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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이십사절기, 24절기, 二十四節氣)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년(太陽年)을 태양의 황경(黃經)에 따라 24등분하여 계절을 자세히 나눈 것으로 절후(節候)·시령(時令)이라고도 한다. 황경이란 태양이 춘분점을 기점으로 황도를 움직인 각도로, 황경이 0°일 때를 춘분으로 하여 표와 같이 15°간격으로 24절기를 구분한다. 절기와 절기 사이는 대략 15일 간격이며, 양력 날짜는 거의 같지만 음력으로는 조금씩 달라지므로 가끔 윤달을 넣어 계절과 맞추고 있다. 24절기는 절(節)과 중(中)으로 분류되는데, 입춘 등 홀수번째 절기는 절, 우수 등 짝수번째 절기는 중이 된다. 사계절은 입춘·입하·입추·입동 등 4립(四立)의 날에서 시작된다. 태양이 황도상을 진행하는 속도는 일평균 0.9856°이며, 태양의 겉보기 지름은 약 32 이므로 하루에 지름의 두 배 가까이 움직이는 셈이 된다. 더욱이 이 속도는 일정하지 않으며, 1월 초가 가장 빠르고, 7월 초가 가장 느리며, 그 속도는 평균치에서 약 3% 정도 달라진다.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이유는 케플러 법칙 때문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춘분점에서 출발하여 황경 30°, 60°, ...와 같이 30도 간격으로 12개의 점을 생각하여 태양이 각 점을 통과하는 순간을 중(中)이라고 하였으며, 또 중간의 황경 15°, 45°, ...의 점을 태양이 통과하는 순간을 절(節)이라 하여 이 중과 절을 합쳐서 24절기로 불렀다. 그리고 각 계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 그것을 달력에 표시하였다. 사실 중국에서는 24절기 시각을 구하는 것이 그 당시에 달력을 만드는 데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국도 중국의 역법을 도입하였기 때문에 24절기를 달력에 표시하였는데, 계절을 나타내는 좋은 표시가 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달력에 표시하고 있다. 2016년 11월 30일에 중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Khí.svg|섬네일|right|360px|황경을 구분으로 나타낸 24절기(한자와 베트남어(꾸옥응으)로 표기) + 24절기 황경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날짜 315° 입춘(立春) 2월 3일 또는 2월 4일 330° 우수(雨水) 2월 18일 또는 2월 19일 345° 경칩(驚蟄) 3월 5일 또는 3월 6일 0° 춘분(春分) 3월 20일 또는 3월 21일 15° 청명(淸明) 4월 4일 또는 4월 5일 30° 곡우(穀雨) 4월 20일 또는 4월 21일 45° 입하(立夏) 5월 5일 또는 5월 6일 60° 소만(小滿) 小満 5월 20일 또는 5월 21일 75° 망종(芒種) 6월 5일 또는 6월 6일 90° 하지(夏至) 6월 21일 또는 6월 22일 105° 소서(小暑) 7월 6일 또는 7월 7일 120° 대서(大暑) 7월 22일 또는 7월 23일 135° 입추(立秋) 8월 7일 또는 8월 8일 150° 처서(處暑) 処暑 8월 22일 또는 8월 23일 165° 백로(白露) 9월 7일 또는 9월 8일 180° 추분(秋分) 9월 22일 또는 9월 23일 195° 한로(寒露) 10월 8일 또는 10월 9일 210° 상강(霜降) 10월 22일 또는 10월 23일 225° 입동(立冬) 11월 7일 또는 11월 8일 240° 소설(小雪) 11월 22일 또는 11월 23일 255° 대설(大雪) 12월 7일 또는 12월 8일 270° 동지(冬至) 12월 21일 또는 12월 22일 285° 소한(小寒) 1월 5일 또는 1월 6일 300° 대한(大寒) 1월 20일 또는 1월 21일 천문학적으로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등 4개만 큰 의미가 있을 뿐, 나머지 20개는 특별한 명칭과 의미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천문학에서는 춘분점, 하지점, 추분점, 동지점 등 4개만 있고, 나머지 20개에 대응하는 명칭이나 용어가 없다.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의 궤적은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태양이 춘분점이나 추분점에 있을 때 적도(0°)에 있으며, 하지점에 있을 때 북회귀선(북위 23.5°) 에 도달하며, 동지점에 있을 때 남회귀선(남위 23.5°)에 도달한다. 태양이 북위 11.75°, 즉 적도와 북회귀선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입하가 아니라, 곡우이다. (적위 참고) 이렇게 되는 이유는, 태양의 적위 δ는 황경 λ에 선형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케플러 법칙과 지구의 적도반경과 극반경의 차이 등에 따른 효과를 무시하면, 로 나타낼 수 있으며(자전축의 기울기 ε = 23.5°), ε가 크지 않으므로 이는 로 근사할 수 있다. 이를 λ에 대한 식으로 바꾸면 이 된다. 이기 때문에 황경 0°의 춘분 이후 최초로 태양이 북위 11.75°에 오는 절기는 황경 45°의 입하가 아닌 황경 30°의 곡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절기는 날씨와 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날씨와 계절은 기온 및 강수량 변화 등 여러 가지 환경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며, 각 절기에 맞는 날씨과 계절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일 뿐, 항상 절기에 맞춰 날씨와 계절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더하여, 절기의 이름과 그에 대한 설명은 중국 주나라 때 화북 지방의 날씨에 맞춰 지었기 때문에, 현대 한반도의 날씨와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근래에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온이 상승했기 때문에, 각 절기의 날씨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결국, 절기는 계절 변화의 시기를 가늠할 때 참고할 지표일 뿐 절대적인 구분 기준으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태음태양력 복날 「절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역법 분류:중국의 문화 분류:한국의 문화 분류:일본의 문화 분류:베트남의 문화 분류:명수 24 |
조선 세종 (朝鮮 世宗, 1397년 5월 15일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군주이며 언어학자이다.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명칭인 세종대왕 (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다. 세종 은 묘호이며,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존시를 합치면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 된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며, 조선의 왕 중에서 왕세자에게 양위를 하지 않고 훙서한 최초의 왕이다.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과 어머니 민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은 과학, 예술, 문화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왕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퍼내었지만 글을 읽지 못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롯한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당뇨, 성병(이 시대에는 생식기와 관련된 병이면 성병이라고 불렀다.) 등을 이기지 못하고 1450년, 눈을 감게 된다. 1418년 9월에서 1450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 9월에서 1422년 5월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 5월에서 1422년 6월까지 한 달 간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이 한 달 간 2차 대리청정을 하였고 그 후 1422년 6월에서 1442년 1월까지 친정을 하였으며 1442년 1월에서 1450년 3월 승하할 때까지 첫째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형 효령대군 이도 (李祹)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과 민제의 딸 원경왕후 민씨의 칠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뒤에 친 여동생 정선공주와 남동생 성녕대군 종이 태어난다. 그밖에 그가 태어난 이듬해에 이복 동생인 효빈 김씨 소생의 경녕군 비가 태어났다. 처음 그의 이름은 막동으로 지었다가 뒤에 이름을 도(祹)로 고쳤다. 1400년(정종 2) 2월 아버지 정안대군 이방원이 왕세자가 되면서 그는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부왕의 즉위 후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부왕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아서 숨겼다고 한다. 그 뒤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인 성리학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숨겨둔 책들을 찾아내어 독서를 계속하였다.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군(孝寧君)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대광보국 충녕대군(大匡輔國 忠寧大君)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동생이며 부왕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誠寧大君)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1418년 음력 2월 4일 14세로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李禔)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18년에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 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降封)하였다.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틀 뒤인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말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화했다. 또한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던 이조판서 황희는 1413년 초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南原)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1422년(세종 4년) 부왕 태종은 그를 소환하도록 권고,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즉시 유배에서 불러들였다. 그는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말하는 호인(好人)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세종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용했다. 1423년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고 민심을 얻었다. 세종의 신임을 얻은 그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과 비호를 받아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郡)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지역에 6진(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조선 앞바다는 그로 인해 얼마간 왜구로부터 잠잠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실책 정찰대 선발 때 제비뽑기를 선발 방법으로 채택해 사기를 떨어뜨렸고, 결국 의욕 없이 나간 정찰대 중 180명이 왜병의 기습에 죽고 말았다.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3포를 개항(1426년)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통해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무역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 1433)과 함길도의 6진(六鎭, 1437)을 개척하게 하였다. 세종어제 훈민정음, 목판본 월인석보 제1권.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정창손, 이개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를 연구하게 된다.(라고 알려져 있으나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는 문자 연구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려 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허용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세종은 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을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을 만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마침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 있자 일행은 그를 만나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그는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 16세기 지방 하층민도 한글 사용, 암클, 언문 등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언어학자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한, 그래서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 일이다. 이때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신하 중에는 최만리와 하위지가 있었는데, 최만리는 청백리로 인정받았음에도 세종을 높이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폄하되었다.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다.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세종은 이들 재상들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소갈증 등을 앓던 세종은 맹사성, 황희, 권진, 김종서 등의 재상들에게 일정 부분의 권한을 위임하여 대신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풍질(風疾)·안질(眼疾) 등을 평생 앓았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이다. 여비(女婢)들의 다툼에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했고, 종의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였다.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희는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자신을 향해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면박하자 도리어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 에 전한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년) 87세로서 은퇴하였다. 세종대의 또다른 정승은 맹사성으로 그는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 신뢰하여 황희, 권진과 함께 그를 중용하였다. 또한 세종 후반기에는 황희 등이 천거한 김종서 등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기도 했다.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계속 중국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을 보냈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부왕 태종대에는 진헌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태종 때의 처녀 조공은 40명이었지만 세종 12년까지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공녀는 74명이었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사정하여 조공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금은광산에서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다 산사태 등이 발생하고 국가의 부가 빠져나갔으며 세종 즉위 후 1430년(세종 12년)까지 74명의 공녀가 명나라에 바쳐졌다.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심한 것을 들어 명나라에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조공 면제 요청은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그러나 세종 사후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다시 부활했고,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중종 때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진다.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 혼상(渾象),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437년. 천문 기구 겸 시계),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漏壺)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 등에 명해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曆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하였다. Waterclock.jpg|섬네일|290px|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현대에 와서 청동 물통 부분만 재구성한 모형이다.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그리고 1436년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서적 편찬에 힘썼다.1431년과 1446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화포(地字銃筒)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했다.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케 하였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한편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정책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田稅制度)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복지정책에도 힘을 쏟았는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남편을 잃은 여자 등 약자들에게 담당 관사에서 쌀을 지급해주도록 했고, 장애인과 노인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정을 한 명씩 내주어서 봉양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은 시각장애인 복지정책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예로 유명한 시각장애인 점복가에게 1435년 벼슬을 준 일이 있다. 세종은 “지화가 국가의 미래를 점치는 일과 왕실 혼인에 자주 참여하여 점복을 잘 치니 벼슬을 내리는 것이 어떠냐”고 정승 황희와 맹사성에게 물었다. 황희가 정4품으로 한정하자고 제안하여 시각장애인 점복가 지화와 이신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러자 사간원에서 반대한 것을 세종은 사옹원의 벼슬은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정당하다고 신하들을 설득시킨 일이 있었다. 한편 시각장애인 독경사는 명통시에서 활동했는데, 명통시는 시각장애인단체로 장애인에게 쌀, 황두를 지원했다. 어려서 그의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요절하였다.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이 갑작스럽게 죽은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한편 그가 즉위한 직후부터 삼촌 회안대군 처형과 사촌형 의령군 이맹종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1422년에는 의령군 이맹종을 홍주에서 여주로 옮겼다가 이맹종 집안의 재산을 회안대군의 딸들에게 나눠주었고, 1422년 4월 사헌부대사헌 성엄 등은 이숙번, 양녕대군, 김한로, 의령군 이맹종 등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이후 계속 의령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려져 결국 1423년(세종 5) 세종은 의령군에게 자진을 명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2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446년 왕비 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헌인릉 서쪽 구룡산에 안장했다. 뒤에 세종이 합장할 빈 관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세종은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소갈증 (당뇨병) 합병증과 중풍등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54세를 일기로 영응대군의 사택인 동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죽기 전 급하게 우찬성 김종서를 고명대신으로 삼고 임종 시 그가 있어 주기를 바랐으나, 세종의 승하후 일주일 남짓이 지나서 왔다. 참고로 다른 한자의 공정왕(恭靖王)은 태조의 2남(방과)이며, 태종의 형이었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定宗 / 정종 이란 묘호는 숙종 7년, 1681년에 받았다.) tomb 1.jpg|섬네일|300px|세종의 능 (영릉).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의 대모산 근처인 구룡산에 안장되었다가 뒷날 이장하였다. 1450년 (문종 1) 4월 21일 (음력 3월 10일) 시호(諡號)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하여 묘호를 ‘세종(世宗)’이라고 정하였다. 세종의 세(世)는 번성 을 의미한다. 6월 30일 (음력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시호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인 1469년(예종 1)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이장 후 1년도 안돼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되었다. 이때 비석과 석물은 구룡산의 것은 방치하고 새로이 조성되었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해 있으며 소헌왕후와 한 봉분안에 함께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조선 세종대왕은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다. 1978년 수도여자사범대학이 그의 묘호를 따 세종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가 출범하였다. 1972년 구룡산 기슭에서 농사짓던 한 농부에 의해 상석, 석물, 석수, 장명등 등이 발견되고 초장지 1km 지점인 내곡동 산 13번지에서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초장지의 비석과 석물 등은 1974년 5월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졌다. 세종이 충녕대군 이었던 시절에 지나칠 정도로 독서만 하여, 태종이 “세자 방의 모든 책을 치우고 쉬게 하라”고 하자 매우 상심하다가 우연히 병풍 틈에서 발견한 ‘구소수간(歐蘇手簡)’을 기뻐하며 닳도록 읽는다. 세종은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책을 1,000번 읽었다고 한다. 세종은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이 있었으며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48년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그린 국가표준영정이나 이당 김은호(金殷鎬)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비공식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젊은 시절에는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고 둔한 모습이었으나 노년에는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세종은 아이를 많이 낳을 정도로 후궁을 많이 거들어 두었고, 매우 정력가이다. 정력가이기에 성병 중 하나인 임질에 걸려서 일평생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 당뇨병)·풍질(風疾) 등을 평생동안 앓았다고 한다. 하지만 뒤젔다 세종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실록 92권 (1441, 세종 23년) 에서의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 쪽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재위 32년 중 20여 년간은 시각에 장애를 느꼈으며 승하(훙서) 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정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아버지 태종이 외척을 숙청한 반면 세종대왕은 이들과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정실인 소헌왕후 심씨는 세종의 고모부인 심종의 조카딸이다. 심종은 세종의 고모 경선공주의 남편으로 심온의 동생이다. 세종대왕의 세 번째 동서인 노물재는 세종의 이종 사촌 형제가 된다. 심온의 세 번째 사위 동지돈녕부사 노물재는 교하 노씨로 우의정 공숙공 노한의 아들이며 성종 때의 영의정 노사신의 아버지이다. 심온의 외손자 노사신은 그의 이종질이자, 처조카가 된다. 심온의 사돈이며 노물재의 아버지인 노한은 세종의 이모부로서, 태종의 장인인 여흥백 문도공 민제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처남인 심준은 외사촌 매제가 된다. 심온의 장남 영중추원사 심준은 민제의 셋째 아들인 지돈녕부사 여원군 민무휼의 사위가 된다. 증조부 조선 추존왕 환조(1315~1361) 증조모 조선 추존왕비 의혜왕후 * 조부 조선 제1대 국왕 태조(1335~1408) * 친조모 신의왕후 한씨(1337~1391) * 계조모 신덕왕후 강씨(1356~1396) ** 아버지 조선 제3대 국왕 태종(1367~1422) **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 누나 정순공주(貞順公主, 1385~1460) *** 자형 청평부원군 이백강(淸平府院君 李伯剛, 1381~1451) *** 누나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1455) *** 자형 평양부원군 조대림(平壤府院君 趙大臨, 1387~1430) *** 누나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1415) *** 자형 길창군 권규(吉昌君 權跬, 1393~1421) *** 형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 원래는 세자였으나, 여러한 비행으로 쫓겨나 대군이 됨 *** 형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 *** 여동생 정선공주(貞善公主, 1404~1424) *** 매제 의산군 남휘(宜山君 南暉, ?~1454) *** 남동생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 - 요절 ***장인 청천부원군 심온(靑川府院君 沈溫, 1375~1419) ** 장모 삼한국대부인 안씨(三韓國大夫人 安氏, ?~1444) 세종 (1397 ~ 1450 / 재위 1418 ~ 1450) - 31년 6개월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 10월 12일 (음력 9월 28일) ~ 1446년 4월 19일 (음력 3월 24일)) * 적1녀 정소공주(貞昭公主) - 요절 * 적1남 왕세자 향(王世子 珦) → 조선 제 5 대 국왕 문종(文宗) * 자부 현덕왕후 권씨 (顯德王后 權氏) * 적2녀 정의공주(貞懿公主) * 부마 연창위 안맹담(延昌尉 安孟聃) * 적2남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 → 조선 제 7 대 국왕 세조 * 자부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 적3남 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 * 자부 부부인 정씨(府夫人 鄭氏) * 적4남 임영대군 구(臨瀛大君 璆) * 자부 군부인 남씨(君夫人 南氏) * 자부 제안부부인 최씨 * 자부 부부인 안씨 * 적5남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 * 자부 영가부부인 신씨(永嘉府夫人 申氏) * 적6남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 자부 완산부부인 최씨(完山府夫人 崔氏) * 적7남 평원대군 임(平原大君 琳) * 자부 강녕부부인 홍씨(江寧府夫人) * 적8남 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 * 자부 대방부부인 송씨(帶方府夫人 宋氏) * 자부 춘성부부인 최씨(春城府夫人 鄭氏) * 자부 연성부부인 김씨(延城府夫人 金氏) 후궁 영빈 강씨(令嬪 姜氏) * 서1남 화의군 영(和義君 瓔) * 자부 군부인 박씨(郡夫人 朴氏) 후궁 신빈 김씨(愼嬪 金氏) * 서2남 계양군 증(桂陽君 璔) * 자부 정선군부인 한씨(旌善郡夫人 韓氏) - 인수대비의 언니 * 서3남 의창군 공(義昌君 玒) * 자부 양원군부인 김씨(梁源郡夫人 金氏) * 서4남 밀성군 침(密城君 琛) * 자부 풍덕군부인 민씨(豊德郡夫人 閔氏) * 서6남 익현군 연(翼峴君 璭) * 자부 김제군부인 조씨(金堤郡夫人 趙氏) * 서9남 영해군 당(寧海君 瑭) * 자부 임천군부인 신씨(林川郡夫人 申氏) * 서10남 담양군 거(潭陽君 璖) - 요절 * 옹주(翁主) 요절 * 옹주(翁主) 요절 후궁 민정혜빈 양씨(愍貞惠嬪 楊氏) * 서5남 한남군 어(漢南君 𤥽) * 자부 양원군부인 권씨(梁源郡夫人 權氏) * 서7남 수춘군 현(壽春君 玹) * 자부 영천군부인 정씨(榮川郡夫人 鄭氏) * 서8남 영풍군 전(永豊君 瑔) * 자부 군부인 박씨(郡夫人 朴氏) 후궁 숙빈 이씨(淑嬪 李氏) * 서2녀 정안옹주(貞安翁主) * 부마 청성위 심안의(靑城尉 沈安義) 후궁 귀인 박씨(貴人 朴氏) 밀양박씨 박강생(朴剛生)의 딸 후궁 귀인 최씨(貴人 崔氏) 후궁 숙의 조씨(淑儀 曹氏) 후궁 소용 홍씨(昭容 洪氏) 후궁 상침 송씨(尙寢 宋氏) * 서1녀 정현옹주(貞顯翁主) * 부마 좌익공신 영천부원군 윤사로(佐翼功臣 鈴川府院君 尹師路) 후궁 사기 차씨(司記 車氏) * 옹주(翁主) 요절 후궁 상식 황씨(尙食 黃氏) 후궁 전찬 박씨(典贊 朴氏) 연도 방송사 제목 배우 1973년 KBS 세종대왕 남일우 1980년 KBS 파천무 유순철 1983년~1984년 MBC 뿌리깊은 나무 한인수 1990년 KBS2 파천무 남성우 1994년 KBS2 한명회 김원배 1996년~1998년 KBS1 용의 눈물 안재모 1998년~2000년 KBS1 왕과 비 송재호 2007년 KBS2 사육신 김준식 2008년 KBS2 대왕 세종 김상경, 이현우, 김도현 2011년 SBS 뿌리깊은 나무 한석규, 송중기, 강산 2011년~2012년 JTBC 인수대비 전무송 2015년~2016년 MBC 퐁당퐁당 Love 윤두준 2016년 KBS1 장영실 김상경 2016년 SBS 육룡이 나르샤 남다름 2016년 채널 A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 김경응 연도 제목 배우 1962년 주유천하 김운하 1964년 세종대왕 최남현 1978년 세종대왕 신성일 2008년 신기전 안성기 2012년 나는 왕이로소이다 주지훈 대한민국 문명의 지도자 - 2011년 (문명 V)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새겨진 만원권. 세종의 이름이 붙은 것 세종과학기지 는 남극 킹조지 섬에 있는 과학 기지이다. 세종대왕상 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문해율 증진을 위해 힘쓴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는 상이다. 세종특별자치시 (世宗特別自治市)는 종전의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과 남면 일대에 건설된 행정중심복합도시이다. 세종로 (世宗路)는 도로명이다. * 세종로 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속한 법정동의 명칭이다. * 세종대로 (世宗大路)는 서울특별시 서울역 사거리를 기점으로 하여 숭례문, 서울시청, 세종대로 사거리, 교보 타워, 세종문화회관, 정부서울청사를 지나 광화문 앞까지 이르는 종로구에 있는 도로이다. * 세종문화회관 은 세종대로에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다. 세종마을 은 경복궁 서쪽 일대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실제 이 지역에 속해 있는 통인동은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다. 21세기 세종계획 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1998년에 시작하여 2007년에 국립국어원이 마무리한 중장기 국어 정보화 사업이다. 이 사업은 한국어 전자 사전 개발 사업, 한국어 말뭉치 개발 사업, 한민족 언어 정보화 사업, 전문 용어/문자코드 표준화 사업, 글꼴 개발 사업, 정보화 인력 양성 사업 등 여러 하위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최종 결과는 2007년 12월 11일에 발표되었다. 세종 솔로이스츠 는 문화 단체로 줄리어드 음대에 재직하고 있는 강효 교수의 책임 아래 운영되고 있는 앙상블 단체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는 문화 단체로 세종대왕의 업적을 추모하며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하였다. DDG-991 세종대왕 은 대한민국 해군의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급 구축함 의 1번함이다. 세종초등학교 는 대한민국의 사립 초등학교이다. 세종고등학교 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소재의 고등학교이다. 세종과학고등학교 는 대한민국의 과학고등학교이다. 세종대학교 는 대한민국의 4년제 사립대학이다. 세종관 은 청와대 본관 앞쪽 왼쪽 건물의 이름이다. 7365 세종 (세종별)은 일본 아마추어 천문가 와타나베 가즈오(渡辺和郎)가 1996년에 발견하여 도쿄 천문대학 교수 후루가와 기이치로 박사의 자문을 받아 세종대왕의 천문학의 업적을 기려 세종이라고 명명한 소행성이다. 세종대왕릉역 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위치한 경강선의 전철역이다. 기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사용하던 1000환, 500환 지폐의 도안.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사용하던 대한민국의 1백원권 지폐의 도안. 1973년부터 사용 중인 대한민국의 1만원권 지폐의 도안. 대한민국의 기념일 한글날 한글을 반포하였으리라 여겨지는 날을 한글 창제를 기리는 날로 삼음.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을 기려 스승의 날로 삼음. 명나라 《세종실록》 서정민. 2008. 《세종, 부패 사건에 휘말리다 (조말생 뇌물 사건의 재구성)》. 살림. (). github.com/eomseongsoo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세종대왕 기념관 (사단법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 탄신 600돌 기념 디지털 한글박물관 한글 재단 한글과 컴퓨터 「세종대왕 - 제1부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한국사傳, KBS, 2008.1.26. 방영 「세종대왕 - 제2부 소리가 하늘이다.」한국사傳, KBS, 2008.02.02. 방영 세종대왕 분류:세종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문자 발명가 분류:한글학자 분류:조선의 언어학자 분류:조선의 유학자 분류:조선의 군인 분류:조선의 과학자 분류:사상가 분류:조선의 작가 분류:조선의 시인 분류:조선의 저술가 분류:조선의 음악가 분류:훈민정음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전주 이씨 분류:1397년 태어남 분류:1450년 죽음 분류:공녀 분류:조선 태종 분류:조선 문종 이도 분류:15세기 한국 사람 분류:15세기 한국의 군주 |
울림이 없는 방에서의 전 지향성 인공 소리 음향학 (音響學)은 소리, 초음파, 그리고 초저주파음파 (즉 기체, 액체, 고체내 모든 물리적 파동)을 연구하는, 여러 분야에 걸쳐 관련있는 과학이다. 음향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를 음향학자(또는 음향 물리학자)라고 한다. 기술 분야에서의 음향학 응용을 가리켜 음향 공학이라고 한다. 음향 물리학자와 음향 공학자들의 관심사 사이에 꽤 많은 공통점이나 상호 작용들이 존재한다. 듣는 것은 동물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말하기는 인류발전과 문화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음향학이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에 (예를 들어 음악, 의학, 농업, 산업, 복지 등) 영향을 끼치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니게 된다. 예술, 공예, 과학, 그리고 기술이, 수많은 다른 지식 분야처럼, 서로 다른 분야를 자극하여 전체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음향학을 나타내는 단어 “acoustic”은 “듣기의, 듣기 위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단어 ακουστικός ( akoustikos ), 그리고 “들리는”이라는 뜻의 ακουστός ( akoustos ) , 그리고 “듣는다” 라는 뜻의 동사 ακούω ( akouo ) 에서 유래되었다. 라틴어 동의어로 “sonic”이 있다. 음향학자들이 가청 주파수 바깥 쪽까지 연구 범위를 확장한 후에, 그것들을 각각 “초음파”, “초저주파”로 확인하게 되었고, “음향학”이란 말은 제한 없이 모든 주파수 영역을 다루는 말이 되었다. 가장 오래된 음향학 학설은 만물의 근원은 수 이다. 이것은 피타고라스의 음계의 이론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일현금으로 실험하여 일정한 비율로 현을 분할하여 음계를 형성하는 것을 알아냈다. 중국의 동주 시대에는 삼분손익법이라는 오래된 책관자에 있으나 음향에 대한 기술은 이것보다 훨씬 옛날에도 있었다. 음향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때는 17세기에서부터 18세기경이며 서양은 음률 이론과 악기를 제작하는 연구를 하였다. 19세기 때는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가 《음향이론》을 저술하고 헬름홀츠가 음향학의 수학적 강의 를 만들어 음향생리와 음향심리에 대해 연구했다. 섬네일 음향학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수천년동안의 예술로서 음악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가 음 간격의 특성에 관심을 보이기 이전까지 과학적 방법으로 명확히 연구되지는 않았다. 피타고라스는 몇몇의 음의 간격이 다른 것들보다 더 아름답게 들리는 이유를 알고 싶어했고, 수학적 비율을 이용해 해답을 찾아냈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는 소리가 공기의 압축과 팽창들로 구성되어있다고 이해했다. 그는 “도달해서 옆의 공기를 때린다…”라는 말로 파동 운동의 특성을 매우 잘 표현하였다. 기원전 20년경, 로마의 건축가이자 기술자인 비트루비우스는 건축 음향학의 시작으로서 간섭, 반향, 잔향에 대해 논의로써 극장에서의 음향학적 특성을 다루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과학혁명 시대와 이후에 걸쳐 음향의 물리학적인 이해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1642)와 메르센 (1588-1648) 들은 독립적으로 진동하는 현에 대한 완전한 법칙을 발견하였다.(이것은 2000년 전에 피타고라스가 시작한 작업이다.) 갈릴레오는 “파동은, 울리는 몸체의 진동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며, 공기를 통해 전파되고 귀의 고막에 도달하여 자극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소리로 해석한다.” 라는 주목할 만한 언급으로써 생리음향학, 심리음향학의 시작을 열었다. 공기 중의 소리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이 1630년과 1680년 사이에 메르센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와중에 뉴턴 (1642-1727)은 고체에서의 파동 속도의 관계를 유도하여 물리음향학의 초석을 마련하였다.(프린키피아, 1687) 18세기에, 파동 전파이론 기술(記述)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익힌 위대한 수학자들에 의해서 음향학이 큰 진전을 보인다. 19세기 음향학의 위대한 거장은 생리 음향학 영역을 정리한 독일의 헬름홀츠와 “The Theory of Sound” 란 기념비적인 작업에 많은 공헌을 하여 이전의 지식들을 결합시킨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이다. 또한 19세기에, 휘트스톤, 옴, 그리고 헨리 등이 전기와 음향학 사이의 유사성을 연구하였다. 20세기는 그때까지 제자리 걸음이던 전반적인 과학 지식에 대해, 기술적 적용들이 싹트던 시절이었다. 첫 번째 적용은 건축 음향학으로써 사빈 사람들의 기공(機工) 작업이고, 이로써 많은 다른 것들이 뒤따르게 된다. 수중 음향학은 1차 세계대전에서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녹음과 전화는 세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자기술과 컴퓨터의 사용으로 인하여 정밀하고 정교한 수준의 소리 측정과 분석이 가능해지고 초음파는 의학과 산업에서 전혀 새롭게 적용되었다. 또한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 변환기(음향 에너지를 생성하고 수용하는)가 발명되어 사용되었다. 소리 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공기 또는 사물의 진동을 뜻한다. 또한 공기 중 전파 속도는 상온 20도의 상태에서 343.7m/s이다. 음압 은 소리의 진동에 의해 발생되는 압력이다.그 단위는 (N/m²), (µbar) 혹은 (Pa)이다. 소리의 진동안에서 음압치는 대략 최소 가청치(약 0,00002Pa)로부터 최대 가청치(약 100Pa)에 달한다.폭 넓은 음압치를 더 잘 얻기 위해서 대부분의 경우 음위가 사용된다. 음위 는 관계음압과 측정된 음압의 20배 로그화된 비율이다. 그 단위는 (dB)이다. 관계치는 f 20µPa의 소리 안에서의 최소 가청치이다. 청각 기관 청각 범위 발성 기관 발성 폭 * 베이스 * 바리톤 * 테너 * 알토 * 메조 소프라노 * 소프라노 |
calendar 1871-72.jpg|right|250px|섬네일|1871~1872년 힌두 달력의 한 페이지 역법 (曆法은 천체의 운행 등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시기를 밝히는 방법이다. 시령 은 흔히 절기 라고도 부르며, 세시와 요일, 일식, 행사일 등을 아울러 이른다. 이러한 역법을 표기한 문서가 달력이다. 유의어로 기년법 (紀年法)이 있으며 이는 천문학적 기년법을 가리키는 역법 외에 사회적 기년법, 종교적 기년법, 정치적 기년법 등으로도 사용된다. 달을 기준으로 한 것은 삭망월이라고 하고, 계절이 순환하는 주기(오늘날에는 태양이 일주하는 주기)를 태양년이라고 한다. 삭망월은 2이다. 아칸 달력 아르메니아 달력 아시리아 달력 바하이력 벵골 달력 베르베르력 불멸기원 태음력 콥트 달력 에티오피아 달력 회계 연도. 게르만력 그레고리력 히브리력 힌두교 달력 인도국립력 ISO 주 이란 달력 아일랜드 달력 이슬람력 일본 달력 자바 달력 주체연호 율리우스력 쿠르드 달력 리투아니아 달력 마야 달력 네팔 달력 민국기원 수정 율리우스 력 룬 달력 타밀 달력 타이 음력 타이 양력 티베트 달력 조로아스터 달력 코사 달력 요루바 달력 중국력 유대력 아랍력 * 바빌로니아 달력 * 아시리아 달력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 아즈텍 달력 바빌로니아 달력 비잔틴 달력 이집트력 프랑스 혁명력 그레고리력의 역법 개혁. 세계력 다리우스 달력 (화성) 아룬드력 가운데땅의 역법 시간대 태음태양력 교회력: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지키는 절기(Seasons)를 요약한 달력. 《시간의 지도 달력》 E.G.리처즈 지음, 이민아 옮김, 까치, 2003 |
"법이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법학 (法學)은 법률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법학에서는 법의 개념을 정리하고 법률의 종류를 분류하며 법의 효력, 적용과 해석 등을 연구한다. 과거 대한민국의 경우, 법학이 사회문제와 법현실을 외면하고 오로지 법률학에만 치중한 결과 개념법학, 체제법학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사법시험을 합격을 위한 수험과목 정도로 전락했다는 수험법학이라는 오명이 제기되되기도 했으나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올바른 접근과 방법론에 따른 연구성과가 축적되고 있으며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학은 실제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을 전제로 실정법의 의미를 인식하고 체계화하는 실용법학과 법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지향하는 이론법학(기초법학)으로 나뉜다. 법해석학은 실용법학의 대표적인 부분으로, 실제로 제정된 법이나 관습법 등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에 비해 이론법학은 이러한 실정법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철학적인 고찰이나 일반이론의 탐구, 역사적인 흐름의 연구 등을 수행한다. 법해석학 공법 * 헌법학 헌법총론, 기본권론, 통치구조론, 헌법재판론 * 행정법학 행정법총론, 행정소송법, 국가보상법(국가배상법), 경찰법, 교육법, 환경법, 방송법 * 조세법학 * 재정법학 * 사회법학 민사법 * 민법 민법총칙, 물권법, 담보물권법, 채권총론, 계약법, 사무관리, 부당이득, 불법행위, 가족법(친족법, 상속법) * 상법 상법총칙, 회사법, 상행위법, 보험법, 해상법, 유가증권법(수표법, 어음법), 증권거래법 * 신탁법 * 노동법 * 소비자보호법 * 지적재산권법 특허법, 저작권법 * 경제법 * 민사소송법, 민사집행법 * 국제사법 형사법 * 형법 형법총론, 형법각론 * 형사소송법 국제법 법정책학 * 입법정책학 * 사법정책학 법철학 법사상 법사학 * 법제사학 ** 로마법, 교회법 ** 중국법제사, 한국법제사 * 법사상사 비교법학 * 대륙법 ** 독일법 독일법제사、독일 헌법, 독일 민법, 독일 형법 ** 프랑스법 프랑스법제사、프랑스 헌법, 프랑스 민법, 프랑스 형법 ** 일본법 ** 대한민국법 * 영미법 ** 미국법 미국법제사, 미국 헌법 * 이슬람법 법사회학 형사정책학 (대분류) * 형사학 ** 범죄학 ** 형벌학 * 정책학 ** 형사정책학 (소분류) 법 경제학 실정법체계 * 자연법·실정법 * 공법·사법·사회법 * 실체법·절차법 * 민사법·형사법 * 국내법·국제법 법률 |
세계 7대 기적(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 순) 기자의 대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 정원 아르테미스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마우솔로스의 영묘, 로도스의 거상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세계 7대 불가사의 (世界七大不可思議)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낸 가장 기적적인 건축물 일곱 가지를 일컫는다.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목록들이 작성되어 왔다. 가장 유명한 목록은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해 낸 세계의 불가사의이다. 다만 중국의 만리장성, 인도의 타지마할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보면, "세계"라는 말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던 헬레니즘 문명권을 뜻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기원전 약 3세기를 전후로 하여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보고 들어서 알던, 주변의 발달된 문명 국가들이 이룩한 웅대한 건축 및 예술 작품을 일컫는다. 그리스의 시인 안티파트로스가 지은 시에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가 언급된다. 그런데 일곱 개의 이른바 " 기적물 "은 시대에 혹은 작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퀴로스의 궁전, 바빌론의 바벨탑이 경우에 따라서 7대 기적물에 손꼽히기도 한다. 원래 파로스의 등대 대신 바빌론 성벽(이슈타르의 문)이 들어갔지만, 6세기에 교체되었다. 다음 목록은 전형적으로 꼽히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목록이다. Cheops BW 1.jpg|섬네일|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피라미드. 대피라미드 (→ 이집트 문명) 바빌론의 공중 정원 (→ 바빌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 알렉산드리아 → 파로스등대) 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 에페소스) 마우솔로스의 영묘 (→ 할리카르나소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 올림피아, → 제우스) 로도스의 거상 (→ 로도스) 이들 중 대피라미드가 가장 오래 된 건조물인데, 유일하게 지금까지 건재하다. 로마의 콜로세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일부 작가들은 중세에 지어진 불가사의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래 목록의 건축물들 중 상당수는 중세에 지어진 것이 아니지만, 중세의 불가사의로 잘 알려진 것들이다. 전형적인 중세의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스톤헨지 콜로세움 콤 엘 쇼카파의 카타콤베 (Catacombs of Kom el Shoqafa) 만리장성 영곡탑(靈谷塔) 하기야 소피아 피사의 사탑 이것들 외에 아래와 같은 것이 들어간다. 타지마할 카이로 요새 엘리 성당 클루니 수도원 State Building from the Top of the Rock.jpg|섬네일|위오른쪽|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미국토목학회는 현대의 불가사의 목록들을 작성했다. 불가사의 착공일 완공일 위치 채널 터널 1987년 12월 1일 1994년 5월 6일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 해협 CN 타워 1973년 2월 6일 1976년 6월 26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930년 1월 22일 1931년 5월 1일, 1967년까지 세계 최고층 빌딩. 100층을 넘는 최초의 건물 미국 뉴욕주 뉴욕 시 금문교 1933년 1월 5일 1937년 5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이타이푸 댐 1970년 1월 1984년 5월 5일 파라나 강, 브라질과 파라과이 사이 델타 계획/ 자위더르 간척 사업 1920년 1997년 5월 10일 네덜란드 파나마 운하 1880년 1월 1일 1914년 1월 7일 파나마 지협(地峽) 2007년 7월 7일 스위스의 영화제작자이자 탐험가인 베르나르드 베버의 뉴 세븐 원더스(New 7 Wonders)’ 재단이 포르투갈 리스본의 경기장에서 ‘신(新) 세계 7대 기적’을 발표했다. 1999년부터 200여 개의 유적지를 접수받아 21개의 후보지를 선정한 뒤 인터넷과 휴대전화 메시지를 이용하여 여론조사를 통한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전화로는 복수 응답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여론조사는 과학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확실히 비과학적"). 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의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치첸이트사의 마야 유적지 만리장성 타지마할 의 고대도시 페트라 로마 콜로세움 New 7 Wonders 분류:명수 7 분류:고대 기술사 |
핵무기 확산 현황 CTBT 비준국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包括的 核實驗 禁止 條約은 모든 핵실험을 금지해 새로운 핵무기 개발과 기존 핵무기의 성능 개선을 막기 위해서 마련한 것이다. 1996년 9월 유엔 총회에서 조약안이 채택됐으며 5대 핵강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를 포함해 154개국이 서명했다. 유엔의 부속 기관인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기구(CTBTO)가 조약 가입 국가의 시찰과 감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조약은 발전용 또는 실험용 원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 라고 지명한 전 세계 44개국 모두가 서명하고 비준해야 발효한다. 2004년 현재 44개 중 영국과 프랑스 등 36개국이 비준했다. 5개국은 서명만 하고 비준은 하지 않았으며, 인도, 파키스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비준은 물론 서명조차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서명과 비준을 모두 마쳤다. CTBT에 반대하는 국가들은 핵무기 감축이 선행되지 않을 경우 핵보유국의 기득권만 보장한다며 조약을 비판하고 있다. 이 조약은 모든 공간(우주 공간, 대기권, 수중, 지하)의 핵실험 실시, 핵폭발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에서 금지하고 있지 않은 지하 핵실험도 금지 대상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핵무기 보유 개발 경쟁이 전개되고, 다양한 핵 실험이 행해졌다. 그러나 핵무기의 위험과 잔인함이 서서히 드러나자, 민중의 반핵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1955년 8월 6일에는 처음 《원자수소폭탄 금지세계대회》가 개최되는 등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세계적으로 핵실험 반대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1959년 9월, 핵보유국이 주체가 되어 《제네바 군축회의》의 전신인, 《10개국 군축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군축위원회의 성과로서 1963년 8월, 미국, 영국, 소련에 의해,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하 핵실험 금지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1994년 1월, 제네바 군축 회의는 지하 핵실험 금지를 포함한 본 계약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은 장기간 계속 되었으나, 인도 등의 반대에 의해 회의에서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에 대한 세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호주가 중심이 되어 이 조약 초안을 유엔 총회에 제출하고 1996년 9월, 압도적인 다수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이 조약의 발효는 1996년 6월 시점에서 《제네바 군축회의》의 구성국이자 국제원자력기구의 세계 에너지 원자로 와 세계의 연구용 원자로 에 게재 되어있는 44개국 모두의 비준이 필요하다. 제 14조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미국(클린턴 행정부는 1996년 9월에 서명했지만, 당시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상원의 비준을 반대하였고, 이후 부시 행정부도 핵 폭발을 수반하지 않는 "임계 핵 폭발"을 실시하여 세계적인 비판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 비준을 권고 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이란, 인도, 이집트,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파키스탄 8개국이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발효되지 않고 있다. 조약 채택 이후 1998년 5월, 인도,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하여, 핵 보유를 선언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스라엘, 이란, 미얀마의 핵 보유 의혹 등이 조약 자체를 유명무실화시킬 우려되고 있다. 임계전 핵실험은 동 조약 채택 이후에도 미국과 러시아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슈퍼컴퓨터 모의 핵실험으로서, 미국은 오바마 정부에서도 4회나 실시했다. 동 조약의 핵실험 정의에 포함되지 않아서, 핵실험 자체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핵확산방지조약(NPT)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TBT)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기구( Comprehensive Nuclear-Test-Ban Treaty Organization)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 준비위원회( Comprehensive Nuclear-Test-Ban Treaty Organization Preparatory Commission) CTBT 홈 페이지 분류:미발효 조약 분류:핵무기 분류:1996년 분류:비핵화 운동 분류:1996년 체결된 조약 분류:제106대 미국 의회 |
켈로그-브리앙 조약 (Kellogg-Briand Pact)은 1928년 8월 27일 미국의 국방장관 프랭크 켈로그 (Frank Billings Kellogg)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 (Aristide Briand)의 발기에 의하여 파리에서 15 개국이 체결한 전쟁 규탄 조약으로서, 서문과 전문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 1 조에 따르면, 조약에 가담 비준한 국가는 자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이나 국제 외교 정치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포기하는 것을 조약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훌륭한 도덕적 이념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조약 위반의 경우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가입국인 독일과 일본이 1940년대에 세계 대전의 주범으로 등장하였을 때, 이들 국가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다만 서류상 규탄만을 할 뿐이었다. 1939년에 이르기까지 6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현재 이 조약은 국제법상 효력을 상실하였다. 조약의 발기자인 켈로그는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2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로카르노 조약 분류:1928년 분류:평화 조약 분류:국제관계사 분류:미국의 역사 분류:20세기 프랑스 분류:프랑스의 대외 관계 분류:국제법 분류:캘빈 쿨리지 행정부 분류:1928년 프랑스 분류:1928년 체결된 조약 분류:1929년 발효된 조약 분류:침략범죄 |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 건물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투르크메니스탄에 존재했던 청동기 시대의 문화이다.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Victor Sarianidi)가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1976년 발표). 박트리아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아무다리야 강 유역을 이르는 그리스어 지명이며, 마르기아나는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마르구시 주(주도는 메르브)의 그리스어 이름이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는 1970년대 후반 사리아니디가 당시 소련에서 주관한 발굴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델바르진(Delbarjin), 다실리 오아시스(Dashly Oasis), 토홀로크 21(Toholok 21), 고누르(Gonur), 켈렐리(Kelleli), 사펠리(Sapelli), 자르쿠탄(Djarkutan) 등 많은 발굴지에서 대형 건축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성벽과 성문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에 대한 보고는 대부분 소련 학술지에 국한되어 소련 말기까지 서방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 고고학)결과에 따라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문화는 기원전 약 3 천 년기의 마지막 세기(21세기)에서부터 2 천 년기의 초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기원에는 학계의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 또 그 쇠퇴 원인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독특한 유적과 유물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몇세기 후 자취를 감춘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문화의 지리적 범위는 꽤 넓어서 이란 남동부, 발루치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 유적이 발견된다. 고고학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발루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이 이 문화의 심장부일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Lamberg-Karlovsky 참조). 도장을 비롯한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유물이 인더스 문명의 유적과 이란 고원,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주민들은 밀과 보리를 수리 재배(irrigation farming)하는 정착인들이었다. 북쪽 스텝 지방의 안드로노보 문화의 유목민들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인상적인 거대 건축 기술, 청동기 도구, 도자기, 반보석 장신구 등은 당시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 세계 문명사). 2001년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유적지에서 조그만 석제 도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독특한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이를 문자로 해석해 박트리아 마르기아나는 독특한 문자까지 발달시킨 명실상부한 문명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새겨진 형상이 초기 그림 문자 단계인지 아니면 진짜 문자체계의 발달을 나타내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도장은 시리아-아나톨리아 지역,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만 지역, 인더스 문명의 도장과는 기조(基調)와 재료에서조차 구별되기 때문에 이들이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는 그 주민이 인도-이란인이었다는 가설로 주목을 받고 있다. 언어학에서 인도-이란어군은 인도-유럽어족의 큰 계열 중 하나로 현재 이란에서 사용되는 페르시아어, 인도에서 사용되는 힌디어 등 여러 언어 집단의 조상이다. 인도이란 조어를 사용한 인도-이란인들은 인도-유럽 조어를 사용하던 초기 인도-유럽인 집단에서 갈라나와 동쪽으로 갔다고 생각된다 (→ 비교 언어학). 사리아니디 자신도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인들이 인도-이란인들이라는 주장을 하며 많은 유적과 유물을 조로아스터교의 모체가 되는 종교 의례의 흔적으로 해석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일부 건물들은 원(原)조로아스터교의 신전으로 해석하고 있다. Sarianidi, V. I. 1976. "Issledovanija pamjatnikov Dashlyiskogo Oazisa," in Drevnii Baktria , vol. 1. Moscow Akademia Nauk. Lamberg-Karlovsky, C. C. 2002. "Archaeology and Language The Indo-Iranians," in Current Anthropology , vol. 43, no. 1, Feb. Chicago Univ. of Chicago 분류:타지키스탄의 역사 분류:우즈베키스탄의 역사 분류: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 분류:아프가니스탄의 역사 분류:박트리아 분류:아시아의 청동기 문화 분류:아프가니스탄의 유적 |
니케아 공의회 (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 Nicaea , 현재 터키의 이즈니크) 황제의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의 공의회이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이 논의되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교회(공교회)의 정치적 외연이 확대되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의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국가통일을 위하여 기독교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으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니케아에 소집하였다. 당시 동방 교회의 주교가 1천명, 서방교회가 8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회의 내용은 주로 아리우스 논쟁, 즉 아버지인 하느님과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어떠냐는 것이었다. 의사내용(議事內容)은 아리우스파, 알렉산드로스파, 중간파(오리게네스 주의파)의 3파로 나뉘어 논의되었는데, 난항을 거듭한 결과 아버지와 아들을 동질(호모우시오스)로 보는 니케아 신조(오늘날의 니케아 신조와는 다소 다름)가 채택되어 아버지와 아들을 이질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삼아 일단 결말을 보았다. *부활절 일자문제 (동방은 유월절 지키고, 서방은 주일을 중시했다.) 그러나 이 회의로 교리논쟁이 해결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후에 더욱 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회의에 있어서 황제의 권력이 교회내 의 문제에 개입하는 악례(惡例)를 남긴 것은 주목할 만하다. 부활절을 춘분후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제정. 알리스터 맥그래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p.223 니케아 분류:로마 가톨릭의 역사 분류:325년 기독교 분류:325년 비잔티움 제국 분류:아리우스파 |
응집물질물리학 (凝集物質物理學은 물질의 응집된 상의 물리적인 특성을 다루는 물리학의 분야다. 응집물질물리학에서는 물리 법칙을 이용하여 이러한 상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양자역학, 전자기학, 통계역학 법칙을 많이 이용한다.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응집된 상의 예로는 액체나 고체 같은 것을 들 수 있고, 조금 더 특이한 응집된 상으로는 일부 물질을 저온으로 냉각시켰을 때 볼 수 있는 초전도 상이나 원자 격자의 스핀이 이루는 상인 강자성, 반강자성 상, 초저온 원자계에서 볼 수 있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물 등이 있다. 응집물질물리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여러 실험적인 방법으로 물질의 특성을 측정하기도 하고, 이론물리학 기법을 이용하여 물리적인 성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학적인 모형을 개발하기도 한다. 응집물질물리학은 다양한 현상과 대상을 연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활발한 분야 중 하나다. 미국의 물리학자 중 약 3분의 1이 응집물질물리학자로 분류되며, 응집물질물리학 분과는 미국물리학회에서 가장 큰 분과이다. 이 분야는 화학, 재료과학, 나노기술과 겹쳐 있으며, 원자물리학, 생물리학하고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응집물질물리학은 고체 물리학에서 나왔는데, 고체 물리학은 물리학의 주요 하위분야로 간주되고 있다. 응집물질물리학이라는 용어는 필립 앤더슨이 1967년 기존에 "고체 이론" 이었던 그의 연구 그룹 이름을 바꿀 때 만들어 낸 것이다. 1978년 미국 물리학회의 고체 물리학 분과는 응집물질물리학 분과로 개명되었다. 이 분야를 응집물질물리학이라고 부르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고체 연구를 위해 개발된 개념과 기술 중 많은 부분이 유체계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기 도체내의 전도 전자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진 유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양자유체를 이룬다. 사실 전자들이 응축하여 흩어짐 없이 흐를 수 있는 새로운 유체가 되는 초전도 현상은 저온에서 3He가 초유체로 되는 현상과 매우 비슷하다. 양자 마당 이론 재료과학 분류:재료과학 분류:물리학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
Lupa Capitolina 로물루스 (Romulus)는 전설적 로마의 건립자이며 초대 왕이다. 전설에 의하면, 로물루스는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전쟁의 한 영웅인 아이네아스(Aeneas)의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라티누스(Latinus)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로물루스에 관한 전설은 로마의 고역사가 파비우스 픽토르(Fabius Pictor)의 설에 의한 것이다. 파비우스의 설에 의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후손은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롱가( Alba longa )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다. 누미토르( Numitor )와 아물리우스 ( Amulius )라는 형제는 씨족의 상속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동생인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장자권을 무시하고 무력을 써서 씨족의 우두머리가 된 후, 심지어 형의 딸 레아 실비아( Rhea Sivia , 혹은 일리아 Ilia )를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으로 삼아 결혼을 못하게 함으로써 누미토르의 가계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다.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은 성직자라는 종교적 위치덕분에 사회에서는 존경받았지만, 평생 동정과 신전의 불을 지킬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물로스와 레무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늑대에게 길러졌다고 전해진다.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로마황제들이 여기에서 살기를 좋아했으며 그 궁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가축을 치는 시종 파우스툴루스는 갓난아이들을 제거하라는 아물리우스의 명에 따라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테베레 강에 띄워 보냈다. 한편 비탄에 잠긴 실비아는 테베레 강에 투신자살 하였다고 한다. 아이들을 실은 바구니는 얼마후 강가로 떠밀려가 멈추어 섰다. 때마침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늑대 어미는 칭얼거리는 아이들에게 젖을 물렸으며, 그리고 딱따구리가 다른 먹을 것을 날아 주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파우스툴루스는 그의 처 라렌티아와 함께 아물리우스의 명을 거역하고 몰래 자신의 집에서 쌍둥이를 양육하였다고도 한다. 하여간 무사히 성장한 이들은 카피톨이라는 일곱개의 언덕에 도시를 건설했고, 이 도시가 고대 로마이다. 분류:로마 신화 분류:쌍둥이 분류:형제자매 분류:기원신화 분류:야생아 |
《 아이네이스 》()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의 제목이다. 아이네이스는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아스의 유랑을 노래한 서사시로서 라틴어로 쓰인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서사시는 전 12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틴어 6각운으로 쓰여졌다. 베르길리우스는 서사시의 주제와 신화적 많은 자료들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빌어 왔다. 특히 서사시의 구성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전반 6 편은 오디세이아(모험)를 그리고 후반 6 편은 일리아스(전쟁)를 전범으로 삼고 있다. 신화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아이네이스가 담고 있는 역사적 요소로는 로마의 건립을 칭송하고 신화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작품이기에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이후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 단테와 함께 3대 서사시 작가로 불리게 된다. 서사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로는 아이네아스, 디도, 투르누스, 알렉토, 라티누스 등등. 트로이의 영웅들과 그들이 이탈리아에 정착하기까지의 항해를 노래한다. 트로이에 적대심을 갖고 있는 유노는 트로이가 함락된 후 목숨을 건져, 아이네이스 지휘아래 시칠리아로 피신하는 트로이 함대를 파멸 시키려고 한다. 바람의 신 아이올루스는 유노의 명령으로 트로이 함대가 풍랑에 휩쓸리도록 하지만, 넵투누스의 개입으로 함대는 구출되어 카르타고항으로 피신을 한다. 유피테르는 베누스에게 트로이 유랑민이 라비니움에 정착한 후, 알바 롱가를 거쳐 로마를 건설하게 되리라 예언한다. 메르쿠리우스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트로이 유랑민에게 호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편 아이네이스는 사냥군으로 변장한 어머니 비너스를 만나 카르타고와 디도에 관해 정보를 얻는다. 얼마 후 아이네이스와 그가 이끄는 유랑민은 디도로부터 환영을 받음과 동시에, 디도는 비너스의 영향으로 아이네이스에게 호감을 갖는다. 환영 만찬회에서 디도는 트로이의 최후와 아이네이스의 7년간에 걸친 유랑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 줄 것을 청한다. 아이네이스는 트로이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이른바 트로이 목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와 그리고 이와 관련된 라오콘의 비극에 대해서 언급된다. 시논이 목마를 열자 그속에 숨어 있던 아카이군이 쏟아져 나와 트로이군을 습격하여 결국 프리아모스의 성이 함락된다. 아수라장이 된 성에서 아이네아스는 베스타 신전에 틀어박힌 헬레나를 발견하고 그녀를 죽일까 망설이는 순간에 베누스가 나타나 이를 만류한다. 아이네이스는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성에서 피신한다. 성문에 이르러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아 헤메는 가운데 아내의 화신이 나타나 이를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고 위로하며, 아이네이스의 앞날에 관해 작은 예언을 남긴 후 사라진다. 가족들이 있는 곳에 다시 돌아와 아이네이스는 그동안 까맣게 모인 피난민을 보고는 깜짝놀란다. 그러나 곧 이들을 이끌고 이다 산을 향해 유랑길에 오른다. 베르길리우스 분류:기원전 1세기 작품 분류:고대 로마의 문학 분류:서사시 분류:유작 분류:미완결 작품 분류:오디세이아 분류: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분류:베르길리우스 |
고대 이집트 문명 은 나일 강 하류에서 번성한 문명이었으며, 최전성기인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 시기에는 에티오피아와도 교류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존재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집트는 원조 수로 제국으로서 관개 산업에 의존하였던 문명이다. 이집트 영토의 대부분은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으나 시나이 반도는 서남아시아에 있다. 이 나라는 지중해와 홍해에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리비아와, 남쪽으로는 수단, 그리고 동쪽으로는 가자 지방과 이스라엘을 마주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흔히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뉜다. 나일 강은 남쪽에서부터 지중해를 향해 북쪽을 향해 흐른다. 이집트의 인구는 대부분 나일 강을 둘러싸고 집중되어 있다. 이 강은 석기 시대와 나카다 문화 시대로부터 근근히 이어져온 이집트 문화의 동맥이다.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지도 고대 이집트 지도. 왕조 시대(Dynastic period c. 3150-30 BC)의 주요 도시와 유적지들을 볼 수 있다. 나일 계곡은 에티오피아(Ethiopia)의 고원에서부터 그 물줄기가 갈라져 내려온다. 나일 계곡 외곽의 사막 지대는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수단 중북부의 앗바라까지 펼쳐져 있는데, 대부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며, 간간이 생기는 오아시스 주변을 빼고는 식물이 전혀 자라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 제1왕조 고대 이집트 제2왕조 고대 이집트 제3왕조 고대 이집트 제4왕조 고대 이집트 제5왕조 고대 이집트 제6왕조 고대 이집트 제7왕조 고대 이집트 제8왕조 고대 이집트 제9왕조 고대 이집트 제10왕조 고대 이집트 제11왕조 고대 이집트 제12왕조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이집트 신화 신성문자 신관문자 민중문자 200px 피라미드 스핑크스 네페르타리의 흉상 고대 이집트 옷 기자 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카이로 서쪽 연안의 지명인데 보통 서쪽 10km의 유적지를 가리킨다. 즉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카프라·멘카우라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에 신전과 스핑크스와 귀족의 묘지인 마스타바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미국·아랍연합 등이 이를 조사하였다. 기자 묘의 부조는 사카라의 부조보다 떨어지나 카이로에서의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손 에 르미에르를 실시하고 있다. 사카라 는 카이로 남방 25 km 지점에 있는 지명이다. 초기 왕조의 왕묘을 비롯하여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 피라미드텍스트가 있는 제5왕조 우니스왕의 피라미드, 부조의 정수(精髓)라고 하는 티(제5왕조)와 메렐카(제6왕조)의 마스타바 및 성우(聖牛)의 묘 세라페움 등이 있다. 또 나일강 쪽으로 고왕국시대의 수도 멤피스의 유적이 있고 야자수 사이 사이에 라메스 2세가 세운 프타흐 신전의 옛터와 그의 거상(巨像)이 있다. 아비도스 (Abydos)는 카이로 남방 약 550 km 지점에 있는 지명. 초기 왕조의 왕묘와 신전이 세워져 있고, 고왕국 시대에는 오시리스 신(神)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신왕국 시대 말기에 걸쳐 이집트 각지로부터 성지(聖地) 순례자가 모여들어, 오시리스 신에 바치는 신전과 개인의 묘가 구축되어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스테레(石碑)가 세워졌다. 신전에는 특히 유명한 제19왕조 세티 1세의 아름다운 부조와 채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석비와 우샤브티 등은 방대한 수에 이른다. 테베 (Thebes)는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로 되었다. 나일 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 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葬祭殿)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서쪽에도 왕궁이 있었던 적이 있다(아멘호테프 3세, 라메스 3세 등). 아멘 신전은 카르나크가 본전이고 룩소르가 부전인데 역대의 왕이 계속 덧붙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가 되었다. 서쪽 왕가의 계곡 과 왕비의 계곡 은 신왕국 시대 왕족의 영원한 집 으로 계획된 것인데 대개의 것은 즉시 도굴당하였다. 귀족의 묘 는 미려한 벽면으로 애호가를 매혹시키고 있다. 데르 엘 바하리(하트솁수트 여왕)와 메디네트 하부(라메스 3세)의 신전은 각각 개성이 있는 대표적 건축이다.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발견한 그의 왕묘에서 부장품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기원전 1354~1345)이 짧았으나 그의 묘는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보물은 공예적 가치가 높고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귀금속 공예(미라의 마스크 등), 보석류 세공, 목공예(침대나 의자), 상아 세공, 석제 용기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금속 공예는 중왕국 시대의 것이 더 우수한 것도 있다. 물론 이것보다 더욱더 많은 유물도 있다 누비아 (Nubia)는 아스완부터 제4카타락트 부근까지의 지역이다. 고래로 아프리카 내륙부와 이집트에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이 지방은 금의 다량 산출로 역대 이집트 국왕은 누비아를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며 여러 곳에 신전과 성채를 구축하였다. 아부심벨 신전과 부헨 성이 그 대표적 유적이고 북누비아의 전 유적지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수몰되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세계 40개국의 협력을 받아서 해체 이동 등을 하여 구제되었다. 아부심벨 신전 은 제19왕조 라메스 2세가 아스완의 남방 300 km 지점에 만든 암굴 신전(岩窟神殿)으로 누비아에서 최고의 유적이다. 대신전은 태양신 라하라크티 등에, 또 소신전은 하트홀 여신에게 바친 것이었다. 특히 대신전 전면에 있는 왕의 거상(巨像)은 높이가 20m 이상이나 되고 내부의 벽면에는 카데시 전투 등의 부조가 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게 되는 것을 세계 각국의 협력에 의해 약 3천 6백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구제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의 원주율 측정법 John Baines & Jaromir Malek, The Cultural Atlas of Ancient Egypt , revised edition, Facts on File, 2000. Barry Kemp, Ancient Egypt Anatomy of a Civilization , Routledge, 1991. Bill Manley (ed.), The Seventy Great Mysteries of Ancient Egypt . Thames & Hudson, Ian Shaw,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분류:문명 분류:이집트학 분류:중동 |
파울로 (, 가톨릭 바오로 공동번역 바울로 개역성경 바울)는 초기 기독교의 전파와 신학에 주춧돌을 놓은 사도이며,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파울로스 서신을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대한민국에서, 이 인물의 이름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같이 옮긴 공동번역성서의 바울로 를 공히 사용하려 했으나 양측의 입장차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는 공동번역성서를 따라 바울로 라고 칭하며,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서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옮긴 성경에 따라 바오로 , 개신교(Protestant Church) 대부분은 1900년 완역된 신약성경전서를 따라 바울 로 칭한다. 성공회(聖公會, Episcopal Church, Anglican Church)에서는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에 따라 바울로 라고 하는데, 바울 , 바우로 라고 부르기도 한다. 파울로스는 초기 기독교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 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가운데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 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했었다. 그렇게 그는 유대교와 구분된 기독교를 확립했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바울은 지성 없이 열정만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열정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변증하는 지성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었다. 바울로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혹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로도 없었겠지만 바울로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평하기도 한다. 파울로스는 그리스에서 사용한 그리스 이름이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샤울()’이다. 재미교포들이 한국어 이름과 영어 이름을 모두 사용하는 것처럼 해외에서 사는 유대인(그리스말로 흩어진을 뜻하는 디아스포라)들도 히브리어 이름과 그리스어 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파울로스도 그리스어 이름인 파울로스와 히브리어 이름인 샤울을 모두 사용했다. 따라서 한때 기독교인들이 사울이 바울로 개명했다는 주장은 사도 파울로스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사도행전에서도 바울로라고도 불리는 사울 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1900년 완역한 신약성경 전서 음역을 따른 개역한글판(대한성서공회)은 ‘바울’,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는 ‘바울로’, 천주교 성경(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은 ‘바오로’라고 한다. 성공회는 파울로스를 ‘바우로’라고 음역하는데, 그 실례로 1965년판 성공회 공동기도문과 성공회 소성인전에 파울로스를 바우로로 음역하며, 현재도 한국 성공회는 바우로를 신명(信名) 즉, 세례받은 신자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기독교 성인.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이다. 흔히 귀족적인 용모에 머리숱이 적고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1세기 이후 등장한 성화에서 볼 수 있다.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출생년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바울은 제국의 시민권이 있었다고 추측하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 22:25-29에서 바울의 선교 활동 중에 유대민족과의 충돌로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 여하튼 파울로스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게다가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 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 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파울로스 자신은 자신의 대단한 출신배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배경을 오물에 빗댄다. 파울로스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율법 공부를 받았는데, 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이러한 체계적 신학교육은 사도 바울을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만큼 뛰어난 신학자로 자라게 해 주었다. 사도 파울로스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 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파울로스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파울로스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도 밝았는데, 사도행전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시인을 인용하여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에는 파울로스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들의 이름을 자세히 적었다. 지식인들의 지성에 맞게 전도한 성 파울로스의 전도는 지혜로운 전도였던 것이다. 34년 다마스쿠스 사건 41년 제1차 예루살렘 방문 51년 소아시아와 그리스에서의 선교, 제2차 예루살렘 방문 59년-60년 로마로의 송환 62년 사망 기원후 5년경 출생 32-33년경 스테파노 부제 순교, 파울로스의 회심 33년-39년경 요르단강 동부 거주 39년경 다마스쿠스 탈출, 예루살렘 방문 39년-43년 시리아와 길리기아 거주 43년-44년경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성 바르나바와 공동 목회. 44년-49년경 1차 전도여행 49년경 예루살렘 공의회 50-52년경 2차 전도여행. 고린토에서 데살로니가전서 작성 53-58년경 3차 전도여행, 에페소에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작성, 감옥에서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필레몬인들에기 보낸 편지집필,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편지집필 58년초 고린토에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집필 58년경 예루살렘에서 체포 58년이후 로마로 이송, 로마선교 62-63년경 석방되어 스페인에서 선교했을 것으로 추정됨.(로마서 15:28) 역사학자중에는 사도 바울이 62년 잠시 석방되어 2년간 고린토 교회, 마케도니아 교회, 로마교회를 돌아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64년-68년 로마에서 순교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사도 파울로스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가던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후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된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개종이라는 단어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성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는 독립종교가 아닌 유대교세계안의 이단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개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파울로스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마르코 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바나바/바르나바가 자신의 사촌 인 마르코 를 전도여행에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파울로스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심한 언쟁(직역하면 엄청난 분노와 성냄)끝에 서로 헤어졌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의 논쟁이 벌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심한 언쟁으로 번역된 파록쉬스모스()는 엄청난 분노와 성냄을 포함하는 말이다. 파울로스와 바르나바간의 언쟁은 서로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며 벌인 감정다툼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분쟁에 대해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신학자인 톰 라이트 주교(Bishop Tom Wright)는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 이라고 불러줄만큼 성격이 유순한 바르나바와 성격이 불같고 급한 바울이 서로 원만하게 지내기는 힘들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파울로스는 아테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에페소스 등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특히 고린토스에서는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라는 유대인 천막업자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나중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활약하지만,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탈 율법적인 신학을 가진 그의 선교활동은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유대교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종교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청교도적인 배경을 갖고 있던 존 폭스 신부의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에페소스교회의 주교인 성 디모테오에게 계승되었다. 베드로와 파울로스-엘 그레코 사도(apostle)는 의 음역이다. απο 는 접두어이며, στολ 은 파송하다 는 동사의 어간 στελ 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뜻이 헬라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도 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 사도 자격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파울로스는 다마스커스에서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나 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주관적 주장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예수가 사도로 임명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1세기 교회에서 파울로스가 과연 사도 인지를 둘러 싼 논쟁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나바의 중재로 그의 진실성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김득중 은 고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석하여 즉,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여 율법, 할례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단절을 주장하며, 유대교 전통을 거부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는데, 바울로는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등의 기존 사도들은 베드로와 바울로가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순교자 스데파노(스데반)를 비롯한 일곱 부제(Diakonos)들은 이방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일치하지 못하고 신학적인 갈등을 겪었는데, 이방기독교 지도자 파울로스는 유대 기독교인들을 다른 복음을 전한다느니, 거짓 형제 라느니 하는 격렬한 말로 비난했고, 유대 기독교 공동체였던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파울로스를 유대교 전통을 파괴하는 인물로 보았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랐지만 바울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존중하였으며, 모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파울로스는 육체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 노동자였다. 정승우에 의하면 한글성서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로 번역한 헬라어 스케노포이오스는 가죽을 가공하는 모든 직업을 뜻하기도 한다. 즉, 파울로스는 사례비를 받아서 생활하던 대다수의 순회 설교자들과는 달리, 육체노동자로 살아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자리를 복음전도의 통로가 되게 하였으며, 자신의 그리스도 신앙과 삶이 일치되게 하였다. 김회권도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한 귀신들을 쫓아낸 파울로스의 능력 은 노동자로서의 정직한 삶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다. 바울 후 기독교 선교활동은 기원후 35년에서 60년 사이 정도에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훈련된 레기온(신약성서의 마르코복음서에서는 군대로 번역)의 정복전쟁으로 지중해 다른 민족들과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해간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주변을 장악한 로마제국은 기술 및 정치 조직에서 다른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그리스(헬라)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유산이 합쳐져서, 지중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도시문명으로 통합되었다. 이를 그리스-로마(그레코-로만)문명이라고 부른다.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신약성서학자 박태식에 따르면, 파울로스는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은 없으며,예수에게 복음을 전달받아서 전한다는 파울로스 서신서속의 언급들도 도 문서나 구전으로 전승된 그리스도의 말씀(예수전승)을 전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파울로스 서신서도 예수 전승을 파울로스가 자신의 신학으로 해석한 신학문서인 것이다. 물론 파울로스가 고린도전서 11:23에서 언급한 성만찬(Holy Communion)설명도 교회를 통해 전승되던 예수의 성만찬 제정이야기를 언급한 것이다. 파울로스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초요 머리로 해석했으며 ,파울로스의 제자들이 선생의 이름을 빌려서 쓴 에페소서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며(에페소 2:20), 민족의 구분이 없는 보편교회 로 해석하고 있다. 이방기독교 지도자 파울로스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칭의를 주장했으며, 이러한 구원관은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와 갈등을 겪게 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 김득중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를 파울로스의 칭의교리가 실천을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성 바울이 생각하기에 성만찬은 사회통합을 위한 성례전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성만찬때마다 부유층 교인들이 빈곤층 교인들과 밥상을 나누지 않는 모습을 "주님이신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성 목요일)에 성만찬을 제정하시어 그분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부유한 교인들이 가난한 교인들과 성만찬을 나누지 않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가난한 교우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이라고 비판했다. 신약성서에서 실제 파울로스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바오로 서간은 14개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로 서신서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 한다. # 확실히 파울로스가 작성한 편지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 파울로스가 썼을 가능성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편지 데살로니가후서 # 파울로스가 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이 담긴 편지 골로새서, 에베소서 #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나, 그와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문체로 기록된 편지 히브리서 Paul s mission and letters Epistles of Apostle Paul Catholic Encyclopedia Paul of Tarsus Encyclopedia Britannica Paul The Apostle and the Poet Paul and Aratus New Perspective on Paul Jewish Encyclopedia Paul of Tarsus Vatican reports discovery of St.Paul s tomb St Paul s tomb unearthed in Rome The Apostle Paul s Shipwreck An Historical Examination of Acts 27 and 28 The Problem of Paul Paul anarchiste éclairé 분류:5년 태어남 분류:64년 죽음 분류:신약성경의 성인 분류:아나톨리아의 로마 가톨릭 성인 분류:성공회 성인 분류:루터교 성인 달력에 표시된 사람 분류:킬리키아 분류:코린토스 분류:사도 분류:참수된 사람 분류:1세기 기독교 성인 분류:1세기 기독교 순교자 분류:1세기 기독교 신학자 |
220px 생태학 (生態學이란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환경은 생물의 주변을 구성하는 생물적, 비생물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영어로 ecology , 독일어로 Ökologie 라 하는 생태학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로 "사는 곳" , "집안 살림" 을 뜻하는 oikos 와 "학문" 을 의미하는 logos 의 합성어이다. "집안 살림 관리" 를 뜻하는 경제학과 어원이 같다. 에른스트 헤켈 생태학이 환경(environment)과 환경보호주의(environmentalism) 등의 용어와 혼동되는 경우가 있지만, 생태학은 둘 다 아니다. 생태학은 과학이고 행동주의적으로 규정된 목표가 없다. 생태학이란 낱말은 1866년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생물체의 일반 형태론, Generelle Morphologie der Organismen , 1866 Berlin). 1869년 헤켈은 예나 잡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이 낱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헤켈이 내린 생태학의 정의는 오늘날까지 생물학자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찰스 엘튼의 동물생태학(Animal Ecology) (1927), 유진 오덤(Eugene Odum) (1963)을 거쳐 생태학의 정의는 다듬어져 왔다. 유진 오덤은 자연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 이라 정의하였고, 이후 찰스 크랩스(Charles J. Krebs) 는 생물의 분포(distribution)와 수도(abundance)를 결정하는 상호작용에 관한 과학적 연구 라 정의하였다. 나아가 산업 생태학은 산업의 라는 말과 생태학 을 융합한 새로운 학문 분야로, 자원이용을 극대화하고 효율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환경에 대한 나쁜 영향을 극소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생태학의 뿌리는 자연사부터 시작된다. 인류의 조상은 사냥감을 어디서, 언제 구할 수 있는지 알아야 했고, 농업 혁명 이후에는 가축이나 곡물을 어떻게 기를지 등 생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였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Historia Animalium에서 들쥐와 메뚜기떼에 대해 설명을 시도하였다. 유해 동물을 없애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던 초기 그리스와 로마인의 생각에서 출발해서 수학과 자연사를 이용하여 현대적인 생태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1968년 레벤후크(Leeuwenhoek)는 수리적인 계산을 통해 딱정벌레의 증식률을 계산했고 한쌍의 파리가 3개월에 약 75만 마리의 파리를 생산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1798년 초기 인구통계학자 맬더스(Malthus)는 인구론(Essay on Population)을 출판하였고 이는 다윈의 자연 선택이론에 영향을 미쳐 진화론으로 발달하게 된다. 군집 연구는 식물생태학자 와밍(J. E. B. Warming)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개체군과 군집(무리)의 광범위한 문제들의 인지와 함께 1900년경 생태학은 과학이 되는 길로 들어섰다. 기후에 따른 분류 지형에 따른 분류 일단, 첫 번째로 햇빛을 통하여 식물이 자란다(또는 물) 두 번째로, 초식동물이 햇빛으로 자란 식물을 먹는다. 세 번째로,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다. (육식동물위에 더 큰 육식동물이 있을수 있다) 마지막으로, 동물(육식,초식,잡식)의 시체가 썩어 식물이 자라는데 쓰인다. 그런 식으로 영원히 돌고도는 것이다(먹이사슬이 붕괴되는 경우도 있다) 녹색 혁명 유기농 자연농법(NF) 「자연정화처리기술의 실제」, 유기물의 부식화, 박철휘 저, 동화기술교역(2004년, 42~47p) 「건강을 살리는 숯」, 숯에는 무엇인가가 살고 있다, 송재만 저, 문예마당(2007년, 46~49p) 「창조주의 특별한 선물」, 생체정보를 활용한 기술의 전망, 김용태 저, 건강신문사(2010년, 50~52p) 생태학관련 사이트들 - BioSites |
섬네일 도도부현 (, Prefectures of Japan)은 일본의 광역 자치 단체인 도 (, 도쿄도), 도 (, 홋카이도), 부 (, 오사카부와 교토부), 현 (, 나머지 43개)을 묶어 이르는 말이다. 도도부현의 하부에는 기초지방자치단체인 시정촌 (市町村)이 있으며, 일부 도시는 행정상 별도의 정령지정도시, 중핵시, 특례시 등으로 지정되어 있다. 시정촌과 같이 지방자치단체의 일종이기에 포괄적 지방자치단체 , 광역적 지방자치단체 라고도 불린다. 홋카이도 1 홋카이도 도호쿠 지방 2 아오모리현 - 3 이와테현 - 4 미야기현 - 5 아키타현 - 6 야마가타현 - 7 후쿠시마현 간토 지방 8 이바라키현 - 9 도치기현 - 10 군마현 - 11 사이타마현 - 12 지바현 - 13 도쿄도 - 14 가나가와현 주부 지방 15 니가타현 - 16 도야마현 - 17 이시카와현 - 18 후쿠이현 - 19 야마나시현 - 20 나가노현 - 21 기후현 - 22 시즈오카현 - 23 아이치현 긴키 지방 24 미에현 - 25 시가현 - 26 교토부 - 27 오사카부 - 28 효고현 - 29 나라현 - 30 와카야마현 주고쿠 지방 31 돗토리현 - 32 시마네현 - 33 오카야마현 - 34 히로시마현 - 35 야마구치현 시코쿠 36 도쿠시마현 - 37 가가와현 - 38 에히메현 - 39 고치현 규슈 40 후쿠오카현 - 41 사가현 - 42 나가사키현 - 43 구마모토현 - 44 오이타현 - 45 미야자키현 - 46 가고시마현 - 47 오키나와현 도쿄도의 도청 소재지는 신주쿠구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최대 도시는 도도부현별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시를 말한다. (도쿄도는 구별) 2015년 인구 조사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인구 및 인구 밀도는 2015년 인구 조사, 면적은〈全国都道府県市区町村別面積調〉의 2014년 10월 1일 시점으로 표기하였고, 북방 영토(하보마이 군도, 시코탄 섬, 쿠나시르 섬, 이투루프 섬)는 제외하였다. 시정촌 수와 군의 수는 2014년 4월 5일 시점으로 표기하였다. 정령지정도시의 행정구는 제외하였고 도쿄 도의 특별구는 포함하였다. 북방 영토(하보마이 군도, 시코탄 섬, 쿠나시르 섬, 이투루프 섬)는 제외하였다. 의원 정수는 2014년 12월 시점으로 표기하였다. 도도부현 일본어 기 현청 소재지 최대 도시 지방 인구 (명) 면적 (km2) 인구 밀도 (명/km2) 시정촌 수 ISO / JIS 번호 의원 정수중의원 / 참의원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다카마쓰시 시코쿠 976,756 1,876.73 520.5 17 37 3 / 2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가고시마시 규슈 1,648,751 9,188.1 179.4 43 46 5 / 2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요코하마시 간토 9,127,323 2,415.81 3,778.2 33 14 18 / 8 고치현 고치시 고치시 시코쿠 728,461 7,103.91 102.5 34 39 2 / 2 교토부 교토시 교토시 긴키 2,610,140 4,612.2 565.9 26 26 6 / 4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구마모토시 규슈 1,786,969 7,409.32 241.2 45 43 5 / 2 군마현 마에바시시 마에바시시 간토 1,973,476 6,362.28 310.2 35 10 5 / 2 기후현 기후시 기후시 주부 2,032,533 10,621.29 191.4 42 21 5 / 2 나가노현 나가노시 나가노시 주부 2,099,759 13,561.56 154.8 77 20 5 / 4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나가사키시 규슈 1,377,780 4,132.32 333.4 21 42 4 / 2 나라현 나라시 나라시 긴키 1,365,008 3,690.94 369.8 39 29 4 / 2 니가타현 니가타시 니가타시 주부 2,305,098 12,584.1 183.2 30 15 6 / 4 도야마현 도야마시 도야마시 주부 1,066,883 4,247.61 251.2 15 16 3 / 2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 우쓰노미야시 간토 1,974,671 6,408.09 308.2 25 09 5 / 2 도쿄도 도쿄 (신주쿠구) 세타가야 구 간토 13,513,734 2,190.9 6,168.1 62 13 25 / 10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도쿠시마시 시코쿠 756,063 4,146.93 182.3 24 36 2 / 2 돗토리현 돗토리시 돗토리시 주고쿠 573,648 3,507.05 163.6 19 31 2 / 2 미야기현 센다이시 센다이시 도호쿠 2,334,215 7,282.14 320.5 35 04 6 / 2 미야자키현 미야자키시 미야자키시 규슈 1,104,377 7,735.31 142.8 26 45 3 / 2 미에현 쓰시 욧카이치시 긴키 1,815,827 5,774.39 314.5 29 24 5 / 2 사가현 사가시 사가시 규슈 833,245 2,440.64 341.4 20 41 2 / 2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사이타마시 간토 7,261,271 3,797.75 1,912 63 11 15 / 6 시가현 오쓰시 오쓰시 긴키 1,413,184 4,017.38 351.8 19 25 4 / 2 시마네현 마쓰에시 마쓰에시 주고쿠 694,188 6,708.23 103.5 19 32 2 / 2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하마마쓰시 주부 3,701,181 7,778.7 475.8 35 22 8 / 4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아오모리시 도호쿠 1,308,649 9,645.4 135.7 40 02 4 / 2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고야시 주부 7,484,094 5,172.4 1,446.9 54 23 15 / 6 아키타현 아키타시 아키타시 도호쿠 1,022,839 11,637.54 87.9 25 05 3 / 2 야마가타현 야마가타시 야마가타시 도호쿠 1,122,957 9,323.15 120.4 35 06 3 / 2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시모노세키시 주고쿠 1,405,007 6,112.3 229.9 19 35 4 / 2 야마나시현 고후시 고후시 주부 835,165 4,464.99 187 27 19 2 / 2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마쓰야마시 시코쿠 1,385,840 5,676.1 244.2 20 38 4 / 2 오사카부 오사카시 오사카시 긴키 8,838,908 1,904.99 4,639.9 43 27 19 / 8 오이타현 오이타시 오이타시 규슈 1,166,729 6,340.61 184 18 44 3 / 2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오카야마시 주고쿠 1,922,181 7,114.62 270.2 27 33 5 / 2 오키나와현 나하시 나하시 규슈 1,434,138 2,281 628.7 41 47 4 / 2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와카야마시 긴키 963,850 4,724.68 204 30 30 3 / 2 이바라키현 미토시 미토시 간토 2,917,857 6,096.93 478.6 44 08 7 / 4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가나자와시 주부 1,154,343 4,186.15 275.8 19 17 3 / 2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모리오카시 도호쿠 1,279,814 15,275.01 83.8 33 03 4 / 2 지바현 지바시 지바시 간토 6,224,027 5,157.64 1,206.8 54 12 13 / 6 홋카이도 삿포로시 삿포로시 홋카이도 5,383,579 83,424.22 68.6 179 01 12 / 4 효고현 고베시 고베시 긴키 5,536,989 8,400.9 659.1 41 28 12 / 4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 이와키시 도호쿠 1,913,606 13,783.75 138.8 59 07 5 / 2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후쿠오카시 규슈 5,102,871 4,986.4 1,023.4 60 40 11 / 4 후쿠이현 후쿠이시 후쿠이시 주부 787,099 4,190.43 187.8 17 18 2 / 2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히로시마시 주고쿠 2,844,963 8,479.38 335.5 23 34 7 / 4 시정촌 일본의 행정구역 일본의 고키시치도 일본의 도주제 논의 도도부현기 분류:일본의 행정 구역 분류:행정 구역 단위 분류:행정 구역 목록 |
War in Finland, 1940 HU55566.jpg|right|섬네일|250px|1940년 핀란드 스키부대 겨울 전쟁 (, 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이라고도 한다. 일명 계속 전쟁 인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과 대비하여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 이라고도 한다. 스탈린은 1939년 말까지 핀란드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핀란드는 1940년 3월까지 버텼으며 이때 양자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맺고, 소비에트 연방에 카리알라 동부 지역(핀란드 영토의 10%, 산업능력의 20%에 해당)을 넘겨주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이 땅과 카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을 합쳐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결국 핀란드는 이웃한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겨울 전쟁 당시 프랑스와 영국이 스칸디나비아 북쪽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논의를 공공연히 하여 나치 독일이 개전 1개월도 안되어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을 준비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베저 작전). 또 소련군이 겨울 전쟁에서 보여준 부진이 아돌프 히틀러가 1941년 소련을 침공(바르바로사 작전)하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핀란드는 1581년부터 스웨덴 왕국의 일부였고 1809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다. 핀란드는 비록 당시 독일 정치를 거머쥔 나치당에 대한 호감은 거의 없었지만 독일과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19세기 말 - 20세기 초 핀란드에 대한 강압적인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으로 이어진 실패한 공산혁명 시도 때문에 소련과 핀란드의 관계는 긴장되고 냉각된 상태를 유지했다. 소련과 나치 독일 은 1939년 8월 23일 불가침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는 동유럽, 중앙유럽, 북유럽 여러 나라의 영토를 양국이 나눠 갖는다는 비밀 조항도 포함했다. 핀란드는 이때 소련의 이해권 에 들어간다고 합의되었다. 독일이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은 동쪽으로부터 침공해 수 주 만에 폴란드는 양국이 합의한 대로 분할되었다. 이 같은 사태를 본 인접 국가들은 자신들도 같은 운명에 처한 것을 깨달았으며 실제로 스탈린은 1939년 9월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상호 방위 조약 을 강요해 군사 주둔권을 획책하여 실질적으로 발트 3국을 완전히 잠식했다. 이러한 이해권 문제의 일환으로 1939년 10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핀란드를 방문해 다음과 같은 골자의 핀-소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핀란드와 러시아 국경 부근의 카렐리아(), 라플란드() 지방 등을 포함해 약 2,300km2에 해당되는 영토의 할양. 수리사르 섬(), 코틀린 섬() 섬 등 핀란드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에 대한 할양. 투르쿠(), 콧카(), 항코(), 헬싱키, 비푸리() 등 발트 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권과 조차 권리. 대부분 약 30년에서 40년 가량이었으며 준수할 것인가도 미지수였다. 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퀴외스티 칼리오가 이를 거부하자, 핀란드 침공에 적절한 구실이 필요했던 소련군은 1939년 11월 26일 국경지대인 만네르헤임 선 부근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공격했다며 이를 이유로 침공을 시작했는데, 이를 이른바 마이닐라 발포 사건(Mainilan laukaukset) 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소련은 11월 29일 핀란드와 외교 관계를 끊었으며 11월 30일 46만 명으로 이루어진 23개 사단으로 핀란드를 공격해 순식간에 만네르헤임 선까지 도달했는데, 이는 1939년 10월부터 이와 같은 침공을 위해 소련은 이미 국경지대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이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은 핀란드 측에서는 오랫동안 추측해온 사실이지만 최근에야 소련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으로 분명히 판명되었다. 이 사건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비밀리에 그리고리 쿠릭()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소련군에게 고의적으로 포격을 한 후 핀란드군의 공격이라고 꾸민 일이었는데, 당시 핀란드군 포병의 장사정 포는 마이닐라까지 사정거리가 못 미치는 즉 핀란드-소련 국경에서 약 20km에서 25 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이러한 핀란드군의 포격 에 의한 소련군의 전사자 는 전혀 없었다. 마이닐라 발포사건 이후 스탈린과 그의 군부 지도자들은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핀란드로부터 뜻밖의 반격을 당하게 되었다. 핀란드인들은 대항했고, 협상 테이블에서처럼 끈기 있게 싸웠다. 그들은 모든 인력과 빈약한 물자 그리고 전통적으로 기지(機智)가 풍부한 국민성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빙점 이하의 혹한 속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찾아내가면서 거대한 소련군과 대결했다. 이 핀란드와 소련과의 싸움은 당시의 가혹한 기후 때문에 겨울 전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 당시 소련군이 점령한 국경 지대의 마을인 테르요키(Terijoki) 에서는 1939년 12월 1일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이른바 테르요키 정부 라는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는 정치 목적 과 군사 목적 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 공화국은 1940년 3월 12일까지 존속되다가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자 새로 수립된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이 정부는 1956년 해체되었으며 그 후 카렐리야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11월 말이 되자 소련군은 공격 개시 태세에 들어갔다.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7군 산하의 10개 사단 병력과 6개 전차 여단은, 24만명의 인원, 1,500대의 탱크, 야포 900문 그리고 항공기 300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카렐리안 지협에 구축된 핀란드 축성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완료했다. 일차 공격 목표는 핀란드 제2의 도시 비푸리를 점령하여 라도가 호의 북쪽 연안에 이르는 도로의 중요한 교차점을 단절시키는 데 있었다. 이 작전은 핀란드군을 분산시킨 다음 소련군이 수도 헬싱키에 진격하기 위한 것이였다. 한편, 소련 제8군 산하의 7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은 병력 15만, 탱크 545대, 포 520문 그리고 항공기 200대를 가지고 라도가호를 우회하여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곳에서 소련 제7군과 연결될 예정이었다. 좀더 북쪽으로는 소련 제9군 산하의 5개 보병사단이 9만 5천의 병력, 275대의 전차 및 포 360문을 가지고 보드니아만의 입구인 스웨덴과의 국경을 향해 진격했다. 목적은 핀란드와 스웨덴과의 육상 교신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북극권에서는 소련 제14군 산하의 3개 보병사단이 병력 5만 5천, 전차 165대, 포 220문의 전력으로 페차모 지역을 점령한 뒤, 유일한 길인 500km에 달하는 북극 하이웨이를 따라 로바니에미까지 남하한 다음, 스웨덴 국경을 향해 서진할 계획이었다. 11월 30일 오전 7시, 소련군은 600문의 포를 동원, 아무런 예고 없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30분 뒤, 소련군 전차와 보병이 진격을 개시했다. 같은 날 아침 소련군은 헬싱키, 비푸리, 투르쿠, 항코 등의 대도시를 포함해 21개 지역에 폭격을 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9시 15분부터 개시된 수도 헬싱키의 폭격에서는 90명 가량의 시민이 사망하고 300명의 시민이 부상을 당하였다. 소련군은 남카렐리아와 콜라 반도, 라플란드에서 침공을 시작했는데, 당시 11월 30일만을 기준으로 핀란드군과 소련군의 비교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핀란드군 보병군 약 337,000–346,500명 (총 3개군 9개 사단), 기동 가능전차 33대, 항공기 110여대. 소련군 보병군 약 46만명(4개 집단군 26개 사단) 전차 3,200여대, 항공기 3,800여대. 당시 핀란드군은 국경에 약 16만 2천명이 주둔하고 있었음. 한편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와 심도에 대해, 만네르하임 원수의 말을 빈다면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최악의 상태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만네르하임은 핀란드군이 소련군에게 가능한 한 많은 피해를 입히면서 지연작전을 수행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전선에 걸쳐 핀란드군은 엄청난 규모의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저녁 무렵, 소련군은 핀란드 영토 내로 8km깊이까지 침투했으며, 이제 그들의 진격을 막기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핀란드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소련 지도부는 전투가 수일 내에 끝나리라 믿고,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병력이 스웨덴 국경에 도착하더라도 국경선을 넘지 말도록 타이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만네르하임은 반격을 중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심각한 시기에 만네르하임은 한 핀란드 사람으로부터 예견치 않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도움을 제의한 사람은 기업인이자 핀란드 군수물자 구매 위원회의 한 사람인 파아보 탈벨라였다. 예비역 대령인 그는 지난 수일 동안 핀란드군이 당하고 있는 패배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탈벨라는 핀란드 내각에서 만네르하임과 절친하게 지내던 자신의 친구 루돌프 발덴 장군을 설득해 만네르하임과 만날 약속을 했다. 헬싱키의 한 호텔에서 세 사람이 만나자 탈벨라는 호텔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핀란드군은 패주만 하고 있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탈벨라는 만네르하임에게, 소련군을 라도가호 북쪽 동부 전선에서 저지하지 않으면, 적은 그쪽으로 들어와 만네르하임선 후방을 공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발덴 장군은 놀라워했다. 그 누구도 오만한 만네르하임에게 그런 투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덴 장군은 닥쳐올 결과에 대해 두려워 했다. 그가 더욱 놀란 것은 만네르하임이 그의 발언을 끝까지 침착하게 듣고 난 후, 탈벨라가 요구한 대로 그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만네르하임은 탈벨라에게 급히 편성한 1개 연대와 3개 대대 병력을 주어, 톨바야르비호의 서쪽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톨바야르비 마을(페트로자보츠크 서북서쪽 약 160km, 레닌그라드 북쪽 약 270km)로 보냈다. 이곳은 소련군의 전초병이 있는 코티사리섬에서 1.6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파아보 탈벨라가 지휘를 맡기 이전의 그 지역 핀란드군은 적의 포화에 쫓겨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장병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벨라는 여기서 버티기로 결심했다. 12월 8일, 탈벨라는 자정 직전에 기습 공격을 명했다. 얼어붙은 호수를 소리없이 건너가, 잠이 든 소련군을 기습한 것이다. 핀란드군은 소총과 수오미 경기관포로 얼마간 공격한 뒤 숲 속으로 철수했다. 어리둥절한 소련군은 공중을 향해 총을 난사했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핀란드군은 톨바야르비의 진지로 안전하게 귀환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은 처음으로 게릴라 전법의 맛을 보게 되었다. 이 전법을 후일 핀란드군은 아주 치명적인 전술로 발전시키게 된다. 핀란드군은 이 전법을 되풀이 사용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으로 적군의 휴식을 빼앗았다. 핀란드 특공대들은 흰색의 위장복을 입어 눈덮인 숲속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았고, 스키를 이용하여 유령처럼 소리없이 나타나 공격하고는 사라졌다. 전원이 스키에 능숙하고 숲속 생활에 익숙하여 마치 사냥을 하듯 소련군을 습격했다. 또한 그들의 사격술은 거의 완벽하여 소련군들은 이들을 하얀 주검이라 불렀다. 한 소련군 장교는, "그들은 700~800m 거리에서 목표물을 사격하며, 거의 실수가 없다."라고 회고했다. 이처럼 핀란드가 동원한 병력은 33만 명에 불과하였지만 게릴라식 전투와 흰 보호색 군복을 입은 기동력이 좋은 스키부대, 현지 사정에 대한 지식에 힘입어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주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기초해 만들어진 일종의 화염병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핀란드인들은 화염병을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불렀는데, 전쟁 개전 초기 헬싱키 도심에 가해진 무차별 소이탄 공격으로 쏟아진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 “우리는 원조용 빵을 투하했다”고 주장했던 소련의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핀란드인들이 “그렇다면 이 술이나 받아라” 하고 화염병을 던졌던 것이다. 1939-40년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해 -40 °C 수준의 온도가 보통이었으며 이는 핀란드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 소련과 핀란드 양쪽의 당초 예상과 달리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침공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자국민들과 나란히 소련군과 싸웠다. 다수의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대에 소련에 가서 "공산주의 건설" 작업에 참여하다 스탈린의 대숙청에 희생된 바 있어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증오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겨울 전쟁은 1918년 핀란드 내전으로 표면화된 이념 갈등과 스웨덴어 사용자들과 핀란드어 사용자들 간의 언어 갈등 등 핀란드 내부의 분열을 상당 부분 치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핀란드 국민들이 보인 단합 정신은 아직도 "겨울 전쟁 정신"이라 불린다. 다만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사상으로 인해 이때 핀란드의 징병군으로 싸우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언급되어야겠다. 한편 핀란드군은 지형을 이용, 또 다른 가공할 전술을 창안해냈다. 적의 부대를 함정에 빠뜨려 산산조각을 내는 전법이다. 그들이 먼저 얼어붙은 호수 뒤편의 작은 구릉 같은 은폐처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진격해오는 적군 종대에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을 가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눈이 뒤덮인 나무들의 허리에 철조망을 서로 연결하여 적의 보병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탱크를 잡는 방법은 호수의 얼음을 깨 구멍을 내고 위장을 해 놓는 것이다. 일단 소련군이 이런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이 틈에 핀란드군은 적군을 옆 또는 뒤에서 공격을 가해 부대와 부대 사이를 절단시키고, 점차 주력 부대로부터 고립시켜, 시간이 갈수록 인원수가 줄어든 작은 집단으로 변모해가도록 만들었다. 핀란드군은 이렇게 고립된 소련군 병사들의 집단을 모티(motti) 라고 불렀다. 그들은 불쏘시개용으로 쪼개야 할 작은 통나무를 그렇게 불렀는데, 아마도 여기서 그 이름을 딴 것 같다. 모티 에 빠진 소련군은 거의가 파멸이었다. 함정에 걸린 소련병들은 급히 얼어붙은 땅을 파 참호를 만드는 등 필사적으로 응전했으나 총알 못지않게 추위와 허기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2월 12일, 톨자야르비를 떠나온 파아보 탈벨라는 모티 전술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소련군 제139사단을 함정에 빠뜨렸다. 이것을 안 소련군은 제75사단을 투입하여 제139사단을 구출하려 했으나, 이들 역시 같은 운명에 빠지고 말았다.12월 23일이 되면서 탈벨라는 소련군 2개 사단의 생존자들을 톨바야르비 동쪽 24km지점의 아이토요기 강변까지 몰아내고, 그곳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 기간중의 소련군 피해는 전사 4천명에 수많은 부상자를 냈고, 많은 병사들이 행방불명되었다. 반면 핀란드측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하여, 전사 630명, 부상 1,320명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군 제163사단은 12월 7일 수오무살미(Suomussalmi, 로바니에미 남동쪽 약 232km) 마을을 점령했다. 이에 맞서 재편성을 끝낸 핀란드군은 마을 주변에 반격을 가해, 소련군으로 하여금 심각한 피해를 입게 만들었다. 전황을 살펴 보면, 소련군이 수오무살미에서 참호를 파고 응전 태세를 갖추는 동안, 하얄마르 실라스부오 대령이 지휘하는 핀란드 제9사단은 적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고 이를 완전 포위한 채 아군 보충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핀란드군이 보유하고 있던 병력을 살펴보면, 새로 충원된 5개 대대의 인원, 2문의 대전차포, 8문의 76mm포가 있었다. 소련군 사령부는 곤경에 빠진 제163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비노그라도프 장군이 지휘하는 제44기갑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비노그라도프는 무능했다. 그는 전투 현장에 늦게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핀란드 저격병을 보자 겁에 질려버렸다. 자군보다 우세한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부하들에게 참호를 파고 응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그곳은 그가 구출해야 할 부대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겨우 6~8km 떨어진 곳이었다. 포위된 소련군 제163사단은 성탄 전야를 기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미 동상에 걸린 그들은 가슴까지 올라오는 눈을 헤치면서 탈출하려고 허우적거렸으나, 핀란드 저격병의 총탄에 몰려 얼어붙은 참호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참호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사살되거나 참호 밖으로 되몰려 나와야 했다. 실라스부오 대령은 뒷날 이렇게 회고했다. "수류탄, 권총, 총검 등 닥치는 대로 있는 무기를 총동원하여 적진을 유린했다. 그들의 탱크조차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탱크에 대항할 수 있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해서 12월 28일, 소련군 제163사단은 괴멸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핀란드군은 포로 500명과 탱크 11대를 노획했다. 이 전투 이후 핀란드군의 관심은 비노그라도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군 제44기갑사단에 집중되었다. 이 기갑사단 역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전력 면에 있어서는 1만 8천의 병력과 40대 이상의 탱크를 보유한 여전히 강력한 전투 집단이었다. 한편으로 핀란드군 척후대가 제44기갑사단의 방위선을 탐색하는 동안, 핀란드 공병대는 소련군 진지 남방 8km 자점에 위치한 여러 개의 호수와 나란히 지나는 눈길(snow road) 을 만들었다. 그 다음, 이 눈길을 따라 집결지를 설치하고, 난방이 된 거처와 따뜻한 음식을 마련했다. 핀란드군은 이러한 집결지에서 잘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 소련 방위선상 취약점을 골라 잠복했다가 적을 덮쳤다. 소련군은 번번히 참패였다. 1월 8일에 이르러 전투는 거의 끝났다. 모두 27,500명의 소련군이 전사했고, 1,300명은 핀란드군의 포로가 되었다. 서방 세계의 언론들은 핀란드의 다윗이 소련 골리앗을 무찌른 것을 찬양했다. 한편 스탈린은 분노하여 그의 부하 장군들에게 그들의 무능을 꾸짖었다. 필연적인 결과로서 숙청이 시작되었다. 재수없이 걸려든 비노그라도프는 겨우 살아남기는 했으나 스탈린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그가 처벌된 표면상의 이유는 "적에게 55개의 야전 주방을 탈취당한" 죄목이었으나, 실은 미숙한 전술로 소련 국가에 끼친 손해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핀란드 수뇌부는 실라스부오 대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켜 수오무살미 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전공을 포상했다. 실라스부오는 다음으로 소련 제54사단에 목표를 맞추고 쿠모(수오무살미 남쪽 약 88km) 근처에서 이를 급습했다. 소련군은 또다시 참호를 파고 항전했다. 포위된 소련군은 보급을 공중 투하에 의존했다. 그러나 핀란드군에게는 대공포가 거의 없어, 소련 공군이 식량과 탄약을 투하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소련 항공기의 비행음을 듣고서 신호탄을 쏘아 소련의 보급 항공기가 아군 지역에 보급품을 투하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한편 소련은 제54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핀란드군이 장기(長技)로 하는 바로 그 전법을 사용하여 스키병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련군 사령부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바로 스키병에게 흰색의 위장복을 지급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결빙에 대처한 무기의 유지 관리법이 전무해서, 총신의 기름이 결빙되어 발포가 되지 않는 수가 많았다. 일부 소련 스키병은 핀란드군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들 부대는 전체가 전멸되다시피 했다. 이렇게 해서 구원부대를 섬멸시킨 실라스부오 준장은 소련군 제54사단을 분열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이 작전을 계속, 제54사단은 결국 지리멸렬되었다. 핀란드 북부에 침입한 소련군이 핀란드의 끈기와 교묘한 술책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동안, 만네르하임 방어선에서 진격을 저지당한 키릴 메레츠코프 장군은 방위선 공략을 재개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그는 우선 방위선 동쪽 끝 지역에 대해 주공세를 펴기 위해 양동작전(陽動作戰)으로 핀란드군의 예비 병력을 그쪽으로 끌어낸 다음, 서쪽 끝의 수모요기강과 물란야르비호 사이의 16km폭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공격 목표가 되는 이 지역은 비푸리주에 위치해 있었다. 메레츠코프는 12얼 17일 만네르하임선에 대한 주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전형적인 러시아식 공격 방식을 취해, 보병은 폭발하는 지뢰나 핀란드군의 연속 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진 자의 시체를 넘어 진격해 갔다. 공격하는 소련군은 부대간의 협동이 전무하였다. 이때문에 만네르하임은 적군의 이 공세를 두고 "형편없이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불협화음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방위선 공방전에서나 다른 전선에서 핀란드는 병력 면에서 4대 1의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빈틈 없는 전술과 필사적 용기로서 소련군을 격파했다. 소련군 탱크가 핀란드군 방위선에 들어가면, 이들은 반드시 핀란드군의 "탱크 파괴조"와 만나게 되어 있다. 이 "탱크 파괴조"는 핀란드 병사 1~2명으로 된 결사대로서, 이들은 3~6kg의 고성능 폭약이나 몰로토프 칵테일을 적 탱크에 투척하는 것이었다. 폭팔물이 없을 때는 커다란 나무를 탱크의 캐터필러 사이에 넣어 이를 저지시켰다. 이런 저런 방법을 합쳐 핀란드군은 이 지역에서 소련군 전차 239대를 격파하고 12대 이상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나포했다. 이리하여 12월 20일에 이르자 메레츠코프는 공세를 중지하였다. 그리고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이 전선은 대체로 평온을 유지했다. 한편 스탈린은 매우 분노하였다. 핀란드가 그런 결사적인 저항을 해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이 소련군의 근본적인 패배의 원인이 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원인은 소련의 자만과 무능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련군은 그리 큰 저항을 예상하진 않았으며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의 지휘관들이 80%가 평화시에 희생당했었다. 이들은 보통 무능하지만 상부의 명령에 잘 복종하는 이들로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1차 세계 대전 때 이미 구식이 된 작전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독창적인 작전을 구사하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과서적인 작전만을 고집했다. 또 겨울에 벌이는 전쟁, 특히 삼림 지대에서 벌이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핀란드군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다. 이들이 대량 사용한 군용 차량은 이같은 조건에 매우 취약했다. 소련군의 한 부대가 핀란드 복병들로 둘러싸인 곳에 제발로 진주해 전멸당한 라테 가 전투(Battle of Raate Road)는 지금도 군사학에서 절대 범하면 안될 중대한 실수의 예로 많이 쓰인다. 이 당시 소련군 편제는 2차대전 중에 확립된 편제와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이 문제였다. 대숙청 이후 살아남아 고위 장성이 된 장군들은 숙청에 대한 두려움은 둘째치고, 대단위 야전군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준장급 이상 장군의 70%가 숙청되었으니 그들의 빈 자리는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들이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위로 중대를 지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단을 지휘하게 되고 상관이나 동료들도 대부분 그런 판국이었으니,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작전 지휘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당시만 해도 아직 항공기, 공병, 기갑병, 포병, 보병 간에 역할이 분명하면서도 잘 협조할 수 있는 전술교리를 갖지 못했다. 장교들의 지휘 능력 문제와 더불어 새로운 현대전에 어울리는 전술교리를 숙지못했다는 점도 소련군이 초전에 대패한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 문제는 당시 대부분 군사 강국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로, 19세기적 전쟁 방식과 전술 교리에서 전차와 비행기로 대표되는 현대 전술 교리로 전환되는 과도기여서 어느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진 않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현대적인 기동전과 전술교리를 개발해서 적용한 군대가 독일군이었지만, 그들의 전술교리도 1940년 서부 유럽 전역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대부분 국가들이 아직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술교리를 채택하고 있었고, 독일의 폴란드 및 서유럽 침공과 소련군의 겨울 전쟁 교훈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된 근대전 전술교리를 갖게 되었으니, 소련군을 무능하다고 할 일도 아니었다. 독일군이 서유럽에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과 영국군도 이 당시 소련군 못지않은 실수를 연발했고, 독일군에 호되게 당한 이후에야 겨우 새로운 전술교리를 채택하게 된다. 핀란드의 장비 부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쟁 초기에는 기초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들만이 군복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자신들의 옷에 적당히 표장을 하였으며 일부는 자신들의 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들쭉날쭉이 된 "군복"에는 아이모 카얀데르 총리의 이름을 따 "카얀데르 모델"이라는 애칭이 붙여졌다. 핀란드군은 적군에게서 탈취한 장비·무기·탄약으로 부족한 장비를 충당하려 노력하였다. 다행히도 핀란드는 러시아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소총을 바꾸지 않아 소련군의 소총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제 수오미 기관단총도 사용되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소련이 PPSH41 기관단총을 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분노한 스탈린은 먼저 속죄양을 찾았고, 여기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가 걸려들었다. 1940년 1월 어느날 스탈린은 국방장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키릴 메레츠코프 장군, 니키타 흐루시초프 등을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보로실로프의 저택으로 소환하였다. 이 모임은 그해 겨울이 유별났던 것만큼 이상한 성격의 회동(會同)이었다. 저녁 식사 도중 스탈린은 벌떡 일어나 보로실로프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지휘관으로서 부적합한 보로실로프가 핀란드 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이 놀란 것은 보로실로프가 신랄한 어조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당신(스탈린)은 오로지 당신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바로 당신이 소련군의 수구파(守舊派)를 숙청하여 훌륭한 군인들을 모조리 처형하지 않았소..."(1937년 피의 대숙청)하고 외쳤다. 이어 보로실로프는 통돼지 구이가 담긴 쟁반을 집어들어 식탁에 내동댕이쳤다. "내 평생에 그런 폭발은 처음 보았다."흐루시초프는 뒷날 이렇게 회상했다. 더욱 놀란 것은 스탈린이 매우 차분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그를 직위 해제했으나 처형하지는 않았다. 한편 스탈린은 핀란드 진주군 사령관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다. 그는 메레츠코프가 수립한 기본적인 공격안에 대해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련병이 겨울 전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또한 다시는 패배를 맛보지 않도록 전선에 병력을 증강했다. 당초 소련은 54만의 병력으로 핀란드를 공격했으나 현재는 티모센코 휘하에 90만의 병력이 있었다. 소련군 전선 후방에서는 병사들에 대해 공격 전술에 관한 집중적인 훈련이 실시되었다. 또한 핀란드의 기를 꺽기 위해 추가로 2,800문의 각종 포를 전선에 반입, 화력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을 감행했다. 수주일에 걸친 목격은 방위선 후방을 거의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핀란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2얼 1일, 소련군은 강력한 탱크 부대를 앞세워 척후 공격을 카렐리아 지협 전반에 걸쳐 개시, 본 공세에 앞서 핀란드군을 한풀 더 꺽었다. 공격은 조직적으로 행해져, 야포와 공중 지원을 받은 소련 공병들은 핀란드군이 대전차 장애물로 이용해온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한 뒤 그로 인해생긴 틈새로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 다음에는 탱크 부대가 진격하고 대규모 보병부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동안 폭격기가 핀란드 진지를 폭격했다. 핀란드군이 한 공격 부대를 격퇴하면 또다른 부대가 공격을 가했다. 만네르하임은 "소련군이 이제는 서로 다른 부대와 협동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법을 터득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2월 11일, 새로 충원을 받은 티모센코 원수 휘하 부대는 총공격에 나섰다. 이때부터 2주 반 동안 소련은 강력한 공격을 되풀이해 핀란드 방위망을 뜷고 내륙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핀란드군은 기진맥진하여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절망적인 노력의 하나로 전에는 불합격시킨 자도 징집하고, 부상자를 재소집하였으며, 심지어 10대 학생으로 자원 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는 일이 많았다. 봄이 되자 만네르하임 휘하의 장병들은 아직도 국부적으로 반격을 가해 승리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포탄이 거의 동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남자가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탈벨라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곳이 위기에 처했다." 핀란드의 방위가 어느 한 모퉁이만 무너지면, 핀란드 전체가 와해될 것이었다. 만네르하임도 이제는 패배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핀란드군의 피해는 증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만네르하임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건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0년 3월 6일, 핀란드는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세계의 여론은 핀란드 편이였다. 세계대전이 아직 전면적으로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 전쟁은 당시 진행되던 유일한 전쟁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련의 침공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인정되었다. 외국의 여러 단체들은 핀란드에 의약품과 같은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핀란드계 이민 인구는 핀란드에 돌아갔으며 외국에서 많은 수가 핀란드에 가서 지원병으로 싸웠다. 스웨덴도 이때만큼은 중립을 지키지 않고 군수품과 현금, 신용, 인도주의에 근거한 지원을 핀란드에 해주었다. 8700명의 스웨덴인 지원병이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헬싱키의 외국 특파원들은 전투에 있어서 핀란드군의 독창력과 성공에 대해 때로는 크게 과장되게 보도를 하였다. 전쟁 발발 1개월도 채 안되어 소련의 지도부는 작전 포기를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1월말이 되어서야 핀란드 정부에게 스웨덴 정부를 통해 예비 평화 제의를 전달하였다. 그때까지 핀란드는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싸운 것이었다. 이 평화 제의 소식이 프랑스와 영국 정부에 알려지자 핀란드에 대한 군사 지원의 동기는 크게 변했다. 핀란드는 "레닌그라드 주변 자국 영토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뿐이었다. 물론 핀란드와 외국의 일반 국민들은 이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며 핀란드는 아직도 자신의 존속을 놓고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0년 2월 연합국들은 지원을 제의했다.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를 통해 10만의 병력이 투입되어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계획으로 내세워졌다. 그러나 실제 핀란드 지원에 들어가도록 계획된 병력은 그 일부뿐이었다. 이 계획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여 독일로 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실이며 그리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연합군의 통과를 거절했다. 실제로 전쟁 이후 연합군의 사령관은 소련군과 전투 상황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치지 않고 핀란드의 부동항 펫사모를 통해 연합군을 투입하자는 제안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영국이 당초부터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장악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 총리의 스웨덴 정부는 무장군이 스웨덴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거절했다. 스웨덴은 겨울 전쟁에 대해서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영국과 독일·소련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켰다. 프랑스·영국군의 통과를 허용하는 것은 국제법상 중립국이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스웨덴 내각은 또 핀란드가 여러 차례 요청한 스웨덴 정규군의 지원을 거절했다. 결국에는 장비와 탄환 지원도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핀란드는 전쟁이 지속되기를 희망한 연합국들과 전쟁이 자국까지 퍼지는 것과 핀란드 패전의 경우 난민 발생을 우려해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희망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에 외교적으로 입지가 좁았다. 독일 역시 협정에서 양보된 것은 나중에 충분히 다시 차지할 수 있다면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라는 권고를 했다. 2월말 핀란드의 총사령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군사 상황 전개가 불리해질 것으로 판단하여 정부가 2월 29일 평화 협상을 시작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날 소련군은 비푸리 공격을 시작하였다. 핀란드가 평화 협정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와 영국이 알게 되자 그들은 재차 지원을 제의했다. 이번에는 핀란드가 3월 12일 이전 지원을 요청한다는 조건하에 50만 병력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병력 중 6천명만이 핀란드에 투입될 계획이었으며 나머지는 스칸디나비아 북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겨울이 끝나면서 소련이 전쟁에서 손을 뗄 의향이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독일의 대표들은 핀란드에게 소련과 협정을 할 것을 권했다. 소련군은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냈으며 소련 정부에게 이는 큰 국제적 망신거리였다. 봄이 오면서 해동으로 소련군이 삼림 지대에서 자칫 수렁에 빠질 상황에 놓였다. 그리하여 2월 12일 평화 조항 초본이 핀란드에 전달되었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스웨덴도 핀란드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여 겨울 전쟁이 빨리 종전되기를 희망했다. 핀란드에 극히 불리한 조항을 받고 핀란드 내각이 망설이는 동안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는 핀란드의 스웨덴 정규군 지원 요청을 거절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2월말이 되자 핀란드군의 탄환은 바닥이 났다. 소련군은 그때까지 많은 사상자만 내면서 넘지 못하던 만네르헤임 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소련 당국은 그들의 군대가 왜 이 방위선을 돌파하기까지 그처럼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나 하는 이유를 자국민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대전차 장애물 같은 구조물의 규모와 강도를 과장해서 발표했다.) 결국 2월 29일 핀란드 정부는 협상을 시작하기로 결정, 1940년 3월 6일 양국은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4개월간의 전쟁 후 소련군에서는 최소 12만 7000명이 사망하였다. 핀란드군은 2만 7000명 정도의 사망자밖에 내지 않았지만, 핀란드는 많은 것을 잃었다.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통해 핀란드는 제2도시 비푸리(Viipuri)를 포함한 공업 중심지인 핀란드령 카렐리야(핀란드어로 카리알라) 영토를 소련에 넘겼다(협상 당시 많은 부분을 핀란드군이 점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이는 핀란드 영토의 10% 가까이 되었다. 핀란드 인구의 약 12%인 42만 2000명의 카렐리야인들은 거주지를 잃었다. 이 조약으로 소련 영토가 된 지역에 있던 핀란드군과 민간인들은 속히 대부분 핀란드로 대피되었다. 핀란드는 이외에도 살라(Salla) 지방과 바렌츠 해의 칼라스타얀사렌토 반도(Kalastajansaarento peninsula), 핀란드 만의 섬 4개를 소련에 넘겨야 했다. 항코(Hanko) 반도도 소련에 군사 기지로 30년간 임대되었다. 핀란드 국민들은 가혹한 평화 조약 조항에 당혹했다. 전쟁에서 잃은 영토보다 평화로 잃은 영토가 더 많은 듯했다. 국제 여론, 특히 스웨덴의 동정은 무의미했다. 그리하여 핀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소련에 대한 복수전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1년 후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이 발발, 전쟁은 재개되었다. 수오무살미 전투 톨바야르비 전투 핀란드의 역사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 핀란드화 로타 스베르드 (Lotta Svärd) 시모 해위해 (Simo Hayha) 소설 데프콘:《데프콘 한중전쟁》에서 한국군과 인민군이 중국 인민해방군을 격퇴하는 이야기에서 소련-핀란드 전쟁이 인용된다. 한국군의 차영진 중령과 인민군의 장교들은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격퇴하기 위해 사용한, 적을 나누어서 격퇴하는 전술을 응용하여 중국 인민해방군을 격퇴한다. 한국어 문헌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영어 문헌 Sander, Gordon F. The Hundred Day Winter War Finland s Gallant Stand against the Soviet Army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3) 400 pp. (Originally published in Finnish.) 핀란드, 러시아어 문헌 (The Mannerheim Line Legend of the Winter War) (The Winter War 1939–1940) (Red tanks the Red Army tank forces, 1918–1945) (Truths about the war. One Finn is worth 5.7 Russians) Capsule review (in Finnish) (Battles of the Winter War) (The Raate Road a tale of heroism in the north during the Winter War) (Reality and Illusions) Leskinen, Jari; Juutilainen, Antti, eds (1999). Talvisodan pikkujättiläinen (Winter War Guidebook). 1st ed. Porvoo WSOY. . (The Winter War at sea) (Battles in Ladoga Karelia) (Foreign volunteers in the Winter War) (The Red Army s execution of Stalin s will) (Battles in the Isthmus) (Victims of the Winter War) (The secret 1930s Finnish and Estonian military collaboration against Soviet invasion) (Finland s glory days) (Soviet objectives before and during the Winter War) (Russian prisoners of war and casualties) (Armament and equipment of the Finnish forces) (The Winter War in the air) (The Navy s first victory Russarö) (The spirit of the Winter War) ( (The Winter War in Soviet historiography) (Myth of the Mannerheim line) Leskinen, Jari; Juutilainen, Antti, eds (2005). Jatkosodan pikkujättiläinen (Continuation War Guidebook). 1st ed. Porvoo WSOY. . (Formation of the Ground Forces) ("Stalin s nuisance, Himmler s louse"—both remarks having been references to Finland) (How to conquer Finland Operational plans of the Red Army 1939–1944) 분류:핀란드의 전쟁 분류:소련의 전쟁 분류:동부 유럽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분류:1939년 분쟁 분류:1940년 분쟁 분류:1939년 핀란드 분류:1940년 핀란드 분류:1939년 소련 분류:1940년 소련 분류:소련-핀란드 관계 |
요하네스 케플러 (, 1571년 12월 27일 - 1630년 11월 15일)는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이자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핵심 인물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행성운동법칙으로 유명하며, 후대의 천문학자들은 그의 저작 《신천문학》, 《세계의 조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를 바탕으로 그 법칙을 성문화하였다. 또한 이 저작들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 생애 동안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신학교의 수학 선생,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의 조수, 루돌프 2세,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 등 세 황제를 모신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의 수학 선생, 발렌슈타인 장군의 점성술사라는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는 광학 연구 분야의 초석을 닦았으며, 굴절 망원경을 개조하여 성능을 향상시켰으며(케플러식 망원경), 동시대의 인물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데 공헌하였다.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천문학(자유 인문의 범위 내에 있는 수학의 한 가지)과 물리학(자연 철학의 한 가지) 사이에는 확고한 경계가 있었다. 그는 이성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빛을 통하여 이해가 가능한 (accessible through the natural light of reason) 지적 계획에 따라서 신은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념에 차 있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자신의 저술 속에 종교적 주장과 이성적 사고를 융합시켰다. 케플러는 천문학을 보편적 수리물리학의 한 갈래로 인식함으로써 고대의 물리학적 우주론의 전통을 바꾸었고, 자신의 새로운 천문학을 이른바 “천체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의 여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에 관하여》의 보충” 이라고 묘사했다. 바일 데어 슈타트의케플러 생가.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바일데어슈타트의 제국자유도시(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슈투트가르트에 속하고 슈튜트가르트 중심부에서 30 km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동네)에서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다. 케플러 본인이 어른이 되고 나서 계산한 바에 따르면, 부모가 결혼한 다음날 오전 4시 47분에 자신이 잉태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제발트는 그곳 읍의 장이었지만 케플러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보수가 불확실한 용병 일로 벌이를 했고, 케플러가 다섯 살 때 집을 나가버렸는데, 80년 전쟁 당시 네덜란드 전선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관집 딸이었던 어머니 카탈리나 굴덴만은 치료사이자 약재상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나중에 마녀로 몰리게 된다. 이르게 태어난 케플러는 병약하지만 영리한 아이였고, 외할아버지의 여관에 묵는 사람들을 자신의 굉장한 수학적 재능으로 놀라게 하곤 했다. Comet of 1577.gif|섬네일|왼쪽|220px|케플러가 여섯 살 때 목격한 1577년 대혜성. 케플러는 여섯 살 때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으며, 후에 그 일을 《여섯 살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에서 "나는 1577년의 혜성에 대해 많이 들었고,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보기 위해 나를 데리고 높은 장소로 올라가셨다"라고 회고했다. 9살 때, 그는 또다른 천문학 현상인 1580년 월식을 관찰하였고, 후에 월식을 보기 위해 “밖으로 불려가서” 달이 “약간 붉은 색이 된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케플러는 어려서부터 천문학을 알게 되었고, 평생에 걸쳐 천문학에 사랑을 쏟았다. 그러나 유년 시절에 천연두를 앓은 바람에 병약한 신체와 불구의 손을 가지게 되었고 시력도 악화되어 관측 능력에 결함이 생겼다.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의 지방 귀족들이 레온베르크에 세운 영재학교에 들어갔다. 케플러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고약한 성격 탓에 친구가 없었다. 훗날 케플러의 자서전에서 이 시절을 묘사한 대목은 끝도 없이 “누군가와 싸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했다”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케플러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았고, 심기증 환자기도 했다. 1589년, 초등 학교, 라틴어 중등 학교, 뷔르템베르크의 국영 개신교 신학교를 거친 뒤,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교에 신학 학생으로 들어가 비투스 뮐러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교과 과정 중에는 수학과 천문학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굉장한 실력의 수학도임을 증명했고 능숙한 점성술사라는 평판을 들었으며, 동년배 학생들에게 별점을 쳐주곤 했다.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미하엘 매스틀린의 지도를 받으며,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관하여 개신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프톨레마이오스설과 일부 제자들에게만 개인적으로 가르쳤던 코페르니쿠스설 양쪽을 모두 배웠다. 그는 이 시점부터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되었다. 학생들 간에 토론이 벌어지면, 케플러는 이론적인 관점과 신학적인 관점 모두에서 지동설을 옹호했고, 태양이 우주를 움직이는 주요한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목사가 되겠다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학업의 막바지에 이르러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개신교 학교(그라츠 대학의 전신)의 수학과 천문학 교사 자리로 천거되었다. 그는 1594년 4월, 나이 23세 때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케플러는 훌륭한 학자이긴 했어도 훌륭한 교육자는 되지 못했다. 목소리는 웅얼거렸고, 빈번히 강의 주제를 벗어나 옆길로 빠졌으며, 그라츠에서의 두 번째 해에는 수강생이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말 못하게 지루한 강의였다고 한다. 신비》에서 묘사된, 케플러의 플라톤의 다면체 구조 태양계 모형. 케플러의 첫 주요 천문학 연구 《우주구조의 신비》()는 코페르니쿠스 설을 옹호한 최초의 출판물이다. 케플러는 그라츠에서 선생을 하고 있을 때인 1595년 7월 19일에 토성과 목성의 궁도대에서의 주기적인 합을 증명해 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다각형들이 서로 안에 갇혀 우주의 기하학적 기반이라고 생각한 확실한 비율로 원에 내접하고 외접한다고 생각했다. 천문 관측 결과와 들어맞는 다각형들의 배열을 찾는 데 실패하자, 케플러는 입체 다면체로 실험을 시작했다. 케플러는 다섯 개의 플라톤의 다면체들이 구형의 천구 에 각각 내접하고 외접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입체들은 각각 다른 입체의 안에 있는 구 안에 있음으로,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여섯 개의 행성들―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그리고 토성에 상응되는 6개의 포개진 겹을 형성하는데, 이 입방체들은 안에서 밖으로 순서대로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이다. 케플러가 이렇게 정다면체와 행성을 연결해서 추측한 배경에는 정다면체의 종류도 유한하다는 사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케플러는 행성이 여섯 개 뿐(적어도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는)인 까닭이 정다면체가 다섯 개 뿐이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고, 정다면체에서 행성의 구들을 유지하는 투명 구조물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케플러는 이 이론을 ‘코스모스의 신비’라고 불렀다. 그는 정다면체와 행성 간 거리의 관계가 ‘신의 손’을 의미한다고 굳게 믿었다. 케플러의 모형의 안쪽을 확대한 것. 제목에 나타냈듯이, 케플러는 자신이 우주에 대한 신의 기하학적인 계획상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케플러의 믿음의 대부분은 우주 자체가 신의 이미지이며, 태양이 성부, 항성 천구가 성자, 그리고 그 사이의 우주 공간이 성령이라는, 케플러의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주구조의 신비》의 첫 번째 원고는 지동설을 천동설에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 성경의 구절들과 조화시키는 데 광범위한 장(章)을 할애했다.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성경 주해를 제거하고, 케플러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포함한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묘사를 추가한 원고 출판에 대한 튀빙겐 대학교 이사회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우주구조의 신비》는 1596년에 출판되었고, 케플러는 1597년에 그 사본을 저명한 천문학자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책이 널리 읽혀지지는 않았지만, 이로써 케플러는 고도로 숙련된 천문학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하게 된다. 또한 후원을 받기 위해 그라츠에서 자신의 직위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물론, 강력한 후원자들을 향해 감정이 넘쳐 흐르는 헌정사를 쓰기도 했다. 이후 나중의 연구에서 세부적인 내용들을 수정할 작정이었지만,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의 플라톤 다면체 우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케플러의 주요한 천문학 연구들은 보다 정밀한 내, 외부의 구의 크기를 알아내기 위해 행성 궤도의 이심률을 계산하는 등, 오직 이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다.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의 초판 출간 이후 25년 동안 주석을 달아, 1621년에 확장된 두 번째 판을 출판했는데, 첫 번째 판의 한배 반 정도의 길이였다.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이 우주론의 모형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연구 제안서를 제출했다. 케플러는 은과 보석으로 모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도 거룩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고 여차하면 공작의 잔으로도 쓸 수 있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안서는 값싸게 종이로 먼저 만들어 보라는 충고와 함께 퇴짜를 맞았다. 메달 안에 그려진 케플러 부부의 초상화. 1595년 12월, 케플러는 23살의 딸 딸린 과부 바바라 뮐러를 소개받고 연애하기 시작했다. 뮐러는 전남편의 재산들을 상속받게 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방앗간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욥스트는 케플러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결혼을 반대했다. 케플러는 할아버지의 신분을 물려받긴 했지만 그의 가난은 신분과 어울리지 않았다. 욥스트는 케플러가 《우주구조의 신비》작업을 마치고 나자 마음이 누그러졌으나 케플러가 책 출판의 세세한 일에 신경을 쓰는 동안 약혼은 거의 파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약혼이 성사되도록 도왔던 교회 사람들이 뮐러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압력을 넣었고 뮐러와 케플러는 1597년 4월 27일 결혼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케플러는 두 아이(하인리히와 수잔나)를 얻었으나 둘 다 어렸을 때 죽고 말았다. 1602년 그들은 딸 수잔나를 낳았고, 1604년 아들 프리드리히를, 그리고 1607년 아들 루트비히를 낳았다. 갈릴레오가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 1597년 8월 4일에 쓰여졌다. 《우주구조의 신비》의 출판과 그라츠 학교 장학사들의 찬성에 따라 케플러는 연구를 연장 및 부연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4개의 책을 더 쓰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고정된 우주의 외관(태양과 붙박이별들)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행성과 그 운동에 대한 것, 다른 것은 행성의 물리적 특성과 지리적 특징(특히 지구에 초점을 맞추어)의 구성에 대한 것이었으며, 마지막은 하늘(천국)이 지구에 미치는 대기광학적·기상학적·점성술적인 영향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많은 천문학자들에게 《우주구조의 신비》를 보내 의견을 구했다. 마구잡이로 여러 곳으로 발송한 책들 중 두 권이 어찌어찌해서 이름 없는 수학 선생의 손에 들어갔다. 그 선생은 케플러에게 "나도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직 논리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라는 답장을 보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책을 받은 과학자들 중에는 루돌프 2세의 제국 수학자이자 튀코 브라헤의 숙적인 라이마루스 우르소도 있었다. 1598년, 오래간만에 편지를 보낸 매스틀린 선생은 우르소의 책은 무가치한 표절품이라고 충고했는데도 우르소와 엮이고 말았다고 케플러를 심하게 꾸짖었다. 우르소는 당시 튀코 체계 를 누가 제창했느냐의 문제로 튀코와 싸우고 있었다. 우르소는 튀코와의 싸움에서 케플러를 인질 삼을 흑심을 품고 있었다. 케플러는 멋도 모르고 우르소에게 “가설이 마음에 듭니다”라는 편지를 보냈고, 우르소는 튀코와의 논쟁에서 자신의 우선권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 저서 《천문학적 가설에 대하여》에서 케플러의 알랑거리는 편지들을 재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우르소는 튀코를 근거없이 비난했고, 참다못한 튀코는 우르소의 책을 마구 찾아내 불태워버렸다. 그런 사정을 몰랐던 케플러는 순진하게 튀코에게 자신의 책을 보냈다. 튀코는 ‘남을 중상모략하는 범죄나 다름없는 책’에 자신의 편지가 이용당한 사실을 케플러가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튀코는 튀코대로 우르소에 대한 소송에 케플러의 언질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튀코 또한 케플러의 이론에 대해 다소 신랄하지만 이치에 맞는 비판을 시작으로 케플러와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반대자들 중 한 명으로서 튀코는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부정확한 수치 자료를 가져다 쓴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 편지들을 통해, 튀코와 케플러는 월면 현상에 대한 이야기 및 코페르니쿠스설과 그 신학적 생존 가능성 등 광범위한 천문학 문제들을 토론했다. 그러나 튀코의 데이터보다 정확한 자료가 없었기에 케플러는 이 많은 쟁점들을 제대로 다뤄 볼 방법이 없었다. 대신, 케플러는 연대학과 〈조화〉, 즉 음악과 수학과 물리학계의 수비학적 관계와 점성학적 중요성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지구가 영혼(후에 태양이 어떻게 행성운동의 원인이 되는지 설명하려고 했을 때 케플러가 사용한 도구)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여, 점성술적 에스펙트와 천문학적 거리를 날씨와 다른 지구의 현상들에 결합한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1599년, 사용 가능한 자료들의 부정확함 때문에 케플러는 또다시 자기 연구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관측 결과와 자기 이론이 맞지 않자 가설의 거창함에 빠져 있던 케플러가 내린 결론은 코페르니쿠스의 관측값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케플러는 누구보다 정확한 관측 자료를 자랑하던 튀코를 만날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 같은 시기 주변 환경이 종교적으로 불안해진 것도 그라츠에서 케플러가 계속 일하는 것을 위협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라츠를 지배하던 대공은 가톨릭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권력 밖으로 밀려났다. 가톨릭을 믿지 않으면 수입의 1할을 벌금으로 내거나 추방당해야 했다. 그 해 12월, 튀코가 케플러를 프라하로 초대했다. 1600년 1월 1일(초대장을 받기도 전에), 케플러는 튀코의 후원이 있다면 이 철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케플러 자신의 사회적·경제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프라하로 출발했다. 튀코 브라헤의 흉상 이 즈음 튀코는 우르소와의 추한 싸움에서 승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가 되어 있었다. “우르소는 불명예인으로 낙인찍히고 참수될 것이다”라는 판결이 나왔고, 우르소는 프라하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1600년 10월 16일,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우르소는 처벌을 받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1600년 4월 4일, 케플러는 튀코의 새 관측소가 세워지던, 프라하에서 50km 정도 떨어진 베나트키나트이제로우에서 튀코 브라헤와 그의 조수 프란츠 텡나겔과 롱고몬타누스를 만났다. 케플러는 두 달 이상 손님으로 머물렀고, 튀코의 화성 관측 일부를 분석했다. 튀코는 자신의 자료를 철저히 극비에 부쳤지만 케플러의 이론 지식에 감동을 받아 곧 자료 입수를 허락했다. 케플러는 자기 저서 《우주구조의 신비》의 이론을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에 기반하여 증명하려 했으나, 집에서 작업하기 위한 자료 복사본을 가져가는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업에는 이후 2년의 시간이 걸린다. 요하네스 예세니우스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정규직을 얻기 위해 튀코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은 격한 싸움 끝에 깨지고, 4월 6일 케플러는 프라하로 가버렸다. 케플러와 튀코는 곧 화해하고 마침내 봉급과 주거 생활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6월, 케플러는 가족들을 데리러 그라츠의 집으로 돌아갔다. 연구실의 튀코 브라헤. 케플러와 튀코는 가깝지만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튀코가 죽을 때까지 싸우고 화해하고를 밥 먹듯이 반복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튀코의 주변에는 늘 조수들, 아첨꾼들, 식객들로 북적거렸고 이들은 시골에서 온 촌뜨기 학자인 케플러를 놀려댔다. 튀코 역시 잠재적 경쟁자인 케플러에게 조금씩 볼 수 있도록 해줬을 뿐 쉽게 자료 전체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튀코는 케플러가 우르소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라츠에서의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이 튀코에게 바로 돌아가겠다는 케플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천문학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희망으로, 케플러는 페르디난트 대공의 수학자로 임용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케플러는 달의 운동에 대한, 힘에 바탕한 이론을 제안한 소론(《지구 안에 달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 In Terra inest virtus, quae Lunam ciet )을 써서 페르디난트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페르디난트 본인이 개신교도들의 추방에 앞장섰고, 케플러는 총 61명의 추방자들 중 15번째로 추방당했다. 페르디난트 아래에서 일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이 소론은 월식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했다. 이 방법은 7월 10일 그라츠에서의 월식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관측은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에서 완성한, 광학 법칙을 탐구하는 데에 기초를 형성했다. 1600년 8월 2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뒤 케플러 가족은 그라츠에서 추방당했다. 몇달 뒤 돌아온 케플러는 나머지 식구들을 데리고 프라하로 떠났다. 한편, 튀코의 연구진에도 변화가 생겼다. 튀코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롱고몬타누스는 덴마크로 돌아갔고, 요하네스 뮐러도 떠났으며, 텡나겔은 튀코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뒤 홀란트(네덜란드)로 가버렸다. 결국 남은 연구원은 튀코와 케플러뿐이었다 1601년의 대부분 동안 케플러는 튀코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는데, 그 대가로 튀코는 케플러에게 행성의 관측 결과를 분석하고 (이제는 고인이 된) 경쟁자 우르소에게 불리한 내용의 논문을 쓰는 일을 시켰다. 케플러는 스승 매스틀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튀코는 좋은 사람이지만 유치하고 변덕스럽다”, “우르소를 반박하는 글을 쓰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당시 케플러가 쓰던 《우르수스에 대한 튀코의 방어》는 튀코가 죽자 미완성인 채로 방치되었고, 1858년에야 출판되었다. 9월, 튀코는 에라스무스 라인홀드의 《프로이센 목록》을 대체하기 위해 황제에게 제출한 새로운 프로젝트 《루돌프 표》의 공동 작업자로 케플러를 임명했다. 1601년 10월 13일, 케플러는 달과 토성, 화성을 관측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튀코는 로젠버그 남작이 베푼 만찬에 놀러 가 포도주를 과음했는데, 예의를 차리느라 화장실에 가지 않고 오랫동안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렸다. 하지만 음식과 음주를 자제하라는 충고를 듣지 않아 병이 악화되었고, 이내 정신을 잃고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졌다. 튀코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는 케플러를 불러 튀코 체계의 연구에 전념해 달라고 유언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혼수상태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날 살려 줘, 날 살려 주게.” “내 삶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게 하소서!”하는 독백을 되풀이하더니 결국 튀코는 1601년 10월 24일에 어이없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틀 뒤, 케플러는 튀코가 완성하지 못한 작업을 완성하는 책임을 지고 튀코의 후임으로 제국 수학자에 임명되었고, 튀코의 관측 자료가 없다고 완강하게 발뺌하는 튀코의 유족들에게 관측자료를 받아내는 일을 해야 했다. 한편, 이듬해 돌아온 텡나겔은 튀코 유족들을 대표해 유족들의 몫을 요구했다. 그 결과, 튀코의 자료들을 사용하기 위해 저작권을 협상하느라 작업물 두 가지의 출판이 4년 지체되었다. 케플러는 그 뒤 11년 동안 황실 수학자로서, 일생 중 가장 생산적으로 지냈다. Heintz d. Ä. 002.jpg|섬네일|220px|신성 로마 제국의 루돌프 2세. 궁정 수학자로서 케플러의 주요 업무는 루돌프 황제에게 별점을 쳐주는 일이었다. 케플러는 당대의 점성술사들이 정밀하게 미래를 예측하거나 구체적인 사건을 예언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회의적으로 바라보았지만, 튀빙겐에서 공부할 시절부터 동료들이나 가족들, 후원자들에게 천궁도로 상세하게 점을 쳐주곤 했다. 또한 황제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도 케플러의 별점을 구했다. 하지만 케플러의 충고들은 별보다는 상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루돌프는 자신의 황궁에 소속된 학자들(셀 수 없이 많은 연금술사들도 포함해서)의 연구에 상당히 흥미가 있었고, 물론 케플러가 물리학, 천문학 연구를 지속하도록 도와 주었다. 프라하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우트라퀴스트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였다. 하지만 황궁에서 일하던 케플러의 지위 덕분에 케플러의 루터교적 신념은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황제는 케플러 가족에게 ‘명목상으로는’ 충분한 보수를 제공했지만, 한도를 넘어버린 황실 금고의 어려움 때문에, 케플러는 재정적 의무를 위해 충분한 돈을 손에 넣으려면 계속해서 애를 써야 했다. 쉽게 말해, 프라하 황궁에서 황제가 준다는 돈은 상징적인 숫자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수령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케플러는 튀코의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루돌프 황제에게 2만 플로린 의 하사금을 약속 받았지만, 실제로는 한 푼도 받지 못했으며, 연봉 500플로린을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케플러의 임금은 3명의 황제(루돌프, 마티아스, 페르디난트)를 거치면서 이런 식으로 꾸준히 체불되어, 페르디난트 2세 때는 밀린 봉급이 1만 2천 플로린에 달했다. 한편, 바바라와 함께한 가정 생활은 이러한 재정적 문제 때문에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둘은 종종 싸우기도 하였고, 바바라의 발작적인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바바라는 높은 계급 출신은 아니었지만, 시골의 상류층 집안의 딸이었던 만큼 남편의 가난한 직업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멸하기까지 했다. 케플러는 또 케플러 나름대로 “아내를 나무라기보다 내 손가락을 깨무는 편이 더 낫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황궁 생활 덕분에 케플러는 요하네스 마태우스 바커 본 바켄펠스, 요스트 뷔르기, 데이비드 파브리시우스 등의 다른 저명한 학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천문학 연구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 ===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에 실린 눈의 구조에 대한 한쪽 삽화. 케플러는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 분석을 계속하면서 《루돌프 표》 목록화를 천천히 시작했다. 한편, 그는 1600년에 펴낸 달에 대한 논문에서 광학 법칙 연구 결과를 소개하였다. 그 당시 월식과 일식은 예상치 못한 그림자의 크기, 개기 월식때 붉게 물드는 달, 개기 일식 때 태양을 둘러싼 이상한 빛 등 정체불명의 현상으로 생각되었다. 대기 굴절과 관련된 이슈들은 〈모든〉 천문학적 관찰에 응용되었다. 케플러는 1603년 대부분의 시간을 광학적 이론에 쏟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연구들을 잠시 멈추었다. 연구 결과 나온 원고는 1604년 1월 1일에 황제에게 헌정되었고, 그 이름은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이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빛의 밝기를 좌우하는 역제곱 법칙, 평면 거울과 곡면 거울에서의 반사 현상,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그리고 시차나 육안상의 천체의 크기 같은 광학의 천문학적 의미를 설명했다. 