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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의 신라 구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한정벌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한정벌(三韓征伐, 일본어: 三韓征伐)이란 고대 일본 주아이 천황(仲哀天皇)의 황후이자 오진 천황(応神天皇)의 어머니인 진구 황후(神功皇后)가 신라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동시대의 《삼국지》나, 《삼국사기》와 같은 다른 사서에는 없는 기록이다. 신라정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목차 1 개요 2 일본 역사학의 해석 2.1 2차 대전 이전의 해석 2.2 2차 대전 이후의 해석 2.2.1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 경위와의 관련 3 관련 항목 4 각주 5 참고문헌 개요[편집] 신화적 요소가 많이 포함돼 있는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 즉위 전기〉(神功皇后即位前紀)에는 삼한정벌의 동기로서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이 있었고, 또 황후가 신라를 항복시켜서 '우마카이'(馬飼い; 말처럼 여겨달라는 것으로, 복종의 의미)로 삼으려 하였다고 쓰여져 있다[1]. 이 기록은 신라를 비하하려는 의식이 보이는 한편, 신라를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면도 나타난다[1]. 가마쿠라 말기의 《하치만구도쿤》(일본어: 八幡愚童訓)의 갑본(甲本)에 의하면 정벌의 동기가 재화,보물에 대한 욕망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어 있어 삼한 정벌에 앞서 신라가 일본을 먼저 침공했다는 내용이 새로 창작되어 있다[1]. 또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화살의 오늬(화살의 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에어 낸 부분)로 돌에 “신라의 대왕은 일본의 개이다”(新羅国ノ大王ハ日本ノ犬也(なり))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질되어 있다[1]. 일본 남북조 말기의 《태평기》(太平記) 39권의 〈신공황후공신라급사〉(일본어: 神功皇后攻新羅給事)에서는 이야기 뼈대는 《하치만구도쿤》에서 변한 것이 없으나 “삼한의 오랑캐”(三韓の夷(えびす))'라는 말이 새롭게 등장하며, 그 때의 삼한이란 동시대 한반도 나라인 고려로 보인다.[1] 일본 역사학의 해석[편집] 2차 대전 이전의 해석[편집]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에 의해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의 해당 기록을 많은 일본인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2]. 이 삼한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조선출병에 개전 명분인 ’조선은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가 적극 활용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고쿠가쿠(国学; 국학) 연구에서 삼한정벌 및 이를 대의명분으로 써먹은 임진-정유재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야마가 소코(山鹿素行)의 《무가사기》(武家事紀) 등)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경향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계속되어 정한론이 대두하였을 때와 실제로 대한제국을 병합하였을 때(한일병합), 일제시대 일선동조론이 생겨나 외지(外地, 일본 제국의 식민지를 가리키는 용어)에 대한 동화정책(황민화교육 등)이 진행할 때도 그 사상적 바탕을 이루었다. 황국사관에 의한 제약 때문에 기키(記紀,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묶어서 부르는 명칭)의 기술을 의심하는 것은 터부시되었기 때문에 진구 황후의 존재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졌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저서 《일본 고전의 연구》(日本古典の研究)에서 진구황후의 전설은 후세에 덧붙여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하였다. "신라 정벌"에 대해선 '사실의 기록 또는 구비전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꽤 후대에 아마도 신라 정토(征土)의 진실이 잊혀질 쯤에 이야기로서 꾸며진 것 같다'라고 분석하면서, 전설이 성립된 시기를 6세기 게이타이 천황 때나 긴메이 천황 때라고 서술하였다. 쓰다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황국사관을 거스리는 것으로 문제가 되어 발매금지 처분을 당했으며, 쓰다 자신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2차 대전 이후의 해석[편집]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 경위와의 관련[편집] 전전(2차대전 종전 이전)에 쓰다는 '천황', '황국'사관의 속박을 타파하려 '국가신도의 경전'(神典)으로 이용되는 기키에 날카로운 사료 비판을 행하고 기키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기초를 구축하였다[3]. 전후의 학자는 기키의 연구를 이어가서 그 문제점, 사료가치에 대한 분석을 진전시켰다. 전후 일본의 역사학에서는, 전전의 황국사관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기키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진일보하였으며, 그 결과 학계의 주류에서는 '삼한정벌'에 관한 기술은 구체적이지 않고 신화적 과장이 다분하여[3]'삼한정벌설은 당시의 신라 상황과 맞지 않는다'[3]는 등, 진구 황후의 실재여부 또한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여부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릉비나 칠지도 등, 《일본서기》가 아닌 당대사료에 의해 논의하게 되었다. 이진희(李進煕) 와코대(和光大) 명예 교수에 의해, 한 때에는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이 일본 육군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찬한 것이라는 설이 강한 힘을 얻었으나, 현재 이 학설은 대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4] 또한 4세기 후기 무렵부터 왜국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사료와 고고학 사료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며, 또한, 호태왕비문에서 왜가 한반도에 진출하여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켜 고구려와 격렬히 싸우게 되었다는 서술이 '공적을 크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 있다고 해도 대강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는 평가가 일본학계에서 정착되는 경향을 보였다. 중국 사서인 《송서》 의 기술을 근거로,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소국가군에 대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방증하는 견해도 있으며, 한국 측의 사서 《삼국사기》에서도 거듭되는 왜의 침공이나 신라와 백제가 왜에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과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전방후원분 발굴조사에서 왜국산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된 것을 토대로 왜국의 한반도 진출이 사실이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한반도 진출설의 근거로서 '삼한정벌' 설화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4세기 후반 이후 왜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입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기키에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것과 같은 고구려 등과의 격렬한 전투를 전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 이 무렵의 일본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문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郎)는 일찍이 일본이 한반도에서 싸웠던 적이 있었다고 하는 희미한 기억과, 여제 사이메이 천황이 신라 원정을 위해, 쓰쿠시 아사쿠라궁(筑紫 朝倉宮)까지 거동한 역사적 사실이 결합되면서, 진구황후 전설이 창작된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5]. 관련 항목[편집] 일본서기 이주갑인상 임나일본부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村井(1999) ↑ 《요미우리 신문》2004년 2월 6일 ↑ 가 나 다 沈(2003) ↑ ‘구일본육군이 입수한 것보다 오래된 호태왕비 탁본이 발견되었는데 구일본육군 입수본과 일치하였다.’, '개찬논쟁에 종지부', 《요미우리 신문》, 2006년 4월 12일자 12면 ↑ 直木孝次郎《神話と歴史》, 2006年吉川弘文館) 참고문헌[편집] 田村圓澄《東アジアのなかの日本古代史》吉川弘文館, 2006년 沈仁安《中国からみた日本の古代》藤田友治, 藤田美代子訳, ミネルヴァ書房, 2003년 津田左右吉《日本古典の研究》岩波書店, 1972년 直木孝次郎《古代日本と朝鮮・中国》講談社学術文庫, 1988년 文芸春秋編《幻の加耶と古代日本》文春文庫, 1994년 村井章介《中世日本の内と外》筑摩書房, 1999년 上垣外憲一《倭人と韓人》講談社学術文庫, 2003년 鈴木英夫「加耶・百済と倭 -《任那日本府》論-」《朝鮮史研究会論文集》第29集, 1991년 沈仁安《中国からみた日本の古代》藤田友治, 藤田美代子訳, ミネルヴァ書房, 2003년 堀敏一《東アジアのなかの古代日本》研文出版, 1998년 山内弘一《朝鮮からみた華夷思想》山川出版社, 2003년 山尾幸久「倭王権と加羅諸国との歴史的関係」《青丘学術論集》第15集, 1999년 vdeh한반도 국가와 일본열도 국가 사이의 분쟁고대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3세기?) 백강 전투(663년) 신라정토계획(753년) 중세 전기 왜구 대마도 정벌(1389, 1396, 1419) 근세 삼포왜란(1510년) 사량진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 정해왜변(1587년) 임진왜란(1592년 ~ 1594년) 정유재란(1597년 ~ 1598년) 근현대 운요호 사건(1875년) 항일의병운동(1895년 ~ 1911년) 임정의 대일선전포고(1941~1945) 독도의용수비대(1953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광개토왕의_신라_구원&oldid=24195548" 분류: 일본 신화일본의 역사신라일본의 전쟁신라의 전쟁삼국 시대일본-한국 관계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1:0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한정벌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한정벌(三韓征伐, 일본어: 三韓征伐)이란 고대 일본 주아이 천황(仲哀天皇)의 황후이자 오진 천황(応神天皇)의 어머니인 진구 황후(神功皇后)가 신라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동시대의 《삼국지》나, 《삼국사기》와 같은 다른 사서에는 없는 기록이다. 신라정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목차 1 개요 2 일본 역사학의 해석 2.1 2차 대전 이전의 해석 2.2 2차 대전 이후의 해석 2.2.1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 경위와의 관련 3 관련 항목 4 각주 5 참고문헌 개요[편집] 신화적 요소가 많이 포함돼 있는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 즉위 전기〉(神功皇后即位前紀)에는 삼한정벌의 동기로서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이 있었고, 또 황후가 신라를 항복시켜서 '우마카이'(馬飼い; 말처럼 여겨달라는 것으로, 복종의 의미)로 삼으려 하였다고 쓰여져 있다[1]. 이 기록은 신라를 비하하려는 의식이 보이는 한편, 신라를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면도 나타난다[1]. 가마쿠라 말기의 《하치만구도쿤》(일본어: 八幡愚童訓)의 갑본(甲本)에 의하면 정벌의 동기가 재화,보물에 대한 욕망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어 있어 삼한 정벌에 앞서 신라가 일본을 먼저 침공했다는 내용이 새로 창작되어 있다[1]. 또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화살의 오늬(화살의 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에어 낸 부분)로 돌에 “신라의 대왕은 일본의 개이다”(新羅国ノ大王ハ日本ノ犬也(なり))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질되어 있다[1]. 일본 남북조 말기의 《태평기》(太平記) 39권의 〈신공황후공신라급사〉(일본어: 神功皇后攻新羅給事)에서는 이야기 뼈대는 《하치만구도쿤》에서 변한 것이 없으나 “삼한의 오랑캐”(三韓の夷(えびす))'라는 말이 새롭게 등장하며, 그 때의 삼한이란 동시대 한반도 나라인 고려로 보인다.[1] 일본 역사학의 해석[편집] 2차 대전 이전의 해석[편집]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에 의해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의 해당 기록을 많은 일본인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2]. 이 삼한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조선출병에 개전 명분인 ’조선은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가 적극 활용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고쿠가쿠(国学; 국학) 연구에서 삼한정벌 및 이를 대의명분으로 써먹은 임진-정유재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야마가 소코(山鹿素行)의 《무가사기》(武家事紀) 등)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경향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계속되어 정한론이 대두하였을 때와 실제로 대한제국을 병합하였을 때(한일병합), 일제시대 일선동조론이 생겨나 외지(外地, 일본 제국의 식민지를 가리키는 용어)에 대한 동화정책(황민화교육 등)이 진행할 때도 그 사상적 바탕을 이루었다. 황국사관에 의한 제약 때문에 기키(記紀,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묶어서 부르는 명칭)의 기술을 의심하는 것은 터부시되었기 때문에 진구 황후의 존재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졌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저서 《일본 고전의 연구》(日本古典の研究)에서 진구황후의 전설은 후세에 덧붙여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하였다. "신라 정벌"에 대해선 '사실의 기록 또는 구비전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꽤 후대에 아마도 신라 정토(征土)의 진실이 잊혀질 쯤에 이야기로서 꾸며진 것 같다'라고 분석하면서, 전설이 성립된 시기를 6세기 게이타이 천황 때나 긴메이 천황 때라고 서술하였다. 쓰다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황국사관을 거스리는 것으로 문제가 되어 발매금지 처분을 당했으며, 쓰다 자신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2차 대전 이후의 해석[편집]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 경위와의 관련[편집] 전전(2차대전 종전 이전)에 쓰다는 '천황', '황국'사관의 속박을 타파하려 '국가신도의 경전'(神典)으로 이용되는 기키에 날카로운 사료 비판을 행하고 기키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기초를 구축하였다[3]. 전후의 학자는 기키의 연구를 이어가서 그 문제점, 사료가치에 대한 분석을 진전시켰다. 전후 일본의 역사학에서는, 전전의 황국사관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기키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진일보하였으며, 그 결과 학계의 주류에서는 '삼한정벌'에 관한 기술은 구체적이지 않고 신화적 과장이 다분하여[3]'삼한정벌설은 당시의 신라 상황과 맞지 않는다'[3]는 등, 진구 황후의 실재여부 또한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여부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릉비나 칠지도 등, 《일본서기》가 아닌 당대사료에 의해 논의하게 되었다. 이진희(李進煕) 와코대(和光大) 명예 교수에 의해, 한 때에는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이 일본 육군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찬한 것이라는 설이 강한 힘을 얻었으나, 현재 이 학설은 대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4] 또한 4세기 후기 무렵부터 왜국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사료와 고고학 사료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며, 또한, 호태왕비문에서 왜가 한반도에 진출하여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켜 고구려와 격렬히 싸우게 되었다는 서술이 '공적을 크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 있다고 해도 대강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는 평가가 일본학계에서 정착되는 경향을 보였다. 중국 사서인 《송서》 의 기술을 근거로,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소국가군에 대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방증하는 견해도 있으며, 한국 측의 사서 《삼국사기》에서도 거듭되는 왜의 침공이나 신라와 백제가 왜에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과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전방후원분 발굴조사에서 왜국산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된 것을 토대로 왜국의 한반도 진출이 사실이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한반도 진출설의 근거로서 '삼한정벌' 설화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4세기 후반 이후 왜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입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기키에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것과 같은 고구려 등과의 격렬한 전투를 전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 이 무렵의 일본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문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郎)는 일찍이 일본이 한반도에서 싸웠던 적이 있었다고 하는 희미한 기억과, 여제 사이메이 천황이 신라 원정을 위해, 쓰쿠시 아사쿠라궁(筑紫 朝倉宮)까지 거동한 역사적 사실이 결합되면서, 진구황후 전설이 창작된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5]. 관련 항목[편집] 일본서기 이주갑인상 임나일본부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村井(1999) ↑ 《요미우리 신문》2004년 2월 6일 ↑ 가 나 다 沈(2003) ↑ ‘구일본육군이 입수한 것보다 오래된 호태왕비 탁본이 발견되었는데 구일본육군 입수본과 일치하였다.’, '개찬논쟁에 종지부', 《요미우리 신문》, 2006년 4월 12일자 12면 ↑ 直木孝次郎《神話と歴史》, 2006年吉川弘文館) 참고문헌[편집] 田村圓澄《東アジアのなかの日本古代史》吉川弘文館, 2006년 沈仁安《中国からみた日本の古代》藤田友治, 藤田美代子訳, ミネルヴァ書房, 2003년 津田左右吉《日本古典の研究》岩波書店, 1972년 直木孝次郎《古代日本と朝鮮・中国》講談社学術文庫, 1988년 文芸春秋編《幻の加耶と古代日本》文春文庫, 1994년 村井章介《中世日本の内と外》筑摩書房, 1999년 上垣外憲一《倭人と韓人》講談社学術文庫, 2003년 鈴木英夫「加耶・百済と倭 -《任那日本府》論-」《朝鮮史研究会論文集》第29集, 1991년 沈仁安《中国からみた日本の古代》藤田友治, 藤田美代子訳, ミネルヴァ書房, 2003년 堀敏一《東アジアのなかの古代日本》研文出版, 1998년 山内弘一《朝鮮からみた華夷思想》山川出版社, 2003년 山尾幸久「倭王権と加羅諸国との歴史的関係」《青丘学術論集》第15集, 1999년 vdeh한반도 국가와 일본열도 국가 사이의 분쟁고대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3세기?) 백강 전투(663년) 신라정토계획(753년) 중세 전기 왜구 대마도 정벌(1389, 1396, 1419) 근세 삼포왜란(1510년) 사량진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 정해왜변(1587년) 임진왜란(1592년 ~ 1594년) 정유재란(1597년 ~ 1598년) 근현대 운요호 사건(1875년) 항일의병운동(1895년 ~ 1911년) 임정의 대일선전포고(1941~1945) 독도의용수비대(1953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광개토왕의_신라_구원&oldid=24195548" 분류: 일본 신화일본의 역사신라일본의 전쟁신라의 전쟁삼국 시대일본-한국 관계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1:0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진주시의 시내버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주시의 시내버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주시내버스 188번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진주시의 시내버스 진주시내버스 구 131번 (운행구간: 경상대~진주여고~희망교~진주역)관리 주체 진주시청 교통행정과차적지 경상남도 진주시 일원운행 지역 고성군, 사천시, 산청군, 의령군 노선 수 85차량 수 256(정규 237)웹사이트 진주버스정보관리시스템 진주시의 시내버스는 진주시의 핵심적인 대중교통으로서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과 그 시행령에 의해 주로 경상남도 진주시 일원을 운행하는 시내 버스의 체계를 통칭한다. 지역적으로 진주시 관내를 그 범위로 하고 있으나 일부 노선은 시계를 벗어나 고성군이나 사천시, 산청군, 의령군 지역까지 운행하기도 한다.[1] 목차 1 노선 및 체계 1.1 노선 번호 부여 체계화 작업 1.2 남부공영(내동)차고지·경상대 기점 1.3 진양호 기점(종점) 1.4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기점 1.5 내동~시내~진양호,집현 1.6 농산물도매시장(초전동) 기점 1.7 판문동 기점 2 업체 3 차량 3.1 차종 3.2 도색 3.3 설비 4 연혁 5 운임 5.1 대체 지불 수단 5.2 무료 환승 제도 6 각주 7 외부 링크 노선 및 체계[편집] 노선 번호 부여 체계화 작업[편집] 일반 간선 노선의 노선 번호는 서울특별시 간선 버스와 비슷한 형태인 '기점 권역 번호 + 종점 권역 번호 + 일련(순서) 번호'의 3자리 수로 체계화되어 있다. 권역 번호는 다음과 같다. 남부공영차고지, 정촌면, 진주역 , 내동면 일부 : 1 진양호차고지/진양호공원 및 인근 : 2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및 인근 : 3 서부권역(내동면 일부, 수곡면, 대평면, 명석면) : 4 명신고/농산물도매시장 및 인근 : 5 금산면 : 6 북부권역(집현면, 미천면, 대곡면) : 7 동부 권역(문산읍 동부, 진성면, 일반성면, 이반성면, 지수면, 사봉면) : 8 남부권역(문산읍 남부, 금곡면) : 9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 0 이 중에서 1,2,3,4,5권역만 기점권역이다. 300,301번 신설로 0번이 등장 이에 따라 진주시의 시내버스는 진주시내 간 또는 진주시내-읍면지역간 일반[2]버스가 있다 개략적인 번호별 노선정보는 아래와 같다. 남부공영(내동)차고지·경상대 기점[편집] <경상대-진주역,정촌>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00 남부공영차고지 ↔ 진주역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25~35 진주역 도착 후 151번으로 변경해서 운행 110 남부공영차고지 ↔ 예하(정촌)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모심, 정촌면사무소 30~40 예하 도착 후 140번으로 번경해서 운행 111 남부공영차고지 ↔ 예하(정촌)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모심, 정촌면사무소 25~35 예하 도착 후 160번으로 변경해서 운행 <경상대~시청~진양호>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20 남부공영차고지 ↔ 진양호공원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한일병원, 공단광장, 진주시청, 기계공고, 시외주차장, 중앙시장,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6~9 121 진양호차고지 ↔ 봉전(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모심, 정촌면사무소 5회 122 진양호차고지 ↔ 소곡(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진주역 5회 123 죽봉(정촌) ↔ 진양호차고지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모심, 정촌면사무소 7회 죽봉기준 21:10 출발차량(진양호방향)은 정촌산단 단지내 경유 124 진양호공원 ↔ 문산(신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진주역 4회 125 진양호공원 ↔ 율곡(경상대)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가좌그린빌, 율곡입구 4회 마지막회차 진양호차고지 출발 126 남부공영차고지 ↔ 신풍(대평)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한일병원, 공단광장, 진주시청, 기계공고, 시외터미널, 중앙시장,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판문동차고지, 가화 3회 <경상대~중앙시장~보건대>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30 남부공영차고지 ↔ 덕산아파트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농협중앙회,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보건대, 촉석초교, 대아중고교 6~9 대아고교 7:29~7:53출발차량은 은빛한보->연암공대->가좌길->후문->사대부고->대학본부(사회과학대)->남문(수의대)->차고지 순으로 운행함(6분 간격) 131 진양호차고지 → 봉전(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진주역 5회 132 진양호차고지 → 소곡(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정촌면사무소 5회 133 진양호차고지 ↔ 심대(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정촌면사무소 7회 134 남부공영차고지 ↔ 봉원중학교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주약초교, 망경동, 육거리, 농협중앙회,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30~40 일부시간대 기동 지원운행 <경상대~이현동~명석>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40 예하(정촌) ↔ 외율(명석) 정촌면사무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30~40 일부시간대 내율 지원운행 141 남부공영차고지 ↔ 추동/남성(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5회 142 남부공영차고지 ↔ 신기(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14회 143 남부공영차고지 ↔ 신풍(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3회 144 남부공영차고지 ↔ 비실(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4회 145 남부공영차고지 ↔ 대평면사무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11회 146 남부공영차고지 ↔ 내팔미(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2회 <경상대~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50 남부공영차고지 ↔ 로컬푸드직매장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진주역, 혁신도시, 종합경기장, 한전사거리,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20~30 151 진주역 ↔ 명신고등학교 경상대학교, 대동마을, 남부공영차고지, 남강휴먼빌, 10호광장, 진주교대, 운동장, 진주여중, 대아중고교, 이현웰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말티고개 25~35 160 예하(정촌) ↔ 석교(금산) 정촌면사무소,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공단시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25~35 161 남부공영차고지 ↔ 공교사(금산)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16회 170 남부공영차고지 ↔ 교도소(대곡)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2회 171 남부공영차고지 ↔ 추계(미천)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제일병원, 천전시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봉원중학교, 기동, 안간 2회 진양호 기점(종점)[편집] <진양호~경상대~혁신도시>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00 진양호차고지 ↔ 속사리(공교사) 평거주공, 희망교, 내동초교, 남부공영차고지,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진주역, 혁신도시 21회 <경상대~진주여고~진양호>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10 남부공영차고지 ↔ 진양호공원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대학병원, 문화예술회관,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이마트, KBS방송국, 신안강변, 제일중학교, 10호광장, 평거주공 35~45 <진양호~대평,수곡,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40 진양호 ↔ 대평면사무소 소싸움경기장, 판문동차고지, 상촌, 명석, 조비 5회 241 진양호 ↔ 신촌(수곡) 소싸움경기장, 명석, 이현웰가, 오죽광장, 서부시장,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육거리, 망경한보, 남강휴먼빌, 삼계, 가호, 완사, 수곡면사무소 2회 250 진양호공원 ↔ 로컬푸드직매장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천수교, 육거리,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17 251 진양호차고지 ↔ 로컬푸드직매장 평거주공, 10호광장, 보건대,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4~11 252 상촌(판문동) ↔ 중촌(초장동) 평거주공, 10호광장, 보건대,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7회 253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제일중학교, 신안주공, KBS방송국, 이마트,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후문, 상대현대,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25~35 <진양호~초전동~금산>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60 진양호차고지 ↔ 국제대(금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문산 12회 261 진양호차고지 ↔ 속사리(금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21회 <진양호~초전동~대곡, 미천, 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70 판문동차고지 ↔ 교도소(대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12회 271 진양호차고지 ↔ 교도소(대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30~45 272 진양호차고지 ↔ 냉정(집현)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진주교대,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12회 <진양호~시내~국제대, 반성>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80 진양호차고지 ↔ 국제대(문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농협중앙회,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20~25 281 진양호차고지 ↔ 남산(반성터미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반성수목원 16회 282 진양호차고지 ↔ 지수(반성터미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북마성, 무등 16회 <진양호~시내~금곡>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90 진양호차고지 ↔ 문산노인요양병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농협중앙회,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20~25 292 진양호 ↔ 가봉(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9회 293 진양호 ↔ 상인담(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4회 294 진양호 ↔ 덕계(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4회 295 진양호 ↔ 송정(문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원촌, 갈곡 8회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기점[편집] <판문동~시내~혁신도시(혁신도시순환노선)>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00 판문동차고지 ↔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소싸움경기장, 평거주공,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35~40 종합경기장에서 혁신도시 내부 편도운행(반시계방향) 301 판문동차고지 ↔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소싸움경기장, 평거주공,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35~40 종합경기장에서 혁신도시 내부 편도운행(시계방향) <판문동~시내~완사>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40 판문동차고지 ↔ 대우(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4회 341 판문차고지 ↔ 자매(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5회 342 판문동차고지 ↔ 백곡(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8회 343 판문동차고지 ↔ 대평면사무소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4회 344 판문동차고지 ↔ 유동(내동)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삼계 6회 <이현동~시내~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50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10호광장, 대아고교,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대림 8~15 351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들말대경, 숯골, 진주여중,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도동구도로, 도동초교, 하대탑마트, 하대대림 35~50 352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들말대경, 숯골, 진주여중,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상평공단, 한일병원, 구35종점, 하대대림,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15~45 353 판문동차고지 ↔ 송백마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옥봉동,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농산물도매시장 6회 <판문동~시내~금산>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60 판문동차고지 ↔ 가방(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10~35 361 판문동차고지 ↔ 공교사(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18회 362 판문차고지 ↔ 덕의(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9회 363 판문차고지 ↔ 가방(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15회 <판문동~시내~초전동~대곡, 미천, 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70 판문동차고지 ↔ 월암(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6회 371 판문동차고지 ↔ 송곡/유동(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중고교 2회 372 판문동차고지 ↔ 덕곡(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중고교 4회 373 판문동차고지 ↔ 한실(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대곡중고교 8회 374 판문동차고지 ↔ 어옥/덕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미천면사무소 4회 375 판문동차고지 ↔ 상미(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미천면사무소 6회 376 판문동차고지 ↔ 추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안간 6회 377 판문동차고지 ↔ 응석사(집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집현면사무소 6회 <이현동~시내~반성, 금곡>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80 판문동차고지 ↔ 평촌/발산(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장안 14회 381 판문동차고지 ↔ 부계(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8회 382 판문동차고지 ↔ 지수/안계(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용봉 4회 383 판문동차고지 ↔ 하촌/구천(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6회 390 진양호차고지 ↔ 금곡종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30~65 내동~시내~진양호,집현[편집]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420 남부공영차고지 → 삼계(진양호) 남강휴먼빌, 육거리, 농협중앙회,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무지개동산 25~30 470 남부공영차고지 → 원동(집현) 남강휴먼빌, 망경동,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집현현대 16회 471 남부공영차고지 → 원동(집현) 남강휴먼빌, 육거리,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집현현대 23회 농산물도매시장(초전동) 기점[편집]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550 농산물도매시장 → 농산물도매시장 서부청사, 동명중고교, 중앙고교, 하대탑마트, 구35종점, 공단광장, 진주시청, 청락원, 기계공고, 시외주차장, 옥봉동,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상평동, 한일병원,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9회 551 농산물도매시장 → 농산물도매시장 서부청사, 동명중고교, 중앙고교, 하대탑마트, 구35종점, 한일병원, 상평동, 시외주차장, 중앙시장, 옥봉동,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청락원,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9회 판문동 기점[편집] <판문동~시내~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730 판문동차고지 ↔ 원동삼거리(집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봉원중학교, 기동, 장흥, 집현현대 6회 731 판문동차고지 → 어옥/덕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봉원중학교, 기동, 원동, 집현현대, 오방 2회 업체[편집] 아래의 4개 업체가 운행에 참여하고 있다. 삼성교통 (97대(정규90) 진주시민버스 (79대(정규 77)) 부산교통 (41대(정규 35)) 부일교통 (39대(정규35))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3개의 업체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 이유는 부산교통과 부일교통은 계열사로서 차고지 공동 사용 및 공동 배차, 예비차 공동 사용 등을 하며 대표 이사도 동일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양 사의 주주 구성도 대부분 비슷하며 운수 종사자도 특정 회사에 고정되지 않고 이동되기도 한다. 이외에 삼성교통과 진주시민버스 두 회사는 각각 독립된 별개의 회사이기는 하나 차고지 공동 사용과 공동 배차를 하는 공동 운수 협정을 맺고 있다. 두 업체는 진주시민버스의 전신인 舊. 신일교통이 삼성교통으로부터 분리(분리 당시 삼화교통, 이후 신일교통으로 사명 변경)되어 나온 1981년부터 30년 이상 공동 운수 협정을 통해 차고지 공동 사용과 공동 배차를 지속하고 있으며, 종사자 간에도 친분이 대단히 두텁다. 또한 삼성ㆍ시민 공동운수협의회를 발족, 시내 버스 관련 행정이나 타 업체와 관련한 사안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 시내 버스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2 vs 2 의 업체 간의 특이한 경쟁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차량[편집] 2018년 1월 현재 총 256(정규 237)대의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전 차량은 도시형 입석 버스 또는 초저상/중저상 버스로서 좌석형 버스는 지난 2003년 2월을 끝으로 없어진 바 있다. 252대의 차량이 10.6~11m 급 대형 버스이며 4대의 8~9m 급 중형 버스가 있다. 차종[편집] 현재 운행되는 차량은 현대자동차 생산 차량의 비중이 높은편이다(256대 중 212대). 천연가스버스는 2004년 5월부터 운행[3]되었으며, 이후부터 신규 차량은 천연가스버스로 출고되다가, 2014년 11월 이후로는 줄곧 디젤버스만 출고되었다. 2018년 3월 현재, 디젤 중형 버스 4대, 대형 버스 99대를 제외한 전 차량이 천연가스버스이며 천연가스버스의 비율이 59.76%(256대 중 153대)에 이르고 있다. 도색[편집] 전 차량이 흰 색 바탕에 청록색과 경상남도 로고를 응용한 경상남도 2000년대형 입석 표준 도색을 적용하고 있다. 차량 전, 후면의 도색 기본 형태는 동일하나 측면 도색의 경우 제조사 및 년식에 따라 일부 차이가 있다. 특히 진주시민버스는 2011년부터 대형 차량에 한해 경상남도 로고를 적용하지 않은 상태로 출고 및 운행하였다. 2015년 3월부터 삼성교통도 신규 차량에 경상남도 로고를 적용시키지 않고 있고, 부산교통과 부일교통도 몇 개월 뒤에 동참하였다. 설비[편집] 냉방 버스 보급률은 2003년 5월에 100%가 달성되었는데, 냉방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개조 차량이 전혀 없이 출고 시부터 냉방 설비가 적용된 차량으로만 이루어진 성과로 당시 이는 전국에서 최초였다. 2015년 12월 현재 대형 버스 전체 258대에 5팬 에어컨이 장착되어 있으며, 중형 버스 4대에만 3~4팬 에어컨이 장착되어 있다. 현재 시내 버스 대형 차량 전체에 5팬 에어컨이 장착된 사례는 전국에서 진주시와 사천시 단 2곳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에 출고된 차량들의 경우, 초저상 버스 뿐만 아니라 일반 버스에서도 자동 변속기를 채택하는 현상이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인 삼성교통과 진주시민버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부산교통의 계열사인 부일교통에서도 자동 변속기 차량을 시범적으로 출고하여 운용하였고, 2015년 8월 이후 정식으로 자동 변속기 차량을 출고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현재 생산되는 자동 변속기 차량은 수동 차량과 연비 차이가 거의 없는데다 고장이 덜하고, 무엇보다도 운전하기 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특히 진주시민버스에서는 수동 차량을 자동 변속기 차량으로 조기 대차 시키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2018년 3월 현재, 자동 변속기 적용 차량의 비율은 90.23%(256대 중 231대(초저상 18대+일반 213대))이다. 연혁[편집] 1965년 4월 : 삼성교통이 마산 시내버스 출신 중고 마이크로버스 10대로 본격 운행 최초 시작 1970년 9월 14일 : 삼성교통 22대가 시내버스로 면허 전환, 본격적인 시내버스 운행 개시 1981년 6월 1일 : 삼성교통에서 삼화교통(舊 신일교통 전신)이 분리 설립 1988년 1월 1일 : 안내양제를 폐지하고 시민자율버스로 전환 1993년 5월 27일 : 舊 진양군 일부 지역에 시외 노선을 전환한 시내 버스 운행 시작 1994년 : 부산교통이 전환 시내 버스 운행에 참여하면서 진주 시내 버스 사업에 착수 1995년 1월 : 도농 통합으로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하여 통합 진주시 출범, 시외 노선의 시내 버스 전환 본격화 1995년 3월 : 냉방 버스, 좌석 버스 도입 (동일 차량) 1996년 1월 : 대한여객, 영화여객이 운행에 참여 1996년 : 좌석버스제 폐지, 해당 차량 입석 격하 및 해당 노선 폐지 또는 형간 전환 2001년 12월 : 舊 동남교통(거창고속 계열사)의 진주 시내 버스 부문(차량 8대 및 노선 전체)이 대한여객과 영화여객 진주 시내 사업부에 분리 흡수 2003년 5월 15일 : 전국 최초로 전 차량 냉방 기본 장착(개조 ×) 완료 2003년 11월 1일 : 선불ㆍ후불 교통 카드제 시행 2003년 12월 23일 : 도내 최초로 버스 도착 안내 시스템 도입 2004년 5월 25일 : 천연가스버스 도입 2006년 1월 27일 : 도내 최초 계약분 초저상버스 도입 (삼성교통) 2006년 10월 13일 : 舊 신일교통 면허 취소 2006년 12월 ??일 : 삼성교통에서 시내버스 10대 임시 증차, 이후 진주시민버스 출범 2007년 2월 26일 : 진주시민버스가 운행에 참여 2007년 3월 19일 : 자동 변속기 적용 일반 버스 도입 (진주시민버스) 2007년 3월 31일 : 승차권 제도 폐지 2007년 11월 22일 : 도내 최초로 중저상버스 도입 (삼성교통) 2008년 9월 8일 : 무료 환승제 시행 2008년 11월 25일 : 동부 지역 순환 버스 001~005번 운행 개시 2010년 12월 : 도내 최초로 한국형 표준 저상 버스인 한국화이바 프리머스 도입 (진주시민버스) 2012년 5월 : 대한여객, 영화여객 진주 시내 사업부가 부일교통으로 통합 2012년 5월 11일 : 교통 카드 전국 호환 실시 2012년 8월 1일 : 전체 노선 번호를 3자리 수로 일괄 개편 2014년 9월 : 전 차량 전, 후면 LED 행선지판 설치 완료 2017년 3월 25일 : 시내버스 부분 개편 및 동부 지역 순환버스 001~005번 폐지 및 일반노선 전환(281~286번) 2017년 6월 1일 : 시내버스 전면 개편 2018년 3월 2일 : 시내버스 부분 재개편 2018년 12월 : 지간선체계 도입 및 환승센터 설치, 대중교통 시설 개선 운임[편집] 현행 운임 요금 체계는 2015년 8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4] 운임 지불은 현금으로 납부하는 방식 외에도 선불 및 후불 교통 카드로 결제하는 방법이 있다. 종류 나이 현금 (원) 카드 (원) 일반 성인 (만 19세 이상) 1300 1250 청소년 (만 13세 ~ 18세) 900 850 어린이 (만 7세 ~ 12세) 650 600 신생아 및 영/유아의 경우 무임이 원칙이나 2인 이상의 해당자를 인솔하고 탑승할 시에는 해당자 2인에 어린이 1인당 요금을 부과한다. 대체 지불 수단[편집] 대체 지불 수단으로 크게 대중화되어 있는 교통 카드 서비스는 2003년 11월부터 실시[5]되었으며, 2012년 5월부터는 전국의 모든 교통 카드로 진주시의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15년 8월부터 시행된 현행 운임 체계로는 교통 카드 사용 시 현금 대비 성인과 청소년, 어린이는 각 50원의 할인 혜택이 있다. 교통 카드 충전 및 구입은 지정된 슈퍼 마켓이나 편의점, 할인 마트, 가로변 교통 카드 충전소 등 기존에 승차권을 판매하던 거의 모든 곳에서 가능하다. 고급 국가 유공자와 중증 장애인, 군경 등은 해당 증서를 제시할 시 무료로 탑승이 가능하다. 무료 환승 제도[편집] 무료 환승 제도는 2008년 9월 8일부터 실시되고 있으며,[6] 교통 카드 사용 시 하차 후 30분 이내, 1회에 한해 다른 노선의 버스로 갈아탈 때 요금을 면제하여 궁극적으로 교통 카드의 이용률 상승 및 1회의 요금 지불로 시내버스가 운행되는 모든 지역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행하는 제도이다. 이는 해마다 줄어들던 시내버스 이용객이 늘어남과 동시에 교통 카드 사용률이 상당히 제고되는 효과를 가져왔다.[7] 그러나 배차 간격이 30분을 넘는 노선에 대해서도 하차 후 30분 이내 환승 시 무료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무료 환승 제도의 세부 규정은 다음과 같다. 교통 카드 사용 시에만 가능 동일 노선에 다시 탑승할 때에는 무료 환승 불가 하차 시 반드시 하차 문 주변에 설치된 하차 단말기에 카드를 접촉 후 확인 필요 동부 지역 5개면 순환 버스에서 일반 간선 버스로 환승한 후 다시 일반 간선 버스로 환승하거나 일반 간선 버스 간 1회 환승 후 동부 지역 5개면 순환 버스에 환승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2회의 무료 환승이 가능 최초 탑승 시 1개의 교통 카드로 2인 이상의 요금을 지불한 후 환승할 경우에는 1인에 한해 무료 혜택이 적용 운행 구간이 중첩되는 고성군내버스[8], 사천시내버스[9], 산청군내버스[10], 하동군 농ㆍ어촌버스와는 무료 환승이 불가능[11] 각주[편집] ↑ 다음 노선이 여기에 해당한다 : 121/122/131/132번(사천시 축동면), 140번(산청군 단성면), 241/340/341번/343번(사천시 곤명면), 292/293/294번(고성군 영오면), 342번(사천시 곤명면, 산청군 단성면), 376번(산청군 생비량면, 의령군 대의면) ↑ 85개 노선 ↑ 진주에도 천연가스버스 시대 개막, 《경남일보》, 2004년 6월 18일 ↑ 진주 시내버스 요금 인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1년 1월 10일 ↑ 진주 시내버스 전자화폐 내달 사용, 《연합뉴스》, 2003년 10월 9일 ↑ 진주시 시내버스 전 구간 무료환승 실시, 《연합뉴스》, 2008년 9월 5일 ↑ 진주 시내버스 이용률 '껑충', 《부산일보》, 2009년 6월 9일 ↑ 고성군 영오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진주시 내동면, 사천시 곤명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진주 시가 지역, 사천시 곤명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외부 링크[편집] 진주버스정보관리시스템 vdeh진주시의 교통철도노선 경전선 역 반성역 진주역 고속도로노선 남해 (10) 통영대전 (35) 나들목·분기점 사천 서진주 진주 문산 진성 지수 진주 분기점 일반도로국도 2호 3호 33호 국지도 30호 지방도 1001호 1002호 1004호 1006호 1007호 1009호 1013호 1049호 1014호 1037호 1040호 주요 간선도로간선도로 경서대로 곤수로 광제산로 남강로 대신로 동부로 동진로 문산로 방어산로 사군로 순환로 오방로 오봉산로 월아산로 정촌우회로 지수로 진마대로 진의로 진주대로 진주성로 호반로 교량 김시민대교 남강대교 진수대교 진주대교 금산교 대관교 대평교 덕천교 월강교 진양교 진주교 창촌교 버스시내 진주 시내버스 고속·시외 진주 진주시외 개양 반성 항공공항 사천공항 기타시내 마이비카드 캐시비 vdeh 대한민국의 시내버스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 서울특별시 광주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인천광역시 강화 옹진 세종특별자치시 경기도 고양 과천 광명 광주 이천 여주 구리 김포 남양주 동두천 부천 성남 수원 시흥 안산 안성 안양·군포(의왕) 양주 오산 용인 의정부 파주 평택 포천 하남 화성 강원도 강릉 동해 삼척 속초 원주 춘천 태백 충청남도 계룡 공주 논산 당진 보령 서산 아산 천안 충청북도 제천 청주 충주 전라북도 군산 김제 남원 익산 전주 정읍 전라남도 광양 나주 목포 순천 여수 경상북도 경산 경주 구미 김천 문경 상주 안동 영주(봉화) 영천 포항 경상남도 거제 김해 밀양 사천 양산 진주 창원 통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제주·서귀포) 국토교통부 광역급행버스 농어촌버스· 마을버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진주시의_시내버스&oldid=24181886" 분류: 경상남도의 버스 교통대한민국의 버스 노선진주시의 교통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0: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진주시의 시내버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주시의 시내버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주시내버스 188번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진주시의 시내버스 진주시내버스 구 131번 (운행구간: 경상대~진주여고~희망교~진주역)관리 주체 진주시청 교통행정과차적지 경상남도 진주시 일원운행 지역 고성군, 사천시, 산청군, 의령군 노선 수 85차량 수 256(정규 237)웹사이트 진주버스정보관리시스템 진주시의 시내버스는 진주시의 핵심적인 대중교통으로서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과 그 시행령에 의해 주로 경상남도 진주시 일원을 운행하는 시내 버스의 체계를 통칭한다. 지역적으로 진주시 관내를 그 범위로 하고 있으나 일부 노선은 시계를 벗어나 고성군이나 사천시, 산청군, 의령군 지역까지 운행하기도 한다.[1] 목차 1 노선 및 체계 1.1 노선 번호 부여 체계화 작업 1.2 남부공영(내동)차고지·경상대 기점 1.3 진양호 기점(종점) 1.4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기점 1.5 내동~시내~진양호,집현 1.6 농산물도매시장(초전동) 기점 1.7 판문동 기점 2 업체 3 차량 3.1 차종 3.2 도색 3.3 설비 4 연혁 5 운임 5.1 대체 지불 수단 5.2 무료 환승 제도 6 각주 7 외부 링크 노선 및 체계[편집] 노선 번호 부여 체계화 작업[편집] 일반 간선 노선의 노선 번호는 서울특별시 간선 버스와 비슷한 형태인 '기점 권역 번호 + 종점 권역 번호 + 일련(순서) 번호'의 3자리 수로 체계화되어 있다. 권역 번호는 다음과 같다. 남부공영차고지, 정촌면, 진주역 , 내동면 일부 : 1 진양호차고지/진양호공원 및 인근 : 2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및 인근 : 3 서부권역(내동면 일부, 수곡면, 대평면, 명석면) : 4 명신고/농산물도매시장 및 인근 : 5 금산면 : 6 북부권역(집현면, 미천면, 대곡면) : 7 동부 권역(문산읍 동부, 진성면, 일반성면, 이반성면, 지수면, 사봉면) : 8 남부권역(문산읍 남부, 금곡면) : 9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 0 이 중에서 1,2,3,4,5권역만 기점권역이다. 300,301번 신설로 0번이 등장 이에 따라 진주시의 시내버스는 진주시내 간 또는 진주시내-읍면지역간 일반[2]버스가 있다 개략적인 번호별 노선정보는 아래와 같다. 남부공영(내동)차고지·경상대 기점[편집] <경상대-진주역,정촌>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00 남부공영차고지 ↔ 진주역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25~35 진주역 도착 후 151번으로 변경해서 운행 110 남부공영차고지 ↔ 예하(정촌)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모심, 정촌면사무소 30~40 예하 도착 후 140번으로 번경해서 운행 111 남부공영차고지 ↔ 예하(정촌)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모심, 정촌면사무소 25~35 예하 도착 후 160번으로 변경해서 운행 <경상대~시청~진양호>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20 남부공영차고지 ↔ 진양호공원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한일병원, 공단광장, 진주시청, 기계공고, 시외주차장, 중앙시장,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6~9 121 진양호차고지 ↔ 봉전(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모심, 정촌면사무소 5회 122 진양호차고지 ↔ 소곡(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진주역 5회 123 죽봉(정촌) ↔ 진양호차고지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모심, 정촌면사무소 7회 죽봉기준 21:10 출발차량(진양호방향)은 정촌산단 단지내 경유 124 진양호공원 ↔ 문산(신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진주역 4회 125 진양호공원 ↔ 율곡(경상대)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가좌그린빌, 율곡입구 4회 마지막회차 진양호차고지 출발 126 남부공영차고지 ↔ 신풍(대평)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한일병원, 공단광장, 진주시청, 기계공고, 시외터미널, 중앙시장,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판문동차고지, 가화 3회 <경상대~중앙시장~보건대>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30 남부공영차고지 ↔ 덕산아파트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농협중앙회,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보건대, 촉석초교, 대아중고교 6~9 대아고교 7:29~7:53출발차량은 은빛한보->연암공대->가좌길->후문->사대부고->대학본부(사회과학대)->남문(수의대)->차고지 순으로 운행함(6분 간격) 131 진양호차고지 → 봉전(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진주역 5회 132 진양호차고지 → 소곡(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정촌면사무소 5회 133 진양호차고지 ↔ 심대(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정촌면사무소 7회 134 남부공영차고지 ↔ 봉원중학교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주약초교, 망경동, 육거리, 농협중앙회,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30~40 일부시간대 기동 지원운행 <경상대~이현동~명석>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40 예하(정촌) ↔ 외율(명석) 정촌면사무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30~40 일부시간대 내율 지원운행 141 남부공영차고지 ↔ 추동/남성(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5회 142 남부공영차고지 ↔ 신기(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14회 143 남부공영차고지 ↔ 신풍(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3회 144 남부공영차고지 ↔ 비실(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4회 145 남부공영차고지 ↔ 대평면사무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11회 146 남부공영차고지 ↔ 내팔미(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2회 <경상대~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50 남부공영차고지 ↔ 로컬푸드직매장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진주역, 혁신도시, 종합경기장, 한전사거리,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20~30 151 진주역 ↔ 명신고등학교 경상대학교, 대동마을, 남부공영차고지, 남강휴먼빌, 10호광장, 진주교대, 운동장, 진주여중, 대아중고교, 이현웰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말티고개 25~35 160 예하(정촌) ↔ 석교(금산) 정촌면사무소,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공단시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25~35 161 남부공영차고지 ↔ 공교사(금산)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16회 170 남부공영차고지 ↔ 교도소(대곡)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2회 171 남부공영차고지 ↔ 추계(미천)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제일병원, 천전시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봉원중학교, 기동, 안간 2회 진양호 기점(종점)[편집] <진양호~경상대~혁신도시>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00 진양호차고지 ↔ 속사리(공교사) 평거주공, 희망교, 내동초교, 남부공영차고지,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진주역, 혁신도시 21회 <경상대~진주여고~진양호>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10 남부공영차고지 ↔ 진양호공원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대학병원, 문화예술회관,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이마트, KBS방송국, 신안강변, 제일중학교, 10호광장, 평거주공 35~45 <진양호~대평,수곡,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40 진양호 ↔ 대평면사무소 소싸움경기장, 판문동차고지, 상촌, 명석, 조비 5회 241 진양호 ↔ 신촌(수곡) 소싸움경기장, 명석, 이현웰가, 오죽광장, 서부시장,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육거리, 망경한보, 남강휴먼빌, 삼계, 가호, 완사, 수곡면사무소 2회 250 진양호공원 ↔ 로컬푸드직매장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천수교, 육거리,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17 251 진양호차고지 ↔ 로컬푸드직매장 평거주공, 10호광장, 보건대,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4~11 252 상촌(판문동) ↔ 중촌(초장동) 평거주공, 10호광장, 보건대,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7회 253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제일중학교, 신안주공, KBS방송국, 이마트,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후문, 상대현대,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25~35 <진양호~초전동~금산>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60 진양호차고지 ↔ 국제대(금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문산 12회 261 진양호차고지 ↔ 속사리(금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21회 <진양호~초전동~대곡, 미천, 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70 판문동차고지 ↔ 교도소(대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12회 271 진양호차고지 ↔ 교도소(대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30~45 272 진양호차고지 ↔ 냉정(집현)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진주교대,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12회 <진양호~시내~국제대, 반성>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80 진양호차고지 ↔ 국제대(문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농협중앙회,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20~25 281 진양호차고지 ↔ 남산(반성터미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반성수목원 16회 282 진양호차고지 ↔ 지수(반성터미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북마성, 무등 16회 <진양호~시내~금곡>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90 진양호차고지 ↔ 문산노인요양병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농협중앙회,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20~25 292 진양호 ↔ 가봉(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9회 293 진양호 ↔ 상인담(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4회 294 진양호 ↔ 덕계(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4회 295 진양호 ↔ 송정(문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원촌, 갈곡 8회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기점[편집] <판문동~시내~혁신도시(혁신도시순환노선)>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00 판문동차고지 ↔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소싸움경기장, 평거주공,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35~40 종합경기장에서 혁신도시 내부 편도운행(반시계방향) 301 판문동차고지 ↔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소싸움경기장, 평거주공,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35~40 종합경기장에서 혁신도시 내부 편도운행(시계방향) <판문동~시내~완사>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40 판문동차고지 ↔ 대우(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4회 341 판문차고지 ↔ 자매(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5회 342 판문동차고지 ↔ 백곡(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8회 343 판문동차고지 ↔ 대평면사무소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4회 344 판문동차고지 ↔ 유동(내동)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삼계 6회 <이현동~시내~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50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10호광장, 대아고교,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대림 8~15 351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들말대경, 숯골, 진주여중,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도동구도로, 도동초교, 하대탑마트, 하대대림 35~50 352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들말대경, 숯골, 진주여중,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상평공단, 한일병원, 구35종점, 하대대림,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15~45 353 판문동차고지 ↔ 송백마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옥봉동,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농산물도매시장 6회 <판문동~시내~금산>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60 판문동차고지 ↔ 가방(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10~35 361 판문동차고지 ↔ 공교사(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18회 362 판문차고지 ↔ 덕의(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9회 363 판문차고지 ↔ 가방(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15회 <판문동~시내~초전동~대곡, 미천, 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70 판문동차고지 ↔ 월암(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6회 371 판문동차고지 ↔ 송곡/유동(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중고교 2회 372 판문동차고지 ↔ 덕곡(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중고교 4회 373 판문동차고지 ↔ 한실(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대곡중고교 8회 374 판문동차고지 ↔ 어옥/덕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미천면사무소 4회 375 판문동차고지 ↔ 상미(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미천면사무소 6회 376 판문동차고지 ↔ 추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안간 6회 377 판문동차고지 ↔ 응석사(집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집현면사무소 6회 <이현동~시내~반성, 금곡>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80 판문동차고지 ↔ 평촌/발산(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장안 14회 381 판문동차고지 ↔ 부계(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8회 382 판문동차고지 ↔ 지수/안계(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용봉 4회 383 판문동차고지 ↔ 하촌/구천(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6회 390 진양호차고지 ↔ 금곡종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30~65 내동~시내~진양호,집현[편집]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420 남부공영차고지 → 삼계(진양호) 남강휴먼빌, 육거리, 농협중앙회,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무지개동산 25~30 470 남부공영차고지 → 원동(집현) 남강휴먼빌, 망경동,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집현현대 16회 471 남부공영차고지 → 원동(집현) 남강휴먼빌, 육거리,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집현현대 23회 농산물도매시장(초전동) 기점[편집]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550 농산물도매시장 → 농산물도매시장 서부청사, 동명중고교, 중앙고교, 하대탑마트, 구35종점, 공단광장, 진주시청, 청락원, 기계공고, 시외주차장, 옥봉동,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상평동, 한일병원,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9회 551 농산물도매시장 → 농산물도매시장 서부청사, 동명중고교, 중앙고교, 하대탑마트, 구35종점, 한일병원, 상평동, 시외주차장, 중앙시장, 옥봉동,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청락원,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9회 판문동 기점[편집] <판문동~시내~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730 판문동차고지 ↔ 원동삼거리(집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봉원중학교, 기동, 장흥, 집현현대 6회 731 판문동차고지 → 어옥/덕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봉원중학교, 기동, 원동, 집현현대, 오방 2회 업체[편집] 아래의 4개 업체가 운행에 참여하고 있다. 삼성교통 (97대(정규90) 진주시민버스 (79대(정규 77)) 부산교통 (41대(정규 35)) 부일교통 (39대(정규35))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3개의 업체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 이유는 부산교통과 부일교통은 계열사로서 차고지 공동 사용 및 공동 배차, 예비차 공동 사용 등을 하며 대표 이사도 동일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양 사의 주주 구성도 대부분 비슷하며 운수 종사자도 특정 회사에 고정되지 않고 이동되기도 한다. 이외에 삼성교통과 진주시민버스 두 회사는 각각 독립된 별개의 회사이기는 하나 차고지 공동 사용과 공동 배차를 하는 공동 운수 협정을 맺고 있다. 두 업체는 진주시민버스의 전신인 舊. 신일교통이 삼성교통으로부터 분리(분리 당시 삼화교통, 이후 신일교통으로 사명 변경)되어 나온 1981년부터 30년 이상 공동 운수 협정을 통해 차고지 공동 사용과 공동 배차를 지속하고 있으며, 종사자 간에도 친분이 대단히 두텁다. 또한 삼성ㆍ시민 공동운수협의회를 발족, 시내 버스 관련 행정이나 타 업체와 관련한 사안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 시내 버스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2 vs 2 의 업체 간의 특이한 경쟁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차량[편집] 2018년 1월 현재 총 256(정규 237)대의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전 차량은 도시형 입석 버스 또는 초저상/중저상 버스로서 좌석형 버스는 지난 2003년 2월을 끝으로 없어진 바 있다. 252대의 차량이 10.6~11m 급 대형 버스이며 4대의 8~9m 급 중형 버스가 있다. 차종[편집] 현재 운행되는 차량은 현대자동차 생산 차량의 비중이 높은편이다(256대 중 212대). 천연가스버스는 2004년 5월부터 운행[3]되었으며, 이후부터 신규 차량은 천연가스버스로 출고되다가, 2014년 11월 이후로는 줄곧 디젤버스만 출고되었다. 2018년 3월 현재, 디젤 중형 버스 4대, 대형 버스 99대를 제외한 전 차량이 천연가스버스이며 천연가스버스의 비율이 59.76%(256대 중 153대)에 이르고 있다. 도색[편집] 전 차량이 흰 색 바탕에 청록색과 경상남도 로고를 응용한 경상남도 2000년대형 입석 표준 도색을 적용하고 있다. 차량 전, 후면의 도색 기본 형태는 동일하나 측면 도색의 경우 제조사 및 년식에 따라 일부 차이가 있다. 특히 진주시민버스는 2011년부터 대형 차량에 한해 경상남도 로고를 적용하지 않은 상태로 출고 및 운행하였다. 2015년 3월부터 삼성교통도 신규 차량에 경상남도 로고를 적용시키지 않고 있고, 부산교통과 부일교통도 몇 개월 뒤에 동참하였다. 설비[편집] 냉방 버스 보급률은 2003년 5월에 100%가 달성되었는데, 냉방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개조 차량이 전혀 없이 출고 시부터 냉방 설비가 적용된 차량으로만 이루어진 성과로 당시 이는 전국에서 최초였다. 2015년 12월 현재 대형 버스 전체 258대에 5팬 에어컨이 장착되어 있으며, 중형 버스 4대에만 3~4팬 에어컨이 장착되어 있다. 현재 시내 버스 대형 차량 전체에 5팬 에어컨이 장착된 사례는 전국에서 진주시와 사천시 단 2곳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에 출고된 차량들의 경우, 초저상 버스 뿐만 아니라 일반 버스에서도 자동 변속기를 채택하는 현상이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인 삼성교통과 진주시민버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부산교통의 계열사인 부일교통에서도 자동 변속기 차량을 시범적으로 출고하여 운용하였고, 2015년 8월 이후 정식으로 자동 변속기 차량을 출고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현재 생산되는 자동 변속기 차량은 수동 차량과 연비 차이가 거의 없는데다 고장이 덜하고, 무엇보다도 운전하기 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특히 진주시민버스에서는 수동 차량을 자동 변속기 차량으로 조기 대차 시키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2018년 3월 현재, 자동 변속기 적용 차량의 비율은 90.23%(256대 중 231대(초저상 18대+일반 213대))이다. 연혁[편집] 1965년 4월 : 삼성교통이 마산 시내버스 출신 중고 마이크로버스 10대로 본격 운행 최초 시작 1970년 9월 14일 : 삼성교통 22대가 시내버스로 면허 전환, 본격적인 시내버스 운행 개시 1981년 6월 1일 : 삼성교통에서 삼화교통(舊 신일교통 전신)이 분리 설립 1988년 1월 1일 : 안내양제를 폐지하고 시민자율버스로 전환 1993년 5월 27일 : 舊 진양군 일부 지역에 시외 노선을 전환한 시내 버스 운행 시작 1994년 : 부산교통이 전환 시내 버스 운행에 참여하면서 진주 시내 버스 사업에 착수 1995년 1월 : 도농 통합으로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하여 통합 진주시 출범, 시외 노선의 시내 버스 전환 본격화 1995년 3월 : 냉방 버스, 좌석 버스 도입 (동일 차량) 1996년 1월 : 대한여객, 영화여객이 운행에 참여 1996년 : 좌석버스제 폐지, 해당 차량 입석 격하 및 해당 노선 폐지 또는 형간 전환 2001년 12월 : 舊 동남교통(거창고속 계열사)의 진주 시내 버스 부문(차량 8대 및 노선 전체)이 대한여객과 영화여객 진주 시내 사업부에 분리 흡수 2003년 5월 15일 : 전국 최초로 전 차량 냉방 기본 장착(개조 ×) 완료 2003년 11월 1일 : 선불ㆍ후불 교통 카드제 시행 2003년 12월 23일 : 도내 최초로 버스 도착 안내 시스템 도입 2004년 5월 25일 : 천연가스버스 도입 2006년 1월 27일 : 도내 최초 계약분 초저상버스 도입 (삼성교통) 2006년 10월 13일 : 舊 신일교통 면허 취소 2006년 12월 ??일 : 삼성교통에서 시내버스 10대 임시 증차, 이후 진주시민버스 출범 2007년 2월 26일 : 진주시민버스가 운행에 참여 2007년 3월 19일 : 자동 변속기 적용 일반 버스 도입 (진주시민버스) 2007년 3월 31일 : 승차권 제도 폐지 2007년 11월 22일 : 도내 최초로 중저상버스 도입 (삼성교통) 2008년 9월 8일 : 무료 환승제 시행 2008년 11월 25일 : 동부 지역 순환 버스 001~005번 운행 개시 2010년 12월 : 도내 최초로 한국형 표준 저상 버스인 한국화이바 프리머스 도입 (진주시민버스) 2012년 5월 : 대한여객, 영화여객 진주 시내 사업부가 부일교통으로 통합 2012년 5월 11일 : 교통 카드 전국 호환 실시 2012년 8월 1일 : 전체 노선 번호를 3자리 수로 일괄 개편 2014년 9월 : 전 차량 전, 후면 LED 행선지판 설치 완료 2017년 3월 25일 : 시내버스 부분 개편 및 동부 지역 순환버스 001~005번 폐지 및 일반노선 전환(281~286번) 2017년 6월 1일 : 시내버스 전면 개편 2018년 3월 2일 : 시내버스 부분 재개편 2018년 12월 : 지간선체계 도입 및 환승센터 설치, 대중교통 시설 개선 운임[편집] 현행 운임 요금 체계는 2015년 8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4] 운임 지불은 현금으로 납부하는 방식 외에도 선불 및 후불 교통 카드로 결제하는 방법이 있다. 종류 나이 현금 (원) 카드 (원) 일반 성인 (만 19세 이상) 1300 1250 청소년 (만 13세 ~ 18세) 900 850 어린이 (만 7세 ~ 12세) 650 600 신생아 및 영/유아의 경우 무임이 원칙이나 2인 이상의 해당자를 인솔하고 탑승할 시에는 해당자 2인에 어린이 1인당 요금을 부과한다. 대체 지불 수단[편집] 대체 지불 수단으로 크게 대중화되어 있는 교통 카드 서비스는 2003년 11월부터 실시[5]되었으며, 2012년 5월부터는 전국의 모든 교통 카드로 진주시의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15년 8월부터 시행된 현행 운임 체계로는 교통 카드 사용 시 현금 대비 성인과 청소년, 어린이는 각 50원의 할인 혜택이 있다. 교통 카드 충전 및 구입은 지정된 슈퍼 마켓이나 편의점, 할인 마트, 가로변 교통 카드 충전소 등 기존에 승차권을 판매하던 거의 모든 곳에서 가능하다. 고급 국가 유공자와 중증 장애인, 군경 등은 해당 증서를 제시할 시 무료로 탑승이 가능하다. 무료 환승 제도[편집] 무료 환승 제도는 2008년 9월 8일부터 실시되고 있으며,[6] 교통 카드 사용 시 하차 후 30분 이내, 1회에 한해 다른 노선의 버스로 갈아탈 때 요금을 면제하여 궁극적으로 교통 카드의 이용률 상승 및 1회의 요금 지불로 시내버스가 운행되는 모든 지역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행하는 제도이다. 이는 해마다 줄어들던 시내버스 이용객이 늘어남과 동시에 교통 카드 사용률이 상당히 제고되는 효과를 가져왔다.[7] 그러나 배차 간격이 30분을 넘는 노선에 대해서도 하차 후 30분 이내 환승 시 무료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무료 환승 제도의 세부 규정은 다음과 같다. 교통 카드 사용 시에만 가능 동일 노선에 다시 탑승할 때에는 무료 환승 불가 하차 시 반드시 하차 문 주변에 설치된 하차 단말기에 카드를 접촉 후 확인 필요 동부 지역 5개면 순환 버스에서 일반 간선 버스로 환승한 후 다시 일반 간선 버스로 환승하거나 일반 간선 버스 간 1회 환승 후 동부 지역 5개면 순환 버스에 환승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2회의 무료 환승이 가능 최초 탑승 시 1개의 교통 카드로 2인 이상의 요금을 지불한 후 환승할 경우에는 1인에 한해 무료 혜택이 적용 운행 구간이 중첩되는 고성군내버스[8], 사천시내버스[9], 산청군내버스[10], 하동군 농ㆍ어촌버스와는 무료 환승이 불가능[11] 각주[편집] ↑ 다음 노선이 여기에 해당한다 : 121/122/131/132번(사천시 축동면), 140번(산청군 단성면), 241/340/341번/343번(사천시 곤명면), 292/293/294번(고성군 영오면), 342번(사천시 곤명면, 산청군 단성면), 376번(산청군 생비량면, 의령군 대의면) ↑ 85개 노선 ↑ 진주에도 천연가스버스 시대 개막, 《경남일보》, 2004년 6월 18일 ↑ 진주 시내버스 요금 인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1년 1월 10일 ↑ 진주 시내버스 전자화폐 내달 사용, 《연합뉴스》, 2003년 10월 9일 ↑ 진주시 시내버스 전 구간 무료환승 실시, 《연합뉴스》, 2008년 9월 5일 ↑ 진주 시내버스 이용률 '껑충', 《부산일보》, 2009년 6월 9일 ↑ 고성군 영오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진주시 내동면, 사천시 곤명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진주 시가 지역, 사천시 곤명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외부 링크[편집] 진주버스정보관리시스템 vdeh진주시의 교통철도노선 경전선 역 반성역 진주역 고속도로노선 남해 (10) 통영대전 (35) 나들목·분기점 사천 서진주 진주 문산 진성 지수 진주 분기점 일반도로국도 2호 3호 33호 국지도 30호 지방도 1001호 1002호 1004호 1006호 1007호 1009호 1013호 1049호 1014호 1037호 1040호 주요 간선도로간선도로 경서대로 곤수로 광제산로 남강로 대신로 동부로 동진로 문산로 방어산로 사군로 순환로 오방로 오봉산로 월아산로 정촌우회로 지수로 진마대로 진의로 진주대로 진주성로 호반로 교량 김시민대교 남강대교 진수대교 진주대교 금산교 대관교 대평교 덕천교 월강교 진양교 진주교 창촌교 버스시내 진주 시내버스 고속·시외 진주 진주시외 개양 반성 항공공항 사천공항 기타시내 마이비카드 캐시비 vdeh 대한민국의 시내버스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 서울특별시 광주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인천광역시 강화 옹진 세종특별자치시 경기도 고양 과천 광명 광주 이천 여주 구리 김포 남양주 동두천 부천 성남 수원 시흥 안산 안성 안양·군포(의왕) 양주 오산 용인 의정부 파주 평택 포천 하남 화성 강원도 강릉 동해 삼척 속초 원주 춘천 태백 충청남도 계룡 공주 논산 당진 보령 서산 아산 천안 충청북도 제천 청주 충주 전라북도 군산 김제 남원 익산 전주 정읍 전라남도 광양 나주 목포 순천 여수 경상북도 경산 경주 구미 김천 문경 상주 안동 영주(봉화) 영천 포항 경상남도 거제 김해 밀양 사천 양산 진주 창원 통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제주·서귀포) 국토교통부 광역급행버스 농어촌버스· 마을버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진주시의_시내버스&oldid=24181886" 분류: 경상남도의 버스 교통대한민국의 버스 노선진주시의 교통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0: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진주시의 시내버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주시의 시내버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주시내버스 188번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진주시의 시내버스 진주시내버스 구 131번 (운행구간: 경상대~진주여고~희망교~진주역)관리 주체 진주시청 교통행정과차적지 경상남도 진주시 일원운행 지역 고성군, 사천시, 산청군, 의령군 노선 수 85차량 수 256(정규 237)웹사이트 진주버스정보관리시스템 진주시의 시내버스는 진주시의 핵심적인 대중교통으로서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과 그 시행령에 의해 주로 경상남도 진주시 일원을 운행하는 시내 버스의 체계를 통칭한다. 지역적으로 진주시 관내를 그 범위로 하고 있으나 일부 노선은 시계를 벗어나 고성군이나 사천시, 산청군, 의령군 지역까지 운행하기도 한다.[1] 목차 1 노선 및 체계 1.1 노선 번호 부여 체계화 작업 1.2 남부공영(내동)차고지·경상대 기점 1.3 진양호 기점(종점) 1.4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기점 1.5 내동~시내~진양호,집현 1.6 농산물도매시장(초전동) 기점 1.7 판문동 기점 2 업체 3 차량 3.1 차종 3.2 도색 3.3 설비 4 연혁 5 운임 5.1 대체 지불 수단 5.2 무료 환승 제도 6 각주 7 외부 링크 노선 및 체계[편집] 노선 번호 부여 체계화 작업[편집] 일반 간선 노선의 노선 번호는 서울특별시 간선 버스와 비슷한 형태인 '기점 권역 번호 + 종점 권역 번호 + 일련(순서) 번호'의 3자리 수로 체계화되어 있다. 권역 번호는 다음과 같다. 남부공영차고지, 정촌면, 진주역 , 내동면 일부 : 1 진양호차고지/진양호공원 및 인근 : 2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및 인근 : 3 서부권역(내동면 일부, 수곡면, 대평면, 명석면) : 4 명신고/농산물도매시장 및 인근 : 5 금산면 : 6 북부권역(집현면, 미천면, 대곡면) : 7 동부 권역(문산읍 동부, 진성면, 일반성면, 이반성면, 지수면, 사봉면) : 8 남부권역(문산읍 남부, 금곡면) : 9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 0 이 중에서 1,2,3,4,5권역만 기점권역이다. 300,301번 신설로 0번이 등장 이에 따라 진주시의 시내버스는 진주시내 간 또는 진주시내-읍면지역간 일반[2]버스가 있다 개략적인 번호별 노선정보는 아래와 같다. 남부공영(내동)차고지·경상대 기점[편집] <경상대-진주역,정촌>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00 남부공영차고지 ↔ 진주역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25~35 진주역 도착 후 151번으로 변경해서 운행 110 남부공영차고지 ↔ 예하(정촌)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모심, 정촌면사무소 30~40 예하 도착 후 140번으로 번경해서 운행 111 남부공영차고지 ↔ 예하(정촌)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모심, 정촌면사무소 25~35 예하 도착 후 160번으로 변경해서 운행 <경상대~시청~진양호>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20 남부공영차고지 ↔ 진양호공원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한일병원, 공단광장, 진주시청, 기계공고, 시외주차장, 중앙시장,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6~9 121 진양호차고지 ↔ 봉전(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모심, 정촌면사무소 5회 122 진양호차고지 ↔ 소곡(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진주역 5회 123 죽봉(정촌) ↔ 진양호차고지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모심, 정촌면사무소 7회 죽봉기준 21:10 출발차량(진양호방향)은 정촌산단 단지내 경유 124 진양호공원 ↔ 문산(신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진주역 4회 125 진양호공원 ↔ 율곡(경상대)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경상대학교, 가좌그린빌, 율곡입구 4회 마지막회차 진양호차고지 출발 126 남부공영차고지 ↔ 신풍(대평)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한일병원, 공단광장, 진주시청, 기계공고, 시외터미널, 중앙시장,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판문동차고지, 가화 3회 <경상대~중앙시장~보건대>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30 남부공영차고지 ↔ 덕산아파트 대동, 율곡입구, 가좌그린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농협중앙회,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보건대, 촉석초교, 대아중고교 6~9 대아고교 7:29~7:53출발차량은 은빛한보->연암공대->가좌길->후문->사대부고->대학본부(사회과학대)->남문(수의대)->차고지 순으로 운행함(6분 간격) 131 진양호차고지 → 봉전(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진주역 5회 132 진양호차고지 → 소곡(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정촌면사무소 5회 133 진양호차고지 ↔ 심대(정촌)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은빛한보, 연암공대, 경상대학교, 정촌면사무소 7회 134 남부공영차고지 ↔ 봉원중학교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주약초교, 망경동, 육거리, 농협중앙회,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30~40 일부시간대 기동 지원운행 <경상대~이현동~명석>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40 예하(정촌) ↔ 외율(명석) 정촌면사무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30~40 일부시간대 내율 지원운행 141 남부공영차고지 ↔ 추동/남성(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5회 142 남부공영차고지 ↔ 신기(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14회 143 남부공영차고지 ↔ 신풍(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3회 144 남부공영차고지 ↔ 비실(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4회 145 남부공영차고지 ↔ 대평면사무소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11회 146 남부공영차고지 ↔ 내팔미(명석)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은빛한보, 제일병원,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서부시장, 북파, 이현웰가, 명석면사무소 2회 <경상대~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50 남부공영차고지 ↔ 로컬푸드직매장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진주역, 혁신도시, 종합경기장, 한전사거리,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20~30 151 진주역 ↔ 명신고등학교 경상대학교, 대동마을, 남부공영차고지, 남강휴먼빌, 10호광장, 진주교대, 운동장, 진주여중, 대아중고교, 이현웰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말티고개 25~35 160 예하(정촌) ↔ 석교(금산) 정촌면사무소,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공단시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25~35 161 남부공영차고지 ↔ 공교사(금산)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16회 170 남부공영차고지 ↔ 교도소(대곡)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MBC, 한일병원,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2회 171 남부공영차고지 ↔ 추계(미천)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제일병원, 천전시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봉원중학교, 기동, 안간 2회 진양호 기점(종점)[편집] <진양호~경상대~혁신도시>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00 진양호차고지 ↔ 속사리(공교사) 평거주공, 희망교, 내동초교, 남부공영차고지, 대동, 율곡입구, 경상대학교, 진주역, 혁신도시 21회 <경상대~진주여고~진양호>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10 남부공영차고지 ↔ 진양호공원 대동마을, 경상대학교, 연암공대, 대학병원, 문화예술회관, 제일예식장, 중앙시장, 갤러리아, 진주여고, 이마트, KBS방송국, 신안강변, 제일중학교, 10호광장, 평거주공 35~45 <진양호~대평,수곡,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40 진양호 ↔ 대평면사무소 소싸움경기장, 판문동차고지, 상촌, 명석, 조비 5회 241 진양호 ↔ 신촌(수곡) 소싸움경기장, 명석, 이현웰가, 오죽광장, 서부시장,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육거리, 망경한보, 남강휴먼빌, 삼계, 가호, 완사, 수곡면사무소 2회 250 진양호공원 ↔ 로컬푸드직매장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천수교, 육거리,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17 251 진양호차고지 ↔ 로컬푸드직매장 평거주공, 10호광장, 보건대,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4~11 252 상촌(판문동) ↔ 중촌(초장동) 평거주공, 10호광장, 보건대,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7회 253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제일중학교, 신안주공, KBS방송국, 이마트,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후문, 상대현대,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25~35 <진양호~초전동~금산>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60 진양호차고지 ↔ 국제대(금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문산 12회 261 진양호차고지 ↔ 속사리(금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21회 <진양호~초전동~대곡, 미천, 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70 판문동차고지 ↔ 교도소(대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12회 271 진양호차고지 ↔ 교도소(대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30~45 272 진양호차고지 ↔ 냉정(집현) 평거주공, 10호광장, 이마트, 진주교대,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홈플러스,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12회 <진양호~시내~국제대, 반성>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80 진양호차고지 ↔ 국제대(문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농협중앙회,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20~25 281 진양호차고지 ↔ 남산(반성터미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반성수목원 16회 282 진양호차고지 ↔ 지수(반성터미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북마성, 무등 16회 <진양호~시내~금곡>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290 진양호차고지 ↔ 문산노인요양병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농협중앙회,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20~25 292 진양호 ↔ 가봉(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9회 293 진양호 ↔ 상인담(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혁신도시,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4회 294 진양호 ↔ 덕계(금곡)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원촌, 문산, 금곡면사무소 4회 295 진양호 ↔ 송정(문산)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한일병원, 목천빌딩, 원촌, 갈곡 8회 판문동차고지,대아고교 기점[편집] <판문동~시내~혁신도시(혁신도시순환노선)>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00 판문동차고지 ↔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소싸움경기장, 평거주공,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35~40 종합경기장에서 혁신도시 내부 편도운행(반시계방향) 301 판문동차고지 ↔ 혁신도시(충무공동주민센터) 소싸움경기장, 평거주공,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공단광장, 종합경기장 35~40 종합경기장에서 혁신도시 내부 편도운행(시계방향) <판문동~시내~완사>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40 판문동차고지 ↔ 대우(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4회 341 판문차고지 ↔ 자매(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5회 342 판문동차고지 ↔ 백곡(수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수곡면사무소 8회 343 판문동차고지 ↔ 대평면사무소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완사 4회 344 판문동차고지 ↔ 유동(내동)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 제일병원, 육거리, 남강휴먼빌, 내동, 삼계 6회 <이현동~시내~초전동>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50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10호광장, 대아고교,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대림 8~15 351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들말대경, 숯골, 진주여중,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도동구도로, 도동초교, 하대탑마트, 하대대림 35~50 352 남부공영차고지 ↔ 농산물도매시장 남강휴먼빌, 희망교, 들말대경, 숯골, 진주여중, 서부시장,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상평공단, 한일병원, 구35종점, 하대대림,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15~45 353 판문동차고지 ↔ 송백마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옥봉동,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농산물도매시장 6회 <판문동~시내~금산>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60 판문동차고지 ↔ 가방(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말티고개,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금산 10~35 361 판문동차고지 ↔ 공교사(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18회 362 판문차고지 ↔ 덕의(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9회 363 판문차고지 ↔ 가방(금산)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청과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선학아파트, 동명중고교, 초장동주민센터, 서부청사, 금산 15회 <판문동~시내~초전동~대곡, 미천, 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70 판문동차고지 ↔ 월암(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면사무소 6회 371 판문동차고지 ↔ 송곡/유동(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중고교 2회 372 판문동차고지 ↔ 덕곡(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서부시장,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대곡중고교 4회 373 판문동차고지 ↔ 한실(대곡)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대곡중고교 8회 374 판문동차고지 ↔ 어옥/덕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미천면사무소 4회 375 판문동차고지 ↔ 상미(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미천면사무소 6회 376 판문동차고지 ↔ 추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안간 6회 377 판문동차고지 ↔ 응석사(집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롯데시네마,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집현면사무소 6회 <이현동~시내~반성, 금곡>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80 판문동차고지 ↔ 평촌/발산(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장안 14회 381 판문동차고지 ↔ 부계(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혁신도시,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8회 382 판문동차고지 ↔ 지수/안계(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용봉 4회 383 판문동차고지 ↔ 하촌/구천(반성터미널) 대아고교, 촉석초교, 보건대학, 진주여고,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국제대, 진성, 사봉 6회 390 진양호차고지 ↔ 금곡종점 평거주공, 10호광장, 진주교대, 보건대, 진주여고, 갤러리아, 중앙시장, 제일예식장, 제일병원, 연암공대, 정촌초교, 원촌, 문산 30~65 내동~시내~진양호,집현[편집]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420 남부공영차고지 → 삼계(진양호) 남강휴먼빌, 육거리, 농협중앙회, 롯데시네마, 이마트, 진주교대, 10호광장, 평거주공, 무지개동산 25~30 470 남부공영차고지 → 원동(집현) 남강휴먼빌, 망경동,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집현현대 16회 471 남부공영차고지 → 원동(집현) 남강휴먼빌, 육거리, 제일병원, 고속터미널, 진주시청, 공단광장, 도동초교, 동명중고교, 명신고교, 집현현대 23회 농산물도매시장(초전동) 기점[편집]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550 농산물도매시장 → 농산물도매시장 서부청사, 동명중고교, 중앙고교, 하대탑마트, 구35종점, 공단광장, 진주시청, 청락원, 기계공고, 시외주차장, 옥봉동, 중앙시장, 시외주차장, 상평동, 한일병원,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9회 551 농산물도매시장 → 농산물도매시장 서부청사, 동명중고교, 중앙고교, 하대탑마트, 구35종점, 한일병원, 상평동, 시외주차장, 중앙시장, 옥봉동, 시외주차장, 기계공고, 청락원, 진주시청, 공단광장, 구35종점, 하대탑마트, 중앙고교, 동명중고교, 서부청사 9회 판문동 기점[편집] <판문동~시내~집현> 노선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730 판문동차고지 ↔ 원동삼거리(집현)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봉원중학교, 기동, 장흥, 집현현대 6회 731 판문동차고지 → 어옥/덕진(미천) 대아고교, 촉석초교, 진주여중, 이마트, 중앙시장, 갤러리아, 강동한의원, 진주여고사거리, 봉원중학교, 기동, 원동, 집현현대, 오방 2회 업체[편집] 아래의 4개 업체가 운행에 참여하고 있다. 삼성교통 (97대(정규90) 진주시민버스 (79대(정규 77)) 부산교통 (41대(정규 35)) 부일교통 (39대(정규35))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3개의 업체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 이유는 부산교통과 부일교통은 계열사로서 차고지 공동 사용 및 공동 배차, 예비차 공동 사용 등을 하며 대표 이사도 동일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양 사의 주주 구성도 대부분 비슷하며 운수 종사자도 특정 회사에 고정되지 않고 이동되기도 한다. 이외에 삼성교통과 진주시민버스 두 회사는 각각 독립된 별개의 회사이기는 하나 차고지 공동 사용과 공동 배차를 하는 공동 운수 협정을 맺고 있다. 두 업체는 진주시민버스의 전신인 舊. 신일교통이 삼성교통으로부터 분리(분리 당시 삼화교통, 이후 신일교통으로 사명 변경)되어 나온 1981년부터 30년 이상 공동 운수 협정을 통해 차고지 공동 사용과 공동 배차를 지속하고 있으며, 종사자 간에도 친분이 대단히 두텁다. 또한 삼성ㆍ시민 공동운수협의회를 발족, 시내 버스 관련 행정이나 타 업체와 관련한 사안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 시내 버스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2 vs 2 의 업체 간의 특이한 경쟁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차량[편집] 2018년 1월 현재 총 256(정규 237)대의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전 차량은 도시형 입석 버스 또는 초저상/중저상 버스로서 좌석형 버스는 지난 2003년 2월을 끝으로 없어진 바 있다. 252대의 차량이 10.6~11m 급 대형 버스이며 4대의 8~9m 급 중형 버스가 있다. 차종[편집] 현재 운행되는 차량은 현대자동차 생산 차량의 비중이 높은편이다(256대 중 212대). 천연가스버스는 2004년 5월부터 운행[3]되었으며, 이후부터 신규 차량은 천연가스버스로 출고되다가, 2014년 11월 이후로는 줄곧 디젤버스만 출고되었다. 2018년 3월 현재, 디젤 중형 버스 4대, 대형 버스 99대를 제외한 전 차량이 천연가스버스이며 천연가스버스의 비율이 59.76%(256대 중 153대)에 이르고 있다. 도색[편집] 전 차량이 흰 색 바탕에 청록색과 경상남도 로고를 응용한 경상남도 2000년대형 입석 표준 도색을 적용하고 있다. 차량 전, 후면의 도색 기본 형태는 동일하나 측면 도색의 경우 제조사 및 년식에 따라 일부 차이가 있다. 특히 진주시민버스는 2011년부터 대형 차량에 한해 경상남도 로고를 적용하지 않은 상태로 출고 및 운행하였다. 2015년 3월부터 삼성교통도 신규 차량에 경상남도 로고를 적용시키지 않고 있고, 부산교통과 부일교통도 몇 개월 뒤에 동참하였다. 설비[편집] 냉방 버스 보급률은 2003년 5월에 100%가 달성되었는데, 냉방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개조 차량이 전혀 없이 출고 시부터 냉방 설비가 적용된 차량으로만 이루어진 성과로 당시 이는 전국에서 최초였다. 2015년 12월 현재 대형 버스 전체 258대에 5팬 에어컨이 장착되어 있으며, 중형 버스 4대에만 3~4팬 에어컨이 장착되어 있다. 현재 시내 버스 대형 차량 전체에 5팬 에어컨이 장착된 사례는 전국에서 진주시와 사천시 단 2곳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에 출고된 차량들의 경우, 초저상 버스 뿐만 아니라 일반 버스에서도 자동 변속기를 채택하는 현상이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인 삼성교통과 진주시민버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부산교통의 계열사인 부일교통에서도 자동 변속기 차량을 시범적으로 출고하여 운용하였고, 2015년 8월 이후 정식으로 자동 변속기 차량을 출고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현재 생산되는 자동 변속기 차량은 수동 차량과 연비 차이가 거의 없는데다 고장이 덜하고, 무엇보다도 운전하기 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특히 진주시민버스에서는 수동 차량을 자동 변속기 차량으로 조기 대차 시키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2018년 3월 현재, 자동 변속기 적용 차량의 비율은 90.23%(256대 중 231대(초저상 18대+일반 213대))이다. 연혁[편집] 1965년 4월 : 삼성교통이 마산 시내버스 출신 중고 마이크로버스 10대로 본격 운행 최초 시작 1970년 9월 14일 : 삼성교통 22대가 시내버스로 면허 전환, 본격적인 시내버스 운행 개시 1981년 6월 1일 : 삼성교통에서 삼화교통(舊 신일교통 전신)이 분리 설립 1988년 1월 1일 : 안내양제를 폐지하고 시민자율버스로 전환 1993년 5월 27일 : 舊 진양군 일부 지역에 시외 노선을 전환한 시내 버스 운행 시작 1994년 : 부산교통이 전환 시내 버스 운행에 참여하면서 진주 시내 버스 사업에 착수 1995년 1월 : 도농 통합으로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하여 통합 진주시 출범, 시외 노선의 시내 버스 전환 본격화 1995년 3월 : 냉방 버스, 좌석 버스 도입 (동일 차량) 1996년 1월 : 대한여객, 영화여객이 운행에 참여 1996년 : 좌석버스제 폐지, 해당 차량 입석 격하 및 해당 노선 폐지 또는 형간 전환 2001년 12월 : 舊 동남교통(거창고속 계열사)의 진주 시내 버스 부문(차량 8대 및 노선 전체)이 대한여객과 영화여객 진주 시내 사업부에 분리 흡수 2003년 5월 15일 : 전국 최초로 전 차량 냉방 기본 장착(개조 ×) 완료 2003년 11월 1일 : 선불ㆍ후불 교통 카드제 시행 2003년 12월 23일 : 도내 최초로 버스 도착 안내 시스템 도입 2004년 5월 25일 : 천연가스버스 도입 2006년 1월 27일 : 도내 최초 계약분 초저상버스 도입 (삼성교통) 2006년 10월 13일 : 舊 신일교통 면허 취소 2006년 12월 ??일 : 삼성교통에서 시내버스 10대 임시 증차, 이후 진주시민버스 출범 2007년 2월 26일 : 진주시민버스가 운행에 참여 2007년 3월 19일 : 자동 변속기 적용 일반 버스 도입 (진주시민버스) 2007년 3월 31일 : 승차권 제도 폐지 2007년 11월 22일 : 도내 최초로 중저상버스 도입 (삼성교통) 2008년 9월 8일 : 무료 환승제 시행 2008년 11월 25일 : 동부 지역 순환 버스 001~005번 운행 개시 2010년 12월 : 도내 최초로 한국형 표준 저상 버스인 한국화이바 프리머스 도입 (진주시민버스) 2012년 5월 : 대한여객, 영화여객 진주 시내 사업부가 부일교통으로 통합 2012년 5월 11일 : 교통 카드 전국 호환 실시 2012년 8월 1일 : 전체 노선 번호를 3자리 수로 일괄 개편 2014년 9월 : 전 차량 전, 후면 LED 행선지판 설치 완료 2017년 3월 25일 : 시내버스 부분 개편 및 동부 지역 순환버스 001~005번 폐지 및 일반노선 전환(281~286번) 2017년 6월 1일 : 시내버스 전면 개편 2018년 3월 2일 : 시내버스 부분 재개편 2018년 12월 : 지간선체계 도입 및 환승센터 설치, 대중교통 시설 개선 운임[편집] 현행 운임 요금 체계는 2015년 8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4] 운임 지불은 현금으로 납부하는 방식 외에도 선불 및 후불 교통 카드로 결제하는 방법이 있다. 종류 나이 현금 (원) 카드 (원) 일반 성인 (만 19세 이상) 1300 1250 청소년 (만 13세 ~ 18세) 900 850 어린이 (만 7세 ~ 12세) 650 600 신생아 및 영/유아의 경우 무임이 원칙이나 2인 이상의 해당자를 인솔하고 탑승할 시에는 해당자 2인에 어린이 1인당 요금을 부과한다. 대체 지불 수단[편집] 대체 지불 수단으로 크게 대중화되어 있는 교통 카드 서비스는 2003년 11월부터 실시[5]되었으며, 2012년 5월부터는 전국의 모든 교통 카드로 진주시의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15년 8월부터 시행된 현행 운임 체계로는 교통 카드 사용 시 현금 대비 성인과 청소년, 어린이는 각 50원의 할인 혜택이 있다. 교통 카드 충전 및 구입은 지정된 슈퍼 마켓이나 편의점, 할인 마트, 가로변 교통 카드 충전소 등 기존에 승차권을 판매하던 거의 모든 곳에서 가능하다. 고급 국가 유공자와 중증 장애인, 군경 등은 해당 증서를 제시할 시 무료로 탑승이 가능하다. 무료 환승 제도[편집] 무료 환승 제도는 2008년 9월 8일부터 실시되고 있으며,[6] 교통 카드 사용 시 하차 후 30분 이내, 1회에 한해 다른 노선의 버스로 갈아탈 때 요금을 면제하여 궁극적으로 교통 카드의 이용률 상승 및 1회의 요금 지불로 시내버스가 운행되는 모든 지역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행하는 제도이다. 이는 해마다 줄어들던 시내버스 이용객이 늘어남과 동시에 교통 카드 사용률이 상당히 제고되는 효과를 가져왔다.[7] 그러나 배차 간격이 30분을 넘는 노선에 대해서도 하차 후 30분 이내 환승 시 무료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무료 환승 제도의 세부 규정은 다음과 같다. 교통 카드 사용 시에만 가능 동일 노선에 다시 탑승할 때에는 무료 환승 불가 하차 시 반드시 하차 문 주변에 설치된 하차 단말기에 카드를 접촉 후 확인 필요 동부 지역 5개면 순환 버스에서 일반 간선 버스로 환승한 후 다시 일반 간선 버스로 환승하거나 일반 간선 버스 간 1회 환승 후 동부 지역 5개면 순환 버스에 환승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2회의 무료 환승이 가능 최초 탑승 시 1개의 교통 카드로 2인 이상의 요금을 지불한 후 환승할 경우에는 1인에 한해 무료 혜택이 적용 운행 구간이 중첩되는 고성군내버스[8], 사천시내버스[9], 산청군내버스[10], 하동군 농ㆍ어촌버스와는 무료 환승이 불가능[11] 각주[편집] ↑ 다음 노선이 여기에 해당한다 : 121/122/131/132번(사천시 축동면), 140번(산청군 단성면), 241/340/341번/343번(사천시 곤명면), 292/293/294번(고성군 영오면), 342번(사천시 곤명면, 산청군 단성면), 376번(산청군 생비량면, 의령군 대의면) ↑ 85개 노선 ↑ 진주에도 천연가스버스 시대 개막, 《경남일보》, 2004년 6월 18일 ↑ 진주 시내버스 요금 인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1년 1월 10일 ↑ 진주 시내버스 전자화폐 내달 사용, 《연합뉴스》, 2003년 10월 9일 ↑ 진주시 시내버스 전 구간 무료환승 실시, 《연합뉴스》, 2008년 9월 5일 ↑ 진주 시내버스 이용률 '껑충', 《부산일보》, 2009년 6월 9일 ↑ 고성군 영오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진주시 내동면, 사천시 곤명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 진주 시가 지역, 사천시 곤명면에서 운행 구간 중첩 외부 링크[편집] 진주버스정보관리시스템 vdeh진주시의 교통철도노선 경전선 역 반성역 진주역 고속도로노선 남해 (10) 통영대전 (35) 나들목·분기점 사천 서진주 진주 문산 진성 지수 진주 분기점 일반도로국도 2호 3호 33호 국지도 30호 지방도 1001호 1002호 1004호 1006호 1007호 1009호 1013호 1049호 1014호 1037호 1040호 주요 간선도로간선도로 경서대로 곤수로 광제산로 남강로 대신로 동부로 동진로 문산로 방어산로 사군로 순환로 오방로 오봉산로 월아산로 정촌우회로 지수로 진마대로 진의로 진주대로 진주성로 호반로 교량 김시민대교 남강대교 진수대교 진주대교 금산교 대관교 대평교 덕천교 월강교 진양교 진주교 창촌교 버스시내 진주 시내버스 고속·시외 진주 진주시외 개양 반성 항공공항 사천공항 기타시내 마이비카드 캐시비 vdeh 대한민국의 시내버스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 서울특별시 광주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인천광역시 강화 옹진 세종특별자치시 경기도 고양 과천 광명 광주 이천 여주 구리 김포 남양주 동두천 부천 성남 수원 시흥 안산 안성 안양·군포(의왕) 양주 오산 용인 의정부 파주 평택 포천 하남 화성 강원도 강릉 동해 삼척 속초 원주 춘천 태백 충청남도 계룡 공주 논산 당진 보령 서산 아산 천안 충청북도 제천 청주 충주 전라북도 군산 김제 남원 익산 전주 정읍 전라남도 광양 나주 목포 순천 여수 경상북도 경산 경주 구미 김천 문경 상주 안동 영주(봉화) 영천 포항 경상남도 거제 김해 밀양 사천 양산 진주 창원 통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제주·서귀포) 국토교통부 광역급행버스 농어촌버스· 마을버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진주시의_시내버스&oldid=24181886" 분류: 경상남도의 버스 교통대한민국의 버스 노선진주시의 교통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0: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규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규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죽적 김규식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김규식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규식金奎植 1946년 당시의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겸 상임위원장 임기 1946년 12월 12일 ~ 1948년 2월 27일 신상정보 국적 대한민국 출생일 1881년 2월 28일 출생지 조선 경상도 동래도호부[주해 1] 사망일 1950년 12월 10일 (69세)[주해 2]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만포군 만포진읍에서 심장병, 천식, 폐렴, 동상, 뇌출혈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 거주지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강원도 홍천군→한성부→ 대한제국 한성부→미국 버지니아주 세일럼→뉴저지주 프린스턴→ 일본 제국 일제 강점기 경성→만주→몽골 울란바토르→중화민국 난징→톈진→베이핑→쓰촨 성 청두 → 충칭→ 미군정 남조선과도정부 서울특별자유시 종로정 삼청동 삼청장→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삼청장 본관 청풍(淸風) 학력 로노크 대학교 영문학 학사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 경력 前 민족자유연맹 총재 우사(尤史) · 죽적(竹笛)이라는 아호를 사용 변갑, 번개비라는 별명을 사용 김성(金成) · 중문(仲文) · 일민(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이라는 가명을 사용 정당 무소속 부모 김지성(김용원)(父), 경주 이씨 부인(母) 배우자 조은수(사별), 김순애(재혼) 자녀 김진필(男), 김진동(男), 김진세(男), 김한애(女), 김민애(女), 김우애(女) 친인척 백부 김우성, 형 김규찬, 사촌 김은식, 처제 김필례, 당숙 김익남, 친족 김관식, 동서 최영욱, 인척 서병호, 김필순, 김염, 김마리아가 있었음. 종교 개신교(장로회)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필체 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1]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의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주해 3] 에 나섰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견해를 수정,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3상결정 부분 지지와 미소공위, 좌우합작 당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金九),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나 1948년 5월 귀환 후, 불반대 불참가로 입장을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초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총장, 파리위원장, 8월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1920년 학무총장, 1930년 8월 학무장, 11월 국무위원, 1932년 11월 국무위원 등을 지내고 1944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대중정치나 선동정치를 경멸하였고 정당활동을 기피하였으며, 정당활동으로는 민족혁명당 주석, 민중동맹 위원장,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등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가명은 '김성'(金成) · '김중문'(金仲文) · '김일민'(金一民) · '여일민'(余一民) · '왕개석'(王介石) 등이며, 별칭으로는 '변갑'이라는 이름도 있었다.[2] 노론 중신인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의 방계 후손이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중 태어난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이다.[3]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1.2 유년기와 소년기 1.1.2.1 불우한 유년기 1.1.2.2 언더우드 소학교 재학 시절 1.1.3 청소년기와 방황 1.2 청년기 1.2.1 청년기 활동과 도미 유학 1.2.2 대학교 재학 시절 1.2.3 대학원 재학 시절 1.2.4 교육과 신앙 활동 1.2.5 선교와 사회단체 활동 1.3 독립운동 1.3.1 중국 망명 초기 1.3.2 독립자금 모금, 무역상 활동 1.3.2.1 신한청년당 창당과 재혼 1.4 임시정부 국무위원 활동 1.4.1 정치 및 외교활동 1.4.1.1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 1.4.1.2 파리위원부 설치 1.4.1.3 파리강화회담 참가와 실패 1.4.1.4 질병과 도미 1.4.1.5 구미위원부 활동 1.4.2 두통 수술과 병원 입원 기간 1.4.3 상하이 귀환과 미국 왕래 1.4.4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활동 1.4.5 임정 탈퇴, 민족유일당 운동 1.4.5.1 극동인민회의 참가 1.4.5.2 교육지원 활동 1.4.5.3 소련 방문과 복귀 1.4.6 민족유일당 운동 1.4.6.1 임시정부 재입각 1.4.6.2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관 생활 1.4.6.3 민족혁명당 주석에 선출 1.4.7 임시정부 재입각 1.4.8 일제 강점기 후반 1.5 정부수립 활동 1.5.1 광복과 귀국 1.5.2 해방후 정치활동 1.5.2.1 신탁통치 반대와 모스크바 3상 결정 지지 1.5.2.2 군정과 임정의 갈등 조절 노력 1.5.2.3 우익 정치인 활동 1.5.2.4 미소공위와 좌우 합작 노력 1.5.3 미소공위 지지 선언 1.5.4 좌우합작운동 전개 1.5.5 과도입법의원 활동 1.5.6 박헌영과의 관계 1.5.7 장택상과의 갈등 1.5.8 미소 공위 성사 노력과 좌우합작운동의 실패 1.5.9 우익 진영과의 갈등 1.6 생애 후반 1.6.1 정당 활동과 암살 위협 1.6.2 민족자주연맹 창당 1.6.3 북한과 교섭 1.6.4 남북협상에 대한 만류 1.6.5 남북협상 참석 1.7 말년 1.7.1 제2차 남북협상 불참 1.7.2 정치적 몰락 1.7.3 대한민국 단독 정부 승인과 말년 1.8 최후 2 사후 3 연보 4 기타 노력 4.1 외교적 노력 4.2 무장 투쟁 노력 4.3 그밖의 활동 5 일화 6 평가 6.1 당대의 여론 6.2 평가와 비판 6.2.1 1990년대 이후의 평가 6.2.2 부정적 평가 6.3 기타 평가 7 성격 8 사상과 신념 8.1 한국인의 민족성 8.2 자유주의관 8.3 국제정세에 대한 관점 8.4 공산주의에 대한 시각 8.5 남북협상의 실패 예견 8.6 경제관 9 상훈 10 학력 11 저서 12 가계 13 작품 속에서 김규식 14 같이 보기 15 기타 16 참고 자료 17 주해 18 각주 19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김규식은 1881년 2월 28일(족보에 의하면) 조선 경상남도 동래부사 종사관인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김용원)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을 따라 그는 본가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따라서 그를 강원도 출신으로도 간주하기도 한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는 아버지 김지성(김용원)과 할아버지 김동선 내외의 묘소가 소재하고 있다.[4] 김규식은 청풍 김씨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전라도관찰사 증 의정부 영의정 김징(金澄)의 8대손이었다. 김구(金構), 김유(金楺)는 그의 7대 방조였다. 그의 가계는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등을 배출한 노론가의 방계였다. 노론 명문가의 후예로 노론 벽파의 거두였던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 노론 청명당의 지도자였던 김치인과 김종수 등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 김익로는 현감을 지냈지만 당대의 정치 거물인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의 사촌 형제였다. 김익로는 김규식의 6대조였다. 그러나 노론 벽파로 분류된 그의 가계는 순조대 이후 몰락했고, 할아버지 김동선(金東璇)의 대에 다시 벼슬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냈다.[4]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선전관을 역임하였고[5], 15세 때부터 왕실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했다.[6]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일본,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으며[5] 당시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4] 유년기와 소년기[편집] 불우한 유년기[편집] 4~8세 무렵의 김규식, 경성부 언더우드 학당에서 촬영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고,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은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였다.[5] 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갔고,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5] 1887년 어머니(혹은 법적 어머니) 경주이씨마저 죽었기 때문에 어린 김규식은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숙부들과 친척들도 생활 형편이 어려웠다. 1886년 5월 구걸을 하던 김규식이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갔는데, 외모는 남루했지만 아이의 눈엔 총기가 있어 보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당)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7] 언더우드는 내한후 1년뒤 고종의 호의로 승인을 얻고 고아원을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직원수가 부족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직접 고아원을 관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2] 유아를 맡기 힘든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다시 김규식을 그의 일가에게로 돌려보냈다.[8] 열병에 걸려 치료도 못받고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9] 중병에 걸려서 돌보는 사람이 없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도 병환 중이었으나, 약과 우유를 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당시 고열과 질병에 시달리던 어린 김규식을 포기한 숙부들은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눕혀놓았고, 병과 함께 굶주림에 허덕이던 김규식은 벽지를 뜯어먹으며 먹을 것을 달라며 울며 애걸하였다 한다.[8] 언더우드 소학교 재학 시절[편집] 조선인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4인(뒷줄 좌로부터 서병호, 김규식, 앞줄은 김일, 원한경 병약한데다가 영양실조까지 걸렸던 그는 영양실조로 인해 여러가지 잔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후일 김순애(金順愛)에 의하면 그는 위장병이 심했고 오랫동안 간질병에도 시달렸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10] 그러나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린채 방치되었던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2]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려운 입장이었으나 그를 고아원으로 데려가고자 노력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언더우드의 그러한 행동을 말렸다.[2]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언더우드는 간질과 위장병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그를 돌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간질과 위장병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언더우드의 지극정성과 간호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2] 그 뒤 언더우드는 그에게 기독교와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빨리 영어 단어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였다. 당시 김규식은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의 동의하에 언더우드에게 영어교육차 보내졌다는 설이 있고, 김지성(김용원) 유배 후 방치된 그를 언더우드가 데려다 간호한 뒤, 언더우드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집에서 그가 세운 학당을 다니며 소년기를 보냈다.[8][11] 청소년기와 방황[편집] 언더우드 학당 시절 (1888년경), 맨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1888년부터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김규식은 영어를 빨리 배우고 정확하게 구사하였다.[12] 그러나 언더우드 몰래 가출하여 아버지를 찾는다고 경성부를 거리를 다니다가 교인들에 의해 잡혀서 다시 언더우드의 집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는 하였다. 그 뒤 우연한 기회에 부친 김지성(김용원)을 상봉하여 고향 홍천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김규식은 언더우드목사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그러나 1891년 할머니가 사망하고, 1892년 부친마저 사망했다.[13] 1894년 가을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이 사망했고, 김규식은 완전히 고아가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숙부들 역시 그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13] 청소년기에 계속된 비극과 철없는 동네 소년들, 무정한 어른들이 보여준 멸시와 차별은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13] 성인이 된 뒤에도 다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인간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13] 이정식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의 근원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 보았다.[13] 후일 그는 정치, 외교,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어떤 계파나 파벌에 연연하거나 스스로 엮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의 사학자 도진순은 이처럼 김규식이 '가족, 집안, 씨족, 파벌 등과 같은 한국의 토착적 기반과 일찍부터 유리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평소 정치적 파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합작에 노력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13]'고 보았다. 주변의 냉담한 시선과 고아라는 차별대우(혹은 서자라는 멸시), 그의 불우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무정함 등은 후일 그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었다. 청년기[편집] 청년기 활동과 도미 유학[편집] 독립신문 독립신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언더우드 선교사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으로 김규식은 서양문물과 근대교육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2] 언더우드의 배려로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도 불리던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앙활동에도 투신하여 그는 한국인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의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2] 언더우드의 극진한 배려와 친자식과 다름 없는 릴리스 여사의 간호와 양육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멸시와 험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런 상처를 극복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1894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김규식은 1894년 3월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한성 관립영어학교는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 轄治臣)이 교장으로 있었다.[2] 병약하고 체구가 작았던 그는 연애나 운동을 하는 것 보다는 주로 그늘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그 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중이던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의 취재기자로 받아들였다. 그가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을 강권하는 서재필 등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서재필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개화를 위한 길은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에게도 미국으로의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14] 1896년부터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15] 그곳에서는 그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출신 환경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1897년 초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서재필 등이 학비를 고국에서 부쳐주었으나, 김규식은 고국에서 부쳐주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였다. 1897년 9월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15] 대학교 재학 시절[편집] 10대 때의 김규식 (1890년대 중반) 로노크 대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00년 가을 정식으로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 입학, 1903년까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6]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의 지원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로노크 대학교에 재학 중 그는 대한제국 고종의 서자(庶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1900년 5월에는 학교 잡지에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실었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연설논문이 실리기도 했다.[16] 한편 한국어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와도 비교하면서 쓴 글이라 한다.[16] 2006년 한국의 역사학자 이정식은 김규식의 글을 읽고 '그만한 글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찬탄하기도 하였다.[16] 1901년 1월에 개최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대학 잡지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16] 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김규식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16][17] 동아리 활동으로는 웅변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데모스테니언 문학회 라는 문학클럽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2년 1월 문학 동호회의 회장이 되었다.[16]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뉴욕주의 어빙턴에서 취직하였다. 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16] 대학 졸업 당시 성적은 전체 3등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 1903년 5월에는 로노크 대학교 교내 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에서 '한국의 정부는 천하고 무능력하며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들의 정부이며 한국은 음모와 역 음모, 타성과 보수주의에 잠겨 있고 나라는 반역자들과 비겁한 겁쟁이들로 가득차있다'고 비판하였다.[18] 대안으로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한탄하기도 하였다.[18] 졸업식 당시 졸업 기념 연사 4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어 '러시아와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러시아 침략과 러일전쟁의 결과를 예견, 분석하였다.[18] 동아시아의 미래는 다가오는 러시아나 일본의 갈등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동아시아의 땅과 바다엔 한 번 더 전쟁이 울릴 것이다. — [18] 러일전쟁을 사전에 예언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1905년 9월 5일 전쟁의 최종 승리는 김규식의 예견대로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국내에서 조직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간사로 선임[19] 되었다. 대학원 재학 시절[편집] 김규식의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 김규식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 대학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03년 가을 그는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라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가을 그는 YMCA 청년회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20] 그 뒤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교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는 YMCA 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20]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청나라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18], 11월 7일 귀국하였다. 그 해 만주의 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림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18] 교육과 신앙 활동[편집] 190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가 되었다. 1905년 그는 상동교회를 찾아, 전덕기·이동녕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였다.[21] 1904년 윤치호와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 YMCA 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반 담당 교수 등을 지냈다.[12] 배재학당에서 그는 영어 과목과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1906년 5월 21일에는 전 군수 조순환(趙淳煥)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세)와 결혼하였다. YMCA청년회 학관의 학감으로 재직 중일 때는 양반 출신 학생들은 스포츠를 천히 여기고 그 시간을 거부했다 한다.[22] 그러나 김규식 박사는 강제로 체조를 시키고 스포츠를 장려했다.[22]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22] 선교와 사회단체 활동[편집] 1907년 장남 김진필(金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9년 7월 한국문법 책을 펴냈고, 로노크 대학교 학보의 1909년 7월호에 실렸다.[20] 1910년 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었다.[12] 종교 활동으로는 1907년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일본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尹致昊)·김정식 등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였다.[23] 새문안교회 집사로 교회 예배당 건설을 추진하였고 1910년에 새문안교회 예배당 헌당과 함께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24], 1910년 숭실중학교 교사로 출강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수사학(修辭學) 과목을 가르쳤다.[25] 조병옥에 의하면 김규식은 수업 시간에 종종 영어시를 읊어주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셀리, 키이츠, 테니슨, 바이런 등의 시들을 잘 읽어 주었다.[25] 조병옥은 숭실중학교 편입생 시절, 가장 재미있게 청강한 과목으로 김규식이 가르치던 수사학이었다 고 회고하였다.[25] 1911년 12월 경기·충청도장로교 연합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2년 9월 1일 김규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평양)에 영문(英文)으로 보고하였다.[25] 1913년 봄 김규식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 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入學)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 제국대학교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25] 독립운동[편집] 중국 망명 초기[편집] 새문안 교회 전별식 105인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1년 9월 조선총독부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 투옥한다. 김규식은 극적으로 투옥은 모면하였다.[26] 1914년 몽골 이동 중 (왼쪽이 김규식, 가운데는 차남 김진동, 왼쪽은 사촌 누이 김은식(金殷植) 1911년 105인 사건 이후로 일본의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그는 1913년 초 인삼장사를 할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경상남도의 한 갑부는 그에게 1천원의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놈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기로 했다'고 표현하였다.[27] 중국 망명후 신규식·여운형 등의 주도로 창설된 동제사의 중견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윤치호의 이복동생인 윤치왕이 군사훈련을 배우겠다고 상하이를 찾아왔으나, 그는 기회가 많으니 영국에 가서 의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여 영국으로 보내주었다.[28] 또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가서 문학 공부를 계속한다, 미국에 간다는 등의 뜬소문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그의 후원자였던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스 언더우드 역시 그의 이런 계획을 전해듣고, 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진학하여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그의 출국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에서는 국내 기독교계 인사들을 의심하였으나 미국인 선교사들 댁을 수색할 수는 없어 윤치호의 집을 수색하기도 했으나 그의 출국을 도왔다는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하고 만다. 1913년 김규식은 베이징·상하이·난징 등지에 먼저 와 있던 여러 애국지사들과 접촉했다.[29] 13년 3월 쑨원, 친치메이, 황싱, 탕샤오이, 왕쳉팅, 웰링턴 V. 쿠 등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만나 교분을 쌓았고, 혁명파의 제2혁명에도 관여하였다.[29] 김규식은 중국 혁명 당시 냉휼(冷橘) 장군의 군대에 합류하여 방부(邦阜)[29] 까지 올라갔는데, 이 부대는 서주부(徐州府)에서 내려온 복벽파 장훈(張勳)의 군대 앞에서 어지러이 후퇴했다.[30] 1913년 9월 중국 혁명은 실패하고 쑨원 등은 망명하면서 그는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오게 되었다.[31] 1918년때 김규식 박사. 1913년 11월 춘원 이광수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단재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독립자금 모금, 무역상 활동[편집] 1910년대 김규식은 몽골에서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32] 1914년부터 2년간 화북과 몽고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동제사에 가입하였고[33] 신채호·홍명희·서병호(1885~1972)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1914년 1월 독립자금을 모금하러 변복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신의주에 갔다가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해 가을 장래의 독립군단 또는 게릴라 부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류동렬, 이태준과 청년들을 이끌고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건너갔다. 여기서 상업과 노동으로 비용을 조달하며 초보적인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자금이 쉽게 조달되지 않았고 이태준은 병사하여 항일군대 결성에는 실패하고 말았다.[34] 이후 피혁 장사를 하다가 잠시 공장에 취직하였으나 맞지 않아 바로 그만두고 허베이 성(河北省)으로 건너가 성경과 기독교 용품을 판매하다가 상하이로 내려와서는 발동기계를 판매하였다. 두 번째 부인 김순애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 앤더슨&마이어회사 지점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16년 아내 조은수 여사가 차남 김진동을 데리고 외몽골로 찾아와 상봉하였으나, 1917년 여름 폐병으로 조은수 여사와 사별하였다.[35] 1918년 3월초 앤더슨&마이어 상사에서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지점을 열기로 계획하였는데, 그에게 지점장으로 부임해줄 것을 전보로 보내왔다. 아무도 울란바토르로 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청해서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 그와 동행한 이는 앤더슨마이어 상사 사원 몇 명과 둘째 아들 김진동, 사촌 여동생 김은식(金殷植)이 동행하였다. 그 뒤 장가구에서 만리장성을 넘은 뒤 자동차로 사막을 횡단하였다. 그러나 차량 고장과 심한 눈보라로 하루 만에 내린 뒤 11일간 산지에 고립되어 있다가, 몽골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에 지나가던 몽골인에게 도움을 청하여 낙타를 타고 37일간 몽골 초원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갔다. 1918년 6월, 출발 3개월만에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어학 재능이 뛰어났던 김규식은 다국어를 구사하였는데, 한국어 외에 영어, 한자(漢字),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36][37] 중국은 지역마다 방언의 차이가 심하였으나 한자를 잘 구사하던 그는 방언의 차이에 상관없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중국인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1917년 12월 친러한족중앙총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36] 신한청년당 창당과 재혼[편집]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 (앞줄 오른쪽 끝) 신한청년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8년 여운형, 서병호 등의 초청으로 중국 톈진에서 상하이(上海)로 건너왔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조직되자, 여운형, 서병호, 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의 창립에 참가하였다.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등의 단체 설립 이후 한국인 청년들이 너도나도 자원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들에게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먼 길을 내다보고 유학을 하여 공부할 것을 권고하며 돌려보내거나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1918년 12월,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임명하고[38] 프랑스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좌절 이후 절망으로 변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프랑스에 있을 때 (1919년 1월 ~ 3월 무렵)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 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38] 이는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기대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상처한 처지였는데 1918년 12월에 서병호와 김필순의 소개로 황해남도 장연군 출신 김순애를 만나 재혼한다. 본래 김규식은 조은수와의 첫 결혼 이전에 김순애와도 혼담이 오갔다. 김규식은 결혼 직후 구식 여성이던 본처 조은수를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는데, 김순애는 조은수의 정신여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김순애의 사람됨을 알아본 조은수는 죽기 전 김순애와 재혼하라고 권고했다 한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줄 것이니 꼭 김순애 양과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처음 그가 청혼했을 때 김순애는 받아주지 않았다. 김순애는 고된 결혼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독신주의를 고집했는데, 병중에 있던 친정어머니 안성은이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애원하여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18년 12월 말 난징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순애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린 뒤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활동[편집] 정치 및 외교활동[편집]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편집] 1920년대의 이화여전 교수이자 YWCA 창립자인 김활란과 그의 처제 김필례 김규식은 재혼 후 보름 만에 김탕, 여운홍 등의 대표단을 이끌고[38] 가명으로 중국인 여권을 발급받아 신분을 위장한 뒤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프랑스로 떠나는 김규식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던 신한청년당원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푼돈을 모두 김규식에게 희사하고, 독립운동가들 중 결혼 예복과 반지가 있는 지사들은 이를 팔아서 돈을 희사하였다. 신한청년당원과 전파통신으로 교신, 신한청년당원들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주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한다.[39] 여권을 얻지 못하던 그는 중국인 쑨원 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던 중화민국 대표단 중 정육수를 만났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도 유창하였는데, 그들이 한국인이며 파리행을 계획한 것을 알아본 정육수 등은 자신들의 배표를 김규식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39]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40]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39]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다.[39]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39] 파리위원부 설치[편집] 파리위원부 발행 '꼬레아 리뷰'(La Coree libre) 제2호 (1919년 2월호)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은 우편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항하여, 그해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41] 프랑스 파리 시내 파리 9구 샤토당가 38번지에 건물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대표부인 임정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이어 파리위원부 내 신한청년당과 조선공보국을 개설하였다. 이들은 계속 수작업으로 '한국의 독립과 환호'(L'INDEPENDANCE de LA COREE et LA PAIX) 등 계속 문건과 홍보 팜플렛을 만들고 모임을 개최, 조선의 현실을 알렸다. 이어 장택상 등 유학중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파리위원부로 찾아와 그의 일을 도왔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39] 김규식은 파리한국통신부를 설립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임시정부 차원의 공식적 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후일 그가 떠나고 이 활동이 중단된 이후 한인들은 자체 힘으로 비공식 외교 활동을 추진했다.[42] 국내·외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에 기대를 걸었고, 김규식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회의장에 조선의 문제 역시 처리되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과 그 일행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거절당하면서, 프랑스 외교부 측은 '회의 참석대상은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만 참가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해 왔다. 김규식은 이를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 알려 왔다. 김규식에게 공식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보내주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설립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39] 당시 이들이 사무실로 사용했던 파리 시내 건물은 파리 시내 '샤토등' 거리 38번지에 위치한 건물로, 2006년에 발견되었다.[43] 파리강화회담 참가와 실패[편집] 파리강화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국민회, 한성임시정부, 상하이 임시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3월 17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로부터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강화대사에 선임되었다.[44] 이어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4월 10일 부재중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11일 파리 현지에 체류 중 외무총장에 선출되고, 파리 현지 주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4월 13일 상해 임정으로부터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받았다. 4월 2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의 학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취소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의정부장관에 피선되었다. 1919년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차장(次長)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각지의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임명장을 받거나 전보로 소식을 접하였다.[45] 국내에서는 137명의 유림(儒林)들이 별도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작성, 그에게 보내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46] 파리 장서사건의 실패로 일본의 감시는 더해갔다. 일본은 김규식 일행에 위협을 느꼈고,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탐문에도 계속해서 홍보책자 등을 인쇄하여 돌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일본의 부탁을 받은 프랑스 경찰들이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고, 여러가지 외교문서를 계속 만들어서 프랑스 외무성에 보내고, 강화회의 의장이 프랑스 대통령 크레망스에게도 발송하였고 세계열강들 대표에게도 여러가지 문서,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내용,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그런 문서를 작성·발송하였다.[41][47] 질병과 도미[편집]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패전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년 7월 14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끝난 다음에 왔다. 이때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갔다.[41][47]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활동무대를 옮겨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41]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김탕, 여운홍, 장택상 등과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 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41] 파리 강화회의 열강들의 외면에 실망과 회의감을 느낀 김규식은 파리위원부위원장직을 사직, 파리위원부를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龍)에게 넘기고 여운홍, 김탕, 장택상 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48] 배로 도미하는 동안,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 배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수반 이승만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타이프로 작성하였다. 8월 6일 김규식 일행은 워싱턴 D.C의 한인위원회에 도착하였다.[47] 구미위원부 활동[편집] 구미외교위원부 시절 김규식과 이승만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코리아 리뷰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 되었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하와이 및 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49] 이후 애국공채표를 작성, 이승만과 공동명의로 발행,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에 보내는 일을 하였다.[47] 이어 서재필을 부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재직하며 김규식은 '극동 정세'(Far Eastern Situation)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47] 여기서 김규식은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일본의 팽창이 그대로 허용된다면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이 극동에서 제거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15년 후 일본은 중국, 시베리아 및 한국의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영·미 각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도 있을 것[47]'이라고 내다보았다.[47] 이는 한동안 묻혀져 있다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역사학 교수 이정식에 의해 발견되었다.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줄곧 국내외 언론에 칼럼과 기고문을 송고하여 싣기도 하였다.[47] 9월 임시정부의 개편때 구미위원부도 함께 개편되면서 그는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으로 물러났다.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 임정에 송부하는 한편 이승만과 함께 독립공채표를 작성하여 기금을 마련하였다. 독립 공채표의 금액은 독립 후 정부가 수립되면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한 채권이었다. 10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여 한국인 교민들과 면담하였고, 10월 30일 캘리포니아주 맥스웰, 10월 31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트, 11월 1일 띠뉴바, 11월 2일 로스앤젤레스 등의 한국인 교포들을 순방하고 11월 3일 다시 워싱턴 구미위원부로 돌아왔다.[47] 구미위원부 활동 내내 미국의 정객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1] 또한 미국 하원에도 한국독립문제를 청원,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독립문제가 미국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미국과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윤치호, 조병옥 등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윤치호와는 주로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동정을 서로 서신과 연락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이들의 행적을 수시로 접하면서도 조선총독부나 일본 제국 정부 당국에 이를 발설하지는 않았다.[1] 두통 수술과 병원 입원 기간[편집]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계속된 두통으로 1919년 말 김규식은 미국체류 중 두골 전면 좌측부분을 절개하는 수술을 했다. 1919년 말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부작용으로 그 뒤로 간질병이 나타나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50] 그의 병원비는 이승만이 부담하였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활동 내내 그는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고, 상하이에서는 이승만이 그의 속을 썩여서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는 그의 부인 김순애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가라앉게 되었다. 이후 중국 상하이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일을 하다가 1920년 상하이에 귀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다. 중국에 도착한 후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정무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4월 25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50] 1919년초 그는 김구 등과 국내에 연락, 고종의 서자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의 탈출 사업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였다.[주해 4] 1919년 봄 영친왕(英親王)의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파혼당한 민갑완(閔甲完)의 일족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오자, 김규식은 민갑완 일족을 맞이한 후 이들의 생활비를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김규식은 상하이 현지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의 간부를 설득하여 민갑완을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51] 그러나, 민갑완은 신학문 공부에 한창 재미 들일 무렵, 일본영사의 압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51]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민갑완은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며 그의 권고를 거절하였다.[51] 임정 구미위원부 발행 50달러권 대한독립공채표 그러나 미국에서의 진료 후에도 통증이 계속되어 다시 수술하러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상하이에 체류 중 갑자기 심한 두통과 원인을 알수 없는 전신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1920년 김규식은 신경통으로 오래 고생하던 끝에 뇌종양 의심을 받아 미국 월터리드 병원[52] 에서 뇌수술을 받았다.[53] 의사는 장기간 휴식을 처방하였으나, 그는 퇴원 3주 후에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육로로 미국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교민들을 찾아다니며 '독립공채'를 판매하였다.[53] 3주 만에 약 5만 2천 달러의 자금을 마련, 상하이로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장이던 이시영(李始榮)에게 송금하였다.[53] 그가 두뇌에 혹이 생긴 것과 두뇌수술을 한 것에 대해 이승만 때문이라는 소문이 상하이에 돌았다. 미국에서 김규식이 이승만에 의해 심한 스트레스와 심리적 고통을 받아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후일 김순애나 서병호는 회고담에서 김규식이 파리 체류 중 생긴 것이며 상해 인사들의 말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 하였다. 상하이 귀환과 미국 왕래[편집] 김규식 1919년 9월부터 1920년 9월 미국 서부지구를 왕래하며 워싱턴 위원부와 국민회의가 협력하는데 기여하였다.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호주에 도착했다. 호주로 건너가 호주의 정치인들을 만났고, 10월 3일에는 호주 수상 월리엄 휴그(William Hughes)를 만나 한국의 독립을 후원해줄 것을 청원하였다.[54] 12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 노백린을 만나 선박 난징 호(南京號)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는 일본밀정의 첩보망에 입수되기도 했다.[55] 1921년 1월 상하이로 돌아와 임정에 합류하였다. 이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전 국무총리 이동휘간의 알력으로 이동휘가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발생한 내분 문제가 닥쳤다. 그는 문제 해결의 시일을 최대한 미루며 내분 수습을 위한 중재안 마련을 고심하였다. 1921년 2월 10일 김규식은 신규식,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 기초 변경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고 2월 21일에는 신규식, 노백린, 신익희, 안창호 등과 함께 외교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다. 이때 대통령 이승만의 성토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그는 말썽많은 대통령제 대신 한성 임시정부의 원래의 직제인 집정관 총재직으로 개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상하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계속되자 상하이에 와 있던 이승만도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그를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조건을 거부하였고 자신이 워싱턴에서 김규식을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등용한 사실과 수술 등의 곤란한 일을 겪으면서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는데 이제와서 자신과 정적들 사이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구미위원장을 임명해놓고도 이승만은 그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측근인 구미위원부 위원의 한사람인 임병직과 상의하는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내분 수습책은 실패하게 된다.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활동[편집]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중호조사의 임정 요인들. 21년 4월 26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1년 4월 신익희, 이유필, 조동호 등과 중국의 독립운동가 심합작, 오산, 주검추 등과 한중호조사에 참여하였다. 4월 29일에는 임정 학무총장직과 의정원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그해부터 임정의 창조, 개조 등을 놓고 논란이 발생하자 그는 창조파에 가담하였다.[56] 9월 한중호조사의 한국인측 평의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57] 이후 임정의 해체를 주장하는 창조파의 영수가 되어 소련에 들어가기도 했다.[13] 독립운동가 사이의 갈등과 내분이 심화되자 그는 독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교육 활동에 투신하려 했다. 그러나 1921년 1월 초 국민대표자회의에서 그를 모스크바에서 열릴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의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선출하였다. 1921년 김규식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2년 5월은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 주비위원에 피선되었다.[58] 1921년 11월부터 여운형,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장가구에서 자동차편으로 출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한파가 닥치지 않아 8일만에 차량으로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 양털가죽과 낙타 가죽 장화, 모피 등을 구비, 6일만에 마차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가 다시 3일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들 독립군은 그해 6월에 자유시 참변 당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 등으로, 이들에게는 유형과 징역 등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르쿠츠크 체류 중,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니 모스크바로 가라는 소식이 통지되었다.[13] 임정 탈퇴, 민족유일당 운동[편집] 극동인민회의 참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극동인민회의입니다. 1922년 1월 김규식은 여운형, 원세훈, 박헌영 등과 함께 교통편을 이용하여 몽골을 지나 소련 모스크바로 갔다. 열차편으로 중국 국경지대에 도착한 뒤, 몽골에 가서는 말과 낙타로 소련의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이때 털로 된 가죽모피와 통조림 형태의 고기로 추위를 견뎠다. 소비에트 연방에 도착한 뒤 김규식과 일행은 열차편을 이용했다. 소련의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노력자대회에 참석했다.[5]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무렵 그는 공산당 후보당원에 명단이 올라 있었다.[59] 인민대표자 대회 회의장에서 그는 여운형 등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선출됐고, 이어 인민대표자 대회의 5인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개회사를 발표하였다.[5] 대회에서 발표에 참가하였고 그는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60] “ 우리는 원동(遠東)에서의 혁명 과업과 관련하여 왕왕 '연합전선'과 '협동'의 필요성을 운위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라파와 미국의 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결탁하였는지를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국의 '이타주의'(利他主義)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미 공화국조차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습니다. ” — 김규식, The Asiatic Revolutionary Movement and Imperialism, Communist Review, 1922[61] 논문에서 그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은 극동아시아의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중국, 일본의 누가 관련되어 있건 간에 한국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극동아시아 전체상황은 혼란 속에 있을 것이다.' 등 극동아시아의 제국주의 침략에서의 해방에 대한 지원을 촉구할 것과 "악명 높은 흡혈국가로-영국, 프랑스, 일본" 등을 지목하며 규탄하기도 하였다. 극동 노력자 대회가 끝난 후에는 레닌을 만나 면담하였다.[5] 이때, 그는 '일본의 침략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논문인 '아시아의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를 영어로 써서 '한·중 양국 인민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 그러나 소련의 반응도 미온적이었고 강대국의 힘을 인정하고 그힘을 이용하려 했던 김규식의 실망은 우리손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바꾸게 되었으며, 그는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 때는 신채호, 서병호, 신숙, 윤해(尹海), 원세훈 등과 더불어 임정을 해산하고 재창조하자는 '창조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창조파의 영수로 추대되기도 했다.[62] 1923년 창조파에서는 임시정부 해산을 주장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를 수반으로 하여 소련의 레닌에게 보고하였으나 승인거절당하였고, 6월 6일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 김구(金九)는 국민대표회의의 강제해산을 명한뒤 개조파와 창조파를 추방하고 만다.[63] 개조파와 창조파가 축출되면서 상하이를 떠났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자국의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모교인 미국 로노크 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LL.D.) 학위를 수여받았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1924년 김구, 김창숙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주해 5] 교육지원 활동[편집] 상하이로 귀환한 1920년 2월 이후 김규식은 서병호와 함께 어학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 어학원 설립 계획은 상하이에 오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영어 등을 가르칠 계획이었다. 김규식은 서병호와 몇몇 중국인 자선사업가들과 함께 500원씩 투자하였다. 이 계획은 1921년부터 그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대회에 다녀오느라 상하이를 떠나야 했으므로 일시 중단되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상해 월리엄즈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고 윌리엄즈대학 학장에 선임되어 학장 겸 교수가 되었으며 나중에 월리엄즈 대학이 4년제로 승격하면서 동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다. 대학 출강 활동과 함께 김규식은 여러 활동을 동시에 병행하였는데, 1923년 서병호(徐丙浩)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남화학원(南華學院) 설립을 추진하였다. 1919년 이후로 중국으로 유학오는 한국인 학생들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교육기관 설치를 고심하던 김규식은 중국인 유지 및 서병호 등과 함께 중국학생과 한국학생을 대상으로 중학예과 2년제, 고등과 4년제, 특별상과 2년제, 대학 각과 4년제의 대규모 학교설립을 계획하여 1923년 9월 11일 중학과와 특별상과를 우선 개교하였다.[64] 개교후 남화학원 교장에 취임하고, 중국어교사 이외에는 전 교수용어를 영어로 사용하게 하여 영어전문학교 성격을 띄게 하였다. 구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중국인을 교사로 채용, 한국인 학생에게는 한국학생특별학급을 설치, 중국어와 영어의 집중적 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였다.[64] 1923년 푸단 대학 상하이 캠퍼스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푸단 대학은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나 영국 조계지가 아닌 시내에 있었다. 그가 푸단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일본 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제보되면서 상하이 시내에서 일본 경찰을 만나 간신히 벗어난 일도 있었다. 여러 번 쫓겨다니면서 그는 변장, 김성(金成), 김중문, 여일민, 왕개석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중국인으로 행세하면서 일본의 의심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위 질환이 있었고, 위통증 외에도 1920년 미국에서 한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강의 도중 기절, 실신하기도 했다. 이 후유증은 1940년경 쓰촨 성에서 진통제와 약물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수시로 괴롭혔다. 1924년 6월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중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을 위한 강습소(예비학교) 설립을 주관하였고, 1924년 9월 15일에는 최창식과 함께 상해고등보수학원을 개설하고 자신은 원장, 최창식은 원감에 취임하고, 여운형 등 강사들을 초빙하였다.[65] 1924년 상해고등보수학원을 승격시켜 삼일중학교(三一中學敎)로 개편하고 원장에 취임하였다. 삼일중학교는 1932년까지 존속되었다.[66] 삼일학교에서 원장이자 영어교사를 겸하던 김규식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열단 단원들에게 영어와 한자를 가르쳤다. 1924년 8월 김규식은 상하이항에서 원세훈 등과 함께 조선인이 운영하는 선박을 타고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소련 방문과 복귀[편집] 러시아 출발 직전에 촬영한 사진(1925년 1월) 1925년 1월 1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 있는 문창범(文昌範)의 집에서 이청천, 윤해, 신숙 등을 만났다. 1925년 1월 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윤해·신숙 등과 회담, 소련의 지원을 얻는 문제에 대한 협의도 하였으나, 소련은 카라한(Lev. M. Karakhan) 외무상을 일본 외무상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여 소련공산당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했는데, 원세훈, 조완구 등이 포함돼 있었다.