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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카를 대공은 프랑스군의 도강을 저지하지 않았다. 카를 대공은 적당한 숫자의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고, 강을 건널 준비를 하는 프랑스군이 이미 도강한 프랑스군을 지원하지 못할 상황에 기습을 가할 생각이었다. 나폴레옹 역시 공격의 위험성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가능한 모든 부대를 전장에 집결시켜 이동시간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마르히펠트에 있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북쪽을 향하여 다리의 전면에 늘어섰다. 이렇게 배치된 프랑스군의 좌익은 아스페른(그로스 아스페른Gross-Aspern)에 위치했고, 우익은 에슬링(혹은 에슬링겐Esslingen)에 위치했다. 두 곳은 모두 다뉴브 강에 가까이 붙어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적에게 넘겨줘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아스페른은 사실, 도나우 강의 강변이라기보다는 강의 지류중 하나에 접해 있었다. 프랑스군은 마을 사이에 빈 공간을 채우고 지원 부대가 전열을 구성할 수 있도록 앞으로 이동하였다.
프랑스군의 좌익은 아스페른에 위치했고 우익은 어디에 위치했나?
에슬링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카를 대공은 프랑스군의 도강을 저지하지 않았다. 카를 대공은 적당한 숫자의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고, 강을 건널 준비를 하는 프랑스군이 이미 도강한 프랑스군을 지원하지 못할 상황에 기습을 가할 생각이었다. 나폴레옹 역시 공격의 위험성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가능한 모든 부대를 전장에 집결시켜 이동시간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마르히펠트에 있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북쪽을 향하여 다리의 전면에 늘어섰다. 이렇게 배치된 프랑스군의 좌익은 아스페른(그로스 아스페른Gross-Aspern)에 위치했고, 우익은 에슬링(혹은 에슬링겐Esslingen)에 위치했다. 두 곳은 모두 다뉴브 강에 가까이 붙어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적에게 넘겨줘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아스페른은 사실, 도나우 강의 강변이라기보다는 강의 지류중 하나에 접해 있었다. 프랑스군은 마을 사이에 빈 공간을 채우고 지원 부대가 전열을 구성할 수 있도록 앞으로 이동하였다.
카를 대공은 프랑스군의 도강을 저지하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기습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카를 대공은 프랑스군의 도강을 저지하지 않았다. 카를 대공은 적당한 숫자의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고, 강을 건널 준비를 하는 프랑스군이 이미 도강한 프랑스군을 지원하지 못할 상황에 기습을 가할 생각이었다. 나폴레옹 역시 공격의 위험성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가능한 모든 부대를 전장에 집결시켜 이동시간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마르히펠트에 있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북쪽을 향하여 다리의 전면에 늘어섰다. 이렇게 배치된 프랑스군의 좌익은 아스페른(그로스 아스페른Gross-Aspern)에 위치했고, 우익은 에슬링(혹은 에슬링겐Esslingen)에 위치했다. 두 곳은 모두 다뉴브 강에 가까이 붙어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적에게 넘겨줘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아스페른은 사실, 도나우 강의 강변이라기보다는 강의 지류중 하나에 접해 있었다. 프랑스군은 마을 사이에 빈 공간을 채우고 지원 부대가 전열을 구성할 수 있도록 앞으로 이동하였다.
나폴레옹이 기습 공격의 위험성 때문에 가능한 한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은?
이동시간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요한 폰 힐러(Johann von Hiller)(Ⅵ), 하인리히 그라프 폰 벨레가르드(Heinrich Graf von Bellegarde)(Ⅰ), 그리고 프란츠 자비에르 프린스 추 호엔촐레른-헤힝겐(Franz Xavier Prince zu Hohenzollern-Hechingen)(Ⅱ)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 방면에 집결하였다. 한편 프란츠 퓌르스트 폰 로젠베르크-오르시니(Franz Fürst von Rosenberg-Orsini)(Ⅳ)는 에슬링을 공격했다. 중앙에 있던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공(Prince Johann of Liechtenstein's)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종대의 머리부분을 공격하려 하는 프랑스군에 대응하여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21일 동안 프랑스군이 도하를 준비하는 다리는 물살이 거세짐에 따라 갈수록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휴식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강을 건넜으며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요한 폰 힐러 등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군대가 집결한 곳은 어느방면인가?
