주영 후보측의 불법 도청이 드러나 파문을 일으킨 사건은?" ]
1992년 14대 대선 당시 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으로 격돌하였다. 김영삼측 선거대책회의 참석자들은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라는 등 지역 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해 크게 문제가 됐으며, 이런 사실을 폭로한 정주영 후보측은 불법 도청으로 인해 공격을 받았다. 이후 "초원복집 사건"으로 불린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초원복집 사건에 대한 폭로가 오히려 영남표를 집결시키는 역풍을 일으켰다. 이때 김영삼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대구, 경북 출신 군부인사인 정호용 등이 같은 경상도 임을 내세워 지지를 호소하였고, 일부 군사정권 인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군정 출신 인사들의 표를 분산시켰다. 선거 유세과정에서 나온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유행했으며, 12월 18일, 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193만표차로 꺾고 대통령이 된다.
korsquad
[ "김영삼의 사생활에 대한 루머 중에 숨겨진 딸을 부르던 명칭은?", "김영삼의 사생활 폭로 기사가 처음 실린 곳은?", "김영삼의 사생활이 노출이 된 계기는?", "그의 사생활 폭로를 한 신문사는?", "김영삼 대통령의 숨겨진 딸의 이름은?" ]
그러나 군사정권 출신과 일부 보수 세력에서는 그의 등장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김영삼의 사생활이 본격적으로 도마에 오른 것은 1992년 민자당 대선후보 때였다. 그 해 2월 20일자 LA매일신문에 '김영삼 씨의, 숨겨둔 딸 가오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시작으로 국내외 언론에서 동시다발적인 보도가 나왔다. 이 과정에서 LA매일신문 발행인 손충무가 긴급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ys의 숨겨둔 딸 가오리 양'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화됐다. 나중에는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져 "숨겨진 딸뿐만 아니라 아들도 있다더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은 이를 호재삼아 김영삼을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korsquad
[ "김영삼의 당선 이후 그의 사생활을 무기로 공격한 이들은?", "김영삼의 사생활 기사를 처음 폭로한 신문의 편집책임자는?",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 후 그를 공격한 세력은?", "당시 LA매일신문의 편집책임자의 이름은?", "손충무 기자의 구속으로 김영삼에 대한 악감정이 악화된 세력은?", "김영삼 정권에서 역사바로세우기와 과거사 청산을 발표하며 철거한 일제시대를 상징하는 건물은?", "김영삼의 사생활을 보도하고 긴급 구속된 LA매일신문의 기자이자 편집 책임자는?" ]
김영삼이 대통령 집권 후 역사바로세우기와 과거사 청산을 발표,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금융실명제로 군사정권 인사들의 차명계좌를 동결시켰으며, 신군부와 하나회를 숙청하고, 광주민주화 운동을 격상, 전두환, 노태우의 비자금 수수를 폭로하게 한 뒤, 광주학살과 12.12의 책임을 물어 사법처리시키는 등의 일련의 행위들을 보이자 보수 세력은 그의 사생활을 들먹이며 집권기간 중 공격을 가하였다. 또한 보도된 LA매일신문의 편집책임자인 극우 언론인 손충무 기자의 구속과, 석방후 미국으로의 정치망명 역시 극우세력의 김영삼에 대한 악감정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극우세력은 그의 사생활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손충무의 구속과 망명을 언론탄압으로 규정하여 공세를 가하였다.
korsquad
[ "김영삼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김영삼 정부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잇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한 날은?", "언론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측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발표한 날짜는?", "5.13 특별 담화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언급한 운동은?" ]
3월 13일, 언론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히고 그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예산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는 일본측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문제는 필요하지 않다면서 그런점에서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최근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에 대해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어 그때그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너무 혁명적인 인상은 주지 않도록 속도를 조정하도록 하라고 부처에 지시하였다. 5월 13일 5·13 특별 담화에서 그는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였다.
korsquad
[ "문민정부 당시 북한에 대해 포용하자는 입장을 가졌던 미국 대통령은?", "1994년 10월 이루어진 북미회담의 이름은?", "1993년 당시 한미 관계 주목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던 정책은?", "클린턴과 김영삼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킨 사건은?", "1993년 7월, 김영삼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 로 존경하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던 미국의 대통령은?", "1994년 10월 남한을 제외하고 북한과 미국간에 이뤄진 합의를 칭하는 말은?" ]
1993년 7월에 한미 관계가 처음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존경하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이 남한을 배제한채 직접 핵 협상을 하면서 김영삼과 클린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하는데,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과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충돌한 것이다. 1994년 10월 남한을 제외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명의로“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북한에 보냈지만 미국은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안 김영삼은 상당히 화를 냈다. 이후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처리 과정에서 클린턴과 김영삼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이 때문에 김영삼은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korsquad
[ "김영삼 대통령과 북한의 회담을 이끈 미국 정치인은?", "김영삼의 대북정책 성향은?",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주선한 인물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날짜는?", "김영삼의 정치철학이 기반되어 있던 이념은?",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한 미국의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 사망시 미국이 제네바의 북한 대표부에 파견한 북미 협상 진행 담당자는?" ]
이 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의 요청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을 주선하였으며, 김영삼은 이를 수락하여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개월도 채 되기 전인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를 제네바의 북한 대표부에 보내 조문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정반대로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려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조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정상회담까지 약속했던 남북 관계는 불신만 커져 남북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영삼의 정치철학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선은 현실적으로 보수주의의 성향이었다.
korsquad
[ "1994년 미국에 의해 추진된 대북 폭격 논의는 어느 지역을 향한 것이었나?", "김영삼정부가 민주주의를 단단히 세우기 위한 일환으로 진행한 3대 정치개혁 법안은 언제 이루어졌는가?", "3대 정치개혁 법안이 이루어진 날짜는?", "당시 군사정권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던 인물들은?" ]
이듬해 1994년에는 김문수, 이재오, 안상수, 등 시민사회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영입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시켰다. 이후 군사정권과 관련 없는 홍준표·오세훈 등의 신진 관료출신과 법관출신들도 등용하였고, 군사정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던 박노해·김남주 등 언론인과 문인들을 대대적으로 감형,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4월 15일에는 3대 정치개혁 법안(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정치자금법 개정안,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서명함에 따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제도 구축의 전기를 이룩했다. 1994년 여름,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변 원자로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검토하자 그는 이에 대한 강경한 반대입장을 펴서 저지하였다고 전해진다.
korsquad
[ "김영삼 정부의 지방 자치 정책 중 일환으로 지역 대표를 누가 직접 선출하는 제도를 만들었는가?", "김영삼 정부의 지방자치제도 확대 이후 시작된 지방 선거유세는 언제였는가?", "그가 1995년에 확대시킨 제도는?", "특별시와 직할시의 부시장과 도의 부지사가 상향조정된 직급은?" ]
1995년 초 그는 내무부 장관에게 특별 지시를 내려 1991년 이후 실시되던 지방 자치 제도를 확대시켜, 1995년부터는 특별시·광역시직할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 등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게끔 제도를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1995년 5월부터 민선 시도지사 후보와 시장, 군수 후보자의 선거 유세가 있었고, 7월 전격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자치단체장을 민선으로 직접 선출하게 되면서 차관급인 서울특별시장과 1급 관리관이던 직할시장, 도지사, 3급 부이사관이던 일선 시의 시장과 직할시의 자치구청장, 4급 서기관 직위이던 군수 등은 정무직으로 개편되어 직급이 사라졌고, 특별시와 직할시의 부시장과 도의 부지사는 2급 이사관에서 1급 관리관으로 직급이 상향 조정되었고, 각 시 군의 4급와 5급 보직이던 부시장과 부군수의 직급은 3급과 4급 보직으로 격상되었다.
korsquad
[ "1995년 4천억 비자금설이 밝혀지게 된 출처는 누구인가?", "5.18 특별법을 제정한 날은 언제인가?", "서석재는 전임 대통령 중 얼마의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는가?", "검찰은 반란죄, 내란죄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한 대상은?", "11월 24일 김영삼이 대통령 명령으로 제정한 법은?", "1995년 8월 2일 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의혹을 제기한 후, 국회의원 박계동에 의해 폭로된 전임 대통령 비리사건을 일컫는 말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폭로 후 제5공화국 인사들의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김영삼이 대통령 명령으로 지시한 법안은?" ]
1995년 8월 2일, 그의 측근이던 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전임 대통령 중 1인이 4천억 이상의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이어 국회의원 박계동에 의해 4천억 비자금설이 폭로되었다. 전두환·노태우의 해명을 요구하여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군부 인사의 혐의에 대해 반란죄,내란죄를 따지지 않고 신군부 인사들을 불기소 처분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사건을 폭로된 이후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수사를 명하였다. 11월 24일 김영삼은 대통령 명령으로 5·18 관련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
korsquad
[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신한국당 내의 분위기를 만들어간 사람은?", "특별사면 대신 전두환, 노태우에게 적용될 수 있었던 대안 중 요건 불성립으로 검토되지 못한 것은?", "전두환은 추징금 중 어느정도를 낼 수 있었는가?", "몇년도 몇일에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었는가?", "당시 법적으로 논란이 있어 법무부가 집중적으로 검토한 문제는?",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풀어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었는가?", "1997년 대선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었던 세 대통령 후보 이름은?",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 확정 후, 사면을 찬성하는 당내 분위기를 주도했던 당시 신한국당 고문의 이름은?",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공약으로 내세운 것은?", "전두환 노태우의 봐주기식 관용을 주장하면서 사면 복권에 찬성 분위기를 조성한 신한국당의 인물은?",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 사유가 있을 때 적용되는 법은?" ]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다.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 대해 찬성하는 방향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실무검토를 마쳤고 광복절 무렵에 사면될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준비되었다"는 법무부의 입장을 보도했는데, 결국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준비가 완료되었던 셈이다. 법무부는 대통령 특별 사면의 경우 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추징금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노태우 씨의 경우는 추징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대부분 보전 처분해 상관이 없지마는,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95억원의 10% 정도만 확보되어 있고 전두환의 경우 재산 추적에 진전이 없어, 나머지 2천억 원에 대해서는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이를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법무부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적용하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형 집행 정지는 명분이 약하고 언제든지 재수감 될 수 있어 전, 노씨 두 사람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분을 마쳤을 때만 가능해 당초부터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전,노 씨를 풀어주는 길은 특별 사면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준비는 대선이전에 완료되었고 김영삼과 정부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사면될 수 있었던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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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7월에 있었던 선거는?", "개편되기 전 당시 차관급의 위치에 있던 직책은?" ]
1995년 초 그는 내무부 장관에게 특별 지시를 내려 1991년 이후 실시되던 지방 자치 제도를 확대시켜, 1995년부터는 특별시·광역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 등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게끔 제도를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1995년 5월부터 민선 시도지사 후보와 시장, 군수 후보자의 선거 유세가 있었고, 7월 전격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자치단체장을 민선으로 직접 선출하게 되면서 차관급인 서울특별시장과 1급 관리관이던 직할시장, 도지사, 3급 부이사관이던 일선 시의 시장과 직할시의 자치구청장, 4급 서기관 직위이던 군수 등은 정무직으로 개편되어 직급이 사라졌고, 특별시와 직할시의 부시장과 도의 부지사는 2급 이사관에서 1급 관리관으로 직급이 상향 조정되었고, 각 시 군의 4급와 5급 보직이던 부시장과 부군수의 직급은 3급과 4급 보직으로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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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당시 김영삼이 당대 외교활동을 강력하게 비꼬아 표현한 상대 대통령은?", "1996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대하는 어민들의 시위는 어느 지역에서 이루어졌는가?", "당시 강원도 어민들이 벌인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 대규모 해상시위는 몇 년도에 일어났는가?", "당시 해상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비난한 정권은?" ]
"나는 대통령 때 외무부에 지시해 독도 인근 해역에 배를 엄청나게 띄워 해상시위를 하도록 했다"며 "그때 배 선착장에 몇 백명이 올라가서 시위를 하니 일본 정부가 우리 외무부에 그만두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지난 1996년 당시 강원도 어민들이 벌인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 망언 규탄' 대규모 해상시위를 언급하고 이어 "대통령이 문제다. 외교 활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일본이 노대통령을) '바보'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노무현 정권의 외교 활동을 비난하였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계획과 관련해 "말만 나오는 것이지 가기는 자기가 어디로 가느냐"면서 "누가 오라는 사람도 있는 것도 아니고…. 김정일에게 아무것도 갖다줄 게 없는데 누가 오라고 하겠나"라고 '쓴소리'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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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이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과는 달리 정치감각이 부족한 사람으로 꼬집은 역사적 인물은?", "김영삼이 성균관대학교 인터뷰에서 역사의 죄인으로 평가한 전 대통령은?",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물은 누구인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인물은 누구인가?", "전두환을 비판하고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의견을 내놓은 방송의 이름은?" ]