[67] 김규식도 이때 소련정부로부터 강제로 축출되었다.[67] 소련에서의 축출 이후, 김규식은 실망감과 함께 미국·프랑스·소련을 비롯한 외세를 불신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도진순에 의하면 그의 외세에 대한 입장은 전반적으로 시시비비주의에 입각한 가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였다.[13] 2월초 일시적으로 승선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2월 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열린 '한인 유학생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주요한의 웅변에 이어 그는 '한국과 동아의 관계'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68] 1925년 2월 8일[69] 과 2월 9일[70] 2월 10일[71] 3회에 걸쳐서 '반성과 단결의 필요'라는 주제로 칼럼을 발표하였다. 한편 그가 보습학원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가르친다는 정보가 1925년 5월 일본인 밀정에 의해 입수되어 조선총독부에 보고되기도 했다.[72] 5월 29일 상하이 주일본 총영사 명의로 발송된 이 문건은 6월 15일부로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되었다.[72] 3월 초 다시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러시아 니콜라스크에 도착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은 1925년 11월 외무상 카라한(Lev. M. Karakhan)을 일본 외무상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였다. 11월 원세훈, 조완구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선박 레닌 호에 강제로 승선당한 뒤 상하이로 추방되어 되돌아왔다. 소련이 일본과 비밀리에 거래한 것을 알고 분개한 그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상주의를 버리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원세훈의 약혼녀는 모스크바에 남겨두고 원세훈만 강제 추방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1926년 최창식(崔昌植)·김기형(金基瀅) 등과 함께 상해 천상리(天祥里)에 삼일공학(三一公學)의 설립에 가담하였다.[73] 한편으로는 1926년부터 1927년에 열린 민족유일당 운동에도 참여하였다.[74] 민족유일당 운동[편집] 임시정부 재입각[편집] 1930년 대학 교수로 재직 중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75] 김규식은 기호파는 아니었으나 기호파와 함께 연대하여 안창호의 취임을 반대했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 지 13일 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10월 김원봉, 의열단원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이광제(李光濟)·안재환(安載煥), 중국인 무광루(睦光錄),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유자명은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와 협의하여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추대했다.[76]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였다. 1927년 텐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것조차 일본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에는 둘째 딸 민애를, 1930년에는 큰딸 한애를 병으로 잃었다.[3][31] 1930년 8월 4일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 동 4일 임정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30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만주 사변'이 폭발하자 김규식은 '중한 민중 대동맹'의 수석 전권을 위임받아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77] 이것은 민간 외교 사절을 파견 하여 미국 정계와 일반 국민의 만주 사변과 일제의 침략상에 대한 공분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으로 선전 강연과 동시에 기부금 모집에 노력 하였다.[77] 1932년 1월 귀국한다. 한편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가게 되어 국무위원을 1935년 10월까지 역임하게 된다.[77]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관 생활[편집]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상해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특별반의 군사교관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지명수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학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체포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의정원 활동 보다는 재야에서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육 활동에 더욱 치중하였으므로 동료들로부터 비협력자, 부도원의원 등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대동맹', 대일전선통일연맹,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단체를 결성,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독립을 위해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특히 '중·한 민중대동맹'(SKPL)은 지하조직으로, 미국에까지 지부를 두고, 워싱턴지부 책임자로는 재미교포 한길수를 임명했다.[78] 그해 10월 12일 상해 민국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 창당회담을 가졌다.[31]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교관이 되었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79] 1933년 4월 5일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명이 모인 구류노류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독립에 관한 연설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것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미국인을 탄복케 하였다 한다. 그해 6월 21일 임시정부 외무부장 신익희의 사퇴로 후임 외무부장이 되었다. 1933년 7월 중한민중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본 동맹의 비밀요원인 리·한(이용직과 한길수)을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본 동맹과 정보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31]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규식과 김구, 조소앙,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각자 의견의 대립과 김구의 임정 법통 고집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31] 민족혁명당 주석에 선출[편집] 김원봉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민족혁명당입니다. 1934년 1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개보선에서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재선출되었다.[80] 1934년 최동오, 김두봉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단결과 규합을 부르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 발기하였다.[81]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여일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으나 그 정체가 탄로나 1935년 일본의 추격을 받게 되자, 난징 중앙정치학교에서는 비교적 안전한 쓰촨 성 성도(成都)에 있는 쓰촨 대학 교수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1935년 중앙정치학교 영어강사직을 사퇴하였고, 이후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5년 11월 일시적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고, 1940년까지 임정을 떠나 있었다. 임정에 몸담고 있으면서 임정 요인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해질 때, 김규식은 대학 교수의 신분으로 이 위기를 모면하곤 하였다. 그것이 청·장년층의 일부 임시정부 고수파로부터는 비협조자로 몰려 비판받기도 하였다. 쓰촨 성으로 피신했다가 1935년 2월 6일 재미국민총회 위임대표 자격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 제3차 회의에 참석했다. 1935년 6월 난징으로 돌아와 지청천 등 민족정당 지도자를 소집하였고 7월 5일 통합 민족혁명당을 재창당, 조직하여 그 주석에 선출되었다.[주해 6]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이 발족되고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자[82] 그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국민부 부장에 선출됐다.[83] 그 뒤 민족혁명당 중앙상무위원 겸 훈련부장에 선출되었으나 1935년 10월 민족혁명당 훈련부장직을 사퇴했다.[84] 김원봉은 그에게 당수직을 양보했고, 당내 무력을 장악한 실권자이면서도 반드시 그의 자문을 구하였다. 10월 임정 국무위원 임기가 만료되자 바로 민족혁명당 주석에 취임하였다. 의열단, 사회주의자, 김원봉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하여 이승만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그를 사회주의자, 과격파로 몰고 가기도 했다. 동시에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있었고 1942년까지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또한 쓰촨 대학의 문학부 외국어학과장, 외국문학과장 등을 지냈고, 동시에 교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때의 김규식은 아호인 우사를 이름으로 써서 '김우사'(金尤史)로 활동하였다. 중국에서 대학교수와 교육자로 활동하며 김규식은 월급의 전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고, 부인 김순애는 삯바느질 등으로 식구들의 살림을 꾸려야 했다.[31] 임시정부 재입각[편집] 임시정부 주석 김구 1938년 쓰촨 성에 도착한다.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쓰촨 성에 도착한 뒤 진통제와 페니실린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뒤 국민당 정부에서는 김규식, 김구, 김원봉에게 합작하라며 합작을 권고하였고 그는 합작을 결정한다. 김원봉의 반대와 김성숙의 입각 설득 등 내홍이 있었으나 임시정부 입각이 결정되었다.[85] 1943년 5월 중경에서 열린 '재중 한인대회'에서. 사진 왼 쪽이 우사 김규식. 그 옆에 안경을 쓴 사람이 윤기섭 1939년 임시정부에 재입각을 결정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86] 1940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확장으로 김구 등과 협의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연합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 1940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이 되고, 194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정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42년 10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1942년 10월 11일 손과(孫科)·김구·김원봉 등과 중경에서 400명을 이끌고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조직하였으며, 문화와 혁명사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1943년 1월 사천대학 영문학 교수직을 사퇴했다. 1943년 민족혁명당 주석에 재선출되었다.[59] 7월 26일 미국방송에 출연, 재미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에서 그는 7월 26일 김구, 조소앙, 이청천, 김약산, 김규식 등이 중국 국민당 총통 장개석과 가진 인터뷰의 결과 및 그에 대한 대책, 조선민족혁명당 LA 총지부와 하와이 총지부의 집행위원 임명 및 집행권의 소재를 밝히는 것, 조선민족 전선연맹의 해산을 공개적으로 언명하고 있다. 항일운동 중 사망한 석정김창화문명철의 업적을 기리며, 하와이 한인대표 황사용 목사의 중경 입국문제 등을 언급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편집] 1944년 충칭에서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을 출간하였다. 1943년 3월 12일 김규식은 미주에 있는 동포들에게 중국 국제 방송 을 통하여 영문으로 임시정부의 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방송을 하였고, 1943년 10월 6일자로 신문 독립 지에 이를 한글로 번역 게재하였다. 1943년 8월 5일과 8월 24일에는 미국·하와이·쿠바·멕시코·기타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동지와 미국인 친구들 을 향해서 "조선 민족 혁명당의 전후 계획"을 발표하였다.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부주석직이 한국독립당의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한데 대하여 원내 두 번째로 다수당의 당수인 그가 부주석으로 안배되었다. 부주석 취임 이후 그는 국민당정부와 협의하며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5] 또한 부주석의 지위 역시 국무위원 선출권한이 없는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로서 선전·외교문제에 치중하였다. 그는 종종 영어와 불어 등으로 자신의 동창, 지인들과 편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국내외와 중국에 파견된 일본 경찰들 중 영어를 해석하지 못하는 형사들이 많았으므로 중간에 유실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었다. 8월 11일 로노크 대학 동창인 알렌 그린랜드(J. Allen Greenland)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나는 지금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있지만 이 자리는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이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선전사업과 임정 내부 문제에 주력하고 있고 늘 군사, 외교, 기타 사업의 계획을 세우는 데 주력하고 있소'라고 했다.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측의 오철성(吳鐵成) 등과 한국 측의 엄항섭(嚴恒燮)·안원생(安原生) 등을 설득,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기독교 한교복리회는 한교의 생활증진과 독립운동의 진행을 촉진함에 기여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정환범(鄭桓範)·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 당하였다.[87] 1945년 5월 25일 임정 김규식 부주석이 중국<大公報> 기자에게 얄타밀약이 허위임을 답변 함. 1945년 충칭에서 실용영문(Practical English)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대학생용으로 300여 페이지였다. 정부수립 활동[편집] 광복과 귀국[편집]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외무부장에 선임되었다.[88] 그러나 김규식은 인공 내각 외무부장 취임을 거절하였다. 8월말 광복과 2차 대전 전승을 기념하여 시집 《양자유경 (양자강의 유혹)》을 내다. 상해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 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때 그는 민족혁명당의 대표이자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다. 임정 귀국을 놓고도 먼저 귀국해야 한다는 한국독립당계와 민족혁명당계 간에 싸움이 발생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양보, 혹은 당수인 김규식을 귀국 제1진에 넣는 조건으로 귀국문제가 종결되었다. 11월 23일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여 차로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국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고, 김규식은 한탄하였다. 김규식 필체, 하단 중간, 해방후 환국기념서명포(보존자 안봉순 “ "우리가 피흘려 싸운 것이 고작 이런 대가 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89] ”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한편 그는 8.15 광복에 대해 이런 견해를 피력하였다. “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본래 하나였던 우리 한민족이 불편 없이 통일되어 교류하고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일러 단일 민족이니 우수한 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우리의 단결된 완전 독립국가 달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애 일같이 주인 정신을 살려 단합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90] ” 1945년 9월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창설된 한국민주당에서는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 지도자를 당의 영수로 추대했다. 그러나 한민당에서는 김규식을 우익성향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한민당의 영수 추대에서 제외되었다.[91][92] 9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미국에 파견, 전후 대책과 함께 이승만과 다른 교민지도자들과 연대함과 동시에 미국 정부의 의중을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출국 직전 중국 정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출국이 무산되었다. 11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을 방문, 임시정부 환송 송별회에 참석하였다.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만찬 시 김규식은 승전축하 시를 한수 지어 헌정했다.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는 문제로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임정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귀국순서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자 민혁당의 서기장이었던 김원봉은 한독당계에 1진을 양보했고, 민혁당계는 한독당에 양보하는 조건으로 부주석이자 민혁당 위원장인 김규식도 귀국 1진에 포함하라고 요구했다.[93]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김구, 장준하, 안미생 등과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김포 비행장에 귀국했다.[93] 11월 귀국 직후 김규식은 윤치호를 방문했다. 이후 여러 번 윤치호를 방문했으나 윤치호는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94][95] 해방후 정치활동[편집]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두 번째가 김규식, 좌측은 김구)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귀국하였지만 그는 임시정부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인 입장이었다.[13] 귀국 초,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그에게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를 묻지 말고 내가 앓고 있지 않는 병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50] 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환영회에 이승만, 김구와 함께 참석하였다. “ 카이로 회담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못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 조선사람 전체의 책임인 것입니다. ” 11월 귀국 후 그는 서울의 삼청장(三淸莊)에 여정을 풀었다. 귀국 초기 새문안교회를 찾아 새문안교회 인사들과 면담하였으며,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방문, 면담하기도 했다. 중도파 혹은 온건우파 성향 때문에 좌익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그는 김구, 이승만, 권동진, 오세창 등이 한민당의 영수로 추대되었을 때 배제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 한민당으로부터도 꾸준한 교섭 제의를 받게 되었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그는 군정청 최고지도자 존 하지와 친밀하였으나, 이승만과 김구는 하지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1일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일시에 열고 임정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96] 삼청장에 기거하며 이시영, 조소앙, 류동렬 등과 함께 경교장을 수시로 방문하였다.[주해 7] 귀국 직후 인사차 임정을 방문한 여운형을 만났으나, 뒤이어 여운형이 경비원에게 끌려가 몸수색을 당하고 다시 들여보내지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를 말리지 않았다. 1945년 12월 1일 돈암장의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97] 12월 9일 윤치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2월 경교장 임정 요인을 찾아온 청년 중 윤판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러자 김규식은 "일본 놈한테 배웠구먼, 왜놈들한테 배웠다...여보게 청년들 그런 짓은 하지 말게." 하며 만류하였다.[98]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99] 신탁통치 반대와 모스크바 3상 결정 지지[편집] 삼청장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김규식 (1946년) 1945년 12월 27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윈스턴 처칠 등 미영소 3개국 수뇌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정문의 원문을 즉시 입수하여 해석,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76명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였으며, 그 내용이 현실적으로 남·북이 미소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코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자, 그는 반탁운동으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 회의 전문을 입수하고 읽은 이후에 부분적인 지지를 하였고,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고 하여 모스크바 3상 협정의 내용을 찬성하는 좌파들의 조직에도 가담하지는 않았다.[100][주해 8] 그러나 찬탁으로 노선을 전환하면서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극우단체가 비밀리에 조직되기도 하였다.[101][102] 1945년 12월 말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김호 등 일부 재미인사들이 그를 도와 활동하기도 했다.[103] 신탁통치 반대 입장에서 찬탁으로 선회하면서 그는 우익측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장덕수가 이승만과 김구를 방문하여 이승만과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과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의 불가피성을 이해한 김규식은 미소공위에도 찬성입장을 보였다. 미소공위에 찬성 내지는 지지 입장을 발표하자 역시 우익세력으로부터 비난받았다.[104][105] 1946년 1월 6일 기독교청년연합회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초빙되었다.[106]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1월 27일 남한에 세워질 정부가 중앙정부로서 유엔의 인정을 받으며, 또 이북과의 통합 방도가 세워진다면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 문제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후일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송남헌은 그가 '김규식이 군중에게 말하기를 '정부가 제주도에 세워졌더라도 그건 중앙정부다'라고 하던 분이 후에 가서는 주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107] 송남헌에 의하면 김규식이 초기에 반탁을 지지했던 것에 대해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라고 했다.[107] 중국 체류 중에도 일본 영사관 경찰과 밀정의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나, 귀국 후에도 동포에 의한 테러, 암살 위혐은 그에게 비애감을 심어 주었다. 군정과 임정의 갈등 조절 노력[편집] 미군정 시기의 김규식 미군정기간 내내 김규식은 미군정과 한국인 지도자들 간의 협력을 위해 노력하였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의 호출을 불쾌해하며 미군정 방문을 거절하는 김구(金九)에게 '시대가 바뀌었다'며 미군정청을 방문하도록 설득한 것도 김규식이었다. 한편 그는 미군정의 각별한 호의를 받았다.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108],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하다가 3월 20일 전화가 끊기게 된다. 민주의원 회의 진행 중인 김규식 (1946년 2월)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09]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 2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 개원에 참석했다. 민주의원이 개원 후, 김규식은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등이 주도하는 우익의 반탁운동에는 소극적이었다. 미군정이 민주의원을 만들 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온건한 좌파세력들을 포섭, 참여시키기 위하여 설득, 노력하였으나 여운형의 참여거부로 실패하였다. 미소공위에 참여해야 된다는 주장을 피력하면서 그는 매국노로 규탄당했고, 그를 암살하기 위한 백의사 조직원들이 삼청장을 쳐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우익 정치인 활동[편집] 김규식, 이승만, 김구 1946년 3월 미소공위 참관 한인의 대표자로 선출됐다. 미소공위 참관 문안 작성 중 김준연(金俊淵)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타이프로 신탁통치 관련 문서를 작성하던 중 찬성이라는 단어를 보고 김준연(金俊淵)은 이를 문제삼기도 했다. 또한 미군정청의 사령관 존 하지 장군은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 김규식을 좌우합작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게 하였다.[110] 1946년 2월 14일 민족혁명당 당수직을 사퇴하였다. 김성숙, 장건상, 김원봉 등이 임정을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담하자,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였으며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좌우합작 참여 배경은 미국 국무성의 요구로 실시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열린 덕수궁 앞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집회 1946년 3월 1일 '3.1.기미년독립선언 기념사업회' 고문에 취임하였고, 3월에 미·소공위가 개최 예정되자,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기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3월 7일 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그는 향후 수립될 정부의 부수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111]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 직무대리에 선출, 3월 20일 미소공위 개최때 미국은 이승만의 반소반탁으로 인해, 이승만이 회의 전면에 나오는 것을 꺼렸고, 김규식이 대신 민주의원 의장대리로 미소공위에 참석하였다. 46년 3월 24일 미소공위에 대처하기 위한 민주의원내 미소공위 교섭단을 구성하여 단장에 취임했다. 3월 19일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108] 하게 되어 김규식은 민주의원 의장 대리에 취임했다. 이승만의 사퇴 이유는 표면상 이유는 건강문제였지만, 사실은 미군정이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의장 대리에 김규식을 앉혔던 것이다.[108][112][113] 1946년 3월 10일 서울시내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열린 대한노총(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결성대회에 참석하고 대한노총 고문으로 선임되었다.[114] 한편 하지는 한때 좌익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도우파인 김규식(金奎植)을 이승만 대신 대통령으로 앉힐 생각도 했다고 한다.[115] 미소공위와 좌우 합작 노력[편집]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한국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116]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117]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앉하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에게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117]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17] 1946년 4월 26일 경성 정동교회에서 한국청년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재에 선임되었다.[118] 한국청년단은 우익 청년단체이면서도 온건한 성향을 띄고 있었고, 주요한, 장준하 등이 한국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6월 10일 민주일보(民主日報) 창간때 명예사장에 추대되었다.[119] 그러나, 5월 10일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이와 동시에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정읍에서 발언하는 사건이 터지자, 김규식은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단독정부수립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 자본가들의 이익을 테러로 옹호하면서 민족분열을 내란으로 하고,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도 세워보자는 가공 가증의 음모이다. 지금이야 우리민족은 통일된 정부를 세워서 공존번영을 누리느냐, 분열된 전제정치를 세워 상잔상학의 비운에 빠지느냐 하는 가장 위험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 인민은 가장 냉정하게 이 두가지중 하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120] 1946년 5월 12일 이승만 등과 독립전취대회에 참석하였다.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121]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 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121] 미소공위 지지 선언[편집]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미소공위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김규식은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122] 그러나 그의 미소공위 지지는 우익 진영의 온갖 인신공격의 원인이 된다. 김규식은 좌우합작이 안될 것이라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길이라면 실패하겠지만 기꺼이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한편 좌우합작위원회에 한민당에서는 대표를 보내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김규식의 설득으로 한민당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를 보냈다. 김규식은 한민당에서 온건한 분파의 지도자인 원세훈을 참가하게 하였다.[123] 1946년 6월과 7월 동안 좌우합작위원회의 비공식적인 회의는 계속되었다. 4사람의 만장일치에 의하여 하지중장의 정치고문이 초대되어 중재자로서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회의 초에 버치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들이 함께 화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123]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소련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소련측의 미소 양군 철퇴 주장에 대해서 김규식과 홍명희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으나, 중도파 정당들은 민족자주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는 양군 철수를 지지했다.[124] 좌우합작운동 전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좌우합작운동입니다.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6년 5월 김규식은 원세훈과 여운형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시도하였고 여운형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5월 15일 서울운동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한구석에서라도 독립정부가 세워진다면 주권을 되찾는 것'이라고 연설하였다. 6월 전향한 조봉암이 중간운동 하던 리극로와 손잡고 조직한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독립전선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려 하자 김규식은 이를 거부했다.[125] 조봉암은 공산당을 탈당한 후 김규식 박사를 만나려고 했는데, 김규식은 조봉암의 면담요청을 거부하였다. 강원용이 김규식 박사한테 “만나야지 왜 거부합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한 번 공산당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아. 조봉암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하는 것이었다.[125] 그 무렵 조봉암이 공산당을 탈당한 게 아니라 박헌영이 이승엽을 인천지구당 책임자로 앉혔기 때문에 반발했을 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125] 조봉암은 김규식을 지지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김규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5] 김규식은 공산당이라고 하면 전향 여부를 떠나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강원룡에 의하면 그래서 조봉암이 좌우합작위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극로와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라 한다.[125]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오른쪽은 김붕준과 안재홍, 오른쪽 맨 끝은 원세훈) 1946년 7월 3일 김규식은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였다가 안재홍과 함께 용공분자로 모는 삐라가 나돌고 벽보가 붙기도 했다. 기독연맹 모임에서 김구의 연설에 이어 김규식이 연설을 하였을 때 참석자들이 모두 귀를 막아 김규식은 퇴장하였다.[126] 거리에는 그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잔뜩 담긴 전단이 살포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전단이 뿌려진 그날 괴청년들은 김규식의 집을 둘러싸고 김규식과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안재홍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 '반(反) 과도입법위원회'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126]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 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선출되었고[110] 1946년 10월 민중동맹(民衆同盟)을 창당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과도입법의원은 각 리단위 마을 대표자가 읍면 단위 대표자를 선발하고 읍면 대표자는 군단위, 군단위 대표자는 도단위, 도단위 대표자가 입법의원 의원을 최종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도입법의원은 합작 7원칙에 따라 출범되었고,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을 통해 좌우합작을 모색하였으나 여운형 일파와 장택상 일파가 과도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난항했다.[2] 또한 과도입법위원회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한민당 일파를 낙선시켰다 한다. 이 일로 한민당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된다. 좌우합작에 적극 참여하는 그의 포용적인 자세를 높이 평가한 미 군정측은 이승만이나 김구 대신 그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세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2] 소련 역시도 조만식과 함께 그를 과도정부의 총리 혹은 수반으로 계획하기도 했다.[2] 과도입법의원 활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니다. 1946년 12월 12일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110] 김규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 ...(이상 생략)...이 의원[주해 9] 이 결코 미 주둔군 사령장관이나 미 군정청의 자문기관이 아니며, 또 미군정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하면 말하자면, 즉 남에 있는 미군정이나 북에 있는 어떠한 군정이나 그 존재를 단축시키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완전한 자격을 얻어, 우리의 일을 우리의 손으로 하며, 우리에게 대한 법령제정도 우리의 손으로 하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로서 자정하는데 매진할 것이다. ” —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개원연설 내용 中 1947년 1월 과도입법위원회 신년사(가운데 털모자에 지팡이를 쥔 이가 김규식, 왼쪽 맨 끝은 서재필,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여운홍, 세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는 장면) 김규식 (1947년 1월) 입법의원 의장이었지만 그는 소수파였다. 입법의원을 그의 사회로 개최하고 난 지 며칠 뒤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127] 홀로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던 김규식은 탁치 반대에 대한 99%의 찬성에 경악하여 발언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곧 과도입법의원에서 누군가 안재홍과 김규식을 찬탁 매국노라는 규탄 발언을 하면서 여러 번 곤경에 처하게 된다. 1946년 12월에 민중동맹이 공식 출범되었으나, 활동 중 김규식은 소극적 반응을 보였고 중도우파 내부도 복잡해 일부 세력만 남게 되었다.[128] 민중동맹이 창당되자 원세훈 등은 그를 당수로 추대했다. 그가 민중동맹의 위원장에 추대된 배경으로는 한민당의 토지정책 등에 반발하여 탈당한 원세훈·김약수·이순탁 등은 민중동맹을 조직하고 그를 당수로 추대했[129] 던 것이다. 1946년 12월에 민중동맹이 공식 출범되었으나, 활동 중 김규식은 소극적 반응을 보였고 중도우파 내부도 복잡해 일부 세력만 남게 되었다.[128] 12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서 성탄절과 신년이 다가오므로 특별히 2주간 휴회하자는 안건이 들어오자 거절하였다. 그는 쉬지 말고 일하자고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당시를 말하며 입법의원들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희생해야 된다고 설득, 입법의원 회의는 성탄절 당일과 12월 30일까지 계속 개원되었다. 1947년 1월 4일, 김규식은 통일입법기구 수립을 위해 '북한측에 특사를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미군정에 밝힌다. “ 우리는 과거 1년간의 쓰라린 경험에 의하여 그릇된 노선의 지도를 청산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광명한 전도를 전망하면서 가장 옳은 노선을 확립하였습니다. 이것이 즉 합작 7원칙의 노선입니다. 합작7원칙의 노선은 우리민족의 진정한 의사와 요구를 대표한 것이므로, 반드시 민중의 지지와 옹호를 받을 것이며, 편파한 일부노선은 필경 민족의 무자비한 비판에서 스스로 청산될 것입니다. 나는 몸이 비록 우익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좌익동지들과 합작할 필요를 느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합작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좌우합작위원회에 임하였으며, 또 남북통일의 임시정부 수립이 실현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 1947년, 신년사 내용 中 과도입법의원이 개설된 뒤 그는 아직까지 회의 절차에 참석해본 적이 거의 없는 입법의원들을 위해 직접 미국식, 유럽식 회의 과정, 원탁토의와 직선 회의 등 회의 방법을 일일이 설명하고, 동의와 제청, 재청, 삼청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계속 설명하였으며, 의원들이 투표 전후에 앞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훈시를 하는 등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1947년 3월 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서 미군정청측 인사와 면담중인 김규식 1947년 4월 22일 김포공항에서 지청천 장군의 귀국을 영접하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1947년 1월 20일, 과도입법위원회에서 이승만 진영과 한민당계인사들이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수적으로 불리하여 김규식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입법의원 회의장에는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진입해 장덕수, 장택상 등의 지휘 아래 반대파들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고 반탁결의가 통과되었다. 반탁결의안의 통과로 김규식의 위신은 크게 실추당했다.[130] 김규식은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지배하는 입법의원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며 시골로 내려갔다.[130] 1월 29일 휴양차 경기도 가평에 내려갔다가 2월 1일 휴양을 마치고 귀경했다. 1월~2월 이승만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는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했으며[131],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매도했다.[131] 1947년 7월, 서재필 박사와 김규식과 여운형. 1947년, 이승만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가 미국에 있던 서재필을 군정 고문관으로 초빙하려 하자 김규식 역시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였다.[132] 그는 군정청과 하지의 의견을 물어본 뒤 서재필 귀국에 적극 찬성, 지지한다. 그는 직접 서재필 귀국 환영 성명서를 지어 발표하였고, 서재필이 귀국하자 김규식은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과 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하기도 했다.[133] 우익 진영과 좌익 진영의 양면 공세에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그는 조병옥, 장택상, 김준연, 김성수, 이순탁, 원세훈, 허정 등 우익 인사들을 상대로 미소공위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 설득하고 다녔다. 1947년 2월 남로당은 2.7파업에 들어가 3월 초까지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을 친일반동이자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싸잡아 비난하며 사회 혼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134] 1947년 3월 15일 조선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되었다. 적십자사 활동 중 그는 정식 대한적십자사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조선적십자사의 국제적십자사 가입요청 서한을 미국적십자사를 통해 연맹에 보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35] 박헌영과의 관계[편집] 그는 여운형, 김원봉 등과의 대화·합작과는 대조적으로 박헌영을 몹시 싫어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좌우합작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음에도 그는 박헌영과의 합작은 거부하였다.[125] 적십자사 활동 중 조선공산당의 총수 박헌영이 조선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의 전신)에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자격으로 가입, 조선적십자사의 이사로 선출되자 김규식은 "나는 박헌영이 이사를 맡은 조직에 앉아서 일 못한다"고 반발했다.[125] 여운형의 측근이었다가 김규식 진영으로 넘어간 강원룡이 김규식에게 "그렇게 공산당을 싫어해서야 어떻게 좌우합작을 합니까"하고 항의하였다.[125] 그러자 김규식은 자신이 소련에서 겪었던 일을 소개하였다.[125] “ 내가 러시아에 자주 다녀왔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참 선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닌이 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1922년까지 5년 사이에 700만 명을 죽였다. 또한 알바니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켰는데, 단 하루 만에 6만 명을 죽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 만일 한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피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로 공산당이 들어와선 안 된다.[125] ” 그는 박헌영과 절친하게 지내던 조봉암 역시 혐오하였다. '조봉암 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125]'라면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규식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잔인하고 비겁한 심성을 가졌고, 그때문에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외국보다 더 심한 유혈사태나 학살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택상과의 갈등[편집] 한편 존 하지는 장택상과 조병옥에게 김규식을 도울 것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특히 장택상은 대놓고 거절하였다. 이에 김규식은 장택상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다. 1946년 6월 경 하지 장군이 통역관 이묘묵을 통해 수도청으로 전화를 걸어 하지 중장이 할 얘기가 있으니 곧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사령관실에 들어서니 하지 중장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으며 장택상이 앉자 김규식을 지지하라고 강요했다.[136] “ 중요한 문제가 있어 오늘 장 총감을 불렀소. 다름 아니라 앞의 정책을 의논하자는 것이오. 지금까지 미 국무성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좌우 합작을 위하여 중립적인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기로 바꾸었습니다. 장 총감도 앞으로는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주기 바라오.[137] ” 그러자 장택상은 '이러한 그의 말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라며 지체 높은 사령관의 말을 제가 감히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말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만 참 잘하셨습니다. 잘 알았소 하고는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내어 그에게 주었다.[138] 하지는 이게 무어요 하고 의아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장택상은 펴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봉투 속에 있는 것이 사표임을 알자 그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언성을 높여 "당신이나 조 부장이나 다 나쁜 사람이오."하면서 심한 욕설까지 했다. 장택상이 하지의 방을 나와서 조병옥을 만나 보았더니 그도 하지의 그같은 제의를 받고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하지는 두 번 다시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138] 군정의 좌우 합작 정책에 따라 두드러지게 된 사람이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당시 치안의 책임을 지고 있던 조병옥과 장택상이 여전히 이승만을 지지하는 데 대하여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장택상이 김규식을 만났다.[139] 김규식은 장택상에게 "장 총감은 이제 사표를 내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지 않아도 곧 갈리게 될 터인데?" 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택상은 하지 중장이 김규식에게 무슨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지 중장을 만났다. 그리고 하지 중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하지는 "당신과 조 부장은 우리 국무성에서 절대 신임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 일개 사령관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138] 고 하였다. 장택상은 '우리가 김 박사를 지지하지 않는 데는 적이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하지 중장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다른 인물로 갈아치운다면 치안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구는 잘 알고 있었다.[139]'고 했다. 한편 김규식은 장택상더러 사퇴하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장택상은 묵살해버렸다. 미소 공위 성사 노력과 좌우합작운동의 실패[편집] 1947년 이 무렵에는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열풍이 불면서 미 국무성 안에 있던 일부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사태를 빚으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여기서 미군정기 조선의 상황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중도파 정치세력은 수차례 테러를 당하게 된다.[140] 이러한 상황에서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가 재개되었다. 김규식은 미.소공위의 성공만이 분단을 막을 길임을 역설했다. “ 우리민족이 공위의 무기휴회로 말미암아 지난 1년 동안 받은 온갖 불행과 상처는 형언할 수 없다. 금번에 재개되는 미소공위는 작년과 같은 복철을 밟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좌우남북이 일치단결하여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만겨레가 한가지로 결심하고 노력하기를 바라고 믿는다. ” — 1947년 5월 13일, 담화문 중 일부[141]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김규식,이묘묵,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허헌 미소 공위 참관 후 현 코리아하우스에서 앨버트 브라운 소장이 여는 만찬에 여운형, 이묘묵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처음 제2차 미소공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었다. 6월 25일 공동위원회 참가를 청원한 남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400여명과 미소 두 나라 대표의 합동회의가 개최됐고, 7월 1일에는 북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와 미,소 두나라 대표의 합동회의가 개최됐다. 그러나 7월 10일 소련 대표가 공동위원회 참가단체로 등록한 남한의 425개 단체를 118개로 제한하자고 제의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체 참여수 문제를 놓고 미국과 소련 양측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좌파·우파 양 진영 역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중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좌우합작위원회 좌측 대표 여운형이 백의사 단원 한지근외 4명 등이 쏜 권총에 맞고 피습 절명하자, 김규식은 여운형의 죽음에 매우 크게 충격 받았다. 김규식은 여운형 영결식에 참석하여 추모사를 남기면서 평가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3] “ 우리는 한 위대한 혁명투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목표인 신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 민족이 합작으로부터 완전 통일에 나아감으로 최후 목적을 달하기를 제창하여 이에 최종까지 노력하던 지도자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몽양 동지의 영별에 대하여 정실상의 감촉보다도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공동진영의 한 용장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곧 민족 전체의 손실이다.[141] ” — 여운형 서거 담화, 1947년 7월 22일, 김규식 1947년 12월, 좌우합작위원회 해단식. 1947년 7월 19일 IOC가입 축하기념으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서울운동장(현재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날, 당시 미군정청 조선 체육부장이자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었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을 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배후를 알 수없는 한지근(韓智根, 본명은 이필형(李弼炯))에 의해 흉탄에 맞아 피습 절명하였다.[142] 여운형이 죽기 몇 시간 전에 또한 김규식도 '죽이겠다'는 협박편지를 받았다고 한다.[143] 김규식은 여운형과 사적으로 형님·아우님 하던 사이였고, 오래전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해방이후 좌우합작운동까지 함께해온 동지였기에 여운형에 대한 그의 특별한 동지애는 1947년 12월, 좌·우합작이 실패로 끝난 뒤에 촬영한 기념사진에 손수 여운형의 얼굴이 든 사진을 오려서 붙이는 것으로도 표현되었다.[3] 우익 진영과의 갈등[편집] 당초 우익 진영에서는 그를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 또는 김성수를 포함하여 4영수로 보았지만 그가 좌우합작에 뛰어들면서 그를 공격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144]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145]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도 않았다. 김규식에 대한 살해 협박은 계속되었다. 삼청장으로 수시로 협박 편지와 투서가 날아왔다. 1947년 7월 19일에는 여운형이 죽기 몇 시간 전에 김규식도 죽이겠다는 협박편지를 받았다고 한다.[146] 이는 'G-2 보고서[146]'를 통해 미국무성으로도 보고되었다. 그가 신탁통치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한 이래 수시로 그에게 협박 투서나 협박전화 등이 걸려왔다. 생애 후반[편집] 정당 활동과 암살 위협[편집] 민족자주연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 이후 김규식은 원세훈,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김규식 역시 극우단체로부터 수시로 암살위협과 테러의 위협에 시달렸고, 조선공산당은 김규식의 주변에 프락치를 보내 교란했다. 1947년 10월 14일 한미문화협회(韓美文化協會) 총회에서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여운형 암살 이후 극좌, 극우 양측으로부터 암살·테러위협과 협박 투서, 프락치 침투 등에 시달림을 당했으며 좌우합작운동의 구심점을 잃어간 상태에서 12월 5일,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포기를 선언하고 말았다.[147]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148] 정당정치를 혐오하였지만 정치결사체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일부 중도좌파, 중도우파 정치인과 청년들의 정치조직 결성 건의를 받아들여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착수하게 된다. 민족자주연맹은 경성부 천도교 강당에서 결성되었다.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의 의장에 선임되었다.[148][149] 결성식에서 그는 극좌-극우를 반대하고 민족주체성을 찾자고 역설하였다.[148] 1947년 미군정에서는 이승만이나 김구대신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임명하고자 생각하였고, 한동안 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소련 군정에서도 통일 한국의 수상으로 김규식의 임명을 고려하기도 하였다.[150] 김규식은 박헌영을 미워하여 조선적십자사 이사로 박헌영이 참여하자 박헌영이 이사로 있는 곳에서는 일 못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151] 그러나 박헌영은 김규식에게도 프락치를 보냈다. 뒤에 김규식의 삼청장에 파견된 기자 이본영은 송남헌에 의하면 '일종의 박헌영 프락치'라 증언했다.[152] 민족자주연맹의 비서처장으로 있던 송남헌은 그에게 권태양을 추천했다. 송남헌은 뒤에 '권태양은 내 밑에 있던 사람으로 내가 추천해서 썼다', '(권태양은) 성시백의 바로 직계이다. 내가 감쪽같이 속았지, 성시백이 선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진술했다.[153] 1947년 6월 16일 8명의 괴청년들이 김규식의 삼청동 자택 침입을 시도했다[104] 가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김규식은 자신이 머무르는 삼청장 안에서도 테러단을 피해 침실을 자주 옮겨다니기까지 했으며, 측근들은 만일의 테러 사태를 염려해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에 참배를 가는 것도 만류하였다.[154][155] 민족자주연맹 창당[편집] 1947년 10월 1일 창립발기회[156] 를 개최하고 민족자주연맹을 공식 창당하였다. 12월 20일 서울특별자유시 천도교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이 있었다. 15개 정당과 사회단체 25개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총재에는 김규식, 정치위원에는 홍명희, 원세훈, 이극로, 손두환, 윤기섭, 김성규, 김순애가 선임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식에는 하지 미국 육군 중장, 윌리언 딘 군정장관, 브라운 미육군 소장, 헬믹 미육군소장, 장건상, 조병옥, 장택상 등이 축사를 하였는데, 장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군정의 핵심인물들이었다.[157] 또한 남조선노동당의 당수 박헌영, 민족주의독립전선 측의 조봉암도 사람을 보내 개회사 직전에 참여하여 내빈축사를 낭독하고 돌아갔다. 미군정 수뇌들은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함으로써, 이 당시 이승만에게 보낸 반응과 대조적으로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그러나 미군정측이 남북지도자회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개인 김규식에 대해서 보인 호의와는 무관하게, 민자련은 미군정, 미국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었다.[157] 김규식을 정점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미소 양군의 철퇴를 지지하여 미국측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다.[156] 북한과 교섭[편집] 김구 1947년 11월 김규식은 남북 지도자 회의 소집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158] 12월 발생한 장덕수 사건으로 이승만 계열과 한국민주당 등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 김구 계열이 합류하면서,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김구의 협력을 얻어냈다. 1948년 1월 김규식은 남북협상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의사를 공식 피력하였다. 2월 4일 삼청장에서 민족자주연맹 지도부를 소집시키고, 이 자리에서 김구와 공동명의로 북측에 서신을 보내 김일성(金日成)과의 회담을 제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김구와 함께 북행길을 결심하여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함께 공동명의로 단독선거 강행을 저지하고 통일국가수립을 위해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서신을 북한의 김두봉에게 보내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였다.[100] 북한에서는 인편을 보내 남북협상 제의가 내려왔다. 그러나 북한의 제의가 당초의 남북요인 회담과는 거리가 있다고 추정하였다. 그는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다음과 같이 5개항의 전제 조건을 먼저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재정치제도를 배격할 것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수립할 것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의할 것 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 미·소 양군의 철퇴 공포할 것 이에 김일성이 5개항 전제조건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응답하자 김규식은 북행을 결심한다.[주해 10] 11월 4일 미국 육군 소장 윌리엄 F. 딘이 미 군정청 군정장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즉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를 발표하였다. “ 조선 속담에 초불득삼(初不得三)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첫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세 번째 노력했을 때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1대 군정장관 아놀드 장군 때와 2대 군정장관 러치 장관 때에 성공하지 못한 자주 독립을 제3대 군정장관인 딘 장군을 맞이함으로써 이 소망을 달성할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통 환영사에서는 되도록이면 오랫 동안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이나, 금일 이 석상에서는 장군에게 환영사를 드리는 나로써는 될 수 있는 대로 단시일에 군정장관의 자리를 물러가고, 제1대 주한미국대사나 특별대사의 자격으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 — 제3대 미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 환영사 1947년 12월 말 그는 남북분단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다시 민족자주연맹과 중도파를 규합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한민당 탈당파인 원세훈, 김약수, 이순탁 등이 그의 노선에 동조하였다. 1948년 2월 4일 김구를 방문하였다.[157] 1948년 2월 4일 민족자주연맹은 남북통일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남북 요인회담을 열 것을 요망하는 서한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발송하기로 건의했다.[157] 이 결의에 따라 김규식은 장덕수 살해사건 관련설로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던 김구를 방문하고,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한은 신기언(申基彦)이, 김두봉에게 보내는 서한은 엄항섭이 기초하여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 연서의 사신 형식으로 발송할 것에 합의했다.[157] 남북협상에 대한 만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입니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59]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레믈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159]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159] 는 공격을 당했다. 김규식 (1948년 4월) 4월 3일 김규식은 서울 필동의 호국역경원에서 열린 통일독립운동자 협의회 결성식에 참석하여 훈화하였다. 김규식은 남북협상의 실패를 예견하였고, 자신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실패하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국민들이 심정적으로는 남북협상을 지지하겠으나 현실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이승만을 선택하리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160]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순 1948년 4월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려 할 때 주변에서는 그에게 북한에 가지 말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남북협상이 정치적 자살 행위임을 김규식은 잘 알고 있었다. 조병옥은 '남북협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등의 결론도 못 얻고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161]' 그래서 조병옥은 김규식을 찾아가 북한에 가지 말 것을 설득하였다. 조병옥은 김규식을 방문하여 3시간 동안 면담하면서 현존 국제정세 하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정부 수립을 협상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협상을 하기 위하여 북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행(虛行)이 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정치적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61] 김규식도 그의 의견을 존중히 여기고 북행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161] 민족자주연맹과 좌우합작파, 우파 일각에서도 그의 남북협상 참여를 만류하였다. 김규식의 비서로 지냈던 송남헌에 의하면 장건상과 원세훈 등은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가할 때, 김규식의 직접 참여가 장차 정치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김규식의 북행을 만류했다고 한다.[160] 장건상은 특히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박사님은 북행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였다. 1948년 4월 14일 서울에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108인 성명'이 발표되었다. 한편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5개 조항의 전문을 보내고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북한이 5개 조항을 수용할리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김일성이 3월 초 답신을 보내 5개항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 하였고, 그로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문화 예술계 인사 108명이 남북협상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찬성 서명을 발표하자 그도 더이상 남북협상을 기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실패를 예상하고 3.8선을 넘어 북행하게 된다.[162] 남북협상 참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입니다. 김구는 1948년 4월 14일 북한으로 갔고, 김규식 일행은 4월 21일 남북연석회의가 열리는 북한으로 갔다. 남북협상의 실패와 민중들이 이승만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각오하였으나 그는 4월 21일 기자들에게 남북협상의 성공을 예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비서 송남헌을 대동하고 3.8선을 넘어 북행하였다.[160][163] 김규식의 남북협상 배경에 대해 리처드 로빈슨은 '이승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혐오감, 애국심이 복합된 것이었다.[164]'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의 특별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평양의 특별호텔에 있을 때 김원봉(金元鳳), 허헌, 박헌영(朴憲永) 등의 방문을 받았다.[165] 환영 피로연에서 그는 '우리는 우리 장단에 맞추어 우리춤을 추자'며 자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규식과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했을 뿐이다. 4월 22일 평양시내에 도착한 김규식은 4김회동에만 참석했을 뿐, 이후 병을 이유로 숙소에 머무르며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163]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166]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8년 5월 5일 김구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166] 말년[편집] 제2차 남북협상 불참[편집]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전에 실패를 예상하였다. 성과 없이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는 5월 14일 북한 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10 총선거에는 ‘불반대·불참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공식적으로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불반대, 불참가를 천명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5·10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단독정부의 수립에는 반대하였으나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였다.[167] 1948년 7월 21일 김구와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규식은 통일독립촉성회 부주석에 추대되었다. 축사에서 그는 '남한이라도 철같이 단결하여 통일 독립 쟁취에 매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167]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167] 1948년 6월 29일 북한에서 황해도 해주에서 열리는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 개최에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고, 8월 한국민주당에서 뒤에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민당의 이 요청 역시 거절하였다. 9월 북한 단정이 확정되자 7월 19일 김구와 함께 북한의 선거는 4월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의 약속위반이라고 비난 성명을 발표하였다.[168] 1948년 10월 잡지 학풍(學風)이 창간되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169] 1948년 12월 일부 남북협상파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단정 반대 입장을 발표할 대표자로 그를 선정하였으나, 그는 파리에 가기를 거절하였다. 정치적 몰락[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전 임시정부 주석 김구 국민장 김규식 추도사 전문 단정 수립 당시 김규식은 이승만박사에게 '나중에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느냐?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이에 이승만은 '역사의 심판은 내가 다 받겠다. 그건 걱정은 말라.'라고 대응했다.[170] 유엔의 승인 이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했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171] 1949년 5월 15일 서울 조선정치학관(건국대학교의 전신) 개교 3주년 기념식에 내빈으로 참석하였다. 통일독립촉진회에서 활동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같이 활동한 김구가 암살되었다. 김구의 장례를 놓고 정부와 장례위원회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김구의 장례는 7월 5일 김규식이 절충하여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 측이 국장을 제의하자, 장례위원회 측이 너희들이 죽여 놓고선 무슨 국장이냐?며 반발하며 민족장을 추진하려고 했다. 결국 김규식이 양자의 의견을 조정, 조율하여 국장과 민족장을 합친 국민장(國民葬)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172] 김규식은 조소앙과 함께 김구의 장례식을 주관하였고,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북협상 당시 끊지 않겠다는 송전을 끊어 그의 정치적 입지를 궁지로 몰고 갔다. 송전이 마비된 뒤 미군에 의해 전기 공급이 복귀되기는 하였으나, 송전 중단의 원인을 김규식의 탓으로 몰고 가는 비난 여론이 나타났었다.[173] 이후 우파 청년들이 드나들던 그의 사저 삼청장은 썰렁하게 변모해갔다. 1949년 7월 3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약칭 민강위)에 참석하였다.[174]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175][176] 이어 김규식은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의장에 피선되었다.[177] 그러나 9월 20일 '민강위' 의장직을 사퇴하였고[178], 민강위 연석회의에 참석했다.[178] 또한 49년 북한에서 송전을 끊어버림으로서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대한민국 단독 정부 승인과 말년[편집] 49년 8월 15일 정부수립 기념 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기념사를 발표하였다. "UN"과 열국이 승인한 대한민국의 1주년을 맞이함에 있어 누구나 다 경하할 바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국토의 완전 통일을 보지 못하고 해방된 이 나라 백성들이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현장은 목불인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으로 민국은 앞으로 진정한 독립국가로서의 명실상부하게 완미한 발전이 있어야 하겠고, 자주통일된 국가로서 국가주인공인 전체 인민의 생활 안정과 행복을 제일로 획득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며 따라서 인류평화에 공헌하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179] 1950년 4월 서재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자신이 좌파로 몰리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였다. “ '(중략)...우리가 누구인지 하느님과 우리가 아는데, 왜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근심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저를 보고 빨갱이라 부른곤 합니다.'(하략) ”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예정되자, 김규식의 지지자들은 그의 총선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김규식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발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자주연맹 내 다른 당원들의 출마는 허용하여, 2대 총선에도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하였다.[180][181] 공식적으로는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전국 각지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당선 가능성이 높은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입후보를 권유하였다.[180] 민족자주연맹 공천으로 출마한 후보자들은 원세훈(서울 중구 갑), 최동오(서울 중구 을), 김붕준(서울 성동 갑), 박건웅(서울 용산 을), 김성숙(金星淑, 경기 고양), 조일근(전북 전주), 박종운(경남 의령), 송일환(경남 울산 갑), 최관수(경남 창원 갑), 김성숙(金成璹 제주도 남제주) 등이었다.[180] 그러나 "북측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아썼다"는 따위의 누명을 씌워 반이승만 성향의 입후보자들을 구금하는 등 관권개입과 폭력, 금력이 판쳤던 게 5·30 선거였다. 그런 탓도 작용해 민족자주연맹 후보 가운데 금배지를 단 이는 원세훈 하나뿐이었다.[180] 최후[편집] 6월 25일, 한국 전쟁 직후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김규식을 마지막으로 본 강원룡에 의하면 여전히 건강이 안좋은 상태였으나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한다.[182] 이승만의 정치적 반대자이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평양에까지 다녀온 자신을 설마 북한 정권이 어떻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82] 그 해 6월, 김규식은 한국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으며[183], 이때 아무도 그에게 피신할 자동차를 보내주지 않았다 한다. 북한 인민군이 소환을 재촉하자 아들 김진동이 동행하려 하였으나 비서인 권태양이 그와 함께 나갔다.[주해 11] 한편 김규식을 인도한 권태양은 조선로동당에서 침투시킨 첩자였다. 송남헌과 강원룡은 권태양을 첩자로 지목했다. 김규식의 측근이었던 강원룡은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권태양이 박소붕이라는 사람에게 '당신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함부로 떠들지 말아.' 라고 하는 말과 그 뒤에 박씨에게 뭐라 하자 박소붕의 태도가 싹 달라지는 것을 보고 권태양의 정체를 의심하였다.[184] 김규식은 북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그를 보냈으나, 그가 김규식이 북에 가도록 일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고 의혹을 제기하였다.[184]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권태양이 성시백이 보낸 프락치라고 증언하였다.[185] 송남헌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도처에 공산당의 프락치들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없었다고 증언하였고[185] '권태양은 내(송남헌)가 속을 정도로 은밀히 활동하였'다고 진술했다.[185] 송남헌은 또한 '권태양이 성시백의 직접선'이라 하였고[185] '8월 25일 공산당에서 하는 해주회의에도 갔다'[185] 고 진술했다. 그는 북한 인민군이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압록강 한 귀퉁이까지 끌려갔다가 1950년 12월 10일, 오랫동안 앓아왔던 심장병,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6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183] 강원룡은 그가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사망했다고 보았으나[17] 사망 장소도 만포진의 민가에서 사망하였는가 북한 인민군 군병원에서 사망하였는가 여부도 불확실하다. 1950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설은 북한에서 공식 주장한 것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1952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주해 12] 사후[편집] 이승만의 정적이자 납북자인 까닭에 금기시되다가 제2공화국 시절에도 부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1960년대 후반 관련 서적 출간 이후 1970년대 후반 이후 재조명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 11월 21일 광복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5] 12월 31일 우사연구회 발기인총회가 열리고 우사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민주의원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직에 있을 때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의 소중함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그를 소위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186]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187] 연보[편집] 1881년 2월 28일 출생 1886년 어머니 사망, 숙부들 집을 전전하게 됨. 1886년 숙부들은 기독교인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그를 맡기려고 했으나, 발육부족으로 4세 미만의 어린이로 본 언더우드의 교회(敎會)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다시 숙부들 댁을 전전하다. 1886년 숙부들도 포기하고 병풍 뒤에 뉘여있던 김규식은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발견되다. 1886년 5월 11일 고아원을 설립하고 돌아온 언더우드의 집에 데려가 극진히 간호하여 병이 완쾌되었다. 그 뒤 다시 숙부들에게 돌려보내졌다. 1887년 언더우드의 양자가 되다. 1891년 아버지 김지성, 유배지에서 풀려나 귀향하였다. 1891년 여름 조모 사망 1891년~1894년 부친과 조부와 함께 살며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894년 가을 할아버지 김동선과 형이 연이어 사망하다. 1896년 3월 한성 관립영어학교 1반 재학생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896년 3월 졸업 직후 조선인 식품점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하였다.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판과 영문판 일간지 독립신문을 발행한 서재필을 찾아가 면담, 그의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였다. 1896년 4월 8일 독립신문사 영어 사무원 겸 회계담당 1897년 서재필 등의 권고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897년 9월 미국 버지니아주 로노크 대학교(Ronaoke College) 예과(豫科:고등학교 과정) 과정에 입학하였다. 1899년 8월 로노크 대학교(Ronaoke College) 예과(豫科:고등학교 과정) 과정을 졸업했다. 1899년 9월 로노크 대학교(Ronaoke College) 1학년에 입학 1899년 여름 유일한 한국인 학우였던 이종계는 아버지 이범진의 부임지를 따라 유럽으로 떠났다. 1901년 3월 수행원 2명을 데리고 로노크에 온 의친왕을 접견하다. 1901년 1학기 당시 질병과 의친왕 수행을 이유로 98일간 대학 강의에 결석하였고, 학교의 허가를 받아 공가처리 되었다. 1901년 6월 28일~7월 7일 의친왕과 한국인 학생들을 수행하여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참석하였다. 1901년 7월 7일 매사추세츠를 떠나 뉴욕주 버팔로에서 열린 남북아메리카 박람회에 참석하였다.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였다. 1903년 3월 로노크 대학교에 복학하였다.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1903년 겨울, 귀국 직전까지 뉴욕에 머물러 있었다.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M. A)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박사 과정 진학을 권고하였으나 거절하고 귀국 수속을 밟다. 1904년 각국의 상사와 광산회사, 은행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904년 배재학당 영어, 수사학 과목 교사 1905년 1월 18일 일본이 여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모교 로노크 대학교 잡지 5월호에 <근대의 세바스토폴리의 함락>이라는 주제로 글을 기고하였다. 1910년 숭실학교 영어, 수사학 과목 교사 1913년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직을 사퇴하고 만주로 건너감. 1913년 3월 27일 ~ 3월 29일 모트 박사의 부탁으로, 모트 박사의 특별 강연을 모두 통역하였다. 1913년 5월 언더우드 목사의 부인 릴리스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회'보 1913년 5월호에 1913년 4월 김규식이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대학원에 입학하여 학위를 받으러 출국했다는 거짓 기사를 발표했다.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의 박달학원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김규식은 박달학원 영어 교수로 초빙되었다. 1913년 11월 춘원 이광수를 만나다. 그는 상하이 성 요한 대학(St. Johan collige)에 입학하려는 이광수에 대한 소개장을 써서 주었다. 1918년 3월 앤더슨&마이어 회사 고륜(高倫, 울란바토르) 지점의 지점장으로 부임하였다. 아들 김진동, 사촌 여동생 김은식을 대동하고 장가구지점에서 출발 직후, 자동차로 가다 11일간 폭설로 중도에 여관에 숙박하였다. 1918년 3월~4월 37일간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넜다. 3월 출발 후 50일 만인 5월 중순에 몽골에 도착, 6월 초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1918년 7월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만주에 땅을 개척, 목장을 경영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총독부의 방해로 실패하다. 1918년 11월 신한청년당에서 파리 강화회의로 보내는 사절단을 선발할 때, 김규식은 여운형의 추천으로 대표단에 선발되다. 여운형은 그가 영어를 잘 하는 점을 들어 그를 사절단으로 추천하였다.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프랑스 외무성으로부터 참여를 거절당하였다. 정부 자격이어야만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프랑스 외무성의 응답을 듣고 상하이로 알렸고, 2·8 독립선언과 3·1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1923년 상하이 푸단대학의 영문학 강사 1923년 로노크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취득. 로노크 대학교는 김규식이 1919년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애국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1923년 장녀 김한애 출생 1924년 1월 코민테른에서 창조파 국민위원을 국경 밖으로 추방하여 여운형, 원세훈 등과 함께 각지를 방황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1924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4년 둘째 딸 김민애 출생 1924년 의열단 고문 1925년 셋째 딸 김우애 출생 1927년 2월 유자명, 이광제, 안재환, 중국인 목광록, 왕조후, 인도인 간타싱 비신싱 등과 난징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조직하였다. 김규식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기관지 [동방민족]을 중국어, 영어, 한글로 월간 발행했다. 1927 4년 전민족독립당 결성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봉암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7월 5일 '연합' 지에다가 영국과 미국의 침략성을 규탄·배척하는 기사를 투고했다가, 영국영사관과 밀통한 일본영사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체포령이 내려졌다. 1927년 둘째 딸 김민애 사망 1930년 첫째 딸 김한애 사망 1932년 7월 만주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독립당의 김두봉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준비회를 구성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에 통일전선을 설립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할 것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다. 1932년 11월 중국에서 만주사변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 국제 사회에 홍보할 사절단을 파견하려 할 때, 북양대학교 교수 자격으로 민간외교사절단 수석전권대표로, 20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는 11월 5일자 한국 동아일보에 실렸다. 1933년 초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파견한 첩자의 미행을 당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첩자를 통해 입수한 자료로 보고서를 작성, 그가 '북미 각지를 다니며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한민중대동맹을 홍보하고 기부금 모집을 노력하였다.', '뉴욕 등지에 대일전선통일동맹, 중한민중대동맹의 지부를 설치한 것' 등이 입수되었고, 그가 '8천 달러의 기부금을 모집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1933년 9월 16일 약산 김원봉이 교장으로 있는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생 입학식에 참석해 "세계정세와 민족혁명의 전도" 라는 주제로 훈화를 하였다. 1935년~1942년 사천성 성도 아미산의 국립 사천대학교 영문학 교수 사천대학교 외국어학과 과장, 외국문학과 과장 1942년 10월 11일 한중문화 협회 설립대회 개최 1943년 1월 20일 임정 선전부장으로 새한일보에 일체의 과거를 다 쓸어버리고 임시정부에 충성하기로 결심하는 내용을 발표함 1944년 7월 3일 김규식은 김구와 김구, 김규식, 임정 내각의 명의로 중화민국중국 총통 장개석에게 중국정부가 한국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해주기를 요청함 1945년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으로 갔다. 당시 민족혁명당의 대표이자 임시정부의 부주석 자격으로 환국 제1진에 끼어서 함께 귀국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반탁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반대에 보류하는 입장을 발표, 그 뒤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암살단이 조직되어 그는 암살단을 피해 거처와 숙소를 옮겨다녀야 했다. 1946년 4월 한국청년회를 창단하고 회장이 되다. 1946년 말 모교 로노크 대학교에 미화 1천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1947년 한민당과 공산당의 무고로 김규식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적산을 팔아 돈을 벌었다는 등 그가 부정한 자금을 축재했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원이 없었던 김규식은 아내 김순애가 삯바느질과 재봉틀을 돌려 생계를 유지할 만큼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47년 3월 16일 조선적십자사 총재 1947년 10월 14일 한미문화협회(韓美文化協會)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기타 노력[편집] 외교적 노력[편집] 그는 국제사회에 있어서 각국가는 자국의 이익에 의해서 서로 동맹도 되었다가 적이 된다고 확신했다. 1919년 4월의 파리강화회의 참여 이전까지는 이상론자였으나, 파리 참석이 좌절되고 소련조차도 조선의 독립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좌절,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자국의 이익에 의한 합종연횡론으로 세계관을 바꾸게 된다. 그는 친미(親美) 인사이면서 친중국(親中國)인사였고, 소련과도 우호적인 노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활동하였고 주로 미 군정청과 교섭하였으므로 친미적 성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미국문명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국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188] 김규식은 외교 관계를 중요시 하면서도 자주성, 자립성과 경계를 강조하였다. 1919년 4월~7월의 파리강화회담에서 외면당한 것에 대한 미국, 프랑스, 영국 등 구미 유럽 각국의 민주주의(民主主意) 정책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고, 미국, 프랑스, 영국을 흡혈귀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구미유럽에 대한 대안으로 김규식은 사회주의를 택하였다.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확신한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소련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에서 조차도 1924년 10월 추방당하면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국을 흡혈귀와 같은 제국주의 침략국가로 보기도[189] 했다. 친미국인사이면서도 미국을 신뢰할 수 없었던 김규식은 해방 직후 미국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항상 미국을 경계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무장 투쟁 노력[편집] 무장투쟁론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무력부대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13년부터 류동렬, 이태준 등과 몽골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위한 한인부대 육성을 목적으로 한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190]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와 방해, 마적단의 출현, 적은 월급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19년 1월에는 모금을 위해 만주를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비밀리에 국내에 진입했다가 되돌아가기도 했다. 1923년 만주로 건너가 고려혁명군 조직에 관여했다.[190] ← 앞 내용 모두 삭제할 것. 군사에 관여한 사람은 우사(尤史) 김규식이 아니라 노은(芦隱)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3명이다. 활동영역도 서간도, 북간도, 외교무대로 제각각이다. 그밖의 활동[편집] 교육가와 학자로서의 활동은 1913년 12월 17일 상해의 박달학원 영어 교수, 1923년 만주 복단대학 상하이 분교 영문학 교수, 1923년 모교인 로노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7∼1929년 톈진(天津) 북양대학(北洋大學) 영문학 교수, 1932년~1937년 난징(南京) 중앙정치학원의 정치교관, 1937년~1940년 쓰촨대학(四川大學) 영문학 교수 강의및 외국어과장, 외국문학과장 등과 같은 강단생활을 하였다.[191] 사회단체 활동으로는 온건 우파 청년들로 구성한 한국청년단 총재로 청년단을 이끌었고, 1947년에는 조선적십자사 총재에 임명되었다. 정치 활동으로 실제 활동은 부총재 백상규가 대리하였으며 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부터는 49년 대한적십자사가 정식으로 부활할 때까지 임시로 적십자사를 이끌었다.[192] 일화[편집] 국어와 함께 영어와 한자, 독일어, 라틴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 의열단 단원, 한국인 공산주의자 등을 모아놓고 영어와 한자(漢字)를 가르쳤다. 상하이에 도래한 초기에 그는 단재 신채호의 요청으로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신채호는 영어단어 뒤에 하였을람 이라는 접속사 등을 반드시 붙여서 읽었다. 김규식은 문법과 철자를 꼼꼼히 보고 틀린 점을 지적한 반면, 신채호는 단어의 뜻만 알면 되지 않느냐며 반발하였다. 김규식은 신채호와 영어 발음, 철자 문제를 놓고 크게 싸웠고, 신채호는 뒤에 이광수를 찾아가 다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193] 목사 강원룡에 의하면 '그의 영어 실력은 미국 사람이 앞에 나와서 하는 영어를 듣다가 영어발음이 틀렸다며 그의 말을 바로잡아줄 정도로 뛰어났다' 한다.[17]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매일 주말이면 그는 꾸준히 교회 예배에 출석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다.[주해 13] 그는 이승만과 한글, 한자, 영어 등으로 자유롭게 대화를 구사할 수 있었다.[194] 평가[편집]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김규식을 지목하였다.[195]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52표를 얻었다.[195]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94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한다.[195]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89표로 4위를 하였다.[195] 소련군정 사령관 테렌티 스티코프의 비밀수첩에는 '장차 한국의 통일 임시정부가 세워졌을시 내각의 총리는 김규식이다.'라고 적어놓았다. 미군정 사령관 아처 로치 소장은 1947년 3월 6일에 작성한 '한국 대통령 임명에 관한 메모'란에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추천했다. 그만큼 그는 좌우세력에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196] 미군정당국의 한 장교는 "임정의 부주석 김규식 박사를 대하고 보니 그처럼 세련되고 견식이 높은 분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를 보고 임정 요인에 대한 그간의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다. 특히 국제적인 정치 감각과 세련된 매너, 달변, 그리고 훌륭한 영어 회화 실력은 놀랄 만한 일이다."[197] 라고 평가하였다. 조병옥은 그가 영어에 능란하였으며, 또 한문도 쉽게 습득해 종횡으로 구사하였는데 그 재주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25] 조병옥은 그가 파리 강화회의에까지 가서 국제적으로 활약을 눈부시게 하였던 고로 그가 귀국하였을 때는 많은 기대를 가졌으나 중간노선을 걸어 퍽이나 실망했던 것이다.[25]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 의열단 단원, 한국인 공산주의자 등을 모아놓고 영어와 한자를 가르쳐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192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폐를 놓고 창조론과 개조론, 임정고수파로 분열했을 때 창조파에 속했고, 1930년대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으로 중국 관내를 옮겨 다니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피체되었을 때에도 그는 대학 교수라는 신분을 통해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3년 남경군관학교 당시에는 이봉창, 윤봉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그도 난징에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위기를 피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측으로부터는 한때 비협조적인 인사로 몰리기도 했다.[198] 영리하고 야심만만한 인사였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기자 마크 게인은 그도 대통령이 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김규식은 영리하고 야심적인 인간이었고, 그의 주변에 있던 미군 중위 버치는 전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즐기는 동시에 자기 친구인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 정부의 고문관이 될 것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199] 평가와 비판[편집] 1990년대 이후의 평가[편집] 남북협상에 실패한 후 납북되어 잊혀졌다가 2000년대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200] 이승만 정권에서 금기인물로 지정되었다는 주장까지도 있다. 2000년 8월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5권이 출간되었으며[200], 그 해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교수 이철순은 "명분에만 집착한 정치가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정권에는 의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접근했고 정세에 따라서는 현실에 적합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김규식은 이상주의 일변도의 정치가가 아니라 현실주의적 측면도 있는 정치가로 본다"고 밝혔다.[201] 1921년~1922년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와 동행했던 나용균에 의하면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어학에 능통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깨끗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202] 합리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 이철순 교수는 그를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남북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북한 정권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도 그런 모습 중 하나다. 그는 유엔의 승인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했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171]'며 '상당히 현실적인 면모를 보였다.[171]'고 평하였다. 부정적 평가[편집] 강원룡은 그는 깨끗한 학자가 적격이었는데, 어쩌다 혼란스러운 정치판에 떠밀려 정치가로서 힘든 길을 걷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 비운의 인물이라 평가하였다.[203] 권모술수를 쓰지 않은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정치적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성격이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이 있다. 성격이 냉정하고 차갑다는 비판과 편협하다는 지적도 있다. 나용균에 의하면 그는 (성격이) 약간 편협한 편이었다고 평하였다.[202] 한편 김준연(金準淵)은 그가 배짱이 없었고 마음이 약했다고 보았다.[202] 윤보선은 그가 '한 번 적이 되면 영원한 적이 된다'고도 평하였다.[202] 강원용은 그가 직선적이고 날카롭고 냉정했다고 보았다.[202] 여운홍은 그가 성격이 급했고 고집이 세고 집착이 강하다고 평하였다. 그런가 하면 배짱이 없었다. 여운홍은 그가 '이승만의 배짱의 10분의 1만 가졌더라면' 하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202] 허정은 그가 상당히 냉정하다고 평가하였다. 명분론에 치우쳤다는 비판도 있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점도 부정적 평가의 하나로 지적된다. 한편 그는 선동에 호소하는 대중정치를 싫어하였고, 달변으로 국민들을 선전, 선동하는 정치인을 경멸하기도 했다. 대중정치와 여론선동을 기피하는 점을 그의 정치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실패요인으로 보기도 한다. 신복룡은 그가 '학자 타입에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초부터 정치를 해선 안될 사람'이라고 비판하였다.[204] 기타 평가[편집] 김규식의 비서로 있었던 송남헌에 의하면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였다. 강원룡은 그가 직선적이고 날카로웠으며 냉정하고 세심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통찰력이 있고 지식이 풍부하였지만 비관적이었다고도 보았다.[162] 한편 둘째아들 김진동은 그가 규율에 엄격한 사람이었으나 모순투성이였다고 평하였다.[162] 한편 광복 직후 45년 12월 경교장 방문 청년 중 윤판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러자 김규식은 이를 만류하기도 하였다.[98] 당대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과 애국, 헌신을 강조한 것에 반해 그는 한국인은 잔인한 심성을 가진 민족[125] 이라는 평을 내려 맹목적인 애국심에서는 거리를 두기도 했다. 매국행위를 찬양하지는 않았음에도 맹목적인 애국심을 거부한 것에서 그는 일부 한국인들로부터 거부감과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으로 미국에 체류할 때 두골절제수술을 받았다. 머리 뒷부분에 혹이 있었던 그는 동료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우사(尤史, 혹있는 양반)라는 별명을 받았고, 그는 '우사'라는 이름을 아호이자 필명으로 썼다. 유년 시절에 얻은 병으로 적은 키에 체구는 작았고, 약간 배가 나온 이미지였다고 한다. 2008년 1월 7일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의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사망한 중국인 김군은 그와는 동명이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노은 김규식'의 후손으로 알려졌다.[205][206][207][208] 몸이 약해서 항상 아팠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수시로 일어났고 뇌종양 수술도 받고 신경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미군정 쪽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sickly'(약골)이었다. 광복 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규식은 "차라리 안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빠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대화를 할 때 '학자풍',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때 쓰는 화법'을 썼다고 한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만난 이래로 여운형과 '형님', '아우님' 하며 계속 여운형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로노크 대학교에서 만난 고종 황제의 서자 의친왕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귀국 직후 김규식은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의 부인이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한민당과 공산당에서는 '그가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 '일제시대의 적산회사의 재산을 착복했다.'는 등의 근거없는 헛소문을 내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강원룡은 그에게 이런 비방을 가하던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한민당계의 한 정치인을 지목했다. 이 정치인은 김준연으로 일제시대에 ML파 공산당에 가담했다가 해방 후 한민당에 가담했던 정치인이었다.[209] 한민당원 김준연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악의적인 내용의 벽보를 잘 붙였는데, 강원룡에 의하면 '김규식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적산을 팔아 돈을 벌었다.[209]'는 글을 써붙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성격[편집] 차갑고 냉정한 학자풍 성격이라는 평가가 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준엽(金俊燁)은 김규식이 인간적으로 가깝게 하기는 어려운 성품이라 지적했다. '김규식은 우리들을 혁명 후배라기 보다는 학생으로 간주하려는 듯하였다. 그는 백범과는 달리 이론적이고 서구적이었으며 인간적으로 좀 가깝게 하기는 어려운 성품으로 느껴졌다'고 하였다.[210] 다른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호의를 베풀고 사소한 것도 잊지 않고 챙겨줄 만큼 각별하였다 한다. 윤치호는 1921년 신흥우를 통해 접한 소식을 통해 그가 다른 임정 요인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흥우군의 말로는 김규식이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불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211]'는 것이다. 아들 김진세에 의하면 그는 단호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김진세는 “아버지는 '항일'에 대해서는 정말 철두철미 하신 분이셨다”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면서는 물론 귀국 이후에도 일본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하셨고 일본 음식조차 드시지 않았다.[212]”고 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김규식의 성격을 차갑다며, '무척 냉정한 분[213]'이라고 지적했다. 김규식은 그가 미주에 있을 때 뉴욕에서 만났다. 허정이 본 그의 첫 인상은 무척 냉정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김규식을 처음 만난 날 허정은 김규식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프랑스에서 고생하는 한국청년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213] 허정은 미국과 유럽에 유학하는 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해줄 것을 김규식에게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김규식은 내가 워싱턴에 있을 때, 한국인 유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좋아서 미국에 왔으면 노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자신의 역량껏 할 것이지 왜 구미위원부를 찾아와 괴롭히느냐?’ 라고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213] 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 합리주의에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교수 이정식은 무정한 어른들과 또래들의 차별대우가 그의 성격이 차갑고 냉정한 성격으로 만든 원인으로 보고 있다. 사상과 신념[편집] 한국인의 민족성[편집] 김규식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배경에는 한국인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인의 민족성은 잔인하다[125] 는 것이다. 공산주의 자체가 잔인한 사상이지만 한국인은 민족성이 잔인한 민족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그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극도로 미워하였다. 그는 박헌영을 극도로 혐오하였고, 박헌영과 절친하게 지냈던 조봉암 역시 미워하였다. 자유주의관[편집] 허정 등이 임정 요인에게 인사하러 경교장을 방문했는데, 임정 요인들 옆에서 김진동은 흡연을 했는데 아무도 그가 담배피우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허정에 의하면 아들 김진동은 아버지 김규식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허정은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임정 요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위엄이 넘치는 김구 선생, 서양 신사와 같은 풍채의 김규식 박사, 체구가 작으면서도 퍽 늠름해 보이는 이시영 선생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시영 선생은 임정 요인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분이었지만, 피로의 기색이나 늙은 티가 조금도 없었고 눈이 번쩍번쩍 빛나 위엄이 있었다.[214]'며 '나에게 기이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은 김규식 선생의 아들 김진동이 아버지 옆에서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광경이었다.[214]'고 했다. 몸이 병약하면서도 애연가였던 김규식은 아들 김진동이 자신의 앞에서 담배피우도록 허락하였다. 당시의 한국 사람들은 그런 김규식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관점[편집]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했고 국제사회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확신했던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의 실패 이후 미국과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대한 혐오감과 냉소를 갖게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의 실패 이후 그는 도덕적 이상주의를 버리고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결탁[61]'했다, '미국은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다.[61]'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 뒤 그는 임시정부 시절과 미군정기를 통해 미군정 및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며 친미인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신뢰하지 말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민중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설을 기피하였으며,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을 경멸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시각[편집]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외면당한 뒤 그는 미국, 영국, 프랑스를 제국주의 집단[61] 이자 '흡혈귀'라고 비판하였다. 구미위원부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온 김규식은 1918년에 만난 여운형 등을 통해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을 소개받았고, 1920년부터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과도 교류한다.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무렵 그는 공산당 후보당원[59] 으로도 명단이 올라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나 지식인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았던 김원봉과도 연대해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을 반대하였다. 김규식은 공산주의자가 집권해서는 안되는 이유로 '내가 러시아에 자주 다녀왔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참 선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닌이 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1922년까지 5년 사이에 700만명을 죽였다. 또한 알바니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켰는데, 단 하루 만에 6만명을 죽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 만일 한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피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로 공산당이 들어와선 안 된다.[125]'는 것이었다. 남북협상의 실패 예견[편집] 48년 3월 그는 남북협상의 실패를 예측하였다. 그리고 남북협상의 실패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그에 의하면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남북협상에 동조하나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이승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3월초 그는 5가지 원칙을 내세워 북행길을 피할 계획이었으나 김일성이 이를 수락하면서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다.[162] 김규식이 북행길에 오를 결심을 하자 장건상 등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인사들 중에서도 삼청장을 찾아와 그의 북행길을 만류하기도 했다. 송남헌은 장건상과 원세훈 등은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가할때, 김규식의 직접 참여가 장차 정치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김규식의 북행을 말렸[160] 다고 증언했다. 중도파의 영수이며 남북협상으로 정치적 몰락이 예상되니 남북협상은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 4으월 14일 문화 예술계 인사 108명이 남북협상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찬성 서명을 발표하자 그도 더이상 남북협상을 기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실패를 예상하고 3.8선을 넘어 북한을 다녀왔다.[162]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전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남북협상에 동조하나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이승만을 선택한다고 예상했던 그는 1948년 5월 10일 공식적으로는 5.10 단독 총선거에 불반대 불참가(반대하지는 않으나, 참가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전국 각지의 민족자주연맹 지역 지구당에 비밀리에 연락하거나 전보를 보내 당원들에게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162] 김규식은 미군정의 권고에 따라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다.[215] 1946년의 좌우합작운동에도 그는 '좌익과의 합작이 쉽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에 회의적이었으며, 좌우합작의 실패를 예상하였다. 그는 좌우합작에 참여를 권하는 미군정 측의 요구를 끈질기게 거절하다가 1946년 4월 경에 이를 수락한다.[216] 좌우합작에 부정적이었던 것에는 좌익기피증도 작용하였다.[162][217] 한편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이승만에 대한 공포감과 이승만에 대한 인격적인 불신도 함께 작용하였다. 경제관[편집] 1946년 10월 마크 게인, 레오너드 버치 미육군 중위 등과의 대담에서 그는 경제관에 대해 밝혔다. 그는 주요 기반 산업의 국유화와 농지 개혁, 그리고 사회 보장을 주장하였다.[218] 상훈[편집] 1989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219] 학력[편집] 1903년 2월 미국 로노크 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Bachelor of Arts) 1905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문학 석사(M.A) 1923년 미국 로노크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주해 14] 저서[편집] 시집, 양자강의 유혹(揚子幽景) 《영작법》 《실용영어》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입문》 번역, 원용사(婉容詞)의 영문번역 번역,《한국교회현황》의 영문번역(1945년 4월 24일) 논문,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1921) 가계[편집]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김징의 8대손이다. 김상로, 김약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은 모두 그의 방계 선조들이다.[220][221] 그의 부인 김순애(金淳愛) 는 제중원 의학교 1회 졸업생이자 독립운동가인 김필순의 동생으로 그녀 역시 독립운동가였다.[220] 귀국 후 교육사업을 하였으며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이었다. 둘째 아들 김진동은 아버지 김규식의 비서와 언론인 등을 지내다가 도미 미국에서 사망하였고, 딸 김우애는 미국에서 교수로 살다가 사망하였다. 셋째 아들 장로 김진세는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로 이주하였다.[221] 사촌 여동생 김은식은 김규식 등을 따라 몽골행에 동행하기도 했다. 김관식 역시 그의 친척으로 김관식의 사위 목사 엄요섭은 그가 김규식의 사촌이 된다[222] 고 했다. 한편 김관식의 프린스턴 대학교 동문인 윤치영은 김관식이 김규식의 재종(6촌)이라 진술했다.[223] 고조부 : 김종민(金鍾敏) 증조부 : 김정연(金正淵), 노론 문신 김종수의 재종손 할아버지 : 김동선(金東璇, ? ~ 1894년, 참봉 역임) 할머니 : ?(? ~ 1891년) 백부: 김우성(金祐性) 숙부: ? 사촌 여동생 : 김은식(金銀植) 사촌 매부 : 이태준(李泰俊), 독립운동가, 의사 아버지 : 김지성(김용원)(金智性, ? ~ 1892년) 친로파로 고종의 러시아 밀사, 신사유람단 비공식 사절,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 사진술, 자전거, 유리제조술, 금은 분석술 도입 어머니 : 경주김씨(慶州金氏, 아버지 김지성의 본처[주해 15]) 어머니 : 경주이씨(慶州李氏, ? ~ 1887년?[224][주해 16]) 형님 : 김규찬(金奎贊, ? ~ ?, 백부 김우성의 양자로 감) 조카 : 김진성(金鎭成, ? ~ ?, 세브란스 의전 출신, 독립군 군의관, 의사) 형님 : 이름 미상, 요절 본처 : 조은수(趙恩受, 본관은 한양, 1890년 ~ 1917년) 장남 : 김진필(金鎭弼, 1910년 ~ 1910년, 요절) 차남 : 김진동(金鎭東, 독립운동가(1912년 ~ 1997년)) 손자 : 김건필(金健必, 김건영(金健永), 1941년[225] ~ ) 손자 : 김영국(金永國, 김국영(金國永) 손자 : 김한영(金韓永) 손녀 : 김수산(金秀山), 김수옥(金秀玉), 김수진(金秀珍), 김수영(金秀英), 김수림(金秀琳), 김수정(金秀晶), 김수송(金秀松) 후처 : 김순애(金淳愛, 1889년 음력 5월 12일 ~ 1976년 5월 17일, 독립운동가) 장녀 : 김한애(金漢愛, 1923년~1930년) 차녀 : 김민애(金敏愛, 1924년~1927년) 삼녀 : 김우애(金尤愛, 1925년 ~ 2001년 1월, 대학교수) 삼남 : 김진세(金鎭世) 자부 : 원정애(元貞愛) 당숙 : 이름 미상 6촌 동생 : 김관식(金觀植, 1887년 ~ 1948년 10월 18일) 당숙 : 김익남(金益南, 1870년 ~ 1937년, 의사) 장인 : 김성담, 후처 김순애의 친정아버지 처남 : 김윤방 처조카 : 김용은 처조카 : 김함라 처조카사위 : 남궁혁 처조카 : 김미렴 처조카 : 김점동(金點童, 다른 이름은 박에스터, 1876년 ~ 1910년 4월 13일) 처조카 : 김마리아 처남 : 김윤오 처남댁 : 김경애 처조카 : 김세라 처조카사위 : 고명우, 세브란스 의전 출신 처외종손 : 고황경, 김순애의 둘째 오빠 김윤오의 외손녀 처남 : 김윤렬 처형 : 김구례(金求禮) 처형부 : 서병호(徐丙浩, 1885년 7월 7일 ~ 1972년 6월 7일, 김구례의 남편) 처외종손 : 서경석, 목사, 처형 김구례와 서병호의 손자 처형 : 김노득 처형부 : 양은수 처제 : 김필례(金弼禮, ? ~ ?, 김순애의 동생, 평양 장대현교회의 여전도회장[222]) 동서 : 최영욱[222] ( 세브란스 의과전문학교 출신, 미군정기 때 전라남도도지사를 역임[222]) 처남 : 김윤렬 처남 : 김필순 처남 : 김인순 외척 : 김익승(金益昇, 1848년 ~ ?, 본관은 경주) 기타 : 정율성, 사돈, 동서 최영욱의 외조카[주해 17] 작품 속에서 김규식[편집] 이묵원 - 《제1공화국》(1981년 MBC 드라마) 김규식 - 《새벽》(1985년 KBS1 드라마) 문회원 - 《야인시대》(2003년 SBS 드라마) 이대로 - 《서울 1945》(2006년 KBS 드라마)[주해 18] 같이 보기[편집]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민족자주연맹 민족혁명당 민주의원 독립협회 독립신문 신한청년당 로노크 대학교 삼청장 김지성 김순애 김구 김원봉 박헌영 언더우드 여운형 여운홍 안창호 이승만 서병호 서재필 신채호 좌우합작운동 윤치호 고황경 한중호조사 극동인민대표회의 조선인민공화국 조소앙 김점동 김원봉 김마리아 김염 김익남 김규흥 김시현 경교장 박찬익 기독교청년회 연희전문학교 이광수 조병옥 한국 광복군 민주의원 민중동맹 남북협상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권태양 송남헌 민필호 허정 기독교청년회 정동교회 좌우합작위원회 남북협상 안재홍 원세훈 장면 장건상 장택상 장준하 조만식 존 하지 한민당 홍천군 제1공화국 제1공화국 (드라마) 의친왕 이범진 남북협상 윤치영 조병옥 김관식 김진동 김붕준 김마리아 김종수 독립신문 신한청년당 경교장 김성수 김염 서병호 김필순 박중양 서재현 서재필 성주식 신익희 엄항섭 윤치왕 프린스턴대학교 영문학 유자명 의열단 김시현 유시태 미군정 한국전쟁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기타[편집] 미국 유학시절(1897∼1903)부터 빼어난 영어 실력으로 정평이 났었고 중국 상하이 윌리엄즈대 교수로 재직할 때(1922∼27)는 셰익스피어 권위자로 이름이 높았다.[226] 그는 외부의 일을 집안에 알리지 않았고, 내부의 일을 외부에 알리지도 않았다. 아들 김진세에 의하면 아버지는 중국에서 활동할 때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나 일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안 하셔서 아버지가 어떤 활동을 했는 지를 나중에 책보고 알 정도였다”면서 “사실 우리 가족들이 모두 모여 산 적이 거의 없었다”고[212] 한다. 참고 자료[편집] 김규식, 《양자유경 (전승을 기념하여)》(The lure of the Yangtze) (황건 역, 한울, 2000) 송남헌, 《송남헌 회고록(김규식과 함께한 길)》 (심지연, 한울(한울아카데미), 2000)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1 (엑소더스, 국판)》 (한길사, 2003)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도서출판 한울, 2000) 강만길 외,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1세트 전5권)》 (한울, 2000) 강만길, 《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 (한울, 2000) 강만길, 《한국민족운동사론》 (강만길, 서해문집, 2008.10.1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김동선, 《김규식의 정치노선과 민족자주연맹의 결성》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선인, 2003) 김학준, 《해방공간의 주역들》(동아일보사, 1996) 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도서출판 당대, 2001) 류근일, 《이성의 한국인 김규식》 (동서문화사, 1981) 박명수, 《잊을 수 없는 신앙선배들의 이야기》 (국민일보사, 2005)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서중석 (역사학자), 《남북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한울, 2000) 서중석 (역사학자), 《비극의 현대지도자》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2)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 (한울아카데미, 2001) 여운홍, 《몽양 여운형》 (청하각, 1967) 연시중, 《한국 정당정치 실록 1권》(항일 독립운동부터 김일성의 집권까지)(지와사랑, 2001.01.20)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통일ㆍ독립의 길 가다 1·2》(우사연구회 지음, 논형, 2007)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전집》(전5권)(우사연구회, 한울, 2000)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믿음, 그리고 겨레사랑》(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이명화, 《김규식의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1992)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신구문고 13) 》 (신구문화사, 197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이준식, 《김규식의 민족운동 노선과 이념》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우사연구회 엮음, 《몸으로 쓴 통일독립운동사:우사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한울, 2000) 이영학,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3)》 (돌베개, 2003)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정태영, 《한국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 (후마니타스, 2007) 최경봉, 《국어학 : 김규식 『대한문법』의 국어학사적 의의》 (우리어문학회, 2004) 최낙복, 《개화기 국어문법의 연구》 (역락, 2009) 최종고 외, 《인물과 전기》 (한들출판사, 2002) 한국사학회, 한국현대인물론 II, (을주문화사, 1987) 한국사학회, 한국현대인물론 1,2(을유문화사, 1987) 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 3》 (한영우, 돌베개, 2007.01.20) 《한국정당사》(한태수, 신태양사, 1965)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주해[편집] ↑ 동래도호부는 아버지 김지성의 집이 아니라 부임지였으므로 김지성의 집인 강원도 홍천을 고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1952년 사망설도 있다. ↑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의사를 표했으나, 뒷날 모스크바 3상회의 전문을 입수하고 읽은 후 부분적인 찬성을 했다.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 독립운동가 송남헌의 증언中..- ↑ 임정 수립 초기까지만 해도 고종과 순종, 혹은 고종의 서자들을 망명시켜서 수반으로 추대하려는 시각을 가진 인사들이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헌법에는 황실을 우대한다는 내용이 써 있었다.강만길. 《한국민족운동사론》. 서해문집. 412쪽. 이때 여운형, 이승만은 왕실 추대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의 입장은 어떠하였는가는 불명확하다. ↑ 그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직원 외에 의열단 단원들에게도 영어와 한자, 중국어를 가르친 인연이 있었다. ↑ 민족혁명당 주석직은 1946년 2월 탈당할 때까지 유지한다. ↑ 다른 임정요인들은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에 각각 숙소를 정했다. ↑ “ 모스크바 3상회의는 신탁통치안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하면 한국에 새로운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 이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주요 원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쏙 빼먹어 신탁통치안 부분만 부풀려놓았다. ” —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근현대사 연구자인 송남헌의 증언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 1항은 임시정부의 구성과 임시정부의 성격과 임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김규식은 신탁통치가 임시정부를 구성한 다음에 생각할 사안이라고 보았었다.서중석 (역사학자).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304쪽. ↑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지칭. ↑ 김규식은 공산주의의 특성 상 북측에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 요구를 포함한 5개항을 수용하지 않을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북한의 김일성이 수용하자 어쩔수 없이 북행하게 되었다. ↑ 김규식의 3남인 김진세의 증언에 의하면 "그쪽에서 '차를 대기시켰으니 우리가 모셔가겠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되실지는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KBS 인물 현대사, 김규식편 참조. ↑ 국립묘지의 무후선열제단 자료와 과목별학습대백과 사전 14, 인명·색인사전(계몽사 편집국, 계몽사, 1987) 등에는 1952년 사망으로 되어 있다. ↑ 이승만과 쉽게 대화할 수 있는 인물, 혹은 이승만 앞에서 5분 이상 대화 할 수 있는 인물은 김규식, 김구, 서재필, 이시영 등 극소수였다. ↑ 박사학위는 모교 로노크 대학교에서 수여한 명예박사였다. ↑ 경주김씨의 아들로 보는 설도 있다. 따라서 그의 남자 형제인 김익승을 김규식의 외삼촌으로 보는 설도 있다. ↑ 경주이씨가 아니라 첩의 소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 최영욱의 누나 최영온이 정율성(정부은)의 어머니이다. ↑ 그러나 좌우합작운동 해설소개 장면이 나올 때 잠시 등장하나, 대사는 없다. 각주[편집] ↑ 가 나 다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01페이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허명섭 칼럼]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크리스찬투데이 ↑ 가 나 다 라 KBS방송 인물현대사 김규식편 Archived 2016년 4월 10일 - 웨이백 머신 방송내용 참고 ↑ 가 나 다 손인수, 《원한경의 삶과 교육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pp.10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위클리조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1》 (한울, 2000) 23페이지 ↑ 윤중식, 새문안교회 - 한국 장로교단 꼿꼿한 ‘'21세 어머니' Archived 2010년 8월 30일 - 웨이백 머신, 국민일보 ↑ 가 나 다 [허명섭 칼럼]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 1등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1쪽 참조. ↑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3쪽 참조. ↑ 갓피아 사랑이야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다 경신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당대총서 15)》 (당대, 2008) 265페이지 ↑ 《8.15의 기억》,한길사. p420 ↑ 가 나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3쪽 참조.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4쪽 참조. ↑ 가 나 다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66페이지 ↑ 가 나 다 라 마 바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5쪽 참조. ↑ 박형우, 《금파 홍석후》 (연세대학교출판부, 2008) 65페이지 ↑ 가 나 다 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 | 돌베개 | 2007) 262페이지 ↑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00~501 ↑ 가 나 다 “생명평화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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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2000년 네이버캐스트: 독립운동가 김규식 네이버캐스트: 독립운동가 김순애 "반세기 넘어서야 성묘라니…"[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조선일보 2006.09.28 佛서 독립운동한 김규식 선생 ‘파리강화회의’ 당시 친필서한 발굴 동아일보 2011.12.12 1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 조선일보 2000.11.30 임정요인 후손 반세기만의 '감격성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조선일보 2006.10.01 전임- 제1대 조선적십자사 총재1947년 3월 15일 ~ 1948년 8월 15일 후임김규식 전임김규식(조선적십자사 총재) 대한적십자사 임시 총재1948년 8월 15일 ~ 1949년 10월 27일 후임양주삼(대한적십자사 총재) 전임초대 제1대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위원장1919년 4월 2일 ~ 1919년 8월 후임황규환(직무대리) 전임초대 제1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1919년 8월 ~ 1919년 9월 후임이승만 전임초대 제1,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1940년 10월 1일 ~ 1948년 8월 15일 후임이시영 전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1942년 ~ 1944년 후임엄항섭 전임초대 제1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위원장1946년 12월 12일 ~ 1947년 6월 3일 후임신익희 vdeh무오 독립선언 민족대표 39인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류동렬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규식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여준 윤세복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시영 이탁 이승만 이종탁 임방 정재관 조용은 조욱 최병학 한흥 허혁 황상규 vdeh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이승만 이시영 제임스 밴 플리트 장제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응오딘지엠 아드난 멘데레스 허위 김좌진 오동진 조병세 안중근 윤봉길 이준 강우규 김구 안창호 신익희 김창숙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최익현 이강년 민영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S. 트루먼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프랑수아 톰발바예 다비드 다코 수루 미강 아피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레온 음바 아마두 아히조 하마니 디오리 조모 케냐타 무테사 2세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퉁쿠 압둘 라흐만 푸트라 알 하즈 타놈 키티카초른 쑹메이링 천궈푸 쑨원 천치메이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조만식 임병직 서재필 박정희 최규하 시리낏 끼띠야꼰 푸미폰 아둔야뎃 전두환 김규식 조소앙 유관순 vdeh2000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유인석 2월 노태준 3월 김병조 4월 이동녕 5월 양진여 6월 이종건 7월 김한종 8월 홍범식 9월 오성술 10월 이범윤 11월 장태수 12월 김규식 vdeh2019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유관순 김마리아 손병희 안창호 김규식·김순애 한용운 이동휘 김구 지청천 안중근 박은식 윤봉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7927718 LCCN: n8100722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규식&oldid=24536858" 분류: 김규식1881년 태어남1950년 죽음한국의 혁명가대한제국의 교육인일제 강점기의 종교인일제 강점기의 교육인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일제 강점기의 대학 교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일제 강점기의 외교관일제 강점기의 시인일제 강점기의 작가일제 강점기의 번역가일제 강점기의 학자일제 강점기의 정치인일제 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중국의 대학 교수한국의 독립운동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부산광역시 출신홍천군 출신청풍 김씨한성관립영어학교 동문경신고등학교 (서울) 동문로노크 대학교 동문프린스턴 대학교 동문범죄 피해자테러 피해자암살 미수 생존자납북자혁명가반파시스트자유주의자공화주의자반공주의자대한적십자사 관련자대한국민의회한성 임시 정부조선민족혁명당조선인민공화국신민회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비상국민회의민족자주연맹신한청년당한국의 극동인민대표회의 참석자한국의 군정기대한민국 제1공화국한국독립당의 당원대한민국의 교육인대한민국의 시인대한민국의 영문학자대한민국의 종교 지도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수상자대한민국의 장로교도반일 감정장로교 독립운동가인성학교 교사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알찬 글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인용집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Bikol CentralBosanski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贛語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atina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Türkmençe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7일 (일) 08: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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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적 김규식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김규식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규식金奎植 1946년 당시의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겸 상임위원장 임기 1946년 12월 12일 ~ 1948년 2월 27일 신상정보 국적 대한민국 출생일 1881년 2월 28일 출생지 조선 경상도 동래도호부[주해 1] 사망일 1950년 12월 10일 (69세)[주해 2]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만포군 만포진읍에서 심장병, 천식, 폐렴, 동상, 뇌출혈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 거주지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강원도 홍천군→한성부→ 대한제국 한성부→미국 버지니아주 세일럼→뉴저지주 프린스턴→ 일본 제국 일제 강점기 경성→만주→몽골 울란바토르→중화민국 난징→톈진→베이핑→쓰촨 성 청두 → 충칭→ 미군정 남조선과도정부 서울특별자유시 종로정 삼청동 삼청장→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삼청장 본관 청풍(淸風) 학력 로노크 대학교 영문학 학사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 경력 前 민족자유연맹 총재 우사(尤史) · 죽적(竹笛)이라는 아호를 사용 변갑, 번개비라는 별명을 사용 김성(金成) · 중문(仲文) · 일민(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이라는 가명을 사용 정당 무소속 부모 김지성(김용원)(父), 경주 이씨 부인(母) 배우자 조은수(사별), 김순애(재혼) 자녀 김진필(男), 김진동(男), 김진세(男), 김한애(女), 김민애(女), 김우애(女) 친인척 백부 김우성, 형 김규찬, 사촌 김은식, 처제 김필례, 당숙 김익남, 친족 김관식, 동서 최영욱, 인척 서병호, 김필순, 김염, 김마리아가 있었음. 종교 개신교(장로회)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필체 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1]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의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주해 3] 에 나섰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견해를 수정,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3상결정 부분 지지와 미소공위, 좌우합작 당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金九),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나 1948년 5월 귀환 후, 불반대 불참가로 입장을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초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총장, 파리위원장, 8월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1920년 학무총장, 1930년 8월 학무장, 11월 국무위원, 1932년 11월 국무위원 등을 지내고 1944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대중정치나 선동정치를 경멸하였고 정당활동을 기피하였으며, 정당활동으로는 민족혁명당 주석, 민중동맹 위원장,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등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가명은 '김성'(金成) · '김중문'(金仲文) · '김일민'(金一民) · '여일민'(余一民) · '왕개석'(王介石) 등이며, 별칭으로는 '변갑'이라는 이름도 있었다.[2] 노론 중신인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의 방계 후손이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중 태어난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이다.[3]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1.2 유년기와 소년기 1.1.2.1 불우한 유년기 1.1.2.2 언더우드 소학교 재학 시절 1.1.3 청소년기와 방황 1.2 청년기 1.2.1 청년기 활동과 도미 유학 1.2.2 대학교 재학 시절 1.2.3 대학원 재학 시절 1.2.4 교육과 신앙 활동 1.2.5 선교와 사회단체 활동 1.3 독립운동 1.3.1 중국 망명 초기 1.3.2 독립자금 모금, 무역상 활동 1.3.2.1 신한청년당 창당과 재혼 1.4 임시정부 국무위원 활동 1.4.1 정치 및 외교활동 1.4.1.1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 1.4.1.2 파리위원부 설치 1.4.1.3 파리강화회담 참가와 실패 1.4.1.4 질병과 도미 1.4.1.5 구미위원부 활동 1.4.2 두통 수술과 병원 입원 기간 1.4.3 상하이 귀환과 미국 왕래 1.4.4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활동 1.4.5 임정 탈퇴, 민족유일당 운동 1.4.5.1 극동인민회의 참가 1.4.5.2 교육지원 활동 1.4.5.3 소련 방문과 복귀 1.4.6 민족유일당 운동 1.4.6.1 임시정부 재입각 1.4.6.2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관 생활 1.4.6.3 민족혁명당 주석에 선출 1.4.7 임시정부 재입각 1.4.8 일제 강점기 후반 1.5 정부수립 활동 1.5.1 광복과 귀국 1.5.2 해방후 정치활동 1.5.2.1 신탁통치 반대와 모스크바 3상 결정 지지 1.5.2.2 군정과 임정의 갈등 조절 노력 1.5.2.3 우익 정치인 활동 1.5.2.4 미소공위와 좌우 합작 노력 1.5.3 미소공위 지지 선언 1.5.4 좌우합작운동 전개 1.5.5 과도입법의원 활동 1.5.6 박헌영과의 관계 1.5.7 장택상과의 갈등 1.5.8 미소 공위 성사 노력과 좌우합작운동의 실패 1.5.9 우익 진영과의 갈등 1.6 생애 후반 1.6.1 정당 활동과 암살 위협 1.6.2 민족자주연맹 창당 1.6.3 북한과 교섭 1.6.4 남북협상에 대한 만류 1.6.5 남북협상 참석 1.7 말년 1.7.1 제2차 남북협상 불참 1.7.2 정치적 몰락 1.7.3 대한민국 단독 정부 승인과 말년 1.8 최후 2 사후 3 연보 4 기타 노력 4.1 외교적 노력 4.2 무장 투쟁 노력 4.3 그밖의 활동 5 일화 6 평가 6.1 당대의 여론 6.2 평가와 비판 6.2.1 1990년대 이후의 평가 6.2.2 부정적 평가 6.3 기타 평가 7 성격 8 사상과 신념 8.1 한국인의 민족성 8.2 자유주의관 8.3 국제정세에 대한 관점 8.4 공산주의에 대한 시각 8.5 남북협상의 실패 예견 8.6 경제관 9 상훈 10 학력 11 저서 12 가계 13 작품 속에서 김규식 14 같이 보기 15 기타 16 참고 자료 17 주해 18 각주 19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김규식은 1881년 2월 28일(족보에 의하면) 조선 경상남도 동래부사 종사관인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김용원)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을 따라 그는 본가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따라서 그를 강원도 출신으로도 간주하기도 한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는 아버지 김지성(김용원)과 할아버지 김동선 내외의 묘소가 소재하고 있다.[4] 김규식은 청풍 김씨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전라도관찰사 증 의정부 영의정 김징(金澄)의 8대손이었다. 김구(金構), 김유(金楺)는 그의 7대 방조였다. 그의 가계는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등을 배출한 노론가의 방계였다. 노론 명문가의 후예로 노론 벽파의 거두였던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 노론 청명당의 지도자였던 김치인과 김종수 등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 김익로는 현감을 지냈지만 당대의 정치 거물인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의 사촌 형제였다. 김익로는 김규식의 6대조였다. 그러나 노론 벽파로 분류된 그의 가계는 순조대 이후 몰락했고, 할아버지 김동선(金東璇)의 대에 다시 벼슬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냈다.[4]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선전관을 역임하였고[5], 15세 때부터 왕실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했다.[6]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일본,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으며[5] 당시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4] 유년기와 소년기[편집] 불우한 유년기[편집] 4~8세 무렵의 김규식, 경성부 언더우드 학당에서 촬영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고,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은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였다.[5] 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갔고,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5] 1887년 어머니(혹은 법적 어머니) 경주이씨마저 죽었기 때문에 어린 김규식은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숙부들과 친척들도 생활 형편이 어려웠다. 1886년 5월 구걸을 하던 김규식이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갔는데, 외모는 남루했지만 아이의 눈엔 총기가 있어 보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당)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7] 언더우드는 내한후 1년뒤 고종의 호의로 승인을 얻고 고아원을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직원수가 부족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직접 고아원을 관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2] 유아를 맡기 힘든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다시 김규식을 그의 일가에게로 돌려보냈다.[8] 열병에 걸려 치료도 못받고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9] 중병에 걸려서 돌보는 사람이 없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도 병환 중이었으나, 약과 우유를 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당시 고열과 질병에 시달리던 어린 김규식을 포기한 숙부들은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눕혀놓았고, 병과 함께 굶주림에 허덕이던 김규식은 벽지를 뜯어먹으며 먹을 것을 달라며 울며 애걸하였다 한다.[8] 언더우드 소학교 재학 시절[편집] 조선인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4인(뒷줄 좌로부터 서병호, 김규식, 앞줄은 김일, 원한경 병약한데다가 영양실조까지 걸렸던 그는 영양실조로 인해 여러가지 잔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후일 김순애(金順愛)에 의하면 그는 위장병이 심했고 오랫동안 간질병에도 시달렸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10] 그러나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린채 방치되었던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2]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려운 입장이었으나 그를 고아원으로 데려가고자 노력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언더우드의 그러한 행동을 말렸다.[2]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언더우드는 간질과 위장병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그를 돌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간질과 위장병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언더우드의 지극정성과 간호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2] 그 뒤 언더우드는 그에게 기독교와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빨리 영어 단어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였다. 당시 김규식은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의 동의하에 언더우드에게 영어교육차 보내졌다는 설이 있고, 김지성(김용원) 유배 후 방치된 그를 언더우드가 데려다 간호한 뒤, 언더우드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집에서 그가 세운 학당을 다니며 소년기를 보냈다.[8][11] 청소년기와 방황[편집] 언더우드 학당 시절 (1888년경), 맨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1888년부터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김규식은 영어를 빨리 배우고 정확하게 구사하였다.[12] 그러나 언더우드 몰래 가출하여 아버지를 찾는다고 경성부를 거리를 다니다가 교인들에 의해 잡혀서 다시 언더우드의 집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는 하였다. 그 뒤 우연한 기회에 부친 김지성(김용원)을 상봉하여 고향 홍천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김규식은 언더우드목사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그러나 1891년 할머니가 사망하고, 1892년 부친마저 사망했다.[13] 1894년 가을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이 사망했고, 김규식은 완전히 고아가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숙부들 역시 그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13] 청소년기에 계속된 비극과 철없는 동네 소년들, 무정한 어른들이 보여준 멸시와 차별은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13] 성인이 된 뒤에도 다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인간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13] 이정식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의 근원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 보았다.[13] 후일 그는 정치, 외교,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어떤 계파나 파벌에 연연하거나 스스로 엮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의 사학자 도진순은 이처럼 김규식이 '가족, 집안, 씨족, 파벌 등과 같은 한국의 토착적 기반과 일찍부터 유리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평소 정치적 파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합작에 노력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13]'고 보았다. 주변의 냉담한 시선과 고아라는 차별대우(혹은 서자라는 멸시), 그의 불우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무정함 등은 후일 그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었다. 청년기[편집] 청년기 활동과 도미 유학[편집] 독립신문 독립신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언더우드 선교사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으로 김규식은 서양문물과 근대교육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2] 언더우드의 배려로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도 불리던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앙활동에도 투신하여 그는 한국인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의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2] 언더우드의 극진한 배려와 친자식과 다름 없는 릴리스 여사의 간호와 양육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멸시와 험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런 상처를 극복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1894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김규식은 1894년 3월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한성 관립영어학교는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 轄治臣)이 교장으로 있었다.[2] 병약하고 체구가 작았던 그는 연애나 운동을 하는 것 보다는 주로 그늘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그 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중이던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의 취재기자로 받아들였다. 그가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을 강권하는 서재필 등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서재필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개화를 위한 길은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에게도 미국으로의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14] 1896년부터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15] 그곳에서는 그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출신 환경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1897년 초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서재필 등이 학비를 고국에서 부쳐주었으나, 김규식은 고국에서 부쳐주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였다. 1897년 9월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15] 대학교 재학 시절[편집] 10대 때의 김규식 (1890년대 중반) 로노크 대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00년 가을 정식으로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 입학, 1903년까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6]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의 지원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로노크 대학교에 재학 중 그는 대한제국 고종의 서자(庶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1900년 5월에는 학교 잡지에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실었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연설논문이 실리기도 했다.[16] 한편 한국어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와도 비교하면서 쓴 글이라 한다.[16] 2006년 한국의 역사학자 이정식은 김규식의 글을 읽고 '그만한 글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찬탄하기도 하였다.[16] 1901년 1월에 개최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대학 잡지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16] 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김규식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16][17] 동아리 활동으로는 웅변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데모스테니언 문학회 라는 문학클럽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2년 1월 문학 동호회의 회장이 되었다.[16]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뉴욕주의 어빙턴에서 취직하였다. 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16] 대학 졸업 당시 성적은 전체 3등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 1903년 5월에는 로노크 대학교 교내 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에서 '한국의 정부는 천하고 무능력하며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들의 정부이며 한국은 음모와 역 음모, 타성과 보수주의에 잠겨 있고 나라는 반역자들과 비겁한 겁쟁이들로 가득차있다'고 비판하였다.[18] 대안으로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한탄하기도 하였다.[18] 졸업식 당시 졸업 기념 연사 4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어 '러시아와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러시아 침략과 러일전쟁의 결과를 예견, 분석하였다.[18] 동아시아의 미래는 다가오는 러시아나 일본의 갈등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동아시아의 땅과 바다엔 한 번 더 전쟁이 울릴 것이다. — [18] 러일전쟁을 사전에 예언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1905년 9월 5일 전쟁의 최종 승리는 김규식의 예견대로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국내에서 조직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간사로 선임[19] 되었다. 대학원 재학 시절[편집] 김규식의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 김규식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 대학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03년 가을 그는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라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가을 그는 YMCA 청년회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20] 그 뒤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교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는 YMCA 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20]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청나라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18], 11월 7일 귀국하였다. 그 해 만주의 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림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18] 교육과 신앙 활동[편집] 190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가 되었다. 1905년 그는 상동교회를 찾아, 전덕기·이동녕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였다.[21] 1904년 윤치호와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 YMCA 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반 담당 교수 등을 지냈다.[12] 배재학당에서 그는 영어 과목과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1906년 5월 21일에는 전 군수 조순환(趙淳煥)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세)와 결혼하였다. YMCA청년회 학관의 학감으로 재직 중일 때는 양반 출신 학생들은 스포츠를 천히 여기고 그 시간을 거부했다 한다.[22] 그러나 김규식 박사는 강제로 체조를 시키고 스포츠를 장려했다.[22]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22] 선교와 사회단체 활동[편집] 1907년 장남 김진필(金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9년 7월 한국문법 책을 펴냈고, 로노크 대학교 학보의 1909년 7월호에 실렸다.[20] 1910년 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었다.[12] 종교 활동으로는 1907년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일본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尹致昊)·김정식 등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였다.[23] 새문안교회 집사로 교회 예배당 건설을 추진하였고 1910년에 새문안교회 예배당 헌당과 함께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24], 1910년 숭실중학교 교사로 출강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수사학(修辭學) 과목을 가르쳤다.[25] 조병옥에 의하면 김규식은 수업 시간에 종종 영어시를 읊어주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셀리, 키이츠, 테니슨, 바이런 등의 시들을 잘 읽어 주었다.[25] 조병옥은 숭실중학교 편입생 시절, 가장 재미있게 청강한 과목으로 김규식이 가르치던 수사학이었다 고 회고하였다.[25] 1911년 12월 경기·충청도장로교 연합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2년 9월 1일 김규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평양)에 영문(英文)으로 보고하였다.[25] 1913년 봄 김규식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 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入學)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 제국대학교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25] 독립운동[편집] 중국 망명 초기[편집] 새문안 교회 전별식 105인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1년 9월 조선총독부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 투옥한다. 김규식은 극적으로 투옥은 모면하였다.[26] 1914년 몽골 이동 중 (왼쪽이 김규식, 가운데는 차남 김진동, 왼쪽은 사촌 누이 김은식(金殷植) 1911년 105인 사건 이후로 일본의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그는 1913년 초 인삼장사를 할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경상남도의 한 갑부는 그에게 1천원의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놈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기로 했다'고 표현하였다.[27] 중국 망명후 신규식·여운형 등의 주도로 창설된 동제사의 중견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윤치호의 이복동생인 윤치왕이 군사훈련을 배우겠다고 상하이를 찾아왔으나, 그는 기회가 많으니 영국에 가서 의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여 영국으로 보내주었다.[28] 또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가서 문학 공부를 계속한다, 미국에 간다는 등의 뜬소문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그의 후원자였던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스 언더우드 역시 그의 이런 계획을 전해듣고, 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진학하여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그의 출국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에서는 국내 기독교계 인사들을 의심하였으나 미국인 선교사들 댁을 수색할 수는 없어 윤치호의 집을 수색하기도 했으나 그의 출국을 도왔다는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하고 만다. 1913년 김규식은 베이징·상하이·난징 등지에 먼저 와 있던 여러 애국지사들과 접촉했다.[29] 13년 3월 쑨원, 친치메이, 황싱, 탕샤오이, 왕쳉팅, 웰링턴 V. 쿠 등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만나 교분을 쌓았고, 혁명파의 제2혁명에도 관여하였다.[29] 김규식은 중국 혁명 당시 냉휼(冷橘) 장군의 군대에 합류하여 방부(邦阜)[29] 까지 올라갔는데, 이 부대는 서주부(徐州府)에서 내려온 복벽파 장훈(張勳)의 군대 앞에서 어지러이 후퇴했다.[30] 1913년 9월 중국 혁명은 실패하고 쑨원 등은 망명하면서 그는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오게 되었다.[31] 1918년때 김규식 박사. 1913년 11월 춘원 이광수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단재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독립자금 모금, 무역상 활동[편집] 1910년대 김규식은 몽골에서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32] 1914년부터 2년간 화북과 몽고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동제사에 가입하였고[33] 신채호·홍명희·서병호(1885~1972)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1914년 1월 독립자금을 모금하러 변복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신의주에 갔다가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해 가을 장래의 독립군단 또는 게릴라 부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류동렬, 이태준과 청년들을 이끌고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건너갔다. 여기서 상업과 노동으로 비용을 조달하며 초보적인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자금이 쉽게 조달되지 않았고 이태준은 병사하여 항일군대 결성에는 실패하고 말았다.[34] 이후 피혁 장사를 하다가 잠시 공장에 취직하였으나 맞지 않아 바로 그만두고 허베이 성(河北省)으로 건너가 성경과 기독교 용품을 판매하다가 상하이로 내려와서는 발동기계를 판매하였다. 두 번째 부인 김순애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 앤더슨&마이어회사 지점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16년 아내 조은수 여사가 차남 김진동을 데리고 외몽골로 찾아와 상봉하였으나, 1917년 여름 폐병으로 조은수 여사와 사별하였다.[35] 1918년 3월초 앤더슨&마이어 상사에서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지점을 열기로 계획하였는데, 그에게 지점장으로 부임해줄 것을 전보로 보내왔다. 아무도 울란바토르로 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청해서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 그와 동행한 이는 앤더슨마이어 상사 사원 몇 명과 둘째 아들 김진동, 사촌 여동생 김은식(金殷植)이 동행하였다. 그 뒤 장가구에서 만리장성을 넘은 뒤 자동차로 사막을 횡단하였다. 그러나 차량 고장과 심한 눈보라로 하루 만에 내린 뒤 11일간 산지에 고립되어 있다가, 몽골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에 지나가던 몽골인에게 도움을 청하여 낙타를 타고 37일간 몽골 초원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갔다. 1918년 6월, 출발 3개월만에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어학 재능이 뛰어났던 김규식은 다국어를 구사하였는데, 한국어 외에 영어, 한자(漢字),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36][37] 중국은 지역마다 방언의 차이가 심하였으나 한자를 잘 구사하던 그는 방언의 차이에 상관없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중국인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1917년 12월 친러한족중앙총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36] 신한청년당 창당과 재혼[편집]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 (앞줄 오른쪽 끝) 신한청년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8년 여운형, 서병호 등의 초청으로 중국 톈진에서 상하이(上海)로 건너왔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조직되자, 여운형, 서병호, 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의 창립에 참가하였다.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등의 단체 설립 이후 한국인 청년들이 너도나도 자원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들에게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먼 길을 내다보고 유학을 하여 공부할 것을 권고하며 돌려보내거나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1918년 12월,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임명하고[38] 프랑스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좌절 이후 절망으로 변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프랑스에 있을 때 (1919년 1월 ~ 3월 무렵)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 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38] 이는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기대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상처한 처지였는데 1918년 12월에 서병호와 김필순의 소개로 황해남도 장연군 출신 김순애를 만나 재혼한다. 본래 김규식은 조은수와의 첫 결혼 이전에 김순애와도 혼담이 오갔다. 김규식은 결혼 직후 구식 여성이던 본처 조은수를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는데, 김순애는 조은수의 정신여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김순애의 사람됨을 알아본 조은수는 죽기 전 김순애와 재혼하라고 권고했다 한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줄 것이니 꼭 김순애 양과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처음 그가 청혼했을 때 김순애는 받아주지 않았다. 김순애는 고된 결혼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독신주의를 고집했는데, 병중에 있던 친정어머니 안성은이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애원하여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18년 12월 말 난징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순애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린 뒤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활동[편집] 정치 및 외교활동[편집]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편집] 1920년대의 이화여전 교수이자 YWCA 창립자인 김활란과 그의 처제 김필례 김규식은 재혼 후 보름 만에 김탕, 여운홍 등의 대표단을 이끌고[38] 가명으로 중국인 여권을 발급받아 신분을 위장한 뒤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프랑스로 떠나는 김규식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던 신한청년당원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푼돈을 모두 김규식에게 희사하고, 독립운동가들 중 결혼 예복과 반지가 있는 지사들은 이를 팔아서 돈을 희사하였다. 