아스페른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요한 폰 힐러(Johann von Hiller)(Ⅵ), 하인리히 그라프 폰 벨레가르드(Heinrich Graf von Bellegarde)(Ⅰ), 그리고 프란츠 자비에르 프린스 추 호엔촐레른-헤힝겐(Franz Xavier Prince zu Hohenzollern-Hechingen)(Ⅱ)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 방면에 집결하였다. 한편 프란츠 퓌르스트 폰 로젠베르크-오르시니(Franz Fürst von Rosenberg-Orsini)(Ⅳ)는 에슬링을 공격했다. 중앙에 있던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공(Prince Johann of Liechtenstein's)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종대의 머리부분을 공격하려 하는 프랑스군에 대응하여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21일 동안 프랑스군이 도하를 준비하는 다리는 물살이 거세짐에 따라 갈수록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휴식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강을 건넜으며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어느군을 주시하고 있나?
프랑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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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페른 방면에 집결한 군은?
오스트리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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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퓌르스트 폰 로젠베르크 오르시니는 어딜 공격하였나?
에슬링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요한 폰 힐러(Johann von Hiller)(Ⅵ), 하인리히 그라프 폰 벨레가르드(Heinrich Graf von Bellegarde)(Ⅰ), 그리고 프란츠 자비에르 프린스 추 호엔촐레른-헤힝겐(Franz Xavier Prince zu Hohenzollern-Hechingen)(Ⅱ)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 방면에 집결하였다. 한편 프란츠 퓌르스트 폰 로젠베르크-오르시니(Franz Fürst von Rosenberg-Orsini)(Ⅳ)는 에슬링을 공격했다. 중앙에 있던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공(Prince Johann of Liechtenstein's)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종대의 머리부분을 공격하려 하는 프랑스군에 대응하여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21일 동안 프랑스군이 도하를 준비하는 다리는 물살이 거세짐에 따라 갈수록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휴식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강을 건넜으며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군이 집결한 곳은?
아스페른 방면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요한 폰 힐러(Johann von Hiller)(Ⅵ), 하인리히 그라프 폰 벨레가르드(Heinrich Graf von Bellegarde)(Ⅰ), 그리고 프란츠 자비에르 프린스 추 호엔촐레른-헤힝겐(Franz Xavier Prince zu Hohenzollern-Hechingen)(Ⅱ)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 방면에 집결하였다. 한편 프란츠 퓌르스트 폰 로젠베르크-오르시니(Franz Fürst von Rosenberg-Orsini)(Ⅳ)는 에슬링을 공격했다. 중앙에 있던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공(Prince Johann of Liechtenstein's)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종대의 머리부분을 공격하려 하는 프랑스군에 대응하여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21일 동안 프랑스군이 도하를 준비하는 다리는 물살이 거세짐에 따라 갈수록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휴식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강을 건넜으며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어디에 위치했는가?
중앙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세 개의 오스트리아 부대는 마을의 반도 점거하지 못했다. 아스페른의 주요 거점 요새는 마세나가 끈질기게 방어하고 있었고, 밤이 되어서야 함락되었다. 그러는 동안 두 마을 사이와 다리의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의 전군이 전장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나누어 일부 보병대를 중앙의 전면으로 이동시켰고,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긴 열을 이루어 아스페른을 공격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프랑스군의 1차 돌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당했으나, 두 번째 흉갑기병(cuirassires)의 공격은 성공하였다. 프랑스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포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호엔촐레른 휘하의 보병 방진에 공격을 가하고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의 기병 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종국에는 퇴각하여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에서 아스페른의 핵심요새를 끈기있게 방어한 사람은?
마세나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세 개의 오스트리아 부대는 마을의 반도 점거하지 못했다. 아스페른의 주요 거점 요새는 마세나가 끈질기게 방어하고 있었고, 밤이 되어서야 함락되었다. 그러는 동안 두 마을 사이와 다리의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의 전군이 전장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나누어 일부 보병대를 중앙의 전면으로 이동시켰고,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긴 열을 이루어 아스페른을 공격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프랑스군의 1차 돌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당했으나, 두 번째 흉갑기병(cuirassires)의 공격은 성공하였다. 프랑스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포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호엔촐레른 휘하의 보병 방진에 공격을 가하고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의 기병 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종국에는 퇴각하여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1차 돌격은 어느군대에 의해 격퇴당했나?
오스트리아군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세 개의 오스트리아 부대는 마을의 반도 점거하지 못했다. 아스페른의 주요 거점 요새는 마세나가 끈질기게 방어하고 있었고, 밤이 되어서야 함락되었다. 그러는 동안 두 마을 사이와 다리의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의 전군이 전장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나누어 일부 보병대를 중앙의 전면으로 이동시켰고,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긴 열을 이루어 아스페른을 공격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프랑스군의 1차 돌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당했으나, 두 번째 흉갑기병(cuirassires)의 공격은 성공하였다. 프랑스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포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호엔촐레른 휘하의 보병 방진에 공격을 가하고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의 기병 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종국에는 퇴각하여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나누어 일부 보병대를 어디로 이동시켰나?
