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stringlengths
127
204k
모질라 파이어폭스 ()는 모질라 재단과 모질라 코퍼레이션이 개발하는 자유 소프트웨어 웹 브라우저로 윈도우, 리눅스, OS X 그리고 안드로이드에서 실행할 수 있다. 이 브라우저는 2014년 2월 기준,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약 12%~22%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두 번째나 세 번째로 가장 많이 쓰이는 웹 브라우저이다. 모질라에 따르면 전 세계 4억 5천만명 이상의 사용자가 있다고 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이란, 독일, 폴란드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웹 브라우저로 각각 55%, 46%, 43%, 41%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웹 페이지를 표시하기 위해 게코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하며 웹 표준을 구현하고 있다. 탭 브라우징, 맞춤법 검사, 통합 검색, 라이브 북마크, 다운로드 관리자 등이 있다. 그리고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엔진(대부분 지역에선 구글이 기본)을 사용할 수 있는 통합 검색 시스템이 있다.(안드로이드 기준. 검색바를 길게 누르면 검색 엔진을 직접 추가 할 수 있다.) 제3자가 만든 부가 기능으로 기능을 추가할 수도 있다. 데이브 하얏트와 블레이크 로스는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를 모질라 프로젝트의 실험적인 분파로서 시작하였다. 그들은 넷스케이프의 후원에서 비롯된 상업적인 요구와 개발자들의 무분별한 기능 추가가 모질라 브라우저의 효용성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모질라 스위트를 비대한 소프트웨어로 보았으며, 모질라 스위트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능이 정제된 브라우저를 만들었다. 모질라 재단은 2003년 4월 3일에 개발의 초점을 모질라 스위트에서 파이어폭스(당시 피닉스)와 선더버드로 전환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0년 3월 22일, 윈도우 모바일 버전의 개발이 잠정 중단되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네이티브 프로그램 불허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는 여러 번 이름 변경을 겪었다. 원래는 피닉스(Phoenix)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피닉스 테크놀로지(Phoenix Technologies)와 상표권 문제가 발생하여 이름을 변경하였다. 변경된 이름인 파이어버드(Firebird)는 파이어버드 자유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모질라 재단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브라우저의 이름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모질라 파이어버드라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 서버 개발자 커뮤니티 측의 압박은 계속되었고, 결국 2004년 2월 9일 모질라 파이어폭스(줄여서 파이어폭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는 2004년 11월 9일 파이어폭스 1이 나오기까지 여러 버전이 발표되었다. 모질라 재단은 안정성과 보안 관련 문제점을 수정하여 2005년 11월 29일 첫 번째 주요 업데이트 버전인 파이어폭스 1.5를 출시하였으며, 파이어폭스 1.5.0.12를 끝으로 윈도우 95에 대한 공식 버전 지원이 중단되었다. 2006년 10월 24일에 파이어폭스 2를 발표하였다. 이 버전은 개선된 탭 브라우징 환경과 부가 기능 관리자, 개선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찾기 및 검색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엔진, 세션 복구 기능, 인라인 맞춤법 검사, 최초에 구글이 제공하는 확장 기능에 의해 기능이 제공되었고 나중에 프로그램 자체에 기능이 통합된 피싱 방지 기능 등이 포함되어 있다. 2007년 겨울에는 파이어폭스 라이브 챗이 론칭되었다. 이는 작동 보증시간과 근무시간 이후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자이브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시스템을 이용해 사용자가 자원봉사자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파이어폭스 2.0.0.20은 윈도우 NT 4.0, 윈도우 98과 윈도우 ME에서 수정없이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버전이다. 2008년 6월 17일에는 34개월의 작업을 끝마치고 수천가지 기능이 개선된 파이어폭스 3을 출시했다. 파이어폭스 3은 웹 페이지를 보여주기 위해 모질라 게코 레이아웃 엔진 버전 1.9를 사용한다. 이 버전은 많은 버그를 수정하고, 표준 준수성을 향상시켰으며 새로운 웹 API들을 적용했다. 그 밖에 새로 디자인된 다운로드 관리자, 북마크와 방문 기록을 저장하는 새 "Places" 시스템과 각 운영 체제별로 독립된 테마가 새로운 기능으로 포함되었다. 파이어폭스 3의 마지막 버전은 3.0.19이다. 파이어폭스 3의 첫 번째 베타 버전은 개발 일정이 늘어지는 중에도 몇 개월 이른 2007년 11월 19일에 나왔고, 이어지는 2008년 봄에 몇 번의 베타 버전이 공개되는 끝에 6월에 최종 버전이 출시되었다. 파이어폭스 3의 코드네임은 그랜 파라디소(Gran Paradiso)이다. 파이어폭스 3은 출시 직후 24시간 동안 800만이 넘는 고유 다운로드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오르기도 했다. 2008년 11월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20%를 돌파했다. 이후 출시된 버전의 주요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 버전 3.5 2009년 6월 30일에 출시된 파이어폭스 3.5의 코드네임은 시레토코(Shiretoko)이다. 개발 초기의 버전 넘버는 3.1이었으나, 후에 베타 4부터 3.5로 변경되었다. 버전 3.6 2010년 1월 21일에 출시된 파이어폭스 3.6의 코드네임은 나모로카(Namoroka)이다. 파이어폭스 3.6은 게코 렌더링 엔진 버전 1.9.2를 사용한다. 4.0 2011년 3월 22일 파이어폭스 4의 안정판이 공개되었다. 파이어폭스 4의 코드네임은 투무쿠마카이(Tumucumaque)이다. 개발 초기의 알파 버전은 3.7을 썼었으나, 베타 버전부터 4.0으로 변경되었다. 버전 13.0 새로운 기능이 새 탭과 기본 홈페이지에 도입되었다. 새 탭을 열면 가장 많이 방문한 페이지가 나타난다. 기본 홈페이지(about:home)는 즐겨찾기, 설정, 과거 방문 기록, 다운로드 관리자 등으로 바로가는 링크를 제공한다. 버전 21.0 새로운 모질라서가 탑재되었으며, 2013년 5월 14일에 출시 예정이다. 버전 57.0 이름이 파이어폭스퀀텀으로 바뀌면서 속도가 향상되었다. 2010년 1월 28일에는 노키아의 마에모 운영 체제로서 모바일용인 코드네임 페넥(Fennec)이 나왔다. 모바일 파이어폭스 1.0은 파이어폭스 3.6의 게코 레이아웃과 동일한 것을 사용한다. 2011년 4월 13일에 새로운 공개형 테스트 채널이 개설되었다. 명칭은 ‘오로라(Aurora)’로, 기존의 비공개형 테스트 채널(나이틀리, Nightly)과 공개형 테스트 채널(베타, Beta)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주소창 자동 완성 기능 탭 브라우징 팝업창 차단 방문한 웹 페이지 기록 저장, 주소창 자동 완성 기능 빠른 북마크 저장 확장 기능(파이어폭스 애드온) 추가 및 관리 확장 기능으로 기본적인 웹 브라우저에 여러 가지 추가 기능을 붙여 사용자 개개인의 편의대로 웹 브라우저를 사용할 수 있다. 너무 많은 확장 기능을 이용하면 웹 브라우저가 느려지는 단점이 있다. 동적인 테마의 전환 테마 기능이 있어 웹 브라우저의 모양을 바꿀 수 있다. 파이어폭스 3.6부터 페르소나를 자체 지원하여 선택의 폭이 더욱 확대되었다. 개인 정보 보호 및 보안 폼의 자동 완성 기능 빠르고 편리한 사이드바 툴바의 검색창 책갈피 그룹 캔버스 기능을 통해 2D/3D 그래픽 기능 브라우저에 내장 SVG(Scalable Vector Graphic) 표준 브라우저 내장 기능으로 탑재 CSS 2, CSS 3, 자바스크립트 1.6의 새로운 웹 표준 기능 지원 강화되고 빨라진 인터넷 속도 HTML 5의 비디오 재생 및 음원 재생 지원 (일부) webRTC,webSocket 지원 KS X 1001의 한글 채움 문자(0xA4D4) 지원. 파이어폭스에서는 탭 브라우징, 맞춤법 검사, 통합 검색, 라이브 북마크, 통합된 다운로드 관리자, 단축키,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 엔진을 사용할 수 있는 통합 검색 시스템이 있다. 파이어폭스에서 사용자가 확장 기능 및 테마를 맞출 수도 있다. 2010년 5월 기준 모질라는 1억 5000만 개 이상의 부가 기능을 addons.mozilla.org(AMO)를 통해 관리하고 있다. 파이어폭스는 웹 개발자들을 위한 에러 콘솔 또는 DCM 검사 또는 파이어버그 부가 기능같은 개발 도구들을 제공한다.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HTML, XML, XHTML, SVG 1.1 (일부), CSS3 (확장 포함, 일부), ECMAScript (자바스크립트), DOM, MathML, DTD, XSLT, XPath, PNG, APNG 이미지 등을 포함한 많은 웹 표준을 구현하고 있다. 또한 클라이언트 쪽의 저장소와 같은 WHATWG 그리고 캔버스 요소를 만드는 것을 제안했다. 2005년 12월, 인터넷 위크 (Internet Week) 지는 기사에서 많은 독자들이 파이어폭스 1.5의 메모리 사용량이 높다고 보고했다. 모질라 개발자들은 파이어폭스 1.5의 많은 메모리 사용량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새로 도입된 빠른 앞뒤로 기능 (FastBack) 때문이라고 밝혔다. 메모리 문제의 다른 알려진 문제는 구글 툴바와 애드블록 구버전 같이 잘못 동작하는 확장 기능, 구버전의 어도비 아크로뱃 리더같이 잘못 작동하는 플러그인 때문이다. PC 매거진이 파이어폭스 2, 오페라 9,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의 메모리 사용량을 비교했을 때, 그들은 파이어폭스가 나머지 두 브라우저보다 거의 두 배 정도 메모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Softpedia는 파이어폭스 1.5다 다른 브라우저보다 시작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밝혔는데, 이후의 속도 테스트에서 확인된다. IE6은 윈도우 XP에서 파이어폭스 1.5보다 더 부드럽게 실행되었는데 이는 많은 구성요소가 시스템 시작시에 이미 로드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하는 것과 비슷하게 시스템 시작시에 파이어폭스의 구성 요소를 불러오는 프리로더가 만들어졌다. PC world와 Zimba가 2006에, 파이어폭스 2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7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한다고 했다. 파이어폭스 3은 모질라, Cybernet, Browser world가 수행한 실험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오페라 9.50 베타, 사파리 3.1 베타, 파이어폭스 2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했다. 2009년 중반, Betnews는 파이어폭스 3.5를 벤치마킹했고 이 때 파이어폭스는 윈도우 XP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7보다 거의 10배 더 빠르게 작동했다. 2010년 1월 Lifehacker는 파이어폭스 3.5, 3.6, 구글 크롬 4(안정 버전, 개발 버전), 사파라 4, 오페라(10.1 안정, 10.5 프리알파)의 성능을 비교했다. Lifehacker는 브라우저들이 페이지 로딩을 시작해서 마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시스템 시작 직후 및 한번 구동된 이후 둘 다) 측정을 했고, 탭 9개를 한번에 띄우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모질라의 Dromaeo 온라인 수트(애플의 SunSpider와 구글의 V8 테스트를 수행한 수트)를 이용해 자바스크립트 속도를 시험했고, 윈도우 7의 프로세스 매니저를 이용해 메모리 사용량을 측정했다. 파이어폭스 3.5와 3.6은 시스템 시작 시에 각각 다섯 번째, 여섯 번째로 빠른 브라우저이고, 탭 9개를 여는 데에는 3.5가 세번째, 3.6이 여섯번 째로 빠른 브라우저, 3.5는 여섯 번째, 3.6은 다섯 번 째로 자바스크립트 테스트에서 빠른 브라우저라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또한 파이어폭스 3.5가 메모리 사용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 다음은 파이어폭스 3.5라고 밝혔다. 2012년 2월, 톰의 하드웨어는 윈도우 7에서 크롬 17, 파이어폭스 10, 인터넷 익스플로러 9, 오페라 11.61, 사파리 5.1.2의 성능을 시험했다. 톰의 하드웨어는 테스트를 성능, 효율성, 안정성, 적합성의 네 범주로 요약했다. 성능 범주에서 그들은 HTML5, Java, 자바스크립트, DOM, CSS3, 플래시, 실버라이트, WebGL, 시작 시간과 로드 시간을 테스트했다. 성능 테스트에서 대부분의 범주에서 받아들일 만 하고 강력하다고 보여졌고, HTML5, HTML5 하드웨어 가속, 자바 부분에서 승리했으며 단지 CSS 성능에서만 약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효율성 테스트에서, Tom s Hardware는 메모리 관리와 사용량을 테스트했다. 이 범주에서 파이어폭스는 적은 메모리 사용으로 동작하는 데에 있어서 유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브라우저였다. 안정성 범주에서 파이어폭스는 적절한 페이지 로드에서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범주인 적합성에서, 파이어폭스는 자바스크립트와 HTML5에 강력한 적합성을 가지고 있음이 판별되었다. 결론적으로, Tom s Hardware는 파이어폭스를 윈도우 7을 위한 최고의 브라우저로 꼽았는데, 구글 크롬에 비해서 조금 더 좋은 것이다. 2013년 6월, Tom s Hardware는 다시 파이어폭스 22, 크롬 27, 오페라 12,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의 성능을 측정했다. 파이어폭스는 대기시간, 자바스크립트 수행 시간, HTML5/CSS3 랜더링, 하드웨어 가속 성능을 측정하는 성능 분야에서 다른 브라우저에 비해서 조금 성능이 좋았다. 파이어폭스는 메모리 효율성, 안정성, 보안, 표준 적합성과 같은 비성능 분야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Toms s Hardware는 성능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를 안전한 승자로 결론지었다. 2014년 1월, 파이어폭스 29, 구글 크롬 34,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메모리 사용량을 시험하는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는 상당한 탭이 열렸을 때 가장 적은 메모리 사용량을 기록했다. 파이어폭스의 소스 코드는 자유 소프트웨어이고 대부분의 소스는 모질라 공용 라이선스(MPL)로 배포된다. 이 라이선스는 소스 코드를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재생산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결과적으로 파이어폭스로부터 몇몇 대중적인 프로그램, 넷츠케이프, Flock, Miro, Iceweasel, Songbird와 같은 프로그램이 파생되었다. 과거에는 파이어폭스는 단지 MPL 버전 1.1로만 배포되었다. 그래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은 라이선스가 허가한 약한 카피래프르에 대해 비판했다. 게다가 MPL 1.1로만 라이선스된 코드는 법적으로 GNU 일반 공용 허가서(GPL)과 호환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모질라는 파이어폭스 대부분을 MPL 1.1, GPL 2.0, LGPL 2.1로 삼중 라이선스로 배포하게 된다. 이 재라이선싱 때문에 개발자들은 용도에 따라 라이선스를 택할 수 있게 되었다. cluding the possibility of proprietary derivative works) if they chose the MPL. However, on January 3, 2012, Mozilla released the GPL-compatible MPL 2.0, and with the release of Firefox 13 on June 5, 2012, Mozilla used it to replace the tri-licensing scheme. 대부분 파이어폭스가 구글 크롬이나 오페라보다 최초 로딩(Cold Start) 시간, 재 시작(Warm Start) 시간이 느리다는 지적을 한다. 다른 게코 기반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하는 K-멜레온 같은 브라우저는 플랫폼에 종속적인 코드를 사용하여 파이어폭스보다 빠르게 불러들인다. 이 문제는 파이어폭스 3.5에서 악화되었으며 파이어폭스 3.6에서 많이 개선이 되었다. 2006년 이전까지는 파이어폭스가 빠른 앞으로/뒤로 기능, 잘못 동작하는 부가 기능과 플러그인 때문에 메모리 사용량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전통적인 멀티 탭 브라우저의 특성인 하나의 프로세서가 많은 페이지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있음에 따른 문제도 있다. 파이어폭스를 포함한 전통적인 멀티 탭 브라우저는 프로세서 하나가 탭을 모두 관리하기 때문에 메모리 사용량이 아주 많은 프로세서가 나타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기존에 여러 개의 프로세서로 관리되던 것이 하나의 프로세서로 합쳐짐에 따른 착시적인 현상 으로, 멀티 탭 브라우징과 메모리 사용량은 관계가 없다. 단적인 예로 멀티 탭 브라우저라도 구글 크롬과 같이 탭마다 개별 프로세서를 생성하는 경우 그런 메모리가 비대한 프로세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점차적인 개선으로 인해 파이어폭스 5에서 메모리 관리 기능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특히 다중 탭을 사용하는 경우 뛰어난 메모리 관리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1월, 파이어폭스 29, 구글 크롬 34,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메모리 사용량을 시험하는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는 상당한 탭이 열렸을 때 가장 적은 메모리 사용량을 기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먼저 확산된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맞추어 웹 페이지가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 ActiveX를 사용한 부가 서비스(보안, 저작권보호, 게임 런처 등)를 이용하기 힘들다. 모질라 한국커뮤니티에서는 2004년 웹 표준 포럼을 개설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토론 및 홍보 활동을 지속하였다. 운영자인 윤석찬의 주도로 반 액티브X 캠페인을 진행하며, 매년 웹 표준 가이드를 무료 제공하고, 김기창 교수와 함께 오픈 웹 소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09년 12월 알라딘, 2010년 1월 YES24 등 대한민국 내 유명 웹 기반 북스토어에서 오픈 웹을 기반으로 하는 파이어폭스 및 사파리 등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외의 브라우저에 결제 가능한 서비스를 출시하였다. 하지만 2010년 2월 YES24에서는 전자지불(PG)사의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이러한 호환성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렌더링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IE Tab 2, Coral IE Tab과 같은 부가 기능이 등장했고, 이 부가 기능을 설치하면 ActiveX나 전자 결제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위에서 제시한 부가 기능들이 파이어폭스의 창 안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하므로,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설치되어 있는 운영 체제에서만 작동하고 리눅스, 매킨토시 등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설치되지 않은 운영 체제를 사용할 경우 위의 부가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영구적인 해결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편, 모질라한국커뮤니티에서는 웹 표준 기반 HTML5 암호화 및 인증서 기능을 탑재하기 위해 W3C 웹 크립토그래피 API를 제안하여, 표준 활동이 시작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유니코드 지원 문제가 원활하지 않으므로 초기의 한국어 위키백과의 발전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후 미디어위키 소프트웨어의 개선으로 문제가 해결되어 많은 윈도우 운영 체제 기반의 사용자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이어폭스는 일부 위키백과 편집자들이 선호하는 브라우저로 Locationbar² 애드온은 주소창에서 유니코드가 글자로 보이지 않고 코드로 보이는 단점을 제거하여 위키백과 편집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는 이와 같은 확장 기능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코드로 표현되고 있다. 이 문제는 파이어폭스 3에서 개선되어 유니코드를 글자 그대로 표현한다. 입력기에 의존한 파이어폭스는 사용하는 한글에 대한 키 입력 이벤트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MS 윈도우 사용자는 한글 입력이 무시된다. 일례로 위키백과에서는 검색의 자동완성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 질의어로 "위키백과"를 입력하는 동안 반응이 없으며 "위키백과 "와 같이 인식가능한 빈 공간이나 알파벳 등이 입력될 때 반응한다. 이러한 문제점에 웹 개발자는 다른 트릭을 써서 해결하고 있다. 파이어폭스의 동기화 서비스는 저장시킨 동기화 데이터가 아무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등 안정성이 극히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북마크 데이터를 동기화 기능으로 저장해둬도 시간이 지나면 동기화 로그인을 했을 때 데이터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본 암호를 정하지 않는 이상, 설정에서 어떤 보안장치도 없이 저장된 암호를 볼 수 있다. 모질라 재단은 Beta , Developer (전 aurora), Nightly 채널 등의 파이어폭스 개발자 빌드를 지원한다. 2015년 11월 현재, 파이어폭스 43이 Beta 채널에, 파이어폭스 44이 Developer 채널에, 파이어폭스 45가 Nightly 채널에 있다. USB 플래시 드라이브같은 휴대용 기기에서 설치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휴대용 버전이 있다. 대표적으로, PortableApps.com에서는 파이어폭스의 휴대용 버전을 제공한다. 확장 지원 버전(Extended Support Release, ESR)은 대량으로 설치하는 기업 등을 위한 버전으로, 일반 정기 출시 버전과 달리 일 년 단위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성능 향상을 하면서 그 일 년 동안에는 정기적으로 보안 갱신을 한다. 운영 체제 64비트 지원 유무 윈도우 지원함 맥 OS 지원함 리눅스 지원함 위키백과 베타 중 시각편집기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브라우저이다. 1 1.5 2 3 4.0 MacOS 10.6.6 ko.png|파이어폭스 4 Firefox 5 on Ubuntu 11.04 ko wiki.png|파이어폭스 5 Firefox 6.0 on Ubuntu 11.04 ko wiki.png|파이어폭스 6 파이어폭스 3의 인터페이스는 운영 체제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아래에 보이는 네 개의 스크린샷이 각 운영 체제에서의 기본 인터페이스이다. 350px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비스타 "Strata" 비주얼 스타일. 350px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XP "Strata" 비주얼 스타일. 350px Mac OS X "Firelight" 비주얼 스타일. 350px 우분투에서의 리눅스 "Tango" 테마. 파이이폭스 로고 디자인 리소스 웹 브라우저 목록 모질라 모질라서 게코 파이어폭스 인사이드 (파이어폭스 팬 사이트) 모질라 한국 커뮤니티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버그질라 모질라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모든 버그를 접수하여 처리하는 곳이다. 한국 모질라 포럼에서 버그를 대신해서 버그질라에 전달하기도 하지만 체계적인 버그 보고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 보고 자체의 신뢰성이 떨어지며, 사용자가 버그를 버그질라에 직접 보고하는 경우 문제를 더욱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바벨질라 영어로 된 확장 기능을 한글화하기 위해 누구나 번역에 참여할 수 있는 사이트이다. 확장 기능의 번역결과가 축적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빠르고 오역을 최소화해 한글화할 수 있다. 그리고 바벨질라 한국 포럼이 운영되고 있어서 한글화와 관련 번역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분류:MacOS 웹 브라우저 분류:POSIX 웹 브라우저 분류:윈도우 웹 브라우저 분류:뉴스 애그리게이터 분류:인터넷의 역사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2002년 소프트웨어 분류: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모질라 라이선스 소프트웨어 분류:FTP 클라이언트 분류:크로스 플랫폼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안드로이드용 웹 브라우저 분류:IOS용 웹 브라우저
베이스 기타 (), 또는 일렉 베이스 는 현악기의 하나로, 보통 4개의 줄을 가지고 있으나, 5현, 6현, 그 이상도 있다. 전기 기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줄이 굵고 낮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다. 종류에 따라 프레시전 베이스, 재즈 베이스, 스타인버거 타입, 프렛레스 타입, 어쿠스틱 베이스 등이 있다. 취향에 따라 손가락, 또는 피크로 친다. 베이스는 크게 헤드와 넥, 바디로 나뉘어 있다. 헤드는 줄이 감기는 줄감개와, 넥 부분의 너트와 줄감개 사이에서 줄을 고정시켜주는 스트링가이드로 이루어져 있다. 줄감개는 줄의 팽팽함을 조절하는 헤드머신과 연결되어있어 튜닝시에 이용된다. 스트링 가이드는 종류에 따라 없는 경우도 있다. 넥은 헤드와 보디 사이에 위치한 부분으로 운지하는 부분이다. 줄들 사이사이에 운지할 수 있도록 줄과 닿는 프렛이 위치하고 있다. 일부 프렛과 프렛 사이에는 포지션마크가 있어 알아보기 쉽게 되어있다. 너트는 헤드에서 넥으로 넘어오는 부분에 위치하는데 줄 간격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바디의 경우 줄에 관계되는 부분으로 브릿지와 픽업이 있고, 출력을 조절하는 볼륨노브와 톤노브가 있다. 볼륨 노브가 2개인 경우 위치에 따라 프론트볼륨 노브와 리어볼륨 노브로 나뉘는 경우도 있다. 액티브와 패시브 전환이 가능한 기타의 경우 패시브/액티브 전환 스위치도 같이 존재한다. 브릿지는 뒤쪽에서 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며 픽업의 경우 현의 진동을 전기신호로 바꿔주는 부분인데, 핑거링 주법을 사용할 시에는 엄지 손가락을 올려놓게된다. 재즈 베이스와 같이 픽업이 두개로 나뉜 경우 헤드에 가까운쪽부터 프론트 픽업, 리어 픽업이라한다. 그밖에 어깨끈(스트랩)을 고정하는 스트랩핀과 케이블을 연결하는 아웃풋잭, 줄의 끝부분이 고정되는 테일피스가 있다. 피크로부터 보디가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해 피크가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가 박자 맞추기를 담당하는 것처럼 밴드악기에서 박자를 담당하는 악기이다. 또한 베이스 기타는 음의 고저를 운지할 수 있음에도 합주할 때에는 드럼의 박자를 이끄는 리듬악기에 가깝기 때문에 박자감이 매우 중요하다. 음의 위치는 통기타와 일렉기타의 위쪽 4현과 동일하다. 픽업의 배열에 따라 나뉘는데 프레시전 베이스는 험버커 픽업, 즉 1,2번/3,4번줄의 픽업이 앞뒤로 바로 붙어있다. 때문에 볼륨 노브가 하나뿐이며 재즈베이스에 비해 다소 두껍고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재즈 베이스는 이와 달리 픽업이 프런트 픽업과 리어 픽업으로 나뉘어 있으며 따라서 볼륨 노브 또한 2개이다. 두개의 픽업이 있기에 다양한 톤이 연출가능하다. 스타인버거 타입이란 스타인버거사에서 나온 베이스를 가리키는 말로 헤드가 없는 특징을 가진다. 작고 가벼워서 휴대성이 몹시 뛰어나다. 튜닝은 브릿지쪽에서 하는데 튜닝할때 힘이 적게 들어간다는 장점이있다. 말그대로 프렛이 없는 베이스를 일컫는다. 프렛이 없기 때문에 사용자의 어느정도 숙련을 필요로하며 슬라이딩을 할 때에 몹시 부드럽다. 하지만 프렛이 없기에 명확한 음을 내기 힘들다는 단점을 지닌다. 일반적인 베이스가 4현만을 사용하는 반면, 5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도 역시 일반 기타에서 위로부터 5줄까지의 음과 동일하다. 4현베이스 튜닝은 4현부터 E - A - D - G 인 반면 5현베이스 튜닝은 (5현기준으로) B - E - A - D - G 이며 솔로를 지향하는 베이시스트들은 로우 B현 대신 E - A - D - G - C 처럼 하이 C 현을 넣어 튜닝하기도 한다. 혹은 둘 모두를 넣기도 하는데, 이를 6현 베이스라 한다. 핑거 피킹 주법이란 검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방법이다. 지문 부분을 이용해 누르는 느낌으로 연주하며 중지가 약지보다 길기에 오른손 잡이의 경우 오른손을 왼쪽으로 약간 기울여 자세를 잡는다. 피크를 이용하는 주법으로 베이스 피크의 경우 기타 피크와는 달리 상당히 두께있는 피크를 사용한다. 위아래로 현에 닿게 연주하며 안정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리고 핑거피킹보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서 주로 록이나 메탈같은 음악에 많이 쓰인다. 베이스 연주의 화룡점정인 주법.엄지와 검지를 이용한 주법으로 엄지의 경우 반동적으로 튕기듯하고 검지는 줄을 흡사 뜯는 느낌으로 연주한다. 빠른 속주가 가능하고 독특한 음색을 낸다. 그루브있는 음악을 연주하기 용이하다. 난이도가 비교적 높아 초보자들은 쉽게 따라하기 힘든 주법이다. 왼손만으로 소리를 낼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머링, 폴링오프가 있다. 해머링은 넥부분의 현에 손가락을 찍듯이 눌러 음을 내는 방법으로 특정음을 낸 후에 해머링을 이용하여 낮은 음을 곧바로 낼수있다. 폴링 오프는 이와 반대로, 가한 손가락으로 줄을 잡아당기듯 연주한다.
록 음악 ()은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생겨난 대중음악의 한 형식이다. 록은 일반적으로 보컬, 리드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의 넷으로 구성되며, 강렬한 기타 혹은 드럼 소리가 특징이다. 대개 보컬, 전기 기타, 그리고 강한 백비트(록음악 특유의 강한비트)로 구성되며, 백비트는 색소폰과 같은 여러 종류의 악기들에 의한 스타일이 일반적이다. 록 음악은 젊음의 기쁨을 찬양하거나 때로는 젊은층이 가진 욕구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록은 1950년대 로큰롤(Rock and Roll)에서 비롯되었다. 록이라는 용어는 정의하기 모호하다. 이 단어는 때때로 여러 장르들이 모호하게 섞여있는 것, 이를테면 소울, 헤비메탈 심지어는 힙합을 포함하는 것까지,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넓게 보자면 로큰롤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좁게 보면 로큰롤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록 음악의 사운드는 전통적으로 전기 기타를 중심으로 하며,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과 심벌이 포함된 드럼 킷을 사용한다. 피아노나 해몬드 오르간, 신시사이저와 같은 건반악기도 역시 자주 사용한다. 록 밴드는 일반적으로 보컬리스트, 리드 기타리스트, 리듬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드러머 등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둘에서 다섯 정도의 멤버로 구성된다. 이 일반적인 형태는 버디 홀리가 고안해냈고 비틀즈가 확립했다. 록 음악은 전통적으로는 백비트가 있는 4/4 박자의 반복적인 리듬을 자주 사용한다. 록 음악은 스타일적으로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한 역사와 다른 장르의 요소의 잦은 유입 등의 이유로 록이란 무엇인가를 음악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힘들다. 록 음악은 처음 시작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전 세계 젊은 세대의 문화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록음악이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 생겼을 때는 로큰롤이라고 불렀는데, 기성 세대들은 로큰롤을 한 때의 유행으로 받아들여 무시하거나 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기성 세대는 이전에는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 그렇지만 1960년대 중반, 로큰롤이 음악 형식의 하나로 자리잡으면서 폭넓은 관심을 끌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록음악의 뿌리였던 블루스에서 벗어나 간단히 록음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록음악은 음반사업뿐만 아니라 영화, 패션, 정치 풍조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음악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음악과 결합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히피 무브먼트, 모드 사조, 비트 사조 등이 있다. 1940년대 재즈가 점점 어려워짐에 따라 대중에 멀어졌다. 재즈의 쇠퇴와 록의 도래 사이의 과도기 시절인 1950년 대 초반에는 스탠다드 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가수로서는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팻 분, 냇 킹 콜 등이 있었다. 미국 사회의 주류였던 백인 기성 세대들이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면 비주류 계층인 흑인들은 블루스 음악을 즐겼으며 농촌의 백인들은 컨트리 송을 즐겼다. 블루스 음악은 스윙 재즈의 영향을 받아 곧 리듬 앤 블루스로 진화했다. 그리고 컨트리 송은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과는 달리 보통의 리듬 앤 블루스는 초기 로큰롤의 형태이다. 로큰롤은 백인 청소년에게 점점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가수는 주로 흑인이었다. 대표적으로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가 있었다. 이에 음반 제작자들은 틈새 시장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흑인의 음색을 낼 수 있는 백인 가수를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숨겨진 리듬 앤 블루스 명곡을 백인이 커버를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들이 가수로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제리 리 루이스, 빌 헤일리, 버디 홀리 등이 있었다. 이들의 장르를 로커빌리 라고 하는데 이것은 로큰롤과 컨트리 송의 진화 형태인 힐빌리를 합친 말이다. 이런 음악들은 미국 주류 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리버풀 등 항구 도시에서 유행을 하게 되었다. 로큰롤은 재즈와 결합하여 스키플 사운드를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비틀즈가 있었다. 주류가 로큰롤을 하였다면 언더그라운드 비주류는 블루스와 재즈 음악을 하였다. 기존의 블루스 음악은 미국에서 탄생했는데 처음에는 통기타와 하모니카 등으로 이뤄진 컨트리 블루스와 델타 블루스 등이 있었다. 곧 미국이 발전을 하게 되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블루스에도 전기 악기가 접목되어 일렉트릭 블루스가 되었는데 특히 시카고에서 인기를 끌어 시카고 블루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음악은 로큰롤이 도래하기 이전 영국으로 전해져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백인)들은 브리티시 블루스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알렉시스 코너와 존 메이올이 있었다. 로큰롤을 하지 않았던 영국 가수 중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공연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하고 말았다. 비틀즈가 그 다음 공격을 하여 성공을 했는데 이를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한다. 뒤이어 애니멀스, 데이브 클락 5, 무디 블루스 등이 진출을 하였다. 이런 가수들은 모드 사조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누벨바그 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음악 이외에도 브리티시 블루스를 하던 사람들도 미국 진출을 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가수가 롤링스톤즈였다.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는데 기성 세대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비트 사조에 빠져들었고 곧 히피 무브먼트로 진화하였다. 이들은 마약을 하였는데 음악적으로도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록이 등장하였다. 사이키델릭 록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언급을 하는 포크 송도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피트 시거와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이 있었다. 한편 이런 식으로 미국식 사이키델릭 록이 마냥 외쳐대는 밴드였다면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은 예술적, 음악적인 실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밥 딜런이 포크 송과 로큰롤 사운드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포크 록을 만들어냈다.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의 발전으로 곧 프로그레시브 록이 등장하게 되었고 브리티시 블루스의 영향으로 블루스 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블루스 록을 하던 밴드였던 크림은 하드 록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지미 헨드릭스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결합시켜 하드 록을 더욱 발전시켰다. 록 음악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흑인 음악의 영향도 중요하다. 락의 시초는 블루스이며 1930년대 로버트존슨이 개발한 리듬이 시초가 된다. 하지만 로버트 존슨이 약혼녀에게 독살 당하고 그가 개발한 리듬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그에게 영향을 받은 50년대 척베리 등과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이 그의 리듬을 발전시켜 락앤롤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 동시대의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같은 락앤롤 뮤지션들의 노래는 젊은 이들을 크게 열광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기성 세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관습적으로 락이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대표적으로 락 이전에 존재했던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었다. 그 이유는 흑인들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상상을 불허하여 그들이 하는 모든것은 매도되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음악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수 없었기 때문에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 이라고 매도되었다. 이때문에 재즈같은 경우는 어느정도 즐기는 백인들이 적잖게 있었지만 흑인들의 한이 담긴 블루스를 즐기고 연주하는 백인들은 찾기 힘들었다. 또한 앞서 소개한 로버트 존슨의 일화중 미시시피 십자로에서 악마를 만나 음악을 배웠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이렇게 와전된 전설 역시 블루스가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블루스에서 발전한 락앤롤을 백인들이 공연장에서 열렬히 부르자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열광을 한다. 클래식, 재즈, 스탠다드 팝 등 기존의 음악을 뒤로하고 락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 전까지는 없었으며, 음악을 들을 때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은 금기였다. 이러한 모습은 기성세대들에겐 젊은이들이 미친것으로 보였으며, 이러한 락은 기성세대의 주 공격 대상이 되었다. 락앤롤은 젊은이들을 악마의 유혹에 빠뜨리는 주적이 된것이다. 이러한 편견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세력으론 기독교가 있었다. 1950년대 락앤롤 뮤지션인 제리 리 루이스의 실화를 다룬 영화 『Great Balls of Fire』을 보면 기독교가 락앤롤을 얼마나 매도하였는지 알 수 있다. 제리는 마지막에 "락앤롤이 악마의 음악이라면 나는 지옥에서도 피아노를 치겠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초기 락앤롤은 기독교 관습으로 인해 악마의 음악 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흑인에 대한 차별이 줄고 젊은이들의 열광도 익숙해지며, 락은 성장세를 타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락에 대한 매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갈수록 퇴폐적인 성향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 락앤롤 밴드 비틀즈는 발라드 명곡 Yesterday 를 발표해서 기성세대에게도 락앤롤을 한다고해서 다 천덕꾸러지는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악동으로 유명한 롤링스톤즈는 온갖 성적인 발언과 추악한 행동으로 기성세대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준다. 또한 1960년대 후반 샤이키델릭이 성행할 때, 샤이키델릭의 음악 성향상 마약의 복용은 흔하게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락은 매우 퇴폐적인 모습을 보인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등이 이런 약물에 의해 사망한다. 또한 락은 대중음악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사고도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저항을 상징하는 포크 뮤지션들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사회에 대한 저항만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고 성적인 문제도 자주 일으켰다.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샤이키델릭, 포크등에 의해 히피문화가 발전하고 약물, 퇴폐성, 폭령성 등의 어두운 부분이 극에 다다른다. 기독교 계열에서 비판을 받는 또다른 이유는 락 뮤지션들중에 반-기독교 성향을 보이는 무신론자도 많을 뿐더러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욕을 잦게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도 있다. KROQ 106.7 - 미서부 최대의 록 음악 전문 라디오 방송국 분류:영어계 외래어
컵라면 컵라면 ()은 컵 형태의 작은 용기에 포장된 국수 식품이다. 원래 일본 닛신식품(Nissin Foods)에서 발명된 것이지만 현재는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매우 쉽게 접할 수 있다.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은 용기에 라면 스프와 뜨거운 물을 붓고 3~4분가량 기다리면 조리가 된다. 조리법이 간단하고 오래 끓이지 않아도 되므로 일반 라면만큼이나 많이 소비된다. 1971년 닛신식품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이 개발하였다. 최초의 컵라면은 닛신 식품의 컵누들이었다. 당시 포화상태였던 일본 내 라면시장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해 새로운 재품을 고민하던 중, 1971년 컵누들을 발명하게 되었다. 당시 해외 시장또한 겨냥하기 위해 라면 용기 안쪽에 포크를 함께 포장해서 팔던 것이 특징이었으며 일본 라면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당시 광고 내용은 ‘끓인 물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였으며 지금 현재에도 일본 컵라면계 1위를 지키고 있다. 1972년 3월 삼양식품에서 국내 첫 컵라면을 출시했고 이후 1976년 컵라면 무인 판매기 5대를 명동 코스코스 백화점, 경희대입구, 삼양식품 체인점, 그랜드 제과, 이대 입구에 설치했다. 이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등에도 컵라면 자판기를 추가했다. 1982년, 농심도 본격적으로 컵라면 경쟁에 끼어들어 육개장 사발면을 출시했고 이에 삼양은 쇠고기, 유부맛 컵라면 65g짜리와 쇠고기맛 대접면 86g짜리를 출시해 맞섰다. 1981년 후 일본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미니 컵라면을 출시했는데 일반 컵라면이 75g, 130엔 인데 비해 이 컵라면은 37g에 60엔으로 절반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출시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 당시에1400 이르는 일본 컵라면 시장에서 10퍼센트에 가까운 매출을 차지했다. 1988년 봉지면에 비해 컵라면의 소금섭취량이 많다는 의견의 기사가 올라와 소비자 건강에 대한 우려를 내비추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컵라면은 이후에도 꾸준히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1989년 일본의 닛산식품회사는 캔속에 물을 붓기만 하면 물이 자동으로 끓는 라면을 개발하였다. 1989년에는 봉지면과 컵라면에 들어가는 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겼다는 일명 우지논란 이 일어났다. 1990년대에는 한강공원 등지에서 컵라면을 판매 허용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한강 공원에서의 라면을 즐기게 되었다. 1996년부터는 편의점이나 구멍가게에서 컵라면을 먹을수 있게되면서 컵라면 소비량이 크게 늘었다. 1998년 컵라면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당시 기업에서는 끓는 물을 붓고 30분이 지나서부터 환경호르몬이 검출되는데 이 시간을 넘겨서 컵라면을 섭취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소비자들의 원성을 샀다. 출시년도 1972 1981 1982 1986 1989 1990 상품명 컵라면 사발면 육개장 사발면 도시락 라면 새우탕 큰사발 왕뚜껑 튀김우동 큰사발 제조사 삼양 농심 농심 팔도 농심 팔도 농심 삼양식품에서 1972년 3월에 국내최초 용기면인 ‘컵라면’ 생산하였고, 농심사가 1981년 11월 국내 최초로 사발형태의 ‘사발면’을 개발하였다. 그 이후로 여러 종류의 컵라면이 개발되었다. 대표적인 컵라면에는 농심의 신라면 , 오뚜기의 참깨라면 , 팔도의 도시락 이 있다. 2012년 부터 삼양에서 불닭볶음면이 출시되면서 한국에서는 매운 라면의 인기가 SNS를 통해 퍼졌다. 이에 컵라면으로도 출시되어 소비자들은 보다 편리한 컵라면을 소비하는 등 "큰컵불닭볶음면"이 유행하였다. 또한 매운맛에 도전하기 위해 삼각김밥, 치즈를 함께 먹는 레시피가 인터넷과 SNS 등에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라면들을 "섞어"먹는 새로운 방식이 시도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섞어먹기 편한 컵라면의 판매량이 증가하였다. 같은 맥락으로 컵라면과 컵라면 내에서의 국물없는 비빔면 종류의 판매가 증가했다. 한국에서의 매운 컵라면이 유행하자 유투브 등에서는 외국인의 한국 컵라면 체험 후기 등의 영상이 유행하였다. 10분 내외의 짧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 매운 컵라면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드러나는데 2017년 사드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중국 및 동남아 지역에서의 불닭볶음면의 매출이 올라갔다. 중국 컵라면은 한국과 달리 일회용 젓가락이나 포크가 들어가 있고, 대부분 액상 스프를 사용하고, 향신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맛의 컵라면이 있다. 매운맛의 라면도 있지만 매운 맛이 아닌 구수한 맛이 나는 컵라면도 있다. 중국에서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라면인 캉스푸 홍샤오니우로우미엔"은 중국 소비자 10명 중 5명이 먹는 라면회사라는 수식이 붙은 캉스푸에서 만든것이며 우리나라 온라인 매장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컵라면으로는 닛신 돈베이 우동이 있다. 이 컵라면은 1971년 세계 최초로 컵라면을 개발한 ‘닛신푸드’의 제품이다. 이 컵라면의 맛은 소고기와 유부 2가지 맛이 있는데 두 제품 모두 면발이 마치 우리나라의 칼국수처럼 굵고 납작하다. 일본의 컵라면에는 우리나라의 컵라면에 들어있는 건더기 양에 비해 풍부한 양의 건더기가 있다. 일본에는 컵라면 박물관이 있는데,이곳에서는 세계최초 치킨라면을 발명한 안도 모모후쿠의 생애를 영화로 상영하는 모모후쿠 극장 과 치킨라면을 손수 만들어 볼 수 있는 치킨라면 팩토리 등 인스턴트 라면을 토대로한 다양한 전시와 활동들을 진행한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 엔화약세 등의 이유로 젊은층에서의 일본여행이 유행하면서 일본 라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그 중 닛신의 컵누들의 경우 세계 최장수 라면으로 독특한 광고로 유명세를 탔다. 태국은 라면에서 신 맛이 난다. 또한, 태국에는 컵라면을 살 때 용기 안에 플라스틱 포크가 들어있기 때문에 따로 나무젓가락을 챙길 필요가 없다. 태국 라면의 가장 큰 특징은 향미유(향신료)가 있어 기호에 맞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며 분말 스프는 약간의 신 맛이 난다는 점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태국의 대표적인 컵라면으로는 마마 인스턴트 누들 쉬림프 크리미 톰얌 플레이버 가 있으며, 이 라면은 톰얌쿵의 맛을 끓여 먹는 라면으로 만든 것인데, 여기서 ‘톰얌쿵’이란 ‘세계 3대 수프’ 중에 하나이다. 태국어로 ‘톰’은 끓임, ‘얌’은 시큼한 맛, ‘쿵’은 새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마 인스턴트 누들 쉬림프 크리미 톰얌 플레이버는 크림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살린 라면이다. 실제로 수프의 색도 빨간색이 아니라 흰 우유를 부은듯한 오렌지색이다. 맛은 일반 라면 스프에 신 맛을 더하면 된다고 한다. 2013년 세계 라면 협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한 명당 일 년에 평균 74.1개의 라면을, 인도네시아는 60.3개를 먹는다고 한다. 이런 열풍이 가능한 이유는 세계 1위의 라면 생산 업체 인도미(Indo mie)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라면은 우리나라에 비해 양이 적고 칼로리가 낮다. 수치로 비교해보면, 125g정도 하는 우리나라의 라면에 비해 인도네시아 라면의 무게는 67g~68g정도로 매우 작다. 1봉지를 섭취했을 때의 칼로리는 우리나라는 500kcal, 인도네시아는 340kcal로 현저히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라면의 면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두껍지 않고 얇다. 소스에는 카피르라임 잎이 들어 있는데, 이 향신료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남아의 음식에 들어가 음식 맛의 풍미를 살려준다. 라면의 제조 공정과 비슷하며 마지막 포장단계에서 봉지가 아닌 용기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면 # 용기면에는 봉지면보다 뜨거운 물에 닿는 면발의 표면적을 증가시키기 위해 면의 굵기를 더욱 가늘게 하는 경우도 많다. # 라면은 밀가루를 주성분으로 하는데 밀가루만 사용하면 면의 쫄깃한 맛이 다소 부족하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분(라면에는 주로 감자를 원료로 만든 감자전분을 주로 사용) 을 밀가루에 일정량 섞어서 면을 만들면 면질도 쫄깃쫄깃해질뿐 아니라 이 감자전분이 밀가루보다 낮은 온도에서 빨리 호화 (일반적으로 익는 현상)되는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조리시간이 짧아지는 효과가 있다. 특히 용기면에는 이 호화온도가 더욱 낮은 감자전분을 사용함으로써 끓이지 않더라도 단시간에 조리가 될 수 있다. 스프 # 컵라면의 분말 스프가 봉지라면보다 더 진한 편이다. 컵라면은 주로 밖에서 먹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김치 를 따로 구매하지 않는 이상 라면만 섭취하기 때문에 간이 심심 할 수 있으므로 이런 소비자를 고려하여 스프의 간을 세게한다는 것이다. 이 용기는 Polystyrene (폴리스티렌) 원료를 10~30배로 고발포하여 시트 내부에 공기층을 형성시킨 것으로 단층구조가 아닌 여러겹이 쌓여있는 구조이다. 액체나 기체에서의 열의 전도는 고체에 비해 느리기 때문에 열의 절연체인 공기가 사이에 존재하게 함으로서 최대한의 열손실을 방해하고자 한 것이다. 열손실이 적어야 용기안의 면이 익을 만한 열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PSP 용기의 특성은 표면이 매끄럽고 깨끗하여 여타 이물질이 묻어있는지를 쉽게 구분 할 수 있으며 국물이 배거나 주위 환경으로부터 어떠한 이물질의 혼입을 막아주는등 위생성이 양호하다. 단열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뜨거운 국물이 있는 라면 용기등에 매우 적합하며 선도유지성이 우수하고 수분증발 방지 등의 효과가 뛰어나다. 또한 충격에 강하여 상품의 운반 보관에 매우 유익하다. 경량성이 뛰어난것도 특징이다. PSP용기는 PS 수지를 5-15배 발포시킨 것으로 크기에 비해 매우 가볍다. 다른 용기보다 가벼우면서 내용물을 동일하게 담을 수 있어 운반이나 취급시 용이한 것이다. 또한 내용물이 용기의 표면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판매와 취급이 편리하며 회수 상태에 따라 원료나 연료로 재활용이 가능하다. PSP 용기가 환경호르몬의 발생 원인이라고 하여 친환경적이라고 주목받는 종이용기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종이용기는 PSP용기보다 개발시 용기 가격이 비싸지만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재활용이 가능하며 2중용기로서 단열효과가 좋아 취식시 안전성이 양호하다. 쉽게 파손되지 않고 내용물 보호에 유리하며 겉면 인쇄도 유리하다. 1998년 6월 일본 국립의약품 위생 연구소에서 기존에 쓰이던 PSP (Polystyrene paper)의 재질로 만들어진 용기에서의 내분비계장애(환경호르몬) 의심 물질인 다이머(dimmer), 트리머(trimer) 용출 시험 결과를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 인용 보도하면서 환경호르몬 논란이 대두되었다. 1998년 4월 26일 동아일보에서 "컵라면 등 용기 생식기능 저하 물질 함유", 1998년 4월 26일 서울경제의 "라면 등 1회용 식기에 생식기능장애 환경호르몬 함유", 1998년 4월 26일 중앙일보의 "컵라면 용기에 환경호르몬 함유... 생식기능 저하될수도" 등의 기사가 그것이다. 기사가 보도된 이후 주 소비층인 주부와 청소년층에서 불신감이 팽배해 졌다. 그러나 지속적인 연구결과 PSP 용기 제조 시 다이머(dimer)와 트리머(trimer) 같은 물질은 환경호르몬 작용 즉, 내분비계 장애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또한 라면 용기의 안전성에 대해 많은 연구발표가 되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내용을 보면 미국 산업화학독성연구소 로저맥클레란 대표는 컵라면 용기와 관련하여 환경호르몬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금물이고, 스틸렌다이머와 트리머에 대한 환경 호르몬 연구결과는 없으며, 자신도 전자레인지에 가열해 먹는다고(전자레인지용 용기로)하면서 안전한 물질임을 피력 한 바 있다. 나아가 일본 환경청은 폴리스틸렌을 내분비교란물질 목록 SPEED 98 개정판에서 삭제하였고, 유럽 아시아를 비롯 세계각국의 정부기관들에서도 사용을 승인한 물질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번 감소세로 이어진 판매량은 회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라면 업체에서는 용기의 변화를 꾀하게 되었으며 PSP 용기에서 PP용기나 종이용기로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한펄프(주)는 컵라면 용기를 라면업체 빙그레와 현진제업와 공동으로 개발하였으며 2000년도 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PSP 용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또한 2005년 농심의 경우 라면용기를 PSP 용기에서 전분발포용기로 교체하였다. 오뚜기의 경우, 독자 기술을 통해 발명한 친환경 용기를 활용,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해도 안전한 컵라면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2017년 기준, 오뚜기는 진라면 2종을 시작으로 참깨라면, 진짬뽕까지 전자레인지용 용기를 확대 적용했으며, 나머지 컵라면의 용기도 전부 친환경 용기로 교체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라면 농심 삼양라면 팔도 분류:국수 요리 분류:중국 요리 분류:일본의 발명품 분류:라면
누리꾼 또는 네티즌 (은 인터넷 통신망에 형성된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네티즌 은 인터넷 망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인 198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누리꾼 이란 말이 방송에서 처음 사용된 시기는 그보다 훨씬 뒤인 참여정부 집권 초반기부터였다. 통신망을 뜻하는 net 과 시민을 뜻하는 citizen 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시민(citizen)은 자립성, 공공성, 능동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네티즌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마이클 하우번(Michael Hauben)은 네티즌이란 용어가 단순히 통신망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모두 통칭하는 개념이 아닌 통신망에서 문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가꾸어가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는다고 한다. 네티즌이라는 용어가 영어권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영어권보다는 중국이나 대한민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 영향으로 영어권에서는 주로 아시아지역 누리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영어권에서는 사이버시티즌 (cybercitizen)이라고도 하며, 인터넛 (internaut internet + astronaut)이라는 은어가 쓰이기도 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누리꾼을 네티즌(ネチズン, netizen)이라 하지 않고, 넷 유저 (ネットユ一ザ一, net user)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한민국 대형 신문사들이 일본어 서비스로 제공한 기사에서 "네티즌(ネチズン)"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서 일본에서는 네티즌 이라 하면 흔히 대한민국의 누리꾼 을 떠올리게 되었다. 2004년 대한민국의 국립국어원에서 네티즌을 순화한 단어로서, 세상을 뜻하는 누리 와 전문인을 뜻하는 꾼 의 파생어이다. 초기에는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순화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했으나, 현재는 두 단어 모두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인터넷은 누리망 으로, 홈페이지는 누리집 으로 순화되었으나, 누리꾼 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며 공식 매체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의견교환과 정보교환을 장점으로 본다. 그러나 익명을 사용하여 토론상대나 특정인의 인격을 모독하는 미성숙함도 이따금씩 지적받는다. 네티즌이란 용어가 중간에 방송을 통해 국립국어원의 누리꾼이란 말로 변용, 사용되는 과정에서 일부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꾼 이란 어미가 붙은 단어의 상징성으로 인해 네티즌이란 용어의 어감 폄하가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네티즌들간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논란의 근원은 과연 사이버 상의 민주시민 이라 볼 수 있는 cybercitizen 을 꾼 이란 어미로 얕잡아 불러도 되는지에 대한 상징성 문제였다. 네티켓 홈페이지
궁중식 떡볶이 해물 떡볶이 떡볶이 ()는 떡면(떡볶이떡) 또는 가래떡을 주재료로 하는 한국 요리이다. 일반적인 떡볶이는 떡면(떡볶이떡) 또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가래떡에 여러 가지 채소와 매운 고추장 등의 양념을 넣어 볶은 음식으로, 남녀노소 불문하는 한국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이다. 한글 맞춤법에 의하면 "떡볶이"가 표준어이다. 현대 한국에서 즐겨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한국전쟁 직후에 개발된 음식이다. 이전에 궁중에서 먹던 떡볶이는 간장 양념에 재어둔 쇠고기를 떡과 같이 볶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시의전서(是議全書) 에서는 "다른 찜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한다. 흰떡을 탕무처럼 썰어 잠깐 볶는다. 다른 찜과 같은 재료가 모두 들어가지만 가루즙은 넣지 않는다"라는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으며, 주식시의(酒食是儀) 에서는 떡을 잘라 기름을 많이 두르고 쇠고기를 가늘게 썬 것과 함께 넣어 볶는다고 나와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궁중 떡볶이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현대의 고추장 떡볶이는 1953년에 마복림(1921~2011)이 광희문 밖 개천을 복개한 서울 신당동 공터에서 길거리식당 음식으로 팔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음식점에서 가래떡을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떨어뜨렸는데 그 떡을 먹고 보니 맛이 좋아서 고추장떡볶이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연탄불 위에 고추장, 춘장을 섞은 양념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MBC 라디오의 "임국희의 여성살롱"이란 프로그램에서 신당동 떡볶이골목이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떡볶이는 고추장을 사용해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 떡볶이와 간장을 사용하는 궁중 떡볶이로 그 종류를 나눌 수 있다. 원래 궁중에서 발달한 떡볶이는 간장 양념에 재어둔 쇠고기를 떡과 같이 볶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운 맛이 아니었으며, ‘궁중 떡볶이’로 불린다. 보통 떡볶이 하면 연상되는 고추장 떡볶이는 대개 고추장과 설탕을 써서 매운 맛과 단 맛을 내는데, 보통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 등의 양념과 단 맛을 내는 설탕이나 물엿 등을 섞은 양념장에 떡을 섞은 뒤 졸여서 볶아낸다. 지역에 따라 여기에 케첩이나 후추, 겨자 등의 재료를 첨가하여 독특한 맛을 내기도 한다. 떡은 떡면(떡볶이떡) 또는 가래떡을 사용하며 떡의 주재료가 쌀가루로 만들었냐 밀가루로 만들었냐에 따라 밀떡볶이 와 쌀떡볶이 로 나뉘기도 한다. 떡볶이가 처음 나오던 시절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흔해진 밀가루로 만든 떡을 사용하였다. 이후 쌀가루로 만든 쌀떡볶이가 나온 이후에도 사용되는 곳이 많다. 밀떡볶이는 떡볶이 국물의 점도가 매우 높아지고, 쌀떡볶이는 오래 끓여도 탄력성이 유지되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밀떡과 쌀떡을 섞어 판매하는 곳도 많다. 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만든 떡으로 만든 떡볶이도 있으며 더 쫄깃하고 잘 퍼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색깔은 노란색인데 익히면 흰색에 가까워진다. 추가하는 양념의 종류에 따라서 치즈 떡볶이, 곱창 떡볶이, 자장 떡볶이, 카레 떡볶이 등의 다양한 떡볶이가 있으며 추가할 수 있는 양념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흔한 고추장 떡볶이 역시 배합과 양념에 따라 맛의 차이가 많이 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분식점과 노점상에서 많이 판매하며 보통 떡볶이와 함께 다른 음식을 곁들여 먹는 경우가 흔하다. 일반적으로 튀김류에 떡볶이 국물을 묻혀 먹기도 하며, 김밥 또는 순대와 곁들이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요즘에는 한식 세계화 과정에서 고급화, 다양화되고 조리법의 노하우 등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NFL 휴스턴 텍선스의 홈구장에서 미식축구구장 최초로 한국식 고추장 떡볶이를 판매하는 등 세계 각국에서도 떡볶이를 직접 판매하는 매장이 늘고 있다. 라볶이 떡볶이 국물과 함께 미리 데쳐놓은 라면 사리를 넣어 조리한 음식. 떡볶이를 먹고 남은 국물을 쓰거나, 떡볶이 국물을 처음부터 만들고 조리하기도 한다. 라면 사리 대신 우동 및 쫄면 사리를 넣어 조리하기도 한다.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옆의 통인시장에서 팔고 있는 기름떡볶이 는 기름과 떡을 중심으로 국물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고추기름과 다진 마늘을 볶아놓은 후k 고춧가루와 굴소스(또는 간장), 맛술을 배합한 양념과 미리 살짝 대쳐 놓은 떡볶이 떡을 넣어 볶는다. 처음 등장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70년대 초 통인동 부근의 옥인동 시장에서 통인시장보다 먼저 기름떡볶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간장과 고추장을 적게 넣으면서 오랜 시간 동안 철판에서 볶아 먹는 방식이었다. 현재 통인시장에서 팔고 있는 기름떡볶이는 이전 방식에 비해 양념을 많이 넣는 편이다. 2014년 2월 한국을 방문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통인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시식하였다. 한국 떡볶이와 짜장소스의 결합으로, 떡볶이의 변형 짜장떡볶이 는 떡볶이 특유의 고추장 소스를 대신하여 짜장소스로 만든것으로, 짜장 특유의 맛이 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어묵은 넣지 않고, 당근, 양파, 양배추, 쇠고기 또는 돼지고기 등을 넣고 만든다. 짜장떡볶이의 칼로리는 1인분에 250칼로리이다. 치즈떡볶이 떡볶이의 변형인 치즈떡볶이 는 완성된 떡볶이 위에 치즈를 얹히거나 떡 속에 치즈가 들어 있는 음식을 말한다. 이는 씹을 때 떡과 치즈가 어우러져 강한 쫀득함을 느낄 수 있다. 분식집에서 판매되며,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도 있는 까다롭지 않은 쉬운 음식이다.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 위에 녹차가루, 허브가루, 깨,파슬리 등을 뿌려 먹기도 한다. 치즈떡볶이의 칼로리는 1인분에 486칼로리이다. 즉석떡볶이 는 테이블에 재료를 갖추고 손님이 직접 조리하여 먹는 떡볶이로, 기본 재료인 양념, 떡과 어묵 외에 여러가지 야채 및 계란, 튀김류를 손님이 원하는대로 추가 및 배합할 수 있다. "떡볶이 뷔페"라고 하는 손님이 직접 재료를 골라 가져와 조리하는 곳도 있다. 떡꼬치 떡꼬치 는 떡볶이떡을 4~5개(더 많을 수도 있다.) 정도 꼬치에 끼워서 기름에 튀긴 후 양념 소스를 발라먹는 음식이다. 떡 외에 채소나 해산물, 고기 등을 같이 끼워넣는 변형도 있다. 떡꼬치가 등장한 시기는 80년대 중후반 즈음으로 보고 있었으며, 현재에는 노점상을 중심으로 간혹 팔리고 있다. 떡꼬치의 전신으로는 15세기 요리책에 나오는 "떡산적"이란 요리로 추측되고 있다. 일명 크림떡볶이라고도 하는 까르보나라 떡볶이는 크림파스타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졌다. 기존의 떡볶이 특유의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대신하여 크림파스타에서 사용하는 크림소스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그리고 어묵 대신 베이컨을 넣는다. 한국 요리 분식 라볶이 떡볶이&쌀면 페스티벌 분류:한국 요리 분류:떡 분류:길거리 음식
떡볶이. 분식 (粉食)은 원래 밀가루로 만든 음식 을 뜻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라면, 국수, 빵 등이 분식에 해당되었으나, 현재는 떡볶이, 김밥, 순대, 어묵, 라면, 닭강정과 같이 단가가 싸서 분식점 등에서 많이 조리·판매되는 음식들을 지칭한다. 대한민국에서 1960년대에 정부에서 쌀부족을 해결하려고 혼식(쌀과 잡곡을 섞어먹는 것)과 분식(밀가루 음식)을 장려하면서 발전했다. 분식점의 효시는 1961년 동성로에서 문을 연 미성당이고, 뒤이어 1963년 같은 상호의 미성당이 남산초등학교 맞은편에 나타난다. 이 두 미성당이 마침내 지역의 분식 문화 전파자가 되었다. 김밥 떡볶이, 라볶이 라면 상추튀김 순대 어묵 튀김 포장마차 분류:대한민국의 문화 분류:음식
순대 ()는 한국의 음식으로, 돼지의 곱창에 채소나 당면을 비롯한 각종 속을 채우고 선지로 맛과 색깔을 낸 후 수증기에 쪄내어 만든다. 남북한 모두에서 인기 있는 길거리 음식이다. 춘추 시대 쓰인 《시경》의 〈대아〉 편에는 ‘갹(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송 대의 운서 《집운(集韻)》에 의하면 이것은 양의 창자에 고기와 내장을 채운 뒤 구운 음식이다. 또 500년대 북위의 농서 《제민요술》에는 양의 선지, 기름, 밀가루, 쌀밥을 섞은 뒤 갖은 양념을 하여 양의 대창에 넣고 삶아서 썰어 먹는 ‘양반장자해(羊盤腸雌解)’라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순대가 한국에 전파된 유래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는 삼국 시대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양반장자해’가 전파되었고, 이를 먹었다는 설이다. 둘째로는 고려 말기에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피순대가 한국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일각에서는 순대는 돼지 창자에 채소와 쌀 따위를 넣어 먹는 칭기즈 칸 시대 원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인 ‘게데스(гэдэс)’가 전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게데스는 그러한 음식이 아니라 단지 몽골의 내장 요리의 총칭이며, 실제 원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은 동물의 내장을 말려 만든 주머니에 건조시킨 고기를 가루 내어 최대 2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이 음식은 ‘보르츠(борц)’라고 하는 순대와 무관한 음식이다. 순대라는 말은 만주어로 순대를 뜻하는 ‘성기 두하(senggi-duha)’에서 유래하였는데, ‘성기’는 피를 뜻하며, ‘두하’는 창자를 뜻한다. 1800년대 후반의 요리책 《시의전서》에는 ‘슌ᄃᆡ’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며, 이는 ‘성기 두하’가 축약된 말이다. 순대의 껍질은 돼지고기 창자를 소금과 밀가루로 문질러 잡내를 없애서 만든다. 손질한 돼지 창자를 뒤집으면 깨끗한 면이 바깥으로 노출된다. 이 안에 두부, 숙주나물, 찹쌀과 각종 향신료와 함께 돼지피를 넣는다. 이렇게 만든 순대를 가마솥에 쪄낸다. 부산, 울산 및 경상남도 일부지역에서는 막장에, 다른 지역에서는 주로 양념 소금에 찍어먹으며, 돼지 간이나 허파 등의 부산물과 함께 팔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순대를 간장에 찍어 먹는다. 재료에 따라 오징어순대, 찹쌀순대 등이 있으며, 만든 지역에 따라 병천 순대, 아바이 순대 등이 있다. 1830년의 《농정회요(農政會要)》에는 ‘도저장(饀猪腸)’이라 하여 돼지의 창자에 선지, 참기름, 콩나물, 후추 등을 섞은 것을 넣어 채운 뒤 삶아 썰어 먹는 요리가 나와 있으며, 이때 설탕砂糖으로 창자를 씻으면 누린내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돼지 창자로 만든 순대를 다룬 조선 시대 최초의 기록이다.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도야지슌ᄃᆡ’라 하여 숙주, 미나리, 무, 배추김치, 두부, 생강, 마늘, 깨소금, 기름, 고춧가루, 후추 등을 돼지 선지와 섞은 것을 창자에 넣어 삶은 뒤 식혀 썰어 먹는 음식이 등장하였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순대는 돼지 내장에 속을 채워 만들며, 주로 소창을 사용하지만 지역에 따라 대창을 사용하기도 한다. 1600년대 말의 《주방문(酒方文)》에는 ‘팽우육법(烹牛肉法)’이라 하여 소의 대창에 선지, 밀가루, 매운 양념을 섞어 채운 뒤 삶아 썰어 먹는 음식의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우장증방(牛腸蒸方)’이라 하여 소의 창자에 소고기, 갖은 양념, 유장을 섞어 채운 뒤 솥에 삶아 식히고 썰어서 초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 나와 있다. 1809년의 《규합총서》에는 소의 곱창에 소고기, 닭고기, 꿩고기, 갖은 양념을 섞어 채운 뒤 솥에 삶아 식힌 뒤 마찬가지 방법으로 먹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중반의 《역주방문(曆酒方文)》에는 ‘우장증(牛腸蒸)’이라 하여 갖은 양념을 한 소의 살코기를 창자에 넣어 솥에 삶은 뒤 생강을 넣은 초장에 찍어 먹는 요리가 적혀 있다. 1800년대 중반의 《임원경제지》에는 ‘관장방’이라 하여 양의 창자에 양념과 유장을 섞은 선지를 넣어 찐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1670년경의 《음식디미방》에는 개의 창자에 개의 살코기, 후추, 천초, 생강, 참기름, 진간장을 섞어 채운 뒤 시루에 삶아서 초와 겨자를 곁들여 먹는 요리가 적혀 있다. 1700년대의 《소문사설(謏聞事說)》에는 ‘어장증(魚腸蒸)’이라 하여 대구의 창자에 대구살을 넣고 찐 뒤 썰어 먹는 요리가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어교슌ᄃᆡ’라 하여 삶은 숙주와 미나리를 소고기와 함께 다진 뒤 두부를 섞어 갖은 양념을 하고, 이것을 잘 씻은 민어의 부레에 넣고 삶은 뒤 썰어 먹는 요리가 나와 있다. 함경도의 명태순대가 유명하다. 당면 순대 당면순대는 당면이 주 재료인 순대이다. 해방 이후 순대는 고가의 음식이었으나, 1960년대 초반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양돈 사업을 육성함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돼지 부속물과 창자의 가격이 많이 내렸고, 여기에 저렴한 당면을 주 재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 당면순대가 대중화하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내장을 제거한 돼지고기의 일본 수출이 본격화하면서 돼지 부속물이 많이 유통되었고, 이에 당면순대의 보급이 뒤따랐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당면순대의 90% 가량은 공장에서 제조되고 있다. 찹쌀순대는 찰순대라고도 한다. 찹쌀로 만든 당면을 사용한 순대, 또는 찹쌀밥을 속으로 사용한 순대를 뜻한다. 피순대는 선지가 주 재료인 순대이다. 당면은 넣지 않으며, 선지, 채소, 다진 고기 등이 들어간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피순대가 유명하다. 백암순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내장에 두부, 숙주와 콩나물 등의 채소를 넣어 만들며, 조선 시대에는 죽산군에서 주로 먹던 것이 우시장이 유명하던 백암 5일장으로 옮겨왔다. 병천순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소창에 선지, 들깨, 배추, 파, 고추, 찹쌀 등을 넣어 만들며, 1960년대 초반 병천 일대에 햄 공장이 생기면서 육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돼지 부산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순대를 파는 가게가 들어선 것이 시초이다. 아바이순대는 함경도식 순대를 변형하여 돼지의 대창에 선지, 찹쌀, 우거지, 숙주, 배춧잎 등이 들어가는 순대로,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특산물이다. 청호동은 본래 모래 해변에 불과하였으나, 한국 전쟁 중 1.4 후퇴 이후 함경남도의 실향민들이 집을 짓고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흔히 1960년대 초반부터 아바이순대가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시기를 1990년대 초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암뽕순대는 돼지 막창으로 만든 순대와 새끼보(자궁, 암뽕)를 함께 내놓는 음식이다. 암뽕순대라는 말은 담양에서 순댓집을 운영하는 배서운이 암퇘지의 자궁이 봉우리와 모양이 비슷한 점에서 착안하여 ‘암퇘지 봉우리’의 두문자어인 ‘암봉’으로 부르던 것이 경음화로 ‘암뽕’이 되었고, 1990년대 초반 〈고향의 아침〉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암뽕과 순대’가 ‘암뽕순대’로 소개되면서 전국에 퍼지게 된 이름이다. 용궁순대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막창으로 만들며, 5일장인 용궁시장 인근에 많이 있던 돼지 도축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이용하여 탄생하였다. 수애(수웨) 또는 돗수애(돝수웨)는 제주도의 순대이다. 선지에 메밀가루를 섞어 만들며, 원나라의 고려 침략기 때 몽골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선지에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섞은 뒤 양의 내장에 채워 만드는 몽골식 피순대인 게데스 초스(гэдэс цус)와 유사하다. 관혼상제를 치르기 위하여 만드는 특별한 음식으로서, 퍽퍽하고 건조한 맛이 특징이다. 창자는 70~80 cm 길이로 잘라 장 속의 내용물을 훑어 제거하고, 안팎을 뒤집은 뒤 굵은소금으로 주물럭거리고 흐르는 물에 씻어 준비한다. 소는 돼지 피에 메밀가루 또는 명아주 가루나 보리가루를 넣고, 부추(겨울철에는 잔파), 빻은 마늘, 생강, 소금 등과 함께 섞어 만든다. 이때 수애에 넣는 소는 창자 한 근에 돼지피 두 사발, 메밀가루 한 사발 정도의 비율로 하여 집었을 때 흘러내릴 정도로 섞어 준비하고, 3분의 2 정도만 채우고 양 끝부분을 묶는다. 꼬챙이로 찌르면 핏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삶아서 식혀서 잘라 먹는다. 예식을 치르는 집의 남자 친척 중 돼지를 잡은 사람들이 소를 준비하여 내장의 속을 채우며, 삶는 것은 나머지 집안 남자들이 담당하였다. 수애는 창자의 부위에 따라 ᄌᆞᆫ배설수애, 훌근배설수애, 막창(창도름)수애로 나뉘는데, 두께가 두꺼우며 지방층이 있어 씹는 맛이 좋은 막창수애가 가장 고급이라고 한다. 순댓국 순대국밥 순대볶음 백순대 순대튀김 명태순대 오징어순대 분류:한국 요리 분류:선지 소시지
여러가지 어묵 (일본식 어묵의 일종) 어묵 ()은 생선의 살을 으깨어 소금과 밀가루, 전분 등 부재료를 넣고 뭉친 후 익혀서 묵처럼 만든 음식이다. 찌거나 굽거나 튀겨 먹는다. 세계 각지에 여러가지 어묵이 있는데, 한국식 어묵은 일본식 어묵에서 유래했다. 생선묵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분식집에서 파는 어묵을 속어로 오뎅으로도 부르기도 하지만, 일본어의 오뎅은 어묵, 무, 곤약 등을 넣고 끓인 탕을 말하며, 이들은 어묵과 오뎅을 구별한다. 한국에서 먹는 한국식 어묵과 일본의 가마보코는 차이가 있다. 어묵은 일본에서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한국에는 18세기 역관 이표가 쓴 요리책 《소문사설》에 可麻甫串(가마보곶)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러나 소문사설에 나오는 가마보곶의 제작 방법은 어묵과 달라, 이것이 어묵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한편 숙종 45년(1719년)의 《진연의궤》에 보면 "생선숙편"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를 한국식의 어묵이라고 보기도 한다. 한국의 어묵은 본래 일제시대에 들어왔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어묵공장은 부평동시장에서 시작한 동광식품(창업주 이상조)이다. 1953년에는 일본에서 어묵제조 기술을 배워 온 박재덕 씨가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삼진어묵을 설립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어묵 공장이다. 때마침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난민이 대거 부산으로 유입되자 어묵 생산은 호황을 맞기 시작한다. 이즈음 동광식품과 삼진어묵의 공장장 출신이 합작해 영주동시장에 환공어묵을 설립하게 된다. 1950년~1960년대에 미도, 환공, 삼진, 동광, 대원, 영진 등의 어묵 제조 공장이 생겨나며 어묵업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는다. 대기업 제품으로는 1985년 삼호 F&G에서 만들었다. 이 때 "어묵"이라는 이름을 처음 썼다. 단, 어묵이라는 이름 자체는 신문 상으로는 1969년에 처음 등장한다. 1990년대 초에 소위 "부산어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마차에서 먹는 어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부산어묵은 앞의 부산어묵과는 달리 길쭉한 모양의 어묵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 부산어묵 오징어 - 갈치살과 오징어의 씹히는 맛이 특징이다. 맛살 - 맛살을 첨가하여 만든 오뎅 만두 - 만두 모양의 오뎅으로 당면과 약간의 채소를 첨가하여 담백하다. 고구마 - 고구마를 첨가해 고소하다. 버섯 - 명태살, 도미살, 당근, 파, 건표고버섯을 넣었다. 치즈 - 조개살과 치즈를 넣었다. 순대 - 고추와 당면을 첨가하여 매콤하다. 가마보코 콩 - 콩을 넣어 담백하고 고소하다. 구운 - 대구살을 주원료로 했다. 치쿠와 가쓰마아게 샤브뎅(냉오뎅) - 인도양 말레이반도에서 도미살로 만들었다. 피시볼 어묵고로케 어묵면 파스텔 드 바칼랴우 – 대구살로 만든다. 연육 분류:수산 가공품
자바 (Java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자바 (Java) -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언어 **자바서버 페이지 ( JSP , JavaServer Pages) - HTML 문서에 자바 코드를 삽입하여 동적 웹 페이지를 생성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 자바스크립트 (Javascript) - 웹 브라우저에서 사용하는 스크립트 언어 * 자바 애플릿 (Java Applet) - 자바 바이트코드 형태로 배포되는 애플릿 자와 섬의 영어 이름. * 이에 관한 동음이의어는 자와에 있다. 자바펜 - 대한민국 필기구 제작 업체 자바 커피 스타워즈에 나오는 외계 생물 중 한 명의 이름이 자바 더 헛이다.
섬네일 한국정보통신대학교 (韓國情報通信大學校,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 ICU )는 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 내에 1997년 설립된 IT 특화 국립대학교이다. 정보통신부 및 여러 IT관련업체, ETRI 등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정보통신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왔으나 2007년 10월에 이사직을 사임하였다. 제3대 허운나 총장이 2004년부로 취임하였고, 2007년 12월 5일 퇴임했다. 이후 이혁재 총장대행이 업무를 수행하였고, 2009년 3월 1일 KAIST와 통합되면서 KAIST-ICC가 설립되었다. 본래는 대학원 과정만 존재하였으나, 2002년에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에서 학부를 세워(School of Engineering, School of IT Business) 한국정보통신대학교로 교명을 개정하였다. 학부생은 매년 120명 정도를 받아들였다.(공학부 90명, IT경영학부 30명) 대학원 외국인 비율은 10%를 훨씬 상회하며, 학부는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 출신 학생이 절반을 넘게 차지했다. 정시모집의 경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개 영역 이상에서 1등급을 받은 학생에게 지원자격이 주어졌다(초기에는 전체등급 1등급이 지원 최소 자격이었다). 전공 전과목은 영어로 진행되며, 1년 3학기제를 도입, 3년 조기졸업이 가능하다. 연차 이내의 학생에 한하여 전액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6년 당시 학부생, 대학원생 총 학생수는 약 1500명 정도였다. 현재는 KAIST-ICC로 운영되며 2011년 기준 학생 수는 2909명이고, 전임 교원 수는 168명이다. 캠퍼스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에 있다. 2004년에 감사원은 정보통신부의 ‘정보화근로사업 및 정보화촉진기금 사업’에 대한 감사에서 국가기관 및 공공단체는 사립학교를 설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통부가 규정을 어기고 사립학교 형태의 ICU를 세워 기금의 일부를 운영비로 지원하는 불합리성을 보였다 며 사립대인 ICU가 국가 기금인 정보화근로사업 및 정보화촉진기금에 의존해 설립되었다는 점이 형평성에 어긋나며 불법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에 한나라당 김영선의원은 국회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였다. 2007년도 예산안에는 KAIST와의 통합을 전제로 ICU에 대한 예산지원을 국회에서 승인하였으나 2008년도 예산안의 ICU 국비 지원안은 기획예산처에서 전액삭감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인수희망자 등의 후원자를 구하거나, 한국과학기술원과의 통합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특별법 제정은 국회에서 반대로 힘든 형편이고, 인수희망자도 없는 실정이라, 한국과학기술원과의 통합방안이 유일한 해결책의 하나로 떠올랐다. 당시 이사회에서는 거듭 결정을 연기하고 있었고 일부 이사진과 총장이 통합에 반발하였다. 허 총장은 양교 통합과 관련, ICU 학부생의 96%가 KAIST와의 하향식 통합에 반대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설문조사 결과를 이사회에 제출했다. 또한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 개편안은 양 대학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한동안 통합 논의가 중단되었으나, 2008년 4월에 정부가 KAIST-ICU 통합이 이뤄진다면 그간 ICU에 지원해오던 매년 75억의 예산을 3년간 지원하기로 약속하여 논의가 재개되었다. 2008년 5월 22일, 통합에 관한 MOU가 교환되어 통합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2009년 1월 16일에는 한국과학기술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통합이 법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ICU는 KAIST와 합병하여 KAIST ICC(IT Convergence Campus.KAIST 문지캠퍼스)로 바뀌었다. 통합 이후 기존 ICU 공학부는 KAIST 정보과학기술대학 정보통신공학과로 변경되었으며, 기존 ICU 공학부 재학생은 희망에 따라 KAIST 전산학과 또는 전기및전자공학과로 전과가 가능했다. 2007년 10월 5일 학부생 200여명은 서울 정보통신부 건물 앞에서 조속한 통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ICU가 학교 정체성과 관련해 법적·정치적 문제로 위기에 처해 있다”며 “학생과 학부모들은 KAIST와의 통합을 원하고 있지만 총장과 경영진 등에 의해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7년 10월 8일 이날 열린 이사회에 허운나 총장은 통합에 반대하며 총장직에서 사임의사를 표명했다. 2008년 3월 27일 KAIST 서남표 총장이 ICU의 요구가 과다해 통합이 어렵게 됐다 고 발표, ICU 혼란 가중 2009년 3월 1일 KAIST에 통합되어 KAIST-ICC 설립 한국정보통신기능대학 분류:1997년 설립 분류:2009년 폐지 분류:대전광역시의 대학교 분류:대전 유성구의 학교 분류:대한민국의 없어진 대학교 분류:한국과학기술원
국제단위계 (國際單位系, , 약칭 SI )는 도량형의 하나로, MKS 단위계(Mètre-Kilogramme-Seconde)이라고도 불린다. 국제단위계는 각 국가별로 상이하게 적용하는 단위를 미터법을 기준으로 현재 세계적으로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널리 쓰이는 도량형이다. 전 세계적으로 단일화된 국제 단위계를 만드려는 노력으로 1960년 10월 제 11차 국제 도량형 총회(Conférence générale des poids et mesures)에서 SI 가 결정되었다. SI단위는 국제단위계를 의미하는 프랑스어(Le Système International d Unités)의 약자이다. 이 당시 국제 단위계의 체계를 접두어, 유도 단위 및 추가 단위에 대해 확립하였다. SI단위는 7개의 기본 단위(미터(m), 킬로그램(kg), 초(s), 암페어(A), 켈빈(K), 몰(mol), 칸델라(cd)), 2개의 보조 단위(라디안(rad), 스테라디안(sr))와 이들로부터 유도되는 조합단위(19개)를 요소로 하는 일관성이 있는 단위의 집단이다. 이들 단위에 SI접두어(16개)를 붙여서 구성한다. 또한 SI라는 말 자체에 국제단위계 라는 뜻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SI단위계라고는 하지 않는다. 국제단위계에서는 7개의 기본 단위가 정해져 있다. 이것을 SI 기본 단위(국제단위계 기본 단위)라고 한다. 물리량 이름 기호 길이 미터 m 질량 킬로그램 kg 시간 초 s 전류 암페어 A 온도 켈빈 K 물질량 몰 mol 광도 칸델라 cd 미터 1미터는 빛이 진공에서 1/299,792,458 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이다. 킬로그램 1킬로그램은 질량의 단위이며 국제 킬로그램 원기의 질량과 같다. 초 1초는 온도가 0K인 세슘-133 원자의 바닥 상태에 있는 두 초미세 준위 사이의 전이에 대응하는 복사선의 9192631770주기의 지속 시간이다. 암페어 1암페어는 무한히 길고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원형 단면적을 가진 두 개의 평행한 직선 도체가 진공 중에서 1미터의 간격으로 유지될 때, 두 도체 사이에 미터당 2×10−7 뉴턴의 힘을 생기게 하는 일정한 전류이다. 켈빈 열역학적 온도의 단위인 켈빈은 물의 삼중점의 열역학적 온도의 1/273.16이다. 몰 1몰은 바닥상태에서 정지해 있으며 속박되어 있지 않은 탄소-12의 0.012킬로그램에 있는 원자의 개수와 같은 수의 구성요소를 포함한 어떤 계의 물질량이다. 몰을 사용할 때에는 구성요소를 반드시 명시해야 하며 이 구성 요소는 원자, 분자, 이온, 전자, 기타 입자 또는 이 입자들의 특정한 집합체가 될 수 있다. 1 칸델라는 진동수 540×1012헤르츠인 단색광을 방출하는 광원의 복사도가 어떤 주어진 방향으로 스테라디안당 1/683와트일 때 이 방향에 대한 광도이다. 유도 단위의 정의 기본량이 아닌 물리량을 유도량이라고 하며 정의식(定義式)이나 실험식같이 물리량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식을 이용하여 기본량이나 이미 있는 유도량으로부터 유도된다. 이 유도량의 단위를 유도단위라고 한다. 유도단위는 대응하는 물리량 사이의 관계식에 따라 기본단위나 이미 정해진 유도단위에서 유도된다. 국제단위계의 유도 단위의 크기는 유도단위를 이끌어 낸 물리관계식에 관계없이 하나의 양에 관해 일치한다. 다만 단위의 명칭은 유도한 관계식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단위로 표시된 SI유도단위를 제외한 유도단위는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특별한 명칭과 기호」를 부여한다. 유도량 이름 기호 넓이 제곱미터 m2 부피 세제곱미터 m3 속력, 속도 미터 매 초 m/s 가속도 미터 매 초 제곱 m/s2 밀도 킬로그램 매 세제곱미터 kg/m3 농도 몰 매 세제곱미터 mol/m3 광휘도 칸델라 매 제곱미터 cd/m2 SI 표준에서 따로 이름이 주어진 유도단위의 목록은 모두 22개로 아래와 같다. 유도량 이름 기호 SI 단위로 나타낸 값 주파수 헤르츠 Hz s−1 힘 뉴턴 N kg·m·s−2 또는 kg·m/s2 압력, 변형력 파스칼 Pa N/m2 = kg·m−1·s−2 또는 kg/m·s2 에너지, 일, 열량 줄 J N·m = kg·m2·s−2 또는 kg·m2/s2 일률, 전력, 동력 와트 W J/s = kg·m2·s−3 또는 kg·m2/s3 전하량, 전기량 쿨롱 C A·s 전위차, 기전력, 전압 볼트 V W/A = kg·m2·s−3·A−1 또는 kg·m2/s3·A 전기 용량 패럿 F C/V = s4·A2·kg−1·m−2 또는 s4·A2/kg·m2 전기 저항 옴 Ω V/A = kg·m2·s−3·A−2 또는 kg·m2/s3·A2 전도율 지멘스 S A/V = s3·A2·kg−1·m−2 또는 s3·A2/kg·m2 자기 선속 웨버 Wb V·s = kg·m2·s−2·A−1 또는 kg·m2/s2·A 자기선속밀도 테슬라 T Wb/m2 = kg·s−2·A−1 또는 kg/s2·A 인덕턴스 헨리 H Wb/A = kg·s−2·A−2 또는 kg/s2·A2 섭씨 온도 섭씨도(셀시우스) ℃ K - 273.15 광선속 루멘 lm cd·sr 조도 럭스 lx lm/m2 방사능 베크렐 Bq s−1 흡수선량 그레이 Gy J/kg = m2·s−2 또는 m2/s2 선량당량 시버트 Sv J/kg = m2·s−2 또는 m2/s2 촉매 활성도 캐탈 kat 유도량 이름 기호 SI 단위로 나타낸 값 평면각 라디안 rad 입체각 스테라디안 sr 이 중에서 라디안과 스테라디안은 기하학적으로 정의된 단위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라디안 은 한 원의 원둘레에서 그 원의 반지름과 같은 길이를 가지는 호의 길이에 대한 중심각이다. 예를 들어 직각은 π/2 rad이다. 원 전체의 각은 2π rad이 된다. 스테라디안 은 반지름이 r인 구의 표면에서 r2인 면적에 해당하는 입체각이다. 구 전체의 입체각은 4π sr이 된다. 유도량 이름 기호 국제단위로 나타낸 값 시간 분 min 1 분 = 60 s 시간 시간 h 1 h 3600 s 시간 일 d 1 d 86400 s 각도 도 ° 1° = (π/180) rad 각도 분 ′ 1′ (π/10800) rad 각도 초 ″ 1″ (π/648000) rad 부피 리터 L 0.001 m3 질량 톤 t 1 t = 103 kg 국제단위계와 함께 사용되는 것이 용인된 비국제단위 에너지 전자볼트 eV 1eV = 1.60217733 (49) × 10−19 J 질량 원자량 단위 u 1u = 1.6605402 (10) × 10−27 kg 길이 천문 단위 au 1au = 1.49597870691 (30) × 1011 m 국제단위계와 함께 사용되는 것이 현재 용인된 그밖의 비국제단위 길이 해리 해리 1 해리 = 1852 m 속력 노트 kn 1 kn (1852/3600) m/s 넓이 아르 a 1a 100 m2 넓이 헥타르 ha 1ha 10000 m2 압력 바 bar 1 bar = 105 Pa 길이 옹스트롬 Å 1 Å 10−10 m 면적 바안 b 1b = 10−28 m2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s;약칭 SI)에서 각 단위의 양의 크기를 쉽게 나타내기 위해 각 단위의 앞에 붙여 쓰는 접두어를 말한다. SI접두어는 각각 10의 거듭제곱(10n 또는 10-n)의 크기(인자)의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원래는 엑사 페타 테라 기가 메가 킬로 헥토 데카 데시 센티 밀리 마이크로 나노 피코 펨토 아토 등 16가지였으나, 1991년 10월 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제타, 요타, 젭토, 욕토 4가지를 추가하기로 결의하여 모두 20가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로마체 소문자를 단위의 기호로 사용하지만, 기호가 고유명사로부터 유려된 것이면 로마체 대문자를 사용한다. 숫자에서 정수부분과 소수부분을 나누는 기호로 프랑스식은 반점(,)을 영국식은 온점(.)을 사용한다. 문장 끝의 마침표를 제외하고는 단위기호 뒤에 온점을 찍지 않는다. 긴(매우 크거나 작은)수를 표기할 때는 판독을 쉽게 하기 위하여 소수점을 중심으로 3자리씩 묶어서 띄어 쓴다.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3자리마다 반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부적절한 표현이다. 미국은 1998년 모든 문서에 SI단위를 사용하고 비SI단위는 SI단위와 반드시 병기하도록 관련법을 규정하였다. 영국은 1994년에 2001년부터 SI단위를 사용하는 법안을 확정하여 SI단위를 도입하였다. 일본은 1993년 계량법을 개정하여 1999년부터 kgf, mmH2O, cal 등 비 SI단위 사용을 폐지하고 SI단위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비 SI단위를 사용하여 검정, 검사성적서 등을 발급할 수 없도록 하였다. 대한민국은 1999년 국가표준기본법을 제정하여 SI단위를 법정계량단위로 사용토록 규정하였다. 국제도량형총회 미터법 국가기술표준원 2.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SI 접두어 3. 나무위키 유도단위 4. 두산백과 7가지 기본단위 분류:표준
1942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24년 만주국(滿州國) 강덕(康德) 9년 1월 1일 -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국 26개국, 워싱턴에서 공동 선언 조인. 1월 14일 - 일제, 조선군사령 공포 1월 20일 - 제2차 세계 대전:독일, 반제회의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기로 결정 2월 - 조선총독부, 구정 폐지 2월 1일 - 마오쩌둥이 정풍운동의 시작을 선언했다. 2월 14일 - 조선총독부, 조선체육진흥회 설립 2월 20일 - 식량관리법 공포 2월 27일 - 해외독립 운동단체 한족대회가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 3월 - 유치환의 , 황순원의 발표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미국,영국,소련 측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 **일제, 일반 가정의 금속 공출 시작. 3월 17일 - 명륜전문학교 설립인가 4월 - 중화민국 정부 국방최고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안 의결 4월 1일 - 조선마사회 설립, 철강통제규칙 공포 4월 18일 - 제2차 세계 대전: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지미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16대의 미국 B-25 폭격기 16대가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오사카, 와카야마, 고베, 나고야, 욧카이치, 가와사키 등 일본의 주요도시를 폭격한 이른바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이 실행됨. 이 작전으로 일본은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의 손해를 입었다. 5월 - 잡지 가 로 제호를 바꾸고 민족지에서 친일지로 전향 5월 1일 **조선어학회 잡지 이 통권 93호로 폐간 **조선총독부, 체력단련 목적으로 조선 전국의 건민운동 전개 5월 8일 - 일제, 조선에 징병제 실시 결정 5월 15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 5월 20일 - 일제, 조선염전매령 공포 5월 27일 - 제2차 세계 대전: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에서 나치 총독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대장 암살 목적 공격(유인원 작전) 5월 29일 - 일제, 고이소 구니아키를 신임 조선 총독으로 임명 6월 - 일제, 조선목재통제령 공포 6월 9일 - 제2차 세계 대전:체코슬로바키아의 리디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파괴됨. 이 마을은 전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6월 5일 -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중 하나인 미드웨이 해전발발 6월 12일 - 제2차 세계 대전:안네 프랑크가 13번째 생일의 선물로 일기장을 받다. 6월 12일 - 제2차 세계 대전:미드웨이 해전종료 6월 15일 - 쿠바 아바나의 전승연합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6월 23일 - 제2차 세계 대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가스실에서 최초로 처형당할 첫 번째 유태인들이 파리 시에서 열차에 실리다. 6월 23일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의 포케볼프 Fw-190이 웨일스에 실수로 착륙하여 연합군에 노획되다. 6월 30일 - 제2차 세계 대전:에르빈 롬멜 지휘 하에 독일-이탈리아군이 엘 알라메인에 도착. 7월 **중국 연안에서 김두봉 등이 조선독립동맹 조직 **국민총력연맹, 가정의 유기그릇 공출 지시 7월 6일 - 이승만,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연설 8월 16일 - 제2차 세계 대전:미.영.소 군부, 모스크바 회담. 소련, 제2 전선 요구. 미-영군,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 (횃불 작전) 결정. 8월 24일 - 제2차 세계 대전 미국-일본, 2차 솔로몬 해전 9월 - 광복군총사령부, 중국 시안에서 충칭으로 본부 이전 9월 8일 - 일본, 〈조선 목재 통제령〉 시행규칙 공포 시행 9월 13일 - 제2차 세계 대전: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시내 돌입 9월 30일 - 일제, 청장년 국민등록 실시 10월 1일 -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등 학자 30여 명,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 10월 5일 - 제2차 세계 대전 2차 엘알라메인 전투가 영국의 승리로 끝나다. 10월 14일 - 일제 강점기 일본, 조선군사령 공포 10월 20일 - 최호진, 간행 11월 8일 - 제2차 세계 대전:미-영군, 북아프리카 상륙. 횟불 작전 11월 11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및 이탈리아군 안톤 작전 개시. 비시 프랑스를 무력으로 점령 11월 20일 - 일제, 조선징병제도 실시요강 결정 12월 1일 - 무선통신에 관한 전시특별규정 제정 12월 20일 - 한국 최초로 노기남 주교 임명 성서조선 필화 사건 일어남 . 김교신, 함석헌, 유달영 등 투옥됨. 1월 8일 - * 영국의 과학자 스티븐 호킹. * 일본의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1월 9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이건희. 1월 17일 - 미국의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 1월 29일 - 쿠바의 우주인 아르날도 타마요 멘데즈 1월 25일 -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에우제비우. 2월 14일 - 미국의 정치가 마이클 블룸버그. 2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혜선. 2월 28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디노 조프. 3월 16일 - 미국의 활동가, 작가 아니타 호프만. 4월 24일 - * 대한민국의 가수, 배호. * 대한민국의 가수, 하청일. 5월 2일 - 벨기에의 체육인 자크 로게. 5월 10일 - 북한의 외교관 지재룡. 5월 16일 - 일본의 가수 사사키 이사오. 5월 22일 - 시어도어 카진스키, 유나바머로 유명한 미국의 테러리스트. 6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길부. 6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지원. 6월 7일 - 리비아의 정치인 무아마르 알 카다피. 6월 17일 - * 대한민국의 가수 현철. * 국제원자력기구의 사무총장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6월 18일 -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타보 음베키. * 영국 출신 음악가 폴 매카트니.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자친토 파케티. 7월 2일 - 멕시코 정치인 비센테 폭스. 8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미술가 차중락(제임스 차). 8월 5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전 정치인 박철언. 8월 20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조세희. 9월 15일 - 중국의 정치가,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전도봉. 10월 23일 - 미국의 과학 소설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 10월 29일 - 미국의 화가 밥 로스. 11월 8일 - 대한민국의 시인 이승훈. 11월 15일 - 아르헨티나의 음악인 다니엘 바렌보임. 11월 17일 - 미국의 영화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11월 20일 - 미국의 47대 부통령 조 바이든.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유강진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김성근. 12월 21일 - 중국의 정치가, 국가주석 후진타오.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진영. 캐롤 롬바드 1월 16일 - 미국 배우 캐롤 롬바드 1월 19일 - 중국 청나라의 황족 종실 겸 정치가 보국공 푸쥔 5월 25일 - 한국 소설가 이효석 5월 27일 -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장 천두슈 6월 4일 - 나치 독일 비밀경찰 총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2년 당시의 세계 지도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2월 15일 기해 2월 계묘 소 3월 17일 기사 3월 갑진 대 4월 15일 무술 4월 을사 대 5월 15일 무진 5월 병오 소 6월 14일 무술 6월 정미 대 7월 13일 정묘 7월 무신 대 8월 12일 정유 8월 기유 소 9월 11일 정묘 9월 경술 대 10월 10일 병신 10월 신해 소 11월 9일 병인 11월 임자 소 12월 8일 을미 12월 계축 대 1943년 1월 6일 갑자
9월 17일. 대한민국 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유엔 에 동시 가입 했다. (사진은 유엔 본사) 1991년 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17일 - 다국적군, 이라크에 공격을 개시하다. (걸프전 발발) 2월 27일 - 걸프전 종전. 쿠웨이트 해방. 3월 3일 - 사인방 사건 재판에서 무기징역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장칭이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실세였던 장쩌민이 조치를 내린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동시에 가택연금 조치 처분되었다. 3월 5일 - 제1호 태풍 샤론이 발생 하였다. 3월 26일 - 대한민국,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 지방선거가 다시 시행되어 기초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개구리소년 사건이 발생하였다 4월 3일 - 대한민국,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마지막 열 번째 사건이 발생하다. 4월 26일 - 명지대생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이 발생하다. 7월 19일 - 이베로 아메리카 정상회의가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출범되다. 6월 12일 -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6월 20일 - 지방선거 광역의회 의원 선거 6월 25일 -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 선언하다. 8월 4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 동남부 해상에서 여객선 오세아노스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으나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승객과 승무원 전원 생존하였다. 8월 6일 -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남북한의 유엔가입 신청안을 이의없이 채택함. 8월 8일 - 레바논에서 이슬람 지하드에 5년 넘게 인질로 붙잡혀 있던 영국 저널리스트 존 매카시가 풀려나다. 8월 14일 -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다. 8월 19일 - 소련의 보수파들이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연금하다. (~21일) 8월 21일 - 라트비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다. 8월 22일 * 대한민국과 알바니아가 수교하다. * 대한민국, 태풍 글래디스가 상륙하다. 8월 24일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하다. 8월 27일 - 몰도바 독립. 9월 2일 - 미국, 발트 해 3개 공화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독립을 승인하다. 9월 4일 - 소비에트 연방, 발트 해 3개 공화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독립을 승인하다. 9월 6일 - 발트 3국 독립. 9월 7일 - 외무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 평양 77그룹 아주그룹 각료회의에 참석하다. 9월 8일 - 마케도니아 공화국 독립. 9월 9일 - 타지키스탄 독립. 9월 13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동시가입결의안, 유엔 사무국에 제출하다. 9월 15일 - 유고슬라비아 전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전면 무력 충돌하다. 9월 17일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마셜 제도, 에스토니아, 미크로네시아 연방, 유엔에 가입하다. 9월 18일 - 마케도니아 공화국, 유고슬라비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9월 19일 - 알프스 산맥에서 석기 시대 사람인 욋치의 미라가 발견되다. 9월 21일 - 아르메니아가 독립하다. 9월 23일 - 이라크, 유엔 핵사찰단 바그다드에 억류되다. 9월 24일 -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다. 10월 3일 - 대한민국과 부룬디가 수교하다. 10월 17일 - 거성관 화재 사고 발생. 11월 24일 - 영국의 가수 프레디 머큐리가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음을 고백하고 숨졌다. 12월 13일 -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다. 12월 16일 - 카자흐스탄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다. 12월 24일 - 러시아, 유엔에 가입하다. 12월 25일 - 소련 공식 해체. 3월 - 일본에서 크레용 신짱 (짱구는 못말려)이 주간 액션에 정식으로 출간되기 시작함. 3월 11일 - KBS 라디오 서울 폐국. 3월 20일 - SBS 라디오 방송 개국. 5월 14일 - 대우국민차(대우조선해양의 전신인 대우조선 계열)에서 티코 출시.(시판은 같은 달 17일) 6월 3일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프린스 시판. 7월 26일 - 일본에서 세가의 대표 게임인 소닉 더 헤지호그 시리즈의 첫 작품이 메가드라이브로 발매되다. 8월 6일 -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을 공개하다. 8월 25일 - 리누스 토르발스가 유즈넷 뉴스그룹에 새로운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고 있다고 발표하다. 9월 7일 - KBS홀이 개관하다. 9월 17일 - 성남시 중원구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분리됨. 9월 25일 - 현대정공(현대모비스의 전신)에서 갤로퍼 시판. 10월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슈퍼 살롱 시판. 10월 1일 - 국군의 날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다. 10월 9일 - 한글날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다. (단, 2013년 한글날이 공휴일로 부활) 10월 12일 - 중화인민공화국 선전 바오안 국제공항이 개항하였다. 11월 4일 - 대우국민차(대우조선해양의 전신인 대우조선 계열)에서 다마스와 라보 출시.(시판은 같은 달 18일) 11월 11일 - 서울지방항공청 발족 11월 26일 - 미국에서 마이클 잭슨이 Dangerous를 발매하였다. 12월 5일 - 잡지 코믹챔프 창간. 12월 9일 - 대한민국 SBS TV 방송 개국. 12월 17일 - 1992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1월 2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유지. 1월 7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육상 선수 캐스터 세메냐. * 벨기에의 축구 선수 에덴 아자르. * 프랑스의 축구 선수 클레망 그르니에. 1월 8일 * 대한민국의 리듬체조 선수 신수지. * 대한민국의 래퍼 지민 (AOA).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축구 선수 리영철. * 몬테네그로의 축구 선수 스테판 사비치. 1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효린. 1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이안. 1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구하라 (카라). 1월 15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은서. 1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기섭 (유키스). 1월 19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노열 (삼성전자 칸). 1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수향. 1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다윤. 1월 24일 - 대한민국의 래퍼 기리보이. 1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해림. 1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아라. 1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형식. 1월 30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정우(CJ 엔투스). * 대한민국의 방송인 변서은. 2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아진. 2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안다. 2월 6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서윤지. * 대한민국의 모델 겸 배우 심채원. 2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남우현 (인피니트). 2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록현 (백퍼센트). 2월 12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정종현(IM).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가솔현. 2월 13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유리안.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엘리아킴 망갈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폰투스 얀손. 2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민. 2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솔라 (마마무). 2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나혜미. 2월 25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송주아. 2월 26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CL. * 대한민국의 가수 이창섭 (비투비). 3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초롱 (에이핑크). 3월 5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비키 로사다. 3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지성 (워너원). 3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주영. * 대한민국의 배우 박유환. 3월 10일 - 대한민국의 래퍼 미르 (엠블랙). 3월 11일 - 일본의 가수 린린 (모닝구 무스메). 3월 13일 * 미국의 래퍼 일라이 (유키스). * 대한민국의 가수 나라 (헬로비너스). 3월 15일 - 일본의 배우 키타노 키이. 3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지안. 3월 21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앙투안 그리즈만. *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 마테우스 우리베. 3월 26일 - 대한민국 출신 미국 야구 선수 롭 레프스나이더 3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승윤. * 대한민국의 성우 정유정. 3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류혜영. * 대한민국의 배우 이호원. 3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이린 (레드벨벳).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은골로 캉테.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파비오 보리니. 4월 1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바니티 레베리사. 4월 2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상욱. 4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정우. 4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미 (나인뮤지스). 4월 6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알렉산드라 포프. 4월 8일 - 일본의 가수 다카하시 미나미 (AKB48). 4월 11일 - 일본의 가수 마노 에리나. 4월 15일 * 일본의 가수 아리오카 다이키 (Hey! Say! JUMP).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안한별 4월 20일 - 일본의 가수 노나카 미사토 4월 23일 - 대한민국의 래퍼 자이언트핑크. 4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슬비. 4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인선. 4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무스. * 대한민국의 배우 정혜성. * 대한민국의 배우 문지후. 4월 30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라에티티아 필리프. 5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진운 (2AM). 5월 3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로헬리오 푸네스 모리. 5월 7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엘리사 바르톨리. 5월 8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임솔아 5월 14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정해진. 5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소율. 5월 16일 - 미국의 피겨스케이터 애슐리 왜그너. 5월 21일 - 미국의 군인 힐다 클레이턴 5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수호 (EXO,EXO-K) 5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윤혜. 5월 26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아영. 5월 28일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지동원. 5월 29일 - 일본의 성우 하야미 사오리. 6월 1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조병세(CJ 엔투스). 6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승희.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유리. 6월 4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에이제이. * 영국의 배우 메건 프레스콧. * 영국의 배우 캐스린 프레스콧.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로렌초 인시녜. 6월 5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남궁경호. 6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손동운 (비스트, 하이라이트). * 대한민국의 가수 장재인. * 일본의 가수 요네자와 루미. 6월 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장민철(SK 게이밍). 6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우 (B1A4). 6월 19일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안드레이 크라마리치. * 덴마크의 축구 선수 카트리네 베예. 6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안승민 (한화 이글스). * 대한민국의 가수 민 (미스에이).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장하나. 6월 24일 - 일본의 가수 키타하라 리에. 6월 27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민하. * 대한민국의 배우 이원근. 6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서현 (소녀시대). * 대한민국의 가수 강민혁 (씨엔블루). 6월 29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석현준(AFC 아약스). 6월 30일 - 일본의 배우 카호. 7월 1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정명훈(SK텔레콤 T1).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백수연. 7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고은. 7월 3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남태희(발랑시엔 FC). * 일본의 가수 이타노 도모미 (AKB48). 7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환희. 7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태준. 7월 10일 - 일본의 가수 마에다 아쓰코 (AKB48). 7월 11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정승빈. 7월 15일 - 일본의 가수 가시와기 유키 (AKB48). 7월 19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박상면. 7월 23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호준.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김성은.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광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황인준. * 칠레의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네 엔들레르. 7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메이다니. 7월 27일 * 일본의 가수 마쓰이 레나 (SKE48). * 대한민국의 배우 조윤우. 7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유환 (스피드). 7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벤. * 대한민국의 배우 지율. 7월 3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문선엽. 8월 1일 - 대한민국의 이스포츠 선수 정민수. 8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남영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은성. * 일본의 가수 마스다 유카. 8월 5일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안드레아스 바이만.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정담.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지수. * 대한민국의 배우 위하준. 8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헤이즈. 8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조현영 (레인보우). 8월 13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백성동.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종훈.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힐다 칼렌. 8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훈 (유키스). * 대한민국의 가수 리세 (레이디스 코드). 8월 22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페데리코 마케다. * 대한민국의 배우 조보아. 8월 2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영한(삼성전자 칸). 8월 2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임태규. * 독일의 축구 선수 마르크 우트. 8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성열 (인피니트) 9월 2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조수연. 9월 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동원(CJ 엔투스). 9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소담. 9월 9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오스카르 두스 산투스 임보아바 주니오르. 9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나 (애프터스쿨). 9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정신 (씨엔블루). 9월 17일 - 일본의 성우 코토부키 미나코. 9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심동섭. 9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Key (샤이니). * 멕시코의 축구 선수 스테파니 마요르. 9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도지한. 9월 25일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조현우. 9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여민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진우 (위너). 10월 2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이은별. 10월 3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박성균(KT 롤스터). 10월 3일 - 일본의 가수 타카죠 아키. 10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니콜. * 대한민국의 가수 레이 (EXO,EXO-M).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슬기. 10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소진 (나인뮤지스).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키카 판 에스.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강아랑. 10월 15일 - 일본의 성우 나카야 사야카.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장예인.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김유라. 10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곽진언.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신원호 (크로스진).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에밀 포르스베리. 10월 26일 - 일본의 배우 이이다 리호. 11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범주. 11월 9일 - 미국의 가수 애슐리 (레이디스 코드).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박형식. * 일본의 가수 카사이 토모미. 11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진영 (B1A4).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래퍼 세용 (마이네임). * 대한민국의 래퍼 딘딘.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우희 (달샤벳, 유니티). 11월 22일 - 일본의 가수 시미즈 사키 (Berryz코보). 11월 24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김미나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케빈 (유키스). 11월 26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마놀로 가비아디니.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도우. 12월 2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정다래.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가영. 12월 7일 - 뉴질랜드의 축구 선수 크리스 우드. 12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민호 (샤이니).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래퍼 LE (EXID).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조은지. 12월 17일 - * 대한민국의 가수 이재진 (F.T 아일랜드). * 대한민국의 배우 정해나.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정다정. * 일본의 가수 이노우에 나루. 12월 19일 - 일본의 여성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 12월 28일 - 일본의 가수 오오야 시즈카.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나영.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철. 올라프 5세 라지브 간디 마일스 데이비스 프레디 머큐리 1월 17일 - 노르웨이의 국왕 올라프 5세. 1월 30일 - 미국의 물리학자 존 바딘. 2월 20일 - 캐나다의 정치철학자 유진 포시. 4월 16일 - 영국의 영화 감독 데이비드 린. 4월 26일 - 대한민국의 열사이자 학생운동가 강경대. 5월 14일 - 중국의 정치인 장칭. 5월 21일 - 인도의 정치인 라지브 간디. 6월 5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허정숙. 7월 19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이창희. 9월 7일 - 미국의 물리학자 에드윈 맥밀런. 9월 28일 * 프랑스의 작곡가 외젠 보자. * 미국의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 11월 9일 - 프랑스 배우 이브 몽탕. 11월 23일 - 독일의 영화배우 클라우스 킨스키 11월 24일 - 영국의 가수,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 12월 18일 - 곽재은 유괴살인범 홍순영 경제학상 로널드 H. 코스 문학상 나딘 고디머 물리학상 피에르질 드 젠 생리학 및 의학상 에르빈 네어, 베르트 자크만 평화상 아웅산 수지 화학상 리하르트 R. 에른스트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경인 소 2월 15일 병진 2월 신묘 대 3월 16일 을유 3월 임진 소 4월 15일 을묘 4월 계사 소 5월 14일 갑신 5월 갑오 대 6월 12일 계축 6월 을미 소 7월 12일 계미 7월 병신 소 8월 10일 임자 8월 정유 대 9월 8일 신사 9월 무술 소 10월 8일 신해 10월 기해 대 11월 6일 경진 11월 경자 대 12월 6일 경술 12월 신축 대 1992년 1월 5일 경진
제16대 대한민국 국회 는 2000년 6월 5일에 개원하였다. 4년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2000년 6월 5일 ~ 2002년 5월 29일 2002년 7월 8일 ~ 2004년 5월 29일 국회의장 이만섭 박관용 국회부의장 홍사덕 (한나라당) 김종하 (한나라당) 김종호 (자유민주연합) 김태식 (새천년민주당) 조부영 (자유민주연합) + 대한민국 국회 정당별 의석수 교섭단체명 정당명 2000년 총선 당시 2004년 총선 당시 지역구 전국구 합계 지역구 전국구 합계 한나라당 한나라당 112석 21석 133석 118석 21석 139석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96석 19석 115석 40석 19석 59석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에서 분리 49석 0석 49석 비교섭단체 자유민주연합 12석 5석 17석 5석 5석 10석 민주국민당 1석 1석 2석 1석 1석 국민통합21 신생정당 1석 1석 희망의 한국신당 1석 1석 자진해산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 무소속 5석 5석 11석 11석 계 227석 46석 273석 224석 46석 270석 + 16대 국회 상임위원회 전반기 위원장 명단 위원회 이름 소속정당 국회운영위원회 정균환 새천년민주당 이상수 새천년민주당 정균환 새천년민주당 법제사법위원회 박헌기 한나라당 정무위원회 박주천 한나라당 재정경제위원회 최돈웅 한나라당 나오연 한나라당 통일외교통상위원회 박명환 한나라당 국방위원회 천용택 새천년민주당 행정자치위원회 이용삼 새천년민주당 교육위원회 이규택 한나라당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이상희 한나라당 김형오 한나라당 문화관광위원회 최재승 새천년민주당 농림해양수산위원회 함석재 자유민주연합 산업자원위원회 박광태 새천년민주당 보건복지위원회 전용원 한나라당 환경노동위원회 유용태 새천년민주당 이윤수 새천년민주당 건설교통위원회 김영일 한나라당 정보위원회 김명섭 새천년민주당 여성위원회 이연숙 한나라당 + 16대 국회 상임위원회 후반기 위원장 명단 위원회 이름 소속정당 국회운영위원회 정균환 새천년민주당 유용태 새천년민주당 법제사법위원회 함석재 한나라당 김기춘 한나라당 정무위원회 이강두 한나라당 이재창 한나라당 재정경제위원회 나오연 한나라당 안택수 한나라당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서정화 한나라당 국방위원회 장영달 새천년민주당 행정자치위원회 박종우 한나라당 교육위원회 윤영탁 한나라당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김형오 한나라당 안동선 자유민주연합 문화관광위원회 배기선 새천년민주당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이양희양희 한나라당 산업자원위원회 박상규 새천년민주당 보건복지위원회 박종웅 한나라당 환경노동위원회 송훈석 새천년민주당 건설교통위원회 신영국 한나라당 정보위원회 김덕규 새천년민주당 여성위원회 임진출 한나라당 날짜 이름 소속정당 선거구 사유 정당별 증감 의석 수 2000년 5월 22일 강운태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광주 남구 입당 ±4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9석자유민주연합 17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1석 이강래 전북 남원시·순창군 박주선 전남 보성군·화순군 이정일 전남 해남군·진도군 2000년 9월 20일 김한길 → 김화중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김화중 승계 2000년 12월 28일 서영훈 → 최명헌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서영훈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최명헌 승계 2000년 12월 30일 송석찬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대전 유성구 자민련 교섭단체 구성 위한 당적 변경 ±3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6석자유민주연합 20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1석 배기선 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송영진 충남 당진군 2001년 1월 8일 강창희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대전 중구 의원꿔주기 반대로 제명 ±1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6석자유민주연합 19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2석 2001년 1월 10일 장재식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서울 서대문구 을 자민련 교섭단체 구성 위한 당적 변경 ±1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5석자유민주연합 20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2석 2001년 1월 28일 한명숙 → 박양수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한명숙 여성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박양수 승계 2001년 6월 1일 김영구 한나라당 서울 동대문구 을 선거 무효 판결로 의원직 상실 -1 한나라당 132석새천년민주당 115석자유민주연합 20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2석 2001년 7월 13일 장영신 새천년민주당 서울 구로구 을 선거 무효 판결로 의원직 상실 -1 한나라당 132석새천년민주당 114석자유민주연합 20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2석 2001년 9월 3일 최돈웅 한나라당 강원 강릉시 당선무효 회피를 위한 사퇴 -1 한나라당 131석새천년민주당 114석자유민주연합 20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2석 2001년 9월 4일 장재식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서울 서대문구 을 연립정부 붕괴로 탈당 ±4 한나라당 131석새천년민주당 114석자유민주연합 16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6석 송석찬 대전 유성구 배기선 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송영진 충남 당진군 2001년 9월 7일 이한동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경기 포천군·연천군 연립정부 붕괴에도 총리직 유임해 제명 ±1 한나라당 131석새천년민주당 115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7석 유삼남 → 조배숙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유삼남 해양수산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조배숙 승계 2001년 9월 10일 장재식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서울 서대문구 을 복당 ±4 한나라당 131석새천년민주당 118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2석희망의 한국신당 1석무소속 3석 송석찬 대전 유성구 배기선 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송영진 충남 당진군 2001년 10월 20일 강창희 무소속 → 한나라당 대전 중구 입당 ±2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8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2석무소속 2석 김용환 희망의 한국신당 → 한나라당 충남 보령시·서천군 2001년 10월 25일 홍준표 한나라당 서울 동대문구 을 재보궐선거 당선 +3 한나라당 136석새천년민주당 118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2석무소속 2석 이승철 서울 구로구 을 최돈웅 강원 강릉시 2002년 1월 5일 손태인 한나라당 부산 해운대구·기장군 갑 사망 -1 한나라당 135석새천년민주당 118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2석무소속 2석 2002년 1월 22일 장성민 새천년민주당 서울 금천구 당선무효 -1 한나라당 135석새천년민주당 117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2석무소속 2석 2002년 1월 27일 심규섭 새천년민주당 경기 안성시 사망 -1 한나라당 135석새천년민주당 116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2석무소속 2석 2002년 2월 21일 김호일 한나라당 경남 마산시 합포구 당선무효 -1 한나라당 134석새천년민주당 116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2석무소속 2석 2002년 2월 26일 한승수 민주국민당 → 무소속 강원 춘천시 탈당 ±1 한나라당 134석새천년민주당 116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1석무소속 3석 2002년 2월 28일 박근혜 한나라당 → 무소속 대구 달성군 탈당 ±1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6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1석무소속 4석 2002년 3월 8일 이만섭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전국구 국회법 개정으로 국회의장 당적보유 금지 ±1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5석자유민주연합 15석민주국민당 1석무소속 5석 2002년 5월 16일 함석재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충남 천안시 을 탈당 ±1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5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무소속 6석 2002년 5월 17일 박근혜 무소속 → 한국미래연합 대구 달성군 한국미래연합 창당 ±1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5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5석 2002년 5월 24일 유성근 한나라당 경기 하남시 당선무효 -1 한나라당 132석새천년민주당 115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5석 2002년 5월 27일 김민석 새천년민주당 서울 영등포구 을 서울시장 출마로 사퇴 -1 한나라당 132석새천년민주당 114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5석 2002년 5월 30일 함석재 무소속 → 한나라당 충남 천안시 을 입당 ±1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4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2002년 6월 14일 박용호 새천년민주당 인천 서구·강화군 을 당선무효 -1 한나라당 133석새천년민주당 113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2002년 6월 25일 정인봉 한나라당 서울 종로구 당선무효 -1 한나라당 132석새천년민주당 113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2002년 6월 28일 정재문 한나라당 부산 부산진구 갑 당선무효 -2 한나라당 131석새천년민주당 112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장정언 새천년민주당 북제주군 2002년 6월 29일 이만섭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장 임기 만료 ±1 한나라당 130석새천년민주당 113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박관용 한나라당 → 무소속 부산 동래구 국회의장 선출 ±1 2002년 7월 1일 손학규 한나라당 경기 광명시 경기지사 취임으로 사퇴 -1 한나라당 129석새천년민주당 111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박광태 새천년민주당 광주 북구 갑 광주시장 취임으로 사퇴 -2 강현욱 전북 군산시 전북지사 취임으로 사퇴 2002년 7월 10일 김태호 한나라당 울산 중구 사망 -1 한나라당 128석새천년민주당 111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2002년 7월 22일 전재희 → 김영선 한나라당 전국구 전재희 재보궐선거 출마 위해 사퇴 김영선 승계 2002년 8월 8일 박진 한나라당 서울 종로구 재보궐선거 당선 +11 한나라당 139석새천년민주당 113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이우재 서울 금천구 권영세 서울 영등포구 을 이경재 인천 서구·강화군 을 김병호 부산 부산진구 갑 서병수 부산 해운대구·기장군 갑 전재희 경기 광명시 김황식 경기 하남시 이해구 경기 안성시 김정부 경남 마산시 합포구 양정규 북제주군 김상현 새천년민주당 광주 북구 갑 +2 강봉균 전북 군산시 2002년 8월 16일 안동선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경기 부천시 원미구 갑 탈당 ±1 한나라당 139석새천년민주당 112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5석 2002년 10월 9일 한승수 무소속 → 한나라당 강원 춘천시 입당 ±1 한나라당 140석새천년민주당 112석자유민주연합 14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2002년 10월 14일 전용학 새천년민주당 → 한나라당 충남 천안시 갑 당적변경 ±1 한나라당 142석새천년민주당 111석자유민주연합 13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4석 이완구 자유민주연합 → 한나라당 충남 청양군·홍성군 ±1 2002년 11월 1일 김명섭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서울 영등포구 갑 탈당 ±2 한나라당 142석새천년민주당 109석자유민주연합 13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6석 강성구 경기 오산시·화성군 2002년 11월 3일 이근진 경기 고양시 덕양구 ±2 한나라당 142석새천년민주당 107석자유민주연합 13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8석 김윤식 경기 용인시 을 2002년 11월 4일 설송웅 서울 용산구 ±11 한나라당 142석새천년민주당 96석자유민주연합 13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19석 김원길 서울 강북구 갑 김영배 서울 양천구 을 박상규 인천 부평구 갑 송석찬 대전 유성구 유재규 강원 홍천군·횡성군 이윤수 경기 성남시 수정구 최선영 경기 부천시 오정구 김덕배 경기 고양시 일산구 을 이희규 경기 이천시 박종우 경기 김포시 2002년 11월 8일 원유철 경기 평택시 갑 ±1 한나라당 142석새천년민주당 95석자유민주연합 13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20석 2002년 11월 9일 유용태 서울 동작구 을 ±3 한나라당 142석새천년민주당 92석자유민주연합 13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무소속 23석 송영진 충남 당진군 장성원 전북 김제시 2002년 11월 11일 정몽준 무소속 → 국민통합21 울산 동구 국민통합21 창당 ±1 한나라당 145석새천년민주당 92석자유민주연합 13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9석 원유철 무소속 → 한나라당 경기 평택시 갑 입당 ±3 이근진 경기 고양시 덕양구 김윤식 경기 용인시 을 2002년 11월 14일 이양희 자유민주연합 → 한나라당 대전 동구 당적변경 ±2 한나라당 147석새천년민주당 92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20석 이재선 대전 서구 을 오장섭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충남 예산군 탈당 ±1 2002년 11월 20일 강성구 무소속 → 한나라당 경기 오산시·화성군 입당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92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9석 2002년 11월 11일 이한동 무소속 → 하나로국민연합 경기 포천군·연천군 하나로국민연합 창당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92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한국미래연합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18석 2002년 11월 23일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 한나라당 대구 달성군 복당 ±1 한나라당 149석새천년민주당 92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18석 2002년 11월 25일 김원웅 한나라당 → 개혁국민정당 대전 대덕구 당적변경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92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18석 2002년 11월 26일 설송웅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서울 용산구 복당 ±12 한나라당 150석새천년민주당 103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석 김영배 서울 양천구 을 김명섭 서울 영등구 갑 유용태 서울 동작구 을 송석찬 대전 유성구 유재규 강원 홍천군·횡성군 이윤수 경기 성남시 수정구 최선영 경기 부천시 오정구 김덕배 경기 고양시 일산구 을 박종우 경기 김포시 송영진 충남 당진군 장성원 전북 김제시 김원길 무소속 → 한나라당 서울 강북구 갑 입당 ±2 박상규 인천 부평구 갑 곽치영 새천년민주당 고양시 덕양구 갑 당선무효 -1 이회창 → 유한열 한나라당 전국구 이회창 대선 출마로 사퇴 유한열 승계 2002년 12월 1일 이인제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충남 논산시·금산군 탈당 ±11 한나라당 150석새천년민주당 102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5석 2002년 12월 3일 안동선 무소속 → 자유민주연합 경기 부천시 원미구 갑 입당 ±2 한나라당 150석새천년민주당 102석자유민주연합 12석민주국민당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3석 이인제 충남 논산시·금산군 2002년 12월 19일 정갑윤 한나라당 울산 중구 재보궐선거 당선 +1 한나라당 151석새천년민주당 102석자유민주연합 12석민주국민당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3석 2002년 12월 27일 이희규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경기 이천시 복당 ±1 한나라당 151석새천년민주당 103석자유민주연합 12석민주국민당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2석 2003년 2월 6일 황승민 → 장광근 한나라당 전국구 황승민 사망 장광근 승계 2003년 3월 4일 김영진 → 오영식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김영진 농림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오영식 승계 김화중 → 구종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으로 사퇴 구종태 승계 2003년 3월 7일 문희상 새천년민주당 경기 의정부시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으로 사퇴 -1 한나라당 151석새천년민주당 102석자유민주연합 12석민주국민당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2석 2003년 3월 28일 김영배 새천년민주당 서울 양천구 을 당선무효 -1 한나라당 151석새천년민주당 101석자유민주연합 12석민주국민당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2석 2003년 4월 8일 원철희 자유민주연합 충남 아산시 의원직 상실 -1 한나라당 151석새천년민주당 101석자유민주연합 11석민주국민당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개혁국민정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2석 2003년 4월 24일 오경훈 한나라당 서울 양천구 을 재보궐선거 당선 +2 한나라당 153석새천년민주당 101석자유민주연합 11석개혁국민정당 2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2석 홍문종 경기 의정부시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경기 고양시 덕양구 갑 +1 2003년 6월 10일 송광호 자유민주연합 → 무소속 충북 제천시·단양군 탈당 ±1 한나라당 153석새천년민주당 101석자유민주연합 10석개혁국민정당 2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3석 2003년 7월 7일 김영춘 한나라당 서울 광진구 갑 탈당 ±5 한나라당 149석새천년민주당 101석자유민주연합 10석개혁국민정당 2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7석 이우재 서울 금천구 이부영 서울 강동구 갑 안영근 인천 남구 을 김영춘 경기 군포시 송광호 무소속 → 한나라당 충북 제천시·단양군 입당 ±1 2003년 9월 20일 설송웅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서울 용산구 탈당 ±37 한나라당 149석새천년민주당 64석자유민주연합 10석개혁국민정당 2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4석 임종석 서울 성동구 김희선 서울 동대문구 갑 이상수 서울 중랑구 갑 유재건 서울 성북구 갑 신계륜 서울 성북구 을 김근태 서울 도봉구 갑 임채정 서울 노원구 을 신기남 서울 강서구 갑 김성호 서울 강서구 을 김명섭 서울 영등포구 갑 이해찬 서울 관악구 을 이호웅 인천 남동구 을 송영길 인천 계양구 정동채 광주 서구 김태홍 광주 북구 을 박병석 대전 서구 갑 송석찬 대전 유성구 이종걸 경기 안양시 만안구 을 배기선 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정장선 경기 평택시 을 천정배 경기 안산시 을 김덕배 경기 고양시 일산구 을 남궁석 경기 용인시 갑 이창복 강원 원주시 김택기 강원 태백시·정선군 홍재형 충북 청주시 상당구 이원성 충북 충주시 문석호 충남 서산시·태안군 송영진 충남 당진군 장영달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정동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강봉균 전북 군산시 김원기 전북 정읍시 이강래 전북 남원시·순창군 정세균 전북 진안군·무주군·장수군 천용택 전북 강진군·완도군 2003년 9월 23일 김덕규 서울 중랑구 을 ±1 한나라당 149석새천년민주당 63석자유민주연합 10석개혁국민정당 2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5석 2003년 10월 14일 정대철 서울 중구 ±1 한나라당 149석새천년민주당 62석자유민주연합 10석개혁국민정당 2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6석 2003년 10월 21일 이미경 이재정 허운나 박양수 오영식 → 안상현 황창주 박종완 한충수 양승부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이미경, 이재정, 허운나, 박양수, 오영식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안상현, 황창주, 박종완, 한충수, 양승부 승계 2003년 11월 1일 최용규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인천 부평구 탈당 ±1 한나라당 149석새천년민주당 61석자유민주연합 10석개혁국민정당 2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7석 2003년 11월 3일 김원웅 개혁국민정당 → 무소속 대전 대덕구 탈당 ±2 한나라당 149석새천년민주당 61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9석 유시민 경기 고양시 덕양구 을 2003년 11월 11일 정대철 무소속 → 열린우리당 서울 중구 열린우리당 창당 ±47 한나라당 149석새천년민주당 60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3석 설송웅 서울 용산구 임종석 서울 성동구 김영춘 서울 광진구 갑 김희선 서울 동대문구 갑 이상수 서울 중랑구 갑 김덕규 서울 중랑구 을 유재건 서울 성북구 갑 신계륜 서울 성북구 을 김근태 서울 도봉구 갑 임채정 서울 노원구 을 신기남 서울 강서구 갑 김성호 서울 강서구 을 이우재 서울 금천구 김명섭 서울 영등포구 갑 이해찬 서울 관악구 을 이부영 서울 강동구 갑 안영근 인천 남구 을 이호웅 인천 남동구 을 최용규 인천 부평구 송영길 인천 계양구 정동채 광주 서구 김태홍 광주 북구 을 박병석 대전 서구 갑 송석찬 대전 유성구 김원웅 대전 대덕구 이종걸 경기 안양시 만안구 을 배기선 경기 부천시 원미구 을 정장선 경기 평택시 을 천정배 경기 안산시 을 유시민 경기 고양시 덕양구 을 김덕배 경기 고양시 일산구 을 김부겸 경기 군포시 남궁석 경기 용인시 갑 이창복 강원 원주시 김택기 강원 태백시·정선군 홍재형 충북 청주시 상당구 이원성 충북 충주시 문석호 충남 서산시·태안군 송영진 충남 당진군 장영달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정동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강봉균 전북 군산시 김원기 전북 정읍시 이강래 전북 남원시·순창군 정세균 전북 진안군·무주군·장수군 천용택 전북 강진군·완도군 정범구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경기 고양시 일산구 갑 탈당 ±1 2003년 12월 9일 김홍신 → 송병대 한나라당 전국구 김홍신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송병대 승계 2003년 12월 12일 조배숙 → 박금자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조배숙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박금자 승계 2003년 12월 26일 김윤식 한나라당 경기 용인시 을 당선무효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60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3석 2004년 1월 14일 백승홍 한나라당 → 무소속 대구 중구 탈당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60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석 2004년 1월 16일 안동선 자유민주연합 → 새천년민주당 부천시 원미구 갑 복당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61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9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석 2004년 1월 20일 김홍일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전남 목포시 탈당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60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9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5석 2004년 1월 30일 정범구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경기 고양시 일산구 갑 복당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61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9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4석 2004년 2월 1일 이상희 → 김영구 한나라당 전국구 이상희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김영구 승계 2004년 2월 1일 김홍일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전남 목포시 탈당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62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9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하나로국민연합 1석무소속 3석 2004년 2월 19일 이한동 하나로국민연합 → 자유민주연합 경기 포천군·연천군 복당 ±1 한나라당 148석새천년민주당 62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3석 2004년 2월 23일 박시균 한나라당 → 무소속 경북 영주시 탈당 ±1 한나라당 147석새천년민주당 62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4석 2004년 2월 26일 박종웅 부산 사하구 을 ±1 한나라당 146석새천년민주당 62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5석 2004년 3월 2일 김일윤 경북 경주시 ±1 한나라당 145석새천년민주당 62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6석 2004년 3월 2일 서청원 서울 동작구 갑 ±3 한나라당 142석새천년민주당 62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9석 하순봉 경남 진주시 윤한도 경남 의령군·함안군 2004년 3월 8일 박승국 대구 북구 갑 ±1 한나라당 141석새천년민주당 62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0석 2004년 3월 16일 조성준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경기 성남시 중원구 탈당 ±1 한나라당 141석새천년민주당 61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1석 2004년 3월 19일 박주선 전남 보성군·화순군 ±1 한나라당 140석새천년민주당 60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3석 김기배 한나라당 → 무소속 서울 구로구 갑 탈당 ±1 2004년 3월 21일 박원홍 서울 서초구 갑 ±1 한나라당 139석새천년민주당 60석열린우리당 47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4석 2004년 3월 22일 김종호 → 변웅전 자유민주연합 전국구 김종호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변웅전 승계 2004년 3월 23일 박승국 무소속 → 열린우리당 대구 북구 갑 입당 ±1 한나라당 139석새천년민주당 60석열린우리당 48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3석 2004년 3월 25일 조웅규 → 박경섭 한나라당 전국구 조웅규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박경섭 승계 2004년 3월 26일 조성준 무소속 → 열린우리당 경기 성남시 중원구 입당 ±1 한나라당 139석새천년민주당 60석열린우리당 49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2석 2004년 3월 29일 설훈 새천년민주당 → 무소속 서울 도봉구 을 탈당 ±1 한나라당 139석새천년민주당 59석열린우리당 49석자유민주연합 10석민주국민당 1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1석 임진출 → 이만재 한나라당 전국구 임진출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이만재 승계 2004년 3월 31일 박인상 → 이종성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박인상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이종성 승계 2004년 4월 15일 민주국민당 → 무소속 총선 득표율 미달로 정당 등록 취소 한나라당 139석새천년민주당 59석열린우리당 49석자유민주연합 10석국민통합21 1석무소속 12석 2004년 5월 21일 박종완 → 안희옥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박종완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 안희옥 승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목록 대한민국 제16대 총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이다. 