2007년 12월에는 성균관대학교 김일영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나라를 건국한 국부이며,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김구는 이루지 못할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박정희를 역사의 죄인으로 혹평하고 5.16 쿠데타가 없었다면 장면 정부가 나라를 잘 이끌었을 것이며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장면의 민주당 정권에서도 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 2008년 5월 라디오 방송인 광주 MBC 표준FM 《시선집중 광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28년의 비망록’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을 비판하였고 5.18 당시의 비극을 회상하였으며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미흡한 것은 아쉽다는 소견을 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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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은 몇 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가?", "김영삼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로 무슨 형태로 이루어졌는가?", "김영삼 대통령이 건강 문제로 찾아간 병원은?", "김영삼 대통령이 서거한 나이는?", "김영삼 대통령의 장례는 어떻게 치뤄졌는가?", "2015년 11월 22일,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5일간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뤘던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향년 89세를 일기로 서거한 김영삼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곳은?" ]
2015년 11월 10일 건강검진 차 서울대학교 병원을 찾아 17일까지 입원한 뒤 퇴원했다. 그러다, 이틀 뒤인 19일 고열과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다시 입원한 후, 11월 21일 오후에 증세가 급격히 악화됨에 따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상태가 전혀 호전되지 않던 김영삼은 결국 2015년 11월 22일 오전 0시 21분 32초에 병마를 물리치지 못하고 혈액 감염 의심으로 치료를 받던 중 향년 89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사망에 이른 직접적인 원인은 허약한 전신 상태에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이 겹쳐 일어난 것으로 판단되었다.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간 국가장으로 치뤄졌다. 이는 국장과 국민장이 통합된 이후 처음 치뤄지는 국가장이다. 이어 11월 26일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이 있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제3장군묘역 우측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독 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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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민정부 당시 역사바로세우기 정책으로 무엇을 시행하였는가?", "문민정부 당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여 영토 분쟁에 강하게 임하기 위한 제스쳐로 무엇을 건설하였는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권에 도입한 제도는?", "김영삼 대통령은이 독도에 일본의 역사 왜곡에 저항하기 위해 건설한 시설은?",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학교의 명칭을 무엇으로 바꾸었나?", "김영삼 정부 시절 개칭된 국민학교의 현재 이름은?", "김영삼 정부에서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진행한 민족의 기틀을 세운 사업은?" ]
김영삼은 문민정부의 성격을 "1993년 광주민중항쟁을 계승한 정부"로 규정하고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였으며 신군부 세력에게는 광주항쟁 유혈진압의 죄도 함께 물었다는 점이 있다. 또 집권 초 검은돈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1993년 8월 12일 모든 금융은 실명으로 거래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거래의 투명성을 가져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1995년부터는 일제 침략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 철거하고 독도접안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일본의 역사 왜곡에 당당히 대항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호언하는 등 일본의 야욕에 당당한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개칭하고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쇠말뚝뽑기로 민족의 기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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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 합의 이후 한국은 북한의 경수로 건설 비용의 몇퍼센트를 부담했는가?", "강경한 대북정책을 고집하던 김영삼 정부가 북미회담에서 고립되면서 얻은 굴욕적인 명칭은?", "김대중 정부 때보다 김영삼 재임 때 더 많았던 실적은?", "당시 문민 정부 때 대북지원은 몇 달러정도 비용이 들었는가?", "김영삼 정부는 경수로 건설비용에 얼마를 부담하였는가?", "김영삼 정부의 연평균 대북 지원 실적은?", "북한 경수로 건설비용 46달러 중, 김영삼 정부가 부담했던 액수는?" ]
연평균 대북지원 실적은 김대중 정부 때보다 문민 정부인 김영삼의 재임 때 더 많았다는 비판도 있다. 연평균 실적을 비교하면 5년간 지속적으로 대북지원이 이뤄졌던 국민의 정부때는 연평균 5천442만달러였던 반면 집권 3년째인 1995년 6월부터 지원을 시작한 문민 정부때는 연평균 9천815만 달러에 달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북핵 합의 당시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자와는 손을 잡지 않겠다"는 논리로 북한과의 대화를 외면했는데 결국 한국 정부를 배제한채 이뤄진 북미협상에서 경수로 제공문제가 합의됐다. 김영삼 정부는 경수로 건설비용 46억달러 가운데 70%에 해당하는 36억달러를 부담했다. 이에 대해 최근 미국의 경수로 공사 중단 요구에 따라 천문학적인 액수를 날리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대화에는 참여하지 못한채 비용만 부담한 '들러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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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에 대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정치적 배신을 했다고 주장한 정치인은?", "김영삼에게 비자금 1000억원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이민우에 따르면 김영삼이 자신의 아들을 제 2인자로 만들려고 지지한 인물은?", "김영삼 대통령이 정보정치와 거리를 두기 위해 단행한 법 개정은?" ]
전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말년에 김영삼이 이회창을 공천해 놓고는 자기 아들(김현철)을 2인자로 만들려고 이인제를 밀었다며 정치하는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법이며, 정치 도의도 없고, 신의도 없다며 비난하였다. 그 외에 새정치국민회의 정한용 의원 등으로부터 비자금 1000억원 조성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묻혀졌다. 그 외에 "YS는 오랜 세월 야당지도자로 있으면서 민심을 잘 읽는 정치를 해왔다. YS는 대통령이 된 뒤 안기부의 정치활동 간여 금지를 골자로 한 안기부법 개정을 단행하는 등 정보정치와 확실한 거리를 두는 듯했다. 하지만 1년쯤 지나면서 안기부 정보보고서를 찾는 빈도가 늘어났다. 마약과도 같다는 정보에 중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민심의 추이에는 둔감해졌다."는 비판도 있다. 한편 군사정권 출신과 보수 세력은 그가 좌파의 숙주가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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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은?", "김영삼이 정치무대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은 무슨 직업을 통해서였는가?",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 중 가장 마지막의 당은?",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에 기반에 두고 있는 정당은?", "김영삼은 이철승 유진산 등과 함께 어떤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었는가?", "민주당 구파 - 통일민주당 - 민자당에 이어 김영삼의 정치적 노선이 계승된 정당은?", "김영삼이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르 거쳐 정치적 기반을 뒀던 정당은?", "국무총리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김영상이 1960년 이후 이적한 정당은?" ]
김영삼의 정치적 노선이 계승된 정당으로는 민주당 구파→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이 있다. 그의 정치적 노선의 뿌리로는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를 거쳐 한국민주당에 정치적 기반을 둔다. 자유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자유당 계열의 인사인 국무총리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였으나 1960년 이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민주당에서 활동하였다. 타 정당에서 민주당으로 입당한 인사들은 신파 계열로 건너갔지만 김영삼은 김성수·신익희·조병옥·윤보선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구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유신 체제 하에서 이철승·유진산·유진오·김대중 등과 함께 반유신체제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구파 내부의 다른 경쟁자인 이철승과 신파의 새로운 주자로 떠오른 김대중 등과 정치적 경쟁관계에 놓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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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부 예산을 횡령해 선거 자금으로 사용했던 불법 사건은?", "안기부 예산 횡령 사건이 김영삼의 정치자금이었음을 폭로한 한나라당 의원은?", "강삼재, 김기섭 등이 자금을 횡령해 여러 선거 과정에서 남용한 사건은?", "홍준표 의원이 당시 속해 있던 당은?", "강삼재, 김기섭 등이 안기부 자금을 횡령해 95년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에 전용했음이 드러난 사건은?", "안풍자금은 김영삼 정치자금의 일부였다고 밝힌 전 한나라당 의원은?" ]
2004년에 드러난 강삼재, 김기섭 등이 안기부 자금을 횡령해 95년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에 전용했다는 안풍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피고인 김기섭이 선거자금 등으로 지원한 1197억 원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 피고인이 은밀히 관리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관련된 정치자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결했다. 이 비자금에 대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92년 대선잔금이거나 당선축하금 또는 기업들을 상대로 조성한 불법 정치자금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2004년 7월 5일, 안기부 예산에서 1996년 총선과 1995년 지방선거 자금을 지원한 게 아니라 YS의 자금을 안기부가 관리한 것이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이 나오자 "안풍자금은 김영삼(YS)의 정치자금의 일부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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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자 확인 소송은 몇 년도에 제기 되었는가?", "당시 김영삼의 비서실장을 맡았던 인물은?" ]
1992년 당시 제기된 친자 확인 소송에 대해 김영삼과 그 주변에선 전혀 언급을 않고 있으며 이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측근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과거 가오리에 대한 김영삼의 공식적인 답변은 두 차례 있었다. 하나는 1992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때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대선운동 과정에서 가오리의 존재는 흑색선전물의 단골 메뉴였다. 이경선씨가 올초 LA선데이저널과 한 인터뷰가 보도된 뒤다. 이 인터뷰 기사는 이씨와 김영삼과의 만남, 딸의 출산과 성장, 김영삼과 가오리의 두 차례 만남, 김영삼으로부터 생활비와 양육비 명목의 23억 원 수수 등 충격적인 사실을 담고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김영삼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김기수씨는 "이경선씨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이씨가 원하는 것은 돈"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딸을 빙자해서 돈을 얻겠다는 칠십 노인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라고 측은함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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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통일민주당을 해체하고 새로 만든 당의 이름은?", "민자당의 고립이 심화된 지역은?", "1992년 대선유세 당시 김영삼후보가 조장한 것은?" ]
1990년 1월 22일에 3당합당으로 통일민주당을 해체하고 민자당창당에 참여해 YS계열인 이기택, 박찬종, 홍사덕, 노무현등은 비판하며 탈당했고, 재야인사들에게 변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민자당은 3당 합당으로 220석의 거대 여당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호남에 대한 고립과 소외는 더더욱 심화되었다. 합당이후에는 초원복집사건으로 의혹을 받았다. 또한 김종필계는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민주정의당과의 합당이 "호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켰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1992년도 대선유세 당시 김영삼후보는 "평양방송이 자신의 낙선을 위해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라고 지령을 내렸다"며 근거없는 이야기로 지역감정을 조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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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현성의 제일 첫 단계인 초발심주의 제일 첫 계위에 오르기 위해 닦아야 하는 예비적인 수행을 무엇이라 하는가?", "52위의 명칭과 뜻이 잘 정리되어 전통적인 대승불교권에서 널리 채용하고 있는 경전은?", "보살영락본업경의 다른 이름은?", "보살영락본업경에서 들고 있는 보살의 수행계위는?", "보살의 본격적인 수행과 그 증득되는 결과중 10주의 제일 첫 계위에 오르기 위한 수행은?", "보석 구슬을 꿰어서 만든 귀중품을 두 글자로 무엇이라 하는가?", "10주의 제일 첫 계위에 오르기 위해 닦아야 하는 예비적인 수행을 무엇이라 하는가?" ]
보살의 수행계위에 대해서는 경전과 논서마다 차이가 있는데 이들 중 《영락경(瓔珞經))》이라고도 불리는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서는 52위(五十二位)를 들고 있다. 이 경전에서는 52위의 명칭과 뜻[名義]이 잘 정리되어 있고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전통적으로 대승불교권에서 널리 채용하고 있다. 《영락경》에 따르면 불과(佛果)를 장엄하는 영락(瓔珞: 보석 구슬을 꿰어서 만든 귀중품)으로서의 본업(本業) 즉 보살의 본격적인 수행[行業]과 그 증득되는 결과란 10주(十住) · 10행(十行) · 10회향(十廻向) · 10지(十地) · 등각(等覺) · 묘각(妙覺)의 42현성(四十二賢聖)을 말하는데, 10신(十信)은 42현성의 제일 처음 단계인 초발심주(初發心住) 즉 10주(十住)의 제일 첫 계위에 오르기 위해 닦아야 하는 예비적인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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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불교사전에서 호심은 무엇으로 명명되는가?", "현성명자품과 석의품은 어느 경전에 있나?", "현대의 불교사전들이 대체로 사용하는 명칭과 순서의 기준은?", "호심을 호법심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영락경의 상권과 하권중 어떤것을 따르고 있는가?", "현대 불교 사전들에서 호심은 무엇으로 명명되고 있는가?", "10신의 명칭과 순서는 무엇과 무엇에 따라 차이가 있는가?" ]
10신의 명칭과 순서에 대해서도 경전과 논서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영락경》에서 상권과 하권에서 나열하고 있는 10신의 명칭과 순서에 차이가 있다. 《영락경》 상권의 〈2. 현성명자품(賢聖名字品)〉에 따르면 아래 표의 왼쪽 열과 같다. 《영락경》 하권의 〈4. 석의품(釋義品)〉에 따르면 아래 표의 3번째 열과 같다. 맨 오른쪽 열의 것은 현대의 여러 불교사전들에서 열거하는, 《영락경》의 명칭과 순서와는 다른 경우의 명칭과 순서인데, 대체로 《영락경》 하권에 나오는 명칭과 순서를 따른 것임을 볼 수 있다. 현대의 불교사전들 중에는 아래 표의 2번째 열에 표시된 것처럼 《영락경》에 나타난 순서와 명칭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영락경》 상권 〈2. 현성명자품(賢聖名字品)〉에 나타난 순서와 명칭을 따르는 경우의 현대 불교사전들에서도 호심(護心)은 호법심(護法心)으로 명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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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락경에서는 10신위의 보살을 항상 아래의 10심을 행한다는 뜻에서 어떻게 칭하고 있는가?", "10가지 수순을 행하는 이름만의 보살로 아직 대승불교의 수행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칭으로 보살이라고 부르는 수행자를 어떻게 칭하는가?", "42현성에 속하지 못한 상태의 수행자를 어떻게 칭하는가?", "정식 수행자는 아니지만 수행중인 보살로 가칭하는 보살을 뜻하는것은?", "보살이라는 이를만 빌린 수행자란 무엇인가?", "영락경에서 10신위의 수행자를 간단히 칭하는 말은?", "주전신상보살을 줄여서 무엇이라 칭하는가?" ]
한편, 《영락경》에서는 10신위(十信位)의 보살을 항상 아래의 10심(十心)을 행한다는 뜻에서 10순명자보살(十順名字菩薩)이라 칭하고 있다. '10순명자보살'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10순(十順)의 이름[名字]만의 보살' 즉 '10가지 수순(隨順: 상응, 계합, 청정)을 행하는 이름만의 보살'로 아직 보살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칭으로서 보살이라고 부르는 수행자를 뜻한다. 즉, 현성(賢聖) 즉 42현성(四十二賢聖)에 속하지 못한 상태의 수행자를 말한다. 10신위(十信位)의 수행자를 또한 '이름만의 수행자'라는 뜻에서 간단히 명자보살이라고도 하고, '초주에 오르기 위해 그 전 단계에서 믿음을 일으키는[想] 수행자'라는 뜻에서 주전신상보살(住前信想菩薩)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신상보살(信想菩薩)이라고도 한다. 또한 '보살이라는 이름만 빌린 수행자'라는 뜻에서 가명보살(假名菩薩)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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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도의 근본은 무엇인가?", "청정한 믿음에서 무엇이 생겨나는가?", "모든 공덕을 쌓는 기본이되는 불도의 근본은 무엇인가?",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면 얻을 수 있는것은?", "불도의 근본이 되는 가치는 무엇인가?" ]