신한청년당원과 전파통신으로 교신, 신한청년당원들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주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한다.[39] 여권을 얻지 못하던 그는 중국인 쑨원 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던 중화민국 대표단 중 정육수를 만났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도 유창하였는데, 그들이 한국인이며 파리행을 계획한 것을 알아본 정육수 등은 자신들의 배표를 김규식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39]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40]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39]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다.[39]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39] 파리위원부 설치[편집] 파리위원부 발행 '꼬레아 리뷰'(La Coree libre) 제2호 (1919년 2월호)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은 우편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항하여, 그해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41] 프랑스 파리 시내 파리 9구 샤토당가 38번지에 건물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대표부인 임정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이어 파리위원부 내 신한청년당과 조선공보국을 개설하였다. 이들은 계속 수작업으로 '한국의 독립과 환호'(L'INDEPENDANCE de LA COREE et LA PAIX) 등 계속 문건과 홍보 팜플렛을 만들고 모임을 개최, 조선의 현실을 알렸다. 이어 장택상 등 유학중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파리위원부로 찾아와 그의 일을 도왔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39] 김규식은 파리한국통신부를 설립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임시정부 차원의 공식적 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후일 그가 떠나고 이 활동이 중단된 이후 한인들은 자체 힘으로 비공식 외교 활동을 추진했다.[42] 국내·외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에 기대를 걸었고, 김규식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회의장에 조선의 문제 역시 처리되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과 그 일행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거절당하면서, 프랑스 외교부 측은 '회의 참석대상은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만 참가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해 왔다. 김규식은 이를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 알려 왔다. 김규식에게 공식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보내주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설립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39] 당시 이들이 사무실로 사용했던 파리 시내 건물은 파리 시내 '샤토등' 거리 38번지에 위치한 건물로, 2006년에 발견되었다.[43] 파리강화회담 참가와 실패[편집] 파리강화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국민회, 한성임시정부, 상하이 임시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3월 17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로부터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강화대사에 선임되었다.[44] 이어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4월 10일 부재중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11일 파리 현지에 체류 중 외무총장에 선출되고, 파리 현지 주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4월 13일 상해 임정으로부터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받았다. 4월 2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의 학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취소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의정부장관에 피선되었다. 1919년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차장(次長)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각지의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임명장을 받거나 전보로 소식을 접하였다.[45] 국내에서는 137명의 유림(儒林)들이 별도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작성, 그에게 보내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46] 파리 장서사건의 실패로 일본의 감시는 더해갔다. 일본은 김규식 일행에 위협을 느꼈고,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탐문에도 계속해서 홍보책자 등을 인쇄하여 돌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일본의 부탁을 받은 프랑스 경찰들이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고, 여러가지 외교문서를 계속 만들어서 프랑스 외무성에 보내고, 강화회의 의장이 프랑스 대통령 크레망스에게도 발송하였고 세계열강들 대표에게도 여러가지 문서,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내용,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그런 문서를 작성·발송하였다.[41][47] 질병과 도미[편집]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패전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년 7월 14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끝난 다음에 왔다. 이때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갔다.[41][47]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활동무대를 옮겨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41]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김탕, 여운홍, 장택상 등과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 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41] 파리 강화회의 열강들의 외면에 실망과 회의감을 느낀 김규식은 파리위원부위원장직을 사직, 파리위원부를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龍)에게 넘기고 여운홍, 김탕, 장택상 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48] 배로 도미하는 동안,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 배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수반 이승만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타이프로 작성하였다. 8월 6일 김규식 일행은 워싱턴 D.C의 한인위원회에 도착하였다.[47] 구미위원부 활동[편집] 구미외교위원부 시절 김규식과 이승만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코리아 리뷰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 되었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하와이 및 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49] 이후 애국공채표를 작성, 이승만과 공동명의로 발행,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에 보내는 일을 하였다.[47] 이어 서재필을 부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재직하며 김규식은 '극동 정세'(Far Eastern Situation)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47] 여기서 김규식은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일본의 팽창이 그대로 허용된다면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이 극동에서 제거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15년 후 일본은 중국, 시베리아 및 한국의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영·미 각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도 있을 것[47]'이라고 내다보았다.[47] 이는 한동안 묻혀져 있다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역사학 교수 이정식에 의해 발견되었다.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줄곧 국내외 언론에 칼럼과 기고문을 송고하여 싣기도 하였다.[47] 9월 임시정부의 개편때 구미위원부도 함께 개편되면서 그는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으로 물러났다.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 임정에 송부하는 한편 이승만과 함께 독립공채표를 작성하여 기금을 마련하였다. 독립 공채표의 금액은 독립 후 정부가 수립되면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한 채권이었다. 10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여 한국인 교민들과 면담하였고, 10월 30일 캘리포니아주 맥스웰, 10월 31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트, 11월 1일 띠뉴바, 11월 2일 로스앤젤레스 등의 한국인 교포들을 순방하고 11월 3일 다시 워싱턴 구미위원부로 돌아왔다.[47] 구미위원부 활동 내내 미국의 정객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1] 또한 미국 하원에도 한국독립문제를 청원,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독립문제가 미국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미국과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윤치호, 조병옥 등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윤치호와는 주로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동정을 서로 서신과 연락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이들의 행적을 수시로 접하면서도 조선총독부나 일본 제국 정부 당국에 이를 발설하지는 않았다.[1] 두통 수술과 병원 입원 기간[편집]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계속된 두통으로 1919년 말 김규식은 미국체류 중 두골 전면 좌측부분을 절개하는 수술을 했다. 1919년 말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부작용으로 그 뒤로 간질병이 나타나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50] 그의 병원비는 이승만이 부담하였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활동 내내 그는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고, 상하이에서는 이승만이 그의 속을 썩여서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는 그의 부인 김순애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가라앉게 되었다. 이후 중국 상하이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일을 하다가 1920년 상하이에 귀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다. 중국에 도착한 후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정무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4월 25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50] 1919년초 그는 김구 등과 국내에 연락, 고종의 서자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의 탈출 사업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였다.[주해 4] 1919년 봄 영친왕(英親王)의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파혼당한 민갑완(閔甲完)의 일족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오자, 김규식은 민갑완 일족을 맞이한 후 이들의 생활비를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김규식은 상하이 현지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의 간부를 설득하여 민갑완을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51] 그러나, 민갑완은 신학문 공부에 한창 재미 들일 무렵, 일본영사의 압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51]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민갑완은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며 그의 권고를 거절하였다.[51] 임정 구미위원부 발행 50달러권 대한독립공채표 그러나 미국에서의 진료 후에도 통증이 계속되어 다시 수술하러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상하이에 체류 중 갑자기 심한 두통과 원인을 알수 없는 전신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1920년 김규식은 신경통으로 오래 고생하던 끝에 뇌종양 의심을 받아 미국 월터리드 병원[52] 에서 뇌수술을 받았다.[53] 의사는 장기간 휴식을 처방하였으나, 그는 퇴원 3주 후에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육로로 미국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교민들을 찾아다니며 '독립공채'를 판매하였다.[53] 3주 만에 약 5만 2천 달러의 자금을 마련, 상하이로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장이던 이시영(李始榮)에게 송금하였다.[53] 그가 두뇌에 혹이 생긴 것과 두뇌수술을 한 것에 대해 이승만 때문이라는 소문이 상하이에 돌았다. 미국에서 김규식이 이승만에 의해 심한 스트레스와 심리적 고통을 받아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후일 김순애나 서병호는 회고담에서 김규식이 파리 체류 중 생긴 것이며 상해 인사들의 말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 하였다. 상하이 귀환과 미국 왕래[편집] 김규식 1919년 9월부터 1920년 9월 미국 서부지구를 왕래하며 워싱턴 위원부와 국민회의가 협력하는데 기여하였다.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호주에 도착했다. 호주로 건너가 호주의 정치인들을 만났고, 10월 3일에는 호주 수상 월리엄 휴그(William Hughes)를 만나 한국의 독립을 후원해줄 것을 청원하였다.[54] 12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 노백린을 만나 선박 난징 호(南京號)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는 일본밀정의 첩보망에 입수되기도 했다.[55] 1921년 1월 상하이로 돌아와 임정에 합류하였다. 이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전 국무총리 이동휘간의 알력으로 이동휘가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발생한 내분 문제가 닥쳤다. 그는 문제 해결의 시일을 최대한 미루며 내분 수습을 위한 중재안 마련을 고심하였다. 1921년 2월 10일 김규식은 신규식,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 기초 변경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고 2월 21일에는 신규식, 노백린, 신익희, 안창호 등과 함께 외교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다. 이때 대통령 이승만의 성토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그는 말썽많은 대통령제 대신 한성 임시정부의 원래의 직제인 집정관 총재직으로 개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상하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계속되자 상하이에 와 있던 이승만도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그를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조건을 거부하였고 자신이 워싱턴에서 김규식을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등용한 사실과 수술 등의 곤란한 일을 겪으면서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는데 이제와서 자신과 정적들 사이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구미위원장을 임명해놓고도 이승만은 그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측근인 구미위원부 위원의 한사람인 임병직과 상의하는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내분 수습책은 실패하게 된다.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활동[편집]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중호조사의 임정 요인들. 21년 4월 26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1년 4월 신익희, 이유필, 조동호 등과 중국의 독립운동가 심합작, 오산, 주검추 등과 한중호조사에 참여하였다. 4월 29일에는 임정 학무총장직과 의정원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그해부터 임정의 창조, 개조 등을 놓고 논란이 발생하자 그는 창조파에 가담하였다.[56] 9월 한중호조사의 한국인측 평의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57] 이후 임정의 해체를 주장하는 창조파의 영수가 되어 소련에 들어가기도 했다.[13] 독립운동가 사이의 갈등과 내분이 심화되자 그는 독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교육 활동에 투신하려 했다. 그러나 1921년 1월 초 국민대표자회의에서 그를 모스크바에서 열릴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의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선출하였다. 1921년 김규식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2년 5월은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 주비위원에 피선되었다.[58] 1921년 11월부터 여운형,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장가구에서 자동차편으로 출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한파가 닥치지 않아 8일만에 차량으로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 양털가죽과 낙타 가죽 장화, 모피 등을 구비, 6일만에 마차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가 다시 3일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들 독립군은 그해 6월에 자유시 참변 당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 등으로, 이들에게는 유형과 징역 등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르쿠츠크 체류 중,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니 모스크바로 가라는 소식이 통지되었다.[13] 임정 탈퇴, 민족유일당 운동[편집] 극동인민회의 참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극동인민회의입니다. 1922년 1월 김규식은 여운형, 원세훈, 박헌영 등과 함께 교통편을 이용하여 몽골을 지나 소련 모스크바로 갔다. 열차편으로 중국 국경지대에 도착한 뒤, 몽골에 가서는 말과 낙타로 소련의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이때 털로 된 가죽모피와 통조림 형태의 고기로 추위를 견뎠다. 소비에트 연방에 도착한 뒤 김규식과 일행은 열차편을 이용했다. 소련의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노력자대회에 참석했다.[5]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무렵 그는 공산당 후보당원에 명단이 올라 있었다.[59] 인민대표자 대회 회의장에서 그는 여운형 등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선출됐고, 이어 인민대표자 대회의 5인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개회사를 발표하였다.[5] 대회에서 발표에 참가하였고 그는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60] “ 우리는 원동(遠東)에서의 혁명 과업과 관련하여 왕왕 '연합전선'과 '협동'의 필요성을 운위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라파와 미국의 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결탁하였는지를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국의 '이타주의'(利他主義)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미 공화국조차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습니다. ” — 김규식, The Asiatic Revolutionary Movement and Imperialism, Communist Review, 1922[61] 논문에서 그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은 극동아시아의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중국, 일본의 누가 관련되어 있건 간에 한국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극동아시아 전체상황은 혼란 속에 있을 것이다.' 등 극동아시아의 제국주의 침략에서의 해방에 대한 지원을 촉구할 것과 "악명 높은 흡혈국가로-영국, 프랑스, 일본" 등을 지목하며 규탄하기도 하였다. 극동 노력자 대회가 끝난 후에는 레닌을 만나 면담하였다.[5] 이때, 그는 '일본의 침략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논문인 '아시아의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를 영어로 써서 '한·중 양국 인민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 그러나 소련의 반응도 미온적이었고 강대국의 힘을 인정하고 그힘을 이용하려 했던 김규식의 실망은 우리손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바꾸게 되었으며, 그는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 때는 신채호, 서병호, 신숙, 윤해(尹海), 원세훈 등과 더불어 임정을 해산하고 재창조하자는 '창조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창조파의 영수로 추대되기도 했다.[62] 1923년 창조파에서는 임시정부 해산을 주장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를 수반으로 하여 소련의 레닌에게 보고하였으나 승인거절당하였고, 6월 6일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 김구(金九)는 국민대표회의의 강제해산을 명한뒤 개조파와 창조파를 추방하고 만다.[63] 개조파와 창조파가 축출되면서 상하이를 떠났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자국의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모교인 미국 로노크 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LL.D.) 학위를 수여받았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1924년 김구, 김창숙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주해 5] 교육지원 활동[편집] 상하이로 귀환한 1920년 2월 이후 김규식은 서병호와 함께 어학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 어학원 설립 계획은 상하이에 오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영어 등을 가르칠 계획이었다. 김규식은 서병호와 몇몇 중국인 자선사업가들과 함께 500원씩 투자하였다. 이 계획은 1921년부터 그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대회에 다녀오느라 상하이를 떠나야 했으므로 일시 중단되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상해 월리엄즈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고 윌리엄즈대학 학장에 선임되어 학장 겸 교수가 되었으며 나중에 월리엄즈 대학이 4년제로 승격하면서 동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다. 대학 출강 활동과 함께 김규식은 여러 활동을 동시에 병행하였는데, 1923년 서병호(徐丙浩)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남화학원(南華學院) 설립을 추진하였다. 1919년 이후로 중국으로 유학오는 한국인 학생들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교육기관 설치를 고심하던 김규식은 중국인 유지 및 서병호 등과 함께 중국학생과 한국학생을 대상으로 중학예과 2년제, 고등과 4년제, 특별상과 2년제, 대학 각과 4년제의 대규모 학교설립을 계획하여 1923년 9월 11일 중학과와 특별상과를 우선 개교하였다.[64] 개교후 남화학원 교장에 취임하고, 중국어교사 이외에는 전 교수용어를 영어로 사용하게 하여 영어전문학교 성격을 띄게 하였다. 구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중국인을 교사로 채용, 한국인 학생에게는 한국학생특별학급을 설치, 중국어와 영어의 집중적 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였다.[64] 1923년 푸단 대학 상하이 캠퍼스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푸단 대학은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나 영국 조계지가 아닌 시내에 있었다. 그가 푸단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일본 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제보되면서 상하이 시내에서 일본 경찰을 만나 간신히 벗어난 일도 있었다. 여러 번 쫓겨다니면서 그는 변장, 김성(金成), 김중문, 여일민, 왕개석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중국인으로 행세하면서 일본의 의심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위 질환이 있었고, 위통증 외에도 1920년 미국에서 한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강의 도중 기절, 실신하기도 했다. 이 후유증은 1940년경 쓰촨 성에서 진통제와 약물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수시로 괴롭혔다. 1924년 6월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중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을 위한 강습소(예비학교) 설립을 주관하였고, 1924년 9월 15일에는 최창식과 함께 상해고등보수학원을 개설하고 자신은 원장, 최창식은 원감에 취임하고, 여운형 등 강사들을 초빙하였다.[65] 1924년 상해고등보수학원을 승격시켜 삼일중학교(三一中學敎)로 개편하고 원장에 취임하였다. 삼일중학교는 1932년까지 존속되었다.[66] 삼일학교에서 원장이자 영어교사를 겸하던 김규식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열단 단원들에게 영어와 한자를 가르쳤다. 1924년 8월 김규식은 상하이항에서 원세훈 등과 함께 조선인이 운영하는 선박을 타고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소련 방문과 복귀[편집] 러시아 출발 직전에 촬영한 사진(1925년 1월) 1925년 1월 1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 있는 문창범(文昌範)의 집에서 이청천, 윤해, 신숙 등을 만났다. 1925년 1월 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윤해·신숙 등과 회담, 소련의 지원을 얻는 문제에 대한 협의도 하였으나, 소련은 카라한(Lev. M. Karakhan) 외무상을 일본 외무상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여 소련공산당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했는데, 원세훈, 조완구 등이 포함돼 있었다.[67] 김규식도 이때 소련정부로부터 강제로 축출되었다.[67] 소련에서의 축출 이후, 김규식은 실망감과 함께 미국·프랑스·소련을 비롯한 외세를 불신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도진순에 의하면 그의 외세에 대한 입장은 전반적으로 시시비비주의에 입각한 가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였다.[13] 2월초 일시적으로 승선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2월 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열린 '한인 유학생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주요한의 웅변에 이어 그는 '한국과 동아의 관계'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68] 1925년 2월 8일[69] 과 2월 9일[70] 2월 10일[71] 3회에 걸쳐서 '반성과 단결의 필요'라는 주제로 칼럼을 발표하였다. 한편 그가 보습학원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가르친다는 정보가 1925년 5월 일본인 밀정에 의해 입수되어 조선총독부에 보고되기도 했다.[72] 5월 29일 상하이 주일본 총영사 명의로 발송된 이 문건은 6월 15일부로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되었다.[72] 3월 초 다시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러시아 니콜라스크에 도착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은 1925년 11월 외무상 카라한(Lev. M. Karakhan)을 일본 외무상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였다. 11월 원세훈, 조완구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선박 레닌 호에 강제로 승선당한 뒤 상하이로 추방되어 되돌아왔다. 소련이 일본과 비밀리에 거래한 것을 알고 분개한 그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상주의를 버리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원세훈의 약혼녀는 모스크바에 남겨두고 원세훈만 강제 추방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1926년 최창식(崔昌植)·김기형(金基瀅) 등과 함께 상해 천상리(天祥里)에 삼일공학(三一公學)의 설립에 가담하였다.[73] 한편으로는 1926년부터 1927년에 열린 민족유일당 운동에도 참여하였다.[74] 민족유일당 운동[편집] 임시정부 재입각[편집] 1930년 대학 교수로 재직 중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75] 김규식은 기호파는 아니었으나 기호파와 함께 연대하여 안창호의 취임을 반대했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 지 13일 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10월 김원봉, 의열단원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이광제(李光濟)·안재환(安載煥), 중국인 무광루(睦光錄),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유자명은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와 협의하여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추대했다.[76]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였다. 1927년 텐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것조차 일본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에는 둘째 딸 민애를, 1930년에는 큰딸 한애를 병으로 잃었다.[3][31] 1930년 8월 4일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 동 4일 임정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30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만주 사변'이 폭발하자 김규식은 '중한 민중 대동맹'의 수석 전권을 위임받아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77] 이것은 민간 외교 사절을 파견 하여 미국 정계와 일반 국민의 만주 사변과 일제의 침략상에 대한 공분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으로 선전 강연과 동시에 기부금 모집에 노력 하였다.[77] 1932년 1월 귀국한다. 한편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가게 되어 국무위원을 1935년 10월까지 역임하게 된다.[77]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관 생활[편집]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상해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특별반의 군사교관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지명수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학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체포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의정원 활동 보다는 재야에서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육 활동에 더욱 치중하였으므로 동료들로부터 비협력자, 부도원의원 등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대동맹', 대일전선통일연맹,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단체를 결성,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독립을 위해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특히 '중·한 민중대동맹'(SKPL)은 지하조직으로, 미국에까지 지부를 두고, 워싱턴지부 책임자로는 재미교포 한길수를 임명했다.[78] 그해 10월 12일 상해 민국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 창당회담을 가졌다.[31]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교관이 되었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79] 1933년 4월 5일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명이 모인 구류노류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독립에 관한 연설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것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미국인을 탄복케 하였다 한다. 그해 6월 21일 임시정부 외무부장 신익희의 사퇴로 후임 외무부장이 되었다. 1933년 7월 중한민중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본 동맹의 비밀요원인 리·한(이용직과 한길수)을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본 동맹과 정보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31]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규식과 김구, 조소앙,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각자 의견의 대립과 김구의 임정 법통 고집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31] 민족혁명당 주석에 선출[편집] 김원봉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민족혁명당입니다. 1934년 1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개보선에서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재선출되었다.[80] 1934년 최동오, 김두봉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단결과 규합을 부르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 발기하였다.[81]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여일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으나 그 정체가 탄로나 1935년 일본의 추격을 받게 되자, 난징 중앙정치학교에서는 비교적 안전한 쓰촨 성 성도(成都)에 있는 쓰촨 대학 교수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1935년 중앙정치학교 영어강사직을 사퇴하였고, 이후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5년 11월 일시적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고, 1940년까지 임정을 떠나 있었다. 임정에 몸담고 있으면서 임정 요인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해질 때, 김규식은 대학 교수의 신분으로 이 위기를 모면하곤 하였다. 그것이 청·장년층의 일부 임시정부 고수파로부터는 비협조자로 몰려 비판받기도 하였다. 쓰촨 성으로 피신했다가 1935년 2월 6일 재미국민총회 위임대표 자격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 제3차 회의에 참석했다. 1935년 6월 난징으로 돌아와 지청천 등 민족정당 지도자를 소집하였고 7월 5일 통합 민족혁명당을 재창당, 조직하여 그 주석에 선출되었다.[주해 6]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이 발족되고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자[82] 그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국민부 부장에 선출됐다.[83] 그 뒤 민족혁명당 중앙상무위원 겸 훈련부장에 선출되었으나 1935년 10월 민족혁명당 훈련부장직을 사퇴했다.[84] 김원봉은 그에게 당수직을 양보했고, 당내 무력을 장악한 실권자이면서도 반드시 그의 자문을 구하였다. 10월 임정 국무위원 임기가 만료되자 바로 민족혁명당 주석에 취임하였다. 의열단, 사회주의자, 김원봉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하여 이승만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그를 사회주의자, 과격파로 몰고 가기도 했다. 동시에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있었고 1942년까지 쓰촨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또한 쓰촨 대학의 문학부 외국어학과장, 외국문학과장 등을 지냈고, 동시에 교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때의 김규식은 아호인 우사를 이름으로 써서 '김우사'(金尤史)로 활동하였다. 중국에서 대학교수와 교육자로 활동하며 김규식은 월급의 전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고, 부인 김순애는 삯바느질 등으로 식구들의 살림을 꾸려야 했다.[31] 임시정부 재입각[편집] 임시정부 주석 김구 1938년 쓰촨 성에 도착한다.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쓰촨 성에 도착한 뒤 진통제와 페니실린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뒤 국민당 정부에서는 김규식, 김구, 김원봉에게 합작하라며 합작을 권고하였고 그는 합작을 결정한다. 김원봉의 반대와 김성숙의 입각 설득 등 내홍이 있었으나 임시정부 입각이 결정되었다.[85] 1943년 5월 중경에서 열린 '재중 한인대회'에서. 사진 왼 쪽이 우사 김규식. 그 옆에 안경을 쓴 사람이 윤기섭 1939년 임시정부에 재입각을 결정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86] 1940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확장으로 김구 등과 협의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연합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 1940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이 되고, 194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정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42년 10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1942년 10월 11일 손과(孫科)·김구·김원봉 등과 중경에서 400명을 이끌고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조직하였으며, 문화와 혁명사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1943년 1월 사천대학 영문학 교수직을 사퇴했다. 1943년 민족혁명당 주석에 재선출되었다.[59] 7월 26일 미국방송에 출연, 재미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에서 그는 7월 26일 김구, 조소앙, 이청천, 김약산, 김규식 등이 중국 국민당 총통 장개석과 가진 인터뷰의 결과 및 그에 대한 대책, 조선민족혁명당 LA 총지부와 하와이 총지부의 집행위원 임명 및 집행권의 소재를 밝히는 것, 조선민족 전선연맹의 해산을 공개적으로 언명하고 있다. 항일운동 중 사망한 석정김창화문명철의 업적을 기리며, 하와이 한인대표 황사용 목사의 중경 입국문제 등을 언급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편집] 1944년 충칭에서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을 출간하였다. 1943년 3월 12일 김규식은 미주에 있는 동포들에게 중국 국제 방송 을 통하여 영문으로 임시정부의 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방송을 하였고, 1943년 10월 6일자로 신문 독립 지에 이를 한글로 번역 게재하였다. 1943년 8월 5일과 8월 24일에는 미국·하와이·쿠바·멕시코·기타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동지와 미국인 친구들 을 향해서 "조선 민족 혁명당의 전후 계획"을 발표하였다.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부주석직이 한국독립당의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한데 대하여 원내 두 번째로 다수당의 당수인 그가 부주석으로 안배되었다. 부주석 취임 이후 그는 국민당정부와 협의하며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5] 또한 부주석의 지위 역시 국무위원 선출권한이 없는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로서 선전·외교문제에 치중하였다. 그는 종종 영어와 불어 등으로 자신의 동창, 지인들과 편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국내외와 중국에 파견된 일본 경찰들 중 영어를 해석하지 못하는 형사들이 많았으므로 중간에 유실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었다. 8월 11일 로노크 대학 동창인 알렌 그린랜드(J. Allen Greenland)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나는 지금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있지만 이 자리는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이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선전사업과 임정 내부 문제에 주력하고 있고 늘 군사, 외교, 기타 사업의 계획을 세우는 데 주력하고 있소'라고 했다.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측의 오철성(吳鐵成) 등과 한국 측의 엄항섭(嚴恒燮)·안원생(安原生) 등을 설득,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기독교 한교복리회는 한교의 생활증진과 독립운동의 진행을 촉진함에 기여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정환범(鄭桓範)·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 당하였다.[87] 1945년 5월 25일 임정 김규식 부주석이 중국<大公報> 기자에게 얄타밀약이 허위임을 답변 함. 1945년 충칭에서 실용영문(Practical English)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대학생용으로 300여 페이지였다. 정부수립 활동[편집] 광복과 귀국[편집]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외무부장에 선임되었다.[88] 그러나 김규식은 인공 내각 외무부장 취임을 거절하였다. 8월말 광복과 2차 대전 전승을 기념하여 시집 《양자유경 (양자강의 유혹)》을 내다. 상해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 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때 그는 민족혁명당의 대표이자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다. 임정 귀국을 놓고도 먼저 귀국해야 한다는 한국독립당계와 민족혁명당계 간에 싸움이 발생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양보, 혹은 당수인 김규식을 귀국 제1진에 넣는 조건으로 귀국문제가 종결되었다. 11월 23일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여 차로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국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고, 김규식은 한탄하였다. 김규식 필체, 하단 중간, 해방후 환국기념서명포(보존자 안봉순 “ "우리가 피흘려 싸운 것이 고작 이런 대가 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89] ”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한편 그는 8.15 광복에 대해 이런 견해를 피력하였다. “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본래 하나였던 우리 한민족이 불편 없이 통일되어 교류하고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일러 단일 민족이니 우수한 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우리의 단결된 완전 독립국가 달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애 일같이 주인 정신을 살려 단합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90] ” 1945년 9월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창설된 한국민주당에서는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 지도자를 당의 영수로 추대했다. 그러나 한민당에서는 김규식을 우익성향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한민당의 영수 추대에서 제외되었다.[91][92] 9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미국에 파견, 전후 대책과 함께 이승만과 다른 교민지도자들과 연대함과 동시에 미국 정부의 의중을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출국 직전 중국 정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출국이 무산되었다. 11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을 방문, 임시정부 환송 송별회에 참석하였다.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만찬 시 김규식은 승전축하 시를 한수 지어 헌정했다.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는 문제로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임정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귀국순서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자 민혁당의 서기장이었던 김원봉은 한독당계에 1진을 양보했고, 민혁당계는 한독당에 양보하는 조건으로 부주석이자 민혁당 위원장인 김규식도 귀국 1진에 포함하라고 요구했다.[93]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김구, 장준하, 안미생 등과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김포 비행장에 귀국했다.[93] 11월 귀국 직후 김규식은 윤치호를 방문했다. 이후 여러 번 윤치호를 방문했으나 윤치호는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94][95] 해방후 정치활동[편집]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두 번째가 김규식, 좌측은 김구)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귀국하였지만 그는 임시정부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인 입장이었다.[13] 귀국 초,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그에게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를 묻지 말고 내가 앓고 있지 않는 병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50] 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환영회에 이승만, 김구와 함께 참석하였다. “ 카이로 회담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못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 조선사람 전체의 책임인 것입니다. ” 11월 귀국 후 그는 서울의 삼청장(三淸莊)에 여정을 풀었다. 귀국 초기 새문안교회를 찾아 새문안교회 인사들과 면담하였으며,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방문, 면담하기도 했다. 중도파 혹은 온건우파 성향 때문에 좌익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그는 김구, 이승만, 권동진, 오세창 등이 한민당의 영수로 추대되었을 때 배제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 한민당으로부터도 꾸준한 교섭 제의를 받게 되었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그는 군정청 최고지도자 존 하지와 친밀하였으나, 이승만과 김구는 하지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1일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일시에 열고 임정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96] 삼청장에 기거하며 이시영, 조소앙, 류동렬 등과 함께 경교장을 수시로 방문하였다.[주해 7] 귀국 직후 인사차 임정을 방문한 여운형을 만났으나, 뒤이어 여운형이 경비원에게 끌려가 몸수색을 당하고 다시 들여보내지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를 말리지 않았다. 1945년 12월 1일 돈암장의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97] 12월 9일 윤치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2월 경교장 임정 요인을 찾아온 청년 중 윤판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러자 김규식은 "일본 놈한테 배웠구먼, 왜놈들한테 배웠다...여보게 청년들 그런 짓은 하지 말게." 하며 만류하였다.[98]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99] 신탁통치 반대와 모스크바 3상 결정 지지[편집] 삼청장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김규식 (1946년) 1945년 12월 27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윈스턴 처칠 등 미영소 3개국 수뇌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정문의 원문을 즉시 입수하여 해석,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76명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였으며, 그 내용이 현실적으로 남·북이 미소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코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자, 그는 반탁운동으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 회의 전문을 입수하고 읽은 이후에 부분적인 지지를 하였고,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고 하여 모스크바 3상 협정의 내용을 찬성하는 좌파들의 조직에도 가담하지는 않았다.[100][주해 8] 그러나 찬탁으로 노선을 전환하면서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극우단체가 비밀리에 조직되기도 하였다.[101][102] 1945년 12월 말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김호 등 일부 재미인사들이 그를 도와 활동하기도 했다.[103] 신탁통치 반대 입장에서 찬탁으로 선회하면서 그는 우익측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장덕수가 이승만과 김구를 방문하여 이승만과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과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의 불가피성을 이해한 김규식은 미소공위에도 찬성입장을 보였다. 미소공위에 찬성 내지는 지지 입장을 발표하자 역시 우익세력으로부터 비난받았다.[104][105] 1946년 1월 6일 기독교청년연합회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초빙되었다.[106]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1월 27일 남한에 세워질 정부가 중앙정부로서 유엔의 인정을 받으며, 또 이북과의 통합 방도가 세워진다면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 문제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후일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송남헌은 그가 '김규식이 군중에게 말하기를 '정부가 제주도에 세워졌더라도 그건 중앙정부다'라고 하던 분이 후에 가서는 주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107] 송남헌에 의하면 김규식이 초기에 반탁을 지지했던 것에 대해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라고 했다.[107] 중국 체류 중에도 일본 영사관 경찰과 밀정의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나, 귀국 후에도 동포에 의한 테러, 암살 위혐은 그에게 비애감을 심어 주었다. 군정과 임정의 갈등 조절 노력[편집] 미군정 시기의 김규식 미군정기간 내내 김규식은 미군정과 한국인 지도자들 간의 협력을 위해 노력하였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의 호출을 불쾌해하며 미군정 방문을 거절하는 김구(金九)에게 '시대가 바뀌었다'며 미군정청을 방문하도록 설득한 것도 김규식이었다. 한편 그는 미군정의 각별한 호의를 받았다.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108],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하다가 3월 20일 전화가 끊기게 된다. 민주의원 회의 진행 중인 김규식 (1946년 2월)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09]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 2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 개원에 참석했다. 민주의원이 개원 후, 김규식은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등이 주도하는 우익의 반탁운동에는 소극적이었다. 미군정이 민주의원을 만들 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온건한 좌파세력들을 포섭, 참여시키기 위하여 설득, 노력하였으나 여운형의 참여거부로 실패하였다. 미소공위에 참여해야 된다는 주장을 피력하면서 그는 매국노로 규탄당했고, 그를 암살하기 위한 백의사 조직원들이 삼청장을 쳐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우익 정치인 활동[편집] 김규식, 이승만, 김구 1946년 3월 미소공위 참관 한인의 대표자로 선출됐다. 미소공위 참관 문안 작성 중 김준연(金俊淵)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타이프로 신탁통치 관련 문서를 작성하던 중 찬성이라는 단어를 보고 김준연(金俊淵)은 이를 문제삼기도 했다. 또한 미군정청의 사령관 존 하지 장군은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 김규식을 좌우합작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게 하였다.[110] 1946년 2월 14일 민족혁명당 당수직을 사퇴하였다. 김성숙, 장건상, 김원봉 등이 임정을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담하자,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였으며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좌우합작 참여 배경은 미국 국무성의 요구로 실시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열린 덕수궁 앞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집회 1946년 3월 1일 '3.1.기미년독립선언 기념사업회' 고문에 취임하였고, 3월에 미·소공위가 개최 예정되자,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기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3월 7일 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그는 향후 수립될 정부의 부수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111]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 직무대리에 선출, 3월 20일 미소공위 개최때 미국은 이승만의 반소반탁으로 인해, 이승만이 회의 전면에 나오는 것을 꺼렸고, 김규식이 대신 민주의원 의장대리로 미소공위에 참석하였다. 46년 3월 24일 미소공위에 대처하기 위한 민주의원내 미소공위 교섭단을 구성하여 단장에 취임했다. 3월 19일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108] 하게 되어 김규식은 민주의원 의장 대리에 취임했다. 이승만의 사퇴 이유는 표면상 이유는 건강문제였지만, 사실은 미군정이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의장 대리에 김규식을 앉혔던 것이다.[108][112][113] 1946년 3월 10일 서울시내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열린 대한노총(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결성대회에 참석하고 대한노총 고문으로 선임되었다.[114] 한편 하지는 한때 좌익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도우파인 김규식(金奎植)을 이승만 대신 대통령으로 앉힐 생각도 했다고 한다.[115] 미소공위와 좌우 합작 노력[편집]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한국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116]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117]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앉하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에게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117]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17] 1946년 4월 26일 경성 정동교회에서 한국청년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재에 선임되었다.[118] 한국청년단은 우익 청년단체이면서도 온건한 성향을 띄고 있었고, 주요한, 장준하 등이 한국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6월 10일 민주일보(民主日報) 창간때 명예사장에 추대되었다.[119] 그러나, 5월 10일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이와 동시에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정읍에서 발언하는 사건이 터지자, 김규식은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단독정부수립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 자본가들의 이익을 테러로 옹호하면서 민족분열을 내란으로 하고,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도 세워보자는 가공 가증의 음모이다. 지금이야 우리민족은 통일된 정부를 세워서 공존번영을 누리느냐, 분열된 전제정치를 세워 상잔상학의 비운에 빠지느냐 하는 가장 위험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 인민은 가장 냉정하게 이 두가지중 하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120] 1946년 5월 12일 이승만 등과 독립전취대회에 참석하였다.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121]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 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121] 미소공위 지지 선언[편집]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미소공위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김규식은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122] 그러나 그의 미소공위 지지는 우익 진영의 온갖 인신공격의 원인이 된다. 김규식은 좌우합작이 안될 것이라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길이라면 실패하겠지만 기꺼이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한편 좌우합작위원회에 한민당에서는 대표를 보내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김규식의 설득으로 한민당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를 보냈다. 김규식은 한민당에서 온건한 분파의 지도자인 원세훈을 참가하게 하였다.[123] 1946년 6월과 7월 동안 좌우합작위원회의 비공식적인 회의는 계속되었다. 4사람의 만장일치에 의하여 하지중장의 정치고문이 초대되어 중재자로서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회의 초에 버치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들이 함께 화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123]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소련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소련측의 미소 양군 철퇴 주장에 대해서 김규식과 홍명희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으나, 중도파 정당들은 민족자주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는 양군 철수를 지지했다.[124] 좌우합작운동 전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좌우합작운동입니다.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6년 5월 김규식은 원세훈과 여운형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시도하였고 여운형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5월 15일 서울운동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한구석에서라도 독립정부가 세워진다면 주권을 되찾는 것'이라고 연설하였다. 6월 전향한 조봉암이 중간운동 하던 리극로와 손잡고 조직한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독립전선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려 하자 김규식은 이를 거부했다.[125] 조봉암은 공산당을 탈당한 후 김규식 박사를 만나려고 했는데, 김규식은 조봉암의 면담요청을 거부하였다. 강원용이 김규식 박사한테 “만나야지 왜 거부합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한 번 공산당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아. 조봉암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하는 것이었다.[125] 그 무렵 조봉암이 공산당을 탈당한 게 아니라 박헌영이 이승엽을 인천지구당 책임자로 앉혔기 때문에 반발했을 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125] 조봉암은 김규식을 지지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김규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5] 김규식은 공산당이라고 하면 전향 여부를 떠나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강원룡에 의하면 그래서 조봉암이 좌우합작위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극로와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라 한다.[125]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오른쪽은 김붕준과 안재홍, 오른쪽 맨 끝은 원세훈) 1946년 7월 3일 김규식은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였다가 안재홍과 함께 용공분자로 모는 삐라가 나돌고 벽보가 붙기도 했다. 기독연맹 모임에서 김구의 연설에 이어 김규식이 연설을 하였을 때 참석자들이 모두 귀를 막아 김규식은 퇴장하였다.[126] 거리에는 그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잔뜩 담긴 전단이 살포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전단이 뿌려진 그날 괴청년들은 김규식의 집을 둘러싸고 김규식과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안재홍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 '반(反) 과도입법위원회'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126]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 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선출되었고[110] 1946년 10월 민중동맹(民衆同盟)을 창당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과도입법의원은 각 리단위 마을 대표자가 읍면 단위 대표자를 선발하고 읍면 대표자는 군단위, 군단위 대표자는 도단위, 도단위 대표자가 입법의원 의원을 최종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도입법의원은 합작 7원칙에 따라 출범되었고,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을 통해 좌우합작을 모색하였으나 여운형 일파와 장택상 일파가 과도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난항했다.[2] 또한 과도입법위원회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한민당 일파를 낙선시켰다 한다. 이 일로 한민당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된다. 좌우합작에 적극 참여하는 그의 포용적인 자세를 높이 평가한 미 군정측은 이승만이나 김구 대신 그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세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2] 소련 역시도 조만식과 함께 그를 과도정부의 총리 혹은 수반으로 계획하기도 했다.[2] 과도입법의원 활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니다. 1946년 12월 12일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110] 김규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 ...(이상 생략)...이 의원[주해 9] 이 결코 미 주둔군 사령장관이나 미 군정청의 자문기관이 아니며, 또 미군정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하면 말하자면, 즉 남에 있는 미군정이나 북에 있는 어떠한 군정이나 그 존재를 단축시키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완전한 자격을 얻어, 우리의 일을 우리의 손으로 하며, 우리에게 대한 법령제정도 우리의 손으로 하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로서 자정하는데 매진할 것이다. ” —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개원연설 내용 中 1947년 1월 과도입법위원회 신년사(가운데 털모자에 지팡이를 쥔 이가 김규식, 왼쪽 맨 끝은 서재필,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여운홍, 세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는 장면) 김규식 (1947년 1월) 입법의원 의장이었지만 그는 소수파였다. 입법의원을 그의 사회로 개최하고 난 지 며칠 뒤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127] 홀로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던 김규식은 탁치 반대에 대한 99%의 찬성에 경악하여 발언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곧 과도입법의원에서 누군가 안재홍과 김규식을 찬탁 매국노라는 규탄 발언을 하면서 여러 번 곤경에 처하게 된다. 1946년 12월에 민중동맹이 공식 출범되었으나, 활동 중 김규식은 소극적 반응을 보였고 중도우파 내부도 복잡해 일부 세력만 남게 되었다.[128] 민중동맹이 창당되자 원세훈 등은 그를 당수로 추대했다. 그가 민중동맹의 위원장에 추대된 배경으로는 한민당의 토지정책 등에 반발하여 탈당한 원세훈·김약수·이순탁 등은 민중동맹을 조직하고 그를 당수로 추대했[129] 던 것이다. 1946년 12월에 민중동맹이 공식 출범되었으나, 활동 중 김규식은 소극적 반응을 보였고 중도우파 내부도 복잡해 일부 세력만 남게 되었다.[128] 12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서 성탄절과 신년이 다가오므로 특별히 2주간 휴회하자는 안건이 들어오자 거절하였다. 그는 쉬지 말고 일하자고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당시를 말하며 입법의원들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희생해야 된다고 설득, 입법의원 회의는 성탄절 당일과 12월 30일까지 계속 개원되었다. 1947년 1월 4일, 김규식은 통일입법기구 수립을 위해 '북한측에 특사를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미군정에 밝힌다. “ 우리는 과거 1년간의 쓰라린 경험에 의하여 그릇된 노선의 지도를 청산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광명한 전도를 전망하면서 가장 옳은 노선을 확립하였습니다. 이것이 즉 합작 7원칙의 노선입니다. 합작7원칙의 노선은 우리민족의 진정한 의사와 요구를 대표한 것이므로, 반드시 민중의 지지와 옹호를 받을 것이며, 편파한 일부노선은 필경 민족의 무자비한 비판에서 스스로 청산될 것입니다. 나는 몸이 비록 우익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좌익동지들과 합작할 필요를 느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합작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좌우합작위원회에 임하였으며, 또 남북통일의 임시정부 수립이 실현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 1947년, 신년사 내용 中 과도입법의원이 개설된 뒤 그는 아직까지 회의 절차에 참석해본 적이 거의 없는 입법의원들을 위해 직접 미국식, 유럽식 회의 과정, 원탁토의와 직선 회의 등 회의 방법을 일일이 설명하고, 동의와 제청, 재청, 삼청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계속 설명하였으며, 의원들이 투표 전후에 앞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훈시를 하는 등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1947년 3월 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서 미군정청측 인사와 면담중인 김규식 1947년 4월 22일 김포공항에서 지청천 장군의 귀국을 영접하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1947년 1월 20일, 과도입법위원회에서 이승만 진영과 한민당계인사들이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수적으로 불리하여 김규식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입법의원 회의장에는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진입해 장덕수, 장택상 등의 지휘 아래 반대파들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고 반탁결의가 통과되었다. 반탁결의안의 통과로 김규식의 위신은 크게 실추당했다.[130] 김규식은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지배하는 입법의원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며 시골로 내려갔다.[130] 1월 29일 휴양차 경기도 가평에 내려갔다가 2월 1일 휴양을 마치고 귀경했다. 1월~2월 이승만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는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했으며[131],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매도했다.[131] 1947년 7월, 서재필 박사와 김규식과 여운형. 1947년, 이승만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가 미국에 있던 서재필을 군정 고문관으로 초빙하려 하자 김규식 역시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였다.[132] 그는 군정청과 하지의 의견을 물어본 뒤 서재필 귀국에 적극 찬성, 지지한다. 그는 직접 서재필 귀국 환영 성명서를 지어 발표하였고, 서재필이 귀국하자 김규식은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과 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하기도 했다.[133] 우익 진영과 좌익 진영의 양면 공세에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그는 조병옥, 장택상, 김준연, 김성수, 이순탁, 원세훈, 허정 등 우익 인사들을 상대로 미소공위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 설득하고 다녔다. 1947년 2월 남로당은 2.7파업에 들어가 3월 초까지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을 친일반동이자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싸잡아 비난하며 사회 혼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134] 1947년 3월 15일 조선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되었다. 적십자사 활동 중 그는 정식 대한적십자사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조선적십자사의 국제적십자사 가입요청 서한을 미국적십자사를 통해 연맹에 보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35] 박헌영과의 관계[편집] 그는 여운형, 김원봉 등과의 대화·합작과는 대조적으로 박헌영을 몹시 싫어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좌우합작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음에도 그는 박헌영과의 합작은 거부하였다.[125] 적십자사 활동 중 조선공산당의 총수 박헌영이 조선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의 전신)에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자격으로 가입, 조선적십자사의 이사로 선출되자 김규식은 "나는 박헌영이 이사를 맡은 조직에 앉아서 일 못한다"고 반발했다.[125] 여운형의 측근이었다가 김규식 진영으로 넘어간 강원룡이 김규식에게 "그렇게 공산당을 싫어해서야 어떻게 좌우합작을 합니까"하고 항의하였다.[125] 그러자 김규식은 자신이 소련에서 겪었던 일을 소개하였다.[125] “ 내가 러시아에 자주 다녀왔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참 선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닌이 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1922년까지 5년 사이에 700만 명을 죽였다. 또한 알바니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켰는데, 단 하루 만에 6만 명을 죽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 만일 한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피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로 공산당이 들어와선 안 된다.[125] ” 그는 박헌영과 절친하게 지내던 조봉암 역시 혐오하였다. '조봉암 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125]'라면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규식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잔인하고 비겁한 심성을 가졌고, 그때문에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외국보다 더 심한 유혈사태나 학살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택상과의 갈등[편집] 한편 존 하지는 장택상과 조병옥에게 김규식을 도울 것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특히 장택상은 대놓고 거절하였다. 이에 김규식은 장택상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다. 1946년 6월 경 하지 장군이 통역관 이묘묵을 통해 수도청으로 전화를 걸어 하지 중장이 할 얘기가 있으니 곧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사령관실에 들어서니 하지 중장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으며 장택상이 앉자 김규식을 지지하라고 강요했다.[136] “ 중요한 문제가 있어 오늘 장 총감을 불렀소. 다름 아니라 앞의 정책을 의논하자는 것이오. 지금까지 미 국무성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좌우 합작을 위하여 중립적인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기로 바꾸었습니다. 장 총감도 앞으로는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주기 바라오.[137] ” 그러자 장택상은 '이러한 그의 말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라며 지체 높은 사령관의 말을 제가 감히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말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만 참 잘하셨습니다. 잘 알았소 하고는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내어 그에게 주었다.[138] 하지는 이게 무어요 하고 의아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장택상은 펴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봉투 속에 있는 것이 사표임을 알자 그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언성을 높여 "당신이나 조 부장이나 다 나쁜 사람이오."하면서 심한 욕설까지 했다. 장택상이 하지의 방을 나와서 조병옥을 만나 보았더니 그도 하지의 그같은 제의를 받고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하지는 두 번 다시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138] 군정의 좌우 합작 정책에 따라 두드러지게 된 사람이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당시 치안의 책임을 지고 있던 조병옥과 장택상이 여전히 이승만을 지지하는 데 대하여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장택상이 김규식을 만났다.[139] 김규식은 장택상에게 "장 총감은 이제 사표를 내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지 않아도 곧 갈리게 될 터인데?" 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택상은 하지 중장이 김규식에게 무슨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지 중장을 만났다. 그리고 하지 중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하지는 "당신과 조 부장은 우리 국무성에서 절대 신임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 일개 사령관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138] 고 하였다. 장택상은 '우리가 김 박사를 지지하지 않는 데는 적이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하지 중장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다른 인물로 갈아치운다면 치안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구는 잘 알고 있었다.[139]'고 했다. 한편 김규식은 장택상더러 사퇴하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장택상은 묵살해버렸다. 미소 공위 성사 노력과 좌우합작운동의 실패[편집] 1947년 이 무렵에는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열풍이 불면서 미 국무성 안에 있던 일부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사태를 빚으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여기서 미군정기 조선의 상황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중도파 정치세력은 수차례 테러를 당하게 된다.[140] 이러한 상황에서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가 재개되었다. 김규식은 미.소공위의 성공만이 분단을 막을 길임을 역설했다. “ 우리민족이 공위의 무기휴회로 말미암아 지난 1년 동안 받은 온갖 불행과 상처는 형언할 수 없다. 금번에 재개되는 미소공위는 작년과 같은 복철을 밟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좌우남북이 일치단결하여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만겨레가 한가지로 결심하고 노력하기를 바라고 믿는다. ” — 1947년 5월 13일, 담화문 중 일부[141]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김규식,이묘묵,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허헌 미소 공위 참관 후 현 코리아하우스에서 앨버트 브라운 소장이 여는 만찬에 여운형, 이묘묵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처음 제2차 미소공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었다. 6월 25일 공동위원회 참가를 청원한 남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400여명과 미소 두 나라 대표의 합동회의가 개최됐고, 7월 1일에는 북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와 미,소 두나라 대표의 합동회의가 개최됐다. 그러나 7월 10일 소련 대표가 공동위원회 참가단체로 등록한 남한의 425개 단체를 118개로 제한하자고 제의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체 참여수 문제를 놓고 미국과 소련 양측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좌파·우파 양 진영 역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중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좌우합작위원회 좌측 대표 여운형이 백의사 단원 한지근외 4명 등이 쏜 권총에 맞고 피습 절명하자, 김규식은 여운형의 죽음에 매우 크게 충격 받았다. 김규식은 여운형 영결식에 참석하여 추모사를 남기면서 평가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3] “ 우리는 한 위대한 혁명투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목표인 신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 민족이 합작으로부터 완전 통일에 나아감으로 최후 목적을 달하기를 제창하여 이에 최종까지 노력하던 지도자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몽양 동지의 영별에 대하여 정실상의 감촉보다도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공동진영의 한 용장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곧 민족 전체의 손실이다.[141] ” — 여운형 서거 담화, 1947년 7월 22일, 김규식 1947년 12월, 좌우합작위원회 해단식. 1947년 7월 19일 IOC가입 축하기념으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서울운동장(현재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날, 당시 미군정청 조선 체육부장이자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었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을 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배후를 알 수없는 한지근(韓智根, 본명은 이필형(李弼炯))에 의해 흉탄에 맞아 피습 절명하였다.[142] 여운형이 죽기 몇 시간 전에 또한 김규식도 '죽이겠다'는 협박편지를 받았다고 한다.[143] 김규식은 여운형과 사적으로 형님·아우님 하던 사이였고, 오래전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해방이후 좌우합작운동까지 함께해온 동지였기에 여운형에 대한 그의 특별한 동지애는 1947년 12월, 좌·우합작이 실패로 끝난 뒤에 촬영한 기념사진에 손수 여운형의 얼굴이 든 사진을 오려서 붙이는 것으로도 표현되었다.[3] 우익 진영과의 갈등[편집] 당초 우익 진영에서는 그를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 또는 김성수를 포함하여 4영수로 보았지만 그가 좌우합작에 뛰어들면서 그를 공격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144]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145]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도 않았다. 김규식에 대한 살해 협박은 계속되었다. 삼청장으로 수시로 협박 편지와 투서가 날아왔다. 1947년 7월 19일에는 여운형이 죽기 몇 시간 전에 김규식도 죽이겠다는 협박편지를 받았다고 한다.[146] 이는 'G-2 보고서[146]'를 통해 미국무성으로도 보고되었다. 그가 신탁통치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한 이래 수시로 그에게 협박 투서나 협박전화 등이 걸려왔다. 생애 후반[편집] 정당 활동과 암살 위협[편집] 민족자주연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 이후 김규식은 원세훈,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김규식 역시 극우단체로부터 수시로 암살위협과 테러의 위협에 시달렸고, 조선공산당은 김규식의 주변에 프락치를 보내 교란했다. 1947년 10월 14일 한미문화협회(韓美文化協會) 총회에서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여운형 암살 이후 극좌, 극우 양측으로부터 암살·테러위협과 협박 투서, 프락치 침투 등에 시달림을 당했으며 좌우합작운동의 구심점을 잃어간 상태에서 12월 5일,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포기를 선언하고 말았다.[147]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148] 정당정치를 혐오하였지만 정치결사체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일부 중도좌파, 중도우파 정치인과 청년들의 정치조직 결성 건의를 받아들여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착수하게 된다. 민족자주연맹은 경성부 천도교 강당에서 결성되었다.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의 의장에 선임되었다.[148][149] 결성식에서 그는 극좌-극우를 반대하고 민족주체성을 찾자고 역설하였다.[148] 1947년 미군정에서는 이승만이나 김구대신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임명하고자 생각하였고, 한동안 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소련 군정에서도 통일 한국의 수상으로 김규식의 임명을 고려하기도 하였다.[150] 김규식은 박헌영을 미워하여 조선적십자사 이사로 박헌영이 참여하자 박헌영이 이사로 있는 곳에서는 일 못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151] 그러나 박헌영은 김규식에게도 프락치를 보냈다. 뒤에 김규식의 삼청장에 파견된 기자 이본영은 송남헌에 의하면 '일종의 박헌영 프락치'라 증언했다.[152] 민족자주연맹의 비서처장으로 있던 송남헌은 그에게 권태양을 추천했다. 송남헌은 뒤에 '권태양은 내 밑에 있던 사람으로 내가 추천해서 썼다', '(권태양은) 성시백의 바로 직계이다. 내가 감쪽같이 속았지, 성시백이 선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진술했다.[153] 1947년 6월 16일 8명의 괴청년들이 김규식의 삼청동 자택 침입을 시도했다[104] 가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김규식은 자신이 머무르는 삼청장 안에서도 테러단을 피해 침실을 자주 옮겨다니기까지 했으며, 측근들은 만일의 테러 사태를 염려해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에 참배를 가는 것도 만류하였다.[154][155] 민족자주연맹 창당[편집] 1947년 10월 1일 창립발기회[156] 를 개최하고 민족자주연맹을 공식 창당하였다. 12월 20일 서울특별자유시 천도교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이 있었다. 15개 정당과 사회단체 25개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총재에는 김규식, 정치위원에는 홍명희, 원세훈, 이극로, 손두환, 윤기섭, 김성규, 김순애가 선임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식에는 하지 미국 육군 중장, 윌리언 딘 군정장관, 브라운 미육군 소장, 헬믹 미육군소장, 장건상, 조병옥, 장택상 등이 축사를 하였는데, 장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군정의 핵심인물들이었다.[157] 또한 남조선노동당의 당수 박헌영, 민족주의독립전선 측의 조봉암도 사람을 보내 개회사 직전에 참여하여 내빈축사를 낭독하고 돌아갔다. 미군정 수뇌들은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함으로써, 이 당시 이승만에게 보낸 반응과 대조적으로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그러나 미군정측이 남북지도자회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개인 김규식에 대해서 보인 호의와는 무관하게, 민자련은 미군정, 미국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었다.[157] 김규식을 정점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미소 양군의 철퇴를 지지하여 미국측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다.[156] 북한과 교섭[편집] 김구 1947년 11월 김규식은 남북 지도자 회의 소집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158] 12월 발생한 장덕수 사건으로 이승만 계열과 한국민주당 등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 김구 계열이 합류하면서,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김구의 협력을 얻어냈다. 1948년 1월 김규식은 남북협상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의사를 공식 피력하였다. 2월 4일 삼청장에서 민족자주연맹 지도부를 소집시키고, 이 자리에서 김구와 공동명의로 북측에 서신을 보내 김일성(金日成)과의 회담을 제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김구와 함께 북행길을 결심하여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함께 공동명의로 단독선거 강행을 저지하고 통일국가수립을 위해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서신을 북한의 김두봉에게 보내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였다.[100] 북한에서는 인편을 보내 남북협상 제의가 내려왔다. 그러나 북한의 제의가 당초의 남북요인 회담과는 거리가 있다고 추정하였다. 그는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다음과 같이 5개항의 전제 조건을 먼저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재정치제도를 배격할 것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수립할 것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의할 것 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 미·소 양군의 철퇴 공포할 것 이에 김일성이 5개항 전제조건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응답하자 김규식은 북행을 결심한다.[주해 10] 11월 4일 미국 육군 소장 윌리엄 F. 딘이 미 군정청 군정장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즉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를 발표하였다. “ 조선 속담에 초불득삼(初不得三)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첫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세 번째 노력했을 때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1대 군정장관 아놀드 장군 때와 2대 군정장관 러치 장관 때에 성공하지 못한 자주 독립을 제3대 군정장관인 딘 장군을 맞이함으로써 이 소망을 달성할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통 환영사에서는 되도록이면 오랫 동안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이나, 금일 이 석상에서는 장군에게 환영사를 드리는 나로써는 될 수 있는 대로 단시일에 군정장관의 자리를 물러가고, 제1대 주한미국대사나 특별대사의 자격으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 — 제3대 미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 환영사 1947년 12월 말 그는 남북분단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다시 민족자주연맹과 중도파를 규합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한민당 탈당파인 원세훈, 김약수, 이순탁 등이 그의 노선에 동조하였다. 1948년 2월 4일 김구를 방문하였다.[157] 1948년 2월 4일 민족자주연맹은 남북통일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남북 요인회담을 열 것을 요망하는 서한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발송하기로 건의했다.[157] 이 결의에 따라 김규식은 장덕수 살해사건 관련설로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던 김구를 방문하고,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한은 신기언(申基彦)이, 김두봉에게 보내는 서한은 엄항섭이 기초하여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 연서의 사신 형식으로 발송할 것에 합의했다.[157] 남북협상에 대한 만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입니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59]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레믈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159]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159] 는 공격을 당했다. 김규식 (1948년 4월) 4월 3일 김규식은 서울 필동의 호국역경원에서 열린 통일독립운동자 협의회 결성식에 참석하여 훈화하였다. 김규식은 남북협상의 실패를 예견하였고, 자신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실패하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국민들이 심정적으로는 남북협상을 지지하겠으나 현실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이승만을 선택하리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160]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순 1948년 4월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려 할 때 주변에서는 그에게 북한에 가지 말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남북협상이 정치적 자살 행위임을 김규식은 잘 알고 있었다. 조병옥은 '남북협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등의 결론도 못 얻고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161]' 그래서 조병옥은 김규식을 찾아가 북한에 가지 말 것을 설득하였다. 조병옥은 김규식을 방문하여 3시간 동안 면담하면서 현존 국제정세 하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정부 수립을 협상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협상을 하기 위하여 북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행(虛行)이 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정치적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61] 김규식도 그의 의견을 존중히 여기고 북행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161] 민족자주연맹과 좌우합작파, 우파 일각에서도 그의 남북협상 참여를 만류하였다. 김규식의 비서로 지냈던 송남헌에 의하면 장건상과 원세훈 등은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가할 때, 김규식의 직접 참여가 장차 정치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김규식의 북행을 만류했다고 한다.[160] 장건상은 특히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박사님은 북행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였다. 1948년 4월 14일 서울에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108인 성명'이 발표되었다. 한편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5개 조항의 전문을 보내고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북한이 5개 조항을 수용할리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김일성이 3월 초 답신을 보내 5개항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 하였고, 그로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문화 예술계 인사 108명이 남북협상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찬성 서명을 발표하자 그도 더이상 남북협상을 기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실패를 예상하고 3.8선을 넘어 북행하게 된다.[162] 남북협상 참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입니다. 김구는 1948년 4월 14일 북한으로 갔고, 김규식 일행은 4월 21일 남북연석회의가 열리는 북한으로 갔다. 남북협상의 실패와 민중들이 이승만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각오하였으나 그는 4월 21일 기자들에게 남북협상의 성공을 예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비서 송남헌을 대동하고 3.8선을 넘어 북행하였다.[160][163] 김규식의 남북협상 배경에 대해 리처드 로빈슨은 '이승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혐오감, 애국심이 복합된 것이었다.[164]'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의 특별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평양의 특별호텔에 있을 때 김원봉(金元鳳), 허헌, 박헌영(朴憲永) 등의 방문을 받았다.[165] 환영 피로연에서 그는 '우리는 우리 장단에 맞추어 우리춤을 추자'며 자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규식과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했을 뿐이다. 4월 22일 평양시내에 도착한 김규식은 4김회동에만 참석했을 뿐, 이후 병을 이유로 숙소에 머무르며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163]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166]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8년 5월 5일 김구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166] 말년[편집] 제2차 남북협상 불참[편집]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전에 실패를 예상하였다. 성과 없이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는 5월 14일 북한 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10 총선거에는 ‘불반대·불참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공식적으로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불반대, 불참가를 천명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5·10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단독정부의 수립에는 반대하였으나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였다.[167] 1948년 7월 21일 김구와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규식은 통일독립촉성회 부주석에 추대되었다. 축사에서 그는 '남한이라도 철같이 단결하여 통일 독립 쟁취에 매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167]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167] 1948년 6월 29일 북한에서 황해도 해주에서 열리는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 개최에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고, 8월 한국민주당에서 뒤에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민당의 이 요청 역시 거절하였다. 9월 북한 단정이 확정되자 7월 19일 김구와 함께 북한의 선거는 4월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의 약속위반이라고 비난 성명을 발표하였다.[168] 1948년 10월 잡지 학풍(學風)이 창간되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169] 1948년 12월 일부 남북협상파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단정 반대 입장을 발표할 대표자로 그를 선정하였으나, 그는 파리에 가기를 거절하였다. 정치적 몰락[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전 임시정부 주석 김구 국민장 김규식 추도사 전문 단정 수립 당시 김규식은 이승만박사에게 '나중에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느냐?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이에 이승만은 '역사의 심판은 내가 다 받겠다. 그건 걱정은 말라.'라고 대응했다.[170] 유엔의 승인 이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했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171] 1949년 5월 15일 서울 조선정치학관(건국대학교의 전신) 개교 3주년 기념식에 내빈으로 참석하였다. 통일독립촉진회에서 활동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같이 활동한 김구가 암살되었다. 김구의 장례를 놓고 정부와 장례위원회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김구의 장례는 7월 5일 김규식이 절충하여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 측이 국장을 제의하자, 장례위원회 측이 너희들이 죽여 놓고선 무슨 국장이냐?며 반발하며 민족장을 추진하려고 했다. 결국 김규식이 양자의 의견을 조정, 조율하여 국장과 민족장을 합친 국민장(國民葬)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172] 김규식은 조소앙과 함께 김구의 장례식을 주관하였고,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북협상 당시 끊지 않겠다는 송전을 끊어 그의 정치적 입지를 궁지로 몰고 갔다. 송전이 마비된 뒤 미군에 의해 전기 공급이 복귀되기는 하였으나, 송전 중단의 원인을 김규식의 탓으로 몰고 가는 비난 여론이 나타났었다.[173] 이후 우파 청년들이 드나들던 그의 사저 삼청장은 썰렁하게 변모해갔다. 1949년 7월 3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약칭 민강위)에 참석하였다.[174]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175][176] 이어 김규식은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의장에 피선되었다.[177] 그러나 9월 20일 '민강위' 의장직을 사퇴하였고[178], 민강위 연석회의에 참석했다.[178] 또한 49년 북한에서 송전을 끊어버림으로서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대한민국 단독 정부 승인과 말년[편집] 49년 8월 15일 정부수립 기념 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기념사를 발표하였다. "UN"과 열국이 승인한 대한민국의 1주년을 맞이함에 있어 누구나 다 경하할 바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국토의 완전 통일을 보지 못하고 해방된 이 나라 백성들이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현장은 목불인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으로 민국은 앞으로 진정한 독립국가로서의 명실상부하게 완미한 발전이 있어야 하겠고, 자주통일된 국가로서 국가주인공인 전체 인민의 생활 안정과 행복을 제일로 획득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며 따라서 인류평화에 공헌하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179] 1950년 4월 서재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자신이 좌파로 몰리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였다. “ '(중략)...우리가 누구인지 하느님과 우리가 아는데, 왜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근심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저를 보고 빨갱이라 부른곤 합니다.'(하략) ”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예정되자, 김규식의 지지자들은 그의 총선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김규식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발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자주연맹 내 다른 당원들의 출마는 허용하여, 2대 총선에도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하였다.[180][181] 공식적으로는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전국 각지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당선 가능성이 높은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입후보를 권유하였다.[180] 민족자주연맹 공천으로 출마한 후보자들은 원세훈(서울 중구 갑), 최동오(서울 중구 을), 김붕준(서울 성동 갑), 박건웅(서울 용산 을), 김성숙(金星淑, 경기 고양), 조일근(전북 전주), 박종운(경남 의령), 송일환(경남 울산 갑), 최관수(경남 창원 갑), 김성숙(金成璹 제주도 남제주) 등이었다.[180] 그러나 "북측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아썼다"는 따위의 누명을 씌워 반이승만 성향의 입후보자들을 구금하는 등 관권개입과 폭력, 금력이 판쳤던 게 5·30 선거였다. 그런 탓도 작용해 민족자주연맹 후보 가운데 금배지를 단 이는 원세훈 하나뿐이었다.[180] 최후[편집] 6월 25일, 한국 전쟁 직후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김규식을 마지막으로 본 강원룡에 의하면 여전히 건강이 안좋은 상태였으나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한다.[182] 이승만의 정치적 반대자이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평양에까지 다녀온 자신을 설마 북한 정권이 어떻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82] 그 해 6월, 김규식은 한국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으며[183], 이때 아무도 그에게 피신할 자동차를 보내주지 않았다 한다. 북한 인민군이 소환을 재촉하자 아들 김진동이 동행하려 하였으나 비서인 권태양이 그와 함께 나갔다.[주해 11] 한편 김규식을 인도한 권태양은 조선로동당에서 침투시킨 첩자였다. 송남헌과 강원룡은 권태양을 첩자로 지목했다. 김규식의 측근이었던 강원룡은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권태양이 박소붕이라는 사람에게 '당신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함부로 떠들지 말아.' 라고 하는 말과 그 뒤에 박씨에게 뭐라 하자 박소붕의 태도가 싹 달라지는 것을 보고 권태양의 정체를 의심하였다.[184] 김규식은 북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그를 보냈으나, 그가 김규식이 북에 가도록 일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고 의혹을 제기하였다.[184]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권태양이 성시백이 보낸 프락치라고 증언하였다.[185] 송남헌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도처에 공산당의 프락치들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없었다고 증언하였고[185] '권태양은 내(송남헌)가 속을 정도로 은밀히 활동하였'다고 진술했다.[185] 송남헌은 또한 '권태양이 성시백의 직접선'이라 하였고[185] '8월 25일 공산당에서 하는 해주회의에도 갔다'[185] 고 진술했다. 그는 북한 인민군이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압록강 한 귀퉁이까지 끌려갔다가 1950년 12월 10일, 오랫동안 앓아왔던 심장병,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6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183] 강원룡은 그가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사망했다고 보았으나[17] 사망 장소도 만포진의 민가에서 사망하였는가 북한 인민군 군병원에서 사망하였는가 여부도 불확실하다. 1950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설은 북한에서 공식 주장한 것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1952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주해 12] 사후[편집] 이승만의 정적이자 납북자인 까닭에 금기시되다가 제2공화국 시절에도 부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1960년대 후반 관련 서적 출간 이후 1970년대 후반 이후 재조명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 11월 21일 광복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5] 12월 31일 우사연구회 발기인총회가 열리고 우사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민주의원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직에 있을 때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의 소중함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그를 소위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186]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187] 연보[편집] 1881년 2월 28일 출생 1886년 어머니 사망, 숙부들 집을 전전하게 됨. 1886년 숙부들은 기독교인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그를 맡기려고 했으나, 발육부족으로 4세 미만의 어린이로 본 언더우드의 교회(敎會)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다시 숙부들 댁을 전전하다. 1886년 숙부들도 포기하고 병풍 뒤에 뉘여있던 김규식은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발견되다. 1886년 5월 11일 고아원을 설립하고 돌아온 언더우드의 집에 데려가 극진히 간호하여 병이 완쾌되었다. 그 뒤 다시 숙부들에게 돌려보내졌다. 1887년 언더우드의 양자가 되다. 1891년 아버지 김지성, 유배지에서 풀려나 귀향하였다. 1891년 여름 조모 사망 1891년~1894년 부친과 조부와 함께 살며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894년 가을 할아버지 김동선과 형이 연이어 사망하다. 1896년 3월 한성 관립영어학교 1반 재학생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896년 3월 졸업 직후 조선인 식품점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하였다.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판과 영문판 일간지 독립신문을 발행한 서재필을 찾아가 면담, 그의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였다. 1896년 4월 8일 독립신문사 영어 사무원 겸 회계담당 1897년 서재필 등의 권고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897년 9월 미국 버지니아주 로노크 대학교(Ronaoke College) 예과(豫科:고등학교 과정) 과정에 입학하였다. 1899년 8월 로노크 대학교(Ronaoke College) 예과(豫科:고등학교 과정) 과정을 졸업했다. 1899년 9월 로노크 대학교(Ronaoke College) 1학년에 입학 1899년 여름 유일한 한국인 학우였던 이종계는 아버지 이범진의 부임지를 따라 유럽으로 떠났다. 1901년 3월 수행원 2명을 데리고 로노크에 온 의친왕을 접견하다. 1901년 1학기 당시 질병과 의친왕 수행을 이유로 98일간 대학 강의에 결석하였고, 학교의 허가를 받아 공가처리 되었다. 1901년 6월 28일~7월 7일 의친왕과 한국인 학생들을 수행하여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참석하였다. 1901년 7월 7일 매사추세츠를 떠나 뉴욕주 버팔로에서 열린 남북아메리카 박람회에 참석하였다.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였다. 1903년 3월 로노크 대학교에 복학하였다.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1903년 겨울, 귀국 직전까지 뉴욕에 머물러 있었다.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M. A)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박사 과정 진학을 권고하였으나 거절하고 귀국 수속을 밟다. 1904년 각국의 상사와 광산회사, 은행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904년 배재학당 영어, 수사학 과목 교사 1905년 1월 18일 일본이 여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모교 로노크 대학교 잡지 5월호에 <근대의 세바스토폴리의 함락>이라는 주제로 글을 기고하였다. 1910년 숭실학교 영어, 수사학 과목 교사 1913년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직을 사퇴하고 만주로 건너감. 1913년 3월 27일 ~ 3월 29일 모트 박사의 부탁으로, 모트 박사의 특별 강연을 모두 통역하였다. 1913년 5월 언더우드 목사의 부인 릴리스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회'보 1913년 5월호에 1913년 4월 김규식이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대학원에 입학하여 학위를 받으러 출국했다는 거짓 기사를 발표했다.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의 박달학원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김규식은 박달학원 영어 교수로 초빙되었다. 1913년 11월 춘원 이광수를 만나다. 그는 상하이 성 요한 대학(St. Johan collige)에 입학하려는 이광수에 대한 소개장을 써서 주었다. 1918년 3월 앤더슨&마이어 회사 고륜(高倫, 울란바토르) 지점의 지점장으로 부임하였다. 아들 김진동, 사촌 여동생 김은식을 대동하고 장가구지점에서 출발 직후, 자동차로 가다 11일간 폭설로 중도에 여관에 숙박하였다. 1918년 3월~4월 37일간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넜다. 3월 출발 후 50일 만인 5월 중순에 몽골에 도착, 6월 초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1918년 7월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만주에 땅을 개척, 목장을 경영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총독부의 방해로 실패하다. 1918년 11월 신한청년당에서 파리 강화회의로 보내는 사절단을 선발할 때, 김규식은 여운형의 추천으로 대표단에 선발되다. 여운형은 그가 영어를 잘 하는 점을 들어 그를 사절단으로 추천하였다.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프랑스 외무성으로부터 참여를 거절당하였다. 정부 자격이어야만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프랑스 외무성의 응답을 듣고 상하이로 알렸고, 2·8 독립선언과 3·1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1923년 상하이 푸단대학의 영문학 강사 1923년 로노크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취득. 로노크 대학교는 김규식이 1919년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애국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1923년 장녀 김한애 출생 1924년 1월 코민테른에서 창조파 국민위원을 국경 밖으로 추방하여 여운형, 원세훈 등과 함께 각지를 방황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1924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4년 둘째 딸 김민애 출생 1924년 의열단 고문 1925년 셋째 딸 김우애 출생 1927년 2월 유자명, 이광제, 안재환, 중국인 목광록, 왕조후, 인도인 간타싱 비신싱 등과 난징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조직하였다. 김규식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기관지 [동방민족]을 중국어, 영어, 한글로 월간 발행했다. 1927 4년 전민족독립당 결성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봉암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7월 5일 '연합' 지에다가 영국과 미국의 침략성을 규탄·배척하는 기사를 투고했다가, 영국영사관과 밀통한 일본영사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체포령이 내려졌다. 1927년 둘째 딸 김민애 사망 1930년 첫째 딸 김한애 사망 1932년 7월 만주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독립당의 김두봉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준비회를 구성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에 통일전선을 설립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할 것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다. 1932년 11월 중국에서 만주사변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 국제 사회에 홍보할 사절단을 파견하려 할 때, 북양대학교 교수 자격으로 민간외교사절단 수석전권대표로, 20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는 11월 5일자 한국 동아일보에 실렸다. 1933년 초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파견한 첩자의 미행을 당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첩자를 통해 입수한 자료로 보고서를 작성, 그가 '북미 각지를 다니며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한민중대동맹을 홍보하고 기부금 모집을 노력하였다.', '뉴욕 등지에 대일전선통일동맹, 중한민중대동맹의 지부를 설치한 것' 등이 입수되었고, 그가 '8천 달러의 기부금을 모집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1933년 9월 16일 약산 김원봉이 교장으로 있는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생 입학식에 참석해 "세계정세와 민족혁명의 전도" 라는 주제로 훈화를 하였다. 1935년~1942년 사천성 성도 아미산의 국립 사천대학교 영문학 교수 사천대학교 외국어학과 과장, 외국문학과 과장 1942년 10월 11일 한중문화 협회 설립대회 개최 1943년 1월 20일 임정 선전부장으로 새한일보에 일체의 과거를 다 쓸어버리고 임시정부에 충성하기로 결심하는 내용을 발표함 1944년 7월 3일 김규식은 김구와 김구, 김규식, 임정 내각의 명의로 중화민국중국 총통 장개석에게 중국정부가 한국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해주기를 요청함 1945년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으로 갔다. 당시 민족혁명당의 대표이자 임시정부의 부주석 자격으로 환국 제1진에 끼어서 함께 귀국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반탁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반대에 보류하는 입장을 발표, 그 뒤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암살단이 조직되어 그는 암살단을 피해 거처와 숙소를 옮겨다녀야 했다. 1946년 4월 한국청년회를 창단하고 회장이 되다. 1946년 말 모교 로노크 대학교에 미화 1천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1947년 한민당과 공산당의 무고로 김규식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적산을 팔아 돈을 벌었다는 등 그가 부정한 자금을 축재했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원이 없었던 김규식은 아내 김순애가 삯바느질과 재봉틀을 돌려 생계를 유지할 만큼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47년 3월 16일 조선적십자사 총재 1947년 10월 14일 한미문화협회(韓美文化協會)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기타 노력[편집] 외교적 노력[편집] 그는 국제사회에 있어서 각국가는 자국의 이익에 의해서 서로 동맹도 되었다가 적이 된다고 확신했다. 1919년 4월의 파리강화회의 참여 이전까지는 이상론자였으나, 파리 참석이 좌절되고 소련조차도 조선의 독립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좌절,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자국의 이익에 의한 합종연횡론으로 세계관을 바꾸게 된다. 그는 친미(親美) 인사이면서 친중국(親中國)인사였고, 소련과도 우호적인 노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활동하였고 주로 미 군정청과 교섭하였으므로 친미적 성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미국문명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국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188] 김규식은 외교 관계를 중요시 하면서도 자주성, 자립성과 경계를 강조하였다. 1919년 4월~7월의 파리강화회담에서 외면당한 것에 대한 미국, 프랑스, 영국 등 구미 유럽 각국의 민주주의(民主主意) 정책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고, 미국, 프랑스, 영국을 흡혈귀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구미유럽에 대한 대안으로 김규식은 사회주의를 택하였다.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확신한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소련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에서 조차도 1924년 10월 추방당하면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국을 흡혈귀와 같은 제국주의 침략국가로 보기도[189] 했다. 친미국인사이면서도 미국을 신뢰할 수 없었던 김규식은 해방 직후 미국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항상 미국을 경계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무장 투쟁 노력[편집] 무장투쟁론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무력부대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13년부터 류동렬, 이태준 등과 몽골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위한 한인부대 육성을 목적으로 한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190]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와 방해, 마적단의 출현, 적은 월급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19년 1월에는 모금을 위해 만주를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비밀리에 국내에 진입했다가 되돌아가기도 했다. 1923년 만주로 건너가 고려혁명군 조직에 관여했다.[190] ← 앞 내용 모두 삭제할 것. 군사에 관여한 사람은 우사(尤史) 김규식이 아니라 노은(芦隱)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3명이다. 활동영역도 서간도, 북간도, 외교무대로 제각각이다. 그밖의 활동[편집] 교육가와 학자로서의 활동은 1913년 12월 17일 상해의 박달학원 영어 교수, 1923년 만주 복단대학 상하이 분교 영문학 교수, 1923년 모교인 로노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7∼1929년 톈진(天津) 북양대학(北洋大學) 영문학 교수, 1932년~1937년 난징(南京) 중앙정치학원의 정치교관, 1937년~1940년 쓰촨대학(四川大學) 영문학 교수 강의및 외국어과장, 외국문학과장 등과 같은 강단생활을 하였다.[191] 사회단체 활동으로는 온건 우파 청년들로 구성한 한국청년단 총재로 청년단을 이끌었고, 1947년에는 조선적십자사 총재에 임명되었다. 정치 활동으로 실제 활동은 부총재 백상규가 대리하였으며 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부터는 49년 대한적십자사가 정식으로 부활할 때까지 임시로 적십자사를 이끌었다.[192] 일화[편집] 국어와 함께 영어와 한자, 독일어, 라틴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 의열단 단원, 한국인 공산주의자 등을 모아놓고 영어와 한자(漢字)를 가르쳤다. 상하이에 도래한 초기에 그는 단재 신채호의 요청으로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신채호는 영어단어 뒤에 하였을람 이라는 접속사 등을 반드시 붙여서 읽었다. 김규식은 문법과 철자를 꼼꼼히 보고 틀린 점을 지적한 반면, 신채호는 단어의 뜻만 알면 되지 않느냐며 반발하였다. 김규식은 신채호와 영어 발음, 철자 문제를 놓고 크게 싸웠고, 신채호는 뒤에 이광수를 찾아가 다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193] 목사 강원룡에 의하면 '그의 영어 실력은 미국 사람이 앞에 나와서 하는 영어를 듣다가 영어발음이 틀렸다며 그의 말을 바로잡아줄 정도로 뛰어났다' 한다.[17]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매일 주말이면 그는 꾸준히 교회 예배에 출석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다.[주해 13] 그는 이승만과 한글, 한자, 영어 등으로 자유롭게 대화를 구사할 수 있었다.[194] 평가[편집]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김규식을 지목하였다.[195]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52표를 얻었다.[195]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94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한다.[195]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89표로 4위를 하였다.[195] 소련군정 사령관 테렌티 스티코프의 비밀수첩에는 '장차 한국의 통일 임시정부가 세워졌을시 내각의 총리는 김규식이다.'라고 적어놓았다. 미군정 사령관 아처 로치 소장은 1947년 3월 6일에 작성한 '한국 대통령 임명에 관한 메모'란에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추천했다. 그만큼 그는 좌우세력에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196] 미군정당국의 한 장교는 "임정의 부주석 김규식 박사를 대하고 보니 그처럼 세련되고 견식이 높은 분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를 보고 임정 요인에 대한 그간의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다. 특히 국제적인 정치 감각과 세련된 매너, 달변, 그리고 훌륭한 영어 회화 실력은 놀랄 만한 일이다."[197] 라고 평가하였다. 조병옥은 그가 영어에 능란하였으며, 또 한문도 쉽게 습득해 종횡으로 구사하였는데 그 재주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25] 조병옥은 그가 파리 강화회의에까지 가서 국제적으로 활약을 눈부시게 하였던 고로 그가 귀국하였을 때는 많은 기대를 가졌으나 중간노선을 걸어 퍽이나 실망했던 것이다.[25]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 의열단 단원, 한국인 공산주의자 등을 모아놓고 영어와 한자를 가르쳐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192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폐를 놓고 창조론과 개조론, 임정고수파로 분열했을 때 창조파에 속했고, 1930년대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으로 중국 관내를 옮겨 다니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피체되었을 때에도 그는 대학 교수라는 신분을 통해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3년 남경군관학교 당시에는 이봉창, 윤봉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그도 난징에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위기를 피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측으로부터는 한때 비협조적인 인사로 몰리기도 했다.[198] 영리하고 야심만만한 인사였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기자 마크 게인은 그도 대통령이 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김규식은 영리하고 야심적인 인간이었고, 그의 주변에 있던 미군 중위 버치는 전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즐기는 동시에 자기 친구인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 정부의 고문관이 될 것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199] 평가와 비판[편집] 1990년대 이후의 평가[편집] 남북협상에 실패한 후 납북되어 잊혀졌다가 2000년대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200] 이승만 정권에서 금기인물로 지정되었다는 주장까지도 있다. 2000년 8월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5권이 출간되었으며[200], 그 해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교수 이철순은 "명분에만 집착한 정치가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정권에는 의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접근했고 정세에 따라서는 현실에 적합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김규식은 이상주의 일변도의 정치가가 아니라 현실주의적 측면도 있는 정치가로 본다"고 밝혔다.[201] 1921년~1922년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와 동행했던 나용균에 의하면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어학에 능통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깨끗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202] 합리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 이철순 교수는 그를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남북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북한 정권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도 그런 모습 중 하나다. 그는 유엔의 승인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했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171]'며 '상당히 현실적인 면모를 보였다.[171]'고 평하였다. 부정적 평가[편집] 강원룡은 그는 깨끗한 학자가 적격이었는데, 어쩌다 혼란스러운 정치판에 떠밀려 정치가로서 힘든 길을 걷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 비운의 인물이라 평가하였다.[203] 권모술수를 쓰지 않은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정치적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성격이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이 있다. 성격이 냉정하고 차갑다는 비판과 편협하다는 지적도 있다. 나용균에 의하면 그는 (성격이) 약간 편협한 편이었다고 평하였다.[202] 한편 김준연(金準淵)은 그가 배짱이 없었고 마음이 약했다고 보았다.[202] 윤보선은 그가 '한 번 적이 되면 영원한 적이 된다'고도 평하였다.[202] 강원용은 그가 직선적이고 날카롭고 냉정했다고 보았다.[202] 여운홍은 그가 성격이 급했고 고집이 세고 집착이 강하다고 평하였다. 그런가 하면 배짱이 없었다. 여운홍은 그가 '이승만의 배짱의 10분의 1만 가졌더라면' 하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202] 허정은 그가 상당히 냉정하다고 평가하였다. 명분론에 치우쳤다는 비판도 있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점도 부정적 평가의 하나로 지적된다. 한편 그는 선동에 호소하는 대중정치를 싫어하였고, 달변으로 국민들을 선전, 선동하는 정치인을 경멸하기도 했다. 대중정치와 여론선동을 기피하는 점을 그의 정치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실패요인으로 보기도 한다. 신복룡은 그가 '학자 타입에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초부터 정치를 해선 안될 사람'이라고 비판하였다.[204] 기타 평가[편집] 김규식의 비서로 있었던 송남헌에 의하면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였다. 강원룡은 그가 직선적이고 날카로웠으며 냉정하고 세심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통찰력이 있고 지식이 풍부하였지만 비관적이었다고도 보았다.[162] 한편 둘째아들 김진동은 그가 규율에 엄격한 사람이었으나 모순투성이였다고 평하였다.[162] 한편 광복 직후 45년 12월 경교장 방문 청년 중 윤판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러자 김규식은 이를 만류하기도 하였다.[98] 당대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과 애국, 헌신을 강조한 것에 반해 그는 한국인은 잔인한 심성을 가진 민족[125] 이라는 평을 내려 맹목적인 애국심에서는 거리를 두기도 했다. 매국행위를 찬양하지는 않았음에도 맹목적인 애국심을 거부한 것에서 그는 일부 한국인들로부터 거부감과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으로 미국에 체류할 때 두골절제수술을 받았다. 머리 뒷부분에 혹이 있었던 그는 동료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우사(尤史, 혹있는 양반)라는 별명을 받았고, 그는 '우사'라는 이름을 아호이자 필명으로 썼다. 유년 시절에 얻은 병으로 적은 키에 체구는 작았고, 약간 배가 나온 이미지였다고 한다. 2008년 1월 7일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의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사망한 중국인 김군은 그와는 동명이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노은 김규식'의 후손으로 알려졌다.[205][206][207][208] 몸이 약해서 항상 아팠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수시로 일어났고 뇌종양 수술도 받고 신경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미군정 쪽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sickly'(약골)이었다. 광복 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규식은 "차라리 안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빠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대화를 할 때 '학자풍',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때 쓰는 화법'을 썼다고 한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만난 이래로 여운형과 '형님', '아우님' 하며 계속 여운형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로노크 대학교에서 만난 고종 황제의 서자 의친왕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귀국 직후 김규식은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의 부인이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한민당과 공산당에서는 '그가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 '일제시대의 적산회사의 재산을 착복했다.'는 등의 근거없는 헛소문을 내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강원룡은 그에게 이런 비방을 가하던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한민당계의 한 정치인을 지목했다. 이 정치인은 김준연으로 일제시대에 ML파 공산당에 가담했다가 해방 후 한민당에 가담했던 정치인이었다.[209] 한민당원 김준연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악의적인 내용의 벽보를 잘 붙였는데, 강원룡에 의하면 '김규식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적산을 팔아 돈을 벌었다.[209]'는 글을 써붙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성격[편집] 차갑고 냉정한 학자풍 성격이라는 평가가 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준엽(金俊燁)은 김규식이 인간적으로 가깝게 하기는 어려운 성품이라 지적했다. '김규식은 우리들을 혁명 후배라기 보다는 학생으로 간주하려는 듯하였다. 그는 백범과는 달리 이론적이고 서구적이었으며 인간적으로 좀 가깝게 하기는 어려운 성품으로 느껴졌다'고 하였다.[210] 다른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호의를 베풀고 사소한 것도 잊지 않고 챙겨줄 만큼 각별하였다 한다. 윤치호는 1921년 신흥우를 통해 접한 소식을 통해 그가 다른 임정 요인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흥우군의 말로는 김규식이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불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211]'는 것이다. 아들 김진세에 의하면 그는 단호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김진세는 “아버지는 '항일'에 대해서는 정말 철두철미 하신 분이셨다”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면서는 물론 귀국 이후에도 일본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하셨고 일본 음식조차 드시지 않았다.[212]”고 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김규식의 성격을 차갑다며, '무척 냉정한 분[213]'이라고 지적했다. 김규식은 그가 미주에 있을 때 뉴욕에서 만났다. 허정이 본 그의 첫 인상은 무척 냉정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김규식을 처음 만난 날 허정은 김규식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프랑스에서 고생하는 한국청년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213] 허정은 미국과 유럽에 유학하는 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해줄 것을 김규식에게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김규식은 내가 워싱턴에 있을 때, 한국인 유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좋아서 미국에 왔으면 노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자신의 역량껏 할 것이지 왜 구미위원부를 찾아와 괴롭히느냐?’ 라고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213] 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 합리주의에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교수 이정식은 무정한 어른들과 또래들의 차별대우가 그의 성격이 차갑고 냉정한 성격으로 만든 원인으로 보고 있다. 사상과 신념[편집] 한국인의 민족성[편집] 김규식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배경에는 한국인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인의 민족성은 잔인하다[125] 는 것이다. 공산주의 자체가 잔인한 사상이지만 한국인은 민족성이 잔인한 민족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그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극도로 미워하였다. 그는 박헌영을 극도로 혐오하였고, 박헌영과 절친하게 지냈던 조봉암 역시 미워하였다. 자유주의관[편집] 허정 등이 임정 요인에게 인사하러 경교장을 방문했는데, 임정 요인들 옆에서 김진동은 흡연을 했는데 아무도 그가 담배피우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허정에 의하면 아들 김진동은 아버지 김규식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허정은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임정 요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위엄이 넘치는 김구 선생, 서양 신사와 같은 풍채의 김규식 박사, 체구가 작으면서도 퍽 늠름해 보이는 이시영 선생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시영 선생은 임정 요인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분이었지만, 피로의 기색이나 늙은 티가 조금도 없었고 눈이 번쩍번쩍 빛나 위엄이 있었다.[214]'며 '나에게 기이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은 김규식 선생의 아들 김진동이 아버지 옆에서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광경이었다.[214]'고 했다. 몸이 병약하면서도 애연가였던 김규식은 아들 김진동이 자신의 앞에서 담배피우도록 허락하였다. 당시의 한국 사람들은 그런 김규식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관점[편집]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했고 국제사회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확신했던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의 실패 이후 미국과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대한 혐오감과 냉소를 갖게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의 실패 이후 그는 도덕적 이상주의를 버리고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결탁[61]'했다, '미국은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다.[61]'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 뒤 그는 임시정부 시절과 미군정기를 통해 미군정 및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며 친미인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신뢰하지 말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민중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설을 기피하였으며,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을 경멸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시각[편집]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외면당한 뒤 그는 미국, 영국, 프랑스를 제국주의 집단[61] 이자 '흡혈귀'라고 비판하였다. 구미위원부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온 김규식은 1918년에 만난 여운형 등을 통해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을 소개받았고, 1920년부터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과도 교류한다.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무렵 그는 공산당 후보당원[59] 으로도 명단이 올라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나 지식인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았던 김원봉과도 연대해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을 반대하였다. 김규식은 공산주의자가 집권해서는 안되는 이유로 '내가 러시아에 자주 다녀왔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참 선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닌이 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1922년까지 5년 사이에 700만명을 죽였다. 또한 알바니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켰는데, 단 하루 만에 6만명을 죽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 만일 한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피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로 공산당이 들어와선 안 된다.[125]'는 것이었다. 남북협상의 실패 예견[편집] 48년 3월 그는 남북협상의 실패를 예측하였다. 그리고 남북협상의 실패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그에 의하면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남북협상에 동조하나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이승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3월초 그는 5가지 원칙을 내세워 북행길을 피할 계획이었으나 김일성이 이를 수락하면서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다.[162] 김규식이 북행길에 오를 결심을 하자 장건상 등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인사들 중에서도 삼청장을 찾아와 그의 북행길을 만류하기도 했다. 송남헌은 장건상과 원세훈 등은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가할때, 김규식의 직접 참여가 장차 정치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김규식의 북행을 말렸[160] 다고 증언했다. 중도파의 영수이며 남북협상으로 정치적 몰락이 예상되니 남북협상은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 4으월 14일 문화 예술계 인사 108명이 남북협상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찬성 서명을 발표하자 그도 더이상 남북협상을 기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실패를 예상하고 3.8선을 넘어 북한을 다녀왔다.[162]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전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남북협상에 동조하나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이승만을 선택한다고 예상했던 그는 1948년 5월 10일 공식적으로는 5.10 단독 총선거에 불반대 불참가(반대하지는 않으나, 참가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전국 각지의 민족자주연맹 지역 지구당에 비밀리에 연락하거나 전보를 보내 당원들에게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162] 김규식은 미군정의 권고에 따라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다.[215] 1946년의 좌우합작운동에도 그는 '좌익과의 합작이 쉽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에 회의적이었으며, 좌우합작의 실패를 예상하였다. 그는 좌우합작에 참여를 권하는 미군정 측의 요구를 끈질기게 거절하다가 1946년 4월 경에 이를 수락한다.[216] 좌우합작에 부정적이었던 것에는 좌익기피증도 작용하였다.[162][217] 한편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이승만에 대한 공포감과 이승만에 대한 인격적인 불신도 함께 작용하였다. 경제관[편집] 1946년 10월 마크 게인, 레오너드 버치 미육군 중위 등과의 대담에서 그는 경제관에 대해 밝혔다. 그는 주요 기반 산업의 국유화와 농지 개혁, 그리고 사회 보장을 주장하였다.[218] 상훈[편집] 1989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219] 학력[편집] 1903년 2월 미국 로노크 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Bachelor of Arts) 1905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문학 석사(M.A) 1923년 미국 로노크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주해 14] 저서[편집] 시집, 양자강의 유혹(揚子幽景) 《영작법》 《실용영어》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입문》 번역, 원용사(婉容詞)의 영문번역 번역,《한국교회현황》의 영문번역(1945년 4월 24일) 논문,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1921) 가계[편집]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김징의 8대손이다. 김상로, 김약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은 모두 그의 방계 선조들이다.[220][221] 그의 부인 김순애(金淳愛) 는 제중원 의학교 1회 졸업생이자 독립운동가인 김필순의 동생으로 그녀 역시 독립운동가였다.[220] 귀국 후 교육사업을 하였으며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이었다. 둘째 아들 김진동은 아버지 김규식의 비서와 언론인 등을 지내다가 도미 미국에서 사망하였고, 딸 김우애는 미국에서 교수로 살다가 사망하였다. 셋째 아들 장로 김진세는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로 이주하였다.[221] 사촌 여동생 김은식은 김규식 등을 따라 몽골행에 동행하기도 했다. 김관식 역시 그의 친척으로 김관식의 사위 목사 엄요섭은 그가 김규식의 사촌이 된다[222] 고 했다. 한편 김관식의 프린스턴 대학교 동문인 윤치영은 김관식이 김규식의 재종(6촌)이라 진술했다.[223] 고조부 : 김종민(金鍾敏) 증조부 : 김정연(金正淵), 노론 문신 김종수의 재종손 할아버지 : 김동선(金東璇, ? ~ 1894년, 참봉 역임) 할머니 : ?(? ~ 1891년) 백부: 김우성(金祐性) 숙부: ? 사촌 여동생 : 김은식(金銀植) 사촌 매부 : 이태준(李泰俊), 독립운동가, 의사 아버지 : 김지성(김용원)(金智性, ? ~ 1892년) 친로파로 고종의 러시아 밀사, 신사유람단 비공식 사절,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 사진술, 자전거, 유리제조술, 금은 분석술 도입 어머니 : 경주김씨(慶州金氏, 아버지 김지성의 본처[주해 15]) 어머니 : 경주이씨(慶州李氏, ? ~ 1887년?[224][주해 16]) 형님 : 김규찬(金奎贊, ? ~ ?, 백부 김우성의 양자로 감) 조카 : 김진성(金鎭成, ? ~ ?, 세브란스 의전 출신, 독립군 군의관, 의사) 형님 : 이름 미상, 요절 본처 : 조은수(趙恩受, 본관은 한양, 1890년 ~ 1917년) 장남 : 김진필(金鎭弼, 1910년 ~ 1910년, 요절) 차남 : 김진동(金鎭東, 독립운동가(1912년 ~ 1997년)) 손자 : 김건필(金健必, 김건영(金健永), 1941년[225] ~ ) 손자 : 김영국(金永國, 김국영(金國永) 손자 : 김한영(金韓永) 손녀 : 김수산(金秀山), 김수옥(金秀玉), 김수진(金秀珍), 김수영(金秀英), 김수림(金秀琳), 김수정(金秀晶), 김수송(金秀松) 후처 : 김순애(金淳愛, 1889년 음력 5월 12일 ~ 1976년 5월 17일, 독립운동가) 장녀 : 김한애(金漢愛, 1923년~1930년) 차녀 : 김민애(金敏愛, 1924년~1927년) 삼녀 : 김우애(金尤愛, 1925년 ~ 2001년 1월, 대학교수) 삼남 : 김진세(金鎭世) 자부 : 원정애(元貞愛) 당숙 : 이름 미상 6촌 동생 : 김관식(金觀植, 1887년 ~ 1948년 10월 18일) 당숙 : 김익남(金益南, 1870년 ~ 1937년, 의사) 장인 : 김성담, 후처 김순애의 친정아버지 처남 : 김윤방 처조카 : 김용은 처조카 : 김함라 처조카사위 : 남궁혁 처조카 : 김미렴 처조카 : 김점동(金點童, 다른 이름은 박에스터, 1876년 ~ 1910년 4월 13일) 처조카 : 김마리아 처남 : 김윤오 처남댁 : 김경애 처조카 : 김세라 처조카사위 : 고명우, 세브란스 의전 출신 처외종손 : 고황경, 김순애의 둘째 오빠 김윤오의 외손녀 처남 : 김윤렬 처형 : 김구례(金求禮) 처형부 : 서병호(徐丙浩, 1885년 7월 7일 ~ 1972년 6월 7일, 김구례의 남편) 처외종손 : 서경석, 목사, 처형 김구례와 서병호의 손자 처형 : 김노득 처형부 : 양은수 처제 : 김필례(金弼禮, ? ~ ?, 김순애의 동생, 평양 장대현교회의 여전도회장[222]) 동서 : 최영욱[222] ( 세브란스 의과전문학교 출신, 미군정기 때 전라남도도지사를 역임[222]) 처남 : 김윤렬 처남 : 김필순 처남 : 김인순 외척 : 김익승(金益昇, 1848년 ~ ?, 본관은 경주) 기타 : 정율성, 사돈, 동서 최영욱의 외조카[주해 17] 작품 속에서 김규식[편집] 이묵원 - 《제1공화국》(1981년 MBC 드라마) 김규식 - 《새벽》(1985년 KBS1 드라마) 문회원 - 《야인시대》(2003년 SBS 드라마) 이대로 - 《서울 1945》(2006년 KBS 드라마)[주해 18] 같이 보기[편집]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민족자주연맹 민족혁명당 민주의원 독립협회 독립신문 신한청년당 로노크 대학교 삼청장 김지성 김순애 김구 김원봉 박헌영 언더우드 여운형 여운홍 안창호 이승만 서병호 서재필 신채호 좌우합작운동 윤치호 고황경 한중호조사 극동인민대표회의 조선인민공화국 조소앙 김점동 김원봉 김마리아 김염 김익남 김규흥 김시현 경교장 박찬익 기독교청년회 연희전문학교 이광수 조병옥 한국 광복군 민주의원 민중동맹 남북협상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권태양 송남헌 민필호 허정 기독교청년회 정동교회 좌우합작위원회 남북협상 안재홍 원세훈 장면 장건상 장택상 장준하 조만식 존 하지 한민당 홍천군 제1공화국 제1공화국 (드라마) 의친왕 이범진 남북협상 윤치영 조병옥 김관식 김진동 김붕준 김마리아 김종수 독립신문 신한청년당 경교장 김성수 김염 서병호 김필순 박중양 서재현 서재필 성주식 신익희 엄항섭 윤치왕 프린스턴대학교 영문학 유자명 의열단 김시현 유시태 미군정 한국전쟁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기타[편집] 미국 유학시절(1897∼1903)부터 빼어난 영어 실력으로 정평이 났었고 중국 상하이 윌리엄즈대 교수로 재직할 때(1922∼27)는 셰익스피어 권위자로 이름이 높았다.[226] 그는 외부의 일을 집안에 알리지 않았고, 내부의 일을 외부에 알리지도 않았다. 아들 김진세에 의하면 아버지는 중국에서 활동할 때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나 일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안 하셔서 아버지가 어떤 활동을 했는 지를 나중에 책보고 알 정도였다”면서 “사실 우리 가족들이 모두 모여 산 적이 거의 없었다”고[212] 한다. 참고 자료[편집] 김규식, 《양자유경 (전승을 기념하여)》(The lure of the Yangtze) (황건 역, 한울, 2000) 송남헌, 《송남헌 회고록(김규식과 함께한 길)》 (심지연, 한울(한울아카데미), 2000)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1 (엑소더스, 국판)》 (한길사, 2003)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도서출판 한울, 2000) 강만길 외,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1세트 전5권)》 (한울, 2000) 강만길, 《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 (한울, 2000) 강만길, 《한국민족운동사론》 (강만길, 서해문집, 2008.10.1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김동선, 《김규식의 정치노선과 민족자주연맹의 결성》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선인, 2003) 김학준, 《해방공간의 주역들》(동아일보사, 1996) 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도서출판 당대, 2001) 류근일, 《이성의 한국인 김규식》 (동서문화사, 1981) 박명수, 《잊을 수 없는 신앙선배들의 이야기》 (국민일보사, 2005)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서중석 (역사학자), 《남북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한울, 2000) 서중석 (역사학자), 《비극의 현대지도자》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2)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 (한울아카데미, 2001) 여운홍, 《몽양 여운형》 (청하각, 1967) 연시중, 《한국 정당정치 실록 1권》(항일 독립운동부터 김일성의 집권까지)(지와사랑, 2001.01.20)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통일ㆍ독립의 길 가다 1·2》(우사연구회 지음, 논형, 2007)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전집》(전5권)(우사연구회, 한울, 2000)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믿음, 그리고 겨레사랑》(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이명화, 《김규식의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1992)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신구문고 13) 》 (신구문화사, 197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이준식, 《김규식의 민족운동 노선과 이념》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우사연구회 엮음, 《몸으로 쓴 통일독립운동사:우사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한울, 2000) 이영학,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3)》 (돌베개, 2003)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정태영, 《한국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 (후마니타스, 2007) 최경봉, 《국어학 : 김규식 『대한문법』의 국어학사적 의의》 (우리어문학회, 2004) 최낙복, 《개화기 국어문법의 연구》 (역락, 2009) 최종고 외, 《인물과 전기》 (한들출판사, 2002) 한국사학회, 한국현대인물론 II, (을주문화사, 1987) 한국사학회, 한국현대인물론 1,2(을유문화사, 1987) 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 3》 (한영우, 돌베개, 2007.01.20) 《한국정당사》(한태수, 신태양사, 1965)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주해[편집] ↑ 동래도호부는 아버지 김지성의 집이 아니라 부임지였으므로 김지성의 집인 강원도 홍천을 고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1952년 사망설도 있다. ↑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의사를 표했으나, 뒷날 모스크바 3상회의 전문을 입수하고 읽은 후 부분적인 찬성을 했다.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 독립운동가 송남헌의 증언中..- ↑ 임정 수립 초기까지만 해도 고종과 순종, 혹은 고종의 서자들을 망명시켜서 수반으로 추대하려는 시각을 가진 인사들이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헌법에는 황실을 우대한다는 내용이 써 있었다.강만길. 《한국민족운동사론》. 서해문집. 412쪽. 이때 여운형, 이승만은 왕실 추대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의 입장은 어떠하였는가는 불명확하다. ↑ 그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직원 외에 의열단 단원들에게도 영어와 한자, 중국어를 가르친 인연이 있었다. ↑ 민족혁명당 주석직은 1946년 2월 탈당할 때까지 유지한다. ↑ 다른 임정요인들은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에 각각 숙소를 정했다. ↑ “ 모스크바 3상회의는 신탁통치안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하면 한국에 새로운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 이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주요 원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쏙 빼먹어 신탁통치안 부분만 부풀려놓았다. ” —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근현대사 연구자인 송남헌의 증언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 1항은 임시정부의 구성과 임시정부의 성격과 임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김규식은 신탁통치가 임시정부를 구성한 다음에 생각할 사안이라고 보았었다.서중석 (역사학자).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304쪽. ↑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지칭. ↑ 김규식은 공산주의의 특성 상 북측에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 요구를 포함한 5개항을 수용하지 않을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북한의 김일성이 수용하자 어쩔수 없이 북행하게 되었다. ↑ 김규식의 3남인 김진세의 증언에 의하면 "그쪽에서 '차를 대기시켰으니 우리가 모셔가겠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되실지는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KBS 인물 현대사, 김규식편 참조. ↑ 국립묘지의 무후선열제단 자료와 과목별학습대백과 사전 14, 인명·색인사전(계몽사 편집국, 계몽사, 1987) 등에는 1952년 사망으로 되어 있다. ↑ 이승만과 쉽게 대화할 수 있는 인물, 혹은 이승만 앞에서 5분 이상 대화 할 수 있는 인물은 김규식, 김구, 서재필, 이시영 등 극소수였다. ↑ 박사학위는 모교 로노크 대학교에서 수여한 명예박사였다. ↑ 경주김씨의 아들로 보는 설도 있다. 따라서 그의 남자 형제인 김익승을 김규식의 외삼촌으로 보는 설도 있다. ↑ 경주이씨가 아니라 첩의 소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 최영욱의 누나 최영온이 정율성(정부은)의 어머니이다. ↑ 그러나 좌우합작운동 해설소개 장면이 나올 때 잠시 등장하나, 대사는 없다. 각주[편집] ↑ 가 나 다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01페이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허명섭 칼럼]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크리스찬투데이 ↑ 가 나 다 라 KBS방송 인물현대사 김규식편 Archived 2016년 4월 10일 - 웨이백 머신 방송내용 참고 ↑ 가 나 다 손인수, 《원한경의 삶과 교육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pp.10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위클리조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1》 (한울, 2000) 23페이지 ↑ 윤중식, 새문안교회 - 한국 장로교단 꼿꼿한 ‘'21세 어머니' Archived 2010년 8월 30일 - 웨이백 머신, 국민일보 ↑ 가 나 다 [허명섭 칼럼]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 1등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1쪽 참조. ↑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3쪽 참조. ↑ 갓피아 사랑이야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다 경신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당대총서 15)》 (당대, 2008) 265페이지 ↑ 《8.15의 기억》,한길사. p420 ↑ 가 나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3쪽 참조.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4쪽 참조. ↑ 가 나 다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66페이지 ↑ 가 나 다 라 마 바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5쪽 참조. ↑ 박형우, 《금파 홍석후》 (연세대학교출판부, 2008) 65페이지 ↑ 가 나 다 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 | 돌베개 | 2007) 262페이지 ↑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00~501 ↑ 가 나 다 “생명평화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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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2000년 네이버캐스트: 독립운동가 김규식 네이버캐스트: 독립운동가 김순애 "반세기 넘어서야 성묘라니…"[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조선일보 2006.09.28 佛서 독립운동한 김규식 선생 ‘파리강화회의’ 당시 친필서한 발굴 동아일보 2011.12.12 1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 조선일보 2000.11.30 임정요인 후손 반세기만의 '감격성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조선일보 2006.10.01 전임- 제1대 조선적십자사 총재1947년 3월 15일 ~ 1948년 8월 15일 후임김규식 전임김규식(조선적십자사 총재) 대한적십자사 임시 총재1948년 8월 15일 ~ 1949년 10월 27일 후임양주삼(대한적십자사 총재) 전임초대 제1대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위원장1919년 4월 2일 ~ 1919년 8월 후임황규환(직무대리) 전임초대 제1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1919년 8월 ~ 1919년 9월 후임이승만 전임초대 제1,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1940년 10월 1일 ~ 1948년 8월 15일 후임이시영 전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1942년 ~ 1944년 후임엄항섭 전임초대 제1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위원장1946년 12월 12일 ~ 1947년 6월 3일 후임신익희 vdeh무오 독립선언 민족대표 39인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류동렬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규식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여준 윤세복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시영 이탁 이승만 이종탁 임방 정재관 조용은 조욱 최병학 한흥 허혁 황상규 vdeh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이승만 이시영 제임스 밴 플리트 장제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응오딘지엠 아드난 멘데레스 허위 김좌진 오동진 조병세 안중근 윤봉길 이준 강우규 김구 안창호 신익희 김창숙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최익현 이강년 민영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S. 트루먼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프랑수아 톰발바예 다비드 다코 수루 미강 아피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레온 음바 아마두 아히조 하마니 디오리 조모 케냐타 무테사 2세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퉁쿠 압둘 라흐만 푸트라 알 하즈 타놈 키티카초른 쑹메이링 천궈푸 쑨원 천치메이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조만식 임병직 서재필 박정희 최규하 시리낏 끼띠야꼰 푸미폰 아둔야뎃 전두환 김규식 조소앙 유관순 vdeh2000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유인석 2월 노태준 3월 김병조 4월 이동녕 5월 양진여 6월 이종건 7월 김한종 8월 홍범식 9월 오성술 10월 이범윤 11월 장태수 12월 김규식 vdeh2019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유관순 김마리아 손병희 안창호 김규식·김순애 한용운 이동휘 김구 지청천 안중근 박은식 윤봉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7927718 LCCN: n8100722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규식&oldid=24536858" 분류: 김규식1881년 태어남1950년 죽음한국의 혁명가대한제국의 교육인일제 강점기의 종교인일제 강점기의 교육인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일제 강점기의 대학 교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일제 강점기의 외교관일제 강점기의 시인일제 강점기의 작가일제 강점기의 번역가일제 강점기의 학자일제 강점기의 정치인일제 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중국의 대학 교수한국의 독립운동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부산광역시 출신홍천군 출신청풍 김씨한성관립영어학교 동문경신고등학교 (서울) 동문로노크 대학교 동문프린스턴 대학교 동문범죄 피해자테러 피해자암살 미수 생존자납북자혁명가반파시스트자유주의자공화주의자반공주의자대한적십자사 관련자대한국민의회한성 임시 정부조선민족혁명당조선인민공화국신민회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비상국민회의민족자주연맹신한청년당한국의 극동인민대표회의 참석자한국의 군정기대한민국 제1공화국한국독립당의 당원대한민국의 교육인대한민국의 시인대한민국의 영문학자대한민국의 종교 지도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수상자대한민국의 장로교도반일 감정장로교 독립운동가인성학교 교사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알찬 글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인용집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Bikol CentralBosanski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贛語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atina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Türkmençe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7일 (일) 08: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목암생명과학연구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목암생명과학연구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재단법인 목암생명과학연구소 형태 재단법인 산업 분야 의약품 연구개발 창립 1984년 5월 9일 창립자 허영섭 국가 대한민국 본사 소재지 대한민국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이현로 30번길 93 사업 지역 전 세계 핵심 인물 허영섭 (창업주), 허일섭 (이사장), 조의철 (연구소장(대행)) 웹사이트 목암생명과학연구소 목암생명과학연구소(MOGAM Institute for Biomedical Research, 구 목암생명공학연구소)는 우리나라 민간 연구기관으로는 최초로 과학기술처(現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승인을 받은 기업 출연 비영리 연구재단법인으로 WHO 협력센터에 지정된 바 있으며, 국문약자로는 목암연구소, 영문약자로는 MOGAM, MIBR로 부르기도 한다. 주사무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이현로 30번길 93에 위치하고 있다. 목차 1 설립 목적 2 주요 연구개발 3 연혁 4 역대 연구소장 5 외부 링크 설립 목적[편집] 질병의 예방, 진단 및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을 개발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과 인류복지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주요 연구개발[편집] 세계 최초 유행성출혈열백신 'Hantavax' 개발 세계 두번째 수두백신 'Suduvax' 개발 연혁[편집] 1984년 05월 목암생명과학연구소 설립(설립 당시 이름 녹십자연구소) 1985년 12월 법인명 개칭(녹십자연구소 -> 목암생명공학연구소) 1981년 06월 세계 최초 유행성출혈열백신 'Hantavax' 개발 1993년 06월 세계 두번째 수두백신 'Suduvax' 개발 2014년 08월 호중구감소증치료제 'Neulapeg' 개발 2016년 05월 법인명 개칭(목암생명공학연구소 -> 목암생명과학연구소) 역대 연구소장[편집] 1대 소장 김경호(1984 ~ 1989) 2대 소장 백승복(1989 ~ 1992) 3대 소장 문홍모(1992 ~ 1996) 4대 소장 정수일(1996 ~ 2000) 5대 소장 박두홍(2000 ~ 2008) 6대 소장 윤 엽(2008 ~ 2013) 7대 소장 허은철(2013 ~ 2015) 8대 소장 최승현(2015 ~ 2018) 9대 소장 조의철(2018 ~ 현재) 외부 링크[편집] 목암생명과학연구소 홈페이지 vdeh 대한민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재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안부 문체부 농식품부 산업부 복지부 환경부 고용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중기부 본부 소속 장관 차관(2인) 과학기술혁신본부 본부장 우정사업본부 국립중앙과학관 국립과천과학관 국립어린이과학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 위원회 목록) 국립전파연구원 전파시험인증센터 우주전파센터 중앙전파관리소 위성전파감시센터 서울전파관리소 서울북부사무소 부산전파관리소 광주전파관리소 대전전파관리소 당진사무소 대구전파관리소 강릉전파관리소 전주전파관리소 제주전파관리소 청주전파관리소 울산전파관리소 산하 공공기관 광주과학기술원 국립광주과학관 국립대구과학관 국립부산과학관 기초과학연구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 별정우체국연금관리단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연구성과실용화진흥원 우체국금융개발원 우체국물류지원단 우체국시설관리단 울산과학기술원 정보통신산업진흥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한국과학기술원 한국과학창의재단 한국나노기술원 한국데이터진흥원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한국연구재단 한국우편사업진흥원 한국원자력의학원 한국인터넷진흥원 한국정보화진흥원 국가과학기술연구회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국식품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전기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천문연구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소관기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국가연구시설장비진흥센터 과학기술인공제회 지식정보보안산업협회 한국과학관협회 한국전파진흥협회 한국정보통신공사협회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정보통신공제조합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대학(또는 대학원) 기능을 가진 법인이다. 이 글은 단체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목암생명과학연구소&oldid=24415704" 분류: 재단법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대한민국의 연구소용인시1984년 설립숨은 분류: 단체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12일 (수) 14:0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비키니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키니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키니의역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키니를 입은 여자, 시카고 (1973년) 아래는 비키니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비키니와 유사한 여성복의 증거는 기원전 5,600년 초기에 발견되었으며, 비키니의 역사는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시대 때, 비키니와 유사한 의복을 입은 여성에 대한 묘사는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이탈리아 시실리에 위치한 저택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에 있는 모자이크이다.[1] 고대에 비키니와 유사한 의복을 입은 여성들의 묘사가 남아 있지만, 이러한 의복들이 현대의 비키니처럼 수영이나 일광욕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고전 수영복과 현대 비키니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서양 기독교 국가에서는 수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18세기까지는 수영복이 필요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선 여성도 수영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여성 수영복은 일상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창기 수영복은 외출복 디자인을 모방한 정도였다. 19세기 수영복은 목에 깃이 달려 있었고 상의는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와야 했으며, 무릎을 덮는 스커트와 검은 스타킹을 입어야 했다. 심지어는 코르셋 위에 드레스를 입거나 긴 바지를 입고 수영을 해야 했다. 이후 20세기가 되어서야 여성의 수영복은 평상복보다 몸의 굴곡을 조금 더 드러낼 수 있었다. 