중앙의 전면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세 개의 오스트리아 부대는 마을의 반도 점거하지 못했다. 아스페른의 주요 거점 요새는 마세나가 끈질기게 방어하고 있었고, 밤이 되어서야 함락되었다. 그러는 동안 두 마을 사이와 다리의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의 전군이 전장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나누어 일부 보병대를 중앙의 전면으로 이동시켰고,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긴 열을 이루어 아스페른을 공격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프랑스군의 1차 돌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당했으나, 두 번째 흉갑기병(cuirassires)의 공격은 성공하였다. 프랑스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포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호엔촐레른 휘하의 보병 방진에 공격을 가하고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의 기병 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종국에는 퇴각하여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호엔촐레른 휘하의 보병 방진에 공격을 가하고 누구의 기병 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나?
리히텐슈타인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세 개의 오스트리아 부대는 마을의 반도 점거하지 못했다. 아스페른의 주요 거점 요새는 마세나가 끈질기게 방어하고 있었고, 밤이 되어서야 함락되었다. 그러는 동안 두 마을 사이와 다리의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의 전군이 전장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나누어 일부 보병대를 중앙의 전면으로 이동시켰고,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긴 열을 이루어 아스페른을 공격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프랑스군의 1차 돌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당했으나, 두 번째 흉갑기병(cuirassires)의 공격은 성공하였다. 프랑스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포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호엔촐레른 휘하의 보병 방진에 공격을 가하고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의 기병 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종국에는 퇴각하여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아스페른의 주요 거점 요새를 방어하던 인물은?
마세나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세 개의 오스트리아 부대는 마을의 반도 점거하지 못했다. 아스페른의 주요 거점 요새는 마세나가 끈질기게 방어하고 있었고, 밤이 되어서야 함락되었다. 그러는 동안 두 마을 사이와 다리의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의 전군이 전장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나누어 일부 보병대를 중앙의 전면으로 이동시켰고,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긴 열을 이루어 아스페른을 공격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프랑스군의 1차 돌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당했으나, 두 번째 흉갑기병(cuirassires)의 공격은 성공하였다. 프랑스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포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호엔촐레른 휘하의 보병 방진에 공격을 가하고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의 기병 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종국에는 퇴각하여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이 부대를 나누어 중앙의 전면으로 이동시킨 병력은?
일부 보병대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본대에 총공격을 시도했다. 프랑스군 본대의 총 병력, 그리고 좌익에 있는 란의 병력과 예비 기병대가 앞으로 진군하였다. 로젠베르크의 우익과 호엔촐레른의 좌익 사이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이 쉽게 붕괴되었다. 승리는 프랑스군에게 돌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남은 예비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났고, 대공은 직접 손에 군기를 들고 병사들을 인도하였다. 란의 부대에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집중되었으며, 란은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 전선에 걸쳐 프랑스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스페른은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심각한 소식이 나폴레옹에게 날아들었다. 이미 예전에 부서진 적이 있던 도나우 강의 다리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 거대한 바지선에 의해 부서졌다는 보고였다.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을 붕괴시켰으나 누구의 개입으로 반전되었나?
카를 대공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본대에 총공격을 시도했다. 프랑스군 본대의 총 병력, 그리고 좌익에 있는 란의 병력과 예비 기병대가 앞으로 진군하였다. 로젠베르크의 우익과 호엔촐레른의 좌익 사이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이 쉽게 붕괴되었다. 승리는 프랑스군에게 돌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남은 예비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났고, 대공은 직접 손에 군기를 들고 병사들을 인도하였다. 란의 부대에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집중되었으며, 란은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 전선에 걸쳐 프랑스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스페른은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심각한 소식이 나폴레옹에게 날아들었다. 이미 예전에 부서진 적이 있던 도나우 강의 다리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 거대한 바지선에 의해 부서졌다는 보고였다.
프랑스군 좌익에는 누구의 병력과 예비기병대가 있었나?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본대에 총공격을 시도했다. 프랑스군 본대의 총 병력, 그리고 좌익에 있는 란의 병력과 예비 기병대가 앞으로 진군하였다. 로젠베르크의 우익과 호엔촐레른의 좌익 사이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이 쉽게 붕괴되었다. 승리는 프랑스군에게 돌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남은 예비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났고, 대공은 직접 손에 군기를 들고 병사들을 인도하였다. 란의 부대에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집중되었으며, 란은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 전선에 걸쳐 프랑스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스페른은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심각한 소식이 나폴레옹에게 날아들었다. 이미 예전에 부서진 적이 있던 도나우 강의 다리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 거대한 바지선에 의해 부서졌다는 보고였다.
도나우 강의 다리가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 거대한 무엇의 의해 부서졌나?