애플이 개인용 컴퓨터에 처음으로 도입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운영 체제인 맥 OS에 대항하여, 당시 널리 쓰이던 MS-DOS에서 멀티태스킹과 GUI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응용 프로그램으로 처음 출시되었다. 현재 전 세계 90%의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고 있으며, 서버용 운영 체제로도 점차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윈도우 운영 체제의 경우 큰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일반 사용자들에게 매우 익숙할뿐 아니라 호환되는 유명한 응용 프로그램이 많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보안 문제에서는 취약한 부분이 많은 운영 체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보안문제에선 취약한 부분이 다른 운영체제와 차이날 정도로 독보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영어 표기는 Windows 이지만 한글로는 여러 가지 표기가 쓰이고 있다. 한국어권에서는 윈도 , 윈도스 , 윈도즈 , 윈도우 , 윈도우즈 , 윈도우스 등 여러 가지 표기가 사용되고 있다. 1995년 대한민국 국립국어원은 컴퓨터 운영 체제 이름인 Windows 95 를 윈도 95 로 정하면서 Windows 의 한글 표기를 윈도 로 확정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제품 이름을 한글로 옮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한국어 홈페이지에 있는 제품명은 모두 영문 이름 Windows 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필요에 따라 윈도우 라는 한글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 출하된 제품의 포장에는 "한글 윈도우"로 표기되어 있으며, 공식 기술자료(KB)와 보도자료(Press) 등에도 "윈도우"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현재 국어사전에 표기된 공식 표준어는 "윈도즈"이다. 윈도우 1.0부터 3.1x에 이르는 버전들은 운영 체제가 아닌, MS-DOS 하에서 동작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로 간주된다. 윈도우 3.0은 애플의 맥 OS와 UI가 매우 흡사하였다. 윈도우 95가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255자까지의 긴 파일 이름 지원, 플러그 앤 플레이를 통한 하드웨어 자동 설치 및 구성 등을 채용하면서 1995년 8월에 출시하였다. 순수 32비트 응용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 있고 윈도우 3.1에 비해 안정성을 높이고 몇 가지 기술을 향상시켰다. 윈도우 95의 OEM 서비스 릴리즈 (OSR) 버전이 몇 가지가 있으며 각기 서비스 팩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윈도우 98이 1998년 6월에 출시되었으며 SE 버전이 1999년 5월에 출시되었다. 최초의 NT 계열 운영 체제는 1993년에 나온 윈도우 NT 3.1이며 여기서 3.1이라는 숫자는 소비자용 윈도우 버전을 가리키며 뒤를 이어 1994년에 윈도우 NT 3.5, 1995년에 윈도우 NT 3.51, 1996년에 윈도우 NT 4.0, 2000년에 윈도우 2000이 출시되었다. 윈도우 2000은 마이크로소프트 제품 활성화를 포함하지 않는 마지막 NT 기반 윈도우이다. NT 4.0은 윈도우 95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처음 도입하였으며 윈도우 95의 내장 32비트 런타임을 처음으로 포함하였다. 과거 윈도우 ME로 인해 쓴맛을 본 MS가 윈도우 9x 커널의 한계를 깨달고 기업용 커널인 NT커널로 윈도우 XP를 홈 에디션과 프로페셔널 에디션으로 출시하였다.과거 윈도우 9x보다 훨씬더 안정적인데다 향상된 시스템 복원 기능등 여러가지 기능을 향상시켜 출시하였다.(틈새 시장에서는 태블릿 PC, 미디어 센터용으로 출시) 그 뒤에 윈도우 XP를 출시한지 1년 반이 지나 서버용 운영 체제인 윈도우 서버 2003이 나왔다. 장기간의 개발 후 윈도우 비스타가 2006년 말에 출시되었으며 서버 제품으로 윈도우 서버 2008이 2008년 초에 출시되었다. 그 뒤에 2009년 7월 22일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의 RTM 버전이 공개되었다. 윈도우 7은 2009년 10월 22일에 공식 출시되었다. 2013년 10월 17일(미국 현지시각) 윈도우 8.1이 공식 출시 되었다. 윈도우 8.1은 윈도우 8 사용자들은 무료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현재 윈도우 10이 정식출시 하였으며 2015년 7월29일에 전세계에서 출시되었다. 윈도우 NT에는 x86 기반 개인용 컴퓨터가 전문적인 세계를 차지하기 이전에 여러 플랫폼의 지원을 포함하였다. 당시 일부 제품이 64비트 프로세서였던 NT 3.1부터 4.0까지 파워PC, DEC 알파, MIPS R4000을 지원하였으나 운영 체제는 이들을 32비트 프로세서로 취급하였다. 인텔 아이테니엄 (IA-64)이 도입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를 지원하는 새로운 버전의 윈도우를 출시하였다. 아이테니엄 버전의 윈도우 XP와 윈도우 서버 2003이 x86 (32비트)가 주류인 시대에 출시되었다. 2005년 4월 25일에 마이크로소프트는 x86-64 아키텍처를 위한 윈도우 XP 프로페셔널 x64 에디션과 윈도우 서버 2003 x64 에디션을 공개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이테니엄 버전의 윈도우 XP의 지원을 2005년에 중단하였다. 윈도우 비스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종 사용자 버전을 위한 x86, x64 에디션으로 처음 출시한 것이다. 윈도우 비스타는 아이테니엄 아키텍처를 지원하지 않는다. 현대의 64비트 윈도우 계열은 AMD64/IA-64 버전의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을 이루며 아이테니엄과 x64 에디션도 존재한다. 윈도우 서버 2008 R2에는 32비트 버전이 없지만 윈도우 7에는 존재한다. 윈도우 CE(윈도우 임베디드 콤팩트)는 위성 내비게이션과 일부 휴대 전화와 같은 소형 컴퓨터에 돌아갈 수 있게 만든 윈도우 에디션이다. 윈도우 CE는 드림캐스트에서 세가의 사유 운영 체제와 더불어 채용되기도 하였다. 윈도우 CE는 윈도우 NT 커널 기반을 하는 소형 에디션인 윈도우 XP 임베디드나 윈도우 NT 4.0 임베디드와는 다른 것이다. 윈도우 XP는 윈도우 2000의 뒤를 잇는 제품이며,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초의 소비자 지향 운영 체제이다. XP 라는 말은 e XP erience 중 "XP"를 따와서 만들었다. 2014년 4월 8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윈도우 XP의 후속작으로, 개인용 버전은 2007년 1월 30일에, 기업용 버전은 2006년 11월 30일에 발매되었다. 이때부터 에어로 테마가 시작되었다. 2017년 4월 11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윈도우 비스타의 후속작으로, 2009년 10월 22일에 6가지 에디션의 소매 버전으로 대중에게 출시되었다. 윈도우 7은 윈도우 비스타에서 이루어 놓은 응용 프로그램 및 하드웨어 호환성을 개선함과 더불어 윈도우 계열의 중심적이고 점층적인 업그레이드에 집중하였다. 윈도우 비스타는 원래 에어로 효과가 있었지만 윈도우 7은 홈 프리미엄부터 시작됐다. 2020년 1월 14일, 지원이 종료될 예정이다. 윈도우 7의 뒤를 이어 윈도우 8이 공개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0년 10월 22일에 네덜란드의 블로그 엔트리에 "2년 뒤에 윈도우 8이 공개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2012년 6월 1일에 윈도우 8 릴리즈 프리뷰가 배포 되었고, 2012년 8월 1일에 윈도우 8 RTM이 MSDN, 테크넷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한국시간 기준으로 2012년 10월 26일 윈도우 8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버그가 많아 8.1로 바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메트로 테마를 적용하였다. 또한 Windows 8부터는 Windows To Go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윈도우 8의 기능 추가 및 핫픽스 롤업 통합 버전. 그 밖에 여러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윈도우 8 사용자들은 윈도우 스토어에서 무료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2014년 9월 30일에 윈도우 10 테크니컬 프리뷰가 공식 발표되었다. 윈도우 9를 건너뛰고 윈도우 10을 개발했던 것이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명칭을 윈도우 원(Windows One)이라고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윈도우 1.0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윈도우 원(1)이 아닌 10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존 Windows 8.1 이후에 Windows 9가 출시되어야 하지만 Windows 98 등의 이전 버전의 Windows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Windows 10으로 즉시 업데이트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에 따라 Windows 8.1까지는 버전 코드가 NT 6.3이였던 것을 갑작스럽게 NT 10.0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에 많은 프로그램에서 혼란이 있었다. ISS(Windows Server)에서 PHP 관련 소스 설정에서 이 때문에 설치에 약간의 트릭이 필요하다.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측은 차세대 윈도우의 이름을 윈도우 10 이라고 지은 이유는 "윈도우 10이 많은 혁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5년 7월 29일 공식 발매를 시작하며 윈도우 7과 윈도우 8.1를 사용하는 모든 이용자에 한해서(비정품 이용자도 포함) 1년 간 무료로 윈도우 10으로 업데이트를 1년 후인 2016년 7월 29일까지 지원하였다. (추가 기능을 사용하는 윈도우에 한해 업그레이드 중이다.) 그리고 2017년 12월 31일 업그레이드가 끝났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마지막 버전이다. Windows 8 Enterprise 버전 또는 Windows 8 이상의 Enterprise 버전에서는 Windows To Go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Windows To Go는 윈도우가 설치되지 않은 PC에 즉시 USB로 부팅할 수 있는 윈도우의 프리뷰와 비슷한 기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모든 UWP(Windows 유니버셜 앱. Windows 10부터는 개선된 Windows Store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한다. )를 제외한 게임 및 다른 모든 Executable ( *.exe ) 파일을 실행할 수 있고 NX 실행비트를 지원한다. Windows To Go는 윈도우 설치 디스크 이미지 내부에 있으며 윈도우 설치의 핵심 파일 및 시스템을 담고 있는 파일인 install.wim을 해석하고 확장하는 방식을 USB에 덮어쓰며 진행된다. Windows 설치 과정과 동일하지만 하드디스크와 달리 포터블이므로 운영체제의 가벼움과 쉽게 액세스 등의 기능이 필요해졌다. 물론 Windows 7 또는 다른 운영체재에서도 일부 Windows To Go를 만들어 주는 일부 프로그램이 있다. 단, install.wim 파일이 필요하며 Windows의 정품 제품키가 필요하다. 먼저 프로그램에서 install.wim에서 운영체제가 Windows To Go를 지원하는지 정보 파일을 확장하여 install.wim이 담고 있는 Windows의 정보를 가져온다. install.wim의 운영체제가 Windows 8 이하일 경우는 계속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일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다음으로 Windows의 파일 확장이 이루어진다. 프로그램에서 install.wim의 내부 파일을 해석하면서 USB에 파일을 확장(배치)해 나가는 구조이다. 완료되면 약 17GB 정도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최소 32GB의 USB에 설치해야 한다. 또한 Windows To Go의 경우 다른 리눅스 계열의 운영체제와 달리 커널이 없어 모든 작업은 USB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USB가 3.1 또는 3.0 이상을 지원하지 않는 이상은 부팅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2.0으로 해본 결과 하루가 지났음에도 부팅이 완료되지 않았다) + 2017년 1월의 윈도우 운영 체제 시장 점유율 윈도우 버전 시장 점유율 모든 버전 83.39% (100%로 볼때) 윈도우 7 46.76% 윈도우 10 23.72% 윈도우 8.1 8.01% 윈도우 8 3.01% 윈도우 XP 8.63 % 마이크로소프트는 초기에 도스의 확장 소프트웨어로서의 윈도우를 출시하였으며 이는 운영 체제가 아니었다. 1993년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윈도우 NT를 운영 체제로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 운영 체제로서의 윈도우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하나는 가정 사용자, 다른 하나는 기업과 전문 IT 사용자용이다. 이 두 운영 체제는 가정용 버전의 경우 게임이나 시각 효과가 더 많이 지원되고 네트워킹이나 보안 등의 기능을 빼는 한편, 전문가용 버전에서는 시각 효과를 제외하고 네트워킹이나 보안을 강화하였다. 첫 독립된 버전 윈도우 1.0은 도스의 확장 소프트웨어로서 1985년 11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2.0은 1987년 12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2.03에서는 서로 겹치는 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는 소송을 걸기도 했다. 윈도우 3.0은 1990년에 출시되자 첫 6개월 만에 2백만 부가 팔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UI 및 멀티태스킹이 많이 개선되었다. 이후 발표된 윈도우 3.1은 트루타입 글꼴을 지원하였는데, 영문 윈도우 3.0과 3.1 사이에 발표된 한글 윈도우 3.0의 경우 영문 윈도우 3.1에 앞서 트루타입 글꼴이 적용되었다. 1993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NT를 내놓았다. 윈도우 NT는 전문가용 운영 체제로 인정되었고 실제로 네트워크용이었으며, 후에 출시된 윈도우 XP의 초석이 되었다. 1995년 8월 윈도우 95가 출시되었다. 표면적으로 윈도우 95는 도스를 포함하지만 도스 상에서 실행되지 않는 완전한 운영 체제가 되었으며, UI가 많이 변경되고 멀티태스킹 기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윈도우 95는 기본적으로 32비트 운영 체제였지만 16비트 하위 호환성을 유지하였다. 3.1과의 호환성을 맞추기 위해 GUI API 등에서 16비트 코드를 수용한 까닭에 성능과 안정성이 떨어졌다. 1998년 6월 윈도우 98이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4.0을 탑재하는 등 크기가 커지면서 윈도우 95에 비해 느리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지만 1999년 윈도우 98 SE를 내놓으면서 많은 문제를 개선했다. 하지만 윈도우 98 SE는 자잘한 업데이트를 패치 받고는 2006년에 윈도우 98과 함께 지원 종료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전문가용 운영 체제인 윈도우 2000을 2000년 2월에 내놓았다. 하지만 윈도우 98의 후속작은 윈도우 ME였고 이는 2000년 9월에 나왔다. 윈도우 ME는 유니버설 플러그 앤 플레이와 시스템 복원 등의 기능을 새로 추가했지만, 출시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윈도우 XP가 출시되어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제조사들의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호환성이 부족했고 메모리 관리가 미흡하여 리소스 부족 문제를 자주 발생시켰다. 2001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XP를 출시하였다. 이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면서 윈도우 95 및 그 후계작의 사용자 편의성을 살렸다. "홈 에디션"과 "프로페셔널"으로 나뉘어 출시되는데, 두 에디션은 완전하게 동일하며 단지 두 가지 기능만 다르다. 도메인에 가입하는 기능과 MUI를 지원하는 기능 이 두 가지 기능이 "홈 에디션"엔 빠져 있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3은 2008년 4월 21일 발표되었다. "윈도우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이 2003년, 2004년, 2005년에 출시되었는데, 이는 DVD/TV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고, 프로그램 녹화 및 원격 조정을 지원한다. 업데이트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매년 새 버전이 출시되다가 윈도우 비스타가 출시되면서 단종되었다. 2003년 4월, 윈도우 서버 2003이 출시되었다. 이는 윈도우 2000 서버 제품군에 비해서 새로운 기능과 강력한 보안을 내세우고 있다. 후속작으로 2005년 12월 윈도우 서버 2003 R2 버전을 출시했다. 윈도우 2003 서비스 팩 2는 2007년 3월에 발표되었다. 2007년 1월 윈도우 비스타가 (코드네임 "롱혼") 출시되었다. 윈도우 비스타는 UAC 기능을 포함하여 윈도우 XP보다 보안이 더욱 강화되었고 미디어센터 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호환성 문제로 일부 국가에서 XP 기반의 프로그램이 비스타에서 작동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일부 사용자들이 XP로 다운그레이드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2008년 3월 윈도우 서버 2008은 윈도우 서버 2003의 후계작으로 개발이 완료되었으며 2008년 3월 20일에 출시되었다. 2009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가 2009년 10월, 비스타의 호환성 문제와 일부 기능을 개선하여, 윈도우 7을 출시했다. 2012년 10월, 윈도우 8이 공개되었다. 2013년 10월 17일(한국 시각), 윈도우 8.1이 공개되었다. 공개 이후부터 기존 윈도우 8 정품 사용자는 윈도우 스토어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윈도우 8.1에서는 Sound Recorder, Scan 등의 기본 앱이 추가되었고, 타일의 크기를 4가지 중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본래 윈도우 8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업 표시줄의 시작 버튼이 다시 생겨났다. 2014년 9월 30일 공개 되었으며 10월 2일(한국 시각 새벽 1시), 윈도우 10프리뷰가 배포되기 시작했다. 윈도우 95, 98등과 이름에러(프로그램이 윈도우 95,98을 윈도우 9까지만 인식을 하는게 대부분이기 때문임)를 줄이기 위해 9을 건너 뛰고 10이 되었다. 2015년 7월 29일, 윈도우 10 정식판이 출시되었다. 1년 간 무료 업그레이드를 제공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윈도우 10 이 무료 업데이트 제공이 종료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사용하지 않고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에뮬레이션으로는 다음과 같다 와인 (소프트웨어) * 다윈 ReactOS 운영 체제 맥 OS 리눅스 * 우분투 (운영 체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설치 윈도우 오류 보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공식 홈페이지 분류:1985년 소프트웨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Microsoft Office)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윈도우, 맥용 사무용 소프트웨어의 묶음이다. 1989년에 맥용으로, 1990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몇 가지 버전을 예로 들면 2007년 1월 30일에 윈도우 비스타와 동시에 출시된 윈도우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과 2008년 1월 15일에 출시된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이 있다. 이 버전들은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오피스 오픈 XML 포맷(.docx, .xlsx, .pptx 등)을 사용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호환성 패키지를 설치하면 윈도우용 오피스 2000-오피스 2003, 맥용 오피스 2004 에서도 이 문서들을 보고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서비스 팩과 더불어 새로운 버전들이 업데이트되었으며 워드,엑셀,파워포인트는 대부분의 오피스 에디션에 기본으로 내장되어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첫 버전은 1989년에 맥용으로 출시되었다. 또한 윈도우용은 1990년에 출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3.0 은 1990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출시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4.0 은 1994년에 출시되었으며 워드 6.0, 엑셀 5.0, 파워포인트 4.0을 포함하고 있다. 워드는 전 버전이 2.0임에도 불구하고 맥용 오피스와 버전 번호를 같이 하기 위하여 2.0 다음 버전을 6.0으로 맞추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4.3 은 마지막 16비트 지원 오피스이다. 이 버전은 윈도우 3.1x과 윈도우 NT 3.1 그리고 윈도우 NT 3.5를 마지막으로 지원하는 버전이다. (윈도우 NT 3.51은 오피스 97까지 지원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5 (버전 7.0, 5.0과 6.0은 워드,엑셀, 파워포인트의 버전을 맞추려고 넘어갔다.)은 윈도우 95와 호환되기 위하여 모두 32비트로 구성된 버전이며. 오피스 95 스탠다드와 오피스 95 프로페셔널의 두가지 에디션이 있다. 스탠다드 버전은 워드 7.0, 엑셀 7.0, 파워포인트 7.0, 스케줄+ 7.0을 포함하고 있으며, 프로페셔널 에디션은 스탠다드 에디션에 액세스 7.0을 추가한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 (버전 8.0)은 엄청나게 많은 변화와 향상이 있었던 버전이다. 일본과 한국을 대상으로 오피스 98(버전 8.5)도 출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0 (버전 9.0)은 매크로 바이러스를 방지하기 위한 디지털 서명 등 새로운 보안 기능을 추가했다. 오피스 2000은 윈도우 95를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며, 제품 인증을 포함하지 않는 버전이기도 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XP (버전 10.0, 오피스 2002라고도 알려져 있다.)는 안전 모드라는 기능을 추가했는데. 만약에 레지스트리 수정등의 이유로 한 프로그램의 로딩이 실패하면. 안전 모드가 문제를 감지하고 수정할 수 있게 했다. 이 버전은 제품 인증이라는 기능도 추가했다. 오피스 XP는 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Me,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 서비스 팩 2 이하 버전을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고,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에서 호환된다고 보고된 첫 번째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3 (버전 11.0)은 2003년에 출시된 버전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인포패스와 마이크로소프트 원노트 프로그램이 추가되었다. 이 버전은 윈도우 XP 스타일의 아이콘과 디자인을 사용한 첫 버전으로, 아웃룩 2003은 정크 메일 필터를 강화했다. 오피스 2003은 윈도우 2000 서비스 팩 3 이상 버전을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며, 윈도우 8,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를 지원하는 첫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 (버전 12.0)은 2007년에 출시된 버전으로 마이크로소프트 그룹을 포함하며, 이전 오피스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터페이스인 리본 UI를 사용한다. 오피스 2003은 윈도우 XP 서비스 팩 2~3, 윈도우 서버 2003 서비스팩 1 이상, 또는 윈도우 비스타에서 사용할 수 있다. 오피스 2007 서비스팩 2부터 오피스 2007은 리브레오피스/오픈오피스에서 쓰이는 ODF 포맷을 지원하며, 윈도우 10과 윈도우 서버 2016을 지원하는 첫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0 (버전 14.0)은 2010년 6월에 출시되었다. 버전 13은 13에 대한 안 좋은 생각 때문에 출시되지 않는다. 테크니컬 프리뷰 1 버전(14.0.4006.1010)이 2009년 5월 15일에 유출되었는데. 7월 13일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공식적으로 오피스 2010에 관해 언급했다. 7월 13일은 새로운 테크니컬 프리뷰 버전(14.0.4302.1000)이 유출된 날이기도 하다.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2003 R2,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을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3 (버전 15.0)은 2012년 7월 16일(현지시간)에 오피스 2013 커스터머 프리뷰에서 공개했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 윈도우 10, 윈도우 서버 2016을 지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 (버전 16.0)은 2015년 5월 4일에 일반 사용자용 프리뷰가 공개되었다. 2015년 9월 22일 오전 9시(PDT)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를 공식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윈도우 10 기반의 UI를 적용한 첫 버전이기도 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9 (버전 17.0)은 현재 최신 버전이며 2018년 9월 24일에 공개되었다. 윈도우 10, 윈도우 서버 2016, 윈도우 서버 2019만을 지원한다. 비공식적으로 윈도우 7에서도 설치가 가능하나, 지원 대상이 아니기에 사용에 제약이 약간 있을 수 있다. 오피스를 만들기 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1.0을 1984년에 출시하고. 엑셀 1.0을 1985년에, 파워포인트 1.0을 1987년에 출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를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포함하지 않는다.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1.0 는 윈도우용 오피스가 출시되기 1년 전인 1989년에 출시되었다. 이 버전은 워드 4.0, 엑셀 2.20, 파워포인트 2.01을 포함한다.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1.5 는 1991년에 출시되었으며, 엑셀 3.0으로 엑셀 버전을 업데이트했으며, 애플의 시스템 7을 처음으로 지원하는 오피스이다.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9 는 1992년에 출시되었으며 엑셀 4.0을 탑재했다.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4.0 은 1993년에 출시되었으며, 파워맥용 첫 오피스 프로그램이었다. 이 버전은 68k 프로세서를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8 맥 에디션 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4와 함께 1998년에 발표되었으며, 처음으로 퀵타임을 지원하는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1 은 2000년에 출시되었으며, 맥 OS X의 이전 버전에서 마지막으로 사용 가능한 버전이다, 맥 OS 8.5 이상에서 작동하며, 마이크로소프트 앙투리지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는 버전인데, 이 버전은 이메일 클라이언트에 노트, 주소록, 달력 등의 부가 기능들이 있는 버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버전 X 는 2001년에 맥 OS X용으로 새롭게 출시된 버전이다.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4 는 2004년에 출시되었다.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 은 2008년에 출시되었다.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1 (버전 15.0)은 2010년 가을에 출시되었다.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 (버전 16.0)은 2015년 3월 5일(현지 시간)에 프리뷰가 공개되었다. 2015년 7월 9일에 출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365 는 2013년 5월 현재 판매 중이다. 기본 프로그램 *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Word) *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Excel) *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 (Outlook/Entourage) *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 (PowerPoint) *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 (Access) * 마이크로소프트 인포패스 (InfoPath)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부터 제거됨. * 마이크로소프트 원노트 (OneNote) * 마이크로소프트 셰어포인트 디자이너 - 프론트페이지를 대체 (SharePoint Designer/FrontPage) * 개발자 도구 - 개발자 에디션에만 포함. 오피스용 비주얼 스튜디오 도구를 대체 * 마이크로소프트 프로젝트 (Project) * 마이크로소프트 퍼블리셔 (Publisher) * 마이크로소프트 비지오 (Visio)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어카운팅 (Accounting)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도큐먼트 이미징 (Document Imaging)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도큐먼트 스캐닝 (Document Scanning)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그루브/셰어포인트 워크스페이스(2010버전 부터는 셰어포인트 워크스페이스로 이름을 바꿨다.) (Groove/Sharepoint Workspace)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인터커넥트 (InterConnect)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픽처 매니저 (Picture Manager)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라이브 스몰 비즈니스 (Live Small Business)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라이브 워크스페이스 (Live Workspace) 라이브 미팅 (Live Meeting)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온라인 (Online) 마이크로소프트 업데이트 (Update) 커뮤니케이터가 커뮤니케이션스 서버 R2로 합쳐졌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폼즈 서버 (Forms Server)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그루브 서버 (Groove Server)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커뮤니케이션스 서버 R2 (Communications Server R2)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퍼포먼스포인트 서버 (PerformancePoint Server)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서버 (Project Portfolio Server)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프로젝트 서버 (Project Server)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셰어포인트 서버 (SharePoint Server) * 액셀 서비스 (Excel Services) * 인포패스 폼 서비스 (Infopath Forms Services)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0 이하 윈도우 비스타 버전 이하 지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3 이상 윈도우 7 버전 이상 지원 맥 OS, macOS 윈도우 버전 마지막 버전 기본 지원 종료일 확장 지원 종료일 윈도우 NT 3.51 서비스 팩 5 오피스 97 2001년 8월 31일 2004년 1월 16일 윈도우 95 오피스 2000 2004년 6월 30일 2009년 7월 14일 윈도우 NT 4.0 오피스 XP 2006년 7월 11일 2011년 7월 12일 윈도우 98 오피스 XP 2006년 7월 11일 2011년 7월 12일 윈도우 98 SE 오피스 XP 2006년 7월 11일 2011년 7월 12일 윈도우 2000 서비스 팩 2 이하 오피스 XP 2006년 7월 11일 2011년 7월 12일 윈도우 2000 서비스 팩 3 이상 오피스 2003 2009년 4월 14일 2014년 4월 8일 윈도우 ME 오피스 XP 2006년 7월 11일 2011년 7월 12일 윈도우 XP 서비스 팩 2 오피스 2007 2012년 10월 9일 2017년 10월 10일 윈도우 XP 서비스 팩 3 오피스 2010 2015년 10월 13일 2020년 10월 13일 윈도우 서버 2003 오피스 2003 2009년 4월 14일 2014년 4월 8일 윈도우 서버 2003 서비스 팩 2 오피스 2010 2015년 10월 13일 2020년 10월 13일 윈도우 비스타 RTM 오피스 2007 2012년 10월 9일 2017년 10월 10일 윈도우 비스타 서비스 팩 1 이상 오피스 2010 2015년 10월 13일 2020년 10월 13일 윈도우 서버 2008 오피스 2010 2015년 10월 13일 2020년 10월 13일 윈도우 7 오피스 2016 2020년 10월 13일 2025년 10월 14일 윈도우 서버 2008 R2 오피스 2016 2020년 10월 13일 2025년 10월 14일 윈도우 8 오피스 2016 2020년 10월 13일 2025년 10월 14일 윈도우 서버 2012 오피스 2016 2020년 10월 13일 2025년 10월 14일 윈도우 8.1 오피스 2016 2020년 10월 13일 2025년 10월 14일 윈도우 서버 2012 R2 오피스 2016 2020년 10월 13일 2025년 10월 14일 윈도우 10 오피스 2019 2022년 1월 11일 2027년 1월 12일 윈도우 서버 2016 오피스 2019 2022년 1월 11일 2027년 1월 12일 윈도우 서버 2019 오피스 2019 2022년 1월 11일 2027년 1월 12일 맥 운영체제 마지막 버전 (68K) 시스템 7.0 - 맥 OS 8.1 오피스 4.2.1 (PPC) 시스템 7.1.2 오피스 4.2.1 (PPC) 시스템 7.5 - 맥 OS 8.0 오피스 98 (PPC) 맥 OS 8.1 - 9.2.2 오피스 2001 (PPC) 맥 OS X 10.1 - 10.5 오피스 버전 X (PPC) Mac OS X 10.2 - 10.5 맥용 오피스 2004 (범용) Mac OS X 10.4 - 10.6 맥용 오피스 2008 (인텔) Mac OS X 10.5 - 맥용 오피스 2011 (인텔) Mac OS X 10.10 - 맥용 오피스 2016 2002년부터 마이크로소프트는 지원 수명(Support LifeCycles) 정책을 지원한다. 초기 버전의 오피스 97 (노트 에디터 97 포함) 은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오피스 97 (아웃룩 98 포함) – 기본적인 핫픽스는 2001년 8월 31일에 지원이 끝났다. 연장된 핫픽스는 2002년 2월 28일에 지원이 끝났다. 보조 지원은 2004년 1월 16일에 끝났다. 오피스 2000 – 기본적인 지원은 2004년 6월 30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09년 7월 14일에 끝났다. 오피스 XP – 기본적인 지원은 2006년 7월 11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11년 7월 12일에 끝났다. 오피스 2003 - 기본적인 지원은 2009년 4월 14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14년 4월 8일에 끝났다. 오피스 2007 - 기본적인 지원은 2012년 10월 9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17년 10월 10일에 끝났다. 오피스 2010 - 기본적인 지원은 2015년 10월 13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20년 10월 13일까지다. 오피스 2013 - 기본적인 지원은 2018년 4월 10일에 끝났다. 연장 지원은 2023년 4월 11일까지다. 오피스 2016 - 기본적인 지원은 2020년 10월 13일까지다. 연장 지원은 2025년 10월 14일까지다. 현재/미래의 버전 - 기본적인 지원은 공개일 후 5년에 끝나거나, 다음 릴리즈가 나온 뒤 2년까지이다. 연장 지원은 5년까지다.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3 한컴오피스 한/글 리브레오피스 오픈오피스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공식 웹 사이트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공식 웹사이트 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분류:1989년 소프트웨어
맥 OS (맥 오에스, Mac OS)는 애플이 매킨토시 용으로 개발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운영 체제이다. 처음에 이 운영 체제는 매킨토시에 포함된 이름 없는 운영 체제로 간단히 시스템 소프트웨어 라고 불렸으나, 1997년 맥 OS 7.6의 출시와 함께 이름이 맥 OS 로 바뀌었다. 옛날 버전의 맥 OS는 모토로라 68000 기반 매킨토시에서만 호환되었다. 그 후 애플이 파워PC 기반 매킨토시를 내놓으면서, 맥 OS는 파워PC용으로도 포팅되었다. 맥 OS 8.1은 모토로라 68000 기반 매킨토시(모토로라 68040)에서 호환되는 마지막 버전이었으며, 맥 OS X는 파워PC만을 지원하다가 인텔 맥을 출시하면서 10.4.4 버전부터 인텔 프로세서용으로 포팅되었다. 10.6 스노 레퍼드부터는 파워PC 프로세서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크게 나누어 전통적인 클래식(Classic) 시리즈(시스템 1.0 ~ 맥 OS 9)와 새로운 맥 OS X 이후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2016 WWDC 2016에 Mac OS Sierra가 출시되며 OS X 에서 Mac OS로 이름이 변경됐다. 옛날의 매킨토시 시스템은 "시스템"과 "파인더"라는 두 가지 종류의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었고. 두 소프트웨어는 버전 번호도 달랐다. 시스템 7.5.3은 맥 OS 로고를 포함한 첫 버전이고, 맥 OS 7.6부터는 이름이 맥 OS로 바뀌었다. 파워PC G3 이전의 시스템은 중요한 부분을 모두 ROM에 저장했다. 원래는 하드 디스크가 없던 옛날의 매킨토시가 플로피 디스크의 한정된 저장 공간을 사용하지 않도록 ROM에 저장했으나, 이 아키텍처는 완전한 그래픽 OS를 명령 줄 인터페이스나 텍스트 콘솔 없이도 사용할 수 있게 해서 시동 오류도 사용자에게 그래픽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이 부분은 당시의 PC와는 차별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장점을 낮은 수준에서도 구현하기 위해 맥 OS는 코어 시스템을 ROM에 의존했으며, 이것은 나중에 애플 컴퓨터나 (저작권으로 보호된 애플의 ROM을 포함한) 라이선스된 클론만이 맥 OS를 구동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맥 OS는 다음 두 분류로 구별할 수 있다. 클래식 맥 OS. 애플의 자체 코드 기반. 맥 OS X 운영 체제, 클래식 맥 OS와 유닉스 계열 NEXTSTEP 기반. 클래식 맥 OS는 완전히 그래픽으로 구성되었으며, 명령 줄이 전혀 없는 운영 체제로, 쉬운 사용법과 협력형 멀티태스킹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주 제한된 메모리 관리와 보호된 메모리. 그리고 불안정한 운영 체제 확장 기능으로 비판을 받았다. 원래 매킨토시는 매킨토시 파일 시스템(MFS)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파일 시스템은 하위 디렉터리를 생성하지 못하며, 1985년에 바로 계층형 파일 시스템(HFS)로 대체되었다. HFS는 하위 디렉터리를 생성하여 디렉터리 트리를 만들 수 있다. 두 파일 시스템은 서로 호환된다. 파워PC 버전의 맥 OS X는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클래식 맥 OS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한 호환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 이 버전은 맥 OS 9#맥 OS 9.1 이후 버전을 돌릴 수 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응용 프로그램은 이 호환 모드에서 잘 돌아가지만 실제 하드웨어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클래식 환경은 맥 OS 9가 x86 프로세서를 지원하지 않아 인텔 맥에서는 구동할 수 없다. 또한 맥 OS X 레퍼드부터는 지원이 중단되어 클래식 모드를 사용할 수 없다. 현재 수많은 클래식 맥 OS 사용자들은 맥 OS X로 업그레이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고 사용자에게 덜 친숙하다는 이유로 비판하였다. 또한 새로운 OS로 다시 포함되지 않은 몇 가지 기능, 같은 하드웨어에서도 클래식 맥 OS보다 느려졌다는 점, 드라이버와 응용 프로그램이 거의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 옛날 매킨토시로의 지원 중단도 비판을 받았다. 때문에 출시 초기에는 많은 사용자들이 클래식 맥 OS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2005년 경에는 거의 모든 사용자가 맥 OS X로 업그레이드했다. 2005년 6월, 스티브 잡스는 WWDC 2005에서 애플 컴퓨터는 파워PC 칩셋에서 인텔 프로세서로 이동할 것이며, 새로운 기기에 맥 OS 클래식의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또 같은 콘퍼런스에서 잡스는 개발자 변환 키트를 제공하여 개발자들이 자신의 응용 프로그램이 인텔 맥에서 잘 돌아가는지 테스트 할 수 있게 했다. 2006년 1월에 애플은 첫 인텔 기반 매킨토시인 아이맥과 맥북 프로를 출시했다. 2006년 2월엔 맥 미니를 출시했으며, 2006년 5월에 맥북, 2006년 8월에 맥 프로로 모든 매킨토시를 인텔 프로세서 기반으로 바꿨다. macOS(맥 OS)는 애플의 가장 최신인 맥 OS 운영 체제다. 이전 이름은 OS X (오에스 텐)이었다. 이 버전은 공식적으로는 단순히 맥 OS의 버전 10이지만, 기존 맥 OS와는 아주 많은 변화를 띄고 있다. 이 운영 체제는 맥 OS 9와 클래식 맥 OS의 다음 버전으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다. 애플이 넥스트 사를 인수하면서 가져온 NEXTSTEP과 마하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macOS는 BSD 코드 베이스를 사용한다. mac은 그동안 데스크톱용 릴리즈로 9번 출시되었다. 2016년 9월 20일에 공개한 macOS 10.12로 , macOS 시에라로 불리며 2017년에 WWDC에서 발표한 macOS 10.13로, macOS 하이시에라로 불린다(macOS 버전 대의 경우, 고양이 과의 펫 네임을 별명으로 붙여 친숙함을 높이려 했는데, OS 10.8 마운틴 라이언을 마지막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데스크톱용 버전과 같이 macOS은 8번의 서버용 릴리즈가 있었다. 첫 번째 릴리즈는 OS X 서버 1.0으로, 서버 버전은 당시의 데스크톱용 맥 OS(클래식 맥 OS)와 아키텍처가 완전히 달랐으며, 많은 서버 관리 도구를 탑재하고 있었다. macOS는 Xserve의 기본 운영 체제이다. 그리고 데스크톱용 버전과 다르게 패러럴즈 데스크톱과 같은 가상 머신에서도 돌아간다. macOS는 아이폰, 아이팟 터치, 아이패드, 애플 TV등 다양한 곳에 사용되는 iOS의 기초이다. vMac, Basilisk II. Executer 등의 서드 파티 68000 에뮬레이터는 인텔 기반 PC에서 맥 OS를 로드할 수 있게 했다. 이 에뮬레이터들은 모토로라 68000 칩셋을 에뮬레이트할 수 있으며, 때문에 맥 OS 8.1 이상의 버전은 파워PC 프로세서를 필요로 하기에 에뮬레이트할 수 없었다. 또한 대부분이 맥 ROM 이미지나 실제 맥 ROM 칩을 필요로 했다. 맥 ROM 이미지를 사용하는 에뮬레이터는 거의 100% 맥 OS 호환성을 유지하며 x86 프로세서에서도 아주 빠른 맥 OS 환경을 구축할 수 있게 해 준다. PearPC라는 파워PC 에뮬레이터는 파워PC 프로세서를 에뮬레이트할 수 있으며, 맥 OS X를 에뮬레이트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이 프로그램은 아직도 초기 개발 상태이고, 네이티브 파워PC 칩보다 속도가 아주 느리다. 맥을 파워PC에서 인텔 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애플은 사용자들이 파워PC 기반 응용 프로그램을 인텔 맥에서 돌려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에뮬레이터 "로제타"를 내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로제타가 PearPC처럼 아주 느린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퍼포먼스는 예상외로 상당히 빨랐다. 또다른 파워PC 에뮬레이터로는 SheepShaver가 있으며, 원래는 BeOS를 파워PC 플랫폼에서 돌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 이 에뮬레이터는 실제 파워PC 프로세서가 필요했으나, 후에 오픈 소스화 되면서 x86 프로세서용으로도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에뮬레이터는 메모리 관리 장치를 에뮬레이트하지 않기 때문에 맥 OS 9.0.4 이후 버전은 에뮬레이트할 수 없다. 몇몇 컴퓨터 제조사들은 맥 OS를 구동할 수 있는 클론 컴퓨터를 만들어왔다. 대표적이 예로 파워 컴퓨팅, UMAX, 모토로라가 그래왔다. 이 버전은 클래식 맥 OS를 정상적으로 구동할 수 있다. 하지만 1997년 애플에 돌아온 스티브 잡스가 곧 클론 라이선싱 프로그램을 끝냈다. 2008년, 사이스타사가 499달러의 베어본 컴퓨터를 내놓았는데, 이 컴퓨터는 맥 OS X 10.5 레퍼드를 돌릴 수 있다. 사이스타는 이 컴퓨터를 오픈 맥이라 부르며, 애플은 현재 이 회사에 소송을 걸고, 판매한 모든 클론을 리콜한 후, 애플에 배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1988년에 애플은 첫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인 A/UX를 출시했다. 이 운영 체제는 당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가 아니었던 맥 OS를 기본 운영 체제로 사용하지 못했던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맥 OS X를 개발할때 A/UX의 코드가 약간 쓰였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은 애플 컴퓨터가 유닉스 계열 워크스테이션에서 애플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 만든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다. 이 프로그램은 X 윈도 시스템을 이용하여 파인더 스타일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에뮬레이트한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 3.0은 맥 시스템 7.5.3과 호환된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SPARCstation과 HP의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1998년 5월 14일 단종되었다. OSF와 애플 컴퓨터가 1996년 2월 리눅스를 파워PC 플랫폼으로 포팅하기 위해 시작한 오픈 소스 컴퓨터 운영 체제로, 1996년 WWDC에서 공개되었으며, 1998년 여름에 커뮤니티 중심의 MkLinux 개발자 단체가 개발을 맡기 시작하였다. 마이크로커널 리눅스 (MicroKernel Linux)의 줄임말이며, 마하 커널 3.0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애플의 EULA를 어기는 행동이지만, 애플 컴퓨터가 아닌 x86 컴퓨터에서 맥 OS X를 구동하는 것은 커널 수정, 커뮤니티 드라이버, 에뮬레이션 등으로 가능하다. 예로, PC-EFI는 애플 컴퓨터에 기본으로 있는 EFI를 에뮬레이트해서 비 애플 컴퓨터에 맥 OS X를 설치할 수 있게 한다. 맥 101 - 애플의 맥 OS 안내서 분류:애플의 운영 체제 분류:1984년 소프트웨어 분류:애플의 소프트웨어
macOS (맥오에스, 이전 이름 OS X, 맥 OS X / Mac OS X)는 기업 애플이 제작한 운영 체제이다. 2002년 4월부터 모든 매킨토시 컴퓨터에 적용되고 있다. 이 운영 체제는 1984년 1월부터 애플 컴퓨터를 이끌어 왔던 맥 OS의 마지막 고전 버전인 맥 오에스 9의 뒤를 잇는다. OS X이라는 이 운영 체제의 예전 이름에 들어있는 "X"라는 글자는 알파벳 "X"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매킨토시의 10번째 운영 체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 숫자 "10"을 뜻하는 것이다. 이 운영 체제는 애플이 1996년 12월에 인수한 NeXT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졌으며 유닉스에 기반을 하고 있다. 2011년 7월 20일에 OS X 라이언이 출시되었다. 기존에도 줄여서 OS X이라고 많이 표현했으나, OS X 마운틴 라이언 공개와 함께 기존 맥 OS X (Mac OS X)에서 맥 (Mac)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제거되었다. 2016년 6월 13일에 macOS 시에라 공개와 함께 제품명이 OS X에서 macOS로 변경되었다. 마하커널과 BSD를 기반으로 한 맥 OS이다. macOS는 다윈 운영 체제 위에 아쿠아 그래픽 레이어와 응용 프로그램 레이어를 올렸고, 이를 위해 쿼츠, 코코아, 카본, 로제타등과 같은 기술을 활용하였다. macOS의 아쿠아 인터페이스는 화제를 모았고, 여러 컴퓨터 산업 부문에서 모방되었다. macOS는 전통적으로 매킨토시가 많이 사용되는 전자출판, 디자인, 멀티미디어 부문 등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macOS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한/글 등의 윈도용 프로그램이 포팅되어 있고, Qt등을 이용하면 macOS로의 포팅을 지원하는 경우에 한해 리눅스용 프로그램도 컴파일하여 사용할 수 있다. + macOS 버전 정보 버전 코드 네임 공개 날짜 출시 날짜 마지막 버전 랩소디 디벨로퍼 릴리즈 그릴1Z4 / 티탄1U 1997년 8월 31일 DR2 (1998년 5월 14일) 맥 OS X 서버 1.0 Medusa 1999년 3월 16일 1.2v3 (2000년 10월 27일) 맥 OS X 디벨로퍼 프리뷰 1998년 5월 11일 1999년 3월 16일 DP4 (2000년 4월 5일) 맥 OS X 퍼블릭 베타 코디악 2000년 9월 13일 미국용:10.b0.1(2), 국제용:10.b0.2(3) 맥 OS X v10.0 치타 2001년 3월 24일 10.0.4 (2001년 6월 22일) 맥 OS X V10.1 퓨마 2001년 7월 18일 2001년 9월 25일 10.1.5 (2002년 6월 6일) 맥 OS X v10.2 재규어 2002년 5월 6일 2002년 8월 24일 10.2.8 (2003년 10월 3일) 맥 OS X 팬서 팬서 2003년 6월 23일 2003년 10월 24일 10.3.9 (2005년 4월 15일) 맥 OS X 타이거 타이거 2004년 4월 4일 2005년 4월 29일 10.4.11 (2007년 11월 14일) 맥 OS X 레퍼드 레퍼드 2006년 6월 26일 2007년 10월 26일 10.5.8 (2009년 8월 5일) 맥 OS X 스노 레퍼드 스노 레퍼드 2008년 6월 9일 2009년 8월 28일 10.6.9 (2016년 1월 28일) 맥 OS X 라이언 라이언 2010년 10월 20일 2011년 7월 20일 10.7.5 (2012년 9월 19일) OS X 마운틴 라이언 마운틴 라이언 2012년 2월 16일 2012년 7월 25일 10.8.5 (12F45) (2013년 10월 3일) OS X 매버릭스 매버릭스 2013년 6월 10일 2013년 10월 22일 10.9.5 (13F34) (2014년 9월 17일) OS X 요세미티 요세미티 2014년 6월 2일 2014년 10월 16일 10.10.5 (14F27) (2015년 8월 13일) OS X 엘카피탠 엘카피탠 2015년 6월 5일 2015년 10월 1일 10.11.6 (15G31) (2016년 7월 18일) macOS 시에라 시에라 2016년 6월 13일 2016년 9월 20일 10.12.6 (16F73) (2017년 7월 20일) macOS 하이 시에라 하이 시에라 2017년 6월 6일 2017년 9월 26일 10.13.4 (17E199) (2018년 4월 5일) macOS 모하비 모하비 2018년 6월 4일 2018년 6월 4일 10.14 (최초버전) (2018년 9월 25일) 2001년 3월 24일 나온 맥 OS X 10.0 치타(Cheetah)는 최초로 나온 맥 OS X이다. 상용 프로그램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전체적인 실행 속도가 매우 느렸다. 베타 버전에 가까운 매우 불안정한 운영 체제로 10.1 (Puma)가 나오자 사용자들의 대부분이 업그레이드를 하였다. 2001년 11월 25일 나온 맥 OS X 10.1 퓨마(Puma)는 치타의 무상 업그레이드 판이다. 퓨마는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하거나 애플 스토어에서 무상으로 구입할 수 있었고 유상으로 주문할 수 있었다. 퓨마는 치타보다 응용 프로그램이 많이 포함되었으며, 3D 그래픽 성능이 향상되었고, DVD 재생 프로그램이 새로 추가되었으며, 프린터, 카메라, 저장장치 등의 드라이버 지원이 확대되었고, 애플 스크립트가 강화되었다. 2002년 7월 24일 나온 맥 OS X 10.2 재규어(Jaguar)는 쿼츠 익스트림 기술과, 랑데뷰 네트워킹 기술(2005년 봉쥬르로 이름이 바뀜)을 지원했으며, iChat 인터넷 메신저와, 스팸메일 필터가 추가되었다. 또 코드네임을 마케팅과 광고에도 사용하였다. 2003년 10월 24일 나온 맥 OS X 10.3 팬더(Panther)는 기존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와 함께 메탈룩 인터페이스를 채용했다. 팬더에서는 파인더가 개선되어 전반적인 실행 속도가 재규어에 비해 매우 빨라졌다. 재규어에서 사라졌던 꼬리표가 다시 부활했으며, 새로 추가된 엑스포제 기능은 응용 프로그램과 창의 전환을 빠르고 직관적으로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밖에도 사용자 계정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기능과 사파리 웹 브라우저, 개발 도구인 Xcode가 추가되었고, 재규어부터 지원된 쿼츠 익스트림 기술은 팬서의 비주얼적인 면을 보다 향상시켰다.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은 10.3.9이다. 2004년 6월 28일에는 WWDC 2004를 통해 맥 OS X 10.4 타이거(Tiger)가 처음 모습을 공개하였다. 타이거에는 문서 파일의 내용과 메타데이터를 검색하는 스팟라이트, 주가 검색 등 간단한 작업을 백그라운드로 실행하는 대시보드, 일련의 작업 흐름을 간단하게 작성할 수 있는 오토메이터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또한 코어 이미지(Core Image), 코어 비디오(Core Video), 코어 오디오(Core Audio) 기능이 추가되었고 64비트 지원이 강화되었다. 그 외에 iChat AV 3.0으로 4자간 화상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사파리 2.0에 RSS 리더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퀵타임이 업그레이드되어 H.264 코덱을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2005년 WWDC에서 인텔 프로세서로의 이전 계획과 인텔 프로세서용 맥 OS X이 발표되었다. 이후 2006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파워피씨 맥과 인텔 맥을 모두 지원하는 맥 OS X 10.4.4가 발표되었다. 10.4.4에서는 사파리나 메일 등 기본 포함된 프로그램들이 파워피씨 맥과 인텔 맥에서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유니버설 바이너리로 작성되었고, 파워피씨용으로 작성된 응용 프로그램을 인텔 맥에서 실행시켜주는 로제타가 추가되었다.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은 10.4.11이다. 2006년 8월 7일 WWDC 06에서 공개되었고, 2007년 10월 26일부터 판매를 시작한 맥 오에스 텐의 버전이다. 레퍼드(Leopard)에서는 채팅 프로그램인 iChat의 업그레이드 버전과, 자동 백업 프로그램인 타임 머신, 가상 데스크톱인 스페이스, 오픈GL기반의 새로운 그래픽 기술인 코어 애니메이션의 탑재, 인텔 맥에서 윈도를 돌릴 수 있게 해주는 부트 캠프의 정식 버전인 부트 캠프 2.0이 포함되었고, 파워피씨/인텔 프로세서, 32/64비트를 모두 지원한다.(완전한 유니버설 바이너리의 이주가 목적이었다.) 2007년 6월 11일 개최된 WWDC 07에서 새로워진 데스크톱, 개선된 파인더, 파일을 열지 않고도 내용을 보여주는 퀵룩 등 레퍼드의 주요 신기술이 발표되었다. 최종 버전은 10.5.8 이며 OS X10.5는 단일 유닉스 규격(Single UNIX Specification)에 인증되었다. 2008년 6월 9일 WWDC 08에서 맥 OS X 의 차기 버전인 맥 OS X 10.6 스노 레퍼드(Snow Leopard)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전 까지의 맥 OS X 의 판올림에서는 새로운 기능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진 것에 반해 이번 버전에는 성능 향상과 안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빠르고 안정적인 64bit 환경으로의 이주가 주 목적이다.) 참석한 개발자들에게 개발자 미리보기 버전을 나누어 주었으며 마지막 DVD OS X다, 인텔 프로세서가 장착된 맥에 설치가 가능하다. GPGPU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인 OpenCL, 다중 프로세서에서 병렬 프로그래밍을 위한 그랜드 센트럴 , 퀵타임 X, 16 TiB의 램 지원, 마이크로소프트 익스체인지 2007 완벽 지원과 같은 기능 및 OS X의 거의 모든 응용 프로그램, 커널, 서브 시스템 및 드라이버(kext) 환경이 64비트로 전환되었다. 2010년 10월 20일 Back to the Mac 이벤트에서 맥 OS X 라이언(Lion)의 프리뷰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판올림에서는 아이패드에 사용된 iOS의 여러 장점을 흡수하였다. 맥 앱 스토어가 지원되어 애플이 직접 응용 프로그램 유통을 맡게 되었다. 런치패드 와 풀 스크린 애플리케이션, 미션 컨트롤 등의 향상된 인터페이스가 지원된다. 페이스타임을 지원하여, 페이스타임을 지원하는 디바이스와 영상통화가 가능하게 된다. 또한 OS X 10.7 버전부터 별도의 서버판 OS X은 없어지며 소비자용 리테일버전에 서버기능이 통합된다. 2011년 7월 20일에 발매되었다. 2012년 2월 16일 발표된 OS X 마운틴 라이언(Mountain Lion)은 iOS 5의 일부 기능을 통합하였다. 아이클라우드를 바탕으로 한 공유 기능 확산, 메시지, 미리알림(reminder), 노트, 알림센터, 게임센터, 에어플레이 미러링, 게이트키퍼가 도입되었다. 2012년 7월 16일에 발매되었다. 애플은 2013년 6월 10일 WWDC 2013에서 OS X 10.9 매버릭스(Mavericks)를 공개했다. 새 지도 앱, 개선된 알림센터, 새 아이북스 앱을 포함한다. 또한 Finder의 Tag기능과 Multiple Display 기능을 지원하며, 2013년 10월 23일에 정식 버전이 출시되었다. 같은 날에 공개된 것은 맥 프로, iOS 7, 맥북 에어 등이다. 애플은 2014년 6월 2일 WWDC 2014에서 OS X 10.10 요세미티(Yosemite)를 공개했다. 기존의 OS X의 유저 인터페이스였던 아쿠아를 제거하고 iOS 7에서 선보인 플랫한 디자인의 아이콘과 그 외의 구성요소를 포함한 인터페이스를 선보였다. 그 외에도 인터페이스 하단부의 독(Dock)이 맥 OS X Panther의 독처럼 입체적인 모양을 버리고 평면적인 사각형이되었다. 또한 메뉴 막대와 독의 색을 어둡게 하고 글자를 하얗게 한 반전 색상을 가진 다크 모드(Dark Mode)를 설정할 수 있게 하였다. 2014년 10월 16일에 정식 버전이 출시되었다. 2015년 6월 9일 WWDC 2015 기조 강연에서 발표, 같은 해 9월 30일에 발매되었다. Mac의 성능 향상, 보안 스택 강화, 풀 스크린에서 앱을 동시에 두 개 표시 할 수 있는 스크린 스플릿 기능, 시스템 폰트 추가 등이 포함되었다. Spotlight가 보다 구어체 검색에 대해서도 결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2016년 6월 30일 WWDC 2016 기조 강연에서 발표, 같은 해 9월 20일에 발매되었다. HFS 포맷 대신 APFS가 실험적으로 도입되었으며, Late 2009 모델(Mac mini를 빼고)보다 이전의 Macintosh에서의 직접 인스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새로운 Siri 도입과 iOS, watchOS와의 보다 많은 연계 기능의 도입이 진행되었다. 또, 이 버전부터 iOS와 watchOS, tvOS 등의 애플 OS와의 이름 친화성을 목적으로 종래의 OS X로 부터 macOS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7년 6월 5일 WWDC 2017 기조 강연에서 발표되었다. HFS+ 대신 APFS를 쓰도록 되어 있으며, 메탈 2와 더불어 고효율 비디오 코딩을 OS단에서 지원한다. iMac 2010년 이전모델은 macOS 하이 시에라 로의 업그레이드가 지원되지 않는다. 2018년 6월 4일 WWDC 2018 기조 강연에서 발표되었다. 보안향상 및 FaceTime 최대 100명 영상통화 등 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버전이다. iMac 2012년 이전모델은 macOS 모하비 로의 업그레이드가 지원되지 않으며, 2018년 9월 24일(현지시각) 정식 배포를 시작했다. 맥 앱스토어는 iOS의 앱스토어랑 비슷한 개념이다.하지만 iOS의 앱스토어에는 있는 앱이 맥 앱스토어에는 없을 수도 있다. 맥 앱스토어에 올라오는 앱들은 모두 애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macOS의 보안기능인 게이트키퍼에 걸리지 않는다. 현재 대한민국의 맥 앱스토어는 게임 카테고리가 빠져있는 상태이다. macOS는 다음 언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영어 한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스페인어 (멕시코)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일본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핀란드어 중국어 (번체) 중국어 (간체) 포르투갈어 (브라질)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터키어 헝가리어 아랍어 카탈로니아어 크로아티아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태국어 우크라이나어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애플 아이맥 맥북 맥북 프로 매킨토시 분류:맥 OS 분류:BSD 분류:1999년 소프트웨어 분류:애플의 소프트웨어
쿼츠 (Quartz)는 OS X에 쓰이는 그래픽 기술의 일부로서, 코어 그래픽스 프레임워크인 쿼츠 2D, 쿼츠 컴포지터의 일부이다. 코어 그래픽스와 합성 엔진에서 2차원 렌더링을 지원하며 명령을 그래픽 카드로 보낸다. 쿼츠는 "코어 그래픽스"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일반적인 용어로서 "쿼츠", "쿼츠 기술"이라는 용어는 거의 모든 부분의 OS X 그래픽 모델에서 컴포지터의 렌더링 계층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용도에서 이 용어는 코어 이미지와 코어 비디오도 아우르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애플이 제공하는 다양한 그래픽 기술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쿼츠 2D 쿼츠 익스트림 쿼츠GL 쿼츠 2D 익스트림 쿼츠 컴포지터 쿼츠 코어 프레임워크 쿼츠 디스플레이 서비스 쿼츠 이벤트 서비스 쿼츠 프레임워크 쿼츠 2D는 주로 2차원 텍스트와 그래픽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가리킨다. 실행 중에 렌더링 및 앤티에일리어싱을 거쳐 2차원 그래픽스를 표현하여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냄으로써 아쿠아를 직접적으로 지원한다. 쿼츠는 하부 픽셀 정밀도로 문자열을 렌더링한다. 그래픽은 기본 동작 모드인, 더 전통적인 앤티에일리어싱에 제한되지만 이 기능을 끌 수 있다. OS X v10.4에서 애플은 쿼츠 2D 익스트림을 도입하였는데, 쿼츠 2D가 지원 GPU를 렌더링할 수 있게 한다. OS X 10.4에서 쿼츠 2D 익스트림은 기본으로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비디오 다시 그리기나 커널 패닉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OS X v10.5에서 쿼츠 2D 익스트림은 쿼츠GL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기능은 여전히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일부 상황에서 성능 저하를 일으키거나 비주얼 글리치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자가 원하면 이 기능은 응용 프로그램 별도 켜고 끌 수 있다. 쿼츠 컴포지터는 쿼츠 2D 및 기타 렌더러(오픈GL, 코어 이미지, 퀵타임 따위)가 사용하는 합성 엔진이다. OS X v10.2 이후로 쿼츠 컴포지터는 지원 그래픽 카드의 프로세서(GPU)를 이용하여 합성 성능을 개선한다. 이 기술은 쿼츠 익스트림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지원 그래픽 카드와 함께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활성화된다. 쿼츠의 초기 개발자 문서에 따르면 쿼츠는 PDF를 이용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쿼츠의 내부 이미징 모델은 PDF 오브젝트 그래프와 관련하여 PDF를 여러 장치에 쉽게 출력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다이렉트엑스 오픈GL Quartz in Tiger Apple s Quartz page for developers Introduction to OS X graphics APIs Cocoa Graphics with Quartz Part 1 Cocoa Graphics with Quartz Part 2 분류:그래픽 소프트웨어 분류:MacOS
128k transparency.png|섬네일|최초의 매킨토시인 매킨토시 128K. 매킨토시 ( 혹은 줄여서 맥 ()은 애플이 디자인, 개발, 판매하는 개인용 컴퓨터의 제품 이름이다. 1984년 1월 24일 처음 출시된 매킨토시 는 당시 유행하던 명령 줄 인터페이스 대신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와 마우스를 채용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였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IBM PC 호환기종(Microsoft사의 Windows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PC)을 쓰고 있다. 매킨토시는 값이 비쌌으며 내부를 공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애플은 1980년대의 MS-DOS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사용하던 IBM 호환 PC 시장 점유율을 서서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애플은 1998년 성공적인 판매와 더불어 매킨토시 상표의 부활을 보여준 아이맥 데스크톱 모델로 다양한 수준의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지금의 맥 시스템은 주로 가정과 교육, 전문직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그것들이 바로 앞서 설명한 일반 사용자용 모델인 아이맥과 맥 미니, 맥북 레티나와 맥북 에어 모델,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인 맥 프로, 맥북 프로 등이있다. 맥 제품들은 하드웨어와 맥에 설치되는 모든 운영 체제를 함께 생산함으로써 사용이 쉽고 용이하게 수직적으로 통합되어있다. 이것은 다양한 제조사가 하드웨어를 만들고 또 각기 다른 제조사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IBM 호환 PC와의 큰 차이점이다. 애플은 자사가 모두 맥 하드웨어를 생산하며 내부 시스템과 디자인, 가격을 모두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애플도 다른 회사의 구성품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현재 매킨토시 의 CPU는 인텔사의 x86 아키텍처이고 그 이전에는 AIM 연합의 PowerPC를 썼고, 그 이전에는 모토로라의 68k를 사용했다. 애플은 또한 맥에서 사용되는 운영 체제를 개발하는데 현재 최신 맥 운영 체제는 macOS 10.14이다. 현재의 맥은 다른 PC 같이 리눅스, FreeBSD, 윈도 같은 운영 체제를 선택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컴퓨터에서는 맥 OS를 사용할 수 없다.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1970년대 후반, 일반 소비자에게 사용이 쉽고 가격이 낮은 컴퓨터를 보급하고자 했던 애플 직원 제프 래스킨(Jef Raskin)이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 종류인 매킨토시(Mcintosh) 로 이름을 짓고자 했으나 이미 그 이름을 쓰고 있던 오디오기기 회사 매킨토시 래버러토리 와의 법률상 문제 때문에 철자를 Macintosh 로 바꾸었다. 1979년 9월 래스킨은 프로젝트를 위해 팀을 구성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 견본을 만들 엔지니어들을 찾기 시작했다. 애플 리사팀(애플 리사 컴퓨터는 매킨토시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더 고급 사양으로 개발되고 있었다)의 멤버였던 빌 앳킨슨(Bill Atkinson)이 더 이전에 입사했던 서비스 기술자인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몇년 뒤, 래스킨은 최초의 매킨토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들게 될 큰 규모의 개발팀을 모으게 된다. 구성원은 래스킨, 빌 앳킨슨(Bill Atkinson),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 크리스 에스피노사(Chris Espinosa), 조애나 호프먼(Joanna Hoffman), 조지 크로(George Crow), 브루스 혼(Bruce Horn), 제리 매넉(Jerry Manock), 수잔 케어, 앤디 허츠필드(Andy Hertzfeld) 그리고 대니얼 콧키(Daniel Kottke) 등이었다. 스미스의 첫 번째 매킨토시 보드는 래스킨이 디자인한 64 킬로바이트(KB) 램, 모토로라 6809E 마이크로프로세서, 256x256 해상도가 지원되는 흑백화면의 사양으로 설계되었다. 매킨토시 프로그래머인 버드 트리블(Bud Tribble)은 리사의 그래픽 프로그램을 매킨토시에서 돌리는 데 관심이 있어, 프로젝트의 지원 자금이 계속 줄어드는 와중에서도 스미스에게 애플 리사의 모토로라 6800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맥에 장착할 수 있는지 의뢰했다. 1980년 12월 스미스는 68000 프로세서를 장착할 뿐 아니라 속도도 5에서 8MHz로 끌어올린 기판 설계에 성공하였다. 이 보드는 또한 384x256 픽셀의 해상도를 지원했다. 스미스의 디자인은 리사보다 적은 개수의 램을 사용하여 생산단가 문제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맥의 최종 디자인은 자체 내장형이었는데 다른 컴퓨터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큰 64Kb 롬에 퀵드로 그래픽 언어를 내장했고, 16개의 64Kb 램 칩을 연결한 128KB RAM을 장착했다. 메모리 슬롯이 없더라도 맥의 RAM은 공장에서 조립시 16개의 칩 슬롯을 256KB로 바꿔 납땜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512KB로 확장이 가능했다. 최종 생산품은 위의 견본 제품에서 9인치 화면과 512x342의 흑백 해상도로 수정되었다. 매킨토시의 구성은 애플의 공동 설립자인 스티브 잡스의 관심을 끌었다. 리사보다 시장성이 더 높다는 것을 깨달은 스티브 잡스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래스킨은 1981년 잡스와의 마찰로 프로젝트를 떠났고 마지막 매킨토시의 디자인은 래스킨보다 잡스의 요구대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이때 잡스는 래스킨이 지은 매킨토시(macintosh)라는 이름까지 바이씨클(bicycle)로 바꾸려 하였으나 이는 취소되었다). 제록스 PARC사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잡스는 제록스 알토 컴퓨터를 관전하고 스몰토크 개발도구를 애플 주식옵션과 교환하는 협상을 위해 제록스 PARC사를 방문한다. 제록스는 세가지 기술을 시연했는데 결국 잡스는 액면가 100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양도하고 GUI 기술을 가져왔다. 리사와 매킨토시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제록스 PARC사가 선보인 기술에 영향을 받아 매킨토시 개발진들의 자체 의견과 조합된 결과이다. 또한 잡스는 산업 디자이너인 하르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에게 매킨토시 개발에 참여하길 권고했고 결과적으로 디자인 언어인 스노 화이트(Snow White)가 탄생하였다. 초기 맥에는 너무 늦은 완료 시기였지만, 1980년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거의 모든 맥에 적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 프로젝트에서의 잡스의 리더십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CEO인 존 스컬리(John Sculley)와의 격렬한 대립 후, 1985년 분노를 머금고 사퇴한다. 컴퓨터 회사인 넥스트(NeXT)를 설립한 잡스는 1997년까지 애플로 복귀하지 않았다. Jobs with Wendell Brown in January 1984, at the launch of Brown s Hippo-C software for Macintosh.jpg|섬네일|Macintosh Hippo-C 소프트웨어 출시 행사:스티브 잡스와웬델 브라운,1984년 매킨토시 128K는 1983년 10월에 언론에 소개됐고, 12월에 18쪽짜리 소책자와 함께 여러 잡지에 소개되었다. 매킨토시는 1984년에, 지금은 15,000,000달러의 거물이 된 리들리 스콧의 TV 광고인 “1984”에 소개되었다. 광고는 1984년 1월 거의 모든 미국인이 시청했던 슈퍼볼 VXIII의 3쿼터에 방송에 나갔는데, 지금은 “획기적 사건”과 “걸작”으로 불린다. 1984 광고에는 “동조”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매킨토시의 등장 (여자의 흰 상의에 피카소 풍의 그림으로 애플사의 매킨토시라고 그려져 있다)을 상징하기 위해 무명의 여자가 출연했다. 이 그림은 빅 브라더(Big Brother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커다란 화면에 얼굴만 보이는 독재자)에게 지배되는 미래를 그린 소설 1984를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4 광고가 전파를 탄 이틀 뒤 매킨토시는 판매를 시작했다. 매킨토시는 인터페이스의 화려함을 자랑하기 위해 맥라이트(MacWrite)와 맥페인트(MacPaint) 두 가지의 응용 프로그램을 꾸러미로 제공했다.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맥 키노트 연설에서 매킨토시는 “매킨토시, 미칠듯이 대단해!(Macintosh, Insanely great!)”라는 명언을 화면에 그리며 합성된 목소리로 소리까지 시연했다. 매킨토시는 단숨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겐 너무 단순한 “장난감”으로 치부되었다. 그 까닭은 기계 전체가 GUI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프로그래머들에겐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 모드와 명령 방식으로 된 코드의 재작업을 의미했고, 이미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에겐 큰 도전이므로 소극적인 움직임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소프트웨어 부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84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멀티플랜(MultiPlan, MS사의 초기 사무용 문서 프로그램)이 MS-DOS에서 독립했고 뒤따라 1985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출시되었다. 1985년에는 로터스 소프트웨어가 로터스 1-2-3의 성공을 잇는 IBM PC용 로터스 재즈(Lotus Jazz)를 출시하지만 큰 실패를 한다. 같은 해 애플은 매킨토시 오피스(Macintosh Office)를 레밍즈(Lemmings) 광고와 함께 출시하지만 매킨토시의 잠재적인 고객에게는 상당한 불명예를 안기며 성공하지 못했다. 1984년 11월 뉴스위크 경선 특별판에서 애플은 2,500,000달러를 들여 39쪽의 모든 광고란을 사들여 화제가 되었다. 애플은 또한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잠재적인 고객들에게는 24시간 동안 대여했다가 후에 매장에 돌려주는 매킨토시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2.000,000명의 고객들이 참여하자 판매사들은 프로모션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주문에 의한 매킨토시의 공급이 부족했고, 반납된 많은 제품들이 다시 팔지 못할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이 판매행사는 CEO인 John Sculley가 가격을 미화 1,995달러에서 2,495달러로 올리는 이유가 되었다. (인플레이션을 위한 조정, 2007년엔 약 5,000달러로 조정.) 1985년, 맥과 애플의 레이저 프린터, 보스턴 소프트웨어(Boston Software)의 맥퍼블리셔(MacPublisher)와 앨더스 페이지메이커(Aldus PageMaker) 같은 맥에 특화된 제품들은 사용자로 하여금 문자와 그림을 배열하여 디자인, 미리 보기, 출력 등을 가능케 했다. - 이런 활동은 전자출판으로 알려지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 전자출판은 유일하게 맥에서만 가능했으나, 결국 후에는 IBM PC 사용자들도 가능하게 되었다. 매크로미디어 프리핸드(Macromeida FreeHand), 쿼크익스프레스, 어도비 포토샵, 그리고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들은 그래픽 전문 컴퓨터로서의 맥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했고 전자출판 시장의 확장과 통합에 도움을 주었다. 초기의 맥이 마주친 한계는 곧 사라졌다 초기의 맥은 1984년의 다른 컴퓨터들과 비교해도 적은 메모리 용량이었고 확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도 부족하거나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1985년 10월, 애플은 맥의 메모리를 512kb로 늘렸지만, 128kb(매킨토시 128K)인 맥에서 확장하기는 어려웠다. 부품의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애플은 1986년 1월 10일 미화 2,600달러의 매킨토시 플러스를 발표했다. 4메가까지 확장 가능한 1메가바이트의 램을 장착했고, 하드 드라이브나 스캐너 등 최대 7개의 주변 장치까지 제어할 수 있는 가히 혁명적인 병렬 SCSI 인터페이스를 제공했다. 플로피 드라이브는 800kb까지 용량이 늘어났다. 맥 플러스(Mac Plus)는 순식간에 성공을 거두었고 1990년 10월 15일까지 생산되었다. 4년하고도 10개월 동안 판매된 셈인데, 이것은 애플 역사상 가장 긴 생명력이었다. 또 다른 사건도 남겼는데, 특히 느린 프로세서 속도와 그래픽 능력의 한계는 업무용 컴퓨터 시장에 맥의 진입을 막는 장애였다. 진화된 모토로라의 CPU는 좀 더 빠른 컴퓨터를 가능케 했고 1987년 애플은 모토로라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모토로라의 68020 16MHZ를 사용한 매킨토시 2를 소개했다. 매킨토시 2의 가장 큰 발전은 ROM에 내장돼 있는, 매킨토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퀵드로(QuickDraw) 언어로 표시되는 색채였다. 특히나 어떤 화면 크기라도 소화할 수 있고 어떤 색 깊이도 소화할 수 있으며 다중 화면을 지원하는 것은 퀵드로의 많은 혁신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매킨토시 2는 지금까지 그리고 처음으로 여러 확장 슬롯과 컬러 그래픽, 공개 아키텍처를 채용했고 애플의 다른 제품들과 확장 가능한 애플 2계열에 영향을 받은, IBM PC와는 다른 디자인은 매킨토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매킨토시 2는 하드 드라이브와 함께 꽤 시끄러웠던 송풍기(fan)이 달린 전원공급장치를 내장하고 있었다. 한 외부 개발사에서 냉각기의 온도를 인식해 송풍기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팔긴 했지만 소비자는 애플의 보증을 받을 수 없었다. 후에 매킨토시 컴퓨터는 좀 더 조용한 하드 드라이브와 전원공급장치를 채용했다. 1986년 9월 애플은 MPW라고도 불리는 매킨토시 프로그래머 웍샵에서 맥용 프로그램을 리사를 통한 개발 대신에 맥에서 개발하는 법을 소개했다. 1987년 애플은 HyperCard를 공개했고, 매킨토시에서 동시 다중작업을 가능케 하는 MultiFinder를 소개했다. 가을에는 모든 애플에 위 두 가지 제품이 꾸러미로 제공되었다. 매킨토시 2를 바로 뒤이어, 매킨토시 SE(Second Edition)가 출시됐는데 최초의 20MB 내장 하드 드라이브와 하나의 확장슬롯이 장착된 맥이었다. SE는 또한 제리 매넉과 테리 오야마의 최초 디자인을 향상시켰고 매킨토시 2의 디자인 언어인 Snow White와 몇 개월 후 애플 IIGS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새로운 애플 데스크탑 박스 B) 마우스와 키보드를 공유했다. 1987년 애플은 자사의 소프트웨어 사업을 클라리스(Claris)로 분리한다. 클라리스는 애플에 쓰였던 몇몇 응용 프로그램의 코드와 법적 권리를 인수했다. 주요 제품은 MacWrite, MacPaint와 MacProject 등이다. 1980년대 후반에 클라리스는 몇몇 수정판 응용 프로그램을 출시하는데 MacPaint Pro, MacDraw Pro, MacWrite Pro 그리고 FileMaker Pro 같은 “프로(Pro)” 계열이었다. 완벽한 사무용 프로그램 한 벌을 만들고자 클라리스는 맥에 있던 Informix Wingz(업무용 문서 프로그램 )를 사들여 이름을 Claris Resolve로 바꾸고 새로운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Claris Impact를 추가했다. 1990년 초기에 오면서, 클라리스 프로그램들은 일반인 사용자들에게 판매되는 맥의 주요품목이 되었고,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91년, 클라리스는 곧 두 번째 인기상품이 되는 ClarisWorks를 출시한다. ClarisWorks는 버전 5.0이 나오면서 AppleWorks로 이름이 바뀐다. 매킨토시 포터블(Macintosh Portable )은 애플의 첫 번째 휴대용 맥이다. 1989년에서 1991년까지 생산했고 시스템 6과 시스템 7을 돌릴 수 있었다. 1988년, 애플은 애플에 저작권이 있는 GUI, 사각형의 창 모양, 화면 겹침 기능(Overlapping), 창의 크기를 변화시키는 기능 등을 무단 사용한 혐의로 마이크로스프트사와 휴렛 패커드사를 고소했다. 4년 후 애플의 패배로 판결이 나고 후에 애플은 다시 항소했다. 애플은 이러한 행동때문에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FSF)을 비롯한 일부 단체로부터 치명타를 맞게 되는데,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은 애플이 GUI 기술을 독점하려 한다고 여겼고 7년 동안 매킨토시 환경에서 돌아가는 GUI 프로그램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다. 1988년 새로운 모토로라 68030 프로세서와 함께 매인 보드에 MMU 내장을 포함해 내부가 향상된 매킨토시 IIx가 출시되었다. 1989년에 슬롯 개수를 줄인 버전으로 매킨토시 IIcx와 16 MHz 69030을 장착한 Mac SE가 뒤따라 출시되었다.(이름 짓는 규칙대로 가면 “SEx”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매킨토시 SE/30라고 지었다.) 그해 후반에 25MHz의 속도로 동작하고 8MB 이상의 램을 지원하지만, 그 프로세서와는 다르게 “32-bit 비호환” ROM(32 bit 중의 8 bit만이 OS 레벨의 주소할당이 가능했다.)을 장착한 매킨토시 IIci는 “32-bit 호환”이 되는 최초의 맥이었다. 시스템 7은 32-bit 주소할당이 가능한 최초의 Mac OS였다. 애플은 또한 매킨토시 포터블도 소개했는데 16 MHz 68000 모델에 능동행렬평판화면(active matrix flat panel display)을 채용했고 어떤 모델은 역광화면(backlit)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다음해에 가격이 미화 9,900달러부터 시작된 매킨토시 IIfx가 베일을 벗었다. 이 제품은 40 MHZ의 빠른 68030 프로세서와는 별개로 더 빠른 메모리, I/O 연산에 할당되는 애플 2 에라 CPU(Apple II-era CPU) 같은 내부적으로 아주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1990년 5월에 성능과 기능면에서 매킨토시 운영 체제에 버금가면서 가격은 더 싼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3.0(Microsoft Windows 3.0)이 출시되었다. 1990년 10월에 애플은 이전보다 가격을 낮춘 제품들을 출시하며 대응했다. 매킨토시 플러스(Macintosh Plus)의 주요 기능만으로 가격을 낮춘 매킨토시 클래식은 미화 999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2001년 초까지 결국 맥의 가격대는 올라갔다. 68020 CPU를 장착하고서 피자 상자 같이 특이한 가방에 들어가는 매킨토시 LC는 미화 1,800달러에 살 수 있었다. 이 제품은 컬러 그래픽과 512 x 384 픽셀을 지원하면서 저렴한 가격의 새로운 모니터를 채용했다. 20 MHz IIci 제품에서 하나의 확장 슬롯만 넣은 매킨토시 IIsi는 미화 2,500달러였다. 이들 세 가지 제품은 모두 잘 팔렸지만, 애플의 순수익은 이전의 매킨토시 제품들보다 낮았다. 시스템 세븐(System 7)은 최초의 주요 판 올림이 이뤄진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다. 1991년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시된 시스템 세븐은 32비트 코드로 재작성되어 나옴으로써, 컬러 그래픽 조작성과 메모리 주소 할당, 네트위킹이 강화되었고 협력적 다중작업(co-operative multitasking) 구현과 가상 메모리 기술까지 적용되어 나온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다. 그해 후반에 애플은 속도가 더 향상된 모토로라 68040 프로세서를 최초로 채용한 매킨토시 쿼드라 700(Quadra 700)과 900을 선보였다. 이 제품들은 16 MHz 68030 CPU를 사용해 전년도 최고 인기 상품이기도 했던 매킨토시 클래식 2(Classic II)와 매킨토시 LC II의 개선판으로서 시장에 나왔다. 또한 이때에 매킨토시는 프락디자인(Frogdesign) 사에 비싼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며 사용하던 디자인 언어인 “Snow White”를 버리고, Apple Industrial Desing Group을 설립하여 새 운영 체제에 사용될 언어를 자체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10월에 휴대용 매킨토시(Macintosh Portable) 제품군은 소형화된 포터블 개념으로 나온 최초의 세 가지 파워북(PowerBook)-- 파워북 100과 16 MHz 68030 CPU를 채용한 파워북 140, 25 MHz 68030 CPU를 채용한 파워북 170으로 대체된다. 이 제품들은 키보드 아래쪽에 손바닥을 놓일 공간을 마련되고, 포인팅 장치(트랙볼)가 내장된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였다. 애플 매장에는 매킨토시 센트리스(Macintosh Centris)라 불린 쿼드라(Quadra) 계열의 중간쯤 되는 모델이 있었는데, 소비자들이 클래식 계열, LC 계열, II계열, Quadra 계열, 펄포마 계열, 센트리스 계열로 혼란스러워 해서 곧 쿼드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애플은 파워북 듀오 계열의 축소판 제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 제품은 사무실 등의 작업장에 쓰이는 기능성 도구 같은 제품이었는데 데스크톱용 기지국(Base Station)에 연결되는 용도였다. 이 제품은 1997년 초반까지 판매되었다. 1994년 5월, 차세대 파워북 계열인 파워북 500을 출시하는데 트랙패드(trackpad)라는 기발한 장치를 최초로 장착한 제품이다. 또한 1994년 애플은 AIM 연합, IBM, 모토로라가 개발했던 RISC 파워피씨(RISC PowerPC) 아키텍처에서 모토로라 CPU를 버렸다. 파워 매킨토시 계열은 새로운 칩을 사용한 첫 번째 제품으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데 9개월 만에 100만 개가 넘게 팔렸다. 이런 기술과 상업적인 성공에도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은 윈도 95 운영 체제와 펜티엄(Pentium) 프로세서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하락시켰다. 이 두 제품은 IBM 호환 PC의 멀티미디어 기능과 동작 속도를 획기적으로 상승시켰지만 윈도 운영 체제의 GUI는 여전히 맥과 닮아 있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애플은 "매킨토시 호환 프로그램(Macintosh clone program)"을 시행했는데, 이 호환 제품들은 다른 회사의 하드웨어(본체)에 애플의 시스템 7 운영 체제를 장착한 제품들이었다. 이 전략은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다소 높여주고 고객들에게는 더욱 싼 하드웨어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애플에게는 경제적인 타격을 주었다. 스티브 잡스는 1997년 애플로 돌아오면서 버전 7.7로 알려진 다음 운영 체제의 이름을 맥 OS 8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애플이 다른 회사에 허용했던 저작권은 오직 시스템 7만 해당했으므로 결국 매킨토시 호환 제품의 생산은 막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은 맥 호환 하드웨어 생산에 상당한 투자를 했던 모토로라사나 파워 컴퓨딩 사(Power Computing Corporation)에게는 치명적인 재정적 손실을 입혔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다음 해인 1998년 애플은 모든 구성품이 하나로 통합된 아이맥(iMac)을 선보인다. 반투명한 아이맥 케이스는 청록색에서 시작해 나중엔 여러 색깔로 생산됐는데, 1990년대 후반에 제품 디자이너인 홀마크(hallmark)가 고안한 것이다. 아이맥은 이전까지 애플의 표준 연결 방식인(그리고 거의 독자 기술이었던) SCSI나 ADB 같은 장치를 버리고 두 개의 USB 단자를 장착했다. 또한 아이맥에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도 없앴는데, 그 대신 CD-ROM을 장착했다. 아이맥은 139일 만에 80만대가 팔리는 기염을 토하고, 그해 애플의 연간 매출은 미화 3억 9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를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던 1995년 이래 처음으로 순수익이 난 해였다. 파란색과 흰색의 조합은 파워 매킨토시(Power Macintosh)에도 적용됐고 연이어 나온 새로운 제품인 아이북(iBook)에도 적용되었다. 1999년 7월에 소개된 아이북은 애플의 첫 번째 일반인용 노트북 컴퓨터였다. 9월에 판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14만대의 선주문이 있었고 10월이 되면서는 아이맥과 비슷한 판매량을 보이면서 인기를 끌었다. 애플은 연이어 큐브(Cube)나 교육 시장용 이맥(eMac), 전문가를 위한 파워북 G4(PowerBook G4) 랩탑 등의 새로운 제품을 생산한다. 최초의 아이맥은 G3 프로세서를 썼으나 G4를 거쳐 G5로 넘어가면서 제품 디자인도 흰색 플라스틱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현재의 아이맥은 알루미늄 케이스다. 2005년 1월 11일, 애플은 미화 499달러로 책정된 맥 미니(Mac Mini)를 출시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가장 값이 싼 맥이다. 맥 OS는 9.2.2판까지 개선되어 나왔지만, 그것의 구식 아키텍처-- 몇 번 갱신이 되긴 했다. 예를 들면 파워 피씨 포트 중의 하나로 나노커널(nanokernel)이 추가됐고 Mac OS 8.6은 멀티프로세싱 서비스 2.0(Multiprocessing Services 2.0)을 지원하도록 수정되었다.-- 는 교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애플은 맥 OS 9을 완전히 재정비한 유닉스 계열 기반의 맥 OS X(Mac OS X)을 소개하는데 다윈(Darwin) 커널과 XNU를 사용하는 넥스트스텝(NEXTSTEP)을 토대로 하였다. 맥 OS X은 2000년 9월에 아쿠아 인터페이스와 함께 퍼블릭 베타로 공개되었다. 원하는 고객들은 미화 29.99달러에 애플의 이 새로운 운영 체제를 미리 체험하고 정품이 발매되기 전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 2001년 3월 24일 Mac OS X의 첫 번째 버전인 10.0(별명은 치타)이 출시되었다. Mac OS X의 초기 버전에서는 이전의 OS에서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들을 클래식이라는 구성을 이용하여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애플은 Mac OS X의 10.5 버전인 레퍼드(Leopard)부터 클래식을 빼버렸다. Mac OS X의 다음 버전들은 2001년 9월 25일 출시된 10.1 버전 "푸마"(Puma), 2002년 8월 24일 출시된 10.2 버전 "재규어"(Jaguar), 2003년 10월 24일 출시된 10.3 버전 "팬서"(Panther), 2005년 4월 29일에 출시된 "타이거"(Tiger), 2007년 10월 26일에 출시된 "레퍼드"(Leopard), 2009년 2월 28일에 출시된 "스노우 레오파드"(Snow Leopard), 2011년 7월 20일에 출시된 "라이온"(Lion)이다. 인텔 버전의 레퍼드는 오픈 그룹으로부터 유닉스 규격 인증을 받았다. 1991년에 CPU를 파워피씨 프로세서로 변경하면서 파워 매킨토시, 파워맥 G3, 파워맥 G4, 파워맥 G5가 출시되었고, 1998년에는 아이맥이 큰 성공을 거두며 애플의 부흥을 이끌었다. 2006년부터는 인텔 프로세서를 사용한 맥이 판매되고 있다. 매킨토시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역사를 두 번 바꾸었다. 매킨토시 128부터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탑재하고 과감하게 5.25인치 드라이브를 버렸다. 또한 아이맥부터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없애고 CD롬 드라이브만 탑재함으로써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매킨토시가 발표되었을 때 운영 체제는 시스템 (System)으로 불렸다. 최초의 시스템은 GUI와 위지위그 등 당시 상황에서는 혁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러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없었다. 1987년 시스템 5.0으로 버전이 올라가면서 멀티파인더를 통해 협력형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다. 1991년에는 가상 메모리, 파일 공유를 지원하고 멀티미디어와 그래픽 지원이 강화된 시스템 7이 출시되었다. 시스템이라는 이름은 파워피씨 프로세서를 처음으로 지원한 7.5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 1997년 맥 OS 7.6이 발표되면서 명칭이 맥 OS (Mac OS)로 변경되었다. 곧이어 멀티스레드 파인더와 새로운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맥 OS 8이 발표되었다. 1999년 맥 OS의 마지막 메이저 버전인 맥 OS 9가 발표되었다. 2001년 초에 발표된 맥 OS X에는 클래식 이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맥 OS X으로 전환하는 동안 기존에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맥 OS 9는 2001년 12월에 발표된 9.2.2를 마지막으로 개발과 지원이 중단되었다. 현재 매킨토시의 운영 체제는 macOS이다. 이것은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 사를 인수하여 BSD 유닉스 계열 기반인 NeXTSTEP을 바탕으로 새로 개발한 것이며, 이때의 이름은 OS X(오에스 텐)이었다. OS X은 더이상 버전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 운영 체제의 이름으로 사용하며, 메이저 버전을 내놓을 때 소숫점 밑의 버전만을 올리며, 코드명을 이용하여 이름붙인다. 치타, 퓨마, 재규어, 팬서, 타이거 등 고양이과 동물들의 이름으로 각 버전의 코드명을 지정하였고 10.9 매버릭스 이후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지명을 사용하여 코드명을 지정하며, 재규어(10.2) 이후로는 코드명을 이용하여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10.12 버전의 시에라를 발표하면서 이름을 macOS로 바꾸었으며, 현재 가장 최신의 운영 체제는 10.14 버전의 모하비이다. 대한민국에서 매킨토시는 전통적으로 북디자인, 음악, 영상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지금은 X86용으로도 나와 있지만, 초기에는 쿼크익스프레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레이저 프린터, 고품질 서체를 매킨토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고, 출력을 쉽게 할 수 있어서 북디자인을 비롯한 디자인계에서는 맥이 널리 사용된다. 음악 분야에서도 로직 프로 등의 주요 스튜디오 레코딩 프로그램을 통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영상 분야에서는 애플의 멀티미디어 기술인 퀵타임을 기반으로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방송이나 영화 업계에서 애용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의 크로스 플랫폼 프로그램 개발 노력으로 제한점들이 많이 사라졌다. 최근에는 인텔 매킨토시가 등장하면서 매킨토시의 판매가 증가하였다. 매킨토시는 가격이 비싸다는 선입관이 널리 퍼져있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매킨토시의 가격이 동일 사양의 PC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하였고 OS X과 윈도를 함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편 한국의 각종 포탈이나 커뮤니티 사이트, 온라인 게임 사이트, 인터넷 뱅킹이나 공공기관 등 공인 인증서를 사용하거나 액티브 엑스를 사용하는 사이트는 매킨토시에서 이용하기 어렵다. 이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가 국내 운영 체제 시장을 거의 독점하는 상황에서 인터넷 사용이 확산되면서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이 윈도-인터넷익스플로러 환경만을 감안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이를 방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액티브 엑스 사용을 권장하지 않는 윈도 비스타가 출시되고 웹에서의 평등한 접근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웹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반 구조를 변경하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윈도우10이 출시된지 1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후 매킨토시는 크게 대상 사용자 유형에 따라 일반 사용자용과 전문 사용자용, 제품 유형에 따라 데스크톱과 노트북으로 분류되어 크게 네 가지 제품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맥 미니, 맥북 에어와 서버인 XServe가 추가된다. 사진 이름 종류 사용자 설명 맥 미니 데스크톱 일반 인텔 듀얼코어 i5 프로세서 장착. 2.3 GHz 버전과 2.5 GHz 버전이 있다.. 애플의 저변확대용 모델. 맥 미니 서버 데스크톱 서브 인텔 쿼드코어 i7 2.0 GHz 프로세서 장착. ODD가 없는 모델로, 대신 500GB의 HDD 두개가 RAID로 구성된다. 운영 체제는 맥 OS X 10.7 서버가 제공된다. 아이맥 아이맥 데스크톱 일반 2010년 여름의 모델에는 SDXC 슬롯이 내장되어 있다. LCD 디스플레이의 크기에 따라 16:9 비율의 21.5인치, 27인치 2가지 모델이 제공되며, 인텔 코어 i3 (3.06 GHz, 3.2 GHz)를 장착했으며, 27인치 모델은 인텔 코어 i3(3.2 GHz, 옵션 3.6 GHz) 또는 네할렘 쿼드코어 프로세서 (i5 2.8Ghz, 옵션 i7 2.93 GHz) 를 장착한 모델도 있다. 27인치 모델은 미니디스플레이포트를 이용한 외부입력이 가능하다. 최근에는 5K 해상도를 지원하는 iMac 5K가 출시되었다. 맥 프로 데스크톱 전문가 전문 업무용 컴퓨터. 인텔 제온 쿼드 코어 프로세서 2.8 GHz 1개(옵션 쿼드 코어 3.2 GHz, 6-코어 3.33 GHz)와 인텔 제온 쿼드 코어 프로세서 2.4Ghz 2개를 장착한 모델이 있다. 12코어 모델은 인텔 제온 6-코어 프로세서 2.66 GHz 2개(옵션 6-코어 2.93 GHz 2개)가 장착되어 있다. 또한 Xserve 단종으로 Server 모델이 추가되었으며 인텔 제온 쿼드 코어 프로세서 2.8 GHz 1개(옵션 쿼드 코어 3.2 GHz, 6-코어 3.33 GHz, 쿼드 코어 2.4 GHz 2개, 6-코어 2.66 GHz 2개, 6-코어 2.93 GHz 2개)를 장착하고 있다. 서버 모델에 한해 맥 OS X 10.6 서버가 제공된다. 맥북 맥북 노트북 일반 인텔 코어 2 듀오 프로세서 장착. 맥북 프로의 유니바디 디자인을 적용한 흰색 모델이 있다. 사양은 맥북 프로 13인치 모델과 유사하나 파이어와이어와 SD 카드 슬롯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북 제품군의 후속 모델이며, 단종되었다. 2015년 새로운 라인업으로 부활했다. 맥북 프로 노트북 일반/전문가 인텔 i5, i7 프로세서를 장착한 전문 업무용 노트북. 13인치, 15인치 모델이 존재한다. 15인치 모델은 화면을 무광 화면으로 교체 할 수 있으며. 15 인치 모델에는 쿼드코어 프로세서가 장착된다.. 파워북 제품군의 후속 모델. 맥북 에어 맥북 에어 노트북 서브/일반 인텔 듀얼코어 i5 프로세서를 장착한 서브 노트북. ODD, 유선 랜 포트, 파이어와이어가 없는 것이 특징. 발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이었다. 현재 11인치 맥북 에어는 1.6 GHz CPU를 장착하며 64GB 또는 128GB 플래시 메모리가 장착되며, 13인치 맥북 에어는 1.7 GHz CPU와 128GB 또는 256GB 플래시 메모리가 장착되어 있다. Xserve XServe 서버 기업 인텔 Xeon "네할렘" 쿼드 코어 프로세서를 장착한 서버용 컴퓨터. 모델에 따라 2.26 GHz 1개와 2개가 제공된다. 2011년 1월 31일까지만 구입이 가능하다(즉, 단종되었다). 1984년 최초의 매킨토시인 매킨토시 128k 출시 1985년 애플 레이저라이터가 출시되면서 출판인쇄 분야에서 매킨토시가 사용되기 시작함 1987년 확장이 가능한 매킨토시 II 출시 1991년 매킨토시 노트북인 파워북 출시 1994년 파워피씨 프로세서를 장착한 파워 매킨토시 출시 1997년 파워북 G3 출시 1998년 아이맥 출시 1999년 아이북, 파워맥 G4 출시 2000년 파워맥 G4 큐브 출시 2001년 파워북 G4 출시, 맥 OS X으로 운영 체제 이전 2002년 아이맥 G4, 이맥, XServe 출시 2003년 파워맥 G5, 아이북 G4 출시 2004년 아이맥 G5, XServe G5 출시 2005년 맥 미니 출시 2006년 인텔 프로세서를 사용한 맥 프로, 맥북 프로, 아이맥, 맥북, 맥 미니 출시 2007년 알루미늄 프레임, 유리 커버가 사용된 아이맥 출시 2008년 초박형 서브노트북 맥북 에어 출시 2008년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만든 유니바디 맥북 13인치와 맥북 프로 15인치 출시. 2009년 네할렘 아키텍처를 채용한 Xserve 출시. 2009년 맥북 알루미늄 모델이 단종되고, 맥북 프로 모델 (13인치, 15인치, 17인치)과 맥북 에어 모델이 수정되었다. 2009년 아이맥 21.5인치와 27인치, 수정된 맥미니와 맥미니 서버, 그리고 유니바디 맥북 출시. 2010년 새로운 맥북 에어 출시 2011년 Xserve가 1월 31일에 단종. 2012년 새로운 맥북 에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15인치(6월 12일), 새로운 아이맥 출시 2012년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13인치(10월 23일) 출시 2013년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맥 프로 출시 2014년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새로운 맥 미니 출시 2015년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뉴 맥북 출시 2016년 맥북 에어 리프레시 모델 출시, 터치바를 단 새로운 맥북 프로 레티나 출시 애플 맥북 사파리 (웹 브라우저) 애플 공식 홈페이지 분류:개인용 컴퓨터 분류:스티브 잡스
한국어의 세계 분포를 나타낸 그림. 한국어 또는 한국말 , 조선말 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공용어로,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어 또는 한국말 이라고 부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말 ,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에서는 조선어 (朝鮮語)라고 부르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는 고려말 이라고 부른다.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해외 이민 등의 요인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베트남 등 세계 여러 지역에 한민족이 이주하면서 이들 한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한국어가 사용되고 있다. 2016년 1월 초 기준으로 한국어 사용 인구는 약 7,720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어 는 대한민국 (북한과 남한으로 나뉨) 에서 쓰는 명칭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말 이라고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만드는 사전의 이름은 《겨레말 큰사전》이다. 1994년부터 열리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 간의 한글과 한국어 컴퓨터 처리를 표준화하려는 학회명은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대회 이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몇몇 국가에서는 한국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조선어 (朝鮮語)가 주로 사용되어왔으나, 최근에는 한국어 로 부르는 경향이 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밀접한 관계에 따라 한국어를 주로 차오셴위 (, 조선어) 라고 부른다. 1992년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 양국이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되면서 한궈위(, 한국어) 또는 한위 (韓語, 한어) 등의 명칭이 쓰이기도 하나, 학술상으로는 여전히 문화어 계열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 중화민국(타이완)은 한국어를 한궈위(, 한국어) 나 한위(, 한어) 로 부른다. 일본에서는 한국어를 조센고(조선어) 라고 불렀으나, 근래에는 간코쿠고(한국어) 라고 부르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 내의 한인(韓人) 교포 사회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로 갈라져 각각 표준어와 문화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NHK는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한국어 회화 명칭을 간코쿠고(한국어) , 조센고(조선어) 대신 한구루 고자 (, 한글 강좌)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중립성을 고려하여 간코쿠ㆍ조센고(韓国・朝鮮語, 한국ㆍ조선어) 고리아고 (, 코리아어)나 가라노쿠니노코토바 (, からのくにのことば, 한나라말) 등의 명칭을 쓰기도 한다. 고리아고(코리아어) 는 1977년 조치 대학교가 처음으로 전공 학과를 개설한 이후 일부 대학교에서 쓴다. 또한 학계에서는 북한에서 쓰이는 것을 조선어, 남한에서 쓰이는 것을 한국어로 구별하여 둘 다 포함하는 말로 (광의의) 조선어라고 한다. 베트남에서의 용법은 중국과 거의 비슷하다. 현재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에 한자 문화권에 속했던 베트남은 한국을 쩨우띠엔 (, 朝鮮)이라고 불렀고, 대한민국은 남쩨우띠엔 (, 南朝鮮), 한국어는 띠엥쩨우띠엔 (, 朝鮮語)으로 불렀다. 한국에 관련된 일반 어휘는 문화어 계열의 어휘가 더 많이 쓰인다. 대한민국의 표준어는 띠엥한 (, 韓語)이라고 부른다. 베트남어 위키백과에는 한국어 문서의 제목이 한국어 를 뜻하는 띠엥한꾸억 (, 韓國語)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한국어는 영어로 Korean , 프랑스어로 Coréen , 스페인어로는 Coreano 로 불린다. 한국어 계통에 대해서는 핀란드 언어학자 람스테드가 알타이어족설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어와의 동계설도 주장되었다. 최근에는 한국어를 고립어(언어유형학)라고 하는 설이 몇몇 학자에서 제창되었으나 어형변화가 없이 어순이 뜻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립어의 대표격인 중국어와 한국어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인정되지 않는다. 한국어는 낱말이 그 어떤 형태상의 어형변화를 하지 않고, 문법적 관계가 주로 어순에 의해 표시되는 언어인 고립어와 다르게 어형변화가 많으며 문법의 어순이 고립어보다 중요하지 않은 교착어이다. 언어유형학이 아닌 비교유형학의 고립어에 한국어가 포함이 된다는 주장도 최근 제창되었지만 비교유형학에서도 한국어를 알타이 제어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20세기 후반까지 우랄-알타이 계통설이 지지를 받았는데, 우랄-알타이어족이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으로 나뉘게 된 뒤에는 알타이 계통설이 가장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한국 초중고 정규교과서에서는 한국어를 교착어인 알타이어족으로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가 몽골어, 퉁구스어, 터키어 등과 함께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하는 학자들은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 예프게니 폴리바노프와 로이 앤드류 밀러 등이 있다.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의 하나로 보는 입장에서는 한국어의 다음과 같은 속성을 근거로 든다. 1. 모음조화가 존재한다. 2. 용언에 굴절이 있는 교착어이다. 3. 주어, 목적어, 동사의 어순을 가지는 S-O-V 어순의 언어이다. 4. 그 외 문법적 어순이 같다. 5. 어두에 특정 자음이 쓰이지 않는 두음법칙이 존재한다. 6. 모음교체, 자음교체, 문법적 성(性), 어두자음군이 없다. 7. 관계대명사와 접속사가 없고 접속사의 결여를 보충하기 위해 부동사를 사용한다. 그러나 한국어는 알타이어족이 가지는 전형적인 특성 외에 다른 특성을 공유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어가 조기에 알타이조어에서 분리되었다는 가설을 성립하게 하였다.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임을 부정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는 정론인 한국어 알타이어족설을 반대하는 주장이다.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이 아니고 고립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중에 언어학자들은 알려진 바가 적다. 대부분이 언어학자가 아닌 다른 전공의 학자들이 알타이어족설을 반대하고 있는 현실이다. 1. 알타이 제어에는 기초 어휘인 신체 지칭이나 친족 명칭어가 유사한 것이 적다. 2. 기초 어휘로서 대명사 일부만이 유사하고, 수사(숫자의 발음)가 다르다. 3. 자음의 음운대응은 있으나 음운대응의 규칙성이 정확하진 못하다.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임을 부정하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가 음운대응의 규칙성의 부족이다.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알타이 제어와 한국어의 음운대응 관계가 적게 밝혀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모음의 대응은 매우 불규칙하다. 하지만 자음 중에서는 몇 가지 밝혀진 대응관계가 있다. 한국어와 몽골어가 가지고 있는 문법의 어순의 유사성은 매우 높다. 또한 유럽의 경우 게르만어,라틴어와 같이 문법의 유사성으로 가까운 언어들을 구분하는데, 전세계에 한국어와 같은 문법의 어순을 가진 언어는 몽골어,퉁구스어,튀르크어,일본어밖에 없다는 점은 한국어에 대한 다른 가설들이 제창되어도, 여전히 알타이어족 가설에 힘이 붙는 이유이다. 한국인은 형질 인류 상으로는 몽골로이드이며 언어상으로는 알타이어를 쓰고 있다. 대한민국의 학교에서는 한국어가 알타이 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문법적인 유사성이 많다는 것과 순수 한글과 일본어에 유사한 단어가 있다는 것에서 나온설이다. 부여어족설 등의 구체적인 가설이 나왔으나, 고대 한국어 자료가 부족하여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노우에 키요시()는 일본어가 친족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오직 한국어 뿐이고, 그렇다면 공통의 조어에서 갈라진 시기를 언어연대학으로 조몬시대 중기 이전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인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가서 정착하였기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에 유사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인이 기록한 일본사서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는 일본인 귀족의 성씨가 한국의 고대 국가인 「 백제 」에서 104씨족, 「 고려 」에서 41씨족, 「 신라 」에서 9씨족, 「 가야 」에서 9씨족 나왔다고 쓰여 있다. 또한 일본 신화에 나오는 다케하야 스사노오노 미코토(建速須佐之男命)는 한국 고대 국가인 신라의 소시모리에 강림하였고 배를 타고 일본의 일향국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나와있으며 일본의 신인 니니기노 미코토는 구시후루다케 (久士布流多気)에 강림하였는데 가야의 왕인 김수로가 강림한 구지봉과 유사성이 보인다는 점이 있다. 또한 일본서기와 고서기에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와 가야 왕자 쓰누가 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가 일본에 건너가서 안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는 숫자 1을 "하나"라고 부르는데 일본에서는 端(단)이라는 한자를 쓰면서 はな(하나)라고 읽고 뜻은 (사물의) 시초; 처음; 최초라는 뜻이다. 端(はな)からわかっていた(하나카라와캇데이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端(はな)からしくじる(하나카라시쿠지루) 초장부터 실수하다 라는 뜻으로 한국 고유 언어와 일본어가 유사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일부는 일본 제국주의가 내선일체를 내세워 한국을 합병했다는 점에서 한-일 어족설은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며 일선동조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어 이외에도 몽골어, 퉁구스어, 터키어, 일본어, 만주어까지 한 어족으로 보며, 해당 다섯 개의 언어와 한국어가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의 언어학자인 김방한이 제시한 가설로, 한국어 기층에 원시 한반도어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의 비알타이어 기층이 있고, 그 위에 알타이어계 요소가 덮인 것이거나, 그 반대로 비알타이어가 알타이 기층에 덮여서 한국어의 뼈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가설이다. 그는 원시 한반도어와 계통적 친연성이 있는 언어로 편의상 고시베리아어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니브히어(길랴크어)를 지목하였다. 다음은 대한민국 표준어를 기준으로 한 모음의 표기이다. 음소 대표적인 음성 적요 예 /ㅏ/ 전설 비원순 저모음, 중설 근저모음 / a i/ 아이 /ㅓ/ 후설 비원순 중저모음 / ʌ di/ 어디 /ㅗ/ 후설 원순 중고모음 / o i/ 오이 /ㅜ/ 후설 원순 고모음 / u ɾi/ 우리 /ㅡ/ 후설 비원순 고모음 /g ɯ / 그 /ㅣ/ 전설 비원순 고모음 / i ma/ 이마 /ㅐ/ 전설 비원순 중저모음 /h ɛ / 해 /ㅔ/ 전설 비원순 중고모음 /nu e / 누에 /ㅚ/ ( 허용) 전설 원순 중고모음 /s ø / 쇠 /ㅟ/ ( 허용) 전설 원순 고모음 / y / 위 양순 치경 치경구개 권설 경구개 연구개 성문 비음 파열음 마찰음 파찰음 탄음 접근음 설측음 + 음운 체계 양순음 치경음 경구개음 연구개음 성문음 파열음 평음 ㅂ () ㄷ () ㅈ () ㄱ () 경음 ㅃ () ㄸ () ㅉ () ㄲ () 격음 ㅍ () ㅌ () ㅊ () ㅋ () 마찰음 평음 ㅅ () ㅎ () 경음 ㅆ () 비음 ㅁ () ㄴ () ㅇ () 유음 ㄹ () /ㅅ/는 , 나 앞에서는 가 된다. 비음 앞과 뒤에서는 로 발음된다. (단, 나 앞에서는 가 된다.) /ㅎ/는 . 나 앞에서는 , 나 앞에서는 , 앞에서는 가 된다. 비음 앞에서는 로 발음되며, 비음 뒤에서는 음가가 사라진다. /ㅂ, ㄷ, ㅈ, ㄱ/는 . 모음 사이, 비음 뒤에서는 가 된다. /ㄹ/는 모음 사이에서는 , 어말에서 또는 겹으로 날 때는 . 겹으로 날 때 나 앞에서는 가 된다. 어두에서는 음가가 없어진다. 위의 표에서 평음. 경음, 격음은 기식성에 의해 나눈 것이고, 긴장성에 의해 무기 연음. 무기 경음. 유기 경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어는 긴장음 체계이다. 조사의 형태는 앞의 소리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은/는, 이/가, 을/를과 같이 음절이 바뀌는 경우도 있고, 에서/서, 으로/로와 같이 음절이 끼어드는 경우도 있다. 은/는, 이/가, 을/를의 경우, 모음이 연쇄되는 것을 피하고자 자음이 삽입되는 규칙적인 경우이나, 와/과, 으로/로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으로/로는 ㄹ 뒤에서 독특한 분포를 보인다. 와/과 역시 중세 한국어에서는 으로/로와 마찬가지로 ㄹ뒤에서 와 가 쓰이는 독특한 분포를 보였으나 현대한국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와/과의 경우 이중모음/ㅘ/가 모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모음 연쇄 환경이 아니고 사용빈도에 따라 분포가 설명된다. + 한국어 조사 자음 뒤 모음 뒤 -의 -의 -은 -는 -이 -가 -을 -를 -과 -와 형태 음소론적 차이는 일부 동사에서도 관찰된다. 한국어는 어근과 접사 등 특정 표지가 붙음에 따라 단어의 기능이 결정되는 교착어로 분류된다. 특히 조사에 따라 문법적 격이 정해지며 이 때문에 고립어에 비해 어순이 비교적 유동적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SOV형 어순, 곧 주어-목적어-동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일반적인 경우 서술어는 반드시 문장의 끝에 위치하여야 한다. 조사는 문법적 격을 나타내는 격조사, 단어끼리 이어주는 접속조사, 특별한 의미를 가하는 보조사로 나뉘며, 조사가 붙는 체언이 개음절인지 폐음절인지에 따라 다른 조사가 붙기도 한다. 일례로, 사람 의 뒤에 붙는 주격 조사는 이 이나, 머리 뒤에 붙는 주격 조사는 가 이다. 어미가 다양한 것이 특징적으로, 문장 내에서 기능이나 수식은 물론 미묘한 분위기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특히 주로 종결 어미나 선어말 어미에 따라 드러나는 낮춤말과 평어, 높임말의 복잡한 존비어 체계가 특징적으로, 화자 간에 존댓말(높임말)과 반말(낮춤말, 평어)에 대한 합의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어색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언어와 호칭선택 문제 때문에 갈등과 권위적 상황이 유발되기도 한다는 분석도 있다. 용언은 동사와 형용사를 포함하는데, 둘의 어미 변화가 거의 동일하다는 특징이 있다. 용언의 기본형은 모두 종결어미의 일종인 -다 로 끝나는 것으로 취급되며, 그 기능에 따라 조금씩 변하나 대부분의 경우 여전히 다 로 끝나 문장의 끝을 암시하게 된다. 그 시제는 현재, 과거, 미래형으로 나뉘며, 이 또한 동사의 종류나 기능에 따라 다양한 어미로 나타난다. 한국어의 어휘는 크게 고유어 ("순우리말"), 한자어, 외래어로 분류된다. 고유어는 한국어의 기층을 형성하는 고유의 어휘로, 사용 빈도가 높은 일상어는 대부분 고유어에 속한다. 음운적으로 ㄹ 소리로 시작되는 토착 어휘는 거의 없으며, 이는 알타이 제어의 음운론적 특징의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어에 한자의 비율은 일반적으로 한자의 비율이 50%라고 하는 잘못된 설이 세간에 퍼져 있으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가능한 한 많은 영어와 독일어인 현대어 낱말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예를 들어 Society=사회)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국어사전이 수록하는 한자어의 상당수는 한문 문장에만 용례가 있고, 한국어에서는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 단어들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현대 국어 사용 빈도 조사 를 보면 우리말의 낱말 사용 비율은 토박이말이 54%, 한자어 35%, 외래어가 2%였다. 외래어라 하면 일반적으로 한자외의 외국어에서 유래한 어휘를 가리킨다. 근대 이전에는 불경을 통하여 간접 차용된 산스크리트어(한자어 형태)를 비롯하여 몽골어에서 두개의 단어가 차용어로 쓰였으며 (예를 들어 송골매), 일제강점기에는 영어와 독일어의 현대어를 한자로 차용하여 사용한 것들이 있다.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등 소수의 인도유럽어족의 어희가 일본을 통하여 들어왔으나 현재 사용 빈도는 매우 적다. 예를 들어 "Part time job"이라는 말을 일본에서 쓰던 독일어인 "아르바이트(Arbeit)"라고 부르며 원래의 아르바이트의 의미와 다르게 쓰인 말들이 있다. 현대에는 영어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영어로부터의 많은 차용어들이 쓰이고 있다. 한반도에서 처음 사용된 문자체계는 한자이다. 한문 유입 이후, 고유명사 표기 등 한국어 표기의 필요성이 대두하였으며, 1934년 경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어순이 한문 어순이 아닌 한국어 어순에 따라 배열되어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여러 고안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임신서기석에 사용된 변칙한문체를 서기체(誓記體) 또는 의국체(擬國體)라고 한다. 단음절어이며 고립어인 한자는 다음절어이면서 교착어인 한국어의 표기에 적합하지 않아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 방법 중에서 이두, 구결이 있었으며 향찰은 소멸하였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국어를 표기하기보다는 문어체의 한문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구어(한국어)와 문어(한문)의 이중체계가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현재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여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한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대한 설이 여러 가지 있었으나, 1940년에 《세종어제훈민정음》이 발견되면서 발성 기관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반포 서문에서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고 적고 있다. 한글을 이후 조선에서 소설이나 편지등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국한문혼용)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이 공식문자이고, 일부 한자어는 한자를 괄호에 넣어 병기(竝記)하기도 하지만 한자의 사용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구 소련 지역에서는 한자를 거의 쓰지 않고 가급적 순한글로 한국어를 표기한다. 1930년대 초반 소련에서는 여러 소수 민족 언어를 대상으로 한 로마자 표기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안을 승인했지만, 실제 로마자 표기안이 마련되어 생활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어 문자생활에서 로마자로 한글·한자를 대체하려던 방안으로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 고유명사의 표기에 쓰는 현재의 로마자 표기 규범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로마자 두문자어 표기와 일부 고유 명사 표기에 로마자를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dialect dragonfly.png|섬네일| 잠자리 를 부르는 여러 가지 말. 한국어의 지역별 방언 구분 한국어의 방언은 경기 방언, 영동 방언, 서북 방언, 충청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동북 방언, 재미 한국어, 재중 한국어, 재일 한국어 등으로 나눈다. 경기 방언과 충청 방언을 중부 말로 합쳐 일컫기도 한다. 모든 방언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대한민국의 표준어는 경기 방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표준어인 문화어는 서북 방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등 영어 사용 국가로의 이민이 늘어나면서 이민 2세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한국계 외국인들이 영어를 번역한 듯한 한국어(번역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약 80년 가까이 분단된 만큼 언어상의 특징도 차이가 있다. 가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건데기나 지팽이와 같이 ㅣ 의 모음 역행 동화를 인정하는 경향이 크며,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두음 법칙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에 여자, 염원, 노동 대신 녀자, 념원, 로동과 같은 낱말을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문체나 구어체를 활용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어감이 강한 표현을 많이 쓴다.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찔리우다 와 같이 대한민국보다 보조용언을 겹쳐 쓰는 경우가 많으며, 접미사 들 을 많이 쓰는 경향도 있다. 어휘 면에서는 특히 많은 차이를 보이며, 외래어 수용에 큰 거리낌이 없는 대한민국에 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말다듬기로 고유어가 많지만, 과거 얼음보숭이 를 쓰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 대부분 아이스크림 이라고 쓰는 것을 볼 때, 외래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추세다. 미국, 중국, 일본, 프랑스, 폴란드,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지에서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한국의 경제 성장에 따른 국제적 위상의 확대와 한류 등의 문화적 영향력의 전파에 힘입은 바가 크다. 과거에는 영어, 일본어 등 유럽, 미주 및 일본을 중심으로만 한국어 학습용 교재가 발간되었으나, 근래에는 한국어 학습 동기의 다변화와 국내 외국인 수의 증가로 중국어, 타이어,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로 한국어 교재가 발간되고 있다. 미국 정부회계감사원이 발표한 미국 국무부 외국어 직무수행 평가서 에 따르면,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와 더불어 한국어를 미국인이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superhard language)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유럽어족인 영어와 한국어의 여러 상이점에 따른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대부분의 외국인은 한국어를 학문으로서 배운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한국어 능력을 검정하기 위한 시험이 몇 가지 있다. 국어능력인증시험(Test of Korean Language;TOKL), 한국어능력시험(Test Of Proficiency in Korean TOPIK), KBS 한국어능력시험(Korean Language Test) 등이 있다. 일본의 네 가지 한국어 시험 가운데 일본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험은 한글능력검정시험과 한국어능력시험이다. 한글능력검정시험을 뺀 나머지 모든 시험은 대한민국 표준어 시험이기 때문에 표준어가 기준이며, 이와 다른 문화어의 맞춤법이나 어법은 오답으로 처리된다. 이외 일본의 대학 입시 센터 시험에는 2002년부터 한국어가 포함되었다. 한글능력검정시험 * 일본의 특정 비영리법인 한글능력검정협회가 주최하는 자격시험으로 6월경(연 2회)에 실시한다. 일본의 한국어 학습자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험이다. 5급이 가장 낮은 급수이고 4급<3급<준2급<2급<1급순으로 급수가 올라간다. 일본국내에서만 통용되며 등급이 영어검정(일본)시험과 거의 같으므로 영어검정시험과 비교 대조되는 경우가 있다. 2006년부터 "준 1급"이 없어졌다. 1, 2급은 문제의 지문을 포함하여 모든 글이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이 시험은 답을 적을 때 대한민국이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든 어느 한쪽으로 일관성 있게 통일되어 있으면 정답으로 간주한다. 근래 한류 붐의 영향으로 초급 수험자는 상당히 증가했으나 반대로 1, 2급 등 고급 레벨에서는 수험자 수가 매우 적다. 2004년 전후에 상급의 시험 문제는 난도가 계속 상승하는 반면, 3급 이하의 급수는 합격률이 90%를 넘나들게 쉬워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2006년 다시 출제 기준과 난이도 조정이 이루어진 결과, 낮은 급수도 난도가 대폭 상승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난이도의 유동에 따라 자격시험으로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어능력시험(TOPIK) * 국립국제교육원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인정하는 자격시험으로 매년 4월과 9월에 시행된다. (한국에서는 2007년부터 일본에서는 2008년부터 연 2회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글능력검정시험과 달리 1, 2급이 초급이고 3, 4급이 중급, 5, 6급이 고급단계이다. 한국, 일본 외에 세계 28개국에서 실시되는 국제적 시험이다. 수험자 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중국이고 두 번째가 일본이다. 외국인이 한국의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할 때 이 시험의 성적증명서 제출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국의 많은 외국인 대상 어학당에서 이 시험의 결과로 반을 편성한다. 세계한국말인증시험(KLPT)() * 한글학회가 주최하는 자격시험으로 4월 10월에 시행된다. 2006년까지는 1,4,7,10월의 연 4회 시행되었으나, 2007년부터 연 2회로 단축되었다. (수험자 수가 적은 것이 원인으로 추측된다) 평가는 500점 만점의 점수제로 토익과 같은 형태이다. 한국어 레벨테스트(KLT) * 점수제이고 1000점 만점이다. 시험시간은 90분이고 비교적 단시간에 시험을 볼 수 있다. 한국,일본외에 중국과 미국에서도 수험이 가능하다. 2004년부터 개시되었지만 2009년 1월 시험 시행이 정지되었다. 한국어 문서가 전 세계 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에 4.1%로, 이는 영어(35.8%), 중국어(14.1%), 일본어(9.6%), 스페인어(9%), 독일어(7%)에 이어 전 세계 6위이다. 웹상에서의 한국어 사용 인구는 전 세계 75억여 명의 인구 중 약 1% 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국가 공용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 공용어) 중화인민공화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공용어) (주요 외국어, 제2외국어 과목 채택) 일본 (인구의 약 0.8% 사용. 주요 외국어, 제2외국어 과목 채택. 공항 및 지하철 안내 언어) 미국 (한인타운 등지에서 사용. SAT 제2외국어 과목 채택) 러시아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 전역 분포.) * 우즈베키스탄 * 카자흐스탄 SOV형 한글 한글날 훈민정음 한국어 순화 한국어의 품사 발음하기 힘든 한국어 문장 긴 한국어 낱말 한국어 사전 한글 한글날 훈민정음 한국어 위키백과 한자 한자어 한자 문화권 한국 고전 번역원 국립국어원 분류:대한민국의 언어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어 분류:중국의 언어 분류:일본의 언어 분류:미국의 언어 분류:캐나다의 언어 분류:한국의 상징 분류:교착어 분류:SOV형 언어
한자 (漢字)는 표어 문자이며, 현재 한국, 중국, 일본등 동아시아 국가에서 쓰이고 있는 중국 고유의 문자이다. 한자의 기원을 유추할 근거는 3,000년 전 사용된 금문과 3,300년 전 사용된 갑골문, 그리고 6,800년 전 사용된 도문인데, 일반으로 갑골문(甲骨文)을 한자의 기원인 글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한비자나 여씨춘추와 같은 책을 보면, 한자는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창힐은 상고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황제라는 설도 있고 황제의 사관이라는 설도 있다. 그 사람이 사물의 모양이나 짐승의 발자국을 본떠 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자는 한 사람이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시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글자도 아니라는 견해가 통설이다. 실존하는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1903년 은허에서 출토된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가 있다. 기원전 14세기 ~ 기원전 11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자는 당시 중대사를 거북의 복갑(腹甲)이나 짐승의 견갑골에 새겨 놓은 실용적인 것이었다. 그 후 주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사주(史籒)가 주문(籒文:大篆)을 만들었고 춘추 전국 시대에는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글자체가 쓰이다가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주문을 개량하여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하였다. 또한, 진의 옥리(獄吏) 정막(程邈)은 실무에 편리한 예서(隸書)를 지었고 한나라 때에는 이것을 계승한 한예(漢隸)가 문자로서 통용됐다. 춘추 전국 시대에 죽간(竹簡)에 쓰인 과두문자(蝌蚪文字)나 종(鐘)·정(鼎) 등에 쓰인 금석문자(金石文字)를 고문(古文)이라고 한다. 후한(後漢)에 이르러 왕차중(王次仲)은 한예를 간략화하여 해서(楷書)를 만들었고 이후 이것을 정서(正書)라 하여 표준 자체로 삼았다. 즉, 이사가 소전을 제정하여 문자 대혁신을 이룩한 후 300여 년이 경과하여 한자는 해서(楷書)로서 정립된 것이다. 목간과 죽간을 대체하여 필기구가 붓·먹·종이가 중심인 시대가 되자 해서가 중용되었고, 삼국시대에는 모필(毛筆)로 쓰기에 편리한 초서(草書)와 행서(行書)가 나타났으며, 육조(六朝)와 당나라 때에는 서도(書道)가 문예의 일부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자의 역사, 특히 양식의 변천을 자형(字形)에 따라 고찰하면 갑골문자·금석문자·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 등 다섯 시대로 구분할 수 있고, 해서 이후로는 오랜 시대에 걸쳐 변화한 흔적이 없다. 다만 서체(書體)로서 조형예술 성격을 띤 다양한 작풍이 나타났을 뿐이다. 한자의 형성 과정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 육서(六書)라고 한다. 후한의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한자를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 등 여섯으로 나누어 한 설명이 현재 육서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기초가 되었다. 日의 필순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 예) 川, 外, 側 # 위에서 아래로 쓴다. # 예) 三, 言, 高 # 가로획과 세로획이 교차될 때에는 가로획을 먼저 쓴다. # 예) 十, 古, 支 # 삐침을 먼저 쓰고 파임을 나중에 쓴다. # 예) 人, 公, 父 # 좌우 모양이 같을 때는 가운데를 먼저 쓴다. # 예) 小, 水, 永 # 예외) 火 # 몸과 안으로 된 글자는 몸을 먼저 쓴다. # 예) 用, 同, 問 # 상하로 꿰뚫는 세로획은 맨 나중에 쓴다. # 예) 中, 事, 車 # 좌우로 꿰뚫는 가로획은 맨 나중에 쓴다. # 예) 女, 母 # 오른쪽 위의 점은 맨 나중에 쓴다. # 예) 犬, 武 ,成 # 받침이 독립된 글자가 아닐 때 받침은 맨 나중에 쓴다. # 예) 近, 建 # 받침이 독립된 글자일 때 받침을 먼저 쓴다. # 예) 起 # 가로획이 짧고 왼쪽 삐침이 길면 가로획부터 쓴다. # 예) 在, 左, 友 # 가로획이 길고 왼쪽 삐침이 짧으면 왼쪽 삐침부터 쓴다. # 예) 布, 右, 有 # 사람 인 (人→亻), 마음 심 (心 →忄), 물 수 (水→氵) 등의 부수는 형태가 변하여 변이 된다. # 예) 休, 情, 江 # 칼 도 (刀), 고을 읍(邑), 하품 흠 (欠) 등의 부수는 형태가 변하여 방이 된다. # 예) 列, 郡, 欲 # 대나무 죽 (竹), 비 우 (雨) 등의 부수는 머리가 된다. # 예) 笑, 雲, 電 # 사람 인 (人), 불 화 (火), 그릇 명 (皿) 등의 부수는 발이 된다. # 예) 無, 盛 # 그 외에도 호(집 엄, 굴바위 엄), 몸(나라 국), 받침(쉬엄쉬엄갈 착), 제부수 등도 있다. # 예) 廷, 四, 高, 行 Characters.png|섬네일|350px| 한자 문화권 ■ 정체자 문화권(중화민국(타이완 및 실효 일대), 홍콩, 마카오) ■ 간체자 문화권(중화인민공화국 대륙 본토) ■ 간체자를 사용하나 정체자도 사용하는 문화권(싱가포르, 말레이시아) ■ 한자와 자국의 문자를 같이 사용하는 국가(대한민국, 일본) ■ 과거에 한자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쓰지 않는 국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 몽골) ※ 대한민국의 경우 정체자를 사용하지만 일반적인 문자사용 방식에서는 한글을 대체해 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위 그림의 색에서는 반영되지 않았음. 한국, 베트남,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은 2천년 이상 중국과 함께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도 1948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력한 한글 전용 정책을 펴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한글만을 쓰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성명(姓名), 학술용어,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나 축약어 등 한자어의 뜻을 특별히 강조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글을 쓴다. 현재는 중국과 중화권 국가(타이완, 싱가포르 등)를 빼면 일본만이 일상에서 한자를 자국의 문자처럼 사용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주로 한글을 쓰지만, 한국어의 단어 중 57% 정도가 한자어이며, 성명과 지명(地名)은 거의 한자어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교육부에서는 자주 쓰는 한자 1,800자를 지정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어의 90% 정도는 이들 한자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학술 용어, 고문(古文) 해독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한자를 쓸 때는 거의 정체자로 쓴다. 일본어에서는 일본의 음절 문자인 가나와 함께 쓰인다. 일본어 한자는 음독(音讀, 일본식 한자음)과 훈독(訓讀, 한자를 같은 뜻의 일본 고유어로 읽는 것)이 함께 쓰이므로 고유어도 한자로 나타낸다. 이 방식은 고유어를 보존하면서 음절 길이를 줄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한자 읽기가 복잡해진다는 단점도 있다. 이 때문에 인명 등 고유명사나 일반인이 읽기 어려운 한자 위에는 읽는 법을 다는 후리가나가 있다. 일본어에서 한자는 명사, 동사와 형용사의 어간 및 일부 부사에 쓰이고, 가나는 문법 기능을 나타내는 토씨와 외래어나 외국어를 표기할 때에 주로 쓰인다. 중화민국에서는 한국에서 쓰는 것과 같은 정체자를 써서 중국어를 표기한다. 중국 대륙에서 중국어는 거의 간체자로 표기한다. 이는 외래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보통 정체자를 쓴다. 베트남에서는 꾸옥응으라고 하는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사용하므로, 일상에서 한자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어의 단어에는 한국의 한자어와 비슷한 한월어(漢越語)가 있다. 다른 문자로 된 문헌을 한자로 번역하는 것을 한역 (漢譯)이라고 한다. "한역"이라는 말은, 특히, 고대에 불교의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의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것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된다. (참고 한역대장경) 200px 실제로 한자는 제자 원리에 따라 무한히 복잡하게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사용된 기록이 있는 문자 중에서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기준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니코드 5.0에 포함된 가장 복잡한 한자는 (수다스러울 절, U+2A6A5)로, 龍(용 룡)을 네 번 써서 이루어진 한자이고 16 × 4 = 64획이다. 이 한자는 조엘 벨라센(Joël Bellassen)(1989) 등에 따르면 기록에 등장하는 중국어 한자 중 가장 복잡하며, 5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똑같은 64획으로 (뜻 미상, 음은 정,八부 62획, U+2053B)이 있으나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자는 興(일어날 흥)을 네 번 써서 이루어진 한자이다. 현재까지 중국어에서 쓰이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산시 성(섬서성)에서 유명한 면 음식인 뱡뱡몐을 가리키는 57획짜리 한자이지만 방언에서만 사용되는 문자로 취급되어 자전에는 나오지 않고, 유니코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대 한자 자전에 나오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코 막힐,코를 킁킁거릴 낭)으로 36획이다. 이 밖에 일부 한자의 ‘고자’(古字)는 상당히 복잡한 경우가 있다. 그 예로 우레 뢰(雷)의 고자는 밭 전(田)이 가로로 4자, 그 밑으로 돌아올 회(回)가 가로로 4자 다시 밭 전이 4자로 된 것이 상하로 2개 있는 모양, 도합 128획이다. 그 이외에도 한국에서 만든 한자인 한국제 한자도 있다. 갑골문자 한문 한자 문화권 한국어 정체자(正體字) 간체자(簡體字) 한국 한자음 한국 고전 번역원 존 한자 사전 KLDP.net 한자 한글 변환 프로젝트 분류:동아시아의 문화
대한민국 국회 (大韓民國 國會는 대한민국의 의회이며 대한민국 입법부의 주축이다. 헌법상 국민을 대표하는 단체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다. 본래는 제헌 헌법에서는 단원제, 1952년 발췌 개헌으로 제정된 제2호 헌법에서는 민의원·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도록 제정되었으나 참의원의 구성이 늦어져 제2공화국 때에 비로소 양원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1년 뒤인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되었다. 1963년부터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국회가 부활하였으나 현재와 같이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뀌어 구성되었다. 매년 9월 1일 정기 국회가 열리고 정기회·임시회의 100일 이내의 회기가 열린다. 이 기간에는 정치적 이슈가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경향이 있다. 임기 2년 국회의장 국회 본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로 결정 * 국회의장이 되면 소속 정당에서 탈당해야 하며, 무소속이 된다 국회부의장 국회 본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로 결정(2인) 참정권 **선거권 --- 만 19세 이상의 한국 국민 * 피선거권 ---만 25세 이상의 한국 국민 임기 --- 4년 정족수 --- 국회의원의 정원은 300석이다. 253석은 소선거구제에 의한 지역구 의원을, 나머지 47석은 정당 투표에 의한 득표율에 따라서 비례대표를 선출한다.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등록문화재 제11호,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60번지 1호, 1935년 완성된 다목적 공공건물.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그 후 세종문화회관 별관을 거쳐 현재는 서울특별시의회로 사용중. 1948년 *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단독 총선거로 제헌국회를 구성하여 5월 31일에 서울 중앙청 중앙홀에서 개원하였다. * 7월 12일 제헌 헌법을 제정하였고, 의장 이승만이 7월 17일 이를 공포(公佈)하였다. 1954년 * 구 경성부민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1975년 *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여의도로 국회의사당을 이전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제2공화국 때에는 양원제를 채택하기도 하였는데, 민의원과 참의원을 두고 있었다. 국회사무처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국회예산정책처 국회입법조사처 국회운영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정무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교육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국방위원회 행정안전위원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 정보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윤리특별위원회 각 상임위원회별로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있으며 수석전문위원은 차관보급으로 전문위원을 대표한다. 한국의 국회는 1년 동안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열리는 미국, 영국 등의 의회와는 달리, 정기회·임시회의 회기로 열린다. 유신헌법 시절에는 국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1년 중 최고 150일까지만 열릴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제82조). 현행 제도로는 연간 회기 일수 제한을 폐지하여 매일 국회가 열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제16대 국회의 경우, 본회의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고 임시국회가 5차례나 있었다. 즉 5달 동안 한 번도 본회의를 열지 않았다. 반면 미국 의회는 2년을 하나의 임기로 하여 전반 1년을 제1회기, 후반 1년을 제2회기라고 한다. 정기회 임시회의 구분이 없다. 대통령이 임시회 집회를 요구하는 일도 없다. 2년의 임기가 지나면, 하원은 전원, 상원은 1/3씩 단계적으로 선거를 하여 교체한다. 1년 내내 회기에 있고, 회기중에는 불체포특권이 있으므로, 사실상 의원은 임기 내내 불체포특권이 있다.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등이 연중회기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현행헌법 제47조 ①국회의 정기회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매년 1회 집회되며, 국회의 임시회는 대통령 또는 국회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에 의하여 집회된다. ②정기회의 회기는 100일을, 임시회의 회기는 30일을 초과할 수 없다. ③대통령이 임시회의 집회를 요구할 때에는 기간과 집회요구의 이유를 명시하여야 한다. 정기회 매년 9월 1일 개회 (그 날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다음날), 회기는 100일 이내 임시회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의 4분의 1 이상이 요구 시, 또는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이 국정조사 요구시 개막. 회기는 30일 이내. 입법권은 국회에 속하고 있으므로(제40조), 법률 제·개정권은 국회의 가장 본질적인 권한에 속한다. 법률안의 제출 :법률안은 국회의원과 정부가 제출할 수 있다(제52조). 국회의원이 법률안을 발의함에는 10명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국회법 제79조 제1항). 정부가 법률안을 제출할 때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제89조 제3호). 법률안의 심의·의결 :국회는 법률안을 심의·의결한다. 국회의장은 제안된 법률안을 본회의에 보고하고 소관상임위원회에 회부하여 그 심사를 거쳐 본회의에 부의한다(국회법 제81조 제1항). 여기서 심사한 결과는 본회의에 회부하지 아니할 수 있으며, 위원회의 결정이 본회의에 보고된 날부터 폐회 또는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한 7일 이내에 의원 30명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여야 하며(국회법 제87조 제1항), 이 요구가 없을 때에는 그 의안은 폐기된다(동조 제2항). :본회의에서 법률안 의결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통과된다. 서명·공포 :국회에서 의결되어 정부로 이송된 법률안은 15일 이내에 대통령이 서명·공포하여야 하며(제53조 제1항),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공포한 날부터 20일이 경과되면 그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송된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에는 대통령은 이의서를 첨부하여 국회에 환부하여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재의 결과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을 하면 그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된다(동조 제2항, 제4항). 그렇지 못하면 그 법률안은 폐기되는데, 이를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이라고 하며, 대통령은 일부거부 내지 수정거부는 하지 못한다(동조 제3항).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헌법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고(제128조 제1항), 대통령안과 국회의원안 모두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이를 의결하며(제130조 제1항),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인다(제130조 제2항). 헌법에 따라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제6조 제1항). 따라서 헌법은 중요조약에 대한 국회의 동의권을 인정하고 있다(제60조 제1항).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국가경비의 세입·세출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국회의 의결을 기초로 하여 행사해야 한다는 재정의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조세의 부과는 반드시 법률에 의거해야 함을 원칙으로 하여 조세의 종목과 세율은 법률로 정한다(제59조). 정부는 회계년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년도 개시 90일 전에 국회에 제출하여야 하며, 국회는 회계년도 개시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해야 한다(제54조 제2항). 국회는 예산안의 심의에 있어서 정부예산안의 수정권은 가지고 있으나, 이 수정권은 지출예산 각 항에 대하여 전액의 삭감 또는 비목의 삭제에 그치는 것이 원칙이고, 지출예산 각 항에 대하여 금액의 증액 또는 새 비목의 설치는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이를 행할 수 있다(제57조). 예비비는 총액으로 국회의 의결을 얻어야 하며, 그 지출은 차기 국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한다(제55조 제2항). 정부는 국채를 모집할 때에는 미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제58조). 국채에 대한 국회의 동의는 기채할 때마다 동의를 얻지 아니하고 연간의 예산총액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동의를 얻어도 된다.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미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제58조).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이라 함은 국가가 1회계년도를 지나는 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채무를 부담하는 계약을 말한다. 감사원은 세입·세출의 결산을 매년 검사하여 대통령과 다음 연도 국회에 그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제99조). 국회에서 의결을 거친 예산의 집행 결과인 결산을 심사함으로써 국회의 재정에 관한 권한을 실효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국회는 일반국정에 관하여 정부를 감시·비판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며, 이를 대정부 견제권 또는 정부통제에 관한 권한이라 한다. 국회의 일반국정에 관한 권한으로는 국무총리를 임명할 때 동의할 수 있는 임명동의권(제86조 제1항), 국무총리·국무위원출석요구권과 질문권(제62조 제2항),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건의권(제63조 제1항·제2항), 긴급재정경제처분명령과 긴급명령사후승인권(제76조 제3항), 계엄해제요구권(제77조 제5항), 선전포고와 국군해외파견·외국군 주류에 대한 동의권(제60조 제2항), 국정감사·조사권(제61조), 탄핵소추권(제65조) 등이다. 국회에 20명 이상의 소속의원을 가진 정당은 하나의 교섭단체가 된다. 교섭단체 제도의 목적은, 국회에서 일정한 정당에 소속하는 의원들의 의사를 사전(事前)에 통합·조정하여 정파간 교섭의 창구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 정당의 의사 개진을 막는다는 단점도 상존한다. 1963년 6대 국회에서 13석의 민주당과 9석의 자유민주당과 2석의 국민의당이 연합하여 삼민회라는 이름의 공동 교섭단체(도합 24석)를 구성했으며, 2008년에는 18석의 자유선진당과 3석의 창조한국당이 공동 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구성하였으나, 곧 해산되었다. 이후 2018년 국민의당에서 갈라져나온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공동 교섭단체인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을 구성하여 제4교섭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2018년 7월 23일, 정의당의 노회찬 의원의 자살로 공석이 되었다. 정의당은 5석으로 감소되었고 민주평화당이 14석임에 따라 20석에 달하지 못하여 교섭단체는 해산되었다. 16대 국회에서는 공동 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이 교섭단체 구성 기준인 20석에서 3석이 부족한 17석밖에 얻지 못하자 그 기준을 10석 이상으로 완화하는 개정안이 나왔다가 통과되지 못해 새천년민주당의 현역 의원 중 일부가 자민련으로 당적을 이동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최근 교섭단체의 요건을 의원 10명 이상으로 완화하는 방안이 아직도 논의 중이다. 회의 공개의 원칙 국회의 의안 심의 과정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여 정책 결정의 민주성과 공정성 확보 회기 계속의 원칙 한 회기 중 의결되지 못한 안건은 다음 회기에서 계속하여 심의하도록 하여 동일한 의안 제출로 인한 번잡성 예방 일사부재의의 원칙 한 번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내에 다시 제출할 수 없도록 하여 소수파에 의한 의사 진행 방해 예방 ↓ 1 6 128 14 7 29 114 1 민중당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무소속 바른미래당 자유한국당 대한애국당 제헌국회부터 2014년 이전까지 사용했던 옛 국회 휘장 1948년 이후 국회는 무궁화를 상징화한 꽃무늬 안에 한자 國(국)을 형상화해 삽입한 것을 휘장으로 사용해왔으나 한글이 아닌 한자를 국가 중요 기관의 휘장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과, 동그란 테두리가 글자에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 國(국)이 아닌 或(혹)자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양원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참의원은 휘장으로 한자 대신 한글 "국"을 삽입한 것을 채택한 바가 있었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 1990년대 이후 꾸준히 비판이 제기되어 왔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2014년 한자를 삭제하고 한글 "국회"를 삽입하는 새 휘장을 채택하는 안이 가결되었고, 현재 새로운 휘장을 사용하고 있다. 국민과 함께하는 스마트 국회를 목표로 최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하여 효율적인 의정환경을 조성하고 투명한 입법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국민에게 국회의 현황과 의정활동을 신속하고 투명하게 제공하며, 입법과정에 국민의 편리한 참여를 보장하기 위하여 아래의 정보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국회 http://www.assembly.go.kr (국회 대표 웹사이트) 국회위원회 http://committee.na.go.kr/ (국회 상임/특별 위원회 정보) 국회사무처 http://nas.na.go.kr (국회 소속기관1 정보) 국회도서관 http://www.nanet.go.kr/ (국회 소속기관2 정보) 국회예산정책처 http://www.nabo.go.kr/ (국회 소속기관3 정보) 국회입법조사처 http://www.nars.go.kr/ (국회 소속기관4 정보) 국회뉴스ON http://www.naon.go.kr/ (바르고 공정한 국회소식) 국회채용시스템 http://gosi.assembly.go.kr/ (국회 채용관련 정보) 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 (접수, 진행, 처리된 의안 정보) 국회입법예고 http://pal.assembly.go.kr/ (진행 및 종료된 입법예고 정보) 법률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law/ (법령 관련 정보) 인터넷의사중계시스템 http://assembly.webcast.go.kr/ (실시간 회의 영상 인터넷 중계) 회의록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record/ (문서 회의록 정보) 영상회의록 http://w3.assembly.go.kr/vod/ (영상 회의록 정보) 맞춤입법콘텐츠검색시스템 http://naph.assembly.go.kr/ (법률, 의안, 회의록 등 통합검색) 국정감사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inspections/ (국정감사 결과 정보) 예결산정보시스템 https://web.archive.org/web/20080517174050/http://nafs.assembly.go.kr:83/ (예산 및 결산 정보) 미디어자료관 http://w3.assembly.go.kr/multimedia/ (국회관련 주요기록 및 홍보 동영상)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여 내 손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국회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앱 서비스 대한민국국회, 국회의원광장, 의안정보, 국회회의록, 국회의사중계, 국회관람, 국회방송, 국회입법예고 국회홈페이지(http://m.na.go.kr), 국회뉴스ON(http://www.naon.go.kr), 법률정보시스템(http://likms.assembly.go.kr/law/) 국회도서관(http://www.nanet.go.kr), 국회예산정책처(http://www.nabo.go.kr), 국회입법조사처(http://www.nars.go.kr) 국회의원의 효율적인 의정활동과 국회 직원의 편리한 업무수행을 지원하기 위하여 디지털본회의장시스템, 입안지원시스템, 의정자료전자유통시스템, e-의안시스템, 영상회의 시스템 등을 운영하고 있다. 과거 대한민국 국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파행에 따른 몸싸움이 꼽혔다. 주요 법안들에서 여야가 갈등을 빚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러한 대립이 대화로 해결되지 못하고 강행 처리하려는 원내 다수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소수 정당과의 충돌로 인해 몸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몸싸움은 1년에 수차례 벌어지기도 했으며, 각종 장비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관련 법안이 추진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여야간의 갈등으로 인해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가 2012년 5월 제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되면서 몸싸움은 사라졌다. 허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법안과 선거제개편 패스트트랙 안건에 대해 국회선진화법이 존재함에도 국회에서는 다시 몸싸움이 일어났다 국회의사당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대한민국의 정당 민의원 참의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구 목록 최고인민회의 분류:서울 영등포구 소재의 관공서 분류:단원제 입법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Microsoft Word)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워드 프로세서다.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워드 프로세서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주요 제품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983년 10월 25일 "Multi-Tool Word for Xenix systems"라는 이름으로 첫 출시되었다. 1983년에 MS-DOS용으로 워드1이라는 버전으로, 1985년에는 매킨토시용으로, 1989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rand()이라 치고 엔터 키를 누르면 도움말이 나온다. 워드의 파일 포맷은 오피스 오픈 XML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doc, .docx라는 확장자를 사용한다. OS X용으로 2004년에 출시되었다. 파워PC(PowerPC) 중앙 처리 장치에서 작동하도록 개발되었고, 인텔사의 중앙 처리 장치에서는 OS X의 로제타 기술로 워드 2004를 에뮬레이팅해 사용할 수 있다. 2008년 1월에 로제타(Rosetta) 기술을 이용해 에뮬레이팅하지 않고도 인텔 중앙 처리 장치든 파워PC(PowerPC) 장치든 상관 없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유니버설 바이너리 버전으로 출시했다. 워드 2007에 새로 나온 기능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모양의 서식 설정 버튼. 서식들 중 하나를 예전 버전보다 쉽게 고를 수 있다. 단어 수가 상태 표시줄에 표시된다. 사용자가 단어를 넣으면 자동적으로 단어 수가 갱신된다. 맞춤법 검사기가 이전에 비해 일관성이 나아졌다. 또한,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문서에서만큼은 "문맥에 맞는 맞춤법" 검사 기능이 들어가 있다. 서식이 설정된 콘텐츠를 문서에 추가할 수 있도록 문서 블록이라는 기능을 제공한다. 파워포인트의 서식 설정 기능과 비슷한 것이 이번 버전에서야 들어갔다. 두 가지 버전의 문서를 비교할 수 있다. 비교 중인 문서, 원본 문서, 수정한 문서가, 화면을 분할하여 각각의 조그마한 창에 표시된다. 문서를 공유하기 전에 문서 검사를 사용하여야지, 해당 문서에서 숨겨진 메타데이터, 개인 정보 또는 문서에 저장된 콘텐츠 등을 검사할 수 있으며,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최종 문서 버전을 다른 사용자와 공유하기 전에 최종본으로 표시 명령을 사용하여 해당 문서를 읽기 전용으로 만들고 최종 문서 버전을 공유할 다른 사용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새로운 수식 편집기가 포함되었으며, TeX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독자적인 Office Math Markup Language(OMML) 문법으로 수식을 직접 입력할 수도 있으며, 위지윅 방식으로도 수식을 입력할 수 있다. 클립보드를 통해 MathML 포맷으로 다른 프로그램과의 자료 호환을 지원하며, MathMagic과 같은 일부 수식 편집기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2007의 수식을 직접 읽어 들이는 것을 지원한다. MS-DOS용 버전 1983년 11월 — 워드 1 1985년 — 워드 2 1986년 — 워드 3 1987년 — 워드 4 aka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4.0 PC용 1989년 — 워드 5 1991년 — 워드 5.1 1991년 — 워드 5.5 1993년 — 워드 6.0 매킨토시용 버전 1985년 1월 — 워드 1 1987년 — 워드 3 1989년 — 워드 4 1991년 — 워드 5 1993년 — 워드 6 1998년 — 워드 98 2000년 — 워드 2001, 맥 OS 9과 마지막으로 호환되는 버전 2001년 — 워드 v.X, 최초의 맥 OS X 전용 호환 버전 2004년 — 워드 2004, 맥용 오피스 2004의 일부 2008년 — 워드 2008,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의 일부 2011년 — 워드 2011,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1의 일부 2015년 — 워드 2016,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6의 일부 윈도우용 버전 1989년 11월 - 워드 1.0 (코드이름 Opus) 1990년 3월 - 워드 1,1 (코드이름 Bill the Cat) 1990년 6월 - 워드 1.1a 1991년 - 워드 2.0, (코드 이름 Spaceman Spiff) 1993년 - 워드 6.0, (코드 이름 T3) 1995년 - 워드 95 (버전 7.0) - 오피스 95에 포함 1997년 - 워드 97 (버전 8.0) - 오피스 97에 포함 1998년 - 워드 98 (버전 8.5) - 오피스 97 파워에 포함 (일본, 한국에서만 배포) 1999년 - 워드 2000 (버전 9) - 오피스 2000에 포함 2001년 - 워드 2002 (버전 10) - 오피스 XP에 포함 2003년 - 워드 2003 (버전 11) - 오피스 2003에 포함 2006년 - 워드 2007 (버전 12) - 오피스 2007에 포함 2010년 - 워드 2010 (버전 14) - 오피스 2010에 포함 2012년 - 워드 2013 (버전 15) - 오피스 2013에 포함 2015년 - 워드 2016 (버전 16) - 오피스 2016에 포함 *2018년 - 워드 2019 (버전 17) - 오피스 2019에 포함 SCO UNIX용 버전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UNIX Systems Release 5.1) OS/2용 버전 1992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for OS/2 버전 1.1B 2014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워드 프로세서이다. 전세계적으로는 90%대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홈페이지 분류:워드 프로세서 분류: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분류: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 분류:윈도우 소프트웨어 분류:1983년 소프트웨어