믿음은 불도의 근본이며 복덕의 모태로써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인도자가 된다는 것으로 信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한 것이다. 믿음은 迷信이나 盲信이 아닌 맑고 깨끗한 淨信이어야 한다고 賢首菩薩은 주장하고 있다. 청정한 믿음에서 모든 공덕이 생기기 때문이다.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바른 법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해 집착이 없어져서 완전히 청정해지며, 그로 인해 위없는 마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믿음에 대하여 『華嚴經』에는 十信의 명칭이나 십신보살의 실천행에 대해서는 설해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를 法藏은 十住 내지 十地의 실천행에는 階位가 있을 수 있지만, 믿음에는 계위가 없기 때문에 나열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大正藏』9, p.433, “信爲道元功德母 增長一切諸善法 除滅一切諸疑惑 示現開發無上道” 『大正藏』9, p.433. 『探玄記』권4, (『大正藏』35, p.187上), “釋云信不成位故不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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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희가 연기자로 입문한 작품은 무엇인가?", "김태희가 악역 한유리 역할로 인기를 얻고, SBS 연기대상에서 뉴스타상을 수상하게 만든 2003년 드라마 작품명은 무엇인가?", "김태희가 S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2015년 드라마의 작품명은 무엇인가?", "김태희가 2003년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맡아 연기했던 인물의 이름은?", "SBS 연기대상에서 김태희는 무슨 상을 받았나?", "2009년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김태희가 맡은 캐릭터 이름은?", "김태희가 악역 한유리 역을 맡아 인기를 얻은 드라마의 제목은?", "김태희가 2009년 KBS 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을 수상 할 수 있게 한 드라마 제목은?" ]
2001년 영화 《선물》에 이영애의 아역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입문하였고, 2002년 독립 영화 《신도시인》에 출연했다. 이후 시트콤《레츠고》(2002), 《스크린》, 《흥부네 박터졌네》(2003)와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다. 2003년에는 《천국의 계단》에서 악역 한유리 역할로 얼굴을 알리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이 드라마로 SBS 연기대상에서 뉴스타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드라마 《구미호 외전》과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에 출연했다. 하지만 이후 영화 《중천》(2006), 《싸움》(2007)에 출연했으나,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2009년에는 시청률 30%대를 기록한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최승희 역할을 연기해 KBS 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드라마 《마이프린세스》(2011), 《나와 스타의 99일》(2012), 《장옥정 사랑에 살다》(2013)에서 주연으로 출연했고, 2015년 드라마 《용팔이》로 S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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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희가 연예계에 데뷔할 때 찍은 광고는 무엇인가?", "2001년 영화 <선물>에서 김태희가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2001년 영화 <선물>의 영화 감독은 누구인인가?", "2000년 김태희가 연예계에 데뷔한 광고는 무슨 제품의 광고였나?", "김태희는 어느 대학교 출신인가?", "2002년 김태희가 출연한 SBS 시트콤의 이름은?", "김태희가 처음 찍은 광고는?", "김태희가 출연한 첫 독립영화의 제목은?" ]
김태희는 이후 지하철에서 광고대행사 디자이너를 우연히 만나 2000년 "화이트" 광고를 찍으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광고 촬영 이후 여러 곳에서 모델 제의가 들어왔고 그녀가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더 화제가 되었다. 2001년 영화 《선물》에서 중등 정연 역을 맡으며 스크린에 첫 데뷔했다. 당시 영화 감독 오기환은 잡지 표지모델로 섰던 김태희를 보고 테스트도 안 해도되니 그냥 데려 오라고 말했다. 이후 대학생활의 숙원이었던 어학연수를 가기 전 홍두현 감독의 독립영화 《신도시인》 출연을 제안받아 출연했고 2002년 개봉했다. 같은 해 경험삼아 SBS 시트콤 《레츠고》에 출연했으나, 2개월만에 종영되고 배우의 길에 대한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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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가 처음으로 장편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작품은 무엇인가?", "2006년 영화 <중천>의 관람객 수는 몇명입니까?", "김태희가 출연한 영화 중천은 어느 나라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촬영됐는가?", "김태희가 출연한 영화 중천의 남자주인공은 누구였나?", "중국 올로케이션으로 김태희가 정우성과 함께 출연한 첫 장편 영화의 제목은?", "김태희가 설경구와 함께 출연한 영화의 제목은?" ]
이 드라마를 통해 자리를 확고히 한 김태희는, 2006년 제작비 130억, 중국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한 영화 《중천》에서 정우성과 함께 공연하며 소화 역할로 첫 장편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그녀는 청룡영화상에서 인기스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연기력에서 “대사 소화가 부족하고 표정연기가 풍부하지 못했다”, “평면적 연기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중천》은 관객수 150만 명을 기록하면서 흥행에도 실패했다. 2007년에는 영화 《싸움》의 윤진아 역할을 연기했다. 연기파 배우 설경구와 공연하며 연기력에 있어서는 이전 작품보다 확실히 좋아졌다는 평을 받았으나, 3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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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첩보액션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김태희가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드라마 <아이리스>의 최고 시청률은 어떠했는가?", "2009년 KBS 연기대상에서 김태희는 무슨 상을 받았나?", "2010년 9월에 김태희가 출연한 영화의 제목은?", "첩보액션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김태희가 맡았던 여주인공의 이름은?", "드라마 <아이리스>의 스핀오프작 제목은?" ]
김태희는 2009년 4년 만에 첩보액션 드라마 《아이리스》의 여주인공 최승희 역할로 출연했다.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9.9%, 평균 시청률 30%대를 기록했다. 연기력에 있어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일부에서는 첩보원 역할에 걸맞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처음으로 연기력으로 우수연기상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우수연기상은 인기로 받은 인기상이 아닌 연기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상이었다. 연기로 인정 못 받고 있다고 그간 생각했다.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2010년 1월 김태희는 소속사를 나무엑터스에서 자신의 형부가 설립한 루아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 9월 16일에는 영화 《그랑프리》에서 서주희 역할로 출연했다. 김태희의 연기력은 이전보다 나아졌다며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으나, 16만 명의 관객수를 끝으로 상업적 실패를 거뒀다. 11월 22일에는 몇몇 내용을 편집해 만든 《아이리스: 더 무비》가 개봉했다. 12월 13일에는 《아이리스》의 스핀오프작 《아테나: 전쟁의 여신》 1회에 회상신으로 특별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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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김태희가 송승헌과 함께 호흡을 맞추어 대학생 이설 역할을 맡아 코믹한 캐릭터를 연기했으며, 이전보다 향상된 연기로 호평을 받고 평균 15%의 시청율을 기록했던 드라마의 작품명은 무엇인가?", "김태희가 첫 일본 드라마에서 평균 시청율 9.3%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끝내었고, 그에 따라 많은 일본 CF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모두 취소되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2011년 1월 방연되었으며 김태희가 출연한 드라마의 이름은?", "김태희가 출연한 일본 후지TV 드라마의 제목은?", "김태희의 첫 일본 진출 드라마의 제목은?", "김태희의 일본에서의 활동과 드라마 촬영이 중단 될 빌미를 제공했던 캠페인은?" ]
김태희는 2011년 1월부터 방영된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에 출연했다. 드라마는 평균 15%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김태희는 송승헌과 함께 공연해 대학생 이설 역할을 맡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달리 코믹한 캐릭터를 연기했고, 이미지의 변화와 이전보다 향상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4월 1일에는 《MBC 다큐스페셜》에서 셀러브리티 바이오그래피 태희의 재발견이 방영되었고, 방송에서 김태희의 일상, 연기력 논란, 학창 시절 등에 대해서 다뤘다. 시청률은 지난 편에 비해 2배 가량 상승한 9.3%를 기록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뭘 말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김태희 홍보프로”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는 “MBC스페셜이 김태희도 다룰 수 있다. 문제는 소재가 아니라 다루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마이 프린세스》가 종영되고 나서 김태희는 일본 기획사 스위트 파워와 계약을 맺고 일본 진출을 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일본 후지TV 드라마 《나와 스타의 99일》에 여주인공 한유나 역할로 출연해 일본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공연했다. 첫 일본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9.3%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끝냈고, 많은 CF 촬영도 진행 할 예정이였다. 그러나 2005년 이완과 함께 스위스에서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인 것을 빌미로 각종 CF 방영 계획이 취소되었고, 드라마 촬영 중단까지 요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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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희가 2007년 활동했던 핑크리본 홍보대사는 무엇을 알리기 위한 역할인가?", "2011년 김태희가 난치병 아동들로 이루어진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앨범에 함께 참여하여 녹음한 노래의 곡명은 무엇인가?", "2004년 김태희는 어느 신문사가 주최한 기업사랑 캠페인의 홍보대사로 활동했는가?", "김태희와 함께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인 김태희의 동생 이름은?", "배우 활동을 하고 있는 김태희 동생 이름은?", "김태희가 난치병 아동들과 함께 참여한 합창단의 이름은?" ]
2004년 김태희는 헤럴드경제 기업사랑 캠페인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2005년에는 동생 이완과 함께 수호천사로 위촉돼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였고, 같은 해 5월 스위스에서 친선문화대사로 선정 돼 "독도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리메이크 앨범 등을 나눠주는 활동을 했다. 이후 2007년 유방암의 위험성을 알리는 핑크리본 홍보대사로 활동을 했고, 7월 22일 부산 해운대에서 열린 핑크리본 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 또한 12월에는 BC카드의 후원을 받아 서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밥차 배식 봉사활동을 했다. 김태희는 2005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006년에도 난치병 어린이들과 함께 자선 활동을 계속 했다. 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난치병 아동들로 이루어진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앨범에 참여했는데, "Make-A-Wish"를 녹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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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월 1일 비(본명: 정지훈)과 김태희가 데이트하는 현장 사진을 올리면서 열애설을 제기한 온라인 언론사는 어디인가?", "비(본명: 정지훈)이 김태희와의 결혼 소식을 알린 날짜는 언제인가?", "2013년 김태희와 열애설이 나온 사람의 본명은?", "비는 어떤 SNS를 통해 2017년 1월 17일에 김태희와의 결혼소식을 알렸나?", "2013년 김태희와의 열애설을 인정한 연예인은?", "배우 이병헌과 이민정의 열애설을 터뜨린 매체의 이름은?" ]
2012년 12월 31일 디스패치는 이병헌과 이민정의 열애설을 터뜨림과 동시에 "디스패치가 새해 첫 커플의 사랑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2013년 1월 1일 비(본명: 정지훈)와 김태희가 데이트하는 현장 사진을 올리면서 열애설을 제기했다. 같은 날 오후 소속사 루아엔터테인먼트는 아직 만난지 1개월 밖에 안되었고, 알아가는 단계라며 교제설을 인정했다. 2017년 1월 17일, 비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자필 편지를 올려 "이제 저 또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훌륭한 남편이자 남자가 되려 한다. 그녀는 제가 힘들 때나 행복할 때나 변치 않고 늘 제 곁을 지켜주며 언제나 많은 것들로 감동을 주었다"에 이어 "이제 신뢰가 쌓이고 사랑이 커져 결실을 맺게 됐다"며 "결혼식과 시간은 현재 시국이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최대한 조용하고 경건하게 마무리하고자 한다"고 결혼 소식을 알렸다. 두 사람은 2011년 한 소셜커머스 광고에 함께 출연하며 친분을 쌓았고, 2012년 가을부터 교제를 시작했고 2013년 1월 1일 열애 사실이 공개됐다. 이후 둘은 결별설 한번 없이 잉꼬 커플로 주목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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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은 여성의 뱃속에 생긴 아이가 성교 도중에 무엇으로 인해 만들어진걸 알지못했나?", "인간과 동물의 번식에 기초가 되는 생리적 결과를 알지 못했다는걸 무엇으로 규정했나?" ]
인간과 동물의 번식에 기초가 되는 생리적 행위의 결과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시인들의 남녀 관계를 규정한다. 남성은 여성의 뱃속에 생긴 아이가 성교 도중에 자신의 정액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지 못했으므로, 갓난아이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이일 뿐 자신의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동일한 여성과의 몇 년간에 걸친 성교 중에 출산이라는 이상한 사건이 몇 차례나 반복되어도 자신을 “아버지”로는 간주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남성이 동일한 여성과 그녀의 임신 9개월 동안 성적 쾌락을 단 한 번밖에 구하지 않았던 경우는 드물었고, 또 그가 그녀와 성교한 유일한 남성인 경우도 극히 드물었던 만큼 더더욱 자신을 아이의 아버지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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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산은 누구도 죽이려 하였는가?", "어부는 화원이 탕택을 토벌하면 누가 망할 것이라 하였는가?", "화원은 황하에서 돌아와 누구를 시켜 탕택을 주살하였는가?", "화원을 죽이려하여, 화원이 황하까지 도망치게 한 인물은 누구인가?", "화원을 따르는 국인이 많다는 점을 들며 화원을 쫒아내면 환씨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인물은 누구인가?", "화원이 탕택을 주살한 이후 어부는 어느나라로 도망갔는가?", "화원이 당산을 피해 간 곳은?" ]
당산(탕택)은 화원도 죽이려 해, 화원은 진나라로 달아나 황하까지 이르렀다. 어석이 화원을 만류하려 하자 어부가 화원이 탕택을 토벌하면 환씨(송 환공의 자손)는 망할 것이라고 어석을 만류했다. 그러나 어석은 화원이 공이 많고 국인들도 많이 따르기 때문에 화원을 쫓아냈다가는 환씨에게도 이롭지 못하리라고 여겼고, 또 화원이 탕택을 감히 토벌하지는 못하리라고 했다. 설령 화원이 탕택을 토벌해 환씨가 망하더라도, 상술(向戌)만은 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화원은 어석의 만류를 받자 황하에서 돌아와 화희와 공손사를 시켜 탕택을 주살하고 평공을 옹립했다. 이에 어석, 상위인, 인주, 상대, 어부는 모두 초나라로 달아났고, 화원은 상술을 좌사로 삼고 노좌를 사마로 삼고 악예를 사구로 삼아 결원을 채우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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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공 몇 년에 초나라와 정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았는가?", "평공이 참여한 진 도공이 다시 정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소집한 것은?", "기원전 564년에 송나라와 진나라가 합심하여 공격한 나라는 어디인가?", "평공 14년에 송나라는 초나라와 어떤 나라의 연합군에게 공격받는가?", "송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앙갚음을 당한 년도는?", "진나라의 정나라 정벌 계획을 도운 인물은?" ]