또한 케플러는 자신의 광학 연구를 인간의 눈에까지 연장했고, 망막 위의 수정체 때문에 이미지들이 상하좌우 반전되어 투영된다는 것을 인지한 최초의 신경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케플러는 이미지가 반전된다는 사실을 광학의 범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딜레마의 해결책을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영혼의 어떤 작용으로 인해 이미지가 뇌 속에 들어가서 바로잡혀진다고 생각했다. 본래 케플러는 이것을 몇주동안 써서 간단한 논문으로 내려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450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이 되고 말았다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은 굴절의 법칙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현대 광학의 기초로 평가받고 있다. supernova.jpg|섬네일|오른쪽|220px|SN 1604의 초신성 잔해 1604년 10월, 새로운 밝은 항성(SN 1604)이 나타났지만 케플러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케플러는 그 항성을 체계적으로 관측하기 시작했다. 그 초신성은 밤 하늘에서 가장 밝은 금성보다 약간 덜 밝았으며, 일 년 이상이나 관측되었다. 점성술적으로, 1603년은 수상궁의 시작 및 약 800년 주기의 대회합(목성과 토성의 합) 기간의 시작으로 지정된 해였다. 점성가들은 앞에서 말한 두 기간을 샤를마뉴의 등장(약 8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약 1600년 전)과 관련시켰고, 이로부터 새로운 황제가 등장한다는 식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리라고 추측했다. 케플러가 2년 뒤에 이 새로운 항성을 자기 저서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에서 기술한 것은, 황제를 위한 황실 수학자이자 점성술사로서 이러한 정황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케플러 본인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점성술적인 역사적 순환 해석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대신 항성의 천문학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이 논문에 항성의 밝기가 점차 어두워지는 것, 항성의 기원에 대한 추측, 시차를 잴 수 없었다는 점이 이 천체가 항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 더 나아가 하늘(천국)은 영원불변한다는(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어져 온 천구가 완벽하고 불변하다는 생각) 교리에 대한 의심 등을 기록했다. 새로운 항성의 탄생은 곧 하늘(천국)이 변화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Drawing of SN 1604.png|섬네일|위오른쪽|왼쪽|뱀주인자리의 발치에 N자로 표시된 새로운 별 (stella nova)의 위치 (왼쪽부터 4째칸, 위쪽부터 8째줄). 두 행성운동법칙이 포함된 《신천문학》()에서 절정에 달한 심화된 연구는, 튀코의 지도하에 화성의 궤도에 관한 분석적 검토로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기 이론에서 무시했던 수학적 요소인 상응점을 이용하여, 케플러는 화성 궤도의 여러 근사치를 계산하고 계산하고 또 계산하여 마침내 튀코의 관측 결과와 2분(평균적인 측정 오류) 범위 내에서 거의 일치하는 모형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는 이 부정확한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형이 특정 지점에서는 관측 결과와 8분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케플러는 전통적인 수학적 천문학 방법의 광범한 배열을 따랐다가 실패하자 관측 결과에 타원 궤도를 대입하는 데 착수했다. Mars retrograde.jpg|섬네일|220px|지구중심설에 바탕한 화성의 겉보기 역행 운동 궤도 그림. 《신천문학》 1장, 1611년. 케플러는 우주를 종교적인 관점으로, 태양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징이며 태양계 기동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케플러는 《자석에 관해서》(1600년)에 나온 지구의 자기적에 대한 윌리엄 길버트의 이론과 광학에 유추하여 자신의 연구를 이끌어 냈다.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에 가깝고 멀리 갈수록 운동이 빨라지고 느려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힘(또는 움직이는 생명) 이 태양에 의해 퍼져나가며, 멀어질수록 약화된다고 생각했다. 이 가정은 천문학적 체계를 부활시킬 수학적 관계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원일점과 지구와 화성의 근일점 측정에 바탕하여 행성의 운동 비율은 태양까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알아냈다. 궤도 주기를 통해 이 관계를 입증했지만, 이는 대규모의 계산을 필요로 했다. 이 작업을 단순화하기 위해 1602년 말에 케플러는 기하학적 관점에서 계산을 다음과 같이 재공식화했다.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행성과 태양 사이 거리에 관계없이 항상 같다.” 이것이 제2 법칙,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이었다. 그러고 나서 케플러는 기하학적 비율법을 사용하여 화성의 전체 궤도 계산에 착수했으며, 화성 궤도가 알 모양임을 확신했다. 거의 40여 번에 달하는 실패 끝에, 마침내 1605년 초에 케플러는 전대의 천문학자들이 못 보고 지나친, 해답이 되기에는 너무 간단하다고 여겨졌던 타원에 대한 생각을 우연히 떠올렸다. 타원형의 궤도가 화성 관측 자료에 들어맞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즉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 이것이 제1 법칙, 타원궤도의 법칙이었다. 케플러는 계산할 때 조수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화성 외의 천체에도 수학적 분석을 하지는 않았다. 그해 말경, 그는 《신천문학》의 원고를 완성했으나, 튀코의 관측 결과를 사용한 것에 대한 튀코의 유족들과의 법적 분쟁으로 인해 1611년까지 출판하지 않았다. === 《굴절광학》, 《꿈》 원고와 다른 작업들―케플러의 추측 === 프라하의 오래된 카를로바 거리. 케플러가 프라하 시절에 살았던 주택이 있는 곳이다. 케플러가 프라하에서 거주한 주택 내부. 《신천문학》이 완성됨에 따라, 여러 해 동안 케플러의 연구 중 대부분은 《루돌프 표》의 준비와, 목록에 바탕한 추산 위치표(행성과 항성의 위치에 대한 예측)의 포괄적인 집합에 맞춰져 있었다(하지만 많은 해가 지나도 둘 다 완성되지 않았다). 또 케플러는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조반니 안토니오 마치니와 협력하려고 시도했는데, 이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케플러의 작업 중 몇은 연대학(특히 예수가 살던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의 날짜 기입)과 점성학(특히 대참사에 관한 연극 같은 예언을 하는 로슬린 등의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다루어졌다. 한편, 케플러는 1608년에 한 무명의 귀족에게 별점을 쳐 줬다. 그의 사주는 “민첩하고, 명민하며, 근면하고, 평범한 일에 한눈팔지 않으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용맹 정진할 것이며, 영광에 대단히 목말라하고 현세의 명예와 권력을 탐식할 것이며 그 결과 스스로 공개적·비공개적 적들을 숱하게 만들 것이나, 그 모든 적들을 대부분 극복하고 정복할 것이다”라고 나왔다. 이 무명의 귀족은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이 사람이 바로 후일 케플러의 새로운 후원자가 되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었다. 케플러와 로슬린은 출판물을 통해 서로의 이론을 공격하거나 공격에 대해 반격했으며, 그 와중에 치료사 필리프 베살리우스는 점성술(그 중에서도 특히 로슬린의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저작을 출판했다. 케플러는 점성술을 지나치게 옹호하는 이론과, 다른 한편으로 점성술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현실을 목도했고, 여기에 응하여 《제삼자의 개입》( Tertius Interveniens )을 썼다. 이 작업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반목하는 학자들간을 중재하는 것이었으나, 이외에도 행성과 인간의 영혼간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 메커니즘에 대한 가설과, 점성술의 가치에 대한 케플러의 총체적인 관점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케플러는 행성의 배열이 인간과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고 진지하게 믿기도 했지만, 점성술이 “어리석은 자들에게 미신을 조장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한 인물이었다. 1610년의 케플러 초상화. 그린이는 미상. 1610년의 첫 번째 달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강력한 기능을 지닌 신형 망원경을 이용, 목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4개의 위성 가니메데, 칼리스토, 이오, 유로파를 발견하였다. 갈릴레오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 〈별세계의 사자〉라는 뜻)를 출판하면서 자기 관측 결과의 신빙성을 강화하기 위해 케플러의 자문을 구하였다. 케플러는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 Dissertatio cum Nuncio Sidereo )를 통해 매우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그는 갈릴레오의 관측을 보증하였고, 갈릴레오의 발견이 뜻하고 암시하는 바와 망원경 이용의 추측 범위를 우주론과 점성술 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광학에까지 확대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해가 지나고, 케플러는 달을 망원경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관측, 《목성의 위성에 대한 해설》( Narratio de Jovis Satellitibus )을 출판하여 갈릴레오의 이론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신천문학》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케플러는 실망하였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목성의 위성들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다.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보증으로 자신을 겨냥한 이런 비판들을 모두 꺾어 버릴 수 있었지만, 케플러는 고맙다는 인사말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케플러는 갈릴레오의 무례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고, 갈릴레오는 천문학 이론의 개혁을 이룬 케플러의 업적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무례하게도 보이는 갈릴레오의 이런 반응에는 다른 속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1577년 대혜성에 대해 튀코는 혜성이 엄연한 천체라고 주장한 데 비해서 갈릴레오는 혜성이 시각적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훗날 케플러는 혜성에 관한 연구에서 튀코를 지지했는데, 매스틀린은 갈릴레오를 한방 먹였다면서 케플러를 축하해 주었다. 비판에 익숙하지 않았던 갈릴레오가 케플러의 이런 태도를 위협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conjecture 2.jpg|섬네일|《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에 실려 있는 도해 중 하나. 케플러의 추측에 대한 삽화이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을 했다는 사실을 들은 뒤, 케플러도 쾰른의 에른스트 공작에게서 빌린 망원경을 이용하여 광학 망원경에 대한 이론상·실험상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1610년 9월에는 《굴절광학》( Dioptrice )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1611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양면 볼록 렌즈로 된 수렴 렌즈와 양면 오목 렌즈로 된 발산 렌즈에 대한 이론적 근거, 또 이 렌즈들이 어떤 작용으로 갈릴레오식 망원경을 구성하는지의 원리, 실상과 허상의 개념은 물론이고, 정립상과 도립상, 그리고 확대 및 축소에 따른 초점 거리의 결과까지 설명했다. 또한 케플러는 볼록 렌즈 두 장을 사용하여 갈릴레오의 볼록 렌즈 - 오목 렌즈 결합보다 높은 배율을 낼 수 있는 향상된 성능의 망원경을 구상하였는데, 이것이 케플러식 망원경으로, 오늘날의 굴절식 천체 망원경의 모태이다. 1611년을 전후하여, 케플러는 《꿈》( Somnium )으로 (사후에) 출판될 원고를 배포하고 다녔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와중에 사라져 버린 이 원고는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그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우화였고, 부분적으로 자전적이었으며, 부분적으로 행성간 여행에 대한 논문이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과학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일 소설 속 서술자의 어머니가 악마들과 어울려 지내다 우주 여행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부분으로 인한 왜곡된 해석은 케플러의 어머니가 마녀 재판에 끌려가는 결과를 낳았는데, 결국 무죄가 입증되고 나자 케플러는 이야기에 과학적 정보(특히 월면 지리학에 관한)는 물론, 이야기의 속뜻이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까지 설명하는 223개의 주석을 달았는데, 본문보다도 길었다. 1590년대 말경에 영국의 월터 롤리 경은 부하 토머스 해리엇에게 포탄 무더기가 쌓인 모양을 보고 포탄의 개수를 알아낼 수 있는 공식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해리엇은 거기서 더 나아가 포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쌓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해리엇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심하다가 당시 최고의 수학자로 명성을 날리던 케플러에게 편지를 보냈다. 해리엇의 편지를 받은 케플러는 가장 밀도가 높게 구를 쌓는 방법은 시장 상인들이 과일을 쌓을 때처럼 육방 밀집 쌓기를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611년 새해 선물로 케플러는 친구이자 오랜 후원자 마태우스 바커 폰 바켄펠스 남작을 위해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 Strena Seu de Nive Sexangula )라는 제목의 짧은 소논문을 지었다. 이 소논문에서 케플러는 눈송이의 육방정계 구조를 연구하고, 그것을 원자론의 물리적 근거로 해석했으며, 구를 가장 촘촘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기술했다. 마지막 것이 후에 케플러의 추측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함께 수백년 동안 수학적 난제로 남았다.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는 케플러의 다른 방대한 저작들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책은 결정체나 식물의 형태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최초의 시도였기에 충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오갈 데 없는 피난자 신세로 프라하를 찾은 지 11년 만에 케플러는 학계를 이끄는 정상급 과학자로 성장해 있었다. 튀코의 후계자라는 위상과 계속해서 묵직한 책들을 내놓은 이력은 케플러가 천문학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박학다식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케플러의 황금기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후원자 루돌프 황제가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편집증에 정신 착란까지 보였고, 황제의 무능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위기에 처했다. 1606년 4월부터 합스부르크 왕가 인사들은 황제를 몰아내고 황제의 동생 마티아스를 황제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 - Holy Roman Emperor (Hans von Aachen, 1625).jpg|섬네일|새 황제 마티아스. 1611년, 프라하의 정치·종교적 불안은 곪아 터질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가던 후원자 루돌프 황제는 동생 마티아스의 강요에 의해 보헤미아 왕의 자리를 포기했다. 또한 그 해에 아내 바바라가 홍반열에 걸려,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바라가 회복되어 갈 즈음, 세 자식들이 모조리 천연두에 걸려,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 아들이 죽자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와 파도바의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뷔르템베르크의 튀빙겐 대학교에서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과 협화신조에 배치되는 케플러의 칼뱅주의적 반대론을 염려하여 케플러의 귀환을 방해했다. 파도바 대학교에서는 공석(空席)이 된 수학 교수직에 전임 갈릴레오의 추천으로 케플러를 임용하려 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가족들은 도이칠란트에 머무르게 하는 대신, 자신은 린츠에서 선생 자리 및 지역 수학자직을 알아보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케플러가 가족과 떨어진 사이 바바라의 병이 재발했고, 그녀는 케플러가 돌아온 직후 사망했다. 케플러는 정치적 대변동, 종교적 불안, 가정의 비극(아내의 유산에 대한 법적 분쟁) 등의 요인으로 더이상 연구를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린츠로의 이사를 연기했고, 1612년 초에 루돌프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프라하에 잔류했다. 대신, 케플러는 연대학 원고 《전원시의 역사》를 초기의 연구와 조화되도록 결합했다. 마티아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물려받은 뒤 케플러의 궁정 수학자로서의 지위(급료도 포함된다)를 재차 보장하였으나, 그가 린츠로 옮겨 가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Statue Linz.jpg|섬네일|린츠의 케플러 동상. 린츠에서 루돌프 표 외에 케플러에게 주어진 기본적 책무는 지역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점성술, 천문학적 용역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린츠에서의 초기 몇 년 동안 프라하에서의 시절에 비해 재정적 안전과 종교적 자유를 누렸지만,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소속된 정통주의적 루터교회에 의해 성만찬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당하였고, 이후 결국 루터교와 결별했다. 린츠에서의 첫 저서는 예수 탄생에 대한 보충 논문 《진실한 1년에 대해,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의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서 나온 인간으로서의 성격》( De vero Anno, quo aeternus Dei Filius humanam naturam in Utero benedictae Virginis Mariae assumpsit )으로, 1613년에 출판했다. 또한 그는 그레고리오 교황의 개량 달력을 도이칠란트의 개신교 국가들에서 받아들일지의 심의에도 참여했다. 또한 같은 해 그는 포도주 통과 같은 용기의 부피를 측정하는 수학 논문 《포도주통의 신계량법》을 썼으나 이 논문은 161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케플러는 린츠에 도착한 즉시 튀빙겐 신학교 동창이었던 주목사 다니엘 히츨러에게 종교모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며칠간 모임을 가진 뒤, 케플러는 루터교의 엄격한 신앙고백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히츨러는 케플러를 쫓아내 버렸다. 케플러는 슈투트가르트의 종교의회에 이 사건을 청원했다. 그러나 종교의회는 히츨러를 두둔하는 모욕스러운 편지와 함께 케플러의 청원을 기각했다. 케플러는 기분이 나빴지만,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서 이 일을 더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루터교, 개혁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두루 기독교적인 믿음을 형성해 주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이끌어 냈다. 다른 루터교도들은 이것을 근거로 케플러를 이단자로 지목하여 고소했다. 케플러는 “진리는 하나인데 세 종파로 찢겨 서로 비참하게 싸우는 게 가슴 아플 따름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신념은 의심, 비난, 협박으로 돌아왔다. 기독교인들끼리 교단의 차이로 분열하고 대립하는 양상은 선교에 지장을 준다는 반성에 따라 교회 일치 운동이 시작된 현대에서야 그의 주장은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는 너무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1617년, 케플러는 튀빙겐의 신학 교수 마티아스 하펜레퍼를 방문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펜레퍼는 케플러와 교환한 편지를 신학교수회와 종교의회에 제출했다. 1619년 7월 31일에 “오류투성이 허상을 버리고 겸손한 믿음으로 신성한 진리를 받아들여라”는 공식 평결이 나왔다. 결국 케플러는 자신의 신학적인 신념으로 인해 루터교와 완전히 결별했다. 린츠의 케플러 거주지 1613년 10월 30일, 41살의 케플러는 24살의 수잔나 로이팅어와 재혼하였는데, 청혼 과정이 상당히 독특했다. 연애에 서툴러 구혼 상대를 쉽게 찾지 못하던 케플러는 신부가 될만한 여성을 이름이 아닌 자신이 정한 후보 번호로 평가하였다. 후보는 1번에서 11번까지였으며,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케플러의 서툰 구혼 솜씨는 당시 린츠 시민들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케플러는 용기를 내어 가장 마음에 들어한 5번 후보, 로이팅어에게 청혼하여 결혼에 성공하였다. 케플러는 로이팅어를 “겸허한 성실, 살림 솜씨, 근면함, 그리고 의붓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를 이겨낸 여자”라고 표현하였다. 재혼 초에 얻은 세 아이들(마르가레타 레기나, 카탈리나, 세발트)은 모두 어렸을 때 죽고 말았지만, 이후에 낳은 세 아이들(1621년생 초르둘라, 1623년생 프리드마르, 1625년생 힐데베르트)은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후 부인 수잔나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케플러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린츠에서 케플러가 처음 쓴 책은 《포도주통의 신계량법》( Nova stereometria doliorum vinariorum )이다. 케플러는 마티아스 황제의 부름을 받아 도나우 강을 따라 레겐스부르크로 가던 도중, 강둑이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포도주통처럼 경계가 지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부피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케플러는 통의 표면이 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얇은 판을 무한히 겹쳐 놓은 것과 대략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물체의 부피를 계산하는 데 이 방법과 유사한 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구 결과 나온 책의 원제는 〈포도주통을 이용한 구적법과 부피 측정법〉이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었다. 책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출판업자들도 나서지 않아 케플러는 인쇄공 요하네스 플랑크를 직접 린츠로 데려와 1615년에 출판했다. 린츠의 대의원회는 이 책에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계약서대로 《루돌프 표》과 지도 제작에나 집중하라고 충고했다. 케플러는 원추 곡선이 만들어 내는 원, 타원, 포물선 등의 도형에 이를 일반화시키려고 했다. 정밀성은 다소 떨어졌지만, 이 책은 17세기 적분학의 기초가 되었다. 《신천문학》의 완성 이후로, 케플러는 천문학 책을 만들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1615년, 그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의 처음 세 권을 완성했고, 이후 4권은 1620년에, 그리고 5 ~ 7권은 1621년에 출판하였다. 케플러의 이 책은 타원궤도의 법칙의 결정판으로, 지동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케플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업이 되었다. 이 책은 행성운동의 세 법칙의 모든 것을 품고 있었으며 천체운동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책은 앞의 두 행성운동법칙을 노골적으로 달과 목성의 주요 위성들에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관측 자료로부터 타원형 궤도를 결론지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루돌프 표》과 관련된 추산 위치표의 속편으로 케플러는 점성술 달력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매우 인기가 있어 다른 연구를 하는 데의 비용까지 충당해 주었다(특히 황실 금고에서 받아야 할 봉급이 체불되었을 때 그러했다). 1617년에서 1624년까지의 6년간 케플러는 이 달력에서 행성의 위치와 날씨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건까지 예측하였다. 후자인 정치적 예측은 종종 정확하게 들어맞았는데, 이는 케플러가 당시의 정치적, 신학적 긴장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24년에 이르는 기간까지 주변의 긴장 상황은 그 정도가 심해져 갔고 예언 자체의 모호함 때문에 케플러는 정치적으로 곤란한 위치에 처했다. 그라츠에서는 케플러의 달력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재판이 진행된 법원이 위치한 레온베르크. 1615년, 케플러의 동생 크리스토프와 금융적으로 분쟁 관계에 있던 우르술라 라인볼트라는 여자는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가 사악한 술수로 자신을 병들게 했다고 주장했다. 라인볼트는 임신한 아이를 지우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다가 탈이 났다. 그녀는 자기 병이 뷔르템베르크 궁정 이발사이자 외과의사인 자기 오빠의 엉터리 처방 때문이 아니라, 3년 반 전에 카타리나가 지어준 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8월, 카타리나는 작은아들 크리스토프와 마을 목사인 사위 게오르크의 도움으로 라인볼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때쯤 케플러의 《꿈》이 알려졌는데, 그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악령을 부리는 노파라는 설정이 화근이었다. 며칠 뒤에는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카타리나가 한 소녀와 좁은 길에서 마주쳤고, 카타리나는 소녀의 옷을 털어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부인이 내 팔을 쳤고, 그 다음부터 팔이 점점 더 아프더니 감각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소녀는 라인볼트 집안에 빚이 있던 할러 집안의 딸이었다. 라인볼트의 오빠의 친구였던 레온베르크 법원 집행관 아인호른은 소녀의 팔에 난 타박상을 “마녀의 손자국”이라고 밝히며 이 사건을 슈투트가르트 고등 종교 평의회로 올려 보냈다. 카타리나는 린츠의 아들 집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고, 케플러는 직접 재판에 개입하기로 했다. 1620년 7월, 라인볼트 일가는 공작을 통해 사건을 형사 사건화했다. 종교 평의회는 카타리나의 체포와 심문, 고문을 명령했다. 결국 카타리나는 한밤중에 빨래 통에 처박혀 끌려갔다. 이 당시 중부 유럽에서 마녀 재판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일이었다. 특히 카타리나는 심술궂은 노파였는데, 말참견으로 권력가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일쑤였는데다, 수면제와 환각제를 몰래 팔기까지 했다. 때문에 케플러는 어머니가 투옥된 것은 어느 정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1620년 8월 초부터 카타리나는 14개월 동안 투옥당했다. 그러나 고발자들은 그녀가 케플러의 《꿈》에 나오는 약품을 혼합하고 악령을 사역하여 그 도움을 받는다는 잘못되고 헛된 소문 외에 어떤 확실한 물증도 없었다. 거기다 서둘러 뷔르템베르크로 달려온 케플러가 주민들이 걸린 질병 등의 과학적 이유를 찾으려 동분서주했다. 튀빙겐 대학교 법학부에 소속되어 있던 동창 베솔트도 케플러를 도왔다. 하지만 케플러와 베솔트가 아무리 노력해도 증거불충분 이상의 판결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카타리나는 구두(口頭) 고문에 처해졌다. 집행관 아울버는 카타리나에게 고문 기구들을 내보이며 이실직고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혐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결백은 자신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실 것이라고 발악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몸을 수그려 주기도문을 외웠다. 고문의 위협 속에서도 혐의를 부인한 증언이 참고가 되어 마침내 혐의가 기각되었다. 1621년 10월 3일, 카타리나는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는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시름시름 앓다가 6개월 후 사망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케플러는 "조화 이론"에 대한 연구를 뒤로 미루었는데, 이 연구의 결과물이 1619년 출판된 《세계의 조화》이다. 《세계의 조화》에 실린 정입방체의 기하학적 조화. 케플러는 어머니가 마녀로 몰린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던 도중 기분 전환용으로 빈센조 갈릴레이 의 《고대와 현대 음악과의 대화》라는 책을 들고 다녔다. 여기서 빈센조는 피타고라스의 조화에 대한 이론을 옹호했다. 케플러는 ‘조화’라고 하는 세계의 수학적 규칙을 찾으려 했고, 기하학에 감명을 받아 “기하학적 물체가 전 우주의 모형을 떠오르게 하였다”고 했다. 《세계의 조화》에서 케플러는 자연계, 특히 천문학적, 점성학적인 면에서의 자연계의 조화를 음악적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세계의 조화》의 중심 설정은 피타고라스, 프톨레미 등 많은 케플러 이전의 천문학자들이 연구했던 〈천체의 음악〉이나 〈천상의 음악〉 이었는데, 《세계의 조화》의 출판 직후에 케플러는 비슷한 때에 독자적으로 조화 이론을 출판했던 로버트 플루드와 선취권 논쟁에 휩싸였다. 케플러는 케플러의 다면체라고 알려진 형태들까지 포함하여 정다각형와 정다면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케플러는 자신의 조화 분석을 음질에서 기인하는 조화가 천체의 영혼에 의해 만들어지며, 점성술의 경우에는 이 음질과 인간의 영혼이 상호작용한다고 음악, 기상학, 점성술에까지 확장했다. 연구의 마지막 부분(제5권)에서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대해 특히 궤도 진입 최저 속도와 태양에서의 궤도 거리의 관계를 다루었다. 비슷한 관계들은 다른 천문학자들도 사용한 바 있지만 케플러는 튀코의 관측 자료와 자신의 천문학 이론으로 훨씬 더 정밀하게 다루었으며 물리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 다른 많은 조화 가운데 케플러는 오늘날 행성운동의 제3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것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그는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라는 것을 (거의) 발견하기까지 많은 조합들을 시도했다. 그러나 천체역학의 넓은 의미에서 이 순수한 운동학적 법칙은 1660년대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원심력에 대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새로운 법칙이 결합되어, 이 법칙은 아이작 뉴턴, 에드먼드 핼리와 크리스토퍼 렌과 로버트 훅이(아마도) 태양과 그 행성들 간의 중력적 인력이 그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추측을 독립적으로 증명하도록 도와주었다. 여기서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근본 원인이 자기력과 비슷한 어떤 성격의 것이라고 제안했다. 물론 중력·만유인력과 자기력은 다르지만 케플러는 그 개념을 예견한 것이다. 한편, 케플러는 겸손한 사람은 아니라서, 자신의 발견을 “신의 환희”, “열광의 도가니”라는 식으로 자화자찬했다. Sustermans 015.jpg|섬네일|마티아스의 뒤를 이은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그의 교조적 가톨릭 신앙은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케플러는 1621년 12월에 린츠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1618년, 체코 프라하에서 성난 개신교도 대의원들이 프라하 황궁을 덮쳐 가톨릭 교도 집정관 두 명을 황궁 창밖으로 집어 던지는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발생했다. 1619년에는 마티아스 황제가 서거하고 근본주의 성향의 가톨릭 교도 페르디난트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이어받았으며, 그 결과 1621년 6월 27일, 프라하에서 케플러의 오랜 벗 예세니우스를 포함한 27명의 개신교도들이 페르디난트 2세황제에 의해 사형당했다. 예세니우스는 혀를 잘린 다음 사지가 찢겨 죽었다. 사형수들의 목은 경고의 의미로 썩어질 때까지 10년간 전시되었다. 이것이 유럽 최초의 세계대전이었던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케플러가 살던 린츠도 프라하만큼은 아니었지만, 유럽 전역을 뒤덮은 광신에 휩쓸렸다. 케플러를 루터교회에서 쫓아냈던 다니엘 히츨러도 감옥에 끌려갔다. 하지만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케플러는 루터교와 결별한 후 개신교도들에게 거부당하는 입장이었고, 제국 수학자라는 신분 덕분에 다른 개신교도들이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안전했다. 오히려 1621년 12월 30일에는 페르디난트 황제가 자신을 제국 수학자로 공식 임명하자 케플러는 깜짝 놀랐다. Rudolphinae - Frontispiece.png|섬네일|《루돌프 표》의 권두화. 케플러 자신 이전의 위대한 천문학자 히파르쿠스, 프톨레미, 튀코를 기념하는 내용이다. 마침내 1623년 케플러는 《루돌프 표》(전 후원자엿던 루돌프 2세의 이름을 딴 것임)를 완성했고, 이 표는 당대에 그 자신의 주저로 여겨졌다. 이것은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행성의 운동을 예측한 천문표였다. 그러나 황제의 출판 요구와 튀코 브라헤의 유족들과의 합의 때문에 1627년까지 인쇄되지 못했다. 또한 30년 전쟁의 근원이기도 했던 그동안의 종교적 긴장 상태는 다시 한번 케플러 가족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1625년, 가톨릭 개혁자들은 케플러의 장서들을 봉인해 버렸으며, 1626년에는 린츠 시가 공격당해 케플러는 그가 《루돌프 표》의 인쇄물을 자비로 편집하던 울름으로 옮겨갔다. 《루돌프 표》를 완성시켰으니, 이제 신교도인 자신은 쫓겨나겠다고 생각했던 케플러는 프라하 황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해 주자 깜짝 놀랐다. 황제는 케플러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케플러가 지난여름 황제의 칙령으로 자신이 이미 해직된 줄 알고 있었다고 하자 황제는 웃으면서 해직은커녕 25년간 연구에 힘쓴 대가로 4천 플로린 을 하사했다. 물론 케플러는 프라하 황궁에서의 돈은 상징적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다. 지금껏 밀린 봉급만 1만 2천 플로린이었다. 전쟁통에 신성 로마 제국의 지급 명령서는 부도 수표나 다름 없었다. 더구나 페르디난트 황제는 케플러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케플러는 당시 출세가도를 달리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공작의 땅으로 가기로 했다. 장군에게 헌정한 케플러의 천궁도. 전쟁 때문에 케플러는 후원자를 모두 잃었다. 비주류라는 이유로 루터교에서 쫓겨났던 케플러는 이번에는 루터교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가톨릭의 박해를 받았다. 1628년, 발렌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황제 군대가 승리하자,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싫었던 케플러는 발렌슈타인의 땅으로 갔다. 발렌슈타인은 어떤 종파든 기독교이기만 하면 모두 용인했다. 케플러는 종교 문제에서 자기 안전을 도모해야 했고, 발렌슈타인은 석학인 케플러를 휘하에 두어 자신이 학문과 과학을 아끼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전하려고 했다. 20년 전 프라하에서 별점을 봐 주었던 케플러를 다시 만난 발렌슈타인은 다시 한번 정확하게 점을 봐 달라고 요구했는데, 새로 본 별점에서 1634년에 ‘무시무시한 흉조’가 들어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케플러의 점성술 자문을 듣고자 했지만, 케플러는 권력자의 점성술 자문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고, 발렌슈타인과 모종의 타협을 했다. 케플러는 행성의 위치 정보만 제공하고, 그 해석은 발렌슈타인의 개인 점성술사 기안바티스타 제노가 담당했다. 한편, 페르디난트 황제는 체불된 케플러의 봉급 1만 1817 플로린 문제를 발렌슈타인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맡겨 버렸다. 말년, 케플러는 돈 독촉을 위한 여행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프라하에서부터 린츠로, 울름으로 사간(Sagan)으로 옮겨 다녔다. 이즈음 사간에서 반개혁 정책이 시작되어 케플러는 경제적인 문제에 정신적 충격까지 받아야 했다. 케플러는 고독감을 달래려고 스트라스부르의 친구 마티아스 베르게너와 서신을 왕래했다. 이 과정에서 베르게너는 케플러의 딸 수산나의 결혼 중매인으로 나섰고, 수산나는 1630년 3월 12일에 야콥 바르타쉬와 결혼했다. 바르타쉬는 《루돌프 표》을 기초로 천문력을 출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 케플러는 그해 4월 초에는 매우 긴 주석을 단 《꿈》 개정판의 출판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자금 사정이 또다시 악화되었다. 오스트리아 북부에서 투자하기로 한 3500 플로린이 1년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케플러에게 린츠로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 또한 발렌슈타인이 제국군 최고 사령관에서 해임되는 바람에, 밀린 제국 수학자 봉급 1만 2천 플로린의 수령이 불투명해졌다. tombstone.PNG|섬네일|220px|케플러의 한 친구가 남긴 케플러의 묘비석 스케치. 케플러의 무덤에 대한 남아있는 자료는 이게 전부다. 케플러는 1630년 10월 8일에 다시 여행을 떠났다. 린츠에 들러서 돈 독촉을 하고,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들러 재고 도서를 처리하고,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1630년 7선제후 회의에 직접 참석해 정치적 세태를 지켜보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케플러는 린츠,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를 거쳐 11월 2일에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하였지만, 차가운 가을 바람을 맞으며 여행한 것이 화근이 되어 병이 들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병인 줄 알았으나, 고열이 덮치고 섬망 상태에 빠지는 등 상태가 악화되었다. 죽기 직전, 케플러는 곁에 있던 목사에게 자신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화해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목사는 그것은 예수와 사탄을 화해시키려는 발상이라고 대꾸했다.. 케플러는 1630년 11월 15일 사망하여 레겐스부르크 성벽 밖의 성 베드로 개신교 묘지에 묻혔고, 그날 저녁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유성우가 내렸다고도 한다). 선제후 회의를 위해 모인 신성 로마 제국의 명망가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케플러의 비문은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 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 였다. 그러나 30년 전쟁 와중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 군대에 의해 묘지가 훼손되어 무덤마저 사라졌다. 케플러의 법칙은 바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갈릴레오나 르네 데카르트 같은 석학들마저 케플러의 《신천문학》을 깡그리 무시했으며, 케플러의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을 포함한 천문학자들은 케플러가 물리학을 천문학에 대입하려던 시도를 마땅찮게 여겼다. 여러 천문학자들은 케플러의 이론 및 그 이론의 응용물들을 천체 관측을 통해 검증했다. 금성과 수성의 정상적으로 관측될 수 없는 상황 하에 이 두 행성의 두 번의 일면통과로 이론의 민감한 점을 시험할 수 있었다. 1631년 11월 7일의 수성 일면통과의 경우에 케플러는 수성에 대한 변수가 극단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일면통과 예정일보다 일찍 찾아보라고 관측자들에게 충고했다. 피에르 가상디는 예정된 날짜에 일면통과를 관측했으며, 이것은 케플러의 예측에 대한 확증이 되었다. 이 관측은 최초의 수성 일면통과 관측이었다. 그러나 금성 일면통과 관측 시도는 거의 한달 뒤였고, 《루돌프 표》의 부정확에 기인하여 실패했다. 가상디는 당시 금성 일면통과가 파리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639년 금성 일면통과를 관측한 제러마이아 호록스는 케플러의 모형의 변수를 조절하기 위해 자기의 관측 결과를 사용했으며, 일면통과 관측을 위한 기계장치를 만들었다. 그는 케플러의 학설을 옹호하는 단체를 남겼다. 한편, 케플러는 다른 16 ~ 17세기의 천문학자들처럼 근대에 비해 고대의 천문학이 조잡하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스티븐 샤핀은 이것이 고대의 진리가 수세기를 거치면서 모방자들과 주석자들에 의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인문주의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샤핀에 의하면 케플러의 이런 사상은 《루돌프 표》의 권두화로 사용된 유명한 판화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판화에서 천문학의 여신의 신전의 뒤쪽에는 투박하고 구조적인 양식의 기둥이 고대 천문학의 조잡함을 드러내고 있고, 신전의 앞에 있는 코페르니쿠스와 튀코는 이오니아식·코린트식의 우아한 기둥 옆에 서 있다. 케플러는 인문주의자면서도 열광적인 플라톤주의자였는데, 그의 최초의 학설인 ‘코스모스의 신비’론에서 이런 점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케플러의 대표적 저서중 하나인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는 유럽 구석구석의 천문학자들에게 읽혀졌고, 케플러의 죽음 이후 케플러의 아이디어들을 확산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1630년과 1650년 사이에, 이 책은 천문학 교본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천문학의 기반을 타원궤도로 전환시켰다. 과학사가 제임스 R. 뵐켈은 케플러의 업적이 갈릴레오의 업적보다 천문학적으로 더욱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케플러는 행성운동법칙 제3법칙을 연구할 당시 지구에 적용되는 측정 가능한 물리 법칙, 즉 정량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법칙들이 천체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을 간파했고, 이로써 인류사 최초로 천체 운동에서 신비주의가 배제되었다. 또한 케플러는 권력자와 권위자만이 지식을 안전하게 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 튀코와는 대조적으로 대학교에서 천문학을 강의했고, 천문학 서적을 출판했으며, SF 소설을 쓰는 등 과학의 대중화에도 힘썼다. 케플러는 《꿈》에서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지동설을 부정하는 대중들에게 지구 자전은 “가능한 일이고 멋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것”임을 알리려고 애썼다. 물론 케플러는 세이건, 도킨스, 굴드 등 현대의 과학저술가들만큼 과학 대중화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세이건은 튀코에서 케플러에 이르는 한 세대 사이에 과학자들의 대중에 대한 태도가 변화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케플러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도 발휘했는데, 그는 미래의 하늘에 “천상의 바람을 잘 탈 수 있는 돛단배”들이 날아아다니고 우주 공간이 “우주의 광막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들”로 그득할 것이며, “용기 있는 인간은 무한한 공간으로 진출할 것이다.”라고 했다. 막스 크루제는 이 말을 우주 여행에 대한 통찰로 해석했다. Hradčany - Tycho Brahe a Johannes Kepler.jpg|섬네일|오른쪽|220px| 프라하에 있는 케플러와 튀코의 기념비. 케플러는 천문학과 자연철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철학과 과학의 사학사에서 매우 중대한 인물이다. 케플러와 그의 운동 법칙은 장 몽투클라의 《수학의 역사》(1758년)와 장밥티스트조지프 들랑브르의 《근대 천문학의 역사》(1821년) 같은 초기 천문학 사학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계몽주의 사고방식으로 쓰여진 사서들은 무신론·불신자들과 케플러 사이에 펼쳐진 철학적, 종교적 논쟁을 다루었지만, 이후의 낭만적 자연철학자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케플러의 성공에 중심을 두고 생각했다. 윌리엄 휴얼은 자기 저서 《귀납적 과학의 역사》(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 1837년)에서 케플러를 귀납적인 과학 천재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휴얼은 이후 《귀납적 과학의 철학》(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 1840년)에서는 가장 진보된 형태의 과학적 방법을 구현한 화신으로 케플러를 치켜올렸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케플러의 원고들(예카테리나 대제가 구입했었다)을 최초로 광범위하게 연구했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아펠트는 케플러를 과학 혁명의 열쇠 라고 강하게 주장했으며, 케플러의 수학 연구와 그의 심미적인 감수성, 통합된 사고 시스템의 일부로서의 신학, 그리고 그의 물리학적 아이디어를 보고 케플러의 인생과 연구를 최초로 확장해 분석하였다. 항공우편 우표. 케플러가 그려져 있다. 현대로 접어든 19세기 후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케플러 저작들이 번역되어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케플러 전집의 조직적인 출판은 1937년에 시작되어 최근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며, 막스 카스파의 케플러 일대기는 1948년에 출판되었다. 한편, 알렉상드르 쿠아레의 케플러를 다룬 저작은 아펠트의 뒤에, 케플러의 우주론과 그 영향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주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쿠아레를 비롯하여 많은 과학사 분야의 제1세대 전문가들은 〈과학 혁명〉이라는 개념을 과학사의 중심 사건으로, 케플러는 그 혁명의 중심 인물로 묘사하였다. of Germany (DDR) 1971, MiNr 1649.jpg|섬네일|220px|케플러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동독의 우표. 과학 혁명에서 케플러의 위치에 대한 논쟁으로, 철학적이고 대중적인 평가들은 매우 다양해졌다. 관련 서적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것들 중 하나인 아서 쾨슬러의 《몽유병자들》( The Sleepwalkers , 1959년)에서 케플러는 의심할 나위 없는 과학 혁명의 영웅(지성적인 면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신학적으로도)으로 그려진다. 찰스 샌더스 퍼스, 노우드 러셀 핸슨, 스티븐 툴민, 칼 포퍼 등의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들은 재삼재사 케플러를 연구하는데, 통약불가능성, 유추적 추론, 반증의 가능, 그 외에도 많은 철학적 개념들을 케플러의 연구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분석심리학과 과학 수사의 관계를 조사하는 데에 케플러와 로버트 플러드 사이에 있던 선취권 분쟁을 이용했다. 존 반빌의 가공의 역사 소설 《케플러》( Kepler , 1981년)는 쾨슬러의 논픽션 내러티브의 자세한 기술과 과학철학의 많은 테마들을 답사하였는데, 이것보다 더욱 가공적인 것은 최근의 논픽션인 《하늘의 음모》( Heavenly Intrigue , 2004년)로, 케플러가 튀코의 데이터를 얻기 위해 튀코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많은 역사적 유산을 남긴 케플러는 가장 유명한 은제 기념주화 중 하나인 10유로 요하네스 케플러 은화의 모티프가 되었으며, 이 기념주화는 2002년 9월 10일에 주조되었다. 케플러는 한스 울리히 폰 에겐베르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에겐베르크 성의 축조에 관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은화 앞면에는 이 에겐베르크 성이 그려져 있고, 은화의 뒷면에는 케플러의 초상화가 있다. 뒷면의 케플러 초상화 앞에는 《우주구조의 신비》에 나오는 구와 다면체가 겹쳐진 모형이 그려져 있다. Kepler-NASA.jpeg|섬네일|왼쪽|220px|케플러 우주 망원경. 2009년, 미국 항공우주국은 케플러의 천문학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해 우주 망원경에 케플러의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케플러 계획이다. 뉴질랜드의 피오르랜드 국립 공원에는 케플러의 이름이 붙은 산맥이 있는데, 케플러 산맥이라고 불리며, 산맥을 관통하는 산책로 이름 역시 케플러 트랙이다. 이렇듯, 이제 케플러는 과학의 현대화와, 그 이전의 인물들의 아이콘이자, 대중적인 이미지로서 자리잡았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쓴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케플러를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이자, 최후의 과학적 점성술사”라고 평가했다.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 우주구조의 신비 ( Mysterium cosmographicum , 1596년)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 ( Ad Vitellionem Paralipomena, Quibus Astronomiae Pars Optica Traditur , 1604년)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 ( De Stella nova in pede Serpentarii , 1604년) 신천문학 ( Astronomia nova , 1609년) 제3자의 개입 ( Tertius Interveniens , 1610년)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 ( Dissertatio cum Nuncio Sidereo , 1610년) 굴절광학 ( Dioptrice , 1611년)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 ( De nive sexangula , 1611년) 진실한 1년에 대해, 영원한 신의 아들의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서 나온 인간으로서의 성격 ( De vero Anno, quo aeternus Dei Filius humanam naturam in Utero benedictae Virginis Mariae assumpsit , 1613년) 전원시의 역사 ( Eclogae Chronicae , 1615년) 포도주통의 신계량법 ( Nova stereometria doliorum vinariorum , 1615년)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 Epitome astronomiae Copernicanae , 1618년 ~ 1621년) Epitome astronomiae copernicanae , 1618 세계의 조화 ( Harmonice Mundi , 1619년) 우주구조의 신비 제2판 ( Mysterium cosmographicum , 1621년) 루돌프 표 ( Tabulae Rudolphinae , 1627년) 꿈 ( Somnium , 1634년) 태양중심설 천문학의 역사 물리학의 역사 케플러의 추측 케플러-푸앵소 입체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 케플러 삼각형 케플러의 문제 과학 혁명 월면 크레이터 케플러 케플러 입방체 기하학적 모양들의 한 집합. 이 중 2개는 케플러가 만들어냄. 케플러 초신성 1604년 초신성. 케플러가 발견하고 묘사. 케플러 달 표면의 크레이터 케플러 화성 표면의 크레이터 1134 케플러 소행성 린츠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교 린츠 사회경제대학에서 1975년 개명. 케플러 대학교 워싱턴 시애틀 소재. 마인 강 옆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근처 하나우에 있는 케플러 거리 독일 뮌헨 시내에 있는 케플러 거리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있는 케플러 거리와 케플러 다리 케플러 발사기지 케플러 광장, 빈 지하철(Wiener U-Bahn)의 고속 지하철 U1 라인에 있는 곳 요하네스 케플러 문법 학교 , 체코 프라하, 프라하에서 케플러가 살았던 곳 근처에 있다. 케플러 계획 외계 행성을 찾는 NASA 계획. 케플러는 파울 힌데미트의 오페라 《세계의 조화》( Die Harmonie der Welt )의 중심 인물이다. 알베르트 귀노바르트는 《세계의 조화》에 바탕한 현악 4중주곡 《케플러》( Kepler )를 작곡했다. 케플러는 레오 페루츠의 역사소설 《밤의 돌다리 아래서》( Nachts unter der steinernen Brücke )에도 등장한다. 존 반빌의 1981년 소설 《소설 케플러》 프랑크 보겔 감독의 1974년 도이칠란트 영화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 케플러와 루돌프 2세에 관한 1989년 영화 《První sekunda》. 라이언 주넬 감독의 2004년 40분짜리 단편 영화《Unseen forces》. 칼 세이건의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제 3부에서 케플러의 업적과 삶을 다루었다. 내용주 참조주 칼 세이건(Sagan, Carl) 《코스모스》( COSMOS ), 제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역자 홍승수, 사이언스북스, 한국어판, 2004년 12월 20일, 막스 크루제(Kruse, Max) 《슈테판의 시간여행》( Im weiten Land der Zeit ) 제3권, 다섯째 날 〈새로운 시대의 도래〉, 역자 이희재, 끌리오, 한국어판, 1998년 7월, 존 그리빈(Gribbin, John) 《과학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Science, a history, 1543-2001 ), 제1장 〈암흑의 시대를 벗어나서〉, 역자 강윤재 외, 들녘, 한국어판, 2004년 11월 20일, 제임스 뵐켈(Voelkel, James R.) 《행성운동과 케플러》( Johannes Kepler and the New Astronomy ), OXFORD 위대한 과학자 시리즈 19권, 역자 박영준, 바다출판사, 한국어판, 2006년 10월 31일, 제임스 뵐켈 《케플러의 신천문학의 구성》( The Composition of Kepler s Astronomia nova ),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 2001년. 구글 책 미리보기 키티 퍼거슨(Ferguson, Kitty) 《티코와 케플러》( Tycho and Kepler The Unlikely Partnership That Forever Changed Our Understanding of the Heavens ). 역자 이풍, 오상, 한국어판, 2004년 5월 31일, 한 안데르센(Andersen, Hanne); 피터 베커(Peter Barker); 시앙 첸(Xiang Chen) 《과학 혁명의 인지 구조》( The Cognitiv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 제 6장 〈코페르니쿠스 혁명〉("The Copernican Revolution.") 뉴욕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06 Armitage, Angus John Kepler , Faber, 1966년 존 반빌(Banville, John) 《케플러》( Kepler ), Martin, Secker and Warburg, London, 1981년 (소설화된 전기). 베커(Barker), 피터(Peter) 그리고 버나드 R. 골드스타인(Bernard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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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monice Mundi · Animated and multimedia version of Book V 분류:1571년 태어남 분류:1630년 죽음 분류:독일의 천문학자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독일의 점성술사 분류:독일의 SF 작가 분류:독일의 음악 이론가 분류:독일의 루터교도 분류:우주론자 분류:슈투트가르트 출신 분류:프라하 출신 분류:튀빙겐 대학교 동문 분류:16세기 독일 사람 분류:17세기 독일 사람 분류:16세기 천문학자 분류:17세기 천문학자 분류:16세기 수학자 분류:17세기 수학자 분류:코페르니쿠스 혁명 |
다음 목록의 내용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의 연대표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부터 암살당한 기원전 44년까지 독재관으로 있었으나 로마 황제(Princeps)가 되지는 않았다. 사진 이름 출생 재위 계승 사망 100px 아우구스투스 CAESAR DIVI FILIVS AVGVSTVS 기원전 63년 9월 2일, 놀라 기원전 27년 1월 16일 ~ 14년 8월 19일 로마 원로원과의 ‘첫 번째 합의’의 결과로 사실상의 황제가 되다. 14년 8월 19일 자연사. 100px 티베리우스 TIBERIVS CAESAR AVGVSTVS 기원전 42년 11월 16일, 로마 14년 9월 18일 ~ 37년 3월 16일 아우구스투스의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37년 3월 16일 자연사. 100px 칼리굴라 GAIVS CAESAR AVGVSTVS GERMANICVS 12년 8월 31일, 이탈리아 안티움 37년 3월 18일 ~ 41년 1월 24일 티베리우스의 조카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41년 1월 24일 가장 신임하는 장군에게 암살. 100px 클라우디우스 TIBERIVS CLAVDIVS CAESAR AVGVSTVS GERMANICVS 기원전 10년 8월 1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루그두눔 41년 1월 25일(26일) ~ 54년 10월 13일 티베리우스의 조카,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칼리굴라의 삼촌.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지명되다. 54년 10월 13일 부인인 소 아그리피나에 의한 독살 가능성 있음. 100px 네로 NERO CLAVDIVS CAESAR AVGVSTVS GERMANICVS 37년 12월 15일, 이탈리아 안티움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 클라우디우스의 의붓아들이자 양아들. 68년 6월 9일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언된 이후 자살. 초상 이름 출생 재위 계승 사망 100px 갈바 SERVIVS GALBA IMPERATOR CAESAR AVGVSTVS 기원전 3년 12월 24일, 이탈리아 테라치나 인근 68년 6월 8일 ~ 69년 1월 15일 네로 사망 후 스페인 지역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 69년 1월 15일 친위대에 의해 암살. 100px 오토 MARCVS OTHO CAESAR AVGVSTVS 32년 4월 25일, 이탈리아 페렌티움 69년 1월 15일 ~ 69년 4월 16일 친위대에 의해 선출. 69년 4월 16일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에게 패배한 후 자살. 100px 비텔리우스 AVLVS VITELLIVS GERMANICVS AVGVSTVS 15년 9월 24일, 로마 69년 4월 17일 ~ 69년 12월 20일 게르마니아군의 지지로 권력을 장악. 69년 12월 20일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에게 살해. 100px 베스파시아누스 TITVS FLAVIVS CAESAR VESPASIANVS AVGVSTVS 9년 11월 17일, 이탈리아 팔라크리네 69년 7월 1일 ~ 79년 6월 24일 동방 지역의 지지로 권력을 장악. 79년 6월 24일 자연사. 100px 티투스 TITVS FLAVIVS CAESAR VESPASIANVS AVGVSTVS 39년 12월 30일, 로마 79년 6월 24일 ~ 81년 9월 13일 베스파시아누스의 첫째 아들. 81년 9월 13일 전염병으로 인한 자연사. 100px 도미티아누스 TITVS FLAVIVS CAESAR DOMITIANVS AVGVSTVS 51년 10월 24일, 로마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 96년 9월 18일 암살. 네르바 (Marcus Cocceius Nerva) (95년 - 98년) 트라이아누스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98년 - 117년)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117년 -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 (138년 -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161년 - 180년) *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Lucius Verus) 161년 - 169년) 콤모두스 (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 (180년 - 193년) 페르티낙스 (Publicus Helvius Pertinax) (193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Didius Iulianus)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Lucius Septimius Severus) (193년 - 211년) 카라칼라 (Marcus Aurelius Antoninus, Caracalla) (211년 - 217년) * 공동 황제 게타 (Geta) (211년 - 212년) 마크리누스 (Marcus Opellius Macrinus) (217년 - 218년) 엘라가발루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Heliogabalus) (218년 - 222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222년 - 235년) 막시미누스 트락스 (Gaius Iulius Verus Maximinus Thrax) (235년 -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238년) 고르디아누스 2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238년) 푸피에누스 (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238년) 발비누스 (Decius Caelius Calvinus Balbinus) (238년) 고르디아누스 3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 (238년-244년) 필리푸스 아라부스 (Marcus Iulius Philippus) (244년-249년) 데키우스 (Gaius Messius Quintus Traianus Decius) (249년-251년) * 공동 황제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Quintus Herennius Etruscus Messius Decius) (251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Gaius Vibius Trebonianus Gallus) (251년-253년) * 공동 황제 호스틸리아누스 (Gaius Valens Hostilianus Messius Quintus) (251년) 아이밀리아누스 (Marcus Aemilius Aemilianus) (253년) 발레리아누스 (Publius Aurelius Licinius Valerianus) (253년-260년) 갈리에누스 (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260년-268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Marcus Aurelius Claudius Gothicus) (268년-270년) 퀸틸루스 (Marcus Aurelius Claudius Quintillus)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Lucius Domitius Aurelianus) (270년-275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Marcus Claudius Tacitus) (275년-276년) 플로리아누스 (Marcus Annius Florianus) (276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Marcus Aurelius Probus) (276년-282년) 카루스 (Marcus Aurelius Carus) (282년-283년) 카리누스 (Marcus Aurelius Carinus) (283년-284년) * 공동 황제 누메리아누스, (28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Valerius Diocletianus) (284년 - 305년) * 공동 황제 막시미아누스 (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286년 - 305년 * 공동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us Chlorus) 293년-306년 * 공동 황제 갈레리우스 Galerius Maximianus 293년 - 311년)) 콘스탄티누스 1세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306년 - 337년) * 공동 황제 갈레리우스 (Galerius Maximianus) * 공동 황제 리키니우스 (Flavius Galerius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308년 - 324년) * 공동 황제 막시미누스 (Gaius Valerius Maximinus Daia 308년 - 313년) 콘스탄티우스 2세 (Flavius Iulius Constantius) (337년 - 361년) (공동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 (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337년 - 340년), 콘스탄스 (Flavius Iulius Constans) 337년 - 350년)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61년 - 363년) 요비아누스 (Flavius Claudius Iovianus) (363년 - 36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 (Flavius Valentinianus) (364년 - 375년) (공동 황제 발렌스 (Flavius Valens, 364년 - 378년) 그라티아누스 (Flavius Gratianus) (375년 - 383년) (공동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 (Flavius Valentinianus), 375-392) * 마그누스 막시무스(383년 - 388년) :제위 찬탈자,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서방황제로 인정받았으나 곧 페위됨 테오도시우스 1세 (Flavius Theodosius) (379년 - 395년) 플라비우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리우스 (Flavius Augustus Honorius) (395년 - 423년) (공동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 Flavius Constantius, 421년) * 요한네스 (Ioannes) (423년 - 42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Placidus Valentinianus) (425년 -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Petronius Maximus) (455년) 아비투스 (Eparchius Avitus) (456년 - 457년) 마요리아누스 (Iulius Valerius Maiorianus) (457년 - 461년) 리비우스 세베루스 (Libius Severus) (461년) - 465년) 안테미우스 (Anthemius) (467년 - 472년) 올리브리우스 (Anicius Olybrius) (472년) 글리케리우스 (Glycerius) (473년 - 474년) 율리우스 네포스 (Iulius Nepos) - (474년 - 475년/480년)서로마 제국 서로마제국의 합법적인 최후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Romulus Augustus, 혹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475년 - 476년) 비공식 최후의 황제 오도아케르와 동고트 왕국으로 이어지다. 테오도시우스 1세 (Flavius Theodosius) (379년 - 395년)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395년 ~408년) 테오도시우스 2세(Flavius Theodosius, 408년 ~ 450년) 마르키아누스(Flavius Marcianus, 450년 - 457년) 레오 1세 트라키아인 ( Flavius Valerius Leo 401-474, 재위 457 - 474) – 군인 레오 2세 ( Flavius Leo 467 - 474, 재위 474) – 레오 1세의 손자, 제논의 아들 제논 ( Flavius Zeno 425 - 491, 재위 474 - 475) – 레오 1세의 사위; 원래 이사우리아 출신 바실리스쿠스 ( Flavius Basiliscus ? - c. 477, 재위 475 - 476) – 제위 찬탈자 레오 1세의 매형 제논 ( Flavius Zeno 재위 476 - 491) – 복위됨 아나스타시우스 1세 ( Flavius Anastasius 430 - 518, 재위 491 - 518) – 황실 시종장 출신; 레오 1세의 사위, 제논의 미망인인 아리아드네 황후에 의해 황제로 승격함 유스티누스 1세 ( Flavius Iustinius 450 - 527, 재위 518 - 527) – 황실 경비대장 유스티니아누스 1세 (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482 - 565, 재위 527 - 565) –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양자;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하다; 로마법을 집대성함; 수많은 서방 영토를 회복하다; 동방정교회의 발전에 힘쓰다. 유스티누스 2세 ( Flavius Iustinius Iunior 520 - 578, 재위 565 - 578) –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카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 Flavius Tiberius Constantinus 540 - 582, 재위 574, 578 - 582) – 콤메스 에스큐비트리스( Comes Excubitris ); 유스티누스 2세의 양자 마우리키우스 ( Flavius Mauricius Tiberius 539 - 602, 재위 582 - 602) –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 포카스 ( Flavius Phocas ? - 610, 재위 602 - 610) – 발칸 군대의 지휘관으로 마우리키우스에 반기를 들어 제위를 찬탈함 헤라클리우스 (Ηράκλειος) (575 - 641, 재위 610 - 641) – 제위 찬탈; 아르메니아 혈통인 카르타고 총독의 아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슬람의 팽창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잃음;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결정함. 콘스탄티누스 3세 (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누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Γ ) (612 - 641, 재위 641) – 헤라클리우스의 아들; 헤라클로나스와 공동통치 헤라클로나스 (콘스탄티누스 헤라클리우스) (Ηρακλωνάς) (626 - 641?, 재위 641) – 헤라클리우스의 아들; 신체 절단 후 폐위됨 콘스탄스 2세 포고나투스 (Πωγωνάτος, 털복숭이 ) (Κώνστας Β ) (630 - 668, 재위 641 - 668) – 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 궁정에서 암살됨 콘스탄티누스 4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Δ ) (649 - 685, 재위 668 - 685) – 콘스탄스 2세의 아들 유스티니아누스 2세 리노트메투스 (Ιουστινιανός Β ο Ρινότμητος) (668 - 711, 재위 685 - 695) – 콘스탄티누스 4세의 아들; 코와 혀가 잘리고 폐위당해 추방됨 레온티우스 (Λεόντιος) (재위 695 - 698) – 제위 찬탈; 스트라테고스; 코가 잘린 후 폐위,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처형됨 티베리우스 3세 (Τιβέριος Γ ο Αψίμαρος) (재위 698 - 705) – 제위찬탈; 아프시마르(Apsimar)라는 이름의 게르만족; 폐위, 처형됨 유스티니아누스 2세 리노트메투스 (Ιουστινιανός Β ο Ρινότμητος) (재위 705 - 711) – 복위되었다가 폐위, 처형됨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 (Φιλιππικός Βαρδάνης) (재위 711 - 713) – 아르메니아 출신; 눈이 뽑힌 후, 폐위 아나스타시우스 2세 (Αναστάσιος Β ) ( ? - 721, 재위 713 - 715) – 필리피쿠스의 궁정비서 출신; 폐위되어 수도원이 들어감; 나중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처형당함 테오도시우스 3세 (Θεοδόσιος Γ ) (재위 715 - 717) – 징세관; 제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감 레오 3세 이사우리아인 (Λέων Γ ο Ίσαυρος) (675 - 741, 재위 717 - 741) – 스트라테고스 콘스탄티누스 5세 코프로니무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Ε ο Κοπρώνυμος ή Καβαλίνος) (718 - 775, 재위 741) – 레오 3세의 아들;폐위됨 아르타바스두스 (Αρτάβασδος ο Εικονόφιλος) (재위 741 - 743) – 레오 3세의 사위 콘스탄티누스 5세 코프로니무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Ε ο Κοπρώνυμος ή Καβαλίνος) (재위 743 - 775) – 복위됨 레온 4세 (Λέων Δ o Χαζάρος) (750 - 780, 재위 775 - 780) –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 (Κωνσταντίνος ΣΤ ) (771 - 797 or 805, 재위 780 - 797) – 레온 4세의 아들; 어머니 이레네에게 눈이 뽑힘 이레네 아테네이아 (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 (755 - 803, 재위 797 - 802) – 레온 4세의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 6세의 어머니; 폐위되어 레스보스 섬에 유배됨 니케포루스 1세 (Νικηφόρος Α ) ( ? - 811, 재위 802 - 811) – 궁정 재무 대신; 불가르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함, 해골은 불가르족 칸 크룸의 술잔으로 사용되다 스타우라키우스 (Σταυράκιος Φωκάς) ( ? - 812, 재위 811) – 니케포루스 1세의 아들; 불가르족 크룸과의 전투에서 부상으로 결국 죽다. 미하일 1세 랑가베 (Μιχαήλ Α Ραγκαβής) (재위 811 - 813) – 니케포루스 1세의 사위, 궁정의 장관; 스스로 제위에서 내려와 수도원에 들어감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 (Λέων Ε ο Αρμένιος) (775 - 820, 재위 813 - 820) – 스트라테고스( Strategos )출신; 암살됨 미하일 2세 (Μιχαήλ Β ο Τραυλός ή Ψελλός) (770 - 829, 재위 820 - 829) – 스트라테고스 출신, 콘스탄티누스 6세의 사위 테오필루스 (Θεόφιλος) (813 - 842, 재위 829 - 842) – 미카일 2세의 아들 * 테오도라 (Θεοδώρα) (재위 842 - 855) – 테오필루스의 황후; 여제이자 미카일 3세의 섭정;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감 미하일 3세 (Μιχαήλ Γ ο Μέθυσος) (840 - 867, 재위 842 - 867) – 테오필루스의 아들; 암살당함 바실리오스 1세 (Βασίλειος Α ) (811 - 886, 재위 867 - 886) - 미하일 3세의 궁정신하 출신; 사냥에서 사고로 죽다 레온 6세 (Λέων ΣΤ ο Σοφός) (866 - 912, 재위 886 - 912) – 바실리오스 1세 또는 미하일 3세의 아들일 수도 있음 알렉산드로스 (Αλέξανδρος Γ του Βυζαντίου) (870 - 913, 재위 912 - 913) – 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 조카의 섭정 콘스탄티노스 7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Ζ ο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905-959, 재위 913 - 959) – 레오 6세의 아들 * 로마노스 1세 레카페누스 (Ρωμανός Α ο Λεκαπηνός) (870 - 948, 재위 919 - 944) –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자 사위와 공동 황제; 아들에 의해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감 로마노스 2세 포르피로옌니토스 (Ρωμανός Β ο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939 - 963, 재위 959 - 963) – 콘스탄티노스 7세의 아들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Νικηφόρος Β Φωκάς) (912 - 969, 재위 963 - 969) – 스트라테고스 (Strategos),; 로마노스 2세의 황후와 결혼; 바실리오스 2세의 섭정; 암살당함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 (Ιωάννης Α Κουρκούας ο Τσιμισκής) (925 - 976, 재위 969 - 976) – 로마노스 2세의 매제; 니케포루스 황후의 연인이었으나 결혼이 금지당함; 바실리오스의 섭정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누스 (Βασίλειος Β ο Βουλγαροκτόνος) (958 - 1025, 재위 976 - 1025) – ‘불가르족의 학살자’; 로마노스 2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8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Η )(960-1028, 재위 1025 - 1028) – 로마노스 2세의 아들; 형 바실리우스 2세와 공동 황제 로마누스 3세 아르기루스 (Ρωμανός Γ ο Αργυρός) (968 - 1034, 재위 1028 - 1034)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독; 조이의 첫 남편으로 콘스탄티누스 8세에 의해 발탁됨; 살해됨 미카일 4세 파플라고니아인 (Μιχαήλ Δ ο Παφλαγών) (1010 - 1041, 재위 1034 - 1041) – 조이의 두 번째 남편 미카일 5세 칼라파테스 (Μιχαήλ Ε ο Καλαφάτης) (1015 - 1042, 재위 1041 - 1042) – 미카일 4세의 조카, 조이의 양자 * 조이 (Ζωή) (978 - 1050, 재위 1042) – 콘스탄티누스 8세의 둘째딸, 1028년부터 황후의 지위, 동생 테오도라와 공동 여제 * 테오도라 (Θεοδώρα) (980 - 1056, 재위 1042) – 콘스탄티누스 8세의 셋째딸; 언니 조이와 공동 여제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Θ ο Μονομάχος) (1000 - 1055, 재위 1042 - 1055) – 조이의 세 번째 남편 테오도라 (Θεοδώρα) (재위 1055 - 1056) – 복위됨 미하일 6세 브링가스 (Μιχαήλ ΣΤ ο Στρατιωτικός) (? - ?, 재위기간:1056 - 1057) – 테오도라가 후계자로 낙점; 폐위됨 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 (Ισαάκιος Α ο Κομνηνός) (1007 경 - 1060, 재위 1057 - 1059) – 장군 출신, 반란으로 즉위; 병으로 제위를 사양하고 수도원에 들어감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Ι ο Δούκας) (1006 - 1067, 재위 1059 - 1067) – 미카일 프셀루스의 영향으로 황제로 선택됨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 (Ρωμανός Δ Διογένης) (1032 - 1072, 재위 1068 - 1071) –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미망인과 결혼; 공동 황제, 폐위되어 맹인이 되어 죽음 미하일 7세 두카스 (Μιχαήλ Ζ Δούκας Παραπινάκης) (1050 - 1090, 재위 1071 - 1078) –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아들, 원래 두 형제와 로마노스와 공동 황제였음;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감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 (Νικηφόρος Γ Βοτανειάτης) (1001 - 1081, 재위 1078 - 1081) – 스트라테고스(Strategos), 미하일 7세의 아내와 중혼; 폐위되어 강제로 수도원에 들어감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 (Αλέξιος Α Κομνηνός) (1057 - 1118, 재위 1081 - 1118) – 이사키오스 1세의 조카;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손조카와 결혼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Ιωάννης Β Κομνηνός o Καλός) (1087 - 1143, 재위 1118 - 1143) –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사냥에서 사고로 죽음 마누일 1세 콤니노스 (Μανουήλ Α Κομνηνός ο Μέγας) (1118 - 1180, 재위 1143 - 1180) – 요안니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 (Αλέξιος B Κομνηνός) (1169 - 1183, 재위 1180 - 1183) – 마누일 1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 (Ανδρόνικος Α Κομνηνός) (1118 - 1185, 재위 1183 - 1185) – 요안니스 2세의 조카; 알렉시오스 2세의 미망인과 결혼; 폐위되고 고문당한 후 처형됨; 트라페주스 제국의 콤니노스 가계의 원조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Ισαάκιος Β Άγγελος) (1156 - 1204, 재위 1185 - 1195) – 알렉시오스 1세의 증손자; 폐위되고 실명당함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 (Αλέξιος Γ Άγγελος) (1153 - 1211, 재위 1195 - 1203) – 이사키오스 2세의 형; 제4차 십자군으로 폐위되어 강제로 수도원에 감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Ισαάκιος Β Άγγελος) (두 번째 재위 1203 - 1204) – 제4차 십자군으로 복위; 알렉시오스 5세에 의해 폐위 *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 (Αλέξιος Δ Άγγελος) (1182 - 1204, 재위 1203 - 1204) –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로 아버지와 공동 황제; 알렉시우스 5세에 의해 폐위되어 살해당함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Αλέξιος Ε Δούκας ο Μούρτζουφλος) (1140 - 1204, 재위 1204) – 제위 찬탈;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 라스카리스 왕조 (니카이아 제국, 1204-1261)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1204년 통치) – 공식적인 즉위는 없었음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Θεόδωρος Α Λάσκαρης) (1174 - 1222, 재위 1204 - 1222) –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치스 (Ιωάννης Γ Δούκας Βατάτζης) (1192 - 1254, 재위 1222 - 1254) – 테오도로스 1세의 사위; 간질환자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Θεόδωρος Β Δούκας Λάσκαρης) (1221 - 1258, 재위 1254 - 1258) – 요안니스 3세의 아들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 (Ιωάννης Δ Δούκας Λάσκαρης) (1250 - 1305, 재위 1258 - 1261) – 테오도로스 2세의 아들, 미하일 8세에 의해 폐위되어 실명당하고 감옥에 갇힘 팔레올로고스 왕조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 1259-1453)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Μιχαήλ Η Παλαιολόγος) (1224 - 1282, 재위 1259 - 1282) –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요한네스 4세의 섭정; 알렉시우스 3세의 증손자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Ανδρόνικος Β ο Γέρος) (1258 - 1332, 재위 1282 - 1328) – 미하일 8세의 아들; 제위에서 물러남 *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281 - 1320)-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공동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Ανδρόνικος Γ Παλαιολόγος ο Νέος) (1297 - 1341, 재위 1328 - 1341) –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1332 - 1391, 재위 1341 - 1347) –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들, 요안니스 6세에게 폐위 당함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Ιωάννης Στ Καντακουζηνός) (1295 - 1383, 재위 1347 - 1354) – 요안니스 5세의 장인;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감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재위 1354 - 1376) – 복위됨; 안드로니코스 4세에 의해 폐위 마쎄오스 칸타쿠지노스 (Ματθαίος Ασάνης Καντακουζηνός) (재위 1353 – 1357) –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와 공동 황제;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의 남편.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 (Ανδρόνικος Δ Παλαιολόγος) (1348 - 1385, 재위 1376 - 1379) – 요안니스 5세의 아들; 반란 끝에 한쪽 눈을 실명당함; 나중에 반란에 성공했다가 다시 폐위; 세 번째 반란을 일으킴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Ιωάννης Ζ Παλαιολόγος) (1370-1408, 공동 황제 1376-1379), deposed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재위 1379 - 1390) – 복위되었다가 다시 폐위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Ιωάννης Ζ Παλαιολόγος) (재위 1390)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ruled 1390 - 1391) – 복위됨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Μανουήλ Β Παλαιολόγος) (1350 - 1425, 재위 1391 - 1425) – 요안니스 5세의 아들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Ιωάννης Ζ Παλαιολόγος) (섭정 1399 - 1402)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Ιωάννης Η Παλαιολόγος) (1392 - 1448, 재위 1425 - 1448) – 마누일 2세의 아들. 공동 황제(재위 ? - 1425년)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ΙΑ Παλαιολόγος Δραγάσης) (1405 - 1453, 재위 1449 - 1453) – 마누일 2세의 아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위에 오르지 않았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때 전사함.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Θωμάς Παλαιολόγος) (1409 or 10 - 1465) –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 로마에 망명 중 죽음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Ανδρέας Παλαιολόγος) (1453 - 1502) – 토마스의 아들;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단독 왕국을 부여받음,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황제의 지위를 팔았고 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로마 황제 목록 비잔티움 제국 라틴 제국 트라페주스 제국 고대 로마사 로마 제국 로마 집정관 연대표 제정 로마 집정관 연대표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동고트 국왕 연대표 분류:군주 목록 분류:지역 연대표 |
정치학 (政治學) 또는 정치과학 (政治科學은 주로 국가권력을 행사하거나 자원의 획득, 배분을 둘러싼 또는 권력의 행사에 영향을 미치려는 제(諸) 세력들 간의 갈등과 투쟁 및 타협으로 나타나는 국가현상을 중심으로 정치사상과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사회과학의 한 분야이다. 정치사상이나 정치이론은 인간이 정치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치에 관한 체계적 연구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전통은 중세 말엽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부활된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의 정치학은 도시공동체나 세계적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며 윤리나 신앙의 입장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정치학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근대적 의미의 정치학은 중세적 세계공동체가 해체되고 근대국가가 형성된 데서 비롯된다. 근대정치학은 근대의 주권국가를 대상을 한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정치학과 구별된다. 마키아벨리는 도덕적인 선입감을 벗어난 객관적 방법을 통해서 세속군주의 통치기술을 논했고 보댕은 법률학적 입장에서 근대국가의 주권성과 아울러 군주의 절대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었다. 이와 같이 근세 초에 전개된 정치학은 교권에 대한 세속권의 절대성과 전제군주국가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정치학은 국가의 주권성과 군주권력의 만능성을 정당화하는 학문의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국가의 기반이 확립되고 전제군주정치에 대항하는 민권사상이 대두하게 됨에 따라 정치학은 국가권력의 소재에 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의 정치학은 국가주권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아울러 정치의 실태에 대한 실증주의적 분석을 기초로 하게 된다. 국가주권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자연법 사상에 기초를 갖는 국가계약설에서 비롯된다. 국가나 사회의 생성을 계약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 말기에 있었다. 애당초 계약설은 국가나 사회가 자연적으로 생겨났다는 사상과 대립되어 생겨났으며, 16세기 후반기에 있어서는 군주와 국민간의 통치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변해 갔다. 이 이론에 의하면 군주의 지배권은 군주와 국민 간의 계약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며 군주가 계약을 어기고 법을 침범할 경우에는 국민의 저항을 받고 국민에 의해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폭군 토벌의 이론으로 등장했던 계약설은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에 국가형성 원리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러나 국가계약설이 반드시 근대적 민권사상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17세기 영국의 민주혁명에 항의하고 절대군주제를 옹호한 대표적 이론가로는 홉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 계약론자는 로크나 루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근대적 민권사상을 주장하고 민주주의 이론에 이바지하고 있다. 계약론의 특색은 정치의 세속적 성격과 이성적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세의 교권이론이나 신앙적 자유와 평등이론과는 다르다. 특히 로크로 비롯된 권력분립론은 몽테스키외에 의해서 3권분립론으로 체계화된다. 그리고 루소의 자유주의론은 독일의 관념적 정치이론으로 연결을 보게 된다. 국가계약설은 17세기의 영국 혁명, 18세기의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의 민주혁명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과격성이 남긴 후유증은 자연법 사상과 국가계약설에 대한 반발을 야기시키게 된다. 국가계약설은 국가와 사회의 생성을 인간의 역사나 경험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할 도리가 없다. 에드먼드 버크는 역사적 입장에서 자연법과 사회계약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반박하고 민족의 관습과 전통과 그 역사적 발전의 가치를 강조하는 보수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다른 한편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들은 공리(utility)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경험주의 이론에 입각한 정치이론을 전개하였다. 공리주의는 정치적 권위의 근거를 추상적 이성이나 권리에서 찾지 않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에서 찾게 된 것이다. 공리주의의 시조인 벤담 및 그의 후계자 J. S. 밀은 입법·대의정부·선거제도 등의 대의민주정치에 있어서의 실제적 문제를 대상으로 연구했고, 현실정치에 대한 많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밀은 산업사회의 발전이 가져오는 정치적 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시했고 개인주의와 사회주의를 조정하는 자유주의의 수정을 주장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발달된 정치학은 독일의 관념적 국가이론 형성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시민사회의 형성이 뒤늦게 이루어진 독일에 있어서는 법학적 정치학의 전통이 확립된다. 본래 군주의 주권성을 옹호하려고 등장했었던 주권 이론이 독일에 있어서는 국가주권 이론으로 변질된다. 독일의 국가론은 군주주권론과 루소의 인민주권론을 절충하여 국가주권론으로 발전하고 국가의 본질을 유기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독일에 있어서의 일반 국가론의 발전은 옐리네크(1851-1911)에 의해서 일단 집대성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학을 수립함에 있어 크게 공헌한 학자로는 블룬츨리(J. K. Bluntschli)를 들 수 있다. 그는 국가학을 국가론·국법학·정책학으로 3분한다. 국법학은 국가를 하나의 법규범 질서로 보고 그것을 범이론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며, 국가론은 국가일반의 존재 그 자체를 사회법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며, 정책학은 국가의 목적과 활동을 연구하는 실천과학이다. 독일에서 발달한 국가학적 전통은 20세기 전반기에 영국에서 주장된 국가다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국가다원론은 국가학에서 전제로 하는 국가주권론에 반대하여 주권의 소재가 다원적인 사회집단에 있음을 주장하는 이론이나 근본적으로는 주권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치학에서 법학적 요소를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근대적 정치학은 자연법에서 비롯된 사회계약설·역사철학·실증주의 국가학을 기본으로 전개된다. 20세기까지의 정치학은 철학이나 법학 또는 역사학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공인을 받지 못했다. 정치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하고 대학에다 정치학과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었으며, 미국에서도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대부분의 대학에서 정치학과를 설치했다. 그 까닭으로 정치학 연구에 있어서 과학기술면에 있어서의 발달은 미국이 가장 앞서고 있다. 다른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제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1945년 이후 정치학은 유례없는 발달을 거듭하고 국제적으로도 공인된 학문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도 해방과 더불어 정치학과 또는 정치 외교학과가 각 대학에 설치되어 정치학을 독립된 학문으로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정치학의 연구대상 및 방법에 있어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학 자체에 대한 국제적 인식도 2차대전을 전후해서 크게 달라진다. 우선 2차대전 이전의 정치학의 실태를 본다면 19세기까지의 국가학적인 전통과 20세기의 과학적 방법이 공존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 있어서도 초기의 정치학의 발달은 독일의 학자와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다. 영국에 있어서의 정치학의 주제는 통치의 원리를 따지는 철학이나 영국 헌정(憲政)의 실태를 설명하기 위한 헌정이론이었다. 프랑스에 있어서의 정치학은 행정적인 효용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어서도 마키아벨리 이후 정치학의 전통은 단절되고, 정치학은 역사와 철학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정치학을 하나의 독립된 과학으로 확립시키려는 움직임이 미국과 영국의 학계에서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정치학을 독립된 과학으로 확립함에 있어 콩트(1798-1857)의 실증주의 철학의 영향력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는 사회현상도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미국에서 크게 환영받고 영국에서도 받아들여진다. 미국에 있어서는 메리엄(C. E. Merriam)의 과학주의적으로 정향된 『정치학의 새국면』 (1925) 이 그 후의 정치학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벤틀리(A. Bentley)의 『통치과정론』 (1908)은 국법학적 전통을 벗어난 동태적 정치학의 대상을 개척하였다. 영국의 배저트(W. Bagehot)도 『물리학과 정치학』 (1900)에서 정치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20세기 전반기의 정치학은 유럽과 미국에 국한된 학문이었으며 유럽 대륙의 제 국가에 있어서의 정치학이 일반적으로 국가학적 전통 가운데 남아 있었음에 반해서 영·미의 정치학은 정치학을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특히 미국에 있어서는 정치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었다. 2차대전 후의 정치학의 발달은 미국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미국에서 발달한 과학적인 방법과 정치의 실태를 해명하려는 비법학적(非法學的)인 연구의 전통은 거의 세계적으로 정치학의 연구와 교수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전통적 정치학 연구에 갇혀 있던 유럽의 정치학계에서도 미국의 정치학을 도입하게 되고, 과학적으로 정향된 정치학 연구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한편 미국의 정치학계는 과학적 정치학의 새로운 분야를 크게 개척하게 된다. 미국이 처해 있는 국제적 위치를 배경으로 국제관계·지역연구 및 후진국 정치까지 포함하는 비교정치 분야에까지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미국의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더욱 추상화된 과학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발달된 행동주의는 인간과 정치를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정치의 문제가 과학기술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행동주의적 접근방법이 광범한 과학기술을 토대로 한다 하더라도 정치생활에 있어서의 가치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 과학은 사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함에 적절할지는 몰라도 사실을 떠난 이념을 정립해 주는 것은 아니다. 행동주의 개척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스턴(D. Easton)이 1969년 미국 정치학회 회장 취임인사에서 밝혔듯이 현대의 정치학은 후기 행동주의시대에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 정치학이 도입되고 대학에 정치학과 또는 정치외교학과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1950년까지의 정치학은 영·미에서 발달한 정치학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을 통해서 도입된 독일의 국가학적 전통이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영·미 특히 미국의 정치학의 영향이 크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주정치론 또는 민주정부론은 우리 학계의 주요 연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정치학은 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념적 또는 제도적 해설에 그쳤으며 미국에서 발달되고 있는 과학적 연구방법까지 도입한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는 전통적 학풍이 청산되고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학풍이 우리 정치학계를 풍미하게 되었다. 정치에 대한 이념·제도의 해설은 점차 지양되고 정치동태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행동주의적 정치학이 도입되는 것도 이 시기이다. 19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정치학의 정향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한편 대한민국 정치의 실태를 설명할 수 있는 토착적 정치학의 개척이 모색되기 시작하다. 그리고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이러한 기운은 더욱 농후해졌다. 한국의 정치학은 이제 국제적 성격을 벗어나 독자적 정치학의 개척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정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에서 지적되었듯이 정치권력을 누가 가지느냐, 그리고 그것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에 따라 일반적으로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대의 저자들은 대부분 이 정체들이 순환한다고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이 있다. 왕정 참주정 귀족정 과두정 민주정 무정부상태 이들 정체 가운데 긍정적인 정체의 장점을 활용하여 정부를 세운 혼합정체를 공화정이라 한다. 마키아벨리 및 그가 독해했던 고대 로마의 학자들은 특히 로마의 정체를 인간의 역량 또는 덕(virtus)이 가장 잘 드러난 정체라고 결론지었다. 영국의 명예 혁명,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등을 통해 18세기~19세기의 서유럽에서부터 자유주의적 국가의 성립이 가능해졌다. 이후 보통선거권의 확립을 통해 현재의 많은 나라들이 적용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가 탄생했다.근대에 들어와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로 인해 사회주의에 알맞은 정체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게 된다. 그 가운데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현실공산주의체제를 성립시킨다. 사회주의 현실공산주의 정치 권력 주권 국가 사회계약 인민 민족 외교 국가를 비롯하여 인간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현상들은 모두 정치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음은 시대 별로 이러한 탐구 및 실천을 벌였던 사람들을 나열한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한비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머스 홉스 장 보댕 존 로크 제러미 벤담 알렉시 드 토크빌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마르크스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마오쩌둥 카를 슈미트 레오 스트라우스 한나 아렌트 안토니오 네그리 개브리얼 아먼드 찰스 에드워드 메리엄( Charles Edward Merriam) * 크레덴다(Credenda) * 미란다 (정치학)(Miranda)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정치인류학( Political anthropology) * 극장 국가( Theatre state) PPE( 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정치공학 선거부정( Electoral fraud) 포괄정당(빅텐트) 싱글이슈 폴리틱스( Single-issue politics) 네포티즘(족벌정치, 연고주의) 분류:정치학 용어 |
어느 고생물학자가 작업을 하고 있다.. Praeparation.JPG|섬네일|250px|에우로파사우루스의 화석 뼈를 준비하고 있다. 고생물학 (古生物學, Paleontology)이란 진화 생물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생물학의 특수 분과로서,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화석을 바탕으로 생물체의 발생과 진화과정 그리고 까마득히 먼 옛날의 생물체의 환경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생물학은 지구상에 예전에 살았던 동식물들이 진화해온 역사를 화석기록, 생흔화석 따위를 통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화석에는 신체의 딱딱한 부분이 암석화된 화석과 기어다닌 흔적, 땅을 판 구멍, 신체의 일부가 암석에 찍혀 남은 흔적, 화석화된 피부, 화학적인 잔여물질 등이 포함된다. 현대의 고생물학과 지질학은 중세 후기부터 유럽의 귀족이나 성직자 사회에서 취미 형태로 땅에서 나온 화석등을 모으고 자신의 수집품을 비교대조 하면서 그 기원을 추론하는데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현상이 유독 유럽 문명권에서만 일어났던 까닭은 유럽의 지질이 주로 중생대의 퇴적암 지층이고 서유럽의 대부분이 습곡을 받지 않은 지층이라 그 구조를 이해하기 쉬웠다라는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송나라의 심괄은 이미 화석의 기원과 더불어 지질학적 과정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 적이 있다. 고생물학은 필연적으로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적이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한 연구이나, 이미 멸종된 생물에 대한 연구일 경우 어쩔 수 없이 화석 기록을 통해 연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석으로 남지 않은 생물에 관한 사항은 미지수로 남을 수밖에 없다. 화석으로 남은 종들 중에서도 특별히 대중적 관심을 끄는 대상은 공룡과 고인류이다. 고생물학에서 밝혀낸 생물의 번영과 멸종은 지질학적인 시간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대표적으로 공룡의 멸종을 경계로 하여 백악기와 제3기가 나뉘며, 삼엽충을 비롯한 많은 고생대형 생물의 대량멸종을 기준으로 하여 페름기와 트라이아스기가 구분된다.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정합을 통한 지질시대의 분류는 사실과 맞지 않다. 부정합 자체가 시간적 공백을 의미하기 때문에, 연속적 시간에서 구분 점 을 찍어야하는 지질시대 분류에는 이용될 수 없다. 어느 지질학적 시기의 끝과 시작은 연속된 퇴적물에서 특정한 생물의 화석이 나오기 시작하는 층으로 정해지는데, 이러한 지점을 황금못(golden spike)이라고 한다. 못을 박아서 그 위치를 남기고 싶어 하는 지질학자들의 염원이 표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화석 * 살아있는 화석 지질학 생물 진화의 역사 |
인간생물학 (人間生物學)이란 의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인간의 신체 구조, 각종 신체기관, 감각, 신경조직의 기능을 연구함과 동시에 인간의 발달 과정(태아의 형성, 성장, 생식, 늙음)에서 빚어지는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생물학의 비교적 새로운 한 분야이다. 인간생물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야로는 해부학, 생리학, 세포생물학, 면역학, 유전학, 진화 생물학, 생물환경학, 고생물학 등을 손꼽을 수 있다. |
로제타석의 탁본 로제타석 (Rosetta石) 또는 로제타 돌 은 기원전 196년에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같은 내용의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 등 세 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쓰여 있는 화강암이다. 이 돌이 있어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과 토머스 영은 잘 알려진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로제타석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때에 만들어진 검은색 비석이다. 1799년 7월 15일 베헤이라 주 로제타에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장교인 피에르 부샤르가 발견하였다. 이 돌은 가장 높은 곳까지의 높이가 114.4 cm (45.04 인치) 이며, 너비는 72.3 cm (28.5 인치), 두께는 27.3 cm (10.9 인치) 이다. 무게는 대략 760 kg (1,676 파운드)으로, 원래는 화강암 혹은 현무암일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현재는 화강섬록암으로 여겨진다. 핑크빛이 도는 어두운 회색이다. 1802년부터 영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같은 내용을 전하기 위하여 세 가지 언어로 적었다. 사제들을 위하여 이집트 신성문자로 적었고 첫 14줄이다. 신하들을 위하여 이집트 민중문자로 적었고 두 번째 32줄이다. 이집트에 사는 그리스어 문화권의 사람들을 위해 고대 그리스어 대문자로 적었고, 마지막의 51줄이다. 내용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나머지는 구체적인 선언문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사제들과 신전에 대한 여러가지 혜택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이어지며 여기에서 소개된 분량은 1/5정도이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1814년 영국인 토마스 영이 이집트 민중문자의 해독을 끝냈고, 이집트 상형문자 해석을 시작했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이 일을 확장하여, 로제타 돌을 해석하였다. 샹폴리옹은 그리스어와 콥트어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부터 해석하였고, 테두리가 둘러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냈다. 그것은 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형문자쪽의 테두리가 둘러진 단어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낸 후 그의 형제에게 가서 이를 해석했다고 알렸다. 1858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프톨레마이오스 학회에서 로제타 스톤의 영어 번역을 처음으로 출간했다. 3명의 학부생 찰스 R. 헤일(Charles R. Hale), S. 헌팅턴 존스(S. Huntington Jones)와 헨리 모턴(Henry Morton)이 번역을 맡았다. 이 번역은 재판까지 금세 모두 팔렸지만, 학술적인 가치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출판을 중단했다. 분류:고대 이집트의 건축 분류:고대 이집트 문학 분류:석비 분류:금석문 분류:번역 분류:다언어 매체 분류:이집트학 분류: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분류:대영박물관 소장품 분류:나일강 삼각주 분류:은유 분류:기원전 2세기 작품 분류:1799년 발굴 |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ios)는 다음을 가리킨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이자 점성학자이다. 프톨레마이오스 (테베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고대 이집트를 다스린 왕조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위의 왕조가 다스린 헬레니즘 왕국이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3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프톨레마이오스 5세 프톨레마이오스 6세 프톨레마이오스 7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프톨레마이오스 9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프톨레마이오스 11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프톨레마이오스 15세 |
키리에 (kyrie)는 흔히 미사곡 (missa곡), 예전곡, 예배곡으로 번역되는 노래로 고대 그리스어, 또는 헬라어 주님이 다스리신다 뜻을 가진 단어 "퀴리유오(κὐριεύω)"에서 유래한 용어의 음악이다. 이 곡의 원명칭인 헬라어 "퀴리에(κὐριη)"는 주님 을 의미하는 "퀴리오스(κὐριοσ)"의 호격, 즉 "주님이시여"의 뜻을 지녔다. 4세기 교회 공인 이후 로마제국교회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헬라어로 작곡한 예전용 성가들과 예전 순서가 서방교회에 전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발전한 곡의 음악으로 동방교회의 예전을 바탕으로 서방교회의 전통을 형성한 예전/전례를 따르는 음악이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의 유럽언어에서 미사 는 로마가톨릭의 예전만이 아니라 개신교인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개혁교 등에서도 예배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미사곡으로 지칭되는 곡이 반드시 로마가톨릭의 음악만이 아니며, 개신교회의 음악만이 아니기도 하다. 서방교회 중에서 근래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 연주되도록 작곡되거나 만들어진 선율이나 작품들이 있으며. 9세기에 집성된 단선율의 성가인 그레고리우스 성가 역시 이런 전례/예전의 전통을 따라 구성되었다. 근래에 와서 주의할 부분은 독일어권의 음악 중에서 번역된 미사곡들이다. 독일어에서 미사 는 개신교의 예배와 천주교의 미사를 통칭하는 용어로 개신교 예배곡도 흔히 루터교 미사곡 또는 복음주의 미사곡 으로 작곡되었다. 이는 유럽어에서는 의미의 혼동이 없지만, 한국어 번역시에 혼동하기 쉬우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구교와 신교 구분없이 이런 예배곡들을 미사곡으로 번역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작곡자의 의도와 달리 개신교 곡이나 천주교 곡이나 모두 미사곡으로 불린다. 물론 현재에 와서는 개신교, 천주교 구분없이 연주되기도 하며, 개신교를 위한 개신교 예배곡인 바흐의 곡들은 신구교 구분 없이 연주된다. 보통 서방교회 전통의 예전/전례에서 미사곡은 키리에(Kyrie), 대영광송(gloria), 크레도(Credo), 상투스(Sanctus), 아뉴스 데이(Agnus dei)의 통상문 노래로 이루어진다. 이 순서는 동방교회의 예배 순서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여전히 서방교회나 동방교회의 전통인 보편표회의 전통으로 존중된다. 이런 순서에 따라서 WCC에서 제정한 예전으로 서방교회의 신구교, 동방교회가 공히 인정한 리마예식서에는 다양한 곡들과 이러한 교회의 공통된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나 개신교회 중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국내의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회에서도 이런 순서에 따라 예배곡으로 예배를 드린다. 전통적 미사곡의 악곡형식은 일정한 가사로 된 다음과 같은 5개 내지 6개의 부분(악장)으로 되어 있다. # 키리에(Kyrie, eleison…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글로리아(Gloria in excelsis Deo…하늘 높은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 크레도(Credo in unum Deum…한 분이신 하느님을…) # 상투스(Sanctus…거룩하시도다…) 및 베네딕투스(Benedictus…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 아뉴스 데이(Agnus Dei…하느님의 어린 양) 이것들은 어떠한 종류의 미사에서도 항상 쓰이며, 통상문이라고 한다. 이상의 5개의 부분은 보통 더 많은 부분으로 나뉜다. 예를 들면 키리에는 때로는 키리에 엘레이손-크리스테 엘레이손-키리에 엘레이손 의 3부분으로 되기도 하고, 상투스에서 베네딕투스가 독립하여 하나의 부분을 형성하기도 한다. 미사곡의 가사는 키리에의 부분만이 그리스어이고, 그 밖에는 모두 라틴어로 노래된다. 본래의 전례용(典禮用) 미사곡으로서 가장 오랜 것은 단선성가(plain song)이며, 후에 그레고리오 성가가 되었다. 13세기경부터 대위법의 발전에 따라 미사곡은 다성양식(폴리포니)으로 쓰게 된다. 기욤 드 마쇼의 《노트르담 미사곡》(1364년)은 초기 다성양식으로 된 걸작이다. 15-16세기 말에 걸쳐 미사곡은 뒤파이, 죠스캥 데 프레, 팔레스트리나 등에 의하여 그 때까지 없었던 큰 발전을 보았다. 특히 팔레스트리나는 100여 곡의 미사곡(《교황 마르켈스의 미사》는 특히 유명하다)을 썼는데, 그 대부분은 4-5성부로 된 아 카펠라(무반주 합창곡)의 양식으로 작곡되었다. 팔레스트리나 이후의 대표적인 미사 작곡가로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루크너 등이 있다. 이 작곡가들의 미사곡은 모두 관현악의 반주를 가지고 있다. 바흐의 《나단조 미사》는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장엄 미사)와 함께 오늘날 연주회에서도 많이 연주되는 작품이다. 가톨릭 교회의 미사 전례에서 사용하는 통상문인 미사곡들을 모아놓은 책들을 미사곡집(Kyriale)라고 부른다. 라틴어 Kyriale는 미사곡 자체를 가리킬 수도, 미사곡집 을 가리킬 수도 있다.역사적으로 성가대가 사용하도록 별도의 책으로 존재하기도 하였다(Kyriale, 1905년).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별도의 책으로 발행되지 않고 미사의 고유문 노래를 모아 놓은 로마 미사 성가집(Graduale Romanum)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 로마 미사 성가집에는 첫째, 18개 조합의 미사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키리에, 글로리아, 상투스, 아뉴스 데이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글로리아를 노래하지 않는 때를 위한 미사곡에는 이 노래가 빠져 있다. 둘째로, 크레도가 6곡 실려 있다. 셋째로, 자유로이 할 수 있는 키리에 11곡, 글로리아 4곡, 상투스 3곡, 아뉴스 데이 2곡이 추가되어 있다. 한편 18개 조합의 미사곡에서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는 곡들이 덧붙여져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미사곡 1번에는 키리에가 2곡이다. 로마 미사 성가집 이후에 너무 어려운 선율을 정리하고 간략하게 만든 단순 미사 성가집(Graduale Simplex)가 발행되었다. 여기에는 역시 너무 어려운 선율을 정리한 미사곡이 실렸는데 이를 Kyriale Simplex ( 단순 미사곡 , 또는 책이라는 관점에서는 단순 미사곡집 )이라 부른다. 로마 미사 성가집(그라두알레 로마눔) 그레고리오 성가 레퀴엠 미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나단조 미사 개신교, 루터교 미사곡- 어도비 플래시 분류:악곡의 형식 분류:서양 고전 음악 |
레퀴엠 (Requiem)은 기독교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위령미사)’에 연주되는 전례 음악이다. 하느님께서 죽은 이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이 미사의 전례(典禮)에서는 처음의 입당송(入祭唱, Introitus)이 라틴어의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로 시작되므로, 이 미사를 레퀴엠 미사 (Requiem Mass) 라고 불렀으며, 그 미사에 쓰이는 곡은 레퀴엠 이라고 하였다. 레퀴엠은 진혼곡(鎭魂曲) 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5세기의 작곡가 아담 폰 풀다(Adam von Fulda)는 이와 같은 종류의 음악을 "죽음의 명상( meditatio mortis )"이라 불렀다 한다. 레퀴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입당송 (Introitus) 자비송 (Kyrie) 부속가 (Sequientia) **Dies irae **Tuba mirum **Rex tremendae **Recordare, Ingemisco ***작곡가들에 따라 Recordare와 Ingemisco를 분리시켜 작곡하거나 한곡으로 합쳐서 작곡하는 경우가 있음. **Confutatis maledictis **Lacrimosa 봉헌송 (Offertorium) **Domine Iesu Christe **Hostias 상투스 (Sanctus) 하느님의 어린 양 (Agnus Dei) **레퀴엠 미사곡에서의 아뉴스 데이에서는 일반 미사에서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Miserere nobis) 라고 하는 부분이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Dona eis requiem)로 바뀌고, 평화를 주소서 (Dona nobis pacem)는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Dona eis requiem sempiternam)로 바뀐다. 영성체송 (Communio) Libera me In paradisum 널리 알려진 레퀴엠으로는 빅토리아, 모차르트, 케루비니, 베를리오즈, 드보르자크, 브루크너, 베르디, 생상스, 가브리엘 포레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다음은 시대별 레퀴엠 작곡가 및 작품 이름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들 중 전통 위령 미사에 쓰이는 Requiem.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소실됨) 하인리히 이그나즈 프란츠 폰 비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Requiem Mass in D minor (K. 626) 요제프 아이블러 루이지 케루비니 샤를 구노 안톤 드보르작 프란츠 리스트 오르간 반주, 테너 솔로 2명, 베이스 솔로 2명 그리고 남성 합창을 위하여 쓰여진 곡. 주세페 베르디 Messa da Requiem 엑토르 베를리오즈 요하네스 브람스 독일 레퀴엠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졌으며, 독일어 성서를 가사로 하는 연주회용 종교음악으로, 교회의 전례에는 쓰일 수 없는 음악이다. 로베르트 슈만 프란츠 슈베르트 독일어로 쓰여짐. 카를 체르니 가브리엘 포레 Requiem in D minor, Op. 48 안톤 브루크너 죄르지 리게티 프랭크 마틴 벤저민 브리튼 《전쟁 레퀴엠》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졌으며, 라틴어 텍스트 중간중간에 영시를 텍스트로 한 부분들이 삽입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폴란드어로 쓰여짐. 류재준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Te decet hymnus, Deus, in Sion, et tibi reddetur votum in Jerusalem. Exaudi orationem meam, ad te omnis caro veniet.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Kyri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Christe eleison, Christ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In memoria aeterna erit iustus ab auditione mala non timebit. Absolve Domine animas omnium fidelium defunctorum ab omni vinculo delictorum et gratia tua illis succurente mereantur evadere iudicium ultionis, et lucis aeterne beatitudine perfrui. Dies irae , dies illa Solvet saeclum in favilla Teste David cum Sibylla. Quantus tremor est futurus, Quando judex est venturus, Cuncta stricte discussurus! Tuba, mirum spargens sonum Per sepulcra regionum Coget omnes ante thronum. Mors stupebit et natura, Cum resurget creatura, Judicanti responsura. Liber scriptus proferetur, In quo totum continetur, Unde mundus judicetur. Judex ergo cum sedebit, Quidquid latet, apparebit Nil inultum remanebit. Quid sum miser tunc dicturus? Quem patronum rogaturus, Cum vix justus sit securus? Rex tremendae majestatis, Qui salvandos salvas gratis, Salva me, fons pietatis! Recordare, Jesu pie, Quod sum causa tuae viae Ne me perdas illa die. Quaerens me, sedisti lassus, Redemisti Crucem passus Tantus labor non sit cassus. Juste judex ultionis, Donum fac remissionis Ante diem rationis. Ingemisco , tamquam reus, Culpa rubet vultus meus Supplicanti parce, Deus. Qui Mariam absolvisti, Et latronem exaudisti, Mihi quoque spem dedisti. Preces meae non sunt dignae, Sed tu bonus fac benigne, Ne perenni cremer igne. Inter oves locum praesta, Et ab haedis me sequestra, Statuens in parte dextra. Confutatis maledictis, Flammis acribus addictis, Voca me cum benedictis. Oro supplex et acclinis, Cor contritum quasi cinis Gere curam mei finis. Lacrimosa dies illa, Qua resurget ex favilla Judicandus homo reus. Huic ergo parce, Deus Pie Jesu Domine, Dona eis requiem. Amen. Domine Jesu Christe , Rex gloriae, libera animas omnium fidelium defunctorum de poenis inferni et de profundo lacu. Libera eas de ore leonis, ne absorbeat eas tartarus, ne cadant in obscurum. Sed signifer sanctus Michael repraesentet eas in lucem sanctam, quam olim Abrahae promisisti et semini ejus. Hostias et preces tibi, Domine, laudi offerimus. Tu suscipe pro animabus illis, quarum hodie memoriam facimus fac eas, Domine, de morte transire ad vitam, quam olim Abrahae promisisti et semini ejus. Sanctus, Sanctus, Sanctus Dominus, Deus Sabaoth! Pleni sunt caeli et terra gloria tua. Osanna in excelsis. Benedictus , qui venit in nomine Domini. Osanna in excelsis. Agnus Dei ,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sempiternam. Lux aeterna luceat eis, Domine cum Sanctis tuis in aeternum, quia pius es.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cum Sanctis tuis in aeternum, quia pius es. Libera me , Domine, de morte aeterna, in die illa tremenda Quando caeli movendi sunt et terra. Dum veneris judicare saeculum per ignem. Tremens factus sum ego, et timeo, dum discussio venerit, atque ventura ira. Quando caeli movendi sunt et terra. Dies illa, dies irae, calamitatis et miseriae, dies magna et amara valde. Dum veneris judicare saeculum per ignem.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In paradisum deducant te Angeli in tuo adventu suscipiant te Martyres, et perducant te in civitatem sanctam Jerusalem. Chorus Angelorum te suscipiat, et cum Lazaro quondam paupere aeternam habeas requiem. 합창 레퀴엠(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스페인어 TV 심포니 오케스트라. Carlos Kalmar. 레퀴엠(가브리엘 포레). 스페인어 TV 심포니 오케스트라. Petri Sakari. 레퀴엠(안토닌 드보르자크). 스페인어 TV 심포니 오케스트라. Carlos Kalmar. 분류:가톨릭 기도문과 전례문 분류:성악곡 분류:악곡의 형식 분류:합창 |
기보법 (記譜法)은 음악을 적는 방법이다. 오선보가 가장 널리 쓰인다. 서양 음악에서는 고대부터 문자로 음의 높이(高低)를 나타내는 문자보(文字譜)가 있었고, 중세에는 네우마(neuma) 악보가 있었으며, 12세기에는 5선에 음의 길이를 나타내는 유량악보(有量樂譜)가 나왔다. 17세기에는 오늘날에 쓰는 것과 거의 같은 5선악보가 정비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인 악보가 되었다. 동양에서도 문자보는 예로부터 쓰여왔고 또 그 종류도 많았다. 한국에서 쓰여온 악보는 기보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중국계 아악을 기록할 때 쓰던 율자보(律字譜), 당악에 쓰던 공척보(工尺譜), 세종 때 만든 정간보(井間譜), 세조 때 쓰던 오음약보(五音略譜), 악기의 소리에 따라 적는 육보(肉譜), 악기의 연주법에 따라 적는 합자보(合字譜), 성악곡의 사설에다 간단히 가락을 뜻하는 기호를 덧붙이는 연음표(連音標) 등이 있다. 고려 때 중국에서 악보와 지결도(指決圖)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율자보와 공척보는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와 쓰인 것이고, 육보는 고려 때에도 있었다고 하며, 정간보·합자보·오음약보는 근세 조선 전기부터 쓰여온 것이다. 음표와 쉼표 임시표 태블러처 |
Abe Official.jpg|섬네일|right|200px|현임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 이 문서는 일본의 역대 내각총리대신 ()에 관한 내용이다. 초대와 제2대는 메이지 18년 태정관 제69호 및 내각 직권을 바탕으로 임명됐다. 제3대부터 제45대까지는 내각 관제를 근거로 해서 임명됐다. 제46대 이후에는 일본국 헌법을 근거로 해서 임명됐다. 또한 제45대는 일본국 헌법 제103조에 의해 일본국 헌법에 의거해서 임명된 것으로 간주된다. 대 는 내각(내각총리대신)이 구성된 댓수, 명 은 몇 번째의 내각총리대신인지를 나타낸다. 기간·일수 는 재직 기간과 재직 일수를 나타낸다. 단, 재직 기간이 연속하지 않은 경우에는 각 재직 기간의 재직 일수를 들어 최종 차수의 재직 일수 뒤에 통산 재직 일수를 표시한다. 출생지 는 해당 인물이 출생한 지역이며 출신지나 선거구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출생지와 선거구가 다른 경우에는 각주를 표시했다. 소속 정당 ==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 (1868년 ~ 1947년) == 대 명 내각총리대신 내각 재직 기간 재직 일수 출생지 학력 영전·겸직 등 비고 참조 1 1 80px 이토 히로부미 제1차 이토 내각 1885년 12월 22일~ 1888년 4월 30일 861일 스오국(현 야마구치현) 쇼카손주쿠 종3위 훈1등 백작종2위 조슈벌 2 2 80px 구로다 기요타카 구로다 내각 1888년 4월 30일~ 1889년 10월 25일 544일 사쓰마국(현 가고시마현) 종2위훈1등백작 사쓰마벌육군 중장재임중 단독 사임 - 80px (산조 사네토미) (산조 잠정 내각) (1889년 10월 25일~ 1889년 12월 24일) (내각총리대신 겸임)종1위 대훈위 공작내대신 3 3 80px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1차 야마가타 내각 1889년 12월 24일~ 1891년 5월 6일 499일 나가토국(현 야마구치현) 쇼카손주쿠 종2위 훈1등 백작내무대신 육군 중장후에 육군 대장조슈 번 일본 제국 헌법하 4 4 80px 마쓰카타 마사요시 제1차 마쓰카타 내각 1891년 5월 6일~ 1892년 8월 8일 461일 사쓰마국(현 가고시마현) 조시칸 종2위 훈1등 백작귀족원 의원(백작)대장대신 사쓰마벌 5 80px 이토 히로부미 제2차 이토 내각 1892년 8월 8일~ 1896년 8월 31일 1,485일 종2위 훈1등 백작후에 정2위 대훈위 후작귀족원 의원(후작) 조슈 번재임중 단독 사임 - 80px (구로다 기요타카) (제2차 이토 내각) (1896년 8월 31일~ 1896년 9월 18일)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종2위 훈1등 백작육군 중장추밀원 의장 6 80px 마쓰카타 마사요시 제2차 마쓰카타 내각 1896년 9월 18일~ 1898년 1월 12일 482일(통산 943일) 정2위 훈1등 백작대장대신 사쓰마벌 7 80px 이토 히로부미 제3차 이토 내각 1898년 1월 12일~ 1898년 6월 30일 170일 정2위 대훈위 후작귀족원 의원(후작) 조슈벌 8 5 80px 오쿠마 시게노부 제1차 오쿠마 내각 1898년 6월 30일~ 1898년 11월 8일 132일 히젠국(현 사가현) 고도칸 정2위 훈1등 백작외무대신 헌정당 총재정당인으로서의 첫 임명 9 80px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2차 야마가타 내각 1898년 11월 8일~ 1900년 10월 19일 711일(통산 1,210일) 정2위 훈1등 공2급 후작귀족원 의원(후작) 조슈벌원수 육군 대장 10 80px 이토 히로부미 제4차 이토 내각 1900년 10월 19일~ 1901년 5월 10일 204일(통산 2,720일) 정2위 대훈위 후작귀족원 의원(후작) 조슈벌입헌정우회 총재재임중 단독 사임 - 80px (사이온지 긴모치) (제4차 이토 내각) (1901년 5월 10일~ 1901년 6월 2일)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정2위 훈1등 후작추밀원 의장 11 6 80px 가쓰라 다로 제1차 가쓰라 내각 1901년 6월 2일~ 1906년 1월 7일 1,681일 나가토국(현 야마구치현) 정3위 훈1등 공3급 자작후에 백작내무대신 조슈벌육군 대장 12 7 80px 사이온지 긴모치 제1차 사이온지 내각 1906년 1월 7일~ 1908년 7월 14일 920일 야마시로국(현 교토부) 소르본 대학교 졸업 정2위 훈1등 후작귀족원 의원(후작) 입헌정우회 총재 13 80px 가쓰라 다로 제2차 가쓰라 내각 1908년 7월 14일~ 1911년 8월 30일 1,143일 종2위 대훈위 공3급 후작후에 정2위 공작귀족원 의원(후작, 후에 공작)대장대신 조슈벌육군 대장 14 80px 사이온지 긴모치 제2차 사이온지 내각 1911년 8월 30일~ 1912년 12월 21일 480일(통산 1,400일) 정2위 훈1등 후작귀족원 의원(후작) 입헌정우회 총재 대 명 내각총리대신 내각 재직 기간 재직 일수 출생지 학력 영전·겸직 등 비고 참조 15 80px 가쓰라 다로 제3차 가쓰라 내각 1912년 12월 21일~ 1913년 2월 20일 62일(통산 2,886일) 정2위 대훈위 공3급 공작귀족원 의원(후작) 조슈벌육군 대장 16 8 80px 야마모토 곤노효에 제1차 야마모토 내각 1913년 2월 20일~ 1914년 4월 16일 421일 사쓰마국(현 가고시마현) 해군병학교 졸업 정2위 훈1등 공1급 백작 사쓰마벌해군 대장 17 80px 오쿠마 시게노부 제2차 오쿠마 내각 1914년 4월 16일~ 1916년 10월 9일 908일(통산 1,040일) 정2위 훈1등 백작후에 대훈위 후작귀족원 의원(후작)내무대신 히젠벌입헌동지회 총재 18 9 80px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내각 1916년 10월 9일~ 1918년 9월 29일 721일 스오국(현 야마구치현) 육군도야마학교 졸업 종2위 훈1등 공1급 백작 조슈벌원수 육군 대장 19 10 80px 하라 다카시 하라 내각 1918년 9월 29일~ 1921년 11월 4일 1,133일 무쓰국(현 이와테현) 사법성 법학교 중퇴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7기·이와테현 모리오카 선거구) 입헌정우회 총재재임 중에 암살 - 80px (우치다 고사이) (하라 내각) (1921년 11월 4일~ 1921년 11월 13일)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종2위 훈1등 백작외무대신 20 11 80px 다카하시 고레키요 다카하시 내각 1921년 11월 13일~ 1922년 6월 12일 212일 무사시국(현 도쿄도) 헵번주쿠 종3위 훈1등 자작귀족원 의원(칙찬)대장대신 입헌정우회 총재 21 12 80px 가토 도모사부로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 1922년 6월 12일~ 1923년 8월 24일 439일 아키국(현 히로시마현) 해군병학교 졸업해군대학교 졸업 종2위 훈1등 공2급 남작해군대신 해군 대장재임 중에 병사 - 80px (우치다 고사이)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 (1923년 8월 24일~ 1923년 9월 2일)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종2위 훈1등 백작외무대신 22 80px 야마모토 곤노효에 제2차 야마모토 내각 1923년 9월 2일~ 1924년 1월 7일 128일(통산 549일) 정2위 훈1등 공1급 백작 사쓰마벌퇴역 해군 대장 23 13 80px 기요우라 게이고 기요우라 내각 1924년 1월 7일~ 1924년 6월 11일 157일 히고국(현 구마모토현) 간기엔 정2위 훈1등 자작 24 14 80px 가토 다카아키 가토 다카아키 내각 1924년 6월 11일~ 1926년 1월 28일 597일 오와리국(현 아이치현) 도쿄 대학 법학부 졸업 종2위 훈1등 자작귀족원 의원(칙찬) 헌정회 총재헌정회·정우회·혁신구락부 연립 정권재임 중에 사망 - 80px (와카쓰키 레이지로) (가토 다카아키 내각) (1926년 1월 28일~ 1926년 1월 30일)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종3위 훈1등귀족원 의원(칙찬)내무대신 25 15 80px 와카쓰키 레이지로 제1차 와카쓰키 내각 1926년 1월 30일~ 1927년 4월 20일 446일 이즈모국(현 시마네현)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종3위 훈1등귀족원 의원(칙찬) 헌정회 총재 대 명 내각총리대신 내각 재직 기간 재직 일수 출생지 학력 영전·겸직 등 비고 참조 26 16 80px 다나카 기이치 다나카 기이치 내각 1927년 4월 20일~ 1929년 7월 2일 805일 나가토국(현 야마구치현) 육군사관학교 졸업육군대학교 졸업 종2위 훈1등 공3급 남작귀족원 의원(칙찬) 퇴역 육군 대장입헌정우회 총재 27 17 80px 하마구치 오사치 하마구치 내각 1929년 7월 2일~ 1931년 4월 14일 652일 도사국(현 고치현) 제3 고등중학교 졸업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5기, 고치현 제2구) 입헌민정당 총재재임 중에 저격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임시 대리 28 80px 와카쓰키 레이지로 제2차 와카쓰키 내각 1931년 4월 14일~ 1931년 12월 13일 244일(통산 690일) 종3위 훈1등 남작귀족원 의원(칙찬) 입헌민정당 총재 29 18 80px 이누카이 쓰요시 이누카이 내각 1931년 12월 13일~ 1932년 5월 16일 156일 빗추국(현 오카야마현) 게이오의숙 중퇴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17기, 오카야마현 제2구) 입헌정우회 총재재임 중에 암살 - 80px (다카하시 고레키요) (이누카이 내각) (1932년 5월 16일~ 1932년 5월 26일)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정3위 훈1등대장대신 30 19 80px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내각 1932년 5월 26일~ 1934년 7월 8일 774일 무쓰국(현 이와테현) 해군병학교 졸업 정2위 훈1등 공2급 자작 퇴역 해군 대장거국일치 내각 31 20 80px 오카다 게이스케 오카다 내각 1934년 7월 8일~ 1936년 3월 9일 611일 에치젠국(현 후쿠이현) 해군병학교 졸업 종2위 훈1등 공3급 퇴역 해군 대장거국일치 내각재임 중에 습격 32 21 80px 히로타 고키 히로타 내각 1936년 3월 9일~ 1937년 2월 2일 331일 후쿠오카현 제일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정3위 훈1등 거국일치 내각 33 22 80px 하야시 센주로 하야시 내각 1937년 2월 2일~ 1937년 6월 4일 123일 이시카와현 육군사관학교 졸업육군대학교 졸업 정3위 훈1등 공4급문부대신 예비역 육군 대장 34 23 80px 고노에 후미마로 제1차 고노에 내각 1937년 6월 4일~ 1939년 1월 5일 581일 도쿄부(현 도쿄도) 제일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중퇴교토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정3위 훈1등 공작귀족원 의원(공작) 거국일치 내각 35 24 80px 히라누마 기이치로 히라누마 내각 1939년 1월 5일~ 1939년 8월 30일 238일 미마사카국(현 오카야마현)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법학박사 정2위 훈1등 남작 거국일치 내각 36 25 80px 아베 노부유키 아베 노부유키 내각 1939년 8월 30일~ 1940년 1월 16일 140일 이시카와현 제4 고등학교 중퇴육군사관학교 졸업육군대학교 졸업 정3위 훈1등 예비역 육군 대장거국일치 내각 37 26 80px 요나이 미쓰마사 요나이 내각 1940년 1월 16일~ 1940년 7월 22일 189일 이와테현 해군사관학교 졸업해군대학교 졸업 정3위 훈1등 공4급 예비역 해군 대장거국일치 내각 38 80px 고노에 후미마로 제2차 고노에 내각 1940년 7월 22일~ 1941년 7월 18일 362일 종2위 훈1등 공작귀족원 의원(공작) 대정익찬회 총재거국일치 내각 39 제3차 고노에 내각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93일(통산 1,035일) 종2위 훈1등 공작귀족원 의원(공작) 40 27 80px 도조 히데키 도조 내각 1941년 10월 18일~ 1944년 7월 22일 1,009일 도쿄부(현 도쿄도) 육군사관학교 졸업육군대학교 졸업 종3위 훈1등 공2급후에 정3위육군대신육군참모총장 육군 중장후에 육군 대장대정익찬회 총재거국일치 내각 41 28 80px 고이소 구니아키 고이소 내각 1944년 7월 22일~ 1945년 4월 7일 260일 도치기현 육군사관학교 졸업육군대학교 졸업 정3위 훈1등 공2급 예비역 육군 대장후에 현역 복귀대정익찬회 총재거국일치 내각 42 29 80px 스즈키 간타로 스즈키 간타로 내각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133일 이즈미국(현 오사카부) 해군병학교 졸업해군대학교 졸업 정2위 훈1등 공3급 남작 퇴역 해군 대장대정익찬회 총재거국일치 내각 43 30 80px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1945년 8월 17일~ 1945년 10월 9일 54일 교토부 육군사관학교 졸업육군대학교 졸업 대훈위 공1급귀족원 의원(황족)육군대신 육군 대장1945년 9월 2일부터 연합국 점령하1945년 9월 6일에 주권 포기 44 31 80px 시데하라 기주로 시데하라 내각 1945년 10월 9일~ 1946년 5월 22일 226일 오사카부 제3 고등중학교 졸업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종2위 훈1등 남작귀족원 의원(칙찬)제1복원대신제2복원대신 일본진보당 총재연합국 점령하 45 32 80px 요시다 시게루 제1차 요시다 내각 1946년 5월 22일~ 1947년 5월 24일 368일 도쿄부(현 도쿄도) 가쿠슈인 고등학과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정3위 훈1등귀족원 의원(칙찬)외무대신 일본자유당 총재연합국 점령하 대 명 내각총리대신 내각 재직 기간 재직 일수 출생지 학력 영전·겸직 등 비고 참조 46 33 80px 가타야마 데쓰 가타야마 내각 1947년 5월 24일~ 1948년 3월 10일 292일 와카야마현 제3 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중의원 의원(제6기·가나가와현 제3구) 일본사회당 위원장일본사회당·민주당·국민협동당 연립 정권연합군 점령하 47 34 80px 아시다 히토시 아시다 내각 1948년 3월 10일~ 1948년 10월 15일 220일 교토부 제일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학박사 중의원 의원(제6기·교토부 제2구)외무대신 민주당 총재민주당·일본사회당·국민협동당 연립 정권연합군 점령하 48 80px 요시다 시게루 제2차 요시다 내각 1948년 10월 15일~ 1949년 2월 16일 125일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1기·고치현 전체구)외무대신 민주자유당 총재연합군 점령하 49 제3차 요시다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제3차 개조내각 1949년 2월 16일~ 1952년 10월 30일 1,353일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2기·고치현 전체구)외무대신 민주자유당 총재 → 자유당 총재민주자유당·민주당 연립파 연립 → 자유당 단독1952년 4월 28일에 주권 회복 50 제4차 요시다 내각 1952년 10월 30일~ 1953년 5월 21일 204일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3기·고치현 전체구) 자유당 총재 51 제5차 요시다 내각 1953년 5월 21일~ 1954년 12월 10일 569일(통산 2,616일)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4기·고치현 전체구) 52 35 80px 하토야마 이치로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1954년 12월 10일~ 1955년 3월 19일 100일 도쿄부(현 도쿄도) 제일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13기·도쿄도 제1구) 일본민주당 총재 53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1955년 3월 19일~ 1955년 11월 22일 249일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14기·도쿄도 제1구) 일본민주당 총재 → 자유민주당 총재대행위원 54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1955년 11월 22일~ 1956년 12월 23일 398일(통산 745일) 정3위 훈1등중의원 의원(제14기·도쿄도 제1구) 자유민주당 총재대행위원 → 자유민주당 총재 55 36 80px 이시바시 단잔 이시바시 내각 1956년 12월 23일~ 1957년 2월 25일 65일 도쿄부(현 도쿄도) 와세다 대학 문학과 졸업와세다 대학 종교연구과 수료 중의원 의원(제4기·시즈오카현 제2구) 자유민주당 총재 56 37 80px 기시 노부스케 제1차 기시 내각개조내각 1957년 2월 25일~ 1958년 6월 12일 473일 야마구치현 제일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정3위중의원 의원(제3기·야마구치현 제2구) 자유민주당 총재 57 제2차 기시 내각개조내각 1958년 6월 12일~ 1960년 7월 19일 769일(통산 1,241일) 정3위중의원 의원(제4기·야마구치현 제2구) 58 38 80px 이케다 하야토 제1차 이케다 내각 1960년 7월 19일~ 1960년 12월 8일 143일 히로시마현 제5 고등학교 졸업교토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정5위중의원 의원(제5기·히로시마현 제2구) 자유민주당 총재 59 제2차 이케다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제3차 개조내각 1960년 12월 8일~ 1963년 12월 9일 1,097일 정5위중의원 의원(제6기·히로시마현 제2구) 60 제3차 이케다 내각개조내각 1963년 12월 9일~ 1964년 11월 9일 337일(통산 1,575일) 정5위중의원 의원(제7기·히로시마현 제2구) 61 39 80px 사토 에이사쿠 제1차 사토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제3차 개조내각 1964년 11월 9일~ 1967년 2월 17일 831일 야마구치현 제5 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종4위중의원 의원(제7기·야마구치현 제2구) 자유민주당 총재 62 제2차 사토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 1967년 2월 17일~ 1970년 1월 14일 1,063일 종4위중의원 의원(제8기·야마구치현 제2구) 63 제3차 사토 내각개조내각 1970년 1월 14일~ 1972년 7월 7일 906일(통산 2,798일) 종4위중의원 의원(제9기·야마구치현 제2구) 64 40 80px 다나카 가쿠에이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1972년 7월 7일~ 1972년 12월 22일 169일 니가타현 주오 공학교 졸업 중의원 의원(제8기·니가타현 제3구) 자유민주당 총재 65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 1972년 12월 22일~ 1974년 12월 9일 718일(통산 886일) 중의원 의원(제9기·니가타현 제3구) 66 41 80px 미키 다케오 미키 내각개조내각 1974년 12월 9일~ 1976년 12월 24일 747일 도쿠시마현 메이지 대학 전문부 상과 졸업메이지 대학 법학부 졸업 정5위중의원 의원(제14기·도쿠시마현 전체구) 자유민주당 총재 67 42 80px 후쿠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내각개조내각 1976년 12월 24일~ 1978년 12월 7일 714일 군마현 제일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정5위중의원 의원(제10기·군마현 제3구) 자유민주당 총재 68 43 80px 오히라 마사요시 제1차 오히라 내각 1978년 12월 7일~ 1979년 11월 9일 338일 가가와현 다카마쓰 고등상업학교 졸업도쿄 상과대학 졸업 종5위중의원 의원(제10기·가가와현 제2구) 자유민주당 총재재임 중에 사망 69 제2차 오히라 내각 1979년 11월 9일~ 1980년 6월 12일 217일(통산 554일) 종5위후에 정2위 대훈위중의원 의원(제11기·가가와현 제2구) - 80px (이토 마사요시) (제2차 오히라 내각) (1980년 6월 12일~ 1980년 7월 17일)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중의원 의원(제5기·후쿠시마현 제2구) 70 44 80px 스즈키 젠코 스즈키 젠코 내각개조내각 1980년 7월 17일~ 1982년 11월 27일 864일 이와테현 제국수산강습소 졸업 중의원 의원(제14기·이와테현 제1구) 자유민주당 총재 71 45 80px 나카소네 야스히로 제1차 나카소네 내각 1982년 11월 27일~ 1983년 12월 27일 396일 군마현 시즈오카 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종6위중의원 의원(제14기·군마현 제3구) 자유민주당 총재 72 제2차 나카소네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 1983년 12월 27일~ 1986년 7월 22일 939일 종6위중의원 의원(제15기·군마현 제3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신 자유 클럽 연립 정권 73 제3차 나카소네 내각 1986년 7월 22일~ 1987년 11월 6일 473일(통산 1,806일) 종6위중의원 의원(제16기·군마현 제3구) 자유민주당 총재 74 46 80px 다케시타 노보루 다케시타 내각개조내각 1987년 11월 6일~ 1989년 6월 3일 576일 시마네현 제1 와세다 고등학원 졸업와세다 대학 제1 상학부 졸업 정8위중의원 의원(제11기·시마네현 전체구) 자유민주당 총재 대 명 내각총리대신 내각 재직 기간 재직 일수 출생지 학력 영전·겸직 등 비고 참조 75 47 80px 우노 소스케 우노 내각 1989년 6월 3일~ 1989년 8월 10일 69일 시가현 히코네 고등상업학교 졸업고베 상업대학 중퇴 중의원 의원(제10기·시가현 전체구) 자유민주당 총재 76 48 80px 가이후 도시키 제1차 가이후 내각 1989년 8월 10일~ 1990년 2월 28일 203일 아이치현 주오 대학 전문부 법과 졸업주오 대학 법학부 중퇴와세다 대학 제2 법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10기·아이치현 제3구) 자유민주당 총재 77 제2차 가이후 내각개조내각 1990년 2월 28일~ 1991년 11월 5일 616일(통산 818일) 중의원 의원(제11기·아이치현 제3구) 78 49 80px 미야자와 기이치 미야자와 내각개조내각 1991년 11월 5일~ 1993년 8월 9일 644일 도쿄부(현 도쿄도) 무사시 고등학교 졸업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8기·히로시마현 제3구) 자유민주당 총재 79 50 80px 호소카와 모리히로 호소카와 내각 1993년 8월 9일~ 1994년 4월 28일 263일 도쿄부(현 도쿄도) 조치 대학 법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1기·구마모토현 제1구) 일본신당 대표일본신당·일본사회당·신생당·공명당·민사당·신당 사키가케·사회민주연합·민주개혁연합 연립 80 51 80px 하타 쓰토무 하타 내각 1994년 4월 28일~ 1994년 6월 30일 64일 도쿄부(현 도쿄도) 세이조 대학 경제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9기·나가노현 제2구) 신생당 당수신생당·공명당·일본신당·민사당·자유당·개혁의 회·민주개혁연합 연립 81 52 80px 무라야마 도미이치 무라야마 내각개조내각 1994년 6월 30일~ 1996년 1월 11일 561일 오이타현 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 졸업 중의원 의원(제7기·오이타현 제1구) 일본사회당 위원장일본사회당·자유민주당·신당 사키가케 연립 82 53 80px 하시모토 류타로 제1차 하시모토 내각 1996년 1월 11일~ 1996년 11월 7일 302일 도쿄부(현 도쿄도)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11기·오카야마현 제2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일본사회당(→사회민주당)·신당 사키가케 연립 83 제2차 하시모토 내각개조내각 1996년 11월 7일~ 1998년 7월 30일 631일(통산 932일) 중의원 의원(제12기·오카야마현 제4구) 자유민주당 총재 84 54 80px 오부치 게이조 오부치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 1998년 7월 30일~ 2000년 4월 5일 616일 군마현 와세다 대학 제1 문학부 졸업와세다 대학 대학원 정치학연구과 석사 과정 수료 중의원 의원(제12기·군마현 제5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 단독→자유민주당·자유당 연립→자유민주당·자유당·공명당 연립→자유민주당·공명당·보수당 연립 85 55 80px 모리 요시로 제1차 모리 내각 2000년 4월 5일~ 2000년 7월 4일 91일 이시카와현 와세다 대학 제2 상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11기·이시카와현 제2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공명당·보수당 연립 86 제2차 모리 내각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전)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후) 2000년 7월 4일~ 2001년 4월 26일 297일(통산 387일) 중의원 의원(제12기·이시카와현 제2구) 87 56 80px 고이즈미 준이치로 제1차 고이즈미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 2001년 4월 26일~ 2003년 11월 19일 938일 가나가와현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10기·가나가와현 제11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공명당·보수당 연립→자유민주당·공명당·보수신당 연립 88 제2차 고이즈미 내각개조내각 2003년 11월 19일~ 2005년 9월 21일 673일 중의원 의원(제11기·가나가와현 제11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공명당·보수신당 연립→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 89 제3차 고이즈미 내각개조내각 2005년 9월 21일~ 2006년 9월 26일 371일(통산 1,980일) 중의원 의원(제12기·가나가와현 제11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 90 57 80px 아베 신조 제1차 아베 신조 내각개조내각 2006년 9월 26일~ 2007년 9월 26일 366일 도쿄도 세이케이 대학 법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5기·야마구치현 제4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 91 58 80px 후쿠다 야스오 후쿠다 야스오 내각개조내각 2007년 9월 26일~ 2008년 9월 24일 365일 도쿄부(현 도쿄도) 와세다 대학 제1 정치경제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6기·군마현 제4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 92 59 80px 아소 다로 아소 내각 2008년 9월 24일~ 2009년 9월 16일 358일 후쿠오카현 가쿠슈인 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9기·후쿠오카현 제8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 93 60 80px 하토야마 유키오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2009년 9월 16일~ 2010년 6월 8일 266일 도쿄도 도쿄 대학 공학부 졸업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 공학부 박사 과정 수료 중의원 의원(제8기·홋카이도 제9구) 민주당 대표민주당·사회민주당·국민신당 연립→민주당·국민신당 연립 94 61 80px 간 나오토 간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 2010년 6월 8일~ 2011년 9월 2일 452일 야마구치현 도쿄 공업대학 이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10기·도쿄도 제18구) 민주당 대표민주당·국민신당 연립 95 62 80px 노다 요시히코 노다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제3차 개조내각 2011년 9월 2일~ 2012년 12월 26일 482일 지바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중의원 의원(제5기·지바현 제4구) 민주당 대표민주당·국민신당 연립 96 80px 아베 신조 제2차 아베 신조 내각개조내각 2012년 12월 26일~ 2014년 12월 24일 729일 중의원 의원(제7기·야마구치현 제4구) 자유민주당 총재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 97 제3차 아베 신조 내각제1차 개조내각제2차 개조내각제3차 개조내각 2014년 12월 24일~ 2017년 11월 1일 1,044일 중의원 의원(제8기·야마구치현 제4구) 98 제4차 아베 신조 내각개조내각 2017년 11월 1일~ 현재 일(통산 일) 중의원 의원(제9기·야마구치현 제4구) ImageSize = width:800 height:auto barincrement:12 PlotArea = top:10 bottom:50 right:130 left:20 AlignBars = late DateFormat = dd/mm/yyyy Period = from:22/12/1885 till:31/03/2019 TimeAxis = orientation:horizontal ScaleMajor = unit:year increment:10 start:22/12/1885 Colors = id:ind value:rgb(0.8,0.8,0.8) BarData = barset:PM PlotData = width:5 align:left fontsize:S shift:(5,-4) anchor:till barset:PM from:22/12/1885 till:30/04/1888 color:pink text:"Ito" fontsize:10 from:30/04/1888 till:24/12/1889 color:pink text:"Kuroda" fontsize:10 from:24/12/1889 till:06/05/1891 color:pink text:"Yamagata" fontsize:10 from:06/05/1891 till:08/08/1892 color:pink text:"Matsukata" fontsize:10 from:08/08/1892 till:18/09/1896 color:pink text:"Ito" fontsize:10 from:18/09/1896 till:12/01/1898 color:pink text:"Matsukata" fontsize:10 from:12/01/1898 till:30/06/1898 color:pink text:"Ito" fontsize:10 from:30/06/1898 till:08/11/1898 color:pink text:"Okuma" fontsize:10 from:08/11/1898 till:19/10/1900 color:pink text:"Yamagata" fontsize:10 from:19/10/1900 till:02/06/1901 color:red text:"Ito" fontsize:10 from:02/06/1901 till:07/01/1906 color:pink text:"Katsura" fontsize:10 from:07/01/1906 till:14/07/1908 color:red text:"Saionji" fontsize:10 from:14/07/1908 till:30/08/1911 color:pink text:"Katsura" fontsize:10 from:30/08/1911 till:21/12/1912 color:red text:"Saionji" fontsize:10 from:21/12/1912 till:20/02/1913 color:green text:"Katsura" fontsize:10 from:20/02/1913 till:16/04/1914 color:green text:"Yamamoto" fontsize:10 from:16/04/1914 till:09/10/1916 color:pink text:"Okuma" fontsize:10 from:09/10/1916 till:29/09/1918 color:green text:"Terauchi" fontsize:10 from:29/09/1918 till:13/11/1921 color:red text:"Hara" fontsize:10 from:13/11/1921 till:12/06/1922 color:red text:"Takahashi" fontsize:10 from:12/06/1922 till:02/09/1923 color:green text:"Tomosaburo Kato" fontsize:10 from:02/0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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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ll:16/01/1940 color:green text:"Abe" fontsize:10 from:16/01/1940 till:22/07/1940 color:green text:"Yonai" fontsize:10 from:22/07/1940 till:18/10/1941 color:red text:"Konoe" fontsize:10 from:18/10/1941 till:22/07/1944 color:red text:"Tojo" fontsize:10 from:22/07/1944 till:07/04/1945 color:red text:"Koiso" fontsize:10 from:07/04/1945 till:17/08/1945 color:red text:"Kantaro Suzuki" fontsize:10 from:17/08/1945 till:09/10/1945 color:blue text:"Higashikuninomiya" fontsize:10 from:09/10/1945 till:22/05/1946 color:green text:"Shidehara" fontsize:10 from:22/05/1946 till:24/05/1947 color:blue text:"Yoshida" fontsize:10 from:24/05/1947 till:10/03/1948 color:pink text:"Katayama" fontsize:10 from:10/03/1948 till:15/10/1948 color:blue text:"Ashida" fontsize:10 from:15/10/1948 till:10/12/1954 color:blue text:"Yoshida" fontsize:10 from:10/12/1954 till:23/12/1956 color:green text:"Ichiro Hatoyama" fontsize:10 from:23/12/1956 till:25/02/1957 color:green text:"Ishibashi" fontsize:10 from:25/02/1957 till:19/07/1960 color:green text:"Kishi" fontsize:10 from:19/07/1960 till:09/11/1964 color:green text:"Ikeda" fontsize:10 from:09/11/1964 till:07/07/1972 color:green text:"Sato" fontsize:10 from:07/07/1972 till:09/12/1974 color:green text:"Kakuei Tanaka" fontsize:10 from:09/12/1974 till:24/12/1976 color:green text:"Miki" fontsize:10 from:24/12/1976 till:07/12/1978 color:green text:"Takeo Fukuda" fontsize:10 from:07/12/1978 till:12/06/1980 color:green text:"Ohira" fontsize:10 from:17/07/1980 till:27/11/1982 color:green text:"Zenko Suzuki" fontsize:10 from:27/11/1982 till:06/11/1987 color:green text:"Nakasone" fontsize:10 from:06/11/1987 till:03/06/1989 color:green text:"Takeshita" fontsize:10 from:03/06/1989 till:10/08/1989 color:green text:"Uno" fontsize:10 from:10/08/1989 till:05/11/1991 color:green text:"Kaifu" fontsize:10 from:05/11/1991 till:09/08/1993 color:green text:"Miyazawa" fontsize:10 from:09/08/1993 till:28/04/1994 color:red text:"Hosokawa" fontsize:10 from:28/04/1994 till:30/06/1994 color:red text:"Hata" fontsize:10 from:30/06/1994 till:11/01/1996 color:pink text:"Murayama" fontsize:10 from:11/01/1996 till:30/07/1998 color:green text:"Hashimoto" fontsize:10 from:30/07/1998 till:05/04/2000 color:green text:"Obuchi" fontsize:10 from:05/04/2000 till:26/05/2001 color:green text:"Mori" fontsize:10 from:26/05/2001 till:26/09/2006 color:green text:"Koizumi" fontsize:10 from:26/09/2006 till:26/09/2007 color:green text:"Shinzo Abe" fontsize:10 from:26/09/2007 till:24/09/2008 color:green text:"Yasuo Fukuda" fontsize:10 from:24/09/2008 till:16/09/2009 color:green text:"Aso" fontsize:10 from:16/09/2009 till:08/06/2010 color:red text:"Yukio Hatoyama" fontsize:10 from:08/06/2010 till:02/09/2011 color:red text:"Kan" fontsize:10 from:02/09/2011 till:26/12/2012 color:red text:"Noda" fontsize:10 from:26/12/2012 till:30/09/2018 color:green text:"Shinzo Abe" fontsize:10 순위 내각총리대신 정당 취임 연도 재임 차수 일수 1 가쓰라 다로 없음 1901년 3 2,886일 2 사토 에이사쿠 자유민주당 1964년 3 2,798일 3 이토 히로부미 없음 1885년 4 2,720일 4 아베 신조 자유민주당 2006년 4 일 5 요시다 시게루 일본자유당 / 민주자유당 / 자유당 1946년 5 2,616일 6 고이즈미 준이치로 자유민주당 2001년 3 1,980일 7 나카소네 야스히로 자유민주당 1982년 3 1,806일 8 이케다 하야토 자유민주당 1960년 3 1,575일 9 사이온지 긴모치 입헌정우회 1906년 2 1,400일 10 기시 노부스케 자유민주당 1957년 2 1,241일 11 야마가타 아리토모 없음 1889년 2 1,210일 12 하라 다카시 입헌정우회 1918년 1 1,133일 13 오쿠마 시게노부 헌정당 / 입헌동지회 1898년 2 1,040일 14 고노에 후미마로 대정익찬회 1937년 3 1,035일 15 도조 히데키 대정익찬회 1941년 1 1,009일 16 마쓰카타 마사요시 없음 1891년 2 943일 17 하시모토 류타로 자유민주당 1996년 2 932일 18 다나카 가쿠에이 자유민주당 1972년 2 886일 19 스즈키 젠코 자유민주당 1980년 1 864일 20 가이후 도시키 자유민주당 1989년 2 818일 일본의 정치 일본의 정당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일본의 역대 내각 내각총리대신 목록(수상관저 홈페이지) 분류:일본의 정치인 목록 분류:총리 목록 |
마술적 사실주의 (Magical Realism)는 하나의 문학 기법으로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에는 인과 법칙에 맞지 않는 문학적 서사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20세기 미하일 불가코프, 에른스트 윙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의 많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등장과 함께 유명해졌다.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독일의 예술 평론가 프랑크 로(Frank Roh)가 1920년대 종래의 사실 표현을 뒤엎는 화가들을 이르기 위해 처음 만들어냈다. 오늘날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특히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해 쓰이는데 이 뜻으로는 비평가 우슬라르 피에트리(Uslar Pietri)가 처음 사용했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자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가 자신의 소설들이 마술적 사실주의 양식을 사용한다고 정의한 후로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다. 전통적인 허구적 사실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별짓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픽션은 플롯이나 인물, 서술자가 완전히 사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마술적 사실주의의 이야기들은 리얼리티를 완전히 고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아내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피의 흐름이 멀리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까지 흘러갔다든지 하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고, 글 속의 인물들은 그러한 상황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마술적 사실주의가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독재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며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표현이 순화되어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리 법칙을 따르는 - 적어도 따르는 척이라도 하는 - SF 류의 문학이나, 작품 내에 일관된 규칙을 갖고 있는 판타지 문학과 달리, 마술적 사실주의는 예측 불허의 스토리로 구성되거나, 적어도 묘사하는 사회가 매우 특별하다. 분류:영화 이론 분류:포스트모더니즘 분류:판타지 장르 분류: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의사 (醫師, medical doctor, physician, surgeon)는 서양의학의 전문가로서 인체의 질병, 손상, 각종 신체 혹은 정신의 이상을 연구하고 진단, 치료함으로써 인간의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로부터 양의사로 불리어 왔다 의료법에 의하면 의료진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助産師)·간호사(看護師)로 나누고 있으며, 이 중 의사는 서양의료와 보건지도에 종사함을 임무로 한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의과대학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여 의학사학위 또는 의무 석사 학위를 받은 자로서 양의사면허 취득을 위한 국가시험에 합격한 다음 보건복지부장관의 면허를 받아야 한다. 다만 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고 영주권을 얻은 자는 소정의 시험을 거쳐 그 면허를 얻을 수 있다. 의과대학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의사면허시험을 통과하여 의사면허를 받은 의사직의 대다수는 크게 기초연구의사와 임상의사의 두가지 방향으로 경력을 쌓게 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외에도 보건행정가를 포함한 경력군이 존재한다. 기초의사는 기초의학 분야(생화학, 분자생물학, 해부학, 생리학, 기생충학, 미생물학, 면역학, 약리학, 예방의학 등)의 전문가로서 이 분야에 대한 교육과 연구에 종사한다. 대부분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에 소속되어 있다. 임상의사는 임상의학 분야의 전문가로서 환자 진료와 교육, 연구에 종사한다. 대한민국의 의료법에 따라 의사가 임상의사로서 진료를 하려면 의원, 병원, 종합병원 등의 의료기관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의사는 전반적인 의학분야에 걸쳐 연구와 진료를 수행할 수 있으나 특정 질환군이나 환자군, 혹은 특정 치료분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연구와 진료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전자의 경우 일반의사, 후자의 경우 전문의사라 불린다. 일차 진료에 필요한 의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여러 환자에 대한 일차 진료를 주로 하게 된다. 특정 분야에 대해 추가적인 수련을 받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를 말한다. 현재 대한민국 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 인정 등에 관한 규정에 규정된 임상의학의 전문과목은 다음과 같다.ㄱㄴㄷ순 가정의학과 결핵과 내과 방사선종양학과 병리과 비뇨기과 마취통증의학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성형외과 신경과 신경외과 안과 영상의학과 예방의학과 외과 응급의학과 이비인후과 직업환경의학과 재활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 정형외과 진단검사의학과 피부과 핵의학과 흉부외과 위의 전문과목에 대한 수련을 받고 전문의를 취득한 후에도 전문과목 내의 특정 분야에서 더 집중적으로 연구와 진료를 위한 수련(임상강사 혹은 펠로우(fellow) 과정을 받는 경우가 있으며, 과정을 마치고 각 학회 주관의 인증 시험 등을 마치는 경우, 세부전문의 혹은 분과전문의로 인증을 받으나, 의료법에서 보호받는 인증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6년 과정으로 이루어진 대학을 졸업하고 의학사 학위를 취득하거나 4년 과정으로 이루어진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의무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국가시험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보건복지부장관이 발부하는 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되며, 의사로서 진료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의사가 된 후에도 추가적인 수련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중 기초의학자가 되기 위한 수련과 전문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가장 활발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초의사의 경우 주로 대학의 기초의학교실에서 조교로서 수련을 받으며, 학부생 교육 및 교수 연구에 참여하며 수련을 받게 된다. 병리학교실, 약리학교실의 경우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기도 한다. 임상의사의 경우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이 대표적이다. 이 수련과정은 보건복지부령에 의해 지정된 수련병원 또는 수련기관에서 이루어진다. 공식적으로는 가정의학과를 제외한 전공의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1년간의 수련의 과정을 수료하여야 하나, 대부분의 경우 가정의학과도 수련의 과정을 마친 후 전공의 과정을 밟는다. 의사의 경우 가정의학과, 결핵과, 예방의학과 전문의는 3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거치며, 그 외의 임상과들은 4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련의 과정은 임상과를 두루 순환하며 각 과에서 임상적 경험을 쌓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고 해당 학회가 정한 기준을 충족하면 전문의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며, 전문의 시험을 통과하면 전문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전문의가 된 뒤에도 해당 임상과에서 더 좁은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임상강사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데 이 과정은 1년 혹은 2년 단위로 이루어지며, 대부분의 경우 특별히 정해진 기간은 없다 위의 과정 외에도 각 학회에서 제공하는 여러가지 교육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며, 때로는 수련병원 혹은 수련기관이 아닌 의료기관에서 다른 의사에게 개인적으로 수련을 받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수련을 마쳐도 특별한 자격이나 면허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미국에서는 의사를 MD또는 DO라고 부르며 직역을 하면 의학박사가 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통상적인 의미의 의학박사 즉 의학Ph.D와 많은 개념적 혼란을 일으킨다. 미국에서 4년제 일반학부 졸업후 메디컬 스쿨(의학전문대학원)에서 4년의 의학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자동으로 받는 학위가 MD나 DO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받고 면허를 취득한 의사들도 스스로를 MD라고 지칭하는 것이 관행화돼있다. 대한민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한 병역 대상 남성은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전에 수련을 받고 싶다면 의무사관후보생이 되며, 추후 몇가지 형태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게 된다. 하지만, 의과대학 졸업 후 반드시 의무사관 후보생이 되는 것은 아니며 수련을 받지 않는다면 일반병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의무사관 후보생중 군의관을 선발하고 남는 자원이 공중보건의가 되게 된다. 의사면허 취득 이 후 의사경력이 3년 이하 일 경우 중위로 임관하며, 2012년 현재 인턴 중도포기자, 인턴 수료 후 전공의 과정에 입문하지 못한자, 전공의 과정을 중도에 포기한자 등이 해당이 된다. 의사경력이 3년이상이거나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는 대위로, 전문의 자격 취득 후 임상강사(펠로우) 과정을 수료한 의사는 대위로 임관하며 2개월의 군사훈련과 2주의 특기훈련 후 36개월간 복무하게 된다. 병의 신분으로 4주 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이등병으로 전역되며 이후 기존 4주훈련 포함 3년 간 공무원의 신분이 되어 공중보건의사로 대체 복무하게 된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수련을 받지 아니하고 공중보건의에 지원한자, 의무사관후보생이나 군의관을 선발되지 않은 자 등이 해당이 된다. 비록 신분은 병이지만 급여는 육군 중위에 준하게 받는다. 어떠한 스포츠이든 국제규모의 대회에서는 경기장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의사가 반드시 대기하게 된다. 특히 이종격투기, 권투, 프로레슬링 등 매우 격렬한 투기종목의 경우 아예 링 닥터(Ring Doctor) 라는 전속 의사를 둔다. 링 닥터는 선수의 몸상태를 파악하여 직권으로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는데 이를 닥터 스톱(Doctor Stop)이라 한다. 의사가 환자에 대해 지는 사법상의 의무는 의학상의 기준에 따라 진단과 치료를 행할 의무("진료상의 주의의무")와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함으로써 진단검사나 치료를 받을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하고, 진료과정에서 피할 수 있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할 의무이다. 의과대학(medical school) 병원 보건의료인국가시험 USMLE 의학 대학 병원 대한의사협회 메디컬잡 간호사 한의사 한약사 약사 권용우/김영규, 의료과오의 민사책임, 신양사, 2005. 김병일, 의료계약법론, 한국학술정보, 2006. 신현호/백경희, 의료분쟁 조정, 소송 총론, 육법사, 2011. 대한의사협회 |
1인 2표제 는 유권자들이 서로 다른 시스템을 사용하는 단일 의회에 대해 두 번의 개별 선거에 실제로 참여하며, 한 선거에서의 결과가 다른 시스템의 결과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혼합 선거 시스템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7대 총선부터 도입된 총선 투표 방식이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선출함에 있어 기존에는 단순 지역구 의석수를 기준으로 각 당에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여 왔으나, 17대 총선부터는 지역구 의원에 대한 표와 별도로 지지정당을 선택하는 두 번째 표를 부여하여 그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게 되었다. 분류:선거 제도 |
윤년 (閏年)은 역법을 실제 태양년에 맞추기 위해 여분의 하루 또는 월(月)을 끼우는 해이다. 태양년은 정수의 하루로 나누어떨어지지 않고, 달의 공전주기와 지구의 공전주기는 다르기 때문에 태양력에서는 하루(윤일), 태음태양력에서는 한 달(윤달)을 적절한 시기에 끼워서 이를 보정한다. 태양력에서는 보통 윤일이 들어 있는 해를 말하는데, 이 경우 1년은 366일이 되며 이것이 바로 윤년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365일 5시간 48분 46초가 걸리므로 365일을 제외한 시간들을 모아 태양력에서는 4년마다 한 번 2월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고, 태음력에서는 평년이 354일이므로 계절과 역월(曆月)을 조절하기 위하여 19년에 7번의 비율로 윤달을 끼워 1년을 13개월로 한다. 윤년이 아닌 해는 평년 이라고 한다. 태양력의 윤년은 12지에서 쥐띠, 용띠, 원숭이띠에 해당하며, 이 해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 및 하계 올림픽이 열린다. 또한 2월 29일 이 낀 경우에는 윤년인 해의 3월 1일부터 그 다음 해 평년인 2월 28일까지 전년과 2요일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2019년 3월 1일과 2020년 2월 28일이 금요일이면 2월 29일로 인해 두 요일이 밀려 토요일은 건너뛰고 2020년 3월 1일과 2021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 된다. 1월은 2월 29일에 의해 4월, 7월과 요일이 동일하고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3월도 마찬가지로 전년 9월과 전년 12월에 동일하고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은 4년에 반드시 하루씩 윤날 (2월 29일)을 추가하는 율리우스력을 보완한 것으로, 태양년과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세 번의 윤년)을 뺐다. 그레고리력의 정확한 윤년 규칙은 다음과 같다. # 서력 기원 연수가 4로 나누어떨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한다. (1992년, 1996년, 2004년, 2008년, 2012년, 2016년, 2020년, 2024년, 2028년 ...) #서력 기원 연수가 4, 100으로 나누어떨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한다. (1900년, 2100년, 2200년, 2300년, 2500년...) #서력 기원 연수가 4, 100, 400으로 나누어떨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둔다. (1600년, 2000년, 2400년...) 즉, 400년에 97년은 윤년이 되며, 1년은 평균 365.2425일이 된다. 이는 춘분점을 기준으로 한 태양년보다 0.0003일(26초)이 길기 때문에,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 그레고리력은 상당히 치밀한 역법으로 1582년에 만들어진 이래 아직까지 수정된 바가 없다. 그러나, 약 3천 년마다 1일의 편차가 발생할 수 있어서 몇 가지 수정안이 제시된 바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4,000년마다 1일씩 윤년을 추가로 빼자는 제안이다. 간혹 이 제안이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재의 태양년과 그레고리력의 수적 차이, 율리우스력이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는 것만 고려하면 3,200년마다 1일씩 윤년에서 제외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수정안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천 년 이상의 주기로 일어나는 지구의 세차운동이나 조석의 감소로 인한 하루 길이의 증가를 계산에 넣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특히, 조석은 후빙기 반동이나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따라 꽤 변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자료는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역법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그리고 2033년에는 윤년과 삭망월이 겹처져서 2033년 문제가 생긴다. 태음태양력에서는 태음력과 태양력의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윤달을 두는데, 윤달이 든 해를 윤년(閏年)이라고 한다. 지구의 공전 주기는 365.2422일인 데 비해 1삭망월은 29.5306일로 1년을 만들면 약 354일이므로 3년만 지나면 3.3일 가량이 모자라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오차를 보정하기 위하여 19년에 일곱 번가량 윤달을 두게 된다. 하계 올림픽은 이 해에 개최된다. 1924년부터 1992년까지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해였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는 이 해에 개최된다. OFC 네이션스컵은 이 해에 개최된다. 1956년부터 2004년까지 AFC 아시안컵이 개최되었던 해였다. 1988년 이래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는 이 해에 치러진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역법 그레고리력 율리우스력 태음태양력 절기 윤달 분류:역법 |