물에 젖어도 무거워지지 않고 잘 마르는 수영복의 요구가 높아지자 소매와 바지의 길이가 짧은 원피스 형태의 수영복이 처음 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패션은 더욱 편리하고 활동적이게 변하였다. 또한 전쟁 후 수영복에 쓰이는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 같은 섬유가 부족해졌고 미국은 재화 배급제도를 시행하였다. 수영복도 이러한 사회적 영향을 받아, 몸에 밀착되는 신축성 있는 원단으로 제작되고 더욱 짧아진 투피스 수영복이 유행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비키니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등장하였다. 1946년 7월 5일에 프랑스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Louis Réard)는 미셸린 베르나르디니(Micheline Bernardini)를 모델로 내세워 현대의 비키니를 처음 선보였다. 레아르의 비키니는 신체 부위를 최소한으로 가린 디자인이었고 여성의 배꼽을 드러낸 최초의 의복이었다. 비키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핵폭탄 실험 장소였던 비키니 섬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는데, 이는 핵폭탄과 같은 충격적인 파급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중들은 비키니의 등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도 여성의 노출은 여전히 비난을 받았고, 때문에 비키니를 입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키니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일부 프랑스 여성들은 이를 환영하였으나 가톨릭과 미디어 그리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비키니를 외설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1950년대부터 유명한 여배우들이 영화에서 비키니를 입고 나오면서 대중의 인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53년 칸 영화제 때,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는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어 눈길을 끌었다. 리타 헤이워드(Rita Hayworth)와 에바 가드너(Ava Gardner) 또한 비키니를 착용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007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 007 살인번호(Dr. No, 1962)에 출연한 우슬라 안드레스는 지금은 해변의 상징이 된 비키니를 입고 바다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 공룡 백만 년(One Million Years B.C., 1966)에서 라켈 웰치(Raquel Welch)가 입은 사슴가죽 비키니는 그녀를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만들어 주었고 1960년대 최고의 의상으로 묘사되었다. 영화와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서양사회에서 비키니는 점차 받아들여졌다. 프랑스인 패션 큐레이터 올리비에 사이야르(Olivier Saillard)는 비키니는 아마 “패션의 힘이 아닌 여성의 힘”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게 된 수영복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수영복의 해방은 언제나 여성의 해방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 비키니 매년 미 달러로 8억 1천 1백만 달러의 사업이 되었고, 비키니 왁싱과 태닝 같은 파생사업들도 크게 성장하였다.[2] 목차 1 현대 비키니의 등장 2 사회적 반발 3 칸 영화제와 배우들의 영향 4 대중매체 속 비키니 5 대중적 수용 6 평가 7 출처 현대 비키니의 등장[편집] 프랑스인 패션 디자이너 자크 헤임(Jacques Heim)은 1956년 5월에 최소주의 디자인의 투피스 수영복을 선보였다. 그는 이 수영복을 가장 작은 물질로 알려진 원자의 이름을 따 ‘아토메' (Atome)라고 이름을 붙였다.[3] 그가 디자인한 수영복은 착용자의 배꼽만 겨우 가릴 정도의 크기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루이 레아르(Louis Réard)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카바레(Les Folies Bergères) 근처에서 모친이 운영하던 여성 속옷 사업을 물려받았다.[4][5] 그는 프랑스 생트로페(St. Tropez) 해변에서 태닝하기 위해 수영복의 끝을 말아 올린 여성들을 보았고[6], 이에 영감을 받아 아토메보다 더 작은 디자인의 수영복인 '비키니'를 만들었다. 레아르의 끈 비키니는 30인치 천으로 만든 신문지 패턴의 네 개의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다.[7] 레아르는 기자회견에서 직접 디자인한 비키니를 입어 줄 모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현역 모델들은 아무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레아르는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유명한 공연장인 카지노 드 파리(Casino de Paris)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던 19살의 미쉘린 베르나르디니(Micheline Bernardini)를 모델로 고용하였다.[8] 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에서 미국이 최초 공개 핵실험을 한 5일 후인 1946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의 공공 수영장(Piscine Molitor)에서 레아르는 비키니를 대중에 선보였다.[9][10][11] 레아르의 비키니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역사상 최초로 여성의 배꼽을 드러낸 의복이었기 때문이다.[12] 헤임은 아토메를 홍보하기 위해 스카이 라이터를 고용하여 지중해 휴양지 상공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이라며 광고하였다. 이에 지지 않고 3주 후, 레아르 또한 비키니를 홍보하기 위해 스카이 라이터를 고용하여 프랑스 리비에라 상공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 보다 더 작은 수영복”이라는 광고하였다.[13][14][15] 레아르는 또한 투피스 수영복은 진정한 비키니가 아니라고 말하는 대담한 광고를 시작하였다.[16] 비록 사람들은 헤임이 디자인 한 아토메를 먼저 입었지만, 레아르가 지은 비키니란 이름이 더 각인되었다.[17] 한편으로는 사회적 반발이 상당하였지만, 레아르는 팬들로부터 5만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 사회적 반발[편집]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투피스 수영복을 고집했기 때문에 비키니는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았다. 1959년 7월에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는 조사차 뉴욕 시 주변에서 비키니를 찾아보았지만, 겨우 몇 개만 발견했다. 패션 및 디자인 기획 연구소의 큐레이터이자 패션 역사가인 케빈 존스(Kevin Jones)는 “레아르는 약 15년에서 20년 정도 시대를 앞서 갔다. 사회의 선봉에 선 상류층의 유럽 여성들만이 비키니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18]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상류층 유럽 여성들이 가장 먼저 코르셋을 벗어던졌던 것처럼, 그들은 가장 먼저 비키니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키니는 환영받지 못하였다. 비키니는 스페인,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호주, 미국의 일부 주에서 착용이 금지되었고, 다른 나라에서도 입는 것이 금기시되었다.[19][20] 1951년 에릭 몰리(Eric Morley)가 주최한 첫 미스 월드 대회에서[21], 비키니를 입은 스웨덴의 키키 하칸손(Kiki Håkansson)이 우승자로 뽑혔다. 이에 종교적인 전통을 중요시 한 국가들은 대표단을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22], 교황 피우스 12세 또한 "비키니는 죄" 라며 비난하였다.[23] 결국, 논란 끝에 전 세계 미인 대회에서 비키니를 입는 것이 금지되었고[24], 하칸손은 비키니를 입은 처음이자 마지막 미스 월드가 되었다. 미국의 한 종교단체(The National Legion of Decency)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키니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25] 1950년대 미국 영화에선 비키니가 모두 삭제된 후에야 바다가 나오는 장면이 상영될 수 있었다.[26] 이외에도 많은 소녀들의 우상들이 비키니를 외설적이라고 비난하였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미스 아메리카 비비 쇼프(Bebe Shopp)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프랑스 소녀들이 비키니를 입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지만 미국 소녀들이 비키니를 입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고 말 하였다. 미국의 수영 선수이자 배우인 에스터 윌리엄스(Esther Williams)도 “비키니를 입는 것은 생각 없는 행동” 이라며 비난하였다.[27] 또한 1965년 독일 뮌헨에서 한 학생은 비키니를 입고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는 이유로 6일 동안 낡은 집을 청소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28] 칸 영화제와 배우들의 영향[편집]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953년 칸 영화제(the Cannes Film Festival) 기간 동안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은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는 1950년대에 유럽에 비키니를 대중화하고, 미국에 비키니 시장을 개척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29] 영국의 영향력 있는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은 비키니를 입은 바르도의 사진은 생트로페(Saint-Tropez) 해변을 비키니의 성지로 만들었다고 보도했다.[30] 1955년 베니스 영화제(Venice Film Festival)에서 영국 배우 다이아나 도스(Diana Dors)는 그녀를 위해 맞춤 제작된 밍크 비키니를 입고 이탈리아 베니스 대운하(Venice's Grand Canal)를 지나 성 마크 광장(St. Mark's Square)까지 곤돌라를 탔다.[31] 이외에도 베티 그레이블(Betty Grable) 또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비키니를 입고 성적 매력을 뽐냈으며, 아니타 에크베르그(Anita Ekberg)와 소피아 로렌(Sophia Loren)도 비키니를 입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유명 배우들이 비키니를 입자, 비키니는 일부 유럽과 미국의 대중들에게 점차 받아들여졌다. 대중매체 속 비키니[편집] 1960년대 잡지와 영화 등 대중매체와 미국에서 일어난 히피 문화와 성혁명의 유행으로 비키니는 청년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1962년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Playboy)는 처음으로 비키니를 표지에 등장시켰다.[32] 1964년 미국의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는 독일 모델 바베트 마치(Babette March)가 흰 비키니를 입고 있는 사진을 표지로 실었다.[33] 이후 영향력을 인정받아, 비키니를 입은 모델이 등장하는 간행물들이 매년 수백만 부 판매되었다.[34] 1967년,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 타임(the magazine)은 젊은 여성 65%가 비키니를 입는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35] 영화에서 배우들이 비키니를 입은 장면들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비키니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2년, 본드 걸 우슬라 안드레스(Ursula Undress)는 영화 007 살인번호(Dr. No)에서 흰색 비키니를 입었다. 안드레스의 비키니 장면은 007 시리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영국의 텔레비전 네트워크 채널 4(Channel 4) 또한 이를 역사상 최고의 비키니 장면으로 선정하였다.[36] 안데라스의 하얀 비키니는 1960년대 영화의 에로티시즘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96년, 영화 공룡 100만 년(One Million Years B.C.)에서 사슴가죽 비키니를 입은 라켈 웰치(Raquel Welch)는 60년대의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이 외에도 유명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제인 맨스필드(Jayne Mansfield),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 제인 러셀(Jane Russell)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비키니를 입은 사진들은 비키니를 대중화 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37] 대중적 수용[편집] 레아르가 죽은 후 4년 뒤 1988년엔, 비키니는 프랑스 수영복 매출의 20%를 차지했다.[38] 1990년대 이후, 비키니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 조사 업체 NPD는 비키니의 매출이 전 세계적으로 80%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NPD는 2000년대 초까지 비키니는 연간 8억 1천 1백만달러 규모의 사업이 되었다고 하였다.[39][40] 비키니 등장 51년 만인 1997년, 미국의 미인대회 참가자들은 전통적인 수영복뿐만 아니라 비키니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최종 17명의 참가자 중 두 명은 비키니를 입었고, 그중 한 명이었던 하와이를 대표하는 에리카 카프만(Erika Kauffman)은 그 해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다.[41] 또한 사람들은 비키니를 수영이나 태닝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의 이목을 끌어 그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입기도 하였다.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세계적인 동물보호단체인 페타(PETA)는 파멜라 앤더슨(Pamela Anderson), 트레이시 빙햄(Traci Bingham), 알리샤 메이어(Alicia Mayer)와 같은 유명 인사들이 상추로 만든 비키니를 입는 광고를 하여 채식주의 캠페인을 홍보하였다.[42] 컬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의 학생들은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의 미국 뉴욕 방문을 비난하기 위해 비키니를 입고 시위를 하였다.[43] 평가[편집] 프랑스 패션 역사학자 올리비에 사이야르(Olivier Saillard) 패션의 힘이 아니라 여성의 힘 때문에 비키니는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영복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수영복의 해방은 항상 여성의 해방과 관련이 있다고 덧붙였다.[44] 또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의상 연구소 연구원 베스 찰스턴(Beth Charleston)은 비키니는 여성의 육체와 도덕, 성 의식의 사회적 도약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45] 출처[편집]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The Bikini: Not a brief affair". BBC News. Retrieved September 17, 2008. ↑ Lorna Edwards, "You've still got it, babe, The Age, June 3, 2006 ↑ Sage, Adam (April 16, 2006). "Happy birthday: the 'shocking and immoral' bikini hits 60". London: The Times.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The Bikini: Not a brief affair". BBC News. Retrieved September 17, 2008. ↑ Rosebush, Judson. "Michele Bernadini: The First Bikini". Bikini Scienc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September 27, 2007. Retrieved September 19, 2007.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The Bikini: Not a brief affair". BBC News. Retrieved September 17, 2008.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The Bikini: Not a brief affair". BBC News. Retrieved September 17, 2008. ↑ David Louis Gold (2009). Studies in Etymology and Etiology: With Emphasis on Germanic, Jewish, Romance and Slavic Languages. Universidad de Alicante. pp. 99–. ISBN 978-84-7908-517-9. Retrieved March 9, 2013. ↑ Campbell, Richard H.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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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ieved August 28, 201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키니의_역사&oldid=24229965" 분류: 의류사숨은 분류: ISBN 매직 링크를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EspañolFrançai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6일 (목) 13: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비키니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키니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키니의역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키니를 입은 여자, 시카고 (1973년) 아래는 비키니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비키니와 유사한 여성복의 증거는 기원전 5,600년 초기에 발견되었으며, 비키니의 역사는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시대 때, 비키니와 유사한 의복을 입은 여성에 대한 묘사는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이탈리아 시실리에 위치한 저택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에 있는 모자이크이다.[1] 고대에 비키니와 유사한 의복을 입은 여성들의 묘사가 남아 있지만, 이러한 의복들이 현대의 비키니처럼 수영이나 일광욕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고전 수영복과 현대 비키니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서양 기독교 국가에서는 수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18세기까지는 수영복이 필요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선 여성도 수영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여성 수영복은 일상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창기 수영복은 외출복 디자인을 모방한 정도였다. 19세기 수영복은 목에 깃이 달려 있었고 상의는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와야 했으며, 무릎을 덮는 스커트와 검은 스타킹을 입어야 했다. 심지어는 코르셋 위에 드레스를 입거나 긴 바지를 입고 수영을 해야 했다. 이후 20세기가 되어서야 여성의 수영복은 평상복보다 몸의 굴곡을 조금 더 드러낼 수 있었다. 물에 젖어도 무거워지지 않고 잘 마르는 수영복의 요구가 높아지자 소매와 바지의 길이가 짧은 원피스 형태의 수영복이 처음 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패션은 더욱 편리하고 활동적이게 변하였다. 또한 전쟁 후 수영복에 쓰이는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 같은 섬유가 부족해졌고 미국은 재화 배급제도를 시행하였다. 수영복도 이러한 사회적 영향을 받아, 몸에 밀착되는 신축성 있는 원단으로 제작되고 더욱 짧아진 투피스 수영복이 유행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비키니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등장하였다. 1946년 7월 5일에 프랑스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Louis Réard)는 미셸린 베르나르디니(Micheline Bernardini)를 모델로 내세워 현대의 비키니를 처음 선보였다. 레아르의 비키니는 신체 부위를 최소한으로 가린 디자인이었고 여성의 배꼽을 드러낸 최초의 의복이었다. 비키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핵폭탄 실험 장소였던 비키니 섬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는데, 이는 핵폭탄과 같은 충격적인 파급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중들은 비키니의 등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도 여성의 노출은 여전히 비난을 받았고, 때문에 비키니를 입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키니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일부 프랑스 여성들은 이를 환영하였으나 가톨릭과 미디어 그리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비키니를 외설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1950년대부터 유명한 여배우들이 영화에서 비키니를 입고 나오면서 대중의 인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53년 칸 영화제 때,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는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어 눈길을 끌었다. 리타 헤이워드(Rita Hayworth)와 에바 가드너(Ava Gardner) 또한 비키니를 착용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007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 007 살인번호(Dr. No, 1962)에 출연한 우슬라 안드레스는 지금은 해변의 상징이 된 비키니를 입고 바다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 공룡 백만 년(One Million Years B.C., 1966)에서 라켈 웰치(Raquel Welch)가 입은 사슴가죽 비키니는 그녀를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만들어 주었고 1960년대 최고의 의상으로 묘사되었다. 영화와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서양사회에서 비키니는 점차 받아들여졌다. 프랑스인 패션 큐레이터 올리비에 사이야르(Olivier Saillard)는 비키니는 아마 “패션의 힘이 아닌 여성의 힘”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게 된 수영복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수영복의 해방은 언제나 여성의 해방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 비키니 매년 미 달러로 8억 1천 1백만 달러의 사업이 되었고, 비키니 왁싱과 태닝 같은 파생사업들도 크게 성장하였다.[2] 목차 1 현대 비키니의 등장 2 사회적 반발 3 칸 영화제와 배우들의 영향 4 대중매체 속 비키니 5 대중적 수용 6 평가 7 출처 현대 비키니의 등장[편집] 프랑스인 패션 디자이너 자크 헤임(Jacques Heim)은 1956년 5월에 최소주의 디자인의 투피스 수영복을 선보였다. 그는 이 수영복을 가장 작은 물질로 알려진 원자의 이름을 따 ‘아토메' (Atome)라고 이름을 붙였다.[3] 그가 디자인한 수영복은 착용자의 배꼽만 겨우 가릴 정도의 크기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루이 레아르(Louis Réard)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카바레(Les Folies Bergères) 근처에서 모친이 운영하던 여성 속옷 사업을 물려받았다.[4][5] 그는 프랑스 생트로페(St. Tropez) 해변에서 태닝하기 위해 수영복의 끝을 말아 올린 여성들을 보았고[6], 이에 영감을 받아 아토메보다 더 작은 디자인의 수영복인 '비키니'를 만들었다. 레아르의 끈 비키니는 30인치 천으로 만든 신문지 패턴의 네 개의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다.[7] 레아르는 기자회견에서 직접 디자인한 비키니를 입어 줄 모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현역 모델들은 아무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레아르는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유명한 공연장인 카지노 드 파리(Casino de Paris)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던 19살의 미쉘린 베르나르디니(Micheline Bernardini)를 모델로 고용하였다.[8] 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에서 미국이 최초 공개 핵실험을 한 5일 후인 1946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의 공공 수영장(Piscine Molitor)에서 레아르는 비키니를 대중에 선보였다.[9][10][11] 레아르의 비키니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역사상 최초로 여성의 배꼽을 드러낸 의복이었기 때문이다.[12] 헤임은 아토메를 홍보하기 위해 스카이 라이터를 고용하여 지중해 휴양지 상공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이라며 광고하였다. 이에 지지 않고 3주 후, 레아르 또한 비키니를 홍보하기 위해 스카이 라이터를 고용하여 프랑스 리비에라 상공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 보다 더 작은 수영복”이라는 광고하였다.[13][14][15] 레아르는 또한 투피스 수영복은 진정한 비키니가 아니라고 말하는 대담한 광고를 시작하였다.[16] 비록 사람들은 헤임이 디자인 한 아토메를 먼저 입었지만, 레아르가 지은 비키니란 이름이 더 각인되었다.[17] 한편으로는 사회적 반발이 상당하였지만, 레아르는 팬들로부터 5만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 사회적 반발[편집]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투피스 수영복을 고집했기 때문에 비키니는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았다. 1959년 7월에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는 조사차 뉴욕 시 주변에서 비키니를 찾아보았지만, 겨우 몇 개만 발견했다. 패션 및 디자인 기획 연구소의 큐레이터이자 패션 역사가인 케빈 존스(Kevin Jones)는 “레아르는 약 15년에서 20년 정도 시대를 앞서 갔다. 사회의 선봉에 선 상류층의 유럽 여성들만이 비키니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18]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상류층 유럽 여성들이 가장 먼저 코르셋을 벗어던졌던 것처럼, 그들은 가장 먼저 비키니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키니는 환영받지 못하였다. 비키니는 스페인,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호주, 미국의 일부 주에서 착용이 금지되었고, 다른 나라에서도 입는 것이 금기시되었다.[19][20] 1951년 에릭 몰리(Eric Morley)가 주최한 첫 미스 월드 대회에서[21], 비키니를 입은 스웨덴의 키키 하칸손(Kiki Håkansson)이 우승자로 뽑혔다. 이에 종교적인 전통을 중요시 한 국가들은 대표단을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22], 교황 피우스 12세 또한 "비키니는 죄" 라며 비난하였다.[23] 결국, 논란 끝에 전 세계 미인 대회에서 비키니를 입는 것이 금지되었고[24], 하칸손은 비키니를 입은 처음이자 마지막 미스 월드가 되었다. 미국의 한 종교단체(The National Legion of Decency)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키니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25] 1950년대 미국 영화에선 비키니가 모두 삭제된 후에야 바다가 나오는 장면이 상영될 수 있었다.[26] 이외에도 많은 소녀들의 우상들이 비키니를 외설적이라고 비난하였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미스 아메리카 비비 쇼프(Bebe Shopp)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프랑스 소녀들이 비키니를 입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지만 미국 소녀들이 비키니를 입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고 말 하였다. 미국의 수영 선수이자 배우인 에스터 윌리엄스(Esther Williams)도 “비키니를 입는 것은 생각 없는 행동” 이라며 비난하였다.[27] 또한 1965년 독일 뮌헨에서 한 학생은 비키니를 입고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는 이유로 6일 동안 낡은 집을 청소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28] 칸 영화제와 배우들의 영향[편집]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953년 칸 영화제(the Cannes Film Festival) 기간 동안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은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는 1950년대에 유럽에 비키니를 대중화하고, 미국에 비키니 시장을 개척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29] 영국의 영향력 있는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은 비키니를 입은 바르도의 사진은 생트로페(Saint-Tropez) 해변을 비키니의 성지로 만들었다고 보도했다.[30] 1955년 베니스 영화제(Venice Film Festival)에서 영국 배우 다이아나 도스(Diana Dors)는 그녀를 위해 맞춤 제작된 밍크 비키니를 입고 이탈리아 베니스 대운하(Venice's Grand Canal)를 지나 성 마크 광장(St. Mark's Square)까지 곤돌라를 탔다.[31] 이외에도 베티 그레이블(Betty Grable) 또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비키니를 입고 성적 매력을 뽐냈으며, 아니타 에크베르그(Anita Ekberg)와 소피아 로렌(Sophia Loren)도 비키니를 입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유명 배우들이 비키니를 입자, 비키니는 일부 유럽과 미국의 대중들에게 점차 받아들여졌다. 대중매체 속 비키니[편집] 1960년대 잡지와 영화 등 대중매체와 미국에서 일어난 히피 문화와 성혁명의 유행으로 비키니는 청년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1962년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Playboy)는 처음으로 비키니를 표지에 등장시켰다.[32] 1964년 미국의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는 독일 모델 바베트 마치(Babette March)가 흰 비키니를 입고 있는 사진을 표지로 실었다.[33] 이후 영향력을 인정받아, 비키니를 입은 모델이 등장하는 간행물들이 매년 수백만 부 판매되었다.[34] 1967년,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 타임(the magazine)은 젊은 여성 65%가 비키니를 입는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35] 영화에서 배우들이 비키니를 입은 장면들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비키니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2년, 본드 걸 우슬라 안드레스(Ursula Undress)는 영화 007 살인번호(Dr. No)에서 흰색 비키니를 입었다. 안드레스의 비키니 장면은 007 시리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영국의 텔레비전 네트워크 채널 4(Channel 4) 또한 이를 역사상 최고의 비키니 장면으로 선정하였다.[36] 안데라스의 하얀 비키니는 1960년대 영화의 에로티시즘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96년, 영화 공룡 100만 년(One Million Years B.C.)에서 사슴가죽 비키니를 입은 라켈 웰치(Raquel Welch)는 60년대의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이 외에도 유명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제인 맨스필드(Jayne Mansfield),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 제인 러셀(Jane Russell)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비키니를 입은 사진들은 비키니를 대중화 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37] 대중적 수용[편집] 레아르가 죽은 후 4년 뒤 1988년엔, 비키니는 프랑스 수영복 매출의 20%를 차지했다.[38] 1990년대 이후, 비키니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 조사 업체 NPD는 비키니의 매출이 전 세계적으로 80%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NPD는 2000년대 초까지 비키니는 연간 8억 1천 1백만달러 규모의 사업이 되었다고 하였다.[39][40] 비키니 등장 51년 만인 1997년, 미국의 미인대회 참가자들은 전통적인 수영복뿐만 아니라 비키니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최종 17명의 참가자 중 두 명은 비키니를 입었고, 그중 한 명이었던 하와이를 대표하는 에리카 카프만(Erika Kauffman)은 그 해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다.[41] 또한 사람들은 비키니를 수영이나 태닝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의 이목을 끌어 그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입기도 하였다.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세계적인 동물보호단체인 페타(PETA)는 파멜라 앤더슨(Pamela Anderson), 트레이시 빙햄(Traci Bingham), 알리샤 메이어(Alicia Mayer)와 같은 유명 인사들이 상추로 만든 비키니를 입는 광고를 하여 채식주의 캠페인을 홍보하였다.[42] 컬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의 학생들은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의 미국 뉴욕 방문을 비난하기 위해 비키니를 입고 시위를 하였다.[43] 평가[편집] 프랑스 패션 역사학자 올리비에 사이야르(Olivier Saillard) 패션의 힘이 아니라 여성의 힘 때문에 비키니는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영복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수영복의 해방은 항상 여성의 해방과 관련이 있다고 덧붙였다.[44] 또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의상 연구소 연구원 베스 찰스턴(Beth Charleston)은 비키니는 여성의 육체와 도덕, 성 의식의 사회적 도약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45] 출처[편집]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The Bikini: Not a brief affair". BBC News. Retrieved September 17, 2008. ↑ Lorna Edwards, "You've still got it, babe, The Age, June 3, 2006 ↑ Sage, Adam (April 16, 2006). "Happy birthday: the 'shocking and immoral' bikini hits 60". London: The Times.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The Bikini: Not a brief affair". BBC News. Retrieved September 17, 2008. ↑ Rosebush, Judson. "Michele Bernadini: The First Bikini". Bikini Scienc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September 27, 2007. Retrieved September 19, 2007.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The Bikini: Not a brief affair". BBC News. Retrieved September 17, 2008.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The Bikini: Not a brief affair". BBC News. Retrieved September 17, 2008. ↑ David Louis Gold (2009). Studies in Etymology and Etiology: With Emphasis on Germanic, Jewish, Romance and Slavic Languages. Universidad de Alicante. pp. 99–. ISBN 978-84-7908-517-9. Retrieved March 9, 2013. ↑ Campbell, Richard H.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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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ieved August 28, 201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키니의_역사&oldid=24229965" 분류: 의류사숨은 분류: ISBN 매직 링크를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EspañolFrançai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6일 (목) 13: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비키니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키니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키니의역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키니를 입은 여자, 시카고 (1973년) 아래는 비키니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비키니와 유사한 여성복의 증거는 기원전 5,600년 초기에 발견되었으며, 비키니의 역사는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시대 때, 비키니와 유사한 의복을 입은 여성에 대한 묘사는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이탈리아 시실리에 위치한 저택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에 있는 모자이크이다.[1] 고대에 비키니와 유사한 의복을 입은 여성들의 묘사가 남아 있지만, 이러한 의복들이 현대의 비키니처럼 수영이나 일광욕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고전 수영복과 현대 비키니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서양 기독교 국가에서는 수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18세기까지는 수영복이 필요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선 여성도 수영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여성 수영복은 일상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창기 수영복은 외출복 디자인을 모방한 정도였다. 19세기 수영복은 목에 깃이 달려 있었고 상의는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와야 했으며, 무릎을 덮는 스커트와 검은 스타킹을 입어야 했다. 심지어는 코르셋 위에 드레스를 입거나 긴 바지를 입고 수영을 해야 했다. 이후 20세기가 되어서야 여성의 수영복은 평상복보다 몸의 굴곡을 조금 더 드러낼 수 있었다. 물에 젖어도 무거워지지 않고 잘 마르는 수영복의 요구가 높아지자 소매와 바지의 길이가 짧은 원피스 형태의 수영복이 처음 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패션은 더욱 편리하고 활동적이게 변하였다. 또한 전쟁 후 수영복에 쓰이는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 같은 섬유가 부족해졌고 미국은 재화 배급제도를 시행하였다. 수영복도 이러한 사회적 영향을 받아, 몸에 밀착되는 신축성 있는 원단으로 제작되고 더욱 짧아진 투피스 수영복이 유행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비키니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등장하였다. 1946년 7월 5일에 프랑스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Louis Réard)는 미셸린 베르나르디니(Micheline Bernardini)를 모델로 내세워 현대의 비키니를 처음 선보였다. 레아르의 비키니는 신체 부위를 최소한으로 가린 디자인이었고 여성의 배꼽을 드러낸 최초의 의복이었다. 비키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핵폭탄 실험 장소였던 비키니 섬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는데, 이는 핵폭탄과 같은 충격적인 파급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중들은 비키니의 등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도 여성의 노출은 여전히 비난을 받았고, 때문에 비키니를 입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키니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일부 프랑스 여성들은 이를 환영하였으나 가톨릭과 미디어 그리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비키니를 외설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1950년대부터 유명한 여배우들이 영화에서 비키니를 입고 나오면서 대중의 인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53년 칸 영화제 때,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는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어 눈길을 끌었다. 리타 헤이워드(Rita Hayworth)와 에바 가드너(Ava Gardner) 또한 비키니를 착용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007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 007 살인번호(Dr. No, 1962)에 출연한 우슬라 안드레스는 지금은 해변의 상징이 된 비키니를 입고 바다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 공룡 백만 년(One Million Years B.C., 1966)에서 라켈 웰치(Raquel Welch)가 입은 사슴가죽 비키니는 그녀를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만들어 주었고 1960년대 최고의 의상으로 묘사되었다. 영화와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서양사회에서 비키니는 점차 받아들여졌다. 프랑스인 패션 큐레이터 올리비에 사이야르(Olivier Saillard)는 비키니는 아마 “패션의 힘이 아닌 여성의 힘”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게 된 수영복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수영복의 해방은 언제나 여성의 해방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 비키니 매년 미 달러로 8억 1천 1백만 달러의 사업이 되었고, 비키니 왁싱과 태닝 같은 파생사업들도 크게 성장하였다.[2] 목차 1 현대 비키니의 등장 2 사회적 반발 3 칸 영화제와 배우들의 영향 4 대중매체 속 비키니 5 대중적 수용 6 평가 7 출처 현대 비키니의 등장[편집] 프랑스인 패션 디자이너 자크 헤임(Jacques Heim)은 1956년 5월에 최소주의 디자인의 투피스 수영복을 선보였다. 그는 이 수영복을 가장 작은 물질로 알려진 원자의 이름을 따 ‘아토메' (Atome)라고 이름을 붙였다.[3] 그가 디자인한 수영복은 착용자의 배꼽만 겨우 가릴 정도의 크기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루이 레아르(Louis Réard)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카바레(Les Folies Bergères) 근처에서 모친이 운영하던 여성 속옷 사업을 물려받았다.[4][5] 그는 프랑스 생트로페(St. Tropez) 해변에서 태닝하기 위해 수영복의 끝을 말아 올린 여성들을 보았고[6], 이에 영감을 받아 아토메보다 더 작은 디자인의 수영복인 '비키니'를 만들었다. 레아르의 끈 비키니는 30인치 천으로 만든 신문지 패턴의 네 개의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다.[7] 레아르는 기자회견에서 직접 디자인한 비키니를 입어 줄 모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현역 모델들은 아무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레아르는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유명한 공연장인 카지노 드 파리(Casino de Paris)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던 19살의 미쉘린 베르나르디니(Micheline Bernardini)를 모델로 고용하였다.[8] 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에서 미국이 최초 공개 핵실험을 한 5일 후인 1946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의 공공 수영장(Piscine Molitor)에서 레아르는 비키니를 대중에 선보였다.[9][10][11] 레아르의 비키니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역사상 최초로 여성의 배꼽을 드러낸 의복이었기 때문이다.[12] 헤임은 아토메를 홍보하기 위해 스카이 라이터를 고용하여 지중해 휴양지 상공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이라며 광고하였다. 이에 지지 않고 3주 후, 레아르 또한 비키니를 홍보하기 위해 스카이 라이터를 고용하여 프랑스 리비에라 상공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 보다 더 작은 수영복”이라는 광고하였다.[13][14][15] 레아르는 또한 투피스 수영복은 진정한 비키니가 아니라고 말하는 대담한 광고를 시작하였다.[16] 비록 사람들은 헤임이 디자인 한 아토메를 먼저 입었지만, 레아르가 지은 비키니란 이름이 더 각인되었다.[17] 한편으로는 사회적 반발이 상당하였지만, 레아르는 팬들로부터 5만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 사회적 반발[편집]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투피스 수영복을 고집했기 때문에 비키니는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았다. 1959년 7월에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는 조사차 뉴욕 시 주변에서 비키니를 찾아보았지만, 겨우 몇 개만 발견했다. 패션 및 디자인 기획 연구소의 큐레이터이자 패션 역사가인 케빈 존스(Kevin Jones)는 “레아르는 약 15년에서 20년 정도 시대를 앞서 갔다. 사회의 선봉에 선 상류층의 유럽 여성들만이 비키니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18]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상류층 유럽 여성들이 가장 먼저 코르셋을 벗어던졌던 것처럼, 그들은 가장 먼저 비키니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키니는 환영받지 못하였다. 비키니는 스페인,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호주, 미국의 일부 주에서 착용이 금지되었고, 다른 나라에서도 입는 것이 금기시되었다.[19][20] 1951년 에릭 몰리(Eric Morley)가 주최한 첫 미스 월드 대회에서[21], 비키니를 입은 스웨덴의 키키 하칸손(Kiki Håkansson)이 우승자로 뽑혔다. 이에 종교적인 전통을 중요시 한 국가들은 대표단을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22], 교황 피우스 12세 또한 "비키니는 죄" 라며 비난하였다.[23] 결국, 논란 끝에 전 세계 미인 대회에서 비키니를 입는 것이 금지되었고[24], 하칸손은 비키니를 입은 처음이자 마지막 미스 월드가 되었다. 미국의 한 종교단체(The National Legion of Decency)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키니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25] 1950년대 미국 영화에선 비키니가 모두 삭제된 후에야 바다가 나오는 장면이 상영될 수 있었다.[26] 이외에도 많은 소녀들의 우상들이 비키니를 외설적이라고 비난하였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미스 아메리카 비비 쇼프(Bebe Shopp)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프랑스 소녀들이 비키니를 입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지만 미국 소녀들이 비키니를 입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고 말 하였다. 미국의 수영 선수이자 배우인 에스터 윌리엄스(Esther Williams)도 “비키니를 입는 것은 생각 없는 행동” 이라며 비난하였다.[27] 또한 1965년 독일 뮌헨에서 한 학생은 비키니를 입고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는 이유로 6일 동안 낡은 집을 청소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28] 칸 영화제와 배우들의 영향[편집]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953년 칸 영화제(the Cannes Film Festival) 기간 동안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은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는 1950년대에 유럽에 비키니를 대중화하고, 미국에 비키니 시장을 개척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29] 영국의 영향력 있는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은 비키니를 입은 바르도의 사진은 생트로페(Saint-Tropez) 해변을 비키니의 성지로 만들었다고 보도했다.[30] 1955년 베니스 영화제(Venice Film Festival)에서 영국 배우 다이아나 도스(Diana Dors)는 그녀를 위해 맞춤 제작된 밍크 비키니를 입고 이탈리아 베니스 대운하(Venice's Grand Canal)를 지나 성 마크 광장(St. Mark's Square)까지 곤돌라를 탔다.[31] 이외에도 베티 그레이블(Betty Grable) 또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비키니를 입고 성적 매력을 뽐냈으며, 아니타 에크베르그(Anita Ekberg)와 소피아 로렌(Sophia Loren)도 비키니를 입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유명 배우들이 비키니를 입자, 비키니는 일부 유럽과 미국의 대중들에게 점차 받아들여졌다. 대중매체 속 비키니[편집] 1960년대 잡지와 영화 등 대중매체와 미국에서 일어난 히피 문화와 성혁명의 유행으로 비키니는 청년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1962년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Playboy)는 처음으로 비키니를 표지에 등장시켰다.[32] 1964년 미국의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는 독일 모델 바베트 마치(Babette March)가 흰 비키니를 입고 있는 사진을 표지로 실었다.[33] 이후 영향력을 인정받아, 비키니를 입은 모델이 등장하는 간행물들이 매년 수백만 부 판매되었다.[34] 1967년,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 타임(the magazine)은 젊은 여성 65%가 비키니를 입는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35] 영화에서 배우들이 비키니를 입은 장면들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비키니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2년, 본드 걸 우슬라 안드레스(Ursula Undress)는 영화 007 살인번호(Dr. No)에서 흰색 비키니를 입었다. 안드레스의 비키니 장면은 007 시리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영국의 텔레비전 네트워크 채널 4(Channel 4) 또한 이를 역사상 최고의 비키니 장면으로 선정하였다.[36] 안데라스의 하얀 비키니는 1960년대 영화의 에로티시즘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96년, 영화 공룡 100만 년(One Million Years B.C.)에서 사슴가죽 비키니를 입은 라켈 웰치(Raquel Welch)는 60년대의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이 외에도 유명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제인 맨스필드(Jayne Mansfield),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 제인 러셀(Jane Russell)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비키니를 입은 사진들은 비키니를 대중화 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37] 대중적 수용[편집] 레아르가 죽은 후 4년 뒤 1988년엔, 비키니는 프랑스 수영복 매출의 20%를 차지했다.[38] 1990년대 이후, 비키니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 조사 업체 NPD는 비키니의 매출이 전 세계적으로 80%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NPD는 2000년대 초까지 비키니는 연간 8억 1천 1백만달러 규모의 사업이 되었다고 하였다.[39][40] 비키니 등장 51년 만인 1997년, 미국의 미인대회 참가자들은 전통적인 수영복뿐만 아니라 비키니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최종 17명의 참가자 중 두 명은 비키니를 입었고, 그중 한 명이었던 하와이를 대표하는 에리카 카프만(Erika Kauffman)은 그 해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다.[41] 또한 사람들은 비키니를 수영이나 태닝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의 이목을 끌어 그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입기도 하였다.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세계적인 동물보호단체인 페타(PETA)는 파멜라 앤더슨(Pamela Anderson), 트레이시 빙햄(Traci Bingham), 알리샤 메이어(Alicia Mayer)와 같은 유명 인사들이 상추로 만든 비키니를 입는 광고를 하여 채식주의 캠페인을 홍보하였다.[42] 컬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의 학생들은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의 미국 뉴욕 방문을 비난하기 위해 비키니를 입고 시위를 하였다.[43] 평가[편집] 프랑스 패션 역사학자 올리비에 사이야르(Olivier Saillard) 패션의 힘이 아니라 여성의 힘 때문에 비키니는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영복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수영복의 해방은 항상 여성의 해방과 관련이 있다고 덧붙였다.[44] 또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의상 연구소 연구원 베스 찰스턴(Beth Charleston)은 비키니는 여성의 육체와 도덕, 성 의식의 사회적 도약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45] 출처[편집] ↑ Westcott, Kathryn (June 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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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ieved August 28, 201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키니의_역사&oldid=24229965" 분류: 의류사숨은 분류: ISBN 매직 링크를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EspañolFrançai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6일 (목) 13: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롯데글로벌로지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롯데글로벌로지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현대로지스틱스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롯데글로벌로지스(주)LOTTE GLOBAL LOGISTICS CO., LTD. 형태 주식회사, 대기업 산업 분야 운수업 창립 1988년 6월 13일 이전 상호 아세아상선㈜ (1988 ~ 1993)현대물류㈜ (1993 ~ 1999)현대택배㈜ (1999 ~ 2010)현대로지엠㈜ (2010 ~ 2012)현대로지스틱스(주) (2012 ~ 2016) 시장 정보 K-OTC: 040830 상장일 비상장 국가 대한민국 본사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0 (세브란스병원빌딩) 핵심 인물 박찬복(대표이사 사장(CEO)) 사업 내용 화물운송 중개, 대리 및 관련서비스업화물자동차 운송업 제품 롯데택배 자본금 118,569,565,000원(2017년 12월 31일) 매출액 1,759,351,471,985원(2017년 12월 31일) 영업이익 (17,419,838,649)원(2017년 12월 31일) 순이익 (29,718,950,934)원(2017년 12월 31일) 자산총액 818,382,852,014원(2017년 12월 31일) 주요 주주 롯데지주(계열회사) 15.22%롯데케미칼(계열회사) 14.53%호텔롯데(계열회사) 11.53%롯데지알에스(계열회사) 11.35%(2018년 4월 9일) 모기업 롯데지주 종업원 1,490명 (2017) 웹사이트 롯데글로벌로지스 롯데글로벌로지스(주)(Lotte Global Logistics)는 대한민국의 운수 기업이다. 대한민국의 택배업에서 업계 1위인 CJ대한통운에 이어 업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본래 현대그룹의 계열사였으나 2014년 7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현대로지스틱스 지분 전량(88.8%)을 이지스일호에 매각했다. 이지스일호는 롯데그룹 계열사 8곳과 현대상선, 일본계 사모펀드 오릭스가 현대로지스틱스를 인수하기 위해 만든 특수목적법인이다. 롯데그룹이 이지스일호가 보유하고 있던 현대로지스틱스의 지분 가운데 71%를 인수한 데 따라 현대로지스틱스의 경영권은 롯데그룹으로 넘어갔다. 2016년 12월 16일 현대로지스틱스(주)에서 롯데글로벌로지스(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목차 1 역사 2 사업 3 연표 3.1 1980년대 3.1.1 1988년 3.2 1990년대 3.2.1 1990년 3.2.2 1992년 3.2.3 1993년 3.2.4 1994년 3.2.5 1996년 3.2.6 1997년 3.2.7 1998년 3.2.8 1999년 3.3 2000년대 3.3.1 2000년 3.3.2 2001년 3.3.3 2002년 3.3.4 2003년 3.3.5 2004년 3.3.6 2005년 3.3.7 2006년 3.3.8 2007년 3.3.9 2008년 3.3.10 2009년 3.3.11 2010년 3.3.12 2012년 3.3.13 2013년 3.3.14 2014년 4 주요 사업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88년 6월 13일에 아세아상선 주식회사로 설립되었다. 1993년 12월 현대물류 주식회사로, 1999년 12월에는 현대택배 주식회사로 바꾸었다가, 2010년 4월 현대로지엠 주식회사로 2012년 4월 '현대로지스틱스 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현대로지스틱스는 현대그룹의 핵심 기업인 현대엘리베이터의 대주주였다. 현대로지스틱스는 2014년 7월 일본의 사모펀드인 오릭스에 인수되었다. 현대로지스틱스는 부채가 동종업계의 타 회사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사모펀드는 기업의 외형적 성장보다는 내실 다지기를 중시하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이 해결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택배 업계는 대표적인 레드오션으로 치열한 단가 인하 등 대형 업체들의 치킨 게임이 심한 분야인데, 2위 업체인 현대로지스틱스가 점유율 경쟁보다는 부채 해소 등 내실강화에 주력함으로써 택배 업계의 경쟁은 다소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1] 사업[편집] 택배업은 온라인 쇼핑의 증가로 시장 전망이 밝으며, 미국에서도 택배 회사들의 주가가 2013년부터 많이 상승하고 있다.[1] 2012년 현대로지스틱스는 미국에 해외직송 물류센터를 설립하고 "아이딜리버"라는 해외특송 서비스를 런칭, 본격적으로 해외직구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는 한진택배에서 운영하는 이하넥스처럼 택배회사가 운영하는 배송대행 서비스다. 대한민국 내 해외직구의 급증으로 관련 사업의 전망은 좋은 편이다.[2] 현재 아이딜리버는 미국 뉴저지, 델라웨어, 오리건에 배송대행 센터를 운영 중이다. 연표[편집] 1980년대[편집] 1988년[편집] 06월 아세아상선㈜ 설립 08월 복합 운송업 면허 취득 12월 FIATA 회원 가입 1990년대[편집] 1990년[편집] 03월 항공화물 대리점업 면허 취득 1992년[편집] 04월 IATA 가입 1993년[편집] 04월 특별간이 보세운송업 면허 취득 05월 국내 긴급상업용 서류 송달업 인가 11월 소화물일관 수송업 면허 취득 12월 현대물류주식회사로 상호변경 1994년[편집] 02월 우신국제운송㈜, 대성기업 흡수합병 1996년[편집] 11월 대구터미널 개장 1997년[편집] 03월 국내최초 택배전용 부곡터미널 개장(현 군포복합터미널) 10월 한국 물류대상 대통령산업포장 수상, 동서울터미널 개장(현 성남터미널) 1998년[편집] 04월 한국로지스틱스학회 물류대상 수상 05월 국내 최초 ISO 9002 물류 전부문 인증획득 09월 자본금 330억으로 증자 11월 '98소비자만족베스트상품 선정 1999년[편집] 01월 남서울터미널(현 구로터미널), 대전터미널 개장 07월 양산터미널 개장 11월 최초 은행에서 선하증권 교부 서비스실시 12월 자본금 405억으로 증자, 현대택배주식회사로 사명 변경 2000년대[편집] 2000년[편집] 02월 광주터미널 개장 03월 국내 최초 의류행거배송 서비스 실시 04월 마산터미널 개장, 전보택배 서비스 실시(한국통신) 06월 2010년 비젼 선포식(Millennium Best) 10월 국내최초 의류택배 전용 경안터미널 개장 12월 중앙일보 히트상품 선정 2001년[편집] 02월 한국일보 코리아 웹어워즈 우수상 수상 03월 인천 터미널 개장 04월 한국능률협회 대한민국 1위 웹사이트 선정 05월 한국산업단지공단 공동물류 지원사업 수주 06월 전자신문 2001년 상반기 히트상품 선정 08월 ISO 9001:2000 전부문 국제표준인증 획득 09월 서울북부터미널 개장 11월 전주터미널 개장 12월 전자신문 2001년 히트 인기상품 선정, 한국경제 소비자대상 수상, 서울경제 브랜드 경쟁력 1위 선정 2002년[편집] 09월 천안터미널 개장, 서울남부터미널 개장 2003년[편집] 06월 국내업계 최초1급 면허 중국현지법인설립(상해현대아륜국제화운유한공사) 08월 신택배시스템 HYDEX Ⅱ 오픈 12월 서울경제 베스트 히트상품 선정 2004년[편집] 01월 서울경제 히트 예감상품 선정 11월 한국 SCM대상 수상(대기업부문) 2005년[편집] 03월 한국 마케팅대상 수상(유통부문) 11월 중국 시노트랜스와 전략적 제휴 2006년[편집] 06월 종합물류업 1차 인증 획득 09월 독일 현지법인 설립(Hyundai Logistics GMBH) 10월 자본금 610억원으로 증자, 국내 최대 처리규모 대전HUB 터미널 개장 2007년[편집] 08월 인도 현지법인 설립(Hyundai Logistics India Private Limited.), 신선물류센터(오포) 개장 10월 서울세관과 남북교역물품 통관협력체제 MOU 체결 2008년[편집] 01월 영국 현지법인 설립(Hyundai Logistics UK.) 03월 베트남 현지법인 설립(Hyundai-Vinatrans Logistics), 중국홈쇼핑(아이즈비전) 물류시장 진출 06월 ISO 14001 환경경영체제 국제규격 인증 획득, 대한민국 신뢰경영 대상 수상 07월 양산터미널 신축 개장 2009년[편집] 10월 현대코스코로지스틱스 합작법인 설립 11월 부산신항 항만하역서비스 개시 2010년[편집] 3월 현대그룹 빌딩으로 사옥이전, 현대로지엠(주)로 사명변경 2012년[편집] 4월 현대로지스틱스(주)로 사명변경 6월 국토해양부 글로벌물류기업 육성대상 선정 11월 한국물류대상 대통령상 수상 2013년[편집] 1월 우수 물류창고업체 인증 12월 군포 터미널 신축(일처리능력 40만 박스) 2014년[편집] 7월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도매시장 시설 현대화산업 주요 사업[편집] 택배서비스: 개인, 기업 서비스, 첨단 택배 시스템 국내물류서비스: 컨테이너 운송, 벌크, 대북물자운송, 국내물류시스템 해운/항공서비스: 해운운송, 항공운송, 사이로직스시스템 TPL서비스: TPL서비스, TPL시스템 같이 보기[편집] 롯데그룹 현정은 각주[편집] ↑ 가 나 치킨게임 종료…활짝 갠 택배 시장, 현대로지스틱스 사모 펀드에 인수돼, 업계 1위 CJ대한통운 ‘강추’, 한국경제 Aug 12, 2014 ↑ 훨씬 싸니까 해외직구한다 2, 더 낮아지는 해외직구 장벽, 월간마이더스 2014년 7월호 외부 링크[편집] 롯데글로벌로지스 홈페이지 vdeh현대그룹관광 현대아산 에이블현대호텔앤리조트 현대종합연수원 제조업 현대엘리베이터 연구원· 자원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인재개발원 현대투자네트워크 이전 계열사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자원개발 현대상선 인천제철 현대미포조선 현대엔지니어링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종합상사 현대정공 현투증권 현대투자신탁운용 현대캐피탈 현대오토넷 현대정유 금강 금강개발산업 기아자동차 동서산업 고려산업개발 하이닉스반도체 한국프랜지 한라건설 이미지퀘스트 문화일보 현대방송 현대로지스틱스 현대코스코로지스틱스 현대증권 현대저축은행 현대자산운용 동해해운 해영선박 현대부산신항만 대한알루미늄공업 현대시멘트 현대양행 방계기업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HDC그룹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KCC그룹 한라그룹 서한그룹 기타 현대고등학교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현대차 컨벤션 호텔 관련 항목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왕자의난 vdeh롯데그룹 창립: 1948년(일본), 1967년(대한민국) 창립자: 신격호(시게미쓰 다케오) 지주회사일본 롯데홀딩스 한국 롯데지주 식품일본 롯데 롯데건강산업 메리초콜릿컴퍼니 롯데리아 (일본) 크리스피 크림 도넛 재팬 긴자코지코너 롯데주류재팬 한국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충북소주 CH음료 HUI 백학음료 MJA와인 롯데아사히주류 롯데푸드 롯데네슬레코리아 롯데GRS 롯데리아 (한국) 엔제리너스 T.G.I. 프라이데이스 크리스피 크림 도넛 나뚜루 버거킹 (일본) 유통, 미디어일본 롯데상사 미도리상사 롯데물산 고준샤 롯데면세점 패밀리 롯데온라인샵 한국 롯데쇼핑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토이저러스 (한국)) 롯데슈퍼 롭스 롯데하이마트 롯데시네마 (롯데엔터테인먼트) CS유통 (하모니마트, 굿모닝마트) 한국STL FRL코리아 (유니클로 (한국)) 디시네마오브코리아 NCF 롯데닷컴 시네마통상 시네마푸드 롯데역사 롯데상사 한국후지필름 무인양품 (한국) 코리아세븐 (세븐일레븐 (한국)) 우리홈쇼핑 (롯데홈쇼핑) 관광일본 롯데 미나요시다이 컨트리 클럽 롯데 가사이 골프 롯데호텔 롯데시티호텔 긴시초 한국 호텔롯데 롯데호텔 롯데시티호텔 롯데면세점 제주 롯데DF글로벌 롯데DF리테일 롯데월드 김해 롯데워터파크 롯데월드 아쿠아리움 롯데월드 키즈파크 롯데호텔부산 롯데JTB 롯데물산 인천종합버스터미널 석유·화학·건설·제조한국 롯데케미칼 롯데MCC 롯데미쓰이화학 롯데베르살리스엘라스토머스 롯데정밀화학 롯데BP화학 롯데첨단소재 롯데건설 롯데렌탈 (롯데렌터카) 롯데알미늄 롯데기공 캐논코리아비즈니스솔루션 한국후지필름 금융한국 롯데카드 롯데멤버스 롯데캐피탈 마이비카드 이비카드 (캐시비) 부산하나로카드 한페이시스 서비스·연구일본 롯데부동산 롯데서비스 롯데그린서비스 한국 롯데정보통신 현대정보기술 롯데피에스넷 롯데스카이힐C.C. 대홍기획 모비쟆미디어 엠허브 롯데자산개발 롯데수원역쇼핑타운 유니버셜자산관리 롯데송도쇼핑타운 롯데인천개발 롯데인천타운 롯데김해개발 롯데몰 롯데 피트인 롯데글로벌로지스 에스앤에스인터내셔날 롯데중앙연구소 롯데인재개발원 롯데미래전략센터 사회·문화·교육한국 롯데장학재단 롯데복지재단 롯데삼동복지재단 스포츠일본 지바롯데마린스 한국 롯데자이언츠 이전 계열사한국 롯데대산유화 KP케미칼 롯데제약 기린식품 롯데브랑제리 롯데전자 롯데주류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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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신경계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추신경계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추신경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뇌 2.중추신경계통 3.척수 중추신경계통(中樞神經系統, 영어: central nervous system; CNS)은 중추신경계라고도 부르며 두개골에 싸여있는 뇌와 척수를 포함하는 신경계로 말초신경계통(Peripheral Nervous System; PNS)과 함께 동물의 행동이나 신체 기작을 제어한다. 척추동물의 중추신경계통은 배아시기 관찰되는 속이 빈 등쪽 신경삭으로부터 유래하며 이와 같은 특징은 척삭동물의 계통적 특징이다. 목차 1 뇌 2 척수 3 진화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뇌입니다. 뇌는 발생학적으로는 신경관의 앞쪽이 부풀어서 발달한 것으로, 대뇌·간뇌·중뇌·소뇌·연수의 5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연수의 끝은 척수와 연결되어 있다. 호흡, 순환, 심장박동, 소화 등의 생명활동과 직결된 작용을 조절하는 부위인 중뇌, 뇌교, 연수를 묶어서 뇌간(brain stem)이라고 한다. 뇌의 각 부분의 발달 정도는 동물의 진화 정도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행동을 하는 동물의 종에 따라서도 차이를 볼 수 있다. 대뇌는 기억과 판단 등을 관장하는 정신활동의 중추이며 또한 감각과 수의운동의 중추로서, 대부분의 행동을 통합하고 조절하는 기능을 하는 고등 정신 작용의 중추이다. 그 작용은 신경 세포체가 모인 회백질에서 일어나는데, 대뇌의 단면을 보면 바깥쪽 부분(피질)은 회백색, 속부분(수질)은 백색을 띠고 있어서 회백색 부분은 '회백질', 백색 부분은 '백질'이라고 한다. 회백질부는 신경 세포체가 많이 모여 있고, 백질부는 축색 돌기가 많은 부분이다. 대뇌피질은 감각영역과 연합영역,운동영역으로 나뉘며 감각영역은 구심성뉴런을 통한 일반감각과 특수감각을 인지한다. 운동영역의 경우 크게 두가지 경로로 나뉘며 추체로와 뇌간로가 이에 속한다. 전자의 경우 다듬어지지않은 운동형태로 나타나며 아주 기본적으로 설계된 운동을 수행한다.뇌간로에서는 이와같은 운동을 정교하고 세심하게 교정하는데 주변환경과 감정적 요소들을 고려한다.연합영역은 위의 두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말하며 보통은 감각과 운동영역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소뇌는 뇌교와 연수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뇌 반구로 덮여있다. 소뇌는 신체와 대뇌 운동영역의 중계자 역할을 하며 몸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중추이며, 약 120g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소뇌의 주요 기능은 신체 각부의 수의근의 수축과 이완을 조절하는 역할과 자세와 평형감각 정보를 받아들여 신체의 평형을 조정한다. 한편, 운동학습 기능이 있어 연습이나 훈련에 의한 운동패턴을 기억하여 숙련된 운동에 대하여는 대뇌피질의 명령이 아닌 소뇌가 직접 주관하여 말초조직에 명령을 전달한다. 간뇌는 중뇌의 앞쪽으로 이어져 좌우 대뇌 반구 사이에 위치하며, 항상성을 유지하는 작용을 하는 자율신경계와 내분비계의 중추이다. 시상, 시상상부 및 시상하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시상하부는 자율신경계의 최고 중추이다. 시상상부는 성과 생식계의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대표적으로 송과체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송과체는 성선의 조기발육을 억제하는 호르몬을 분비한다.뇌간에는 중뇌,뇌교,연수가 포함된다.중뇌는 뇌교와 소뇌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구의 운동을 조절하며, 소뇌와 함께 자세 유지에 관여한다.뇌교는 중뇌와 연수 사이에 위치해 연결한다.연수에는 침분비·기침·재채기의 반사·호흡·순환 운동 등의 조절 중추가 있다. 또, 연수에는 대뇌의 좌우 반구에서 나가는 신경 섬유(수의 운동에 관한 신경)의 80% 정도가 교차된다. 나머지 20%는 척수 내에서 교차하므로, 대뇌의 우반구는 몸의 좌반신을, 좌반구는 우반신을 지배하게 된다. 척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척수입니다. 척수는 연수에 이어진 신경 중추로서 척추 속에 들어 있다. 척수는 대뇌와는 반대로, 바깥쪽(피질)이 백질, 안쪽(수질)은 H자 모양의 회백질로 되어 있다. 백질은 주로 축색 돌기(신경 섬유)로 이루어지며, 회백질은 신경 세포체가 모여 있어서 시냅스는 이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척수의 백질에서는 배쪽과 등쪽에서 좌우 1쌍의 척수 신경이 갈라져 나오는데, 배쪽으로 나온 신경은 전근(복근)으로서 운동 신경으로 되어 있고, 등쪽으로 나온 신경은 후근(배근)으로서 감각 신경으로 되어 있다. 전근과 후근은 척추 안에서 하나가 되고, 척추를 나와 각각 근육이나 감각기에 분포한다. 척수는 뇌와 감각 기관이나 근육 등에 분포하는 말초 신경 사이를 연락하는 작용 외에, 무조건 반사의 중추로서 연수·간뇌 등의 지배를 받아 땀·젖분비 및 배변·배뇨 등의 작용을 하고 무릎 반사에도 관계한다. 진화[편집] 해면동물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신경계를 가지고 있지만, 편형동물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필요로 하게 되어 두화가 일어나게되며 신경세포들이 개체의 앞쪽으로 집중되어 뇌와 신경삭을 이루게 되었다. 관상 신경계는 원색동물인 창고기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뇌와 척수가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척추동물 가운데 원구류 이상인 동물에서이다. 원구류 먹장어 등의 원구류의 경우, 연수는 다른 척추동물의 것과 비슷하고, 또 중뇌·간뇌·단뇌(端腦) 및 후구 등도 구별되지만 소뇌는 형성되어 있지 않든가 있어도 아주 작다. 연골어류 연골어류의 상어류에서는 후각기의 발달과 더불어 단뇌(후엽)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또 소뇌도 현저하게 발달되어 있다. 간뇌나 중뇌는 뇌의 등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경골어류 경골어류는 생활 양식에 따라 뇌의 발달도 다양하다. 단뇌는 대부분이 후각의 중추로 후뇌 또는 후엽이라 불리며, 후구·후색 등의 돌기물이 분화되는 것도 있다. 특히, 간뇌의 하면에는 뇌하수체나 혈맥층이라 불리는 구조가 있는데, 혈맥층은 혈관이 많은 부속물로 수압에 의해 수심을 감지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양서류 양서류는 계통적으로는 어류보다도 발달한 동물이지만, 뇌의 발달면에서는 오히려 원시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뇌는 고등한 척추 동물의 기본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등쪽 부분에는 대뇌 피질로 발달된 조직이 나타나 있다. 단뇌의 대부분은 후각 중추이나, 배쪽 부분에는 대뇌핵이 길게 발달되어 있어서 후각 이외의 각종 구심성 회로의 중추 역할을 한다. 소뇌는 동물에 따라 다르지만, 개구리 등에서는 평형 감각의 발달과 함께 소뇌도 잘 발달되어 있다. 파충류 파충류는 소뇌가 작은 것이 특징적이다. 중뇌는 시각과 관계되는 시엽(視葉)과, 그 뒤쪽에 청각에 관계되는 1쌍의 융기가 생김으로써 '사구체(四丘體)'라고 하는 구조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단뇌는 양서류보다 더욱 발달되는데, 포유류에서 볼 수 있는 신피질의 근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뇌핵과 구피질과의 구별도 뚜렷해져 처음으로 뇌실을 가진 대뇌 반구가 나타난다. 조류 조류는 전뇌, 즉 대뇌·간뇌가 두드러지게 발달되는데, 이것은 대뇌핵의 선상체가 발달한 것으로, 피질은 파충류에 비해 그다지 진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물을 잘 보므로 시엽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여, 간뇌의 양쪽에 튀어나오게 된다. 포유류 포유류에는 다른 척추동물에 비해 대뇌가 현저하게 발달되어 있다. 대뇌 이하의 부분, 즉 간뇌·중뇌·연수는 '뇌간'이라 하여 대뇌와 구별한다. 대뇌는 고등 동물일수록 잘 발달하며, 그 대부분은 대뇌 피질로 되어 있다. 대뇌의 표면에는 주름이 있는데, 고등한 동물일수록 주름이 많아진다. 간뇌는 대뇌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는데, 간뇌의 시상(視床)도 대뇌 피질의 발달에 따라 현저하게 발달한다. 소뇌는 대뇌에서 뇌간을 통하여 척수로 연결되는 신경으로부터 옆으로 빠져나와 있는 것으로, 대뇌처럼 좌우 양반구로 나뉘어 있다. 소뇌도 대뇌가 발달함에 따라 신소뇌에 의한 소뇌 반구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2차적으로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같이 보기[편집] 말초신경계통 참고 자료[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중추신경계통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신경계통중추신경계통 뇌척수막척수뇌: 마름뇌(숨뇌, 다리뇌, 소뇌) 중간뇌 앞뇌(사이뇌, 대뇌) 말초신경계통몸신경계통 감각신경 운동신경 뇌신경 척수신경 자율신경계통 교감신경계통 부교감신경계통 창자신경계통 전거 통제 GND: 4067637-7 NDL: 0098965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중추신경계통&oldid=23864031" 분류: 신경계통신경과학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ܐܪܡܝܐঅসমীয়া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Taqbaylit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atinaLingála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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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신경계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추신경계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추신경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뇌 2.중추신경계통 3.척수 중추신경계통(中樞神經系統, 영어: central nervous system; CNS)은 중추신경계라고도 부르며 두개골에 싸여있는 뇌와 척수를 포함하는 신경계로 말초신경계통(Peripheral Nervous System; PNS)과 함께 동물의 행동이나 신체 기작을 제어한다. 척추동물의 중추신경계통은 배아시기 관찰되는 속이 빈 등쪽 신경삭으로부터 유래하며 이와 같은 특징은 척삭동물의 계통적 특징이다. 목차 1 뇌 2 척수 3 진화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뇌입니다. 뇌는 발생학적으로는 신경관의 앞쪽이 부풀어서 발달한 것으로, 대뇌·간뇌·중뇌·소뇌·연수의 5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연수의 끝은 척수와 연결되어 있다. 호흡, 순환, 심장박동, 소화 등의 생명활동과 직결된 작용을 조절하는 부위인 중뇌, 뇌교, 연수를 묶어서 뇌간(brain stem)이라고 한다. 뇌의 각 부분의 발달 정도는 동물의 진화 정도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행동을 하는 동물의 종에 따라서도 차이를 볼 수 있다. 대뇌는 기억과 판단 등을 관장하는 정신활동의 중추이며 또한 감각과 수의운동의 중추로서, 대부분의 행동을 통합하고 조절하는 기능을 하는 고등 정신 작용의 중추이다. 그 작용은 신경 세포체가 모인 회백질에서 일어나는데, 대뇌의 단면을 보면 바깥쪽 부분(피질)은 회백색, 속부분(수질)은 백색을 띠고 있어서 회백색 부분은 '회백질', 백색 부분은 '백질'이라고 한다. 회백질부는 신경 세포체가 많이 모여 있고, 백질부는 축색 돌기가 많은 부분이다. 대뇌피질은 감각영역과 연합영역,운동영역으로 나뉘며 감각영역은 구심성뉴런을 통한 일반감각과 특수감각을 인지한다. 운동영역의 경우 크게 두가지 경로로 나뉘며 추체로와 뇌간로가 이에 속한다. 전자의 경우 다듬어지지않은 운동형태로 나타나며 아주 기본적으로 설계된 운동을 수행한다.뇌간로에서는 이와같은 운동을 정교하고 세심하게 교정하는데 주변환경과 감정적 요소들을 고려한다.연합영역은 위의 두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말하며 보통은 감각과 운동영역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소뇌는 뇌교와 연수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뇌 반구로 덮여있다. 소뇌는 신체와 대뇌 운동영역의 중계자 역할을 하며 몸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중추이며, 약 120g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소뇌의 주요 기능은 신체 각부의 수의근의 수축과 이완을 조절하는 역할과 자세와 평형감각 정보를 받아들여 신체의 평형을 조정한다. 한편, 운동학습 기능이 있어 연습이나 훈련에 의한 운동패턴을 기억하여 숙련된 운동에 대하여는 대뇌피질의 명령이 아닌 소뇌가 직접 주관하여 말초조직에 명령을 전달한다. 간뇌는 중뇌의 앞쪽으로 이어져 좌우 대뇌 반구 사이에 위치하며, 항상성을 유지하는 작용을 하는 자율신경계와 내분비계의 중추이다. 시상, 시상상부 및 시상하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시상하부는 자율신경계의 최고 중추이다. 시상상부는 성과 생식계의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대표적으로 송과체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송과체는 성선의 조기발육을 억제하는 호르몬을 분비한다.뇌간에는 중뇌,뇌교,연수가 포함된다.중뇌는 뇌교와 소뇌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구의 운동을 조절하며, 소뇌와 함께 자세 유지에 관여한다.뇌교는 중뇌와 연수 사이에 위치해 연결한다.연수에는 침분비·기침·재채기의 반사·호흡·순환 운동 등의 조절 중추가 있다. 또, 연수에는 대뇌의 좌우 반구에서 나가는 신경 섬유(수의 운동에 관한 신경)의 80% 정도가 교차된다. 나머지 20%는 척수 내에서 교차하므로, 대뇌의 우반구는 몸의 좌반신을, 좌반구는 우반신을 지배하게 된다. 척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척수입니다. 척수는 연수에 이어진 신경 중추로서 척추 속에 들어 있다. 척수는 대뇌와는 반대로, 바깥쪽(피질)이 백질, 안쪽(수질)은 H자 모양의 회백질로 되어 있다. 백질은 주로 축색 돌기(신경 섬유)로 이루어지며, 회백질은 신경 세포체가 모여 있어서 시냅스는 이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척수의 백질에서는 배쪽과 등쪽에서 좌우 1쌍의 척수 신경이 갈라져 나오는데, 배쪽으로 나온 신경은 전근(복근)으로서 운동 신경으로 되어 있고, 등쪽으로 나온 신경은 후근(배근)으로서 감각 신경으로 되어 있다. 전근과 후근은 척추 안에서 하나가 되고, 척추를 나와 각각 근육이나 감각기에 분포한다. 척수는 뇌와 감각 기관이나 근육 등에 분포하는 말초 신경 사이를 연락하는 작용 외에, 무조건 반사의 중추로서 연수·간뇌 등의 지배를 받아 땀·젖분비 및 배변·배뇨 등의 작용을 하고 무릎 반사에도 관계한다. 진화[편집] 해면동물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신경계를 가지고 있지만, 편형동물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필요로 하게 되어 두화가 일어나게되며 신경세포들이 개체의 앞쪽으로 집중되어 뇌와 신경삭을 이루게 되었다. 관상 신경계는 원색동물인 창고기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뇌와 척수가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척추동물 가운데 원구류 이상인 동물에서이다. 원구류 먹장어 등의 원구류의 경우, 연수는 다른 척추동물의 것과 비슷하고, 또 중뇌·간뇌·단뇌(端腦) 및 후구 등도 구별되지만 소뇌는 형성되어 있지 않든가 있어도 아주 작다. 연골어류 연골어류의 상어류에서는 후각기의 발달과 더불어 단뇌(후엽)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또 소뇌도 현저하게 발달되어 있다. 간뇌나 중뇌는 뇌의 등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경골어류 경골어류는 생활 양식에 따라 뇌의 발달도 다양하다. 단뇌는 대부분이 후각의 중추로 후뇌 또는 후엽이라 불리며, 후구·후색 등의 돌기물이 분화되는 것도 있다. 특히, 간뇌의 하면에는 뇌하수체나 혈맥층이라 불리는 구조가 있는데, 혈맥층은 혈관이 많은 부속물로 수압에 의해 수심을 감지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양서류 양서류는 계통적으로는 어류보다도 발달한 동물이지만, 뇌의 발달면에서는 오히려 원시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뇌는 고등한 척추 동물의 기본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등쪽 부분에는 대뇌 피질로 발달된 조직이 나타나 있다. 단뇌의 대부분은 후각 중추이나, 배쪽 부분에는 대뇌핵이 길게 발달되어 있어서 후각 이외의 각종 구심성 회로의 중추 역할을 한다. 소뇌는 동물에 따라 다르지만, 개구리 등에서는 평형 감각의 발달과 함께 소뇌도 잘 발달되어 있다. 파충류 파충류는 소뇌가 작은 것이 특징적이다. 중뇌는 시각과 관계되는 시엽(視葉)과, 그 뒤쪽에 청각에 관계되는 1쌍의 융기가 생김으로써 '사구체(四丘體)'라고 하는 구조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단뇌는 양서류보다 더욱 발달되는데, 포유류에서 볼 수 있는 신피질의 근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뇌핵과 구피질과의 구별도 뚜렷해져 처음으로 뇌실을 가진 대뇌 반구가 나타난다. 조류 조류는 전뇌, 즉 대뇌·간뇌가 두드러지게 발달되는데, 이것은 대뇌핵의 선상체가 발달한 것으로, 피질은 파충류에 비해 그다지 진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물을 잘 보므로 시엽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여, 간뇌의 양쪽에 튀어나오게 된다. 포유류 포유류에는 다른 척추동물에 비해 대뇌가 현저하게 발달되어 있다. 대뇌 이하의 부분, 즉 간뇌·중뇌·연수는 '뇌간'이라 하여 대뇌와 구별한다. 대뇌는 고등 동물일수록 잘 발달하며, 그 대부분은 대뇌 피질로 되어 있다. 대뇌의 표면에는 주름이 있는데, 고등한 동물일수록 주름이 많아진다. 간뇌는 대뇌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는데, 간뇌의 시상(視床)도 대뇌 피질의 발달에 따라 현저하게 발달한다. 소뇌는 대뇌에서 뇌간을 통하여 척수로 연결되는 신경으로부터 옆으로 빠져나와 있는 것으로, 대뇌처럼 좌우 양반구로 나뉘어 있다. 소뇌도 대뇌가 발달함에 따라 신소뇌에 의한 소뇌 반구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2차적으로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같이 보기[편집] 말초신경계통 참고 자료[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중추신경계통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신경계통중추신경계통 뇌척수막척수뇌: 마름뇌(숨뇌, 다리뇌, 소뇌) 중간뇌 앞뇌(사이뇌, 대뇌) 말초신경계통몸신경계통 감각신경 운동신경 뇌신경 척수신경 자율신경계통 교감신경계통 부교감신경계통 창자신경계통 전거 통제 GND: 4067637-7 NDL: 0098965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중추신경계통&oldid=23864031" 분류: 신경계통신경과학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ܐܪܡܝܐঅসমীয়া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Taqbaylit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atinaLingála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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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과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대 그리스의 과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플라톤(좌측)과 아리스토텔레스(우측). 과학사 배경 이론과 사회학 역사학 의사과학 시대별 고대 문화 고대 그리스 중세 르네상스 과학 혁명 낭만주의 문화별 아프리카 비잔티움 중국 인도 중세 이슬람 자연 과학 천문학 생물학 식물학 진화학 생태학 고생물학 화학 지질학 물리학 지구물리학 수학 대수학 미적분학 조합학 기하학 논리학 확률 통계학 삼각법 사회 과학 인류학 경제학 지리학 언어학 정치 과학 심리학 사회학 지속 가능성 기술 농과학 컴퓨터 과학 재료 과학 공학 의학 인의학 수의학 해부학 신경과학 신경학 영양학 병리학 약학 연표 포털 분류 v • d • e • h 고대 그리스 전성기의 0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의 관심은 인간의 사회나 윤리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 자연을 이루고 있는 근본 물질이 무엇9이며, 이 물질들이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어 자연 현상을 일으키게 되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보였던 학자들이 있었다. 즉, 보다 더 이전의 신화 시대에 자연 현상을 대체로 초자연적인 존재의 탓으로 돌리던 관습에서 벗어나서, 이들 소크라테스 이전의 학자들은 자연 안에서 자연 현상의 원인 또는 기원을 찾았다. 이런 뜻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자연철학자라 불렀으며, 따라서 자연 철학 또는 과학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간주된다. 목차 1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 2 플라톤 3 아리스토텔레스 4 함께보기 5 참고문헌 6 주해 및 인용자료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편집]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자연철학자로 밀레토스 지역 출신의 탈레스를 꼽았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의 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을 물 위에 떠 있는 땅덩이의 흔들림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이는 이전의 고대인들이 흔히 신의 분노와 같은 초자연적 설명에 그쳤던 자연 현상들의 원인을 자연 안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이어서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으로 구체적인 물질이 아닌 추상적 개념인 ‘무한자’개념을 제시하였으며,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인 ‘공기’이며 만물은 이 공기가 희박해지거나 밀집되면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이들은 물질의 근원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러한 주장을 펼쳤을 것이다. 이들에게 만물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여겨졌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매우 극적으로 표현하였는데,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유명한 문구 속에 이러한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이탈리아 지역인 엘레아 지방 출신인 파르메니데스는 자명해 보이는 만물의 변화를 부정하면서 존재는 유일한 것이고 변화하거나 운동할 수 없는 것이라는 기묘한 명제를 제시했다. 이는 일견 터무니 없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그의 제자인 제논이 도전적으로 제시한 몇 가지 역설[1]들은 변화를 자명한 것으로 보는 인간의 감각 경험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내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을 이루는 근원으로 흙, 물, 불, 공기의 네 ‘뿌리’를 지세했다. 이 뿌리들이 ‘사랑’의 힘으로 결합하여 만물을 이루고, 이들이 분해되면 다시 이 네 종류의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받아들인 ‘4원소설’은 근대 화학이 탄생하기까지 약 2천 년 간 서양인들의 물질관을 지배해 왔다. 그리고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관은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의 우주관, 운동관 등과 결합하여 정연한 자연관의 체계를 이루었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을 계속 쪼개어 나가면 최종적으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에 이르게 된다.’는 원자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물질관에서는 입자들이 무질서하고 기계적인 운동이 가정되고 입자 사이의 진공 개념이 전제되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창조주가 의미 없는 진공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플라톤[편집]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사에 대한 그의 논의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연 철학의 내용을 다룬 대화편인 티마이오스는 중세의 자연철학적 논의뿐만 아니라 근대 및 현대과학의 성격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중세부터 15세기 후반까지도 플라톤의 저작 중 유일하게 널리 알려져 있던 플라톤의 대화편이 바로 티마이오스였는데, 이 책이 기독교의 창조주를 연상하게 하는 우주를 설계해 낸 데미우르고스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기독교의 창조주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데미우르고스는 우주를 만들어 낸 창조주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혼돈 속의 물질에 질서와 조화를 가하여 우주를 다듬어 낸 장인으로 인식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문명권에서의 후세 과학자들은 우주 속에서 창조자의 계획과 목적 그리고 그 창조물이 보여줄 조화와 균형을 찾으려 집착했다. 이 때문에 과학의 역사 곳곳에서 플라톤의 영향이 미쳐있다. 플라톤은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물질로 4원소설을 수용하고, 설계자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여 이 4가지 원소를 만드는 과정을 다소 길게 논한다. 즉, 이들 4원소를 가장 간단한 입체 도형으로 설명하는 기하학적 원소론을 제시한다. 플라톤은 흙은 정육면체, 불은 정사면체, 공기는 정팔면체, 물은 정십이면체라고 주장하면서 흙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원소들은 그들을 이루고 있는 기하학적인 성분들의 이합집산을 통하여 그 구성 성분이 바뀔 수 있는 것으로 그린다. 또한, 그는 가장 완벽한 도형은 원이라 간주하고 천체의 운동은 원운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물질 대신 추상적인 기하학적 도형으로 물질의 근원을 나타낸 플라톤의 태도는,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지각 경험보다는 이성적인 추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칠판 위에 그려진 원은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개념으로서 원과 같이 온전하지 못하며, 따라서 지각 경험보다는 합리적 추론에 근거한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이란 피상적이고 불완전함을 보여주려 했듯이, 플라톤 역시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이란 어차피 불완전한 것임을 말하고자 했다.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는 후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어, 17세기 갈릴레이가 자연 현상을 수학적인 언어로 그려내려는 태도에서 이러한 플라톤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형성 과정에서 하이젠베르크 역시 자신의 물리학적 상상력은 플라톤의 기하학적 물질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편집] 20년 가까이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쓰기 시작한 많은 용어나 개념들을 사용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플라톤의 제자임이 명백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이란 어떠한 사실의 근거가 되는 원인들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달리 설명될 수 없다는 논증이 이루어져야만 참된 지식일 수 있다는 다분히 기하학적인 지식관을 매우 정교한 논리를 통해 펼쳐 나간다.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라는 뜻으로 통틀어서 ‘기관(Organon)’이라고 불렸던 논리학 저술들이 바로 이러한 기하학적 도구가 잘 드러나 있는 글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태도 역시 플라톤의 유산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현상의 원인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지나치게 현상의 물질 원인에 집착하였으며, 플라톤은 지나치게 물질이 지닌 형상 또는 개념에 집착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원인의 이해란 그 자연 현상의 물리적 원인이나 형상뿐만 아니라 그 작용,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러한 현상이 무엇을 이루게 되는가 하는 목적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며, 추구해야 할 지식의 폭을 확장했다. 모든 자연 현상의 원인을 추적해서 설명하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중요한 학자들의 자연관을 분석, 비판해가면서 그 후 2천년 가까이 서양 문명을 주도하는 우주관, 물질관, 변화관을 창현해 낸다. 우선 그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을 받아들인다. 지상의 물질은 이 4가지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중 불과 공기는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질을 지니며, 흙과 물은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본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주는 지구와 이를 중심으로 하여 동심원을 그리며 선회하는 달과 해, 행성들, 항성들 및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천구들로 이루어진다. 하늘 위의 행성이나 항성은 지상의 4가지 원소들과 달리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원을 기리는 원운동을 보이므로 지상의 4가지 원소와는 다른 제5원소라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위로 또는 아래로 움직이는 4원소를 지닌 지상계와 언제나 원운동이나 원운동들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제5원소로 이루어진 천상계라는 두 구조로 이루어진 우주관이 형성되는 셈이다. 그는 또한 플라톤과 달리 물질의 근원인 4원소를 도형이 아닌 성질로 파악하였다. 즉, 그는 따뜻함 - 차가움과 축축함 - 건조함의 두 쌍의 성질을 바탕으로 해서 흙(차가움과 건조함), 물(차가움과 축축함), 공기(따뜻함과 축축함), 불(따뜻함과 건조함) 등 4원소의 성질들을 연결시켰다. 이것으로 그는 물이 가열되면 물의 차가운 성질이 따뜻한 성질에 굴복해서 공기로 변화한다는 식으로 물질의 변화를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운동으로 파악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운동에는 ‘원인 운동’이 있어야 하며, 원인은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지상에서의 운동에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스러운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 운동’이다. 자연스러운 운동은 물체가 지닌 본래의 속성으로, 가벼운 것은 본연의 위치인 위쪽으로 올라가고 무거운 것은 아래쪽 땅으로 내려가는 직선 운동이다. 강제 운동은 반드시 외부에서 운동 원인이 접촉해서 작용하는 것으로 던져진 물체의 운동이 여기에 속한다. 함께보기[편집] 과학사 헬레니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자연과학 참고문헌[편집]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까치, 1998, ISBN 8972911976 로마 기원에서부터 2000년까지, 법문각, 1991 주해 및 인용자료[편집] ↑ 「David C. Lindberg,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에서 “‘날아가는 화살은 과녁에 당도할 수 없다.’는 제논의 역설은 감각을 통해 얻은 상식적인 경험 지식을 논리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vdeh고대 그리스역사 에게 문명 키클라데스 문명 미노스 문명 미케네 문명 그리스 암흑기 그리스 고졸기 그리스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지리 고대 그리스 식민지 다르다넬스 해협 델로스섬 델포이 도리스 로도스섬 마그나 그라이키아 마케도니아 왕국 밀레토스 스파르타 아이올리스 아테나이 안티오케이아 알렉산드리아 에게해 에페소스 에페이로스 올림피아 이오니아 이오니아해 코린토스 크레타 키프로스 테바이 테르모필라이 트로이아 페르가몬 펠로폰네소스반도 폰토스 생활 경제 교육 노예 제도 농업 민주주의 매춘 법률 신화 올림픽 음식 전쟁 종교 철학 축제 포도주 종교 다신교 밀의종교 디오니소스 엘레우시스 오르페우스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사후 세계 인물철학자 고르기아스 데모크리토스 디오게네스 레우키포스 소크라테스 아낙사고라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아리스토텔레스 안티스테네스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엠페도클레스 이암블리코스 제논 (엘레아) 제논 (키티온) 카르네아데스 크라테스 크리시포스 크세노파네스 클레안테스 탈레스 테아노 테오프라스토스 트라시마코스 파르메니데스 포르피리오스 포세이도니오스 프로타고라스 플로티노스 플라톤 피론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히피아스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루키아노스 메난드로스 바킬리데스 사포 소포클레스 스트라본 시모니데스 아라토스 아르케스트라토스 아리스토파네스 아이소포스 아이스킬로스 아폴로도로스 에우리피데스 칼리마코스 크세노폰 테스피스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 플루타르코스 핀다로스 헤로다스 헤로도토스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수학자·과학자 디오판토스 마리노스 메나이크모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타르코스 아폴로니오스 에라토스테네스 에우독소스 에우클레이데스 코논 테오도로스 프톨레마이오스 헤론 히파르코스 히파소스 히파티아 히포크라테스 정치가·웅변가 데모스테네스 레오니다스 리산드로스 리쿠르고스 솔론 아리스티데스 알렉산드로스 알키비아데스 에우메네스 크리티아스 키몬 테미스토클레스 티몰레온 페리클레스 프톨레마이오스 피로스 건축 사모트라키섬의 신전군 아고라 아르테미스 신전 아크로폴리스 제우스 신전 파르테논 신전 헤파이스토스 신전 예술 건축 도자기 문학 연극 음악 조각 주화 과학 과학 기술 수학 의학 천문학 언어 원시 그리스어 미케네어 호메로스 그리스어 고대 그리스어 방언《도리스 로크리스 마케도니아 아르카디아 아이올리스 아티케 이오니아 팜필리아》 코이네 그리스어 문자 선문자 A 선문자 B 그리스 문자 쿠마이 문자 vdeh과학사고대의 과학 고대 그리스의 과학 헬레니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자연과학 중세의 과학 조선 시대의 전통 과학 기술 이슬람 세계의 과학 중세 유럽의 과학 과학 혁명 코페르니쿠스 혁명 고전 역학의 혁명 근대 과학 근대 화학의 성립 물리학의 발전 지질학의 발전 진화와 유전 개념의 변화 과학의 제도화 기술의 발전 동양의 근대 과학 현대 과학 현대물리학 현대 화학 현대 지구과학 현대 생물학 한국의 현대 과학 연관문서 중국의 수학 중세 대학 스콜라 철학 과학학 과학철학 과학 방법론 과학적 방법 박물학 물리학사 천문학의 역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대_그리스의_과학&oldid=22397988" 분류: 고대 그리스의 과학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SuomiFrançaisItalianoLingua Franca NovaNederlandsPortuguês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5일 (토) 10: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고대 그리스의 과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대 그리스의 과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플라톤(좌측)과 아리스토텔레스(우측). 과학사 배경 이론과 사회학 역사학 의사과학 시대별 고대 문화 고대 그리스 중세 르네상스 과학 혁명 낭만주의 문화별 아프리카 비잔티움 중국 인도 중세 이슬람 자연 과학 천문학 생물학 식물학 진화학 생태학 고생물학 화학 지질학 물리학 지구물리학 수학 대수학 미적분학 조합학 기하학 논리학 확률 통계학 삼각법 사회 과학 인류학 경제학 지리학 언어학 정치 과학 심리학 사회학 지속 가능성 기술 농과학 컴퓨터 과학 재료 과학 공학 의학 인의학 수의학 해부학 신경과학 신경학 영양학 병리학 약학 연표 포털 분류 v • d • e • h 고대 그리스 전성기의 0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의 관심은 인간의 사회나 윤리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 자연을 이루고 있는 근본 물질이 무엇9이며, 이 물질들이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어 자연 현상을 일으키게 되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보였던 학자들이 있었다. 즉, 보다 더 이전의 신화 시대에 자연 현상을 대체로 초자연적인 존재의 탓으로 돌리던 관습에서 벗어나서, 이들 소크라테스 이전의 학자들은 자연 안에서 자연 현상의 원인 또는 기원을 찾았다. 이런 뜻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자연철학자라 불렀으며, 따라서 자연 철학 또는 과학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간주된다. 목차 1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 2 플라톤 3 아리스토텔레스 4 함께보기 5 참고문헌 6 주해 및 인용자료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편집]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자연철학자로 밀레토스 지역 출신의 탈레스를 꼽았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의 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을 물 위에 떠 있는 땅덩이의 흔들림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이는 이전의 고대인들이 흔히 신의 분노와 같은 초자연적 설명에 그쳤던 자연 현상들의 원인을 자연 안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이어서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으로 구체적인 물질이 아닌 추상적 개념인 ‘무한자’개념을 제시하였으며,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인 ‘공기’이며 만물은 이 공기가 희박해지거나 밀집되면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이들은 물질의 근원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러한 주장을 펼쳤을 것이다. 이들에게 만물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여겨졌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매우 극적으로 표현하였는데,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유명한 문구 속에 이러한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이탈리아 지역인 엘레아 지방 출신인 파르메니데스는 자명해 보이는 만물의 변화를 부정하면서 존재는 유일한 것이고 변화하거나 운동할 수 없는 것이라는 기묘한 명제를 제시했다. 이는 일견 터무니 없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그의 제자인 제논이 도전적으로 제시한 몇 가지 역설[1]들은 변화를 자명한 것으로 보는 인간의 감각 경험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내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을 이루는 근원으로 흙, 물, 불, 공기의 네 ‘뿌리’를 지세했다. 이 뿌리들이 ‘사랑’의 힘으로 결합하여 만물을 이루고, 이들이 분해되면 다시 이 네 종류의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받아들인 ‘4원소설’은 근대 화학이 탄생하기까지 약 2천 년 간 서양인들의 물질관을 지배해 왔다. 그리고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관은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의 우주관, 운동관 등과 결합하여 정연한 자연관의 체계를 이루었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을 계속 쪼개어 나가면 최종적으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에 이르게 된다.’는 원자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물질관에서는 입자들이 무질서하고 기계적인 운동이 가정되고 입자 사이의 진공 개념이 전제되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창조주가 의미 없는 진공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플라톤[편집]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사에 대한 그의 논의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연 철학의 내용을 다룬 대화편인 티마이오스는 중세의 자연철학적 논의뿐만 아니라 근대 및 현대과학의 성격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중세부터 15세기 후반까지도 플라톤의 저작 중 유일하게 널리 알려져 있던 플라톤의 대화편이 바로 티마이오스였는데, 이 책이 기독교의 창조주를 연상하게 하는 우주를 설계해 낸 데미우르고스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기독교의 창조주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데미우르고스는 우주를 만들어 낸 창조주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혼돈 속의 물질에 질서와 조화를 가하여 우주를 다듬어 낸 장인으로 인식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문명권에서의 후세 과학자들은 우주 속에서 창조자의 계획과 목적 그리고 그 창조물이 보여줄 조화와 균형을 찾으려 집착했다. 이 때문에 과학의 역사 곳곳에서 플라톤의 영향이 미쳐있다. 플라톤은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물질로 4원소설을 수용하고, 설계자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여 이 4가지 원소를 만드는 과정을 다소 길게 논한다. 즉, 이들 4원소를 가장 간단한 입체 도형으로 설명하는 기하학적 원소론을 제시한다. 플라톤은 흙은 정육면체, 불은 정사면체, 공기는 정팔면체, 물은 정십이면체라고 주장하면서 흙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원소들은 그들을 이루고 있는 기하학적인 성분들의 이합집산을 통하여 그 구성 성분이 바뀔 수 있는 것으로 그린다. 또한, 그는 가장 완벽한 도형은 원이라 간주하고 천체의 운동은 원운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물질 대신 추상적인 기하학적 도형으로 물질의 근원을 나타낸 플라톤의 태도는,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지각 경험보다는 이성적인 추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칠판 위에 그려진 원은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개념으로서 원과 같이 온전하지 못하며, 따라서 지각 경험보다는 합리적 추론에 근거한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이란 피상적이고 불완전함을 보여주려 했듯이, 플라톤 역시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이란 어차피 불완전한 것임을 말하고자 했다.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는 후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어, 17세기 갈릴레이가 자연 현상을 수학적인 언어로 그려내려는 태도에서 이러한 플라톤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형성 과정에서 하이젠베르크 역시 자신의 물리학적 상상력은 플라톤의 기하학적 물질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편집] 20년 가까이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쓰기 시작한 많은 용어나 개념들을 사용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플라톤의 제자임이 명백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이란 어떠한 사실의 근거가 되는 원인들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달리 설명될 수 없다는 논증이 이루어져야만 참된 지식일 수 있다는 다분히 기하학적인 지식관을 매우 정교한 논리를 통해 펼쳐 나간다.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라는 뜻으로 통틀어서 ‘기관(Organon)’이라고 불렸던 논리학 저술들이 바로 이러한 기하학적 도구가 잘 드러나 있는 글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태도 역시 플라톤의 유산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현상의 원인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지나치게 현상의 물질 원인에 집착하였으며, 플라톤은 지나치게 물질이 지닌 형상 또는 개념에 집착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원인의 이해란 그 자연 현상의 물리적 원인이나 형상뿐만 아니라 그 작용,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러한 현상이 무엇을 이루게 되는가 하는 목적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며, 추구해야 할 지식의 폭을 확장했다. 모든 자연 현상의 원인을 추적해서 설명하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중요한 학자들의 자연관을 분석, 비판해가면서 그 후 2천년 가까이 서양 문명을 주도하는 우주관, 물질관, 변화관을 창현해 낸다. 우선 그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을 받아들인다. 지상의 물질은 이 4가지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중 불과 공기는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질을 지니며, 흙과 물은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본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주는 지구와 이를 중심으로 하여 동심원을 그리며 선회하는 달과 해, 행성들, 항성들 및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천구들로 이루어진다. 하늘 위의 행성이나 항성은 지상의 4가지 원소들과 달리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원을 기리는 원운동을 보이므로 지상의 4가지 원소와는 다른 제5원소라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위로 또는 아래로 움직이는 4원소를 지닌 지상계와 언제나 원운동이나 원운동들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제5원소로 이루어진 천상계라는 두 구조로 이루어진 우주관이 형성되는 셈이다. 그는 또한 플라톤과 달리 물질의 근원인 4원소를 도형이 아닌 성질로 파악하였다. 즉, 그는 따뜻함 - 차가움과 축축함 - 건조함의 두 쌍의 성질을 바탕으로 해서 흙(차가움과 건조함), 물(차가움과 축축함), 공기(따뜻함과 축축함), 불(따뜻함과 건조함) 등 4원소의 성질들을 연결시켰다. 이것으로 그는 물이 가열되면 물의 차가운 성질이 따뜻한 성질에 굴복해서 공기로 변화한다는 식으로 물질의 변화를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운동으로 파악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운동에는 ‘원인 운동’이 있어야 하며, 원인은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지상에서의 운동에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스러운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 운동’이다. 자연스러운 운동은 물체가 지닌 본래의 속성으로, 가벼운 것은 본연의 위치인 위쪽으로 올라가고 무거운 것은 아래쪽 땅으로 내려가는 직선 운동이다. 강제 운동은 반드시 외부에서 운동 원인이 접촉해서 작용하는 것으로 던져진 물체의 운동이 여기에 속한다. 함께보기[편집] 과학사 헬레니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자연과학 참고문헌[편집]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까치, 1998, ISBN 8972911976 로마 기원에서부터 2000년까지, 법문각, 1991 주해 및 인용자료[편집] ↑ 「David C. Lindberg,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에서 “‘날아가는 화살은 과녁에 당도할 수 없다.’는 제논의 역설은 감각을 통해 얻은 상식적인 경험 지식을 논리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vdeh고대 그리스역사 에게 문명 키클라데스 문명 미노스 문명 미케네 문명 그리스 암흑기 그리스 고졸기 그리스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지리 고대 그리스 식민지 다르다넬스 해협 델로스섬 델포이 도리스 로도스섬 마그나 그라이키아 마케도니아 왕국 밀레토스 스파르타 아이올리스 아테나이 안티오케이아 알렉산드리아 에게해 에페소스 에페이로스 올림피아 이오니아 이오니아해 코린토스 크레타 키프로스 테바이 테르모필라이 트로이아 페르가몬 펠로폰네소스반도 폰토스 생활 경제 교육 노예 제도 농업 민주주의 매춘 법률 신화 올림픽 음식 전쟁 종교 철학 축제 포도주 종교 다신교 밀의종교 디오니소스 엘레우시스 오르페우스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사후 세계 인물철학자 고르기아스 데모크리토스 디오게네스 레우키포스 소크라테스 아낙사고라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아리스토텔레스 안티스테네스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엠페도클레스 이암블리코스 제논 (엘레아) 제논 (키티온) 카르네아데스 크라테스 크리시포스 크세노파네스 클레안테스 탈레스 테아노 테오프라스토스 트라시마코스 파르메니데스 포르피리오스 포세이도니오스 프로타고라스 플로티노스 플라톤 피론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히피아스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루키아노스 메난드로스 바킬리데스 사포 소포클레스 스트라본 시모니데스 아라토스 아르케스트라토스 아리스토파네스 아이소포스 아이스킬로스 아폴로도로스 에우리피데스 칼리마코스 크세노폰 테스피스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 플루타르코스 핀다로스 헤로다스 헤로도토스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수학자·과학자 디오판토스 마리노스 메나이크모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타르코스 아폴로니오스 에라토스테네스 에우독소스 에우클레이데스 코논 테오도로스 프톨레마이오스 헤론 히파르코스 히파소스 히파티아 히포크라테스 정치가·웅변가 데모스테네스 레오니다스 리산드로스 리쿠르고스 솔론 아리스티데스 알렉산드로스 알키비아데스 에우메네스 크리티아스 키몬 테미스토클레스 티몰레온 페리클레스 프톨레마이오스 피로스 건축 사모트라키섬의 신전군 아고라 아르테미스 신전 아크로폴리스 제우스 신전 파르테논 신전 헤파이스토스 신전 예술 건축 도자기 문학 연극 음악 조각 주화 과학 과학 기술 수학 의학 천문학 언어 원시 그리스어 미케네어 호메로스 그리스어 고대 그리스어 방언《도리스 로크리스 마케도니아 아르카디아 아이올리스 아티케 이오니아 팜필리아》 코이네 그리스어 문자 선문자 A 선문자 B 그리스 문자 쿠마이 문자 vdeh과학사고대의 과학 고대 그리스의 과학 헬레니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자연과학 중세의 과학 조선 시대의 전통 과학 기술 이슬람 세계의 과학 중세 유럽의 과학 과학 혁명 코페르니쿠스 혁명 고전 역학의 혁명 근대 과학 근대 화학의 성립 물리학의 발전 지질학의 발전 진화와 유전 개념의 변화 과학의 제도화 기술의 발전 동양의 근대 과학 현대 과학 현대물리학 현대 화학 현대 지구과학 현대 생물학 한국의 현대 과학 연관문서 중국의 수학 중세 대학 스콜라 철학 과학학 과학철학 과학 방법론 과학적 방법 박물학 물리학사 천문학의 역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대_그리스의_과학&oldid=22397988" 분류: 고대 그리스의 과학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SuomiFrançaisItalianoLingua Franca NovaNederlandsPortuguês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5일 (토) 10: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밀레니엄 개발 목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밀레니엄 개발 목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밀레니엄 개발 목표 (뉴욕) 밀레니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s)는 UN에서 2000년에 채택된 의제로,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을 반으로 줄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목차 1 8대 목표 2 8대 목표별 주요 지표 3 21개 세부 목표 4 같이 보기 5 외부 링크 8대 목표[편집] 절대빈곤 및 기아 근절 보편적 초등 교육 실현 양성평등 및 여성능력의 고양 아동사망률 감소 모성보건 증진 AIDS, 말라리아 등 질병 예방 지속가능한 환경 확보 개발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 구축 8대 목표별 주요 지표[편집] 1일 소득 1.25달러 미만 인구 반감 모든 혜택 부여 모든 교육수준에서 남녀차별 철폐 5세 이하 아동사망률 2/3 감소 산모사망율 3/4 감소 말라리아와 AIDS 확산 저지 안전한 식수와 위생환경 접근 불가능 인구 반감 MDGs 달성을 위한 범지구적 파트너쉽 구축 21개 세부 목표[편집] 1990년에서 2015년까지 하루 1불 이내의 소득으로 생활 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절반으로 감소시킨다 완전하고 생산적인 고용 및 여성과 청년층을 포함한 모두에게 '일다운 일자리'(decent work)를 제공한다. 1990년에서 2015년까지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비율을 절반 수준으로 감소시킨다. 2015년까지 전 세계 모든 남녀 어린이들이 동등하게 초등교육 전 과정을 이수하도록 한다. 2005년까지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에 대한 성별 불균형을 없애고, 2015년까지 모든 수준의 교육에서 성별 균형에 도달한다. 2015년까지 1990년 기준 5세 미만 유아사망률의 2/3를 감소시킨다. 2015년까지 1990년 기준 산모사망률의 3/4를 감소시킨다. 2015년까지 모든 여성이 출산 시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게 한다. 2015년까지 HIV/AIDS 확산을 멈추고 감소세로 돌려놓는다. 2010년까지 HIV/AIDS 치료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 접근권을 이룩한다. 2015년까지 말라리아 및 다른 주요 질병의 발생을 막고 감소세로 전환시킨다. 지속가능 발전의 원칙을 국가 정책과 계획에 통합시키고 유실된 환경자원을 회복시킨다. 생물 다양성 손실을 줄이며 급속도로 진행되는 멸종율을 2010년까지 완화시킨다. 2015년까지 안전한 식수와 기본적인 위생 시설에 접근하지 못하는 인구 비율을 절반으로 줄인다. 2020년까지 빈민가에 거주하는 적어도 1억 명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최빈국의 특별한 요구를 다룬다. 최빈국, 내륙국가, 소규모 도서개발도상국의 특별한 필요를 다룬다. 개방적이고 공정하며 예측가능하고 비차별적인 무역과 금융시스템을 더욱 발전시킨다. 개발도상국의 외채문제를 포괄적으로 취급한다. 제약회사와 협력하여 필수의약품을 개발도상국에 적정가격으로 제공한다. 민간부문과 협력하여 개발도상국이 신기술, 특히 정보통신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같이 보기[편집] 지속가능 개발 목표 외부 링크[편집] 밀레니엄 개발 목표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밀레니엄 개발 목표 vdeh 유엔주요 기구 총회(→ 의장) 안전 보장 이사회(→ 이사국) 경제 사회 이사회 신탁 통치 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사무국 사무총장 사무부총장 주요 본부 뉴욕 (본부) 나이로비 빈 제네바 기금 및 계획 유니세프(UNICEF) 유엔 개발 계획(UNDP) 유엔 난민 기구(UNHCR) 세계 식량 계획(WFP) 유엔 마약 범죄 사무소(UNODC) 유엔 인구 기금(UNFPA) 유엔 무역 개발 회의(UNCTAD) 유엔 환경 계획(UNEP)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사업 기구(UNRWA) 유엔 여성기구(UN Women) 유엔 인간 주거 계획(UN-Habitat) 전문 기구 세계은행(World Bank)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 보건 기구(WHO) 유네스코(UNESCO) 국제 노동 기구(ILO) 식량 농업 기구(FAO) 국제 농업 개발 기금(IFAD) 국제 해사 기구(IMO) 세계 기상 기구(WMO) 세계 지식 재산권 기구(WIPO) 국제 민간 항공 기구(ICAO) 국제 전기 통신 연합(ITU) 유엔 산업 개발 기구(UNIDO) 만국 우편 연합(UPU) 세계 관광 기구(UNWTO) 기타 기구 유엔 에이즈 합동 계획(UNAIDS) 유엔 재해 경감 국제 전략(UNISDR) 유엔 프로젝트 조달 기구(UNOPS) 관련 기구 국제 원자력 기구(IAEA) 세계 무역 기구(WTO)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기구(CTBTO) 화학 무기 금지 기구(OPCW) 국제 형사 재판소(ICC) 국제 무역 센터(ITC) 회원국 정회원 옵서버 역사 국제 연맹 대서양 헌장 연합국 공동 선언 유엔(UN) 회원국 확장의 역사 결의안 총회 결의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관련 항목 유엔 헌장 유엔기 유엔의 날 국제 기념일 유엔 글로벌 콤팩트 유엔 기념 공원 밀레니엄 개발 목표 지속가능 개발 목표 유엔 대학교 이 글은 유엔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밀레니엄_개발_목표&oldid=22362647" 분류: 경제 지표개발빈곤유엔사회경제학공문서숨은 분류: 유엔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Bamanankan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हिन्दी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ҚазақшаLatina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Bahasa Melayu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2일 (수) 17: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예문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예문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예문관(藝文館)은 조선의 행정기관이자 연구기관으로 예조의 속아문이다.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목차 1 기능 2 연혁 3 구성 4 각주 5 같이 보기 기능[편집] 칙령(勅令)[1]과 교명(敎命)[2]을 관장하였으며 봉교 이하의 관원들은 번을 갈라 승지와 함께 궁중에서 숙직하며 조회,조참,상참,수대 등 정례행사와 백관회의 등 기타 중대회의에 참석하여 회의록을 기록,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하여 실록편찬의 자료를 편찬하였다. 요즈음의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해당한다. 연혁[편집] 예문관은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제찬과 사명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으며 뒤에 한사원, 한림원으로 고쳤다. 그후로도 문한서, 사림원, 예문춘추관으로 불리다가 1325년(충숙왕 12년)에 춘추관을 분리하여 예문관으로 하였다.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한림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예문관으로 환원되었으나 1389년(공양왕 1년)에 춘추관과 합하여 다시 예문춘추관으로 개편되어 조선에 이어졌다. 그렇게 조선에서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예문춘추관으로 지속되던 중 1401년(태종 1년)에 춘추관을 분리하여 예문관으로 개편하였다. 그 후 1478년(성종 9년)에 집현전에 의거하여 홍문관과 분리, 개편하여 대우를 극진히하였으나 세종대의 집현전에 이르지 못하였다. 예문관은 이후 1894년(고종 31년)에 갑오개혁 때 경연청(經筵廳)에 병합되었다. 구성[편집] 품계 관직 정원 비고 정1품 영사(領事) 1명 영의정(領議政) 겸직(兼職) 종1품 정2품 대제학(大提學) 1명 겸직(兼職) 종2품 제학(提學) 1명 겸직(兼職) 정3품(당상) 부제학(副提學) 1명 정3품(당하) 직제학(直提學) 1명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겸직(兼職) 종3품 정4품 응교(應敎) 1명 홍문관(弘文館) 관원 겸직(兼職) 종4품 정5품 종5품 정6품 종6품 정7품 봉교(奉敎) 2명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겸임(兼任) 종7품 정8품 대교(待敎) 2명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겸임(兼任) 종8품 정9품 검열(檢閱) 4명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겸임(兼任) 종9품 정4품 응교는 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에서 교리(정5품) 중 뽑아서 겸직함. 각주[편집] ↑ 임금이 관부에 내리는 명령 ↑ 왕비•왕세자•왕세자빈 등을 책봉할때 내리는 훈유문서(가르침과 경계의 글) 같이 보기[편집] vdeh 조선의 통치 기구의정부 / 비변사 승정원 의금부 사헌부 사간원 집현전 규장각 훈련도감 포도청 한성부 개성부 종친부 충훈부 의빈부 돈녕부 봉조하 중추부 내금위 겸사복 오위 경연 이조 충익부 내시부 상서원 종부시 사옹원 내수사 액정서 호조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사섬시 군자감 제용감 사재감 풍저창 광흥창 전함사 평시서 사온서 의영고 장흥고 사포서 양현고 오부 예조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춘추관 승문원 통례원 봉상시 교서관 내의원 예빈시 악학 관습도감 악학도감 장악원 관상감 전의감 사역원 세자시강원 세손강서원 종학 소격서 종묘서 사직서 빙고 전생서 사축서 도화서 혜민서 활인서 귀후서 사학 문소전 연은전 기자전 병조 5위 훈련원 사복시 군기시 전설사 세자익위사 세손위종사 형조 장례원 전옥서 공조 상의원 선공감 수성금화사 전연사 장원서 조지서 전설서 와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예문관&oldid=20120573" 분류: 조선의 행정기관예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11월 22일 (수) 14: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스미다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미다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미다 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미다 구 스미다 구의 위치 한자 표기 墨田区 가나 표기 すみだく 나라 일본 지방 간토 지방 도도부현 도쿄 도 분류코드 13107-5 면적 13.77 km² 인구 269,163명(추계인구,2019년 6월 1일) 스미다 구(일본어: 墨田区)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시타마치(下町)라고 불리는 전쟁 이전부터의 주택 지역이다. 또 프로 스모의 대회가 열리는 료고쿠 국기관(両国国技館)이 있다. 2019년 4월 1일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268,192명으로 집계됐고, 인구 밀도는 19,361km²였다. 면적은 13.77 km²이다. 목차 1 지리 2 지역 2.1 북부(구 무코지마 구(向島区)) 2.2 중앙부(구 혼조 구(本所区)) 2.3 남부(구 혼조 구(本所区)) 3 역사 4 시설·건축물 5 산업 6 교통 6.1 도로 6.2 철도 7 자매 도시 8 출신자 9 참조 10 외부 링크 지리[편집] 스미다 구는 도쿄의 본토 부분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주요 강으로 스미다 강과 아라카와 강이 있으며 구의 경계를 일부를 이룬다. 북쪽으로 아다치 구, 북서쪽으로 아라카와 구, 동쪽으로 가쓰시카 구, 남동쪽으로 에도가와 구, 서쪽으로 다이토 구, 남서쪽으로 주오 구, 남쪽으로 고토 구와 접한다. 지역[편집] 북부(구 무코지마 구(向島区))[편집] 스미다(墨田) 쓰쓰미도리(堤通) 히가시스미다(東墨田) 야히로(八広) 히가시무코지마(東向島) 다치바나(立花) 분카(文花) 교지마(京島) 오시아게(押上) 중앙부(구 혼조 구(本所区))[편집] 아즈마바시(吾妻橋) 히가시코마가타(東駒形) 혼조(本所) 나리히라(業平) 요코카와(横川) 남부(구 혼조 구(本所区))[편집] 요코아미(横網) 료고쿠(両国) 치토세(千歳) 이시와라(石原) 가메자와(亀沢) 미도리(緑) 다테카와(立川) 기쿠카와(菊川) 다이헤이(太平) 긴시(錦糸) 고토바시(江東橋) 역사[편집] 1947년 3월 15일에 이전의 혼조 구와 무코지마 구가 합쳐져 성립되었다. 시설·건축물[편집] 아사히 맥주 본사 도쿄 스카이 트리-NHK와 다른 방송국들은 새로운 탑의 건설을 제의하였다. 이것이 완공되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독립 구조로 서있는 탑이자 일본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이 되었다. 2011년에 탑이 완성돼서 본 전역에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이 가능하다. 료고쿠 국기관 에도-도쿄 박물관 아사히 맥주 본사 : 아사히 맥주 본사의 아사히의 불꽃은 1989년 프랑스의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 디자인했다. 아사히 맥주 본사는 도쿄에서 유명한 현대식 건축물 중 하나다.[1] 산업[편집] 도부 철도(본사) 아사히 맥주(본사) 일본담배산업(공장) 라이온(본사) 교통[편집] 도로[편집] 수도고속도로 제6호 무코지마 선: 고마가타 나들목 - 무코지마 나들목 - 쓰쓰미도리 나들목 수도고속도로 제7호 고마쓰가와 선: 긴시초 나들목 국도 제6호선 국도 제4호선 철도[편집] 게이세이 전철 오시아게 선: 오시아게 역 - 게이세이 히키후네 역 - 야히로 역 도쿄 도 교통국 지하철 1호선 아사쿠사 선 : (다이토 구) - 혼조아즈마바시 - 오시아게 지하철 10호선 신주쿠 선: 기쿠카와 역 지하철 12호선 오에도 선: 료고쿠 역 도쿄 지하철 11호선 한조몬 선: 긴시초 역 - 오시아게 역 동일본 여객철도 소부 본선: 료고쿠 역 - 긴시초 역 도부 철도 이세사키 선: 나리히라바시 역 - 히키후네 역 - 히가시무코지마 역 - 가네가후치 역, 오시아게 역 - 히키후네 역 가메이도 선: 히가시아즈마 역 - 오무라이 역 - 히키후네 역 자매 도시[편집] 서대문구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2003년 10월 3일 - ) 스징산 구 ( 중국 베이징, 1997년 12월 13일 - ) 출신자[편집] 가쓰시카 호쿠사이 가쓰 가이슈 참조[편집] ↑ Bolstad, Max. Asahi Beer Hall. bento.com Tokyo Architecture Review, 1998. Accessed 2016-09-19.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스미다구 (일본어/영어) 공식 홈페이지 (한국어) 스미다 구 관광 vdeh도쿄도의 행정 구역도쿄 23구 신주쿠구 가쓰시카구 고토구 기타구 나카노구 네리마구 다이토구 도시마구 메구로구 미나토구 분쿄구 세타가야구 스기나미구 스미다구 시나가와구 시부야구 아다치구 아라카와구 에도가와구 오타구 이타바시구 주오구 지요다구 다마 지역시부 고가네이시 고다이라시 고마에시 고쿠분지시 구니타치시 기요세시 니시토쿄시 다마시 다치카와시 마치다시 무사시노시 무사시무라야마시 미타카시 아키루노시 아키시마시 오메시 이나기시 조후시 하무라시 하치오지시 후추시 훗사시 히가시무라야마시 히가시야마토시 히가시쿠루메시 히노시 니시타마군 미즈호정 오쿠타마정 히노데정 히노하라촌 도서부오시마 지청 오시마정 고즈시마촌 니지마촌 도시마촌 미야케 지청 미야케촌 미쿠라지마촌 하치조 지청 하치조정 아오가시마촌 오가사와라 지청오가사와라촌 전거 통제 VIAF: 254403225 NDL: 0026357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미다구&oldid=24496098" 분류: 스미다구도쿄도의 구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cèhالعربيةمصرى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CatalàCebuano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贛語GalegoKreyòl ayisyen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8일 (금) 21: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로어노크 식민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어노크 식민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로어노크 식민지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는 현재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데어 카운티 지역에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에게 칙허를 받은 월터 롤리 경의 주도로 최초로 건설된 유럽 식민지이다. 월터 롤리 경은 1583년 뉴펀들랜드의 세인트 존스의 식민지를 개척하려다가 익사한 배다른 형제인 험프리 길버트 경의 칙허를 이어받았으며, 먼 친척이자 그의 대리인이었던 랠프 래인과 리처드 그렌빌을 통해 세부적 계획을 실천하려 하였다.[1] 존 화이트에 의해 노스캐롤라이나주 로어노크 섬에 개척되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1585년에서 1587년 여러 무리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려 시도를 했지만, 거주지를 버리거나 죽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섬의 주민들은 영국-스페인 전쟁(1585년) 동안 보급을 받지 못했으며, 존 화이트가 식량과 물품을 조달 받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3년간에 흔적없이 사라져 잃어버린 로어노크 식민지라고 부른다. 목차 1 롤리의 개발권 획득 2 최초의 개척자 3 두 번째 개척자 3.1 화이트의 잉글랜드 귀환 4 토머스 해리엇 5 로어노크 탐문 조사 6 로어노크 식민지 실종에 대한 가설 6.1 현지 부족과의 통합 6.2 다른 이론 6.2.1 체서피언족 6.2.2 해상조난, 기아 6.2.3 스페인인 6.2.4 데어 스톤즈 6.2.5 버지니아 파즈 지도 6.2.6 고고학적 증거 6.2.7 잃어버린 식민지 DNA 프로젝트 6.2.8 기후 요인 7 로어노크의 실종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롤리의 개발권 획득[편집] 월터 롤리 경 1584년 3월 5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월터 롤리 경에게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땅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칙허를 허가했다. 이 칙허는 롤리가 10년 이내에 북아메리카에 개척지를 건설할 것을 요구했고, 그것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권리는 사라진다고 규정되어 있었다.[2]:9 롤리와 여왕은 이 사업으로 신세계에서 부를 이끌어 내고, 보물을 실은 스페인 함대에 해적선을 보내 습격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3]:135 롤리 자신이 직접 북미를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1595년과 1617년, 남미 오리노코 강 유역의 습지에서 전설의 엘도라도를 찾아 탐사 원정대를 이끈 바 있다. 1584년, 롤리는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에서 적절한 개척지를 탐사하기 위해서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 원정대는 필립 아마다스와 아서 버로우가 지휘했으며,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 뱅크스를 선택했다. 거기에서는 남쪽으로 개척지를 가지고 있는 스페인을 습격할 수도 있었고, 토착 민족인 캐롤라이나 알곤킨 어족의 크로아탄 부족과 접촉할 수도 있는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최초의 개척자[편집] 1584년 4월 27일, 월터 롤리 경은 북미 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필립 아마다스와 아서 바로우가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7월 4일 로어노크 섬에 도달하였고[2]:32, 이내 현지의 서코탄과 코로아토안 인디언과 교류 관계를 맺었다. 바로우는 만테오와 완치즈라는 이름을 가진 2명의 코로아탄 인디언을 데리고 귀환했다.[2]:44–45 그들은 그 지역의 정치적 관계와 지리를 롤리 경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 정보에 근거하여, 롤리 경은 리처드 그렌빌 경이 이끄는 두 번째 탐사대를 조직했다. 그렌빌은 자신이 타고 있던 타이거호(Tiger)와 로벅호(Roebuck), 레드 라이언(Red Lion), 엘리자베스호(Elizabeth)와 도로시호(Dorothy)를 이끌고 1585년 4월 9일 플리머스를 출발했다. 불행하게도 투르투갈 해안 근처에서 심한 폭풍을 만나 타이거호는 나머지 함대들과 떨어지게 되었다.[2]:57 선장들은 우발적인 사태를 만난다면 푸에르토리코에서 재회하기로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타이거호는 5월 11일 머스키토 만[4](과야닐리 만)에 도착하였다. 다른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렌빌은 그곳의 스페인인들과 친교를 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약탈을 했으며[2]:62, 요새도 구축했다.[5]:91 그 요새가 만들어진 직후 엘리자베스호가 도착했으며, 결국 그렌빌은 나머지 배를 기다리다 지쳐서 6월 7일 다시 출발을 하였다. 요새는 폐기되었으며, 현재 그 위치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6월 26일, 타이거호가 오크라콕 만을 항해하다가 여울에 부딪쳐 대부분의 보급품을 유실하게 된다.[2]:63 탐사대는 배를 수리를 하고, 7월 초에 로벅호와 도로시호와 재회를 하게 되는데 두 배모두 아우터 뱅크에 미리 도착을 해 있었다. 레드 라이언호도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도중에 승객을 내려주고는 약탈을 하기 위해 뉴펀들랜드로 떠났다.[2]:64 본토 해안과 그곳에 있는 원주민 거주지를 초도 탐사한 이후에, 아쿠아스코콕 마을의 원주민들은 은잔을 훔쳤다고 욕을 먹었다. 그 보복으로 마을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2]:72 월터 롤리 경 등을 포함한 여러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잉글랜드의 작가이자, 궁정 관료였던 리처드 하클룻에 의해 편찬된 당시의 최초의 로어노크 항해 보고서 또한 이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6](하클룻 자신이 직접 신세계를 여행한 적은 없다.) 이 사고와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렌빌은 1586년 4월에 추가 인원과 보급품을 가지고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노아노크 섬의 북단에 랠프 레인과 107명을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남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585년 4월 17일 하선을 했다.[7] 레인은 섬에 작은 요새를 세우고, 주변 지역에 대한 탐사를 하게 했다. 현존하는 로어노크 요새에 대한 그림은 남아있지 않지만, 과야닐라 만에 존속했던 요새와 구조가 유사할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1586년 4월이 저물 무렵에도 그렌빌의 구호선이 당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편 6월에, 마을의 파괴로 인해 야기된 증오는 요새에 대한 습격에 불을 붙였으며, 식민지 개척자들은 습격을 물리치지 못했다.[8]:5 그 습격 직후, 프랜시스 드래이크경이 카리브해에서 성공적인 해적질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서 야금술사인 조아킴 간스를 포함한 일행들을 잉글랜드로 되돌려보내 주기로 제안을 했고, 그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귀향 항로 중에 로어노크 개척민들은 담배와 옥수수 그리고 감자를 가지고 왔다.[8]:5 구호 함대는 그래이크 일행이 개척민들과 떠난 직후 도착했다. 식민지가 버려진 것을 발견하고서 그렌빌은 로어노크 섬에 대한 롤리 경의 영유권을 주장을 보호하기위해서, 또한 잉글랜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규모 분견대만 남기로 같이 간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두 번째 개척자[편집] 북미에서 탄생환 최초의 잉글랜드계 어린이 버지니아 데어의 세례, 석판화, 1880 1587년, 롤리 경은 체사피크 만에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 115명의 새로운 개척민을 파견했다. 이들을 이끈 이는 이전의 로어노크 탐사에 동행했던 예술가이자, 롤리 경의 친구였던 존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이후 지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롤리는 로어노크 개척지에서 도움을 줄 12명의 보좌관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우선 로어노크로 가서 그렌빌의 사병들을 모으라고 명령을 받았지만, 1587년 7월 22일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잉글랜드 요새를 지켰던 한 명의 유해로 추정되는 해골 한 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6] 그들은 당시 새로운 식민지를 돕는데 이 병력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그렌빌의 병력이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6] 함대 사령관 시몬 페르난데스는 그들이 로어노크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식민지 정착민들을 배에 싣고 귀환하는 것을 거부했다.[5]:215 그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동기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화이트는 크로아탄 부족들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으며, 전년에 전투를 벌였던 랄프 레인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적의에 가득한 부족들은 그들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 직후, 식민지 개척민 조지 하우가 알베말 만에서 게잡이를 하려 홀로 탐사를 하다가 한 인디언에게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120–23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개척민들은 화이트 지사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설득한다.[9]:120–23 잔여한 개척민들은 대서양을 건너서 온 남녀와 미국 땅에서 최초로 출생한 잉글랜드인이었던 화이트의 손녀까지 모두 115명이었다.[10]:19 화이트의 잉글랜드 귀환[편집] 화이트는 1587년 말 잉글랜드로 향행했다. 그 시기에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페르난데스가 좀처럼 귀환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처럼 상당히 위험했다.[11] 구조선 계획은 겨울에 돌아가기를 거부한 선장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무적함대와 교전에 동원된 잉글랜드 배들로 인해 로어노크로 돌아갈 수 있는 여분의 배들의 남아 있지 않았다.[3]:125–26 크로아탄이라는 글자의 발견 스페인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3년동안 재보급 시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사략선 원정대를 데리고, 카리브해에서 돌아 오는 길에 로어노크 섬 앞바다에 들를 수 있는 약속을 받아냈다. 화이트는 손녀의 3번째 생일인 1590년 8월 18일 로어노크 섬에 상륙했지만, 개척지는 버려져 있었다. 그의 대원들도 남자 90명, 여자 17명, 어린이 11명의 개척민들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3]:130–33 실종에대한 유일한 단서는 마을 둘러 친 울타리 기둥 위에 새겨진 ‘크로아토안’라는 글자였으며, ‘크로’는 나무 근처에 새겨져 있었다. 모든 주택과 요새는 허물어져 있었고, 이것은 그들이 서둘러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식민지를 떠나기 전에, 화이트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강제로 떠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몰타 십자를 나무 근처에 새겨두게 지시했다.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이것을 그들이 크로아토안 섬(현재의 해터러스 섬)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는 수색을 진행할 수 없었다. 큰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었으며, 그의 병력들도 더 이상의 진행을 거부했고 다음 날 그들은 길을 떠났다.[3]:130–33 토머스 해리엇[편집] 1560년생인 토머스 해리엇은 롤리 경의 고용인으로 1580년대 초반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이후 들어왔다. 그가 최초의 항해에 동반하지는 않았지만, 해리엇은 1584년 식민지 탐사대에 아서 바로우의 군인으로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롤리 경의 1차 로어노크 탐사대의 인원들에게 항해법을 교육했고, 결국에는 로어노크에 두 번째 개척대로 항해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박물학자로 화가들과 개척민들의 지도자인 존 화이트와 함께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12] 그들이 로어노크에 도착한 1585년 4월부터, 그들이 떠나게 된 1586년 7월까지, 해리엇과 화이트 모두 로어노크 지역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했다. 해리엇과 함께 샘플과 노트를 여러권의 노트로 만들었지만, 식민지의 실종으로 남아있지 못했다. 그러나 해리엇도 주변 지역의 식생에 대한 세부내용을 기록했으며, 그것은 그가 편찬한 《버지니아의 새롭게 발견된 땅에 대한 짧고, 사실적인 보고서》(A Brief and True Report of the New Found Land of Virginia)로 남아있다. 이것은 원래 식민지의 진행사항을 롤리 경의 요청으로 영국 정부에 보고할 내용이었다. 현대 사학자들은 이것을 홍보자료로 여기고 있으며, 이 기록은 해리엇의 야생생물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식민지가 사라졌을 무렵의 인디언 활동에 대한 그림으로 인해 로어노크 역사에 상당히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12] 해리엇의 보고서에는 로어노크 인디언과 잉글랜드 개척민들과의 사이가 상호 조용하고, 건설적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로어노크 인디언과 롤리의 사령관, 리처드 그렌빌과 그의 후계자인 랄프 레인 모두 유혈 투쟁을 나타내는 다른 역사적 증거들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해리엇의 잉글랜드에 보낸 그의 보고서에서 이러한 정황들을 거의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렌빌 또는 레인의 토지보유권 하의 혼란스런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들은 더 많은 정착민들이 로어노크를 얻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리엇의 보고서는 1588년이 되어서야 잉글랜드나 잉글랜드의 출판사에 남겨졌으며, 이때는 잃어버린 식민지의 운명이 이름을 빼고는 총체적인 상황이 숨겨져 있었다.[12] 로어노크 탐문 조사[편집] 재건된 롤리 요새 국립사적지 12년이 흐른 뒤, 롤리 경은 그의 식민지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알아내고자 했다. 새뮤얼 메이스가 탐사대를 이끌었으며, 이 1602년 탐사는 롤리 경이 직접 배를 구매하였고, 약탈을 막기 위해 선원들의 임금을 보전해 주기로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항해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나 롤리 경은 여전히 그 여행으로 돈을 벌고자 했으며, 메이스의 선단은 향나무나 잉글랜드로 가져오면 돈이되는 사사프러스와 같은 식물들을 채집하고자 아우터 뱅크스에 상륙을 했다. 그들의 관심을 식민지로 돌릴 수 있게 되었을 즘에 기상이 악화되었고, 로어노크 섬에는 가지도 못하고 귀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롤리 경은 반란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탐사대를 보낼 수 없었다.[3]:134–35 스페인은 식민지를 발견하기는 원하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어노크를 해적 기지로 이용하려는 롤리 경의 계획을 알고서, 스페인은 로어노크를 파괴하기를 원했다. 게다가, 그곳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 부정확한 보고를 얻고 있었으며, 실제보다 식민지 개척이 훨씬 잘 되었을거라고 상상했다.[3]:135–37 1590년, 그들은 아주 우연히 식민지의 잔해를 발견했지만, 주요 본거지의 외곽에 만들어 둔 지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본거지가 체사피크 만 지역(존 화이트가 예정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스페인 전쟁으로 화이트가 적절한 때 돌아오지 못하자, 신대륙에 있었던 스페인 당국은 그러한 모험을 할만한 충분한 지원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3]:135–37 로어노크 식민지 실종에 대한 가설[편집] 1587년 실종된 식민지의 끝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잃어버린 식민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식민지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생겨났다. 주류가 된 가설은 그들이 지역의 크로아탄 족 또는 핫테라스 족 또는 다른 알곤 족 인디언에 의해 분산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주민과 동화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현지 부족과의 통합[편집] 프랜시스 넬슨의 지도, 1607년경 2000년 사학자 리 밀러는 저서 《로어노크: 잃어버린 식민지의 미스테리 풀기》(Roanoke: Solving the Mystery of the Lost Colony)라는 책에서 잃어버린 식민지의 일부 생존자들이 제임스타운 식민지에 의해 만도아그(적 부족에게 흔히 부여된 알곤킨 명칭)로 밝혀진 다른 인디언 부족들에게 습격을 당한 초와노크 부족에게 피난처를 구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만도아그 부족은 이로쿼이 어를 말하는[13]:45 부족인 투스카로라나 와이노크로 알려진 이노 족이라고 믿어지고 있다.[10]:255–56 소위 주니가 지도(Zuniga Map,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에게 이 지도를 확보하여 건네 준 잉글랜드에 파견된 스페인 대사 페드로 드 주니가의 이름을 딴)는 약 1607년 제임스타운의 개척민 프랜시스 넬슨에 의해 그려졌으며, 이것 또한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이 지도는 "루녹에서 온 옷을 입을 네 남자"가 누스 강의 이로쿼이 족 지역에 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책임자 윌리엄 스트라치는 1612년 페카리카닉과 오차나호엔 인디언 정착촌에서 쓴 《영국령 버지니아 여행의 역사》(The historie of travaile into Virginia Britannia)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돌 벽을 가진 2층의 가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 인디언들은 로어노크 정착민들로부터 그런 기술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4]:222 또한 동일한 시기에 여러 인디언 거주지에서 유럽인 포로들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10]:250 1612년 스트라치는 리타녹에 있는 에노 족 정착촌에서 에야노코라고 불리는 추장의 보호 하에 있는 4명의 잉글랜드인 성인 남성과 2명의 소년, 1명의 소녀가 목격되었다고 전했다. F. 로이 존슨의 저서 《진실과 전설 속의 잃어버린 식민지》에서 공동 저자 토마스 C. 패러 모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1610년까지 타스카로라 족 국가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들의 일부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인상적이다. 1608 년에 제임스타운의 개척자 프랜시스 넬슨가 그린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내륙 지도는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증거이다. 다른 이론[편집] 체서피언족[편집] 사학자 데이빗 비어즈 퀸은 식민지 전체가 이주를 하고, 이후 파괴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존 스미스 선장과 제임스타운 개척민들이 1607년 정착을 했을 때,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 중 하나는 로어노크 개척민들의 위치를 찾는 것이었다. 웨로안스 부족의 추장 포우하탄은 스미스 선장에게 버지니아에 기반을 둔 포우하탄 연맹에 대해 말을 했으며, 제임스타운 개척민들이 도착하기 전에 포우하탄 연맹에 가맹을 거부한[15]:21–24 오늘 날의 사우스 햄든가 외곽 지역의 동부에 살고 있었던 체서피언 부족들과 함께 때문에 로어노크 개척민들을 쓸어버렸다고 말을 했다. 그들이 그의 제국을 파괴하기 위해 봉기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말했다.[16]:101 해상조난, 기아[편집]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는 식민지 개척민들이 단순히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힘으로 잉글랜드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러한 시도를 하다가 자멸했다는 것이있다. 1587년 화이트 주지사가 출발할 때, 해안 탐사 또는 식민지 본토에 이주를 위하여 1척의 핀네스(소형 범선)와 몇 척의 소형 선박을 남겨두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인[편집] 또 다른 이론은 스페인이 식민지를 파괴했다는 것이있다. 로어노크 이전 시대에, 스페인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 찰스 요새에 있던 프랑스 식민지의 흔적을 파괴했다. 또한 현재 플로리다 잭슨빌에 있던 카로리누 요새의 주민을 학살했다. 하지만 화이트가 식민지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10년 후 1600년이 되어도, 스페인은 잉글랜드 실패한 식민지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이론의 가능성은 희박하다.[3]:137 데어 스톤즈[편집]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한 무더기의 암석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버지니아 데어의 어머니였던 엘레노어 데어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을 했다. 이 돌에는 식민지의 여행과 그들의 최후에 대해 말해 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것들을 사기라고 믿고 있지만, 오늘 날에도 이 돌들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학자들도 일부 있다.[17] 버지니아 파즈 지도[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고고학적 증거[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잃어버린 식민지 DNA 프로젝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기후 요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로어노크의 실종[편집] 2010 개봉 영화 '베니싱'의 소재가 된 실화 같이 보기[편집] 버지니아 식민지 각주[편집] ↑ “Charter to Sir Walter Raleigh, March 25, 1584”. 흐로닝언 대학교. 2013년 1월 5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Quinn, David B. (1985년 2월). 《Set Fair for Roanoke: Voyages and Colonies, 1584–1606》. UNC Press Books. ISBN 978-0-8078-4123-5. 2011년 7월 3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Kupperman, Karen Ordahl (1984년 1월 25일). 《Roanoke, The Abandoned Colony》. Rowman & Littlefield. ISBN 978-0-8476-7339-1.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Teacher Handbook to Roanoke Revisited”. 《Fort Raleigh National Historic Site》.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2011년 7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Milton, Giles (2001년 10월 19일). 《Big Chief Elizabeth: The Adventures and Fate of the First English Colonists in America》. Macmillan. ISBN 978-0-312-42018-5.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Blacker, Irwin (1965). 《Hakluyt's Voyages: The Principle Navigations Voyages Traffiques & Discoveries of the English Nation》. 뉴욕: The Viking Press. 522쪽. ↑ Lane, Ralph. “The Account by Ralph Lane. An account of the particularities of the imployments of the English men left in Roanoke by Richard Greenevill under the charge of Master Ralph Lane Generall of the same, from the 17. of August 1585. until the 18. of June 1586. at which time they departed the Countrey; sent and directed to Sir Walter Ralegh.”. 《Old South Leaflets (General Series) ; No. 119.》. 노스캐롤라인 대학교 at Chapel Hill. 2011년 1월 17일에 확인함. ↑ 가 나 Fleming, Walter Lynwood (1909). 《The South in the Building of the Nation: History of the States》. The Southern historical publication society.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Grizzard, Frank E.; Smith, D. Boyd (2007). 《제임스타운 식민지: A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History》. ABC-CLIO. ISBN 978-1-85109-637-4.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Miller, Lee (2000). 《Roanoke: Solving the Mystery of the Lost Colony》. Arcade Publishing. ISBN 978-1-55970-584-4.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Neville, John D. “The John White Colony”. 국립공원국. 2008년 10월 8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Harriot,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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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어노크 식민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어노크 식민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로어노크 식민지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는 현재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데어 카운티 지역에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에게 칙허를 받은 월터 롤리 경의 주도로 최초로 건설된 유럽 식민지이다. 월터 롤리 경은 1583년 뉴펀들랜드의 세인트 존스의 식민지를 개척하려다가 익사한 배다른 형제인 험프리 길버트 경의 칙허를 이어받았으며, 먼 친척이자 그의 대리인이었던 랠프 래인과 리처드 그렌빌을 통해 세부적 계획을 실천하려 하였다.[1] 존 화이트에 의해 노스캐롤라이나주 로어노크 섬에 개척되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1585년에서 1587년 여러 무리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려 시도를 했지만, 거주지를 버리거나 죽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섬의 주민들은 영국-스페인 전쟁(1585년) 동안 보급을 받지 못했으며, 존 화이트가 식량과 물품을 조달 받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3년간에 흔적없이 사라져 잃어버린 로어노크 식민지라고 부른다. 목차 1 롤리의 개발권 획득 2 최초의 개척자 3 두 번째 개척자 3.1 화이트의 잉글랜드 귀환 4 토머스 해리엇 5 로어노크 탐문 조사 6 로어노크 식민지 실종에 대한 가설 6.1 현지 부족과의 통합 6.2 다른 이론 6.2.1 체서피언족 6.2.2 해상조난, 기아 6.2.3 스페인인 6.2.4 데어 스톤즈 6.2.5 버지니아 파즈 지도 6.2.6 고고학적 증거 6.2.7 잃어버린 식민지 DNA 프로젝트 6.2.8 기후 요인 7 로어노크의 실종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롤리의 개발권 획득[편집] 월터 롤리 경 1584년 3월 5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월터 롤리 경에게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땅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칙허를 허가했다. 이 칙허는 롤리가 10년 이내에 북아메리카에 개척지를 건설할 것을 요구했고, 그것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권리는 사라진다고 규정되어 있었다.[2]:9 롤리와 여왕은 이 사업으로 신세계에서 부를 이끌어 내고, 보물을 실은 스페인 함대에 해적선을 보내 습격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3]:135 롤리 자신이 직접 북미를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1595년과 1617년, 남미 오리노코 강 유역의 습지에서 전설의 엘도라도를 찾아 탐사 원정대를 이끈 바 있다. 1584년, 롤리는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에서 적절한 개척지를 탐사하기 위해서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 원정대는 필립 아마다스와 아서 버로우가 지휘했으며,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 뱅크스를 선택했다. 거기에서는 남쪽으로 개척지를 가지고 있는 스페인을 습격할 수도 있었고, 토착 민족인 캐롤라이나 알곤킨 어족의 크로아탄 부족과 접촉할 수도 있는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최초의 개척자[편집] 1584년 4월 27일, 월터 롤리 경은 북미 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필립 아마다스와 아서 바로우가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7월 4일 로어노크 섬에 도달하였고[2]:32, 이내 현지의 서코탄과 코로아토안 인디언과 교류 관계를 맺었다. 바로우는 만테오와 완치즈라는 이름을 가진 2명의 코로아탄 인디언을 데리고 귀환했다.[2]:44–45 그들은 그 지역의 정치적 관계와 지리를 롤리 경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 정보에 근거하여, 롤리 경은 리처드 그렌빌 경이 이끄는 두 번째 탐사대를 조직했다. 그렌빌은 자신이 타고 있던 타이거호(Tiger)와 로벅호(Roebuck), 레드 라이언(Red Lion), 엘리자베스호(Elizabeth)와 도로시호(Dorothy)를 이끌고 1585년 4월 9일 플리머스를 출발했다. 불행하게도 투르투갈 해안 근처에서 심한 폭풍을 만나 타이거호는 나머지 함대들과 떨어지게 되었다.[2]:57 선장들은 우발적인 사태를 만난다면 푸에르토리코에서 재회하기로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타이거호는 5월 11일 머스키토 만[4](과야닐리 만)에 도착하였다. 다른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렌빌은 그곳의 스페인인들과 친교를 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약탈을 했으며[2]:62, 요새도 구축했다.[5]:91 그 요새가 만들어진 직후 엘리자베스호가 도착했으며, 결국 그렌빌은 나머지 배를 기다리다 지쳐서 6월 7일 다시 출발을 하였다. 요새는 폐기되었으며, 현재 그 위치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6월 26일, 타이거호가 오크라콕 만을 항해하다가 여울에 부딪쳐 대부분의 보급품을 유실하게 된다.[2]:63 탐사대는 배를 수리를 하고, 7월 초에 로벅호와 도로시호와 재회를 하게 되는데 두 배모두 아우터 뱅크에 미리 도착을 해 있었다. 레드 라이언호도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도중에 승객을 내려주고는 약탈을 하기 위해 뉴펀들랜드로 떠났다.[2]:64 본토 해안과 그곳에 있는 원주민 거주지를 초도 탐사한 이후에, 아쿠아스코콕 마을의 원주민들은 은잔을 훔쳤다고 욕을 먹었다. 그 보복으로 마을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2]:72 월터 롤리 경 등을 포함한 여러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잉글랜드의 작가이자, 궁정 관료였던 리처드 하클룻에 의해 편찬된 당시의 최초의 로어노크 항해 보고서 또한 이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6](하클룻 자신이 직접 신세계를 여행한 적은 없다.) 이 사고와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렌빌은 1586년 4월에 추가 인원과 보급품을 가지고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노아노크 섬의 북단에 랠프 레인과 107명을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남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585년 4월 17일 하선을 했다.[7] 레인은 섬에 작은 요새를 세우고, 주변 지역에 대한 탐사를 하게 했다. 현존하는 로어노크 요새에 대한 그림은 남아있지 않지만, 과야닐라 만에 존속했던 요새와 구조가 유사할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1586년 4월이 저물 무렵에도 그렌빌의 구호선이 당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편 6월에, 마을의 파괴로 인해 야기된 증오는 요새에 대한 습격에 불을 붙였으며, 식민지 개척자들은 습격을 물리치지 못했다.[8]:5 그 습격 직후, 프랜시스 드래이크경이 카리브해에서 성공적인 해적질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서 야금술사인 조아킴 간스를 포함한 일행들을 잉글랜드로 되돌려보내 주기로 제안을 했고, 그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귀향 항로 중에 로어노크 개척민들은 담배와 옥수수 그리고 감자를 가지고 왔다.[8]:5 구호 함대는 그래이크 일행이 개척민들과 떠난 직후 도착했다. 식민지가 버려진 것을 발견하고서 그렌빌은 로어노크 섬에 대한 롤리 경의 영유권을 주장을 보호하기위해서, 또한 잉글랜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규모 분견대만 남기로 같이 간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두 번째 개척자[편집] 북미에서 탄생환 최초의 잉글랜드계 어린이 버지니아 데어의 세례, 석판화, 1880 1587년, 롤리 경은 체사피크 만에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 115명의 새로운 개척민을 파견했다. 이들을 이끈 이는 이전의 로어노크 탐사에 동행했던 예술가이자, 롤리 경의 친구였던 존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이후 지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롤리는 로어노크 개척지에서 도움을 줄 12명의 보좌관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우선 로어노크로 가서 그렌빌의 사병들을 모으라고 명령을 받았지만, 1587년 7월 22일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잉글랜드 요새를 지켰던 한 명의 유해로 추정되는 해골 한 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6] 그들은 당시 새로운 식민지를 돕는데 이 병력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그렌빌의 병력이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6] 함대 사령관 시몬 페르난데스는 그들이 로어노크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식민지 정착민들을 배에 싣고 귀환하는 것을 거부했다.[5]:215 그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동기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화이트는 크로아탄 부족들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으며, 전년에 전투를 벌였던 랄프 레인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적의에 가득한 부족들은 그들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 직후, 식민지 개척민 조지 하우가 알베말 만에서 게잡이를 하려 홀로 탐사를 하다가 한 인디언에게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120–23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개척민들은 화이트 지사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설득한다.[9]:120–23 잔여한 개척민들은 대서양을 건너서 온 남녀와 미국 땅에서 최초로 출생한 잉글랜드인이었던 화이트의 손녀까지 모두 115명이었다.[10]:19 화이트의 잉글랜드 귀환[편집] 화이트는 1587년 말 잉글랜드로 향행했다. 그 시기에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페르난데스가 좀처럼 귀환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처럼 상당히 위험했다.[11] 구조선 계획은 겨울에 돌아가기를 거부한 선장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무적함대와 교전에 동원된 잉글랜드 배들로 인해 로어노크로 돌아갈 수 있는 여분의 배들의 남아 있지 않았다.[3]:125–26 크로아탄이라는 글자의 발견 스페인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3년동안 재보급 시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사략선 원정대를 데리고, 카리브해에서 돌아 오는 길에 로어노크 섬 앞바다에 들를 수 있는 약속을 받아냈다. 화이트는 손녀의 3번째 생일인 1590년 8월 18일 로어노크 섬에 상륙했지만, 개척지는 버려져 있었다. 그의 대원들도 남자 90명, 여자 17명, 어린이 11명의 개척민들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3]:130–33 실종에대한 유일한 단서는 마을 둘러 친 울타리 기둥 위에 새겨진 ‘크로아토안’라는 글자였으며, ‘크로’는 나무 근처에 새겨져 있었다. 모든 주택과 요새는 허물어져 있었고, 이것은 그들이 서둘러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식민지를 떠나기 전에, 화이트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강제로 떠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몰타 십자를 나무 근처에 새겨두게 지시했다.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이것을 그들이 크로아토안 섬(현재의 해터러스 섬)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는 수색을 진행할 수 없었다. 큰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었으며, 그의 병력들도 더 이상의 진행을 거부했고 다음 날 그들은 길을 떠났다.[3]:130–33 토머스 해리엇[편집] 1560년생인 토머스 해리엇은 롤리 경의 고용인으로 1580년대 초반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이후 들어왔다. 그가 최초의 항해에 동반하지는 않았지만, 해리엇은 1584년 식민지 탐사대에 아서 바로우의 군인으로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롤리 경의 1차 로어노크 탐사대의 인원들에게 항해법을 교육했고, 결국에는 로어노크에 두 번째 개척대로 항해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박물학자로 화가들과 개척민들의 지도자인 존 화이트와 함께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12] 그들이 로어노크에 도착한 1585년 4월부터, 그들이 떠나게 된 1586년 7월까지, 해리엇과 화이트 모두 로어노크 지역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했다. 해리엇과 함께 샘플과 노트를 여러권의 노트로 만들었지만, 식민지의 실종으로 남아있지 못했다. 그러나 해리엇도 주변 지역의 식생에 대한 세부내용을 기록했으며, 그것은 그가 편찬한 《버지니아의 새롭게 발견된 땅에 대한 짧고, 사실적인 보고서》(A Brief and True Report of the New Found Land of Virginia)로 남아있다. 이것은 원래 식민지의 진행사항을 롤리 경의 요청으로 영국 정부에 보고할 내용이었다. 현대 사학자들은 이것을 홍보자료로 여기고 있으며, 이 기록은 해리엇의 야생생물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식민지가 사라졌을 무렵의 인디언 활동에 대한 그림으로 인해 로어노크 역사에 상당히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12] 해리엇의 보고서에는 로어노크 인디언과 잉글랜드 개척민들과의 사이가 상호 조용하고, 건설적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로어노크 인디언과 롤리의 사령관, 리처드 그렌빌과 그의 후계자인 랄프 레인 모두 유혈 투쟁을 나타내는 다른 역사적 증거들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해리엇의 잉글랜드에 보낸 그의 보고서에서 이러한 정황들을 거의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렌빌 또는 레인의 토지보유권 하의 혼란스런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들은 더 많은 정착민들이 로어노크를 얻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리엇의 보고서는 1588년이 되어서야 잉글랜드나 잉글랜드의 출판사에 남겨졌으며, 이때는 잃어버린 식민지의 운명이 이름을 빼고는 총체적인 상황이 숨겨져 있었다.[12] 로어노크 탐문 조사[편집] 재건된 롤리 요새 국립사적지 12년이 흐른 뒤, 롤리 경은 그의 식민지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알아내고자 했다. 새뮤얼 메이스가 탐사대를 이끌었으며, 이 1602년 탐사는 롤리 경이 직접 배를 구매하였고, 약탈을 막기 위해 선원들의 임금을 보전해 주기로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항해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나 롤리 경은 여전히 그 여행으로 돈을 벌고자 했으며, 메이스의 선단은 향나무나 잉글랜드로 가져오면 돈이되는 사사프러스와 같은 식물들을 채집하고자 아우터 뱅크스에 상륙을 했다. 그들의 관심을 식민지로 돌릴 수 있게 되었을 즘에 기상이 악화되었고, 로어노크 섬에는 가지도 못하고 귀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롤리 경은 반란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탐사대를 보낼 수 없었다.[3]:134–35 스페인은 식민지를 발견하기는 원하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어노크를 해적 기지로 이용하려는 롤리 경의 계획을 알고서, 스페인은 로어노크를 파괴하기를 원했다. 게다가, 그곳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 부정확한 보고를 얻고 있었으며, 실제보다 식민지 개척이 훨씬 잘 되었을거라고 상상했다.[3]:135–37 1590년, 그들은 아주 우연히 식민지의 잔해를 발견했지만, 주요 본거지의 외곽에 만들어 둔 지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본거지가 체사피크 만 지역(존 화이트가 예정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스페인 전쟁으로 화이트가 적절한 때 돌아오지 못하자, 신대륙에 있었던 스페인 당국은 그러한 모험을 할만한 충분한 지원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3]:135–37 로어노크 식민지 실종에 대한 가설[편집] 1587년 실종된 식민지의 끝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잃어버린 식민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식민지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생겨났다. 