평공 치세 초기에는 이웃한 정나라가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를 오갔고, 송나라는 줄곧 진나라 편에 섰기에 진나라의 통솔을 받아 정나라를 공격했으며 초나라의 편을 든 정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평공 12년(기원전 564년)에 진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공격했다. 평공 13년(기원전 563년) 6월에는 초나라 영윤 자낭(子囊)과 정나라 자이(子耳)의 공격을 받아 위나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7월에는 자낭과 자이가 노나라를 치다 돌아오면서 송나라의 소읍을 공격, 함락시켰다. 평공은 진 도공이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연 회맹에 참석하고 정나라 보복 공격에도 참여했으나, 진 도공의 이 둘째 출병은 초나라 공자 정(公子貞 = 자낭)이 정나라를 구원하자 일단 물러서면서 정나라는 다시 초나라 편에 붙었다. 평공 14년(기원전 562년)에는 초나라와 정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공격은 정나라가 진나라에 귀순하기 위해 진나라가 초나라에 노를 격발하여 초나라를 크게 쳐 초나라를 완전히 꺾어주기를 기대한 수작이었다. 4월, 평공은 진 도공이 다시 정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소집한 제후연합군에 참여했고, 상술이 먼저 정나라 동문 밖에 주둔했다. 정나라는 6월에 제후연합군에 화친을 청했다. 초나라에서는 자낭을 보내고 또 진나라에 원군을 청해 정나라를 치니, 정나라는 바로 초 · 진나라에 항복하고 또 송나라를 쳤다. 평공은 진 도공이 9월에 다시 소집한 제후연합군에 참여해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번에는 초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지 못해, 결국 정나라는 진 도공에게 넘어갔다. 그 때문에 송나라는 평공 15년(기원전 561년)에 초나라 자낭과 진나라 서장 무지(無地)에게 보복 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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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537년 평공이 태자로 책봉한 인물은?", "옛 태자 좌의 무고를 안 평공은 이려를 무엇에 처했는가?", "태자 좌가 죽은 후에 누가 송나라의 태자로 책봉되는가?", "혜장이려는 태자 좌가 군위를 얻기 위해 어떤 나라의 사자와 결탁했다고 모함하는가?", "태자 좌가 죽은 후에야 그의 결백을 알게 된 평공은 이려에게 어떠한 형을 내리는가?", "옛 태자 좌를 중상모략한 인물은?", "태자 좌의 자살 이후, 형벌을 받은 인물은?" ]
평공 39년(기원전 537년) 가을, 평공이 참소를 듣고 태자 좌를 죽이고 공자 좌(송 원공)를 태자로 책봉했다. 전말은 이러하다. 초나라 사자가 진나라에 가다가 송나라를 지나가자 사자와 면식이 있던 태자 좌가 청해 사자를 접대했다. 태자와 원한이 있던 태자의 내사(內師)인 시인 혜장이려(惠牆伊戾)가 태자를 시종하기를 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려는 초나라 사자와 결맹한 것처럼 꾸며 태자 좌가 군위를 얻고자 초나라 사자와 결맹했다고 모함했다. 송 평공이 조사해 보니 이려가 꾸며놓은 증거가 있었다. 평공은 공자 좌 생모인 첩 기(棄)와 좌사 상술(向戌)에게 물었는데 모두 태자 좌에게 불리하게 증언했다. 결국 평공은 태자를 가두었다. 태자 좌는 공자 좌에게 사면을 청하고 정오를 기한으로 정했는데, 이를 들은 좌사는 공자 좌를 잡아두어 제때 찾아가지 못하게 하니 태자 좌는 자살하고 공자 좌가 대신 태자가 됐다. 이후, 옛 태자 좌의 무고를 안 평공은 이려를 팽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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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 등과 손을 잡아 맞선 상대는?", "청나라가 패배한 이후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나라는?", "흥선대원군과 같이 암살을 공모한 사람은?", "명성황후는 세도정권을 부활시키기 위해 누구를 기용했는가?", "명성황후가 암살당한 해는?" ]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한테 겨냥하는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당한 이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친일 성향을 띤 급진 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과 주조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공모에 의해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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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 민자영이 참여한 것은?", "고종이 명성황후를 운형군에서 같이 돌아온 곳은?", "민자영이 왕비가 된 후 생모가 받은 작위는?", "금혼령을 받는 최소의 나이는?", "고종이 친영을 거행할 때 어디로 돌아왔는가?", "명성황후의 이름은?", "명성황후가 왕비로 정해진 날짜는?", "명성황후의 아버지의 이름은?" ]
1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왕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 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2월 15일(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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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3년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상소를 올린 사람은?", "흥선대원군의 형으로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좋지 못했던 인물은?", "서원 철폐로 대원군과 척을 진 이들은?",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탄핵을 받은 해는?", "명성황후가 유학자 세력과 교류하여 포섭해 온 대표적인 인물은?" ]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입을 모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해 왔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단체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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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사상가로 발탁해 우의정에 등요한 사람은?",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 정책을 담당했던 경상도 관찰사의 이름은?", "안기영, 권정호와 함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고 한 사람은?", "명성황후가 1876년 맺은 조약은?", "경기도 향시가 예정되었던 날은?", "1876년 일본과 맺은 조약의 이름은?", "노론의 개화사상가이며 명성황후가 우의정에 등용했던 인물은?" ]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우호세력을 중용하여 세력을 강화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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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집이 고종에게 전한 황준헌의 책은?", "별기군과 구식군대 간의 차별로 발생한 사건은?", "임오군란에서 군인들을 지원한 사람은?",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책은?",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사람은?", "개화파 김홍집에 의해 고종에게 전해진 책의 이름은?", "1882년에 발생한 군란은?" ]
이런 한편,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개화파 김홍집은 1881년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을 문제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斥邪) 상소 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역모를 계획했다. 그 해 8월에는 대원군의 주변 인물인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이재선(李載先) 즉 대원군의 서자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종 폐위를 위한 역모를 은밀히 전개했으나, 고변으로 인해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영 등 주동자들이 옥에 갇히고 사형당했다. 1882년에는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명성황후인물들은 대원군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의 위협을 받고, 명성황후는 은신한 반면 많은 인물들이 피습당했다. 일본 공사관도 피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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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과 명성황후가 연금된 경우궁의 보초를 맡은 사람의 이름은?", "10월 18일 원새개의 면회 요청을 저지하려한 사람은?", "갑신정변 이후 명성황후가 의존한 나라는?", "조선이 일본에게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로 한 조약은?", "명성황후는 민영익과 심상훈으로 하여금 무엇을 청하도록 하였는가?", "명성황후와 고종이 연금되었던 궁의 이름은?", "조선이 일본에게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로 한 조약의 이름은?" ]
정권을 장악한 급진 개화파들은 즉시 자신들의 정강과 개혁안을 공포하고, 각국 공사관에 이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렸다. 이에 명성황후는 민영익과 경기 감사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군의 원조를 청하도록 했다. 명성황후와 고종이 연금되었던 경우궁의 보초를 맡았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에겐 우리들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부탁했고, 다케조에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명성황후와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바꾸도록 했다. 그 해 고종은 10월 18일 청나라 공사 원세개(袁世凱)와 6백 명의 군인들의 면회 요구를 받았고, 김옥균은 이를 저지하려하여 그들간에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중국 군인들이 배로 늘어났고, 일본인 군인들은 혼란 와중에 민심의 표적이 되어 공격받았다. 일본인 군인 2백 명은 일단 후퇴하였으며, 정부군 8백 명도 열세로 인해 패배했다. 이런 때에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홍영식, 박영교, 몇 명의 사관생도의 호위를 받으며 이탈하여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 유혁로와 함께 다케조에 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문을 통해 삼각산과 양화나루,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했다. 명성황후는 이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의존하게 된 반면, 일본은 공사관의 화재와 군중들에게 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을 조선에게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일본에게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로 한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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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가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개로 접촉한 나라는?",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맺은 밀약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나라는?", "1885년 원새개가 대동하고 귀국한 사람은?", "1885년 3월에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된 곳은?", "대원군은 무엇을 대동하여 귀국하였는가?",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을 얻기위해 조선에 개입한 나라는?", "1885년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 당한 곳의 이름은?" ]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혼란으로 더욱 약화되어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는데, 남하 정책으로 얼지 않는 항구를 얻으려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러시아와 청나라와 일본 등 열강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다. 명성황후는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개로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으려 했다. 이러나 밀약은 먼저 중국에 발각되어, 1885년 2월엔 묄렌도르프에게 영장이 발부되고 대원군은 원세개를 대동하여 귀국되었다. 1885년 3월에는 거문도가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1887년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와의 합의 끝에 철수했다. 이런 한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는 명성황후와 밀약을 또 맺으려 했으나 원세개가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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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가 받은 형벌은?", "조병갑의 부패를 규탄하는 농민운동을 이끈 사람은?", "온건 개화파 및 친척 척신들이 동학 농민군을 지칭한 용어는?", "동학은 누가 일으켰는가?", "동학의 제2대 교주는?", "동학의 창시자는?", "동학의 2대 교주의 이름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중심 지도자의 이름은?" ]
이와 같이 조선을 둘러싸고 러시아, 일본, 청나라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속에서 명성황후는 정부와 권력의 안정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이 와중에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은 비록 민중을 거짓말로 홀렸다는 죄목을 받은 최제우가 처형되었으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재기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농민들이 2만여명 모여 농민을 괴롭히는 지방관들의 퇴출과 민생고를 탕감하고,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 등을 요구하였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는 온건 개화파 및 친척 척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이 동학 농민군을 동비(東匪. 동학의 불한당들.)로 보고한 것을 그대로 믿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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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명성황후가 지원을 요청한 나라는?", "조선을 내정을 개혁하자는 빌미로 청나라에 협력을 제의한 나라는?", "일본이 총리로 임명한 사람의 이름은?", "농민군과 관군이 조선에 일본군과 청군이 당도하자 맺은 조약은?", "일본은 총리 대신에 누구를 앉혔는가?", "민씨 일가가 일본에 의해 퇴출당하고 일본이 총리 대신에 앉힌 사람은?",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점령되고 명성황후가 원병을 요청했던 나라는?" ]
같은 해 4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되고 흥선대원군이 반군을 지원하여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성황후는 지원을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군인들이 청나라에 의해 파병되자 이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농민군과 관군은 조선에 일본군과 청군이 당도하자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처리키로 하고 휴전했다. 그러나 조선에 온 이들 오랑캐들은 주둔하며 군대를 증파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빌미로 일본은 청나라와의 협력을 제의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민씨 일가는 일본이 궁궐에 보낸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일본어: 大鳥 圭介 오오토리 케이스케)와 휘하의 군인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대원군은 또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됐으며, 일본은 김홍집을 총리 대신에 앉히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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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점령한 곳은?", "대원군에게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경기도 감사 홍순형의 집에 은신한 사람은?",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에 의해 점령된 곳은?", "김홍집 내각이 일본군의 괴뢰정부로 만들어져 진행한 것은?" ]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이 일본군 혼성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대원군은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했으며,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일가의 세도는 무너졌다. 대원군 일가는 그러나 달포 만에 일본의 의도로 끌어내려진다. 대원군의 대신으로 김홍집 내각이 일본군의 괴뢰정부로 만들어지며, 이 정부는경장사업(更張事業)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민씨 일족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徽)로 개명)을 필두로 은 모두 유배되었고, 명성황후도 위기 중에 폐위 위기를 아슬아슬히 넘겨 홍순형(洪淳馨) 경기도 감사의 집에 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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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에 운현궁에 찾아간 인물은?", "전봉준에게 후한 대접을 한 사람은?",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와서 조선의 내정을 간섭한 이들은?", "녹두장군은 누구인가?", "조선의 내정은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어느 나라의 간섭을 받는가?", "운현궁에서 1890년대 초반부터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던 인물은?", "조선에 청나라 군대가 다시 동원된 운동은 무엇인가?" ]
동학의 농민 무리들에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 초기의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단순 비적인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는 동학 농민군을 부정적으로 볼만한 이유와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녹두장군 즉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운현궁에 전봉준은 1890년에 찾아갔다. 운현궁에서 전봉준은 1890년대 초반부터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간 전봉준은 또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봉준은 1893년 2월 흥선대원군을 방문하려 한성부로 올라가기도 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잠깐 손님으로 와 있던 것 뿐이나 대원군은 전봉준에게 매우 후한 대접을 했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밀접한 관계로부터 전봉준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세간엔 돌았다. 이런 한편 조선의 내정은 또 한 번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동원된 청나라 군대의 간섭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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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곳은?",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의 지원을 얻은 것은 매우 잘못한 것이라고 비판한 사람은?", "유길준이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지적한 곳은?", "왕후 제거 계획에 대원군에 협력한 인물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대원군을 설득하기 시작한 해는?" ]