바지선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본대에 총공격을 시도했다. 프랑스군 본대의 총 병력, 그리고 좌익에 있는 란의 병력과 예비 기병대가 앞으로 진군하였다. 로젠베르크의 우익과 호엔촐레른의 좌익 사이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이 쉽게 붕괴되었다. 승리는 프랑스군에게 돌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남은 예비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났고, 대공은 직접 손에 군기를 들고 병사들을 인도하였다. 란의 부대에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집중되었으며, 란은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 전선에 걸쳐 프랑스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스페른은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심각한 소식이 나폴레옹에게 날아들었다. 이미 예전에 부서진 적이 있던 도나우 강의 다리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 거대한 바지선에 의해 부서졌다는 보고였다.
남은 예비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난 사람은?
카를 대공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본대에 총공격을 시도했다. 프랑스군 본대의 총 병력, 그리고 좌익에 있는 란의 병력과 예비 기병대가 앞으로 진군하였다. 로젠베르크의 우익과 호엔촐레른의 좌익 사이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이 쉽게 붕괴되었다. 승리는 프랑스군에게 돌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남은 예비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났고, 대공은 직접 손에 군기를 들고 병사들을 인도하였다. 란의 부대에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집중되었으며, 란은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 전선에 걸쳐 프랑스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스페른은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심각한 소식이 나폴레옹에게 날아들었다. 이미 예전에 부서진 적이 있던 도나우 강의 다리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 거대한 바지선에 의해 부서졌다는 보고였다.
프랑스군이 승리하기 직전에 나타나 전세를 역전시킨 인물은?
카를 대공
이 글은 아스페른-에슬링_전투에 대한 글 입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본대에 총공격을 시도했다. 프랑스군 본대의 총 병력, 그리고 좌익에 있는 란의 병력과 예비 기병대가 앞으로 진군하였다. 로젠베르크의 우익과 호엔촐레른의 좌익 사이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이 쉽게 붕괴되었다. 승리는 프랑스군에게 돌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남은 예비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났고, 대공은 직접 손에 군기를 들고 병사들을 인도하였다. 란의 부대에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집중되었으며, 란은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 전선에 걸쳐 프랑스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스페른은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심각한 소식이 나폴레옹에게 날아들었다. 이미 예전에 부서진 적이 있던 도나우 강의 다리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 거대한 바지선에 의해 부서졌다는 보고였다.
결국 어느 군대가 아스페른을 차지했는가?
오스트리아군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將帥)가 되었다. 후백제(後百濟)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서부 지역에서 견훤(甄萱)의 군사(軍事)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尙州) 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羅州)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충청도(忠淸道) 지역과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상주(尙州)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泰封國)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羅州)를 공략하여 후백제(後百濟)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弓裔)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세웠다.
고려 태조는 언제 태어났나?
877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將帥)가 되었다. 후백제(後百濟)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서부 지역에서 견훤(甄萱)의 군사(軍事)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尙州) 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羅州)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충청도(忠淸道) 지역과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상주(尙州)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泰封國)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羅州)를 공략하여 후백제(後百濟)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弓裔)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세웠다.
태조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궁예의 장수가 된 때는 언제인가?
896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將帥)가 되었다. 후백제(後百濟)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서부 지역에서 견훤(甄萱)의 군사(軍事)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尙州) 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羅州)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충청도(忠淸道) 지역과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상주(尙州)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泰封國)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羅州)를 공략하여 후백제(後百濟)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弓裔)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세웠다.
태조가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운 때는 언제인가?
918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將帥)가 되었다. 후백제(後百濟)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서부 지역에서 견훤(甄萱)의 군사(軍事)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尙州) 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羅州)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충청도(忠淸道) 지역과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상주(尙州)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泰封國)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羅州)를 공략하여 후백제(後百濟)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弓裔)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세웠다.
태조는 몇년도에 태어났나?
877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將帥)가 되었다. 후백제(後百濟)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서부 지역에서 견훤(甄萱)의 군사(軍事)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尙州) 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羅州)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충청도(忠淸道) 지역과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상주(尙州)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泰封國)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羅州)를 공략하여 후백제(後百濟)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弓裔)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세웠다.
태조의 아버지는 송악의 호족 누구였나?
왕륭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將帥)가 되었다. 후백제(後百濟)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서부 지역에서 견훤(甄萱)의 군사(軍事)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尙州) 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羅州)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충청도(忠淸道) 지역과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상주(尙州)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泰封國)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羅州)를 공략하여 후백제(後百濟)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弓裔)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세웠다.
태조는 누구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나?
궁예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甄萱)이 경주(慶州)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公山 棟藪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高敞 戰鬪)와 병산 전투(炳散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劍)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後百濟)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新羅)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敬順王)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敬順王)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 와 부인 박씨(夫人 王氏) 를 내려주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慶州)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敬順王)을 경주(慶州)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高麗)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渤海)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태조가 후백제를 무너뜨린 때는 언제인가?