Moo-hyun - cropped headshot, 2004-Oct-26.jpg|섬네일|175px|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는 2004년 3월 12일에 국회에서 노무현의 정치적 중립성 을 이유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의 주도하에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을 대상으로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킨 사건을 말한다. 이때 노무현의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4일 헌재에서 탄핵소추안이 기각되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탄핵 소추 64일만에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2004년 3월 12일에 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고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이에 동조하였으며,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소추안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직무는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이뤄진 탄핵소추안 가결이었다. 탄핵 소추안 통과는 그 타당성에 대한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70% 정도의 국민이 탄핵소추안 통과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KBS, MBC, SBS 등 여러 방송사들은 탄핵 투표 당시 국회의 혼란과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방영하였다.한편 전국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모여 광화문 일대 등에서 탄핵 반대 촛불 시위를 벌였다. 2004년 5월 14일에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에서 기각 결정을 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판정이 내려지는 동안, 헌재 앞에서는 탄핵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집회가 열렸고, 반대편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들이 모여 탄핵 반대 촛불 집회를 하며 지속적으로 충돌을 빚었다. 16대 국회.svg|섬네일|300px|노무현 탄핵사건 당시의 국회정당별 의석 획득 수■ 한나라당 145석 ■ 새천년민주당 57석■ 열린우리당 49석■ 자유민주연합 10석 ■ 민주국민당 1석■ 국민통합21 1석■ 무소속 11석 2004년 2월 18일 노무현은 경인지역 6개 언론사와 가진 합동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라고 발언하여 특정정당 지지를 유도한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2004년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발언과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라고 발언하였고 이로 인해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2004년 3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을 위반했다고 판정하고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다. 2004년 3월 4일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선관위의 결정에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04년 3월 5일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및 측근비리 등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지 않으면 탄핵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같은 야당인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에 탄핵안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2004년 3월 6일 청와대는 부당한 정치적 정략적인 압력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2004년 3월 9일 한나라당 의원 108명,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이 서명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 이 발의되었다. 자유민주연합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재차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2004년 3월 10일 탄핵안을 처리하려는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과 탄핵안을 반대하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의사당 내에서 대치했고 탄핵안 1차 처리에 실패한다. 2004년 3월 11일 노무현은 특별 기자 회견을 열고 사과요구를 거부하며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이 노건평에게 3000만원을 건넸다는 의혹에 대해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한 분들이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이후 남상국은 서울 한남대교 밑에서 투신자살을 했고, 이에 탄핵에 반대하던 자유민주연합이 자유투표로 당론을 선회하면서 탄핵안 가결이 급진전된다.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 3분에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회단상을 점거하고 저항했지만, 국회 경호권 발동으로 이를 막고 국회(임시회) 제 2차 본회의를 개회하였다.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소속 의원 등 총 195명이 투표를 실시하였으며, 투표 결과 193명 찬성, 2명 반대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오후 3시, 소추결의서 정본이 헌법재판소에 송달되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창원의 로템사를 방문 중이었고,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지금 이 과정은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위한 진통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괴롭기만 한 소모적 진통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날 열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여 "마지막일지 모르겠는데 내년에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2004년 3월 30일 헌재, 1차 변론 2004년 4월 2일 헌재, 2차 변론. 양측 절차적 정당성과 부당성을 각기 주장함. 소추위원 측, 노무현 대통령 등 29명 증인 신청 2004년 4월 9일 헌재, 3차 변론. 신청 받은 29명 증인 가운데 4명 채택, 19명 기각, 6명 보류(노무현 대통령 포함)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집권여당 열린우리당 압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대참패 2004년 4월 20일 헌재, 4차 변론. 최도술(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안희정(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선 후보실 정무팀장) 증인신문 진행 2004년 4월 23일 헌재, 5차 변론. 여택수(전 대통령 제1부속실 행정관) 증인신문. 증인으로 소환된 신동인 롯데쇼핑 사장은 입원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음 2004년 4월 27일 6차 변론 2004년 4월 30일 7차 최후 변론 2004년 5월 14일 오전 10시에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을 기각하기로 결정했다.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 재적 271명 중 2/3인 181명 동의 필요 선택 득표 가 부 기권 무효 미투표 당시 국무총리 탄핵안이 발의된 3월 9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탄핵반대는 65.2% 찬성은 30.9%였지만 노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60.6%, 사과가 필요없다는 의견은 30.1%로 엇갈렸다. 국회는 탄핵소추 사유에서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 라고 밝혔다. 많은 국민이 당시 탄핵에 반발한 이른바 탄핵 역풍에 힙입어, 2004년 4월 15일에 열린 제17대 총선에서 사실상의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라는 국회 과반수를 획득했다.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최초로 원내 과반을 차지하였다.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은 9석의 소수 정당으로 전락했고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려 제4당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야당 내 탄핵을 주도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정계에서 물러났다.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 때 선봉자 역할을 한 탄핵 5인방 이라 불리는 박관용 국회의장,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홍사덕 총무,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유용태 원내총무는 정계에서 물러났다. 총선 때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삼보일배를 한 새천년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도 총선에서 낙마하고 유학길에 올라야 했다. 3김 가운데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도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그러나 추미애, 조순형과 친박연대로 복귀한 홍사덕은 차기 보궐선거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에 성공했으며 이를 근거로 탄핵에 대한 국민의 재평가가 내려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조 전 대표의 당선으로 탄핵 주역 이라는 멍에를 벗었다고 자평했다. 2004년 3월 12일 국회를 통과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유사이래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심판을 시작했다. 소추위원 측과 피청구인 측 변호사, 그리고 그들이 요청한 증인들을 출석시켜 모두 7차례 변론을 진행하였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일부 위반했으나 그 위반 정도가 탄핵의 사유가 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소추안을 기각 결정하였다. + 소추사유 선고결과 행위 조항 결과 열린우리당 지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열린우리당 지지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없음 대한민국 선거법 폄하 헌법준수 의무 위반 국민투표 언급 헌법준수 의무 위반 국회 비하 헌법준수 의무 없음 다수당에 대해 대통령이 정치적 편향성을 보임으로써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 등 다양하다. 이 사태는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못하고 국민을 볼모로 잡고 정치게임을 벌였다며 정치불안과 국내 경제계의 충격과 국가 대외신인도 하락, 그에 따른 경제위기 등 파장이 우려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노무현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하던 3월 12일 경남 창원 ㈜로템 공장을 방문 중이었다. 노 대통령은 탄핵 소식을 접한 뒤 "오늘 저녁까지는 괜찮다"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는 등 예정된 일정을 차질없이 소화했다.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 상태에서 귀경한 노 대통령은 곧바로 국무위원 간담회를 갖고,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데 시간을 잘 활용하겠다"며 향후 활동범위를 스스로 규정했다. 탄핵심판이 최종 기각된 후, 청와대는 보도자료를 통해 노 대통령의 지난 64일을 "탄핵기간은 노 대통령에게 역사를 성찰하고 자아를 재충전하며 국정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학습의 시간이었다"로 규정하였다. 노무현은 헌재 심판 후 즉시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2004년 5월 13일, 조선일보에서 탄핵 심판의 소수 의견을 공개하기로 했다는 오보를 냈다. 2004년 5월 14일 선고 당일, KBS 1TV, MBC, SBS 등의 지상파 3사 및 YTN 등이 심판과정을 생중계 했다. 한나라당 장광근 의원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통해 “탄핵안 가결은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정략이다. 탄핵을 기다리며 버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라고 주장했다. 사건 당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법에서는 위헌심판결정,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에 대해 소수의견을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탄핵심판과 정당해산심판에는 소수의견을 공개한다는 규정이 없었다. 사건 이후 탄핵심판과 정당해산심판의 소수의견도 공개하도록 개정되었다. 소수의견 내용과 각각 의견에 찬성한 헌법재판관 명단이 헌재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노무현 박근혜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박근혜 대통령 탄핵 YTN 돌발영상 "탄핵 D-DAY `전쟁`" (탄핵)`총선 발언`에서 국회 표결까지(일지) 분류:2004년 대한민국 분류:대한민국 제16대 국회 분류: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분류:대한민국의 정치 분류:대한민국 헌법재판소 판례 분류:노무현 분류:노무현 정부 분류:탄핵 분류:박근혜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분류:자유한국당 분류:열린우리당 분류:2004년 3월 분류:2004년 4월 분류:2004년 5월 분류:2004년 판례
right 촛불 집회 ( - 集會는 시민들이 광장 등에서 촛불을 들고 벌이는 집회이다. 주로 야간에 이루어진다. 세계 각 곳의 촛불 집회는 보통 비폭력 평화 시위의 상징이며, 침묵 시위의 형태를 띤다. 대표적인 것으로 1988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촛불 시위가 있다. 촛불시위는 시각적 효과가 크고, 일과를 끝낸 시민들의 참여가 용이하며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장점이 있다. 대한민국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상 일몰 후에는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어 있음 문화행사 등을 예외로 하는 것을 이용해 문화제 등의 명목으로 촛불시위가 진행되었다. 문화제는 노래 등에 대한 대중공연의 형식이 가능하며 구호를 외치거나 피켓을 드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이후 야간 집회 금지 사건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과 자정까지의 야간 시위 금지 위헌 결정에 의해 합법적으로 야간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1988년 3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수입 협상 반대 촛불집회 1992년 코텔 유료화 반대 촛불집회 2002년 11월 ~ 12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추모 촛불집회 - 오마이뉴스의 김기보(아이디 앙마 ) 시민기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가장 유명하다. 2004년 3월 ~ 4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통과 반대 촛불집회 2004년 12월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촛불집회 2004년 11월 ~ 2005년 2월 국가보안법 반대 촛불집회 2008년 5월 미국 광우병 수입 협상 반대 시위 촛불집회 2009년 2월 용산 참사 추모 촛불문화제 2011년 반값등록금 공약 촉구 촛불집회 2013년 6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규명 촛불집회 2016년 10월 ~ 2017년 5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및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촛불집회 촛불 집회 위키 (위키아 산하) 진화하는 집회 문화, 《서울신문》, 2008.7.31.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의 위헌 여부를 따지는 공개변론 동영상 헌법재판소 분류:시위 분류:양초
응구기 와 시옹오 응구기 와 티옹오 ( , 1938년 1월 5일 ~ )는 케냐의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이다. 응구기는 1938년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당시 "백인 고지()"로 불리는 고지대의 리무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비옥한 고지대의 원래 주인이었다가 땅을 백인에게 빼앗긴 키쿠유 족 출신이며 기독교 신자로 자라났다. (나중에 그는 영어와 기독교를 배척하고 이름도 본명인 제임스 응구기 에서 응구기 와 티옹오 로 바꾼다) 캄팔라(현 우간다의 수도)의 마케레레 대학과 영국의 리즈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아이야 울지마라() , 사이의 강() , 한 알의 밀()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주로 식민지에서의 문화 충돌과 기독교의 역할, 영국의 키쿠유 족 등 아프리카인들 탄압, 식민 지배에 대항한 마우마우 반란 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케냐 독립 이후로는 부패한 정치인들을 강력히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77년에는 나는 원할 때 결혼하겠다() 라는 희곡의 정치권 풍자가 정권의 미움을 사 응구기는 대니얼 아랍 모이 당시 대통령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수감 중에 그는 소설 피의 꽃잎() 를 집필하였다. 석방 후 1982년 케냐를 떠나 런던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1987년에는 대표작 마티가리(Matigari) 를 발표하였다. 후에 나이로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키쿠유어를 사용한 소설 집필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0년에 발표된 십자가의 악마(키쿠유어 Caitaani muthara-Ini) 는 사상 최초의 키쿠유어 소설이다. 응구기는 참된 아프리카 문학은 아프리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92년부터는 뉴욕 대학(NYU)에서 비교문학과 공연학 교수로 있다. 공식 웹사이트 분류:1938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케냐의 소설가 분류:케냐의 수필가 분류:케냐의 극작가 분류:박경리문학상 수상자 분류:마케레레 대학교 동문 분류:리즈 대학교 동문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교수 분류:케냐의 망명자
율리시스 (Ulyss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이다.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 (1954년 영화) 율리시스 (1967년 영화) 율리시스 소설에 바탕한 영화 율리시스 (시) 앨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 무어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의 소설 율리시스 (캔자스) 율리시스 (뉴욕) 율리시스 (로봇) 폭탄 탐지 로봇 율리시스 (케이블 시스템) 해저 통신 케이블 네트워크 율리시스 (우주선) 태양을 연구하기 위한 우주 탐사선 USS 율리시스 미국 해군 함선 이름 율리시스 S. 그랜트 미국의 장군이자 18대 대통령
right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는 대한민국에서 2004년 5월 30일부터 4년 임기의 제17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이다. 2004년 4월 15일 목요일에 실시하였고 총 299명을 선출하였다. 3김시대의 종식과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당적 이탈과 열린우리당 창당,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4천억 불법 대북 송금,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를 시점으로부터 과거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변경하여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인 2표제를 도입했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초 정동영이 당의장에 선출되면서 새천년민주당에 뒤처지던 지지도가 역전되어 2위로 올라섰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과 경합 내지는 근소한 차이로 1위로 올라서는 선전을 펼쳤다. 이에 일각에서는 17대 총선에서 과반수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제1당은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이 나왔는데, 2004년 3월 12일에 터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에 힘입어 당의 지지도가 급상승하였고, 과반수가 확실시되는 상황으로 반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를 앞세운 선거운동이 효력을 발휘하고 여기에 정동영 당시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정동영은 이에 책임을 지고 선대 위원장직 사퇴 및 비례대표 후보 사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총선 결과 원내 152석을 확보하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선거에서 집권당으로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나라당은 수백억원의 기업 비자금을 대선 자금으로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당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고,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키면서 지지도가 결정적으로 하락하였다. 이후 전당 대회에서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한 홍사덕 의원을 제치고 총선에서의 승리를 공약한 박근혜 의원이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다. 박근혜 대표는 차떼기 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죄와 함께 거여 견제론에 바탕하여 선거 운동을 펼쳤고, 영남 지역의 지지에 힘입어 원내 121석을 확보하여 선거 운동 기간 초기에 예상되었던 참패를 면할 수 있었다. 원내 의석수 121석(지역구 100석/비례 21석) 중 지역구 100석 가운데 60석 정도는 영남권 지역이며 나머지 40석은 비영남권(서울 강남권, 강원, 경기 동남부)이다. 만약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 100석에 미달했다면 한나라당은 위기를 맞게 된다. 민주노동당은 사상 최초로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權永吉) 대표의 지역구를 포함, 두 곳의 지역구에서 승리하였고, 13.0% 정당투표 득표율로 무려 8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하여 새천년민주당을 제치고 원내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새천년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공동으로 통과시킨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반발로 지지도가 급락하는 타격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한나라당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있는 호남 지역에서의 약세가 두드러졌고, 이어진 당내 내분의 결과 추미애가 새천년민주당의 선대 위원장을 맡았다. 추미애는 광주광역시에서 삼보일배를 하면서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지지세 회복을 도모했지만 광주광역시와 전라북도에서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전라남도에서 5석, 비례대표 4석을 얻어 원내 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충청권 에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충청권에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하고 이를 실현에 옮기려는 상황에서 자민련이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공조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데 대해 충청권의 민심은 냉랭했고 그 결과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의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충청남도에서 겨우 4석을 얻는데 그쳤다. 자민련 총재 김종필은 비례대표 순위 1번으로 등록하여 국회의원선거 10선 달성을 목표로 했지만 지역구 의석이 4석에 그치고 비례대표 득표 역시 2.8%로, "비례대표 득표율 3% 이상 또는 지역구 5석 이상"인 비례대표 의석 배분 규칙에 미달하여 원내 입성이 좌절되어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제17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은 문경·예천의 신국환과 나주·화순의 최인기뿐이었다.(이후 두 의원 모두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국민통합21은 울산 동구의 정몽준이 당선에 성공하여 1석을 얻었지만 대한민국의 시·도당과 당원의 수가 부족하여 17대 국회가 개시된 후 약 3개월여가 2004년 9월경에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전국 선거인수 35,596,497명 중 21,581,550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60.6%를 기록하였으며 이는 지난 16대 총선의 투표율 57.2%와 비교하면 높고, 2002년 대선의 70.8%에 비교하면 낮은 수치이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별 투표율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투표율 62.2 % 61.9 % 59.3 % 57.4 % 60.2 % 58.9 % 62.0 % 59.7 % 59.7 % 58.2 % 56.0 % 61.2 % 63.4 % 61.5 % 62.3 % 61.1 % ↓↓ 10 152 9 2 1 4 121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무소속 국민통합21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 +정당별 당선자 수 (명)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합계 한나라당 100 21 121 새천년민주당 5 4 9 열린우리당 129 23 152 자유민주연합 4 0 4 국민통합21 1 0 1 민주노동당 2 8 10 무소속 2 ― 2 합계 243 56 299 지역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유민주연합 민주노동당 국민통합21 기타 합계 서울특별시 16 - 32 - - - - 48 부산광역시 17 - 1 - - - - 18 대구광역시 12 - - - - - - 12 인천광역시 3 - 9 - - - - 12 광주광역시 - - 7 - - - - 7 대전광역시 - - 6 - - - - 6 울산광역시 3 - 1 - 1 1 - 6 경기도 14 - 35 - - - - 49 강원도 6 - 2 - - - - 8 충청북도 - - 8 - - - - 8 충청남도 1 - 5 4 - - - 10 전라북도 - - 11 - - - - 11 전라남도 - 5 7 - - - 1 13 경상북도 14 - - - - - 1 15 경상남도 14 - 2 - 1 - - 17 제주도 - - 3 - - - - 3 합계 100 5 129 4 2 1 2 243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비고 한나라당 8,083,609 37.90% 100 새천년민주당 1,698,368 7.96% 5 열린우리당 8,957,665 41.99% 129 자유민주연합 569,083 2.67% 4 국민통합21 63,989 0.6% 1 민주국민당 4,347 0.02% 등록취소 희망2080 1,253 0.01% 등록취소 민주공화당 2,405 0.01% 등록취소 구국총연합 226 0.00% 등록취소 기독당 8,267 0.04% 등록취소 노권당 2,582 0.01% 등록취소 녹색사민당 37,789 0.18% 등록취소 민주노동당 920,229 4.31% 2 사회당 8,004 0.04% 등록취소 무소속 972,954 4.56% 2 총합 21,330,770 243 기호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비고 1 한나라당 7,613,660 35.8% 21 2 새천년민주당 1,510,178 7.1% 4 3 열린우리당 8,145,814 38.3% 23 4 자유민주연합 600,462 2.8% 5 국민통합21 119,746 0.6% 6 희망2080 31,501 0.15% 등록취소 7 민주공화당 24,360 0.11% 등록취소 8 구국총연합 9,330 0.04% 등록취소 9 기독당 228,837 1.08% 등록취소 10 노권당 37,084 0.17% 등록취소 11 녹색사민당 103,845 0.49% 등록취소 12 민주노동당 2,774,061 13.0% 8 13 민주화합당 39,785 0.19% 등록취소 14 사회당 47,311 0.22% 등록취소 총합 21,285,974 56 국회의원 정당명부 비례대표 56석의 의석 배분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지역별 득표 지역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유민주연합 국민통합21 민주노동당 기타 합계 서울특별시 1,752,221 403,043 1,801,956 600,462 119,746 601,447 4,777,570 인천광역시 362,722 56,282 414,125 22,506 5,147 160,663 1,048,152 경기도 1,531,102 262,206 1,738,893 86,362 16,378 584,516 4,322,319 강원도 269,533 23,222 252,922 8,854 4,710 84,909 663,227 대전광역시 145,375 18,551 262,067 86,644 2,230 70,779 597,765 충청남도 164,667 21,836 295,169 184,699 4,086 81,100 776,064 충청북도 188,491 13,576 277,904 39,078 3,117 81,226 622,222 광주광역시 10,626 182,295 301,972 2,047 1,933 76,965 585,754 전라남도 27,025 313,396 433,215 9,320 7,903 104,009 927,454 전라북도 29,095 115,832 573,711 8,105 5,927 95,095 852,929 부산광역시 844,734 32,193 577,310 11,333 5,327 206,080 1,711,650 울산광역시 167,681 6,874 143,573 3,885 26,216 100,856 460,552 경상남도 660,604 19,577 441,987 11,000 5,768 220,836 1,396,206 대구광역시 674,046 12,163 241,850 8,319 3,268 125,593 1,085,820 경상북도 712,923 17,126 280,445 14,174 9,795 146,700 1,221,982 제주도 72,815 12,006 108,725 2,635 1,107 33,287 236,318 열린우리당은 당초 170석, 많게는 200석까지 차지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동영 의장의 노인발언으로 턱걸이하는데에 그쳤다. 반면 한나라당의 경우 박근혜의 지도 아래 기사회생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데에 성공하였다. 민주노동당은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중에선 최초로 원내에 입성한 정당이 되었다. 자유민주연합의 경우, 4석을 얻는데 그쳤고 봉쇄조항을 넘기지 못함으로써 비례 1번이었던 김종필이 낙선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목록 2005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2006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2007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법률 제7189호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2004년 3월 12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제17대 국회의원선거총람 2004.4.15 시행』(중앙선거관리의원회 2004) 분류:2004년 선거 총선 분류:대한민국 제6공화국 분류:2004년 4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 내림 마장조(작품 번호 55)는 1803년에 처음 작성되어 1804년에 완성된 교향곡이다. 처음에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기리며 이 곡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을 하려고 했으나, 1804년 5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름을 지워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1805년 4월 7일에 빈에서 베토벤 자신의 직접 지휘로 초연되었다. 제1악장 - 알레그로 콘 브리오 (Allegro con brio) 제2악장 - 장송 행진곡 아다지오 아사이 (Marcia funebre Adagio assai) 제3악장 -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Scherzo Allegro Vivace) 제4악장 - 피날레 알레그로 몰토 (Finale Allegro Molto) 분류: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분류:1803년 작품 분류:여름 분류:내림마장조 작품
헤이그 (는 네덜란드의 정부 소재지이다. ‘헤이그’는 영어식 이름이다. 네덜란드어로는 덴하흐 ( )라고 하며, 정식 명칭은 ‘백작가의 사유지’라는 뜻의 스흐라벤하허 ( )이다. 네덜란드 서쪽 북해 연안에 있으며 자위트홀란트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1868년 헤이그 헤이그는 네덜란드의 백작 플로리스 4세가 사냥하는 곳을 건설하기 위해 (지금의 Hofvijver) 연못 쪽에 땅을 구입했을 때인 1230년경 시작했다. 1248년 네덜란드의 백작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것으로 예상한 윌리엄 2세가 사냥 터를 궁전으로 넓히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 궁전이 완성되기 전인 1256년 죽었지만 그곳의 여러 부분이 그의 아들 플로리스 5세에 의해 마무리 되었고 그중 아직도 남아있는 기사의 홀 을 뜻하는 Ridderzaal은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이다. 아직도 군주가 하는 연례 및 연설 등의 정치적 이벤트를 위해 사용 중이다. 네덜란드의 모든 정부 부서와 대법원, 그리고 네덜란드에 주재하는 각국 공관이 헤이그에 있다. 헤이그에는 또 다음과 같은 여러 유엔 기구가 있다. 국제사법재판소 - 앤드루 카네기의 재정지원을 받았음. 평화궁(Vredespaleis)에 소재.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 화학무기금지기구 헤이그 특사 사건 공식 홈페이지 분류:네덜란드의 도시 분류:자위트홀란트주의 도시 분류:네덜란드의 주도 분류:북해의 항구 도시 분류:네덜란드의 옛 수도
열린우리당의 로고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열린우리당 (열린우리黨, 약칭 우리당 )은 개혁국민정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의 내 정당 개혁, 정치 개혁의 완수를 요구하던 개혁 세력들이 2003년 11월 11일에 결성, 창당되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은 개방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당의 4대 강령은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로서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 시대적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전국 정당’을 표방하면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쳤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행정수도 이전을 주장했으며, 2004년 주류정당들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으나 2004년 총선을 통해 1988년 이래 최초로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게 되어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하였으나 보수야당과의 충돌이 일었고, 2005년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한나라당의 거부로 대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한길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호남기반의 민주당과 합당하자는 수많은 대통합파 의원들의 집단탈당으로 과반이 붕괴되고 중도개혁통합신당에 이어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면서 그에 흡수 · 합당되었다. 2003년 7월 7일에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등 개혁파 의원 5명과 9월 20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강봉균, 김근태, 김덕배, 김명섭, 김성호, 김원기, 김태홍, 김택기, 김희선, 남궁석, 문석호, 박병석, 원혜영, 설송웅, 송석찬, 송영길, 송영진, 신계륜, 신기남, 유재건, 이강래, 이상수, 이원성, 이창복, 이해찬, 임종석, 임채정, 장영달, 정대철, 정동채, 정세균, 천용택, 홍재형, 이종걸, 천정배 총 35명, 9월 23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김덕규, 배기선, 10월 23일에 유선호, 오영식, 우상호, 채상현이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11월 1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최용규, 11월 3일에 개혁국민정당에서 탈당한 김원웅, 유시민 2명의 의원을 주축으로 하여 당원들의 주체적 참여 속에 2003년 11월 11일에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2004년 3월 8일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승국과 3월 30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조성준이 3월 30일에 입당했다. 2004년 1월 11일 임시 전당 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이 첫 당의장에 당선되었으며 김근태 의원이 첫 원내대표가 되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밀려 3위를 기록하던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수직 상승하여 1위가 되었다. 한편, 같은 해 3월 9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제출되고 열린우리당은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3월 12일 탄핵소추안은 통과되었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수행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연합을 통해 진행된 탄핵소추안 통과였으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탄핵에 대해 반대하였고 여러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시위를 했고, 결국 탄핵은 부결되었다. 그 이후 치뤄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한때 정동영 의장의 "60대 이상의 노인들은 투표 하면 안된다"는 노인 폄하발언 논란으로 제1당 달성이 한때 어렵게 보이기도 하였던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의장이 비례대표 의원 후보 사퇴 등 최선의 대응을 통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2석을 차지, 의회 과반수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어 헌법재판소는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가결안을 기각하였다. 이 판결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권한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국정운영이 정상화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하였고, 한나라당의 ‘도덕성’ 문제와 탄핵 역풍에 힘입어 우리당은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총선 이후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의 사퇴로 신기남 의원, 이부영 전 의원이 차례로 의장직을 승계하였으며 천정배 의원이 5월에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은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121석의 한나라당은 4대 개혁 입법에 완강하게 맞섰다. 결국 2004년 말, 천정배 원내대표는 연내에 4대 개혁 입법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2005년 1월초, 당의장을 맡게 된 임채정 의원은 한국 사회의 양극화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을 제시하였으며 1월에 정세균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열린우리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2005년 4월 2일의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당선된 문희상 의원은 양극화해소와 동반성장, 그리고 당의 리더쉽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장 취임직후 실시되었던 4월 재보궐선거와 10월에 실시된 두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상임중앙위원들과 함께 사퇴하였다. 이후 우리당은 비상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정세균 의원을 당의장에 겸임 선출하였다.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국회 통과시킴으로써 여야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2005년 7월 28일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지명권, 조각권 등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을 한나라당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개혁 진영 내부의 자중지란만 초래하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8월 1일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대연정 제안을 단호히 거부한 데 대하여 "지역주의 집착당임을 재확인해준 것"이라고 성토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에 대한 당내 호남권 일부 의원들의 반발과 관련해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설득에 나섰다. 전병헌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이날 상임중앙위원회의 직후 브리핑을 통해 "박 대표 회견은 대단히 실망스럽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2006년 1월 2일 정세균 의원이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당의장을 사퇴함으로써 1월 8일 유재건 의원이 임시 당의장을 승계했고, 1월 23일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우리당은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2월 18일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국민적 지지회복에 전력을 다하였다. 당원들은 어려운 당상황을 극복하고 5.31 지방선거를 이끌어나갈 당의장에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을, 최고위원으로 김근태, 김두관, 김혁규, 조배숙 의원을 선출하였다. 2006년 1월 당시, 한나라당은‘사학법개정’을 반대하며 국회앞에서 끊임 없는 시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우리당은 국회정상화 노력을 통하여 2006년 2월 임시국회가 개최되도록 하였으며 지방정부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개선을 추진하였다. 우리당은 결국 2006년 5월 31일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전북 한곳만 얻고, 참패를 당했다. 이에 정동영 의장이 물러나고 김근태 의원이 당의장직을 승계하였다. 김근태 의장은 를 구성하고 서민경제회복과 기업의 투자활성화, 일자리창출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과 10월의 재보궐 선거에서도 우리당은 연패했으며, 정당의 지지도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우리당은 지지자와 국민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강하게 요구받기 시작하였다. 우리당은 새로운 정치,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정치를 위한 최우선과제가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단결, 대통합신당의 건설이라는데 뜻을 같이 하고 200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민주당과의 재통합, 시민사회 등 다양한 연대 등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통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대통합신당 건설을 앞당기고자 하는 고민속에 당의 일부는 탈당을 선언하였다. 2007년 1월 22일 임종인 의원을 시작으로 1월 23일 최재천, 이계안, 1월 28일 천정배, 1월 30일 염동연, 2월 3일 정성호 의원이 연이어 탈당하였다. 2월 6일에는 소속 국회의원 23명 집단 탈당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은 의회 제2당으로 변모하였으며 2007년 6월 에는 추가적으로 16명이 탈당하면서 2004년 4월 15일 총선때 152석 이었던 의석수는 73석으로 줄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대통합과 2007년 대선승리를 위한 전 당원의 결의를 다지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하여 2월 14일 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정세균 당의장을 선출하였다. 아직 낮은 국민지지도와 일부 의원들의 집단탈당등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속에서 전당대회가 자칫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우리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모인 약 72%의 당원들이 참석하여 를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원내대표 장영달 의원을 비롯한 최고위원들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였으며, 이들에게 대통합신당의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2007년 8월 18일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공식 의결하였는데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 중도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시민단체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2007년 8월 5일에 창당된 정당이다. 2007년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 열린우리당이 합당하였다. 2007년 8월 21일 열린우리당 사수파 당원들로 구성된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 는 중앙선관위를 상대로 합당수리 무효확인 가처분 및 본안소송을 서울 행정법원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소장에서 "우리당 당규에 따르면 전당대회 5일 전인 8월13일까지 대의원 명부를 확정하도록 돼있다"며 "그러나 당 지도부는 8월15일에 가서 재적 대의원 5천347명을 확정했고 다시 전대 당일인 18일 재적 대의원을 5천200명으로 임의 보고해 합당을 결의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당 지도부가 우리당 당헌.당규를 명백하게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불법과 반칙으로 얼룩진 8.18 전대는 원천무효"라고 덧붙였다. 2007년 8월 30일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 는 "열린우리당이 추구한 정치.정당 개혁의 목표가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고, 당의 법통과 정통성을 온전히 승계하기 위해 중앙선관위에 열린우리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를 등록했다"고 밝혔다. 주로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친노와 비노 실용파 친정,영진 성향의 친김근태, 중도보수 성향의 친고건계와 중진인 광장파 등이 있다. 2007년 들어 통합신당 움직임이 보이면서 대통합파와 당사수파로 분열하였다. 당원(기간당원) 전국 대의원 대회 중앙 위원회 상임 중앙 위원회 * 상임 중앙 위원 당의장 * 정세균 ( (전) 당의장) 전국위원회 사무처(사무처장) 대수 역대 대표 직함 임기 1 김원기 의장 2003년 10월 27일 ~ 2004년 1월 11일 2 정동영 의장 2004년 1월 11일 ~ 2004년 5월 17일 3 신기남 의장 2004년 5월 17일 ~ 2004년 8월 20일 4 이부영 의장 2004년 8월 20일 ~ 2005년 1월 3일 (임시) 임채정 임시집행위원장 2005년 1월 5일 ~ 2005년 4월 2일 5 문희상 의장 2005년 4월 2일 ~ 2005년 10월 28일 (임시) 정세균 비상집행위원장 2005년 10월 29일 ~ 2006년 1월 3일 (임시) 유재건 비상집행위원장 2006년 1월 6일 ~ 2006년 2월 18일 6 정동영 의장 2006년 2월 18일 ~ 2006년 6월 1일 7 김근태 의장 2006년 6월 9일 ~ 2007년 2월 14일 8 정세균 의장 2007년 2월 14일 ~ 2007년 8월 20일 김근태 2003년 10월 27일 창당 준비위원회에서 원내대표로 선출 천정배 2004년 5월 11일 정세균 2005년 1월 24일 김한길 2006년 1월 23일 장영달 2007년 1월 31일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 민주당의 유종필 대변인은 "영남 패권정당을 노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2005년판 3당 합당 시도"라며 "만일 한나라당과의 연정이 성사된다면 과거 3당 합당 때처럼 호남을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차라리 그럴바에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라"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단 수석부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강조한 선거제도 개편에는 동조하나 연정과 선거제도를 교환하겠다는 발상은 정치개혁의 대의에도 맞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비판했다. 국민의 정부 부정 민주당의 유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도청 문제를 가지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격하시켜 DJ와 차별화를 시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북송금특검으로 6·15 남북 공동선언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구냉전세력인 한나라당에 팔아넘긴 천박한 인식이 있다”고 비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 탈당파들과 대북송금 특검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했다. 호남 민심 이반 민주당에 밀려 호남의 지지율이 낮아진 것은 국민의 정부를 부정하는 등의 호남 소외정책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다. 국론 분열 보수파들은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파 청산 등의 일련의 개혁이 국론분열시킨다"면서 "모든 국력을 경제와 안보 등의 현안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주장한다. 열린우리당을 분열과 실패의 상징으로 규정하며 탈당파, 국민중심당, 민주당원들은 反한나라당 대통합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해체를 주장했다. 그러나 친노세력과 당내 사수파는 "지역주의 야합"이라며 비판하며 열린우리당으로의 대통합을 요구했다. 실시년도 선거 국회정원 당선자 현황(지역구/비례대표) 득표율 2004년 제17대 총선 299 (243/56) 152 (129/23) 38.26% 2003년 11월 11일, 우리당 창당대회는 모든 공직후보를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뽑고 지도부도 당원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당헌을 채택한 뒤, 김원기, 이경숙, 이태일 창당준비위원장들을 공동 임시의장으로 추대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정동영 5,307 63.7% 의장 2 신기남 2,817 33.8% 상임중앙위원 3 이부영 2,817 25.7% 상임중앙위원 4 김정길 1,742 20.9% 상임중앙위원 5 이미경 1,695 20.3% 상임중앙위원 6 장영달 1,092 13.1% 7 허운나 1,073 12.9% 8 유재건 808 9.7% 총투표수 8,338 2004년 1월 11일, 우리당 전당대회는 의장인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상임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문희상 4,266 43% 의장 2 염동연 3,339 33.7% 상임중앙위원 3 장영달 3,092 31.2% 상임중앙위원 4 유시민 2,838 28.6% 상임중앙위원 5 김두관 2,687 27.1% 6 송영길 1,468 14.8% 7 김원웅 1,076 10.9% 8 한명숙 1,058 10.7% 여성 몫 상임중앙위원 총투표수 10,498 2005년 4월 2일, 우리당 전당대회는 의장인 문희상 의원을 비롯한 상임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정동영 4,450 48.2% 의장 2 김근태 3,847 41.7% 상임중앙위원 3 김두관 3,218 34.9% 상임중앙위원 4 김혁규 2,820 30.6% 상임중앙위원 5 임종석 1,991 21.6% 6 김부겸 1,355 14.7% 7 조배숙 424 4.2% 여성 몫 상임중앙위원 8 김영춘 353 3.8% 총투표수 9,229 2006년 2월 18일, 우리당 전당대회에서는 대의원 70%, 당원 여론조사 30% 예비경선을 통해 8명으로 압축한 후보들에 대해 선거인단이 1인 3표로 투표한 결과, 정동영 전 의장을 비롯한 5명을 상임중앙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007년 2월 14일, 2/3에 가까운 소속 의원들의 탈당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당 전당대회는 정세균 전 원내대표를 새 의장으로 추대하고, 추대된 지도부에 대통합신당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2007년 8월 20일, 통합신당과 우리당 합당수임기관 합동회의는 열린우리당의 대통합민주신당 흡수합당을 결의하였다. 인물 * 노무현 * 허경영 참여 정부 대한민국의 정당 * 개혁국민정당 (2002년) * 국민참여당 (2010) * 대통합민주신당 (2007) - 열린우리당을 기반으로 창당한 정당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분류:2003년 설립된 정당 분류:2007년 폐지 분류: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노무현 정부 분류:노무현 분류:유시민 분류:문재인 분류:변희재 분류:대한민국의 해산된 정당
자유한국당 (自由韓國黨)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제20대 국회 원내 제2당이다. 상징색은 빨간색이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와 민주당 조순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이 때 두 정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 이 출범하였다. 이후 잠깐동안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하였으나, 이회창이 대선에서 낙선함으로써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2002년 대선에서도 패해 계속해서 야당 생활을 했으며, 노무현 탄핵 소추를 계기로 2004년 총선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2006년 지방 선거에서 압승하였고, 이후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자리잡았으며, 2008년 총선때 압승을 거두어 여대야소 정국을 형성하였다. 이후 촛불 시위 등 잇따라 당이 존폐위기에 놓였으나 2012년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도 승리하여 여당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박근혜가 대통령직으로부터 탄핵되자 새누리당은 여당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이에 따라 상당수 지지자들이 이탈하면서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에 패배하였다. 본래 한나라당 내에는 전신인 민주자유당에서부터 시작된 3개의 계파, 곧 민주정의계(민정), 통일민주계(민주), 신민주공화계(공화)가 존재했고, 그 외에도 소장파들이 여러 개 존재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보수 계열과 민주 계열이 있었으나, 이 중 민주 계열은 2003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이어 2008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친 박근혜 계열이 친박연대로, 또한 보수 계열의 의원들이 자유선진당으로 이동하여 분열이 계속되었다. 한편 당의 주요 축이던 친이계, 친박계 간의 갈등이 계속되기도 했으며, 2011년 이후 친이계가 몰락하면서 친박계가 당권을 쥐게 되었다. 이후 당명을 새누리당 으로 바꾸고, 상징색도 이제까지의 파랑에서 빨강으로 바꾸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선진통일당을 흡수하면서 보수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고 제도권 보수정당중에는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현재 원내 최장수 정당으로, 한나라당의 명칭을 쓰던 1997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와 비박계의 갈등이 깊어지고,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원내 제1당의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 내주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비박계의 동조로 가결된 이후 갈등이 커지면서, 비박계 29명이 이탈하여 바른정당을 창당하였다. 2017년 2월 13일에 당명을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 으로 변경하였다. parties of south korea (1988-).svg|섬네일|300px|1988년 이후 대한민국의 정당사. 푸른색이 보수정당이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지만, 당초 합당을 주도한 민정계(민주정의당 출신)가 당권을 쥐고 있었다. 중도 성향을 띠고 있었던 통일민주당은 합당 전 노태우 정부를 견제하던 야당이었고, 경쟁 상대인 평화민주당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평화민주당이 운동권 영입을 하면서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김영삼도 재야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여야는 물론 야당끼리의 대립도 심화시킬 수 있는 철저한 4당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을 견제하면서도 정부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과의 경쟁은 계속 되었고, 김영삼 자신의 차기 집권 가능성도 낮았다. 이리하여 구국의 결단 이라는 명목 하에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주도하였고, 드디어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합당 직후 의석수가 단독 개헌선인 200석을 넘는 초거대 여당이 되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이후 양심수 및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 및 학교 경찰 투입 등 독재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커졌지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여세를 몰아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첫 지방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허나 이것은 계파 갈등만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열릴 대선의 후보자를 두고 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을 지명하려 했으나, 김영삼을 축으로 한 민주계(통일민주당 출신)의 반발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김영삼은 투쟁을 선언하였고,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을 차기 대선 후보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경선에서 패한 이종찬은 탈당 후 새한국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출마했고, 한때 우호적이었던 민정계와 공화계(신민주공화당 출신)간의 갈등마저 심해지면서 공화계마저 민주계 지지를 선언한다. 차츰 당권이 민주계로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노태우는 총재로 선출되었지만, 민주계의 계속되는 반발과 정치적 중립 을 명목으로 탈당한다. 이후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민주자유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지만, 당권은 이미 민주계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당권이 넘어간 후에도 민주자유당은 여전히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로 분류되었다. 민정계는 여전히 강경보수색을 띄고 있었는데 반해, 민주계와 공화계는 온건보수색을 띄고 있었다. 새로 당권을 쥔 민주계 외에 나머지 두 세력은 군부 세력이었지만, 그래도 공화계는 민주계를 지지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주도로 한 민주계는 1994년 말부터 개혁 과 세계화 를 내세우면서 공화계의 일선 후퇴를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민주계와 공화계간의 갈등이 촉발되었고, 마침내 김종필이 이끄는 공화계가 1995년 2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3월 자유민주연합을 독자적으로 창당하면서 분당이 일어났다. 이후 민주자유당은 민정계와 민주계로만 분류되었다. 같은 해 열린 지방 선거에서 탈당파들이 만든 자민련이 바람을 타면서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노태우가 비자금에 연루되면서 구속되었고, 이어 과거사 청산이 시작되면서 전두환과 함께 광주 학살의 원흉 으로 낙인 찍혔다. 이렇게 되면서 민정계마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김영삼은 이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민정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민주자유당 은 당권이 넘어가고도 민정계가 만들었다 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결국 1995년 11월 이름을 가칭 신한국당 으로 개명했고, 이후 전면 물갈이를 단행하면서 민주자유당의 해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강재섭 등을 제외한 상당수의 민정계와, 자유민주연합에 가담하지 않고 남아있던 잔류 공화계가 당에서 추방당하면서 민주자유당은 민주계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이회창 전 총리나 김문수, 이재오 등과 같은 민중당 인사 등 자신의 반대파들까지 영입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은 5,6년 만에 해체되었다.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젊은 피 수혈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신한국당은 1996년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139석을 획득하여 원내1당으로 부상했으며, 특히 서울에서는 여당이 야당을 제치고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등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 심지어 약세가 두드러졌던 호남에서조차 1명이 당선되는 등 지역주의를 부분적으로 타파했다. 하지만 1988년, 1992년과 마찬가지로 여소야대 국회가 이어지자 정치공작을 펼쳐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을 영입시키는 수단으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도를 추락시켰고, 동년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 등 민주계조차 반민주적 성격을 보이면서 국민과 재야의 지지도는 한 층 더 추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의 반대파였던 이회창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계 입문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이회창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서 국민과 여당 내의 지지율도 상승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야당이 이회창의 아들 병역 기피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도덕성 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경제 위기가 겹치고 신한국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이회창의 지지도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선에서 패한 민주계의 이인제가 독자 출마를 하면서, 이회창과 김영삼 간의 갈등이 촉발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민주계 강삼재가 이회창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김영삼이 몰래 이인제를 지원한다 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서 계파 갈등은 더 심해졌다. 이 상황 속에서도 김영삼은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를 하루만에 중단 결정을 내려 대선에서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오히려 계파 갈등을 더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적용했다. 결국 김영삼과 이회창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은 가운데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새 총재로 선출되었고, 이후 김영삼을 추방시키려고 했다. 이회창은 차츰 자신의 YS이미지를 지우기 시작했고, 이어 11월 김영삼을 전격 추방시켰다. 결국 민주계마저 사실상 몰락하였고,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모든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11월 13일 통합민주당 조순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를 도출해내 21일 양당 합당을 통한 단일화를 이루었다. 이로써 신한국당은 2년 만에 해체되었고,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 조순을 총재로 한 한나라당 이 출범했다. 1997년 11월, 과거 대법관 시절부터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는 취지로서 소수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는이회창이 이끄는 신한국당이 조순이 이끄는 민주당과 합당하며 한나라당 이 출범했다. 기존의 신한국당처럼 민주계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총재도 민주당계인 조순(통합민주당 출신)을 총재로 추대했지만 실절적인 당권은 이회창이 쥐고 있었다. 이후 이회창은 15대 대선에서 활약을 보여 이인제를 누르고 2위 자리를 차지했고 대선 직전에는 오정은 전 청와대 행정관 등 이른바 총풍 3인방 이 북한 인사와 접촉하여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총풍까지 동원하려 했지만 결국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에게 패하여 낙선, 정권 교체로 이어진다(총풍 사건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음). 그러나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햇볕정책과 김종필 총리 임명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로 일관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급기야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창은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가 아닌, 한나라당의 총재로 부상한다(1998년 8월).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둘 다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 등 한나라당의 각종 스캔들을 들춰 한나라당을 압박하였으며, 약 40명에 달하는 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갔다. 게다가 김영삼과의 갈등도 심해 민주계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김대중과 김종필의 사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회창은 다시 기회를 잡는다. 전대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의 당내 입지를 좁혀 표하게 만들었으며, 김대중 정부의 여러 가지 부패, 비리 사건을 이용해 집요하게 여당을 공격했다. 이런 이회창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된다. 게다가, 공동여당의 의석수를 누르고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여,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민주계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피 수혈 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하였다.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부터 돌풍을 몰고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초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무명이었던 노무현의 등장 과정과 달리 이회창은 정계 입문 전부터 유명세를 떨친 것은 물론 1997년 대선 때부터 실질적인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사실상 2002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도움과 국회의원 시절의 독특한 정치행보,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는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정치가, 지난 30여 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민적인 행보를 하던 이회창 후보는 서민적 이미지 만들기에는 실패한다. 사실, 노사모에 비견될만한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쌓아온 여러 가지 경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 김대중 정부 말기의 대형 측근 비리 사건은 이회창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계열과 이인제, 김윤환 계열의 이탈로 리더십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4월 한나라당 내 김용갑 등 당내 보수파가 그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천명하는 등 강경 보수 성향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만회하는 듯 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호남, 충청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도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고, 9월에는 정몽준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등 이회창이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작은 차이나마 꾸준히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대선 중 이회창과 대립하던 박근혜가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분당이 있었으나, 얼마 뒤 다시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회창도 비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2년에만 823억 정도를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차떼기 를 비롯하여,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점, 1997년 대선에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비리 혐의(법정에서는 무혐의로 판결) 등으로 이회창은 여당의 악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아들 이정연, 이수연의 병역 면제와 관련, 2001년초부터 대선 직후까지 모병담당자였던 김대업, 설훈 등으로부터 병역 면제 의혹이 제기되어 왔고, 병역면제 의혹으로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서해교전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입장인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때문에 전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로 인해 11월부터는 노무현이 여론조사 상에서 이회창을 2~3% 앞서는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선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지지를 철회하고, 각종 보수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 결국 이회창은 또다시 낙선하였고, 이후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회창도 이를 기점으로 모든 당권을 내놓았다. 한나라당 당명 시절 로고 (2004년)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그는 더 이상 당권을 쥐지 않게 되었다. 대선 직후 민정계인 박희태가 새 총재로 선출되었으나, 얼마 뒤 같은 민정계인 최병렬이 새 총재로 선출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국민들에 대한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노무현의 여러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노무현의 새천년민주당도 그를 압박하면서 민주당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7일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등 5명과 기타 진보/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동하면서, 분당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2004년에 접어들어, 민주당은 노무현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며 노무현 탄핵안을 제출했다. 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동조하였고, 실질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던 가운데 3월 12일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1987년 이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 일어났다. 여기서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크게 실망했고, 지지도는 더욱 더 추락했다. 게다가,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 에 처했을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당 대표가 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한나라당 최초로 여성 대표가 되었다. 박근혜는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거여 견제론 등으로 열린우리당을 견제했고, 영남에서 전폭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탄핵 으로 인해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결국 제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 위기 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내기는 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152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에게 참패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원내 1당의 지위는 빼앗겼고,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사실상의 여당 정도로, 명목상 야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입당으로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이 정책을 국론 분열 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강하게 압박했고, 그들은 결국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2005년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통과시켰다. 이에 박근혜 대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 이어 열린우리당의 대연정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6년 4월 7일 자유민주연합(2004년 이후 사실상 국민들에게 잊혀졌다)을 흡수했으며, 여세를 몰아 동년 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대대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이미 박근혜는 모든 당권을 장악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오랫동안 총재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잠시 가라앉았던 계파 갈등이 벌어졌다. 서울특별시 시장을 하면서 지지를 얻은 이명박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서 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어 친이계가 당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고 친박계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계파 갈등이 심화된다. 박근혜는 경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명박에게 패했다. 일단 박근혜는 승복했지만, 계파 간의 갈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무명 생활을 하던 이회창이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강행하여 지지도가 추락했지만, 이미지가 실추된 열린우리당을 제치고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선의 결과가 이미 예상된 상태에서 이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게 된다. 이어 2008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여당이 되었다. 이명박의 취임으로 한나라당은 1998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여당이 되었고, 취임 초반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국민들의 지지가 높게 적용하면서 2008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을 획득하여, 특히 서울에서 48석 가운데 40석를 차지했지만 충청지역에서 야권에게 패배했지만 일단 친여 성향 무소속 의원를 영입해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4개월 후 미국산 소고기 등에 관한 논란으로 시위가 터졌고, 이 시위를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은 7.4%까지 추락했고, 한나라당의 지지율도 그에 못지 않게 추락했다. 2008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전 대표 박희태가 정몽준을 제치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지지율 추락의 결과로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했다. 이어 이듬해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선거 3개월전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안보 이슈에 상당한 호재를 받았지만 수도권과 영남 지역 등에서만 승리하였다. 지방 선거 참패로 인해 정몽준 대표가 사임했고, 이후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안상수가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 시기 친이계와 친박계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갈등이 심해진 끝에 급기야 분당설까지 나왔다.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나,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게 되었다. 2011년 7월 4일 전당대회에서 홍준표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최구식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수행비서관이 2011년 10월 26일 재보궐 선거에서 선관위를 디도스로 공격한 데다가 야권연대 등으로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했고, 12월 홍준표와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였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새누리당 당명 시절 로고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한나라당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재편된 지도부는 2012년 2월 13일 당명을 새누리당 으로 바꾸었으며, 상징색을 파랑색에서 빨강색으로 바꾸었다. 이명박 정부의 여파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등 2012년 총선거에서 패배가 예상되었으나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하여 승리하였다. 하지만 문대성 등 당선자 2명이 당에서 출당되었고 강창희 국회의장 선출로 출당되면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12년 11월 선진통일당과 합당함으로써 2000년대 중반 이후 분열되었던 제도권 보수 정당들이 새누리당으로 모두 합당되었다. 이리하여 일단은 보수 정당들의 분열이 사실상 종식되었고, 그래서 2017년 1월 바른정당이 출범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 말 탈당으로 이명박 대통령도 탈당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탈당하지 않음으로서 1987년 이후 대선을 앞두고 당적을 버리지 않은 첫 대통령이 되었다. 새누리당 시절부터 박근혜는 사실상 당권을 쥐게 되었고, 이어 2012년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새누리당은 정권을 연장하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세월호 침몰 사고, 그리고 재보궐선거의 연전연승 박근혜 취임 이후 새누리당은 계속해서 재보궐선거에서 연승했지만 2014년 4월 16일에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면서 위기에 몰렸고, 결국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에게 패배했다. 다만 기초단체장 선거는 117곳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15명를 뽑는 다음 달 7.30 재보궐선거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호남지역에서 사상 처음 전남 곡성-순천 지역구에서 이정현 의원이 당선되었다, 11명 당선되어 의석수 157석으로 국정운영의 동력이 강화되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내 공천권 문제와 계파간의 갈등,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정치·정책 방식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오히려 여당·대통령의 지지율는 정체되어 가고 심지어 공천을 받지 못한 이재오, 유승민, 주호영, 윤상현, 권은희, 류성걸, 강길부, 김태환 의원 등은 상향식 공천을 문제삼아 대거 탈당하고 심지어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서울 용산구의 진영 의원도 역시 새누리당에서 탈당하며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송광호, 박상은, 조현룡, 심학봉 의원마저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의석수도 감소되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한 조경태 의원은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원내 의석수도 146석으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언론들의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은 120~140석 정도 획득한다는 전망과 함께 수도권에서 야권에게 대참패할 것이 예상되었고 심지어 영남권도 야당, 무소속 후보에게 자리를 내주는 등 대참패를 예상했다. 결과는 그대로 충격적인 대참패였다. 122석를 얻어 원내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전국 유권자가 과반이 넘는 수도권에서 1여다야 구도 속에서 완패했으며 특히 서울에는 12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는 13대 총선 민주정의당이 세운 10석보다 못한 것으로, 최악의 성적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전통적 강세 지역인 강남3구에서는 지난 총선에서 7석을 모두 차지했는데 20대 총선에서는 3곳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내주고 경기도에서 60석 가운데 19석만을 차지하고 인천에서도 4석만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영남지역에서 전통 텃밭 대구·경북에서 대구에서 3곳에서 패배하고 부산에서 6곳에서 더민주, 무소속 후보에게 헌납하고 경남에서는 4곳과 울산 3곳에서도 야권·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호남권에서는 전남 순천시에서 이정현, 전북 전주시 을에서 정운천 후보가 당선되면서 새누리당은 호남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반면 제주도에서 야당 후보에게 완패하며 3회 연속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논란 끝에 지도부가 사퇴하고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친박계는 탈당파의 복당에 반대했지만 개원 이후 6월 16일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2016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소속 정당에서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던 강길부·유승민·안상수·윤상현의 복당을 승인했고 주호영·장제원·이철규의원에 대한 복당은 6월 23일에 승인했다. 그러나 조해진·류성걸·권은희 전 의원등 친유승민계 낙선자에 대한 복당은 승인되지 않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분당과 바른정당의 창당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이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고 탈당자가 생기는 등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비박계와 일부 친박계는 이를 의식한 듯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에 거대야당과 동조했고, 국회에서 이들의 동조로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이후 친박계인 이정현 대표가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지 않았고, 이후 치뤄진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친박계 정우택 의원이 선출되면서 비박계 의원 30여명이 2016년 12월 말 대거 탈당하여 보수 정당 사상 최초로 분당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12월 16일 의원총회에서 119표 중 62표를 얻은 친박계의 정우택, 55표를 얻은 나경원을 누르고 원내대표가 되고, 이정현 대표가 사의를 밝혀 대표대행이 되었다. 이후 윤리위원 문제는 추가 인선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해결되었으나 비상대책위원장 인선 문제로 비박계와 친박계가 대립하였다. 비박계는 유승민을 비대위 위원장으로 선임할 것을 요구했으나 친박계가 거부하였고,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35명은 12월 27일 새누리당을 탈당한다고 21일 발표하였다. 2016년 12월 27일 비박계 29명이 탈당해 또 다른 보수 정당인 바른정당을 결성한다.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 파면으로 명목상 여당 지위를 잃었다. 3월 31일 홍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크게 밀릴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게 적지 않은 격차로 2위 자리까지 내주었다. 그러나 19대 대선 직전, 홍준표 대통령 후보의 당무 우선권 발동에 따라 옛 새누리당에서 탈당했던 바른정당 국회의원 12명과 2017년 1월에 탈당했던 정갑윤 의원까지 의원 13명이 다시 한국당에 복당하면서 일단 개헌저지선 100석을 회복했고 보수층이 막판에 결집하는데 불구하고 결국 2위를 기록했다. 세부적으로는 대경권에서 1위를 기록했으나 부울경에서 2위, 수도권에서 3위를 기록하는 등 처음 추세에 비해 선전하긴 했지만 호남권에서도 문재인 후보에게 2백만표 차이로 대참패를 당했다.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 558만표 차이로 패배하면서 지난 17대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집권여당 생활은 9년 5개월만에 제1야당이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개표 초반쯤 한국당 당사 찾아가서 기자회견를 통해 홍준표는 이번 대선 패배를 승복했고 한국당 복원하고 보수우파의 잃어버린 자존심를 일으키는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홍준표가 대선후보 자격으로 당헌 104조의 당무우선권에 따라 복당을 승인한 것과 친박의원 3인(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여 사면한 것에 대한 합법성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친박계는 복당 승인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5월 12일 복당 조치와 친박 3인 사면을 추인했다. 2017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19대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2017년 말에는 홍준표 대표의 주도로 보수통합을 계속 추진해 11월 초 박근혜를 제명했고 11월 6일 바른정당 통합파 9명의 의원이 자유한국당 복당 계획을 밝혔다. 이중 8명의 의원은 11월 8일에 탈당을 하였고 11월 9일 자유한국당 당원자격심사회의의 결정으로 국회의원 8인과 지역위원장 그리고 지방의원등 기타 복당신청자들의 복당을 승인했다. 자유한국당은 남은 1명인 주호영의원의 복당도 승인할 예정이지만, 나머지 바른정당 국회의원들은 탈당 후 복당 신청을 해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친박계는 홍준표 대표가 이들의 복당을 받아들인 것에 반발하였다. 이후 홍준표의 성완종 리스트 재판의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친홍준표계 바른정당 복당파 김성태가 결선투표 없이 원내대표가 되면서 친홍계 바른정당 복당파가 완전히 당권을 잡았다. 한편 홍 대표는 복당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바른정당을 탈당한 김세연 의원과 박인숙 의원을 받아들였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단체장 5곳과 경기·인천지역를 사수하고 서울를 탈환한다는 전력를 세워서 승리한다고 각오했지만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의 드루킹 게이트과 안희정 충남지사의 성추행 스캔들으로 인해 악재가 발생되어 역전를 할수 있는 기대를 걸었지만 그러나 대구 북구 갑 정태옥 의원의 특정 지역 비하 발언으로 악재가 발생하여 선거판세에 상당한 영향를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수도권 광역·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결국 정태옥 의원는 한국당에서 탈당를 시키고 사태를 수습했지만 결국에는 대구·경북권를 제외한 모든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역시 226명 중 53명만 배출하는 데 그쳤다. 특히 수도권 66곳 지역 가운데 4곳에서만 승리하여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기록하고 만다. 특히 수도권 빅3 가운데 완패하여 경기·인천를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심지어 부울경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23년만에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또한 동시에 치러진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도 12곳 중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았던 경북 김천에서 한국당에서 탈당한 무소속 후보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겨우 방어하는 성공했지만 경북 김천를 제외한 11곳에서 모두 패배했다. 자유한국당의 역사상 최대 참패로 끝나면서 홍준표 대표는 사퇴하였고, 김성태 원내대표가 대표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7월 11일에는 여의도에서 영등포동으로 당사를 옮겼다. 김성태 대행은 "여의도 당사의 15%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기존의 기득권과 잘못된 인식, 사고를 전부 여의도에 버려두고 여기서는 오로지 국민의 삶만 생각하는 진정한 서민 정당으로 태어나겠다"고 밝혔다. 한편 당 체제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기로 하였으나, 이회창, 김용옥, 이국종, 최장집 등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모두 비대위원장직을 고사하였다. 그러나 7월 16일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가 비대위원장에 내정되었다. 김 비대위원장은 인적청산보다 가치와 비전 정립이 먼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박정희 시대처럼 국가기획주의에 입각해 기업을 간섭하는 국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당에)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면서 시장자유 확대를 강조하였고,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국가주의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임명한 김대준 비대위원의 더불어민주당 당적 및 전과 논란이 발생했고, 김대준 비대위원은 사퇴하였다. 또한 인적청산 등에서도 소극적이고, 가치와 정책 재정립도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론조사상으로도 지지율은 횡보 상태이며 원내 5당인 정의당에게 지지율을 추월당했다. 2018년 10월 1일, 전원책 변호사가 자유한국당 내 인적쇄신을 책임질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 위원이 되었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조강특위에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전 변호사는 대규모 인적청산을 예고했다. 그러나 전당대회 개최 시기 등의 현안을 두고 전 위원과 당 비대위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결국 11월 9일 당 비대위는 전 위원에게 문자로 해촉을 통보했다. 2018년 말로 들어서면서 문재인 정부의 연이은 악재로 인하여 반대 급부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2019년 초 리얼미터 조사 결과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20% 후반을 기록했으며, 더불어민주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한 자리수까지 좁혔다. 그러나 친박계 김진태,김순례,이종명의원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망언으로 인해 큰 악재가 발생되어 지지율이 큰폭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지지율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황교안 대표가 취임한 뒤에는 30%대의 지지율도 회복하였다. 그리고 2019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에서 통영 고성 지역구에서 정점식 후보가 여유롭게 승리하고, 창원 성산에서 강기윤 후보가 정의당의 여영국 후보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선전했다. 1995년 12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법처리로 민자당은 5공 세력을 청산하고 신한국당으로 개명한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합당하여 창당하였다. 당시 당명은 한나라당.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낙선하여 야당이 됨. (김영삼 정부의 IMF위기와 친인척비리사건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이 당시 자유민주연합과 새정치국민회의의 단일화 후보 김대중에게 패배) 2002년 4월 22일 박근혜 의원이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해 탈당(한국미래연합 창당) 2002년 11월 19일 한국미래연합이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과 흡수 합당.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 두 번째 낙선. 2003년 개혁파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 (열린우리당으로 이동) 2006년 2월 20일 자유민주연합을 흡수합당. 2007년 선진평화연대 계열 당원들이 탈당.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이동)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 당선. 10년 만에 재집권.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당선자가 제17대 대통령에 취임. 2008년 3월 21일 공천파동으로 친박근혜계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 (친박연대로 이동) 2008년 충청권 기반의 당원들이 탈당. (자유선진당으로 이동) 2008년 4월 9일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3석을 차지하며, 제1당을 차지함. 2012년 2월 2일 미래희망연대를 흡수합당.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으로 당명 변경.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2석을 차지하며, 원내 과반 의석으로 1당을 차지함. 2012년 11월 16일 선진통일당을 흡수합당.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 당선.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당선자가 제18대 대통령에 취임. 2016년 4월 13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22석를 차지하며, 원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원내 제1당 지위는 상실. 2016년 6월 16일 무소속 4인을 복당시켜 원내 제1당에 복귀. 2016년 12월 27일 대통령 탄핵 등 계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비박근혜계 의원들이 대거 탈당, (바른정당으로 이동) 다시 원내 제2당이 됨.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의 대통령 파면으로 인해 집권여당 지위를 상실.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홍준표 후보가 낙선하여 9년 5개월만에 제1야당이 됨. 2018년 2월 12일 늘푸른한국당을 흡수합당. 자유한국당은 과거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였으나 2016년 총선 참패 이후 지도체제를 단일성 집단지도체제 로 전환하고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분리 선출한다. 당 대표와 선출직 최고위원, 지명직 최고위원, 당연직 최고위원(원내대표,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한다. 당 대표와 선출직 최고위원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과 당원, 일반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득표순으로 선출되며, 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협의를 거쳐 지명직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대변인 등의 당직을 임명한다.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제10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박희태, 최고위원으로 정몽준·허태열·공성진·박순자 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송광호 의원, 박재순을 임명하였다. 박희태 대표는 2009년 10.28 재보선 출마를 위해 2009년 9월 사퇴하였고, 2008년 전당대회에서 2위를 득표한 정몽준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0년 6.2 지방선거가 당의 패배로 끝나자, 정몽준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6월 3일 총사퇴하였으며, 약 1개월 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한나라당이 운영되었다.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제11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안상수, 최고위원으로 홍준표·나경원·정두언·서병수 의원이 선출되었으나, 2011년 4.27 재보궐 선거가 패배로 끝나면서,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2011년 5월 8일 총사퇴하였고, 약 2개월동안 원내대표 체제로 한나라당이 운영되었다. 2011년 7월 4일 한나라당 제12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전직 지도부 중 1명인 홍준표 의원이 선출되었고, 최고위원으로 유승민·나경원·원희룡·남경필 의원이 선출되었다. 최고위원 당선자 4명 중 나경원·원희룡 의원 역시 전직 지도부였다. 그러나, 2011년 10.26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나경원 후보가 박원순 야권단일후보에게 패하자,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2011년 12월 9일 총사퇴하였고, 2011년 12월 19일부터 2012년 5월 15일 전당대회까지 약 5개월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되었다.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제1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황우여, 최고위원으로 이혜훈, 심재철, 정우택, 유기준 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한기호 의원, 유수택을 임명하였다.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김무성, 최고위원으로 서청원, 김태호, 이인제, 김을동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이정현 의원을 임명하였고, 2016년 1월 안대희 전 대법관을 임명하였다. 2016년 8월 9일 새누리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이정현, 최고위원으로 조원진, 이장우, 강석호, 최연혜 의원이, 청년최고위원으로 유창수가 선출되었다.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를 임명하였다. 2017년 7월 3일 자유한국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홍준표, 최고위원으로 이재만, 김태흠, 류여해, 이철우 의원이, 청년최고위원으로 이재영이 선출되었다.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이종혁 전 경상남도청 정무특별보좌관을 임명하였다.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염동열 의원을 임명하였다. 류여해 최고위원은 제명당하고 이철우 최고위원은 경북도지사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2019년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황교안, 최고위원으로 조경태. 정미경, 김순례, 김광림 의원이, 청년최고위원으로 신보라이 선출되었다. 자유한국당 의원 총회는 자유한국당의 원내단체로 두 개의 산하 위원회를 두고 있다. 원내대책위원회는 원내대표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현재 원내대표는 나경원 의원이다. 정책위원회는 당 강령 및 전국규모 선거의 정책공약 등 주요정책을 수립한다. 현재 정용기 의원이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다. 최고위원회의의 하부 기구로 사무처는 당무집행기구, 원내대책위원회 및 정책위원회의 지원의 업무를 수행한다. 사무총장이 관할하는 중앙사무처는 당의 조직관리, 재정, 행정지원, 인사를 총괄하며, 시, 도당 사무처를 관장한다. 현재 한선교 의원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에는 대표최고위원이 통솔하는 전략기획본부가 있어 주요정치현안 및 전략을 관장한다. 홍보기획본부는 당의 이념과 정강, 정책 및 당 활동 등의 홍보를 관장한다. 중앙당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0길 18 한양빌딩에 있다. (2019년 4월 기준) 사무총장 한선교 원내수석부대표 정양석 * 원내부대표단 강석진, 강효상, 김규환, 김순례, 김정재, 김현아, 송석준, 송언석, 신보라, 이만희, 이양수, 이은권, 정유섭 정책위원회 의장 정용기 *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이종배 중앙직능위원회 의장 김재경 당무감사위원장 황윤원 인권위원장 이만희 법률자문위원장 최교일 국민공감전략위원장 김승희 인재영입위원장 이명수 여의도연구원장 김세연 전략기획부총장 추경호 조직부총장 원영섭 홍보본부장 홍지만 대변인 (수석대변인), 민경욱, 전희경 원내대변인 김순례, 김정재, 이만희, 이양수 당대표 비서실장 이헌승 대수 역대 총재 직함 임기 1 조순 총재 1997년 11월 21일 ~ 1998년 4월 9일 2 조순 총재 1998년 4월 10일 ~ 1998년 8월 4일 (임시) 이기택 총재 권한대행 1998년 8월 5일 ~ 1998년 8월 30일 3 이회창 총재 1998년 8월 31일 ~ 2000년 5월 22일 (임시) 강창성 총재 권한대행 2000년 5월 23일 ~ 2000년 5월 30일 4 이회창 총재 2000년 5월 31일 ~ 2002년 4월 1일 (임시) 박관용 총재 권한대행 2002년 4월 2일 ~ 2002년 5월 13일 대수 역대 대표 직함 임기 1 이한동 대표위원 1997년 11월 21일 ~ 1998년 4월 10일 2 서청원 대표최고위원 2002년 5월 14일 ~ 2003년 1월 29일 (임시) 박희태 대표 권한대행 2003년 1월 30일 ~ 2003년 6월 25일 3 최병렬 대표최고위원 2003년 6월 26일 ~ 2004년 3월 22일 4 박근혜 대표최고위원 2004년 3월 23일 ~ 2004년 7월 4일 (임시) 김덕룡 대표 권한대행 2004년 7월 5일 ~ 2004년 7월 18일 5 박근혜 대표최고위원 2004년 7월 19일 ~ 2006년 6월 15일 (임시) 김영선 대표 권한대행 2006년 6월 15일 ~ 2006년 7월 10일 6 강재섭 대표최고위원 2006년 7월 11일 ~ 2008년 7월 2일 7 박희태 대표최고위원 2008년 7월 3일 ~ 2009년 9월 6일 8 정몽준 대표최고위원 2009년 9월 7일 ~ 2010년 6월 3일 (임시)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 2010년 6월 4일 ~ 2010년 7월 13일 9 안상수 대표최고위원 2010년 7월 14일 ~ 2011년 5월 8일 (임시) 정의화 비상대책위원장 2011년 5월 8일 ~ 2011년 7월 3일 10 홍준표 대표최고위원 2011년 7월 4일 ~ 2011년 12월 9일 (임시) 나경원 대표 권한대행 2011년 12월 9일 ~ 2011년 12월 11일 (임시) 황우여 대표 권한대행 2011년 12월 12일 ~ 2011년 12월 18일 (임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2011년 12월 19일 ~ 2012년 5월 14일 11 황우여 대표최고위원 2012년 5월 15일 ~ 2014년 5월 14일 (임시) 이완구 비상대책위원장 2014년 5월 15일 ~ 2014년 7월 13일 12 김무성 대표최고위원 2014년 7월 14일 ~ 2016년 4월 14일 (임시) 원유철 대표 권한대행 2016년 4월 14일 ~ 2016년 5월 10일 (임시) 정진석 대표 권한대행 2016년 5월 11일 ~ 2016년 6월 1일 (임시) 김희옥 혁신비상대책위원장 2016년 6월 2일 ~ 2016년 8월 9일 13 이정현 당대표 2016년 8월 9일 ~ 2016년 12월 16일 (임시) 정우택 대표 권한대행 2016년 12월 16일 ~ 2016년 12월 28일 (임시)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 2016년 12월 29일 ~ 2017년 3월 31일 (임시) 정우택 대표 권한대행 2017년 4월 1일 ~ 2017년 7월 2일 14 홍준표 당대표 2017년 7월 3일 ~ 2018년 6월 14일 (임시)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 2018년 6월 15일 ~ 2018년 7월 16일 (임시) 김병준 혁신비상대책위원장 2018년 7월 17일 ~ 2019년 2월 27일 15 황교안 당대표 2019년 2월 28일 ~ 1997년 9월 3일~2004년 5월 18일 까지는 원내총무직함을 사용함. 대수 역대 원내대표 직함 임기 1 목요상 원내총무 1997년 9월 3일 ~ 1997년 12월 21일 2 이상득 원내총무 1997년 12월 22일 ~ 1998년 4월 19일 3 하순봉 원내총무 1998년 4월 20일 ~ 1998년 8월 10일 4 박희태 원내총무 1998년 8월 10일 ~ 1999년 1월 14일 5 이부영 원내총무 1999년 1월 15일 ~ 2000년 6월 1일 6 정창화 원내총무 2000년 6월 2일 ~ 2001년 5월 13일 7 이재오 원내총무 2001년 5월 14일 ~ 2002년 5월 16일 8 이규택 원내총무 2002년 5월 17일 ~ 2003년 6월 29일 9 홍사덕 원내총무 2003년 6월 30일 ~ 2004년 5월 18일 10 김덕룡 원내대표 2004년 5월 19일 ~ 2005년 3월 4일 11 강재섭 원내대표 2005년 3월 5일 ~ 2006년 1월 11일 12 이재오 원내대표 2006년 1월 12일 ~ 2006년 7월 12일 13 김형오 원내대표 2006년 7월 13일 ~ 2007년 8월 26일 14 안상수 원내대표 2007년 8월 27일 ~ 2008년 5월 17일 15 홍준표 원내대표 2008년 5월 18일 ~ 2009년 5월 20일 16 안상수 원내대표 2009년 5월 21일 ~ 2010년 5월 3일 17 김무성 원내대표 2010년 5월 4일 ~ 2011년 5월 5일 18 황우여 원내대표 2011년 5월 6일 ~ 2012년 5월 8일 19 이한구 원내대표 2012년 5월 9일 ~ 2013년 5월 14일 20 최경환 원내대표 2013년 5월 15일 ~ 2014년 5월 7일 21 이완구 원내대표 2014년 5월 8일 ~ 2015년 1월 25일 22 유승민 원내대표 2015년 2월 2일 ~ 2015년 7월 8일 23 원유철 원내대표 2015년 7월 14일 ~ 2016년 5월 3일 24 정진석 원내대표 2016년 5월 3일 ~ 2016년 12월 16일 25 정우택 원내대표 2016년 12월 16일 ~ 2017년 12월 12일 26 김성태 원내대표 2017년 12월 12일 ~ 2018년 12월 11일 27 나경원 원내대표 2018년 12월 11일 ~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선거 낙선으로 야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최병렬 대표가 2003년 6·26 전당 대회에서 ‘포스트 이회창’의 첫 대표로 선출되어 전성기를 맞았으나 차떼기 논란과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임하였다. 한나라당은 제17대 총선 참패 위기에 처하였으나 박근혜 신임 대표의 활약으로 121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박근혜 대표는 16대 대선 이후 불거진 이회창 후보 진영의 800억원대 차떼기 오명을 씻기 위해 천막 당사를 세우고 당을 쇄신하는 ‘청소부’ 역할을 맡았다.2005년 7월 28일 불법 대선 자금과 천안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이후 참여정부의 4대 법안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보수 야당의 역할을 하였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제안한 대연정을 거부했다. 2003년 11월 30일 최병렬 대표는 신행정수도 이전 통과를 약속했고 당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는 2004년 6월 지자체 재보선 승리 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로 돌아섰고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이 나오자 열린우리당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합의하여 가결시켰다. 당의 경선중 박근혜 측에서 BBK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 친이(親李, 친이명박) 진영과 친박(親朴, 친박근혜) 진영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박근혜 측은 결과에 승복해 갈등은 사라지는 듯하다가, 본격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어 집단탈당사태가 일어난건 공천파동에서였다. 이후 친박연대가 창당되면서 미디어법 등 몇 가지 정책들에서 친이계와 친박계의 미묘한 의견 차이는 있어왔으나, 2010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사수안을 번복하고 제안한 세종시 수정안 방침에 대해 친박연대를 비롯한 당의 주요 친박계 의원들이 반발하면서 그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박근혜는 원안 추진을 재차 강조하여 화합의 가능성이 낮아진 데 이어 심지어 분당 가능성까지 나왔다. 이전에 홍준표는 박근혜의 세종시 원안 추진론 발언에 대해 탈당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이었고, 정몽준이 당론을 변경해야 한다는 말에 박근혜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해 책임지실 문제"라며 정몽준 책임론을 들고 나왔으며,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직 관계자들까지 박근혜를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야당들이 추진했던 정운찬 총리 해임안을 여당 내 친박계 의원들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친이계 의원들은 "총리 해임안에 찬성하는 것은 분당하자는 것" 이라며 계파간의 대립이 극화되었다. 6월 29일 세종시와 관련해서 친박계 의원들을 비롯하여 야당의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수정안이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친이, 친박간의 갈등이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다는 관측들이 나왔다. 하지만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였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대한민국의 보수정당들은 주로 TK로 불리는 경상북도 지역을 지지기반으로 한다. 1972년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인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와 신민당 후보였던 김대중의 대결 구도 속에서 경상도와 전라도가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또한 서울지역에서 보수성향이 강한 강남3구 그리고 안보 이슈에서 민감하는 지역 인천 섬지역과 경기 북부지역이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민주당 합동 전당대회는 양당의 합당과 한나라당의 출범을 의결하고, 9개항의 강령과 62개항의 기본정책을 채택한 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겸 명예 총재로, 민주당 조순 총재를 총재로 선출했다. 이어 조순 총재는 신한국당 이한동 대표를 대표위원으로 지명했다. 1998년 4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표직을 폐지하고 총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조순 총재와 이회창 명예총재를 각각 총재와 명예총재로 재추대했다. 정권교체와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 패배 이후 40여명의 의원들이 탈당해 여당으로 향함으로써 한 때 과반을 차지했던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제16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조순 총재는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이회창 4,083 55.7% 총재 2 이한동 1,554 21.2% 3 김덕룡 1,283 17.5% 4 서청원 392 5.4% 총투표수 7,326 1998년 8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명예총재를 조순 총재를 대신할 신임 총재로 선출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이회창 4,717 66.3% 총재 2 김덕룡 1,473 20.7% 3 강삼재 663 9.3% 4 손학규 257 3.6% 총투표수 7,110 2000년 5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총재를 총재로 재선출했다. 이부영 이상희 이회창 최병렬 합 계 인천 201 10 1,111 79 울산 73 31 446 206 제주 48 18 361 65 강원 71 44 891 101 대구,경북 133 54 3,143 427 전북 278 31 505 117 부산,경남 197 103 2,895 934 대전,충남 124 45 1,643 153 광주,전남 512 67 1,112 368 경기 486 81 2461 424 충북 60 15 592 152 서울 743 109 2,321 1,668 총합 2,926 608 17,481 4,694 2002년 새천년민주당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을 전국순회 국민참여경선으로 진행하면서 무명에 가까웠던 노무현 후보가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것에 자극을 받은 한나라당 역시 당원 50%, 국민 50% 총 50000명의 선거인단을 모집해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순회경선을 실시했으나 이회창 후보의 독주로 인해 큰 흥행은 하지 못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서청원 3,603 33.6% 대표최고위원 으로 선출 2 강창희 3,336 31.1% 최고위원 3 김진재 2,788 26% 최고위원 4 강재섭 2,652 24.7% 최고위원 5 박희태 2,478 23.1% 최고위원 6 하순봉 2,062 19.2% 최고위원 7 김일윤 2,060 19.2% 8 이해구 1,933 18% 9 정형근 1,593 14.8% 10 김부겸 1,448 13.5% 11 김기배 1,415 13.2% 12 안상수 977 9.1% 13 김정숙 936 8.7% 여성 몫 최고위원 14 김호일 883 8.2% 15 홍준표 883 8.2% 16 함종한 844 7.9% 17 강인섭 569 5.3% 총투표수 7,110 5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경선 결과에 따라 이회창 전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그에 따라 최고위원 경선을 실시해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김정숙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3일 뒤 제1차 최고위원회의는 최고위원 최다득표자인 서청원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한나라당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재검표 결과 선거 결과에 거의 변동이 없음에 따라 서청원 대표는 대선 패배와 대선 불복에 책임을 지고 박희태 최고위원을 권한대행으로 지명한 뒤 사퇴한다. 그 뒤, 2번의 대선 패배를 겪은 한나라당은 당 정치개혁특위의 개혁안에 따라 당 대표와 지역운영위원 체제를 택하고, 경선을 위해 일반당원 50%, 국민 50%로 구성된 22만 227446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최병렬 46,074 35.8% 대표 2 서청원 42,965 33.4% 3 강재섭 18,899 14.7% 4 김덕룡 15,680 12.2% 5 이재오 2,697 2.1% 6 김형오 2,406 1.9% 총투표수 128,721 2003년 6월 26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선거인단 투표 결과에 따라 최병렬 전 서울시장을 대표로 선출했다. 2004년 2월 22일, 불법대선자금사건으로 구속된 서청원 전 대표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역풍으로 퇴진 압박을 받던 최병렬 대표가 퇴진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조기 전당대회가 열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로 인한 역풍으로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3월 18일에서 3월 23일로 연기하고, 국민의 관심을 받기 위해 사상 최초로 대표 경선에 여론조사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박근혜 1,255(환산) 1,359 2,614 당 대표 49.8 53.9 51.8 2 5 홍사덕 553(환산) 900 1,453 22 35.7 28.8 3 4 김문수 498(환산) 109 607 19.8 4.3 12 4 3 박진 106(환산) 104 210 4.2 4.1 4.2 5 1 권오을 110(환산) 50 160 4.4 2 3.2 합계 - 3월 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부총재를 과도기 대표로 선출한다. 2004년 5월 19일 한나라당 당선자총회는 최고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 지도체제를 도입하고, 대의원 50%, 여론조사 30%, 인터넷 선거인단 20%가 1인2표로 각각 대표,최고위원을 뽑아 1~5위로 최고위원회를 구성하고 1위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득표순위 이름 합산득표수 반영득표율 비고 1 박근혜 8,433 84.2% 대표최고위원 2 원희룡 2,610 26.1% 최고위원 3 김영선 2,249 22.5% 최고위원 4 이강두 2,185 21.8% 최고위원 5 이규택 1,968 19.66% 최고위원 6 정의화 1,525 15.2% 7 곽영훈 1,050 10.4% 총투표수 10010 7월 19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당헌당규를 개정한 뒤 투표에 들어가, 여론조사, 인터넷투표와 합산해 박근혜 전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한편 소장파인 원희룡 의원과 김영선 의원이 여론조사와 인터넷투표에서의 강세로 중진인 이강두, 이규택 의원을 꺾고 최고위원직에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박근혜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권을 장악하려는 친이계의 이재오 전 원내총무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박계가 지원한 강재섭 전 원내대표의 대결이 되었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대의원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4 강재섭 954(환산) 4,299 5,254 대표최고위원 30.2 58.4 50 2 3 이재오 1,423(환산) 3,368 4,791 최고위원 45.1 45.7 45.6 3 7 강창희 554(환산) 2,071 2,626 최고위원 17.6 28.1 25 4 5 전여옥 1,161(환산) 833 1,994 최고위원 36.8 11.3 19 5 2 정형근 633(환산) 1,339 1,993 최고위원 20.1 18.2 18.9 6 1 권영세 540(환산) 1,223 1,773 17.1 16.6 16.9 7 8 이규택 809(환산) 847 1,656 25.6 11.5 15.7 8 6 이방호 213 735 949 6.8 10 9 합계 - 7월 11일, 1인 2표제로 대의원 70% 여론조사 30%를 반영한 최고위원 경선 결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강재섭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한나라당 후보자 선출 선거.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재임 시절 버스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원을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오히려 2년간 대표를 지내며 대한민국 제17대 총선에서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내고 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를 압승으로 이끈 박근혜 전 대표가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당에서는 둘의 화합을 중재하려 했으나, 경선 룰은 생각보다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명박 후보 측은 당의 결정에 따른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경우 자신에게 유리하게 국민 참여폭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박근혜 후보 측은 ‘원칙’을 내세우며 룰 변경을 거부했다. 3월 18일 결정된 경선룰에 따르면 선거인단이 4만 명에서 20만명으로 (일반선거인단은 1만 2천 명에서 6만 명으로) 늘었고, 전당대회는 6월에서 8월로 연기되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경선룰에 반발해 곧바로 탈당한 뒤, 후에 창당되는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하였다. 6월 13일 후보 등록이 완료되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홍준표 전 클린정치위원장, 원희룡 전 최고위원, 고진화 의원 등이 후보로 등록하였다. 그 중 고진화 후보는 7월 20일 사퇴한다. 여권에는 지지율이 높은 후보도 없었고, 범여권 정당의 지지율은 지리멸렬한 반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50%를 상회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경선은 곧 본선으로 여겨졌고, 달아오른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측에는 BBK 문제가, 박근혜 후보 측에는 정수장학회 문제가 붉어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친인척 관여 부동산 투기 의혹, 부인의 15차례 위장전입 의혹, BBK 관련 주가조자 의혹, X파일 존재론, 산악회 선거법 위반 논란, 도곡동 땅 문제 등이 붉어지며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조금씩 끌어내렸다. 이 상황에서 타 후보들은 1985년 이명박 후보의 처남과 형 이상은 씨가 도곡동 일대의 땅을 잔뜩 매입한 후 지하철 개통으로 차익을 엄청 남기고 1995년 포스코에 되판 사건을 문제 삼았다. 전당대회를 6일 전인 8월 14일 검찰은 형 이상은 씨의 몫 일부가 이명박 후보의 차명계좌라는 중간수사발표가 하면서 이명박 사퇴론이 거세졌다. 그러나 다음날 대검찰청 정동기 차장이 곧바로 “도곡동 땅은 이명박 후보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라는 말을 던지며 가까스로 수습한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20%) 선거인단(80%) 총 득표 비고 비율 비율 비율 1 1 이명박 16,868(환산) 64,216 81,084 대통령 후보 51.54 49.06 49.56 2 3 박근혜 13,986(환산) 64,648 78,634 42.74 49.39 48.06 3 2 원희룡 1,079(환산) 1,319 2,398 3.30 1.01 1.47 4 4 홍준표 793(환산) 710 1,503 2.42 0.54 0.92 5 고진화 후보 사퇴 8월 20일, 여론조사에서 크게 격차를 벌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대의원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박희태 1,865(환산) 4,264 6,129 대표최고위원 60.2 56.4 57.6 2 7 정몽준 2,896(환산) 2,391 5,287 최고위원 92.6 31.7 49.6 3 4 허태열 555(환산) 2,792 3,284 최고위원 19.8 37 30.8 4 3 공성진 283(환산) 2,306 2,589 최고위원 9.6 30.5 24.3 5 6 김성조 209(환산) 2,245 2,454 5.5 29.7 23 6 5 박순자 382(환산) 509 891 여성 몫 최고위원 12.5 6.7 8.4 합계 - 2008년 7월 3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친박계의 지원을 받는 허태열 전 충북지사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미래희망연대와의 합당을 추인하고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대의원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13 안상수 1,295(환산) 3,021 4,316 대표최고위원 40.6 40.6 40.6 2 3 홍준표 1,482(환산) 2,372 3,854 최고위원 46.4 31.9 36.3 3 10 나경원 1,530(환산) 1,352 2,882 최고위원 47.8 18.2 27.1 4 6 정두언 472(환산) 1,964 2,436 최고위원 14.6 26.4 22.9 5 12 서병수 142(환산) 1,782 1,924 최고위원 4.4 24 18.1 6 5 이성헌 89(환산) 1,301 1,390 2.6 17.5 13.1 7 9 한선교 790(환산) 403 1,193 24.6 5.4 11.2 8 4 이혜훈 144(환산) 1,034 1,178 4.4 13.9 11.1 9 2 김대식 155(환산) 819 974 4.8 11 9.2 10 1 김성식 132(환산) 533 665 4 7.2 6.3 11 8 정미경 147(환산) 299 446 4.6 4 4.2 합계 - 국민 여론조사 30%를 합산한 투표 결과, 안상수 전 원내대표가 홍준표 전 원내대표와 나경원 전 원내부대표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1년 5월 8일, 안상수 지도부가 4.27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 한나라당은 조기 전당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정의화 전 국회부의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황우여 원내대표가 대표 권한대행을 맡도록 했다. 6월 7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지도부 선출 경선에 70% 반영되는 선거인단을 대의원, 당원, 청년선거인단으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3 홍준표 12,356(환산) 29,310 41,666 대표최고위원 50.4 51.3 51 2 6 유승민 4,638(환산) 27,519 32,157 최고위원 18.9 48.1 39.4 3 7 나경원 14,903(환산) 14,819 29,722 최고위원 60.8 25.9 36.4 4 1 원희룡 6,579(환산) 22,507 29,086 최고위원 26.8 39.4 35.6 5 4 남경필 6,036(환산) 8,860 14,896 최고위원 24.6 15.5 18.2 6 5 박진 3,294(환산) 5,662 8,956 12.4 9.9 11 7 2 권영세 1,211(환산) 5,695 6,906 5 10 8.5 합계 - 7월 4일, 경선 결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홍준표 전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을 지낸 친박계 핵심 유승민 의원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1년 12월 7일, 10.26 재보선 패배와 뒤이은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으로 당 지지율이 추락하자, 유승민, 원희룡, 남경필 최고위원이 동반사퇴했고, 이틀 뒤인 12월 9일 버티던 홍준표 대표마저 사퇴하자 지도부가 붕괴되어 조기 전당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지도부 사퇴로 대표 권한대행을 맡았던 나경원 최고위원마저 12월 11일 사퇴하자 12월 19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박근혜 전 대표를 만장일치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개정을 의결했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황우여 8,540(환산) 21,487 30,027 대표최고위원 58.2 62.7 61.3 2 3 이혜훈 3,241(환산) 11,213 14,454 최고위원 22.1 32.7 29.5 3 7 심재철 5,695(환산) 5,805 11,500 최고위원 38.8 16.9 23.5 4 5 정우택 4,305(환산) 6,900 11,205 최고위원 29.3 20.1 22.9 5 4 유기준 2,040(환산) 7,742 9,782 최고위원 13.9 22.6 20 6 6 홍문종 1,704(환산) 6,820 8,524 11.6 19.9 17.4 7 8 원유철 1,587(환산) 3,168 4,755 10.8 9.2 9.7 8 1 김경안 1,008(환산) 2,855 3,863 6.9 8.3 7.9 9 9 김태흠 1,251(환산) 2,541 3,792 8.5 7.4 7.7 합계 -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황우여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순위 기호 이름 선거인단 여론조사 총 득표 비고 비율 비율 비율 1 2 박근혜 71,176 15,413 86,589 대통령 후보 86.18% 74.73% 83.97% 2 5 김문수 5,622 3,333 8,955 6.81% 16.16% 8.68% 3 3 김태호 2,616 682 3,298 3.17% 3.31% 3.20% 4 1 임태희 2,341 335 2,676 2.83% 1.62% 2.60% 5 4 안상수 739 861 1,600 0.89% 4.17% 1.55%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은 경선을 통해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2012년 11월 6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선진통일당과의 합당을 의결했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김무성 13,153(환산) 39,553 52,706 대표최고위원 49.2 63.4 59.1 2 8 서청원 9,821(환산) 28,472 38,293 최고위원 36.7 45.6 43 3 1 김태호 5,427(환산) 19,903 25,330 최고위원 20.3 31.9 28.4 4 3 이인제 10,524(환산) 10,258 20,782 최고위원 39.4 16.4 23.3 5 6 홍문종 2,472(환산) 14,157 16,629 9.24 22.7 18.9 6 5 김을동 8,751(환산) 5,839 14,590 여성 몫 최고위원 32.7 9.4 16.4 7 9 김상민 1,399(환산) 2,136 3,535 5.2 3.4 4 8 4 박창달 923(환산) 2,370 3,293 3.5 3.8 3.6 9 7 김영우 998(환산) 2,069 3,067 3.7 3.3 3.4 합계 -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김무성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016년 4월 14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자 정진석 대표권한대행의 추천으로 김용태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에 내정되었으나 친박계의 반발로 5월 17일 전국위원회가 무산되면서 김용태 내정자는 사퇴하였다. 이후 6월 2일 다시 열린 전국위원회가 김희옥 동국대학교 총장을 혁신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들어선 새누리 혁신비상대책위원회는 7월 14일 5차 전국위원회를 통해 대표 권한을 강화하고 최고위원과 분리 선출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이에 친박계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는 대표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비박계에서는 이에 맞서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판론이 나왔으나 6월 28일,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불출마를 결정하자 7월 6일, 최경환 전 부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이에 친박계는 서청원 전 대표를 추대하려 했고, 이에 나경원 전 최고위원이 출마를 고심하기도 했으나 7월 19일 서청원 전 대표 역시 불출마를 선언하자 다음날 나경원 전 최고위원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친박계는 홍문종 전 사무총장에게 출마를 권유했으나 7월 27일 홍문종 전 사무총장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고, 막판에 출마를 고심하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역시 불출마를 결정하면서 대표 경선에는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 정병국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주호영 전 특임장관, 김용태 전 혁신위원장 내정자와 한선교 의원 등이 출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된 친박계 측이 오히려 총선 공천 과정에서 당내 조직력이 강화되면서, 비박계에서는 단일화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고, 7월 29일, 정병국 의원과 김용태 의원이 여론조사를 통해 정병국 의원만이 후보로 등록했고, 8월 5일, 주호영 후보와 정병국 후보 간 여론조사를 통해 주호영 후보가 비박계 단일후보로 선출되었으며, 김무성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비박계 대권주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에 친박계 역시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적 멀어진 이주영 후보나 한선교 후보 대신 이정현 후보를 지원하면서, 오더 투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1 이정현 44,421 당 대표 40.9 2 4 주호영 31,946 29.4 3 2 이주영 21,614 19.9 4 5 한선교 10,757 9.9 - 3 정병국 사퇴 2016년 8월 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이정현 전 최고위원을 당대표으로 선출하였다.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비대위원장에 인명진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2017년 2월 13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자유한국당으로의 당명개정을 의결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자 3월 12일 자유한국당은 31일 전당대회를 개최해 여론조사 50%, 책임당원투표 50%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선출하기로 하였다. 3월 16일까지 진행된 후보 등록에는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김진태 의원,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안상수 의원, 원유철 전 원내대표, 조경태 의원,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용한 청년위원장이 등록했다. 2017년 3월 18일에 실시된 1차 컷오프에서는 김진, 신용한, 조경태 후보가 탈락했다. 2017년 3월 20일에 실시된 2차 컷오프에서는 안상수, 원유철 후보가 탈락했다. 순위 기호 이름 여론조사 (50%) 책임당원 투표 (50%) 총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4 홍준표 46.7 61.6 54.15 대통령 후보 2 3 김진태 17.5 21.1 19.3 3 1 이인제 24.6 5.1 14.85 4 2 김관용 11.2 12.2 11.7 합계 - 2017년 3월 31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책임당원투표 50%, 여론조사 50%를 통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홍준표 후보를 선출하였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30%) 선거인단 투표(70%)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홍준표 11,697(환산) 40,194 51,891 당 대표 49.4 72.7 65.7 2 3 원유철 7,103(환산) 11,021 18,125 30 19.9 23 3 1 신상진 4,877(환산) 4,036 8,914 20.6 7.3 11.3 합계 - 2017년 7월 3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홍준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2018년 6월 14일,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자 김성태 대표권한대행은 6월 24일 안상수 전 인천광역시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비대위원장을 물색하였고, 김병준 전 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이 내정되었다. 7월 17일 자유한국당 전국위원회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2018년 11월 29일,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이 입당한 데 이어 2019년 1월 15일, 야권 차기 대권 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입당했다. 황교안 전 총리가 유력한 차기 대표로 대세론을 형성하자 1월 30일에는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홍준표 전 대표가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다. 2월 27일로 예정된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는 황교안 전 총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 홍준표 전 대표를 비롯해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 안상수 전 인천시장, 정우택 전 원내대표, 주호영 전 특임장관, 김진태 의원 등이 출마를 선언했다. 2월 7일, 2차 북미정상회담이 2월 27일부터로 발표되자 황교안 전 총리와 김진태 의원을 제외한 오세훈 전 시장, 홍준표 전 대표, 심재철 전 부의장, 안상수 전 시장, 정우택 전 원내대표, 주호영 전 장관 등은 전당대회를 2주 이상 연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비대위와 선관위가 27일 개최를 강행하자 결국 해당 후보 6명은 2월 10일 전당대회 보이콧을 선언한다. 결국 2월 12일 황교안 전 총리, 김진태 의원과 입장을 번복한 오세훈 전 시장만이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다. 2월 8일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및 폄하 논란이 확산되자 윤리위원회는 2월 14일 이종명 의원을 제명하고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 김진태 의원과 최고위원 후보로 등록한 김순례 의원에 대한 징계는 유보해 다시 한 번 논란을 일으켰다. 전당대회 과정에서는 김진태 후보의 막말에 이어 압도적인 지지율의 황교안 후보까지 태블릿 PC 조작설 이나 5.18 유공자 명단 공개 등 김진태 후보의 극우적인 주장에 동참하며 당이 극우화되어간다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논란들 속에 중도층이 이탈하는 대신 김진태 후보의 선동 속에 극우세력들이 연설회장에서 소란을 피워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25.4%라는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순위 기호 이름 선거인단 투표(70%) 국민 여론조사(30%)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1 황교안 53,185 15,527(환산) 68,713 당 대표 55.3 37.7 50 2 2 오세훈 21,963 20,689(환산) 42,653 22.9 50.2 31.1 3 3 김진태 20,955 4,969(환산) 25,924 21.8 12.1 18.9 합계 - 2019년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황교안 전 총리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과의 전두환 사면에 대한 거래 논란 ===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 대해 찬성하는 방향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실무검토를 마쳤고 광복절 무렵에 사면될 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준비되었다"는 법무부의 입장을 보도했는데, 결국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준비가 완료되었던 셈이다. 법무부는 대통령 특별 사면의 경우 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추징금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노태우 씨의 경우는 추징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대부분 보전 처분해 상관이 없지마는,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95억원의 10% 정도만 확보되어 있고 전두환의 경우 재산 추적에 진전이 없어, 나머지 2천억 원에 대해서는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이를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법무부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적용하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형 집행 정지는 명분이 약하고 언제든지 재수감 될 수 있어 전, 노씨 두 사람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을 마쳤을 때만 가능해 당초부터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전,노 씨를 풀어주는 길은 특별 사면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준비는 대선이전에 완료되었고 김영삼과 정부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사면될 수 있었던 형국이었다. 이런 집권당에서의 사면 논의에 대해 1997년 8월 31일, 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간담회에서 "김영삼 대통령 임기중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여 동서화합의 길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이어 "그들(전두환 노태우)이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SBS 대통령 후보와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총재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용서론을 강조했다. 이렇게 김대중후보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내세우자 경향신문은 "화해의 정치인 부각 영남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포용 색깔론 차단 효과까지 ‘용서’광주여론도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김대중))총재가 정치권의「뜨거운 감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10월 23일,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김대중후보가 당선되면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김대중 후보를 대신해 대표 연설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집권 정치 보복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김대중후보의 약속을 거듭 강조하고 아무런 전제 조건을 달지 않은 채 전두환·노태우 前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다. 그에 대응하여 9월 1일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은 보수세력의 연합과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 줘야 된다고 요구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조기석방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사회 각계에서도 개탄의 분위기가 쏱아졌다.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9월 12일, 당초 전두환 사면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대선 전에 사면을 할 것이라며 입장을 선회한다. 이렇게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회창은 9월 24일, cbs와 경실련과의 간담회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구금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는 곧 경쟁자인 김대중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회창과 김대중이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 공약을 내세운 것에 대해 이인제도 경쟁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복권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결국 이렇게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경쟁적으로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12월 18일 대선에서 이회창은 김대중후보에게 39만표차로 떨어져 낙선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로 사면 복권되었다. 당시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은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에 김대중대통령 당선자가 이것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김대중당선자는 12월 21일, 일산자택에서 "이제는 국민 통합이 중요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지지했다. 이런 사면에 대해 낙선한 이회창후보 측근도 "이회창쪽에서도 추석전 조기사면을 요구한 만큼 김대중당선자도 사면을 주장했으니 당연한조치"라고 평했고 낙선한 이인제후보쪽에서도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이제는 국민대화합의 계기가 되어야 하고 매우 잘된 일"이라고 평가했다. 12월 21일, 김대중당선자가 김영삼대통령과 협의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 것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평가했다. 뉴욕타임스지는 김대중 당선자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동의한 것은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묻어둘 의사가 있음을 시시한 것이라고 평가했고 미국의 ABC방송은 김대중 당선자가 40년간에 걸친 고난의 정치역정을 용서로써 마무리 짓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ABC방송은 이어 김 당선자의 용서는 경제회생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떠안게 된 새 지도자로서 정치적인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워싱턴포스트 신문은 김 당선자의 이번 조치가 국가 화합과 지역감정 해소, 그리고 경제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화합책의 하나로 김대중대통령당선자는 두 명의 전임 독재자들에 대한 사면에 동의했다. 김영삼대통령 측 대변인은 김대중당선자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동의했다고 밝혔으나 김대중 당선자측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우리가 그들(김영삼,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 전두환, 노태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뿐"이라고 밝혀 사면에 대한 둘의 미묘한 신경전을 보도했다. 당시 사면에 대해 1997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도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유력 대통령후보들이 모두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 후 사면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새누리당의 공약이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당은 무상급식을 야당의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며 비난해 왔으나 2010년 6월 2일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두자 제한적 무상급식 확대 방침을 밝혀 포퓰리즘 논란이 일고 있다. 2010년부터 서울시를 중심으로 제기된 무상급식 논란에 대해서 당은 오세훈이 추진하는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공식 지원하기로 하였으나 2011년 8월 0세 무상보육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민주당의 복지정책과 무상급식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무상정책은 추진하는 정책적 모순점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3조원이 필요한 4세까지의 영유아 보육에 대한 무상보육은 세금폭탄이 아니고, 서울시에서 부담해야하는 700억원의 초중학교 무상급식 비용은 세금폭탄으로 돌아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민주당이 내놓은 반값 등록금 정책에 대해서 그동안 반대해왔던 당시 한나라당은 황우여가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후로 긍정적인 쪽으로 급격히 정책을 선회한것도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9년 7월 21일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당시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수정안 내용과 관련, “한나라당은 정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LG로부터 150여억 원가량의 뇌물을 현금으로 트럭째 받은 것을 비롯, 대통령 선거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을 받는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 때문에 당에 차떼기정당 이라는 명칭이 씌워졌다. 2006년 지방선거에는 공천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공천 뇌물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004년 2월 4일 최병렬 당 대표는 "불법대선자금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당사와 천안 연수원 등 당의 재산을 팔아서 국민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라며 사과했다. 2004년 10월 26일에는 국무총리였던 이해찬이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발언을 해 국회 파행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당의 공천을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았고,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지도부가 뇌물을 받고 비례대표를 공천해 해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7년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학생을 고용해 특정 후보에 유리한 댓글을 작성하도록 한 한나라당 당원 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2018년 6월에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 10년 넘게 매크로를 이용한 인터넷 여론조작을 해왔다는 폭로가 나왔다. 지난 2004년부터 2012년까지 한나라당 의원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직원에 따르면 2006년 지방 선거 때부터 한나라당에서 매크로를 이용한 댓글과 공감 수 조작을 지속적으로 해왔고, 2007년 대선 때도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매크로를 활용한 여론 조작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활동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변경 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2014년 지방 선거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SNS 소통본부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또 다른 관계자는 "새누리당이 매크로를 활용해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가짜 뉴스를 확산시켰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 사건을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으며 드루킹 특검에도 이 사건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를 요구하기로 했다. 당시 한나라당 측에서 댓글 알바를 고용해 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조작하려 한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아고라의 일부 IP를 조사해 보니 한나라당이 위촉한 국민소통위원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아고라에서 욕설댓글을 집단적으로 작성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고 이 의원은 지적했다. 한나라당과 국민소통위는 "돈을 받고 고용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바라고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2007년 1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중앙일간지의 원색적인 연재소설 주인공인 조철봉 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도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최연희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명박의 마사지걸 발언, 박계동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 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성희롱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건들은 개인 의원들의 실수이지만, 한나라당에서 이러한 사건이 자꾸 터지면서 성나라당 , 성희롱당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언급되며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한, 2014년 9월 전 국회의장이자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던 박희태 씨가 골프장에서 여성 캐디의 가슴을 찌르는 등의 성추행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 항소하였으나 2심 재판부에서 기각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의 원심이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2017년 1월, 당내 윤리위원회에 의해 제명당했다. 홍준표 대표는 돼지발정제로 친구의 성폭행을 도왔다는 취지의 내용을 자신의 자서전에 무용담 삼아 담았다가 논란에 휩싸였다 2019 김학의 (박근혜 대통령 당시 법무부 차관) 별장 성폭행 문제로 수사중 새누리당은 2008년 총선 이후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하였으며 이명박의 당선으로 집권여당이 되었다. 원내 과반수의 찬성이 있으면 법안은 통과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새누리당은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등과 관련되어 야당이 반대하였던 법안 등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는 정상적인 검토,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새해 예산안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3년 연속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거나, 야당과의 합의 없이 단독으로 통과되었고 미디어법과 재협상한 한미FTA,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새누리당에 의해 날치기되었다. 이에 대해 야당과 일부 언론들은 새누리당이 날치기로 처리했다고 비판했다. 2011년 예산안은 박희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호원들의 호위 속에 처리되었다. 날치기는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하는 계기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새누리당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처리된것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12월 28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들은 집회를 갖고 날치기 7적을 규정하며 사퇴를 요구했다. 2012년 총선 다가오자 이명박 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를 느낀 당시 한나라당이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전당대회 개최할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비상대책위원들을 선출하는 방식을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투표로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줄 것인지 문제였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였던 친이계는 전당대회 개최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서 당시 고승덕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서울경제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던 중 칼럼에서 돈봉투와 줄세우기가 난무하는 전당대회를 개최하지 말고 박근혜 의원에게 당권을 주자는 취지에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가 건네진 사실을 칼럼에서 언급하면서 이런 폐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로 생긴 종편 채널들이 시청률 경쟁을 하면서 한 종편에서 고승덕 의원을 출연시켜 대담을 하는 중에 위 칼럼을 근거로 돈봉투 사건을 흥미위주로 다시 꺼내면서 이를 뉴스로 확대 재생산하여 국가적으로 큰 논란이 생겼다. 위기가 커진 새누리당에서는 전당대회 개최 없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게 되었고, 고승덕 의원이 언론에 누가 돈봉투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자 새로 구성된 당 지도부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검찰에 위 사건에 대한 수사의뢰를 하게 되어, 고승덕 의원은 검찰에서 박희태 후보가 돈봉투를 살포한 사실을 진술하게 되었다. 돈봉투는 고승덕 의원 외에도 다른 의원들에게 광범위하게 살포되었으며, 박희태 국회의장 전 비서 고명진씨가 당시 캠프 상황실장인 김효재 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돈봉투를 진술하였다는 논란이 거듭되었다. 논란이 거듭되자 부인하던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수석비서관은 국회의장과 대통령수석비서관에서 결국 사퇴하였고,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수사는 축소되어 고승덕 의원 외에 돈봉투가 건네졌다는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박희태 위원만 벌금을 선고받고 마무리되었다. 이후 고승덕 의원이 친박계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고승덕은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박희태는 이명박에 의하여 특별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고승덕 의원이 당시 관행처럼 행해지던 전당대회 돈봉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도개선 차원에서 썼던 칼럼에서 시작했다가 특정인에 대한 흥미 위주 형사사건으로 변질되어 300만원짜리 돈봉투 하나가 건네진 사건으로 축소되어 종결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19대 국회에서는 여야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하여 법 개정을 하여 전당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차량 등 실비용을 당원협의회나 지역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일부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처럼 정당이 아닌 전당대회 후보자가 개인적으로 돈봉투를 건네는 행위는 여전히 형사처벌이 가능한 불법행위로 남게 되었다. 2012년 12월 13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새누리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PC 여러대로 여론 조작 작업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해당 오피스텔 입구에는 선거 6일 전을 알리는 문구와 ‘President War Room(대통령 선거 상황실)’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으며, 박근혜 대선 후보가 발행한 임명장과 SNS 미디어본부장 직함으로 된 명함이 다량 발견됐다. 선관위 등에 따르면 이 사무실 대표 윤정훈은 2012년 대선 기간 새누리당‘국정홍보대책위원회’ 총괄팀장 겸 국민편익위원회 SNS미디어본부장을 맡았으며,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 미등록 선거운동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 7명을 고용해 인터넷, SNS에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혀 졌다. 이들은 박근혜 대선 후보에게 유리하고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불리한 글을 트위터에 게시하고 리트윗(공유)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누리당은 이와 관련해 당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당에서 돈을 들여 사무실을 차려주거나 지원한 사실이 없다. 개인적으로 사무실을 차려놓고 활동한 것으로, 새누리당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2012년 12월 14일 선거관리위원회는 ‘SNS 불법 선거운동’이 이뤄진 여의도 오피스텔의 임차 비용을 박근혜 대선 후보 선대위 권아무개 새누리당 국정홍보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김아무개 새누리당 수석부위원장이 지급했다고 밝혔고, 특히 “직원들의 리트윗 활동 실적을 ‘박근혜 후보를 위한 가계부채특별위원회 SNS 활동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해 새누리당 가계부채특위 안상수 위원장 에게 수시로 보고한 사실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윤정훈은 2013년 12월 26일 대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새누리당의 뿌리가 3당 합당에 있는 만큼 군사정권에서의 폐해, 친일파 청산 등 과거사 정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박근혜는 5.16 쿠데타를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옹호해 비판을 받았으며, 김무성 의원 등 다수의 인사들이 5.16 쿠데타는 군사혁명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빚었다. 박근혜 정부들어 주요 인사청문회 대상 후보자들이 5.16 쿠데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는 것 또한 비판 받는다. 이와 같이 상식에서 벗어난 과거사 인식 문제의 원인이, 군사정권에서 정작 책임을 져야 했던 민정당 인사 대부분이 3당 합당을 거치며 보수 정당에 그대로 흡수되었던 데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문재인은 "군부독재,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고 인권을 유린했던 정치세력이 그 과거에 대해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내가 볼 때 살아있는 노인들 99% 이상이 친일한 사람들”이라며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거의 50년간 지속되었는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친일 안 하고 배겼겠는가"라고 발언하여 친일논란을 불렀고, 박정희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과거 친일파의 후손, 재벌과 친인척 관계를 맺어 카르텔을 형성하였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 여론의 종북몰이와 각종 부정부패를 묵과한다는 비판도 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회창 이명박 *박근혜 2011년 재보궐선거 디도스 사건 총풍 사건 2008년 대한민국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 자유한국당 홈페이지 분류:대한민국의 정당 분류:1997년 설립된 정당 분류:대한민국의 보수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국제민주연합 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