1895년 9월, 일본 공사에 미우라 고로 와 명성황후 제거의 모의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려는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등이 대원군의 도움을 받으려 대원군에게 다가갔으나, 대원군은 일단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교동에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대원군이 운현궁에 있을 때 오카모토가 대원군을 설득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이때 일본 공사관을 비밀리에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기를 수시로 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길준은 왕후 제거에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의 지원을 얻은 것은 매우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래도 왕후 제거 계획에 관해 유길준은 대원군에 협력했는데, 이준용을 두고 박영효와 서광범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위장된 의도적인 고문치사를 계획하는 중에 유길준의 갑작스런 왕후 제거 계획 가담 소식에 당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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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한 맹세에 자필로 서명한 사람은?", "맹세에서 명성황후가 죽은 후 국왕을 보필하여 궁중을 감독할 사람으로 정한 이는?" ]
1895년 8월에 명성황후는 죽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음모가 일본 공사 겸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와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幸彦), 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과 함께 꾸미어졌는데, 명성황후의 죽음은 일본인 군인들과 로닌들이 맡고, 대외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발표하는 것이 골자였다. 8월 16일 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맹세에 자필로 서명했다. 그 내용은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언약을 받아 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은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필로 각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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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이 은거했던 별장의 이름은?", "명성황후가 죽어 마땅하다는 내용을 담은 대원군의 글은?", "고종이 민씨 척족이 무위로 돌렸다고 주장한 것은?", "대원군이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며 무엇을 발표했는가?", "명성황후 암살 작전은 언제 결행에 들어갔는가?" ]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명성황후 암살 작전이 그들에 의해 결행에 들어갔다. 대원군이 은거했던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일본군은 로닌과 일본 군인, 명성황후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 300명가량을 모았다. 대원군은 미우라와 결탁하고 합의하여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나아갔다. 대원군은 먼저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주장의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내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이 고유문의 내용은 '민씨 일가의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대원군은 제 자필로, 일본의 강요도 없이 적어놓았다. 대원군이 이런 글을 적는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 글을 미리 들은 조선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원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그러했는지 본인의 의지로 그러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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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7년 명성황후가 처음에 받은 시호는?", "연호를 광무로 고친 사람은?", "명성황후가 처음 안치되었던 곳은?", "고종은 연호를 무엇으로 고쳤는가?", "10월에 고종은 무엇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는가?" ]
명성황후의 직위는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죽음 이틀 뒤 폐인으로 강등했으나, 바로 다음 날 그녀의 직위는 고종의 명으로 "빈"(嬪)으로 올라갔다. 국모에게 저질러진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했으며, 명성황후의 지위도 완전히 복원되어 암살 이전 생전 마지막 작호인 왕후로 복작됐다. 1897년 음력 1월 6일 문성의 시호를 받고 문성왕후가 됐으며, 능호는 홍릉으로 고쳤다. 그러나 뒤에 시호의 문성(文成)이 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여러 논의 끝에 음력 3월 2일 명성왕후로 개칭됐다. 같은 해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대한제국정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같은 해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그녀 역시 황후에 추존되어 명성황후가 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또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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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가 쓰치다 조스케를 죽인 곳은?", "김구가 낭인으로 오인한 쓰치다 조스케의 직업은?" ]
한편, 명성황후의 암살은 조선 민중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암살에 관련된 조선인 장교들과 군인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이 때에 백범 김구(이 때의 이름은 김창수, 金昌洙)는 의병으로 만주에 있다가 1895년 초 귀국하며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낭인으로 오인하며 치하포에서 만나 그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김구는 이에 대해 뒷날 그가 일본 낭인이거나 왕비 암살에 가담한 자라고 주장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일본인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그 일본인이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그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배 교수는 백범도 그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7년 도진순 창원대학교 교수는 일본의 자료로부터 그가 계림장업단의 상인이며 민간인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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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일본 공사의 이름은?", "1903년 우범선을 죽인 사람은?",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 일본 낭인에 협력한 사람은?" ]
일본 자객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 또한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 2006년에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통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이 길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의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이 일본 낭인에 협력했다. 그 밖에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도 포섭하였다. 이 중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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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한 사람은?",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본 사람은?", "명성황후의 사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 황현의 책의 제목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 이라고 혹평했던 사람은?", "명성황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 되어 있는 책의 이름은?" ]
그의 벗 윤치호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지목했던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다. 암살 직후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날짜 미상의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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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이 제거했으나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이 다시 불러들인 것은?",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의 척족 세력이 지원한 것은?", "일부 평론가에 의해 명성황후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청의 황후는?", "명성황후와 더불어 19세기 동양의 최악의 황후로 비판받는 인물은?",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의 정책 노선은?" ]
또한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극단적 평론가는 비슷한 시기 청제국을 쇠퇴시킨 서태후와 동급을 취급하기도 한다. 보통 그들은 서태후와 명성황후를 19세기 동양의 최악의 황후라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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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의 적들의 우두머리는?", "왕비가 친인척으로 거의 석권해 버린 것은?" ]
민씨는 첫눈에도 예사로운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두뇌회전 또한 기민해 보였다. 성격도 대단히 차분하고 냉철하게 느껴졌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중략)…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호의, 뛰어난 지성과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통역자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화법은 탁월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비의 주위는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었다. 왕비가 그녀의 재능과 권력으로 조정의 고위관직을 친인척을 등용하여 거의 석권해 버렸으므로 그녀에 대한 대원군의 반감은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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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석 갤럭시 S8의 색상 종류는 총 몇 종인가?", "삼성 갤럭시 S8에서는 기본 디자인 요소인 홈 버튼 구조는 무엇으로 대체되었는가?", "갤럭시 S8에서 기존 디자인에서 빠진 구조는 무엇인가?", "갤럭시 S8의 전체 면적 중 앞면 디스플레이는 몇 %를 차지하는가?", "기존의 갤럭시 시리즈가 가지고 있던 물리 홈 버튼 구조가 없어지고 이것 대신 갤럭시 S8에 새롭게 생겨난 것은 무엇인가?", "갤럭시 S6 및 S7에 비해 갤럭시 S8이 충격에 약하다는 견해가 많았는데 이는 S8의 액정이 어떤 구조로 바뀌었기 때문인가?" ]
전반적인 디자인은 갤럭시 S6 엣지부터 내려오는 패밀리룩을 따르고 있다. 특히, 갤럭시 S6과 갤럭시 S7은 기존과 동일하게 평면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본가 모델에도 엣지 디스플레이를 탑재했다. 또한, 갤럭시 S 시리즈를 넘어 갤럭시 시리즈의 기본 디자인 요소였던 물리 홈 버튼 구조가 아예 사라지고 소프트 키로 대체되었다. 앞면의 디스플레이는 휴대폰의 전체 면적 중 85%를 차지한다. 그러나 크기는 전작들과 비교했을때 세로로 약간 길어졌을 뿐 큰 크기변화는 없다. 색상은 미드나잇 블랙, 오키드 그레이, 아크틱 실버, 코랄 블루, 메이플 골드 총 6종이다. 전작인 S6, S7에 비해 액정이 곡면구조가 되면서 충격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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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갤럭시 8에 탑재되는 칩셋은 삼성 역시노스 9 Series (8895)와 무엇인가?", "삼성 갤럭시 S8에 사용되는 퀄컴 스탭드래곤 835에 탑재된 GPU는 무엇인가?", "갤럭시 S8의 사양은 지역에 따라 2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퀼컴 스냅드래곤 835이며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갤럭시 S8의 사양을 이전 갤럭시 시리즈와 비교하였을때 성능면에서는 약 퍼센트 향상되었는가?" ]
사양은 우선 AP로 삼성 엑시노스 9 Series (8895)와 퀄컴 스냅드래곤 835 MSM8998을 지역에 따라 취사선택해 사용한다. 전자는 삼성전자의 2세대 자체 CPU 아키텍처를 사용한 쿼드코어 CPU와 ARM Cortex-A53 쿼드코어 CPU에 big.LITTLE 솔루션을 적용한 HMP 모드 지원 옥타코어 CPU와 ARM Mali-G71 에이코사코어 GPU를 사용한다. 후자는 Qualcomm Kryo 280 옥타코어 CPU를 쿼드코어 CPU로 구성된 두 개의 클러스터로 나누어 한 쪽에는 고클럭 세팅으로 빅 클러스터 형태로 만들고 다른 한 쪽에는 저클럭 세팅으로 리틀 클러스터 형태를 만들어 big.LITTLE 솔루션을 모방한다. 그리고 퀄컴 Adreno 540 GPU를 사용한다. 두 모바일 AP 모두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의 10 nm FinFET LPE 공정에서 생산되었으며 특히, 10 nm 계열 공정을 사용해서 생산한 모바일 AP를 탑재해서 출시한 최초의 스마트폰 중 하나이다. 이전 공정 대비 성능이 약 25% 정도 향상되었고, 전력 효율도 약 30% 가량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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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갤럭시 S8의 기본 내장메모리 용량은?", "삼성 갤럭시 S8의 램은 몇 기가 바이트인가?", "갤럭시 S8의 사용가능한 RAM은 몇 GB인가?", "갤럭시 S8의 두 가지 사양 중 엑시노스 9 Series 장착 모델이 사용하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의 종류는 무엇인가?" ]
RAM은 LPDDR4X SDRAM 방식이며 4 GB다. 삼성 엑시노스 9 Series (8895)와 퀄컴 스냅드래곤 835 MSM8998이 LPDDR4X SDRAM 컨트롤러를 내장했다. 또한, 전작인 갤럭시 S7 & 갤럭시 S7 엣지 대비 RAM 용량을 증가시키지 않고 유지하게 되었다. 내장 메모리는 64 GB 단일 모델이지만, 삼성 엑시노스 9 Series (8895) 탑재 모델이 UFS 2.1 규격의 낸드 플래시를 사용하고, 퀄컴 스냅드래곤 835 MSM8998 탑재 모델은 UFS 2.0 규격의 낸드 플래시를 사용한다. 공개 당시 삼성전자는 UFS 2.1 규격의 낸드 플래시를 사용한다고 밝혔으나, 이후 확인결과 탑재되는 모바일 AP에 따라 낸드 플래시를 달리 탑재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논란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micro SD 카드로 용량 확장이 가능하다. 단, 듀얼심 모델의 경우 하이브리드 듀얼심 방식이기 때문에 두 번째 SIM 카드와 micro SD 카드를 동시에 장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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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갤럭시 S8에 탑제되는 슈퍼 아몰레드 방식의 디스플레이의 이름은 무엇인가?", "삼성 갤럭시 S8의 디스플레이 기본 해상도는 몇인가?", "갤럭시 S8의 기본 해상도는?", "기존의 갤럭시 S 시리즈의 디스플레이 모양은?" ]
디스플레이는 5.8인치 18.5:9 비율의 2960 x 1440 해상도를 지원하며 패널 형식은 엣지 디스플레이 기술이 도입된 Super AMOLED 방식의 Infinity Display를 탑재했다. 16:9 비율인 WQHD 해상도에 비해 세로 부분이 확장된 해상도로, 삼성전자는 이를 Quad HD+라고 명명해서 홍보하고 있다. 또한, 소프트 키 구조를 가져서 물리 홈 버튼이 삭제되었지만, 압력 센서를 이용해 포스 터치처럼 소프트 키를 조작하는 사용자가 물리 홈 버튼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사용 환경을 느낄 수 있도록 재현했다고 한다. 우선, 2220 x 1080 해상도를 기본 해상도로 사용하며 설정에서 이를 높이거나 낮추는 조절이 가능하다. 또한, 갤럭시 노트7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AMOLED 디스플레이 기술인 'Y-OCTA'를 적용하여 터치 센서가 디스플레이에 직접적으로 인쇄되어 디스플레이 패널이 경량화 되었다고 한다. 특히, 반듯한 직사각형이었던 기존 갤럭시 S 시리즈의 디스플레이와는 달리 코너 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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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갤럭시 S8의 배터리 용량은 몇인가?", "삼성 갤럭시 S8의 풀 충전시 동영상 재생 시간은 최대 몇 시간인가?", "갤럭시 S8의 배터리 용량은?", "갤럭시 S8의 Wi-Fi 사용 기준 인터넷 사용 시간은 최대 몇 시간인가?", "갤럭시 S8 사양 중 삼성 엑시노스 9 Serise 장착 모델의 최대 동영상 재생 시간은 몇 시간인가?", "갤럭시 S8 스펙사양 중 배터리 용량은 몇 mAh인가?" ]
배터리 용량은 내장형 3,000 mAh이다. 이는 전작인 갤럭시 S7과 배터리 용량이 동일한 것이다. 삼성전자의 발표 내용에 의하면 삼성 엑시노스 9 Series (8895) 탑재 모델 기준, 동영상 재생 시간이 최대 17시간으로 전작인 갤럭시 S7 대비 약 1시간 가량 증가했으며 Wi-Fi 사용 기준으로 인터넷 사용 시간이 최대 14시간으로 전작인 갤럭시 S7 대비 약 1시간 가량 감소했다. 하지만, 디스플레이 비율 변화와 해상도 차이를 고려하면 배터리 효율은 전작인 갤럭시 S7보다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작과 마찬가지로 삼성전자 Adaptive fast charging 규격과 퀄컴 퀵 차지 2.0 규격의 고속충전 솔루션과 자기유도 방식의 표준 규격인 Qi 규격과 자기유도 방식이지만 자기공진 방식의 A4WP와 호환성을 강화한 PMA 규격의 무선충전 솔루션 및 고속 무선충전 솔루션을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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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갤럭시 S8의 카메라는 몇 만 화소인가?", "삼성 갤럭시 S8 카메라에 적용된 센서는 아이소셀 S5K2L2 센서와 무엇을 혼용하였는가?", "갤럭시 S8의 후면 카메라 화소는?", "갤럭시 S8의 전면 카메라 화소는?", "갤럭시 S8에 설치된 전면 카메라의 화소수는 얼마인가?", "갤럭시 S8에 탑재된 후면 카메라의 화각은 몇 도 인가?" ]