936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甄萱)이 경주(慶州)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公山 棟藪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高敞 戰鬪)와 병산 전투(炳散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劍)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後百濟)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新羅)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敬順王)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敬順王)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 와 부인 박씨(夫人 王氏) 를 내려주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慶州)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敬順王)을 경주(慶州)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高麗)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渤海)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태조가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한 때는 언제부터인가?
926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甄萱)이 경주(慶州)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公山 棟藪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高敞 戰鬪)와 병산 전투(炳散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劍)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後百濟)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新羅)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敬順王)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敬順王)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 와 부인 박씨(夫人 王氏) 를 내려주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慶州)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敬順王)을 경주(慶州)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高麗)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渤海)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서 쫓겨나 투항해 온 년도는?
935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甄萱)이 경주(慶州)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公山 棟藪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高敞 戰鬪)와 병산 전투(炳散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劍)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後百濟)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新羅)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敬順王)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敬順王)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 와 부인 박씨(夫人 王氏) 를 내려주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慶州)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敬順王)을 경주(慶州)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高麗)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渤海)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태조가 후백제를 무너뜨린 년도는?
936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甄萱)이 경주(慶州)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公山 棟藪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高敞 戰鬪)와 병산 전투(炳散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劍)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後百濟)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新羅)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敬順王)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敬順王)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 와 부인 박씨(夫人 王氏) 를 내려주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慶州)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敬順王)을 경주(慶州)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高麗)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渤海)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신라의 어느왕이 자발적으로 태조에서 투항을 했나?
경순왕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후에 태조는 혜종 왕무가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이 있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이 태자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太子)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왕건이 태자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한 무엇을 대광 박술희에게 보여주었나?
자황포 비단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후에 태조는 혜종 왕무가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이 있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이 태자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太子)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박술희가 왕건이 보여준 자황포 비단을 보고 누구를 정윤(태자)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는가?
혜종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후에 태조는 혜종 왕무가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이 있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이 태자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太子)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처녀는 왕건이 찾오기 전에 무엇이 나오는 꿈을 꾸었나?
황룡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후에 태조는 혜종 왕무가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이 있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이 태자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太子)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왕건이 태자를 책봉할때 왕건이 장화왕후 오씨에게 징표로 하사한것은?
자황포 비단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자청하여 어디로 보내줄것을 청하였나?
변방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궁예는 왕건에게 어떤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나?
역모 혐의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왕건은 누구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보내 줄것을 요청하였나?
궁예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왕건이 어떤 군을 지휘했나?
수군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궁예는 왕건이 어느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칭찬을 하였나?
나주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왕건은 궁예에게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에 왕건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물었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 하고는 집중하는 자세를 취했다. 왕건은 심히 당황해하여 안절부절하였다. 궁예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귓속말로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라고 귀띔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왕건은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다.
왕건은 누구에게 공포감을 느꼈나?
궁예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왕건은 궁예에게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에 왕건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물었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 하고는 집중하는 자세를 취했다. 왕건은 심히 당황해하여 안절부절하였다. 궁예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귓속말로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라고 귀띔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왕건은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다.
궁예 옆에서 고의로 붓을 떨어뜨려 왕건에서 귓속말을 전한 사람의 이름은?
최응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궁예는 호족들과 계속 갈등하였고,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다.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918년 이들은 그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새 군주로 세웠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신혜왕후 류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으로 향하였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왕위에 오를것을 청한 때는 언제인가?
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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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두 왕자와 누구를 살해하였나?
왕후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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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세력에 염증을 느끼고 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 사람은?
궁예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궁예는 호족들과 계속 갈등하였고,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다.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918년 이들은 그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새 군주로 세웠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신혜왕후 류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으로 향하였다.
궁예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등은 누구를 왕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우나?
왕건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궁예는 호족들과 계속 갈등하였고,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다.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918년 이들은 그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새 군주로 세웠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신혜왕후 류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으로 향하였다.
홍유, 배현경 등이 왕건을 찾아가 왕위에 오를것을 청한 년도는?
918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의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 하여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환선길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지 몇일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가?
4일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의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 하여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환선길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고려 건국후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인가?
마군장군 환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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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고려를 건국한지 4일 만에 누가 반란을 일켰는가?
환선길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의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 하여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환선길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환선길의 역모계획은 누구에 의해 발각되었나?
복지겸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의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 하여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환선길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환선길의 동생 이름은?
환향식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철원에서 즉위한 뒤 다시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추진하였다. 철원 지역에서는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그는 불안감 때문에 송도로 옮겨가게 된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었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건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고토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즉위 초반 지역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궁로 맞이하였고, 아들들을 특별히 송도에서 수학하게 하였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과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각지의 호족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왕건은 철원에서 즉위한 뒤 수도를 어디로 옮겼는가?