프랑스 문학 (-文學)은 프랑스에서 창작된 문학 작품을 일컫는다. 원주민 골족(Gaulois)의 언어는 켈트어였고, 그들이 개명하기 시작한 것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기원전 100년) 로마의 문화와 혼합되면서부터이다. 로마 제국의 한 속주(屬州)로 5세기 동안 예속되면서 인종적 혼합인 갈로-로맹인(人)을 형성했고 기독교를 비롯하여 제도·관습·언어 등이 로마화(化)하여 갈로 로맹 문화로 미개한 상태를 벗어났다. 한편 언어는 프랑스 지방의 사투리처럼 된 구어(口語) 라틴어를 사용하여 이를 정통 라틴어에 대하여 로망스어라 한다. 당시 프랑스는 크게 북부는 오일어(langue d oïl), 남부는 오크어(langue d oc)로 분화되어 있었는데, 현대 불어는 오일어, 그중에서도 파리 방언에 기원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가 거의 유일한 문어였지만 차츰 지방의 로망스어, 즉 프랑스어로도 글을 쓰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가장 오래된 불문학의 흔적은 9세기의 스트라스부르 서약과 성녀 에울랄리아 찬가로 거슬러 올러간다. 중세 프랑스 문학 중세 프랑스 문학은 신앙과 기사도정신(騎士道精神)을 고취하거나 귀부인과 기사들의 사랑과 무용(武勇)을 담은 귀족문학과 상류층·승려·지배자를 풍자하는 해학적인 서민문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최초의 서사시인 무훈시(武勳詩,기사도 로망)들, 장시 로망 등이 전자에 속하고 여우 이야기 등이 후자에 속한다. 16세기 프랑스 문학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16세기에 선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자극을 받고 이를 섭취·소화하는 과정에 두 가지 흐름이 발원한다. 하나는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로마 고전문예의 큰 장르(정형서정시, 극시)들을 프랑스어로 소화하여 부흥시키려는 시(詩) 운동이다. 마로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형식을 프랑스어로 시도했으며 고전 라틴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의 주제와 양식을 모방하고자 했으며, 이는 피에르 드 롱사르를 필두로 한 플레야드파(7성시인)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에서 신중히 단어를 선별하고 언어구조를 모방해 불어에 받아들여 불어를 고전언어 못지않게 고상한 문학언어로 만드는 것을 꾀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어는 고전 프랑스어(Français classique)로 발전하게 되고 중세 프랑스어와 상당한 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가다듬고 순화된 고전 프랑스어로 희극·비극 장르의 도입을 시도함으로써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터가 닦였다. 다른 하나의 흐름은 고전문예에 담긴 정신·사상을 되살리려는 산문문학의 흐름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금서지정을 받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로 유명한 라블레는 인간성과 현세적 삶의 해방을, 《수상록》으로 에세(essai)라는 1인칭 문학을 창조한 몽테뉴는 회의와 검증(檢證)·인간탐구의 정신을 일으켜 놓았다. 17세기 프랑스 문학 17세기는 프랑스에 있어서 대세기(大世記, le Grand Siècle)라 불린다. 종교갈등도 잦아든 전제군주 치하의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문학사에 있어서도 불어에게 몰리에르의 언어 (la langue de Molière)라는 이칭을 선사한 몰리에르가 활약한 것도 이 때이다. 17세기의 문학사는 바로크와 고전주의라는 양대산맥의 대립·상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610년대 등장한 바로크는 문학적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어 프레시오지테, 뷔를레스크 등의 갈래를 낳았으며, 마들렌 드 스퀴데리를 위시한 살롱이라는 문학공간이 흥성하기도 하였다. 귀부인들이 주재하는 살롱이 속출 유행하면서 사회적 지식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민간의 세력권을 이루고, 사교·대화·시적 교류·관찰을 통해 살롱문학(인물·성격묘사, 회고록, 잠언집 등)이 발달한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1660년이 문학사의 구분점이 되어 고전주의 문학이 전성기를 만든다. 몰리에르를 비롯한 라신, 라퐁텐 등이 궁정의 비호를 받으며 고전주의 극시(劇詩)를 만들어냈다. 17세기 말 신앙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성이 중요시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8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진다. 18세기 프랑스 문학 18세기는 계몽시대(siècle des Lumières)라 불리는데, 이전 세기의 르네상스 및 데카르트적 정신을 통해 이성의 승리를 추구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계몽주의는 전 유럽의 현상이지만, 18세기 사상을 가장 잘 결집해낸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들이었으며, 이로써 프랑스 혁명을 넘어 전 유럽 및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당시 프랑스 및 불어권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들로서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 등이 있다.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안 루이즈 제르맨 드 스탈 (Anne Louise Germaine de Staël) 알렉상드르 뒤마 (Alexandre Dumas) 알렉상드르 뒤마 (아들) (Alexandre Dumas fils) 기욤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프로스페르 메리메 (Prosper Mérimée)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 (Charles Augustin Sainte-Beuve) 귀스타브 플로베르 (Gustave Flauber)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스탕달 (Stendhal)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에드몽 드 공쿠르 (Edmon de Goncourt) 쥘 드 공쿠르 (Jules de Goncourt) 아르투르 랭보 (Arthur Rimbaud) 쥘 베른 (Jules Verne)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에밀 졸라 (Émile Zola) 아나톨 프랑스 (Anatole France) 알퐁스 도데 (Alphonse Daudet) 스테판 말라르메 (Stephane Mallarme) 로맹 롤랑 (Romain Rolland)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루이 페르디낭 셀린 (Louis-Ferdinand Celine) 프랑수아 사강 (Françoise Sagan)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 Exupery)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 (Marguerite Yourcenar) 조르주 심농 (Georges Simenon) 쥘리앵 그린 (Julien Green) 클로드 시몽 (Claude Simon) 로맹 가리 (Romain Gary) 미셸 우엘베크 (Michel Houellebecq) 프랑스 문학자 문학상 *불문학 분류:프랑스의 문화 분류:프랑스어 문학 |
250px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는 프랑스의 사회 정치사에서 격동기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비롯된 정치 사회적 변화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나아가서 유럽의 새로운 정치적 판도와 사회 문화적 가치 체계의 변모를 가져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7월혁명, 계몽주의 등의 낱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의 격동하는 프랑스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이 반드시 정치 사회적 소용돌이의 산물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역사 정치적 배경을 미리 살펴 봄으로써 인간 문화 발전의 동기가 되는 여러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문화, 특히 문학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드니 디드로, 볼테르, 빅토르 위고, 장 자크 루소, 프랑수와 샤토브리앙 등은 바로 18세기 말을 전후로 프랑스의 정치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활동한 작가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정치와 문학세계가 - 넓게는 학문세계 -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데카당스 상징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 ( l art pour l art ) 파르나스 제르미날 프랑수와 샤토브리앙 (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제르멘느 드 스탈 (Germaine de Staël) 알렉상드르 뒤마 (Alexandre Dumas) 알렉상드르 뒤마 (아들) (Alexandre Dumas fils) 기욤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프로스페르 메리메 (Prosper Mérimée)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 귀스타브 프로베르 (Gustave Flaubert) 오노레 드 발작 (Honoré de Balzac) 스탕달 (Stendhal)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에드몽 드 공쿠르 (Edmon de Goncourt) 쥘 드 공쿠르 (Jules de Goncourt) 장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샤를르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에밀 졸라 (Émile Zola) 아나톨 프랑스 (Anatole France) 알퐁스 도데 (Alphonse Daudet) 스테판 말라르메 (Stéphane Mallarmé) 로맹 롤랑 (Romain Rolland) 분류:프랑스 문학 |
경제학 (經濟學)은 재화나 용역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비와 같은 경제현상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이다. economics 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 οἰκονομία에서 유래한다. 경제학은 복잡한 경제 활동에서 특정한 규칙성을 발견하여 경제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탐구하고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전제와 분석 대상을 설정한다. 그중에서도 현대 경제학에서의 주요 연구 대상은 세계의 경제 상태, 개개인과 기업이 노동, 소비, 투자, 고용, 가격 등을 어떻게 결정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또한 경기의 침체와 호황, 개인이나 국가간에 나타나는 부의 불균형과 같은 것들도 경제학의 주요 관심 분야이다. 정치경제학의 한 영역으로 시작하였다. Jevons, W. Stanley (1879). The Theory of Political Economy , 2nd ed., Macmillan. p. xiv. 기본적으로 경제학은 매우 거시적이고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다른 외적 조건이 동일하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전제 하에서 모든 분석이 진행된다.(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배제를 추상(abstract)이라 부른다.) 그러나 경제학자마다 분석 대상과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주목하거나 과감히 배제해버리는 부분은 모두 각각 다르다. 이러한 전제와 분석대상의 차이로부터 각 경제학파들의 차이가 생겨난다.이중 몇몇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문제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부의 성격과 원천 (애덤 스미스), 대지에서 수확되는 생산물의 분배를 규율하는 법칙 (리카도), 삶의 일상사에서 인간이 하는 행동 (데번포트),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희소한 수단과 목적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인간의 행동 (로빈슨), 유효수요의 결정 요인 분석과 국민소득수준과 고용량 (케인스), 근대사회의 움직임에 관한 경제적 법칙을 규명하는 것 (마르크스) 경제학의 학파에는 고전학파, 케인즈주의, 제도학파, 통화주의, 신고전파, 행동경제학, 신제도주의등이 있다. 비주류 경제학으로는 대표적으로 포스트케인지언이 있으며 그 이외에도 신경경제학 등이 있다. 실증경제학은 무엇인가 를 연구하는 반면 규범경제학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를 연구한다. 현대 주류경제학은 자원 등 경제적 가치가 있는 대상이 희소하고 이를 선택할 때에는 기회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전제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기와 같은 것마저 공짜가 아니다. 개인, 기업, 국가와 같은 경제 주체들은 시장에 참여하여 재화와 용역의 수요와 공급을 창출하고, 이 과정에서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려한다. 따라서 경제 활동은 각 경제 주체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는 경향성을 보이게 되고 이때문에 일정한 규칙이 성립하게 된다. 경제학은 이러한 경제 활동의 규칙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경제를 예측한다. 경제학은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는 실증경제학과 가치 판단에 따라 경제 활동을 평가하는 규범경제학으로 나뉠 수 있다. 한편, 경제학은 시장에 참여한 경제 주체의 활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미시경제학 과 국가 단위 규모의 경제 활동과 정책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거시경제학 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모든 과정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사용되는 최종적인 대상을 재화와 서비스라고 한다. 재화는 유형적인 대상, 서비스는 무형적인 대상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머리빗은 재화이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서비스이다. 재화와 서비스는 노동, 자본, 원자재 같은 생산요소를 결합하여 생산된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머리빗은 노동력과 머리빗 만드는 기계(자본),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원자재)를 결합하여 생산된다.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는 경제 행위자들 사이에서 교환되어 분배된다. 분배된 재화와 서비스는 최종적으로 소비되어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게 된다. 이 각각의 과정, 즉 생산, 교환, 분배, 소비 등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생산, 교환, 분배, 소비 등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나 혹은 특정한 산업 역시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노동경제학, 농업이라는 산업에 특화된 농업경제학 등이 그 예이다. 산업 내의 구도를 연구하는 산업조직론, 국가 간 무역을 연구하는 국제무역론, 국가 간 금융 거래와 흐름을 연구하는 국제금융론 등도 있다. 장기적이고 경제 전체를 연구하는 분야로는 거시경제학이 있으며, 거시경제학에서는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률, 물가 등을 다룬다. 직접적으로 경제와 관련된 문제 이외에도 현대의 경제학은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불릴만큼 인접 학문의 주제들을 넓게 연구하고 있다. 법, 투표, 범죄, 정보, 교육 등이 대표적으로 인접 학문과 겹치는 분야들이다. 고전파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 경제학이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한 1776년 이후이다. 애덤 스미스 이전에 경제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를테면 경제에 대한 노동가치설의 효시가 되는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할 당시, 각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지금처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았다.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세금, 수출입 규제 등은 체계적인 이론적 바탕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 능력을 강조하며 개인이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였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에 개입하지 않아도 시장에서의 가격 조정을 통해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이런 시장의 기능을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애덤 스미스는 또한 분업의 이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고, 노동가치설을 설명하기도 했다. 국부론 이후, 토마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마르크스 등이 애덤 스미스를 계승하여 가치론, 분배 이론, 국제 무역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애덤 스미스 이후, 경제학이 방법론 상의 큰 변화를 겪은 것은 한계 효용 학파의 등장 이후이다. 한계 효용 학파는 물리학의 프레임워크를 받아들여 미적분을 사용한 수학적인 모형을 개발했다. 일반 균형 모형이 연구된 것이 한계 효용 학파 시대이다. 경제학이 현대의 주류 경제학과 가까운 모습으로 정착한 것은 한계 효용 학파 이후다. 한계 효용 학파 이전의 경제학에는 수학이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많은 부분이 말로 설명되었다. 한계 효용 학파에 따르면, 합리적인 경제주체는 한계 효용이 한계 비용과 같아지는 지점을 선택한다. 이 원리는 현대에서도 다수의 경제 모형의 결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리이다. 한계 효용 학파 시대에 경제학은 처음으로 대학에 독립된 학과로 개설되었다. 알프레드 마셜이 190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경제학과를 개설한 것이 최초이다. 알프레드 마셜의 제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국가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현대에 사용되는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 등의 경기 부양 정책의 기초적인 논리를 마련했다. 그는 거시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경기 불황시에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조했다. 1944년에 존 폰 노이만과 오스카 모겐스턴은 게임의 이론과 경제 행위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는 게임 이론의 시초가 되는 저작으로 여겨진다. 게임 이론은 경제 행위자간 상호작용을 다루는 경제학의 분야이다. 현대의 경제학은 학문으로서 성공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의 정책 결정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초창기에는 도덕 철학이나 정치학의 일부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심리학과 더불어 사회과학 중 정말로 과학으로 분류되다시피 하는 영역이다. 경제는 연구하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그 이유는 첫째, 경제라는 시스템은 절대적인 크기가 크며, 둘째, 인간이라는 변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셋째, 상호작용하는 요소가 다양하고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 이유들 때문에 경제는 실험을 통해 연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주류경제학은 독특한 연구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많은 경우에 경제학은 경제를 수학적 모형으로 만들어 그 성질을 분석한다. 주류경제학에서 인간의 행동을 수학적으로 형식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가정은 인간의 선호에 대한 합리성 가정이 있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합리성 가정은 인간의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은 수학적으로 형식화된 몇 개의 공리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의 현대 주류경제학 이론은 이 공리에 기초하고 있다.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그다지 강한 가정은 아니다. 경제학에서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두 개의 대상을 똑같이 좋아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순서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에게 세 명의 친구 영희, 철수, 민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영희를 철수보다 더 좋아하고, 철수를 민희보다 더 좋아하면, 당신은 영희를 민희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이 경우 세 명의 친구에 대한 선호는 영희>철수>민희의 순서가 된다. 영희, 철수, 민희를 똑같이 좋아하는 경우에도 합리성 가정은 만족된다. 다만 합리성 가정이 배제하는 경우는 영희를 철수보다 더 좋아하고, 철수를 민희보다 더 좋아하는데, 민희를 영희보다 더 좋아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영희>철수이면서 철수>민희지만 영희>민희라고 쓸 수 없게 된다. 합리성 가정은 크게 무리있는 가정은 아니지만, 이 합리성 가정에 대해서는 신경경제학, 행동경제학 등 다른 경제학계에서 비판이 있었다. 실증적으로는 합리성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있으며 어린아이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경제학에서는 주로 실험 대신 통계적 방법으로 이론을 검증한다. 경제학 이론을 검증하는데 특화된 통계학을 계량경제학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시뮬레이션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신경경제학 같은 비주류 경제학에서는 fMRI등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경제학은 크게 개인과 기업 등의 개별 경제 주체의 행동을 다루는 미시경제학과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 인플레이션 등 경제 전체의 움직임을 다루는 거시경제학, 그리고 일정기간의 경제활동 및 경제조직에 대한 역사와 변천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경제 외적 활동이나 제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연구하는 경제발전론으로 나뉜다. 현대의 주류 경제학은 그 중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며 환경경제학, 교육경제학, 정보경제학,노동경제학 등 연구의 주제나 연구방법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기타 제도학파 경제학의 경우 경제발전론에 큰 비중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과 다르게 개별 경제주체 보다는 제도적인 차원인 생산관계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 분석 대상이 주류경제학에서의 거시 경제학과 크게 겹친다고 볼 수 있으며, 경제발전론의 주요 분파중 하나인 종속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미시경제학은 개인과 기업 등 개별 경제 주체의 행동을 다룬다. 미시경제학은 개별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이 제약되어 있을 때, 개별 주체가 어떻게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대개의 경우 수학적으로는 제약하의 최적화로 모형화한다. 미시경제학의 하위 분야인 게임이론에서는 경제 주체 간의 상호작용을 다룬다. 그 외의 미시경제학에 속하는 경제학 분야로는 산업조직론,재정학 등이 있다. 거시경제학은 경제 전체의 움직임을 다룬다.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 인플레이션 등이 거시경제학의 주요 주제이다. 거시경제학의 하위 분야로는 국제금융론 등이 있다. 개념적으로 경제학을 크게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나누지만, 그 경계가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경제의 거시적인 현상은 결국 미시적인 현상들의 상호작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거시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총수요 개념은 실제로는 각 가계의 수요가 종합된 개념이며, 각 가계의 수요는 미시경제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여 최근의 거시경제학에서는 미시경제학적 설명을 기초로 한 모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다만 사용하는 수학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학부 기초 수준의 과목에서는 미시경제학적 설명이 포함된 거시경제학 모형이 잘 다뤄지지는 않는다. 저개발 국민경제의 경제적 기본여건과 발전의 저해요인을 규명, 해결하여 실질국민소득의 양적 성장과 질적 수준을 향상시켜 복지경제 사회로 지향하는 보편적 경제이론과 정책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개발도상국의 개념과 특징 및 저해요인, 경제발전의 기초조건, 경제발전의 역사, 중상주의, 고전학파, 신고전학파, 케인즈와 그의 후계자, 동태적 경제성장에 관한 이론 등의 전통적 경제발전이론과 중상주의, 역사학파, 마르크스, 슘페터, 로스토우 등의 비전통적 경제발전이론, 개발도상국의 사회학적 접근방법, 자원의 간접 및 직접배분, 균형,불균형 성장론, 농업개발론과 공업개발론, 노동집약적 기술과 자본집약적 기술, 자유주의 무역론과 보호주의 무역론 등을 포함한 개발도상국 경제의 이론 등이 주요 내용이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이론과 정책에 중점을 둔다. 통계학은 경제학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경제학은 실험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통계적인 방법으로 검증하는 경우가 많다. 통계학 중에서도 경제 데이터 특유의 난점에 집중하는 통계학을 계량경제학이라고 한다. 계량경제학을 사용한 이론 검증은 대부분의 경제학 분야에서 사용된다. 계량경제학 이외에 경제 과정을 확률 과정으로 모형화하는 경우에도 통계학적 기초가 필요하다. 고전 경제학(古典經濟學, classical economics)은 경제사상사에서 최초의 근대 경제 이론으로 지목하는 경제학의 한 부류이다. 고전경제학을 정립한 주요 학자로는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토머스 멜더스,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있다. 이들 외에도 윌리엄 퍼티, 요한 하인리히 폰 튀넨,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 등도 고전경제학자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1776년 출간된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이 고전경제학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고전경제학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제 이론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1870년 시작된 영국의 신고전경제학 발현의 근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시초다. 케인즈 경제학(Keynesian economics)은 20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사상에 기초한 경제학 이론이다. 케인즈 경제학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이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혼합경제를 장려한다. 이는 시장과 민간 부문이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방임주의적 자유주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실제로 케인즈 경제학은 여러 경제학자들이 방임주의의 실패로 인한 것으로 여기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케인즈의 이론은 거시경제적 흐름이 각 개인들의 미시적 행동을 압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적 과정을 잠재 생산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보는 18세기 후반 이후 고전 경제학자들의 관점과는 달리, 케인즈는 (특히 불황기에) 경제를 이끌어 가는 요소로서 상품에 대한 총수요를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1930년대의 높은 실업률과 디플레이션에 대해 거시적인 규모에서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정책적으로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고 논했다. 불황 시기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보다 많은 돈이 유동되므로 시민들의 소비와 투자가 유도되어 경제가 정상 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이 케인즈의 주장이다. 이는 공급경제학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수요주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카고 학파 (경제학)는 시카고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진들의 연구와 관련된 신고전파 경제학 학파이다. 시카고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케인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학의 거물들인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있다. 거시 경제학의 맥락에서, 시카고 학파는 연안 대학들에 기반을 둔 짠물 학파와 대조적으로, 거시 경제학의 "민물 학파"와 연결된다. 시카고 거시 경제 이론은 1970년대 중반까지 통화 주의를 지지하는 케인즈식을 거부해 왔는데, 그 때 그것은 합리적인 기대의 개념에 기초하여 주로 새로운 고전적인 거시 경제학으로 돌아섰다. 민물 학파와 짠물 학파의 구분은 두 전통이 서로 상당히 결합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 구식이다. 구체적으로, 새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고전적인 경제학에 대한 반응으로 불완전한 경쟁과 끈적거리는 임금에 대한 전통적인 케인스 학파의 집중을 포기하지 않고 합리적인 기대치를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도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이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 이론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정책에 반영 시켰다. 또한 남미에서는 일명 "시카고 보이즈"라고 불리는 시카고대 출신 경제학자들이 경제부 총리 같은 중요 직책들을 다루었다. 지난 6년간 4개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과 총 30개의 노벨 경제학상으로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부는 2, 3위이자 다른 세계적인 경제학부인 하버드나 MIT를 합친 것 보다도 노벨 경제학자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배출해 오고 있다. 현재 시카고대의 경제학부는 전통적인 시카고학파 출신 보다는 여러가지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교수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교수진 중에서 대표적으로 2017년도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효율적 시장 가설(이 가설 또한 시카고학파 출신 교수이자 2013년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유진 파마 교수의 이론이다)을 반대하는 리처드 탈러 교수가 있다. 정책면에서는 전세계 경제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중앙은행 총재, 은행가, 지식인 30명으로 구성된 G30조직에서 5명이 시카고대 출신이다. 이 5명은 전 일본 중앙 은행 총재, 전 인도 중앙 은행 총재이자 IMF의 총괄 경제학자, 전 이스라엘 중앙 은행 총재이자 미국의 가장 큰 은행인 JP모간 체이스의 총괄 회장,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인 UBS 회장, 그리고 "중앙 은행의 중앙 은행"이라고 부리는 Bank of International Settlements (중앙 은행들을 관리하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중앙 은행)의 총재가 포함 되어있다. 거시경제학 내의 학파다. 소위 신자유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보통 통화주의는 프리드먼이 창시하다시피 한 50~60년대의 학파고, 새고전주의는 루카스, 사전트, 프레스콧 등이 연관이 있는 70년대 이후의 학파다. 소스타인 베블런이 시초다. 신제도학파는 종류가 굉장히 많지만 가장 주류적 위치를 점하는 분야는 합리적 선택 신제도주의다. 합리적 선택 신제도주의는 통상 주어진 제도적 환경 하에서 합리적 인간의 행태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공공선택론, 게임이론, 로널드 코즈, 엘레너 오스트롬, 나아가 행동 경제학 등이 이와 관계가 있다. 주로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찰에 초점을 맞추는 경제학이다. 신경경제학과도 관계가 있다. 기존 경제학은 합리적이고(rational),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에 기반한 학문인 반면,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제한적으로 합리적이며, 때론 감정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미국 같은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주류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하나,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제대로 전파가 되지 못했다. 신경과학에 근거한 경제학이다. 니콜라스 조제스쿠-뢰겐을 시초로 하는 경제학 분야이다. 열역학 법칙을 경제학에 적용한다. 경제를 생태계의 일부로 보는 관점을 적용한 경제학 분야이다. 열역학 경제학과 관계가 깊다. 1970년대에 인류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인류 사회와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함께 추구해야 한 다는 분야가 태동하였다. 이 분야가 바로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이다. 1960년대에 선진국에서 환경주의의 영향을 받아 환경문제를 경제학의 테두리에서 고민하는 분야가 태동하였다. 환경경제학(environmental economics)이다. 환경호르몬은 유독 폐기물, 온실효과 기체 등 환경을 오염시키는 물질은 경제 활동의 결과 배출된다, 따라서 환경경제학은 경제 활동의 영역 안에서 환경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환경경제학에서는 시장실패, 곧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은 외부효과 때문에 발생하며, 외부효과는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나타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환경경제학은 시장 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 및 수질 오염, 유독 폐기물, 지구 온난화, 생물 다양성 보존 등에 관련된 환경정책에 대한 비용 및 편익 분석을 통해서 가장 효율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시장실패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환경오염의 원인 제공자가 환경 이용에 대해 응분의 가격을 치르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이를 실시해야 한다. 이를테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설정한 다음에 이러한 탄소 배출권을 자유롭게 사고팔게 하는 방법이 대표적 사례이다. 《국부론》, 1776년, 아담 스미스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936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카도 노동 가치설 정교화, 비교 우위설 창시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알프레드 마셜 경제학에 수학적 분석 도구 도입, 일반 균형 이론 존 메이너드 케인즈 거시경제학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신자유주의의 대부. 법 경제학 밀턴 프리드먼 신자유주의의 대부, 통화주의 주장 로버트 루카스 합리적 기대 로날드 코즈 코즈 정리 폴 새뮤얼슨 현시 선호 이론 *폴 크루그먼 국제무역 이론 *그레고리 맨큐 경제학 교과서 의 저자 케네스 애로우 불가능성 정리 칼 폴라니 시장균형 부정 경제철학( Philosophy and economics) 비즈니스 윤리 PPE( 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진화경제학( Evolutionary economics) 행동경제학 유동성 함정( Liquidity trap) 세계의 화폐 전자화폐 경제심리학 의사결정 복잡계 경제학( Complexity economics) 산타페 연구소(SFI)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Max Planck Institute for Evolutionary Anthropology) *노벨 경제학상 |
동양 미술사 (東洋美術史)는 아시아(동양) 지역 미술의 역사이다. 동양 미술은 그림의 표현 양식, 특히 쓰이는 기본재료에 따라 크게 묵화와 채색화로 나뉜다. 채색화는 그림의 대상에 따라 아래과 같이 구분한다. 현대에 이르러 서양화의 회화방법과 사용되는 재료의 부분적인 수용을 통하여 동양화는 그 표현양식 및 기법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서양미술사의 메소포타미아 항목을 참고. 서양 미술사 분류:미술사 미술 |
서양 미술의 역사에 관하여 서술한다. 서양미술의 근원지는 현재의 유럽과 함께 중동지역, 서부와 남부 러시아를 기준으로 하며 이후에는 북 아메리카 지역까지 확장된다. 미술의 역사는 출토되거나 보존된 미술품을 기준으로 그 작품이 생겨나게 된 시대적 배경과 작가, 작가의 특성 등을 고려하고 있다.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며 따라서 미술의 역사를 말할 때 각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그 파장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미술의 발전은 동양미술과 극히 많은 차이를 보인다. 서양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고대의 기원전 4만년까지 올라가며 조각품과 동굴벽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여러 문명과의 교류를 거쳐가며 미술은 서양미술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집트 문명 시절에는 왕과 신을 거대한 조각상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와 같은 유명한 고대 건축물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양미술은 조각과 그림, 직물에서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으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서양미술은 극적인 발전과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이후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위시한 근대미술이 발전하였으며, 인상주의는 모더니즘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20세기 이후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빌렌도프의 여인 (Woman from Willendorf) 기원전 4만년전 경. 서양 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분명치 않다. 기원전 4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인류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초의 미술 형태를 이루는 돌 조각품을 만들게 된다. 기원전 3만년에서 2만 5천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프의 여인 (Woman from Willendorf)이라는 작은 조각품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최초의 미술작품 중 하나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고대에 만들어진 미술 작품들은 정확한 제작년도를 추정하기 힘들며 작가는 물론 어떤 민족이 제작했는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즉, 미술의 역사는 사실상 이미 역사가 시작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서야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의 미술 작품은 대다수가 유럽과 남부 러시아를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재료는 대부분 돌이나 짐승의 뼈를 조각한 작품이거나 동굴 벽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고대에 만들어진 미술 작품들은 그 용도가 관상용이 아닌 종교적이거나 교육적인 이유라고 추정되며 사람의 모습이나 들소, 야생말, 다른 야생동물 등 일상적이고 그들이 흔히 보는 모습들을 소재를 다루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번창하기 시작한 이 초기 문명들은 아시아의 서부지역으로 오늘날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와 이란이 있는 지역이다. 이 시기의 미술 작품들은 점점 더 복잡하고 많은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무늬와 문양을 패턴 형식으로 나타내는 등 디자인 적인 감각에서 많은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술작품들은 토기나 도자기 등 생활에 밀접한 필수품 위에 나타나기도 하며 조각품들은 고대의 미술품보다 더욱 자세하게 소재를 재현해내고 있다.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4천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번창한 수메르 문명은 농업 기술을 사용하여 불모지였던 땅을 농작지로 바꾼 후 그곳에 정착했다. 수메르 문명의 미술품으로는 토기의 겉면을 조각하여 부조의 형태를 만든 우루크의 항아리 가 있다. 이 항아리는 세 개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맨 위의 장면에는 보통 여인 혹은 그들이 믿었던 여신 이나나(Inanna) 혹은 여신의 사제로 여겨지는 여인에게 바구니를 건네는 남성의 모습과 남성의 뒤로 여러 개의 바구니, 항아리, 그리고 숫양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나체의 남성들이 바구니에 공물 등을 담아 걸어가고 있다. 당시에는 신의 앞에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옷을 벗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 아래 세 번째 장면에서는 가축들과 곡식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런 식으로 탄생된 미술품들은 가장 초기의 문자 형태를 형성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땅을 상징하는 가로 선의 활용과 조각과 조각 사이의 공간 등은 문자와 글의 초기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당시 수메르 문명은 나름대로의 형태의 문학 문화 또한 갖고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그것인데, 이 시는 인류 최초의 가장 위대한 시로 꼽히고 있다. 수메르의 신전에서는 그들이 섬기던 신과 여신을 조각한 것으로 보여지는 작은 조상들이 여럿 발견되곤 한다. 이들 조상들은 눈이 크게 과장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는 사라지고 없지만 보석이나 조개의 껍질이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들이 남긴 비문에 의하면 그들은 이러한 조상들이 단순히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조각한 상이 아니라 생명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수메르 문명은 이후 기원전 2350년경 아카드인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시기부터 실물 크기의 왕의 조각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동으로 만든 왕의 두상 조각품은 현재 바그다드에 있는 이라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두상 작품은 금속을 조각하는 기법에 있어 매우 높은 기술력과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조각품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석이나 조개 껍질을 장식하여 신과 같은 우상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초대 왕 이었던 사르곤의 손자 나람신은 전쟁에서 이긴 기념으로 자신의 전승비를 조각하여 남기기도 했다. 이 전승비 속에서 그는 마치 신처럼 다른 군사들보다 두 배는 더 크며 불사의 몸을 갖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 전승비에는 나무와 언덕과 같은 경치 또한 조각되어 있으며 이것은 인류 최초의 풍경화의 형태로 여겨지고 있다. 언덕에 적혀진 비문은 훗날에 새겨진 것으로, 제작되었던 초기 시기에는 비문을 새겨넣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Gudea Louvre AO13.jpg|섬네일|150px|라가시의 구데아 왕의 두상 (루브르 박물관) 기원전 2180년 아카드 문명은 멸망하게 되었으며 단 하나의 도시 라가시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구데아의 평화로운 통치 아래 문학과 미술에 있어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구데아 역시 이전의 아카드의 왕들처럼 실물 크기의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긴 하였으나 그의 조각상은 이전의 조각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고 신 Ningirsu를 섬기는 종이며 자신을 양치는 목자 라 칭하였다. 그의 조각상에서는 옛 왕들의 조각상과 다르게 수염을 깨끗이 깎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조각상들은 매우 단단한 돌로 조각되어 있고 신전 주변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Zanbil에 주재한 지구라트. 수메르 문명이 번창할 시기에 지어진 신전들은 지구라트(Ziggurats)라고 불리고 있다. 이 신전들은 진흙을 빚어 만든 벽돌로 지어졌으며 높은 사제들과 왕에게만 출입이 허용된 성스러운 곳이었다. 이 신전들은 모세가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받았던 시나이 산(Mount Sinai)와 같이 성스러운 산(Holy mountains)으로 여겨졌다. 평지에서 살았던 수메르인들에게 있어 산은 흐르는 물과 생명력을 가진 식물 등을 상징했다. 그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여신 Ninhursag를 산의 여인 이라고도 불렀으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서양의 산에 대한 상징문화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천년 이후부터 번창하기 시작한 바빌론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함무랍비의 통치 아래 바빌론 제국은 마리(Mari)와 니네베(Nineveh)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확장되었다. 함무랍비는 인류 역사 최초의 법전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법전은 stele라 불리는 석판 위에 새겨넣어져 있으며 이 석판의 윗쪽 부분에는 성스러운 산, 혹은 지구라트 위에 서서 인간의 모습을 한 신에게 법전을 받는 함무랍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바빌론 문명의 조각품은 옛 수메르 문명이나 아카드 문명의 예술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에 전시된 통치자의 두상은 옛 아카드 인들의 동으로 만든 두상 조각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조각품 또한 눈동자가 비어 있는데, 보석이나 조개 껍질 따위를 채워넣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교적 부드러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머리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매우 인상적인 여왕 Napirasu의 조각상(루브르 박물관)이 수사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헤프트 테페(Haft Tepe) 부근에 위치한 Chogha Zanbil의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 근방에서 발견된 지구라트들보다 훨씬 더 큰 건축물이다. 이 지구라트는 푸른색과 초록색의 벽돌로 지어진 세 개의 신전과 합병되어 있으며 기원 전 1250년경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이 건축물은 원래 5층 정도의 높이로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나, 현재는 심하게 훼손되었다. (→지구라트 참조) 오늘날의 파키스탄인 인더스 문명은 수메르 문명과 무역거래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無 초기의 이집트 문명은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나일 강을 따라 번성했다. 나일 강은 초기의 이집트 인들에게 농업을 위한 경작지, 나무, 풀, 돌, 식물, 그리고 운송 수단 등 여러가지를 제공했으며 고대 이집트 문명이 거대한 제국으로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집트 문명은 군주제로,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막화된 땅에 둘러싸여져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나일 강 주변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나일 강을 하피(Hapy) 신이 수호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신들의 신이었던 태양신 라(Ra 혹은 Re)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로 여기며 숭배했다. 나일 강의 북쪽 지대는 험준한 계곡이 많은 곳으로 이곳의 대다수의 주민들은 사하라의 신석기 시대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유목민들이었으며, 이들이 살던 지역은 석기 시대의 돌 조각과 벽화의 흔적을 현재까지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메삭(Messak)에서 발견된 동물을 그린 벽화나 도기 등은 이집트의 북쪽 지방에서 발견되었으며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4천년에서 3천2백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도기에 그림을 그려넣는 것은 기원전 4천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점점 사라져가는 풍습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 시기에 발견된 그릇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미 돌을 조각하거나 구멍을 뚫고 윤이 나도록 다듬는 데에 숙련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례식 때에는 흙을 빚어 만든 작은 남성이나 여성 모양의 조상과 시신을 함께 묻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조상들이 죽은 이들의 시중을 들게 되며 이후 죽은 이들은 영생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이집트의 미술 문화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같은 시기에 무덤 안에서 그림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아마로 만든 옷 조각이나 벽에 그려졌던 그림 등은 현재 카이로에 주재한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두 그림은 모두 나일 강에서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하마나 갑판 선실이 있는 배, 그리고 노를 젓는 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납작한 실루엣 형식으로 그려졌으며,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처럼 어떠한 기준이나 법칙이 없는 납작한 2차원의 공간 속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소재나 용도에 있어 이 작품은 선대의 어떤 미술 문화와도 구분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미술 문화는 나르메르왕이 북 이집트와 남 이집트를 합병 통치하기 이전부터 이미 천천히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르메르의 팔레트 (The palette of Narmer) 고대 이집트 특유의 평면적인 미술 풍조의 시작은 바로 이 작품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나르메르의 팔레트는 이집트 문명의 초대 왕이었던 나르메르의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부조 조각품으로, 이집트 문명의 독특한 예술 문화를 열었던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팔레트는 앞면과 뒷면으로 나뉘어 양면에 각각 조각과 문양을 새겨넣어 당시 이집트 문명의 문화와 풍습을 암시하고 있다. 팔레트의 앞면에는 목이 긴 두 마리의 괴수가 서로의 목을 둥글게 꼬아 동그란 원 형태를 이루고 있다. 둥그렇게 패인 이 원은 다른 부분보다 훨씬 깊게 패인 것으로 보아 종교의식 혹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의식에 필요한 물감 따위를 담아두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괴수들은 지면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가로선 위에 서 있으며 팔레트의 중앙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위에는 나르메르 왕이 남부 이집트의 통치자의 상징인 붉은 코브라 왕관을 쓰고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의 목을 참수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팔레트의 하단 부분에는 나약함을 상징하듯 벌거벗은 채 황소들에게 짓밟히는 적군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황소는 왕의 권력과 힘을 상징하기 위함으로, 적군의 성벽을 부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팔레트의 뒷면에는 나르메르가 서서 포로를 죽이려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나르메르는 다른 이들 보다 두 배 이상 큰 모습이며, 다른 이들과 분리된 지면을 밟고 서 있다. 또한 나르메르의 다리에는 근육의 모양새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선들이 패여있으며 이것은 그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오른편에 조각된 매는 하늘의 신 호루스(Horus)를 상징하며 북부 이집트의 신이기도 하다. 매는 남부 이집트를 상징하는 밧줄을 잡고 있으며 이 밧줄은 여섯 개의 파피루스로 이어지고 있다. 팔레트 위에 새겨진 모든 형태들은 각각 어떠한 상징성을 갖고 있으며 훗날 쓰임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이 팔레트 위에는 나르메르와 포로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반면 초기 상형문자의 형태로 보이는 무늬 또한 조각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팔레트는 나르메르의 승리를 실제로 발표하기 위한 성명이나 문서로 해석된다. 고대 이집트의 문명은 오늘날 가장 신비하고 위대한 미술 문화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는 시기이다. 신왕국 시대 때 이집트의 미술은 다른 문명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이후 가장 크게 발전하게 되는 그리스 문명의 미술 문화의 기반을 다진 것도 또한 이집트의 미술이다. 유화 수채화 프레스코 동판화 석판화 목판화 모자이크 벽화 정물화 산수화 인물화 데생 마사치오 마사치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조르조네 (이탈리아어 지오르지오네) 티티안 (이탈리아어 티치아노) 조르지오 바사리 라파엘로 안토니오 코레지오 한스 홀베인 알브레히트 뒤러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히에로니무스 보슈 안니발 카라치 라비니아 폰타나 대 피테르 브뢰겔 브론치노 폰토르모 엘 그레코 파르미지아니노 카라바조 디에고 벨라스케스 피터르 파우얼 루번스 렘브란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귀도 레니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장앙투안 와토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브룬 자크 루이 다비드 안토니오 카노바 도미니크 앵그르 프란시스코 고야 외젠 들라크루아 윌리엄 블레이크 귀스타브 모로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쿠르베 장 프랑수아 밀레 폴 세잔 카미유 피사로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툴루즈 로트렉 메리 카사트 베르트 모리조 구스타브 클림트 마티스 바실리 칸딘스키 에드바르드 뭉크 조르즈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신디 셔먼 주디 시카고 차학경 프리다 칼로 바바라 크루거 낸 골딘 키키 스미스 제니 홀저 니키드 생팔 에바 헤세 바네사 비크로프트 미술용어집 Honour, Hugh and John Fleming, The Visual Arts A History . 2005년. Person Edcation, Inc., Upper Saddle River, New Jersey. |
세포생물학 (細胞生物學은 생물체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세포의 구조를 연구하는 생물학의 전문 연구분야이다. 세포의 관찰과 연구는 분자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세포학은 세포의 구조에서 비롯하여 세포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생물의 생성과 발전에 보다 상세한 지식을 얻음으로써 생물학 관련 분야, 생화학, 유전학, 진화 생물학 등에 유익한 자료를 제공한다. 세포핵 (Nucleus) 세포핵은 유전자 세포 원형질의 중심이며 유전정보체인 DNA와 (히스톤 histone) 단백질의 복합체인 염색분체를 담고 있다. 핵소체 (Nucleolus) 핵소체는 세포핵 가운데에 있는 알맹이로서 RNA와 단백질 합성에 관여한다. 세포분열시 소실되었다가 분열과정이 종료되면 다시 형성된다. 중심소체 (Centrioles) 중심소체는 한 쌍이 세포에 들어 있으며 세포분열시 염색체를 세포막에 가까이 이동시켜 두 개의 세포를 형성하는 데 관여한다. 세포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시기에 주로 알갱이 형태로 존재하며 세포분열이 개시되기 전(간기의 S기 - 간기의 염색사 복제기)에 성상체로 변화 후 분열직전 방추사로 변화한다. 기본 단층구조는 9+0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섬모나 편모의 기저부로 사용된다. 소포체 (Endoplasmic reticulum) 소포체는 리보솜과 결합되어 있는 조면소포체와 결합되지 않은 활면소포체로 나뉜다. 조면소포체에서는 세포밖으로 나갈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며 활면소포체에서는 탄수화물과 지질의 합성에 관여한다. 골지장치 (Golgi apparatus) 골지장치는 세포의 중추전달체계로서 화학반응을 거쳐 형성된 단백질 등을 저장, 수송, 분비하는 역할을 한다. 리보솜 (Ribosome) 리보솜은 세포에 두루 퍼져 있는 작은 알맹이들로서 소포체에서 단백질을 합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세포핵에서 DNA로부터 전사된 전령 RNA(mRNA)와 결합하여 정확한 순서의 아미노산을 합성한다. 리소솜 (Lysosome) 리소솜은 골지장치로부터 유래된 세포내 소낭으로 가수분해 효소를 함유하고 있어 많은 유기화합물을 포함하는 식포와 결합하여 물질분해를 담당하고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이물질도 용해할 수 있는 세포소기관이다. 또한 갑상선 호르몬과 같은 물질을 합성 분비하는 데 관여한다. 미세소관 (Microtubles) 미세소관은 작은 단백질 성분의 중합체로 이루어진 미세관 구조들로 세포골격을 이루며, 세포분열 과정에서 세포내 구조물들의 이동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포질 (Cytoplasm) 세포질은 세포의 껍질로서 다른 세포와 벽을 만들어 주며, 세포로 유기물질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세포 안에서 합성된 물질을 내 보내는 역할을 한다.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 미토콘드리아는 세포내 화학에너지 생성을 담당하는 소기관으로 내부공생설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포내 호흡을 주도한다. 유기 고분자 화합물을 분해하여 이산화탄소와 물로 전화시키고 이때 유리되는 에너지를 아데노신 삼인산으로 저장하여 생명체가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생화학 세포 생물학 관련 사이트들 분류:생물학 분류:세포생물학 |
오른쪽 아이네이아스 ()는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의 한 영웅으로서, 전설상 아프로디테와 트로이 사람 안키세스의 아들이라 한다. 트로이가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후, 그의 아버지와 아들 율루스(Iulus)와 함께 이탈리아 반도로 피신하였다고 전해지며, 이 전설은 후에 로마의 국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혹은 아이네이드)에서 극적으로 노래 되었다. 이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난 뒤 카르타고에 닿아 그곳의 여왕 디도와 사랑을 나누는 등 7년 동안의 유랑 끝에 이탈리아의 라티움에 상륙하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의 왕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새로운 도시 라비니움을 건설하였고 이후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로 묘사되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가 로마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조상이라는 로마 건국 신화도 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증손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최초의 영국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분류:그리스 신화의 인물 분류:로마 신화 분류:일리아스의 등장인물 분류:아프로디테의 자식 분류:트로이아 전쟁 관련자 분류:트로이아인 |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 (, , 기원전 70년 10월 15일 - 기원전 19년 9월 21일)는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이다.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으로 이후 전유럽의 시성으로 추앙받게 되는 시인으로 단테가 저승의 안내자로 그를 선정할 만큼 위대한 시인이었다. 이탈리아의 포 강 중류의 만투아(Mantua, 현재 만토바 Mantova) 근교의 안데스(Andes)에서 태어나다 (출생시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의 고향은 당시 로마의 행정구역인 갈리아 키살피나( Gallia cisalpina 갈리아 알프스 이쪽 지역, 즉 이탈리아 북부)로서 그의 부모는 서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농부이자 도자기굽는 일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마기아 폴라(Magia Polla)는 베르길리우스를 낳기 전에 월계수가 울창하게 자라는 해몽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이 꿈과 관련하여 그의 이름 Vergilius 는 라틴어의 virga (어린나무)에서, 그리고 여기서 기원후 5세기를 전후로 Virgilius 라는 명칭이 (현재 영어나 프랑스어의 표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59년에서 53년까지 베르길리우스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메디올라눔(Mediolanum, 현재 밀라노)로 가 웅변술과 여러 학문들을 배운다. 기원후 54년에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웅변술을 배운 후, 실지로 소송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활약을 하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과, 워낙 수줍음이 많은 천성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정계 데뷰를 포기하고 젊은 문학자들과 잦은 교류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을 접하게 되고, 이후 문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기원후 52년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가서 시로가 주도하던 에피쿠로스학파에 들어가 약 3-4년간 생활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깊이 배우게 된다. 시를 써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알게 되어, 일생 동안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농경시》(Georgica)등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낭송하기도 한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건국을 다룬 작품을 써 보라고 권하자 그에 응하여 《아이네이스》(Aineis)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기 전의 11년 동안 썼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시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서사시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집필하였다. 또한, 단테의 에서 지옥의 안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집으로 《농경시》,《목가》,《아이네이스》 등이 있다. Vergilii Maronis Opera , 편집 R.A.B. Mynors, 1972 Oxford (자주 재판). 참고서적 단테 클럽 미국의 단테협회의 전신이다. 같은 이름의 역사 추리 소설이 나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베르길리우스 저, 천병희 역, 아이네이스, 숲, 2004(초판)/2007(개정판) 분류:기원전 70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19년 죽음 분류:고대 로마의 시인 분류:서사시인 분류:만토바 출신 분류:기원전 1세기 시인 |
정치 (政治, politics)에 대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학문적인 정의는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내린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이다. 또는 정치를 국가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하는 경향도 있는 바, 대표적으로 막스 베버는 정치를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 라고 정의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정치를 국가의 영역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 내재된 권력 관계로 정의하는 경향도 생겼다. 이와 같이 정치는 "배분",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 "권력 관계" 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어느 한 측면도 소홀히 여겨질 수는 없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정치의 정의는 아마도 해롤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이 말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and how)"라는 것일 것이다. 라스웰 또한 정치를 배분 의 측면에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학은 정치적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학문이다. 관련된 분야로는 정치철학, 비교정치학, 국제정치학 등이 있다. 정치라는 말은 메이지시대 일본인이 만든 신조 한어이다,(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근대화와 동서양 문화 교양학과편 p323) ‘정치’(政治)에서 ‘정’(政)은 바르다의 ‘正’(정)과 일을 하다 또는 회초리로 치다의 의미인 攵(등글월문 = 攴)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이다. 즉,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한다. 정(政)은 특히 자신의 부조화로운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 는 물(氵= 水)과 건축물(台 태)이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이것은 물(水)의 넘침에 의한 피해를 잘 수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조화로운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로운 것,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정치(政治)는 다른 말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政治家)는 먼저 자신의 부조화로운 것, 네거티브한 것, 즉, 천지자연의 이치에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스려 극복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 곤란함, 부조화로운 면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군자 또는 성인을 의미한다. 정부는 규칙이나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시킬 권위를 가진 조직체를 말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정부를 군주정과 과두정, 금권정, 민주정으로 분류했다. 근대의 정부들은 대체로 위와 같이 간단히 분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입헌군주정에서는 군주가 국가의 원수로서 존재하나, 실제의 권력은 국회를 비롯한 입법기관 등이 보유하고 있다. 공화정은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현대에는 민주정의 기준도 상당히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를 민주국가로 규정하고 있으나, 국외의 많은 이들은 이를 전체주의적 독재정으로 인식하고 있다. 독재정은 한 사람이나 집단이 법률적 제한을 받지 않고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정당성이 아닌 폭력에 기반해 행사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독재"라는 표현은 많은 경우 비난의 의미로 사용된다. 주권은 정부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영토를 통치할 능력을 말한다. 주권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권 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권리를 일컫는다. 나아가 국가의 정치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원리를 국민 주권 이라 한다. 정치경제학 정당 정치학 정치 유세 선거 공약( Election promise) 정치 컨설팅( Political consulting) 정치 참여 정치적 부패 정치 평론 정치심리학 분류:사회 |
공산주의 (共産主義, Communism)는 자본가 계급이 소멸되고, 노동자 계급이 주체가 된 생산수단의 공공 소유에 기반을 둔 무계급 사회 조직, 공동체 형성에 관한 이론, 또는 그러한 체제를 목표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정치 운동들을 일컫는다. 경제적으로는 필요에 따라 분배받고, 능력에 따라 일하는 경제 구조로 대변된다. 공산주의 정치 운동은 역사적으로 억압받던 계급들의 해방을 주장하고, 그 해방된 주체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조직 형성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했지만, 이러한 코뮨주의적 주장은, 19세기 후반 근대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미미해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분파중에 제일 큰 세력을 형성한 분파인 마르크스주의 는 코뮨주의와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서 인식하는 공산주의 에 대해 정확히 알려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의 라틴어 는 함께하는 이라는 뜻이고, 공산(共産) 은 함께 소유하고 생산한다는 뜻이다. 공산주의는 주로 경제 체제라고 흔히 불리지만, 딱 경제 체제로만 구별되어있는 사상이 아니며, 정확히는 경제·정치·사회·철학·통치 체제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크게 네 가지 뜻으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로 제일 흔하게 쓰이는 의미는 마르크스주의의 학설적 이론을 통칭하여 부르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하나의 이론으로 구성된 체제의 가능성이며, 세 번째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실행하고 있는 국가의 정경체제를 부를 때 쓰인다. 네 번째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 즉, 무계급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이렇게 다양한 뜻으로 구분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첫글자가 소문자로 쓰여있는 communism 은 사회주의 체제 국가의 정경체제를 가리켰고, 첫글자가 대문자로 쓰이는 Communism 은 공산주의 를 가리켰다. 이론적으로 공산주의는 19세기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정치사상에 그 기원을 둔다. 인류의 초기 사회 조직은 "고대의 공산주의"라 정의될 수 있겠으나 정치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일반적으로 아직 형성 중인 미래의 사회 체계를 제시한다. 스스로 공산주의자라 부르는 공동체들 사이에는 상당한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와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주의)의 사상에 근접하다고 인식되는 일련의 분파들은 20세기 초 이후 국제 정치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계급 투쟁은 핵심적인 역할을 지닌다. 이를 따르면 공산주의 체제의 형성은 자본가 계급(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이)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의 최정점이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서 공산주의 생산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 "라 불리는 과도기적 기간이 불가피하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되는 공산 사회는 역사적으로 실현된 적이 없으므로 하나의 이론적 가능성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공산당 체제하에 있는 정치·경제적 사회를 일컫는 일에 흔히 사용된다. 흔히 공산주의의 반대를 민주주의라 칭하나, 공산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며, 공산주의의 정확한 반대어는 자본주의이다. Marx.jpg|178px|right|섬네일|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라고 여겨지는 마르크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서 공화파인 자코뱅 당과 지롱드 당이 프랑스 정치 권력을 공동 지배하였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상 퀼로트(노동자 및 농민)가 자코뱅을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사실상 진보적인 자코뱅 당이 프랑스 정국을 주도했다. 하지만 자코뱅의 지도자였던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의 특유 급진적 정책은 자코뱅의 적들을 자극, 단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인해 자코뱅 혁명 정부는 붕괴된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들에 의해 우경화가 된 상태로 진행됐다. 자코뱅의 평등주의 정책이 하나씩 소멸되면서 다시 다수 노동자, 농민의 삶은 추락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자코뱅의 혁명 분위기를 되살리려 했던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세력은 급진적 자코뱅 당 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세력을 지도하던 인물은 프랑수아노엘 바뵈프였는데, 바뵈프는 오늘날 공산주의하면 생각나는 평등주의, 무상분배, 토지 균등분배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바뵈프는 프랑스 근대 정치 역사에서 최초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폭넓게 칭한 혁명가였다. 이 당시는 공산주의란 용어는 루소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 이상을 혼합한 용어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정치 이론은 당시 기득권 세력을 자극시켰고, 그를 따르는 급진 자코뱅 세력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다. 또한 그도 1797년에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19세기 중후반,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는 기존의 이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스스로 공산주의자선언 이란 소책자를 내어 바뵈프 이후 금기시 되었던 공산주의란 용어를 다시 유럽 전역에 불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유럽 전역에서 사회당의 결성을 부채질했으나 이들 당의 정책은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이른바 "개량"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예외였다. 당내 분파인 볼셰비키가 레닌의 지도 아래에 1917년 혁명을 일으켜 임시 정부를 타도하고 국가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1918년 당은 이름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으로 바꾸었다. 그 후부터 여러 나라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는 각 국가의 사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농민이 주류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은 마오쩌둥주의라는 혁명 주도 세력을 농민으로 정의한 공산주의도 생기게 되며, 폴포트주의같은 친화교적이며, 주체사상 같은 유교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더 큰 공산주의도 생기게 된다. 기본적으로는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자립할 수 있는 무국가, 무군데 자치체 세상을 의미하는 어떠한 체제에 관련된 용어이며,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까지 이르는 모든 방법을 구체화한 사상이다. 공산주의란 용어는 역사적 사건마다 그 의미가 달라졌는데, 1차 대전이 종전되기 전인 1917년 이전에 공산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뜻으로 인식됐으나 1차 대전 종전 이후 인터내셔널이 여러 종파로 붕괴하므로 사회민주주의는 사회개량주의 계열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리켰고,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따르는 과학적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리켰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는 혁명을 통한 사회변혁을 주장한다는 의미로, 사회주의는 빈부의 격차에 반대하여, 인간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로 이해되었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이후 해외의 수많은 사회당은 공산당으로 변하고 소련 공산당과 다양한 종류의 관계를 맺었다. (국제 공산주의를 참고하라.)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막 후 스스로 공산주의라 칭하는 체제들이 동유럽에 들어섰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그 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기타 사회주의 정부 형태를 채택한 제3세계 나라 중에는 쿠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 라오스가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 전 세계의 2/5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살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처음으로 정립된 것이며, 기본적으로 투기 가능한 화폐, 돈인 자본 이 양산되고, 그것으로 하여금 자본회전을 통하여 효율적인 잉여가치, 착취이윤 창출과 동시에 생산수단이 자본가의 손안에 있고 그것들이 이윤생산을 목적으로 운용되며, 토지와 노동력을 사고팔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후에, 사유재산의 발생 원인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정립했으며, 카를 마르크스가 단독으로 저작한 저서들에는 사유재산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자본주의 붕괴론 을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설명했는데,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축적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착취도가 심해지는 궁핍화이론 단계까지 오고, 그 결과 대중계급의 소비 의욕이 지나치게 낮아져, 결국 초과공급현상이 심해져 자본가 계급의 이윤의 증대되지 않는 것으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정권이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무산계급의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강대국은 그러한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제국주의 와는 다른, 새로운 초제국주의 또는 신제국주의 라는 경제적 침략 행위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윤을 채워나가게 되어있다. 마르크스는 원시 사회, 부족 사회 등은 단계적일지라도 사회 체제 상 비단계로 서술했으며, 1단계의 사회체제의 형태인 왕정이라는 체제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전복된다고 주장했고, 자본주의 체제는 2단계의 사회체제라고 주장했다. 신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사회주의 체제 는 마르크스주의에 3단계의 사회체제라고 정의해놓았다. 즉, 왕정이라는 일인독재의 전제군주제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 독재같은 사회 체제는 원시적인 체제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가는 이행기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정하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로 발전될 수록 주기적인 공황에 매우 약하여, 이윤율 저하 경향이 초반 공황에 비해 매우 잦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되어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정권이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건설된다고 주장하였다.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취지와는 다르게, 단순한 프랑스 혁명과 같은 자유주의 혁명이랑 비슷한 형태의 혁명으로 일어났다. 일부 정통 마르크스주의 성향 학자들은 오히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인 2단계에서 사회주의 체제인 3단계로 이어지는 혁명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가 언급한 1단계의 왕정 체제에서 2단계의 자본주의 체제로 가는 자유주의 혁명과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에게 주는 부정적 영향은 특정 국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의 성격에 맞는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 혁명계급이 노동자, 농민과 같은 무산계급이 주류이다. 부르주아 민주제(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를 이렇게 통칭함.)는 말 그대로 부르주아들만의 자유권과 참정권이 있는 시대였다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제는 무산계급만이 자유권과 참정권을 가져야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기 기간에는 혁명에 반대하는 반동세력 에 대항하여 승리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공산당선언에서는 자본가 및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층과의 화합이 없다는 전제로 폭력혁명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논점은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와 다른데,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각 노동자가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여, 비집단적이고 분자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반면, 레닌주의에서는 다수의 노동자를 지휘하는 지휘 체계 정당인 전위대 체계론을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전위대가 노동자를 지휘하여, 더 전략적으로 혁명을 일으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 이념을 향한 공산주의 체제 시절을 경험했던 국가들은 주황색이며, 현재도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국가는 붉은색으로 분류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시대는 흔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체제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라고 정의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서는 각자 계파마다 다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이므로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개조된 형태라고 주장하지만, 일부 사회민주주의자는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에서 파생된 일종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이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와는 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처음으로 성공한 국가가 러시아 제국이었고 그 당시 혁명의 주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 레닌주의를 방침으로 혁명을 이행했기 때문이다.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좀 다른데, 일단 사유재산에 대해 거의 큰 언급을 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와 다르게, 레닌주의에서는 공산주의에 도달하려면 확실하고 강제적인 당재산제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에 달성하면서 그 후 나타나는 문제까지 언급했다. 또한 공산주의의 핵심이었던 유물사관 을 현실에 맞게 수정했다. 그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도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서 묘사된 산업 노동자, 농민 계급이 주류를 이은 혁명 세력이 자본주의 정권을 전복시킬 수 없다고 믿어,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위대 체계론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공산주의의 각 계파 내 큰 논쟁 거리를 낳았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카를 마르크스와 다르게 국가를 절대화 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경제적 제국주의 또는 구 제국주의와 같은 세력이 사회주의 과도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를 여러가지 수법으로 방해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 이유를 들어 노동 계급은 하나로 결집된 단결 공산 국가를 조직하고 혁명 세력을 지원하여 세계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공산주의 세력끼리 국제적 화합을 도모하고 세계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전인민국가론을 주장했다. 또한 제국주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민으로 이루어진 군대와 경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금융 그리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혀냈고 이것을 현재 흔히 제국주의론 이라고 한다. 몇몇 학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 제국이 혁명 대상에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 제국은 고도의 산업화가 되지 않은 1단계의 체제 즉, 왕정이었는데, 2단계의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부르주아 독재)가 없이 혁명이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대로라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시점엔 발전된 자본주의 형태여야하며 왕정이 타도된 자본주의 체제여야한다. 이 말대로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가 될 때 소련은 산업화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보편적인 민주주의 의식이 높지 않았다.(물론 2차 대전의 주요 승전국으로써 초강대국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본질은 위에 언급된 유물사관에서 탈피된 개념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는 의견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시대에는 당재산제도를 따르며, 공동생산이 이루어진다. 최소한의 필요에 따른 소비가 이루어진다. 또한 자본가 계급은 사라지며 모든 기업은 당소유화되어 당의 재산이 된다. 계급 차이는 노사관계가 사라지고 인민(노동자, 지식인, 학생, 농민)과 지도자(위원, 주석)로 나뉜다. 공화제는 사회주의 공화제를 사용하며, 각 지도자(인민위원)은 각 지역의 임명제로 선출되고 주석이 선출되는 것도 철저한 임명제 방식으로 치루어지며, 공산당이라는 일당체제 하에 국정운영을 한다. 자본주의 국가와 다르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당을 사유정치집단이 아닌 당주도의 서비스 기관으로 통칭한다. 철학적으로는 소련이 등장하고 나서 소련의 체제가 공산주의 체제의 모태가 되었을 때 적어도 1세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철학적 정책을 실질적으로 따르는 공산주의 국가는 없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전에 존재한 거의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사회-철학적 관점을 따랐다.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이란, 모든 물질은 의식 이 있다고 규정하며 인간을 세상에서 존재하는 제일 우수한 물질 로 보는 유물론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불가지론과 어느정도 상반되며 신이라 절대적인 존재를 추종하는 종교를 부정한다. 소련에서의 러시아 정교회 탄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개신교 탄압, 베트남에서의 천주교 탄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무신론적 관점 말고도 공산주의의 반제국주의적 성격도 레닌주의의 철학관점이라고 해둘 수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 진화형태는 제국주의 라고 언급하였다. 반제국주의적 성향 때문에 인간해방론적 사고방식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인간해방론 은 노동해방론 과 같은 뜻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억압세력을 일소하고 노동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관점에서 노동해방론 을 주창했고, 레닌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확장 과정을 통해 착취, 억압을 받는 모든 인민을 해방시켜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현재의 인간해방론은 더욱더 세분화 된 후자의 뜻을 담고있다. 후에 이 개념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김일성의 노동당 유일사상 10대 원칙에는 개신교 유일신 사상을 많이 이용하였고, 김일성이 개신교 가정 출신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반제국주의와 인간해방론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하며, 혁명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세계혁명론적 사고방식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으로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이 세계혁명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혁명론적 사고방식은 꼭 요인들의 직접투쟁적 지원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일어나는 공산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국가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주는 방법도 포함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의 유동적인 계급 투쟁의 실현도 포함된다. 후에 이 세계혁명론은 트로츠키주의에서 발전되었다. 현대 시대에서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 관점을 따르기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에서는 폭력혁명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를 거치면 생산수단을 상품화할 수 있는 모든 공정 및 인프라를 건설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해체되고,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에게 주고 노동자가 자신을 위한 자체 생산수단을 얻을 수 있어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한 세대마다 자신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얻어 자신의 몇 십배나 해당하는 세대가 쓸 수 있는량의 상품 및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색은 친소, 황색은 친중, 흑색은 중립 노선의 공산주의 체제 국가이다. 공산주의 종류 별 성향 공산주의의 종류에 대한 것은 각 학자들에 의해 의견이 다르지만, 보통 마르크스-레닌을 기점으로 파생된 사상을 공산주의의 종류로 간주한다.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는 공산주의에서 파생되었다기 보다는 공산주의를 현실화시킨 기반 사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공산주의에서 파생된 기타 사상의 상-하부 구조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은데, 공산주의에 종류가 있다면 과연 소련의 공산주의는 무엇이였냐는 것이다. 때문에, 공산주의라는 사상은 종류와 상관없이, 평균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보통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따른다. 옆의 사진에서 특정 색으로 칠해진 국가는 한 때 공산주의를 경험한 국가인데, 적색으로 칠해진 국가는 소련의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거나, 친소련 정책을 구현시키는 국가를 의미한다. 현재까지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과 쿠바, 라오스 역시 친소련 노선을 따랐었다. 황색의 경우 친중국적인 정책을 구현하는 국가이거나 마오쩌둥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대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민주 캄푸치아(캄보디아)가 있는데, 민주 캄푸치아의 경우 친화교주의적인 폴포트주의가 정식 이념이었고, 친중국 노선을 따랐다. 또한 알바니아의 경우는 1946년에서 1961년 사이 스탈린주의를 표방하였지만, 반스탈린 인사인 흐루쇼프가 소련의 대통령이 되면서, 1961년 친중노선으로 급선회한다. 흑색의 경우는 친중국도 아니고, 친소련도 아닌 외교 상태이며, 사상도 역시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마오쩌둥주의가 아닌 자체 개발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통치한 국가를 의미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현재는 사실상 공산주의를 폐기한 것으로 간주됨)의 경우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주체사상이,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가 주요 이념이었기에 흑색으로 칠해졌다. 현재 유고슬라비아의 경우는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로 분리 독립되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블라디미르 레닌이 계승하여 보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한 순간적으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도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짧은 기간으로 묘사되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구현화 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국가의 존재 더불어 프롤레타리아로 이루어진 군대 및 경찰이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혁명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전위당론 을 채택해 당의 수직적 구조를 본격화하고 국유화 체제를 강화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연관성 그리고 신식민지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했다. 그의 이론은 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따랐다. 1945.jpg|섬네일|left|178px|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개조하여, 스탈린주의라는 사상을 만들어냈다. 스탈린주의는 스탈린 통치 시절 소련의 공식적인 정치-경제체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스탈린이 자신이 만든 사상을 스탈린주의 라 명명하지 않고 마르크스-레닌주의 라고 불렀는데, 스탈린이 사실은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을 심하게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 받기도 한다. 주요 내용은 일국사회주의론을 기점으로 만들어졌으며 "전 세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 하나만 있으면 된다."라는 일념 하에 만들어졌다. 당시 레닌 통치 시절 세계 혁명을 부흥시키는 쪽으로 사상을 발전시켜야한다는 트로츠키와 달리 스탈린은 세계 혁명보다는 일단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공산주의 혁명을 군사적 행동으로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스탈린 집권 이후에 이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군사적 행동으로 전 세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의 전위조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야했고,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자발적 생산보다는, 국가 통제 양식에서의 생산방식을 선택하였고 그로 인해 빠른 집단산업화와 집단농업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착취는 더 늘어갔고, 자본가 대신 공산당원 이라는 신분의 생산수단 장악은 기존의 껍데기만 다를 뿐 자본주의 체제와 다를 바 없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유럽의 동서구권 좌파 진영 및 다수의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특히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닌 군국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주의가 횡행하던 시기에는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 간의 마찰이 심화되었었는데,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는 수정주의적이면서, 공산주의의 전통을 이으지 않은 사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는 국가를 개인숭배화시키는 국가주의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후에 다른 공산주의의 파생 사상에 큰 영향을 준다. 또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한 공산주의는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계급이 생산수단을 공동소유하고, 생산물의 공동소유 및 분배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공산주의는 본래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 급진적 풀뿌리 민주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벌어진 러시아 내전의 과정 이후, 레닌에 의해 실행되었던 노동자 계급의 생산수단 공동소유라는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가 스탈린 체제에 들어서 크게 퇴색되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병영국가적인 모습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대공황을 극복하고, 큰 폭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탈린식 공산주의가 공산주의의 전형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스탈린에 의해 권력에서 쫓겨난 트로츠키마저도 자신의 저서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1930년대 소련의 사회체제가 왜곡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소련은 노동자 계급의 공산주의 국가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 일부(국제 사회주의자 경향 등)는 소련에서 민주주의적 측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스탈린을 위시한 소련공산당 관료들이 자본가 계급과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면서 소련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스탈린주의를 군국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좌파 파시즘 의 일부일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trotsky.jpg|섬네일|right|178px|트로츠키, 그는 스탈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세계혁명론을 필두로 한 트로츠키주의의 창시자이다. 트로츠키주의는 레프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레닌주의를 세계 혁명 쪽으로 발전시켜 만든 공산주의의 분파 사상이다. 트로츠키주의는 공산주의의 하부 이론인 세계혁명론을 영구혁명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국제 노동자 운동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는 국제 공산주의의 시초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큰 반발심을 주기도 했지만, 제일 큰 반발심을 표출한 쪽은 바로 남미 쪽의 친미 정부였다. 당시 남아메리카의 기타 정부는 친미 정부하에 극단적 반공주의 체제를 실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곳은 항상 반미-공산주의 투쟁이 심한 지역이었는데, 트로츠키주의는 이러한 공산주의 운동을 적극 지원해준다는 이론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을 가진 트로츠키주의가 소련 사회를 휘어잡을 시, 남미의 친미 정부는 극심한 공산주의자들의 맹공을 받아야하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 다툼에 밀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후 일생을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며 살았는데 그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는 《스탈린주의 날조학》이라는 저서가 있다. 마오쩌둥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개조하여, 만들어낸 중국식 사회주의이다. 아시아 일대의 공산당계에서는 마오쩌둥주의가 제일 영향력있는 공산주의로 평가되고 있다. 스탈린 사후 1960년대 소련이 흐루쇼프를 중심으로 어느정도 탈스탈린화 되면서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대립한 사상이기도 하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업화는 유럽에 비해 훨씬 늦었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1차 산업에 의존하여, 공장과 같은 2차 산업의 생산라인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체는 산업 노동자가 되어야하는데, 산업이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산업 노동자 또한 없었다.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농민들로 인한 혁명을 주로하고 그에 관한 사상을 정립화시키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사정에 맞춰서 재개조하게 된다. 마오쩌둥주의의 하부 사상들은 민족주의, 대중주의(포퓰리즘), 신민주주의를 기초로 하였으며, 마오쩌둥주의와 레닌주의 주요 차이점은 혁명의 주체가 산업 노동자이냐, 농민이냐이며 마오쩌둥주의에서는 혁명의 주체가 농민이 되어야한다고 명시되어있는 것과, 유물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와 달리 마오쩌둥주의는 관념론적 관점을 옹호한다. 마오쩌둥주의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사정에 따라 계승된 공산주의 사상이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 일각에서는 오히려 고도로 산업화 된 자본주의 체제를 공산화시킬 때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마오쩌둥주의보다는 개조되지 않은 레닌주의를 선호하기도 하였다. 이 사상의 하부 조직중 하나인 신민주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언급된 인민민주주의와도 같은 뜻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 문화에 맞춰진 민주주의라고 이름을 달리하였다. 신-민주주의 라고 불린 까닭은 분단국가로 견제할 상대인 중화민국의 삼민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신민주주의는 삼민주의를 개조한 중국의 개조된 민주주의이며, 삼민주의는 구(舊)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현재 마오쩌둥주의는 인도 공산당, 네팔 공산당의 주요 이념이기도 하고, 주로 저개발 지역의 농업지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덩샤오핑 이론에 맞써는 중국 공산당 내 보수파의 주요 이념이기도 하다. 때문에 중국 내에서의 보수주의는 전 세계적 보수주의의 의미와 달리 마오쩌둥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티토주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개조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이며 기존의 공산주의에 비해 파격적인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공산주의에 파생된 사상이지만 일부 학자들에 의해 사회주의의 일부 라고도 묘사된다. 유럽공산주의를 제외하고 모든 공산주의 분파에서 유일무이하게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레닌주의의 제일 기초적인 사회주의 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공산주의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포기한 이론이며, 오히려 공산주의에 도달한다는 표현이 티토주의에서는 친소련파들을 향한 멸칭으로 등장한다. 주요 내용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되, 모든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영향은 혹여나 그 국가가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보장받아야하며,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침범은 있을 수 없다는 이론이다. 또한 이 티토주의는 냉전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립 속에서 초월적 독립관을 지녔었는데, 티토주의에서도 자본주의 체제는 개조되지 않은 체제라 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복되어야할 체제로 보았지만, 사회주의 체제는 인민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기본적인 체제이기 때문에, 냉전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들 끼리의 단합적인 태도의 전제하에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외교적 격차는 모두 없어져야하며, 그것은 소련에게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티토주의는 유럽에서 사회주의적인 민족주의 사상이라고도 불리며, 이 때문에 스탈린과 유고슬라비아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라이벌 공산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민주성이 보장된 사회를 저버렸고, 부르주아적 공산주의자 내지는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레닌주의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독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룩셈부르크주의에서 구현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는 의회공산주의를 기초로하며, 완벽한 삼권분립을 주창한다. 197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공산당 등의 서구의 공산당들은 유로코뮤니즘(Eurocommun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소련 특히, 스탈린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이며 무조건적인 지지의 전통에서 분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당들은 프랑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일본도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1970년대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70% 이상의 득표율을 얻기도 했었으나,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소련의 위성 국가들의 붕괴 이후 의석 수가 줄어들며 위상이 급격히 떨어졌다.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포함하며,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코뮌주의 적 양상과는 다른,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일어난 문제점을 기준으로 서술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분배를 강조하기 때문에 해당 행정에 종사하는 공무원을 다수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는 총체적으로 관료주의가 팽배했다. 또한 일당독재체제이므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관련된 정책은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공산당에 의해 정해져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나 기타 민주주의와 달리 사회주의 공화제는 일당일파에 지배 하에 의한 사법, 행정, 입법 과정이 이루어졌으며, 삼권분립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때문에 정권을 가진 공산당의 일개파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른 정치양극화, 위계화도 심했다. 이러한 관료주의는 대다수 인민들의 반항심을 키웠고 결국 이는 총체적인 생산성 저하의 원인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노멘클라투라 현상이 있다. 토니 클리프를 포함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대표로 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한, 자유사회주의계 정치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영구적인 무산계급 정치혁명 의 포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중앙집권적 성향을 띤 민주주의 제도인 민주집중제라는 제도 자체가 스탈린주의와 결합하면서, 관료주의에 대응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구조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유물사관,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사회-철학적 정신을 기초로 하여 교육하고 지침하여 인간을 더욱 더 개조된 물질 상태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와 레닌 그리고 여러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을 "사회주의 소유 구조와 생산 체계를 대표로하는 경제적 물질로 하여금, 아직 의식이 개조되지 않은 해방되지못한 인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개조되지 않은 물질 상태의 인간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는 인간으로 비유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론과 같은 것들을 지침으로 한 인간의 사회-철학적 행동이 없이 개인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이렇듯이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무의식으로 사는 것은 인간(물질)의 방치된 형태이고 이 방치된 물질을 사상적으로 개조시켜 더 개조된 물질로 하여금 한마디로 신형인간 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기존의 일반 유물론과 달리,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의 의지의 주관성과 관계없이, 오직 인간은 물질을 보고 뇌수의 이성으로 도출되는 특수한 또는 정해진 물질적 행동을 포함해,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해주는 특수한 의식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기계론적 유물론과 달리,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오랜 시간 다른 구조의 생산 양식과, 수 많은 물질을 인식해, 그 자체로써 고차원적인 의식을 가진 인간이 충분히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즉, 사회자본, 어떠한 부조리한 사회체제가 인간의 우위에 있어 인간의 생각과 그에 더불어 모든 물질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인간이 사회를 변증시키고 차이를 보아 변화시켜야 하며 그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라는 계층안에 두었다. 그리고 그 신형인간을 만드는 단계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이라고 칭하였다. 이 기간에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인간의 사상적 정신을 완벽하게 개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기라고 단언하였다. 또한 이렇게 굳혀진 사상적 정신이 후에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하여 무정부, 무군대의 무방비 상태가 되어도 마르크스철학에 정통한 각 인민들의 자치체로 인해 자연적으로 질서를 유지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사상정신보다 사익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으므로 이러한 철학 관점을 장기간 주입시키기는 어려웠으며 결국 마르크스 철학정신의 부재로 인해 과학적 사회주의 체제 하에 살고있는 모든 대다수의 국가는 정신은 마르크스가 흔히 말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시절과 다를 바 없었지만, 현실은 그들의 본능과 맞지 않은 사회주의 체제로써 여러가지 내부적 문제가 생기게 되는 원인이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 외,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등이 정립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 정권을 붕괴시킨 뒤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채택하고,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하나의 견고한 사회주의 체제로 다져서, 제국주의 진영을 이긴다는 궁극적 목표가 있었지만, 이러한 공산주의 목표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기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시기적으로 산업 발전이 느렸던 소련과 이를 포함한 수 많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사실상,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군비 경쟁에 부담감을 느꼈다고 평가되며, 서방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군비 경쟁으로 인해 대다수의 민중들의 복지 수준도 하락했다. 이는 정부의 불신과 이념의 불신을 낳게된다. 그리고 그에 의한 결과는 전체적인 생산력, 의욕심 하락의 형태로 나타났다. 공산주의 경제 이론에서 주장하는 필요생산 이 가능해지려면, 농축산물과 공산품을 위주로한 경공업이 발달되어야하며, 2차 산업 중에서는 생필품, 공산품 위주로 생산해야 한다. 고수익을 창출해내는 일부 2차 산업 부문은 식량, 생필품의 자급률을 원만하게 유지하는 한 늘리는 것도 고려해야한다. 특히 공산주의에서 금융 계열 3차 산업은 자본가들이 잉여가치 또는 자신들의 물질욕을 채우기 위해 인민을 착취(예를 들면 채권자소득률과 불로소득을 주요 소득으로하는)하면서 더욱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업으로 규정하였으며 금융 산업이 비활성화 되어있다. 또한 모든 기업을 국유화하고 인간의 필수적인 교육 및 의료 서비스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모두 지원해주기 때문에 4차 산업역시 배제된다. 때문에 공산주의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식량의 자급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현실공산주의 국가로 대표되는 소련의 경우는 군수산업과 항공·우주산업, 공장 기계부품 제조산업이 발달했지만, 그와 반대로 생필품의 생산력은 부진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주도의 기술진으로 여러 가지 신상품을 배출해냈는데, 이 방법은 한계가 있었다. 일단 획기적인 상품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개발해낸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이익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더더욱 확실한 이유는 자본가 계급은 경제 활동에 있어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할만한 최적의 개체인데 자본가라는 계급을 생산력을 발생시키지 않고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비효율적이고 취약한 존재라고 여겨 자본가 계급을 모두 일소하였기 때문에 경제에 관해서 경쟁력있는 혁신적인 산업화의 아이디어가 더디어졌다. 즉, 사회주의의 분배제는 각 개체 간의 경쟁심을 유발시키지 못했다. 이 결과는 경제적 문제에서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공산주의의 치명적인 경제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봉급의 격차와 한계효용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동기화를 부여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대부분의 국가는 고도로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2차 산업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고 1차 산업인 어업, 농업과 같은 것들이 주류를 이었다. 원래 산업 노동자들을 주요 기반으로 삼는 공산주의 노선은 중공에서 마오쩌둥주의라고 개조되어 농민들로 이루어진 혁명 활동이 일어났다. 러시아도 같은 상태였다. 당시 러시아는 고도로 산업화 된 근대 자본주의라기보다는 제정 시대, 중상주의적 구조였다. 이로 인한 제일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브랜드의 가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여러가지 상품의 브랜드 가치는 브랜드의 가치가 낮은 상품보다 실효성이 낮아도 커버가 될 수 있다는 무궁무진한 경제적 장점이있다. 그러나 이러한 브랜드 가치가 없는 상태에서 바로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 중국은 장기간 수출력침체기를 맞게 된다. 그 예로 고도의 산업가치가 활성화 된 상태에서 공산화 된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다른 서구권과 다를 바 없는 경제성장력을 보여주었다. 스탈린 시기 부터 소련은 지나친 식량난에 시달려야했다. 그 이유는 지나친 중공업화에 있었는데, 당시 스탈린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량의 무기제조, 전차제조에 들어갔고 그 도중 식량의 자급률이 낮아져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무리한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해 집단 농장화를 추진하다, 약 700만명의 아사자를 낸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다를 바 없었는데, 김일성의 일당일파 경제발전을 하면서 지나치게 중공업을 발전시켜 당시 대한민국에 비해 경제성장력이 높았지만, 결국 아사자가 30만명이 속출하면서 고난의 행군 시기가 찾아온다. 물론 이 문제도 지나친 중공업화로 인한 식량의 자급률 문제였다. 수 많은 경제학 전문가들은 대다수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식량 외교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무역의 거래 상대국 역시 같은 이념으로하는 공산주의 국가와 타 중립국가 뿐이었다. 당시 자본주의의 맹주였던 미국과 서구권의 강대국들은 공산주의 국가의 수입수출 및 경제활동을 제재해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분배되는 자본에 비해 공산품, 기본식량의 물가가 심하게 오르면서 식량의 자급률에 문제가 생기고만다. 또한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집단 농장화를 하다가 아사자를 더욱더 발생시켰으며, 공산주의 국가에 큰 경제적 후유증을 남긴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의 평균 식량 자급률은 안정적인 자급률이라 평가되는 140%의 반인 70% 이상을 넘지 못하였으며, 당시 미국은 270%, 서구권인 스위스는 250%, 덴마크는 230%, 영국은 130%를 넘었으며 서구권의 평균 식량 자급률은 약 200%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는데 이 중 미국을 대표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필리핀, 대한민국,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등지에는 미국의 전면적 후원을 등에 업은 강력한 국가주의 정부가 들어서 반공산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국내 진보사회운동 세력들을 공권력으로 탄압하며 정치계에서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로 불리는 매카시즘 등으로 진보 진영 분열을 꾀했다. (자세한 것은 코인텔프로를 참고하라.) 이러한 반공주의는 미국에서도 극심하였다. 1950~60년대이후 미국의 공산주의 탄압은 겉으로는 공산주의자와 간첩 추방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뉴딜정책 관련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힘없게 하려는 미국 공화당의 정치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정부는 지적 반공주의 그러니까 반공주의 지식인들의 활동을 CIA에서 거액보조금으로 키우는 방법으로 정치와 외교문제에 대해 자유주의 견해를 주장하는 미국내 자유주의자들의 수를 급감시키기도 했다. 매카시 광풍이 1954년 막을 내린 이후에도 미국 내 공산주의 탄압은 계속되어 미국 지식인 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미국 지식인사회에서 활약하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 지지자들이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출판계도 마찬가지여서 미국 출판사 편집자들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진보적 작가들의 책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출판인들은 유럽 출판계와 협동하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외면받은 작가들과 계약하는 등 공산주의 탄압으로 침체된 미국 지식인 사회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그 실례로 미국 랜덤하우스 계열사였던 판테온 출판사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P. 톰슨의《영국노동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es ), 에릭 홉스봄, E. H. 카 등의 저서, 미국 노예제도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해석한 《노예제도의 정치경제학》( The Political Economy of Slavery , 유진 제노비스 저) 등을 출판하였다. 부르주아 경제학으로부터의 비판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적 체제로서, 사람들의 근본적인 욕구 를 무시한 체제이다. 개인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음으로 인해 공산주의 체제는 낮은 생산성과 개인의 불행이 만연한 체제가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의지와 사회의 의지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완벽한 독재자"라는 언급으로 공산주의의 내적 결함을 지적한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의 비판 공산주의의 역사적 단계론은 근대주의적 사고 방식이다. 무정부주의(아나키즘)자들로부터의 비판 공산주의 이론은 레닌주의에서부터 잘못되었다. 본래 마르크스주의에서 국가 라는 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권위체임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는 국가를 절대화시켰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경제, 정치,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공산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왜곡되고 적대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한국 전쟁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한국 전쟁 발생 20년 전후로 출생한 사람들(2010년 기준으로 60대이상의 노년층)이 남북한 대립의 상황으로 인해 공산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적대적인 것과 관련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철학적 이념, 정경체제가 아닌 절대적 통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축소돼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북한의 정치 경제 권력이 김일성, 김정일 일가에 독점되는 특유의 시스템과 결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들을 거치면서 공산주의는 기성세대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반의어인 것처럼 쓰였다. (ex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이는 공산주의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며, 과거 공산주의 정부들이 민주적이지 않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댓말이 아니라 개념에 담긴 것으로 볼 때는 민주주의가 포함된 개념이며 인민민주주의 독재 가 그것이다. 그 실례로 옛 동독의 정식국명은 독일민주공화국(DDR)였으며, 북한의 정식국명은 실제 민주주의의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라는 북한의 정치 시스템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대한민국의 군인 대통령 시대를 지나 사회가 선진국식 민주화와 전지구적 시장경제로 점차 진행되고 냉전이 종료된 뒤는 공산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는 상당히 없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보수나 진보를 떠나서 부족한 편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당재산제를 주장하지 않으며, 대신에 생산수단의 사회화 즉, 생산수단이 공유되는 사회 체제를 주장하며, 국가 체제의 소멸도 주장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원하는 공산주의 사회란 현대 사회로 따지면 국가의 권력은 최소화되고 노동자 협동조합체가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각자의 사유재산권은 보장된 사회이다. 좀더 강권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인 소비에트 체제에서는 특정 작업장이 목표 생산량에 연속적으로 도달하지 못하면, 징계 처분을 내렸으며, 목표 생산량을 훨씬 넘는 생산력을 보여주었으면, 여러 소소한 특혜도 있었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주장은 다소 왜곡된 주장이다. 즉 "일을 정해진 수준 만큼 하지 않을 경우 엄벌을 받으며 일을 정해진 수준 이상을 할 경우 자신이 초과 달성한 업무량에 비해서 거의 제대로 특혜를 받기 힘들었다."가 정확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포함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노동에 있어서는 강제성을 띄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 자체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 를 내걸지만 개인의 잉여재산을 축적하는 행위는 금했기 때문에 사실상 필요한 만큼만 받을 수 있었고 항상 모든 자원이 집중되는 당에 기대어서 당에 자신의 자유를 종속당함으로써 개인적 차원에서 독립은 있을 수가 없었다. 카를 마르크스 공산주의 이론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인물.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와 공동 작업.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비폭력적 사회주의를 최초로 주창한 인물. 블라디미르 레닌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인물. 베니토 무솔리니 사회주의자였으나 1919년을 기점으로 우경화됨. 파시즘의 창시자. 레온 트로츠키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 주도. 이오시프 스탈린 레닌의 뒤를 이어 소련의 지도자가 됨. 좌파 파시즘의 대표적인 사례.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의 시기에 자극을 받아 독일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함. 그러나, 레닌주의에는 부정적인 정통 마르크스주의 안토니오 그람시 러시아 혁명의 시기에 이탈리아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함.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을 주도함. 에르네르토 체 게바라 남아메리카 대륙의 전설적인 공산주의 혁명가 라울 카스트로 쿠바 공산당의 1세대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 동독의 지도자. 천두슈 중국 초기 공산주의자,지도자 리다자오 중국의 초기 공산주의자,지도자 취추바이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왕밍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리리싼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장궈타오 중국 공산당의 전쟁 군인, 지도자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최초 주석, 문화혁명 총지휘자. 장춘차오 문화혁명 지도자. 왕훙원 문화혁명 지도자 야오원위안 문화혁명 지도자 폴 포트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군벌 지도자.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지도자. 박헌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주석, 조선 공산주의 혁명을 주도한 인물 호찌민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 수파누봉 라오스의 공산주의 혁명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의 정치인. 황장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체사상 창시자.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두 번째 지도자.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세 번째 지도자. 좌익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반공주의 냉전 체제 좌파 민족주의 적색파시즘 주체사상 종북주의 북한식 사회주의 무신론 유물론 변증법 러시아 혁명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비공산주의 좌파 하우스키퍼 블라디미르 레닌 칼 마르크스,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 1844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1845 칼 마르크스, 《공산당선언》, 1848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 1867 칼 마르크스, 《고타강령비판》, 1875 프리드리히 엥겔스, 《반듀링론》, 1878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1883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1884 블라디미르 레닌,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 1894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1899 블라디미르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1902 블라디미르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가지 전술》, 1905 블라디미르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908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로자 룩셈부르크, 《자본축적론》, 1917 블라디미르 레닌,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1986(국내 출판), 1917 블라디미르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 레닌주의의 제문제》, 1935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거름, 1999(국내 출판), 1936 레온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국내 출판), 1936 마오쩌둥, 《신민주주의론》, 1940 앨릭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책갈피, 1994(국내 출판) 존 몰리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책갈피, 2005(국내 출판)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 2004(국내 출판) 크리스 하먼, 에르네스트 만델 등,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풀무질, 1995(국내 출판) 분류:경제 이념 분류:사회 이론 분류:정치 이념 분류:철학 이론 분류:혁명 분류:사회주의 분류:평등주의 분류:인문주의 분류:마르크스주의 분류:카를 마르크스 |
이탈리아 공화국 (, 약자 IT, ITA, , 음역어 이태리(伊太利))은 남유럽의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의 두 섬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로 이루어진 단일 의회 공화국이다. 북쪽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또 주변 바다로는 동쪽의 아드리아 해, 남쪽의 이오니아 해, 서쪽의 티레니아 해와 리구리아 해로 둘러싸여 있다. 이탈리아 영토 안쪽에는 위요지 국가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이 접하여 있으며, 스위스 영토 안쪽에 이탈리아의 월경지 영토인 캄피오네디탈리아가 있다. 국토 면적은 301,340 km²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 60,200,000여 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로마를 비롯하여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등이 있다.유명한 폼페이도 이탈리아에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 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옛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등 게르마니아 부족과 몽골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타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등)과 도시국가들(베네치아 공화국 등)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리소르지멘토"라는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19세기 말부터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는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어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로도스 섬, 도데카니사 제도, 중국 톈진까지 지배하였다. 원래 군주제 국가였으나(이탈리아 왕국) 1946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 공동체(EC)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 연합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99년에 유로화를 채택하였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는 민주 공화국이며,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서 삶의 질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이 나라는 높은 생활 수준을 구가하며, 2010년 인간 개발 지수는 24위였다. G8과 G20 소속이며, 2011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 8위이다. 이탈리아는 오늘날 유럽 연합의 창립 회원국으로, 1957년 로마 조약이 체결된 나라이기도 하며,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원년 회원국이다. 그 밖에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와 세계 무역 기구(WTO), 유럽 평의회, 서유럽 연합의 일원이다. 이탈리아의 군비 지출은 세계 8위이며,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핵 공유에 참여하고 있다. 이탈리아(특히 로마)는 정치와 문화 면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데, 식량 농업 기구(FAO),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세계 식량 계획(WFP)의 본부가 이 곳에 위치한다.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와 더불어 유럽의 정치, 사회, 군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주요 지역 강국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높은 교육 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한 세계화된 나라이며, 2009년 국가 브랜드 순위에서 6위를 차지하였다. 또 이탈리아의 기대 수명은 뉴질랜드와 버뮤다 다음 세계 19위로 길다. 또 관광 대국인 이탈리아는 해외에서 4,370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5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나라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데서(44곳) 보여주듯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대졸자 초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3,000유로이다.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of Italy (1861-1946).svg|섬네일|왼쪽|150px|이탈리아 왕국의 국기. 중앙에 사보이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다. 이 문장은 1946년에 폐지되어, 오늘날의 국기로 재탄생했다. 이탈리아의 역사는 지중해 지역 전체의 문화·사회 발달에 끼친 영향을 볼 때 그 중요성이 크다. 이탈리아는 선사 시대에도 중요한 인간 활동의 무대여서 라치오주, 토스카나, 움브리아, 바실리카타 지역 등 곳곳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와 에트루리아 시대, 특히 여러 세기에 걸쳐 지중해 지역을 지배한 로마 제국은 세계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 제국 후에는 중세의 인본주의와 르네상스(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등이 활동했다)가 유럽의 철학과 예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근대 이탈리아는 민족국가로의 발전이 늦어졌는데, 1861년 3월 17일에야 반도 본토의 나라들과 양(兩) 시칠리아 가 당시 피에몬테와 사르데냐 왕이던 사보이 왕가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지배 아래 통일되었다(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은 총리였던 카보우르였다. 로마는 그 후에도 교황령에 계속 남아 있다가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현재 바티칸 시국은 산마리노와 함께 이탈리아에 완전히 둘러싸인 독립 국가이다. 1883년에 아프리카에 진출,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1896년에는 에티오피아와 교전하였으나 실패, 에티오피아의 주권을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포했으나, 1915년에 연합국에 가담했다.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티롤지방을 비롯한 아주 일부지역만 얻었을뿐 큰 소득은 얻지 못했다. 국내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싸움이 빈번하였으며, 이에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위한 계급투쟁을 벌였다. 실례로 1919년 3월에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에서 노동자의 공장 운영, 거리투쟁, 생산리 등의 강력한 행동이 개시되었는데, 이는 남부 농업지역에도 파급되어 노동자층의 계급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민중들의 단결을 두려워한 지주, 군벌 등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하며 국가주의를 내세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지지하였다. 1922년 집권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재정부는 1936년, 에티오피아와 교전하여 승리, 5년동안 이탈리아 영토로 편입했다. 나중에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독일과 일본과 동맹을 맺었으나 이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에 패전했다. 1946년 6월 2일 국민 투표를 통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새 헌법에 따라 엔리코 데 니콜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첫 선거에서 루이지 에이나우디가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전쟁시 대한민국에 의료인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55년 조바니 그론키가 후임으로 선출되었고, 1962년 안토니오 세니가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세니는 병으로 인해 2년만에 사임, 이탈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그 해에 주세페 사라가트가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71년 조바니 레오네가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록히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레오네는 퇴임을 얼마 앞두고 조기 사임하였다. 1978년 산드로 페르티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첫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하였고 7년 뒤 프란체스코 코시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페르티니 정권 시절 알도 모로 총리가 살해되고 바티칸 시국의 교황이 급사하는 등의 혼란이 일어났고, 코시가 정권 역시 공산당이 비난을 받는 등 혼란에 시달렸다. 그런가 하면 1992년 출범한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정권은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 주로 힘썼다. 이탈리아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연합의 원년 회원으로 서유럽의 정치·경제적 통일에 동참하였으며 1999년에는 유로를 통화로 도입하였다. 그 해에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2006년 조르조 나폴리타노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 헌법 상 재임은 금지되어 있으나, 2013년 대선에는 후보자가 나오지 않아 나폴리타노가 자동으로 2번째 임기를 수행하게 되어, 이탈리아의 최장기 집권 대통령 및 유일하게 재선한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2015년 1월 14일 사임하였고, 후에 대선에서 헌법재판관 출신의 세르조 마타렐라가 당선되었다. 2006년 이후 징병제를 없애고 모병제를 실시한다. 국방예산(국방비)이 감축되었다. 이탈리아의 행정 구역. 이탈리아는 20개의 주(regione)로 구성되어 있다. 라치오주 롬바르디아주 리구리아주 마르케주 몰리세주 바실리카타주 발레다오스타주 베네토주 사르데냐주 시칠리아주 아브루초주 에밀리아로마냐주 움브리아주 칼라브리아주 캄파니아주 토스카나주 트렌티노알토아디제주 풀리아주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 피에몬테주 이탈리아 영토의 대부분은 지중해에 뻗은 커다란 반도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주변 바다를 몇 구역으로 나눈다. 북동쪽으로는 아드리아 해, 남동쪽으로는 이오니아 해, 남서쪽으로는 티레니아 해, 북서쪽으로는 리구리아 해를 형성한다. 이탈리아 반도의 등뼈에 해당하는 아펜니노 산맥은 북서쪽에서 알프스 산맥과 맞닿는다. 알프스 산맥은 곡선을 그리며 이탈리아의 북쪽 경계를 형성한다. 이 지역에는 충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포-베네치아 평원이 있어 물은 포 강과 알프스 산맥, 아펜니노 산맥, 돌로미티 산맥 등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지류로 흘러든다. 포 강 외에 잘 알려진 강에는 테베레 강, 아디제 강, 아르노 강 등이 있다. 몽블랑 산 해발 4,810m의 몽블랑 산(이탈리아어로 몬테 비앙코)이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산은 나폴리 근처의 휴화산 베수비오 산과 시칠리아의 활화산 에트나 산 이 두 화산이다. 이탈리아의 경제는 다양화된 산업 경제로 프랑스, 영국과 총생산과 1인당 생산이 비슷하다. 지역에 따른 경제격차가 큰 편으로, 산업화되고 사유 기업 중심인 북부와 농업 중심으로 발전이 덜 되고 실업률이 20%에 달하는 남부 사이의 불균형을 아직까지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서유럽의 인근 나라들과 비교할 때 중소 기업의 수가 많다. 산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원자재와 에너지 필요량의 75%는 수입에 의존한다. 지난 10년간 이탈리아는 유럽경제통화연맹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긴축된 재정 정책을 편 결과 낮은 이율과 물가 상승률에 힘입어 1999년 유로화의 첫 도입 당시부터 이탈리아 역시 유로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제 실적은 다른 EU 나라들에 비해 뒤떨어진다. 현 정부는 다수의 단기 개혁을 시도해 경쟁력을 높이고 장기 성장을 도모하려 하나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지하는 구조적 개혁, 즉 높은 세율을 낮추는 것, 경직된 노동 시장과 높은 비용이 드는 연금 제도를 재정비하는 것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불경기와 노동 조합들의 반대 때문이다. 농업은 올리브, 포도, 토마토, 밀, 쌀 등의 생산으로 발달하였으며, 포도주의 생산은 프랑스와 맞붙는 편이다. 공업은 북부의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 등지를 중심으로 기계, 자동차, 섬유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가난하던 남부에서도 최근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포 강 유역에는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이다. 이탈리아 볼로냐와 에밀리아로마냐주(州)는 협동조합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기독공보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제일 발전이 더딘 도시였던 볼로냐와 에밀리아로마냐주(州)는 협동조합 운동으로써 주민들이 높은 소득을 얻고 있으며, 실업률이 낮다. 2013년 기준으로 에밀리아로마냐주(州)와 볼로냐의 협동조합은 8천여개, 4백여개이다. 노동자 임금이 에밀리아로마냐 주는 4만 유로(원화로 약 6천만 원)이고, 볼로냐는 이탈리아 평균 임금의 2배에 가깝다. 실업률은 볼로냐는 3.1%인데, 사회복지학자들은 실업률이 2퍼센트 내외라면 완전고용이라고 생각하므로 협동조합이 발전된 지역은 고용이 매우 안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탈리아는 언어와 종교 면에서는 동질적인데 비해 문화·경제·정치 면에서는 다양하다. 이탈리아의 인구밀도는 1km2당 196명으로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 소수집단도 있는데 가장 큰 소수집단은 남티롤의 독일어 사용 인구(1991년 통계 28만 7503명이 독일어 사용, 11만 6914명이 이탈리아어 사용)와 트리에스테와 그 근교의 슬로베니아어 사용 인구이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12년 현재 (세계은행 추정) 1.40명이다. 합계 출산율은 1995년 1.18로 바닥을 친 이래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라틴계인 이탈리아인이 주류를 형성하는 국가다. 하지만 북부, 중부, 남부에 따라 인종이 달라지는 편이다. 북부에 갈수록 장신, 금발, 푸른 눈동자의 인종이 많이 보이고, 남부로 갈수록 단신, 짙은 머리털에 검은 눈동자의 인종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남부에서 북부로 일거리를 찾으러 많은 이주민들이 늘어나 모두 섞인 편이다. 또 소수 민족으로 유대인과 국경지역에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슬로베니아인이 살고 있다. and Campanary - Pisa 2014 (2).JPG|섬네일|250px|오른쪽|피사의 사탑 주세페 베르디 이탈리아는 문화 예술과 수많은 기념물들로 잘 알려져 있다. 피사의 사탑과 로마의 콜로세움 등의 역사적 건축물과 이탈리아 음식(피자, 파스타 등), 포도주, 생활 양식, 우아함, 디자인, 영화, 연극, 문학, 시, 미술, 음악(특히 오페라), 관광 등은 이탈리아를 세계적 문화국가로 만들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도시들이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는 14세기와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페트라르카, 토르콰토 타소,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시와 조반니 보카치오, 니콜로 마키아벨리,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산문은 서양 문화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티, 산드로 보티첼리, 프라 안젤리코, 미켈란젤로 등의 거장들을 배출한 회화와 조각, 건축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대 미술가로는 조각가 톰마소 제라치가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몬테베르디, 팔레스트리나 비발디 등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19세기에는 조아키노 로시니, 주세페 베르디, 자코모 푸치니 등의 작곡가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오페라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현대의 이탈리아 미술가들과 작가, 영화감독, 건축가, 작곡가, 디자이너 등도 오늘날 서양 문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 종목은 단연 축구로 이탈리아인들의 축구에 대한 광적인 열정은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는 1934년, 1938년, 1982년, 그리고 최근의 2006년 네 차례에 걸쳐 FIFA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또한 현재까지 굵직한 국제대회에서 단 한 번도 독일에게 패한 적이 없다. 이 나라는 월드컵에서 남·북한에게 모두 패배한 적이 있었다. 이밖에 농구와 배구,핸드볼도 인기 있으며 이탈리아 북부와 지방 항구도시에서는 세계2차대전 당시 미군의 영향으로 야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이탈리아의 성악가 체칠리아 바르톨리, 안드레아 보첼리, 루치아노 파바로티, 레나타 테발디 등이 이탈리아를 빛내고 있다. 이탈리아인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이탈리아 전체 인구는 5,7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축구협회에 가입된 클럽은 대개 2만개 가량이 되고 선수는 무려 11만 명에 이른다. 이탈리아는 영국으로부터 대략 19세기 말쯤 축구를 받아들였는데 영국과 독일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 4대 축구 강국으로 불린다. 전국에서 뽑힌 18개 팀이 맞붙은 세리에(Serie) A 경기가 열리는 날은 이탈리아 전체가 용광로처럼 들 끓게 된다. 이탈리아의 축구는 팬들에게 짜릿한 감동과 흥분, 즉 창조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고, 클럽과 시, 정부, 기업에게 막대한 재원을 안겨준다. 이탈리아의 진정 굴뚝 없는 산업은 축구로서 국민적인 비즈니스로 정착했다. 축구 이외에 전국적인 인기를 모으는 스포츠로는 자전거 경주가 있다. 유명한 자전거 경주인 지로 디탈리아 (Giro d Italia) 나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에서 이탈리아 선수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따라 달리곤 한다. 이탈리아는 체육수업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수영이나 펜싱은 물론 조정과 사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챔피언과 올림픽 챔피언을 적지 않게 배출했으며, 선수들 모두 스포츠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 옛 로마 제국 때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지게 된 까닭에 수도인 로마 시를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압도적인 강세에 있으며, 이탈리아의 역사 자체도 교회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해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1929년부터 1978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인 국교였으며, 현재에도 국민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이다. 현재는 국교가 없고,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므로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믿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소수이지만 다른 기독교 종파인 개신교 등도 존재한다. 또한 이민자들에 의하여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종교도 존재한다. 이탈리아 기행(지은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 의회 홈페이지 주한이탈리아대사관 분류:이탈리아어권 분류:G7 회원국 분류:G8 회원국 분류:G20 회원국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유럽 연합 회원국 분류:유럽 평의회 회원국 분류: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분류:경제 협력 개발 기구 회원국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 약칭 소비에트 연방 () 또는 소련 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소련은 대영제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면적이 넓었던 국가였다. 소련의 영토 면적은 22,402,200 km² 였다. 지구의 전체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덮는 이 면적은 북아메리카 전체에 비견할 만하였다. 유럽 부분은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였고, 이 부분은 소련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었다. 동쪽의 영토는 태평양에 닿고,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마주 하고 있었다. 아시아 부분의 인구는 유럽 부분 보다 적었다. 소련의 영토는 동서로 1만 킬로미터에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으며, 4개의 기후대(한대 기후, 냉대 기후, 온대 기후, 건조 기후)가 걸쳐 있었다.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길어 약 6만 킬로미터에 달하였다. 국경선의 길이 중 3분의 2는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이란, 몽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와 접하였다. 해상 국경으로는 베링 해협으로 미국의 알래스카와 마주보고 있었으며 소야 해협을 두고 일본의 홋카이도와 접해 있었으며, 북극해를 두고 덴마크의 그린란드 및 캐나다와 접했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 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하여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 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 전쟁이 발발하였다. 소련은 1945년 5월 9일 독소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45년 8월 대일전에 참전하여 승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과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은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1986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의 경제를 중흥시키려 하였다.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소련 국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노동자-농민 평의회 를 뜻한다. 노동자, 농민, 군인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한다. 작게는 각 생산수단 및 소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의 최고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체제는 블라디미르 레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의 형태와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라고 밝혔다. 이러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른 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제도의 경우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 이 장기간 일당 독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가 하나의 정통적 체제 로 대변된다는 점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은 당 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진행하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폭력 을 실행하기 위한 체계화 된 조직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당 독재는 공산주의 사회에 진입한 후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소비에트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장기화했고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공산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학문적으로 보면 소련이 기준에 따라 민주주의에 들어갈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성립기와 말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소련의 국기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2:1이다. 바탕의 색은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금색의 낫과 망치는 각각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였고, 그 위의 붉은 별은 5대륙 노동자의 단결을 의미하였다. 1955년에는 낫과 망치의 모양이 기존의 크기보다 조금 작아졌으며, 1980년에는 국기 배경색이 진홍색에서 조금 연한 진홍색으로 변했다. 소련의 국장은 1923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 사용되었다. 국장 가운데에는 지구를 배경으로 금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으며 지구 아래쪽에는 떠오르는 금색 태양이, 지구 위쪽에는 빨간색 별이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밀 이삭이 감싸고 있으며 빨간색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빨간색 리본에는 소련의 표어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15개 공화국의 언어로 쓰여져 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혁명 이후 성립한 임시 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특히 독일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랄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임시 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11월 7일에 레닌의 지도 하에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외국 열강이 볼셰비키를 공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백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프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적군으로 개편했다. 적군은 외국 열강과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12월 30일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1924년 레닌의 사후 집권한 스탈린은 세계 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레프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하였고, 이후 멕시코에서 트로츠키를 살해하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Bild 183-R80329, Josef Stalin.jpg|섬네일|왼쪽|이오시프 스탈린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 레벤스라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은 중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소련과 독일은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았고 발트 3국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승리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련은 동부 독일을 점령했고 서부 독일을 점령한 프랑스, 영국, 미국과 독일을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과 전쟁을 해 승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만주국 및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였고, 외몽골과 사할린을 얻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전후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사상이라고 평가했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소련인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그리고 기존에 국교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켰고, 소련군의 명칭을 붉은 군대에서 소비에트군으로, 국가 를 국제공산당가인 인터내셔널가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면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을 깨뜨렸다. István körút a Falk Miksa (Néphadsereg) utca felől a Honvéd utca felé nézve. A szovjet csapatok ideiglenes kivonulása 1956. október 31-én. Fortepan 24787.jpg|섬네일|오른쪽|헝가리 봉기 때 부다페스트로 입성하는 소련군 (1956년)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또,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창설하여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였다. 또한, 1956년에 소련은 부다페스트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미국과는 직접적인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핵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의 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중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 Kosygin May 1972.jpg|섬네일|왼쪽|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이 양국간 과학 기술 협정 동의서에 조인하는 모습 (1972년) 1964년에 실각한 흐루쇼프에 이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후, 식료품이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다. 1968년 8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은 무력으로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다. 1979년 12월 27일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실시했지만 이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대한 서방 여러 국가들의 대량 보이콧을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되어 소련의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렀던 것뿐 아니라, 막대한 전비를 지출했기 때문에 경제를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and Gorbachev hold discussions.jpg|섬네일|오른쪽|350px|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로널드 레이건의 회담 (1985년)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4년 2월 안드로포프가 죽고 안드로포프를 승계한 콘스탄틴 체르넨코마저 1985년 3월에 죽자,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소련의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소련 공산당 1당 독재 대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고르바초프 집권 후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 국가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한 동유럽 혁명이 일어났다. 대부분은 무혈 혁명이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유혈 혁명이 일어나 1989년 12월 25일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즉석 재판에서 총살당하였다.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1989년 12월 3일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유럽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였지만 소련 영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1991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던 부시조차도 그에게 다시 폭력이 발생하면 경제 관계가 동결될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경고하였다.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소련 공산당을 해산하였지만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하였으나 막지 못하였다. 소련은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Communism.jpg|섬네일|오른쪽|300px|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있는 콤무니즘 봉, 1989년. 소련은 유럽 대륙의 동부와 아시아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였다. 그 영토의 대부분은 북위 50도 이북에 있었다. 또한 소련은 22,402,200 km² 의 면적을 차지하여 세계 제1의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그 면적은 지구의 육지 면적의 1/6에 달하였다. 소련의 거대한 영토는 한대, 아한대로부터 아열대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었다. 면적의 11%는 경작지, 16%는 초원지대, 41%는 숲, 32%는 (툰드라를 포함한) "기타"로 분류되었다. 소련 서부의 그단스크 만의 칼리닌그라드로부터 동부의 베링 해협에 있는 라트마노바 섬 사이의 거리는 1만km가 넘었으며, 소련 서부와 동부 사이의 시차는 11시간에 이르렀다. 1991년 당시, 소련은 서쪽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몽골, 북한과 육상의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소련의 최고점 콤무니즘 봉 (7,495m) 소련의 극북 북위 81˚52 (북극해) 소련의 극남 북위 35˚09 (아프가니스탄 국경) 소련은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SSR)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헌법,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인구 100만이 되지 않는 민족은 그 규모에 따라 자치 공화국(ASSR), 자치주, 자치관구를 이루었다. 그들도 독자적인 헌법과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15개의 공화국은 소련의 붕괴 이후 모두 독립한 국가가 되었다. Republics Numbered Alphabetically.png|섬네일|350px| 1.아르메니아 2.아제르바이잔 3.벨로루시 4.에스토니아 5.그루지야 6.카자흐 7.키르기스 8.라트비아 9.리투아니아 10.몰도바 11.러시아 12.타지크 13.투르크멘 14.우크라이나 15.우즈베크 소비에트 공화국 독립 국가 수도 가맹연도 모스크바 1922년 키예프 1922년 민스크 1922년 타슈켄트 1924년 아슈하바트 1924년 두샨베 1929년 예레반 1936년 바쿠 1936년 알마티 1936년 비슈케크 1936년 트빌리시 1936년 탈린 1940년 리가 1940년 빌뉴스 1940년 키시뇨프 1940년 SpasskayaTower Red Square Moscow.hires.jpg|섬네일|오른쪽|220px|모스크바 Vladivostok 20030804 118.jpg|섬네일|220px|오른쪽|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타슈켄트 민스크 츠힌발리 트빌리시 스탈린그라드 (볼고그라드) 스베르들로프스크 (예카테린부르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르스크 알마아타 (알마티) 카잔 우파 첼랴빈스크 마그니토고르스크 옴스크 톰스크 페름 쿠이비셰프 (사마라) 고리키 (니주니노브고르트) 아르항겔스크 리가 바쿠 프룬제 (비슈케크) 에리반 (예레반) 빌뉴스 탈린 아슈가바트 (아슈하바트) 두샨베 키시뇨프 (키시너우) 하리코프 심페로폴 광장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졌다.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민주집중제, 계획경제를 기초로 하는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로 불리는 체제는, 노동자, 농민 및 대중 계층이 지지하는 정당에 의한 독재 체제이며, 표현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져 일반 노동자·농민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를 공산당이 대신한 것뿐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되지 않은 체제가 되었다는 평도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은 「적색 황제」라고도 불렸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스탈린주의 하의 공산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와 동일시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마지막에 잠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탈린 시대 이래 소련의 국가 원수는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의 의장이었으나, 실권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있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이후의 서기장들은 최고 간부 회의 의장을 겸임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는 1991년 8월의 쿠데타가 3일 천하에 그친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소련 공산당을 해체하여 막을 내렸다. Khruchchev Colour (cropped).jpg|섬네일|오른쪽|220px|니키타 흐루쇼프 (1961년) CPA 4774(Cutted).jpg|섬네일|오른쪽|220px|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77년) 역대 소련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블라디미르 레닌 (1922년 ~ 1924년) 이오시프 스탈린 (1924년 ~ 1953년)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3년 3월 ~ 1953년 9월) 니키타 흐루쇼프 (1953년 ~ 1964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64년 ~ 1982년) 유리 안드로포프 (1982년 ~ 1984년)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년 ~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년 ~ 1991년) 내각은 소련 최고 집행 기관이면서 최고 회의의 휘하기관이다. 내각의 수장은 총리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한다. 역대 소련의 총리는 다음과 같다. 이오시프 스탈린 (1941년 5월 6일 ~ 1945년) 이오시프 스탈린 (1945년 ~ 1953년 3월 5일)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3년 ~ 1955년) 니콜라이 불가닌 (1955년 ~ 1958년) 니키타 흐루쇼프 (1958년 3월 27일 ~ 1964년 10월 14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년 ~ 1990년 3월) 발렌틴 파블로프 (1991년 1월 14일 ~ 1991년 8월 22일) 이반 실라예프 (1991년 9월 6일 ~ 1991년 12월 25일) 정치국 (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정식 명칭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은 소련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체의 기능을 했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간부회라고 불렸다. 1990년에 열린 제28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의 권한을 최고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정치국은 1991년 8월의 쿠데타 실패 직후에 해산되었다. 1987년까지 정치국원은 소련 공산당원만 출마할 수 있었으며, 각 지역에서 하향식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마지막 정치국원이 선출되었던 1990년 7월 14일에는 부로케비시우스, 굼바리아제, 고르바초프, 구렌코, 자소호프, 이바시코, 카리모프, 루신쉬, 마살리예프, 모프시샨, 무탈리보프, 나자르바예프, 니야조프, 폴로즈코프, 프로코피예프, 루비크스, 세묘노바, 실라리, 소콜로프, 스트로예프, 프롤로프, 셰닌, 야나예프 등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소비에트 최고 회의(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소련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법을 만들고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설 기관으로는 최고회의 간부회를 선출했으며,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 소련 국가 원수였다. 연방 회의(연방원)과 민족 회의(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회의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회의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11개 자치공화국, 5개의 자치구 및 민족관구에서 선출되었다. 1989년, 소련의 50코페이카 동전 소련은 세계 2위(1985년 GDP 2조 2천억 달러,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는 약 9,300$(1990년 기준, 세계 31위)에 달했다. 소련은 생산 노동자에 한하여 주 35시간 근로제를 채택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한하여 주 41시간 근로까지 허용했다. 경제력에 관련해서 소련은 군수산업, 산업정비기기산업 부문에서 그 규모가 세계 1위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가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1965년 이전까지는 소련의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하였으나, 1965년 이후부터는 고스플란의 역할이 축소되고, 각 생산 수단을 맡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을 했다. 192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내전은 소련 경제를 피폐화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이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제가 안정된 후 소련은 다시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용하였으며, 1930년대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여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5년 부터 지속된 계획 경제는 소련의 중앙당국 재경 간부들에게 막중한 임무를 부여했다. 이러한 중노동으로 인해 중앙경제계획당국 노동자들의 불만이 생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5년에는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공산주의적인, 경영인 위주의 단위 혼합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소련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소련은 1950년대에도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소련의 초대 대통령)는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대중차 라다(ЛАДА) 1200 군사에 투자되는 자금에 비해 국민 생활에 필요한 전자제품이나 소비재의 개발과 생산, 물류의 정비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서방의 전자제품이나 화장품, 의류 등의 소비재의 수입, 유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만 설치된 굼(GUM) 등의 외화 전용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이나 공산당 간부와 그 가족뿐이었다. 소련의 서방 수출은, 농산물이나 어패류 등의 제1차 상품, 원유나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 자원이 대부분이었다. 통화인 루블 자체도 국외에서 통화로서의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서방과의 무역수지는 대개 적자였거나 매우 적었다. 그에 비해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과의 무역은 1차 상품이나 에너지 자원은 물론, 전자제품이나 소비재, 공작기계로부터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군사 물자까지도 수출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물자가 사실상의 원조품으로서 무상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되었다. 강의 댐 건설, 1934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만들었다. 유명한 콤비나트로는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있다. 소련은 중공업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공업 생필품의 질은 서방 세계에 비해 떨어졌다. 소련은 천연가스와 석유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였다. 소련의 농업은 대부분 솝호스(Sovkhoz)와 콜호스(Kholkoz)를 통해 이루어졌다. 솝호스는 Sovetskoe khozyaistvo(소비에트 농장)의 약칭으로, 거대한 국영농장이었다. 솝호스의 농작물 생산은 정부의 계획에 따라 결정되었다. 생산하는 농작물은 수매 가격까지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 콜호스는 집단농장으로, 1928년에 시작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경작을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가 일소되었다. 농기구나 가축 등은 공유되었으며 생산물은 정부에 매각되었다. 각 개인의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 채소의 재배,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해도 되었다.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 증가에 직접 연결되는 이 자류지 재배는 집단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나타내서 취약한 소련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 국경일 날짜 한국어 이름 러시아어 이름 변경 사항 1월 1일 새해 Новый Год 2월 23일 소련군의 날 День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и Военно-Морского Флота 1918년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의 창설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Международный Женский День 5월 1일 국제 노동자의 날 Первое Мая - День Солидарности Трудящихся 5월 9일 승리의 날 День Победы 1945년 나치 독일의 항복 11월 7일 ~ 11월 8일 10월 혁명 Седьмое Ноября 1917년 10월 혁명; День Примирения이라고도 불림. Revolution celebration 1983.png|섬네일|300px|1983년 혁명 축하 군사 퍼레이드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에 원자 폭탄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현재까지 폭발한 가장 큰 폭탄이었던 차르 봄바 수소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고 많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과 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싸우는 소련군 병사, 1988년.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국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9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의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러왔다. 또한 대한항공기 격추사건과 같은 민간기 격추 사건을 일으키는 등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는 서방 여러 나라의 반발을 샀다. 또한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 자유 민주주의 진영과 대립하였으며, 동시에 회원국 내에서 일어난 반소, 반공 운동에 무력으로 개입하였다.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쿠바와 북베트남 등 공산주의 국가에 각종 무기를 수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라에 무기와 그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 등을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하여, 그들 나라의 군사 기술의 향상에 기여하였으며, 그 중에는 스파이나 테러리스트의 양성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과 소련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붉은 광장에서 미사일,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 소련은 1950년대 이후 미국과 나라의 위신을 걸고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고, 또한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 소유즈 등 일련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고,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으며, 우주 개발 이외에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를 개발하여 거대과학과 순수과학에 있어서도 소련은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소련은 항공기, 잠수함, 탱크 등의 병기공학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소련의 전투기로는 수호이, 미그를, 항공기로는 일류신, 투폴레프 등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스탈린의 오르간」이라고 불리며 독일군이 두려워한 카츄샤 로켓도 개발하였다. 또한 스텔스에도 중요한 이론적 영향을 주었으며, 테트리스 등의 컴퓨터 게임도 개발하였다. 미르 그러나 소련의 거대과학에 대한 치중은 군사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항공 우주 산업이나 중공업을 우선한 나머지 소비재의 제조가 뒷전으로 밀려 민중을 괴롭히게 되었다. 또한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 개발과 공장 건설로 인하여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일도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의 유해 물질과 방사능에 의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였다. 소련은 아카뎀고로도크 같은 과학 도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외국으로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여 과학 시설이 밀집한 일부 도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된 도시가 되었으며, 이들 도시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소련은 공산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시기인 1989년 말 이후를 제외한 모든 시기 동안 자유 노조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노조는 당에 소속이 된 상태로 운영이 되었다. 또한, 산업노동자들이 패권을 잡은 사회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능동적 노동운동보다는 정부의 생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용 노동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당은 해당 방침에 따라 공산주의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 노동자 칭호를 수여하였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알렉세이 스타하노프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목표초과달성과 노동생산성향상 노동운동이다. 소련의 헌법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검열에 의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었고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부는 유명한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후원했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명연주를 남겼다.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 소속된 볼쇼이 발레단과 레닌그라드의 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된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인정받는다. 고르바초프 시대 이후에는 대중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소련의 영화 소련의 체스 소련의 춤 소련의 음악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blocks, Liepaja.jpg|250px|오른쪽|섬네일|소련 주거정책의 상징인 흐루숍카 아파트 소련 성립 당시 초기의 연당 평균 실업률은 0.7 ~ 1.3% 였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는 0.1% 미만의 실업률을 기록했다. 노동 복지는 당시 자본주의 선진국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일례로,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세계 최초로 외국인노동자차별금지법, 아동노동금지법, 양성평등고용법 등을 명문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법들이 실질적으로 실행되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명문화 했다. 또한 법적으로 지정된 공휴일과는 별도로 각 산업지마다 약 연평균 25일의 휴일을 주었다. 1917년 11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유럽 최초로 일 8시간, 주 48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일 10시간 내지는 일 14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던 유럽 국가들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내전기에서 1930년대 후반까지 이러한 것들이 소련 내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961년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주 41시간 근무제로 노동법이 수정되었으며, 1968년에는 주 35시간 근로제로 바뀌었다. 또한 해고 과정이 매우 까다로워, 해고율이 매우 낮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고성장을 해온 소련 경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선 본격적인 복지 제도가 실시된 것이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엔 지식·문화·예술에 관련된 복지 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다. 각 공동체엔 문화예술 시설과 도서 시설이 들어섰다. 이 당시 소련은 서적 출판율이 세계 1위에 달할 만큼 높았으며, 독서량은 1960년대에 들어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빈부의 차 없이 거의 모든 계층이 문화·예술 활동을 하거나 또는 감상할 수 있었다. 소규모 교육 제도도 발달하여, 추가 교육을 받고싶은 노동계급은 여유 시간을 내서 학점을 이수해 추가적인 학력증진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이는 모두 무상이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는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0년까지 대부분 이어졌다. 교육, 의료, 주거 등 여러가지를 보장해주는 사회적 임금이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주거 복지의 경우는 1950년대 후반부터 짓기 시작한 호당 평균 18평 짜리 5 ~ 7층(층당 평균 8호) 패널형 아파트인 흐루쇼프카로 해결했으며 이 아파트들은 무상배당되었다. 식량의 경우는 러시아 소비에트 시절인 1918년부터 각 소행정단위마다 존재하는 식량 배급소에서 일정 식량을 배급했다. 이러한 배급은 1921년 신경제정책을 도입하면서부터 다시 폐지되었고, 1929년에는 식량배급제가 다시 부활했다. 1935년에는 식량 분배 수위를 국가가 조절할 필요가 사라지면서 다시 폐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부활하여 1940년대 후반까지 시행되었다. 소련은 1947년부터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내걸지 않았지만, 의류, 옥수수, 비누와 같은 생필품의 경우는 배급으로 분배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러한 정책은 소련이 붕괴하는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1988년까지는 이러한 복지 시스템이 어느정도 유지가 되었지만, 몰타 회담 이후 소련은 시장경제 제도를 급진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가지 사회적 복지 혜택이 많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공산주의적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국가가 되었다. soviet pupils.jpg|섬네일|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한 소련 학생들, 1985년. 러시아 제국의 교육은 무료가 아니었으며, 하층 계급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여기에 러시아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는 학교 교육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1914년 어린이의 91%가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나, 1920년 24.9%에 불과했다. 따라서 1926년까지도 교육 개선은 지지부진했으나 이 시점부터 개선이 시작되었다. 1923년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 의무교육이 시작되었고, 소련의 교육 위원회 초대 위원장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문맹 퇴치를 위하여 글을 아는 사람들을 채용하여 글을 가르쳤다. 1937년 센서스에 따르면 문자해독율은 75%로 상승했다. 소련이 몰락하기 직전, 의무교육은 11년제(초등학교 4년, 중학교 7년)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종합대학은 5년제, 단과대학은 4 ~ 6년제였다. 1981년부터 10학년(발트 국가들은 11학년)까지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고, 모든 학교는 정부가 관리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의료 서비스와 국민 건강 상태는 매우 뒤쳐진 상태였다. 혁명 이후 1918년에 정부는 "의료는 국가의 관리 하에 둘 것이고, 의료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제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명 이후 소련의 평균 수명은 증가하였다. 그러나 1964년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이 64.89세의 정점에 도달한 이후 다시 하락하기 시작하여 1984년 61.7세까지 떨어졌으며, 소련이 멸망할 때까지 정점의 수준을 끝내 회복할 수 없었다. 소련의 스포츠는 모두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고 자유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운동선수가 프로모터가 기획하는 운동 경기에서 나감으로써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이윤을 얻는 상업적 스포츠(프로 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소련은 국위 선양을 위해 스포츠, 특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소련은 국가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으로 선수를 육성했고, 소련의 운동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소련은 축구, 농구, 배구, 하키, 아이스하키, 기계 체조 강국이었다. 소련이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소련은 스포츠 강국 동독과 미국을 크게 앞서며 55개의 금메달로 압도적인 1위를 하였다. 1980년 소련은 1980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공산 진영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하였다(표면상의 불참사유는 선수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는 것). 이 두 올림픽을 두고 "반쪽 대회"라고 한다. 소련은 월드컵에 7회 출전했으며, 1966년에는 4위를 차지했다. 또한 1956년과 1988년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공산 청년 동맹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의 신문이 유명했고 특히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22,000,000부가 넘는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통신사는 1925년에 창설된 국영 타스통신이 있었다. 대외 방송은 1922년 창설된 모스크바 라디오가 있었다. 소련인은 외국의 방송을 듣는 것이 금지되었고,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보도기관에 대해서는 소련 공산당이 완벽하게 보도 관제를 했다. 이것은 외국의 큰 뉴스나 체르노빌 사고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은 큰 사건으로부터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 당간부의 숙청이나 지하철 사고, 탄광 사고와 같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 위해가 되는 보도는 일절 불가능했으며, 만약 보도되어도 정부와 당에 유리하도록 왜곡되었다. 서방 언론의 특파원은 기본적으로 국내를 자유롭게 취재, 보도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 사전에 신청이 필요했다. 또한 취재처의 선택 및 일정은 모두 준비 된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등의 국제적 이벤트나, 외국의 수뇌진이 공식 방문을 할 때 소련을 방문한 보도진에게는 준비된 취재 스케줄이 반드시 제공되었다. 서방의 보도기관에서 일하는 소련인 종업원 역시 당국이 선택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보도기관이나 그 특파원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해야만 하였다. 소련의 인구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 구성을 보였다. 그 국경 내에 15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소련의 인구는 1990년 291,000,000명으로 중국, 인도에 이어 당시 세계 제3위였다. 다수를 이루는 민족은 러시아인(50.78%)이고, 다음은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의 순이었다. 그 이외에도 벨라루스인(3.51%), 카자흐인(2.85%), 아제르바이잔인(2.38%), 아르메니아인(1.62%), 타지크인(1.48%), 조지아인(1.39%), 몰도바인(1.17%), 리투아니아인(1.07%), 투르크멘인(0.95%), 키르기스인(0.89%), 라트비아인(0.51%), 에스토니아인(0.36%), 기타(9.75% 타타르인, 체첸인, 독일인, 야쿠트인, 바슈키르인, 유대인, 헝가리인 등)등의 민족이 있었다.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낮았던 데 비해, 캅카스 3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과 몰도바에서는 높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차차 낮아져 갔다. 공식적 언어는 없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면서 주로 사용되었다. 소련 외무부 청사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맹주였으며,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 이외에도 중남미(쿠바), 중동(남예멘), 아프리카(앙골라, 모잠비크 등), 동아시아 등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과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소련은 유엔의 원년(元年) 회원국이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었다. 이들 위성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위성 국가가 된 몽골은 제외).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알바니아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대한민국(남한)과 소련의 관계는 북한의 수립을 소련이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것과 특히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소련의 역할 때문에 출발부터 적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한국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고 중국과 함께 정전 회담에 참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다.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점차 누그러져 갔으나, 1978년 4월 21일 대한항공의 보잉 707기가 무르만스크 인근에 강제 착륙당한 사건과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 벌어졌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차츰 해빙되었다.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였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1990년 6월 대한민국-소련 정상 회담이 열렸으며, 1990년 10월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에로플로트가 대한민국에 취항하였다. 공산국가들의 맹주였던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미국과는 냉전 이라고 하는 형태로 대립해, 1950년대의 한국 전쟁이나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 등, 대리 전쟁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형태의 군사적 대립을 하고 있었지만, 전면적인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쌍방의 억제력이 되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봉쇄나 쿠바 위기 등에서는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의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영공을 침범한 미군기의 격추 등 한정적인 군사적 대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대립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국교가 끊어진 적은 없고, 쌍방의 수도에 대한 민간기의 노선연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건이 있었을 때에는, 「제재 조치」로서 민간기의 노선연장이 시한적으로 제한되거나 스파이 사건 등이 표면화되어, 한쪽의 외교관이 국외 추방되면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다른 한쪽 국가의 외교관을 맞받아 국외 추방하는 등의 외교적 술책을 하고 있었다. 일본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만주국과의 국경에서 종종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노몬한 사건 등). 1941년 4월에 소-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945년 8월 8일에 소련은 이것을 일방적 파기,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또한 일본인 포로를 오랫동안 강제 노동 수용소에 구류했다. 그 후, 1956년에 소-일 공동 선언을 통해 국교가 회복했지만,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인데다가 쿠릴 열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 냉전이 종결되었다. 국공 내전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당초에는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관계가 악화되어 1960년대에는 국경 분쟁이나 사상적인 대립의 문제로 말미암아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했다. 양국간의 이와 같은 대립관계는 그 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출국은 망명과 외화 유출을 막는 것을 주된 이유로 당국의 허가가 없는 한 출국은 불가능했다. 또, 자유 진영 국민과의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위성국 국민과의 결혼조차도 소련 당국으로부터 다양한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외국 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이나 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악단 등에는, 승무원이나 악단원의 망명을 저지하고 서방 언론 노출을 감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산당의 정치장교가 동행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신을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 라는 레닌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자료에 따르면 소련 국민의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대다수는 기독교 및 이슬람교(대부분 수니파, 아제르바이잔인은 시아파)를 신봉하였다. 소수의 유대교, 불교, 라마교, 샤머니즘 신자도 있었다.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가 다수이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도 존재했으며, 개신교는 침례교,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의 교파들이 있었다. 소련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중범죄자에 대해 재판 과정없이 총살형을 시행하는 국가였으며, 범죄에 대한 처벌이 매우 강한 나라 중 하나였다. 또한 사회보장정책이 광범위하게 보장되는 소련 사회에서 자연인이 범죄인으로 되는 일은 드물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소련 사회는 범죄율이 매우 낮고, 치안이 강한 사회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1987년부터 고르바초프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정부 통제력에 상당한 손실이 왔고, 그 결과 치안력이 약해져 범죄 문제에 시시각각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소련 말기에 일어난 범죄율 급증의 이유로 고르바초프의 개혁주의 정책으로 인한 범죄 통제력 약화와, 시장 경제 정책으로 인해 나타난 빈부격차, 사회 불안정을 든다. 1989년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수목적대 를 설립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0년에 이르러서 소련 내의 범죄는 중앙정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났다. 프로파간다는 소련이 국민들의 공산주의적 애국심을 키우기 위하여서 만든 일종의 이벤트다. 프로파간다를 위하여 소련은 포스터, 라디오, 책, 미술 등을 이용했다. 소련의 프로파간다, 특히 레닌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선구적인 것으로, 몽타주 이론이나 전위파 등이 그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미하일 고르바초프 게오르기 말렌코프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코시긴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키릴 메레츠코프 니콜라이 불가닌 미하일 투하쳅스키 게오르기 주코프 세묜 티모셴코 안드레이 그로미코 유리 가가린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소련의 역사 소련의 지도자 소련의 군사 소련의 경제 냉전 군비 경쟁 핵 군비 경쟁 우주 경쟁 우주 탐사 크렘린 국가보안위원회 소련 공산당 공산주의 사회주의 레닌의 이름이 붙은 장소 스타하노프 운동 문화 궁전 독립 국가 연합 콤소몰 피오네르 The Soviet Union 분류:유럽의 옛 나라 분류:아시아의 옛 나라 분류:공산주의 국가 분류:유엔의 옛 회원국 분류:러시아어권 분류:슬라브어권 분류:무신론 국가 분류:냉전기의 정체 분류:1922년 설립 분류:1991년 폐지 |