후면 카메라는 OIS 기술이 적용된 카메라 모듈에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 아이소셀 S5K2L2 센서와 소니 엑스모어 IMX333 센서를 혼용하여 1,200만 화소 카메라를 77도의 화각으로 설정해 탑재했다. 그리고 AF 트래킹을 지원하고 "Dual Pixel" 기술을 활용한 위상차 검출 AF를 지원한다. 이는 전작인 갤럭시 S7 & 갤럭시 S7 엣지와 동일한 카메라 화소수 및 기능을 지원하는 것이다. 또한, 센서 크기는 1/2.55인치이며 조리개 밝기는 F/1.7이다. 전면 카메라는 800만 화소 카메라를 80도의 화각으로 설정해 탑재했다. 여기에 AF를 지원한다. 또한, 센서 크기는 1/3.6인치이며 조리개 밝기는 F/1.7이다. 그리고 전작인 갤럭시 S7 & 갤럭시 S7 엣지까지의 갤럭시 시리즈 소속 스마트폰의 전면 카메라는 광각 렌즈 적용으로 인해 결과물이 왜곡되어 얼굴이 길어보이는 역효과가 있었는데, 드디어 해당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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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번디가 태어난 곳은?", "테드 번디를 낳은 생모는 누구?", "테드 번디가 태어난 날은?", "테디 번디가 태어난 날짜는?", "테디 번디의 어머니 이름은?", "테드 번디의 어머니는?", "출생증명서에 적힌 테드 번디의 아버지는?", "가족 일부가 번디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 사람은?" ]
테드 번디는 1946년 11월 24일 버몬트 주 벌링턴 소재 미혼모들을 위한 엘리자베스 룬드 홈에서 엘리너 루이지 코웰에게서 태어났다. 번디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번디의 출생증명서에는 아버지가 세일즈맨이자 공군 예비역인 '로이드 마셜'이라고 되어 있지만, 번디의 어머니인 루이지는 나중에 이름이 '잭 워싱턴'(Jack Worthington)인 것 같은 한 선원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수 년 후 탐정들은 해군이나 상선 인명록에서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의 기록을 찾지 못했다. 가족 일부는 번디의 아버지는 루이지 자신의 아버지인 사뮤엘 코웰(Samuel Cowell)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지만, 이것과 관련된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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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번디의 외조부모는 누구?", "테드 번디가 3살까지 살았던 곳은?", "번디는 누구에게 출생증명서를 직접 찾은 것이라고 하였나?", "번디는 몇 살때까지 외조부모의 필라델피아 집에서 살았나?", "번디가 자신의 진짜 출생 기록이 버몬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해는?", "번디가 여자친구에게 자신을 서자라고 부른 뒤 출생증명서 사본을 보여줬다고 한 인물은?", "테드 번디가 진짜 출생 기록이 있다는 것을 안 해는?" ]
번디는 3살때까지 외조부모인 사뮤엘 코웰과 엘리너 코웰의 필라델피아 집에서 살았다. 외조부모는 번디를 아들처럼 키웠는데 당시 혼외자로 인한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어린 테드까지도 외조부모가 번디의 부모이며 번디의 어머니는 누나라고 들었다. 번디는 차츰 진실을 알게되었지만, 상황을 감안해서 그 사실을 덮었다. 번디는 한 여자친구에게 사촌이 자신을 '서자'라고 부른 뒤에 번디의 출생증명서 사본을 보여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번디는 자서전작가 스티븐 미쇼와 휴 애인스워스에게 출생증명서는 직접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번디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자서전 작가이자 실제 범죄이야기 작가 앤 룰(Ann Rule)은 번디가 버몬트에 있는 진짜 출생 기록이 있다고 알게 된 1969년전까지 출생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했다고 믿었다. 번디는 일생에 걸쳐 자신의 어머니가 번디의 진짜 아버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번디의 진짜 혈통을 찾기 위해 자신을 떠난 것에 대해 분노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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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지의 여동생은 누구?", "번디의 외할머니가 앓고 있던 병은?", "테드 번디의 외할아버지는 누구?", "1987년 번디와 가족 일원들이 변호인단에게 말한 압제적으로 약자를 괴롭히며 편견이 심한 사람의 이름은?", "루이지의 여동생 이름은?", "번디가 묘사한 우울증으로 전기치료를 정기적으로 받는 소심하고 순종적인 여성은 누구인가?", "번디의 외조부이며 약자를 괴롭히고 편견에 가득찬 사람의 이름은?", "루이지의 여동생이며 외조부가 계단참 아래로 밀친 사람의 이름은?", "번디의 외할머니가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받던 것은?" ]
일부 인터뷰에서 번디는 자신의 외조부모에 대해 친근하게 말했고, 룰에게 외조부에 대해서 "닮았고", "존경하며", "의지했다"라고 말했다. 1987년 번디와 다른 가족 일원들은 변호인단에게 사뮤엘 코웰은 압제적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며 흑인, 이탈리아 출신자, 카톨릭 교도, 유대인을 혐오하는 편견이 심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번디의 외조부는 자신의 아내와 가족의 개를 때리고 이웃의 고양이 꼬리를 잡고 휘둘렀다. 한번은 외조부가 루이지의 여동생인 줄리아가 늦잠을 잦다고 계단참 아래로 밀치기도 했다. 외조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한번은 테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어봤을 때 몹시나 격분했다. 번디는 자신의 외할머니가 우울증을 위한 전기치료를 정기적으로 받는 소심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 묘사했고 죽어서 집을 떠날까봐 두려워했다. 테드는 심지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충격적인 행동을 보이곤 했다. 줄리아는 어느날 잠에서 깼을 때 코웰의 부엌에서 나온 칼들로 둘러싸인 채 줄리아의 3살 짜리 조카가 침대 옆에 서서 웃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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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지는 언제 자신의 성을 코웰에서 넬슨으로 바꾸었나?", "루이지가 자신의 가족들과 필라델피아에서 어디로 이주하였나?", "루이지가 조니 컬페퍼 번디를 언제 만났나?", "1950년 루이지의 성은 무엇으로 바뀌었나?", "조니 컬페퍼 번디의 직업은 무엇인가?", "루이지와 조니 사이에 친자식은 몇 명인가?", "1950년 루이지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향한 주는?", "루이지가 조니 컬페퍼 번디를 만난 곳은?", "테드가 조니에 대한 불평을 한 사람은?" ]
1950년에 루이지는 자신의 성(姓)을 코웰에서 넬슨으로 바꿨고, 가족 구성원 다수의 주장으로 필라델피아를 떠나 자신의 아들과 함께 사촌인 앨런과 제인 스콧과 살기 위해 워싱턴 주 터코마로 이주했다. 1951년 루이지는 병원 요리사인 조니 컬페퍼 번디를 타코마에 있는 성인 싱글 나이트에서 만났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 결혼을 했고 조니 번디는 정식으로 테드를 입양했다. 조니와 루이지는 그들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가졌고, 조니는 입양한 테드를 캠핑여행이나 다른 가족 활동에도 함께하려고 했지만 테드는 먼 거리를 유지했다. 테드는 훗날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조니에 대해서 자신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고, "매우 현명하지도 못했고", "많은 돈을 벌지도 못했다"라고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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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디는 무엇을 찾기 위해 이웃집들을 돌아 다녔나?", "테드 번디가 특히 주로 탐독한 다큐멘터리들은 무엇인가?", "테드 번디는 누구에게 편지를 보냈나?", "번디는 자신이 탐정잡지, 범죄소설 그리고 성범죄 관련 실제 범죄 다큐멘터리들을 탐독했다고 누구에게 말했나?", "번디가 자신은 절대로 사실기반의 탐정잡지를 읽은 적이 없고 생각만 해도 무섭다라고 주장한 내용의 편지는 누구에게 보낸 것인가?", "번디가 자신이 술을 많이 마셨고 옷을 벗고 있는 여자나 전에 본 적 없는 것들을 찾아 돌아다녔다고 말한 것은 누구와의 대화에서 였나?", "폴리 넬슨과 대화할 때 번디가 성범죄 관련하여 탐독했다고 한 것은?", "번디가 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전에 절대로 읽은 적이 없다고 한 것은?", "번디가 술을 많이 마셨고 가려지지 않는 창문을 찾아 밤늦게까지 돌아다녔다고 말한 인물은?" ]
번디는 자신의 전기 작가와 이야기했을 때 타코마 시절에 대해서 서로 다른 회상을 하기도 햇다. 미쇼와 애인스워스와 대화했을 때, 번디는 여자 나체 사진을 찾기위해 쓰레기 통을 찔러보면서 이웃집들을 돌아다녔다라고 말했다. 폴리 넬슨과 대화중에는 무척이나 탐정잡지나, 범죄소설 그리고 특히 사체나 불구가 된 사진이 있는 성범죄 관련 실제 범죄 다큐멘터리들을 탐독했다고 말했다. 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번디는 자신은 "절대로 이전에 사실기반의 탐정잡지를 읽은 적이 없고, 생각만으로도 무섭다."라고 주장했다. 미쇼와의 대화에서 번디는 술을 많이 마셨고 여자들이 옷을 벗고 있거나 혹은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가려지지 않는 창문을 찾아 밤늦게까지 지역사회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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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번디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는?", "테드번디가 고등학교 졸업후 입학한 대학교는?", "테드 번디가 1966년 퓨젯 사운드 대학교에서 어디로 전학갔나?", "번디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는?", "1966년 번디가 중국어를 배우기위해 들어간 대학교는?", "1968년 8월 마이애미에서 록펠러 대표단 자격으로 번디가 참가한 것은?", "1967년 번디가 사귄 대학교 친구의 이름은?", "번디가 1968년 참여한 행사는?", "번디가 브룩스와 헤어지고 향한 곳은?" ]
196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퓨젯 사운드 대학교에서 1년을 보냈고, 1966년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워싱턴 주 시애틀에 소재한 워싱턴 대학교으로 전학했다. 1967년 번디는 한 대학교 친구와 사귀게 되었는데, 번디의 전기에서 여러 필명으로 확인된 스테파니 브룩스였다. 1968년 초기에 번디는 학교를 그만두고 최저임금 급여수준의 직업들을 전전했다. 또한 넬슨 록펠러의 대선 캠페인을 위한 시애틀 사무소에서 자원해서 일하기도 했고, 8월에는 록펠러 대표단 자격으로 마이애미에서 있었던 196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후에 얼마되지 않아 브룩스는 번디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그녀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녀가 번디는 미성숙하며 야심이 없는 것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정신과의사 도로시 루이스는 훗날 이 위기를 "아마도 번디의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브룩스의 절교에 무척이나 당황한 나머지 번디는 콜로라도로 떠났고 점점 더 동쪽으로 가면서 알칸사스나 필라델피아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기도 했고 템플 대학교에 한 학기 등록하기도 했다. 룰이 믿기로는, 1969년 초반이 번디가 출생 기록을 담당하는 사무소에 방문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인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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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테드 번디는 워싱턴 주로 돌아왔나?", "엘리자베스 클로퍼의 고향은?", "엘리자베스 클로퍼가 비서로 일한 곳은?", "1969년 번디가 만난 엘리자베스 클로퍼는 어디 출신인가?", "1970년 중반에 번디가 다시 워싱턴 대학에 등록할 때 전공은 무엇인가?", "앤 룰이 집필한 번디의 전기 제목은 무엇인가?", "1970년대 중반에 번디가 등록한 대학교는?", "번디가 워싱턴 대학교에서 전공한 학문은?", "번디와 시애틀 자살 핫라인 위기 센터에서 같이 일했으며 번디의 전기를 쓴 사람의 이름은?" ]
1969년 가을에 번디는 위싱턴주로 돌아왔는데, 이때 번디는 엘리자베스 클로퍼를 만났는데 유타주 오그던 출신의 이혼녀였다. 클로퍼는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비서로 일했다. 그들의 관계는 1976년 유타주에서 번디의 첫 번째 투옥때까지 지속된다. 1970년 중반에 번디는 현실에 충실하며 목표에 집중해서 워싱턴 대학교에 다시 등록하는데, 이번에는 전공이 심리학이었다. 번디는 우수한 학생이 되었고, 교수진에게서도 인정받았다. 1971년 번디는 시애틀 자살 핫라인 위기 센터에서 일을 구했는데, 그곳에서 앤 룰을 만나서 같이 일하게 되었다. 룰은 전직 시애틀 경찰관이었고 나중에 번디의 전기들 중에서 최고인 《내 옆의 이방인》(The Stanger beside me)을 쓴 범죄물 작가가 된다. 앤 룰은 그 당시 번디의 성품에 별다른 것을 보지 못했고, 번디를 "친절하며 배려심이 깊고 공감능력도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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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번디가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한 해는?", "테드번디가 1972년 졸업한 대학교는?", "워싱턴 주 공화당 의장을 지낸 사람은?", "1972년 번디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누구의 재선 캠페인에 합류했나?", "번디는 누구를 따라다니며 선거 유세 연설을 녹음해서 에반스 캠프팀이 분석하도록 도왔나?", "에반스가 재선에 성공한 후 번디는 누구의 사무보조원으로 고용됐나?", "번디가 대학생인 것처럼 행동하며 미행하고 연설을 녹음한 사람은?", "번디를 사무보조원으로 채용한 사람은?", "번디가 유타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 허가를 받은 해는?" ]
1972년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번디는 주지사 다니엘 J. 에반스의 재선 캠페인에 합류했다. 대학생인 것처럼 행세하며 에반스의 적수인 전 주지사 앨버트 로젤리니를 따라다니면서 미행했고, 선거 유세 연설을 녹음해서 에반스 캠프팀이 분석하도록 도왔다. 에반스가 재선에 성공한 뒤에 번디는 워싱턴 주 공화당 의장인 로스 데이비스에게 사무보조원으로 고용됐다. 데이비스는 번드를 좋게 회상했고 번디를 "똑똑하며 진취적이며... 그리고 체제 신봉자"라고 묘사했다. 1972년 초기에 번디는 별로 좋지 못한 로스쿨 입학 시험 성적에도 불구하고 퓨젯 사운드 대학교와 유타 대학교 로스쿨 입학허가를 받았다. 번디는 에반스, 데이비스 그리고 다수의 워싱턴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진에게 추천서를 받은 것이 강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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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테드 번디는 어느 대학교 로스쿨 학생이 되었는가?", "테드 번디는 언제 로스쿨에 입학하였나?", "테드 번디는 누구에게 브룩스를 자신의 약혼녀라 소개하였나?", "번디가 브룩스와 관계를 다시 전개한 해는?", "번디가 브룩스를 만나면서 동시에 데이트한 여성의 이름은?", "1973년 번디가 로스쿨 학생으로 다니게 된 대학교는?", "1973년 번디가 관계를 다시 시작한 사람은?", "번디가 브룩스를 약혼녀라고 소개한 사람은?", "1973년 번디가 로스쿨에 들어간 학교는?" ]
1973년 여름에 캘리포니아행 공화당 출장기간에 번디는 브룩스와의 관계를 다시 전개했는데, 브룩스는 번디의 두드러진 법률적 정치적 커리어의 정점에 위치한 진중하고 헌신적인 직업인으로서의 변모를 경이로워했다. 번디는 또한 계속해서 다른 여자는 없는 것처럼 클로퍼와 데이트를 했다. 1973년 가을에 번디는 퓨젯 사운드 대학교 로스쿨의 학생이 되었고 브룩스와의 연애로 계속했는데, 브룩스는 번디와 함께 있기 위해 여러번 시애틀로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들은 결혼에 대해 의논을 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번디가 브룩스를 데이비스에게 자신의 약혼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4년 1월 번디는 갑자기 모든 만남을 중단했는데 브룩스의 전화와 편지에는 답신이 없었다. 한 달 뒤 마침내 번디와 전화통화에 성공한 브룩스는 번디에게 아무 설명없이 갑자기 교제관계를 끝낸 이유를 번디에게 물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번디가 대답하기를 "스테파니, 당신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브룩스는 다시는 번디와 이야기할 수 없었다. 훗날 번디가 설명하기를 "나는 단지 내가 브룩스와 결혼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길 원했을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브룩스는 1968년 자신이 먼저 번디를 거절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번디가 교제관계를 치밀하게 계획해서 먼저 거절한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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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디는 어디서 처음으로 납치를 시도하였나?", "테드번디가 언제 아틀랜틱 시티에서 두명의 여성을 살해했나?", "번디의 관해 문서화된 최초의 살인은 언제로 되어있나?", "번디는 1969년 처음으로 납치를 시도한 장소가 어디라고 넬슨에게 말했나?", "번디는 1969년 아틀랜틱 시티에서 몇 명의 여성을 살해했다고 아트 노만에게 말했나?", "번디의 문서화된 최초의 살인은 번디가 몇 살때인가?", "번디가 1969년 애틀랜틱 시티에서 두 명을 살해했다고 말한 사람은?", "번디가 8살때 납치한 사람은?", "문서화된 자료로 볼 때 번디가 최초로 살인을 저지른 나이는?" ]
번디가 언제부터 혹은 어디서부터 여성들을 죽이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일치된 의견은 없다. 번디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말했고 자신의 초기 범죄들에 대한 특정 사항들을 밝히기를 거부했는데, 사형집행을 앞둔 며칠 전에는 후기 범죄들에 대해서는 여러 장의 그림으로 묘사로 고백했음에도 말이다. 번디는 넬슨에게 1969년 뉴저지주 오션 시티에서 처음으로 납치를 시도했지만 1971년 어느 시점에 시애틀에서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번디는 정신과의사 아트 노만에게 필라델리아에 있는 가족을 만나는 동안인 1969년에 아틀랜틱 시티에서 두 명의 여성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번디는 강력반 형사 로버트 D. 케플에게 1972년 시애틀에서의 한 번의 살인과 1973년 워싱턴주 툼워터 인근에서 한 히치하이커와 연관된 다른 살인에 대해서 암시는 줬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절했다. 룰과 케플 둘 다 번디가 십대시절부터 살인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정황증거는 1961년에 번디가 8살 나이의 터코마의 앤 마리 버르를 유괴해서 납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의 혐의이고 번디는 반복해서 부인했다. 번디에 관해 문서화된 최초의 살인은 번디가 27살때인 1974년의 것이다. 자백에 의하면 번디는 필요한 기술들을 완전히 익혀서 범죄현장에서 최소한의 범의학 증거만 남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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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애틀에서 남동쪽으로 60마일 떨어진 올림피아 소재의 대학교는?", "시애틀 남동쪽 110 마일 떨어진 앨랜스버그 소재의 대학은?", "시애틀에서 남쪽으로 260마일 떨어진 코밸리스 소재의 대학은?", "3월 12일 사라진 19살 여대생 도나 게일 맨슨이 다니던 대학교는?", "4월 17일 센트럴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 모임을 마치고 기숙사로 오던 중에 사라진 여대생의 이름은?", "5월 6일 오리건 주립 대학의 기숙사를 떠나 커피를 마시려 나가다 사라진 여대생의 이름은?", "19살인 도나 게일 맨슨이 기숙사를 떠나 향한 곳은?", "저녁 어드바이서 모임을 마치고 기숙사로 오던 중 사라진 사람은?" ]