PDF (Portable Document Format, 이동가능 문서형식);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전자 문서 형식으로, 일반 문서 및 문자, 도형, 그림, 글꼴을 포함할 수 있다. PDF는 컴퓨터 환경에 관계없이 같은 표현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장치 독립성 및 해상도 독립성을 가진다. PDF는 2008년에 ISO 32000 오픈 포맷으로 표준화되었으며 구현을 위해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는다. 1993년 어도비사 PDF 1.0버전과 어크로뱃 1.0 버전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등장하였다. 그런데 초기 도입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도비사가 어도비 어크로뱃을 무료로 배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PDF의 초기 버전은 기능적으로 당시 환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외부로의 하이퍼링크가 지원되지 않았고, 파일 사이즈가 너무 커서 당시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다운로드하거나 파일을 렌더링(rendering)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특히 당시에는 이미 경쟁 파일 포맷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Envoy, Common Ground Digital Paper, Farallon Replica가 있다. 심지어 어도비사의 포스트스크립트(.ps)는 같은 회사의 PDF에 비해 우수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1995년에는 AT&T Lab에서는 도서관의 도서나 각종 문서의 보관을 위해 새로운 파일 포맷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후 DuVu 프로젝트로 발전하여 .djv/.djvu 포맷이 만들어졌다. 당시에 이 포맷은 e북이나 온라인 카탈로그, 이미지 파일 교환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어도비사는 어크로뱃 리더(현재의 어도비 리더)를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하였으며 PDF 포맷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PDF는 온라인 상의 인쇄용 문서의 실질적 산업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서 형식이나 제작 기술에 독점적인 기술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서 형식이 공개되어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In-Design 뿐 아니라 다양한 상용 프로그램 및 무료 프로그램에서 PDF를 지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서가 표현 가능하고, 암호화 및 압축 기술을 통해 내용의 변조가 어려우며, 사용권을 다양하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지원 가능하다는 점이 다른 문서 형식과 비교될 수 있는 장점이다. 또한 이러한 장점들로 인해서 실용적인 가상 프린터로 사용되기도 한다. 어도비 시스템즈에서는 PDF를 읽을 수 있는 어도비 리더 프로그램을 홈페이지를 통해서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를 통해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맥 OS, 리눅스 등에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어도비사에서는 PDF 제작을 위한 어도비 어크로벳이라는 별도의 프로그램 역시 판매하고 있다.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을 PDF를 읽거나 또는 읽고 쓰는 데 사용할 수 있다. PDF-Pro - 한국어 PDF 제작 도구. CutePDF – 광고를 출력하지 않는 무료 PDF 변환기. Doc2pdf – 전자 우편 로봇에 의한 변환. GNOME PDF 뷰어 팍스잇 리더 iText – 자바 PDF 변환기 gnujpdf – 자바 PDF 변환기 PJX PDF 프로그래밍을 위한 자바 패키지 libharu – C/C++ 변환기. OpenOffice.org – PDF 형식으로 문서를 출력할 수 있음. OttoPDF 팬더 라이브러리 PDF Sign&Seal - PDF 문서 디지털 서명 Ascertia Docs 온라인 디지털 서명 PDF/X-3 sharpPDF – C# PDF 라이브러리. Xpdf – PDF 뷰어. PDFTOHTML – PDF 대 HTML 변환기. WikiPDF – 미디어위키 글 PDF 변환기. POM - PDF 파일을 합지는 오픈소스 자바 도구. 에빈스 - 그놈을 위한 여러 문서 형식을 지원하는 문서 뷰어. KPDF - KDE를 위한 xpdf 기반의 PDF 뷰어. NESPDF 구글 오피스 폴라리스오피스 드롭박스, 원드라이브 등의 많은 클라우드 스토리지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 PDF 보기를 지원한다. Go2PDF – 프리웨어 가상 프린터 드라이버. 단, 설치시 번들기능주의 해제 PDFCreator – 윈도용 GPL PDF 프린터 드라이버, 단 설치시 번들기능 (무언가 추가적으로 다른걸 같이 설치하려는 시도)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해제할 것 전자 문서 데자부 (파일 형식)( DjVu) GNU enscript PDF Association - The PDF Association is the industry association for software developers producing or processing PDF files. Adobe PDF 101 Summary of PDF 분류:페이지 기술 언어 분류:그래픽 파일 포맷 분류:어도비 시스템즈 분류:오픈 포맷
워드 프로세서 ()는 각종 전자 문서를 읽고 고치거나 작성할 수 있는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뜻한다. 또,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인기있던 독립형 사무 기기의 일종을 뜻하기도 하는데, 문서 편집을 위한 타자기에 자판 입력과 인쇄 기능을 더한 것이 특징이었다. 워드 프로세서는 2개의 천공 테이프 스테이션이 있고 하나의 테이프를 다른 테이프로 교체하는 것(한 테이프는 이름과 주소가 포함 되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송신할 본문를 포함함)을 허용하는 Friden Flexowriter에서 파생되었다. 줄 바꿈 기능은 없었으나, 이 기능은 IBM의 Magnetic Tape Selectric Typewriter에 의해 시작되었다. 단순한 문서 편집기와는 달리 문서의 문단 모양, 글꼴 모양, 표 편집, 그림 삽입 등을 외양에 집중하여 문서를 작성할 수 있으므로 사무실이나 학교 등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주로 쓴다. 초기에는 한글, 영문 등 단어나 문장 입력과 간단한 편집에 집중되었으나 고급 사용자들이 워드프로세서를 전자출판에 응용하면서 교회 주보, 수학 문제지 등의 간단한 전자출판도 가능하게 되었다. 아래아한글의 경우 도스용 시절부터 일부 고급 사용자들이 한글과 컴퓨터에서 아래아한글 선전을 위해 발행하던 월간지였던 월간 《한글과 컴퓨터》에 자신들이 개발한 전자출판 노하우를 투고할 만큼 일부 사용자들에 의해 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 애용되었다. 하지만 워드 프로세서의 전자출판 기능은 쿼크익스프레스 등의 전문적인 전자출판 프로그램에 비해 출력 기능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쿼크익스프레스의 경우 마스터 인쇄, 오프셋 인쇄 등 다양한 인쇄에 맞춘 망점 조절이 가능하지만, 워드 프로세서는 망점 조절 기능이 없다. 워드 프로세서 파일은 그림이 들어갈 경우 상대적으로 문서의 용량이 커지고, 워드 프로세서별 확장자나 형식이 달라 같은 제품임에도 버전별로 호환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230px 워드 프로세서 전용기는 휴대용 워드프로세서로 흑백 액정, 워드프로세서, 전열 방식의 프린터, 충전용 배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1983년 개발된 큐닉스 글마당이며, 그 뒤를 이어 고려시스템의 명필, 금성사의 장원 등이 개발되었다. 그외 대우전자에서 개발된 르모도 사용되었다. 기존의 타자기에 비해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문서의 수정과 편집이 용이하고 별도의 출력도 가능하여 수동식 타자기를 대체할 사무용품으로 큰 각광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전자식 타자기도 보급되었고, 곧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장착된 개인용 컴퓨터와 프린터가 급격히 보급되면서 그 경제성이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까지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를 워드프로세서 실기시험 수검기종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 폐지되었고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도 전자식 타자기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사임당 *보석글 *아래아한글 *하나워드 *아리랑,윈워드등이 개발되었음. 한/글(한글과 컴퓨터) MS Word(마이크로소프트) 훈민정음 오픈오피스 현재 사용되는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는 다음과 같다. 한/글(한글과 컴퓨터) MS Word(마이크로소프트) 훈민정음 워드퍼펙트 오픈오피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워드프로세서 점유율은 한/글이 2 정도를, MS 워드가 8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는 MS 워드가 90% 넘는 점유율을, 한/글은 0.4% 정도의 점유율을 보인다. 《소년탐정 김전일》공포의 보물찾기편에서는 진범이 수사를 피하기 위해 워드 프로세서로 가짜 유서를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오히려 김전일의 의심을 받게 된다. 《짱구는 못말려》에서는 짱구 아빠가 밤을 새워서 작성한 기획서를 워드 프로세서에 내장된 프린터로 인쇄하는 내용이 나온다. 오피스
문서 편집기 (文書編輯機) 또는 텍스트 에디터 ()는 단순한 문서 파일을 편집하기 위해 쓰이는 소프트웨어이다. 이진 형식이 아닌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형식의 파일을 읽고 간단한 조작으로 편집하여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의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 중의 하나이다. 텍스트 에디터로 생성된 일반 텍스트 파일과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워드퍼펙트, 또는 OpenOffice.org와 같은 워드 프로세서로 생성된 문서파일에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일반 텍스트 파일은 파일에서 표현된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편집하고 나타낼 수 있다. 표시 할 수 없는 유일한 문자는 사용된 문자 집합의 제어문자이다; 실질적으로 줄바꿈, 탭 그리고 폼 피드(formfeed)를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요즘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자집합은 ASCII로 일반 텍스트 파일은 과거에 문서작성을 할 때(예를 들면 구체적인 사용설명, 혹은 사용 안내)보다, 프로그래밍과 구성을 하는데 더 자주 사용된다. 문서는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을 정의하는 것 이외에도 구체적인 파일 포맷 "제어 문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굵게, 기울임꼴, 글꼴, 열, 표 등의 기능을 활성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일반 페이지 포맷 기호들이 일단 바탕화면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가장 간단한 워드 프로세서의 기본화면에서 볼 수 있다.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은 일반 텍스트 파일을 편집하며 기본 텍스트 파일 형식으로 저장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작성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작성해야 한다. 저장 형식을 지정할 때에, 특히 소스 코드, HTML, 그리고 구성, 제어 파일과 같이 특히 더 중요한 파일에는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프로그램을 초기값으로 그대로 둘경우, 파일은 "특수 문자"를 포함하게 될 것이며 파일이 의도하고자 했던 유틸리티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윈도우에서 실행 중인 Emacs.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 유명한 문서 편집기의 하나이다. 당근 에디터, 윈도우즈에 기본적으로 포함된 메모장과 유사하되 훨씬 더 풍부한 기능이 있다. 유닉스 계열 보통 vi 계열, 이맥스 등이 설치되어 있다. 그놈 계열 Gedit 등이 설치되어 있다. 개발사 플랫폼 운영 체제 라이선스 특징 이맥스 ,(Emacs) GNU Win32, 윈도, 리눅스, 솔라리스, AIX, 맥 OS X GPL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자유 소프트웨어 Vim ,(vi) Bram Moolenaar와 Vim Developers GNOME 윈도, 리눅스, 유닉스 GPL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그놈 에디터 ,(gedit) GNU GNOME 리눅스 GPL GNOME 기본 문서 편집기 Leafpad(잎사귀메모장) GNU,Tarot Osuji GNOME,KDE 리눅스 GPL http://tarot.freeshell.org/leafpad/ 블루피시 ,(BlueFish) GNU GNOME 윈도, 리눅스 GPL http://bluefish.openoffice.nl/ 카테 (Kate) GNU KDE 리눅스 GPL KDE 기본 문서 편집기 KWrite GNU KDE 리눅스 GPL KDE 기본 문서 편집기 Scribes GNU GNOME 리눅스 GPL 노트패드++ GNU GNOME 리눅스 GPL 무료,http://notepad-plus.sourceforge.net/ 메모장 GNU GNOME 윈도, 리눅스 GPL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SimpleText 애플 GNOME 맥 OS X GPL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TextEdit 애플 GNOME 맥 OS X GPL 운영 체제 기본 문서 편집기 당근 편집기 개발자 김상형님 MS 윈도 오픈소스,퍼블릭도메인(PD) 무료 에디트 플러스 개발자 김상일 윈도 셰어웨어 가격 $35 엠에디터 Emurasoft 윈도 셰어웨어 가격 $40 울트라 에디트 IDM Computer Solutions 윈도, 맥 OS X, 유닉스 사유 저작권 가격 $60 EditPad Pro Just Great Software Co. OS X 사유 저작권 가격 $50 검색 및 치환 잘라내기, 복사, 붙여넣기 조판 실행 취소 및 다시 시도 가져오기 필터링 워드 프로세서 파일 뷰어
글 은 한글과컴퓨터에서 개발된 워드 프로세서이다. 제품 이름은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ᆞ를 쓴 글 로 표기하고, ‘HWP(Hangul Word Processor의 준말)’ 또는 ‘ 아래아 한글 또는 한/글 로 불린다. 2014년 기준 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이다. 도스용으로 시작되었고, 현재는 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용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유닉스, 리눅스, 매킨토시와 안드로이드 및 아이폰용으로도 제작되고 있다. 한/글로 작성된 문서 파일은 파일 확장자로 .hwp를 갖고 있으며, .hwt로 저장하여 양식(Form) 문서로 저장할 수 있다. 2010년부터 HWP의 개방형문서포맷인 OWPML은 KS X 6101로 등록되어 있으며, 확장자로 .hwpx 또는 .owpml 을 지원한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이찬진은 1988년 가을 서울대 컴퓨터연구회에서 만난 김형집, 우원식, 김택진과 함께 아래아한글 이라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해 베타 버전인 0.9판을 1989년 3월에 발표하였다. 베타버전인 0.9판은 5.25인치 360kb 디스켓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린터로 출력할 수는 없었다. 최초의 상용버전인 1.0판이 1989년 4월 24일 출시되었다. 5.25인치 2D (360KB) 플로피 디스크 3장의 용량으로 만들어진 한/글 1.0판은 종로 전기/전자 상가인 세운상가의 소규모 유통업체 러브리컴퓨터 라는 회사를 통해 4만 7천 원의 가격으로 출시되었다. 1.0 판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위지위그 편집 기능 8가지 한글/로마자 비트맵 글꼴 지원 180 DPI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 지원 특수 문자 입력 및 선 그리기 기능 등 *조합형을 채택하여 1,1172자의 한글 을 모두 표현할 수 있고 옛 한글도 상당수 지원 *한글카드나 PC기종에 상관없이 제품을 사용할 수 있음 *두벌식 자판 및 세벌식 자판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입력 방법을 지원 주) 베타버전과 같이 3장으로 이루어진 1.0 버전에서 프린터로 출력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4,5번 디스켓이 추가된 형태에서 프린터 출력이 가능했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1989년 6월에는 주석 처리 기능, 금칙 처리 기능과 9핀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에서의 인쇄 품질이 향상된 1.1판이 출시됐다. 또한 1.0판에서는 설명서 대신 몇 장의 안내문만을 제공했던 것에 비해 1.1판 후반 부터는 정식 설명서를 링 파일에 묶어 제공했다. (책자 형태로 되어 있는 정식 설명서의 날짜는 1989년 11월 27일로 되어 있다.) 한글과컴퓨터가 설립되기 전인, 1990년 1월 한/글의 1.20판이 출시되었다. 1.20판이 출시되기 전에도 1.11판등 버전업이 수시로 있었다 1.2판에서 추가된 기능은 다음과 같다. ASCII 텍스트파일 저장 기능 강화 한/영 전환키가 shift+space 키로 변경 선 그리기로 만든 표 보호 기능 등 1990년 6월 300 DPI 레이저 프린터 해상도를 지원하는 한/글 1.2L이 출시되었다. 한/글 1.2판 이후로 한/글은 출력할 수 있는 해상도의 조건에 따라 레이저판, 도트판이 따로 나뉘었으며 300 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레이저판은 14만 원, 180 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도트판은 5만 원의 가격으로 판매했다. 레이저판에는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프린터 포트에 꽂아야만 프로그램이 동작하는 하드웨어 키(lock)가 들어 있었는데 후에 한/글 2.5가 출시되면서 제거되었다. 1990년 9월에는 글꼴 다운로드 인쇄 방식을 사용해 레이저 프린터에서의 인쇄 속도를 향상시키고, 그림 인쇄, SVGA 모니터 지원 기능이 추가된 한/글 1.3L이 출시되었다. 1990년 10월 이찬진이 한글과컴퓨터사를 열었으며, 한글문화원 사무실 내부에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정내권, 박흥호 등 외부 직원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1990년 12월 20일에 1.5판이 도트판과 레이저판의 두 종류로 나뉘어 발매되었다. 도트판의 경우 5.25인치 2D(360KB) 플로피 디스크 다섯 장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당시 컴퓨터의 대부분이 하드 디스크가 없는 XT나 AT 기종이었기 때문에, 한자 사전을 쓰기 위해 디스켓을 바꿔 끼우고, 인쇄하기 위해 디스켓을 바꿔 끼우는 식으로 오늘날보다 훨씬 불편하게 제품을 사용해야 했다. 이 외에도 다음의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도트판에서도 그림 인쇄 가능 로마자 가변폭 글꼴 추가 한글 필기체 추가되어 한글 필기체, 명조체,고딕체,샘물체가 한글서체였다. 자동 쪽 번호 매김(페이징), 구역(컬럼 블록, 단축키 F4) 설정 등 몇 가지 버그를 수정한 1.51판이 1991년 1월 출시되었다. 1991년 11월 18일 텍스트 파일을 문단 단위로 읽는 기능과 플로터 파일을 인쇄하는 기능을 추가한 한/글 1.52판이 출시되었으며, 한/글 1.53D도 출시되었다. 이들 제품을 통해 한/글은 완성형보다 한글을 많이 쓸 수 있는 조합형 한글,다양한 글꼴, 인쇄기를 이용한 깔끔한 인쇄를 쓸 수 있는터라 한국인이 널리 사용하는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표 기능이 없어서 선 그리기로 표를 그려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1992년 한/글 2.0이 개발되면서 기존 버전의 문제점들이 개선되었다. 아래아한글 1.53을 비롯한 1.5버전의 한/글을 어떤 누리꾼들은 윈도용 문서작성기보다 못하다고 낮추어보기도 하지만,이는 시대의 특징을 생각하지 못한 짦은 생각이다. 책만드는 일을 하는 김진섭은 책만들기를 가르쳐주는 책인《책 잘만드는 책》에서 1990년대에는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은 첨단을 걷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 실례로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에서는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와 손글씨로 학급신문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글 워드 프로세서는 첨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는 윈도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에 익숙한 세대들이 볼 때에는 모자른 것이지만,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부터 써온 세대에게는 글을 깔끔하게 쓴다는 사실만으로도,당시 학생이었던 이들에게는 숙제를 깔끔하게 써서 낸다는 자부심을 주는 것만으로도 가장 좋은 문서작성 도구였다. 1992년 7월 27일 한/글 2.0 전문용이, 9월 21일에 일반용이 출시되었다. 한/글 2.0은 레이저판과 도트판의 구분을 버리고, 일반용과 전문가용이라는 구분을 달고 출시되었다. 한/글 2.0은 문서 작성 기능만 갖추고 있던 한/글 1.52와는 달리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한 전자 출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기능들을 추가시켰다. 1포인트부터 127포인트까지의 글꼴 가변 크기 조정 기능 자간, 장평, 가변 조정 기능 및 문단 모양 편집 지원 글꼴과 문단 모양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스타일 지정/적용 기능 한/글 2.0 전문용에서 비트맵 글꼴과 윤곽선 글꼴을 모두 지원 전문용에서 추가 확장팩을 통해 2수준 확장한자(4888자+1만여 자) 지원 수식 편집 기능 표를 작성하고 편집하는 기능, 다단 편집 기능, 글상자, 그림 등의 틀 자유 배치 기능 한글 맞춤법 검사 기능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도움말 개선 메모리 관리 방식의 변화로 최대 편집 쪽수의 증가 마우스 지원 이 기능들은 IBM PC에서 한글을 지원하는 워드프로세서로서는 한/글 2.0이 최초로 구현한 기능들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기능을 추가한 2.0버전의 출시로 당시 소프트웨어 업계의 최고의 스타로서 한글과컴퓨터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의 추가로 인해 디스켓의 장수도 이전 버전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물론 하드 디스크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었고, 전문가용 버전은 XT 컴퓨터에서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업그레이드 수요가 늘어났다. 이때부터 묵향 등 한/글용 외부 글꼴 패키지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한/글이 인기를 끌면서 IBM PC용 한글 글꼴 시장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타자기 출력물과 별 차이 없는 품질로 전자 출판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한/글 옛 버전과 달리, 수식 편집, 인화지 출력, 편집 가능 쪽수 확대, 윤곽선 글꼴, 다단 편집 등으로 기능을 강화한 한/글 2.0의 등장으로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간이 전자 출판이 IBM PC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수식 기능은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수학 교재 편집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93년 9월 한/글 2.1 버전이 출시되었으며, 전문가용, 일반용, 수검용, 꼬마 등으로 구분되었다. 80386 프로세서용 32비트 코드로 제작 (전문가용)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직관화 문서 압축 저장 기능 글꼴을 그리는 알고리즘을 개선, 글꼴의 추가 및 삭제 관리 지원 가상메모리를 사용, 편집 매수 제한이 100여 쪽에서 500쪽으로 늘어남 (전문가용) 전문용에서 컬러 인쇄 및 1200 DPI 인화지 출력을 지원함으로써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한 전자출판의 가능성을 제시 출력에 필수적인 포스트스크립트(PS) 호환용 로마자 글꼴, 샘체, 안상수체, 휴먼고딕 등 휴먼컴퓨터사 글꼴 기본 제공 (전문가용) 이외에도 세세한 개선점들이 많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992년 4월 개발된 윈도 3.1을 다음해인 1993년 6월 한글 윈도 3.1로 내놓으면서 멀티미디어 PC/홈 PC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멀티미디어 PC의 등장, 그리고 그에 따른 윈도 3.1의 대대적인 보급이 한/글의 미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글이 갓 2.1판을 출시하고 도스용 2.5판 개발에 들어갔을 즈음, 한글 윈도 3.1에서 동작하는 즉, 윈도의 장점을 살린 여러 가지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메소프트의 파피루스, 금성소프트의 윈워드,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 5.0,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핸디소프트의 아리랑, 휴먼컴퓨터의 글사랑 등이 등장하면서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는 한/글 3.0b 윈도용이 등장하기까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른 업체들은 이미 윈도 3.1용 워드프로세서를 내놓고, 한/글에서 불가능한 멀티태스킹(다중 작업), OLE(다른 프로그램에서 만든 개체의 삽입 수정), 3차원 글꼴 다듬기(글맵시/워드아트), 윈도용 트루타입 글꼴(화면의 글꼴 모양과 인쇄한 글꼴 모양이 동일한 서체) 호환, 9개까지의 다중 문서 편집(한/글은 그때까지 2개의 문서만 동시에 열 수 있었음) 등을 장점으로 내세우며 나름대로의 시장을 차지하고 있을 즈음, 한글과컴퓨터는 여전히 도스용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2.5를 개발하면서 시간을 천천히 끌어갔다. 물론 윈도용 한/글도 동시에 개발하고 있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속도나 안정성 측면에서 부족했던 윈도 3.1용 워드프로세서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1994년 SEK 전시회에서 한/글 2.5가 발표됐다. 덧실행(add-on) 프로그램 지원 신명시스템, 태시스템 등의 추가 글꼴 및 프라임 영한 사전을 제공하는 확장팩 출시 인쇄 속도 개선 및 모아찍기, 나눠 찍기 등의 변형 인쇄 기능 지원 글꼴 미리보기 기능 지원 수식 및 확장 한자 윤곽선 글꼴 지원 불법 복제 방지용 락을 제거 신명조를 기본글꼴로 사용함. 2.5판부터는 전문용/일반용 구분이 없어진 대신 2.1 전문용을 업그레이드 한 2.5 기본판이 12만원에 판매되면서 가격을 50% 정도 인하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로의 업그레이드를 고려하는 사용자를 위해 한/글 2.5 구입자들에게는 윈도용 한/글 3.0 무료 교환쿠폰이 제공되었다. 또한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한/글 2.5가 포함되었다. 한/글은 2.0 버전 이후부터 미국의 워드퍼펙트라는 워드프로세서를 많이 참조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능의 구현이나, 조판 방식 등에서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출시 전까지 미국에서 최고의 시장 점유율을 가졌던 워드프로세서인 워드퍼펙트와의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윈도용 한/글 3.0이 몇 달 뒤 출시되었다. 한/글 3.0판 윈도용이 1995년 3월 출시되었다. 윈도용 한/글의 첫 출시는 윈도 95 출시와 함께 그 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윈도용 한/글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다른 윈도용 한글 워드프로세서와는 달리, 운영체제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 인터페이스, 독립 입출력 방식을 채택하였다. 윈도용 한/글 3.0은 윈도 3.1의 기본 프로그램 모양을 따르지 않고, 넥스트스텝과 윈도 95의 인터페이스를 혼합한 형태의 프로그램 모양을 선보였다. 또한 완성형 한글 코드만을 지원하는 윈도 3.1의 입력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도스용 한/글의 입력 체계, 즉 조합형 한글 코드를 변형한 한컴 2바이트 코드를 사용으로써, 11,172자 현대 한글은 물론 옛 한글까지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부터 조합형 한글 체계를 통한 한글의 완전한 표현을 장점으로 내세웠던 한/글이니만큼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 도스용 한/글의 글꼴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단축키도 도스용 한/글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도스용 한/글에 익숙한 사용자들이 손쉽게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기존 도스용 한/글의 문서를 아무런 손상없이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렇게 기존 도스용 한/글의 커널을 그대로 윈도용으로 컨버전한 한/글 3.0은 도스용 한/글의 장점 위에 멀티태스킹, OLE 기능, 윈도용 글꼴 및 프린터 드라이버 지원, 글맵시 기능 등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서 꼭 필요한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도스용 한/글 사용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글 3.0에는 버그가 굉장히 많았다. 이는 32비트 코드로 작성된 한/글 3.0이 16비트 운영체제인 윈도 3.1에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Win32s 런타임이 불안정했기 때문으로, 패치 버전인 한/글 3.0a에서는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윈도 95가 출시되기 이전까지는 많은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가격은 기본팩이 12만원으로 책정되어 2.5와 동일했으며, 2.5의 확장팩 내용을 담은 추가 CD가 4만원의 가격으로 추가 인하되었다. 그리고 도스용 한/글의 마지막 버전인 한/글 3.0이 1995년 6월 출시되었다. 한/글 3.0 도스용에서 추가된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 윈도용 한/글 3.0에서 저장한 파일 열기 지원(단, 글맵시 등은 불러오지 못함) 인터페이스 개선 및 도구 상자 추가 한/영 자동 변환 기능 및 빠른 교정 기능 문서 내 하이퍼 링크(하이퍼텍스트) 기능 덧실행 기능이 더 강화되어 PC통신 에뮬레이터, 공학용 계산기, CD 플레이어 등을 한/글 내부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함. 수채화라는 그래픽 편집/드로잉 프로그램을 도스용 한/그림이라는 이름으로 번들로 제공 타자 연습 프로그램 제공 가격은 기본팩 + CD-ROM이 12만 원의 가격으로 판매되었으며, 개정판인 한글 3.01 도스용은 한/글 오피스 96에 포함되었다. 1995년 8월 윈도 95가 출시된 뒤 1995년 11월 한글 윈도 95가 출시된 직후, 도스용 한/글 3.0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자 최초의 윈도 버전인 3.0b가 출시되었다. 기본 내용은 도스용 한/글 3.0과 동일하지만 윈도 95에서도 실행이 가능해졌고, 여러 가지 버그가 수정되었으며,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이 추가되었다. 윈도 3.1에서의 한/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윈도 95에서는 대부분 해결됨으로써 이 때를 기점으로 한/글이 윈도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글 3.0b가 대중적인 성공을 얻고 난 후, 한/글은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 완전히 성격을 탈바꿈했다. 한글과컴퓨터는 1996년 출시할 예정이었던 한/글 4.0(가칭) 도스용 개발을 취소하고, 더 이상의 도스용 버전 개발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윈도 95 출시이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국내 기업체 공략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널리 쓰였던 로터스 1-2-3와 워드퍼펙트를 1990년부터 이겨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95 버전까지만 해도 한글판의 불완전한 번역과 잦은 버그, 한/글 문서와의 비호환 문제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97 버전에서부터 VBA를 이용한 특유의 확장성, 네트워크를 통한 다중 사용자의 작업 공유 기능, 강화된 도움말, 다량의 클립아트와 글꼴 번들, 여러가지 사용자 편의 기능,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의 강화, 전 세계 문서 호환, 엑셀, 파워포인트와의 통합 등을 앞세워 점차 기업체를 중심으로 사용자 수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그 뿐 아니라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훈민정음 등도 워드프로세서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미처 기업 시장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못했던 한글과컴퓨터의 약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한글과컴퓨터도 한/글을 기반으로 한컴 오피스 스위트(Haancom Office Suite)를 출시했는데, 이 첫 주자는 한/글 3.0b의 초기판에 저가로 번들(한/글 3.0b 구입자에 한해 3만원의 가격에 판매)된 윈도용 로터스 1-2-3(스프레드시트)와 프리랜스 그래픽스(프레젠테이션 소프트웨어)였다. 물론 서로 다른 회사의 제품을 패키지만 통합한 것인 만큼, 호환성에 약간에 문제가 있었고, 로터스 1-2-3, 프리랜스 그래픽스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버린 제품들이라 그 파급력이 덜했지만 한컴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6년 7월에는 다양한 소프트웨어와의 통합패키지로 선보인 한/글 프로 96과 한/글 오피스 96이 출시되었다. 한/글 프로 96은 기본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인터넷문서 편집,문서모음집인 문서마당 등 다양한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96을 기반으로, 주소록, 타자연습, 폼프로세서 틀마름이, 팩스 프로그램, 메일 프로그램 등 다양한 유틸리티를 추가한 종합 패키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한/글 오피스 96에는 이전에 선보였던 로터스 1-2-3와 프리랜스 그래픽스의 업그레이드 판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과는 달리 기업체 판매를 목적으로 출시된 한/글 오피스 96은 포함된 로터스 1-2-3 5.0과 프리랜스 그래픽스 프로그램의 기능 미비로 인해, MS 오피스에 비해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로터스에서 제작한 프로그램과 한/글 96간의 인터페이스 차이도 이용자의 불만을 샀다. 그나마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도 개인용 시장의 포화와 심각한 불법 복제 등의 영향으로 이전 수준의 성공을 거뒀을 뿐 더 이상의 성장이 정체되었다. 한/글을 제외하면 한/그림(그림 그리기), 한/아름, 한/맥 등 출시한 여러 제품이 모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진출한 인터넷 시장에서도 검색 엔진인 심마니를 빼고 별다른 실적을 낳지 못했다. 1996년 11월에는 한/글 96을 기반으로 중국어, 일본어 인터페이스 및 다국어 입력기를 채용한 한/글 국제판과 일본 시장을 목표로 한 한/글 일본판이 출시되었고, 1997년에는 한/글 97을 탑재한 한컴홈 97과 한컴 오피스 97이 출시되었으나, 판매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한컴에서는 한컴오피스 97을 대학생들을 위한 아카데믹 버전으로도 출시하는 등 사용자의 구매력에 맞추는 방식의 영업을 사용하였다. 1998년 6월에는 한글과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를 받는 조건으로 한/글 소스코드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기고, 더 이상의 한/글 개발을 중단하기로 하는 양해 각서를 마이크로소프트와 체결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사용자의 반대 여론에 부딪친 한글과컴퓨터는 이 계약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한글지키기운동본부로부터 100억원 투자 유치를 받아 한/소프트 회원유치운동과 함께 한/글 815버전을 출시했다. 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 사장은 회사 실적 악화의 책임을 지고 한글과컴퓨터의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지오이월드 대표이사였던 전하진이 신임 대표 이사로 선임되었다. 한/글 97은 실행 취소 기능이 매우 취약했지만 역대 윈도용 한/글 시리즈 중 가장 완성도가 높았으며, 가장 높은 보급율을 보여준 제품이었다. 또한 매킨토시용으로도 개발되어 맥사용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자 출판 종사자가 PC에서 작성된 원고 내용을 한/글 97로 작업했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글 97은 출판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그 예로 출판기획자 모민원씨는 《너희가 한/글 97을 아느냐?》(혜지원)을 초보자편과 활용편으로 출판하였다. 활용편에서는 편지지,단행본,생활정보지,일기예보(한/글 97의 도형기능 사용), 잡지 만들기 등을 소개했다. 후속 제품인 워디안이 출시되었는데도 한/글 97과의 호환성 문제와 커다란 인터페이스의 변화로 인해 한/글이 가지고 있던 독창적인 요소들을 상당수 잃게 되어 사용자로 하여금 한/글 97에서 신버전으로 교체를 꺼리게 하였고, 한/글 97 사용자들이 상위 버전인 워디안의 문서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보급되어 있는 한/글 97 사용자를 위해 상위 버전의 사용을 꺼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이러한 인터페이스의 무리한 변화와 호환 불능은 그 이전의 한/글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예를 들어 한/글 2.1과 한/글 2.5는 그리고 한/글 2.5과 한/글 3.0(도스용)는 인터페이스가 바뀌지 않아서 새로운 버전을 쉽게 배울 수 있었고, 윈도용 한/글 96문서를 글맵시등의 윈도 고유의 기능을 빼고는 한/글 3.0에서 읽었으므로 정보를 쉽게 주고받았다. 한/글 국제판을 통합한 한/글 97 기능 강화판도 출시되었고 한/글 815 버전 구입자들에게는 정가 19,800원, 처음 사용자에게는 60,000원에 판매되었다. 또한 리눅스 개발 업체인 미지리서치에서는 한/글 96을 리눅스용으로 포팅한 한/글 for X R4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한/글 97에서 제공된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 한글 맞춤법 검사 기능 강화 한/글 97에서는 맞춤법에 어긋나는 문장이나 단어에 붉은 밑줄이 그어지게 하여, 맞춤법 기능을 강화하였다. 손가락 아이콘을 사용한 기능 구분 한/글 97에서는 대화 상자에서 기본 기능과 세부 기능을 모두 접기와 펴기 아이콘으로 구분하였다. 손가락 모양의 아이콘을 누르면 세부 기능이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표 도구 모음 기능 한/글 97에서는 도구 모음으로 표작성과 편집을 하도록 기능을 추가하였다. 2000년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2.1 이후, 한/글 97까지는 커널 기반에서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파일의 호환성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사용법에도 큰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한/글 워디안은 모든 소스 코드를 새로 작성함으로써 이전 버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이는 마이크로소프트 측에서 한/글 97의 소스 코드를 갖고 있다는 점이 한글과컴퓨터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글 워디안은 256단계의 다단계 되돌리기/반복(실행 취소) 기능을 지원하고, 변형 다단 편집, 표 서식 기능 강화, 엣센스 영한사전과 표준 국어 대사전을 삽입하는 등 커다란 개선 사항이 있었지만, 워디안에서 작성한 문서를 이전 버전에서 읽을 수 없는 문제, 이전 버전의 문서를 워디안에서 본래대로 읽을 수 없는 문제, 프로그램의 안정성 문제가 지적되었고, 바뀐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지 못한 사용자들이 여전히 한/글 97을 계속 사용하면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한글과컴퓨터사에서는 한/글 워디안의 패치파일을 1개월에 1번씩 제공하는 등의 강행군으로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1729 빌드의 서비스 팩을 발표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잠복해 있었다. 2001년에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워디안을 기반으로 이전 버전 파일과의 호환성 문제 및 안정성 문제를 해결한 제품으로 나중에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향상시킨 한/글 2002 SE로 무상 업그레이드되었다. 한/글 2002판은 한/글 워디안 사용자들을 위해 업데이트 다운로드와 정품 CD가 무상 배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외국계 펀드와 당시 경영진과의 한글과컴퓨터사의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한글과컴퓨터는 프라임산업개발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XML 문서 원과 공개 키 기반 암호화, 스킨, 작업창 기능이 추가된 제품이다. 한/글 2004와 함께 출시된 한컴오피스 2004는 국산 스프레드시트인 넥셀과 자체 개발한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한컴 슬라이드 2004를 포함함으로써 토종 오피스 스위트로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능 면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비해 아직 부족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엑셀, 파워포인트와 사용법이 비슷하며, 파일 호환도 가능해 주목을 받았다. 협동 작업을 위한 버전 관리 기능, 메모 기능의 추가. XML로 작성된 한/글 서식과 ODBC의 연동, 표의 가로 세로 대칭 뒤집기, 아랍어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이 한/글 2005는 itq 워드와 같은 컴퓨터 문서에 관한자격증 시험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윈도용과 리눅스용이 함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컴퓨터 공간 용량 문제 때문에 2000년도부터 2011년도 당시에는 2002,2004,"2005",2007버전은 컴퓨터 실기 자격증 표준 소프트웨어로 잘 알려져 있다. 한/글 2006 for 맥 애플컴퓨터코리아의 기술 지원으로 OS X용이 2005년 출시되었다. 기존의 한/글이 가진 기능을 Mac OS X 환경에서 구현하였다. 트루타입과 한/글 전용 글꼴을 지원하며 지원 사양은 OS X 10.3/10.4 이상, 파워PC G4와 G5 (인텔은 로제타 기술로 실행되나, 속도가 느리고 512 MB 이상 메모리가 필요하다. 한/글 2014 for 맥 2013년 12월 19일 OS X(10.4) 인텔CPU용으로 출시하였다. 한/글 2010 프로그램을 기본으로 만들어지고, MAC UI를 충실히 따랐다. 선과 도형에 앤티에일리어스가 적용되었고, 반투명한 선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이 향상되었고, 워터마크, 암호화 기능, 세로쓰기, 공인 인증서 암호화 기능, 개체 연결선, 개체 그림자 삽입 등 보안성이 향상되었다. 또한 추가로 ValuePack를 설치하면 다양한 기능과 더불어 PDF 문서를 쉽게 생성할 수 있는 무료 Haansoft PDF 문서 변환 드라이버를 설치할 수 있어 편리한 문서 변환 기능을 제공한다. 한/글 2007을 기반으로 리눅스 사용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운영체제 특성의 차이로 인해 일부 동작이나 기능이 지원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응용 프로그램 간 복사 및 붙이기나 ActiveX 및 윈도용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기능은 제한된다. 게다가 문서 인쇄시 인쇄기의 드라이버에 따라 인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해당 인쇄기의 드라이버가 리눅스용 드라이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일의 형태가 .rpm로 되어있기 때문에 rpm군의 패키지를 사용하지 않는 리눅스 배포판(특히 우분투)은 몇 가지 설정을 해야 했다. 2010년 3월 3일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2010은 한/글 2007의 차기작으로 리본 메뉴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도입하였다. ODF문서를 읽어올수 있으며, 저장할 수 있고, MetaBlog API를 한글자체에서 적용하여 한글로 작성한 문서를 블로그로 업로드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정보 유출 방지를 위한 기능도 추가되어 있다. 또한 한/글 2007에서 제공하던 Haansoft PDF의 명칭이 회사 이름의 영문 표기법이 바뀜에 따라 Hancom PDF로 바뀌었다. 2010년 6월 29일 HWP 문서의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다. 이로써 ISO 국제 표준 문서 형식인 ODF와 OOXML을 지원과 함께 표준화와 개방성 강화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2010년 7월 29일에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2010 기반의 한컴오피스를 볼 수 있는 한컴오피스 뷰어를 출시하였으며,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다. 또한 옛 한글 표현 방식으로 2008까지 써 오던 한양 PUA 코드를 버리고, 유니코드 표준인 첫가끝 코드를 사용한다. 시스템 내용 구성이 이전 2000 시리즈하고는 완전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으로 구성을 했다. 이전 버전 하위호환 기능이 삭제되었는데 차트에다가 복잡한 선을 그리는 이전 버전 하위호환 기능이 삭제되어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 공부 학생들한테 많은 비난을 샀다. 다만, 그림에 복잡한 선을 집어넣는 기능은 남아 있다. 2013년 10월 10일에 한컴 오피스 2014가 출시됐다. 윈도 8용 터치 인터페이스 지원이 특징적이다. 2016년 1월 26일에 한컴 오피스 NEO가 출시됐다. 지원하는 파일 형식이 많아졌다는게 특징적이다. 2017년 11월 2일에 한컴오피스 2018이 출시되었다. 8·15광복을 기념하여 출시된 제품이다. 한/글 97에 기반한(R4) 제품으로, 제품이 담긴 CD와 함께 1년간의 사용권을 판매하였다. 이 제품에 포함된 한/글 97은 표 아이콘을 제공하는 등의 개선점이 있고 한/글 96 기반의 국제판도 함께 포함되었다. 매달 사용료(개인 월 2,500원)를 내고 인터넷에서 인증을 받아 사용하는 한/글 제품이다. 한/글 2002 SE의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사전, 클립아트, 일부 글꼴 데이터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이용할 수 있고, 원격 저장소(10MB)도 제공하였다.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 작은 한/글 프로그램을 내장하여 USB를 연결할 수 있는 어느 PC에서나 한/글 작업이 가능하게 만든 제품이다. 넥스소프트 사가 개발한 스프레드시트 제품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엑셀과 비슷한 인터페이스와 사용법을 가지고 있으며, 한글과컴퓨터에 넥셀 을 매각하였다. 엑셀의 일부 고급기능이 없는 대신 저가로 공급되어, 중소기업 등을 대상으로 인기를 끈 제품으로 현재 한컴오피스 제품군에 포함되어 판매되고 있다. 한컴오피스 2007 버전까지는 넥셀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한컴오피스 2010 버전부터는 한/셀 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한/쇼는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와 비슷한 기능을 지닌 프레젠테이션 제품으로 한컴오피스 제품군의 하나이다. 한컴오피스 2007 버전까지는 한컴 슬라이드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한컴오피스 2010 버전부터는 한/쇼 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다른 한글과컴퓨터 제품처럼 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같은 외국 소프트웨어의 훌륭한 대체품이 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이 한/글로 워드 프로세싱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일부 출판 기획자는 미적 감각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텍스트 위주의 전자 출판이나 수식이 많이 들어가는 수학 교재 편집 등에 활용하고 있다. 그 실례로 한/글을 이용한 전자 출판은 모민원 씨, 위형복 씨등의 고급 사용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으며, 한컴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월간 한글과 컴퓨터에는 한/글 2.1을 이용한 악보 만들기,문서 클리닉등의 한/글을 이용한 전자 출판 노하우들이 독자 기고등으로 실려서 출판 기획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글은 일본어, 노르웨이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그리스어(헬라어),독일어등의 외래어를 쓸 수 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한자인 정체자, 중국어 간체 및 번체, 일본 한자 및 가나 (일본어를 읽고 쓸 수 있다면, 로마자로 가나를 입력할 수 있다.)뿐만 아니라 구결 및 옛 한글(한양 사용자 정의) 지원 글꼴과 같이 배포한다. 또한 한/글에서는 신약성서 저자들이 사용한 말인 헬라어를 로마자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 연구를 위해 헬라어를 사용해야 하는 성서학자, 신학생, 기독교 성직자, 신학서적 기획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한/글은 사용자가 원하는 문서를 정확하고 깔끔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급 사용자들은 한/글을 이용하여 단순한 전자 출판을 하기도 한다. 한/글을 이용하면 적절한 전자출판 항목으로는 1. 수식이 많이 들어가는 수학교재 2. 각주와 표가 많이 들어가는 논문 3. 교회 주보, 소식지처럼 화려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되고 표와 텍스트가 많이 들어가는 문서 4. 일본어 가나, 헬라어등을 빠르게 입력해야 하고 화려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간단한 외국어나 성서 교재등이 있다. 한/글은 스타일 기능 제공, 반복되는 글자나 그림을 넣을 수 있는 바탕쪽, 간단한 도형 그리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는 쿼크익스프레스 등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의 바탕쪽 기능은 한 개의 파일 내에서 페이지마다 들어가는 글자와 그림을 각 페이지마다 다르게 넣을 수 있는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에 비하면 미흡하지만, 페이지마다 들어가야 하는 글자나 그림을 한 번에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의 마스터 기능과 거의 비슷하다. 그외 자간, 행간 조절, 그림 위치 조정, 한글, 로마자, 숫자와 특수 문자에 맞춘 다른 글꼴 사용 및 자간 조절 등 간이 전자 출판에 필요한 기능들을 한/글에서는 세심하게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글은 한글글꼴인 윤명조, 영문은 영문서체인 Garamond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글의 맞춤법 기능은 교정/교열의 수고를 일부 덜어준다. 물론 한/글의 맞춤법은 오자(誤字)를 고치는 수준의 기계적 맞춤법 기능이므로, 편집자는 원고를 인쇄하여 여러 번에 걸친 교정교열을 보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한/글은 문서 작성을 위해 개발된 워드프로세서이기 때문에, 북 디자인, 카드, 달력, 편지지 등의 팬시(Fancy) 디자인에는 쿼크 익스프레스, 인디자인 등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가 더 적합하다. 한/글은 공공기관에서 널리 쓰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인 우체국에서 문서작성과 표계산을 할 때에 한/글과 한/셀을 사용한다 . 비록 HWP 형식이 한국 내부에서는 DOC, PDF, RTF 파일 대신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편이지만, 이 프로그램이 한국 밖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대다수 프로그램에서 HWP 형식의 문서를 읽어들이지 못하며, 여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문서의 내용이 완벽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글과컴퓨터 뷰어 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또 2010년 06월 29일 한/글 문서 파일형식(hwp)을 공개하였고, 개방형 문서포맷인 OWPML은 KS에 등록하여 지원하고 있다. 최근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네이버오피스나 MS-WORD에서 HWP파일을 지원한다. 한 때 파일 이름에 컴퓨터의 고유 코드 페이지(한국어 윈도의 경우 KS X 1001)에 없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으면 오류를 표시하고 파일을 읽고 쓸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약자나 속자로 된 한자 이름이 포함된 파일). 이 문제는 한/글 2010 이상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클립보드를 이용한 작업에서 사용하는 데이터를 다른 응용 프로그램에서 인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근래에 들어 아래아 한글의 클립보드 데이터 호환성 문제에 많은 진전이 있었고, 아래아 한글 마크업 언어 체계의 정비 등을 통하여 호환성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한/글은 전자출판 소프트웨어에서 비한다면 인쇄에서 미흡한 부분이 많다. 전자 출판 소프트웨어에서 제공되는 CMYK 색조합 기능, 마스터 인쇄, 오프셋 인쇄 등 인쇄 방식에 따라 망점의 개수를 다르게 조정해 주는 망점 조정 기능 등이 한/글에서는 제공되지 않는다. 한/글은 새로운 판이 출시될 수록 프로그램이 차지하는 용량이 증가하고 있다. ASV는 Auto Save File(자동 저장 파일)의 준말로, 한글 문서 작업 도중에 컴퓨터(혹은 프로그램이)가 갑자기 잘못된 종료가 되었을 경우에 자동으로 저장(백업)이 되는 파일이다. ASV형식의 파일은 잘못된 종료 이후 한/글 최초실행시에 자동으로 로드되며, 로드 즉시 삭제된다. 2014년 기준 대한민국 내 점유율은 20%정도이다. 전세계 점유율은 0.4%이다. 일본에도 수출한 적 있으나 매출이 좋지 않아 철수했다. 분류:한글과컴퓨터 분류:워드 프로세서 분류:도스용 소프트웨어 분류:윈도우 소프트웨어 분류: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 분류:유닉스 소프트웨어 분류:1989년 소프트웨어
케냐 공화국 ( 또는 케냐 (Kenya는 동아프리카의 공화국이다. 인도양에 면해 있으며 북동쪽으로 소말리아, 북쪽으로 에티오피아와 남수단, 서쪽으로 우간다, 남쪽으로 탄자니아와 국경을 맞닿고 있다. 수도는 나이로비이며 공용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이다. 케냐의 주요 종족은 키쿠유족, 루히아족, 루오족, 칼렌진족, 캄바족, 키시족,메루족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백인, 인도인, 아랍인 등 비아프리카계 민족은 전체 인구의 1% 정도를 차지한다. 인구는 4,403만 명(2013년 7월,CIA 추정자료)이다.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에 따르면 조상이 2백만 년 전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투르카나 호 근처에서의 최근 발굴에 따르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같은 호미니드인(hominid)이 260만 년 전 이 나라 땅에 있었다. 케냐의 식민 시대 역사는 1885년 독일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888년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들어왔다. 독일이 해안 영토를 1890년에 영국에게 넘겨줘 두 열강 사이의 분쟁도 적지 않았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마우마우 반란)으로 비상 사태하에 있었다. 영국은 단계적으로 케냐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입법 회의 직접 선거를 치렀다. 그러면서 좀 더 온건한 세력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가 이끄는 케냐 아프리카 국민연맹(KANU,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이 독립 정부 조직을 주도하게 되었다. 1963년 12월 12일 케냐는 독립을 선포했다. 1년 후 케냐타는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케냐 인민연맹(KPU, Kenya People s Union)이 정당 활동이 금지된 1969년 이후로는 KANU가 유일한 정당이었다. 1978년 케냐타 사망 이후 부통령이었던 대니얼 아랍 모이(Daniel arap Moi)가 예상을 깨고 권력 암투에서 승리해 케냐의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2년 6월 개헌으로 케냐는 공식적으로 일당 체제가 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 국민들의 요구로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1992년 다당(多黨) 선거가 치러졌다. KANU가 과반수의 표를 획득하고 모이가 재선되었지만 야당도 의회석의 45%를 차지했다. 더 자유화 된 1997년 선거에서도 모이가 야당의 분열해 힘입어 재선되고 KANU도 간신히 과반수의 표를 획들했다. 그러나 헌법상 모이가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된 2002년 대선에서는 야당이 연합하여 국민 무지개 연립(National Rainbow Coalition, NARC)을 결성, 므와이 키바키를 대표로 내세워 당선시켜 독립 후 계속되었던 KANU의 독주에 종지를 찍었다. 그 후 개헌 문제가 케냐 정치의 최대 현안이 되었는데 이 문제로 국민 무지개 연립은 분열되었고 2005년에는 므와이 키바키가 지지한 개헌안이 대통령의 권한을 충분히 억제하지 않는다는 논란 속에 국민투표 끝에 부결되었다. 케냐의 구 면적은 224,961 제곱마일, 혹은 582,646 제곱킬로미터이며, 케냐는 마다카스카르 다음으로 세계에서 47위로 면적이 넓다. 인도양 해변측은 낮은 평지가 있으며 내륙에는 고지대 산맥과 고원이 있다. 내륙에 위치한 고지대는 거대한 단층 계곡에 의해 양분되어 있다; 서쪽에는 기름진 고원이 있다. 케냐 고지는 아프리카에서 하나의 가장 성공적인 농업지대이다. 고지에는 케냐의 가장 높은 지대가 있다(또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가장 높음) 또한, 5,199미터인 케냐 산맥은, 빙하적 지형이다. 기후는 지역마다 확연히 다르다. 인도양의 해안을 끼고 있으며 중앙 고원 지대 사이에 저평원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원 지대는 동아프리카 지구대로 나뉘며 서부에는 비옥한 토양이 나타난다. 케냐의 고원 지대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가장 생산력이 뛰어난 토질로 손꼽힌다. 케냐 산(Mount Kenya)은 고도 5,199 m에 이르며 빙하가 있기도 하다. 케냐 산 적도를 걸치고 있어 해안은 무더운 열대 기후이며 내륙 지방은 고지대로 건조한 기후이다. 내부일수록 건조하고 해안에는 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케냐-탄자니아 국경 지방에 킬리만자로 산이 있기 때문에 그 일대는 서늘하다. 케냐는 남반구에 있기 때문에 북반구 나라들과 여름과 겨울의 날씨가 바뀌어서 나타난다. 6-8월은 겨울이다. 그러나 케냐의 겨울은 동북아시아의 겨울과 매우 다른 풍경이다. 눈이 내리지 않으며 날씨 또한 영하로 거의 떨어지는 일이 없다. 단지 일교차가 매우 심해 새벽과 밤에는 매우 쌀쌀하게 느껴지며, 낮에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정도이다. 물론 아프리카의 겨울 햇살은 뜨겁다. 나무 그늘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이 차가워서 땀이 금세 마르고 겨울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모기도 많이 없다. 그만큼 날씨가 상대적으로 더 쌀쌀하다는 것이다. 케냐는 적도에 있지만 연평균 기온이 16도이다. 케냐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다.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직접 선거를 통해 뽑는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는 것은 물론 케냐의 7개 주 중 적어도 5개 주에서 표의 25% 이상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2010년 개정된 케냐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효투표의 과반을 얻어야 하는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47개 카운티의 절반 이상에서 최소 25%의 득표를 해야 한다. 부통령과 내각도 대통령에 의해 임명한다. 국회를 붕게 (Bunge)라고 부르며 단원제를 실시한다. 총 의석 수는 224석이다. 200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키쿠유족(17.15), 루햐족(13.83), 칼렌진족(12.87), 루오족(10.48), 캄바족(10.08), 케냐의 소말리족(6.18), 키시족(5.71), 미지켄다족(5.08), 메루족(4.29) 순으로 나타났다. 이외 백만명 이하인 민족들은 10.98%를 차지했다. 2010년 헌법 7조국민어, 공식어, 기타 언어는 “(1) 공화국의 국민어는 스와힐리어다. (2) 공화국의 공식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다. (3) 국가는 (a) 케냐 인민의 언어의 다양성을 증진, 보호하며 (b) 토착어, 케냐의 수화, 점자 및 장애인에게 접근가능한 다른 의사소통의 형식과 기술의 발전과 사용을 증진한다.”고 했다. 국민어는 영어(national language)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암암리에 국가어(State language)라는 인상을 풍기므로 주의를 요한다. 하지만 이것은 헌법상의 규정이고, 모든 영역에서 하위단계는 스와힐리어, 고위단계에서는 영어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법정의 경우 대법원에서는 영어를 전용한다. 교육의 경우 중학교부터는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 스와힐리어가 영어를 누르고 상층부를 차지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논자들이 말하는 아프리카비관주의의 일면이다. 케냐는 독립 이후 영연방의 정회원국이다. 2009년 인구조사(2010년 08월 발간)에 따르면 기독교는 82.99%-그중 개신교(47.66), 로마 가톨릭(23.46), 기타(11.87)-, 이슬람교는 11.21%로 나타났다. 이외 극소수의 힌두교도와 정령신앙도 있다. 15세 이상 문자 해독률은 85.1%(남자 90.6%, 여자 79.7%)이다(2003년). 문맹률도 높다. 케냐는 동아프리카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인근 국가들과 달리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서방 자본을 유치해 독립 이래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가 부패와 일부 수출품에 대한 의존 때문에 대니얼 아랍 모이 정부 시절에 경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경제 개혁의 실패로 IMF 원조가 몇 번 중단되기도 하였다. 2002년 새로 들어선 정부는 부패척결과 외국 원조의 확보에 노력을 치중하고 있으며, 케냐의 경제는 농업과 관광업에 의존한다. 가장 큰 소득원은 마시는 차와 커피. 한 해 3000억 원 이상이 관광업 수입이다. 케냐의 기아문제는 여전히 주목할만한 수준이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케냐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21.9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볼 때, 절반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이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72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아주 심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주목할만한 수준이다. 많은 케냐인은 직접 조각상을 만들어 지니고 다닌다. 장신구 등도 직접 만든다. 또한 모든 작품이나 생활용품에 대한 재료를 자연에서 채취한다. 케냐는 육상 경기의 강국으로, 중/장거리 달리기, 마라톤에서 강세를 보인다.그러하다. 대한민국과 1964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같은 해 나이로비에 주케냐 한국대사관이 설립되었는데 동아프리카에 세워진 대한민국 대사관으로는 가장 역사가 깊다. 현재 한국과 케냐는 대한항공직항편이 운항 중단으로 폐선되어 주로 중동지역을 경유해서 출입국을 한다.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으나 사실상 남한의 우방국인 이 나라는 지금까지도 북한의 상주공관 설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88 서울 올림픽 때 케냐는 선수단과 임원을 서울로 파견하였다. 루이 리키 리처드 리키 대니얼 아랍 모이 (케냐의 2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응구기 와 티옹오 (케냐의 시인) 왕가리 마타이 (아프리카 여성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환경운동가, 정치운동가) 라일라 오딩가 (케냐의 현 총리) 토머스 음보야 조모 케냐타 (케냐의 초대 대통령) 음비유 코이낭게 음와이 키바키 우후루 케냐타(케냐의 현 대통령) 버락 오바마 시니어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아버지) 조나단 무취리 (현 테크니온 인터네셔널 토목공학 전공중) 케냐 의회 홈페이지 케냐 관광부 케냐 외무부 주 대한민국 케냐 명예총영사관 주케냐 대한민국 대사관 분류:영국의 옛 식민지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영어권 분류:스와힐리어권 분류:아프리카 연합 회원국 분류:영국 연방 회원국 분류:반투어권
한글 맞춤법 ( - 法)은 한국어의 맞춤법으로,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한국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의 기준을 정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연철이라 하여 글을 소리 나는 그대로 썼다. 예를 들면 잡히다 를 자피다 로 썼다.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면서 말의 원형을 밝혀 쓰는 (잡-히-다) 방식이 표준으로 정해졌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분단 직후에도 계속 쓰이다가 도전을 받았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통일안의 표음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비판하며 극단적인 형태주의의 조선어 신철자법을 만들었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완화되었지만, 아직 북측의 철자법은 남한보다는 형태주의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1953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 간소화 파동이 있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기법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학계의 반대로 그러지 못한 것이다. 1980년 한글학회에서 《한글맞춤법》을 내었고, 현재는 문교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에서 1988년 1월 19일 고시하여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는 규정을 따른다. 1988년 개정의 주요 내용으로는, 한자어에서는 사이시옷을 붙이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였고(다만 두 음절로 된 6개 한자어만 예외로 사이시옷을 붙이기로 함), "가정란/가정난" 등으로 혼용되어 쓰이던 것을 두음법칙 규정을 구체화하면서 "가정란"으로 적도록 하였다. 띄어쓰기 규정에서 보조 용언은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붙여 씀도 허용하였고, 성과 이름은 붙여 쓰도록 하였다. 수를 표기할 때도 종전에는 십진법 단위로 띄어 쓰던 것을 만 단위로 띄어 쓰도록 하였다. 따라서 123456은 십이만 삼천사백오십육 이다(종전에는 십 이만 삼천 사백 오십 육 이라고 썼음). 한글 맞춤법은 6개의 장, 15개의 절, 57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문장 부호)도 있다. 제1장 총칙(總則) 제2장 자모(字母) 제3장 소리에 관한 것 * 제1절 된소리 * 제2절 구개음화(口蓋音化) * 제3절 ㄷ 소리 받침 * 제4절 모음(母音) * 제5절 두음 법칙(頭音 法則) * 제6절 겹쳐 나는 소리 제4장 형태에 관한 것 * 제1절 체언과 조사 * 제2절 어간과 어미 * 제3절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 * 제4절 합성어 및 접두사가 붙은 말 * 제5절 준말 제5장 띄어쓰기 * 제1절 조사 * 제2절 의존 명사,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 및 열거하는 말 등 * 제3절 보조 용언 * 제4절 고유 명사 및 전문 용어 제6장 그 밖의 것 부록 한글 맞춤법에서는 보조 용언을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인 데 반해, 조선말규범집에서는 붙여 쓴다. 한글 자모의 명칭과 사전에서의 배열 순서가 서로 다르다. 국립국어원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부호 표준어 대한민국 표준어 표준어 규정 * 표준어 사정 원칙 * 표준 발음법 외래어 표기법 로마자 표기법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한국어의 남북간 차이 한글 맞춤법 남, 북한 맞춤법 비교 분류:한국어 분류:한국어 어문 규정
수학에서, 주기 함수 (週期函數는 함숫값이 일정 주기마다 되풀이되는 함수이다. 일상적인 예로, 시계 시간은 시간에 대한 함수로서 주기 함수이다. 즉, 시계의 행동은 날마다 똑같다. 0이 아닌 실수 및 실수 부분 집합 및 실수 함수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함수 를 주기 함수 라고 하고, 실수 를 의 주기 (週期라고 한다. 임의의 에 대하여, 이다. 인 유한 실수 구간 이 존재한다. 즉, 의 그래프는 그 "유한한" 제한의 그래프에 대한 거듭된 수평 평행 이동으로 생성된다. * 여기서 이며, 이다. 즉, 는 함수의 그래프를 수평 방향으로 만큼 평행 이동하는 변환이다. 이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임의의 에 대하여, 이다. 인 유한 실수 구간 이 존재한다. 실수 주기 함수 및 실수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실수 를 의 기본 주기 (基本週期라고 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는 양의 최소 주기이다. . 즉, 의 주기는 곧 이다. 실수 주기 함수 의 주기와 0의 집합을 로 적자. 즉, 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는 덧셈에 대하여 닫혀있다. 다시 말해, 임의의 에 대하여, 이다. 특히, 임의의 및 에 대하여, 이다. 따라서 는 덧셈에 대한 아벨 군을 이룬다. 실수 주기 함수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가 기본 주기를 갖지 않는다. 가 에서 조밀 집합이다. 만약 주기 함수 가 기본 주기를 갖지 않는다면, 상수 함수이거나, 아니면 모든 곳에서 불연속이다. 실수를 그 소수 부분으로 대응시키는 함수 는 과 같이, 주기 함수이며, 그 기본 주기는 1이다. 삼각 함수는 모두 주기 함수이다. 사인 · 코사인 함수는 , 탄젠트 함수는 를 기본 주기로 한다. 상수 함수는 주기 함수이며, 모든 실수를 주기로 갖는다. 따라서, 기본 주기가 없다. 디리클레 함수 는 주기 함수이며, 모든 유리수를 주기로 갖는다. 따라서, 기본 주기가 없다. 주파수 파동 분류:미적분학 분류:초등 수학 분류:푸리에 해석학 분류:함수의 유형
나이로비 (Nairobi)는 케냐의 수도이다. 시원한 물 을 뜻하는 마사이어 에와소 니이로비(Ewaso Nyirobi) 또는 엥카레나이로비(Enkarenairobi) 에서 현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나이로비의 인구는 2백5십만에서 3백만 정도로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해발 1700m로 이 지역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1899년 몸바사와 캄팔라를 잇는 우간다 철도 건설을 위한 조달 기지로 세워진 것이 유래가 되어 20세기 초 전염병과 화재 이후 완전히 재건되어 오늘날의 대도시에 이르고 있다. 1907년 영국령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수도가 되었고 1963년 케냐의 독립과 함께 케냐의 수도가 되었다. 1998년 8월 7일에는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테러단체 알카에다에 의한 폭탄 테러가 발생, 나이로비에서만 213명(미국인 12명 포함)이 사망했다. 미국 대사관이 나이로비 중심지에 있어 인명 피해가 특히 심했다. 1999년 2월 17일에는 터키의 쿠르드인 반군 PK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이 주 나이로비 그리스 대사관에서 체포되어 터키로 추방되었다. 나이로비에는 두 개의 유엔 기구가 소재해 있다. 유엔환경계획(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 UNEP) 유엔인간정주센터(United Nations Centre of Human Settlement, 약칭 Habitat) 대한민국 주케냐대사관은 1964년 나이로비에 설립되었으며 아프리카 주재 공관 중 가장 역사가 깊다.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 나이로비의 공항은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이다. 예전에 주 공항이었던 윌슨 공항은 오늘날에는 주로 국내선용으로 쓰인다. 고속도로로는 대표적으로 티카와 나이로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인 티카 도로가 있다. 나이로비 시 안에는 특이하게도 야생동물 보호지인 나이로비 국립공원(Nairobi National Park)이 있어서 맹수들을 비롯한 야생동물을 자연 상태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콜로라도주 덴버 (1975) 2014년 5월 5일 급조폭발물이 티카 도로의 버스 안에서 터지면서 3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그 사고의 영향으로 버스에 큰 구멍이 난 후 전소되었다. 뉴스 데일리 네이션 더 스탠다드 Nairobi.com 커뮤니티 Nairobians.Com 나이로비의 학교와 단과대학 기타 The City of Nairobi (공식 웹사이트) 나이로비 시의 구글 맵 나이로비의 신비한 케냐 리뷰 나이로비 주식 교환소 나이로비에 대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폴링레인 지도 - 고도 = 1738 m (붉은 점들이 철도이다) 나이로비에 전 거주자의 도시 가이드 8월 7일 기념 공원, 1998년 폭발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에게 바침 네이버 캐스트 여행 - 나이로비 분류:아프리카에 위치한 수도 분류:케냐의 도시
찰스 로버트 다윈 (, , FRS, 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 진화론에 기여가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다.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다윈은 생물의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을 소개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 종의 기원 》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다.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수정된 내용에서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종의 기원》 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인간과 원숭이는 공통 조상을 갖는다 는 그의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그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진화가 관찰되는 현대와 진화의 명백한 증거들이 관찰되었던 과거에도 과학계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전혀 없으나,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설자들에 의해 이러한 논쟁은 심화되었다. 7살의 찰스 다윈, 1816년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부유한 의사 로버트 워링 다윈과 어머니 수잔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이름이 난 의사였다. 외할아버지는 영국 도자기 산업의 창시자이며, 도예가이자 기업가인 조시아 웨지우드였다. 할아버지들은 박물학자이며,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수잔의 동생인 외삼촌은 모두 사업가로 다윈 가족과 웨지우드 가족은 모두 오랫동안 친밀하였고, 그의 부모님과 더불어 몇 쌍의 겹결혼으로 인해 친한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수잔이 다윈이 8세 때 생을 마감하고, 누나인 캐롤라인 등 3명의 누이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다윈을 길렀다. 아버지 로버트는 아내의 죽음에 성격이 엄격해졌지만,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질까 봐서 심하게 꾸짖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웨지우드의 가문은 다윈의 탄생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영국의 전통교회로 뿌리내린 성공회를 받아들였지만, 양가 모두 원래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무게를 두는 반(反) 삼위일체 기독교 교회인 유니테리언 교회의 신도였다. 다윈가는 휘그당의 급진자유주의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렇듯 다윈의 집안은 자유주의가 전통인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로버트는 관례에 따라 아이들에게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러나 다윈 남매와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학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8세 때 식물, 조개, 광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는 할아버지와 달리 박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인 원예가 취미였기 때문에 어린 다윈은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졌다. 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형 에라스머스는 화학 실험에 몰두했고 다윈에게 실험을 돕게 했다. 다윈은 형을 라즈라고 부르면서 그리워했다. 그는 할아버지 에라스무스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1817년부터 1825년까지 다윈은 초중등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다윈은 교육을 지식전수로 잘못 이해하여 학생만의 좋은 점들을 존중하고 키워주지 않는 잘못된 교육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여, 교사에게서 항상 멍하게 있는 녀석 이라는 심한 욕을 듣기도 했다. 1818년, 다윈은 슈루즈버리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에 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스 다윈은 형인 이래즈머스 다윈과 함께 학교 정원에 화학 실험실까지 마련했다. 의사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를 의대로 진학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찰스는 의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청소년기 때부터 곤충 채집과 동물 관찰에 흥미를 보였다. 아버지는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다윈은 16세 때인 1825년에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 슬하를 떠나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졌고, 의학보다는 곤충 채집같은 경험에 입각한 자연계의 다양성을 좋아했다. 더구나 마취학이 없었기 때문에 수술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19세기 유럽 의학의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모습과 지나치게 학문에 치우친 의대 교수들의 지루한 강의에 친숙해지지 못하고 1827년에 에딘버러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당시 남미의 탐험 여행에 동행한 경험이 있는 흑인 해방노예(영국에서는 1833년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노예무역이 없어졌음)존 에드먼스턴에게서 동물의 박제 제작 방법을 배웠다. 다윈은 존을 매우 느낌이 좋은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워 했다. 존 에드먼스턴이 가르쳐준 박제만들기는 나중에 비글호의 항해에 참가해 생물 표본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학년 때에는 플리니 협회(급진적인 유물론에 매료된 박물학의 학생들의 클럽,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와 연관)에 소속해, 해양 생물의 관찰 등에 종사했다. 다윈은 로버트 에드몬드 그랜트의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활환경과 해부학의 연구를 도왔다. 어느날, 그랜트는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을 칭찬했다. 다윈은 놀랐지만, 그 무렵 할아버지의 책을 읽어 유사한 개념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생각이 논쟁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의 박물학의 수업은 지질학의 수성론(Neptunism)과 화성론(Plutonism) 논쟁 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또 식물의 분류를 배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물수집을 자랑한 에딘버러 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를 도왔다. 1827년 아들이 성공회 신부(Episcopal Reverend)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본인의 흥미에 따라 식물학자 헨슬로와 지질학자 아담 세지윅 교수의 지도를 받았으며 1831년에 졸업했다.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버지는 다윈을 성공회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182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넣어 신학,고전, 수학을 배우게 했다. 다윈은 성공회 신부가 되면 성공회 미사 집전, 성서와 신학연구등의 교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박물학에 쏟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였지만 찰스 다윈의 관심은 신학이 아닌 박물학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도 육촌 윌리엄 다윈 폭스와 함께 필수는 아니었던 박물학이나 곤충 채집에 심취했다. 폭스의 소개로 성직자이자, 박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다윈은 학내에서 헨슬로가 만든 정원을 둘이서 자주 산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헨슬로와의 만남에 대해서, 자신의 연구에 가장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 성직자이면서 지질학자였던 아담 세지윅에게 배워, 층서학에 평범하지 않는 재능을 발휘했다. 동시에 당시 다윈은 신학의 권위자인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 )을 읽었고, 모든 생물은 하느님이 천지창조의 시점에서 완벽한 형태로 창조했다고 하는 설을 납득하고 믿었다. 자연철학의 목적은 관찰을 기반으로 한 귀납적 추론에 의해서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기술한 존 허쉘의 새로운 책이나, 알렉산더 훔볼트의 과학적 탐험 여행 등의 책을 읽었다. 그들의 불타는 열의에 자극되어 열대 지방에서 박물학을 배우기 위해서 졸업한 뒤 동년배들과 테네리페 섬에 여행할 계획을 세우며, 그 준비 단계로 세지윅의 웨일스 지질 조사에 참가했다. 이때의 그의 취미는 음악이나 후에 잔인하다며 그만둔 사냥이었다. 입학을 했던 1827년 여름에는 조시아 2세와 그 딸이자, 미래의 아내가 될 엠마 웨지우드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고 파리에 몇 주간 머물렀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대륙 여행이었다. 1831년에서 최고 성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과학 역사는 이 두 대학교 시절을 다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은 훗날 회고록에서 "학문으로서 대학교도 (에딘버러 대학교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뒤 그는 세계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 로버트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에딘버러 대학 재학시절의 은사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간곡한 설득으로 아버지 로버트는 아들의 세계일주를 허용하였고, 이는 훗날 그의 생애는 물론 생물학계에도 족적을 남기게 되는 비글호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글호의 여행 경로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출항 → 브라질 사우바도르 항 → 리우데자네이루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포클랜드 섬 →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서 → 칠레 발파라이소 →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섬→ 태평양 횡단 → 뉴질랜드 →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 대서양의 어센션 섬 → 다시 브라질 살바도르 항구 → 영국 플리머스 항 도착 다윈은 성공회 교회에서의 목회보다는 생물학과 지질학에 관심이 많아 세지위크 교수를 따라 북웨일스에 지질학 연구를 위해 여행했다. 헨슬로의 추천으로 1831년 12월 27일 로버트 피츠로이 선장이 이끄는 〈비글〉이라는 이름의 탐험선에 박물학자로서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 게 아니라,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원하는 선장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 선실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다윈은 피츠로이의 함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1831년 12월 27일 시작한 〈비글호〉의 항해는 피츠로이가 의도한대로 거의 5년이나 지속되었고, 다윈은 그 시간 대부분을 육지에서 지질학을 조사하면서 그리고 자연사 수집물을 수집하면서 보냈다. 그동안 비글호는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그렸다. 그는 관찰한 것, 이론적 고찰을 꼼꼼히 기록했고, 가끔씩 견본들을 편지와 함께 가족들을 위해 잡지 사본을 캠브리지로 보냈다. 그는 지질학, 딱정벌레 수집, 해양 무척추동물에 전문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초보였고, 전문가들의 평가를 위해 열심히 견본을 수집했다. 항해를 하는 동안 겪게되는 반복적인 뱃멀미로 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동물학 노트는 조용한 휴식기간에 수집한 플랑크톤으로부터 해양 무척추동물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갈라파고스 군도의 각 섬, 그리고 섬의 해변과 내지에 사는 거북과 새들이 동일한 과에 속하는 종임에도 환경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그를 깊이 매료시켰다. 세인트 줄리안 항구의 첫 번째 정박에서, 다윈은 높은 화산바위 절벽의 흰띠가 조개껍질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피츠로이는 그에게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의 1권을 선물했는데,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융기와 침강을 한다는 육지의 균일적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윈은 라이엘이 주장한 것을 목격하고, 지질학에 대해 이론화하고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된다. 브라질에서 다윈은 열대우림을 보고 기뻐했지만, 노예주인이 노예를 함부로 대하는 노예제도를 보고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파타고니아에 있는 푼타아틀라에서는 절벽의 오래되지 않은 조개껍질 옆에서 멸종한 거대 포유류의 화석뼈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날씨나 재해로 인한 변화의 징조없이 최근에 멸종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였다.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메가테리움(Megatherium) 곧 땅에서 나무뿌리를 먹으며 사는 늘보의 화석을 치아와 뼈장갑의 연관관계를 이용해서 밝혀냈는데, 처음에는 그 지역에 있는 아르마딜로가 가지고 있는 장갑의 거대한 확장판처럼 보였다. 그 최초의 발견은 영국에 귀국했을 때 큰 흥미를 불러일어켰다. 그는 가우초(목동)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내륙으로 지질학을 탐사하며 화석을 더 수집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혁명의 시기에 원주민이나 식민지 사람 모두를 바라보는 사회적, 정치적, 인류학적 통찰을 가지게 했으며, 두가지 종류의 레아(남미 타조)가 분리되긴 했지만, 겹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그는 계단 모양의 널빤지 같은 평원과 해안에서 길러진 조개껍질을 목격했는데, 이것은 일련의 융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라이엘의 두 번째 권을 읽고, 종의 창조의 중심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발견과 라이엘의 부드러운 연속과 종의 멸종에 관한 개념에 도전하는 이론을 받아들였다. 비글호의 첫 번째 남미 탐사에서 푸에지언의 습격 비글호에는 세 명의 파타고니아 원주민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비글호의 항해에서 인질로 사로잡혔던 이들이었다. 첫해에는 잉글랜드에서 보냈고, 이번 여행에서는 선교사로 참여하였다. 다윈은 이들이 정감있고, 문명화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들의 친척들은 야생에서 길들인 동물들처럼 거칠고, 비참하고, 저급한 야만인들처럼 보았다. 다윈에게는 이들의 차이가 문명의 진보의 차이이지, 인종적 저능함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잉글랜드 사람과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전통이 다른 것 뿐이지, 인종이 우열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는 반(反)진화론 기독교인들이 다윈이 원주민들을 미개인으로 생각하여 인간과 유인원사이의 중간진화단계가 있었다고 믿었는데, 이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을 보고 철회했다는 주장이 근거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과학자 친구들과는 달리,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건널수 없는 다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속되었고, 선교는 포기를 하고 만다. 지미 버튼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아내를 얻어 다른 원주민들처럼 살았으며, 잉글랜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다윈은 칠레에서 지진을 경험했고, 높은 파고에 휩쓸린 홍합층을 포함한 육지가 막 솟아올랐던 징후를 보았다. 높은 안데스 산맥에서 조개껍질과 모래 해변에 자라는 여러 화식 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는 육지의 융기와 바다 섬의 침강 그리고 산호 보초 그들을 둘러싸 산호섬이 되었다고 이론화했다. 지리적으로 새로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다윈은 더 오래된 “창조의 중심”에 덧붙여진 야생에서 증거를 찾았고, 흉내지빠귀(mockingbird)가 칠레의 그것과 연관은 있지만, 섬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그는 그들이 왔던 섬마다 약간씩 변종된 거북이 껍질 형태가 있다는 것을 총독에게 들었지만, 식용으로 잡은 거북이를 잡아먹은 후에도 그것들을 수집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유대류 쥐캥거루와 오리너구리가 너무 특이해 보여 이 두가지가 원래부터 있어왔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 원주민(에보리진)들이 유머를 가지고 있는 즐거운 사람들이지만, 유럽 정착민들에 의해 감소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글호는 코코스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조사를 했으며, 그 조사는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피츠로이는 비글호 항해의 공식적인 보고서를 쓰고 있었는데, 다윈의 일기를 보고서는 한권의 평가서로 합치자고 제안을 한다. 다윈의 저널은 결국 자연사에 대해 분리된 세 번째 권으로 다시 쓰여진다. 케이프타운에서 다윈과 피츠로이는 존 허셀을 만났다. 그는 그 당시에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에 대한 찬사를 썼는데, “기적의 진행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자연”을 “미스테리 중 미스테리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여는 대담한 숙고이자, 다른 것에 의해 멸종된 종의 대체”라고 찬사를 했다. 배가 고향을 향해 갈 때 다윈은 노트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흉내지빠귀, 거북, 포크랜드 제도의 여우가 옳다면, "종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그런 사실들”(such facts undermine the stability of Species)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would를 undermine 앞에 덧붙였다. (‘종의 안정성을 뒤흔들 수도 있는 그런 사실들’로 번역된다.) 그는 이후 그런 사실들이 “종의 기원에 빛을 던져주는 것처럼 보였다!”고 썼다. 1836년까지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지질과 동식물에 대하여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 결과 생물의 진화를 확신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나온 화석과 현생 생물과의 비교,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동물의 지리적 변이에서 특히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세계 일주 탐험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결과 보고서 작성에 노력하였다. 1837년 다윈은 이른바 "적색 메모장" (Red Notebook)에 최초로 종의 변화 에 관한 착상을 기록한다. 찰스 다윈의 초상화 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콘월주의 팰머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윈은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스승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우가 1835년 그의 학생이었던 다윈의 편지를 모아 다윈의 지리학 편지라는 팜플렛을 만들어 배포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스러우스베리에 있는 고향집을 방문해 친척들을 만났고, 이후 식물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박물학자로 비글호에 소개를 해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캠브릿지로 서둘러 갔다. 헨슬로 교수와 함께 자신이 가져온 수많은 표본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윈의 항해 기록도 정리하여 1839년에 >로 출판했다. 다윈의 부친은 투자를 종용하여 그의 아들을 자선 모금을 할 수 있는 과학자로 만들었다. 흥분한 다윈은 그가 수집한 표본과 수집품을 설명해줄 과학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동물학자들은 저장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창고에 넣어둔 표본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10월 29일 찰스 라이엘은 그를 열렬히 맞았고, 곧 유망한 해부학자, 리처드 오웬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는 왕립외과대학에서 다윈이 수집한 화석 뼈 표본을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오웬은 다윈이 수집한 메가테리움과 같은 거대 멸종 육상 동물들의 거의 완벽한 두개골 등을 보고 놀랐다. 이러한 멸종 동물들은 남미의 현존하는 개체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다윈은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고, 그의 저널을 다시 쓰기 위해 캠브릿지에서 숙박을 했다. 그는 최초의 논문을 썼는데, 남미 대륙이 조금씩 융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37년 1월 4일 런던지질학회에 회람되었다. 같은 날, 그는 동물학회에 그의 포유류와 조류의 표본에 대한 발표를 했다. 조류학자 존 굴드는 곧 다윈이 검은새 그로스-비크와 핀치의 혼합 종이라고 생각했던 갈라파고스 새가 사실은 핀치의 12개의 분리된 종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2월 17일 다윈은 지질학회 평의회로 선출되었으며, 라이엘 의장은 다윈의 화석에 대한 오웬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를 했으며, 종의 지리적 연속성은 그의 동일과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 초 다윈은 라이엘의 과학 학회에 가입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하느님을 법의 프로그래머로 묘사한 찰스 바비지와 같은 전문가와 회합을 했다. 새로운 종의 “미스테리 중 미스테리”에 대한 존 허셜의 편지는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서 찾은 설명과 함께 널리 토론이 되었다. 다윈은 자로유로운 사상을 가진 형 해라즈머스 다윈과 함께 휘그당의 일원으로 머물렀다. 또한 인구과밀과 가난으로 복지가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논쟁적인 휘그당의 〈신빈민법〉(Poor Law reforms)의 근원이 되는 맬더스의 주장을 선동했던 절친한 작가 해리엇 마티노도 그의 신념의 동반자였다. 유니테리언으로서 그녀는 종의 변이를 뜻하는 급진적인 결론을 반겼다. 당시 이러한 설은 그랜트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영향을 받은 외과의사들이 신봉하던 것들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방어적인 성공회 사회 질서의 아나테마(anathema, 저주)였던 것이다. 굴드는 다윈을 만나서 각각 다른 섬에서 채집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흉내지빠귀가 변종이 아니라, 분리된 종이라고 말을 해준다. 그리고 다윈이 굴뚝새라고 생각했던 것도 또한 핀치류라고 알려줬다. 다윈은 섬마다 구별하여 핀치에 분류표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글호에 탑승한 로버트 피츠로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노트에서 자료를 찾아 섬마다 종을 분리했다. 그 두 마리 레아는 또한 다른 종이었고, 3월 14일 다윈은 그들의 분포가 남쪽으로 가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발표했다. 3월 중순경 다윈은 레아나 거대한 과나코를 닮은 이상한 마크라우케니아와 같이 멸종했거나, 살아 있는 종의 지리적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가능성”에 대해 적색 노트에서 고민 중이었다. 수명에 관한 그의 생각, 즉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노트 B에 7월 중순 경 적게 되었다.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고 지리학자로도 활동하며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1842년에는 런던 교외에 은거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엠머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했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분포와 구조〉를 발표했으며, 1842년 6월,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에 대한 35쪽짜리 초고를 연필로 썼다. 같은 해에 종의 발생 에 관해 착상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호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다. 이러한 활발한 학문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등 5개 언어에 능통한 부인 엠머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하다. cartoon depicting Charles Darwin as an ape (1871).jpg|섬네일|위오른쪽|1871년 당시 찰스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서 풍자한 영국의 신문 만평 1856년 진화론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되기 전에 앨프리드 월리스로부터 자기의 학설과 똑같은 취지의 논문이 온 것을 보고 놀랐으나,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배려로 1858년에 린네 학회 총회에서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하였다. 1859년 종의 기원 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자연선택 을 수립하였다. 그에 의하면 어떤 형태의 생물이 오랜 세월동안 환경에 맞추어서 서서히 모습을 변화해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발언 중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 는 부분은 당시 유럽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기독교가 그때까지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었고 다윈의 견해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냐 아니냐를 놓고 영국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다. 이 토론회에 다윈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찰스 라이엘, 앨프리드 월리스, 토머스 헉슬리 등이 나왔고, 기독교 측으로는 영국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가 나왔다. 논쟁은 생중계되었고, 논쟁 후반에 윌버포스가 진화론 지지 진영을 향해 그대의 할아버지쪽 선조가 원숭이냐, 할머니쪽 선조가 원숭이냐 라는 질문을 던졌고, 헉슬리는 부도덕한 인간을 할아버지라 하느니 정직한 원숭이를 할아버지라 하겠다고 응수하여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진화론의 찬반을 놓고 격렬한 논쟁의 장이 되었다. 그의 발표는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확고한 기반을 닦게 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차츰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현대 생물학은 변이에 관한 그의 견해의 대부분을 부정하고 있으나, 생존 경쟁설은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동물학·식물학 및 인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 와 사람의 진화에 대해 다루는 (1871) 등이 있다. 풍자 만화 2.jpg|섬네일|오른쪽|140px|1859년 당시 찰스 다윈을 풍자한 신문 만화 다윈은 흔히 진화론의 이론을 정리한 생물학자로만 알려져 있어서 당시 일부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당시 백인들의 흑인노예 제도에 격분하여, 노예 제도를 반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당시 비글호 선장과 노예제도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선장이 노예들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다윈은 이에 대해서 만약 주인이 없는 곳에서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백인 주인들이 노예들을 고문하는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한편 그의 종의 기원 발표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한 문제의 발언이 나오기 직전인 1856년 독일의 라인란트 주 뒤셀도르프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다윈이 죽기 전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윈이 친구에게 히브리 성서의 창조설을 진리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존재하나 이는 거짓이다. 다윈의 유언은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 이라는 말을 남기고 1882년 4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산호초의 확산과 그 구조 (The Structure and Distribution of Coral Reefs, 1842 London).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 (Geological Observation on the vocanic Islands, 1844 London).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 (Geological Obeservation on South America 1846 London). 《종의 기원》 ( On the Origin of Species )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1859 London)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The Descent of Man, 1871 London)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1872, London)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 (1881) Charles Darwin bibliography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 할머니 매리 하워드 아버지 로버트 워링 다윈 (1766 - 1848) 어머니 수잔나 웨지우드, 조지아 웨지우드의 딸 (1765 - 1817) * 형 처 엠머 웨지우드, 조수이자 외사촌 * 사촌 프랜시스 골턴 * 친족 엘스턴의 로버트 워링 다윈 자연선택 영국일간지 더 타임스는 2009년 2월 18일자 기사에서 진화론을 창시한 다윈의 뛰어난 창의력은 자폐증의 영향일 것으로 생각된다는 보도를 하였다. 더 타임스는 "다윈은 아마도 자폐증의 한 종류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던 것 같다. 다윈의 독창성은 이 자폐증 증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교의 마이클 피츠제럴드 정신의학 교수의 견해를 인용하였다. 피츠제럴드 교수는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으로 다윈은 놀라운 집중력, 보통 사람 이상의 집요함,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미세한 부분을 보는 엄청난 능력, 한 과제에 평생 매달리는 끝없는 열정, 독창적 연구를 하는 독립적인 정신 등을 보유했다."고 설명했다. 2010년 후반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IBM이 후원하는 계통학 추적 프로젝트 따라 다윈의 고손자인 크리스 다윈의 DNA 추출하여 Y염색체를 조사한 결과, 다윈의 조상은 4만5천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으로 이주한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일원으로 스페인 남부에 살다가 1만2천년 무렵에 영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다윈의 유전자는 ’R1b’라는 집단으로 분류됐는데, 크로마뇽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다윈은 비글호에 탑승해 여행하던 중, 남미에서 흡혈곤충에게 물려 샤가스병에 걸렸다고 한다. 다윈이 말년에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한 편지가 무려 19만 7천 달러에 낙찰되었다. 종의 기원 진화론 찰스 라이엘 이래즈머스 다윈 라마르크 진화이론의 사회적 영향 토머스 헉슬리 적자생존 용불용설 앨프리드 월리스 요한 칼 플로트 네안데르탈인 다윈주의( Darwinism) The Complete Work of Charles Darwin Online 분류:1809년 태어남 분류:1882년 죽음 분류:잉글랜드의 생물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지질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박물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철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불가지론자 분류:진화생물학자 분류:갑각류학자 분류:사상가 분류:세계일주자 분류:남아메리카 탐험가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동문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동물행동학자 분류:에든버러 대학교 동문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분류:코플리 메달 수상자 분류:다윈-웨지우드 가 분류:푸르 르 메리트 민사훈장 수훈자 분류:잉글랜드의 곤충학자 분류:19세기 생물학자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츠 칼리지 동문
프란츠 카프카 (, 1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5살의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의 독일어를 쓰는 중간계급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콘골드(1972)에 따르면 거대하고 이기적이고 거만한 사업가 로 그려져 있고, 카프카 자신에 따르면 강하고 건강하고 먹성 좋으며 목소리가 크고 자기 만족감에 충만한, 우세하고 끈기있고 인간 본성과 지식을 갖춘 진짜 카프카 로 그려진다. 헤르만 카프카는 야콥 카프카의 넷째 아들로 남부의 피세크(Pisek) 가까운 곳의 유대인 마을인 오섹(Osek)에서 프라하로 이주해, 외판원으로 몇 년간 일한 후 악세사리를 파는 소매점을 열었다. 사업상 상표는 jackdaw(카프카의 체코어)로, 소매점은 곧 15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성장한다. 그곳에서 헤르만 카프카는 포데브라디(Poděbrady)의 양조업자 야콥 뢰비(Jakob Löwy)의 딸 율리(1856-1943)와 결혼하였다.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 헤르만에게 아들 카프카는 헛소리나 해대는 몽상가에 불과했고, 어린 카프카의 눈에 아버지는 지독한 일벌레에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사업의 성공에만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더구나 어머니 율리도 남편의 사업을 도와 하루 12시간씩 일하느라 평일에는 부모 모두 집에 없었고, 카프카와 그의 형제들은 보모와 하인들이 돌아가며 키웠다. 카프카의 나이 두 살 때, 그리고 네 살 때 동생인 게오르크와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만다. 여섯 살 때인 1889년에는 여동생 가브리엘레(엘리,1889-1941)가, 또 1년 뒤에는 발레리(발리,1890-1942)가,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오틀리(오틀라, 1892-1943)가 태어났지만, 세 여동생은 폴란드 우치의 게토나 나치 강제 수용소로 흩어져 그곳에서 죽었다. 그 중 오틀라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뒤 다시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억세고 독선적이었던 헤르만은 틈만 나면 아들 카프카에게 "나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며 몰아 붙였고 카프카는 수모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상인의 기질이 보이지 않자 독일계 인문 중고등학교에 입학시킨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루돌프 일로비, 시오니스트 휴고 베르크만, 에발트 펠릭스 프리브람, 오스카 폴락 등 평생을 두고 교유하게 될 몇 사람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1901년 프라하의 카를 대학교(카렐 대학교)에 진학한 카프카는 주로 문학과 예술사 강의에 흥미를 보였으나, 아버지의 요구대로 법학을 택한다. 카프카는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웠으나 체코어도 유창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프랑스어와 그 문화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는 플로베르였다. 1889년에서 1893년 그는 정육시장에 있는 도이체 크나벤슐레(Deutsche Knabenschule)라는 남자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곳은 지금 프라하의 Masná 거리이다. 유태교육은 13세 때의 Bar Mitzvah 축제와 아버지와 1년에 4번 유태교 교회를 가는 것이 전부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엄격한 고전 지향적인 주립 김나지움(Altstädter Deutsches Gymnasium)에 입학한다. 이곳은 구시가지 광장(Stare Mesto)의 킨스키(Kinský) 궁전에 있다. 1901년 졸업시험(Matura exam)을 끝냈다. 1907년 11월 1일 그는 제네랄리(Assicurazioni Generali)라는 공격적인 이탈리아계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거의 9개월 정도 일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 8시~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 때문에 글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1908년 7월 15일 관두고 2주 후 보다 마음에 드는 보헤미안 왕국의 노동자 사고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그는 종종 보험 담당관으로서의 자신의 일을 밥벌이(Brotberuf, 브로트베루프)라고 불렀다. 1908년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 보험 회사로 자리를 옮긴 후로는 죽기 2년 전인 1922년까지 그곳에서 법률고문으로 근무하는 한편, 오후 2시에 퇴근하여 밤늦도록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일에 무관심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 동안 몇 번의 승진이 그가 열심히 일했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 그의 삶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는 안전헬멧을 발명했다. 1912년 이 일로 메달을 받았다. 보헤미아 왕국의 강철 밀 기계(steel mill) 사망률을 1000명당 25명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그는 연례 보고서를 직접 편집, 작성하는 일도 맡았으며, 그 사본을 친구들에게 보낼 만큼 자부심이 있었다. 병행하여 카프카는 문학작업도 해나갔다. 가까운 친구인 막스 브로드, 펠릭스 웰치 등이 속한 그룹을 친밀한 프라하 동아리(Der enge Prager Kreis) 로 부르기도 했다. 1911년 여동생 엘리의 배우자인 카를 헤르만이 카프카에게 석면공장(프라하 석면 헤르만 회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카프카는 처음에는 많은 자유시간을 그 일에 할애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시기 그는 이디시 극장(Yiddish theatre)의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막스 브로트는 이디시 극장에 대해 카프카를 염려했다. 그는 그 밖의 카프카의 모든 일에 지지를 보냈었다. 이 공연은 카프카가 유다이즘과 관계를 키워 가게 된 시작점이었다. 이 무렵 유럽의 노동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카프카는 공무 출장과 노동자들과의 접촉 등 이곳에서의 업무를 통해 관료기구의 무자비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이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내면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에서 개인의 소외와 무력감에 대해 보여주는 깊은 통찰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무덤 1912년 그의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를 만났다. 펠리체는 베를린에 있는 속기용 구술 녹음기 회사를 다니며 일하고 있었다. 그 후 5년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종종 만났다. 두 번이나 약혼하기도 했지만 1917년 결국 그들은 헤어졌다. 1917년부터 카프카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회복을 위해 쉬는 게 필요했고 가족들, 특히 그의 셋째 누이 오틀라가 그를 돌보았다. 그 자신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남들에게 혐오스럽게 인식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소년 같고 깔끔하고 꾸미지 않은 외모, 조용하고 멋진 태도, 꽤 지적이고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1920년대 초반 그는 체코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밀레나 예젠스카(Milena Jesenská)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23년 그는 가족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잠깐 가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정통 유태교 집안 출신으로 유치원 교사였다. 그녀는 게토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독립적이었다. 도라는 그의 연인이 되었고 카프카가 탈무드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줬다. 카프카가 임상적인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을 앓았음은 정설로 이해된다. 또 편두통, 불면증, 변비, 부스럼과 불안정증도 있었는데 보통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세들이 나타났다. 그는 채식이나 멸균되지 않은 우유(이 우유는 아마 결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의 대량 음용 등 자연요법 처방을 통해 여러 병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결핵은 악화되었다. 그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그 다음 비엔나에서 가까운 결핵요양소에 갔고 그곳에서 1924년 6월 3일 사망했다. 굶주림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의 목은 음식을 먹으면 너무 아픈 상태였다. 정맥영양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때라 영양공급을 할 방법이 없었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단식광대의 주인공과 닮은 운명이다) 그의 유해는 프라하로 보내졌고 1924년 6월 11일 지즈코프(Žižkov) 구역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카프카는 평생 불행하게 지냈다.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생전에 카프카는 출판업자들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발표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를 꺼렸으며, 발표된 작품들도 대중의 몰이해 속에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워줄 것을 부탁했을 만큼 쓰는 것 외의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타계후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카프카는 공식적인 종교에 대해 전생애에 걸쳐 무관심했다. 그의 글에서 유대인으로서의 특성을 결코 나타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대인 뿌리를 당황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지적으로 하시디즘(유대교 신비주의의 하나)이 그의 맘을 강하게 끌었다. 특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경험 같은 면 때문에 그랬다. 생애 마지막 10년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판결 , 화부 , 단식광대 , 시골 의사 등에 나타난 윤리적 절차적 진퇴양난의 상황은 법과 정의 같은 것에 관련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대한 카프카의 관심을 담고 있다. 가수 요제핀 에서의 논쟁적 해설자의 웃길 만큼 세심한 스타일은 랍비들의 수사적 관습을 은근히 나타낸다. 카프카의 동상 카프카는 생전에 몇 편의 단편만을 발표하였으며, 발표된 작품은 그가 작성한 작품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미완성으로 마감되었으며(예외는 《변신》 뿐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죽을 때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죽기전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유산 관리 집행인인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모두 파기시켜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보유하고 있던 많은 작품을 출간하게 감독하였다. 출간된 작품은 곧 주목받기 시작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인 도라 디아만트 또한 카프카의 유언대로 부분적으로 원고를 파기하였으나, 비밀리에 20편의 노트와 35편의 편지를 숨겨 가지고 있다가 193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압수당했다. 이 유실된 원고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912년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개제), 『변신』을 쓰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형지에서』와 『심판』 집필에 들어갔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1917년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여러 곳으로 정양을 다니게 되고, 1922년에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변신』 외에 대표작으로 『심판』 『성(城)』 『실종자』 『유형지에서』 『시골의사』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등이 있다. 카프카의 모든 출판된 작품은,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체코어로 쓴 몇편의 편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독일어로 쓰였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체코어에 유창했다. 그러나 그는 프라하 독일어로 저술했는데, 보헤미아의 수도인 그곳의 유태인과 비주류인 기독교인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는 프라하 독일어가 고지 독일어 (High German) 보다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하 독일어를 잘 사용함으로써 그는 그의 작품을 완전히 그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아주 긴 문장을 쓸 수도 있었다. 카프카는 마침표 바로 앞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장의 박력을 종종 주기도 했다. 그런 박력은 의미와 강조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번역자가 직면하는 또 다른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그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를 "판결" 마지막 문장에 쓴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그 순간 끝없는 교통행렬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와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이런 명백히 이중 의미를 지닌 Verkehr 란 단어를 쓴 이유는 카프카의 고백에 따르면 이렇다. 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한 고백에 따르면 그는 "격렬한 사정 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 번역에서는 교통 이란 번역밖에 다른게 뭐가 있겠는가? 한 작가의 삶이 물론 그의 문학 창작에 경우에 따라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카프카의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은 그의 문학 세계의 섬세한 면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의 문학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대충 간추려 본다면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상, 그의 약혼녀 펠리스 바우어, 유대인의 주체의식 등을 들 수 있겠다. 문학비평의 측면에서는 자주 거론된 "삶의 의미 추구"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짧게 손꼽을 수 있겠다. 카프카는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이렇게 강력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친구에게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첫대면 (1912년 8월 13일)을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펠리체 바우어가 이 짧은 기록에서 마치 카프카 소설의 한 인물처럼 묘사된 것에서 우리는 그녀의 존재가 카프카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아마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첫대면 후 카프카는 그야말로 억제할 수 없는 창작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약 한달 후 그는 하루밤 사이에 (9월 23일)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수도 없이 써 보낸 편지는 훌륭한 서한문학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오늘날 카프카의 섬세한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카프카를 알게 된 당시 독일의 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무여직원이었다. 아메리카 (Amerika) 혹은 실종자 (Der Verschollene) 심판 (Der Prozess) 성 (Das Schloß) 소송 (심판) (Der Prozess) http://www.gutenberg.org/etext/7849 지방에서의 결혼예식 (Hochzeitvorbereitungen auf dem Lande) 관찰 (Betrachtung) 변신 (Die Verwandlung) http://www.gutenberg.org/etext/5200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 단식 예술가 (Der Hungerkünstler) 시골 의사 (Ein Landarzt)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Franz Kafka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분류:1883년 태어남 분류:1924년 죽음 분류:체코의 소설가 분류:체코의 무신론자 분류:유대계 오스트리아인 분류:유대계 체코인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프라하 출신 분류:프라하 카렐 대학교 동문 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 분류:실존주의자 분류:19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분류: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 분류:오스트리아의 아나키스트