김재규 (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전국구),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이며 호는 덕산(德山)이다. 국가유공자 대상 명단에 올라가며 범죄자 누명 벗고 사면 복권예정이다. 열사 칭호 부여. 대통령과 대통령경호실장 사살(10·26 사건) 혐의로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되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 바로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사면 예정이며 사면이후 유족에게 국가유공자 지정하여 예우 받고 유족연금 지급 예정. 국립묘지에 안장시킬 예정이다. 안동고등농림학교 졸업 대구농업전문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2기 육군대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과 졸업 (공학석사) 박정희의 동향(경상북도 구미)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이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였다. 1952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3년 부터 1973년 까지는 보병제6사단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다. 이후 군사정권 치하에서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 1973년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의 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해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는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빈번한 소요사태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979년 8월 11일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YH貿易 女工 籠城 事件),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마사태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을 수습하면서,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시국 수습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徹) 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차지철과 그를 옹호하는 박정희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주프랑스 공사 이상열(李相悅)을 매수하여 1979년 10월 7일 전(前)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을 유인 살해하도록 유도한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및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연회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시해, 10.26 사태를 일으키고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경기도 포천소제에 있는 사단 본부 박물간에 역대 사단장 사진이 있는데 그중에 이분 사진만 제거가 되어있다 (이사건 때문에 사진이 철거가 되었다)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알려진 정설은 박정희의 무조건적인 차지철 신임과, 그로 인한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 때문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것이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 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2005년 5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1979년 9월 말 이전,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은 중앙정보부 연수생 2명을 적임자로 선정하였다. 연수생 A는 제3국인 2명에게 살인 청부를 하여 이들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승용차로 김형욱을 납치해 파리 근교로 끌고갔고, 제3국인이 권총으로 김형욱을 살해한 뒤 낙옆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연수생 B는 제3국인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를 지급하였다. 관저에서 연수생 A로부터 결과를 보고받은 이상열은 증거를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고, 귀국한 A는 1979년 10월 13일 경 김재규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결과를 보고 받은 김재규는 A를 중앙정보부장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로 발령하고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 두개씩을 지급하며 살해에 가담한 B와 나눠 갖도록 했다.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으며,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 와 같은 주장도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을 계기로 재평가 목소리가 커졌다. 사람들이 김재규 묘소를 방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알리는 신문들과 꽃다발, 시바스 리갈 등 술병 등을 놓고 갔다고 한다. 또한 명예회복 사업을 하기 위해 1000만원 모금운동을 한 모 포털사이트의 스토리펀딩은 2017년 1월 모금에 성공했다. 김재규 관련 책들도 국정농단 사태 이후 판매량이 18배 이상 올랐고, 온라인에서는 김재규 사진이 담긴 옷이 판매되고, 이 수익금으로 흉상을 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10.26 탕탕절 이라고 문재인 정부에서 공식 국가기념일로 지정 예정이며 국기 계양및 국가 공휴일로 지정 예정. 국가보훈처에서 10월 26일을 탕탕절 또는 민주화기념절로 칭호하여 국가기념일 승격. 충무무공훈장,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천수장·삼일장·국선장·광복장·통일장과 킹압둘아지즈훈장(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받았다. 아버지 김형철 (? ~ ?) 어머니 권유금 (1905년 ~ 1999년) 아내 김영희 (1930년 ~ ) 남동생 김항규 (1929년 ~ 1997년) 누이동생 김재선 (1933년 ~) 누이동생 김재숙 (1935년 ~ ) 누이동생 김단희 (1943년 ~ ) 매제 오수춘 (1937년 서울 출생. 육군사관학교 16기 및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1973년 육군 제3군단 부참모장 재직시 대한민국 육군 중령 예편. 김단희의 부군.) 누이동생 김순희 (1946년 ~ ) 남동생 김영규 (1951년 ~ ) 김동현 - 1993년 (제3공화국) MBC 드라마 김흥기 - 1995년 (코리아게이트) SBS 드라마 박근형 - 1995년 (제4공화국) MBC 드라마 김흥기 - 1998년 (삼김시대) (SBS) 드라마 박용수 - 2004년 (효자동 이발사) 청어람 영화 김형일 - 2005년 (제5공화국) MBC 드라마 백윤식 - 2005년 (그때 그사람들) MK픽쳐스 영화 10·26 사태 중앙정보부 박정희 차지철 정승화 최종대 박선호 박흥주 정병주 김오랑 전두환 박종규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최규하 정부 유신정우회 안두희 김형욱 이후락 김종필 분류:1926년 태어남 분류:1980년 죽음 분류:김녕 김씨 분류:구미시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교수형된 사람 분류:한국의 암살자 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 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 분류: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차장 분류: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장 분류:대한민국의 건설부 장관 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 분류:전두환 분류: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동문 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 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 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 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 분류:육군대학교 동문 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살인자 분류:대통령 암살자 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 |
북대서양 조약 기구 (, 또는 북대서양 동맹 은 국제 군사 기구로 1949년 4월 4일 체결된 북대서양 조약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 기구는 회원국이 어떤 비가입국의 공격에 대응하여 상호 방어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집단 방어 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벨기에의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최고사령관 또한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다. 벨기에는 유럽 및 북아메리카의 회원국 중 한 곳이며, 2017년 6월 기준으로 29개국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21개국이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의 회원국이며 15개국이 개별적으로 제도화된 대화 및 회담의 가입국이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의 군사 지출비는 세계 전체 군사 지출비의 70%을 차지한다. 회원국의 방어 비용은 GDP의 2&를 차지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한국 전쟁 발발 이전까지 정치적 연합에 불과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회원국들이 충격을 받았고 통합된 군사 체계가 미국의 최고 사령관 2명의 지시 하에 구축되었다.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1955년 설립된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대립하게 되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방어 체계에 대한 신용과 더불어 유럽 국가들과 미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심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이러한 의심은 프랑스가 1961년 독자적인 핵무기를 개발한데 이어 1966년부터 30년간 군사 동맹에서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유고슬라비아 해체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개입하게 되었다. 이들의 첫 군사 개입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1992년부터 3년간 이어졌고, 이후 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유고슬라비아에 폭격을 가했다. 정치적으로도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옛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더 나은 관계를 모색했고, 1999년과 2004년 대부분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들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다. 북대서양 조약 5조는 회원국이 무장 공격을 당한 회원국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9·11 테러 이후 처음이자 유일하게 이루어졌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주도하는 국제안보지원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것이었다. 이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추가적인 역할의 범위를 넓혀 작전을 수행했다. 이라크에 교관을 파견하고, 해양 방어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1973호에 따라 2011년 리비아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여 리비아 내전에 개입했다. 덜 잠재적인 4조는 회원국 간의 회담에 따라 결정되는데 총 5번 주최되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2003년 터키가 처음 발령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시리아 내전에 대하여 터키가 2번 주최했다. 2014년에는 러시아의 크림 공화국 합병을 문제로 폴란드가 주최했으며 터키가 2015년 ISIL의 위협에 맞서 다시 개최하였다. 2017년 6월 5일 몬테네그로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NATO는 이후 동서냉전 체제하에서 서방국가들의 집단적 안전보장체제 구축의 모델로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대항하는 대표적 상징으로서의 위상을 지녀왔는데 그 본질은 군사동맹이었다. 북대서양 조약 체약국으로 구성되는 NATO는 회원국 간의 이해 관계가 맞물려 파동을 겪기도 했는데, 프랑스는 1966년 3월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미국과 대립하다가 통합 군사 조직에서 탈퇴하였고, 그리스는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과 관련된 NATO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1974년 4월에 통합 군사 조직에서 탈퇴하였다가 1980년 10월에 다시 복귀했다. 초기 NATO의 조직은 상설기관으로 최고기관인 각료이사회와 사무국, 그리고 그 아래의 전문·보좌 기관과 통합군사기구로 구성되었다. 각료이사회는 회원국 외무·재무·국방 장관 및 관계장관으로 구성되는 최고기관으로 연 2회 이상의 정례회합을 가지며, 각국의 대통령·총리·수상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산하에 핵방위문제위원회·방위계획위원회·핵기획 그룹 등의 전문기관이 설치되어 그 보좌를 받으며, 보조기관으로 대사급 상설이사회가 설치되었는데, 사무총장이 의장을 겸임하고, 회의방식은 만장일치제를 채택하였다. 전문기관 중 핵방위문제위원회는 프랑스·룩셈부르크·아이슬란드를 제외한 회원국 국방장관으로 구성되어 NATO의 핵전략을 결정하였고, 방위계획위원회는 회원국 국방장관으로 구성되는 최고군령기관으로 통합군사조직을 통할하며, 핵기획 그룹은 1966년 12월 방위계획위원회와 동시에 설치되었는데 프랑스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회원국방장관으로 구성되었다. 방위계획위원회는 통합군사조직의 최고통수기관이며 그 아래 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 대서양해군사령부(ACLANT), 해협연합군사령부, 3기구를 관할하였다. SHAPE는 북대서양 최고사령부라고도 칭하는데, 각료이사회의 결정에 의해 1951년 4월 발족하였다. 방위 범위는 영국·프랑스·포르투갈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과 영국영공이며, 전시에는 최고사령관이 유럽 지역의 육·해·공 3군이 작전권을 행사하였다. 산하에 북유럽군·중부유럽군·남부유럽군·영국반공군·기동부대·조기경계기동대 등 6개 사령부를 두었다. ACLANT는 상비병력은 없지만 훈련시·전시에는 회원국 해군이 전속되었다. 방위범위는 영국·프랑스 해협과 잉글랜드 연안을 제외한 미국 연합수역에서 유럽·아프리카 연안수역까지, 즉 위도상으로는 북극에서 적도까지였다. 해협연합사령부는 해협연합군 사령관과 해협연합군 항공대 사령관의 지휘 아래 영국·프랑스 해협과 북해남부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설립 당시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통합군사조직에서 탈퇴하자 브뤼셀로 이전하였다. NATO는 1990년대에 들어서 딜레마에 봉착하기도 했는데, 1991년에는 나토 회원국에 대해 즉각적으로 어떠한 군사적 위협도 없을 정도로 상황이 개선되어, 미래의 나토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그 해에 바르샤바조약국들은 동맹관계를 청산하는 데에 합의했고, 소련의 공산당은 정부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으며, 1991년 후반에 소련은 해체되었다. 바르샤바 조약 기국가 붕괴된 후, 나토는 나토 회원국뿐만 아니라 이전에 바르샤바조약을 체결한 나라들도 포함하는 북대서양협력회의를 결성했다. 이 기구는 두 개의 국가 집단 사이의 연대를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91년에 나토는 유럽에 대한 핵무기 공급을 80%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나토는 1992년에 소속군이 유럽의 비회원국들에게 평화유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군사적인 역할이 커지도록 했다. 나토는 1994년 2월 소속 항공기가 유엔이 지정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비행 금지 구역을 침범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전투기 4대를 격추함으로써 처음으로 전투행위를 수행했다. 또한 1994년에는 대부분 과거에 공산국가였던 20개국이 평화를 위한 동반자라고 하는 나토와의 연대 기구에 가입하였고, 군사적으로도 참여하였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 베를린 봉쇄 NATO 음성 문자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 바르샤바 조약 기구 상하이 협력 기구 집단 안보 조약 기구 항구적 자유 작전(OEF) ISAF * PRT * RRT NATO 공식웹사이트 NATO 조약문 분류:국제 기구 분류:냉전 분류:냉전기의 조약 분류:브뤼셀의 단체 분류:1949년 군사사 |
김정일 (金正日,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이다. 본관은 전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의 첫째 아들이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그는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을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귀환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 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줄여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로 불렸다.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되었으며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정일은 1941년(주체 30년) 2월 16일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42년 2월 16일 량강도 삼지연군의 백두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고 하나, 생년과 출생지 모두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북한에서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조작한 것은 김일성의 출생년도 1912년과 30년 주기로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파일:Kim Il-sung and Kim Jong-suk.jpg|섬네일|left|200px|김일성이 하마탄(라즈돌노예)의 남야영 시절인 1941년 3월 1일 아내 김정숙과 함께 찍은 사진.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에 김일성 자필로 1941년 3월 1일 B야영에서 봄을 맞아 찍었다고 적어 놓았다. 김정일 출산 직후의 사진으로 보이며, 당시 김일성부부가 남야영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흔히들 김정일이 소비에트 연방(현재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 (, Yuri Irsenovich Kim)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고 하지만 이도 정확하지 않다. 김일성 일가가 뱌츠코예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거기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 중순이므로, 뱌츠코예는 김정일의 출생지가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또 소련군 시절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 아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으며, 소련군 문서에는 해방 후 평양에 온 뒤인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따라서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도 평양에 온 이후에나 가능하고, 소련에 있을 당시 이름은 유리 지체노비치 진 (Юрий Жичэнович Цзин, Yuri Zhichenovich Jing)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의 정확한 출생지를 두고는 논란이 많으나 명백히 밝혀진다. 만주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김일성은 김정숙과 함께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캠프)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캠프) 두 곳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간다. 김정일은 거기서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Lazo St.) 88번지(2층 빨간벽돌집)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김정일이 태어난 집 위치 구글맵 (건물 사진도 다수 올라 있음) 러시아 연해주(Primorskiy kray) 라즈돌노예(Razdol noye) 라조 가(Ulitsa Lazo Lazo St.) 88번지 좌표 43°33 32.2"N 131°55 16.5"E 라즈돌노예 기차역에서 큰 길(Ulitsa Lazo)을 따라 동쪽으로 500 여 m 가서 북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옴. 큰길에서 김정일이 출생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초입에서 바라본 구글 스트리트 뷰 골목길 왼편에 보이는 건물 중 안쪽이 88번지임. 건물 이미지 1 구글맵 김정일이 태어난 집이라는 이미지 설명이 나옴. 건물 이미지 2 구글맵 건물 이미지 3 구글맵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김정숙과 함께 라즈돌노예 기차역은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김일성 가족이 88여단이 창설되면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 밀영(백두산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 태어난 것으로 선전하고 있으며, 이 밀영은 성역화되어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거니와,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 당시 백두산 속에 밀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그가 한동안 백두산 인근 만주의 창바이 현(長白縣), 푸쑹 현(撫松縣), 안투 현(安圖縣) 등지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식량과 물자 조달이 어렵고, 겨울이면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되는 백두산 깊숙한 곳에 밀영을 만들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그런 곳에서 한겨울에 김정일을 낳았을 가능성은 더욱더 없다. 해방 후 김일성을 항일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이미지를 덧붙이기 위해 지어낸 말이며, 백두혈통이니 하는 말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레오니드 바신(1915~2006)도 후일 해방 직후 소련 군정 당시 일을 회상하며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자 "우리는 그가 진짜이고 백두산의 호랑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를 보아도 백두산의 이미지는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러시아어 이름 유리의 애칭인 유라 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45년 8·15광복 이후 부모를 따라 북한으로 들어온 후로도 한동안 김유라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러시아식 이름을 버리고 김정일(金正一)이라 하였고, 1980년에는 한자 이름을 正日로 개명하였다. 북한 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처음부터 김정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정일(正日)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김정숙(金正淑)의 정 (正)과 아버지 김일성(金日成)의 일 (日)을 합친 이름이다. 조부 김형직이나 조모 강반석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사망했으나, 증조부 김보현과 증조모 이보익은 그가 10대일 때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광복으로 귀국한 후, 김정일은 북한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김정일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자랐다 of Kim Jong Il.jpg|섬네일|right|200px|유년기의 어느 날(1947년) 김정일은 1948년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남산소학교 인민반 졸업후 한국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 Jeong Il and Kim Jeong Sook 1948.jpg|섬네일|left|230px|어머니 김정숙, 여동생 김경희 등과 함께 강원도 화진포에서 (1948년 8월 7일)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어머니 김정숙, 가운뎃 줄 첫 번째가 김정일, 세 번째가 여동생 김경희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어머니 김정숙에게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2월 10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를 조직하였다. 남한 정보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과 계모와의 관계 등으로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는 주로 독서와 시, 작문 등에 심취하였다.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 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 하였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문학과 시에 빠지기도 했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 및 공산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과 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과 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입당 초기 학생당원의 신분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 밑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다. 그 뒤 1973년 9월까지 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 부부장,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일성의 잠재적 후계자로 여겨졌던 숙부 김영주와 이복 형제로서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평일 등과 갈등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1980년대 중반에 숙부 김영주와 이복 동생 김평일을 제치고 후계자지위를 확정짓는다. 그리고 1994년 집권 이후 이들은 사실상 정계에서 축출되어,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떠돌게 되었으며, 계모 김성애 역시 정치적으로 숙청하였다.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비서에 유임되고, 겸임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12월 29일 최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비서에 유임되었다.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성장 운동에 동참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직접 지도하였고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벌여 근로자의 노동 능률을 높이는 데 노력했으며,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9기, 제10기, 제11기 대의원에 연임되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 이후 조선로동당 조직담당 비서,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거쳐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넘겨받는다. 그 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조선인민군 원수라 하고 공화국 원수라는 계급을 별도로 신설하여 자칭하였다. 1993년 4월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겸임조항을 정령에서 삭제하면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되었다. 군권과 함께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한 김정일은 이어 조선로동당의 당권도 장악하였다.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를 실각시킴에 따라 1990년대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행사 석상에서 김영주는 보이지 않게 된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이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넣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정일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 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의 집권 이후 김성애 역시 공식석상에서 제외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전임되었다. 2001년에는 김일성과 주석궁 안마사의 사생아인 김현을 전격 처형하기도 했다. 1994년 아버지인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간의 유훈통치를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김정일 본인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하였으며 2009년 4월 9일에야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 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 라고 선언하였다.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다시 재추대되었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김정일은 2008년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뒤 2009년 전후, 김정은을 청년대장 으로 소개하였다. 이어 2010년 9월 김정은이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맡으며 공개석상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김일성 주석을 빼닮은 외모로 큰 관심을 끌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 2001년 블라디미르 푸틴과의 회담 2001년에는 여러 번 러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 등과 회담하였고, 푸틴이 답방하여 회담을 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하였으나 방문하지 않았다. 2009년 4월 9일에는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2011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2000년 이후 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시로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미국의 카터, 클린턴 등의 전직 대통령 역시 수시로 평양을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 외교활동의 목적으로 그는 자원 지원을 주로 중점적으로 하였다. 북한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자연재해와 공산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 이라고 부른다. 약 6년간의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한은 이제 강성대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시기에 굶어 죽었다. 2003년에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리포트에서는 북한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 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으로부터 상당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 김정일은 2010년을 기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화폐개혁은 실패했다. 김정일은 비날론, 주철, 옷감 등 산업현장을 시찰, 방문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본다. 2009년 2월 21일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시찰하였고 2월 22일 함북의 7월7일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 2010년 3월 14일 북한노동당 황해북도위원회 책임비서 최룡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경희, 장성택,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리제강, 리재일을 대동하고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였다. 김정일은 먼저 농장책임일군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 개건된 혁명사적관 우렝이양식장 등을 돌아본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농업생산을 늘이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농장앞에 나서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이어 그는 미곡협동농장에서 최근년간 농업생산을 급격히 늘일수 있은 기본요인은 종자혁명방침을 철저히 관철한데 있다고 하면서 일군들과 농업근로자들의 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켜 농장의 기후풍토에 맞는 우량품종을 도입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있게 추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200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북한의 최대 명절인 9·9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아 김정일 건강설이 증폭되었다. 그러다가 김정일의 동정이 묘연해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건강 이상설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조사 결과 김정일은 8월 15일 전후로 뇌졸중과 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최근 김정일이 입원했다는 것을 전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은 듯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80일 만에 은둔생활에서 벗어나면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은 미국 정부가 김정일 건강이 예상보다 악화되었고, 실각 및 사망을 전제로 대책을 세우는 것을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2009년 3월 19일에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에 김 위원장은 배가 쏙 들어가고 매우 야윈 모습으로 나와서 건강 이상설에 힘을 실었다. 한편 김정일은 2009년 3~4월경 김정은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해 자신을 대신해서 엘리트들을 감시하게 하고, 김정일 사후에도 김정은이 엘리트들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 조직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우동측 부부장이 김정은의 보위부를 통한 엘리트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다. 김정일의 영결식은 12월 28일 평양직할시에서 거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고 추모곡이 작곡되었다.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열차가 아닌 평양 교외 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12년 2월 16일 71회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에 추서되었다. 세계적으로 최악의 지도자 1~2위를 늘 다투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정치범 수용소와 자유와 끔찍한 인권을 탄압을 자행했다. 현대판 봉건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이 대리청정체계로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테러리즘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아웅산 폭파 사건과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이런 테러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우방국들마저 외교관계를 기피하기 시작해 외교무대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에 의해 테레지원국으로 정해져 적선국 제재를 받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완전히 소외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사회주회 경제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생상성 향상을 이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보장에 해가 될까 두려워 오히려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를 통해 수 많은 아사자가 나왔지만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50만톤 이상이기 때문에 아사자는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됐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1995년 국제사회에 식량원조를 요청하면서 부각된 식량난 을 통해 대외적으로 선전해오던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들어났다.. 세계적으로 볼 때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대체로 자국 국민의 삶의 향상을 위해 노력했던 근거가 보이지만 그는 그런 노력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핵개발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경제제재를 받는 것인데 자국민의 삶과 나라 경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핵개발을 통해 얻는 건 대외적으로 독제체재를 유지를 위한 협상카드이다. 또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난은 1992년 이후 식량절약을 위해 하루 두끼 먹기 운동 을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명백한 배후이다. 북한은 군의 일반 지휘통제에 더해서 중앙에서 정치장교까지 따로 보내 2중으로 관리 통제하는 군지휘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통제력이 약한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사격 훈련 중 탄피분실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비상이 걸리 것을 대비해 본다면 최고지휘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저런 대규모의 도발을 실행할리 만무하다. 북한은 2009년부터 후계자에게 정권이양하는 과도기 과정이었고 2000년 이후부터 생겨난 장마당경제로 인해서 중앙권력의 약화를 우려해 화폐개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화하려 했지만 오히려 화폐개혁의 부작용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내부혼란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대남도발을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시켜 내부단속을 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는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한데 대해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28살 애송이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이상한 나라가 북한"이라며 "정부는 북한 권력층과 군부의 동향은 물론 관련 첩보 입수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북한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급변 사태에 대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0년대의 남포갑문 개발의 성공이 그의 치적이라는 견해도 있다지만 이건 북한당국의 일반적인 주장을 이해하는 수준의 논리이다. 남포갑문은 북한 남포특별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갑문으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1개 군단의 군 병력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으나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 겨우 완성하였다.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물이 새어들어오고 틈이 벌어지고 갑문이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 유지보수를 위해 1개 건설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다. 문제는 갑문공사로 생긴 간척지가 생겨났지만 오해려 갑문때문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 고위층 탈북자인 김덕홍 증언에 따르면 남포갑문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홍수피해를 막는 효과가 없으며 갑문으로 인한 간척지가 주는 편익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홍수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면 지천과 하천정비를 했어야 하지만 이 사업은 소규모 사업이 복수형이여서 정치적 선전에 불리하고 대규모 갑문사업은 정치적 선전에 유리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경제적 편익보다는 정치적인 선전을 우선에 둔 사업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1평안남도 순천에 연간 10만 t 규모로 추가건설되던 비날론 공장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팝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제논리를 배제하고 정치적 선전이나 사상무장으로 계획된 사업은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하고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가동이 중지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에 들어갔지만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포갑문과 순천비날론 공장에 투여한 자본은 150억 달러에 가까운데 북한이 가지고 있던 자본여력 대부분을 산업시설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정치 선전물 건설에 쓴 것이다. 스위스와 해외 은행에 비자금을 예치해두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지금 제재가 진행되고 있다. 2004년 4월 22일 북한과 중국 국경 지대인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으로 인해 150여명이 숨지고 1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폭발사건은 김정일의 열차 통과 30분 전에 발생해 김정일에 대한 암살기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북한의 김정일이 지난 2004년 4월 용천역에서 발생한 대형폭발사건은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였다고 인정했으며, 암살과 쿠데타를 우려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지난 2009년 2월 26일 현대그룹, 인내와 관용제안 이라는 제하의 비밀전문에서 2월 13일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과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하종선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사장 등과 점심을 함께 하며 나눈 이야기를 17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보고했다. 이 항목 가운데 김정일과 인민군 이라는 항목에서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은 "지난 2004년 김 위원장을 암살하려 한 열차폭발사건이후 인민군은 김 위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됐다"고 보고했다. 또, "김 위원장은 열차 통과 30분 전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휴대폰을 통해 자신이 탑승한 열차의 통과시간이 전해짐으로써 거의 근접한 시간에 폭발시킬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은 이사건이 자신에 대한 암살실패사건으로 믿고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휴대폰 도입이 특이할만큼 늦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현 회장은 또 "김 위원장이 암살과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문학과 시, 영화, 역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시와 노래를 짓는 것도 좋아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민족과 운명", "조선의 별" 등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신상옥 감독을 통해서 "불가사리"를 제작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으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정일은 몇 개의 곡도 작곡하였다. 1952년 8월에는 가요 을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문화예술론》, 《미술론》, 《김정일저작선집》을 비롯한 200여 편이 넘는 저작들을 집필하였다. 역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단군릉을 수시로 살펴보고, 단군릉의 정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기타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히 신앙을 가졌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은 전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 리평의 아내였으나 그와 이혼시켜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성혜림은 정식 배우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슬하에 장남 김정남을 두었다. 1966년 혹은 1968년 아버지 김일성이 소개해준 조선로동당 간부의 딸인 김영숙과 정식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영숙과의 관계는 소원하여 딸 김설송과 김춘송만 있을 뿐 별다른 관계는 없다.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 고용희와의 사이에서는 김정철, 김정은 형제와 딸 김여정이 있다. 한때 고용희와 김정남 간의 갈등설이 돌았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 때 비서 출신인 첩 김옥이 그를 수행하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으며, 둘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역시 확인된 것은 없다. 국제 사회에 김정일의 가족관계로써 알려진 것은 성혜림(1남, 김정남), 김영숙(2녀, 김설송, 김춘송), 고용희(2남 1녀,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등이다. 대한민국의 일각에서는 그가 변태성욕자이며 수시로 여러 여성들과 비정상적인 향락을 즐기는데 5명의 부인을 제외한 다른 여인들과도 관계를 가졌다. 손희림, 우인희, 홍영숙, 정혜순, 윤혜영 이다. 손희림은 김정일에게 강간을 당했고, 김정일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김정일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건강이 약화되었다. 북한의 공훈배우 우인희 와도 관계가 있었는데, 우인희는 김정일과의 관계를 떠벌리고 다니다 결국 처형 당했다. 그리고 가수 윤혜영과 관계를졌는데 윤혜영은 다른남자를 좋아하였는데 김정일이 분개해 윤혜영을 총살하였다. 2004년에는 그의 통치방식과 사생활, 여성 편력 등을 소재로 한 방송이 방영되기도 했다. 그 밖에 그의 여인들 간의 권력암투가 화제가 되기도 한다. 2010년 8월 공식 후계자로 선언한 김정은은 고용희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일설에는 고용희가 아닌 김옥의 아들이라는 의혹 도 제기되어 있다. 또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김정일이 여러 여성들을 ‘내연의 처(concubine)’로 삼은 것은 대표적인 권력남용이라고 보도했다. 타임은 “김 위원장의 축첩은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문제”라며 “심지어 남한에 특공대를 보내 유명 영화배우 등 여러 여성을 납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잡지는 또 “이 ‘친애하는 지도자’는 혼인을 거듭하며 자녀 5명을 뒀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9명의 사생아가 더 있다”고 보도했다. 상당수의 여성들을 기쁨조로 두고 있으며 이들에게 안마를 받고 가무를 감상하며 이들을 갖고 이용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classroom.jpg|섬네일|일본의 조선학교 교실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 사실 일부 간부층에게는 김정일의 어눌하고 빠른 말투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간부들 사이에서는 김정일을 떼떼 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떼떼란 말을 더듬는다는 북한의 은어(隱語)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시 누가 나올까 하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추측 속에서 대한민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고 김대중과 반갑게 포옹했다. 2002년에는 박근혜의 예방을 직접 받기도 하였고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에는 육로로 방북하는 대한민국의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자신이 직접 영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루 더 묵고 가라는 제안을 당시에 하였으나 노무현은 거절하였다. 그의 이름을 딴 꽃으로 김정일화(Kimjongilia)가 있다.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의 이름을 딴 김일성화도 있다. 1988년 2월 김정일의 46회 생일에 처음 소개되었다. 라틴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일본인 가모 모토데루(加茂元照)가 20년 동안의 품종을 개량한 것이며 김정일에게 처음 선물하였다고 한다. 이복동생 김현을 정적으로 내몰아서 2001년에 조용히 총살시켰다. 최근 구글의 슈미트 회장이 그의 시신에 참배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그의 딸인 소피 슈미츠는 김정일이 가장 좋아했던 컴퓨터가 맥북 프로 15인치라고 전언하였다. 1966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 학사 페루 우와치오 국립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페루 까하마르까 국립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1978년, 1982년, 1992년 김일성훈장 3회 수상 1973년 2월 김일성상 수상 2003년 12월 멕시코 푸에블라 주 이수카르 데 마탐로스 시 명예시민 작품 〈피바다〉·〈꽃 파는 처녀〉·〈한 자위단원의 운명〉 저서 〈영화예술론〉(1973), 《김정일선집》(전14권),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전10권)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노래 불후의 고전적명작〈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조국의 품〉,〈진달래〉 시 〈우리 교실〉,〈조선아 너를 빛내리〉, 〈대동강의 해맞이〉 사우스 파크 팀 아메리카 세계 경찰 심슨가족 - 시즌17 에피소드16 1983년~1985년 - 김병기, KBS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 1995년 - 김윤형, MBC 드라마 《제4공화국》 2006년 - 백일섭, 영화 《한반도》 2018년 - 기주봉, 영화 《공작》 전체 가계도 김정일 중심의 가계도 계모 김성애 1929년~2014년 서모 제갈씨 서모 김송죽 아내 * 홍일천 * 성혜림(成蕙琳) (1937-2002) * 김영숙 * 고용희 (1953-2004) * 김옥 * 정인 손희림 * 정인 우인희 * 정인 윤혜영 * 정인 홍영숙 * 정인 정혜순 자녀 * 장남 김정남(金正男) * 차남 김정철(金正哲) * 삼남 김정은(金正銀 또는 金正恩) * 장녀 김혜경(金惠敬) * 차녀 김설송 * 삼녀 김춘송 * 사녀 김여정(1987년 9월 26일 ~) * 사생아 딸2명 손자녀(김정남의 자녀들) * 손자 김한솔 * 손자 김이순 * 손녀 김솔희 * 손자 김금솔 형제자매 * 동생 김만일(金萬一, 김슈라) * 동생 김경희(金敬姬/金慶喜/金景姬) * 동생 김평일(金平一) * 동생 김영일 * 동생 김경진 * 동생 김현 * 동생 김백연 기타 * 숙부 김철주 * 숙부 김영주 * 이모 김영숙(생모 김정숙의 동생) * 처조카 이한영 * 친족 강량욱 * 사촌동생 손재대 조선로동당 보천보전자악단 기쁨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영화 불가사리 김일성종합대학 왕재산경음악단 조선인민군 김정일화 김정일의 호칭 목록 최고인민회의 김평일 김영주 김정숙 김현 이한영 후지모토 겐지 박정근 광폭정치(廣幅政治, 북한의 정치용어) 김영수 외, 《김정일시대의 북한》 (김영수 외, 삼성경제연구소, 1997) 최진욱, 《김정일 정권과 한반도 장래》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5) Michael Breen, Kim Jong-Il North Korea s Dear Leader, John Wiley and Sons (January, 2004), hardcover, 228 pages, Bradley Martin, Under The Loving Care Of The Fatherly Leader North Korea And The Kim Dynasty, St. Martins (October, 2004), hardcover, 868 pages, 유작촌, 『정통과 계승—위대한 인간, 새로운 문명을 위하여 김정일비서의 사상이론적 평전》, (현대사, 1992) 김인숙, 《김정일, 사회주의 위업의 향도자》, (평양출판사, 1993)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한반도 절반의 상속인 김정일》, (중앙일보사, 1994) 탁진·김강일·박홍제, 《김정일지도자 제1부》, (평양출판사, 1994) 김남진 외, 《향도의 태양 김정일장군》, (평양출판사, 1995) 김인숙, 《민족의 운명과 김정일령도자》, (평양출판사, 1995) 평양출판사,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 략력》, (평양출판사, 1996) 김현식·손광주, 《다큐멘터리 김정일》, (천지미디어, 1997) 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 (토지, 1999) 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을유문화사, 2000)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Born in the USSR – Kim Jong-Il s childhood. The many family secrets of Kim Jong Il 분류:1941년 태어남 분류:2011년 죽음 분류:공화국영웅 수훈자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료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원수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인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서전 작가 분류:조선로동당의 정치인 분류:김일성종합대학 동문 분류:반기독교주의자 분류:함경남도 출신 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분류:김일성 분류:김정은 분류:대량 살인자 분류:자유 연애 분류:김일성 가 분류:심근 경색으로 죽은 사람 분류:대량 살인자 분류:6성장군 분류:조선인민군 장군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자 분류: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분류:한국의 혁명가 |
노태우 (盧泰愚, 1932년 12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 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군사 반란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로 전학한 뒤 1950년 한국 전쟁 중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입대하였다. 1951년에 육사에 11기 생도로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1년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의 창설준비요원과 교관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에는 1967년 지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4년 장군으로 진급,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예편 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85년에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으로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내정되어 당권 전부를 위임받고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 근소한 표차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중국, 동구권,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1991년에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자치제 부활을 수용하여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 결정이 내려지자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이를 강행하였다. 1993년 퇴임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연루,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구속되었다.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97년 12월 22일에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1983년 서울 올림픽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그해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였고, 86 아시안게임을 유치시킨 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준비와 진행을 지원했다. 체육을 좋아하여 육사생도 시절에는 육상부와 럭비부 팀원으로 활약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제13대 대선 당시 보통 사람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1994년 그가 정치 비자금을 챙긴 것이 당시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당시 국회의원 박계동 등에 의해 연이어 폭로되면서 풍자되었다. 노태우는 1932년 8월 17일(음력 7월 16일)에 대구(달성군) 공산면 신용동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서 팔공산에 백일기도를 드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결혼 후 9년만에 노태우를 낳았다. 노태우는 그 근본 자체는 삼국지의 오나라 참모인 노숙의 후손으로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의정부의 영의정을 지낸 문광공 노사신의 15대손이다. 4년 뒤 동생 노재우가 태어났다. 어머니가 노태우를 임신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가 콩밭에 김을 매던중 밭에 큰 구렁이가 숨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집으로 도망 오는데 구렁이가 따라와서 부엌에 숨어있는 노태우 어머니의 발뒤꿈치를 물고 온 몸을 휘감아서 놀라서 깨었다 한다. 할아버지는 이 구렁이가 용이라 하여 원래 아이의 이름을 태룡 (泰龍)이라고 지으려 했으나 일제 시대였으므로 꿈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어리석을 우 (遇)를 붙여 이름을 태우 (泰遇)라고 지었다. 아버지 노병수는 소학교 학력이 전부였으나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떴으며, 189cm의 훤칠한 키를 가진 사람이었다. 또한 음악적 재질이 뛰어났으며 한문을 잘 하여 면서기를 지냈다. 아버지는 노태우와 노재우 두 형제를 무릎에 앉히고 특별히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어려서 들은 유성축음기 노래 덕에 그는 일찍부터 노래를 잘 불렀으며, 베사메무초 와 방랑시인 김삿갓 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노태우가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노래 실력이었다. 어머니 김태향은 학식은 없었으나 신앙심이 두터운 불교 신자로서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1939년 아버지 노병수는 동생(노태우의 숙부) 노병상(盧秉祥)의 중학교 졸업식을 참석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노태우는 끼니를 거르는 등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형이 죽었다는 부채의식을 가진 숙부는 아버지 이상으로 조카들을 키웠고 사촌 형제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아버지의 유품인 퉁소를 즐겨 불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고 음악적 기량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노태우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피우며 자라기는 어려웠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며 말을 아끼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그의 집은 팔공산 근처에 있었다. 1939년 3월 집근처에서 6km 떨어진 공산소학교에 입학했으며, 직접 걸어서 통학하며 다녔다. 형편이 넉넉치 않아 그는 맨발로도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성격이 유순하였던 그는 화를 잘 내지 않았는데 학창시절의 별명은 스마일이었다고 한다. 화내는 것을 잘 볼 수 없고 언제나 싱글벙글이었다고 한다. 귀가 크고 듣기를 잘 했다고도 한다. 1945년에 공산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소학교 동창 101명 중 중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남학생 1명, 여학생 2명으로 그가 유일하게 중학교로 진학했던 것이다. 중학교 5학년 무렵에는 싸우는 친구를 설득하여 화해시키고 잘 조정하여 조선 세종때의 황희 정승에서 따서 "노(盧) 정승"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부친의 사후 그의 집안은 이렇다할 공직에 몸담던 인물이 없었으므로 그의 집안은 창씨개명에 참여하지 않고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소학교 시절 노태우는 성적이 상위권이었으나 형편이 어려웠기에 그의 6학년 때의 담임선생은 특별히 저녁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가르쳤으며, 그는 밤길에도 혼자 산을 넘어서 집에 도착하여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다. 그는 점차 말수가 적고 독서에만 흥미를 두게 되었다. 1945년 3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학질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와 열병으로 고생했으나 극적으로 생존하였다. 그리고 대구고보 4학년 편입시험에 10대 1의 경쟁률에서 상위 성적을 얻고, 경북중에 편입학하였다. 재학 초기 학생들 중에는 정치 활동에 참여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학생은 학업에 전념해야 된다 며 거절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몸집도 작고 싸움을 싫어하였으며 정치 이념문제에 개입하지 않은 덕에 순탄한 학교생활을 하였다. 당시 정치인들 중 그는 김구를 특별히 존경했다. 이후에도 대화 도중 김구가 한 발언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4학년 당시 성적은 224명 중 102등이었으나 5학년 당시에는 218명 중 68등으로 올랐다. 대구고보 재학 중 그는 장래 희망을 의사로 정하였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하면서 의사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 재학 중에는 학예회에 자주 나갔으며 직접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노래를 그의 동창인 경북의사회 회장을 지낸 윤건호는 5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경북고 시절의 담임인 이길우는 그가 과묵하고 착실한 모범생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했다고 후일 회고하였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의 전차 청소년기의 그는 성격이 매우 온순했다 하는데 대구공업중학교 동창인 이태원(후일 교사가 됨)은 공업중학 졸업후 대학에 가고 싶어서 노태우를 찾아가 그의 노트를 빌려다가 공부했는데도 한번도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접은 그는 대신 자녀들 교육에 힘써 후일 딸 노소영과 아들 노재헌을 서울대에 진학시키고, 특히 딸 노소영은 시카고 대학교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자녀 교육에 신경을 썼다. 1950년 한국 전쟁을 맞으면서 피난갔다가 바로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투입됐고, 학도병으로 있던 중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입학한다. 이로써 정식 이등병의 신분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듬해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51년 10월 헌병학교 정규 1기생의 신분으로 첫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사관생도 재학 중 그는 전두환·정호용 등을 만나 인맥관계를 형성하였다. 전두환과는 여러 드라마에서 묘사된 상하관계가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으로 둘은 명백한 친구사이 이다. 일찍부터 같은 대구 출신인 전두환과 친하게 지냈는데 후일 그는 인터뷰에서 전두환에게는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고 회고한 바 있다. 육사 생도시절, 스포츠를 좋아한 그는 육상부와 럭비부원으로 활동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그는 럭비선수로 활동했다. 럭비선수 활동 초기에는 자주 다쳐서 아키생키(일본식 빨간 소독약)를 자주 바른다 하여 악까중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한 연습으로 럭비팀의 주전 멤버로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및 타 대학교와의 럭비 경기와 친선경기에서 연속으로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때 이기백, 정호용, 김복동, 권익현 등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헤르만 헤세 등의 시집을 애독하였고 홍사용 시인의 시집 등을 즐겨 읽었다. 그 중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은 특별히 애장하기도 했다. 육사 재직 중 그는 대통령 이승만이 사열나온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육군사관학교를 둘러보다가 여기가 어디냐 라고 지목한 것을 훗날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1955년 2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사11기로 육군소위에 임관하였다. 기소된 뒤 그를 연행한 장본인이 당시 헌병대위였던 노태우였다. 이후 전방으로 투입되었다가 1956년 봄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그는 5사단장이던 박정희를 보고 특별한 인물이라고 예상했다. 5사단 소대장 시절 사단장이었던 박정희는 그에게 각별히 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의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을 거쳐 육군정보학교로 배속되었다. 이후 육사 11기생 동기들과 함께 친목 모임인 북극성회(北極星會)에 가담했고 이어 하나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군대에서 금지되어 있는 군내 사조직을 결성한 그는 이를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운영해 나갔다. 육군 중위 재직 중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대구직할시 본가에 자주 출입하던 중 그의 누이인 김옥숙, 김정숙 자매를 보게 된다. 이어 김옥숙을 유심히 보게 되다가 정식으로 청혼하였고, 1959년 5월 31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1959년에 먼저 진급한 동기 전두환 대위 등 4인의 대한민국 장교들과 함께 6개월 동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브랙 기지로 군사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와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 두 과정을 차례로 수료한 뒤 귀국했다. 1960년초에는 북극성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60년 대위로 진급,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담당 장교가 되었다. 1961년에 전두환 등과 함께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요원이 되었고 ROTC 교관이 되어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인 장교후보생을 교육하였다. 같은 해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육군대위 재직 중 전두환 등의 장교들과 함께 군사혁명 지지를 선언하고, 군사혁명 지지 행진 에 참가하였다. 베트남 전쟁 방첩부대 정보장교를 거쳐 1966년 국군 방첩부대 방첩과장, 이후 육군본부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하였으며, 1962년에는 육사 11기 이후 정규 육사출신들로 구성된 북극성회 회장에 선출되어 육사 졸업생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67년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그 해 베트남 전쟁에는 맹호사단 재구대대(1연대 3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이때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특별히 을지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또, 맹호사단 재구대대장으로 있을 때는 사이공과 하노이를 잇는 1번도로의 복구와 베트남 대민 지원을 적극 추진했다. 또한 1번도로 변 빈딩 성 푸카트 군 캇하트 면의 1번도로 주변에는 주택들을 건설하여 주민들의 거주지 복구를 주관했다. 그가 복구한 마을 이름은 그의 이름을 붙이려 했으나, 노태우는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는 뜻에서 부대 이름이 재구대대라 했다며 재구촌으로 하라고 했다. 이듬해 귀국하였다. 1968년 육군대학에 입교, 그해에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수도경비사단 대대장으로 부임했으며, 1970년 육군대령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로 서종철 육군참모총장을 보좌하였다. 1971년 보병 연대장을 거쳐 1974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지냈다. 한편 음악적 소질을 지닌 그는 부대장으로 재직 시 직접 부대가를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1976년 박종규, 차지철 등에 의해 발탁되어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었고, 1978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 그 해 전두환이 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전두환 등의 후원하에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전격 발탁되었다. Ho Yong 1985-3-22.png|섬네일|왼쪽|140px|친구이자 동기인 정호용, 신군부 서열 2, 3순위였던 노태우와 정호용은 이후 3당 합당 과정에서 정치적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윤필용 필화사건으로 다른 하나회 회원들과 함께 정치적 위기에 몰렸으나 1979년 3월 전두환이 재기에 성공하여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복직된 뒤 그도 육군 제 9보병 사단장으로 전임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 당하자 전두환과 함께 군부를 장악, 그해 12월초 서울에서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정승화·김재규 등을 군부에서 축출하고 정승화 체포작전을 진행하였다. 이때 노태우는 실패를 염려하여 박철언 등에게 부인과 가족을 부탁하였다.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 며 버텼다. 노태우는 즉시 9사단의 특전부대 병력을 서울로 급파하였다.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노태우는 9사단 특전대 병력을 청와대와 총리실, 관저 등에 보내 최규하 대통령 주변과 정부를 장악하였다.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현을 잡아오라 하였다. 상관을 체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집행되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마저 서슴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노태우는 9사단 예하 29연대를 중앙청으로 진주시킨다. 한편 노재현은 1공수특전여단에게 체포되어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연행된다. 이로서 전두환은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노태우는 5월 17일 오전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단행과 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해, 이날 24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계엄이 전국 확대되는데 관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계획과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의 25인의 비상대책위원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6월에는 국보위 상임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그는 국보위 상임위원직을 겸직했다. 1980년 야당 정치인 가택연금 당시 그는 김종필 등을 비롯한 육사 선배들과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에게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고문을 치욕으로 여기던 구 군사정권 출신 인사들은 그의 깍듯한 예우에 감동받았다. 이 중 김종필과의 계속된 만남 도중, 김종필은 신군부 세력 중 그에게 유일하게 깍듯이 대했던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가르쳤고, 감정을 드러내지 말것과 불쾌감을 드러내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며 이후 1인자와 틈이 벌어지지 않는 비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후 노태우는 1980년 8월 육군중장으로 진급, 8월 6일에 전두환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8월 23일 전두환의 후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國軍保安司令部司令官)직을 역임하였다. 당시 그는 수경사령관이었는데,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강력 추천으로 전두환의 후임자로 내정되었다. 퇴역하기 전 7월 11일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81년 7월 15일 예비역 대장으로 서부전선에서 전역식을 하고 예편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불같았던 전두환은 친구였던 노태우를 점점 하대하여 노태우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일설에는 노태우가 한강변에서 통곡하더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소문은 시중에 돌고 돌아서 그의 육사 동기들을 거쳐 전두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2인자가 불평불만을 드러낼 경우 1인자의 손에 숙청당할 우려가 있다는 김종필의 충고를 잊지 않고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김종필은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끝까지 선배님, 형님이라며 존대한 노태우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감시병력들을 내보낸 뒤, 이승만과 김구의 고사,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노태우에게 설명하였다. 전두환은 후에 자신의 재선 기도와 내각제 개헌이 실패하자 6.10 민중 항쟁 후 노태우가 정권을 잡으면 자신은 무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노태우는 전두환을 백담사에 보내고 민정당 명예총재직을 사퇴하게 만들었다. Doo-hwan.png|섬네일|오른쪽|200px|육사 동기이자 친구인 전두환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에 의해 민주정의당 당무위원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민정당의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981년 7월 16일 정무 제2장관이 되고, 그 해 11월에는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을 순방하였다. 11월 스페인,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등을 거쳐 12월 나이지리아, 오트볼타공화국, 서독, 네덜란드와 아프리카, 미국 등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이때 그가 중공에도 방문한다는 기사가 떴으나 오보로 드러났고, 바티칸 시국에 방문했을 때는 특별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국에 방문해줄 것을 간청하여 성사시키기도 했다. 귀국 후 1982년 통일원에서 북조선에 남북고위급 회담을 제의하자 그해 2월 25일부터 정무2장관으로 남북한고위회담 수석대표로 참여하였다. 정무2장관 당시 외교안보 담당 특보를 겸하며 올림픽을 유치를 확정시키기 위해 설득과 노력 끝에 1988년 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다. 한편 전두환은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해두고 있었고 노태우는 강력 반발하였다. 노태우는 자신이 크게 기여한 것을 강조했고, 전두환은 어디서 말대꾸를 하느냐며 자신이 발탁했음을 강조했다. 또한 전두환의 최측근인 장세동도 잠재적 대통령 후계자로 점지되고 있었다. 전두환은 그를 하대하고 반말과 무시를 하기도 했지만 노태우는 김종필의 충고를 잊지 않고, 끝까지 불평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1982년 3월 20일 체육부 장관 과 그해 4월 28일 제41대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 그는 무사명, 무책임, 무소견, 무기력을 추방하자는 구호를 내걸어 4무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각 행정기관에 퇴근시간이 지난 뒤에도 상사나 동료직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퇴근을 미루는 눈치보기 퇴근, 일 미루기 행위를 일절 금지시켰다.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에 임명되었다. 무임소장관과 체육부장관 등 국무위원으로 겸임한 기간 외에도 그는 1987년 7월 9일까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직을 보유하였다. 1981년 11월부터는 부총리라는 대외직명을 사용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에게 특별 배려를 목적으로 부총리급으로 대우하고 대외직명을 부총리로 하였다. 당시 예편은 노태우가 전혀 예측하지 않은 조치였다는 설이 있다. 내심 전두환의 후계자를 꿈꾸던 노태우는 가장 튼튼하게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군에 남아 참모총장의 길로 가려고 했다. 때문에 일순 모든 것이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다. 측근들 중에는 눈물을 쏟으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고, 노태우 자신도 어느 선배를 찾아가 울먹이며 분을 토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무작정 노태우를 예편시킨 것은 아니었다. 내심 정무2장관을 생각하고 있었고 예편 이틀만인 7월 16일 그 자리에 앉혔다. 노태우는 군복을 벗게 된 마당에 부총리자리를 노렸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처고종사촌 박철언을 통해 안보담당 부총리 겸 정무2장관을 교섭했다. 전두환은 당장에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노태우 정무장관이 해외 순방에 나선 그해 11월, 대외직명 부총리급을 주었다. 11월 9일 그는 해외 순방을 나가면서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83년에는 88올림픽이 서울특별시 유치가 확정되면서 서울올림픽대회 임시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정식 구성되면서 위원장이 되어 1986년까지 3년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아시안게임 임시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어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서울로 유치시키기 위해 각국의 정부 고위층과 아시안 게임 담당자들을 설득하였다. 1984년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KOC 위원장이 되고, 1984년 서울 아시안 게임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역시 정식 조직위원회가 발족하자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아시안 경기대회 준비와 진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로 입후보하였다. 1985년에 제12대 총선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곧바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총재인 전두환이 서울 서대문구 출마를 권하자 그것보다는 전국구 의원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박철언의 건의로 전국구 3번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의 후임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높은 번호를 얻으면 전두환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것으로 판단했다. 대표위원 취임 첫날 그는 우리 당은 무엇보다도 자율과 개방을 내실화하면서 끊임없는 자기 혁신 속에 당내의 언로는 가능한 한 넓혀나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하였다. 이후 야당과의 타협론을 내세웠는데 이는 군부 출신 내부의 강경파들과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된다. 이때 전두환은 그에게 당권을 전권 위임하였으나 그와 노신영 사이에서 후계자를 선택하려 했다. 그러나 노신영을 선택하려는 것을 군부 집단의 집단 반발로 노태우룰 낙점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 신군부 출신 내에서도 그는 보복을 잘할 것이라며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무렵 이민우 등 야당 일각에서 직선제를 주장하자 그는 전두환으로부터 직선제 개헌을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가 여기에 호응하지 않음으로서 전두환과 갈등하게 된다. 1985년 12대 국회 개원협상의 민정당 측 대표자로 야당 인사들을 설득하여 국회 개원을 이끌어냈다. 그해 4월 초까지도 야당은 체포된 재야인사들의 선 사면과 후 개원을 강하게 밀고 나갔으나 그는 선 개원 입장을 내세웠고, 협상은 결렬되었으나 결국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 등을 간곡히 설득한 끝에 야당을 국회로 등원시켰다. 여당 내 강경파들은 단독개원을 추진했지만 그는 반대하며 "국회의 개원을 위해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경주해 우리의 노력과 의지과 국민과 야당에 충실히 전달되도록 힘쓰자."며 강경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1985년에 예산안 파동이 발생했고 직접 나서서 겨우 파동을 수습하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을 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그 뒤 노신영에게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고 했으나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노태우를 후계자로 정했다. 1987년 6월에는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다른 대안자로 지목되던 노신영과 정호용을 제치고 민주정의당 내에서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되었다.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렸고, 노태우는 이 대회에서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러나 같은 날부터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6월 민주항쟁)가 일어났다.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4·13 호헌 조치를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와 회사원들까지 가담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는 집회가 전국에 확산된 것이다. 당시 제5공화국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였는데, 이에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승락을 받아냈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직선제 형태의 대통령 선거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제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1987년 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여, 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19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실행하도록 한다. #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가 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한다. #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서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 사회 각 부분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당시 그의 6·29 선언은 고독한 결단이라고 선전되고 연출되었으나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였지만 전두환의 확고한 지배하에 있었으며 노태우의 개별적 자율성은 없었다 고 평가된다. 한편 이를 통해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강경파 군부와의 차별 및 군사 정권 인사들의 지지를 동시에 획득하였다. 노태우는 민심이 이반되던 1987년 내내 그는 전두환 정권에 충성을 맹세한다. 8월 5일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당일의 전당대회에서 민주정의당 제2대 총재에 피선되었다.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노태우는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유세하였다. 그러나 야권은 하룻밤 사이에 별을 더 단 육군 대장 출신이 어떻게 보통사람이냐며 반박했고 그는 전역 후 민간인의 신분이니 보통사람이 맞다며 응수했다. 한편 당시 국회의장인 이재형 역시 "노총재는 평균보다 앞서 가는 사람이 맞다. 생긴 것도 보통 이상이요 그가 앞으로도 할 일도 보통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평균 의지를 갖고 보통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평균 시민들 앞에서 이끌어 나갈수 있는 것 보통사람인 것은 맞다"며 그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의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발언은 보통 사람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이후 1994년 서석재·박계동 등의 폭로사건으로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는 곧 비아냥의 용어로 바뀌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차별화 된 선거 공약을 내세우며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머리, 주걱턱 등 연예계의 금기용어도 이때 해금되었다고 한다. 그는 정권 중간평가와 경인운하 건설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도 불구하고 광주직할시 지역 유세 당시 광주 학살의 원흉 또는 방조자의 한 사람 이라는 항의 시위대가 나타나서 달걀과 밀가루, 오재미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의 양념 이라며 관련자들의 처벌을 반대하고 오히려 전두환에게 선처를 호소하면서 사건은 그냥 넘어가게 된다. 선거 유세 중 그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제창하였다. 그는 당시 인구 10만 미만의 중소도시들도 직접 찾아다니면서 선거 유세를 벌였다. 그의 유세에 자극받은 김종필 등도 성남, 의정부 등의 중소도시를 직접 찾아다니며 선거 유세를 하게 되었다. 초기 노태우는 패배를 예상하였고 전두환 역시 패배를 예상했다. 그러나 군 출신 인사 중에서도 김종필이 출마하며 민주공화당과 한국국민당의 법통을 주장했기에 군 출신 인사와 보수 인사들의 표심이 갈라지리라 예상, 노태우의 선거 캠프에서는 참신함과 대화와 타협론을 내세워 박정희, 전두환은 물론이고 박정희 계열인 김종필 등과도 차별성을 구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승리가 예상되던 양김의 분열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통일민주당 후보 선출 문제를 놓고 논란을 빚던 1987년 8월 11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조기 후보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조정 주장이 맞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9월 14일에는 김대중과 만났고,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선을 하지 않을 바에는 굳이 잡음의 소지가 있는 36개 지구당 창당은 필요없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주장을 일축한다. 계속된 토론에도 김대중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 9월 29일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간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다음날인 9월 30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야당 후보자들의 단일화를 촉구하던 재야인사들은 이를 적전분열 이라며 강도높게 질타하였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 민정당 대표로 있을 때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있을때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1987년 7월 10일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제2대 민정당 총재로 취임하였다. 한편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선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 1987년 11월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28%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1987년 당시 노태우, 김영삼 대선 후보는 각각 광주 유세에 나섰다가 성난 시민들이 던진 돌과 화염병에 곤욕을 치렀다. 당시 김대중이 평민당을 창당하면서 젊은피 수혈이라는 정책을 펴서 학생운동권 중 민족 해방 계열 출신 청년 정치지망생들을 대량으로 영입하면서 언론 매체 등에서조차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그 역시 다른 재야 인사 및 운동권 계열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태우는 의정부시, 고양군, 성남시 등 중소도시에도 직접 유세를 다니기도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는 전국 득표율 36%로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김종필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새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원활한 여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5월 28일 야 3당 총재와 청와대 4자회담을 열어 구속자석방 등의 방침을 밝혔다. 대북관계를 포함하여 대외관계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자,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노태우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또한 그는 "중용(中庸)을 근간으로 화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층간ㆍ지역간의 반목을 해소하면서 새시대를 민주 발전과 민족 자본의 시대로 만들겠다"는 정치 이념을 피력하였다. 그는 연설문 등의 초안을 검토 후 내용을 암기하여 그대로 자연스럽게 발표하였다. 노태우의 대통령직 취임 직후 5공 청산을 원하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을 주저했고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고 백담사로 은둔하였다(이것은 국정감사 부활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전두환의 백담사 은둔 기간 중에도 시민사회단체는 전두환 구속, 12.12, 5.18 관련 처벌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가 내세운 대표적인 국정 방향 2가지는 다음과 같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북방 정책" 특히 북방 외교정책 은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주요 업적으로 손꼽힌다. 노태우는 집권 이후 제2세계의 상징과도 같았던 소련과 국교를 맺었고, 이후 헝가리 등과 같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차례로 국교를 맺었다. 뿐만 아니라 냉전 이후인 1992년에는 한국 전쟁의 적성국이었던 중국과도 국교를 맺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중공과의 외교관계 수립은 오랜 우방이었던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얻게 된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역시 대표적이다. 그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시절인 1987년 국회연설에서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시대는 권위체제로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다원의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나와있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오지 않았고,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정치적 선전으로 그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외교적으로는 이른바 "북방외교"를 천명하고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 수교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국제 연합 입성을 이끌어냈다. 그는 7·7 선언 이래의 북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 방문시 보좌진을 파견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연결하여 한소 정상회담과 한러 관계를 다시 복원시켰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천황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89년 3월 4일, 국회에서 지방자치법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북방정책, 다른 말로 북방외교 라 불리는 외교정책을 통해 일단 양적인 면에서 한국 외교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국내외의 외교환경이 만들어준 개연성의 덕택이 컸다는 점에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한국의 대(對)공산권 외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공산권 국가들과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던 기존의 이념지향적 외교 정책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제5공화국까지의 북방외교는 거의 답보상태에 있었고 교역·통상분야도 간접·제3자 형식의 미미한 규모였던 것에 비하면, 제6공화국의 출범과 동시에 가속화된 북방정책은 지극히 바람직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공산권과의 수교를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소련,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거나 관계를 개선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국제 연합(UN)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1991년에는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는 남북한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한편, 정부의 주도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소련과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0년 소련과 수교하였고, 소련의 해체 직후 러시아와 재수교하였다. 1992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에게 직접 만남을 제의, 정상회담을 개최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 그 해에 몽골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베트남과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1988년에는 7 ·7선언으로 알려진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을 발표하면서 노태우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직접 작성, 발표하였다. 동구권과도 공식 수교를 위한 접촉을 추진, 사절을 파견한 끝에 1989년 2월 1일 헝가리와 공식 수를 맺었다. 2월 27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한·미 정상회담을 하면서 조지 부시를 설득,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1990년 6월 초 미국 방문 중, 미국에 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체류소식을 접한 뒤 밀사를 보내 비밀 회담을 하였다. 비밀 회담 결과로 6월 5일 한-소 정상회담을 가졌고, 6월 6일 부시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때 고르바초프로부터 한국 방문을 약속받고 10월 1일 소련과의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지고 10월 30일에는 서울에 주 소련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91년에는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하게 되자, 북한과의 동시 가입은 있을 수 없다는 국내 보수단체들의 집단반발을 무릅쓰고 남북한이 함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발표를 수락했다. 1992년 1월 노태우-부시 정상 회담이 있었고, 2월에 남북한은 나진-선봉 지구 개발 공동보조에 합의하였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을 만나 정상회담을 개최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8월)하였고 같은 해 몽골 및 베트남(12월)과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구 소련(舊 蘇聯)에서 독립한 신생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1991년 독립), 아르메니아, 조지아 및 또 다른 신생국인 몰도바(1992년 독립)와 수교하였다. 그리고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도 이해에 수교하였다. 그 밖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등 1992년에만 모두 18개국과 수교하여 총 수교국 수가 170개국으로 늘어났고 정상회담이 12회, 외무장관회담이 41회에 이르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외교를 벌였다. 특히 수교국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구 소련(舊 蘇聯)에서 독립한 나라들과 잇따라 국교를 수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밖에도 주요 공산권 및 제3세계 국가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노태우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북방외교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북방외교의 성과는 1970년대 말 중국 공산당의 실용주의 노선 채택, 냉전체제의 종식과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에 유발된 중앙유럽 국가들의 정치·경제개혁 및 개방 등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한국의 경제발전(과장된 면이 많았다.)과 국민적 논의의 대두라는 국내 정세변화가 맞물린 결과이다. 다만, 급변하는 정세변화에 한국이 조금 더 빨리 진지하게 대응하고 그 주체가 정부나 정치권 일부에 그치지 않고 정보개방과 국민적 의사의 결집에 의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라크(1989년), 몽골, 예멘(각 1990년)와도 수교하였다. 한편 국민 여론과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 및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추진하였다. 1990년 5월 24일 비행기편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가이후 총리와 1차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일본의 천황 아키히토로부터 사과 성명을 얻어내기도 했다. 한편 1989년 초부터 통일원 등에 지시하여 서울 올림픽과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로 일시 중단했던 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도 다시 추진하였다. 1989년 대북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9월 11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 특별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을 제시하여 새로운 통일논의를 발표하였다. 1990년 1월 10일 신년 연두 회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고령이산가족 왕래 및 금강산 공동개발 등을 추진할 것을 제의했다. 그의 제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수락하였다. 1990년 6월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다시 그에게 남북대화 재개를 요청했고,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고위급회담 제7차 예비회담이 7월 3일로 예정되었다. 그 해 7월 3일의 남북고위급 회담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하였지만 남북간의 대화분위기가 지속되자 7월 20일 남북한 민족대교류에 관한 특별담화문을 작성, 발표하여 8월 13일부터 8월 17일까지 이산가족 상봉 및 남북 자유 방문, 안전귀환 상호 보장 등을 북측에 제의하였다. 이를 북한측이 수용하면서 9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총리 연형묵 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 90명 일행이 서울을 방문하였다. 이에 일부 보수단체에서는 그들을 처형해야 된다고 시위를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대화가 진전되어 1990년 9월 5일 남북총리회담이 개막되었다. 회담 2일차인 9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연형묵 총리를 독대, 연형묵은 그에게 단독 면담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한편 UN 가입 정책도 추진하여 1991년 9월 16일 대한민국의 UN가입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구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가입시켜야 한다고 하여 결국 동시에 가입하게 되었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하여, 중국 건국 후 43년만에 수교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때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중화민국과의 단교 문제로 일부 보수단체에서 반발했고, 중화민국에서도 반발했다. 이에 중화민국 외교부는 노태우의 중국과의 수교를 항의한 뒤, 결국 단교하였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1988년에는 7 ·7선언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노태우 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제시되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남북한간의 적극적인 교류를 제의하고,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 관계 개선하는 일에 협조할 뜻을 선언했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두 개의 주권국가의 연합을 과도기 단계로 인정한 점에서 이전과는 달랐다. 북한은 민간교류를 원하는 당국자간의 교류를 회피해 왔지만,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남북화해가 선결과제임을 깨닫고 남한의 교류제의를 수락했다. 그리하여 1990년 9월부터 총리를 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회의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리는 동안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열리고, 남북의 축구팀이 통일축구대회를 서울과 평양 두 곳에서 가졌으며, 1991년 4월에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5월에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참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91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했다.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非核化)에 관한 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남북한 공동으로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1992년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고위급 회담을 앞두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산 가족 상봉에 큰 기대를 걸고 8차 고위급 회담에서 반드시 성사시키라고 특별 지시를 했다. 대신 북한은 비전향 장기수인 리인모 노인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회담의 대변인 이동복은 이 때, 이른바 "이동복 훈령 조작 사건"의 주역이었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대한 대통령의 지침을 받기 위해, 평양의 상황실은 서울로 청훈(請訓)하였는데, 서울로부터 답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동복은 엉뚱한 훈령을 정원식 대표에게 보고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 ·7선언)에서 남북간에 민족공동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 등 6개항 원칙을 선언하면서 공산주의권과의 관계개선의 의사를 천명하였다. 그는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 또한 우리는 소련·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이른바 "북방외교"(또는 "북방정책", Nordpolitik)는 곧 가시화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소련과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 수립이 시작되었다. 1988년 8월에 헝가리와의 상주대표부 설치협정 체결(1988년 10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주(駐)헝가리 한국대표부가 개설)은 북방정책의 첫 결실로 평가된다. 1989년 동구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와 수교한데 이어, 같은 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와도 수교하였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일왕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90년 1월 인위적 정계개편(삼당 합당)을 시발로 하여 국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1990년 초 공산권 국가들과 일거에 국교를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3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몽골, 루마니아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이루고, 4월에는 고르바초프가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드디어 9월 30일 한-소 국교 정상화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수교의 정책 수단은 국내경제력이었다. 헝가리와 수교시 6억2500만 USD의 상업 차관을 약속하였고, 한-소 수교시에는 30억USD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1990년 11월 헝가리의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한국의 유엔 가입 등 한반도 평화정착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공산권과의 수교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이끌어 냈다. 1991년 소련 붕괴직후 러시아와 재수교하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성립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및 알바니아와 1991년에 수교하였다. 노태우의 경제 정책은 자유화와 개방화의 확대였다. 그의 정권 하에서 경제는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수출은 600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1986년 대한민국은 대외교역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이래 그 폭이 매년 확대, 1989년 대한민국은 마침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반전하였다. 그러나 수출은 1990년대 초 경기침체로 부진을 겪게 되었다. 1988년 2월 25일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노태우는 초기 "6공 황태자" 라는 별명을 얻은 박철언 등을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3당 합당으로 들어온 김영삼 등의 반발과, 차기 대권을 보장하지 않을 때 정권퇴진도 불사하겠다는 구 민주계(김영삼 계열)의 저항에 굴복하여 차기 대권 후보자직과 총재직을 김영삼에게 양도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보수 세력으로부터 쉽게 허락하였다, 물렁하다며 비난받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5공 청산의 기치를 내걸고 5공 인사들을 대부분 정리, 자진 퇴임을 유도하였으나 5.18 관련자 처벌에는 미온적이었다. 이에 따라 야당과 운동권에서는 5.5공화국이라며 반발했다. 한편 그는 6.29 선언으로 5공화국의 잔재를 털어버리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 했고 장기집권의 종식을 정치적 최대 목표 로 지명했다. 또한 5공 청산론을 내세워 청와대에 있던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고 민간인 출신 전문가들과 대학 교수 출신 인사들을 기용했다. 이에 신군부 출신들은 집단 반발했으나 그는 들어주지 않았고, 신군부 출신들은 노신영이나 정호용, 장세동 대신 노태우를 지지한 점을 언급하며 반발하였으나 노태우는 이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이후 일부 신군부 인사들과는 척을 지게 된다. 또한 노태우는 인적 쇄신을 목적으로 김종인 등 각 분야의 민간 전문가들을 영입하는 한편, 박정희, 전두환 정권 치하에 저항하여 대쪽 판사로 이름났던 법관 이회창을 영입하여 정계로 발탁하였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취임 직후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추모 행사에 대한 간섭, 감시요원 배치를 없애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법통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김준엽의 제안은 거부하였다. 취임 직후부터 그는 공산권이 붕괴되리라 보고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외교 담당자들을 초빙하여 연구를 지시하게 했다. 1988년 7월 7일 남북동포 교류 추진 등 대북정책 6개항을 골자로 한 7·7선언 을 직접 작성, 발표하였으며 8월 8일에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중공"을 중국 으로 공식 호칭키로 발표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으나, 각 언론과 문헌에 "중공" 대신 중국 으로 사용하도록 지시, 추진하여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문헌 자료에서는 "중공" 대신 중국 으로 쓰이게 되었다. Tae-woo - cropped, 1989-Mar-13 03.jpg|220px|섬네일|오른쪽|찰스 오스토트(Charles P. Ostott)를 방문한 노태우 (1989년) 1989년 3월 보안사령부가 친위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방해가 될 만한 반정부인사 목록을 만들고 이들을 개별적으로 사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D-데이 전후로 전원 검거한다는 명목 하에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노태우가 5공을 답습한 것 중 하나였으며, 일종의 정치적 개입이었다. 보안사 3처(우종일 처장·김용성 과장)는 1989년 4월 계엄에 대비해 각계 주요인사 923명의 인적사항·예상 도주로·예상 은신처·체포조 등이 기재된 청명카드를 작성하고 계엄시 이들을 검거·처벌하기 위한 청명계획을 수립했다. 보안사 3처 ‘청명 태스크포스’의 ‘청명’ 대상자 선정과 등급분류는 공안합수부 정책협의회에서 검찰·경찰의 좌익인사 자료와 보안사의 좌익인사 명단과 등급 등을 참조해 작성했다. 청명카드 작성작업을 완료한 뒤 1989년 8월 을지훈련기간에 8개 부대를 선정해 도상훈련까지 실시했다. 이어 보안사 3처 6과 분석반은 1990년 10월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청수(동향파악) 대상자라는 가명칭으로 민간인 1300여명에 대해 공개 자료와 예하 보안부대의 동향관찰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개인별 신상자료철을 작성·관리했다. 보안사가 A급으로 분류해 사찰한 민간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이해찬 전 국무총리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 이강철 전 대통령 정무특보(당시 진보정치연합 공동대표), 임종석 전 의원(당시 전대협 의장), 고 문익환 목사, 이창복 전 의원(당시 전민련 상임공동의장), 유인태 전 의원(당시 진보정치연합 사무처장), 이태복 전 노동부 장관(당시 주간 편집실장), 정윤광 당시 지하철노조 위원장 등 총 109명이다. 보안사가 지목한 청명 대상자 중 하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파일에는, 1989년 당시 거주하던 부산 남구 남천동 S아파트 내부 도면까지 그려져 있다. 아파트 내부 방 구조, 화장실과 베란다 위치 등도 파악해둔 상태였다. 평소 몇 시에 집을 나서 몇 시에 귀가하는지, 타고 다니는 차량은 무엇인지, 자주 걸어 다니는 동선, 평상시 자주 만나는 친구와 연락처, 예상도주로와 예상은신처까지 모두 기록돼 있다. 1989년 5월 22일 전교조는 연세대학교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때 학교는 이미 전투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으며 창립식 직후 폭력적인 진압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다쳤다. 이날 참가하였던 교사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다. 5월 22일 저녁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교사 노조는 불법이라 천명하고 해산 및 단속을 천명하였다. 이어 문교부 장관 정원식 역시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인사들에 대한 구속과 해임, 불이익 조치를 취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후 전교조 가입 인사 및 동조자들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계속하였다. 우선 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에 결성에 참여한 오종렬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학생 운동권들은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처음에는 노태우와 정원식의 마네킹을 화형하는 수준이었던 학생운동권들의 시위는 점차 분신자살로 이어졌다. 한편 정원식 장관은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징계, 유급조치, 퇴학 등을 지시했다. 그 뒤 노태우는 정원식 등과 협의하여 특별 지시를 내려 조치를 완화,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한다. 1500명의 전교조 관련 교사 해임과 파면, 징계에 대한 반발과 증오,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연이어 터진 김귀정(金貴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격화되었고, 노태우는 전교조는 불법 조직이라는 뜻을 반복하였다. 노태우는 재임기간 내내 전교조는 불법조직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해직된 전교조 교사들은 1993년 10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 1년차이던 이날까지 전교조 복직 신청을 받아서 95%가 복직되었다. 1490명 중 1424명이 복직을 신청하고, 66명이 복직 신청을 거부한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는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을 발표했다. 6개항으로 된 이 선언의 내용을 보면,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이산가족 생사 확인 적극 추진, 남북교역 문호개방, 비군사 물자에 대한 우방국의 북한 무역 용인, 남북 간의 대결외교 종결, 북한의 대미·일 관계 개선 협조 등이다. 이 선언 후 우리 정부는 대북 비난 방송을 중단했으며, 남북 대학생 국토순례대행진을 북한측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Olympic torch.jpg|오른쪽|섬네일|180px|1988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 당시 성화 점화 모습 at the closing ceremonies of the 1988 Summer Games.JPEG|오른쪽|섬네일|180px|1988년 하계 올림픽 폐막식 때 있었던 불꽃놀이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원래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인류의 가슴에 화합과 전진을 심어주고 당당히 세계사의 주역으로 나선 것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를 개최한 것은 1986년 아시안 게임 이후 2년 만의 일이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자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당시 공산 국가와 외교 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북한은 이들 공산 국가의 참가를 막기 위한 로비 활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공산 국가 중에서는 중국이 1984년 7월에, 동독이 1985년 3월에 참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우선 중국의 경우 당시 중소 분쟁으로 인해 소련에 기대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걷고 있던 공산주의 국가였고, 이미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올림픽 보이콧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한편으로는 1990년 아시안 게임 유치 문제 등을 의식해 서울 하계 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 그리고 동독의 경우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자국 스포츠계 인사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2회 연속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서울 하계 올림픽 참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나 그 외의 친소(親蘇) 공산주의 국가의 참가 역시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운용 IOC 위원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소련 측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련의 참가 선언을 이끌어냈고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 공산 국가들도 참가하였다. 그 외의 몽골·라오스·베트남 등의 아시아 공산 국가와 친북한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도 참가하면서 12년만에 동서 양 진영 대부분 국가가 참가하면서 참가국 수는 사상 최대인 160개국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부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아 IOC 전 회원국 참가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서 끝까지 문호를 개방했고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의 남북한 공동 개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회 참가를 거절하였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공산주의 국가였던 쿠바, 에티오피아, 세이셸이 동참하면서 보이콧했다. 고립 성향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알바니아 역시 불참하면서 알바니아는 4회 연속으로 하계 올림픽에 불참했다. 니카라과는 대한민국의 수교국이었으나 선수단 구성과 재정 문제를 이유로 참가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 IOC 회원국 중 7개 국가가 불참하였다. 마다가스카르는 대회 참가를 선언했지만 재정 문제를 이유로 철회했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IOC에서 축출된 상태였으므로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나미비아는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배하에 있어 IOC에 가입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캄보디아,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부룬디, 코모로, 상투메 프린시페,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 나우루, 키리바시, 투발루, 세인트키츠 네비스, 도미니카 연방, 세인트루시아는 독립 국가였지만 당시 IOC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참가하지 못했다. 1988년 10월 2일, 서울 올림픽은 폐막되었다. 노태우 (1989년) 1989년 5월 동의대학교의 입시부정에 항의하던 동의대학교 학생들이 전투경찰 5명을 납치, 폭행하고 학내에 감금하여 이를 구출하려던 경찰관 7명이 화재와 추락으로 숨지고 외부에 근무중이던 경찰관 등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91명의 대학생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09년 민주화 운동으로 최종 인정되었다. 1989년 7월 27일 대한민국 김포국제공항을 이륙, 태국의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다를 거쳐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할 예정이던 대한항공의 803편(맥도넬더글러스 DC-10 여객기)이 악천후와 시야 미확보, 안개 등의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가 추락, 탑승객 7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승객과 승무원 200명을 태운 대한항공 DC-10 여객기가 한국시간을 기준으로 이날 오후 2시 30분 경 추락하여 탑승객 72명이 사망하고 139명이 부상했다(리비아 현지주민도 포함). 탑승객 대부분은 중동 현지에서 근로하는 근로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대건설과 대우건설, 동아건설 (공영토건 포함) 등 150명의 근로자들이 모두 탑승하였다. 사고의 원인은 시계 240m의 짙은 안개 속에서 조종사가 무리한 착륙시도를 하다 일어난 것이다. Young Sam 1996.png|125px|섬네일|오른쪽|김영삼 Jong-pil 1999.png|125px|섬네일|오른쪽|김종필 1987년 대통령 선거의 뒤를 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은 최다의석을 확보하였으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5석을 획득하여,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했다. 이 때문에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이 부결되는 등 난관에 부딪혔고, 그는 결국 합당을 추진하기로 한다. 비슷한 시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역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원내 3당으로 밀려나게 된다. 평소 노태우를 멀리하던 김영삼은 "만약에 이대로 있다가는 대통령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여당의 지위를 얻고자 했고, 얼마 뒤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가 무소속 후보를 매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합당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 신민주공화당 역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김종필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온것은 물론이요, 김종필 자신조차도 정권을 잡기 위해 합당을 결심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민주세력이었던 김영삼이 합당을 한다고 하자 민주당은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당시 청문회스타 라고 불린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협조적이었으나, 합당을 한다고 하자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이기택, 김정길, 장성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민주진영의 주요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론이 좌절되었다. 1990년 1월 21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한자리에 모여 합당하기로 합의하였고, 이튿날 3당 체제(물론 이는 전당 대회 전까지 행해졌다)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개헌선을 훨씬 초과한 218석을 차지하는 등 절대권력을 쥐게 된 민자당은 날치기 통과 강행, 반대파 억압, 사회운동 탄압 등의 독재정치를 펼치게 되었고, 이에 자연히 민주인사들의 반발을 가져오게 된다. 1988년 8월 21일 미국 순방후 귀국 장면 1988년 1월 1일의 신년사에서 그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한다 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제5공화국 시절 은근히 유행하던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1988년 여당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다. 이에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 을 추진해 1990년 3월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한편 노태우는 언론 자유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른 결과로는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 이라는 지위를 부여한 것이 있다. 또한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대대적으로 단행하였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장으로 함석헌을 위촉하여 서울평화선언을 채택하게 했고, 1991년에는 장준하 등을 복권시키고 그해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또한 윤보선 대통령과 함석헌 등을 국가 원로로 예우하였다. 그러나 잇단 조치들로 보수 세력과 군출신 인사들의 반감과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현재의 기무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목록에는 정계와 노동계,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 기록이 담겨 있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보안사는 이후 기무사로 이름을 바꿨으며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윤석양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85학번으로 학생운동으로 4학년 2학기에 제적되어 군 복무를 하게 됐다. 신병교육 뒤인 1990년 7월 3일, 윤석양은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어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 (이하 혁노맹)에서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보안사의 협박에 못이긴 윤석양은 혁노맹 간부 1인의 소재지를 알려주었고, 이 후 혁노맹 수사에 홍대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등 조금씩 협조했다. 7월 19일, 보안사 수사관들은 윤석양을 변장시켜 홍대 앞이 보이는 2층 카페로 데려가 혁노맹 관계자를 지목하도록 했고, 윤석양의 도움으로 혁노맹 관련자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이 후, 보안사 수사관들은 윤석양을 조금씩 신임하게 되었고, 보안사에서는 8월 22일, 현역군인 10명이 포함된 혁노맹 사건을 발표했다. 윤석양은 탈영 이후, 혁노맹은 1990년 3월에 자진해체했으며, 계속 활동했다는 보안사의 발표 내용은 조작이라고 밝혔다. 이후 윤석양은 보안사 분석반으로 옮겨져 혁노맹에 대한 수사 보고서 작성과 사노맹에 대한 자료 정리를 도왔다. 하지만 9월 22일, 말 지의 10월호에서 "보안사의 혁노맹 사건 조작 진상"이라는 기사를 내보내자 보안사의 한 계장이 윤석양에게 이중스파이가 아니냐고 물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윤석양은 9월 23일 새벽 2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관련 색인표와 디스켓을 가지고 보초 교대 시간을 틈타 보안사를 탈영,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에 은신했다. 한편 집권 직후부터 각종 살인 범죄와 강간 등의 범죄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1990년 10월 13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선언인 10.13 특별 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 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각종 깡패와 폭력조직의 활보와 야당 경선 내에도 깡패조직인 용팔이 등이 출몰하자 그는 1990년초부터 특별선언을 준비하여 발표한다. 내용의 골자는 첫째, 국가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 둘째,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 셋째, 과소비와 투기, 퇴폐와 향락을 바로잡아 일하는 사회 , 건강한 사회 를 만들어나갈 것 등 이었다. 10월 14일 노태우는 각부 장관들을 소집하여 10.13 특별 선언의 후속 조치로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자정 이후 심야영업 단속과 통제, 유흥업소 단속, 교통질서 위반 집중 단속, 공중질서 위반 집중 단속, 학교 주변 청소년보호구역 확대, 불량 비위생 식품 단속, 가정파괴범, 유괴 납치범, 좌익사범 등 흉악범을 비롯한 각종 반사회성 범죄조직에 대한 소탕 등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또한 그는 보복성 범죄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대상에 추가하고 각종 형사관계법을 개정해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가정파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학생운동권들은 공안당국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범죄와의 전쟁 선언 후 2년 뒤인 1992년 초 각종 극성 범죄율은 약 5% 정도 감소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을 공약하였고, 그 결과로 평시 작전 통제권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에 환수했다. 1991년 11월 13일 노태우는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각각 추진하려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의 핵포기 선언에 대해 김영삼은 이를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1988년부터 노태우와 당시 문교부 장관 정원식은 전교조를 불법 조직으로 규정하고 단속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학생운동권들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에 결성에 참여한 오종렬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징계, 유급조치, 퇴학 등을 가했다. 그 뒤 조치를 완화시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한다. 1500명의 전교조 관련 교사 해임과 파면, 징계에 대한 반발과 증오,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연이어 터진 김귀정(金貴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으로 학생운동가들은 정원식 퇴진 데모와 반 정원식 시위, 정원식의 허수아비와 마네킹을 놓고 정원식 화형식 등을 집행하기도 했다. 그 뒤 정원식은 한국외국어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91년 덕망높은 교육자의 발탁을 이유로 노태우에 의해 총리로 발탁되었다. 한편 노태우 정권을 군부독재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던 학생운동권 세력은 1989년 이후 다시 분신자살과 투신자살 등을 감행하였다. 명지대학교의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시위 참여 후 학교로 돌아오던 도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2일이 지난 후 1991년 4월 26일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위해 시위가 진행되었고,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이 진압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폭력에 의해 사망했고, 이에 대하여 항의하는 시위 도중 성균관대생 김귀정까지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4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안응모 내무부 장관을 경질시켰다. 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하였고 이어서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정국 이 조성되었다. 이로 인해 민주화에 소극적이던 노태우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게 되자, 노태우 정권은 5월 8일에 노태우 정권을 비난하며 자살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대필했다는 소위 유서대필사건까지 조작하면서 사건을 덮으려 하였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 라는 글로 분신자살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학생들의 협박과 비난이 계속되었고, 정원식 사건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온 정원식에게 대학생들은 계란, 유리조각, 밀가루, 페인트 등을 투척했다. 6월 4일 노태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사건에 대한 분노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며 특별 대책을 주문했다. 윤형섭 교육부 장관에게서 정원식의 계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접한 노태우는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오늘의 학원폭력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바로 관계자를 소집한다. 이어 노태우는 학생들의 패륜을 질타하며 정원식, 김지하 등에 대한 폭력 사건에 대한 엄벌을 지시하였다. 노태우는 6월 4일 각부 장관과 경찰, 검찰, 문교부 인사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사회적 윤리와 도덕성, 인성을 회복하고 학원가에 만연한 그릇된 풍토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라고 지시했다. 당초 노태우 정부는 경찰 수사선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으나 보수단체들의 시위로 검찰수사로 사건을 확대했다. 노태우는 바로 검찰총장 정구영을 불러 엄단을 지시했다. 검찰과 경찰의 합동 수사본부가 조직되고 6월 5일 오전 외국어대학교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시작, 교내 주변을 탐문수사하여 정원식 규탄시위에 참여한 학생 310명을 체포, 연행했다. 1991년 국제로터리클럽 폴해리스 명예회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장준하를 명예회복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라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요구를 노태우가 전격 수용,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가 치러지면서 30여년만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다. 이때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자당이 압승했지만 3당 합당을 계기로 국회에서 개헌선을 넘는 거대여당을 출범시켰으나 보수 진영의 반발과, 야당의 반발이 있었다. 그 해 서울 주변지역 개발정책 중 일산 신도시와 성남시에서 바다 모래로 지은 아파트들이 발견되어 책임자를 바로 문책하였다. 노태우는 이후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이 있었고 후계자로는 박철언 등을 내정하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그에게 항의하며 집단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도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긴뒤, 1992년 8월 28일 노태우는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에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된다는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자당을 탈당하였다. 1992년 9월 18일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 이에 따라 10월 9일 사상 첫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 한편 대선 직전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는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에 대한 악감정은 계속되었는데 후일 그는 김영삼을 가리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권력투사처럼 행동했고, 그의 국정운영 능력을 의심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어 후계자로 만들게 되었다"면서 "그는 민주주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었으니 나는 색맹환자였던 셈이며 역사와 국민앞에 죄송하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한편 김영삼에게 순순히 밀려난다고 봤던 그는 야당 인사들에게도 정치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하기도 했다. 김대중에게는 20억원 이상의 정치 자금을 지원했다. 1993년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이 되었다. 2월 25일 김영삼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연희동 자택으로 퇴임하였다. 대통령 퇴임 직후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면서 증권가를 중심으로 대통령의 비자금 보유설이 나돌자 그는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1994년 국회의원 서석재에 의해 4천억 비자금 설이 제기되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반박하였다. 1995년 서석재 의원 등에 의해 그의 비자금 조성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같은 해 국회의원 박계동에 의해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수설이 제기되어 수사에 들어가자, 해외 순방 출국 길에 언론,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비자금 수사 후 비자금 수수가 사실로 드러나자 굴복하였다. 1995년 10월, 노태우는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면 광주사태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망언으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노태우씨는 "중국은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고 말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당시 노태우의 망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망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국회의원 박계동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주)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 원의 예금계좌 조회표 사본을 제시하며 노태우 비자금 4천억원! 이라는 발언을 강조, 노태우의 비자금 4,000억 원이 여러 시중 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10월 20일 신한은행측에서 이 계좌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가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1995년 10월 20일부터 검찰이 그의 계좌를 수사, 추적한 끝에 노태우의 경호실장 이현우가 검찰에 자진 출두하여 "우일양행 명의 차명계좌에 입금되어 있는 돈은 노태우가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돈이며, 전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 이태진이 관리해 왔다"고 진술, 정치비자금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를 계기로 검찰의 수사결과 비자금 수수가 드러나자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 사실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원 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원 가량이 남았다 고 밝혔다. 수사과정에서는 1995년 10월의 대국민 담화와는 달리 기업체로부터 3,400∼3,500억원을 받고,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위해 조성한 자금 중 사용하고 남은 돈과 당선 축하금 1,100억원 등을 합쳐서 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1995년,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되어 이전에 대통령 재직시 조성한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 등의 죄목으로 전격 구속되었다. 그해, 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해 11월 16일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노태우가 수감당할 때, 대법원은 노태우에게 대통령 재직 당시 뇌물을 준 재벌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40여 명을 뇌물 공여죄로 기소했지만 항소심에서 재벌기업인들에게는 전원 집행유예, 무죄 선고로 석방되었다. 한편 노태우는 옥중에서 항소했고,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이를 계기로 12·12 군사 반란과 5·17 사태에 대한 재수사 여론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취임 직후부터 문민 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계승한 정부임을 천명하고 12.12 사건과 5.17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지시했다. 1996년부터 12.12와 5.17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져, 1997년 4월 17일 12·12사태와 5·18사건 및 대통령 비자금 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형, 추징금 2천 688억원의 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사면되었다. 1997년 당시 2629억원을 추징금을 선고받고 6월말까지 2286억원을 납부하였다. 2008년 당시 남은 추징금은 387억여 원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 김대중은 동서화합을 이유로 그를 복권시켰다. 이후 각종 국가 행사에 국가 원로로 초청되었다.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 회원 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도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노태우는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 전두환과 나란히 앉아 행사를 참관하기도 했다. 사면 이후 노태우는 건강이 악화되어 특별한 정치적 행보와 언론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추징금을 꾸준히 납부하던 노태우는 2008년 들어 동생 노재우와 조카 노호준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2008년 4월에는 동생과 조카 명의의 회사가 자의 비자금으로 설립된 것이라며 소송을 벌였으며, 12월에는 동생과 조카의 주주권 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하지만 이후 가처분 신청에서 패소하였고 나머지 추징금 환수의 난항이 예상되었다. 노태우는 2천 628억원의 전체 추징금 가운데 2천 339억원을 환수한 상태다. 2008년 2월의 이명박 대통령 취임 행사에도 건강상태의 악화로 불참하였다. 한편 최근 노태우는 소뇌 위축증을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이다. 2011년 4월에는 기관지에서 침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한의사협회는 5월 11일 노태우의 몸에서 발견된 침과 침뜸사 김남수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침이 유사하다고 주장한 뒤 서울중앙지검에 침 시술자의 신원을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김남수는 1990년대 초 이후 노태우를 만난 적 없으며, 제자들의 침 수술 의혹에 대해서도 "모르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노태우는 2013년 6월 현재 231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다. 노태우 측은 자식 대신 동생, 사돈으로부터 남은 추징금을 추징해달라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노태우는 동생과 사돈에게 제기한 재산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취하하고 사돈과 동생이 추징금을 납부하기로 합의하였다. 9월 3일 노태우의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이 80억원을 납부하고 동생 노재우가 9월 4일 남은 150억 4천만원을 납부하여 남아있던 추징금을 모두 완납하였다.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 (을유문화사, 1987) 《노태우 회고록 상: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조선뉴스프레스, 2011) 《노태우 회고록 하:전환기의 대전략》 (조선뉴스프레스, @ DA-SC-91-01927 퍼블릭 도메인 사진 DF-SC-91-07852 퍼블릭 도메인 사진 DF-SC-91-07853 퍼블릭 도메인 사진 분류:1932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교하 노씨 분류:대구광역시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 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분류: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 분류:불교 이탈자 분류:대한민국의 감리교도 분류:대한민국의 음악가 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인 분류:대한민국의 정무제2장관 분류:대한민국의 체육부 장관 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 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분류:한국의 회고록 작가 분류:노태우 정부 분류:하나회 분류:민주정의당 분류:민주자유당의 정치인 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 분류:대구공산초등학교 동문 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 분류:육군헌병학교 동문 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 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 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 분류:미국 육군특수전학교 동문 분류:육군대학교 동문 분류:노태우 가 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 분류: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