약 한 달에 한 명 정도로 여자 대학생들이 계속해서 사라졌다. 3월 12일 시애틀에서 남동쪽으로 60 마일(97 km) 떨어진 올림피아 소재 에버그린 주립 대학의 19살 도나 게일 맨슨은 기숙사를 떠나 캠퍼스에 열린 재즈 콘서트장으로 향했지만, 그곳에 도착할 순 없었다. 4월 17일에는 수잔 엘라인 랜코트가 사라졌는데 시애틀 남동쪽 110 마일(180 km) 떨어진 앨랜스버그 소재 센트럴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의 저녁 어드바이서 모임을 마치고 기숙사로 오는 중이었다. 두 명의 여성 센트럴 워싱턴 대학 학생들이 나중에 누군가를 만났던 사실(한 명은 랜코트가 사라진 밤에, 다른 한 명은 3일 전 밤에)에 대해 알리려고 나섰는데, 한 쪽 팔에 깁스를 한 남자가 한 더미의 책들을 갈색 혹은 탄색 폭스바겐 비틀 자동차에 실어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5월 6일에는 시애틀에서 남쪽으로 260 마일(420 km) 떨어진 코밸리스 소재 오리건 주립 대학교에서 로베르타 캐슬린 팍스가 기숙사를 떠나 학생 조합 빌딩에 있는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려고 나갔지만,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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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1일 시애틀-터고마 국제 공항 인근 버리엔에 있는 모텔에서 사라진 사람은?",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중인 조지안 호킨스가 사라진 날은?", "22살 브렌다 캐롤 볼이 사라진 날짜는?", "6월 1일 사라진 브렌다 캐롤의 나이는?", "6월 11일 사라진 조지안 호킨슨가 다니던 대학교는?", "사라진 모든 여성들의 인종은?", "6월 11일 이른 시간에 사라진 워싱턴 대학교 학생의 이름은?" ]
킹 카운티 보안관 사무소와 시애틀 경찰서의 형사들의 근심은 커져만 갔다. 확실한 물리적 증거가 없었으며 사라진 여성들이 젊고, 매력적이며 긴 머리결을 소유한 백인 대학생이라는 점만 빼면 거의 공통점이 없었다. 6월 1일 22살의 브렌다 캐롤 볼이 시애틀-터고마 국제 공항인근 버리엔에 있는 플레임 여관을 떠난 뒤에 사라졌다. 브렌다가 팔에 깁스를 한 갈색 머리의 남자와 주차장에서 대화하고 있던 것이 마지막 목격이었다. 6월 11일 이른 시간에 워싱턴 대학교 학생 조지안 호킨스가 사라졌는데 남자친구 주거지와 여학생 클럽하우스 사이의 밝게 불이 켜진 길을 걷다가 그랬다. 바로 다음날 아침 3명의 시애틀 살인사건 전담 형사들과 법과학 요원들이 길 전부를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호킨스의 실종이 기사화된 이후, 목격자들이 그 날 밤에 한 남자가 기숙가 인근 도로 뒤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목발을 한 상태로 가방을 옮기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 여성은 그 남자가 자신에게 자신의 밝은 갈색 폭스바겐 비틀 차량으로 가방을 옮기는 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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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실종자 6명과 스팍스의 끔찍한 폭행 사건에 관한 기사들이 보도된 지역은?", "여성 실종자 6명과 스팍스의 끔찍한 폭행 사건이 보도 된 후 급격하게 줄어든 것은?", "여성 실종자 6명과 스팍스의 끔찍한 폭행사건을 어떤 보도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나?", "워싱턴주와 오리건 전역에 몇 명의 여성 실종자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었나?", "경찰이 발견한 실종 사건의 공통점 중 실종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어디 근처였나?", "여성 실종자들은 모두 무엇을 입고 있었나?", "모든 실종이 일어난 곳 부근에 있던 것은?", "대부분의 범죄현장에서 목격된 차량은?", "여성 실종자 6명에 대해 보도되자 급격히 줄은 것은?" ]
여성 실종자 6명과 스팍스의 끔찍한 폭행 사건에 관한 기사들이 워싱턴주와 오리건 전역에 신문과 텔레비전으로 보도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가 확산되었고 여성 히치하이킹은 급격히 줄었다. 사법당국은 사태해결에 관한 압력을 받게 되었지만 물리적 증거 부족이 그들을 괴롭혔다. 경찰은 기자들에게 약간의 정보도 줄 수가 없었는데 조사에 방해가 될까봐 그런 것이다. 희생자들 사이에서 진전된 공통점들이 발견되었다. 실종은 모두 밤에 작업 중인 건설현장 인근에서 일어났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앞둔 일 주일 이내의 시기였다. 모든 피해자는 슬랙스나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범죄현장에서 깁스나 팔걸이 붕대를 하고 갈색 혹은 탄색 폭스바겐 비틀 차량을 모는 남자가 목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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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북서부 살인 사건의 마지막 사건이 일어난 날짜는?", "태평양 북서부 살인 사건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곳은?", "7월 14일 테드 번디에 의해 유괴되어 살해 당한 킹 카운티 소년법정에서 보호관찰관으로 일하였던 23살의 여자는 누구?", "7월 14일 레이크 새머미시 주립 공원에서 일어난 사건의 희생자는 몇 명인가?", "23살의 제니스 앤 오트는 어디에서 보호관찰관으로 일했나?", "피크닉을 갔다가 화장실에서 실종된 여성의 이름은?", "제니스 앤 오트의 직업은?", "피크닉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이름은?", "번디가 스티븐 미쇼에게 나스런드와 함께 돌아갔을 때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 사람은?" ]
태평양 북서부 살인 사건의 마지막은 7월 14일 일요일 시애틀 동쪽 20 마일(32 km) 떨어진 이사쿠아 소재 레이크 새머미시 주립 공원에서 2명의 여성 유괴사건이었다. 5명의 여성 목격자들은 팔걸이 붕대를 한 테니스 운동복을 입고 아마도 캐나다나 영국 같은 밝은 억양의 젊고 매력적인 남자에 관해 묘사했다. 자신을 '테드'라고 소개한 남자가 그들에게 탄색 혹은 갈색의 폭스바겐 비틀 자동차에서 보트를 꺼내는 걸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4명은 거절했지만 한 사람은 그 남자와 함께 자동차까지 갔고, 보트가 없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 3명의 추가적인 목격자들은 그 남자가 킹 카운티 소년법정에서 보호관찰관로 일하는 23살의 제니스 앤 오트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았는데, 보트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남자와 함께 해변을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 약 4시간 후에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던 19살 데니스 마리 나스런드가 피크닉을 가서 화장실에 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번디는 스티븐 미쇼에게 말하기를 번디가 나스런드와 함께 돌아갔을 때 오트는 아직 살아 있었다고 했지만 나중에 번디는 루이스와의 인터뷰에서 처형 전날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사실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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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번디가 아이다호에서 아직까지 미확인된 히치하이커를 강간한 다음 교살했던 날은?", "10월 2일 테드 번디가 어디서 16살 나이의 낸시 윌콕스를 납치핬나?", "낸시의 유해가 묻힌 곳은?", "9월 2일 테드는 어디에서 히치하이커를 강간하고 교살했나?", "10월 2일 테드가 할러데이에서 납치한 여성의 이름은?", "번디가 사형집행 전에 고백하기 전까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던 살인사건의 갯수는?", "테드에게 살해당할 때 낸시 윌콕스의 나이는?", "테드가 낸시 윌콕스를 납치한 곳은?" ]
달이 지나자 새로운 일련의 살인이 시작되었는데, 2건은 번디가 사형집행 전에 고백할 때까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9월 2일 테드는 아이다호에서 아직까지 미확인된 히치하이커를 강간한 다음 교살했고, 그런 다음 강가 근처에서 시체 잔해를 처리했던지 아니면 다음날 시체를 사진찍고 훼손시켰다. 10월 2일 테드는 솔트레이크시티 외곽 할러데이에서 16살 나이의 낸시 윌콕스를 납치해서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끌고가서 병적인 충동을 충족시기기 위한 목적으로 강간한 후에 놓아줬다. 그러나 번디는 말하기를 소리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발적으로 낸시를 교살했다고 말했다. 낸시의 유해는 할러데이 남쪽 200 마일 떨어진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 근처에 묻혔고, 결코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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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훈이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공부한 전공은?", "윤정훈의 사역 내용 중 미국 시카고에서 활동했던 교회는?", "2013년 윤정훈이 탈북난민구출네트워크에서 맡은 직급은?", "윤정훈이 졸업한 대학교는 어디인가?", "윤정훈의 출생연도는 언제인가?", "대한민국의 모괴자 윤정훈이 학사 학위를 취득한 대학교는?", "2013년 기준으로 밝은 인터넷 만들기 운동본부 공동대표, 탈북 난민 구출 네트워크 미디어 팀장 등을 맡았던 인물은?" ]
윤정훈 (1974년 ~ )은 대한민국의 목회자이다. 총신대학교 신학과 학사(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을 졸업하였고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 설교학과(Th.M)를 구약학 전공으로 수료하였다. 경기도 남양주 소재 주평강교회, 서울시 역삼동 소재 충현교회, 미국 시카고 소재 갈보리교회, 서울시 둔촌동 소재 오륜교회 등에서 교육전도사, 강도사, 교육목사, 협동목사, 부목사로 사역했다. 2013년 현재 밝은인터넷만들기운동본부 공동대표, 그린콘텐츠무브먼트 대표, idisciple(한국교회인터넷선교전략본부) 대표, 한국시민단체협의회 SNS위원장, 기독교싱크탱크 사무총장, 탈북난민구출네트워크 미디어팀장 등을 맡고 있고 또 소셜미디어커뮤니케이션 CEO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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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이 지원하고 있다는 윤정훈의 발언이 담긴 녹취록을 공개한 매체는?", "윤정훈을 지원한 국정일보의 발행인이 당원으로 있는 정당은?", "박근혜가 SNS 여론 조작 보고를 받은 사실이 공개된 해는?", "윤정훈이 보고회에서 만든 조직의 명칭은 무엇인가?", "새누리당 당원이 발행인으로 있는 출간지의 이름은 무엇인가?", "윤정훈이 조직한 조직으로 SNS 여론 조작을 위해 결성한 조직은?", "윤정훈이 새마음포럼을 지원하고 있다고 발언한 기관은 무엇인가?" ]
새누리당과 박근혜측, 윤정훈은 서로의 연관성을 부인하였으나, 2012년 12월 17일에, 박근혜가 2012년 9월 17일 30명을 동원하여 3백만명에게 노출시켜 여론 형성을 해간다는 SNS 여론 조작 보고를 받은 사실이 공개되었다. 특히 이 보고회에는 '새마음포럼'을 조직하여 활동을 한다고 하였는데 윤정훈의 사무실에서 압수된 파일철에 새마음포럼이라는 제목이 붙은 파일철이 발견되었다. 한편 나는꼼수다에서는 윤정훈이 '국정원이 지원하고 있다', '공짜로 하는게 아니다'라고 발언한 녹음을 공개했다. 윤정훈은 녹음된 발언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은 시인하며 국정일보, 국정방송의 발행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잘못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국정일보는 새누리당 당원이 발행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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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9월 12일 박쥐에 물려 광견병에 감염된 학생의 이름은?", "광견범 검사를 받은 제나 기즈가 후송된 병원은?", "제나 기즈의 광견병 감염을 확인한 미국의 기관은?", "제나기즈가 교회에서 무엇에게 손을 물렸나?", "제나기즈가 박쥐에 물려 걸린 병은?", "하나의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현상을 무엇이라 하는가?", "미국 CDC의 검사에 의해 어떤한 병의 감염이 확인되었나?" ]
2004년 9월 12일, 미국의 성모 마리아 스프링스 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제나 기즈(당시 15세)는 자신의 고향 위스콘신 근처의 교회에 가다가 박쥐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박쥐가 검지를 살짝 물게 되었고, 과산화 수소로 치료를 받았다. 가족들은 이 사고에 대해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37일 후에 제나의 신경계에서 이상 증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후 성 아그네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는, 섭씨 39도에 달하는 열과 다시증(하나의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현상) 증상이 발견되었으며, 횡설수설하고 왼팔을 물어뜯는 등 이상행동이 나타났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치료를 받지 않은 상태였고 입원 당시 이미 백신으로 치료할 수 있는 시기를 넘긴 상태였다. 통상적인 치료에 반응이 없었고, 일반 병원체 검사에서도 음성이 나왔다. 증상이 악화되어 가자, 제나 기즈의 어머니는 제나가 박쥐에 물렸던 사실을 언급했고, 제나는 곧 광견병 검사를 받았으며 윌로우바이 박사가 있는 위스콘신 주의 와우와토사 시에 있는 위스콘신 어린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얼마 후 미국 CDC의 검사에 의해 광견병 감염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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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견병 치료를 위한 실험적 방법을 고안한 연구팀 담당 의사는?", "뇌 자체에는 거의 손상을 입히지 않으나, 일시적인 뇌의 기능장애를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병의 이름은?", "광견병의 연구와 제나의 치료를 위해 제나에게 실험을 했던 박사는?", "광견병 실험을 위해 바이러스로부터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 제나를 혼수상태로 만들었는가?", "윌로우바이의 연구팀은 어떠한 병의 치료를 위한 실험적인 방법을 만들어 내었나?", "어떠한 항체가 면역체계를 통해 생성되기를 기다리며 리바비린, 아만타딘 등의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하였나?" ]
의학사에 의하면 광견병으로 인한 죽음의 대부분은 일시적인 뇌의 기능장애가 원인이었으며, 이것은 뇌 자체에는 거의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윌로우바이의 연구팀은 광견병 치료를 위한 실험적인 방법을 만들어냈다. 제나의 부모는 제나가 이 실험을 통해 치료를 받는 데에 동의하였다. 윌로우바이는 제나를 인위적인 혼수상태에 빠뜨리고자 했으며, 이것은 제나의 뇌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연구팀은 제나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체내의 면역 체계가 광견병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스스로 생성시킬 수 있을 만큼 제나가 오래 생존해주길 기대하였다. 제나에게는 케타민, 미다졸람, 페노바르비탈등을 투여하여 뇌 활동을 억제했으며, 광견병에 대한 항체가 면역체계를 통해 생성되기를 기다리며 리바비린, 아만타딘 등의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하였다. 6일 후, 제나의 면역체계 동작이 확실히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나자 인위적인 혼수상태를 중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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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 입학한 제나를 평가하였던 신경과 의사의 이름은?", "제나가 광견병으로부터 해방됐다고 공식으로 인정받은 것은 병원에 들어온 몇일 뒤 인가?", "병원에 들어온후 며칠이 지나자 제나는 자신의 신체에서 광견병 바이러스가 사라졌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격리 병동에서도 나올 수 있었나?", "제나가 대학에 입학하자 그녀의 상태에 대해 놀랍도록 잘 회복되었다며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평한 인물의 이름은?" ]
병원에 들어온 후 31일이 지나자, 제나는 자신의 신체에서 광견병 바이러스가 사라졌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격리 병동에서도 나올 수 있었다. 제나가 겪었을 수도 있는 뇌 손상에 대한 염려가 있었지만, 약간의 장애를 겪은 뒤에는 광견병 발병 및 치료 과정이 그녀의 인지능력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제나는 수 주간에 걸친 회복요법을 마친 후 2005년 1월 1일 퇴원하였다. 동년 초에 혼자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학교에 복귀했으며, 자동차 운전을 시작하였다. 미네소타 소재 비영리 의학 재단인 마요 클리닉의 신경과 의사 케네스 맥은, 제나가 대학에 입학하자 그녀의 상태에 대해 "놀랍도록 잘 회복되었다"며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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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이 러시아의 침입에 의해 핀란드를 양도하게 된 해는 언제인가?",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가 폐위당한 뒤 즉위한 왕은 누구인가?", "나폴레옹 1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체결한 강화조약은 무엇인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대륙봉쇄에 참가한 인물로써 스웨덴 총사령관에 등극한 인물은 누구인가?", "베르나토르가 프랑스와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국가는?", "스웨덴은 러시아의 침입 때문에 어느 나라를 넘겨줍니까?", "베르나도트는 왕세자와 함께 어떤 지위에 오른 후, 실권을 얻습니까?" ]
스웨덴은 제4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입해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선 다음에도 계속 영국과의 동맹을 고수하다가 1808년 이를 명분으로 한 러시아의 침입을 받고 7세기 이상 유지해온 핀란드를 양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이었던 구스타프 4세가 폐위당하고 아들이 없는 카를 13세가 즉위하여 1810년 나폴레옹의 소극적 지지 하에 프랑스의 원수 베르나도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왕세자와 스웨덴군 총사령관에 오른 후 실권을 획득한 베르나도트는 자주중립노선을 추구, 이중 외교를 통해 한편으로는 나폴레옹의 요구에 부합하여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와 동맹해 대륙 봉쇄에 참가하고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동시에 영국, 러시아와 비밀리에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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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군이 러시아 원정을 시작한 날짜는?", "빌뉴스에서 후퇴한 알렉산드르 1세가 총지휘권을 데 톨리에게 넘긴 뒤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이동한 곳은?", "프랑스의 러시아 원정 당시 러시아군을 이끌었던 지휘자는?", "1812년 6월, 러시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건너갔던 강의 명칭은?", "원정 당시 빌뉴스 후퇴 직 후 데 톨리에게 지휘권을 넘기며 이동한 곳은?", "7월 중순에 리가를 점령한 군대는 누가 지휘했습니까?", "드리사 요새는 어떤 나라군의 침공을 받으면 주요 거점으로 쓰려고 했습니까?" ]