안니카 소렌스탐 안니카 소렌스탐 ( , 1970년 10월 9일 ~ )은 스웨덴의 여자 골프 선수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록들을 남긴 골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스톡홀름 출생으로, 12세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미국 애리조나 대학에 유학 중이던 1992년에 세계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우승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93년에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 1994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LPGA) 신인상을 받았으며, 다음 해인 1995년에는 3승을 거둬 상금왕에 올랐다. 2003년 5월에는 여성 선수로는 58년 만에 미국 프로 골프(PGA) 투어에 초대받았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뱅크 오브 아메리칸 콜러니얼 (총상금 500만 달러)에 출전한 그녀는 2라운드 합계 5오버파 145타 96위에 머물러 컷 오프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같은 해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분류:1970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스웨덴의 여자 골프 선수 분류:애리조나 대학교 동문 분류: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헌액자 분류:스웨덴의 무신론자 분류:LPGA 투어 골프 선수 분류:스웨덴계 미국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 (,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에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마리아는 원래 모두 7남매를 낳았다. 장남인 루드비히 마리아는 태어나자 마자 곧 죽었고, 둘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셋째 카를과 넷째 요한을 낳은 후에 낳은 자녀들도 모두 일찍 죽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살림을 맡아 준 가정부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부양은 베토벤의 몫이었다. 첫째 동생인 안톤 카를(Anton Karl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베토벤 전기 작가인 세이어(Thayer)는 바가텔집 작품33과 가곡 작품52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 카를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스 요한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다음에는 형에게 돈을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로부터는 더 멀어졌다. 상재가 대단해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고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 4개월, 즉 8살이었다. 다시말해 아들 베토벤의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2살을 속였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하였다. 이때문에 베토벤은 자신의 실제나이를 2살적게 알고 살게 되는데 훨씬 후에야 자신의 실제 나이를 알게 된다. 또 아버지는 베토벤에게 피아노 연주를 시켜 번돈으로 술을 사먹으며 흥청망청 썼다. 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게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데 도와주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는데,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이었으나(1781년), 나중에 악장 안드레아 루체시가 지휘하는 궁정 예배당에 고용되었다.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이때부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의대생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는 그를 폰 브로이닝 집안(von Breuning, 나중에 베겔러는 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에 소개해 주었다. 베토벤은 종종 폰 브로이닝 집안에 갔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문학과 고전문학을 접하였으며, 몇몇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의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집안에 비교한다면 편안한 곳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평생 친구이자 재정지원자가 되는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 된다.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오토 얀(Otto Jhan)은 모차르트가 베토벤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87년 베토벤의 첫 빈 여행에 관하여 확실하게 단정짓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모차르트를 만났는지, 만났다면 어느정도 대화를 나누었는지, 또는 모차르트에게서 레슨을 받았는지의 여부도 확인할만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토 얀이 주장한 것과 같이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만났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근거 또한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당시의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어서 사소한 방문객은 잘 만나주지도 않았던 터라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은 시골청년 베토벤에게 관심을 보였을리 없고, 모든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리라는 것이 근래의 통설이며 국제음악계에서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것을 증명해줄만한 물질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선제후의 도움으로 1792년 베토벤은 빈으로 갔다. 아마 1790년대 말 당시 런던으로 가던 요제프 하이든이 성탄절 쯤에 본에서 머물 때 그에게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2곡의 장송칸타타(WoO.87,WoO.88) 악보를 보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어 1792년 7월에 런던에서 빈으로 귀환한 뒤부터 베토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자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즉시 하이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이든은 그에게 만족했지만, 베토벤은 실제로 가르침을 받다보니 이전의 위대한 우상이었던 거장 하이든에게 여러가지로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하이든이 고치고 돌려준 베토벤의 악보를 본 요한 셍크(Johann Schenk, 1753-1836)가 미처 하이든이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주자 하이든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베토벤은 마침내 "하이든에게서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하이든의 느긋하고 여유있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가르치는 상대가 젋은 혈기에 급한 성격으로 알려진 베토벤이었으니 둘이 서로 잘 맞지 않았음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후 베토벤은 당시 빈에서 뛰어난 이론가로 통하던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가르침을 받고, 모짜르트의 연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성악곡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793년말, 결국 베토벤은 하이든 곁을 떠나지만 두 사람간의 불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베토벤이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던 C단조 3중주곡을 출판하지 말라고 하이든이 충고한 것 때문에 베토벤은 심한 상처를 받았던 일도 있듯이,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개운치 않은 앙금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1794년, 하이든이 두 번째 영국 여행을 떠나자 베토벤은 선생님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1795년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곡을 완성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그해 8월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때 카를 리히노브스키 후작 저택의 연주회에서 직접 들려주었다. 이 3곡의 소나타가 작품2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하이든과 베토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토벤 쪽에서 말하자면 하이든은 과거의 업적을 놓고 볼 때 역시 위대한 대선배였다. 단지 그는 자신의 향학열을 만족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위와 연륜을 갖춘 하이든 쪽에서 볼 때도 신출내기 청년 음악가의 불평이나 불만 따위에 일일이 대응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정이 두 사람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막아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피아노 3중주 1~3번 작품1과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품2를 작곡한 것 외에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WoO작품번호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을 볼수록 작곡 양식이 성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어느 변주곡집에서 그의 교향곡 3번의 주제와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찾아낸 바 있다.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성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관계는 1802년(또는 1809년까지일수도 있다.)까지 이어졌다.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 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 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 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1803년의 베토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하였으며,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임금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았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자유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와 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의 부탁으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과 2번과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는데, 쿠퍼는 이를 "성격의 강렬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 역동성, 음조 면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었다" 고 평가하였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 2월 2일에 베토벤은 교향곡 1번을 초연하기 위하여 도시 극장을 임대하였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의 7중주,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이들 곡은 당시 출판되지 않은 상태였다) 등 다양한 곡목을 공연하였다.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차이퉁(Allgemeine musikalische Zeiting) 지에서 "오랫동안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묘사했던 이 연주회는 어려움도 겪었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연주자들이 독주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목관 5중주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인다.)무치오 클레멘티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자신의 초기 작품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그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멜러(Josef Willibrord Mähler)가 그린 1804년의 베토벤.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인 백작부인 안나 브륀스비크(Anna Brunswik)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교습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맏딸 요제피네(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와 관계를 맺어, 그때부터 수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교습이 끝난 직후 요제피네는 요제프 다임(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백작과 혼인하였으며, 베토벤은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도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제자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페르디난트 리스 를 가르쳤는데, 그는 작곡가가 되어 나중에 그들의 만남을 다룬 책인 "베토벤은 기억한다"을 썼다. 젊은 카를 체르니 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체르니 자신도 저명한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 있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 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 서울방송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에서는 베토벤이 청각장애를 겪은 이유를 납중독일 것으로 헤아렸다. 백만불 미스터리의 보도내용에 따르면,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 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 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 때 이 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납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 이로써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중독임이 밝혀졌다.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임을 배려한 여가수 카롤리네 웅거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고, 관객들의 환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1815년의 베토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그가 사용한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청력상실은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청력을 잃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수첩에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고,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그의 비서 안톤 신틀러(Anton Schindler)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 버리거나 수정하였다.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 베토벤 이전까지의 음악가와 귀족간의 관계는 종속관계였다. 바하, 헨델, 하이든, 모짜르트 등등의 작곡가들도 마찬가지 였다. 하이든도 에스테르하지 가문 소속의 음악가였지만 에스테르가문의 후계자가 워낙 음악에 관심이 없던 탓에 말년이 돼서야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모짜르트도 귀족과의 종속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아르코 백작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은 끝에 결국 종속관계에서 벗어났지만, 그 덕분에 후원을 받지 못하여 가난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모짜르트의 말년 작품들이 더 성숙했던 이유는 귀족과의 종속관계에서 귀족의 요구대로 작곡했던 틀을 벗어나 좀더 자신의 감정이 반영된 영향이 큰 이유였다. 베토벤도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는데, 베토벤은 역대 음악가들 중에서 최초로 가장 많은 후원을 받았을 뿐더러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이 워낙 평이 좋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이름의 붙여진 판(van)이라는 호칭이었다. Van 이라는 호칭은 그 당시에는 네덜란드 출신 귀족에게 붙여지는 표시였고, 그의 할아버지 루드비히가 17살 때 독일로 이주한 네덜란드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많은 게르만계의 독일,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베토벤에게만큼은 같은 동급으로 대우를 해주었다. 베토벤의 이름에 붙여진 Van 칭호 덕분에 그의 초창기 빈 데뷔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쉬운 편이었다. 베토벤은 귀족들로부터 동급 지원을 받았었을 뿐더러, 음악가로서의 가치를 높여주게 되어 나중에는 베토벤 스스로도 귀족들의 존경과 인사를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베토벤》(계몽사)에 따르면,1812년 베토벤과 그가 존중하는 시인인 괴테가 테플리쯔(Teplitz) 온천에서 처음으로 만나 같이 산책을 하던 중에 자신들의 앞으로 지나가는 왕후들의 행렬을 보고 괴테는 먼저 인사를 했지만, 베토벤은 그들이 먼저 인사를 하기를 기다렸으며 왕후들에게 먼저 인사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로 인하여 괴테와 베토벤은 친분을 깊게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나중에 베토벤이 베티나 브렌타노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아 전해지게 된다. 이렇게 괴테와 헤어진 뒤에 좋아하는 시인들로 호우머, 쉴러, 클롬슈토크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괴테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베토벤의 이런 사고방식은 후대 음악가 및 예술가들의 인식을 바꿔놓는데 크게 기여를 하여 베토벤 사후에 여러 음악가들이 귀족의 종속관계가 아닌 음악가, 즉 하나의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받을 길을 가는 발판을 마련해주게 되어 후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상당히 존경했던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베토벤의 후원으로 돌아와서, 그의 데뷔 초창기에는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었으나,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등 그의 초기 후원자들 몇몇은 작곡을 요청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함과 더불어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인 루돌프 대공이었을 터인데, 그는 1803년 혹은 1804년에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1824년까지 만났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곡을 헌정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대공 3중주(1811년)과 대작 장엄 미사(Missa Solemnis, 1823)도 있다. 루돌프도 답례로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품 한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 악우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보관되어 있다. 왕실 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악장(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Kinsky) 백작과 롭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롭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어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은 훗날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의 거처는 불과 2km 떨어져 있는 거리에 살았지만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못해 쉽게 만나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소심한 성격 또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만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그 후 슈베르트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허약한 목소리를 듣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슈베르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검에 따르면 머리카락에 수은이 치사량 이상 함유되어 있어서 독살의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베토벤의 작품은 보통 세 시기, 즉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1802년 정도까지를 초기로, 그 이후부터 1814년 정도까지를 중기로, 그리고 1815년 무렵부터를 후기로 본다. 초기, 즉 고전기는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평을 넓힌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첫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 첫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도 들어있다. 중기, 즉 영웅기는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면모를 나타내는 대 편성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부터 교향곡 8번까지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 열정 등), 또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들 수 있다. 후기는 1815년경부터인데,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가령 현악 사중주곡(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9번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은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 밖의 이 시기 작품으로는 장엄 미사, 마지막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 대 푸가,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등)이다.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러와 영국의 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와 E. T. A. 의적인 민속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향곡 1번 C 장조, Op. 21 (1800년) *교향곡 2번 D 장조, Op. 36 (1803년) *교향곡 3번 E flat 장조 “영웅”, Op. 55 (1805년) *교향곡 4번 B flat 장조, "낭만적", Op. 60 (1807년) *교향곡 5번 c 단조, "운명", Op. 67 (1808년) *교향곡 6번 F 장조 “전원”, Op. 68 (1808년) *교향곡 7번 A 장조, "대곡", Op. 92 (1813년) *교향곡 8번 F 장조, "소곡", Op. 93 (1814년) *교향곡 9번 d 단조 “합창”, Op. 125 (1824~5년) *교향곡 10번 E flat 단조 Bia. 838 (1824~7년) 한때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으로 알려졌던 “예나” 교향곡(C 장조)은 프리드리히 비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미완성 교향곡으로 알려진 10번 교향곡은 베리 쿠퍼에 의해 단악장 교향곡으로 재구성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89년에 초연되었다. 피아노 협주곡 0번 E flat 장조 WoO. 4 (1784년) 피아노 협주곡 1번 C 장조 Op. 15 (1796년 ~ 1797년) 피아노 협주곡 2번 B flat 장조 Op. 19 (1798년) 피아노 협주곡 3번 c 단조 Op. 37 (1803년) 피아노 협주곡 4번 G 장조 Op. 58 (1807년) 피아노 협주곡 5번 E flat 장조 “황제”, Op. 73 (1809년) 피아노 협주곡 6번 D 장조 Hess. 15 (1814 ~ 1815년) (미완성) (감상 https://www.youtube.com/watch?v=fx9SlluALSw ) 피아노 협주곡 Op. 61a (바이올린 협주곡을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작품. 베토벤이 직접 카덴차를 붙임)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론도 B flat장조 WoO.6 (1793년) 바이올린 협주곡 D 장조, Op. 61 (1808년) 바이올린 협주곡 C 장조 WoO.5 (1792년, 1악장 259마디만 남음)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1번 G장조 작품40 (1802년)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2번 F장조 작품40 (1798년) 삼중협주곡 C 장조 Op. 56 (1805년) 오보에 협주곡 F장조 Hess.12 (1793년, 단편) 교향곡 > OP. 91 "전쟁" (1810년) (전쟁교향곡으로 알려진 곡이며, 2파트로 되어있어 구성상으로는 최초의 교향시임) 합창환상곡 C단조 Op. 80 헌당식 서곡 Op. 124 (다장조) 에그몬트 서곡 Op. 84 (사장조) 코리올란 서곡 Op. 62 (다단조) 레오노레 서곡 제 3번 Op. 72b (다장조) 초기 현악 사중주 * Op. 18 (6곡) ** 현악 사중주 1번 F 장조 (1799년) ** 현악 사중주 2번 G 장조 (1800년) ** 현악 사중주 3번 D 장조 (1798년) ** 현악 사중주 4번 c 단조 (1801년) ** 현악 사중주 5번 A 장조 (1801년) ** 현악 사중주 6번 B flat 장조 (1801년) ** 현악 사중주 17번 F 장조 Hess.34 (1802년, 피아노 소나타 9번 편곡판) 중기 현악 사중주 * 현악 사중주 7번 - 9번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Op. 59 (1806년) ** 현악 사중주 7번 F 장조 ** 현악 사중주 8번 e 단조 ** 현악 사중주 9번 C 장조 * 현악 사중주 10번, 11번 ** 현악 사중주 10번 E flat 장조 “하프”, Op. 74 (1809년) ** 현악 사중주 11번 f 단조, “세리오조”, Op. 95 (1810년) 후기 현악 사중주 및 대푸가 * 현악 사중주 12번 F flat 장조, Op. 127 (1825년) * 현악 사중주 13번 B flat 장조, Op. 130 (1825년) * 현악 사중주 14번 c sharp 단조, Op. 131 (1826년) * 현악 사중주 15번 a 단조, Op. 132 (1825년) * 현악 사중주를 위한 대푸가 B flat 장조, Op. 133 (1824년 - 1825년)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대푸가, Op. 134 (1826년) * 현악 사중주 16번 F 장조, Op. 135 (1826년) 현악 오중주 C 장조, Op. 29 (1801년) 현악 오중주 C 단조, Op. 104 (1817년) 현악 오중주 C 장조, Hess. 41 "마지막 악상" (1826년)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 (1797년) 피아노 삼중주 4번 B flat장조 Op. 11 "거리의 노래" (1797년) 피아노 삼중주 5번 D 장조 Op. 70-1 "유령" (1808년) 피아노 삼중주 6번 E flat장조 Op. 70-2 (1808년) 피아노 삼중주 7번 B flat장조 Op. 97 "대공" (1811년) 피아노 삼중주 8번 E flat장조 WoO. 38 (1791년) 피아노 삼중주 9번 B flat장조 WoO. 39 (1812년) 피아노 삼중주 10번 E flat장조 Op.44 "테마와 14개의 변주곡" (1792년) 피아노 삼중주 11번 G 장조 Op. 121a, “카카두 변주곡” (1816년) 피아노, 플룻, 바순을 위한 3중주 G장조 WoO.37 (1786년) 목관7중주 Op.20의 피아노 3중주 편곡판 Op. 38 (1803년) 현악5중주 Op.5의 피아노 3중주 편곡판 Op.63 (1806년) (타 작곡가에 의해 편곡) 피아노 4중주 1번 E flat 장조 WoO. 36-1 피아노 4중주 2번 D 장조 WoO. 36-2 피아노 4중주 3번 C 장조 WoO. 36-3 Op. 12 (1798년) * 바이올린 소나타 1번 D 장조 *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 장조 * 바이올린 소나타 3번 E flat 장조 바이올린 소나타 4번 a 단조, Op. 23 (1801년) 바이올린 소나타 5번 F 장조 “봄”, Op. 24 (1801년) Op. 30 (1803년) * 바이올린 소나타 6번 A 장조 * 바이올린 소나타 7번 c 단조 * 바이올린 소나타 8번 G 장조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 장조 “크로이처”, Op. 47 (1803년) 바이올린 소나타 10번 G 장조, Op. 96 (1812년) 바이올린 소나타 11번 A 장조, Hess. 46 (1792년, 단편) 첼로 소나타 1번, 2번, Op. 5 (1796년) 첼로 소나타 3번 A 장조, Op. 69 (1808년) 첼로 소나타 4번, 5번, Op. 102 (1815년) 미뉴에트곡집 WoO 10 그 중에 2번 사장조가 유명함 미사곡 C장조 작품86 (1807년) 장엄미사곡 D장조 작품123 (1823년)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작품85 (1803년) 피델리오 작품72 (1판은 1805년, 2판은 1806년, 3판은 1814년에 작곡) 베스타의 불 Hess 115 (1803년, 미완성) 겔레르트에 의한 6개의 노래 작품48 (1803년) 6개의 연가곡집 "멀리있는 연인에게" 작품98 (1816년) 대표 가곡 "아델라이데" 작품46 (1795년) 대표 가곡 "그대를 사랑해" WoO. 123 (1795년) 대표 가곡 포함하여 200여곡 작곡 작곡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작품112 (1815년) 영광의 순간 작품136 (1814년) 황제 요제프 2세의 장송칸타타 WoO. 87 (1790년) 황제 레오폴드 2세 즉위축제 칸타타 WoO. 88 (1790년) 전원 칸타타 "즐거운 건배의 노래" WoO. 103 (1814년) 그외 다수 칸타타 작곡 아아, 믿지 못할 사람이여 작품65 (1796년) 키스의 실험 WoO. 89 (1792년) 아가씨와 사이좋게 WoO. 90 (1792년) 그외 다수 아리아 작곡 코리올란 서곡 작품62 (1807년) 에그몬트 작품 84 (1810년) 아테네의 폐허 작품 113 (1811년) 명명축일 작품 115 (1815년) 슈테판왕 작품 117 (1811년) 헌당식 작품124 (1822년) 그외 총 11곡 작곡 스코틀랜드 민요집 (25곡) 작품108 (1816년) 아일랜드 민요집 (25곡) WoO. 152 (1813년) 아일랜드 민요집 (20곡) WoO. 153 (1813년) 아일랜드 민요집 (12곡) WoO. 154 (1813년) 웨일즈 민요집 (26곡) WoO. 155 (1814년) 스코틀랜드 민요집 (12곡) WoO. 156 (1818년) 여러나라 민요집 (12곡) WoO. 157 (1815년) 그외 다수 민요 작곡 카논 "연인의 품에 즐겁고 편한하게" WoO. 159 (1795년) 그외 100여곡의 캐논 작곡 Op. 2 (1796년) * 피아노 소나타 1번 f 단조 * 피아노 소나타 2번 A 장조 * 피아노 소나타 3번 C 장조 피아노 소나타 4번 E flat 장조, Op. 7 (1797년) Op. 10 (1798년) **피아노 소나타 5번 c 단조 **피아노 소나타 6번 F 장조 **피아노 소나타 7번 D 장조 피아노 소나타 8번 c 단조 “비창”, Op. 13 (1798년) * Op. 14 (1799년) * 피아노 소나타 9번 E 장조 * 피아노 소나타 10번 G 장조 피아노 소나타 11번 B flat 장조, Op. 22 (1800년) 피아노 소나타 12번 A flat 장조 “장송행진곡”, Op. 26 (1801년) Op. 27 (1801년) * 피아노 소나타 13번 E flat 장조 “환상곡풍” * 피아노 소나타 14번 c sharp 단조 “월광” 피아노 소나타 15번 D 장조 “전원” Op. 28 (1801년) Op. 31 (1802년) * 피아노 소나타 16번 G 장조 * 피아노 소나타 17번 d 단조 “템페스트” * 피아노 소나타 18번 E flat 장조 “사냥” Op. 49 (1792년) * 피아노 소나타 19번 g 단조 * 피아노 소나타 20번 G 장조 피아노 소나타 21번 C 장조 “발트슈타인”, Op. 53 (1803년) * 안단테 파보리 -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두 번째 악장의 원곡, WoO. 57 (1804년) 피아노 소나타 22번 F 장조, Op. 54 (1804년) 피아노 소나타 23번 f 단조 “열정”, Op. 57 (1805년) * 피아노 소나타 24번 F sharp 장조 “테레제를 위하여”, Op. 78 (1809년) 피아노 소나타 25번 G 장조 “뻐꾸기”, Op. 79 (1809년) 피아노 소나타 26번 E flat 장조 “고별”, Op. 81a (1810년) 피아노 소나타 27번 e 단조, Op. 90 (1814년) 피아노 소나타 28번 A 장조, Op. 101 (1816) 피아노 소나타 29번 B flat 장조 “함머클라비어”, Op. 106 (1819년) 피아노 소나타 30번 E 장조, Op. 109 (1820년) 피아노 소나타 31번 A flat 장조, Op. 110 (1821년) 피아노 소나타 32번 c 단조, Op. 111 (1822년)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 D장조 작품6 (1797년) 피아노 소나타 33~35번 WoO, 47 "선제후" (1783년) 6개의 테마와 변주곡 F장조 작품 34 (1802년) 15개의 변주곡과 푸가 E flat장조 작품 35 "영웅 변주곡" (1802년) 터키행진곡을 테마로 한 6개의 변주곡 D장조 작품 76 (1809년) 디아벨리 왈츠 테마를 주제로 한 33개의 변주곡 C장조 작품 120 (1823년,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과 어깨를 견줄만한 대작임) 그외 총 21곡의 피아노 변주곡 작곡 바가텔 1~7번 Op. 33 (1802년) 바가텔 8~18번 Op. 119 (1821년) 바가텔 19~24번 Op. 126 (1824년) 바가텔 25번 A단조 WoO.59 (Grove Op.173) "엘리제를 위하여" (1810년) 바가텔 26번 F장조 WoO.57 (Grove Op.170) "재미있는 안탄데" (1803년, 원래 피아노 소나타 21번의 2악장으로 작곡) 바가텔 27번 C단조 WoO.52 (1795년, 원래 피아노 소나타 7번의 악장으로 작곡) 바가텔 28번 C장조 WoO.56 (1804년) 모든 장조를 위한 2곡의 전주곡 Op. 39 (1803년) 네 손을 위한 행진곡 1~3번 Op. 45 (1803년) 론도 1~2번 Op. 51 (1797 ~ 1798년) 환상곡 F단조 Op. 77 (1809년) 폴로네이즈 C장조 Op. 89 (1814년) 그외 200여곡 이상의 다수 소품들이 있음 영국국가의 의한 7개의 변주곡 바장조 WoO.78 # 독일어 Wikipeidia(WoO를 거의 배제한)에서의 목록 2012년 12월 17일 현재의 Liste der Werke Beethovens https://de.wikipedia.org/w/index.php?title=Liste_der_Werke_Beethovens&oldid=111778021 # Online listing of the WoO catalogue Beethoven s music without Opus number - WoO http://www.lvbeethoven.com/Oeuvres/ListWoO.html # 영어 Wikipedia에서의 WoO, Anh, Hess, Biamonti 목록 2013년 1월 6일 현재의 Works without opus numbers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compositions_by_Ludwig_van_Beethoven#Works_without_opus_numbers Clive, Peter., Beethoven and His World A Biograph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1, Cooper,Barry., Beethoven Oxford University Press, US, 2008 Cross, Milton., The Milton Cross New Encyclopedia of the Great Composers and Their Music, Doubleday, Garden City, NJ, 1953 Landon, H C Robbins., Beethoven a documentary study, Macmillan, 1970 Lockwood, Lewis., Beethoven The Music And The Life, W. W. Norton, 2005, Solomon, Maynard., Beethoven , 2nd edition, Schirmer Books, New York, 2001, Stanley, Glenn.(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Beethoven, 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0, Thayer, A. W., The Life of Ludwig Van Beethoven Vol,Beethoven Association, 1921 Kerman, Joseph; Tyson, Alan; Burnham, Scott G. "Ludvig van Beethoven", Grove Music Online, ed. L. Macy (accessed 29 November 2006), grovemusic.com. # # Beethoven-Haus Bonn 의 web-site Bonn 소재 베토벤 생가 의 홈피 http://www.beethoven-haus-bonn.de/sixcms/detail.php?id deutsch # Raptus Association (베토벤 관련) Beethoven der grosse Meister http://www.raptusassociation.org/indexg.html # NNDB 인명사전 Profile, Books & Parallels 중에서 베토벤의 bibliography 부분 http://www.nndb.com/people/871/000024799/bibliography 분류:1770년 태어남 분류:1827년 죽음 분류:독일의 작곡가 분류:고전주의 작곡가 분류:19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분류:오페라 작곡가 분류:오스트리아에 거주한 독일인 분류:18세기 독일 사람 분류:19세기 독일 사람 분류:1778년 데뷔 분류:독일의 고전 피아노 연주자 분류:오르간 연주자 분류:본 출신 분류:청각 장애 음악가 분류:독일의 로마 가톨릭교도
빈 (, , , , , 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도나우강이 도시 내부를 흐르며 인구는 약 182만 명이다. (2013년 기준) 1683년 경의 빈 원시 시대부터 현재의 빈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고, 기원전 15년에 로마군이 경계선을 세워 “빈드보나”라고 이름을 지었다. 게르만족이 거기를 차지할 때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800년대 후반에는 마자르족이 빈을 통치하였다. 독일 황제군이 900년대 후반에 빈을 정복하였고, 1150년에는 바벤베르크 가문의 주요 관저가 되었다. 1273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리로서 번영하였다. 교통의 요지여서 11세기에는 십자군의 통로로서 융성하였고, 15세기 이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하였다. 전성기 시절엔 인구 200만을 넘나드는 대도시였다.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두 차례(1529년, 1683년) 빈 문턱 앞까지 왔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군이 두 번이나 빈을 공략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빈에서 《꿈의 해석》을 출간한 1900년경, 빈은 다소 고색창연하기는 하지만 우아한 대도시로 비쳐졌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대성당의 고딕식 첨탑은 바로크 스타일의 여러 교회를 보듬고 있었다. 법원 건물은 화려와 우울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접시 오른쪽에 은제 식기를 놓고 스페인 식으로 식사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군이 빈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 소련군의 공세로 벌어진 빈 공세는 베를린 공방전 다음으로 치열하였다. 1955년까지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점령 아래 있었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인이 대부분이며, 소수의 체코인, 헝가리인도 살고 있다. 인네레슈타트(Innere Stadt) 제1구 레오폴트슈타트(Leopoldstadt) 제2구 란트스트라세(Landstraße) 제3구 비덴(Wieden) 제4구 마르가레텐(Margareten) 제5구 마리아힐프(Mariahilf) 제6구 노이바우(Neubau) 제7구 요제프슈타트(Josefstadt) 제8구 알저그룬트(Alsergrund) 제9구 파보리텐(Favoriten) 제10구 짐머링(Simmering) 제11구 마이들링(Meidling) 제12구 히칭(Hietzing) 제13구 펜칭(Penzing) 제14구 루돌프스하임퓐프하우스(Rudolfsheim-Fünfhaus) 제15구 오타크링(Ottakring) 제16구 헤르날스(Hernals) 제17구 베링(Währing) 제18구 되블링(Döbling) 제19구 브리기테나우(Brigittenau) 제20구 플로리드스도르프(Floridsdorf) 제21구 도나우슈타트(Donaustadt) 제22구 리징(Liesing) 제23구 시내에는 슈테판 대성당 등 각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이는 교회와 쇤브룬궁,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벨베데레궁, 호프부르크 등 문화 시설이 많다. 이처럼 문화와 관광의 중심지인 동시에, 도나우 강변에는 오스트리아 유수의 공업지대가 펼쳐져 있다. 또한 음악의 도시로도 알려졌으며, 베토벤을 비롯한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하이든 그리고 말러 등의 음악가들이 여기서 활약을 하였다.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빈 소년 합창단이 유명하다. 2011년에는 빈 카페하우스 문화가 유네스코(UNESCO)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96년, "쇤브룬궁과 정원 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2001년에 시내 중심시 및 그 이 등록대상에 추가되어, 에는 이 "빈 역사 지구"로 명명되었다. 그것은 몇 가지 역사적인 건물, 성 슈테판 성당 및 문화 기관을 포함한다. 호프부르크 왕궁(Hofburg) 알베르티나 (Albertina)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 빈 국립 오페라 극장(Wiener Staatsoper) 칼스 교회(Karlskirche)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 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Parlamentsgebäude) Viena2.jpg|호프부르크 왕궁 대성당 de Schönbrunn Vienne.jpg|쇤브룬 궁전 국립 오페라 극장 vespere.jpg|칼스 교회 Parlament Athena.jpg|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 Vienna June 2006 009.jpg|벨베데레 궁전 비엔나 유엔 사무국 유엔 빈 사무국을 비롯하여 빈에 본부가 있는 국제 기구는 다음과 같다. *유엔 산업 개발 기구 (UNIDO) 국제 원자력 기구(IAEA) *유엔 난민 기구 (UNHCR) *유엔 국제 무역법 위원회 (UNCITRAL) 유럽 안보 협력 기구 (OSCE) 석유 수출국 기구(OPEC)(1965년 개장) 헝가리 부다페스트 (1990년) 러시아 모스크바 (1991년) 우크라이나 키예프 (1991년)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1993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1994년) 폴란드 바르샤바 (2001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003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2005년) 체코 브르노 (2006년) 공식 웹사이트 비엔나에 대한 정보 빈에 대하여 네이버 캐스트 여행 - 빈 분류:오스트리아의 도시 분류:오스트리아의 주 분류:오스트리아의 주도 분류:유럽에 위치한 수도 분류:도나우강 주변 도시 분류:오스트리아의 세계유산
도나우강 (, , 은 독일 남부에서 발원하여 루마니아 동쪽 해안을 통해 흑해로 흘러가는 길이 2,860km의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도나우강은 독일 남부의 브레게강과 브리가흐강이 합류하면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평원을 지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이른다. 여기서 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면서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를 통과하는데 이곳은 철문(the Iron Gate)이라고 불리는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하류에 이르면 저지대인 루마니아 남부의 왈라키아 평원을 지나게 된다. 흑해에 가까워지면서 도나우강은 도브루자 구릉지대를 만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다시 동쪽으로 흘러 비로소 흑해로 유입한다. 강 하구에서는 세 개의 주요 분류로 나뉘면서 삼각주를 형성하는데 그 면적은 약 5,000km2이다. 강이 흐르는 지역에 따라 불리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독일, 오스트리아 도나우강 (Donau) 슬로바키아 두나이강 (Dunaj) 헝가리 두너강 (Duna) 크로아티아 두나브강 (Dunav) 세르비아 두나브강 (Дунав / Dunav) 불가리아 두나프강 (Дунав) 루마니아, 몰도바 두너레강 (Dunăre) 우크라이나 두나이강 (Дунаи) 독일의 라인 마인 도나우 운하가 1992년 건설된 이후 도나우강은 북해의 로테르담으로부터 흑해의 술리나까지 전 유럽을 가로지르는 3500km 수로의 일부가 되었다. 도나우강으로 운송된 화물량은 1987년에 1950년 수준의 13.3배인 9천 180만 톤으로 집계되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 시기에 있었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과정에서 세르비아 교량 3곳이 파괴되어 도나우강 운행이 한동안 힘들어졌다가 2002년 그 잔해가 모두 치워졌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유명한 왈츠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An der schönen, blauen Donau ) 가 있다. 울름 - 독일 빈 - 오스트리아 브라티슬라바 - 슬로바키아 부다페스트 - 헝가리 베오그라드 - 세르비아 분류:독일의 강 분류:루마니아의 강 분류:몰도바의 강 분류:불가리아의 강 분류:세르비아의 강 분류:슬로바키아의 강 분류:오스트리아의 강 분류:우크라이나의 강 분류:크로아티아의 강 분류:헝가리의 강 분류:유럽의 국제 하천 분류:루마니아-불가리아 국경 분류:루마니아-세르비아 국경 분류:루마니아-우크라이나 국경 분류: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분류: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 분류:오데사주의 강 분류: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강 분류:바이에른주의 강 분류: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강 분류:빈의 강 분류: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강
망델브로 집합 망델브로 집합 ()은 브누아 망델브로가 고안한 프랙탈의 일종이다. 망델브로 집합은 다음 점화식으로 정의된 수열이 발산하지 않는 성질을 갖도록 하는 복소수 c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z0 = c (단, zn은 복소수.) :zn+1 = zn2 + c 이를 복소수를 사용하지 않고 정의하려면 모든 복소수를 실수부와 허수부로 나누면 된다. 만약 zn을 (xn,yn)로, c를 (a,b)로 바꾸면 위 식은 다음과 같이 된다. :(x0,y0)=(0,0) :xn+1 = xn2 - yn2 + a :yn+1 = 2 xn yn + b (단, xn,yn,a,b는 실수.) 가 된다. 이 집합의 이름은 이를 고안한 프랑스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의 이름을 따라서 만들었졌는데, 원래 독일어(또는 이디시어) 이름대로 만델브로트 집합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다른 망델브로 집합 표기로 f(z) = z2 + c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함수로 표현하면 f(z) = z2 + c가 된다. 망델브로 집합을 실제로 그릴 때에는 점화식에 따라 zn을 계산하면서 수열이 발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대수적으로 검사하게 된다. zn의 절댓값이 2보다 크다면(즉, xn2+yn2>22이라면) zn은 발산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때의 c는 망델브로 집합에 속해 있지 않는다. 이 때의 2라는 값은 발산하는 수열의 계산을 미리 막아 주는 역할을 하며, 경계값이라고 부른다. 반면 망델브로 집합 안에 속해 있는 점의 경우 zn은 발산하지 않으므로 무한히 계산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적절한 n값 이후에 계산을 멈추어야만 한다. 무한히 계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론적인 망델브로 집합이 아닌 이에 근사한 집합만 얻을 수밖에 없다. 수학적인 의미에서 망델브로 집합을 그린다면 집합 안의 부분과 밖의 부분 두 가지만 의미가 있으며 단 두 가지 색으로만 칠해져도 충분하다. 하지만 많은 프랙탈 생성 소프트웨어에서는 처음으로 경계값을 벗어난 zn의 n값에 따라 망델브로 집합 바깥의 영역을 다른 색으로 칠한다. 예를들어 가장 빨리 발산하는 점은 어두운 녹색으로, 그리고 발산속도가 느려질수록 더욱더 밝은 녹색으로 칠하면 이론적으로 발산속도가 늦어질수록 그 c값은 망델브로 집합에 가깝다는 뜻이며 이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망델브로 집합에 색을 입히는 방법에 따라서 예술적인 그림이 나올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한 프랙탈 예술도 있다. frame 망델브로 집합은 통계적인 자기 유사성을 지닌다. 망델브로 집합의 경계의 하우스도르프 차원은 2차원이다. (망델브로 집합 자체도 물론 2차원이다.)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Julia set)의 일종의 "지도"가 된다. 망델브로가 그려지는 복소 평면의 각 점이 쥘리아 집합의 초기값과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있는데, 망델브로 집합 내부의 점에 대응하는 쥘리아 집합은 연결 공간인 반면, 바깥의 점들은 연결 공간이 아닌 쥘리아 집합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복소수의 다른 점화식으로 정의되는 다른 프랙탈의 경우도 망델브로 집합에 대응되는 것과 쥘리아 집합에 대응되는 것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도 종종 해당되는 프랙탈의 망델브로 집합과 쥘리아 집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식으로 정의되고 "피닉스 집합(phoenix set)"이라고 불리는 프랙탈의 경우, 우리는 x와 y의 초기치를 (x1,y1) (0,0)으로 놓고 "피닉스의 망델브로 집합Mandel-type phoenix"을 그릴 수 있고 임의의 c값에 대해서 "피닉스의 쥘리아 집합Julia-type phoenix"을 그릴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합에서도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의 "지도"가 되며 망델브로 집합의 안의 점에 대응되는 쥘리아 집합은 connected이며 바깥의 점에 대응되는 것은 disconnected인 성질이 보존된다. 한 개의 변수 c 대신 여러 개의 변수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 때의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의 완전한 지도가 되기 위해서 2차원 이상의 차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프랙탈과 카오스 , 안대영 교우사 (2015.3.5) 프랙탈을 찾는 사람들 "Mandelbrot set - online generator" Ultra Fractal - 가장 대중적인 소프트웨어 (윈도) Fractint - 거의 모든 플랫폼 지원. (도스, 윈도, 리눅스, 유닉스, ...) " Makin Magic Fractals" ChaosPro - (윈도) Xaos - 실시간 확대/축소 가능. (오픈소스 - 윈도, 맥킨토시, 리눅스, etc.) Apophysis - 가볍고 다루기 편함. 분류:프랙탈
쥘리아 집합. 쥘리아 집합 ()은 가스통 쥘리아가 고안한 프랙탈의 일종이다. 쥘리아 집합은 주어진 복소수 c에 대해서 다음 점화식에 따라 정의된 수열이 발산하지 않는 성질을 갖도록 하는 복소수 z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zn+1 = zn2 + c 위의 점화식은 만델브로 집합의 것과 같지만, 만델브로 집합은 z0=0+0i일 때 z를 발산하지 않게 하는 c의 집합이라는 점이 다르다. 즉, z와 c의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쥘리아 집합은 만델브로 집합과 동일하게 자기유사성을 가지며 가까운 두 점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초기 조건의 민감성도 가진다. 쥘리아 집합을 생성하기 위한 간단한 프로그램 예제 (Windows, 370 kb) 프랙탈과 카오스 , 안대영 교우사 (2015.3.5) 만델브로 집합_복소수와 프렉탈 분류:프랙탈
수도 (首都) 또는 서울 은 한 국가의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말한다. 수도에는 대부분 중앙 정부가 소재해, 국가원수 등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거점으로 두는 도시이다. 다만 중앙 정부의 소재와는 별도로 그 나라의 상징적 존재로 인정되고 있는 도시가 수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국가에 따라서는 여러 개의 수도가 있기도 하며, 수도에 실제 행정부가 위치하지 않거나, 주요 국가 기관이 여러 도시에 나뉘어 위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부는 프리토리아에, 입법부는 케이프타운에, 사법부는 블룸폰테인에 있다. 네덜란드의 헌법은 암스테르담을 수도로서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 정부와 대법원은 헤이그에 위치해 있다. 무조건 최대도시라고 수도는 아니다. 최대도시가 수도가 아닌 나라는 다음과 같다. 1.중화인민공화국 수도=베이징 최대도시=상하이 2.베트남 수도=하노이 최대도시=호치민 3.미국 수도=워싱턴 최대도시=뉴욕 4.오스트레일리아 수도=캔버라 최대도시=시드니 5.스위스 수도=베른 최대도시=취리히 현재 대한민국은 헌법에 명시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서울이 수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였으나,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수도에 대한 고유어 표현은 서울 이다. 그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수도(首都)를 뜻하는 신라어 서라벌 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은 쇠鐵-벌源 이나 설새 新, 金-벌땅 羅, 城 의 뜻이라는 주장이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후 이를 셔ㅸㅡㄹ(shovl) 이라고 읽게 되었고, 그 외에도 박제가는 저서 북학의에서 서울을 徐蔚 으로 음차해 사용했다. 수도 이름순 수도 목록 나라 이름순 수도 목록 수도권
쿠마라지바 () 구마라습 , 구마라십 , 구마라집 , 344~413)는 구자국(龜玆國 현재의 신장 쿠차에 속함) 출신의 불교 사상가다. 한자 표기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 (羅什), 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중국 후진(後秦) 시대 장안(長安)에 와서 약 300권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게 유명하며, 그 불경 번역은 불교 보급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 삼장법사(三蔵法師)로 불리며, 훗날 현장(玄奘) 등 많은 삼장이 등장하였다. 쿠마라지바는 현장과 함께 2대 대역성(大訳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訳経家)로 꼽는다.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鳩摩炎)의 아들로 어머니는 쿠차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이며, 쿠차국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서역(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에서 대승(大乘)소승(小乘)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열심히 대승을 설파하여 그 명성은 중국 내부에까지 퍼졌다.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다. 군사(軍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여광을 돕기도 했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써 취급했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의 잔학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년 동안 여광과 여찬(呂纂) 밑에서 양주(涼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서기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었다.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쿠마라지바의 역문은 유려하여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般若經) 연구는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Sutra book.jpg|250px|섬네일|오른쪽|쿠마라지바가 번역한 아미타경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공적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불설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30권)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유마경』(維摩經) 3권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 *『중론』(中論) 4권 일부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의 번역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고 번역된 뒤에도 「 신역 」(新譯)이라 불린 현장의 번역에 대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 구역 」(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 쿠마라지바는 번역에 대해 "이미 입에서 한 번 씹은 밥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같아, 원래의 맛을 잃는 것은 물론 심지어 구역질까지 느끼게 한다"고 했으며, 한역에 대해서도 "천축의 풍습은 문채를 몹시 사랑하여 그 찬불가는 지극히 아름답다. 지금 이것을 한문으로 옮겨 번역하면 그 뜻만 얻을 수 있을 뿐 그 말까지 전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조선 중기의 문인 서포 김만중은 쿠마라지바의 말을 인용해, 문학의 가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음성언어)에서 시작해 글과 노래(즉 시각언어)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이라며, 한글로 쓰여진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칠언고시 같은 중국식으로 번역하려는 것에 대해 자기(조선)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중국)의 말을 배워서 표현해 봤자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고 당시의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즉 한자로 적지 않은 순수한 모국어)가 소위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속할지는 모르지만 표현의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고 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 3권 - 여산(廬山)의 승려 혜원(慧遠)과 주고 받은 문답집이다. *『출삼장기집』(出三蔵記集) 권14 *『고승전』(高僧傳) 권제2(대정신수대장경 제50책 No.2059) *『진서』(晉書)「열전」 오쵸 에니치(横超慧日), 스와 요시즈미(諏訪義純) 공저 『라지바』(羅什)(신정판新訂版 인물 중국의 불교人物中国の仏教, 오쿠라 출판大蔵出版, 1991년) 분류:344년 태어남 분류:413년 죽음 분류:후량 (오호 십육국)의 불교 신자 분류:후진 (오호 십육국)의 불교 신자 분류:중국의 승려 분류:중국의 번역가 분류:중국의 불교 선교사 분류:불교 철학자 분류:불경 번역가
동물행동학 (動物行動學, ethology)은 20세기 초엽에 동물학의 한 연구 분야로 시작되었다. 동물의 행동, 행태, 습성 뿐 아니라 진화, 유전, 학습, 환경 등의 관찰을 통하여 동물행동에 대해 이해하려 하는 학문이다. 일반 대중 및 학계에 동물행동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한 대표적 학자로는 1973년 동물 행동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네덜란드 생물학자 니콜라스 틴베르헌(Nikolaas Tinbergen)과 오스트리아 생물학자들인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와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를 들 수 있다.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고 행동의 인과관계 분석, 행동의 생존값, 행동의 개체발생 및 계통 발생 검토, 네 가지의 큰 과제로 나뉜다. 유전학, 생리학, 신경생물학 등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동물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최첨단 장비와 수학적 통계 분석이 수반되어야 하는 정밀 학문이다. 동물행동학에서는 행동의 정밀한 관찰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개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는 관찰은 충분치 않다. 우리 개는 초당 한 걸음씩 성큼성큼 걷고 있다. 머리는 어깨 관절 높이와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긴장이 풀린 듯 귀가 옆으로 40도 각도로 쳐져 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뒤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 와 같이 구체적이고 정확한 관찰을 해야한다. 동물은 아주 짧은 동안에도 많은 수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다. 이러한 많은 수의 행동들을 관찰해야 하는 학문이 동물행동학이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는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작가, 저널리스트 그리고 철학자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가 주아브 보병 연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1913년 알제리의 몬도비(Mondovi)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1842년생의 노동자였고 아버지는 1885년 생이다. 뤼시앵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인 마른 전투에서 1914년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를 가졌다. 그는 스페인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카뮈는 어린 시절 알제리에서 가난하게 지냈다.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그리고 두명의 외삼촌들과 살았다. 1923년 그는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리세 에 들어갔으나 빈부격차를 크게 느꼈고 어머니가 하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했다. 후일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하였다. 재학 중에도 각종 임시직을 전전하였으며 대학 중퇴 이후에도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과 같은 잡다한 일을 하였다.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난다. 그는 1935년 플로티누스(Plotinus)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 과정을 끝냈다. 그 동안에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가난했지만 멋부릴줄 아는 멋쟁이였으며 축구팀 골키퍼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다. 훗날 외모면에서 종종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되곤 했다. 1935년 카뮈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에스파니아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공산당 동료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결과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았고 1937년 당에서 제명당했다. 그는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혐오했다. 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으나 서로간의 불륜과 시몬의 모르핀 중독으로 인해 1940년 이혼한다. 1940년 카뮈는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결혼했다. 비록 그는 프랑시느를 사랑했지만 카뮈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 부부의 관계는 비끄덕 거렸다. 심지어 프랑시느가 1945년에 케서린과 잔이라는 쌍둥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혼외 관계를 가졌으며 그중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배우 마리아 카자레스와의 관계도 있었다. 이러한 카뮈의 불륜은 프랑신에게 더 고통을 주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 (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이 극단은 에키프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사회주의자를 위한 소품을 썼으며,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 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이다. 카뮈는 1939년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참전을 신청했지만 폐결핵으로 프랑스 군대입대를 거절당했다. 이후 카뮈는 파리스와(Paris-Soir) 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위 포니 워(Phony war)라고 불리는 시기에 카뮈는 반전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1월 15일 파리에서 베르마흐트(독일육군)가 저지른 가브리에 페리의 처형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한 저항을 결심했다. 그 후 그는 보르도로 이동하여 그 근교에서 파리스와의 활동을 끝냈다. 이 해, 그의 첫 책인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저술하였다. 그는 1942년에 잠시 동안 알제리의 오랑으로 돌아갔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카뮈는 지하에서 같은 이름의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가담하였다. 이 그룹은 나치에 저항하여 활동하였고 여기서 카뮈는 보샤르(Beauchard)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물게 1945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이때부터 카뮈는 장폴 사르트르를 알게 되었다. 전쟁 이후에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생제르망 가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를 자주 찾기 시작했다. 카뮈는 프랑스적 사고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비록 그는 좌익의 정치학을 배웠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강한 비난으로 인해 사르트르와 소원해지게 되었다. 1949년 카뮈의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은둔상태로 살았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담은 《반항하는 인간》를 발표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당시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의 기분도 상하게 했다. 이러한 반응은 카뮈를 화나게 했고 그는 연극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철학에 대한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시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과 《패스트》와 같은 많은 작품에서 설명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사상이다. 그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 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작품으로는 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1944)와 (1945)로 성공을 얻었다. 의 각색이 바로에 의해 상연되고, 그 다음에는 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 칼데론의 , 도스토옙스키의 등이 있다. 그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장 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50년 카뮈는 인권 운동에 자신의 전력을 다 바쳤다. 1952년 UN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UNESCO의 임원직을 사임했다. 1953년 그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의 방식을 비난했다. 1956년 그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방식의 파업분쇄와 소비에트 연방이 10월 헝가리 반란을 진압한데 대하여 저항의 소리를 냈다. 카뮈는 그의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주장했다. 사형 반대 운동에 대한 그의 주목할 만한 기여로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하여 쓴 에세이가 있다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여전히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던 카뮈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 (pied-noirs)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인“유럽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 서방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간의 공존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뒤에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는 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 하였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였다. 알베르 카뮈의 묘비 카뮈는 상스(sens)에서의 차 사고로 Villeblevin의 작은 마을에 있는 Le Grand Fossard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1960년 1월 4일에 사망했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전철 티켓이 발견되었다. 카뮈가 전철로 여행을 떠나려 했음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는 전철 대신에 자동차로 떠났다. 동시에 카뮈는 젊은 시절 가장 잘못된 죽음의 방법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포셀 베가 차의 운전자, 미첼 갈리마르, 카뮈 책의 출판자이자 친한 친구, 역시 사고에 대해 곤란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카뮈는 the Lourmarin Cemetery, Lourmarin, Vaucluse, Provence-Alpes-Côte d Azur, France에 매장되었다. 카뮈 사후, 그의 두개의 작품이 유작으로서 출판되었다. 그중 첫 번째는 이방인과 흡사한 Meursault이라 불리는 인물의 특징을 그린 행복한 죽음이라 명명된 책이었는데 197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관계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두 번째 유작은 미완성의 소설로 카뮈가 죽기 직전까지 지은 최초의 인간이다. 이 소설은 알제리에서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1995년에 출판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일반적인 종교들이 우리가 신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부조리를 지적하는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부조리를 개인적인 경험의 범주로 인지하였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ㅇ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 《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1942년 카뮈는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인 《이방인》을 출판하였고 이어 동시에 부조리에 관한 문학적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출판하였다. 그는 또 부조리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에 관한 연극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1945년까지 상영되지 못했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4개의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것은 1943년 the Revue Libre에서, 두 번째 것은 1944년 Cahiers de Libération에서, 세 번째 것은 1945년 Libertés신문에서, 출판되었다. 4개의 모든 편지들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1945년에 작품집 《레지스탕스, 반역, 그리고 죽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카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독자에게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과 같은 이원성에 관하여 독자에게 발표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행복이란 무상한 것으로 인간의 상태는 하나의 필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적이지 않고 삶과 행복의 위대한 진가를 반영하면서 이 분석을 행하고 있다. 신화(Le Mythe)에서 이 이원성은 페러독스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가 좀 더 위대해지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죽을 것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무의미해 질 것임을 알고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원성과 함께 사는 한(나는 나의 불행한 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또한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페러독스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나는 나의 삶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동시의 나의 삶은 무가치하다.) 신화에서 카뮈는 우리는 어떻게 부조리를 경험하고 어떻게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의 삶은 여기에 가치를 두는 데 의미를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무가치하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그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다. 칼리쿨라는 끝내 자신의 부조리 논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고의로 야기한 암살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카뮈가 아마 칼리쿨라의 부조리적 이성이 틀렸다고 제안하는 할지라도 이 연극의 반 영웅은 작가가 뫼르소의 마지막 대사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는 대중의 토론을 고양시켰다; 그의 다양한 제안은 우리를 부조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기여하도록 유혹하였다. 협동, 울력, 일치와 같은 개념은 카뮈에 관한 중요한 열쇠이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하였고 확실한 대답으로서의 니힐리즘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그리고 인간은 무관심, 객관, 때때로의 모호함,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나 예비되고 불안정한 인간의 행동에 의하여 창조된 부조리적 세계의 신하라는 실존주의가 자주 취하는 관점을 따르고 있다. 카뮈는 자신의 삶을 통틀어 독일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하여 수많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반대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을 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였다. 나치 점령자와 프랑스의 이적자들에게 카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카뮈의 잘 알려진 사르트르와의 결별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있다. 카뮈는 근본주의자의 이름안에 사르트르에 의해 신봉되는 대중정책이 전체주의에 호응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는 공산주의 경찰국가에 대한 맹공뿐만이 아니라 대중혁명정책에 관한 의문을 드러낸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카뮈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했으며, 1957년 감정에 사로잡혀 1956년 헝가리 혁명 일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소련군의 잔인한 진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행복한 죽음》 A Happy Death ( La Mort heureuse ) (1936–1938, 사후 출간 1971) 《이방인》 The Stranger / The Outsider ( L Étranger ) (1942) 《페스트》 The Plague ( La Peste ) (1947) 《전락》 The Fall ( La Chute ) (1956) 단편집《적지와 왕국》 Exile and the Kingdom ( L exil et le royaume ) (collection) (1957) 《최초의 인간》 The First Man ( Le premier homme ) (집필중 사망하여 미완성, 1995) 기독교적 형이상학과 신플라톤 철학 Christian Metaphysics and Neoplatonism (학위논문) (1935) 《안과 겉》 Betwixt and Between / The Wrong Side and the Right Side ( L envers et l endroit ) (모음집, 1937) 《결혼》 Nuptials ( Noces ) (1938) 《시지프 신화》 The Myth of Sisyphus ( Le Mythe de Sisyphe ) (1942) 《반항하는 인간》 The Rebel ( L Homme révolté ) (1951) 《시사평론1》 Actuelles I, Chroniques 1944-1948 (1950) 《시사평론2》 Actuelles II, Chroniques 1948-1953 (1953) 《시사평론3》(알제리 연대기) Actuelles III, Chroniques algériennes, 1939-1958 (1958) 《아스튀리의 반란》 Révolte dans les Asturies (1936), 공저 《칼리굴라》 Caligula (1938) 《오해》 The Misunderstanding ( Le Malentendu ) (1944) 《계엄령》 The State of Siege ( L État de Siège ) (1948) 《정의의 사람들》 The Just Assassins ( Les Justes ) (1949) 《정령》 Les Esprits (피에르 드 라리베의 원작을 번안) (1953) 《십자가에의 예배》 La Dévotion de la croix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의 원작을 번안) (1953) 《흥미있는 경우》 Un cas intéressant (디노 부차티의 원작을 번안) (1955) 《한 수녀를 위한 진혼곡》 Requiem for a Nun ( Requiem pour une nonne , 윌리엄 포크너 원작을 번안) (1956) 《올메도의 기사》 Le Chevalier d Olmedo (로페 데 베가의 원작을 번안) (1957) 《악령》 The Possessed ( Les Possédés , 도스토옙스키 원작을 번안) (1959)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s à un ami allemand (1948), 공저의 부분으로 출간 《여름》 L Été (1954) 《단두대에 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Guillotine ( Réflexions sur la guillotine ) (Extended essay, 1957) 《태양의 후예》 La Postérité du soleil (사진집) (1965) 《스웨덴 연설》 Discours de Suède (1958) 《작가수첩1》 Notebooks 1935–1942 (1962) 《작가수첩2》 Notebooks 1943–1951 (1965) 《작가수첩3》 Notebooks 1951–1959 (1989) 《여행일기》 Journaux de voyage (1978) 《젊은 시절의 글》 Écrits de jeunesse d Albert Camus (1973) 김화영이 번역하고 책세상에서 출간된 카뮈의 전집 # 1권 (1931~1939) 문학청년 시절의 미발표 원고 모음인《젊은 시절의 글》, 투명하고 단순한 문체의 초기 산문《안과 겉》, 작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소설《행복한 죽음》,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산문《결혼》, 절대성에 대한 갈망을 비장하게 그린 희곡《칼리굴라》 # 2권 (1939~1942) 카뮈가 천착한 첫 번째 주제인 인간과 세계의 ‘부조리’를 담은 소설《이방인》과 철학적 에세이《시지프 신화》그리고 작품 구상을 위한 메모와 철학적·문학적 단상을 기록한 《작가수첩1》 # 3권 (1944~1947) 부조리 연극의 대표작《오해》, 나치의 폭력에 대한 저항 의지를 드러낸 네 편의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첫 번째 장편소설《페스트》 # 4권 (1947~1950) 희곡《계엄령》, 희곡《정의의 사람들》,《여행일기》,《시사평론1》 # 5권 (1950~1951) 《작가수첩2》, 에세이《반항하는 인간》 # 6권 (1951~1957) 지중해적 사유를 보여주는 ‘태양’의 에세이《여름》, 카뮈 문학의 원숙기에 쓰인《전락》, 사형 제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담은《단두대에 대한 성찰》, 카뮈의 유일한 연작 단편집《적지와 왕국》 # 7권 (1957~1959) 1959년 12월까지의 기록을 담은《작가수첩 III》,에세이《스웨덴 연설》, 에세이《문학비평》 Fonds Albert Camus - Cité du livre d Aix en Provence 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 The Albert Camus Society 분류:1913년 태어남 분류:1960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작가 분류:프랑스의 소설가 분류:프랑스의 수필가 분류:프랑스의 극작가 분류:프랑스의 철학자 분류:프랑스의 인문주의자 분류:프랑스의 아나키스트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스페인계 프랑스인 분류:알제리계 프랑스인 분류:프랑스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레지스탕스 관련자 분류:장폴 사르트르 분류: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 분류:프랑스 공산당원 분류:프랑스의 공산주의자 분류: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분류:실존주의자 분류:알제리에 거주한 프랑스인 분류:프랑스의 무신론자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Sérgio Vieira de Mello, 1948년 3월 15일 - 2003년 8월 19일)는 브라질 외교관으로, 30년 이상 유엔에서 활동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태생인 지 멜루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면,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캄보디아, 동티모르, 보스니아 등에서 근무하며, 분쟁조정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이라크에 특별대사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중 2003년 8월 19일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차랑 폭탄테러에 희생되었다. 테러에 희생되기 전 그는 일부에 의해 코피 아난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 비에이라 지 멜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세르지우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리우데자네이루 출신 분류:프리부르 대학교 동문 분류:브라질의 테러 피해자 분류:차량 폭탄으로 죽은 사람 분류:브라질의 유엔 직원
미하엘 안드레아스 헬무트 엔데 (, 1929년 11월 12일 ~ 1995년 8월 28일)는 독일의 작가이다. 바이에른주의 최남단인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태어나 슈투트가르트 근처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판타지 문학으로 유명하다. 뮌헨의 연극학교를 졸업한 후 배우, 극작가, 연출가, 비평가로서 다양하게 활동하였다. 1960년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1973년 동화소설 《모모》를 발표하여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엔데의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3,000만 부 이상의 재고가 판매되고 약 40종류 언어로 번역되었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시에 사로잡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전세계에 수천만의 독자를 가진 엔데에 대해 세계의 언론들은 동화와 환상소설을 통해 금전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고발한 철학자로 평가하였다. 작품으로는 , , , , , 등이 있다. 1960년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Jim Knopf und Lukas, der Lokomotivführer)》 1962년 《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Jim Knopf und die wilde Dreizehn)》 1967년 《Die Spielverderber (The Spoilsport)》 1972년 《끈기짱 거북이 트랑퀼라 (Tranquilla Trampeltreu die beharrliche Schildkröte)》 1973년 《모모 (Momo)》 1975년 《Das Kleine Lumpenkasperle》 1978년 《Das Traumfresserchen (Translated into English by Gwen Mars as The Dream Eater in 1978)》 《Lirum Larum Willi Warum Eine lustige Unsinngeschichte für kleine Warumfrager》 1979년 《끝없는 이야기 (Die unendliche Geschichte)》 1981년 《Der Lindwurm und der Schmetterling oder Der seltsame Tausch (1981)》 1982년 《Die zerstreute Brillenschlange》 《Die Schattennähmaschine》 《Das Gauklermärchen (The Juggler s Tale)》 《Written with Erhard Eppler and Hanne Tächl - Phantasie/Kultur/Politik Protokoll eines Gesprächs (Fantasy/Culture/Politics transcript of a conversation)》 《Die Ballade von Norbert Nackendick; oder das nackte Nashom》 1983년 《거울 속의 거울 (Der Spiegel im Spiegel)》 1989년 《Der satanarchäolügenialkohöllische Wunschpunsch)》 1984년 《Norbert Nackendick; oder das nackte Nashom》 《Der Spiegel im Spiegel (1986) (Translated into English by J. Maxwell Brownjohn as Mirror in the Mirror a labyrinth in 1986)》 《Filemon Faltenreich》 《Der Goggolori (1984)》 1985년 《Archäologie der Dunkelheit (Archaeology of Darkness)》 1986년 《Trödelmarkt der Träume Mitternachtslieder und leise Balladen (Midnight songs and quiet ballads)》 1988년 《Ophelias Schattentheater (Translated into English by Anthea Bell as Ophelia s Shadow Theater in 1989)》 《Wrote the libretto for Die Jagd nach dem Schlarg》 1989년 《Der satanarchäolügenialkohöllische Wunschpunsch (Translated into English by Heike Schwarzbauer and Rick Takvorian as The Night of Wishes or, The Satanarchaeolidealcohellish Notion Potion in 1992)》 《Die Vollmondlegende (1989) (The Legend of the Full Moon)》 1990년 《Die Geschichte von der Schüssel und vom Löffel》 1992년 《자유의 감옥 (Das Gefängnis der Freiheit)》 《Der lange Weg nach Santa Cruz (The Long Road to Santa Cruz)》 1993년 《Der Teddy und die Tiere》 《Der Rattenfänger)》 1998년 《망각의 정원 (Der Niemandsgarten)》 외 다수 미하엘 엔데 (SFReaders.org https://web.archive.org/web/20110202123233/http://www.michaelende.de/ www.michaelende.de 독일어 https://web.archive.org/web/20040513115029/http://www.michael-ende-gymnasium.de/treffpunkt/michael-ende/start.htm 독일어 분류:1929년 태어남 분류:1995년 죽음 분류:독일의 판타지 작가 분류:독일의 아동문학 작가 분류:신화창조 작가 분류:인지학자 분류:연방공로십자소수장 수훈자 분류: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출신 분류:위암으로 죽은 사람 분류:20세기 독일 사람
파울 카를 파이어아벤트 (, 1924년 1월 23일 ~ 1994년 2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이다. UC 버클리에서 철학 교수를 역임하며 현대 과학철학에 크게 공헌했다. 과학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방법론을 거부하였으며, 과학적 지식을 다른 종류의 지식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폴 파이어아벤트는 1924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에서 초등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1943년 그는 독일군에 입대하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군 복무 기간 중 그는 동부 전선에서 척추에 유탄을 맞았고, 남은 생애 동안 다리를 절어야 했다. 1947년에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학, 역사, 사회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951년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서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로 가서 칼 포퍼 아래에서 연구하였다. 처음에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과학관을 존경하였지만 뒤에 포퍼의 과학관을 철저히 비판하게 된다. 1955년 이후 1990년 까지 UC 버클리, 오클랜드 대학교, 서섹스 대학교, 예일 대학교, 런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ETH 취리히 등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마지막엔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의 두 군데에서 동시에 교수직을 가지고 있었다. 은퇴 이후 1990년에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에서 명예교수직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스스로 아나키즘적, 다다이즘적이라고 평가했다. 파이어아벤트는 런던 정치경제대학의 러커토시 임레와 함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주제로 책을 쓰려 했다. 이 계획은 1974년 러커토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이 맡은 부분을 《방법에 반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1989년 UC 버클리를 떠난 파이어아벤트는 1991년 학계에서 은퇴한 후 1994년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자들이 항상 사용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정해진 방법론이야말로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함으로써 과학적 진보를 막는다고 생각했다. 파이어아벤트는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한 이론이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이성적이 아닌 미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갈릴레오 등의 과학사적 사례 연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노력하였다. 파이어아벤트는 귀납을 강조하는 논리실증주의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부각된 칼 포퍼의 반증주의 양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관찰이나 반증주의적 논박 모두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의 경계 조건을 설정하려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로 보았다. 라카토쉬 임레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에 대해서는 이론 자체의 모호함이 자신이 주창한 아나키즘적 과학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파이어아벤트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중세 기독교,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교조라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과학의 억압으로부터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의 발전을 인문사회적 결과로 해석하는 스트롱 프로그램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과학지식만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며, 이러한 지식의 확보는 과학의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과학주의에 반대한다. 즉, 과학주의가 권력과 손을 잡고 행정과 교육과 정치 등 인간 생활 전반을 규제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사회는 다양성이 허용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존중받는 ‘민주적 상대주의’이다. 그는 ‘자유를 증대하고 풍요로운 삶과 보람된 삶을 살려고 하는 노력’을 옹호하고 ‘전인적으로 발전된 인간을 길러내고 또 길러낼 수 있는 개성의 함양’을 지지한다. 그리고 조상들이 유일하게 참되다고 생각 한 종교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듯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과학의 속박에서 이 사회를 해방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이어아벤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사회 이다. 만약 과학에 어떤 보편적인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포퍼 등 기존의 과학철학자들로부터 급진적인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성이여 안녕(Farewell to Reason) 이 책은 이성 중심, 과학 중심의 근대 이후 서구 세계관에 대한 일종의 선전 포고이며, 과학이 가장 신뢰할 만한 지식이라는 상식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과학이나 신화나 미신, 점성술과 비교해서 결코 우월한 지식일 수 없다는 파이어아벤트의 결론은 고유한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 과학은 논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기 때문에 몇가지 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 방법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것이다. 방법에의 도전(Against Method Outline of an 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 과학철학 상대주의 칼 포퍼 토머스 쿤 러커토시 임레 방법론적 아나키즘 분류:1924년 태어남 분류:1994년 죽음 분류: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과학철학자 분류:인식론 학자 분류:오스트리아의 아나키스트 분류:빈 출신 분류: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동문 분류: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교수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 분류:오스트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올림포스 12신을 묘사한 18세기 후반 Monsiau 작품.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 12신 , 또는 도데카테온 (, dōdeka, "열둘" + θεοί, theoi, "신들")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 판테온의 주역 열두 신을 말한다. 숫자 12는 고대 바빌론에서 통용되던 12 천문성좌도와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올림포스 12신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그리스 신화에 정착되었으며, 아테네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최초로 이 열두 신을 신전에 봉정하였다. 이들에 대한 종교 의식이 처음으로 언급된 고대 문헌은 헤르메스가 등장하는 호메로스 찬가이다. 예술과 시에 표현된 고전적인 구성에 따르면,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레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프로디테,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헤스티아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는 별개로 로마 신화의 구성은 유피테르, 유노, 넵투누스, 케레스, 마르스, 메르쿠리우스, 불카누스, 베누스, 미네르바, 아폴로, 디아나, 베스타로 이루어져 있다. 장피에르 베르낭에 따르면, 올림포스 12신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이 숫자에 누가 포함되느냐에 따라서 그 구성이 쉽게 바뀌는 유동성을 띄었다. 기원전 400년 경 헤로도토스는 도데카테온을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아테나, 헤르메스, 아폴로, 알페이오스, 크로노스, 레아, 카리테스로 구성하였다. 근대 문헌학자 빌라모비츠는 헤로도로스의 열두 신을 따랐다. 헤로도토스는 열두 신 중 한 명으로 헤라클레스를 포함시켰다. 루키아노스 또한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를 열두 신에 포함시켰는데,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두 신은 설명하지 않았다. 코스 섬에서는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를 열두 신에 포함시켰으며,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는 제외하였다. 그러나 핀다로스, 아폴로도로스, 헤로도로스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헤라클레스를 열두 신이 아닌 숭배의 대상 중 한 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올림포스 열두 신을 일 년의 열두 달과 연관지으며, 마지막 달에는 하데스와 죽음의 영혼의 영광을 기리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그가 하데스를 열두 신 중 한 명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데스는 지하 세계의 신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구성에는 점차 제외되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열두 신을 황도 12궁과 함께 나열하였으며, 이 구성에서 헤스티아는 제외하였다. 헤스티아를 대신하여 디오니소스가 열두 신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며, 헤베, 헬리오스, 페르세포네를 비롯한 다른 신들이 열두 신에 포함되기도 한다. 에로스는 다른 열두 신, 특히 그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와 나란히 묘사되어 있기도 하는데, 올림포스 열두 신 중 하나로 보지는 않는다.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가 형제들과 함께 티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헤스티아, 하데스는 모두 한 형제이며, 아레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프로디테, 아테나, 아폴로, 아르테미스, 카리테스,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헤베,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의 자녀이다. 일부 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스를 헤라 혼자서 낳은 것으로, 아프로디테는 우라노스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설명한다. 이 밖에 제우스로부터 태어났지만 다른 신을 수행하거나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신들은 올림포스 12신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스 이름 로마 이름 동상 주관 세대 출생 및 정체 제우스 유피테르 80px 신들의 왕이자 올림포스 산의 지배자; 하늘과 천둥, 정의의 신. 첫 번째 올림포스 12신의 리더 헤라 유노 80px 신들과 하늘의 여왕; 여성과 결혼, 양육의 여신. 첫 번째 제우스의 본처이자 누나 포세이돈 넵투누스 80px 바다의 지배자; 말을 창조한 바다와 지진의 신. 첫 번째 제우스의 형 데메테르 케레스 80px 풍요와 농업, 자연, 계절의 여신. 첫 번째 제우스의 내연녀이자 누나 헤스티아 베스타 80px 화덕과 가정의 여신 (제외되어 디오니소스가 열두 신이 됨). 첫 번째 제우스의 누나 아프로디테 베누스 80px 사랑과 아름다움, 욕망, 다산의 여신. 첫 번째 부친 우라노스 모친 없음 아폴론 아폴로 80px 태양신; 광명과 의술, 음악, 시, 예언, 궁술, 진리의 신. 두 번째 부친 제우스 모친 레토 아레스 마르스 80px 전쟁과 격분, 증오, 유혈의 신. 두 번째 부친 제우스 모친 헤라 아르테미스 디아나 80px 사냥과 처녀, 달의 여신. 두 번째 부친 제우스 모친 레토 아테나 미네르바 80px 지혜와 기술, 전략의 여신. 두 번째 부친 제우스 모친 없음 헤파이스토스 불카누스 80px 신들의 대장장이; 불과 대장간의 신. 두 번째 제우스 모친 헤라 디오니소스 바코스 80px 술, 포도주, 음료와 광란, 취함의 신. 두 번째 부친 제우스 모친 테베의 공주 세멜레 헤르메스 메르쿠리우스 80px 신들의 사자; 상업과 체육, 도둑, 목동, 나그네의 신. 두 번째 부친 제우스 모친 마이아 (신화) 주해 1 ^ 다른 신화에는 우라노스가 크로노스에게 거세를 당하고 그의 생식기가 바다에 빠진 것이 아프로디테의 탄생 기원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거품에서 태어난"이라는 아프로디테 어원을 뒷받침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보다 윗세대이거나 동일한 세대일 수도 있다. 아프로디테#탄생을 참고하라. 다음은 고전 올림포스 12신 목록에 포함되지 않지만 위에서 설명한 다른 목록에 포함될 수 있는 신들이다. 알페이오스 - 강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 의술의 신. 카리테스 -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여신. 크로노스 - 티탄이자, 제우스의 아버지. 디오니소스 - 술과 회합, 향락의 신. (헤스티아가 자리를 양보) 하데스 - 죽은 자의 지배자; 저승과 지하 풍요 (보석과 귀금속)의 신. 제우스의 맏형 헤베 - 청춘의 여신, 술 따르는 자. 헬리오스 - 티탄이자, 태양의 화신. 헤라클레스 -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포네 - 봄과 죽음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레아 - 티탄이자, 제우스의 어머니. 비아 - 폭력의 화신. 크라토스 - 권력의 화신. 디오네 - 제우스의 연인이자 아프로디테의 어머니. 에일레이티아 - 출산의 여신이자, 헤라와 제우스의 딸. 에오스 - 새벽의 화신. 에리스 - 불화의 여신. 에로스 - 정욕과 욕망의 신. 가니메데스 - 올림포스 신들의 궁전에서 술 따르는 자. 호라이 - 올림포스의 관리인. 이리스 - 무지개의 화신, 헤르메스와 함께 올림포스의 사자. 레토 - 티탄이자,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의 어머니. 모르페우스 - 꿈의 신. 무사 - 과학과 예술을 주관하는 9명의 여신. 네메시스 - 보복과 징벌의 여신. 니케 - 승리의 여신. 판 - 야생, 양치기, 자연, 동물의 신. 파이안 - 만물의 치유자. 페르세우스 - 제우스의 아들, 그리스 신화의 영웅 중 한 명. 헬리오스 - 티탄이자, 해의 신. 셀레네 - 티탄이자, 달의 신. 젤로스 - 경쟁의 신. 고대 그리스의 종교 그리스 신들의 가계도 그리스 신화 그리스 신화 등장인물 목록 디 콘센테스 12 올림피안 목록 판테온의 주요 신 요약 분류:그리스 신화 분류:명수 12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80px 음악 듣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판 성경 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헨델은 프로이센의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피렌체 등지에서 활동하다 1712년 이후 런던에 정착하였다.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영국에 귀화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46작품과 오라토리오 23작품, 많은 양의 교회음악은 물론 많은 기악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헨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악파인 보논치니(1670년-1747년)와는 음악상의 적수였다. 이들의 경쟁과 헨델을 질투하는 음모 때문에 수차례의 파산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헨델은 그를 원망하지않고 오히려 보논치니의 질투를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과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경기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헨델은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1732년까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필생의 대작인 《메시아》가 24일이란 단기간에 탈고하여,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초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메시아의 초연후 8년째인 그가 65세 되던 해에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생존시의 《메시아》 공연만 해도 34회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 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년∼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헨델은 가난한 음악가 구제회에 1000 파운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아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냈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헨델의 작품 목록 ChoralWiki - 헨델 작품의 무료 악보 The Mutopia Project - 헨델의 작품의 무료 악보, MIDI 파일 다운로드 Werner Icking Music Archive - 헨델 작품의 무료 악보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도서관 - Handel cylinder recordings Kunst der Fuge 헨델 작품의 MIDI 파일 Creative Commons recordings - 수상 음악, 오르간 협주곡 작품 4번, 타메를라노 등 GFHandel.org, Brad Leissa와 David Vickers 제작 Haendel.it (이탈리어) Handel-with-care.net (프랑스어) Winton Dean s magisterial "Handel s Operas" covering the years 1726-1741, 재판본 . 헨델 박물관, 할레의 헨델 가옥 할레의 헨델 페스티발 2007년 5월 31일 ~ 6월 10일 분류:1685년 태어남 분류:1759년 죽음 분류:영국의 작곡가 분류:독일의 작곡가 분류:바로크 시대 작곡가 분류:오페라 작곡가 분류:독일계 영국인 분류:영국으로 귀화한 사람 분류:영국의 루터교도 분류:할레 출신 분류:18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분류:18세기 독일 사람
1807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청(淸) 가경(嘉慶) 12년 일본(日本) 분카() 4년 청(淸) 인종 가경제(仁宗 嘉慶帝) 12년 조선(朝鮮) 순조(純祖) 7년 2월 - 나폴레옹, 러시아 공격. 3월 29일 - 하인리히 올베르스, 소행성 4 베스타를 발견. 8월 17일 -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 허드슨 강에서 최초의 증기선 클레몬트 호 시운전 성공 영국과 덴마크, 군사 분쟁. 1월 19일 -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부동맹의 장군 로버트 리. 7월 4일 - 이탈리아의 군인 겸 정치가 주세페 가리발디. 8월 8일 - 청나라의 황족 종실 겸 정치가 이혁정친왕 단화. 5월 10일 - 프랑스 원수 로샹보 10월 1일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2월 7일 계묘 2월 계묘 대 3월 9일 계유 3월 갑진 대 4월 8일 계묘 4월 을사 소 5월 8일 계유 5월 병오 소 6월 6일 임인 6월 정미 대 7월 5일 신미 7월 무신 소 8월 4일 신축 8월 기유 소 9월 2일 경오 9월 경술 대 10월 1일 기해 10월 신해 소 10월 31일 기사 11월 임자 대 11월 29일 무술 12월 계축 대 12월 29일 무진
1940년 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22년 만주국(滿州國) 강덕(康德) 7년 1월 4일 - 조선총독부, 조선영화령 공포로 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을 통제 1월 9일 - 조선총독부, 신년도 노무동원계획 결정 1월 23일 - 중앙선 죽령터널 개통 1월 31일 - 일제, 육군통제령 및 해군통제령 공포 2월 11일 * 조선에서 창씨개명 실시 * 조선영화인협회 창립 2월 14일 - 일제가 묘지규칙을 개정, 신고제를 허가제로 변경 2월 29일 **해티 맥다니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머미 역으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일제가 석탄 등 18개 품목을 수출통제품으로 결정 3월 5일 -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대표, 조선의 참정권 청원을 위해 일본 도쿄로 출발 3월 6일 - 겨울전쟁 정전. 3월 21일-프랑스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 총사퇴 3월 31일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전 37권 완간 4월 - 만주 지안현에서 고구려 벽화 다수 발견 4월 9일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 덴마크·노르웨이 침공. (베저 작전) 4월 15일 - 평안북도 선천의 유림, 전 회원 창씨 결정 4월 18일 - 경조전보 제도 폐지 5월 - 인천 강화 전등사에서 묘법연화경판 발견 5월 9일 -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하와이 애국단 등이 한국독립당 조직 (위원장 김구) 5월 10일 - 제2차 세계 대전 영국 체임벌린 내각 총사퇴. 5월 10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 베네룩스 삼국 공격 개시. 5월 15일 - 나일론 스타킹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판매되다. 5월 15일 - 최초의 맥도날드 식당이 생김. 5월 20일 - 유대인 대학살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다. 5월 21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 볼로뉴를 점령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분리시킴 5월 21일 - 제2차 세계 대전 구데리안군은 솜므강을 도하하여 교두보 확보 6월 - 일본 나고야에서 민족부흥회 사건으로 이수영 등 23명 체포 6월 2일 - 사탕배급증제 실시 6월 7일 - 조선어학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발표 6월 10일 - 제2차 세계 대전 노르웨이가 독일에 항복하다. (베저 작전) 6월 11일 - 평양박물관, 강서군 고려요지, 낙랑고분 발굴 착수 6월 14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이 파리에 진주하다. 6월 23일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가 점령한 프랑스의 파리 시를 방문하다. 7월 - 경상북도 안동에서 원본 발견 7월 1일 - 조선총독부, 학생의 만주, 중국 여행 금지 7월 10일 - 프랑스에 비시 정권 수립. 7월 14일 - 경기도 학생근로대 조직 8월 11일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강제 폐간 8월 12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영국 본토 공습 개시 8월 17일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전시생활체제 강요 8월 18일 - 미국과 캐나다, 공동방위조약 체결 8월 20일 -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망명지 멕시코에서 자객에게 피살 8월 30일 - 제2차 빈 중재 루마니아의 영토인 트란실바니아의 절반이 헝가리의 영토로 편입된다. 9월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충칭으로 거점 이전 9월 7일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이 57일간의 런던 야간 폭격을 시작(영국 본토 항공전). 9월 9일 - 일제가 학생 복장을 국방색으로 통일 9월 13일 - 제2차 세계 대전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 이집트 침공(북아프리카 전역) 9월 17일 - 중화 민국 충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한국 광복군 창설. 9월 23일 - 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 인도차이나 반도 침공 개시 9월 27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세 추축국이 독일 베를린에서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다. 10월 9일 -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 제도를 국무위원제로 개정 10월 15일 - 인도 민족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반영 불복종 운동 개시 10월 15일 - 아돌프 히틀러를 소재로 한 찰리 채플린 감독·주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되다. 10월 16일 - * 제2차 세계 대전 유대인을 수용하기 위한 바르샤바 게토가 세워지다. * 벤저민 O. 데이비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장성이 되었다. * 국민총력연맹이 조직되어 황국신민화운동 강제 시행 10월 25일 - 중국 정부, 한국 광복군의 중국 전선 참전을 승인 11월 5일 -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공화당의 웬델 윌키(Wendell Willkie)를 꺾고 사상 처음 세 번째 임기를 지내는 미국 대통령이 되다. 11월 29일 -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충칭에서 시안으로 본거점을 이전, 군사특파단을 폐지하고 건군공작 착수와 유격전 수행 12월 11일 - 국민총력경성부연맹, 연하, 연회, 선물, 여행 폐지 결정 12월 22일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운동 방침에 관한 선포문 발표 12월 25일 - 경성 부민관에서 친일단체 황도협회 결성 1월 1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황인용. 1월 26일 - 대한민국 정치인 김우식. 2월 7일 - 대한민국의 대금, 아쟁 명인 서용석. (→ 2013년) 2월 9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 존 맥스웰 쿠체. 2월 24일 - 스코틀랜드의 전 축구 선수 데니스 로. 2월 25일 - 대한민국의 탤런트, 영화배우 여운계. (→ 2009년) 3월 10일 - 미국의 영화배우 척 노리스. 3월 16일 - 독일의 정치학자 클라우스 오페. 3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순원. 4월 1일 - 케냐의 환경·정치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 2011년) 4월 8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김응용. 4월 13일 - 프랑스의 소설가, 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4월 16일 -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덴마크 군주. 4월 25일 - 미국의 영화배우 알 파치노. 5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세윤. 5월 20일 - 중화민국 국적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야구 감독 오 사다하루. 6월 5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겸 대학 교수 차수웅. 6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근형 6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불암. 6월 19일 - 재일 한국인 출신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장훈. 6월 21일 - 대한민국의 요리연구가 심영순. 6월 27일 - 미국의 수학자 대니얼 퀼런. (→ 2011년) 7월 6일 - 카자흐스탄의 정치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8월 25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이재후. 9월 20일 - 일본의 제92대 총리 아소 다로. 10월 4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실비오 마르솔리니. 10월 9일 - 영국의 대중음악가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 (→ 1980년) 10월 14일 - 영국의 가수 클리프 리처드.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가 윤용남. 10월 23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김창국. (→ 2016년)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행정가 펠레.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겸 제 14대 국회의원 이주일. (→ 2002년) 11월 26일 - 이탈리아 수학자 엔리코 봄비에리. 11월 27일 - 홍콩의 무술 배우 이소룡. (→ 1973년)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양승춘. (→ 2017년) 12월 26일 - 미국의 경제학자 에드워드 프레스콧 6월 22일 - 독일의 기상학자 블라디미르 쾨펜. (← 1846년) 6월 29일 -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 (← 1879년) 8월 20일 - 러시아의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 도끼 살인. (← 1879년) 9월 27일 - 독일의 문학 비평가 발터 베냐민. (← 1892년) 11월 24일 - 일본의 겐로 사이온지 긴모치. (← 1849년) 12월 21일 - 미국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 (← 1896년)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2월 8일 신사 2월 기묘 대 3월 9일 신해 3월 경진 소 4월 8일 신사 4월 신사 대 5월 7일 경술 5월 임오 소 6월 6일 경진 6월 계미 대 7월 5일 기유 7월 갑신 소 8월 4일 기묘 8월 을유 소 9월 2일 무신 9월 병술 대 10월 1일 정축 10월 정해 소 10월 31일 정미 11월 무자 대 11월 29일 병자 12월 기축 소 12월 29일 병오
유대인 () 또는 유태인 (猶太人), 유다인 은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기원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집단이다. 히브리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의 가계는 기원전 18세기경에 가나안과 그 주변 지역에 살았던 성서 속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 부인들인 사라, 리브가, 레아, 라헬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곱은 자신의 아들이자 당시 이집트의 고관이었던 요셉과 고센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파라오가 초청하여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이들 족장들의 후손들은 나중에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했으며 이후 모세의 지도 하에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보통 이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탈출 시기를 기원전 13세기로 본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주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후손이며 부분적으로는 베냐민 지파와 레위 지파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들 지파는 고대 유다 왕국을 형성했었으며 이 중 유다 지파가 주류였고 베냐민과 레위 지파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에도 속했었다. 유대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은 사마리아인인데, 이들은 연합 왕국 분열 이후 형성된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이며 그들의 전승에 따르면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이들의 조상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대 민족성과 종교는 매우 밀접한 관계인데 이는 유대교가 유대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로의 개종자들은 보통 유대인 사회 내에서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던 이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주류 유대교에서 개종은 권장되는 것은 아니며 어려운 일로 여겨지며 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과의 결혼이 이에 해당된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로 수립되었으며 기본법에서 스스로를 유대 국가로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귀환법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요구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국적 취득을 승인한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고대에 두 번 정치적으로 독립을 달성했었다. 첫번째 시기는 판관 시대와 이후 이어지는 연합 왕국 시대였으며 연합 왕국의 몰락 이후 그 영토는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된다.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로마 시대의 유다의 지명이었던 유대아(Judea)에서 유래되었으며 남유다 왕국 출신의 사람을 의미한다. 기원전 587년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제1차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유다의 지배층을 추방하였다. 기원전 586년엔 유다가 신바빌로니아의 일부가 되었으며 유다에 남은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게 되었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다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끝났다. 제2차 성전은 기원전 515년에 건설이 끝났다. 페르시아령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제에게 멸망하는 기원전 333년까지 제국에서 평화로운 지역에 속했다. 유대인들은 이후 다시 기원전 140년에서 36년까지 하스모니안 왕조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한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명에 따라, 영원하고 고대 이스라엘인과 고대 히브리인은 아브라함의 후예로서 가나안 땅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고대 히브리 왕국을 세웠다. 2대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왕국의 수도로 삼았으며, 사울 왕가와 필리시테인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하느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다윗왕이 그 뒤를 이었다. 그의 아들 3대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북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어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게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6세기 신(新)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에 멸망하였다. 그 후 유대인들의 땅은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승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는데 당시 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비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서의 외경 중 마카비 상,하 에 나와 있다. 마카비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 약 100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기원후 66년 유대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 땅에서 유대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살았으며 이슬람교가 성장하면서는 일부가 인도와 중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대인 중 일부는 지중해 연안 외의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인데 하자르인(Khazars), 이두매아인(Edomites),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등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흔히 사용하는 아슈케나짐(Ashkenazim)와 세파라딤(Sephardim)의 구분은 종교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를 다 포함한다. 어떤 학자들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이나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며 세파라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식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다 민족의 4대 분파는 다음과 같다. 아슈케나짐 -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다가 동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일부는 프랑스와 독일에 살고 있지만 인근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라트비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에도 살고 있다. 세파라딤 -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았으나, 16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쪽에 소수만 남게 되고, 상당수는 네덜란드, 터키, 북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했다. 미즈라힘 -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지에도 퍼졌다. 이들은 세파라딤 유대인들과 종교 의례가 거의 같아 보통 세파라딤이라 부르기도 한다. 베타 이스라엘 - 에티오피아에 살던 흑인 유대인으로 팔라샤(Falasha) 라고도 불린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소수 분파가 있다. 예멘 유대인 (Yemenite Jews) - 테이마님(Teimanim) 이라고도 한다. 동방 유대인이었는데 지리적·사회적으로 다른 유대인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특이한 예배식과 의례가 발전하였다. 베네 이스라엘 - 인도의 뭄바이(봄베이)에 살았다. 코친 유대인 - 이들도 인도에 살았다. 로마니오트 (Romaniotes) - 헬레니즘 시대부터 현재까지 발칸 반도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다. 전 세계에 6천 명 정도 있다. 아슈케나짐은 전통적으로 이디시어를, 세파라딤은 라디노어(유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동방 유대인은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했으나 아람어, 페르시아어(파르시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 이후 세파라딤 유대인들은 흩어져 유럽에 이주, 아슈케나짐와 동화되거나 중동으로 이주, 동방 유대인들과 동화되었다. 오늘날 유대인의 80% 정도가 아슈케나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범 세파라딤계이다. 유대인 하위 집단에는 그루짐(Gruzim) 즉 카프카스 조지아 지방의 유대인, 유후림(Juhurim) 즉 코카서스 동부 다게스탄의 산악 유대인, 마크레빔(Maghrebim) 즉 북아프리카 유대인, 아바유다야(Abayudaya) 즉 우간다 유대인 등이 있다. 그밖에도 러시아의 러시아 유대인,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유대인,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일본의 아시아유대인도 있다. 한편 헝가리계 유대인 역사학자 아서 쾨슬러와 일본 학자 우노마사미 등은 아슈케나짐이 인종적으로 셈족이 아닌 백인계 투르크족 하자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를 지낸 폴리악도 1944년에 이란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이런 주장에 동조했다. 이들이 하자르 멸망 후 동유럽·중앙유럽으로 흩어져 아슈케나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셈족 유대인들에게는 금발이나 푸른 눈이 없으나 아슈케나짐 중에는 백인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이들이 많은 이유라 한다. 2005년 유럽 유전체 학술지에 따르면 최근 인류학과 유전학 연구의 성과로 아슈케나짐과 세파라딤을 비롯한 기타 유대인의 인종학적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이 밝혀져 아서 쾨슬러 등이 주장한 아슈케나짐의 하자르 설은 비판을 받고 있다. 세파라딤과 아슈케나짐 사이엔 갈등이 많은데, 세력으로나 영향면에서 아슈케나짐이 압도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가 약 1천 8백만 명 정도였으나 히틀러가 집권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약 1천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전 세계 134개국에 약 1천 4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약 580만 명, 이스라엘에 약 6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각각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친 유대인의 후손이며 소련의 경우 자국으로 피해서 들어온 유대인들을 거의 한반도 근처까지 도피시켰는데 그 일대에 유대인 자치주가 형성되었다. 훗날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유대인 자치주에 살던 유대인 대부분이 독일로 되돌아갔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240만 명, 라틴 아메리카는 약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건국된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대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은 프랑스로, 그 다음이 영국이다. 그 외, 독일, 헝가리, 네덜란드 등이며, 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과 동유럽으로 현재 많은 유대인이 많이 이주해 온다고 한다. 중국 송나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서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한 성씨로는 리(李), 장(张), 안(俺), 진(金)씨 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일부가 고려로 들어오기도 했다. 북송의 카이펑(开封)에 거주하여 카이펑유대인(开封犹大人) 또는 이츠러예 (一赐乐业, 일사락업)인(人)으로 불렸다. 이츠러예(一赐乐业)는 북송 황제가 하사한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음역이다. 중국에 진출한 이슬람교의 무슬림처럼 유대인 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종교신앙으로 인해,북송시대의 중국인들은 이 두 집단 모두를 고교(古教), 남모회회(藍帽回回) 등으로 불렀으며, 유대인을 죽흘(竹忽), 주오(主吾), 주호득(朱乎得), 축호(祝虎), 주혁(珠赫) 등으로 불렀다. 북송 카이펑의 이츠러예 인들은 한족과 같이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으며, 명(明)나라가 건국되자,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색목인(色目人), 회회인(回回人)은 본족내 통혼(本族内通婚)을 불허함을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히브리 민족 이스라엘 민족 사마리아인 유대교 분류:러시아의 민족 분류:아시아의 민족 분류:유럽의 민족 분류:이스라엘의 민족 분류:중국의 민족 분류:미국의 민족 분류:캐나다의 민족 분류:프랑스의 민족 분류:영국의 민족 분류:독일의 민족 분류:민족종교집단
시스템 소프트웨어 (system software는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한 플랫폼을 제공하고 컴퓨터 하드웨어를 동작,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된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컴퓨터 시스템의 운영을 위한 모든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대한 일반 용어이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사용자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응용 소프트웨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메모리에서 하드 디스크로 데이터를 전송한다든지 문자열을 디스플레이 장치로 출력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한다. 시스템 소프트웨어에는 로더, 운영 체제, 장치 드라이버, 프로그래밍 도구, 컴파일러, 어셈블러, 링커, 유틸리티 등이 포함한다.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는 시스템 소프트웨어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C 런타임 라이브러리는 보통 시스템의 일부로 여기지만, 오픈GL이나 데이터베이스 라이브러리의 경우는 명확하지 않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집적 회로의 비휘발성 기억 장소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를 보통 펌웨어로 부른다. 부트 로더 운영 체제 장치 드라이버 셸 로더 라이브러리 * C 표준 라이브러리 등 부호 생성 도구 * 컴파일러 소프트웨어 공학 상용 소프트웨어 응용 소프트웨어 Definition of System software @ Webopedia System software @ sourceforge.net 분류:전산장비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 1743년 8월 26일 ~ 1794년 5월 8일)는 프랑스의 화학자이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대한민국에서는 짧게 줄여 라부아지에 라고도 표기한다. 그는 뛰어난 실험자였으며, 화학 이외의 다른 방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공직에 있기도 하였다. 연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여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면서 화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산화 과정에서 산소의 작용, 산화나 호흡 간의 정량적인 유사점 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학 반응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확립하였으며 원소와 화합물을 구분하여 근대 화합물 명명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화학에 정량적인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학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라부아지에는 1743년 파리의 의회 법률 고문으로 일하던 장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인 에밀리에 라부아지에 사이의 첫째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에밀리에 라부아지에는 딸을 한 명 더 낳은 뒤 1794년 3월 24일 사망하였다. 1748년 라부아지에의 가족은 장 앙투안의 장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바람으로, 1754년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760년 여동생이 사망한 후, 가족의 애정과 기대가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라부아지에 역시 그들에 기대에 부응하여 배우는 데에 상당한 열정을 가졌다.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에게 배웠는데, 라카유는 라부아지에가 자연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1년 6월 콜레주 마자랭을 졸업하였고, 가문의 전통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자연 과학에 큰 관심을 두었고, 라카유의 조언을 따라 기상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와 라카유와의 관계는 1762년 3월 라카유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라부아지에는 왕의 정원에서 베르나르 데 쥐시외 등의 수업을 듣기도 하였다. 특히 기욤프랑수아 루엘의 화학 수업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루엘은 지질학을 처음으로 가르친 화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실험적인 방법을 매우 중시하는 등 앞서 나가는 면도 있었으나, 연금술과 사원소설(四元素說)에 큰 관심을 가지는 등의 구시대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장에티엔 게타르를 만나 1763년 광물학적·지질학적 조사를 위해 발루아 지방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게타르는 이후로도 계속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지도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4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자연 과학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1764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대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방안에 관해서 공모를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여기에 참여하였고 그의 제안은 뛰어남을 인정받아 1766년 8월 9일 아카데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 1765년 2월 27일 라부아지에는 석고를 분석하여 그 논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게타르의 제안으로 작성된 이 논문은 지질학·광물학·화학 등을 모두 다루고 있었다. 1766년 3월 19일 그는 석고에 관한 두 번째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필요성을 느껴 4월 아카데미의 실험 물리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아카데미는 라부아지에의 신청을 거절하였으며, 라부아지에는 요청이 거절된 바로 다음 날 화학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1767년 6월 14일 라부아지에는 게타르를 따라 보주 산맥을 탐사하러 떠났고, 10월 19일에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라부아지에는 각 지역의 광천수를 분석하여 그것이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6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자리에 공석이 생기자 라부아지에는 새로운 회원 후보자가 되었고, 5월 18일의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함에 따라 6월 1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당시에 물을 계속해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이 여러 과학자 사이에서 만연하였다. 과학자들은 식물이 물만으로도 자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물이 흙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로버트 보일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가 물을 계속해서 증류하면 고체가 남으며, 이것이 물이 변화하여 생긴 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주장에 의심하였으며, 1770년 4월 10일에 발표한 논문에서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 반증으로 인해서 라부아지에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해졌다. 라부아지에는 물을 100일 동안 증류하였고 그 결과 고체가 남음을 알게 되었지만, 생성된 고체의 질량을 측정한 후 물을 증류하는 데 사용했던 용기의 질량을 측정하자 생성된 고체의 질량만큼 용기의 질량이 감소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생성된 고체는 물에서 연유한 물질이 아니라 용기가 일부 녹아서 생성된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그리고 이는 물이 흙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였다. 1772년 11월 1일에 라부아지에는 황과 인을 연소할 경우 공기를 흡수하여 질량이 증가하고, 금속회(금속 산화물)를 가열할 경우 공기를 잃으며 금속이 생성되고 질량이 감소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그는 공기 중 어느 성분이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이 실험의 결과를 《물리와 화학 소론》( Opuscules Physiques et chimiques )이라는 책으로 1774년에 출판하였다. 1774년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비(非)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으로 산소를 발견하였고, 그해 10월 라부아지에는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75년 3월 프리스틀리는 “탈플로지스톤 공기”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한편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 역시 1772년경 산소를 발견하여 그에 관한 내용을 라부아지에에게 1774년 9월 30일 편지로 보냈으나, 정작 라부아지에는 10월 15일 셸레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일부 과학사 학자, 특히 스웨덴의 과학사 학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셸레의 편지를 무시한 일이 단순한 무례함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연소와 관련된 공기 일부와 대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공기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하였다.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이산화 탄소가 생성된다는 사실은 이전의 실험을 통해서 알려졌다. 1775년 3월 라부아지에는 숯가루를 연소한 후 발생하는 기체를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추가적인 실험을 통해서 이때 발생하는 기체가 이산화 탄소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계속된 실험에서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금속회를 숯을 사용하지 않고 가열하면 금속 형태의 수은과 대기 중의 공기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는 기체가 생성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금속회가 포함하고 있던 기체와 숯이 반응하여 이산화 탄소가 발생하고, 따라서 금속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가 일반 공기와 성질이 유사하나 더 오랫동안 촛불을 태울 수 있고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체에서 산소를 추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결과를 1775년 3월 24일에 발표하였다. 4월 26일 라부아지에는 이 실험의 결과를 토대로 금속회를 가열할 경우의 질량 변화는 공기의 출입으로 인한 것이며, 이 공기는 대기 중의 공기보다 더 순수하다고 설명하였다. 이 실험의 결과와 산소의 발견은 이후 라부아지에가 산소가 연소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여 이후 라부아지에가 새로운 연소 이론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1768년 라부아지에는 세금 징수 조합의 일원이 되었고, 담배 생산과 판매를 관장하는 담배 위원회의 지역 감찰관이 되었다. 그의 상관은 세금 징수원, 변호사, 그리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감독이기도 한 자크 폴즈였다. 라부아지에는 주로 소매상인들 간의 밀수와 사기를 적발하는 역할을 받았다. 당시 담배는 많은 양이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밀수되곤 하였으며, 소매상인들은 그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서 밀수한 담배를 농장에서 생산된 담배와 섞은 후 재와 물을 첨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소매상인들이 판매하는 담배의 질을 분석하여 이러한 사기 행위를 적발하곤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당시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부유해졌으며, 1771년 12월 4일 자크 폴즈의 외동딸인 마리안 피에레테 폴즈와 결혼하였다. 이후 마리안은 이후 실험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하면서 라부아지에를 도왔다. 라부아지에는 많은 돈을 벌어 최고의 과학 장비를 사들일 수 있었다. 1772년에 라부아지에의 아버지인 장 앙투안은 라부아지에에게 귀족의 칭호를 매수해주었다. 이는 당시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관습이었다. 1774년 8월 24일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루이 16세에 의해서 프랑스의 재정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라부아지에가 속해있던 세금 징수 조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튀르고는 쓸모없는 세금을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세금 징수원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튀르고의 자유주의정책으로 교역과 소비가 많이 늘어나 거둘 세금도 많아졌기 때문에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라부아지에의 영향은 점점 커져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소금·담배·알코올성 음료 등 파리에 드나드는 물건의 세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와 그의 부인〉, 자크 루이 다비드, 1788. 1775년 5월 26일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성분 중 특정 성분이 생물의 호흡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의 공기 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실 이 공기는 산소로, 셸레와 프리스틀리에 의해서 이미 발견되어있었다.) 1777년에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ombustion en général 에서 라부아지에는 모든 산은 공기 내의 특정 성분에 의해서 생성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principe oxygine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그리스어로 산을 생성하는 것 이라는 뜻으로, 산소의 어원이 되었다. (principe oxygine 역시 산소와 같은 물질이나 라부아지에는 처음에 이를 알지 못하였다.)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설탕과 principe oxygine이 반응하면 옥살산이 생성되는 등 여러 물질과 반응하여 산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이론은 염화 수소 등 산소를 포함하지 않은 산에 관해서는 들어맞지 않으나, 산소산을 설명하기 적합하다.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자신의 발견과 이전의 연소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생명의 공기 는 principe oxygine과 연소 현상에 관계되는 화소(火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이 세 가지 기체는 모두 산소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그는 1777년 11월 12일에 제출된 논문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소를 ‘물체가 불에 타기 때문에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고, 물체가 타는 이유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플로지스톤설은 순환논법에 불과하고, 결국 플로지스톤설은 가설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1783년 6월 25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협조하에 라부아지에는 수소를 연소시킬 경우 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물의 조성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1783년 6월 26일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왕립 학회에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산화 납을 수소와 함께 가열했더니 산화 납이 납으로 환원되면서 수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통해서 수소가 곧 플로지스톤이며, 이것이 산화 납과 결합하여 금속의 납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은 수소가 산화 납의 산소와 반응하여 물이 된 것이었으나, 프리스틀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1784년 1월 15일에는 헨리 캐번디시가 물의 정량적·정성적 조성을 발표하였으며,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할 경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탈 플로지스톤 공기 , 즉 산소가 된다고 발표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산화 납을 납으로 환원시킬 경우 물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것이 산소라는 설을 반박하였다. 178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라부아지에는 물의 분석과 합성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실험은 과학자 30명 이상의 입회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고열을 이용하여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반대로 수소와 산소 기체를 이용하여 물을 합성해 보이기도 하였다. 또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물은 원소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원소의 화합물, 특히 당시 플로지스톤의 정체라고 추정되던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연구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할 근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에 대비되는 많은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 갔으나, 여전히 많은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1785년에 제출한 논문인 Les Réfelxtions des le phlogistique 에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정확히 규명되어있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는 이론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연소가 일어날 때 생명의 공기 를 이루고 있는 principe oxygine과 화소(火素) 중 화소가 물체와 결합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로지스톤설과 그의 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소와 관련된 물질의 이동방향이다. 플로지스톤설에서는 연소가 일어나면서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에서 빠져나간다고 보았고,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와 결합한다고 본 것이다. 현대의 연소 이론과 이를 비교해 보면, 라부아지에가 생각하였던 생명의 공기 , principe oxygine, 그리고 화소는 모두 산소이다. 그러나 연소반응에서 산소의 변화는 라부아지에가 생각했던 것과 같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플로지스톤설을 대변하는 다른 과학자들에게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론을 비판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아일랜드의 리처드 커원에 의해서 1787년 출판된 An Essay on Phlogiston and the Constitution of Acids 이 있다. 커완은 이 책에서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이며,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는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주장하였다. 라부아지에와 기통 드 모르보 등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커완의 주장에 관해서 반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 플로지스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으며, 수소 역시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을 통해서 물체를 연소시킬 때 일어나는 질량의 변화를 손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체에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하여도 이것이 연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산소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거쳐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많은 과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편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널리 알릴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789년 1월 17일 《화학 원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그의 연구를 정리하여 공기와 물의 조성, 연소와 산에서의 산소의 역할, 열과 호흡, 발효에 관한 이론 등을 저술하였다. 제2부에서는 산, 염기 등의 목록과 화합물, 화학 원소 등의 목록을 저술하였는데, 이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화학 물질 목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제3부에서는 실험에 관해서 저술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연소 이론은 단순히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하였다는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라부아지에의 연소 이론은 산소와 연관된 여러 가지 반응에 적용되었으며 호흡·발효·부패 등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도입되었다. 또한, 새로운 이론의 도입은 수많은 새로운 산·염기·염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화합물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곧 화학적 명명법 정리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원소의 개념 역시 확장되어 재정립되었다. 이러한 체계의 확립은 근대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이를 화학 혁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화합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서 기준이 제각각이라, 이름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라부아지에·클로드 루이 베르톨레·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 등이 주축이 되어 화학적 명명법을 개정하였고, 이를 1787년에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 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화학 물질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이름은 그 물질의 성질을 잘 드러내며, 이름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에 근간을 둔다는 등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 화학 물질들을 새롭게 명명하였다. 이후 마르틴 하인리히 클라프로트를 주축으로 한 독일의 화학자, 그리고 자신의 관측을 더 중시했던 헨리 캐번디시와 예전의 이론에 집착했던 조지프 프리스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의 화학자도 프랑스 화학자의 움직임에 동참하였다.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 은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독일·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과학사 학자들은 이러한 화학적 명명법 개정은 통일된 화학적 언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 화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하여 큰 의의를 두고 있다. 1789년 출판된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 에 실린 얼음 열량계의 그림 라부아지에는 1782년경부터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의 협력하에 물리학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특히 그는 열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라부아지에와 라플라스는 열에 따른 물질의 팽창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고안하기도 하고, 조지프 블랙의 얼음 열량계를 개량하기도 하였다. 또한, 두 사람은 어떤 물질이 상태 변화를 일으킬 때 출입하는 열은 상태 변화를 역으로 진행할 경우 열 출입 역시 반대로 되고 그 양은 같다는 열역학의 기본 법칙을 제시하였다. 1783년에 라플라스와 함께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haleur 에서 라부아지에는 물질은 고체·액체·기체의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물질 입자가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영향을 끼치는 열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기체를 온도와 압력을 조절함으로써 액체 또는 고체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발효와 호흡에 관해서도 연구하였고, 이에 관련된 화학적 과정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5년 10월 13일의 실험을 통해서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을수록 동물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는 호흡 과정에서 산소가 흡수되고 이산화 탄소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1783년 6월 28일 제출한 열(熱)에 관한 논문인 〈열에 관한 보고서〉( Mémoire sur la chaleur )에서 생체 내에서 발생하는 열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생명체가 들이마신 산소는 일종의 느린 연소 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연소 반응이 허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고, 발생한 열은 혈액을 통해서 몸 전체로 공급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체내에서 일어나는 소화는 연소 반응과 유사한 면이 있으나, 라부아지에는 반응이 일어나는 위치를 잘못 파악하였다. 반응은 허파에서 일어나지 않고 온몸에 존재하는 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체내에서 일어나는 생리 현상의 중요성을 인지하였고, 물질 대사를 통해서 생명체가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초적인 인식은 옳았다. 자크 네케르 세금 징수원으로서의 능력과 과학적·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1775년 3월 30일 재정 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라부아지에를 화약국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일꾼을 대상으로 초석과 화약에 관한 화학과 수학 지식 등을 가르치는 교육 과정을 개설하였고, 화약 제조 과정을 크게 개선하였으며,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어 초석이 많이 산출되는 이유에 관한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6년 4월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병기창으로 그의 집과 연구실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큰 도서관과 거대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화학자뿐만이 아닌 당대의 수많은 과학자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남편의 실험을 종종 돕기도 하였다. 그녀는 화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가 튀르고가 해임하고 자크 네케르를 재정 총감으로 임명한 이후에도 라부아지에는 화약국장 자리를 유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8년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 산지를 찾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고 조직 체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의 화약 제조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초석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 질산을 제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내었으나 초석 합성에는 실패하였다. 1778년 라부아지에는 발루아 근처의 사유지를 샀다. 그는 자기 사유지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통한 새로운 경작 제도를 시도하였고, 이는 농작물의 생산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라부아지에의 재정 관리 능력은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공중위생에 관심을 가져 센 강의 수질에 관한 연구나 음식의 보존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네케르는 종종 대중의 의견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왕의 위엄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루이 16세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781년 5월 19일 네케르를 해임하였다. 1784년 라부아지에는 독일의 의사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치료 요법을 검증하는 데 일조하였다. 메스머는 자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라부아지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여러 과학자와 함께 메스머의 치료 요법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785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가 되었고, 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조직을 개편하였다. 1787년에는 1778년에 라부아지에가 담배와 술 등의 밀수를 막기 위해서 제안한, 파리를 벽으로 둘러싸는 방안이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785년 6월 7일 라부아지에는 네케르의 후임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요청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담은 기사를 《프랑스 신보》( Gazette de France )를 출판하였다. 칼론은 이에 만족하였고, 라부아지에를 신설된 농업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농업 위원회의 위원이 된 후 그는 농업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하고, 농업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루타바가 경작을 장려하기 위해서 농부에게 씨를 분배해 주고 경작 방법을 가르쳤으며, 농부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융자해줄 은행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업 위원회는 파리 농업학회와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각 지역의 농업학회는 농업 위원회의 방침이나 조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1787년 위원회장이 교체되고 4월 9일에는 칼론이 재정 총감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경작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작 제도를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787년 라부아지에는 오를레앙 주(州)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와 오를레앙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 의회의 하위 기관인 공공복지 및 농업 위원회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벵티엠()이라는 소득세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 세금에 관해서는 귀족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귀족도 벵티엠의 과세 대상이 되는, 새로운 토지세로 변경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부역을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인 타유()의 일부로 변경하는 것에 관해서, 이 역시도 모든 사람이 타유의 과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귀족 계급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복지 사안에 관심을 가져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는 정체되어 있던 프랑스의 농경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였으며, 이외에도 산업 발전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1788년 4월 16일 라부아지에는 할인 은행()의 이사(理事)가 되었다. 1776년에 튀르고가 설립한 이 은행은 금화와 은화를 만드는 배타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지폐를 발행하는 것 역시 주 업무였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하어 있어서 자크 네케르가 복직한 8월 말에는 국가 재정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네케르는 할인 은행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사들은 이를 승낙하였다. 라부아지에도 또한, 재정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을 국영화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의회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일했지만, 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여전히 국가의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하여 갔으며, 의회는 은행이 지나치게 큰 힘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국영화에 비협조적이었고, 이와 함께 프랑스의 경제 역시 심하게 악화하여 갔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간에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788년 여름, 그는 네케르에게 보내는 논문을 통해서 삼부회를 개최할 때 그 대표를 어떻게 선출해야 하는지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역에서부터 전국에 걸친 4단계의 회의를 개설하여 각각의 회의에서 상위 회의로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1789년 7월에 라부아지에의 경력은 최고에 달했다. 그는 학문과 공직 양쪽 모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그의 활동은 조금씩 제한받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당시 라부아지에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8월 6일에 그는 코뮌의 대표자로서 화난 시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생루이에 있는 화약고를 찾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프랑스 혁명은 점점 진행되어 갔다. 1790년 5월 8일 국회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도량형 통일안 제작을 의뢰하였다. 비록 국제적인 협조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가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비서와 회계 업무를 담당하였고, 헌법제정국민의회에 일의 진행을 보고하는 일 역시 그가 맡았다. 1793년 1월에는 질량의 단위를 정하는 일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라부아지에는 많이 활약하여 1791년 12월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재무 담당관이 되었고, 1792년 1월에는 헌법제정국민의회에서 조직한 기술 및 교역 고문 위원회에 참석하였으며, 리세 기술학교(Lycèe des Arts)의 경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1791년 3월 20일 헌법제정국민의회는 라부아지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봉직해온 세금 징수 조합을 해체하였으며, 그 대신 국가에서 관장하는 징세 기관이 도입되었다. 라부아지에는 기관의 장으로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선정되지 못하였다. 관한 실험 장면. 마리안 폴즈 라부아지에 그림. 1790년 말, 라부아지에는 모든 정치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의회의 재정 고문의 자리만 유지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과학 연구를 재개하였다. 그는 호흡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호흡은 혈액을 식히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대신 호흡은 탄소와 수소를 연소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발한 작용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여, 열이 호흡때문에 발생하면 발생한 열을 땀의 증발을 통해서 방출한다고 주장하였고, 상당한 양의 수분이 호흡을 통해서도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발한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물의 양 측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양분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고, 1792년에는 동물의 유기 합성에 양분이 사용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에 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혁명 중에도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입지는 점점 위협받게 되었다. 1792년 8월 15일 그는 화약국장에서 물러나면서 병기창에 있는 자신의 집과 연구소도 옮겨야 했다. 게다가 1793년 8월 8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를 비롯한 수많은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다. 라부아지에는 이를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1793년 9월, 세금 징수 조합의 청산이 빠르게 진행되기를 원했던 국민 공회는 전직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인이었던 앙투안 뒤팽에게 전직 세금 징수원들의 처리를 맡겼다. 1793년 11월 24일, 국민 공회의 의원인 프랑수아 루이 부르동은 전직 세금 징수원의 체포를 발의하였고, 이는 국민 공회를 통과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1월 28일 그의 장인인 자크 폴즈와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 1794년 5월 2일, 뒤팽이 제안한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처분안이 혁명법원으로 넘겨졌으며, 라부아지에는 사형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5월 5일 뒤팽의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으며, 결국 5월 8일 기소된 32명 중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28명이 유죄로 결론지어져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날 저녁 라부아지에는 자크 폴즈와 함께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라부아지에의 사형 직후, 집행관이 라부아지에의 집과 연구실의 모든 책, 기자재 등의 목록을 작성해 갔고, 5월 30일 이를 몰수하였다. 거의 모든 라부아지에의 재산이 몰수된 상황에서 라부아지에의 부인인 마리안 라부아지에 역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녀는 피신하지 않고 집을 지켰다. 결국 6월 14일 그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으나 남편과는 달리 사형은 면하고 8월 17일에 풀려났다. 12월 10일, 전직 세금 징수원의 사형 이후 매우 어렵게 살아가는 유족의 이야기가 담긴 Le cri dis familles 가 출판되자 사형을 주도한 앙투안 뒤팽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1795년 마리안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몇몇 유족이 뒤팽에게 전직 세무 징수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였으며, 그 결과 1796년 4월 그녀는 공식적으로 라부아지에의 유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1805년 마리안은 럼포드 백작 벤저민 톰프슨과 재혼하였고, 1836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처형이 완전히 그릇되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천문학자 제롬 랄랑드는 1795년 초,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라부아지에에 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관한 업적을 기술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796년 8월 2일 두 번째 장례식이 치러졌고 이는 매우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3,000명이 장례식에 참여하였으며, 라부아지에에 관한 수많은 찬사와 애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라부아지에의 사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따라서 이러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라부아지에의 조수였던 엘테일은 프랑스혁명을 피해 미국에 이민하여 듀폰사를 설립했다. 칼 빌헬름 셸레 자크루이 다비드 산소 플로지스톤설 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 11th edition,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1911. Donovan, A., Antoine Lavoisier science, administration, and revolution ,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 ed. by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 15th edition, Chicago Encyclopaedia britannica, 2007, . Poirier, J. P., Lavoisier, chemist, biologist, economist , trans. by Balinski, R.,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6, . 유지영, 〈프리스틀리와 라봐지에〉, 《한국과학사학회지》, 서울 한국과학사학회, Vol.12 No.1, 1990. 조정미, 〈산소는 누가 발견하였는가〉, 《基礎科學硏究誌》, Vol.15,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 1996. Antoine Laurent Lavoisier A virtual museum of Antoine Lavoisier Antoine Lavoisier - Chemical Achievers profile. Who was the first to classify materials as "compounds"? - Fred Senese The Complete Works of Lavoisier edited by Pietro Corsi (Oxford University) and Patrice Bret (CNRS) Radio 4 program on the discovery of oxygen by the BBC 분류:1743년 태어남 분류:1794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화학자 분류:프랑스의 생물학자 분류:프랑스의 저술가 분류:화학 원소를 발견한 사람 분류:산업혁명 관련자 분류:파리 출신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참수된 사람