삼인산(ATP)의 구조. ATP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주요 분자이다. 물질대사 (物質代謝) 또는 단순히 대사 (代謝) 또는 메터볼리즘 (라틴어, 독일어 metabolismus, 은 생물의 세포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어나는 화학 반응이다. 효소가 반응을 촉매하며, 대사를 통해 생물은 성장하고 번식하며, 구조를 유지하고 환경에 반응한다. 대사라는 단어는 소화와 세포 간에 물질 수송 등을 포함하여 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화학 반응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반응의 일부를 중간 대사 (라 한다. 대사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이화작용()은 세포 호흡을 통하여 유기 분자를 분해하고 에너지를 얻는 반응이다. 동화작용()은 에너지를 이용하여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세포의 구성 성분을 합성하는 반응이다. 대사의 화학 반응은 대사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사경로에서 한 화합물이 여러 단계의 반응을 거쳐 다른 화합물로 변화하고, 단계마다 다른 효소가 차례로 반응을 촉매한다. 효소는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을 에너지를 요구하는 반응과 짝지어 생명체가 필요로 하는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효소는 반응이 좀더 빠르게 일어나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또 세포 주위의 환경이나 세포에 오는 신호에 반응하기 위해 대사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생물의 대사 시스템에 따라 어떤 물질이 영양소인지 독인지가 정해진다. 예를 들어, 황화 수소는 몇몇 원핵생물에게는 양분이지만, 동물들에게는 독이다. 생물체의 대사 속도는 필요한 음식의 양과 음식을 얻는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 생물 종이 다를지라도 기본적인 대사경로와 그 구성 성분은 매우 유사하다. 시트르산 회로를 구성하는 중간체로 널리 알려진 카복실산들은 단세포 세균인 대장균에서부터 거대한 다세포 생물인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모든 생물에 존재한다. 대사경로는 진화 초기에 등장했으며, 그 효율성 때문에 계속해서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과 식물, 미생물의 구조는 대부분 아미노산, 탄수화물, 지질(종종 지방이라고 불림) 이렇게 세 가지 기본적인 분자로 이루어진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며, 대사는 이 분자들을 만들어 세포와 조직의 구성 성분으로 쓰거나, 분해하여 에너지로 쓰는 화학 반응이다. 주요 생화학 분자는 결합하여 DNA나 단백질 같은 고분자가 된다. 분자 종류 단량체 이름 중합체 이름 중합체 예시 아미노산 아미노산 단백질 (폴리펩타이드라고도 함) 섬유상 단백질과 구형 단백질 탄수화물 단당류 다당류 녹말, 글리코젠 및 셀룰로스 핵산 뉴클레오타이드 폴리뉴클레오타이드 DNA 및 RNA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펩타이드 결합을 통해 결합한 선형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단백질 중 다수는 효소로 대사의 화학 반응을 촉매한다. 기타 단백질은 세포 형태를 유지하는 세포골격과 같이 구조나 기계적 기능을 담당한다. 단백질은 또한 세포 신호, 면역 반응, 세포 부착, 막을 통한 능동수송, 세포 주기에 주요 역할을 한다. 아미노산은 또한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포도당이 부족하거나 세포가 대사적 스트레스 상태일 때 시트르산 회로에 진입하는 탄소원을 제공하여 세포의 에너지 대사에 관여하기도 한다. 구조 지질은 생화학 분자들 중 가장 다양한 유형으로 나뉜다. 주요 역할로는 생체막 안팎을 구성하는 것과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이 있다. 지질은 소수성이나 양친매성 물질로 정의되지만 벤젠이나 클로로폼과 같은 유기 용매에 녹는다.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을 포함하는 큰 화합물 무리이다. 글리세롤이 지방산 세 분자에 결합한 에스터를 트라이글리세라이드라 한다. 트라이글리세라이드 구조에서 조금씩 변형된 화합물이 존재한다. 스핑고지질의 스핑고신, 인지질의 인산염과 같은 친수성 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 밖에 스테로이드도 주요 지질 유형으로, 콜레스테롤이 여기에 속한다. Fisher to Haworth.gif|섬네일|직선형 사슬 형태와 고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포도당 탄수화물은 하이드록시기가 많은 알데하이드나 케톤으로 사슬이나 고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탄수화물은 생물계에서 가장 풍부한 분자이다. 기능도 다양해서 에너지를 저장하고 수송하는 역할(녹말, 글리코젠), 구조적 역할(식물의 셀룰로스, 동물의 키틴)을 한다. 기본적인 탄수화물 단위를 단당류라고 하며, 갈락토스, 과당,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포도당이 있다. 단당류는 무한정에 가까운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하여 다당류를 형성할 수 있다. 핵산인 DNA와 RNA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이다. 각 뉴클레오타이드는 인산기와 리보스 당, 질소 염기로 이루어진다. 핵산은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데 사용되며, 전사와 번역 과정을 통해서 유전 정보를 발현시키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유전 정보는 DNA 수선 기작이 있어 보호되고, DNA 복제를 통해 분자 수를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HIV처럼 RNA 유전체를 가지면서 역전사를 통하여 바이러스 RNA 유전체로부터 DNA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스플라이소좀이나 리보솜과 같은 리보자임에 있는 RNA는 화학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로 작용한다. 각각의 뉴클레오사이드는 핵염기에 리보스 당이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염기는 질소를 포함한 고리 구조로, 퓨린과 피리미딘으로 나뉜다. 뉴클레오타이드는 또한 대사에서 작용기 전이 반응에 참여하는 조효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px|left|조효소 아세틸 조효소 A의 구조. 전이 가능한 아세틸기가 왼쪽 끝의 황 원자와 결합하고 있다. 대사는 거대한 화학 반응이지만 작용기의 전이와 관련된 몇 가지 기본적인 반응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공통적인 화학 반응 덕분에 세포는 서로 다른 반응에 참여하는 작용기를 운반하는 대사 중간체의 수를 줄일 수 있다. 조효소는 이렇게 작용기를 운반하는 중간체이다. 작용기 전이 반응은 특정한 한 조효소에 의하여 진행되며, 효소는 그 조효소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따라서 조효소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며, 재활용된다. 주요 조효소 중 하나가 세포 공동의 에너지 통화라 할 수 있는 아데노신 삼인산(ATP)이다. ATP는 서로 다른 화학 반응 간에 화학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사용된다. 세포에는 소량의 ATP만 존재하고, 에너지 요구량에 부합하기 위해 세포는 계속해서 ATP를 빠르게 재생성한다. ATP는 동화작용과 이화작용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 이화작용은 분자를 분해하는 과정이고, 동화작용은 분자를 합성하는 과정이다. 이화작용을 통하여 ATP가 생산되고, 동화작용은 ATP를 소모한다. 그 밖에도 ATP는 인산화 반응에서 인산기를 운반하기도 한다. 비타민은 소량이 필요하지만 세포가 생산할 수 없는 유기 화합물이다. 사람의 영양 측면에서, 비타민은 체내에서 변화한 후 대개 조효소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수용성 비타민은 세포에서 이용될 때 인산화되거나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한다. 비타민 B3(나이아신)의 유도체인 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NAD+)는 전자수용체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조효소이다. 수백 가지 종류의 탈수소효소가 각자의 기질에서 전자를 제거하고 NAD+를 NADH로 환원시킨다. 환원된 조효소 형태인 NADH는 수많은 환원효소의 기질이 되어 환원 반응에 참여한다. NAD+와 NADP+는 세포 내에서 두 가지 연관된 형태인 NADH와 NADPH로 존재한다. NAD+/NADH 형은 이화작용에서, NADP+/NADPH는 동화작용에서 각각 더 중요하게 사용된다. 무기 원소는 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트륨과 칼륨은 풍부한 반면, 다른 원소들은 소량 존재하면서 기능한다. 포유류 무게의 99%는 탄소, 질소, 칼슘, 나트륨, 염소, 칼륨, 수소, 인, 산소, 그리고 황이 차지한다. 유기 화합물(단백질, 지질, 탄수화물)이 대부분의 탄소와 질소를 포함하며, 산소와 수소는 물로서 존재한다. 풍부한 무기 원소는 이온성 전해질 역할을 한다. 가장 중요한 이온은 나트륨과 칼륨, 칼슘, 마그네슘, 염화 이온, 인산염과 유기 이온인 탄산수소염이다. 막 안팎의 이온 기울기는 정확하게 조절되어 삼투압과 수소 이온 농도를 유지시킨다. 신경과 근육 조직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활동전위는 세포외액과 세포기질 사이에서 전해질이 교환되면서 만들어진다. 전해질은 세포막에 있는 이온 통로를 통하여 세포에 드나든다. 예를 들어 근육 수축은 이온 통로와 T-소관()을 통한 칼슘, 나트륨, 칼륨의 이동에 의존한다. Haemoglobin.png|섬네일|헤모글로빈의 구조. 단백질 소단위는 빨강색과 파랑색으로, 철을 함유하는 헴 고리는 초록색으로 나타내었다. PDB 1GZX. 전이 금속은 미량 원소로 존재하며, 아연이나 철은 미량 원소 중에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금속 원소는 단백질의 보조 인자로 쓰이며, 카탈레이스같은 효소와 산소를 운반하는 단백질(예를 들어 헤모글로빈)의 활성에 필수적이다. 금속 보조 인자는 단백질의 특이적인 자리에 결합한다. 효소 보조 인자는 촉매 반응 중에 변형될 수 있지만, 촉매 반응이 끝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금속 미량 영양소는 특이적인 수송체에 의해 생물체 내로 흡수되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페리틴이나 메탈로티오네인()과 같은 저장 단백질과 결합한다. 이화작용은 큰 분자를 분해하는 대사 과정으로 음식을 분해하고 산화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이화작용으로 동화작용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고 에너지를 얻는다. 이화작용의 정확한 특성은 생물마다 각기 다르며, 필요에 따라서는 생물을 에너지와 탄소를 얻는 원천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아래 표 참고). 에너지원으로 유기영양생물()은 유기물을, 무기영양생물()은 무기물을, 광영양생물()은 태양광을 사용한다. 대사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산화환원 반응에 의존하며, 전자를 유기물, 물, 암모니아, 황화 수소, 철 이온(Fe2+)과 같은 환원된 전자공여체에서 산소, 질산염, 황산염과 같은 전자수용체로 전달한다. 동물의 경우 이 반응은 복잡한 유기물을 이산화 탄소와 물과 같은 간단한 분자로 분해하는 형태이다. 식물이나 남세균 등 광합성 생명체는 전자 전달 반응이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고 태양광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해 저장하는 용도로 쓰인다. +대사에 따른 생물 분류 에너지원 태양광 광- 영양생물 이미 존재하는 분자 화학- 전자공여체 유기 화합물 유기- 무기 화합물 무기- 탄소원 유기 화합물 종속- 무기 화합물 독립- 동물에게 가장 흔한 이화작용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단백질, 다당류, 지질 등의 큰 유기 분자를 세포 바깥에서 보다 작은 분자로 소화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작은 분자를 세포 내로 흡수하여 에너지를 일부 방출하는 더욱 작은 분자, 대개는 아세틸 조효소 A(아세틸-CoA)로 전환한다. 마지막으로 아세틸 조효소 A는 시트르산 회로와 전자전달계를 통해 물과 이산화탄소로 산화되고,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일부는 조효소 NAD+를 NADH로 환원하면서 에너지를 저장한다. 녹말, 셀룰로스, 단백질 등의 고분자는 세포 내로 빠르게 흡수될 수 없고, 세포 대사에 이용되기 전에 더 작은 단위로 분해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효소 몇몇이 이러한 중합체를 소화한다. 소화 효소에는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하는 단백질 가수분해 효소, 다당류를 단당류 같은 단순한 당으로 분해하는 글리코사이드 가수분해효소(글리코시데이스) 등이 있다. 미생물은 단순히 주변에 소화 효소를 분비하고, 동물만이 특수한 세포에서 장으로 효소를 분비한다. 세포 바깥에서 효소가 고분자를 분해하여 만들어낸 아미노산과 당은 능동수송 단백질을 통해 세포 내로 운반된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의 이화작용을 단순하게 나타낸 그림 탄수화물 이화작용은 탄수화물을 더 작은 단위로 분해하는 과정이다. 탄수화물은 대개 단당류로 소화된 후에 세포로 유입된다. 세포로 들어온 단당류(포도당이나 과당)는 해당과정을 거치면서 피루브산으로 전환되고 ATP가 만들어진다. 피루브산은 몇몇 대사 회로의 중간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세틸 조효소 A(아세틸-CoA)로 전환되어 시트르산 회로로 들어간다. 시트르산 회로에서 ATP가 더 많이 생산되기는 하지만, 이 회로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물은 아세틸-CoA가 산화되면서 NAD+에서 생산된 NADH이다. 무산소 조건에서는 젖산 탈수소효소의 작용으로 해당과정을 통해 젖산이 생산되고, NADH는 해당과정에서 재사용되기 위해서 NAD+로 재산화된다. 포도당은 오탄당 인산 경로라는 다른 경로로 분해될 수도 있다. 오탄당 인산 경로는 조효소 NADPH를 환원하고, 핵산의 구성 성분인 리보스와 같은 오탄당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가수분해된다. 글리세롤은 해당과정으로 들어가고 지방산은 베타 산화 과정을 통하여 분해되어 아세틸-CoA를 방출하고, 시트르산 회로에 진입한다. 지방산이 산화되면 산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탄수화물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스테로이드 또한 베타 산화와 유사한 과정을 통해 몇몇 세균에 의해 분해되어 상당한 양의 아세틸-CoA, 프로피오닐-CoA, 피루브산으로 전환되고, 이들은 모두 세포가 에너지를 얻는 데에 쓸 수 있다. 결핵균( M. tuberculosis )은 탄소원으로 콜레스테롤만을 이용하여 증식할 수 있으며, 콜레스테롤 사용 경로와 관련된 유전자가 결핵균이 감염되는 생활사의 여러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미노산은 단백질이나 다른 생체분자를 합성하는데 이용되거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어 요소와 이산화 탄소로 산화된다. 아미노산의 산화 경로는 아미노기 전이효소에 의해 아미노기를 제거하면서 시작한다. 아미노기는 요소 회로로 들어가고, 아미노기가 제거된 탄소 골격은 케토산의 형태로 남는다. 이 케토산 중에 몇몇은 시트르산 회로의 중간체로, 예를 들어 글루탐산이 탈아미노화되면 α-케토글루타르산이 된다. 어떤 아미노산은 포도당신생합성 과정을 통해 포도당으로 전환될 수 있는데, 이를 당생성 아미노산이라 한다. 산화적 인산화 과정에서 전자는 유기 분자에서 제거되어 산소로 옮겨지고 방출된 에너지는 ATP를 만드는데 쓰인다. 이 과정은 진핵생물의 경우 미토콘드리아 막에 있는 단백질 복합체들, 즉 전자전달계에서 일어난다. 원핵생물에서는 세포의 내막에 있는 단백질들에서 일어난다. 이 단백질 복합체들은 환원된 분자(즉, NADH)에서 산소로 전자가 전달되면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막 바깥으로 양성자를 퍼낸다(pump). 합성효소(ATP synthase)의 기작. ATP는 빨간색, ADP와 인산기는 분홍색, 회전하는 기둥 소단위는 검은색으로 나타냄 미토콘드리아 기질에서 막 사이 공간으로 양성자를 퍼내면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경계로 안팎으로 양성자의 농도 차가 생겨서 전기화학적 기울기를 형성한다. 이 힘에 의하여 양성자는 ATP 합성효소를 통하여 다시 미토콘드리아로 돌아간다. 양성자 흐름에 따라 ATP 합성효소의 기둥 소단위체(γ 소단위체)가 회전하고, ATP 합성효소 활성 자리의 구조가 변화하여 ADP을 ATP으로 인산화한다. 화학무기영양생물()은 원핵생물의 일종으로 무기 화합물을 산화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여기 속하는 생물은 수소, 환원형 황 화합물(황화물, 황화 수소, 티오황산염), 철 이온(Fe II), 암모니아 등의 환원력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이들 화합물을 산화하고 산소나 아질산염을 전자수용체로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무기 화합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미생물의 대사는 이산화 탄소에서 아세트산을 생산하거나(), 질화 작용(), 탈질소 작용() 등 전세계적인 생물지구화학적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토양비옥도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식물, 남세균, 녹색유황세균류와 몇몇 원생생물은 태양광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 과정은 종종 광합성의 일부로서 이산화 탄소를 유기 화합물로 전환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자색 세균과 녹색유황세균류가 태양광을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듯이 원핵생물은 에너지 포착과 탄소 고정을 각각 따로 시행할 수 있으며, 동시에 대사 방향을 탄소 고정이나 유기 화합물의 발효로 전환할 수 있다. 태양광을 에너지로 저장하는 생물 역시 양성자 농도 기울기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저장하므로 원리상 산화적 인산화와 유사하다. 양성자 농도 기울기에 의한 힘이 ATP 합성을 유도한다. 전자전달계를 돌리기 위한 전자는 광합성 반응 중심 또는 로돕신이라는 빛을 모으는 단백질로부터 온다. 반응 중심은 그곳에 존재하는 광합성 색소의 종류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뉜다. 광합성 세균은 대개 한 종류의 반응 중심을 가지고, 식물과 남세균은 두 종류를 모두 가진다. 식물과 조류, 남세균은 광계 II 에서 빛 에너지를 받아 물에서 전자를 제거하고 부산물로 산소를 방출한다. 전자는 사이토크롬 b6f 복합체로 전달되고, 그 에너지로 엽록체의 틸라코이드 막 안쪽으로 양성자를 퍼낸다. 양성자는 다시 막을 가로질러 확산되면서 ATP 합성효소를 작동시킨다. 전자는 광계 I 으로 전달되어 조효소 NADP+를 환원시켜 NADPH가 캘빈 회로에서 사용되게 하거나, ATP 생성을 계속하기 위해 재활용된다. 동화작용은 이화작용에서 방출된 에너지로 복잡한 분자를 합성하는데 이용하는 대사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세포의 구조를 이루는 복잡한 분자는 작고 단순한 전구물질로부터 차례로 합성된다. 동화작용은 기본적으로 세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아미노산, 단당류, 아이소프레노이드, 뉴클레오타이드와 같은 전구물질을 생산하고, 그 다음에는 ATP에 저장된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구물질을 활성이 있는 형태로 바꾼다. 마지막으로 이 전구물질들을 조립하여 단백질, 다당류, 지질, 핵산 등의 복잡한 분자들을 생산한다. 생물에 따라 스스로 세포 내에서 만들 수 있는 분자들의 종류가 각기 다르다. 식물과 같은 자가영양생물은 이산화 탄소나 물처럼 간단한 분자에서 다당류나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다. 반면에 종속영양생물은 보다 복잡한 물질을 합성하기 위한 전구물질들, 예컨대 단당류나 아미노산을 필요로 한다. 생물은 궁극적인 에너지원에 따라 더 세분화된다. 광합성독립영양생물()과 광합성종속영양생물()은 빛에서 에너지를 얻고, 화학독립영양생물()과 화학종속영양생물()은 무기 산화 반응을 통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식물 세포 안의 엽록체(초록색) 광합성은 햇빛과 이산화 탄소(CO2)를 이용하여 탄수화물을 합성하는 과정이다. 식물과 남세균, 조류는 광합성을 통해 물을 분해하고 산소를 부산물로 생산한다. 이 과정은 광합성 반응 중심에서 생산된 ATP와 NADPH를 사용하여 CO2를 3-포스포글리세르산으로 전환하고, 3-포스포글리세르산은 이후 포도당으로 전환된다. 탄소 고정 반응은 캘빈 회로의 일부로 루비스코(RuBisCO)라는 효소가 참여한다. 식물에서는 C3 탄소 고정, C4 탄소 고정, 그리고 CAM 광합성 이렇게 세 종류의 광합성이 일어나며, 이들은 CO2가 캘빈 회로에 들어가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C3 식물은 CO2를 직접적으로 고정하고, C4 식물과 CAM 식물은 CO2를 먼저 다른 화합물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이는 강렬한 햇빛과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이다. 광합성 원핵생물의 경우 탄소 고정 기작이 좀 더 다양하다. 캘빈 회로, 역방향 시트르산 회로(), 혹은 아세틸-CoA의 카복실화를 통해 이산화 탄소를 고정한다. 화학독립영양() 원핵생물 또한 캘빈 회로를 통해 이산화 탄소를 고정하지만, 반응을 진행하기 위한 에너지는 무기 화합물에서 얻는다. 단순한 유기산은 포도당과 같은 단당류로 전환될 수 있고, 그 후에 녹말 같은 다당류로 합성된다. 피루브산, 젖산, 글리세롤, 3-포스포글리세르산 및 아미노산 등에서 포도당을 생성하는 것을 포도당신생합성이라고 한다. 포도당신생합성은 해당과정과 많은 부분에서 겹치는 중간체들을 통해 피루브산을 포도당 6-인산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포도당신생합성 경로에 참여하는 효소들 중에는 해당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효소가 있으므로 포도당신생합성은 단순히 해당과정의 역반응은 아니다. 이로 인하여 포도당을 생성하고 분해하는 것이 각기 따로 조절될 수 있으며, 두 대사 경로가 에너지만 소모하는 무익 회로(futile cycle)로 동시에 작동하는 것을 방지한다. 에너지를 저장하는 일반적인 분자는 지방이지만, 척추동물의 경우 지방산은 포도당신생합성을 통하여 포도당으로 전환될 수 없다. 이는 식물과 달리 동물에게는 아세틸-CoA를 피루브산으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효소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기간 기아 상태에서 척추동물은 지방산을 대사하지 못하는 조직(예를 들어 뇌)이 포도당 대신에 사용할 케톤체를 생산해야 한다. 식물과 세균 등 다른 생물은 시트르산 회로에서 탈카복실화 반응을 우회하여, 아세틸-CoA를 옥살아세트산으로 변환하고 포도당 생산에 이용될 수 있게 하는 글리옥실산 회로를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다당류와 글리칸은 유리딘 이인산 글루코스(UDP-glucose)와 같은 반응성 당인산을 중합되고 있는 다당류의 하이드록시기에 순차적으로 부가하는 글리코실전이효소()에 의해 생성된다. 기질 고리 구조에 있는 하이드록시기라면 당이 중합될 수 있기 때문에 다당류는 사슬 구조와 가지친 형태 모두가 될 수 있다. 생성된 다당류는 그 자체로 구조적 기능이나 대사적 기능을 하거나, 올리고당전이효소()에 의해 지질이나 단백질에 결합할 수도 있다. synthesis.svg|섬네일|300 px|단순화된 스테로이드 합성 경로. IPP는 아이소펜테닐 피로인산, DMAPP는 다이메틸알릴 피로인산, GPP는 제라닐 피로인산을 의미한다. 지방산은 아세틸-CoA 단위체를 중합하고 환원하는 지방산 생성효소()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방산의 아실 사슬은 아실기를 더하고 알코올로 환원한 후, 알켄으로 탈수소화하고 다시 알케인으로 환원하는 일련의 반응에 의해 신장된다. 지방산 생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는 두 그룹으로 나뉜다. 동물과 균류는 여러 기능을 가진 제1형 단백질 하나에 의해 지방산을 합성하고, 식물의 색소체와 세균은 제2형 단백질이 합성 경로의 각 단계에 관여한다. 테르펜과 아이소프레노이드는 카로티노이드를 포함하는 지질의 큰 부류로 식물에서 생산되는 천연물 중 가장 큰 집단이다. 이 화합물은 반응성 전구체인 아이소펜테닐 피로인산과 다이메틸알릴 피로인산에서 받은 아이소프렌 단위체의 중합과 변형을 통해 생산된다. 이러한 전구체들은 서로 다른 경로로 합성된다. 동물과 고세균은 아세틸-CoA에서 시작해서 메발론산 경로를 통해 전구체를 합성하고, 식물과 세균은 피루브산과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을 이용하여 합성한다. 활성화된 아이소프렌 공여체를 이용하는 주요 반응 중 하나가 스테로이드 생합성 경로이다. 스테로이드 합성 경로에서 아이소프렌 단위체는 결합하여 스쿠알렌이 되고, 고리를 형성하여 라노스테롤이 된다. 라노스테롤은 콜레스테롤과 에르고스테롤 등 다른 스테로이드로 전환된다. 생물에 따라 20가지의 아미노산을 합성할 수 있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세균과 식물은 20가지 전부를 합성할 수 있지만, 포유류는 오직 열한 가지의 비필수 아미노산만을 합성할 수 있고 나머지 아홉 가지의 필수 아미노산은 음식물에서 얻어야 한다. 마이코플라스마( Mycoplasma pneumoniae )과 같이 단순한 기생충은 모든 아미노산을 합성할 수 없고 숙주로부터 직접 아미노산을 탈취한다. 모든 아미노산은 해당과정, 시트르산 회로, 혹은 오탄당 인산 경로의 중간생성물로부터 합성된다. 질소는 글루탐산과 글루타민에서 공급된다. 아미노산은 적절한 α-케토산의 형성에 의존하여 합성되고, α-케토산은 아미노기 전달반응에 의하여 아미노산이 된다. 아미노산은 펩타이드 결합에 의해 사슬형으로 연결되고 단백질이 된다. 각각의 단백질은 특이적인 아미노산 서열로 이루어지며, 이를 일차 구조라 한다. 아미노산은 다양한 서열로 결합하여 셀 수 없이 다양한 단백질을 형성한다. 단백질이 형성될 때 아미노산은 에스터 결합으로 운반 RNA(tRNA)에 붙어서 활성화된다. 이 아미노아실-tRNA 전구체는 ATP를 이용하는 아미노아실 tRNA 합성효소에 의해 생산된다. 아미노아실-tRNA는 리보솜의 기질이 되고, 리보솜은 전령 RNA에 있는 서열 정보에 따라 아미노산을 신장하는 단백질 사슬에 결합시킨다. 뉴클레오타이드는 아미노산, 이산화 탄소, 폼산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대사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생물들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뉴클레오타이드를 효과적으로 회수하는 체계를 발달시켰다. 퓨린은 뉴클레오사이드(리보스에 결합한 염기) 형태로 합성된다. 아데닌과 구아닌은 뉴클레오사이드 전구체인 이노신 일인산에서 합성되며, 아미노산 글라이신, 글루타민, 아스파르트산 및 조효소 테트라하이드로엽산에서 전이된 폼산에서 원자를 이용한다. 피리미딘은 글루타민과 아스파르트산에서 형성된 오로트산으로부터 합성된다. 모든 생물은 영양분으로 사용할 수 없는 화합물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대사적 기능이 없는 이물질이 세포 내에 축적되면 해로울 수 있다. 이렇게 유해성을 가진 물질을 생체이물이라 한다. 합성 약물, 자연 독소, 항생제 같은 생체이물은 생체이물을 대사하는 효소에 의하여 해독된다. 사람의 해독 효소에는 사이토크롬 P450 산화효소, UDP-글루쿠로노실전이효소(), 글루타티온 S-전이효소 등이 있다. 이 효소계는 생체이물을 산화하고(1기), 생체이물 분자에 수용성 작용기를 부가한 후(2기), 세포 밖으로 퍼내거나 다세포 생물의 경우 계속해서 대사 과정을 거쳐 배출시킨다(3기). 생태학에서 이 반응은 특히 미생물의 오염 물질 생분해와 오염된 땅과 기름 유출에 대한 생물적 환경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생물의 반응은 많은 부분 다세포 생물의 반응과 유사하지만, 미생물은 특유의 엄청난 다양성으로 다세포 생물에 비하여 훨씬 많은 종류의 생체이물을 처리하며, 유기염소 화합물과 같이 잔류성 유기 오염 물질까지도 처리할 수 있다. 한편 호기성 생물에게는 산화적 스트레스 문제가 있다. 산화적 인산화와 이황 결합 등의 과정은 과산화수소 같은 활성산소를 생성한다. 유해 산화제는 글루타티온 같은 항산화 대사체나 카탈레이스 혹은 과산화효소 등에 의해 제거된다. 열과 일의 전달에 대한 열역학 법칙은 생물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어떤 닫힌계에서 전체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총량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생물은 놀라운 복잡성으로 이 법칙에 모순되는 것 같지만, 생물은 주변 환경과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하는 열린계로 존재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계는 평형 상태가 아니며, 환경의 엔트로피를 높이면서 고도의 복잡성을 유지하는 흩어지기계()이다. 세포는 이화작용의 자발적 과정과 동화작용의 비자발적 과정을 짝지어 대사가 일어나도록 한다. 열역학적 용어로, 대사는 무질서를 창조하면서 질서를 유지한다. 생물이 있는 환경은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대사는 세포 내의 일정한 조건, 즉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섬세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대사 조절은 또한 생물이 신호에 반응하고 환경과 적절히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떻게 대사 경로가 통제되는지 이해하는데에는 아래의 밀접하게 연결된 두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사 경로에서 효소를 조절()한다는 것은 어떻게 효소가 신호에 반응하여 활성이 증가하고 감소하는지를 의미한다. 효소가 발휘하는 통제()란 활성이 변화한 효소가 전체 대사 경로의 속도(혹은 흐름)에 미치는 영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효소의 활성이 크게 변화하더라도(매우 잘 조절됨) 이 변화로 인하여 대사 경로의 흐름에 큰 변화가 없다면, 이 효소는 해당 대사 경로의 통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glucose metabolism ZP.svg|left|섬네일|400 px|포도당 흡수와 대사에 미치는 인슐린의 영향. 인슐린이 수용체에 결합하면(1), 단백질 활성화 연쇄반응(3-6)이 개시된다(2). Glut-4 수송체가 원형질 막으로 이동하고 포도당이 유입된다(3). 글리코겐이 합성되고(4), 해당이 일어나며(5), 지방산 합성이 시작된다(6). 대사 조절에는 다양한 단계가 있다. 내인성 조절은 대사 회로가 기질이나 산물의 수준에 따라 스스로를 조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물이 양이 감소하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그 경로로의 흐름이 증가한다. 이런 경우에는 종종 다른 자리 입체성 조절로 효소의 활성을 조절한다. 외인성 통제는 다세포 생물의 세포가 다른 세포로부터 온 신호에 반응하여 대사를 변경할 때 나타난다. 이 때 신호는 대개 호르몬이나 성장 인자 형태로, 세포 표면에 있는 특수한 수용체에 의해 감지된다. 신호는 단백질 인산화 연쇄 반응을 거쳐 이차 신호 전달계에 의해 세포 내로 전달된다. 외인성 조절의 예로 잘 알려진 것이 인슐린 호르몬에 의한 포도당 대사의 조절이다. 인슐린은 혈당량의 증가에 따라 생산된다. 인슐린이 수용체에 결합하면 단백질 인산화효소 연쇄반응을 활성화하여 세포로 하여금 포도당을 흡수하여 지방산이나 글리코겐 등 저장형 분자로 전환하게 한다. 포도당의 대사는 글리코겐을 분해하는 인산가수분해효소와 합성하는 글리코겐 합성효소의 활성에 따라 통제된다. 이 두 효소는 인산화를 통해 상호조절된다. 즉, 글리코겐 분해효소는 인산화되면 활성화되고, 합성효소는 저해된다. 인슐린은 단백질 인산분해효소를 활성화하고, 따라서 글리코겐 분해 및 합성효소의 인산화 정도를 감소시켜 글리코겐이 합성되도록 유도한다. of life int.svg|섬네일|세 개의 도메인에서 갈라진 생물의 공통 조상을 나타낸 계통수. 세균은 푸른색, 진핵생물은 붉은색, 고세균은 초록색. 몇몇 문의 상대적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위에서 기술한 해당과정, 시트르산 회로와 같은 주요 대사 경로들은 모든 생물 도메인에 존재하며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에도 있었다. 공통 조상 세포는 원핵세포였으며 아마도 광범위한 아미노산, 뉴클레오타이드, 탄수화물, 지질 대사를 갖춘 메테인 세균이었을 것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오래된 대사 경로를 계속 유지한 것은 그 대사가 특정한 대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당과정과 시트르산 회로의 경우 최소의 단계로 매우 효율적인 최종 산물을 생산한다. 비부호 DNA 단편에 영향을 미치는 돌연변이는 대사 효율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효소를 이용한 대사 중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대사의 일부이고, 이전의 대사 경로는 고대 RNA 세계의 일부였을 것이다. 새로운 대사 경로가 진화한 기작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이 여럿 존재한다. 원형의 대사 경로에 이전부터 존재하던 효소가 새로운 반응 경로에 통합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효소가 차례로 더해지고 복제되어 전체 경로가 분지하였다는 모델이 있다. 각 기작의 상대적인 중요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유전체 연구를 통하여 대사 경로의 효소가 공동의 조상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따라서 이미 존재하던 경로에서 차례로 새로운 기능을 가진 경로로 진화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사 네트워크의 단백질 구조의 진화를 추적하는 연구에서 나온 대안적인 모델에 따르면, 효소는 서로 다른 대사 경로에서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널리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효소의 진화적 모자이크가 나타나는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대사의 일정 부분이 특정 단위()로서 서로 다른 경로에서 재활용되고 여러 분자에 대해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진화를 통해 새로운 대사 경로가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사 기능을 잃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몇몇 기생충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대사 과정이 퇴화하고 숙주로부터 아미노산, 뉴클레오타이드, 탄수화물을 얻게 되었다. 세포내 공생하는 생물에서 이와 유사한 대사 능력 감소를 찾아볼 수 있다. thaliana metabolic network.png|left|섬네일|애기장대( Arabidopsis thaliana ) 시트르산 회로의 대사 네트워크. 효소와 대사산물은 붉은 사각형으로, 그 사이의 상호작용은 검은 선으로 나타냄 전통적으로 물질대사는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단일 대사 경로에 초점을 맞춘 연구 대상이었다. 특히 귀중한 연구 도구인 방사성 추적자를 사용하여 전구물질에서 최종 산물까지 경로를 생물 전체나 조직, 세포 수준에서 규명할 수 있다. 화학 반응을 촉진하는 효소를 정제하여 저해제에 대한 반응과 속도를 조사한다. 동시에 세포나 조직 안에 있는 작은 분자를 밝혀내고, 이 분자들의 총체적 집합을 대사체라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단순한 대사 경로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지만, 완전한 세포의 대사와 같은 더 복잡한 계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수천 가지의 효소가 공존하는 세포 내 대사 네트워크의 복잡성이란 것이 어떤 개념인지는 불과 43개의 단백질과 40개의 대사산물 사이의 상호작용을 나타낸 오른쪽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유전체 서열에는 최대 45,000개에 이르는 유전자 목록이 있다. 이제는 유전체 자료를 이용하여 전체 생화학 반응의 네트워크를 재구성하고, 그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전체적인 수학적 모델을 산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전통적인 방법으로 얻은 대사 경로와 대사산물 자료를 단백체학과 DNA 마이크로어레이 연구에서 얻은 유전자 발현 자료에 통합할 때 수학적 모델이 유용하다. 이러한 기술을 통하여 사람의 대사에 대한 모델이 정립되고, 의약품 개발이나 생화학 연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대사 모델은 같은 단백질이나 대사산물을 공유하는 질병을 분류하기 위한 네트워크 분석에 이용되고 있다. 세균의 대사 네트워크는 나비 넥타이 조직의 좋은 예이다. 나비 넥타이 구조는 광범위한 영양물질을 받아들여 상대적으로 적은 중간체를 통해 다양한 산물과 복잡한 고분자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이다. 대사 공학은 주요한 대사 정보 응용 기술이다. 효모, 식물 및 세균은 생명공학기술에 유용하게 유전적으로 변형되어 항생제나 의약품 혹은 1,3-프로판디올(1,3-propanediol), 시킴산 같은 산업용 화합물 생산에 이용된다. 유전자 변형은 대개 생산하는데 드는 에너지 양을 줄이고, 생산량을 증대시키며, 폐기물을 감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산토리오가 저울에 있는 모습. 1614년 처음 출판된 Ars de statica medicina 의 삽화 물질대사라는 용어는 변화 혹은 전복(顚覆을 뜻하는 에서 유래하였다. 1260년 이븐 알나피스(Ibn al-Nafis는 저서에서 "인체와 각 부분은 지속적인 소멸과 생성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영구적인 변화를 겪는다"고 서술하면서 물질대사의 개념을 처음으로 문서화하였다. 물질대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역사는 몇 세기에 걸쳐 나타난다. 동물 전체를 연구하던 초기 시기에서 개인의 대사 반응을 연구하는 현대의 생화학으로 발전하였다. 사람의 대사에 대한 첫 통제 실험은 1614년 출판된 산토리오 산토리오의 저서 Ars de statica medicina 에서 나타난다. 그는 일상에서 각종 활동을 하는 동안 스스로 무게 변화를 측정하고, 섭취한 음식 무게의 대부분은 잃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을 "인식할 수 없는 호흡"이라 불렀다. 초기에 물질대사 기작은 밝혀지지 않았고 어떤 힘이 살아있는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생각하였다. 19세기에 효모에 의하여 설탕이 알코올로 발효되는 것을 관찰한 루이 파스퇴르는 발효가 효모 세포 안에 있는 물질이 발효를 촉매 작용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알코올성 발효는 효모 세포의 죽음이나 부패가 아니라 삶과 연관된 활동이다"고 기술하였다. 이 발견과 1828년 프리드리히 뵐러의 요소의 화학적 합성에 대한 논문은 전적으로 무기 전구체만으로 유기 화합물 합성을 논한 중요한 발견이다. 이로써 세포에서 발견된 유기 화합물이나 화학 반응이 일반적인 화학 반응의 원리와 다를 것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에두아르트 부흐너가 20세기 초 효소를 발견함에 따라 세포의 생물학적 연구에서 물질대사의 화학 반응을 분리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생화학의 시초가 되었다. 생화학의 지식은 20세기 초에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가장 많은 연구를 한 근대 생화학자 중 한 명은 크레브스()로, 물질대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요소 회로를 발견하였고, 후에 한스 콘버그(Hans Kornberg)와 함께 시트르산 회로와 글리옥실산 회로를 발견하였다. 현대 생화학은 크로마토그래피, X선 회절을 이용한 분광학, NMR 분광법, 방사성 동위원소 표지, 전자 현미경, 분자 역학 시뮬레이션 등 새로운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술들을 통해 세포에 있는 분자 및 물질대사 경로들을 발견하고 상세히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세포대사 기초대사율(BMR, RMR) 대사물질 *생체에너지학( Bioenergetics) **동화작용 * 이화작용 대사 증후군 만성 피로 증후군(CFS) 분류:생화학 분류:생물학 |
그레고어 멘델 (Gregor Mendel, 1822년 7월 22일~1884년 1월 6일)은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식물실험자이며 아우구스티노회의 수사이자 사제로서 이른바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수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유전학의 첫 장을 연 생물학자이다. 멘델은 1822년 7월 22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렌 지방(현재의 체코)의 작은 읍인 하인젠도르프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농사와 원예 일을 도왔던, 멘델은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834년부터 1840년까지는 트로파우(지금의 체코의 오파바)의 김나지움(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에 해당)과정을 다녔고, 1840년에서 1843년까지는 올뮈츠(지금의 체코의 올로모우츠)의 철학연구소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보충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커다란 애착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지주가 시키는 강제노동으로 허리를 다쳐 병이 나는 바람에 멘델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843년 고향 근처에 있는 소도시인 모라바의 브륀(지금의 체코 브르노)에 있는, 14세기에 건립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했으며, 그레고리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수사로서의 생활은 멘델을 물질적 결핍에서 해방시켰으며,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847년에 로마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수도원에서 수련 생활을 하는 동안에 과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1849년에 멘델은 브륀 근처에 있는 즈나임(즈노이모) 중등학교의 보조교사가 되어 잠깐 그리스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이와 동시에 멘델은 이전의 못 이룬 대학교에서의 자연과학 공부의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1850년 빈 대학교 자연과학부에 입학을 시도하지만, 시험에서 떨어졌고, 또한 정규교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역시 떨어졌다. 그 뒤 대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빈 대학교에 겨울학기 청강생으로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물리학·화학·수학·동물학·식물학 등의 자연과학 기초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1851~53). 1853년에는 견문과 학계와의 접촉을 넓히기 위해 빈의 동식물학회에 가입하게 되고, 1854년 완두콩의 해충에 관한 연구를 학회에서 발표한다. 1854년 그는 브륀으로 다시 돌아와 1868년까지 브륀 국립 실과 학교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으나 교원 자격증은 끝내 얻지 못했다. 그는 1856년부터는 수도원에 있는 조그마한 뜰에서 완두를 재료로 하여 유전에 대한 실험을 시작, 7년 후 멘델의 법칙 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을 1865년 브륀의 자연 과학 협회의 정례회에서 발표하고, 그 논문은 따로 인쇄하여 발표하였다. 그동안 식물에 대한 225회에 이르는 인공 교배를 하여 1만 2,000종의 잡종을 얻었으며, 계속 실험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인정받지 못하고 1900년대에 들어서야 재조명을 받게 된다. 식물학·양봉·기상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구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1868년 아빠스가 되면서 과학은 그의 생활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으며, 1872년 공포된 교회 과세법에 반대, 정부와 대립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지루한 싸움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만성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등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멘델의 법칙이 학계에 받아들여졌다. 1910년 브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 곳은 멘델 광장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856년부터 수도원의 작은 정원에서 실험을 시작하여 유전의 기본원리를 발견했으며 이러한 원리들은 나중에 유전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연구를 했으나, 과학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일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 가운데 몇몇은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1862년 브륀에서 자연과학학회를 창립했으며 멘델은 이 모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수도원과 학교의 도서관에는 중요한 과학 서적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과수원과 농장에서 얻었던 경험들 때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농학·원예학·식물학에 관한 책을 많이 보았다. 멘델 자신도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책들이 나오면 곧 구입을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1860, 1870년대에 출판된 찰스 다윈의 연구노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멘델은 다윈의 맨 처음 저서가 나오기 전에, 또한 유전이 진화의 원인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이미 실험을 시작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1865년 2월 8일과 3월 8일에 열린 브륀 자연과학학회에서 결과를 보고할 때에도 식물의 교잡 에 대한 깊은 관심을 언급했으며, 이 분야에서 자기보다 먼저 발표한 사람들의 연구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히면서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꿍하거나, 이들 사이의 통계적 상관도를 명확히 밝힐 수 있을 만큼 폭넓고 올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하나도 없다." 유전 연구 실험에 반드시 필결할 수 있었다. 요한 조건에 대한 이러한 논술과 그 조건들을 만족시켜주는 예비 실험 자료들을 통해 그는 유전과 진화 및 일반적인 생물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우성과 열성 표현형 (1)부모 세대 (2)F1 세대 (3)F2 세대 그는 자신이 관찰하면서 정원에서 길렀던 여러 가지 완두를 서로 교배했다. 이들 완두는 키가 큰 것과 작은 것, 잎겨드랑이에서 꽃이 피었을 때 색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등과 같이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대립형질과, 씨의 색·모양, 줄기에 꽃이 피는 위치, 콩꼬투리의 모양 등 유사한 차이를 갖는 대립형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식물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대립형질이 변종과 그들의 자손에 계속 나타나는 것은 유전의 기본단위 때문이라는 이론을 세웠는데, 이 유전단위가 지금은 유전자로 알려져 있다. 실험결과에 대한 멘델의 해석은 사람을 포함한 다른 생물들을 통해 계속 관찰되면서 충분히 증명되었는데, 이는 유전단위가 간단한 통계법칙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칙의 기본원리는 잡종의 생식세포 안에는 양친 중 어느 한쪽에서 온 유전물질 절반과 다른 한쪽에서 온 유전물질이 절반씩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식세포 안에서 대립형질이 분리되는 것을 멘델의 제1법칙 또는 분리의 법칙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대립형질들이 여러 쌍 있을 경우, 이러한 형질들은 모든 가능한 조합을 이루며 독립적으로 자손들에게 전해진다고 했다. 그가 뿌린 완두의 여러 변종들에서, 그는 독립유전의 법칙에 따라 무작위로 재조합된 7쌍의 대립형질들을 관찰했으며, 이러한 원리를 통계적으로 검증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현재 멘델의 제2법칙, 즉 독립의 법칙은 서로 다른 연관 그룹 또는 서로 다른 염색체 상에 있는 유전자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멘델은 우성도 관찰했는데, 이것은 잡종이 대립형질 가운데 1가지 형질만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형질을 우성형질이라고 했으며, 관찰한 7쌍의 형질에 모두 나타난다고 보았으나 더욱 광범위한 실험을 통해서 이것이 모든 대립형질에 적용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들이 그가 처음 증명한 특별한 유전단위 또는 유전자에 의한 유전 체계가 기본적으로 틀렸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멘델의 유전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체계는 검증·확인되어 일반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생물학의 기본적인 원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실험결과로부터 유추한 이러한 이론과 설명은 2편의 논문에 실려 있는데, 1865년초 자연과학학회에서 발표했으며 다음해 이를 좀더 자세하게 기록해 학회 회보에 게재했다. 〈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이 붙은 이 논문은 유럽과 미국의 주요한 도서관에 보내졌지만 당시에는 브륀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생물학적인 견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뮌헨대학교의 유명한 식물학자 칼 빌헬름 폰 네겔리는 멘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학자지만 멘델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네겔리조차도 멘델의 논문에 실린 수학적 논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멘델은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 다른 식물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려고 노력했다. 1869년 또다른 1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그가 조사한 식물은 네겔리가 멘델에게 실험재료로 추천한 조밥나물속으로, 이 식물의 배는 수정이 일어나지 않고 밑씨가 자라 만들어지는 체세포 단위생식을 하기 때문에 검증재료로는 본질적으로 적당하지 못했으며 멘델의 원리를 확인하기에도 부적합했다. 말년에 그는 "나의 시대는 반드시 온다."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그의 업적은 유전과 진화의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대발견이었으며, 그에 의하여 유전학이 창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멘델의 연구는 ‘관찰→가설 설정→실험→법칙 수립’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적 방법론을 충실히 따랐다. 실질적이고도 명확한 근거를 통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유전학적 법칙을 완결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의 실험은 그 계획의 교묘함과 실험의 정확성, 자료 처리법이 탁월한 점, 논리가 명쾌한 점 등 생물학 사상 가장 뛰어난 실험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는 동료 수도사들과 자기가 살던 도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나, 당시의 위대한 생물학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00년 유럽의 식물학자 칼 에리히 코렌스, 에리히 체르마크 폰 세이세네크, 휴고 드 브리스 등이 각각 멘델과 비슷한 결과를 얻어내고 34년 전에 발표된 실험결과와 개괄적인 원리를 문헌에서 찾아냄으로써 그는 죽은 뒤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은 멘델의 실험이 유전학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고 많은 나라의 생물학자들이 멘델의 학설을 확인하고 그 응용 범위를 넓히고 있으며, 진화학·발생학·생리학·생화학·의학·농학·사회과학 등을 이해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멘델의 유전법칙 네이버 캐스트 생물 산책 - 제노믹 임프린팅 Mendel s Paper in English Mendel Museum of Genetics Mendel in Darwin s Shadow , by David Allen at Macroevolution.net Biography, bibliography and access to digital sources in the Virtual Laboratory of the Max Planck Institute for the History of Science 1913 Catholic Encyclopedia entry, "Mendel, Mendelism" Online Mendelian Inheritance in Man Augustinian Abbey of St. Thomas at Brno A photographic tour of St. Thomas Abbey, Brno, Czech Republic Johann Gregor Mendel Why his discoveries were ignored for 35 (72) years This has the basics of Mendel and is more appropriate in style for a GCSE student Masaryk University to rebuild Mendel’s greenhouse | Brno Now Gregor Mendel Primary Sources 분류:1822년 태어남 분류:1884년 죽음 분류: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분류: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체코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로마 가톨릭 철학자 분류:오스트리아의 유전학자 분류:브르노 출신 분류:체코의 식물학자 분류: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분류:체코의 생물학자 |
프랑스어 ( 또는 )는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언어이다. 프랑스어는 프랑스와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그 외에도 아프리카 등지의 공용어로서 국제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언어다. 유엔에서는 영어와 함께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는 한자로 음역 약칭으로 불어 (佛語)라 부르기도 한다. 언어 분류학상 로망스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로망스어는 그 이름이 뜻하듯이 고대 로마인이 쓰던 라틴어에서, 또는 이의 방언에서 발생한 언어군을 일컫는다. 하지만 프랑스어는 고전 라틴어(Latin classique)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세속 라틴어(Latin vulgaire)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교적 간단한 통사구조와 굴절이 거의 상실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현재의 프랑스 지역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로마의 군인, 상인, 이주민 등의 잦은 왕래, 그리고 그들과 갈리아(프랑스의 라틴어 이름)의 원주민들과의 교섭을 통하여 프랑스어의 모체가 되는 새로운 언어 ‘갈리아 서민 라틴어(Latin populaire des Gaules)’가 생겨났다. 이 갈리아 서민 라틴어는 그 당시에 새겨진 또는 작성된 비문과 기록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문법, 발음, 어휘 등에서 라틴어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인류의 모든 활어와 마찬가지로 갈리아 서민 라틴어는 시간이 감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언어가 현재의 프랑스어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라틴어 이외에 켈트어, 고대 그리스어, 그리고 이른바 게르만어, 영어, 이탈리아어로부터 많은 낱말을 받아들여 동화시켰다. 처음 기록된 불어 문헌은 8세기의 스트라스부르 서약으로, 라틴어로부터의 분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형태의 고대 불어를 확인할 수 있다. 불어의 시대별 변천사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고대 프랑스어 (, 11-13세기) 중기 프랑스어 (, 14-16세기) 근대 프랑스어 (, 17세기-현재) 근대불어 중 17-18세기를 고전 프랑스어()로 별도로 나누기도 한다. 고대불어는 라틴어에서 분화한 여러 로망스어 방언 중 북부 프랑스의 오일어 방언, 특히 프랑시앵(francien) 방언을 일컫는 것이며, 중기 프랑스어는 고대와 근대의 과도기적 형태이며, 근대불어는 프랑스사에서 대세기()이라 불리는 17세기에 플레야드, 몰리에르 등의 고전주의 작가들이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의 문법과 어휘를 받아들여 완성한 것이기에 중기 프랑스어와는 확연한 차이가 나게 된다. 17세기 작가 장 드 라퐁텐의 우화집의 원문을 프랑스의 아동들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근대불어는 현대에 와서도 거의 변하지 않은 데 비하여 중기불어는 직해하기가 좀 더 어려워지고, 고대 프랑스어는 전문지식이 없으면 불어 원어민도 독해할 수 없다. 프랑스어는 29개 나라에서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고, 그 중 대부분의 나라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커뮤니티인 프랑코포니를 구성한다. 또한 국제 연합(UN)을 비롯한 많은 국제 기구의 공식 언어이다. 프랑스어는 유럽에서 네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는 모국어이며,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이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프랑스와 벨기에의 제국적 야망으로 인해 프랑스어는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폴리네시아 등에 전파되었다.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많은 국가는 프랑스, 캐나다(인구의 25%), 벨기에(인구의 45%), 스위스(인구의 20%), 룩셈부르크 순이다. 다음은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인 나라의 목록이다. 벨기에 베냉 부르키나파소 부룬디 카메룬 캐나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코모로 콩고 공화국 콩고 민주 공화국 코트 디부아르 지부티 적도 기니 프랑스 가봉 기아나 기니 아이티 룩셈부르크 마다가스카르 말리 모나코 니제르 르완다 세네갈 세이셸 스위스 토고 바누아투 라틴어의 후예이나, 라틴어의 명사곡용은 대명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고정된 어순으로 명사의 문법적 위치를 나타내게 되었다. 반면에 동사의 굴절은 비교적 풍부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동사는 인칭과 복잡한 시제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단, 이러한 동사변화의 많은 부분은 대개 음운론적 변화에 비해 보수적인 정서법에 의해 표시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입말에 있어서는 많은 인칭과 시제의 동사변화가 사실상 많이 수렴 통합되었다. 예를 들면, 규칙동사 중 제1변화하는 동사(예 penser)는 1/3인칭 단수, 2인칭 단수, 3인칭 복수의 동사변화가 철자로는 구분되나(pense, penses, pensent) 발음상으로는 동일하다(/펑스/). 이러한 동사변화의 음운적 변별성의 결손에 인하여 불어에서의 인칭표시는 주어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로망스어로서는 특이하게 주어 대명사를 생략하지 않는다. 동사변화만으로 인칭을 알 수 있기에 주어 대명사를 일일이 표시하지 않는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와는 대조적이다. 로마자를 사용한다. 프랑스어의 알파벳은 모두 26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k와 w는 외래어를 표기하는 데에만 쓰인다.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프랑스어는 음운변화에 따른 정서법개혁이 적극적이지 않아, 철자법이 다른 로망스어에 비하면 비직관적인 편이이다. 일반적으로 어말의 글자는 묵음이다. 악상 때귀 (accent aigu ´ )는 언제나 위에 붙으며 닫힌 음 e 을 나타낸다 é cole (학교) * 예외 열린음 є 을 나타내는 경우 év é nement (사건) 악상 그하브 (accent grave ` )는 a, e, u 위에 붙으며 열린 음 є 을 나타낸다 p è re (아버지) 악상 씨흐꽁플렉스 (accent circonflexe ^ )는 a, e, i, o, u 위에 붙을 수 있으며 강조된 장음을 나타내며, 때로는 발음 변천에 따라서 뒤에 붙은 s 가 생략된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â me (영혼), b ê te (짐승, 어리석은), î le (섬), bient ô t (곧), fl û te (플루트) 발음 부호가 아닌 같은 낱말을 구별하기 위한 표시로서 * à (전치사 ...로) - a (avoir 동사의 삼인칭 단수) * où (의문대명사 어디) - ou (접속사 혹은) * dû (과거분사 빚진) - du (de + le) * sûr (형용사 확실한) - sur (전치사 ... 위에) 트레마 (le tréma ¨ ) e, i, u 위에만 붙으며 연속된 두 모음의 발음을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두 점은 뒤의 모음에 붙인다 No ë l(성탄절), Ha ï ti(아이티) 프랑스어의 시제는 12개나 된다. 프랑스어의 12시제는 현재, 전과거, 반과거, 복합 과거, 근접 미래, 전미래, 단순미래, 대과거, 조건현재, 조건과거, 접속과거, 접속현재이다. 안녕하세요(낮) Bonjour. 봉쥬흐. 안녕하세요(저녁) Bonsoir. 봉솨 , 봉수아 , 봉수와 친구 Coucou. 꾸꾸 , 쿠쿠 안녕 Salut. / Comment ça va? 살뤼 , 살류 / 꼬망 사 바?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Enchanté(e). 엉셩떼. 고맙습니다 Merci. 메흐씨. 매우 고맙습니다 Merci beaucoup. 메흐씨 보꾸. 천만의 말씀입니다. Je vous en prie. 쥬 부 장 프히. 실례합니다 Excusez-moi. 엑스퀴제-뫄? , 무아 , 무와? 미안합니다 Pardon. 빠흐동. 빡동. 여보세요. Allô. 알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 Bonne journée. 본 쥬흐네. 좋은 저녁 보내세요. Bonne soirée. 본 수아헤. 행운을 빌어요. Bonne chance. 본 샹-쓰. 좋은 여행 되세요. Bon voyage. 봉 부와야-쥬. 열심히 해! 잘 해! Bon travail. 봉 트하바이. 생일 축하해요. Bon anniversaire. 본 아니베흐쎄-흐. 맛있게 드세요. Bon appétit. 보나뻬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onne année. 본 아네. 메리 크리스마스 Joyeux Noël. 쥬아유 노엘. 어떻게 지내세요? 꼬망 딸레-부? 잘 지내고 있습니다 Je vais bien. 쥬 배 비앙. 저는 프랑스인입니다. 쥬 쒸 프랑세. 저는 한국인(남자)입니다 쥬 쒸 꼬헤엉. 저는 한국인(여자)입니다 쥬 쒸 꼬헨-느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쥬 쒸 브뉘 들라 꼬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Comment vous appelez-vous?-Quel est ton nom? 꼬망 부 자쁠레 부? 껠 레 똔 농? 제 이름은 Je m appelle 쥬 마뻴__ 잘 모르겠어요 Je ne sais pas. 쥬 느 쎄 빠 예/아니오 Oui/Non. 위/농 맞다니까:Si. 씨. 좋습니다 트헤 비앙 이거 얼마에요? Combien ça coûte? 꽁비앙 싸 꾿? 8유로 입니다. C est 8(huit) Euros. 쎄 위뙤호. 안녕히 계세요 Au revoir 오 흐부아 나중에 보자. À plus tard. 아 쁠뤼 따흐 조금 있다 보자, 안녕 À tout à l heure! 아 뚜딸뢰-흐 오늘 날씨가 어떻나요? Quel temps fait-il aujourd hui? 껠 떵 페띨 오쥬흐뒤? 날씨가 좋습니다. Il fait beau. 일 페 보. 가는 길 좀 여쭙겠습니다. Pour 뿌흐 이것은 무엇입니까? Qu est-ce que c est? / C est quoi, ça? 께스끄 쎄? / 쎄 꾸아 싸?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Je t aime. 쥬 뗌 유감입니다. Je suis désolé pour toi. /Je regrette. / C est dommage. 쥬 쒸 데졸레 뿌흐 뚜아 / 쥬 흐그헷-뜨 / 쎄 도마-쥬 죄송합니다. Je suis désolé(e). / Pardon. 쥬 쒸 데졸레. / 빠흐동. 물론이죠. Bien sûr. 비앙 쒸-흐 좋습니다. Ok. D accord. 오께. 다 꼬-흐 그저 그렇다. Comme ci, comme ça. 꼼 씨 꼼 싸(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 괜찮습니다. Ce n est pas grave. 쓰 네 빠 그하-브 건배합시다. Santé! 상떼! 도와주세요. Aidez-moi, s il vous plaît. 에데 무와, 씰 부 플레. 프랑스어에서는 70은 60과 10 (soixante-dix)으로, 80은 4개의 20 (quatre-vingts)으로 90은 4개의 20과 10 (quatre-vingt-dix)이다. 하지만, 지역(스위스,벨기에 등)에 따라 70을 septante , 80을 huitante 이나 octante , 90을 nonante 와 같은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국가 표준어 공용어 비공용어 ○ ○ ○ ○ ○ ○ ○ ○ ○ ○ ○ ○ ○ ○ ○ ○ ○ ○ ○ ○ ○ ○ ○ ○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프랑스어 Ⅰ을 선택할 수 있다. 응시자 수가 4100명이며, 유럽계 언어들 중에서는 가장 많다. 현재 한국에서 가르치는 프랑스어는 파리 방언에 기초한 표준 프랑스어이다. 프랑스어의 ISO 639에 따른 언어코드는 fr, 고프랑스어 (842년 - 1400년)의 코드는 fro, 그리고 중기프랑스어 (1400년 - 1600년)의 코드는 frm이다. 알리앙스 프랑세즈( Alliance Française, AF ) - 프랑스어 교육기관 프랑코포니(OIF) -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50여 개국 정상이 2년마다 모여서 정상 회담을 하는 국제기구 프랑스어의 한글 표기 ClicNet 미국 스와스모어 대학교의 프랑스어/프랑스 문학 데이터베이스 한국어-프랑스어 사전 Association des francophones de Corée 한불 친선 협회 Cercle franco-coréen 분류:가봉의 언어 분류:기니의 언어 분류:니제르의 언어 분류:룩셈부르크의 언어 분류:르완다의 언어 분류:마다가스카르의 언어 분류:말리의 언어 분류:모나코의 언어 분류:바누아투의 언어 분류:베냉의 언어 분류:벨기에의 언어 분류:부룬디의 언어 분류:부르키나파소의 언어 분류:세네갈의 언어 분류:세이셸의 언어 분류:스위스의 언어 분류:아이티의 언어 분류:안도라의 언어 분류:인도의 언어 분류:적도 기니의 언어 분류: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언어 분류:지부티의 언어 분류:차드의 언어 분류:카메룬의 언어 분류:캐나다의 언어 분류:코모로의 언어 분류:코트디부아르의 언어 분류:콩고 공화국의 언어 분류:콩고 민주 공화국의 언어 분류:토고의 언어 분류:프랑스의 언어 분류:SVO형 언어 |
마스코트인 Tux 턱스 (Tux)는 리눅스 프로젝트의 공식 마스코트이다. 통통한 펭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1996년 래리 유잉(Larry Ewing)이 만들었다. 리눅스의 마스코트를 펭귄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는 리눅스 커널의 작성자 리누스 토르발스에게서 나왔다. 1st revision tux.png|PaX 버전 그림 그림 버전 2.6.29 버전 때 턱스 대신 나온 "터즈". 태즈메이니아데빌이다. 리누스 토르발스, David Diamond Just for Fun The Story of an Accidental Revolutionary , New York, HarperBusiness, 2001년, , (번역서) 리눅스 그냥 재미로 , 한겨레출판사, } Article discussing the creation of Tux } Linux 2.0 Penguins (Larry Ewing) } A complete history of Tux 분류:리눅스 분류:새 마스코트 분류:컴퓨터 마스코트 |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 1899년 7월 21일 ~ 1961년 7월 2일)는 미국 육군 상사 예편한 미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헤밍웨이의 실속 있고 절제된 표현 방식은 20세기 소설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모험적인 삶과 대중적인 이미지 역시 후대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 헤밍웨이는 대다수의 작품을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발표하였고,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헤밍웨이는 7개의 소설, 6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고 2개의 논픽션 작품들을 출판하였다. 3개의 소설, 4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고 3개의 논픽션 작품들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헤밍웨이의 대다수의 작품들은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헤밍웨이는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헤밍웨이는 고등학교를 마친 이후 이탈리아의 전방 군대에 입대하여 구급차 운전사가 되기 전에 《캔자스 시티 스타》에서 몇 달 동안 기사를 썼다. 1918년에 심하게 부상을 입은 헤밍웨이는 집으로 되돌아왔다. 헤밍웨이가 겪은 전쟁 경험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1921년, 헤밍웨이는 그의 4명의 아내 중 첫 번째 아내인 해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하였다. 부부는 헤밍웨이가 해외 특파원으로 근무한 곳인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된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소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 근대주의적 작가들과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26년에는 그의 첫 소설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출판한다. 1927년 해들리 리처드슨과 이혼한 뒤, 헤밍웨이는 폴린 파이퍼와 재혼을 한다. 둘은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해외 특파원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이혼하게 되고, 헤밍웨이는 내전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를 쓴다. 1940년, 헤밍웨이는 세 번째 아내인 마사 겔혼을 만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런던에서 메리 웰시를 만난 후에 이혼을 했다. 헤밍웨이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파리 해방 전투에 참여한다. 1952년에 《노인과 바다》를 출판하고 난 이후에,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의 사파리로 떠난다. 그 곳에서 두 차례의 비행기 사고를 당한 그는 남은 생의 대부분을 병과 함께 지낸다. 헤밍웨이는 1930년도에는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거주했고,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쿠바에서 거주한다. 1959년에는 아이다호주 케첨에 위치한 집을 구입하였고, 1961년 여름, 헤밍웨이는 그 곳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원래 성악가로 여섯 남매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활동적인 인물로 낚시 및 사냥, 권투 등을 즐겼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17년 지방 신문에 "캔자스 시티 스타"지의 인턴 기자가 되었다가 그만두었고, 1918년 적십자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호사루타 전선에 엠뷸란스 기사로 자원하여 중상을 입게 된다. 전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토론토 스타"지의 프리랜스 기자를 지냈고, 특파원으로 파리로 건너가 거트루드 스타인 등과 사귀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행동파 작가로 스페인 내전에 파시스트이자 후에 군사 독재자가 된 프랑코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참여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은 그러한 경험이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 당시 그의 소설은 헐리우드 영화의 소재를 제공하여 영화화되기 하였다. 단편은 짧은 문체의 작품이 많으며, 이들은 대실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와 이후 계속되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원조가 되었다.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1952년에 발표된 《노인과 바다》가 좋은 평가를 받아 수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해에 두번 항공기 사고를 당한다. 두 번의 항공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중상을 입고 시상식에는 나가지 못했다. 이후 그의 특징이었던 강인한 신체와 활동적인 생활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말년에 사고의 후유증에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 활동도 점차 막히기 시작한다. 결국 1961년 아이다호주에서 엽총으로 62세의 나이에 자살했다. 남동생인 레스터 헤밍웨이는 작가로, 손녀 마고 헤밍웨이와 마리엘 헤밍웨이는 여배우가 되었다. 《해류 속의 섬들》( Islands in the Stream )의 무대가 된 바하마의 비미니에는 그가 머물렀던 호텔의 방을 개조하여 개장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박물관〉이 있어서, 유품 등이 전시되었었지만, 200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생애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은 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의 무공으로 은공훈장 수여 1953년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 수상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 한국어 번역본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1925년 《봄의 분류》 The Torrents of Spring 1926년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1937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1950년 《강건너 숲속으로》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 1952년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1970 해류속의 섬들 Islands in the Stream 1986 에덴의 동산 The Garden of Eden 1999 여명의 진실 True at First Light 1932년 오후의 죽음 Death in the Afternoon 1935년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 Green Hills of Africa 1960년 위험한 여름 The Dangerous Summer 1964년 《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eable Feast 헤밍웨이의 말 (인터뷰집) 거물들의 춤 (시집) 마지막 못다한 이야기 (서간문집) 헤밍웨이의 글쓰기 (글쓰기) 더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기사) 단행본으로 묶여나온 것 외에도 중복 발췌역이 많음. 가장 많이 번역한 역자는 김욱동과 하창수. 그 외에 현혜진 / 성시림 / 구자언 등. 김유조는 헤밍웨이 미공개 단편선 을 번역. 1923 "Three Stories and Ten Poems" 1924 『우리 시대에』 "In Our Time" 1927『여자없는 남자들』 "Men Without Women" 1933 승리자에겐 아무것도 주지말라 "Winner Take Nothing" 1938 제오열 "The Fifth Column and the First Forty-Nine Stories"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 The Short Happy Life of Francis Macomber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 등을 수록 * 1969 "The Fifth Column and Four Stories of the Spanish Civil War" 1972 "The Nick Adams Stories" 1987 "The Complete Short Stories of Ernest Hemingway The Finca Vigia Edition" (1937) The Spanish Earth (1962) Adventures Of A Young Man 은 헤밍웨이의 Nick Adams 이야기를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헤밍웨이 박물관(Museo Momerial Ernest Hemingway )은 쿠바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에 있다. 1928년 헤밍웨이가 쿠바를 방문한 후 줄곧 머물며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쓴 곳으로 내부는 당시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며 노인과 바다 책이 있는 방, 타이프라이터, 동물박제, 9,000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분류:1899년 태어남 분류:1961년 죽음 분류:미국의 소설가 분류:미국의 수필가 분류:미국의 회고록 작가 분류:19세기 미국 사람 분류:20세기 미국 사람 분류:미국의 종군 기자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미국 육군 군인 분류: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미국의 스페인 내전 관련자 분류:국제여단 관련자 분류:제2차 세계 대전 종군 기자 분류:오버로드 작전 관련자 분류:일리노이주 출신 분류:자유 연애 분류:로마 가톨릭교회 이탈자 분류:개신교도 이탈자 분류:항공 사고 생존자 분류:자살한 작가 분류:화기로 자살한 사람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프랑스에 거주한 미국인 분류:캐나다에 거주한 미국인 분류:이탈리아에 거주한 미국인 분류:스페인에 거주한 미국인 분류:쿠바에 거주한 미국인 분류:기분장애 환자 |
리누스 베네딕트 토르발스 (, 1969년 12월 28일 ~)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스웨덴계 핀란드인으로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리눅스 커널과 깃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후에 그는 리눅스 커널 개발 최고 설계자가 되었고, 현재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커널의 플랫폼 독립적인 부분과 인텔 IA-32 아키텍처로 구체화되는 핵심 커널의 컴포넌트들을 관리한다. 저명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리더들에게 부여되는 명예 타이틀직인 자비로운 종신독재자( BDFL , Benevolent Dictator for Life)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리누스는 닐스(Nils)와 안나(Anna) 토르발스의 아들이자, 시인 올레 토르발스(Ole Torvalds)의 손자로 태어났다. 리누스의 가족은 아이티 인구의 5.5% 정도를 차지하는 소수 스웨덴어 사용자에 속한다. 리누스의 이름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던 미국인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에서 따온 것이지만, 리누스는 자신의 저서 《Rebel Code Linux and the Open Source Revolution》라는 책에서 "나의 이름은 피너츠에 나오는 라이너스에나 어울린다"고 언급한 바 있다. 리누스는 1988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해 다녔고, 1996년 컴퓨터 과학 석사로 졸업했다. 석사 논문 제목은 리눅스 이식 가능한 운영 체제 이다. 리누스는 대학교 1학년을 끝낸 후 포병 관측 장교로 핀란드 군에 입대하여 소위로서 11개월간 복무하여 병역을 마쳤다. 1990년에 복학한 후 최초로 DEC MicroVAX에서 운영하는 ULTRIX의 형태로 유닉스를 만나게 되었다. 리누스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코모도어 VIC-20와 함께 시작했다. 이후 싱클레어 QL를 구입하고 그 운영체제를 변형시키며 OS를 변형시키고 어셈블리어 프로그램과 텍스트 에디터를 만들거나 몇 가지 게임을 프로그램 하기도 하였다. 1991년 2월 2일, 그는 인텔 80386 기반의 IBM PC를 구입하였다. 한 달 정도 페르시아의 왕자 등의 게임을 하면서 MINIX의 사본을 기다렸는데, MINIX가 도착한 직후 그는 리눅스 커널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2000년 6월에 헬싱키 대학교는 리누스 토르발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리누스 토르발스, David Diamond Just for Fun The Story of an Accidental Revolutionary , New York, HarperBusiness, 2001년, , (번역서) 리눅스 그냥 재미로 , 한겨레출판사, 리누스의 개인 홈페이지 The Rampantly Unofficial Linus Torvalds FAQ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1969년 태어남 분류:핀란드의 프로그래머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핀란드의 무신론자 분류:미국의 무신론자 분류:컴퓨터 선구자 분류:리눅스 관계자 분류:해커 분류:스웨덴어 사용 핀란드인 분류:핀란드계 미국인 분류:헬싱키 출신 분류:헬싱키 대학교 동문 분류:인터넷 명예의 전당 분류:핀란드의 블로거 분류:미국의 블로거 |
1971년 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 경제 포럼의 전신 유럽경영포럼 창설 1월 25일 - 이디 아민, 쿠테타로 우간다의 정권을 장악하다. 3월 25일 - 1971년 3월 25일 밤.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저지하려는 파키스탄 군인의 총칼에 수도 다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4월 27일 -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어,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8월 10일 - 경기도 광주시 철거민 단지서 5만여 명이 정부의 약속위반에 항의하며 대규모 소요 벌임. 8월 15일 - 바레인 독립 8월 19일 - 대한민국,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들, 대학자유화 요구 선언 발표. 8월 20일 - 남북적십자 대표, 분단후 판문점에서 회의. 8월 23일 - 실미도 사건 실미도에서 훈련받던 특수부대원들이 서울로 진입하여 군경과 교전. 9월 3일 - 카타르, 영국으로부터 독립. 9월 8일 - 대한민국 정부, 국토종합개발계획 발표. 9월 13일 - 중국 중국 공산당 부주석 겸 국방부장 린뱌오, 반마오쩌둥 쿠데타 음모가 발각돼 소련으로 탈출하다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9월 18일 - 일본 치바 현에서 남자 3명이 이리듐-192를 만지자 이상 증세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9월 20일 - 남북적십자사, 이산가족 찾기 예비회담 판문점서 첫 개최. 9월 21일 - 바레인, 부탄, 카타르, 유엔 가입. 9월 22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판문점에 남북직통전화 개설. 10월 6일 - 남북적십자 제3차 예비회담에서 본회담을 서울과 평양에서 교대 개최 합의. 10월 7일 - 오만, 유엔 가입. 10월 15일 - 유신체제 서울특별시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이 진주하다. 10월 21일 - 중화인민공화국, 유엔 내에서 중국 대표권이 인정되다.(기존의 중화민국은 권리 박탈 후 탈퇴함.) 10월 27일 - 콩고민주공화국이 국호를 자이르로 변경. 11월 15일 - 인텔사, 인텔 4004 출시. 11월 26일 -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 5개국 중립화안에 조인. 12월 9일 - 아랍에미리트, 유엔 가입. 12월 12일 - 고려대학교가 우석대학교를 인수하기로 하고 합병하여 고려대학교는 의과대학을 보유하게 되었다. 12월 25일 -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가 발생하다. 김포국제공항의 국내선 청사가 준공되다. 2월 - 미공군 기지로 사용되던 여의도 비행장이 전면 폐쇄되다. 6월 28일 - 천주교 제주지목구 설립. 9월 19일 - 대한민국 MBC 음악FM 개국. 10월 - 최초로 여의도에 지어진 건축물이자 국내 첫 민간인 고층아파트인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입주가 시작되다. 12월 23일 - 미국 뉴욕의 제1 세계 무역 센터가 완공되었다. 1월 2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서용빈. 1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일화. 1월 7일 - 미국의 배우 제러미 레너. 1월 8일 - 스위스의 축구 선수 파스칼 추베르뷜러. 1월 10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류정한. 1월 11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재후. 1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조규찬. 1월 15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황정민. 1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지영. 1월 18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주제프 과르디올라. * 케냐의 작가 비냐방가 와이나이나. 1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웅인. 1월 25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진수 1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서진. 1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영애. 2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석천. 2월 4일 - 대한민국의 열사이자 학생운동가 강경대. 2월 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유동균. 2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승대. * 대한민국의 배우 정선경. 2월 11일 - 대한민국의 연기자 박소현. 2월 14일 - 일본의 가수, 연기자 사카이 노리코. 2월 17일 - * 대한민국의 방송인 겸 프리 랜서 아나운서 임경진. * 대한민국의 개그맨 신동엽. 2월 20일 -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재홍. * 핀란드의 축구 선수 야리 리트마넨. 2월 24일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장진. 3월 1일 * 대한민국의 성우 최재호. * 대한민국의 배우 마동석. 3월 2일 - 대한민국의 연기자 고현정. 3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 현 야구 코치 이숭용. 3월 11일 - 미국의 배우 조니 녹스빌. 3월 16일 - 미국의 배우 앨런 튜딕. 3월 17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조웅천. 3월 18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정준하 3월 26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최진철. * 일본의 만화가 안노 모요코. 3월 28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김혜연. 3월 29일 - 일본의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 3월 31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최상덕. 4월 6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히치하이커. * 스웨덴의 축구 심판 마르틴 한손. 4월 8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조원우. 4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태우. 4월 19일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유희열. (Toy). 4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상인. 4월 30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겸 대학 교수 양소영. 5월 3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서동균. 5월 10일 * 대한민국의 연기자 김남주. * 일본의 성우 야나세 나츠미. * 북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 5월 11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서지오. 5월 12일 - 일본의 성우 나가사와 나오. 5월 18일 - 미국의 전 축구 선수 브래드 프리델. 5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작곡가 도민호. 5월 25일 - * 일본의 소설가 이사카 고타로.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유지현. 6월 5일 - 미국의 가수 겸 배우 마크 월버그. 6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경호. 6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재훈. 6월 11일 - 대한민국의 성우 류점희. 6월 16일 - 미국의 힙합 가수 투팍. 6월 22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강상수. 6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진희. 6월 28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파비앵 바르테즈. * 미국의 배우 아일린 퀸 * 일본의 성우 키무라 아키코. *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미국의 기업가 일론 머스크. 6월 30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겸 정치가 장진영. 7월 3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널리스트 줄리언 어산지. 7월 6일 - * 대한민국의 희극인 남희석. * 일본의 가수, 뮤지컬 배우 사카모토 마사유키. (V6). 7월 14일 - 잉글랜드의 축구 심판 하워드 웹. 7월 16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겸 배우 김정난. 7월 21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방송인 궈즈젠 7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연우. 7월 23일 - 중국의 아나운서로 랑융춘. 7월 24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디노 바조. 7월 25일 - * 대한민국의 배우 김승수. * 대한민국의 배우 양정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석민. 7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광식. 7월 31일 - 대한민국의 성우 홍소영. 8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기원. 8월 4일 - 일본의 배우 단 레이. 8월 7일 - 일본의 성우 우에다 요지. 8월 10일 - 아일랜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로이 킨. 8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류승수. 8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태균 8월 21일 - 일본의 성우 하기와라 마사토. 8월 22일 - 영국의 배우 리처드 아미티지. 9월 1일 - 터키의 전 축구 선수 하칸 쉬퀴르. 9월 4일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이계벽. 9월 8일 - 영국의 배우 마틴 프리먼. 9월 10일 - 일본의 성우 겸 가수 사쿠라이 토모. 9월 11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최동수. 9월 18일 - 미국의 배우 제이다 핑킷 스미스. 9월 20일 - 스웨덴의 전 축구 선수 헨리크 라르손. 10월 1일 - 대한민국의 연기자 송일국. 10월 9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규봉. 10월 15일 * 크로아티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니코 코바치. * 슬로베니아의 전 축구 선수 즐라트코 자호비치.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유상철. 10월 20일 - 미국의 가수 스눕 독. 10월 23일 - 미국인 래퍼 지누 (지누션). 10월 27일 * 대한민국의 연기자 오연수. * 그리스의 전 축구 선수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 10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 안재욱.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전형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한수. 11월 2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강철. 11월 3일 -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전 축구 선수 드와이트 요크. 11월 12일 - 미국의 래퍼 페리. 11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C (뜨거운 감자). 11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권오중. 12월 2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프란체스코 톨도. 12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류태준. 12월 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은성.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진영.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정훈석.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철수. 12월 24일 - 푸에르토리코의 배우 리키 마틴. 12월 25일 - 영국의 가수 다이도. 12월 28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세르히 바르후안.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엄상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상경. 1월 10일 -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사업가 코코 샤넬. 1월 26일 -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 관련 활약한 독일의 군인 헤르만 호트. 3월 11일 - 대한민국의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4월 6일 - 러시아의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6월 1일 -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 6월 15일 - 미국의 화학자 웬들 메러디스 스탠리. 7월 6일 - 미국의 재즈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 7월 7일 - 미국의 애니메이터 어브 아이웍스. 9월 11일 - 니키타 흐루쇼프, 구 소련의 정치인. 10월 12일 - 미국의 정치가 딘 애치슨. 10월 17일 - 빌리 아이흘러, 독일의 언론인, 정치인. 10월 25일 - 러시아의 과학자 미하일 얀겔. 11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호. 12월 9일 - 미국의 정치학자, 외교관 랠프 번치. 경제학상 시몬 쿠즈네츠 문학상 파블로 네루다 물리학상 데니스 가보르 생리학 및 의학상 얼 서덜랜드 2세 평화상 빌리 브란트 화학상 게르하르트 헤르츠베르크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경인 소 1월 27일 임자 2월 신묘 대 2월 25일 신사 3월 임진 소 3월 27일 신해 4월 계사 소 4월 25일 경진 5월 갑오 대 5월 24일 기유 윤5월 소 6월 23일 기묘 6월 을미 대 7월 22일 무신 7월 병신 소 8월 21일 무인 8월 정유 대 9월 19일 정미 9월 무술 대 10월 19일 정축 10월 기해 대 11월 18일 정미 11월 경자 소 12월 18일 정축 12월 신축 대 1972년 1월 16일 병오 |
1972년 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월 30일 - 북아일랜드의 데리에서 영국군 낙하산부대가 공화주의자들의 근거지인 보그사이드 지역에 진입, 시민권을 주장하는 시위대에게 발포해 14명이 사망했다. (피의 일요일) 2월 19일 - 일본에서 아사마 산장 사건 발생 5월 13일 - 일본 오사카에서 센니치 백화점 화재 발생 5월 25일 - 류큐 제도, 다시 일본 영토로 편입. 7월 4일 - 7.4 남북 공동 성명 7월 27일 - 미국의 전천후 고기동 4세대 전술전투기 F-15 이글이 첫비행에 성공하다. 8월 11일 - 베트남 전쟁, 미국의 마지막 지상 전투 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군하다. 8월 29일 - 대한적십자사,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 참석위해 평양 도착. 8월 30일 -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이 평양에서 열리다. 9월 5일 - 검은 구월단에 의한 뮌헨 올림픽촌 습격 사건이 발생하다. 9월 29일 -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수교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회담을 가진 뒤 중일공동성명을 조인,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 10월 3일 -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첫 핵무기제한조치인 전략무기제한협정(SALTⅠ) 조인. 10월 17일 - 10월 유신의 시작. 11월 6일 - 타이 학생들 일본 상품 불매운동 결의. 11월 21일 -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투표율 91.9%, 찬성률 91.5%) 12월 23일 -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 일대에서 지진이 일어나 약 5만명이 사망했다. 12월 27일 - 유신헌법 공포, 박정희 제8 대 대통령 취임 미국 뉴욕의 제 2 세계 무역 센터가 완공되었다. 미국 뉴욕의 제 5 세계 무역 센터가 완공되어 개장하였다. 4월 22일 - 대한민국의 지상파TV에 미스코리아 실황중계 시작. 4월 - 인텔사, 인텔 8008 출시. 8월 9일 - 대한민국 문화공보부, 국기에 대한 맹세 교육 실시. 8월 18일 - 남북적십자사, 남북회담위한 직통전화 개통. 8월 25일 - 대한민국,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8월 26일 - 제20회 뮌헨 올림픽 개막. (~9월 11일) 9월 9일 - 침술을 이용한 마취수술법이 대한민국에서는 처음 성공. 9월 25일 - 제5회 아시아대법원장회의, 14개국 대표 참가한 가운데 서울서 개막. 10월 6일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인구 600만 돌파. 11월 30일 - 재단법인 국기원 설립. 12월 3일 - 마징가Z 일본에서 방영 시작. 1월 1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릴리앙 튀랑. 1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서희. 1월 8일 - 미국의 가수 정재윤 (솔리드). 1월 11일 - 미국의 배우 어맨다 피트. 1월 12일 - 대한민국의 스포츠 캐스터 한명재. 1월 28일 - 일본의 야구 선수 신조 쓰요시. 1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종훈. 2월 1일 * 푸에르토리코의 랩퍼 테고 칼데론.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정선희. 2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도현. 2월 5일 - * 덴마크의 왕세자빈 마뤼 엘리사베트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김지선. 2월 8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윤정수. 2월 8일 - 미국의 프로레슬링 선수 빅 쇼. 2월 10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기흥. 2월 12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허문회. 2월 14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이윤석. 2월 15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서경석. 2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정학. 2월 17일 - 미국 펑크록 밴드 그린데이의 빌리 조 암스트롱. 2월 19일 - 일본의 배우 오모리 나오. 2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서태지. 2월 2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전태열. 2월 29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장웅. * 이탈리아의 배우 안토니오 사바토 주니어. 3월 3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임혁필. 3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동건. 3월 8일 - 대한민국의 성우 한수림. 3월 9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방송인 하이샤 3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기성.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방송인 배칠수. 3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경호. 3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여진. 3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민종. * 미국의 래퍼 이준 (솔리드). 3월 28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정민철. 3월 29일 -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후이 코스타. 3월 29일 - 일본의 성우 스와베 준이치. 3월 30일 - 체코의 전 축구 선수 카렐 포보르스키. 4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아현. 4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석훈. 4월 17일 - * 대한민국의 성우 주자영 * 일본의 축구 심판 니시무라 유이치. 4월 18일 - * 대한민국의 배우 고명환. * 대한민국의 가수 김성재. 4월 19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히바우두. 4월 30일 - 일본의 전 축구 선수 모리시마 히로아키. 5월 2일 - 미국의 프로레슬러 드웨인 존슨. 5월 4일 - 미국 펑크록 밴드 그린데이의 마이크 던트. 5월 6일 - 일본의 성우 키쿠치 시호. 5월 8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문동환. 5월 1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은영선. 5월 12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모델 궁선영. 5월 13일 - 대한민국의 기자, 앵커 박성호. 5월 15일 - 대한민국의 성우 안종덕. 5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차명욱. 5월 1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선. 5월 21일 - 미국의 힙합 가수 노토리어스 B.I.G.. 5월 30일 - 일본의 성우 호시 소이치로. 6월 2일 -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한석. * 미국의 배우 웬트워스 밀러. 6월 9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원희. 6월 10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하지은. 6월 11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박소라. 6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진영. 6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전상렬. 6월 19일 - 미국의 축구 선수 브라이언 맥브라이드. 6월 23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지네딘 지단. 6월 24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유호한. 6월 30일(음력 5월 20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강병규. 7월 1일 - 방송연예인 전용준. 7월 1일 - 일본의 성우 이나다 테츠. 7월 3일 - 미국의 배우 맷 슐즈. 7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원형. 7월 11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감독 박경완 7월 17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야프 스탐. 7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박석진. 7월 20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아영. 7월 21일 - 일본의 배우, 가수, 기업인 하루나 아이. 7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염정아. 8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석준. 8월 6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김수용. 8월 8일 - 루마니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비오렐 몰도반. 8월 14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유재석. 8월 15일 - 미국의 배우 벤 애플렉. 8월 18일 - 일본의 연기자, 가수 나카이 마사히로 (SMAP). 8월 24일 -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선수 윤동식. 8월 27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쿠 코치 조경환. 8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희. 8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배용준. 8월 30일 - * 미국의 배우 캐머런 디애즈. * 체코의 전 축구 선수 파벨 네드베트. 9월 7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재걸. 9월 8일 - 일본의 성우 세키 토모카즈. 9월 9일 - * 대한민국의 배우 김가연. * 대한민국의 학원인 강민성. * 크로아티아의 배우 고란 비슈니치.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국혜정. 9월 12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박현승. 9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선수 방수현. 9월 14일 - 대한민국의 성우 오주연. 9월 21일 - * 영국의 가수 리엄 갤러거 (오아시스). * 대한민국의 판사 정진아. 9월 23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심은하. * 대한민국의 성우 윤미나. 9월 27일 - 미국의 배우 귀네스 팰트로. 10월 2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윤택. 10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주혁. 10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주미. 10월 6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사업가 고소영. * 대한민국의 배우 류시원.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마크 슈워처. 10월 7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수필가 이지희. 10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명민. 10월 9일 - 일본의 가수 V6의 멤버 나가노 히로시.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성주. * 미국의 래퍼 션 (지누션).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진필중. 10월 15일 - 프랑스의 영화 감독, 배우 마티외 데미. 10월 16일 - 벨기에의 전 축구 선수 이브 세르네일스. 10월 17일 * 미국의 랩 가수 에미넴. * 대한민국의 성우 표영재.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심재학. 10월 19일 - 일본의 성우 아오키 사야카. 10월 20일 - 독일, 미국의 영화 감독 토어 프로이덴탈. 10월 21일 - 일본의 성우 모리타 마사카즈.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수. 10월 24일 - 베트남계 미국인 배우 밴 다크홈. 10월 26일 - 프랑스의 소설가 샨사. 10월 29일 - 러시아의 미술가 안드레이 프로코피예프. 11월 4일 -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루이스 피구. 11월 9일 - 일본의 성우 오기하라 히데키. 11월 13일 - 일본의 연기자, 가수 키무라 타쿠야 (SMAP). 11월 15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현진. 11월 28일 - 일본의 전 축구 선수 나나미 히로시. 12월 2일 - 대한민국의 작가, 전 아나운서 손미나. 12월 11일 - 사우디아라비아의 전 축구 선수 사미 알 자베르.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성우 하성용.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정재. 12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황수정. 12월 29일 * 영국의 배우 주드 로. * 대한민국의 개그맨 이휘재. 4월 2일 - 프란츠 할더, 독일의 군인. 4월 4일 - 미국의 목사, 정치가 애덤 클레이턴 파월 2세. 4월 15일 - 미국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 4월 16일 -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5월 2일 - 미국의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5월 13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공진항. 5월 14일 - 대한민국의 화가 이상범. 5월 28일 - 에드워드 8세, 영국의 국왕. 5월 29일 - 러시아의 과학자 스티븐 티모셴코. 7월 27일 - 일본의 바둑기사 세고에 겐사쿠. 10월 24일 - 미국의 야구 선수 재키 로빈슨.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두한. 12월 21일 -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의 군인 파울 하우서. 12월 26일 -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12월 27일 - 캐나다의 총리 레스터 B. 피어슨. 경제학상 존 힉스, 케네스 애로 문학상 하인리히 뵐 물리학상 존 바딘, 리언 쿠퍼, 존 로버트 슈리퍼 생리학 및 의학상 제럴드 에델만, 로드니 로버트 포터 화학상 크리스천 B. 안핀슨, 스탠퍼드 무어, 윌리엄 하워드 스타인 평화상 수상자 없음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소 2월 15일 병자 2월 계묘 대 3월 15일 을사 3월 갑진 소 4월 14일 을해 4월 을사 소 5월 13일 갑진 5월 병오 대 6월 11일 계유 6월 정미 소 7월 11일 계묘 7월 무신 대 8월 9일 임신 8월 기유 소 9월 8일 임인 9월 경술 대 10월 7일 신미 10월 신해 대 11월 6일 신축 11월 임자 대 12월 6일 신미 12월 계축 소 1973년 1월 5일 신축 |
1974년 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3월 28일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의 대통령에 취임. 4월 25일 - 카네이션 혁명 발생. 5월 18일 - 인도, 서부 라자스탄의 타르 사막에서 핵실험 실시. 8월 9일 - 워터게이트 사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사임하고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38대 대통령으로 취임. 이로써 워터게이트 사건은 종결되었다. 8월 15일 - 육영수 저격사건,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다 부인 육영수 여사를 피격·살해한 사건이 발생. 8월 22일 - 대한민국, 신민당, 당수에 김영삼 의원 선출. 8월 23일 -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 1호, 4호 해제. 9월 4일 - 미국,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국교수립. 9월 8일 -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 워터게이트 사건의 주동자인 리처드 닉슨 전대통령 사면. 9월 16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 9월 17일 - 그레나다, 기니비사우, 방글라데시, 유엔 가입. 9월 23일 -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결성 11월 26일 -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사임. 후임에 미키 다케오가 선출. 11월 27일 - 민주회복국민선언 가 발표된다. 1월 - 미국 뉴욕의 제 6 세계 무역 센터가 완공되어 개장하였다. 1월 20일 - 미국의 다목적 전투기 F-16의 프로토타입 YF-16이 비공식적인 시험 비행을 실시했다. 3월 - 유리 겔라가 일본을 방문함. 3월 30일 - 산학협동재단 설립. 4월 - 인텔사, 인텔 8080 개발. 6월 20일 태백선 제천~고한간 80.1 km 전철화 개통. 8월 2일 - 아시아개발은행(ADB) 발족. 8월 5일 - 삼성중공업 설립. 8월 15일 - * 대한민국, 경부선 새마을호 운행 개시.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9월 1일 - 마징가Z, 일본에서 방영종료. 9월 13일 - 대한민국, 국립천문대(현재 한국천문연구원) 발족. 9월 23일 - 대한민국, NGO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11월 24일 -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되었다. 12월 5일 - 채화역이 폐지됨. 오리온 초코파이 첫 출시. 1월 3일 - 일본의 성우 이토 겐타로. 1월 7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훌렌 게레로. 1월 10일 - 일본의 성우 유즈키 료카. 1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황성관. 1월 17일 - 이란의 샴쌍둥이 비자니 자매. (라단 비자니, 라엘 비자니) 1월 18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지혜. 1월 23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박나림. 1월 26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조효상. 1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진웅. 1월 30일 - 영국의 배우 크리스찬 베일. 1월 31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전숙경. 2월 3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제동. 2월 6일 - 일본의 성우 요시노 히로유키. 2월 8일 - 에콰도르의 축구 선수 울리세스 데 라 크루스. 2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원기준. 2월 13일 - 영국의 가수 로비 윌리엄스. 2월 19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기상캐스터 한연수. 2월 20일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정경배. * 이란의 축구 선수 카림 바게리. 2월 22일 -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제임스 블런트. 2월 25일 - 일본의 성우 모리쿠보 쇼타로. 2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적. 3월 4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아리엘 오르테가. * 대한민국의 배우 김정은.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최만호. 3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형선. * 대한민국의 가수 김윤아 (자우림). 3월 14일 * 캐나다의 배우 그레이스 박.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황윤성. * 대한민국의 희극인 박성호. 3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동률. 3월 17일 - 대한민국의 기자 최영철. 3월 21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전광주. 3월 23일 * 스페인 카탈루냐의 영화 감독 자우메 코예트세라. * 뉴질랜드의 권투 선수 마크 헌트. 3월 29일 - * 대한민국의 성우 장경희. * 일본의 성우 타구치 히로코. 3월 30일 - 일본의 가수 코마츠 미호. 3월 31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배정민. 4월 1일 * 대한민국의 성우 현경수.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서동욱. 4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엄태웅. 4월 6일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로베르트 코바치. 4월 8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박지훈. 4월 11일 - 캐나다의 모델, 배우 트리샤 헬퍼. 4월 12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이명진. * 일본의 성우 아사이 키요미. 4월 14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광국. 4월 15일 - 대한민국의 모델 출신 배우 변정수. 4월 1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최석필. 4월 18일 * 영국의 영화 감독 에드거 라이트. * 프랑스의 좌파 정치가 올리비에 브장스노. 4월 20일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강동우. 4월 22일 - 대한민국의 축구 해설자 박문성. 4월 27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정성호. 5월 8일 - * 대한민국의 사격 선수 여갑순.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장석희.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진갑용. 5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성욱 5월 10일 - * 대한민국의 방송인 신정환.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실뱅 윌토르. 5월 17일 - * 미국의 축구 선수 에디 루이스. * 대한민국의 배우 곽도원. 5월 2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김성준. 5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배승배. 5월 30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대의. 6월 3일 - 대한민국의 전 농구선수,현 방송인 서장훈 6월 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동수. 6월 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이대진. 6월 11일 * 미국의 래퍼 DJ 샤인 (드렁큰 타이거). * 대한민국의 래퍼 타이거 JK (드렁큰 타이거). 6월 13일 - 일본의 성우 사쿠라이 타카히로. 6월 23일 - * 대한민국의 TV조선 방송기자 엄성섭.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영철. 6월 24일 - * 대한민국의 SBS 아나운서 박찬민.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대희. 6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필모. 6월 3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백재호. 7월 1일 - 대한민국의 여자 미술가 겸 뮤지컬배우 이홍. 7월 3일 - 타이완의 영화 배우 권이봉. 7월 5일 - 대한민국의 성우 안영아. 7월 6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제 호베르투. 7월 7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대현. 7월 9일 - 일본의 가수 쿠사나기 츠요시. 7월 11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안드레 오이여르. 7월 17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클라우디오 로페스 7월 18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은정. 7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호. 7월 23일 - 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 전승우. 7월 30일 - 미국의 배우 힐러리 스왱크. 7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영준. * 대한민국의 배우 이종혁. 8월 4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코린 디아크르. 8월 7일 - 미국의 영화 배우 마이클 섀넌. 8월 10일 - 코스타리카의 축구 선수 루이스 마린. 8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철기. 8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설수진. 9월 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윤여진. 9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영. * 일본의 성우 타카하시 히로키. 9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병욱. * 크로아티아의 종합격투기 선수 미르코 필로포비치. 9월 12일 - 일본의 성우 스즈무라 켄이치. 9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선미. 9월 15일 - * 대한민국의 성우 박경혜. * 대한민국의 배우 조재윤. 9월 16일 - 일본의 작곡가 고사키 사토루. 9월 18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솔 캠벨. 9월 2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병욱. 9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주진모. 10월 3일 - 대한민국의 기자 김태욱.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혜경.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오상민. 10월 26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지영. 11월 1일 - 대한민국의 리포터, 전 아나운서 정은영. 11월 2일 - 미국의 힙합 가수 넬리. 11월 9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11월 11일 - 미국의 영화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11월 15일 -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세르지우 콘세이상. 11월 16일 - 영국의 축구 선수 폴 스콜스.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와 탤런트 한정수. 11월 22일 - 미국의 야구 선수 케니 레이번. 12월 2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재홍. * 대한민국의 성우 윤동기. 12월 6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정아. 12월 7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강풀.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박둘선. 12월 16일 - 대한민국의 성우 홍범기.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만석. 12월 21일 - * 대한민국의 성우 사성웅. * 대한민국의 배우 정만식. 12월 23일 - 에콰도르의 축구 선수 아구스틴 델가도. 12월 24일 - 칠레의 전 축구 선수 마르셀로 살라스.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수린.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윤서인. * 일본의 성우 오리카사 후미코. 12월 30일 - 대한민국 태생 미국 입양인 출신 화제인물 필립 클레이(김상필) 6월 18일 - 게오르기 주코프, 구 소련의 군인. 6월 22일 - 프랑스의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 8월 15일 - 대한민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12월 20일 - 육영수 저격범 문세광. 경제학상 군나르 뮈르달, 프리드리히 본 하이에크 문학상 에이빈드 윤손, 하뤼 마르틴손 물리학상 마틴 라일, 안토니 휴이시 생리학 및 의학상 알베르트 클라우데, 크리스티앙 드 뒤브, 조지 팔라데 평화상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화학상 폴 플로리 엔리코 봄비에리, 데이비드 멈퍼드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병인 대 1월 23일 갑자 2월 정묘 대 2월 22일 갑오 3월 무진 소 3월 24일 갑자 4월 기사 대 4월 22일 계사 윤4월 소 5월 22일 계해 5월 경오 소 6월 20일 임진 6월 신미 대 7월 19일 신유 7월 임신 소 8월 18일 신묘 8월 계유 소 9월 16일 경신 9월 갑술 대 10월 15일 기축 10월 을해 대 11월 14일 기미 11월 병자 소 12월 14일 기축 12월 정축 대 1975년 1월 12일 무오 |
장자 장자 (莊子, 병음 Zhuāngzǐ, 기원전 369년?-기원전 286년)는 중국 전국 시대 송(宋)나라 몽(蒙; 현재의 안휘성 몽성 또는 하남성 상구 추정) 출신의 저명한 중국 철학자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老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명은 주(周)이다. 후세에 노자와 함께 부를 때 노장 (老莊)이라 부른다. 도교에서는 남화진인 (南華眞人), 또는 남화노선 (南華老仙)이라 부르기도 하며,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 황건적의 지도자 장각에게 도를 전수하는 선인이 바로 남화노선(장자)이다.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어느 날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을 깨니 내가 꿈을 꾸고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고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장자는 이처럼 상식적인 사고 방식에 의문을 품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일찍이 몽(蒙) 칠원(漆園)의 관리가 되었으나, 생활은 매우 가난했다. 《장자》 외편 〈추수(秋水)〉편에 따르면, 초나라 위왕(威王)이 사람을 보내 정치를 보좌해 주길 청했으나, 장자는 거절하였다. 혜자(惠子)와 교우했다. 장자의 인생론에서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ㆍ정신을 버리고 허정 (虛靜), 염담 (恬淡)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자유ㆍ독립을 얻어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을 진인 이라고 하며,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도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만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지식론이 깔려 있다. 이 지식론은 명가(名家)의 궤변이나 전변(田騈)의 제물설(齊物說)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도 (道)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 = 도 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物)의 생사(生死)를 기(氣)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흔히 노자와 장자를 묶어 흔히 노장사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노자가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 대해, 장자는 개인의 안심입명에만 몰두했다. 노자가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무위자연에 처할 것을 가르쳤던 반면, 장자는 속세를 초탈하여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즉 노자는 어느정도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 반면 장자는 오직 개인에 대한 것을 강조하였다. 분류:기원전 369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286년 죽음 분류:기원전 3세기 중국 사람 분류:기원전 4세기 중국 사람 분류:기원전 4세기 철학자 분류:도가 분류:도교 분류:범신론자 분류:중국의 작가 분류:중국의 논리학자 분류:중국의 아나키스트 분류:주나라의 음악가 분류:주나라의 도교 신자 분류:장수 신화 |
펠로폰네소스 전쟁 ()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이 전쟁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아티케의 침략을 되풀이하였고,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전쟁의 첫 단계는 기원전 421년에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막을 내렸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에서 다시 교전이 일어나 이내 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켈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여 군대 전체가 궤멸되었다. 이 패배로 전쟁은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는데, 보통 ‘데켈레이아 전쟁’ 혹은 ‘이오니아 전쟁’으로 불린다. 이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을 잠식하였으며, 결국 아테네의 제해권을 빼앗았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궤멸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아테네는 이듬해에 항복하였다. 역사가 투퀴디데스가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미 잘 지적하였듯,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정치, 역사 그리고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세를 뒤바꾸었다. 국제 관계 면에서 전쟁 전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는 종속국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하였으며, 반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주도국이 되었다. 전쟁에 따른 경제적 영향은 그리스 전역에 미쳐,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빈곤이 만연하였고,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또 이 전쟁으로 그리스 사회에는 앞서 말한 영향보다 포착하기 어려운 변화가 생겼는데, 민주주의 국가인 아테네와 과두정 국가인 스파르타의 전쟁으로 서로의 나라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세계에서 내전이 잦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또, 그리스의 전쟁은 원래 제한되고 정형적인 형태였으나, 나라 사이의 전면전으로 변화하였으며, 대규모 잔학 행위도 등장하였다. 전쟁은 종교적, 문화적 금기를 훼손했으며, 농촌과 도시를 파괴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황금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내전으로 분류하기도 애매한 이 전쟁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다른 폴리스는 엄연히 다른 나라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제국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델로스 섬에 위탁된 자금을 관리하던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이에 스파르타가 내심 불만을 가지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고 따라서 대립의 소지가 컸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발판으로 강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자 스파르타와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테네가 코린토스 및 메가라를 위협하면서 코린토스 지협을 장악하는 동시에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려 하자 스파르타와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삼십년 평화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던 아테네는 코린토스와 상업상 이해관계의 충돌에 있는 식민지 코르퀴라와 동맹을 하게 된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건재한 동안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으며, 페리클레스 사후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했다. 이에 28년간이나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투퀴디데스는 전쟁의 시작을 에피담노스에서 벌어진 분쟁에서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 에피담노스는 이오니오스 만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식민시로 약간 특이한 역사를 가졌는데, 에피담노스는 케르퀴라의 식민시였지만 식민시의 건설자는 코린토스인인 팔리오스였고 처음 정착민들중 코린토스 인도 몇몇 있었다. 때문에 코린토스인은 에피담노스를 자신들의 식민시로 여기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피담노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에 민중파와 귀족사이에 분쟁이 벌어진다. 여기서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귀족을 추방하는 일이 벌어졌고 반대로 귀족이 에피담노스 주변에 비헬라스인과 연대하는 일이 발생했다.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케르퀴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냈으나 거절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때문에 에피담노스 민중파는 이번에는 델포이 신탁(에피담노스를 창건한 코린토스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에게서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자, 코린토스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을 길잡이로 삼으라는 신탁을 받는다)을 명분으로 코린토스에게 도시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고 코린토스는 때마침 케르퀴라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에피담노스의 민중파의 요구를 수용해서 군대를 육로로 자신들의 식민시이자 케르퀴라와 에피담노스 사이에 있던 아폴로니아로 파병한다. 결국 양 국가는 에피담노스를 두고 처음에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충돌하게된다. 코린토스는 75척의 선단에 2000명의 중무장보병을 태워서 에피담노스로 보냈고 이에 케르퀴라는 80척의 선단으로 맞서서 악티온 곶에서 싸우게된다. 이 해전에서 케르퀴라는 승리를 거둬서 15척의 코린토스 선박을 파괴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레우킴메 곶에 승전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케르퀴라는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코린토스의 식민시 레우카스와 동맹국인 엘리스의 퀼레네 항구를 공격한다. 그렇게 1년간 대치하던중 코린토스가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시작하자 비록 이전에 승리하기는 했지만 동맹국이 없던 케르퀴라는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하고 이에 코린토스도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는 두 번의 민회 끝에 케르퀴라가 아테네가 침공을 당할 시에만 돕는 조건부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앞에 조건대로 활동할 10척의 아테네 함대를 파견한다. 이후 코린토스와 동맹국은 150척의 대규모 함대를 케르퀴라 앞바다에 파견했고 이에 케르퀴라도 140척의 함대로 대응해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는 코린토스가 70척의 함대를 파괴해서 매우 우위에 있었는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테네의 10+10척(나중에 증강된 함대)의 함대가 전투에 개입하고 갑작스러운 제3자의 개입에 코린토스는 후퇴한다. 이후 코린토스가 아테네 함대에 사절을 보내 개입한 이유를 묻자 민회에서 결정된 동맹을 설명해주었고 코린토스도 아테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는지 퇴각 그렇게 승패가 정해지지 않고 해전은 끝이 난다. 처음에는 아테네가 이길 공산이 매우 컸었다. 그것은 해군에 대한 경험지식이 풍부한 데다가 스파르타 진영은 해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르키다모스 전쟁 으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아티케를 선제공격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태풍, 해일 등의 자연재해를 만나 전쟁을 개시하기도 전에 군사적으로 큰 피해를 입어 해군력이 스파르타 해군과 엇비슷한 수준에 이른다. 결국 양측은 군사적으로 대치중에 있어 승패도 없이 10년간 전쟁을 계속하다가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맺어져 양측은 휴전 조치를 내렸고 한동안의 평화가 계속된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계속된 전쟁으로 델로스 동맹 국가간의 분열이 계속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분열은 전쟁 중반에서부터 델로스 동맹간에 의견 차이로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때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 측에 먼저 휴전을 제안했던 이유이기도 했고 전쟁국력을 쏟아 부어야 한 상황이었는데 전쟁 처음부터 아테네 측이 전쟁을 강압한 탓에 델로스 동맹은 분열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동맹국가가 델로스 동맹 탈퇴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상황이 일어날 경우 아테네로써는 군사적으로 약해질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해 들어오면 제국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파르타 측에 휴전협정을 요청하는 한편, 재차 공격 기회를 노렸던 것이다. 결국에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아테네 측과 스파르타 측에서 충돌이 일어나면서 이내 니키아스 평화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켈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아테네 측은 반격해오는 스파르타를 막기 위해 알키비아데스로 새로운 아테네군 지도자로 추천되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군사정보를 파악하는 한편 군사배치 등을 계획 중이었으나 전쟁 개시 전에 내분이 먼저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의 정적들의 사소한 고발과 모함으로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아테네의 군사 상황을 모두 넘겨버린다. 이 사건이 아테네의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결국,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였고, 원정군 전체가 궤멸되었다. 스파르타는 이와 동시에 페르시아와 군사협정 체결을 받아 페르시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흑해의 차단에 나선다. 그리하여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과 군사력을 약화시켰으며. 뒤이어 기원전 404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궤멸시켜 해상권을 빼앗았다. 이 해전을 끝으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아테네는 이듬해에 항복하였다. 스파르타는 도시의 성벽을 모두 파괴하도록 강요했으며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 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면서 그리스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갔는데,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변질되었고 오랜 전쟁으로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파르타가 테바이에 패하면서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그리스의 주도권이 테바이로 넘어갔고 테바이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패하면서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는 유럽 역사의 주 무대에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다시 누리지 못하고 퇴장하였으며, 로마 제국(다만 중세 시기 로마는 공용어가 그리스어로 바뀌었고 라틴계보다는 그리스계가 우세했기에 그리스의 역사로 보기도 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단지 그들의 신화와 철학만이 남아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결과 델로스 동맹은 해체 수순에 들어갔고, 아테네에서는 공화정이 붕괴하고 스파르타의 지도하에 과두파 정권(삼십인 정권)이 발족하여 공포정치를 하며 숙청을 지휘했다. 하지만 9개월 후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공화정 파 세력이 삼십인 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탈취한다. 공화정 정권하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의 원인이 된 알키비아데스와 삼십인 정권의 지도자 크리티아스 등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에 의해 탄핵당하고, 공개 재판을 통해 사형을 당했다. 기원전 401년경에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2세와 작은 키루스 사이에서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며, 〈쿠나크사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 참가한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를 썼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지배자인 지위는 잃었지만 유력 폴리스로 계속 존재했다. 그리스 지방을 지배하려는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해 아테네와 테바이 그리고 이후에는 코린토스 등의 스파르타와 적대적인 폴리스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여러 폴리스가 합종연횡을 반복하면서 스파르타에 대항하였다. (예를 들면 코린토스 전쟁,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기원전 379년에 마침내 스파르타가 그리스와 에게 해의 패권을 장악했지만, 해상 교역이 가져올 부가 시민들 사이에 빈부격차를 낳았고, 주로 자작농으로 구성된 병역을 지는 자유민이 700명 정도까지 감소했기 때문에 질높은 강병을 내세운 리쿠르고스 제도(, Lycurgus)는 타격을 받았다. 기원전 378년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대체하는 제2차 해상 동맹을 재결성했다. 그리스 세계는 보이오티아 전쟁으로 만성적인 전쟁 상태에 빠져 서서히 쇠퇴한 반면, 아테네는 기원전 375년의 낙소스 연안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고 해상의 제해권을 되찾았다 . 기원전 371년 스파르타 군은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군에 패배를 당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잃었다. 일시적으로 패권을 잡은 테바이도 기원전 362년에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에파메이논다스가 사망하면서 패권을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357년에 테바이와 아테네 사이에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356년에는 테바이를 중심으로하는 암피크티온 동맹과 포키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테네 - 스파르타 연합군 사이에서 제3차 신성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 355년에 동맹시 전쟁은 동맹 도시의 승리로 끝났고, 제2차 해상 동맹은 붕괴되었다. 기원전 346년에 제3차 신성 전쟁도 암피크티온 동맹이 승리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기원전 347년에 플라톤이 사망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고향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귀국하여, 알렉산더 3세의 스승이 된 것도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38년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테바이 연합군이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패배를 당하고, 마케도니아의 패권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그리스 세계는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스파르타만 마케도니아가 주도하는 헬라스 동맹(코린토스 동맹)에 참가하였고, 나중에 아기스 3세가 마케도니아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지만, 기원전 331년 메갈로폴리스 전투에서 패했다.) 기원전 336년에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자 일시적으로 헬라스 동맹은 혼란에 빠졌지만, 알렉산더가 권력을 장악했다.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천적 페르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마케도니아 군을 이끌고 동방원정에 나섰다. 분류:고대 그리스의 전쟁 분류:아테네의 전쟁 분류:스파르타의 전쟁 분류:테베의 전쟁 분류:아르고스의 전쟁 분류:델로스 동맹 분류:고대의 내전 분류:기원전 5세기 분쟁 |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1799년 5월 20일 - 1850년 8월 18일)는 프랑스의 소설가이다.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는 쉰한 살이란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00여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편의 단편소설, 여섯 편의 희곡과 수많은 콩트를 써낸 정력적인 작가이다. 1799년 투르에서 태어난 발자크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자기보다 서른두 살이나 많은 남자와 사랑없는 결혼을 한 발자크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유모에게 양육을 맡기는가 하면, 겨우 여덟살 때 기숙학교로 보내진 뒤 6년 만에 쇠약해진 심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를 찾지 않았다. 이러한 ‘불행한 기혼녀’와 그 여성이 지닌 냉정한 모성은 발자크 소설의 주요한 모티브가 된다. 파리에서 열여섯 살부터 법률 공부를 하면서 공증인 사무실의 서기로 일했으나 스무 살이 되던 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가족에게 1년의 유예기간을 얻어 레디기에르 가의 누추한 다락방에서 예비작가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발자크가 자신의 이름으로 작가적 명성을 얻기까지는 10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희곡작가가 되려던 처음의 의도를 포기하고 가명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20대 초반, 스물두 살 연상의 베르니 부인을 만나 연인인 동시에 문학적 조언자로서 오랫동안 그녀를 의지처로 삼게 된다. 이 이외에도 발자크는 쥘마 카로를 비롯하여 다브랑테스 공작 부인, 카스트리 후작 부인 등 많은 여인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많은 작품의 여주인공에게서 그 여인들의 단편적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이십대 중반에 시도한 인쇄업의 실패로 많은 빚을 지게 된 발자크는 평생 빚쟁이에 쫓기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은 ‘발자크의 집’이란 이름으로 박물관이 된, 당시 발자크가 기거했던 파시의 집 뒷문에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오후 네시에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정부터 다음날 낮까지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소설을 썼던 발자크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하녀이자 정부였던 브뤼뇰 부인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포도주 박물관’으로 통하는 뒷골목으로 도망치곤 했던 것이다. 포도주 박물관의 한 켠을 이루고 있는 동굴에 등불을 든 발자크 상이 서 있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상하기 힘든 작업의 결과 발자크는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1830년 무렵부터 마지막 소설 ≪가난한 친척≫을 발표한 1848년까지 2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00여 편의 소설을 남길 수 있었다. 프랑스 낭만주의가 꽃을 피운 시대에 사실주의의 문을 연 발자크는 1841년 그동안 자신이 써낸 모든 작품과 앞으로 써낼 작품의 목록을 가지고 {인간희극}이란 총서를 기획한다.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를 지닌 하나의 완전한 건축물을 꿈꾸었던 그는 뷔퐁의 박물학의 영향을 받아 여러 종의 동물들로 분화된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각자가 속한 활동 영역에 따라 여러가지 전형적인 인간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등장인물만 2천여 명이 넘는 ≪인간희극≫은 대혁명 직후부터 1848년 2월 혁명 직전까지 프랑스 사회의 파노라마를 정치, 경제, 사회적 영역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내밀한 사적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또한 파리 뿐만 아니라 지방과 시골까지 아우르면서 어느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자 한 발자크적 야심의 산물이다. 비록 계획했던 작품들로 온전히 채워지진 못했지만 ≪인간희극≫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역작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중에서도 ≪외제니 그랑데≫를 포함하여 ≪고리오 영감≫, ≪사촌 베트≫, ≪골짜기의 백합≫, ≪마법 가죽≫, ≪루이 랑베르≫, ≪사라진 환상≫, ≪샤베르 대령≫, ≪세라피타≫, ≪미지의 걸작≫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등이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빚에 쫓기는 형편과는 별개로 스스로 ‘문학의 나폴레옹’이 되고자 했던 발자크는 글을 쓰기 위해 하루에 40잔 가까이 커피를 마신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런 극단적인 과도함은 그에게 돌이키기 힘든 심장질환을 안겨준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열정적인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발자크의 삶은 작가적 재능을 위해서도, 또 어렵게 얻은 사랑을 위해서도 지나치게 빨리 소진되어 버린다. 익명의 여성독자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한스카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8년이나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결실을 맺는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는 단순한 사랑의 증표를 넘어 발자크 문학세계의 세세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한스카 부인은 발자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그녀와 결혼한 지 불과 5개월 만인 1850년 8월 18일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분류:1799년 태어남 분류:1850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소설가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투르 출신 분류:프랑스의 판타지 작가 분류:프랑스의 문학 평론가 |
알바 롱가 (Alba Longa)는 고대 로마의 로물루스 신화에서 언급되는 지방의 명칭이다. 이 지방 이름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는가 라는 물음은 고고학계에서 한동안 토론되었으며, 오늘날 알바 롱가는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했던 지방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리비우스의 건국사( Ab urbe condita 1.1-1.3)에 따르면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아스( Aeneas )는 트로이가 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의해 함락된 후 (→ 트로이 전쟁), 그를 따르는 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로 피신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트로이 부족이 정착한 곳에는 이미 이탈리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얼마안가 두 부족은 정복전쟁을 하였다. 라티누스( Latinus )를 족장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원주민은 트로이 부족에게 패배한 후 이들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아이네아스는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 Lavinia )를 처로 맞아들였으며, 트로이 부족의 새로운 도시 이름을 처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 Lavinium )이라 불렀다. 아이네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라비니움을 떠나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산기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알바 롱가 라 불렀다. 로마의 초기 건국사는 분분적으로 전설적 색체를 띠고 있다. 특히 트로이의 후손과 이탈리아 원주민의 융화와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되는 로마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잘 그려져 있다. 분류:고대 로마 |
호메로스 (, , 기원전 8세기경)는 고대 그리스 중 그리스 암흑기 말기에 활동했던 유랑시인이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및 그밖에 여러 시의 작가이며, 맹인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정확한 생몰 년대는 미상이고,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어식 이름인 호머 (Homer)로도 알려져 있다. 호메로스 히오스 섬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음유 시인 오르페우스의 후손이라 하나, 그의 가계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20세기 초반까지 호메로스는 교과서에 약 기원전 750년경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활동하던 이른바 유랑시인으로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의 작품이라고 나왔었다. 그러나 고전문헌학계에서는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에 관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호메로스에 관해서는 예부터, 특히 18세기 이래 학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그 쟁점은 호메로스라고 하는 시인이 있어, 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만들었는가의 여부이다. 처음에는 실존을 인정했으나, 근대에 와서의 단서는 독일의 고전학자 볼프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가운데 모순이 굉장히 많다는 것(한 번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영웅이 후에 다시 전사하는 등)에 착안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논쟁이 극단으로 나가 드디어는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실재하지 않았다. 다만 짧은 시가 있었을 뿐으로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집대성되어 호메로스의 시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시 호메로스의 실존을 긍정하는 견해가 유력해고 있다. 《일리아스》로 하여금 세계 최대의 서사시가 되게끔 만들고 있는 예술적 통일은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논쟁은 호메로스의 정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 그리고 이 작품들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과 토론에 관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고전과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를 연구하는 호메로스학 학자는 17~20세기에 특히 많았다. 호메로스 논쟁의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이 실존인물 논쟁은 고대 그리스 시절인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 학자들도 제기한 바 있다. 이 논쟁은 아래와 같다. #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라 전해지는 호메로스는 단일 인물인가 여러 시인들의 합작인가? #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상황에서 시를 썼는가? 이 질문들의 대답 여하에 따라 몇가지 고고학적 해답의 가능성이 더해진다. # 호메로스 서사시가 구현한 전설은 얼마나 믿을만한가? #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연대 추정이 가능한 가장 오래된 요소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오르페우스 헤시오도스 헤로도투스 파우사니아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네이버캐스트 - 호메로스 분류:생몰년 미상 분류:고대 그리스의 시인 분류:서사시인 분류:구전시인 분류:시각 장애인 분류:고대 히오스인 분류:실존 인물 논란 분류:기원전 8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8세기 시인 분류:신화예술 분류:트로이아 전쟁 분류:미케네 문명 |
《일리아스》 ()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이름은 트로이인들의 왕성인 ‘일리온’에서 유래하였다. 일리아스 란 이름은 일리온의 노래 란 뜻이다. 오디세이아(Odysseia)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와 후대 서양의 문학예술과 문화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는 호메로스라고 알려져 있다. 주제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전쟁인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51일간의 사건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의 장군인 아킬레우스가 중심이 되어 원한과 복수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비극을 다뤘다. 9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상황과 전쟁에 관여하는 올륌포스의 신들, 장수들의 이야기 등을 위주로 한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서 시는 24편으로 나뉘며, 그리스의 대표적 시운중의 하나인 6각운(Hexametre)으로 작곡되었다. 각 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 순서로 이름이 붙어있다. 그리스 문학의 대부분이 운명론에 따른 체념이나 절망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정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영광된 죽음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가 작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는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호메로스가 후대에 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밀먼 페리는 "호메로스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그의 서사시의 구조를 보면 구전이 되기 좋도록 되어 있다고 보고, 호메로스가 혼자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문자화 했다고 본다. 제1권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가멤논이 아폴론 사제의 딸, 크뤼세이스를 모욕한 죄과로 아카이 진영(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전염병이 번진다. 총지휘관 아가멤논은 공개 회의에서 아킬레우스와 격한 말다툼 끝에 그의 애첩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음로써 또한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게 된다. 분노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는 앞으로 트로이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에 따라 제우스를 은밀히 찾아가 아카이아군이 패배하도록 요청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낸다. 제2권 아가멤논은 제우스가 보낸 꿈에서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것을 본다.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가멤논은 장군들과 토론 끝에, 전체 군사회의를 소집한다. 네스토르와 오디세우스는 열띤 논쟁을 벌이며, 아카이아군은 트로이 정복을 포기하고 귀향하자는 의견에 마음이 솔깃해지지만, 신들의 영향하에 있는 오뒷세우스의 강한 반대와 건의에 따라 트로이군과 빨리 결전을 치르자는 데에 합의를 본다. 시의 후반(484-877 이른바 전함 카탈로그 )은 전쟁에 참가한 아카이아군과 트로이아군의 지방, 도시 그리고 지휘관들을 노래하고 있다. 제3권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은 들판으로 나가 전투를 위해 진을 친다. 그러나 트로이아의 장군 파리스는 홀로 양 진영 사이에 나서서 자신과 단판을 할 아카이아 용사는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친다. 아카이아군 진영에서 마땅한 도전자를 찾고 있을 때를 같이하여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는 헬레나를 망루에 불러내어 아카이아의 장군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내 파리스는 헬레나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와 일대일 결투을 벌인 끝에 패배하며, 아프로디테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헬레나는 여신의 강요로 파리스가 쉬고 있는 침소로 가 그를 약간은 핀잔을 주면서 위로한다. 제4권 제우스를 중심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트로이전쟁의 앞날에 관한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한다. 아카이아군의 편을 드는 헤라의 요구로 아테나는 판다로스를 꾀어 메넬라오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힘으로서 이 전에 맺은 협약을 깨친다. 트로이아군의 간계에 분격한 아가멤논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아카이아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장군들이 이끄는 부대의 열병식을 끝마친 후 아카이아군은 드디어 트로이아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제5권 디오메데스의 무공과 아테나의 도움으로 아카이아군은 트로이아군을 궁지에 몰아 넣는다. 디오메데스는 선두에 서서 만나는 졸개들을 모조리 물리친 후 메넬라오스를 부상시킨 판다로스와 그를 지원하는 아이네아스와 대결한다. 먼저 창을 던져 판다로스를 단숨에 꺼꾸러뜨린 다음 아이네아스에게는 바윗돌을 집어던져 기절을 시킨다. 죽을 지경에 놓인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끼어들지만 성난 황소 같은 디오메데스에게 손에 부상을 입고 도망친다. 아이네아스는 결국 아폴론에 의해 구출되며, 아폴론은 아테나가 잠시 전장을 비운 틈을 타 트로이아군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또한 아레스가 트로이군의 편을 듦으로써 아카이아군이 궁지에 몰린다. 이를 지켜본 헤라는 다시 아테나를 시켜 아카이아군을 돕도록 한다. 다시 디오메데스는 아테나의 힘을 등에 업고 아레스와 맞붙어 싸운다 제6권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틈에 헥토르는 동생 헬레노스의 간청에 따라 성으로 돌아가 아낙네들로 하여금 아테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도록 권유한다. 이 사이에 전장에서는 트로이아 장군 글라우코스와 아카이아 장군 디오메데스는 서로 족보를 묻고는 서로의 조상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뻐하며 싸움을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우정의 표시로 교환한다. 헥토르는 트로이아 성에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동생 파리스를 만나 핀잔을 준 뒤, 남편을 찾아 어린 아들 아스튀르낙스를 품에 안고 이리저리 헤메는 아내 안드로마케를 성문 근처에서 만나 눈물어린 이별의 대화를 나눈다. 이는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이다. 제7권 아테나와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아카이아의 가장 용맹한 장수와 일대 일로 싸우게 부추긴다. 텔라몬의 아들, 큰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일대 일로 결투를 벌인다. 밤이 되어 양쪽 군대가 갈라지고 네스토르가 전사자들을 화장할 수 있도록 휴전을 맺고 아카이아 인들의 선단 주위에 방벽을 쌓도록 권유한다. 제8권 제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아가멤논에게 복수해 주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들에게 이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에 다른 신들도 아카이아 군이나 트로이군을 도와주지 못한다. 제우스는 이데산으로 가서 아카이아인들에게 패배를 트로이아 인들에게는 승리의 영광을 내린다.트로이군은 승리하고 밤이 되자 승리에 도취된 헥토르는 아카이아군의 진영앞에서 야영을 한다. 제9권 전세가 많이 불리해지자 아카이아 군은 전쟁을 접고 귀국하려고 한다. 아가멤논은 귀국을 하려고 하지만 디오메데스와 네스토르는 이에 반대한다. 아가멤논은 네스토르의 조언에 따라 아킬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킬레우스와 화해하려고 하였으나 아킬레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제10권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장군들을 깨워 파수병들을 돌아보게 한다.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는 트로이군의 정탐군인 돌론을 죽이고 트로이군의 진영에 몰래들어가 트로이군을 정탐한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우스는 정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라키아인들의 진영을 급습하고 말들을 빼앗아 돌아온다. 제11권 새로운 날이 밝자, 아가멤논은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로 군사들을 이끌고 나온다. 그는 용감히 싸웠지만 부상을 입고 디오메데스도 역시 부상을 입고 선단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오디세우스가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아이아스가 그를 구해준다. 역시 오디세우스도 부상을 당하고 아카온과 에우리필로스도 부상을 당해 선단으로 물러난다.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싣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보내 네스토르가 싣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다. 제12권 아카이아군은 트로이군에 쫓겨 방벽안으로 밀려들어가고 헥토르는 방벽을 공격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이에 맞서서 항전을 독려한다. 리키아의 두 장군 글라우코스와 사르페돈이 방벽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글라우코스는 부상을 당해 물러가고 사르페돈이 격국 방벽을 허물고 만다. 헥토르가 돌로 쳐서 방벽의 문을 부수자 트로이군은 방벽을 넘어 문을 지나 물밀듯이 아카이아 진영으로 쳐들어 간다. 제13권 아카이아 군의 선단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포세이돈은 제우스 몰래 아카이아인들을 도와주며 격려한다. 맹렬하게 공격하는 헥토르를 맞아 두 아이아스가 무너진 방벽 근처에서 선전하고 전선의 왼쪽에서는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가 아이네이아스와 파리스 등을 맞아서 분투한다.헥토르는 풀리다마스의 조언에 따라 군사들을 한쪽으로 집결시켜서 맹렬히 공격을 퍼붓는다. 제14권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대접한 다음 다시 싸움터로 돌아가다가 부상당한 아가멤논,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와 마주친다. 아가멤논은 철군을 주장하는데 오디세우스가 반대한다. 한편, 헤라는 잠의 신의 도움으로 제우스를 이데산에서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이틈을 타서 포세이돈은 아카이아 인들을 도와주는데 큰 아이아스가 던진 돌에 헥토르가 맞고 부상당하여 물러나게 되고 이를 기회로 아카이아인들이 공세를 시작하여 트로이군이 후퇴한다. 작은 아이아스는 큰 공을 세운다. 제15권 제우스는 잠에서 깨어나자 헤라에게 크게 화를 낸다. 이리스를 포세이돈에게 보내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아폴론을 헥토르에게 보내어 그를 회복시키게 한다. 헥토르가 회복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아카이아 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자 아카이안인들은 결국 맨 앞쪽의 선단으로 부터 후퇴하기 시작한다. 큰 아이아스는 해전(海戰)에 쓰는 긴 창을 들고 홀로 분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트로이 군은 맨 앞쪽에 있던 프로테실라오스의 배애 불을 지른다. 제16권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고 출전하여 트로이 군을 선단에서 몰아낸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트로이군을 선단에서 몰아내기만 하고 돌아오라고 일렀으나 파트로클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도망하는 트로이군을 쫓아진격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추격전에서 사르페돈을 죽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결국 헥토르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제17권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 군과 트로이군과의 일전일퇴의 격전이 벌어진다.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에게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벗겨 자신이 입고는 더욱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메넬라오스가 안틸로코스를 보내 파트로클로스의 전사소식을 아킬레우스에게 알리게 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분전하는 동안 메넬라오스와 메리오네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시체와 귀환한다. 제18권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분노한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새로운 갑옷과 방패를 만들어주도록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하겠다고 약속한다. 헥토르가 다시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다시 탈취하려고 공격하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무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크게 고함을 지르자 트로이 군이 놀라서 도망친다. 밤이 되자 풀리다마스는 헥토르에게 아킬레우스가 출전하기 전에 트로이아 군을 성 안으로 철수 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헥토르는 이에 따르지 않는다. 아카이아 군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헤파이스토스는 테티스가 부탁한 아킬레우스의 새 무장을 만들어준다. 제19권 날이 밝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새로운 무장을 가져다 주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모든 아카이아 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해한다. 오디세우스의 권고에 따라 모든 아카이아 인들은 아침을 먹고 아킬레우스를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출정하기 전에 아킬레우스의 준마 크산토스가 헤라의 힘을 입어 인간의 음성으로 아킬레우스가 오늘은 승리하지만 결국 전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무시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제20권 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당장 트로이 성을 함락하지 못하도록 여러 신들이 전쟁에 관여하는 것을 허락한다. 아폴론이 아이네이스를 부추겨 아킬레우스에게 맞서게 한다. 여러 신들은 각자 자신들이 응원하는 측으로 갈라선다. 아이네이스가 위험해지자 포세이돈은 그를 구해준다.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싸움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헥토르는 이를 무시하고 동생 폴리도로스의 죽음에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에게 맞선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는데 아폴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다. 아킬레우스는 도망치는 트로이군을 크게 무찌른다. 제21권 트로이 군의 일부가 스카만드로스 강에 빠져 헤어나오니 못하는데 아킬레우스가 칼을 빼들고 뒤쫓아가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제물로 삼기위해 12명의 젊은 군인을 생포해 온다. 강의 신이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를 들판으로 추격하나 헤파이스토스가 불로 강의 신을 물리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군을 성안으로 모두 몰아넣는다. 제22권 헥토르는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문앞으로 나가 아킬레우스와 일전을 기다린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쫓고 쫓기다가 트로이 성을 세바퀴나 돈다. 제우스는 헥토르의 파멸을 결정하고 아폴론은 헥토르를 도와주지 못한다. 아테나가 데이포보스로 변하여 헥토르로 하여금 아킬레우스에게 대항하도록 유도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전차에 매달고 돌아간다. 헥토르의 부모와 아내는 성벽 위에서 통곡한다. 제23권 파트로클로스의 혼령이 밤에 아킬레우스에게 나타나 자신의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청한다. 아침이 되자 아카이아 군은 나무를 해와서 파트로클로스를 화장한다. 그 다음날 화장터 위에 봉분을 만들고 아킬레우스 주최아래 장례 경기가 벌어진다. 제24권 아킬레우스가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 나서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돈다. 제우스는 테티스를 보내어 헥토르의 시체를 욕보이지 말고 돌려주라고 명령하면서 이리스를 프리아모스에게 보내어 몸값을 내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프리아모스는 제우스가 보내준 메시지를 믿고 길을 떠나 헤르메스의 안내를 받으면서 무사히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도착한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인도하고 헥토르의 장례기간동안에는 휴전하겠다고 약속한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거둬가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호메로스 저, 천병희 역, 일리아스, 숲, 2007(제1판)/2015(제2판) (희랍어 원전 번역) 페르세우스 프로젝트 중 일리아스 분류:호메로스 분류:서사시권 분류:퍼블릭 도메인 책 분류:기원전 8세기 책 |
floating 적도 좌표계 는 망원경을 통한 천체 관측에서 사용되는 좌표체계이다. 적도 좌표계에서는 측량되는 각도로는 적위와 적경 그리고 시간각이 있다. and dec on celestial sphere.png|섬네일|적도 좌표계. 파란색은 적경을 나타내고, 녹색은 적위를 나타낸다. 적위는 지구의 위도와 비슷한 개념이다. 천구의 적도를 0º, 천구의 북극을 +90º, 천구의 남극을 -90º로 둔 각도로 천체를 지나는 시간권을 따라 그 천체까지 잰 각이다. 적경은 춘분점을 기준으로 천체가 속한 시간권까지 반시계방향으로 잰 각이다. 적경은 춘분점으로부터 동쪽으로 0~24시로 나타낸다. 시간각은 남중 자오선에서 천체가 속한 시간권까지 천구의 적도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잰 각을 말한다. 항성시를 구할 때 주로 사용하며 남중한 별의 시간각은 0시이다. 지평 좌표 황도 좌표계 분류:천구좌표계 |
르네상스 (, 또는 문예 부흥 (文藝復興), 학예 부흥 (學藝復興)은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말한다.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동시에 르네상스를 거쳐서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 혹은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안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국가, 즉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은 이 운동에 거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초 이 운동의 인문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교회 개혁과 학문적 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von Michelangelo.jpg|섬네일|left|다비드, 미켈란젤로가 조각함. 플로렌스의 아카데미아 갤러리 이탈리아어로 Il Rinascimento(Rinasimento)라는 어원을 가진 이 말은 프랑스 역사가인 미슐레가 프랑스어인 Renaissance라는 말로 확립시켰으며 이것이 영어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원 의미는 “재생”(再生, rebirth)이라는 뜻으로 르네상스라는 개념에 포함된 재생이라는 의미는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고전 텍스트의 재발견이며 또 하나는 유럽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 자체이다. 흔히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다 르네상스라는 명칭이 개념화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었다. 1550년, 이탈리아의 화가-역사가 조르조 바사리가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Le vite de piu ecce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ettori)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중세 예술이 극복되는 과정을 ‘미술의 재생’이라고 언급. 1559년,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아미요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ΟΙ ΒΙΟΙ ΠΑΡΑΛΛΗΛΟΙ)을 번역하면서 그 헌정문에 ‘문예의 재생’을 언급 1697년,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벨이 “역사비평사전”에서 ‘문예 르네상스’라는 항목 수록 1701년, 프랑스의 문학자 퓌르티에르이 “보편적 사전”에서 ‘미술 르네상스’라는 항목 수록 18세기, 볼테르는 르네상스 시기가 중세로부터의 탈출구가 되었다고 간주 1855년, 프랑스의 역사가 미슐레가 “프랑스사”의 7권에 ‘르네상스’라는 이름을 붙여 최초의 학문적 관심사를 불러일으킴 1860년, 스위스의 역사가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에서 르네상스의 개념을 확립 1975년 이후 많은 학자들은 르네상스가 하나의 특정한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해스킨스등과 같은 역사가가 ‘12세기 르네상스’나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렀던 작업들 때문에 생긴 발상이다. 지금은 이런 관점이 학자들 사이에 많이 보편화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국 르네상스’ 등 다양한 용례들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등장으로 요즘에는 ‘르네상스 시기’라는 말이 ‘근대 초기’라고 대치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다. 르네상스라는 말의 조어력은 점차 커져서 어떤 시기의 전성기나 융성기를 할렘 르네상스나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 등과 같이 은유적으로 르네상스 시기라고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da Vinci - Lady with an Ermine.jpg|섬네일|right|250px|〈흰 족제비를 안고 있는 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83년~1490년 르네상스라는 말이 19세기에 만들어진 이후 르네상스 시기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왔다. 부르크하르트 시대에는 르네상스가 명백한 시대구분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게르만계 학자들의 중세 재평가 작업에 의해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즉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다.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은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중심이 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된 흐름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아랍의 지식을 흡수하고, 경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고, 현세지향적이 되고, 인쇄술의 발달로 지식이 확산될 토양을 확보하고, 예술에서 새로운 기법과 실험을 시도하게되는 등의 변화를 말한다. 이 관점은 르네상스 시기에 유럽이 암흑기에서 벗어나 대항해시대로 상징되는 경제성장 시기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종종 근대의 시작으로 간주되곤 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를 미술, 문학, 철학 등이 변화된 유사혁명 정도로 본다. 오직 극소수의 가진자들에게만 의미가 있었을 뿐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세였다는 관점이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르네상스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적, 이념적 변화 정도로 본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에 대해 적었던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의 민중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이징가는 르네상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였는가에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르네상스는 중세 말기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 시기에 파괴된 것이 더 많지는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예를 들어, 라틴어는 르네상스 시기까지 자연적인 변화를 겪으며 사용되던 살아있는 언어였는데, 고전 순수주의라는 강박관념으로 화석화시켜버린 것이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과 손다이크는 르네상스 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를 시간적, 지역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여러 곳에서 점진적으로 시작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중세가 언제 어디서 끝나는지도 얘기할 수 없다. 보통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이슬람 세계, 비잔틴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여 서유럽과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11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도시의 활성화로 도시는 점차 도시국가 형태의 자치도시가 되었다. 13세기 말의 경제성장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가 심해져서 특유의 시민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도시국가는 그 특성상 고대의 도시국가와 유사한 점도 있어 로마법이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초기 르네상스를 제현인물로 피렌체 출신의 단테 가 있다. 그는 정적에 의해 추방당해 유랑생활을 하던 중 대표작인 신곡 을 완성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를 지옥, 연옥의 안내인으로 등장시키는데, 영혼의 정화를 통해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고전문학과 가톨릭을 조화시켜 대 서사시를 그려내었다. 단테보다 후대 사람인 페트라르카는 로마 제국 시대에 인간이 최고의 것을 성취했고 그 이후 점차 부패하여 중세 암흑시대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를 종교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진보로 간주했으므로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산을 재발견하여 "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전문헌을 모으고 라틴어로 시와 책을 쓰다가 이런식으로 고전 교양을 모아 인간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사색하는 방식을 인문주의 라고 불렀다. 그는 속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온고지신적인 태도는 이후의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 의 역사와 키케로 의 도덕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최초의 인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화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조토 이다. 그는 시공간을 다룸에 있어 고대의 스타일을 원용하였다. 법률에 있어서는 볼로냐 대학 을 중심으로 로마법 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는데 그 체계화를 이룬 사람은 바르톨루스 다. 이러한 움직임은 1348년의 흑사병과 각종 정치적인 격변으로 더이상 꽃피지 못했다. 이러한 인문주의가 다시 꽃피게 되는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 르네상스의 시작점을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1453년)에서 찾는 관점도 있다. 그것은 대포와 화약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고 비잔티움 제국, 그리스 학자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을 가지고 로마로 도망쳤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으며 유럽의 오래된 종교적 질서가 붕괴되는 것에 일조하였다. 르네상스가 영국에 들어왔을 때는 엘리자베스 1세 때이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토머스 모어 같은 작가들을 배출해냈다. 14세기~16세기까지 이탈리아 도시들이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웠다. 피렌체,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같은 도시에서는 이러한 경제력으로 자치권을 사들여, 영주나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났고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신도 인간처럼 표현하던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기운을 르네상스라 한다. 특히 르네상스 미술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전성기를 맞은 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곧 신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생각이 바뀌는 지적 흐름과 이탈리아 중북부가 도시주 형태의 자치상태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당시 피렌체는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하여 토스카나지방의 중심지였고 14세기경부터 교회, 이슬람 세계, 동로마 제국 등의 고전문화에 영향받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이탈리아에는 고대 유물이 많았고 따라서 조각가, 건축가 등이 고대 로마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했다. 건축에서는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건축에 애를 먹고 있던 피렌체 대성당의 큰 돔을 올리는 데 성공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후 건축가 브라만테 등이 나타나 르네상스 건축을 이어나간다. 회화에서는 마사초가 그 서막을 열었다. 그의 자연주의적 태도는 이후 프란체스카, 베로키오등의 원근법, 해부학 등으로 이어진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인간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는 말로 유명한데 그는 건축, 회화를 넘나드는 방대한 저술로 인문주의자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후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박식가들이 뒤이어 회화, 건축, 조각 등에서 다방면의 재능을 드러내었다. 15세기 초엽, 그 때까지 그 본질에 있어서 중세적 양식을 답습하고 있던 이탈리아 조각은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두 개념, 즉 고전 형식의 재현과 적극적인 사실(寫實) 표현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전 예술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서 중시하는 고대 사상과 그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 반면에 휴머니즘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불러일으켜, 북방에 있어서 중세 예술의 말기를 장식하는 자연주의로 나아갔다. 같은 자연주의라 할지라도 15세기에 있어서 자연에의 접근은 중세와 달라서 직관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었고, 종합적이기보다 분석적이며, 신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보다 자연 바로 그것을 위하고, 세계의 기존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체상이 또다시 주제로 채용된 것은 그 표현이다. 음악은 르네상스 시기의 강력한 교황들의 후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시스티나 성당의 성가대는 전 유럽의 음악가, 성악가들로 이루어졌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프레와 팔레스트리나 등이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개한 곳은 피렌체,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등의 도시가 있다. 학술과 예술가들을 키웠던 후원자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분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피렌체에서 상업과 은행업으로 성공해 교황청 재산을 관리하면서 재력가문이 되었다. 15세기부터 300여년 간 르네상스 사상 예술 과학 등을 폭넓게 후원했다. 그 중 미켈란젤로는 15세 때부터 2년 간 메디치 가문의 궁전에서 지내면서 많은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며 자랐다. 하지만 15세기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의해 피렌체의 예술이 쇠퇴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의해 밀라노의 스포르차가도 추방당했으나 로마에서는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1515년)이 추진되어 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로마가 일시적으로 황폐해지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토스카나 대공국등에서 미술은 계속 꽃필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밝은 시대가 아니라 흑사병이 유행하거나 정치적 싸움, 전쟁이 계속된 시대였다.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궁정과 교황청 등 극히 일부에서 뿐이었고 일반적으로는 미신과 마술이 믿어지던 시대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럽의 근대를 이끈 역할을 했지만 그 시기 이탈리아 국내 정치는 엉망이었다. 교황령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로 갈라지고 외국으로부터 간섭받아 국가의 통일이 늦어져 정치, 사회적 근대화가 지연되는 결과가 초래된 시기였다. 1600년에 우주의 무한성을 말했던 조르다노 브루노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갈릴레이가 지동설로 종교재판을 받은 것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운 과학연구를 진행하기는 어려워졌다. 이미 16세기 후반, 미술에서도 형식주의의 매너리즘(manierismo)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 창조력은 북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17세기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중심이 된 바로크 미술의 시대가 되었으니 문화적 불모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와 가까운 바이에른에서 시작이 되었다. 독일 르네상스는 르네상스적 요소와 후기 고딕적요소가 결합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다른지역보다 독일에 르네상스적 요소가 늦게 도달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 4명의 사도 등의 미술 작품을 완성한 알브레히트 뒤러가 선두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외에도 많은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이 있다. 15세기 # 슈테판 로흐너 # 미하엘 파허 16세기 #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 루카스 크라나흐 # 한스 발둥그린 # 한스 홀바인 또한 지식인들이 라틴어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바탕이 만들어졌다. 폴란드에서는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이탈리아의 화가, 상인, 사상가들이 폴란드에 들어오면서,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얀 코하노프스키 같은 시인들이 등장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중요한 기념물은 다른 많은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예 포즈난, 그단스크, 헤움노). 슈체친의 슬라브 왕자 의 중세 성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변화가 다른나라와 같이 극심하지 않았다. 다른 유럽에 비해 중세의 문화가 혁파되지 않았고, 문학에서는 이탈리아의 혁신을 받아들였지만 서정시집과 이전의 전통을 잊지는 않고 제 3의 것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전기의 집대성으로서 대표적으로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있다.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가장 대표적인 스페인 르네상스 시인이자 작가로 스페인에 이탈리아로부터 처음으로 르네상스 시를 도입한 사람이다. 조형예술에서는 이탈리아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현지 전통과 잘 융화하였다. 르네상스의 혁신은 스페인에 매우 늦게 전달되었는데, 거의 스페인 예술에서의 르네상스는 고딕풍에서 매너리즘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건축은 다음과 같이 16세기 금은 세공사에 의해 사용된 장식을 활용한 건축양식 플라테레스코(15세기에서-16세기의 1분기), 순수(정통)주의 및, 이탈리아풍 (16세기 전반기), 에레리아노; 엘에스꼬리알의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에서 연유한 건축용어(1559년부터 다음세기 중반) 크게 세 시대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중 첫 번째는 표면적인 형태에서 드러나는데 전반적인 고딕양식을 유지하면서 파사드의 화려한 장식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장식은 세밀하고 풍부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살라망카 대학 건물의 파사드의 장식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순수(정통)주의는 이탈리아의 가장 후반기의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데, 알람브라의 카를로스 5세 궁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스타일의 중심지는 안달루시아 지방으로서 우베다와 바에사의 안드레스 데 발데비에라, 디에고 데 실로에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에레리아노 양식은 길게 늘이는 특성을 지닌 매너리즘에 대한 수용에서 비롯되었으며 후안 데 에레라가 엘에스꼬리알에 건축한 수도원이 명실공히 스페인 르네상스의 야심작이라 칭할만 하다. 조각에서는 고딕양식의 전통 헤게모니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지된다. 새로운 스타일의 첫 번째 흔적으로서는 펠리페 비가르니와 도메니코 판셀리의 작품을 들 수 있다. 보다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외형을 가진 스타일이 발생되었고, 이러한 독특한 매너리즘은 이후 바로크 조각의 기초가 되었다. 회화에서의 스페인의 르네상스는 고딕양식의 유산을 유지하는 동시에 이탈리아로부터의 새로운 방식이 공존하는데 이러한 분열은 페드로 베루구에테가 우르비노에서 작업한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스페인 르네상스를 가장 크게 특징짓는 것은 매너리즘으로 명명된 엘 그레코로 대표되는 고유의 양식이다. 오늘날에 벨기에와 합쳐있던 네덜란드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교통의 관로였다. 거의 이탈리아와 같은 시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난 걸로 알려졌다. 을 쓴 에라스무스와 같은 작가가 등장했고, 판 에이크 형제와 피터르 브뤼헐히에로니무스 보쉬 같은 화가들이 등장하였다. 130년간 지속되던 르네상스는 1530년경 끝이 났다. 그 이유는 우선 1492년 크리스토발 코론이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인도로 가는 해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사실은 아메리카로 가는 해로였다.) 그 후에는 북서부 유럽의 상인들이 무역상품을 리스본과 안트웨르펜을 통해 거래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1517년 아우구스티노회의 수도사인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유럽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로 분열되었다. 교회의 분열은 그동안 납부금과 세금의 형태로 이탈리아를 풍요롭게 했던 돈줄의 고갈을 의미했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과 종교개혁으로 결국 이탈리아는 상업적 무역자본과 자본, 두가지를 동시에 잃었다 또 이탈리아는 그 당시 이탈리아 전쟁 등이 겹치며 정치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르네상스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분류:유럽의 중세사 분류:프랑스어 낱말 |