송악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철원에서 즉위한 뒤 다시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추진하였다. 철원 지역에서는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그는 불안감 때문에 송도로 옮겨가게 된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었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건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고토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즉위 초반 지역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궁로 맞이하였고, 아들들을 특별히 송도에서 수학하게 하였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과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각지의 호족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왕건은 어떤 종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는가?
불교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철원에서 즉위한 뒤 다시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추진하였다. 철원 지역에서는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그는 불안감 때문에 송도로 옮겨가게 된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었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건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고토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즉위 초반 지역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궁로 맞이하였고, 아들들을 특별히 송도에서 수학하게 하였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과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각지의 호족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태조가 즉위한 지역의 이름은?
철원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철원에서 즉위한 뒤 다시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추진하였다. 철원 지역에서는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그는 불안감 때문에 송도로 옮겨가게 된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었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건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고토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즉위 초반 지역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궁로 맞이하였고, 아들들을 특별히 송도에서 수학하게 하였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과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각지의 호족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태조는 철원에서 즉위하여 수도를 어디로 옮겼나?
송악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철원에서 즉위한 뒤 다시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추진하였다. 철원 지역에서는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그는 불안감 때문에 송도로 옮겨가게 된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었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건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고토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즉위 초반 지역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궁로 맞이하였고, 아들들을 특별히 송도에서 수학하게 하였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과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각지의 호족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태조는 호국신앙으로 어느 종교를 삼았나?
불교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또한 염상진은 경종이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볼모를 데려가는 것은 반역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건은 염상진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왕건은 누구의 주장을 듣고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되었나?
염상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또한 염상진은 경종이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볼모를 데려가는 것은 반역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건은 염상진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고려시대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어디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나?
도성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또한 염상진은 경종이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볼모를 데려가는 것은 반역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건은 염상진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지방의 성주들은 누구를 도성에 볼모로 남겨 두었나?
아들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또한 염상진은 경종이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볼모를 데려가는 것은 반역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건은 염상진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왕건은 누구로부터 경종의 역모사실를 들었나?
염상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또한 염상진은 경종이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볼모를 데려가는 것은 반역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건은 염상진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누가 도성에 볼모로 잡혀있던 공직의 아들을 청주로 데리고 갔나?
경종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대형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몰래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한 왕건은 이흔암의 처 환씨가 환선길 형제의 누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고변을 한 사람은 누구인가?
수의대형령 염장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대형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몰래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한 왕건은 이흔암의 처 환씨가 환선길 형제의 누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왕건은 이흔암의 처 환씨가 누구의 누이라는점을 강조하였나?
환선길 형제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대형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몰래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한 왕건은 이흔암의 처 환씨가 환선길 형제의 누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흔암의 역모를 왕건에게 고변한 사람은?
염장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대형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몰래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한 왕건은 이흔암의 처 환씨가 환선길 형제의 누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역모 소식을 듣고 왕건은 염탐꾼을 보내 누구를 감시하라고 했는가?
이흔암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대형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몰래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한 왕건은 이흔암의 처 환씨가 환선길 형제의 누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흔암의 목이 베인 장소는?
시장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초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로 기습하였다. 한참 싸우던 견훤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태조는 경북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기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가 보낸 고려군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대구의 공산(팔공산)에서 태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태조는 병력을 잃고 겨우 후퇴한다.
927년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어디로 기습하였나?
경주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초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로 기습하였다. 한참 싸우던 견훤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태조는 경북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기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가 보낸 고려군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대구의 공산(팔공산)에서 태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태조는 병력을 잃고 겨우 후퇴한다.
경주를 기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누구를 신라 왕으로 앉혔나?
김부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초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로 기습하였다. 한참 싸우던 견훤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태조는 경북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기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가 보낸 고려군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대구의 공산(팔공산)에서 태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태조는 병력을 잃고 겨우 후퇴한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고 즉시 어디에 원병을 요청하였는가?
고려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초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로 기습하였다. 한참 싸우던 견훤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태조는 경북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기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가 보낸 고려군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대구의 공산(팔공산)에서 태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태조는 병력을 잃고 겨우 후퇴한다.
견훤은 갱애왕과 신라왕족을 죽이고 누구를 신라왕으로 추대하는가?
김부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초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로 기습하였다. 한참 싸우던 견훤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태조는 경북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기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가 보낸 고려군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대구의 공산(팔공산)에서 태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태조는 병력을 잃고 겨우 후퇴한다.
견훤이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진로를 변경하여 영천을 거켜 어디를 기습하였나?