주류가 된 가설은 그들이 지역의 크로아탄 족 또는 핫테라스 족 또는 다른 알곤 족 인디언에 의해 분산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주민과 동화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현지 부족과의 통합[편집] 프랜시스 넬슨의 지도, 1607년경 2000년 사학자 리 밀러는 저서 《로어노크: 잃어버린 식민지의 미스테리 풀기》(Roanoke: Solving the Mystery of the Lost Colony)라는 책에서 잃어버린 식민지의 일부 생존자들이 제임스타운 식민지에 의해 만도아그(적 부족에게 흔히 부여된 알곤킨 명칭)로 밝혀진 다른 인디언 부족들에게 습격을 당한 초와노크 부족에게 피난처를 구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만도아그 부족은 이로쿼이 어를 말하는[13]:45 부족인 투스카로라나 와이노크로 알려진 이노 족이라고 믿어지고 있다.[10]:255–56 소위 주니가 지도(Zuniga Map,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에게 이 지도를 확보하여 건네 준 잉글랜드에 파견된 스페인 대사 페드로 드 주니가의 이름을 딴)는 약 1607년 제임스타운의 개척민 프랜시스 넬슨에 의해 그려졌으며, 이것 또한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이 지도는 "루녹에서 온 옷을 입을 네 남자"가 누스 강의 이로쿼이 족 지역에 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책임자 윌리엄 스트라치는 1612년 페카리카닉과 오차나호엔 인디언 정착촌에서 쓴 《영국령 버지니아 여행의 역사》(The historie of travaile into Virginia Britannia)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돌 벽을 가진 2층의 가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 인디언들은 로어노크 정착민들로부터 그런 기술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4]:222 또한 동일한 시기에 여러 인디언 거주지에서 유럽인 포로들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10]:250 1612년 스트라치는 리타녹에 있는 에노 족 정착촌에서 에야노코라고 불리는 추장의 보호 하에 있는 4명의 잉글랜드인 성인 남성과 2명의 소년, 1명의 소녀가 목격되었다고 전했다. F. 로이 존슨의 저서 《진실과 전설 속의 잃어버린 식민지》에서 공동 저자 토마스 C. 패러 모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1610년까지 타스카로라 족 국가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들의 일부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인상적이다. 1608 년에 제임스타운의 개척자 프랜시스 넬슨가 그린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내륙 지도는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증거이다. 다른 이론[편집] 체서피언족[편집] 사학자 데이빗 비어즈 퀸은 식민지 전체가 이주를 하고, 이후 파괴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존 스미스 선장과 제임스타운 개척민들이 1607년 정착을 했을 때,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 중 하나는 로어노크 개척민들의 위치를 찾는 것이었다. 웨로안스 부족의 추장 포우하탄은 스미스 선장에게 버지니아에 기반을 둔 포우하탄 연맹에 대해 말을 했으며, 제임스타운 개척민들이 도착하기 전에 포우하탄 연맹에 가맹을 거부한[15]:21–24 오늘 날의 사우스 햄든가 외곽 지역의 동부에 살고 있었던 체서피언 부족들과 함께 때문에 로어노크 개척민들을 쓸어버렸다고 말을 했다. 그들이 그의 제국을 파괴하기 위해 봉기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말했다.[16]:101 해상조난, 기아[편집]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는 식민지 개척민들이 단순히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힘으로 잉글랜드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러한 시도를 하다가 자멸했다는 것이있다. 1587년 화이트 주지사가 출발할 때, 해안 탐사 또는 식민지 본토에 이주를 위하여 1척의 핀네스(소형 범선)와 몇 척의 소형 선박을 남겨두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인[편집] 또 다른 이론은 스페인이 식민지를 파괴했다는 것이있다. 로어노크 이전 시대에, 스페인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 찰스 요새에 있던 프랑스 식민지의 흔적을 파괴했다. 또한 현재 플로리다 잭슨빌에 있던 카로리누 요새의 주민을 학살했다. 하지만 화이트가 식민지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10년 후 1600년이 되어도, 스페인은 잉글랜드 실패한 식민지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이론의 가능성은 희박하다.[3]:137 데어 스톤즈[편집]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한 무더기의 암석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버지니아 데어의 어머니였던 엘레노어 데어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을 했다. 이 돌에는 식민지의 여행과 그들의 최후에 대해 말해 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것들을 사기라고 믿고 있지만, 오늘 날에도 이 돌들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학자들도 일부 있다.[17] 버지니아 파즈 지도[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고고학적 증거[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잃어버린 식민지 DNA 프로젝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기후 요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로어노크의 실종[편집] 2010 개봉 영화 '베니싱'의 소재가 된 실화 같이 보기[편집] 버지니아 식민지 각주[편집] ↑ “Charter to Sir Walter Raleigh, March 25, 1584”. 흐로닝언 대학교. 2013년 1월 5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Quinn, David B. (1985년 2월). 《Set Fair for Roanoke: Voyages and Colonies, 1584–1606》. UNC Press Books. ISBN 978-0-8078-4123-5. 2011년 7월 3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Kupperman, Karen Ordahl (1984년 1월 25일). 《Roanoke, The Abandoned Colony》. Rowman & Littlefield. ISBN 978-0-8476-7339-1.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Teacher Handbook to Roanoke Revisited”. 《Fort Raleigh National Historic Site》.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2011년 7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Milton, Giles (2001년 10월 19일). 《Big Chief Elizabeth: The Adventures and Fate of the First English Colonists in America》. Macmillan. ISBN 978-0-312-42018-5.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Blacker, Irwin (1965). 《Hakluyt's Voyages: The Principle Navigations Voyages Traffiques & Discoveries of the English Nation》. 뉴욕: The Viking Press. 522쪽. ↑ Lane, Ralph. “The Account by Ralph Lane. An account of the particularities of the imployments of the English men left in Roanoke by Richard Greenevill under the charge of Master Ralph Lane Generall of the same, from the 17. of August 1585. until the 18. of June 1586. at which time they departed the Countrey; sent and directed to Sir Walter Ralegh.”. 《Old South Leaflets (General Series) ; No. 119.》. 노스캐롤라인 대학교 at Chapel Hill. 2011년 1월 17일에 확인함. ↑ 가 나 Fleming, Walter Lynwood (1909). 《The South in the Building of the Nation: History of the States》. The Southern historical publication society.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Grizzard, Frank E.; Smith, D. Boyd (2007). 《제임스타운 식민지: A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History》. ABC-CLIO. ISBN 978-1-85109-637-4.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Miller, Lee (2000). 《Roanoke: Solving the Mystery of the Lost Colony》. Arcade Publishing. ISBN 978-1-55970-584-4.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Neville, John D. “The John White Colony”. 국립공원국. 2008년 10월 8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Harriot,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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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어노크 식민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어노크 식민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로어노크 식민지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는 현재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데어 카운티 지역에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에게 칙허를 받은 월터 롤리 경의 주도로 최초로 건설된 유럽 식민지이다. 월터 롤리 경은 1583년 뉴펀들랜드의 세인트 존스의 식민지를 개척하려다가 익사한 배다른 형제인 험프리 길버트 경의 칙허를 이어받았으며, 먼 친척이자 그의 대리인이었던 랠프 래인과 리처드 그렌빌을 통해 세부적 계획을 실천하려 하였다.[1] 존 화이트에 의해 노스캐롤라이나주 로어노크 섬에 개척되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1585년에서 1587년 여러 무리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려 시도를 했지만, 거주지를 버리거나 죽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섬의 주민들은 영국-스페인 전쟁(1585년) 동안 보급을 받지 못했으며, 존 화이트가 식량과 물품을 조달 받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3년간에 흔적없이 사라져 잃어버린 로어노크 식민지라고 부른다. 목차 1 롤리의 개발권 획득 2 최초의 개척자 3 두 번째 개척자 3.1 화이트의 잉글랜드 귀환 4 토머스 해리엇 5 로어노크 탐문 조사 6 로어노크 식민지 실종에 대한 가설 6.1 현지 부족과의 통합 6.2 다른 이론 6.2.1 체서피언족 6.2.2 해상조난, 기아 6.2.3 스페인인 6.2.4 데어 스톤즈 6.2.5 버지니아 파즈 지도 6.2.6 고고학적 증거 6.2.7 잃어버린 식민지 DNA 프로젝트 6.2.8 기후 요인 7 로어노크의 실종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롤리의 개발권 획득[편집] 월터 롤리 경 1584년 3월 5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월터 롤리 경에게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땅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칙허를 허가했다. 이 칙허는 롤리가 10년 이내에 북아메리카에 개척지를 건설할 것을 요구했고, 그것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권리는 사라진다고 규정되어 있었다.[2]:9 롤리와 여왕은 이 사업으로 신세계에서 부를 이끌어 내고, 보물을 실은 스페인 함대에 해적선을 보내 습격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3]:135 롤리 자신이 직접 북미를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1595년과 1617년, 남미 오리노코 강 유역의 습지에서 전설의 엘도라도를 찾아 탐사 원정대를 이끈 바 있다. 1584년, 롤리는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에서 적절한 개척지를 탐사하기 위해서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 원정대는 필립 아마다스와 아서 버로우가 지휘했으며,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 뱅크스를 선택했다. 거기에서는 남쪽으로 개척지를 가지고 있는 스페인을 습격할 수도 있었고, 토착 민족인 캐롤라이나 알곤킨 어족의 크로아탄 부족과 접촉할 수도 있는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최초의 개척자[편집] 1584년 4월 27일, 월터 롤리 경은 북미 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필립 아마다스와 아서 바로우가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7월 4일 로어노크 섬에 도달하였고[2]:32, 이내 현지의 서코탄과 코로아토안 인디언과 교류 관계를 맺었다. 바로우는 만테오와 완치즈라는 이름을 가진 2명의 코로아탄 인디언을 데리고 귀환했다.[2]:44–45 그들은 그 지역의 정치적 관계와 지리를 롤리 경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 정보에 근거하여, 롤리 경은 리처드 그렌빌 경이 이끄는 두 번째 탐사대를 조직했다. 그렌빌은 자신이 타고 있던 타이거호(Tiger)와 로벅호(Roebuck), 레드 라이언(Red Lion), 엘리자베스호(Elizabeth)와 도로시호(Dorothy)를 이끌고 1585년 4월 9일 플리머스를 출발했다. 불행하게도 투르투갈 해안 근처에서 심한 폭풍을 만나 타이거호는 나머지 함대들과 떨어지게 되었다.[2]:57 선장들은 우발적인 사태를 만난다면 푸에르토리코에서 재회하기로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타이거호는 5월 11일 머스키토 만[4](과야닐리 만)에 도착하였다. 다른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렌빌은 그곳의 스페인인들과 친교를 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약탈을 했으며[2]:62, 요새도 구축했다.[5]:91 그 요새가 만들어진 직후 엘리자베스호가 도착했으며, 결국 그렌빌은 나머지 배를 기다리다 지쳐서 6월 7일 다시 출발을 하였다. 요새는 폐기되었으며, 현재 그 위치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6월 26일, 타이거호가 오크라콕 만을 항해하다가 여울에 부딪쳐 대부분의 보급품을 유실하게 된다.[2]:63 탐사대는 배를 수리를 하고, 7월 초에 로벅호와 도로시호와 재회를 하게 되는데 두 배모두 아우터 뱅크에 미리 도착을 해 있었다. 레드 라이언호도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도중에 승객을 내려주고는 약탈을 하기 위해 뉴펀들랜드로 떠났다.[2]:64 본토 해안과 그곳에 있는 원주민 거주지를 초도 탐사한 이후에, 아쿠아스코콕 마을의 원주민들은 은잔을 훔쳤다고 욕을 먹었다. 그 보복으로 마을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2]:72 월터 롤리 경 등을 포함한 여러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잉글랜드의 작가이자, 궁정 관료였던 리처드 하클룻에 의해 편찬된 당시의 최초의 로어노크 항해 보고서 또한 이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6](하클룻 자신이 직접 신세계를 여행한 적은 없다.) 이 사고와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렌빌은 1586년 4월에 추가 인원과 보급품을 가지고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노아노크 섬의 북단에 랠프 레인과 107명을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남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585년 4월 17일 하선을 했다.[7] 레인은 섬에 작은 요새를 세우고, 주변 지역에 대한 탐사를 하게 했다. 현존하는 로어노크 요새에 대한 그림은 남아있지 않지만, 과야닐라 만에 존속했던 요새와 구조가 유사할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1586년 4월이 저물 무렵에도 그렌빌의 구호선이 당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편 6월에, 마을의 파괴로 인해 야기된 증오는 요새에 대한 습격에 불을 붙였으며, 식민지 개척자들은 습격을 물리치지 못했다.[8]:5 그 습격 직후, 프랜시스 드래이크경이 카리브해에서 성공적인 해적질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서 야금술사인 조아킴 간스를 포함한 일행들을 잉글랜드로 되돌려보내 주기로 제안을 했고, 그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귀향 항로 중에 로어노크 개척민들은 담배와 옥수수 그리고 감자를 가지고 왔다.[8]:5 구호 함대는 그래이크 일행이 개척민들과 떠난 직후 도착했다. 식민지가 버려진 것을 발견하고서 그렌빌은 로어노크 섬에 대한 롤리 경의 영유권을 주장을 보호하기위해서, 또한 잉글랜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규모 분견대만 남기로 같이 간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두 번째 개척자[편집] 북미에서 탄생환 최초의 잉글랜드계 어린이 버지니아 데어의 세례, 석판화, 1880 1587년, 롤리 경은 체사피크 만에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 115명의 새로운 개척민을 파견했다. 이들을 이끈 이는 이전의 로어노크 탐사에 동행했던 예술가이자, 롤리 경의 친구였던 존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이후 지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롤리는 로어노크 개척지에서 도움을 줄 12명의 보좌관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우선 로어노크로 가서 그렌빌의 사병들을 모으라고 명령을 받았지만, 1587년 7월 22일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잉글랜드 요새를 지켰던 한 명의 유해로 추정되는 해골 한 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6] 그들은 당시 새로운 식민지를 돕는데 이 병력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그렌빌의 병력이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6] 함대 사령관 시몬 페르난데스는 그들이 로어노크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식민지 정착민들을 배에 싣고 귀환하는 것을 거부했다.[5]:215 그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동기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화이트는 크로아탄 부족들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으며, 전년에 전투를 벌였던 랄프 레인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적의에 가득한 부족들은 그들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 직후, 식민지 개척민 조지 하우가 알베말 만에서 게잡이를 하려 홀로 탐사를 하다가 한 인디언에게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120–23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개척민들은 화이트 지사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설득한다.[9]:120–23 잔여한 개척민들은 대서양을 건너서 온 남녀와 미국 땅에서 최초로 출생한 잉글랜드인이었던 화이트의 손녀까지 모두 115명이었다.[10]:19 화이트의 잉글랜드 귀환[편집] 화이트는 1587년 말 잉글랜드로 향행했다. 그 시기에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페르난데스가 좀처럼 귀환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처럼 상당히 위험했다.[11] 구조선 계획은 겨울에 돌아가기를 거부한 선장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무적함대와 교전에 동원된 잉글랜드 배들로 인해 로어노크로 돌아갈 수 있는 여분의 배들의 남아 있지 않았다.[3]:125–26 크로아탄이라는 글자의 발견 스페인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3년동안 재보급 시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사략선 원정대를 데리고, 카리브해에서 돌아 오는 길에 로어노크 섬 앞바다에 들를 수 있는 약속을 받아냈다. 화이트는 손녀의 3번째 생일인 1590년 8월 18일 로어노크 섬에 상륙했지만, 개척지는 버려져 있었다. 그의 대원들도 남자 90명, 여자 17명, 어린이 11명의 개척민들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3]:130–33 실종에대한 유일한 단서는 마을 둘러 친 울타리 기둥 위에 새겨진 ‘크로아토안’라는 글자였으며, ‘크로’는 나무 근처에 새겨져 있었다. 모든 주택과 요새는 허물어져 있었고, 이것은 그들이 서둘러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식민지를 떠나기 전에, 화이트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강제로 떠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몰타 십자를 나무 근처에 새겨두게 지시했다.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이것을 그들이 크로아토안 섬(현재의 해터러스 섬)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는 수색을 진행할 수 없었다. 큰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었으며, 그의 병력들도 더 이상의 진행을 거부했고 다음 날 그들은 길을 떠났다.[3]:130–33 토머스 해리엇[편집] 1560년생인 토머스 해리엇은 롤리 경의 고용인으로 1580년대 초반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이후 들어왔다. 그가 최초의 항해에 동반하지는 않았지만, 해리엇은 1584년 식민지 탐사대에 아서 바로우의 군인으로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롤리 경의 1차 로어노크 탐사대의 인원들에게 항해법을 교육했고, 결국에는 로어노크에 두 번째 개척대로 항해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박물학자로 화가들과 개척민들의 지도자인 존 화이트와 함께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12] 그들이 로어노크에 도착한 1585년 4월부터, 그들이 떠나게 된 1586년 7월까지, 해리엇과 화이트 모두 로어노크 지역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했다. 해리엇과 함께 샘플과 노트를 여러권의 노트로 만들었지만, 식민지의 실종으로 남아있지 못했다. 그러나 해리엇도 주변 지역의 식생에 대한 세부내용을 기록했으며, 그것은 그가 편찬한 《버지니아의 새롭게 발견된 땅에 대한 짧고, 사실적인 보고서》(A Brief and True Report of the New Found Land of Virginia)로 남아있다. 이것은 원래 식민지의 진행사항을 롤리 경의 요청으로 영국 정부에 보고할 내용이었다. 현대 사학자들은 이것을 홍보자료로 여기고 있으며, 이 기록은 해리엇의 야생생물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식민지가 사라졌을 무렵의 인디언 활동에 대한 그림으로 인해 로어노크 역사에 상당히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12] 해리엇의 보고서에는 로어노크 인디언과 잉글랜드 개척민들과의 사이가 상호 조용하고, 건설적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로어노크 인디언과 롤리의 사령관, 리처드 그렌빌과 그의 후계자인 랄프 레인 모두 유혈 투쟁을 나타내는 다른 역사적 증거들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해리엇의 잉글랜드에 보낸 그의 보고서에서 이러한 정황들을 거의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렌빌 또는 레인의 토지보유권 하의 혼란스런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들은 더 많은 정착민들이 로어노크를 얻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리엇의 보고서는 1588년이 되어서야 잉글랜드나 잉글랜드의 출판사에 남겨졌으며, 이때는 잃어버린 식민지의 운명이 이름을 빼고는 총체적인 상황이 숨겨져 있었다.[12] 로어노크 탐문 조사[편집] 재건된 롤리 요새 국립사적지 12년이 흐른 뒤, 롤리 경은 그의 식민지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알아내고자 했다. 새뮤얼 메이스가 탐사대를 이끌었으며, 이 1602년 탐사는 롤리 경이 직접 배를 구매하였고, 약탈을 막기 위해 선원들의 임금을 보전해 주기로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항해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나 롤리 경은 여전히 그 여행으로 돈을 벌고자 했으며, 메이스의 선단은 향나무나 잉글랜드로 가져오면 돈이되는 사사프러스와 같은 식물들을 채집하고자 아우터 뱅크스에 상륙을 했다. 그들의 관심을 식민지로 돌릴 수 있게 되었을 즘에 기상이 악화되었고, 로어노크 섬에는 가지도 못하고 귀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롤리 경은 반란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탐사대를 보낼 수 없었다.[3]:134–35 스페인은 식민지를 발견하기는 원하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어노크를 해적 기지로 이용하려는 롤리 경의 계획을 알고서, 스페인은 로어노크를 파괴하기를 원했다. 게다가, 그곳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 부정확한 보고를 얻고 있었으며, 실제보다 식민지 개척이 훨씬 잘 되었을거라고 상상했다.[3]:135–37 1590년, 그들은 아주 우연히 식민지의 잔해를 발견했지만, 주요 본거지의 외곽에 만들어 둔 지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본거지가 체사피크 만 지역(존 화이트가 예정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스페인 전쟁으로 화이트가 적절한 때 돌아오지 못하자, 신대륙에 있었던 스페인 당국은 그러한 모험을 할만한 충분한 지원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3]:135–37 로어노크 식민지 실종에 대한 가설[편집] 1587년 실종된 식민지의 끝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잃어버린 식민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식민지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생겨났다. 주류가 된 가설은 그들이 지역의 크로아탄 족 또는 핫테라스 족 또는 다른 알곤 족 인디언에 의해 분산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주민과 동화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현지 부족과의 통합[편집] 프랜시스 넬슨의 지도, 1607년경 2000년 사학자 리 밀러는 저서 《로어노크: 잃어버린 식민지의 미스테리 풀기》(Roanoke: Solving the Mystery of the Lost Colony)라는 책에서 잃어버린 식민지의 일부 생존자들이 제임스타운 식민지에 의해 만도아그(적 부족에게 흔히 부여된 알곤킨 명칭)로 밝혀진 다른 인디언 부족들에게 습격을 당한 초와노크 부족에게 피난처를 구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만도아그 부족은 이로쿼이 어를 말하는[13]:45 부족인 투스카로라나 와이노크로 알려진 이노 족이라고 믿어지고 있다.[10]:255–56 소위 주니가 지도(Zuniga Map,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에게 이 지도를 확보하여 건네 준 잉글랜드에 파견된 스페인 대사 페드로 드 주니가의 이름을 딴)는 약 1607년 제임스타운의 개척민 프랜시스 넬슨에 의해 그려졌으며, 이것 또한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이 지도는 "루녹에서 온 옷을 입을 네 남자"가 누스 강의 이로쿼이 족 지역에 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책임자 윌리엄 스트라치는 1612년 페카리카닉과 오차나호엔 인디언 정착촌에서 쓴 《영국령 버지니아 여행의 역사》(The historie of travaile into Virginia Britannia)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돌 벽을 가진 2층의 가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 인디언들은 로어노크 정착민들로부터 그런 기술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4]:222 또한 동일한 시기에 여러 인디언 거주지에서 유럽인 포로들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10]:250 1612년 스트라치는 리타녹에 있는 에노 족 정착촌에서 에야노코라고 불리는 추장의 보호 하에 있는 4명의 잉글랜드인 성인 남성과 2명의 소년, 1명의 소녀가 목격되었다고 전했다. F. 로이 존슨의 저서 《진실과 전설 속의 잃어버린 식민지》에서 공동 저자 토마스 C. 패러 모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1610년까지 타스카로라 족 국가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들의 일부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인상적이다. 1608 년에 제임스타운의 개척자 프랜시스 넬슨가 그린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내륙 지도는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증거이다. 다른 이론[편집] 체서피언족[편집] 사학자 데이빗 비어즈 퀸은 식민지 전체가 이주를 하고, 이후 파괴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존 스미스 선장과 제임스타운 개척민들이 1607년 정착을 했을 때,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 중 하나는 로어노크 개척민들의 위치를 찾는 것이었다. 웨로안스 부족의 추장 포우하탄은 스미스 선장에게 버지니아에 기반을 둔 포우하탄 연맹에 대해 말을 했으며, 제임스타운 개척민들이 도착하기 전에 포우하탄 연맹에 가맹을 거부한[15]:21–24 오늘 날의 사우스 햄든가 외곽 지역의 동부에 살고 있었던 체서피언 부족들과 함께 때문에 로어노크 개척민들을 쓸어버렸다고 말을 했다. 그들이 그의 제국을 파괴하기 위해 봉기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말했다.[16]:101 해상조난, 기아[편집]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는 식민지 개척민들이 단순히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힘으로 잉글랜드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러한 시도를 하다가 자멸했다는 것이있다. 1587년 화이트 주지사가 출발할 때, 해안 탐사 또는 식민지 본토에 이주를 위하여 1척의 핀네스(소형 범선)와 몇 척의 소형 선박을 남겨두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인[편집] 또 다른 이론은 스페인이 식민지를 파괴했다는 것이있다. 로어노크 이전 시대에, 스페인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 찰스 요새에 있던 프랑스 식민지의 흔적을 파괴했다. 또한 현재 플로리다 잭슨빌에 있던 카로리누 요새의 주민을 학살했다. 하지만 화이트가 식민지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10년 후 1600년이 되어도, 스페인은 잉글랜드 실패한 식민지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이론의 가능성은 희박하다.[3]:137 데어 스톤즈[편집]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한 무더기의 암석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버지니아 데어의 어머니였던 엘레노어 데어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을 했다. 이 돌에는 식민지의 여행과 그들의 최후에 대해 말해 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것들을 사기라고 믿고 있지만, 오늘 날에도 이 돌들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학자들도 일부 있다.[17] 버지니아 파즈 지도[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고고학적 증거[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잃어버린 식민지 DNA 프로젝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기후 요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로어노크의 실종[편집] 2010 개봉 영화 '베니싱'의 소재가 된 실화 같이 보기[편집] 버지니아 식민지 각주[편집] ↑ “Charter to Sir Walter Raleigh, March 25, 1584”. 흐로닝언 대학교. 2013년 1월 5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Quinn, David B. (1985년 2월). 《Set Fair for Roanoke: Voyages and Colonies, 1584–1606》. UNC Press Books. ISBN 978-0-8078-4123-5. 2011년 7월 3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Kupperman, Karen Ordahl (1984년 1월 25일). 《Roanoke, The Abandoned Colony》. Rowman & Littlefield. ISBN 978-0-8476-7339-1.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Teacher Handbook to Roanoke Revisited”. 《Fort Raleigh National Historic Site》.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2011년 7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Milton, Giles (2001년 10월 19일). 《Big Chief Elizabeth: The Adventures and Fate of the First English Colonists in America》. Macmillan. ISBN 978-0-312-42018-5.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Blacker, Irwin (1965). 《Hakluyt's Voyages: The Principle Navigations Voyages Traffiques & Discoveries of the English Nation》. 뉴욕: The Viking Press. 522쪽. ↑ Lane, Ralph. “The Account by Ralph Lane. An account of the particularities of the imployments of the English men left in Roanoke by Richard Greenevill under the charge of Master Ralph Lane Generall of the same, from the 17. of August 1585. until the 18. of June 1586. at which time they departed the Countrey; sent and directed to Sir Walter Ralegh.”. 《Old South Leaflets (General Series) ; No. 119.》. 노스캐롤라인 대학교 at Chapel Hill. 2011년 1월 17일에 확인함. ↑ 가 나 Fleming, Walter Lynwood (1909). 《The South in the Building of the Nation: History of the States》. The Southern historical publication society.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Grizzard, Frank E.; Smith, D. Boyd (2007). 《제임스타운 식민지: A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History》. ABC-CLIO. ISBN 978-1-85109-637-4.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Miller, Lee (2000). 《Roanoke: Solving the Mystery of the Lost Colony》. Arcade Publishing. ISBN 978-1-55970-584-4. 2011년 6월 3일에 확인함. ↑ Neville, John D. “The John White Colony”. 국립공원국. 2008년 10월 8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Harriot,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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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르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뷰티르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뷰티르산 일반적인 성질 IUPAC 이름 butanoic acid 화학식 C4H8O2 CAS 번호 107-92-6 PubChem 264 ChemSpider 259 물리적 성질 분자량 88.11 g/mol 녹는점 268.05 K-5.1 °C22.82 °F 끓는점 436.9 K163.75 °C326.75 °F 밀도 0.9528 g/cm3 형태 무색 유성 액체 열화학적 성질 안전성 뷰티르산(영어: butyric acid, 그리스어 "βούτῡρον"에서 유래, "butter"를 의미함)은 계통명은 부탄산(영어: butanoic acid)이고, BTA로 약칭되며,[1] 화학식이 CH3CH2CH2-COOH 인 카복실산이다. 뷰티르산의 염 및 에스터(에스테르)는 뷰티레이트(butyrate) 또는 부타노에이트(butanoate)로 알려져 있다. 뷰티르산은 우유 특히 염소, 양 및 아메리카들소의 젖, 버터,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 및 혐기성 발효 산물(결장 및 액취증 포함)에서 발견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허쉬 공정에 의해 생산된 밀크 초콜릿에서 발견되거나, 허쉬 초콜릿의 맛을 모방하기 위해 첨가된 것으로 추측된다.[2] 뷰티르산은 사람의 구토물에 존재하며, 불쾌한 냄새를 낸다.[3] 뷰티르산은 불쾌한 냄새와 콕 쏘는 맛을 가지며, 에테르와 유사한 약간 감미로운 뒷맛을 가진다. 개와 같은 좋은 냄새 탐지 능력이 있는 포유류는 뷰티르산을 10ppb(parts per billion)로 탐지할 수 있는 반면에 사람은 10ppm(parts per million)이상의 농도에서 뷰티르산을 탐지할 수 있다. 뷰티르산은 1814년 프랑스의 화학자 미셀 외젠 슈브뢰이(Michel Eugène Chevreul)에 의해 불순한 형태로 처음 관찰되었다. 1818년까지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을 특징짓기 위해 충분하게 정제했다. 그러나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에 대한 초기 연구를 발표하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 파리에 있는 과학 아카데미에 원고 형태로 연구 결과물을 맡겼다. 또한 프랑스의 화학자인 앙리 브라코노(Henri Braconnot)도 버터의 성분을 연구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우선권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1815년 초에 슈브뢰이는 버터 냄새의 원인이 되는 물질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4] 1817년에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의 성질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뷰티르산의 이름을 지었다.[5] 그러나, 1823년에 이르러서야 뷰티르산의 특성이 자세히 밝혀졌다.[6] 뷰티르산이란 이름은 처음 발견된 물질인 butyrum (또는 buturum)이라는 버터의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목차 1 화학 1.1 안전성 2 제조 3 사용 4 생화학 4.1 미생물의 생합성 5 약리학 5.1 약력학 5.2 약동학 5.2.1 물질대사 6 연구 6.1 말초 치료 효과 6.1.1 면역 조절과 염증 반응 6.1.2 암 6.1.3 당뇨병 7 같이 보기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화학[편집] 뷰티르산은 동물성 지방에서 에스터의 형태로 발견되는 지방산이다. 뷰티르산의 트라이글리세라이드는 버터의 3~4%를 차지한다. 버터가 산패할 때, 가수분해에 의해 글리세라이드로부터 뷰티르산이 유리되어 불쾌한 냄새가 난다. 뷰티르산은 짧은 사슬 지방산이라고 불리는 지방산 하위 그룹의 주요 구성원이다. 뷰티르산은 염기와 강력한 산화제와 반응하여 많은 금속을 공격하는 중-강산이다.[7] 뷰티르산은 물, 에탄올 및 에테르에 쉽게 용해되는 유성의 무색 액체이며 염화 칼슘과 같은 염으로 포화되어 액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뷰티르산은 중크롬산 칼륨과 황산을 사용하여 이산화 탄소와 아세트산으로 산화되는 반면, 알칼리성 과망간산 칼륨은 뷰티르산을 이산화 탄소로 산화시킨다. 칼슘 염인 Ca(C4H7O2)2·H2O 은 뜨거운 물보다 차가운 물에 더 잘 녹는다. 뷰티르산은 이소뷰티르산(2-메틸프로판산)이라 불리는 구조 이성질체를 갖는다. 안전성[편집] 뷰티르산을 취급할 때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무 또는 PVC 장갑, 보호 안경, 화학 반응 저항성 옷, 신발과 같은 개인 보호 장비를 사용한다. 뷰티르산을 흡입하면 목이 아프고, 기침, 작열감, 호흡 곤란을 유발할 수 있다. 뷰티르산의 섭취는 복통, 쇼크 및 쇠약을 초래할 수 있다. 뷰티르산에 물리적으로 노출되면 통증, 물집, 피부 화상을 유발할 수 있지만 눈에 노출되면 통증, 심한 화상 및 시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7] 제조[편집] 뷰티르산은 당분 또는 녹말의 발효에 의해 산업적으로 제조되며, 탄산 칼슘은 제조 공정에서 형성된 산을 중화하기 위해 첨가된다. 녹말의 뷰티르산 발효는 고초균(Bacillus subtilis)의 직접 첨가에 의해 촉진된다. 뷰티르산의 염 및 에스터(에스테르)는 뷰티레이트 또는 뷰타노에이트로 불린다. 뷰티르산 또는 뷰티르산 발효는 돼지풀의 일종인 Heracleum giganteum 의 오일에서 헥실 에스터 헥실 뷰티레이트로 발견되며, 파스닙(Pastinaca sativa)에서 옥틸 에스터 옥틸 뷰티레이트로 발견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피부균총 및 땀에서 주목받아 왔다. 사용[편집] 뷰티르산은 다양한 뷰티레이트 에스터 제조에 사용된다. 메틸 뷰티레이트와 같은 뷰티르산의 저분자 에스터는 대부분 기분 좋은 향과 맛을 가진다. 그래서 식품 및 향수에 첨가제로 사용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병원성 세균의 증식을 감소시키는 능력 때문에 동물 사료 보충제로도 사용된다.[8] 뷰티르산은 EU FLAVIS 데이터베이스(번호 08.005)에서 식품 향료로 승인되었다. 또한 강한 냄새 때문에 뷰티르산은 낚시 미끼 첨가제로도 사용되었다.[9] 잉어(Cyprinus carpio) 미끼에 사용되는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많은 향들은 에스터 염기로 뷰티르산을 사용한다. 뷰티르산 자체 또는 뷰티르산이 첨가된 물질에 의해 어류가 유인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뷰티르산은 유럽 잉어나 유럽 납줄개의 입맛에 맞는 몇몇 유기산들 중 하나였다.[10] 뷰티르산은 해양 생물 보호 단체가 일본 포경선 선원들을 방해하거나,[11] 낙태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낙태 크리닉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악취탄으로도 사용되어 왔다.[12] 뷰티르산은 아세트산과 함께 셀룰로스와 반응하여 다양한 도구, 부품 및 코팅에 사용되는 셀룰로스 아세테이트 뷰티레이트(CAB)를 생산할 수 있으며 셀룰로스 아세테이트보다 분해에 대한 저항성이 더 크다.[13] 그러나, CAB는 열기 및 습기에 노출되면 뷰티르산을 방출하며 분해될 수 있다.[14] 이 과정은 오래된 스크루 드라이버 및 기타 수공구의 구토물 냄새 같은 불쾌한 냄새로 종종 관찰된다.[15] 생화학[편집] 미생물의 생합성[편집] 뷰티레이트는 혐기성 세균에 의해 수행되는 발효 공정의 최종 생성물로 생산된다. 발효차인 콤부차는 발효로 생성된 뷰티르산을 포함하고 있다. 이 발효 경로는 1861년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세균에서 뷰티레이트 생성 세균 종류의 예시 : Clostridium butyricum Clostridium kluyveri Clostridium pasteurianum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Fusobacterium nucleatum Butyrivibrio fibrisolvens Eubacterium limosum 그 경로는 대부분의 생물체에서 일어나는 포도당이 2분자의 피루브산으로 분해되는 해당과정으로 시작된다. 피루브산은 피루브산 생성효소(피루브산:페레독신 산화환원효소)로 불리는 효소 시스템을 포함하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아세틸-CoA로 산화된다. 2분자의 이산화 탄소(CO2)와 2분자의 수소 원자(H2)가 세포로부터 부산물로 생성된다. 반응 효소 아세틸-CoA → 아세토아세틸-CoA 아세틸-CoA-아세틸 전이효소 아세토아세틸-CoA →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탈수소효소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 크로토닐-CoA 크로토네이스 크로토닐-CoA → 부티릴-CoA (CH3CH2CH2C=O-CoA) 뷰티릴-CoA 탈수소효소 CoA가 인산기로 대체되어 뷰티릴 포스페이트를 생성함 포스포부티릴레이스 인산기가 ADP와 결합하여 ATP와 뷰티레이트을 생성함 뷰티레이트 카이네이스 발효의 마지막 단계에서 ATP가 생성된다. 포도당 1분자당 3분자의 ATP가 생성되는 비교적 높은 수율을 가진다. 이러한 발효 과정의 전체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C6H12O6 → C4H8O2 + 2 CO2 + 2 H2 몇몇 세균 종류은 뷰티레이트 발효로 시작하는 대체 경로에서 아세톤과 n-뷰탄올을 형성한다. 이들 세균 종류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Clostridium acetobutylicum, 산업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아세톤 및 프로판올 생산자 Clostridium beijerinckii Clostridium tetanomorphum Clostridium aurantibutyricum 이러한 세균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뷰티레이트 발효로 시작하지만, pH가 5미만으로 떨어지면 pH가 더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뷰탄올과 아세톤 생산으로 대사가 전환된다. 아세톤 1분자 당 2분자의 뷰탄올이 생성된다. 대사 경로의 변화는 아세토아세틸-CoA 생성 이후에 일어난다. 이 과정의 중간 생성물은 2가지 가능한 대사 경로를 취한다: 아세토아세틸-CoA → 아세토아세테이트 → 아세톤 아세토아세틸-CoA → 뷰티릴-CoA → 뷰틸알데하이드 → 뷰탄올 저항성 녹말, 귀리 시리얼, 펙틴, 구아 등으로부터 유래한 고발효성 섬유 잔류물들은 셀룰로스와 같은 저발효성 섬유보다 대장균에 의한 뷰티레이트를 포함하는 짧은 사슬 지방산을 더 많이 생성한다.[16] 한 연구에 따르면 저항성 녹말은 다른 형태의 식이 섬유보다 지속적으로 많은 뷰티레이트를 생성한다.[17] 소와 같은 반추동물에서 식이 섬유로부터 짧은 사슬 지방산을 생성하는 것은 우유와 버터 속에 뷰티레이트가 들어있는 원인이다.[18] 프룩탄은 프리바이오틱(prebiotic) 가용성 식이 섬유의 또 다른 공급원이다. 프룩탄은 부추속(Allium) 식물과 십자화과(Cruciferous) 식물과 같은 황이 많이 포함된 채소의 가용성 섬유에서 종종 발견된다. 프룩탄의 공급원은 밀,[19] 호밀, 보리, 양파, 마늘, 아스파라거스, 비트, 치커리, 파의 흰색 부분, 브로콜리, 방울 양배추, 양배추, 회향 등을 포함하고, 프럭토올리고당(FOS), 올리고프럭토스, 이눌린과 같은 프리바이오틱스(prebiotics)를 포함한다.[20][21] 이러한 식품의 대부분은 저항성 녹말에 비해 뷰티레이트 생성이 부족하지만 많은 장점을 가진다. 이들 식품은 일반적으로 낮은 혈당 지수를 가지며,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histone deacetylase, HDAC) 저해제로 혈액뇌장벽을 통과하여 뇌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연로로 사용되는 β-하이드록시뷰티르산으로부터 혜택을 보는 케톤생성성 식이를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22] 뷰티레이트 생성 식품의 다른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제는 설포라판(sulforaphane)[23] 으로 사람의 유방암 세포를 억제하는데 도움을 준다.[24] 설포라판은 쥐에서 모발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25] 궤양을 예방하는 화합물을 함유하고 있으며,[26] 쥐의 인지 능력에 도움을 준다.[27] 브로콜리의 설포라판은 적절하지 않게 준비되면 파괴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28] 마늘에 함유된 프럭탄에서 발견된 디알릴 디설파이드(diallyl disulfide)는 설치류에서 화학 독성 및 발암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밝혀졌으며,[29] 사람의 대장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할 때 뷰티레이트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나타냈다.[30] 약리학[편집] 약력학[편집] 다른 짧은 사슬 지방산(short-chain fatty acids, SCFAs)들과 마찬가지로 뷰티레이트는 에너지 균형을 조절하는데 도움을 주는 영양 센서로 기능하는 유리 지방산 수용체인 FFAR2와 FFAR3의 작용 물질이다.[31][32][33] 다른 짧은 사슬 지방산들과는 달리,[33] 뷰티레이트는 니아신 수용체 1(NIACR1, 또는 GPR109A로도 알려진)의 작용 물질이기도 하다.[31][32][33] 뷰티르산은 특히 대장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사용되고, 간에서 지방산 대사 과정 동안 ATP를 생성하는데 이용된다.[31] 뷰티르산은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제(구체적으로, HDAC1, HDAC2, HDAC3, and HDAC8)로 작용하여 세포에서 히스톤이 아세틸화된 상태로 머물게 한다.[31] 히스톤의 아세틸화는 히스톤 단백질과 DNA 사이의 정전기적 인력을 줄임으로써 염색질의 구조를 느슨하게 풀어준다.[31] 일반적으로 전사인자는 히스톤이 DNA와 단단하게 결합된 영역(즉, 탈아세틸화된, 예를 들어 이질염색질)에 접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뷰티르산은 프로모터에서 전사 활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며,[31]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활성으로 인해 보통 침묵되거나 하향 조절된다. 약동학[편집] 식이 섬유의 미생물 발효를 통해 결장에서 생산되는 뷰티레이트는 결장세포와 간에서 흡수되어[주 1] 에너지 대사 과정 동안 ATP를 생성한다.[31] 그러나 일부 뷰티레이트는 결장 말단부에서 흡수되고, 간문맥으로 들어가지 않아 순환계를 통해 뷰티레이트가 전신의 여러 장기에 분포될 수도 있다.[31] 전신 순환을 하는 뷰티레이트는 모노카복실레이트 수송체(즉, SLC16A 수송체들의 일종)를 통해 혈액뇌장벽을 용이하게 통과할 수 있다.[34][35] 세포막을 가로지르는 뷰티레이트의 통과를 매개하는 다른 수송체로는 SLC5A8(SMCT1), SLC27A1(FATP1), SLC27A4(FATP4)가 있다.[35] 물질대사[편집] 뷰티르산은 뷰티레이트-CoA 리게이스라고도 불리는 사람에 있는 다양한 XM-리게이스(xenobiotic/medium-chain fatty acid-ligase)(ACSM1, ACSM2B, ASCM3, ACSM4, ACSM5, ACSM6)에 의해 대사된다.[3] 이 반응에 의해 생성된 대사 산물은 뷰티릴-CoA이며, 다음과 같이 생성된다.[3] ATP + 뷰티르산 + CoA → AMP + 피로인산(PPi) + 뷰티릴-CoA 짧은 사슬 지방산인 뷰티레이트는 지방산 대사를 통한 에너지(즉, 아데노신 삼인산 또는 ATP) 공급원으로써 미토콘드리아에 의해 이용된다. 사람에서 트라이아실글리세롤 라이페이스는 다음 반응을 통해 뷰티레이트의 프로드러그인 트라이뷰티린(tributyrin)을 다이뷰티린(dibutyrin)과 뷰티레이트(Butyrate)로 전환시킨다.[36] 트라이뷰티린 + H2O= 다이뷰티린 + 뷰티레이트 연구[편집] 말초 치료 효과[편집] 뷰티레이트는 에너지 항상성 및 관련 질환(당뇨병 및 비만), 염증 및 면역(예: 항균 및 항암 효과가 있음)과 관련해서 사람에게 많은 유익한 효과를 제공한다.[32][37] 이러한 효과는 지방산 대사 동안 ATP를 생성하는 미토콘드리아에 의한 뷰티레이트의 이용을 통해 일어나거나 또는 하나 이상의 뷰티레이트의 히스톤 변형 효소 표적(즉,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및 G-단백질 연결 수용체(즉, FFAR2, FFAR3, and NIACR1)를 통해 일어난다.[32] 면역 조절과 염증 반응[편집] 뷰티레이트의 면역계에 미치는 영향은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의 억제와 뷰티레이트의 G 단백질 연결 수용체 표적인 NIACR1(GPR109A), FFAR2(GPR43), FFAR3(GPR41)의 활성화를 통해 매개된다.[33][38] 짧은 사슬 지방산 중 뷰티레이트는 시험관 내에서 장 조절 T세포의 가장 강력한 프로모터이며, NIACR1 리간드들 중에서 유일하다.[33] 뷰티르산은 결장에서 염증 반응의 중요한 매가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뷰티르산은 염증 매개 궤양성 대장염과 대장암을 막는 예방적, 치료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뷰티레이트는 항균 펩타이드 LL-37을 통해 사람에게 항균성을 부여하며, 이는 히스톤 H3에 대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억제를 통해 유도된다.[38][39][40] 뷰티레이트는 FOXP3(Tregs의 전사인자)의 유전자 발현을 증가시키고,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의 억제를 통해 결장 조절 T세포(regulatory T cells, Tregs)를 촉진시킨다.[33][38] 이러한 작용을 통해 뷰티레이트는 항염증성 사이토카인인 인터루킨 10의 발현을 증가시킨다.[38][33] 뷰티레이트는 또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를 통해 부분적으로 매개되는 IFN-γ–STAT1 신호전달경로를 억제함으로써 대장 염증을 막는다. 일시적인 IFN-γ 신호전달은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숙주의 면역 반응과 관련이 있는 반면 만성적인 IFN-γ 신호전달은 종종 만성적인 염증과 관련이 있다. 뷰티레이트가 T세포의 Fas 유전자 프로모터에 결합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1(HDAC1)의 활성을 억제하여 Fas 프로모터의 과아세틸화 및 T세포 표면의 Fas 수용체의 상향 조절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41] 이는 뷰티레이트가 결장 조직에서 T세포의 세포 사멸을 증가시켜 염증의 원인(IFN-γ 생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제안되었다.[41] 다른 NIACR1 작용제와 마찬가지로 뷰티레이트도 뇌, 위장관, 피부 및 혈관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서 현저한 항염증효과를 나타낸다.[42][43][44][45] FFAR3에 결합한 뷰티레이트는 신경펩타이드 Y의 방출을 유도하고, 결장 점막 및 장 면역계의 기능적 항상성을 촉진한다.[46] 뷰티르산은 포유류 결장(결장세포)의 막을 형성하는 세포의 에너지(ATP) 공급원으로 중요하다. 뷰티르산을 에너지로 사용하지 않으면, 결장세포는 상향조절된 자가소화 작용(즉, 자기소화)을 겪는다.[47] 암[편집] 뷰티레이트는 정상세포와 암세포에서 서로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이는 "뷰티레이트의 역설(butyrate paradox)"로 알려져 있다. 특히 뷰티레이트는 결장 종양 세포는 억제하고, 정상적인 결장상피 세포는 촉진시킨다.[48] 그 신호전달 메커니즘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49] 보고서는 뷰티레이트의 화학적 예방 효과가 부분적으로 종양 형성 과정과 관련된 노출량, 노출시간 및 식이 지방의 종류에 달려 있다고 제안했다.[16] 발효될 수 있는 섬유에서 뷰티레이트와 같은 휘발성 지방산(짧은 사슬 지방산)의 생산은 대장암에서 식이 섬유의 역할에 기여할 수 있다.[16] 뷰티르산을 포함한 짧은 사슬 지방산은 적절한 양의 식이 섬유가 함유된 식물성 식품인 프리바이오틱스를 먹이로 하거나 발효시키는 유익한 장내 세균(프로바이오틱)에 의해 생산된다. 이 짧은 사슬 지방산은 에너지 생성과 세포 증식을 증가시켜 결장 세포에 도움이 되며, 결장암을 예방할 수 있다.[50] 반대로 일부 연구자들은 뷰티레이트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며 뷰티레이트를 잠재적인 암 유발자로 간주하고 있다.[51] 생쥐에 대한 연구 결과 뷰티레이트가 MSH2 결핍 결장 상피세포의 형질전환을 유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2] 이는 유전자 결핍과 관련이있다.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 나이아신, β-하이드록시뷰티레이트 및 커규민은 효과적인 보조 치료제가 될 수 있다.[53] 당뇨병[편집] 미생물과 당뇨병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는 뷰티레이트가 모델 동물과 제2형 당뇨병 환자에서 "심각한 면역 대사 효과"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7] 또한 비만, 당뇨병과 인체 내에서 현저한 장내 세균의 불균형 간의 관계 역시 주목받았으나, 아직 이에 대해선 완전하게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37] 이러한 질병에서 뷰티레이트의 사용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 보고서는 이들 질병의 치료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질병의 병태생리학(즉, 생체분자의 메커니즘)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를 요구했다.[37] 같이 보기[편집] 히스톤 히스톤 변형 효소 히스톤 아세틸화효소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하이드록시뷰티르산 α-하이드록시뷰티르산 β-하이드록시뷰티르산 γ-하이드록시뷰티르산 β-하이드록시 β-메틸뷰티르산 β-메틸뷰티르산 주해[편집] ↑ 결장에서 흡수된 대부분의 뷰티레이트는 간문맥을 통해 순환계로 들어간다.[31] 간문맥으로 들어가는 대부분의 뷰티레이트는 간을 거친다.[31] 각주[편집] 본 문서에는 현재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Butanoic A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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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tylated histones cause the chromatin structure to loosen by weakening electrostatic attraction between the histone proteins and the DNA backbone. This process enables transcription factors and the basal transcriptional machinery to bind and increases transcription. ... However, many studies have shown that at least some of these beneficial effects can be attributed NaB’s ability to increase acetylation around the promoters of neurotrophic factors, such as BDNF, GDNF and NGF and thus increasing their transcription [41], [42], [43], [44], [45], [46], [47] and [48]. ... Butyrate also signals through GPR109a ... Much of the butyrate produced in the colon is used as an energy source by the colonocytes, but some butyrate can also exit the colon through the portal vein, where the liver absorbs another large portion [74] and [75]. However, the distal colon is not connected to the portal vein, allowing for some systemic butyrate to be circulated. Indeed, there are many reports of high fiber diets increasing blood levels of circulating butyrate [75], [76] and [77]. These later reports raise the possibility that increases in circulating butyrate could affect CNS function directly. ↑ 가 나 다 라 Kasubuchi M, Hasegawa S, Hiramatsu T, Ichimura A, Kimura I (2015). “Dietary gut microbial metabolites, short-chain fatty acids, and host metabolic regulation”. 《Nutrients》 7 (4): 2839–49. PMC 4425176. PMID 25875123. doi:10.3390/nu7042839. Short-chain fatty acids (SCFAs) such as acetate, butyrate, and propionate, which are produced by gut microbial fermentation of dietary fiber, are recognized as essential host energy sources and act as signal transduction molecules via G-protein coupled receptors (FFAR2, FFAR3, OLFR78, GPR109A) and as epigenetic regulators of gene expression by the inhibition of histone deacetylase (HDAC). Recent evidence suggests that dietary fiber and the gut microbial-derived SCFAs exert multiple beneficial effects on the host energy metabolism not only by improving the intestinal environment, but also by directly affecting various host peripheral tissues.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Hoeppli RE, Wu D, Cook L, Levings MK (February 2015). “The environment of regulatory T cell biology: cytokines, metabolites, and the microbiome”. 《Front Immunol》 6: 61. PMC 4332351. PMID 25741338. doi:10.3389/fimmu.2015.00061. Specific species that have been recognized by their high levels of butyrate production include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and the cluster IV and XIVa of genus Clostridium ... Administration of acetate, propionate, and butyrate in drinking water mimics the effect of Clostridium colonization in germ-free mice, resulting in an elevated Treg frequency in the colonic lamina propria and increased IL-10 production by these Tregs (180, 182). Of the three main SCFAs, butyrate has been found to be the most potent inducer of colonic Tregs. Mice fed a diet enriched in butyrylated starches have more colonic Tregs than those fed a diet containing propinylated or acetylated starches (181). Arpaia et al. tested an array of SCFAs purified from commensal bacteria and confirmed butyrate was the strongest SCFA-inducer of Tregs in vitro (180). Mechanistically, it has been proposed that butyrate, and possibly propionate, promote Tregs through inhibiting histone deacetylase (HDAC), causing increased acetylation of histone H3 in the Foxp3 CNS1 region, and thereby enhancing FOXP3 expression (180, 181). Short-chain fatty acids partially mediate their effects through G-protein coupled receptors (GPR), including GPR41, GPR43, and GPR109A. GPR41 and GPR43 are stimulated by all three major SCFAs (191), whereas GPR109A only interacts with butyrate (192). Figure 1: Microbial-derived molecules promote colonic Treg differentiation. ↑ Tsuji A (2005). “Small molecular drug transfer across the blood-brain barrier via carrier-mediated transport systems”. 《NeuroRx》 2 (1): 54–62. PMC 539320. PMID 15717057. doi:10.1602/neurorx.2.1.54. Other in vivo studies in our laboratories indicated that several compounds including acetate, propionate, butyrate, benzoic acid, salicylic acid, nicotinic acid, and some β-lactam antibiotics may be transported by the MCT at the BBB.21 ... Uptake of valproic acid was reduced in the presence of medium-chain fatty acids such as hexanoate, octanoate, and decanoate, but not propionate or butyrate, indicating that valproic acid is taken up into the brain via a transport system for medium-chain fatty acids, not short-chain fatty acids. ↑ 가 나 Vijay N, Morris ME (2014). “Role of monocarboxylate transporters in drug delivery to the brain”. 《Curr. Pharm. Des.》 20 (10): 1487–98. PMC 4084603. PMID 23789956. doi:10.2174/13816128113199990462. Monocarboxylate transporters (MCTs) are known to mediate the transport of short chain monocarboxylates such as lactate, pyruvate and butyrate. ... MCT1 and MCT4 have also been associated with the transport of short chain fatty acids such as acetate and formate which are then metabolized in the astrocytes [78]. ... SLC5A8 is expressed in normal colon tissue, and it functions as a tumor suppressor in human colon with silencing of this gene occurring in colon carcinoma. This transporter is involved in the concentrative uptake of butyrate and pyruvate produced as a product of fermentation by colonic bacteria. ↑ “triacylglycerol lipase – Homo sapiens”. 《BRENDA》. Technische Universität Braunschweig. 2015년 5월 25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Tilg H, Moschen AR (September 2014). “Microbiota and diabetes: an evolving relationship”. 《Gut》 63 (9): 1513–1521. PMID 24833634. doi:10.1136/gutjnl-2014-306928. Recent studies have suggested that gut bacteria play a fundamental role in diseases such as obesity, diabetes and cardiovascular disease. Data are accumulating in animal models and humans suggesting that obesity and type 2 diabetes (T2D) are associated with a profound dysbiosis. First human metagenome-wide association studies demonstrated highly significant correlations of specific intestinal bacteria, certain bacterial genes and respective metabolic pathways with T2D. Importantly, especially butyrate-producing bacteria such as Roseburia intestinalis and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concentrations were lower in T2D subjects. This supports the increasing evidence, that butyrate and other short-chain fatty acids are able to exert profound immunometabolic effects. ↑ 가 나 다 라 Wang G (2014). “Human antimicrobial peptides and proteins”. 《Pharmaceuticals (Basel)》 7 (5): 545–94. PMC 4035769. PMID 24828484. doi:10.3390/ph7050545. The establishment of a link between light therapy, vitamin D and human cathelicidin LL-37 expression provides a completely different way for infection treatment. Instead of treating patients with traditional antibiotics, doctors may be able to use light or vitamin D [291,292]. Indeed using narrow-band UV B light, the level of vitamin D was increased in psoriasis patients (psoriasis is a common autoimmune disease on skin) [293]. In addition, other small molecules such as butyrate can induce LL-37 expression [294]. Components from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ay regulate the AMP expression as well [295]. These factors may induce the expression of a single peptide or multiple AMPs [296]. It is also possible that certain factors can work together to induce AMP expression. While cyclic AMP and butyrate synergistically stimulate the expression of chicken β-defensin 9 [297], 4-phenylbutyrate (PBA) and 1,25-dihydroxyvitamin D3 (or lactose) can induce AMP gene expression synergistically [294,298]. It appears that stimulation of LL-37 expression by histone deacetylase (HDAC) inhibitors is cell dependent. Trichostatin and sodium butyrate increased the peptide expression in human NCI-H292 airway epithelial cells but not in the primary cultures of normal nasal epithelial cells [299]. However, the induction of the human LL-37 expression may not be a general approach for bacterial clearance. During Salmonella enterica infection of human monocyte-derived macrophages, LL-37 is neither induced nor required for bacterial clearance [300]. Table 3: Select human antimicrobial peptides and their proposed targetsTable 4: Some known factors that induce antimicrobial peptide expression ↑ Yonezawa H, Osaki T, Hanawa T, Kurata S, Zaman C, Woo TD, Takahashi M, Matsubara S, Kawakami H, Ochiai K, Kamiya S (2012). “Destructive effects of butyrate on the cell envelope of Helicobacter pylori”. 《J. Med. Microbiol.》 61 (Pt 4): 582–9. PMID 22194341. doi:10.1099/jmm.0.039040-0. ↑ McGee DJ, George AE, Trainor EA, Horton KE, Hildebrandt E, Testerman TL (2011). “Cholesterol enhances Helicobacter pylori resistance to antibiotics and LL-37”. 《Antimicrob. Agents Chemother.》 55 (6): 2897–904. PMC 3101455. PMID 21464244. doi:10.1128/AAC.00016-11. ↑ 가 나 Zimmerman MA, Singh N, Martin PM, Thangaraju M, Ganapathy V, Waller JL, Shi H, Robertson KD, Munn DH, Liu K (2012). “Butyrate suppresses colonic inflammation through HDAC1-dependent Fas upregulation and Fas-mediated apoptosis of T cells”. 《Am. J. Physiol. Gastroin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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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GPR109A's primary pharmacological ligand in clinical use, niacin has been used for over 50 years in the treatment of cardiovascular disease, mainly due to its favourable effects on plasma lipoproteins. However, it has become apparent that niacin also possesses lipoprotein-independent effects that influence inflammatory pathways mediated through GPR109A. ↑ Graff EC, Fang H, Wanders D, Judd RL (February 2016). “Anti-inflammatory effects of the hydroxycarboxylic acid receptor 2”. 《Metab. Clin. Exp.》 65 (2): 102–113. PMID 26773933. doi:10.1016/j.metabol.2015.10.001. HCA2 is highly expressed on immune cells, including macrophages, monocytes, neutrophils and dermal dendritic cells, among other cell types. ... Recent studies demonstrate that HCA2 mediates profound anti-inflammatory effects in a variety of tissues, indicating that HCA2 may be an important therapeutic target for treating inflammatory disease processes. ↑ Wakade C, Chong R (December 2014). “A novel treatment target for Parkinson's disease”. 《J. Neurol. Sci.》 347 (1-2): 34–38. PMID 25455298. doi:10.1016/j.jns.2014.10.024. GPR109A and its agonists are known to exert anti-inflammatory actions in the skin, gut and retina. ↑ Farzi A, Reichmann F, Holzer P (2015). “The homeostatic role of neuropeptide Y in immune function and its impact on mood and behaviour”. 《Acta Physiol (Oxf)》 213 (3): 603–27. PMC 4353849. PMID 25545642. doi:10.1111/apha.12445. In the context of this review it is particularly worth noting that short chain fatty acids such as butyrate, which the colonic microbiota generates by fermentation of otherwise indigestible dietary fibre (Cherbut et al. 1998), stimulate L cells to release PYY via the G-protein coupled receptor Gpr41 (Samuel et al. 2008). In this way, short chain fatty acids can indirectly attenuate gastrointestinal motility as well as electrolyte and water secretion (Cox 2007b). More importantly, short chain fatty acids exert homeostatic actions on the function of the colonic mucosa and immune system (Hamer et al. 2008, Tazoe et al. 2008, Guilloteau et al. 2010, Macia et al. 2012a, Smith et al. 2013). Whether PYY plays a role in these effects of short chain fatty acids awaits to be investigated, but may be envisaged from the finding that PYY promotes mucosal cell differentiation (Hallden & Aponte 1997). ↑ Donohoe, Dallas R.; Garge, Nikhil; Zhang, Xinxin; Sun, Wei; O’Connell, Thomas M.; Bunger, Maureen K.; Bultman, Scott J. (2011년 5월 4일). “The Microbiome and Butyrate Regulate Energy Metabolism and Autophagy in the Mammalian Colon”. 《Cell Metabolism》 13 (5): 517–526. ISSN 1550-4131. PMC 3099420. PMID 21531334. doi:10.1016/j.cmet.2011.02.018. ↑ Vanhoutvin SA, Troost FJ, Hamer HM, Lindsey PJ, Koek GH, Jonkers DM, Kodde A, Venema K, Brummer RJ (2009). Bereswill S, 편집. “Butyrate-induced transcriptional changes in human colonic mucosa”. 《PLOS ONE》 4 (8): e6759. PMC 2727000. PMID 19707587. doi:10.1371/journal.pone.0006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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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ID 25036629. doi:10.1016/j.cell.2014.04.051. ↑ “Colon Cancer Shuts Down Receptor That Could Shut It Down”. 《ScienceDaily》. 2016년 5월 4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영어) International Chemical Safety Card 1334 vdeh지질: 지방산포화 지방산 뷰티르산 (C4) 발레르산 (C5) 카프로산 (C6) 에난트산 (C7) 카프릴산 (C8) 펠라르곤산 (C9) 카프르산 (C10) 운데실산 (C11) 라우르산 (C12) 트라이데실산 (C13) 미리스트산 (C14) 펜타데칸산 (C15) 팔미트산 (C16) 마르가르산 (C17) 스테아르산 (C18) 노나데실산 (C19) 아라키드산 (C20) 헨에이코실산 (C21) 베헨산 (C22) 트라이코실산 (C23) 리그노세르산 (C24) 펜타코실산 (C25) 세로트산 (C26) 헵타코실산 (C27) 몬탄산 (C28) 노나코실산 (C29) 멜리스산 (C30) 헨트라이아콘틸산 (C31) 라세로산 (C32) 프실산 (C33) 게드산 (C34) 세로플라스트산 (C35) 헥사트라이아콘탄산 (C36) 헵타트라이아콘탄산 (C37) 불포화 지방산ω-3 지방산 α-리놀렌산 (18:3) 스테아리돈산 (18:4) 에이코사펜타엔산 (EPA, 20:5) 도코사헥사엔산 (DHA, 22:6) ω-6 지방산 리놀레산 (18:2) γ-리놀렌산 (18:3) 디호모-γ-리놀렌산 (20:3) 아라키돈산 (20:4) 아드렌산 (22:4) ω-7 지방산 팔미톨레산 (16:1) 박센산 (18:1) 파울린산 (20:1) ω-9 지방산 올레산 (18:1) 엘라이드산 (트랜스-18:1) 곤도산 (20:1) 에루크산 (22:1) 네르본산 (24:1) 미드산 (20:3) 생체분자: 탄수화물 알코올 당단백질 글리코사이드 지질 에이코사노이드 지방산 / 지방산 대사 중간생성물 인지질 스핑고지질 스테로이드 핵산 구성 성분 뉴클레오타이드 대사 중간생성물 단백질 표준 아미노산 / 아미노산 대사 중간생성물 테트라피롤 헴 대사 중간생성물 전거 통제 LCCN: sh85018405 GND: 4448004-0 BNF: cb12561820m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뷰티르산&oldid=23726431" 분류: 생화학 물질지방산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웹아카이브 틀 웨이백 링크CS1 - 영어 인용 (en)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ಕನ್ನಡКыргызчаLatinaLatviešu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తెలుగు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8일 (월) 12: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뷰티르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뷰티르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뷰티르산 일반적인 성질 IUPAC 이름 butanoic acid 화학식 C4H8O2 CAS 번호 107-92-6 PubChem 264 ChemSpider 259 물리적 성질 분자량 88.11 g/mol 녹는점 268.05 K-5.1 °C22.82 °F 끓는점 436.9 K163.75 °C326.75 °F 밀도 0.9528 g/cm3 형태 무색 유성 액체 열화학적 성질 안전성 뷰티르산(영어: butyric acid, 그리스어 "βούτῡρον"에서 유래, "butter"를 의미함)은 계통명은 부탄산(영어: butanoic acid)이고, BTA로 약칭되며,[1] 화학식이 CH3CH2CH2-COOH 인 카복실산이다. 뷰티르산의 염 및 에스터(에스테르)는 뷰티레이트(butyrate) 또는 부타노에이트(butanoate)로 알려져 있다. 뷰티르산은 우유 특히 염소, 양 및 아메리카들소의 젖, 버터,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 및 혐기성 발효 산물(결장 및 액취증 포함)에서 발견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허쉬 공정에 의해 생산된 밀크 초콜릿에서 발견되거나, 허쉬 초콜릿의 맛을 모방하기 위해 첨가된 것으로 추측된다.[2] 뷰티르산은 사람의 구토물에 존재하며, 불쾌한 냄새를 낸다.[3] 뷰티르산은 불쾌한 냄새와 콕 쏘는 맛을 가지며, 에테르와 유사한 약간 감미로운 뒷맛을 가진다. 개와 같은 좋은 냄새 탐지 능력이 있는 포유류는 뷰티르산을 10ppb(parts per billion)로 탐지할 수 있는 반면에 사람은 10ppm(parts per million)이상의 농도에서 뷰티르산을 탐지할 수 있다. 뷰티르산은 1814년 프랑스의 화학자 미셀 외젠 슈브뢰이(Michel Eugène Chevreul)에 의해 불순한 형태로 처음 관찰되었다. 1818년까지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을 특징짓기 위해 충분하게 정제했다. 그러나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에 대한 초기 연구를 발표하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 파리에 있는 과학 아카데미에 원고 형태로 연구 결과물을 맡겼다. 또한 프랑스의 화학자인 앙리 브라코노(Henri Braconnot)도 버터의 성분을 연구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우선권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1815년 초에 슈브뢰이는 버터 냄새의 원인이 되는 물질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4] 1817년에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의 성질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뷰티르산의 이름을 지었다.[5] 그러나, 1823년에 이르러서야 뷰티르산의 특성이 자세히 밝혀졌다.[6] 뷰티르산이란 이름은 처음 발견된 물질인 butyrum (또는 buturum)이라는 버터의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목차 1 화학 1.1 안전성 2 제조 3 사용 4 생화학 4.1 미생물의 생합성 5 약리학 5.1 약력학 5.2 약동학 5.2.1 물질대사 6 연구 6.1 말초 치료 효과 6.1.1 면역 조절과 염증 반응 6.1.2 암 6.1.3 당뇨병 7 같이 보기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화학[편집] 뷰티르산은 동물성 지방에서 에스터의 형태로 발견되는 지방산이다. 뷰티르산의 트라이글리세라이드는 버터의 3~4%를 차지한다. 버터가 산패할 때, 가수분해에 의해 글리세라이드로부터 뷰티르산이 유리되어 불쾌한 냄새가 난다. 뷰티르산은 짧은 사슬 지방산이라고 불리는 지방산 하위 그룹의 주요 구성원이다. 뷰티르산은 염기와 강력한 산화제와 반응하여 많은 금속을 공격하는 중-강산이다.[7] 뷰티르산은 물, 에탄올 및 에테르에 쉽게 용해되는 유성의 무색 액체이며 염화 칼슘과 같은 염으로 포화되어 액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뷰티르산은 중크롬산 칼륨과 황산을 사용하여 이산화 탄소와 아세트산으로 산화되는 반면, 알칼리성 과망간산 칼륨은 뷰티르산을 이산화 탄소로 산화시킨다. 칼슘 염인 Ca(C4H7O2)2·H2O 은 뜨거운 물보다 차가운 물에 더 잘 녹는다. 뷰티르산은 이소뷰티르산(2-메틸프로판산)이라 불리는 구조 이성질체를 갖는다. 안전성[편집] 뷰티르산을 취급할 때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무 또는 PVC 장갑, 보호 안경, 화학 반응 저항성 옷, 신발과 같은 개인 보호 장비를 사용한다. 뷰티르산을 흡입하면 목이 아프고, 기침, 작열감, 호흡 곤란을 유발할 수 있다. 뷰티르산의 섭취는 복통, 쇼크 및 쇠약을 초래할 수 있다. 뷰티르산에 물리적으로 노출되면 통증, 물집, 피부 화상을 유발할 수 있지만 눈에 노출되면 통증, 심한 화상 및 시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7] 제조[편집] 뷰티르산은 당분 또는 녹말의 발효에 의해 산업적으로 제조되며, 탄산 칼슘은 제조 공정에서 형성된 산을 중화하기 위해 첨가된다. 녹말의 뷰티르산 발효는 고초균(Bacillus subtilis)의 직접 첨가에 의해 촉진된다. 뷰티르산의 염 및 에스터(에스테르)는 뷰티레이트 또는 뷰타노에이트로 불린다. 뷰티르산 또는 뷰티르산 발효는 돼지풀의 일종인 Heracleum giganteum 의 오일에서 헥실 에스터 헥실 뷰티레이트로 발견되며, 파스닙(Pastinaca sativa)에서 옥틸 에스터 옥틸 뷰티레이트로 발견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피부균총 및 땀에서 주목받아 왔다. 사용[편집] 뷰티르산은 다양한 뷰티레이트 에스터 제조에 사용된다. 메틸 뷰티레이트와 같은 뷰티르산의 저분자 에스터는 대부분 기분 좋은 향과 맛을 가진다. 그래서 식품 및 향수에 첨가제로 사용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병원성 세균의 증식을 감소시키는 능력 때문에 동물 사료 보충제로도 사용된다.[8] 뷰티르산은 EU FLAVIS 데이터베이스(번호 08.005)에서 식품 향료로 승인되었다. 또한 강한 냄새 때문에 뷰티르산은 낚시 미끼 첨가제로도 사용되었다.[9] 잉어(Cyprinus carpio) 미끼에 사용되는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많은 향들은 에스터 염기로 뷰티르산을 사용한다. 뷰티르산 자체 또는 뷰티르산이 첨가된 물질에 의해 어류가 유인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뷰티르산은 유럽 잉어나 유럽 납줄개의 입맛에 맞는 몇몇 유기산들 중 하나였다.[10] 뷰티르산은 해양 생물 보호 단체가 일본 포경선 선원들을 방해하거나,[11] 낙태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낙태 크리닉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악취탄으로도 사용되어 왔다.[12] 뷰티르산은 아세트산과 함께 셀룰로스와 반응하여 다양한 도구, 부품 및 코팅에 사용되는 셀룰로스 아세테이트 뷰티레이트(CAB)를 생산할 수 있으며 셀룰로스 아세테이트보다 분해에 대한 저항성이 더 크다.[13] 그러나, CAB는 열기 및 습기에 노출되면 뷰티르산을 방출하며 분해될 수 있다.[14] 이 과정은 오래된 스크루 드라이버 및 기타 수공구의 구토물 냄새 같은 불쾌한 냄새로 종종 관찰된다.[15] 생화학[편집] 미생물의 생합성[편집] 뷰티레이트는 혐기성 세균에 의해 수행되는 발효 공정의 최종 생성물로 생산된다. 발효차인 콤부차는 발효로 생성된 뷰티르산을 포함하고 있다. 이 발효 경로는 1861년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세균에서 뷰티레이트 생성 세균 종류의 예시 : Clostridium butyricum Clostridium kluyveri Clostridium pasteurianum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Fusobacterium nucleatum Butyrivibrio fibrisolvens Eubacterium limosum 그 경로는 대부분의 생물체에서 일어나는 포도당이 2분자의 피루브산으로 분해되는 해당과정으로 시작된다. 피루브산은 피루브산 생성효소(피루브산:페레독신 산화환원효소)로 불리는 효소 시스템을 포함하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아세틸-CoA로 산화된다. 2분자의 이산화 탄소(CO2)와 2분자의 수소 원자(H2)가 세포로부터 부산물로 생성된다. 반응 효소 아세틸-CoA → 아세토아세틸-CoA 아세틸-CoA-아세틸 전이효소 아세토아세틸-CoA →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탈수소효소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 크로토닐-CoA 크로토네이스 크로토닐-CoA → 부티릴-CoA (CH3CH2CH2C=O-CoA) 뷰티릴-CoA 탈수소효소 CoA가 인산기로 대체되어 뷰티릴 포스페이트를 생성함 포스포부티릴레이스 인산기가 ADP와 결합하여 ATP와 뷰티레이트을 생성함 뷰티레이트 카이네이스 발효의 마지막 단계에서 ATP가 생성된다. 포도당 1분자당 3분자의 ATP가 생성되는 비교적 높은 수율을 가진다. 이러한 발효 과정의 전체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C6H12O6 → C4H8O2 + 2 CO2 + 2 H2 몇몇 세균 종류은 뷰티레이트 발효로 시작하는 대체 경로에서 아세톤과 n-뷰탄올을 형성한다. 이들 세균 종류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Clostridium acetobutylicum, 산업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아세톤 및 프로판올 생산자 Clostridium beijerinckii Clostridium tetanomorphum Clostridium aurantibutyricum 이러한 세균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뷰티레이트 발효로 시작하지만, pH가 5미만으로 떨어지면 pH가 더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뷰탄올과 아세톤 생산으로 대사가 전환된다. 아세톤 1분자 당 2분자의 뷰탄올이 생성된다. 대사 경로의 변화는 아세토아세틸-CoA 생성 이후에 일어난다. 이 과정의 중간 생성물은 2가지 가능한 대사 경로를 취한다: 아세토아세틸-CoA → 아세토아세테이트 → 아세톤 아세토아세틸-CoA → 뷰티릴-CoA → 뷰틸알데하이드 → 뷰탄올 저항성 녹말, 귀리 시리얼, 펙틴, 구아 등으로부터 유래한 고발효성 섬유 잔류물들은 셀룰로스와 같은 저발효성 섬유보다 대장균에 의한 뷰티레이트를 포함하는 짧은 사슬 지방산을 더 많이 생성한다.[16] 한 연구에 따르면 저항성 녹말은 다른 형태의 식이 섬유보다 지속적으로 많은 뷰티레이트를 생성한다.[17] 소와 같은 반추동물에서 식이 섬유로부터 짧은 사슬 지방산을 생성하는 것은 우유와 버터 속에 뷰티레이트가 들어있는 원인이다.[18] 프룩탄은 프리바이오틱(prebiotic) 가용성 식이 섬유의 또 다른 공급원이다. 프룩탄은 부추속(Allium) 식물과 십자화과(Cruciferous) 식물과 같은 황이 많이 포함된 채소의 가용성 섬유에서 종종 발견된다. 프룩탄의 공급원은 밀,[19] 호밀, 보리, 양파, 마늘, 아스파라거스, 비트, 치커리, 파의 흰색 부분, 브로콜리, 방울 양배추, 양배추, 회향 등을 포함하고, 프럭토올리고당(FOS), 올리고프럭토스, 이눌린과 같은 프리바이오틱스(prebiotics)를 포함한다.[20][21] 이러한 식품의 대부분은 저항성 녹말에 비해 뷰티레이트 생성이 부족하지만 많은 장점을 가진다. 이들 식품은 일반적으로 낮은 혈당 지수를 가지며,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histone deacetylase, HDAC) 저해제로 혈액뇌장벽을 통과하여 뇌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연로로 사용되는 β-하이드록시뷰티르산으로부터 혜택을 보는 케톤생성성 식이를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22] 뷰티레이트 생성 식품의 다른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제는 설포라판(sulforaphane)[23] 으로 사람의 유방암 세포를 억제하는데 도움을 준다.[24] 설포라판은 쥐에서 모발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25] 궤양을 예방하는 화합물을 함유하고 있으며,[26] 쥐의 인지 능력에 도움을 준다.[27] 브로콜리의 설포라판은 적절하지 않게 준비되면 파괴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28] 마늘에 함유된 프럭탄에서 발견된 디알릴 디설파이드(diallyl disulfide)는 설치류에서 화학 독성 및 발암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밝혀졌으며,[29] 사람의 대장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할 때 뷰티레이트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나타냈다.[30] 약리학[편집] 약력학[편집] 다른 짧은 사슬 지방산(short-chain fatty acids, SCFAs)들과 마찬가지로 뷰티레이트는 에너지 균형을 조절하는데 도움을 주는 영양 센서로 기능하는 유리 지방산 수용체인 FFAR2와 FFAR3의 작용 물질이다.[31][32][33] 다른 짧은 사슬 지방산들과는 달리,[33] 뷰티레이트는 니아신 수용체 1(NIACR1, 또는 GPR109A로도 알려진)의 작용 물질이기도 하다.[31][32][33] 뷰티르산은 특히 대장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사용되고, 간에서 지방산 대사 과정 동안 ATP를 생성하는데 이용된다.[31] 뷰티르산은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제(구체적으로, HDAC1, HDAC2, HDAC3, and HDAC8)로 작용하여 세포에서 히스톤이 아세틸화된 상태로 머물게 한다.[31] 히스톤의 아세틸화는 히스톤 단백질과 DNA 사이의 정전기적 인력을 줄임으로써 염색질의 구조를 느슨하게 풀어준다.[31] 일반적으로 전사인자는 히스톤이 DNA와 단단하게 결합된 영역(즉, 탈아세틸화된, 예를 들어 이질염색질)에 접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뷰티르산은 프로모터에서 전사 활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며,[31]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활성으로 인해 보통 침묵되거나 하향 조절된다. 약동학[편집] 식이 섬유의 미생물 발효를 통해 결장에서 생산되는 뷰티레이트는 결장세포와 간에서 흡수되어[주 1] 에너지 대사 과정 동안 ATP를 생성한다.[31] 그러나 일부 뷰티레이트는 결장 말단부에서 흡수되고, 간문맥으로 들어가지 않아 순환계를 통해 뷰티레이트가 전신의 여러 장기에 분포될 수도 있다.[31] 전신 순환을 하는 뷰티레이트는 모노카복실레이트 수송체(즉, SLC16A 수송체들의 일종)를 통해 혈액뇌장벽을 용이하게 통과할 수 있다.[34][35] 세포막을 가로지르는 뷰티레이트의 통과를 매개하는 다른 수송체로는 SLC5A8(SMCT1), SLC27A1(FATP1), SLC27A4(FATP4)가 있다.[35] 물질대사[편집] 뷰티르산은 뷰티레이트-CoA 리게이스라고도 불리는 사람에 있는 다양한 XM-리게이스(xenobiotic/medium-chain fatty acid-ligase)(ACSM1, ACSM2B, ASCM3, ACSM4, ACSM5, ACSM6)에 의해 대사된다.[3] 이 반응에 의해 생성된 대사 산물은 뷰티릴-CoA이며, 다음과 같이 생성된다.[3] ATP + 뷰티르산 + CoA → AMP + 피로인산(PPi) + 뷰티릴-CoA 짧은 사슬 지방산인 뷰티레이트는 지방산 대사를 통한 에너지(즉, 아데노신 삼인산 또는 ATP) 공급원으로써 미토콘드리아에 의해 이용된다. 사람에서 트라이아실글리세롤 라이페이스는 다음 반응을 통해 뷰티레이트의 프로드러그인 트라이뷰티린(tributyrin)을 다이뷰티린(dibutyrin)과 뷰티레이트(Butyrate)로 전환시킨다.[36] 트라이뷰티린 + H2O= 다이뷰티린 + 뷰티레이트 연구[편집] 말초 치료 효과[편집] 뷰티레이트는 에너지 항상성 및 관련 질환(당뇨병 및 비만), 염증 및 면역(예: 항균 및 항암 효과가 있음)과 관련해서 사람에게 많은 유익한 효과를 제공한다.[32][37] 이러한 효과는 지방산 대사 동안 ATP를 생성하는 미토콘드리아에 의한 뷰티레이트의 이용을 통해 일어나거나 또는 하나 이상의 뷰티레이트의 히스톤 변형 효소 표적(즉,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및 G-단백질 연결 수용체(즉, FFAR2, FFAR3, and NIACR1)를 통해 일어난다.[32] 면역 조절과 염증 반응[편집] 뷰티레이트의 면역계에 미치는 영향은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의 억제와 뷰티레이트의 G 단백질 연결 수용체 표적인 NIACR1(GPR109A), FFAR2(GPR43), FFAR3(GPR41)의 활성화를 통해 매개된다.[33][38] 짧은 사슬 지방산 중 뷰티레이트는 시험관 내에서 장 조절 T세포의 가장 강력한 프로모터이며, NIACR1 리간드들 중에서 유일하다.[33] 뷰티르산은 결장에서 염증 반응의 중요한 매가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뷰티르산은 염증 매개 궤양성 대장염과 대장암을 막는 예방적, 치료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뷰티레이트는 항균 펩타이드 LL-37을 통해 사람에게 항균성을 부여하며, 이는 히스톤 H3에 대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억제를 통해 유도된다.[38][39][40] 뷰티레이트는 FOXP3(Tregs의 전사인자)의 유전자 발현을 증가시키고,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의 억제를 통해 결장 조절 T세포(regulatory T cells, Tregs)를 촉진시킨다.[33][38] 이러한 작용을 통해 뷰티레이트는 항염증성 사이토카인인 인터루킨 10의 발현을 증가시킨다.[38][33] 뷰티레이트는 또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를 통해 부분적으로 매개되는 IFN-γ–STAT1 신호전달경로를 억제함으로써 대장 염증을 막는다. 일시적인 IFN-γ 신호전달은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숙주의 면역 반응과 관련이 있는 반면 만성적인 IFN-γ 신호전달은 종종 만성적인 염증과 관련이 있다. 뷰티레이트가 T세포의 Fas 유전자 프로모터에 결합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1(HDAC1)의 활성을 억제하여 Fas 프로모터의 과아세틸화 및 T세포 표면의 Fas 수용체의 상향 조절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41] 이는 뷰티레이트가 결장 조직에서 T세포의 세포 사멸을 증가시켜 염증의 원인(IFN-γ 생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제안되었다.[41] 다른 NIACR1 작용제와 마찬가지로 뷰티레이트도 뇌, 위장관, 피부 및 혈관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서 현저한 항염증효과를 나타낸다.[42][43][44][45] FFAR3에 결합한 뷰티레이트는 신경펩타이드 Y의 방출을 유도하고, 결장 점막 및 장 면역계의 기능적 항상성을 촉진한다.[46] 뷰티르산은 포유류 결장(결장세포)의 막을 형성하는 세포의 에너지(ATP) 공급원으로 중요하다. 뷰티르산을 에너지로 사용하지 않으면, 결장세포는 상향조절된 자가소화 작용(즉, 자기소화)을 겪는다.[47] 암[편집] 뷰티레이트는 정상세포와 암세포에서 서로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이는 "뷰티레이트의 역설(butyrate paradox)"로 알려져 있다. 특히 뷰티레이트는 결장 종양 세포는 억제하고, 정상적인 결장상피 세포는 촉진시킨다.[48] 그 신호전달 메커니즘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49] 보고서는 뷰티레이트의 화학적 예방 효과가 부분적으로 종양 형성 과정과 관련된 노출량, 노출시간 및 식이 지방의 종류에 달려 있다고 제안했다.[16] 발효될 수 있는 섬유에서 뷰티레이트와 같은 휘발성 지방산(짧은 사슬 지방산)의 생산은 대장암에서 식이 섬유의 역할에 기여할 수 있다.[16] 뷰티르산을 포함한 짧은 사슬 지방산은 적절한 양의 식이 섬유가 함유된 식물성 식품인 프리바이오틱스를 먹이로 하거나 발효시키는 유익한 장내 세균(프로바이오틱)에 의해 생산된다. 이 짧은 사슬 지방산은 에너지 생성과 세포 증식을 증가시켜 결장 세포에 도움이 되며, 결장암을 예방할 수 있다.[50] 반대로 일부 연구자들은 뷰티레이트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며 뷰티레이트를 잠재적인 암 유발자로 간주하고 있다.[51] 생쥐에 대한 연구 결과 뷰티레이트가 MSH2 결핍 결장 상피세포의 형질전환을 유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2] 이는 유전자 결핍과 관련이있다.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 나이아신, β-하이드록시뷰티레이트 및 커규민은 효과적인 보조 치료제가 될 수 있다.[53] 당뇨병[편집] 미생물과 당뇨병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는 뷰티레이트가 모델 동물과 제2형 당뇨병 환자에서 "심각한 면역 대사 효과"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7] 또한 비만, 당뇨병과 인체 내에서 현저한 장내 세균의 불균형 간의 관계 역시 주목받았으나, 아직 이에 대해선 완전하게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37] 이러한 질병에서 뷰티레이트의 사용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 보고서는 이들 질병의 치료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질병의 병태생리학(즉, 생체분자의 메커니즘)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를 요구했다.[37] 같이 보기[편집] 히스톤 히스톤 변형 효소 히스톤 아세틸화효소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하이드록시뷰티르산 α-하이드록시뷰티르산 β-하이드록시뷰티르산 γ-하이드록시뷰티르산 β-하이드록시 β-메틸뷰티르산 β-메틸뷰티르산 주해[편집] ↑ 결장에서 흡수된 대부분의 뷰티레이트는 간문맥을 통해 순환계로 들어간다.[31] 간문맥으로 들어가는 대부분의 뷰티레이트는 간을 거친다.[31] 각주[편집] 본 문서에는 현재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Butanoic A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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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tylated histones cause the chromatin structure to loosen by weakening electrostatic attraction between the histone proteins and the DNA backbone. This process enables transcription factors and the basal transcriptional machinery to bind and increases transcription. ... However, many studies have shown that at least some of these beneficial effects can be attributed NaB’s ability to increase acetylation around the promoters of neurotrophic factors, such as BDNF, GDNF and NGF and thus increasing their transcription [41], [42], [43], [44], [45], [46], [47] and [48]. ... Butyrate also signals through GPR109a ... Much of the butyrate produced in the colon is used as an energy source by the colonocytes, but some butyrate can also exit the colon through the portal vein, where the liver absorbs another large portion [74] and [75]. However, the distal colon is not connected to the portal vein, allowing for some systemic butyrate to be circulated. Indeed, there are many reports of high fiber diets increasing blood levels of circulating butyrate [75], [76] and [77]. These later reports raise the possibility that increases in circulating butyrate could affect CNS function directly. ↑ 가 나 다 라 Kasubuchi M, Hasegawa S, Hiramatsu T, Ichimura A, Kimura I (2015). “Dietary gut microbial metabolites, short-chain fatty acids, and host metabolic regulation”. 《Nutrients》 7 (4): 2839–49. PMC 4425176. PMID 25875123. doi:10.3390/nu7042839. Short-chain fatty acids (SCFAs) such as acetate, butyrate, and propionate, which are produced by gut microbial fermentation of dietary fiber, are recognized as essential host energy sources and act as signal transduction molecules via G-protein coupled receptors (FFAR2, FFAR3, OLFR78, GPR109A) and as epigenetic regulators of gene expression by the inhibition of histone deacetylase (HDAC). Recent evidence suggests that dietary fiber and the gut microbial-derived SCFAs exert multiple beneficial effects on the host energy metabolism not only by improving the intestinal environment, but also by directly affecting various host peripheral tissues.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Hoeppli RE, Wu D, Cook L, Levings MK (February 2015). “The environment of regulatory T cell biology: cytokines, metabolites, and the microbiome”. 《Front Immunol》 6: 61. PMC 4332351. PMID 25741338. doi:10.3389/fimmu.2015.00061. Specific species that have been recognized by their high levels of butyrate production include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and the cluster IV and XIVa of genus Clostridium ... Administration of acetate, propionate, and butyrate in drinking water mimics the effect of Clostridium colonization in germ-free mice, resulting in an elevated Treg frequency in the colonic lamina propria and increased IL-10 production by these Tregs (180, 182). Of the three main SCFAs, butyrate has been found to be the most potent inducer of colonic Tregs. Mice fed a diet enriched in butyrylated starches have more colonic Tregs than those fed a diet containing propinylated or acetylated starches (181). Arpaia et al. tested an array of SCFAs purified from commensal bacteria and confirmed butyrate was the strongest SCFA-inducer of Tregs in vitro (180). Mechanistically, it has been proposed that butyrate, and possibly propionate, promote Tregs through inhibiting histone deacetylase (HDAC), causing increased acetylation of histone H3 in the Foxp3 CNS1 region, and thereby enhancing FOXP3 expression (180, 181). Short-chain fatty acids partially mediate their effects through G-protein coupled receptors (GPR), including GPR41, GPR43, and GPR109A. GPR41 and GPR43 are stimulated by all three major SCFAs (191), whereas GPR109A only interacts with butyrate (192). Figure 1: Microbial-derived molecules promote colonic Treg differentiation. ↑ Tsuji A (2005). “Small molecular drug transfer across the blood-brain barrier via carrier-mediated transport systems”. 《NeuroRx》 2 (1): 54–62. PMC 539320. PMID 15717057. doi:10.1602/neurorx.2.1.54. Other in vivo studies in our laboratories indicated that several compounds including acetate, propionate, butyrate, benzoic acid, salicylic acid, nicotinic acid, and some β-lactam antibiotics may be transported by the MCT at the BBB.21 ... Uptake of valproic acid was reduced in the presence of medium-chain fatty acids such as hexanoate, octanoate, and decanoate, but not propionate or butyrate, indicating that valproic acid is taken up into the brain via a transport system for medium-chain fatty acids, not short-chain fatty acids. ↑ 가 나 Vijay N, Morris ME (2014). “Role of monocarboxylate transporters in drug delivery to the brain”. 《Curr. Pharm. Des.》 20 (10): 1487–98. PMC 4084603. PMID 23789956. doi:10.2174/13816128113199990462. Monocarboxylate transporters (MCTs) are known to mediate the transport of short chain monocarboxylates such as lactate, pyruvate and butyrate. ... MCT1 and MCT4 have also been associated with the transport of short chain fatty acids such as acetate and formate which are then metabolized in the astrocytes [78]. ... SLC5A8 is expressed in normal colon tissue, and it functions as a tumor suppressor in human colon with silencing of this gene occurring in colon carcinoma. This transporter is involved in the concentrative uptake of butyrate and pyruvate produced as a product of fermentation by colonic bacteria. ↑ “triacylglycerol lipase – Homo sapiens”. 《BRENDA》. Technische Universität Braunschweig. 2015년 5월 25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Tilg H, Moschen AR (September 2014). “Microbiota and diabetes: an evolving relationship”. 《Gut》 63 (9): 1513–1521. PMID 24833634. doi:10.1136/gutjnl-2014-306928. Recent studies have suggested that gut bacteria play a fundamental role in diseases such as obesity, diabetes and cardiovascular disease. Data are accumulating in animal models and humans suggesting that obesity and type 2 diabetes (T2D) are associated with a profound dysbiosis. First human metagenome-wide association studies demonstrated highly significant correlations of specific intestinal bacteria, certain bacterial genes and respective metabolic pathways with T2D. Importantly, especially butyrate-producing bacteria such as Roseburia intestinalis and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concentrations were lower in T2D subjects. This supports the increasing evidence, that butyrate and other short-chain fatty acids are able to exert profound immunometabolic effects. ↑ 가 나 다 라 Wang G (2014). “Human antimicrobial peptides and proteins”. 《Pharmaceuticals (Basel)》 7 (5): 545–94. PMC 4035769. PMID 24828484. doi:10.3390/ph7050545. The establishment of a link between light therapy, vitamin D and human cathelicidin LL-37 expression provides a completely different way for infection treatment. Instead of treating patients with traditional antibiotics, doctors may be able to use light or vitamin D [291,292]. Indeed using narrow-band UV B light, the level of vitamin D was increased in psoriasis patients (psoriasis is a common autoimmune disease on skin) [293]. In addition, other small molecules such as butyrate can induce LL-37 expression [294]. Components from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ay regulate the AMP expression as well [295]. These factors may induce the expression of a single peptide or multiple AMPs [296]. It is also possible that certain factors can work together to induce AMP expression. While cyclic AMP and butyrate synergistically stimulate the expression of chicken β-defensin 9 [297], 4-phenylbutyrate (PBA) and 1,25-dihydroxyvitamin D3 (or lactose) can induce AMP gene expression synergistically [294,298]. It appears that stimulation of LL-37 expression by histone deacetylase (HDAC) inhibitors is cell dependent. Trichostatin and sodium butyrate increased the peptide expression in human NCI-H292 airway epithelial cells but not in the primary cultures of normal nasal epithelial cells [299]. However, the induction of the human LL-37 expression may not be a general approach for bacterial clearance. During Salmonella enterica infection of human monocyte-derived macrophages, LL-37 is neither induced nor required for bacterial clearance [300]. Table 3: Select human antimicrobial peptides and their proposed targetsTable 4: Some known factors that induce antimicrobial peptide expression ↑ Yonezawa H, Osaki T, Hanawa T, Kurata S, Zaman C, Woo TD, Takahashi M, Matsubara S, Kawakami H, Ochiai K, Kamiya S (2012). “Destructive effects of butyrate on the cell envelope of Helicobacter pylori”. 《J. Med. Microbiol.》 61 (Pt 4): 582–9. PMID 22194341. doi:10.1099/jmm.0.039040-0. ↑ McGee DJ, George AE, Trainor EA, Horton KE, Hildebrandt E, Testerman TL (2011). “Cholesterol enhances Helicobacter pylori resistance to antibiotics and LL-37”. 《Antimicrob. Agents Chemother.》 55 (6): 2897–904. PMC 3101455. PMID 21464244. doi:10.1128/AAC.00016-11. ↑ 가 나 Zimmerman MA, Singh N, Martin PM, Thangaraju M, Ganapathy V, Waller JL, Shi H, Robertson KD, Munn DH, Liu K (2012). “Butyrate suppresses colonic inflammation through HDAC1-dependent Fas upregulation and Fas-mediated apoptosis of T cells”. 《Am. J. Physiol. Gastroin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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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GPR109A's primary pharmacological ligand in clinical use, niacin has been used for over 50 years in the treatment of cardiovascular disease, mainly due to its favourable effects on plasma lipoproteins. However, it has become apparent that niacin also possesses lipoprotein-independent effects that influence inflammatory pathways mediated through GPR109A. ↑ Graff EC, Fang H, Wanders D, Judd RL (February 2016). “Anti-inflammatory effects of the hydroxycarboxylic acid receptor 2”. 《Metab. Clin. Exp.》 65 (2): 102–113. PMID 26773933. doi:10.1016/j.metabol.2015.10.001. HCA2 is highly expressed on immune cells, including macrophages, monocytes, neutrophils and dermal dendritic cells, among other cell types. ... Recent studies demonstrate that HCA2 mediates profound anti-inflammatory effects in a variety of tissues, indicating that HCA2 may be an important therapeutic target for treating inflammatory disease processes. ↑ Wakade C, Chong R (December 2014). “A novel treatment target for Parkinson's disease”. 《J. Neurol. Sci.》 347 (1-2): 34–38. PMID 25455298. doi:10.1016/j.jns.2014.10.024. GPR109A and its agonists are known to exert anti-inflammatory actions in the skin, gut and retina. ↑ Farzi A, Reichmann F, Holzer P (2015). “The homeostatic role of neuropeptide Y in immune function and its impact on mood and behaviour”. 《Acta Physiol (Oxf)》 213 (3): 603–27. PMC 4353849. PMID 25545642. doi:10.1111/apha.12445. In the context of this review it is particularly worth noting that short chain fatty acids such as butyrate, which the colonic microbiota generates by fermentation of otherwise indigestible dietary fibre (Cherbut et al. 1998), stimulate L cells to release PYY via the G-protein coupled receptor Gpr41 (Samuel et al. 2008). In this way, short chain fatty acids can indirectly attenuate gastrointestinal motility as well as electrolyte and water secretion (Cox 2007b). More importantly, short chain fatty acids exert homeostatic actions on the function of the colonic mucosa and immune system (Hamer et al. 2008, Tazoe et al. 2008, Guilloteau et al. 2010, Macia et al. 2012a, Smith et al. 2013). Whether PYY plays a role in these effects of short chain fatty acids awaits to be investigated, but may be envisaged from the finding that PYY promotes mucosal cell differentiation (Hallden & Aponte 1997). ↑ Donohoe, Dallas R.; Garge, Nikhil; Zhang, Xinxin; Sun, Wei; O’Connell, Thomas M.; Bunger, Maureen K.; Bultman, Scott J. (2011년 5월 4일). “The Microbiome and Butyrate Regulate Energy Metabolism and Autophagy in the Mammalian Colon”. 《Cell Metabolism》 13 (5): 517–526. ISSN 1550-4131. PMC 3099420. PMID 21531334. doi:10.1016/j.cmet.2011.02.018. ↑ Vanhoutvin SA, Troost FJ, Hamer HM, Lindsey PJ, Koek GH, Jonkers DM, Kodde A, Venema K, Brummer RJ (2009). Bereswill S, 편집. “Butyrate-induced transcriptional changes in human colonic mucosa”. 《PLOS ONE》 4 (8): e6759. PMC 2727000. PMID 19707587. doi:10.1371/journal.pone.0006759. [깨진 링크] ↑ Klampfer L, Huang J, Sasazuki T, Shirasawa S, Augenlicht L (August 2004). “Oncogenic Ras promotes butyrate-induced apoptosis through inhibition of gelsolin expression” (PDF). 《The Journal of Biological Chemistry》 279 (35): 36680–8. PMID 15213223. doi:10.1074/jbc.M405197200. ↑ Lupton, Joanne R. (2004). 《Microbial Degradation Products Influence Colon Cancer Risk: the Butyrate Controversy》. vol. 134 no. 2: J. Nutr. 479–482쪽. ↑ “Low-carb diet cuts risk of colon cancer, study finds | University of Toronto Media Room”. 《media.utoronto.ca》. 2016년 5월 4일에 확인함. ↑ Belcheva, Antoaneta; Irrazabal, Thergiory; Robertson, Susan J.; Streutker, Catherine; Maughan, Heather; Rubino, Stephen; Moriyama, Eduardo H.; Copeland, Julia K.; Kumar, Sachin (2014년 7월 17일). “Gut microbial metabolism drives transformation of MSH2-deficient colon epithelial cells”. 《Cell》 158 (2): 288–299. ISSN 1097-4172. PMID 25036629. doi:10.1016/j.cell.2014.04.051. ↑ “Colon Cancer Shuts Down Receptor That Could Shut It Down”. 《ScienceDaily》. 2016년 5월 4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영어) International Chemical Safety Card 1334 vdeh지질: 지방산포화 지방산 뷰티르산 (C4) 발레르산 (C5) 카프로산 (C6) 에난트산 (C7) 카프릴산 (C8) 펠라르곤산 (C9) 카프르산 (C10) 운데실산 (C11) 라우르산 (C12) 트라이데실산 (C13) 미리스트산 (C14) 펜타데칸산 (C15) 팔미트산 (C16) 마르가르산 (C17) 스테아르산 (C18) 노나데실산 (C19) 아라키드산 (C20) 헨에이코실산 (C21) 베헨산 (C22) 트라이코실산 (C23) 리그노세르산 (C24) 펜타코실산 (C25) 세로트산 (C26) 헵타코실산 (C27) 몬탄산 (C28) 노나코실산 (C29) 멜리스산 (C30) 헨트라이아콘틸산 (C31) 라세로산 (C32) 프실산 (C33) 게드산 (C34) 세로플라스트산 (C35) 헥사트라이아콘탄산 (C36) 헵타트라이아콘탄산 (C37) 불포화 지방산ω-3 지방산 α-리놀렌산 (18:3) 스테아리돈산 (18:4) 에이코사펜타엔산 (EPA, 20:5) 도코사헥사엔산 (DHA, 22:6) ω-6 지방산 리놀레산 (18:2) γ-리놀렌산 (18:3) 디호모-γ-리놀렌산 (20:3) 아라키돈산 (20:4) 아드렌산 (22:4) ω-7 지방산 팔미톨레산 (16:1) 박센산 (18:1) 파울린산 (20:1) ω-9 지방산 올레산 (18:1) 엘라이드산 (트랜스-18:1) 곤도산 (20:1) 에루크산 (22:1) 네르본산 (24:1) 미드산 (20:3) 생체분자: 탄수화물 알코올 당단백질 글리코사이드 지질 에이코사노이드 지방산 / 지방산 대사 중간생성물 인지질 스핑고지질 스테로이드 핵산 구성 성분 뉴클레오타이드 대사 중간생성물 단백질 표준 아미노산 / 아미노산 대사 중간생성물 테트라피롤 헴 대사 중간생성물 전거 통제 LCCN: sh85018405 GND: 4448004-0 BNF: cb12561820m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뷰티르산&oldid=23726431" 분류: 생화학 물질지방산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웹아카이브 틀 웨이백 링크CS1 - 영어 인용 (en)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ಕನ್ನಡКыргызчаLatinaLatviešu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తెలుగు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8일 (월) 12: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뷰티르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뷰티르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뷰티르산 일반적인 성질 IUPAC 이름 butanoic acid 화학식 C4H8O2 CAS 번호 107-92-6 PubChem 264 ChemSpider 259 물리적 성질 분자량 88.11 g/mol 녹는점 268.05 K-5.1 °C22.82 °F 끓는점 436.9 K163.75 °C326.75 °F 밀도 0.9528 g/cm3 형태 무색 유성 액체 열화학적 성질 안전성 뷰티르산(영어: butyric acid, 그리스어 "βούτῡρον"에서 유래, "butter"를 의미함)은 계통명은 부탄산(영어: butanoic acid)이고, BTA로 약칭되며,[1] 화학식이 CH3CH2CH2-COOH 인 카복실산이다. 뷰티르산의 염 및 에스터(에스테르)는 뷰티레이트(butyrate) 또는 부타노에이트(butanoate)로 알려져 있다. 뷰티르산은 우유 특히 염소, 양 및 아메리카들소의 젖, 버터,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 및 혐기성 발효 산물(결장 및 액취증 포함)에서 발견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허쉬 공정에 의해 생산된 밀크 초콜릿에서 발견되거나, 허쉬 초콜릿의 맛을 모방하기 위해 첨가된 것으로 추측된다.[2] 뷰티르산은 사람의 구토물에 존재하며, 불쾌한 냄새를 낸다.[3] 뷰티르산은 불쾌한 냄새와 콕 쏘는 맛을 가지며, 에테르와 유사한 약간 감미로운 뒷맛을 가진다. 개와 같은 좋은 냄새 탐지 능력이 있는 포유류는 뷰티르산을 10ppb(parts per billion)로 탐지할 수 있는 반면에 사람은 10ppm(parts per million)이상의 농도에서 뷰티르산을 탐지할 수 있다. 뷰티르산은 1814년 프랑스의 화학자 미셀 외젠 슈브뢰이(Michel Eugène Chevreul)에 의해 불순한 형태로 처음 관찰되었다. 1818년까지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을 특징짓기 위해 충분하게 정제했다. 그러나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에 대한 초기 연구를 발표하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 파리에 있는 과학 아카데미에 원고 형태로 연구 결과물을 맡겼다. 또한 프랑스의 화학자인 앙리 브라코노(Henri Braconnot)도 버터의 성분을 연구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우선권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1815년 초에 슈브뢰이는 버터 냄새의 원인이 되는 물질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4] 1817년에 슈브뢰이는 뷰티르산의 성질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뷰티르산의 이름을 지었다.[5] 그러나, 1823년에 이르러서야 뷰티르산의 특성이 자세히 밝혀졌다.[6] 뷰티르산이란 이름은 처음 발견된 물질인 butyrum (또는 buturum)이라는 버터의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목차 1 화학 1.1 안전성 2 제조 3 사용 4 생화학 4.1 미생물의 생합성 5 약리학 5.1 약력학 5.2 약동학 5.2.1 물질대사 6 연구 6.1 말초 치료 효과 6.1.1 면역 조절과 염증 반응 6.1.2 암 6.1.3 당뇨병 7 같이 보기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화학[편집] 뷰티르산은 동물성 지방에서 에스터의 형태로 발견되는 지방산이다. 뷰티르산의 트라이글리세라이드는 버터의 3~4%를 차지한다. 버터가 산패할 때, 가수분해에 의해 글리세라이드로부터 뷰티르산이 유리되어 불쾌한 냄새가 난다. 뷰티르산은 짧은 사슬 지방산이라고 불리는 지방산 하위 그룹의 주요 구성원이다. 뷰티르산은 염기와 강력한 산화제와 반응하여 많은 금속을 공격하는 중-강산이다.[7] 뷰티르산은 물, 에탄올 및 에테르에 쉽게 용해되는 유성의 무색 액체이며 염화 칼슘과 같은 염으로 포화되어 액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뷰티르산은 중크롬산 칼륨과 황산을 사용하여 이산화 탄소와 아세트산으로 산화되는 반면, 알칼리성 과망간산 칼륨은 뷰티르산을 이산화 탄소로 산화시킨다. 칼슘 염인 Ca(C4H7O2)2·H2O 은 뜨거운 물보다 차가운 물에 더 잘 녹는다. 뷰티르산은 이소뷰티르산(2-메틸프로판산)이라 불리는 구조 이성질체를 갖는다. 안전성[편집] 뷰티르산을 취급할 때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무 또는 PVC 장갑, 보호 안경, 화학 반응 저항성 옷, 신발과 같은 개인 보호 장비를 사용한다. 뷰티르산을 흡입하면 목이 아프고, 기침, 작열감, 호흡 곤란을 유발할 수 있다. 뷰티르산의 섭취는 복통, 쇼크 및 쇠약을 초래할 수 있다. 뷰티르산에 물리적으로 노출되면 통증, 물집, 피부 화상을 유발할 수 있지만 눈에 노출되면 통증, 심한 화상 및 시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7] 제조[편집] 뷰티르산은 당분 또는 녹말의 발효에 의해 산업적으로 제조되며, 탄산 칼슘은 제조 공정에서 형성된 산을 중화하기 위해 첨가된다. 녹말의 뷰티르산 발효는 고초균(Bacillus subtilis)의 직접 첨가에 의해 촉진된다. 뷰티르산의 염 및 에스터(에스테르)는 뷰티레이트 또는 뷰타노에이트로 불린다. 뷰티르산 또는 뷰티르산 발효는 돼지풀의 일종인 Heracleum giganteum 의 오일에서 헥실 에스터 헥실 뷰티레이트로 발견되며, 파스닙(Pastinaca sativa)에서 옥틸 에스터 옥틸 뷰티레이트로 발견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피부균총 및 땀에서 주목받아 왔다. 사용[편집] 뷰티르산은 다양한 뷰티레이트 에스터 제조에 사용된다. 메틸 뷰티레이트와 같은 뷰티르산의 저분자 에스터는 대부분 기분 좋은 향과 맛을 가진다. 그래서 식품 및 향수에 첨가제로 사용된다. 또한 뷰티르산은 병원성 세균의 증식을 감소시키는 능력 때문에 동물 사료 보충제로도 사용된다.[8] 뷰티르산은 EU FLAVIS 데이터베이스(번호 08.005)에서 식품 향료로 승인되었다. 또한 강한 냄새 때문에 뷰티르산은 낚시 미끼 첨가제로도 사용되었다.[9] 잉어(Cyprinus carpio) 미끼에 사용되는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많은 향들은 에스터 염기로 뷰티르산을 사용한다. 뷰티르산 자체 또는 뷰티르산이 첨가된 물질에 의해 어류가 유인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뷰티르산은 유럽 잉어나 유럽 납줄개의 입맛에 맞는 몇몇 유기산들 중 하나였다.[10] 뷰티르산은 해양 생물 보호 단체가 일본 포경선 선원들을 방해하거나,[11] 낙태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낙태 크리닉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악취탄으로도 사용되어 왔다.[12] 뷰티르산은 아세트산과 함께 셀룰로스와 반응하여 다양한 도구, 부품 및 코팅에 사용되는 셀룰로스 아세테이트 뷰티레이트(CAB)를 생산할 수 있으며 셀룰로스 아세테이트보다 분해에 대한 저항성이 더 크다.[13] 그러나, CAB는 열기 및 습기에 노출되면 뷰티르산을 방출하며 분해될 수 있다.[14] 이 과정은 오래된 스크루 드라이버 및 기타 수공구의 구토물 냄새 같은 불쾌한 냄새로 종종 관찰된다.[15] 생화학[편집] 미생물의 생합성[편집] 뷰티레이트는 혐기성 세균에 의해 수행되는 발효 공정의 최종 생성물로 생산된다. 발효차인 콤부차는 발효로 생성된 뷰티르산을 포함하고 있다. 이 발효 경로는 1861년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세균에서 뷰티레이트 생성 세균 종류의 예시 : Clostridium butyricum Clostridium kluyveri Clostridium pasteurianum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Fusobacterium nucleatum Butyrivibrio fibrisolvens Eubacterium limosum 그 경로는 대부분의 생물체에서 일어나는 포도당이 2분자의 피루브산으로 분해되는 해당과정으로 시작된다. 피루브산은 피루브산 생성효소(피루브산:페레독신 산화환원효소)로 불리는 효소 시스템을 포함하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아세틸-CoA로 산화된다. 2분자의 이산화 탄소(CO2)와 2분자의 수소 원자(H2)가 세포로부터 부산물로 생성된다. 반응 효소 아세틸-CoA → 아세토아세틸-CoA 아세틸-CoA-아세틸 전이효소 아세토아세틸-CoA →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탈수소효소 β-하이드록시부티릴-CoA → 크로토닐-CoA 크로토네이스 크로토닐-CoA → 부티릴-CoA (CH3CH2CH2C=O-CoA) 뷰티릴-CoA 탈수소효소 CoA가 인산기로 대체되어 뷰티릴 포스페이트를 생성함 포스포부티릴레이스 인산기가 ADP와 결합하여 ATP와 뷰티레이트을 생성함 뷰티레이트 카이네이스 발효의 마지막 단계에서 ATP가 생성된다. 포도당 1분자당 3분자의 ATP가 생성되는 비교적 높은 수율을 가진다. 이러한 발효 과정의 전체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C6H12O6 → C4H8O2 + 2 CO2 + 2 H2 몇몇 세균 종류은 뷰티레이트 발효로 시작하는 대체 경로에서 아세톤과 n-뷰탄올을 형성한다. 이들 세균 종류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Clostridium acetobutylicum, 산업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아세톤 및 프로판올 생산자 Clostridium beijerinckii Clostridium tetanomorphum Clostridium aurantibutyricum 이러한 세균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뷰티레이트 발효로 시작하지만, pH가 5미만으로 떨어지면 pH가 더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뷰탄올과 아세톤 생산으로 대사가 전환된다. 아세톤 1분자 당 2분자의 뷰탄올이 생성된다. 대사 경로의 변화는 아세토아세틸-CoA 생성 이후에 일어난다. 이 과정의 중간 생성물은 2가지 가능한 대사 경로를 취한다: 아세토아세틸-CoA → 아세토아세테이트 → 아세톤 아세토아세틸-CoA → 뷰티릴-CoA → 뷰틸알데하이드 → 뷰탄올 저항성 녹말, 귀리 시리얼, 펙틴, 구아 등으로부터 유래한 고발효성 섬유 잔류물들은 셀룰로스와 같은 저발효성 섬유보다 대장균에 의한 뷰티레이트를 포함하는 짧은 사슬 지방산을 더 많이 생성한다.[16] 한 연구에 따르면 저항성 녹말은 다른 형태의 식이 섬유보다 지속적으로 많은 뷰티레이트를 생성한다.[17] 소와 같은 반추동물에서 식이 섬유로부터 짧은 사슬 지방산을 생성하는 것은 우유와 버터 속에 뷰티레이트가 들어있는 원인이다.[18] 프룩탄은 프리바이오틱(prebiotic) 가용성 식이 섬유의 또 다른 공급원이다. 프룩탄은 부추속(Allium) 식물과 십자화과(Cruciferous) 식물과 같은 황이 많이 포함된 채소의 가용성 섬유에서 종종 발견된다. 프룩탄의 공급원은 밀,[19] 호밀, 보리, 양파, 마늘, 아스파라거스, 비트, 치커리, 파의 흰색 부분, 브로콜리, 방울 양배추, 양배추, 회향 등을 포함하고, 프럭토올리고당(FOS), 올리고프럭토스, 이눌린과 같은 프리바이오틱스(prebiotics)를 포함한다.[20][21] 이러한 식품의 대부분은 저항성 녹말에 비해 뷰티레이트 생성이 부족하지만 많은 장점을 가진다. 이들 식품은 일반적으로 낮은 혈당 지수를 가지며,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histone deacetylase, HDAC) 저해제로 혈액뇌장벽을 통과하여 뇌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연로로 사용되는 β-하이드록시뷰티르산으로부터 혜택을 보는 케톤생성성 식이를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22] 뷰티레이트 생성 식품의 다른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제는 설포라판(sulforaphane)[23] 으로 사람의 유방암 세포를 억제하는데 도움을 준다.[24] 설포라판은 쥐에서 모발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25] 궤양을 예방하는 화합물을 함유하고 있으며,[26] 쥐의 인지 능력에 도움을 준다.[27] 브로콜리의 설포라판은 적절하지 않게 준비되면 파괴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28] 마늘에 함유된 프럭탄에서 발견된 디알릴 디설파이드(diallyl disulfide)는 설치류에서 화학 독성 및 발암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밝혀졌으며,[29] 사람의 대장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할 때 뷰티레이트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나타냈다.[30] 약리학[편집] 약력학[편집] 다른 짧은 사슬 지방산(short-chain fatty acids, SCFAs)들과 마찬가지로 뷰티레이트는 에너지 균형을 조절하는데 도움을 주는 영양 센서로 기능하는 유리 지방산 수용체인 FFAR2와 FFAR3의 작용 물질이다.[31][32][33] 다른 짧은 사슬 지방산들과는 달리,[33] 뷰티레이트는 니아신 수용체 1(NIACR1, 또는 GPR109A로도 알려진)의 작용 물질이기도 하다.[31][32][33] 뷰티르산은 특히 대장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사용되고, 간에서 지방산 대사 과정 동안 ATP를 생성하는데 이용된다.[31] 뷰티르산은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제(구체적으로, HDAC1, HDAC2, HDAC3, and HDAC8)로 작용하여 세포에서 히스톤이 아세틸화된 상태로 머물게 한다.[31] 히스톤의 아세틸화는 히스톤 단백질과 DNA 사이의 정전기적 인력을 줄임으로써 염색질의 구조를 느슨하게 풀어준다.[31] 일반적으로 전사인자는 히스톤이 DNA와 단단하게 결합된 영역(즉, 탈아세틸화된, 예를 들어 이질염색질)에 접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뷰티르산은 프로모터에서 전사 활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며,[31]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활성으로 인해 보통 침묵되거나 하향 조절된다. 약동학[편집] 식이 섬유의 미생물 발효를 통해 결장에서 생산되는 뷰티레이트는 결장세포와 간에서 흡수되어[주 1] 에너지 대사 과정 동안 ATP를 생성한다.[31] 그러나 일부 뷰티레이트는 결장 말단부에서 흡수되고, 간문맥으로 들어가지 않아 순환계를 통해 뷰티레이트가 전신의 여러 장기에 분포될 수도 있다.[31] 전신 순환을 하는 뷰티레이트는 모노카복실레이트 수송체(즉, SLC16A 수송체들의 일종)를 통해 혈액뇌장벽을 용이하게 통과할 수 있다.[34][35] 세포막을 가로지르는 뷰티레이트의 통과를 매개하는 다른 수송체로는 SLC5A8(SMCT1), SLC27A1(FATP1), SLC27A4(FATP4)가 있다.[35] 물질대사[편집] 뷰티르산은 뷰티레이트-CoA 리게이스라고도 불리는 사람에 있는 다양한 XM-리게이스(xenobiotic/medium-chain fatty acid-ligase)(ACSM1, ACSM2B, ASCM3, ACSM4, ACSM5, ACSM6)에 의해 대사된다.[3] 이 반응에 의해 생성된 대사 산물은 뷰티릴-CoA이며, 다음과 같이 생성된다.[3] ATP + 뷰티르산 + CoA → AMP + 피로인산(PPi) + 뷰티릴-CoA 짧은 사슬 지방산인 뷰티레이트는 지방산 대사를 통한 에너지(즉, 아데노신 삼인산 또는 ATP) 공급원으로써 미토콘드리아에 의해 이용된다. 사람에서 트라이아실글리세롤 라이페이스는 다음 반응을 통해 뷰티레이트의 프로드러그인 트라이뷰티린(tributyrin)을 다이뷰티린(dibutyrin)과 뷰티레이트(Butyrate)로 전환시킨다.[36] 트라이뷰티린 + H2O= 다이뷰티린 + 뷰티레이트 연구[편집] 말초 치료 효과[편집] 뷰티레이트는 에너지 항상성 및 관련 질환(당뇨병 및 비만), 염증 및 면역(예: 항균 및 항암 효과가 있음)과 관련해서 사람에게 많은 유익한 효과를 제공한다.[32][37] 이러한 효과는 지방산 대사 동안 ATP를 생성하는 미토콘드리아에 의한 뷰티레이트의 이용을 통해 일어나거나 또는 하나 이상의 뷰티레이트의 히스톤 변형 효소 표적(즉,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및 G-단백질 연결 수용체(즉, FFAR2, FFAR3, and NIACR1)를 통해 일어난다.[32] 면역 조절과 염증 반응[편집] 뷰티레이트의 면역계에 미치는 영향은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의 억제와 뷰티레이트의 G 단백질 연결 수용체 표적인 NIACR1(GPR109A), FFAR2(GPR43), FFAR3(GPR41)의 활성화를 통해 매개된다.[33][38] 짧은 사슬 지방산 중 뷰티레이트는 시험관 내에서 장 조절 T세포의 가장 강력한 프로모터이며, NIACR1 리간드들 중에서 유일하다.[33] 뷰티르산은 결장에서 염증 반응의 중요한 매가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뷰티르산은 염증 매개 궤양성 대장염과 대장암을 막는 예방적, 치료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뷰티레이트는 항균 펩타이드 LL-37을 통해 사람에게 항균성을 부여하며, 이는 히스톤 H3에 대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억제를 통해 유도된다.[38][39][40] 뷰티레이트는 FOXP3(Tregs의 전사인자)의 유전자 발현을 증가시키고, I형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의 억제를 통해 결장 조절 T세포(regulatory T cells, Tregs)를 촉진시킨다.[33][38] 이러한 작용을 통해 뷰티레이트는 항염증성 사이토카인인 인터루킨 10의 발현을 증가시킨다.[38][33] 뷰티레이트는 또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저해를 통해 부분적으로 매개되는 IFN-γ–STAT1 신호전달경로를 억제함으로써 대장 염증을 막는다. 일시적인 IFN-γ 신호전달은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숙주의 면역 반응과 관련이 있는 반면 만성적인 IFN-γ 신호전달은 종종 만성적인 염증과 관련이 있다. 뷰티레이트가 T세포의 Fas 유전자 프로모터에 결합된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1(HDAC1)의 활성을 억제하여 Fas 프로모터의 과아세틸화 및 T세포 표면의 Fas 수용체의 상향 조절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41] 이는 뷰티레이트가 결장 조직에서 T세포의 세포 사멸을 증가시켜 염증의 원인(IFN-γ 생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제안되었다.[41] 다른 NIACR1 작용제와 마찬가지로 뷰티레이트도 뇌, 위장관, 피부 및 혈관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서 현저한 항염증효과를 나타낸다.[42][43][44][45] FFAR3에 결합한 뷰티레이트는 신경펩타이드 Y의 방출을 유도하고, 결장 점막 및 장 면역계의 기능적 항상성을 촉진한다.[46] 뷰티르산은 포유류 결장(결장세포)의 막을 형성하는 세포의 에너지(ATP) 공급원으로 중요하다. 뷰티르산을 에너지로 사용하지 않으면, 결장세포는 상향조절된 자가소화 작용(즉, 자기소화)을 겪는다.[47] 암[편집] 뷰티레이트는 정상세포와 암세포에서 서로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이는 "뷰티레이트의 역설(butyrate paradox)"로 알려져 있다. 특히 뷰티레이트는 결장 종양 세포는 억제하고, 정상적인 결장상피 세포는 촉진시킨다.[48] 그 신호전달 메커니즘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49] 보고서는 뷰티레이트의 화학적 예방 효과가 부분적으로 종양 형성 과정과 관련된 노출량, 노출시간 및 식이 지방의 종류에 달려 있다고 제안했다.[16] 발효될 수 있는 섬유에서 뷰티레이트와 같은 휘발성 지방산(짧은 사슬 지방산)의 생산은 대장암에서 식이 섬유의 역할에 기여할 수 있다.[16] 뷰티르산을 포함한 짧은 사슬 지방산은 적절한 양의 식이 섬유가 함유된 식물성 식품인 프리바이오틱스를 먹이로 하거나 발효시키는 유익한 장내 세균(프로바이오틱)에 의해 생산된다. 이 짧은 사슬 지방산은 에너지 생성과 세포 증식을 증가시켜 결장 세포에 도움이 되며, 결장암을 예방할 수 있다.[50] 반대로 일부 연구자들은 뷰티레이트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며 뷰티레이트를 잠재적인 암 유발자로 간주하고 있다.[51] 생쥐에 대한 연구 결과 뷰티레이트가 MSH2 결핍 결장 상피세포의 형질전환을 유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2] 이는 유전자 결핍과 관련이있다.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 나이아신, β-하이드록시뷰티레이트 및 커규민은 효과적인 보조 치료제가 될 수 있다.[53] 당뇨병[편집] 미생물과 당뇨병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는 뷰티레이트가 모델 동물과 제2형 당뇨병 환자에서 "심각한 면역 대사 효과"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7] 또한 비만, 당뇨병과 인체 내에서 현저한 장내 세균의 불균형 간의 관계 역시 주목받았으나, 아직 이에 대해선 완전하게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37] 이러한 질병에서 뷰티레이트의 사용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 보고서는 이들 질병의 치료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질병의 병태생리학(즉, 생체분자의 메커니즘)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를 요구했다.[37] 같이 보기[편집] 히스톤 히스톤 변형 효소 히스톤 아세틸화효소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하이드록시뷰티르산 α-하이드록시뷰티르산 β-하이드록시뷰티르산 γ-하이드록시뷰티르산 β-하이드록시 β-메틸뷰티르산 β-메틸뷰티르산 주해[편집] ↑ 결장에서 흡수된 대부분의 뷰티레이트는 간문맥을 통해 순환계로 들어간다.[31] 간문맥으로 들어가는 대부분의 뷰티레이트는 간을 거친다.[31] 각주[편집] 본 문서에는 현재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Butanoic A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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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tylated histones cause the chromatin structure to loosen by weakening electrostatic attraction between the histone proteins and the DNA backbone. This process enables transcription factors and the basal transcriptional machinery to bind and increases transcription. ... However, many studies have shown that at least some of these beneficial effects can be attributed NaB’s ability to increase acetylation around the promoters of neurotrophic factors, such as BDNF, GDNF and NGF and thus increasing their transcription [41], [42], [43], [44], [45], [46], [47] and [48]. ... Butyrate also signals through GPR109a ... Much of the butyrate produced in the colon is used as an energy source by the colonocytes, but some butyrate can also exit the colon through the portal vein, where the liver absorbs another large portion [74] and [75]. However, the distal colon is not connected to the portal vein, allowing for some systemic butyrate to be circulated. Indeed, there are many reports of high fiber diets increasing blood levels of circulating butyrate [75], [76] and [77]. These later reports raise the possibility that increases in circulating butyrate could affect CNS function directly. ↑ 가 나 다 라 Kasubuchi M, Hasegawa S, Hiramatsu T, Ichimura A, Kimura I (2015). “Dietary gut microbial metabolites, short-chain fatty acids, and host metabolic regulation”. 《Nutrients》 7 (4): 2839–49. PMC 4425176. PMID 25875123. doi:10.3390/nu7042839. Short-chain fatty acids (SCFAs) such as acetate, butyrate, and propionate, which are produced by gut microbial fermentation of dietary fiber, are recognized as essential host energy sources and act as signal transduction molecules via G-protein coupled receptors (FFAR2, FFAR3, OLFR78, GPR109A) and as epigenetic regulators of gene expression by the inhibition of histone deacetylase (HDAC). Recent evidence suggests that dietary fiber and the gut microbial-derived SCFAs exert multiple beneficial effects on the host energy metabolism not only by improving the intestinal environment, but also by directly affecting various host peripheral tissues.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Hoeppli RE, Wu D, Cook L, Levings MK (February 2015). “The environment of regulatory T cell biology: cytokines, metabolites, and the microbiome”. 《Front Immunol》 6: 61. PMC 4332351. PMID 25741338. doi:10.3389/fimmu.2015.00061. Specific species that have been recognized by their high levels of butyrate production include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and the cluster IV and XIVa of genus Clostridium ... Administration of acetate, propionate, and butyrate in drinking water mimics the effect of Clostridium colonization in germ-free mice, resulting in an elevated Treg frequency in the colonic lamina propria and increased IL-10 production by these Tregs (180, 182). Of the three main SCFAs, butyrate has been found to be the most potent inducer of colonic Tregs. Mice fed a diet enriched in butyrylated starches have more colonic Tregs than those fed a diet containing propinylated or acetylated starches (181). Arpaia et al. tested an array of SCFAs purified from commensal bacteria and confirmed butyrate was the strongest SCFA-inducer of Tregs in vitro (180). Mechanistically, it has been proposed that butyrate, and possibly propionate, promote Tregs through inhibiting histone deacetylase (HDAC), causing increased acetylation of histone H3 in the Foxp3 CNS1 region, and thereby enhancing FOXP3 expression (180, 181). Short-chain fatty acids partially mediate their effects through G-protein coupled receptors (GPR), including GPR41, GPR43, and GPR109A. GPR41 and GPR43 are stimulated by all three major SCFAs (191), whereas GPR109A only interacts with butyrate (192). Figure 1: Microbial-derived molecules promote colonic Treg differentiation. ↑ Tsuji A (2005). “Small molecular drug transfer across the blood-brain barrier via carrier-mediated transport systems”. 《NeuroRx》 2 (1): 54–62. PMC 539320. PMID 15717057. doi:10.1602/neurorx.2.1.54. Other in vivo studies in our laboratories indicated that several compounds including acetate, propionate, butyrate, benzoic acid, salicylic acid, nicotinic acid, and some β-lactam antibiotics may be transported by the MCT at the BBB.21 ... Uptake of valproic acid was reduced in the presence of medium-chain fatty acids such as hexanoate, octanoate, and decanoate, but not propionate or butyrate, indicating that valproic acid is taken up into the brain via a transport system for medium-chain fatty acids, not short-chain fatty acids. ↑ 가 나 Vijay N, Morris ME (2014). “Role of monocarboxylate transporters in drug delivery to the brain”. 《Curr. Pharm. Des.》 20 (10): 1487–98. PMC 4084603. PMID 23789956. doi:10.2174/13816128113199990462. Monocarboxylate transporters (MCTs) are known to mediate the transport of short chain monocarboxylates such as lactate, pyruvate and butyrate. ... MCT1 and MCT4 have also been associated with the transport of short chain fatty acids such as acetate and formate which are then metabolized in the astrocytes [78]. ... SLC5A8 is expressed in normal colon tissue, and it functions as a tumor suppressor in human colon with silencing of this gene occurring in colon carcinoma. This transporter is involved in the concentrative uptake of butyrate and pyruvate produced as a product of fermentation by colonic bacteria. ↑ “triacylglycerol lipase – Homo sapiens”. 《BRENDA》. Technische Universität Braunschweig. 2015년 5월 25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Tilg H, Moschen AR (September 2014). “Microbiota and diabetes: an evolving relationship”. 《Gut》 63 (9): 1513–1521. PMID 24833634. doi:10.1136/gutjnl-2014-306928. Recent studies have suggested that gut bacteria play a fundamental role in diseases such as obesity, diabetes and cardiovascular disease. Data are accumulating in animal models and humans suggesting that obesity and type 2 diabetes (T2D) are associated with a profound dysbiosis. First human metagenome-wide association studies demonstrated highly significant correlations of specific intestinal bacteria, certain bacterial genes and respective metabolic pathways with T2D. Importantly, especially butyrate-producing bacteria such as Roseburia intestinalis and Faecalibacterium prausnitzii concentrations were lower in T2D subjects. This supports the increasing evidence, that butyrate and other short-chain fatty acids are able to exert profound immunometabolic effects. ↑ 가 나 다 라 Wang G (2014). “Human antimicrobial peptides and proteins”. 《Pharmaceuticals (Basel)》 7 (5): 545–94. PMC 4035769. PMID 24828484. doi:10.3390/ph7050545. The establishment of a link between light therapy, vitamin D and human cathelicidin LL-37 expression provides a completely different way for infection treatment. Instead of treating patients with traditional antibiotics, doctors may be able to use light or vitamin D [291,292]. Indeed using narrow-band UV B light, the level of vitamin D was increased in psoriasis patients (psoriasis is a common autoimmune disease on skin) [293]. In addition, other small molecules such as butyrate can induce LL-37 expression [294]. Components from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ay regulate the AMP expression as well [295]. These factors may induce the expression of a single peptide or multiple AMPs [296]. It is also possible that certain factors can work together to induce AMP expression. While cyclic AMP and butyrate synergistically stimulate the expression of chicken β-defensin 9 [297], 4-phenylbutyrate (PBA) and 1,25-dihydroxyvitamin D3 (or lactose) can induce AMP gene expression synergistically [294,298]. It appears that stimulation of LL-37 expression by histone deacetylase (HDAC) inhibitors is cell dependent. Trichostatin and sodium butyrate increased the peptide expression in human NCI-H292 airway epithelial cells but not in the primary cultures of normal nasal epithelial cells [299]. However, the induction of the human LL-37 expression may not be a general approach for bacterial clearance. During Salmonella enterica infection of human monocyte-derived macrophages, LL-37 is neither induced nor required for bacterial clearance [300]. Table 3: Select human antimicrobial peptides and their proposed targetsTable 4: Some known factors that induce antimicrobial peptide expression ↑ Yonezawa H, Osaki T, Hanawa T, Kurata S, Zaman C, Woo TD, Takahashi M, Matsubara S, Kawakami H, Ochiai K, Kamiya S (2012). “Destructive effects of butyrate on the cell envelope of Helicobacter pylori”. 《J. Med. Microbiol.》 61 (Pt 4): 582–9. PMID 22194341. doi:10.1099/jmm.0.039040-0. ↑ McGee DJ, George AE, Trainor EA, Horton KE, Hildebrandt E, Testerman TL (2011). “Cholesterol enhances Helicobacter pylori resistance to antibiotics and LL-37”. 《Antimicrob. Agents Chemother.》 55 (6): 2897–904. PMC 3101455. PMID 21464244. doi:10.1128/AAC.00016-11. ↑ 가 나 Zimmerman MA, Singh N, Martin PM, Thangaraju M, Ganapathy V, Waller JL, Shi H, Robertson KD, Munn DH, Liu K (2012). “Butyrate suppresses colonic inflammation through HDAC1-dependent Fas upregulation and Fas-mediated apoptosis of T cells”. 《Am. J. Physiol. Gastrointest. Liver Physiol.》 302 (12): G1405–15. PMC 3378095. PMID 22517765. doi:10.1152/ajpgi.00543.2011. ↑ Offermanns S, Schwaninger M (2015). “Nutritional or pharmacological activation of HCA(2) ameliorates neuroinflammation”. 《Trends Mol Med》 21 (4): 245–255. PMID 25766751. doi:10.1016/j.molmed.2015.02.002. Neuroinflammatory cells express HCA2, a receptor for the endogenous neuroprotective ketone body β-hydroxybutyrate (BHB) as well as for the drugs dimethyl fumarate (DMF) and nicotinic acid, which have established efficacy in the treatment of MS and experimental stroke, respectively. This review summarizes the evidence that HCA2 is involved in the therapeutic effects of DMF, nicotinic acid, and ketone bodies in reducing neuroinflammation. ↑ Chai JT, Digby JE, Choudhury RP (May 2013). “GPR109A and vascular inflammation”. 《Curr Atheroscler Rep》 15 (5): 325. PMC 3631117. PMID 23526298. doi:10.1007/s11883-013-0325-9. As GPR109A's primary pharmacological ligand in clinical use, niacin has been used for over 50 years in the treatment of cardiovascular disease, mainly due to its favourable effects on plasma lipoproteins. However, it has become apparent that niacin also possesses lipoprotein-independent effects that influence inflammatory pathways mediated through GPR109A. ↑ Graff EC, Fang H, Wanders D, Judd RL (February 2016). “Anti-inflammatory effects of the hydroxycarboxylic acid receptor 2”. 《Metab. Clin. Exp.》 65 (2): 102–113. PMID 26773933. doi:10.1016/j.metabol.2015.10.001. HCA2 is highly expressed on immune cells, including macrophages, monocytes, neutrophils and dermal dendritic cells, among other cell types. ... Recent studies demonstrate that HCA2 mediates profound anti-inflammatory effects in a variety of tissues, indicating that HCA2 may be an important therapeutic target for treating inflammatory disease processes. ↑ Wakade C, Chong R (December 2014). “A novel treatment target for Parkinson's disease”. 《J. Neurol. Sci.》 347 (1-2): 34–38. PMID 25455298. doi:10.1016/j.jns.2014.10.024. GPR109A and its agonists are known to exert anti-inflammatory actions in the skin, gut and retina. ↑ Farzi A, Reichmann F, Holzer P (2015). “The homeostatic role of neuropeptide Y in immune function and its impact on mood and behaviour”. 《Acta Physiol (Oxf)》 213 (3): 603–27. PMC 4353849. PMID 25545642. doi:10.1111/apha.12445. In the context of this review it is particularly worth noting that short chain fatty acids such as butyrate, which the colonic microbiota generates by fermentation of otherwise indigestible dietary fibre (Cherbut et al. 1998), stimulate L cells to release PYY via the G-protein coupled receptor Gpr41 (Samuel et al. 2008). In this way, short chain fatty acids can indirectly attenuate gastrointestinal motility as well as electrolyte and water secretion (Cox 2007b). More importantly, short chain fatty acids exert homeostatic actions on the function of the colonic mucosa and immune system (Hamer et al. 2008, Tazoe et al. 2008, Guilloteau et al. 2010, Macia et al. 2012a, Smith et al. 2013). Whether PYY plays a role in these effects of short chain fatty acids awaits to be investigated, but may be envisaged from the finding that PYY promotes mucosal cell differentiation (Hallden & Aponte 1997). ↑ Donohoe, Dallas R.; Garge, Nikhil; Zhang, Xinxin; Sun, Wei; O’Connell, Thomas M.; Bunger, Maureen K.; Bultman, Scott J. (2011년 5월 4일). “The Microbiome and Butyrate Regulate Energy Metabolism and Autophagy in the Mammalian Colon”. 《Cell Metabolism》 13 (5): 517–526. ISSN 1550-4131. PMC 3099420. PMID 21531334. doi:10.1016/j.cmet.2011.02.018. ↑ Vanhoutvin SA, Troost FJ, Hamer HM, Lindsey PJ, Koek GH, Jonkers DM, Kodde A, Venema K, Brummer RJ (2009). Bereswill S, 편집. “Butyrate-induced transcriptional changes in human colonic mucosa”. 《PLOS ONE》 4 (8): e6759. PMC 2727000. PMID 19707587. doi:10.1371/journal.pone.0006759. [깨진 링크] ↑ Klampfer L, Huang J, Sasazuki T, Shirasawa S, Augenlicht L (August 2004). “Oncogenic Ras promotes butyrate-induced apoptosis through inhibition of gelsolin expression” (PDF). 《The Journal of Biological Chemistry》 279 (35): 36680–8. PMID 15213223. doi:10.1074/jbc.M405197200. ↑ Lupton, Joanne R. (2004). 《Microbial Degradation Products Influence Colon Cancer Risk: the Butyrate Controversy》. vol. 134 no. 2: J. Nutr. 479–482쪽. ↑ “Low-carb diet cuts risk of colon cancer, study finds | University of Toronto Media Room”. 《media.utoronto.ca》. 2016년 5월 4일에 확인함. ↑ Belcheva, Antoaneta; Irrazabal, Thergiory; Robertson, Susan J.; Streutker, Catherine; Maughan, Heather; Rubino, Stephen; Moriyama, Eduardo H.; Copeland, Julia K.; Kumar, Sachin (2014년 7월 17일). “Gut microbial metabolism drives transformation of MSH2-deficient colon epithelial cells”. 《Cell》 158 (2): 288–299. ISSN 1097-4172. PMID 25036629. doi:10.1016/j.cell.2014.04.051. ↑ “Colon Cancer Shuts Down Receptor That Could Shut It Down”. 《ScienceDaily》. 2016년 5월 4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영어) International Chemical Safety Card 1334 vdeh지질: 지방산포화 지방산 뷰티르산 (C4) 발레르산 (C5) 카프로산 (C6) 에난트산 (C7) 카프릴산 (C8) 펠라르곤산 (C9) 카프르산 (C10) 운데실산 (C11) 라우르산 (C12) 트라이데실산 (C13) 미리스트산 (C14) 펜타데칸산 (C15) 팔미트산 (C16) 마르가르산 (C17) 스테아르산 (C18) 노나데실산 (C19) 아라키드산 (C20) 헨에이코실산 (C21) 베헨산 (C22) 트라이코실산 (C23) 리그노세르산 (C24) 펜타코실산 (C25) 세로트산 (C26) 헵타코실산 (C27) 몬탄산 (C28) 노나코실산 (C29) 멜리스산 (C30) 헨트라이아콘틸산 (C31) 라세로산 (C32) 프실산 (C33) 게드산 (C34) 세로플라스트산 (C35) 헥사트라이아콘탄산 (C36) 헵타트라이아콘탄산 (C37) 불포화 지방산ω-3 지방산 α-리놀렌산 (18:3) 스테아리돈산 (18:4) 에이코사펜타엔산 (EPA, 20:5) 도코사헥사엔산 (DHA, 22:6) ω-6 지방산 리놀레산 (18:2) γ-리놀렌산 (18:3) 디호모-γ-리놀렌산 (20:3) 아라키돈산 (20:4) 아드렌산 (22:4) ω-7 지방산 팔미톨레산 (16:1) 박센산 (18:1) 파울린산 (20:1) ω-9 지방산 올레산 (18:1) 엘라이드산 (트랜스-18:1) 곤도산 (20:1) 에루크산 (22:1) 네르본산 (24:1) 미드산 (20:3) 생체분자: 탄수화물 알코올 당단백질 글리코사이드 지질 에이코사노이드 지방산 / 지방산 대사 중간생성물 인지질 스핑고지질 스테로이드 핵산 구성 성분 뉴클레오타이드 대사 중간생성물 단백질 표준 아미노산 / 아미노산 대사 중간생성물 테트라피롤 헴 대사 중간생성물 전거 통제 LCCN: sh85018405 GND: 4448004-0 BNF: cb12561820m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뷰티르산&oldid=23726431" 분류: 생화학 물질지방산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웹아카이브 틀 웨이백 링크CS1 - 영어 인용 (en)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ಕನ್ನಡКыргызчаLatinaLatviešu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తెలుగు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8일 (월) 12: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암보이나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암보이나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암보이나사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암보이나의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거주지 (위)와 반다네이라 (아래), 1655년 판화 암보이나 사건(네덜란드어: Ambonse Moord, 영어: Amboyna Massacre)은 1623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의 암보이나 섬(암본 섬)에 있는 잉글랜드의 길드 사무소를 네덜란드가 습격해 길드 사무소 직원을 모두 살해한 사건이다. 암본 사건 또는 암보이나 학살이라고 불린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향신료 무역은 좌절되었고, 네덜란드는 섬의 이익을 독점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한 잉글랜드는 인도에 화살을 조준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향신료 무역을 둘러싼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치열한 경쟁의 결과였으며, 17세기 후반까지 두 나라의 긴장 관계의 근원으로 남았다. 목차 1 배경 2 사건 3 결과 4 참고문헌 5 각주 6 외부 링크 배경[편집] 암보이나 섬은 말루쿠 제도 남쪽 스람 섬의 남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정향 등의 향료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럽에서 비싸게 거래되던 이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이 섬에 진출을 시도하는 나라가 잇따랐다. 1512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최초로 진출한 이래, 암보이나 섬의 향료는 포르투갈이 독점했다. 그러나 1599년에 네덜란드인들이 무역을 통해 진출한 이래, 1605년 2월 스티븐 반 데르 하겐이 무혈로 뉴빅토리아 요새를 점령하고, 지배권을 확립했다. 반면 잉글랜드도 1615년에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영란 양국 정부는 1619년 런던에서 방위조약(Treaty of Defence)을 체결하고, 아래의 사항을 서로 확인했다. 향료 무역은 향후 양국이 공동으로 실시하며, 이익 분배에 있어서 네덜란드 기득권을 존중하고 3분의 2를 네덜란드에, 나머지 잉글랜드가 얻는다. 그동안 양국이 점령한 지역의 영유권은 그대로 간직되지만, 향후 정복한 땅은 양국에서 절반씩 나눈다. 그러나 네덜란드 현지 당국은 이 협정을 무시하고 거래를 했고, 격노한 영국인은 바타비아의 네덜란드를 내쫒는다. 양자의 갈등과 대립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사건[편집]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두 회사는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양 당사자는 거래하던 현지의 통치자들과의 관계를 맺고 서로를 깎아내리기 위해 나쁜 믿음, 조약 의무 불이행, 비열한 시도를 포함하여 서로 수많은 불평을 했다. 암보이나 지역에서, 지방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총독인 헤르만 반 스페울트는 1622년 후반에 충성의 대상을 스페인으로 바꾸려고 하는 트르나테 술탄과 분쟁을 겪었다. 반 스페울트는 잉글랜드가 이런 문제를 비밀스럽게 야기했다고 의심했다.[1] 그 결과, 암보이나의 네덜란드인들은 무역소를 그들과 공유하고 있는 영국 무역상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막연한 의심은 1623년 2월 일본인 용병 중 하나인 로닌(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고용한 주인없는 사무라이[2])이 빅토리아 요새의 방어 감시의 현장에서 붙잡히면서 확고해졌다. 고문으로 심문을 하자, 그 군인은 다른 일본 용병과 요새를 점거하고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음모를 고백했다. 그는 또한 음모를 꾸민 일원으로 잉글랜드인 수장인 가브리엘 토어슨을 연루시켰다. 그 후 토어슨과 암보이나와 인접한 섬의 다른 잉글랜드인 직원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3] 전부는 아니지만[4] 대부분의 경우 심문을 당하면서 고문을 당했다.[5] 고문은 머리 위에 천을 덮고 물을 끼얹어 질식시키는 방식의 물고문이 행해졌다. (오늘 날에는 워터보딩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행해지던 통상적인 수사 고문이었다. 네덜란드의 재판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의 용의자는 고문 여부에 상관없이 유죄로 판결났다. 고소된 혐의가 반역이었기 때문에, 자백을 한 자들(자백은 로마 네덜란드 법률에 따라 유죄 판결을 위해 필요했다)은 암보이나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총독과 협의회로 구성된 법원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영국인 4명과 일본인 2명은 사면되었다. 결과적으로 10명의 영국인, 9명의 일본인과 1명의 포르투갈인(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었던)이 참수를 당했다. 1623년 3월 9일에 그들은 참수를 당했고, 영국인 수장인 가브리엘 토어슨의 머리는 모두가 볼 수 있게 기둥에 찔려 세워졌다. 이 사건은 양국 정부가 수년간 추구해 온 목표였던 이 지역에서의 영국 - 네덜란드 협력에 대한 희망을 끝장냈으며, 동인도 제도에서 네덜란드의 지배력의 시작을 알렸다. 결과[편집] 이 사건은 이내 잉글랜드 본국에 전달되었고, 양국 간에 진행하고 있던 동인도 회사의 합병 협상은 결렬되면서, 결국 외교 문제로까지 발전했다. 사건 발생 31년이 지난 1654년 네덜란드가 8만 5000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남아시아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은 축소되었고, 네덜란드가 지배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일단 같은 양의 금과 교환된 적이 있었을 정도의 고급품이었던 향료의 가격은 점차 하락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세계적 지위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새로운 해외 거점을 인도에 요구한 잉글랜드는 좋은 면제품의 대량 생산으로 국력을 키웠다. 