국제어 또는 국제보조어 (國際補助語, International Auxiliary Language, (int.) auxlang, IAL)란 예술어와 함께 인공어의 한 종류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들간 의사소통의 장벽을 낮추기 위해 만들어진 중립적이고 간단한 구조의 언어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에스페란토, 인테르링구아, 이도, 볼라퓌크 등의 언어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세 유럽의 라틴어, 현대의 영어 등 비슷한 성격을 띤 자연어 역시 국제어라 이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세종대학교에서 우니쉬를 만든 바가 있다. 유럽의 주요 언어를 섞은 듯한 유로판토는 언어 유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 tnfprl 국제어이다. |
C. Iulii Caesaris quae extant, 1678 갈리아 전기 (, Gallia 戰記) 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9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전체는 총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권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의 각 1년 동안 일어난 일을 기술했다. (단, 제3권은 57년과 56년을 모두 다루고 있다) 제1권부터 제7권은 카이사르가 직접 서술했고, 제8권은 카이사르의 비서였던 발부스의 요청으로 인해, 카이사르의 부장이었고 카이사르가 죽은 뒤 집정관까지 된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특유의 간결하고 우아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체로 기술하였고 "나는... 이러했다"라고 쓰지 않고 "카이사르는....했다"라고 제3인칭 시점으로 기술했다. 히르티우스가 쓴 제8권은 사실적인 필체로 전쟁기를 기록하고 있다. 각 권의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권 기원전 58년 갈리아 개관, 헬베티족과 게르만족 아리오비스투스왕과의 싸움, 제2권 기원전 57년 벨가이 인과의 전쟁, 해변에 살던 여러부족의 복속, 제3권 기원전 57년-56년 알프스산지의 부족의 토벌, 갈리아 서해안과 아퀴타니아 정벌, 북방부족의 정벌 제4권 기원전 55년 라인 강 도하와 제1차 브리타니아 침공, 제5권 기원전 54년 제2차 브리타니아 침공 및 에부로네스족과 네르비족의 반란, 제6권 기원전 53년 라인 강 도하와 갈리아와 게르만족의 사정, 에부로네스족 정벌, 제7권 기원전 52년 갈리아 전체와의 전쟁, (베르킨게토릭스 반란과 알레시아 공방전) 제8권 기원전 51년 아울루스 하르티우스의 저술 비투리게스족, 카르누테스족, 벨로바키족의 반란과 욱셀로두눔 점령 《갈리아 전기》, 엄미희 역, 느낌이 있는 책, 2009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숲, 2012. 라틴어 원문 영문 번역 프랑스어 번역 분류:군사 책 분류:역사책 분류:라틴 문학 분류:고대 로마의 전쟁 분류:갈리아 분류:기원전 1세기 역사책 |
두 개의 스레드를 실행하고 있는 하나의 프로세스. 스레드 (thread)는 어떠한 프로그램 내에서, 특히 프로세스 내에서 실행되는 흐름의 단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 프로그램은 하나의 스레드를 가지고 있지만, 프로그램 환경에 따라 둘 이상의 스레드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이러한 실행 방식을 멀티스레드(multithread)라고 한다. 멀티프로세스와 멀티스레드는 양쪽 모두 여러 흐름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멀티프로세스에서 각 프로세스는 독립적으로 실행되며 각각 별개의 메모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멀티스레드는 프로세스 내의 메모리를 공유해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프로세스 간의 전환 속도보다 스레드 간의 전환 속도가 빠르다. 멀티스레드의 다른 장점은 CPU가 여러 개일 경우에 각각의 CPU가 스레드 하나씩을 담당하는 방법으로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여러 스레드가 실제 시간상으로 동시에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멀티스레드의 단점에는 각각의 스레드 중 어떤 것이 먼저 실행될지 그 순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두 스레드가 특정 공유 변수 i의 값을 1 증가시키는 명령을 실행할 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 공유되는 변수 i의 값을 레지스터에 저장 # 레지스터의 값을 1 증가시킨다. # 변수 i에 그 값을 저장한다. 이때 두 스레드가 실행될 때 어떤 스레드가 먼저 실행될지는 보장되지 않으며, 만약 다음과 같은 순서로 실행된다면 스레드 동작 i의 값 스레드 1의 레지스터 스레드 2의 레지스터 스레드 1 i의 값을 레지스터에 저장 0 0 스레드 1 레지스터 값을 1 증가 0 1 스레드 1 i에 값 저장 1 1 스레드 2 i의 값을 레지스터에 저장 1 1 1 스레드 2 레지스터 값을 1 증가 1 1 2 스레드 2 i에 값 저장 2 1 2 최종 결과로 i는 2가 증가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실행된다면 스레드 동작 i의 값 스레드 1의 레지스터 스레드 2의 레지스터 스레드 1 i의 값을 레지스터에 저장 0 0 스레드 2 i의 값을 레지스터에 저장 0 0 0 스레드 1 레지스터 값을 1 증가 0 1 0 스레드 2 레지스터 값을 1 증가 0 1 1 스레드 1 i에 값 저장 1 1 1 스레드 2 i에 값 저장 1 1 1 최종 결과로 i는 1이 증가되고, 이것은 원래 프로그램의 의도(각각의 스레드가 i를 1씩 증가하는 동작)와 다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스레드의 실행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므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 이러한 문제를 경쟁 조건이라고 하며, 문제를 막기 위해 세마포어와 같은 방법을 통해 공유 데이터에 접근하는 스레드의 개수를 한개 이하로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스레드를 지원하는 주체에 따라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사용자 레벨 스레드 (User-Level Thread) === 사용자 스레드는 커널 영역의 상위에서 지원되며 일반적으로 사용자 레벨의 라이브러리를 통해 구현되며, 라이브러리는 스레드의 생성 및 스케줄링 등에 관한 관리 기능을 제공한다. 동일한 메모리 영역에서 스레드가 생성 및 관리되므로 속도가 빠른 장점이 있는 반면, 여러 개의 사용자 스레드 중 하나의 스레드가 시스템 호출 등으로 중단되면 나머지 모든 스레드 역시 중단되는 단점이 있다. 이는 커널이 프로세스 내부의 스레드를 인식하지 못하며 해당 프로세스를 대기 상태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 커널 레벨 스레드 (Kernel-Level Thread) === 커널 스레드는 운영체제가 지원하는 스레드 기능으로 구현되며, 커널이 스레드의 생성 및 스케줄링 등을 관리한다. 스레드가 시스템 호출 등으로 중단되더라도, 커널은 프로세스 내의 다른 스레드를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실행시켜준다. 다중처리기 환경에서 커널은 여러 개의 스레드를 각각 다른 처리기에 할당할 수 있다. 다만, 사용자 스레드에 비해 생성 및 관리하는 것이 느리다. 스레드도 프로세스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행 흐름이므로 실행과 관련된 데이터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스레드는 자신만의 고유한 스레드 ID, 프로그램 카운터, 레지스터 집합, 스택을 가진다. 코드, 데이터, 파일 등 기타 자원은 프로세스 내의 다른 스레드와 공유한다. 위의 기본 데이터 외에도 하나의 스레드에만 연관된 데이터가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이런 데이터를 스레드 특정 데이터 (Thread-Specific Data, 줄여서 TSD)라고 한다. 멀티스레드 프로그래밍 환경에서 모든 스레드는 프로세스의 데이터를 공유하고 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개별 스레드만의 자료 공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여러 개의 트랜잭션을 스레드로 처리할 경우, 각각의 트랜잭션 ID를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때 TSD가 필요하다. TSD는 여러 스레드 라이브러리들이 지원하는 기능 중의 하나이다. 멀티스레드 환경이 확산됨에 따라 전통적인 프로세스 관리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해졌다. 예를 들어, fork 또는 exec와 같은 시스템 호출시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fork 문제 어떤 프로세스 내의 스레드가 fork를 호출하면 모든 스레드를 가진 프로세스를 생성할 것인지, 아니면 fork를 요청한 스레드만 가진 프로세스를 생성할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유닉스에서는 각각 2가지 버전의 fork를 지원하고 있다. exec 문제 fork를 통해 모든 스레드를 복제하고 난 후, exec를 수행한다면 모든 스레드들이 초기화된다. 그렇다면 교체될 스레드를 복제하는 작업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애초에 fork를 요청한 스레드만을 복제했어야 한다. 한편, fork를 한 후에 exec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모든 스레드를 복제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다 멀티스레딩 스레드/멀티스레딩 분류:병행 컴퓨팅 |
옛 갈리아 지역 지도 갈리아 () 또는 골 ()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전까지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국 이탈리아에 포함시키기 전까지의 갈리아 키살피나 (알프스 이남 북부 이탈리아)도 포함되었다. 이 지방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1세기에 이르러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아퀴타니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벨기카, 고지 게르마니아의 다섯 로마 속주로 나뉘었다. 갈리아의 원 거주민은 켈트족으로, 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켈타이(Celtae) 를 라틴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갈리아의 켈트족은 수십여 개의 부족국가로 갈라져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갈리아인들은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에게 사로잡힌 이후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한 갈리아 제국을 건설했으나 273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다시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갈리아를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였는데, 알프스 산맥 이 쪽 지역의 갈리아 즉 포강 유역을 갈리아 키살피나라고 부르고, 알프스 산맥 너머의 갈리아 즉 유럽의 먼 나머지 지역을 갈리아 트란살피나라고 불렀다. 갈리아 지방은 포도주가 크게 발달하였으므로 로마산 포도주가 갈리아산 포도주에 밀릴 것을 우려한 로마 황제가 한때 포도 생산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1950년대부터 르네 고시니와 알베르 우데르조가 합작하여 만든 아스테릭스 는 갈리아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이다. 암비오릭스 갈리아 키살피나 갈라티아 로마 공화정 분류:로마의 속주 분류:철기 시대 |
벨가이 (Belgae)는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의 일부를 합친 지역의 켈트족 원주민들을 일컫는 라틴어이다. 벨가이는 로마로부터 멀리 북쪽에 떨어져 있어 상인의 왕래조차 뜸한 지역이었으며 갈리아 전쟁을 계기로 역사에 등장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갈리아 전체를 갈리아, 아퀴타니아, 벨가이의 셋으로 나누며 언어, 관습, 제도가 서로 다르며 벨가이가 게르만족과 인접해 있는 까닭에 가장 호전적이라 기록했다. 갈리아 전쟁 이후 벨가이는 다른 중북부 갈리아와 합쳐 갈리아 코마타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후에 벨기카로 나뉘었다. 갈리아 전쟁기에는 아트레바테족, 벨로바키족, 칼레티족, 모리니족, 네르비족, 아투아투키족, 메나피족, 레미족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 중 레미족은 기원전 58년 다른 벨가이 부족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반로마 연합을 빠져나와 카이사르와 동맹, 후에 갈리아 전체의 유력 부족 중 하나로 떠올랐다. 분류:유럽의 민족 분류:켈트족 분류:네덜란드의 민족 분류:벨기에의 민족 분류:프랑스의 민족 |
아시아의 문명을 잇는 실크로드 몽골제국 이전의 아시아 250px 아시아의 역사 는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등의 해안 지역과 이를 잇는 유라시아 스텝 지역의 역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 지역에서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강, 황하 등의 큰 강 유역에서 주요 고대 문명이 발생하였다. 이들 문명은 수학이나 바퀴 등의 기술을 교류하였다. 또 독자적으로 문자가 발명되었다. 고대 문명은 점차 도시, 국가, 제국으로 성장해갔다. 스텝 지역은 오래전부터 기마 유목민족의 영역이었다. 이들은 스텝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북쪽의 시베리아는 울창한 숲과 툰드라 때문에 스텝의 기마민족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대륙의 중앙부는 해안과는 높은 산맥과 사막으로 나뉘어 있다. 카프카스 산맥, 히말라야 산맥, 카라쿰 사막, 고비 사막 등은 스텝 지역의 기마병들이 쉽게 건널 수 없는 장벽이었다. 해안 도시들이 보다 기술이나 문화는 앞서 있었으나, 스텝의 기마병들을 막아내기에는 군사력이 충분치 않았다. 이들은 중국, 인도, 중동의 도시를 정복한 기마민족은 곧 이들 문화에 동화되어갔다. 한국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이후 주로 한반도와 만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바탕으로 발전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이다. 한국의 역사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것이며, 기원전 6000년 이전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청동기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중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 왕국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고 한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에 한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해 여러 국가로 나누어졌다. 공동기원(Common Era) 초기에, 삼국시대를 맞아 세 왕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다른 고조선의 후속 국가들을 정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세 왕국은 경제와 군사 면에서 서로 경쟁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력하였고, 특히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해 흉노 등 중앙아시아의 기마 민족과 수나라 등 중국 세력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부터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해상 교역과 육상 교역을 통해 중앙아시 아부터 시작해 아라비아와까지 교류하였다. 신라의 힘은 화랑도 를 바탕으로 서서히 커져서 결국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 하여 멸망시켰다. 한편 전직 고구려 장군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를 건국하 였다. 이로써 한반도와 만주,연해주에 걸친 남북국시대 가 성립된다. 신라가 9세기 후반에 국력이 쇠퇴하자,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고,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비슷한 시기,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 시대에는 국교로서 불교 문화가 번성하였다. 또한 고려는 남북국시대 부터 이어져 온 활발한 국제교역 활동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고려 말까지 벽란도 를 중심으로 이를 계속하였다. 993-1019년 동안 고려는 거란과 전쟁을 벌여서 거란을 격퇴하였다. 1238년 몽골이 침입하였고 30년에 가까운 전쟁끝에 양 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공민왕의 자주개혁이 있기 전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는데, 이 시기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되었다. 1392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 한글이 창제되고 측우기, 앙부일구와 같은 발명도 이루어졌다. 또한 북방의 여진 과 남쪽의 왜구 를 토벌하였으며, 화차 와 같은 군사병기도 제작되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수군을 이끈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여러 명장들의 노력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조직적인 저항,그리고 명나라의 조선으로의 파병 덕분에 결국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청나라와 사대를 맺게 되며 청은 왕의 나라 조선은 신하의 나라가 된다. 이후 영조, 정조의 치세를 겪으며 실학이 융성하였고 천주교가 전래되었지만 유교와의 마찰로 뒤이은 왕들에 의해 탄압받았다. 1870년대 초반 일본은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중국과 충돌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는 일본의 낭인들에게 암살되었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의화단 운동 진압 당시 청국의 만주를 점거한 러시아가 조선에까지 영향력을 뻗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인은 일본의 점령에 저항하고자 곳곳에서 3.1 운동을 1919년에 전개하였다. 뒤이어 이러한 독립운동을 총괄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직접 군부대를 조직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유엔은 소련과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그 계획은 미소공위에서 입장차이로 결렬되어 곧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분단 이후 양 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1950년에 북한이 남한을 선제공격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
일본의 역사 (日本-歷史는 일본과 일본인이 현재까지 걸어온 모든 역사적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플라이스토세의 일본은 대륙과 이어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동아시아대륙의 동단의 반도를 이루고 있었고, 대륙과 같은 구석기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플라이스토세 전기에서 중기에 걸쳐서 빙하기와 간빙기가 2번 반복하고 여기에 동반하여 간빙기에는 해수면이 상승하고 빙하기에는 하강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일본열도와 동아시아대륙의 지세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 2만년 전까지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인류의 왕래가 이루어졌던 일본 열도 는 플라이스토세 후기(12만6천년전~1만년전)가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대량의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약 1만 2천년 전에 대한해협(현해탄)과 쓰가루 해협 등 일본을 둘러싼 제해협이 형성되고 최종적으로는 홀로세 초인 1만년 전쯤 모든 해협이 확정되어 유라시아 대륙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 이어서 일본에서는 조몬 문화(기원전 1만 3천 년 경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신석기문화로 이행했다. 그 뒤에도 해진 현상(海進現像)이 계속되어, 일본 열도는 현재의 혼슈, 시코쿠, 규슈, 홋카이도의 네 개의 큰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분리되었다.몽골계 중국계 인종과 시베리아 지역을 통해 왔다고 추정되는 아이누족, 남방 폴리네시아 지역에서 온 민족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오늘날의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 사람들을 다른 지역에서 건너 온 사람이라 하여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한다. 시대의 동탁() 도래인들은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일본 열도 각지,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규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중국을 비롯한 대륙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 야요이 문화는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 야요이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래되던 시기에 규슈에서 시작된 벼농사 또한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와 도호쿠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도호쿠 북부까지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 3세기 이후 도래인의 유입은 드물어지다가, 3세기 후반부터 호족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조정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서 각지에 고분이 축조되고, 중국에서 한자를 수입하여 고분문화가 성립되었다. 다시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기까지 도래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4세기 후반부터 남진 정책으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가야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일본 열도로 피난 오는 사람들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 왕실은 백제를 비롯하여 백제 등지에서 피난 오는 도래 기술자로부터 유용한 대륙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백제가 고구려에 대적할 수 있도록 전면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 왕실이 도래인들에게 각종 특혜를 주면서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도래 씨족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6세기 말에는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어 7세기 전반의 아스카 시대에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가 생겨났다. 특히 7세기에 이르러 도래인 계열 씨족 중 대표적인 씨족이었던 소가 씨()는 불교를 앞세워 모노노베 씨 등의 경쟁 씨족을 제압하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어 5대에 걸쳐 일본 왕실의 외척이 되어 정치적으로 실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001.jpg|150픽셀|섬네일|왼쪽|다이카 개신을 주도한 덴지 천황 이처럼 소가 씨를 비롯한 도래인 씨족이 일본 황실을 위협하자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645년 정변으로 소가 씨를 멸문하였으며,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로 천도하고 이듬해 다이카 개신에 관한 조칙을 공포하였다. 이후 임신(壬申)의 난(, 672년)을 거쳐, 681년 덴무 천황이 최초로 율령 반포를 준비한 이래 8세기에 접어들어서 당나라의 율령을 기반으로 한 일본식 율령의 본격적인 편찬이 시작되고 701년 (다이호 원년)에 다이호 율령을 반포하여 첫 결실을 거둔다. 이리하여 천황을 정치적·종교적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율령국가(律令國家)가 형성되었다. 다이호 율령은 이후에 후지와라노 후히토 등에 의해 누차 손질되어오며 10세기까지 일본에서 최고 법전의 지위를 유지한다. 8~9세기의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의 문화는 대륙 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으나 헤이안 초기에는 여러 가지 가나가 만들어졌고 정치적으로도 율령국가가 변질하여 섭관정치, 이어 인세이가 장원(莊園)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한편 이전부터 율령 반포에 참여하는 등 일본 왕실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후지와라 씨는 9세기 초에 이르러 소가 씨처럼 황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하기 시작했다. 비록 간무(桓武)와 사가(嵯峨) 두 천황이 귀족을 누르고 절대 왕권을 행사한 적이 있었으나 사가 천황 이후에 후지와라 씨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조카이자 사위인 몬토쿠 천황이 사망하자 어린 외손자인 세이와 천황을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이 되어 정권을 독점하였다. 요시후사 이후에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관백()이 되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처럼 후지와라 씨는 천황이 어리면 섭정직을, 천황이 성인이 되면 관백직을 번갈아가며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를 섭관정치라 하며, 11세기 후반 시라카와 천황의 인세이가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no Yoritomo.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초상화 11세기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변모하였으나 지방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정도로 막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지역 주민 스스로가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만 했다. 헤이안 시대 후반, 지방에서는 호족과 부농들이 자신들이 개간한 농지를 사유화하고 이를 지키려고 스스로 무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무사() 계층이 되었다. 처음에는 지방 호족들을 위해 움직이던 무사들은 점차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 황실에서 탈락되어 지방으로 내려온 방계 후손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한편 무사들의 성장과 더불어 11세기 후반 후지와라 씨와 무관한 고산조 천황이 대대적으로 장원을 정리하고, 1086년 시라카와 천황이 인세이를 통해 번잡한 법령을 무시하고 빠른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상황 측과 재위 중인 천황 측이 서로 권력 대결을 벌이는 상황도 일어났다. 그리고 한 세기에 달하는 원정 기간 동안 계속된 암투 속에서 절대적 세력으로 성장한 무사 계층들 간의 긴장은 결국 왕실과 귀족들이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를 앞세워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통하여 내란을 치르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초래하였다. 두 차례의 난 끝에 미나모토 씨를 거의 절멸시킨 다이라 씨의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권력을 잡았다가 오래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남은 다이라 씨 또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하여 궤멸되고 말았다. 다이라 씨를 섬멸하고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2세기 말 가마쿠라()에 무사 계층이 정치를 하는 체제인 막부를 만들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나, 요리토모 사후 자손들의 대가 끊기면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창시한 가마쿠라 막부는 호조 씨의 싯켄 정치를 통해 명맥을 이어나갔다. 호조 씨의 싯켄 정치 체제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을 막아냄으로써 크게 고양되었으나, 얼마 못 가 포상 문제로 체제가 요동치다가 지방 무사(武士)의 파악에 실패하여 결국 지지 기반을 상실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은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해 오며 싯켄 정부를 배신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함께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어 천황 중심의 전제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고다이고 천황에 불만을 품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336년 7월 고다이고 천황을 몰아내고 반대파인 고묘 천황을 앞세워 도피한 고다이고 천황의 요시노 정부와 맞서게 된다. 이를 남북조 시대라 하며, 1392년 10월 남조의 천황이 북조의 천황에 양위하는 형식으로 흡수되기까지 57년간 지속되었다. 이에 앞서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 직위를 하사받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4세기 중엽 겐무 식목 17조를 제정하고, 교토 교외의 무로마치에 쇼군의 저택을 두어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되었다. hideyoshi.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무로마치 막부는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킨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満) 대에 이르러 명(明)과 국교를 회복하이 성행하면서 무로마치 문화를 이룩하였다. 이 시대에는 구케(公家)와 부케(武家)의 문화가 융합하여 동산문화힉文化)가 번성했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미쓰 사망 이후, 슈고(守護)가 영주화(領主化)하여 성장한 슈고 다이묘들이 차기 쇼군 계승 후보들을 앞세워 암투를 벌이면서 막부의 체제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1467년에 발발한 오닌의 난과 더불어 일본은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난립하여 센고쿠 시대로 돌입하였다. 센고쿠 시대 초반에는 여전히 각 지역에서 유력자였던 슈고 다이묘가 위세를 떨쳤으나, 곧 슈고 다이묘들 대신 장원을 경영하며 실력을 키운 슈고다이와 고쿠닌들, 그리고 호조 소운이나 사이토 도산과 같이 미천한 신분이나 대중의 지지를 얻은 사람들도 슈고 다이묘들을 타도하고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하였다. 센고쿠 다이묘라고 불린 이들은 오닌의 난 이후 5~60년 사이에 슈고 다이묘들을 거의 압도하여 센고쿠 다이묘들이 각지에 할거(割據)하는 센고쿠 시대가 오고, 고대 귀족은 몰락하여 막부의 권력이 쇠퇴했다. 16세기 중엽 기독교와 총이 전해졌는데, 기독교는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포교로 침투되었고, 총은 센고쿠 다이묘의 전술·축성법(築城法)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16세기 후반부터 두각을 드러난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 오다 노부히데, 모리 모토나리 등이 크게 세력을 불려 경쟁하였으나, 결국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인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수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지배체제가 탄생함으로써 센고쿠 시대는 막을 내린다. 1590년 최종적으로 간토의 호조 씨를 패망시켜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반대파 다이묘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명나라와 인도를 지배하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몇 번의 도발을 거쳐 1592년 여러 다이묘들의 15만 8천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초반에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평양성까지 지배 관할에 둠으로써 조선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한반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몇몇 관군 부대의 저항, 명나라의 지원으로 점차 위기에 몰렸으며, 1598년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일본군의 철군에 따라 끝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이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핵심 세력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문관 계층과 지방의 유력한 무장들이 모인 가토 기요마사 등의 무장 세력이 각각 서군과 동군이 되어 후계 권력 장악을 두고 크게 다투기 시작했다. 이들은 1600년 미노(美濃)의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하였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였다. 최후의 패자(覇者)로서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을 처벌하고, 통일국가를 재건하여, 1603년에는 쇼군직에 올라 에도 막부를 개창한다. 또 1614년에서 1615년 사이에 걸친 오사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잠재적 적대 세력을 섬멸하고 도쿠가와 씨의 통치 체제를 확립시킨다. 에도 막부(1603–1868)는 바쿠한(幕藩) 체제 밑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鎖國)을 행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敎化)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태평 무드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을 촉진시켰고,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겐로쿠 문화(元祿文化), 화정기(化政期)의 문화를 번성케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0년에 걸쳐 안정시킨 막부를 이어받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중신들에게 유교 사상을 철저히 연구할 것을 지시했고, 한편으로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은 《대일본사》(大日本史)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치(文治)를 지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경제의 실권을 쥔 도시민의 힘은 한편으론 무사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농민의 궁핍화와 거듭되는 재해는 농민폭동을 빈발하게 하여 바쿠한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심각한 낭비와 더불어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겐로쿠 호황으로 쌓인 탄탄한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은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새로 화폐를 주조하여 그 차익으로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이로 인한 화폐 가치의 저하와 함께 급등한 물가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겐로쿠 화폐 대신 양질의 새로운 화폐인 쇼토쿠 화폐를 주조하고 금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쇼토쿠 신령을 발표, 나가사키 등의 무역항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선박 수와 무역액을 크게 제한·삭감하는 등 겐로쿠 호황 직후에 일어난 경제적 동요를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겐로쿠와 쇼토쿠 시대의 짧은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노부 대에 겐로쿠 화폐를 대신할 화폐가 주조된 이후 몇대에 걸쳐 계속 화폐의 질과 주조량을 변화시켜가면서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고 직할령의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이러한 재정난 속에서 기이 도쿠가와 씨 출신으로 제8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이에야스 시대의 정치 제도를 바탕으로 교호 개혁을 단행하였고,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대에는 다누마 오키쓰구 등 다누마 씨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 회복을 꾀하였지만 결국 당대에 일어난 기근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하여 실패,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산케 계층 등은 이에 대한 책임을 다누마 씨에게 물어 실각시켰다. Perry s second fleet.jpg|250픽셀|섬네일|오른쪽|매슈 페리의 2차 일본 파견 함대 (1854년) 19세기 중기 이후는 구미(歐美) 열강이 동양으로 진출하여 일본에게 개국을 요구했고, 하급 무사에 의한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막부 타도 운동이 격화하여 결국 260여년에 걸친 에도 바쿠후는 쓰러지고 메이지 유신을 맞게 되었다. 다누마 씨의 뒤를 이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후다사시 등 고리대금업자로부터 차용한 빚을 모두 파기시키는 기연령을 발동하고, 당시의 풍속에 대하여 엄격한 규제 정책을 시행하는 등의 간세이 개혁을 시행하였지만, 이에시게의 뒤를 이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대립하다가 실각하였다. 이에나리는 분카와 분세이 시대에 걸쳐 오고쇼 자리에서 거의 50년 동안 실권을 잡으면서 쇼군 권위의 선양과 막부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나, 1833년부터 1839년까지 이어진 덴포의 기근을 거치면서 신뢰를 잃은 막부는 조슈, 사쓰마 등지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기 중국으로의 진출을 위해 태평양의 중간 기착지를 필요로 했던 미국은 1853년 매슈 페리 동인도 함대 사령관을 제독으로 일본에 파견해 개방을 강요하였다. 결국 1854년 미일 화친 조약 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막부는 쇄국 체제를 풀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대한 조슈와 사쓰마를 비롯한 여러 번들의 막부에 대한 공격으로 인하여 막부의 권위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막부에서는 조정과의 융화를 꾀하고자 고부갓타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손노조이를 주장하던 조슈 출신 무사 세력은 천황을 통해 서양에 대항하는 조이 ()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며 막부를 압박하였고, 결국 막부가 이를 수용하자 조슈에서는 일방적으로 외국선을 포격하고, 사쓰마에서는 체류 중이던 영국인이 사무라이에게 살해되는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양 4개국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사쓰마에서는 영국이 사쓰마와 무력 마찰을 일으키는 등 막말의 일본은 서구 열강에 의하여 계속 요동치는 상황에 처했다. 조슈 정벌과 사쓰에이 전쟁을 거치면서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하급 무사들은 최종적으로 막부 자체를 없앨 것을 주장하며 도바쿠 (討幕,토막) 운동을 전개하였다. 1866년에는 도사(土佐)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와 조슈 간의 비밀 군사 동맹이 성립하고, 막부에 우호적인 고메이 천황의 뒤를 이어 도바쿠 세력에 의해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막부를 크게 압박하자 결국 1867년 10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쇼군의 권력을 천황에게 되돌리게 되어 메이지 천황은 같은 해 12월 9일 친정 (親政)을 선포한다. and white photo of emperor Meiji of Japan.jpg|150픽셀|섬네일|오른쪽|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메이지 천황 1868년 왕정 복고를 표방한 메이지 천황은 왕권 선양을 위한 혁신을 꾀했는데 교토조정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구케(公家)와 제후(諸侯), 그리고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구 바쿠후 세력을 타도하고 1868년 7월 에도 막부가 위치한 에도(江戶)를 도쿄로 바꾸고 이듬해에는 교토의 고쇼에서 도쿄의 고쿄로 천도(遷都)했으며, 다양한 이유로 쉽게 연호가 바뀌던 것을 메이지 천황 대에 이르러서는 한 대에 한 연호만 쓸 수 있도록 한 일세일원제가 채택되는 등 모든 체제를 일신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했다. 정부는 부국강병책에 의해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추진하고 군대·경찰을 비롯한 전신·철도·각종 공장 등 관영사업을 개시했다. 또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주도로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 서남웅번(西南雄藩) 세력들이 우선 판적봉환을 단행하였고, 1869년 6월에는 전국의 번들이 판적을 봉환하게 되었다. 1871년에는 이에 대한 반발 세력을 제압하고 더 강력한 중앙 집권제의 확립을 위해 서남웅번의 병력 약 1만 명을 중앙군으로 편성하여 군사력을 확보하고, 같은 해 7월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행정 구역을 부현제()로 바꾸고 부지사와 현령(県領)은 중앙에서 임명해 파견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형식적으로나마 신분제를 철폐하여 높은 왕족(상경), 다이묘, 사무라이 계층은 귀족층으로 통일되고, 그 이하 사농공상 순의 신분층은 평민()으로 삼는다고 발표하여 불완전한 사민평등 () 조치를 단행하였다. 1877년의 서남전쟁(西南戰爭)을 최후로 종래의 불평 사족(不平士族)들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신분 개혁 이후에 일본에서는 입헌 정치 에 대한 요구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74년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애국공당을 결성해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자유 민권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는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같이 전래된 민주주의 정치 방식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확산된 것과 너무 강력한 중앙 정부에 의해 자치권마저 부정당한 전통적인 향촌 사회의 반발심도 작용하였다. 1878년 정부는 삼신법()을 제정해 부분적으로 지방제를 개편하여 이들의 반발심을 잠시 무마시키고자 하였으나 같은 해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정부 요직자들이 사망함으로써 정치권의 중심이 공백에 빠지자 1881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서남웅번 출신의 무사들이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점진적인 국회의 개설과 독일식의 강력한 군주권을 골자로 한 헌법 제정 방침을 정하고 1890년까지 국회를 개설시킨다는 국회 개설의 칙유 (勅諭)를 발표하여 민권파의 강력한 주장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1889년 2월 11일에 초안을 몇 번 손질한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을 반포하여 근대기 일본은 비록 거의 형식적이었지만 입헌 국가로 도약하였다. 1890년에 의회 개설에 의해 천황제의 지배체제가 완성되었다. 국회 개설과 더불어 공업의 발흥으로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본 일본은 한국과 중국으로의 정치 · 경제적 침투를 통해 점차 제국주의를 형성해 나갔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를 이김으로써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했고, 그 배상금을 기초로 하여 금본위제(金本位制)를 수립,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이 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확보한 일본은 조선 자체에 대한 종속화를 꾀했지만 번번이 조선의 대규모 민족 저항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조선에 진출하고자 했던 러시아와의 충돌로 인하여 실패했다. 또 조선 왕실도 박영효 등 친일 세력을 추방하는 등 일본의 일방적인 조선 침략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6년 경복궁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도록 하였는데 조선 의병(義兵)의 대규모 저항과 고종이 시위의 의미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환궁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일본은 조선에서 입지를 상실하며 국제적인 비난 속에 경쟁국 이었던 러시아의 입지를 강하게 만들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계기로 한국에서 입지를 굳힌 러시아는 만주(滿洲)의 러시아령에서 병력을 증강시켜 한반도에의 침투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러시아와 한반도와 만주의 권익을 둘러싸고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타협을 보지 못하자 1904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 러일 전쟁을 치렀고,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미국의 지지와 쓰시마 해협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러시아를 축출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해 다시금 정치·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였다.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더욱 노골화하였고, 영국과 미국 간의 밀약으로 조선 지배를 강대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화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어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면서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내정권을 박탈, 군대 또한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1910년 8월 23일 통감부를 총독부 (總督府)로 바꾸고 육군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지배를 위해 대한제국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통감부를 일본 천황이 직접 임명한 총독이 관리하는 조선총독부로 바꾸었다. 또 친일파이거나 일본어에 능통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한제국 관료들의 자리는 일본인들에게 배분되었다. 처음에 일본은 현역 군인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군인 출신인 헌병 계층에게 치안 임무를 위임하여 조선인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항일 투쟁을 강압적으로 짓밟는 무단 통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무단 통치에 대항하는 항일 투쟁은 계속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전국적인 단위로 3·1운동이 일어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본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3·1운동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가까쓰로 진압한 일본은 사이토 마코토를 총독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문화 통치 , 산미 증식 등을 표방하며 처음에는 유화책을 펼치다가 곧 경찰의 병력을 4배 이상 늘리고,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였으며 친일파의 양성을 꾀하였다. 또한 산미 증식 정책을 통해 쌀을 대량으로 약탈해갔다. 그 과정에서 한민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등을 조직하며 계속 저항해나갔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토와 같이 치안 유지법을 한반도에도 적용하여 한민족의 독립 운동, 특히 사회주의 독립 운동을 강하게 탄압하였고, 만주 사변 이후에는 민족 말살 정책 을 내세워 한국어 등 한민족과 관련된 고유 교육 또한 금지시키고 징용과 징병, 위안부를 모집하는등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Taishō.jpg|180픽셀|섬네일|오른쪽|다이쇼 천황 1911년에 성립된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행정 및 재정의 정리와 감세를 추진하는 긴축(緊縮)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신해혁명에 위협을 느낀 제국 육군은 한반도에 주둔시킬 제국 육군 제2사단의 증설을 정부에 강하게 요구하였고, 정부는 내각회의를 거쳐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국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사표를 내는 사건이 벌어져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총사직하고, 뒤를 이은 제3차 가쓰라 내각은 일본 천황을 앞세워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의회를 경시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미노베 다쓰키치, 입헌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입헌정우회의 오자키 유키오 등이 중심이 되어 족벌(族閥)의 타파와 헌정옹호를 내건 호헌 운동 ()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쓰라 다로와 이하 내각이 성립 50일만에 퇴진하는 다이쇼 정변이 발생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1918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의 교주만과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이권을 할양받는 것을 영국과 프랑스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지중해에 소규모 함대만을 파견하는 등 독일과의 직접적인 전투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산둥 반도를 점령하고 나서, 일본은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년 1월)하였고, 중국은 이를 수용(5월)할 수 밖에 없었다. (→21개조 요구)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 운동(1919년)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 일본이 이와 같이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본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1911~25년)로 경제호황을 누렸다. 한편, 러시아 혁명(1917년)에 뒤이어 일어난 러시아 내전(1917~22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백군을 도와 7만 2천여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와 같이 다이쇼 시기의 중국과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침략 활동은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러한 침략 활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영국에 이은 강국으로 상승,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대전중 획득한 일본의 이권이 인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경제 불황과 재정 위기를 모두 극복하고 값싼 공장제 상품을 아시아 지역으로 수출하여 막대한 무역 이익을 취했지만 오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의 생산력 회복으로 인하여 수출이 축소되면서 무역이 적자로 전환하고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게이힌 지역의 상공업 지대가 초토화되면서 다시 불황이 찾아온다.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결함은 최대한으로 드러나는 등 불황이 한층 더 심화되자, 극우 보수 세력과 청년 장교층은 국민들의 불만 감정을 앞세워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일례로 1930년 11월, 만주 침략에 반대 입장을 가졌던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우파 청년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무력침략이 시작되어, 1931년 9월에 관동군의 주도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의 제어를 무시하고 만주 전역을 점령하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앞세워,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중화민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 일본은 사실 상 고립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16일)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32년 5월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 후임으로 군인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수상(1932년 5월 26일 ~ 1934년 7월 8일)이 되어 군·정·관에 타협을 통한 거국일치 를 표방함으로써 정당내각은 단절되고,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이토 마코토 내각 이후에도 육군 내의 여러 계파의 도전은 계속되어 급기야 1936년 2월 26일 청년 장교들이 내대신, 대장대신 등을 암살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막강해져 히로타 고키 내각 때 군부대신의 현역제가 부활, 사실상 군부가 내각을 좌우하게 되었다. 1936년에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또 히로타 고키 내각은 화북(hua2 bei2 )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그 구실로 중화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는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키지 않고자 하였지만 곧 전쟁은 화중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1937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난징과 그 주변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전시 체제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일본 열도 내 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식민지에서의 군부의 경제적 수탈에 기여하였다. 8월 9일 나가사키 시에 투하된 원자 폭탄 팻 맨 (Fat Man) 이렇게 중·일 전쟁이 장기화 될 무렵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일본과 추축 동맹을 체결하고, 1939년에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처음에 일본은 유럽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방하였으나, 프랑스·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던 1940년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군사동맹을 맺고, 1940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을 빼앗기로 하는 남진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영국·중화민국·네덜란드 등 4개국은 이에 대하여 이른바 ABCD 포위망( A merica· B ritish· C hina· D utch)을 형성하여 석유 등 중요한 전쟁물자에 대해 수출을 금지하여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본은 처음에 미국과의 원만한 교섭을 통하여 이를 해결코자 하였으나 협상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자 고노에 후미마로의 제2차 내각은 퇴진하고 대신 통제파의 도조 히데키 내각이 조직되어 1941년엔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하고, 1941년 12월 1일 개전을 결의하고 같은 해 12월 8일 미국 해군이 주둔하던 하와이 진주만을 급습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에 선전포고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大東亞共榮圈)을 표방하며 처음에 말레이 반도, 버마와 타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필리핀 등을 점령하는 등 연합군에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이 연패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반격에 성공한 미국은 일본의 점령 지역을 탈환하였으며 1944년 7월에는 사이판 섬을 점령하여 전초 기지로 삼고, 일본 열도의 주요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흐르자 도조 히데키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으며, 그 뒤를 고이소 구니아키와 요나이 미쓰마사의 협력 체제인 고이소 내각이 계승했지만 1945년 6월 오키나와 섬이 함락되었고, 7월에는 일본군의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어 전세는 계속 불리해져만 갔다. 하지만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였고, 결국 같은 해 8월 8일 소련이 참전하고 8월 6일과 9일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자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쇼와 천황이 직접 항복 선언 을 발표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joins the United Nations.jpg|섬네일|left|일본의 유엔 가입 일본의 항복 이후 일본 열도에 진주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에서 결정한 "일본의 전후 처리"를 기초로 하여 점령 정치를 실시하였다. 1945년 9월 도쿄에 연합국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 (GHQ)가 설치되었고,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은 모두 해방되거나 타이완이나 만주국 같은 경우는 원래대로 중국의 통치 하에 복귀하도록 하였다. 점령 통치는 사실상 미국의 단독 점령의 가까운 형태로 전개되어 그 기본 방침은 민주화의 추진과 군국주의·일본식 제국주의의 배제가 있었다. 그러한 방침을 골자로 하여 같은 해 10월에 여성, 특히 부인(婦人)에 대한 해방과 노동 조합의 허가, 교육의 민주화, 압제적이고 전근대적인 제도의 폐지, 경제의 민주화에 관한 5대 개혁 지령을 발표하여 일본군의 무장 해제, 전쟁을 지휘한 수뇌부의 체포, 치안유지법의 폐지와 정치범의 석방, 이른바 인간선언을 통한 일본 천황의 신격화의 부정, 전쟁을 지원한 대기업들의 해체 등이 이루어졌다. 이어 1946년 11월 3일에는 GHQ의 권고로 기존의 일본 제국 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새 헌법이 발표되었다. 새 헌법은 주권재민, 평화주의에 따른 군대의 미보유, 인권의 보장, 국회 중심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민법과 형법 등과 같은 하위 법률들도 대폭 개정되어, 일본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민주주의 국가로 재출발했다. 또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일본은 미국의 병참 기지가 되었고, 대량의 군수 물자가 생산되는 등 일명 한국 전쟁 특수 경기(特需景氣)로 호황을 누리며 전쟁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하고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와 함께 주권 또한 회복하여 1956년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력의 회복은 다수의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부흥과 세계로의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를 치르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외교적, 군사적으로 일본의 대미 의존도가 크게 높아지고 1960년 미일 안보 조약의 개정에 따른 불평등 주장이 나오면서 이른바 안보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한 때 집권 자민당 내각을 총사퇴 시키고 많은 국민들이 안보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할 만큼 크게 일어났으나 정부와 여당의 경제발전정책 수립과 1968년 벌어진 도쿄 대학에서의 극렬 학생운동과 그 정점이었던 야스다 사건이 터짐으로서 주춤하였으며, 1970년 요도호 사건과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일부 좌익 적군파에 의한 극렬 투쟁이 결정적으로 다수 국민들의 혐오를 삼에 따라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으로 1955년에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여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이 이루어져 사회당과 함께 55년 체제를 형성, 보수정당이 절대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근 40년간 자유민주당의 장기 집권이 이루어져 특정 정당이 오랜 기간 집권함으로써 각종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of Japan 20090831.jpg|180픽셀|섬네일|오른쪽|55년 체제의 붕괴가 일본 사회에 미친 파장은 매우 컸다. 민주당의 2009년 총선 승리를 알린 일본의 신문들. 1970년대에 이룬 경제의 고도 성장은 1980년대에 이르러 버블 경제 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경제를 크게 번성시켰다. 그러나 과도한 주가의 증가와 부동산 매입으로 인해 1990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이 진행되어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 상태에 빠졌다. 그로 인하여 지지를 상실한 자유민주당은 한 때 10개월 정도 정권을 상실하기도 하였다가 진보 정당과의 연정을 거쳐 계속 55년 체제의 집권 골격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9년 8월 30일에 치러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자유민주당에 압승을 거둬 전후 최초로 완전한 정권 교체 가 이루어져 2009년 9월 16일부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하였고, 2010년 6월 하토야마의 사퇴 후 간 나오토 내각이 성립되어 이후 2011년 9월 2일에 노다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이래 보여준 민주당 내각의 대처와 경기 침체에 대한 반발로 인해 201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를 당하고, 자유민주당이 다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2012년 12월부터 2018년 현재까지, 자유민주당 소속의 아베 신조가 총리를 지내고 있다. 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 일본의 무역사(:ja:日本の貿易史)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 네덜란드 사절단( Dutch missions to Edo) * 데지마 상관장(네덜란드어 Lijst van VOC-opperhoofden in Japan) * 남만무역 * 1868년 이전에 일본을 방문한 서양인 일람( List of Westerners who visited Japan before 1868) ** 윌리엄 애덤스(미우라 안진) 조선 통신사 아이누 민족 류큐 민족 류큐 제도의 역사 * 류큐 사절단(:ja:江戸上り, Ryukyuan missions to Edo) 내용주 참조주 Topsecret 일본 고대의 역사 |
MPEG (엠펙)는 영문 Moving Picture Experts Group 의 약자이다. 국제표준화단체로서의 공식 명칭은 ISO/IEC JTC1/SC29/WG11이다. MPEG은 ISO 및 IEC 산하에서 비디오와 오디오 등 멀티미디어의 표준의 개발을 담당하는 소규모의 그룹이다. 1988년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첫 모임을 갖은 이래, 현재는 350여명의 다양한 산업계와 학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간 4회의 표준화 총회를 가지며, ITU 산하의 비디오 압축 표준화 단체인 VCEG과 함께 Joint Video Team (JVT) 를 구성해 H.264/AVC 표준을 공동 제정하고 있다. (이 표준은 이 공동 표준화를 통해 개발되어 ISO와 ITU 양 측 모두에서 공히 표준으로 인정된다.) MPEG은 다음과 같은 압축 포맷과 부가 표준을 만들었다. MPEG-1 최초의 비디오와 오디오 표준. 비디오 CD의 표준으로 쓰였으며, MP3 오디오 압축 포맷이 여기에 포함된다. 표준 해상도는 352x240, 30프레임/초이다. CD 1장에 74분의 영상을 담을 수 있다. MPEG-2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표준. 디지털 위성 방송, 디지털 유선 방송, 고화질 TV 방송, DVD 비디오 등의 컴퓨터 멀티미디어 서비스에 쓰인다. 표준 해상도는 720x480, 1280x720이며 60프레임/초이다. 음질은 CD와 동일한 퀄리티를 지원한다. MPEG-3 원래 HDTV 방송을 위해 고안되었으나, MPEG-2 표준에 내용이 합쳐져 중지된다. MPEG-4 MPEG-2를 확장하여 영상/음성 "객체", 3D 콘텐츠, 저속 비트율 인코딩, 디지털 재산권 관리 지원등을 포함한다. 멀티미디어 통신에서의 이용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영상압축기술 인터넷과 이동 통신 환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흔히 이야기하는 MPEG-4 동영상 표준은 MPEG-4 Part 2 Visual에 해당하며, 흔히 H.264라 부르는 코덱이 MPEG-4의 Part 10 Advanced Video Coding으로 정의되어 있다. 또한, 3차원 모델을 압축하기 위한 3차원 메쉬 부호화(3D Mesh Coding) 또한 지원한다. MPEG-7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기술하기 위한 형식적 시스템. 이 표준은 검색 사이트에서 키워드로 동영상을 검색하는 등 다양한 종류의 멀티미디어 정보 검색에 사용할 수 있다. MPEG-21 MPEG-21 은 이 미래의 표준을 멀티미디어 프레임워크라고 표현한다. MPEG은 MPEG-21 이후 빈번히 창안되는 새로운 표준 기술들을 각 분류별로 통합하고자, 아래와 같은 기술 분류별 표준을 창안하여 현재 기술 표준화에 적용하고 있다. MPEG-A 멀티미디어 애플리케이션 포맷 (MAF) 을 위한 표준이다. MPEG-B 시스템 표준 분류를 위한 MPEG 표준이다. MPEG-C 비디오 표준 분류를 위한 MPEG 표준이다. MPEG-D 오디오 표준 분류를 위한 MPEG 표준이다. (사실상 MPEG 서라운드 (MPEG Surround) 표준에 해당한다.) MPEG-E 멀티미디어 미들웨어를 위한 표준이다. MPEG 영상 코덱은 변환 코덱을 이용하는 손실 압축 방식을 사용한다. 손실 변환 코덱에서, 그림과 소리의 샘플은 작은 조각으로 나뉘고, 주파수 공간으로 변환되어 양자화된다. 이렇게 조작된 값들은 다시 엔트로피 부호화된다. MPEG-1, MPEG-2, MPEG-4 등의 동영상 코딩 시스템에는 움직임 보상 등의 과정을 이용하여, 연속되는 두 그림 또는 근처의 그림들 사이의 차이를 경제적으로 전송함으로써 압축이 이루어진다. MPEG은 스트림 포맷과 디코더(복호기) 표준만을 정한다. 인코더는 표준화되어 있지 않으며, 유효한 비트 스트림을 만들기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예가 제공된다. 다시 말하면, MPEG-4 디코더는 어떤 인코더로 만들어졌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MPEG-4 스트림을 디코딩할 수 있다. 데이터 압축 Pro-MPEG 영상 코덱 오디오 코덱 비디오 압축 MPEG 공식 웹 사이트 MPEG 관련 자료와 살펴볼 곳 링크 MPEG2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 MPEG 관련 논문, 라이브러리, 소스 코드 등에 대한 공개된 항목들 MPEG Forum 분류:ISO 표준 분류:파일 포맷 분류:오디오 파일 포맷 |
오른쪽 MPEG-2 (엠펙 투)는 MPEG(Moving Picture Expert Group)이 정한 오디오와 비디오 인코딩(부호화)에 관한 일련의 표준을 말하며, ISO 표준 13818(13818-1은 시스템, 13818-2는 비디오 부호화, 13818-3은 오디오...)로 공표되었다. MPEG-2는 일반적으로 디지털 위성방송, 디지털 유선방송 등의 디지털 방송을 위한 오디오와 비디오 정보 전송을 위해 쓰이고 있다. 또, MPEG-2의 표준을 약간 변형한 인코딩 포맷은 상업 DVD의 표준으로 돌비 디지털, DTS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MPEG-2 13818-2 비디오 표준은 MPEG-1과 비슷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에서 사용하는 비월주사 방식의 영상을 지원한다. MPEG-2 비디오(부분 2)는 저속 비트율(1 Mbit/s) 환경에는 부적합하지만, 초당 3 메가비트 이상을 요구하는 MPEG-1보다는 향상된 압축률을 보이고 있다. MPEG-2의 MPEG-1과 구별되는 특징으로는 데이터 유실이 많은 전송 환경에도 적합한 트랜스포트 스트림이 정의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이는 현재 디지털 방송에 사용되고 있다. MPEG-2는 원래 MPEG-3로 개발하려던 HDTV(고선명 텔레비전) 전송의 표준 또한 포함한다. 또한 MPEG-1과도 호환성도 보장되어 표준을 따르는 MPEG-2 디코더는 MPEG-1 스트림도 재생할 수 있다. 이 부분의 표준은 ITU-T의 비디오 코딩 전문가 그룹(Video Coding Experts Group, VCEG)과 ISO/IEC의 동화상 전문가 그룹(Moving Picture Experts Group, MPEG)이 공동으로 표준화를 진행하였으며, 따라서 ITU-T의 H.262와 MPEG의 13818-2는 동일하다. MPEG-2 13818-3 오디오 표준은 MPEG-1 오디오 표준에서 발전되어 채널의 확장을 하는 MC (다중 채널)과 낮은 표본화 주파수를 제공하는 LSF (낮은 샘플링 주파수:Low Sampling Frequency)(24 kHz, 22.05 kHz, 16 kHz)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두가지 모두 MPEG-1 오디오를 복호화할 수 있는 하위 호환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알고리즘 측면에서는 추가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MPEG-1과 동일한 압축율을 가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MPEG-2에서는 압축율을 높이는 대신, 하위 호환성을 지원하지 않는 AAC (고급 오디오 코딩)를 13818-3이 표준화 된 후 13818-7로 표준화하고 있다. AAC에는 기존 MPEG 오디오에서 사용되지 않던, LTP, TNS, 예측 도구가 추가되었으며 레이어로 구분하던 MPEG-1,2와는 달리 도구의 집합인 프로파일로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다. (덜 복잡함, 조절할 수 있는 샘플 속도) DVD / DVB 에서 사용되는 변경된 표준을 제외한 MPEG-2 비디오와 MPEG-2 오디오에 대한 일반 정보. . 영상 데이터 + 타임 스탬프(시각 정보) 소리 데이터 + 타임 스탬프 MPEG-2는 오디오 신호를 비롯한 동영상의 일반적인 인코딩(부호화) 을 위한 규약이다. 부호화된 비디오 스트림은 화면 내 예측( I ntra), 전방 예측( P redictive), 양방향 예측( B idirectional)의 세가지 프레임들의 배치를 규정한 GOP(Group of Pictures) 구조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부호화할 원본은 소리가 포함된 일정한 해상도의 영상이 초당 25(CCIR규정) 프레임 또는 초당 29.97(FCC규정) 프레임의 속도로 바뀌는 동영상이다. MPEG-2는 비월주사(interlaced scan)와 순차주사(progressive scan) 두 가지 방식의 비디오 스트림을 모두 지원한다. 순차주사 방식에선 부호화의 기본 유닛이 프레임(한 장의 영상)이 되고, 비월주사 방식에선 필드(한 장의 영상의 홀수줄, 혹은 짝수줄만으로 이루어짐)이다. 아래 설명에서 "픽처" 혹은 "정지 영상"이라고 말한 것은 각각의 기본 유닛(즉 필드나 프레임)을 가리킨다. MPEG-2 스트림은 단일 영상을 부호화한 데이터 프레임의 연속이다. 각 정지영상을 부호화하는 방법엔 화면 내 예측(I), 전방 예측(P), 양방향 예측(B) 세 가지가 있다. 각 비디오 이미지는 루미넌스(명도) 성분 Y 와 두 개의 크로미넌스(색차) U, V 채널로 우선 나뉜다. 각각에 대해 공간적으로 "매크로 블록(macroblock)"이라 불리는 16x16 크기의 격자로 나뉘며, 이 매크로 블록이 부호화의 기본적인 조각이 된다. 매크로 블록은 8x8 크기의 "블록" 4개가 합쳐진 것이다. 원본 이미지의 색상 샘플링 포맷에 따라 한 매크로 블록이 8x8 크기의 색차 정보 블록을 가질지, 아니면 16x16을 가질지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쓰이는 4:2:0 포맷에서는, 한 색상이 매크로 블록 하나(16x16)당 한 개의 크로미넌스 블록(8x8)만을 갖게 되어, 하나의 매크로 블록은 4개의 명도 정보(Luminance) 블록, 1개의 U블록, 1개의 V블록으로 총 6개의 블록을 갖게 된다. I 픽처의 경우 이미지 데이터는 다음 문단에서 설명하는 인코딩 절차를 바로 거치게 되며, P (혹은 B) 픽처의 경우엔 우선 "움직임 보상"(motion compensation)이라 불리는 과정을 거쳐 이전 영상(B의 경우엔 이전과 이후의 영상)과의 관련성을 검색하여 이용한 후 다음 인코딩을 진행하게 된다. 움직임 보상에선 P (혹은 B) 픽처로 만들어질 영상의 각 매크로 블록이 이전(B의 경우엔 이후도 포함) 영상의 어느 부분과 가장 관련성이 높은가를 알아내어 그 부분과의 공간상의 변위인 "움직임 벡터"(motion vector)와 두 영상간의 차이가 다음과 같이 부호화 되어 전송되게 된다. 각 블록은 8x8 이산 코사인 변환(discrete cosine transformation)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변환으로 얻어진 각 계수들은 미리 정해진 값들로 나누어 양자화 되고, 지그재그로 재배열 된 후 영에 대한 RLC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허프만 코딩으로 부호화를 마친다. I 픽처 인코딩은 공간적인 반복성에 대한 것이고, P 와 B 픽처는 시간적인 반복성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동영상을 이루는 이어지는 두개의 정지영상은 서로 상당히 비슷하며, 그래서 P 픽처는 보통 I 픽처의 10%, B 픽처는 2%의 크기로 부호화된다. 이 세 가지 프레임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프레임들은 GOP(Group of Pictures)라 불리는 구조를 이룬다. 다양한 구조의 GOP가 가능하지만 많이 쓰이는 것은 I_BB_P_BB_P_BB_P_BB_P_BB_ 의 순서로 15개의 프레임이 하나의 GOP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12개의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GOP구조도 자주 쓰인다. GOP 구조의 I, P, B 프레임의 구성 비율은 비디오 스트림의 성격, 출력 스트림이 가져야 하는 대역폭(bandwidth)등에 따라 정해진다. 인코딩에 걸리는 시간도 비율을 결정하는 한 요소이다. 이를테면 실시간으로 전송해야 하는 생방송의 경우에 인코딩에 동원되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B 픽처가 많이 들어간 스트림은 I 픽처만으로 이루어진 스트림에 비해 인코딩에 3배 정도의 시간이 들 수 있다. MPEG-2 인코더의 출력 비트율은 일정해야 하거나, 정해진 최대 비트율을 갖고 변할 수 있다. 가변 비트율의 예로 10.4 Mbps를 최대 비트율로 갖는 DVD 영화를 들 수 있다. 일정한 비트율을 얻기 위해서 양자화의 수준을 변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양자화가 심하게 될 경우엔 전송된 스트림이 디코딩 된 화면에 격자모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현상은 비트율이 내려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MPEG-2 는 또한 새로운 오디오 인코딩 방식을 도입한다. 이는 반으로 줄어든 샘플링 율을 사용하는 저속 비트율 인코딩 (MPEG-1 Layer 1/2/3 LSF) 다채널 인코딩. 최고 5.1 채널 돌비를 견제하기 위해서 개발하였지만, 결국 돌비 디지털에 밀려서 거의 사장됨. 새로운 오디오 인코딩 방식인 AAC 코덱에 대한 표준화 DVD 표준에는 다음과 같은 제한 사항이 더해진다. 해상도의 제한 * 720 x 480 픽셀, 초당 59.94 필드 (FCC) * 720 x 480 픽셀, 초당 29.97 프레임 (FCC) * 720 x 576 픽셀, 초당 50 필드 (CCIR) * 720 x 576 픽셀, 초당 25 프레임 (CCIR) 초당 최고 9,8 메가비트 YUV 4:2:0 부가적인 자막 가능 오디오 * 48 kHz MPEG-2 Layer 2 가능 * 48 kHz 최고 초당 448 킬로비트의 디지털 돌비 가능 * 754 또는 초당 1510 킬로비트 의 DTS 가능 * 최소한 하나의 MPEG 오디오 또는 DD 오디오 트랙 포함 GOP 구조의 제한 DVB-MPEG에 더해진 제한 사항. 다음의 SDTV 급 해상도만 허용됨. * 720 × 480 화소, 24/1.001, 24, 30/1.001 또는 30 프레임/초 * 640 × 480 화소, 24/1.001, 24, 30/1.001 또는 30 프레임/초 * 544 × 480 화소, 24/1.001, 24, 30/1.001 또는 30 프레임/초 * 480 × 480 화소, 24/1.001, 24, 30/1.001 또는 30 프레임/초 * 352 × 480 화소, 24/1.001, 24, 30/1.001 또는 30 프레임/초 * 352 × 240 화소, 24/1.001, 24, 30/1.001 또는 30 프레임/초 * 720 × 576 화소, 25 프레임/초 * 544 × 576 화소, 25 프레임/초 * 480 × 576 화소, 25 프레임/초 * 352 × 576 화소, 25 프레임/초 * 352 × 288 화소, 25 프레임/초 ISO/IEC 13818-1 시스템 - 비디오와 오디오 데이터의 동기화와 다중 송신을 정의. ISO/IEC 13818-2 비디오 - 비월주사, 순차주사 비디오 신호의 압축 코덱을 정의. ISO/IEC 13818-3 오디오 - 오디오 신호의 개념적인 압축 코덱, MPEG-1 (MP3)에 여러 채널을 쓸 수 있게 한 확장을 정의. ISO/IEC 13818-4 테스트 절차를 정의. 호환성 테스트를 위한 절차를 서술하였음. ISO/IEC 13818-5 소프트웨어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정의. ISO/IEC 13818-6 DSM-CC (Digital Storage Media Command and Control의 약자)의 확장을 정의. ISO/IEC 13818-7 AAC (고급 오디오 코딩) ISO/IEC 13818-9 실시간 인터페이스를 위한 확장. ISO/IEC 13818-10 DSM-CC의 순응 확장 ISO/IEC 13818-11 MPEG2 시스템 위의 IPMP MPEG-ts DVD AAC MPEG-4 MPEG-2 표준에 대한 간단 안내 MPEG-2 살펴 보기 MPEG-2 영상 압축 분류:ISO 표준 분류:DVD 분류:영상 코덱 분류:오디오 코덱 분류:MPEG 분류:ISO/IEC 표준 분류:영상 압축 |
갈리아 전쟁 (라틴어 Bellum Gallicum) 은 기원전 58년에 시작해 기원전 51년에 끝난 로마 공화정과 갈리아 부족간의 전쟁이다.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프로빈키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로마는 당시 갈리아의 독립 켈트족 부족국가들과 교역 및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이두이족은 당시 세콰니족, 헬베티족, 게르만족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 헬베티족은 대서양에 면한 산토니족의 영토로 이주하기 위해 프로빈키아속주를 지날 것을 카이사르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의 영토를 지나려 했다. 이에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는 이후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전쟁 자체는 8년째, 기원전 5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알레시아 공방전의 결과로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났으며, 기원전 51년은 전후처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갈리아 전쟁에 대한 1차 사료로는 카이사르의 저작 《갈리아 전쟁기》가 남아 있다. 전쟁당시 갈리아의 지도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갈리아 키살피나, 프로빈키아, 일리리아의 3개 로마 속주의 총독으로 임지에 도착했다. 게르만족에게 밀려난 헬베티족은 스위스 레만호 동쪽연안에서 브르타뉴 지방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하이두이족에게 길을 내달라고 하고 카이사르에게 통과를 요청했으나 카이사르는 허가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의 12만 명정도가 라인강을 건너오자 하이두이족과 공동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손 강연안에서 헬베티족을 기습하고, 달아나는 헬베티족을 쫓아 비브락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강화를 맺었다. 헬베티족과 전투 이후 갈리아인들은 게르만부족중 하나인 수에비족을 물리쳐 달라고 카이사르에게 부탁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작했으나 브장송에서 협상을 결렬되고 수에비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브장송에 겨울 숙영지를 짓고 라인강을 로마의 방위선으로 결정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갈리아인들 사이의 내부부족의 투쟁에 개입했다. 로마군은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까지 진출하여 레미족과 동맹을 맺고 벨가이의 여러부족과 전투를 벌였다. 벨가이인(현재의 벨기에)은 약 30만 명으로 수에시오네스족의 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로마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센 강을 건너 벨가이인들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카이사르는 수에시오네스족을 물리치고 벨로바키족, 암비아니족과 차례로 강화를 맺은 다음 지금의 벨기에 영토인 갈리아 북동부를 평정하였고 크라수스 빛꾸러기 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게 대서양 연안의 부족을 평정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갈리아 전체가 평화로워 졌고 카이사르는 겨울 숙영지를 갈리아 중서부 (현재의 오를레앙)에 잡았다. 카이사르는 제1차 삼두정치의 주인공들인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차례로 만난 이른바 "루카회담"에서 다시한번 삼두정치의 방향을 정하였다. 그 사이 베네티족을 비롯한 갈리아 서부의 부족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카이사르는 브르타뉴 지방으로 이동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로마 해군 선단이 베네티족의 함대 220척을 격파하여 베네티족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한편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들도 곳곳에서 카이사르대신 전과를 올렸다. 라인강에서는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노르망디는 사비누스, 아키텐에서는 청년 크라수스가 각각 승리하였다. 카이사르는 노르망디에서 겨울 숙영지를 설치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라인강으로 진격하여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쳐부수었다. 오늘날의 독일 본과 쾰른사이의 중간지점에서 다리를 놓아 처음으로 라인강을 넘어 수감부리족을 공격하고 우비족과 화평을 맺었다. 이후 서부로 방향을 돌려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 그때까지 브리타니아는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로마에게 미지의 땅이었다. 카이사르는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는데 해안가에서 브리타니아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격전을 치렀지만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다시 갈리아로 돌아왔다. 한편 카이사르는 아버지 크라수스를 따라 시리아로 원정을 떠나는 크라수스에게 기병 1,000을 주어 보내고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상황도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제2차 브리타니아원정을 계획하였다. 그전에 트리베리족을 복속시키고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게릴라 전술로 공격했고 카이사르는 템즈강을 건너 쳐들어가서 브리타니아의 카시벨라우누스와 강화를 맺고 가을에 갈리아로 돌아왔다. 한편 그 해, 갈리아에서는 밀의 수확이 예년에 훨씬 못미쳤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여덞개로 분산하여 겨울을 보내기로 하고 각각 부하장군들에게 나누어 월동했는데 그중의 한군데에서 15개 대대 9,000명의 병사가 에부로네스족의 족장, 암비오릭스의 계략에 말려들어 몰살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네르비족과 아투아투키족도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6만 명의 벨가이족 군대가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겨울 숙영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즉각 군단을 모아 키케로를 구하러 달려갔고 반란부족을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다시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 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킨 네르비족을 제압한 후 파리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참석하지 않은 부족을 반란부족으로 간주하여 압박했고 결국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의 복종을 받았다. 이로써 배후를 강화한 카이사르는 역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트레베리족을 라비에누스에게 격파하게 하고 합류하였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만들어 두 번째로 라인강을 넘어갔으나 깊숙이 추격하지는 않았다. 게르만족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다시 돌아와 진지를 짓고 6,000명을 라인강 서쪽에 에 주둔시켰다. 암비오릭스를 쫓아 북쪽으로 추격했으나 결국 붙잡지는 못하고 돌아와 랭스에서 부족장 회의를 다시 주재하고 반란군 주동자를 처형하였다. 기원전 52년 카르누테스족이 오를레앙의 로마인을 살해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이된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부족의 총궐기를 호소하여 갈리아 부족 대부분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카이사르는 프로빈키아에서 갈리아 중부로 달려가 모든 군단을 모아 반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보르주에서 농성하는 갈리아군을 격파하지만 게르고비아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틈을 타서 갈리아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전투를 걸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요새에서 6만 명의 병력으로 농성하였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에 포위망을 구축하지만 갈리아 부족 연합의 20만이 넘는 대군이 포위망을 다시 포위하여 안팎의 적을 상대해야했다. 9월에 벌어진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격전을 치르고 갈리아부족 포위군을 격파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무기를 버리고 카이사르에 투항하였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다시 여덟 군데로 나누어 겨울을 나게하고 자신은 하이투이족의 영토에서 숙영했다. 이로써 사실상의 갈리아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 겨울 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 7권을 간행했다. 전쟁 8년째에는 알레시아 공방전이후 전후처리를 하여 모든 부족을 로마에 복속시켰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로마화하고 속주세를 정액제로 바꾸었다. 갈리아의 부족들 분류:로마 공화정의 전쟁 분류:갈리아 분류: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
로마 ()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라치오주의 주도이며,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km2로 서울시의 2배정도이고, 2014년 인구는 290여만명이다. 로마시 권역의 인구는 430여만명이다. 로마 대도시현의 인구는 400만이 넘지만 밀라노나 나폴리 대도시현에 비해 면적이 3~4배 넓은 편이고 되려 로마시의 면적과 밀라노와 나폴리의 대도시현의 면적이 비슷하므로 세 도시 모두 300만 정도로 비슷한 규모의 도시라 볼 수 있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그 전부터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 Caput mundi )’, ‘영원한 도시( la Città Eterna )’라고 부른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만 역사·종교·문화적으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she-wolf Musei Capitolini MC1181.jpg|섬네일|왼쪽|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젖을 먹이는 늑대 청동상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아이네아스의 후예이자 전쟁의 신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테베레 강가에서 동쪽에 위치한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형제 간에 불화가 일어나 싸움이 일어났고, 레무스는 로물루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로물루스는 자기의 이름을 따서 그 도시 국가를 로마라고 했고, 로마의 건국 시조로 추대받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전설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빠르며, 기원전 8세기 혹은 9세기경, 북방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해 온 민족이 테베레 강 하구에 정착한 것이 로마의 시초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되는 철기 시대의 유적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전설과 사실은 꼭 일치하지 않는다. 로마는 라틴족의 도시 국가 건설로 출발했다는 것이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로물루스의 건국이후 244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한 로마 왕정체제를 이뤘다. 기원전 509년에 마지막 왕이 폐위되고 이후 450여년간 로마 공화정체제로 운영되었다. 기원전 2, 3세기에 세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146년)과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2년-기원전 168년)으로 지중해를 장악했다. 이후 권력투쟁이 두드러지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사이에 내전(기원전 88년-기원전 80년)이 발발했으며,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기원전 73-기원전 71)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기원전 59-기원전 54)가 뒤따른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원전 58년-기원전 51년)을 마치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내전(기원전 49년-기원전 45년)의 승리를 통해 종신 독재관으로 권력을 잡지만, 기원전 44년 공화정 지지파인 브루투스등에 의해 암살당한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 의한 제2차 삼두정치(기원전 43-33)가 뒤따랐지만,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유일의 권력자가 되어 로마제국시대를 열었다. 117.svg|섬네일|서기 117년 트라야누스 황제시절 로마제국의 최대 판도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68년까지 100여년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 황제의 자살로 막을 내리고, 네 명의 황제의 해라 불린 서기 68년 내전의 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서기 69-96)가 열린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 이후 로마제국의 황금기인 오현제 시대(96년-169년) 또는 팍스로마나 시대라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뒤따랐다. 트라야누스 황제시기(98년-117년)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된다. 이 시기 로마는 인구 수는 100여만명으로,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192년, 콤모두스 황제의 암살이후 내전이 벌어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승리하면서 세베루스 왕조(193년-235년)를 열게 된다.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암살이후, 40여년간 20여명의 황제가 암살되고 바뀌는 혼란의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리는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 정치를 창안하여 제국의 위기를 막으려 했다. 50여년간의 사두 정치 체계이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때 현 이스탄불 위치에 있는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고 천도하였고, 395년에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사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게 된다. 로마제국의 수도는 사두 정치 체제때 로마시를 벗어나 지금의 밀라노인 메디올라눔, 현 터키지역의 니코메디아, 현 독일지역의 트리어, 현 세르비아지역의 시르미움 네 군데로 나눠 제국을 통치하였고, 이후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제국은 이후 라벤나로 천도하면서, 로마시는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4, 5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서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약탈을 받으며 서로마제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410년에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로마 약탈 (410년))되고, 455년에는 반달족에 의해 로마가 다시 함락(로마 약탈 (455년))된다. 476년, 게르만 용병 장군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Vittorio Emanuele Ⅱ Monument, Roma 6세기 이후 동고트 왕족을 정복한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등 몇몇 게르만족 왕국의 지배를 거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샤를마뉴의 기부장에 따르면 800년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청에 로마의 지배권을 주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5세기 중반 이후, 교황령의 수도로서 다시 번창해진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치세에는 성벽 개수, 궁전 건설, 교회 수복 공사 등이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유명한 예술가나 건축가들이 대거 로마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5세기 말엽에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교황을 위해 예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루터교 용병들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면서(이른바 로마 약탈 사건) 르네상스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울러 가옥들이 어수선하고 밀집한 형태를 띤 중세의 도시가 근대화 되기 시작한 때는 16세기 말의 교황 식스토 5세의 시대로, 포폴로 광장에서 도시 중심부로 이어지는 세 개의 도로를 닦았으며, 광장과 샘도 만들어 찬란했던 로마의 모습을 되살려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끝난 때도 이 시대이다. 대응 종교 개혁 시대 로마의 특징인 바로크 양식은 17세기의 건축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에 베르니니나 보로미니와 같은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로마의 외관을 바꾸어갔다. 18세기에는 교황의 통치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스페인 계단 등에서 볼 수 있는 18세기 전반의 로코코 양식의 건물은 이윽고 신고전주의라는 독특한 건물로 대체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 다수의 귀중한 미술품을 약탈하였다.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로마는 다시 교황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항공기의 발달 덕분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나 미국 등 비유럽 지역에서도 다수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파리나 런던, 마드리드 등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서 사랑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는 급격히 성장하여, 밀라노를 제치고 이탈리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치, 행정적 기능이 집중된 행정수도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본부격인 로마 교황청이 소재한 바티칸 시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국제기관의 관청이 다수 진출해 있는 등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베베가 맨발로 뛴 것으로 유명한 1960년 하계 올림픽이 이 곳에서 개최되었다. del Campidoglio.jpg|섬네일|로마의 시청사인 세나토리오 궁전 로마는 로마 카피탈레 (Roma Capitale, 수도 로마) 란 이름으로 특별 코무네 지위에 올라 있으며, 이탈리아 전 코무네 8,101개 중에서 면적과 인구 모두 제일 큰 코무네이다. 로마 코무네 행정청은 역사상 로마 행정부의 소재지였던 카피톨리노 언덕의 세나토리오 궁전에 자리해 있다. 흔히 로마의 지방 정부를 가리킬 때 이 언덕의 이탈리아어 이름인 캄피돌리오 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마의 무니치피오 로마는 1972년부터 무니치피오 (municipio, 복수형은 무니치피 (municipi), 2001년까지는 시르코시치오니 (circoscizioni))라는 이름의 행정 구역으로 세분화됐다. 무니치피오는 시내 분권화를 확대한다는 행정 근거를 이유로 설치됐다. 각 무니치피오는 주민이 뽑은 대표와 네 명의 의원이 5년씩 행정을 맡는다. 무니치피오들은 반대로 행정상에 적용되진 않으나 예로부터 전해오는 로마의 각 구역들의 경계와 겹치는 경우가 꽤 많다. 로마의 무니치피오는 처음엔 20개였다가 하나를 제해 19개로 줄었으며, 2013년에는 15개로 다시 축소됐다. 로마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각기 다른 형태의 비행정 구역으로도 나뉜다. 역사 중심부 지역은 22개 리오네로 세분되며, 프라티와 보르고만 제외하면 모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내에 자리해 있다. 리오네는 고대 로마의 각 지역에서 출발해 중세에 리오네로 발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 교황 식스토 5세 시기에는 다시 14개 지역에 이르렀고, 마침내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각 리오네의 경계를 획정했다. 나폴레옹 점령 시기에는 새로운 행정 구역이 잠깐 적용됐으며, 이후 체계상의 큰 변동은 없었다. 그러다 1870년 이탈리아의 세번째 수도로 로마가 되었고, 신수도의 필요성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팎의 도시화와 인구 폭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1874년에는 새롭게 도시화된 지구였던 몬티 리오네에서 15번째 리오네인 에스퀼리노가 갈라져 나왔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머지 리오네들도 속속 생겨났다 (마지막은 1921년 신설된 프라티 리오네로, 교황 우르바노 8세 성벽 외곽에 있는 유일한 리오네였다). 이후부터는 로마 시의 새로운 행정 구역명으로 콰르티에레 (quartiere) 가 사용됐다. 오늘날 모든 리오네는 제1무니치피오의 일부로 속해 있으며, 이 때문에 제1무니치피오는 역사 중심부 (Centro Storico)의 범위와 완전히 일치한다. 로마는 2015년 1월 1일부로 로마 수도 광역시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이 로마 수도 광역시는 로마 광역권에 북쪽으로 치비타베키아까지 뻗어나갔던 구 로마현을 대체했다. 로마 수도 광역시의 면적은 총 5,353제곱미터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며, 리구리아주에 맞먹는다. 이와 더불어 로마는 라치오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이탈리아 정부의 소재지이다.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과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의 공식 소재지, 이탈리아 의회의 양원 의사당 소재지, 그리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소재지는 모두 로마의 역사 중심부 내에 있다. 국가 행정기관들 역시 시내 전반에 걸쳐 있으며, 대표적으로 올림픽 스타디움 부근 파르네시나 광장에 자리한 이탈리아 외교부 청사를 들 수 있다. 도무스 아우레아 로마 가도 **아우렐리아 가도 * 카시아 가도 * 플라미니아 가도 **팔라티노 언덕 Monte Palatino **아피아 가도 아우구스투스 영묘 카라칼라 욕장 콜로세움 판테온 포로 로마노( 포룸 로마눔 ) 나보나 광장 *캄피돌리오 광장 Piazza di Campidoglio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의 상 *라테라노 광장 Piazza Laterano *분수대( 캄피돌리오 언덕 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분수대, 세나토리오 궁 ) *마르첼로 극장의 유적 *베네치아 광장 Piazza Venezia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콜론나 광장 Piazza Colonna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 Piazza di Campo dei Fiori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in Vincoli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성당 *도미네 쿼 바디스 성당 Chiesa di Domine Quo Vadis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Sopra Minerva *산 안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 Sant Andrea della Valle 라테라노 궁전 *알템프스 궁전 Palazzo Altemps (로마 국립 박물관) *퀴리날레 궁전 palazzo del Quirinale 카피톨리니 미술관 Museo Capitolino *악기 박물관 Museo Nazionale degli Strumenti Musicali *베네치아 궁전 박물관 Museo Nazionale del Palazzo di Venezia 산탄젤로 성 *치르코 마시모 Circo Massimo (고대 전차 경주장) *진실의 입 Bocca della Verita *헤라클레스 신전 Tempio di Ercole Vincitore Olimpico 2008.JPG|섬네일|스타디오 올림피코,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경기장들 중 하나로 관중 인원 70,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축구는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로마는 1934년과 1990년 FIFA 월드컵의 결승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이 두 결승전이 열렸던 스타디오 올림피코는 로마의 스포츠 문화를 대변하는 경기장이자 세리에 A에 속한 AS 로마와 SS 라치오의 홈 경기장이다. AS 로마에서 프란세스코 토티 선수와 다니엘레 데 로시 선수는 모두 로마 태생이며 특별히 인기가 많다. 아틀레티코 로마는 레가 프로 프리마 디비시오네에서 마이너 팀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홈 경기장은 스타디오 플라미니오이다. 로마는 1960년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빌라 보르게세나 카라칼라 욕장 등의 고대 유적을 경기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올림픽 경기를 위해서 올림픽 스타디움, 빌라지오 올림피코 등을 새로 만들었다. 현재 로마는 2020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 밀라노, 토론토, 브리즈번, 몬트리올 등과 유치 경쟁을 벌고 있는 중이다. 럭비 유니온은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스타디오 플라미니오 경기장은 2000년부터 식스 네이션스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럭비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로마는 유니오네 럭비 카피톨리나, 럭비 로마, S.S. 라치오 같은 지방 럭비 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매년 5월이 되면 로마는 포로 이탈리코 클레이 코트에서 ATP 월드 투어 마스터스 1000의 테니스 토너먼트 대회를 개최한다. 사이클은 제 2차 세계 대전 기간까지만 해도 인기가 있었으나, 요즘에는 그 인기가 식은 상태이다. 로마는 1989년과 2000년에 지로 디탈리아 결승전을 두 번 개최한 적이 있다. 로마는 그 외의 스포츠 팀들, 예로 들어 농구 (비르투스 로마), 배구 (M. 로마 발리), 핸드볼, 워터 폴로 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Pretorio - Colonna di Parigi alle Terme di Diocleziano 1010023.JPG|섬네일|위오른쪽|1956년에 파리 시에게 선물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욕장 유적에서 발견된 원주 로마 시는 1956년부터 파리 시와 독자적으로 파트너 도시 결연을 맺었다. 파리 :(프랑스어) Seule Paris est digne de Rome; seule Rome est digne de Paris. :(이탈리아어) Solo Parigi è degna di Roma; solo Roma è degna di Parigi. :"파리야말로 로마에게 어울리는 도시며, 로마야말로 파리에게 어울리는 도시다." 로마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 아차카치 알제 베이징 베오그라드 브라질리아 카이로 키예프 크라쿠프 런던 물탄 뭄바이 마드리드 마르벨라 몬트리올 플로프디프 뉴델리 서울 시드니 티라나 도쿄 통에런 튀니스 워싱턴 DC 구글 어스에서 로마시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Ancient Rome 3D 공식 웹사이트 분류:이탈리아의 도시 분류:라치오주의 코무네 분류:로마 수도 광역시의 코무네 분류:이탈리아의 현도 분류:이탈리아의 주도 분류:유럽에 위치한 수도 분류: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 분류:하계 패럴림픽 개최 도시 분류:고대 도시 분류:종교 도시 분류:이탈리아의 세계유산 |
토머스 핀천 (Thomas Ruggles Pynchon, Jr. 1937년 5월 8일 - )는 미국의 소설가이다. 1937년 5월 8일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코넬 대학에서 공학물리를 전공하다 잠시 해군에 복무한 후 인문대로 전공을 바꿨고 1959년 영어학으로 학교를 마침. 그 해, 그의 첫 단편 소설 작은 비 가 출판되었고 이는 그 후 출판된 몇 편의 단편과 함께 늦게 배우는 사람 이라는 단편모음으로 1984년 재출판되었다. 그는 시애틀의 보잉사에서 기술자료를 쓰는 일을 하면서 그의 첫 장편소설 브이. 를 쓰기 시작했고 이는 1963년 출판되었다. 그는 두 번째 작품으로 제49호 품목의 경매 를 1966년에 출판했고 그 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그의 대작 중력의 무지개 (1973)를 썼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율리시즈 라는 평을 받았고 1974년 퓰리처 상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집행위원회에서 "읽기 힘들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거부되었고 그 해 퓰리처 상은 수상작없이 넘어갔다. 그의 다른 소설로는 바인랜드 (1990)와 메이슨과 딕슨 (1997)이 있다.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그의 성향은 아주 유명하여 그의 실제 정체와 주거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는데 음모론과 망상증이 근간을 이루는 그의 소설의 분위기가 이를 부추기는 데에 한 몫하기도 했다. 한글 번역이 이루어진 작품으로는 브이. 가 브이 (학원사)와 V를 찾아서 (민음사)라는 이름으로 두 번 번역되었고 제 49호 품목의 경매 가 벽호에서 나오는 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중 한 권으로 번역되었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2007년 재발간되었다. 단편집 늦게 배우는 사람 은 벽호의 제 49호 품목의 경매 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 2013년에 중력의 무지개(새물결)가 번역되었다. 핀천 관련 자료 Hyperarts Pynchon Guide 핀천의 소설에 대한 주석 모음 (브이., 중력의 무지개, 메이슨과 딕슨) Spermatikos Logos 핀천 관련 글 모음 분류:1937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소설가 분류:코넬 대학교 동문 분류:미국의 수필가 |
《 V. 》(브이.)는 토머스 핀천의 첫 장편 소설이다. 유럽 역사를 거쳐 등장하는 브이. 라는 존재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허버트 스텐실의 노력을 그린 작품이다. 《V.》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테마의 축을 이루는 것은 20세기 초반의 역사의 비인간화 를 상징하는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이들 사건 속에 관찰자로서 계속 등장하는 브이. 라는 여인(?)의 관계를 밝히려는 스텐실의 노력이다. 꽤 취약한 인과관계(브이. 라는 이니셜) 속에서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스텐실의 노력은 소설의 또 하나의 테마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역사 혹은 인간의 존재에 패턴 혹은 계획이 존재하는가 혹은 모든 사건이 서로 무관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텐실의 노력에 대비되는 것이 기계치인 베니 프로페인(프로페인은 불경스런 이라는 의미)의 폐인과 같은 삶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의 비인간화를 경계하면서도, 그 치명적 영향을 두려워하여 인간적 접촉과 그에 수반한 감정을 거부한다. 브이. 는 핀천 소설의 주요 소재인 음모론 , 엔트로피 를 매우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베니 프로페인이 겪는 여자 문제들은 중력의 무지개 의 슬로쓰롭의 더욱 커다란 문제의 전주이다. 인간의 기계화에 대한 주제는 여러 다른 작품들에서 다루어진 바 있다. 그중의 한 예가 기계 인간이 되기 위해서 긴 여행을 떠나는 은하철도 999이다. #폐인이자 인간 요요 프로페인 나락으로 떨어지다. # 1955년, 23살 먹은 가톨릭 신자이자 유대인인 해군 출신의 베니 프로페인이 버지니아주 노포크에 도착하여 옛 동료들과 조우하다. 술에 취해 일주일간을 보낸 그는 어쩌다 보니 파올라 마이즈스트랄의 생활을 책임지게 되고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피나 멘도자를 만나 하수구의 악어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게 되다. 프로페인은 1954년 여름 캣스킬에서 잠시 사귀었던 레이첼 아울글래스와 다시 만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 #심히 병든 패거리들 #*레이철 오울글래스는 쇼엔메이커에게 가서 친구 에스더의 성형수술비를 지불한다. 그날 저녁 그녀는 파티에서 스텐실과 마주치고 여기서 우리는 브이. 를 추적하는 스텐실의 노력에 대해 처음 알게 된다. 스텐실은 쇼엔메이커에게 관심을 보이고 우리는 심히 병든 패거리들 의 회원들을 소개받는다. 파티가 끝나가는 동안 색소폰 연주자 맥클린틱 스피어는 브이 노트 에서 연주를 하고 청중 중에는 파올라 마이즈스트랄과 심히 병든 패거리들 회원 3명이 있다. #빠른 변장의 명수 스텐실 8명의 역할을 해내다 #*이 장은 짧은 도입부와 8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이야기에서 스텐실은 다른 인물의 역할로 등장한다. 1898년 알렉산드리아의 카페 종업원 P. 아이얼로서 그는 두 영국인의 만남을 엿듣는다. 그들은 포펜타인과 그 동료 굿펠로우로서 아이얼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로부터 여러 시나리오를 상상해낸다. #*그의 두 번째 역할은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파티 시중을 드는 유세프이다. 유세프는 나일 계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마찰을 알고 있다. 파티에는 포펜타인과 굿펠로우가 참석하고 있다. 이 두사람과 파란 안경을 쓴 사나이 사이에는 어떤 음모가 존재하는 듯하다. 파티에는 빅토리아 렌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의 동생 밀드레드가 참석하고 있다. #에스더 코를 고치다 #스텐실 악어들과 함께 서쪽으로 갈 뻔하다. #프로페인 지상으로 올라오다 #그녀는 서쪽 벽에 걸려 있다 #레이철은 요요를 돌려 받고, 루니는 노래를 하고, 스텐실을 치클리츠를 방문하다 #몬다우겐의 이야기 #다양한 세트의 젊은이들이 함께 하다 #파우스토 마이즈스트랄의 고백 #상황이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요요 끈은 정신의 상태였던 것으로 판명되다 #사랑에 빠진 브이. #사하 #발레타 #에필로그 1919 *1955년 버지니아 노포크, 뉴욕 맨해튼 *1898년 카이로/알렉산드리아 *1899년 이탈리아 플로렌스 *1922년 수드웨스트(나미비아), 남아공 *1942년/1955년/1919년 말타 *1913년 이탈리아 피렌체 분류:1963년 소설 분류:미국 소설 |
특수 상대성이론 (特殊相對性理論, , 또는 특수상대론 (特殊相對論은 빛의 속도에 견줄 만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들을 다루는 역학 이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고속의 물체에 대하여 기존의 뉴턴 역학의 갈릴레이 변환을 대체하고, 갈릴레이 변환과 달리 고전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과 일관적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갈릴레이 변환 대신 로런츠 변환을 채용한다. 이 이론에서는, 갈릴레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관성계가 동등하지만,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과 일관하게 광속이 모든 관성계에서 동등하다. 즉, 빛 (혹은 다른 질량이 없는 입자)의 속도는 이를 방출하는 물체와 관찰자 사이의 상대운동에 무관하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여러 가지 놀라운 예측을 하는데, 이 예측들은 전부 실험에 의해 검증되었다. 로런츠 변환을 도입함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운동학적으로 더 이상 구별하여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둘을 더하여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고, 이를 민코프스키 공간으로 나타낸다. 이에 따라, 시간과 공간 중 하나에만 의존하는 측정량 (예를 들어 길이, 시간 간격 등)은 서로 다른 관성계에서 서로 다른 값을 가진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에 해당하는 값들을 합쳐서 4차원 벡터로 나타내면 다루기 쉽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어떤 일반적 속도 상수(광속)가 존재하므로, 이를 이용하여 질량과 에너지를 관계지을 수 있다. 이론에 따르면, 어떤 계의 질량은 그 계의 운동량 중심의 (순간적인) 관성계에서의 에너지와 같다 (E = mc2). 이를 질량-에너지 등가성이라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뉴턴 역학과 같이) 상대성 원리를 오로지 관성계에 대해서만 적용한다. 즉, 가속계는 관성계와 실험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에 발견된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고려하면 가속계가 관성계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가속계와 관성계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강한 중력장이 없는 경우, 특수 상대성 이론은 물리적 현상을 정확히 기술한다. 다루어지는 속도가 빛의 속도에 비해 훨씬 작은 일상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예측은 뉴턴 역학의 예측과 일치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가정에서 시작한다. # 모든 관성계는 동등하다. # 진공에서의 빛의 속력은 어느 관성계에서나 일정하다. 첫 번째 가정은 어느 관성계(속도가 일정한 계)에서든 물리 법칙은 동등하게 적용된다는 뜻이다. 비록 땅에서 볼 때 시속 100 km로 가는 차가 같은 방향으로 시속 50 km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시속 50 km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체적인 값의 차이와는 달리 두 관성계 모두에서 물리 법칙, 즉 관성의 법칙, 운동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등은 동등하게 적용된다. 이렇게 모든 관성계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이 같으므로 물리 법칙의 차이를 이용해서 두 관성계를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관성계는 동등하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더 진정한 기준관성계 에 가깝지 않다. 두 번째 가정은 어느 관성계에서 관측하든지 빛의 속도는 동일하게 관측된다는 것이다. 기존의 갈릴레오 변환에서는 관성계 A에 대해 u 의 속도로 움직이는 관성계 B에서 관측한 어느 물체의 속도가 v 일 때 관성계 A에서 관측한 물체의 속도는 u+v 이다. 하지만 이 변환은 빛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관성계 A에 대해 u 의 속도로 움직이는 관성계 B에서 관측한 빛의 속력이 c 일 때 관성계 A에서 관측한 빛의 속력은 u+c 가 아닌 c 이다. 150px 150px 트럭 좌표계에서는 양쪽에 빛이 동시에 도착한 것으로 보이지만, 외부 좌표계에서는 트럭 뒷면에 빛이 먼저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동시성은 좌표계에 따라 상대적이다. 즉 동시 라는 것은 좌표계에 따라서 다르게 관측된다는 것이다. 한 좌표계에서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라 관측되었더라도 다른 좌표계에서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관측될 수 있다. 이 현상의 가장 유명한 예는 다음과 같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버스가 있고 버스의 앞면과 뒷면의 정확한 중앙에 전등이 하나 놓여 있다. 이 전등이 꺼져 있다가 갑자기 켜진다고 하자. 이때 전등에서 나온 빛이 버스의 앞면에 도달하는 사건을 A, 뒷면에 도달하는 사건을 B라 하자. 그러면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은 A와 B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관측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전등이 앞면과 뒷면의 정중앙에 있기 때문에 앞면과 뒷면으로 향한 빛의 진행 거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스 외부에서 보면 B가 A보다 먼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외부에서 보면 빛은 앞과 뒤를 향해 같은 속력으로 진행하지만 뒷면은 빛을 향해 가까워지고, 앞면은 빛에서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뒷면으로 향한 빛이 앞면으로 향한 빛보다 먼저 도착하게 된다. 즉 두 관찰자의 동시가 일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성질이 아니라 어떠한 두 사건에 대해서도 성립하는 일반적인 법칙이다. 또한 이 성질은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을 설명하는 데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중에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 시간 팽창(Time dilation)은 어떤 관성계에서 상대속도를 가지는 다른 관성계를 관측할 때 시간이 팽창된 것으로 관측되는 것을 뜻한다. 즉 관성계 A에서 움직이는 다른 관성계 B를 보면 B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모든 관성계는 동등하기 때문에 역으로 다른 관성계 B에서 관성계 A를 관측하면 A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으로 관측된다. 정확히는 A에서 관측한 B의 시간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여기서 :는 관찰자의 좌표계에 대해 이동하는 좌표계에서 측정한 두 사건 사이의 시간 간격, :는 관찰자의 좌표계에서 측정한 두 사건 사이의 시간 간격, :는 관찰자와 이동하는 좌표계 간의 상대속도, :는 진공 중에서의 빛의 속도, :는 로런츠 인자이다. 이 두 관측 결과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관성계 A에서 B의 시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측정 시작 시각과 끝 시각을 각각 측정해서 두 차이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B는 움직이고 있으므로 측정 시작 시각의 B의 위치와 끝 시간의 위치 두 곳에 각각 시계를 놓아야 한다. 이때 측정 전에 두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이 같아야 한다. 이렇게 두 시계의 시각을 같게 조정하는 것을 동기화 ()라 한다. 그러나 A에서 두 시계를 동기화하였더라도 이것을 B가 관측했을 때는 동시성의 상대성에 의해 두 시계가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B가 관측하기에는 A가 잘못된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B의 시간이 A보다 느리게 간다는 A의 관측 결과는 B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B에서 A를 관측하는 경우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실험이 필요하다. A에서 B를 관측할 때는 A에 동기화된 2개의 시계와 B에 하나의 시계가 필요했지만 B에서 A를 관측하는 경우에는 B에 동기화된 2개의 시계와 A에 하나의 시계를 사용해 실험을 한다. 즉 A와 B는 서로 다른 실험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두 결과는 상호 모순적이지 않다. 양 끝을 동시에 측정해야 한다. 길이 수축(Length contraction)은 어떤 관성계에서 상대속도를 가지는 다른 관성계를 관측할 때 길이가 수축된 것으로 관측되는 것을 뜻한다. 즉 관성계 A에서 움직이는 다른 관성계 B를 보면 B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진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모든 관성계는 동등하기 때문에 역으로 다른 관성계 B에서 관성계 A를 관측하면 A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진 것으로 관측된다. 정확히는 A에서 관측한 B의 길이가 다음과 같이 보인다. 여기서 :는 이동하는 물체의 좌표계에서 측정한 물체의 길이(고유 길이), :는 물체에 대해 이동하는 관찰자의 좌표계에서 측정한 물체의 길이이다. 이 두 관측 결과 역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물체의 양 끝 지점의 위치를 동시에 측정해서 그 차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A에서 두 지점을 동시에 측정하였더라도 이것을 B가 관측했을 때는 동시성의 상대성에 의해 양 끝을 다른 시각에 측정한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B가 관측하기에는 A가 잘못된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B의 길이가 짧아졌다는 A의 관측 결과는 B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은 기존의 갈릴레이 변환으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갈릴레이 변환 대신 로런츠 변환을 쓴다. 만일 어떤 사건이 계에서 의 시공간 좌표를 갖고, 에 대해 의 상대속도를 가지는 계에서 의 좌표를 갖는다면, 이 두 좌표들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이 변환의 특징은 변환 후에도 빛의 속도는 로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는 맥스웰 방정식에서 빛의 속도가 좌표계에 관계없이 일정하다고 예측한 사실과 일치한다. 따라서 고전역학의 갈릴레오 변환과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을 모순 없이 결합시켜주는 변환으로 평가된다. 고전 역학에서의 운동량인 는 더이상 상대론적 속도에서 보존되지 않는다. 그 대신 상대론적 운동량 이 보존되는데 그 크기는 다음과 같다. 이 식에서 라고 하면 고전적인 운동량인 이 된다. 또한 고전적인 운동에너지인 역시 상대론적 속도에서는 성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정의된다. 이 식 역시 일 때 고전적인 운동 에너지인 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보존되는 에너지는 운동에너지가 아닌 총에너지 이다. 이 중 운동에너지가 아닌 을 정지 에너지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질량과 에너지가 자유롭게 변환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질량과 에너지는 완전히 동등하다는 의미로 다시 말해 질량 의 정의에 가깝다. 이 때의 질량 을 정지 질량이라 한다. 보다 엄밀한 정지 질량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정지 질량은 어느 관성계에서도 일정하다. 따라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이라 하면 정지 질량을 일컫는다.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전자기파는 특정한 속도를 지닌다. 1905년 이전에는 학자들은 전자기파가 에테르라고 불리었던 매질 위에서 전파되며, 전자기파의 속도는 에테르에 대하여 상대적인 속도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1887년에 행해진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에테르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1889년에 조지 피츠제럴드()는 물체가 높은 속도로 움직일 때는 그 길이가 축소된다고 제안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헨드릭 로런츠 와 조지프 라모어 는 오늘날 로런츠 변환이라고 불리는 변환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효과들을 에테르에 의한 전기적 효과라고 취급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 에서 로런츠 변환 및 관련된 공식들이 시공간의 근본적인 성질임을 두 개의 기본 가정 아래 증명하였다. 같은 해에 아인슈타인은 질량-에너지 등가성에 대한 논문 〈물체의 관성이 그 에너지 함량에 관계있는가?〉 를 발표하였다. 이 두 논문은 오늘날 특수 상대성 이론의 시초로 평가된다.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 중력 중력장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이 문서는 태국의 역사 에 대해서 서술한다. 기원전 2300년전 유물로 추정되는 토기항아리 동남아시아의 인류 거주사는 50만 년이 넘는다. 최근 이루어진 반치앙 유적(Ban Chiang)의 고고학 조사 등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4000년에 이미 오늘날의 태국에 초기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벼농사의 발달은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를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이러한 발달이 이곳에서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음을 시사한다. 타이족은 언어학적으로 중국 남부에 있는 여러 집단과 관련이 있다. 6세기와 7세기에 거쳐 중국 남부에서로부터 동남아시아로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타이족이 남하하기 전에 이 지방에는 선주민인 말레이족, 몬족, 크메르족 등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수고타이 왕국 시절의 불상 타이인들은 13세기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크메르 제국 지배하에 있던 1238년 수코타이에서 타이 족장들이 크메르를 타도하고 타이인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왕 시절 오늘날의 타이 지역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다 1365년에 아유타야 왕국에 넘어갔다. 아유타야 왕국은 1700년대까지 타이 남부와 중부 지역을 지배한다. 수코타이 왕국이 쇠퇴하자 차오프라야 강가에 1350년 새로운 타이 왕국이 세워졌다. 수코타이 왕국 시절에도 타이 북부에는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란나타이 왕국이 융성했으며 독립 왕국으로 유지해오다, 1558년 버마와 아유타야와 번갈아 가며 식민통치를받으며, 오랜 기간 동안 존속되다 결국에는 아유타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아유타야 왕국 시절의 불상 아유타야 왕국의 첫째 왕 라마티보디 1세는 타이 역사에 두가지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첫째는 소승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고 융성하게 해 힌두교 왕국인 이웃 크메르 제국와 구별되게 한 것이고 둘째는 같은 이름의 힌두교 법률서와 타이의 전통 풍습에 기초해 다르마샤스트라(Dharmashastra)라는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다르마샤스트라는 19세기까지 타이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을 시작으로 아유타야 왕국은 서양과 접촉을 조금 가졌지만 1800년대까지는 이웃하는 나라들과 인도, 중국 등과의 관계가 우선되었다. 차크리 왕조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건물 지붕 4백 년 이상 계속된 아유타야 왕국은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수도가 불타고 6개 부분으로 분열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때 딱신(Taksin) 장군이 타이 왕국을 재통일하여 톤부리에 새로 수도를 정하고 1769년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전해진 바에 의하면 탁신은 정신 이상자가 되어 톤부리 왕국은 1대로 끝나고 1782년 차크리(Chakri) 장군이 라마 1세로 즉위, 차크리 왕조의 첫째 왕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톤부리에서 차오프라야 강 건너편에 있는 방콕에 수도를 건설했다. 라마 1세를 이어 왕이 된 후계자들은 1826년 영국이 이웃 버마에서 승리한 일을 계기로 유럽 식민주의의 대두에 대응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았다. 타이는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으로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 1833년에는 미국과 시암(1939년 이전과 1945년-1949년에 사용되었던 타이의 옛이름) 간에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 몽꿋(라마 4세, 1851년-1868년)와 그의 아들 출라롱꼰(라마 5세, 1868년-1910년) 즉위 하에서 시암은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굳게 다졌다. 타이인들은 이들 왕들의 능력 있는 외교력과 타이 정부의 근대화 개혁 때문에 타이가 남아시아·동남아시아를 통틀어 식민지화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여긴다. 이는 타이의 오늘날 국명인 프라텟 타이(1939년-1945년에는 비공식 국명으로 사용, 1949년 5월 11일 공식 국명으로 제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프라텟은 나라 , 타이는 자유로운 이라는 뜻이다.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은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을 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케다의 일부였던 파타니(Pattani) 주와 얄라(Yala) 주, 나라티왓(Narathiwat) 주, 사툰(Satun) 주가 타이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입헌 군주국으로 발전하였다. 1932년 시암 쿠데타로 인해 타이의 정부는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뀌었다. 쁘라자띠뽁(라마 7세)은 처음에는 이 변화를 수용했지만 후에 당시 10세였던 조카 아난다 마히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쁘라자띠뽁은 퇴위하면서 지배자의 의무는 특정 소수뿐만이 아니라 온 국민을 위해 통치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난다 마히돌(라마 8세)는 1946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공식 견해는 자신의 총을 청소하다가 실수로 발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는 타이 역사상 재위 기간이 최장인 군주이며 타이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 타이는 명목상 입헌 군주국이나 1992년까지는 수차례 루앙 피분송크람과 사릿 타나라자타 등의 군사 정권의 지배를 거의 계속 받아왔으며 그 간간히 있던 민주 정부는 대개 단명해왔다. 1992년 선거 이후 타이는 명실공히 민주주의 국가이며 헌법에 따라 정권이 바뀌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모든 동남아시아는 일본군에 점령당하였으며, 타이 남부까지 일본군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타이에서 미국과 영국을 지지했던 이들인 사리 타이(Saree Thai) 에 힘입어 타이는 미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버마,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타이는 그 지역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 지역 협력체인 아세안(ASEAN)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06년에는 2006년 타이 쿠데타가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지고, 2008년에는 2008년 타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3대 대왕(3大 大王) 역대 군주 중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로서 대왕의 칭호를 받은 군주를 말한다. |
굴. 굴 은 바다에서 사는 굴과의 연체동물 가운데 먹는 것의 총칭이다. 바위에 붙어 살기 때문에 석화(石花)라고도 한다. 조개껍데기 속에는 부드러운 몸체가 있다. 아가미는 음식물을 모아 위에서 소화하도록 하며, 안쪽의 내전근으로 껍질을 여닫는다. 굴은 익혀서 먹기도 하지만 생으로도 먹는데, 중세 유럽에는 미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음식으로서 작용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책으로는 M. F. K. Fisher가 쓴 《Consider the Oyster》라는 책이 있다. 한편 굴은 미국 공익과학센터(CSPI)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자료를 토대로 열거한 가장 위험한 음식 에서 4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굴이 노로바이러스나 비브리오에 쉽게 오염되기 때문이다. 굴은 영양가가 풍부해 바다의 우유 라고도 불린다. 가을부터 겨울 동안에 영양가가 높고 맛이 좋다. 굴 굴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비타민A, B1, B2, B12, 철분, 동, 망간, 요오드, 인, 칼슘,아연 등이 많다. 참굴의 경우 먹을 수 있는 부분 기준 100g 당 인이 115mg, 철분이 75mg 이다. 굴의 당질의 대부분은 글리코겐인데, 이 성분은 소화 흡수가 잘 되어서 어린이나 노약자, 환자 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식품으로 권장된다. 옛날부터 빈혈과 간장병 후의 체력회복에 좋은 강장식품으로 여겨져 왔다. 한방에서는 땀을 흘리지 않게 하고 신경쇠약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기며, 뇌일혈과 불면증에 좋다고 한다. 굴껍질은 간장 및 장질환과 두통에 가루내어 달여 먹으면 특효가 있다고 한다. 식용에 이용되는 굴의 종류에는 참굴·아메리카굴·포르투갈굴·호주굴·봄베이굴·갓굴·토굴·유럽굴·올림피아굴 등이다. 굴양식은 옛날부터 중국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기원전 1세기에 나폴리에서 양식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숙한 굴은 내만의 수온이 2-5℃로 되는 5-8월이 산란기이다. 수중을 부유하고 있는 유생은 0.4mm 정도로 자라면 바위에 부착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를 보아 굴껍데기나 큰가리비의 조가비를 연결한 부착기를 바닷속에 넣어 치패(稚貝)를 부착시켜 채묘(採苗)한다. 부착된 치패는 4~5일 정도 경과하면 깨알 정도로 커지는데, 이것을 종(種)굴이라고 한다. 수하식 양식은 종굴이 언제나 바닷속에 잠겨 있으므로 간조시에 노출되는 바위의 굴보다 성장이 빠르다. 굴의 부착성을 이용하여 조개껍데기 등의 부착기에 붙인 다음, 이 부착기를 다시 긴 줄에 꿰어 뗏목·뜸에 매달아 수하시켜 양식한다. 양식생물을 부착시키기 위해 부착기를 꿴 줄을 수하련(垂下連)이라 하며, 현대식 양식은 대부분 이 방법을 쓴다. 수하식 양식에는 말목식·뗏목식·로프(밧줄)식 등이 있다. 말목식(또는 간이 수하식)은 물이 얕은 연안에 말목을 박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서 수하연을 매달아 양식하는 방법인데 시설이 간단하여 굴의 종묘생산에 많이 이용된다. 뗏목식은 대나무·쇠파이프 등으로 뗏목을 만들고 그 아래에 합성수지로 만든 뜸통을 달아서 부력을 크게 한 것에다 수하연을 매단 것인데, 이 방법은 시설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굴 양식이 시작된 초기에는 많이 쓰였으나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로프식은 연승식(連繩式)이라고도 하는데, 수면에 로프를 뻗쳐 뜸통을 달아 뜨게 하고, 양끝을 닻으로 고정시킨 다음, 이 로프에 수하연을 매단 것이다. 파도에 견디는 힘이 크기 때문에 내만(內灣)뿐 아니라 비교적 외해에도 설치할 수가 있다. 중국 대륙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통영굴이 대륙 수출의 길을 넓히고 있다. 네이버 캐스트 - 굴, 석화 분류:굴과 분류:연체동물 |
아이스킬로스 ( 기원전 525년/524년 - 기원전 456년/455년)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 작가이다. 비극예술의 창조에 기본적인 형태를 부여한 80여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7편의 작품과 다수의 단편 등이 있다. 아이스킬로스의 흉상 Aeschyli Tragoediae septem , 1552 기원전 525년/524년 아테나이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엘레우시스(오늘날의 엘레프시나)에서 귀족인 에우포리온()의 아들로 태어났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기원전 471년에서 기원전 469년 사이에 히에론 왕의 초청으로 시켈리아 섬의 쉬라쿠사이로 여행하여 그 곳에서 비극 《페르시아인들》을 상연하였다.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56년 겔라에서 사망하기전 또 한 차례(기원전 458년?) 쉬라쿠사이로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 사튀로스극을 포함 약 90편의 비극을 쓴 것으로 전해지나 현존하는 비극은 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던 일곱 편 뿐이다.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99년 24세의 나이로 비극 경연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나, 나이 40세가 되던 기원전 484년에야 비로소 첫 승을 이룬다. 그는 평생 13회 우승하였다. 그는 아테나이를 떠나 시켈리아의 겔라에서 살다가 그 곳에서 70세로 기원전 456년/455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테나이를 떠난 까닭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비극 배우의 수를 1명에서 2명으로 늘렸으며, 장식 회화와 도구를 무대장치로 사용하였다. 또한 가면·가발·신 등을 창안하였고, 비극의 3부작 제도를 완성하였다. 그의 주요 공헌을 보면, 비극에서의 합창시의 형식이나 배열을 정비하여 극의 악곡적 구성과 극적 리듬의 통합에 성공했다는 점과, 운율적인 극대화의 기본적 격조를 낳았다는 점, 그리고 비극의 테마로서 제신이나 기괴한 신령에 얽힌 얘기를 즐겨 다루어, 테마에 어울리는 장대하고 화려한 연출방법을 만들어냈다는 점 등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합창대는 어떤 작품에서나, 중대한 위기나 불안에 떠는 군중으로서 극적으로 위치가 주어지고 있으며 합창가는 신을 부르거나 혹은 신을 칭송하는 종래의 제사적인 형태와 기능을 지니면서 동시에 극의 참가자로서의 합창대의 집단적 표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배우는 그러한 집단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그와 반대로 그 적대자가 되는 수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비극 은 배우의 대화에서 운율형식이 일정하지 않아, 장면에 따라서는 이암보스 형식이거나 토로카이오스 형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이 작가의 실험단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극 구성의 그 자체에도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면이 은연 중에 병존한다. 은 말하자면 보고극, 즉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조건이 갖춰진 페르시아 왕궁이란 곳에 중대사건이 보고되고, 그 보고의 서사성에 극적 긴박감이 주어진다는 구성과 망령극, 즉 망령 출현이라는 형태로 사실성을 버리고 초시간적인 수준으로 상상력을 비약시키는 구성이 1편 가운데에서 동시에 사용되고, 또한 마지막으로는 극이란 사건의 당사자가 패배의 슬픔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는 취향으로 끝나고 있다. 하나의 극적 사건을 몇 개의 다른 시점(視点)의 수준에서 다뤄 입체적인 깊이를 주고 각각의 시점 사이에 긴장감을 자아내는 그리스 비극 특유의 드라마투르기는 아이스킬로스의 이와 같은 대담한 몇몇 실험이 모태가 되어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가 비극예술에 대해 품었던 원대한 포부는 3부작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드라마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시인의 의미 부여이며 또한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이상의 탐구이기도 하여, 이 시야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연속 테마에 바탕을 둔 3편의 극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구상을 훌륭히 구현시킨 3부작(··)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페르시아인들》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탄원하는 여인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 사티로스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 : 《아가멤논》 :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또는 코이포로이) : 《자비로운 여신들》(또는 에우메니데스) 피네우스(Phineus) 포트니아이의 글라우코스(Glaukos Potnieus) 라이오스(Laios) 오이디푸스(Oidipus) 스핑크스(Sphinx) 사튀로스극 아이귑토스의 아들들(Aigyptioi) 다나오스의 딸들(Danaides) 아뮈모네(Amymone) 불을 붙이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Pyrkaieus) 프로테우스(Proteus) 사튀로스극 아이스킬로스, 천병희 역,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 도서출판 숲, 2008.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아이스킬로스 Selected Poems of Aeschylus Aeschylus-related materials at the Perseus Digital Library Online English Translations of Aeschylus Photo of a fragment of The Net-pullers "Aeschylus, I Persians" from the Loeb Classical Library, Harvard University Press "Aeschylus, II The Oresteia" from the Loeb Classical Library, Harvard University Press "Aeschylus, III Fragments" from the Loeb Classical Library, Harvard University Press 분류:기원전 6세기 태어남 분류:기원전 5세기 죽음 분류:고대 아테네의 극작가 분류:고대 아테네의 시인 분류: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관련자 분류:마라톤 전투 분류:사고사한 사람 분류: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5세기 시인 |
아가멤논 (Άγαμέμνων)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높이 받든 영웅의 이름이다. 아가멤논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역사상 실재했는지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이 처음으로 등장한 후 그를 둘러싼 일화와 전설은 고대 그리스문학에서 즐겨 다룬 소재 가운데 하나다. 아가멤논 둘러싼 많은 이야기는 그의 족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은 아트레우스 장남이자 메넬라오스의 형이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 특히 아르고스, 미케네, 코린토스 등 지배하는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동맹군의 총지휘관으로서 100척의 전함이 그의 지휘하에 있었다고 한다. 아가멤논은 트로이와 전쟁에서 승리하고서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고 귀향하지만, 바로 그날 잔치에서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일에 원한 품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역으로 배반당했다. 제우스 ㅜ 플루토 탄탈로스 ┬ 디오네 펠롭스 ┬ 히포다메이아 ┌─────────┐ 티에스테스 아트레우스 ─┬─ 클레올라 ──────────┬ 펠로페이아 ┌────────────┐ 펠로페이아 플레이스테네스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크리소테미스 엘렉트라 엘렉트라 콤플렉스 클리타임네스트라 플레이스테네스 오레스테스 분류:그리스 신화의 영웅 분류:미케네의 왕 분류:일리아스의 등장인물 분류:오디세이아의 등장인물 분류:트로이아 전쟁 관련자 분류:자녀 살해자 분류:암살된 사람 |
네티켓 (Netiquette) 또는 인터넷 예절 혹은 인터넷 예의 는 인터넷 공간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다. 영어 네티켓은 네트워크(Network)와 에티켓(Etiquette)의 합성어이다. 네티켓은 법적 제재에 의존하는 타율적 해결보다는 네티즌 스스로 자율적으로 사이버공간의 문제를 미리 방지하고 이성적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터넷 공간은 절대로 가상의 익명 공간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네티켓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전자우편을 사용할 때의 네티켓 온라인 대화를 할 때의 네티켓 메일링리스트 사용 및 그룹토의를 할 때의 네티켓 유스넷(usenet) 뉴스를 사용할 때의 네티켓 웹(WWW)문서를 작성할 때의 네티켓 원격접속(Telnet)이나 파일전송(FTP)을 할 때의 네티켓 PC통신 예절 운영자 네티켓 이용자 네티켓 https://web.archive.org/web/20140319070422/http://www.i-museum.or.kr/sub04/04/netiquette_read2.jsp%3Creferences/%3E%3Cbr /> 1994년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의 버지니아 셰어 교수가 제시한 네티켓의 핵심원칙(아래)`이 # 가상공간에서 만나는 상대방이 인간임을 기억하라. # 실제 생활에서 적용된 것과 같은 기준과 행동을 고수하라. # 현재 자신이 어떤 곳에 접속해 있는지 알고, 그곳 문화에 어울리게 행동하라. # 다른 사람의 시간을 존중하라. # 온라인상의 당신 자신을 근사하게 만들어라. # 전문적인 지식을 공유하라. # 논쟁은 절제된 감정 아래 행하라. #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라. # 당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마라. #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하라.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음란·폭력 정보의 유통 허위정보 컴퓨터 바이러스,유사 바이러스 유포 해킹(hacking), 핵티비즘(hacktivism) 사생활 침해, 개인정보유출 재산권 침해 무단 광고(spam) 꼭 지켜야 한다 네티즌 분류:인터넷 문화 |
전한(前漢) 초원(初元) 5년 전한(前漢) 원제(元帝) 5년 신라(新羅)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1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이 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가 되다. 클레오파트라가 막내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고 카이사리온을 공동 지배자로 삼다. 키케로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탄핵연설 필리피카이 음력 4월 - 혜성이 삼(參)에 나타났음이 한반도에서 관측되었다. 3월 15일 - 로마의 군인,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
1999년 8월 프랑스에서 찍은 일식 모습 일식의 궤도 일식 (日蝕/日食, solar eclipse은 달이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가리는 천문현상을 말한다. 지구 표면에서 볼 때의 태양과 달의 시직경이 비슷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궤도면(황도)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면(백도)이 거의 일치하여 달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태양의 앞쪽으로 지나 태양을 가리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때를 일식이라고 한다. 태양이 달에 완전히 가리면 개기일식 (皆旣日蝕), 일부만을 가리면 부분일식 (部分日蝕), 해와 달이 겹쳐졌으나 달이 해를 전부 가리지 못해서 반지 모양으로 가려지면 금환식 (金環蝕) 또는 금환일식 이라 한다. 일식은 태양과 달이 합을 이루는 초하룻날에 볼 수 있지만, 매달 일어나지는 않는다. 달의 궤도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또는 지구에서 볼 때 태양이 지구를 도는) 천구상의 궤도인 황도와 달이 지구를 도는 궤도인 백도는 5도 이상 기울어져 있어서, 달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종종 지구를 빗겨 간다. 또한, 달은 타원의 궤도를 돎으로 지구에서 멀어졌을 때 달의 시직경이 태양을 전부 가리지 못할 정도로 작아질 수 있다. 일식은 매년 최소 2회에서 5회까지 발생하며, 그중 개기일식은 2회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상의 한 지역에서의 개기일식은 드문데, 이는 일식이 지표면 위로 달의 그림자 또는 본그림자가 지나는 좁은 길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식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일부 고대나 근대 문화에서는 초자연적 원인에 의해 일어나거나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기도 했다. 천문학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는 대낮에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기에 두려워할 수 있었다. 일식 때 태양을 직접 바라보는 것은 눈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 있으므로, 일식 관측에는 특별한 보호 장비(태양 안경 등)나 간접적으로 관측하는 기술이 사용된다. 개기일식에서 완전히 가려진 태양만을 보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안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식의 상태를 식별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에 위험이 있다. 고정된 장소에서 그러한 상태는 2시간여의 총 시간 동안 최고 7.5분 동안만 지속된다. 먼 곳까지 예상된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에는 일식 추적자 (eclipse chasers) 또는 반그림자 애호가 (umbraphiles)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일식은 식이 최대로 진행되었을 때의 상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개기일식(Total Eclipse)() 달의 각크기가 태양의 각크기보다 크거나(즉, 근지점, 슈퍼문) 같을 때,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경우. 금환일식(Annular Eclipse) 달의 각크기가 태양의 각크기보다 작아 태양을 완전히 가리지 못했을 때(즉, 원지점), 달이 해의 내부에 완전히 들어간 경우. 부분일식 달이 태양의 부분만을 가리는 경우. 혼성일식(Hybrid Eclipse) 지역에 따라 개기일식 또는 금환일식으로 관측되는 경우.달의 각크기가 태양의 각크기보다 미세하게 작을 경우. 달의 궤도는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궤도보다 약 5° 기울어져 있어서 일식과 월식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일식이나 월식은 지구와 태양과 달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었을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달이 지구에 가까울 때 일식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태양을 완전히 숨기게 되어 이른바 개기일식(皆旣日蝕)이 된다. 그러나 달이 지구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일식 현상이 일어나면 달은 태양을 다 가리지 못하여 주변이 반지처럼 남는 금환식(金環蝕)이 된다. 개기일식에서는 달그림자가 원뿔 모양으로 늘어나 그 꼭짓점이 지구 표면에 도달한다. 이 그림자를 본영(本影)이라 한다. 이 지점에서 보면 개기일식이 된다. 본영의 바깥쪽에 있는 넓은 반영(半影) 부분에서 보면 달의 중심이 태양의 중심에서 빗나가 있어 이른바 부분일식을 볼 수 있다. 달의 궤도 운동에 의해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지점은 지구 표면 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간다. 그림자의 중심이 지나가는 지점에서 관측할 때, 달은 서쪽에서 태양을 뒤쫓아와 태양의 모양이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부분일식이 되며, 이 부분일식이 점차 깊어져 개기일식이 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태양이 서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다시 부분을 가리게 된다. 개기일식이 이어지는 시간은 길어도 7분 30초 정도이다. 개기일식이 되면 눈부신 태양 반구가 달에 가려지기 때문에 태양의 상층 대기인 채층(彩層)이나 그 위쪽으로 확산되는 코로나를 관측할 수 있다. 금환식 때는 달 그림자 본영의 꼭짓점이 지구 표면에 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연장선상의 지점에서 보는 것이 되므로, 달이 태양보다 작아 보이는 금환식이 된다. 반영이 넓은 지역에서 부분 일식을 볼 수 있는 것은 개기일식의 경우와 같다. 금환식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감에 따라 달이 오른쪽(서쪽)에서 태양을 쫓아 추월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멀어지고, 태양까지의 거리가 다소 가까워지면 달의 시지름이 태양의 시지름보다 상대적으로 작아지는데, 이때 달이 태양의 광구(光球)를 완전히 가리지 못하므로 본영(本影)이 지표에까지 닿지 못하여 금환식현상이 생긴다. 달그림자는 지표 표면을 서에서 동으로 이동해 간다. 본영이 지구 전체로 보면 최초로 상륙하는 것은 일출 지점이며, 이 지점에서는 달과 지표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본영의 꼭짓점이 지표에 도달하지 않고 금환식이 된다. 그러나 본영이 동쪽으로 옮겨가서 낮에 일식이 일어나는 지점에 접어들 무렵에는 지구의 반지름 정도 되는 달과 지표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게 되므로 본영의 꼭짓점이 지표에 도달하여 개기일식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영이 동쪽으로 옮겨가서 지구 전체적으로 일식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이르면 일식은 그 지방의 일몰 전에 일어나 다시 금환식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일식이 지역에 따라 개기일식이 되거나 금환식이 되는 경우를 금환 개기식이라 한다. 또 달이 태양을 추월하여 일식이 일어날 때 달이 태양의 북쪽 또는 남쪽을 통과하면 개기일식이나 금환식은 일어나지 않고 부분 일식으로 끝나 버리는 경우도 있다. 1001년부터 2000년까지 있었던 개기 일식의 경로. 개기 일식은 전지구적으로는 약 18개월에 한 번씩 일어나지만, 특정한 장소에서 개기 일식이 일어날 확률은 평균 370년에 한 번 꼴이다. 지상전체로 볼 때, 한 해를 기준으로, 일식은 적어도 2회, 많으면 5회까지 일어날 수 있다. 달은 태양보다 400배 더 작다. 그러나 태양은 달보다 400배 정도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달이 태양과 겹쳐지면 일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태양 - 달 - 지구 가 됐을 때에 신월(월령0일)이 뜨게 된다. 그러나 신월이 뜰 때마다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구의 공전 궤도와 달의 공전 궤도가 약 5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태양 - 달 - 지구 가 정확히 일직선이 됐을 때에 일식이 일어난다. 이는 월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월식의 경우, 태양-지구-달이 일직선이 되었을때.) *2006년 3월 29일 (개기) 2009년 7월 22일 (개기) 2010년 1월 15일 (금환) - 아프리카 중부, 몰디브, 인도 남부, 스리랑카, 미얀마, 중국. 2011년 1월 4일 일식 (부분) 2011년 6월 2일 일식 (개기) 2011년 11월 25일 (부분) 2012년 5월 21일 일식 (금환) 2015년 3월 20일 (개기) 2016년 3월 9일 (부분) 2018년 8월 11일 (부분) *2019년 1월 6일 (부분) == 미래의 일식(부분일식은 거의 매년마다 일어나서 제외) == 2035년 9월 2일 (개기(강원도,고성의 휴전선이남 10㎞지역,북한의 평양일대 지역,부분(북한과 고성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2049년 11월 25일 (혼성) 2095년 11월 27일(금환) 역1919년 개기일식의 음화. 1919년 아서 에딩턴경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중력장에서의 빛의 굴절을 일식을 통하여 관측하였다. 오늘날에는 중력 이상이 일어난다는 주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경제학자 모리스 알레는 진자가 일식기간 이상하게 움직이는 사실을 관측하여 알레 효과(Allais effect)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중력을 달이 가리는 중력 가리움이 있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고 이것이 사실인지 연구하고 있다. 1999년 8월 11일, 20세기 마지막 개기일식과 관련, 유명 스페인 디자이너이자 점성술사로도 알려진 파코 라반은 일식이 시작되면 우주정거장 미르가 파리로 추락할 것이라고 했다. 예언이 빗나가자 사과했다. 독일의 주식시장 점성술사인 우베 크라우스는 "일반적으로 개기일식은 시장을 불안하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투자분석가인 아치 크로포드는 "세기말에 일어나는 개기일식으로 인해 주가가 폭락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전망했지만, 예언은 빗나갔다. 2009년 7월 22일, 중국과 인도의 개기일식과 관련, 뭄바이의 한 점성술사는 인도에서 카슈미르 지방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이슬람교 원리주의 무장세력이나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에 의한 공격이 발생해 명망있는 정치지도자가 암살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일식을 불길하게 여기는 힌두신화의 영향으로 인도에서는 제왕절개 수술을 예정했던 임산부들의 수술날짜 변경 의뢰가 잇따랐다.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역사에 비춰보면 일식이 빈번하게 출현했던 시기에 폭동이나 전쟁, 그리고 자연재해가 발생할 확률은 95%"라는 주장을 담은 게시물이 급속도로 퍼졌다. 2017년 8월 21일, 미국의 개기일식과 관련, 크로포드 퍼스펙티브의 편집자 아치 크로포드의 뉴스레터에 따르면 2008년 1월 러시아에서 일식이 있었고, 6일이 지나 러시아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조지아와 전쟁을 치렀다. 크래포드는 오는 21일 예정된 개기일식을 두고 "호전적인 반응이 즉각 나타날 것"이라며 "좋든 싫든 간에 역사적인 사건이 미국과 관련해서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크로포드는 기술적 분석과 행성 주기 등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투자자문업자다. 월식 식의 계절 식의 주기 식분 감마 (식현상) 네이버 캐스트 - 달, 태양을 삼키다 한국천문연구원 - 천문우주정보 - 일식 소개 Solar eclipse time sequence NASA s Eclipse Home Page, Fred Espenak Search among the 11,898 solar eclipses over five millennium and display interactive maps Detailed eclipse explanations and predictions, Hermit Eclipse Prof. Druckmüller s eclipse photography site World Atlas of Solar Eclipse Paths, F. Espenak E-mail notification on upcoming eclipses Animated maps of past and future solar eclipses. Eye Safety During Solar Eclipses, F. Espenak (NASA Goddard Space Flight Center) How to Watch a Partial Solar Eclipse Safely, A. M. MacRobert (Sky & Telescope magazine) UK hospitals assess eye damage after solar eclipse, British Medical Journal, 1999년 8월 21일, p. 319–469 분류:식현상 분류:태양 |
+ 최근의 개기 월식 160px2014년 4월 15일 개기 월식 160px2014년 10월 8일 개기 월식 160px2015년 4월 4일 개기 월식 160px2015년 9월 28일 개기 월식 월식 (月蝕/月食, 은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오는 현상이다. 월식은 태양 - 지구 - 달의 위치로 배열될 때 일어나게 되며 이때 달의 위상은 보름달인 망이 된다. 월식은 달이 지구의 본 그림자 속에 들어갈 때 관측되는 개기 월식 ()과 달이 지구의 본 그림자와 반 그림자 사이에 위치할 때 관측되는 부분 월식 으로 나뉜다. 이 때,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간 달표면에서는 개기 일식이 일어난다. 월식은 일 년에 2번 이상은 일어난다. 월식은 지구의 밤인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월식이 자주 관측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이 일어날 때의 그림자가 지구의 그림자이며, 이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라고 하였다. 개기월식이 일어날 때 달이 붉게 보이는 것은 지구 대기에 의한 산란 때문인데, 태양에서 나온 빛 중 파장이 짧은 푸른 빛이 산란되고 결과적으로 파장이 긴 붉은 빛이 달에 도달한다. 그와 동시에 월식이 일어날 때 달의 위상이 이지러지는 방법은 보통 초승달이나 상현달과는 다른 모양이다. 월식을 찍은 연속 사진. 1997년 9월 17일 월식 개기 월식 2000년 7월 16일 월식 개기 월식 2004년 5월 5일 월식 개기 월식 2007년 8월 28일 월식 개기 월식 2011년 6월 16일 월식 개기 월식 2014년 10월 8일 월식 개기 월식 2018년 1월 31일 월식 개기 월식 2018년 7월 28일 월식 개기 월식 태양 - 지구 - 달 이 됐을 때에 보름달이 뜨게 된다. 그러나 보름달이 뜰 때마다 월식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구의 공전 궤도와 달의 공전 궤도가 약 5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태양 - 지구 - 달 이 정확히 일직선이 됐을 때에 월식이 일어난다. 이는 일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일식 식현상 달의 궤도 본그림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Lunar Eclipse time sequence U.S. Navy Lunar Eclipse Computer NASA Eclipse home page Search among the 12,064 lunar eclipses over five millennium and display interactive maps Lunar Eclipses for Beginners Shadow and Substance for animation of future and past eclipses Tips on photographing the lunar eclipse from New York Institute of Photography E-mail notification on upcoming eclipses 분류:식현상 |
DCT와 DFT의 비교 이산 코사인 변환 , DCT (discrete cosine transform)는 이산 푸리에 변환(DFT)과 유사한 변환이다. 이산여현변환 (離散餘弦變換)이라고 하기도 한다. 수식적으로는 길이가 두 배이고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에 DFT 연산을 수행하는것과 동일하다.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의 푸리에 변환도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이기 때문이다. 입력/출력 데이터를 반 샘플 정도 이동시키는 등 8가지의 변형이 있는데 그중에서 4가지가 널리 사용된다. 가장 널리 쓰이는 변형 DCT 알고리즘은 type-II DCT인데, 이것을 그냥 "DCT"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의 역변환이 type-III DCT인데 마찬가지로 단순히 "역DCT"혹은 "IDCT"라고 부른다. DCT와 연관된 변환은 두 가지가 있다. 이산 사인 변환 (DST)은 실수 값을 가지는 홀함수의 DFT와 동일하며, 변형 이산 코사인 변환 (MDCT)은 다른 하나는 겹치는 데이터를 사용한다. 실수 신호에 대하여, 변환 결과물이 복소수로 나오는 DFT와는 달리 실수로만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간편하여 신호처리 및 영상처리에 널리 사용한다. 특히 신호의 에너지 성분 대부분이 저주파 성분 일부에 집중되는 에너지 집중 현상 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실 압축에 널리 사용한다. 예를 들어, JPEG 영상 압축, MJPEG, MPEG, 디브이 동영상 압축등에서 DCT를 사용한다. N × N 블록에 2차원 DCT-II을 적용하고, 결과값을 양자화하고 엔트로피 부호화한다. 이때, N 값은 보통 8이며 이 블록의 행과 열에 DCT-II 공식을 적용한다. 결과값은 8 × 8 변환 계수 행렬이며, (0,0) 원소는 (주파수가 0인) 직류 성분이고 나머지 성분은 점점 주파수가 커지는 순서로 배열된다. dft dct.svg|섬네일|350px|right|2차원 DCT와 DFT의 비교 변형 이산 코사인 변환 (modified discrete cosine transform, 줄여서 MDCT)는 AAC, Vorbis, MP3등의 오디오 압축에 사용한다. DCT는 편미분 방정식을 푸는데도 사용할 수 있다. 이산 코사인 변환은 역함수가 존재하는 선형함수 F R N -> R N 이다. ( R 은 실수의 집합이다.) 또는 N × N 정사각행렬로 나타낼 수도 있다. DCT의 정의는 약간씩 다를 수 있다. 아래 공식 중 하나를 이용하여 N 개의 실수 x 0, ..., x N -1가 N 개의 실수 f 0, ..., f N -1로 변형한다. DCT-I의 역변환은 DCT-I에 2/( N -1)을 곱한 것이다. DCT-IV의 역변환은 DCT-IV에 2/ N 을 곱한 것이다. DCT-II의 역변환은 DCT-III에 2/ N 을 곱한 것이며, DCT-III의 역변환은 DCT-II에 2/ N 을 곱한 것이다. DFT과 마찬가지로, 관습적으로 변환 공식 앞에 일정한 수를 곱해서 정규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역변환 공식 앞에 곱하는 수를 없애기 위해서 변환 공식 자체에 를 곱하기도 한다.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O( N 2)의 연산이 필요하지만, 고속 푸리에 변환(FFT)과 마찬가지로 계산 과정을 분해하여 O( N log N )만큼의 연산으로 계산할 수도 있다. O( N )만큼의 전처리 및 후처리 과정을 통해 DCT를 FFT로 변환하여 계산할 수도 있다. 소스 코드 분류:디지털 신호 처리 분류:푸리에 해석학 |
탈레스 (, Thales, 기원전 6세기(대략 기원전 625년~기원전 624년 경~대략 기원전 547년~기원전 546년 경)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한테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 최초의 수학자, 최초의 고대 그리스 7대 현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탈레스가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운동 경기 관람 중에 탈수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음.) 탈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믿을 만한 고대 저술가들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탈레스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라는 도시 출신이며,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넓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이집트 여행의 영향으로, 수학과 천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과 천문학에 관련된 업적들이 아주 많은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문학을 이용해서 기원전 585년에 일어나는 일식을 예언한 것이 있다. 또한, 수학의 기하학적 방법을 빌어서 이집트에서도 가장 큰 피라미드라고 알려져 있는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업적도 유명하다. 철학자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따르면, 밤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영리한 트라키아 하녀가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바로 앞의 우물은 보시지 못하는군요!"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탈레스의 친구가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돈 있는 사람들만 잘 살고, 돈 없는 사람들은 못 사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라고 말하자, "친구!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은 널려 있어. 머리를 한 번 써보라구."라고 탈레스가 되받아쳤다. 그러자 그 친구는 "넌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어디 내가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보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그 말을 듣고,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리고 친구가 돌아와서 보니, 탈레스는 친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돈을 갖고 있었다. 과연 탈레스는 무슨 방법을 썼을까? 당시에는 올리브가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쓰는 용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가 여행을 떠난 후, 올리브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 탈레스는 올리브의 생산량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탈레스는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기름 압축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당만 차지하는 기름 압축기를 기꺼이 팔았다. 올리브가 풍작일 때, 탈레스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압축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탈레스는 기름 압축기를 사람들한테 빌려 주면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거라고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땅도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 그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세워보기에는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밀레토스 학파에 대해서는 더 많은 바가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각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어받아, "가장 1차적인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 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의 친구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라고 주장하게 된다. 한편,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탈레스가 직접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전기 발생 실험을 최초로 행한 사람이 바로 탈레스라고 한다. 여담으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탈레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기하학의 정리 5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저술가들의 글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원은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 된다. 두 직선이 수직으로 만나면 같은 각을 이룬다. 반원에 대한 원주각은 항상 직각이다. 삼각형의 한 변과 양 끝의 각이 다른 삼각형의 그것과 같으면 두 삼각형은 합동이다.(흔히, ASA 합동 정리라고 말한다.)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은 서로 같다.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 박영훈 지음. 교과서를 만든 수학자들, 김화영 지음.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분류:기원전 624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546년 죽음 분류: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분류: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분류: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분류:고대 그리스의 물리학자 분류:고대 그리스의 작가 분류:고대 밀레토스인 분류:형이상학자 분류:그리스 칠현인 분류:밀레토스 학파 분류:기원전 6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6세기 철학자 분류:기원전 6세기 작가 |