1812년 6월 24일 프랑스군이 국경인 네만 강을 넘어 러시아 원정을 시작했다. 바클레이 데 톨리가 지휘하는 러시아의 제 1 서부군은 10만여 이상의 대군이었으나 나폴레옹군에 비하면 그래도 크게 열세였다. 데 톨리는 네만 강가의 흐로드나와 카우나스에서 원정군의 전위 부대와 맞닥뜨린 후 가망 없어 보이는 싸움을 피해 빌뉴스를 버리고 드리사로 후퇴하면서 좀 더 남서쪽 국경 지대에 주둔해 있던 바그라티온이 지휘하는 약 3만여 명의 제 2 서부군에게 합류를 요구했다. 빌뉴스에서 후퇴한 후 알렉산드르 1세는 데 톨리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주고 모스크바를 경유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 드리사 요새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받으면 전장으로 선택할 드리사 주변의 주요 거점으로 쓰기 위해 세운 시설이었지만 원정군의 우세를 감당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한 데 톨리는 드리사 역시 포기하고 내륙으로의 후퇴를 계속했다. 7월 중순에는 마크도날의 군대가 리가를 점령했다. 프로이센군 2만 3천명이 주력인 이 방면의 3만 2천여 원정군은 더 이상 공세로 나가지 않고 12월까지 라트비아에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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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원정군의 탈영병들은 붙잡히면 대개 어떻게 되었는가?", "러시아 원정군의 인마 손실이 유독 높았던 때는 언제인가?", "원정군의 낙오자들이 항상 위험감지를 해야만 했던 부족은 어디인가?", "의약품이나 생필품등의 고갈로 병사들이 얻게 된 전염병은 무엇인가?", "원정군의 악조건으로 탈영 후에도 기습의 위험을 감지해야 했던 부족은 무엇인가?", "러시아 원정 초반에 원정군 기병을 와해할 정도로 큰 데미지를 입혔던 것은 어떤 자원의 부족 때문입니까?", "러시아 원정 당시, 낙오자들에게는 코자크 족과 어떤 존재의 습격이 찾아옵니까?" ]
7월 한여름의 무더움과 강행군으로 인한 인마의 손실이 유난히 높았다. 특히 말먹이 풀의 부족은 큰 전투 없이도 원정 초반 거의 10만에 달하던 원정군 기병을 점차 와해할 정도였다. 위생 환경은 극도로 불량해서 행군로 주변에 시체와 오물이 널렸고 위생대의 수송 물자들은 다른 수레들처럼 뒤에 처져서 제대로 필요한 의약품을 적시에 공급할 처지가 못 되었다. 티푸스 등의 전염병도 돌기 시작해 나중에 겨울이 되자 죽은 동료의 옷마저 껴입는 일이 허다해졌을 때 이로 인해 병이 빠르게 퍼지게 되었다. 탈영병도 속출했는데 이들은 붙잡히면 대개 총살되었으므로 전쟁으로 인한 어수선함을 기회로 여겨 주위를 약탈하며 떠돌거나 은적했다. 낙오자들도 적지 않게 생겼는데 이들에게는 코자크 족이나 러시아 농부들의 습격 등으로 인한 위험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양군이 소비하는 식량과 물자는 엄청났고 원정군은 보통 러시아군이 후퇴한 길을 따라 이동했으므로 행군로 인근은 양쪽에 의해 완전히 털리게 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전투보다는 기타 악조건과 군기 저하로 인해 나폴레옹군 본대는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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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라즈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길목의 방어를 맡은 장군은 누구인가?", "마힐루에서 벌어진 다부의 프랑스군과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사이의 전투에서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의 패배로 어디로 향하는 길목이 막히게 되었는가?", "마힐루에서 바그라티온의 군대를 격파한 프랑스군의 수장은 누구인가?", "혈전을 벌이고 나폴레옹이 겨울숙영지로 선택한 곳은?", "비텝스크 길이 막혀서 어떤 곳이 새로운 합류 지점으로 뽑힙니까?", "마힐루에서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어느 쪽의 전투가 벌어집니까?" ]
폴라즈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통하는 길목을 방어하도록 비트겐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는 2만 5천의 병력을 남겨둔 데 톨리는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쪽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비텝스크로 이동했다. 러시아의 두 서부군은 여기서 합류해 원정군에 대항할 계획이었으나 7월 23일에 마힐루에서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바그라티온의 군대가 패하고 비텝스크로 가는 길이 막혔다. 그 결과 스몰렌스크가 새로운 합류 지점으로 선별되었고 데 톨리는 휘하 전군과 함께 비텝스크를 떠나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7월 28일 무방비 상태의 비텝스크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진격을 멈추고 도시를 겨울 숙영지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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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중반 나폴레옹의 추격 재개와 러시아군의 퇴각 중단 및 전투 태세 돌입으로 벌어진 전투는 무엇인가?", "스몰렌스크는 대부분 어떤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가?", "데 톨리가 10만병력을 배치한 곳의 지역은?", "미쉘 네원수가 지휘하여 지형을 불리함에도 격퇴한 전투는?", "러시아가 퇴각을 멈추고 본대와 합류 후 프랑스군과 전투를 치른 전투는 무엇인가?", "러시아가 전투 태세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8월의 전투는 무엇입니까?", "스몰렌스크 공격을 지휘한 네 원수가 러시아군 후위대와 치른 전투는 무엇입니까?" ]
그러나 우세를 이용해 러시아군 본대와 승부를 가리기로 마음먹은 나폴레옹은 추격을 곧 재개했고 8월 초에 드디어 합류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군도 퇴각을 그만두고 전투 태세에 들어가 8월 중반 스몰렌스크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데 톨리는 스몰렌스크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전개했는데 바그라티온이 이끌고 온 3만여 명은 도시를 방위하도록 하고 나머지 10만여 병력은 날개와 후방의 도로고부시에 배치했다. 원정군의 대대적인 포격을 받게 된 스몰렌스크는 목재 건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의도적 방화까지 겹쳐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나폴레옹군이 계속 도시 중심부로 육박해오자 데 톨리는 결전을 피해 군대에게 도시를 벗어나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스몰렌스크 공격을 최전선에서 지휘하던 네 원수는 3만여 병력으로 러시아군을 추격해 다음 날 데 톨리가 직접 지휘하는 4만여 명의 러시아군 후위대와 발루티노 전투를 치렀다. 이는 무승부로 끝났고 러시아군은 퇴각할 기회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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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군과 뒤따라온 나폴레옹군이 모스크바로 가는 길 근처에서 격전을 벌인 전투의 이름은 무엇인가?", "보로디노 전투에서 양군의 병력은 어느 정도였는가?", "모스크바 가는 길목에서 수적으로 대등했던 혈전을 펼친 전투는?", "보로디노 전투에서 전사시킨 러시아군의 지휘관 이름은?", "보로디노 전투를 통해 프랑스군에서 발생한 사상자수는 얼마나 되는가?", "보르디노 전투는 모스크바 길목에서 러시아군이 어떤 군과 벌인 격전입니까?", "러시아 원정 전투 초반에 보르디노 마을을 점거한 좌익은 누가 지휘합니까?" ]
여기서 러시아군은 모스크바로 가는 길 부근에서 뒤따라온 나폴레옹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보로디노 전투다. 양군은 각각 13만여 병력에 600여 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어 숫적으로는 거의 대등했다. 전투 초반은 나폴레옹의 뜻대로 풀려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이끄는 좌익은 보로디노 마을을 점거한 다음 우익에 포진해 있던 러시아군 주력을 묶었고 다부가 이끄는 중앙의 주력은 러시아군 제 1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에 성공하고 우익은 러시아군 극좌익을 무너뜨리고 지휘관 투취코프 장군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포니아토프스키의 기병대가 러시아군 좌익을 우회하는 것을 심하게 방해받아 결국 정면 공격만 남게 되었고 끝없는 포격으로 인해 연기가 전장의 시야를 가린 상황에서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전력의 3할 이상을 잃은 데다 나폴레옹의 근위대가 개입하는 것을 염려한 쿠투조프가 퇴각을 지시하고 나폴레옹은 사투를 벌인 병사들의 상태를 참작해 추격 명령을 내리지 않아 전투는 일단락되었다. 프랑스군도 거의 3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나폴레옹조차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이 경험한 가장 끔찍한 전투였다고 묘사했다. 이 전투에서는 수많은 상급 장교들도 희생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그라티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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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은 어디에 머무르면서 알렉산드르 1세의 협상 요청을 기다렸는가?", "나폴레옹은 재차 전쟁이 일어나기 전 특무대사로 누구를 쿠투조프에게 사절로 보냈는가?", "나폴레옹의 평화협정에 끝내 찬성하지 않았던 러시아의 대표적 인물은?", "나폴레옹이 쿠투조프를 통해 협정달성을 목표로 했던 인물은?", "협정을 위해 나폴레옹이 머물런 궁전은 어디인가?", "나폴레옹은 화재 진압 후에 어디 머무릅니까?", "모스크바가 무너지고 러시아에서 프랑스와 화평을 원했지만 누가 반대했습니까?" ]
화재를 진압한 후 다시 크렘린 궁에 머무르면서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가 협상을 청해오기를 기다렸으나 무소식이었고 이에 스스로 평화 협정을 제안했으나 알렉산드르는 회답하지 않았다. 차르가 모스크바 함락 이후에도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는 교신을 몇 차례 더 시도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시간만 흘렀다. 이 동안에 보로디노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던 러시아 군 본대는 병력과 물자를 보충할 여유를 얻었고 남부에서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이, 북부에서는 핀란드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이 나폴레옹군과의 거리를 계속 좁혀 왔다. 10월 초 알렉산드르 1세는 쿠투조프에게도 교섭을 금지시켰고 나폴레옹은 재차 전쟁 발발 전까지 특무 대사로 러시아에 주재하던 로리스통 장군을 쿠투조프에게 사절로 파견했으나 결국 뜻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편 영국은 러시아가 프랑스와 강화를 맺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자금과 물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외교적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나갔다. 모스크바의 함락 이후 러시아 상류층 사이에서도 프랑스와의 화평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해졌으나 알렉산드르 1세는 끝내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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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군이 비트겐슈타인의 군대에 합류하면서 생 시르의 군대를 공격해 탈환한 지역의 이름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떠난 시점의 본대 병력 수는 어느 정도였는가?", "비트겐슈하인과 합류하여 생시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탈환한 곳은 어디인가?", "나폴레옹이 떠난 후 후발대로 떠난 그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생시르의 군대를 격파하여 승기를 잡은 남아있던 러시아의 군대는?", "나폴레옹이 철군을 결정했을 때에 러시아군은 어디서 남하하고 있었습니까?", "모스크바를 끝내 떠난 나폴레옹군 본대는 대략 얼마 정도입니까?" ]
협정이 성사되지 않은데다가 코자크 기병대가 수송대와 전령을 습격하는 일이 잦아지고 겨울이 다가오자 보급이 날이 갈수록 불확실해지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여긴 나폴레옹은 철군을 결정했다. 이 무렵 핀란드에서 남하하던 러시아군이 비트겐슈타인의 군대와 합류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우세해진 전력으로 생 시르의 군대를 공격해 폴라즈크를 탈환했다. 10월 19일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떠났고 10월 말에는 남아 있던 후위부대가 퇴각을 개시했다. 탈취한 물건들을 실은 수레가 가득했으나 부상병이나 환자들은 다수가 도시에 남겨져 운명에 맡겨졌다. 실제로 이들은 맨 먼저 입성한 코자크 족과 도시민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고 후에 빌나에서도 비슷한 참극이 벌어졌다.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이 꽤 되었는데 나폴레옹이 입성한 후에도 도망가지 않았던 이들은 원정군이 도시를 떠난 후 있을 보복이나 무질서 상황을 염려해 후퇴 행렬에 가담했다. 이 시점에서 모스크바를 떠난 나폴레옹군 본대는 대략 9만 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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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은 누구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모야이스크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가?", "비아즈마의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원정군은 얼만큼의 병력을 잃은 뒤에나 스몰렌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는가?", "비아즈마의 공세에도 활로를 뚫고 쿠투조프가 도착한 목적지는?", "후퇴를 위해 11월 중순 나폴레옹이 지정한 퇴각로는?", "나폴레옹이 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선택했던 방향은?", "나폴레옹이 민스크를 새롭게 목표 삼고 우디노와 누구에게 합류를 명령합니까?", "지원 병력을 요청 받았지만 삼천명의 기병만 보낸 자는 누구입니까?" ]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 부근에 예비 병력으로 남겨두었던 빅토르 페랭 원수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남서쪽 길을 벗어나 모야이스크 쪽으로 방향을 돌려 모스크바로 진격할 때의 행군로에 다시 들어섰다. 주변이 이미 전번의 행군으로 인해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후퇴가 더욱 고단해졌다. 11월 초에는 비아즈마에서 밀로라도비치 장군이 지휘하는 한 러시아 군대가 다부의 후위대를 가로막고 전투를 벌였다. 비아즈마의 러시아군은 포병대의 우세를 활용해 원정군을 동요 상태로 몰아넣고 위기에 빠뜨렸으나 지원 병력 요청을 받은 쿠투조프가 삼천 명의 기병만 보내는 바람에 활로를 뚫는 데 성공한 원정군은 만여 명의 병력을 잃고 궁지를 벗어나 스몰렌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민스크를 새로운 목표 지점으로 선택하고 비트겐슈타인의 군대에게 연합해 대항하던 우디노와 빅토르 페랭에게 비텝스크 근방을 떠나 군대를 남쪽으로 인솔해 자신과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그 다음 나폴레옹은 그 때까지 제일선에 투입되지 않았던 근위대와 함께 선두에 서고 외젠 드 보아르네, 다부, 최종적으로는 네의 군대가 차례로 뒤따르게 한 후 11월 중순 드네프르 강을 건널 지점으로 정한 오르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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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젠 드 보아르네의 군대는 어디로 향하다가 밀루라도비치군의 공격을 당했는가?", "쿠투조프는 공적을 인정 받아 무슨 작위를 하사받았는가?", "3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우세를 점한 군대는?", "드 보아르네와 다부의 군대에 치명타를 안겨준 군대는?", "쿠투조프에게 군대를 학살당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은?", "나폴레옹과 정면에서 맞서기 싫어 포격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폴레옹의 청년 근위대가 골리친 군대의 소수 병력이 지키는 어떤 마을을 공격합니까?" ]
나폴레옹이 근위대와 함께 중계점인 크라스니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방치한 후, 그가 온 길을 이미 주변부에서 대기하던 밀로라도비치의 러시아군이 단절하고 쿠투조프에게 이를 전했다. 모스크바에서 퇴각하기 시작한 원정군을 줄곧 남쪽에서 간격을 유지하며 추격해온 쿠투조프는 크라스니에 있는 나폴레옹의 근위대를 북쪽의 골리친, 서쪽에서 오는 토르마소프, 동쪽의 밀루라도비치의 군대와 협력해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크라스니로 향하던 외젠 드 보아르네의 군대는 길을 막은 밀루라도비치군의 공격으로 인해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천여 명을 잃고 간신히 목적지로 들어갔고 다음날 근방에 도착한 다부의 군대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나폴레옹은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오르샤로 통하는 서북쪽 길을 열어 두는 역할을 맡기고 자신은 만여 명의 근위대와 함께 남동쪽으로 수 킬로미터까지 접근한 쿠투조프의 본대를 상대로 오히려 공세로 나갔다. 그러자 나폴레옹과의 정면 대결을 꺼린 쿠투조프는 월등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포격만 하며 전진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북쪽에서는 나폴레옹의 청년 근위대가 중심이 되어 골리친 군대의 소수 병력이 지키는 우바로보 마을을 공격해 빼앗고 다부의 군대가 크라스니로 진입하는 것을 원호했다. 밀로라도비치의 군대가 쿠투조프의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하자 틈이 생겼고 덕분에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크게 소모되어 있었던 다부의 군대는 크라스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골리친의 군대가 반격으로 나가 우월한 포병과 기병을 내세워 공격을 되풀이해서 6천명이 정원이었던 청년 근위대는 절반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마을을 다시 내주었다. 토르마소프의 군대가 서쪽에서 바싹 다가와 퇴로를 차단할 것을 우려한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에서 마지막으로 출발한 네의 후위대를 기다리지 않고 오르샤로의 후퇴를 재개했다. 쿠투조프는 크라스니 마을을 되찾는 것으로 일단 만족했는데 이런 영문을 모르던 네의 8천여 병력과 수만 명의 인파는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주변에 집결한 러시아군을 상대하게 되어 항복을 거부하고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탈출한 네와 천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쿠투조프는 열세인 원정군을 완전히 격파할 호기를 놓쳤으나 그럼에도 공적을 인정받아 스몰렌스크 공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이 시점 몰도바 주둔군 3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한 치챠고프는 민스크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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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의 군대는 어디를 탈환하여 북쪽에서부터 남하해 러시아 원정군을 압박해왔는가?", "나폴레옹은 남은 군대와 오르샤에서 무슨 강을 건너 우디노와 빅토르 페랭의 남은 정규군과 재결합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군대가 빅토르 페렝과 우디노의 군대를 쫓기 전에 어느 일대를 빼앗습니까?", "나폴레옹은 휘하 군대를 다독이며 바리사우에서 어느 강을 건너려 합니까?" ]
나폴레옹은 남은 군대와 함께 오르샤에서 드네프르 강을 건너 빅토르 페랭과 우디노의 남은 3만여 정규군과 재결합해 약 5만 명의 체계 잡힌 병력과 그 절반 가량의 낙오병, 비전투원들을 움직이게 되었다. 북쪽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군대가 비텝스크 일대를 탈환한 후 빅토르 페랭과 우디노의 군대를 뒤쫓아 남하하여 압박해오고 있었다. 치챠고프와 비트겐슈타인이 이끄는 두 군대가 합류한 후 원정군의 후퇴를 저지하며 쿠투조프의 본대와 연계해 공격해오면 탄약과 물자가 거의 다 떨어진 상황에서 여지없이 전멸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휘하 군대를 독려해 최대한 빨리 서쪽으로 가 바리사우에서 베레지나 강을 건너려고 했다. 이 즈음에는 기온이 다시 올라가 드네프르 강도, 베레지나 강도 얼어붙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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