참고문헌[편집] Coolhaas, W. Ph., "Aanteekeningen en opmerkingen over den zoogenaamden Ambonschen moord", in: Bijdragen tot de Taal-, Land- en Volkenkunde van Nederlandsch-Indië, Vol. 101 (1942), p. 49–93 Evans, M.D. (1998): Preventing Torture: A Study of the European Convention for the Prevention of Torture and Inhuman or Degrading Treatment or Punishment, Oxford U.P.; 512 pages, ISBN 0-19-826257-4 Hunter, W.W., Roberts, P.E. (1899): A History of British India, Longman, Green & Co. Jourdain, J. e.a. (1905): The Journal of John Jourdain, 1608–1617, Describing His Experiences in Arabia, India, and the Malay Archipelago, Hakluyt Society Markley, R. (2006): The Far East and the English Imagination, 1600–1730, Cambridge U.P.; 324 pages ISBN 0-521-81944-X Milton, G., Nathaniel’s Nutmeg: How one man's courage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 2000 Sceptre; 400 pages, ISBN 0-340-69676-1 Records of the special committee of judges on the Amboyna Massacre (Ambonse moorden), at the Nationaal Archief of the Netherlands in The Hague (part of the records of the Staten Generaal, records number 1.01.07, inventory number 12551.62) A Reply to the Remonstrance of the Bewinthebbers or Directors of the Dutch East-India Company, East-India Company (1632) Shorto, R., The Island at the Center of the World. Doubleday 2004 Schmidt, B. (2001): Innocence abroad: The Dutch imagination and the New World, 1570–1670, Cambridge University Press; 480 pages, ISBN 0-521-80408-6 Zwicker, S.N. (2004): The Cambridge Companion to John Dryden, Cambridge U.P., 318 pages ISBN 0-521-53144-6 각주[편집] ↑ State Papers, No. 537I ↑ 일본인 용병들은 포르투갈과 태국 왕들도 고용하고 있었다. 야마다 나가마사 참조 ↑ State Papers, No. 499I ↑ A number of the factors from the adjacent islands(Powle, Ladbrooke, Ramsey, and Sadler) had unshakeable "alibis" and were therefore left in peace; State Papers, No. 499I ↑ Under Roman Dutch Law, as under other continental European systems of law, based on the ius civile, torture was allowed in specific circumstances; Evans pp. 4–6. Though the English common law did not need torture for investigative purposes (as a confession was not required for conviction), the English did torture in cases of treason. For this purpose, a royal or Privy Council warrant was required, based on the Royal Prerogative.For a contemporary instance see the entry about the torture in February 1620/21 of one "Peacock of Cambridge" in the diary of William Camden in connection with the trial of Thomas Lake. A warrant for the torture of John Felton was quashed in 1628. 외부 링크[편집] Sainsbury, W. Noel (ed.), Calendar of State Papers Colonial, East Indies, China and Japan – 1622–1624, Volume 4 (1878) [1] (네덜란드어) Resolutiën Staten-Generaal 1626–1630, Bewerkt door I.J.A. Nijenhuis, P.L.R. De Cauwer, W.M. Gijsbers, M. Hell, C.O. van der Meij en J.E. Schooneveld-Oosterling [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암보이나_사건&oldid=23559695" 분류: 네덜란드-영국 관계스튜어트 시대영국 동인도 회사말루쿠주숨은 분류: 네덜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فارسیBahasa Indonesia日本語മലയാളംNederlandsРусскийTürkçe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8일 (월) 14: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플라시도 도밍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플라시도 도밍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영어 위키백과의 Plácido Domingo 문서를 번역하여 문서의 내용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신뢰성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출처가 제시되도록 번역하여 주십시오. 번역을 완료한 후에는 {{번역된 문서}} 틀을 토론창에 표기하여 저작자를 표시하여 주십시오. 문맥상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문서를 같이 번역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번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는 다른 문서를 보고 싶으시다면 분류:번역 확장 필요 문서를 참고해주세요. 플라시도 도밍고Plácido Domingo 기본 정보본명 호세 플라시도 도밍고 엠빌José Plácido Domingo Embil출생 1941년 1월 14일(1941-01-14) (78세)스페인 마드리드직업 오페라 가수, 뮤지컬 배우활동 시기 1959년 ~ 현재 호세 플라시도 도밍고 엠빌(스페인어: José Plácido Domingo Embil, 1941년 1월 14일 ~ )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한 오페라 가수, 성악가이자 지휘자이다. 1959년 멕시코 시티의 국립 가극장에서 데뷔했다. 1961년 몬테레이에서 연기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이 본격적인 첫 주연이다. 1968년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으로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마우리치오 역을 맡아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데뷔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The three tenors(3대 테너)라 불렸다. 목차 1 약력 2 평가 3 트리비아 4 서훈 5 외부 링크 약력[편집]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모두 스페인 민속 오페라인 사르수엘라(Zarzuela) 극단에서 활동하던 가수였다. 여덟 살 때 부모를 따라 멕시코로 이주하였으며, 그 곳에서 성장했다. 멕시코시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지만, 이후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어 부모처럼 사르수엘라 극단의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1년 멕시코시티 오페라극장에서 바리톤으로 공식 데뷔했고, 이후 성역을 끌어올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남주인공인 알프레도 역으로 출연하면서 테너로 전향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서 1965년 동안에는 이스라엘 국립오페라단에서 활약하다가 196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을 훌륭히 소화하여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후 세계 각지의 오페라 극장 무대를 석권했고, 도이체 그라모폰이나 데카, RCA 등 세계 유수의 클래식 레이블들에서 음반을 발매하며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2009년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바리톤으로 회귀하여 시몬 보카네그라의 타이틀 롤로 재데뷔했다. 시몬 역을 맡는 도중에 직장암으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2010년 봄에 수술을 받은 뒤 완쾌되었고, 현재 오페라 무대와 콘서트에서 다시 활동 중이다. 수술 후에는 무대 출연을 자제하는 편이라지만, 전보다 약간 줄었을 뿐 아직도 꾸준히 활동 중이다. 특히 일반적인 성악가들은 좋은 기량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은퇴는 커녕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수준을 넘어서서, 잊혀진 작품이나 초연작, 바리톤 배역에 출연하는 등 아직도 새로운 배역을 맡으며 레퍼토리를 넓히고 있는 노익장을 발휘 중이고, 물론 전성기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한 가창을 보여주고 있다. 2013년 7월에도 색전증으로 입원하였으나, 퇴원하자마자 원래 잡혀있던 페스티벌 일정을 모두 소화하는 강철 체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현재는 아무래도 건강 때문인지 타이틀 롤 보다는 조연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레퍼토리는 더 넓어진다.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류 역사상 평생 가장 많은 배역을 맡은 오페라 가수가 확실할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평가[편집] 원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더불어서 세계 3대 테너로 불렸지만, 파바로티 사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테너다.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박사학위를 비롯한 수많은 학위와 미국의 자유의 훈장,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 등 온갖 상훈, 영국의 명예 기사작위까지도 있다. 물론 이런 영예는 도밍고 뿐만 아니라 파바로티와 카레라스 역시 휩쓸었지만 말이다. 파바로티와 비교하여 목소릴 분류하자면 그는 리릭 테너보다 좀 더 무거운 성질인 스핀토 테너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만 한정하기에는 리리코와 드라마티코의 배역에도 잘 어울리는 음성을 가지고 있다. 성악가들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인 언어의 장벽도 거의 없어서 모국어인 스페인어 레퍼토리는 물론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등등 엄청나게 폭 넓은 언어로 된 오페라 배역들을 소화해낸다. 심지어 이들 언어로 어느 정도 회화까지 가능한 수준이라고. 학생 시절에 이런저런 연극 무대에 단역으로 출연한 경험도 있어서 연기력도 상당히 뛰어나며, 대사와 음악을 빨리 외우는 능력 또한 갖춰 레퍼토리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쉬지 않고 연구하는 그의 열정이 도밍고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바리톤 출신이었기 때문에 바리톤 배역을 부른 적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본인이 피가로역을 맡은 세비야의 이발사.[5] 다만 바리톤으로 시작해 테너 성부로 음역대를 끌어올린 탓에, 파바로티처럼 투명하고 파워풀한 고음을 내지는 못한다. 물론 도밍고만 못 내는 게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안티들의 경우에는 테너이면서도 커리어의 대부분에 걸쳐 높은 도(Do)를 내지 않았던 도밍고의 약점을 희화화시켜 'Mingo'라고 부르기도 한다. 쉽게 말해 '도'밍고에서 '도'를 뺀 거다. 대신 그 약점을 잘 생긴 외모와 세련된 목소리, '쓰리 테너' 중 가장 다양한 레퍼토리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손쉽게 커버해낸다. 외모와는 달리 상당한 학구파로 유명하다. 음대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던 탓에 이 분야들에서도 나름대로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특히 지휘 쪽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오페라 뿐 아니라 관현악 작품들에도 손을 대고 있는 중이다. 오페라 가수로선 매우 한정된 레퍼토리만 반복적으로 소화했던 파바로티와는 달리 끊임없이 새로운 배역에 도전해 현재 126개의 배역을 소화한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중 몇 개는 바리톤 배역이다. 새로운 레퍼토리 도전과 관련해 특히 커리어 후기에 접어들어서 바그너 테너 역에 도전한 것이 눈에 띈다. 처음에는 로엔그린 등 다소 가벼운 역부터 시작했지만 종국에는 트리스탄이나 지크프리트 같은 정통 헬덴 테너의 배역까지 소화했다. 때마침 90년대 바그너 가수 기근 현상과도 맞물려 이 분야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바그너 음악의 성지인 바이로이트에도 진출해서 꽤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음악 역사상으로도 이탈리아 오페라와 바그너 오페라 양쪽에 정통한 거의 유일한 테너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로엔그린 실황 영상물이 추천할 만하다. 목소리 뿐만 아니라 외모도 상당히 잘 생겼기 때문에 극장용 또는 비디오용 오페라 영상 주역을 자주 맡았다. 지금껏 도밍고가 출연한 오페라 영상물은 5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가히 오페라 영화의 제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선 음반에서는 파바로티가 캐스팅 됐었지만, 음반 녹음 직후에 진행된 영상물에서는 도밍고가 기용되었다. 파바로티와 도밍고 이외의 다른 배역은 다 동일하다. 트리비아[편집] 한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와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쓰리 테너 콘서트'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페라와 성악은 물론이며 일반 대중가요까지도 폭 넓게 불러왔으며, 존 덴버와 같이 불러 유명한 Perhaps Love, 모린 맥기번과 같이 부른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등등 팝송을 담은 크로스오버 앨범들도 많이 내놓았다. 파바로티가 유명 가수들을 섭외해 진행한 자선 공연 시리즈인 '파바로티와 친구들' 을 벤치마킹 했는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유명 가수들을 불러모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빈 교향악단의 반주로 크리스마스 대중 콘서트를 개최하고 그 실황으로 라이브 앨범을 발매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마드리디스타이기도 하다. 레알 마드리드 홈 경기 오프닝도 도밍고가 불렀다.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 등과 더불어 2012년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성악가로서의 전성기에도 콘서트에서 직접 지휘를 하기도 했으며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성악을 하기 힘들어지면 지휘자로 먹고 살겠다" 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실제로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지휘자로서의 활동이 많아지고 있다. 다만 아직 성악가로서도 은퇴는 하지 않은 듯 보인다. 사생활도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이후에는 마르타와 30년 이상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아들 중 플라시도 도밍고 주니어는 싱어송라이터와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고, 아버지가 개최한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비롯한 무대에서 자작 가요들을 내놓은 바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 성악 콩쿨을 만들어 계속해서 성악 인재들을 발굴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그리운 금강산의 한국어 발음이 한국인 성악가보다 정확했다는 풍문이 있다. 서훈[편집] 2002년 영국 명예 대영 제국 훈장 2등급(honorary KBE, 외국인대상 정원외 명예훈장) 2002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플라시도 도밍고 음악 포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97777704 LCCN: n81014470 ISNI: 0000 0001 2144 7141 GND: 118680242 SELIBR: 280359 SUDOC: 027771202 BNF: cb12404462r (데이터) 뮤직브레인즈: 521df2bd-01f6-456e-9d5f-f081068819c2 NDL: 00438076 NKC: jn19990210180 ICCU: IT\ICCU\INTV\025676 BNE: XX904915 CiNii: DA0209295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플라시도_도밍고&oldid=23917896" 분류: 194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스페인의 남자 가수스페인의 오페라 가수멕시코의 남자 가수멕시코의 오페라 가수스페인의 남자 뮤지컬 배우1959년 데뷔멕시코의 남자 뮤지컬 배우이탈리아의 남자 뮤지컬 배우스페인계 멕시코인테너마드리드 출신그래미상 수상자명예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미국에 거주한 스페인인멕시코에 거주한 스페인인울프상 예술 부문 수상자숨은 분류: 번역 확장 필요 문서스페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B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ymar ar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Ido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Napulitano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6일 (화) 13: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플라시도 도밍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플라시도 도밍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영어 위키백과의 Plácido Domingo 문서를 번역하여 문서의 내용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신뢰성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출처가 제시되도록 번역하여 주십시오. 번역을 완료한 후에는 {{번역된 문서}} 틀을 토론창에 표기하여 저작자를 표시하여 주십시오. 문맥상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문서를 같이 번역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번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는 다른 문서를 보고 싶으시다면 분류:번역 확장 필요 문서를 참고해주세요. 플라시도 도밍고Plácido Domingo 기본 정보본명 호세 플라시도 도밍고 엠빌José Plácido Domingo Embil출생 1941년 1월 14일(1941-01-14) (78세)스페인 마드리드직업 오페라 가수, 뮤지컬 배우활동 시기 1959년 ~ 현재 호세 플라시도 도밍고 엠빌(스페인어: José Plácido Domingo Embil, 1941년 1월 14일 ~ )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한 오페라 가수, 성악가이자 지휘자이다. 1959년 멕시코 시티의 국립 가극장에서 데뷔했다. 1961년 몬테레이에서 연기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이 본격적인 첫 주연이다. 1968년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으로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마우리치오 역을 맡아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데뷔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The three tenors(3대 테너)라 불렸다. 목차 1 약력 2 평가 3 트리비아 4 서훈 5 외부 링크 약력[편집]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모두 스페인 민속 오페라인 사르수엘라(Zarzuela) 극단에서 활동하던 가수였다. 여덟 살 때 부모를 따라 멕시코로 이주하였으며, 그 곳에서 성장했다. 멕시코시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지만, 이후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어 부모처럼 사르수엘라 극단의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1년 멕시코시티 오페라극장에서 바리톤으로 공식 데뷔했고, 이후 성역을 끌어올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남주인공인 알프레도 역으로 출연하면서 테너로 전향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서 1965년 동안에는 이스라엘 국립오페라단에서 활약하다가 196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을 훌륭히 소화하여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후 세계 각지의 오페라 극장 무대를 석권했고, 도이체 그라모폰이나 데카, RCA 등 세계 유수의 클래식 레이블들에서 음반을 발매하며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2009년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바리톤으로 회귀하여 시몬 보카네그라의 타이틀 롤로 재데뷔했다. 시몬 역을 맡는 도중에 직장암으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2010년 봄에 수술을 받은 뒤 완쾌되었고, 현재 오페라 무대와 콘서트에서 다시 활동 중이다. 수술 후에는 무대 출연을 자제하는 편이라지만, 전보다 약간 줄었을 뿐 아직도 꾸준히 활동 중이다. 특히 일반적인 성악가들은 좋은 기량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은퇴는 커녕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수준을 넘어서서, 잊혀진 작품이나 초연작, 바리톤 배역에 출연하는 등 아직도 새로운 배역을 맡으며 레퍼토리를 넓히고 있는 노익장을 발휘 중이고, 물론 전성기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한 가창을 보여주고 있다. 2013년 7월에도 색전증으로 입원하였으나, 퇴원하자마자 원래 잡혀있던 페스티벌 일정을 모두 소화하는 강철 체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현재는 아무래도 건강 때문인지 타이틀 롤 보다는 조연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레퍼토리는 더 넓어진다.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류 역사상 평생 가장 많은 배역을 맡은 오페라 가수가 확실할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평가[편집] 원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더불어서 세계 3대 테너로 불렸지만, 파바로티 사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테너다.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박사학위를 비롯한 수많은 학위와 미국의 자유의 훈장,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 등 온갖 상훈, 영국의 명예 기사작위까지도 있다. 물론 이런 영예는 도밍고 뿐만 아니라 파바로티와 카레라스 역시 휩쓸었지만 말이다. 파바로티와 비교하여 목소릴 분류하자면 그는 리릭 테너보다 좀 더 무거운 성질인 스핀토 테너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만 한정하기에는 리리코와 드라마티코의 배역에도 잘 어울리는 음성을 가지고 있다. 성악가들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인 언어의 장벽도 거의 없어서 모국어인 스페인어 레퍼토리는 물론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등등 엄청나게 폭 넓은 언어로 된 오페라 배역들을 소화해낸다. 심지어 이들 언어로 어느 정도 회화까지 가능한 수준이라고. 학생 시절에 이런저런 연극 무대에 단역으로 출연한 경험도 있어서 연기력도 상당히 뛰어나며, 대사와 음악을 빨리 외우는 능력 또한 갖춰 레퍼토리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쉬지 않고 연구하는 그의 열정이 도밍고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바리톤 출신이었기 때문에 바리톤 배역을 부른 적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본인이 피가로역을 맡은 세비야의 이발사.[5] 다만 바리톤으로 시작해 테너 성부로 음역대를 끌어올린 탓에, 파바로티처럼 투명하고 파워풀한 고음을 내지는 못한다. 물론 도밍고만 못 내는 게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안티들의 경우에는 테너이면서도 커리어의 대부분에 걸쳐 높은 도(Do)를 내지 않았던 도밍고의 약점을 희화화시켜 'Mingo'라고 부르기도 한다. 쉽게 말해 '도'밍고에서 '도'를 뺀 거다. 대신 그 약점을 잘 생긴 외모와 세련된 목소리, '쓰리 테너' 중 가장 다양한 레퍼토리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손쉽게 커버해낸다. 외모와는 달리 상당한 학구파로 유명하다. 음대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던 탓에 이 분야들에서도 나름대로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특히 지휘 쪽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오페라 뿐 아니라 관현악 작품들에도 손을 대고 있는 중이다. 오페라 가수로선 매우 한정된 레퍼토리만 반복적으로 소화했던 파바로티와는 달리 끊임없이 새로운 배역에 도전해 현재 126개의 배역을 소화한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중 몇 개는 바리톤 배역이다. 새로운 레퍼토리 도전과 관련해 특히 커리어 후기에 접어들어서 바그너 테너 역에 도전한 것이 눈에 띈다. 처음에는 로엔그린 등 다소 가벼운 역부터 시작했지만 종국에는 트리스탄이나 지크프리트 같은 정통 헬덴 테너의 배역까지 소화했다. 때마침 90년대 바그너 가수 기근 현상과도 맞물려 이 분야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바그너 음악의 성지인 바이로이트에도 진출해서 꽤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음악 역사상으로도 이탈리아 오페라와 바그너 오페라 양쪽에 정통한 거의 유일한 테너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로엔그린 실황 영상물이 추천할 만하다. 목소리 뿐만 아니라 외모도 상당히 잘 생겼기 때문에 극장용 또는 비디오용 오페라 영상 주역을 자주 맡았다. 지금껏 도밍고가 출연한 오페라 영상물은 5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가히 오페라 영화의 제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선 음반에서는 파바로티가 캐스팅 됐었지만, 음반 녹음 직후에 진행된 영상물에서는 도밍고가 기용되었다. 파바로티와 도밍고 이외의 다른 배역은 다 동일하다. 트리비아[편집] 한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와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쓰리 테너 콘서트'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페라와 성악은 물론이며 일반 대중가요까지도 폭 넓게 불러왔으며, 존 덴버와 같이 불러 유명한 Perhaps Love, 모린 맥기번과 같이 부른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등등 팝송을 담은 크로스오버 앨범들도 많이 내놓았다. 파바로티가 유명 가수들을 섭외해 진행한 자선 공연 시리즈인 '파바로티와 친구들' 을 벤치마킹 했는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유명 가수들을 불러모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빈 교향악단의 반주로 크리스마스 대중 콘서트를 개최하고 그 실황으로 라이브 앨범을 발매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마드리디스타이기도 하다. 레알 마드리드 홈 경기 오프닝도 도밍고가 불렀다.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 등과 더불어 2012년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성악가로서의 전성기에도 콘서트에서 직접 지휘를 하기도 했으며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성악을 하기 힘들어지면 지휘자로 먹고 살겠다" 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실제로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지휘자로서의 활동이 많아지고 있다. 다만 아직 성악가로서도 은퇴는 하지 않은 듯 보인다. 사생활도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이후에는 마르타와 30년 이상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아들 중 플라시도 도밍고 주니어는 싱어송라이터와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고, 아버지가 개최한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비롯한 무대에서 자작 가요들을 내놓은 바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 성악 콩쿨을 만들어 계속해서 성악 인재들을 발굴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그리운 금강산의 한국어 발음이 한국인 성악가보다 정확했다는 풍문이 있다. 서훈[편집] 2002년 영국 명예 대영 제국 훈장 2등급(honorary KBE, 외국인대상 정원외 명예훈장) 2002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플라시도 도밍고 음악 포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97777704 LCCN: n81014470 ISNI: 0000 0001 2144 7141 GND: 118680242 SELIBR: 280359 SUDOC: 027771202 BNF: cb12404462r (데이터) 뮤직브레인즈: 521df2bd-01f6-456e-9d5f-f081068819c2 NDL: 00438076 NKC: jn19990210180 ICCU: IT\ICCU\INTV\025676 BNE: XX904915 CiNii: DA0209295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플라시도_도밍고&oldid=23917896" 분류: 194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스페인의 남자 가수스페인의 오페라 가수멕시코의 남자 가수멕시코의 오페라 가수스페인의 남자 뮤지컬 배우1959년 데뷔멕시코의 남자 뮤지컬 배우이탈리아의 남자 뮤지컬 배우스페인계 멕시코인테너마드리드 출신그래미상 수상자명예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미국에 거주한 스페인인멕시코에 거주한 스페인인울프상 예술 부문 수상자숨은 분류: 번역 확장 필요 문서스페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B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ymar ar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Ido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Napulitano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6일 (화) 13: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순옥 (작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순옥 (작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순옥 출생 1971년 (47–48세) 직업 작가 국적 대한민국 소속 지담 (구 예인 E&M), SM 라이프디자인 그룹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활동기간 2000년 ~ 현재 장르 TV 드라마 대표작 내 딸 금사월 (2015-2016)왔다! 장보리 (2014)아내의 유혹 (2008-2009) 김순옥(1971년 ~ )은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다. 2000년 MBC 베스트극장 《사랑에 대한 예의》로 데뷔하였다. 이후 2007년 MBC 아침드라마 《그래도 좋아!》가 좋은 반응을 얻은 뒤부터 특유의 빠른 스토리 전개와 파격적인 설정으로 《아내의 유혹》과 《천사의 유혹》 등 막장 스토리를 히트시키며 인기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소재와 개연성이 없는 전개 등으로 막장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목차 1 학력 2 집필 활동 2.1 텔레비전 드라마 3 작품의 특징 4 같이 보기 5 각주 학력[편집]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집필 활동[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2000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사랑에 대한 예의》 2000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아버지의 가을》 2001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바다끝 물고기》 2002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겨울이 갈 때까지》 2002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천국에서 굽는 붕어빵》 2004년 MBC 소설극장 《빙점》 2007년 MBC 아침드라마 《그래도 좋아!》 2008년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2009년 SBS 월화드라마 《천사의 유혹》 2010년 SBS 주말극장 《웃어요, 엄마》 2012년 SBS 특별기획 《다섯 손가락》 2012년 SBS 일일드라마 《가족의 탄생》[1] 2014년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2015년 MBC 주말 특별기획 《내 딸, 금사월》 2017년 SBS 특별기획 《언니는 살아있다》 2018년 SBS 드라마스페셜 《황후의 품격》 작품의 특징[편집] 김순옥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은 악녀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며, 그 등장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MBC 아침드라마 《그래도 좋아!》 : 서명지 (고은미 분)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 민소희 (장서희 분), 신애리 (김서형 분) SBS 월화드라마 《천사의 유혹》 : 주아란 (이소연 분) SBS 주말극장 《웃어요, 엄마》 : 조복희 (이미숙 분), 황보미 (고은미 분)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다섯 손가락》 : 채영랑 (채시라 분)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 연민정 (이유리 분), 도혜옥 (황영희 분), 김인화 (김혜옥 분) MBC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내 딸, 금사월》 : 신득예 (전인화 분), 오혜상 (박세영 분)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 : 양달희 (김다솜 분), 구세경 (손여은 분), 이계화 (양정아 분) SBS 드라마 스페셜 《황후의 품격》: 태후 강씨 (강은란) (신은경 분), 민유라 (이엘리야 분), 서강희 (윤소이 분) 같이 보기[편집] 막장 드라마 각주[편집] ↑ 김영인 작가의 건강 악화로 작가 교체 이 글은 작가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순옥_(작가)&oldid=24379459" 분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각본가이화여자대학교 동문197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숨은 분류: 작가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02: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순옥 (작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순옥 (작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순옥 출생 1971년 (47–48세) 직업 작가 국적 대한민국 소속 지담 (구 예인 E&M), SM 라이프디자인 그룹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활동기간 2000년 ~ 현재 장르 TV 드라마 대표작 내 딸 금사월 (2015-2016)왔다! 장보리 (2014)아내의 유혹 (2008-2009) 김순옥(1971년 ~ )은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다. 2000년 MBC 베스트극장 《사랑에 대한 예의》로 데뷔하였다. 이후 2007년 MBC 아침드라마 《그래도 좋아!》가 좋은 반응을 얻은 뒤부터 특유의 빠른 스토리 전개와 파격적인 설정으로 《아내의 유혹》과 《천사의 유혹》 등 막장 스토리를 히트시키며 인기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소재와 개연성이 없는 전개 등으로 막장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목차 1 학력 2 집필 활동 2.1 텔레비전 드라마 3 작품의 특징 4 같이 보기 5 각주 학력[편집]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집필 활동[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2000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사랑에 대한 예의》 2000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아버지의 가을》 2001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바다끝 물고기》 2002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겨울이 갈 때까지》 2002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천국에서 굽는 붕어빵》 2004년 MBC 소설극장 《빙점》 2007년 MBC 아침드라마 《그래도 좋아!》 2008년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2009년 SBS 월화드라마 《천사의 유혹》 2010년 SBS 주말극장 《웃어요, 엄마》 2012년 SBS 특별기획 《다섯 손가락》 2012년 SBS 일일드라마 《가족의 탄생》[1] 2014년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2015년 MBC 주말 특별기획 《내 딸, 금사월》 2017년 SBS 특별기획 《언니는 살아있다》 2018년 SBS 드라마스페셜 《황후의 품격》 작품의 특징[편집] 김순옥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은 악녀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며, 그 등장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MBC 아침드라마 《그래도 좋아!》 : 서명지 (고은미 분)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 민소희 (장서희 분), 신애리 (김서형 분) SBS 월화드라마 《천사의 유혹》 : 주아란 (이소연 분) SBS 주말극장 《웃어요, 엄마》 : 조복희 (이미숙 분), 황보미 (고은미 분)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다섯 손가락》 : 채영랑 (채시라 분)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 연민정 (이유리 분), 도혜옥 (황영희 분), 김인화 (김혜옥 분) MBC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내 딸, 금사월》 : 신득예 (전인화 분), 오혜상 (박세영 분)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 : 양달희 (김다솜 분), 구세경 (손여은 분), 이계화 (양정아 분) SBS 드라마 스페셜 《황후의 품격》: 태후 강씨 (강은란) (신은경 분), 민유라 (이엘리야 분), 서강희 (윤소이 분) 같이 보기[편집] 막장 드라마 각주[편집] ↑ 김영인 작가의 건강 악화로 작가 교체 이 글은 작가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순옥_(작가)&oldid=24379459" 분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각본가이화여자대학교 동문197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숨은 분류: 작가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02: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현보 종가 문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현보 종가 문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현보 종가 문적(李賢輔 宗家 文籍) 대한민국의 보물 종목 보물 제1202호 (1994년 7월 29일 지정)수량 일괄(고문서23매,전적7책,회화1첩)시대 조선시대소유 이성원위치 안동시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태사길 69-7 (옥정동)좌표 북위 36° 34′ 0.2″ 동경 128° 44′ 5.8″ / 북위 36.566722° 동경 128.734944° / 36.566722; 128.734944좌표: 북위 36° 34′ 0.2″ 동경 128° 44′ 5.8″ / 북위 36.566722° 동경 128.734944° / 36.566722; 128.734944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이현보 종가 문적(李賢輔 宗家 文籍)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기록유산이다. 1994년 7월 2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02호로 지정되었다.[1] 목차 1 개요 2 세부목록 3 같이 보기 4 각주 5 참고 자료 개요[편집] 이 문적류들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시조작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1467∼1555)와 그의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지 고문서와 전적류, 회화류 등이다.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문과에 급제한 뒤 내직으로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과 외직으로 밀양과 안동, 충주 등지의 지방관을 지냈다. 이후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42년 76세 때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말년을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소재로 삼아 시조를 지은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 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고문서류인 교지는 총 23매로써 연산군 4년(1498)∼명종 15년(1560) 사이의 것으로 이현보(14매), 이파(1매), 이문량(8매)과 관련된 교지들이다. 전적류로서는『애일당구경첩』으로 모두 2책으로 되어있다. 한책은 당시 명사들의 친필로 쓴 시를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이고,『애일당구경별록』은 생일가를 포함한 국문가사 등 이현보의 작품과 행적을 별도로 모아 편성한 것이다. 또한 회화류의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는 이현보가 동부승지로 재직시 승정원 관원 10명과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는 훼손이 심하기는 하나, 다른 계회도와는 달리 『은대계회도』가 처음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계회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교지 등의 자료는 조선 전기 인사행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들로써 평가되며, 전적류들은 국문가사와 국문학 연구자료로 주요한 것들이다. 세부목록[편집] 농암유고초(聾巖遺稿草) 1책 정동면례시일록(亭洞緬禮時日錄) 1책 계사구로회첩(癸巳九老會帖)) 1첩 분천강호록(汾川講好錄) 1책 당음비사(棠陰比事) 3권(卷) 1책 애일당구경별록(愛日堂具慶別錄) 1책 애일당구경첩 <상>(愛日堂具慶帖 <上>) 1책 애일당구경첩 <하>(愛日堂具慶帖 <下>) 1책 성균생원이현보문과병과 급제교지(成均生員李賢輔文科丙科 及第敎旨) 1건 이현보 교지-홍치십사년사월일(李賢輔 敎旨-弘治十四年四月日) 1건 이현보 교지-홍치십오년시월일(李賢輔 敎旨-弘治十五年十月日) 1건 이현보 교지-홍치십칠년정월일(李賢輔 敎旨-弘治十七年正月日) 1건 이현보 교지-홍치십칠년이월일(李賢輔 敎旨-弘治十七年二月日) 1건 이현보 교지-정덕이년십이월일(李賢輔 敎旨-正德二年十二月日) 1건 이현보 교지-정덕구년시월이십일(李賢輔 敎旨-正德九年十月二十日) 1건 이현보 교지-정덕십년삼월일(李賢輔 敎旨-正德十年三月日) 1건 이현보 교지-가정오년이월십구일(李賢輔 敎旨-嘉靖五年二月十九日) 1건 이현보 교지-가정오년시월십구일(李賢輔 敎旨-嘉靖五年十月十九日) 1건 이현보 교지-가정오년십일월십칠일(李賢輔 敎旨-嘉靖五年十一月十七日) 1건 이현보 교지-가정칠년삼월일(李賢輔 敎旨-嘉靖七年三月日) 1건 이현보 교지-가정이십이년삼월일(李賢輔 敎旨-嘉靖二十二年三月日) 1건 이현보 교지-가정삼십육년삼월이십이일(李賢輔 敎旨-嘉靖三十六年三月二十二日) 1건 이파 증직교지-가정이십오년십일월초이일(李坡 贈職敎旨-嘉靖二十五年十一月初二日) 1건 이문량 교지-정덕십오년윤팔월일(李文樑 敎旨-正德十五年閏八月日) 1건 이문량 교지-가정십삼년윤이월일(李文樑 敎旨-嘉靖十三年閏二月日) 1건 이문량 교지-가정이십이년시월일(李文樑 敎旨-嘉靖二十二年十月日) 1건 이문량 교지-가정이십이년십일월일(李文樑 敎旨-嘉靖二十二年十一月日) 1건 이문량 교지-가정이십사년삼월일(李文樑 敎旨-嘉靖二十四年三月日) 1건 이문량 교지-가정이십육년삼월일(李文樑 敎旨-嘉靖二十六年三月日) 1건 이문량 교지-가정삼십일년시월일(李文樑 敎旨-嘉靖三十一年十月日) 1건 이문량 교지-가정삼십구년구월초삼일(李文樑 敎旨-嘉靖三十九年九月初三日) 1건 같이 보기[편집] 이현보 각주[편집] ↑ 문화체육부고시제1994-19호, 《보물지정》, 문화체육부장관, 대한민국 관보 제12778호, 72면, 1994-07-30 참고 자료[편집] 이현보 종가 문적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현보_종가_문적&oldid=16010143" 분류: 경상북도의 보물안동시의 문화재교지계회도조선의 책영천 이씨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6년 3월 15일 (화) 23: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뇌척수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뇌척수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뇌척수액의 맥동을 보여주는 MRI 사진 뇌척수액은 뇌와 척수 주위의 거미막밑 공간을 순환한다. 뇌실계통 뇌척수액(腦脊髓液, cerebrospinal fluid, CSF)은 수액이라고도 부른다. 뇌와 척수를 둘러싼 연질막과 지주막(거미막) 사이에 있는 공간인 지주막 하강(거미막밑 공간)과 뇌실을 채우고 있는 액체를 말한다. 뇌의 고랑과 수조, 척수의 중심관에 들어 있는 액체도 뇌척수액이다. 뇌와 척수를 뇌척수강 내에 부유시켜서 뇌 피질을 물리적·면역학적인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완충 역할을 한다. 대뇌 혈류를 자가조절하고, 뇌와 척수의 조직액을 대신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뇌의 맥락얼기에서 생산되고, 무색·투명하며 약알칼리성으로 전체의 양은 100∼150 mℓ이다. 조성은 림프와 거의 같으나 단백질은 매우 적다. 목차 1 구조 1.1 생산 1.2 순환 1.3 재흡수 1.4 구성성분 1.5 발생 2 기능 2.1 부력 2.2 보호 2.3 화학적 안정 2.4 노폐물 제거 3 임상적 중요성 3.1 수두증 3.2 요추천자 3.3 비중 3.4 알츠하이머병 4 같이 보기 5 각주 및 참고 문헌 6 외부 링크 구조[편집] 생산[편집] 뇌척수액은 하루에 약 500 ml[1](약 0.4 ml/분[2])가 생산되고, 일정하게 재흡수되어 양은 100-160 ml로 유지된다. 맥락얼기의 뇌실막 세포가 전체 뇌척수액의 2/3 이상을 생산한다. 맥락얼기는 제4뇌실에 있는 정맥얼기로, 뇌척수액으로 가득 찬 빈 공간이다. 나머지 뇌척수액은 뇌실의 표면과 거미막밑 공간 주위의 표면에서 생산된다.[3] 뇌실막 세포는 가쪽뇌실로 나트륨 이온을 능동적으로 분비한다. 이에 따라 삼투압이 형성되어 뇌척수액이 있는 공간으로 물이 유입된다. 음전하를 띠는 염화물은 양전하를 띠는 나트륨 이온과 함께 움직이면서 전기적으로 중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뇌척수액은 혈장보다 나트륨과 염화물의 농도가 높고, 칼륨, 칼슘, 포도당 및 단백질의 농도는 낮다.[3][4] 순환[편집] 뇌실계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뇌척수액은 뇌실계통을 따라 순환한다. 뇌실은 뇌에 있는 빈 공간이다. 대부분의 뇌척수액은 두 개의 가쪽뇌실에서 생성되어 뇌실사이구멍(interventricular foramina of Monro)을 지나 제3뇌실로 이동하고, 이어서 중간뇌수도관(cerebral aqueduct of Sylvius)을 거쳐 제4뇌실로 이동한다. 제4뇌실은 뇌줄기의 뒤쪽에 있는 부푼 부분이다. 제4뇌실에서 뇌척수액은 세 구멍을 지나 거미막밑 공간으로 들어간다. 가운데로는 정중구멍(foramen of Magendie)을, 양 가쪽으로는 가쪽구멍(foramen of Luschka)을 지난다. 거미막밑 공간은 뇌와 척수를 덮고 있다.[3] 뇌척수액은 박동하면서 이동하고, 유속은 약 0.77 ml/분이다.[5] 재흡수[편집] 뇌척수액은 거미막과립을 통하여 경질막정맥굴로 들어가서 혈관계로 돌아간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 연구는 뇌척수액이 뇌신경을 따라 흐르고 척수신경뿌리가 뇌척수액을 림프로 들어가게 한다고 보고하였으며,[6] 이렇게 흐르는 뇌척수액이 거미막과립이 발달하지 않은 신생아의 뇌척수액 재흡수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뇌척수액은 머리뼈 바깥의 림프관, 특히 체판(cribriform plate)을 통하여 코의 점막밑 림프관으로 대부분 흡수된다.[7] 구성성분[편집] 머리뼈 안에 있는 뇌척수액, 혈액, 실질(parenchyma)의 부피 분포 각 부분에 존재하는 뇌척수액의 부피 뇌척수액은 표본 채집 위치에 따라 혈장단백질의 약 0.3% 혹은 15-40 mg/dL을 포함한다.[8] 뇌와 척수를 둘러싼 거미막밑 공간에는 135-150 ml이 들어 있을 수 있으므로 많은 양이 거미막밑 과립을 통하여 위시상정맥굴의 혈액으로 유출된다. 뇌척수액은 하루에 3.7번, 혹은 6-7시간마다 한 번씩 교환된다.[1] 뇌척수액이 연속적으로 정맥으로 흐르면서 뇌와 뇌척수액로 투과되는 큰, 지질에 용해되지 않는 분자의 농도를 낮춘다.[9] 뇌척수액의 압력은 요추천자를 통하여 잴 수 있다. 옆으로 누워 있는 사람은 10-18 cmH2O(8-15 mmHg 혹은 1.1-2 kPa), 앉아 있는 사람은 20-30 cmH2O(16-24 mmHg 혹은 2.1-3.2 kPa)이다.[10] 신생아는 8-10 cmH2O(5.9-7.4 mmHg 혹은 0.78-0.98 kPa)이다. 뇌척수액의 압력이 변화하는 원인은 대개 기침을 하거나 목정맥의 내부 압력 변화 때문이다. 누운 자세일 때 요추천자로 추정된 뇌척수액 얍력이 머리속압력(intracranial pressure)과 유사하다. 뇌척수액에 있는 단백질의 양은 상이하다. 일반적으로 요추나 수조에 있는 뇌척수액에 비하여 뇌실에 있는 뇌척수액에 구형 단백질과 알부민이 더 적다.[11] IgG 양을 측정하는 IgG 지수는 I g G C S F I g G s e r u m a l b u m i n C S F a l b u m i n s e r u m {\displaystyle {{IgG_{CSF} \over IgG_{serum}} \over {albumin_{CSF} \over albumin_{serum}}}} [12]와 같이 구한다. IgG 지수 기준치는 0.73으로, 값이 더 높으면 다발성 경화증이 있음을 나타낸다.[12] 뇌척수액에 있는 이온과 금속의 표준범위 뇌척수액 내의 이온과 금속의 표준범위[13] 물질 최저[13] 최고[13] 단위 혈장에 포함된 양 대비 백분율[13] 삼투질농도[14] 280 300 mmol/L 나트륨[14] 135 150 mmol/L 칼륨[14] 2.6 3.0 mmol/L 염화물[14] 115 130 mmol/L >100% 칼슘[14] 1.00 1.40 mmol/L ~50% 마그네슘[14] 1.2 1.5 mmol/L >100% 철 0.2 0.4 µmol/L 뇌척수액에 있는 기타 분자의 표준범위 뇌척수액에 있는 기타 분자의 표준범위 물질 최저 최고 단위 혈장에 포함된 양 대비 백분율 포도당[14] 50[15] 80[15] mg/dL ~60%[13] 2.2,[16] 2.8[13] 3.9,[16] 4.4[13] mmol/L 단백질[14] 15[13][15] 40,[8] 45[13][15] mg/dL ~1%[13] 알부민 7.8[17] 40[17] mg/dL 0[18] - 0.7%[18] 젖산 1.1[13] 2.4[13] mmol/L 크레아티닌 50[13] 110[13] µmol/L 인 0.4[13] 0.6[13] µmol/L 요소 3.0[13] 6.5[13] mmol/L 이산화탄소 20[13] 25[13] mmol/L 뇌척수액에 있는 기타 구성 물질의 표준범위 뇌척수액 기타 구성 물질의 표준범위 물질 최저 최고 단위 혈장에 포함된 양 대비 백분율 적혈구 n/a[15] 0[15] / negative cells/µL or cells/mm3 백혈구 0[15] 3[15] cells/µL cells/mm3 pH[14] 7.28[13] 7.32[13] (-log M) PCO2[14] 44[13] 50[13] mmHg 5.9[19] 6.7[19] kPa PO2 40[13] 44[13] mmHg 5.3[19] 5.9[19] kPa 발생[편집] 발생 3주 경에 배아는 세 엽으로 분화한다. 배아의 등쪽 표면을 덮고 있는 세포층을 내배엽이라고 한다. 등쪽 표면의 가운데에 있는 직선형 구조를 척삭이라 한다. 내배엽이 증식하면서 척삭은 발생하는 배아 가운대로 이끌려오고, 신경관으로 발달한다.[20] 뇌는 배아 발생 4주 째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머리가 생길 신경관 주위가 여러 군데 부풀고, 이후에 각각 중추신경계의 구성요소로 분화한다. 이 시기의 뇌는 앞뇌(prosenchephalon), 중간뇌(mesencephalon), 마름뇌(rhombencephalon) 세 부분으로 나뉜다.[20] 발생하는 전뇌는 신경관(neural cord)을 감싸고 있다. 신경관은 궁극적으로 가쪽뇌실이 된다. 뇌실의 안쪽 표면을 따라서 얇은 뇌실 벽이 있고, 맥락얼기가 발달하여 뇌척수액을 방출한다. 뇌척수액은 재빨리 신경관(neural canal)을 채운다.[20] 기능[편집] 부력[편집] 사람의 뇌는 질량이 약 1400 g 정도이지만, 뇌척수액에 떠있는 뇌의 무게는 25 g까지 감소한다.[21] 뇌는 중성부력 상태로 존재하면서 스스로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밀도를 유지한다. 뇌척수액이 없으면 뇌의 아래쪽 부분에는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않고 뉴런이 괴사할 것이다.[22] 보호[편집] 뇌척수액은 급격한 움직임이나 타격으로부터 뇌 조직을 보호한다. 교통 사고나 스포츠 부상 등 특수한 상황에서 뇌척수액이 두개골에 가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출혈이나 뇌 손상을 일으키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22] 화학적 안정[편집] 뇌척수액은 뇌실계통 안을 흐르고 혈액뇌장벽을 지나 혈류로 다시 흡수되면서 중추신경계에서 생기는 대사 부산물을 제거한다.[23] 이를 통하여 신경내분비인자 분포의 항상성 조절이 이루어진다. 신경내분비인자는 약간의 변화로도 신경계 기능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손상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글라이신 농도가 높으면 체온과 혈압 조절 기능이 교란되고, 뇌척수액 pH가 높으면 어지럼증이 생기거나 실신하기도 한다.[22] 노폐물 제거[편집] 덴마크어: Maiken Nedergaard는 뇌의 글림프계(glymphatic system)의 뇌척수액이 대사 결과 생산된 독소와 노폐물을 뇌 조직의 세포 사이질액에서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24] 글림프계의 활성은 수면 중에 증가한다. 수면 중에, 신경아교세포의 수축으로 통제되는 세포외 채널이 열려서 뇌척수액이 뇌로 급격하게 유입된다.[25] 이를 통하여 각성 상태에서 뇌의 활동으로 생산된 대사 노폐물, 예를 들면 베타 아밀로이드 등을 수면 중에 제거하는 데에 뇌척수액이 큰 역할을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임상적 중요성[편집] 뇌척수액 압력이 높아지면 뇌의 혈류가 제한될 수 있다. 뇌척수액이 원활하게 흐르지 못하면 뇌척수액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두개척수 순응도(craniospinal compliance)와 두개골내 혈류에도 영향을 미쳐 뉴런과 신경아교세포를 취약하게 한다. 또 정맥계통도 여기에 관여한다. 유아와 어린이는 특히 뇌척수액 압력과 뇌실 크기 사이의 관계가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정맥압 변화에 일부 기인한다.[26] 몇몇 포유류에서 뇌척수액과 림프계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예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궁에서 맥락얼기가 뇌척수액을 분비하는 능력이 형성되는 시기에 뇌척수액-림프 연결이 형성된다. 수두증을 포함하는 뇌척수액 장애와 비정상적인 뇌척수액-림프 수송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26] 수두증[편집] 수두증은 말 그대로 머리(뇌)에 물이 찬 상태로, 뇌척수액 흐름이나 재흡수가 정상적이지 않거나 과다하게 많은 뇌척수액이 생산되어 생긴다. 뇌에 있는 빈 공간인 뇌실에 뇌척수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되어 두개골내 압력(ICP)이 높아질 수 있다. 수두증이 발생 중에 발생하면 두개골이 커질 수도 있다.[27] 흔히 정신적 장애를 동반하며, 경련성 발작(convulsive episode)이나 터널시야를 동반하기도 한다. 수두증은 빨리 교정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으며, 영아와 나이가 많은 어른에게서 빈도가 더 높다. 요추천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요추천자입니다. 사람의 뇌척수액 뇌척수액은 다양한 신경계질환을 진단하는 데에 사용되며, 요추천자를 통하여 수집한다.[28] 요추천자는 무균 조건에서 거미막밑 공간, 대개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허리뼈 사이에 바늘을 넣어 실시한다. 바늘을 통해 수집된 뇌척수액에 있는 세포의 수를 세고 단백질과 포도당 농도를 검사한다. 이러한 지표만으로도 거미막밑 출혈과 중추신경계 감염(수막염 등)을 진단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뇌척수액 배양 검사를 통하여 감염의 원인이 된 미생물을 얻을 수 있다. 올리고클론띠(oligoclonal band) 등 더욱 정교한 방법으로는 진행중인 염증 상태(예를 들면 다발성 경화증)를 알 수도 있다. 베타-2 트랜스페린 분석은 뇌척수액 누수를 감지하는데 매우 민감하고 특이적인 분석법이다.[29] 두개골내 압력을 측정할 때에 요추천자를 행하기도 한다. 특정한 수두증의 경우 두개골내 압력이 높아지기도 한다. 두개골내 압력이 종양 등으로 인하여 높아진 것으로 의심될 때에는 요추천자를 실시해서는 안 된다. 뇌 헤르니아를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29] 요추천자를 받은 사람의 1/3은 두통을 경험한다.[29] 비중[편집] 뇌척수액은 마취과학에도 중요한 요소이다. 비중(baricity)은 사람의 뇌척수액 대비 물질의 밀도(농도)이다. 마취를 할 때에 비중을 통하여 특정한 약물이 경막내 공간에 퍼지는 정도를 알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편집] 뇌척수액에 있는 단백질 표지자 세 개를 통하여 알츠하이머병이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단백질 표지자는 각각 뇌척수액 아밀로이드 베타 1-42과 뇌척수액 내 총 타우 단백질 및 P-τ181p이다. 단백질 표지자를 통한 검사에서 민감도는 높았지만 특이도는 낮았다.[30][31]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뇌척수액 수막염 수두증 각주 및 참고 문헌[편집] ↑ 가 나 Netter FH (2000년 3월 10일). CIBA 원색도해의학총서 편찬위원회 편, 편집. 《CIBA원색도해의학총서》. 1(Part 1). 도서출판 정담. 31쪽. ISBN 8980850980. ↑ David N. Irani (2008). 〈Chapter 3 CSF Secretion, Recirculation, and Resorption〉. 《Cerebrospinal Fluid in Clinical Practice》. Elsevier Health Sciences. 12쪽. ISBN 1-4160-2908-7. ↑ 가 나 다 Guyton AC, Hall JE (2005). 《Textbook of medical physiology》 11판. Philadelphia: W.B. Saunders. 764쪽. ISBN 978-0-7216-0240-0.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Saladin, Kenneth (2012). 《Anatomy and Physiology》 6판. McGraw Hill. 519–20쪽.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Brinker T, Stopa E, Morrison J, Klinge P (2014). “A new look at cerebrospinal fluid circulation”. 《Fluids Barriers CNS》 11: 10. PMC 4016637. PMID 24817998. doi:10.1186/2045-8118-11-10.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 Zakharov A, Papaiconomou C, Djenic J, Midha R, Johnston M (2003). “Lymphatic CSF absorption pathways in neonatal sheep revealed by sub arachnoid injection of Microfil”. 《Neuropathol. Appl. Neurobiol.》 29 (6): 563–73. PMID 14636163. doi:10.1046/j.0305-1846.2003.0050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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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척수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뇌척수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뇌척수액의 맥동을 보여주는 MRI 사진 뇌척수액은 뇌와 척수 주위의 거미막밑 공간을 순환한다. 뇌실계통 뇌척수액(腦脊髓液, cerebrospinal fluid, CSF)은 수액이라고도 부른다. 뇌와 척수를 둘러싼 연질막과 지주막(거미막) 사이에 있는 공간인 지주막 하강(거미막밑 공간)과 뇌실을 채우고 있는 액체를 말한다. 뇌의 고랑과 수조, 척수의 중심관에 들어 있는 액체도 뇌척수액이다. 뇌와 척수를 뇌척수강 내에 부유시켜서 뇌 피질을 물리적·면역학적인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완충 역할을 한다. 대뇌 혈류를 자가조절하고, 뇌와 척수의 조직액을 대신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뇌의 맥락얼기에서 생산되고, 무색·투명하며 약알칼리성으로 전체의 양은 100∼150 mℓ이다. 조성은 림프와 거의 같으나 단백질은 매우 적다. 목차 1 구조 1.1 생산 1.2 순환 1.3 재흡수 1.4 구성성분 1.5 발생 2 기능 2.1 부력 2.2 보호 2.3 화학적 안정 2.4 노폐물 제거 3 임상적 중요성 3.1 수두증 3.2 요추천자 3.3 비중 3.4 알츠하이머병 4 같이 보기 5 각주 및 참고 문헌 6 외부 링크 구조[편집] 생산[편집] 뇌척수액은 하루에 약 500 ml[1](약 0.4 ml/분[2])가 생산되고, 일정하게 재흡수되어 양은 100-160 ml로 유지된다. 맥락얼기의 뇌실막 세포가 전체 뇌척수액의 2/3 이상을 생산한다. 맥락얼기는 제4뇌실에 있는 정맥얼기로, 뇌척수액으로 가득 찬 빈 공간이다. 나머지 뇌척수액은 뇌실의 표면과 거미막밑 공간 주위의 표면에서 생산된다.[3] 뇌실막 세포는 가쪽뇌실로 나트륨 이온을 능동적으로 분비한다. 이에 따라 삼투압이 형성되어 뇌척수액이 있는 공간으로 물이 유입된다. 음전하를 띠는 염화물은 양전하를 띠는 나트륨 이온과 함께 움직이면서 전기적으로 중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뇌척수액은 혈장보다 나트륨과 염화물의 농도가 높고, 칼륨, 칼슘, 포도당 및 단백질의 농도는 낮다.[3][4] 순환[편집] 뇌실계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뇌척수액은 뇌실계통을 따라 순환한다. 뇌실은 뇌에 있는 빈 공간이다. 대부분의 뇌척수액은 두 개의 가쪽뇌실에서 생성되어 뇌실사이구멍(interventricular foramina of Monro)을 지나 제3뇌실로 이동하고, 이어서 중간뇌수도관(cerebral aqueduct of Sylvius)을 거쳐 제4뇌실로 이동한다. 제4뇌실은 뇌줄기의 뒤쪽에 있는 부푼 부분이다. 제4뇌실에서 뇌척수액은 세 구멍을 지나 거미막밑 공간으로 들어간다. 가운데로는 정중구멍(foramen of Magendie)을, 양 가쪽으로는 가쪽구멍(foramen of Luschka)을 지난다. 거미막밑 공간은 뇌와 척수를 덮고 있다.[3] 뇌척수액은 박동하면서 이동하고, 유속은 약 0.77 ml/분이다.[5] 재흡수[편집] 뇌척수액은 거미막과립을 통하여 경질막정맥굴로 들어가서 혈관계로 돌아간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 연구는 뇌척수액이 뇌신경을 따라 흐르고 척수신경뿌리가 뇌척수액을 림프로 들어가게 한다고 보고하였으며,[6] 이렇게 흐르는 뇌척수액이 거미막과립이 발달하지 않은 신생아의 뇌척수액 재흡수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뇌척수액은 머리뼈 바깥의 림프관, 특히 체판(cribriform plate)을 통하여 코의 점막밑 림프관으로 대부분 흡수된다.[7] 구성성분[편집] 머리뼈 안에 있는 뇌척수액, 혈액, 실질(parenchyma)의 부피 분포 각 부분에 존재하는 뇌척수액의 부피 뇌척수액은 표본 채집 위치에 따라 혈장단백질의 약 0.3% 혹은 15-40 mg/dL을 포함한다.[8] 뇌와 척수를 둘러싼 거미막밑 공간에는 135-150 ml이 들어 있을 수 있으므로 많은 양이 거미막밑 과립을 통하여 위시상정맥굴의 혈액으로 유출된다. 뇌척수액은 하루에 3.7번, 혹은 6-7시간마다 한 번씩 교환된다.[1] 뇌척수액이 연속적으로 정맥으로 흐르면서 뇌와 뇌척수액로 투과되는 큰, 지질에 용해되지 않는 분자의 농도를 낮춘다.[9] 뇌척수액의 압력은 요추천자를 통하여 잴 수 있다. 옆으로 누워 있는 사람은 10-18 cmH2O(8-15 mmHg 혹은 1.1-2 kPa), 앉아 있는 사람은 20-30 cmH2O(16-24 mmHg 혹은 2.1-3.2 kPa)이다.[10] 신생아는 8-10 cmH2O(5.9-7.4 mmHg 혹은 0.78-0.98 kPa)이다. 뇌척수액의 압력이 변화하는 원인은 대개 기침을 하거나 목정맥의 내부 압력 변화 때문이다. 누운 자세일 때 요추천자로 추정된 뇌척수액 얍력이 머리속압력(intracranial pressure)과 유사하다. 뇌척수액에 있는 단백질의 양은 상이하다. 일반적으로 요추나 수조에 있는 뇌척수액에 비하여 뇌실에 있는 뇌척수액에 구형 단백질과 알부민이 더 적다.[11] IgG 양을 측정하는 IgG 지수는 I g G C S F I g G s e r u m a l b u m i n C S F a l b u m i n s e r u m {\displaystyle {{IgG_{CSF} \over IgG_{serum}} \over {albumin_{CSF} \over albumin_{serum}}}} [12]와 같이 구한다. IgG 지수 기준치는 0.73으로, 값이 더 높으면 다발성 경화증이 있음을 나타낸다.[12] 뇌척수액에 있는 이온과 금속의 표준범위 뇌척수액 내의 이온과 금속의 표준범위[13] 물질 최저[13] 최고[13] 단위 혈장에 포함된 양 대비 백분율[13] 삼투질농도[14] 280 300 mmol/L 나트륨[14] 135 150 mmol/L 칼륨[14] 2.6 3.0 mmol/L 염화물[14] 115 130 mmol/L >100% 칼슘[14] 1.00 1.40 mmol/L ~50% 마그네슘[14] 1.2 1.5 mmol/L >100% 철 0.2 0.4 µmol/L 뇌척수액에 있는 기타 분자의 표준범위 뇌척수액에 있는 기타 분자의 표준범위 물질 최저 최고 단위 혈장에 포함된 양 대비 백분율 포도당[14] 50[15] 80[15] mg/dL ~60%[13] 2.2,[16] 2.8[13] 3.9,[16] 4.4[13] mmol/L 단백질[14] 15[13][15] 40,[8] 45[13][15] mg/dL ~1%[13] 알부민 7.8[17] 40[17] mg/dL 0[18] - 0.7%[18] 젖산 1.1[13] 2.4[13] mmol/L 크레아티닌 50[13] 110[13] µmol/L 인 0.4[13] 0.6[13] µmol/L 요소 3.0[13] 6.5[13] mmol/L 이산화탄소 20[13] 25[13] mmol/L 뇌척수액에 있는 기타 구성 물질의 표준범위 뇌척수액 기타 구성 물질의 표준범위 물질 최저 최고 단위 혈장에 포함된 양 대비 백분율 적혈구 n/a[15] 0[15] / negative cells/µL or cells/mm3 백혈구 0[15] 3[15] cells/µL cells/mm3 pH[14] 7.28[13] 7.32[13] (-log M) PCO2[14] 44[13] 50[13] mmHg 5.9[19] 6.7[19] kPa PO2 40[13] 44[13] mmHg 5.3[19] 5.9[19] kPa 발생[편집] 발생 3주 경에 배아는 세 엽으로 분화한다. 배아의 등쪽 표면을 덮고 있는 세포층을 내배엽이라고 한다. 등쪽 표면의 가운데에 있는 직선형 구조를 척삭이라 한다. 내배엽이 증식하면서 척삭은 발생하는 배아 가운대로 이끌려오고, 신경관으로 발달한다.[20] 뇌는 배아 발생 4주 째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머리가 생길 신경관 주위가 여러 군데 부풀고, 이후에 각각 중추신경계의 구성요소로 분화한다. 이 시기의 뇌는 앞뇌(prosenchephalon), 중간뇌(mesencephalon), 마름뇌(rhombencephalon) 세 부분으로 나뉜다.[20] 발생하는 전뇌는 신경관(neural cord)을 감싸고 있다. 신경관은 궁극적으로 가쪽뇌실이 된다. 뇌실의 안쪽 표면을 따라서 얇은 뇌실 벽이 있고, 맥락얼기가 발달하여 뇌척수액을 방출한다. 뇌척수액은 재빨리 신경관(neural canal)을 채운다.[20] 기능[편집] 부력[편집] 사람의 뇌는 질량이 약 1400 g 정도이지만, 뇌척수액에 떠있는 뇌의 무게는 25 g까지 감소한다.[21] 뇌는 중성부력 상태로 존재하면서 스스로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밀도를 유지한다. 뇌척수액이 없으면 뇌의 아래쪽 부분에는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않고 뉴런이 괴사할 것이다.[22] 보호[편집] 뇌척수액은 급격한 움직임이나 타격으로부터 뇌 조직을 보호한다. 교통 사고나 스포츠 부상 등 특수한 상황에서 뇌척수액이 두개골에 가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출혈이나 뇌 손상을 일으키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22] 화학적 안정[편집] 뇌척수액은 뇌실계통 안을 흐르고 혈액뇌장벽을 지나 혈류로 다시 흡수되면서 중추신경계에서 생기는 대사 부산물을 제거한다.[23] 이를 통하여 신경내분비인자 분포의 항상성 조절이 이루어진다. 신경내분비인자는 약간의 변화로도 신경계 기능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손상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글라이신 농도가 높으면 체온과 혈압 조절 기능이 교란되고, 뇌척수액 pH가 높으면 어지럼증이 생기거나 실신하기도 한다.[22] 노폐물 제거[편집] 덴마크어: Maiken Nedergaard는 뇌의 글림프계(glymphatic system)의 뇌척수액이 대사 결과 생산된 독소와 노폐물을 뇌 조직의 세포 사이질액에서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24] 글림프계의 활성은 수면 중에 증가한다. 수면 중에, 신경아교세포의 수축으로 통제되는 세포외 채널이 열려서 뇌척수액이 뇌로 급격하게 유입된다.[25] 이를 통하여 각성 상태에서 뇌의 활동으로 생산된 대사 노폐물, 예를 들면 베타 아밀로이드 등을 수면 중에 제거하는 데에 뇌척수액이 큰 역할을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임상적 중요성[편집] 뇌척수액 압력이 높아지면 뇌의 혈류가 제한될 수 있다. 뇌척수액이 원활하게 흐르지 못하면 뇌척수액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두개척수 순응도(craniospinal compliance)와 두개골내 혈류에도 영향을 미쳐 뉴런과 신경아교세포를 취약하게 한다. 또 정맥계통도 여기에 관여한다. 유아와 어린이는 특히 뇌척수액 압력과 뇌실 크기 사이의 관계가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정맥압 변화에 일부 기인한다.[26] 몇몇 포유류에서 뇌척수액과 림프계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예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궁에서 맥락얼기가 뇌척수액을 분비하는 능력이 형성되는 시기에 뇌척수액-림프 연결이 형성된다. 수두증을 포함하는 뇌척수액 장애와 비정상적인 뇌척수액-림프 수송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26] 수두증[편집] 수두증은 말 그대로 머리(뇌)에 물이 찬 상태로, 뇌척수액 흐름이나 재흡수가 정상적이지 않거나 과다하게 많은 뇌척수액이 생산되어 생긴다. 뇌에 있는 빈 공간인 뇌실에 뇌척수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되어 두개골내 압력(ICP)이 높아질 수 있다. 수두증이 발생 중에 발생하면 두개골이 커질 수도 있다.[27] 흔히 정신적 장애를 동반하며, 경련성 발작(convulsive episode)이나 터널시야를 동반하기도 한다. 수두증은 빨리 교정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으며, 영아와 나이가 많은 어른에게서 빈도가 더 높다. 요추천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요추천자입니다. 사람의 뇌척수액 뇌척수액은 다양한 신경계질환을 진단하는 데에 사용되며, 요추천자를 통하여 수집한다.[28] 요추천자는 무균 조건에서 거미막밑 공간, 대개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허리뼈 사이에 바늘을 넣어 실시한다. 바늘을 통해 수집된 뇌척수액에 있는 세포의 수를 세고 단백질과 포도당 농도를 검사한다. 이러한 지표만으로도 거미막밑 출혈과 중추신경계 감염(수막염 등)을 진단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뇌척수액 배양 검사를 통하여 감염의 원인이 된 미생물을 얻을 수 있다. 올리고클론띠(oligoclonal band) 등 더욱 정교한 방법으로는 진행중인 염증 상태(예를 들면 다발성 경화증)를 알 수도 있다. 베타-2 트랜스페린 분석은 뇌척수액 누수를 감지하는데 매우 민감하고 특이적인 분석법이다.[29] 두개골내 압력을 측정할 때에 요추천자를 행하기도 한다. 특정한 수두증의 경우 두개골내 압력이 높아지기도 한다. 두개골내 압력이 종양 등으로 인하여 높아진 것으로 의심될 때에는 요추천자를 실시해서는 안 된다. 뇌 헤르니아를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29] 요추천자를 받은 사람의 1/3은 두통을 경험한다.[29] 비중[편집] 뇌척수액은 마취과학에도 중요한 요소이다. 비중(baricity)은 사람의 뇌척수액 대비 물질의 밀도(농도)이다. 마취를 할 때에 비중을 통하여 특정한 약물이 경막내 공간에 퍼지는 정도를 알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편집] 뇌척수액에 있는 단백질 표지자 세 개를 통하여 알츠하이머병이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단백질 표지자는 각각 뇌척수액 아밀로이드 베타 1-42과 뇌척수액 내 총 타우 단백질 및 P-τ181p이다. 단백질 표지자를 통한 검사에서 민감도는 높았지만 특이도는 낮았다.[30][31]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뇌척수액 수막염 수두증 각주 및 참고 문헌[편집] ↑ 가 나 Netter FH (2000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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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1 관리 - et al.의 직접적인 사용 (링크)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 Herskovits AZ, Growdon JH (2010년 8월). “Sharpen that needle”. 《Archives of Neurology》 67 (8): 918–20. PMID 20697041. doi:10.1001/archneurol.2010.151. 외부 링크[편집] (영어) 뇌척수액의 순환 전거 통제 GND: 4125641-4 NDL: 0057495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뇌척수액&oldid=23073331" 분류: 체액중추신경계통신경학숨은 분류: CS1 관리 - 추가 문구CS1 관리 - 여러 이름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5년 1월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인용 오류 - 필요 이상의 변수가 사용됨CS1 관리 - et al.의 직접적인 사용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덴마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English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Latina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ଓଡ଼ିଆ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21일 (수) 22: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NeXTSTEP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NeXTSTEP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NeXTSTEP NeXTSTEP에서 돌아가는 Nethack회사 / 개발자 NeXTOS 계열 유닉스상태 역사적소스 형태 일부 오픈 소스 구성 요소를 포함한 클로즈드 소스최초 버전 출시일 1989년 9월 18일 (29년 전)(1989-09-18)마지막 버전 3.3마지막 버전 출시일 1995년마케팅 대상 기업, 아카데미 프로그래밍 언어 C, 오브젝티브-C지원되는 플랫폼 모토로라 68000, 인텔 x86, SPARC, PA-RISC커널형태 하이브리드기본 UI 그래픽라이선스 사유 EULA NeXTSTEP(넥스트스텝)은 애플사의 공동 설립자인 스티브 잡스가 1985년 설립한 넥스트 사(NeXT Inc.)에서 개발한 객체 지향형 운영 체제이다. 넥스트 워크스테이션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유닉스 계통의 운영 체제로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마우스 조작에 의한 그래픽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객체 지향형 기능을 제공하므로 프로그램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후에 랩소디(Rhapsody)를 거쳐 OS X으로 발전되었다. 넥스트스텝은 발매 당시 혁신적인 개발환경으로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당시 객체지향개발 방법론과 개발도구가 생소하던 시점에 '모든것이 객체다' 다른 기치를 걸고 현재의 컴포넌트 지향적인 개발 환경과 비슷한 환경을 하였다. 당시 오브젝티브-C라는 생소한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개발의 효율성으로 인하여 엔터프라이즈업계와 국방부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되었다. 넥스트스텝은 현재 macOS과 iOS, tvOS, watchOS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목차 1 기능 2 역사 3 버전 4 참고 사항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기능[편집] NeXTSTEP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마하 커널 기반의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 (BSD로부터의 소스 코드 포함) 디스플레이 포스트스크립트 및 윈도잉 엔진 오브젝티브-C 언어 및 런타임 일부 키트를 포함한 객체 지향 (OO) 응용 프로그램 계층 OO 계층을 위한 개발 도구 역사[편집] 넥스트스텝의 미리보기 출시판은 1988년 10월 12일 넥스트 컴퓨터의 런칭과 함께 등장하였다. 최초의 완전한 출시판인 넥스트스텝 1.0은 1989년 9월 18일 출시되었다.[1] 최신 버전 3.3은 1995년 초에 출시되었고 당시 넥스트 컴퓨터에 쓰인 모토로라 68000 계열 프로세서뿐 아니라 인텔 x86, 썬 SPARC, HP PA-RISC 기반 시스템에도 동작하였다. 버전[편집] 버전 출시일 설명 0.8 1988년 10월 12일 0.8a 1988년 0.9 1988년 넥스트 하드웨어만 지원하는 버전 1.0 1989년 1.0a 1989년 2.0 1990년 9월 18일 2.1 1991년 3월 25일 2.1a 2.2 3.0 1992년 말 3.1 1993년 5월 25일 i486, PA-RISC, SPARC 아키텍처 지원. 3.2 1993년 10월 3.3 1995년 2월 NeXTSTEP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었음 4.0 (베타) 1996년 오픈스텝과 애플 인수 이전의 개발자들을 위한 베타 버전 애플사가 NeXT를 사들인 뒤에 실질적으로 마지막 버전은 3.3까지 나와 있다. 참고 사항[편집] 1990년 최초의 웹 브라우저와 월드 와이드 웹이 NeXTSTEP 플랫폼에서 개발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오픈스텝 윈도 메이커 그누스텝 (GNUstep) 각주[편집] ↑ Singh, Amit (December 2003). “What is Mac OS X?”. 《osxbook.com》. 2011년 4월 18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NeXTComputers.org (영어) NeXT - Curlie (DMOZ 기반) vdeh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 AIX BSD 드래곤플라이 BSD FreeBSD HP-UX IRIX 리눅스 LynxOS macOS 미닉스 NetBSD NEXTSTEP OpenBSD QNX SCO 오픈서버 솔라리스 시스템 V Tru64 제닉스 유닉스웨어 VxWorks 티맥스OS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85163749 LCCN: n91092798 GND: 4309098-9 이 글은 운영 체제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NeXTSTEP&oldid=21566404" 분류: BSD유닉스 계열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운영 체제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Lietuvių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Kiswahili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6월 15일 (금) 05:0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늑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늑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늑대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늑대 일본 오사카 텐노지 동물원의 늑대.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포유강 목: 식육목 과: 개과 속: 개속 종: 회색늑대 아종: 늑대 학명 Canis lupus chancoGray, 1863 이명 * coreanus (Abe, 1923) dorogostaiskii (Skalon, 1936) ekloni (Przewalski, 1883) filchneri (Matschie, 1907) karanorensis (Matschie, 1907) laniger (Hodgson, 1847) niger (Sclater, 1874) tschiliensis (Matschie, 1907) "saxicolor" (Smith, 1834)[1] 몽골늑대(영어: Mongolian Wolf)는 러시아 동부, 몽골 지역, 위구르 지역을 포함한 중국 북부에 서식하고 있는 회색늑대의 아종 중 하나이다. 이 늑대 아종은 안정적인 개체수 동향과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서식지 때문에 2004년부터 IUCN이 관심 필요에 등극했다.[2] 늑대는 늑대의 최근에 이전 아종을 더 적은 범위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지정하는 경향에 따라 동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3] 늑대는 일부 과학자들이 모두 그렇지 않은 다른 늑대의 아종에 비해 작은 크기, 하악골 형태 등으로 개와 가까운 계열로 추측한다.[4] 목차 1 특성 2 이주 및 서식지 3 위협 4 보호 5 각주 6 외부 링크 특성[편집] 늑대의 털은 황갈색이며, 등 뒤는 진한 검정색과 회색이 섞여 있다. 목, 가슴, 배, 다리 안쪽은 순백색이고 머리는 옅은 회갈색, 이마는 검회색을 띈다. 두개골은 유라시아늑대와 거의 닮았지만, 유라시아늑대에 비해 다리가 짧다.[5] 털 색은 계절마다 다르다. 겨울 털은 허리와 꼬리가 검은색 또는 흰색, 담황색 등의 털이 섞여 있으며,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가는 털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되어 있다. 머리 아래의 털은 배와 다리 바깥쪽의 털처럼 희고 회색이 거의 없다. 때때로, 앞다리에 다양한 명도의 어두운 줄무늬가 있을 수 있다. 귀는 창백한 회색 또는 짙은 황토색이다. 정수리와 턱은 검은색 얼룩의 줄무늬가 있으며, 이는 뺨 윗부분과 귀, 눈 아래까지 나 있다. 턱 색은 검정부터 흰색까지 다양하다. 겨울 털은 어깨 털이 100~120mm이고, 등 뒤는 70~80mm, 측면은 40~60mm 정도의 길이이다. 이 종의 무게는 45kg을 거의 초과하지 않는다.[6] 이주 및 서식지[편집] 1847년부터 1923년까지, 늑대는 다양한 학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 북부, 러시아, 외몽골,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서식지를 가지고 있었다.[7] 인도나 네팔, 중국령 티베트 지역, 중앙아시아에 서식하는 개체들은 현재 chanco 아종으로 보지 않는다. 위협[편집] 늑대의 주요천적은 표범과 호랑이, 곰, 검독수리, 인간이다. 늑대는 지속적인 가축 약탈로 인한 큰 박해와 독 중독으로 인한 지속적인 위협에 처하고 있다. 서식지의 단편화로 인해, 결과적으로 지역의 장기 생존에 필요한 인구에 비해 서식지가 작아지게 되었다. 몽골 지역의 종은 털을 이용하기도 한다.[2]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는 호랑이, 표범, 곰, 멧돼지들과 함께 사람에 해로운 동물로 몰려 구제당했다.[8] 보호[편집] 현재 늑대는 몽골, 중국, 러시아에서는 보호 지역을 제외하고는 보호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한반도 지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선 현재 서식이 불명확하고, 대한민국 지역의 늑대는 절멸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각주[편집] ↑ Wozencraft, W.C. (2005). 〈Order Carnivora〉 [식육목]. Wilson, D.E.; Reeder, D.M. 《Mammal Species of the World: A Taxonomic and Geographic Reference》 (영어) 3판. 존스 홉킨스 대학교 출판사. ISBN 978-0-8018-8221-0. OCLC 62265494. ↑ 가 나 Mech, L.D., Boitani, L. (IUCN SSC Wolf Specialist Group) (2010). “Canis lupus”. 《멸종 위기 종의 IUCN 적색 목록. 2011.2판》 (영어). 국제 자연 보전 연맹.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 Mech, L. D., Boitani, L. (2003). 《Wolves: Behaviour, Ecology and Conserva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London. ISBN 0-226-51696-2.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 Olsen, S.J., Olsen, J.W. (1977). The Chinese wolf, ancestor of new world dogs. Science 197: 533–535. ↑ Gray, J. E. (1863). Notice of the Chanco or Golden Wolf (Canis chanco) from Chinese Tartary. Proceedings of the Zoological Society of London: 94 ↑ Geptner, V. G., Nasimovich, A. A., Bannikov, A. G. (1972). Mlekopitaiuščie Sovetskogo Soiuza. Vysšaia Škola, Moskva. (In Russian; English translation: Heptner, V.G., Nasimovich, A. A., Bannikov, A. G.; Hoffmann, R.S. (1988). Mammals of the Soviet Union. Vol II, Part 1a: Sinenia and Carnivora (sea cows, wolves and bears). Smithsonian Institute and the National Science Foundation, Washington DC). ↑ Ellerman, J. R., Morrison-Scott, T. C. S. (1966). Checklist of Palaearctic and Indian mammals 1758 to 1946. Second edition. British Museum of Natural History, London. Page 219. ↑ Neff, R. (2007). Devils in the Darkness: Korea’s Gray Wolves. OhmyNews, 23 May 2007. 외부 링크[편집]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늑대 (영어) The IUCN Wolf Specialist Group: Canis lupus (영어) Arkive Images of Life on Earth: Canis lupus vdeh회색늑대 동물계 포유강 식육목 개과 개속 회색늑대 종 및 아종본종회색늑대유라시아 유라시아늑대(승명아종) 툰드라늑대 아라비아늑대 카스피해늑대 몽골늑대 (한국늑대) †에조늑대 †일본늑대 인도늑대 이탈리아늑대 이베리아늑대 극지 북극늑대 †베르나드늑대 맥킨지강늑대 배핀섬늑대 그린란드늑대 알래스카툰드라늑대 유콘늑대 †케나이반도늑대 허드슨만늑대 미주 멕시코늑대 †뉴펀들랜드늑대 브리티시컬럼비아늑대 밴쿠버섬늑대 †플로리다검은늑대 †캐스케이드산늑대 †그레고리늑대 †매니토바늑대 북부록키산늑대 래브라도늑대 알렉산더군도늑대 동부늑대* †모골룬산늑대 †텍사스늑대 대평원늑대 매켄지계곡늑대 †남부록키산늑대 기타 개 기원 딩고 혼종 코이늑대 늑대개 흑색늑대 동부늑대* 역사 브리튼 아일랜드 옐로스톤 국립공원 한반도 생태 서식지 의사 소통 늑대의 질병 외톨이 늑대 이주 패턴 팩 늑대 재도입 늑대 사냥 사냥에서 개 이용 늑대의 인간 공격 늑대의 애완 및 사역 늑대고기 문화 늑대와 민속, 종교, 신화 문장학에서의 늑대 볼프 아세나 펜리르 늑대인간 바르그 형태 변환자 구비오의 늑대 암늑대 울버 크고 나쁜 늑대 * 회색늑대의 아종이라는 설과 늑대와 코요테의 혼종이라는 설이 논쟁중이다. 공용 문서 · 위키스피시즈 문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늑대&oldid=24389131" 분류: 늑대회색늑대의 아종1863년 기재된 동물네팔의 포유류몽골의 포유류부탄의 포유류인도의 포유류중국의 포유류파키스탄의 포유류러시아의 포유류개과육식성숨은 분류: CS1 - 영어 인용 (en)CS1 관리 - 여러 이름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talianoКырык марыBahasa Melayu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6일 (목) 18: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2013년 9월 27일 보그 패션 나잇 아웃에서 이종석. 수상 및 후보 시상식 수상 후보 KBS 연기대상 1 1 SBS 연기대상 5 7 MBC 연기대상 3 3 서울 드라마 어워즈 0 0 코리아드라마어워즈 3 4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 2 4 대종상 0 0 청룡영화상 0 0 백상예술대상 1 7 총계 수상 합계 27 후보 합계 43 다음은 대한민국의 배우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이다. 목차 1 텔레비전 1.1 SBS 연기대상 1.2 MBC 연기대상 1.3 KBS 연기대상 1.4 MBC 방송연예대상 1.5 백상예술대상 1.6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1.7 아시아 태평양 스타 어워즈 1.8 그리메상(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1.9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1.10 더 서울어워즈 1.11 스타일 아이콘 아시아 어워즈 1.12 Mnet 20's Choice 1.13 숨피 어워즈 2 영화 2.1 대종상영화제 2.2 백상예술대상 3 기타 시상식 4 시간 순 목록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텔레비전[편집] SBS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1]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후보 2014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특별상 수상 [2] 《피노키오》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박신혜) 수상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10대 스타상 수상 2017 《당신이 잠든 사이에》 수목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수지) 수상 MBC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6 《W》 대상 수상 [3][4]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수상 KBS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년 《학교 2013》 남자 신인연기상 수상 [5] MBC 방송연예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1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코미디/시트콤부문 남자 신인상 후보 백상예술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TV부문 남자예능상 후보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4 《너의 목소리가 들려》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6]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5 《피노키오》 TV부문 남자인기상 수상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7]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2014 《닥터 이방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2015 《피노키오》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8] 아시아 태평양 스타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학교 2013》·《너의 목소리가 들려》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9] 《너의 목소리가 들려》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2016 《W》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후보 2018 《당신이 잠든 사이에》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남자 케이스타인기상 후보 그리메상(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4 《피노키오》 최우수 남자연기자상 수상 [10]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빈칸 문화부문 한류대상 수상 더 서울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8 《당신이 잠든 사이에》 드라마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스타일 아이콘 아시아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1 빈칸 SIA's 초이스상 수상 2013 빈칸 스타일 아이콘 본상 수상 2014 빈칸 스타일 아이콘 본상 후보 Mnet 20's Choice[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 빈칸 20's 부밍스타 후보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드라마 스타 남자부문 후보 숨피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5 《피노키오》 남우주연상 수상 [11] 영화[편집] 대종상영화제[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4 《피끓는 청춘》 인기상 후보 백상예술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코리아》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4 《피끓는 청춘》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기타 시상식[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출처 2005 신 한류스타 선발대회 신인광고모델부문 네티즌상 빈칸 수상 2006 스마트 모델 선발대회 포토제닉상 빈칸 수상 2014 제9회 아시아 모델상 시상식 한국 모델스타상 빈칸 수상 2015 제1회 한빛상 시상식 배우부문 한빛상 빈칸 수상 [12] 2015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한국소비자브랜드위원회) 중국소비자가 뽑은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특별상 - 한류스타부문 빈칸 수상 [13] 제6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빈칸 수상 [14] 2016 건국대학교 전기 학위수여식 공로상 빈칸 수상 [15] 시간 순 목록[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05 신 한류스타 선발대회 신인광고모델부문 네티즌상 수상 2006 스마트 모델 선발대회 포토제닉상 수상 2011 제4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SIA's 초이스상 수상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남자 신인상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후보 2012 제4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예능상 후보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제6회 Mnet 20's Choice 20's 부밍스타 후보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연기상 《학교 2013》 수상 2013 제4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코리아》 후보 제7회 Mnet 20's Choice 드라마 스타 남자부문 《너의 목소리가 들려》 후보 제6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제6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스타일 아이콘 본상 수상 제2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남자 우수연기상 《학교 2013》《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제21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문화부문 한류대상 수상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후보 2014 제5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후보 TV부문 인기상 후보 영화부문 인기상 《피끓는청춘》 후보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인기상 후보 제9회 아시아 모델상 시상식 한국 모델스타상 수상 제7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최우수연기상 《닥터 이방인》 후보 제6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스타일 아이콘 본상 후보 제27회 그리메상 남자 최우수연기자상 《피노키오》 수상 SBS 연기대상 특별상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수상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피노키오》 후보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박신혜) 수상 2015 제10회 숨피 어워즈 남우주연상 《피노키오》 수상 제5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인기상 수상 제1회 한빛상 시상식 배우부문 한빛상 수상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 중국소비자가 뽑은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특별상 수상 제8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최우수연기상 《피노키오》 수상 제6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수상 2016 건국대학교 전기 학위수여식 공로상 수상 제5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W》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후보 MBC 연기대상 대상 《W》 수상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수상 2017 SBS 연기대상 수목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당신이 잠든 사이에》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수지) 수상 같이 보기[편집] 이종석의 작품 목록 각주[편집] ↑ 너목들' 이종석, SBS연기대상 미니 男우수연기상 스타뉴스 2013-12-31 ↑ 'SBS연기대상' 이종석 "귀한 배우 되지 않겠다" 개념소감 뉴스엔 2015-01-01 ↑ 황소영 기자 (2016년 12월 30일). “[MBC 연기대상] 김소연X서인국X이종석 등 총 7인 대상 후보”. 일간스포츠. 2017년 8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2월 30일에 확인함. ↑ 최진실 기자 (2016년 12월 31일). “이종석, 맥락있는 대상…인생작 만나 날았다”. 엑스포츠 뉴스. ↑ 이종석 신인상 “오래보아야 사랑스러운 배우될 것" (KBS 연기대상) 티브이데일리 2012-12-31 ↑ 김승현 기자 (2014년 4월 28일). “김수현·유아인·이종석…백상 男연기상으로 대세 격돌”. 엑스포츠뉴스. ↑ ★포토 이종석,'2013 KDA 남자우수상 수상' 스타뉴스 2013-10-02 ↑ '코리아드라마어워즈' 이종석 "'너목들' 식구들과 다시 만나 좋은 성과 기분 좋아" 스포츠투데이 2015-10-09 ↑ 이종석, 남자 우수연기상 "특별한 감성 없다고 생각했는데…"(대전드라마페스티벌) TV리포트 2013-11-16 ↑ 이종석, 촬영감독들이 뽑은 ‘그리메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역대 최연소로 수상 스포츠경향 2014-12-09 ↑ “Announcing the Results of the 10th Annual Soompi Awards 2014”. 《Soompi》. 2015년 2월 16일. ↑ 한류선정조직위원회 제1회 '2015 한빛상 시상식' 개최 국제뉴스 2015-06-18 ↑ 2015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 흔들리지 않는 브랜드 철학, 소비자 신뢰 높였다 한국경제 2015-10-15 ↑ 이종석 데뷔 6년만 국무총리표창, 남다른 행보 뉴스엔 2015-10-27 ↑ 이종석, 22일 건국대 졸업…공로상 수상 스포츠조선 2016-02-19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이종석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Jong-Suk Lee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종석의_수상_및_후보_목록&oldid=24204215" 분류: 배우의 수상 목록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3: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2013년 9월 27일 보그 패션 나잇 아웃에서 이종석. 수상 및 후보 시상식 수상 후보 KBS 연기대상 1 1 SBS 연기대상 5 7 MBC 연기대상 3 3 서울 드라마 어워즈 0 0 코리아드라마어워즈 3 4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 2 4 대종상 0 0 청룡영화상 0 0 백상예술대상 1 7 총계 수상 합계 27 후보 합계 43 다음은 대한민국의 배우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이다. 목차 1 텔레비전 1.1 SBS 연기대상 1.2 MBC 연기대상 1.3 KBS 연기대상 1.4 MBC 방송연예대상 1.5 백상예술대상 1.6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1.7 아시아 태평양 스타 어워즈 1.8 그리메상(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1.9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1.10 더 서울어워즈 1.11 스타일 아이콘 아시아 어워즈 1.12 Mnet 20's Choice 1.13 숨피 어워즈 2 영화 2.1 대종상영화제 2.2 백상예술대상 3 기타 시상식 4 시간 순 목록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텔레비전[편집] SBS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1]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후보 2014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특별상 수상 [2] 《피노키오》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박신혜) 수상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10대 스타상 수상 2017 《당신이 잠든 사이에》 수목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수지) 수상 MBC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6 《W》 대상 수상 [3][4]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수상 KBS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년 《학교 2013》 남자 신인연기상 수상 [5] MBC 방송연예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1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코미디/시트콤부문 남자 신인상 후보 백상예술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TV부문 남자예능상 후보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4 《너의 목소리가 들려》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6]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5 《피노키오》 TV부문 남자인기상 수상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7]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2014 《닥터 이방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2015 《피노키오》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8] 아시아 태평양 스타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학교 2013》·《너의 목소리가 들려》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9] 《너의 목소리가 들려》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2016 《W》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후보 2018 《당신이 잠든 사이에》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남자 케이스타인기상 후보 그리메상(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4 《피노키오》 최우수 남자연기자상 수상 [10]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빈칸 문화부문 한류대상 수상 더 서울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8 《당신이 잠든 사이에》 드라마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스타일 아이콘 아시아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1 빈칸 SIA's 초이스상 수상 2013 빈칸 스타일 아이콘 본상 수상 2014 빈칸 스타일 아이콘 본상 후보 Mnet 20's Choice[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 빈칸 20's 부밍스타 후보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드라마 스타 남자부문 후보 숨피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5 《피노키오》 남우주연상 수상 [11] 영화[편집] 대종상영화제[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4 《피끓는 청춘》 인기상 후보 백상예술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코리아》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4 《피끓는 청춘》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기타 시상식[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출처 2005 신 한류스타 선발대회 신인광고모델부문 네티즌상 빈칸 수상 2006 스마트 모델 선발대회 포토제닉상 빈칸 수상 2014 제9회 아시아 모델상 시상식 한국 모델스타상 빈칸 수상 2015 제1회 한빛상 시상식 배우부문 한빛상 빈칸 수상 [12] 2015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한국소비자브랜드위원회) 중국소비자가 뽑은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특별상 - 한류스타부문 빈칸 수상 [13] 제6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빈칸 수상 [14] 2016 건국대학교 전기 학위수여식 공로상 빈칸 수상 [15] 시간 순 목록[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05 신 한류스타 선발대회 신인광고모델부문 네티즌상 수상 2006 스마트 모델 선발대회 포토제닉상 수상 2011 제4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SIA's 초이스상 수상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남자 신인상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후보 2012 제4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예능상 후보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제6회 Mnet 20's Choice 20's 부밍스타 후보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연기상 《학교 2013》 수상 2013 제4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코리아》 후보 제7회 Mnet 20's Choice 드라마 스타 남자부문 《너의 목소리가 들려》 후보 제6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제6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스타일 아이콘 본상 수상 제2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남자 우수연기상 《학교 2013》《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제21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문화부문 한류대상 수상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후보 2014 제5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후보 TV부문 인기상 후보 영화부문 인기상 《피끓는청춘》 후보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인기상 후보 제9회 아시아 모델상 시상식 한국 모델스타상 수상 제7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최우수연기상 《닥터 이방인》 후보 제6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스타일 아이콘 본상 후보 제27회 그리메상 남자 최우수연기자상 《피노키오》 수상 SBS 연기대상 특별상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수상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피노키오》 후보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박신혜) 수상 2015 제10회 숨피 어워즈 남우주연상 《피노키오》 수상 제5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인기상 수상 제1회 한빛상 시상식 배우부문 한빛상 수상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 중국소비자가 뽑은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특별상 수상 제8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최우수연기상 《피노키오》 수상 제6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수상 2016 건국대학교 전기 학위수여식 공로상 수상 제5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W》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후보 MBC 연기대상 대상 《W》 수상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수상 2017 SBS 연기대상 수목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당신이 잠든 사이에》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수지) 수상 같이 보기[편집] 이종석의 작품 목록 각주[편집] ↑ 너목들' 이종석, SBS연기대상 미니 男우수연기상 스타뉴스 2013-12-31 ↑ 'SBS연기대상' 이종석 "귀한 배우 되지 않겠다" 개념소감 뉴스엔 2015-01-01 ↑ 황소영 기자 (2016년 12월 30일). “[MBC 연기대상] 김소연X서인국X이종석 등 총 7인 대상 후보”. 일간스포츠. 2017년 8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2월 30일에 확인함. ↑ 최진실 기자 (2016년 12월 31일). “이종석, 맥락있는 대상…인생작 만나 날았다”. 엑스포츠 뉴스. ↑ 이종석 신인상 “오래보아야 사랑스러운 배우될 것" (KBS 연기대상) 티브이데일리 2012-12-31 ↑ 김승현 기자 (2014년 4월 28일). “김수현·유아인·이종석…백상 男연기상으로 대세 격돌”. 엑스포츠뉴스. ↑ ★포토 이종석,'2013 KDA 남자우수상 수상' 스타뉴스 2013-10-02 ↑ '코리아드라마어워즈' 이종석 "'너목들' 식구들과 다시 만나 좋은 성과 기분 좋아" 스포츠투데이 2015-10-09 ↑ 이종석, 남자 우수연기상 "특별한 감성 없다고 생각했는데…"(대전드라마페스티벌) TV리포트 2013-11-16 ↑ 이종석, 촬영감독들이 뽑은 ‘그리메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역대 최연소로 수상 스포츠경향 2014-12-09 ↑ “Announcing the Results of the 10th Annual Soompi Awards 2014”. 《Soompi》. 2015년 2월 16일. ↑ 한류선정조직위원회 제1회 '2015 한빛상 시상식' 개최 국제뉴스 2015-06-18 ↑ 2015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 흔들리지 않는 브랜드 철학, 소비자 신뢰 높였다 한국경제 2015-10-15 ↑ 이종석 데뷔 6년만 국무총리표창, 남다른 행보 뉴스엔 2015-10-27 ↑ 이종석, 22일 건국대 졸업…공로상 수상 스포츠조선 2016-02-19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이종석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Jong-Suk Lee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종석의_수상_및_후보_목록&oldid=24204215" 분류: 배우의 수상 목록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3: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 2013년 9월 27일 보그 패션 나잇 아웃에서 이종석. 수상 및 후보 시상식 수상 후보 KBS 연기대상 1 1 SBS 연기대상 5 7 MBC 연기대상 3 3 서울 드라마 어워즈 0 0 코리아드라마어워즈 3 4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 2 4 대종상 0 0 청룡영화상 0 0 백상예술대상 1 7 총계 수상 합계 27 후보 합계 43 다음은 대한민국의 배우 이종석의 수상 및 후보 목록이다. 목차 1 텔레비전 1.1 SBS 연기대상 1.2 MBC 연기대상 1.3 KBS 연기대상 1.4 MBC 방송연예대상 1.5 백상예술대상 1.6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1.7 아시아 태평양 스타 어워즈 1.8 그리메상(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1.9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1.10 더 서울어워즈 1.11 스타일 아이콘 아시아 어워즈 1.12 Mnet 20's Choice 1.13 숨피 어워즈 2 영화 2.1 대종상영화제 2.2 백상예술대상 3 기타 시상식 4 시간 순 목록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텔레비전[편집] SBS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1]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후보 2014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특별상 수상 [2] 《피노키오》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박신혜) 수상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10대 스타상 수상 2017 《당신이 잠든 사이에》 수목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수지) 수상 MBC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6 《W》 대상 수상 [3][4]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수상 KBS 연기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년 《학교 2013》 남자 신인연기상 수상 [5] MBC 방송연예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1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코미디/시트콤부문 남자 신인상 후보 백상예술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TV부문 남자예능상 후보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4 《너의 목소리가 들려》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6]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5 《피노키오》 TV부문 남자인기상 수상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7]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2014 《닥터 이방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2015 《피노키오》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8] 아시아 태평양 스타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학교 2013》·《너의 목소리가 들려》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 [9] 《너의 목소리가 들려》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2016 《W》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후보 2018 《당신이 잠든 사이에》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남자 케이스타인기상 후보 그리메상(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4 《피노키오》 최우수 남자연기자상 수상 [10]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빈칸 문화부문 한류대상 수상 더 서울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8 《당신이 잠든 사이에》 드라마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스타일 아이콘 아시아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1 빈칸 SIA's 초이스상 수상 2013 빈칸 스타일 아이콘 본상 수상 2014 빈칸 스타일 아이콘 본상 후보 Mnet 20's Choice[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2 빈칸 20's 부밍스타 후보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드라마 스타 남자부문 후보 숨피 어워즈[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5 《피노키오》 남우주연상 수상 [11] 영화[편집] 대종상영화제[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4 《피끓는 청춘》 인기상 후보 백상예술대상[편집] 연도 작품 부문 결과 출처 2013 《코리아》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2014 《피끓는 청춘》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기타 시상식[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출처 2005 신 한류스타 선발대회 신인광고모델부문 네티즌상 빈칸 수상 2006 스마트 모델 선발대회 포토제닉상 빈칸 수상 2014 제9회 아시아 모델상 시상식 한국 모델스타상 빈칸 수상 2015 제1회 한빛상 시상식 배우부문 한빛상 빈칸 수상 [12] 2015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한국소비자브랜드위원회) 중국소비자가 뽑은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특별상 - 한류스타부문 빈칸 수상 [13] 제6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빈칸 수상 [14] 2016 건국대학교 전기 학위수여식 공로상 빈칸 수상 [15] 시간 순 목록[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05 신 한류스타 선발대회 신인광고모델부문 네티즌상 수상 2006 스마트 모델 선발대회 포토제닉상 수상 2011 제4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SIA's 초이스상 수상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남자 신인상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후보 2012 제4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예능상 후보 TV부문 남자인기상 후보 제6회 Mnet 20's Choice 20's 부밍스타 후보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연기상 《학교 2013》 수상 2013 제4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인기상 《코리아》 후보 제7회 Mnet 20's Choice 드라마 스타 남자부문 《너의 목소리가 들려》 후보 제6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제6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스타일 아이콘 본상 수상 제2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남자 우수연기상 《학교 2013》《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수상 제21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문화부문 한류대상 수상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이보영) 후보 2014 제5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너의 목소리가 들려》 후보 TV부문 인기상 후보 영화부문 인기상 《피끓는청춘》 후보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인기상 후보 제9회 아시아 모델상 시상식 한국 모델스타상 수상 제7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최우수연기상 《닥터 이방인》 후보 제6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스타일 아이콘 본상 후보 제27회 그리메상 남자 최우수연기자상 《피노키오》 수상 SBS 연기대상 특별상 《닥터 이방인》·《피노키오》 수상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피노키오》 후보 10대 스타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박신혜) 수상 2015 제10회 숨피 어워즈 남우주연상 《피노키오》 수상 제5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인기상 수상 제1회 한빛상 시상식 배우부문 한빛상 수상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 중국소비자가 뽑은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특별상 수상 제8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최우수연기상 《피노키오》 수상 제6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수상 2016 건국대학교 전기 학위수여식 공로상 수상 제5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중편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W》 후보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후보 MBC 연기대상 대상 《W》 수상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한효주) 수상 2017 SBS 연기대상 수목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당신이 잠든 사이에》 수상 베스트 커플상 (with 수지) 수상 같이 보기[편집] 이종석의 작품 목록 각주[편집] ↑ 너목들' 이종석, SBS연기대상 미니 男우수연기상 스타뉴스 2013-12-31 ↑ 'SBS연기대상' 이종석 "귀한 배우 되지 않겠다" 개념소감 뉴스엔 2015-01-01 ↑ 황소영 기자 (2016년 12월 30일). “[MBC 연기대상] 김소연X서인국X이종석 등 총 7인 대상 후보”. 일간스포츠. 2017년 8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2월 30일에 확인함. ↑ 최진실 기자 (2016년 12월 31일). “이종석, 맥락있는 대상…인생작 만나 날았다”. 엑스포츠 뉴스. ↑ 이종석 신인상 “오래보아야 사랑스러운 배우될 것" (KBS 연기대상) 티브이데일리 2012-12-31 ↑ 김승현 기자 (2014년 4월 28일). “김수현·유아인·이종석…백상 男연기상으로 대세 격돌”. 엑스포츠뉴스. ↑ ★포토 이종석,'2013 KDA 남자우수상 수상' 스타뉴스 2013-10-02 ↑ '코리아드라마어워즈' 이종석 "'너목들' 식구들과 다시 만나 좋은 성과 기분 좋아" 스포츠투데이 2015-10-09 ↑ 이종석, 남자 우수연기상 "특별한 감성 없다고 생각했는데…"(대전드라마페스티벌) TV리포트 2013-11-16 ↑ 이종석, 촬영감독들이 뽑은 ‘그리메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역대 최연소로 수상 스포츠경향 2014-12-09 ↑ “Announcing the Results of the 10th Annual Soompi Awards 2014”. 《Soompi》. 2015년 2월 16일. ↑ 한류선정조직위원회 제1회 '2015 한빛상 시상식' 개최 국제뉴스 2015-06-18 ↑ 2015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 흔들리지 않는 브랜드 철학, 소비자 신뢰 높였다 한국경제 2015-10-15 ↑ 이종석 데뷔 6년만 국무총리표창, 남다른 행보 뉴스엔 2015-10-27 ↑ 이종석, 22일 건국대 졸업…공로상 수상 스포츠조선 2016-02-19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이종석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Jong-Suk Lee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종석의_수상_및_후보_목록&oldid=24204215" 분류: 배우의 수상 목록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3: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유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유아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유아(幼兒)는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어린이를 가리킨다.[1] The Mighty Toddler와 The Emotional Life of the Toddler에 따르면 유아는 만 1세부터 만 5세까지의 나이대에 속하는 어린이다.[2][3] 대한민국의 국어사전에 따르면 유아는 생후 1년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대한민국 영유아보육법에서 영유아란 만 6세 미만의 취학 전 아동을 말한다.[4] 이 시기에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발달하게 되며, 유치원 또는 보육원에서 보육되는 시기에 해당한다.[5] 목차 1 유아기의 발달 1.1 행동 1.2 운동 발달 1.3 정서 1.4 사회성 1.5 인성 1.6 신체발달 1.6.1 1. 신체적 성장 1.6.2 2. 뇌의 성장 2 유아 감염병 3 기타 3.1 각국의 유아 4 같이 보기 5 각주 유아기의 발달[편집] 유아기에는 체중의 증가가 현저하고, 체격이 눈에 띄게 튼튼해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뛴다든지, 달린다든지, 기어오른다든지 하는, 몸 전체를 사용하는 신체의 운동이 발달하게 된다. 또한, 언어생활이 급속하게 발달하게 된다.[5] 행동[편집] 이 시기에 유아는 사회적 역할과 이동 능력을 많이 배운다. 이 시기에 적어도 아기는 어떤 물건을 짚고 걸어간다. 보통 유아는 먼저 배우는 것과 나중 배우는 것이 다르다. 또한, 형제 자매들 사이에도 배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유아기에는 언어를 배울 때 '맘마', '멍멍' 등의 한 단어 수준에서 벗어나 '엄마, 까까' 등의 두 단어 수준으로 올라가게 되고, 만 4세가 되면 말은 어느 정도 배워서 대화가 가능하다.[6] 이 시기를 때로는 "미운 네살" 이라고 불리는데, 변덕이 빈번하며 짜증을 많이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계는 아이들의 사회 환경마다 다르지만 빠르게는 9개월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아이가 엄마나 돌보아 주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서서히 발견하는 과정이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해 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만 2세부터 만 5세까지 사이에 자신의 독립성을 발견하는 일을 되풀이한다. 따라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일관되게 반응하고, 아이들의 안전과 돌보는 사람의 용납함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회적인 상호작용은 유아 발달에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어른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고 듣고 반복하면서 언어와 걸음마, 사회 기술을 익힌다. 대부분은 유아기에 기저귀를 빼고 배변을 훈련한다. 약간의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17개월부터 배변 훈련을 하게 되며, 만 3살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평균적으로 24개월 이후에 배변 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이른 배변 훈련은 유아가 강박관념을 갖게 되므로 피해야 한다. 야뇨증에 걸린 유아는 기저귀를 더 차게 되며, 배변 훈련을 늦게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즈란식 배변 훈련이라고 해서 아이의 심리를 파악해서 단 하루 만에 기저귀를 떼는 훈련법도 개발되었다. 운동 발달[편집] 유아기에 있어서 운동발달은 현저하다. 이동운동으로서 1세 전후로 기기·서기·걷기 등이 가능해지고, 손·팔의 운동으로서 물건에 대한 도달·파악·손놀림이 가능해진다. 이후로는 다시 많은 운동이 발달한다. 불안정했던 보행은 속도나 거리가 증가하고, 양쪽 다리의 벌린 간격이 좁아진다. 3세에서는 계단 오르기가 가능해지고, 4세에서 달리기·뛰기·던지기·미끄러지기·올라가기·스킵(skip) 등이 최초엔 어설프지만 차차 가능하게 된다. 5세에서는 동작이 민첩해지고, 6세에서는 자유로이 뛰어다닌다.[7] 손끝의 운동은 약간 늦어지나 2세에서 토막쌓기로 집짓기를 할 수 있고, 3세에서 수직선을 그리며, 가위나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고, 4세에서 원이나 사각형을 그리며, 5세에서 삼각형을 그리고, 6세에서 손끝을 상당히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다.[7] 정서[편집] 유아기에는 언어생활이 발달하여 대체로 자유로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동무들이나 어른들과도 그런대로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의존적(依存的)·정서적이다.[5] 유아기 정서는, 지속시간이 짧고, 폭발적·일과적(一過的)이고,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이다.[8] 유유아기(乳幼兒期)에는, 소음이나 낯선 물건·낯선 장면·낯선 사람,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 등을 두려워하며, 6세경이 되면서 상상력의 발달과 더불어 상상의 생물·괴물 등에 대한 무서움이 증가한다. 또한 어두움이라든가 위험한 것, 유해물 등에 대한 두려움도 증가한다.[8] 사회성[편집] 1년쯤 되면 어른의 요구나 의사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며 모방도 나타나는데, 이 무렵이 되면 처음 수동적이었던 어른과의 사회적 관계가 능동적·적극적·상호교섭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2세 이후가 되면 본격적인 어린이끼리의 상호교섭이 나타난다. 다른 어린이에게 말을 건다거나, 간단한 놀이에 함께 참가하는데 아직 따로따로이다. 소위 평행(平行)놀이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서의 사회성은 3세 이후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무렵이 되면 어린이끼리 함께 놀려고 하는 의욕이 나타나고,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논다. 반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경쟁의식도 나타나게 된다. 싸움이 많고, 어른에 대해서 반항하려는 경향도 나타난다. 5, 6세가 되면 집단의식이 명료해진다. 놀이상대의 수나 놀이시간은 증가하고, 서로 교섭이 있는 놀이가 전개되어, 다른 어린이에 대한 우호적·협력적인 접근을 찾는 행동을 차차 나타내게 된다. 동무들의 집에 놀러 간다든지, 간단한 심부름이 가능해진다. 유치원생활 따위의 생활공간의 확대도 있으며, 사회성이 여러 가지 면에서 발달하는 시기이다.[9] 인성[편집] 유아기는 인성의 형성에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유아기의 어린이는 주된 생활공간이 가정이며, 부모와의 접촉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반응양식을 학습해 나간다. 가정이 인성의 정상적인 발달에 필요하다는 것은, 어떤 사정으로 양친에서 떨어져서 유아원이나 고아원 등에 수용된 어린이에 관한 연구에서도 명백하다. 다만, 모든 가정이 바람직한 역할을 수행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관련 연구에 의하면 부모의 교육태도가 어린이의 인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10] 어린이의 인성 형성은 양친과의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관계에도 의존하고 있다. 그 경향은 아동기 및 그 이후가 되면 더욱 강해진다. 친구관계가 인성의 형성에 끼치는 영향의 형태는 부모자식관계와 다르게 상호작용적이다. 즉 어린이의 인성이 친구관계에 영향을 주는 반면, 그와 같은 친구 관계가 반대로 어린이의 인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11] 신체발달[편집] 유아기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신체의 크기나 모습에서 현저한 변화한다. 영아기 이후에 신장은 매년 7cm씩 증가하여 6세가 되면 115cm 정도로 성장한다. 유아기의 신장은 성인이 되었을 때에 얼마만큼 자랄 것인가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신체의 비율에서도 신장에 대한 머리 크기의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여, 초등학교 입학시기가 되면 머리가 크고 무거워 보이는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다. 체중의 증가도 완만하게 이루어져, 6시가 되면 20kg 정도가 된다. 두뇌의 발달은 영어기와 마찬가지로 급속하게 이루어지며, 2세경에는 성인의 두뇌크기의 75%, 5세경에는 성인의 90%까지 성장한다. 1. 신체적 성장[편집] 2. 뇌의 성장[편집] 유아기의 가장 중요한 신체발달 중 하나는 뇌와 신경계의 지속적인 성장이다. 영아기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뇌는 유아기에도 계속해서 성장한다. 유아 감염병[편집] 일생 동안에 한 번은 걸리는 감염병으로 대개 유아기에 병에 걸려 면역이 되는 것에 홍역·백일해 및 볼거리(유행성이하선염) 등이 있다. 그 밖에 꼭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디프테리아·성홍열·이질·유행성소아마비·뇌막염·수족구병 등이 유유아기(乳幼兒期)에 많으며, 이들은 각각 특유한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디프테리아나 성홍열·이질 등에는 항균제가 잘 듣기 때문에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를 받으면 된다. 홍역·볼거리에는 특효약은 없지만 성인의 혈청을 사용하여 가볍게 치료한다든지, 항균제로써 여병을 방지한다.[12] 기타[편집] 유아가 걷게 되더라도 아기들이 지치거나 빨리 가고 싶은 경우 유모차나 버기에 태워 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유아기에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 조선 시대에는 유아기의 아이들은 오방장 두루마기를 입었다.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교통 사고도 '어린이 교통 사고'의 범주에 포함된다. 각국의 유아[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5년 7월 21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앙골라, 케냐, 탄자니아, 토고,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국가 또는 후진국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이 죽는 경우도 있다.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아르디 리잘과 알디 수간다는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웠으나 현재는 알디 수간다만 하루에 2갑씩 담배를 피우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을 대부분 유아원 또는 유치원에 보낸다. 축구 강국인 네덜란드에서는 축구 신동인 유아기의 아이가 프로 축구팀과 계약을 맺은 경우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유아라 해서 5살짜리 축구 신동인 찰리 윌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여 화제가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영아 어린이 보육 교육 각주[편집] ↑ 이에 해당하는 영어의 ‘toddler’는 아장아장 걷는 이를 뜻한다. ↑ Barker, Robin (2001) The Mighty Toddler: The essential guide to the toddler years, Pan Macmillan Australia, Sydney, p1. ↑ Lieberman, Alicia F, (1993) The Emotional Life of the Toddler, The Free Press, New York, p1. ↑ 현재시행법령보기 ↑ 가 나 다 유아기의 교육,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출처: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제 6단원 '언어의 세계' 212쪽;저자:교육과학기술부 ↑ 가 나 유아기의 운동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가 나 유아기 - 정서·욕구·동기의 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유아기의 사회성 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부모·자식관계와 인성,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친구관계와 인성,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유아전염병, 《글로벌 세계 대백과》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유아 vdeh사람의 발달 과정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갱년기 노년기 중장년은 장년기와 갱년기 두 시기를 함께 어우러 말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GND: 4031081-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유아&oldid=24272809" 분류: 인간의 발달 과정어린이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فارسیBahasa Indonesiaमराठी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icilianu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4일 (금) 21: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유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유아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유아(幼兒)는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어린이를 가리킨다.[1] The Mighty Toddler와 The Emotional Life of the Toddler에 따르면 유아는 만 1세부터 만 5세까지의 나이대에 속하는 어린이다.[2][3] 대한민국의 국어사전에 따르면 유아는 생후 1년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대한민국 영유아보육법에서 영유아란 만 6세 미만의 취학 전 아동을 말한다.[4] 이 시기에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발달하게 되며, 유치원 또는 보육원에서 보육되는 시기에 해당한다.[5] 목차 1 유아기의 발달 1.1 행동 1.2 운동 발달 1.3 정서 1.4 사회성 1.5 인성 1.6 신체발달 1.6.1 1. 신체적 성장 1.6.2 2. 뇌의 성장 2 유아 감염병 3 기타 3.1 각국의 유아 4 같이 보기 5 각주 유아기의 발달[편집] 유아기에는 체중의 증가가 현저하고, 체격이 눈에 띄게 튼튼해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뛴다든지, 달린다든지, 기어오른다든지 하는, 몸 전체를 사용하는 신체의 운동이 발달하게 된다. 또한, 언어생활이 급속하게 발달하게 된다.[5] 행동[편집] 이 시기에 유아는 사회적 역할과 이동 능력을 많이 배운다. 이 시기에 적어도 아기는 어떤 물건을 짚고 걸어간다. 보통 유아는 먼저 배우는 것과 나중 배우는 것이 다르다. 또한, 형제 자매들 사이에도 배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유아기에는 언어를 배울 때 '맘마', '멍멍' 등의 한 단어 수준에서 벗어나 '엄마, 까까' 등의 두 단어 수준으로 올라가게 되고, 만 4세가 되면 말은 어느 정도 배워서 대화가 가능하다.[6] 이 시기를 때로는 "미운 네살" 이라고 불리는데, 변덕이 빈번하며 짜증을 많이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계는 아이들의 사회 환경마다 다르지만 빠르게는 9개월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아이가 엄마나 돌보아 주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서서히 발견하는 과정이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해 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만 2세부터 만 5세까지 사이에 자신의 독립성을 발견하는 일을 되풀이한다. 따라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일관되게 반응하고, 아이들의 안전과 돌보는 사람의 용납함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회적인 상호작용은 유아 발달에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어른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고 듣고 반복하면서 언어와 걸음마, 사회 기술을 익힌다. 대부분은 유아기에 기저귀를 빼고 배변을 훈련한다. 약간의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17개월부터 배변 훈련을 하게 되며, 만 3살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평균적으로 24개월 이후에 배변 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이른 배변 훈련은 유아가 강박관념을 갖게 되므로 피해야 한다. 야뇨증에 걸린 유아는 기저귀를 더 차게 되며, 배변 훈련을 늦게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즈란식 배변 훈련이라고 해서 아이의 심리를 파악해서 단 하루 만에 기저귀를 떼는 훈련법도 개발되었다. 운동 발달[편집] 유아기에 있어서 운동발달은 현저하다. 이동운동으로서 1세 전후로 기기·서기·걷기 등이 가능해지고, 손·팔의 운동으로서 물건에 대한 도달·파악·손놀림이 가능해진다. 이후로는 다시 많은 운동이 발달한다. 불안정했던 보행은 속도나 거리가 증가하고, 양쪽 다리의 벌린 간격이 좁아진다. 3세에서는 계단 오르기가 가능해지고, 4세에서 달리기·뛰기·던지기·미끄러지기·올라가기·스킵(skip) 등이 최초엔 어설프지만 차차 가능하게 된다. 5세에서는 동작이 민첩해지고, 6세에서는 자유로이 뛰어다닌다.[7] 손끝의 운동은 약간 늦어지나 2세에서 토막쌓기로 집짓기를 할 수 있고, 3세에서 수직선을 그리며, 가위나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고, 4세에서 원이나 사각형을 그리며, 5세에서 삼각형을 그리고, 6세에서 손끝을 상당히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다.[7] 정서[편집] 유아기에는 언어생활이 발달하여 대체로 자유로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동무들이나 어른들과도 그런대로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의존적(依存的)·정서적이다.[5] 유아기 정서는, 지속시간이 짧고, 폭발적·일과적(一過的)이고,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이다.[8] 유유아기(乳幼兒期)에는, 소음이나 낯선 물건·낯선 장면·낯선 사람,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 등을 두려워하며, 6세경이 되면서 상상력의 발달과 더불어 상상의 생물·괴물 등에 대한 무서움이 증가한다. 또한 어두움이라든가 위험한 것, 유해물 등에 대한 두려움도 증가한다.[8] 사회성[편집] 1년쯤 되면 어른의 요구나 의사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며 모방도 나타나는데, 이 무렵이 되면 처음 수동적이었던 어른과의 사회적 관계가 능동적·적극적·상호교섭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2세 이후가 되면 본격적인 어린이끼리의 상호교섭이 나타난다. 다른 어린이에게 말을 건다거나, 간단한 놀이에 함께 참가하는데 아직 따로따로이다. 소위 평행(平行)놀이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서의 사회성은 3세 이후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무렵이 되면 어린이끼리 함께 놀려고 하는 의욕이 나타나고,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논다. 반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경쟁의식도 나타나게 된다. 싸움이 많고, 어른에 대해서 반항하려는 경향도 나타난다. 5, 6세가 되면 집단의식이 명료해진다. 놀이상대의 수나 놀이시간은 증가하고, 서로 교섭이 있는 놀이가 전개되어, 다른 어린이에 대한 우호적·협력적인 접근을 찾는 행동을 차차 나타내게 된다. 동무들의 집에 놀러 간다든지, 간단한 심부름이 가능해진다. 유치원생활 따위의 생활공간의 확대도 있으며, 사회성이 여러 가지 면에서 발달하는 시기이다.[9] 인성[편집] 유아기는 인성의 형성에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유아기의 어린이는 주된 생활공간이 가정이며, 부모와의 접촉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반응양식을 학습해 나간다. 가정이 인성의 정상적인 발달에 필요하다는 것은, 어떤 사정으로 양친에서 떨어져서 유아원이나 고아원 등에 수용된 어린이에 관한 연구에서도 명백하다. 다만, 모든 가정이 바람직한 역할을 수행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관련 연구에 의하면 부모의 교육태도가 어린이의 인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10] 어린이의 인성 형성은 양친과의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관계에도 의존하고 있다. 그 경향은 아동기 및 그 이후가 되면 더욱 강해진다. 친구관계가 인성의 형성에 끼치는 영향의 형태는 부모자식관계와 다르게 상호작용적이다. 즉 어린이의 인성이 친구관계에 영향을 주는 반면, 그와 같은 친구 관계가 반대로 어린이의 인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11] 신체발달[편집] 유아기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신체의 크기나 모습에서 현저한 변화한다. 영아기 이후에 신장은 매년 7cm씩 증가하여 6세가 되면 115cm 정도로 성장한다. 유아기의 신장은 성인이 되었을 때에 얼마만큼 자랄 것인가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신체의 비율에서도 신장에 대한 머리 크기의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여, 초등학교 입학시기가 되면 머리가 크고 무거워 보이는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다. 체중의 증가도 완만하게 이루어져, 6시가 되면 20kg 정도가 된다. 두뇌의 발달은 영어기와 마찬가지로 급속하게 이루어지며, 2세경에는 성인의 두뇌크기의 75%, 5세경에는 성인의 90%까지 성장한다. 1. 신체적 성장[편집] 2. 뇌의 성장[편집] 유아기의 가장 중요한 신체발달 중 하나는 뇌와 신경계의 지속적인 성장이다. 영아기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뇌는 유아기에도 계속해서 성장한다. 유아 감염병[편집] 일생 동안에 한 번은 걸리는 감염병으로 대개 유아기에 병에 걸려 면역이 되는 것에 홍역·백일해 및 볼거리(유행성이하선염) 등이 있다. 그 밖에 꼭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디프테리아·성홍열·이질·유행성소아마비·뇌막염·수족구병 등이 유유아기(乳幼兒期)에 많으며, 이들은 각각 특유한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디프테리아나 성홍열·이질 등에는 항균제가 잘 듣기 때문에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를 받으면 된다. 홍역·볼거리에는 특효약은 없지만 성인의 혈청을 사용하여 가볍게 치료한다든지, 항균제로써 여병을 방지한다.[12] 기타[편집] 유아가 걷게 되더라도 아기들이 지치거나 빨리 가고 싶은 경우 유모차나 버기에 태워 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유아기에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 조선 시대에는 유아기의 아이들은 오방장 두루마기를 입었다.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교통 사고도 '어린이 교통 사고'의 범주에 포함된다. 각국의 유아[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5년 7월 21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앙골라, 케냐, 탄자니아, 토고,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국가 또는 후진국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이 죽는 경우도 있다.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아르디 리잘과 알디 수간다는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웠으나 현재는 알디 수간다만 하루에 2갑씩 담배를 피우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을 대부분 유아원 또는 유치원에 보낸다. 축구 강국인 네덜란드에서는 축구 신동인 유아기의 아이가 프로 축구팀과 계약을 맺은 경우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유아라 해서 5살짜리 축구 신동인 찰리 윌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여 화제가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영아 어린이 보육 교육 각주[편집] ↑ 이에 해당하는 영어의 ‘toddler’는 아장아장 걷는 이를 뜻한다. ↑ Barker, Robin (2001) The Mighty Toddler: The essential guide to the toddler years, Pan Macmillan Australia, Sydney, p1. ↑ Lieberman, Alicia F, (1993) The Emotional Life of the Toddler, The Free Press, New York, p1. ↑ 현재시행법령보기 ↑ 가 나 다 유아기의 교육,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출처: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제 6단원 '언어의 세계' 212쪽;저자:교육과학기술부 ↑ 가 나 유아기의 운동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가 나 유아기 - 정서·욕구·동기의 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유아기의 사회성 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부모·자식관계와 인성,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친구관계와 인성,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유아전염병, 《글로벌 세계 대백과》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유아 vdeh사람의 발달 과정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갱년기 노년기 중장년은 장년기와 갱년기 두 시기를 함께 어우러 말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GND: 4031081-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유아&oldid=24272809" 분류: 인간의 발달 과정어린이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فارسیBahasa Indonesiaमराठी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icilianu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4일 (금) 21: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유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유아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유아(幼兒)는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어린이를 가리킨다.[1] The Mighty Toddler와 The Emotional Life of the Toddler에 따르면 유아는 만 1세부터 만 5세까지의 나이대에 속하는 어린이다.[2][3] 대한민국의 국어사전에 따르면 유아는 생후 1년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대한민국 영유아보육법에서 영유아란 만 6세 미만의 취학 전 아동을 말한다.[4] 이 시기에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발달하게 되며, 유치원 또는 보육원에서 보육되는 시기에 해당한다.[5] 목차 1 유아기의 발달 1.1 행동 1.2 운동 발달 1.3 정서 1.4 사회성 1.5 인성 1.6 신체발달 1.6.1 1. 신체적 성장 1.6.2 2. 뇌의 성장 2 유아 감염병 3 기타 3.1 각국의 유아 4 같이 보기 5 각주 유아기의 발달[편집] 유아기에는 체중의 증가가 현저하고, 체격이 눈에 띄게 튼튼해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뛴다든지, 달린다든지, 기어오른다든지 하는, 몸 전체를 사용하는 신체의 운동이 발달하게 된다. 또한, 언어생활이 급속하게 발달하게 된다.[5] 행동[편집] 이 시기에 유아는 사회적 역할과 이동 능력을 많이 배운다. 이 시기에 적어도 아기는 어떤 물건을 짚고 걸어간다. 보통 유아는 먼저 배우는 것과 나중 배우는 것이 다르다. 또한, 형제 자매들 사이에도 배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유아기에는 언어를 배울 때 '맘마', '멍멍' 등의 한 단어 수준에서 벗어나 '엄마, 까까' 등의 두 단어 수준으로 올라가게 되고, 만 4세가 되면 말은 어느 정도 배워서 대화가 가능하다.[6] 이 시기를 때로는 "미운 네살" 이라고 불리는데, 변덕이 빈번하며 짜증을 많이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계는 아이들의 사회 환경마다 다르지만 빠르게는 9개월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아이가 엄마나 돌보아 주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서서히 발견하는 과정이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해 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만 2세부터 만 5세까지 사이에 자신의 독립성을 발견하는 일을 되풀이한다. 따라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일관되게 반응하고, 아이들의 안전과 돌보는 사람의 용납함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회적인 상호작용은 유아 발달에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어른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고 듣고 반복하면서 언어와 걸음마, 사회 기술을 익힌다. 대부분은 유아기에 기저귀를 빼고 배변을 훈련한다. 약간의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17개월부터 배변 훈련을 하게 되며, 만 3살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평균적으로 24개월 이후에 배변 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이른 배변 훈련은 유아가 강박관념을 갖게 되므로 피해야 한다. 야뇨증에 걸린 유아는 기저귀를 더 차게 되며, 배변 훈련을 늦게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즈란식 배변 훈련이라고 해서 아이의 심리를 파악해서 단 하루 만에 기저귀를 떼는 훈련법도 개발되었다. 운동 발달[편집] 유아기에 있어서 운동발달은 현저하다. 이동운동으로서 1세 전후로 기기·서기·걷기 등이 가능해지고, 손·팔의 운동으로서 물건에 대한 도달·파악·손놀림이 가능해진다. 이후로는 다시 많은 운동이 발달한다. 불안정했던 보행은 속도나 거리가 증가하고, 양쪽 다리의 벌린 간격이 좁아진다. 3세에서는 계단 오르기가 가능해지고, 4세에서 달리기·뛰기·던지기·미끄러지기·올라가기·스킵(skip) 등이 최초엔 어설프지만 차차 가능하게 된다. 5세에서는 동작이 민첩해지고, 6세에서는 자유로이 뛰어다닌다.[7] 손끝의 운동은 약간 늦어지나 2세에서 토막쌓기로 집짓기를 할 수 있고, 3세에서 수직선을 그리며, 가위나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고, 4세에서 원이나 사각형을 그리며, 5세에서 삼각형을 그리고, 6세에서 손끝을 상당히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다.[7] 정서[편집] 유아기에는 언어생활이 발달하여 대체로 자유로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동무들이나 어른들과도 그런대로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의존적(依存的)·정서적이다.[5] 유아기 정서는, 지속시간이 짧고, 폭발적·일과적(一過的)이고,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이다.[8] 유유아기(乳幼兒期)에는, 소음이나 낯선 물건·낯선 장면·낯선 사람,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 등을 두려워하며, 6세경이 되면서 상상력의 발달과 더불어 상상의 생물·괴물 등에 대한 무서움이 증가한다. 또한 어두움이라든가 위험한 것, 유해물 등에 대한 두려움도 증가한다.[8] 사회성[편집] 1년쯤 되면 어른의 요구나 의사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며 모방도 나타나는데, 이 무렵이 되면 처음 수동적이었던 어른과의 사회적 관계가 능동적·적극적·상호교섭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2세 이후가 되면 본격적인 어린이끼리의 상호교섭이 나타난다. 다른 어린이에게 말을 건다거나, 간단한 놀이에 함께 참가하는데 아직 따로따로이다. 소위 평행(平行)놀이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서의 사회성은 3세 이후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무렵이 되면 어린이끼리 함께 놀려고 하는 의욕이 나타나고,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논다. 반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경쟁의식도 나타나게 된다. 싸움이 많고, 어른에 대해서 반항하려는 경향도 나타난다. 5, 6세가 되면 집단의식이 명료해진다. 놀이상대의 수나 놀이시간은 증가하고, 서로 교섭이 있는 놀이가 전개되어, 다른 어린이에 대한 우호적·협력적인 접근을 찾는 행동을 차차 나타내게 된다. 동무들의 집에 놀러 간다든지, 간단한 심부름이 가능해진다. 유치원생활 따위의 생활공간의 확대도 있으며, 사회성이 여러 가지 면에서 발달하는 시기이다.[9] 인성[편집] 유아기는 인성의 형성에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유아기의 어린이는 주된 생활공간이 가정이며, 부모와의 접촉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반응양식을 학습해 나간다. 가정이 인성의 정상적인 발달에 필요하다는 것은, 어떤 사정으로 양친에서 떨어져서 유아원이나 고아원 등에 수용된 어린이에 관한 연구에서도 명백하다. 다만, 모든 가정이 바람직한 역할을 수행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관련 연구에 의하면 부모의 교육태도가 어린이의 인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10] 어린이의 인성 형성은 양친과의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관계에도 의존하고 있다. 그 경향은 아동기 및 그 이후가 되면 더욱 강해진다. 친구관계가 인성의 형성에 끼치는 영향의 형태는 부모자식관계와 다르게 상호작용적이다. 즉 어린이의 인성이 친구관계에 영향을 주는 반면, 그와 같은 친구 관계가 반대로 어린이의 인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11] 신체발달[편집] 유아기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신체의 크기나 모습에서 현저한 변화한다. 영아기 이후에 신장은 매년 7cm씩 증가하여 6세가 되면 115cm 정도로 성장한다. 유아기의 신장은 성인이 되었을 때에 얼마만큼 자랄 것인가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신체의 비율에서도 신장에 대한 머리 크기의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여, 초등학교 입학시기가 되면 머리가 크고 무거워 보이는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다. 체중의 증가도 완만하게 이루어져, 6시가 되면 20kg 정도가 된다. 두뇌의 발달은 영어기와 마찬가지로 급속하게 이루어지며, 2세경에는 성인의 두뇌크기의 75%, 5세경에는 성인의 90%까지 성장한다. 1. 신체적 성장[편집] 2. 뇌의 성장[편집] 유아기의 가장 중요한 신체발달 중 하나는 뇌와 신경계의 지속적인 성장이다. 영아기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뇌는 유아기에도 계속해서 성장한다. 유아 감염병[편집] 일생 동안에 한 번은 걸리는 감염병으로 대개 유아기에 병에 걸려 면역이 되는 것에 홍역·백일해 및 볼거리(유행성이하선염) 등이 있다. 그 밖에 꼭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디프테리아·성홍열·이질·유행성소아마비·뇌막염·수족구병 등이 유유아기(乳幼兒期)에 많으며, 이들은 각각 특유한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디프테리아나 성홍열·이질 등에는 항균제가 잘 듣기 때문에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를 받으면 된다. 홍역·볼거리에는 특효약은 없지만 성인의 혈청을 사용하여 가볍게 치료한다든지, 항균제로써 여병을 방지한다.[12] 기타[편집] 유아가 걷게 되더라도 아기들이 지치거나 빨리 가고 싶은 경우 유모차나 버기에 태워 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유아기에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 조선 시대에는 유아기의 아이들은 오방장 두루마기를 입었다.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교통 사고도 '어린이 교통 사고'의 범주에 포함된다. 각국의 유아[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5년 7월 21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앙골라, 케냐, 탄자니아, 토고,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국가 또는 후진국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이 죽는 경우도 있다.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아르디 리잘과 알디 수간다는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웠으나 현재는 알디 수간다만 하루에 2갑씩 담배를 피우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을 대부분 유아원 또는 유치원에 보낸다. 축구 강국인 네덜란드에서는 축구 신동인 유아기의 아이가 프로 축구팀과 계약을 맺은 경우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유아라 해서 5살짜리 축구 신동인 찰리 윌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여 화제가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영아 어린이 보육 교육 각주[편집] ↑ 이에 해당하는 영어의 ‘toddler’는 아장아장 걷는 이를 뜻한다. ↑ Barker, Robin (2001) The Mighty Toddler: The essential guide to the toddler years, Pan Macmillan Australia, Sydney, p1. ↑ Lieberman, Alicia F, (1993) The Emotional Life of the Toddler, The Free Press, New York, p1. ↑ 현재시행법령보기 ↑ 가 나 다 유아기의 교육,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출처: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제 6단원 '언어의 세계' 212쪽;저자:교육과학기술부 ↑ 가 나 유아기의 운동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가 나 유아기 - 정서·욕구·동기의 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유아기의 사회성 발달, 《글로벌 세계 대백과》 ↑ 부모·자식관계와 인성,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친구관계와 인성,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유아전염병, 《글로벌 세계 대백과》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유아 vdeh사람의 발달 과정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갱년기 노년기 중장년은 장년기와 갱년기 두 시기를 함께 어우러 말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GND: 4031081-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유아&oldid=24272809" 분류: 인간의 발달 과정어린이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فارسیBahasa Indonesiaमराठी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icilianu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4일 (금) 21: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예종석 (1953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예종석 (1953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08년 5월) 예종석(芮鍾碩, 본관 의흥, 부산광역시 출생, 1953년 12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경영학자이다. 정치인 예춘호의 아들로, 마케팅 전문가로 알려져 있고 한양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였다.[1] 2017년 2월 17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 캠프 홍보본부장이 되었다.[2][3] 목차 1 학력 2 현재 3 경력 4 역임 5 저서 6 수상 7 각주 8 외부 링크 학력[편집] 1980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경제학 학사 1982년: 인디애나 대학교 경제학석사 1985년: 인디애나 대학교 경영학석사 1986년: 인디애나 대학교 경영학박사 현재[편집] 1989년 -: 한국 경영 연구원(KMDI) 연구위원 1995년 -: 한국 마케팅 연구원 연구위원 1996년 -: (주) 한독약품 고문 1998년 -: (주) 제일모직 사외이사 2001년 -: (주) 두산 사외이사 2001년 -: 에스콰이아 문화재단 이사 2005년 -: 한국일보 '한국교육산업대상' 심사위원장 2005년 -: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편집위원 2005년 -: 월간 마케팅 편집위원 2005년 -: 일본능률협회 글로벌 경영위원회 GCSI 평가위원회 위원장 2006년 -: (주) 제일모직 감사위원회 위원장 2006년 -: (주) 두산 감사위원회 위원장 2006년 -: 대한적십자사 사회협력 위원 2007년 -: 분당제생병원 자문위원 2007년 -: HKC 담배주식회사 경영고문 2007년 -: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장 2007년 -: 재단법인 영도육영회 이사장 2007년 -: 서울경제신문 교육산업 경영인대상 심사위원장 2007년 -: 한국비영리학회 이사 2008년 -: 아름다운재단 이사 2008년 -: 한양대학교 글로벌경영전문대학원장 2008년 -: 인디애나대학교 한국총동문회 회장 2014년 -: 비영리민간단체 십시일밥 이사장 2017년 -: 문재인 대선 캠프 홍보본부장 경력[편집] 1980년 - 1983년: Indiana 대학교 Research Fellow 1983년 - 1986년: Indiana 대학교 강사 및 교수 1986년 - 현재: 한양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1991년 - 1995년: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 마케팅 주임교수 1995년 : 한양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부장 2000년 - 2004년: 한양대학교 경영연구소 소장 역임[편집]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소장 대한 적십자사 총재 특별보좌역 한국 소비자학회 회장 한국 경영학회 부회장 한국 마케팅학회 부회장 한양대학교 경영연구소 소장(2000~2004) 동아일보 ‘2007 대선 매니페스토 평가위원 한국 마케팅저널 편집위원장 한국 경영학회 상임이사 학술 진흥재단 심사평가 위원 소비자 보호원 정책 심의 위원(2003 ~ 2006) 한국공항공사 자문위원(2002~2006) 아름다운재단 정책 자문 단장(2000) 한국 능률협회 고객만족대상 심사 위원(2003) 한국 경영학회 상남경영학자상 선정 위원(2003) 동아일보 내셔널 어젠다 위원회 경제 과학기술 분과 위원장(2003) 두산그룹, 제일모직, 포스코 개발, 매일유업, 에스콰이어, 한국공항공사 경방필백화점, 한국인삼공사 등 다수기업 자문교수 및 고문역임 삼성그룹, 현대그룹, LG그룹, SK그룹, 코오롱 그룹, 태평양그룹, 대상그룹 등에 마케팅 자문 및 CS경영, 경영전략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자문 및 교육 수행 한솔교육 사회공헌 위원장 한겨레신문 사외이사 저서[편집] 《예종석 교수의 아주 특별한 경영수업》. 리더스북. 2006년. ISBN 9788901059822 《예종석 교수의 희망경영》. 마젤란. 2008년. ISBN 9788991059276 《활명수 100년 성장의 비밀》. 리더스북. 2009년. ISBN 9788901101170 수상[편집] 2004년: 소비자학연구 최우수 논문상 2006년: 한국고객만족경영학회 우수 논문상 각주[편집] ↑ 김성휘. '마케터' 예종석 '정책통' 김수현 교수, 문재인 합류 의미는. 머니투데이. 2017년 2월 17일. ↑ 이지상. 문재인, 홍보본부장에 예종석 교수 영입…손혜원은?. 중앙일보. 2017년 2월 17일. ↑ 손병관. "악의적인 '문재인 공격'에는 맞대응 안희정의 '대연정', 더 세게 반박했어야". 오마이뉴스. 2017년 3월 3일. 외부 링크[편집] 예종석의 '선거마케팅, 알아야 이긴다' 제1회 아버지 예춘호를 말하다. 2017년 2월 18일. 예종석의 '선거마케팅, 알아야 이긴다' 제2회 마케팅 전략의 승리, 트럼프 선거. 2017년 2월 20일. 예종석의 '선거마케팅, 알아야 이긴다' 제3회 선한 의지. 2017년 2월 21일. 예종석의 '선거마케팅, 알아야 이긴다' 제4회 정치는 음식이다. 2017년 2월 25일. 예종석의 '선거마케팅, 알아야 이긴다' 제5회 황교안이 차린 특검 제사상. 2017년 2월 27일. 예종석의 '선거마케팅, 알아야 이긴다' 제6회 예폭선생의 오마이뉴스 인터뷰 후기. 2017년 3월 4일. 예종석의 '선거마케팅, 알아야 이긴다' 제7회 김종인 의원 탈당. 2017년 3월 7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예종석_(1953년)&oldid=24205358" 분류: 195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동문의흥 예씨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대한민국의 저술가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사외이사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08년 5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4:3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막돼먹은 영애씨 17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막돼먹은 영애씨 17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막돼먹은 영애씨 17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tvN 방송 기간 2019년 2월 8일 ~ 2019년 4월 26일 방송 시간 매주 금요일 오후 11시 방송 시즌 17 방송 횟수 12부작 추가 채널 O tvN 기획 이명한 책임프로듀서 안상휘 제작사 CJ ENM 연출 한상재, 윤재순, 김새별, 조제욱 조연출 홍경득, 김태경, 유아라 극본 한설희, 백지현, 홍보희, 오은지 출연자 김현숙, 이승준 외 해설 박형욱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전편 막돼먹은 영애씨 16 외부 링크 막돼먹은 영애씨 17 홈페이지 《막돼먹은 영애씨 17》은 tvN에서 2019년 2월 8일부터 2019년 4월 26일까지 방영된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 중 열일곱 번째 드라마다. 목차 1 소개 2 등장 인물 2.1 영애네 2.2 낙원사 2.3 영애 가족들 2.4 그 외 인물 2.5 특별출연 3 시청률 4 각주 5 외부 링크 소개[편집]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7이라 쓰고 엄마영애 시즌 1이라 읽는다. 등장 인물[편집] 영애네[편집] 김현숙 : 이영애 역 - 낙원사 디자인팀장 이승준 : 이승준 역 - 회사원, 이영애의 남편 이규한 : 이규한 역 - 성인 웹툰 작가, 승준의 사촌동생 연제형 : 연제형 역 - 규한의 어시스턴트 낙원사[편집] 정보석 : 정보석 역 - 사장 라미란 : 라미란 역 - 디자인팀 부장 윤서현 : 윤서현 역 - 영업팀 차장 정지순 : 정지순 역 - 영업팀 과장 고세원 : 김혁규 역 - 영업팀 대리, 이영채의 남편 박수아 : 나수아 역 - 경리, 라미란의 동생 영애 가족들[편집] 송민형 : 이귀현 역 - 아버지 김정하 : 김정하 역 - 어머니 정다혜 : 이영채 역 - 동생, 치킨집 사장 그 외 인물[편집] 김지아 : 이헌 역 - 이영애와 이승준의 딸 정윤건 : 김해밀 역 - 이영채와 김혁규의 장남 전성애 : 전성애 역 - 김정하의 친구이자 앙숙관계 김재화 : 김재화 역 - 청산유주 대표 김정남 주부진 김영희 엄태옥 안영미 박선우 이용규 김사훈 최화영 김한규 강태식 박기륭 국중웅 김해곤 손주환 노희중 김기탁 정탁 윤다예 이수아 김도진 전은미 남윤서 : 가은 역 성민준 : 윤찬 역 특별출연[편집] 문세윤 : 무당 역 (1화) 허안나 : 박안나 역 - 나이트클럽 박 사장 딸 (2회) 송영재 : 정보석의 친구 역 (3회) 강예빈 : 강예빈 역 - 전직 낙원사 직원, 다이어트 회사 직원 (6회) 장광 : 왕회장 역 - 정보석의 매형 (8회)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9년 회차 방송일 부제 AGB 시청률[1]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제1회 2월 8일 맘 돼버린 영애씨 2.562% 2.707% 제2회 2월 15일 에~라이(lie) 낙원사 2.617% 2.894% 제3회 2월 22일 다 터져버린 하루 2.420% 3.043% 제4회 3월 1일 젖 끊고 하이킥 2.865% 3.247% 제5회 3월 8일 아뿔싸! 갑분사(寺) 2.239% 2.392% 제6회 3월 15일 금쪽같은 내 새끼, 반쪽같은 내 세 끼 2.368% 2.381% 제7회 3월 22일 오 마이, 갓영애 2.682% 3.195% 제8회 3월 29일 죄와 벌: 배반의 낙원 2.707% 3.308% 제9회 4월 5일 모(母)르는 사이, 봄 2.559% 2.766% 제10회 4월 12일 헌이 아빠를 부탁해 2.686% 3.068% 제11회 4월 19일 워킹 MOM대로 안 되네요 3.077% 3.553% 제12회 4월 26일 그래도 막돼먹은! 2.926% 3.027% 평균 시청률 2.642% 2.965% 각주[편집] ↑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 참조. Archived 2016년 6월 1일 - 웨이백 머신 유료플랫폼 가입 가구 기준. 외부 링크[편집]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7 홈페이지 tvN 불금시리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톱스타 유백이(2018년 11월 16일 ~ 2019년 1월 25일)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7(2019년 2월 8일 ~ 2019년 4월 26일) 쌉니다 천리마마트(2019년 9월 ~ ) vdeh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현재와 예정)스케치 코미디 및인포테인먼트 《코미디빅리그》 《프리한 19》 리얼리티 쇼 《강식당2》 《고교급식왕》 《놀라운 토요일》 《서울메이트3》 《슈퍼히어러》 《신서유기7》 《씬의 퀴즈》 《유 퀴즈 온 더 블럭》 《짠내투어》 《플레이어》 《현지에서 먹힐까? - 미국 편》 토크 쇼 《곽승준의 쿨까당》 《문제적 남자》 《쇼! 오디오자키》 《수미네 반찬》 《어쩌다 어른》 드라마 월화 《60일, 지정생존자》 수목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불금 《쌉니다 천리마마트》 토일 《아스달 연대기》 《드라마 스테이지》 다큐멘터리 《tvN 스페셜》 《리틀빅 히어로》 vdeh의 텔레비전 드라마현재 월화 《60일, 지정생존자》 수목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불금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7》 토일 《아스달 연대기》 드라마 스테이지† 과거 금토드라마 시트콤 아침드라마 일요드라마 †부정기적 프로그램 KBS MBC SBS tvN OCN JTBC MBN 채널A TV조선 vdeh 불금불토드라마2010년대 후반2016년 《신데렐라와 네명의 기사》 《안투라지》 2018년 《빅 포레스트》 《톱스타 유백이》 2019년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7》 《쌉니다 천리마마트》 아침 | 월화 | 수목 | 금토 | 토일 | 불금불토 † 2018년부터는 불금시리즈로 방영됨. vdeh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 막돼먹은 영애씨 1 (2007) 막돼먹은 영애씨 2 (2007) 막돼먹은 영애씨 3 (2008) 막돼먹은 영애씨 4 (2008) 막돼먹은 영애씨 5 (2009) 막돼먹은 영애씨 6 (2009) 막돼먹은 영애씨 7 (2010) 막돼먹은 영애씨 8 (2010) 막돼먹은 영애씨 9 (2011) 막돼먹은 영애씨 10 (2012) 막돼먹은 영애씨 11 (2012) 막돼먹은 영애씨 12 (2013) 막돼먹은 영애씨 13 (2014) 막돼먹은 영애씨 14 (2015) 막돼먹은 영애씨 15 (2016) 막돼먹은 영애씨 16 (2017) 막돼먹은 영애씨 17 (201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막돼먹은_영애씨_17&oldid=24261191" 분류: TvN 불금불토드라마2019년 드라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21: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K리그 2000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리그 2000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성 디지털 K-리그 개요 대회 명칭 삼성 디지털 K-리그 시즌 2000 우승 안양 LG 치타스 정규리그 1위 안양 LG 치타스 준우승 부천 SK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안양 LG 치타스수원 삼성 블루윙즈 각종 기록 최다 득점 김도훈 (15득점) 최다 점수 경기 전남 3 - 7 수원 (10월 11일) 최다 연승 기록 10경기 안양 (6월 14일 ~ 7월 29일) 최다 연패 기록 9경기 울산 (4월 22일 ~ 6월 14일) 최다 관중 – 최소 관중 – 평균 관중 – 인접 대회 이전← 1999 다음2001 → 2000년 K-리그는 1983년에 아시아 최초의 프로축구리그로 출범한 K-리그가 맞이하는 18번째 시즌이다. 삼성과의 리그 메인 스폰서 계약에 따라 2000년 대회의 정식 명칭은 '삼성 디지털 K-리그 2000'이다. 시즌은 5월 14일에 열린 수원 삼성 블루윙즈 대 부천 SK의 경기로 개막하였으며, 11월 15일에 열린 안양 LG 치타스 대 부천 SK의 경기로 폐막하였다. 정규 시즌과 포스트 시즌을 포함하여 총 10개 구단이 모두 140경기를 벌였다. 흥행에 있어서 2000년 대회는 전반적인 '흉작'의 와중에도 프로축구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경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10월 11일 광양에서 열린 전남 드래곤즈 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정규 리그 최종전이다. 이 경기에서 양팀은 '총 10개'의 소나기골을 뽑아냄으로써 K리그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득점 기록(9골)을 경신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구단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득점 공동 기록(7골)과 함께 단일경기 해트트릭 2번(데니스, 산드로)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리그 구성원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시즌에 앞서 충청남도 천안시를 연고지로 삼던 '천안 일화 천마'가 경기도 성남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성남 일화 천마'가 되었다. 리그 방식은 전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2000년 대회는 정규 리그와 챔피언십으로 구성된 K-리그 및 조별 리그와 결선 토너먼트로 구성된 리그컵이 함께 진행되었다. 2000년 대회는 각 팀들의 전력이 평준화되어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다. 