이광수 (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번역가,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기도 하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으며,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 여성 해방과 동성애, 자유 연애론 긍정 등 진보적 주장을 펴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 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 이 한민족 쇠퇴의 원인이라며 비판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독립운동을 계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되었었는데,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어 전선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 (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외에도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 「지원병 장행가」, 「지원병훈련소의 하루」 등을 발표하고,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과 연설을 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데, 그는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때에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신리 940번지 익성동에서 아버지는 전주이씨 안원대군의 후손인 이종원(李鍾元)과 어머니 충주 김씨(忠州金氏)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 세명은 모두 요절하여 사실상의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종원은 42세였고 두 번 상처한 후 재혼한 상태였으며, 어머니 충주 김씨는 세 번째 부인이었다. 이광수의 가계는 조선 태조의 고조부인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 진(珍)의 22대손이 된다. 조선 건국 후 안원대군(安原大君)으로 추증된다. 그 뒤 21대조 사마 시(施)는 종정경 평해군(平海君), 20대조 행 원주병마만호(行原州兵馬萬戶) 희무(希武)는 종정경 윤산군(崙山君), 19대조 진사 춘흥(春興)은 종정경 동남군(潼南君)인데 이들은 모두 생전에 왕족을 지낸 것이 아니고, 조선 건국 후 한참 지난 1872년(고종 9)에 왕족의 예로서 군으로 추증된 벼슬들이다. 그의 가계는 이후 농민처럼 지내다가 6대조 때부터는 아들이 하나라서 4대 독자였고, 할아버지 이건규가 아버지 형제를 보았다. 어릴적 이름은 보경(寶鏡)이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종원은 꿈에 늙은 승려 한 사람이 거울을 주고 가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 하여 이름을 보경이라 하였다. 춘원이라는 아호(雅號) 외에 고주(孤舟)·외배·올보리라는 별호도 있다. 할아버지 건규(建圭)는 증조부가 학행과 효자 정려를 받았으므로 음서로 통덕랑을 지냈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시와 글씨와 술을 즐기다가 기생 한 명을 첩으로 들인 뒤 주막집을 차렸다. 아버지 이종원은 초시에는 합격했지만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실패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집안의 가난과 세를 댈 돈이 없어 이광수가 유아기일 무렵 정주군 내에서만 9번 이사다녔다. 그위 위로 형이 세 명 있었으나 모두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3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므로 유년기에 심한 기침과 발작을 한 것을 본 일가들은 그가 일찍 죽을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한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5,6세가 되도록 잔병치레가 심하여 부모의 간호를 받거나 의원이 그의 집을 자주 출입하였다.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떼고 기억력이 남달리 좋아 신동 소리를 들었다. 처음 이름은 보경이라 하였다가 뒤에 광수로 개명하였다. 그에게는 이복형제들이 여러 명 있었고, 친형제로는 위로 친형 세 명이 요절하였고,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뒤 이복형제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친 여동생 중 3년 연하인 애경은 만주 영구에 사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다가 1936년에 사망했고, 여동생 애란은 부모를 잃은 뒤 어떤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결혼 이듬해에 죽었다. 5세에는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과 명심보감까지 읽어내려갔으며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좋은 학교를 보낼수 없어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배웠으며 한시와 부(賦)를 지었다. 그 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신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도둑질해서 키웠다 고도 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말수 적고 병약한 그는 혼자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몇 안되는 친구로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후일 시인이 된 백석(본명은 백기행), 근처 곽산면 출신 김소월 등이 있었다. 열 살에 담배장사를 시작했던 이광수는 평생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어머니가 삼취부인이라는 점을 들먹이면서 그를 무시하며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17세 무렵의 이광수 가세가 기울자 담배 장사를 하던 중,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누이동생 둘과 고아가 되어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의 집안은 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춘원 스스로 왕족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태조의 직계 후손도 아니라서 왕족으로서의 예우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게 된다. 고아가 된 그는 재종조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동생들을 두고 재종조부 집을 나와,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였다. 어려서 폐렴과 결핵을 얻었는데 병원에 가서 고칠 비용도 없고 치료시기를 놓치면서 평생 병약했다.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꼈으며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이광수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무시, 무심한 어른들의 막말과 욕설은 그에게 심한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상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던 그를 딱하게 여긴 어느 천도교인이 그를 위로하였고, 그 호의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천도교에 입교를 결심한다. 그 뒤 이광수는 우연히 문필과 관련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면서 도쿄와 한성부에서 오는 문서를 베끼고 배포하는 일을 했다. 그 뒤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이 무렵 경성부에서 열린 이승훈과 안창호, 유길준의 초빙 강연을 듣고 감화된 그는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의 연설, 어록 등을 입수하여 탐독하곤 하였다. 그는 후일 자신의 사표이자 민족의 사표로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을 손꼽기도 했다. 1904년(광무 8년) 일본 관헌이 천도교(동학)을 탄압하자 진남포에서 배편으로 제물포(인천)를 거쳐 상경했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바로 타이세이 중학교(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그에게 학비를 대줄 사람이 없어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학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11월에 일시 귀국했고, 경성부로 올라갔다. 몸이 병약하여 고된 일을 하기 힘들었던 그는 경성부의 상점 종업원 등으로 일하면서 학비를 모았다. 1906년 2월 학비를 장만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 그해 3월 복학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폐렴과 결핵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김성수와 송진우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 시내에 있던 개신교 목사의 집을 알려주었다. 이광수는 배편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개신교 목사댁에서 지냈다. 일본인 목사의 집에서 하숙하는 동안 일본인 목사는 매일 새벽과 저녁때 하나님, 대일본제국을 위해 도와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그는 하나님과 정의, 도덕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되었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주의를 하나님이 구제하지 않는가,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1906년 3월 타이세이 중학교(大成)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하였고, 홍명희·최남선 등을 만나 사귀었다. 타이세이 중학교 재학 중 그는 문일평,홍명희 등과 함께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 을 발행하면서 시와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발표했다. 같은 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메이지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다. 이때 일본에서 만난 홍명희와 친하게 지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톨스토이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어 일본 유학 중 프리드리히 니체의 무신론과 불가지론, 에른스트 헤켈의 적자생존론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을 접하고 두루 섭렵하였다. 1907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이때 미국에서 귀국하던 안창호(安昌浩)가 도쿄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받고 독립, 계몽 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신학을 고집하여 세운 메이지 학원의 분위기에 처음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나, 적응해감에 따라 청교도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서공부 시간에 익힌 기독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1907년 12월 황성신문에 정육론 (情育論)을 발표하였고, 1908년에는 국내에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新文館)에 참여하여 작품과 시집을 발표하였으며, 그해 엉클 톰스 캐빈의 한글 번역본인 검둥의 설움을 신문관을 통해 간행하였다. 1909년에는 방랑 이라는 소설을 썼다. paper Youth No.1.jpg|썸네일|왼쪽|130px|소년지 제1호 (1907년) 또한 홍명희(洪命熹), 문일평(文一平), 안재홍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1908년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1908년 11월 1일 회람지 을 발행하면서 시,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소년지와 소년회가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될 때까지 그는 유학생활 틈틈이 작품과 논설을 발표하곤 했다. 1909년 11월 7일에는 소설 〈노예 (奴隷)〉를 발표하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존경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찍이 김옥균과 박영효와 같은 우리나라 개화파의 스승이었고, 이광수는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려셨다”고 부러워했다. 춘원 이광수는 후쿠자와를 가리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라며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를 꿈꿨다. 의병장 신돌석이 조선인의 밀고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민중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탐욕을 부린 것이라 판단, 교육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된다. Hye-seok.jpg|썸네일|140px|left|연인의 한사람인 나혜석(그가 한때 사귀던 연인이기도 했다.) 1909년 11월 18일에 일본어로 된 소설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뒤, 며칠을 밤새워서 또 다른 작품을 써서 11월 24일에는 소설 〈호 虎〉를 발표하였다. 1909년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지어 한국 국내의 《황성신문》에 송고, 발표하였다. 그의 일본어 시 사랑의 노래는 일본 잡지 부의 일본 에 게재되어 일본유학생간에 그의 문명은 점차 높아갔다. 1910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이틀 동안 총 4회에 걸쳐 쓴 여행기 여행의 잡감 (旅行의 雜感)을 발표하였다. 춘원은 당시 본명 대신 이보경(李寶境)이라는 이름과 고주(孤舟)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여기서 춘원은 일본과 조선의 풍경을 대비하면서 조선의 소년들에게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이라고 촉구한다. 춘원의 여행기를 실은 신한자유종 3호는 1910년 4월 1일 일본 도쿄에서 발간됐다. 여행기에는 일본을 떠나는 심정과 다시 보게 된 조선의 풍경에 대한 춘원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교차되어 있다. 일본 유학 직후 그는 신한소년회라는 유학생 소년 친목모임에도 가입하여 활동한다. 신한자유종 을 펴낸 것으로 알려진 신한소년회는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어린 소년들이 각자 손으로 쓴 원고를 서로 필기하며 돌려 있는 습작 모임이었다. 1910년 나(余)의 자각한 인생 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 고 하였다.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대한흥학보》 제11호에 평론〈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했다. 같은 해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5학년을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다. 1910년 3월 다시 출국하려 했으나 남강 이승훈의 추천으로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그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 김소월 등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오산학교에는 그 외에도 유영모, 1913년에 신규 교사가 된 조만식 등이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오산학교의 교가(校歌)를 직접 작사하기도 했다. 교사 활동을 하며 순 한글체 문장으로 된 단편소설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소설 《무정》은 예상하지 않았던 히트를 쳐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의 무정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는 찬반의 시비가 분분했으나 그의 자유 연애 사상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1910년 계몽단체 광문회(光文會)의 회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광문회에는 박은식, 주시경, 김두봉, 장지연, 홍명희, 변영만, 정인보, 한용운, 오세창, 이광수, 안재홍, 현제명, 안창호 등 제제다사들이 모여 우국의 열정으로 시국담론·민족자결결의를 다진 한국근대정신 발원지이기도 하다. 1910년 시 옥중호걸을 발표하였다. 1910년 7월 중매로 만난 1년 연하의 수원 백씨 백혜순(白惠順)과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결혼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이후 그는 결혼할 자유와 이혼할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고 다녔다. 또한 이혼은 조선시대의 출처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과 보다 나은 삶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무의미한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은 서로간의 피로이자 무의미한 시간 낭비임을 강연과 칼럼을 통해 역설하였다. 한일 합방 후 망명 길에 평북 정주에 들른 단재 신채호를 오산학교 교사 이광수가 찾아갔다. 신채호는 허리를 구부리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은 채 세수를 하느라 옷이 다 젖고 있었다. 그가 의아스러워하면서 묻자“일본놈들에게 고개 숙이는 것도 분한데 세숫대야에까지 고개를 숙이겠는가.”라고 답하였다. 1910년 10월 이광수는 한일합방에 좌절하여 모든것을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려고 오산학교 교사직을 사퇴하려 하였으나, 학생을 길러내어 국가의 대계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이승훈의 만류로 남아 있었다. Seung Hun.jpg|섬네일|160px|오산학교의 교장 이승훈 1911년 105인 사건 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오산학교 학감(교감)으로 취임하여 임시 교장으로 온 로버트 목사와 함께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 김기홍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불태운 오산학교 교사를 재건하여 학교를 부활시킨다. 1911년 백남훈(白南薰), 신익희, 김도연(金度演), 정노식(鄭魯湜), 전영택(田榮澤) 등과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학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투신하기로 맹세하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물에 타 마신다. 그 해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그는 오산학교의 국어 교사와 문학 교사였는데, 학생들에게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말하였고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는 없다는 것을 수업시간에 설파하였다. 또한 톨스토이와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에른스트 헤겔을 언급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과 변증법, 유물론, 무신론, 적자 생존설 등을 가르치기도 하여 기독교계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일부 기독교선교사들은 오산학교에서 이광수를 해임시킬 것을 요청했으나 옥중에 수감 중인 이승훈의 반대로 해임을 면하였다. 1913년 미국의 여성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의 〈검둥이의 설움〉을 한글로 처음 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 등을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광수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진화론과 프리드리히 니체, 에른스트 헤겔, 적자 생존론, 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오산학교 임시 교장인 로버트 목사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 싸우게 되었고, 결국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떠나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느 학생의 학부형이 교장인 로버트 목사에게 이를 항의했고 이것이 알려지면서 로버트 목사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13년 여름 웅천의 어떤 강연회에 연사로 초청되어 다녀오는 동안, 오산학교의 학생 몇 명이 이광수 배척운동을 했고, 학부형들이 동참하면서 확산되었다. 그가 톨스토이주의를 선전하는 이단자라는 점과, 니체와 헤겔 같은 위험한 사상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춘원 배척운동의 명분이었다. 1913년 11월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을 떠나 만주로 가 상하이에 잠시 머무르기도 하였다. 11월 그는 만주와 상해,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상하이에서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송상순 등과 함께 지내다가 1914년 6월 출국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오산학교에 복직했다. 1914년 10월부터는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단편, 장편소설과 글, 칼럼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청춘지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18년에 폐간되고 만다. 이광수는 1914년 초 한 달간 안정근의 집에 머문 일이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출국을 준비한다. 안정근에게 여비를 받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1914년 6월 신규식의 추천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을 맡기로 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향했으나 그해 8월 러시아 치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행을 단념하고 귀국했다. 오산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15년 김병로(金炳魯), 인촌 김성수(金性洙), 전영택(田榮澤), 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는 한편,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9월 다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15년 9월 오산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무정.jpg|썸네일|320px|right|1917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 연재된 소설 무정 .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연재되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여성 허영숙(許英肅)과 연애하였다. 그런데 허영숙과 연애하는 도중에 미술학교에 유학 중이던 나혜석과도 연애하게 된다. 두 여성과 연애하던 중 나혜석과의 결혼을 희망하였으나 자신의 친구이자 나혜석의 오빠인 나경석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그가 고향에 부인 백혜순이 있는 유부남인데다가 다른 여자인 허영숙과 사귄다는 점 때문이었다. 1916년에는 평론 문학이란 하오를 발표했으며 소설과 시 외에도 자신과 타 작가의 작품을 평론하는 등의 문학평론작도 발표하였다. 모교 와세다 대학교 대학 시절의 친구 안재홍 1916년 9월 와세다 대학 본과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대학 입학 초 그는 여가시간에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한편으로 계몽적 논설을 국내에 보내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명성을 쌓았고,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소설 무정(1917)이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후 다음해 1918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1만부가 팔렸다. 연이어 이어서 소년의 비애 , 윤광호 , 방황 등을 탈고하고 《청춘》지에 발표하였다. 1916년 도쿄미대 출신의 김관호가 졸업작품 해질녘으로 일본 문전(文展)에서 특선을 차지한 소식을 접하자 춘원 이광수는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다 는 글을 특별 기고해 이를 극찬했다. " 해질녘 은 대동강에서 목욕하는 두 여인을 그린 누드화이다. 보랏빛으로 물든 석양의 능라도 풍경은 인상파 화풍으로 아련하게 묘사하고 풍만한 두 나부(裸婦)의 뒷모습은 몽환적인 낭만파 화풍이다." 당시 매일신보는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면서 춘원 이광수의 흥분에 가득 찬 관람기를 게재했다. 아! 특선, 특선이라! 특선이라면 미술계의 알성 급제다… 장하도다 우리 김군! 그러나 신문은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춘화를 그렸다며 폄하했고, 이광수가 그런 춘화를 격찬했다며 비방이 가해졌다. 이광수는 그림은 그림이며 그림을 보고 음란하다고 비판하고 반입은 커녕 보도도 못하게 할만큼 사회가 고루하다며 개탄하였다. 초판본.JPG|섬네일|160px|right|소설 무정 초판본 (1913년) 1917년 3월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에 특대생으로 진급했으나 결핵을 앓아 고생했고, 격심한 과로 끝에 결핵과 폐질환이 심해졌다. 이때의 친구로는 안재홍, 송진우 등이 있었다. 그는 자유 연애론을 주장, 결혼할 자유, 연애할 자유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할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부모의 동의, 허락이 없더라도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17년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 소설 무정은 청년층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화제가 되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집에 찾아와 팬이라며 서명을 받아가는가 하면, 이광수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 근처에서 노숙을 하거나 여관에서 생활하며 난처한 이광수가 그들을 설득한 뒤 돈을 손에 쥐여서 되돌려보내기도 했다. 작품 무정에서도 그는 낭만주의적인 사랑과 자유 연애를 옹호하였다. 1917년 1월 1일∼6월 4일 매일신보에 연재될 당시에는 화제만큼이나 논란도 컸다. 부도덕한 작품 이라는 중장년 독자층의 비난을 반박하는 연설회가 열리기도 했다. 유림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 무정의 신문 연재를 중단시켜 달라는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새로운 시대사조를 반영해 청년남녀의 신연애관과 이에 따른 번민과 갈등을 옮겨놓은 장편이 잇따라 선을 보였다. 자유연애를 다룬 무정 이 매일신보에 연재되는 동안 여학생들의 편지가 쏟아졌다. 영채가 불쌍하다 , 형식이 영채를 버리면 안 된다 는 동정과 호소였다. 중추원 양반들은 이광수란 어미 아비 없이 자란 상놈의 자식 이라며 연재를 중단하라는 진정서를 냈다. 가정 교육이 안된 상놈의 작품이 어린 자녀들의 도덕과 인륜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리학자들의 항의 전화와 규탄 집회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월 5원이던 춘원의 고료는 10원으로 뛰었다. 훗날 김동인이 동아일보에 소설 젊은 그들 을 쓸 때 편집국장이던 이광수는 “작가의 자존심은 죄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독자 본위로 써 달라.”고 주문했다. 1910년대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연애소설이고 춘원의 출세작이었다. 이전에도 조선 사회에 장편 소설과 신문에 연재되는 장편 연재 소설은 존재하였지만, 그의 작품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 로 평가된다. 매일신보의 연재를 마친 뒤 회동서관에서 무정을 정식 출간하였다. 문필 활동을 통해 이광수는 기존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자로 등장하여, 근대주의적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역설했으며, 그러한 주장은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사고에 토대를 두었다. 그는 초기의 작품과 칼럼, 강연을 통해 허위와 이름뿐인 유교의 허례허식과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조롱하였다. 장편 무정(1917)을 비롯하여, 장편 개척자 (1918), 단편 무정 (1910), 어린 벗에게(1917), 윤광호 (1918), 논설 자녀중심론(1918), 위선 수가 되고 연후에 인이 되라(1917)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저작들을 통해 사회 부조리를 지적하였다. 그는 작품과 강연을 통해 인간은 소중한 존재라는 점과, 여자도 사람이며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여자의 해방은 가정의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여자의 해방은 자유 연애로서 이룩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에 유교 사상가와 조선 선비들은 풍속을 해치고 인륜을 어지럽힌다며 비난을 가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7백년간 조선 사회에서 허례허식과 위선, 이름 뿐인 도덕과 겉치레만 남겼고, 나만이 옳다는 관점은 당쟁과 배척의 원인이 되었다고 공격하였다. 성리학자들과 시골 선비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그가 유년 시절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을 문제삼아 상놈 , 호로자식 등의 극언을 퍼붓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계속 인간은 평등하며, 남녀는 평등하며, 사람이 귀중한 것이라는 견해를 설파하고 다녔다. 허영숙(그는 한국의 초기 서양식 산부인과 의사의 한사람이었다.) 격심한 과로로 폐질환과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병원 진료비가 없어 휴학하고 1917년 말 요양차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 자격으로 한반도 남부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다녔다. 1917년 장편 소설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1918년 폐병이 재발하여 쓰러졌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인 간호로 건강을 되찾았다. 비록 폐병은 완쾌돼지 못하였지만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에 감격한 이광수는 그와 결혼을 약속한다. Gwang-gu 1919.png|썸네일|오른쪽|150px|이광수 (1919년) 그런데 가부장제도와 중매 결혼에 심각한 회의를 품던 이광수는 가부장제도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말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중심의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의 발언권을 동등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과 애정 없는 결혼을 유지할 이유는 없으며 애정이 있는 결혼이라고 해도 애정이 사라진다면 언제든 이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소문이 확산되면서 곤욕을 당했다. 또한, 그 해에 전통적인 부조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비판하고,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 《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가족 간의 평등한 발언권을 말하여 다시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여성에게도 자유와 권리가 소중하다는 주장을 했고, 여자가 해방되는 길은 오직 가사에서 해방되는 것과 자유 연애에 있음을 천명하여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베이징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 이 애정도피 사건으로 그는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세간의 질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2·8 독립 선언을 낭독한 도쿄 히비야 공원 1918년 백혜순과 이혼하고 4년 연하의 양천 허씨 허영숙(許英肅)과 재혼하였다. 허영숙은 일본 유학 당시 만나 연애하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1918년 11월 중순경 우드로우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다. 출국 직전 그는 윤치호를 찾아가 대표자 파견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윤치호는 그에게 여비만 주고, 운동 참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몇몇 동지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다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다. 일본 체류 당시 그는 글을 잘 지어서 유명하였다. 당시 유학생의 한 사람인 최태영은 후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8 선언 은 이광수가 썼는데 춘원은 글을 잘 써서 당시 이미 유명했지요. 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부터 그는 2·8 독립 선언을 치밀하게 준비, 주도하였다. 상하이와 도쿄에 있던 유학생, 청년 독립운동가들과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白寬洙), 김상덕, 최팔용(崔八鏞), 김도연, 송계백(宋繼白)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在日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또한 여러 선전 홍보물 등을 발간, 인쇄하여 양심적인 지식인 계층의 각성과 협력, 참여를 적극 호소하였다. 12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인 『신한청년』의 창간호 표지이다. 주필은 이광수(李光洙)였다. 신채호 상하이에서 그는 김규식, 신채호, 신성모, 신규식, 신익희, 윤보선 등의 청년 지사들을 만났다. 한편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김규식이 문법문제를 고집하다가 뜻만 알면 그만이 아니냐는 신채호와 심하게 싸운 뒤, 그가 대신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신채호는 영어를 읽을 때마다 한국어의 조사(助詞)를 꼭 넣었다. I는 am a boy 라고 하는 식이었다. 문장마다 하여슬람 이라며 한문 읽듯 토도 달았다. 김규식은 매번 "발음을 똑바로 하라"고 신채호에게 야단쳤다. 신채호는 "발음은 쓸데없으니 뜻만 가르쳐달라 해도 까다롭게 군다"며 투덜댄 뒤 영어 선생을 소설가 이광수로 바꿨다. 상하이에서 만난 인사들 중 김규식과는 호형호제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같은 불우한 환경에 멸시와 고난을 받고 자란 점 등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꼈고 김규식은 더욱 그를 친동생처럼 각별하게 챙겨주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일본에 파견,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서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을 만나고 2월 8일 2·8 독립 선언의 선언문을 기초 하였다. 그는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과 독립운동 거사에 관한 모의를 하고 스스로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다.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인 신익희, 최팔용, 김도연, 김준연, 안재홍, 윤치영, 나혜석, 김상덕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발표한다. 학생 시위대는 춘원 이광수가 기초를 세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한 뒤 거리행진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막아섰고 양측 사이에는 격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팔용 등 시위 학생 60여 명이 체포됐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는 변장하고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은 전체 조선민족의 의사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 중국에 도착하자 그는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미국계)와 데일리 뉴스(영국계)를 찾아가 동경 조선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운동을 알려 세계에 보도케 한다. 춘원은 그 두뇌의 뛰어남으로 해서 후일 임시정부에서도 큰 비중을 두게 된다. 다시 도쿄로 돌아온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조선반도 내에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에 적극 호응, 공감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칼럼과 전단지를 익명으로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한 이광수의 와세다 대학 학적부 이름은 검은 줄로 지워져 있었는데 퇴학사유란에는 “학비미납”이라는 내용의 일본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이광수와 최팔용, 송계백 등 2.8 독립 선언 주동자 3인의 학적부는 1996년 케이블 TV Q채널의 취재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담당PD인 김권재는 다니구치 구나오 와세다대학 교무과장이 학칙상 공개가 불가능하지만 이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이므로 특별히 공개한다며 보여주었다. 고 밝혔다. 3월 1일 국내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은신해 있다가 변장을 하고 중국인을 가장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Minguok Limshi Zhengfu.jpg|210px|right|섬네일|충칭 임시정부 청사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임정 공보국장으로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을 겸하며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또한 겸임 《독립신문》 주필과 신한청년당 기관지 《신한청년》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상하이에 와서 그는 다시 홍명희를 만났다. 1919년 5월 안창호가 상하이로 오자, 다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창립 발기인이 되고,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주필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 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라는 안창호의 권고에 감화하여, 이광수는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문학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하기도 했다. 1919년 8월 21일자 1919년부터 그는 잡지 《독립》지를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이었고, 또한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임시정부의 사실을 알렸으며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 《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그는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그는 국내에 보내는 선전 홍보물을 통해 국내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독립 운동 참여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무지한 자들만 못하다, 배움의 의미를 알 수없다며 분노하였다. 1920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소년 김산 등을 만났다. 그러나 김산은 곧 무정부주의자와 의열단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된다. 1920년 2월 김일엽, 나혜석 등이 여성잡지 신여자지를 창간하자, 이광수는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정칠성, 박인덕 등과 함께 신여자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만다. 임정 일에 대해서 그는 많은 일에 적극적인 활동, 발언을 하여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19년 9월 임정 통합 개편때는 공보국장직을 사직하고 임정 사료편찬위원의 한 사람으로 역사서 편수를 담당하였다. 1920년 7월 국내에서 간행된 잡지 《폐허 (廢墟)》지의 동인으로 참여, 원고를 국내로 송고, 택배로 부쳐서 발표하였으나 폐허지는 반일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총독부에 의해 곧 폐간당하고 만다. Kwang-su 1920.png|썸네일|왼쪽|150px|임시정부 직원 시절의 이광수 (1920년)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조선인 대표들은 출입조차 거부당했다. 이광수가 기대한 것처럼 조선독립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독립의 기회는 찾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연합국의 한 나라요, 승전국 측에 속해 있었으며, 국력도 나날이 강해지고 국제적 지위도 날로 높아져갔다. 그러한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거의 희망이 없는 일로 보였다. 이광수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요령과 술수, 위선, 속임수 등에 좌절, 절망하였다. 요령과 술수, 속임수를 걷어내지 않고는 독립을 할 수가 없으며, 독립한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독립은 오래 갈 수 없다며 절규했다.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점점 지치기 시작하였다. 약 1년간은 도산 안창호와 함께 방을 얻어 자취생활도 하고 또 이리저리 생활의 방편을 찾아서 중국신문에 구직광고를 내기까지 했다. 생활고와 함께, 국내에 밀파되었던 비밀요원들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에 무관심한 민중들의 현실을 접하면서 실망하였다. 1920년에 이광수는 흥사단 상하이 조계의 임시 반장을 맡기도 하는데, 1920년 여름 방학 무렵 일본에서 허영숙이 이광수를 찾아왔다. 허영숙의 상하이 임시정부 방문은 당시 상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한다. 월탄 박종화는 그의 일기 에서 이광수가 이때 허영숙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매수당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허영숙이 이광수에게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언질 받고 이를 설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 박종화에 의하면 이 소문이 확산되면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은 충격을 받고 홧김에 일본 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한다. 그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과 함께 임정의 재정형편도 점차 어려워졌다. 1920년말 재정난으로 사료편찬위원회가 해산되고 독립신문도 속간이 어렵게 되었다. 이광수는 임정으로부터 제네바 주재 대표로 선임되었으나 여비 사정으로 떠나지 못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안창호의 적극 주선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이 무렵부터 이광수는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희망 없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지에 관해 그는 점차 깊은 회의에 빠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 단체와 파벌 간의 이권다툼 등도 점차 그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을 강화시켰다. 이광수와 홍명희,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 지내왔는데, 2년 뒤인 1921년 3월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폐병의 악화와, 국민대표자대회 등 임정 요인과 독립운동가들간의 파벌다툼과 의욕 상실 등이 원인이었다. 1921년 2월 이광수가 안창호에게 귀국할 뜻을 보이자 안창호는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귀국한다. 한편 국민대표자대회는 임정과는 다르다며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여하라는 설득들도 있었지만, 춘원은 모두 사양하고 귀국을 택한다. 안창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내주었다. 그가 상하이를 떠날 때는 안창호와 신채호 만이 마중나와 그를 배웅하였다. 1921년 4월말 단신으로 상하이항을 떠나 배편으로 개성으로 귀국, 열차를 타고 가던 중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검문검속을 하던 일본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곧 풀려났다. 그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자 이때부터 시중에는 그가 변절자라는 의혹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해 4월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귀국 직후 일제나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별반 저항없이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에 그는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뒤 재정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던 이광수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3월까지 《개벽》에 논문 〈소년에게〉를 연재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22년 종학원 교사로 초빙되어 철학, 윤리학, 심리학, 종교철학, 논리학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 〈가실 (嘉實)〉을 집필하였다. 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 전쟁을 겪었고,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할머니를 여의고 재종조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또한 동학당인 천도교도가 되면서 천도교의 일을 본 탓으로 일본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고 일본, 미국 유학의 꿈도 좌절되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중매로 만난 본부인 백혜순과는 사랑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겪고 이혼을 결심, 합의하에 이혼하였지만 그에게 가해진 것은 조강지처를 버린 인간, 타락한 인간, 향락과 음란의 상징이라는 꼬리표였다. 또한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이혼할 자유도 있다는 그의 견해와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점 등을 들어 그를 멸시하였다. 그리고 이광수의 생모 충주 김씨가 세 번째 부인(3취 부인)이라는 점을 들어 그는 서자로 취급당하고 무시당했다. 또한 1919년 1월부터 국내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 호소했지만 이 역시 무시되었다. 어려서부터 폐렴과 결핵, 손발 동상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후처가 된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로 위기를 여러번 모면하였다. 그러나 동료 문인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은 허영숙이 그를 타락시켰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Bong-seun.png|썸네일|오른쪽|140px|아들 이봉근그는 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춘원은 허영숙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봉근은 여덟 살 때 잃었다. 두 번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은 대부분 요절하였고 아들 이영근, 딸 이정화 등만이 살아남았다. 춘원은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던 듯하다. 틈만 나면 허생전, 율곡선생, 원효대사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이의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끼어 노래를 부르고 윷놀이도 했다. 그래선지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아이들은 늘 아버지 편이었다. 박한영.jpg|썸네일|왼쪽|140px|석전 박한영 귀국 직후 폐질환으로 요양하였으나, 병세가 완화된 뒤에는 독립운동의 실패와 임시정부의 혼란, 협력해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 등을 보며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다. 1921년말과 1923년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는 금강산을 방문하고 기행문인 금강산유기를 지었다. 여기에는 장안사, 유점사 등 한국전쟁 때 유실된 사찰과 사라진 기암괴석의 존재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1922년 1월 9일 박종화, 현진건, 이상화 등과 함께 잡지 《백조 (白潮)》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경 아내 허영숙이 상하이에 이광수를 찾아왔을 때 아내와 함께 돌아오다가(일설에는 홀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선천(宣川)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 이에 대해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견과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있다. 1922년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문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을 찾아갔다. 그는 박한영의 지도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과 서예와 한시(漢詩) 짓는 법을 배웠고, 그의 불교전문강원에도 출입하며 설법을 들었다. 1926년 무렵 박한영은 서울 안암동 개운사 대원암에 개설한 불교전문강원에서 신석정,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등을 지도했으며 3000수에 이르는 한시를 남겼다. 서정주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한밤중에 홀로 깨어 고민하는 때의 언저리쯤에는 반드시 다시 이 분의 깊은 도애(道愛)를 돌이켜 생각하곤 어머니의 품속에 파묻히는 아이처럼 파묻히어 새로 살 힘을 얻는다"고 회고했다. 이광수는 일시적으로 승려가 되려고 했지만 박한영은 그대는 중노릇 할 사람은 아니라며 설득해서 되돌려보낸다. 심리적 안정을 회복한 그는 이후 문필 활동과 사회 활동에 전념한다. 귀국 이후 그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 기사를 쓰거나 칼럼과 논설과 소설을 송고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22년 초부터 경신학교의 교사로 출강하며 영어를 가르쳤다. 원동위원부.png|썸네일|왼쪽|150px|1922년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식, 맨앞줄 가운데가 이광수 1922년 흥사단의 측면 지원 조직인 수양동맹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3월 잡지 《개벽》에 발표한 〈소년에게〉의 내용이 출판법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당국의 관리 대상이 되어 감시, 내사당했다. 그 뒤 1922년 9월 30일 밤에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첫 면담을 가졌으며, 그때부터 사이토의 정치참모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와 빈번히 접촉하였고, 그들의 주선으로 월수당 3백 엔을 받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한다. 그러나 얼마 뒤 퇴사한다. 1922년 흥사단의 국내 지부인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을 주관하였다. 1922년 주요한 등과 함께 안창호의 연락을 받고 경성부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평양에 동우구락부 (同友俱樂部)의 발족을 지시했다. 안창호는 단체의 기준과 회원 자격, 단체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이광수와 주요한 등에게 지시하고 거사자금을 보내 설립에 착수하게 하였다. 1923년 5월 김성수와 송진우의 권유로 다시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광수는 그들의 후원을 받아들여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객원논설위원이 되었다. 5월 16일 동아일보 사회부 촉탁기자가 되었다. 심우섭 이광수 이상협.JPG|썸네일|오른쪽|170px|동아일보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왼쪽부터 진학문, 심우섭, 이광수, 이상협 순) 그는 여자도 인간이며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자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결혼과 가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는 유교학자들의 분노를 초래했다. 또한 1918년부터 그는 칼럼과 논설에서 동성애에 대한 것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동성애 역시 존중받아야 될 사랑이며, 사랑할 권리가 있고, 사랑할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동성애 옹호론을 작품에도 일부 반영하였다. 후일 2007년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의 한국문학자 미국 출신의 가브리엘 실비안은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 를 연구한 논문이 함께 게재됐다. 여기에서 실비안씨는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 코드에 대한 기존 이론을 재검토하며 “이광수야말로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하기 이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뤄온 작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중의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대해,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라고 하였다. 동성애를 정신병이나 광증의 일부로 보던 조선 사람들에게 그의 동성애 옹호는 충격을 주었다. Changho.jpg|섬네일|left|180px|도산 안창호. 안창호의 사상에 감화받은 그는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고, 후에는 흥사단과 수양동우회 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그는 일찍이 나태하고 게으르며 무기력한 이 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나약하며 공짜를 바라며, 허황되다, 요령과 술수에 능하다, 그리고 속임수와 눈가리기에 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습성으로는 서로간의 신뢰도 어렵지만,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일부 국민들의 의지만으로 독립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지 않고는 어느 나라도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22년 잡지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자치운동론 을 내세워 이때부터 차츰 총독부로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이광수는 삼일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 이라고 주장했다. 〈민족개조론〉의 타협적인 내용은 곧 민족진영 인사들의 감정을 자극, 논란을 일으키면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민족개조론〉은 실력 양성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자치를 얻자는 자치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이광수가 잡지 개벽 에 민족개조론 을 발표했을 때 그 반응은 일파만파의 충격이었다.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당했다. 민족 개조론의 발표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사주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 또한 총독부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유랑했던 젊은 시절 동포들의 비참한 삶과 지도자들의 이전투구를 보고 착상한 것이며, 정신적 대부인 도산의 “점진적 개혁”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그는 조선 사회는 요령과 기만, 허위가 판치는 사회이며, 이런 사회, 이런 시민 의식으로는 백년이 지나도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는 공감 보다는 감정적인 반론과 공격이 계속되었다. 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기자가 된다. 편집국장 이광수.JPG|섬네일|right|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시절 (1923년) 1923년 중반에는 도산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소설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송진우, 김성수 등이 소환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결국 111회 중편완(中篇完) 부분에서 연재중단되었다. 1923년 가을, 실의에 빠진 그는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주지인 월하노사(月河老師)라는 늙은 불교승려의 인도로 《법화경 法華經》을 접한다. 이후 그는 《법화경 法華經》을 한글로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법화경에 널리 심취하게 되었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의 국법이)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에 대해 일본의 국법이 허하지 않는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는 논설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후 이광수 주도의 타협적인 자치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광수가‘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발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이 논설의 요지는‘일본 법률의 범위 안에서 정치 산업 교육의 3대 정책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사설 민족적 경륜 이 물의를 일으켜 동아일보에서 스스로 퇴사했다. 그러나 김성수와 송진우의 배려로 1924년 2월 동아일보의 기자로 다시 복귀했고 동아일보에 〈허생전〉을 연재하다가, 같은 해 11월부터 장편소설 〈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여기자인 최은희를 발탁하였다. 최은희가 기자로 발탁되게 된 데는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 그리고 기자 덕목으로서 차고 넘칠 무한한 배포가 작용했다. 최은희가 동경 일본여대 3학년 재학 중인 1924년, 여름방학을 맞아 춘원의 집을 찾았을 때 일이다. 최은희는 춘원의 부인이자 산부의과 의사인 허영숙과 가까운 사이였다. 허영숙은 한 부호로부터 진료비 85원 10전을 떼어 먹힐 처지였고, 최은희는 청부사를 자임했다. 최은희는 채무자 집에 찾아갔으나 그가 외출하고 없자 마루에 돗자리를 펴 낮잠을 자거나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최은희는“의료규정을 알아보시고 부당하거든 고소하세요.”라며 귀가한 부호에게 쏘아 부쳤고, 강짜를 부리다가 차츰 진료비를 깎는 쪽으로 타협하려던 이 악성 채무자에게 “내가 종일 이 집에서 치마에 묻힌 먼지는 털고 갈망정 단돈 10전도 못 깎아 드리겠소”라며 결국 돈을 온전히 다 받고 일어섰다. 마침 그 때 조선일보가 ‘부인 기자’(여기자라는 의미)를 급구했고, 이광수는 이상협 편집고문에게 최은희의 진료비 추심 청부 일화를 들려주며 “그만한 배짱과 수완이면 넉넉하고 부인과 왕래 편지를 보니 문장도 신문기사보다 낫다”고 천거했다. 이후 1933년 8월 29일까지 사설과 횡설수설, 소설(13편),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 하루 원고지 70장 이상을 동아일보 지면에 발표했다. 안창호, 윤치호 등의 감화를 받은 그는 안창호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고, 이후 그를 도와 흥사단의 국내 조직과 1922년 수양동우회의 모태인 수양동맹회 등을 결성하였다. 그는 수양동맹회를 흥사단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자, 국내외 흥사단의 연락 기관 겸 흥사단 국내조직의 측면 지원 단체로 운영하였다. 이광수는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 1922년 수양동맹회를 결성했는데, 그 전문(前文)에서 “정치 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주의(主義)”라고 발표하였다. 1923년과 1924년 그는 계몽 활동과 강연을 통해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며 기존의 조선 사회는 이러한 여자들의 권리와 권익을 심하게 무시하거나 착취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자들에게도 자유가 부여되어야 하며 여자의 자유는 결혼과 가정으로부터의 탈출이 선행되어야 하며, 자유 연애를 통해 여자의 해방,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이광수는 또 조선의 자녀는 오직 부모를 위한 꼭두각시 인형이라며 비판했다. 이광수는 "조선의 자녀는 오로지 부모(父母)를 위해서만 살았고, 또 부모를 위해 일했고 죽는, 부모 중심의 삶을 강요받았다. 한번도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 개인적 행복을 위한 교육의 자유와 혼인의 자유까지 부모에게 박탈당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며 지적했다. 그러자 유림들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인데 부모가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것이 옳다며 이광수를 공격했다. 도리어 이광수가 유년기에 고아가 된 것을 지적하며 호로자식의 궤변이라고 비방했다. 또한 그는 1920년대 경성부에 확산된 전화기를 보고 멀지 않은 미래에 전화기 역시 전국 각지로 확산될 것이며, 쉽게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전화기도 등장하리라 보았다. 그는 라디오가 보급된 뒤 텔레비전 역시 널리 보급될 것이고, 미래에는 일방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아니라 기계를 매개로 하여 직접 대화가 가능한 시대도 올 것이라 예상하였다. 1924년 초부터 문학잡지 발간을 계획한 그는 여러 부호들을 찾아다니다가 방인근과 경주 최부잣집 등의 지원으로 《조선문단》의 창립발기인이 되어 창립을 주재했으며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여성에게 교육 기회를 부여하자, 자녀는 부모의 노리개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당시 사람들은 반감을 품었고, 후원자를 얻기 어려웠다. 〈재생〉연재를 끝낸 1925년초 다시 동아일보에 〈춘향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광수는 문학을 통해 사회를 계몽, 변화, 개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을 통한 사회 계몽, 변화 시도에 대해 김우진은 이를 비판하였다. 작가 김우진은 다이쇼 시대 개인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삼았던 시라카바(白樺)파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희곡 〈정오〉 〈이영녀〉 〈두데기 시인의 환멸〉 등에서 사회적 억압과 통제의 현실을 폭로하고, 인습과 도덕을 극복한 초월적 개인을 형상화하면서 자유로운 개인 이자 공적 인격체 인 시민 을 발견한다. 김우진은 1926년 쓴 평론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 이광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우진은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문(美文)이 아니오, 재화(才華)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다"라면서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드는 생명력,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며 그의 계몽론을 비판했다. 단기 지 동우구락부를 운영하면서 그는 미국에 있던 안창호,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과 연락하고 국민회 회보를 입수하여 확산시켰다. 또한 동우구락부 회원의 자격에 여자도 가입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남자 회원과 여자 회원간에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남녀 모두 같은 한 사람의 회원이자 동지로 대우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1925년 다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복귀했다. 1925년 7월 대구의 언론인 김승묵이 잡지 《여명 (黎明)》을 창간하자, 《여명 (黎明)》지의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여명》 지는 1927년 1월에 폐간되었다. 한편 1925년 동아일보는 춘향전의 개작을 신춘문예의 공모작으로 걸었는데 당선작이 없자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 을 1925년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수십 편의 춘향전 개작 공모작 중에서 뚜렷한 작품이 없자 동아일보는 다음해 9월 24일 당선작이 없어 춘원 이광수에게 집필을 의뢰했음을 사고로 밝혔다. 1925년 봄부터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하여 통합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 수양동우회로 발족시키는데 힘을 쏟은 끝에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수양동우회는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 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실질적인 모든 사업과 실천 내용은 흥사단의 국내 조직 역할 단체였다. 수양동맹회를 동우구락부와 합하여 동우회로 확대 개편한 직후인 2월에는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동광》을 창간하여 주요한과 함께 잡지를 주재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수양동우회의 조직을 의심하고 안창호의 국내 대리인으로 의심하자 그는 동우회는 사회 계몽 단체임을 들어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라고 변명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났다. 1926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고 중퇴한 학력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했다. 이 때 재학번호(학번)가 1번으로, 경성제국대학 제1호 학생인 셈이다. 1927년 작품 《마의태자》를 발표하고 이어 1928년 《단종애사》를 발표하였다. 1929년에 YMCA 근처에 생긴 멕시코 다방은 이광수와 복혜숙이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이후 해방때까지 그는 멕시코 다방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는 다방에서, 혹은 산사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곤 했다. 1920년대에 와서 그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역사 교육을 금지시키는 것에 반발, 단재 신채호의 저서와 문건을 입수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역사 관련 칼럼과 소설, 시, 희곡 등을 짓기로 결심한다. 1926년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야간반 학생으로 다녔지만 폐병이 심해지자 작업도 힘들어졌고, 1926년 9월 경성제대 1학년 2학기 초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이후 집에서 요양하며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28년 장편소설 〈마의태자〉를 발간했다. 바로 단종애사를 지었는데 이듬해 1929년 단종애사는 대중의 인기를 크게 얻었다. 이광수는 장편 단종애사 에서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집권한 역사를 다뤘다. 그는 사육신(死六臣)이 처형당한 날 신숙주의 아내 윤씨가 목숨을 끊었다고 썼다. 변절한 남편이 부끄럽다며 다락방에 올라가 목을 맸다고 묘사했다. 이광수는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실린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는 세조실록 2년 1월 23일자엔 신숙주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제학 신숙주의 처 윤씨의 상(喪)에 조효문을 보내 호상하게 하다. 윤씨가 숨진 것은 사육신 사태가 일어나기 다섯 달 전이었다. 그때 신숙주는 세조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 있었다. 신숙주 아내를 둘러싼 야사는 정사(正史)와 전혀 다른 허구였던 셈이다. 1928년 3월 다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복학하였다, 그러나 폐병과 과로 등으로 몸이 약해지면서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1930년 1월 경성제국대학을 중퇴하고 만다. 1930년 봄, 주요한, 정지용, 주요섭 등과 함께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지의 필진으로 참여한다. 1930년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소설 《혁명가의 아내》를 발표하였다. 1931년 6월 26일부터 조선일보에 소설 《이순신》의 연재를 시작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한편 이순신의 일대기를 발표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선총독부는 그의 작품을 검열하고 그의 집 주변을 내사하기 시작한다. 1932년 동아일보에 소설 《흙》을 연재하였다. 소설 《흙》은 계몽운동가 이종준(李鍾駿)의 맏딸을 모델 로 한 실화소설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흙》 역시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신문에 연재됐던 이광수의 소설 흙 의 주인공 허숭을 보면서 정주영은 한때 변호사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정주영은 두 번 연속 변호사 시험에 낙방하고 결국 열아홉이 되던 해 서울로 상경한다. 이광수의 작품들이 당대 청년층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본 조선총독부 당국은 그의 작품 내용을 검열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발표한 단종애사는 무정 이후 작품들 중 무정, 흙 등과 함께 전국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같은 무렵 친구이자 경쟁자인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발표하여 경쟁하게 된다. 조선일보는 1928년 11월 17일 실린 임꺽정 연재 예고 기사에서 "세계적 명작 알렉산더(알렉상드르) 뒤마의 암굴왕 보다도 더욱 그 구도가 크거니와 홍명희 선생의 필치는 오히려 뒤마류의 것보다도 훨씬 장대할 것을 미리 말씀합니다"라고 광고했다. 임꺽정 은 동아일보를 긴장시켰다. 동아일보는 임꺽정 연재 예고가 나간 직후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 연재를 예고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양대 민간지에서 문단의 양 거두가 승부를 겨루게 된 것이었다. 두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인기를 끌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임꺽정이 연재되는 동안 조선일보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의 연재소설을 능가할 수 있었다"( 한국언론인물지 )고 회고했다. 단종애사를 통해 사람들은 단종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사육신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조선총독부에 협력한 중추원 고관들을 한명회, 신숙주로, 조선총독부와 일본 천황을 찬탈자 수양대군으로 해석하였다. 작품은 크게 공감대를 형성하여 많은 남녀노소가 애독하였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단종애사가 막을 내린 다음날은 특별히 동아일보 신문 기사에 단종애사가 끝난 것을 보도하기도 했다. 한편 김동인은 수양대군의 관점에서 쓴 소설 대수양을 짓기도 했다. 후일 이광수 역시 세조의 입장에서 쓴 장편소설 세조대왕을 쓰기도 했다. 1930년대의 이광수 1930년초 경성부 홍지동에 별장 춘원헌을 구입하여 별장으로 활용하며 집과 별장을 오갔다.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은 후대에 세워진 영인미술관 근처에 있으며, 현진건의 집터와 박종화가 살던 가옥이 주변에 있다. 이곳에 체류하며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과 시사, 정치에 대한 담론을 하기도 했다. 박종화와의 오랜 대화 틈틈이 얻은 공통된 결론은 교육을 통한 계몽이었다. 1930년부터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하였다. 경기도 양주의 어느 농촌을 방문했다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농촌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농촌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학생들에게 농촌 계몽운동에 나서줄 것을 권고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는 문인으로서 브나로드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1931년 춘원 이광수가 잡지 동광 대담에서 구한말 개화파 주역이던 박영효에게 개화사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물었다. 이에 박영효는 "신사상은 박규수의 집 사랑방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때 비로소 박규수의 사랑방 모임이 온 천하에 널리 알려진 순간이었다. 1931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겸임 국어국문학 강사로도 초빙되었으며, 각 학교의 문학 강연에도 출강하였고 방송과 개인 교습 등으로 문인을 길러내기도 했다. 우연히 그를 찾아온 소년 피천득에게도 문학인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 후에 피천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다. 고 회상하였다. 또한 1924년 작가 채만식을 추천하여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시키기도 했다. 한편 10세에 모친을 여읜 뒤 삼촌 집을 전전하던 피천득을 잠시 받아주어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기도 했다. 브나로드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 확산되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인 에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1932년 4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춘원 이광수는 장편소설 흙 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주인공 허숭의 입을 통해 젊은 지식인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그는 직접 자신의 작품 흙과 칼럼, 강연을 통해서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열정을 갖고 농촌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민중의 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계속되었다. 1930년부터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브나로드 운동과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 장편·단편 소설과 시를 모집하였는데, 이중 대표작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심훈(沈熏)의 《상록수 (常綠樹)》였다. 그는 1931년 5월에 개최된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1931년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주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一色)’을 뽑는 사진공모전에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 최정원(崔貞嫄) 등을 선발하였다. 당시 삼천리사(社)는 “구라파에 전 구라파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각국에도 그러한 모양으로, 우리 반도에도 전 조선을 대표할 려인 한 분을 찾아” 보자며 “고상전아(高尙典雅)하고 아름다운 미모에다가 균제된 체격, 만신(滿身)이 예지와 총명에 찬 듯한 근대적 려인”을 뽑겠다고 광고를 냈다(『삼천리』, 1931.5). 삼천리 지의 고정필진인 이광수 역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당시 삼천리지는“18세 이상의 조선 여성, 3년 이내의 사진일 것”을 응모자격 조건으로 걸고, 심사는 심미계(審美界)의 권위 를 지닌 이광수, 염상섭, 김억, 안석주, 이승만(李承萬), 허영숙, 나혜석, 김원주, 최승희 등을 선정했다. 1931년 10월 그는 삼천리사 주최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총 326명의 응모 사진 중 특선 1명 포함해 14명의 입상자를 선정해 발표하였다. 1931년 1월초 이광수는 우연히 이순신 가문의 후손에게 엄청난 양의 빚이 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이광수는 이순신 유적지 보존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931년 아산 이순신 장군 묘역이 경매 처분될 위기에 이르자 동아일보는 사설과 기획기사를 연속 보도해 이순신을 재조명하고 유적을 영구보존하자는 운동을 주도했다. 윤치호는 거금을 들여 이순신 묘역과 사당, 위토가 일본인 손에 매각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였다. 이광수는 경성과 평양, 대구, 부산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연설을 통해 이순신 유적지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 기사에도 이를 반영, 충무공 유적지를 탐방하는 연재 기사를 직접 썼고, 소설 이순신 을 집필하였다. 또한 1931년 5월초, 이광수는 동아일보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아산 이순신 묘소의 위토가 경매에 부쳐질 위기에 처한 것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순신 유적지 보존기금 마련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직접 소설로 쓰기로 하고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1931년 5월 25일에 결성된 충무공 유적보존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광수는 1931년 5월 21일∼6월 10일 현지 사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실었고, 6월 26일부터는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소설 이순신전에서 이광수는 이순신을 자기희생적이며 충성스러운 애국자로 묘사했다. 이를 두고 훗날 대한민국 국방대학 국가안전보장문제연구소 연구기획실장 노영구는 “영웅은 영웅이되 충의(忠義)를 강조하며, 인격의 힘으로 열등한 민족을 개조하는 영웅으로 그려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순신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과, 의도적으로 이순신과 조선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엮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931.png|섬네일|right|180px|망중한을 달래는 이광수(1931년 무렵) 1931년부터 장편 소설 이순신을 집필하였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인데도 군관에서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 등장인물이 모두 실존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당연히 조선과 왜국의 대결이었는데, 이광수가 이를 ’이순신 대 원균 등 이순신을 모함한 장수와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바꾸어 놓았다”는 김탁환 교수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32년 1월의 이봉창의 투탄 사건을 애석히 실패했다 하고, 그해 4월의 윤봉길의 투탄 사건을 쾌거라고 주장했다가 헌병의 귀에 들어가 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당했다. 6월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인천항에 도착하자, 자동차로 인천항에 가서 안창호의 호송 차량을 경성까지 따라갔다. 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자 크게 낙심,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안창호를 자주 면회하였다. 안창호의 재판비용과 석방, 구명운동에 나서는 한편 윤치호, 김성수 등을 찾아가 안창호의 출옥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안창호가 심장과 간장 등이 좋지 않음을 들어 병보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안창호는 징역 4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조병옥 등과 연락하며 수양동우회를 운영해 나갔다. 또한 당대의 화려한 자유 연애관으로 비판받던 나혜석, 박인덕과도 자주 만나 교류하였고, 만년에 나혜석이 병으로 고생할 때도 자주 문병을 가기도 했다. 그는 시중에서 나혜석과 박인덕을 비난, 비판하는 것을 위선이라며 조롱하였다. 자신은 불륜과 외도를 하면서 자기 남편과 부인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누이에게는 정결과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며, 자신들은 혼전, 혼후의 문란한 행위를 하면서도 가족들에게만 순결함과 지조를 요구한다며 위선과 기만이 만연한 사회라며 조소하였다. 기존의 유림과 기독교 등의 종교계에서는 그가 탈선과 타락을 부추긴다며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많은 작품은 민족주의와 평등주의,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갱생의 이상을 담고 있어, 당시의 개화된 청년층에 큰 감명을 주었다. 1932년 7월 30일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3년 열차로 시베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1933년 8월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같은 달 28일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와 경제부장 서춘 등 유능한 언론인을 스카우트해 조선일보 혁신에 나섰다. 보다 좋은 조건이라 생각한 그는 방응모의 제의에 응한다. 1933년 7월 19일 조선일보의 제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方應謨)는 한 달 후 동아일보에서 이광수와 서춘(徐椿)을 스카우트해 각각 부사장과 주필(主筆)에 임명하였다. 9월 27일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소설 유정 (有情) 을 연재하였다. 이광수는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겸 취체역(이사),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학예부장, 정리부장 등 5개 직책을 동시에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 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4년 5월에 조선일보 부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선일보의 이사직은 1950년까지 유지하였다. 1934년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실은 글에서 "아랫목에 뜻뜻이 등을 굽고 있는 생활은 암만 해도 투쟁보다도 은둔을 의미한다."는 견해를 펼쳤다. of Yi Kwang-su.JPG|섬네일|left|180px|이광수 가족사진 (1937년)(왼쪽부터 장남 이진근, 이광수, 차남 이봉근(이광수 앞에 선 이), 부인 허영숙, 삼남 이영근(허영숙이 안은 아기))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 연애 등이 유행하였다. 이광수는 "일반 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희구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관념군이요 그로란 호기벽을 만족시킬 만한 관념군"이라고 해석했다( 동광 1931년 1월 1일자). 에로와 그로의 관념론도 좋지만 큰 뜻을 품는 대의지사가 점차 줄어들어감을 애석해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와 조선 왕조시대 1천년의 지나친 엄숙주의는 민중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탈하고 삭막한 사회를 만들었다며 억지로 엄숙한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1930년대에는 유성기(축음기)와 라디오가 각지로 보급되었고, 유행가가 확산되었다. 이 무렵부터 인기있는 곡은 유행가라 하여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행가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노래들 뿐이었다. 장백산인(이광수) 은 이 범람하는 유행가 를 전염병 이라며, "근년에 조선에 유행되는 가요는… 부어라 먹자 두들겨라 식이 아니면 주색의 방종한 향락을, 검열관이 허하는 한에서 고취하는가 십흔 것들…"이라고 비판했다.(1934년 4월 19일자) 그는 유행가라는 노래들이 전부 남녀간의 사랑만을 노래한 곡들이 많지 다른 내용은 없다며 식상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대중가요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1934년 그가 참여하던 어린이잡지인 《어린이》지가 경영난과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결국 123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만다. 1935년 안창호가 가출옥하자 두부를 사들고 서대문형무소로 가서 영접하였다. 그해 조선일보에 를 연재하였다. 그는 시와 작품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를 가해자로, 한국인을 피해자로 역할을 상정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손녀 둘을 데리고 살던 할머니는 곱상의 손녀는 부잣집으로, 밉상의 손녀는 가난한 집으로 예웠다. 가까히 사는 곱상의 손녀가 할머니를 모셨는데 구박이 심하고 굶기다시피하여 밉상의 손녀를 찾아가다 고개 마루에서 기진하여 숨진다. 맘씨 고운 밉상의 손녀가 찾아와 보리밭가에 묻어드렸고 이듬해 그 무덤에서 피어났다는것이 할미꽃의 기원 설화였다. 춘원은 가난하고 무력한 이 피해 이미지를 보리밭가 찌그러진 무덤에 핀 할미꽃에 투영하였다. 역사란 가해·피해의 대결구도로 꾸려져 내렸는데 할미꽃은 한국인에게 있어 피해편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꽃이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신화, 민담을 시와 소설로 풀어냈고, 이순신은 조선의 독립운동가, 이순신을 모함하는 대신은 일제와 총독부에, 사육신을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신숙주와 한명회를 일제와 총독부에 비유하였다. 1930년대 초, 그의 작품의 뜻을 해석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그를 위험한 반체제 문인으로 규정하고 감시하게 된다. 1936년 6월 1일 경성일보사 초대사장이자 조선 언론정책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아베 미쓰이에의 흉상 건설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신사 참배에 협조를 부탁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37년 일본을 방문, 이때 일본의 유명한 기생집인 명월관을 방문했다. 춘원 이광수도 도쿄 명월관을 방문한 기록을 조광 1937년3월호의 ‘동경문인회견기’에 남겼다. 와세다대 은사였던 요시다 교수와 야마모토 개조사 사장 등 문인들과 일본식 고급요정에서 저녁을 함께한 춘원은 조선 요정에 가보고 싶다는 주위 권유에 따라 2차로 명월관을 찾는다. Prison2.JPG|섬네일|일제 강점기의 서대문 형무소 그는 종종 명월관을 찾아 술과 노래를 즐기곤 했다. 황태자 이은 부부와 이광수는 도쿄 명월관을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는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 직후,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경성부에서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조직원을 불라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조직원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건강했던 그는 독방에 수감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병 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 영어생활을 하였다. 1938년 초 6개월 만에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이 무렵에 《사랑》, 《세조대왕》 등을 집필하였다. 이광수, 1937년 이광수의 사상, 세계관은 작품으로도 투영되었는데 1910년 데뷔 이후 초기에는 기독교적 경건함과 애국 계몽주의적인 경향을 띄었다. 이광수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 연애를 고취하고, 성인이 된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개입하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족보를 없애고 위선적인 문벌 사회와, 유교의 학통과 학풍 등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인륜을 어지럽히고 금수화를 획책하는 인간이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무정에서는 서양의 교육을 불신하는 국내 사람들을 조롱하며 신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에 대한 불신을 버릴 것을 역설하였으며, 흙에서는 농민계몽 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적 시민윤리와 사회 계몽을 역설하였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본질에 갈등, 번뇌, 환멸감을 느끼면서 점차 현실지향적으로 변해갔다. 그 자신도 1930년대의 한 작품을 발표할 때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1930년대에 갈 수록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처음 사회 계몽과 개혁을 설파하였으나 사람들은 호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낭만주의자나 공상주의자라고 비판하거나, 단지 소설과 역사 소설에만 관심을 갖는 민중들을 보고 점차 실망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종종 남녀간의 애정, 정사 관계 등의 단편작과 시를 발표했는데 1919년의 베이징 애정도피와 연관시켜서 그를 비방하곤 하였다. Chang-ho 1937.jpg|섬네일|right|120px|수감 무렵의 안창호 서대문 형무소 옥사 내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국에서 총 181명이 체포돼 이중 4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이광수, 조병옥 등 11명에게 징역이 선고됐다. 1938년 3월 10일 자신의 스승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가 병사하자, 이광수는 커다란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홍난파와 현제명의 이탈을 비판하면서 인간 사회의 신뢰와 의리라는 구호에 대한 회의와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1910년 문단 등단 초반부터 이미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도덕, 정의 등의 존재를 의심하던 그는 정의와 가족간의 의리, 애정에 대해서도 심히 의심, 회의하게 되었다. 그는 죽은 안창호의 곁을 떠난 홍난파와 현제명 등을 비판하였지만 자신도 심적인 고통으로 방황하며 재판을 받던 중 불면증과 신경증이 심해지자 병보석을 신청한다. 그 해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 그리고 바로 병보석이 받아들여져 보석신청 후, 집행유예로 출감하였다. 출감 직후 그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1939년 1월 이후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안창호와 유길준을 절세의 애국자라고 확신하던 그는 윤치호와 자주 교류하며 실력 양성론에 대한 확신을 다져나갔다. 훗날 이광수는 윤치호에 대해 “8개 국어를 하는 어학의 천재로서 영어는 서양인보다 더 잘 한다”고 술회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사고방식과 의식의 계몽이 없이는 절대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크게 상심한 이광수는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당시 대처승이었던 청담(靑潭) 순호(淳浩)를 만났다가 그와 불교의 교리를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된다. 순호를 만나서는 일주일간 불교사상에 관한 격론을 펼친 끝에 순호는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으로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 (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jpg|섬네일|right|200px|동료 문인들과 함께 (1937년(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순) 1938년 12월 14일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 에 참석하여 강연을 한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나섰다. 이어 이광수는 민족 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자 고 주장하면서 “의례 준칙의 일본화”와 “생활 방식의 일본화”를 역설했다. 그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이광수는 이광수 (李狂獸)라는 빈축을 사게 되었다. 형식적이던 당시 사회의 도덕, 인륜의 구호에 염증을 느끼던 그는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친구, 가족 등의 인간 관계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시중의 비난 역시 속된 위선자들의 비판에 불과하다며 일축,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름뿐이고 실천하지 않는 헛된 도덕과 인륜의 구호만이 난무한다며 현실을 조소하였다. 이후 1930년대 초에 구입한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에 한동안 칩거해 있기도 하였다. 그 해 1939년 3월 14일 북지(北支)황군 위문 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을 맡는 등 문단사절 파견을 주도하였고, 7월 잡지 《삼천리》에 문단사절의 의의 를 발표해 조선민족이 일본국민이라는 견지와 감지(感地)에서 문예를 창작하거나 평론하려는 국민주의의 문인이나 문학은 조선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나사변을 계기로 조선민족의 황민화라는 대변혁이 일어났다. 이번 문단사절은 실로 이 변혁을 문단의 입장에서 표시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그에게는 수많은 협박 편지와 협박 전화가 쏟아졌고, 그의 주변에는 최남선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떨어져나갔다. 1939년 6월 30일 그는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로 1939년 11월 3일 발족한 문인단체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1월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서 협회 주최 전선(前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2월 3일 남대문통 금천대 회관에서 열린, 조선문인협회 결성 피로를 겸한 사업계획협의간담회를 주도했다. Lee Kwang Su.jpg|섬네일|left|130px|1939년 12월 12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 개명 권고 칼럼 1939년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 시행을 발표하면서 조선인 사회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 을 선언하기도 한다. 1939년 12월 12일 이광수는 경성일보에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창씨개명 지지 주장에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은 불가피한 일이며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 이라고 답하였다. 39년 12월 20일 오후 4시부터 서울 반도호텔에서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공개 원탁회의가 열렸다. 일본인 측에서는 유가미, 매일신보의 이노우에, 그리고 몇몇 인사들이 참석했다. 조선인 측에서는 한상룡, 장덕수, 이광수와 윤치호가 참석했고, 최린이 사회를 보았다. 매일신보 주최 원탁회의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요즈음 젊은이들을 건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하는게 토론 주제였다. 이때 이광수는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상민이 재산을 모아 양반의 족보를 돈주고 사서 혈통을 위조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신문지면과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광수는 다시한번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그는 총독의 은혜를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창씨개명의 취지에 적극 찬성하고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앞장서서 창씨개명하였다. 이후 그에게는 무수한 협박과 투서, 비난이 쏟아졌다. 윤치호는 그에게 창씨개명을 적극 지지한 것은 섣부른 행위라며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사설란에다가 이광수는 香山光浪 (가야마 미쓰로)이라는 창씨개명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창씨개명을 적극 옹호하는 한편, 자신의 창씨개명을 합리화했다. 창씨개명.jpg|썸네일|320px|right|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창씨와 나〉 그가 창씨개명을 단행하다 다시 그의 집 앞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돌과 인분, 쓰레기 등을 던졌다. 하루는 벽초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가 “최린, 이광수가 창씨개명을 했답니다. 이런 ×자식들 때문에 민족적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입니까”라며 흥분했다. 그러자 한용운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 자들을 과대평가하고 있소.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개가 있다면 당신에게 크게 항의할 것이요.”창씨 사건 뒤로 한용운은 그와 절교하여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1940년 2월 22일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 로 지원병 훈련소에 1차로 1일 입영견학을 했다. 또한, 이 무렵 소설 〈무명〉으로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최하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8월 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주최로 내지 작가인 기쿠치 칸,고바야시 히데오,나카노 미노루 등이 중심이 돼 반도호텔에서 열린 문예좌담회에 참가했다. 9월 29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지원병행가〉가 방송되었다.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 로 지원병훈련소에 2차 1일 입영견학을 갔다왔다. 12월 25일 황도학회가 만들어질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0년 6월 3일 이광수의 집을 방문한 윤치호는 그의 부인에게서 "자기 남편이 창씨개명한 후 1천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하나같이 욕설을 퍼붓거나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6월 무렵에도 그는 하루 평균 5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조선총독부에서도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살생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8000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 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충격에 빠진다. 1941년 양주군의 봉선사에 내려가 암자 관무헌에 거처, 외부 출입을 줄이며 4년간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1940년 맨 먼저 창씨개명을 한 이광수는 1948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수감된 뒤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저항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에 협력하고 호의를 얻어낸 다음, 일본으로부터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을 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창씨개명에 가장 먼저 앞장서고 동료들에게도 창씨개명을 권고하는 것에 다른 동료 문인들은 못마땅히 여겼다. 이광수는 1940년 경성일보(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일본어로 발행된 신문) 창간을 주도한 도쿠토미 소호에게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을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1941년 중국 난징(南京) 대동아문학자대회에 함께 참석한 소설가 김팔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우리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생겨 조선 사람의 문부대신도 육군대신도 나오게 되는 날이면 그때 가서야 일본인이 깨닫고서 이러다가는 일본이 조선인의 나라가 되겠으니 안 되겠다 하고서 살림을 갈라가게 된단 말이오. ...(이하 중략)... 그제야 우리는 삼천리 강토를 되찾아가지고 독립한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그는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으려면 일단 당국자들에게 신뢰감을 얻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당국으로부터 참정권을 얻어내고, 그 뒤에 자치권을 얻고, 일본 정부의 조선인 각료와 인재들의 진출 등의 과정을 거쳐서 일본 스스로가 조선을 독립시키게끔 단계적으로 밟아나가자고 역설하였다. 1941년 1월 20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애국일의 노래〉가 방송되는 한편, 일문 산문집〈동포에 부침〉을 발표, 간행하였다. 1941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대해 경성고법이 전원무죄를 선고했으나 최윤세와 이기윤은 이미 감옥에서 숨지고 김성업은 불구가 된 뒤였다. 또한 그가 사표로 받들던 안창호도 이미 사망한 뒤였다. 또한 일부 동료들은 전향하여 친일파가 되거나 총독부 고관에게 뇌물을 바치고 청탁을 하기도 했다. 이 무죄판결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다. 1941년 5월 5일부터 이른바 국민연극 을 표방하는 현대극장 부설 국민연극연구소에서 예술개론을 강의했다. 8월 25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관한 채권봉공대 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 을 팔았다.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10월 18일 조선임전보국단 대구지부 설치를 위한 위원으로 파견되었다. 12월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25세면 인생 끝 이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또한 일본에는 자신들이 전쟁터에서 다 죽고 나면 일본 땅에 조선인들이 모두 들어와 살 것 이라는 말도 떠돌았다고 한다. 이때 이광수와 최남선은 하루 빨리 일본에 협조해 일본의 시민이 되는 게 살 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1942년 2월 27일부터 29일까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 전진대강연회 연사로 활약했다. 5월 경성일보 귀빈실에서 조병상,이숙종 등과 일본인 고관들이 모인 좌담회에 출석하여 황민화를 찬양했다. 5월 15일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대연설회에서 획기적 대선물 이라는 연재로 연설했다. 6월 10일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일본군인이 되는 마음 가짐 을 듣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11월 3일부터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12월 8일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 에서 시를 낭독했다. Gwang-su 1943.png|썸네일|오른쪽|200px|일제 강점기 후반의 이광수 (1943년) 1943년부터 그는 여러 학병 권유의 글과 연설을 언론과 방송 등을 통해 번갈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3년 2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국민개병가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4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김용제(金龍濟)·최재서(崔載瑞)·김기진(金基鎭) 등과 같이 주도해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협회,조선센류협회, 국민시가연맹 네 단체가 통합해 결성한 조선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를 결성하여 조선문인보국회의 이사에 선출되었다. 8월 18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희망의 아침〉이 방송되었다. 8월 16일 아서원에서 열린 조선문인보국회 제1회 이사회에 참석했다. 1943년 학생이던 시인 황금찬은 일본 도쿄에서 이광수를 만났다. 황금찬이“지금 우리말도, 우리 글자도 없는데, 그래도 문학을 해야 하냐”고 묻자, 이광수는 “문학은 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언어를 빼앗겼지만 사람까지 빼앗기진 않았다. 일본말로 글을 썼더라도 그 글을 쓴 사람은 한국인이 아닌가”라며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1944년 1월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덕망있는 인사를 앉히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결핵과 폐렴, 간염 등으로 고생하던 이광수는 1944년 3월 은둔생활을 위해 경성부의 집을 청산하고 양주군 진건면 사릉리 주변에 땅을 사고 진건면 사릉3리 520에 집을 지은 뒤 그곳으로 가서 짓고 농사를 시작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춘원을 친일파이기보다는 문인으로 존경했다. 또한 신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과 여성들은 그를 “춘원 선생님”이라며 존칭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말 경성부에서 아이들과 내려온 부인 허영숙은 “경성에서는 ‘친일파 이광수타도’라는 구호가 나붙고 험악하니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고 하였다. 1943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가 주관한 “결전소설과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했다. 1943년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작가 최남선, 기업인 김연수, 친일파 정치인 이성근(李聖根) 등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 으로 연설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 최남선은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라며 한일 양국 공통의 상무(尙武) 정신을 역설했고, 이에 이광수는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 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며 동조했다. 그는 1943년 12월에도 일본에 체류하며 도쿄에 파견되어 일본 유학생들의 학병 지원 권고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이광수 1944년 2월 26일 경성 종로서가 주도한 총후 황민등에서 실무위원을 맡았다. 1944년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이 됨과 동시에 같은 날 열린 결전태세즉용 재선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고, 8월 17일 적국 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 이라는 제목 아래 문학도 결전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그 뒤 다시 양주군 진건으로 내려와 요양하였다. 1944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 왕징웨이 정권의 수도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했다. 한편 조선 총독부는 그에게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자신이 이 직책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명성은 사라질 것이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당시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당시 그를 조선의 유력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서에 그에 대한 평을 남겼다. 1945년 1월 4일부터 17일까지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大和同盟이 주도한 처우감사 총궐기 재성유지협의회 운동준비위원으로서 처우감사총궐기전선대회 에 참여해 강연했다. 2월 11일 대화동맹(大和同盟) 준비위원 겸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2월경 일본 신태양사(구 일본모던사)가 주관하는 제6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불령선인들을 전부 체포해서 집결시킨 뒤 총살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1945년 3월 잠시 은신해 있기도 했다. 그 해 4월 조선총독부에서 특별히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사양하였다.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으며, 6월 24일 정치깡패이자 제국의회 의원 박춘금이 당수인 대의당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광수, 1940년대 초반 태평양 전쟁 무렵 이광수는 시, 소설, 평론,좌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천황제와 황국신민화 찬양,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 정당화와 전시동원 독려, 그리고 문학을 통한 보국 등을 적극 선전하는데 주력했다. 작품으로는 1939년 2월호 동양지광 잡지에 발표한 시 <가끔씩 부른 노래>를 시작으로 1940년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1940년 4월 조선일보에 <내선일체와 조선문학>을 발표했다. 1940년 11월에는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국민총력), 1942년 12월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국민문학) 등을 발표했고, 1943년 2월에는 춘추지에 <폐하의 성업에>를, 1945년 1월 18일에는 매일신보에 <모든 것을 바치리> 등 103편의 시,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또한 <조선의 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1943년 3월 이후 은둔생활과 농사, 요양 등을 하며 가끔 강연회에 참석하였고 이후 광복 직전까지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다. 전향 이후 이광수의 친일논설집은 1941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내용면에서는 중국과의 사대관계 단절 위에 일본과 유대강화를 필연적으로 보는 내선일체론, 후방에서 천황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총후봉공론, 후천개벽을 곧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는 시대로 파악하는 대동아 공영론 등 이광수 친일론의 골격을 담고 있다. 글 곳곳에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것을 내비치는 고민을 담고 있어 그 내용을 곧 이광수의 본심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특히 소극적 친일론에서 적극적 친일론으로 돌아선 이광수의 논설을 듬뿍 담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이 정말 그의 본심이었는지의 의문이 글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때 발간된 친일논설집은 1997년 작가 이경훈 등에 의해 현대어로 번역되어 재출간되기도 했다. 1945년 3월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 불령선인, 지도자들을 압송하여 처형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가려다가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양주군 진접면 초막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8월 양주 진접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 8월 15일 김동인과 함께 광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45년 8월 보름날 정오에 일본천황 유인이 울음 섞인 소리로 온 일본인에게 부득이 항복한다는 포고를 할 때, 라디오 앞에 외배(이광수)도 울면서 그 방송을 들었다. (김동인의 증언)” 그는 일제 식민지가 오래갈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광복은 그에게 충격이 되었다. 8월 15일 춘원은 광복 후 봉선사로 돌아와 차와 경전의 향기가 가득한 다경향실(茶經香室)에 머물렀다. 1921년에 결혼했던 아내 허영숙과는 1946년 5월 21일에 합의 이혼하였는데, 서울신문은 이 소식을 전하며“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자)라며 비판하였다. 해방 직후에도 일제하에 출간됐던 심훈의 《상록수》와 함께 이광수의 《무정》 등은 재출간되었고, 여전히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1945년 9월부터 그는 일제 말의 전향 선언으로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남녀간의 연애, 정사에 대한 단편, 장편과 시들도 있어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유림의 비난을 받는 등의 수난을 당했다. 그는 서울 시내의 허름한 쪽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칼럼과 기사 외에 송진우와 김성수가 보내주는 생활비에 의존하였다. 불운한 생활 와중에 윤치호의 병문안을 다녔고, 병원에 입원과 통원진료를 반복하던 나혜석을 찾아 위문하였으며 그 해 12월에 윤치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한편 윤치호에 대한 투석, 규탄 시위 등을 이광수는 직접 지켜보았고, 병중에 외출을 나선 이광수를 향해 야유를 퍼붓고 돌과 휴지를 던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광수의 가족들에게도 비난과 멸시가 가해졌다. 뮤리엘 서재필 주요한.png|섬네일|right|180px|1947년 서재필 귀국 직후 기념촬영 사진(앞줄 왼쪽 두 번째는 춘원 이광수, 세 번째는 딸 뮤리엘, 가운데는 서재필, 뒷줄 가운데는 주요한(뮤리엘 뒷편에 선 남자) 1946년 9월 2일 월요일 새벽, 이광수는 6촌 동생이자 승려였던 이학수의 주선으로 봉선사로 숨었고(봉선사 주지였던 이학수는 당시 조선불교 경기교무원장으로 있었다) 이학수의 도움으로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국어, 작문 교사로 영어, 국어, 작문을 가르치며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이광수는 현제명이 작곡한 광동중학교 교가에 가사를 붙였고, 1976년 5월 29일 봉선사와 광동중학교 입구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47년 1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부터 안창호의 평전 집필을 의뢰받고 《도산 안창호》(1947. 5)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했다(당시 친일에 대한 비판 여론 때문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없었으므로 책에 “춘원”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1950년에 간행된 제3판부터였다). 이때부터 다시 글쓰기에 몰두하여 1947년 6월 《꿈》을 면학서포에서 간행했고, 그 해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가 출간될 때 윤문 작업에 참여하였다 1948년 12월에 간행된 이광수의 자서전 〈나의 고백〉 1948년 1월 이후 한반도의 정가에서는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제기되었는데, 이광수는 정부 수립론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이나 언급을 회피하였다. 1947년 12월과 1948년 10월에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주로 여성체험과 관련하여 표현한 〈나-소년편〉과 〈나-스무살고개〉를 간행했다. 1948년 6월에는 1946년 10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자신의 생활세계와 내면세계를 면밀하게 기록한 글에 당시 좌익을 상쟁(相爭)의 논리 라며 비판하는 《내 나라》 등 3편의 논문을 추가한 《돌베개》를 생활사에서 간행했다. 1948년부터 이광수는 장덕수를 추모한 전기문 설산과 나 를 저술하였는데, 이광수는 장덕수를 “설산은 호 그대로 개방적이요, 결백하고 어린애와 같이 표리가 없는 사람” 이라며 추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이광수, 최남선 같은 이데올로그형 협력자들은 배제됐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격렬한 성토의 대상이 되었던 이광수는 12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춘추사)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 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나의 고백》에는 친일에 대한 변호 외에도 〈친일파의 변〉이라는 부록이 있는데, 〈홍제원 목욕〉, 〈삼학사〉, 〈관공리는 반민족자였던가〉, 〈미국인의 친일파관〉, 〈대한민국과 친일파〉 등의 글에서 이광수는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안았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광수, 반민특위 수형 시절 (1949년 2월초) 반민특위 재판 공판 모습. 1949년 1월부터 이광수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반민특위의 2차 검거(문화계)가 시작된 첫날인 1949년 2월 7일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다. 1차 심문이 끝난 후 조사관에게 약속한 대로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썼다. 같은 날 같은 죄목으로 검거된 최남선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자열서》를 쓴 반면,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자세를 그대로 견지했다. 자신이 태평양 전쟁 무렵 협력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광수는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 8천 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와 자신을 바꾸려했다"고 항변하였다(다만 그 살생부 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나오지 않았다). 한편 이광수의 셋째 아들 이영근(당시 중앙중학 6학년)이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아비는 폐병 3기, 신장결핵 등으로 사선(死線)에서 방황한 적이 있습니다."라며 아버지에 대한 보석 신청과 함께 자신을 대신 수감해 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투서하였고 이광수는 1949년 3월 4일 고혈압증 등의 사유로 특별히 병보석으로 출감되었고 석방 이후 다시 봉선사로 돌아와 틈틈이 글을 쓰며 생활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 되어 칼럼을 송고하던 중 폐렴과 결핵 등의 악화로 양주군 진건면으로 내려와 요양하는 한편 칼럼, 강연 활동에 초빙되어 전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7월 3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약칭 민강위)에 참석하고, 8월 20일에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 그는 여기서 김규식을 지지하였다. 1950년 1월 다시 장편소설 《서울》을 태양신문에 연재했으나, 좌익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문제가 되어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유작 《운명》을 집필했고, 5월에는 《사랑의 동명왕》이 한성도서에서 간행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6월 22일, 자택에서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졌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7월 5일에 효자동 집이 차압당하고, 6일에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7월 12일, 이광수는 김규식, 김동원, 안재홍, 방응모, 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되던 도중 지병인 폐결핵에 동상까지 겹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친구 홍명희가 김일성의 허락을 얻어 강계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다시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이광수는 1950년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승용차 안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오랜 친구인 홍명희, 안재홍, 평소 그의 작품을 애독하던 김원봉 등에 의해 장례식을 치루고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되었다. 6․25 전쟁 후 허영숙은 식솔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그가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글을 쓴 점을 두고 비판이 가해졌고, 그가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된 것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 유교적인 가치관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안창호, 김구, 김규식을 지지하여 오래도록 재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동료 문인들인 박종화, 이희승, 최현배, 최남선 등에 의해 복권이 시도되었고, 1957년 11월 23일 사상계사 주최로 육당,춘원의 밤 이 개최되었다. 1959년 12월 춘원선집 (광영사)가 발간되었다. 1963년 11월 이광수전집 (삼중당)이 완간되어 13일에는 흥사단, 삼중당 주최로 이광수전집 완간기념강연회 가 열렸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광수의 작품과 활동에 대한 조명,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1년 10월 신선 이광수 전집 이 간행되었다. 북한에서도 1980년 이후 그에 대한 조명과 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의 이름이 붙은 평양 리광수고등중학교 가 개교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그가 한국 전쟁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소련과 미국 등의 교포를 통해 한국 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때 그가 1970년대까지 북한에 생존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1991년에 그의 셋째 아들 이영근이 북한측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1950년에 사망한 것을 확인하였다.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된 이광수의 묘는 홍명희, 안재홍 등의 사후 버려졌다가, 1980년대 중반 주택 개발 문제로 그의 시신을 찾으라는 북한 당국의 지시로 인민군 병사들이 주택의 지반을 파헤친 끝에 시신을 찾아내 신미리 특설묘지로 이장하였다. 평양특별시 룡성구역 룡궁1동 산기슭의 특설묘역으로 다시 개장되었다. 그가 머무르던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그의 자택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이광수의 작품《무정》 영문판이 그의 손녀 이성희에 의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소설, 전기, 시집, 평전, 수필 외에도 서예에 능하여 많은 서예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어린 희생》 소설 《무정》 《재생》 《소년의 비애》 《개척자》 《무명》 《꿈》 《나》 《윤광호》 소설 《흙》 《마의태자 《원효대사》 《춘향》 소설 《단종애사》(1929) 소설 《유정》 《사랑》(1938)(1987년 KBS 1TV에서 드라마화) 소설 《세조대왕》 《혁명가의 아내》 《무명》 《애욕의 피안》 《할멈》 《가실 (嘉實)》 자서전 《나의 고백》 기타 불교 소설로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마의태자》 등도 썼다. 《이순신》 전기 《안창호》 《사랑의 동명왕》 (1965) 설산과 나 춘원시가집 (春園詩歌集) 금강산유기 오동 (1936) 우덕송(牛德頌) 돌베개 《검둥이의 설움》 해리엇 비처 스토 원작 《정육론 情育論》 《신생활론》 《공화국의 멸망》 《자녀중심론》 논설 《어린 벗에게》 논설 《민족개조론 (民族改造論)》 《민족적 경륜》 사료취선 (史要聚選) 4권 사상을 접하면서 이광수는 마태오 복음서를 읽고 세례자 요한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했을 정도로 감동받았으며,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기독교 사상이 나타나 있는 예술론에 심취하여 이같은 기독교 정신을 자신의 작품 속에도 구현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1920년에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문젯점》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이광수가 당시 조선교회의 문제점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조선 교회는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다. # 조선 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너무 이분화해서 교회에만 치중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인 세상 일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외면한다. # 상당수 개신교 목사들의 수준이 형편없다.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신앙들이 너무 많다. 기도가 만병통치약인 줄 안다. 한민족을 계몽하자면서 미신적 신앙을 전수하니 이게 왠말이냐? # 조선교회는 개신교회와 천주교회 모두 합쳐서 100년이 넘는 선교역사를 가졌는데, 어째 조선에는 제 소리 하나 없이 다 가져온 것이냐?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자주성)이 없다. # 선교사들과 그들이 인정하는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가졌다. 다양하고 자발적인 성서를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 조선의 기독교는 감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에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송영옥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어 있지만, 그는 기독교 사상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고 고양된 정서의 감동을 통하여 깨닫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광수의 작품 ‘만주에서’의 화자는 한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을 연달아 언급한다. 그런 화자의 시점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관찰하는 시점이 아니라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며 달리는 기차와 매개된 시점이다. 그 중 강(江)의 자연적 위치보다는 경의선 철도의 노선에 바탕을 둔 시점이다. 근대인에게 자연은 재구성되고 정복된 존재다. 기차를 타고 누빌 수 있는 땅, 과학기술과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새롭게 재조직된 자연은 바로 인간이 정복한 식민지로서의 자연이다.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신문에 장편소설 《흙》 등을 발표하였다. 작품 흙에는 브나로드 운동의 활동상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작품 흙에서는 주인공 허숭 등이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스타일로 아침을 먹는 장면 등 서구식 생활을 소개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의 작품 꿈 은 바로 낙산사에서 있었던 한 스님의 사랑을 관음상과 교감시킨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 조신의 꿈 설화에서도 힌트를 얻기도 했다. 그의 작품 꿈은 무용가 김복희의 꿈 탐욕이 그리는 그림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1990년에는 영화감독 배창호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후대의 작가 김탁환은 이순신을 쓰면서 이순신의 적은 원균이 아니라 왜 수군 장수였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부각시킨다. 김탁환은 작가의 말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본 구도는 조선 조정의 당파싸움 및 수군 내부의 쟁공과 반목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적이었던 왜군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두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김탁환은 “이것은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대립 구도 대신 이순신 대 이순신을 모함하고 핍박한 장수와 대신들을 대립구도로 택한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구도에서는 조선과 왜군의 대립을 조선인 내부의 대립으로 치환시키려는 민족개조론의 발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에서 남녀간의 사랑과 낭만을 다루었다. 이광수가 무정 에서 힘주어 강조한 것은 정(情)이고, 그것은 후대에 김동리나 박완서에게, 심지어 최근 젊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져 변주되어 왔다. 20세기의 한국의 소설, 작품, 드라마, 영화 등에는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작품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은 그토록 그리워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나서 손만 잡고 잔다. 이는 20세기 초 이광수의 소설들에서부터 시작된 장면이다. 그는 식민 통치의 억압과 현실의 부조리, 구 사상과 새로운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과의 갈등, 유교적 가치관과 기독교 사상의 대립, 혹은 유교적 권위주의와 서구식 시민 민주주의 간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였으며, 넓게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억압과 폭력에서부터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에 의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권위와 관습이라는 이름 하의 폭력을 적극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를 방대한 양의 소설, 논문, 칼럼과 논설문, 시가, 수필류, 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이광수는 늘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게으름, 나태함, 안일함, 위선, 허례허식 등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와 일본처럼 근면함, 성실성, 진솔함,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몸에 익히고 생각을 바꿔야만 독립의 첫 걸음을 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요령과 술수, 시기심, 거짓말 등이 만연하다며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않고는 독립을 이룩할 수 없으며, 독립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없으리라고 봤다. 그는 이렇듯 열등한 민족성을 지닌 조선인들이니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요,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신돌석을 밀고한 조선인부터 한일 합방 이후 다수의 조선인들이 일제 체제에 협력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점 등은 독립운동에 대한 환멸을 불러왔다. 또한 시기심과 술수와 요령, 거짓말이 만연한 것이야 말로 조선인의 가장 열등한 습성이라며 이러한 습성을 고치고 진실되고, 참될 것을 계속 호소하였다. 이광수가 잡지 개벽 에 민족개조론 을 발표한 직후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 당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손해를 보는 지름길이라며 이를 한탄하였다. 이를 두고 언론인 김대중은 춘원 이광수가 쓴 민족개조론 을 읽으면 우리는 모두 슬퍼지기 마련이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비참하고 천박했었는가 하는 점이 슬프고, 그래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 슬프고, 옳은 소리를 옳지 못한 시기에 내놓은 작가의 시대착오가 슬프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글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가리고, 또 그 글을 쓴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다시 읽어보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민족을 개조 하기보다 민족을 개선 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고 평하였다. 작가 이인화는 그 논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수의 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극한의 비전을 제시했던 작가 이광수의 용기에 진정한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 고 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의 글에서 오늘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며 그가 그 글을 쓴 시점과 상황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어도 그의 민족개조론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고 평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진실되고 참될 때만이 조선이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20년대에 이광수는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론을 품게 되었다. 1930년대에 가서는 독립무용론을 주장했다. 이때의 이광수는 3·1 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남들이 하자 하니까) 따라서 한 것 이라 하고 식민지하에서의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낸 이후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에 대한 평가나 한국인론, 한국사회론은 늘 격렬한 논쟁을 촉발하는 강한 인화성을 보여왔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주정 잘하기로 첫째가 아라사(俄羅斯), 둘째가 일본, 셋째가 조선사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족의 정신 개조와 함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기틀이라 보았다. 1924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발표한 ‘민족적 경륜(經綸)’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조선에 새로운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 새로운 문화는 바로 정치, 산업, 문화의 근대화였다. 조선에 새로운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정치적, 산업적, 교육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교육, 정치, 산업 운동이 연합해서 일어나야 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 운동이라고 봤다. 그는 독립 이전에 실력 양성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실력이 없이 의지만 갖고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는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봉건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권리와 가치를 존중해주지 않았으며, 여자도 인간이고 따라서 여성을 해방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여자가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가정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자유로운 연애와 자유로운 성관계를 포함한 자유 연애는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그가 고아인 점을 언급하며 상놈이 주장하는 못된 사상이라며 비방하고, 각 언론에 그의 작품이 실리지 못하게 전화항의나 방문 등을 통해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무정 등은 이러한 여성해방론을 반영시킨 작품이었다. 이광수는 당시 전 조선 청년의 지적 표상이요, 전 조선 여성의 연인 이라 일컬어질 만큼 인기 정상에 올라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유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접한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탄복하고 이를 조선 사회에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는 열등감과, 고아인 그에 대한 부모 없는 자식이라는 지속적인 냉대와 멸시, 어머니 김씨가 세 번째 부인으로 사실상의 서자 취급을 받은 점 등은 그로 하여금 조선 사회의 인습에 저항하거나, 조선 사회의 기성 가치관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는 여성이 가정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연애하여 여성이 해방되는 것과 조선 사회에 잔존하는 양반, 상민의 신분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봉건의 늪에서 민족을 구제하고자 했던, 그 열의가 너무나 강렬해서 분별지마저 상실했다 는 시각도 있다. 이광수는 늘 젊은이들에게 소처럼 살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는 성실성을 인간의 최고의 미덕이라 예찬했다. 춘원 이광수는 수필 우덕송(牛德頌) 을 썼을 만큼 소를 좋아했다. 그의 느리고 부지런함, 그의 유순함. 그러면서도 일생에 한두 번 노할 때에는 그 우렁찬 영각, 횃불 같은 눈으로 뿔이 꺾이도록 맥진(驀進)함, 그의 침묵함…. 이라 하여 소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예찬하였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아이들에게도 순순히 끌려가는 모습이 예수와 닮아 거룩해 보이기도 하는 소의 우직함을 칭찬한다. 그는 소의 성실성과 우직함을 예찬, 강조하였다. 소파 방정환을 만나 어린이도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감화된 그는 평생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반말을 쓰지 않고 존댓말을 썼다. 또한 자신보다 10세, 20세 이상 연하인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형님, 아우님 하기도 했다. 그가 한때 사귀었던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은 해방 직후에 그를 만났는데 그가 반말을 쓰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한 것을 회고하기도 했다. "춘원은 내가 인사하면 어린 나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어요. 말소리와 표정이 언제나 부드러웠고 눈동자 빛깔이 엷어 꼭 서양사람 같았죠." "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10세, 20세 이상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고, 또한 젊은이들의 의견이라 하여 무조건 반박하거나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그를 줏대없다, 체신없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또한 이광수는 조선 사회가 지나치게 엄숙함만을 강조한다며 이것 역시 가식적인 조선의 한 모습으로 규정했다. 그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외에도 소설과 작품을 통해 남녀간의 평등과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과 여자에게도 욕망과 애정, 성욕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파하면서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비난 과 함께 1920년대, 30년대, 40년대 뭇 여성팬들의 인기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는 연애는 남녀 본연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며 자유로운 연애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 라 주장했는데 이는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춘원은 조선 사회가 비인간적으로 여성을 괴롭히고 억압하고 학대해왔다 전제하고, 봉건 제도의 압제와 유교 이념의 억압 하에 수백년을 신음하고 시달려 온 여성의 해방은 자유로운 연애로서 완성시킬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나혜석, 김일엽의 연인이었고, 김명순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1917년-1918년 무렵에는 잠시 나혜석의 연인이었고 1930년에는 김일엽과도 잠시 사귀기도 했다. 그는 나혜석이 정조 취미론과 이혼 고백장 등으로 지탄을 받을 때도 그를 도와주었고, 김일엽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적극 옹호하였다. 또한 김명순의 후견인으로 그를 문단에 발탁하였으며 이병도의 집에 머무르도록 주선해주었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이들의 자유연애를 비난할 때마다 이들의 자유 연애론을 인간 본연의 감정이며 솔직한 자기 표현이라며 옹호하였다. 이광수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자신이 김성수, 송진우 등과 중앙학회, 윤치호 등의 후원으로 유학 생활을 한 것을 늘 인식하고 있었고, 일본 유학 시절부터 젊은 중고등학생 문인, 청년 문인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지도, 후원하였다. 시인 구보 박태원도 춘원(이광수)에 의해 여러 지면에 시를 발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소학교에 다니던 소년 피천득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발굴하였다. 이광수는 그를 금아(琴兒), 즉 거문고소년으로 불렀다. 소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경기고)에 다니던 소년의 재능을 맨 먼저 알아본 이도 춘원이었다. 금아라는 호는 춘원 이광수가 가야금을 잘 탔다는 그의 어머니를 떠올려 지어줬다. 이후 피천득은 금아를 자신의 아호로 평생 사용하였다. 1930년대 열린 시 창작 대회에서 김영랑은 화려하게 핀 모란을 보며 시를 썼지만 마음에 안 들었던지 쓰레기통에 던지려 하자 춘원 이광수가 왜 그걸 버리느냐며 시를 낭송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여러 신진 문인과 작가, 시인들을 발굴했고, 형편이 어려운 문인들의 작품 활동을 적극 지원, 독려하였다. 1936년 연희전문을 수석으로 졸업한 송방용은 바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 을 읽고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치고 싶어서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그의 책을 읽고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고 생각된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당시 종로 네거리에 있었던 화신상백화점 4층 서적부에서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라는 책을 사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줄거리는 다 잊었지만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사랑에 빠져 친구의 부인과 애정도피 생활을 하는 말하자면 평범한 애정소설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그들이 애정도피 생활을 하게 되는 만주 간도의 한국인 마을의 배경이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은 광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천황폐하의 적자(赤子)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내 생명을 새털과 같이 바치는 일이야 말로 남아로서 가장 보람있는 삶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충직한 황국신민이었던 홍안의 소년에게는 그 소설에 전개되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 배경에서 분명히 황국신민의 세계와는 어딘가 분명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어떻든 나는 이 소설을 읽은 후부터 춘원의 소설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덧 매주 담임선생에게 제출하는 일본어 일기 외에 한글의 일기장이 따로 생겼다. 고 하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실의에 빠진 채만식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것도 이광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를 중퇴한 채만식은 1924년 단편 ‘세길로’가 이광수에 의해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채만식의 사람됨됨이를 높이 평가해 그를 동료 문인들에게 널리 소개해주었다. 자신의 작품 애욕의 피안 등을 읽고 작품평을 한 신인 박태원을 건방지다는 혹평 대신 문단에 추천하기도 했다. 3·1 운동에 참가해 모진 고초를 겪은 추계 최은희를 추천하여 조선일보에 입사, 최초의 여기자로 필명을 날리게 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인들과 중국인, 외국 교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안창호의 측근인 구익균은 그의 작품이 일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일본 사람들도 춘원을 숭배했어. 이광수 문학을 좋아했다. 는 것이다. 사후에도 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승려 법정은 자신의 사촌 동생에게 이광수의 책들을 추천하였다. 사촌동생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법정은“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춘원(이광수)님 지은 것은 대개가 믿고 읽을 만하다. 내 책장에서 읽을 만한 것을 골라사 읽고 잘 보존하여라. 나플탈렌을 넣어두면 좀이 들지 않을 것이다.(1958년 5월 13일)”라고 하였다. 대학 시절 이광수의 집에 드나든 문학청년이던 법철학자 이항녕은 후일 소설 교육가족 , 청산곡 과 수필 객설록 등의 작품을 썼다. 기업인이자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은 그의 작품 흙을 읽고 변호사가 될 꿈을 품기도 했다. 후대의 작가인 양귀자 역시 그의 작품 유정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양귀자는 후일 초등학생때 외삼촌 책꽂이에서 이광수 전집을 발견, 유정 을 읽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흐느껴 울었다. 너무 좋아서 말이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소설만 있다면 이 괴로운 세상(학교 가기가 끔찍히 싫었단다)도 얼마든지 살아나갈수 있겠구나 라고 했다 한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는 1948년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다석 유영모(柳永模)를 만나고 6년간 사사하였다. 1922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논문 민족개조론과 1924년에 발표한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을 통해 그는 한국인의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결여, 무질서, 잔꾀, 요행을 바라는 심리, 음험한 술수 등을 지적했다. 민족 개조론에 이어 민족적 경륜은 당시의 국민적 감정을 자극했고, 종교계까지 가세하여 그를 비난하자 물의를 일으켜 결국 동아일보를 일시적으로 퇴사하게 되었다.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에서 그는 나라 잃은 원인을 그는 당파 싸움과 한국인의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결여, 무질서, 잔꾀, 요행을 바라는 심리, 음험한 술수 등 국민성 자체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교육을 통해 계몽하고 민족운동을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독립이 어렵다면 치권이라도 획득하여야 된다며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의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 사회는 사기, 협잡, 위선이 만연한 사회라고 규정했다. 또한 신의가 없고, 이조 당쟁의 악습을 답습하여 끼리끼리 파벌 짓기를 좋아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는 독립이 불가하며 독립을 하더라도 유혈사태나 큰 갈등이 수시로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정치적 독립 이전에 국민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서로간의 신뢰하는 사회로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1930년대 초, 한국인은 단일민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 1933년에 쓴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의 일부에서 “조선 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라고 발표했다. 이전에도“2천만 민족은 동일한 단군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단일 혈통을 강조한 표현이 간간이 신문 등지에 보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한국인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종족으로 구성됐다는 주장도 제기될 정도로 단일민족설은 드문 주장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동국민족(한국인)이 부여족을 주 종족으로 하는 6종족으로 구성됐다고 주장했고, 박은식은 ’몽배금태조(꿈에 금나라 태조를 뵙다)’에서 조선족과 만주족이 모두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신채호의 6종족론을 비판, 조선인은 다같이 단군이라는 한 조상에서 갈라진 단일 민족이며 단일 인종으로 규정하였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한국학 교수 신기욱은 그를 한국형 파시즘과 권위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신기욱은 1930년대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에는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 이광수 식의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로 연결되면서 한국적 권위주의의 뿌리가 됐다고 생각한다. 고 지적하였다. 1910년대에는 이광수 이해조 등에 의해 계몽주의 문학이 주도되었다. 그는 소설과 시 등 문학작품이 시대의 정신, 시대의 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유연애론, 자유주의, 개화, 계몽 등 소설과 시를 통해 계몽주의적인 가치관을 드러냈다. 그는 시와 소설, 희곡 등 문학작품을 통해서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점과 문학작품의 대중화를 통해 계몽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1919년 김동인은 이광수 등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순수문학 운동을 전개 하기도 했다. 김동인은 문학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일 뿐이며 정치성을 띄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수는 문학 작품 역시 그 시대 문화의 하나이니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혀 도입하지 않을수는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에 맞서 사실주의 수법을 썼으며, 신경향파와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 문학 운동을 벌였다. 김우진도 이광수의 문학 계몽론을 비판하고 자연주의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소설과 칼럼, 시 에는 당대 사회 문제를 반영하거나 언급하였다. "세말이 되면 진고개와 종로에서 장, 단스 같은 것을 일등상으로 걸어놓고 경품부 대매출을 한다. 그때마다 안해는 장이 빠지기를 바라고 물건을 삿다. 그러나 뽑는 것마다 타울수건, 화저까락 따위요, 바라는 장은 아니 빠졌다.(동광 1932년 1월 25일자)" 이광수(李光洙)가 그린 자개장 당첨을 꿈꾸며 물건을 사들이는 아내 모습이다. 그는 이상도 좋지만 당대의 시대상, 현실 문제, 현실의 모순 등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는 참된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당면 문제를 다루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설이 구전과 민담으로 전해지는 소설과 시문, 풍경 등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그 역시 자신의 작품에 현실이 반영되었음을 밝혔다. 무정에는 노일전쟁과 새로운 사회상에 눈뜬 조선 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 했고, 개척자는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 전까지의 조선 , 재생은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 군상 群像은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 이라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이상형인 여성의 기준을 밝히면서 “체격이 팔다리나 몸통이 자로 잰 듯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바로 맞고, 몸 쓰는 것, 걷는 것 등 모든 동작이 날씬하여 남의 눈에 조금도 거슬리게 보이지 않고... (이하 중략)... 또 취미와 그 정신이 아울러 고상하다면 그야말로 내가 찾는 미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얼굴은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윤곽에다가 눈은 어디까지든지 크고 처진 듯하며 코나 귀가 복스럽게 예쁘고 살결이 하얀 분”이어야 한다며 얼굴 생김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준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사스럽고 음란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다른 작가, 문인, 시인, 예술가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거나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 소설가 현진건은 “첫째로 키가 조금 큰 듯하고 목선이 긴 여자가 좋다. 제아무리 얼굴이 예쁘장하고 몸맵시가 어울려도 키가 땅에 기는 듯하고 목덜미가 달라붙은 여자는 보기만 해도 화증이 난다”며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광수의 공개발언 이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형 여자, 이상형 남자에 대한 의견이 나타났다. 중추원의 귀족들과 일부 유학자들은 그가 상스럽고 음란한 사상을 부추긴다면 비난하였다. 그는 조선 사회를 개선하려면 문명화, 근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 사회의 새로운 문화의 하나로 철도와 열차를 지목했다. "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 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 그 나라는 잘 된다. 수레바퀴소리, 증기와 전기기관소리, 쇠마차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이광수 ‘무정’)"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장점을 취하고 사회를 개선시키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 에서 기차역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무대다. 그의 작품 무정을 두고 "철도가 작품의 한가운데를 횡단하고 있다. (작품에서) 기차는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작품 흙에서는 주인공들이 서양식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을 묘사하여 서구 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1936년 계명 이라는 잡지에 남긴 기고문을 통해 백두산 등반에 대한 소감을 남겼다.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또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산인 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 백두산의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상 실제적 사정에 대하여 묻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작고 부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까닭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있을 까닭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을 우리가 이렇게 알아야 옳으며, 또 이렇게 알아도 그만이리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광수‘계명’1936)” 금강산을 오른 뒤에는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 며 그 절경을 칭찬하였다.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유기 를 통해 내금강의 빼어난 경관을 묘사하였다. 산을 좋아한 그는 여러 산을 등산하였지만 그는 백두산을 비롯한 일부 산에 대해서는 등산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광수는 등산을 좋아하여 전국 각지의 명산을 찾아가 등산, 답사하였다. 2006년 소설가 한승원은 이광수가 전쟁 독려의 목적으로 작품을 지었다고 비판했다. 작가 한승원은“이광수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에 연재한 원효대사 에서 원효가 신라 젊은이들에게 ’성스러운 전쟁에 기꺼이 몸을 던져라’라고 부르짖게 했다”며 “춘원의 원효대사 는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충동질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원효의 삶과 사상을 오독(誤讀)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광수작 원효대사 의 작품해설을 쓴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인 국문학자 이병주는 "일제가 춘원에게 원효대사 의 집필을 허락한 것은 원효가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충성한 불요불굴의 정신을 비상체제하의 한인(韓人)에게 알려 이른바 국가총동원 의 선정성을 노린 것이었다."면서도 "이광수는 이를 역이용해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았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2006년 4월 원효대사의 재출간 문제를 놓고 화남출판사 편집주간 이승철 시인과 한승원 작가 사이에 논쟁이 오갔다. 한승원 작가가 "원효의 사상을 오독한 것"이라며 이광수의 소설을 비판한 것에 대해 이승철 주간은 "어떤 이유로도 출판의 자유는 침해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효의 사상은 여러 작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김준태 시인은 “이광수가 문학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어 쓴 이 소설은 그가 작가로서 야심을 저버리지 않고 창작에 전력투구했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면서 “소설 ’원효대사’의 한계는 주인공 ’원효의 한계’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살다간 춘원 이광수의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0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 되어 친일 문학인으로 선정된 42인 가운데 가장 많은 편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이광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항일 민족주의자로서 35-36년을 살고 47세경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약 6년간을 친일로 살았다.”는 점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출하기 위한 행동이였고, 이광수는 사실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광수는 민족의 양심수 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1909년 〈사랑인가〉를 탈고한 시점에서 이미 친일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48년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보고서에 따르면, 이광수는 광병적(狂炳的) 친일 급 열렬 협력자 로 평가되었다. 한편 소설가 복거일은 이광수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것은 아니 라고 하였다. 2007년 10월 원로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 에서 “친일에 대한 이광수의 업보는 남들에 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며 “수십년 간에 걸친 그의 항일운동과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며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우선 해방 정국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광수를 친일혐의로 구속 투옥한 것에 대해 “친일인사 다수 중에서 특히 죄질이 나빴던 문인은 빠지고 이광수 등 선배 문인만 기소한 것은 잘못이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참작 없이 구속투옥에 의한 재판을 진행한 것은 결코 공정한 처사가 아니었다”며 “힘 없는 사람들만 처벌했다는 점에서 큰 과오가 있으며 법이 대중적 인기 논리에 편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신분석학자 이중오는 민족개조론을 친일의 증거로 지목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민족개조론은 하나의 텍스트로 접근하는 한 어떤 친일의 흔적도 찾아낼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광수 대신 도산 안창호 이름으로 출간됐다면 그 논문은 지금 다른 운명을 맞고 있을 것 이라며 이광수 비판론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다른 문인들은 무책임하게 친일 의혹을 회피하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친일 문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광수라는 희생양을 통해 누구도 주지 않는 면죄부를 강탈해 간 친일파 지성인들의 책동 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이중오는 “그가 ‘왜 친일을 했을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를 친일 인사의 대명사로 인식하는 흑백논리만 있을 뿐, ‘인간 이광수’에 대한 이해는 없는 것이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9년 단국대학교 김원모 교수는 "이광수의 친일은 민족의 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겉으로는 친일을 했지만 내면으로는 철저히 독립을 원했다."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춘원이 도쿠토미 소호에게 1940년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의 이유를 밝힌 편지를 1989년 발견했다. “처음엔 편지 내용에 수치심을 느꼈죠. 하지만 자료를 뒤져 연구를 계속하면서 친일과 관련된 이광수의 다른 면모를 이해하게 됐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김원모는 이광수 친일연구와 관련해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처럼 좁은 대롱으로 대상을 보듯 실증 연구 없이 일제강점기 인물의 한 면만 편협하게 부각해 매국노로 매도하는 학계의 분위기는 잘못됐다”고 밝혔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이광수의 삶을 볼 때 친일 행적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광수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조선 독립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보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이 일본의 국민으로 동등하게 사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본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 하였다. 2007년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이광수의 친일 행위 중 일부는 친일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장선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때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 김우종은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광수가 친일 활동을 시작한 시점으로 간주되는 《개벽》에 발표된 ’민족개조론’에 대해 김씨는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한 것이었다”고 강변하며 “이것을 일제에게 식민 통치의 구실을 주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또한 “’민족개조론’이 발표되기 넉달 전 베이징에서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 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1923년에 함께 조직한 것이 수양동맹회였다”며 “민족개조론의 내용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교해보면 이 논문은 안창호의 독립운동노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우종은 이광수가 어린 시절 동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일본 유학생 시절 3.1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2.8 독립 선언문 을 주도적으로 작성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수십년 간에 걸친 항일투쟁의 노력과 문학적 업적은 친일행적을 상쇄하는 바가 있다”고 거듭 변호했다. 이에 대해 김재용 원광대 국문과 교수는 “1938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두 일본국민이 될 것을 주장했다”며 “1940년에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그의 행적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특히 이광수의 문학적 성과와 항일투쟁의 노력이 친일 행적을 상쇄한다는 김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이광수보다 지명도가 높았던 홍명희는 일제의 종용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며 “공과(功過)를 다 같이 다뤄야지 공 때문에 과가 지워지거나 과 때문에 공이 지워지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의 부인 허영숙이 조선총독부가 매수한 밀정이고 허영숙이 그를 포섭했다는 의혹은 소설가 박종화 등을 통해 제기되었다. 이후 부인 허정숙이 밀정, 조선총독부에 포섭되었느냐 여부 역시 논란 중에 있다. 한편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광수의 갑작스런 귀국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광수는 일제 총독부의 밀사로 의심받던 아내 허영숙을 만난 뒤 돌연 귀국, 변절자로 의심받았다. 김우종은 “이광수에게 있어 허영숙은 아내 이상의 존재였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의사였던 허영숙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당시 집필 중이던 ’무정’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의 개인적 환경을 일체 무시하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문인협회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본인까지 회원으로 참여해 그들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광수의 친일은 자발적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해방 후 1946년 이광수는 허영숙은 이혼을 하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그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축적한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기 위한 위장이혼이었다고 비판한다. 또 일각에서는 친일파로 몰린 자신 때문에 가족이 피해 받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족.jpg|썸네일|260px|right|이광수의 가족사진. (1940년 8월 27일자 매일신보에 실렸다.) 후일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백두진은 그의 두 번째 부인 허영숙의 친정 조카사위였다. 할아버지 이건규(李建圭, ? - 1910년) 아버지 이종원(李鍾元, 1850년 - 1902년 8월 14일) 어머니 충주 김씨(忠州金氏, 1869년 - 1902년 8월 22일) * 형 3명, 요절 * 여동생 이애경(1895년 - 1936년) * 여동생 이애란(1900년 - ?) 전처 백혜순(1918년 이혼, ? - ?) * 아들 이진근(李震根, 1914년 - ?) 후처 허영숙(許英肅, 1895년 음력 8월 18일 - 1975년, 1946년 이혼) * 아들 이봉근(李鳳根, 1927년 5월 30일 - 1934년 2월 22일) * 아들 이영근(李榮根, 미국으로 이주.) ** 손녀 이성희(미국명 앤 리) * 딸 이정란(李廷蘭) * 딸 이정화(李廷華. 1935년 - , 미국에 거주, 1998년 미국 시민권 취득, 펜실베니아 대학교 교수 역임.) 외할머니 양씨(梁氏, ? - 1897년) 사촌형제 이학수(李學洙, 1921년 스님으로 출가) 장인 허종(許鍾, 허영숙의 친정아버지), 허영숙은 허종의 넷째 딸이었다. 기타 * 처조카 허명재, 두 번째 부인 허영숙의 친정 조카 * 처조카사위 백두진(白斗鎭,1908년 10월 31일 - 1993년 9월 5일)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아버지 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후반의 행적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미군은 그의 교육을 잘 받았다는 점과 소년 활동에 적극적이다 는 점을 주목했다. 미군은 그에게 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 고 평가하였다.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언문일치의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현대 문학의 여명을 이룩한 공헌자로 높이 평가되며,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고리, 역사 소설의 대중화에 기여한 작가로로 평가된다. 이광수는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현실주의, 인도주의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고 애국적인 작품, 역사 소설 외에도 가부장제, 조혼풍습 등을 비판하고 사회 계몽과 신교육, 과학 기술 문명을 수용할 것을 주장한 점과 자유 연애론 등 다양한 사상과 신념을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것은 시대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라는 반론도 있다.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다. 계몽주의·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서 한국 근대 정신사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는 평가도 있다.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한승옥은 그의 작품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이광수는 문장을 쉽게 쓰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분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도, 초등학교만 나와도, 읽을 수 있다. 역사 소설을 봐도 정사는 물론, 야사와 민담까지 아우르고 있다. 불교용어가 많이 나오지만,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쓰는 능력을 가졌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가 요새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문호가 됐을 것이다. 요즘 작가들이 단명한 것은 공부를 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즘 학생들은 이광수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80년대에는 친일파라고 싫어했는데, 90년에 들어와서는 아예 읽을 생각조차 않는다. 대학 국문과에서도 문학사나 작가론에서 스쳐지나갈 뿐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한승옥은 "친일 여부를 앞에 놓지 말고 문학 자체를 봐야 한다. 이광수의 복합적인 면, 인간적인 점을 조명해야 한다. 이광수처럼 드라마틱한 사람도 없다. 그의 시대로 들어가서 장단점을 재평가해야 한다.‘무정’이 현대소설의 효시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다. 춘원은 장편을 주로 썼는데, 작가는 본래 장편소설에서 역량이 드러나는 법이다. 기회가 닿으면 제대로 된 이광수 평전을 쓰고 싶다. 이제는 이광수 문학상이 나올 때도 된 것 아닌가."라며 맹목적인 비판을 비판하였다. 작가 이인화는 "이광수야말로 시대정신이 근대의 초극 이 아니라 근대의 재평가 로 돌아설 때마다 끊임없이 재론될 전형적인 근대인이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이광수가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시대의 닦달을 겪으며 기어올라간 성취의 드라마는 필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에 각고면려를 쏟아부어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근대의 자유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이 가져온 그의 불행한 말년은 근대가 부여한 자유의 공포를 가르쳐주었다. 고 하였다. 국민대학교 교수 방민호는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인 깊이가 있다."고 평하였다. 기독교운동가인 함석헌은 육당, 춘원의 밤은 지나가다 라는 글에서“육당, 춘원이 무엇인가?… 이 나라가 기울어지려 할 때, 이 민중이 고난에 빠지려 할 때, 그 불평을 잘 울라고 하늘이 세웠던 이들 아닌가? 그들은 참 잘 울었다. 그 소년 잡지, 그 역사, 그 단군론, 그 백두산 참관, 그 백팔번뇌, 그 무정, 그 개척자, 그 단종애사, 이순신, 원효, 이차돈, 그것이 다 이 민족을 위해 울고 이 나라를 위해 슬프게 힘있게 우렁차게 운 것 아닌가?” 춘원보다 10년 아래인 함석헌은 “그들을 위해 분해하고 아끼고 의아해 하는 것은 그렇게 울던 그들이 내처 힘있게 울지 않고 중도에 그 소리가 그만 막혀버렸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 하였다. 작가 겸 시인인 피천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다."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철학과 현실 가을호에 “(춘원 이광수는)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김용준은 그를 친일파로 볼 수만은 없다고 평하였다. 때론 춘원 이광수를 친일문인 운운하여 그를 매도하는 신문기사를 대할 때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춘원을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글쎄,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에 앞서 그는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사람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미국의 한국학자 가브리엘 실비안은 "이광수야말로 한국 사회에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하기 이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뤄온 작가"라며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교수 한승조는 최남선ㆍ이광수 선생처럼 민족문화를 위해 노력한 분들을 크게 이해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 행위로 한국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커다란 흠집을 만든 사람 또한 이광수이기 때문이다. 라고 평가했다. 한편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에만 치중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그에 대한 호평은 시장성 거품이라 비판했다. 소비 지향성 경제의 거품에 들떠서 이광수가 친일은 했어도 소설은 훌륭했다 , 서정주가 역사적 과오는 범했지만 시는 좋다 는 식의 미학적 착시현상이 90년대 한국문학을 흐렸다는 것이다. 작가 공임순은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 에 대해 이순신은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과 나약하고 무기력한 백성과 대조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런 순결 지상주의는 이순신을 단 하나의 민족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대신, 조선의 역사 전체를 오욕과 부정의 역사로 경계짓기 때문이란 것. 이라고 주장했다. 국수주의와 파시즘, 역사 왜곡과 미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는 비판도 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조선의 대중들을 길들이려 한 기득권층적인 논설이라는 비판도 있다. 소설가 김원일은 “일제 말기에 그가 보인 친일행각은 따지더라도 그의 문학은 우리의 자산으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면서 “인간의 흑백논리로 단칼에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평하였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이광수를 양면적인 인물이라 보았다. 그에 의하면 춘원 이광수는 두 얼굴의 지식인이라 한다. 춘원은 간디에 대한 예찬을 통해 톨스토이의 화두인 평화와 비폭력을 옹호했지만, 한편으로는 ’힘이 있는 자만이 자유와 개성을 논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신조로 삼은 인물이었다. 박노자는 이런 춘원의 두 얼굴이 민족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근본단체’로 본 데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그는 춘원이 근대를 배우면서 독립적인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 개인의 생명과 자존 같은 부분을 거의 처음부터 제외했기 때문이라며 “’계급’을 아예 ’이기적 욕망의 결과물’로만 치부해 배제하고 ’개인을’ 개인 그 자체가 아닌 하나의 부속으로만 인식하는 거대 담론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결과는 거의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은 그를 민족주의자로 봤다. 춘원이 한결같이 국가주의 내지는 민족주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은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취사선택됐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허동현은 그 근거로 춘원이 1910년에 쓴 나(余)의 자각한 인생 중 한 구절을 제시한다. 그는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라는 구절을 통해 춘원이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기 훨씬 이전부터 관념적인 민족 이나 국가 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허 교수는 춘원이 종교적 사랑을 예찬하면서 한편으로는 일그러진 근대를 찬양한 야누스적 존재라기보다는 ’민족’이라는 실에 자신이 삶의 궤적에서 만난 다양한 사조라는 구슬들을 꿴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작가 김현주는 “이광수의 미적 기획을 전체주의 정치학의 표현”이라 평하였다. 한신대학교 교수 서영채는 그와 염상섭을 비교하였다. 서영채는 민족계몽주의를 지향했던 이광수의 문학이 공동체의 자기보존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면, 염상섭의 문학은 자아의 진정성에 대한 추구를 형상화함으로써 근대성의 또다른 원천으로 존재한다. 며 차이점을 지적하였다. 김윤식은 루쉰의 사상을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란 주제에 몰두한 이광수의 사상형성과정과 비교하기도 했다. 김도연에 의하면 그는 몸이 병약했다고 한다. 작가 홍사중이 최남선과 이광수의 지적 배신을 다룬 첫 저서를 냈을 때 홍사중의 아버지의 첫마디는 "사람은 남에 대해서는 쉽게 말을 잘하는 법이다"였다 한다. 이광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고구마꽃을 가리켜 "백 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꽃"이라고 하였다. 그의 작품 꿈은 1955년 최은희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그의 작품들 중 일부는 1950년대 이후 영화화, 드라마화, 연극화 되기도 했다. 그의 시 중 당달구야는 국악인 출신 가수 정수빈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다른 그의 시 낙화암은 김대현이 곡을 붙여 사비수라는 곡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백범일지의 윤문과 교정에 참여하였다. 해방정국기에 그는 백범일지를 다듬고 정리하여 1947년 말 초판이 발간하게 했다. 2·8 독립 선언 3·1 만세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신문 동아일보 신간회 흥사단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회 사건 독립신문 창씨개명 대화동맹 민족 개조론 최남선 김동인 주요한 주요섭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박인덕 염상섭 허정숙 브나로드 운동 여성 해방 운동 민족 개조론 김성수 김동인 송진우 안창호 윤치호 유길준 조만식 파시즘 백범일지 신익희 장덕수 이범석 안호상 윤치영 김구 김규식 김활란 송진우 임영신 현진건 김소월 박종화 서재필 송계월 안병욱 정칠성 정종명 조봉암 홍명희 이순재 - 1969년 (춘원 이광수), 영화, (청년 역) 김진규 - 1969년 (춘원 이광수), 영화, (중년 역) 전무송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이순재 - 1982년 (종로부루스), 영화 백윤식 - 1990년 (반민특위), MBC 드라마 문성근(장년), 최수종(청년), 고정일(아역) - 1992년 (춘원 이광수), MBC 드라마 강신일 - 2012년 (꿈), 연극 서울 홍지동 이광수 별장 터 - 등록문화재 제87호 작가와 비평, 《작가와 비평 제3호》 (여름언덕, 2005)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3쪽. "인민군에 끌려간 춘원(春園·이광수) 북(北) 회유에도 협조 거부" 조선일보 2009.10.09 북한, 6·25 납북인사 묘역 첫 공개 조선일보 2005.07.26 남가주대, 이광수 `무정 희귀 재판본 소장 확인 임정 수립 90주년―3·1운동에서 임시정부까지 임시정부, 왜 상하이인가 조선일보 2009.04.01 (케이블TV) Q채널,특집다큐서 이광수 등 학적부 공개 조선일보 1998.06.01 NHK 다큐멘터리 (1) NHK 다큐멘터리 (2)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美, 1944년 조선 유력인사 성향평가표 작성 방민호, 〈이광수 장편소설 『원효대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서정시학 2010 겨울호》(서정시학 편집부, 2010) 김우종,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휴먼메신저 2007년 가을호》(한국휴머니즘문인연합, 2007) 이중오, 《이광수를 위한 변명》, (중앙M&B, 2000) 김원모, 《영마루의 구름》,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9) 한승옥, 《이광수 문학 사전》,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2)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2》, (도서출판 솔, 1999) 이중오, 《이광수를 위한 변명》 (중앙M&B, 2000) 이광수, 《흙》 (문학과 지성사, 2005) 이광수, 《무정》 (도서출판 빛샘, 1997) 이광수, 《이광수 전집》 (삼중당, 1971) 이광수, 《이순신》 (청포도, 2004) 이광수, 《금강산유기》 (실천문학, 1998) 이광수, 《동포에 고함》 (이경훈외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7) 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나무이야기, 2009) 황금찬, 《나는 어느 호수의 어족인가》 (천우, 2004)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조선일보, 《조선일보 사람들》, (조선일보, 2005) 공임순, 《식민지의 적자들》, (도서출판 푸른역사, 2005) 하영선, 《역사 속의 젊은 그들》 (을유문화사, 2011) 한원영, 《한국신문연재소설의 사적 연구》(도서출판 푸른사상, 2010) 차유진, 《손녀딸의 부엌에서 글쓰기》 (모요사, 2009) 김철, 《복화술사들》 (문학과 지성사, 2008) 민족문학사연구소, 《제도로서의 한국 근대문학과 탈식민성》, (민족문학사연구소, 소명출판, 2008) 박숙자, 《한국 문학과 개인성》 (소명출판, 2008) 김선학, 《시에 잠긴 한국인 생각》 (국학자료원, 2007) 안창남 외, 《잃어버린 풍경 1920~1940》 (이지누 엮음, 호미, 2005) 이광수 외, 《멀리 간 동무》 (홍진P&M, 2006) 송명희, 이광수, 《이광수의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국학자료원, 1997) 이민희, 《마지막 서적중개상 송신용 연구》 (보고사, 2009) 정찬주, 정찬주의 茶人기행 (열림원, 2006) 이영아, 《예쁜 여자 만들기》 (푸른역사, 2011) 박태원, 《구보가 아즉 박태원일 때》(깊은샘, 2005) 서영채, 《사랑의 문법 이광수, 염상섭, 이상》 (민음사, 2004) 김종회, 《문학과 예술의 혼》 (문학의숲, 2007) 상허학회, 《한국현대문학의 정치적 내면화》 (깊은샘, 2007)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2006) 사에구사 도시카쓰, 《이광수 작품선》 (이룸, 2003) 김윤식,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서울대출판부, 2003)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의 초상》 (도서출판 옛오늘, 2004) 방민호, 《모던 수필》 (향연, 2003) 한승옥, 《이광수 문학사전》 (고려대학교출판부, 2002) 최은희,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문이재, 2003) 사에구사 도시카쓰, 《사에구사 교수의 한국문학 연구》 (베틀·북, 2000) 김윤식ㆍ김재홍ㆍ정호웅ㆍ서경석 공저, 《우리문학 100년》 (현암사, 2001) 김철 외, 《문학속의 파시즘》 (삼인, 2001) 김성한, 《거인들의 시대》 (동아일보사, 2011) 심원섭, 《한-일 문학의 관계론적 연구(국학자료원, 1999) 이정화, 《그리운 아버님 춘원》, (도서출판 우신사, 1993)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3》, (한길사, 1986) 북한, 6·25 납북인사 묘역 첫 공개 조선일보 2005.07.26 책마을 친일과 애국 사이… 춘원의 두얼굴 조선일보 2000.01.10 이광수 18살 때 쓴 미공개 여행기 찾았다 동아일보 2012.07.18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 근대적 욕망의 윤리적 파멸… 삼국유사와 조우하다 동아일보 2012.09.04 이광수·김동인·주요한을 다시 본다 조선일보 2009.08.31 이광수ㆍ한승원 원효 로 격돌 조선일보 2006.04.26 춘원 이광수의 `무정 영문판 출판 조선일보 2005.10.23 춘원 이광수는 어떻게 친일로 변절했나 오마이뉴스 2005.09.18 "親日 해명할수 있다면" 조선일보 2000.05.10 조선 유력인사 5명 美 인물평가 내용 달맞이언덕 표석 이광수 시 철거논란 조선일보 2007.12.13 ‘이광수 문학 사전’ 낸 한승옥 교수 조선일보 2002.06.25 춘원 이광수 미공개 詩·논설 발굴 조선일보 2003.08.27 북한, 6·25 납북인사 묘역 첫 공개 조선일보 2005.07.26 분류:1892년 태어남 분류:1950년 죽음 분류:정주시 출신 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출판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 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번역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 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 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 분류:대한민국의 시인 분류:대한민국의 출판인 분류:대한민국의 자유주의자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조선일보사 분류:신한청년당 분류:서울대학교 교수 분류:전주 이씨 분류:대한민국의 천도교 교역자 분류:납북자 분류:고문 피해자 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 분류:자유 연애 |