경주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초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로 기습하였다. 한참 싸우던 견훤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태조는 경북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기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가 보낸 고려군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대구의 공산(팔공산)에서 태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태조는 병력을 잃고 겨우 후퇴한다.
견훤이 경주를 기습한 년도는?
927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태조는 누구와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갔는가?
신숭겸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왕건이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하여 장사지내고 어떤 시호를 내렸는가?
장절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왕건은 930년 어떤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였나?
고창 전투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태조는 누구와 옷을 바꾸어 입고 포위망을 빠져나갔나?
신숭겸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신숭겸은 누구의 화살에 맞고 전사하였나?
견훤군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태조는 머리가 없는 신숭겸의 시신에 무엇으로 머리모형을 만들어 끼워 장사지냈나?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공산 싸움에서 패퇴한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경북지역의 성이 후백제로 투항하자 왕건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투항을 만류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다시 대거 왕건에게 귀순, 고려로 발길을 돌렸다. 경북 호족들의 투항과 견훤 군사의 노략질 등으로 경북 지역의 민심이 왕건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또한 발해가 멸망하고 후발해, 정안국이 세워졌지만 불안감을 느낀 발해 유민들이 계속 고려로 유입되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그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민심을 수습하게 되었다.
어떤 싸움에서 패퇴한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었는가?
공산 싸움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공산 싸움에서 패퇴한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경북지역의 성이 후백제로 투항하자 왕건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투항을 만류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다시 대거 왕건에게 귀순, 고려로 발길을 돌렸다. 경북 호족들의 투항과 견훤 군사의 노략질 등으로 경북 지역의 민심이 왕건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또한 발해가 멸망하고 후발해, 정안국이 세워졌지만 불안감을 느낀 발해 유민들이 계속 고려로 유입되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그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민심을 수습하게 되었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누구에게 귀순, 고려로 발길을 돌렸는가?
왕건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공산 싸움에서 패퇴한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경북지역의 성이 후백제로 투항하자 왕건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투항을 만류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다시 대거 왕건에게 귀순, 고려로 발길을 돌렸다. 경북 호족들의 투항과 견훤 군사의 노략질 등으로 경북 지역의 민심이 왕건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또한 발해가 멸망하고 후발해, 정안국이 세워졌지만 불안감을 느낀 발해 유민들이 계속 고려로 유입되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그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민심을 수습하게 되었다.
어느 전투에서 패퇴한뒤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였나?
공산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공산 싸움에서 패퇴한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경북지역의 성이 후백제로 투항하자 왕건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투항을 만류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다시 대거 왕건에게 귀순, 고려로 발길을 돌렸다. 경북 호족들의 투항과 견훤 군사의 노략질 등으로 경북 지역의 민심이 왕건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또한 발해가 멸망하고 후발해, 정안국이 세워졌지만 불안감을 느낀 발해 유민들이 계속 고려로 유입되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그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민심을 수습하게 되었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로 인하여 경북지역의 민심은 누구를 지지하였나?
왕건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의 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29년 7월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부장인 홍술이 전사했다. 그러자 왕건은 직접 출정을 단행한다. 929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왕건이 고창에 오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군대와 식량을 지원하였고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고창 지역의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겨우 퇴각하였다.
후백제군이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킨 때는 언제인가?
929년 7월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의 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29년 7월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부장인 홍술이 전사했다. 그러자 왕건은 직접 출정을 단행한다. 929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왕건이 고창에 오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군대와 식량을 지원하였고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고창 지역의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겨우 퇴각하였다.
929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인 어디로 몰려들었나?
고창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의 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29년 7월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부장인 홍술이 전사했다. 그러자 왕건은 직접 출정을 단행한다. 929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왕건이 고창에 오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군대와 식량을 지원하였고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고창 지역의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겨우 퇴각하였다.
후백제군이 의성부를 공격한 년도는?
929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의 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29년 7월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부장인 홍술이 전사했다. 그러자 왕건은 직접 출정을 단행한다. 929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왕건이 고창에 오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군대와 식량을 지원하였고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고창 지역의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겨우 퇴각하였다.
후백제군이 의성부를 공격해 그곳의 성주가 전사하였는데 누구인가?
홍술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27년의 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29년 7월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부장인 홍술이 전사했다. 그러자 왕건은 직접 출정을 단행한다. 929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왕건이 고창에 오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군대와 식량을 지원하였고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고창 지역의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겨우 퇴각하였다.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은 어느지역의 호족이었나?
고창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그해 3월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9월 야산으로 고려에 입국한다. 그는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상부(尙父)의 예로써 받아들였다. 그 뒤 견훤은 어느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등창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축출한 점을 들어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 936년 9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다.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와 홍산(黃山 : 연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금산사에 갇혀있던 견훤이 고려에 입국한 때는 언제인가?