특히 강팀으로 분류되었던 부산 아이콘스, 울산 현대 호랑이,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나란히 부진하고, 반대로 중하위권으로 분류되었던 안양 LG 치타스, 성남 일화 천마, 부천 SK가 나란히 전력이 향상되면서 팬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안양 LG 치타스는 구단의 과감한 투자와 조광래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이 어우러져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6월 14일에 1위에 등극한 뒤 단 한 차례의 양보도 없이 순위를 수성하다가 9월 30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로 역전승하며 순위를 확정지었다. 이로써 안양 LG 치타스는 럭키금성 황소라는 이름으로 1990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10년만에 정규 리그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한편, 안양 LG 치타스는 10년 만에 부활한 2군 리그에서도 정상에 오르는 경사를 누렸다. 목차 1 참가 구단 2 운영 방식 3 순위 3.1 정규 리그 3.2 시즌 최종 4 정규 시즌 5 포스트 시즌 5.1 준플레이오프 5.2 플레이오프 5.3 챔피언 결정전 6 우승 7 기록 7.1 득점 7.2 도움 8 수상 8.1 최우수선수상 8.2 득점상 8.3 도움상 8.4 신인선수상 8.5 베스트 11 8.6 감독상 8.7 기타 9 각주 참가 구단[편집] 시즌에 앞서 충청남도 천안시를 연고지로 삼던 '천안 일화 천마'가 경기도 성남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성남 일화 천마'가 되었다. 팀 연고지 데뷔 시즌 참가 횟수 전년 순위 대전 시티즌 대전광역시 1997년 4 8위 부산 아이콘스 부산광역시 1983년 18 2위 부천 SK 부천시[1] 1983년 18 3위 성남 일화 천마 성남시 1989년 12 10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시 1996년 5 1위 안양 LG 치타스 안양시 1984년 17 9위 울산 현대 호랑이 울산광역시 1984년 17 6위 전남 드래곤즈 전라남도 1995년 6 4위 전북 현대 모터스 전라북도 1995년 6 7위 포항 스틸러스 포항시 1983년 18 5위 운영 방식[편집] 단일 리그 제도: 총 10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이 다른 팀과 모두 세 번씩 경기를 치르는 '정규 리그'(정규 시즌)를 진행한다. 이에 따라 2000년 대회의 정규 리그에서는 총 135경기가 진행되며, 각 팀은 27경기를 치른다. 정규 리그 1위에서 4위를 기록한 팀들은 '챔피언십'(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 정규 리그 5위에서 10위를 기록한 팀들은 해당 순위가 시즌 최종 순위가 된다. 4강 플레이오프 제도: 정규 리그 순위를 기준으로 1위는 '챔피언 결정전'에, 2위는 '플레이오프'에, 3위와 4위는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준플레이오프의 승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4위가 된다. 플레이오프의 승자는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며,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3위가 된다. 챔피언 결정전의 승자는 리그 우승 팀에 등극하며, 패자는 리그 준우승 팀이 된다. 연장전・승부차기 제도: 정규 시간(전반전 45분, 후반전 45분 및 인저리 타임) 내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 경기는 무승부로 종료되지 않으며 연장전에 돌입한다. 연장전에서 승리한 팀에게는 승점 2점을 부여한다. 연장전 내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 경기는 종료되지 않으며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승부차기에서 승리한 팀에게는 승점 1점을 부여한다. 정리하자면 정규 시간 승리 시에는 승점 3점을, 연장전 승리 시에는 승점 2점을, 승부차기 승리 시에는 승점 1점을, 패배 시에는 승점 0점을 부여한다. 순위[편집] 정규 리그[편집] 순위 팀 경기 승1 승2 승3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 1 안양 LG 치타스 (Q) 27 17 0 2 8 46 25 +21 53 챔피언 결정전 2 부천 SK (Q) 27 10 0 6 11 45 35 +10 36 플레이오프 3 성남 일화 천마 (Q) 27 12 0 6 9 43 33 +10 42 준플레이오프 4 전북 현대 모터스 (Q) 27 11 0 4 12 34 40 -6 37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7 11 0 3 13 48 43 +5 36 6 부산 아이콘스 27 9 0 2 16 42 42 0 29 7 전남 드래곤즈 27 8 0 4 15 28 35 -7 28 8 대전 시티즌 27 7 0 3 17 26 40 -14 24 9 포항 스틸러스 27 5 0 7 15 31 39 -8 22 10 울산 현대 호랑이 27 6 0 2 19 26 37 -11 20 * 2000년 5월 14일부터 동년 10월 11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 *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시즌 최종[편집] 순위 팀 경기 승1 승2 승3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 1 안양 LG 치타스 (C) 27 17 0 2 8 46 25 +21 53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2 부천 SK 27 10 0 6 11 45 35 +10 36 3 성남 일화 천마 27 12 0 6 9 43 33 +10 42 4 전북 현대 모터스 27 11 0 4 12 34 40 -6 37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7 11 0 3 13 48 43 +5 36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6 부산 아이콘스 27 9 0 2 16 42 42 0 29 7 전남 드래곤즈 27 8 0 4 15 28 35 -7 28 8 대전 시티즌 27 7 0 3 17 26 40 -14 24 9 포항 스틸러스 27 5 0 7 15 31 39 -8 22 10 울산 현대 호랑이 27 6 0 2 19 26 37 -11 20 * 마지막 업데이트 : 2000년 12월 31일 *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정규 시즌[편집] 정규 시즌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2000의 경기 결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포스트 시즌[편집] 포스트 시즌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챔피언십 2000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준플레이오프[편집] '2000년 K-리그 챔피언십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 리그 3위와 정규 리그 4위가 맞붙는다. 경기는 단판 승부이며, 정규 리그 3위의 홈에서 진행한다. 준플레이오프의 승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준플레이오프의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4위가 된다. 챔피언십 준PO 11월 1일 전북 현대 모터스 1 – 2 (a.e.t.) 부천 SK 전주시 UTC+9 19:00 박성배 53' 66' 전경준 94' 이원식 경기장: 전주종합경기장 관중 수: 10,068 플레이오프[편집] '2000년 K-리그 챔피언십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 리그 2위와 준플레이오프의 승자가 맞붙는다. 경기는 홈・어웨이로 치뤄지며, 정규 리그 2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은 원정에서, 2차전은 홈에서 진행한다. 플레이오프의 승자는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의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3위가 된다. 챔피언십 PO 1차전 11월 5일 성남 일화 천마 1 – 3 부천 SK 성남시 UTC+9 15:00 김대의 46' 20' 윤정춘 47' 강철 85' 곽경근 경기장: 성남종합운동장 관중 수: 12,784 챔피언십 PO 2차전 11월 8일 부천 SK 2 – 3 (a.e.t.) 성남 일화 천마 서울특별시 UTC+9 19:00 윤정춘 59' 곽경근 102' 51' 홍도표 66' 박남열 78' 황연석 경기장: 목동운동장 관중 수: 6,832 챔피언 결정전[편집] 챔피언 결정전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챔피언 결정전 2000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0년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정규 리그 1위와 플레이오프의 승자가 맞붙는다. 경기는 홈・어웨이로 치뤄지며, 정규 리그 1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은 원정에서, 2차전은 홈에서 진행한다. 챔피언 결정전의 승자는 리그 우승 팀에 등극하며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2라운드 출전권이 주어진다. 챔피언 결정전의 패자는 리그 준우승 팀이 된다. 챔피언 결정전 1차전 11월 12일 부천 SK 1 – 4 안양 LG 치타스 서울특별시 UTC+9 15:00 이원식 후39' 후13' 왕정현 후23' 정광민 후34' 최용수 후44' 유상수 경기장: 목동운동장 관중 수: 13,825 챔피언 결정전 2차전 11월 15일 안양 LG 치타스 1 – 1 (4 – 2 승부차기) 부천 SK 안양시 UTC+9 18:30 안드레 76' 59' 곽경근 경기장: 안양종합운동장 관중 수: 20,883 승부차기 김성일 안드레 김성재 한상구 히카르도 이임생 곽경근 김기동 강철 우승[편집] K-리그 우승 안양 LG 치타스 1 1 1 제18대 대한민국 챔피언 (3회 우승) 1985년・1990년・2000년 기록[편집] 득점[편집] 득점 순위 상위 10인은 다음과 같으며, 전북 현대 모터스의 김도훈이 15득점을 기록하여 득점상을 수상했다. 순위 선수 소속 득점 경기 1 김도훈 전북 현대 모터스 15 27 2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14 34 3 이원식 부천 SK 13 32 4 정광민 안양 LG 치타스 13 34 5 이상윤 성남 일화 천마 13 36 6 박남열 성남 일화 천마 13 41 7 박성배 전북 현대 모터스 11 32 8 세자르 전남 드래곤즈 11 39 9 안정환 부산 아이콘스 10 20 10 데니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 27 * '득점 수'가 동률인 경우에는 '경기당 득점'을, '경기당 득점'이 동률인 경우에는 '시간당 득점'을 기준으로 득점 순위가 산정되었다. 도움[편집] 도움 순위 상위 10인은 다음과 같으며, 안양 LG 치타스의 안드레가 14도움을 기록하여 도움상을 수상했다. 순위 선수 소속 득점 경기 1 안드레 안양 LG 치타스 14 38 2 전경준 부천 SK 13 38 3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10 34 4 마니치 부산 아이콘스 9 34 5 데니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7 27 6 양현정 전북 현대 모터스 7 32 7 신태용 성남 일화 천마 7 34 8 신진원 대전 시티즌 6 30 9 샤리 부천 SK 6 32 10 서혁수 전북 현대 모터스 6 32 * '도움 수'가 동률인 경우에는 '경기당 도움'을, '경기당 도움'이 동률인 경우에는 '시간당 도움'을 기준으로 도움 순위가 산정되었다. 수상[편집] 최우수선수상[편집] vdehK리그1 최우수선수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성화 1984: 박창선 1985: 한문배 1986: 이흥실 1987: 정해원 1988: 박경훈 1989: 노수진 1990: 최진한 1991: 정용환 1992: 홍명보 1993: 이상윤 1994: 고정운 1995: 신태용 1996: 김현석 1997: 김주성 1998: 고종수 1999: 안정환 2000: 최용수 2001: 신태용 2002: 김대의 2003: 김도훈 2004: 나드손 2005: 이천수 2006: 김두현 2007: 따바레즈 2008: 이운재 2009: 이동국 2010: 김은중 2011: 이동국 2012: 데얀 2013: 김신욱 2014: 이동국 2015: 이동국 2016: 정조국 2017: 이재성 2018: 말컹 제18대 MVP 선수 소속 비고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제18대 K-리그 챔피언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fw 득점상[편집] vdehK리그1 득점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윤기 1984: 백종철 1985: 피아퐁 1986: 정해원 1987: 최상국 1988: 이기근 1989: 조긍연 1990: 윤상철 1991: 이기근 1992: 임근재 1993: 차상해 1994: 윤상철 1995: 노상래 1996: 신태용 1997: 김현석 1998: 유상철 1999: 샤샤 2000: 김도훈 2001: 산드로 2002: 에드밀손 2003: 김도훈 2004: 모따 2005: 마차도 2006: 우성용 2007: 까보레 2008: 두두 2009: 이동국 2010: 유병수 2011: 데얀 2012: 데얀 2013: 데얀 2014: 산토스 2015: 김신욱 2016: 정조국 2017: 조나탄 2018: 말컹 제18대 득점왕 선수 소속 비고 김도훈 전북 현대 모터스 20경기 12득점 (경기당 득점: 0.60)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fw 도움상[편집] vdehK리그1 도움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창선 1984: 렌스베르겐 1985: 피아퐁 1986: 강득수 1987: 최상국 1988: 김종부 1989: 이흥실 1990: 최대식 1991: 김준현 1992: 신동철 1993: 윤상철 1994: 고정운 1995: 아미르 1996: 라데 1997: 데니스 1998: 정정수 1999: 변재섭 2000: 안드레 2001: 우르모브 2002: 이천수 2003: 에드밀손 2004: 홍순학 2005: 히칼도 2006: 슈바 2007: 따바레즈 2008: 브라질리아 2009: 루이스 2010: 구자철 2011: 이동국 2012: 몰리나 2013: 몰리나 2014: 이승기 2015: 염기훈 2016: 염기훈 2017: 손준호 2018: 세징야 제18대 도움왕 선수 소속 비고 안드레 안양 LG 치타스 29경기 10도움 (경기당 도움: 0.34) 제18대 K-리그 챔피언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mf 신인선수상[편집] vdehK리그 영플레이어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5: 이흥실 1986: 함현기 1987: 김주성 1988: 황보관 1989: 고정운 1990: 송주석 1991: 조우석 1992: 신태용 1993: 정광석 1994: 최용수 1995: 노상래 1996: 박건하 1997: 신진원 1998: 이동국 1999: 이성재 2000: 양현정 2001: 송종국 2002: 이천수 2003: 정조국 2004: 문민귀 2005: 박주영 2006: 염기훈 2007: 하태균 2008: 이승렬 2009: 김영후 2010: 윤빛가람 2011: 이승기 2012: 이명주 2013: 고무열 2014: 김승대 2015: 이재성 2016: 안현범 2017: 김민재 2018: 한승규 2012년까지는 신인선수상 수상자 제16대 신인왕 선수 소속 비고 박성배 전북 현대 모터스 – 베스트 11[편집] vdeh2000 K리그 베스트 11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GK 신의손 DF 강철 이임생 김현수 마시엘 MF 안드레 신태용 전경준 데니스 FW 최용수 김도훈 감독상[편집] vdehK리그1 감독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함흥철 1984: 장운수 1985: 박세학 1986: 최은택 1987: 이차만 1988: 이회택 1989: 김정남 1990: 고재욱 1991: 비츠케이 1992: 이회택 1993: 박종환 1994: 박종환 1995: 박종환 1996: 고재욱 1997: 이차만 1998: 김호 1999: 김호 2000: 조광래 2001: 차경복 2002: 차경복 2003: 차경복 2004: 차범근 2005: 장외룡 2006: 김학범 2007: 파리아스 2008: 차범근 2009: 최강희 2010: 박경훈 2011: 최강희 2012: 최용수 2013: 황선홍 2014: 최강희 2015: 최강희 2016: 황선홍 2017: 최강희 2018: 최강희 기타[편집] 부문 선수 소속 비고 특별상 이용발 부천 SK 2000시즌 전경기 전시간 출전 조성환 부천 SK 2000시즌 전경기 전시간 출전 최우수 심판상 이상용 – 주심 부문 수상 곽경만 – 부심 부문 수상 각주[편집] ↑ 부천 SK의 연고지는 경기도 부천시였지만 당시 부천종합운동장의 공사로 인해 실제 경기는 서울특별시에 소재한 목동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vdeh K리그1 시즌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vdehFC 서울 (안양 LG 치타스) - 2000년 K-리그 우승 (3회)← 이전 1998년 대한민국 FA컵 우승2006년 삼성 하우젠컵 우승 다음 → 1 정길용 2 김도용 3 손현준 4 김동진 5 이상헌 6 무탐바 7 장형석 8 김성재 9 최태욱 10 최용수 11 드라간 12 이영표 13 최원권 14 박용호 15 김병채 16 이동준 17 김귀화 (주장) 18 안드레 19 김성일 20 정현호 22 김주영 23 정광민 24 강준호 25 제용삼 26 박종인 27 장영훈 28 왕정현 29 김대성 30 유진오 31 원종덕 32 정창근 33 한상구 34 이재천 35 에릭 36 진순진 37 최승범 38 허성욱 39 김진용 40 박정환 41 백민철 42 김기현 43 유상수 44 신의손 45 최윤열 46 김범수 47 쿠벡 48 히카르도 감독: 조광래 수석 코치: 이춘석 코치: 이영진, 신재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리그_2000&oldid=24424419" 분류: K리그 시즌2000년 대한민국2000 축구 리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05: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K리그 2000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리그 2000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성 디지털 K-리그 개요 대회 명칭 삼성 디지털 K-리그 시즌 2000 우승 안양 LG 치타스 정규리그 1위 안양 LG 치타스 준우승 부천 SK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안양 LG 치타스수원 삼성 블루윙즈 각종 기록 최다 득점 김도훈 (15득점) 최다 점수 경기 전남 3 - 7 수원 (10월 11일) 최다 연승 기록 10경기 안양 (6월 14일 ~ 7월 29일) 최다 연패 기록 9경기 울산 (4월 22일 ~ 6월 14일) 최다 관중 – 최소 관중 – 평균 관중 – 인접 대회 이전← 1999 다음2001 → 2000년 K-리그는 1983년에 아시아 최초의 프로축구리그로 출범한 K-리그가 맞이하는 18번째 시즌이다. 삼성과의 리그 메인 스폰서 계약에 따라 2000년 대회의 정식 명칭은 '삼성 디지털 K-리그 2000'이다. 시즌은 5월 14일에 열린 수원 삼성 블루윙즈 대 부천 SK의 경기로 개막하였으며, 11월 15일에 열린 안양 LG 치타스 대 부천 SK의 경기로 폐막하였다. 정규 시즌과 포스트 시즌을 포함하여 총 10개 구단이 모두 140경기를 벌였다. 흥행에 있어서 2000년 대회는 전반적인 '흉작'의 와중에도 프로축구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경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10월 11일 광양에서 열린 전남 드래곤즈 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정규 리그 최종전이다. 이 경기에서 양팀은 '총 10개'의 소나기골을 뽑아냄으로써 K리그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득점 기록(9골)을 경신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구단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득점 공동 기록(7골)과 함께 단일경기 해트트릭 2번(데니스, 산드로)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리그 구성원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시즌에 앞서 충청남도 천안시를 연고지로 삼던 '천안 일화 천마'가 경기도 성남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성남 일화 천마'가 되었다. 리그 방식은 전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2000년 대회는 정규 리그와 챔피언십으로 구성된 K-리그 및 조별 리그와 결선 토너먼트로 구성된 리그컵이 함께 진행되었다. 2000년 대회는 각 팀들의 전력이 평준화되어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다. 특히 강팀으로 분류되었던 부산 아이콘스, 울산 현대 호랑이,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나란히 부진하고, 반대로 중하위권으로 분류되었던 안양 LG 치타스, 성남 일화 천마, 부천 SK가 나란히 전력이 향상되면서 팬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안양 LG 치타스는 구단의 과감한 투자와 조광래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이 어우러져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6월 14일에 1위에 등극한 뒤 단 한 차례의 양보도 없이 순위를 수성하다가 9월 30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로 역전승하며 순위를 확정지었다. 이로써 안양 LG 치타스는 럭키금성 황소라는 이름으로 1990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10년만에 정규 리그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한편, 안양 LG 치타스는 10년 만에 부활한 2군 리그에서도 정상에 오르는 경사를 누렸다. 목차 1 참가 구단 2 운영 방식 3 순위 3.1 정규 리그 3.2 시즌 최종 4 정규 시즌 5 포스트 시즌 5.1 준플레이오프 5.2 플레이오프 5.3 챔피언 결정전 6 우승 7 기록 7.1 득점 7.2 도움 8 수상 8.1 최우수선수상 8.2 득점상 8.3 도움상 8.4 신인선수상 8.5 베스트 11 8.6 감독상 8.7 기타 9 각주 참가 구단[편집] 시즌에 앞서 충청남도 천안시를 연고지로 삼던 '천안 일화 천마'가 경기도 성남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성남 일화 천마'가 되었다. 팀 연고지 데뷔 시즌 참가 횟수 전년 순위 대전 시티즌 대전광역시 1997년 4 8위 부산 아이콘스 부산광역시 1983년 18 2위 부천 SK 부천시[1] 1983년 18 3위 성남 일화 천마 성남시 1989년 12 10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시 1996년 5 1위 안양 LG 치타스 안양시 1984년 17 9위 울산 현대 호랑이 울산광역시 1984년 17 6위 전남 드래곤즈 전라남도 1995년 6 4위 전북 현대 모터스 전라북도 1995년 6 7위 포항 스틸러스 포항시 1983년 18 5위 운영 방식[편집] 단일 리그 제도: 총 10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이 다른 팀과 모두 세 번씩 경기를 치르는 '정규 리그'(정규 시즌)를 진행한다. 이에 따라 2000년 대회의 정규 리그에서는 총 135경기가 진행되며, 각 팀은 27경기를 치른다. 정규 리그 1위에서 4위를 기록한 팀들은 '챔피언십'(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 정규 리그 5위에서 10위를 기록한 팀들은 해당 순위가 시즌 최종 순위가 된다. 4강 플레이오프 제도: 정규 리그 순위를 기준으로 1위는 '챔피언 결정전'에, 2위는 '플레이오프'에, 3위와 4위는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준플레이오프의 승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4위가 된다. 플레이오프의 승자는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며,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3위가 된다. 챔피언 결정전의 승자는 리그 우승 팀에 등극하며, 패자는 리그 준우승 팀이 된다. 연장전・승부차기 제도: 정규 시간(전반전 45분, 후반전 45분 및 인저리 타임) 내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 경기는 무승부로 종료되지 않으며 연장전에 돌입한다. 연장전에서 승리한 팀에게는 승점 2점을 부여한다. 연장전 내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 경기는 종료되지 않으며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승부차기에서 승리한 팀에게는 승점 1점을 부여한다. 정리하자면 정규 시간 승리 시에는 승점 3점을, 연장전 승리 시에는 승점 2점을, 승부차기 승리 시에는 승점 1점을, 패배 시에는 승점 0점을 부여한다. 순위[편집] 정규 리그[편집] 순위 팀 경기 승1 승2 승3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 1 안양 LG 치타스 (Q) 27 17 0 2 8 46 25 +21 53 챔피언 결정전 2 부천 SK (Q) 27 10 0 6 11 45 35 +10 36 플레이오프 3 성남 일화 천마 (Q) 27 12 0 6 9 43 33 +10 42 준플레이오프 4 전북 현대 모터스 (Q) 27 11 0 4 12 34 40 -6 37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7 11 0 3 13 48 43 +5 36 6 부산 아이콘스 27 9 0 2 16 42 42 0 29 7 전남 드래곤즈 27 8 0 4 15 28 35 -7 28 8 대전 시티즌 27 7 0 3 17 26 40 -14 24 9 포항 스틸러스 27 5 0 7 15 31 39 -8 22 10 울산 현대 호랑이 27 6 0 2 19 26 37 -11 20 * 2000년 5월 14일부터 동년 10월 11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 *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시즌 최종[편집] 순위 팀 경기 승1 승2 승3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 1 안양 LG 치타스 (C) 27 17 0 2 8 46 25 +21 53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2 부천 SK 27 10 0 6 11 45 35 +10 36 3 성남 일화 천마 27 12 0 6 9 43 33 +10 42 4 전북 현대 모터스 27 11 0 4 12 34 40 -6 37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7 11 0 3 13 48 43 +5 36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6 부산 아이콘스 27 9 0 2 16 42 42 0 29 7 전남 드래곤즈 27 8 0 4 15 28 35 -7 28 8 대전 시티즌 27 7 0 3 17 26 40 -14 24 9 포항 스틸러스 27 5 0 7 15 31 39 -8 22 10 울산 현대 호랑이 27 6 0 2 19 26 37 -11 20 * 마지막 업데이트 : 2000년 12월 31일 *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정규 시즌[편집] 정규 시즌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2000의 경기 결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포스트 시즌[편집] 포스트 시즌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챔피언십 2000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준플레이오프[편집] '2000년 K-리그 챔피언십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 리그 3위와 정규 리그 4위가 맞붙는다. 경기는 단판 승부이며, 정규 리그 3위의 홈에서 진행한다. 준플레이오프의 승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준플레이오프의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4위가 된다. 챔피언십 준PO 11월 1일 전북 현대 모터스 1 – 2 (a.e.t.) 부천 SK 전주시 UTC+9 19:00 박성배 53' 66' 전경준 94' 이원식 경기장: 전주종합경기장 관중 수: 10,068 플레이오프[편집] '2000년 K-리그 챔피언십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 리그 2위와 준플레이오프의 승자가 맞붙는다. 경기는 홈・어웨이로 치뤄지며, 정규 리그 2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은 원정에서, 2차전은 홈에서 진행한다. 플레이오프의 승자는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의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3위가 된다. 챔피언십 PO 1차전 11월 5일 성남 일화 천마 1 – 3 부천 SK 성남시 UTC+9 15:00 김대의 46' 20' 윤정춘 47' 강철 85' 곽경근 경기장: 성남종합운동장 관중 수: 12,784 챔피언십 PO 2차전 11월 8일 부천 SK 2 – 3 (a.e.t.) 성남 일화 천마 서울특별시 UTC+9 19:00 윤정춘 59' 곽경근 102' 51' 홍도표 66' 박남열 78' 황연석 경기장: 목동운동장 관중 수: 6,832 챔피언 결정전[편집] 챔피언 결정전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챔피언 결정전 2000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0년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정규 리그 1위와 플레이오프의 승자가 맞붙는다. 경기는 홈・어웨이로 치뤄지며, 정규 리그 1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은 원정에서, 2차전은 홈에서 진행한다. 챔피언 결정전의 승자는 리그 우승 팀에 등극하며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2라운드 출전권이 주어진다. 챔피언 결정전의 패자는 리그 준우승 팀이 된다. 챔피언 결정전 1차전 11월 12일 부천 SK 1 – 4 안양 LG 치타스 서울특별시 UTC+9 15:00 이원식 후39' 후13' 왕정현 후23' 정광민 후34' 최용수 후44' 유상수 경기장: 목동운동장 관중 수: 13,825 챔피언 결정전 2차전 11월 15일 안양 LG 치타스 1 – 1 (4 – 2 승부차기) 부천 SK 안양시 UTC+9 18:30 안드레 76' 59' 곽경근 경기장: 안양종합운동장 관중 수: 20,883 승부차기 김성일 안드레 김성재 한상구 히카르도 이임생 곽경근 김기동 강철 우승[편집] K-리그 우승 안양 LG 치타스 1 1 1 제18대 대한민국 챔피언 (3회 우승) 1985년・1990년・2000년 기록[편집] 득점[편집] 득점 순위 상위 10인은 다음과 같으며, 전북 현대 모터스의 김도훈이 15득점을 기록하여 득점상을 수상했다. 순위 선수 소속 득점 경기 1 김도훈 전북 현대 모터스 15 27 2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14 34 3 이원식 부천 SK 13 32 4 정광민 안양 LG 치타스 13 34 5 이상윤 성남 일화 천마 13 36 6 박남열 성남 일화 천마 13 41 7 박성배 전북 현대 모터스 11 32 8 세자르 전남 드래곤즈 11 39 9 안정환 부산 아이콘스 10 20 10 데니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 27 * '득점 수'가 동률인 경우에는 '경기당 득점'을, '경기당 득점'이 동률인 경우에는 '시간당 득점'을 기준으로 득점 순위가 산정되었다. 도움[편집] 도움 순위 상위 10인은 다음과 같으며, 안양 LG 치타스의 안드레가 14도움을 기록하여 도움상을 수상했다. 순위 선수 소속 득점 경기 1 안드레 안양 LG 치타스 14 38 2 전경준 부천 SK 13 38 3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10 34 4 마니치 부산 아이콘스 9 34 5 데니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7 27 6 양현정 전북 현대 모터스 7 32 7 신태용 성남 일화 천마 7 34 8 신진원 대전 시티즌 6 30 9 샤리 부천 SK 6 32 10 서혁수 전북 현대 모터스 6 32 * '도움 수'가 동률인 경우에는 '경기당 도움'을, '경기당 도움'이 동률인 경우에는 '시간당 도움'을 기준으로 도움 순위가 산정되었다. 수상[편집] 최우수선수상[편집] vdehK리그1 최우수선수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성화 1984: 박창선 1985: 한문배 1986: 이흥실 1987: 정해원 1988: 박경훈 1989: 노수진 1990: 최진한 1991: 정용환 1992: 홍명보 1993: 이상윤 1994: 고정운 1995: 신태용 1996: 김현석 1997: 김주성 1998: 고종수 1999: 안정환 2000: 최용수 2001: 신태용 2002: 김대의 2003: 김도훈 2004: 나드손 2005: 이천수 2006: 김두현 2007: 따바레즈 2008: 이운재 2009: 이동국 2010: 김은중 2011: 이동국 2012: 데얀 2013: 김신욱 2014: 이동국 2015: 이동국 2016: 정조국 2017: 이재성 2018: 말컹 제18대 MVP 선수 소속 비고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제18대 K-리그 챔피언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fw 득점상[편집] vdehK리그1 득점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윤기 1984: 백종철 1985: 피아퐁 1986: 정해원 1987: 최상국 1988: 이기근 1989: 조긍연 1990: 윤상철 1991: 이기근 1992: 임근재 1993: 차상해 1994: 윤상철 1995: 노상래 1996: 신태용 1997: 김현석 1998: 유상철 1999: 샤샤 2000: 김도훈 2001: 산드로 2002: 에드밀손 2003: 김도훈 2004: 모따 2005: 마차도 2006: 우성용 2007: 까보레 2008: 두두 2009: 이동국 2010: 유병수 2011: 데얀 2012: 데얀 2013: 데얀 2014: 산토스 2015: 김신욱 2016: 정조국 2017: 조나탄 2018: 말컹 제18대 득점왕 선수 소속 비고 김도훈 전북 현대 모터스 20경기 12득점 (경기당 득점: 0.60)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fw 도움상[편집] vdehK리그1 도움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창선 1984: 렌스베르겐 1985: 피아퐁 1986: 강득수 1987: 최상국 1988: 김종부 1989: 이흥실 1990: 최대식 1991: 김준현 1992: 신동철 1993: 윤상철 1994: 고정운 1995: 아미르 1996: 라데 1997: 데니스 1998: 정정수 1999: 변재섭 2000: 안드레 2001: 우르모브 2002: 이천수 2003: 에드밀손 2004: 홍순학 2005: 히칼도 2006: 슈바 2007: 따바레즈 2008: 브라질리아 2009: 루이스 2010: 구자철 2011: 이동국 2012: 몰리나 2013: 몰리나 2014: 이승기 2015: 염기훈 2016: 염기훈 2017: 손준호 2018: 세징야 제18대 도움왕 선수 소속 비고 안드레 안양 LG 치타스 29경기 10도움 (경기당 도움: 0.34) 제18대 K-리그 챔피언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mf 신인선수상[편집] vdehK리그 영플레이어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5: 이흥실 1986: 함현기 1987: 김주성 1988: 황보관 1989: 고정운 1990: 송주석 1991: 조우석 1992: 신태용 1993: 정광석 1994: 최용수 1995: 노상래 1996: 박건하 1997: 신진원 1998: 이동국 1999: 이성재 2000: 양현정 2001: 송종국 2002: 이천수 2003: 정조국 2004: 문민귀 2005: 박주영 2006: 염기훈 2007: 하태균 2008: 이승렬 2009: 김영후 2010: 윤빛가람 2011: 이승기 2012: 이명주 2013: 고무열 2014: 김승대 2015: 이재성 2016: 안현범 2017: 김민재 2018: 한승규 2012년까지는 신인선수상 수상자 제16대 신인왕 선수 소속 비고 박성배 전북 현대 모터스 – 베스트 11[편집] vdeh2000 K리그 베스트 11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GK 신의손 DF 강철 이임생 김현수 마시엘 MF 안드레 신태용 전경준 데니스 FW 최용수 김도훈 감독상[편집] vdehK리그1 감독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함흥철 1984: 장운수 1985: 박세학 1986: 최은택 1987: 이차만 1988: 이회택 1989: 김정남 1990: 고재욱 1991: 비츠케이 1992: 이회택 1993: 박종환 1994: 박종환 1995: 박종환 1996: 고재욱 1997: 이차만 1998: 김호 1999: 김호 2000: 조광래 2001: 차경복 2002: 차경복 2003: 차경복 2004: 차범근 2005: 장외룡 2006: 김학범 2007: 파리아스 2008: 차범근 2009: 최강희 2010: 박경훈 2011: 최강희 2012: 최용수 2013: 황선홍 2014: 최강희 2015: 최강희 2016: 황선홍 2017: 최강희 2018: 최강희 기타[편집] 부문 선수 소속 비고 특별상 이용발 부천 SK 2000시즌 전경기 전시간 출전 조성환 부천 SK 2000시즌 전경기 전시간 출전 최우수 심판상 이상용 – 주심 부문 수상 곽경만 – 부심 부문 수상 각주[편집] ↑ 부천 SK의 연고지는 경기도 부천시였지만 당시 부천종합운동장의 공사로 인해 실제 경기는 서울특별시에 소재한 목동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vdeh K리그1 시즌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vdehFC 서울 (안양 LG 치타스) - 2000년 K-리그 우승 (3회)← 이전 1998년 대한민국 FA컵 우승2006년 삼성 하우젠컵 우승 다음 → 1 정길용 2 김도용 3 손현준 4 김동진 5 이상헌 6 무탐바 7 장형석 8 김성재 9 최태욱 10 최용수 11 드라간 12 이영표 13 최원권 14 박용호 15 김병채 16 이동준 17 김귀화 (주장) 18 안드레 19 김성일 20 정현호 22 김주영 23 정광민 24 강준호 25 제용삼 26 박종인 27 장영훈 28 왕정현 29 김대성 30 유진오 31 원종덕 32 정창근 33 한상구 34 이재천 35 에릭 36 진순진 37 최승범 38 허성욱 39 김진용 40 박정환 41 백민철 42 김기현 43 유상수 44 신의손 45 최윤열 46 김범수 47 쿠벡 48 히카르도 감독: 조광래 수석 코치: 이춘석 코치: 이영진, 신재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리그_2000&oldid=24424419" 분류: K리그 시즌2000년 대한민국2000 축구 리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05: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K리그 2000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리그 2000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성 디지털 K-리그 개요 대회 명칭 삼성 디지털 K-리그 시즌 2000 우승 안양 LG 치타스 정규리그 1위 안양 LG 치타스 준우승 부천 SK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안양 LG 치타스수원 삼성 블루윙즈 각종 기록 최다 득점 김도훈 (15득점) 최다 점수 경기 전남 3 - 7 수원 (10월 11일) 최다 연승 기록 10경기 안양 (6월 14일 ~ 7월 29일) 최다 연패 기록 9경기 울산 (4월 22일 ~ 6월 14일) 최다 관중 – 최소 관중 – 평균 관중 – 인접 대회 이전← 1999 다음2001 → 2000년 K-리그는 1983년에 아시아 최초의 프로축구리그로 출범한 K-리그가 맞이하는 18번째 시즌이다. 삼성과의 리그 메인 스폰서 계약에 따라 2000년 대회의 정식 명칭은 '삼성 디지털 K-리그 2000'이다. 시즌은 5월 14일에 열린 수원 삼성 블루윙즈 대 부천 SK의 경기로 개막하였으며, 11월 15일에 열린 안양 LG 치타스 대 부천 SK의 경기로 폐막하였다. 정규 시즌과 포스트 시즌을 포함하여 총 10개 구단이 모두 140경기를 벌였다. 흥행에 있어서 2000년 대회는 전반적인 '흉작'의 와중에도 프로축구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경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10월 11일 광양에서 열린 전남 드래곤즈 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정규 리그 최종전이다. 이 경기에서 양팀은 '총 10개'의 소나기골을 뽑아냄으로써 K리그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득점 기록(9골)을 경신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구단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득점 공동 기록(7골)과 함께 단일경기 해트트릭 2번(데니스, 산드로)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리그 구성원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시즌에 앞서 충청남도 천안시를 연고지로 삼던 '천안 일화 천마'가 경기도 성남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성남 일화 천마'가 되었다. 리그 방식은 전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2000년 대회는 정규 리그와 챔피언십으로 구성된 K-리그 및 조별 리그와 결선 토너먼트로 구성된 리그컵이 함께 진행되었다. 2000년 대회는 각 팀들의 전력이 평준화되어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다. 특히 강팀으로 분류되었던 부산 아이콘스, 울산 현대 호랑이,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나란히 부진하고, 반대로 중하위권으로 분류되었던 안양 LG 치타스, 성남 일화 천마, 부천 SK가 나란히 전력이 향상되면서 팬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안양 LG 치타스는 구단의 과감한 투자와 조광래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이 어우러져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6월 14일에 1위에 등극한 뒤 단 한 차례의 양보도 없이 순위를 수성하다가 9월 30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로 역전승하며 순위를 확정지었다. 이로써 안양 LG 치타스는 럭키금성 황소라는 이름으로 1990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10년만에 정규 리그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한편, 안양 LG 치타스는 10년 만에 부활한 2군 리그에서도 정상에 오르는 경사를 누렸다. 목차 1 참가 구단 2 운영 방식 3 순위 3.1 정규 리그 3.2 시즌 최종 4 정규 시즌 5 포스트 시즌 5.1 준플레이오프 5.2 플레이오프 5.3 챔피언 결정전 6 우승 7 기록 7.1 득점 7.2 도움 8 수상 8.1 최우수선수상 8.2 득점상 8.3 도움상 8.4 신인선수상 8.5 베스트 11 8.6 감독상 8.7 기타 9 각주 참가 구단[편집] 시즌에 앞서 충청남도 천안시를 연고지로 삼던 '천안 일화 천마'가 경기도 성남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성남 일화 천마'가 되었다. 팀 연고지 데뷔 시즌 참가 횟수 전년 순위 대전 시티즌 대전광역시 1997년 4 8위 부산 아이콘스 부산광역시 1983년 18 2위 부천 SK 부천시[1] 1983년 18 3위 성남 일화 천마 성남시 1989년 12 10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시 1996년 5 1위 안양 LG 치타스 안양시 1984년 17 9위 울산 현대 호랑이 울산광역시 1984년 17 6위 전남 드래곤즈 전라남도 1995년 6 4위 전북 현대 모터스 전라북도 1995년 6 7위 포항 스틸러스 포항시 1983년 18 5위 운영 방식[편집] 단일 리그 제도: 총 10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이 다른 팀과 모두 세 번씩 경기를 치르는 '정규 리그'(정규 시즌)를 진행한다. 이에 따라 2000년 대회의 정규 리그에서는 총 135경기가 진행되며, 각 팀은 27경기를 치른다. 정규 리그 1위에서 4위를 기록한 팀들은 '챔피언십'(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 정규 리그 5위에서 10위를 기록한 팀들은 해당 순위가 시즌 최종 순위가 된다. 4강 플레이오프 제도: 정규 리그 순위를 기준으로 1위는 '챔피언 결정전'에, 2위는 '플레이오프'에, 3위와 4위는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준플레이오프의 승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4위가 된다. 플레이오프의 승자는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며,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3위가 된다. 챔피언 결정전의 승자는 리그 우승 팀에 등극하며, 패자는 리그 준우승 팀이 된다. 연장전・승부차기 제도: 정규 시간(전반전 45분, 후반전 45분 및 인저리 타임) 내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 경기는 무승부로 종료되지 않으며 연장전에 돌입한다. 연장전에서 승리한 팀에게는 승점 2점을 부여한다. 연장전 내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 경기는 종료되지 않으며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승부차기에서 승리한 팀에게는 승점 1점을 부여한다. 정리하자면 정규 시간 승리 시에는 승점 3점을, 연장전 승리 시에는 승점 2점을, 승부차기 승리 시에는 승점 1점을, 패배 시에는 승점 0점을 부여한다. 순위[편집] 정규 리그[편집] 순위 팀 경기 승1 승2 승3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 1 안양 LG 치타스 (Q) 27 17 0 2 8 46 25 +21 53 챔피언 결정전 2 부천 SK (Q) 27 10 0 6 11 45 35 +10 36 플레이오프 3 성남 일화 천마 (Q) 27 12 0 6 9 43 33 +10 42 준플레이오프 4 전북 현대 모터스 (Q) 27 11 0 4 12 34 40 -6 37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7 11 0 3 13 48 43 +5 36 6 부산 아이콘스 27 9 0 2 16 42 42 0 29 7 전남 드래곤즈 27 8 0 4 15 28 35 -7 28 8 대전 시티즌 27 7 0 3 17 26 40 -14 24 9 포항 스틸러스 27 5 0 7 15 31 39 -8 22 10 울산 현대 호랑이 27 6 0 2 19 26 37 -11 20 * 2000년 5월 14일부터 동년 10월 11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 *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시즌 최종[편집] 순위 팀 경기 승1 승2 승3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 1 안양 LG 치타스 (C) 27 17 0 2 8 46 25 +21 53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2 부천 SK 27 10 0 6 11 45 35 +10 36 3 성남 일화 천마 27 12 0 6 9 43 33 +10 42 4 전북 현대 모터스 27 11 0 4 12 34 40 -6 37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7 11 0 3 13 48 43 +5 36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6 부산 아이콘스 27 9 0 2 16 42 42 0 29 7 전남 드래곤즈 27 8 0 4 15 28 35 -7 28 8 대전 시티즌 27 7 0 3 17 26 40 -14 24 9 포항 스틸러스 27 5 0 7 15 31 39 -8 22 10 울산 현대 호랑이 27 6 0 2 19 26 37 -11 20 * 마지막 업데이트 : 2000년 12월 31일 * 출처 : 한국프로축구연맹 *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정규 시즌[편집] 정규 시즌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2000의 경기 결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포스트 시즌[편집] 포스트 시즌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챔피언십 2000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준플레이오프[편집] '2000년 K-리그 챔피언십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 리그 3위와 정규 리그 4위가 맞붙는다. 경기는 단판 승부이며, 정규 리그 3위의 홈에서 진행한다. 준플레이오프의 승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준플레이오프의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4위가 된다. 챔피언십 준PO 11월 1일 전북 현대 모터스 1 – 2 (a.e.t.) 부천 SK 전주시 UTC+9 19:00 박성배 53' 66' 전경준 94' 이원식 경기장: 전주종합경기장 관중 수: 10,068 플레이오프[편집] '2000년 K-리그 챔피언십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 리그 2위와 준플레이오프의 승자가 맞붙는다. 경기는 홈・어웨이로 치뤄지며, 정규 리그 2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은 원정에서, 2차전은 홈에서 진행한다. 플레이오프의 승자는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의 패자는 시즌 최종 순위 3위가 된다. 챔피언십 PO 1차전 11월 5일 성남 일화 천마 1 – 3 부천 SK 성남시 UTC+9 15:00 김대의 46' 20' 윤정춘 47' 강철 85' 곽경근 경기장: 성남종합운동장 관중 수: 12,784 챔피언십 PO 2차전 11월 8일 부천 SK 2 – 3 (a.e.t.) 성남 일화 천마 서울특별시 UTC+9 19:00 윤정춘 59' 곽경근 102' 51' 홍도표 66' 박남열 78' 황연석 경기장: 목동운동장 관중 수: 6,832 챔피언 결정전[편집] 챔피언 결정전의 자세한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 챔피언 결정전 2000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0년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정규 리그 1위와 플레이오프의 승자가 맞붙는다. 경기는 홈・어웨이로 치뤄지며, 정규 리그 1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은 원정에서, 2차전은 홈에서 진행한다. 챔피언 결정전의 승자는 리그 우승 팀에 등극하며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2라운드 출전권이 주어진다. 챔피언 결정전의 패자는 리그 준우승 팀이 된다. 챔피언 결정전 1차전 11월 12일 부천 SK 1 – 4 안양 LG 치타스 서울특별시 UTC+9 15:00 이원식 후39' 후13' 왕정현 후23' 정광민 후34' 최용수 후44' 유상수 경기장: 목동운동장 관중 수: 13,825 챔피언 결정전 2차전 11월 15일 안양 LG 치타스 1 – 1 (4 – 2 승부차기) 부천 SK 안양시 UTC+9 18:30 안드레 76' 59' 곽경근 경기장: 안양종합운동장 관중 수: 20,883 승부차기 김성일 안드레 김성재 한상구 히카르도 이임생 곽경근 김기동 강철 우승[편집] K-리그 우승 안양 LG 치타스 1 1 1 제18대 대한민국 챔피언 (3회 우승) 1985년・1990년・2000년 기록[편집] 득점[편집] 득점 순위 상위 10인은 다음과 같으며, 전북 현대 모터스의 김도훈이 15득점을 기록하여 득점상을 수상했다. 순위 선수 소속 득점 경기 1 김도훈 전북 현대 모터스 15 27 2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14 34 3 이원식 부천 SK 13 32 4 정광민 안양 LG 치타스 13 34 5 이상윤 성남 일화 천마 13 36 6 박남열 성남 일화 천마 13 41 7 박성배 전북 현대 모터스 11 32 8 세자르 전남 드래곤즈 11 39 9 안정환 부산 아이콘스 10 20 10 데니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 27 * '득점 수'가 동률인 경우에는 '경기당 득점'을, '경기당 득점'이 동률인 경우에는 '시간당 득점'을 기준으로 득점 순위가 산정되었다. 도움[편집] 도움 순위 상위 10인은 다음과 같으며, 안양 LG 치타스의 안드레가 14도움을 기록하여 도움상을 수상했다. 순위 선수 소속 득점 경기 1 안드레 안양 LG 치타스 14 38 2 전경준 부천 SK 13 38 3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10 34 4 마니치 부산 아이콘스 9 34 5 데니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7 27 6 양현정 전북 현대 모터스 7 32 7 신태용 성남 일화 천마 7 34 8 신진원 대전 시티즌 6 30 9 샤리 부천 SK 6 32 10 서혁수 전북 현대 모터스 6 32 * '도움 수'가 동률인 경우에는 '경기당 도움'을, '경기당 도움'이 동률인 경우에는 '시간당 도움'을 기준으로 도움 순위가 산정되었다. 수상[편집] 최우수선수상[편집] vdehK리그1 최우수선수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성화 1984: 박창선 1985: 한문배 1986: 이흥실 1987: 정해원 1988: 박경훈 1989: 노수진 1990: 최진한 1991: 정용환 1992: 홍명보 1993: 이상윤 1994: 고정운 1995: 신태용 1996: 김현석 1997: 김주성 1998: 고종수 1999: 안정환 2000: 최용수 2001: 신태용 2002: 김대의 2003: 김도훈 2004: 나드손 2005: 이천수 2006: 김두현 2007: 따바레즈 2008: 이운재 2009: 이동국 2010: 김은중 2011: 이동국 2012: 데얀 2013: 김신욱 2014: 이동국 2015: 이동국 2016: 정조국 2017: 이재성 2018: 말컹 제18대 MVP 선수 소속 비고 최용수 안양 LG 치타스 제18대 K-리그 챔피언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fw 득점상[편집] vdehK리그1 득점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윤기 1984: 백종철 1985: 피아퐁 1986: 정해원 1987: 최상국 1988: 이기근 1989: 조긍연 1990: 윤상철 1991: 이기근 1992: 임근재 1993: 차상해 1994: 윤상철 1995: 노상래 1996: 신태용 1997: 김현석 1998: 유상철 1999: 샤샤 2000: 김도훈 2001: 산드로 2002: 에드밀손 2003: 김도훈 2004: 모따 2005: 마차도 2006: 우성용 2007: 까보레 2008: 두두 2009: 이동국 2010: 유병수 2011: 데얀 2012: 데얀 2013: 데얀 2014: 산토스 2015: 김신욱 2016: 정조국 2017: 조나탄 2018: 말컹 제18대 득점왕 선수 소속 비고 김도훈 전북 현대 모터스 20경기 12득점 (경기당 득점: 0.60)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fw 도움상[편집] vdehK리그1 도움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박창선 1984: 렌스베르겐 1985: 피아퐁 1986: 강득수 1987: 최상국 1988: 김종부 1989: 이흥실 1990: 최대식 1991: 김준현 1992: 신동철 1993: 윤상철 1994: 고정운 1995: 아미르 1996: 라데 1997: 데니스 1998: 정정수 1999: 변재섭 2000: 안드레 2001: 우르모브 2002: 이천수 2003: 에드밀손 2004: 홍순학 2005: 히칼도 2006: 슈바 2007: 따바레즈 2008: 브라질리아 2009: 루이스 2010: 구자철 2011: 이동국 2012: 몰리나 2013: 몰리나 2014: 이승기 2015: 염기훈 2016: 염기훈 2017: 손준호 2018: 세징야 제18대 도움왕 선수 소속 비고 안드레 안양 LG 치타스 29경기 10도움 (경기당 도움: 0.34) 제18대 K-리그 챔피언 2000시즌 K-리그 베스트 11 mf 신인선수상[편집] vdehK리그 영플레이어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5: 이흥실 1986: 함현기 1987: 김주성 1988: 황보관 1989: 고정운 1990: 송주석 1991: 조우석 1992: 신태용 1993: 정광석 1994: 최용수 1995: 노상래 1996: 박건하 1997: 신진원 1998: 이동국 1999: 이성재 2000: 양현정 2001: 송종국 2002: 이천수 2003: 정조국 2004: 문민귀 2005: 박주영 2006: 염기훈 2007: 하태균 2008: 이승렬 2009: 김영후 2010: 윤빛가람 2011: 이승기 2012: 이명주 2013: 고무열 2014: 김승대 2015: 이재성 2016: 안현범 2017: 김민재 2018: 한승규 2012년까지는 신인선수상 수상자 제16대 신인왕 선수 소속 비고 박성배 전북 현대 모터스 – 베스트 11[편집] vdeh2000 K리그 베스트 11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GK 신의손 DF 강철 이임생 김현수 마시엘 MF 안드레 신태용 전경준 데니스 FW 최용수 김도훈 감독상[편집] vdehK리그1 감독상 K리그1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K리그2 (MVP・득점왕・도움왕・베스트 11・감독) 영플레이어 팬타스틱 플레이어 1983: 함흥철 1984: 장운수 1985: 박세학 1986: 최은택 1987: 이차만 1988: 이회택 1989: 김정남 1990: 고재욱 1991: 비츠케이 1992: 이회택 1993: 박종환 1994: 박종환 1995: 박종환 1996: 고재욱 1997: 이차만 1998: 김호 1999: 김호 2000: 조광래 2001: 차경복 2002: 차경복 2003: 차경복 2004: 차범근 2005: 장외룡 2006: 김학범 2007: 파리아스 2008: 차범근 2009: 최강희 2010: 박경훈 2011: 최강희 2012: 최용수 2013: 황선홍 2014: 최강희 2015: 최강희 2016: 황선홍 2017: 최강희 2018: 최강희 기타[편집] 부문 선수 소속 비고 특별상 이용발 부천 SK 2000시즌 전경기 전시간 출전 조성환 부천 SK 2000시즌 전경기 전시간 출전 최우수 심판상 이상용 – 주심 부문 수상 곽경만 – 부심 부문 수상 각주[편집] ↑ 부천 SK의 연고지는 경기도 부천시였지만 당시 부천종합운동장의 공사로 인해 실제 경기는 서울특별시에 소재한 목동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vdeh K리그1 시즌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vdehFC 서울 (안양 LG 치타스) - 2000년 K-리그 우승 (3회)← 이전 1998년 대한민국 FA컵 우승2006년 삼성 하우젠컵 우승 다음 → 1 정길용 2 김도용 3 손현준 4 김동진 5 이상헌 6 무탐바 7 장형석 8 김성재 9 최태욱 10 최용수 11 드라간 12 이영표 13 최원권 14 박용호 15 김병채 16 이동준 17 김귀화 (주장) 18 안드레 19 김성일 20 정현호 22 김주영 23 정광민 24 강준호 25 제용삼 26 박종인 27 장영훈 28 왕정현 29 김대성 30 유진오 31 원종덕 32 정창근 33 한상구 34 이재천 35 에릭 36 진순진 37 최승범 38 허성욱 39 김진용 40 박정환 41 백민철 42 김기현 43 유상수 44 신의손 45 최윤열 46 김범수 47 쿠벡 48 히카르도 감독: 조광래 수석 코치: 이춘석 코치: 이영진, 신재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리그_2000&oldid=24424419" 분류: K리그 시즌2000년 대한민국2000 축구 리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05: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천상지희 다나&선데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천상지희 다나&선데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천상지희 다나&선데이 기본 정보 국가 대한민국 장르 댄스 팝 활동 시기 2011년 ~ 레이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사 SM 엔터테인먼트 관련 활동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구성원 다나 선데이 천상지희 다나&선데이는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다나와 선데이로 구성된 2인조 유닛 그룹이다. 목차 1 구성원 2 발매 음반 3 같이 보기 4 외부 링크 구성원[편집] 이름 소개 다나 본명: 홍성미 (Hong Sung-Mi, 洪性美) 소속그룹: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소속사 : SM 엔터테인먼트 생년월일: 1986년 7월 17일(1986-07-17) (32세) 포지션: 리더, 메인보컬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학과 학사 선데이 본명: 진보라 (Jin Bo-Ra, 秦寶拉) 소속그룹: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소속사 : SM 엔터테인먼트 생년월일: 1987년 1월 12일(1987-01-12) (32세) 출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포지션: 리드보컬 학력: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재학 발매 음반[편집] 나 좀 봐줘 (One More Chance) 지금 그대 처음엔 아메리카노 같이 보기[편집]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SM 엔터테인먼트 외부 링크[편집] vdeh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린아 · 다나 · 선데이 · 스테파니정규 음반대한민국 《한번 더, OK?》 일본 《Graceful 4》 《Dear...》 싱글대한민국 〈Too Good〉 〈The Club〉 〈열정 (My Everything)〉 일본 〈Boomerang〉 〈The Club〉 〈Sweet Flower〉 〈juicy LOVE〉 〈Piranha〉 〈Stand Up People〉 〈Here〉 천상지희 다나&선데이 〈나 좀 봐줘 (One More Chance)〉 〈처음엔 아메리카노〉 관련 항목SM 엔터테인먼트 · 에이벡스 · 리듬존 vdehSM 엔터테인먼트경영진 이수만 (회장·총괄 프로듀서) 김영민 (사장) 가수현재 그룹 틴틴파이브 (표인봉, 이웅호, 홍록기, 이동우, 김경식) 동방신기 (유노윤호, 최강창민)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린아, 다나, 선데이) 슈퍼주니어 (이특, 희철, 예성, 강인, 신동, 성민, 은혁, 동해, 시원, 려욱, 규현) 소녀시대 (태연, 써니, 효연, 유리, 윤아) 샤이니 (온유, 키, 민호, 태민) f(x) (빅토리아, 엠버, 루나, 크리스탈) EXO (수호, 카이, 시우민, 백현, 레이, 디오, 찬열, 세훈, 첸) 레드벨벳 (아이린, 슬기, 웬디, 조이, 예리) NCT (태일, 태용, 쿤, 도영, 텐, 재현, 마크, 쟈니, 유타, 윈윈, 정우, 루카스, 해찬, 런쥔, 제노, 재민, 천러, 지성) 현재 솔로 강타 보아 추가열 제이민 조미 과거 그룹 메이저 (임범준, 서연수) J&J (김주현, 강준식) H.O.T. (문희준, 장우혁, 토니 안, 이재원) 배드 보이스 써클 (최일권, 신태권, 여인택, 송운석) 플라이 투 더 스카이 (환희, 브라이언) @ (에디, 앤서니) 밀크 (박재영, 김보미, 배유미, 서현진) 블랙 비트 (황상훈, 이소민, 정지훈, 심재원, 장진영) 슈가 (아유미, 이하린, 육혜승, 황정음, 박수진) 신비 (유수진, 오상은, 유나) 모닝 (백보람, 신성희, 김부연, 장민경) JYJ (영웅재중, 믹키유천, 시아준수) 트랙스 (제이, 김정모, 긴조) 과거 솔로 현진영 한동준 김광진 이지훈 장나라 장리인 윤상 스테파니 티파니 수영 서현 크리스 루한 타오 종현 헨리 유닛 · 프로젝트 그룹 SM TOWN S.M. THE BALLAD S 강타 & 바네스 M&D 천상지희 다나&선데이 슈퍼주니어-K.R.Y. 슈퍼주니어-T 슈퍼주니어-M 슈퍼주니어-Happy 슈퍼주니어-D&E 소녀시대-태티서 소녀시대-Oh!GG Younique Unit EXO-CBX 비트버거 NCT U NCT 127 NCT DREAM 배우 · 희극인현재 소속 이재룡 유호정 김민종 이연희 설리 최종윤 김이안 과거 소속 손지창 윤다훈 유준상 고아라 박명수 김영철 김미진 김완기 전환규 함효주 김이삭 노민우 강정우 한경 김기범 작곡가 · 프로듀서현재 소속 유영진 유한진 송광식 켄지 히치하이커 디즈 앤드류 최 Coach & Sendo 과거 소속 홍종화 Groovie K 장용진 이윤재 김영후 김지후 에스엠컬처앤콘텐츠현재 소속 신동엽 강호동 전현무 이수근 김병만 김생민 류담 장동혁 김태현 김미정 황신혜 김시후 송재림 백현 이학주 김수로 윤소희 오정연 장위안 한석준 공다임 김재범 김여진 박정복 박진 성두섭 윤나무 윤소호 이경화 이나윤 임병근 장유상 정하루 조민성 김현주 배다빈 김관수 최연우 김수연 박성광 과거 소속 한지민 한채영 공형진 장동건 정소민 김하늘 강예원 갤럭시아에스엠소속 선수 추신수 손연재 고진영 김자영 안신애 양지승 김비오 김민선 심석희 최민정 차준환 김민석 김민선 최재우 강영서 방수빈 정해림 김국영 우상혁 에스팀소속 모델 장윤주 송경아 한혜진 전은주 진아름 지현정 수주 양윤영 진정선 백지원 이혜정 장수임 김성희 송해나 태은 이현이 여혜원 정호연 이선정 김현진 홍지수 고소현 김진경 아이린 주선영 안재현 이철우 박지운 조민호 김종훈 황기쁨 윤소정 기도훈 미스틱엔터테인먼트미스틱89현재 아티스트 조규찬 신치림(윤종신, 하림, 조정치) 정진운 퓨어킴 에디킴 장재인 투개월(도대윤) 박재정 박상돈 포르테 디 콰트로(손태진) 퍼센트 정인 조원선 과거 아티스트 박지윤 김예림 김연우 뮤지 현재 MC 이지연 서장훈 김영철 기안84 과거 MC 박지윤 현재 크리에이터 정석원 과거 크리에이터 윤혜진 에이팝아티스트 브라운 아이드 걸스(제아, 미료, 나르샤, 가인) 조형우 천둥 민서 크리에이터 조영철 이민수 김이나 AIKM아티스트 스쿠비 두(브레이, 덕배) 자이언트핑크 크리에이터 케이준 미스틱액터스현재 아티스트 강래연 고민시 김기방 김사권 김석훈 김성은 노수산나 박시연 박혁권 오지은 오타니 료헤이 유주혜 이규한 이아리 이정혁 장준유 조한선 태항호 하재숙 한채아 과거 아티스트 신소율 장소연 손은서 키이스트vdeh키이스트 (콘텐츠와이)경영진 신필순(CEO) 배성웅(CEO) 양근환(CEO) 배용준(이사) 소속 배우 (키이스트)남성 김수현 김현중 배용준 인교진 주지훈 김희찬 서동건 우도환 손현주 김동욱 윤형렬 여성 문가영 배누리 박수진 소이현 손담비 이세나 정려원 한예슬 한보름 김혜인 지소연 천민희 박선아 조영서 김시은 정해나 남경 엄정화 윤혜진 소속 배우 (콘텐츠와이)남성 김지훈 이지훈 이현우 김도완 문성호 이강민 홍승범 한도우 여성 홍수현 이다인 한지혜 서효림 장다윤 류한비 과거 소속남성 류상욱 박서준 소지섭 엄태웅 권화운 여성 조안 이나영 임수정 홍진영 여의주 박은빈 안소희 구하라 관련 회사 SM 엔터테인먼트 연습생현재 연습생 SM 루키즈 (라미, 히나, 고은, 닝닝, 샤오쥔, 양양, 헨드리) 과거 연습생 지노 SM 루키즈 (혜린, 한솔, 이양) 관련 문서 SM 엔터테인먼트의 음반 SM STATION 에스엠컬처앤콘텐츠 갤럭시아에스엠 에스팀 미스틱엔터테인먼트 미스틱 엔터테인먼트의 음반 키이스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천상지희_다나%26선데이&oldid=19439804" 분류: 2011년 데뷔2인조 음악 그룹유닛 음악 그룹SM 엔터테인먼트 소속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8월 29일 (화) 10: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기독교의 교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기독교의 교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기독교의 교육에 대해 설명한다. 중세문화의 기본은 기독교이다. 학문에 있어서는 신학이 가장 중시되었으며, 철학은 '문학의 종(從)'이었다. 기독교 그 자체의 발전이 중세의 사상적·문화적·교육적 특징을 뒷받침했다. 대학에서는 신학부가 가장 격식이 높았다. 기독교 문화가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대조되어 서양 문화의 2대 조류를 만들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교육제도·내용 및 방법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고대교육에 있어서 인간본위 및 주지주의(主知主義)가 중시된 데 비하여, 기독교의 이상은 신을 본위로 한 주정주의(主情主義)에 입각했다. 이러한 신 본위와 주정주의가 고대교육의 인간본위 및 주지주의와 대조된 것이 원시 기독교 이상의 특색이었다. 이러한 이상은 내세(來世)에서만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며, 현세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초현세주의, 내세주의, 도야사상(陶冶思想)이 원시 기독교의 이상이었다. 또한 동포애 정신과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표방, 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적을 사랑할 수 있는 정신을 도야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이상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는 종교 자체를 하나의 교육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지적 발달을 위한 어떤 것보다 도덕적 훈련이 최고의 과제였다. 그리스도의 설교와 교훈 자체가 그들이 주장하는 높은 이상이었고, 교육의 목적임과 동시에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내세를 위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준비하는 일이 곧 교육적 이상이었다. 이와 같은 교육적 이상은 교육제도에 있어서도 종교를 중심으로 하여 신을 신봉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중세의 교육사에 있어서 기독교가 로마 황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정신계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희생과 사도(使徒)의 전도, 신자의 순교정신이 민심을 감동케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이교도를 그리스도 교도화하기 위한 학교가 발달하게 되어, 2세기경에는 문답학교·고급문답학교·사원학교 등 세 가지 단계의 학교가 성립되었다. 이어 6세기경부터는 수도원이 기독교 승려의 수양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수도원은 현세의 향락주의를 거부하고, 영적(靈的) 생활을 찾기 위한 승려들의 은둔처가 되었다. 이 수도원제도는 로마의 퇴폐와 더불어 교회 안에서 심오한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자는 운동으로 나타나, 13세기에 이르러 유럽 각지에 널리 전파되었다. 수도원제도는 인간의 금욕적인 요소를 강조하며, 은거생활을 주장하는 한편, 육체적 고통을 인내하려는 습관과 정신을 훈련시켰다. 그 이상은 빈곤·순결·복종이었고, 수도생활을 실천하려는 승려는 개인생활·사유재산·개인의 자유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실천한 사람이 성(聖)베네딕트였다. 베네딕트는 529년에 이탈리아의 몬테 카시노 산상(山上)에 수도원을 창설하였고, 수도생활에 관한 세 가지 규칙을 제정하였다. 한편, 중세기의 교육사상 제2기에 속할 수 있는 스콜라주의 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발견되고, 그의 사상이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이용되기 시작할 때부터 비롯되었다. 이 시기에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 알베르트 승정(Albert 僧正), 아퀴나스(Tomas Aquinas) 등 저명한 신학사상가가 출현하여 신학사상에 있어서는 눈부신 발전을 보였지만, 교육사상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아퀴나스와 같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의 경우도 교육사상 그 자체에는 별반 창조적인 것이 없었다. 아퀴나스는 지식의 습득을 도덕의 습득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존재하는 어떤 가능성의 발전에 있다고 보았다. 또 그는 지식이란 '어떤 보편적 원리'에 내재하는 능동적 지성이라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한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지적 개념을 이끌어 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교육적 문제보다도 형이상학적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스콜라주의적·아리스토텔레스적 지식원리에 더욱 심취했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요컨대 중세기를 통해 아퀴나스와 같은 당대의 위대한 인물에서도 교육에 대한 관심이 희박했음을 알 수 있지만,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교육도 근대교육을 지향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목차 1 문답학교 2 고급문답학교 3 사원학교 4 수도원 학교 5 스콜라 철학과 교육 문답학교[편집] 문답학교라는 말은 '말로써 가르친다'는 뜻이며, 문답방법에 의하여 교육하는 학교를 말한다. 이 학교의 목적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아동과 이교도(異敎徒)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준비교육을 실시하는 데 있었다. 단시일에 걸친 세례 후보자 양성교육을 실시하던 초기 수업 기간은 점차 길어져 2년 내지 3년으로 연장되었다. 교과내용은 기독교 교리에 관한 간단한 지식을 전달하며, 세례를 받기에 적당한 예비교육을 시켰다. 이 학교에서는 읽기·쓰기·셈하기 등에 관한 것은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고, 교육정도는 낮았으며, 교회학교에 지나지 않았다. 고급문답학교[편집] 문답학교는 기독교를 희망하는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 교육정도가 낮았다. 이러한 학교의 교사 또는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 고급문답학교였다. 그래서 이 학교를 다른 말로 문답교사학교라고도 한다. 이 학교의 교육내용은 신학·철학·자연과학·수사학·천문학·수학·문학·역사학 등으로 교육정도는 상당히 높았으며, 로마·아테네·동방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사원학교[편집] 일명 본산(本山)학교라고도 한다. 이 학교는 각 교구의 본산 소재지에 세운 학교로 각 교구(敎區)의 감독이 유지·경영하였으므로 감독학교(監督學校:episcopal school)라고도 하였다. 이 학교는 교회의 지도자와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었으나, 나중에는 일반 자녀도 받아들여 중세 교육의 일대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교육내용은 읽기·쓰기·찬송가 등 기초적 공통교과를 이수한 후에 성경·철학·그리스 문학·신학 등을 가르쳤다. 수도원 학교[편집] 수도원의 기원은 동방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첫째, 정신적인 면에서 로마 말기에 팽배하였던 사회의 타락과 향락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둘째,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역시 로마 말기에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심한 박해 때문이었다. 이미 데키우스 황제(Gaius, Messius Quintus Trajanus Decius, 재위 249-251)의 박해 때에 이 난을 피하여 이집트 사막에서 집단을 이루어 은둔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은거(隱居) 수도자들 가운데 당시에 특히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이집트인 안토니우스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밑에 모여들어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수도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종교적 집단생활은 차츰 서방으로 전파되어 성 베네딕트(St. Benedict, 480?-547?)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는 520년경 남(南)이탈리아의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산 위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수도자들에게 청빈·정결·복종에 의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부정하고 금욕적 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신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육체적 고통을 견디어 내는 습관과 정신을 훈련하였다. 한가한 시간을 갖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심한 노동과 기도에 전념하는 한편, 종교에 관한 독서에 몰두하였으며 명상에 잠긴 채 정신적인 순화를 꾀하였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중세에 있어서 학예(學藝) 발달의 온상이었고, 그 중심이 되었다. 수도원 학교라는 것도 따로 독립된 학교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수도원 생활의 정신, 즉 종교생활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도원에 부설된 교육소였었다. 이와 같은 수도원 학교는 그 수용대상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승려를 지망하는 5세 내지 7세의 아동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승려를 지망하지 않는 일반 아동을 수용하여 교육하는 것이었다. 교육내용은 종교적인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외에도 초등교육과에 있어서는 읽기·쓰기·셈하기을 가르쳤고, 고등교과에 있어서는 7자유과를 교수하였다. 후에 일부 진보적인 수도원학교에서는 이러한 7자유과 외에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을 교재 속에 채택하기도 하였다. 교육방법은 금욕적 정신에 입각하여 엄격하게 훈련하였으며, 체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종교적 영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사색과 명상을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수도원 교육은 유럽 각지에 보급되었다. 특히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전성시대를 이루었고, 서양 중세에 있어서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부터 수도원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차차 귀족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마침내는 본래의 숭고하고 엄격한 취지가 희박해졌다. 스콜라 철학과 교육[편집]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해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여 중세 후기에 와서는 공식철학이 되었고, 주로 본산학교(本山學校)·수도원 학교에서 유행하였다. 6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중세 초기에는 교회의 교리가 의심없이 받아들여졌으나, 그리스와 아라비아에 머무르던 십자군의 귀환 이후 회의주의가 싹터, 종전과 같이 무조건 교회의 교리를 승인하지는 않게 됐다. 이에 자극을 받아 본산학교·수도원학교는 더 활발히 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고 하여, 그리스의 철학 체계를 빌려 교회의 교리를 이성적 견지에서 재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사실상의 발달은 아일랜드의 스코투스(J. Scotus, 815-877)로부터 비롯하였다. 스코투스는 진리의 표준은 이성에 있다고 했으며, 교회의 권위를 옹호하는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신앙은 인식에 선행하므로 알기 위하여 믿으라" "그리스도 교인은 신앙을 통해서 지식으로 나아갈 것이요, 지식을 통해서 신앙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스콜라 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는 그리스 철학을 빌려 신앙을 합리화하고, 신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점에 있었다고 하겠다. 스콜라 철학이 당시의 교육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종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던 교회의 권위에 대해 다소나마 인간으로서 회의(懷疑)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이름난 스콜라 철학자의 명성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대학의 발전에 자극을 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16세기에 와서 문예부흥, 종교개혁을 통한 인문주의 교육과 17세기에 와서 실학주의 교육사상을 낳게 한다는 점 등이다.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기독교의_교육&oldid=22683763" 분류: 기독교 교육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0월 5일 (금) 20: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손영목 (작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손영목 (작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손영목 출생 1966년 8월 25일(1966-08-25) (52세) 직업 작가 국적 대한민국 학력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장르 텔레비전 드라마 대표작 메이퀸, 황금 무지개 손영목(1966년 8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각본가이다. 1992년 《내일은 사랑》를 아내 김지수와 공동 집필하면서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였다.[1] 목차 1 학력 2 집필 활동 2.1 텔레비전 드라마 2.2 라디오 프로그램 3 수상 4 각주 학력[편집] 밀양동강중학교 브니엘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집필 활동[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연도 제목 방송사 유형 연출 공동 집필 2017 도둑놈, 도둑님 MBC 주말 특별기획 오경훈, 장준호 차이영 2015-2016 화려한 유혹 MBC 월화 김상협 김희원 2013-2014 황금 무지개 MBC 주말 특별기획 강대선 이재진 2012 메이퀸 MBC 백호민 이성준 빈칸 2010-2011 프레지던트 KBS2 수목 김형일 정현민 손지혜강희연 황금창 2009 천추태후 KBS1 대하 신창석 황인혁 이상민 강영란 2005 바람꽃 KBS1 TV소설 한철경 빈칸 2000-2001 천둥소리 KBS2 수목 이상우 김정록 빈칸 1999-2000 누나의 거울 KBS1 TV소설 이상우 빈칸 1998-1999 천사의 키스 KBS2 월화 전산 빈칸 1997-1998 그대 나를 부를 때 KBS2 수목 김종창 빈칸 1997 테마 드라마 - 강아지와 육법전서 KBS2 주말 김종식 빈칸 1996-1997 머나먼 나라 KBS2 수목 김종식 정성효 빈칸 1995 바람의 아들 KBS2 수목 김종식 빈칸 1994 마지막 승부 MBC 월화 장두익 빈칸 1992 내일은 사랑 KBS2 청춘 이영희 전산윤석호 이덕건 김지수 라디오 프로그램[편집] 《사람 사는 세상》[1] (SBS, 1989년) 수상[편집] 1997년 제33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극본상 - 머나먼 나라 2012년 MBC 연기대상 올해의 작가상 - 메이퀸 각주[편집] ↑ 가 나 유인경 (1993년 7월 17일). “夫婦(부부) 시대(22) 방송작가"드라마 엮듯 사랑도 엮지요"”. 경향신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손영목_(작가)&oldid=23930501" 분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각본가1966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브니엘고등학교 동문고려대학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3월 28일 (목) 21: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차명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차명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차명환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89년 11월 27일(1989-11-27) (29세)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시 프로게이머 정보 랭킹 19 종족 스타크래프트: 저그스타크래프트 II: 테란 아이디 KT.MGW)Great 별명 몽환이, 명환의숲, 차레기, 차pp, 몽환저그, 하이브저그, 차이코패스, 준우스운자 웹사이트 http://www.cyworld.com/chamyunghwan 차명환(1989년 11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다. 목차 1 생애 2 차명환과 하이브 3 주요 기록 3.1 전적 3.2 개인리그 3.3 별명 4 외부 링크 5 각주 생애[편집] 대한민국 공군 사병으로 복무한 그는 KT.MGW)Great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공군 ACE 소속이었다. 브루드워 종족은 저그이며 스타크래프트2 종족은 테란이다. 2007년 상반기 드래프트에서 삼성전자 칸의 1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다.[1] 2011년 7월 28일 공군 ACE 입대 지원을 신청하여 9월에 공군 입대가 확정되면서 11-12 시즌에는 두 시즌 내내 공군 ACE의 유니폼을 입었다. 2012년 초부터 그해 여름까지는 공식전 12연패를 하기도 했다. 그 뒤 2013년 9월 25일 제대했는데, 제대 이후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차명환과 하이브[편집] 차명환과 하이브는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대개 저그vs저그 동족전의 경우에는 다른 종족전들에 비해 최소의 적은 유닛(드론,저글링,뮤탈리스크,스커지), 최소의 시간, 최저의 자원채취로 매우 빨리 게임이 끝나는 경기가 많은데 차명환의 경우 이런 평소의 저저전보다는 하이브 저그전에 관해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빅파일 MSL 2010 32강에서 김명운을 상대로 하이브 저그전을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하이브 경기의 가능성을 보였다. 김명운은 웅진 스타즈 저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던 하이브 운영에 일가견이 있었던 선수였고 하이브 운영 또한 많이 안나오는 경기였기때문에 그 해 MBC Game AWARD에서 명경기들 중 하나로 뽑히기도 한다. 또, 2010년 6월 12일 프로리그 경기에서 웅진 스타즈의 김명운의 후배 김민철을 만나 또다시 하이브 운영을 선보여 승리하고 승자 인터뷰에서 '앞으로 저그전에서 다양한 운영을 시도하고 싶고 그 트렌드를 이끌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힌다. 이후 피디팝 MSL 2010 32강에서 며칠 전까지 10연승을 달리던 신상문을 꺾고 김민철을 다시 만나 초반의 유리함을 이용해 하이브 운영까지 끌고가 상대의 본진에 나이더스 커널을 뚫거나 러커로 저글링을 방어, 울트라로 러커밭을 뚫고 가디언으로 상대방의 드론을 견제하는 기막힌 하이브 운영으로 해설자들에게 감탄을 쏟게 만드는 경기를 만들었다. 이후 차명환에게는 '하이브저그, 몽환저그, 차이브' 등의 별명이 붙여지면서 모두가 차명환에게 앞으로의 저저전 하이브 운영을 기대했다. 결국 차명환은 16강에서는 김성대를 2:0으로 완파, 8강에서는 우승 후보였던 김구현도 3:2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빅파일 MSL 2010에서 인연을 맺었던 김명운이었다. 차명환은 1세트에서 본진 트윈 해처리이후 앞마당에 해처리를 한번 더 펼친 3해처리상태에서 쏟아지는 올저글링으로 상대를 저글링 숫자로 압도하여 경기를 승리한다. (이 빌드가 결승전 1세트의 복선이 된다.) 2세트에서는 모두가 고대하던 하이브 운영을 선보였지만 멀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패한다. 하지만 이후 내리 두 세트를 따내 3:1로 피디팝 MSL 2010 결승전에 진출한다. 결승에서는 CJ 엔투스의 신동원을 만나 1:3으로 패배하였으나, 1세트에서 선보인 뮤탈리스크와 퀸, 러커를 적절히 활용한 하이브 운영은 어느 정도 관심을 끌었다. 주요 기록[편집] 전적[편집] 통산전적 (12.07.16 기준, 스타2 전적포함) 경기 승-패 승률 대 테란 53 23–30 43.4% 대 저그 92 48–44 52.2% 대 프로토스 69 30–39 43.5% 총합 214 101–113 47.2% 개인리그[편집] 개인리그 준우승 1회[2] 2006년 4월 엘리트 학생복 캠퍼스 챔피언십 광주지역 고등부 준우승 2007년 1월 제28회 커리지매치 입상 2008년 5월 곰TV TG삼보-인텔 클래식 2008 시즌1 32강 2010년 4월 하나대투증권 MSL 2010 8강 2010년 7월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Season 2 36강 2010년 7월 빅파일 MSL 2010 32강 2010년 10월 박카스 스타리그 2010 36강 2011년 2월 피디팝 MSL 2011 준우승 (1:3 신동원) 2011년 4월 ABC마트 MSL 2011 32강 별명[편집] 몽환이,몽환저그 : 이름인 명환과 몽환이 발음과 글자가 거의 비슷해서 붙여진 별명. 명환의숲 : 키네틱플로우의 히트곡인 몽환의 숲과 몽환과 비슷한 이름인 명환을 합성. 하이브 저그 :하이브 운영을 잘해 붙여졌다. 준우스운자 : 신동원 과 같이 ABC마트 MSL 2011 조지명식에서 우승자,준우승자 의권리를 행사해 D조에 이제동,이영호,김택용,염보성을 몰아 넣어 사상 최고의 죽음의 조를 만든 데서 비롯. 차이코패스 : 2011년에 자신의 미니홈피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글을 올려 빈축을 샀고, 앞선 '준우스운자'란 별명이 붙은 죽음의 조 사건을 비아냥하는 인터넷 카툰 제목과, 죽음의 조 사건에 분노한 일부 팬들에게서 붙은 별명. 외부 링크[편집] 차명환 미니홈피 2011 ABC Mart 조지명식 '차명환이 택동록을 만든 이유는?' 2011 ABC Mart 조지명식 '차명환과 신동원의 합작품' 2011 ABC Mart 조지명식 DC 스타크래프트 갤러리 'Maestro'의 분석글 각주[편집] ↑ 김동현 (2007년 3월 13일). “상반기 프로게이머 신인 드래프트 50명 중 37명 '안착'”. 《게임동아》 (게임동아). 2017년 5월 31일에 보존된 문서. 2017년 5월 31일에 확인함. ↑ MSL 1회 준우승. vdeh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리그리그개인전 스타리그 MBC게임 스타리그 곰TV 클래식 소닉 스타리그1 아프리카TV 스타리그1 SSL 시리즈1 단체전 프로리그 (1군) 드림리그 (2군) MBC게임 팀리그 위너스리그 경남 - STX컵 마스터즈 조직협회 한국e스포츠협회 게임 개발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게임 배급사 한빛소프트 방송국 OGN MBC 게임 곰TV 아프리카TV SPOTV GAMES 경기장 용산 e-Sports 스타디움 (온게임넷→OGN, 철거됨) 히어로센터 (MBC 게임, 철거됨) 곰TV 목동 스튜디오 (곰TV, 철거됨) ITV 랭킹전 iTV 스튜디오/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야외 특설무대(iTV 경인방송, 철거됨) 프릭 업 스튜디오 (아프리카TV) 넥슨 아레나 (SPOTV GAMES) 방송인OGN 정소림 엄재경 김정민 아프리카TV 박상현 이승원 임성춘 SPOTV GAMES 김철민 한승엽 이성은 과거 게임단 KT 롤스터 STX SouL 웅진 스타즈 SK텔레콤 T1 CJ 엔투스 삼성 칸 제8프로게임단 공군 ACE 이스트로 위메이드 폭스 온게임넷 스파키즈 MBC게임 히어로 화승 OZ 기타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명예의 전당 골든 마우스 MSL 금배지 KeSPA컵 1KeSPA 비공인 리그2012년 9월 22일부로 대한민국의 모든 KeSPA 공인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완전히 종료됨. 단, KeSPA 비공인 리그는 열리고 있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차명환&oldid=21757278" 분류: 198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남원시 출신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저그 선수삼성 갤럭시 (e스포츠)의 선수공군 ACE의 선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7월 14일 (토) 16: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전주곡 (드뷔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주곡 (드뷔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8번 전주곡의 테마 클로드 드뷔시의 전주곡(Préludes)은 피아노를 위한 독주곡이다. 1권과 2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 12개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흐나 쇼팽의 전주곡과 달리, 곡들 사이의 조성에 연관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제1권은 1909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 제2권은 1912년 말에서 1913년초 사이에 작곡하였다. 목차 1 제 1권 (1e Livre) L. 117 2 제 2권 (2e Livre) L. 123 3 같이 보기 4 외부 링크 제 1권 (1e Livre) L. 117[편집] I. 델피의 무희들 (Danseuses de Delphes) II. 돛(Voiles) III. 들을 지나는 바람 (Le vent dans la plaine) IV.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 속에 감돈다 (Les sons et les parfumes tournent dans l'air du soir) V. 아나카프리의 언덕 (Les collines d'Anacapri) VI. 눈 위의 발자국 (Des pas sur la neige) VII. 서풍이 본 것 (Ce qu'a vu le vent d'Ouest) VIII. 아마빛 머리의 처녀 (La fille aux cheveux de lin) IX. 끊어진 세레나데(La sérénade interrompue) X. 가라앉은 성당 (La cathédrale engloutie) XI. 퓌크의 춤 (La danse de Puck) XII. 음유시인 (Minstrels) 제 2권 (2e Livre) L. 123[편집] I. 안개 (Brouillards) II. 고엽(Feuilles mortes) III. 비노의 문 (La puerta del Vino) IV. 요정의 무희 (Les fées sont d'exquises danseuses) V. 히드가 무성한 황무지 (Bruyère) VI. 괴짜 라빈 장군 (General Lavine-eccentric) VII. 달빛 쏟아지는 테라스 (La terrasse des audiences du clair de lune) VIII. 물의 요정 (Ondine) IX. 피크윅 경을 예찬하며 (Hommage à S.Pickwick Esq.P.P.M.P.C.) X. 카노프 (Canope) XI. 교대하는 3도 (Les tierces alternées) XII. 불꽃 (Feux d'artifice) 같이 보기[편집] 클로드 드뷔시 작품 목록 외부 링크[편집] 악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전주곡_(드뷔시)&oldid=22794251" 분류: 클로드 드뷔시의 작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15일 (월) 10: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전주곡 (드뷔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주곡 (드뷔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8번 전주곡의 테마 클로드 드뷔시의 전주곡(Préludes)은 피아노를 위한 독주곡이다. 1권과 2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 12개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흐나 쇼팽의 전주곡과 달리, 곡들 사이의 조성에 연관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제1권은 1909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 제2권은 1912년 말에서 1913년초 사이에 작곡하였다. 목차 1 제 1권 (1e Livre) L. 117 2 제 2권 (2e Livre) L. 123 3 같이 보기 4 외부 링크 제 1권 (1e Livre) L. 117[편집] I. 델피의 무희들 (Danseuses de Delphes) II. 돛(Voiles) III. 들을 지나는 바람 (Le vent dans la plaine) IV.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 속에 감돈다 (Les sons et les parfumes tournent dans l'air du soir) V. 아나카프리의 언덕 (Les collines d'Anacapri) VI. 눈 위의 발자국 (Des pas sur la neige) VII. 서풍이 본 것 (Ce qu'a vu le vent d'Ouest) VIII. 아마빛 머리의 처녀 (La fille aux cheveux de lin) IX. 끊어진 세레나데(La sérénade interrompue) X. 가라앉은 성당 (La cathédrale engloutie) XI. 퓌크의 춤 (La danse de Puck) XII. 음유시인 (Minstrels) 제 2권 (2e Livre) L. 123[편집] I. 안개 (Brouillards) II. 고엽(Feuilles mortes) III. 비노의 문 (La puerta del Vino) IV. 요정의 무희 (Les fées sont d'exquises danseuses) V. 히드가 무성한 황무지 (Bruyère) VI. 괴짜 라빈 장군 (General Lavine-eccentric) VII. 달빛 쏟아지는 테라스 (La terrasse des audiences du clair de lune) VIII. 물의 요정 (Ondine) IX. 피크윅 경을 예찬하며 (Hommage à S.Pickwick Esq.P.P.M.P.C.) X. 카노프 (Canope) XI. 교대하는 3도 (Les tierces alternées) XII. 불꽃 (Feux d'artifice) 같이 보기[편집] 클로드 드뷔시 작품 목록 외부 링크[편집] 악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전주곡_(드뷔시)&oldid=22794251" 분류: 클로드 드뷔시의 작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15일 (월) 10: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시애의 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시애의 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시애의 난(李施愛-亂)은 1467년(세조 13년) 5월부터 8월까지 함경도 길주의 호족 이시애 등이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이시애는 길주 출신의 호족 토반으로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함길도는 이성계의 고향으로 조선왕조의 주요 연고지 중의 하나였으며,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외지에서 부임한 관리들에 대한 반발로 함경도내 유향소 세력을 규합, 1467년 5월 이시애 등은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단종 폐위 등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거병하였으나 거병 3개월만에 내부 분열로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許惟禮)가 관군과 내통함으로써 진압되었다. 목차 1 개설 2 배경 3 경과 3.1 반란 초기 3.2 교전 3.3 교전 상황 3.4 진압 3.5 결과 4 사후 5 각주 6 함께 보기 개설[편집]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에도 중앙의 관리를 많이 파견했다. 그리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여진세력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함길도(咸吉道)에도 수령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본도인(本道人)의 반발이 있었는데, 때마침 조정에서 호패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자유로운 이주가 불가능해졌다. 세조 13년(1467) 5월 회령부사 이시애는 그의 본거지 길주(吉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함길도의 수령을 함길도인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함흥 이북의 주군(州郡)이 이에 호응하였으며, 각지 유향소(留鄕所)가 지도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반군은 정부군에게 대패(大敗)하고 이시애는 여진으로 도망하려다. 체포·참수되었다. 배경[편집]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지내다가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이시합(李施合), 매부 이명효(李明孝) 등과 함께 조정의 함경도인 지역차별과 단종 폐위 등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거사를 모의, 1467년(세조 13) 5월 회령에서 거병,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편집] 반란 초기[편집] 이시애는 길주로부터 단천, 북청, 홍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그곳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고 자기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여 거병하였다. 이시애는 '함길도의 절도사(節度使)가 진장(鎭將)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함경도관찰사 신면, 길주목사(吉州牧使) 설징신(薛澄新) 등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이어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軍民)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 지역 출신인 이 곳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1] 조정에서는 어유소, 귀성군, 남이 등에게 소수의 토벌대를 이끌고 출정시켰다. 그러나 반군의 기세가 거세자 구성군 준의 관군은 철원까지 퇴각했고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반란군은 함길도와 평안도까지도 영향을 넓혀가고 있었다. 세조는 다시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鎭北大將)으로 삼아 평안도병력 3천명의 지휘권을 주어 영흥으로 나아가게 하고, 병조참판 박중선(朴仲善)을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하여 황해도 병사 1천명을 이끌고 문천군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장군 어유소에게는 한성부 소속 경병(京兵) 1천명을 보내 구성군군을 돕게 하였다. 이시애는 중앙에서도 연락통을 띄워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한성부의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 모략전술을 폈다. 세조는 이에 속아 한명회, 신숙주 등을 한때 투옥하였다가, 신면, 강효문 등이 처형된 소식을 접하고는 곧 구성군 준(龜城君 浚)을 병마도총사(兵馬都摠使)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교전[편집] 1467년 5월 15일 귀성군은 겨우 강원도 북부에 있던 이시애군을 패퇴시키고 회양(淮陽)으로 나아갔다. 세조는 5월부터 각종 효유문(曉諭文)을 내려 보내고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으나, 통지문을 들고 간 사자는 죽임당했다. 동시에 반군 지휘자들을 체포하는 자들에게는 현상금을 조건으로 걸었다. 6월 1일 억류되었던 체찰사 윤자운이 병사 한 사람과 옷을 갈아입고 극적으로 이시애의 진영에서 탈출해오자 귀성군은 윤자운을 호송한 뒤 철령을 넘어 안변에 진을 쳤고,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반군과 교전하였다. 그 동안에도 이시애는 때로 2백~5백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마곡역(麻谷驛)에 나오기도 하고, 이시합은 홍원군 하탄동에서 귀성군의 부장 차운혁(車云革)에게 사로잡혔으나 거짓 속임수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당시 반군은 함흥, 관군은 영흥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세조는 효유문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던 정책을 거두고, 궐내에 금고했던 신숙주 등의 중신을 풀어주는 동시에, 친정(親征)을 계획하는 등 강경책을 강구하였다. 이시애는 이같은 세조의 강경정책에 당황해 북청을 거쳐 이성(利城, 지금의 이원군) 다보동으로 본부를 옮겼다가 다시 북청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시애의 후퇴로 구성군의 관군은 6월 19일 함흥을 점령하고 홍원으로 나아가 서쪽인 함관령(咸關嶺) 아래 신원(新原)에 새 막사를 짓고 근거지로 하여 전군을 지휘하였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鐘介), 산개(山介)의 두 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귀성군의 군사는 안변에서 평안도 지역의 이시애군을 격퇴하는 한편 강순은 박중선, 허종, 어유소 등과 더불어 종개령을 넘어 북청 앞의 평포(平浦)에서 이시애군을 궤멸시키고 진을 쳤다. 교전 상황[편집] 6월 19일 이시애군은 북청을 떠나 퇴각하고, 이시합은 2만여 명의 군졸을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汝注乙峴)에 주둔시키는 한편, 자신은 단천 이북의 여러 진군(鎭軍)과 여진족 500여 명을 합쳐 이성 고사리포(高沙里浦)에서 북청 어소(於所)로 나아가 관군을 협공하려 했다. 이를 모르는 관군은 북청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이시애군은 없었고, 주변에 있던 이시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강순은 마침내 김교(金嶠)의 건의에 따라 목책(木柵)을 두르고, 또 밖에는 녹각(鹿角 : 사슴뿔과 같이 대나무로 짜서 만든 적을 막는 물건)을 늘어놓는 한편, 성 밖에는 갱도를 파고 그위를 평지처럼 하여 적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6월 24일 밤 4고(四鼓[2])에 이시애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으나, 강순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성문을 굳게 닫아걸어 공격을 무시하고 응전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북도 사람을 시켜 대의(大義)로써 이시애군을 효유하니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이시애는 10여회나 싸움을 걸었으나 관군의 북청 수비진을 뚫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관군은 이시애에게 대궐에 나아가 자수(自首)할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북청에서 패퇴한 이시애군은 다시 군세를 정비하였다. 7월 14일 이시애는 자신의 사위인 이명효(李明孝)로 하여금 홍원·북청·갑산·삼수의 백성들을 모아 탕구령(湯口嶺)을 넘어 홍원 서쪽인 신익평(申翌坪)에 주둔해 관군의 함흥과 북청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마어령(磨於嶺)을 넘어 2진을 형성하게 하는 동시에, 이시애 자신은 회령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대문령(大門嶺)을 넘어 열여문평에 진을 쳐서 장기전을 펴고 관군의 자멸을 기다렸다. 한편, 관군은 북청에 있는 군사를 홍원으로 후퇴시키려 하여 1·2·3진으로 나누어 이시애군을 뚧고 나가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시애는 이 틈을 타서 북청을 점령하였다. 그 동안에도 관군은 이시애 등에게 효유에 나섰으나 이시애가 듣지 않자 결국 장기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진압[편집] 7월 25일 관군은 한밤중에 비밀리에 행동을 개시해 진북장군 강순의 군사를 1진으로 삼아 산개령을 넘게 하고, 2진 대장 어유소의 군사는 종개령을 넘게 해 북청으로 진입, 양면공격을 하게 하는 동시에 귀성군의 군사는 평포로 진격하였다. 강순과 어유소의 군사는 협공을 하여 산개·종개령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북청으로 쇄도해 들어가 이시애가 임명한 가짜 부절도사 유득지(劉得之)의 군을 격퇴시키고 그 병력을 흡수하여 당시 관군의 수는 약 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시애는 북청 패퇴의 소식을 듣고 1만여 명의 군병을 이끌고 북청 동쪽 68리에 있는 천험의 만령(蔓嶺)으로 갔다. 만령은 남으로는 바다, 북으로는 태산을 등지고 있어 관군과의 전투에는 비교적 유리하였다. 관군은 다시 만령 공격에 나섰다. 강순의 1진이 먼저 만령 밑에 도착하고 어유소의 2진을 기다렸다가 7월 말 강순군, 어유소군, 귀성군군이 집결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먼저 귀성군과 강순, 박중선 등이 이끄는 군사는 큰길로 나아가고, 허종 등은 큰길 남쪽 중봉(中峰)으로 가갔다. 또한 우공(禹貢)은 큰길 중봉, 그리고 어유소는 바닷가와 동령(東嶺)으로, 김교 등은 북산(北山) 밑으로 나아가 각각 만령을 향해 4면에서 포위, 협공하는 전술을 써서 진격하여 이시애군의 선봉진인 만령 주봉(主峯)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이시애가 있는 중봉으로 공격해 갔다. 7월말 전세가 상당히 불리해지자, 밀리던 이시애는 여진족과도 내통, 여진족을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여진족에 파견했던 사자가 당도하기도 전에 신숙주, 허종(許琮), 강순,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3만 군대가 함경남도 홍원(洪原), 북청(北靑)에 주둔하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이원군의 만령(蔓嶺)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7월 31일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2천 명의 병력으로 3중 포열을 한 뒤 결사적으로 버텼다. 그날 유시(酉時[3])에 이르러 만령 동봉에서 어유소군이 이시애군이 중봉으로 간 것을 접하고, 이시애군의 좌측 허를 찔러 방어선의 일각을 통과함으로써 방어선을 무너트렸다. 이어 관군은 육탄전으로 이시애군을 패퇴시켰다. 결국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이성 쪽으로 도망쳤다. 결과[편집] 8월 1일 관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해 이성까지 쫓아갔으나 이시애군은 이성군의 객사, 창고 등을 불사르고 다시 북으로 패주하였다. 8월 8일 이성을 출발한 귀성군 등의 관군은 마운령(磨雲嶺)을 넘어 영제원으로 나아가고, 이시애는 단천에 진을 쳐서 남대천(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패주하여 길주로 달아났다. 8월 12일 관군 연합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하여 단천에서 교전하여 패퇴시키고 탈환, 다시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영동역(嶺東驛)까지 이시애군을 밀고 나갔다. 이 때 이시애는 허종 휘하의 허유례(許惟禮)의 계교에 빠져 이시합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鏡城)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시애의 처조카인 사옹원별좌(司饔院別坐) 허유례는 자기 아버지가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李珠), 황생(黃生) 등을 포섭한다. 허유례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서 길주권관(吉州權管)으로 있음을 알고 거짓 항복하는 척 하고는 경성 운위원(雲委院)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이시애의 수하인 이주(李珠)·이운로(李雲露)·황생(晃生) 등을 설득해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게 했다. 이들을 설득하여 자연스럽게 이시애 형제에게 접근하여 이시애 형제를 묶어 남이 등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사후[편집] 8월 이시애 군은 남이 등의 토벌대에 의해 궤멸당하고, 이시애 등 생포된 자들은 8월 12일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구성군 준에 의해 참수형되고 효수되었다. 이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으며, 함경도의 유향소는 폐지되었다. 구성군 이준과 남이, 조석문(曺錫文), 어유소, 허종, 허유례 등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녹훈되고 김서형(金瑞衡)등 많은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들이 책록되었다. 각주[편집] ↑ 이후 함길도를 임지로 꺼리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 밤 4경, 오전 2시~4시 ↑ 오후 5시∼7시 함께 보기[편집] 이징옥의 난 남이의 옥사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조선 왕조의 경제·사회적 구조"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시애의_난&oldid=23537586" 분류: 1467년 분쟁1467년 한국조선의 반란쿠데타 미수조선 세조한명회신숙주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5일 (금) 15: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시애의 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시애의 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시애의 난(李施愛-亂)은 1467년(세조 13년) 5월부터 8월까지 함경도 길주의 호족 이시애 등이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이시애는 길주 출신의 호족 토반으로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함길도는 이성계의 고향으로 조선왕조의 주요 연고지 중의 하나였으며,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외지에서 부임한 관리들에 대한 반발로 함경도내 유향소 세력을 규합, 1467년 5월 이시애 등은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단종 폐위 등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거병하였으나 거병 3개월만에 내부 분열로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許惟禮)가 관군과 내통함으로써 진압되었다. 목차 1 개설 2 배경 3 경과 3.1 반란 초기 3.2 교전 3.3 교전 상황 3.4 진압 3.5 결과 4 사후 5 각주 6 함께 보기 개설[편집]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에도 중앙의 관리를 많이 파견했다. 그리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여진세력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함길도(咸吉道)에도 수령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본도인(本道人)의 반발이 있었는데, 때마침 조정에서 호패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자유로운 이주가 불가능해졌다. 세조 13년(1467) 5월 회령부사 이시애는 그의 본거지 길주(吉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함길도의 수령을 함길도인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함흥 이북의 주군(州郡)이 이에 호응하였으며, 각지 유향소(留鄕所)가 지도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반군은 정부군에게 대패(大敗)하고 이시애는 여진으로 도망하려다. 체포·참수되었다. 배경[편집]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지내다가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이시합(李施合), 매부 이명효(李明孝) 등과 함께 조정의 함경도인 지역차별과 단종 폐위 등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거사를 모의, 1467년(세조 13) 5월 회령에서 거병,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편집] 반란 초기[편집] 이시애는 길주로부터 단천, 북청, 홍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그곳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고 자기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여 거병하였다. 이시애는 '함길도의 절도사(節度使)가 진장(鎭將)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함경도관찰사 신면, 길주목사(吉州牧使) 설징신(薛澄新) 등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이어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軍民)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 지역 출신인 이 곳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1] 조정에서는 어유소, 귀성군, 남이 등에게 소수의 토벌대를 이끌고 출정시켰다. 그러나 반군의 기세가 거세자 구성군 준의 관군은 철원까지 퇴각했고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반란군은 함길도와 평안도까지도 영향을 넓혀가고 있었다. 세조는 다시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鎭北大將)으로 삼아 평안도병력 3천명의 지휘권을 주어 영흥으로 나아가게 하고, 병조참판 박중선(朴仲善)을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하여 황해도 병사 1천명을 이끌고 문천군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장군 어유소에게는 한성부 소속 경병(京兵) 1천명을 보내 구성군군을 돕게 하였다. 이시애는 중앙에서도 연락통을 띄워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한성부의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 모략전술을 폈다. 세조는 이에 속아 한명회, 신숙주 등을 한때 투옥하였다가, 신면, 강효문 등이 처형된 소식을 접하고는 곧 구성군 준(龜城君 浚)을 병마도총사(兵馬都摠使)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교전[편집] 1467년 5월 15일 귀성군은 겨우 강원도 북부에 있던 이시애군을 패퇴시키고 회양(淮陽)으로 나아갔다. 세조는 5월부터 각종 효유문(曉諭文)을 내려 보내고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으나, 통지문을 들고 간 사자는 죽임당했다. 동시에 반군 지휘자들을 체포하는 자들에게는 현상금을 조건으로 걸었다. 6월 1일 억류되었던 체찰사 윤자운이 병사 한 사람과 옷을 갈아입고 극적으로 이시애의 진영에서 탈출해오자 귀성군은 윤자운을 호송한 뒤 철령을 넘어 안변에 진을 쳤고,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반군과 교전하였다. 그 동안에도 이시애는 때로 2백~5백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마곡역(麻谷驛)에 나오기도 하고, 이시합은 홍원군 하탄동에서 귀성군의 부장 차운혁(車云革)에게 사로잡혔으나 거짓 속임수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당시 반군은 함흥, 관군은 영흥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세조는 효유문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던 정책을 거두고, 궐내에 금고했던 신숙주 등의 중신을 풀어주는 동시에, 친정(親征)을 계획하는 등 강경책을 강구하였다. 이시애는 이같은 세조의 강경정책에 당황해 북청을 거쳐 이성(利城, 지금의 이원군) 다보동으로 본부를 옮겼다가 다시 북청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시애의 후퇴로 구성군의 관군은 6월 19일 함흥을 점령하고 홍원으로 나아가 서쪽인 함관령(咸關嶺) 아래 신원(新原)에 새 막사를 짓고 근거지로 하여 전군을 지휘하였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鐘介), 산개(山介)의 두 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귀성군의 군사는 안변에서 평안도 지역의 이시애군을 격퇴하는 한편 강순은 박중선, 허종, 어유소 등과 더불어 종개령을 넘어 북청 앞의 평포(平浦)에서 이시애군을 궤멸시키고 진을 쳤다. 교전 상황[편집] 6월 19일 이시애군은 북청을 떠나 퇴각하고, 이시합은 2만여 명의 군졸을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汝注乙峴)에 주둔시키는 한편, 자신은 단천 이북의 여러 진군(鎭軍)과 여진족 500여 명을 합쳐 이성 고사리포(高沙里浦)에서 북청 어소(於所)로 나아가 관군을 협공하려 했다. 이를 모르는 관군은 북청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이시애군은 없었고, 주변에 있던 이시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강순은 마침내 김교(金嶠)의 건의에 따라 목책(木柵)을 두르고, 또 밖에는 녹각(鹿角 : 사슴뿔과 같이 대나무로 짜서 만든 적을 막는 물건)을 늘어놓는 한편, 성 밖에는 갱도를 파고 그위를 평지처럼 하여 적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6월 24일 밤 4고(四鼓[2])에 이시애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으나, 강순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성문을 굳게 닫아걸어 공격을 무시하고 응전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북도 사람을 시켜 대의(大義)로써 이시애군을 효유하니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이시애는 10여회나 싸움을 걸었으나 관군의 북청 수비진을 뚫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관군은 이시애에게 대궐에 나아가 자수(自首)할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북청에서 패퇴한 이시애군은 다시 군세를 정비하였다. 7월 14일 이시애는 자신의 사위인 이명효(李明孝)로 하여금 홍원·북청·갑산·삼수의 백성들을 모아 탕구령(湯口嶺)을 넘어 홍원 서쪽인 신익평(申翌坪)에 주둔해 관군의 함흥과 북청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마어령(磨於嶺)을 넘어 2진을 형성하게 하는 동시에, 이시애 자신은 회령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대문령(大門嶺)을 넘어 열여문평에 진을 쳐서 장기전을 펴고 관군의 자멸을 기다렸다. 한편, 관군은 북청에 있는 군사를 홍원으로 후퇴시키려 하여 1·2·3진으로 나누어 이시애군을 뚧고 나가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시애는 이 틈을 타서 북청을 점령하였다. 그 동안에도 관군은 이시애 등에게 효유에 나섰으나 이시애가 듣지 않자 결국 장기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진압[편집] 7월 25일 관군은 한밤중에 비밀리에 행동을 개시해 진북장군 강순의 군사를 1진으로 삼아 산개령을 넘게 하고, 2진 대장 어유소의 군사는 종개령을 넘게 해 북청으로 진입, 양면공격을 하게 하는 동시에 귀성군의 군사는 평포로 진격하였다. 강순과 어유소의 군사는 협공을 하여 산개·종개령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북청으로 쇄도해 들어가 이시애가 임명한 가짜 부절도사 유득지(劉得之)의 군을 격퇴시키고 그 병력을 흡수하여 당시 관군의 수는 약 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시애는 북청 패퇴의 소식을 듣고 1만여 명의 군병을 이끌고 북청 동쪽 68리에 있는 천험의 만령(蔓嶺)으로 갔다. 만령은 남으로는 바다, 북으로는 태산을 등지고 있어 관군과의 전투에는 비교적 유리하였다. 관군은 다시 만령 공격에 나섰다. 강순의 1진이 먼저 만령 밑에 도착하고 어유소의 2진을 기다렸다가 7월 말 강순군, 어유소군, 귀성군군이 집결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먼저 귀성군과 강순, 박중선 등이 이끄는 군사는 큰길로 나아가고, 허종 등은 큰길 남쪽 중봉(中峰)으로 가갔다. 또한 우공(禹貢)은 큰길 중봉, 그리고 어유소는 바닷가와 동령(東嶺)으로, 김교 등은 북산(北山) 밑으로 나아가 각각 만령을 향해 4면에서 포위, 협공하는 전술을 써서 진격하여 이시애군의 선봉진인 만령 주봉(主峯)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이시애가 있는 중봉으로 공격해 갔다. 7월말 전세가 상당히 불리해지자, 밀리던 이시애는 여진족과도 내통, 여진족을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여진족에 파견했던 사자가 당도하기도 전에 신숙주, 허종(許琮), 강순,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3만 군대가 함경남도 홍원(洪原), 북청(北靑)에 주둔하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이원군의 만령(蔓嶺)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7월 31일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2천 명의 병력으로 3중 포열을 한 뒤 결사적으로 버텼다. 그날 유시(酉時[3])에 이르러 만령 동봉에서 어유소군이 이시애군이 중봉으로 간 것을 접하고, 이시애군의 좌측 허를 찔러 방어선의 일각을 통과함으로써 방어선을 무너트렸다. 이어 관군은 육탄전으로 이시애군을 패퇴시켰다. 결국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이성 쪽으로 도망쳤다. 결과[편집] 8월 1일 관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해 이성까지 쫓아갔으나 이시애군은 이성군의 객사, 창고 등을 불사르고 다시 북으로 패주하였다. 8월 8일 이성을 출발한 귀성군 등의 관군은 마운령(磨雲嶺)을 넘어 영제원으로 나아가고, 이시애는 단천에 진을 쳐서 남대천(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패주하여 길주로 달아났다. 8월 12일 관군 연합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하여 단천에서 교전하여 패퇴시키고 탈환, 다시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영동역(嶺東驛)까지 이시애군을 밀고 나갔다. 이 때 이시애는 허종 휘하의 허유례(許惟禮)의 계교에 빠져 이시합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鏡城)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시애의 처조카인 사옹원별좌(司饔院別坐) 허유례는 자기 아버지가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李珠), 황생(黃生) 등을 포섭한다. 허유례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서 길주권관(吉州權管)으로 있음을 알고 거짓 항복하는 척 하고는 경성 운위원(雲委院)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이시애의 수하인 이주(李珠)·이운로(李雲露)·황생(晃生) 등을 설득해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게 했다. 이들을 설득하여 자연스럽게 이시애 형제에게 접근하여 이시애 형제를 묶어 남이 등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사후[편집] 8월 이시애 군은 남이 등의 토벌대에 의해 궤멸당하고, 이시애 등 생포된 자들은 8월 12일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구성군 준에 의해 참수형되고 효수되었다. 이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으며, 함경도의 유향소는 폐지되었다. 구성군 이준과 남이, 조석문(曺錫文), 어유소, 허종, 허유례 등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녹훈되고 김서형(金瑞衡)등 많은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들이 책록되었다. 각주[편집] ↑ 이후 함길도를 임지로 꺼리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 밤 4경, 오전 2시~4시 ↑ 오후 5시∼7시 함께 보기[편집] 이징옥의 난 남이의 옥사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조선 왕조의 경제·사회적 구조"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시애의_난&oldid=23537586" 분류: 1467년 분쟁1467년 한국조선의 반란쿠데타 미수조선 세조한명회신숙주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5일 (금) 15: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시애의 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시애의 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시애의 난(李施愛-亂)은 1467년(세조 13년) 5월부터 8월까지 함경도 길주의 호족 이시애 등이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이시애는 길주 출신의 호족 토반으로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함길도는 이성계의 고향으로 조선왕조의 주요 연고지 중의 하나였으며,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외지에서 부임한 관리들에 대한 반발로 함경도내 유향소 세력을 규합, 1467년 5월 이시애 등은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단종 폐위 등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거병하였으나 거병 3개월만에 내부 분열로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許惟禮)가 관군과 내통함으로써 진압되었다. 목차 1 개설 2 배경 3 경과 3.1 반란 초기 3.2 교전 3.3 교전 상황 3.4 진압 3.5 결과 4 사후 5 각주 6 함께 보기 개설[편집]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에도 중앙의 관리를 많이 파견했다. 그리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여진세력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함길도(咸吉道)에도 수령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본도인(本道人)의 반발이 있었는데, 때마침 조정에서 호패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자유로운 이주가 불가능해졌다. 세조 13년(1467) 5월 회령부사 이시애는 그의 본거지 길주(吉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함길도의 수령을 함길도인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함흥 이북의 주군(州郡)이 이에 호응하였으며, 각지 유향소(留鄕所)가 지도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반군은 정부군에게 대패(大敗)하고 이시애는 여진으로 도망하려다. 체포·참수되었다. 배경[편집]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지내다가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이시합(李施合), 매부 이명효(李明孝) 등과 함께 조정의 함경도인 지역차별과 단종 폐위 등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거사를 모의, 1467년(세조 13) 5월 회령에서 거병,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편집] 반란 초기[편집] 이시애는 길주로부터 단천, 북청, 홍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그곳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고 자기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여 거병하였다. 이시애는 '함길도의 절도사(節度使)가 진장(鎭將)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함경도관찰사 신면, 길주목사(吉州牧使) 설징신(薛澄新) 등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이어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軍民)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 지역 출신인 이 곳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1] 조정에서는 어유소, 귀성군, 남이 등에게 소수의 토벌대를 이끌고 출정시켰다. 그러나 반군의 기세가 거세자 구성군 준의 관군은 철원까지 퇴각했고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반란군은 함길도와 평안도까지도 영향을 넓혀가고 있었다. 세조는 다시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鎭北大將)으로 삼아 평안도병력 3천명의 지휘권을 주어 영흥으로 나아가게 하고, 병조참판 박중선(朴仲善)을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하여 황해도 병사 1천명을 이끌고 문천군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장군 어유소에게는 한성부 소속 경병(京兵) 1천명을 보내 구성군군을 돕게 하였다. 이시애는 중앙에서도 연락통을 띄워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한성부의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 모략전술을 폈다. 세조는 이에 속아 한명회, 신숙주 등을 한때 투옥하였다가, 신면, 강효문 등이 처형된 소식을 접하고는 곧 구성군 준(龜城君 浚)을 병마도총사(兵馬都摠使)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교전[편집] 1467년 5월 15일 귀성군은 겨우 강원도 북부에 있던 이시애군을 패퇴시키고 회양(淮陽)으로 나아갔다. 세조는 5월부터 각종 효유문(曉諭文)을 내려 보내고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으나, 통지문을 들고 간 사자는 죽임당했다. 동시에 반군 지휘자들을 체포하는 자들에게는 현상금을 조건으로 걸었다. 6월 1일 억류되었던 체찰사 윤자운이 병사 한 사람과 옷을 갈아입고 극적으로 이시애의 진영에서 탈출해오자 귀성군은 윤자운을 호송한 뒤 철령을 넘어 안변에 진을 쳤고,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반군과 교전하였다. 그 동안에도 이시애는 때로 2백~5백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마곡역(麻谷驛)에 나오기도 하고, 이시합은 홍원군 하탄동에서 귀성군의 부장 차운혁(車云革)에게 사로잡혔으나 거짓 속임수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당시 반군은 함흥, 관군은 영흥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세조는 효유문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던 정책을 거두고, 궐내에 금고했던 신숙주 등의 중신을 풀어주는 동시에, 친정(親征)을 계획하는 등 강경책을 강구하였다. 이시애는 이같은 세조의 강경정책에 당황해 북청을 거쳐 이성(利城, 지금의 이원군) 다보동으로 본부를 옮겼다가 다시 북청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시애의 후퇴로 구성군의 관군은 6월 19일 함흥을 점령하고 홍원으로 나아가 서쪽인 함관령(咸關嶺) 아래 신원(新原)에 새 막사를 짓고 근거지로 하여 전군을 지휘하였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鐘介), 산개(山介)의 두 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귀성군의 군사는 안변에서 평안도 지역의 이시애군을 격퇴하는 한편 강순은 박중선, 허종, 어유소 등과 더불어 종개령을 넘어 북청 앞의 평포(平浦)에서 이시애군을 궤멸시키고 진을 쳤다. 교전 상황[편집] 6월 19일 이시애군은 북청을 떠나 퇴각하고, 이시합은 2만여 명의 군졸을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汝注乙峴)에 주둔시키는 한편, 자신은 단천 이북의 여러 진군(鎭軍)과 여진족 500여 명을 합쳐 이성 고사리포(高沙里浦)에서 북청 어소(於所)로 나아가 관군을 협공하려 했다. 이를 모르는 관군은 북청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이시애군은 없었고, 주변에 있던 이시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강순은 마침내 김교(金嶠)의 건의에 따라 목책(木柵)을 두르고, 또 밖에는 녹각(鹿角 : 사슴뿔과 같이 대나무로 짜서 만든 적을 막는 물건)을 늘어놓는 한편, 성 밖에는 갱도를 파고 그위를 평지처럼 하여 적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6월 24일 밤 4고(四鼓[2])에 이시애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으나, 강순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성문을 굳게 닫아걸어 공격을 무시하고 응전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북도 사람을 시켜 대의(大義)로써 이시애군을 효유하니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이시애는 10여회나 싸움을 걸었으나 관군의 북청 수비진을 뚫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관군은 이시애에게 대궐에 나아가 자수(自首)할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북청에서 패퇴한 이시애군은 다시 군세를 정비하였다. 7월 14일 이시애는 자신의 사위인 이명효(李明孝)로 하여금 홍원·북청·갑산·삼수의 백성들을 모아 탕구령(湯口嶺)을 넘어 홍원 서쪽인 신익평(申翌坪)에 주둔해 관군의 함흥과 북청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마어령(磨於嶺)을 넘어 2진을 형성하게 하는 동시에, 이시애 자신은 회령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대문령(大門嶺)을 넘어 열여문평에 진을 쳐서 장기전을 펴고 관군의 자멸을 기다렸다. 한편, 관군은 북청에 있는 군사를 홍원으로 후퇴시키려 하여 1·2·3진으로 나누어 이시애군을 뚧고 나가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시애는 이 틈을 타서 북청을 점령하였다. 그 동안에도 관군은 이시애 등에게 효유에 나섰으나 이시애가 듣지 않자 결국 장기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진압[편집] 7월 25일 관군은 한밤중에 비밀리에 행동을 개시해 진북장군 강순의 군사를 1진으로 삼아 산개령을 넘게 하고, 2진 대장 어유소의 군사는 종개령을 넘게 해 북청으로 진입, 양면공격을 하게 하는 동시에 귀성군의 군사는 평포로 진격하였다. 강순과 어유소의 군사는 협공을 하여 산개·종개령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북청으로 쇄도해 들어가 이시애가 임명한 가짜 부절도사 유득지(劉得之)의 군을 격퇴시키고 그 병력을 흡수하여 당시 관군의 수는 약 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시애는 북청 패퇴의 소식을 듣고 1만여 명의 군병을 이끌고 북청 동쪽 68리에 있는 천험의 만령(蔓嶺)으로 갔다. 만령은 남으로는 바다, 북으로는 태산을 등지고 있어 관군과의 전투에는 비교적 유리하였다. 관군은 다시 만령 공격에 나섰다. 강순의 1진이 먼저 만령 밑에 도착하고 어유소의 2진을 기다렸다가 7월 말 강순군, 어유소군, 귀성군군이 집결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먼저 귀성군과 강순, 박중선 등이 이끄는 군사는 큰길로 나아가고, 허종 등은 큰길 남쪽 중봉(中峰)으로 가갔다. 또한 우공(禹貢)은 큰길 중봉, 그리고 어유소는 바닷가와 동령(東嶺)으로, 김교 등은 북산(北山) 밑으로 나아가 각각 만령을 향해 4면에서 포위, 협공하는 전술을 써서 진격하여 이시애군의 선봉진인 만령 주봉(主峯)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이시애가 있는 중봉으로 공격해 갔다. 7월말 전세가 상당히 불리해지자, 밀리던 이시애는 여진족과도 내통, 여진족을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여진족에 파견했던 사자가 당도하기도 전에 신숙주, 허종(許琮), 강순,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3만 군대가 함경남도 홍원(洪原), 북청(北靑)에 주둔하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이원군의 만령(蔓嶺)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7월 31일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2천 명의 병력으로 3중 포열을 한 뒤 결사적으로 버텼다. 그날 유시(酉時[3])에 이르러 만령 동봉에서 어유소군이 이시애군이 중봉으로 간 것을 접하고, 이시애군의 좌측 허를 찔러 방어선의 일각을 통과함으로써 방어선을 무너트렸다. 이어 관군은 육탄전으로 이시애군을 패퇴시켰다. 결국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이성 쪽으로 도망쳤다. 결과[편집] 8월 1일 관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해 이성까지 쫓아갔으나 이시애군은 이성군의 객사, 창고 등을 불사르고 다시 북으로 패주하였다. 8월 8일 이성을 출발한 귀성군 등의 관군은 마운령(磨雲嶺)을 넘어 영제원으로 나아가고, 이시애는 단천에 진을 쳐서 남대천(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패주하여 길주로 달아났다. 8월 12일 관군 연합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하여 단천에서 교전하여 패퇴시키고 탈환, 다시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영동역(嶺東驛)까지 이시애군을 밀고 나갔다. 이 때 이시애는 허종 휘하의 허유례(許惟禮)의 계교에 빠져 이시합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鏡城)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시애의 처조카인 사옹원별좌(司饔院別坐) 허유례는 자기 아버지가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李珠), 황생(黃生) 등을 포섭한다. 허유례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서 길주권관(吉州權管)으로 있음을 알고 거짓 항복하는 척 하고는 경성 운위원(雲委院)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이시애의 수하인 이주(李珠)·이운로(李雲露)·황생(晃生) 등을 설득해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게 했다. 이들을 설득하여 자연스럽게 이시애 형제에게 접근하여 이시애 형제를 묶어 남이 등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사후[편집] 8월 이시애 군은 남이 등의 토벌대에 의해 궤멸당하고, 이시애 등 생포된 자들은 8월 12일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구성군 준에 의해 참수형되고 효수되었다. 이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으며, 함경도의 유향소는 폐지되었다. 구성군 이준과 남이, 조석문(曺錫文), 어유소, 허종, 허유례 등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녹훈되고 김서형(金瑞衡)등 많은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들이 책록되었다. 각주[편집] ↑ 이후 함길도를 임지로 꺼리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 밤 4경, 오전 2시~4시 ↑ 오후 5시∼7시 함께 보기[편집] 이징옥의 난 남이의 옥사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조선 왕조의 경제·사회적 구조"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시애의_난&oldid=23537586" 분류: 1467년 분쟁1467년 한국조선의 반란쿠데타 미수조선 세조한명회신숙주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5일 (금) 15: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날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날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날개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날개를 펼친 혹고니 참새의 날개. 양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볼 수 있다 날개 또는 나래[1] 는 새나 곤충등의 몸 양쪽에 붙어서 날 수 있게 해주는 기관을 말하며, 비행기 등의 물체를 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곤충의 날개는 외골격이 바뀌어서, 새나 박쥐의 날개는 앞다리가 변화하여 생겼다. 목차 1 어휘 1.1 유체역학에서의 날개 1.2 그 외의 용법 2 생물의 날개 2.1 소사 2.2 홰치지 않는 날개 3 항공기의 날개 3.1 날개에 관계된 용어 3.1.1 형상관계 3.1.2 성능관계 3.2 날개 이론 3.2.1 기본 3.2.2 2차원날개와 3차원날개 3.2.3 회전날개 4 문화속의 날개 4.1 신화·종교에서의 날개 4.2 자유의 상징으로서의 날개 4.3 그 외 5 날개를 이용한 스포츠 6 각주 7 같이 보기 어휘[편집] 유체역학에서의 날개[편집] #항공기의 날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세기에 들어가면 비행기가 등장해, 비행기의 날개라는 개념이 태어남과 동시에, 유체역학 등의 새로운 학문 분야가 발전해, 날개라는 말도 새로운 정의를 얻게 되었다. 그 정의는 대개, 유체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양력을 얻을 수 있는 형상을 한 물체라는 것이다. 또 이 정의로부터, 이 말은, 비행기의 날개 이외에도 다양한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수중익선의 수중날개 등도 날개의 일종이다. 레이싱 카 등에 장착되는 윙은, 상하를 반대로 한 날개이며, 차체를 지면에 꽉 누르기 위해서 아래로 향한 양력(다운 포스) 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범의 한 형태인 세로돛은, 수평 방향의 양력을 얻는 날개라 생각할 수 있다. 프로펠러나 로터 등의 회전날개도 날개의 일종이다. 산업용의 압축기나 풍력 터빈[2]의 블레이드 등도 회전날개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의 용법[편집] 전의로서 일반적으로, 중앙에 위치하는 중심적인 구조로부터 좌우에 내다 붙인 것 같은 구조를 칭해 날개라고 부르거나 또 윙 등으로도 부른다. 사상적 입장을 의미하는 좌익, 우익은 혁명기 프랑스의 의회에서의, 좌우로 나누어진 의원석을 그렇게 불렀던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건축물의 예로서는, 우지 뵤도인 봉황당의 익랑이나, 하네다 공항 (빅 버드)의 동명 윙 등을 들 수 있다. 생물의 날개[편집] 조류의 날개에서는 부위에 따라 각종의 기능을 담당한다, 여러가지 형상의 깃털이 발달했다. 생물학등의 분야에서 특히 엄밀한 날개의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용법으로 말하면, 날개를 가진 생물은 이하의 3종류다: 익룡류: 멸종. 비교적옆에 긴, 막상의 날개였다고 생각된다. 조류: 깃털을 휘감은 날개를 가진다. 날개깃, 조류용어#익우부 등을 참조. 박쥐류: 길게 뻗은 손가락의 뼈와 피막에 의해 구성된 날개를 가진다. 이것에 가세해 곤충류의 시를 날개로서 취급하기도 한다. 모두, 비상(범상 및 공중 정지를 포함)을 목적으로 한, 홰치는 기능을 가진 것이다. 소사[편집] 날개의 홰침에 의한 비상을 최초로 한 생물은 고생대의 곤충이며, 이 능력의 획득이 곤충의 오늘날 번영의 하나의 요인이라 생각된다. 곤충은, 홰침에 의한 비상 능력을 획득한 유일한 무척추동물이다. 중생대가 되면 척추동물에도 홰침 비상을 실시하는 날개의 소유자가 나타났다. 현재로서는, 삼첩기 중순의 익룡이 그 전조였다고 생각된다. 쥬라기 무렵이 되면, 공룡의 계통의 일부로부터, 새가 태어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깃털이 화석에 남기 어려운 일도 있어, 공룡-새계통의 진화 중에서 홰침 비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날개의 진화가 어떠한 과정을 밟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3]. 마지막에 등장한 홰침 비상을 실시하는 생물은 포유류의 박쥐이며, 신생대의 제3기였다고 생각된다. 홰치지 않는 날개[편집] 이상과 같이 일반적인 용법을 고집하지 않고, 항공기적인 날개의 의미를 유용한다면, 글라이더와 같이 활공하는 능력을 가진 여러가지 생물이 시야에 들어 온다. 홰쳐 상승하거나 장거리를 항속하는 능력은 그들에게는 없지만, 안에는 고도차이의 4~5배의 거리를 활공하는 것도 있다. 여러가지 접근의 것이 알려져 있다. 날다람쥐, 하늘 다람쥐, 후크로모몬가, 날원숭이: 사지의 사이 등에 발달한 피막의 "날개"를 가진다. 트비트카게: 늑골이 옆으로 늘어나 체 간으로부터 크게 쑥 내민 형태가 되어, 거기에 피막이 발달한다. 평상시는 작게 접어져 있다. 현금 척추동물 속에서 사지로부터 독립한 "날개"를 가진 유일한 생물이다. 트비야모리: 트비트카게만큼 발달하지 않지만 늑골이 퍼져 날개의 역할을 완수한다. 롱기스쿠아마: 화석종. 발달한 동체의 복수의 비늘이 날개의 역할을 완수했다. 트비헤비: 늑골을 펼쳐 몸을 평평하게 해, 전신을 S자형으로 하는 것으로, 거의 전신을 날개로서 사용한다. 트비가엘류: 사지의 손가락이 길고, 거기에 발달한 "물갈퀴"를 사용해 활공한다. (나무위생이며, 유영은 하지 않는다) 날치류: 가슴비레, 배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가 발달해, 날개의 역을 완수한다. 트비이카: "앞뒷날개(카너드)"를 갖춘 것과 동시에, 다리와 점액으로 타원 평면형의 "날개"를 형성. 식물: 일부의 식물의 과실에는, 동적 양력을 이용해 이동거리를 버는 것이 있어, 시과로 불린다. 대부분은 일종의 회전날개이며, 단풍나무속의 종자가 유명. 특징적인 것은 보르네오섬의 삼림에 나는 하네후크베 (Zanonia Macrocarpa; 박과)로, 이것은 좌우 대칭인, 무뒷날개의 글라이더다. 한층 더 의미를 펼친다면, 수생생물이 많게 볼 수 있는 지느러미도 또한 유체역학적인 의미로 날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생물이 활공이나 유영을 위해서 발달시킨 기관은 제일적으로는 피막이며 지느러미인 것이고, 이것들을 날개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미국 하늘 다람쥐 트비트카게(날개를 반 정도 전개한 상태) 트비가엘 트비워 익과의 여러 가지 참새의 왼쪽 날개 항공기의 날개[편집] B-2는 수평꼬리도 수직꼬리도 가지지 않은 무미익기(전익기라고도 함). 제트 엔진도 날개에 내장했다(앞의 부푼 곳). 항공기, 특히 부력이 아니고 동적 양력을 이용해 비행하는 중항공기에서, 날개는 엔진 이상으로 중요한 필수의 장비품이다(예를 들어, 글라이더에는 엔진이 없지만, 날개는 있다). 역사적 경위에 대한 자세한 것은 비행기의 역사 등을 참조. 고양력장치 양력의 크기는 비행 속도의 2제곱에 비례하기(양력 참조) 때문에 저속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이착륙시에는 비행 속도를 올리는 이외 방법으로 충분한 양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사용되는 플랩 등의 장치는 고양력장치라 불린다. 자세한 것은 링크를 참조. 날개의 구조 항공기의 날개 구조는, 동체 등 다른 부분의 구조와 같이, 시대와 함께 변화해 오고 있다. 자세한 것은 비행기#주 날개 등을 참조. 날개에 관계된 용어[편집] 간단한 설명만 적혀 있다. 상세한 것에 대해서는 각 용어의 링크를 참조. 형상관계[편집] 주 날개의 익형의 모델과 각부의 명칭. A익현장, B중심선, C최대익후, D최대 캐파, E익현선, F전연, G 후연. 전연 날개의 앞쪽 가장자리. 자주 영어의 Leading Edge로부터 LE로도 표기된다. 후연 날개의 뒷쪽 가장자리. 자주 영어의 Trailing Edge로부터 TE로도 표기된다. 익현선 코드 라인(chord line)이라고도 말한다. 전연과 후연을 묶은 직선이다. 이 부분의 길이는 익현장 혹은 코드장이라고 하여(단지 익현으로 길이에 임해서 말하기도 한다), 수식에서는 c나 l 등으로 표기된다. 익형 날개를 익현에 따라서 세로로 자른 단면. 에어 포일(airfoil/aerofoil), 날개 단면이라고도 한다. 흐름의 성질(속도·점성 등)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이 존재해, 날개의 성능을 크게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중심선 날개의 표면과 아래쪽 면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을 전연으로부터 후연까지 연결한 선. 캠버 중심선의 휘어진 상태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쉽게 말하면 중심선과 익현선의 차이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캠버라면 가장 차이가 큰 부분(최대 캠버)을 가리키는 것이 많아, 최대 캠버를 익현장으로 나누어 백분율(%)로 고쳐 표시한다. 최대 야영자의 위치는, 전연으로부터 익현장의 15-40% 전후가 많아, 또, 캠버가 있는 경우, 영각이 0도 상태에서도 양력을 발생한다. 또 캠버가 0인 익형을 대칭날개라고 한다. 익후 날개의 최대의 두께를 익후라고 하여, 최대익후를 익현장으로 나누어 백분율(%)로 고치고 나서, 최대익압비로서 표시한다. 최대익후의 위치는, 일반날개에 전연으로부터 익현장의 20% 전후가 많아, 고속기에 사용되고 있는 층류날개에서 40%까지 내려 항력을 줄이고 있다. 익폭 날개의 가로폭의 길이. 스팬(span), 윙 스팬이라고도 한다. 회전날개의 경우, 브레이드 한 장의 길이. 수식에서는 b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익평면형 날개를 바로 위에서 보았을 때의 형태. 단지 평면형이라고도 한다. 테이퍼(테이퍼)이거나, 타원형이거나, 후퇴각이 붙어 있거나 한다. 이 형상이 날개의 특성을 크게 좌우한다. 자세한 것은 링크를 참조. 날개 면적 날개 평면형의 면적. 투영 면적이라고도 한다. 날개를 평면에 투영했을 때의 최대 투영 면적을 날개 면적으로 한다. 동체와 겹치는 부분도 포함하고 생각한다. 수식에서는 S로 나타내지는 것이 많다. 가로세로비 일반적으로는 장방형의 세로와 가로길이의 비. 세장비 혹은 어스펙트 레시오라고도 한다. 날개의 경우, (익폭) sup2/sup÷날개 면적이라는 무차원수로 나타낸다. 예를 들면, 날다람쥐는 1~2, 보잉 747-400은 약 8, 폭 신천옹은 15 정도. 후술의 양항비에 크게 영향을 준다. 극히 대략적으로 말하면, 날개는 얇을수록 효율이 좋다. 예를 들면 장거리의 해상 비행이 요구되는 해조는, 일반적으로 육지의 새보다 얇은 날개를 가진다. 수식에서는 AR나 A 등으로 표기된다. 가는 초비 날개 중앙부의 익현장과 날개 단부의 익현장의 비율. 일반적으로 λ(Lambda)로 나타내진다. 영각 AoA(Angle of Attack)라고도 한다. 익현선(코드 라인)과 흐름이 이루는 각도. 수식에서는 α(알파)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력의 크기는 대체로 영각에 비례해 증대한다. 비행기의 동체선과 익현선이 이루는 모퉁이인 부착각(angle of incidence), 진행 방향이 이루는 각도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An-225의 주 날개에는 하반각을 붙였다. 상반각 수평면으로부터 기울기상에 쑥 내밀듯이 설치된 날개의 경우에, 수평면과 날개가 이루는 모퉁이. 간단하게 말하면, 날개가 만세하고 있는 각도. 비행의 안정성에 관련되는 요소로 간단하게 말하면, 상반각을 붙이면 뱅크를 되돌릴 방향으로 힘이 가한다. 즉, 외력에 의한 혼란에 대해서 자세를 바탕으로 되돌리는 복원력이 가한다. (다만 상반각을 너무 붙이면 , 복원력이 뱅크각을 넘어 버려, 결과적으로 기체를 반대에 넘어뜨리려는 힘이 가해, 오히려 불안정이 된다. 또, 방향 안정성이 약한 경우라면 더치 롤이라 불리는 사행 운동을 일으킨다. 그 경우, 상반각을 줄이거나 반대로 하반각을 부록, 또는 뒷날개의 재검토등의 설계 조사를 실시한다) 초음속으로의 순항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콩코드의 주 날개는 얇았다. 하반각 수평면으로부터 기울기하에 쑥 내밀듯이 장착된 날개의 경우에, 수평면과 날개가 이루는 모퉁이. 하반각을 붙이면 안정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옛날에는 금기로 여겨졌지만, 주 날개에 큰 후퇴각이 있는 고속 제트기에서는 후퇴각에 의한 복원력이 너무 커서 하반각을 붙여 조정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안정성보다 자재로 비행하는 것이 중요한 전투기는 하반각을 붙인 것이 있다. 성능관계[편집] 레이놀즈 수 물체에서의 주위의 흐름의 끈기를 나타내는 무차원수. 유체의 점성·날개의 크기·흐름의 속도에 의해서 정해져, 날개의 성능에 크게 영향을 주는 매우 중요한 파라미터. 보통은 자리수 단위로 표현한다. 수식에서는 R나 Re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력 날개에 생기는 공기력 가운데, 흐름과 수직인 성분. 수식에서는 L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항력 날개에 생기는 공기력 가운데, 흐름과 평행한 성분. 수식에서는 D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항비 양력÷항력(L/D) 혹은 양력 계수÷항력 계수(CsubL/sub/CsubD/sub)로 나타내지는 무차원수. 날개의 성능을 특징짓는 중요한 값. 간단하게 말하면, 양항비가 큰 날개는, 성능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양력이나 항력은 속도나 영각등에 의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1개의 날개도 상태에 의해서 변화한다. 날개뿐만이 아니고, 항공기나 새 등 비상체 전체에서도 말하는 일이 있다. 익면하중 기체 중량을 날개 면적으로 나눈 값. 즉 날개(의 단위면적 근처)가 결려야 할 중량을 나타낸다. 실속 날개(특히 표면)로부터 흐름이 박리하는 현상. 스톨(stall)이라고도 한다. 실속 상태에 빠지면 항력이 증대해, 양항비가 작아져, 또 기류의 혼란에 의해서 안정성이 악화된다. 날개 이론[편집] 기본[편집] 자가용 소형기와 같은 저아음속기의 날개는 일반적으로 이하와 같은 단면 형상(익형)을 하고 있다: 전연은 둥글고, 전연으로부터 1/3 정도의 곳에서 최대의 두께가 되어, 후연이 예리한 얇은 우적형상 단면의 상하 중간을 묶는 선이 원호상 이것을 닮은 익형을 가진 것이 날개로 불리거나 이러한 형상을 가리켜 편 날개모양 등이라 하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현실에는 사용되는 흐름의 성질(속도·점성 등)에 의해서 단면 형상은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 등의 고정익기는, 날개를 갖춘 기체 전체가 전진해, 날개에 바람을 받는 것으로 양력을 얻는다. 활공중의 새 등도 같다. 자세한 양력 발생의 원리, 양력과 항력의 관계등에 대해서는 양력이나 항력을 참조. 2차원날개와 3차원날개[편집] 2차원날개 균일한 익형 (어디를 잘라도 같은 단면형)으로, 익폭이 무한대의 날개를 생각해 이 날개에 대한 흐름을 논의하는 일이 있다. 이러한 날개를 2차원날개라고 부른다. 익형의 형상에만 주목해 그 특성만을 논의하고 싶을 때에 상정한다. 반드시 공상상의 날개라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면, 풍동에 익형을 시험한다는 경우, 균일한 익형을 가진 날개의 모형을 풍동내의 전체 폭에 걸쳐서(벽에서 벽으로) 달아 중앙 부근에서는 익폭의 영향을 무시할 수 있어 2차원날개로 취급한다. 3차원날개 현실에 사용되는 날개는 길이가 유한하다. 익평면형이나 상하 방향의 변화(상반각) 등이 문제가 된다. 더욱 익폭방향으로 익형이 변화하는 것도 드물지 않다. 이와 같이 익형(날개 단면)이라는 2차원(평면) 이외의 요소도 고려할 때의 날개를 3차원날개라고 부른다. 헬리콥터의 로터도 양력 발생 원리 자체는 같다. 사진은 시코르스키 CH-53 시 스탤리온. 회전날개[편집] 어느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상대속도를 얻는 날개를 회전날개라고 한다. 양력을 발생하는 원리 그 자체는 고정날개과 다르지 않지만, 날개 자체가 회전하는 것으로 주위의 유체와의 상대속도를 얻을 수 있다(즉, 양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회전날개로 불리는 것은, 회전축이 얇은 편 날개모양 물체의 일단에 있는 것으로, 헬리콥터의 로터·비행기나 선박의 프로펠러·단풍의 종자 등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이 경우, 회전축측과 첨단측에서 흐름의 속도에 차이가 성과 양력의 차이가 되기 위해, 양력차이의 경감을 목적으로, 비틀림을 붙이는·위치에 의해서 익형을 바꾼다는 대책이 채택해지는 것이 많다. 자세한 것은 프로펠러·로터·터빈을 참조. 한편, 이러한 원반면내 운동이 아니고 수차와 같은 회전을 하는 날개도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별로 회전날개라고 하지 않는다. 문화속의 날개[편집] 신화·종교에서의 날개[편집] 이시스 신(기원전 14세기, 이집트) 페르세폴리스에 남은 조로아스터교의 심볼Faravahar (기원전 6세기?)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c. 190 BC) 무하마드에게 천계를 주는 천사 지브리르(가브리엘) (1307) 아야 소피아 내벽에 복원된 사랍. 6매의 날개만으로 표현되고 있다. (14세기) 비슈누신의 탈 것, 가루다 아즈텍의 유익사신 켓살코아틀 자유의 상징으로서의 날개[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그 외[편집] 이카로스 날개를 이용한 스포츠[편집] 행글라이더 패러글라이더 카이트서핑 각주[편집] ↑ 김태식 기자, '짜장면', 표준어 됐다, 《연합뉴스》, 2011년 8월 31일 작성. ↑ 다만 이 경우는 바람으로부터 동력을 얻는 쪽이다. ↑ 깃털을 가진 공룡이나, 비상 가능한 단계에 이른 소형 공룡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간신히 20세기 말 이후, 최근 20년 정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날개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날개 비행 항공: 비행기(항공기) (여객기, 전투기, 제트기 ...등) 동물 및 곤충 (새, 잠자리, 드래곤, 익룡, 박쥐 ...등) 전거 통제 GND: 4419759-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날개&oldid=24370274" 분류: 유체역학비행항공기 부품조류학곤충해부학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العربيةAymar aru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ahasa BanjarMìng-dĕ̤ng-ngṳ̄ČeštinaCymraegDanskEnglishEsperantoEesti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eilge贛語Gàidhlig客家語/Hak-kâ-ngîעבריתHrvatskiKreyòl ayisyenMagyarBahasa IndonesiaIñupiakId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АдыгэбзэҚазақшаಕನ್ನಡKurdîLatinaLingálaLatviešuBahasa MelayuNorsk nynorskNorskOccitanPicardPiemontèis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Winaray中文文言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8: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날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날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날개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날개를 펼친 혹고니 참새의 날개. 양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볼 수 있다 날개 또는 나래[1] 는 새나 곤충등의 몸 양쪽에 붙어서 날 수 있게 해주는 기관을 말하며, 비행기 등의 물체를 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곤충의 날개는 외골격이 바뀌어서, 새나 박쥐의 날개는 앞다리가 변화하여 생겼다. 목차 1 어휘 1.1 유체역학에서의 날개 1.2 그 외의 용법 2 생물의 날개 2.1 소사 2.2 홰치지 않는 날개 3 항공기의 날개 3.1 날개에 관계된 용어 3.1.1 형상관계 3.1.2 성능관계 3.2 날개 이론 3.2.1 기본 3.2.2 2차원날개와 3차원날개 3.2.3 회전날개 4 문화속의 날개 4.1 신화·종교에서의 날개 4.2 자유의 상징으로서의 날개 4.3 그 외 5 날개를 이용한 스포츠 6 각주 7 같이 보기 어휘[편집] 유체역학에서의 날개[편집] #항공기의 날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세기에 들어가면 비행기가 등장해, 비행기의 날개라는 개념이 태어남과 동시에, 유체역학 등의 새로운 학문 분야가 발전해, 날개라는 말도 새로운 정의를 얻게 되었다. 그 정의는 대개, 유체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양력을 얻을 수 있는 형상을 한 물체라는 것이다. 또 이 정의로부터, 이 말은, 비행기의 날개 이외에도 다양한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수중익선의 수중날개 등도 날개의 일종이다. 레이싱 카 등에 장착되는 윙은, 상하를 반대로 한 날개이며, 차체를 지면에 꽉 누르기 위해서 아래로 향한 양력(다운 포스) 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범의 한 형태인 세로돛은, 수평 방향의 양력을 얻는 날개라 생각할 수 있다. 프로펠러나 로터 등의 회전날개도 날개의 일종이다. 산업용의 압축기나 풍력 터빈[2]의 블레이드 등도 회전날개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의 용법[편집] 전의로서 일반적으로, 중앙에 위치하는 중심적인 구조로부터 좌우에 내다 붙인 것 같은 구조를 칭해 날개라고 부르거나 또 윙 등으로도 부른다. 사상적 입장을 의미하는 좌익, 우익은 혁명기 프랑스의 의회에서의, 좌우로 나누어진 의원석을 그렇게 불렀던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건축물의 예로서는, 우지 뵤도인 봉황당의 익랑이나, 하네다 공항 (빅 버드)의 동명 윙 등을 들 수 있다. 생물의 날개[편집] 조류의 날개에서는 부위에 따라 각종의 기능을 담당한다, 여러가지 형상의 깃털이 발달했다. 생물학등의 분야에서 특히 엄밀한 날개의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용법으로 말하면, 날개를 가진 생물은 이하의 3종류다: 익룡류: 멸종. 비교적옆에 긴, 막상의 날개였다고 생각된다. 조류: 깃털을 휘감은 날개를 가진다. 날개깃, 조류용어#익우부 등을 참조. 박쥐류: 길게 뻗은 손가락의 뼈와 피막에 의해 구성된 날개를 가진다. 이것에 가세해 곤충류의 시를 날개로서 취급하기도 한다. 모두, 비상(범상 및 공중 정지를 포함)을 목적으로 한, 홰치는 기능을 가진 것이다. 소사[편집] 날개의 홰침에 의한 비상을 최초로 한 생물은 고생대의 곤충이며, 이 능력의 획득이 곤충의 오늘날 번영의 하나의 요인이라 생각된다. 곤충은, 홰침에 의한 비상 능력을 획득한 유일한 무척추동물이다. 중생대가 되면 척추동물에도 홰침 비상을 실시하는 날개의 소유자가 나타났다. 현재로서는, 삼첩기 중순의 익룡이 그 전조였다고 생각된다. 쥬라기 무렵이 되면, 공룡의 계통의 일부로부터, 새가 태어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깃털이 화석에 남기 어려운 일도 있어, 공룡-새계통의 진화 중에서 홰침 비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날개의 진화가 어떠한 과정을 밟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3]. 마지막에 등장한 홰침 비상을 실시하는 생물은 포유류의 박쥐이며, 신생대의 제3기였다고 생각된다. 홰치지 않는 날개[편집] 이상과 같이 일반적인 용법을 고집하지 않고, 항공기적인 날개의 의미를 유용한다면, 글라이더와 같이 활공하는 능력을 가진 여러가지 생물이 시야에 들어 온다. 홰쳐 상승하거나 장거리를 항속하는 능력은 그들에게는 없지만, 안에는 고도차이의 4~5배의 거리를 활공하는 것도 있다. 여러가지 접근의 것이 알려져 있다. 날다람쥐, 하늘 다람쥐, 후크로모몬가, 날원숭이: 사지의 사이 등에 발달한 피막의 "날개"를 가진다. 트비트카게: 늑골이 옆으로 늘어나 체 간으로부터 크게 쑥 내민 형태가 되어, 거기에 피막이 발달한다. 평상시는 작게 접어져 있다. 현금 척추동물 속에서 사지로부터 독립한 "날개"를 가진 유일한 생물이다. 트비야모리: 트비트카게만큼 발달하지 않지만 늑골이 퍼져 날개의 역할을 완수한다. 롱기스쿠아마: 화석종. 발달한 동체의 복수의 비늘이 날개의 역할을 완수했다. 트비헤비: 늑골을 펼쳐 몸을 평평하게 해, 전신을 S자형으로 하는 것으로, 거의 전신을 날개로서 사용한다. 트비가엘류: 사지의 손가락이 길고, 거기에 발달한 "물갈퀴"를 사용해 활공한다. (나무위생이며, 유영은 하지 않는다) 날치류: 가슴비레, 배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가 발달해, 날개의 역을 완수한다. 트비이카: "앞뒷날개(카너드)"를 갖춘 것과 동시에, 다리와 점액으로 타원 평면형의 "날개"를 형성. 식물: 일부의 식물의 과실에는, 동적 양력을 이용해 이동거리를 버는 것이 있어, 시과로 불린다. 대부분은 일종의 회전날개이며, 단풍나무속의 종자가 유명. 특징적인 것은 보르네오섬의 삼림에 나는 하네후크베 (Zanonia Macrocarpa; 박과)로, 이것은 좌우 대칭인, 무뒷날개의 글라이더다. 한층 더 의미를 펼친다면, 수생생물이 많게 볼 수 있는 지느러미도 또한 유체역학적인 의미로 날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생물이 활공이나 유영을 위해서 발달시킨 기관은 제일적으로는 피막이며 지느러미인 것이고, 이것들을 날개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미국 하늘 다람쥐 트비트카게(날개를 반 정도 전개한 상태) 트비가엘 트비워 익과의 여러 가지 참새의 왼쪽 날개 항공기의 날개[편집] B-2는 수평꼬리도 수직꼬리도 가지지 않은 무미익기(전익기라고도 함). 제트 엔진도 날개에 내장했다(앞의 부푼 곳). 항공기, 특히 부력이 아니고 동적 양력을 이용해 비행하는 중항공기에서, 날개는 엔진 이상으로 중요한 필수의 장비품이다(예를 들어, 글라이더에는 엔진이 없지만, 날개는 있다). 역사적 경위에 대한 자세한 것은 비행기의 역사 등을 참조. 고양력장치 양력의 크기는 비행 속도의 2제곱에 비례하기(양력 참조) 때문에 저속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이착륙시에는 비행 속도를 올리는 이외 방법으로 충분한 양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사용되는 플랩 등의 장치는 고양력장치라 불린다. 자세한 것은 링크를 참조. 날개의 구조 항공기의 날개 구조는, 동체 등 다른 부분의 구조와 같이, 시대와 함께 변화해 오고 있다. 자세한 것은 비행기#주 날개 등을 참조. 날개에 관계된 용어[편집] 간단한 설명만 적혀 있다. 상세한 것에 대해서는 각 용어의 링크를 참조. 형상관계[편집] 주 날개의 익형의 모델과 각부의 명칭. A익현장, B중심선, C최대익후, D최대 캐파, E익현선, F전연, G 후연. 전연 날개의 앞쪽 가장자리. 자주 영어의 Leading Edge로부터 LE로도 표기된다. 후연 날개의 뒷쪽 가장자리. 자주 영어의 Trailing Edge로부터 TE로도 표기된다. 익현선 코드 라인(chord line)이라고도 말한다. 전연과 후연을 묶은 직선이다. 이 부분의 길이는 익현장 혹은 코드장이라고 하여(단지 익현으로 길이에 임해서 말하기도 한다), 수식에서는 c나 l 등으로 표기된다. 익형 날개를 익현에 따라서 세로로 자른 단면. 에어 포일(airfoil/aerofoil), 날개 단면이라고도 한다. 흐름의 성질(속도·점성 등)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이 존재해, 날개의 성능을 크게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중심선 날개의 표면과 아래쪽 면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을 전연으로부터 후연까지 연결한 선. 캠버 중심선의 휘어진 상태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쉽게 말하면 중심선과 익현선의 차이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캠버라면 가장 차이가 큰 부분(최대 캠버)을 가리키는 것이 많아, 최대 캠버를 익현장으로 나누어 백분율(%)로 고쳐 표시한다. 최대 야영자의 위치는, 전연으로부터 익현장의 15-40% 전후가 많아, 또, 캠버가 있는 경우, 영각이 0도 상태에서도 양력을 발생한다. 또 캠버가 0인 익형을 대칭날개라고 한다. 익후 날개의 최대의 두께를 익후라고 하여, 최대익후를 익현장으로 나누어 백분율(%)로 고치고 나서, 최대익압비로서 표시한다. 최대익후의 위치는, 일반날개에 전연으로부터 익현장의 20% 전후가 많아, 고속기에 사용되고 있는 층류날개에서 40%까지 내려 항력을 줄이고 있다. 익폭 날개의 가로폭의 길이. 스팬(span), 윙 스팬이라고도 한다. 회전날개의 경우, 브레이드 한 장의 길이. 수식에서는 b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익평면형 날개를 바로 위에서 보았을 때의 형태. 단지 평면형이라고도 한다. 테이퍼(테이퍼)이거나, 타원형이거나, 후퇴각이 붙어 있거나 한다. 이 형상이 날개의 특성을 크게 좌우한다. 자세한 것은 링크를 참조. 날개 면적 날개 평면형의 면적. 투영 면적이라고도 한다. 날개를 평면에 투영했을 때의 최대 투영 면적을 날개 면적으로 한다. 동체와 겹치는 부분도 포함하고 생각한다. 수식에서는 S로 나타내지는 것이 많다. 가로세로비 일반적으로는 장방형의 세로와 가로길이의 비. 세장비 혹은 어스펙트 레시오라고도 한다. 날개의 경우, (익폭) sup2/sup÷날개 면적이라는 무차원수로 나타낸다. 예를 들면, 날다람쥐는 1~2, 보잉 747-400은 약 8, 폭 신천옹은 15 정도. 후술의 양항비에 크게 영향을 준다. 극히 대략적으로 말하면, 날개는 얇을수록 효율이 좋다. 예를 들면 장거리의 해상 비행이 요구되는 해조는, 일반적으로 육지의 새보다 얇은 날개를 가진다. 수식에서는 AR나 A 등으로 표기된다. 가는 초비 날개 중앙부의 익현장과 날개 단부의 익현장의 비율. 일반적으로 λ(Lambda)로 나타내진다. 영각 AoA(Angle of Attack)라고도 한다. 익현선(코드 라인)과 흐름이 이루는 각도. 수식에서는 α(알파)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력의 크기는 대체로 영각에 비례해 증대한다. 비행기의 동체선과 익현선이 이루는 모퉁이인 부착각(angle of incidence), 진행 방향이 이루는 각도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An-225의 주 날개에는 하반각을 붙였다. 상반각 수평면으로부터 기울기상에 쑥 내밀듯이 설치된 날개의 경우에, 수평면과 날개가 이루는 모퉁이. 간단하게 말하면, 날개가 만세하고 있는 각도. 비행의 안정성에 관련되는 요소로 간단하게 말하면, 상반각을 붙이면 뱅크를 되돌릴 방향으로 힘이 가한다. 즉, 외력에 의한 혼란에 대해서 자세를 바탕으로 되돌리는 복원력이 가한다. (다만 상반각을 너무 붙이면 , 복원력이 뱅크각을 넘어 버려, 결과적으로 기체를 반대에 넘어뜨리려는 힘이 가해, 오히려 불안정이 된다. 또, 방향 안정성이 약한 경우라면 더치 롤이라 불리는 사행 운동을 일으킨다. 그 경우, 상반각을 줄이거나 반대로 하반각을 부록, 또는 뒷날개의 재검토등의 설계 조사를 실시한다) 초음속으로의 순항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콩코드의 주 날개는 얇았다. 하반각 수평면으로부터 기울기하에 쑥 내밀듯이 장착된 날개의 경우에, 수평면과 날개가 이루는 모퉁이. 하반각을 붙이면 안정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옛날에는 금기로 여겨졌지만, 주 날개에 큰 후퇴각이 있는 고속 제트기에서는 후퇴각에 의한 복원력이 너무 커서 하반각을 붙여 조정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안정성보다 자재로 비행하는 것이 중요한 전투기는 하반각을 붙인 것이 있다. 성능관계[편집] 레이놀즈 수 물체에서의 주위의 흐름의 끈기를 나타내는 무차원수. 유체의 점성·날개의 크기·흐름의 속도에 의해서 정해져, 날개의 성능에 크게 영향을 주는 매우 중요한 파라미터. 보통은 자리수 단위로 표현한다. 수식에서는 R나 Re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력 날개에 생기는 공기력 가운데, 흐름과 수직인 성분. 수식에서는 L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항력 날개에 생기는 공기력 가운데, 흐름과 평행한 성분. 수식에서는 D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항비 양력÷항력(L/D) 혹은 양력 계수÷항력 계수(CsubL/sub/CsubD/sub)로 나타내지는 무차원수. 날개의 성능을 특징짓는 중요한 값. 간단하게 말하면, 양항비가 큰 날개는, 성능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양력이나 항력은 속도나 영각등에 의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1개의 날개도 상태에 의해서 변화한다. 날개뿐만이 아니고, 항공기나 새 등 비상체 전체에서도 말하는 일이 있다. 익면하중 기체 중량을 날개 면적으로 나눈 값. 즉 날개(의 단위면적 근처)가 결려야 할 중량을 나타낸다. 실속 날개(특히 표면)로부터 흐름이 박리하는 현상. 스톨(stall)이라고도 한다. 실속 상태에 빠지면 항력이 증대해, 양항비가 작아져, 또 기류의 혼란에 의해서 안정성이 악화된다. 날개 이론[편집] 기본[편집] 자가용 소형기와 같은 저아음속기의 날개는 일반적으로 이하와 같은 단면 형상(익형)을 하고 있다: 전연은 둥글고, 전연으로부터 1/3 정도의 곳에서 최대의 두께가 되어, 후연이 예리한 얇은 우적형상 단면의 상하 중간을 묶는 선이 원호상 이것을 닮은 익형을 가진 것이 날개로 불리거나 이러한 형상을 가리켜 편 날개모양 등이라 하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현실에는 사용되는 흐름의 성질(속도·점성 등)에 의해서 단면 형상은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 등의 고정익기는, 날개를 갖춘 기체 전체가 전진해, 날개에 바람을 받는 것으로 양력을 얻는다. 활공중의 새 등도 같다. 자세한 양력 발생의 원리, 양력과 항력의 관계등에 대해서는 양력이나 항력을 참조. 2차원날개와 3차원날개[편집] 2차원날개 균일한 익형 (어디를 잘라도 같은 단면형)으로, 익폭이 무한대의 날개를 생각해 이 날개에 대한 흐름을 논의하는 일이 있다. 이러한 날개를 2차원날개라고 부른다. 익형의 형상에만 주목해 그 특성만을 논의하고 싶을 때에 상정한다. 반드시 공상상의 날개라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면, 풍동에 익형을 시험한다는 경우, 균일한 익형을 가진 날개의 모형을 풍동내의 전체 폭에 걸쳐서(벽에서 벽으로) 달아 중앙 부근에서는 익폭의 영향을 무시할 수 있어 2차원날개로 취급한다. 3차원날개 현실에 사용되는 날개는 길이가 유한하다. 익평면형이나 상하 방향의 변화(상반각) 등이 문제가 된다. 더욱 익폭방향으로 익형이 변화하는 것도 드물지 않다. 이와 같이 익형(날개 단면)이라는 2차원(평면) 이외의 요소도 고려할 때의 날개를 3차원날개라고 부른다. 헬리콥터의 로터도 양력 발생 원리 자체는 같다. 사진은 시코르스키 CH-53 시 스탤리온. 회전날개[편집] 어느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상대속도를 얻는 날개를 회전날개라고 한다. 양력을 발생하는 원리 그 자체는 고정날개과 다르지 않지만, 날개 자체가 회전하는 것으로 주위의 유체와의 상대속도를 얻을 수 있다(즉, 양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회전날개로 불리는 것은, 회전축이 얇은 편 날개모양 물체의 일단에 있는 것으로, 헬리콥터의 로터·비행기나 선박의 프로펠러·단풍의 종자 등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이 경우, 회전축측과 첨단측에서 흐름의 속도에 차이가 성과 양력의 차이가 되기 위해, 양력차이의 경감을 목적으로, 비틀림을 붙이는·위치에 의해서 익형을 바꾼다는 대책이 채택해지는 것이 많다. 자세한 것은 프로펠러·로터·터빈을 참조. 한편, 이러한 원반면내 운동이 아니고 수차와 같은 회전을 하는 날개도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별로 회전날개라고 하지 않는다. 문화속의 날개[편집] 신화·종교에서의 날개[편집] 이시스 신(기원전 14세기, 이집트) 페르세폴리스에 남은 조로아스터교의 심볼Faravahar (기원전 6세기?)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c. 190 BC) 무하마드에게 천계를 주는 천사 지브리르(가브리엘) (1307) 아야 소피아 내벽에 복원된 사랍. 6매의 날개만으로 표현되고 있다. (14세기) 비슈누신의 탈 것, 가루다 아즈텍의 유익사신 켓살코아틀 자유의 상징으로서의 날개[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그 외[편집] 이카로스 날개를 이용한 스포츠[편집] 행글라이더 패러글라이더 카이트서핑 각주[편집] ↑ 김태식 기자, '짜장면', 표준어 됐다, 《연합뉴스》, 2011년 8월 31일 작성. ↑ 다만 이 경우는 바람으로부터 동력을 얻는 쪽이다. ↑ 깃털을 가진 공룡이나, 비상 가능한 단계에 이른 소형 공룡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간신히 20세기 말 이후, 최근 20년 정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날개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날개 비행 항공: 비행기(항공기) (여객기, 전투기, 제트기 ...등) 동물 및 곤충 (새, 잠자리, 드래곤, 익룡, 박쥐 ...등) 전거 통제 GND: 4419759-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날개&oldid=24370274" 분류: 유체역학비행항공기 부품조류학곤충해부학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العربيةAymar aru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ahasa BanjarMìng-dĕ̤ng-ngṳ̄ČeštinaCymraegDanskEnglishEsperantoEesti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eilge贛語Gàidhlig客家語/Hak-kâ-ngîעבריתHrvatskiKreyòl ayisyenMagyarBahasa IndonesiaIñupiakId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АдыгэбзэҚазақшаಕನ್ನಡKurdîLatinaLingálaLatviešuBahasa MelayuNorsk nynorskNorskOccitanPicardPiemontèis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Winaray中文文言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8: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날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날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날개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날개를 펼친 혹고니 참새의 날개. 양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볼 수 있다 날개 또는 나래[1] 는 새나 곤충등의 몸 양쪽에 붙어서 날 수 있게 해주는 기관을 말하며, 비행기 등의 물체를 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곤충의 날개는 외골격이 바뀌어서, 새나 박쥐의 날개는 앞다리가 변화하여 생겼다. 목차 1 어휘 1.1 유체역학에서의 날개 1.2 그 외의 용법 2 생물의 날개 2.1 소사 2.2 홰치지 않는 날개 3 항공기의 날개 3.1 날개에 관계된 용어 3.1.1 형상관계 3.1.2 성능관계 3.2 날개 이론 3.2.1 기본 3.2.2 2차원날개와 3차원날개 3.2.3 회전날개 4 문화속의 날개 4.1 신화·종교에서의 날개 4.2 자유의 상징으로서의 날개 4.3 그 외 5 날개를 이용한 스포츠 6 각주 7 같이 보기 어휘[편집] 유체역학에서의 날개[편집] #항공기의 날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세기에 들어가면 비행기가 등장해, 비행기의 날개라는 개념이 태어남과 동시에, 유체역학 등의 새로운 학문 분야가 발전해, 날개라는 말도 새로운 정의를 얻게 되었다. 그 정의는 대개, 유체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양력을 얻을 수 있는 형상을 한 물체라는 것이다. 또 이 정의로부터, 이 말은, 비행기의 날개 이외에도 다양한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수중익선의 수중날개 등도 날개의 일종이다. 레이싱 카 등에 장착되는 윙은, 상하를 반대로 한 날개이며, 차체를 지면에 꽉 누르기 위해서 아래로 향한 양력(다운 포스) 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범의 한 형태인 세로돛은, 수평 방향의 양력을 얻는 날개라 생각할 수 있다. 프로펠러나 로터 등의 회전날개도 날개의 일종이다. 산업용의 압축기나 풍력 터빈[2]의 블레이드 등도 회전날개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의 용법[편집] 전의로서 일반적으로, 중앙에 위치하는 중심적인 구조로부터 좌우에 내다 붙인 것 같은 구조를 칭해 날개라고 부르거나 또 윙 등으로도 부른다. 사상적 입장을 의미하는 좌익, 우익은 혁명기 프랑스의 의회에서의, 좌우로 나누어진 의원석을 그렇게 불렀던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건축물의 예로서는, 우지 뵤도인 봉황당의 익랑이나, 하네다 공항 (빅 버드)의 동명 윙 등을 들 수 있다. 생물의 날개[편집] 조류의 날개에서는 부위에 따라 각종의 기능을 담당한다, 여러가지 형상의 깃털이 발달했다. 생물학등의 분야에서 특히 엄밀한 날개의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용법으로 말하면, 날개를 가진 생물은 이하의 3종류다: 익룡류: 멸종. 비교적옆에 긴, 막상의 날개였다고 생각된다. 조류: 깃털을 휘감은 날개를 가진다. 날개깃, 조류용어#익우부 등을 참조. 박쥐류: 길게 뻗은 손가락의 뼈와 피막에 의해 구성된 날개를 가진다. 이것에 가세해 곤충류의 시를 날개로서 취급하기도 한다. 모두, 비상(범상 및 공중 정지를 포함)을 목적으로 한, 홰치는 기능을 가진 것이다. 소사[편집] 날개의 홰침에 의한 비상을 최초로 한 생물은 고생대의 곤충이며, 이 능력의 획득이 곤충의 오늘날 번영의 하나의 요인이라 생각된다. 곤충은, 홰침에 의한 비상 능력을 획득한 유일한 무척추동물이다. 중생대가 되면 척추동물에도 홰침 비상을 실시하는 날개의 소유자가 나타났다. 현재로서는, 삼첩기 중순의 익룡이 그 전조였다고 생각된다. 쥬라기 무렵이 되면, 공룡의 계통의 일부로부터, 새가 태어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깃털이 화석에 남기 어려운 일도 있어, 공룡-새계통의 진화 중에서 홰침 비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날개의 진화가 어떠한 과정을 밟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3]. 마지막에 등장한 홰침 비상을 실시하는 생물은 포유류의 박쥐이며, 신생대의 제3기였다고 생각된다. 홰치지 않는 날개[편집] 이상과 같이 일반적인 용법을 고집하지 않고, 항공기적인 날개의 의미를 유용한다면, 글라이더와 같이 활공하는 능력을 가진 여러가지 생물이 시야에 들어 온다. 홰쳐 상승하거나 장거리를 항속하는 능력은 그들에게는 없지만, 안에는 고도차이의 4~5배의 거리를 활공하는 것도 있다. 여러가지 접근의 것이 알려져 있다. 날다람쥐, 하늘 다람쥐, 후크로모몬가, 날원숭이: 사지의 사이 등에 발달한 피막의 "날개"를 가진다. 트비트카게: 늑골이 옆으로 늘어나 체 간으로부터 크게 쑥 내민 형태가 되어, 거기에 피막이 발달한다. 평상시는 작게 접어져 있다. 현금 척추동물 속에서 사지로부터 독립한 "날개"를 가진 유일한 생물이다. 트비야모리: 트비트카게만큼 발달하지 않지만 늑골이 퍼져 날개의 역할을 완수한다. 롱기스쿠아마: 화석종. 발달한 동체의 복수의 비늘이 날개의 역할을 완수했다. 트비헤비: 늑골을 펼쳐 몸을 평평하게 해, 전신을 S자형으로 하는 것으로, 거의 전신을 날개로서 사용한다. 트비가엘류: 사지의 손가락이 길고, 거기에 발달한 "물갈퀴"를 사용해 활공한다. (나무위생이며, 유영은 하지 않는다) 날치류: 가슴비레, 배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가 발달해, 날개의 역을 완수한다. 트비이카: "앞뒷날개(카너드)"를 갖춘 것과 동시에, 다리와 점액으로 타원 평면형의 "날개"를 형성. 식물: 일부의 식물의 과실에는, 동적 양력을 이용해 이동거리를 버는 것이 있어, 시과로 불린다. 대부분은 일종의 회전날개이며, 단풍나무속의 종자가 유명. 특징적인 것은 보르네오섬의 삼림에 나는 하네후크베 (Zanonia Macrocarpa; 박과)로, 이것은 좌우 대칭인, 무뒷날개의 글라이더다. 한층 더 의미를 펼친다면, 수생생물이 많게 볼 수 있는 지느러미도 또한 유체역학적인 의미로 날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생물이 활공이나 유영을 위해서 발달시킨 기관은 제일적으로는 피막이며 지느러미인 것이고, 이것들을 날개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미국 하늘 다람쥐 트비트카게(날개를 반 정도 전개한 상태) 트비가엘 트비워 익과의 여러 가지 참새의 왼쪽 날개 항공기의 날개[편집] B-2는 수평꼬리도 수직꼬리도 가지지 않은 무미익기(전익기라고도 함). 제트 엔진도 날개에 내장했다(앞의 부푼 곳). 항공기, 특히 부력이 아니고 동적 양력을 이용해 비행하는 중항공기에서, 날개는 엔진 이상으로 중요한 필수의 장비품이다(예를 들어, 글라이더에는 엔진이 없지만, 날개는 있다). 역사적 경위에 대한 자세한 것은 비행기의 역사 등을 참조. 고양력장치 양력의 크기는 비행 속도의 2제곱에 비례하기(양력 참조) 때문에 저속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이착륙시에는 비행 속도를 올리는 이외 방법으로 충분한 양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사용되는 플랩 등의 장치는 고양력장치라 불린다. 자세한 것은 링크를 참조. 날개의 구조 항공기의 날개 구조는, 동체 등 다른 부분의 구조와 같이, 시대와 함께 변화해 오고 있다. 자세한 것은 비행기#주 날개 등을 참조. 날개에 관계된 용어[편집] 간단한 설명만 적혀 있다. 상세한 것에 대해서는 각 용어의 링크를 참조. 형상관계[편집] 주 날개의 익형의 모델과 각부의 명칭. A익현장, B중심선, C최대익후, D최대 캐파, E익현선, F전연, G 후연. 전연 날개의 앞쪽 가장자리. 