바로크 (, , 는 서양 예술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의 프랑스 전사인 에서 유래했다. barocco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는데, 뜻은 왜곡된 삼단논법, 혹은 불협화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소리를 의미한다. 바로크의 예술적 표현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서양의 미술, 음악, 건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양식의 변천에 따라 바로크의 시대는 전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뉜다. 예술적 경향에서 보면 후기 바로크 시대는 곧 로코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1. 반종교 개혁운동 종교개혁으로 인해 약화된 지상의 가치, 인간이 지닌 감정, 상상력 등에 대한 가치를 반종교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였다. 2.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으로 인한 정치체계의 변화 수공업과 상업에 바탕을 둔 부르주아들이 과거 귀족들의 경제적 수준에 버금가는 부를 이루었고, 이들이 절대 군주를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바로크 예술 형태를 권력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다. 흔히 바로크 미술의 시작 지점은 로마이고,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는 카라바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미술의 모든 장르와 하나의 시대를 한꺼번에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바로크 이후로 미술사에서는 동시대에 여러 가지 미술 사조가 등장하며, 각각의 장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기도 한다. 카라바조 루벤스 렘브란트 반 라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안토니 반 다이크 베르니니 벨라스케스 루카 조르다노 몬테베르디 · 안토니오 비발디 · 헨리 퍼셀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헨델 순식간에 로맨틱한 정원에서 궁전으로 바뀌는 무대장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 플랏에서 처음 고안되었다. 이러한 무대 장치로 연극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표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브로드웨이 연극 등 상업적 연극에서 보이는 드라미틱한 무대장치는 바로크 시대의 연극에서 기원하였다. 영화 바텔, 파리넬리와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에서 상연된 오페라 오르페우스는 바로크 시대의 스타일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성베드로 대성당 · 베르사유 궁전 · 빌라노우궁ㆍ캄피돌리오 광장ㆍ런던의 성 파울 성당 서양 미술사 분류:유럽의 근세사 |
지리산 (智異山)은 대한민국의 경상남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의 뜻은, 智異에서 알 수 있다. 智異는 다름을 아는 것, 차이를 아는 것, 그리고 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뜻으로는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또 백두대간의 맥에서 흘러왔다고 하여 두류산 (頭流山)이라고도 불렸다. 800여종의 식물과 동물이 서식하여 있고 천왕봉을 주봉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있다. 1967년 12월 29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이에 따른 고찰이 많고 근·현대 문화재도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산이다. 서산대사의 횡령암기에는 반야봉 좌우의 두 봉우리인 황령과 정령에 한나라 소제 3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하여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고 고개의 이름을 두 장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지 않지만 달궁 계곡 근처에 이 기록을 뒷바침해 주는 지명들이 구전되어 내려온다. 지리산은 쫓겨온 자들의 땅이었다. 항일의병, 동학혁명군, 항일빨치산,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이곳에 몸을 숨겼다. 행정 구역 상으로 3도, 1시 4군, 15 면 경상남도 함양군과 산청군과 하동군, 남원시, 구례군에 걸쳐 있다.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최고 높이는 1,915m (천왕봉)이다. 산이 차지하는 총면적은 471.758 km²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이며, 둘레는 320 km 에 달한다.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 등을 잇는 25.5km의 주능선 상에 토끼봉, 명선봉, 영신봉, 촛대봉 같은 1,000m를 넘는 준봉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제석봉(1,806m) 삼도봉(1,533m) 토끼봉(1,538m) 촛대봉(1,703m)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칠선계곡, 한신계곡, 뱀사골, 피아골,한수골, 도장골, 목동골, 대성골 등의 계곡이 지리산에 안기워 있다. 이 계곡들의 물이 각각 남북으로 흘러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되어 함양과 산청으로 흐르고, 또 하나는 마이산에서 흘러온 물을 만나 섬진강이 된다. 뱀사골 계곡의 폭포가 있는 곳은 국내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으로 유명하다. 지리산의 산자락에는 화엄사, 연곡사, 구례 천은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칠불사, 벽송사와 같은 이름난 사찰이 있다. 가시오갈피나무 지리산에는 대략 1500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도 있다. 환경부가 멸종위기야생식물로 지정해 보호되고 있는 가시오갈피나무, 깽깽이풀, 기생꽃, 세뿔투구꽃, 자주솜대, 천마, 히어리 등이 있다. 이처럼 풍부한 지리산 식물들 가운데는 북방계 식물 또는 고산식물로 분류할 수 있는 구름병아리난초, 금강애기나리, 기생꽃, 너도바람꽃, 땃두릅나무, 만병초, 산오이풀, 자주솜대, 참바위취, 회목나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지리산을 대표할 만한 식물들로 다른 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곳이 이들의 분포의 남방한계선에 해당하므로 의미가 있다. 북방계 식물들이 지리산 높은 곳에 자라고 있는 것은 빙하기 때 남쪽으로 내려왔던 북쪽 식물들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고산지역에만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지리 또는 지리산 이 붙은 식물들도 있다. 하지만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도 지리 또는 지리산 이 붙지 않은 식물도 있다. 지리산에 다양한 식물이 살 수 있는 것은 독특한 조건을 갖춘 식물생육지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생육지는 고산능선으로서 해발 1500m 이상의 지역에 길게 형성된 능선에 특별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주릉 곳곳에 발달한 바위봉우리나 초원에는 귀한 식물이 많다. 왕등재 부근의 해발 1000m 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슾지 왕능재늪은 감자개발나물, 닭의난초, 동의나물, 방울새난, 세모부추, 숫잔대, 애기부들등 습지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재선충에 감염된 나무가 1그루 발견된 이후 실시된 특별예찰 결과 추가 감염목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리산에 있는 반달곰과 비슷한 종류의 곰 지리산은 여러 동식물의 낙원으로서 지리산 국립공원의 야생동물의 종류는 89종으로 이중 텃새가 37종, 여름새가 33종, 겨울새가 12종, 통과새가 7종이다. 우점종은 어치이고 붉은머리오목눈이, 박새, 노랑턱멧새, 동고비, 쇠박새, 직박구리 순으로 우점도가 높다. 천연기념물로는 큰소쩍새, 소쩍새, 붉은배새매, 올빼미, 새매, 재두루미 등 7종이 관찰된 적이 있다. 희귀조류 중 나무발발이는 관찰 기록만 있고 바위종다리는 저지대에서 관찰된 적이 있다. 평지에서 번식하는 종으로 알려져 있는 검은딱새, 붉은뺨멧새가 노고단 1,500m 고지에서 번식하고 있다. 지리산은 야생동물 서식에 알맞은 울창한 수림과 먹이가 충분하기 때문에 야생동물에게는 낙원이다. 지금까지 학계에 조사, 보고된 지리산 서식동물은 포유류가 15과 41종, 조류가 39과 165종, 곤충류가 215종 등 총 421종이다. 포유류의 경우에는 멧돼지나 고라니, 너구리, 청설모등 포유동물이 많이 서식한다. 대한민국의 여러 멸종위기 동물이 서식하는 장소이다. 하늘다람쥐, 삵, 담비, 수달, 반달가슴곰이나 아무르표범등이 서식한다. 이들은 대부분 촬영된 지리산북부사무소 야생동식물보호단이 서식지 인근에 10여대의 무인센서카메라를 설치, 2004년부터 2년여간 활동 장면을 찍은 것들이다. 이 가운데 하늘다람쥐는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서식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이 발견되는 것은 원시림, 계곡의 수질이 복구되고 있다는 증거라는 분석이 있다. 또한 지리산은 국립공원관리단이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지금까지 방사된 곰의 숫자는 28마리이며, 6마리는 폐사하고 4마리는 적응을 하지 못해 회수되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겨울나기를 성공적으로 하고 번식을 하는 등 야생화 하고 있다는 조짐이 있다. 50마리 이상이 야생화에 성공했을 때 전국 각지에도 복원사업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옛날에는 지리산에 아무르표범(한국표범)이나 시베리아호랑이(한국호랑이)가 살았다고 하나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목격담과 발자국 흔적으로 인해 적은 수나마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등산로 통행안내 표지판 지리산은 주릉이 동서방향으로 25.5km를 뻗어있고, 1000m가 넘는 준봉들을 잇는 능선은 전체적으로 완만하고 샘이 많아 좋은 등산로이다. 또한 깊은 계곡이 있어 남북 방향으로는 계곡에서 시작하는 등산로가 많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을 직접 오르는 길은 동쪽의 중산리와 백무동을 거치는 길이다. 서쪽 지역은 계곡이 아름다운 뱀사골과 길이 뚫려 접근하기 쉬운 성삼재-노고단 코스이다. 주릉을 종주하는 코스는 고전적으로는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의 길인데, 근래에는 성삼재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화엄사-대원사 산행길은 대략 2박 3일에서 3박 4일이 걸리는 길로,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7km까지는 힘든 편이나 노고단에서 화개재까지는 큰 어려움은 없다. 토끼봉의 가파른 비탈을 올라 연하천에서 1박을 하고, 벽소령과 세석을 지나 장터목에서 2박을 한다. 마지막날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하산한다. 최근에는 인월 덕두산이나 바래봉에서 시작해 산청 웅석봉까지 4박 5일(혹은 5박 6일)에 걸쳐 종주에 나서는 이들도 있다. 중산리를 시작해서 천왕봉에 이르는 산길은 천왕봉을 가장 빠르게 오르는 길로 가장 인기 있는 산행코스여서 봄, 가을 입산금지 기간에도 산행이 허용된다. 중산리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유암폭포 코스와 장터목을 거치지않는 법계사 코스가 있다. 칼바위까지는 경사가 급하다. 칼바위에서 장터목 코스와 법계사 코스가 갈라진다. 법계사 코스는 가깝기는 하지만 로타리 산장에서 천왕봉까지는 경사가 급하나, 일출을 보려면 이 길을 택해야 한다. 법계사 코스는 5.4km로 약 4시간이 걸린다. 그 외에도 백무동을 기점으로 하는 한신계곡 코스, 쌍계사를 기점으로 하는 삼신봉 코스, 뱀사골을 기점으로 하는 뱀사골계곡 코스, 피아골을 기점으로 하는 피아골 코스, 산동면을 기전으로 하여 만복대에 오르는 코스 등이 있다. 벽소령 대피소 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산4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1996년에 지어진 대피소로 120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규모가 큰 편(449.0m²)에 속하나, 샘터가 500m가량 아래로 내려가야 있어 주릉에 있는 대피소 중에 가장 물을 구하기 어렵다. 연하천 대피소 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산120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72.00m²이고, 4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노고단 대피소 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110-2에 위치하고 있다. 1987년 건축한 제1대피소(381.0m²/140명 수용) 외에 1994년 제2대피소(315.0m²/50명 수용)를 추가로 건축하였다. 피아골 대피소 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368에 위치하고 있다. 1984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81.00m²이고, 5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뱀사골 대피소 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산120에 위치하고 있다. 1985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157.0m²이고, 80명을 수용할 수 있다. 2007년 3월 25일자로 폐쇄되었다. 2007년 12월말 현재 철거공사 중이다. 세석 대피소 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산325에 위치하고 있다. 종전에 있던 대피소를 1995년에 새로 지었는데, 최근에는190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지리산 국립공원내 대피소 중에 가장 크다(면적 653.0m²) 넓은 세석평전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릉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물을 구하기가 쉬워 찾는 사람이 많다. 세석평전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면 한신계곡이 시작되어 백무동이 있는 마천지구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남부능선이 시작된다. 천왕봉 일출봉 반야봉 낙조 벽소령의 달 세석의 철쭉 불일현폭 노고단의 운해 피아골의 단풍 연하천 선경 칠선계곡 섬진강 맑은물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10월의 지리산 10월의 지리산 10월의 지리산 10월의 지리산 pokpo.JPG|선유폭포 Nogodan at Jirisan, Korea 03.JPG|노고단 Korea-Mountain-Jirisan-04.jpg|2006년 지리산 한국의 산 내용 출처 |
불확정성 원리 (不確定性原理는 양자 역학에서 맞바꿈 관측량(commuting observables)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observable)을 동시에 측정할 때, 둘 사이의 정확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원리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고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으로부터 얻어진 근본적인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퍼짐(또는 불확정도)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양자상태에서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RMS)편차 (X의 표준편차)는 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P의 표준편차)는 두 표준편차의 곱은 다음과 같다. 즉, 위치와 운동량의 표준편차의 곱은 디랙 상수의 절반보다 같거나 크다. 양자역학의 물리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는 여러 관점이 있다. 아래는 기본적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를 서술한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 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아낼 수 없고, 두 측정값의 부정확도를 일정 이하로 줄일 수 없다는 양자역학적 원리이다. 고전역학의 예측과는 달리, 양자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적인 값을 가질 수 없으며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플랑크상수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이는 입자계로부터 동일한 측정의 과정을 여러 번 거친 통계에 대한 진술이지, 단순히 입자계를 한번 측정하여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양자현상은 특정한 시도에 의해 그때그때 얻어지는 결과물에 대한 예측이 아니며, 여러 번의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기댓값과 같은 통계적인 예측만을 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는 이러한 양자현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물리적인 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관계에만 성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관측에 적용될 수 있다. 양자현상의 관측량들은 연산자에 의해 얻어지는데, 각 연산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두 연산자를 교환(맞바꿈) 관계에 있지 않다 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한다. 앞서 언급한 위치와 운동량은 교환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은 불확정적인 것이다. 반면 3차원 공간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할 경우엔, 다른 두 방향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교환 가능한 관계이므로 그것들에 대해서는 불확정적이지 않게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교좌표계에서의 관측을 생각해보자. x축 상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는 x축상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만, 이 관측은 y축과 z축 상의 위치와 운동량 관측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모든 관측에 불확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처음의 결과가 실험 오차에 의한 것이었다면 x축상의 위치와 y축상의 운동량의 측정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부분이 바로 기술적 한계와 불확정성 원리가 구별되는 부분이다. 또한 불확정성 원리는 관측 행위의 순서가 관측하고자 하는 상태에 영향을 주는 양자현상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교환관계에 있지 않은 두 연산자에 의한 관측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는 경우, 즉 한번의 관측을 수행한 후 다른 관측을 수행할 때 두 관측 순서를 바꾸면 각각은 다른 결과가 얻어지게 된다. 이것은 처음의 관측에 의해 상태가 변화하게 되어 다음 관측에서는 처음과 같지 않은 상태에 대해 측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초기 상태가 관측에 의해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파동 함수 붕괴 ()라고 말한다. 양자 현상의 상태는 파동함수로 표현되므로, 그 파동 함수가 변화했다는 것은 수학적 계산에 의해 전과 같은 관측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1924년부터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소에서 원자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25년 5월, 문제를 단순화시켜 복잡한 수소원자가 아닌 가상적인 조화 진동자를 설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그는 조화 진동자에서 고전적인 다주기 체계에 상응하는 위치 좌표를 푸리에 급수로 전개하여 이에 대한 수학적인 형식화를 추구한 결과, 그가 시도한 새로운 방법이 에너지 보존법칙을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5년 6월, 휴양지인 헬골란트 섬에서 최초로 양자 현상에 대한 새로운 역학을 정립해냈다. 이후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현상 내에서는 물리량들과 연관시킨 수학적 대상 두 개를 함께 곱함으로써 얻어지는 답이 곱이 수행되는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독특한 특성을 발견했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물리량과 연관된 수학적 대상은 연산자이며, 두 연산자 사이에는 교환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수학적 특징은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것이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고 하이젠베르크 자신 역시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때 막스 보른은 1925년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에 담긴 비교환적 양들이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행렬임을 인식할 수 있었고, 하이젠베르크의 연구 내용을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행렬로 표현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새로운 역학은 행렬역학이라 명명되었다. 1926년 3월,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의 비교환적 성질이 불확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당시 닐스 보어는 불확정성 을 상호보완성 이라고 표현했다), 미시적인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노력한 결과, 1927년 3월에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였다. 후에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아인슈타인은 "관찰이란 현상과 그것에 관련된 자연법칙을 알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이 이론이다."라고 말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관점하에 새로운 현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결과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착상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계기를 제공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비결정론적인 특성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수학적인 논증을 완성한 하이젠베르크는 이후 사고 실험을 통하여 빛과 물질의 파동, 입자의 이중성이 불확정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하이젠베르크의 1927년 논문은 와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형태였다. :. 같은 해 7월에 미국의 얼 케너드()가 오늘날과 같이 와 를 관측가능량의 표준편차로 정의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부등식 을 증명하였다. gamma ray microscope.svg|섬네일|160px|right|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 전자(파란색), 입사되는 감마선(녹색), 산란된 감마선(붉은색). 산란된 감마선은 현미경의 관측 구경에 임의의 각도로 들어오게 된다. 현미경으로 입자를 관측하는 사고 실험인 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 ()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사용했던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현미경에 사용하는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상을 형성하는 해상도가 높다는 사실을 토대로, 원자 속 전자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관측에 사용되는 빛은 감마선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자 속의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감마선과 같이 짧은 파장(높은 진동수)의 광자를 쏠 경우, 감마선 광자가 가진 운동량은 매우 커서 원자가 전자를 잡아두는 에너지를 초과한다. 따라서 이 경우 전자의 위치는 정확히 관측되지만, 광자는 전자에 큰 임의의 운동량을 전달하므로 컴프턴 효과에 의해 전자의 운동량은 부정확하게 측정된다. 반대로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긴 파장(낮은 진동수)의 광자를 쏠 경우 광자의 충돌이 전자의 운동량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전자에 의해 크게 산란된 광자는 관측자에게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전달해 줄 수 없다. 위의 두 상황에 의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슬릿을 통과하는 입자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작은입자가 x축 방향으로 놓인 폭이 a인 슬릿을 통과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x축으로의 불확정성은 가 된다. 이 입자는 드브로이의 물질파에 해당되는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슬릿을 통과한 입자의 파동은 회절하게 되고, 인 곳에서 첫 번째 간섭무늬가 나타나게 된다. 이 경우 전자가 발견될 확률은 회절된 파동함수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입자의 확률적 분포가 절반각인 에 해당되는 영역 안으로 제한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운동량의 불확정도는 다음과 같다. 이때 드브로이의 물질파 관계식으로부터 운동량 이므로 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정도는 다음과 같다. 이 과정은 일반적인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위치와 운동량 불확정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설명하는 발견적 논의(heuristic argument)이므로 그 결과는 정성적이다. 즉, 위 식의 우변인 h는 수학적으로 엄밀한 불확정도가 아니다. 임의의 관측량 A에 대한 분산은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관측량 B의 분산은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해 코시-슈바르츠 부등식을 적용하면 다음의 식을 얻는다. 한편, 임의의 복소수 z는 복소수의 일반적인 성질에 의해 다음의 식이 항상 성립한다. 따라서 우변의 에 위의 관계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 식 우변의 괄호 안의 내적을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부등식 괄호 안의 내적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위 계산결과는 다음과 같이 두 연산자에 대한 교환자 표기법으로 나타낼 수 있다. : 따라서 최종적으로 다음의 식을 얻게 된다. : 이것이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이다. 여기서 는 임의의 연산자이므로 교환자가 0이 아닌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은 일반화된 불확정성의 특정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차원(x축) 공간 상에 존재하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양자역학에서 운동량을 측정하는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위치와 운동량 연산자의 교환자는 다음의 과정을 통해 계산된다. 임의의 함수 f를 제거하면 위치-운동량 교환자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을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양변에 제곱근을 취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며 양자역학의 기본 가정으로부터 유도되는 하나의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에 대한 보다 엄밀한 전개로써 2003년 1월에 나고야 대학교의 오자와 마사나오(小澤正直) 교수는 측정의 한계, 측정 행위에 의한 교란과 양자 자체의 성질에 의한 양자의 움직임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식을 제안했다. 본래의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은 물리량 와 그것을 측정하는 결과 연산자 와의 차이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을 의미하는 와 측정 도중의 의 변화량(요동)의 제곱평균제곱근을 의미하는 를 도입하면 와 같게 되는데, 오자와는 보다 일반적인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원리의 보완식으로써 두 개의 항이 추가되는 을 제시하였다. 이 식에 따르면 작은 양자에 대하여 기존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의 측정의 한계 를 넘는 측정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이후 빈 공과 대학교와 나고야 대학교의 공동 연구에 의하여 특정 조건에서 놓인 중성자의 두 종류 스핀 값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실험으로써 증명되었으며, 2012년 1월 15일 《네이쳐 피직스》에 개재되었다. 임의의 관측량 의 기댓값을 시간에 대해 미분하면 다음과 같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적용하면 이므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는 헤르미트이므로 , 따라서 임의의 관측량와 그것에 대한 연산자 , 해밀토니안 사이에는 다음의 관계가 성립한다. 연산자가 시간에 무관하다고 가정하면 마지막 항은 0이 된다. 이제 위 식을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 식의 양변에 제곱근을 취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에너지와 시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의 관계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식이 바로 에너지-시간의 불확정성 원리이다.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아인슈타인이 당시 점차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닐스 보어가 반박한 사건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제5차(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슬릿 과 제6차(1930년) 솔베이 회의에서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박스 가 불확정성원리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이다. 또한 양자역학의 측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정교한 사고실험인 EPR 역설 (1935년)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슬릿 은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으로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보어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자 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에너지-시간 관계의 불확정성에 대한 사고 실험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닐스 보어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보어는 이 효과가 불확정성 관계에 정확하게 일치함을 보일 수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에 의해 반박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모순성보다는 불완전성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된 EPR 역설은 1935년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에 의해 발표되었다(EPR이란 명칭은 세명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물리계는 측정하기 전에 이미 물리적 성질들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국소적 실재론 관점을 고수하던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이를 입증하기 위한 정교한 가상실험을 설계했다. EPR측은 어떠한 물리적 영향력도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전달될 수 없다는 국소성의 원리 를 근본 원리로 가정하고 있다. 양자역학의 전통적인 입장에 따르면 측정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는 거리에 관계없이 먼 곳에 순식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action-at-a-distance)이므로, 양자역학은 국소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역설적인 상황을 발생시키게 된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불완전 체계이며, 물리계의 상태를 완벽하게 알아내기 위해선 파동함수 이상의 숨은 변수 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4년 존 벨은 EPR 역설을 검증할 수 있는 실제 실험을 고안했다. 벨은 실험의 결과가 벨의 부등식 을 판별한다고 말했는데, 부등식이 성립한면 EPR측의 주장이 옳은 것이고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양자역학의 체계가 유지되며 어떠한 숨은 변수도 허용되지 않음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이후 벨부등식을 입증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결과,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져 양자역학의 비국소적 특징이 밝혀짐과 동시에 양자역학의 체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벨의 실험과는 별개의 방법으로 EPR이 주장한 나타난 양자역학의 비국소적 특징을 설명할 수도 있다. 만약 EPR측의 주장처럼 파동함수의 붕괴가 유한한 속도로 일어난다면 국소성의 원리보다 더 우선시되는 원리인 각운동량 보존법칙 이 깨지게 된다.(이렇게 될 경우 물리학에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파동함수의 붕괴는 순간적으로, 즉 비국소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Cropper, William H. 『위대한 물리학자 4』. 김희봉 역.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7. Cushing, James T.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 송진웅 역.서울 북스힐, 2006. Griffiths, David J. Introduction to Quantum Mechanics . Pearson Education, Inc., 2005. 임경순. 「하이젠베르크와 양자역학」. 『한국물리학회』. 2006. 한국물리학회 네이버 오늘의 과학 불확정성의 원리 분류:과학 법칙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분류:부등식 분류:수리물리학 분류:양자역학 분류:원리 |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질량의 단위를 나타내는 국제킬로그램 원기. 질량 (質量은 물리학에서 물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양을 일컫는 말이다. 질량의 SI 단위는 킬로그램(kg)이다. 질량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의 물질이나 물질관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질량은 일반적으로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정의된다. 관성질량 능동적 중력질량 수동적 중력질량 관성질량은 에른스트 마흐의 방식에 따라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의된다. 뉴턴의 작용-반작용 법칙에 가속도의 법칙을 적용해 "두 물체를 작용시켰을 때, 두 물체의 가속도는 항상 반대 방향이며, 그 크기의 비는 두 물체에 고유한 양이 된다."라고 해석하고, 물체의 질량을 기준물체의 질량에 대한 배수로 정의한다. 즉 물체의 관성질량이 m이고 이 물체에 F의 힘이 작용하면, 가속도 a=F/m으로 주어진다. 맥스웰의 고전전자기학 이론에서부터 전자기적 질량과 상대론적 질량을 유도할 수 있다. 전자기적 질량에서는 전하를 띤 물체가 유전체를 통과할 때 발생하는 변위 전류에 의해 물체가 저항을 받아 물체가 질량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전자기적 질량은 전자기장의 운동량 보존의 한 표현으로, 관성질량에 해당한다. 막스 아브라함은 전자의 질량을 전자기적 질량으로 표현하였다. 카우프만은 실험을 통해 전자의 질량이 온전히 전자기적 질량으로 표현됨을 보였으나 반박되었다. 상대론적 질량은 기준계의 운동과 관계없이 맥스웰 방정식이 동일한 형태로 유지되도록 로런츠 변환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로런츠 변환을 적용할 때 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하려면 물체의 질량이 속도에 의존하는 값이 된다. 운동량 보존 법칙에서 유도된 상대론적 질량 또한 관성질량이다. 상대론적 질량은 물체가 기준계에 대해 불변량이 정지해 있을 때의 질량으로 나타내지며, 이를 고유 질량 또는 정지 질량이라고 한다. 전자의 비전하에 대한 실험 결과 전자기적 질량이 틀린 이론이고 상대론적 질량이 옳은 이론임이 확인되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유도된다. 쌍생성, 쌍소멸의 경우와 같이 질량과 에너지는 남김없이 변환될 수 있다. 능동적 중력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은 뉴턴의 중력법칙으로 질량을 정의한다. 전자는 물체가 주위에 만드는 중력장의 크기의 비로 질량을 정의하고, 후자는 중력장을 만드는 물체에서 같은 거리만큼 두 물체가 떨어져 있을 때, 두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의 비로 질량을 정의한다. 즉, 지구 표면에서 지구가 물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Fg, 중력가속도의 크기를 g라 하면, 물체의 수동적 중력질량은 Fg/g가 된다.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은 실험적으로 높은 정밀도로 확인되어 있으며, 능동적 중력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서 유도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이 같은 것으로 가정되므로 세 가지 질량의 정의가 이론적으로 동등하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의 물질이나 물질관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kilogram, 2.jpg|섬네일|국립표준기술연구소에 보관 중인 백금(90%)과 이리듐(10%) 합금으로 이루어진 1㎏ 원기(原器)의 모습 현재 국제단위계(SI 단위계)에 따르면 질량은 킬로그램이라는 단위로 측정된다. 킬로그램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킬로그램(kg)은 질량의 단위이다. 킬로그램은 국제킬로그램원기 의 질량과 같다. 이 정의는 1901년 제 1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정해진 것이다. 이 정의가 있기 전까지 킬로그램은 4℃의 물 1L의 질량이라고 정의되어 있었지만 물의 밀도의 불안정성 때문에 1889년 미터 조약에서 1kg에 해당하는 질량 원기를 만들게 되었다. 현재 7개의 SI단위 가운데 유일하게 질량만이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아 질량의 단위를 정의하고 있는데, 이 이유는 국제킬로그램원기를 통해 원자 하나가 측정될 때 수반되는 오차 수준의 정밀도보다 높은 정밀도로 측정하고자 하는 물체의 질량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당시에는 원자질량단위가 생각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현재 이 원기는 인공물이어서 물리적 특성이 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2011년에 열린 제 24회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기존의 원기를 폐지하고 새로운 질량의 정의를 도입할 방침을 밝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새 대안은 플랑크 상수를 통해 질량을 정의하는 방안이다. 질량의 단위는 킬로그램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단위가 바로 원자질량단위이다. 원자질량단위는 1961년 IUPAC 회의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원자질량단위(u)는 12-탄소의 질량을 12u로 정의함으로써 주어진다. 수식으로 쓰면 이로써 주어지는 원자질량단위를 킬로그램으로 환산하면 대략 1.66×10−27kg 정도가 된다. 여기까지 언급하지 않은 질량의 단위로는 주로 영국에서 쓰는 파운드(lb), 입자물리학에서 볼 수 있는 플랑크 질량(mp), 천문학에서 볼 수 있는 태양질량등이 있다. 질량은 물체가 가지는 고유한 양이며 고유하기 때문에 질량은 변화하지 않고 보존된다. 그런데, 무게는 지구상 에서는 질량과 중력가속도의 곱이므로 무게는 지구에서나 어디서나 다르다. 다시말해 지구에서 측정한 무게와 달에서 측정한 무게가 다른것이다. ‘질량’의 개념이 아이작 뉴턴에 의해 처음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었는데, 그 바탕에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어 뉴턴시대까지 이어지는 물질에 대한 이해의 역사적 발전의 성과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책들 《자연학》, 《형이상학》, 《천체에 관하여》을 통해 고대인들의 물질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있는 탐구의 시도를 볼 수 있다. 이후 위의 책들의 저술로서 파생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을 보완하기 위한 10~12세기의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와 같은 이슬람의 자연철학자들의 활약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중세 유럽의 신학자들은 신학에서의 중요한 문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과 연관짓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에 대한 이븐 루시드의 저술은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지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와 같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마침내 아지디우스 로마누스는 질량과 근접한 개념인 질료량 을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고대 문명에서 교역이 발달하고 상품의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상품들의 양을 측정할 방법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고대에도 역시 무게와 부피를 결정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아래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of the heart3.jpg|무게를 재는 아누비스, 1285 BC|right|200 px|섬네일 오른쪽 그림을 보면 고대 이집트의 신 아누비스가 심장의 무게를 저울을 통해 재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종교에서는 측정의 용도로 저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경에서도 무게를 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제 23장 16절에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를 통해 이 부분에서는 돈의 무게를 달았던 시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초의 측정의 기준은 무게의 단위가 아니라 부피의 단위었다. 기원전 2800년경에 발견된 최초의 부피의 단위를 나타내는데 쓰였던 수메르 초기왕조시대의 라가슈에서 출토된 엔테메나라는 은제항아리는 10 실라(sila)(대략 5리터) 를 정의하는 데 쓰였다. 반면에 무게의 단위는 그 당시에는 장소마다 매우 다양했다. 아시리아왕국의 살마나사(Salmanassar)5세 때 미나(mina)(대략 1킬로그램)가 공식적인 무게의 단위로 쓰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른 상품의 양은 다른 단위를 통해 측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고대부터 무게 또는 상품의 양을 비교하기 위해 저울을 이용했지만,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게는 현대에 우리가 이해는 것과 같이 물질의 양이나 질량에 비례하는 힘이나 다른 역학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무게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색깔, 냄새와 같은 특성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다. 피에르 부트루(Pierre Boutroux)라는 학자는 이러한 현상이 바로 자유낙하는 물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결론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은 자연의 본성, 또는 자연의 현상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활발한 토론을 하였다. 그리스의 많은 자연철학자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에 대해 많이 탐구하였고, 《물리학》( Physics ), 《형이상학》( Metaphysics )과 같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 물질의 본성에 대해서 루크레티우스, 심플리치우스와 같은 자연철학자들, 그리고 스토아 학파, 플라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같은 여러 학파들 사이에 많은 토론이 오갔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여러 고대문헌들을 통해서 고대에는 정량적인 의미로서의 ‘물질의 양’,즉 질량과 연관성을 가지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은 고대를 거쳐 중세까지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세시대의 이슬람의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와 같은 자연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생각들을 내놓았다. Altemps Inv8575.jpg|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동안 사람들의 자연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갈릴레오의 등장 전까지는 거의 반박되지 못하였다. |right|200px|섬네일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애 동안 물리학, 형이상학, 시, 희극, 음악, 논리학, 정치학, 윤리학에 걸치는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대부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서양 철학의 전반적인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후에 아이작 뉴턴에 의한 고전역학의 등장으로 사장되었지만, 그의 물리학에 대한 글은 이후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그의 이론을 후세 사람들이 보완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질량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Physica page 1.png|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물리학》1837년 에디션. 이 책에 담겨있는 설명들은 이후 약 2천년간 후세 사람들의 물리적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150px|섬네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자발적 운동이 있을 수 없다. 즉, 움직여 주는 것이 없으면 운동도 없다. 운동을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운동하는 물체가 태어난 장소로 향하는 것은 자연운동 이며 그외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강제운동 이다. 자연운동의 경우에는 물체의 자연본성이 그 움직여주는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어떤 물체가 자연운동을 수행해서 태어난 장소에 도달하면 그것의 운동은 종결된다. 중요한 부분은 강제운동을 다루는 대목인데, 강제운동의 경우에는 움직여주는것은 외부의 힘이다. 외부의 힘은 그 물체로 하여금 그 자연본성을 어기고 자신이 태어난 장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데, 여기서 이 외부힘이 사라지면 운동은 중단된다. 힘만이 물체의 운동을 유일하게 결정하지는 않았다. 지상계에서의 모든 운동은 외부의 힘에 대한 저항력이 작용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저항력과 외부의 힘이 운동의 빠르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자연운동을 논의하는 가운데 《천체에 관하여》와 《물리학》에서 다른 무게를 가진 두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약 두 개의 물체가 무게 또는 가벼움을 제외한 다른 모든 특징들이 같다면, 무거운 물체가 두 물체의 무게의 비율에 따라 빠르게 움직인다. 이 문장은 보통 무게운 물체는 더 호잉이 잘 ㅊ니다. ㅏ제러드 호잉 그들의 무게에 비례하여 더욱 빨리 떨어진다. 라는 말로 요약된다.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르면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무게는 그 입자가 큰 물체를 구성하는 입자인지 작은 물체를 구성하는 입자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만약 어떤 입자가 작은 물체의 구성요소였다가 큰 물체의 구성요소가 된다면, 그 입자의 무게는 무거워진다. 이러한 생각들을 종합해 볼때, 고대에 있어서 무게는 크기성질이 아닌 세기성질에 더 가까웠다. 두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물질의 양(질량)과 무게 사이의 정비례관계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무게는 결코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척도가 될 수 없었다. 사실 애초부터 이러한 무게와 질량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물질관에서는 절대 고려될 수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불은 물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소였다. 그리고 불은 가벼운 성질을 가지는 원소였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가벼움이 아닌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가벼움이었고, 따라서 불은 가볍기 때문에 지상계의 외곽으로 상승한다고 하였다. 곧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무게(우주 중심으로 하강하려는 자연본성)를 가지지 않는 물질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 자연운동으로서의 물체의 낙하운동이 아닌 외부의 요인에 의한 강제운동에 있어서도 ‘물질의 양’, 즉 질량의 개념을 찾아 보기 힘들다. 지상계에서의 모든 강제운동에서는 외부의 힘 뿐만 아니라 매질의 저항 역시 작용한다. 즉, 모든 운동은 기동력(움직여 주는 힘)과 저항에 의존한다. 강제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저서 《물리학》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에서 언급한 강제운동에서의 두가지 운동의 요인인 무게와 매질의 저항을 제외하고는 다른 요인을 배제한다. 물체 자체의 내재적인 저항(관성질량)과 가속시키는 힘의 존재에 대한 부정에 대한 암시를 그의 저서 《천체에 관해서》(라틴어 De Caelo , 영문 On the heavens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서술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질량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그 어느 곳에서도 ‘물질의 양’ 과 관련된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물리학은 자연본성( physis )에 더 가까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질료 ( hylē , 본래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목재를 의미했다)를 비롯한 여러 용어들은 사실 유기체와 유기체적 현상과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기물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불변적인 성질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변하지 않는 ‘물질의 양’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섬네일 피타고라스의 학파의 영향을 받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이후 그의 철학을 따랐던 사람들은 물질의 형이상학적 본질은 공간이라고 했고, 물리학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보려고 했다. 물리학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보는데 토대가 되었던 생각은 기하학적 크기는 어디서나 불변이고 항상 일정하다는 사실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공간은 모든 것들의 모체였고 영구적이기 때문에 기하학적 크기는 물질의 정량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신빙성있는 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플라톤 학파의 생각은 스토아 학파의 큰 반대에 부딪혔다. 스토아 학파는 공간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스토아 학파의 주장의 핵심은 바로 물체는 단지 수학적인 공간의 크기이상의 성질을 가지는 물리적 객체라는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수학적인 기하학적 객체와 물리적 객체를 구분짓는 요소는 바로 물리적인 압력에 저항하는 물체의 저항성이었다. 이 성질은 물체가 완전히 구부러지거나 모든 원소들이 섞이는 것을 막는다. 이후 2세기경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다고 보고되는 엠피리쿠스는 물체는 크기, 모양, 저항, 무게를 갖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크기, 모양은 물체에게 공간적 크기를 부여하여 기하학적 객체를 획득하게 하는 요소들이고 저항과 무게는 그 기하학적 객체를 물리적 객체로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의 저항과 무게가 물질의 양을 나타낼 수 있는 척도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물질 자체는 절대 정량적인 값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크기, 모양, 저항, 무게는 모두 세기 성질과 관련지어 질량을 나타내는 척도로 이용될 수 있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체의 성질들은 물질의 양과는 거리가 먼 물체의 부수적인 형상에 불과했다. 섬네일 비록 고대 철학과 과학에서 ‘물질의 양’에 대한 개념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물질이 보존된다는 생각을 고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영구적, 불멸적인 성질의 개념에 대해 초석을 놓았다. 그의 형이상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를 서술하고 있다. :아무것도 무(無)에서 생겨나지 않고 아무것도 무(無)로 변하지 않는다. left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루크레티우스는 《만물의 본성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ings )라는 장편의 서사시를 남겼다. 이 서사시는 물질이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성질에 대해 논하는 매우 유명하고 대표적인 시 중 하나이다.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 두 문장은 분명히 분해되지 않고 창조되지 않는 물질의 성질에 대해 거론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문장들은 루크레티우스는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체계와는 다른 사고체계를 가졌음이 틀림없음을 증명한다. 또한, 막스 야머는 위의 문장들을 통해 루크레티우스가 물질의 양과 무게의 비례관계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무게는 물질의 양에 대한 척도의 기능을 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섬네일 architectura.jpg|섬네일|right|100px|체사레 체사리에노에 의해 번역된 《건축에 대하여》(De Architectura)의 1521년 이탈리아어판. 여기에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일화가 실려있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히는 아르키메데스와 부력에 관한 일화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히에로 2세는 아르키메데스에게 신에게 바칠 왕관이 순금으로 되어있는지 의뢰했는데, 그는 이 문제를 고민한 끝에 사람이 욕조에 들어가면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가 저술한 책 《뜨는 물체에 관하여》에서는 자신이 발견한 지금 불리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에 대해 설명한다. 이러한 일련의 아르키메데스와 부력의 원리와의 관련성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가 비중과 밀도의 개념을 통해 질량의 개념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종종 현대의 많은 과학서적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비중과 밀도의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라고 서술되어있다. 더불어, 많은 물리학의 교과서들이 역학에서의 질량의 개념을 도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해 서술한다. 사실, 아르키메데스의 일화의 대중화에 공헌한 비트루비우스는 기원전 15년경 쓰인 그의 유명한 저서 《건축에 대하여》(De architectura)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는 글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왕관과 같은 무게를 가지는 두개의 질량(영어로 번역 two masses, 라틴어 원문 duas massas)을 이용한 것으로 전해진다(후략). 여기서 질량(Massa)은 이 문맥에서 덩어리(lump)를 의미하는데, 과학적인 용어의 질량으로서 해석하는 것은 아르키메데스가 질량의 개념과 연관이 있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비록 그의 유체정역학에 대한 설명에서 비중의 개념이 암시되어 있지만, 이 용어는 아르키메데스가 정의하지도 않았고 사용하지도 않았다. 신학서에 등장하는 창조, 죽음, 그리고 성변화(聖變化, transubstantiation)와 관련된 현상을 언급하는 문구들을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중세 신학자들의 여러 시도는 물질과 질량의 개념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한 설명들은 물질의 생성, 소멸, 그리고 변화의 자연철학과 전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물질의 보존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을 자연운동과 강제운동으로 구별하여 서술한다. 하지만 그의 운동이론은 강제운동의 특수한 사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그 사례는 바로 투척된 물체의 사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움직여 주는 요인이 없으면 운동도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투척된 물체의 경우 그 물체를 던지는 사람의 손(움직여 주는 요인)을 떠나는 순간 그 물체를 움직여 주는 요인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손을 떠나도 투척된 물체의 지속되는 운동을 어떻게 설명하냐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설명은 움직이는 물체가 통과해 가는 매질이 운동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모호한 설명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물체가 처음 움직이면서 매질을 움직이게 되고, 그 움직임 때문에 매질이 다시 물체에 운동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강제운동의 원인을 전부 외부에 의한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결코 다른 학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고대 말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강제운동의 원인을 외부의 매질에 의한 것이 아닌 비물질적 운동원인을 가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개념은 ‘임페투스(Impetus)’라 불리게 되었고 존 뷔리당(John Buridan)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그는 그의 임페투스 이론을 다루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물질의)양이 많을수록 물체에는 더욱 많은 물질이 있다, 그리고 그 양만큼 물체는 더욱 강한 임페투스를 수용할 수 있다. 이제 밀도가 크고 무거운 물체는 가볍고 듬성듬성한 물체와 비교했을 때 두 물체의 다른 특징은 모두 같다고 한다면 무거운 물체가 더욱 많은 제 1의 물질(prime matter)을 가지고 있다. 이 서술을 통해 임페투스는 물질의 양에 비례하는 양임을 알 수 있다. 임페투스의 속도와의 연관성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섬네일 :기동자(mover)가 어떤 물체를 운동상태에 놓이게 할 때 그 사람은 특정한 임페투스를 그 물체에 가한다. 여기서 이 임페투스는 그 사람이 그 물체를 위로든, 아래로든, 옆으로든, 혹은 원형의 궤적으로든 움직이게 하려는 방향. 그 가해진 임페투스는 속도와 같은 비율로 증가한다. 이 임페투스가 있기 때문에 기동자가 그 물체를 움직이는 것을 멈춘 후에도 물체가 계속 운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의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는 이 추동력에 의해 유발되는 공기저항(그리고 그 돌의 중력) 때문에 임페투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해진다. 그래서 돌의 운동은 점점 느려진다, 그리고 결국 임페투스는 사라지고 돌의 중력이 우세하게 된다. 따라서 돌은 자연운동을 하게 되어 아래로 떨어진다. 위의 두 서술을 종합해 볼 때, 임페투스는 아래와 같은 간단한 수식적 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다. 이 관계식은 고전역학에서의 운동량 개념과 일부 유사성을 띠고 있다. 더불어, 뷔리당과 그의 학파는 물체 속에 있는 물질의 양이 기동력에 저항하는 저항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일련의 고전역학과 임페투스 이론간의 유사성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뷔리당의 임페투스 이론을 근현대 역학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평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임페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고 뷔리당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개념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즉, 임페투스는 운동량이 아니고 여기서의 저항은 절대 관성이 아니다. 뷔리당 이외에도 색소니의 앨버트(Albert of Saxony)와 니콜 오렘의 저술에서 역시 물질의 양과 임페투스 이론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섬네일 뷔리당을 비롯한 중세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에 대한 연구가들은 그의 역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임페투스 의 개념 도입 등 여러 방면에서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구의 흐름은 15, 16세기에 접어들어서 스콜라 학문의 일부를 이루게 되어 대학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는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하여 중세 학자들이 해결하려 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의 문제에서 그의 탐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후에 근대 역학의 근간을 이루는ㅡ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관성의 개념, 운동의 상대성ㅡ개념과 원리들을 이끌어냈다. 비록 그의 관성에 대한 개념이 근대의 관성의 개념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익숙해진 후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보완되고 수정되어 관성질량의 개념의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관성에 관련한 언급은 (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를 옹호하는 살비아티는 지구가 움직이면 지구 위의 물체가 뒤로 뒤처지니 않냐는 심플리치오의 질문에 대해 배에서의 운동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여기서 물체의 관성적 운동에 대한 암시가 드러난다. :살비아티 누가 시험을 하던 간에, 그는 지금까지 서술된 것과는 다른 결과를 얻을 것이오. 그는 배가 멈추어 있건 어떠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건, 돌은 항상 배의 같은 자리에 떨어지는 것을 볼 것이오. 섬네일 그는 1632년 교황청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이후 역학에 연구에 몰두하여 1638년 ( 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갈릴레이의 관성에 대한 생각이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서 관성과 관련된 문장에 주목해보자. 위 두 문장을 통해서 갈릴레이의 관성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고전역학에서의 관성의 개념에 근접해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고전역학에서의 관성은 수평한 평면위에서 운동해야 한다는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관성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위의 갈릴레이의 말에 따르면 물체는 속도를 유지하며 균질한 운동을 계속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 균질한 운동이 등속 직선운동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등속 원운동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갈릴레이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비록 그는 관성의 개념을 도입했지만, 이 개념을 질량과 연계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1623년 출판된 책 에서 물질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물질의 일차적인 특성들을 나열했지만, 물질의 비기하학적이고 지속적인 특징(질량)을 고려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그의 저서 에 대한 주석에서도 갈릴레오는 질량에 대해 정의를 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묘사된다. 섬네일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케플러는 그의 스승 티코 브라헤로부터 얻은 당시로서는 아주 정확한 천문 관측 데이터를 통해 천체들이 등속원운동을 한다는 기존의 이론이 들어맞지 않고 타원 궤도로 교체되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존에는 단순하고, 완벽하고, 연속성을 띠는 원의 성질 때문에 플라톤 때부터 행성의 원운동은 자연스러운 운동으로 인식되었지만, 케플러는 행성이 타원 궤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 과연 이러한 타원궤도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여전히 자연스러움 이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인과적 원인을 밝혀주는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인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곧 케플러는 이러한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동역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단순히 형이상학적 개념에 머물렀던 관성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케플러의 관성에 대한 생각은 뉴턴 이전의 관성개념의 구체화 단계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고 이후 뉴턴이 관성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실, 케플러의 관성에 대한 개념은 타원궤도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그의 초기의 관성에 대한 생각을 그의 저서 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그는 그의 저서 에서 행성은 운동을 하지 않으려는 명백하고 내재적인 경향이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상호 끌어당김 현상을 통해 역학적 관점에서의 질량의 개념을 언급한다. 케플러가 제시한 위의 중요한 관계는 질량의 실험적 정의의 바탕이 되는 원리로서도 이용될 수 있다. 이 원리는 후에 마흐가 질량을 정의하는 데 쓰였던 방법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케플러는 이러한 가능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마침내 형이상학적인 추측에 불과했던 관성의 개념을 물리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다음 문장에서 관성의 개념이 어떻게 물리학적인 논리에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케플러에게 있어서 관성은 자기자신이 공간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물질의 성질인 뿐만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저항, 즉 관성의 정도는 물질의 양에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관성 혹은 운동에 저항하는 것은 물질의 성질이다. 주어진 부피 안의 물질의 양이 많을수록 관성의 세기는 증가한다. 케플러의 다른 저서에서도 관성의 세기와 다른 물리적 양과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천체들은 수학적인 점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되고 운동에 저항하는 내재적 성질이나 무게와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물질적 객체로 생각되어야 한다. 이 운동에 저항하는 내재적 성질은 물체의 부피와 그 물질의 밀도에 의해 결정된다. 위의 인용문에 따른 관성의 세기와 물리적 양과의 관계는 후에 뉴턴이 질량을 정의하면서 제시했던 관계식과도 유사하다. 케플러는 관성질량의 개념의 형성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케플러의 관성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자발적인 운동의 불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관성의 개념에 있어서 운동상태를 유지하는 측면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섬네일 데카르트는 관성질량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데카르트 역학은 17세기 초에 출현하여 ‘기계적 철학’체계의 일부로서 동시대의 인물인 보일, 가쌍디(Gassendi)와 더불어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학이 관성을 고려했는지 아니면 배제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다. 분명한 것은, 그의 역학에 따르면, 물질의 유일한 본질은 외연(外延), 즉 공간을 차지하는 성질이다. 물질의 양은 무게에 비례하는 양이 아닌 부피로서 주어졌다. 그에게 있어서 무게는 물질의 부수적인 특징에 불과하고 물질의 양과 무게는 비례하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체계는 동시대의 다른 자연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저서 ( Principia philosophiae )에서는 그는 다음과 같은 자연법칙을 서술했다. 위의 법칙들은 물체의 관성적 특성에 대해서 거의 정확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 책에서 ’관성(inertia또는 natural inertia)‘이란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데카르트가 말한 이 자연법칙들은 뉴턴의 에서 비슷한 형태로 재서술되어 있다. 사실 프린시피아의 ’공리들, 혹은 운동의 법칙‘의 제 1법칙에 서술되어 있는 관성의 법칙은 뉴턴이 데카르트의 의 위의 법칙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이를 통해 데카르트 체계가 후의 뉴턴의 개념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섬네일 17세기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하위헌스는 물질의 동역학적인 측면에 있어서 폭넓은 탐구를 했다. 그는 지금까지 정성적으로만 논의되었던 원심력에 대해서 처음으로 정량적인 논의를 제시했다. 또한, 그는 충돌현상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탐구하여 데카르트의 충돌이론을 반박하고 후에 뉴턴역학과도 일치하는 두 물체의 충돌시의 속도와 질량과의 관계를 정량적으로 얻어냈다. 하위헌스의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관성질량 개념의 성립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그의 저서 ( De vi cetnrifuga )에서 원운동을 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물체의 변하지 않는 양(solid quantities)사이의 관계를 제시했다. 섬네일 |
@ 은 아스키의 64번째 부호로, 현대에는 전자 우편 주소를 표기할 때 주로 쓰인다. 영어로는 at sign 이라고 부르며 흔히 at (앳)이라고 읽는다. @ 의 모양 때문에 한국에서는 흔히 골뱅이 라고 부른다. 전자우편 주소 표기에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영어 단어 at과 뜻인 일반적인 상업부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사과 15개가 2달러인 경우 장부에 간략하게 "apple 15 @ 2$"로 기입하였다. 2004년에 모스 부호에 포함되었고, 콤마트(commat)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모스 부호로는 A와 C의 연타(.--.-.)로 표시한다. 트위터 등에서는 누군가에게 답장을 쓸 때 "OO에게"라는 의미로 사용자이름 앞에 @를 쓴다. (예 @사용자이름) 모두() 에서는 홈페이지를 찾을때 홈페이지명 뒤에 @을 붙여서 검색한다.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의미는 같지만 성별을 나타내기 위해 a와 o로 끝나는 단어를 동시에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한다. (예 extranjer@) 언어권마다 @을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네덜란드어 - apestaart (원숭이 꼬리) 노르웨이어 - grisehale (돼지 꼬리) 덴마크어 - snabel (코끼리 코) 독일어 - Klammeraffe (거미 원숭이) 러시아어 - собака (사바까 작은 개) 바스크어 - bildua (동그란 a) 불가리아어 - кльомба (클렴빠 뜻 없음) 또는 маймунско A (마이문스꼬 원숭이 A) 일본어 - 単価記号 (단가 기호) 또는 アットマーク (at mark의 일본어 발음) 이탈리아어 - chiocciola (지렁이) 중국어 * 중국 본토 艾特 (영어 at 의음역어) * 타이완 小老鼠 (작은 쥐) 체코어 - zavinac (청어 절임) 핀란드어 - kissanhäntä (고양이 꼬리) 한국어 - 골뱅이, 앳, 동그람 에이(인쇄용어) 헝가리어 - kukac (벌레) 말레이시아어 - lion (사자) 히브리어 - שטרודל (슈트루 델) 기호 유니코드(16진) 참조 문자(10진) 명칭 @ U+0040 @ 상업용 앳(Commercial At) ﹫ U+FE6B ﹫ 작은 상업용 앳(Small Commercial At) @ U+FF20 @ 전각 상업용 앳(Fullwidth Commercial At) 분류:문장 부호 분류:타이포그래피 분류:인쇄 약물 |
로스앤젤레스 (, los ˈaŋxeles, 음차 나성(羅城))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1290.6 평방 킬로미터이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를 기준으로 3,792,621 명의 인구 가 거주하고 있어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미국 전체에서는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가장 많다. 로스앤젤레스는 약 1,8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의 중심지로, 이 대도시권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며, 세계에서 가장 큰 대도시권 중 한 곳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군 중 한 곳인 로스앤젤레스 군의 군청소재지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사람들을 앤젤레노스(Angelenos)라고 부르기도한다. 로스앤젤레스는 1781년 9월 4일 스페인 총독 펠리페 데 네베에 의해 설립되었다. 1821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멕시코에 편입되었다. 이후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결과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맺으면서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지역을 미국에게 양도했다. 로스앤젤레스는 1850년 4월 4일 지방자치제를 시작했고, 5달 후 캘리포니아 연방 자격을 획득했다. 천사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로스앤젤레스는 사업, 국제 무역, 엔터테인먼트, 문화, 미디어, 패션, 과학, 스포츠, 기술, 교육의 중심 도시로, 세계 도시 순위 6위, 세계 파워 도시 순위 13위에 올랐다. 도시에는 문화, 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 기업 본사들이 밀집해 있어 미국 내 가장 중요한 경제 도시이다. 또한 할리우드는 텔레비전 제작, 비디오 게임, 음악 산업에 있어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영화 제작 산업으로 매우 유명하다. 1932년과 1984년에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2028년에도 하계 올림픽을 열게 되었다. 1869년 촬영한 구시장. 로스앤젤레스 해안 지역은 수 천년 전부터 북미 원주민 부족 통바(또는 가브리엘리노스)와 추마시가 거주하고 있었다. 가브리엘리노는 이 지역을 "옻나무가 많은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iyáangẚ(스페인어로 양나라고 부름)라고 불렀다.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 로드리게스 카브리요는 1542년 스페인 제국 하에 캘리포니아 남부를 발견했다.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후안 크레스피는 1769년 8월 2일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이르렀다. 1771년 프린치스코회 수도사 후니페로 세라는 이 지역에 미션 샌 가브리엘 교회를 지었고, 이 지역에 처음으로 전도를 했다. 1781년 9월 4일, 44명으로 이루어진 정착민 집단은 "로스 포브레도레스"로 잘 알려진 정착촌을 설립했고, 정착민들은 이곳을 "엘 푸에블로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라 레이나 데 로스 안겔레스 데 포르시운쿨라"라고 불렀는데, 영어로 "로스앤젤레스 강에서 온 천사의 여왕 성모 마리아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천사의 여왕은 성모 마리아의 경칭이다. 정착민의 3분의 2는 아프리카계와 유럽계가 섞인 메스티소 또는 물라토였다. 정착촌은 수 십년동안 작은 목장 마을에 불과했지만, 1820년 거주자는 약 650명으로 증가했다. 오늘 날 이 지역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오래 된 유적지 중 한 곳으로, 로스앤젤레스 플라자 역사 지구와 올베라 거리에 있는 역사지구로 기념되고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속해있던 이 지역은 1821년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이후 멕시코 영토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멕시코 법에따라 당시 멕시코의 통치자였던 피오 피코는 로스앤젤레스를 알타 캘리포니아 지역의 수도로 선포했다. 멕시코-미국 전쟁이 일어나던 중 멕시코의 법은 끝나면서 미국이 이 지역을 다스렸고, 1847년 1월 13일 카후엔가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전쟁에서 진 멕시코는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으로 캘리포니아 지역을 미국에 양도했다. 1876년 서던퍼시픽은 로스앤젤레스에 철도 건설을 완료했다. 1892년부터 1923년까지는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미국은 세계 석유 생산량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고, 캘리포니아 지역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산유국으로 만드는데 한 몫했다. 1900년 인구는 102,000만 명 이상까지 늘었고, 도시의 수도 시설에 압력을 가했다. 1913년 윌리엄 멀홀랜드의 감독하에 로스앤젤레스 수로교가 완료되면서 도시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했다. 1910년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에 합병되었고, 도시에는 이미 적어도 10개의 영화 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1921년 L.A.는 세계 영화 산업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이후 대공황이 오면서 도시에 계속해서 돈을 공급했던 영화 산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시의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았다. 1930년 도시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겼다. 1932년에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Torch Tower of the Los Angeles Coliseum.jpg|섬네일|240px|1932년과 1984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주경기장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컬리시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 이후에 로스앤젤레스는 샌퍼넌도밸리 쪽으로 스프롤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빨리 확산되었다. 1969년 로스앤젤레스는 인터넷의 발생지 중 한 곳으로, 멘로파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으로 아파넷을 개발했다. 1984년에 로스앤젤레스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당시 공산주의 14개 국가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1984년 하계 올림픽은 이전보다 더 많은 상업적 성과를 거뒀다. 현대 신문지들의 분석에 따르면, 1932년 하계 올림픽 개최 경험과 로스앤젤레스의 도움이 두 번째 올림픽의 이윤까지 얻게해줬다고 발표했다. 1992년 4월 29일에는 인종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는데, 경찰청 경찰관의 로드니 킹의 구타 동영상 사건이 시미벨리 배심원단들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LA 폭동이 발생했다. 1994년 강도 6.7의 노스리지 지진으로 125억 달러의 재산피해와 72명이 죽었다. 세기 말에 일어난 램파드 스캔들은 미국 역사상 경찰의 위법 행위에 중 가장 광범위하게 문서화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2002년 샌퍼넌도밸리와 할리우드는 도시에서 독립하기 위해 선거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Angeles Basin JPLLandsat.jpg|왼쪽|섬네일|240px|로스앤젤레스 반도 로스앤젤레스는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펼쳐져있고 총면적 502.7 제곱 마일(1,302km2)인데, 육지 면적은 468.7 제곱 마일(1,214km2), 수면 면적은 34.0 제곱 마일 (88km2)으로 이루어져있다. 도시는 세로 44마일(71 km), 가로 29마일(47Km)로 뻗어있다. 도시의 총 둘레는 342마일(550Km)이다. 로스앤젤레스는 평평하고 언덕이 많은 두 지형을 갖추고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는 마운트 루켄스로, 5,074 피트 (1,547 m)이다. 이 곳은 샌퍼넌도밸리의 북동쪽 끝자락에 있다. 산타모니카산맥의 동쪽 끝 시작점은 태평양 쪽의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와 로스앤젤레스 반도의 샌퍼넌도밸리를 분리한다. 마운트 워싱턴을 포함한 다운타운의 북쪽 지역은 많은 땅이 언덕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보일하이츠 크렌쇼 지역 주변의 볼드윈 힐스, 샌피드로는 동부 지역의 일부분이다. 로스앤젤레스 강은 계절에 따라 수위가 크게 달라지며, L.A. 지역 배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국 육군 공병대는 콘크리트로 51마일에 걸쳐 방수로 공사를 했다. 강은 카노가 공원 지역에서 시작해 산타모니카산맥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샌퍼넌도밸리의 동쪽으로 흐르고, 이 곳을 지나고나서 남쪽의 다운타운, 그리고 태평양의 롱 비치 항구로 흘러간다. 발로나 크릭에서 산타 모니카 베이, 플라야 딜 레이 쪽으로도 작게 흐른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해변, 습지, 산지와 같은 다양한 서식지가 존재 해 토종 식물 종이 많다. 가장 흔하게 해안 세이지 관목류를 볼 수 있다. 이 외에 토종 식물로 금영화, 양귀비과 식물, 토이온, 코스트참나무, 자이언트갯보리 등이 있다. 로스앤젤레스해바라기와 같은 토착종의 대부분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간주 될 정도로 희귀하다. 이 지역의 토착종은 아니긴하지만 로스앤젤레스의 시목은 에리스리나 나무(에리스리나 카프라)이며, 시화는 극락조화이다. 멕시코팬팔름, 카나리아섬팔름, 캘리포니아팬팔름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몇 안되게 흔히 볼 수있는 토착종이다. 로스앤젤레스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에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지질의 불안정은 많은 단층을 만들어내고, 거의 매년 10,000번의 지진이 일어난다. 주요 단층 중 하나는 산 안드레아스 단층이다. 태평양 판과 북아메리카 판 사이 경계선이 있는 이 단층은 남부 캘리포니아에 큰 지진을 일으킬 원인으로 예상되고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일어난 주요 지진으로는 1994년 노스리지 지진을 포함해 1987년 휘티어내로스 지진, 1971년 샌퍼넌도밸리 지진, 1993년 롱비치 지진이 있다. 이렇게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약간의 진동이나 낮은 강도의 지진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 주변과 광역권은 또한 맹목적 돌진 지진에서 오는 위험이 언제든지 있다. 일부 도시 지역은 쓰나미에 취약한데, 1960년 발디비아 지진 당시 항만 근처 지역은 파도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에코파크에 있는 야자수 로스앤젤레스는 아열대-지중해성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해안 지역은 Csb , 육지 지역은 Csa 로 구분)를 띠고 있고, 연강수량이 충분하기 때문에 쾨펜의 BSh 또는 BSk (스텝 기후)로 분류되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는 거의 일년내내 맑기때문에 매년 강수량을 측정 할 수있는 날은 평균 35일뿐이다. 다운타운의 평균 온도는 66 °F (19 °C)으로, 낮에는 75 °F (24 °C), 밤에는 57 °F (14 °C)이다. 가장 추운 달은 1월달로, 낮에는 59에서 73 °F (15에서 23 °C), 밤에는 45에서 55 °F (7에서 13 °C)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더운 달은 8월로, 낮에는 79에서 90 °F (26에서 32 °C), 밤에는 64 °F (18 °C)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 4월, 5월, 6월, 11월은 일년 중 기온이 90 °F (32 °C)가 넘는 날은 하루 정도이며, 7월, 8월, 10월은 3일, 9월은 5일이다. 기온의 변동폭은 상당한데, 내륙지역에서 하루에 기온이 가장 높을때와 낮을때 차이가 30 °F (17 °C)를 넘는 경우도 있다. 바다의 연평균 온도 중 1월에는 58 °F (14 °C)에서 63 °F (17 °C)이고, 8월에는 68 °F (20 °C)이다. 일조시간은 1년에 총 3,000시간 이상으로, 12월의 평균 일조시간은 7시간, 7월의 평균 일조시간은 12시간이다. 또 이 지역은 미기후 현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곳으로, 서로 다른 기온이 만나 극단적인 온도 변화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산타모니카 피어의 7월의 평균적인 최고기온은 75 °F (24 °C)인데 반해 카노가 공원은 95 °F (35 °C)이다. 남부캘리포니아 해안에 위치한 도시는 "June Gloom"이라고 부르는 늦봄, 초여름과 같은 날씨가 계속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또한 아침에 흐린 날씨나 안개가 낀 날씨를 동반해서 이른 오후에나 태양이 뜬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의 평균 연강수량은 384.6 mm이다. 비는 겨울이나 봄(주로 11월, 4월)에 주로 내린다. 일반적으로 소나기 형태로 내리지만, 가끔 큰비와 겨울 폭풍 중 천둥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도한다. 산악 지역은 강수량이 약간 더 많고, 해안 지역은 대체로 적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의 샌퍼넌도밸리 지역은 연간 410mm에서 510mm까지의 강수량을 기록한다. 눈은 도시 지역에서는 극히 적지만, 도시 경계 내의 강설량은 대체로 산악 지대에서 온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기록된 가장 많이 내린 강설량은 1932년 당시 2인치(5cm)이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최고 기온은 2010년 9월 27일 기록한 113 °F (45 °C)이고, 가장 낮았던 기온은 1944년 12월 22일 기록된 24 °F (−4 °C)이다. 도시는 80개가 넘는 구역과 주변 지역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대부분의 지역은 도시의 비법인지구 또는 지역 사회로 통합되었다. 인근 지역사회와 내륙의 대부분은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에 포함되었다. 도시는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 이스트 로스앤젤레스, 노스이스트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로스앤젤레스, 하버 지역, 그레이터 할리우드, 윌셔, 웨스트사이트, 산페르난도, 크레센타밸리. 로스앤젤레스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지역 사회도 포함한다 웨스트 애덤스, 왓츠, 라이메르트 파크, 볼드윈 힐스, 베니스, 다운타운 파이낸셜디스트릭트, 할리우드, 실버레이크, 코리아타운, 웨스트우드 그리고 부유층이 많은 할리우드힐스, 벨에어, 베네딕트캐년, 로스 펠리스, 퍼스픽펠리세이즈, 센추리시티, 브렌트우드, 핸콕파크. Center LA Live.jpg|L.A. 라이브 s Chinese Theatre, by Carol Highsmith fixed & straightened.jpg|그라우맨스차이니즈 극장 Observatory, Los Angeles, California.jpg|그리피스 천문대 Records Building LA.jpg|캐피톨 레코드 빌딩 Flight East.jpg|앤젤스 플라이트 (2).jpg|섬네일|위오른쪽|아카데미상이 열리는 돌비 극장 힐스의 할리우드 사인 로스앤젤레스는 종종 "세계 창조의 수도"라고 불린다. USC스티븐스혁신기관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는 문명의 역사상 그 어떤 도시보다 예술가, 작가, 영화 제작자, 배우, 댄서, 음악가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는 할리우드의 고향으로, 세계적으로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영화산업의 중심지라는 증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하고,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상이 매년 이 곳에서 열린다. 마지막으로 로스앤젤레스는 USC 영화예술학교가 있는 곳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학교이다. 공연예술은 로스앤젤레스의 문화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USC스티븐스혁신기관에 따르면 매년 1,100개 이상의 연극이 만들어지고 매주 21개의 연극이 열린다고한다. 로스앤젤레스 뮤직 센터는 미국에서 가장 큰 공연 예술 센터 중 한 곳으로, 연간 13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뮤직 센터로 유명한 곳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생겨난 곳이다. 센터시어터그룹, 로저 와그너 합창단,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단과 같은 이름있는 단체 또한 음악 센터의 거주자 기업이다. 재능은 콜번 스쿨과 USC 손턴 음악 학교와 같은 최고의 기관에서 가르친다. 로스앤젤레스 군에는 841개가 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있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는 세계의 그 어떤 도시보다 1인당 박물관 수가 많다. 미국 서부에서 제일 큰 미술 박물관인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세계의 귀중한 물품이 많은 기관 J. 폴 게티 트러스트의 일부인 게티 센터,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은 유명한 박물관들이다. 주요 미술관들은 대부분 갤러리 로에 위치하고있으며, 한달간 열리는 다운타운 아트 워크에는 수 만명이 참석한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본사 로스앤젤레스 금융 지구 센추리시티에 있는 20세기 폭스의 본사 폭스 플라자 이 지역의 영어로된 주요 일간신문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이다. La Opinión 은 스페인어로된 주요 일간신문, 《미주 중앙일보》에서 발행하는 《The Korea Daily》와 《코리안 타임스》는 한국어로된 주요 일간신문이다.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센티널》은 미국 서부 가장 많은 흑인 독자 수를 자랑하고있는 로스앤젤레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주요 일간신문이다. 플라야델레이에 본사를 두고있는 《인베스터즈 비즈니스 데일리》는 L.A.의 기업 사무실에서 발행된다. 샌퍼넌도밸리 지역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뉴스》, 《LA 위클리》, 《로스앤젤레스 시티비트》,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의 음악계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L.A. 레코드》, 《로스앤젤레스 매거진》, 《로스앤젤레스 비지니스 저널》, 법률 산업과 관련된 신문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저널》, 《더 할리우드 리포트》, 엔터테인먼트 산업 관련 신문 《버라이어티》,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뉴스》는 수 많은 작은 지역신문들을 대안하는 주간지, 잡지들이다. 주요 신문들 이외에도 이민공동체들에게 에르메니아어,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히브리어, 아랍어, 페르시안어와 같은 자신의 모국어로된 많은 지역 정기 간행물을 발행한다. 로스앤젤레스에 인접한 많은 도시들은 로스앤젤레스 주변지역과 보도와 독자가 겹치는 일간지를 가지고있다. 사우스베이에서 발행되는 《데일리 브리즈》, 《더 롱비치 프레스-텔레그램》이 이와 같은 예이다.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은 일곱 개의 VHF를 할당받은 유일한 두 곳의 미디어 시장이다. 로스앤젤레스는 세 개의 PBS 뿐만 아니라 주요 방송 채널이 있는 도시이다. 월드 TV로 두 개의 채널이 있고 몇개의 스페인어 텔레비전 네크워크도 있다. KTBN-TV 40은 미국 기독교 케이블 방송의 주요 네트워크국으로 샌타애나에 본사를 두고있다. 또한 다양한 독립 텔레비전 방송국이 운영되고있다. 로스앤젤레스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은 NFL 로스앤젤레스 램스와 로스앤젤레스 차저스, 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NBA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NHL 로스앤젤레스 킹스, MLS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WNBA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 등이 있다. 2000년에는 3,694,820명이었으며, 2006년에는 약 3,849,478명으로 늘어났다. 2005–2007년 미국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백인은 로스앤젤레스 인구의 48.7% 이고, 흑인은 9.9%, 인디언은 0.5%, 아시아계 미국인은 10.6%이었다. 그리고 히스패닉과의 혼혈이 인구의 48.5%를 차지했다. 약 380만 인구 가운데 ‘백만장자’만도 약 25만 명에 이른다.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만 노숙자가 10만 명에 이르기도 한다. Financial district.JPG|섬네일|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의 금융지구. 로스앤젤레스의 경제는 국제무역, 엔터테인먼트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게임, 음악산업), 항공우주 산업, 기술, 석유, 패션, 섬유, 관광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 미국 서부에서 가장 큰 공업지역이다. 로스앤젤레스 주변 항구와 롱비치는 서반구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이고, 세계 다섯 번째 항구이다. 또 환태평양 무역에 있어서 필수적인 항구이다. 이 외에 주요 산업으로 대중 매체, 금융, 통신, 법, 의료, 교통이 있다. 로스앤젤레스-롱비치-산타애나 대도시 통계 지구(MSA)의 대도시총생산(GMP)는 7,357억 달러(2010년 기준)로, 뉴욕-뉴어크-브리지포트 대도시권과 도쿄 수도권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경제 규모이다.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이 하나의 국가로 독립 해 명목 국내총생산을 따진다면 세계 15위이다. 영국의 러프버러대학교 연구 그룹이 2010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는 "알파 세계도시"로 분류되었다. 포춘 500 순위에 든 기업 중 여섯 개가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여섯 개의 기업은 자원 기업 옥시덴탈 페트롤리움, 건강보험 회사 헬스 넷, 금속 배급회사 릴라이언스 스틸 엔 알류미늄, 기술 컨설팅회사 AECOM, 부동산 회사 CBRE 그룹, 건설사 튜터페리니이다. 이 외에 캘리포니아 피자 키친, 캐피탈 그룹 컴퍼니스, 치즈케이크 팩토리, 커피빈 앤드 티리프, deviantART, 폭스 엔터테인먼트 그룹, 게스, 도쿄팝 등 수 많은 기업들이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USC)는 매년 40억 달러를 기부해 도시의 가장 큰 민간 부문 고용과 기부를 하고 있다. 2010년 도시의 포괄적인 연차 재무보고에 따르면 2009년 가장 많은 고용을 한 기관 10위권에 로스앤젤레스 군,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세다스 시나이 의료센터, 카이저 퍼머넌트, 폭스 엔터테인먼트 그룹, 파머스 인슈어런스 그룹, 팀원, 노스럽 그러먼이 포함되었다. 도시와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은 광범위한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망으로 연결되어있다. 텍사스교통국은 연간 도시 교통량 조사에서 로스앤젤레스가 2005년 인구 1인 당 연간 교통 정체량이 최고라고 발표했는데, 미국에서 가장 혼잡한 도로 교통량을 보유하고있다. 연구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의 인구 1인 당 연간 교통 체증 경험 시간이 72시간으로, 각각 평균 60시간을 기록한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워싱턴 D.C., 애틀랜타에 이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도시의 교통 혼잡률에도 불구하고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와 같은 다른 주요 도시에 비해 통근 거리는 비교적 짧다. 로스앤젤레스의 평균 통근 시간은 26.2분으로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와 비슷한 수준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주요 고속도로는 남쪽으로 샌디에이고에서 멕시코 티후아나를 이어주고, 북쪽으로는 새크라멘토, 포틀랜드, 시애틀,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주는 주간고속도로 제5호선과 잭슨빌까지 이어지는 주간고속도로 제10호선 등이 있다. 또 캘리포니아 해안지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북해안지역, 오리건주, 워싱턴주를 이어주는 국도 제101호선이 있다. Angeles County Metro Rail and Metro Liner map.svg|섬네일|로스앤젤레스 군 광역철도와 로스앤젤레스 군 광역급행버스 노선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도심 교통당국과 교통 기업은 광범위한 버스노선 뿐만 아니라 전철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를 가로질르는 모노레일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9월 버스와 전철, 모노레일을 합친 월간 대중교통 이용자는 3,880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이중 3,050만 명이 버스 이용자들이였는데, 버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번째로 혼잡하다. 전철과 모노레일을 합친 월 평균 이용객은 820만 명이다. 2005년 로스앤젤레스의 통근자 10.2%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조사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통을 담당하고 있는 공사는 로스앤젤레스 도시 교통국 (Los Angeles County Metro Transit Authority, LACMTA)다. 로스앤젤레스 전철은 미국에서 아홉 번째로 이용자가 많고, 모노레일은 두 번째로 많다. 노선으로는 전철 노선인 파란선, 빨간선, 보라선, 초록선, 금선, 엑스포선이 있다. 오렌지 라인과 실버 라인은 간선급행버스체계 형식으로 지어졌다. 메트로링크의 통근철도는 로스앤젤레스와 주변 지역, 교외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메트로링크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도심 교통당국에서 운영하는 철도교통 이외에 도시간을 이어주는 암트랙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는 역은 다운타운 북쪽에 있는 유니온역이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테마 빌딩. 로스앤젤레스의 주요 공항으로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IATA LAX, ICAO KLAX)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은 2006년 6,100만 명의 이용객과 200만 톤 이상의 화물 처리를 했는데,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혼잡하며, 미국에서 세 번째로 혼잡한 공항이다. 또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즈의 허브 공항이다. 이 외에 주요 공항으로 다음과 같이 있다. (IATA ONT, ICAO KONT) LA/온타리오 국제공항은 로스앤젤레스 소재의 공항으로, 국내선을 운영하고 있다. (IATA BUR, ICAO KBUR) 밥 호프 공항은 버뱅크 공항으로도 잘알려져있다. 샌퍼난도와 샌 가브리엘 밸리 사이를 운영한다. (IATA LGB, ICAO KLGB) 롱비치 공항은 롱비치/하버 지역을 운영한다. (IATA SNA, ICAO KSNA) 존 웨인 공항은 오렌지 카운티의 소재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밴 나이스 공항(IATA VNY, ICAO KVNY)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범용 공항 중 한 곳이다. 로스앤젤레스는 25군데의 자매 도시가 있다. 나고야 시 (1959) 에일라트 (1959) 사우바도르 (1962) 보르도 (1964) 베를린 (1967) 루사카 (1968) 멕시코시티 (1969) 오클랜드 (1971) 부산광역시 (1971) 뭄바이 (1972) 테헤란 (1972) 타이베이 시 (1979) 광저우 (1981) 아테네 (1984) 상트페테르부르크 (1984) 밴쿠버 (1986) 기자 (1989) 자카르타 (1990) 카우나스 (1991) 마카티 (1992) 스플리트 (1993) 산살바도르 (2005) 베이루트 (2006) 이스키아 (2006) 예레반 (2007)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로스앤젤레스 통합 교육구 공식 홈페이지 주 로스앤젤레스 대한민국 총영사관 네이버 캐스트 여행 - 로스앤젤레스 분류:캘리포니아주의 도시 분류:미국의 항구 도시 분류: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 분류:하계 패럴림픽 개최 도시 분류:캘리포니아주의 군청 소재지 |
로널드 윌슨 레이건 (, , 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의 40대(1981년 ~ 1989년) 대통령과 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이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화이트사이드 카운티에 있는 탬피코에서 태어났고, 일리노이 주 리 컨트리에 있는 딕손에서 자랐으며, 일리노이 주 유레카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으로 문학사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 레이건은 처음으로 일리노이 주를 떠나 아이오와로 가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으며, 1937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자리를 옮겼다. Reagan in Dixon, Illinois, 1920s.jpg|섬네일|180px|왼쪽|일리노이주, 딕손에서 10대 때 로널드 레이건 Reagan as Radio Announcer 1934-37.jpg|섬네일|왼쪽|라디오의 스포츠 아나운서 시절 1911년, 일리노이주 탬피코에서 가난한 구두 판매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932년 유레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 할리우드에 들어가 1964년까지 《Kings Row》(1942년) 등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나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민주당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했으나, 1950년대 초부터 차츰 보수적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1949년에는 제인 와이먼과 이혼했고 3년뒤인 1952년에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공군 기지의 부관으로 종군했고, 1962년, 공화당에 가입했고 신자유주의자로 증세와 재정지출 확대에 매우 비판적이었다.1966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주지사로 당선되어 조세감면, 복지제도의 축소, 고등교육정책에 힘을 쏟았고 캘리포니아 주의 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바꿨다. 196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며 197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에게 패했으나 1980년에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경제불황으로 인기가 추락했던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지미 카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미국은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했는데 기존 케인스 경제학으로는 설명을 할 수 없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기현상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집권당 내부에서도 상당한 세력의 반대가 있었지만 임기초부터 방만한 재정지출 축소와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다. 또 가격과 경쟁을 정부에서 통제하고 관리감독하는 틀자체를 폐지시켜버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항공기 산업인데 당시 미국의 항공사는 민간 업체였지만 항공요금은 정부에서 가격을 통제했다. 항공사들은 가격경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할인행사나 기내식 서비스로 서로 경쟁을 하려고 했지만 레이건 정부 이전까지만해도 이런 기내식 서비스나 할인권 발매 같은 경쟁도 금지시키고 동일하게 운영하게 늘 관리감독을 했다. 레이건 정부에서 산업부분에 경쟁체제를 도입한 후 항공사들끼리 가격경쟁이 일어나면서 항공권 가격은 일제히 하락했다. 이 저렴한 항공권 때문에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항공기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런 경쟁이라는 개념은 지금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지만 냉전시기였던 당시만해도 경쟁이라는 개념은 금기시하던 시대였다. 물론 레이건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을 벗어났고 동시에 침체한 경기를 활성화해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됐다는 건 수치상으로 증명이 된다. 문제는 경쟁에서 밀려난 소수의 계층이 존재한다는 점인데 레이건 정부는 이런 계층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인식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1981년 3월 30일에는 힐튼 호텔에서 노동계 지도자들과 오찬을 마치고 떠나던 도중 정신질환자였던 존 힝클리(John Hinckley)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히 총알이 심장에서 12 cm 떨어진 곳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테쿰세의 저주를 피해간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 저격사건으로 인해 경호원이었던 팀 매카시(Tim McCarthy)도 몸으로 레이건을 막아 부상을 당했으나 회복되었다. 당시 존 힝클리는 범행 이유에 대해 당시 유명 영화배우였던 조디 포스터(Alicia Christian Foster)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고 범행 이유를 자백하였고,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점과 대통령이 무사하다는 점이 정상 참작되어 1982년, 무죄 판결을 받고 세인트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재임시절 여러번 방한 한 적도 있었고 그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도 정상회담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장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면서 전두환은 취임 직후 한국 대통령 최초로 백악관 국빈방문을 성사해 냈고, 이후로도 찰떡같은 한미공조를 이뤄냈다.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과도 절친했던 레이건은 한미일 삼각공조를 성공적으로 이룩해냈다. 장벽의 붕괴를 연설하는 레이건 (1987년) and Gorbachev hold discussions.jpg|섬네일|소련 고르바쵸프와 정삼회담을 하는 레이건 (1985년) 레이건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보수적이고 강경한 국내외정책을 펼쳐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에게 압승을 거두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을 억제한 ‘레이거노믹스’의 결과 재정 및 무역 적자를 초래했고 대외정책에서 레바논 파병과 리비아 폭격, 냉전체제가 공산권의 사멸로 끝났으니 국방비를 복지비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평을 억누르려는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과 반군지원 등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위협을 주었고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우방국인 영국을 옹호했으며 아르헨티나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중남미에서는 레이건이 마가렛 대처의 정부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등 레이건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1986년 이란 - 콘트라 사건 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1987년 12월에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중거리핵전력폐기조약 (INF Treaty)을 맺어 냉전을 종식시켰고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부통령이었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도와 공화당 재집권에 성공했으며 1989년에 퇴임하였다. Bush presents Reagan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1993.jpg|섬네일|왼쪽|퇴임을 앞둔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가 1989년에 퇴임한 미국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하는 모습 (1993년) 그는 공화당을 더욱 강경한 보수주의로 이끌었던 미국 보수주의운동 진영에서 배출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나이인 70세의 나이로 취임한 대통령이기도 했으며, 최초로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였다. 그 후, 1989년, 조지 H. W. 부시는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그는 퇴임하고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자택으로 돌아갔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다시 돌아왔지만 빌 클린턴이 당선되고 조지 H. W. 부시는 결국 낙선되었다. 하지만 1993년, 조지 H. W. 부시는 퇴임을 앞두고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레이건의 묘비 1994년 11월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뇌의 퇴행성 질환의 하나로 의식의 혼탁과 기억 장애 등의 증상을 유발하는 이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를 바랬고, 이 병의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1995년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과 국립 알츠하이머병 재단과 함께 로널드 낸시 레이건 연구소(Ronald and Reagan Research Institute)를 창설했다. 1997년 10월에는 자신의 대통령 재직 사실도 모르고, 정신 혼미와 발작증상 등이 나타났으며, 1999년에는 신체기능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2004년 6월 5일10년간 투병해 온 그는 캘리포니아의 자택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향년 93세의 일기로 끝내 별세했다. 2011년, 갤럽(Gallup)의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레이건이 19%를 득표하며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14%를 기록한 링컨이었다. 사회학자 송호근은 기술관료적 성격을 갖는 정치인이라면 불가능했을 사회혁신을 특유의 정치력으로 밀어붙인,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 중 한 명으로 레이건 대통령을 언급했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점에 분배구조와 복지개혁에 주력하며 노사협력 제도를 창안해 정착시키고, 사회적 투명성과 합리성을 증진하는 제도는 물론 상호신뢰를 높이는 각종 제도를 도입했던 선진국 지도자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배드 듀드스 VS. 드래곤닌자라는 아케이드 게임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닌자 집단에게 납치당하지만 배드 듀드스에 의해 구조된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레이건은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고령의 나이에 당선되었다(취임식 기준 만 69세 349일). 하지만 이 기록은 도널드 트럼프가 만 70세의 나이로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깨졌다. 기독교 우파 레이거노믹스 로널드 레이건호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1966년 선거 캘리포니아 주지사 33대 공화당 57.55% 3,742,913표 1위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1970년 선거 캘리포니아 주지사 33대 공화당 52.83% 3,439,174표 1위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1980년 선거 미국의 대통령 40대 공화당 50.75% 43,903,230표 1위 25px 1984년 선거 미국의 대통령 40대 공화당 58.77% 54,455,472표 1위 25px 분류:1911년 태어남 분류:2004년 죽음 분류:보수주의 분류:미국의 대통령 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 분류:아일랜드계 미국인 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분류:아일랜드계 미국 대통령 분류:일리노이주의 정치인 분류:캘리포니아주의 정치인 분류:캘리포니아주지사 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분류:알츠하이머병으로 죽은 사람 분류:미국 공군의 장교 분류:유레카 대학교 동문 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 분류:미국의 장로교도 분류: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옛 미국 민주당의 정치인 분류:공화당 (미국)의 정치인 분류:1968년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1976년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1980년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1984년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미국의 자서전 작가 분류:백수리 훈장 (폴란드) 수훈자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 분류:미국의 보수주의 분류:공화당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보수주의자 분류:미국의 일기 작가 |
Every Little Thing (에브리 리틀 씽)은 일본 에이벡스에 소속된 대중음악 그룹이다. 줄여서 ELT 라고도 부른다. 일본 내에서 인기가 있고, 한국에도 상당한 팬층을 갖고 있다. 에이벡스 그룹의 에이벡스 트랙스에 소속되어 있다. Every Little Thing 이란 이름은 "우주에서 내려다 보면 작은 존재인 인간과 동물등 모든 것들에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덧붙여 "만물은 어차피 모두 조그맣다. 앞만 보고 가자!"란 메시지도 담고 있다고 한다. 1996년에 보컬, 작사 담당 모치다 카오리, 기타 · 작곡 · 편곡 담당 이토 이치로, 리더 사운드 프로듀스 · 키보드 · 작사 · 작곡 · 편곡 담당 이가라시 미츠루의 3명으로 첫 번째 싱글 "Feel My Heart"로 avex trax에서 데뷔했다. 이 싱글은 오리콘 최고 순위 24위를 기록하고 약 1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1997년에 세 번째 싱글 "Dear My Friend" 로 히트를 치고 첫 앨범 "everlasting"의 메가 히트, 1998년 여덟 번째 싱글 "Time goes by"가 싱글 최초의 밀리언 히트를 기록하는 등 이가라시 음악의 세계관, 신디사이저를 구사한 사운드와 모치다의 보컬, 패션이 10대~20대를 중심으로 지지를 받게 되고,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성장하였다. 초창기 작사 · 작곡 · 편곡은 이가라시가 혼자서 맡아서 데뷔 이래 하이 페이스를 유지하며 싱글 릴리스를 계속해왔다. 1999년 제작을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이가라시의 생각에서 3월의 열한 번째 싱글 "Over and Over", 열두 번째 싱글 "Someday, Someplace"와 베스트 앨범 "Every Best Single +3"의 릴리스 후 릴리스와 투어 없이 휴식기를 보냈다. 2000년에 열세 번째 싱글 " Pray / Get Into A Groove"와 열네 번째 싱글 "sure", 세 번째 앨범 "eternity"발매 후 3월에 이가라시가 프로듀싱에 전념하기 위해 탈퇴하였다. "이가라시가 탈퇴 후 사운드 프로듀싱에 전념할 것"이라고 발표 이후부터 TV와 콘서트에 출연은 하지 않고 악곡 제공은 계속 이어갈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eternity"에서 싱글 컷 된 열다섯 번째 싱글 "Rescue me (Single Mix)"를 제외하고 나머지 ELT의 악곡에 직접적으로 이가라시가 참여하는 것은 오랫동안 없었다. 그로부터 약 9년 뒤인 2009년 9 월 23일 발매된 서른여섯 번째 싱글 "DREAM GOES ON", 같은 해 11월 18일 발매된 서른일곱 번째 싱글 "冷たい雨", 2010년 2월 24일 발매된 서른여덟 번째 싱글 "Change"에 이가라시가 사운드 프로듀서로 작곡 · 편곡에 참여하였다. 이가라시 탈퇴 후 곡의 작사는 거의 모두 모치다가 하고 있고, 작곡은 카즈히토 키쿠치, 타고 쿠니오, HIKARI 등의 작곡가로부터 곡을 제공받고 있다. 물론 모치다와 이토가 작곡을 맡는 경우도있다. 또한 사운드 면에서도 이가라시 시절에는 신디사이저를 많이 사용한 곡이 많았지만, 이가라시 탈퇴후 1년여를 거친 2001년 가을 이후에는 밴드 사운드 어쿠스틱 지향의 곡이 많아지고 있다. (이가라시 탈퇴 직후에는 그의 노래 스타일을 답습한 곡이 많았다). 2007년 무렵부터는 기타 이외의 반주를 메인으로 하고 기타를 장식음으로 처리하는 곡도 증가하기 시작해 이가라시가 프로듀싱을 재개한 2009년 이후에는 초창기의 스타일을 다시 도입한 곡도 만들고 있다. 대표곡 중 하나인 "fragile"는 2001년 오리콘 연간 가라오케 차트에서 1위를 차지, 그 후에도 3년 연속 연간 TOP10에 진입하는 등, 일반 여성의 가라오케의 애창곡으로 정착하고있다. 여성 아티스트의 경우 솔로 체제가 많은 가요계에서 이러한 밴드 체제로 데뷔 이후 15년 이상 활동을 하고있는 매우 귀중한 존재이다. 또한 NHK 홍백가합전은 8회 연속 출전하였다. (1997년 ~ 2004년) 현재 구성원 모치다 카오리 (, 1978년 3월 24일 - ) 보컬, 작사 이토 이치로 (, 1967년 11월 10일 - ) 기타 이전 구성원 이가라시 미쓰루 (, 1969년 5월 17일 - ) 작사, 작곡과 키보드. 2000년에 탈퇴했다. 서포트 멤버 하야시 마사후미 - 키보드 (2001년 가을 - 현재) 소가와 토모지 - 밴드 프로듀서 (2011년 여름 - 현재) 카사하라 나오키 - 베이스 (2005년 여름 - 현재) 마쓰가와 코우지 - 드럼 (2013년 겨울 - 현재) 이전 서포트 멤버 카토 카오루 - 기타 (데뷔 - 2007년 12월) 사이드 기타. 탈퇴 후 ELT에서는 사이드 기타를 배치하지 않고 있다. 아사다 타케시 - 베이스 (데뷔 - 2001년) 야마다 사토시 - 베이스 (2002년 - 2005년) 쿠와지마 겐야 - 키보드 (데뷔 - 2001년) 야시로 츠네히코 - 키보드 (2001년 투어) 타나하시 노부히토 - 밴드 프로듀서 (2001년 - 2004년 여름) 나카무라 야스나리 - 밴드 프로듀서 (2004년 여름 - 2011년 초) 코도우 케이이치 - 드럼 (데뷔 - 2001년) 야마구치 타카 - 드럼 (2001년 가을 - 2012년) # Feel My Heart(1996.8.7) # Future World(1996.10.23) # Dear My Friend(1997.1.22) # For the moment(1997.6.4) # 만났을 때처럼(1997.8.6) # Shapes Of Love/Never Stop!(1997.10.22) # Face the change(1998.1.7) # Time goes by(1998.2.11) ※ Every Little Thing이 발매한 싱글 중 유일한 밀리언 셀러 # FOREVER YOURS(1998.6.17) # NECESSARY(1998.9.30) # Over and Over(1999.1.27) # Someday, Someplace(1999.3.3) # Pray/Get Into A Groove(2000.1.1) # sure(2000.2.16) # Rescue me/Smile Again(2000.6.14) # 사랑의 조각(2000.10.18) ※ 이가라시 미쓰루 탈퇴 후 발매한 첫 싱글 # fragile/JIRENMA fragile/ Dilemma(2001.1.1) ※ 이니셜 D 3rd Stage 엔딩으로 JIRENMA가 사용됨 # Graceful World(2001.2.21) # jump(2001.10.17) # 기억(2002.5.15) # 소박한 기도(2002.8.16) # UNTITLED 4 ballads(2002.12.18) # Grip!(2003.3.12) # Fundamental Love(2003.7.30) # 내일 또 봐요(2003.11.12) # 하늘모양(2004.2.25) # /good night 연애편지 / good night(2004.12.15) # 그대의 손(2005.10.26) # azure moon(2006.3.15) # Hi-Fi Message(2006.6.14) # 스이미(2006.8.30) # 반짝임의 시간(2007.8.8) # 사랑을 하고 있어(2007.10.31) # (2008.2.13) # 새로운 날들/황금의 달(2008.8.27) # Dream Goes On (2009.9.23) # 차가운 비(2009.11.18) # Change (2010.2.24) # STAR (2011.2.23) # MOON (2011.2.23) # 宙 -そら-/響 -こえ- (2011.7.13) # アイガアル(2011.8.24) # Landscape (2011.12.7) # ON AND ON (2013.2.20) # ハリネズミの戀/Lien (2013.04.10) # ANATA TO (2015.04.22) # KIRA KIRA / AKARI (2015.11.4) # everlasting(1997.4.9) # Time to Destination(1998.4.15) # eternity(2000.3.15) # 4 FORCE(2001.3.22) # Many Pieces(2003.3.19) # commonplace(2004.3.10) # Crispy Park(2006.8.9) # Door(2008.3.5) # CHANGE (2010.3.24) # ORDINARY (2011.9.21) # FUN-FARE (2014.2.19) # Tabitabi (2015.9.23) # Every Best Single +3(1999.3.31) # Every Ballad Songs(2001.12.5) # Every Best Single 2(2003.9.10) # ACOUSTIC:LATTE(2005.2.16) # 14 Message - Every Ballad Songs:2(2007.2.14) # Every Best Singles ~COMPLETE~ (2009.12.23) # Every Cheering Songs ~すべての人達に贈るELT応援ソングベスト~ (2015.1.14) # Every Best Singles 2 ~MORE COMPLETE~ (2015.9.23) # THE REMIXES (1997.9.17) # THE REMIXES II (1998.11.18) # SUPER EUROBEAT presents Euro Every Little Thing (2001.9.5) # The Remixes III 〜Mix Rice Plantation〜 (2002.2.27.) # Cyber TRANCE presents ELT TRANCE (2002.2.27) Concert Tour 98 Time to Destination :앨범 "Time to Destination" 발매와 함께 진행한 첫 번째 투어. 이가라시가 참가한 유일한 투어이다. concert tour spirit 2000 :앨범 "eternity" 발매와 함께 진행한 투어. 이가라시가 빠진 키보드 자리는 대타 없이 기존 서포트 멤버 쿠와지마만 참여했다. 이 투어의 성공이 이후 2명의 활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Concert Tour 2001 4 FORCE :앨범 "4 FORCE의 발매와 함께 진행한 투어. 데뷔 당시부터 ELT를 서포트해온 멤버 (Kbd 쿠와지마, Dr 코도우, Ba 아사다)가 참여한 마지막 투어이다. 이 투어에서만 키보드 파트에 야시로 츠네히코가 추가로 참여하였다. 2003 tour MANY PIECES :기타 이외의 모든 서포트 멤버가 바뀐 후 첫 투어. 이 투어부터 어쿠스틱 코너가 매번 등장한다. commonplace tour 2004-2005 :ELT 사상 최대 규모의 투어. 이것은 각 지역을 모두 돌고 싶다는 두 사람의 희망에 의한 것이었지만, 투어 초반부터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하고 투어 막바지에는 연말연시의 가요 프로그램 참여가 겹친다는 빠듯한 일정도 있었고, 모치다가 급성 기관지염이 발병하여 구마모토 공연에서는 fragile 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모치다가 우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는 1월 28일, 30일에 예정된 공연이 각각 4월 8일과 4월 3일로 연기되어 버렸다. 그러나 라이브 DVD는 당초 예정대로 모든 공연을 마치기 전에 3월 24일에 발표되었다. concert tour 2006-2007 Crispy Park :앨범 "Crispy Park"의 발매와 함께 진행한 투어. concert tour 2008 Door :앨범 "Door"의 발매와 함께 진행한 전국 투어. 기타 서포트 멤버 카토 카오루가 탈퇴했고, 이 투어에만 현악기 3명이 참가했다. 투어 후반부터 이토가 다래끼가 생겨 검은 안대를 끼고 무대에 섰다. concert tour 2009-2010 MEET :2009년 10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진행된 전국 투어. "ELT로서는 처음으로 앨범을 내걸지 않은 투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이른바 "베스트 히트 투어"). 투어 기간 동안 베스트 앨범 "Every Best Single ~COMPLETE~"가 발매되었고, 투어 막바지 도쿄 공연 전에 오리지널 앨범 "CHANGE"가 발매되었다. 또한 도쿄 공연에는 12년 만에 이가라시 미츠루가 서프라이즈 게스트로 등장 해 ELT투어 사상 최초로 키보드 3명이 연주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3월 28일 마지막 공연에서는 모치다의 생일 케이크가 등장하였다. (모치다 생일이 공연 4일전). 이가라시가 케이크를 가지고 등장했을 때, 키보디스트 하야시 마사후미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하야시의 생일 케이크라고 믿고 있었다. (하야시의 생일 케이크는 그날 리허설 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투어에서 오랫동안 라이브로 연주하지 않았던 "Over and Over"가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었다. Premium Christmas Concert Tour 2010 :2010년 12월 7일부터 23일까지 열린 투어. 투어중인 MEET 무대 세트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현악기 4명이 참가했다. Every Little Thing 15th Anniversary Concert Tour 2011 ~ 2012 "ORDINARY" :2011년 10월부터 2012년 3월까지 진행된 전국 투어. 데뷔 15주년을 기념한 앨범 "ORDINARY"를 중심으로 한 컨셉 투어이다. 또한 ELT 서포트 멤버인 하야시 마사후미 (키보드)와 야마구치 타카 (드럼)가 2001년 가을부터 이때까지 ELT 서포팅 10년째가 되었다. (특히 하야시는 현재까지 ELT 최장 기간 서포트 멤버로 남아 있다.) 최근까지 라이브로 연주되어 온 "Free Walkin "(이 곡으로 밴드 멤버 소개와 각자의 솔로를 선보인다.)은 연주되지 않았다. Every Little Thing Concert Tour 2013 - ON AND ON - :2013년 1월부터 6월까지 진행된 전국 투어. MEET 투어 때와 마찬가지로 신곡 (싱글)의 발매는 있었지만, 앨범의 제작/발매는 없었다. 투어 후반부터 모치다가 어쿠스틱 기타 연주 (신곡 "Lien")를 선보였다. 2001년부터 10년 가까이 ELT의 드럼을 맡았던 야마구치 타카가 빠지고, 이 투어부터는 마쓰가와 코우지가 드러머로 참여하였다. (강한 어깨의 소유자로, 앙코르시 일반적으로는 닿지 않는 2층석까지 수건을 던지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토가 마쓰가와를 아이언 맨 이라고 부른다.) Every Little Thing Concert Tour 2014 - FUN FARE - :2014년 2월 22일부터 7월 6일까지 진행된 전국 투어. 앨범 "FUN-FARE"를 중심으로 한 컨셉 투어. 마지막 투어 "ON AND ON"처럼 겨울부터 여름에 걸쳐 열리는 투어. 이 투어의 큰 특징으로, 모치다가 처음으로 헤드셋 마이크를 착용하고 춤을 추면서 노래했다. 마지막 공연은 당초 7월 11일 나하 시민 회관에서 개최될 예정 이었지만, 태풍 8호의 영향으로 무대 세트와 장비를 실은 11톤 트럭 4대의 배편 수송이 되지 않아 최소한의 장비를 공수하고 연출을 대폭 축소 · 변경한 후 실시하는 것도 검토되었지만, 안전면이나 장비 등의 사정에 의해 무산되었다. 또한 이 투어는 ELT는 처음으로 마지막 공연을 완수하지 못하고 종료한 투어가 되었다. (사실상의 마지막 공연은 7월 6일 도쿄 국제 포럼 A) Every Little Thing Web사이트 에이벡스 Every Little Thing 뮤직재팬플러스 뮤직재팬플러스 분류:에이벡스 그룹 음악가 분류:혼성 음악 그룹 분류:일본의 팝 록 밴드 분류:1996년 결성된 음악 그룹 분류:NHK 홍백가합전 출연자 |
보아 (1986년 11월 5일 ~ )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대한민국 솔로 가수 겸 배우다. 1998년 SM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참가해 연습생이 되었고 그 동시에 이수만이 제일 공을 들여 만든 최고의 연예인이다. 데뷔 전부터 일본어와 영어를 배워 해외진출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랜 연습 기간을 거친 뒤, 2000년 8월 25일 한국 첫 정규 음반 ID; Peace B 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후 일본의 레이블사 AVEX와 계약을 체결하고 2001년 일본 데뷔 싱글 "ID; Peace B"를 발매하며 일본에 진출했다. 일본 첫 정규 음반 Listen to My Heart 는 한국 가수로 처음으로 오리콘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1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2004년 발매한 두 번째 일본 정규 음반 Valenti 와 일본 베스트 음반 Best Of Soul 이 100만 장을 넘겼다. 한국에서도 No.1 (2002), Atlantis Princess (2003), My Name (2004), Girls On Top (2005)을 발매하였다. 2009년 4월 17일에는 미국 진출을 선언하며 미국 첫 정규 음반 BoA 를 발매해 한국 가수로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진입했다. 2010년에는 한국에서 5년 만의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 를 발매했고, 2년 뒤인 2012년 일곱 번째 정규 음반 Only One 을 발매했다. 그로부터 2년여만인 2015년 5월에는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보아 자신이 전곡을 작사, 작곡하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한 여덟 번째 정규 음반 Kiss My Lips 를 발매하였다. 2018년 2월에는 데뷔 이래 첫 미니앨범인 ONE SHOT, TWO SHOT 을 발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아홉 번째 정규 음반 WOMAN 을 발매하였다. 보아는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하였다. 지금까지 여섯 장의 정규 음반을 연속으로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는 하마사키 아유미와 코다 쿠미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세 장의 정규 음반을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해 밀리언 셀러를 달성하였고, 일본에서 지금까지 1000만 장에 가까운 음반이 판매되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보아의 경제적 가치는 2000억 원이 넘고, 음반 외 활동까지 합치면 수천 억 원에 이른다고 추산되고 있다. 남양주양정초등학교 (졸업) 서울삼육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졸업) 보아는 어머니 성영자 와 아버지 권재철 사이에서 1986년 11월 5일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에서 태어났다. 보아의 아버지는 TBC 방송국의 사운드 엔지니어였고, 방송국 퇴사 후에는 음향 장비와 관련된 일을 했다. 그 후, 보아의 아버지가 목장을 경영하면서, 보아는 도시가 아닌 한적한 시골에서 자랐고, 보아의 어머니는 방송에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전원에서 마음껏 뛰놀며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아이들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도심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생활을 즐기며 감춰져 있던 감수성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해 지금의 삼남매가 있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아의 형제로는 두 오빠가 있는데, 큰오빠인 권순훤은 서울대학교 음대 학사, 동대학원을 나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작은오빠인 권순욱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하며 서인영, 보아, 걸스데이 등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보아는 남양주양정초등학교에 다녔고, 전교회장을 역임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고, 한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때 나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무척 좋아했거든요."라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사립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이후 한국켄트외국인학교(K.K.F.S.)로 전학했다. 가수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수활동에만 집중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2002년 8월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2003년 4월 고졸(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던 중 13살(6학년)이었던 1998년, SM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약 2년 반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다. 나중에 보아는 인터뷰에서 "노래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무대에 설 수는 없었습니다. 가수가 되기 위해 3년 동안 피나는 훈련을 참아 냈습니다."라며 말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당시 보아를 "세계시장을 겨냥한 여가수"를 준비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따라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NHK 아나운서의 집에 머물며 정확한 일본어 발음을 익혔고, 구리시 서울삼육중학교에 다니던 중 영어회화를 위해서 한국켄트외국인학교로 전학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보아의 데뷔 프로젝트를 "신비 프로젝트"라 이름을 붙이고 보아의 데뷔를 진행해 나갔다. 이는 30억 정도를 들인 프로젝트였으며, SM 엔터테인먼트에서 H.O.T. 등의 가수들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모두 동원한 중대한 프로젝트였다. 보아의 데뷔가 다가오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바비, 신비라는 소문이 돌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아는 2000년 8월 25일 "15세의 춤추는 소녀"라고 불리며 데뷔 앨범 ID; Peace B 를 발매했다. ID; Peace B 에는 동명의 타이틀곡 "ID; Peace B"와 "SARA", 〈비밀일기〉 등 소녀적인 감성을 살린 밝은 댄스 곡과 발라드 곡으로 채워졌다. 보아는 2000년 8월 27일 SBS의 《인기가요》을 통해 데뷔 무대를 가졌다. 보아는 나름 어린나이에 당시 춤과 노래를 소화하며 화제성을 모았으나, 데뷔 초 아주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탓에 근거없는 루머가 퍼지면서 안티 팬들이 늘어 갔고 이들에게서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당시 차트 10위대를 유지하는 등 신인으로서 어느정도 성공은 했지만, 30억이라는 준비 과정과 비교하면 첫 앨범 활동은 그에 걸맞은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데뷔 이후 2001년 3월 7일, 보아는 에이벡스와 레이블 계약을 채결하며 일본 진출을 선언했고 그동안의 수록곡들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바꿔 부른 스폐셜 앨범 Don t start now - Jumping into the world 을 발매했다. 또한 같은 날, 일본 도쿄에서 대만, 홍콩, 일본 각국 취재진이 모여 쇼케이스를 취재했으며, 에이벡스는 이 쇼케이스에 7억을 투자했다. 에이벡스의 회장 요다 다츠미는 "보아는 카리스마와 빼어난 댄스동작, 가창력을 지녀 J-Pop의 여왕 아무로 나미에를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2001년 5월 30일 보아는 일본에서 데뷔 싱글 "ID; Peace B"를 발매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했고 오리콘 주간 싱글차트 20위권에 진입했다. 7월 25일에 발매한 두 번째 싱글 "Amazing Kiss"를 발매해 역시 20위권에 진입했다. 12월 5일에는 세 번째 싱글 〈키모치와 츠타와루〉를 발매해 오리콘 싱글차트 최초로 11위에 진입했고, 이어 12월 19일에는 코다 쿠미와 함께 네 번째 싱글이자 9·11 테러 추모 싱글인 "The Meaning of Peace"를 발매해 오리콘 싱글차트 7위에 오르며 이때부터 일본에서 가능성을 보였다. 2002년 1월 17일에는 네 번째 싱글 "LISTEN TO MY HEART"를 발매해 처음으로 오리콘 싱글 차트 5위에 올랐고 18만 장에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보아는 7장의 싱글을 발매한 이후 2002년 3월 13일 첫 일본 정규 앨범 LISTEN TO MY HEART 을 발매해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오리콘 일간,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했다. 이후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해 앨범은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2002년 4월 12일에는 한국에서 두 번째 한국 정규 앨범 No.1 을 발매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 있던 상황이었고, 이와 동시에 타이틀 곡 〈NO.1〉은 2002년 월드컵과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음악산업협회의 음반 판매량 집계에 따르면 《No.1·늘..》은 2002년 한 해 동안 54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 기록은 2002년 발매된 전체 음반들 중 4위를 차지하는 기록이다. 보아는 이 앨범에서 후속곡 〈My Sweetie〉와 발라드 곡 〈늘..〉 등으로 활동하다가 8월에 2집 활동을 마감했다. 8월 28일에는 일본에서 6번째 싱글 "VALENTI"를 발매했다. "VALENTI"는 라틴 리듬의 경쾌한 댄스 곡으로, 보아의 일본 싱글들 중 년 현재까지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싱글이다. 음반 순위 면에서도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이어 3주 뒤에는 7번째 싱글 〈奇蹟/NO.1〉을 발매했다. 특히 싱글 〈/NO.1〉을 발매한 주에는 〈VALENTI〉와 〈/NO.1〉이 모두 주간 차트 5위권 내에 진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12월 11일에는 발라드 싱글 〈JEWEL SONG/BESIDE YOU-僕を呼ぶ声-〉를 발매하고 활동했다. 한편, 9월 26일에는 그 간의 일본 활동곡들을 모아 한국어로 번안하여 수록한 스페셜 앨범 《MIRACLE》이 대한민국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 보아는 〈VALENTI〉와 〈기적〉으로 활동했고, 3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히트했다. 이러한 정규 2집 활동과 스페셜 앨범에서의 활약 덕분에 한국음악산업협회 기준 2002년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아티스트가 되었고, 연말 보아는 서울가요대상과 SBS 가요대전, m.net Music Video Festival에서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매년 12월 31일 그 해 인기 가수들이 출연하여 노래하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 무대에서 보아는 〈VALENTI〉를 노래했다. 이 때 출연한 뒤 보아는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 무대에 올랐다. 2003년 1월 29일, 보아는 일본에서 2번째 정규 앨범 VALENTI 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발매 일주일 만에 6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120만장을 돌파하며 보아의 첫 밀리언 셀러로 기록되었고, 2003년 오리콘 연간 앨범 차트에서 5위를 마크했다. 《VALENTI》 발매 이후에는 오사카 시·나고야·도쿄 등지를 돌면서 첫 콘서트 투어 BoA 1st LIVE TOUR 2003 VALENTI 를 개최하였다.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4개의 공연이 일정에 잡혀 있었지만 이후 2회의 추가 공연이 결정되어 총 6회의 공연을 펼쳤다. 특히, 도쿄 공연 때에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관람한 기사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5월 14일에는 9번째 싱글 〈Shine We Are!/Earthsong〉을 발매하였다. 발매 당일 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지만, 주간 차트에서는 모리야마 나오타로의 〈〉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2003년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는 한인들을 위한 음악제가 여럿 개최되었다. 보아도 4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음악제 와 9월 29일 뉴욕에서 열린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 한인 대축제 에 출연하였다. 5월에는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제작한 대한민국 특집 프로그램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로서 출연하여 진행자와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다. 5월 30일에 보아는 대한민국에서 3번째 정규 앨범 《Atlantis Princess》를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타이틀 곡은 〈아틀란티스 소녀〉로,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를 묘사한 동화 같은 가사를 담고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보아는 이 곡으로 6월 1일부터 TV 활동을 시작했고, 후속곡 〈Milky way〉와 발라드 곡 〈나무〉로 활동을 계속하며 3집 활동은 9월까지 이어졌다. 이때 보아는 교통사고로 인한 매니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타이틀 곡 〈아틀란티스 소녀〉대신 〈나무〉를 불러 매니저를 추모하며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3집 발매에 앞선 2003년 2월 보아는 서울특별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이에 맞춰 보아는 서울을 홍보하는 노래 〈서울의 빛〉을 녹음했으며, 2003년 5월 25일 제1회 하이 서울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며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서울의 빛〉은 이 시기에 발매된 3집에도 수록되었고,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에서도 들을 수 있다. 10월 22일에는 싱글 〈DOUBLE〉이 발매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동시 발매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첫 싱글, 일본에서는 통산 10번째 정규 싱글이었다. 이러한 싱글 동시 발매는 이어 발매된 〈Rock With You〉도 똑같이 이루어졌다. 12월 3일에는 대한민국에서 《MIRACLE》과 같은 방식의 스페셜 앨범 《SHINE WE ARE》가 발매되었다. 2004년 1월 15일, 일본에서 3번째 정규 앨범 《LOVE & HONESTY》가 발매되었다.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보아의 통산 3번째 1위였다. 이 앨범으로 미국의 빌보드 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 영국의 UK 차트 등 공신력있는 음악 차트를 토대로 세계 각국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여 순위를 매기는 유나이티드 월드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 이후에도 보아는 《BEST OF SOUL》로 1위에 오른다. 앨범 발매 후 일본에서의 2번째 콘서트 투어도 진행되었는데, BoA LIVE TOUR 2004 LOVE & HONESTY 는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총 9회의 공연을 선보인 콘서트 투어였다. 3월 19일에는 보아가 참여한 m-flo의 싱글 〈the Love Bug〉가 발매되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후 m-flo의 VERBAL이 보아의 콘서트 무대를 찾았을 때나, 2004년 연말 m-flo가 내한하여 MKMF에 참가했을 때 함께 〈the Love Bug〉를 부르기도 했다. 2월 14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MTV 아시아 어워즈 에 한국과 일본의 공동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 최고 인기 아티스트상 과 특별상인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상 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때 축하무대에서 보아는 록 밴드와 함께 〈Rock With You〉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불렀다. 6월 11일에는 대한민국 4번째 정규 앨범 《My name》을 발매하고 타이틀 곡 〈My Name〉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음악 스타일은 이전의 보아와는 아주 다른 파격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까지 〈NO.1〉·〈아틀란티스 소녀〉 등의 귀여운 10대 소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타이틀 곡 〈My Name〉은 어반 댄스 스타일의 곡으로, 골반 댄스 등 노래의 안무도 화제를 낳았다. 보아는 이 앨범의 수록곡 〈Spark〉와 〈My Prayer〉로 9월까지 활동했고, 연말에 MKMF에서 대상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9월 1일에는 일본에서 13번째 싱글 〈QUINCY/コノヨノシルシ〉를 발매했다. 이어 3개월 뒤인 12월 1일에는 14번째 싱글 〈メリクリ〉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잘 맞는 발라드 곡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보아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판매량도 싱글 〈Shine We Are!/Earthsong〉 이후 넘지 못했던 10만 장 선을 넘었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롱 히트했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위저가 리메이크한 곡이기도 하다. 2005년 2월 2일, 보아는 일본에서 첫 번째 베스트 앨범 《BEST OF SOUL》을 발매했다. 《BEST OF SOUL》은 2001년 〈ID; Peace B〉로 일본에서 데뷔한 이후, 〈メリクリ〉까지 총 14장의 싱글을 발매하는 동안 발표했던 싱글 곡들을 모은 앨범으로, 첫 주 48만장으로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최종적으로는 110만 장 가까이 팔렸다.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고 2개월 뒤 일본에서의 3번째 라이브 투어 콘서트 BoA ARENA TOUR 2005 BEST OF SOUL 를 열었다. 투어 기간 직전에 발매된 15번째 싱글 〈DO THE MOTION〉은 보아의 싱글들 중 최초로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도 최초의 기록이다. 2005년 보아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국에서 출간한 영어교재 《》의 〈〉라는 글에 국제적인 스타의 성공 사례로 실려 화제를 모았다. 6월 24일부터는 대한민국에서 5번째 정규 앨범 《Girls On Top》을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타이틀 곡 〈Girls On Top〉은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남성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댄스 곡으로, 이 곡에서는 곡 후반에서 남자 댄서의 등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안무가 화제가 되었다. 이 곡으로 보아는 MBC 《음악캠프》에서 1위를 수상했고,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는 7월 17일부터 7월 31일까지 3주 연속으로 1위에 해당하는 뮤티즌 송 을 수상했다. 이어 후속곡 〈MOTO〉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에서의 5집 활동이 마감되어 갈 때쯤, 8월 31일에 16번째 싱글 〈make a secret〉이 발매되었다. 〈DO THE MOTION〉의 노선을 이어 나가듯 절제되고 세련된 분위기의 곡이다. 11월 23일에는 빠른 댄스 곡을 앞세운 17번째 싱글 〈抱きしめる〉를 발매했다. 한편, 이때부터 보아는 본격적으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7년 중의 보아 보아는 2006년 2월 15일 네 번째 일본 정규 앨범 OUTGROW 를 발매했다. OUTGROW 는 발매 첫 주 222,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라 네 장의 앨범이 연속으로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전 앨범들에 비해 발매 첫 주 가장 낮은 판매량을 보였다. 2006년 4월 5일에는 일본 19번째 싱글 "七色の明日~brand new beat~/Your Color"를 발매했다. 이어 8월 9일에는 20번째 싱글 "KEY OF HEART/DOTCH"를 발매했다. 〈KEY OF HEART〉도 〈~brand new beat~〉의 연장선 상에 서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21번째 싱글 "Winter Love"는 11월 1일에 발매되었다. 처음으로 실연 을 주제로 한 애절한 발라드 곡이다. 여름에는 일본에서 여러 행사에 참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ap bank 페스티벌 과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 였다. ap bank 페스티벌 은 Mr.Children의 보컬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고바야시 다케시, 사카모토 류이치 등이 모여 만든 환경 단체인 ap bank에서 주최하는 축제로, 대형 가수들이 초대되며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대에서 보아는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함께 앨범 《OUTGROW》의 수록곡 〈cosmic eyes〉를 불렀다.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 는 매년 도쿄 메이지 신궁에서 개최되는 불꽃놀이로, 보아는 불꽃놀이 축하무대에 올라 6곡을 공연했다. 이 때 오른쪽 발목 부상을 입은 채 댄스 곡 공연을 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가을부터는 라이브 투어 BoA THE LIVE 2006 -裏ボア…聴かせ系- 를 개최했는데, 이 콘서트는 한 곡도 춤추지 않고 오직 노래만으로 공연한 콘서트이다. 댄스 곡도 새롭게 편곡하여 공연하였고, 이전까지와 비교하면 관객과 아주 가까운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했다. 한편 2006년에는 한국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 의 OST 〈Sunshine〉에 참여했고, 성우로써 목소리 연기에 도전했다. 보아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헷지》에서 헤더 역을 맡아 한국어와 일본어로 목소리 연기했는데, 《헷지》가 제59회 칸 영화제에서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목소리 연기를 맡은 보아는 한국 가수로서는 처음이자 최연소로 칸 영화제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았다. 1월 17일에 일본에서 5번째 정규 앨범 《MADE IN TWENTY (20)》가 발매되었다. 이어 3월부터는 일본 내 통산 5번째 콘서트 투어인 BoA ARENA TOUR 2007 MADE IN TWENTY (20) 를 개최하였다. 4월 25일에는 화장품 광고 음악으로 쓰인 싱글 〈Sweet Impact〉를, 9월 26일에는 도시바 휴대전화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된 발라드 싱글 〈LOVE LETTER〉를 발매했다. 12월 12일에는 일본의 록 밴드 DOPING PANDA의 Yutaka Furukawa와 함께한 격렬한 댄스 곡 〈LOSE YOUR MIND〉를 싱글로 내놓아 미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으로부터 흑인도 무색할 정도로 펑키의 느낌이 잘 살아있고 전성기 때의 마이클 잭슨이 떠오른다는 극찬을 받았다. 2005년 영국에 이어 보아의 입지적인 스토리가 일본 영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0월 말에는 애니콜의 광고 모델이 되었고, 애니콜을 홍보하기 위해 구성된 애니밴드라는 밴드의 메인 보컬로 참여했다. 이들은 11월 말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2006년에 이어 한국 영화 《M》의 OST 〈안개〉에 참여했다. 11월 26일에는 일본 베스트 히트가요제 골드 아티스트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홍백가합전과 함께 6년 연속 수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보아는 2월 27일에 일본에서 6번째 정규 앨범 《THE FACE》를 발매했다. 《THE FACE》는 11만장 대의 판매량으로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보아는 데뷔 앨범부터 정규 앨범 6연속 1위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하마사키 아유미에 이은 역대 단독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어 콘서트 투어 BoA LIVE TOUR 2008 ~THE FACE~ 를 개최했다. 8월 15일에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펼치는 콘서트 "SM 타운 라이브 08"에 출연해 9개월 만에 모국의 무대에 올랐다. 한편, 구글 코리아에서 리서치 목적으로 여러 웹페이지를 검색한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국 등 모두 31개국가 및 국민의 대표적 한국 대표 키워드 10개로 인물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확인되었다. 연말 보아는 연말 프로인 SBS 가요대전에 엔딩으로 참가하였으며 시간을 내어 연초까지 대한민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in 2010 Asia Song Festival.jpg|섬네일|230px|2010 아시아 송 페스티벌에서 〈Hurricane Venus〉 공연 중의 보아. 보아는 2009년 3월 17일 미국 데뷔 음반 BoA 를 발매하며 미국 진출을 했는데, 음반에는 블러드샤이& 아방트, 션 가렛, 브라이언 케네디와 같은 프로듀서들이 참여했다. BoA 는 발매 첫 주 8,000장을 팔아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올랐다. 빌보드 200 이외에 댄스/일렉트로닉 앨범차트에서 5위까지 진입했다. 음반 발매에 앞서 2008년 10월 21일 첫 번째 싱글 "Eat You Up"을 발매해 빌보드 핫 댄스클럽 플레이차트 8위에 올랐으며, 2009년 6월 2일 발매한 두 번째 싱글 "I Did It for Love"는 19위까지 진입했다. 이후 2010년 1월 발매한 세 번째 싱글 "Energetic"은 빌보드 핫 댄스클럽 송 17위까지 진입했다. 비슷한 시기, 보아는 2009년 4월 18일 일본에서 두 번째 베스트 음반 Best & USA 를 발매했다. Best & USA 는 발매 첫 날 29,433만 장을 팔아 오리콘 데일리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나, 위클리 차트에서는 145,000만 장을 팔아 2위를 차지했다. 200년 6월 2일 발매한 일본 26번째 싱글 Vivid 는 29,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싱글 차트 5위에 올랐다. 싱글의 수록곡인 "Kissing you", "Sparkling", "Joyful Smile"은 모두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2009년 2월 18일에는 27번째 싱글인 "에이엔/UNIVERSE/Believe in LOVE"를 발매했고 22,000만 장의 판매량으로 위클리 싱글 차트 8위에 올랐다. 이후 보아는 일곱 번째 일본 정규 음반 발매에 앞서 2009년 10월 28일 28번째 싱글 "BUMP BUMP!"을 발매했고, 13,800만 장을 팔아 위클리 싱글 차트 8위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9일 29번째 싱글 "마모리타이 ~White Wishes~"를 발매했고 50,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3위에 올려놓았다. 한편, "White Wishes"는 2009 도쿄 게임쇼에 출연해 Tales of Graces 의 주제곡으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2009년 12월 4일부터 5일은 도쿄, 8일에는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크리스마스 콘서트 BoA THE LIVE X mas 2009를 진행했고, 2010년 3월 3일 공연 실황을 담은 DVD 음반 BoA THE LIVE 2009 X mas 를 발매했다. 이후 보아가 직접 프로듀싱에 나선 일곱 번째 일본 정규 음반 Identity 를 2010년 2월 10일에 발매했다. 음반은 오리콘 위클리 앨범 차트 4위에 올랐으며, 72,000만 장을 팔아치웠다. 이외에 타이완 국제 음반 차트 2위를 차지했고, 필리핀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6월 21일에는 한국 컴백에 앞서 30번째 일본 싱글이자 디즈니 온 아이스 일본 공연 25주년을 기념하는 싱글 "WOO WEEKEND"를 발매해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0위에 올랐다. 보아는 Live Tour 2010 Identity를 마치고 난 뒤, 2010년 8월 5일 여섯 번째 한국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 를 발매하며 5년만에 컴백했다. 보아는 발매에 앞서 "GAME", 〈옆 사람〉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고, 2011년 8월 2일 타이틀곡 "Hurricane Venus"의 티저도 공개했다. "Hurricane Venus"는 공개되자마자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휩쓸었고, 가온 디지털 종합 차트 3위에 올랐다. Hurricane Venus 는 55,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6집의 리패키지 음반인 Copy & Paste 를 2010년 9월 24일 발매했다. 2010년 12월 6일에는 일본에서 디지털 싱글 "I See Me"를 발매하였으며, 이 곡은 보아 자신이 광고모델인 오디오 테크니카의 CM송으로 사용되었다. 보아는 2011년 12월 4일부터 SBS 《K팝 스타》에 출연했는데, YG를 대표하는 양현석, JYP를 대표하는 박진영과 함께 SM을 대표하는 심사위원으로 2012년 4월까지 방송되었다. 12월 7일에는 일본 데뷔 10주년을 맞이해 발매하는 DVD을 선보였는데, 이에 앞서 첫 DVD 싱글 "Milestone"을 발매했다. 또한 2011년 12월 10일과 11일 양일간 일본에서 자신의 일본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라이브, THE LIVE 2011 X mas ~The 10th Anniversary Edition~을 개최했는데, 이 공연 실황을 담은 DVD도 발매되었다. 2013년 베네통 S/S 글로벌 캠페인 열 번째 모델 발표회에서 보아. 2012년 7월 25일 보아는 일곱 번째 한국 정규 앨범 Only One 을 발매했다. 이에 앞서 22일 온라인을 통해 먼저 발매되었고, 동명의 타이틀곡인 "Only One"은 보아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이다. 또한 "Only One" 뮤직비디오에 유아인과 함께 출연했다. 2012년 7월 28일에는 일곱 번째 정규 앨범 컴백을 맞이해 SBS에서 데뷔부터 지금까지의 성장 모습을 담은 컴백쇼 《보아 4354》를 방영했다. "Only One"은 가온 디지털 차트와 코리아 K-Pop 핫 100차트 2위에 올랐고, 앨범은 34,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2012년 11월 18일부터는 지난 해에 이어 《K팝 스타 2》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였다. 2013년 1월 26, 27일에는 대한민국 서울 올림픽 공원 올림픽홀에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BoA SPECIAL LIVE 2013 ~Here I Am~이라는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1월 28일에는 콘서트에서 처음 공개한 보아의 자작곡 〈그런 너〉의 음원을 공개했다. 이후 2월 27일에는 일본 31번째 싱글 〈Only One〉을 발매했고 첫 주 약 1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차트 10위에 올랐다. 6월 26일 발매된 32번째 싱글 〈Tail of Hope〉는 일본 후지 TV 드라마 《백의의 눈물》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2013년 9월에는 KBS 드라마 《연애를 기대해》에 캐스팅되어 배우 데뷔를 하였으며, 보아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메이크 유어 무브 3D》도 개봉했다. 2015년에는 한국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보아 자신이 앨범 수록곡 전곡 작사, 작곡하고, 직접 프로듀싱한 여덟 번째 정규 음반 Kiss My Lips 를 발표했는데, 5월 6일에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가 작사와 피쳐링에 참여하고, EXO의 세훈이 뮤직비디오에 참여한 "Who Are You"를 선공개한 뒤, 그로부터 6일 뒤인 2015년 5월 12일에 동명의 타이틀곡인 "Kiss My Lips"를 비롯한 수록곡 12곡을 공개했다. 하지만 길었던 공백에 비해 음악방송 활동이 불과 3주에 불과해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는데, 대신 이전 앨범활동과 달리 《크라임씬》, 《삼시세끼》, 《냉장고를 부탁해》 등과 같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색다른 모습을 선보였으며, 2015년 8월 22, 23일에는 여성 아이돌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2015 BoA Special Live "NOWNESS"라는 제목의 두번째 한국 단독 콘서트이자 데뷔 15주년 기념 콘서트를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1일에 세트리스트 일부를 수정하여 도쿄에서도 공연하였는데 이는 보아가 최초로 한국 콘서트를 일본에서 공연한 것으로 세트리스트 대부분을 한국어로 불렀다. 12월 중순엔 일본에서는 EDM 장르의 새 싱글 "Lookbook"을 발매하고, 한국에서는 Winter Garden 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후배가수인 f(x)와 레드벨벳과 함께 순차적으로 겨울싱글을 발매하며 음악활동을 이어나갔다. 2016년 SM STATION에 참여하여 빈지노와 함께한 No Matter What 은 음원차트 1위를 달성하며, Beatburger 팀이 부른 Music Is Wonderful 에 피처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음악활동 외에 연기활동도 이어나가 2015년 10월부터 《가을우체국》이라는 영화의 원톱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촬영하였고, 이는 2017년 3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미 상영되고, 2017년 10월 19일에 정식개봉하였다. 2016년 가을에는 송지효와 이선균이 주연인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촬영하였다. === 2017–현재 첫번째 미니앨범과 한일 양국의 아홉번째 정규앨범 === 2018년 4월 17일 행복얼라이언스 협약식에서 보아 2017년 1월, 보아는 첫 미니앨범을 2월 중으로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일정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2월 23일에는 보아가 프로듀스 101 시즌2를 진행한다는 기사가 발표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SG 워너비의 이석훈과, 전 애프터스쿨 리더 가희가 트레이너로 합류하여 함께 하였으며, 보아는 프로그램 진행 중 SM STATION을 통해 봄비(Spring Rain) 를 한국에서 발표하고, 일본에서는 BoA THE LIVE in Billboard Live 개최, 디지털 싱글인 Right Here, Right Everywhere 공개를 발표하는 등 프로그램 이외의 가수로서의 활동도 함께 진행하며 성공적으로 방송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프로듀스 101 시즌2 마지막 방송(6월 16일)에서 중간 광고 방송 전 CAMO 컴백 티저 영상이 방영되며 컴백 소식을 알렸고, 2017년 6월 26일 디지털 싱글형태로 정식 발매되었으나 별도의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별도의 활동이 없었던 보아는 2017년 11월 일본 공식홈페이지에 2018년 초, 4년여만의 일본 정규 9집 앨범 私このままでいいのかな 발매와 함께 2018년 3월부터 4월까지 일본 전국 라이브 투어 공연 BoA THE LIVE 2018 ~Unchained~ 개최가 됨을 알렸다. 또한 이번 개최되는 라이브 공연에서는 자신의 최초 미니앨범인 Unchained 의 CD반을 관객 전원에게 증정하고, CD+DVD반은 mu-mo 한정으로 발매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편 한국에서도 CAMO 이후 약 반년만의 컴백 소식이 밝혀졌으며, 이 앨범의 준비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인《키워드#보아》가 방영되었다. 이 앨범의 선공개곡인 내가 돌아(NEGA DOLA) 는 1월 31일에 뮤직비디오와 음원이 공개되었으며, 2월 1일 엠카운트다운을 시작으로 활동을 1주일 동안 활동을 하였고, 이후 2월 20일 데뷔 후 첫 미니앨범인 ONE SHOT, TWO SHOT 를 공개하고 1주일동안 각종 음악방송에 참여하여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앨범활동이 끝나고 2018년 5월부터 8월까지 이수근, 서장훈, 박성광, 태용, 유아, 니클라스 클라분데와 함께 《식량일기 닭볶음탕편》에 출연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0일~21일에는 열리는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에 참가하여, 데뷔 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해 11곡을 소화하였다. 그 다음 주 수요일인 10월 24일에는 한국 정규 9집 《WOMAN》이 발매되어 2주라는 짧은 기간동안만 활동하였지만, 2018년 11월 28일부터 SBS에서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더 팬》에 팬마스터 역할로 참여하고 있으며 2018년 12월 29일과 30일 양일동안에는 2018년 12월 20일과 21일 양일 간 일본에서 개최됐던 BoA THE LIVE 2018 X mas 의 한국 공연 버전인 BoA THE LIVE 2018 in SEOUL 을 개최하여 팬들을 만났다. 20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에서 공연중의 보아. 보아는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에서 노래를 잘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보아의 주요 장르로는 힙합, R&B, 댄스 팝이다. 또한 보아는 평소에 핑크, 에이브릴 라빈의 노래를 들으면서 록 장르의 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발라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우타다 히카루, 하마사키 아유미와 종종 비교되어 왔다. 보아는 데뷔 이후 아티스트로서의 인생에 올인해야 했고, 이 때문에 "My Name", "Girl s On Top", "Hurricane Venus"와 같은 강한 일렉트로닉 댄스 노래만 해왔다. 하지만 2012년 일곱 번째 정규 앨범 Only One 을 기준으로 보아는 강한 여전사 이미지를 버리고 일렉트로닉 댄스곡은 그만하고 싶다고 밝혔다. 보아는 미국 진출 당시 힙합풍의 노래 "Eat You Up"을 첫 싱글로 발매했는데, 《LA타임즈》에서 "Eat You Up"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질투할만 노래이지만, 보아가 미국에서 장기적 성공을 하기위해선 브리트니 이상의 차별화된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계적인 뮤직비디오 감독인 조셉 칸은 보아에게 "보아는 굉장히 퍼포먼스적으로 춤과 노래가 모두 뛰어난 환상적인 가수다. 세계적인 어떤 스타들과 비교해도 보아만큼 퍼포먼스를 잘 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은 보아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아의 주요 음악적 영향은 힙합이지만, R&B도 즐긴다고 했다. 보아는 데뷔때부터 마이클 잭슨을 팬이자 롤 모델이라고 말해왔는데, "팝의 황제 잭슨은 내 영웅이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보아는 자신의 콘서트에서 잭슨의 노래를 공연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자넷 잭슨, 브리트니 스피어스, 제니퍼 로페즈, 제이-지, 저스틴 팀버레이크, 넬리와 같은 댄스 팝, R&B 가수들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핑크, 에이브릴 라빈과 같은 팝 록 장르의 가수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보아는 이후 많은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씨스타의 효린은 "그동안 보아를 존경했다. 그런 무대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보아의 "My Name" 무대를 공연했다. f(x)의 루나는 "어렸을 적부터 보아가 롤모델이어서 모든 것들을 똑같이 닮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또한 보아는 활동 중인 후배 가수들과 연습생들 사이에서 조사한 "본받고 싶은 롤모델" 1위로 뽑혔다. 보아는 데뷔 2년 전부터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비교적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데뷔를 준비했고, 소속사 또한 그녀를 대한민국 내에서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해외진출을 데뷔 이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친 그녀는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 전에 바로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의 거대 연예 매니지먼트사인 AVEX와 계약에 성공한 최초의 한국 가수이다. 보아는 많은 브랜드 광고에 출연하였는데, 보아가 광고를 했었던 브랜드로는 올림푸스, 나이키, 로레알, 꼬달리, 엘리트 교복, 서울우유, 미샤, 삼성 에니콜, 큐리텔, 비브라스, 하이트 맥주, 메이블린 뉴욕, 팅, KB 카드, 베가레이서, 브레인 토피아 닷컴, apm, 광동 옥수수 수염차, 초코틴틴, GM 대우 자동차 일본에서는 코세, 스케쳐스, 오디오 테크니카, 한국GM과 같은 광고에 출연했었다. 한국 정규 음반 2000 ID; Peace B 2002 No.1 2003 Atlantis Princess 2004 My Name 2005 Girls On Top 2010 Hurricane Venus 2012 Only One 2015 Kiss My Lips 2018 WOMAN 일본 정규 음반 2002 LISTEN TO MY HEART 2003 VALENTI 2004 LOVE & HONESTY 2006 OUTGROW 2007 MADE IN TWENTY (20) 2008 THE FACE 2010 IDENTITY 2014 WHO S BACK? 2018 私このままでいいのかな 미국 정규 음반 2009 BoA 영화 《헷지》 (Over The Hedge, 2006) - 헤더 역 / 한국판, 일본판 더빙 목소리 출연 《I AM.》(I AM., 2012) - 보아 역 / 본인역으로 출연 《관능의 법칙》 (2014) - 특별 출연 《메이크 유어 무브 3D》 (2013) - 아야 역 / 여주인공으로 출연 《빅매치》 (2014) - 수경 역 《SMTOWN THE STAGE》 (2015) - 보아 역 / 본인역으로 출연 《가을 우체국》 (2017) - 임수련 역 / 여주인공으로 출연 드라마 《골뱅이 @》(SBS, 2000.12.19) - 특별출연 《아테나 전쟁의 여신》(SBS, 2011.01.03 / 01.04) - 7회, 8회 특별출연 《연애를 기대해》(KBS2, 2013) - 주연애 역 / 여주인공으로 출연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JTBC, 2016) - 권보영 역 방송 《보아&브리트니 스페셜》(SBS, 2003.12) 《K팝 스타》(SBS, 2011-2012) / 심사위원으로 참여 《승승장구》(KBS, 2012.5.29 / 6.5) - 116회, 117회 《2012 희망로드 대장정》 (KBS, 2012.7.14)/ 봉사활동 《컴백쇼-보아 4354》(SBS, 2012.7.28) 《K팝 스타 시즌 2》(SBS, 2012-2013) / 심사위원으로 참여 《크라임씬》(JTBC, 2015.6.3) - 시즌2 9회 《삼시세끼》(tvN, 2015.6.19 / 6.26) - 시즌2 6, 7회 《냉장고를 부탁해》(JTBC, 2015.7.20 / 7.27) - 36, 37회 《히든싱어 4》(JTBC, 2015.10.3) - 1회 출연, 최종 우승 《전설의 초대 with 박인비》 (MBC, 2016.11.26) 《PRODUCE 101 시즌2》 (M.net, 2017) / 진행 《밤도깨비》(JTBC, 2017.11.19 / 11.26) - 16, 17회 《키워드#보아》(XtvN, 2018.01.28-2018.03.18) 《식량일기 닭볶음탕 편》(tvN, 2018.05.30-2018.08.08) 《해피투게더》(KBS, 2018.11.8) - 5회 *《더 팬》(SBS, 2018-2019) - 12회 라디오 《Beat It BoA s World》 (JPN) 2003년 ~ 2007년, DJ로 활동 BoA 한국 공식 웹사이트 BoA 일본 공식 웹사이트 BoA 미국 공식 웹사이트 분류:남양주시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 분류:대한민국의 가수 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 분류:대한민국의 어린이 가수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모델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SM 엔터테인먼트 소속 분류:월드 뮤직 어워드 수상자 분류:하이원 서울가요대상 대상 수상 음악가 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 분류:M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 수상 음악가 분류:대한민국의 전자 음악가 분류: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 분류:KBS 뮤직뱅크 1위 수상자 분류:Mnet 엠카운트다운 1위 수상자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000년 데뷔 분류:1986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에이벡스 그룹 음악가 분류:K팝 스타 분류:안동 권씨 분류:남양주양정초등학교 동문 분류:서울삼육중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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