다음은 언론사 (言論社) 목록이다. 한국방송공사(KBS) 문화방송(MBC) SBS 한국교육방송공사(EBS) OBS경인TV 종합편성채널 JTBC MBN TV조선 채널A 보도전문채널 YTN 연합뉴스TV 경제보도전문채널 이토마토TV 한국경제TV 매일경제TV SBS CNBC 서울경제TV 이데일리TV MTN 아시아경제TV 영국방송협회(BBC) 케이블 뉴스 네트워크(CNN) 일본방송협회(NHK) 중국중앙방송(CCTV) 미국 방송 회사(ABC) 전국지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국민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 지방별 신문 경기신문 수원일보 경기일보 중부일보 경인일보 기호일보 인천신문 인천일보 강원일보 국제신문 부산일보 경상일보 울산매일 경남신문 경남일보 경남도민일보 대구신문 대구일보 매일신문 영남일보 경북도민일보 중부매일신문 충청일보 옥천신문 대전일보 중도일보 충청투데이 전북일보 전라일보 전북도민일보 새전북신문 전북중앙신문 광주일보 광주매일신문 남도일보 무등일보 전남일보 제민일보 제주신문 제주일보 경제신문 매일경제신문 한국경제신문 서울경제 헤럴드경제 스포츠신문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 스포츠한국 스포츠동아 스포츠경향 스포츠월드 IT신문 디지털타임스 전자신문 한겨레21 위클리경향 시사인 레이디경향 씨네21 보물섬 현대문학 신동아 여성동아 새벗 과학동아 뿌리깊은 나무 샘터 개벽 주간조선 월간서예 건강과 근육 월간조선 새교육 한글 국어새교육 마당 대한뉴스 좋은생각 까치 게이머즈 과학소년 우등생논술 일요신문 주간동아 PC사랑 PC라인 신문 (미국) 신문 (영국) 신문 (프랑스) 신문 (독일) 신문 (일본) 신문 (중국) 연합뉴스 뉴시스 뉴스1 NSP통신 로이터통신 AFP통신 AP통신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데일리서프라이즈 뉴데일리 데일리안 뉴스라이브 빅뉴스 데일리NK 미디어오늘 유니온프레스 포바이포뉴스 코리아옵저버 뉴트리션 딴지일보 네이버 다음 네이트 구글 줌
그리스 문자 () 또는 희랍 문자 (希臘文字)는 그리스어를 쓰는 데 사용되는 자모 문자이다. 자음과 모음이 따로 있는 자모 문자 중 가장 오래된 문자로, 자모 문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알파벳(alphabet)’은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인 알파와 베타에서 왔다. 기원전 9세기경 발달하여 현재까지 그리스어 표기에 사용된다. 그밖에 그리스 숫자를 비롯, 원주율 등의 여러 수학 기호, 물리학의 여러 입자 이름, 항성의 이름 등 다양한 용도로도 쓰인다.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 널리 쓰이는 로마 문자와 키릴 문자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익히 알려진 그리스 문자 형태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사용되던 형태로 아테네와 그 연맹 도시들이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헬레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이오니아 지방, 특히 아티카 변형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로마 문자는 서부 그리스 문자 변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확히는 서부 그리스 문자 변형을 받아들인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온 것이다. 키릴 문자는 사실상 포교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스 문자와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받은 슬라브 토착 문자를 혼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 문자와 그 기원은 아래와 같다. 문자 이름 발음 해당하는 페니키아 문자 로마자 표기법 고대그리스어(한글) 현대그리스어(한글) 고철자법영어(한글) 고대 현대 고대 현대 Α α (알파) (알파) Alpha(알파) Aleph 알레프 a a Β β 베타 비타 Bet(a)벳/베트/비타 Beth 베트 b b Γ γ (감마) (감마) Gamma(감마) (나 앞)(기타) Gimel 기멜 g gh, g, j Δ δ 델타 델타 Delta델타 Daleth 달레트 d d, dh Ε ε 엡실론 엡실론 Epsilon(미국 가끔)엡사일론 He 헤 e e Ζ ζ 제타 지타 Zet(a)젯/제트/지타 ,후에 Zayin 자인 z z Η η 에타 이타 Eta이타 Heth 헤트 e, ē i Θ θ 테타 씨타 Theta씨타 Teth 테트 th th Ι ι 여타 요타 Iota(미국 가끔)아요타 , Yodh 요드 i i Κ κ 카파 카파 Kappa카파 (나 앞)(기타) Kaph 카프 k k Λ λ 람다 람다 Lambda람다 Lamedh 라메드 l l Μ μ 므프/무/뮈 미 Mu뮤 Mem 멤 m m Ν ν 누… 니 Nu뉴 Nun 눈 n n Ξ ξ 크시 크시 Xi(s/z/ks/gz)aɪ☜자이 Samekh 사메크 x x, ks Ο ο 오미크론 오미크론 Omicron(미국 가끔)오마이크론 Ayin 아인 o o Π π 피 피 Pi파이 Pe 페 p p Ρ ρ 러 로 Rho로 , Res 레스 r( rh) r Σ σ ς 싱마 시그마 Sigma사이마/시그마 Sin 신 s s Τ τ 타우 타우/타프 Tau불어:또 Taw 타우 t t Υ υ 웁실론 윕실론 Upsilon(미국 가끔)업사일론 ,후에 Waw 와우 u, y(자음 사이) y, v, f Φ φ 피 피 Phi파이 ف파 ph f Χ χ 키 히 Chi카이 (나 앞)(기타) 기원불명 ch ch, kh Ψ ψ 프시 프시 Psi싸이(영어라서 Psy 같은 발음) φ ps ps Ω ω 어메가 오메가 Omega오미가 Ayin 아인 o, ō o 아래 문자는 표준 그리스 문자는 아니지만, 예전, 혹은 일부 방언에서 사용되었던 문자이다. 와우, 코파, 삼피는 그리스 숫자에서도 사용된다. 글자 이름 발음 해당하는 페니키아 문자 로마자 표기법 Ϝ ϝ/Ͷ ͷ 와우(Digamma) Waw 와우 w Ϛ ϛ 스티그마(Stigma) st Ͱ ͱ 헤타(Heta) h Ϻ ϻ 산(San) Sade 차데 s Ϙ ϙ/Ϟ ϟ 코파(Koppa) Qoph 코프 q Ͳ ͳ/Ϡ ϡ 삼피(Sampi) 기원 불명 ss Ϸ ϸ 쇼(Sho) š U0370.pdf 와우 (영어) Ϝ ϝ 와우 (영어) Ͷ ͷ 스티그마 (영어) Ϛ ϛ 헤타 (영어) Ͱ ͱ 산 (영어) Ϻ ϻ 코파 (영어) Ϙ ϙ 코파 (영어) Ϟ ϟ 삼피 (영어) Ͳ ͳ 삼피 (영어) Ϡ ϡ 쇼 (영어) Ϸ ϸ
시시포스 또는 시지푸스 (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서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코린토스 왕국에서는 그를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왕 헬렌의 아들, 혹은 후손이었던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라 한다. 다른 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라고도 한다. 플레이아데스 메로페의 남편으로서 에피라(코린토스)를 건설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기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라고도 한다(오디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아가 라에르테스와 혼인하기 전). 시시포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시포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가서는 저승에 돌아오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가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는 저승에서 벌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오디세이아 , xi. 593-600). 그가 이 벌을 받은 정확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그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여행하는 이들을 살해한 벌이라고 한다. 한편 플레이아데스 7자매는 사후에 하늘로 올려져 별자리가 되었는데, 그중 신과 연애했던 6명은 빛을 발하였으나 인간 시지포스의 아내였던 메로페만이 부끄러워서 빛이 약하다는 전승도 있다. 또한 시시포스의 아들인 글라우코스는 벌로 불임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설과 말에게 잡아먹혔다는 전승도 있다. 알베르 카뮈는 그가 바위를 굴러 올렸으나 떨어질 줄 알고도 바위를 굴리는 것과 밀어 올린 바위가 굴러떨어졌을때 다시 바위를 올리려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인간승리라고 평가했다. 카뮈는 이러한 행위를 부조리라고 평가했다. 시지프의 신화 글라우코스 아우톨리코스 오딧세우스 벨레로폰 헬렌 분류:그리스 신화의 영웅 분류:코린토스의 왕 분류:트릭스터 분류:아이올로스 가 분류:코린토스 신화
러셀의 역설 (-逆說은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 발견한 논리적 역설로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이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레게의 공리체계에서 M 은 "자신을 정의하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not fall under its defining concept)"라는 개념(concept)에 해당한다. 따라서, 프레게의 체계 역시 모순을 낳는다. 러셀이 정확히 언제 이 역설을 발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1901년 5월이나 6월경 특정 영역의 개체의 수는 그 개체의 하등계급 수보다 작다는 칸토어의 법칙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 러셀의 역설과 소박한 집합론(naïve set theory) === 소박한 집합론에서 ‘소박한’은 후대 수학자들이 칸토어가 발견한 집합론을 공리 집합론(axiomatic set theory)과 구분 짓기 위해 붙인 것이다. ‘naïve’ 란 단어를 ‘소박한’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지만, ‘덜 성숙된’, ‘생각이 얕은’ 이런 느낌의 단어이다. 칸토어의 집합론에 그런 단어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천재 칸토어는 집합론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논의 역설 이후 금기 시 되어온 무한의 개념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무한한 집합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시 수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년배인 수학자 푸앙카레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무한 수를 심각한 수학 질병이라고 불렀고, 칸토어에게 중요했던 선배 수학자 크로네커는 그를 과학 사기군, 배교자, 젊은이를 지적 타락으로 이끄는 자라고 매도했다. 철학자들도 이러한 비난에 가세했고, 성직자들은 그의 시도를 신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겼다. 그리고, 러셀의 역설과 베른의 역설과 같은 역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편, 그의 당대 일부 수학자들은 칸토어 집합론의 공리화를 시작한다.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 에 나오는 그 공리화 방법론을 집합론에 도입한 것이다. 집합론을 체계화 시킨 측면도 있지만, 러셀의 역설을 비롯한 역설들이 주장하는 칸토어 집합론이 지닌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도 있다. 오직 이러한 역설들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계급의 공리(Axiom of class)는 그 필요성이 의문일 뿐만 아니라, 칸토어의 집합론에 심각한 제약을 가한다. 러셀의 역설은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러셀은 유형이론을 바탕으로 모순을 해결하였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분류:소박한 집합론의 역설 분류:자기언급 역설 분류:버트런드 러셀 분류:1901년 과학
토요일 (土曜日은 금요일 뒤의 날, 일요일 앞의 날이다. 월요일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ISO 8601의 권고에 따라 한 주의 여섯 번째 날이다. 일요일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한 주의 일곱 번째 날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토요일은 주말에 속한다. 새우리말 큰사전에서 토요일을 찾아 보면 칠요일의 제일 끝날. 곧 일요일로부터 일곱째 되는 날. 토요 -> 주말 (週末) Merriam Webster s Collegiate Dictionary(영어사전)에서도 토요일을 찾아보면 "the seventh day of the week"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부 게르만어파 언어에서 토요일은 사투르누스의 날 (을 어원으로 하고 있는데, 사투르누스는 토성을 상징하는 신이므로,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토요일 로 불린다.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 북게르만어 즉 노르만어 위주로는 lördag이라고 한다. 그러나 게르만 어의 중심인 독일어는 또 Samstag이라고 다르게 부른다. 잠Sam이라는 위인/신이 있는가 혹은 아래 라틴 어파sabato 특히 불어를 접해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다. 남부 유럽 언어 및 동남아 언어에서 토요일 이란 낱말은 안식일(샤밭)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그 예로는 그리스어 , 이탈리아어 , 인도네시아어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토요일을 한 주의 여섯째 날이라는 의미로 星期六 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는 2012학년도부터 주5일제를 실시하여 모든 토요일에 학교를 나오지 않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기업체에서는 2005년 1월 1일부터 주5일제를 적용하면서 토요일에는 근무하지 않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토요일에 근무하지 아니하나 일부 중소기업 등에서는 토요일에도 사실상 근무한다. 일본에서는 1월 14일 이후 첫 토요일에 센터시험의 지리역사•공민, 국어, 외국어 시험을 본다. 기독교의 일부 교파에서는 이 날에 안식일 예배한다. (이들 중 로마 가톨릭교회는 토요일 오후 4시부터 주일 미사를 실시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 날을 안식일로 간주한다. 2009-10시즌부터 UEFA 챔피언스리그와 UEFA 유로파리그의 결승전이 토요일에 열린다. 프리미어리그 등 프로 축구 리그는 대체로 토요일에 경기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나 헝가리는 공휴일이 화요일이나 목요일이면 연휴를 만들고 직전 토요일을 평일로 한다.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한반도 주변 바다의 이름 동중국해 (東中國海)는 제주도 남쪽부터 타이완에 걸쳐있는 서태평양의 연해이다. 일본에서는 동지나해(東支那海라고 부르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른다. 타이완 해협을 통해 남중국해와, 대한해협과 제주도 북동쪽 해역을 통해 동해와, 제주도 서쪽 해역을 통해 황해와 이어져 있다. 국제 수로 기구에서 1953년 발간한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제3판에 따르면, 동중국해는 동쪽의 규슈와 난세이 제도를 따라 그은 곡선을 경계로 필리핀 해와 나뉜다. 북동쪽은 제주도 동쪽 끝부터 일본의 후쿠에 섬 남쪽 끝과 규슈까지 이은 직선을 경계로 동해와 접한다. 북서쪽은 제주도 서쪽(북위 33°17 )부터 중국 대륙의 양쯔강 하구까지 이은 직선을 경계로 황해와 접한다. 남서쪽은 타이완 섬 북쪽 끝과 푸젠 성의 동쪽 해안(북위 25°24 )을 이은 선을 경계로 남중국해와 접한다. 해역의 크기는 약 1,249,000 km²이다. 동중국해 해역의 천연 가스 개발을 둘러싸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 대한민국, 중화민국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동중국해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의 경계로 중일 중간선을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오키나와 해구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중일 중간선 서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서 천연가스 채굴시설 춘샤오 (를 건설하자 일본은 중간선 동쪽의 천연가스까지 흡수될 수 있다며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 양국은 2008년 6월 중간선을 포함한 해역의 공동 개발에 합의했고, 춘샤오 개발에 일본 기업이 투자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교섭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타이완 제주도 마라도 이어도 남해 남중국해 분류:태평양의 해역 분류:아시아의 해역 분류:중국의 해역 분류:일본의 해역 분류:대한민국의 해역 분류:타이완의 해역
비드쿤 아브라함 레우리츠 욘쇤 크비슬링 (, 1887년 7월 18일 ~ 1945년 10월 24일)은 노르웨이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텔레마르크주 출생이며 1942년 2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노르웨이 정부가 런던에 망명해 있는 동안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총리직을 지냈다. 종전 후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퓌러(Führer, 총통; 히틀러의 칭호)로 불렸다. 그는 오슬로의 뷔그되위(Bygdøy)에 있는 별장에서 살았는데, 북유럽 신화에서 딴 기믈레(Gimle)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군사사관학교 생도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 노르웨이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소련에서 1920년대 기근 당시 그곳에서 난민 구제 사업을 하던 탐험가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농민당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노르웨이의 헌법 기념일인 1933년 5월 17일 크비슬링은 지방 검사 요한 베른하르드 요르트와 함께 민족협동당(Nasjonal Samling)을 창당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당을 본따서 반(半)민주주의 노선을 취한 지도자 중심의 정당이었다. 크비슬링이 당에서 히틀러가 나치당에서 맡은 역할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민족 단일당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으나 1935년을 전후하여 노골적인 친독 반유대 노선을 취하기 시작하자 지지는 줄어들어 독일의 침공 당시 당원수는 2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독일이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왕과 정부가 북쪽으로 피난간 혼란을 틈타 크비슬링은 세계 최초로 라디오 뉴스 시간에 쿠데타를 선언한 이가 되었다. 크비슬링은 히틀러와 전해에 면담한 바 있어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지배하기를 원하여 크비슬링이 수립한 정부는 닷새 만에 해체되고 요제프 테르보펜(Josef Terboven)을 노르웨이의 통치자(Reichskommissar)로 앉혔다. 테르보펜과 크비슬링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테르보펜은 높은 자리에 노르웨이인을 앉히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는지 1942년 크비슬링을 정부수반(총리에 해당)으로 임명, 1943년 2월 1일부터 직책을 맡게 했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가 독일 점령하에서 벗어난 뒤 다른 두 명의 민족단일당 지도자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다. 망명 정부는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 동안의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종전 후 재판을 대비해 사형 제도를 부활시켰었다. 이 때문에 후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크비슬링"이 반역자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신조어는 이미 크비슬링 생전에도 사용되었다. 일례로 당시 "베를린을 방문한 비드쿤 크비슬링"이라는 제목의 풍자 만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크비슬링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히틀러는 저는 반역자입니다 라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풍자이다. 베저 작전 노르웨이의 저항운동 분류:1887년 태어남 분류:1945년 죽음 분류:노르웨이의 섭정 분류:노르웨이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노르웨이 파시스트 분류:노르웨이의 나치 부역자 분류:언어 유희 분류:파시스트 지배자 분류:노르웨이의 반공주의자 분류:노르웨이의 전쟁범죄 기결수 분류:덴마크계 노르웨이인 분류:노르웨이의 총리
트롬쇠 (Tromsø)는 노르웨이 북부 트롬스(Troms) 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2012년 현재 72,066 명의 주민이 있다. 트롬쇠 시의 면적은 도심 바깥의 넓은 지역까지 포함해서 2558 km²이다. 트롬쇠는 노르웨이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로 북극권 트롬쇠위아 섬(Tromsøy)에 위치해 있다(북위 69° 40 33", 동경 18° 55 10"). 세계에서 최북단에 있는 대학교인 트롬쇠 대학교가 있어 세계 최북단의 대학 도시로 알려져 있다. 트롬쇠는 1250년 세워져 1794년 도시 헌장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에는 북극해의 주요 무역 기지가 되어 많은 북극 탐험대가 이곳으로부터 출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노르웨이 정부가 대피해 와 잠시 정부 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트롬쇠는 의료산업 관련 소프트웨어와 원격치료 관련 프로그램의 분야에서 국제적인 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노르웨이 리그에 참가하는 축구 구단으로 트롬쇠 I.L.과 트롬쇠 U.I.L.이 있다. 수많은 북극 탐험대들이 트롬쇠를 출발지로 삼아 북극의 관문 이라고도 한다. 트롬쇠 주민들이 터득한 북극의 조건에 대한 실제 지식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움베르토 노빌레(Umberto Nobile),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 등 여러 탐험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이들은 대원들을 트롬쇠에서 모집하기도 했다. 북극권에 위치한 관계로 5월 21일부터 7월 23일까지는 해가 지지 않는다(백야 현상). 매년 6월에 백야 마라톤을 개최한다. 최근에는 1월에 북극야 하프 마라톤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트롬쇠에서 발행되는 신문으로는 블라데 트롬쇠(Bladet Tromsø) 와 노르뤼스(Nordlys) 가 있다. 하지 때에 이곳 트롬쇠 지역에서도 백야 관측이 가능하다. 저녁 무렵 태양이 서쪽으로 점점 높이가 낮아지다가 자정 때에는 태양이 북쪽의 낮은 하늘을 거쳐서 북동쪽으로 떠오른다. 트롬쇠 출신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바이오스피어(Biosphere)의 게이르 옌센(Geir Jenssen) 작가 및 철학가 페테르 베셀 삽페(Peter Wessel Zapffe) 영화감독 에리크 숄비에르그(Erik Skjoldbjaerg) 조각가 요르겐 드레위에르(Jorgen Dreyer) 미국의 변호사, 민주당 국회의원 아이나 호이달(Einar Hoidale) 대중음악 가수 레네 말린(Lene Marlin) 일렉트로닉 음악 그룹 로익솝(Röyksopp)의 스베인 베르게(Svein Berge)와 토르비에른 브룬틀란(Torbjørn Brundtland) 트롬쇠 전경 케미 (, 1940년) 룰레오 (, 1950년) 링쾨빙 (, 1950년) 그림스비 (, 1961년) 푸네 (, 1966년) 앵커리지, (, 1969년) 자그레브 (, 1971년) 무르만스크 (, 1972년) 케찰테낭고 (, 1999년) 가자 지구 (, 2001년) 공식 홈페이지 분류:노르웨이의 도시 분류:노르웨이의 항구 도시 분류:노르웨이의 스키장
레네 말린 페데르센 (Lene Marlin Pedersen, 1980년 8월 17일 태어남)은 레네 말린 (Lene Marli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노르웨이의 가수이다. 노르웨이 북부의 트롬쇠 출신이다. 1998년 〈언포기버블 시너(Unforgivable Sinner)〉라는 곡을 싱글로 내 데뷔한데 이어 1집 《플레잉 마이 게임(Playing My Game)》을 냈다. 1999년 MTV 유럽 시상식에서 북유럽 최고 그룹/가수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2집 《어나더 데이(Another Day)》를, 2005년에는 3집 《로스트 인 어 모먼트(Lost in a Moment)》를 냈다. 《플레잉 마이 게임(Playing My Game)》 (1998년) 《어나더 데이(Another Day)》 (2003년) 《로스트 인 어 모먼트(Lost in a Moment)》 (2005년) 팬 페이지(영어) 말린, 레네 분류:살아있는 사람 말린, 레네 분류:트롬쇠 출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 ( , , 1828년 9월 9일 ~ 1910년 11월 20일)은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였으며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전쟁과 평화》(1869년), 《안나 카레니나》(1877년)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에 러시아 남부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과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 분석’을 통하여 최상의 리얼리즘을 성취해 냈다. 이 작가는 일상의 형식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벗겨내고자 했다.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는 레닌의 말처럼, 톨스토이는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이 준비되고 있던 시기를 적확(的確)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혁명에 용해시켰다. 나아가서 전 인류의 예술적 발전을 한 걸음 진전시키는 데 그의 문학과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자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교회(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1901년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몸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어서, 귀족들의 방해로 폐교되기는 했지만 1860년 고향 툴라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여, 부모의 강요로 아동노동을 하는 게 전부였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게 해주었다. 당시 부모들은 처음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톨스토이가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냈다. 농민학교는 자유로웠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서 진짜 교육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쓰기도 했는데,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도록 한 내용 때문에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는 귀족들은 농민들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칭찬을 들었다. 톨스토이가 1894년에 저서한 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인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또한 그는 죽기 전 며칠 전인 1910년 11월 1일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 고 말했다. (“God is the limitless All of which man realises himself to be a limited part. The truth exists only in God…”) 또한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서 25장 40절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라는 단편소설은 폭력은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평화주의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미 투르게네프나 오스트로프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근대 연극사에서 유명하게 한 것은 주로 (1886), (1891), (1911) 등의 작품이라 하겠다. 은 실화에 의거해 러시아 농민의 음산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자연주의 희곡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러시아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는 시골 귀족의 무의미한 생활을 풍자한 것. 은 기독교적 자기 희생과 결혼법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설 와 은 모스크바 예술극단 이 각색, 상연한 바 있다. Leo Tolstoy 분류:1828년 태어남 분류:1910년 죽음 분류:러시아의 소설가 분류:러시아의 반전 운동가 분류: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분류:러시아의 에스페란티스토 분류:러시아의 동방 정교도 분류:러시아의 수필가 분류:러시아의 일기 작가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루트비히 필리프 칸토어 ( , 1845년 3월 3일~1918년 1월 6일)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독일의 수학자이다. 무한 집합에 대한 연구로 현대 수학의 기반이 되는 기초적 집합론을 창시하였다. 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 2월 1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일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칸토어는 6명의 자녀 가운데 맏이었다. 아버지는 주식 투자가였고, 외할아버지 프란츠 뵘()은 러시아 제국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다. 칸토어 가족은 1856년 칸토어가 11세 되었을 때 아버지의 병으로 인하여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독일 비스바덴으로 이사하였고, 그 뒤 곧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하였다. 칸토어는 1860년 다름슈타트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862년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63년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하여 레오폴트 크로네커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에른스트 쿠머 등의 강의를 수강하였다. 1866년 여름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보냈다. 1867년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수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69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을 수여받았고, 연구원()이 되었다. 1872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 1874년에 발리 구트만(Vally Guttmann)과 결혼하여 총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879년에 34세의 나이에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칸토어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이전하려 하였으나, 베를린의 레오폴트 크로네커는 칸토어를 매우 싫어하였으므로 이는 무산되었다. 크로네커는 수학의 구성주의를 지향하였는데, 칸토어의 집합론은 구성주의와 철학적으로 정반대되었기 때문이었다. 1881년에 칸토어는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직을 리하르트 데데킨트에게 수여하려 하였으나 데데킨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칸토어와 데데킨트는 1882년에 모든 서신을 중단하게 되었다. 칸토어는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와도 서신을 교환하였으나, 미타그레플레르는 1885년에 칸토어의 논문의 철학적 함의에 반감을 표의하였고, 이 때문에 칸토어와 미타그레플레르와의 관계 또한 중단되었다. 칸토어는 1884년에 여러 수학자들과 비판을 주고받다가 깊은 우울증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퇴원한 뒤 칸토어는 수학을 기피하고 철학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에 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들이 사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라는 가설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였으며 수시로 관련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회복한 칸토어는 1891년에 대각선 논법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신경증은 계속하여 재발하였고 1899년과 1903년에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할레 대학교는 칸토어가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칸토어가 앓던 정신질환을 현대 수학사학자들은 양극성장애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그의 병은 특히 말년에 심해져 여러 망상적인 주제에 집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신의 뜻을 지키는 신성한 임무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학자들이 자신을 중상모략하고 있다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실제로 지도교수이던 크로네커가 칸토어가 교수직을 얻는 데에 훼방놓은 전적이 있기도 했다. 1904년에 쾨니그 줄러는 칸토어의 집합론의 핵심 개념이었던 정렬 정리의 "반증"을 발표하였다. 곧 이 반증은 심각한 오류를 포함한다는 것이 알려졌으나, 칸토어는 큰 충격을 받았고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칸토어는 매 2~3년마다 입원을 반복하였다. 결국 1913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은퇴한 칸토어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동안 궁핍과 영양 부족에 시달렸다. 1917년에 마지막으로 할레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칸토어는 아내에게 퇴원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다가 1918년 1월 6일 심장마비로 병원 내에서 사망하였다. 개수가 자연수의 개수보다 많음을 증명한 대각선 논법 칸토어는 무한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집합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집합의 크기에 대한 연구로 무한 집합과 정렬 집합을 정의하였다. 칸토어는 무한 집합끼리도 그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음을 증명하였다. 또한 칸토어의 정리는 집합과 멱집합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무한의 무한성"의 존재를 암시한다. 초한수에 관한 칸토어의 이론은 당대 유명한 수학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현대의 대다수 수학자들은 그의 초한수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며 칸토어의 이론은 현대의 수학기초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후 연속체 가설을 고안하여 직관적으로 참이라 믿고 수년 간 그 증명에 힘을 쏟았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연속체가설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체계에서 반증과 증명이 불가능하여 독립적임이 각각 쿠르트 괴델과 폴 코언에 의해 증명되었다. 수학의 본질은 그것이 갖는 자유로움에 있다. "Das Wesen der Mathematik liegt in ihrer Freiheit" "The essence of mathematics is its freedom."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Cantor)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수 없다. -다비트 힐베르트 독일어 Aus dem Paradies, das Cantor uns geschaffen, soll uns niemand vertreiben können. 영어 (번역) No one shall expel us from the Paradise that Cantor has created. 알레프 수 연속체 가설 초한수 분류:1845년 태어남 분류:1918년 죽음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19세기 철학자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독일의 논리학자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러시아의 수학자 분류:러시아의 논리학자 분류: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동문 분류:유대계 독일인 분류:유대계 러시아인 분류:집합론 분류: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분류:집합론자 분류:발트 독일인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고틀로프 프레게 ( , 1848년 11월 8일 ~ 1925년 7월 26일)는 독일의 수리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근대 수리철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848년 11월 8일에, 당시 공식적으로 스웨덴-노르웨이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독일 통치 아래 있던 도시 비스마르()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는 1908년에 공식적으로 메클렌부르크에 반환되었다.) 비스마르의 김나지움을 1869년에 졸업하였고, 김나지움의 교사 구스타프 아돌프 레오 작세()는 프레게의 수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예나 대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고하였다. 프레게는 1869년에 예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4학기를 공부하였고, 1871년에 괴팅겐 대학교로 전학하여 1873년 12월에 사영기하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74년에 예나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을 마치고, 예나에서 수학 개인 강사로 일했다. 1887년 3월 14일에 마르가레테 카타리나 소피아 아나 리제베르크(, 1856년 2월 15일 ~ 1904년 6월 25일)와 결혼하였다. 1879년에 예나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879년에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을 출판하였고, 이 책에서 술어 논리를 최초로 도입하였다. 1884년에는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를 출판하여 수의 개념의 심리주의적 정의를 비판하였다. 1893년에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1권을 출판하였고, 1896년에 예나 대학교의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1903년에 《산술의 기본 법칙》2권을 출판하였다. 1917년 또는 1918년에 예나 대학교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말년에 들어 수학에 관한 활동을 거부하고 의회민주주의, 자유주의, 가톨릭교, 외국인 등을 비판하는 극단적인 글들을 저술하였다. 다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외국인 동료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였다고도 전해진다. 1925년 7월 26일에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작은 마을 바트클라이넨()에서 사망하였다. 《개념 표기법》 표지 1879년에 출판된 책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에서 프레게는 기존에 알려진 명제 논리를 술어 논리로 확장하였고, 명제 논리와 술어 논리를 표현하는 형식적 언어를 고안하였다. 프레게의 표기법은 다음과 같다. 개념 《개념 표기법》 표기 현대 표기 부정 60px 함의 80px 전칭 기호 Quantifier1.png 존재 기호 Quantifier3.png 동치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 이론(theory of description)과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의 중요한 핵심이 되는 양화(quantification)가 바로 술어논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고안한 프레게의 개념이다. 그의 업적은 당시에는 거의 인정받지 않았으나, 그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주세페 페아노, 버트런드 러셀 등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에드문트 후설도 프레게의 영향을 받았다. 프레게는 수학이 논리학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논리주의의 초기 주창자 중에 하나였다. 프레게는 1884년에 출판된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에서 기존의 심리주의적 수의 개념을 비판하였고, 수의 개념이 종합적() 개념이 아니라 해석적()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1권 1893년, 2권 1903년)에서 프레게는 논리학으로부터 산술을 유도하려고 시도하였다. 1판이 출판된 뒤, 버트런드 러셀은 프레게의 공리계가 러셀의 역설을 함의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프레게는 이미 완성된 2권에 이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부록을 추가하였다. 프레게는 언어철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특히 고유명사의 뜻과 지시체() 사이의 차이에 관해 논의하였다. *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 *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 * 〈함수와 개념〉 * 〈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 * 〈개념과 대상에 관하여〉 *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총 2권) * 〈기하학의 기초에 관하여〉 **〈함수란 무엇인가?〉 * 〈사고 논리적 연구〉 * 〈부정〉 * 〈복합 사고〉 마지막 3편의 논문은 합쳐 《논리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계획이었으나, 프레게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다. * 분류:1848년 태어남 분류:1925년 죽음 분류:19세기 철학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독일의 철학자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독일의 논리학자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예나 대학교 동문 분류:버트런드 러셀 분류:형이상학자
알프레드 히치콕 경 (, , 1899년 8월 13일 ~ 1980년 4월 29일)은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이다. ‘서스펜스의 대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으며, 그의 영화는 공포 영화 장르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으며, 이런 영화는 사소한 실수가 불러일으키는 것을 일깨우게 한다. 그는 감독 외에도 제작, 각본, 편집, 미술에 능하였다. 최초의 스타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현기증》, 《싸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창》, 《오명》 등이 있다. 대부분의 그의 대표작들은 아카데미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하였으며 그의 작품들 중에 작품상을 받은 작품은 《레베카》가 유일하다. 히치콕은 1899년 농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의 막내아들로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William)은 어부 출신의 야채상인 조지프(Joseph)와 일용직 노동자의 딸 앤 머호니(Anne Mahoney)의 9남매의 자식들 중 한 명이었고 어머니 에마(Emma)는 경찰관 존 웰런(John Whelan)의 딸이었다. 히치콕은 1910년부터 스탬퍼드힐()에 있는 예수회 소속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그에 따른 체벌은 10대 시절의 히치콕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13년 학교를 마친 히치콕이 아직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 윌리엄이 1914년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히치콕은 전신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으나 이 직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상관의 도움으로 광고부로 이직한 히치콕은 영화와 문학에 심취했다. 주로 영국 탐정소설을 읽었지만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에 매료되어, 훗날 자신이 공포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포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히치콕은 영화사에서 자막을 도안하는 일을 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곳에서 영화 제작 기술을 익혔다. 1922년 히치콕은 시모어 힉스(Seymour Hicks)와 함께 공동으로 영화 《항상 부인에게 얘기하세요》(Always Tell Your Wife)를 감독했고,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첫 작품 《기쁨의 정원》(The Pleasure Garden)과 두 번째 영화 《마운틴 이글》(The Mountain Eagle)은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평범한 일상 속에 갑작스럽게 악이 침투한다는 히치콕 특유의 설정을 바탕으로 한 세 번째 영화 《하숙인》(The Lodger)에 이르러서 히치콕은 자신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영국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신인 감독으로 자리잡은 히치콕은 1926년 1월 2일 영화 편집자 앨마 리빌()과 결혼했고,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British International Pictures)에 스카웃되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 《링》(The Ring)은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이전의 영화들과는 달리, 히치콕과 엘리엇 스태너드()가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실험적인 기법이 도입되었다. 《링》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나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유성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히치콕은 연극 대본을 원작으로 하는 자신의 영화 《협박》(Blackmail)에서 부분적으로 소리를 집어넣었고, 이 영화는 평단과 관객 양쪽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히치콕은 영화제작사 측의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연극작품을 영화화하려는 경향 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부인 앨머와 밸 밸런타인()이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한 《부자와 이방인》(Rich and Strange)과 히치콕 본인이 제작한 영화 《캠버 경의 여인들》(Lord Camber s Ladies)의 연이은 실패로 히치콕은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와 결별했다. 고먼트 브리티시(Gaumont-British) 사와 재계약한 히치콕은 자신이 바라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범죄 스릴러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The Man Who Knew Too Much), 《39계단》, 《비밀 첩보원》(Secret Agent), 《사보타주》(Sabotage), 《젊음과 순수》(Young And Innocent) 등 히치콕의 영국에서 만든 영화 중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30년대 후반 히치콕은 미국 진출을 결정지었고, 1938년 7월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미국의 제작자 마이런 셀즈닉(Myron Selznick)의 동생 데이비드 O. 셀즈닉과 계약했다. 감독들에게 일일이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리는 셀즈닉과의 공동 작업은 곧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레베카》는 아카데미상 작품상, 촬영상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히치콕은 자신의 장기인 서스펜스 영화 《의혹》(Suspicion), 《의혹의 그림자》 외에도 코미디 《스미스 부부》(Mr. & Mrs. Smith), 첩보 영화 《파괴 공작원》(Saboteur) 등 제작자 측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영화를 만들었다. 《패러딘 부인의 사랑》(The Paradine Case)을 끝으로 히치콕은 셀즈윅을 떠났다. 제작자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영화 제작사 트랜스애틀랜틱 픽처스(Transatlantic Pictures)를 세운 히치콕은 첫 컬러 영화 《로프》(Rope)를 발표했고, 이어서 《염소자리 아래서》(Under Capricorn)를 만들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영화사는 문을 닫았고 인기 배우를 기용하여 제작한 다음 작품 《무대 공포증》(Stage Fright)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히치콕은 주식과 부동산 투자, 각종 방송과 강의에 출연함으로써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히치콕은 신인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만들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 즈음부터 히치콕은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새》 등 그의 대표작들을 발표했다. 이후에 발표한 《찢어진 커튼》(Torn Curtain), 《토파즈》(Topaz)는 이전만큼의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히치콕은 일흔을 넘긴 나이에 다시 메가폰을 잡고 1972년 《프렌지》(Frenzy)를 발표해 흥행했다. 평소 과체중에 음주가 잦았던 히치콕은 점차 건강이 악화되었고, 자신의 마지막 영화 《가족 음모》(Family Plot)를 발표했다. 그는 차기작을 준비할 생각이었으나 더 이상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영화일에서 은퇴했다. 1980년 4월 16일 미국 영화연구소 시상식에서 한 연설이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이었다. 같은 해 4월 29일 히치콕은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히치콕의 영화에는 맥거핀이라는 요소가 자주 등장한다. 맥거핀이란 영화의 플롯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내용이나 인물에 관해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용상 무언가 중요한것임을 암시하지만 실상은 플롯의 진행에 있어 아무런 관련성도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히치콕은 맥거핀을 관객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트뤼포는 히치콕에서 맥거핀에 대해 질문했고 이에 대해 히치콕이 든 예는 오명에서의 와인병이었다. 히치콕은 맥거핀이란 관객과 등장인물들의 관심을 끄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레이터인 감독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와인병에 든 우라늄 가루’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맥거핀에 대한 일화로 히치콕은 트뤼포에게 《오명》(Notorious)의 일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히치콕은 제작자들을 상대로 맥거핀이 되는 우라늄 가루에 대해 설득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프로듀서들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물질이 왜 사랑이야기에 들어가야 하는지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결국 《오명》의 시나리오는 대부분의 프로듀서들로부터 거절됐고 히치콕은 이 영화의 제작과 맥거핀을 고집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제작비를 충원했다. 맥거핀에 대한 히치콕의 신념은 확고했다. 맥거핀은 관객이 중심이 되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관객을 통제하는 장치였다. 따라서 극의 서스펜스를 위해서 맥거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첩보활동을 위해 나치 비밀조직의 수장 알렉스 세바스찬과 결혼까지 불사한 알리시아는 안주인으로서 세바스찬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녀는 저택의 거실 장식장에 있던 와인병 하나를 두고 나치 조직원들끼리 냉랭한 기류가 형성되는 것을 눈치챈다. 이 와인병은 그들 사이에서도 일급비밀인 중대한 것으로 보인다.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데블린은 알리시아와 함께 와인창고로 들어가기로 한다. 그는 알리시아에게 세바스찬이 결혼 축하파티를 열도록 청하라고 종용한다. 파티 당일, 세바스찬의 결혼기념 파티에 초대되어 온 데블린은 알리시아와 함께 지하창고에 잠입해 와인병을 찾는다. 그는 실수로 와인병 하나를 깨뜨리고 안에 들어있던 검은 색 모래입자들은 바닥에 쏟아진다. 숨막힐 듯 조여오는 서스펜스의 순간. 두 사람이 우라늄 가루와 병조각의 흔적을 치우는 동안 세바스찬은 하인을 데리고 파티에 쓸 술을 가지러 지하창고로 내려간다. 이 일로 세바스찬은 알리시아가 나치조직의 비밀을 캐기 위해 위장 결혼한 미국의스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어머니에게 아내의 처분을 두고 의논하고 결국 두 사람은 작당해서 알리시아를 독살하기로 한다. 이렇게 검정색 가루가 든 와인병은 사건이 진행되는 모터의 역할을 한다. 관객에게 관심사는 데블린과 알리시아의 불가능해보이는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다. 관객은 와인병에 호기심을 기울이게 되고 나중에 와인병이 깨져 버리면서 사건은 더 발전하지만, 중요한 점은 관객은 더 이상 와인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와인병은 깨어져 관심을 끈 순간, 그것으로 본래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 꼭 필요한 우라늄 입자가 든 와인병’ 은 나치의 구체적인 계획과 미국의 첩보활동이라는 서브 테마에 관심을 두게 유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와인병은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중간에 사라져버리는 맥거핀이라 할 수 있다. 1958년에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둔 작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맥거핀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관객과 등장인물들의 주의를 끄는 사람과 사물로 나타난다. 주인공 로저 O. 쏜힐(캐리 그란트)은 악당들로부터 아무 잘못없이 캐플란으로 오인이 되어버린다. 쏜힐은 캐플란이 과연 누구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유엔빌딩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인누명까지 쓰게 되고 도주자 신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는 미국을 횡단하며 갖은 모험을 겪게 된다. 그런데 쏜힐의 도주라는 사건의 발단이 되는 ‘캐플란’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조직내에서 일명 ‘교수’라 불리는 CIA 요원은 회의중 반담이라는 악당의 조직에 잠입시킨 요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지어낸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캐플란이 맥거핀이었다는 사실은 영화 시작 45분이 경과한 후 간단하게 밝혀진다. 관객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쏜힐이 캐플란을 만나기 위해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서스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차안에서 만난 이브 캔달이라는 묘령의 여인의 도움을 받아 경찰과 반담무리들의 눈을 속인다. 이브는 쏜힐에게 캐플란의 전언이라면서 황야 한 가운데로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면 캐플란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캐플란을 쏜힐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또 하나의 맥거핀은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고대 조각상이다. 이것은 이브가 반담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빼앗아서 도주하는 물건으로 나온다. 하지만 반담이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고가의 유물로만 나올 뿐, 구체적으로는 언급되지 않는다. 러쉬모어산으로 도주한 이브와 쏜힐은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까지도 조각상을 악당들에게 넘겨 주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조각상이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 관객은 그 안에 마이크로 필름조각이 들어있는 것을 보지만 그것은 잠시 화면에 잡힐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것이 기밀정보를 담은 것이라는 암시에 그칠 뿐 그 내용에 대해서 히치콕은 영화에서 전혀 다루지 않는다. 쏜힐은 이브를, 이브는 이 조각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사실 자체는 서스펜스를 낚는 미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또한 감독 자신이 영화 속 어딘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것을 찾는 것 또한 한 재미가 된다. 영화의 등장방법은 지나가는 행인등이나 때로는 영화속 신문기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히치콕 감독은 《히치콕 극장》시리즈(, 1955년-1961년)의 사회,작품의 원작과 주제선정,감수를 맡았는데, 이 프로그램은 1958년 그 해의 최고 방송 시리즈로서 골든 글로브상을 받았다. 후에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자 1961년부터 방영 시간이 30분에서 한시간으로 늘어났다. 제목도 《Alfred Hitchcock Hour》로 바뀌었다. 영화업계가 새로운 매체인 TV와의 경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히치콕은 TV시리즈에 출연함으로써 자신의 인기를 높이고 이름을 알렸다. 히치콕 감독은 1956년 12월 추리소설 잡지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를 창간했다(실제로 히치콕 감독은 잡지의 편집 등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이름과 초상권을 대여해준 것 뿐이었지만 이 잡지로 인해 그는 연간 1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초기에는 콘텐츠가 평범해서 금방 사라질 것으로 보았으나, 우수작가들의 참여로 콘텐츠의 수준이 높아지고, 대중들에게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꾸준히 간행되고 있다. 1997년에는 코지(Cozy)장르(한정된 공간에서 범죄가 벌어지는 설정의 미국 추리소설장르, 하드보일드에 상대되는 용어)의 《누가 머피 부인의 차우더에 독을 넣었는가?》()를 선보이기도 했다. 1980년 대영 제국 훈장 2등급(KBE, 작위급 훈장) 프랑수아 트뤼포, 《히치콕과의 대화》 베른하르트 옌드리케, 《앨프레드 히치콕》, 한길사, 1997 분류:1899년 태어남 분류:1980년 죽음 분류:잉글랜드의 영화 감독 분류:미국의 영화 감독 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사람 분류:영국의 기사 분류: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 분류:아카데미 어빙 탤버그 상 수상자 분류:골든 글로브상 세실 B. 데밀상 수상자 분류:에식스주 출신 분류:런던 출신 분류:런던 대학교 동문 분류:아일랜드계 잉글랜드인 분류:20세기 잉글랜드 사람 분류:미국에 거주한 잉글랜드인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 , , 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운동가 ·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 언론인이다.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년 4월 3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1941년 5월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상을 겸하였다. 1945년 6월 27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가 중 하나였던 소련을 산업화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과학 기술의 개발에도 중점을 두어 과학과 교육, 물리학자 등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후에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발판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9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자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 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 빛나는 태양 , 삶의 지주 , 위대한 조직자 , 위대한 지도자 ,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 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 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의 인간 백정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 이라는 가명은 강철 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본래 이름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 (이며, 어릴 적의 이름이자 애칭은 소소 ()다. 1894.jpg|섬네일|왼쪽|150px|1894년의 어린 스탈린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이던 조지아(국가)의 고리에서 구두 제화공과 신기료 장사를 하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재봉사이던 어머니 에카테리네 겔라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탈린 전기의 저자인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1938년 소련에서 출판 된 스탈린 전기는 그의 생애를 1879년 12월 21일로 표기해놓고 있으나, 그가 그루지아에 가서 문서를 확인해본 결과 그가 태어난 해는 1978년 12월 18일이라고 한다. 알콜중독자에 술주정꾼인 아버지 베사리온을 두었던 그는 어린 시절 무자비한 구타, 폭행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 베사리온은 불같은 성격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였다. 베사리온은 구두 장사가 잘 되지 않자 알콜중독에 걸려 계속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 에카테리네는 아버지 베사리온에게 수시로 폭행당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한 스탈린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이후 아버지의 보복을 두려워 겁을 먹었던 스탈린은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 까지 이웃집에서 머물렀다. 7살(1886)에 그는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천연두를 손과 바늘로 짠 탓에 그의 얼굴은 곰보가 되었다. 후에 소련의 사진들은 스탈린의 천연두 자국을 모두 편집, 삭제하였다. 기억력이 좋고 영민했던 그는 독서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체력이 강했다 하나 약체에 발육부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청난 의지력을 가졌던 그는 일찍부터 본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터득했다. 또한 피의 복수를 하는 캅카스인의 전통대로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를 꾀하는 데 있어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을 집념을 키워 나갔다.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했던 그는 주변의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오직 독서만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는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스탈린은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대로 10살(1889) 때 교회 소학교에 입학했다. 스탈린은 일찍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1888년(9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하여 구두 공장에 찾아가 아들을 되찾아왔다. 어머니의 기대와 노력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교회 학교들은 조지아 민족들에게 러시아인이 되는 교육을 강요하였다. 스탈린은 교육 과정과 수업 내용에 대해 강한 반발과 교사들, 제도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12살(1891)에 2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후 스탈린은 왼쪽 팔이 영구히 불구가 되었고, 청년기 때는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발육부진으로 키는 160cm를 약간 넘었다. 스탈린은 고리 시내에 있는 교회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외부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그의 러시아어는 약간 불완전하여 항상 후음성의 조지아어 액센트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조지아어만을 사용하였다. 1894년(15살) 초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하였다. 1894년 15살에 그는 장학금을 받고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소재한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는 조지아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 1학년 재학 중 스탈린은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했는데,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았다. 그가 시에서 다룬 주제는 대지와 자연, 민족정신 등이었다. 신학교 2학년 이후 그는 조지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 러시아인을 만드는 교육을 강요하는 스승들과 마찰이 잦았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 서적을 접하면서 종교와 민족보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중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와 종교적 질서에 대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가정 환경이 어려웠음에도 재학 중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받았다. 신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나, 재학 중 그는 국제 공산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쓴 저서와 다른 금서들을 비밀리에 탐독하다가 신학교에서 그는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혔고 비밀 결사조직인 메사메 다시() 에 가담하기도 했다. 신학교 졸업 전 해인 1899년 말 스탈린은 기말고사 시험을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당시 신학교의 문서에는 그가 수업료를 낼 수 없어서 퇴학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하여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혁명 활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였으나,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몸이 쇠약해져 중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으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어머니의 뜻을 저버렸다. 신학교를 떠난 직후 스탈린은 레닌의 저작과 관련 서적들을 폭넓게 읽었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20대 초반의 스탈린 1899년 12월 스탈린은 트빌리시 천문대에 채용되어 천문대 서기로 수개월간 근무했다. 트빌리시 천문대의 공무원은 그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직업이라 한다. 그가 육체 노동은 전혀 한 적이 없다 는 주장도 있다. 조지아의 유대인 재벌인 로스차일드 일가가 소유한 정유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1900년(21세) 지하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0년부터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그는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지만,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다. 스탈린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는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려 든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이러한 비난은 조직 내부의 단결을 저해한다는 논리로 대응한다. Svanidze.jpg|섬네일|오른쪽|180px|첫 부인 에카테리네 스바니제(그녀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가난 속에 최후를 맞이하면서 스탈린은 한층 냉혹하게 변한다.) 이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그가 존경하고 탐독하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분당하게 되자, 스탈린은 보다 혁명운동에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02년 4월(23세)부터 1903년 3월(24세)까지 스탈린은 혁명 활동을 하다가 7번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2년에서 1903년 무렵 연인 에카테리네 스바니제()를 만났는데, 스바니제는 러시아 육군 군복제조사 미싱공으로 일하였다. 시짓기와 작문 재주가 탁월했던 스탈린은 연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래를 부르고 시도 읊었다고 한다. 1903년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곧 차르의 비밀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1903년말 스탈린은 캅카스 지역 볼셰비키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전업혁명가로서 여러 비합법적인 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활동에는 파업 선동, 정부 비판, 사회 부조리 지적, 민병 조직, 민중 선동뿐 아니라 자금확보를 위한 은행강도, 반대파 요인 암살, 테러, 몸값 납치 같은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5년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석했지만 회의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1905년 무렵 스탈린은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각종 시민사회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1905년 그는 동료에게 은신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거기에서 첫사랑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애칭은 카토)를 다시 만났다. 1906년 스톡홀름 회의에 참석했다. 스바니제와의 꾸준한 교제 결과 스바니제의 마음을 움직여 1906년 7월 스탈린은 스바니제와 결혼하였고, 후에 아들 야코프를 얻었다. 신혼여행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마냥 행복했다. 스탈린의 한 혁명 동료는 신혼 초기의 스탈린에 대해 “혁명에만 몰두하던 그가 아내에게만은 부드럽고 세심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가난과 외로움으로 고생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병이 들어 사망했다. 아내 카토가 고생하며 늘 그가 경찰에 붙잡히지 않기만 기도한 것을 전해들은 그는 크게 상심하였다. 그는 "첫 아내의 죽음 이후로 나는 모든 인간성을 버렸다."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곧 1907년 스탈린은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볼셰비키 조직 확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인쇄물과 홍보 팜플렛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도심에 뿌리고, 각지를 다니며 홍보와 연설, 강연 등을 통해 볼셰비키가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집단임을 선전했다. 이는 비가 오거나, 대량 폭설로 교통이 막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각지를 순행하는 것으로 열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선전, 홍보 등으로 인력과 조직을 끌어모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07년 6월 25일(음력으로는 6월 12일)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 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체포 후 교도소에서 촬영한 사진(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여러 번 탈출에 성공한다.) 1903년부터 그가 시베리아로 망명하던 1913년까지 스탈린은 볼셰비키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전국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담한 강도 행각도 서슴치 않았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성공적으로 탈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여러 번 체포되었는데, 그때마다 탈출에 성공해 전제 러시아의 비밀경찰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호송 차량에서 뛰어내려 도망치기도 했고, 경찰과 격투를 벌여 때려눕히고 도주하기도 했다. 스탈린의 현상금을 내걸은 포스터가 걸리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체포되지 않고 각처를 은신해 다녔다. 첫 아내 스바니제와의 비극적인 사별은 스탈린의 냉혹하고 난폭한 성격을 한층 더 강화시켰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정치 자금 확보를 위한 은행 강도를 금지하자, 스탈린은 이에 항의하여 잠시 사임하였다. 이후 현금수송차에 대한 대규모 강탈을 지휘하였는데, 이때 4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스탈린은 다시 바쿠로 도피했는데, 여기서 1908년 12월 부인 스바니제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냉혹한 혁명가가 되기 전 그는 매력적이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에게 잘 보이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시도 읊었다. 바보 연기로 주변을 웃기기도 했다. Dzhugashvili.jpg|섬네일|왼쪽|160px|장남 야코브 주가슈빌리 결혼한 지 16개월 만에 아내 스바니제가 트빌리시에서 발진티푸스로 숨지고 말았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은 급히 아내에게 달려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스탈린은 아내의 눈을 감겨준 뒤 끌어안고 오열하다가 결국 실신했다. 그는 직접 관을 준비해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 겔라제의 일기에는 스탈린은 아내의 장례식이 있던 날 그 자리에서 오열하다 실신했다고 한다. 첫 아내인 스바니제의 비극적인 죽음은 스탈린의 냉혹한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스탈린은 술에 취하면 곧잘 병중인 스바니제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동료들에게 곧잘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가 죽자 스탈린은 심히 오열했는데 어머니 겔라제 역시 그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두기도 했다. 스바니제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야코프는 1920년대 말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는데, 스탈린은 그를 약골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하였다. 스바니제를 잃고, 바쿠에서 체류하며 스탈린은 아제르바이잔인과 페르시아인 무슬림, 수백명의 흑인들까지 포섭, 게릴라 단체를 조직하여 파르티잔 운동을 시작했고, 노동자 파업과 각종 집회, 선전 선동을 기획하였으며 많은 수의 러시아 차르의 지지자들을 살해하는 등 파르티잔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몸값 납치, 강도, 보호료 뜯기, 위조 화폐 제작 등의 범죄적인 활동으로 자금을 확보하였다. 1911년 스탈린. 스탈린은 결국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7번이나 추방되지만 마지막 세 번을 제외하면 그때마다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가 받은 형량 선고가 가벼운 데다가 번번이 쉽게 은신하고 도피했기 때문에, 동료 공산주의혁명가들로부터 제국경찰의 보수를 받는 프락치 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제1차 중앙위원회에 그를 신입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볼셰비키당 내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1912년 4월 스탈린은 풀려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잡지 프라우다를 창간하였다. 평소 과묵하고 그다지 말주변이 없는 스탈린은 당의 공식 신문인 프라우다의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강철의 인간 이라는 뜻인 "스탈린" {스탈(стал)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한다.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반격 암호로 쓰이기도 했다.}이라는 가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이름으로 당의 출판물에 기고하고, 언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제국 경찰의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기민한 피신과 체포 뒤에도 성공적으로 탈출하는 것에 대한 당내 첩자 의혹, 제국 비밀경찰 의혹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혹 속에서도 레닌은 1912년 스탈린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도록 승격시켰다.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 후광 덕에 스탈린에 대한 각종 의혹은 해소되거나 서서히 묻혀져갔다. 그러나 뒤에 레닌은 임종 직전 자신의 스탈린 후원을 크게 후회하였다 한다. 스탈린은 프라우다를 간행하면서 각종 학술 용어 보다는 지역과 하층민들이 두루 읽을수 있도록 비전문 용어와 지역지부에서 간행되는 신문에는 지역 방언의 활용 등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의 마케팅 효과는 성공을 거두어 프라우다의 구독, 배달은 타타르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징병대상자가 되지만, 12세 때 당한 교통사고로 인한 왼쪽 팔의 장애 때문에 병역 면제되었다. in exile 1915.jpg|섬네일|오른쪽|120px|이오시프 스탈린 (1915년 무렵) 1913년 스탈린은 시베리아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각지를 전전했다. 이 기간 중 그는 황실과 귀족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을 키워나갔다.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가 제위에서 퇴위된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벌어져 제정이 무너지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당시 스탈린은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제의 가족은 물론 황족들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차르와 그 가족의 처형에는 일부 공감하였으나, 귀족과 황족까지 처형하는 것을 놓고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그리고 볼셰비키에서 조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며 주저하였다. 3월 초 스탈린은 처음에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를 프라우다의 편집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곧 4월의 당 회의에서 레닌의 견해를 듣고 그의 4월 테제 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입장을 바꾸어 임시정부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볼셰비키 당원 중 앞장서서 혁명으로서 임시정부를 접수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서서히 장악하자며 만류하였다. 1917년 4월에 스탈린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에 의해 체포령이 내린 레닌이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돕기도 하고, 유혈극을 피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포위된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시키고 스탈린은 혁명의 혼란기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었다. 1917년 3월 25일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온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편집 책임을 다시 맡았다. 스탈린은 레닌이 없는 볼셰비키 당을 지도하면서 위태로운 순간을 넘겼으며, 불안정한 권력을 승계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에 볼셰비키가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의 영향을 받아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적 의사를 번복, 볼셰비키당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보다 호전적인 생각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한편 스탈린은 제정의 압력을 피해 핀란드에 출국중이었던 레닌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돌아오게 하였다. 한편 10월 임시정부는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하자 체포되었던 볼셰비키 당원을 석방시켜 방위전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볼셰비키는 이를 이용하여 임시정부를 전복할 혁명을 꾸몄다. 레닌, 레프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스모르니 학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를 가결하였고 11월 7일(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 케렌스키가 전선을 방문한 틈을 이용하여 실행에 옮겼다. (10월 혁명) 이는 별다른 희생 없이 성공했고, 11월 8일 임시정부 각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917년 11월 당시, 11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레프 트로츠키의 역할만큼 눈에 띄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이후 그의 최대 라이벌로 성장했다. 스탈린, 레닌, 칼리닌.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집권한 직후, 스탈린은 인민위원회 내무인민위원(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17년 인민위원회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인종문제담당 장관)을 겸임하였다. 곧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세력(하얀 군대)이 일어나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었다. 레닌은 5명으로 구성된 볼셰비키당 정치국을 신설하였으며, 여기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닌은 스탈린을 볼가 강변의 차리친 시의 수비를 위해 보냈고, 1918년 5월 차리친에 도착했다.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유력 지휘관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세묜 부됸니와 친구가 되어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당시 국방인민위원을 맡아 붉은 군대를 총지휘하고 있던 트로츠키의 정책에 자주 반대했다. 내전 중 스탈린을 포함한 붉은 군대 지도자들은 승리를 위해 잔인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작농을 협박하여 식량을 강탈하는가 하면 식량징발에 반발하는 마을을 불태우도록 했고, 서부 전선에서의 대량 탈영을 막기 위해 탈영자들을 공개처형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1919년 스탈린은 국가정보통제담당 인민위원(보안담당 장관)에 임명되어, 인종 문제 담당 인민위원과 국가 정보 통제 담당 인민위원을 겸임하였다. 그해 스탈린은 옛 공산당 동료의 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Nadezhda Alliluyeva)와 재혼했다. 시를 짓는 재주가 있던 그는 평소 냉정한 합리주의자였으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연애하면서 갑자기 낭만주의자, 낙천주의자로 변신하여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는데, 스탈린은 크렘린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Lenin and Joseph Stalin, 1919.jpg|섬네일|왼쪽|160px|레닌과 함께 (1919년) 소련 내전이 마무리될 무렵, 볼세비키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한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레닌과 트로츠키는 더 북쪽에 있는 바르샤바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트로츠키는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 지휘관 부아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군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리보프에 있던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트로츠키와 스탈린 모두 후퇴하여 리보프와 바르샤바는 모두 점령하지 못했고, 스탈린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스탈린은 1920년 8월 모스크바로 돌아와 자신을 변호하고 군사지휘를 사임하였다. 9월 22일 제9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공개적으로 스탈린을 비판하였다. 1923년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직과 국가통제인민위원직을 사퇴했다. 후에 스탈린은 1920년의 실패를 가져온 이들에게 철저히 복수했다. 그리하여 후에 자신을 비판한 트로츠키를 암살하고 1939년 나치와의 협정을 통한 폴란드 침공으로 르보프를 소련영토로 만들고 그때 포로로 잡은 폴란드 군 장교들을 대규모로 처형하였다. (카틴 숲의 학살). 후에 연합국의 수뇌부가 모인 얄타 회담에서도 리보프는 전후에도 반드시 소련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위대를 잘 조직했던 그는 트로츠키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 사적인 조직 업무에 관심이 없는 라이벌들의 헛점을 공격하며 당내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21년부터 소련의 국가 원수인 레닌이 병석에 누워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병든 레닌의 의사를 무시하고 능멸하였다. 레닌은 죽기 1년 전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유언 을 썼는데, 이는 레닌 사망 직후와 스탈린 자신의 사망 직후에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한 자료로 널리 선전되었다. portrait 1937.jpg|섬네일|왼쪽|140px|스탈린 초상화 (1937년작) 스탈린의 폭력적 정치수단, 지나친 러시아주의 그리고 관료주의적 성향은 스승인 레닌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였다. 레닌은 특히 그의 유명한 유언장에서 "스탈린에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으나, 1924년에 이르러 이미 거의 모든 내부 정치 조직체는 스탈린의 지배권하에 들어갔다. 레닌의 유언 문서는 레닌이 친필로 직접 작성한 것이라 스탈린의 당내 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용의주도함 때문에 레닌의 유언을 은폐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절하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은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그를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준(準)비잔틴식으로 우상화했다.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이 된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축출한 후 최고권력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자신의 우상화도 함께 추진했다. 1925년 차리친 시를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로 개명하였다. 경쟁자 이전에 견해가 달랐던 트로츠키와는 수시로 충돌했는데, 국적과 국경을 초월한 국제 노동자, 무산자 연대를 통해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 에 맞서 그는 소련 단독으로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한 국가를 공산주의화 시킨다는 일국공산주의론을 확립했다.(스탈린주의 참조) 권력투쟁 과정에서 스탈린의 용의주도함과 치밀함을 간파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망명하였다. 한편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는 강화되어 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난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트로츠키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1928년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를 공산당에서 출당하고 5년 뒤에는 투옥시켰다. trotsky.jpg|섬네일|왼쪽|140px|동지이자 경쟁자인 레프 트로츠키(그러나 1921년 이후 그의 정적이자 라이벌로 변한다.) 집권 직후 스탈린이 집단화와 산업화, 중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연방 사회 일각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우파 자본주의 세력은 레닌의 죽음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공산주의 정권을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정보원들을 통해 자본주의 세력의 움직임을 간파한 그는 우파 인사들의 집회장소를 급습하여 체포, 숙청한다. 또한 1924년부터 레닌의 유지 계승, 트로츠키파 지지자에 의한 스탈린 암살 비밀조직들이 비밀리에 조직됐다가 적발되면서 스탈린의 의심과 분노는 한층 극에 달하게 된다. 1925년 이후부터 반대파 인사에 대한 가혹한 숙청이 계속되었고, 1930년 이후에는 그의 반대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소련군 내부의 장군급 인사를 단행한 뒤, 군 장군을 숙청한다. 특히 1937년 6월까지 비밀재판을 통해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스탈린 체제에 위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숙청되었다. 이들은 모두 소련군의 군사전략가들이었는데, 이들의 숙청과 동시에 스탈린은 작전술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켰다. 이들 소련군 초기 군사연구가들의 작전술은 스탈린이 죽고난 뒤에야 재개된다. 장군들을 숙청, 처형시킨 후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새로운 장교들을 장군으로 승진 발탁한다.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와 그의 동료들 등 소련군 초기 핵심 군사이론가들에 대한 처형과 숙청, 장군들에 대한 숙청 등은 그들이 만들고 연구했던 보고서와 군사이론서들까지도 반민중적 불온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서가 되었으며, 그들의 이론들은 토론과 적용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핀란드 침공작전의 실패와 2차 대전 초기의 독일의 기습공격과 모스크바까지 패퇴하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다. 이들의 이론을 활용하지 못한 점이 패퇴의 원인이라는 견해가 나타나면서 기갑, 기계화 부대를 통한 작전술 이론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스탈린의 연구 금지와 의심으로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언급하지 못했다. 그는 중견 장교들과도 꾸준히 면담했는데, 이는 그들을 통해 장군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까지 대략 2천만 명 정도를 숙청했고, 이 중 200만 명 정도는 해외 유학파, 당 중앙위원과 현역, 예비역 군 장군, 기술관리들을 포함한 고급인력들이었다. 이후 그는 내부에서 적을 만들고 그 적을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하고 측근과 군부의 충성심을 유도했다. 1928년 스탈린은 시장경제를 부분 수용했던 레닌의 준 자본주의적인 신경제정책을 버리고, 국가가 직접 기간산업을 관리하는 국영산업화 정책을 채택 하여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추진했다. 기간 산업을 국영화함과 동시에 경제 정책을 국가 주도로 통제하는 형태로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스탈린은 농민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도시로 떠나지 않던 농촌의 약 2,500만 세대가 2, 3년 내로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 집단 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이에 필사적으로 반발 저항하던 농민들은 소련군과 비밀경찰로부터 공격을 받고 체포, 사살되었다. 쿨라크 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들, 스탈린의 경제개발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농민들은 집회·시위를 벌였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도시로 강제추방되거나 총살당하였으며, 일부는 수감자의 폭증으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악조건 속에서 강제노동했다. Stalin and Maxim Gorky, 1931.jpg|섬네일|오른쪽|180px|작가 막심 고리키와 함께 (1931년)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닌의 신경제 정책을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으로 대체해 산업화와 특히 농업 생산물의 공동생산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후에 공산주의의 한 취약점으로 꼽히게 되는 강제 노동 생산 즉, 생산성 없는 경제 활동의 첫 장을 열었다. 그러나 강제 산업화와 노동 생산은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가난과 억압을 받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옛 소련의 산업화를 통한 부강한 나라 건설이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1932년 혁명 기념 만찬에 참석했다가 만취 상태로 공개 석상의 여러 사람 앞에서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모멸감을 느낀 나데즈다는 바로 파티장을 뛰쳐나갔고, 그날 밤 스탈린의 인간적인 결점과 정치적 실패를 비판하는 서신을 남기고 자살했다. 두 번째 아내의 자살 이후 스탈린은 신혼 살림을 차렸던 아파트를 떠나, 크렘린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나데즈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국 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직을 사퇴하려 했으나 정치국 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만류로 번복하였다. 그러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화되고 격무에 시달리자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여성들을 가까이하기도 했다. 반면에 그의 딸 스베틀라나에게는 아들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편애를 하게 된다.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그는 당시 소련 국내 생산품의 사용을 유도하였고, 수입품 억제와 함께 수출산업 육성과 자국제품 수출 증대에 힘썼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엄청난 실패와 기계 고장 등의 부작용들도 수반되었으며, 이는 반대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각종 시위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반발을 무마하고자 강경 진압을 하는 한편, 회사 간부·산업 관리인들을 비판, 규탄하고 그들의 경영 잘못으로 몰아 여론재판에 계속 회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피고들은 겁에 질려 허위자백을 하고 희생됨으로써 그의 경제실책으로 야기된 재앙을 대신 짊어지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경제정책은 상당부분 효과를 거두어 수출력과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1928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강철은 5배, 전력은 8배, 시멘트는 2배, 석탄은 4배, 석유는 3배로 생산고가 늘어났고 철도를 포함한 수송수단은 4배로 늘어났다. 즉, 스탈린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은 농업 중심의 후진국을 급속도로 근대화·산업화·도시화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며, 그는 소련 국내외에서 폭넓게 인정받았다. 스탈린의 잠재적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스, 조지 버나드 쇼 등 유명 작가들과 예술인, 당대의 열광적인 외국인 목격자들에게도 널리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경제정책과 동시에 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90% 이상이나 되던 소련의 문맹률이 교육 정책을 통하여 1%까지 감소하였고, 또 다른 지식층을 양성하였다. 한편 스탈린은 예술 공연에도 정책적으로 개입하였다. 1934년 1월 가 소련에 상륙, 초연과 함께 흥행을 거두었다. 스탈린은 1936년 를 직접 보러 극장을 찾았다가, 레이디 맥베스 관람 중 극중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치정 살인 부분이 나오자 이를 불쾌히 여겨 1막이 끝나자 역정을 내면서 자리를 떴다. 며칠 뒤 소련의 최대 일간언론이자 당의 충실한 기관지인 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를 강하게 비난하는 글이 실렸고, 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상영금지조치되었다. 346 Berias letter to Politburo.jpg|섬네일|왼쪽|170px|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40) 그러나 성급한 산업화는 농업과 환경을 파괴하여 홀로도모르와 같은 재앙을 불렀고, 집단농장화로 성과 없는 농업생산에 회의적이던 농민들의 생산물 수는 감소했고, 우크라이나에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식량사정을 악화시켰다. 하지만 스탈린은 기근 지역에 급송해야 할 식량을 계속 수출했다. 이 때문에 당과 군대 내에서 정치적 반대파가 많아졌다. 이때 대중적 인기를 가지고 있었던 레닌그라드시 지구당의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이를 트로츠키의 음모로 선전하였고,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를 뿌리뽑는다는 명목하에 스탈린에게 도전했거나 도전할만한 자들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이 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당 제1서기가 스탈린 격하연설 도중 스탈린 자신이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 고 암시한 바 있다. 이 숙청 작업을 담당한 곳은 내무인민위원회(NKVD) 였으며, 당내는 물론 군부나 심지어는 내무인민위원회 내부에서도 숙청작업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군부에서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한 여러명의 장군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Kirov and Joseph Stalin, 1934.jpg|섬네일|오른쪽|스탈린과 세르게이 키로프 (1934년) 1934년 12월 1일 스탈린에 맞먹을 만큼의 권력을 가졌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했는데, 키로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권력과 인기가 높아짐을 두려워한 스탈린의 사주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되자 이에 연루된 암살자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옛 혁명 주역이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재판정에 끌려나와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34년 제17차 당 대회에서 뽑힌 중앙 위원과 후보 위원 139명 중 98명을 처형했고 17명을 강제 수용소로 쫓아냈으며 제17차 당 대회 대의원 1961명 중 무려 1108명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1937년 1월과 1938년 3월 또다시 대규모의 마녀재판을 감행했는데 트로츠키를 따르던 31명의 사람을 처형하고 심지어 1936년과 1938년에는 이전에 숙청을 지휘했던 전직 내무인민위원장인 겐리흐 야고다와 니콜라이 예조프가 도리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그가 자신을 암살하면 회고록을 폭로하겠다고 꾸준히 협박하여 스탈린의 정적숙청의 칼날을 피해갔다. 1937년 6월 한 달에만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포함해 8명의 장군을 간첩 혐의로 처형한 것을 비롯해 육군 원수, 군 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여단장 등 1500명을 처형했는데 이 수가 붉은 군대 간부 최고 군사회의 멤버의 75%에 달했으며 원수 5명 중 4명, 군사령관 15명 중 13명, 군단장급 85명 중 62명, 사단장급 195명 중 110명, 여단장급 406명 중 220명, 연대장급 고급 장교 중 70% 이상이 숙청당했다. 대숙청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 1938년 바실리 블류헤르과 니콜라이 부하린, 야코프 페테르스, 1939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카를 라데크, 1940년 알리 쇼겐추코프와 니콜라이 예조프, 1950년 그리고리 쿨리크 등까지 강타했다. 부하린 특히 스탈린의 혁명동지이기도 했던 니콜라이 부하린(Nikolaj Bukharin)의 경우 130개 항목의 죄명으로 법정에 기소당했는데, 이는 고문에 의한 자백들이었다. 부하린은 고난받는 인민대중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자본주의적, 퇴폐적인 생활을 향유한 부도덕한 이중인격의 가식적인 인물이었고 사치를 일삼았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고소당하였다. 이외에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초기 작품 《저녁(ВЕЧЕР)》(1912), 《Anno Domini MCMXXI》(1922) 등으로 당국으로부터 부르주아적이란 비판을 받고 활동을 거의 중단당했다. 196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던 레프 란다우는 UPTI 사건으로 조사받은 뒤 모스크바를 탈출했으나 1938년 5월 27일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에 유형당했다. 이후 1939년 5월 29일 동료 표트르 카피차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39년 열린 제18차 당대회에 참석,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였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팽창하면서 위협을 느낀 그는 서방국가들과 반(反) 히틀러 동맹을 결성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거절당했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히틀러와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유럽 대륙을 전전하다가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한 레프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독재성과 레닌의 유언을 들어 그를 비판했는데, 이것이 국제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자신의 반대 여론으로 확장될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에 자객을 보내 트로츠키의 암살을 계획했다. 트로츠키 암살 계획은 성공하여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는 멕시코 시티 남부 코요아칸의 자택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는 스탈린 사후 1972년 트로츠키의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Bild 183-H27337, Moskau, Stalin und Ribbentrop im Kreml.jpg|섬네일|오른쪽|200px|1939년, 스탈린과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 Bild 183-H1216-0500-002, Adolf Hitler.jpg|섬네일|왼쪽|180px|아돌프 히틀러 1939년 8월 스탈린과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용기를 얻은 독일의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새로 동맹국이 되기는 했지만 스탈린은 결코 믿을 수 없는 국가였던 독일이 서방국가들과 교전하고 있는 동안 소련 내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한편 서부전선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 나갔다. 이후 폴란드 동부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루마니아의 일부를 병합하여 편입시켰다. 한편으로는 핀란드를 공격하여 승리하면서, 핀란드에 영토 할양을 강요하기도 했다. 1941년 5월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1년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스탈린은 연방의 총리를 겸했다. 이 해에 동방으로 팽창하려던 독일의 히틀러와 전쟁하게 되었다. Secretary general CCCP 1942.jpg|섬네일|오른쪽|160px|이오시프 스탈린 (1942년) 1940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북유럽 3국이 소비에트연방 가입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그런데 투표 하루 전에 만장일치라는 투표 결과였다. 이는 분명한 조작이었지만, 당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소련 국내에서는 이를 전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이나 행할 수 있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져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발트 3국의 소련 합병은 얄타 회담 이후 더욱 분명하게 정해졌으며, 이후 1991년 무너질 때까지 소련의 영토로써 인정된다. 현재 발트 3국은 소련의 합병이 분명한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에 속해있던 시기를 강제 점령기 로 규정하고 있다. signs the Soviet–Japanese Neutrality Pact-1.jpg|섬네일|왼쪽|190px|일소 중립 조약에 서명하는 일본 제국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 지켜보는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뒷줄 가운데) 1941년 4월 13일 스탈린은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소련을 기습 공격한 이후 독일군은 소련 영토 깊숙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동맹이라 생각했던 히틀러의 기습공격에 스탈린이 충격을 받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흐루쇼프는 그가 한동안 무력증에 빠졌음을 증언했으나, 스탈린은 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스스로 소련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겨울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깊숙히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그는 피신권고를 물리치고 수도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일대 반격을 위한 준비작업을 지시했다. 1941년 7월 19일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담당 인민위원에 취임했다. 1941년 독소 전쟁 발발을 틈타 체첸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反)소련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1942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스탈린이 총지휘하는 소련군은 독일군과 맞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세는 역전되어 독일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1943년 12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처칠 등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체첸의 반발이 가라앉자, 스탈린은 체첸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1944년 봄, 비밀리에 체첸인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과정에서 반발하는 자는 사살했고, 체첸인구의 10%가 강제 이주 당시 사망했다고 한다. 타인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몇번의 쿠테타 이후 동료들을 믿지 못했고, 특히 군대를 불신하여 장군을 다수 죽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쟁 초기에 그는 아돌프 히틀러처럼 군사 업무에 수시로 관여하고 전화를 이용한 부적절한 지령으로 군사업무에 간섭하다가, 점차 군사적인 결정을 현지의 지휘관들에게 위임하였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 1945년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얄타 회담을 추진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대단한 협상가로서 이 외국 정치가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협상했는데, 그의 우수한 협상 기술을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 이든이 칭찬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연합군 측의 승리로 독소 전쟁의 최종 승리는 당연 스탈린의 차지가 되었다. 일본의 항복 직전 8월 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도움 요청으로 일본의 식민지에도 소련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10여 일 만에 일본은 항복했고, 스탈린은 아시아에서도 소련의 몫을 요구하였다. 국제사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성과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소련군 부상자와 사망자가 수천 명임을 들어 대가를 요구하였다. 1945년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에 재선출되었다. 1945년 6월 27일에는 소련군 대원수에 취임하여 소련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7월 25일. 포츠담 회담. 1945년 여름 미국으로부터 연합군 파병에 동참을 제안받자 그는 수락하였다. 뒤에 미국 내부에서는 그를 끌어들인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고, 8월 15일 일본 항복 직후, 미국은 소련군이 2차 대전 종결에 끼친 영향이 없다고 비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7월과 8월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2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예로 들며 소련군 역시 2차 대전 해결에 기여했음을 강변했다. 1946년 2월 25일 소련 인민위원회 국방담당위원직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고, 1947년 3월 3일에는 자신이 겸하던 국방부장관직에 니콜라이 불가닌을 임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외국의 국가 원수와 및 내빈에게 수여했다. 1946년 이후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수시로 소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자격을 심사했다. 최종 결론은 김일성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이 무렵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숨어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생각하여 1950년까지 히틀러를 잡아내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미 자살하고 없었지만, 스탈린의 이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NKVD는 히틀러를 찾아내 죽이기 위해 아르헨티나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한편 1945년과 1948년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확정된 일도 있었다. Stalin.jpg|섬네일|180px|왼쪽|유제프 치란키에비치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망중한을 보내는 스탈린 (1947년) 1989년까지의 동유럽내 공산권 국가. 1947년 북유럽 3국에서 개최된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스탈린은 140%의 득표율을 얻었다. 민망했던 선거당국은 선거 다음 날 스탈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하려고 이웃 선거구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 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는 계속 간섭거부를 추진했고,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를 표방하며 소련 진영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스탈린이 주도하는 단일체로서의 세계공산주의, 일국공산주의 정책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 내 다른 14개의 피지배 국가들이 티토주의의 선례에 따라 분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염려한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 내 각국(각공화국)에서 여론 재판이 일어나도록 배후 조종하고, 1930년대 소련의 대숙청 때와 같은 조작을 하여 공산 위성국 지도자들이 스스로 티토주의자임을 자백하게 만들어 다수의 위성국 지도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처형시켰다. 경공업의 생산력 증대 외에 그는 물리학자들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과학원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수립 계획하고 적극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으나, 우주선의 발사는 그의 생전에는 볼 수 없었다. 비록 스탈린의 생전에는 우주 탐사를 볼 수 없었으나,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 반공주의자이며 그를 심히 경멸하였던 비오 12세는 친서를 써서 특사편에 보내 핵 전쟁만은 중단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1949년 3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 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1945.jpg|섬네일|왼쪽|140px|이오시프 스탈린 (1945년)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인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스탈린은 자신을 암살한 거라 염려하여 자신의 비밀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명한다. 그리고 별장에 도착한 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4일 만인 3월 5일 숨졌다. 3월 4일에는 별장의 비밀 방에서 식사를 시켰으나, 그 날의 식사는 먹지 않고 첫 번째 비밀 방에 방치해두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간은 알 수 없다. 집권기간 동안 사적으로 뇌물을 받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다. 비교적 청렴한 생활과 종교를 부정하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정교회에 호의적이었다는 점 역시 그의 정적들로부터 그에 대한 비판을 신중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죽기 직전, 스탈린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폭로하거나 암살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주치의들을 숙청하였다. 이 때문에 주치의들이 체포, 고문 등으로 끌려가면서 스탈린 자신이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공식 발표된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졸중이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독살됐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일설에는 목이 졸려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사망 장소는 자신의 관저였는데, 그곳의 위치는 자신을 암살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이 찾지 못하도록 깊숙하고 복잡한 곳에 위치한 숲속에 별장을 지은데다가 주택도 암살방지를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형태로 되어 경비원들조차 스탈린의 위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병원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사망 후 3일이 지난 3월 8일에 식사담당 파출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스탈린 흉상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김일성은 장문의 애도문을 소련에 보냈다. 사후 시신은 미이라화 되어 레닌 묘 옆에서 보존되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시에 화장되어 크렘린 벽묘지에 묻혔다. 스탈린은 사후 1956년 초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에 의해 비판받은 뒤 격하당하였다. 이후 스탈린의 동상, 흉상, 초상화, 비석 등 각종 기념물들은 철거되어 사라졌다. 스탈린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그라드가 됐던 차리친 시는 1962년 이후 볼고그라드(Volgograd)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소논쟁 , 헝가리사건 등과 소련-중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관계에 금이 가는 등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실각하면서 스탈린 격하논쟁은 주춤해지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영웅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러시아와 독립국가 연합 14개국의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경제발전과 부국강병을 달성한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였다. 2008년 8월 러-조지아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에 진입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의 생가와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소련 내 기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0년대 이후 소련사 연구자들 중 스탈린 전문가들은 스탈린의 독살설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2003년 3월 5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나우모프와 미국 예일대학의 소련연구가인 조나단 브렌트는 공동저서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 에서 독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나우모프와 브렌트에 의하면 스탈린 독살의 용의자로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스탈린 사망 후 베리야는 "내가 그를 해치우고 모든 사람을 구했다"며 자랑한 내용을 니키타 흐루쇼프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이 책은 정치국원 4명이 모두 공모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당시 의료진의 보고서 초안에는 스탈린이 숨지기 전 광범위한 위장 출혈을 보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3개월 뒤 공개된 공식 보고서에는 병명에 관련된 내용이 삭제되었다. 당시 크렘린에서 근무하던 경비병 한 명도 베리야로부터 병세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스탈린의 음식에 과다 복용할 경우 장기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항응혈제 와파린 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독살설 외에 침실에서 목졸려 죽었다는 설도 있다. 흐루쇼프는 베리야가 그를 암살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광고 모델로 그려진 러시아의 한 버스 스탈린의 치하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농업국에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 탈바꿈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소련이 독소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모스크바 사수 및 연합국 지위 획득 역시 그의 치적으로 기록된다. 또한 독소 전쟁에서 초반의 패배에 큰 책임이 있긴 하지만, 여러가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책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소련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또한 서방 연합국과의 흥정을 통해 중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확인함으로써 전후 미국과 함께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스탈린 만두 경제적으로는 국가 중심의 통제 경제와 중소 수공업을 양성하면서 대량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련의 경제를 살린 인물로 평가된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레닌주의를 더욱 구체화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리적인 혁명이론으로 전개하였다. 소련은 물론 다른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스탈린적 해석을 학습하였고, 이를 혁명의 전략전술로 논리로 삼았다. 스탈린의 생전에 편찬된 《볼셰비키당사》의 제4장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문서임과 함께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정권의 주체사상의 핵심적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한편 무모하게 추진해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기간산업의 국영화로 소련 국내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산업화 정책으로 농업이 주류이던 소련을 산업화했으며 소련의 산업화를 완성시켜 독일에 반격할 수 있는 전력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현재 러시아에서는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부정적 평가보다 높으며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도 국가적, 민족적 영웅으로 칭송된다. 조지아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일부 러시아 국민들 중에는 스탈린을 생각하면서 피와 편집증, 잔혹함이 아니라 승리와 힘, 무사무욕, 국가의 존재이유를 떠올린다. 또한 러시아의 청년 층 중 일부는 스탈린을 나치를 물리친 강력한 군주로도 기억된다. 1990년 이후 러시아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고르바초프나 보리스 옐친 등은 당초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제재하였으나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 여론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사수한 전쟁 영웅, 산업화를 통해 소련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 영웅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탈린의 재평가를 놓고 그의 인권 탄압과 정적 숙청에 관련된 비판과 잡음이 일고 있다. 또 스탈린은 조지아인임에도 2008년 5월의 한 온라인 투표에서 위대한 러시아인 3위에 올랐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 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러시아 국영 TV채널 로시아 방송은 2008년 5월 러시아 역사연구소와 함께 이미아 로시아 (러시아의 이름)라는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영국 BBC 방송의 ‘위대한 영국인’이란 프로그램을 본뜬 것으로 러시아인들의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제작됐다. 경제 사정의 악화와 중산층 붕괴 등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고자 로시아 방송과 역사문제연구소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으며, 다양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인물을 찾는 이 프로젝트의 첫 단계에서 인터넷과 문자메시지, 전화 투표로 다양한 시대의 인물 500명이 선정됐다. 두 번째 투표 단계에서 50명으로 대상의 폭이 한층 좁아졌다. 9월 최종 결선 진출자 12명이 선정되면서 인기투표와 토론은 한층 치열해졌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12명의 심사위원단이 구성됐고 각 심사위원은 12명의 인물 중 1명을 맡아 해당 인물을 대변했다. 프로그램은 12월 28일 최종 결과 발표와 함께 막을 내렸다. 1위는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왕자, 2위는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 3위는 스탈린이 차지했다. 역사학자 엘레나 얌폴스카이아는 스탈린이 러시아인의 3대 영웅의 하나로 꼽힌 것은 "민주주의의 이름하에 자행돼 온 자본가들의 독재와 물질만능주의에 따른 정신적 피폐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불만과 회의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스탈린을 생각하면서 피와 편집증, 잔혹함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 무사무욕, 민족의 존재이유를 떠올린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스탈린 이후 민주주의 정부는 국민들에게 만족감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가 계속되고 국민 영웅으로 여겨질 정도까지 불만을 가중시켜온 셈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러시아인들의 스탈린에 대한 존경심은 지난해 8월 러-조지아 전쟁에서도 증명됐다. 러시아군이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를 침략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집권 과정, 집권 이후에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독재자 또는 살인마라는 비판도 있다. 나오미 울프는 스탈린이 히틀러를 연구했다고 하였다. 스탈린은 생전에도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관료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소련을 관료국가로 만들었다"면서 강도높게 비판받았으며, 사후에는 생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숙청들로 거세게 비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공범이라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의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지난달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지적했다. 비정상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새디스트였고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비판도 있다. Stalin with daughter Svetlana, 1935.jpg|섬네일|오른쪽|160px|딸 스베틀라나와 함께 성적으로 롤리타 콤플렉스 취향으로 어린이를 좋아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딸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가 남긴 회고에 의하면 스탈린은 사망 직전 병적으로 소년들, 소녀들의 사진을 수집했다고 한다. 한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급사하자 암살 배후로 지목, 얄타 회담 혹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루즈벨트에게 독이 든 차를 먹였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마리아 유디나라는 피아니스트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유디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유디나는 레닌 이후 정권을 잡은 독재자 스탈린의 예술인들에 대한 억압정책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동료 예술인들을 변호하는데 앞장섰다. 반체제 인사들을 옹호하는 등 마리아 유디나의 이런 태도를 스탈린이 가만 두고 있을 리가 없지만 유디나에겐 극히, 정말 극히 예외적으로 강제수용소에는 보내지 않고 그가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유디나의 연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디나가 연주하는 모차르트(확실히 모르겠지만 피아노 협주곡 23번일 것이다.)의 방송실황을 듣고 있던 스탈린이 그의 연주에 매우 감동하여 당장 녹음 테이프를 구해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스탈린이 유디나를 좋아했고 존경하였기에 유디나에 대해서는 최대한 배려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다. 유디나는 스탈린에게 정면도전도 불사했던 몇 안 되는 용감했던 예술가 중의 하나였으며 이에 국립 음악원 교수직에서도 해직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그만큼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치고는 지나치게 적은 수의 음반만을 남긴 것으로 보아, 그의 연주와 녹음 활동에 정치적 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 는 시각이 있다. 스탈린이 유디나를 배려한 것에 대해서도 볼세비키 혁명 당시부터 있었던 유디나의 혁명 과정에서의 업적들과 그의 대중적인 인기, 위치 등을 모두 고려했을 때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더 큰 반발이 있을 것이란 점을 인식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 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스탈린 메달 200px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우상화를 추진해 나갔다. 스스로 만능의 천재 , 빛나는 태양 , 삶의 지주 ,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 로서 찬양을 받았고, 러시아 정교회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 로 찬양받았다. 스탈린의 초상화나 동상이 소련 내 곳곳에 걸리거나 세워졌고, 스탈린 개인에 대한 숭배가 만연했다. 한편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고위 정치인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각지에 세워진 스탈린의 동상과 휘호, 상징물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재임기간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재임기간 중 철거되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모든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자신을 포함한 소련 인민들의 대다수가 비공식적으로 믿고 있던 정교회를 이용해,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정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리하여 정교회의 총주교가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25년 이래 선출되지 않았던 모스크바 총주교직이 스탈린의 제안으로 다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같은 교회력도 부활되었고, 혁명 후 폐쇄되었던 수많은 정교회 성당이나 수도원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 때문에 어떤 러시아 정교회는 스탈린을 정교회를 부활시킨 은혜로운 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에 정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공산주의자였던 스탈린을 시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파가 반발하고 있다. 소련은 일본의 국력이 강해지자 일본 민족과 비슷해 보이는 황인종을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국이 독립하자 본래 만주 민족의 땅인 연해주에 대한 영토 반환 분쟁을 대비해 1937년부터 시베리아, 연해주 등에 살고 있던 모든 황인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강제 이주로 수많은 동양인들이 희생되었으나, 덕분에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연해주, 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하여 중국, 일본, 한국과의 영토 분쟁을 피할 수 있었다. 1953년 3월 6일,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 날 저녁 공산군들은 모든 전선에서 불꽃과 신호탄을 하늘에 올렸으며 각 병사는 스탈린에 대한 고별인사로 동시에 공중을 향하여 조총 사격을 하였다. 스탈린의 사망은 동서해빙과 외부 세계에 대한 소련 지도층의 새로운 접근 방식과 태도 변화를 초래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에서 미국이 손을 떼고 일본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 진심으로 전쟁을 시작하자 전황을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드디어 전쟁 종결과 평화 달성의 주도권을 잡을 시기가 왔다며 좋아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종결하자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자 지원을 감소시켰다. 또한 김일성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고 확신하여 경계하게 된다. 1953년 3월 19일 스탈린은 소련 각료회의에서 한국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은 소련과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익에 배치된다며 이른 시일 내에 정전협상을 마무리지을 것을 결정했다. 1940년에 발생한 폴란드 카틴 숲의 학살의 배후는 스탈린이 지시했지만, 스탈린을 영웅시하는 기류가 확산됨에 따라 학살에 스탈린은 연관이 없다는 견해가 러시아의 좌파계열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2009년 러시아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이 학살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다. 2009년 4월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스탈린이 폴란드 장교 수천 명의 학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노바야 가제타의 보도에 대해 스탈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러시아 검찰에 고소, 기사 철회와 함께 천만 루블, 우리 돈으로 4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스탈린 동상 러시아의 우익 성향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2009년 4월 기밀해제된 서류 중에서 자료들을 발췌, 4월 22일 “최근 기밀해제된 서류에서 스탈린이 소련 자국민과 외국인 수천명에 대한 살생부에 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스탈린이 민간인 처형을 직접 지시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고, 스탈린의 개인 서명이 담긴 처형허가증을 발견해 기사화했다. 주가슈빌리의 변호인인 유리 무킨은 이날 법정에서 “스탈린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공정한 지도자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주가슈빌리 본인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노바야 가제타 측 변호인인 젠리 레즈니크는 “스탈린이 수만 명의 사람을 죽인 것은 널리 인정된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스탈린 명예훼손 재판은 러시아 및 구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법정은 관객들로 가득찼고, 법정 밖에는 스탈린의 지지하는 진보성향의 사람들 모여들었다 모스크바 법정 밖에서 스탈린 지지 집회를 벌이던 한 여성은 “스탈린 시대에 이 나라는 존경받았다”면서 “지금 우리는 가난뱅이지만 당시에는 다른 국가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내 우익성향 단체들은 이번 소송을 공산주의의 향수에 젖은 좌익들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를 호의적으로 그려내려는 섬뜩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2008년의 구 소련 내 한 초등학교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이 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이뤄냈다면서 그를 “유능한 지도자”라고 기술했다. 모스크바의 한 지하철 역에 스탈린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판이 등장했다. BBC는 러시아가 소련 시절의 공포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인권운동단체 메모리얼 의 역사학자인 니키타 페트로프는 “스탈린의 손자가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스탈린에 대한 명예회복 시도”라며 “이는 과거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하겠다는 것”이라며 스탈린 명예훼손 소송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노바야 가제타의 보도에 대해 “이 문서 자체가 거짓”이라며 날조 의혹을 제기하였고, “스탈린은 직접적으로 누구에 대해서도 처형을 명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9년 10월 모스크바 법원은 스탈린의 폴란드 장교 학살설을 보도한 노바야 가제타의 무죄판결을 내렸고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패소하였다.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의 주변에 자신의 정보원을 심고 이들로부터 정보를 빼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스탈린의 구두 (동상) Hitler.png|섬네일|140px|오른쪽|적대적 동지인 히틀러와 함께 1917년 12월에 창설된 체카(Cheka, 반혁명 태업단속 비상위원회)를 개조하여 특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 Komitet Gosudarstvennoy Bezopasnosti)를 조직했다. 그는 국가보안위원회(KGB)를 특무기관이자 친위조직으로 활용했다. 고소 공포증이 있던 그는 비행기나 헬리콥터 탑승을 꺼렸다. 추락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염려한 그는 고층 건물에 오르기도 꺼렸고, 장거리 여행도 주로 열차를 이용했다. 그의 총리 관저에는 비슷한 모양의 방을 3, 4개 이상 더 만들고, 내부에서 리모콘으로 작동하게 되는 자동문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업무 평가에 있어서 그는 치밀하고 꼼꼼하여 그는 수많은 인민위원회 위원들과 장관들로부터 수많은 서류를 일일이 직접 보고받았다. 각부 장관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결재하고 계산하며 업무를 추진했다. 작고 왜소하고 약한 체구에도 과중한 격무를 무난히 소화하였으며 새벽 3시~4시까지 정무를 보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정무를 주관했다. 일설에는 그가 오전 10시~11시 무렵에 늦게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은 독서를 좋아하여 업무가 없는 때는 독서로 소일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헤겔 등의 유물론과 자본론, 변증법은 물론 찰스 다윈과 헉슬리의 적자 생존론,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등의 내용을 거의 대부분 이해, 암기하고 있었고, 베른슈타인을 개량주의 타협론이라 비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붉은 군대의 중전차 IS-2호는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 호라고 지어졌다. 후에 그는 바트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성격이 치밀하여 꼼꼼하고 메모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억력이 비상하였다. 자아도취에 빠졌고 무자비한 면모를 보였다. 1945년 5월 7일 독소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뒤에 스탈린 우상화가 만연하였고, 공공기관이나 광장, 거리 등에 그를 찬양하는 기념물과 작품이 조성되었다. 1949년에는 그가 베를린을 정벌한 뒤 세계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비행기로 베를린에 도착하는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남녀 어린이의 사진을 유난히 좋아하였고, 딸 스베틀라나는 이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생전의 스탈린은 구세주와 영웅으로 묘사됐는데 사후에는 의심 많고 잔인한 독재자로서 많이 표현된다. 소련 시기에 씐 소설에서 스탈린은 대부분 간접으로 묘사된다.(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 스탈린의 사망 이후 그는 독재자, 특히 공산주의 독재자로서 묘사되었고 소련을 다루는 많은 소설에서 그려졌다. 1949년에 발표된, 그의 독소전쟁 승리를 과장해 확대한 선전영화 〈베를린 함락〉(Падение Берлина)에서 그는 베를린을 함락하고서 비행기로 베를린에 도착해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전 세계 인민들에게 환영받는다는 설정으로 막을 내린다. 2009년 스탈린이 인민군 특수부대를 구성하여 화성에서 온 외계인을 대적한다는 게임 〈스탈린 대 화성인〉(Stalin VS martians)이 출시되기도 했다. 그 밖에 게임 〈커맨드 앤 컨커〉(Command & Conquer)에도 등장한다. 그의 아들 중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던 야코브 주가슈빌리가 독일군에 붙잡혔고,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로 잡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와 포로교환을 추진했으나, 스탈린은 "원수와 대위를 어떻게 교환하느냐"며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야코프는 처형당했다. 한편 파울루스 원수는 "원수는 보잘 것 없는 사병(아돌프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민족을 위해 일개 사병으로 자원 입대함)을 위해 죽을 수 없다"라며 조국을 배신했다. 할아버지 바노 주가슈빌리(Vano Djughashvili) 아버지 이오시프 비사리오니스제 주가슈빌리(Joseph Besarion Vanovis Jughashvili, 1850년 – 1909년 8월 25일) 어머니 케테반 겔라제(Ketevan Geladze, 1858년 2월 5일 ~ 1937년 6월 4일) * 형 미하일 주가슈빌리(1876년 ~ ?) * 형 게오르규 주가슈빌리(1877년 ~ ?) 에카테리나 스바니제(Ekaterina Svanidze, 1885년 ~ 1907년) * 아들 야코브 주가슈빌리 스탈린(1907년 ~ 1943년, 전사) **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 스탈린(1936년 ~ 2016년) 나데즈다 알릴루예바(Nadezhda Alliluyeva, 1901년 ~ 1932년) * 아들 바실리 주가슈빌리 스탈린(1921년 ~ 1962년) *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Svetlana Iosifovna Alliluyeva 혹은 Svetlana stalina, 1926년 2월 28일 ~ 2011년 11월 22일, 1967년 3월 미국으로 망명) * 사위 모로조프(1945년 이혼) * 사위 유리 주다노프, 안드레이 주다노프의 아들 외조부 기리히 겔라제(Glakh Geladze) 외조모 멜라니아(Melania) 관련 이념 사회주의 공산주의 스탈린주의 * 주체사상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반수정주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내셔널리즘 좌파 내셔널리즘 트로츠키주의 국가주의 국가사회주의 반자유주의 관료주의 인민민주주의 파시즘 반파시즘 좌파 파시즘 프롤레타리아 독재 무신론 계획경제 개인 우상화 적자생존설 러시아의 내셔널리즘 텍스트 소련 사회주의의 역사 조지아 볼셰비키 멘셰비키 국제주의 코민테른 스탈린그라드 러시아 사회민주당 붉은 군대 사회주의 문화 국제 여단 역사 사건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대숙청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독소 불가침조약 독소전쟁 카틴 숲의 학살 독소 전쟁(대조국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한국 전쟁 스탈린 격하 운동 인물 블라디미르 레닌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히로히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김일성 이승만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게오르크 헤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라브렌티 베리야 니키타 흐루쇼프 니콜라이 우스트랼로프 말렌코프 레프 트로츠키 니콜라이 말렌코프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루즈벨트 프란시스코 프랑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박정희 박헌영 사담 후세인 우고 차베스 Josef Stalin.jpg|섬네일|200px|1954년에 발행된 스탈린 추모 우표 《스탈린선집 (1905-1931)》 《레닌주의의 기초 레닌주의의 제문제》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선집 (1905-1931)》 (J.V.스탈린, 전진, 1990) 이오시프 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 레닌주의의 제문제(두레문고 4)》 (스탈린, 윤시인 역, 두레, 1990)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나의 아버지 스탈린-위대한 생애(위대한 생애)》 (스베틀라나, 민병산 역, 일신서적출판사, 1993) 딸 스베틀라나가 쓴 일대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스탈린의 딸-스베틀라나의 고백》(스베틀라나, 정연권 역, 대문출판사, 1966) 존 루카치, 《히틀러와 스탈린의 선택 1941년 6월》 (존 루카치, 이종인 역, 책과함께, 2006)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 S WAR)》 (리처드 오버리, 류한수 역, 지식의풍경, 2003) 로버트 서비스, 《스탈린 강철 권력-문제적 인간(문제적 인간)》 (로버트 서비스, 윤길순 역, 교양인, 2007) E. H. 카,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 (E. H. 카, 최영보 역, 고려대학교출판부, 1991) 로버트 대니엘스, 《스탈린 혁명》 (로버트 대니엘스, 석영중 역, 신서원, 1997) 헤다 가자, 《인물로 읽는 세계사 2:스탈린》 (헤다 가자, 김기연 역, 대현출판사, 1993)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이오시프 스탈린 Documentary 52 Staline par Staline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에 대한 서울방송 유포터 전상중님의 취재기사 성자(聖者) 가 된 독재자 스탈린? 가장 파괴적인 두 독재자, 히틀러 대 스탈린 - 오마이뉴스 스탈린 앞의 김일성과 박헌영 - 한겨레신문 분류:1879년 태어남 분류:1953년 죽음 분류:러시아 제국 사람 분류:러시아의 정치인 분류:러시아의 시인 분류:러시아의 작가 분류:소련의 공산주의자 분류:러시아 내전 관련자 분류:사상가 분류:조지아의 시인 분류:러시아의 언론인 분류:소비에트 연방원수 분류:조지아의 정치인 분류:소련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소련의 국방상 분류:소련의 시인 분류:반기독교주의자 분류:러시아의 혁명가 분류:러시아의 무신론자 분류:러시아의 제1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조지아계 러시아인 분류: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의문사한 사람 분류:블라디미르 레닌 분류:대량 살인자 분류:대숙청 가해자 분류:코민테른 관련자 분류: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분류:소련 각료평의회 주석 분류:인민위원평의회 주석 분류:적기훈장 수훈자 분류:적성훈장 수훈자 분류:레닌 훈장 수훈자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고참 볼셰비키 분류:19세기 조지아 사람 분류:20세기 조지아 사람 분류:조지아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러시아의 공산주의자 분류:러시아 혁명 관련자 분류:평양 소련군정 관련자 분류:러시아의 반유대주의 분류: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골드바흐의 추측 (Goldbach s conjecture)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정수론의 미해결 문제로,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개의 소수(Prime number)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하나의 소수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은 허용한다. 1742년 6월 7일에 프로이센 수학자 크리스티안 골드바흐(Christian Goldbach)는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은 추측을 제안하였다. 그는 편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추측을 했다. 그는 1을 소수로 취급했지만 후에 이 개념은 폐기되었다. 이 두 추측은 동치이지만 당시에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골드바흐의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오일러는 1742년 6월 30일에 답장을 보내 골드바흐와 한 예전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골드바흐의 원래 추측을 포함한다. 모든 짝수가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면, 홀수의 경우 3을 더하면 되고, 짝수의 경우는 2를 더하면 세 소수의 합으로도 표현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위 추측을 강한 골드바흐의 추측 (strong Goldbach conjecture)이라고 부르고 최초에 골드바흐가 제시했던 5보다 큰 모든 정수는 세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 는 주장은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 (weak Goldbach conjecture)이라고 불린다. 강한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이라면,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은 당연히 참이 된다. 강한 골든바흐의 추측을 짝수 골드바흐 추측(even Goldbach conjecture), 약한 골든바흐의 추측을 홀수 골드바흐 추측(odd Goldbach conjecture)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500px 예를 들어, 50까지의 짝수는 :4 = 2+2 :6 = 3+3 :8 = 3+5 :10 5+5 :12 = 5+7 :14 7+7 :16 5+11 :18 7+11 :20 7+13 :22 11+11 :24 11+13 :26 13+13 :28 11+17 :30 13+17 :32 13+19 :34 17+17 :36 17+19 :38 19+19 :40 17+23 :42 19+23 :44 13+31 :46 23+23 :48 19+29 :50 19+31 위와 같이,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짝수에서 가능한지는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짝수 n을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의 수 (4 ≤ n ≤ 1,000) 짝수 n을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의 수 (4 ≤ n ≤ 1,000,000) 컴퓨터로 직접 계산하여 짝수가 두 소수의 합인지 확인하는 시도가 예전부터 있었다. T. Oliveirae Silva는 이하에서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임을 확인했다. 골드바흐의 추측은 반드시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 한 쌍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고, 같은 두 수를 쓸 수도 있다. 1930년 러시아 수학자 Lev Schnirelmann은 4보다 큰 모든 짝수는 20개 이하의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함을 증명했다. 20이라는 수치는 수학자들이 계속 줄여왔고, 1995년 프랑스 수학자 Olivier Ramaré는 6까지 줄인 것이 가장 최근의 결과이다. 1937년 러시아 수학자 Vinogradov는 매우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는데, 충분히 큰 수 이상의 홀수에 대해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여기서 충분히 큰 수는 이었는데, 이후 중국 수학자 첸과 왕에 의해 이 값은 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남은 결과를 직접 확인하기에는 여전히 큰 수이다. 1975년 미국 수학자 휴 몽고메리 (Hugh Montgomery)와 영국 수학자 로버트 찰스 본(Robert Charles Vaughan)은 "대부분"의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함을 증명했다. 즉,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지 않은 짝수 개수의 비율의 극한값이 영에 수렴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2013년 Harald Helfgott은 위의 충분히 큰 수 이하의 홀수들에 대해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임을 증명하였고, 따라서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은 참임이 증명되었다. 쌍둥이 소수 추측 (twin prime conjecture)과 골드바흐의 추측은 구조적으로 유사성이 있다. 쌍둥이 소수 추측은 와 가 모두 소수인 수가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 정확히 두 개의 소인수를 가지는 수가 무한히 많다는 추측이다. 골드바흐 추측은 4이상의 모든 짝수에 대해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모든 4 이상의 짝수 에 대해 가 두 개의 소인수를 가지는 1과 사이의 k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추측이다.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 때문에 두 추측은 같이 다루어져 왔으며, 지금까지 검증된 수치적 자료들도 이를 뒷받침 하는 듯 보인다. 수학의 미해결 문제 천의 정리 리만 제타 함수 디리클레 급수 오일러의 곱셈 공식 분류:수론 분류:소수에 관한 추측 분류:힐베르트 문제 분류:수학의 미해결 문제