935년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그해 3월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9월 야산으로 고려에 입국한다. 그는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상부(尙父)의 예로써 받아들였다. 그 뒤 견훤은 어느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등창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축출한 점을 들어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 936년 9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다.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와 홍산(黃山 : 연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고려는 견훤의 맏아들인 누가 이끄는 후백제와 홍산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나?
신검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그해 3월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9월 야산으로 고려에 입국한다. 그는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상부(尙父)의 예로써 받아들였다. 그 뒤 견훤은 어느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등창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축출한 점을 들어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 936년 9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다.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와 홍산(黃山 : 연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견훤은 어디에 갇혀 있었나?
금산사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그해 3월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9월 야산으로 고려에 입국한다. 그는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상부(尙父)의 예로써 받아들였다. 그 뒤 견훤은 어느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등창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축출한 점을 들어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 936년 9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다.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와 홍산(黃山 : 연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태조는 누구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상부로서 예를 보였나?
견훤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그해 3월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9월 야산으로 고려에 입국한다. 그는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상부(尙父)의 예로써 받아들였다. 그 뒤 견훤은 어느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등창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축출한 점을 들어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 936년 9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다.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와 홍산(黃山 : 연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견훤의 맏아들의 이름은?
신검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호족들의 난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결혼 정책을 펼쳤다. 각지의 유력 호족들의 딸과 누이를 왕후나 후궁으로 삼는 것이었다. 통일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후고구려 역시 호족 연합체였고 발해계 유민, 신라계 세력, 후백제계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했다. 태조는 이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하던 중 결혼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게 된다. 통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신라처럼 각지의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
왕건은 호족들의 난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떤 정책을 펼쳤는가?
결혼 정책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호족들의 난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결혼 정책을 펼쳤다. 각지의 유력 호족들의 딸과 누이를 왕후나 후궁으로 삼는 것이었다. 통일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후고구려 역시 호족 연합체였고 발해계 유민, 신라계 세력, 후백제계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했다. 태조는 이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하던 중 결혼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게 된다. 통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신라처럼 각지의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
통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신라처럼 어떤 성격이 강했나?
호족연합체적 성격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호족들의 난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결혼 정책을 펼쳤다. 각지의 유력 호족들의 딸과 누이를 왕후나 후궁으로 삼는 것이었다. 통일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후고구려 역시 호족 연합체였고 발해계 유민, 신라계 세력, 후백제계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했다. 태조는 이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하던 중 결혼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게 된다. 통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신라처럼 각지의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
태조는 호족들의 난립을 억제하기위해 어떠한 정책을 활용하였나?
결혼 정책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호족들의 난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결혼 정책을 펼쳤다. 각지의 유력 호족들의 딸과 누이를 왕후나 후궁으로 삼는 것이었다. 통일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후고구려 역시 호족 연합체였고 발해계 유민, 신라계 세력, 후백제계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했다. 태조는 이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하던 중 결혼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게 된다. 통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신라처럼 각지의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
고려의 왕거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던 세력은?
지방 호족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고려 건국 초기에 정주의 류씨, 충주의 유씨, 황주의 황보씨, 경주의 김씨, 평산의 유씨, 광주의 왕씨, 신천의 강씨, 평산의 박씨, 의성의 홍씨 등 유력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여 왕후나 제3,제4왕후와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또한 후백제계 세력인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들 역시 후비로 맞이하여 후백제계열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했고, 왕건은 935년 신라 항복 이전에 신라 경순왕의 소개로 경순왕의 사촌여동생이자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와 결혼하는 한편,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 유씨와 서녀 부인 왕씨를 신라 경순왕에게 보내서 사위로 삼는 등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그때까지도 성씨가 없던 부하장수나 장졸들에게 성씨를 사성하기도 했다.
고려 건국 초기 견훤의 사위인 누구의 딸들을 후비로 맞이하여 후백제계열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나?
박영규
이 글은 고려_태조에 대한 글 입니다. 고려 건국 초기에 정주의 류씨, 충주의 유씨, 황주의 황보씨, 경주의 김씨, 평산의 유씨, 광주의 왕씨, 신천의 강씨, 평산의 박씨, 의성의 홍씨 등 유력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여 왕후나 제3,제4왕후와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또한 후백제계 세력인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들 역시 후비로 맞이하여 후백제계열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했고, 왕건은 935년 신라 항복 이전에 신라 경순왕의 소개로 경순왕의 사촌여동생이자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와 결혼하는 한편,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 유씨와 서녀 부인 왕씨를 신라 경순왕에게 보내서 사위로 삼는 등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그때까지도 성씨가 없던 부하장수나 장졸들에게 성씨를 사성하기도 했다.
왕건은 경순왕의 사촌여동생이자 김억렴의 딸인 누구와 결혼하였는가?
신성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