칸 영화제 ()는 세계 3대 국제 영화제 중 하나로서 국제 영화계의 메카 로 통한다. 1946년 9월 20일 - 10월 5일 처음으로 개최된 이래, 프랑스 남부 칸에서 보통 매년 5월에 열린다. 수상 부문은 황금종려상, 감독상, 각본상, 남·여자배우상 등이 있다. 영화제의 작품의 특성은 영화감독의 재능과 실험성에 초점을 두어 대중성과 작품성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2014년 7월 1일, 프랑스의 유로 TV 방송국 카날 플러스의 공동설립자이자 전 회장인 피에르 레스퀴르가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 이사회는 질 제이콥스를 명예 집행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of oz movie poster.jpg|섬네일|왼쪽|180px|1939년 출시된 오즈의 마법사 포스터 칸 영화제는 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 중의 하나이다. 병설되어 있는 국제 전시장도 MIFED, American Film Market와 대등한 세계 3대 시장으로 손꼽힌다. 전시장에는 800개사, 수천명의 영화 제작자(프로듀서), 바이어, 배우 등이 모여, 세계 각국에서 모이는 영화배급사에 신작 영화를 파는 프로모션의 장소가 되고 있다. 특히, 세계 3대 영화제와 세계 3대 시장이 동시에 개최되는 것은 칸느 뿐이기 때문에 전 세계 언론매체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으며, 매회 전 세계에서 수많은 배우, 영화 제작자가 참석한다. 개최 기간 동안 주전시장을 시작으로 각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전시회는 각 제작사의 부스에 설명회 파티가 열린다. 앞으로 개봉되는 영화는 물론, 예고편 밖에 할 수 없는 영화와 아직 대본조차 할 수 없는 기획 단계의 영화까지 판매된다. 이 시장은 앞으로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예측하고 구매를 결정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1930년대 후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개입으로 정치색을 강화했던 《베니스 영화제》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개최된 것이 이 칸 영화제의 시작이다. 1939년 개최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종전 후 1946년 정식으로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예산 문제로 개최되지 않았고, 1951년에 다시 개최되었다. 이때부터 팔레 데 페스티발(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ès)이 대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68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마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베리, 진 가브리엘 아루비콧코, 클로드 를루슈, 로만 폴란스키, 장뤼크 고다르의 요청으로 영화제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대한민국 작품으로는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1999년 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2년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감독상, 2003년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그랑프리와 2009년 박쥐로 심사위원상, 2010년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와 2011년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이 비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을 수상한 바 있다. 칸 영화제에는 여러 섹션이 존재한다. 공식 섹션 - 영화제의 주요 행사 * 경쟁부문 - 20여편의 초정작이 황금종려상을 두고 경쟁한다. 뤼미에르 극장(Théâtre Lumière)에서 상영된다. * 주목할만한 시선 - 다양한 지역과 문화의 독창적이고 색다른 20편이 출품된다. 경쟁부문에 오르지 못한 영화가 초청된다. 드뷔시 극장(Salle Debussy)에서 상영된다. * 비경쟁부문 - 경쟁부문과 같이 뤼미에르 극장에서 상영되지만 상을 놓고 경쟁은 하지 않는다. * 특별상영 * 시네파운데이션 - 학생 작품이 초청된다. * 단편영화 - 경쟁부문과 마찬가지로 상을 놓고 경쟁한다. 대상작품은 단편작품이다. 병행 섹션 - 비경쟁 프로그램으로 영화의 다른 측면을 발견하기위해 만들어짐 * 칸 클래식 * 황금카메라 그 외 섹션 - 영화제 기간 동안 외부 단체들이 제작 * 감독주간 * 국제비평가주간 행사 * Marché du Film - 필름마켓 or.jpg|섬네일|1979년 칸 영화제에서 《지옥의 묵시록》에게 시상된 황금종려상 최고상은 《황금 종려상》(Palme d Or, Golden Palm)라고 하며, 20개 내외의 후보작 중에서 선정된다. 두 개 이상의 작품이 선정된 해도 있다. 처음에는 최고상을 "GP"(Grand Prix du Festival International du Film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라고 했었는데, 1955년에 트로피 모양을 딴 "황금 종려"를 정식 명칭으로 "그랑프리" 상으로 삼았다. 1965년 최고 상품의 정식 명칭을 "GP"로 변경했다가, 1975년 다시 "황금 종려"라고 변경했다. 오랫동안 칸느에서 "그랑프리"는 최고상의 정식 명칭 또는 별칭이었지만, 1990년 심사위원 특별상(Grand Prix Spécial du Jury)에 "그랑프리"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혼란을 초래했다. 심사 위원은 유명 영화인과 문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문별로 심사 위원들이 다르다. *; 경쟁부문 * 황금종려상 최우수 작품상 * 심사위원대상 2등 작품상 * 심사위원상 3등 작품상 * 감독상 * 남자배우상 * 여자배우상 * 각본상 *; 주목할 만한 시선 * 대상 * 심사위원상 * 감독상 * 배우상 * 각본상 *; 단편 경쟁부문 * 단편 황금종려상 FIPRESCI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에서 시상 황금카메라상 최고의 데뷔 영화 시네파운데이션상 학생 영화 퀴어종려상 유럽영화상 벌칸상 트로페 쇼파르 연도 작품 감독 부문 상 1999년 《소풍》 송일곤 단편 경쟁부문 심사위원대상 2002년 《취화선》 임권택 경쟁부문 감독상 2004년 《올드보이》 박찬욱 경쟁부문 심사위원대상 2005년 《주먹이 운다》 류승완 감독 주간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망종》 장률 비평가 주간 프랑스독립영화배급협회(ACID)상 2007년 《밀양》 이창동 경쟁부문 여우주연상 (전도연) 《만남》 홍성훈 시네파운데이션 3등상 2008년 《스탑》 박재옥 시네파운데이션 3등상 2009년 《박쥐》 박찬욱 경쟁부문 심사위원상 《남매의 집》 조성희 시네파운데이션 3등상 2010년 《시》 이창동 경쟁부문 각본상 《하하하》 홍상수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 2011년 《아리랑》 김기덕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 《야간비행》 손태겸 시네파운데이션 3등상 2013년 《세이프》 문병곤 단편 경쟁부문 황금종려상 2016년 《아가씨》 박찬욱 경쟁부문 벌칸상 (류성희 미술감독) 2018년 《버닝》 이창동 경쟁부문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벌칸상 (신점희 미술감독)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그들 각자의 영화관 황금종려상 수상작 목록 칸 영화제 마켓 칸 영화제 데이터베이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분류:1939년 설립 분류:프랑스의 영화제 분류:5월의 행사 분류: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분류:국제 영화제 분류:알프마리팀주의 관광지
스웨덴어로 된 인터내셔널 인터내셔널가 (, 는 노동자 해방과 사회적 평등을 담고있는 민중가요이다. 프랑스어 원 가사는 외젠 포티에(Eugène Pottier, 1816년 - 1887년)에 의해 1871년 파리코뮌이 한창이였을적에 쓰여졌고 피에르 드제테(Pierre Degeyter, 1848년-1932년)가 1888년에 곡을 붙였다. 참고로 작사자인 외젠 포티에는 철도 노동자였고, 피에르 드제이터는 가구세공인으로, 작사자와 작곡자 모두 노동 계급 출신이다. 프랑스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가 프랑스 혁명 이후 면면히 계승되어온 자코뱅식 애국주의 전통을 상징한다면, 인터내셔널가는 자코뱅주의와 더불어 프랑스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쳐온 사회주의 전통을 상징하는 노래 로 애창된다. 애초에 인터내셔널가가 처음 유래되어 만들어진 파리 코뮌 자체가 급진성향의 자코뱅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정치 운동이었다. 이 노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노래 중 하나이며, 러시아어판은 한때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로 채택되어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쓰였다. 그러다가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코민테른을 해체하면서 새 국가를 채택하게 되었는데 1944년 이후에는 인터내셔널가 대신에 소련 찬가로 대체된다. 여기서 인터내셔널 은 단순히 국제적 이라는 뜻이 아닌, 사회주의자들의 국제기구인 제1인터내셔널을 의미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으면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갈라선 이후로는 인터내셔널 이라는 조직 자체가 무의미해졌으나, 오늘날에도 불리고 있다. 원곡은 프랑스어이지만,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언어별로 다양한 가사가 존재한다. 한국에는 일제 강점기 1920년대때 조선공산당이 인터내셔널가를 일역한 일본의 국제가 를 조선어로 직역, 번역되어 불린 것이 시초다. 이 가사는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국제가’또는‘국제공산당가’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으며, 주로 의전용으로 사용된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좌익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금기시되어 인터내셔널가 또한 잊혀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 민중음악 활동가들이 외국에서 악보를 다시 들여오며 복원되었다. 그 뒤에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시기 노동운동 노래패를 통해 현재 대한민국에서 부르는 인터내셔널가 가사가 확립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과 북한의 인터내셔널가 가사는 서로 다르다. 프랑스어 원본 소련 국가 한국어 번역본 조선어 번역본 1 :Debout les damnés de la terre :Debout les forçats de la faim :La raison tonne en son cratère, :C est l éruption de la fin. :Du passé, faisons table rase, :Foule esclave debout debout :Le monde va changer de base :Nous ne sommes rien, soyons tout Refrain :C est la lutte finale, :Groupons-nous, et demain :L Internationale, :Sera le genre humain. :C est la lutte finale, :Groupons-nous, et demain :L Internationale, :Sera le genre humain. 2 :Il n est pas de sauveurs suprêmes, :Ni dieu, ni César, ni tribun, :Producteurs, sauvons-nous nous-mêmes :Décrétons le salut commun :Pour que le voleur rende gorge, :Pour tirer l esprit du cachot, :Soufflons nous-mêmes notre forge, :Battons le fer quand il est chaud :(Au refrain) 3 :L État comprime et la loi triche, :L impôt saigne le malheureux, :Nul devoir ne s impose au riche, :Le droit du pauvre est un mot creux, :C est assez languir en tutelle, :L Égalité veut d autres lois :Pas de droits sans devoirs, dit-elle, :Égaux, pas de devoirs sans droits :(Au refrain) 4 :Hideux dans leur apothéose, :Les rois de la mine et du rail :Ont-ils jamais fait autre chose :Que dévaliser le travail? :Dans les coffres-forts de la bande, :Ce qu il a créé s est fondu, :En décrétant qu on le lui rende, :Le peuple ne veut que son dû. :(Au refrain) 5 :Les rois nous saoulaient de fumée, :Paix entre nous, guerre aux tyrans :Appliquons la grève aux armées, :Crosse en l air et rompons les rangs :S ils s obstinent ces cannibales, :A faire de nous des héros, :Ils sauront bientôt que nos balles :Sont pour nos propres généraux :(Au refrain) 6 :Ouvriers, paysans, nous sommes, :Le grand parti des travailleurs, :La terre n appartient qu aux hommes, :L oisif ira loger ailleurs. :Combien de nos chairs se repaissent :Mais si les corbeaux, les vautours, :Un de ces matins disparaissent, :Le soleil brillera toujours :(Au refrain) 1 :Вставай, проклятьем заклейменный, :Весь мир голодных и рабов :Кипит наш разум возмущенный :И в смертный бой вести готов. :Весь мир насилья мы разрушим :До основанья, а затем :Мы наш, мы новый мир построим, :Кто был ничем, тот станет всем. : Припев. ::Это есть наш последний ::И решительный бой, ::С Интернационалом ::Воспрянет род людской 2 :Никто не даст нам избавленья — :Ни бог, ни царь и не герой. :Добьемся мы освобожденья :Своею собственной рукой. :Чтоб свергнуть гнет рукой умелой, :Отвоевать свое добро, :Вздувайте горн и куйте смело, :Пока железо горячо. : Припев. 3 :Лишь мы, работники всемирной :Великой армии труда, :Владеть землей имеем право, :Но паразиты никогда. :И если гром великий грянет :Над сворой псов и палачей, :Для нас все так же солнце станет :Сиять огнем своих лучей. : Припев. 1절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을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 해! 후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 주인들, 승리를 위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2절 :어떠한 높으신 분도, 고귀한 이념도, :허공에 매인 십자가도 우릴 구원 못 하네! :우리 것을 되찾는 것은 강철 같은 우리 손, :노예의 쇠사슬을 끊어 내고 해방으로 나가자! 후렴 반복 3절 :억세고 못박혀 굳은 두 손 우리의 무기다! :나약한 노예의 근성 모두 쓸어 버리자! :무너진 폐허의 땅에 평등의 꽃 피울 때, :우리의 붉은 새 태양은 지평선에 떠온다! 후렴 반복 1절 :일어나라 저주로 인맞은 주리고 종된 자 세계 :우리의 피가 끓어 넘쳐 결사전을 하게하네. :억제의 세상 뿌리빼고 새 세계를 세우자. :짓밟혀 천대받은 자 모든 것의 주인이 되리. 후렴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림 싸움이니 :인터나쇼날로 인류가 떨치리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림 싸움이니 :인터나쇼날로 인류가 떨치리 2절 :하느님도 임금도 영웅도 우리를 구제 못하라 :우리는 다만 제 손으로 해방을 가져오리라 :거세인 솜씨로 압박 부시고 제것을 찾자면 :풀무를 불며 용감히 두드려라 쇠가 단김에 후렴 반복 3절 :우리는 오직 전 세계의 위대한 로력의 군대 :땅 덩어리는 우리의 것이니 기생충에게는 없으리 :개무리와 도살자에게는 큰 벼락 쏟아져도 :우리의 머리 우에는찬란한 태양이 비치리 후렴 반복 민중가요 파리코뮌 영국의 짐승들 혁명을 꿈꾸는 자여, 이 노래를 부르라! 음악으로 읽어보는 혁명의 역사 여러 언어로 된 인터내셔널(MP3 형식) MP3파일 소련 등 제2세계 노래 모음 사이트. 영문 및 가사 지원 분류:사회주의 상징 분류:소련의 상징 분류:옛 국가 분류:국제주의 분류:노동가요 분류:제1인터내셔널 분류:파리 코뮌 분류:공산주의 상징 분류:1871년 노래 분류:다언어 노래
톨스토이 (Толсто́й, Tolstoy/Tolstoi)는 러시아의 성씨이다.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톨스토이(1823 - 1889) - 러시아의 정치가 레프 톨스토이(1828 - 1910) - 러시아의 작가, 사상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83 - 1945) - 러시아의 소설가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 톨스토이(1817 - 1875) - 러시아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표트르 톨스토이(1645 - 1729) - 러시아의 외교관, 정치인 톨스토이 운동 제정 말기의 러시아에서 일어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사회운동 빅토리아 톨스토이 스웨덴의 가수
에르되시 팔 (, , (책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 에선 폴 에어디쉬라고 발음하기도 했다.), 1913년 3월 26일~1996년 9월 20일)은 헝가리의 수학자이다. 수백 명의 다른 수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하여 조합론, 그래프 이론, 정수론 등에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레온하르트 오일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에르되시는 1913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에르되시의 아버지 에르되시 러요시()와 어머니 어너() 둘 다 수학 교사였다. 아버지의 성은 원래 엥글렌데르()였는데, "에르되시"로 개명하였다. 에르되시는 누나가 둘 있었으나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성홍열로 죽어서, 외동아들로 자랐다. 1914년에 아버지 에르되시 러요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공격해 온 러시아 제국 군대에 포로로 잡혀가 6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전쟁 포로로 있었다. 에르되시의 어머니는 남편과 두 딸을 잃은 후 에르되시에 극도로 집착해, 에르되시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의 교육을 받았다. 에르되시는 4살 때에 이미 혼자서 이미 알려져 있던 소수의 몇몇 성질을 발견했다고 한다. 1920년에 아버지가 풀려나 돌아오고, 아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헝가리의 유대인 대학 입학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에르되시는 국가 시험 수상을 이유로 1930년에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에 21세의 나이에 페예르 리포트() 아래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34년에 에르되시는 헝가리의 반유대주의를 피하여 영국 맨체스터로 망명하였다. (에르되시의 아버지와 두 명의 삼촌은 홀로코스트 동안 처형당했다.)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자리를 얻었지만, 종신 재직권을 수여받지 못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그의 삶을 특징짓는 떠돌이 연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에르되시는 대한 기록은 그가 순진하고, 아이같은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일례로, 1941년 그는 다른 수학자와 열띤 토론을 하다가, 미국 롱아일랜드의 군사 통신 시설을 모르고 지나쳤는데, 이들은 스파이 혐의로 붙잡히고, 이 사건은 연방수사국의 기록 파일에 올려졌다. 또한, 에르되시는 명성과 천재성으로 어느 대학에서도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누구든지 그의 마음에 드는 주제를 가지고 온 수학자라면 함께 논문을 썼다. 결과적으로 그는 거의 1500개의 공동 논문을 쓴, 역사상 공동연구를 가장 많이 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와 공동연구를 했던 수학자들은 에르되시 수란 말까지 만들어 냈다. 이와 같이 에르되시는 혼자서는 논문을 거의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수학을 ‘사회적 활동’으로 만든 수학자라고 할 수 있다. 에르되시는 죽음을 표현할 때 "떠난다"는 말을 썼고 "죽는다"란 말은 수학을 그만두는 것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는 아이들을 엡실론(epsilon, 수론에서 무한소를 의미함)이라고 불렀고 아이들을 좋아했다. 1950년대 초, 에르되시의 연방수사국 기록은 그가 매카시 수사의 주목을 받게 하였다. 이 때문에 에르되시는 갑자기 미국행 귀국 비자를 거부당했다. 그 결과, 그는 이후 10년 동안 많은 시간을 이스라엘에서 지냈다. 1960년대 초, 그는 다시 미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수차례 청원을 내서, 1963년 11월에 다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후 30년간, 에르되시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영국의 몇 대학에 자리를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는 어느 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대학들을 전전한 방랑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암페타민을 다량 복용하며, 하루 최대 4-5시간밖에 자지 않고, 극도로 오랜 시간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9년에 에르되시의 친구 로널드 그레이엄은 그에게 한 달 동안 약을 먹지 않고 버티면, 500 미국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에르되시는 이 내기를 이겼지만 약물을 복용하지 않는 동안 연구를 할 수가 없었고, 이 바보같은 내기 때문에 인류의 수학 발전이 한 달 늦춰졌다고 불평했다. 에르되시는 1983년/1984년 5만 미국 달러 상금의 울프상 수학 부문 등 많은 상들을 받았다. 그는 단촐하게 살았으며, 거의 대부분의 재산을 학생들을 돕거나, 문제 풀이 상금으로 내거는 것으로 썼다. 에르되시는 말년까지 활발한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96년 9월 20일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학회가 끝난 몇 시간 후 심근 경색으로 인하여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에르되시는 평생 독신이었으며 자녀를 두지 않았다. 에르되시는 부다페스트의 코즈머 가(街) 유대인 공동 묘지()에서 부모 옆에 매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적혀 있다. 에르되시의 수학적 업적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으며 그 양도 많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론이나 틀을 짜는 수학자가 아닌, 특별히 어렵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의 해결사였다. 그는 특히 조합론, 그래프 이론, 수론 분야의 문제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단지 문제를 푸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름답고 기초적인 풀이를 얻고자 했다. 증명은 결과가 왜 참인지에 대한 직관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여러 단계의 복잡한 수순으로 이루어져 통찰력에 도움이 되지 않은 증명은 의미가 적다고 생각했다. 에르되시의 증명의 특징은 복잡한 문제를 아름답고 시각적인 방법으로 푼다는 점이다. 그는 1951년 수론 분야의 여러 논문으로 미국 수학회에서 수여하는 콜 상()을 수상했다. 에르되시는 항상 재치있는 어구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에르되시는 수학적으로 아름다운 증명을 볼 때마다 “ 그 책 에 있는 증명이군!(This one s from The Book !)”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 책’이란 신이 수학 정리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최적인 증명을 써 둔 상상 속의 책이다. (에르되시의 전기의 번역본에서 ‘신의 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985년에 그는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한 콤펙트 기수 라도 그래프 불가촉 수 램지 이론 해바라기 세메레디의 정리의 추측 에르되시-보와인 상수 에르되시 추측 분류:1913년 태어남 분류:1996년 죽음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헝가리의 수학자 분류:헝가리의 무신론자 분류:울프상 수학 부문 수상자 분류:부다페스트 출신 분류:조합론자 분류:그래프 이론가 분류:노터데임 대학교 교수 분류:퍼듀 대학교 교수 분류: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분류:유대계 헝가리인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베저위붕 작전 () 또는 베저 작전 은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칸디나비아의 중립국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작전이다. 암호명 "베저위붕"은 독일어로 "베저 강 훈련"을 뜻한다.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략하였다. 나치는 프랑스와 영국이 이들 국가와 손을 잡거나 점령하여 독일을 공격하는 교두보로 삼을 계획(이는 실제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을 세우는 것에 대한 대비라며 침략을 정당화했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두 나라 주재 독일 대사들이 양국 정부에 독일군이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양국의 중립을 보호하기위해 왔다고 통보했다. 덴마크는 독일의 입장에서 볼 때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노르웨이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징검다리였으며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얼마만큼 관리가 필요했다는 것뿐이었다. 덴마크는 작고 평지로 이루어져 독일군의 작전 수행에는 딱 알맞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새벽 초 덴마크군 몇몇 연대가 독일군에 대해 저항을 하여 열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덴마크 정부는 순식간에 내정에 간섭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사실 독일 대사가 덴마크 정부를 찾아와 독일군의 진주를 허락하라고 요구하기도 전에 이미 독일군은 국경을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덴마크가 별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항복한 관계로, 1943년 여름까지는 독일 점령은 매우 관대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와 추방도 지연이 되어 그들은 거의 모두 스웨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덴마크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수는 500명을 넘지 않고 50명 미만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당시 덴마크의 왕이었던 크리스티안 10세는 매일 코펜하겐을 국왕의 정복을 입고 산책하면서 침묵으로 항의했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저항운동 비드쿤 크비슬링 A detailed article about the German invasion of Denmark A short introduction to the German invasion of Norway 분류:제2차 세계 대전의 해전 분류:서유럽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분류:독일의 전투 분류:노르웨이의 역사 분류:1940년 4월 분류:1940년 5월 분류:1940년 6월 분류:1940년 덴마크 분류:1940년 노르웨이
케냐의 국기 (비율 2:3) 케냐의 국기 는 1963년 12월 12일 독립과 동시에 지정되었다. 국기의 디자인은 케냐의 독립 운동을 주도한 케냐의 정치 단체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의 기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이다. 검정색, 빨강색, 초록색 가로 줄무늬 사이에 얇은 하얀색 가로 줄무늬 2개가 그려져 있으며 국기 가운데에는 마사이족의 방패와 창이 그려져 있다. 검정, 빨강, 녹색은 각각 흑인, 피, 자연을 상징하는 범아프리카색이다. 흰색은 평화를 뜻하며, 마사이족의 방패와 창은 자유의 수호를 나타낸다. 케냐의 국기 규격과 색상은 다음과 같다. 케냐의 국기 규격 색상 검정 빨강 초록 하양 RGB 0–0–0(#000000) 187–0–0(#BB0000) 0–102–0(#006600) 255–255–255(#FFFFFF) of the Kenya Defence Forces.svg|육군기 Ensign of Kenya.svg|해군기 Colour of the Kenyan Navy.svg|대통령 전용 해군기 Force Ensign of Kenya.svg|공군기 presidential standard JOMO KENYATTA.png|조모 케냐타 대통령 시대에 사용된 케냐의 대통령기 presidential standard DANIEL ARAP MOI.svg|대니얼 아랍 모이 대통령 시대에 사용된 케냐의 대통령기 presidential standard MWAI KIBAKI.png|음와이 키바키 대통령 시대에 사용된 케냐의 대통령기 presidential standard UHURU KENYATTA.png|우후루 케냐타 대통령 시대에 사용된 케냐의 대통령기 of the Witu Protectorate (1893-1920).svg|위투 보호령의 기 (1893년 7월 31일 ~ 1920년) of Kenya (1895–1921).svg|영국령 동아프리카 시대의 기 (1895년 ~ 1921년) of Kenya (1921–1963).svg|영국령 동아프리카 시대의 기 (1921년 ~ 1963년) 국기 분류:국기
밀도범함수 이론 (Density functional theory, DFT)은 물질, 분자 내부에 전자가 들어있는 모양과 그 에너지를 양자 역학으로 계산하기 위한 이론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어떤 분자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특정 분자의 모양과 성질 등등을 예측할 수 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과학 계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양자 역학 계산 분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상사 구조를 갖는 다체 문제에 어디든 적용할 수 있으므로, 최근 전자구조와 별 상관 없는 많은 통계 물리학에 사용되기도 하다. 엔리코 페르미가 기본적인 이론을 도입하였다. 월터 콘() 등이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켰다. 콘은 이 공로로 199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물질의 성질을 공부하려면 {많은 원자핵}+{많은 전자}문제, 즉 다체 물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원자가 아닌 복잡한 분자 (혹은 고체, 등등)에 대한 문제를 풀기는 이론상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므로 몇 개의 근사 방법이 필요하다. 첫 번째 근사는 보른-오펜하이머 근사(Born-Oppenheimer approximation)로 전자보다 수천배 이상 무거운 핵을 고정된 것으로 보고 핵에 의한 전기장 안에서 전자의 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많은 전자로 이루어진 시스템 문제를 푼다는 것이다. 밀도범함수이론에서는 많은 전자 문제를 단순히 전자들의 파동함수들대신 전자 밀도함수로 대체함으로 손쉽게 계산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공간상의 어떤 점에 전자가 있을 때 이 전자가 느끼는 퍼텐셜은 다른 모든 곳에서 오는 것을 밀도함수를 통한 평균장 으로 볼 수 있다.(Mean Field Theory/Approximation). 이때 전자의 밀도 함수는 전자의 파동 함수들을 절댓을 구해 제곱해서 채워진 준위까지 더해준 것으로 정의된다. 밀도범함수의 출발은 원자핵+전자 시스템을 풀기위해 시작됐지만 이론상 많은 동일한 형태의 입자/장 상호작용을 하는 다체 문제면 적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시스템의 퍼텐셜은 외부 요인에 의한 퍼텐셜(주로 원자핵 또는 이온이 전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나를 기술한다 (혹은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 원자핵+전자로 해서 모든 전자를 고려한다면 온전자(all electron)계산 이온+전자(보통 가전자)로 고려한 경우는 가짜 퍼텐셜(pseudopotential)계산 이 해당되겠다.) , 전자들끼리의 정전기적 상호작용( 하트리 퍼텐셜 이라 한다.), 전자를 서로 교환했을 때 (순전히 양자 역학에서만) 나타나는 교환-상관(exchange-correlation) 퍼텐셜 이 있다. 으로 나타난다. 이 중 마지막에 교환-상관 퍼텐셜은 아무도 정확히 어떤형태를 가지는지 모르고 보통의 경우 양자몬테카를로 계산값과 장론의 결과를 근사적으로 잘 맞추는 형태로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국소 전자 밀도에만 의존하는 교환-상관 퍼텐셜 범함수를 사용하게 되면 국소 밀도 근사(local density approximation)라고 하고, 선형 근사를 쓰게 되면 일반화된 기울기 근사(generalized gradient approximation)이라고 한다. 많은 경우 국소 밀도 근사만으로 계를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전하 이동이 큰 계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공간상의 어떤 점에서 함수 값을 구할때 모든공간의 정보를 필요로한 경우 이를 논로컬(non-local) 하다고 말하고 해당점의 정보만 필요한 경우를 국소적 ()이라고 한다. 위의 퍼텐셜에서는 외부요인에 의한 퍼텐셜은 local혹은 non-local할 수 있고, 하트리 퍼텐셜은 확실히 non-local하며, local density approximation을 사용했을때는 교환-상관 퍼텐셜은 local하고 generalized gradient approximation을 사용했을 경우, 즉, 1차미분 기여도를 포함했을 때에는 semi-local하다고 한다. 호헨버그(Hohenberg) 와 콘(Kohn)의 정리 # 해밀토니언이 주어지면 파동함수를 구할 수 있고 파동함수에서 밀도함수를 구할 수 있는데 ( 이론상 ) 밀도함수에서 파동함수를 구할 수도 있다. 즉, 파동 함수와 밀도 함수는 일대일 대응하고, 파동 함수와 해밀토니언또한 일대일 대응한다. 결국 밀도 함수와 해밀토니언은 일대일 대응한다. (invertibility) 계산 과정에서, 해밀토니안, 파동함수, 밀도함수는 같은 대상을 표현한 서로 다른 표현 방식에 지나지 않을 뿐, 같은 것이다. # 변분 원리를 이용해서 정확한 바닥상태 에너지를 계산 할 수 있다. # 외부에서 오는 퍼텐셜을 뺀 나머지는 언제나 같다. (universality) 콘-샴(Kohn-Sham) 정리 정확한 바닥 상태 밀도 함수는 콘-샴 방정식이라고 하는 슈뢰딩거 방정식과 흡사한 방정식을 풀면 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해밀토니언 는 여기서 은 전자 질량이다. 정리하면 # 전자 밀도를 구하기 위해 전자의 파동 함수들을 이용하고 # 전자 밀도를 이용해 퍼텐셜을 계산한다. # 주어진 퍼텐셜로부터 콘-샴 방정식을 푼다. 풀이 결과는 전자의 파동 함수이다. 보통 계산을 위해서는 처음에 밀접 결합 근사 등으로 "적당히" 파동 함수를 근사하고 1, 2, 3의 과정을 거치면 처음에 대입한 파동 함수보다 더 나은 파동 함수를 얻는다. 다시 이것을 초기 예상값으로 하여 재계산을 거듭한다. 실제에서는 적당히 (상당히 보수적으로) 이전 단계의 초기 예상값과 계산 결과값을 잘 섞어서 초기 예상값으로 사용한다. 즉 self-consistent 방법으로 풀이한다. 전자들이 돌아 다니는 분자들에서 전자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빨리 돌아다니고 있는지 그 에너지를 구하려면 양자 역학적으로 묘사해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 이해하고 계산하려고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양자 역학 계산을 수십 개 수백 개 전자에 대해 하려 한다면(아주 단순한 분자인 부탄 가스 분자 2개만 있어도 전자 숫자가 백개에 이른다.) 그것은 너무나 긴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인 즉슨, 전자 하나 하나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말고, 전자 무더기를 한 덩어리의 양으로 따져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는 덩어리가 많이 쏠려 있고, 전자가 덜 출몰하는 지역에는 덩어리가 조금밖에 없는 울퉁불퉁한 도넛의 모양으로, 전자들의 떠돌아다니는 영혼의 서글픈 그림자만 그려보는 것이다. 전자 하나 하나를 따지지 않고, 도넛으로 된 전자 덩어리만 생각해도 에너지를 구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까. 도넛으로 된 전자 덩어리의 모양과 에너지와의 관계를 표시하는 수식이 KS 방정식이다. Self-consistent 방법 이 전자 덩어리의 모양을 구하는 방법이 self-consistent 방법인데, 이걸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아무렇게나 도넛을 만들어 놓고, 방정식(전자들이 처한 상황에서 꼭 만족해야할 조건식)을 얼마나 만족시키는지 계산해 본다. 당연히 별로 안만족 시킬 것이다. 그러면 도넛의 어떤 부분을 주물럭주물럭해서 모양을 좀 바꾸어 본다. 잘 바꾸었다면, 아까보다는 좀 더 만족시킬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강 점차 주물럭거리면서 모양을 바꾸어 조건식을 상당히 잘 맞출 때까지 바꾸어 보면, 어느 수준까지 주물럭거린 도넛은 우리가 원하는 전자 덩어리 모양과 꽤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교환 에너지(exchange energy) 밀도범함수론에서 가장 신경 쓸 필요가 있는 교환 에너지(exchange energy)를 구하는 범함수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왼쪽에 있는 전자 하나가 발에 땀나게 오른쪽으로 뛰어가고, 오른쪽에 있는 전자 하나가 열심히 뛰어서 왼쪽으로 가서 두 전자가 자리를 살짝 바꾼 경우를 따져 보자. 두 전자는 열심히 뛰어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두 전자가 정확히 자리를 바꾸기만 한 경우에는, 전자가 분명히 많이 움직여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거국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고, 이것은 양자 역학에서는 전자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과 다를바 없게(!) 평가되어야 한다. 즉 이런 "자리만 바꾸기"가 많이 일어난다면, 움직였다고 한들 움직이지 않은 것이나 다를바 없는 것들이 많았으므로, 실제 에너지는 더 낮아져야만 한다. (양자 역학적으로, 그런 것은 움직인 것이 아니다.) 밀도범함수 이론은 전자들이 선풍기의 날개나 헬리콥터 날개처럼 매우 빨리 돌아다녀서 멀리서 보면 마치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전자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전자끼리 자리만 바꾼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치는 것을 따로 계산해 주어야 한다. 이런 자리만 바꾼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를 도넛의 모양을 대강 보고 짐작해 주어야 하며, 이 짐작을 하는 방법이 바로, "교환 에너지 범함수"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코릴레이션(상관성) 에너지 라는 것도 동시에 고려해 주므로, 교환 코릴레이션(상관성) (exchange correlation) 범함수라는 것을 사용하게 된다. 좋은 교환 코릴레이션 범함수를 구하는 방법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대강 만들어내는 것이고, 기존의 방법들에서 나온 결과를 참조시켜 작동하도록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B3LYP라는 범함수가 대체로 모든 경우에 큰 오류가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 보는 게 좋다는 말이 있듯이 밀도범함수이론을 컴퓨터에서 돌려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대개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혼자서 또는 팀을 짜서 구현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남이 짜 놓은 것을 가져다가 잘 쓰면 된다. 후자의 경우를 먼저 살펴 보면 ElectronicStructure.org/software 에 자유 소프트웨어를 구할 수 있는 다수의 링크가 있다. (화학쪽 소프트웨어로는 NWChem 과 GAMESS 가 있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기본적으로 운영 체제는 유닉스나 리눅스로 가정하고 있고, 다른 많은 과학 소프트웨어 배포본이 그렇듯이 포트란 소스가 있고 이걸 컴파일해서 쓰는 형태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상용 포트란 컴파일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BLAS나 LAPACK 같은 수학 라이브러리가 필요할텐데 netlib 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컴파일된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서는 작은 문제가 아니라면 슈퍼 컴퓨터나 리눅스 클러스터가 필요하다. 이는 다란 메모리가 필요하고 따라서 받아들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N 순의 알고리즘이 적용되어 있지 않다면 O(N^3)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소스 코드를 수정하는 것은 쉽지는 않겠지만 읽는 것으로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다음에 전자의 경우를 살펴 보겠다.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기저를 결정하는 일이다. (기저는 힐베르트 공간을 생성하는 완전한 세트이기 때문에 기저가 바뀌면 representation, 쉽게 말해서 수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흔히 쓰이는 기저집합은 평면파(plane wave)와 local orbital (가우시안을 사용한다 해서 가우시안-Gaussian-이라고 하는 유명한 소프트웨어가 있음.)가 있다. 그 다음 결정할 일은 all electron을 할 건지 pseudopotential을 쓸 것인지 또 교환상관 퍼텐셜은 어떤 것을 쓸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제 굵은 가지는 결정되었고 세부 사항으로 어떤 플랫폼에서 돌릴 것인지 어떤 수학 라이브러리를 쓸 것인지 결정하고 코드를 쓰면 되겠다. (숙련된 프로그래머라면 대략 몇 달 만에 겨우 돌아가는 코드를 짤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코드가 쓸만하게 될 때까지는 수년~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 월터 콘의 자기 소개 글 분류:양자역학
이소룡 (, 1940년 11월 27일 ~ 1973년 7월 20일), 영어명 브루스 리 ()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활동한 중국계 미국인 무술 배우이자 철학가, 무술가이며, 절권도의 창시자이자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무술가이자 문화적 아이콘으로 평가된다. 그는 영화배우인 브랜든 리와 섀넌 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의 본명은 이진번 ()으로 생전 체격은 173cm, 62kg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하였으며 홍콩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홍콩과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는 기존 홍콩의 무술 영화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가 제작한 영화의 특성과 분위기는 이후 홍콩뿐 아니라 세계의 무술계와 무술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소룡은 특히 그가 제작한 영화에서 나타나는 중국의 자존심과 민족주의로 인해 홍콩 내에서 우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1940년 11월 27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의 중국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리하이취안(李海泉,이해천)은 중국인이었으며, 신자였던 어머니 그레이스 호(何愛瑜,하애유)는 중국인과 독일계 백인의 혼혈인이다. 이소룡이 생후 3개월이었을 때 부모와 홍콩으로 돌아갔다. 이소룡은 홍콩에서 무용을 떨치던 그의 스승인 엽문을 사사(師事)하여 영춘권을 배웠고, 공력권, 홍가권, 권투, 펜싱 등을 배웠다. 아울러 한국인 태권도 고수 이준구 사범과 교류하면서 태권도의 발차기를 배워 자신의 절권도를 정립하는데 이용하였다. 이소룡은 엽문의 추천으로 영춘권에 복싱을 배웠는데 이후 1959년에 격투기 대회를 출전 하게 된다.1.2라운드에서 실력자들을 5분만에 ko시킴으로 결승전 까지 가게 되었으나 결승전때 상대방의 발차기에 전신 마비가 된다.하지만 이후 격투 실력으로 영화 《그린 호넷》(1968년)에 캐스팅된다. 이소룡의 신변을 걱정하던 부모는 이소룡를 미국으로 보내 자신들의 오랜 친구와 지내게 하기로 결심했다. 이소룡은 단돈 $100을 지니고 미국으로 향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잠시 지낸 후 이소룡은 시애틀로 옮겨 역시 아버지의 친구였던 루비 초우(Ruby Chow) 밑에서 일하게 된다. 1959년 이소룡은 시애틀에서 에디슨 기술 고등학교(Edison Technical School)를 졸업했다. 그는 워싱턴 대학교 (University of Washington)에 진학하여 철학, 연극, 심리학 등을 공부한다.. 1964년에 결혼하게 되는 미래의 배우자 린다 에머리를 만난 것도 바로 워싱턴 대학에서다. 그는 린다 사이에 브랜든 리(1965년~1993년)와 섀넌 리(1969년~) 두 자녀를 두었다. 영화 배우가 되었던 브랜든 리는 1993년 영화 《크로우》를 촬영 도중 총기오발사고로 사망했으며, 섀넌 리는 1990년대에 몇몇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소룡이 출생했을 때 붙여진 광동식 이름은 진번(振藩)이었다. 그가 태어나자 메리 글러버 박사가 브루스(Bruce)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당시 그의 어머니는 영어 이름을 준비해 놓지 않은 상태여서 그 이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소룡의 영어 이름은 그가 라샐 칼리지(La Salle College)에 입학하기까지는 가족들 사이에서 불리지 않았다. 이소룡이 19살이던 1959년에 싸움에 휘말려, 상대방을 크게 다치게 하여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소룡의 아버지는 유명한 광둥 경극 배우였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주 어린 나이부터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생후 3개월에 《금문녀》라는 영화로 데뷔하였다. 그가 18세가 되었을 때 이미 그는 스무 편의 영화에 출연한 상태였다.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인 1958년에서 1964년까지 그는 오직 무술만을 연마하며 영화계와는 떨어져 지낸다. 하지만 1964년 롱비치 가라데 토너먼트에서 이소룡이 보인 고도의 무술 시범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무술가였던 윌리엄 도저(William Dozier)의 눈에 띄게 된다. 도지어는 곧 이소룡을 불러 오디션을 치르는데 그의 전광석화 같은 동작은 제작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결국 TV 시리즈 《그린 호넷》( The Green Hornet )에서 밴 윌리엄스(Van Williams)와 더불어 가토(Kato) 역을 맡게 된다. 이 시리즈는 1966년부터 1967년까지 한 시즌만을 상영하고 종료되었다. 1969년 이소룡은 처음으로 미국 영화《말로우》( Marlowe )에 출연하였다. 그는 폭력배로 출연하여 사립 탐정인 필립 말로우(제임스 가너 분)를 위협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말로우를 걷어 차려다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역을 연기했다. 1971년 이소룡은 TV 드라마 《롱스트리트》( Longstreet )에 4개의 에피소드에 걸쳐 무술 선생으로 출연하게 된다. 이후 이소룡은 자신의 아이디어로 《 The Warrior 》라는 시리즈를 제안하게 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소룡의 이 아이디어는 《쿵후》( Kung Fu )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워너 브러더스는 이소룡의 노력에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소림사 무술가의 역할은 무술가가 아닌 데이비드 캐러딘에게 주어진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인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작품은 미국 대중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상영물에서 자신의 조연적 역할에 만족하지 못한 이소룡은 홍콩으로 돌아가는데, 골든 하베스트 (Golden Harvest) 대표 추문회(鄒文懷; Raymond Chow)로부터 영화 출연 계약을 제시 받게 된다. 이소룡은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 )에서 첫 주연을 맡는데, 이 영화는 전 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순식간에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는다. 이후 그는 다시 두 개의 성공작을 찍게 되는데, 바로 《정무문》과 《맹룡과강》이 그것이다. 특히 《맹룡과강》에서는 그가 극작가, 감독, 주연, 그리고 무술 안무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의 시범을 통해 그는 가라데 챔피언이었던 척 노리스를 만났었다. 이 인연을 계기로 《맹룡과강》에서 로마, 콜로세움의 최후 결투 씬으로 그를 출연시키게 된다. 1973년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와 워너 브러더스사의 최초의 공동 제작 작품인 《용쟁호투》의 주연을 맡게 된다. 이 영화로 인해 이소룡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소룡은 이 때 알게 된 당시 엑스트라 배우인 청룽(성룡)을 후원해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촬영이 종료되고 몇 달 후, 그리고 불과 개봉 3주 전에 이소룡은 갑작스레 사망하고 만다. 《용쟁호투》는 그해 최고 수입을 올린 영화가 되었고 이소룡이 무술의 전설로 남기게 된다. 《용쟁호투》의 제작비는 1973년 당시 US$ 850,000였다.. 지금까지 《용쟁호투》는 전 세계에서 2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더군다나 《용쟁호투》라는 영화를 모티브로 해서 《더블 드래곤》이라는 비디오 게임도 만들어졌다. 《용쟁호투》의 감독인 로버트 클라우스(Robert Clouse)는 이소룡이 각본을 쓰고 연출하려다 못다 끝낸 《사망유희》를 완성시키려 시도했다. 이소룡은 이미 《사망유희》를 위해 40분 이상의 촬영을 마친 상태였다. 로버트 클라우스는 1978년 새로운 줄거리와 캐스팅을 가지고 대역과 이소룡의 다른 영화 장면을 사용하여 완성시킨다. 하지만 이 짜깁기 영화는 이소룡이 찍은 40분 중 15분만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대역을 사용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빠진 나머지 촬영분은 22년 후 발견되어 다큐멘터리 《 이소룡 전사의 일대기 》에서 공개되었다.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롱비치에서 있었던 무술 시범을 관람하기 위해 이소룡이 나타났는데 그 곳에서 무술 시범을 하는 척 노리스를 만났다. 이소룡은 노리스의 무술 시범에 감탄하여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에 같이 출연하자는 제의를 했고 노리스는 이를 흔쾌히 응했다. 이 후 두사람은 절친이 되었으며 노리스는 이소룡의 영화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40년 생 동갑내기였기 때문에 마음이 매우 잘 통했다. 때문에 영화를 촬영할 때 호흡을 맞추기도 매우 쉬웠다. 영화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은 많은 적들을 차례로 때려눕히게 되어 있었다. 당시 성룡은 엑스트라였으며 영화 용쟁호투가 액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턴트맨을 별로 사용하지 않아 엑스트라가 스턴트까지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성룡은 이소룡에게 맨 마지막으로 매를 맞고 쓰러지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소룡은 성룡을 잘못 때려 크게 다치게 했다. 너무나 미안해 했던 이소룡은 성룡에게 여러 번에 걸쳐 사과를 되풀이했다. 그 이후 이소룡은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성룡을 연기자로서 대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 일화로 성룡은 이소룡을 죽을 때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 중의 은인이라 회고했다. 이소룡의 죽음은 1970년 5월 10일의 사건에서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 스튜디오에서 《용쟁호투》 더빙 작업 도중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 전신 발작과 뇌부종으로 그는 긴급히 홍콩 침례교회 병원 (Hong Kong Baptist Hostpital)에 실려가는데 의사들은 마니톨(Mannitol)을 투여하여 그를 살릴 수 있었다. 이 증상들은 이후 그가 사망한 날 다시 나타나게 된다. 1973년 7월 20일 홍콩, 이소룡은 제임스 본드였던 조지 라젠비 와의 저녁 약속을 앞두고 있었다. 이소룡은 그와 이후에 영화를 제작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소룡의 배우자인 린다에 의하면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 제작자인 레이먼드 초우와 2시에 만나 《사망유희》 제작에 대해 의논하였다. 레이먼드 초우와 이소룡은 4시까지 함께 있다가, 이소룡의 친구이자 대만 여배우였던 베티 팅 페이(Betty Ting Pei)의 아파트로 운전하여 갔으며, 세 사람은 페이의 집에서 극본을 검토했다. 초우는 저녁 식사 약속을 위해 떠났다. 잠시 후, 이소룡은 두통을 호소했고, 팅 페이는 아스피린과 근이완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쿠아제식(Equagesic)이라는 진통제를 건네줬다. 오후 7시 30분 경, 이소룡은 잠이 들었다. 이소룡이 약속된 저녁 식사에 나타나지 않자, 초우는 팅 페이의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이소룡은 깨어나지 않았다. 의사를 불러 10분간 소생을 시도한 후 실패하자 이소룡은 구급차에 실려 퀸 엘리자베스 병원(Queen Elizabeth Hospital)로 후송된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외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뇌는 크게 부어올라 있었다 (1400에서 1575그램으로). 이소룡은 겨우 향년 33세였다. 부검 결과 체내에 이쿠아제식과 미량의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었다. 2005년 10월 15일 인터뷰에서 초우는 이소룡이 Equagesic의 근육 이완제 - 진통제에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성분인 - 에 예민 반응을 일으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소룡의 공식 사인은 과실사(death by misadventure) 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소룡이 처음 쓰러졌을 때 그를 치료한 랭퍼드(Langford)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0만건 이상의 부검의 경력을 가진 R. D. 티어(R. D. Teare) 교수는 이소룡의 죽음 건에 배치된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는 대마 성분의 검출은 우연에 불과하며 그것이 이소룡의 죽음을 야기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이성적"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결론은 성분에 대한 과민 반응에 의한 뇌부종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피터 우 박사(Dr. Peter Wu)의 초기 소견은 이소룡의 사인은 대마와 이쿠아제식 둘 다에 의해서라는 것이었지만, 이후 그는 대마에 의한 사망이라는 소견에는 무리가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결론적으로 이소룡의 사인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 이소룡 사후 그의 아내 린다는 시애틀로 돌아와 레이크 뷰 공원묘지(Lakeview Cemetery) 276번에 안장했다.. 스티브 맥퀸, 척 노리스 등이 운구를 맡았다. 이소룡의 전설적인 위치, 젊은 나이에 괴이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의 사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삼합회에 의한 살해, 그리고 그의 가족이 저주를 받았다는 저주론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저주론"은 20년후 그의 아들 브랜든 리 마저 28세의 나이에 영화 《크로우》 촬영 도중 총기오발사고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 크로우는 그의 아버지 이소룡의 마지막 영화였던 《사망유희》와 마찬가지로 브랜든 리의 사후에 개봉되었고 컬트의 지위를 얻게 된다. 브랜든 리는 그의 아버지 곁에 묻히게 된다. 성룡, 홍금보 등과 함께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 소속 배우 중 하나인 그가 찍은 작품으로는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 등이 있다. 《사망유희》는 제작 도중 이소룡이 사망하여 한국출신인 김태정을 대역으로 하여 완성되었다. 이소룡의 마지막 기획 작품은 후에 왕우가 타이틀롤을 맡은 《직도황룡(直搗黃龍;The Man from Hong Kong/ 한국개봉명 스카이하이)》이다. 골든 하베스트와 호주의 합작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사망유희 제작 후 이소룡의 차기작으로 예정되었었다. 이소룡의 죽음으로 왕우가 대신 주연을 하였으며 제임스 본드 배우로 당시 유명했던 조지 레이전비가 출연한다. 미국의 연예 전문 잡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인터넷 판에서 보도한 탁월한 액션 배우 25명 에서 11위를 차지했다. 이소룡의 근육은 극단적으로 싸움에 특화되어 있는 근육으로 보디빌더처럼 우람하지 않으면서도 근육의 밀도가 매우 높다. 깡마른 체격에 지방이 거의 없어서 몸이 극단적으로 단단했다. 아뵤~ - 이소룡이 극중에서 싸울 때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쓸며 외치는 소리. 현재까지도 계속 유행하고 있다. 여러 게임에서 이소룡을 패러디한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이소룡을 패러디하여 탄생된 캐릭터들은 다음과 같다. * 켄시로 - 북두의 권 * 마샬 로우, 포레스트 로우 - 철권 * 드래곤 킴 - 월드 히어로즈 * 페이롱 - 스트리트 파이터 * 쟌리 - 데드 오어 얼라이브 * 리우 캉 - 모탈 컴뱃 * 우롱 - 이얼쿵푸의 아케이드 판 주인공 * 블루스 - 이얼쿵푸의 아케이드 판 최종 상대 * 리 - 이얼쿵푸의 MSX 판, 패미콤 판 주인공 * 진 - 마샬 챔피언 그외 * DC 인사이드 등에서 굴다리 밑과 10초 얘기를 하는 싱하형이라는 인물 * 짜장소녀 뿌까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아뵤 * 하루마키 류 (이대룡) - 괴짜 가족(원제 우라야스 철근 가족)에 등장하는 담임 선생, 원래부터 어릴 적의 모범생이었다가 UFO에 납치당하고 두뇌개조 수술을 당하면서 바보로 전락당하고 말았기 때문에 무술 실력이 없다. * 아케이드 게임 더블 드래곤 - 테크노스 저팬이 제작했던 액션 게임, 등장하는 적들의 일부는 용쟁호투에 등장하는 적들의 이름을 따다 붙였으며 이소룡의 용쟁호투를 모티브로 만든 게임이 더블 드래곤이다. 거룡 - 1977년 영화《최후의 정무문》 진국곤 - 2008년 중국 드라마 《이소룡 전기》 브루스 라이(여소룡) - 1976년 영화 굿바이 브루스 리에서 이소룡 역. 김태정 - 1985년 영화 특명 어벤저에서 주인공 커트 맥키니를 지도하는 이소룡의 유령 역. 제이슨 스콧 리 - 1993년 영화 드래곤에서 이소룡 역. 장대언 - 2008년 영화 엽문 2에서 소년 이소룡 역. 하종도 - 1976년 BRUCE LEE THE MAN, THE MYTH 이소룡 역. 성룡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 쌍절곤 이소룡 - 공식 홈페이지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이소룡 Sijo Bruce Lee Bruce Lee Interview Light a Pixel - The Digital Memorial Bruce Lee 분류:절권도인 분류:미국의 무술가 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홍콩의 남자 영화 배우 분류:홍콩의 영화 감독 분류:홍콩의 영화 각본가 분류:홍콩의 영화 제작자 분류:워싱턴 대학교 동문 분류:독일계 미국인 분류:중국계 미국인 분류:1940년 태어남 분류:1973년 죽음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의문사한 사람 분류:샌프란시스코 출신 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 분류:홍콩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독일계 홍콩인 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 분류:잉글랜드계 홍콩인 분류:홍콩의 스턴트 배우 분류:중국의 무신론자 분류:미국의 무신론자
나트륨 ( 또는 소듐 (← 미국식 soʊdiəm, 영국식 səʊdiəm)은 알칼리 금속에 속하는 화학 원소로 기호는 Na (←)이고 원자 번호는 11, 원자량은 22.9898 g/mol이다. 자연상태로는 생성되지 않으며, 화합물로 부터 추출이 가능하다. 독일어식 표기인 나트륨 으로 불리다가 IUPAC 공식 표기인 소듐 ()을 따라서 대한화학회에서는 공식 명칭을 소듐으로 개정하되 당분간은 나트륨도 혼용 가능하도록 결정하였다. 2014년부터 대한화학회에서 나트륨과 소듐 복수 표준에서 소듐만 인정하기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국립국어원 지정 표준어는 나트륨 이다. 문화어에서는 나트륨 을 사용하다가 1970년경 나트리움 으로 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트륨"이란 이름은 이집트의 소다 광산이 있는 나트론(Natron)에서 유래했다. "소듐"이란 이름은 아라비아어의 소다(soda)에서 유래하였으며 1807년에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가 수산화 나트륨을 전기분해하여 발견하였다. 오일)에 잠긴 나트륨 덩어리. 무르고 금속 광택이 있는 금속으로 노란 불꽃을 내며 탄다. 반응성이 강하여 공기중에 보관할 수 없고 좌측 그림과 같이 보관하여야 한다. 3주기 1족의 알칼리 금속으로 1개의 원자가 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1가 양이온이 되기 쉽다. 지구 지각 내 원소 함량에서 6번째에 속하지만 강한 반응성으로 인하여 금속임에도 불구하고 화학식으로 나타낼수 있으며, 홑원소 물질로는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장석이나 염화 나트륨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세계 각지의 암염이나 소다회, 또는 바닷물에서 전기분해로 얻는다. 생명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성분인 소금(염화 나트륨, NaCl)의 구성 요소로서 주로 바닷물 속에 용해되어 있으며 일부는 암염등의 형태로 육지 및 지하에도 존재한다. 해수의 염류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탄산 나트륨(Na2CO3)은 화합물의 한 종류로, 탄산과 수산화 나트륨의 염이다. 유리에 주로 포함되어 있어 빛의 통과시, 자외선을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탄산 나트륨은 나트륨 이온(Na+)이 포함되어 있어 물에 잘 녹는다. NaOH(수산화나트륨, 가성소다), NaNO3(질산 나트륨), Na2S(황화 나트륨), Na2SO4(황산 나트륨) 등이 있다. 이들 나트륨 이온(Na+)이 포함된 염들은 물에 잘 녹는다. 액체나 세포의 삼투압을 일정하게 보존하고, 나트륨 이온은 칼륨 이온과 함께 신경 내부에서 신호의 전달에 사용된다. 이러한 생리적인 메카니즘의 조절에 관여하는 세포내에서의 나트륨-칼륨 펌프는 물질대사에 매우 중요하다. 화학용어 개정안 : 포타슘(potassium) : 알케인 : 알켄 : 알카인 나트륨 - WebElements.com 분류:알칼리 금속 분류:화학 원소 분류:환원제
디지털 텔레비전 (Digital Television, DTV )은 기존의 텔레비전에서 아날로그 신호를 사용했던 것에 반해, 디지털 신호를 이용하여 동영상과 소리를 방송 및 수신할 수 있는 방송 시스템을 말한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디지털 방식으로 압축되고 변조된 데이터를 이용하므로, 디지털 텔레비전용으로 설계된 텔레비전 수상기나 셋톱박스를 통해서만 시청할 수 있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기존의 텔레비전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을 가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채널이 차지하는 대역폭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멀티캐스팅(한 채널에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방송하는 기능), 전자 프로그램 가이드, 대화형 텔레비전 등의 특수한 서비스들도 가능하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아날로그 텔레비전보다 나은 수준의 화질과 음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디지털 텔레비전의 영상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이므로 아날로그 텔레비전이나 영화 필름에서 나타나지 않는 화질상의 문제점들을 개선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이것은 현재 사용되는 대역폭 및 (MPEG-2와 같은) 압축 알고리즘의 제한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지만, 16/35mm 필름과 같은 원본 영상과 세밀하게 비교해 보지 않는 이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정도는 아니다. 디지털 TV는 아날로그 TV와 같은 대역폭 (6 MHz 혹은 7 MHz) 에서 더 많은 채널을 수신하고 HD 급 방송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신호는 아날로그 신호가 가지고 있던 "고스트 현상" 이나 "스노우 노이즈", 그리고 오디오의 고정 노이즈와 같은 증상을 제거하여 깨끗한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수신율이 낮은 곳에서는 MPEG 압축 방식에 의해 "블로킹" 과 같은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거나, 아날로그 TV에서는 약간의 노이즈와 함께 시청이 가능했던 방송들을 전혀 시청할 수 없거나 하는 경우가 발생된다. 방송사에서 결정한 기술적인 표준에 정의된 철학과 오류 정정 수준에 따라 디지털 TV는 완벽하게 동작하거나 전혀 동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HD급 디지털 TV로의 전환 과정에서 화면의 가로세로비 형식을 4:3 에서 16:9 로 전환하는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TV 화면의 형식이 영화나 사람의 시각에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기존의 화면에서는 "레터박스" 라고 하여 4:3 형식의 화면의 위아래에 검은 띠를 넣어서 화면의 가로세로비를 16:9 로 맞추었다. 전 세계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점유 현황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은 각개국에서 개발 단계에 있다. 정부에서는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을 "차세대 성장 동력 사업" 중의 하나로 간주하여 세계적인 "디지털 혁명"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투자를 늘리고 있으며, 기존의 TV 에서 사용하던 주파수 대역을 다른 통신 수단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고 있다. 방송사업자들은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을 디지털 위성파 텔레비전과 디지털 케이블 텔레비전 또는 PVR 이나 VOD 와 같은 다른 디지털 영상물 배포 기술과 경쟁할 수단으로 보고 있으며, 시청자들과 더욱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고 있다. 장비 생산업체에서는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을 위해 먼저 셋톱박스(set-top box)를 판매하고 있으며, 지금은 텔레비전과 셋톱박스가 합쳐진 일체형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을 기존의 안테나에서 더 많은 프로그램이나 고화질의 방송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은 많은 채널을 한정된 공간에 넣어야 해서 많은 기계로 거쳐서 직접 안테나로 받아서 보는 것보다 화질이 떨어질 수 있다. 직접 안테나로 받아서 보는 것이 제일 깨끗하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이미 가능한 대역폭 내에서 수많은 채널을 서비스하고 있는 위성파 텔레비전 시장에서 살아 남았다. 미국과 영국의 디지털 위성파 텔레비전의 사업 모델은 케이블 TV와 비슷하다. 디지털 위성파 텔레비전 사업자들은 pay-TV 와 같이 많은 수의 채널들을 패키지로 묶어 서비스하려는 경향이 있다. 위성 방송은 지상파 방송에 비해 더 넓은 RF 대역폭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채널의 수와 고화질의 방송을 제공할 수 있다. 이미 기존의 아날로그 케이블 셋톱박스가 공급된 곳에서는 디지털 방송을 수신하기 위해 셋톱박스의 교체가 필요하다. 사용자 입장에서 주된 이점으로는 단순히 화질이 좋아진 것과 채널이 늘어난 것이지만, (케이블 사업자가 셋톱박스 하드웨어와 미들웨어 소프트웨어를 선택하는 것에 따라) 아날로그 방송에 비해 더 많은 기능이 추가될 수도 있다. 종종 부가 정보가 포함된 (일주일 단위의) TV 가이드를 보거나, 특정 프로그램을 예약한 뒤 시간을 알려 주거나, 부모가 아이들이 볼 방송의 등급을 제한하는 등의 기능이 포함되기도 한다. 케이블 사업자들은 또한 디지털로 방송되는 영상물을 DES 와 같은 방식으로 암호화하여 더 나은 등급 제한 기능을 제공하거나 불법적인 접근을 방지하기도 한다. 더 진보된 케이블 네트워크에서는 상호대화형 기술을 사용하여 디지털 TV 용 셋톱박스에서 사업자 측에게 사용자의 정보를 넘겨주는 양방향 데이터 통신이 가능하다. 이로 인해 웹 형식의 상호대화형 서비스(VOD (Video-on-Demand), 게임, 투표 ...)를 제공할 수 있다. 모든 디지털 방송은 표준 해상도 텔레비전(SDTV)과 고해상도 텔레비전(HDTV) 화면을 전송할 수 있다. 초기의 SDTV 텔레비전 방송 표준은 아날로그였으며, 디지털 SDTV 텔레비전 방송은 아날로그 방송과의 호환성을 위해 그 구조를 사용한다. 디지털 전환 진행 중인 전 세계 지도 (2019년 1월 1일 기준) 스페인에서 아날로그 종료 안내문 2006년 룩셈부르크(지상파), 네덜란드 2007년 안도라, 핀란드, 스웨덴, 스위스 2008년 독일 2009년 덴마크, 맨 섬, 노르웨이, 미국 (전출력 중계소) 2010년 벨기에, 크로아티아, 에스토니아, 건지 섬, 저지 섬, 라트비아, 룩셈부르크(케이블, 위성), 산마리노, 슬로베니아, 스페인, 영국(웨일스) 2011년 오스트리아, 캐나다, 키프로스, 프랑스, 이스라엘, 일본(후쿠시마현, 이와테현, 미야기현은 제외), 몰타, 모나코, 터키, 영국(스코틀랜드) 2012년 체코, 지브롤터, 아일랜드, 이탈리아, 일본(후쿠시마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리투아니아,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오만,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이집트, 바레인, 이라크, 쿠웨이트, 레바논, 시리아, 예멘, 포르투갈, 슬로바키아, 대한민국, 중화민국, 영국(잉글랜드, 북아일랜드)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 아제르바이잔, 불가리아, 헝가리, 마케도니아, 모리셔스, 뉴질랜드, 폴란드, 짐바브웨 2014년 세르비아, 아이슬란드, 나미비아, 알제리 2015년 벨라루스, 브루나이, 그리스, 인도, 이란, 모로코 (UHF 대역), 멕시코, 몰도바, 루마니아 (UHF 대역), 르완다, 터키, 케냐, 우간다, 가나 2016년 버뮤다, 브라질(연방구, 고이아스주 리오베르데), 몽골, 우크라이나, 칠레, 중화인민공화국(중국중앙텔레비전), 부룬디 2017년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주, 상파울루주같은 일부 대도시), 필리핀 (라이트 네트워크), 스리랑카, 루마니아 (2단계), 독일 (유니티미디어) 2018년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주, 상파울루주를 포함한 모든 대도시), 엘살바도르, 루마니아 (VHF 대역), 태국,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북한 2019년 러시아, 볼리비아, 싱가포르, 인도 (1단계), 말레이시아,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 페루 (리마, 카야오), 스리랑카, 코스타리카 2020년 브라질(전 지역), 중화인민공화국 (상업 방송), 모로코 (VHF 대역), 파나마, 홍콩, 인도네시아, 태국 (채널 3),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몰도바 (나머지), 수단, 코트디부아르 2021년 도미니카 공화국, 미국 (저출력 중계소), 인도 (2단계),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2022년 캐나다 (나머지 지역), 엘살바도르 2023년 쿠바, 필리핀 (나머지 지역), 인도 (마지막 단계), 페루 (나머지 지역) 2023년 이후 베트남 알수없음 이란, 남아프리카 공화국, 우루과이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 위성 방송 디지털 위성 방송으로는 대한민국의 유일 유료 위성 방송사인 KT스카이라이프가 서비스를 하고 있다. H.264방식을 이용해 여러 개의 채널에서 HD급 화질로 방송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SD로 방송되고 있다. 난시청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무궁화 위성 3호와 무궁화 위성 5호의 무료수신일 경우 KBS1을 제외한 전 채널이 SD로 공급되고 있으며 일부 채널에 대한 HD전환은 현재 논의중 이긴 하나 결정된 바가 없다. 케이블 방송 케이블 사업자도 OpenCable기술을 사용하여 디지털 케이블 방송을 하고 있다. 디지털 케이블 방송사업자로는 CJ헬로비전, (옛Qrix), HCN, 딜라이브 (구:C&M), CMB, 티브로드, 딜라이브 (구:GS)등이 있다. 이 역시도 소수의 채널을 HD로 방송하나 대다수의 채널은 SD로 방송된다. 참고로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2012년 12월 31일에 종료돼도 케이블의 아날로그 방송은 2015년부터 기존 아날로그 방식에서, 8VSB 방식의 디지털 대역으로 전환되었다. IPTV IPTV로는 KT의 올레 TV, SK브로드밴드의 B TV, LG유플러스의 U+ TV 사업자 방송들이 있으며 이들 모두 디지털로 방송 중이며 각 셋톱박스를 이용해 해상도를 정할 수 있다. (ATV 480i, SDTV 480p, HDTV 720p, Full HDTV 1080i를 권장한다.) 일본에서 아날로그 종료 안내문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을 줄여서 지데지 (地デジ)라고 부르는 일본에서는 2011년 7월 24일, 지상파아날로그TV방송이 완전 종료되고 ISDB방식의 지상파디지털TV방송 체제로 완전 전환되었다. 일본 최초의 디지털 TV 방송으로 기록된 1996년에 CS방송 스카이 퍼펙TV와 2000년에 BS 디지털 방송에 뒤이은 쾌거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일본은 1989년에 NHK가 BS방송을 활용한 아날로그 하이비전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미국나 유럽의 디지털 HD방송에게 시장을 선점당하는 시행착오를 경험한 바 있다. 먼저 1단계는 NHK가 BS 방송 중 일부를 활용하여 하루에 1시간 정도의 실험적인 하이비전 방송을 시도하였다. 2단계에는 NHK와 6개 민방이 연합하여, 하루에 8시간 동안 하이비전 프로그램을 제공하였고, 이후 17시간으로 1일 방송시간이 확대하였다. 3단계에는 NHK와 6개 민방이 중심이 되어 디지털 BS방송을 시작하였고, 2003년 12월부터 지상파 디지털 방송이 서비스를 개시하였지만, 프로그램의 경우 프라임 타임에 NHK는 90% 이상이 HD 로 제작되었고, 민영 방송사들의 약 50%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2006년말까지 전국 디지털 TV 방송이 서비스를 완성하였으며, 그 뒤에 2011년 7월 24일에 디지털 TV 방송을 전환하였다. 단, 도호쿠 지방 3개 현(이와테현·미야기현·후쿠시마현 등)의 경우 지진 해일의 여파로, 아날로그 송출 중단 시기가 2012년 3월 31일로 순연되었다. 영국엔 세가지 형태의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이 있다. 그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스카이(Sky)로 불리는 영국 Sky 방송 이 제공하는 위성방송, 버진 미디어(Virgin Media; 예전의 텔레웨스트와 NTL)가 제공하는 디지털 케이블 방송, 프리뷰(Freeview)로 불리는 무료 공중파 지상파 방송서비스이다. 최초로 출범한 디지털 지상파 방송인 ONdigital (후엔 ITV Digital로 불림)은 실패하고 방송사는 파산했다. 2002년 프리뷰(Freeview)가 ITV Digital을 대체했다. 프리뷰는 동일한 DVB-T 방식을 사용하였으나, 오류 정정 수준을 크게 높여서 전 사업자를 파산으로 몰고간 수신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또한 유료 방송서비스를 기조로 하는 대신, 프리뷰는 기존의 5개 아날로그 무료 공중파와 새로운 20개 디지털 채널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모든 서비스는 SD급으로 전송되고 있다. 정부는 2010년까지 아날로그 방송을 중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9년 6월 12일부터 전국에서 소출력 방송사를 제외한 모든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이 중단되었으며 미국 국민들은 디지털 방송 수신기와 같은 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을 받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첫 번째로 디지털 전환을 완료한 국가로 기존의 아날로그 브라운관 텔레비전 보유자들의 대한 처우도 원만하게 해결되며 이러한 과정은 대한민국의 디지털 전환의 모델이기도 하다. 캐나다 방송통신위원회(CRTC)는 미국과 동일한 디지털 표준을 채택했으나,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 일자를 정하지 않고, 시장에 의한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2009년 9월 현재 캐나다 방송사들이 디지털 방송 송출을 확대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큰 도시들에서는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으나, 그 외에서는 디지털 방송이 되지 않는 이유는 미국 방송 대체가 바로 그 이유다. 미국 방송 대체란, 캐나다 방송국이 동시간대의 미국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재송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2011년 8월 11일에 (극한 지역 제외) 아날로그 방송 송출을 끝낸다. 2009년 1월 현재 토론토에서는 아날로그로 방송하는 모든 방송사들(TV Ontario 제외, 하지만 디지털 방송이 예정됨)이 디지털로도 방송하고 있다. 밴쿠버에서는 거의 모든 방송사들이 디지털로 방송하고 있다. 그 외 몬트리올, 오타와 등에서는 CBC가 디지털로 방송하고 있다. 캘거리에서는 Global과 CTV가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에드먼턴에서는 Global이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2009년 9월 현재 전체적으로 밴쿠버, 토론토, 캘거리에서만 대형 방송사들이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또한 토론토, 밴쿠버와 같은 미국 국경과 가까운 도시에서는 미국에서 송출되는 디지털이나 아날로그 방송도 수신할 수 있다. 그리고 2012년 5월 31일까지 극한 지역과 모든 지역의 방송사들이 아날로그 방송 송출을 완전히 종료 후 완전 디지털화를 완료화였다. 모든 대도시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지역 방송국은 현재 아날로그 PAL G/K방식과 디지털 DVB-T 방식으로 동시송출하고 있다. SD급이 가장 일반적인 해상도이다. 법적으로 모든 방송은 100% SD급으로 송출되어야 하며, 이 중 일주일에 20시간 이상은 HD 해상도로 동시 송출하여야 한다. 상업방송의 다채널 방송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예를 들어 스포츠 중계방송이 시간관계상 계속될 수 없으면, 부가채널로 중계되며, 원 채널은 정규방송을 내보낸다.)중지되면, 금지되어 있다. 스페셜 방송 서비스사(SBS)는 부가채널(월드 뉴스 채널)을 갖고 있으며, 호주 방송 회사(ABC)도 2003년까지 ABC 키즈와 Fly TV 채널을 갖고 있었다. 정보방송을 하기 위해선 방송사는 해당 허가를 받아야 한다. 2003년 12월 호주 최초의 디지털 전용 방송사가 탄생했다. 태스매니아 디지털 텔레비전국은 네트워크 텐의 태스매니아 지부로 시작되었다. 이 채널의 도입으로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은 여타지역과는 달리 호버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2008년(이 시한은 재고될 것이다.)까지 모든 방송사가 디지털 방송만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현재 아날로그 텔레비전 주파수는 다른 목적으로 쓰이도록 비워질 것이다. 2007년까지는 더 이상의 무료 공중파 방송은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시한은 2005년 재고될 예정이다. 현재,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은 아냘란코스키(Anjalankoski) 등의 모든 지역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가시청권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바사(Vaasa) 지역의 방송국은 핀란드 방송 회사(YLE) 채널을 방송하고 있다. 또한 대도시에 위치한 다수의 케이블 회사가 기본방송과 유로방송을 디지털로 서비스하고 있다. YLE TV1, YLE TV2, MTV3, Neolonen으로 구성된 기본 채널에 더하여, 24시간 뉴스 채널, 스포츠 채널을 시청할 수 있다. 이 모든 채널을 무료다. 그러나 새로 생기는 채널 중에 유료채널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2007년 9월 1일, 아날로그 방송 송출은 중지되었다. 2003년 두 단계를 거쳐서 베를린과 그 주변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완전히 DVB-T 형식의 디지털 방송으로 바뀌었으며 2008년 11월 25일 디지털 전환이 완료되었다. 2000년대 초부터 독일의 30여개 이상의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위성신호를 아날로그와 디지털(DVB-S 방식)로 송출했다. 2003년에 디지털로만 송출하는 방송은 독일 유일의 유료방송인 프리미어(Premiere)였으며, 프리미어 방송은 너무 이르게 디지털 방송에 암호를 걸어 소유권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에 심각한 금전적 위기를 겪었다. 케이블 방송은 아직도 프리미어(DVB-C 방식)와 아날로그 밴드를 얻지 못한 몇 군소업체를 제외한 대부분이 아날로그 형태이다. 이런 상황은 이전까지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던 도이체 텔레콤이 기반시설을 매우 천천히 매각하였으며, 매입사가 케이블 방송에 새로운 투자를 거의 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텔레비전 방송 시스템 ATSC 디지털 라디오 셋톱박스 통합 서비스 디지털 방송 SBTVD 단일 칩 시스템 쌍방향 텔레비전 고선명 텔레비전 DVB-T 디지털텔레비전 영국 정부 웹사이트 디지털 방송 호주 ATSC
1999년 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1일 * 유로화 도입. * 대한민국, 하나은행, 보람은행 합병. 1월 30일 - 제4회 동계아시안게임이 강릉에서 2월 6일까지 개최되었다. 2월 11일 - 이스라엘, 헤즈볼라 거점 폭격. 2월 12일 - 미국 상원이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안을 부결시키다. 2월 12일 - 복제 소 영롱이가 탄생하다. 3월 8일 - 정부, 4개 협동조합(농, 축, 임, 인삼협) 통합을 골자로 하는 협동조합 개혁안 발표. 3월 12일 - 헝가리와 폴란드가 NATO에 가입함. 3월 15일 - 포항공항에서 대한항공 1533편 활주로 이탈 사고 발생으로 79명 부상. 3월 24일 - 코소보 전쟁 발발. (~ 6월 10일) 4월 15일 - 대한항공 6316편 추락 사고가 일어남. 4월 19일 -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 방문. 4월 30일 - 캄보디아가 ASEAN의 1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5월 11일 - MBC 본사에서 주조정실 난입 방송사고 발생. 5월 20일 - 대구광역시 효목동에서 대구 황산테러 발생. 6월 1일 - 아메리칸 항공 1420편 활주로 이탈 사고로 11명 사망, 110명 부상. 6월 15일 - 서해에서 남북 경비정 간에 총격전이 벌어지다(서해 교전, 제1연평해전). 6월 30일 -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군 소재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건으로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23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당함. 7월 16일 - 대한민국 탈옥수 신창원이 2년 5개월만에 검거. 7월 20일 - 전 중국공산당 주석 장쩌민이 중국에 있는 수백만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을 탄압하다. 7월 31일 - 미국 달 탐사선 루나 프로스펙터, 달에 충돌. 8월 4일 -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에서 첫 출현. 8월 7일 - 대한민국 첫 냉동난자 수정 아기 탄생. 8월 9일 - 일본참의원, 기미가요와 히노마루(일장기)를 국가와 국기로 정하는 법안 가결. 8월 10일 - 네덜란드, 세계 최초로 안락사 인정 법안 마련. 8월 11일 - 20세기 최후 개기 일식 진행. 8월 13일 - 신구범 축협 회장이 농협과의 통합에 반발해 국회에서 할복자살을 시도했다. 8월 16일 - 대한민국, 대우채권단, 대우 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 체결.(사실상 그룹해체) 8월 17일 - 터키에 진도 7.8의 강진 발생, 3만여 명 매몰. 8월 19일 -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수만 명의 시민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하다. 8월 23일 - 남북분단이후 첫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국방회담 베이징에서 개최. 8월 26일 - 대한민국 대우 채권금융기관, 대우그룹 12개 계열사 워크아웃 결정. 8월 28일 -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 호, 13년 만에 공식 활동 종료. 8월 30일 -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 여부를 묻는 투표가 유엔 감시하에 실시되다. 9월 2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효 주장하며 새로운 해상군사분계선 일방 획정. :: 대한민국 김종필 국무총리와 일본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회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사일 문제관련 한미일3국 공조협력체제 유지 합의 9월 10일 - 대한민국, 일본 대중문화 2차 개방 발표. 9월 14일 - 나우루, 키리바시, 통가, 유엔 가입 9월 16일 - 대한민국, 동티모르 파병 결정 9월 24일 - 대한민국,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9월 28일 - 대한민국 국회, `국군부대의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견 동의안 가결 9월 29일 - 미국 AP,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첫 보도. 10월 4일 - 대한민국 월성3호기 원자로 누설로 작업자 22명 방사능 피폭 10월 16일 -대한민국이 상록수 부대를 동티모르에 파병하다. 이날 파병된 병력은 선발대 160명이다. 10월 30일 -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소재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가 발생하여 중고생을 비롯한 52명이 숨지고 71명이 부상당함. 10월 31일 -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 사고가 일어나다. 11월 6일 - 오스트레일리아, 군주제 폐지안을 부결시키다. 11월 26일 :: 인도네시아군의 암본 충돌 개입으로 29명 사망, 120명 부상자 발생 :: UN, 동티모르 저항군의 보안군 전환 교육을 실시 :: 12월14일- 미국의 배우 칼리 스콧 콜린스. 12월 22일 -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가 일어남. 12월 31일 ::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이 퇴임하다. :: 전 세계가 새천년을 준비하다. :: 일부에선 이 날을 20세기의 마지막 날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절대로 아니며, 20세기 마지막날은 2000년 12월 31일이다. 1월 1일 - SBS 러브FM이 FM 방송으로 개국. 1월 13일 - 그룹 god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1월 30일 ~ 2월 6일 -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 개최. 3월 16일 - 삼성전자, 세계 최초로 256M D램 양산체체 돌입. 4월 15일 - 기아자동차에서 비스토, 카스타 출시. 4월 20일 - 8시 40분경, 이순신과 부친 이정, 아내 상주방씨의 묘지에 대한 봉분보수작업을 벌이던 중 칼과 쇠말뚝 발견. 4월 28일 - 현대자동차에서 에쿠스 출시. 5월 5일 - 윈도우 98 세컨드 에디션 출시. 6월 2일 - 기아자동차에서 카렌스 출시. 6월 8일 - 현대자동차에서 베르나 출시.(시판은 같은 달 9일) 6월 19일 - 이탈리아의 토리노가 2006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 6월 25일 - 마이클 잭슨이 한국에서 마이클과 친구들 자선 공연 개최. 6월 30일 - 부산 도시철도 2호선 호포 ~ 서면 구간 개통. 7월 2일 - 서울 지하철 8호선 완전 개통(암사 ~ 잠실 구간). 7월 5일 - 여의도공원 개장 7월 14일 -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및 TBN 대전교통방송 개국. 7월 30일 -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및 TBN 대구교통방송 개국. 8월 24일 - 제3대 천주교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의 주교 서품식 및 교구장 착좌미사가 거행되었다. 8월 25일 - 대한민국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대한민국 이동전화 가입자 2천만 명(국민 2.3명당 1대꼴) 돌파 발표. 8월 27일 - 미국 마이클 존슨, 11년 만에 남자 육상400m에서 세계신기록(43초18) 수립. 9월 4일 - 한국방송공사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첫방송. 9월 6일 -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개통. 9월 12일 - 세레나 윌리엄스, 흑인 여성으로 41년 만에 US오픈테니스 첫 우승. 9월 13일 - 대한민국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불법 감청에 대한 처벌 강화를 내용으로 한 전기통신 감청 관련 현황 및 대책 발표. 9월 18일 - 일본, 신칸센 0계가 도쿄발 나고야행 고다마 473호를 마지막으로 도카이도 신칸센에서 완전히 은퇴. 9월 21일 -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 최고 목판본 중국서 발견. 9월 29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자 마라톤 선수 정성옥, 스페인 세비야 열린 7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우승. 10월 1일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개항. 10월 6일 -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서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개통됨(박촌 ~ 동막). 10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정현이 1집 Let s Go to My Star 발매 후 데뷔. 와, 바꿔 등으로 흥행. 10월 15일 - 현대자동차에서 트라제 XG 출시.(시판은 같은 달 18일) 10월 22일 - KBS 2TV의 금요 시츄에이션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시즌 1) 이 첫방송을 개시하였다. 11월 8일 - 기아자동차에서 리오 출시.(시판은 같은 달 10일) 11월 17일 - 대한민국, 200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1월 22일 -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 구간(합정~당산)이 재개통. 11월 23일 - 대우자동차(현 한국GM)에서 매그너스 출시.(시판은 12월 2일) 12월 7일 -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귤현역이 개통. 1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봉재현 (골든차일드). 1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여름 (우주소녀). 1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손보승. 1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양홍원. 1월 18일 - 미국의 배우 캐런. 1월 22일 - 캐나다의 래퍼 데이지 (모모랜드). 1월 25일 - 중국의 가수 루카스 (NCT, WayV). 1월 26일 - 대한민국의 모델 이진이. 2월 2일 - 대한민국의 래퍼 벨라 (엘리스). 2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지범 (골든차일드). 2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립. 2월 11일 - 대한민국의 래퍼 디노 (세븐틴). 2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하나 (프리스틴). 2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동현 (골든차일드) 2월 25일 - 대한민국의 래퍼 라키 (아스트로). 2월 27일 - 대한민국의 스키점프선수 박규림. 3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리 (레드벨벳). * 대한민국의 래퍼 옌자민. 3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주학년 (더보이즈). 3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진지희. 3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채상우. 4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하민. 4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수빈 (빅톤). 4월 9일 - 잉글랜드의 배우 아이작 헴프스테드라이트. 4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윤하. 4월 23일 - 대한민국의 래퍼 채영 (트와이스). 5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수현. 5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나은 (에이프릴). 5월 11일 - 대한민국의 래퍼 휘영 (SF9). 5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다영 (우주소녀). 5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연 (프리스틴). 5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은채 (다이아). 5월 28일 - 미국의 배우 캐머런 보이스. 5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지훈 (워너원). 6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소현. 6월 14일 * 중화민국의 가수 쯔위 (트와이스). * 대한민국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김민석. 6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린 (오마이걸). 6월 27일 - 대한민국의 피겨스케이팅선수 김규은. 6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혜림. 7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혜원 (아이즈원).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선수 황대헌. 7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연미. 7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소혜 (아이오아이). 7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홍주찬 (골든차일드). 8월 2일 - 캐나다의 래퍼 마크 (NCT). 8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연정 (우주소녀). 8월 8일 - 중국의 가수 샤오쥔 (WayV). 8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안형섭. 8월 11일 - 대한민국의 래퍼 창빈 (스트레이 키즈). 8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주이 (모모랜드). 9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빛. 9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현승민. 9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유정. 9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인 (모모랜드). 9월 28일 - 중국의 가수 헨드리 (WayV). 9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예나 (아이즈원). 10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정은.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성 (엘리스).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원소현. 11월 2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박우진 (워너원). 11월 5일 - 대한민국의 래퍼 유경 (엘리스). 11월 10일 - 미국의 배우 키어넌 십카. 11월 12일 - 대한민국의 래퍼 최유정 (위키미키, 아이오아이).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천재인 12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미나 (구구단).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도연 (위키미키). 12월 14일 - 미국의 배우 칼리 스콧 콜린스.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선수 김예진.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탤런트 김다니.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지현.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소희 (엘리스). 후세인 1세 스탠리 큐브릭 조 디마지오 존 F. 케네디 주니어 하산 2세 2월 7일 -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 3월 7일 - 미국의 영화 감독 스탠리 큐브릭. 3월 8일 - 미국의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 3월 14일 -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계훈제. 5월 23일 - 미국의 프로레슬러 오언 하트. 6월 1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상진. 7월 16일 - 미국 정치가 존 F. 케네디 주니어 비행기사고로 사망. 7월 21일 - 영국, 미국의 광고인 데이비드 오길비. 7월 23일 - 모로코의 국왕 하산 2세. 9월 13일 -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벤저민 블룸. 9월 23일 - 대한민국 기업가 허정구. 10월 2일 - 대한민국 농구코치 김현준. 11월 11일 - 대한민국 영화배우 최무룡. 경제학상 로버트 먼델 문학상 귄터 그라스 물리학상 헤라드뒤스 엇호프트,마르티뉘스 J. G. 벨트만 생리학 및 의학상 권터 블로벨 평화상 국경없는 의사회 화학상 아흐메드 H. 즈웨일 작품상 셰익스피어 인 러브 감독상 스티븐 스필버그(라이언 일병 구하기) 남우주연상 로베르토 베니니(인생은 아름다워) 여우주연상 귀네스 팰트로(셰익스피어 인 러브) 남우조연상 제임스 코번(애플리케이션) 여우조연상 주디 덴치(셰익스피어 인 러브)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병인 대 2월 16일 기해 2월 정묘 소 3월 18일 기사 3월 무진 소 4월 16일 무술 4월 기사 대 5월 15일 정묘 5월 경오 소 6월 14일 정유 6월 신미 소 7월 13일 병인 7월 임신 대 8월 11일 을미 8월 계유 소 9월 10일 을축 9월 갑술 대 10월 9일 갑오 10월 을해 대 11월 8일 갑자 11월 병자 대 12월 8일 갑오 12월 정축 소 2000년 1월 7일 갑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살상무기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의 大量破壞兵器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국제 문제로 대두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통 북핵 문제(北核問題)라고 약칭한다. 넓은 범위에서 핵무기 뿐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유한 생화학 무기도 이 문제에 포함된다. 북한은 핵 확산 금지 조약에 1985년에 가입했으나 완전한 사찰을 막아 핵개발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황장엽 조선노동당 전 비서는 "북한은 96년에 파키스탄과 협정을 맺고 우라늄235로 핵무기를 만드는 제조기술을 넘겨받은 뒤 본격적으로 핵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면서 "북한은 1993년께 연료봉 1800개 중 절반을 재처리했다"고 말했다. 지하 핵실험 준비가 1993년 당시에 완료됐다고 주장했다. 1992년 4월 24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방연구소의 겐나디 추프린 부소장은 시사주간지 모스크바 뉴스 최신호에 기고한 글에서, 최근 기밀해제된 KGB 보고서에서, 소련은 1990년대 초에 북한이 핵폭탄을 개발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이를 묵인해왔다고 한다. 황장엽은 1997년 망명 직후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묵살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해,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음을 밝혔다. 1985년 당시 소련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1994년 7월 27일, 북한에는 이미 핵무기를 5개나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5개나 더 개발한 뒤 이를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미국에 알릴 예정이라고 북한을 탈북한 북한 정무원 교원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상급교원 조명철씨가 귀순기자회견에서 밝혀 큰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북한은 핵탄두개발과 함께 핵탄두를 탑재할 로켓개발에 열중하고 양산체제로 들어갈 것이며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타개할 방법은 핵무기의 완성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핵무기 5개로는 북한에 충분하지 않으며 공개될 경우 국제적 압력으로 더 이상의 핵개발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북한권력 3위인 강성산 정무원총리의 사위인 강명도씨는 김정일 체제에 대한 학자적인 반감이 귀순동기라고 밝혔다. 이러한 강씨의 회견에서 국내 언론들은 믿을 수 없다, 북한이 5개나 보유한 것이 가능한가라는 반응을 보였고 미국과 일본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월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1개~2개즈음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고 미국 PBS와의 인터뷰에서도 이같이 밝혔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핵 개발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아주 단호하고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북한은 핵무기를 손에 쥐면 이를 써버릴 위험이 높은 정권이기 때문에 북한의 핵 개발은 엄청난 악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머지않아 이란과 이라크가 핵 개발에 성공해 미국에 대항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의 가능성만 보이더라도 곧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돼 이 지역의 안정이 크게 위험해 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클린턴은 "북한이 핵을 개발해 사용하려 한다면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다"라며 강력 경고했다. 1993년, 북한은 핵 확산 금지 조약을 탈퇴할 것이라 공언하는데, 이를 1차 북핵 위기라고 부른다. 이 위기는 1994년 북미 간에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미국의 북한에 핵무기를 이용한 공격을 하지 않는 공식적인 평화 협정 을 체결하며,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핵발전소의 대체수단인 경수로 발전소 제공 하며, 핵발전소를 중지하는 조건으로 대체 에너지인 중유를 제공 한다는 조건의 제네바 합의로 잠정 해소 되었다. 그러나, 미국 공화당은 북한과의 합의는 공산국가와의 회의책이라며 반대하여,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 지원을 위한 자금 지원을 미국 의회 는 불허하였다. 제네바 합의의 핵심 이행 사항인 경수로 발전소 걸설 지연에 대해서 북한은 지속 항의를 하였다. 당시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이 경수로 프로젝트가 마쳐 지기 전에 붕괴 될것을 예상하여, 북한의 정권이 붕괴전까지 핵 개발을 중단하도록 하기 위하여, 북한과 합의를 하였다고 실토하였다. 미국이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지 않았지만, 북한의 원자로 가동을 8년 간을 중지할 수 있었으며, 2002년 영변 원자로 재가동과 다음 해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로 제네바 합의는 파기되고 2차 북핵 위기를 맞는다. 이후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에도 독자적으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2006년 10월 9일 풍계리 핵 실험장에서의 핵 실험이 성공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 지질조사국과 일본 지진 당국은 리히터 규모 4.2의 지진을 검출하여 북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2007년 2월 13일 6자회담이 진행되어 2.13합의 가 맺어졌다. 합의 주요 내용은 북한의 핵시설 폐쇄, 핵 불능화, 핵사찰 수용, 및 중유 100만톤 상당의 에너지 지원 등이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영변의 원자력 발전 냉각탑을 폭파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13 합의사항은 이행 시한을 넘기고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북한은 여러차례 핵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명박 정부 시기,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이 진행될 당시 1차례, 박근혜 정부 시기,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인 2013년에 1차례, 이어서 2016년에 무려 2차례나 진행하였다. 특히, 2016년에는 수소탄 실험 성공 발표에 이어서, 관측하는 기관에 따라 20kt ~ 30Kt까지 추정되는 강력한 핵 실험을 진행하였다. 2006년 10월 09일, 1Kt 이하, 초보적 수준의 핵 기폭 장치 실험 2009년 05월 29일, 2~6Kt 추정, 핵분열 이용 핵무기 실험 2013년 02월 12일, 6~7Kt, 고농축 우라늄 사용 실험 2016년 01월 06일, 6Kt, 북한 수 2016년 09월 09일, 10Kt 이상유 완성 주장 2017년 9월 3일, 60kt, ICBM 탑재용 수소탄 시험 성공 주장 또한, 북한은 탄도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핵탄두를 탑재할 가능성을 내비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2015년 부터는 북한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SLBM)에 핵탄두가 탑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유를 경제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 대미 수교 협상용으로 보는 시각, 또는 미국을 위협하여 한미동맹을 폐기하고 만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한반도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는 시각이 있다. 1992년 4월 2일,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 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방사능물질 전문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 러시아 해외정보국은 북한이 1992년에 옛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60개를 생산할 수 있는 56∼200 kg의 플루토늄을 밀반입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994년 8월 26일, 독일 수사당국이 지난 5월 플루토늄-239를 숨겨 갖고있다 붙잡힌 무기밀매상 아돌프 예클레에 대한 집중수사를 통해 북한과의 연계를 보여주는 위임장 등 관련 증거서류를 찾아냈다. 예클레는 북한으로부터 무기급 핵물질 구입을 위해 1억 달러까지 처리할 수 있는 전권 위임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1994년 현재, 플루토늄 1 kg 당 암시장 거래가가 25만∼30만 달러를 호가하고 있다. 1억 달러면 플루토늄 400 kg을 살 수 있다. 1995년 북한의 플루토늄 밀반입 계획은 당시 북한 대성은행이 유럽의 한 은행계좌를 통해 독일의 중개상에게 보내는 5000만 달러 송금 명세서가 미국 정보당국에 확인됨으로써 밝혀졌다. 2005년 3월에 김명철이라는 조총련 출신의 사람이 북한 관계자가 80년대에 북한이 플루토늄을 300kg정도 보유하였다고 주장했으나, 그 말을 듣게 된 일시,장소,경위를 말해주지 않았고, 북한 관계자의 인적사항을 말해주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조총련 출신의 사람은 북한에서는 버림을 받고, 배척당하기 때문에, 근거없는 주장이다. 어찌됐건,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은 50kg 정도다. 북한이 무기급 플루토늄 또는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 및 추후 예상되는 시설은 다음과 같다. 영변 IRT-2000 - 경수로, 전기출력 8MWe, 매년 4 kg의 플루토늄 생산가능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 - 흑연감속로, 전기출력 5MWe, 매년 5 kg 플루토늄 생산가능 영변 30메가와트 원자로 - 경수로, 전기출력 30MWe, 매년 15 kg의 플루토늄 생산가능, 시험가동중 영변 우라늄 농축 공장 - P2형 원심분리기 4,000개, 매년 80 kg 고농축 우라늄 생산가능 영변 50메가와트 원자로 - 흑연감속로, 전기출력 50MWe, 매년 50 kg 플루토늄 생산가능, 추가 건설기간 15개월 예상 태천 200메가와트 원자로 - 흑연감속로, 전기출력 200MWe, 매년 200 kg 플루토늄 생산가능, 추가 건설기간 15개월 예상 2013년 기준으로 서방의 전문가들이 고려하는 핵물질 생산시설은 위의 6기이다. 모두 완공되었을 경우, 북한은 매년 274 kg의 플루토늄과 80 kg의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20kt급 원폭 1기를 생산하는데 드는 핵물질의 양은 플루토늄 3-6kg, 고농축 우라늄 5-16kg정도이다. 2014년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백서는 자체 생산한 플루토늄 40여 kg을 보유했다고 추정한다. 김명철의 300 kg, 코메르산트의 56 kg, 국방백서의 40여 kg이면 대략 400 kg이다.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에서 매년 플루토늄을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론보도가 자주 바뀌었다. 초기에는 매우 대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하다가, 2016년에는 고작 5 kg을 생산할 수 있다는 보도의 흐름이다. 그러나 어떤 보도에서 핵전문가는, 1년간 원전을 가동해 폐연료봉 8천개를 재처리하면, "아무리 적어도 최소한" 핵폭탄 하나는 분명히 만든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핵폭탄 하나에 5-7 kg 정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보도들의 5 kg 추출론은 이 보도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즉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계산하여 추측한 "최대" 생산량이 아니라, 아무리 적어도 최소한 핵폭탄 한발은 만들지 않겠느냐는 전문가의 말을 와전하여, 최대한 5 kg 추출이 가능하다고 보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NRDC는 고급기술일 경우 플루토늄 1 kg이면 핵출력 1 kt인 핵분열탄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AGM-69 SRAM의 W69 핵탄두는 핵분열탄시 17 kt, 핵융합탄시 210 kt으로 12.35배 핵출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즉, 고급기술일 경우 플루토늄 1 kg이면 핵출력 1 kt인 핵분열탄을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해 핵출력 12.35 kt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위협감소국(DTRA)에서는, 북한이 10kt급 핵폭탄을 서울에 투하할 경우 최소 18만 명의 사망자와 16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1992년 4월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는 북한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핵미사일 분해 작업을 하는 일부 러시아 장교들이 방사능 물질을 kg당 5만 루블에 밀매하고 있으며, 밀수출업자들은 이를 해외에서 kg당 75만달러에 되판다. 고철을 실은 차량과 철도편으로 수송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최근 2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국경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간 플루토늄은 56kg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5년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에서 "북한은 지난 2003년에 4600여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20~24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8000개 재처리시 41kg라는 의미이다. 2006년 국정원은 북한이 폐연료봉 2500개를 재처리했을 경우 추출가능한 플루토늄 량이 25∼30㎏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8000개 재처리시 96kg이란 의미이다. 2003년 합참 전략기획본부의 신재곤 전략분석과장(육군 대령)은 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을 가동해 제네바 합의 이후 보관중인 폐연료봉 8000개(50t)를 재처리한다면 4∼5개월 안에 핵무기 3∼5개 제조분량의 고순도 플루토늄 24∼32kg을 추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2016년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가 완전히 가동되면 해마다 6 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2016년 김동엽 경남대 교수는 "통상 5MW 원자로에 연료봉 8000개가 들어가니까 많이 처리하면 (매년) 플루토늄을 10 kg까지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6년 8월 22일, 미국 ISIS는 IAEA 보고서 등을 인용해 북한이 2016년 올해 재처리를 통해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을 5.5∼8㎏으로 추정했다. 2001년 8월 북한은 카자흐스탄 우스티 카메노고르스크의 우브 공장과 세미팔라틴스크의 아크좌일라우 공장 등지에서 제조한 고농축우라늄 32㎏을 수입했다. 1994년 이후 매년마다, 북한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로부터 핵물질과 핵기술을 수입했으며, 2002년까지 핵무기 10개 분량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수입했다. 세계일보가 카자흐스탄 고위 관계자로부터 러시아어로 된 A4용지 4쪽의 극비 보고서를 단독 입수했으며,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과 미국 정부에도 전달되었다. 당시에는 HEU 25 kg이 20 kt 핵폭탄 한발로 계산했기 때문에, HEU 250 kg으로 추정된다. 2017년 7월, 미국 국방정보국(DIA)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758 kg과 플루토늄 54 kg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 국방정보국(DIA) 국장은, 핵 무기를 500㎏ 이하로 소형화하여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에 핵 탄두를 탑재할 능력을 갖춰 미국 본토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3년 리비아가 비핵화를 선언하면서, 중국어로 된 소형 핵탄두 설계도가 발견되었다. 북한은 이 중국산 소형 핵탄두 설계도를 입수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리비아 관리들은 미국 조사관들에게 국제 핵무기 암시장의 일원인 중개상으로부터 5,000만 달러를 주고 이 중국어로 된 소형 핵탄두 설계도를 구입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핵탄두 소형화가 상당히 진전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소형 핵탄두를 만든 상태라는 의견도 있다. 핵 개발 초기 단계에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0mm 장사정포(사정거리 53km), FROG-5/7 지대지 로켓(사정거리 55-70km), SCUD-B/C형 미사일(사정거리 300-500km), 노동,대포동 미사일(사정거리 1300km 이상)과 각종 폭격기 등의 다양한 잠재적 핵 투발수단을 보유한 상태였다. 이에 더 나아가 수 차례의 인공위성 발사 시험을 통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KN-08(화성 12호)의 성능 개량을 추진해왔다. Mars-12는 2017 년 5 월 14 일 시험되었으며, 2111.5km의 정점을 가지며 787km 떨어진 곳에 상륙했다.2017 년 9 월 15 일 시험에서 3700km의 비행 거리를 보였습니다. 잠수함은 발사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극성 1 호는 2016 년 8 월 24 일 높은 각도로 550km 떨어진 곳에서 착륙했다. 2017년 7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 화성-14형 발사에 성공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날 시험 발사는 최대 고각발사 체제로 진행되었고, 미사일은 정점고도 2,802km를 찍고 933km를 비행하였다고 알려졌다.또 다른 미사일 시험은 2017 년 7 월 28 일에 수행되었다.이 미사일은 3700km의 최고점을 갖고 998km에 상륙했다.북아메리카 본토를 타겟팅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과 러시아 다음으로 대규모의 화학 무기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화학 무기 국가이며, . 살상 무기인 신경 작용제 VX 를 포함하여 최소한 2500 ~ 5000 톤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작를학 무기 종류 화학 비축량 Phosgene 파악 불가 Diphosgene 파악 불가 Mustard 1,000t 이상 Lewisite 파악 불가 Phosgene oxime 파악 불가 Sarin (GB) 1,000t 이상 Tabun (GA) 파악 불가 Soman (GD) 파악 불가 Adamsite (DM) 파악 불가 VX 145t 이상 북한은 탄저균,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페스트, 브루셀라증, 야토병, 발진티푸스, 천연두, 유행성출혈열, 황열병, 보툴리눔 독소, 황우 독소 등 13종의 균체를 10여개 시설에서 최대 5,000톤 가량 보유하고 있다. 탄저균 100 kg을 대도시 상공 위로 저공비행하면서 살포하면 100~300만 명이 사망할 수 있으며, 이는 1메가톤(Mt)의 수소폭탄에 맞먹는 살상 규모이다. 북한은 1954년부터 미생물연구소를 설립운영하면서 탄저균, 천연두, 페스트, 콜레라, 보툴리늄 독소는 무기화가 완료되었으며, 실제 사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생물학무기는 탄저병과 천연두로 알려졌다. 미국 랜드연구소 브루스 베넷 박사는 "맑은 밤 30km2 면적인 서울 지역에 탄저균 10kg을 살포했을 경우 최고 9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본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는 중국이 매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1991년 7월 북조선이 중국 감숙성 은천 미사일 기지에서 사정거리 800km의 중거리 다탄두(MIRV) 탄도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의 원조로 개발한 것으로서, 발사시설은 중국이 대여했다. 북조선은 1988년 이후 90명의 과학자를 은천 핵로켓기지에 파견, 중국으로 부터 핵실험 기술 및 미사일발사 기술을 배웠다. 미사일 실험을 성공한 것으로 보아 핵실험 기술 습득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위해 230명의 육해공군 무기 전문가들을 중국 요동반도 다롄에 있는 다롄 해군 기지에 파견해 연수중이라고 일본 월간 센타쿠지가 1991년 12월 6일 보도했다. 1992년 4월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는 북한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핵미사일 분해 작업을 하는 일부 러시아 장교들이 방사능 물질을 kg당 5만 루블에 밀매하고 있으며, 밀수출업자들은 이를 해외에서 kg당 75만달러에 되판다. 고철을 실은 차량과 철도편으로 수송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최근 2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국경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간 플루토늄은 56kg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조선은 그동안 리비아에서 발견된 중국 DF-2 핵미사일의 핵탄두 설계도를 입수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대니 B. 스틸먼은 저서 The Nuclear Express에서, ‘중국의 친구들’이 북조선은 중국의 CHIC-4 설계도를 개량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고 소개하였다. 중국 DF-2 핵미사일의 CHIC-4 핵탄두는 폭발력 12 kT, 무게 1,500 kg이다. 신의주와 단둥은 압록강 철교로 이어져 있는데, 이 다리를 통해 트럭으로 수많은 미사일 부품, 핵무기 부품이 수출입 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리팡웨이는 1972년생 중국인 비밀무기상이다. FBI 홈페이지에 500만 달러의 현상수배범으로 올라와 있다. 미국은 중국에 리팡웨이 신병인도를 요청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 이란국방산업기구(DIO), 방산기업인 샤히드 헤마트 산업그룹(SHIG), 샤히드 바게리 산업그룹(SBIG)에 첨단 무기 부품을 수출했다. 단순한 무기중개상이 아니라 광섬유 자이로스코프 같은 첨단 미사일 부품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다롄에 본사를 둔 림트(LIMMT)라는 회사가 12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이란에 최첨단 미사일 부품과 핵개발 부품을 판매중인데,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차관보가 "칸 박사 다음가는 거물"이라고 말한다.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1990년대 이란과 북한에 핵개발 부품을 판매했다. 리팡웨이는 이란에만 최첨단 미사일 부품봐 핵개발 부품을 판매하고 있어서, 북한과 관련되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상당히 의심받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북한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은 2012년 6월 공개한 보고서에서 북한의 불법 화물이 중국 다롄항으로 운반돼 다른 배에 옮겨 실린 뒤 이란으로 이동한다고 지적했다. 다롄은 리팡웨이의 본거지이다. 리팡웨이의 조부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해방군 대령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고위 장교의 자손들이 계속 관련 공직에 채용되는게 전세계의 일반적인 관행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리팡웨이가 중국 국가안전부의 비밀요원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런 리팡웨이의 장기간의 대규모 무기 밀매와, 미국 정부의 신병인도 요청 거부 등은, 중국 정부가 이란과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핵개발을 지원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기에 넉넉한 정황 증거들이다. 북한이 무수단 미사일 19발을 다렌항에서 이란 화물선으로 환적하는 방식으로, 이란에 수출했다. 2018년 5월, 북미 정상회담 직전에, 김정은이 다롄을 방문,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정은이 리팡웨이를 직접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무기밀매 계약을 하러 갔다는 것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2017년 9월 9일, 독일 앙겔라 메르켈 수상은 북한 핵문제 해결에 이란식의 타결을 제안하며 유럽의 국가중 독일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헨리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2017년 10월 10일 백악관에서 중국과 협상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책을 논의하였으며, 제임스 메티스 미국 국방장관과 항공모함 준비 상태 확인과 휴전선 인근의 서울 시민의 인명살상을 최소화 하는 군사적 옵션도 논의하였다. 1953년 3월 소련과 원자력 평화적 이용 협정 체결 1962년 영변 원자력 연구소 설치 1963년 6월 소형 연구용 원자로(IRT-2000)를 소련에서 도입 1974년 9월 국제 원자력 기구(IAEA) 가입 1985년 핵 확산 금지 조약(NPT)에 가입 1991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 1992년 IAEA와 원자력 설비시설의 감찰에 관한 특별조약 체결 1992년 4월 24일, 최근 기밀해제된 KGB 보고서, 소련은 1990년대 초에 북한이 핵폭탄을 개발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이를 묵인해왔다. 1993년 IAEA의 영변 원자력 발전소 감찰 요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으로부터 거부 1993년 3월 12일 한미연합군사훈련 재개를 이유로 NPT 탈퇴 선언. 1차 북핵위기 1994년 7월 27일, 북한이 핵폭탄 5개를 보유중이라고 김일성 대학교 조명철 교수가 귀순 기자회견 1994년 제네바 합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간에 핵무기 개발에 관한 특별계약) 1995년 국제 원자력 기구측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협정 재시도 1997년 국제 원자력 기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협조부실에 비판 2000년 미국의 핵무기 전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하 원자력 시설 감찰 결과 핵무기 생산에 필요한 시설이 없음 보고 2002년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 이에 따라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석유원조 중지시킴. 2차 북핵위기 2003년 NPT에서 탈퇴 2004년 중국의 중재로 6개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 핵무기 분쟁 회담. 2005년 2월 10일 핵무기 보유 선언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채택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BDA)를 이용한 미합중국의 대북 금융제재 2006년 7월 5일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2006년 10월 9일 1차 핵 실험을 강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를 통해 풍계리 핵 실험장에서 핵 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이날 오전 10시35분께 함경북도 화대리 지역에서 진도 3.58에서 3.7 규모의 지진파를 감지했다고 밝혔다. 2007년 2월 13일 2.13 합의 2008년 8월 영변 원자력 발전소 냉각탑 폭파 2008년 8월 플루토늄 양 불일치 논란, 핵불능화 철회 2009년 5월 25일 2차 핵 실험을 강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날 오전 9시 54분, 풍계리 핵 실험장에서 핵 실험을 실시한 후, 같은 날 12시에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를 통해 핵 실험을 성공적으로 보도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날 단거리 미사일 3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2011년 12월 북미 잠정합의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2012년 3월 은하 3호 미사일 발사 2013년 2월 - 3차 핵 실험 강행 2016년 1월 6일 4차 핵 실험 강행 2016년 2월 광명성 4호 미사일 발사 2016년 9월 9일 5차 핵 실험 강행 2017년 9월 3일 6차 핵 실험 강행 2018년 4월 21일 핵-미사일 실험 중단 및 핵 실험장 폐기 선언 풍계리 핵 실험장 6자 회담 그랜드바겐 한국전쟁 한국휴전협정 북미평화협정 한국의 재통일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201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2016년 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2016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201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CNS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기 분쟁에 관한 분석 분류:남북 관계 분류:핵무기 분류:나라별 대량살상무기 분류:핵무기 개발 계획
국가별 조약인준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 (核武器-非擴散-關-條約,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약칭 핵확산방지조약 (核擴散防止條約, Non-Proliferation Treaty - NPT , (核武器 傳播 防止 條約))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가 핵무기를 갖는 것과 핵무기 보유국이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약으로, 핵확산 금지 조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66년 후반부터 미·소의 타협이 진전되어 1967년 초에는 미·소 간에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소 초안의 심의를 맡았던 제네바 군축위원회에서는 비핵보유국이 특히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문제점으로 핵의 평화적 이용도 금지된다는 것, 핵보유국의 핵군축의무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비핵보유국의 핵활동에 대한 사찰이 내정간섭 수준이라는 것, 비핵보유국은 아무런 안전보장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기한이 너무 길다는 것 등을 지적하였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비핵보유국가의 논쟁은 1968년 6월 19일 미, 영, 소 3국이 적극적 안전보장 을 유엔안보리에 제출, 발표함으로써 NPT의 구성이 완료가 되었다 그러나 미·소 양국은 약자인 이들 비핵보유국에게 조약을 강요한면이 없지 않다. 그 결과 1969년 6월 12일 유엔 총회는 95:4, 기권 13으로 이 조약의 지지결의를 채택하였다. 핵무기 보유국인 서명국 전부와 나머지 40개국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이 조약의 발효는 미·소의 비준서 기탁이 끝난 1970년 3월 5일 이루어졌다. 2010년 6월 현재 가맹국은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등 핵보유국을 비롯한 189개국이다. 조약은 매 5년마다 핵확산금지조약의 평가회의를 통해 재검토된다. 본디, 핵 확산 금지 조약은 25년 기한이었으나 1995년 5월 11일, 뉴욕에서의 평가회의에서 서명국이 합의하여 조약을 조건없이 무기한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NPT는 서문과 1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1. 핵의 비확산 2. 핵무기 군비 축소 3. 핵 기술의 평화적 사용 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NPT의 조약의 목적은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의 핵 보유를 막고, 핵 보유국 내에서는 핵무기 증가, 핵무기 기술발전, 핵실험 등을 방지하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추진하기 위해 체결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1975년 4월 23일 86번째 정식 비준국이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85년 12월 12일에 가입을 했으나, 1993년 3월 12일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규약에 따라 탈퇴 선언 발효에 필요한 3개월이 지나기 직전인 1993년 6월 11일 조미공동성명에 따라 탈퇴를 일방적으로 유보하였다. 이후 2차 북핵위기가 가열되던 2003년 1월 10일에 유보하였던 탈퇴 선언을 재발효하여 NPT에서 탈퇴하였다. NPT는 조약당사국을 핵국가와 비핵국가로 구분하며, 비핵국가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를 제조, 획득, 관리하거나 이양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는 반면, 핵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 이양이나 개발지원만을 금지할 뿐이다. 핵군축에 관한 조치나 조약에 대해서도 아무런 성과가 없으며, 핵확산금지나 핵무기의 완전한 부재도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NPT는 핵보유 국가가 비핵국가의 핵무장을 막기 위한 정책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불평등조약이라는 것은 모든 가입국에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것은 어떤 경우에든 핵확산을 막음으로써 인류와 지구의 공멸을 피해야 한다는 일부 시민단체의 주장을 이용해 핵 강대국들이 억지로 조약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핵국가들 사이에서는 핵보유국들이 핵무기 감축을 전혀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잠재되어 있다. 게다가 조약의 비당사국들은 오히려 NPT의 틈새를 이용하여 핵국가와 비핵국가 사이에서 이익을 추구해왔으며 핵개발에 앞장서 왔다. 인도와 파키스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어떠한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핵실험을 하여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이스라엘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이란, 태국, 브라질, 독일 등은 핵개발 의혹을 받고 있다. NPT는 핵국가와 비핵국가 간의 차별적 구도 위에 세워진 조약이다. 핵확산을 막기 위해 비핵국가들은 핵무기 개발이나 획득이 절대 금지되고 안전조치제도에 의한 사찰을 받아야 하는 반면, 핵국가들은 단지 점진적인 핵무기 감축에 노력하는 것만이 요구되고 있다. 대다수 비핵국가들은 이 조약에서 요구하는 대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평화적 핵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으나 핵국가들은 안전조치라는 명목으로 비핵국가들의 모든 연구 활동을 감시하는 한편, 자국들이 보유한 핵 무기의 감축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조약의 제 10조 1항을 보면, 각 당사국은 당사국의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자국의 지상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결정하는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각 당사국은 동 탈퇴 통고를 3개월 전에 모든 조약 당사국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행한다. 동 통고에는 동 국가의 지상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으로 그 국가가 간주하는 비상사태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가입돼 있으나 핵보유국인 프랑스와 중국은 미·소 위주의 성격에 반발해 최초에는 가입하지 않았다가 1992년이 돼서야 가입했으며,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쿠바 등이 미가입국으로 남아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3년 3월과 2003년 1월 탈퇴를 선언하였다. 국제 원자력 기구 (IAEA)는 이 조약에 가입된 비핵무장 국가만을 대상으로 원자력시설 감시를 정기 및 수시로 실시하고 있다. 핵 실험 금지 조약 핵무기 보유국 핵무기금지조약(TPNW) 분류:북핵문제 분류:1970년 분류:냉전기의 조약 분류:핵무기 분류:비핵화 운동 분류:1968년 체결된 조약 분류:1970년 발효된 조약
분류학 (分類學 또는 생물 분류학 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물의 계통과 종속을 특정 기준에 따라 나누어 정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분류학이 추구하는 목적은 크게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생물체를 대상으로 한다. 이 모든 생물체에 대한 정보 수집을 통하여 그들의 계보역사의 재구성. 생물체에 관한 진화과정 및 관련학의 도움을 빌어 그의 원인추적. 관련 학문, 예컨대 생지질학, 생화학에 필요한 정보 제공. 생물학 관련 세부 분야, 예컨대 생물환경학, 유전학의 조직 혹은 분류체계 설정. 위의 분류체계 설정을 통하여 실제 생태계에서 필요로 하는 설계에 기여. 오늘날 알려지고 남겨진 문헌을 근거로 할 때 생물 분류학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의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둘로 나누기 방법"(Dihairesis)을 처음으로 동물의 분류에 사용하였는데 이를테면 동물을 온혈 - 냉혈동물로 나누고 여기서 온혈동물을 다시 깃털을 가진 동물과 깃털이 없는 동물 등으로 나누어 동물학을 미흡하나마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는 이와 같은 분류 방법을 식물계에 확장 응용하였으며, 이 분류방법은 그가 이끄는 페리파테토스학파에 의해 계속 연구 발전되었다. 약 2300년 전에 세워진 이와 같은 분류방법은 놀랍게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쓰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생물분류법은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에 의해서 비로소 커다란 혁신을 하게 되었다. 이후 몇몇 국제 학술회의를 거쳐 린네에 의해 체계화되고 정의된 분류법을 바탕으로 오늘날 국제 학술상 통일적으로 쓰이고 있는 생물분류법이 정립되었다. right 린네가 착안한 분류법의 핵심은 생물의 종과 속을 구분함과 더불어 이들의 소속관계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데에 있으며, 형식상 다음과 같은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종의 이름은 라틴어로 쓴다. 종의 이름 뒤에는 종의 특징을 12단어 이내로 간추려 기재한다. 생물 분류 분류군 존재론 계통분류학 국제 동물명 규약(ICZN, International Code of Zoological Nomenclature) 국제 식물명 규약 (ICBN, International Code of Botanical Nomenclature) 분류:생물학 분류:생물 분류 분류:생물의 명명법
임베디드 오픈타입 (Embedded OpenType, EOT) 글꼴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웹 페이지에 임베디드 글꼴로 사용할 목적으로 설계한 오픈타입 글꼴의 축소형이다. 확장자는 ".eot"이다. 웹 임베디드 폰트 툴 (Web Embedded Fonts Tool, WEFT)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동적 웹 글꼴 유틸리티이다. WEFT는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웹 페이지와 연결된 동적 글꼴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대부분의 글꼴을 WEFT를 사용해서 첨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글꼴들은 디자이너에 의해서 첨부할 수 없음으로 디자인되기도 한다. 또한 문제가 있는 글꼴들은 사용할 수 없다. 비영어권 웹 사이트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술이고, 한국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외의 브라우저를 사용하면 글꼴을 볼 수 없다. 오픈타입 WEFT 홈페이지 분류:글꼴 포맷
300px 수영 (水泳)은 팔다리를 움직여 수면 또는 수중을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헤엄 ()이라고도 한다. 스포츠 경기 종목뿐만 아니라 물놀이나 다이빙 등의 행위를 총칭하는 말로서 흔히 사용된다. 수영의 목적은 레크리에이션, 건강, 경영, 직업(군사, 프로스포츠), 여행 등이 있다. 자유형 평영 배영 접영 혼영 발차기 계영 잠영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국제 수영 연맹) 아시아 수영 선수권 대회‎ (아시아 수영 연맹) 수영영법 대한수영연맹 국제수영연맹 한국수영 분류:올림픽 경기 종목
고대 로마 (古代 - , , 는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 고대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 문화의 용광로였다. 고대 로마의 문화, 법, 군사 체제는 서구 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법, 정치, 전쟁, 예술, 문학, 건축, 기술, 언어 분야의 기틀이 됐다. 고대 로마는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했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 국가로 왕정 체제였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웠다. 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에 200여 년 이상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점진적으로 이뤘다. 내부의 신분 투쟁 가운데도 로마는 외적들을 복속시키며 마침내 기원전 272년 경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했다. 로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150여 년 간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기원전 1세기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씨를 뿌리고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시작된 제정 초기의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 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라틴어 문학 등 그레코-로만 문화의 전성기를 이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년~117년)에 로마 제국은 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남으로는 아프리카 수단까지, 서로는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까지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오늘날 면적으로 환산하면 현재 미국 면적의 2/3에 달하고 인구도 현 미국의 절반에 약간 안되는 정도로 추산된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 공인 후 교황 선출 문제를 기화로 서로마, 동로마로 분할됐으며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서기 5세기 경 서로마 제국은 멸망 후 게르만족의 여러 독립 국가로 갈라져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등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타 서유럽의 정치 세력들이 나타난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으로 발전했으나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한다. 로마 통치 하의 지역 기원전 약 10세기를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정착하여 살던 여러 부족은 약 2-300년에 걸쳐 서로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였으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8세기 경 라티움에는 라티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 땅은 티베리스 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자리잡아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평야였다.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유럽어 족이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질 때 형성된 일개 인도-유럽어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분명 농경과 목축으로 먹고 살았을 것이며,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었고, 손으로 조야한 도자기를 만들어 썼는데, 이들의 집은 화로와 대문 밖에 없는 원형 나무 오두막이었다. 몇몇 보석 장신구와 청동 혹은 철 연장을 제외하면 이들은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쓴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라는 이름의 도시가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기원 전설은 거의 대부분 비역사적인 허구이므로, 지리적 혹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검증이 필요하다. 기원전 750년경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들어섰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는데, 이 곳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게끔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이었고, 다른 한 집단은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도시 로마의 발전에 있어 각별히 중요한 민족이었다. suckles Romulus and Remus.jpg|섬네일|전설에서는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의 시조라고 전한다. 왕정 시대는 공화정 이전 시대로 기원전 753년부터 508년까지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날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의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설정한 것으로, 그는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 없이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을 연구하여 이 날짜를 도출했다. 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하고 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이 지역에 귀족·왕족 계급을 이루어 피지배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 말경에 이곳의 지배권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이 시점에 라티움과 사비니 부족이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공화정 체제를 세웠다. 에트루리아가 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라티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다가 산지 종족들이 라티움(latium)을 침공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로마에 사회·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면서 왕정이 몰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fasti)에 기록된 기원전 509~507년을 왕정 몰락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초기에는 군사 위원회 (military tribune)에 의한 공동통치의 형태였다가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기자 2명의 집정관 제도로 바꾸었다. 로마의 정체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 집정관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뒤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5세기 중엽쯤에는 공화정의 고위 정무관직을 집정관이라 하였다. 집정관은 원래 귀족들의 자문 회의였던 원로원과 협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은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공화정의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이 있었다. 정무관직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공화정의 민회로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두며,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요직 관리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 comitia centuriata ),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하는 트리부스회( comitia tributa )가 있었다.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중 베이 점령은 라티움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팽창을 거듭한다. 이후 삼니움 족의 캄파니아 침입에 개입하여 3차 삼니움 전쟁을 치루었고 여기서 승리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시 타렌툼이었다. 기원전 281년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시를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로마는 3차에 걸쳐 포에니 전쟁(BC 264 - BC 146)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1,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초반에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나 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한다. 후에 3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협약을 위반하여 로마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 이로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와 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 Carthage.jpg|섬네일|upright|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의 군사 제도에 극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다. 해외 팽창은 내분을 불렀다. 원로원 의원은 로마 속주의 부를 통해 부유해졌지만 주로 소농 출신의 병사들은 고향을 오래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했으며, 임금 노동 대신 외국 노예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대농장이 발달했다. 전리품 수입 덕분에 새로 확보한 속주에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세금 징수 할당 제도로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계급은 경제적 이익을 거머쥘 기회를 얻었다.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 행위가 금지되면서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은 정치 권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원로원은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 계속 토지 개혁에 발목을 잡았고, 기사 계급에 정치 발언권 확대를 거부했다. 원로원의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 출신의 폭력조직을 조종하여 완력으로 유권자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은 기원전 2세기 말 평민에게 주로 귀족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토지 개혁 입법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극에 달했다. 두 형제는 살해당했는데, 여기에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과 기사 계급을 달래고자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일부 입법을 통과시켰다. 또 이탈리아 동맹국에 로마 시민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기원전 91~88년에 동맹국 전쟁이 일어났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점차 사병화(私兵化)되었으며, 유력한 장군이 국가와 원로원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써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 술라는 내전을 벌였으며, 술라가 기원전 82년 콜리네 문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결국 기원전 81년~79년에 술라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술라는 무너져가던 공화정을 부흥시키려 개혁을 하고 독재관에 취임한 지 2년 만에 자진 퇴임한다. 그러나 술라가 죽으면서 로마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술라의 부하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 이후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카이사르와 원로원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로 나뉘어 전개된다. 기원전 58년부터 7년에 걸쳐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탑수스 전투와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어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 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지만, 공화정을 가장했다. 이때의 통치체제를 원수정이라 하며(사실상 제정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프린켑스(제1의 시민)라 칭한다(이렇게 아우구스투스가 독재관을 거부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양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때문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심각한 반대 없이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본격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었고, 이 왕조는 티베리우스 사후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치세를 거쳐 기원후 68년 네로가 자살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후 1년간 로마는 내전상태에 돌입하면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즉위한다. 후에 시리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군단의 지지를 받아 로마에 입성하여 비텔리우스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대를 개창한다. 제정 시대에도 영토 확장은 이어졌으며 안정을 유지했지만, 흔히 저열하고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도 몇몇 있었다(가령 혹자는 칼리굴라를 정신이상자로 보기도 하며(즉위 후 얼마지나지 않아 정신병이 걸려 폭정을 일삼았다). 네로는 국가 정사보다 개인 관심사에 더 몰두하며 잔인했다는 평판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네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뒤를 잇는다.(AD 69 - AD 96)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이후에 로마 번영의 시작을 알린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콤모두스)에 제국은 영토나 경제ㆍ문화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대략 80년간 지속되면서 이시기에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에 제국은 번영했다. 트라야누스 재위시에는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의 정복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되며, 그 지배 지역이 650만km²에 이르렀다. 트라야누스 사후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제국을 순찰하면서 국경 수비를 강화하는데 힘쓴다. Empire Map.png|섬네일|left|300px|기원후 117년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 제국 최대 판도. 193년에서 235년 사이는 세베루스 황조의 치제(흔히 말하는 군인황제시대)로 헬리오가발루스같은 무능한 지배자도 나타났다. 게다가 군대가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3세기의 위기’라는 혼란기(49년간 20여명의 황제가 교체됨)로 접어들었다. 이 위기는 유능했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단락지었으며, 293년에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副帝)가 지배하는 사두 체제를 도입했다. 여러 공동 황제는 50년 이상 서로 대립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현 이스탄불)하고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에 비잔티움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갈라졌다. 4세기가 넘도록 서부 지역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퇴 일로로 치달았다. 4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고트족이 밀려나 제국 국경 안쪽에 피난처를 구하게 되었다. 401년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 시를 약탈했다. 반달족은 로마 속주인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455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476년 9월 4일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12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로마의 서부 지역 지배는 막을 내렸다. 비잔티움 제국도 마찬가지 위기를 겪었지만 서쪽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잠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수복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몇 년이 채 안 되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미쳤던 비잔티움의 세력 범위는 줄어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치명적인 전염병 등으로 비잔티움은 또한 이슬람의 발흥에 위협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토를 곧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직접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8세기경 이슬람의 확대를 막아냈으며, 9세기 초에는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기원후 1000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했으며, 문화와 교역이 번영했다. 그러나 이 정복 이후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 이 사건은 결국 제국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백년간 내분과 터키의 침략으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1095년 서방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인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여 비잔티움 제국에 파견한다. 수십년이 흘러 파견된 제4차 십자군 당시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제국내의 물품을 약탈하고 비잔티움 제국은 잠시동안 분열되어 몇몇 후계 국가들(니케아 제국, 라틴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에피로스 공국)이 들어서다가 결국 니케아 제국이 최종 승자가 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국 군대가 수도를 수복한 뒤 제국은 에게 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아무도 제국을 부흥시키지 못하고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의 메메드 2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다. 수도 로마는 당대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렀으며(이는 19세기에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의 인구와 맞먹는다) 최대 추정치는 140만, 최소 추정치는 45만 명이다. 로마의 공공 장소는 발걸음 소리와 마차 바퀴가 덜걱거리는 소리(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낮에는 도성에 마차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금한 바 있다)로 시끄러웠다. 역사가의 추정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인구 20% 정도가 도심지에 살았으며(로마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전체로는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25–40%이다), 1만 명 이상이 군사 정착촌에 거주하여 전근대 기준으로 매우 높은 도시화율을 보였다. 대부분의 도심지에는 포룸과 신전과 비슷한 양식의 더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로마 사회는 대단히 위계적이며 계급을 의식하는 사회였다. 최하층은 노예(servi), 그 위로는 피해방인(해방노예, liberti), 그리고 위에는 자유 시민(cives)이 있었다. 자유 시민은 또 일정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로마 역사 초기 계층은 로마 창건을 이끈 100명의 가부장 출신의 귀족과 나머지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공화정 시대에 이 구분의 중요성은 떨어지게 되는데, 일부 평민 가문이 부유해져 정계에 진출했으며, 귀족 계급이 몰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나 자신의 가족에서 집정관에 오르면 신귀족(nobilis, 新貴族)으로 인정받았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키케로는 이런 유형의 신인(新人, novus homo)으로 이들의 후손은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혈통 귀족인 경우 지속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유지했으며, 여러 종교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자는 공화정 말기까지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다. 계층 구분은 원래 군역 할당에 기반을 두었는데, 감찰관이 정기적으로 재산에 따라 각 시민을 특정 계층으로 분류했다. 가장 부유한 집단은 원로원 계급으로, 정계와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기사 계급(equites)으로 원래 이들은 군마(軍馬)를 부담할 수 있는 집단을 일컬었으며, 나중에는 유력한 상인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하위 계급은 원래 군사 장비 구입 수준에 따라 정해졌으며, 최하로는 군에 입대시킬 아들외에는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proletarii,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이 말에 뿌리를 두고 있음)가 있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에 이들은 군대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부나 사회의 인식 면에서 피해방인보다 약간 높은 집단으로 정도로 기록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에 투표권의 비중은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시민들은 선거 지역구격인 "트리부스(tribus)"에 등록되어 있었다. 부유한 계층의 트리부스는 재산 수준이 낮은 트리부스보다 인원 수가 적었으며, 무산자 계층 전체에는 트리부스가 겨우 하나밖에 할당되지 않았다. 투표는 계급 순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전체 트리부스의 과반에 이르면 투표가 종결되었으므로, 가난한 계급은 아예 투표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는 일부 동맹국에는 라티움인의 권리를 보장했는데, 이 권리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과 외국인(peregrini)의 중간 수준의 신분을 의미했으며 로마법이 이 지위를 성문적으로 보장했고, 이들 나라의 최고 정무관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라틴인의 권리에는 여러 층위가 있는데, 주된 구분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권"(cum suffragio, 로마의 트리부스에 등록되어 트리부스 민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와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sine suffragio, 로마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은 기원전 91~88년의 동맹국 전쟁 이후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기원후 212년 카라칼라의 칙령으로 제국내의 모든 자유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여성은 남성 배우자와 어느 정도 동등한 기본권이 있었으나,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투표를 하거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로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가구)였다. 가족의 개념에는 가부장 (pater familias)과 아내, 자녀, 다른 친척이 포함되었다. 상류층에서는 노예와 하인도 가족의 일부를 이루었다. 가부장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 절대권(patria potestas, 가부장권)을 행사했다. 가부장은 결혼(보통 돈 때문에)과 이혼을 결정할 수 있었고,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으며, 자손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었고, 심지어 생사 여탈권까지 있었다(그러나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이 생사여탈권이 금지된다). 가부장권은 성인 아들과 그 가족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그 아들은 가부장으로 인정받지도, 자신의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로마 역사 초기에 딸은 결혼하면 남편의 가부장 수권(手權, manus)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이런 관습은 낡은 것이 되어, 여성이 친정을 자신의 진정한 가족으로 계속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남성 계통을 기준으로 혈통을 인정했으므로, 모든 자녀는 남편의 가족에 속했다. 서로 혈연관계가 있는 여러 가족의 집단을 씨족(gens)라고 했다. 가족은 혈통이나 양자 입적으로 구성되었으나 정치적ㆍ경제적 연대이기도 했다. 특히 공화정 시대에 일부 유력 가문(gentes maiores)은 정계를 지배했다. 고대 로마에서 결혼은 특히 상류층 사이에서는 낭만적인 결합이기보다는 경제적·정치적 결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가부장은 보통 딸이 12살에서 14살 사이 나이일때 사위를 구했다. 신랑은 대개 신부보다 나이가 많았다. 상류층에서는 여자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데 반해, 하류층 여성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했다고 한다. 공화정 초기 로마에는 공립 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소년들은 부모나 노예 교사(paedagogi, 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이다)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이 시대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은 젊은이에게 농업, 전쟁, 로마의 전통, 공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종교ㆍ정치 활동을 하면서 사회 생활을 다양하게 익혔다. 귀족 자제는 16세 나이에 유력 정치인 밑에서 정치를 배웠으며, 17세부터 군대에서도 활동했다(이런 관습은 제정 시대에도 일부 귀족 가문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나라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그리스의 교육 방식과는 여전히 달랐다고 한다. 부모가 여력이 있으면 7살 나이의 소년과 일부 소녀들을 집 밖의 사립 학교(ludus)로 보냈다. 이들이 11살이 될 때까지 교사(litterator 또는 magister ludi)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때론 그리스어까지 가르쳤다. 12살부터 학생은 중등 학교에 가서 교사(grammaticus)에게서 그리스어와 로마 문학을 배웠다. 16세 나이가 되면 몇몇 학생은 수사학 학교에 갔다(이곳 교사(rhetor)는 대개 그리스인 출신이었다). 이 정도의 교육 수준은 법조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준비했으며, 이들은 로마의 법을 암기해야 했다. 학생들은 종교 축제나 장날 외에는 매일 학교에 갔으며, 여름 방학도 있었다. 원래 로마는 각 부족에서 서로 돌아가며 선출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왕권의 정확한 속성은 확실하지 않다.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과 권위의 살아있는 상징은 왕이었다. 다만 군사 분야에서는 왕은 절대적인 명령권(imperium)을 행사했다. 또 국가 종교의 수장이기도 하였다. 원로원은 왕을 위한 자문 기구였으며, 쿠리아회는 임금이 입안한 법을 정하고 비준할 수 있는 민회였다. 있는 로마 원로원 의원들을 향해 카틸리나를 비판하는 키케로. 19세기 프레스코화. 공화정기의 신분 투쟁으로 로마는 로마 특유의 민주정과 과두정이 혼합되었다. 의 어원이 된 는 공공의 일 을 뜻하는 말이었다. 로마법은 전통적으로 민회에서만 표결로 투표할 수 있었다.(트리부스회) 마찬가지로 공직 출마자도 인민이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자문 기능을 하는 과두적인 정치 기구였다. 공화정에서 원로원에는 강력한 권위(auctoritas)가 있었으나 기능상 자문 기구이므로 입법권은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원로원의 집단적인 의지에 맞서기는 힘들었다. 원로원 의원은 감찰관이 명문 귀족 중에서 임명했는데, 감찰관은 "부도덕한" 행실을 한 의원을 면직할 수도 있었다. 가령 뇌물을 받는다거나 혹은 소 카토가 감찰관이던 시절에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아내와 포옹하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나중에 독재관 술라의 개혁으로 재무관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에는 엄격한 관료제가 없었으며, 세금도 징세 청부를 통해 거두었다. 재무관, 조영관, 혹은 장관(praefectus) 등 정무관은 본인 돈으로 공무를 처리했다. 시민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정무관은 1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동료 정무관과 권력을 분할하도록 하였다. 가령 평상시에는 최고 권력은 집정관 두 사람이 함께 보유했다. 비상시에는 임시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 행정 체제는 필요할 때마다 수차례 개정되었다. 결국 로마가 크게 팽창하면서 공화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정 성립으로 이어진다. 제정 초기는 정부는 공화정의 형태를 가장하였다. 로마 황제는 그저 제1시민 (priceps)일 뿐이었으며, 원로원은 과거 민회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황제의 권력은 점차 전제 권력으로 발전했으며, 원로원은 황제가 임명하는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 시대의 행정 체제를 물려받지 않았는데, 공화정에는 원로원 외에 영속적인 행정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최고위 행정가와 원로원 의원, 자신의 친구, 전문 법률가 등을 모아 조언을 구하였으며, 원로원 의원, 기사, 피해방인, 심지어 노예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기용하여 곡물, 수도, 치안, 법, 재정 등 일종의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 고대 로마의 법리와 사법은 12표법(기원전 449년)에서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대전으로 이어진다. 로마법은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존속했으며, 서유럽 법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로마법은 17세기 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적용되었다. 고대 로마법의 주된 구분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된대로 시민법 (Ius Civile), 만민법 (Ius Gentium), 자연법 (Ius Naturale)이다. 시민법은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은 시민들의 송사에 대해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만민법은 외국인들이나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에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외국 법무관(Praetor Peregrinus)은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의 송사에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법(Ius Naturale)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연법을 포함하며, 외국인과 로마 시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초기 로마의 군대는 추첨에 의한 징병제이었다. 그러던 것이 국가 로마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지원제로 바뀌었고(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마침 고도성장기의 로마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실업자의 구제책으로 환영받았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뀌면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엄청나게 커져 있던 군대의 규모를 줄이고,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편성하던 방식을 바꿔 상비군 제도로 개편했다. 이 제정 로마의 상비군은 국경 바깥의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부분 국경 부근에 배치되었다. 로마의 일곱 언덕 일곱 언덕이 자리잡은 로마 시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는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포룸, 판테온 등 아치를 활용한 장대한 건물이 많았다. 분수에서는 수백 마일 길이의 수도관을 타고 운반되어 온 신선한 식수가 솟았으며, 극장, 체육관, 그리고 도서관과 가게, 시장, 상하수도를 갖춘 로마식 목욕탕도 있었다. 고대 로마의 지배 영역 널리 전원 별장(villa)와 같은 가옥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수도 로마 시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궐이 있었으며, 하층 평민이나 중류 기사 계급은 도심지의 아파트(insulae)에 살았다. 이런 곳은 상류층 지주들이 임대료 수입을 얻기 위해 지은 곳이기도 했는데, 콜레기움(collegium)이나 선술집(taberna)이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료 곡물 배급을 받으며, 검투사 경기를 즐겼으며, 상류 귀족의 피호민으로 필요할 때 도와주고 지켜주는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로마인의 모국어는 라틴어로, 이 언어는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며 문법상 낱말 배열이 상당히 자유롭고, 어간에 붙는 접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라틴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반을 둔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나왔다. 현존하는 라틴 문학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부터 쓰인 매우 정제된 문어인 고전 라틴어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구어는 민중 라틴어로 고전 라틴어와는 문법과 어휘가 다르며 심지어는 발음까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주요 언어였지만, 로마인이 공부한 대부분의 문학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교양있는 상류층은 그리스어도 구사했다. 또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후대 비잔티움 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어가 라틴어 대신 제1언어였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은 뒤 그리스어는 비잔티움 제국 정부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확장되면서 라틴어도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 라틴어가 여러 지역에서 방언으로 갈라져, 수많은 로망스어로 발전하였다. 초기 로마 종교는 최소한 신에 대해서는 글로 쓰여진 이야기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하나의 신념 체계라기보다는 숭배의례이며 의식(儀式)에 가까웠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의식을 통해 신을 불러내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보답을 약속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그리스 신화와 달리 로마의 신은 인격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문, 경계, 꽃, 곡물 등에 서린 정령(numen)을 숭배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나 장소, 사물에 신성한 혼(genius)이 있다고 믿었다. 공화정 시대에 로마 종교는 사제직을 갖춘 엄격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사제들은 원로원 의원 출신이었다.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종교 제문을 보관하고 종교 의식을 감독하였으며, 가장 높은 성직자는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 국가 종교의 수장이었다. 사제(flamen)는 여러 신의 의식을 치렀으며, 복점관(augur)은 점을 쳤다.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은 왕이 축출된 뒤 왕 대신 종교 권한을 얻었다. 그리스 문화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옛 로마의 신은 점차 그리스의 신과 동일시되었다 그리하여 유피테르는 제우스와, 마르스는 아레스와, 넵투누스는 포세이돈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또 로마의 신은 각자 동일시된 그리스 신의 신화와 속성도 이어받게 되었다. 제정 시대에 로마 사람들은 정복당한 민족들의 신화도 흡수하여, 외국신을 모시는 신전 옆에 전통적인 이탈리아 신전이 있는 경우도 생겼다.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기원후 64년 네로 시대에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그리스도 교도를 수색하면서 잔인한 고문과 태형을 가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기독교 박해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기독교는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기원후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으로 제국 내에서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 숭배가 금지되었다. 로마의 회화는 그리스의 영향이 보이며, 남아있는 작품은 대개 시골 별장의 천장과 벽을 꾸미는 프레스코화이며, 라틴 문학 이야기를 다룬 나무나 상아 등에 그린 그림도 있다. 폼페이에서 로마의 그림 몇 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예술사가들은 로마의 회화사를 네 시기로 구분한다. 로마 회화의 첫 번째 양식은 기원전 2세기 초에서 기원전 1세기 초중반까지 유행했다. 이 양식은 주로 대리석이나 쌓은 돌을 모방한 것으로,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묘사한 것도 있다. 두 번째 양식은 기원전 1세기 초로, 건축물이나 풍경을 3차원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하였다. 세 번째 양식은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에 있었으며, 이전의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단순한 장식을 선호했다. 작은 건물 모습, 풍경, 추상적인 디자인을 단색 배경 가운데에 놓았다. 네 번째 양식은 기원후 1세기에 시작했는데, 신화의 장면을 묘사하며, 건축물 모습이나 추상적인 문양도 남아 있다. 젊고 고전적인 비례를 쓰던 시기에 흉상 조각은 나중에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합으로 발전했다. 안토니누스 황조와 세베루스 황조 시대에 더욱 화려해진 머리와 수염이 유행하였다. 부조 조각도 발전했는데, 보통 로마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라틴 문학은 그 기원부터 그리스 작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존하는 몇몇 초기 작품을 보면 초기 로마의 군사적 승리를 묘사한 서사시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공화정기 로마가 팽창하면서 저자들은 시, 희극, 역사, 비극도 쓰게 되었다. 폼페이와 헤라클라네움에서 찾은 낙서, 유곽, 회화, 조각을 보면 로마 사람들은 대단히 성에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음악은 주로 그리스의 음악에서 나왔으며, 로마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추수나 베짜기, 결혼식이나 장례식, 사랑이나 풍자 등 일상 생활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노래가 있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 때 음악이 연주되곤 하였다. on Trajan s column.JPG|섬네일|200px|right|코르누를 연주하는 로마군 장교(cornicen). 트라야누스 기둥. 로마 군대에서는 투바(tuba, 긴 트럼펫)나 코르누(cornu, 프렌치 호른과 비슷하다)같은 악기를 써서 여러가지 명령을 전달했으며, 부키나(bucina, 호른이나 트럼펫으로 추정)나 리투스(lituus) 는 의전 행사에 쓰였다. 투바와 코르누를 비롯하여 물 오르간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막간에 쓰여 전차 경주와 검투의 흥분을 고조하였으며, 극장에서도 물 오르간과 티비아이(tibiae, 로마식 아울로스에 해당하는 더블 파이프)이 쓰였다. 무언극도 로마의 인기있는 오락이었으며, 합창, 기악, 무용과 함께 정기적으로 협연하였다. 제사나 축제 음악 등 종교 의식에도 대부분 음악을 이용하였는데, 희생 의식에는 도살되는 동물의 울부짖음을 숨기기 위하여 티비아이를, 주신(酒神) 바쿠스 제의에는 심벌즈와 탬버린을 썼으며, 여러 의식에서 방울을 쓰거나 성가를 불렀다. 고대 저술가들은 유명한 대연주가, 큰 합창단, 오케스트라 및 웅대한 음악 축제와 경연 대회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로마의 직업 음악가들은 협회를 만들어 공적인 행사와 사적인 연회에 연주자를 보냈으며, 인기있는 연주자에게 엄청난 연주비가 지불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여러 황제들이 음악을 지원하고 육성하였는데, 심지어 네로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고자 하였으며 경연 대회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어떤 음악사가는 음악이 거의 모든 공공 행사에 쓰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음악은 오락 및 교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키케로나 퀸틸리아누스와 같은 저술가들은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음악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3~4세기에 걸쳐 제국이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이전의 큰 규모의 음악 활동은 중단되었다. 현재 고대 로마의 음악에 대해 그리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여러 그림, 일부 악기, 수천 건의 문헌이 남아있지만, 로마 시대의 라틴어 악보는 남아있지 않다. 음악사가들은 로마의 음악가가 음악 연주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로마의 젊은이는 뛰기, 레슬링, 권투, 경주 등 여러가지 놀이와 체육을 즐겼다. 시골에서 부유층은 낚시와 사냥도 즐겼다. 로마에는 핸드볼과 비슷한 구기 종목도 있었다. 주사위 놀이, 보드 게임, 도박도 매우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여성들은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저녁 잔치에서 음악, 춤, 시 낭송과 같은 오락을 즐겼다. 평민들은 클럽이나 모임에서 비슷한 잔치를 열기도 했는데, 보통 오락을 즐기는 저녁 식사란 후원을 받아 선술집에서 여는 모임을 뜻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혹은 목마 넘기를 하며 놀았다. 창투사 레티아리우스가 결투 상대인 검투사 세쿠토르에게 삼지창을 겨누고 있다. 검투는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검투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황제의 손짓으로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지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여러 전문가들은 검투사를 죽이라는 손 동작은 ‘엄지손가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손짓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르지만, 어떤 전문가는 승자 쪽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려서 패자의 죽음을 명령했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지 않고 주먹을 들어올리면 살려주라는 뜻이었다고 보고 있다.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죄수나 검투사를 무장하거나 맨몸으로 경기장에 놓고 동물을 풀기도 하였다. 대경기장(circus maximus)도 로마에서 인기있는 장소였는데, 주로 경마나 전차 경주를 벌이는 곳이며, 경기장에 물을 채워 가상 해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그 밖에도 여러가지 행사가 많았다. 이 경기장은 38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므로, 로마 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대경기장의 경주로 한가운데에는 각각 일곱 개의 커다란 달걀과 일곱 개의 돌고래가 있는 신전이 둘 있었는데, 선수가 한 바퀴 돌때마다 일곱 중 하나씩 없애서 횟수를 표시했다. 스포츠 말고도 대경기장은 시장과 도박판이기도 했다. 황제 등 정부 고위인사도 대경기장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장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고위 인사, 기사, 그 밖에 경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예약석에 앉았다. 황제가 특정 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적절한 일로 여겨졌다. 대경기장은 기원전 600년에 생겼으며,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다 기원후 549년에 마지막 경마 경기가 치러진 후 문을 닫았다. 고대 로마는 인상적인 기술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 성과는 중세 시대에 잊혀지고 말았다. 로마의 여러 실용적인 기술 혁신은 이전의 그리스의 것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의 공학 기술은 군사 관련 기술과 더불어 로마의 우수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야이며, 도로, 교량, 수도관, 목욕탕, 극장, 경기장을 건설하는데 기여했다. 콜로세움, 퐁 뒤 가르, 판테온 등 여러 유적이 아직도 로마의 공학과 문화의 증거로 남아있다. 로마는 건축으로 유명하였다. 로마 건축은 그리스 건축과 더불어 고전 건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로마 건축은 그리스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로마는 그리스의 엄밀하고 정격적인 설계와 비례를 차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둥과 주두의 배열 방식(오더)인 복합식(composite order)과 토스카나식(Tuscan order)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아치에서 배워온 돔 외에는 공화정 말기까지 별다른 건축적 성과가 없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콘크리트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발명되었다. 이것은 화산회로 만든 강력한 시멘트로, 대리석을 밀어내고 로마의 주요 건축 자재가 되었으며, 여러 건축 방식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기원전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축 저작인 건축론을 썼다.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는 기원전 40년경 시리아(혹은 이집트)에서 발명된 취관(glassblowing) 를 이용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 원정 당시 견본을 가져오면서 전래되었다. 가도(Via Appia). 수도 로마에서 이탈리아 남부까지 연결된 도로로 오늘날에도 멀쩡하다. 콘크리트 덕분에 튼튼한 포장도로인 로마 도로를 깔 수 있게 되었는데, 상당수 로마 도로는 로마가 멸망한지 천 년 뒤에도 계속 쓰였다. 광대하고 효율적인 제국 전역의 도로망은 로마의 패권과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로마 도로는 전체적으로 5만 마일에 달하였고, 변방의 도로는 군사공병 기술자가 축조하였는데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비트루비우스 저서 12권 1장에 있는 공법을 보면, 맨 아래 기초로 큰 돌층과 부스러기층을 번갈아 깔고, 그 위에 모래층을 펴고, 맨 위에는 다각형 큰 돌의 상부를 갈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덮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로마 도로는 로마 군단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건설한 도로였다. 그러나 이 대로는 로마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교역의 중심지인 로마의 위상을 굳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로마 정부는 역참 제도를 운영하여, 도로 일정한 간격마다 여행자들이 쉴 곳을 제공했으며 필요한 지역에 다리를 건설하여 24시간에 800km를 이동할 수 있는 파발 체제를 마련했다. du gard.jpg|섬네일|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프랑스의 퐁 뒤 가르. 기원전 19년에 건설되었다. 로마는 수많은 수도관을 건설하여 도시와 산업 지역, 농경지에 물을 공급했다. 로마 시에는 총 길이가 3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관이 있었다.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는 매우 적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있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이펀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로마인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위생과 사교 목적의 공공 목욕탕(termae)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여러 가옥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 대하수도( cloaca maxima )가 있어 늪지를 배수하고 티베리스 강으로 폐수를 처리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상하수도의 납으로 된 수도관 때문에 납 중독이 퍼져 출산율이 저하되고 로마 사회가 쇠퇴하면서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 함유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수도관은 폐쇄되지 않아 계속 물이 흘러 각 가정과 공공 시설의 배수구로 빠져나갔으며, 수도 꼭지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결식하거나 결식할 위험이 있는 식량빈곤층들에게 식량배급권을 지급하였다. HBO의 TV 드라마, "Rome" 시즌1의 DVD 세트 에미상 다수 수상. 콜린 매컬로(Colleen McCullough), "로마의 일인자"(The First Man in Rome).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그 밖에도 다수의 로마 관련 역사소설을 썼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 일본과 한국의 베스트셀러. 고대 로마의 역사를 그려낸 평설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기, 내란기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살루스티우스 카틸리나 전기, 유구르타 전기 타키투스 연대기, 역사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로마 왕정 로마 공화정 로마 제정 로마 집정관 목록 로마 황제 목록 로마 문화 로마 검투사 분류:고대사 분류:문명 분류:유럽의 옛 나라 분류:5세기에 멸망한 나라
진화생물학 (進化生物學)은 문자 그대로 지구 상의 생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현대 생물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분과중의 하나이다. 진화란 생물의 다양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뜻하며, 그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진화생물학의 핵심이다. 진화학이란 생명의 역사에 관한 학문으로, 그 시작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진화가 관찰되는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진 상태이며, 진화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진화는 생물의 역사만을 다루므로 생명의 기원은 화학진화라는 다른 분야에서 다루고 있다. 진화생물학은 화학진화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는 종종 오해를 낳지만, 화학진화는 생화학의 분야로서 진화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된다. 진화(evolution)는 포괄적으로는 생명의 변화를 말한다. 과거와 현재의 생명체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고 왜 달라졌는가를 설명하는 분야가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내용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 진화는 발전이 아닌 다양성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생물이 진화했다(evolve)는 것은, 생물이 이전보다 나아졌다(Progress)는 뜻이 아니다. (생물이 지금까지 자손을 남겼다 + 과거의 조상과는 달라졌다.)라고 봐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능의 추가는 물론 삭제도 일어나며, 복잡해지는 과정도 있으나 간단해지는 과정도 존재한다. 진화를 진보와 혼동하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오해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오해는 진화했다, 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생물은 진화를 선택하지 않는다. 같은 종의 다양한 유전자 군에서 자연이 특정 환경에 더 많은 후손을 남기는 유전자를 선택함이 진화로 나타난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이 주체이고 종은 객체이다. 자연이 선택하는 것이지, 각 개체, 혹은 종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어떤 종이 어떻게 진화했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영어로는 몰라도 한국어로는 진화를 당했다고 해야 그나마 정확한 의미에 가깝다. # 종 개념을 명확히 한다 우리가 말하는 분류학의 종(species) 개념은, 상식적으로 우리가 생물을 나누는 기준과는 다른 개념이며, 이 개념 또한 상당히 불분명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과거 종을 나누는 기준은 외부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현재는 유전자를 기반으로 분류하고 있다. 사자와 호랑이는 명백히 다른 종이나 서로 간에 (생식능력이 없는) 새끼를 낳을 수 있고, 세인트버나드와 치와와는 같은 종이지만 크기의 차이로 인해 자연상태에서는 서로 간에 새끼를 낳을 수 없다. # 자연선택 자연선택은 특정 자연환경이 적합한 개체 혹은 집단을 선택한다는 개념이다. 적합성(Fitness)이 가장 높은 개체나 집단을 자연이 선택하며, 적합성은 주로 생존율과 번식율의 함수로 표현된다. # 시간 진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 시간 개념은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단위가 대부분이다. 5만 년은 일반적으로 진화 또는 지질변이에서 대단히 빠른 시간단위가 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란 종이 겪는 5만 년과 한 사람의 뱃속에서 살아가는 대장균에게 숙주의 일생은 진화라는 관점에서 거의 동일한 기간이 될 수 있다. # 개체군 진화는 개체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종 집단 수준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일어나는 현상이다. 개체는 사라질 수 있으나, 유전자의 변이는 집단 속에 남게 된다. # 인류와 대장균은 같은 수준의 진화적 산물이다 대장균보다 발전한 것이 인류가 아니며, 다른 생명보다 우월한 생명이란 개념은 의미가 없다. 계통도에서 상위와 하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분류상 복잡하고 간단한 것은 있으나 복잡한 것이 단순한 것보다 나은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과거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들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간단한 원시생명체에서 다양한 구조를 가진 복잡한 세포생명체가 형성되는 과정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이 생겨나는 과정 그러나 현대에는 유전적 정보증가, 즉 다양성의 증가와 군체 형성 등으로 이미 해결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생물의 진화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양한 유전적 변이가 유전자 집단 내에 축적된다. 환경의 변화로 인한 압력이 가해지는 과정에서, 유전적 변이에 의한 집단 내의 선택이 이루어진다. 긴 시간동안의 선택 결과, 유전자 집단 내의 유전적 변이가 원래 집단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달라진다. 이 과정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시간 단위 안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으며, 급격한 외부 요인은 진화를 가속한다는 것이 화석을 통해 알려져 있다. (캄브리아기 생물 대폭발 (cambrian explosion), 페름기 및 백악기 대멸종 등) 다양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 유전자 집단에서는 특정한 환경 아래에서 유리한 유전자와 그렇지 않은 유전자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유리한 유전자 가 그 유전자를 가진 개체의 생존 및 번식능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다음 세대의 유전자 집단에는 유리한 유전자 의 수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때 유리한 유전자 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유리한 유전자 란, 단순히 자손을 많이 남기는 데 유리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비록 개체에는 해를 끼치는 유전자일지라도 자손을 남기는 데 유리하다면 그것은 자연 선택에 유리한 유전자이다. 이 개념은 멘델의 우열 개념과 함께 자주 오용되어 왔으므로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한다. 유전자는 바뀔 수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방사선, 화학물질, 단순한 복사과정의 실수 등에 의해 유전자가 바뀔 수 있으며, 이러한 유전적 변이는 외부의 압력 - 선택압 - 이 가해지지 않는 한 유전자 집단 안에 계속 축적된다. 돌연변이는 해로울 수 있으며, 생명체는 이러한 돌연변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세포 내 복구장치 및 발생 과정에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는 있으나, 확률적인 문제로 돌연변이는 계속 축적된다. 돌연변이로 축적되는 유전자 집단 내의 유전적 다양성은 자연선택의 도움으로 세대가 지날수록 앞 세대와는 다르게 바뀐다. 또한 이러한 유전자 집단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서로 섞이지 못할 수 있으며 이런 경우 한 유전자 집단과 다른 유전자 집단 안의 유전적 변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서로 다른 선택압이 가해진 두 유전자집단은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유전적으로 섞일 수 없게 되며, 이렇게 된 경우를 종의 분화 라고 표현한다.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 1908년 11월 15일 ~ 1957년 5월 2일)는 미국의 정치가이다. 위스콘신주의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단적인 반공 활동과 공산주의 색채를 의심받은 미국 유명 인사에 대한 청문, 고소 및 추방으로 알려져 있다. 조지프 매카시는 위스콘신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20세가 되어서야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속성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고학으로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통 마켓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마켓 대학교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지방 판사가 되었다. 지방 판사 재직 시절 위스콘신 주의 낙농업을 하는 농부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어 낙농업이 발달한 위스콘신 주에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위스콘신 주에서 판사로 재직하였다. 전쟁 참전 전에 낙농업 관련 판결로 인기를 모았던 판사였으므로 정계 입문 권유를 받게 되어, 1946년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아일랜드계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아일랜드계 정치집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소속정당은 달랐지만, 케네디 가의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에게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상원의원 재직 초기 매카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초선 의원이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월 7일 자신의 정치적 조언자들로부터 귀가 번쩍 뜨일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반공 이었다. 1949년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등장, 소비에트 연방의 원자 폭탄 실험과 중앙유럽·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영향력 증대, 그리고 당시 미국을 휩쓸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등은 반공의 가치를 크게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부녀자 당원 집회에서 행한 반공주의 연설에서 이른바 매카시즘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의 연설로 미국 전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많은 미국 군인들이 전쟁에서 희생되면서 국민들은 두려움과 괴로움에 사로잡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발 열풍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매카시는 상원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청문회도 열게되었지만 ,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매카시 시대"로 불릴 정도로 반공주의의 바람이 몰아쳤다. 또한 매카시의 반공주의 발언에서 유래한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는 극단적인 반공사상을 지칭하는 일반용어로 자리잡았다. 1952년 재선된 그는 계속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도하였다. 그의 공격적 발언은 갈수록 심해져서 마침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지도부, 육군 장군들까지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으나, 1954년 국회 청문회에서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발언으로 판명되었다. 청문회 당시 육군측 변호사들은 집요하게 추궁했는데, 이에 대해 매카시는 흥분하며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고 당시 이 모습을 36일간의 텔레비전 생중계로 본 미국 국민들은 더 이상 매카시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1954년 12월 상원은 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의제로 올려, 67대 22로 그에 대한 비난을 의결하였다. 미국 민주당에서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를 제외한 의원 전원이 찬성하였다. 케네디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유로 불참하였는데, 실제로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참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한편 매카시 의원의 소속 정당이었던 미국 공화당에서도 상당수 의원들이 찬성하여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상원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매카시는 미치광이 혹은 간신모리배 등에 비유되었다. 이에 크게 상심한 그는 이전부터 앓아오던 두통과 조증을 해소하고자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알코올 중독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다. 상원의원의 직위는 유지했으나, 거의 활동은 할 수 없었고, 공화당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건강을 잃어 1957년 만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양당의 여러 의원들이 참석하였다. 매카시 시대에 적극 동조한 유명인으로는 유명한 반공주의자들인 로널드 레이건, 엘리아 카잔, 월트 디즈니를 꼽을 수 있으며, 반대로 피해자로는 영화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및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을 들 수 있다. 매카시즘 반공주의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조지프 매카시 분류:1908년 태어남 분류:1957년 죽음 분류:미국의 정치인 분류:아일랜드계 미국인 분류:위스콘신주 출신 정치인 분류:매카시즘 분류:미국의 반공주의자 분류:로마 가톨릭교도 분류: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위스콘신주의 연방 상원의원 분류: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동문 분류:독일계 미국인
레핀이 그린 멘델레예프의 초상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 ( , , 1834년 2월 8일 - 1907년 1월 20일)는 러시아의 화학자이다. 주기율표를 최초로 작성한 이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토볼스크(Tobolsk)인근 Verkhnie Aremzyani에서 11, 13, 혹은 17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그 수는 출처마다 다르며, 정확한 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해에 그의 선생님이었던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Ivan Pavlovich Mendeleev)가 시력을 상실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브나(Maria Dmitrievna Mendeleeva)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녀는 그녀 가족의 유리공장을 다시 세워 살림을 꾸려나간다. 1847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리공장이 화재로 파괴되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는다. 멘델레예프가 15세이던 1849년 그의 어머니는 멘델레예프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남은 두 자녀(멘델레예프와 리자)를 데리고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건너가 정착했다. 멘델레예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곧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남편 친구의 도움을 받아 Main Pedagogical Institute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이 기관에 들어간지 10주가 안되어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2년 후 그는 결핵진단과 함께 단지 수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869년 3월 6일, 러시아화학회에서 그는 주기율표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여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의 성질과 실제 원소의 성질이 맞아떨어진 사례가 몇 개 존재한다. 로타르 마이어도 거의 같은 시기 거의 비슷한 주기율표를 생각해 내었으나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을 예측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 불린다. 멘델레예프는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 상은 프랑스의 무아상이 수상했고 멘델레예프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1907년 생을 마감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멘델레예프의 초상화 (러시아의 가장 잘 알려진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5년작) 멘델레예프의 사진 -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에드거 파스 스미스 소장품(Edgar Fahs Smith Collection) 원래의 주기율표 - 설명과 함께 멘델예프의 첫 주기율표 초안 - 1869년 2월 17일 :멘델레예프는 1889년 연 1회 열리는 페러데이 강연의 강사로 초청받았다. 그는 강연을 통해 새로 얻은 통찰을 펼쳤다. 페러데이 강연 - 1889년 7월 4일 - 설명과 함께 분류:1834년 태어남 분류:1907년 죽음 분류:러시아의 화학자 분류:러시아의 발명가 분류:러시아의 백과사전 편집자 분류:무기화학자 분류:이신론자 분류: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동문 분류: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분류:코플리 메달 수상자 분류: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19세기 러시아 사람 분류:19세기 화학자 분류:20세기 화학자 분류:주기율표 분류:화학 원소를 발견한 사람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기원전 100년 7월 12일-기원전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 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급기야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 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설상의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집안이었다.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코그노멘(cognomen, 가문 이름) "카이사르(Caesar)"는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라틴어로 자르다 라는 뜻의 caedere , caes- )로 태어난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에는 다른 설명이 나오는데,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이나 밝은 회색 눈()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전투 중 코끼리(무어말 caesai )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깊은 계보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가문에서 배출한 집정관 수도 세 명에 불과하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동명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공화정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법무관직까지 올랐으며,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매형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영향력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또 카이사르의 가정 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문법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카이사르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율리아였다. 카이사르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수에토니우스나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기에 보면, 내용이 10대 때부터 시작하며, 두 책의 시작부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혼란한 시절이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 사이에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로마 시민권 문제를 놓고 동맹국 전쟁을 벌였으며, 그러는 사이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동부 속주를 위협하였다. 로마 정계는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로 갈라져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두 파벌은 각자 공통적인 대의가 없어서 정당이나 정파와는 다르다. 벌족파는 원로원의 전통적이고 헌정상의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었으며, 민중파는 전통적인 과정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벌족파였는데, 카이사르의 유년기 때 두 정치가의 대립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동맹국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두 사람 모두 미트리다테스 정벌 전쟁에 지휘권을 원하였으나, 당초 술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선거구 개혁과 미트라다테스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후 폭동이 일어났고 로마에서 탈출한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술피키우스를 처형하고 마리우스파를 축출하였으나, 술라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마리우스가 임시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와 그의 정치적 동맹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도시를 장악하고, 술라를 공적(公適)으로 선언하였으며, 마리우스 군대는 술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복수하였다. 기원전 86년 초에 마리우스가 세상을 떠났으나, 킨나를 중심으로 한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 기원전 85년 어느날 아침에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신발을 신는 중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자 카이사르는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지명되었는데, 전임자인 메룰라가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제직에 오르는 사람은 귀족일 뿐 아니라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사 출신 가문의 평민 여자인 코수티아(Cossutia)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 이때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맺었던 술라가 돌아와 마리우스 지지자들에 대항한 내전을 종결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그는 기원전 82년 11월 1일에 콜리나 대문의 전투로 로마를 장악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하였는데, 전통적으로 6개월 동안 단 한 번 재직하는 독재관직과 달리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상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마리우스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내어 부관참시되어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당시 킨나는 항명을 일으킨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미 살해된 상황이었다. 술라의 처벌자 명단 공개로 그의 정적 수 백명이 죽거나 추방되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 역시 명단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을 면하였으나,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기를 거부하여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라파가 있던 모계쪽 집안과 베스타 여사제의 관여 덕분에 그에 대한 위협은 취소되었다. 술라는 망설이며 결국 사면에 승낙하였는데, 카이사르 속에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음을 보았노라고 말한 바 있다.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틸리니 공성전에서 공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았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에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 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 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으며, 국장이 열렸다.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유산을 몰수당한 터라 재산이 없던 카이사르는 로마 시에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었다.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빼어난 웅변에다 인상적인 제스처와 높은 목소리를 갖추었으며,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던 전직 총독들을 가차없이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 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 에게 해를 지나던 중,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잡혀있을 때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 해적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해적들이 그의 몸값을 은 20 탈란톤으로 잡자, 카이사르는 50 탈란톤을 요구하라고 고집하였다.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로도스로 갔으나, 곧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에 불려갔으며, 폰토스의 침략을 막고자 보조군을 모병하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에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 그 해에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장례 중에 (술라 집권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하였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제패할 때와 같은 나이에 자신은 이룬 것도 없다는데 불만을 느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 그는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물의를 빚었다. 그는 또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였으며,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보다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된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 Wien - Kunsthistorisches Museum - Gaius Julius Caesar.jpg|섬네일|오른쪽|빈의 예술사 박물관에 있는 카이사르 흉상.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키케로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라비리우스의 변호를 맡았으나, 그는 대역죄(perduellio)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에게 청원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야니쿨룸 언덕에 군기를 내려 민회를 산회시켰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 세력들이 카이사르와 같은 민중파 정적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방호책으로 삼았던 비상 결의에 반대 여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 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후보들은 서로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경쟁 후보들은 뛰어난 경험과 지위를 가졌지만 카이사르가 무난히 당선되었는데, 아마도 두 경쟁 후보가 서로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에 관저가 있었다. 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카이사르는 카토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쪽지는 카토의 의붓누이인 세르빌리아에게서 온 연애 편지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금되었다. 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 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이 제사에는 남성이 출입할 수 없었으나,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라는 젊은 귀족 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폼페이아를 유혹할 목적이 분명하였다. 그는 잡혀서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그는 로마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 임페라토르 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직에 출마하길 원하였다. 만일 그가 개선식을 열려면, 행사 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도시 바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사령관직에서 이임하고 일반 시민 신분으로 로마에 들어와야 했다. 결국 그는 개선식과 선거 출마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부재중 출마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카토가 이를 막았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는 깨끗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지지를 청하였으며 부유한 루케이우스와 제휴하였으나, 체제의 주류 세력은 보수파인 비불루스를 밀어주었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카토조차도 그를 지지하여 뇌물을 썼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 카이사르는 재혼하였는데, 이번 배우자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당선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인 칼푸르니아였다. 집정관에 취임하자 카이사르는 현대의 신문격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광장에 붙였다. 악타 디우르나로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이 그대로 민중에 공개됨으로써 민중파인 카이사르의 입지는 더욱 강해졌다. 또한 공직자가 1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율리우스 레페르토리(공직자 윤리에 관한 율리우스 판례법)을 제정하여 공직 생활의 정화를 도모하였다. 카이사르는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lex iulia de agraria)을 제안하였는데, 그라쿠스 형제가 제출하려했던 농지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할 수 있으나 20년동안 남에게 양도할 수 없다. # 국유지 임차 신청자격은 폼페이우스와 5년 종군한 자와 3명의 자녀를 둔 무산자로 정한다. # 250헥타르 이상 부정 임차지를 환수하는 비용은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전쟁 후 국고에 납입한 2억 세스테르티우스로 한다. # 부정 임차지 반환에 따른 보상금 액수는 재무관이 결정한다. # 임차 농지 재분배는 20명의 상설위원으로 구성하고 법안 제출자는 그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기존체제에서 개혁을 실시하려 했기 때문에 보수파를 회유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보수파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삼두의 강력한 힘을 이용했다. 삼두의 일파인 폼페이우스는 필요할 경우 무력도 불사하며 지지했으며,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삼두 정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도시에 운집하였으며, 삼두정의 반대자들을 위협하였다. 비불루스는 불길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선언하여 법을 무효화하려 시도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이 그를 포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불루스의 릭토르(lictor)들이 들고 다니는 속간은 부러졌으며, 그와 함께 있던 호민관 두 사람이 다쳤고 비불루스 자신도 똥 한 바가지를 뒤집어썼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집으로 물러나 그 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다가 이따금 나쁜 전조를 선언하였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입법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의 풍자가들은 이때부터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처음 선출되었을 때,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 해에 맡을 전임 집정관 자리로 속주 총독직 대신 이탈리아의 목초지와 숲을 맡겨서 장래에 그의 권력에 제약을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삼두 정치가 입법시킨 바티니우스 법 에 따라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그가 맡을 전임 집정관 임기는 단 1년이 아니라 5년으로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기소가 면제되었다. 카이사르는 푸블리카누스의 속주세 예납제도를 폐지하여 속주세의 공정성을 실현하였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정복한로마세계의 동방을 재편성하는 법안을 가결시키고 게르만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 (socius e amicus populi romani)로 임명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쫓겨난 상태였으므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부하인 가비니우스를 파견하여 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3천 탈렌트를 받았으나 크라수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이 돈의 절반을 써야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 갈리아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 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하이두이족(Haedui)은 전에 하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프로빈키아 통과를 요청한 헬베티족의 요구를 거절했다. 헬베티족은 하이두이족의 승인을 얻고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려 했으나 다툼이 벌어졌고 이에 하이두이족은 헬베티족을 적대하며 동맹국인 로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하이두이족의 족장 둠노릭스는 헬베티족과 연락을 취하다 카이사르에게 발각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형이자 하이두이족의 족장 디비키아쿠스가 동생을 대신해 용서를 바라자 둠노릭스를 용서했다. 카이사르는 손 강에서 헬베티족을 기습공격했고 큰 손실을 입은 헬베티족은 디비코라는 강화사절을 보냈으나 그는 카이사르가 요구한 인질제공을 거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와 헬베티족은 비브락테 전투에서 맞붙었다. 헬베티족은 밀집대형으로 진격하였지만 로마군이 투창공격을 퍼붓자 방패에 창이 박혀 방패를 버리고 싸워 크게 손실을 입었다. 보이족과 툴링기족이 곧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제1열을 헬베티족과 싸우게 하고 제2열은 보이족과 툴링기족과 대적하게 했다. 이렇게 한바탕 치열한 전투에 이루어지고 결국 카이사르가 헬배티족을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에게 헬베티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자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갈리아인들의 요청에 따라 게르만족과 대적하게 되자 수에비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그때 로마군에서 게르만인에 대한 공포가 퍼졌으나 카이사르는 몸소 연설로 로마군의 전투 의지를 되찾게 했다. 카이사르는 제10군단을 이끌고 아리오비스투스와 브장송에서 직접 만나 회담을 했고 그 협상은 게르만인들의 도발행위로 인해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는 사절을 보냈으나 그들이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로잡히자 그와 전투를 벌였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전투에서 질것이라는 게르만 여인의 점에 따라 전투를 바라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적군포로를 심문하여 이 사실을 알아내었고 게르만인들의 전투의욕이 적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더 과감하게 공격했고 아리오비스투스는 어쩔수없이 로마군과의 회전을 준비했다. 게르만족은 배후에 아녀자가 탄 마차를 포진시켰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로마군 우익은 적군의 공격을 버텨냈으나 좌익은 적군의 수적우세에 밀리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아끼는 부하이자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전투에 동원되지 않는 제3열 군사를 이끌고 좌익을 지원했다. 힘을 얻은 로마군의 공격에 게르만족은 다수가 죽고 아리오비스투스는 게르마니아으로 달아났다. 게르만인들의 배후에 강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게르만족이 죽거나 아리오비스투스를 비롯한 소수의 요인들만이 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두 아내와 한 딸은 죽고 다른 딸들은 사로잡혔다. 이 해의 모든 전투를 끝내고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런 자의적인 군 편성은 적법성이 의심스러웠는데, 키살피나 갈리아인은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 부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와중에 레미족은 반군들을 배신하고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다. 수에시오네스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통합된 벨가이 동맹군 29만명은 레미족의 영토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와 레미족을 향해 귀갑대형을 이루고 진격해왔다. 로마군 진영 근처에 비브락스(Bibrax)라는 이름의 레미족 도시가 있어 벨가이군은 이 도시를 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브락스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인과 크레타인으로 구성된 궁수들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비브락스에 구원병으로 보냈다. 벨가이군은 이들의 구원에 힘을 얻은 레미족의 거센 반격에 공성을 중단하고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다. 로마군 진영은 강을 끼고 두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벨가이인의 공격을 받는 쪽은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했고 강 건너편의 지휘는 사비누스가 맡았다. 벨가이군은 강을 건너 사비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진지 안에 있던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접근해오는 적과 싸웠다. 로마군은 물속에서 움직임이 둔해진 벨가이군을 무찔렀다. 벨가이인들은 패전소식과 식량부족에 통합된 벨가이 병력을 각 부족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각 부족으로의 귀환은 소란스러운 것이 패주에 가까워 벨가이인들은 카이사르가 보낸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크게 전사자를 내었다. 카이사르는 적군 연합부대를 크게 격파하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우선 수에시오네스족을 격퇴하고 벨로바키족과 암바니아족과 강화를 맺었다. 벨로바키족은 부족내의 반로마파가 모두 브리타니아에 도망쳐 버렸다고 주장했다. 로마군은 이어 벨가이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을 가진 네르비족과 싸우게 되었다. 그들은 매복해 있었으며 로마군의 군량수송부대에 첩자를 두었다. 카이사르가 그들의 영토에 도착하자 기습공격을 하여 로마군의 허를 찔렀다. 로마 기병대는 이미 격파되었고 카이사르도 한번에 여러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전투를 시작했다. 로마군의 제9군단과 제10군단은 좌익에 포진해 있다가 아트레바테스족을 쳐부수었고 제11군단과 제8군단은 우익에서 비로만두이족을 격파했지만 로마군 중앙의 제12군단과 제7군단은 좌우익이 빠져나가 노출된 곳에서 보두오그나투스가 이끄는 네르비족의 공격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중앙의 병사들 간의 대열이 좁아 전투에 방해가 됨을 알아차리고 대열을 넓힐 것을 명령했다. 방진을 짤것을 지시했고 로마군은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가 제10군단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러 오자 네르비족은 열세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로 네르비족의 전투력은 궤멸되었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볼모제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어 아투아투키족의 수도인 아투아투카를 공격했고 로마군의 공성기에 놀란 아투아투키족은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했고 아투아투카의 전체 무기 중 삼분의 일 가량만 버려졌다. 아투아투키족은 남은 무기를 들고 로마군을 기습했으나 4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였다. 카이사르는 5만명이나 되는 아투아투카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넘겼다. 카이사르의 공적에 로마 원로원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15일 감사제를 올렸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로마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이었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오르기로 하고 이후에는 카이사르처럼 장기 전임 집정관직을 맡기로 하여, 임기를 5년으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는 것으로 정하였다.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의 부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최강의 부족 수에비족에게 밀려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 문제를 교섭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우비족(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은 게르만 부족)의 영토를 제공할 것이니 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두 게르만 부족은 그 제안을 고려할 것이니 사흘간의 여유를 줄것을 간청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이 게르만인의 기병대가 아직 갈리아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물을 보급해야 한다면서 군대를 조금만 전진시키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대로 카이사르는 로마군 기병대를 전진시켜 그들에게 게르만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오게 했다. 게르만 기병의 급습을 받아 기병을 74기나 잃었다. 게다가 이 희생자 중에 피소라는 이름의 카이사르의 갈리아인 친구가 있었다. 교섭이 깨졌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게르만인들을 공격했고, 병력이 43만명이나 되는 두 부족은 전의를 잃고 대부분이 죽거나 일부가 게르마니아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이 전투가 로마에 전해지자 카토는 카이사르가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게르만인을 기습한 것은 부당한 처사이고 따라서 카이사르를 게르만족에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늦여름에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하면서 브리타니아 섬(오늘날의 브리튼)에 건너가서 기원전 57년에 벨로바키의 반로마파가 브리타니아에 달아났으며 지난 해에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베네티족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섬에 대해 잘 몰랐으며, 켄트에 상륙 거점을 얻어 어렵게 브리타니아인을 격파하였으나 기병대가 도착하지 못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또한 배가 파손되어 이를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어서 겨울에 갈리아로 돌아갔다. 다만 브리타니아인들을 다시 격파하고 강화를 맺은 다음, 인질을 요구하여 이들을 갈리아로 보내겠다고 하여 브리타니아를 떠나는 명분을 명확히 했다.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의 만두브라키우스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이자 브리타니아 연합군 총사령관인 카시벨라우누스와 전투를 벌였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부족간의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자로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생각보다 강한 것을 알자 게릴라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것과 다르게 기병을 먼저 보내지 않고 보병과 같이 진격시키게 하여 브리타니아인의 기습공격을 막아내고 곧 반격해 그들을 격파했다. 카이사르가 카시벨라우누스의 본거지를 공격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로마군을 격퇴하지 못했다. 결국 브리타니아인들은 본거지에서 로마군에게 패하였고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로마군의 군량이 부족해져 카이사르는 군대를 분할하여 갈리아의 여러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그 중 군단장 사비누스와 코타가 이끄는 9천명의 로마군은 에부로네스족의 땅에 배치되었다. 에부로네스족장 암비오릭스는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사비누스와 코타에게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고 지금 갈리아 각지에서 크게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신들이 로마군을 호위할테니 진영지를 떠나고 카이사르와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그전까지 로마에 우호적이던 암비오릭스의 속임수에 두 군단장은 속고 말았다. 사비누스는 진영지를 떠날 것을 주장했고 코타는 진영지를 지키며 버티는 것이 낫다고 했으나, 결국 사비누스의 뜻대로 진영지를 떠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진영으로 향했다. 행군 도중에 그들은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라비에누스의 진영지에 도착했다. 암비오릭스의 선동으로 네르비족과 아투아투카족은 퀸투스 키케로의 진영을 공격했고 그 수가 6만면에 달했다. 당시 병이 든 키케로는 적의 십분의 일 밖에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분전했고 키케로의 구원요청을 받은 카이사르는 7천명의 군대를 급조하여 키케로의 진영지에 도착한 뒤, 적군을 유인하여 격파했다. 많은 수의 갈리아인이 죽었으나 로마군의 손실은 없었다.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병사들 중에 다치지 않은 자가 전체의 10분의 1 정도였다. 한편 라비에누스는 트레베리족의 인두티오마루스를 격파하고 죽이는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로 다시 진격하고 암비오릭스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암비오릭스를 무찌르면서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를 평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반란음모를 꾸민 카르누테스(Carnutes) 족장 아코를 사형시켰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 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는 폭력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로써 삼두 정치는 결렬되었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기원전 52년, 족장을 잃은 카르누테스족은 본거지인 케나붐에서 로마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갈리아 중부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로마군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북이탈리아의 카이사르가 중부 갈리아에 있는 그의 군단과 합류하였고, 비투리게스족의 수도인 아바리쿰이 카이사르에게 점령되었지만 반로마군의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수도인 게르고비아로 향했고 이즈음에 로마의 동맹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근거지인 게르고비아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게르고비아를 한 차례 습격하고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습격한 뒤 퇴각하는 과정에서 선발대에게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들을 공격하여 700명을 전사시켰다. 그중 로마군 백인대장은 46명이나 죽었다. 게르고비아 공략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퇴각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추격하여 한 차례 회전이 벌어졌다. 갈리아 기병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격했으나 카이사르는 방진을 이루어 이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전투에서 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만두비족의 도시 알레시아로 들어갔다. 카이사르는 이를 알고 즉시 알레시아를 포위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전역에 지원군을 요구하였고 이에 26만에 달하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의 군대를 다시 포위하였다. 알레시아의 농성군은 7만명으로, 갈리아전력은 총 33만이었다. 반면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12개 군단 5만명이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포위전 알레시아 전투가 기원전 52년 9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양쪽의 갈리아군은 완전히 차단되어 농성하는 갈리아인들은 지원군이 도착한 줄도 몰랐다. 전투는 기병전으로 시작되었고, 카이사르의 게르만 기병의 활약에 갈리아 기병은 퇴각했다. 기병전에서 패한 후, 갈리아인들은 공성기를 이용하여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재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이끄는 6만명의 갈리아 정예병이 다 완성되지 않은 로마군의 북쪽 포위망을 공격해왔지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보내 이들을 막게하면서 포위망 여기저기에 지원군을 보냈다. 북부에서 적이 강하게 공격해오자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북부 전선에 도착했다. 카이사르와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치열하게 싸웠고 카이사르는 기병대를 갈리아군 배후로 보내 그들을 격파하였다.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고 부관은 전사하였다. 6만명의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나머지 갈리아인들도 각자의 부족으로 패주하였다. 이를 안 베르킨게토릭스는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인 군단장이었다.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와 형제인 마르쿠스, 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전쟁 기간 동안 로마군이 3백만 명의 적과 싸웠으며, 그 가운데 1백만은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00개 부족이 복속되었으며,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 아바리쿰(부르주) 시의 전체 주민 총 40,000명이 살육당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 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푸르거-군티(Furger-Gunti)는 헬베티 군대의 병사 수가 60,000명이 넘는 것은 기록된 전술을 고려했을 때 전혀 있을 법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실제 수효는 총 이주민 수가 160,000명에 전투원 수는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델브뤽(Delbrück)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 갈리아 전쟁은 서유럽에 로마문화를 전파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갈리아 전쟁 이후, 갈리아는 빠르게 속주화되었고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정복한 전 지역을 "갈리아 코마타(Gallia comata)"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었다. 결국 갈리아 일대는 카이사르의 세력기반이 되어 그가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일조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각상.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켰고, 그 전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단 일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카이사르가 직접 저술한 「내전기」에서는 루비콘 도하가 단순히 아리미눔 도착 으로만 적혀있으며, 이때 카이사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ἀνερρίφθω κύβος)"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 주사위는 던져졌다 ( alea iacta est )"라고 썼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휘하의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넌 후, 제일 먼저 아리미눔에 입성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는 5개 대대를 떼어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티움을 공격하고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 해를 따라 피사우룸, 파눔,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1월 12일 쿠리오는 피사우룸, 1월 13일 파눔, 1월 14일에는 안코나까지 함락시키고 1월 15일 안토니우스도 아레티움에 입성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친척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전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임명해 2개 군단이 주둔한 카푸아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양자 회담을 벌이고 동시에 군단 해산을 제안하는 내용의 서한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냈다. 그리고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 로마를 버린 채 200명에 달하는 상당 수의 원로원 의원들과 각종 개인 재산과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등과 함께 노예, 하인들을 데리고 남하했으나 국고에 들어 있는 재산은 채 옮기지 못하고 도주했다. 이 때문에 국고 재산은 고스란히 남았고 1월 20일 쿠리오는 아구비움에 입성해 플라마니아 가도의 요충지를 얻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때 폼페이우스의 답장을 받았으나 그가 제안한 양자 회담을 묵살시키고 자신에게만 군단해산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게다가 그는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떠나는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은 그가 계속 본국에 군사력을 가지고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와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백인대장을 지내고 오리엔트 원정에도 참전한 루키우스 푸피우스가 아욱시뭄에서 군사를 이끌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에 실패하고 카이사르는 아욱시뭄 근처 킹쿨룸에서 보급을 해 2월 3일 아욱시뭄에 입성했다. 2월 5일 카이사르는 피르뭄에 입성하고 제12군단도 참여했으며 아스쿨라네움으로 행군했다. 이에 기원전 57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10개 대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오자 도망쳐버려 2월 15일 아스쿨라네움도 쉽게 함락되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불리우스 루푸스가 13개 대대가 되는 병력을 모아 코르피니움에 주둔했고 곧이어 아헤노바르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행군해 3.3개 군단에 달하는 33개 대대가 모일 예정이었다. 이에 루푸스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루케리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더 남쪽인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 근처의 술모나 주민들의 호응도 얻고 남프랑스 속주에서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22개 대대도 합류해 결국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아헤노바르부스는 붙잡혔다가 카이사르의 배려로 석방되고 2월 21일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에도 입성했다.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키케로는 "아군을 버리는 폼페이우스와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는 얼마나 다른가" 라며 카이사르에게도 편지를 보내 카이사르의 관용을 칭찬했다. 카이사르는 답변했다. “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은 믿어야 할거요. 그렇게 행동한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그리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 기쁘기 한량없소.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해도, 나는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브룬디시움으로 도망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일행을 이끌고 2월 25일 항구 도시인 브린디시움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에게 양자 회담을 통한 강화를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배신하는 짓을 벌일 수 없다며 강화를 거부했다. 6개 군단 60개 대대로 불어난 카이사르 군단이 오는 가운데 잦은 탈영으로 50개 대대로 줄어든 폼페이우스는 3월 17일 카이사르의 저지선을 뚫고 그리스로 본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무혈제패했지만 폼페이우스를 놓쳐 내전은 장기화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고, 폼페이우스의 7개 군단이 주둔한 이베리아 반도는 평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파비우스의 3개 군단과 합류하여 히스피니아로 진격했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진채를 공격하였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유인책에 빠져 위기에 빠졌으나 특유의 용맹을 발휘하여 위급에서 벗어났다. 카이사르군은 200명 가량의 적을 전사시켰으나 진채를 빼앗지 못하고 그들도 80명의 카이사르군을 전사시켰다. 갑자기 카이사르의 6개 군단은 세그레 강의 홍수로 고립되었고 군량보급도 차단되었다. 이런 상태로 한달을 버틴 카이사르는 운하를 파서 물길을 바꾸어 고립에서 벗어났고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9만명의 폼페이우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식량부족에 빠트리게 했다. 폼페이우스군의 군량이 부족해지자 현지병력의 탈영이 심해졌고 아프라니우스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군의 도주는 카이사르에게 계속 저지되었으며 그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폼페이우스군의 일개병사들은 카이사르에게 항복을 바랬고 아프라니우스의 아들마저 카이사르군과의 화해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자 페트레이우스는 화해를 거부하며 병사들의 전의를 다시 일깨웠고, 폼페이우스군 진영에 들어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식량부족으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 휘하 병사들의 군대해산을 명하고 모두 석방시켰다. 또 다른 히스파니아의 사령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싸워보지도 않고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히스파니아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법무관 레피두스를 시켜 독재관에 취임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그는 술라가 반역자로 규정하여 살생부에 올라 망명생활을 하는 자들에 대한 추방형을 폐지했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아헤노바르부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 마실리아 연합함대를 격파하였고 폼페이우스의 편을 든 마실리아는 결국 카이사르군에 항복하였다. 한편, 아티우스 바루스는 아욱시뭄에서 아프리카로 도망쳐 스스로 총독을 자칭한 다음, 정식 총독으로 임명된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지 못하게 막았다. 심지어 투베로의 병든 아들도 아프리카 땅에 상륙하지 못하게 했다. 카이사르의 부장 쿠리오가 이끄는 4개 군단은 시칠리아 점령을 완수한 뒤 아프리카에서 아티우스 바루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공격했다. 바루스군은 패했고 쿠리오는 카이사르군의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 라고 불리었다. 쿠리오의 군대에 아프리카인들이 퍼트린 역병이 퍼지고 탈영병도 몇 있었지만 쿠리오는 연설로 병사들을 단결시키고 코르넬리우스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누미디아왕 유바를 우습게 본 쿠리오는 유바가 렙티스 사람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군하였고, 유바왕의 부하 사부라가 소수의 군대를 지휘한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4개 군단과 함께 포위당하고 말았다. 쿠리오는 도주를 권하는 장교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렇게 외쳤다. "카이사르의 군대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수 없소" 이 말을 외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보병들도 모조리 몰살당했다. 바루스는 유바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살려주기를 요구했으나 유바는 몇명을 제외하고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려 갈리아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군과 맞섰으나 노련한 폼페이우스의 해군장수 리보에게 패하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후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기원전 48년 1월 4일에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배가 부족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직접 이끄는 제1진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으로 나누어 아드리아 해를 건너기로 했다. 제1진은 먼저 출발하여 폼페이우스 해군의 방해를 피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그리스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들은 1월 5일에 오리쿰을, 1월 7일에 아폴로니아를 점령했다. 폼페이우스 해군 총사령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군 제1진의 무사통과에 격분하여 해안경비체제를 강화했다. 심지어 총사령관인 비불루스가 배 위에서 자는 등 임전태세를 편 까닭에 카이사르군 제2진은 출항도 하지 못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의 지상군와 대치했으나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의 진영에 머무르던 비불리우스 루푸스를 폼페이우스에게 보내 강화를 제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수뇌진과의 타협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과 타협해 볼 생각으로 휘하 장수인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를 보냈다. 바티니우스의 제안에 폼페이우스군 병사들은 이에 반응하였으나 곧이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나온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바티니우스를 비난하자 병사들은 화가 나 창을 회담장에 던졌다. 이에 몇명의 카이사르의 장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라비에누스는 선언했다.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기 전에는 강화란 없다." 카이사르는 비불루스와 만나 회담을 벌이려 했으나 카이사르를 매우 싫어하는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만나기를 거절하고 리보가 카이사르와 회담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리보와의 회담으로 강화성사에 기대를 걸었으나 이것도 실패했다. 비불루스는 무리하게 해상에서 생활하다 건강이 나빠져 병사했다. 그가 병사한 후로는 폼페이우스 해군의 감시도 느슨해져서 안토니우스의 제2진도 브룬디시움을 습격한 리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탈리아를 떠나 3월 26일에 에피루스 북부의 항구 닌페움에 상륙하여 리수스를 점령한 뒤 4월 3일에 제1진과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2개 군단과 500기를 주고 마케도니아로 보냈고,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1개 군단과 200기를 주어 테살리아로, 사비누스에게도 5개 대대와 약간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로 보냈다. 그런다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진인 디라키움과 페트라를 포위했다. 군사의 수가 적음에도 폼페이우스의 진영보다 보루의 수가 많고 더 긴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렇게 몇 달간 대치한 뒤에 폼페이우스군은 말먹이가 부족해지자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공격하였다. 당시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으로 떠나 카이사르의 진영에는 총사령관이 없는 상태였다. 원래 카이사르가 직접 포위망 북부를, 안토니우스가 남쪽 포위망을 맡았는데 사령관이 없는 북부전선을 루키우스 술라의 조카이지만 카이사르파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지휘했다. 총 여섯군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폼페이우스군은 카이사르군의 뛰어난 분전으로 단 하나의 포위망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특히 카이사르의 백인대장 스카이바는 200명으로 폼페이우스군 25000명의 공격을 4시간이나 버텨냈으며 스카이바 자신의 방패에는 화살구멍이 120개나 뚫려있었다. 결국 푸블리우스 술라의 구원을 받아 폼페이우스군을 격퇴했으나 술라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술라가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했으나 술라는 총사령관이 없는 이상 그가 지시하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카이사르 진영에 로우킬루스와 에구스라는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알로브로게스족 귀족 출신 기병 장교가 있었는데, 그들은 휘하 기병들의 급료와 전리품을 강탈하여 부하들의 원망을 샀다. 결국 기병들이 카이사르에게 이들의 부정을 고발하자 카이사르는 형제를 불러 그들을 나무랐다. 전투가 끝나고 벌을 받을 것 같자 이 형제는 폼페이우스에게로 달아났다. 카이사르군의 첫 탈영병이었다. 기원전 48년 7월 10일 폼페이우스는 이들로부터 카이사르군의 정보를 듣고 방어설비가 약한 카이사르의 포위망 남쪽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함락시키며 카이사르군 장교인 마르켈리누스가 이끄는 제9군단을 격파하였다. 제9군단의 제1대대에서는 백인대장 6명 중 5명이 죽을 정도로 위기에 빠졌고,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개 대대의 구원을 받아 간신히 궤멸을 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진영을 공격함으로써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이 만든 측벽을 방벽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공격하였고 이로인해 폼페이우스가 구원병력을 데려올 수 있게 시간을 제공하게 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증강된 병력에 두려움과 공황상태에 빠진 카이사르군은 1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달아났다. 전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 포로를 조롱하고 모조리 죽였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거지인 디라키움 일대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그리스 동부에 위치한 테살리아로 유인하면서 7월 24일 도미티우스와 합류했다. 그리고 테살리아의 도시인 곤피스와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자 라리사를 제외한 모든 도시가 카이사르를 지지하였다. 카이사르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다시 강화를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망설이다가 파보니우스의 혹독한 비난을 받고 제안을 거절했다. 폼페이우스는 테살리아에서 스키피오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의 진영은 승리에 도취되어 전투에 관한 논의보다는 승리 후에 얻을 보상이나 직위, 카이사르파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아헤노바르부스와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가 취임하고 있던 최고 제사장에 자신이 더 적임자라고 논쟁을 벌였다. 렌툴루스는 자신이 가장 고령임을, 스키피오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의 장인임을, 아헤노바르부스는 수도에서의 명망을 들며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했다. 아티우스 루푸스는 아프라니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와 싸울때 휘하 병사들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라비에누스는 결전을 망설이는 폼페이우스에게 결전을 치를 것을 주장했다. "저들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했던 군대였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정예병사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자들이 건강을 잃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본토에 남겨졌습니다. 게다가 적군이 보유한 최고의 병사들은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양군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만났고 이때 카이사르군은 군단병이 22000명, 기병이 1000기였던 반면에 폼페이우스군은 군단병이 47000명, 기병이 7000기였다. 카이사르는 고지대에 있던 폼페이우스를 평원으로 이끌고 결전 준비를 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잠시 행군을 멈추어라. 그리고 그대들이 매일같이 바라던 적과의 전투를 생각하라!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때가 찾아왔다. 그대들의 마음은 이미 전장에 있지 않은가?”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기병력으로 카이사르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나의 작전에 귀를 기울이면 더욱 확고한 신념을 품고 전투에 임하게 될 것이오. 본인은 아군기병에게 양쪽 군대의 간격이 좁아지면 카이사르군의 우익으로 돌아 노출된 측면을 공격하고 후방의 제 3열을 포위하여 카이사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라고 명령하였소. 그렇게 되면 적은 우리군이 무기를 투척하기도 전에 패주하고 말것이오. 이 작전이 맞아 떨어진다면 우리 군은 군단의 피해도 없고 사상자도 거의 없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소. 우리의 기병이 우세하므로 어렵지 않게 승리할 것이오."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전술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전투에서 진다면 진영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이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장수들은 이에 따랐다. 폼페이우스의 속셈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고참 군단병 2000명으로 제4열 별동대를 편성하여 카이사르군 우익 뒷편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대들에게 전투의 승패가 달려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카이사르의 제10군단 수석 백인대장 크라스티누스는 비장한 연설을 하였다. "나의 부대에 있던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그대들이 총사령관 앞에서 약속한 성실함과 용맹함을 보여라.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전투가 될것이다. 이 전투가 끝나면 우리들의 총사령관은 지위를 되찾을 것이고, 우리는 자유를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을것이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를 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이시여, 나는 오늘 전장에서 쓰러지든 살아남든 장군의 치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크라스티누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파르살루스 전투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을 전진시키지 않음으로써 카이사르군이 두배의 거리를 달려오게 하여 그들의 체력을 떨어트리고 전열을 흩어놓으려 하였다. 폼페이우스의 부장 트라아리우스가 제안한 작전이었다. 이는 폼페이우스군이 움직이지 않으면 카이사르군은 무기를 들고 갑절의 거리를 달려가야하고, 따라서 폼페이우스군 앞에 도달하였을때 지쳐서 대열이 흩뜨려질테니깐 그때 맞아 싸우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의 갈리아 전쟁 7년의 오랜 전투 경험이 그들이 폼페이우스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었다. 그들은 중간지점에서 잠시 진격을 멈춰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돌격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폼페이우스 군단병은 이 돌격을 그럭저럭 버텨냈다. 곧 폼페이우스는 기병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수적에서 열세인 카이사르 기병은 못 당해내는 것처럼 후퇴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이 카이사르군 배후로 돌아가는 순간 카이사르는 제4열 창병 부대를 출격시켰다. 카이사르의 창병 부대는 정면에서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막아섰고 후퇴했던 카이사르 기병도 적군 기병의 배후를 포위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은 곧 격파되었고 이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전투를 단념하고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은 이때까지 카이사르군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으나 새 병력을 교체 투입하는 카이사르의 전술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다. 패잔병들은 진영이 있는 언덕으로 달아났으나 카이사르는 즉시 이 언덕을 포위하였다. 폼페이우스 패잔병들은 곧 항복했으며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이들의 귀가를 선선하게 허락했다.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6000명에서 15000명, 포로는 총 24000명에 달했으나 카이사르군의 손실은 고작 200명에 불과했다. 다만 카이사르군 백인대장은 30명이나 전사하였다. 이것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최종 결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압승으로 끝났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적군 사령부에 도달했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렌툴루스를 비롯한 정적들의 탐욕과 사치에 경악하여 이렇게 외쳤다. "모두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런 다음 바로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한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뗏목에 불을 붙인 역청과 황을 실어 여러차례 카이사르군에게 보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 소식에 크게 사기가 올라간 카이사르군을 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 고참병은 카시우스의 배를 나포하고 그들을 내쫓았다. 카시우스 휘하 폼페이우스군은 그때까지 파르살루스 전투 결과가 카이사르군이 퍼트린 거짓소식인줄 알았다고 한다.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사령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레이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을 조종하는 궁중관료들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때 그는 그의 배에 불을 붙였는데 그 불이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버렸다. 그 와중에 폼페이우스 암살 주모자이자 이집트의 실권자인 포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부하이자 군권을 장악한 아킬라스도 공주 아르시노에에게 지휘권을 빼앗기고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카이사르와 아르시노에의 부하 가니메데스는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그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아르시노에군과 합류하였다. 전장은 시내를 벗어나 나일 강의 삼각주(델타)로 옮겨졌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해 봄에 나일 강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알렉산드레이아의 내전에서 승리한 데 축하하였다. 파라오의 배는 400척의 다른 배를 대동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로마법에서는 오로지 로마 시민 사이의 결혼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결혼할 때까지 무려 14년동안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이어나갔으며(로마인의 시각에서 이는 간통이 아니었다) 카이사리온의 아버지도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차례 이상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로마 바깥의 테베레 강을 건너면 있는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지냈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 veni vidi vici )라고 적었다.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이사르의 숙적 소 카토, 아프라니우스, 라비에누스 등의 폼페이우스 잔당이 쿠리오를 격파한 누미디아왕 유바와 연합하여 카이사르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상륙하여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와 싸웠다. 이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누미디아군의 맹공에 큰 위기에 처했다. 이 공격에 카이사르 기병은 반격하지 못하고 적의 포위를 막으려 버티고 있었다. 카이사르 보병과 라비에누스군이 곧 맞붙었고 누미디아군은 투척무기를 던졌고 카이사르 쪽에서도 필룸을 던져 응수했다. 카이사르군이 전투에서 불리해지며 원형진을 이루었다. 이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을 향해 어린 새내기 군대라고 놀렸다. 이 조롱에 격분한 카이사르 제10군단의 한 백인대장이 투구를 벗어 던지며 라비에누스에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한 다음 카이사르의 정예인 제10군단의 힘을 보여주겠다면서 그에게 창을 던졌다. 라비에누스는 말에 창이 맞자 굴러 떨어졌으며 누미디아군의 엄호를 받으며 퇴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몇몇 카이사르군은 두려움에 달아났고 카이사르는 한 기병을 붙잡으며 외쳤다. "적들은 저기에 있단 말이다!" 결국 카이사르는 최대한 길게 진형을 늘어트리며 적을 공격했고 라비에누스의 누미디아군을 흩어놓았다. 페트레이우스가 1500명의 누미디아 기병으로 카이사르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루스피나 전투에서 힘들게 승리한 카이사르는 마우레타니아와 연합하여 유바가 없는 누미디아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마우레타니아에는 시티우스라는 로마인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그를 회유했다. 카이사르는 탑수스를 공격하였고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은 군대를 양분하여 카이사르를 봉쇄했다.(탑수스는 바다에 면한 곶 끝에 위치하면서도 육지쪽에는 석호가 펼쳐져 있는데 2킬로미터의 가늘고 긴 육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탈출을 막으려면 군대를 양분해야 했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는 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의 군대를 상대하였는데 스키피오군은 중앙에 보병, 좌우익에 기병, 극좌우익에는 코끼리를 배치하였다. 카이사르는 중앙에 기병을 배치했고, 좌우익에는 보병, 극좌우익에는 제5군단 병사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코끼리들은 제5군단 병사들의 투창에 전선에서 이탈했고 카이사르 기병은 적군 보병을 뚫고 적군 좌우익의 배후를 포위하였다. 전방에는 카이사르 보병이 배후에는 카이사르 기병이 폼페이우스군을 포위하였고 신속히 그들은 궤멸되었다. 이후 유바왕은 도주했고 자마에서 쫓겨나자 동행한 페트레이우스와 동반자살했다. 총사령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사로잡히는 것을 면하기 위해 자살했다. 아프라니우스와 파우스투스 술라는 카이사르군에게 잡혀 죽었고 라비에누스와 아티우스 바루스는 그와중에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우티카에 있던 카토는 자결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했다. 이에 키케로는 「카토」를 저술하여 카토의 행위를 찬양하였고 카이사르는 「안티 카토」를 저술하여 이를 반박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시찰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게 개선식을 치르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일레르다 전투 이후, 카이사르에게 평정된 히스파니아는 카이사르파 총독 카시우스의 실정으로 폼페이우스파로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고자 파비우스와 페디우스를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히스파니아에 직접 다시 출정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 기병대를 지휘하던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군을 유인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뒤로간 것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기병대가 붕괴된 것으로 잘못 보아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 패인이었다. 라비에누스는 전사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도주하다가 카이사르군에 잡혀 죽었다. 폼페이우스의 둘째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만이 히스파니아에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동료 집정관, 그해말 파비우스가 병사하여 이후 보궐집정관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에 선출되었다.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가 문다에서 승전한 데 기념하며 로마 건국 기념일인 4월 21일에는 대규모 경기와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 이어 그는 기원전 46년 임기 6개월이었던 독재관 임기 규정을 변경,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2년 동안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0022 - transparent background.png|섬네일|카이사르는 주화에 처음으로 자신의 흉상을 새겼다. 유언장 작성-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미리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이어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언의 공동 집행자로 지명했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복지 정책- 카이사르는 국가에서 곡물의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카이사르는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 47년에서 44년까지 카이사르는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 달력 개정- 카이사르는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은 매우 오랜 세월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로 길어졌다.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가령 영어의 July 등)은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에서 기원한 것이다. 수도 재개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다. 포룸 로마눔의 내부에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바실리카 율리아가 지어졌다. 카이사르는 사이프타 율리아, 마르켈루스 극장(훗날,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은 조카를 기리기 위해 극장의 이름에 조카의 이름을 붙였다.)도 건설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완공하지 못한 건축물은 옥타비아누스가 완성했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황제들은 그를 따라 포룸을 건설 및 발전시켰다.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로마의 교육과 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재건- 카이사르는 로마세계의 도시개발을 꾀하여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도시들을 재건 및 건설하였다. 이후, 제정시대에 카르타고는 크게 발전하여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금융 개혁- 카이사르는 금융 개혁도 실시하였다. 이자율의 제한을 연리 12% 이하로 정하였고 물가가 폭등한 내전 이전으로 담보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원로원 체제 약화-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개혁도 진행시켰다. 갈리아를 비롯한 속주의 유력자들에게 원로원의석을 제공하여 원로원의 정원을 900명으로 늘였다. 이는 키케로나 마르쿠스 브루투스 같이 속주민과의 융합을 싫어하는 보수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일관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던 원로원 최종권고를 완전히 폐지해 버려, 원로원의 강권을 박탈했다. 사법 개혁- 카이사르는 사법 개혁도 실시하였다. 앞서 말한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하여 재판도 받지 않고 로마 시민이 처형당하는 것을 금지한 셈프로니우스 법 을 부활시켰다. 배심원의 자격조건을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여 배심원 구성비율을 둘러싼 다툼을 종식시켰다. 카이사르는 재판이 나온 뒤의 항소를 민회가 아닌 종신 독재관인 카이사르 자신에게 제기하도록 바꾸었다. 그리고 정치범에 대한 최고형을 사형이 아닌 추방형으로 규정했다. 교통 규제- 카이사르는 혼잡한 로마의 교통을 규제했다. 낮에 수레가 다닐 수 없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함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수레가 밤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률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을 들으며 잠을 자야했다.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의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이것은 갈리아전쟁 당시 카이사르에게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은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각한 본국의 경계는 북이탈리아를 포함한 것임을 보여준다. 치안 대책- 카이사르는 기존에는 없었던 치안대를 만들어 치안대책을 강구했다. 카이사르 이전에 치안대가 없던 까닭에 로마에 정치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치안대를 만들어 이를 방지하였다. 그 밖의 개혁-그 밖에 늪지를 개척하는 사업과 오스티아 항만 개조, 해방노예 등용을 추진했다. 카이사르의 암살 종신 독재관 취임- 기원전 44년 2월 15일 그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고, 성대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공화정은 붕괴하고 제정이 사실상 시작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에게서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웬 무례한 짓인가!(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고 썼다. 겁을 먹은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암살자들이 칼을 들어 독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고 한다. 독재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였다고 말했노라고 썼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 플루타르코스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은 라틴어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인데,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실제로는 라틴어와 영어가 혼용된 문장 "Et tu, Brute? Then fall, Caesar."의 앞부분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대사에 라틴어를 쓴 것은 당시 카이사르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며, 단지 이 희곡을 쓴 당시 이미 대중적인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언가 말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들이 건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브루투스와 그의 패거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나아가 사랑하는 도시를 향해 "로마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다. 그러나 연회장에서 도망쳐나온 의원들이 이미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소리쳐 말해서 로마 시민들은 각자 자기 집에 문을 걸어잠그고 틀어박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반란자들은 절대권력자의 죽음에 기쁨을 터뜨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 특히 카이사르와 함께 많은 전쟁을 치른 고참병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카이사르 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유증을 통해 그에게 유산의 2/3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유서에는 포로로마노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에서 한명당 300세르테르티우스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유산의 2/3은 그리 많지않은 돈이였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1600여 년 뒤 셰익스피어가 쓴 것처럼("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들어보시오...") 연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의 일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게다가 장례 연설 중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가 났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스에 막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전쟁 자금과 병사가 필요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이름이 지닌 명분과 정당성도 있어야 했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 (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 (Divi filius)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암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 캅카스, 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카이사르에게는 무덤이 없다. 그의 유해는 포로 로마노에서 화장되었는데, 불길이 꺼져갈 무렵 내린 세찬 비에 유해를 태운재가 씻겨갔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간혹 카이사르가 뇌전증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 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또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소발작(absence seizure)을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그의 발작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카이사르 사후에 태어난 사람인 수에토니우스의 글이다. 그가 뇌전증 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의학 역사가들은 그의 병이 뇌전증성 발작을 유발하는 저혈당증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C. Iulii Caesaris quae extant, 1678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쟁기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이어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라고 평가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전량 회수 및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할아버지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어머니 아우렐리아 첫 번째 아내 코수티아(파혼) 두 번째 아내 코르넬리아 킨나, 킨나의 딸, * 딸 율리아, 대 폼페이우스의 후처로 시집보냄 * 양자 아우구스투스 클레오파트라 7세 *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6세 카이사리온 큰누나 율리아 카이사리아,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결혼, 퀸투스 페디우스와 재혼 작은누나 율리아 카이사리아 매부 아티우스 * 조카딸 아티아 * 조카사위 옥타비우스 * 조카사이 필리푸스, 아티아의 두번째 남편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 기원전 100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7월 12일 로마의 서민지역인 수부라 지구에서 탄생. 기원전 85년 - 아버지 사망. 집정관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 기원전 82년 - 술라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피. 미누키우스 총독의 군대에 지원하여 참모가 됨.(~81년) 기원전 80년 - 미누키우스의 레스보스섬 공략전에 참가. 기원전 78년 - 술라 사망. 로마로 귀국. 기원전 77년 - 변호사 개업을 하고 당시 권력자들을 고소하지만 실패. 기원전 76년 - 고소 실패로 로도스 섬으로 도피 유학을 가던중 해적의 습격으로 포로가 되 몸값을 주고 석방후 해적 소탕. 기원전 73년 - 로마로 귀국해 제사장 및 대대장이 됨. 기원전 70년 - 회계감사관에 취임(~69년). 먼 에스파냐에 부임. 귀국후 원로원 의원이 되다. 기원전 68년 - 고모의 장례식에서 대담한 추도연설을 행함. 아내 코르넬리아 사망. 기원전 65년 - 안찰관에 취임. 자비로 아피아 가도를 보수하고 화려한 검투시합을 개최. 기원전 63년 - 최고 제사장에 취임. 카틸리나 역모사건 에 대해 키케로, 소 카토와 논전. 기원전 62년 - 법무관에 취임. 후처 폼페이아에 얽힌 귀족 클라우디우스의 스캔들 때문에 아내와 이혼. 기원전 61년 -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현지인인 발부스를 등용. 대서양 연안을 평정. 기원전 60년 - 카이사르, 귀국하여 이듬해 집정관에 출마. 폼페이우스·크라수스와 손잡고 삼두정치 결성. 기원전 59년 - 집정관에 취임. 농지법과 공직자에 대한 율리우스 법을 가결. 기원전 58년 - 갈리아 전쟁 1년째. 카이사르, 갈리아 총독에 부임. 헬베티족과 아리오비스투스 격파. 기원전 57년 - 갈리아 전쟁 2년째.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에 진출하여 벨가이 반란군을 격파하고 각 지방을 평정. 기원전 56년 - 갈리아 전쟁 3년째. 카이사르·크라수스·폼페이우스의 루카 회담. 갈리아 각 지방을 평정. 기원전 55년 - 갈리아 전쟁 4년째.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대승.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 어머니 아우렐리아 사망. 기원전 54년 - 갈리아 전쟁 5년째.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암비오릭스의 반란. 카이사르, 반란군을 격파. 딸 율리아 사망. 기원전 53년 - 갈리아 전쟁 6년째. 갈리아 북동부의 모든 부족을 평정.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갈리아 대반란이 일어남. 카이사르, 게르고비아를 공격하러 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격파. 갈리아 전쟁기 전7권 간행 기원전 51년 - 알레시아 공방전의 전후 처리로 모든 부족을 복종시키고 평정 갈리아의 로마화 에 착수. 기원전 50년 - 북이탈리아 속주로 귀환. 기원전 49년 - 원로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 를 결의. 1월 12일 라벤나를 떠난 카이사르,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도하("주사위는 던져졌다!"). 내전의 시작. 일레르다 전투 승리. 이듬해인 기원전 48년도 집정관에 선출. 기원전 48년 - 카이사르, 그리스에 상륙.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 카이사르,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이집트인들과 벌인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 기원전 47년 - 『내전기』 전3권 완성. 소아시아에 상륙, 카파도키아 지방의 젤라에서 파르나케스를 격파("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기원전 46년 -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군을 대파. 로마에 귀환. 네 차례의 개선식을 거행. 내전이 사실상 종결. 각종 개혁 실시. 율리우스력(태양력) 채택. 국립 조폐소를 창설. 기원전 45년 -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반카이사르파가 봉기하자 히스파니아로 떠나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 기원전 44년 - 2월 원로원과 민회, 카이사르를 종신 독재관에 임명. 3월 15일 카이사르, 원로원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 1차 출처 ; 카이사르 본인의 작품 Forum Romanum Index to Caesar s works online (라틴어 원문과 영어 번역) omnia munda mundis 갈리아 전기 하이퍼텍스트 ; 고대 역사서 , Book 13 (영어 번역) Cassius Dio, Books 37–44 (영어 번역) Plutarch on Antony (영어 번역, Dryden판) Plutarch The Life of Julius Caesar (영어 번역) Plutarch The Life of Mark Antony (영어 번역) Suetonius The Life of Julius Caesar. (라틴어 원문과 영어, cross-linked the English translation by J. C. Rolfe) Suetonius The Life of Julius Caesar (J. C. Rolfe 영어 번역, 수정판) 2차 출처 네이버캐스트 - 율리우스 카이사르 분류:기원전 100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44년 죽음 분류:로마 공화정의 집정관 분류:로마 원로원 의원 분류:독재관 분류:고대 로마의 장군 분류:고대 로마의 작가 분류:고대 로마의 역사가 분류:육군 군인 분류:해군 군인 분류:회고록 작가 분류:인물신 분류:로마 출신 분류: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분류:친위 쿠데타를 한 지도자 분류:암살된 국가원수 분류:암살된 군인 분류:살해된 작가 분류:자상으로 죽은 사람 분류:기원전 1세기 통치자 분류:기원전 1세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