자주 영어의 Leading Edge로부터 LE로도 표기된다. 후연 날개의 뒷쪽 가장자리. 자주 영어의 Trailing Edge로부터 TE로도 표기된다. 익현선 코드 라인(chord line)이라고도 말한다. 전연과 후연을 묶은 직선이다. 이 부분의 길이는 익현장 혹은 코드장이라고 하여(단지 익현으로 길이에 임해서 말하기도 한다), 수식에서는 c나 l 등으로 표기된다. 익형 날개를 익현에 따라서 세로로 자른 단면. 에어 포일(airfoil/aerofoil), 날개 단면이라고도 한다. 흐름의 성질(속도·점성 등)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이 존재해, 날개의 성능을 크게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중심선 날개의 표면과 아래쪽 면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을 전연으로부터 후연까지 연결한 선. 캠버 중심선의 휘어진 상태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쉽게 말하면 중심선과 익현선의 차이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캠버라면 가장 차이가 큰 부분(최대 캠버)을 가리키는 것이 많아, 최대 캠버를 익현장으로 나누어 백분율(%)로 고쳐 표시한다. 최대 야영자의 위치는, 전연으로부터 익현장의 15-40% 전후가 많아, 또, 캠버가 있는 경우, 영각이 0도 상태에서도 양력을 발생한다. 또 캠버가 0인 익형을 대칭날개라고 한다. 익후 날개의 최대의 두께를 익후라고 하여, 최대익후를 익현장으로 나누어 백분율(%)로 고치고 나서, 최대익압비로서 표시한다. 최대익후의 위치는, 일반날개에 전연으로부터 익현장의 20% 전후가 많아, 고속기에 사용되고 있는 층류날개에서 40%까지 내려 항력을 줄이고 있다. 익폭 날개의 가로폭의 길이. 스팬(span), 윙 스팬이라고도 한다. 회전날개의 경우, 브레이드 한 장의 길이. 수식에서는 b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익평면형 날개를 바로 위에서 보았을 때의 형태. 단지 평면형이라고도 한다. 테이퍼(테이퍼)이거나, 타원형이거나, 후퇴각이 붙어 있거나 한다. 이 형상이 날개의 특성을 크게 좌우한다. 자세한 것은 링크를 참조. 날개 면적 날개 평면형의 면적. 투영 면적이라고도 한다. 날개를 평면에 투영했을 때의 최대 투영 면적을 날개 면적으로 한다. 동체와 겹치는 부분도 포함하고 생각한다. 수식에서는 S로 나타내지는 것이 많다. 가로세로비 일반적으로는 장방형의 세로와 가로길이의 비. 세장비 혹은 어스펙트 레시오라고도 한다. 날개의 경우, (익폭) sup2/sup÷날개 면적이라는 무차원수로 나타낸다. 예를 들면, 날다람쥐는 1~2, 보잉 747-400은 약 8, 폭 신천옹은 15 정도. 후술의 양항비에 크게 영향을 준다. 극히 대략적으로 말하면, 날개는 얇을수록 효율이 좋다. 예를 들면 장거리의 해상 비행이 요구되는 해조는, 일반적으로 육지의 새보다 얇은 날개를 가진다. 수식에서는 AR나 A 등으로 표기된다. 가는 초비 날개 중앙부의 익현장과 날개 단부의 익현장의 비율. 일반적으로 λ(Lambda)로 나타내진다. 영각 AoA(Angle of Attack)라고도 한다. 익현선(코드 라인)과 흐름이 이루는 각도. 수식에서는 α(알파)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력의 크기는 대체로 영각에 비례해 증대한다. 비행기의 동체선과 익현선이 이루는 모퉁이인 부착각(angle of incidence), 진행 방향이 이루는 각도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An-225의 주 날개에는 하반각을 붙였다. 상반각 수평면으로부터 기울기상에 쑥 내밀듯이 설치된 날개의 경우에, 수평면과 날개가 이루는 모퉁이. 간단하게 말하면, 날개가 만세하고 있는 각도. 비행의 안정성에 관련되는 요소로 간단하게 말하면, 상반각을 붙이면 뱅크를 되돌릴 방향으로 힘이 가한다. 즉, 외력에 의한 혼란에 대해서 자세를 바탕으로 되돌리는 복원력이 가한다. (다만 상반각을 너무 붙이면 , 복원력이 뱅크각을 넘어 버려, 결과적으로 기체를 반대에 넘어뜨리려는 힘이 가해, 오히려 불안정이 된다. 또, 방향 안정성이 약한 경우라면 더치 롤이라 불리는 사행 운동을 일으킨다. 그 경우, 상반각을 줄이거나 반대로 하반각을 부록, 또는 뒷날개의 재검토등의 설계 조사를 실시한다) 초음속으로의 순항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콩코드의 주 날개는 얇았다. 하반각 수평면으로부터 기울기하에 쑥 내밀듯이 장착된 날개의 경우에, 수평면과 날개가 이루는 모퉁이. 하반각을 붙이면 안정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옛날에는 금기로 여겨졌지만, 주 날개에 큰 후퇴각이 있는 고속 제트기에서는 후퇴각에 의한 복원력이 너무 커서 하반각을 붙여 조정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안정성보다 자재로 비행하는 것이 중요한 전투기는 하반각을 붙인 것이 있다. 성능관계[편집] 레이놀즈 수 물체에서의 주위의 흐름의 끈기를 나타내는 무차원수. 유체의 점성·날개의 크기·흐름의 속도에 의해서 정해져, 날개의 성능에 크게 영향을 주는 매우 중요한 파라미터. 보통은 자리수 단위로 표현한다. 수식에서는 R나 Re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력 날개에 생기는 공기력 가운데, 흐름과 수직인 성분. 수식에서는 L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항력 날개에 생기는 공기력 가운데, 흐름과 평행한 성분. 수식에서는 D로 표기되는 것이 많다. 양항비 양력÷항력(L/D) 혹은 양력 계수÷항력 계수(CsubL/sub/CsubD/sub)로 나타내지는 무차원수. 날개의 성능을 특징짓는 중요한 값. 간단하게 말하면, 양항비가 큰 날개는, 성능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양력이나 항력은 속도나 영각등에 의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1개의 날개도 상태에 의해서 변화한다. 날개뿐만이 아니고, 항공기나 새 등 비상체 전체에서도 말하는 일이 있다. 익면하중 기체 중량을 날개 면적으로 나눈 값. 즉 날개(의 단위면적 근처)가 결려야 할 중량을 나타낸다. 실속 날개(특히 표면)로부터 흐름이 박리하는 현상. 스톨(stall)이라고도 한다. 실속 상태에 빠지면 항력이 증대해, 양항비가 작아져, 또 기류의 혼란에 의해서 안정성이 악화된다. 날개 이론[편집] 기본[편집] 자가용 소형기와 같은 저아음속기의 날개는 일반적으로 이하와 같은 단면 형상(익형)을 하고 있다: 전연은 둥글고, 전연으로부터 1/3 정도의 곳에서 최대의 두께가 되어, 후연이 예리한 얇은 우적형상 단면의 상하 중간을 묶는 선이 원호상 이것을 닮은 익형을 가진 것이 날개로 불리거나 이러한 형상을 가리켜 편 날개모양 등이라 하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현실에는 사용되는 흐름의 성질(속도·점성 등)에 의해서 단면 형상은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 등의 고정익기는, 날개를 갖춘 기체 전체가 전진해, 날개에 바람을 받는 것으로 양력을 얻는다. 활공중의 새 등도 같다. 자세한 양력 발생의 원리, 양력과 항력의 관계등에 대해서는 양력이나 항력을 참조. 2차원날개와 3차원날개[편집] 2차원날개 균일한 익형 (어디를 잘라도 같은 단면형)으로, 익폭이 무한대의 날개를 생각해 이 날개에 대한 흐름을 논의하는 일이 있다. 이러한 날개를 2차원날개라고 부른다. 익형의 형상에만 주목해 그 특성만을 논의하고 싶을 때에 상정한다. 반드시 공상상의 날개라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면, 풍동에 익형을 시험한다는 경우, 균일한 익형을 가진 날개의 모형을 풍동내의 전체 폭에 걸쳐서(벽에서 벽으로) 달아 중앙 부근에서는 익폭의 영향을 무시할 수 있어 2차원날개로 취급한다. 3차원날개 현실에 사용되는 날개는 길이가 유한하다. 익평면형이나 상하 방향의 변화(상반각) 등이 문제가 된다. 더욱 익폭방향으로 익형이 변화하는 것도 드물지 않다. 이와 같이 익형(날개 단면)이라는 2차원(평면) 이외의 요소도 고려할 때의 날개를 3차원날개라고 부른다. 헬리콥터의 로터도 양력 발생 원리 자체는 같다. 사진은 시코르스키 CH-53 시 스탤리온. 회전날개[편집] 어느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상대속도를 얻는 날개를 회전날개라고 한다. 양력을 발생하는 원리 그 자체는 고정날개과 다르지 않지만, 날개 자체가 회전하는 것으로 주위의 유체와의 상대속도를 얻을 수 있다(즉, 양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회전날개로 불리는 것은, 회전축이 얇은 편 날개모양 물체의 일단에 있는 것으로, 헬리콥터의 로터·비행기나 선박의 프로펠러·단풍의 종자 등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이 경우, 회전축측과 첨단측에서 흐름의 속도에 차이가 성과 양력의 차이가 되기 위해, 양력차이의 경감을 목적으로, 비틀림을 붙이는·위치에 의해서 익형을 바꾼다는 대책이 채택해지는 것이 많다. 자세한 것은 프로펠러·로터·터빈을 참조. 한편, 이러한 원반면내 운동이 아니고 수차와 같은 회전을 하는 날개도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별로 회전날개라고 하지 않는다. 문화속의 날개[편집] 신화·종교에서의 날개[편집] 이시스 신(기원전 14세기, 이집트) 페르세폴리스에 남은 조로아스터교의 심볼Faravahar (기원전 6세기?)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c. 190 BC) 무하마드에게 천계를 주는 천사 지브리르(가브리엘) (1307) 아야 소피아 내벽에 복원된 사랍. 6매의 날개만으로 표현되고 있다. (14세기) 비슈누신의 탈 것, 가루다 아즈텍의 유익사신 켓살코아틀 자유의 상징으로서의 날개[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그 외[편집] 이카로스 날개를 이용한 스포츠[편집] 행글라이더 패러글라이더 카이트서핑 각주[편집] ↑ 김태식 기자, '짜장면', 표준어 됐다, 《연합뉴스》, 2011년 8월 31일 작성. ↑ 다만 이 경우는 바람으로부터 동력을 얻는 쪽이다. ↑ 깃털을 가진 공룡이나, 비상 가능한 단계에 이른 소형 공룡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간신히 20세기 말 이후, 최근 20년 정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날개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날개 비행 항공: 비행기(항공기) (여객기, 전투기, 제트기 ...등) 동물 및 곤충 (새, 잠자리, 드래곤, 익룡, 박쥐 ...등) 전거 통제 GND: 4419759-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날개&oldid=24370274" 분류: 유체역학비행항공기 부품조류학곤충해부학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العربيةAymar aru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ahasa BanjarMìng-dĕ̤ng-ngṳ̄ČeštinaCymraegDanskEnglishEsperantoEesti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eilge贛語Gàidhlig客家語/Hak-kâ-ngîעבריתHrvatskiKreyòl ayisyenMagyarBahasa IndonesiaIñupiakId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АдыгэбзэҚазақшаಕನ್ನಡKurdîLatinaLingálaLatviešuBahasa MelayuNorsk nynorskNorskOccitanPicardPiemontèis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Winaray中文文言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8: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검독수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검독수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검독수리 보전 상태 관심대상(LC), IUCN 3.1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조강 목: 수리목 과: 수리과 아과: 검독수리아과 속: 검독수리속 종: 검독수리 학명 Aquila chrysaetosLinnaeus, 1758 검독수리의 분포 검독수리(Golden eagle)는 수리과에 속하며, 학명은 Aquila chrysaetos 이다. 목차 1 개요 2 외형 3 종 분류 3.1 각 아종과 분포 구역 4 생태 4.1 먹이 활동 4.2 번식 4.2.1 서식 4.2.2 번식 활동 5 개체 수 보존 및 현 상태 6 인간과의 관계 6.1 매사냥 6.2 문장으로의 사용 6.3 종교 6.3.1 북아메리카 6.3.1.1 독수리 포획 문제에 관한 추가 내용 6.3.2 힌두교 7 각주 개요[편집] 북반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맹금류 중 하나로, 다른 수리과 조류처럼 주행성 맹금류에 속한다. 한 때 전북구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인간의 거주 구역으로부터 점차 사라져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멸종되었거나 희귀해 졌으나, 여전히 유라시아, 북아메리카, 그리고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 흔하게 존재한다. 세계에서 검독수리가 가장 흔하게 서식하는 곳으로는 캘리포니아의 앨러미다 군의 남부 지역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멸종위기 1급으로 매우 희귀하며, 천연기념물 243-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1][2][3][4] 검독수리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갈색을 띄고 있으며, 머리와 목에 보다 연한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에 서식하는 종의 몸 길이는 수컷 81cm, 암컷 89cm로 암컷이 더 크며, 날개길이 57~63cm, 꽁지길이 31~35cm, 몸무게 약 4.4kg이고, 날개를 폈을 때의 길이는 2m에 달한다.[5] 검독수리의 먹이로는 토끼, 다람쥐, 청설모, 너구리, 뱀 등이 있으며, 사냥 시 재빠른 속도와 민첩함, 강한 발톱으로 먹이를 공격해 들어올리거나 머리를 제압하는 방법을 쓴다. 먹이가 부족할 때는 사체를 먹기도 하고, 사슴, 산양, 아이벡스등의 대형 포유류나 살쾡이, 여우 등의 육식성 포유류를 사냥하기도 한다. 유라시아에 분포하는 대형종들은 늑대를 사냥하거나 사살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심지어 불곰의 새끼를 채 간 사례도 있다. 이외에 까마귀, 갈매기와 같은 조류와 함께 백조나 두루미와 같은 대형 조류까지도 먹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검독수리는 155km² 정도의 영역을 차지해 생활하며, 수컷 한 마리가 암컷 한 마리와 생활하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한다. 일부일처제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검독수리 수컷간의 싸움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며, 검독수리 수컷이 암컷보다 작은 이유이기도 하다(수컷간의 경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 수컷의 크기가 클 필요가 없다). 검독수리의 둥지는 절벽, 나무 등의 높은 곳에 지어지며, 전신주와 같은 인공 구조물에 지어지기도 한다. 검독수리는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번식기에 큰 둥지를 짓고, 암컷은 여기에 한 개에서 네 개 가량의 알을 낳으며, 40일 전후의 부화기간을 갖는다.[2] 깨어난 새끼가 둥지를 떠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개월이며, 이 기간동안 1~2마리 정도만이 살아남는다. 외형[편집] 검독수리의 아성체. 꽁지에는 흰 깃털이 있으며 어두운 색의 목 깃털을 가지고 있다. 다 자란 검독수리의 크기는 매우 다양한데, 그 중 가장 큰 종류는 수리과 내에서 가장 큰 종류로 꼽힌다. 검독수리의 몸 길이는 66~90cm이며, 날개 편 길이는 180~234cm, 몸무게는 2.5에서 7kg까지 나간다.[6][7] 가장 작은 종류는 현재 대한민국과 일본에 서식하며, 가장 큰 종류는 카자흐스탄 남부와 중국 남서부 지역, 만주, 인도 북부 등지에 서식한다. 다른 맹금류와 같이, 암컷이 수컷에 비해 훨씬 크며, 검독수리의 경우 암컷의 몸무게가 수컷에 비해 1.25배에서 1.3배 정도 더 나간다. 비행 중인 검독수리. 목 뒤쪽의 노란색 깃털, 꼬리와 날개 관절 부분의 흰 깃털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깃털의 색은 검은 갈색에서 짙은 갈색까지 다양한데, 여기에 정수리와 목 뒤쪽의 깃털은 두드러진 황금빛의 노란색을 띄고 있으며, 햇빛을 받으면 이것이 더욱 두드러져 영어로 "Golden Eagl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날개의 위쪽도 비교적 밝은 색을 띄고 있다. 다 자라지 못한 새끼도 어미와 대체로 비슷하나, 약간 칙칙한 반점이 여기저기 나 있는 모습을 띄고 있다. 또, 이들은 꼬리에 하얀 줄무늬가 있으며 날개 관절 부위에도 하얀 깃털이 있는데, 이들은 완전히 자라는 5세가 되기까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겉 깃털은 짧은 기간안에 털갈이를 한다.[8] 종 분류[편집] 이 종은 카를 폰 린네가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에서 처음으로 분류하였다.[9] 검독수리는 수리과에서 가장 큰 조류 중 하나이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 광범위하게 서식하고 있는 종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검독수리는 흰허리독수리, 항라머리검독수리, 쐐기꼬리수리와 함께 범세계적인 우수종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각 아종과 분포 구역[편집] Aquila c. chrysaetos (린네, 1758년) –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유라시아 전 지역, 동,서 시베리아 여기에, 크기나 깃털의 외형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5개의 종이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이들은 세계의 서로 다른 각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Aquila chrysaetos canadensis (린네, 1758년) - 북아메리카. Aquila chrysaetos kamtschatica (니콜라이 세베르조프, 1888년) – 동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에서 캄차카 반도까지. A. c. canadensis속에 속하여 분류되는 경우도 있음. Aquila chrysaetos daphanea (니콜라이 세베르조프, 1888년) – 카자흐스탄 남부, 만주 동부, 중국 남동부, 파키스탄 북부, 카슈미르, 그리고 인도 서부. Aquila chrysaetos homeryi (니콜라이 세베르조프, 1888년) –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터키 동부와 이란. Aquila chrysaetos japonica (니콜라이 세베르조프, 1888년) – 대한민국과 일본. 중기 홍적세에 현 프랑스 지역에서 존재하던 더 큰 종류의 검독수리는 직계후손종인 Aquila chrysaetos bonifacti로 분류되며, 크레타 섬의 리코 동굴에서 발견된 후기 홍적세의 거대종은 Aquila chrysaetos simurgh라 이름 붙여졌다.[10]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검독수리 위키생물종에 관련된분류 및 자료가 있습니다. 검독수리 생태[편집] 먹이 활동[편집] 검독수리의 얼굴 모습. 휘어진 부리는 먹이를 찢기에 적합한 도구이다. 검독수리의 주된 먹이는 토끼류나 다람쥐류(들다람쥐, 프레리도그 등)와 같은 작은 포유류로, 이들의 비율이 전체 먹이의 50%에서 94%를 차지한다. 다른 포유동물로는 쥐, 담비, 여우, 새끼 사슴, 산양 등이 자주 먹이로서 사냥당한다.[11] 포유류 다음으로 중요한 먹잇감은 다른 조류들이다. 여기에는 닭목에 속하는 조류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나, 이외에 어치나 백조 역시 잠재적인 사냥감이다. 먹이가 부족한 겨울에는 사체 또한 검독수리의 먹이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조차도 없을 때에는 다 자란 영양이나 순록과 같이 자신보다 몇 배나 큰 동물조차 먹이로 삼는다.[12] 심지어는 불곰의 새끼를 채 간 1건의 사례가 보고되고 있으며, 다 자란 불곰조차도 검독수리 두 마리의 공격을 받고 달아나는 장면이 촬영된 바 있는데, 여기서 검독수리의 공격은 먹이로 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상대를 쫓아내기 위해 감행된 공격으로 추정된다.[13] 검독수리는 조류 중 단연 최상위 포식자로, 다 자란 검독수리는 다른 맹금류처럼 다른 포식자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 반면 다른 맹금류에 대한 검독수리의 공격행위는 몇 건 보고된 바 있는데, 개중에는 바다매, 참매, 말똥가리 등이 새끼나 알, 심지어는 성체까지 공격을 받은 사례가 보고되었다. 한편 매, 도둑갈매기, 말똥가리 등은 검독수리의 경쟁 포식자로서 활동하며, 집단적으로 둥지를 틀고 이에 근접해 오는 검독수리에 집단 대항하는 방식으로 검독수리에 대항한다.[14] 한 예로, 매의 둥지에 접근하던 검독수리가 둥지를 지키던 매 암수의 급습을 받고 사망한 사례가 있다.[15] 이러한 사례는 수리류가 매들에 비해 훨씬 크고 강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며 실제로 그 반대의 사례가 훨씬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16] 그러나 이보다도 검독수리는 다른 맹금류로부터 먹이를 빼앗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들은 시체를 먹는 큰 수리류에 비해 훨씬 작음에도 불구하고, 다수가 연계하여 이들을 사체로부터 몰아낼 수 있다. 검독수리의 시력은 매우 뛰어나며, 극히 먼 거리에서도 먹이를 찾아낼 수 있다. 그 예로, 검독수리가 2km 거리에서 토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17] 다만 이는 낮에만 가능하며, 따라서 검독수리는 낮에만 먹이 활동을 할 수 있다. 검독수리의 결단력은 사람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검독수리의 커다란 발톱은 먹이를 부수거나 죽이고, 운반하는데 주로 사용되며, 휘어진 부리는 먹이를 찢고 삼키는데 사용된다. 검독수리 암수는 역할 분담을 통해 사냥을 하며, 주로 한 쪽이 먹이를 다른 한 쪽이 기다리는 곳으로 모는 방식을 사용한다. 한편, 검독수리 암수간의 크기 차이는 암컷을 사이에 둔 수컷간의 경쟁이 없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짝짓기를 하지 못한 다른 검독수리가 영역 내에 살 수 있도록 허용할 수 있는 원인이 되며, 검독수리의 수명이 매우 길어 자라는 속도가 느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개체수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번식[편집] 서식[편집] 프랑스 알프마리팀주에 위치한 시앙 계곡에 틀려 있는 검독수리의 둥지(왼쪽 중앙부). 검독수리는 보통 집단을 이뤄 함께 살아간다. 이들은 영역 내에 여러 개의 둥지를 틀고 몇 년에 걸쳐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데, 이 둥지들은 주로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풀들로 장식된 형태를 하고 있다. 오래된 둥지는 지름 약 2미터에 높이 1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검독수리가 필요할 때마다 둥지를 보강하고, 수시로 넓히기 때문에 그 크기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의 둥지를 나무에 틀 경우, 나뭇가지가 둥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질 수도 있다. 한편 검독수리가 먹이로 하기에 너무 작은 동물들은 검독수리의 둥지를 피난처로 삼기도 하는데, 이는 이들을 먹이로 하는 포식자들의 경우 검독수리의 먹잇감으로 적합한 크기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검독수리의 영역 내로 접근하지 않으려 하며, 따라서 자연적으로 검독수리의 둥지 근처에 거주할 경우 이들로부터 안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번식 활동[편집] 생후 14일이 된 검독수리의 새끼. 일반적으로 검독수리는 4~5살을 전후해 번식 활동을 시작한다. 일부일처의 대표적인 동물로써 검독수리는 짝짓기 후 수 년간 서로간의 신뢰를 굳건히 하는 행동을 하는데, 이를 위해 암수는 각각 서로를 다른 맹금류로부터 헌신적으로 보호하며, 추운 겨울철에도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검독수리 암컷은 한 개에서 네 개 까지의 알을(보통 두 개 정도) 1월에서 9월 사이에 낳는다. 알은 순백색에서부터 계피색, 혹은 갈색의 점이나 얼룩이 섞인 형태 등 다양한 색을 띈다. 이들은 첫 번째 알을 낳은 직후부터 부화를 시작해 새끼가 태어나는 40-45일까지 이를 계속한다.[18] 갓 태어난 새끼는 하얀 솜털로 덮여 있으며, 나는 법을 배워 직접 사냥을 할 수 있는 50일이 되기까지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 먹는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새끼 중 먼저 태어난 쪽이 살아남으며, 다른 한 쪽은 둥지를 떠나지 못하고 죽는데, 이는 먼저 태어난 새끼가 자라는데 보다 유리하며, 따라서 어미가 가져온 먹이를 둔 다툼에서 대부분 승리하여 먹이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끼간 먹이 경쟁은 먹이가 부족할 때 어미의 먹이 활동량을 줄일 수 있으며, 다른 새끼의 몫까지 챙기려 들 경우 오히려 먼저 난 새끼가 부화 직후 사망할 수 있기 때문에 종족 번식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먹이가 풍족할 때는 두 마리가 무사히 성체가 된다. 검독수리는 새끼를 돌보고 키우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사냥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무사히 자란 대부분의 검독수리는 수 년간 생존할 수 있으나, 그 이전에는 가장 먼저 태어난 새끼조차도 생후 일주일 간이 가장 큰 고비로, 이 기간 동안의 사망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개체 수 보존 및 현 상태[편집] 모스크바 동물원의 검독수리. 한 때, 검독수리는 유럽, 아시아 북부,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본 등지에 서식했다. 과거 검독수리는 숲과 평원에도 널리 살았지만, 현재에는 거의 대부분 산지에 서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에는 덴마크, 스웨덴 등지에서 검독수리가 다시 저지대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중부 유럽에 거주하던 검독수리의 수는 크게 줄어, 현재는 아펜니노, 알프스, 카르파티아 산맥과 같이 인간의 거주가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만 서식한다. 영국의 경우, 2003년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442개의 거주지를 발견하였다.[19] 한편, 2007년에 이루어진 보다 작은 규모의 조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헤브리디스 제도에 대규모의 서식지가 추가로 발견되었으며, 스코틀랜드 남부와 잉글랜드 북부에도 소규모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20] 또한, 1969년과 2003년 사이 컴브리아주의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도 이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19] 아일랜드의 검독수리는 사냥으로 인해 1912년에 멸종되었는데, 이를 재도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이에 따라, 2001년에서 2006년까지 총 46마리의 검독수리가 글렌비히 국립 공원과 더니골주에서 방사되었는데, 이후 최소 3마리의 검독수리 암컷이 사망했음을 확인하였다. 이외에도 안정적인 개체 수 확보를 위해 앞으로 총 60마리의 검독수리를 방사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7년 4월에는 검독수리 암수 한 쌍이 아일랜드에서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새끼를 부화시켰다. 한편, 글렌비히 국립 공원에서 검독수리의 번식을 촉진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21] 북아메리카의 경우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개체 수의 눈에 띄는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 개체 수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19세기 말부터 진행된 거주하던 영역의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이다.[22] 20세기에는 중금속 중독 또한 빈번한 문제였지만, 이는 환경 오염에 대한 강력한 규제로 인해 그 심각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미국에서 검독수리는 흰머리독수리와 함께 보호 법령 제정을 통해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현대에 검독수리에게 주어진 거주지와 먹이의 양은 극히 제한적인 요소이다. 20세기 초 송전선과의 충돌은 검독수리의 매우 심각한 사망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검독수리의 개체 수는 여전히 아시아 및 아메리카에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로, 국제 자연 보호 연맹의 기준으로 볼 때 멸종 위기에 있지는 않은 안전 상태이다. 인간과의 관계[편집] 키르기스 사냥꾼과 검독수리. 매사냥[편집] 주로 매를 길들여 샤낭에 이용하는 매사냥은 검독수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이들을 생포한 후 길들여 사냥에 이용하는 사냥법이 일부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곳은 중앙아시아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몽골과 같은 지역의 유목민들이 검독수리를 이용한 사냥을 계속하고 있다.[23] 이러한 사냥의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는데, 몽골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매사냥에 사용되는 암석 조각이 발견되었다.[24] 이러한 사냥을 하는 사냥꾼들은, 이 기술을 어린 시절부터 익히고 그 후대에 다시 익히게 하는 방법으로 대대로 전승시켜왔는데, 이 기술을 익히는 것은 한 번이 아닌 여러 단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렇게 기술을 익힌 사람만이 보다 크고, 강하고, 위험한 검독수리를 훈련시킬 수가 있는데, 이마저도 그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의 감시하에 행해진다.[25] 한편, 카자흐스탄의 경우 이렇게 길들여진 검독수리의 이름은 그 나이에 따라 다르게 불리게 된다. 검독수리를 매사냥에 이용하기 위해 훈련할 때는 아성체, 즉 갓 날기 시작한 어린 검독수리를 주로 사용한다. 검독수리를 포획하는데는 약 1~2일이 걸리는데, 사냥꾼은 이를 위해 비둘기와 같은 먹잇감을 미끼로 이들을 유인해 사로잡는다. 이렇게 사로잡은 검독수리를 수 일간 방치해 두면, 이들은 굶주림과 불면증으로 쇠약해지는데, 이 때 조련사가 악기 등을 연주하며 이들과의 교감을 시도하고, 이후에는 직접 먹이를 주면서 이들을 훈련하기 시작한다. 검독수리는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 이를 대부분 거부하며, 심지어는 조련사를 공격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점차 익숙해지고, 조련사에게 복종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하는데, 마치 개를 훈련시킬 때 줄로 묶은 공을 사용하는 것처럼 고기를 채워넣은 동물 인형을 이용해 훈련을 한다. 굶주린 검독수리는 이를 실제 먹잇감처럼 사냥해 운반하고, 속에 채워진 먹이를 먹음으로써 사냥에 대한 능력을 키워가게 된다. 이외에 조련사는 검독수리를 안장 위에 앉혀, 함께 사냥터로 나가는데, 이는 흔들림과 말발굽 소리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조련사의 손등 위로 돌아오도록 하는 훈련도 하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의 훈련을 거친 후에야 검독수리는 사냥 도구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며, 더 이상 조련사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26][27] 문장으로의 사용[편집] 멕시코의 독수리 문장. 검독수리는 현재 독일,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멕시코, 카자흐스탄 5개 국의 국조이며, 이 중 독일, 알바니아,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계승한 것이다. 또, 검독수리는 아랍 국가들의 문장으로도 널리 쓰이는데, 대표적인 예가 살라딘의 독수리 문장이다. 이 영향으로, 현재 이 문장은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으며, 리비아와 예멘에서도 과거에 사용했었다. 검독수리는 독수리자리의 모태인데, 이 독수리자리는 로마 군단의 깃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이후에도 독일,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멕시코, 이집트, 루마니아, 이외에 다른 여러 국가들에서도 문장으로써 사용되었다. 종교[편집] 북아메리카[편집] 검독수리의 깃털로 된 모자를 쓰고 있는 파토와미족 추장. 1925년. 독수리류는 일부 문화권,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 및 캐나다 원주민들 사이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 만큼이나 많은 수에 의해 종교적으로 신성시되는 새이며, 특히 독수리의 깃털은 종교 의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징물이다.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독수리를 신성시하여 존경하며, 흰머리독수리 및 검독수리의 깃털 외 다른 신체 부분 또한 신성시한다. 독수리의 깃털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머리 장식으로 자주 사용되는데, 이 장식은 기독교의 성경이나 십자고상에 비견될 만한 중요 상징물이다. 독수리 깃털은 또한 원주민들의 각종 의식과 행사에 널리 사용되는데, 주로 우수한 능력을 발휘한 지도자에 대한 영예와 같은 부족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리는 의식에 많이 사용된다. 현재 미국 정부는 독수리 깃털에 관련해 법률을 제정하여 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독수리의 깃털을 얻으려 할 경우 선조 대에 등록을 신청하여 미 연방에 의해 정식 부족으로써 인정을 받은 원주민에 한해서만 이를 허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전통 의식을 위한 독수리 깃털의 보급은 세습 재산으로써 취급되어 이에 대한 전통적으로 소유권을 지닌 이에 한해서 제한없이 행해질 수 있다. 한편, 검독수리나 그 깃털 및 신체 일부에 대한 상업적 거래는 불법으로 간주된다.[28] 2006년 2월 1일, USFWS의 대표인 데일 홀은 2006년 호피족의 독수리 깃털 채집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허가하여 이슈가 되었다. 또, 이듬해 4월 26일에는 또다른 허가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전 허가 사항에서 호피족에게는 40마리의 검독수리 새끼를 깃털 채집을 위해 포획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2003년 발족한 이래, 뉴멕시코 주의 앨버커키 시 담당자를 제외한 USFWS의 수뇌부는 2006년과 2007년에 독수리 깃털 채집에 대한 허가를 하여 이슈화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새롭게 종교 의식으로써 시작한 독수리 수집은 호피족을 선두로 다른 부족들까지 살아있는 독수리를 포획하기 위해 USFWS의 허가를 받으려 하게 하고 있다. 독수리 포획 문제에 관한 추가 내용[편집] 예메즈 푸에블로 카운티 - 2006년 10월, USFWS에 의해 예메즈 푸에블로 카운티에 대해 미국 산림청이 관리하는 발데스 칼데라에 서식하는 개체 중 2마리의 검독수리 포획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USFWS는 2002년 예메르 푸에블로의 독수리 채집 신청을 기각한 바 있었다. 이 허가 이후 2007년 예메즈 푸에블로는 검독수리 미성체 2마리를 성공적으로 포획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타오스 푸에블로 카운티 - 2007년 2월, USFWS는 뉴멕시코의 타오스 카운티에 위치한 타오스 푸에블로족 영토 내의 검독수리 성체 1마리를 사냥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여기에 허가인에 대해 사냥한 검독수리의 신체 부분을 미국 내 어디로든 이송할 수 있다는 추가적인 허가가 내려졌다. 이슬레타 푸에블로 카운티 - 2007년 4월, 뉴멕시코의 베르나릴로 및 발렌시아 카운티에서 2마리의 검독수리 성체를 포획하는 것에 대한 허가가 있었다. 힌두교[편집] 비슈누 신의 동물인 가루다의 모습. 힌두교에서 가루다는 하급 신성물로, 비슈누신의 이동 수단으로서 묘사된다. 가루다는 황금색 신체를 가진 건장한 남성의 모습에 흰 얼굴, 붉은 날개, 그리고 독수리의 입을 가졌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있다. 이 고대 신은 태양을 가릴 정도로 거대하다고 한다. 각주[편집] ↑ Petersen-Raptors of California ↑ Kqed.org, "Cool critters the Golden Eagle". ↑ Kqed.org, "fatal attraction birdsd and wind turbines". ↑ 검독수리(Golden Eagle, 천연기념물 제243-2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깨진 링크([http://web.archive.org/web/*/http://100.naver.com/100.nhn?docid=8315 과거 내용 찾기)] 네이버 백과사전, 검독수리 [golden eagle]][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Ferguson-Lees & Christie (2001). Raptors of the World. Houghton Mifflin Company ISBN 978-0-618-12762-7 ↑ Golden Ea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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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clopædia Britannica. Ultimate Reference Suite. Chicago: Encyclopædia Britannica. ↑ 가 나 Mark Holling and the Rare Breeding Birds Panel Report for 2003-4 accessed 4 March 2010. ↑ Mark Holling and the Rare Breeding Birds Panel (2010). “Rare breeding birds in the United Kingdom in 2007”. 《British Birds》 103: 45–6. ↑ RTÉ News (2007) ↑ E.g. Henninger (1906) ↑ Gates (1990) ↑ 인용 틀이 비었음 (도움말) ↑ Рудь М. “Беркут”. Натуралист (украинский журнал). 8 декабря 2009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도움말) ↑ “Охота с ручным беркутом”. ЮНЕСКО. 8 декабря 2009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도움말) ↑ Энциклопед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 Ф. А. Брокгауз, И. А. Ефрон — СПб., 1891 Т. 3А (6): Бергер — Бисы. ↑ USDCDN (1986), USFWS-SR (2001), USFWS-OLE (2004a,b), e-CFR (2008) 생물 분류 식별자 Wd: Q41181 ADW: Aquila_chrysaetos ARKive: aquila-chrysaetos Avibase: 5F8E7CA845BD413F BioLib: 8534 eBird: goleag EoL: 10985575 EPPO: AQUICR 유럽식물데이터베이스: 96734 화석연구데이터베이스: 94489 GBIF: 2480506 IBC: golden-eagle-aquila-chrysaetos iNaturalist: 5074 IRMNG: 10194898 ITIS: 175407 IUCN: 22696060 NCBI: 8962 Species+: 6150 WoRMS: 159107 Xeno-canto: Aquila-chrysaetos 전거 통제 GND: 4183017-9 NDL: 0106267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검독수리&oldid=24475460" 분류: IUCN 적색 목록 관심대상종검독수리속일본의 천연기념물1758년 기재된 동물수리멕시코의 새미국의 새캐나다의 새아시아의 새유럽의 새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인용 오류 - 날짜인용 오류 - 인용 틀이 비었음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From 변수가 없는 생물 분류 식별자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АҧсшәаAlemannisch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НохчийнCebuanoᏣᎳᎩTsetsêhestâheseCorsu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ryskGaeilgeGàidhlig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Interlingua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KurdîКыргызчаLatinaLumbaart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မြန်မာဘာသာ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Diné bizaadOccitanИрон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Саха тыла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ไทยTürkmençe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Winaray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4일 (월) 20: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검독수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검독수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검독수리 보전 상태 관심대상(LC), IUCN 3.1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조강 목: 수리목 과: 수리과 아과: 검독수리아과 속: 검독수리속 종: 검독수리 학명 Aquila chrysaetosLinnaeus, 1758 검독수리의 분포 검독수리(Golden eagle)는 수리과에 속하며, 학명은 Aquila chrysaetos 이다. 목차 1 개요 2 외형 3 종 분류 3.1 각 아종과 분포 구역 4 생태 4.1 먹이 활동 4.2 번식 4.2.1 서식 4.2.2 번식 활동 5 개체 수 보존 및 현 상태 6 인간과의 관계 6.1 매사냥 6.2 문장으로의 사용 6.3 종교 6.3.1 북아메리카 6.3.1.1 독수리 포획 문제에 관한 추가 내용 6.3.2 힌두교 7 각주 개요[편집] 북반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맹금류 중 하나로, 다른 수리과 조류처럼 주행성 맹금류에 속한다. 한 때 전북구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인간의 거주 구역으로부터 점차 사라져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멸종되었거나 희귀해 졌으나, 여전히 유라시아, 북아메리카, 그리고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 흔하게 존재한다. 세계에서 검독수리가 가장 흔하게 서식하는 곳으로는 캘리포니아의 앨러미다 군의 남부 지역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멸종위기 1급으로 매우 희귀하며, 천연기념물 243-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1][2][3][4] 검독수리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갈색을 띄고 있으며, 머리와 목에 보다 연한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에 서식하는 종의 몸 길이는 수컷 81cm, 암컷 89cm로 암컷이 더 크며, 날개길이 57~63cm, 꽁지길이 31~35cm, 몸무게 약 4.4kg이고, 날개를 폈을 때의 길이는 2m에 달한다.[5] 검독수리의 먹이로는 토끼, 다람쥐, 청설모, 너구리, 뱀 등이 있으며, 사냥 시 재빠른 속도와 민첩함, 강한 발톱으로 먹이를 공격해 들어올리거나 머리를 제압하는 방법을 쓴다. 먹이가 부족할 때는 사체를 먹기도 하고, 사슴, 산양, 아이벡스등의 대형 포유류나 살쾡이, 여우 등의 육식성 포유류를 사냥하기도 한다. 유라시아에 분포하는 대형종들은 늑대를 사냥하거나 사살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심지어 불곰의 새끼를 채 간 사례도 있다. 이외에 까마귀, 갈매기와 같은 조류와 함께 백조나 두루미와 같은 대형 조류까지도 먹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검독수리는 155km² 정도의 영역을 차지해 생활하며, 수컷 한 마리가 암컷 한 마리와 생활하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한다. 일부일처제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검독수리 수컷간의 싸움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며, 검독수리 수컷이 암컷보다 작은 이유이기도 하다(수컷간의 경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 수컷의 크기가 클 필요가 없다). 검독수리의 둥지는 절벽, 나무 등의 높은 곳에 지어지며, 전신주와 같은 인공 구조물에 지어지기도 한다. 검독수리는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번식기에 큰 둥지를 짓고, 암컷은 여기에 한 개에서 네 개 가량의 알을 낳으며, 40일 전후의 부화기간을 갖는다.[2] 깨어난 새끼가 둥지를 떠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개월이며, 이 기간동안 1~2마리 정도만이 살아남는다. 외형[편집] 검독수리의 아성체. 꽁지에는 흰 깃털이 있으며 어두운 색의 목 깃털을 가지고 있다. 다 자란 검독수리의 크기는 매우 다양한데, 그 중 가장 큰 종류는 수리과 내에서 가장 큰 종류로 꼽힌다. 검독수리의 몸 길이는 66~90cm이며, 날개 편 길이는 180~234cm, 몸무게는 2.5에서 7kg까지 나간다.[6][7] 가장 작은 종류는 현재 대한민국과 일본에 서식하며, 가장 큰 종류는 카자흐스탄 남부와 중국 남서부 지역, 만주, 인도 북부 등지에 서식한다. 다른 맹금류와 같이, 암컷이 수컷에 비해 훨씬 크며, 검독수리의 경우 암컷의 몸무게가 수컷에 비해 1.25배에서 1.3배 정도 더 나간다. 비행 중인 검독수리. 목 뒤쪽의 노란색 깃털, 꼬리와 날개 관절 부분의 흰 깃털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깃털의 색은 검은 갈색에서 짙은 갈색까지 다양한데, 여기에 정수리와 목 뒤쪽의 깃털은 두드러진 황금빛의 노란색을 띄고 있으며, 햇빛을 받으면 이것이 더욱 두드러져 영어로 "Golden Eagl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날개의 위쪽도 비교적 밝은 색을 띄고 있다. 다 자라지 못한 새끼도 어미와 대체로 비슷하나, 약간 칙칙한 반점이 여기저기 나 있는 모습을 띄고 있다. 또, 이들은 꼬리에 하얀 줄무늬가 있으며 날개 관절 부위에도 하얀 깃털이 있는데, 이들은 완전히 자라는 5세가 되기까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겉 깃털은 짧은 기간안에 털갈이를 한다.[8] 종 분류[편집] 이 종은 카를 폰 린네가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에서 처음으로 분류하였다.[9] 검독수리는 수리과에서 가장 큰 조류 중 하나이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 광범위하게 서식하고 있는 종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검독수리는 흰허리독수리, 항라머리검독수리, 쐐기꼬리수리와 함께 범세계적인 우수종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각 아종과 분포 구역[편집] Aquila c. chrysaetos (린네, 1758년) –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유라시아 전 지역, 동,서 시베리아 여기에, 크기나 깃털의 외형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5개의 종이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이들은 세계의 서로 다른 각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Aquila chrysaetos canadensis (린네, 1758년) - 북아메리카. Aquila chrysaetos kamtschatica (니콜라이 세베르조프, 1888년) – 동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에서 캄차카 반도까지. A. c. canadensis속에 속하여 분류되는 경우도 있음. Aquila chrysaetos daphanea (니콜라이 세베르조프, 1888년) – 카자흐스탄 남부, 만주 동부, 중국 남동부, 파키스탄 북부, 카슈미르, 그리고 인도 서부. Aquila chrysaetos homeryi (니콜라이 세베르조프, 1888년) –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터키 동부와 이란. Aquila chrysaetos japonica (니콜라이 세베르조프, 1888년) – 대한민국과 일본. 중기 홍적세에 현 프랑스 지역에서 존재하던 더 큰 종류의 검독수리는 직계후손종인 Aquila chrysaetos bonifacti로 분류되며, 크레타 섬의 리코 동굴에서 발견된 후기 홍적세의 거대종은 Aquila chrysaetos simurgh라 이름 붙여졌다.[10]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검독수리 위키생물종에 관련된분류 및 자료가 있습니다. 검독수리 생태[편집] 먹이 활동[편집] 검독수리의 얼굴 모습. 휘어진 부리는 먹이를 찢기에 적합한 도구이다. 검독수리의 주된 먹이는 토끼류나 다람쥐류(들다람쥐, 프레리도그 등)와 같은 작은 포유류로, 이들의 비율이 전체 먹이의 50%에서 94%를 차지한다. 다른 포유동물로는 쥐, 담비, 여우, 새끼 사슴, 산양 등이 자주 먹이로서 사냥당한다.[11] 포유류 다음으로 중요한 먹잇감은 다른 조류들이다. 여기에는 닭목에 속하는 조류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나, 이외에 어치나 백조 역시 잠재적인 사냥감이다. 먹이가 부족한 겨울에는 사체 또한 검독수리의 먹이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조차도 없을 때에는 다 자란 영양이나 순록과 같이 자신보다 몇 배나 큰 동물조차 먹이로 삼는다.[12] 심지어는 불곰의 새끼를 채 간 1건의 사례가 보고되고 있으며, 다 자란 불곰조차도 검독수리 두 마리의 공격을 받고 달아나는 장면이 촬영된 바 있는데, 여기서 검독수리의 공격은 먹이로 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상대를 쫓아내기 위해 감행된 공격으로 추정된다.[13] 검독수리는 조류 중 단연 최상위 포식자로, 다 자란 검독수리는 다른 맹금류처럼 다른 포식자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 반면 다른 맹금류에 대한 검독수리의 공격행위는 몇 건 보고된 바 있는데, 개중에는 바다매, 참매, 말똥가리 등이 새끼나 알, 심지어는 성체까지 공격을 받은 사례가 보고되었다. 한편 매, 도둑갈매기, 말똥가리 등은 검독수리의 경쟁 포식자로서 활동하며, 집단적으로 둥지를 틀고 이에 근접해 오는 검독수리에 집단 대항하는 방식으로 검독수리에 대항한다.[14] 한 예로, 매의 둥지에 접근하던 검독수리가 둥지를 지키던 매 암수의 급습을 받고 사망한 사례가 있다.[15] 이러한 사례는 수리류가 매들에 비해 훨씬 크고 강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며 실제로 그 반대의 사례가 훨씬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16] 그러나 이보다도 검독수리는 다른 맹금류로부터 먹이를 빼앗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들은 시체를 먹는 큰 수리류에 비해 훨씬 작음에도 불구하고, 다수가 연계하여 이들을 사체로부터 몰아낼 수 있다. 검독수리의 시력은 매우 뛰어나며, 극히 먼 거리에서도 먹이를 찾아낼 수 있다. 그 예로, 검독수리가 2km 거리에서 토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17] 다만 이는 낮에만 가능하며, 따라서 검독수리는 낮에만 먹이 활동을 할 수 있다. 검독수리의 결단력은 사람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검독수리의 커다란 발톱은 먹이를 부수거나 죽이고, 운반하는데 주로 사용되며, 휘어진 부리는 먹이를 찢고 삼키는데 사용된다. 검독수리 암수는 역할 분담을 통해 사냥을 하며, 주로 한 쪽이 먹이를 다른 한 쪽이 기다리는 곳으로 모는 방식을 사용한다. 한편, 검독수리 암수간의 크기 차이는 암컷을 사이에 둔 수컷간의 경쟁이 없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짝짓기를 하지 못한 다른 검독수리가 영역 내에 살 수 있도록 허용할 수 있는 원인이 되며, 검독수리의 수명이 매우 길어 자라는 속도가 느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개체수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번식[편집] 서식[편집] 프랑스 알프마리팀주에 위치한 시앙 계곡에 틀려 있는 검독수리의 둥지(왼쪽 중앙부). 검독수리는 보통 집단을 이뤄 함께 살아간다. 이들은 영역 내에 여러 개의 둥지를 틀고 몇 년에 걸쳐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데, 이 둥지들은 주로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풀들로 장식된 형태를 하고 있다. 오래된 둥지는 지름 약 2미터에 높이 1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검독수리가 필요할 때마다 둥지를 보강하고, 수시로 넓히기 때문에 그 크기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의 둥지를 나무에 틀 경우, 나뭇가지가 둥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질 수도 있다. 한편 검독수리가 먹이로 하기에 너무 작은 동물들은 검독수리의 둥지를 피난처로 삼기도 하는데, 이는 이들을 먹이로 하는 포식자들의 경우 검독수리의 먹잇감으로 적합한 크기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검독수리의 영역 내로 접근하지 않으려 하며, 따라서 자연적으로 검독수리의 둥지 근처에 거주할 경우 이들로부터 안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번식 활동[편집] 생후 14일이 된 검독수리의 새끼. 일반적으로 검독수리는 4~5살을 전후해 번식 활동을 시작한다. 일부일처의 대표적인 동물로써 검독수리는 짝짓기 후 수 년간 서로간의 신뢰를 굳건히 하는 행동을 하는데, 이를 위해 암수는 각각 서로를 다른 맹금류로부터 헌신적으로 보호하며, 추운 겨울철에도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검독수리 암컷은 한 개에서 네 개 까지의 알을(보통 두 개 정도) 1월에서 9월 사이에 낳는다. 알은 순백색에서부터 계피색, 혹은 갈색의 점이나 얼룩이 섞인 형태 등 다양한 색을 띈다. 이들은 첫 번째 알을 낳은 직후부터 부화를 시작해 새끼가 태어나는 40-45일까지 이를 계속한다.[18] 갓 태어난 새끼는 하얀 솜털로 덮여 있으며, 나는 법을 배워 직접 사냥을 할 수 있는 50일이 되기까지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 먹는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새끼 중 먼저 태어난 쪽이 살아남으며, 다른 한 쪽은 둥지를 떠나지 못하고 죽는데, 이는 먼저 태어난 새끼가 자라는데 보다 유리하며, 따라서 어미가 가져온 먹이를 둔 다툼에서 대부분 승리하여 먹이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끼간 먹이 경쟁은 먹이가 부족할 때 어미의 먹이 활동량을 줄일 수 있으며, 다른 새끼의 몫까지 챙기려 들 경우 오히려 먼저 난 새끼가 부화 직후 사망할 수 있기 때문에 종족 번식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먹이가 풍족할 때는 두 마리가 무사히 성체가 된다. 검독수리는 새끼를 돌보고 키우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사냥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무사히 자란 대부분의 검독수리는 수 년간 생존할 수 있으나, 그 이전에는 가장 먼저 태어난 새끼조차도 생후 일주일 간이 가장 큰 고비로, 이 기간 동안의 사망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개체 수 보존 및 현 상태[편집] 모스크바 동물원의 검독수리. 한 때, 검독수리는 유럽, 아시아 북부,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본 등지에 서식했다. 과거 검독수리는 숲과 평원에도 널리 살았지만, 현재에는 거의 대부분 산지에 서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에는 덴마크, 스웨덴 등지에서 검독수리가 다시 저지대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중부 유럽에 거주하던 검독수리의 수는 크게 줄어, 현재는 아펜니노, 알프스, 카르파티아 산맥과 같이 인간의 거주가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만 서식한다. 영국의 경우, 2003년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442개의 거주지를 발견하였다.[19] 한편, 2007년에 이루어진 보다 작은 규모의 조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헤브리디스 제도에 대규모의 서식지가 추가로 발견되었으며, 스코틀랜드 남부와 잉글랜드 북부에도 소규모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20] 또한, 1969년과 2003년 사이 컴브리아주의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도 이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19] 아일랜드의 검독수리는 사냥으로 인해 1912년에 멸종되었는데, 이를 재도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이에 따라, 2001년에서 2006년까지 총 46마리의 검독수리가 글렌비히 국립 공원과 더니골주에서 방사되었는데, 이후 최소 3마리의 검독수리 암컷이 사망했음을 확인하였다. 이외에도 안정적인 개체 수 확보를 위해 앞으로 총 60마리의 검독수리를 방사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7년 4월에는 검독수리 암수 한 쌍이 아일랜드에서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새끼를 부화시켰다. 한편, 글렌비히 국립 공원에서 검독수리의 번식을 촉진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21] 북아메리카의 경우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개체 수의 눈에 띄는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 개체 수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19세기 말부터 진행된 거주하던 영역의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이다.[22] 20세기에는 중금속 중독 또한 빈번한 문제였지만, 이는 환경 오염에 대한 강력한 규제로 인해 그 심각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미국에서 검독수리는 흰머리독수리와 함께 보호 법령 제정을 통해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현대에 검독수리에게 주어진 거주지와 먹이의 양은 극히 제한적인 요소이다. 20세기 초 송전선과의 충돌은 검독수리의 매우 심각한 사망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검독수리의 개체 수는 여전히 아시아 및 아메리카에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로, 국제 자연 보호 연맹의 기준으로 볼 때 멸종 위기에 있지는 않은 안전 상태이다. 인간과의 관계[편집] 키르기스 사냥꾼과 검독수리. 매사냥[편집] 주로 매를 길들여 샤낭에 이용하는 매사냥은 검독수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이들을 생포한 후 길들여 사냥에 이용하는 사냥법이 일부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곳은 중앙아시아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몽골과 같은 지역의 유목민들이 검독수리를 이용한 사냥을 계속하고 있다.[23] 이러한 사냥의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는데, 몽골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매사냥에 사용되는 암석 조각이 발견되었다.[24] 이러한 사냥을 하는 사냥꾼들은, 이 기술을 어린 시절부터 익히고 그 후대에 다시 익히게 하는 방법으로 대대로 전승시켜왔는데, 이 기술을 익히는 것은 한 번이 아닌 여러 단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렇게 기술을 익힌 사람만이 보다 크고, 강하고, 위험한 검독수리를 훈련시킬 수가 있는데, 이마저도 그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의 감시하에 행해진다.[25] 한편, 카자흐스탄의 경우 이렇게 길들여진 검독수리의 이름은 그 나이에 따라 다르게 불리게 된다. 검독수리를 매사냥에 이용하기 위해 훈련할 때는 아성체, 즉 갓 날기 시작한 어린 검독수리를 주로 사용한다. 검독수리를 포획하는데는 약 1~2일이 걸리는데, 사냥꾼은 이를 위해 비둘기와 같은 먹잇감을 미끼로 이들을 유인해 사로잡는다. 이렇게 사로잡은 검독수리를 수 일간 방치해 두면, 이들은 굶주림과 불면증으로 쇠약해지는데, 이 때 조련사가 악기 등을 연주하며 이들과의 교감을 시도하고, 이후에는 직접 먹이를 주면서 이들을 훈련하기 시작한다. 검독수리는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 이를 대부분 거부하며, 심지어는 조련사를 공격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점차 익숙해지고, 조련사에게 복종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하는데, 마치 개를 훈련시킬 때 줄로 묶은 공을 사용하는 것처럼 고기를 채워넣은 동물 인형을 이용해 훈련을 한다. 굶주린 검독수리는 이를 실제 먹잇감처럼 사냥해 운반하고, 속에 채워진 먹이를 먹음으로써 사냥에 대한 능력을 키워가게 된다. 이외에 조련사는 검독수리를 안장 위에 앉혀, 함께 사냥터로 나가는데, 이는 흔들림과 말발굽 소리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조련사의 손등 위로 돌아오도록 하는 훈련도 하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의 훈련을 거친 후에야 검독수리는 사냥 도구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며, 더 이상 조련사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26][27] 문장으로의 사용[편집] 멕시코의 독수리 문장. 검독수리는 현재 독일,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멕시코, 카자흐스탄 5개 국의 국조이며, 이 중 독일, 알바니아,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계승한 것이다. 또, 검독수리는 아랍 국가들의 문장으로도 널리 쓰이는데, 대표적인 예가 살라딘의 독수리 문장이다. 이 영향으로, 현재 이 문장은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으며, 리비아와 예멘에서도 과거에 사용했었다. 검독수리는 독수리자리의 모태인데, 이 독수리자리는 로마 군단의 깃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이후에도 독일,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멕시코, 이집트, 루마니아, 이외에 다른 여러 국가들에서도 문장으로써 사용되었다. 종교[편집] 북아메리카[편집] 검독수리의 깃털로 된 모자를 쓰고 있는 파토와미족 추장. 1925년. 독수리류는 일부 문화권,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 및 캐나다 원주민들 사이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 만큼이나 많은 수에 의해 종교적으로 신성시되는 새이며, 특히 독수리의 깃털은 종교 의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징물이다.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독수리를 신성시하여 존경하며, 흰머리독수리 및 검독수리의 깃털 외 다른 신체 부분 또한 신성시한다. 독수리의 깃털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머리 장식으로 자주 사용되는데, 이 장식은 기독교의 성경이나 십자고상에 비견될 만한 중요 상징물이다. 독수리 깃털은 또한 원주민들의 각종 의식과 행사에 널리 사용되는데, 주로 우수한 능력을 발휘한 지도자에 대한 영예와 같은 부족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리는 의식에 많이 사용된다. 현재 미국 정부는 독수리 깃털에 관련해 법률을 제정하여 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독수리의 깃털을 얻으려 할 경우 선조 대에 등록을 신청하여 미 연방에 의해 정식 부족으로써 인정을 받은 원주민에 한해서만 이를 허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전통 의식을 위한 독수리 깃털의 보급은 세습 재산으로써 취급되어 이에 대한 전통적으로 소유권을 지닌 이에 한해서 제한없이 행해질 수 있다. 한편, 검독수리나 그 깃털 및 신체 일부에 대한 상업적 거래는 불법으로 간주된다.[28] 2006년 2월 1일, USFWS의 대표인 데일 홀은 2006년 호피족의 독수리 깃털 채집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허가하여 이슈가 되었다. 또, 이듬해 4월 26일에는 또다른 허가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전 허가 사항에서 호피족에게는 40마리의 검독수리 새끼를 깃털 채집을 위해 포획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2003년 발족한 이래, 뉴멕시코 주의 앨버커키 시 담당자를 제외한 USFWS의 수뇌부는 2006년과 2007년에 독수리 깃털 채집에 대한 허가를 하여 이슈화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새롭게 종교 의식으로써 시작한 독수리 수집은 호피족을 선두로 다른 부족들까지 살아있는 독수리를 포획하기 위해 USFWS의 허가를 받으려 하게 하고 있다. 독수리 포획 문제에 관한 추가 내용[편집] 예메즈 푸에블로 카운티 - 2006년 10월, USFWS에 의해 예메즈 푸에블로 카운티에 대해 미국 산림청이 관리하는 발데스 칼데라에 서식하는 개체 중 2마리의 검독수리 포획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USFWS는 2002년 예메르 푸에블로의 독수리 채집 신청을 기각한 바 있었다. 이 허가 이후 2007년 예메즈 푸에블로는 검독수리 미성체 2마리를 성공적으로 포획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타오스 푸에블로 카운티 - 2007년 2월, USFWS는 뉴멕시코의 타오스 카운티에 위치한 타오스 푸에블로족 영토 내의 검독수리 성체 1마리를 사냥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여기에 허가인에 대해 사냥한 검독수리의 신체 부분을 미국 내 어디로든 이송할 수 있다는 추가적인 허가가 내려졌다. 이슬레타 푸에블로 카운티 - 2007년 4월, 뉴멕시코의 베르나릴로 및 발렌시아 카운티에서 2마리의 검독수리 성체를 포획하는 것에 대한 허가가 있었다. 힌두교[편집] 비슈누 신의 동물인 가루다의 모습. 힌두교에서 가루다는 하급 신성물로, 비슈누신의 이동 수단으로서 묘사된다. 가루다는 황금색 신체를 가진 건장한 남성의 모습에 흰 얼굴, 붉은 날개, 그리고 독수리의 입을 가졌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있다. 이 고대 신은 태양을 가릴 정도로 거대하다고 한다. 각주[편집] ↑ Petersen-Raptors of California ↑ Kqed.org, "Cool critters the Golden Eagle". ↑ Kqed.org, "fatal attraction birdsd and wind turbines". ↑ 검독수리(Golden Eagle, 천연기념물 제243-2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깨진 링크([http://web.archive.org/web/*/http://100.naver.com/100.nhn?docid=8315 과거 내용 찾기)] 네이버 백과사전, 검독수리 [golden eagle]][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Ferguson-Lees & Christie (2001). Raptors of the World. Houghton Mifflin Company ISBN 978-0-618-12762-7 ↑ Golden Ea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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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 연합왕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라곤 연합왕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라곤 연합왕국 아라곤어: Corona d'Aragón카탈루냐어: Corona d'Aragó라틴어: Corona Aragonum스페인어: Corona de Aragón ← ← 1162년 – 1716년 → → → 국기 문장 수도 불명확 정치공용어 아라곤어, 카탈루냐어, 카스티야어, 라틴어정부 형태 전제군주제역사 • 연합왕국 성립 1162년지리1443년 어림 면적 250,000km2인구1443년 어림 300,000명 인구 밀도 1.2명/km2기타국교 로마 가톨릭 아라곤 연합왕국(아라곤어: Corona d'Aragón, 카탈루냐어: Corona d'Aragó, 라틴어: Corona Aragonum, 스페인어: Corona de Aragón)은 아라곤의 군주가 지배하는 국가들의 동군 연합으로 이뤄진 왕국이다. 14세기와 15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아라곤 연합왕국은 오늘날의 스페인 동부와 프랑스 남서부, 그리고 그리스까지 걸친 지중해의 주요 섬으로 해양 왕국이었다. 각 왕국들은 같은 왕이 지배한다는 것 외에는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현대적 의미에서 아라곤 연합왕국은 단일한 국가라기보다는 연방제의 형태를 갖고 있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아라곤 연합왕국은 그 일부인 아라곤 왕국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1469년 가톨릭 군주들의 결혼으로 아라곤 연합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결합하여 스페인 왕국의 토대를 쌓았다. 이후 아라곤 연합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세습하게 되어, 1716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아라곤 연합왕국이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목차 1 배경 2 역사 2.1 기원 2.2 영토확장 2.3 카스티야와의 연합 2.4 해체 3 수도 4 영토 5 각주 6 외부 링크 배경[편집] 아라곤 연합 왕국의 정치적 수도는 사라고사로, 아라곤의 왕은 이 도시의 라 세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아라곤의 경제 중심지는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였다. 팔마데마요르카 또한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아라곤 연합 왕국은 최종적으로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백작령, 발렌시아 왕국, 마요르카 왕국, 시칠리아 왕국, 몰타,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을 포함하게 되었다. 또한 몽펠리에, 프로방스, 코르시카, 네오파트리아 공국, 아테네 공국을 잠시동안 지배하였다. 오늘날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은 722년부터 "레콘키스타"라 불리는 주기적인 전투와 함께 중세를 보냈다.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소왕국들과 싸우고,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 남쪽으로 확장을 계속한 아라곤 연합 왕국과 무르시아 동쪽으로 확장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아라곤 연합 왕국은 그리스에서 바르바리 해안에 걸친 지중해 방향으로 힘을 기울였다. 아라곤의 지중해 제국 건설 과정에서, 각 연합 왕국에서 온 "알모가바르"라는 용병들이 참여하였다. 어떤 이들은 아라곤 연합 왕국을 수백년동안 지중해를 지배한 해양 제국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카탈루냐어로 쓰인 《바다의 영사》는 세계 최초로 편찬된 해양법 법전이다. 아라곤의 전성기에는 실제로 유럽의 주요 강대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서로 다른 왕국이 국왕을 통해서만 정치적 연합을 이루었으므로, 동시대인 Marqués de Lozoya는 아라곤 연합 왕국이 연방제 국가일 뿐 중앙집권화된 왕국이 아니며, 제국은 더더욱 아니라고 서술했다.[1] 아라곤을 제국으로 언급하는 당시의 공식 문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치 국가들의 연합으로 간주되었다. 역사[편집] 기원[편집] 16세기 회화에 묘사된 아라곤 여왕 페트로넬라와 바르셀로나 후작 라몬 베렝게르 4세 아라곤 연합 왕국은 1137년 아라곤 여왕 페트로넬라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과 바르셀로나 백작령(프로방스 후작령 포함)이 연합하면서 시작되었다.[2][3]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아들 알폰소 2세가 1162년 왕위에 오르면서 두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연합 후에도 양국의 통치기구와 의회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더 부유했으나, 아라곤 왕가가 "에스파냐의 황제"라 불린 나바라의 산초 3세의 후손으로 더 높은 작위를 가졌으므로 연합 왕국의 이름은 아라곤이 되었다.[4] 또한 군사적 재능이 형편없어 "수도승"이란 별명으로 불린 페트로넬라 여왕의 아버지 라미로 2세가 딸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혼인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자신을 "나의 왕이자 주군이시며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요구하였다. 따라서 라몬 백작은 형식적으로 아라곤 왕가의 일원이 되어 아라곤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영토확장[편집] 알폰소 2세는 발렌시아를 정복할 기회를 노렸으나, 나바라의 산초 6세의 침공으로 야심을 버려야 했다. 알폰소 2세는 전선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카졸라 협정을 맺어, 각자 점령할 수 있는 이슬람 영토의 한계를 정하고, 카스티야가 무르시아를 점령하는 대신 발렌시아는 아라곤 왕국이 갖기로 협정을 맺었다. 9세기 이후 아키텐 공작, 푸아 후작, 툴루즈 후작과 아라곤의 군주들은 오시타니아의 여러 지역들을 지배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카타리파 또는 알비파라 불린 기독교 교파가 로마 가톨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아라곤은 프랑스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잃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을 받아 알비 십자군을 일으킨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오시타니아 지방을 완전히 점령하여, 프랑스 북부의 카페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라곤의 페드로 2세가 1212년 가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이슬람군을 물리치고 돌아왔을 때,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를 점령하고 페드로 2세의 매형이자 신하인 툴루즈 후작 라몬 6세를 추방했다. 군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진군한 페드로는 뮤헤에서 라몬 6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시몽 드 몽포르와 맞섰다. 1213년 9월 12일 벌어진 뮤헤 전투에서 페드로는 만용을 부리다 전사하고, 아라곤 군대는 대패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아라곤 연합 왕국은 프랑스 왕국의 오시타니아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13세기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영토 확장 전쟁을 개시하여 마요르카 섬을 합병하고 발렌시아 왕국을 절반 이상 차지하였다. 마요르카의 하우메 2세가 지배하고 있던 세르다냐, 루시용, 몽펠리에는 이때부터 사실상 아라곤에 합병되었고, 발렌시아는 기존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연합 왕국의 세 번째 구성원이 되었다. 1258년 아라곤과 프랑스는 협정을 맺어, 아라곤은 피레네 이북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하고 프랑스는 카탈루냐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기로 하였다.[5] 1266년 1월 하이메 1세는 무르시아를 점령하고 자신의 카탈루냐 백성들을 이주시킨 후, 카졸라 협정에 따라 카스티야에 넘겼다.[6] 1282년 시칠리아인들이 앙주 왕가에 반란을 일으켜 주둔군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인들의 요청을 받고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에 성무금지 조치를 내리고, 페드로 3세를 파문했다. 아라곤의 하이메 2세는 발렌시아를 완전히 점령하여, 아라곤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사르데냐-코르시카 왕국을 하이메 2세에게 주어 연합 왕국에 추가시켰으나, 이 연합은 1세기도 유지되지 못했다. 1381년 아라곤의 페드로 4세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여왕의 결혼으로 시칠리아 왕국, 아테네 공국, 네오파트리아 공국이 연합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1388년 네리오 1세 아치아이올리에게 그리스 영토를 잃었다. 1422년 알폰소 5세는 나폴리 왕국을 점령했다. 중세 사회에서 근대 초기의 절대 왕정으로 전이하는 다른 왕국과 마찬가지로, 아라곤 국왕은 귀족들과 끊임없이 세력다툼을 하였다. 아라곤 국왕은 무어인들에게서 빼앗은 발렌시아, 마요르카 등의 도시를 귀족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일종의 자치 기구인 "푸에로"(스페인어: fuero, 카탈루냐어: furs)를 설치하여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했다. 이웃의 카스티야 왕국 또한 마찬가지로 레콘키스타에서 획득한 도시를 봉건 귀족의 영지로 주는 대신 자치권을 부여했다. 카스티야와의 연합[편집] 카스티야와 레온, 그리고 아라곤, 발렌시아, 시칠리아, 마요르카의 왕과 여왕이 된 페르난도 5세와 이사벨 1세 1410년 아라곤의 마르티노 1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따라서 아라곤,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의 대표가 모여 난투극으로 이어진 격렬한 논쟁 끝에 페드로 4세의 외손자이자 카스티야의 왕족인 페르난도 엘 데 안테케라가 추대되어 페르난도 1세로 왕위에 올랐다. 페르난도 1세의 손자 페르난도 2세는 프랑스와 나바라에 빼앗긴 카탈란 북부의 루시용과 세르다냐 지방을 다시 빼앗아 왔다. 1469년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엔리케 4세의 이복누이이자 나중에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여왕이 된 이사벨 왕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두 왕국의 연합은 장차 스페인 왕국의 기반이 되었다.[7][8][9] 이 시점에서 아직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 왕국은 각각 기존의 통치기구를 유지한 채 독립적인 왕국으로 남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이기도 했던 카를로스 1세는 1516년 포르투갈과 알가르브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을 통합하여 단일한 국가로서의 스페인을 완성하였다. 해체[편집] 발렌시아, 마요르카, 시칠리아의 점령이 가져온 급격한 인구증가는 아라곤 연합 왕국의 전성기를 가져온 한편, 사회적 갈등도 불러왔다.[10] 이후 아라곤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성장을 멈추고, 아라곤 왕국의 권력은 차츰 새로운 스페인 연합 왕국으로 이동했다. 아라곤은 1659년 루시용을 잃고, 1707년-1716년 미노르카 및 이탈리아 영토들을 잃었으며, 스페인 궁정의 정책으로 정부의 공용어 또한 카스티야어로 변경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직후인 1716년,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아라곤 연합 왕국과 그 통치기구들을 폐지하고 모든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에 흡수하여, 부르봉 왕가가 지배하는 단일한 전제주의 왕국으로서의 스페인 통합을 완료했다.[11] 수도[편집] 알폰소 5세와 페르난도 2세가 나폴리에 수도를 정한 뒤,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아라곤 연합 왕국의 실질적 수도는 나폴리였다. 특히 알폰소 5세는 나폴리를 수도로 삼기 위해 큰 돈을 들여 나폴리의 궁정을 아름답게 꾸몄다.[12] 이후 펠리페 2세 시대까지 아라곤 궁정은 고정된 도시에 있지 않고 이동하였다.[13] 아라곤 왕들은 사라고사의 라 세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므로 사라고사를 상징적 수도로 볼 수는 있으나, 경제적 행정적 수도는 아니었다. 영토[편집] 안도라 코르시카 아테네 공국 네오파트리아 공국 아라곤 왕국 마요르카 왕국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발렌시아 왕국 몰타 카탈루냐 루시용 프로방스 몽펠리에 제보당 각주[편집] ↑ Marqués de Lozoya, Historia de España, Salvat, ed. 1952, vol. II page 60: "El Reino de Aragon, el Principado de Cataluña, el Reino de Valencia y el Reino de Mallorca, constituyen una confederación de Estados". ↑ Thomas N. Bisson,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a short history, 1986, chapter II. The age of the Early Count-Kings (1137–1213) (The Principate of Ramon Berenguer IV 1137–1162), page 31 ↑ Cateura Benàsser, Pau. “Els impostos indirectes en el regne de Mallorca.” (PDF). 2008년 4월 24일에 확인함. El Tall dels Temps, 14. (Palma de) Mallorca: El Tall, 1996. ISBN 84-96019-28-4. 127pp. ↑ “The Kingdom of Aragon”. Aragón Turismo. 2010년 9월 20일에 확인함. ↑ H. J. Chaytor. “Chapter 6, James the Conqueror”. 《A History of Aragon and Catalonia》. 2008년 4월 25일에 확인함. ↑ Bisson 1986:67 ↑ Stanley G. Payne. “Chapter Nine, The United Spanish Monarchy”. 《A History of Spain and Portugal》.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 H. J. Chaytor. “Juan II. Union of Aragon with Castile”. 《A History of Aragon and Catalonia》.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 Richard Herr. “Chapter 3, The Making of Spain”. 《An historical essay on modern Spain》.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 Bisson T. N. Epilogue, page 188-189 ↑ Bisson T. N. Epilogue, page 189 ↑ History books (Donzelli), Medieval Historic, Rome 1998, ISBN 88-7989-406-4 ↑ A team of investigators of the UIB directed by Doctor Josep Juan Vidal. “Felipe II, the King that defended Majorca but didn't want to recognize all its privileges” (PDF). Servei de Comunicacions de la UIB. 2008년 5월 29일에 보존된 문서 (PDF).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스페인어) 외부 링크[편집] 아라곤 연합 왕국의 카탈루냐 문학 vdeh아라곤 국왕Rei d'Aragón시메나가 레미로 1세 산초 페로 1세 알리폰소 1세 로 바탈레로 레미로 2세 오 몬체 페이로넬라 바르셀로나가 알리폰소 2세 오 카스토 페로 2세 오 카톨리코 차이메 1세 오 콘퀘리도르 페로 3세 로 그란 알리폰소 3세 오 리베랄 차이메 2세 엘 후스트 알리폰소 4세 로 부에노 페로 4세 오 케리모니오소 추안 1세 오 카사타이레 마르틴 1세 루마니스타 트라스타마라가 페란도 1세 단테케라 알리폰소 5세 로 마그나니모 추안 2세 엘 센세페 페란도 2세 오 카톨리코 추아나 1세 라 로카 압스부루고가 카를로스 1세 엘 케사르 펠리페 1세 로 푸르덴트 펠리페 2세 오 피아도소 펠리페 3세 로 그란 카를로스 2세 엘 헤치사도 « 나바라 국왕 스페인 국왕 »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라곤_연합왕국&oldid=24390288" 분류: 아라곤 연합왕국스페인의 중세사유럽의 옛 왕실이탈리아반도의 옛 나라프랑스의 중세사숨은 분류: 아라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카탈루냐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스페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Hrvatski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atinaLatviešuМакедонскиمازِرونی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rtuguêsRuna SimiРусскийSardu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اردو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6일 (목) 23: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아라곤 연합왕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라곤 연합왕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라곤 연합왕국 아라곤어: Corona d'Aragón카탈루냐어: Corona d'Aragó라틴어: Corona Aragonum스페인어: Corona de Aragón ← ← 1162년 – 1716년 → → → 국기 문장 수도 불명확 정치공용어 아라곤어, 카탈루냐어, 카스티야어, 라틴어정부 형태 전제군주제역사 • 연합왕국 성립 1162년지리1443년 어림 면적 250,000km2인구1443년 어림 300,000명 인구 밀도 1.2명/km2기타국교 로마 가톨릭 아라곤 연합왕국(아라곤어: Corona d'Aragón, 카탈루냐어: Corona d'Aragó, 라틴어: Corona Aragonum, 스페인어: Corona de Aragón)은 아라곤의 군주가 지배하는 국가들의 동군 연합으로 이뤄진 왕국이다. 14세기와 15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아라곤 연합왕국은 오늘날의 스페인 동부와 프랑스 남서부, 그리고 그리스까지 걸친 지중해의 주요 섬으로 해양 왕국이었다. 각 왕국들은 같은 왕이 지배한다는 것 외에는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현대적 의미에서 아라곤 연합왕국은 단일한 국가라기보다는 연방제의 형태를 갖고 있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아라곤 연합왕국은 그 일부인 아라곤 왕국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1469년 가톨릭 군주들의 결혼으로 아라곤 연합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결합하여 스페인 왕국의 토대를 쌓았다. 이후 아라곤 연합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세습하게 되어, 1716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아라곤 연합왕국이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목차 1 배경 2 역사 2.1 기원 2.2 영토확장 2.3 카스티야와의 연합 2.4 해체 3 수도 4 영토 5 각주 6 외부 링크 배경[편집] 아라곤 연합 왕국의 정치적 수도는 사라고사로, 아라곤의 왕은 이 도시의 라 세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아라곤의 경제 중심지는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였다. 팔마데마요르카 또한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아라곤 연합 왕국은 최종적으로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백작령, 발렌시아 왕국, 마요르카 왕국, 시칠리아 왕국, 몰타,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을 포함하게 되었다. 또한 몽펠리에, 프로방스, 코르시카, 네오파트리아 공국, 아테네 공국을 잠시동안 지배하였다. 오늘날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은 722년부터 "레콘키스타"라 불리는 주기적인 전투와 함께 중세를 보냈다.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소왕국들과 싸우고,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 남쪽으로 확장을 계속한 아라곤 연합 왕국과 무르시아 동쪽으로 확장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아라곤 연합 왕국은 그리스에서 바르바리 해안에 걸친 지중해 방향으로 힘을 기울였다. 아라곤의 지중해 제국 건설 과정에서, 각 연합 왕국에서 온 "알모가바르"라는 용병들이 참여하였다. 어떤 이들은 아라곤 연합 왕국을 수백년동안 지중해를 지배한 해양 제국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카탈루냐어로 쓰인 《바다의 영사》는 세계 최초로 편찬된 해양법 법전이다. 아라곤의 전성기에는 실제로 유럽의 주요 강대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서로 다른 왕국이 국왕을 통해서만 정치적 연합을 이루었으므로, 동시대인 Marqués de Lozoya는 아라곤 연합 왕국이 연방제 국가일 뿐 중앙집권화된 왕국이 아니며, 제국은 더더욱 아니라고 서술했다.[1] 아라곤을 제국으로 언급하는 당시의 공식 문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치 국가들의 연합으로 간주되었다. 역사[편집] 기원[편집] 16세기 회화에 묘사된 아라곤 여왕 페트로넬라와 바르셀로나 후작 라몬 베렝게르 4세 아라곤 연합 왕국은 1137년 아라곤 여왕 페트로넬라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과 바르셀로나 백작령(프로방스 후작령 포함)이 연합하면서 시작되었다.[2][3]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아들 알폰소 2세가 1162년 왕위에 오르면서 두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연합 후에도 양국의 통치기구와 의회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더 부유했으나, 아라곤 왕가가 "에스파냐의 황제"라 불린 나바라의 산초 3세의 후손으로 더 높은 작위를 가졌으므로 연합 왕국의 이름은 아라곤이 되었다.[4] 또한 군사적 재능이 형편없어 "수도승"이란 별명으로 불린 페트로넬라 여왕의 아버지 라미로 2세가 딸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혼인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자신을 "나의 왕이자 주군이시며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요구하였다. 따라서 라몬 백작은 형식적으로 아라곤 왕가의 일원이 되어 아라곤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영토확장[편집] 알폰소 2세는 발렌시아를 정복할 기회를 노렸으나, 나바라의 산초 6세의 침공으로 야심을 버려야 했다. 알폰소 2세는 전선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카졸라 협정을 맺어, 각자 점령할 수 있는 이슬람 영토의 한계를 정하고, 카스티야가 무르시아를 점령하는 대신 발렌시아는 아라곤 왕국이 갖기로 협정을 맺었다. 9세기 이후 아키텐 공작, 푸아 후작, 툴루즈 후작과 아라곤의 군주들은 오시타니아의 여러 지역들을 지배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카타리파 또는 알비파라 불린 기독교 교파가 로마 가톨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아라곤은 프랑스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잃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을 받아 알비 십자군을 일으킨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오시타니아 지방을 완전히 점령하여, 프랑스 북부의 카페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라곤의 페드로 2세가 1212년 가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이슬람군을 물리치고 돌아왔을 때,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를 점령하고 페드로 2세의 매형이자 신하인 툴루즈 후작 라몬 6세를 추방했다. 군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진군한 페드로는 뮤헤에서 라몬 6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시몽 드 몽포르와 맞섰다. 1213년 9월 12일 벌어진 뮤헤 전투에서 페드로는 만용을 부리다 전사하고, 아라곤 군대는 대패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아라곤 연합 왕국은 프랑스 왕국의 오시타니아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13세기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영토 확장 전쟁을 개시하여 마요르카 섬을 합병하고 발렌시아 왕국을 절반 이상 차지하였다. 마요르카의 하우메 2세가 지배하고 있던 세르다냐, 루시용, 몽펠리에는 이때부터 사실상 아라곤에 합병되었고, 발렌시아는 기존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연합 왕국의 세 번째 구성원이 되었다. 1258년 아라곤과 프랑스는 협정을 맺어, 아라곤은 피레네 이북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하고 프랑스는 카탈루냐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기로 하였다.[5] 1266년 1월 하이메 1세는 무르시아를 점령하고 자신의 카탈루냐 백성들을 이주시킨 후, 카졸라 협정에 따라 카스티야에 넘겼다.[6] 1282년 시칠리아인들이 앙주 왕가에 반란을 일으켜 주둔군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인들의 요청을 받고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에 성무금지 조치를 내리고, 페드로 3세를 파문했다. 아라곤의 하이메 2세는 발렌시아를 완전히 점령하여, 아라곤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사르데냐-코르시카 왕국을 하이메 2세에게 주어 연합 왕국에 추가시켰으나, 이 연합은 1세기도 유지되지 못했다. 1381년 아라곤의 페드로 4세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여왕의 결혼으로 시칠리아 왕국, 아테네 공국, 네오파트리아 공국이 연합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1388년 네리오 1세 아치아이올리에게 그리스 영토를 잃었다. 1422년 알폰소 5세는 나폴리 왕국을 점령했다. 중세 사회에서 근대 초기의 절대 왕정으로 전이하는 다른 왕국과 마찬가지로, 아라곤 국왕은 귀족들과 끊임없이 세력다툼을 하였다. 아라곤 국왕은 무어인들에게서 빼앗은 발렌시아, 마요르카 등의 도시를 귀족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일종의 자치 기구인 "푸에로"(스페인어: fuero, 카탈루냐어: furs)를 설치하여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했다. 이웃의 카스티야 왕국 또한 마찬가지로 레콘키스타에서 획득한 도시를 봉건 귀족의 영지로 주는 대신 자치권을 부여했다. 카스티야와의 연합[편집] 카스티야와 레온, 그리고 아라곤, 발렌시아, 시칠리아, 마요르카의 왕과 여왕이 된 페르난도 5세와 이사벨 1세 1410년 아라곤의 마르티노 1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따라서 아라곤,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의 대표가 모여 난투극으로 이어진 격렬한 논쟁 끝에 페드로 4세의 외손자이자 카스티야의 왕족인 페르난도 엘 데 안테케라가 추대되어 페르난도 1세로 왕위에 올랐다. 페르난도 1세의 손자 페르난도 2세는 프랑스와 나바라에 빼앗긴 카탈란 북부의 루시용과 세르다냐 지방을 다시 빼앗아 왔다. 1469년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엔리케 4세의 이복누이이자 나중에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여왕이 된 이사벨 왕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두 왕국의 연합은 장차 스페인 왕국의 기반이 되었다.[7][8][9] 이 시점에서 아직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 왕국은 각각 기존의 통치기구를 유지한 채 독립적인 왕국으로 남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이기도 했던 카를로스 1세는 1516년 포르투갈과 알가르브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을 통합하여 단일한 국가로서의 스페인을 완성하였다. 해체[편집] 발렌시아, 마요르카, 시칠리아의 점령이 가져온 급격한 인구증가는 아라곤 연합 왕국의 전성기를 가져온 한편, 사회적 갈등도 불러왔다.[10] 이후 아라곤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성장을 멈추고, 아라곤 왕국의 권력은 차츰 새로운 스페인 연합 왕국으로 이동했다. 아라곤은 1659년 루시용을 잃고, 1707년-1716년 미노르카 및 이탈리아 영토들을 잃었으며, 스페인 궁정의 정책으로 정부의 공용어 또한 카스티야어로 변경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직후인 1716년,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아라곤 연합 왕국과 그 통치기구들을 폐지하고 모든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에 흡수하여, 부르봉 왕가가 지배하는 단일한 전제주의 왕국으로서의 스페인 통합을 완료했다.[11] 수도[편집] 알폰소 5세와 페르난도 2세가 나폴리에 수도를 정한 뒤,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아라곤 연합 왕국의 실질적 수도는 나폴리였다. 특히 알폰소 5세는 나폴리를 수도로 삼기 위해 큰 돈을 들여 나폴리의 궁정을 아름답게 꾸몄다.[12] 이후 펠리페 2세 시대까지 아라곤 궁정은 고정된 도시에 있지 않고 이동하였다.[13] 아라곤 왕들은 사라고사의 라 세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므로 사라고사를 상징적 수도로 볼 수는 있으나, 경제적 행정적 수도는 아니었다. 영토[편집] 안도라 코르시카 아테네 공국 네오파트리아 공국 아라곤 왕국 마요르카 왕국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발렌시아 왕국 몰타 카탈루냐 루시용 프로방스 몽펠리에 제보당 각주[편집] ↑ Marqués de Lozoya, Historia de España, Salvat, ed. 1952, vol. II page 60: "El Reino de Aragon, el Principado de Cataluña, el Reino de Valencia y el Reino de Mallorca, constituyen una confederación de Estados". ↑ Thomas N. Bisson,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a short history, 1986, chapter II. The age of the Early Count-Kings (1137–1213) (The Principate of Ramon Berenguer IV 1137–1162), page 31 ↑ Cateura Benàsser, Pau. “Els impostos indirectes en el regne de Mallorca.” (PDF). 2008년 4월 24일에 확인함. El Tall dels Temps, 14. (Palma de) Mallorca: El Tall, 1996. ISBN 84-96019-28-4. 127pp. ↑ “The Kingdom of Aragon”. Aragón Turismo. 2010년 9월 20일에 확인함. ↑ H. J. Chaytor. “Chapter 6, James the Conqueror”. 《A History of Aragon and Catalonia》. 2008년 4월 25일에 확인함. ↑ Bisson 1986:67 ↑ Stanley G. Payne. “Chapter Nine, The United Spanish Monarchy”. 《A History of Spain and Portugal》.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 H. J. Chaytor. “Juan II. Union of Aragon with Castile”. 《A History of Aragon and Catalonia》.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 Richard Herr. “Chapter 3, The Making of Spain”. 《An historical essay on modern Spain》.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 Bisson T. N. Epilogue, page 188-189 ↑ Bisson T. N. Epilogue, page 189 ↑ History books (Donzelli), Medieval Historic, Rome 1998, ISBN 88-7989-406-4 ↑ A team of investigators of the UIB directed by Doctor Josep Juan Vidal. “Felipe II, the King that defended Majorca but didn't want to recognize all its privileges” (PDF). Servei de Comunicacions de la UIB. 2008년 5월 29일에 보존된 문서 (PDF).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스페인어) 외부 링크[편집] 아라곤 연합 왕국의 카탈루냐 문학 vdeh아라곤 국왕Rei d'Aragón시메나가 레미로 1세 산초 페로 1세 알리폰소 1세 로 바탈레로 레미로 2세 오 몬체 페이로넬라 바르셀로나가 알리폰소 2세 오 카스토 페로 2세 오 카톨리코 차이메 1세 오 콘퀘리도르 페로 3세 로 그란 알리폰소 3세 오 리베랄 차이메 2세 엘 후스트 알리폰소 4세 로 부에노 페로 4세 오 케리모니오소 추안 1세 오 카사타이레 마르틴 1세 루마니스타 트라스타마라가 페란도 1세 단테케라 알리폰소 5세 로 마그나니모 추안 2세 엘 센세페 페란도 2세 오 카톨리코 추아나 1세 라 로카 압스부루고가 카를로스 1세 엘 케사르 펠리페 1세 로 푸르덴트 펠리페 2세 오 피아도소 펠리페 3세 로 그란 카를로스 2세 엘 헤치사도 « 나바라 국왕 스페인 국왕 »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라곤_연합왕국&oldid=24390288" 분류: 아라곤 연합왕국스페인의 중세사유럽의 옛 왕실이탈리아반도의 옛 나라프랑스의 중세사숨은 분류: 아라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카탈루냐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스페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Hrvatski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atinaLatviešuМакедонскиمازِرونی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rtuguêsRuna SimiРусскийSardu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اردو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6일 (목) 23: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안토니오 비발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토니오 비발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발디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비발디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기본 정보출생 1678년 3월 4일(1678-03-04) 이탈리아 베네치아사망 1741년 7월 28일 (63세) 이탈리아 베네치아직업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장르 클래식 음악악기 바이올린활동 시기 1701년 ~ 1741년 배우자 無종교 천주교(가톨릭 사제)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이탈리아어: Antonio Lucio Vivaldi, 문화어: 안또니오 비발디, 1678년 3월 4일 ~ 1741년 7월 28일)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직자,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붉은 머리의 사제’(司祭, 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대중화를 시도한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된 《사계》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 머리라서 평생 붉은 머리의 신부라는 조롱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체력이 좋지 않았던 그는 미사보다는 작곡이나 성가대 업무를 주로 보았다. 목차 1 생애 2 주작품 3 영화화 4 미디어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아버지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 성가대의 바이올리니스트를 하기도 했다. 이후 레그렌치에게 작곡을 배웠다. 15세 신학교에 가 23살에 서품을 받았으나, 본디 몸이 약하여 숨이 차서 미사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는 머리가 붉은 색이라 평생 '빨강 머리의 신부'라는 놀림을 받았다. 비발디는 1703년부터 1740년에 걸쳐 대체로 베네치아의 여자 고아원 겸 음악학교이던 피에타 고아원에 근무했으며 1716년에는 피에타 고아원 밴드부의 합주장(合奏長)이 되었다. 이 학원의 학생들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에서도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비발디는 마음껏 해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발디는 그 동안에도 자작한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순회하기도 하고 빈이나 암스테르담으로 가기도 하였다. 1741년에 빈으로 간 비발디는 빈궁 속에 객사(客死)하여 그 곳 빈민묘지에 안치되었다. 이 때의 빈 방문 목적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받으러 간 것으로 추측된다. 비발디의 이름은 그 후 잊혀져 있었으나 대 바흐가 편곡한 작품이 계기가 되어 그 전모가 밝혀졌다. 주작품[편집] 그의 작품은 오페라와 여러 곡의 교회 음악과 기악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을 주로 한 협주곡이 유명하며, 그 때까지의 악곡에 비하여 리듬이 활발하고 노래하듯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독일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흐는 그의 작품을 건반악기 연주용으로 편곡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신포니아 23곡, 합주 협주곡 <조화의 영감>,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4계> 등이 있다. 특히 <4계>는 표제 음악의 표본으로 불린다. 그는 약 500곡이나 되는 기악작품, 약 40곡의 오페라 외에 모테토,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작곡은 처음에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으나 대부분은 수고(手稿) 형태 외엔 남아 있지 않다. 비발디는 무엇보다 우선 토렐리(1658년~1709년), 알비노니(1671년~1750년)들에 의하여 개발된 독주 콘체르토의 세계에서 안정된 양식을 확립시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복수(複數)의 독주악기로 하는 콘체르토도 수없이 썼으나 이것은 대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되었으며 전합주와 독주가 교대하는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했다. 영화화[편집] 대한민국에서 2009년 1월 8일에 그의 생애를 영화화한 《안토니오 비발디-베니스의 왕자》가 개봉되었다. 안토니오 비발디 역에는 스테파노 디오니시가 열연하였다. 미디어[편집] Op. 4 Concerto 1 "Spring" mvt 1: Allegro 비발디의 사계 중 봄 1악장 알레그로, 요한 해리슨 바이올린 Op. 4 Concerto 1 "Spring" mvt 2: Largo 비발디의 사계 중 봄 2악장 라르고, 요한 해리슨 바이올린 Op. 4 Concerto 1 "Spring" mvt 3: Allegr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2 "Summer" mvt 1: Allegro non molt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2 "Summer" mvt 2: Adagi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2 "Summer" mvt 3: Prest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3 "Autumn" mvt 1: Allegr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3 "Autumn" mvt 2: Adagio molt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3 "Autumn" mvt 3: Allegr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4 "Winter" mvt 1: Allegro non molt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4 "Winter" mvt 2: Larg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4 "Winter" mvt 3: Allegr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Concerto for Oboe and Orchestra in C major (RV 447) - 2. Andante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oboeist Edino Biaggi Credo (RV 591) - 1. Credo in Unum Deum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the Advent Choir directed by Gabriel Pavel Credo (RV 591) - 2. Et Incarnatus Est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the Advent Choir directed by Gabriel Pavel Credo (RV 591) - 3. Crucifixus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the Advent Choir directed by Gabriel Pavel Nulla in mundo pax sincera (RV 630) - 1. Larghetto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soprano Cristina Piccardi Nulla in mundo pax sincera (RV 630) - 2. Recitativ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soprano Cristina Piccardi Nulla in mundo pax sincera (RV 630) - 3. Allegro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soprano Cristina Piccardi 재생에 문제가 있으면 미디어 도움말을 보십시오.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안토니오 비발디 (영어) 안토니오 비발디 - 월드캣 안토니오 비발디 - 국제 악보 도서관 프로젝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42027007 LCCN: n79021280 ISNI: 0000 0001 2129 9169 GND: 118627287 SELIBR: 100018 SUDOC: 027472183 BNF: cb139008966 (데이터) BIBSYS: 90224852 ULAN: 500336474 뮤직브레인즈: ad79836d-9849-44df-8789-180bbc823f3c NLA: 36529158 NDL: 00527045 NKC: jn19990008800 ICCU: IT\ICCU\CFIV\005228 BNE: XX95876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안토니오_비발디&oldid=24491957" 분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탈리아의 클래식 작곡가이탈리아의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베네치아 출신1678년 태어남1741년 죽음오페라 작곡가17세기 클래식 작곡가18세기 클래식 작곡가17세기 이탈리아 사람18세기 이탈리아 사람오스트리아에 거주한 이탈리아인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신부숨은 분류: 이탈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15 종류의 전거 통제 정보를 포함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B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ymar ar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islama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Mìng-dĕ̤ng-ngṳ̄НохчийнCebuanoChamoruکوردی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Estremeñu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urlanGaeilgeGalegoBahasa HulontaloGaelg客家語/Hak-kâ-ngîעבריתFiji Hindi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KabɩyɛҚазақшаಕನ್ನಡ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Lingua Franca NovaLimburgsLigureLumbaartLietuviųLatviešuMalagasyОлык марий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Кырык марыBahasa MelayuMirandésNāhuatl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LivvinkarjalaਪੰਜਾਬੀPicard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Tarandíne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Саха тыла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SvenskaKiswahili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Vepsän kel’Tiếng ViệtVolapükWinaray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19:5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안토니오 비발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토니오 비발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발디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비발디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기본 정보출생 1678년 3월 4일(1678-03-04) 이탈리아 베네치아사망 1741년 7월 28일 (63세) 이탈리아 베네치아직업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장르 클래식 음악악기 바이올린활동 시기 1701년 ~ 1741년 배우자 無종교 천주교(가톨릭 사제)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이탈리아어: Antonio Lucio Vivaldi, 문화어: 안또니오 비발디, 1678년 3월 4일 ~ 1741년 7월 28일)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직자,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붉은 머리의 사제’(司祭, 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대중화를 시도한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된 《사계》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 머리라서 평생 붉은 머리의 신부라는 조롱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체력이 좋지 않았던 그는 미사보다는 작곡이나 성가대 업무를 주로 보았다. 목차 1 생애 2 주작품 3 영화화 4 미디어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아버지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 성가대의 바이올리니스트를 하기도 했다. 이후 레그렌치에게 작곡을 배웠다. 15세 신학교에 가 23살에 서품을 받았으나, 본디 몸이 약하여 숨이 차서 미사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는 머리가 붉은 색이라 평생 '빨강 머리의 신부'라는 놀림을 받았다. 비발디는 1703년부터 1740년에 걸쳐 대체로 베네치아의 여자 고아원 겸 음악학교이던 피에타 고아원에 근무했으며 1716년에는 피에타 고아원 밴드부의 합주장(合奏長)이 되었다. 이 학원의 학생들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에서도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비발디는 마음껏 해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발디는 그 동안에도 자작한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순회하기도 하고 빈이나 암스테르담으로 가기도 하였다. 1741년에 빈으로 간 비발디는 빈궁 속에 객사(客死)하여 그 곳 빈민묘지에 안치되었다. 이 때의 빈 방문 목적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받으러 간 것으로 추측된다. 비발디의 이름은 그 후 잊혀져 있었으나 대 바흐가 편곡한 작품이 계기가 되어 그 전모가 밝혀졌다. 주작품[편집] 그의 작품은 오페라와 여러 곡의 교회 음악과 기악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을 주로 한 협주곡이 유명하며, 그 때까지의 악곡에 비하여 리듬이 활발하고 노래하듯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독일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흐는 그의 작품을 건반악기 연주용으로 편곡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신포니아 23곡, 합주 협주곡 <조화의 영감>,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4계> 등이 있다. 특히 <4계>는 표제 음악의 표본으로 불린다. 그는 약 500곡이나 되는 기악작품, 약 40곡의 오페라 외에 모테토,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작곡은 처음에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으나 대부분은 수고(手稿) 형태 외엔 남아 있지 않다. 비발디는 무엇보다 우선 토렐리(1658년~1709년), 알비노니(1671년~1750년)들에 의하여 개발된 독주 콘체르토의 세계에서 안정된 양식을 확립시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복수(複數)의 독주악기로 하는 콘체르토도 수없이 썼으나 이것은 대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되었으며 전합주와 독주가 교대하는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했다. 영화화[편집] 대한민국에서 2009년 1월 8일에 그의 생애를 영화화한 《안토니오 비발디-베니스의 왕자》가 개봉되었다. 안토니오 비발디 역에는 스테파노 디오니시가 열연하였다. 미디어[편집] Op. 4 Concerto 1 "Spring" mvt 1: Allegro 비발디의 사계 중 봄 1악장 알레그로, 요한 해리슨 바이올린 Op. 4 Concerto 1 "Spring" mvt 2: Largo 비발디의 사계 중 봄 2악장 라르고, 요한 해리슨 바이올린 Op. 4 Concerto 1 "Spring" mvt 3: Allegr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2 "Summer" mvt 1: Allegro non molt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2 "Summer" mvt 2: Adagi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2 "Summer" mvt 3: Prest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3 "Autumn" mvt 1: Allegr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3 "Autumn" mvt 2: Adagio molt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3 "Autumn" mvt 3: Allegr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4 "Winter" mvt 1: Allegro non molt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4 "Winter" mvt 2: Larg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Op. 4 Concerto 4 "Winter" mvt 3: Allegro From Vivaldi's Four Seasons. John Harrison, Violin Concerto for Oboe and Orchestra in C major (RV 447) - 2. Andante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oboeist Edino Biaggi Credo (RV 591) - 1. Credo in Unum Deum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the Advent Choir directed by Gabriel Pavel Credo (RV 591) - 2. Et Incarnatus Est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the Advent Choir directed by Gabriel Pavel Credo (RV 591) - 3. Crucifixus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the Advent Choir directed by Gabriel Pavel Nulla in mundo pax sincera (RV 630) - 1. Larghetto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soprano Cristina Piccardi Nulla in mundo pax sincera (RV 630) - 2. Recitativ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soprano Cristina Piccardi Nulla in mundo pax sincera (RV 630) - 3. Allegro Performed by the Advent Chamber Orchestra with soprano Cristina Piccardi 재생에 문제가 있으면 미디어 도움말을 보십시오.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안토니오 비발디 (영어) 안토니오 비발디 - 월드캣 안토니오 비발디 - 국제 악보 도서관 프로젝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42027007 LCCN: n79021280 ISNI: 0000 0001 2129 9169 GND: 118627287 SELIBR: 100018 SUDOC: 027472183 BNF: cb139008966 (데이터) BIBSYS: 90224852 ULAN: 500336474 뮤직브레인즈: ad79836d-9849-44df-8789-180bbc823f3c NLA: 36529158 NDL: 00527045 NKC: jn19990008800 ICCU: IT\ICCU\CFIV\005228 BNE: XX95876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안토니오_비발디&oldid=24491957" 분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탈리아의 클래식 작곡가이탈리아의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베네치아 출신1678년 태어남1741년 죽음오페라 작곡가17세기 클래식 작곡가18세기 클래식 작곡가17세기 이탈리아 사람18세기 이탈리아 사람오스트리아에 거주한 이탈리아인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신부숨은 분류: 이탈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15 종류의 전거 통제 정보를 포함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B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ymar ar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islama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Mìng-dĕ̤ng-ngṳ̄НохчийнCebuanoChamoruکوردی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Estremeñu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urlanGaeilgeGalegoBahasa HulontaloGaelg客家語/Hak-kâ-ngîעבריתFiji Hindi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KabɩyɛҚазақшаಕನ್ನಡ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Lingua Franca NovaLimburgsLigureLumbaartLietuviųLatviešuMalagasyОлык марий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Кырык марыBahasa MelayuMirandésNāhuatl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LivvinkarjalaਪੰਜਾਬੀPicard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Tarandíne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Саха тыла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SvenskaKiswahili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Vepsän kel’Tiếng ViệtVolapükWinaray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19:5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장희진 (1944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희진 (1944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희진(張僖辰, 1944년 8월 16일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79년 KBS 드라마 동심초로 데뷔하였다. 목차 1 출연작 1.1 드라마 1.2 연극 1.3 뮤지컬 2 학력 3 경력 4 수상 5 외부 링크 출연작[편집] 드라마[편집] 1995년 《장녹수》 (KBS2) 1997년 《욕망의 바다》 (KBS) 1998년 《왕과 비》 (KBS) 2002년 《야인시대》 (SBS) 2003년 《찔레꽃》 (KBS) 2008년 《우리들의 해피엔딩》 (MBC) 2008년 《땀의 순교자 탁덕 최양업》 (평화방송) 2011년 《광개토태왕》 (KBS) 2012년 《해피앤드 101가지 부부이야기 - 내 어머니, 당신 어머니》 (채널A) 연극[편집] 2010년 《존왕》 2005년 《악극 꿈에 본 내 고향》 뮤지컬[편집] 201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학력[편집]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계성여자고등학교 경력[편집] 1997년 제4회 세계여성극작가대회 한국대표 수상[편집] 1982년 동아연극상 연기상 외부 링크[편집] 네이트 인물정보 - 장희진 네이버 인물정보 - 장희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희진_(1944년)&oldid=20258352" 분류: 1944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서울특별시 출신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연극인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명지대학교 동문계성여자고등학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12월 18일 (월) 13:3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20세 이하 대회에 관한 것입니다. 17세 이하 대회에 대해서는 1991년 FIFA U-17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Campeonato Mundial de Júniores Portugal '91대회 개요개최국 포르투갈개최 기간 6월 14일 ~ 6월 30일참가국 16개 (6개 대륙)경기장 5개 (5개 도시) 최종 순위● 우승국 포르투갈 (2번째 우승)● 준우승국 브라질● 3위 소련● 4위 오스트레일리아통계총 경기수 32경기득점 총합 82골 (경기당 2.56골)총 관중수 731,500명 (경기당 22,859명)최다 득점 선수 세르게이 셰르바코프 (5골)최우수 선수 이밀리우 페이시페어 플레이 소련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1989 1993 → v • d • e • h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는 1991년 6월 14일부터 6월 30일까지 포르투갈에서 열린 8번째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부터 연령 제한이 기존의 19세 이하에서 20세 이하로 상향 조정되었다. 목차 1 개최 도시 및 경기장 2 본선 진출 팀 3 조별 리그 3.1 A조 3.2 B조 3.3 C조 3.4 D조 4 결선 토너먼트 4.1 8강전 4.2 준결승전 4.3 3·4위전 4.4 결승전 5 우승 6 수상 7 최종 순위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기마랑이스 -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리스본 - 이스타디우 다 루스 브라가 -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파루 -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포르투 -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본선 진출 팀[편집] 연맹 예선 본선 진출 팀 AFC (아시아) 1990년 AFC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코리아* 시리아 CAF (아프리카) 1991년 아프리카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코트디부아르 이집트 CONCACAF (북중미&카리브) 1990년 CONCACAF U-20 토너먼트 멕시코 트리니다드 토바고^ CONMEBOL (남아메리카) 1991년 CONMEBOL U-20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OFC (오세아니아) 1990년 O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 오스트레일리아 UEFA (유럽) 1990년 UEFA U-18 축구 선수권 대회 잉글랜드 아일랜드 소련 스페인 스웨덴^ 개최국 포르투갈 (*)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 단일팀(코리아)을 구성하여 참가했다. 이에 따라 시리아가 남은 한 자리를 승계받아 참가했다. (^) : 처음으로 참가한 팀. 조별 리그[편집] 보기 조별 리그를 통과하여 8강에 진출한 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팀 A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포르투갈 6 3 3 0 0 6 0 +6 코리아 3 3 1 1 1 2 2 0 아일랜드 2 3 0 2 1 3 5 −2 아르헨티나 1 3 0 1 2 2 6 −4 1991년 6월 14일21:00 포르투갈 2 : 0 아일랜드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65,000명 심판: 피에를루이지 파이레토 (이탈리아) 핀투 17'카푸슈 78' 리포트 1991년 6월 15일19:00 아르헨티나 0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2,000명 심판: 에르네스토 필리피 (우루과이) 리포트 조인철 88' 1991년 6월 17일19:00 아일랜드 1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5,500명 심판: 로버트 소텔 (캐나다) 매카시 58' 리포트 최철 89' 1991년 6월 17일21:30 포르투갈 3 : 0 아르헨티나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60,000명 심판: 기 후탈스 (벨기에) 질 56'토흐스 80'토니 86'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9:00 아일랜드 2 : 2 아르헨티나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38,000명 심판: 라울 도밍게스 (미국) 오코너 9'갤러거 63' 리포트 델가도 55'몰리나 57' (페널티골) 1991년 6월 20일21:30 포르투갈 1 : 0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38,000명 심판: 엔리케 마린 가요 (칠레) 토흐스 42' 리포트 B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브라질 5 3 2 1 0 6 3 +3 멕시코 4 3 1 2 0 6 3 +3 스웨덴 2 3 1 0 2 4 6 −2 코트디부아르 1 3 0 1 2 3 7 −4 1991년 6월 15일19:00 멕시코 3 : 0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2,000명 심판: 다치 기이치로 (일본) 에르난데스 20'피네다 51'알바레스 아르코스 64' 리포트 1991년 6월 15일21:30 브라질 2 : 1 코트디부아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8,000명 심판: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안드레이 29'루이스 페르난두 79' 리포트 티에히 48' 1991년 6월 17일19:00 브라질 2 : 2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3,500명 심판: 레슬리 어빈 (북아일랜드) 누니스 18'루이스 페르난두 45' 리포트 피네다 57', 67' 1991년 6월 18일19:00 코트디부아르 1 : 4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1,500명 심판: 주앙 마르팅스 핀투 코헤이아 (포르투갈) 맘보 64' (페널티골) 리포트 뢰들룬드 13'빌드 23', 46'안데르손 87' 1991년 6월 20일19:00 코트디부아르 1 : 1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4,000명 심판: 알리 부지사임 (아랍에미리트) 세리 79' 리포트 피네다 83' 1991년 6월 20일21:30 브라질 2 : 0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4,000명 심판: 피에를루이지 파이레토 (이탈리아) 누니스 29'에우베르 78' 리포트 C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오스트레일리아 6 3 3 0 0 4 0 +4 소련 4 3 2 0 1 5 1 +4 이집트 2 3 1 0 2 6 2 +4 트리니다드 토바고 0 3 0 0 3 0 12 −12 1991년 6월 15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2 오스트레일리아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720명 심판: 알베르토 테하다 노리에가 (페루) 리포트 오콘 52'실 76' 1991년 6월 16일17:00 이집트 0 : 1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5,680명 심판: 후안 파블로 에스코바르 로페스 (과테말라) 리포트 셰르바코프 6' 1991년 6월 18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6 이집트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웨이지훙 (중국) 리포트 후세인 8'사데크 24'이스마일 36'사크르 60'엘셰시니 79'압델 아지즈 82' 1991년 6월 18일21:30 오스트레일리아 1 : 0 소련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베른트 하이네만 (독일) 멀로니 21'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7:00 오스트레일리아 1 : 0 이집트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8,8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트라야노프스키 43'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4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8,800명 심판: 이드리사 사르 (모리타니) 리포트 포흘레바예우 9'코노발로프 15'미하일렌코 22'셰르바코프 35' D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스페인 5 3 2 1 0 7 0 +7 시리아 4 3 1 2 0 4 0 +4 잉글랜드 2 3 1 0 2 3 4 −1 우루과이 1 3 0 1 2 0 7 −7 1991년 6월 15일19:30 잉글랜드 0 : 1 스페인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헤나투 마르시글리아 (브라질) 리포트 피에르 84' 1991년 6월 16일19:00 시리아 1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500명 심판: 알하기 파예 (감비아) 마다나 57' 리포트 1991년 6월 18일19:00 스페인 6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다니엘 로뒤트 (스위스) 피에르 10' (페널티골), 34'우르사이스 22', 75', 80' (페널티골)마우리시오 36' 리포트 1991년 6월 18일21:30 잉글랜드 3 : 3 시리아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존 매코넬 (오스트레일리아) 앨런 12'오퍼드 69', 84' 리포트 라마단 18'아와드 27'헬루 65' 1991년 6월 20일19:00 스페인 0 : 0 시리아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000명 심판: 레슬리 어빈 (북아일랜드) 리포트 1991년 6월 20일21:30 잉글랜드 0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000명 심판: 풀 샨도르 (헝가리) 리포트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6월 22일 - 리스본 포르투갈 (AET) 2 6월 26일 - 리스본 멕시코 1 포르투갈 1 6월 23일 - 브라가 오스트레일리아 0 오스트레일리아 (PSO) 1 (5) 6월 30일 - 리스본 시리아 1 (4) 포르투갈 (PSO) 0 (4) 6월 22일 - 포르투 브라질 0 (2) 브라질 5 6월 26일 - 기마랑이스 코리아 1 브라질 3 3·4위전 6월 23일 - 파루 소련 0 스페인 1 오스트레일리아 1 (4) 소련 3 소련 (PSO) 1 (5) 6월 29일 - 포르투 8강전[편집] 1991년 6월 22일18:30 포르투갈 2 : 1 (연장)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90,000명 심판: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토흐스 3' (페널티골)토니 101' 리포트 멘도사 35' 1991년 6월 22일21:30 브라질 5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25,000명 심판: 기 후탈스 (벨기에) 마르키뉴스 15'에우베르 41', 67'자이르 47', 53' 리포트 최철 40' 1991년 6월 23일17:00 오스트레일리아 1 : 1 (연장) 시리아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헤나투 마르시글리아 (브라질) 실 20' 리포트 A. 만도 56' 승부차기 실 오콘 키트너 머스캣 바비치 스탠턴 5 : 4 F. 만도 알칼리파 가에브 압둘 라자크 라마단 시바이 1991년 6월 23일21:30 스페인 1 : 3 소련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3,0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우르사이스 85' 리포트 셰르바코프 35', 64'만드레코 80' 준결승전[편집] 1991년 6월 26일18:30 브라질 3 : 0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22,000명 심판: 라울 도밍게스 (미국) 마르키뉴스 15'카스트루 18'에우베르 32' 리포트 1991년 6월 26일21:30 포르투갈 1 : 0 오스트레일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112,000명 심판: 풀 샨도르 (헝가리) 후이 코스타 31' 리포트 3·4위전[편집] 1991년 6월 29일21:30 오스트레일리아 1 : 1 (연장) 소련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6,000명 심판: 이드리사 사르 (모리타니) 실 87' 리포트 셰르바코프 39' (페널티골) 승부차기 실 오콘 코리카 바비치 포포비치 스탠턴 4 : 5 포흘레바예우 부시마노프 바발라랸 맘추르 셰르바코프 민코 결승전[편집] 1991년 6월 30일19:00 포르투갈 0 : 0 (연장) 브라질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127,0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리포트 승부차기 조르즈 코스타 피구 토흐스 후이 코스타 4 : 2 하몽 에우베르 안드레이 마르키뉴스 우승[편집]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팀 포르투갈2번째 우승 수상[편집] 골든 슈 골든 볼 페어 플레이상 세르게이 셰르바코프 이밀리우 페이시 소련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포르투갈 6 5 1 0 9 1 +8 11 2 브라질 6 4 2 0 14 4 +10 10 3 소련 6 3 1 2 9 6 +3 7 4 오스트레일리아 6 3 2 1 6 3 +3 8 5 스페인 4 2 1 1 8 3 +5 5 6 시리아 4 1 3 0 5 4 +1 5 7 멕시코 4 1 2 1 7 5 +2 4 8 코리아 4 1 1 2 3 7 -4 3 9 이집트 3 1 0 2 6 2 +4 2 10 스웨덴 3 1 0 2 4 6 -2 2 11 잉글랜드 3 0 2 1 3 4 -1 2 12 아일랜드 3 0 2 1 3 5 -2 2 13 코트디부아르 3 0 1 2 3 7 -4 1 14 아르헨티나 3 0 1 2 2 6 -4 1 15 우루과이 3 0 1 2 0 7 -7 1 16 트리니다드 토바고 3 0 0 3 0 12 -12 0 vdeh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U-20 월드컵본선 튀니지 1977년 일본 1979년 오스트레일리아 1981년 멕시코 1983년 소련 1985년 칠레 1987년 사우디아라비아 1989년 포르투갈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1993년 카타르 1995년 말레이시아 1997년 나이지리아 1999년 아르헨티나 2001년 아랍에미리트 2003년 네덜란드 2005년 캐나다 2007년 이집트 2009년 콜롬비아 2011년 터키 2013년 뉴질랜드 2015년 대한민국 2017년 폴란드 2019년 미정 2021년 예선 AFC CAF CONCACAF CONMEBOL OFC UEFA 선수 명단 1977년 1979년 1981년 1983년 1985년 1987년 1989년 1991년 1993년 1995년 1997년 1999년 2001년 2003년 2005년 2007년 2009년 2011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91년_FIFA_세계_청소년_축구_선수권_대회&oldid=24490415" 분류: FIFA U-20 월드컵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1991년 청소년 축구1991년 6월1991년 포르투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14:1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20세 이하 대회에 관한 것입니다. 17세 이하 대회에 대해서는 1991년 FIFA U-17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Campeonato Mundial de Júniores Portugal '91대회 개요개최국 포르투갈개최 기간 6월 14일 ~ 6월 30일참가국 16개 (6개 대륙)경기장 5개 (5개 도시) 최종 순위● 우승국 포르투갈 (2번째 우승)● 준우승국 브라질● 3위 소련● 4위 오스트레일리아통계총 경기수 32경기득점 총합 82골 (경기당 2.56골)총 관중수 731,500명 (경기당 22,859명)최다 득점 선수 세르게이 셰르바코프 (5골)최우수 선수 이밀리우 페이시페어 플레이 소련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1989 1993 → v • d • e • h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는 1991년 6월 14일부터 6월 30일까지 포르투갈에서 열린 8번째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부터 연령 제한이 기존의 19세 이하에서 20세 이하로 상향 조정되었다. 목차 1 개최 도시 및 경기장 2 본선 진출 팀 3 조별 리그 3.1 A조 3.2 B조 3.3 C조 3.4 D조 4 결선 토너먼트 4.1 8강전 4.2 준결승전 4.3 3·4위전 4.4 결승전 5 우승 6 수상 7 최종 순위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기마랑이스 -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리스본 - 이스타디우 다 루스 브라가 -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파루 -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포르투 -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본선 진출 팀[편집] 연맹 예선 본선 진출 팀 AFC (아시아) 1990년 AFC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코리아* 시리아 CAF (아프리카) 1991년 아프리카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코트디부아르 이집트 CONCACAF (북중미&카리브) 1990년 CONCACAF U-20 토너먼트 멕시코 트리니다드 토바고^ CONMEBOL (남아메리카) 1991년 CONMEBOL U-20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OFC (오세아니아) 1990년 O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 오스트레일리아 UEFA (유럽) 1990년 UEFA U-18 축구 선수권 대회 잉글랜드 아일랜드 소련 스페인 스웨덴^ 개최국 포르투갈 (*)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 단일팀(코리아)을 구성하여 참가했다. 이에 따라 시리아가 남은 한 자리를 승계받아 참가했다. (^) : 처음으로 참가한 팀. 조별 리그[편집] 보기 조별 리그를 통과하여 8강에 진출한 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팀 A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포르투갈 6 3 3 0 0 6 0 +6 코리아 3 3 1 1 1 2 2 0 아일랜드 2 3 0 2 1 3 5 −2 아르헨티나 1 3 0 1 2 2 6 −4 1991년 6월 14일21:00 포르투갈 2 : 0 아일랜드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65,000명 심판: 피에를루이지 파이레토 (이탈리아) 핀투 17'카푸슈 78' 리포트 1991년 6월 15일19:00 아르헨티나 0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2,000명 심판: 에르네스토 필리피 (우루과이) 리포트 조인철 88' 1991년 6월 17일19:00 아일랜드 1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5,500명 심판: 로버트 소텔 (캐나다) 매카시 58' 리포트 최철 89' 1991년 6월 17일21:30 포르투갈 3 : 0 아르헨티나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60,000명 심판: 기 후탈스 (벨기에) 질 56'토흐스 80'토니 86'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9:00 아일랜드 2 : 2 아르헨티나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38,000명 심판: 라울 도밍게스 (미국) 오코너 9'갤러거 63' 리포트 델가도 55'몰리나 57' (페널티골) 1991년 6월 20일21:30 포르투갈 1 : 0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38,000명 심판: 엔리케 마린 가요 (칠레) 토흐스 42' 리포트 B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브라질 5 3 2 1 0 6 3 +3 멕시코 4 3 1 2 0 6 3 +3 스웨덴 2 3 1 0 2 4 6 −2 코트디부아르 1 3 0 1 2 3 7 −4 1991년 6월 15일19:00 멕시코 3 : 0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2,000명 심판: 다치 기이치로 (일본) 에르난데스 20'피네다 51'알바레스 아르코스 64' 리포트 1991년 6월 15일21:30 브라질 2 : 1 코트디부아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8,000명 심판: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안드레이 29'루이스 페르난두 79' 리포트 티에히 48' 1991년 6월 17일19:00 브라질 2 : 2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3,500명 심판: 레슬리 어빈 (북아일랜드) 누니스 18'루이스 페르난두 45' 리포트 피네다 57', 67' 1991년 6월 18일19:00 코트디부아르 1 : 4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1,500명 심판: 주앙 마르팅스 핀투 코헤이아 (포르투갈) 맘보 64' (페널티골) 리포트 뢰들룬드 13'빌드 23', 46'안데르손 87' 1991년 6월 20일19:00 코트디부아르 1 : 1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4,000명 심판: 알리 부지사임 (아랍에미리트) 세리 79' 리포트 피네다 83' 1991년 6월 20일21:30 브라질 2 : 0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4,000명 심판: 피에를루이지 파이레토 (이탈리아) 누니스 29'에우베르 78' 리포트 C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오스트레일리아 6 3 3 0 0 4 0 +4 소련 4 3 2 0 1 5 1 +4 이집트 2 3 1 0 2 6 2 +4 트리니다드 토바고 0 3 0 0 3 0 12 −12 1991년 6월 15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2 오스트레일리아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720명 심판: 알베르토 테하다 노리에가 (페루) 리포트 오콘 52'실 76' 1991년 6월 16일17:00 이집트 0 : 1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5,680명 심판: 후안 파블로 에스코바르 로페스 (과테말라) 리포트 셰르바코프 6' 1991년 6월 18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6 이집트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웨이지훙 (중국) 리포트 후세인 8'사데크 24'이스마일 36'사크르 60'엘셰시니 79'압델 아지즈 82' 1991년 6월 18일21:30 오스트레일리아 1 : 0 소련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베른트 하이네만 (독일) 멀로니 21'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7:00 오스트레일리아 1 : 0 이집트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8,8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트라야노프스키 43'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4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8,800명 심판: 이드리사 사르 (모리타니) 리포트 포흘레바예우 9'코노발로프 15'미하일렌코 22'셰르바코프 35' D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스페인 5 3 2 1 0 7 0 +7 시리아 4 3 1 2 0 4 0 +4 잉글랜드 2 3 1 0 2 3 4 −1 우루과이 1 3 0 1 2 0 7 −7 1991년 6월 15일19:30 잉글랜드 0 : 1 스페인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헤나투 마르시글리아 (브라질) 리포트 피에르 84' 1991년 6월 16일19:00 시리아 1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500명 심판: 알하기 파예 (감비아) 마다나 57' 리포트 1991년 6월 18일19:00 스페인 6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다니엘 로뒤트 (스위스) 피에르 10' (페널티골), 34'우르사이스 22', 75', 80' (페널티골)마우리시오 36' 리포트 1991년 6월 18일21:30 잉글랜드 3 : 3 시리아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존 매코넬 (오스트레일리아) 앨런 12'오퍼드 69', 84' 리포트 라마단 18'아와드 27'헬루 65' 1991년 6월 20일19:00 스페인 0 : 0 시리아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000명 심판: 레슬리 어빈 (북아일랜드) 리포트 1991년 6월 20일21:30 잉글랜드 0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000명 심판: 풀 샨도르 (헝가리) 리포트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6월 22일 - 리스본 포르투갈 (AET) 2 6월 26일 - 리스본 멕시코 1 포르투갈 1 6월 23일 - 브라가 오스트레일리아 0 오스트레일리아 (PSO) 1 (5) 6월 30일 - 리스본 시리아 1 (4) 포르투갈 (PSO) 0 (4) 6월 22일 - 포르투 브라질 0 (2) 브라질 5 6월 26일 - 기마랑이스 코리아 1 브라질 3 3·4위전 6월 23일 - 파루 소련 0 스페인 1 오스트레일리아 1 (4) 소련 3 소련 (PSO) 1 (5) 6월 29일 - 포르투 8강전[편집] 1991년 6월 22일18:30 포르투갈 2 : 1 (연장)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90,000명 심판: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토흐스 3' (페널티골)토니 101' 리포트 멘도사 35' 1991년 6월 22일21:30 브라질 5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25,000명 심판: 기 후탈스 (벨기에) 마르키뉴스 15'에우베르 41', 67'자이르 47', 53' 리포트 최철 40' 1991년 6월 23일17:00 오스트레일리아 1 : 1 (연장) 시리아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헤나투 마르시글리아 (브라질) 실 20' 리포트 A. 만도 56' 승부차기 실 오콘 키트너 머스캣 바비치 스탠턴 5 : 4 F. 만도 알칼리파 가에브 압둘 라자크 라마단 시바이 1991년 6월 23일21:30 스페인 1 : 3 소련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3,0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우르사이스 85' 리포트 셰르바코프 35', 64'만드레코 80' 준결승전[편집] 1991년 6월 26일18:30 브라질 3 : 0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22,000명 심판: 라울 도밍게스 (미국) 마르키뉴스 15'카스트루 18'에우베르 32' 리포트 1991년 6월 26일21:30 포르투갈 1 : 0 오스트레일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112,000명 심판: 풀 샨도르 (헝가리) 후이 코스타 31' 리포트 3·4위전[편집] 1991년 6월 29일21:30 오스트레일리아 1 : 1 (연장) 소련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6,000명 심판: 이드리사 사르 (모리타니) 실 87' 리포트 셰르바코프 39' (페널티골) 승부차기 실 오콘 코리카 바비치 포포비치 스탠턴 4 : 5 포흘레바예우 부시마노프 바발라랸 맘추르 셰르바코프 민코 결승전[편집] 1991년 6월 30일19:00 포르투갈 0 : 0 (연장) 브라질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127,0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리포트 승부차기 조르즈 코스타 피구 토흐스 후이 코스타 4 : 2 하몽 에우베르 안드레이 마르키뉴스 우승[편집]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팀 포르투갈2번째 우승 수상[편집] 골든 슈 골든 볼 페어 플레이상 세르게이 셰르바코프 이밀리우 페이시 소련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포르투갈 6 5 1 0 9 1 +8 11 2 브라질 6 4 2 0 14 4 +10 10 3 소련 6 3 1 2 9 6 +3 7 4 오스트레일리아 6 3 2 1 6 3 +3 8 5 스페인 4 2 1 1 8 3 +5 5 6 시리아 4 1 3 0 5 4 +1 5 7 멕시코 4 1 2 1 7 5 +2 4 8 코리아 4 1 1 2 3 7 -4 3 9 이집트 3 1 0 2 6 2 +4 2 10 스웨덴 3 1 0 2 4 6 -2 2 11 잉글랜드 3 0 2 1 3 4 -1 2 12 아일랜드 3 0 2 1 3 5 -2 2 13 코트디부아르 3 0 1 2 3 7 -4 1 14 아르헨티나 3 0 1 2 2 6 -4 1 15 우루과이 3 0 1 2 0 7 -7 1 16 트리니다드 토바고 3 0 0 3 0 12 -12 0 vdeh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U-20 월드컵본선 튀니지 1977년 일본 1979년 오스트레일리아 1981년 멕시코 1983년 소련 1985년 칠레 1987년 사우디아라비아 1989년 포르투갈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1993년 카타르 1995년 말레이시아 1997년 나이지리아 1999년 아르헨티나 2001년 아랍에미리트 2003년 네덜란드 2005년 캐나다 2007년 이집트 2009년 콜롬비아 2011년 터키 2013년 뉴질랜드 2015년 대한민국 2017년 폴란드 2019년 미정 2021년 예선 AFC CAF CONCACAF CONMEBOL OFC UEFA 선수 명단 1977년 1979년 1981년 1983년 1985년 1987년 1989년 1991년 1993년 1995년 1997년 1999년 2001년 2003년 2005년 2007년 2009년 2011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91년_FIFA_세계_청소년_축구_선수권_대회&oldid=24490415" 분류: FIFA U-20 월드컵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1991년 청소년 축구1991년 6월1991년 포르투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14:1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20세 이하 대회에 관한 것입니다. 17세 이하 대회에 대해서는 1991년 FIFA U-17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Campeonato Mundial de Júniores Portugal '91대회 개요개최국 포르투갈개최 기간 6월 14일 ~ 6월 30일참가국 16개 (6개 대륙)경기장 5개 (5개 도시) 최종 순위● 우승국 포르투갈 (2번째 우승)● 준우승국 브라질● 3위 소련● 4위 오스트레일리아통계총 경기수 32경기득점 총합 82골 (경기당 2.56골)총 관중수 731,500명 (경기당 22,859명)최다 득점 선수 세르게이 셰르바코프 (5골)최우수 선수 이밀리우 페이시페어 플레이 소련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1989 1993 → v • d • e • h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는 1991년 6월 14일부터 6월 30일까지 포르투갈에서 열린 8번째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부터 연령 제한이 기존의 19세 이하에서 20세 이하로 상향 조정되었다. 목차 1 개최 도시 및 경기장 2 본선 진출 팀 3 조별 리그 3.1 A조 3.2 B조 3.3 C조 3.4 D조 4 결선 토너먼트 4.1 8강전 4.2 준결승전 4.3 3·4위전 4.4 결승전 5 우승 6 수상 7 최종 순위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기마랑이스 -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리스본 - 이스타디우 다 루스 브라가 -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파루 -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포르투 -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본선 진출 팀[편집] 연맹 예선 본선 진출 팀 AFC (아시아) 1990년 AFC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코리아* 시리아 CAF (아프리카) 1991년 아프리카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코트디부아르 이집트 CONCACAF (북중미&카리브) 1990년 CONCACAF U-20 토너먼트 멕시코 트리니다드 토바고^ CONMEBOL (남아메리카) 1991년 CONMEBOL U-20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OFC (오세아니아) 1990년 O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 오스트레일리아 UEFA (유럽) 1990년 UEFA U-18 축구 선수권 대회 잉글랜드 아일랜드 소련 스페인 스웨덴^ 개최국 포르투갈 (*)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 단일팀(코리아)을 구성하여 참가했다. 이에 따라 시리아가 남은 한 자리를 승계받아 참가했다. (^) : 처음으로 참가한 팀. 조별 리그[편집] 보기 조별 리그를 통과하여 8강에 진출한 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팀 A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포르투갈 6 3 3 0 0 6 0 +6 코리아 3 3 1 1 1 2 2 0 아일랜드 2 3 0 2 1 3 5 −2 아르헨티나 1 3 0 1 2 2 6 −4 1991년 6월 14일21:00 포르투갈 2 : 0 아일랜드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65,000명 심판: 피에를루이지 파이레토 (이탈리아) 핀투 17'카푸슈 78' 리포트 1991년 6월 15일19:00 아르헨티나 0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2,000명 심판: 에르네스토 필리피 (우루과이) 리포트 조인철 88' 1991년 6월 17일19:00 아일랜드 1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5,500명 심판: 로버트 소텔 (캐나다) 매카시 58' 리포트 최철 89' 1991년 6월 17일21:30 포르투갈 3 : 0 아르헨티나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60,000명 심판: 기 후탈스 (벨기에) 질 56'토흐스 80'토니 86'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9:00 아일랜드 2 : 2 아르헨티나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38,000명 심판: 라울 도밍게스 (미국) 오코너 9'갤러거 63' 리포트 델가도 55'몰리나 57' (페널티골) 1991년 6월 20일21:30 포르투갈 1 : 0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38,000명 심판: 엔리케 마린 가요 (칠레) 토흐스 42' 리포트 B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브라질 5 3 2 1 0 6 3 +3 멕시코 4 3 1 2 0 6 3 +3 스웨덴 2 3 1 0 2 4 6 −2 코트디부아르 1 3 0 1 2 3 7 −4 1991년 6월 15일19:00 멕시코 3 : 0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2,000명 심판: 다치 기이치로 (일본) 에르난데스 20'피네다 51'알바레스 아르코스 64' 리포트 1991년 6월 15일21:30 브라질 2 : 1 코트디부아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8,000명 심판: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안드레이 29'루이스 페르난두 79' 리포트 티에히 48' 1991년 6월 17일19:00 브라질 2 : 2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3,500명 심판: 레슬리 어빈 (북아일랜드) 누니스 18'루이스 페르난두 45' 리포트 피네다 57', 67' 1991년 6월 18일19:00 코트디부아르 1 : 4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1,500명 심판: 주앙 마르팅스 핀투 코헤이아 (포르투갈) 맘보 64' (페널티골) 리포트 뢰들룬드 13'빌드 23', 46'안데르손 87' 1991년 6월 20일19:00 코트디부아르 1 : 1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4,000명 심판: 알리 부지사임 (아랍에미리트) 세리 79' 리포트 피네다 83' 1991년 6월 20일21:30 브라질 2 : 0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4,000명 심판: 피에를루이지 파이레토 (이탈리아) 누니스 29'에우베르 78' 리포트 C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오스트레일리아 6 3 3 0 0 4 0 +4 소련 4 3 2 0 1 5 1 +4 이집트 2 3 1 0 2 6 2 +4 트리니다드 토바고 0 3 0 0 3 0 12 −12 1991년 6월 15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2 오스트레일리아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720명 심판: 알베르토 테하다 노리에가 (페루) 리포트 오콘 52'실 76' 1991년 6월 16일17:00 이집트 0 : 1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5,680명 심판: 후안 파블로 에스코바르 로페스 (과테말라) 리포트 셰르바코프 6' 1991년 6월 18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6 이집트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웨이지훙 (중국) 리포트 후세인 8'사데크 24'이스마일 36'사크르 60'엘셰시니 79'압델 아지즈 82' 1991년 6월 18일21:30 오스트레일리아 1 : 0 소련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베른트 하이네만 (독일) 멀로니 21'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7:00 오스트레일리아 1 : 0 이집트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8,8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트라야노프스키 43'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4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8,800명 심판: 이드리사 사르 (모리타니) 리포트 포흘레바예우 9'코노발로프 15'미하일렌코 22'셰르바코프 35' D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스페인 5 3 2 1 0 7 0 +7 시리아 4 3 1 2 0 4 0 +4 잉글랜드 2 3 1 0 2 3 4 −1 우루과이 1 3 0 1 2 0 7 −7 1991년 6월 15일19:30 잉글랜드 0 : 1 스페인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헤나투 마르시글리아 (브라질) 리포트 피에르 84' 1991년 6월 16일19:00 시리아 1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500명 심판: 알하기 파예 (감비아) 마다나 57' 리포트 1991년 6월 18일19:00 스페인 6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다니엘 로뒤트 (스위스) 피에르 10' (페널티골), 34'우르사이스 22', 75', 80' (페널티골)마우리시오 36' 리포트 1991년 6월 18일21:30 잉글랜드 3 : 3 시리아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존 매코넬 (오스트레일리아) 앨런 12'오퍼드 69', 84' 리포트 라마단 18'아와드 27'헬루 65' 1991년 6월 20일19:00 스페인 0 : 0 시리아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000명 심판: 레슬리 어빈 (북아일랜드) 리포트 1991년 6월 20일21:30 잉글랜드 0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000명 심판: 풀 샨도르 (헝가리) 리포트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6월 22일 - 리스본 포르투갈 (AET) 2 6월 26일 - 리스본 멕시코 1 포르투갈 1 6월 23일 - 브라가 오스트레일리아 0 오스트레일리아 (PSO) 1 (5) 6월 30일 - 리스본 시리아 1 (4) 포르투갈 (PSO) 0 (4) 6월 22일 - 포르투 브라질 0 (2) 브라질 5 6월 26일 - 기마랑이스 코리아 1 브라질 3 3·4위전 6월 23일 - 파루 소련 0 스페인 1 오스트레일리아 1 (4) 소련 3 소련 (PSO) 1 (5) 6월 29일 - 포르투 8강전[편집] 1991년 6월 22일18:30 포르투갈 2 : 1 (연장)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90,000명 심판: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토흐스 3' (페널티골)토니 101' 리포트 멘도사 35' 1991년 6월 22일21:30 브라질 5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25,000명 심판: 기 후탈스 (벨기에) 마르키뉴스 15'에우베르 41', 67'자이르 47', 53' 리포트 최철 40' 1991년 6월 23일17:00 오스트레일리아 1 : 1 (연장) 시리아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헤나투 마르시글리아 (브라질) 실 20' 리포트 A. 만도 56' 승부차기 실 오콘 키트너 머스캣 바비치 스탠턴 5 : 4 F. 만도 알칼리파 가에브 압둘 라자크 라마단 시바이 1991년 6월 23일21:30 스페인 1 : 3 소련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3,0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우르사이스 85' 리포트 셰르바코프 35', 64'만드레코 80' 준결승전[편집] 1991년 6월 26일18:30 브라질 3 : 0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22,000명 심판: 라울 도밍게스 (미국) 마르키뉴스 15'카스트루 18'에우베르 32' 리포트 1991년 6월 26일21:30 포르투갈 1 : 0 오스트레일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112,000명 심판: 풀 샨도르 (헝가리) 후이 코스타 31' 리포트 3·4위전[편집] 1991년 6월 29일21:30 오스트레일리아 1 : 1 (연장) 소련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6,000명 심판: 이드리사 사르 (모리타니) 실 87' 리포트 셰르바코프 39' (페널티골) 승부차기 실 오콘 코리카 바비치 포포비치 스탠턴 4 : 5 포흘레바예우 부시마노프 바발라랸 맘추르 셰르바코프 민코 결승전[편집] 1991년 6월 30일19:00 포르투갈 0 : 0 (연장) 브라질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127,0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리포트 승부차기 조르즈 코스타 피구 토흐스 후이 코스타 4 : 2 하몽 에우베르 안드레이 마르키뉴스 우승[편집]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팀 포르투갈2번째 우승 수상[편집] 골든 슈 골든 볼 페어 플레이상 세르게이 셰르바코프 이밀리우 페이시 소련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포르투갈 6 5 1 0 9 1 +8 11 2 브라질 6 4 2 0 14 4 +10 10 3 소련 6 3 1 2 9 6 +3 7 4 오스트레일리아 6 3 2 1 6 3 +3 8 5 스페인 4 2 1 1 8 3 +5 5 6 시리아 4 1 3 0 5 4 +1 5 7 멕시코 4 1 2 1 7 5 +2 4 8 코리아 4 1 1 2 3 7 -4 3 9 이집트 3 1 0 2 6 2 +4 2 10 스웨덴 3 1 0 2 4 6 -2 2 11 잉글랜드 3 0 2 1 3 4 -1 2 12 아일랜드 3 0 2 1 3 5 -2 2 13 코트디부아르 3 0 1 2 3 7 -4 1 14 아르헨티나 3 0 1 2 2 6 -4 1 15 우루과이 3 0 1 2 0 7 -7 1 16 트리니다드 토바고 3 0 0 3 0 12 -12 0 vdeh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U-20 월드컵본선 튀니지 1977년 일본 1979년 오스트레일리아 1981년 멕시코 1983년 소련 1985년 칠레 1987년 사우디아라비아 1989년 포르투갈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1993년 카타르 1995년 말레이시아 1997년 나이지리아 1999년 아르헨티나 2001년 아랍에미리트 2003년 네덜란드 2005년 캐나다 2007년 이집트 2009년 콜롬비아 2011년 터키 2013년 뉴질랜드 2015년 대한민국 2017년 폴란드 2019년 미정 2021년 예선 AFC CAF CONCACAF CONMEBOL OFC UEFA 선수 명단 1977년 1979년 1981년 1983년 1985년 1987년 1989년 1991년 1993년 1995년 1997년 1999년 2001년 2003년 2005년 2007년 2009년 2011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91년_FIFA_세계_청소년_축구_선수권_대회&oldid=24490415" 분류: FIFA U-20 월드컵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1991년 청소년 축구1991년 6월1991년 포르투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14:1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20세 이하 대회에 관한 것입니다. 17세 이하 대회에 대해서는 1991년 FIFA U-17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Campeonato Mundial de Júniores Portugal '91대회 개요개최국 포르투갈개최 기간 6월 14일 ~ 6월 30일참가국 16개 (6개 대륙)경기장 5개 (5개 도시) 최종 순위● 우승국 포르투갈 (2번째 우승)● 준우승국 브라질● 3위 소련● 4위 오스트레일리아통계총 경기수 32경기득점 총합 82골 (경기당 2.56골)총 관중수 731,500명 (경기당 22,859명)최다 득점 선수 세르게이 셰르바코프 (5골)최우수 선수 이밀리우 페이시페어 플레이 소련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1989 1993 → v • d • e • h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는 1991년 6월 14일부터 6월 30일까지 포르투갈에서 열린 8번째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부터 연령 제한이 기존의 19세 이하에서 20세 이하로 상향 조정되었다. 목차 1 개최 도시 및 경기장 2 본선 진출 팀 3 조별 리그 3.1 A조 3.2 B조 3.3 C조 3.4 D조 4 결선 토너먼트 4.1 8강전 4.2 준결승전 4.3 3·4위전 4.4 결승전 5 우승 6 수상 7 최종 순위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기마랑이스 -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리스본 - 이스타디우 다 루스 브라가 -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파루 -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포르투 -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본선 진출 팀[편집] 연맹 예선 본선 진출 팀 AFC (아시아) 1990년 AFC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코리아* 시리아 CAF (아프리카) 1991년 아프리카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코트디부아르 이집트 CONCACAF (북중미&카리브) 1990년 CONCACAF U-20 토너먼트 멕시코 트리니다드 토바고^ CONMEBOL (남아메리카) 1991년 CONMEBOL U-20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OFC (오세아니아) 1990년 O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 오스트레일리아 UEFA (유럽) 1990년 UEFA U-18 축구 선수권 대회 잉글랜드 아일랜드 소련 스페인 스웨덴^ 개최국 포르투갈 (*)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 단일팀(코리아)을 구성하여 참가했다. 이에 따라 시리아가 남은 한 자리를 승계받아 참가했다. (^) : 처음으로 참가한 팀. 조별 리그[편집] 보기 조별 리그를 통과하여 8강에 진출한 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팀 A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포르투갈 6 3 3 0 0 6 0 +6 코리아 3 3 1 1 1 2 2 0 아일랜드 2 3 0 2 1 3 5 −2 아르헨티나 1 3 0 1 2 2 6 −4 1991년 6월 14일21:00 포르투갈 2 : 0 아일랜드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65,000명 심판: 피에를루이지 파이레토 (이탈리아) 핀투 17'카푸슈 78' 리포트 1991년 6월 15일19:00 아르헨티나 0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2,000명 심판: 에르네스토 필리피 (우루과이) 리포트 조인철 88' 1991년 6월 17일19:00 아일랜드 1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5,500명 심판: 로버트 소텔 (캐나다) 매카시 58' 리포트 최철 89' 1991년 6월 17일21:30 포르투갈 3 : 0 아르헨티나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60,000명 심판: 기 후탈스 (벨기에) 질 56'토흐스 80'토니 86'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9:00 아일랜드 2 : 2 아르헨티나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38,000명 심판: 라울 도밍게스 (미국) 오코너 9'갤러거 63' 리포트 델가도 55'몰리나 57' (페널티골) 1991년 6월 20일21:30 포르투갈 1 : 0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38,000명 심판: 엔리케 마린 가요 (칠레) 토흐스 42' 리포트 B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브라질 5 3 2 1 0 6 3 +3 멕시코 4 3 1 2 0 6 3 +3 스웨덴 2 3 1 0 2 4 6 −2 코트디부아르 1 3 0 1 2 3 7 −4 1991년 6월 15일19:00 멕시코 3 : 0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2,000명 심판: 다치 기이치로 (일본) 에르난데스 20'피네다 51'알바레스 아르코스 64' 리포트 1991년 6월 15일21:30 브라질 2 : 1 코트디부아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8,000명 심판: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안드레이 29'루이스 페르난두 79' 리포트 티에히 48' 1991년 6월 17일19:00 브라질 2 : 2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3,500명 심판: 레슬리 어빈 (북아일랜드) 누니스 18'루이스 페르난두 45' 리포트 피네다 57', 67' 1991년 6월 18일19:00 코트디부아르 1 : 4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1,500명 심판: 주앙 마르팅스 핀투 코헤이아 (포르투갈) 맘보 64' (페널티골) 리포트 뢰들룬드 13'빌드 23', 46'안데르손 87' 1991년 6월 20일19:00 코트디부아르 1 : 1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4,000명 심판: 알리 부지사임 (아랍에미리트) 세리 79' 리포트 피네다 83' 1991년 6월 20일21:30 브라질 2 : 0 스웨덴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4,000명 심판: 피에를루이지 파이레토 (이탈리아) 누니스 29'에우베르 78' 리포트 C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오스트레일리아 6 3 3 0 0 4 0 +4 소련 4 3 2 0 1 5 1 +4 이집트 2 3 1 0 2 6 2 +4 트리니다드 토바고 0 3 0 0 3 0 12 −12 1991년 6월 15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2 오스트레일리아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720명 심판: 알베르토 테하다 노리에가 (페루) 리포트 오콘 52'실 76' 1991년 6월 16일17:00 이집트 0 : 1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5,680명 심판: 후안 파블로 에스코바르 로페스 (과테말라) 리포트 셰르바코프 6' 1991년 6월 18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6 이집트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웨이지훙 (중국) 리포트 후세인 8'사데크 24'이스마일 36'사크르 60'엘셰시니 79'압델 아지즈 82' 1991년 6월 18일21:30 오스트레일리아 1 : 0 소련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베른트 하이네만 (독일) 멀로니 21'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7:00 오스트레일리아 1 : 0 이집트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8,8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트라야노프스키 43' 리포트 1991년 6월 20일19:30 트리니다드 토바고 0 : 4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8,800명 심판: 이드리사 사르 (모리타니) 리포트 포흘레바예우 9'코노발로프 15'미하일렌코 22'셰르바코프 35' D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스페인 5 3 2 1 0 7 0 +7 시리아 4 3 1 2 0 4 0 +4 잉글랜드 2 3 1 0 2 3 4 −1 우루과이 1 3 0 1 2 0 7 −7 1991년 6월 15일19:30 잉글랜드 0 : 1 스페인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헤나투 마르시글리아 (브라질) 리포트 피에르 84' 1991년 6월 16일19:00 시리아 1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500명 심판: 알하기 파예 (감비아) 마다나 57' 리포트 1991년 6월 18일19:00 스페인 6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다니엘 로뒤트 (스위스) 피에르 10' (페널티골), 34'우르사이스 22', 75', 80' (페널티골)마우리시오 36' 리포트 1991년 6월 18일21:30 잉글랜드 3 : 3 시리아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1,500명 심판: 존 매코넬 (오스트레일리아) 앨런 12'오퍼드 69', 84' 리포트 라마단 18'아와드 27'헬루 65' 1991년 6월 20일19:00 스페인 0 : 0 시리아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000명 심판: 레슬리 어빈 (북아일랜드) 리포트 1991년 6월 20일21:30 잉글랜드 0 : 0 우루과이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5,000명 심판: 풀 샨도르 (헝가리) 리포트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6월 22일 - 리스본 포르투갈 (AET) 2 6월 26일 - 리스본 멕시코 1 포르투갈 1 6월 23일 - 브라가 오스트레일리아 0 오스트레일리아 (PSO) 1 (5) 6월 30일 - 리스본 시리아 1 (4) 포르투갈 (PSO) 0 (4) 6월 22일 - 포르투 브라질 0 (2) 브라질 5 6월 26일 - 기마랑이스 코리아 1 브라질 3 3·4위전 6월 23일 - 파루 소련 0 스페인 1 오스트레일리아 1 (4) 소련 3 소련 (PSO) 1 (5) 6월 29일 - 포르투 8강전[편집] 1991년 6월 22일18:30 포르투갈 2 : 1 (연장) 멕시코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90,000명 심판: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토흐스 3' (페널티골)토니 101' 리포트 멘도사 35' 1991년 6월 22일21:30 브라질 5 : 1 코리아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25,000명 심판: 기 후탈스 (벨기에) 마르키뉴스 15'에우베르 41', 67'자이르 47', 53' 리포트 최철 40' 1991년 6월 23일17:00 오스트레일리아 1 : 1 (연장) 시리아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관중수: 10,000명 심판: 헤나투 마르시글리아 (브라질) 실 20' 리포트 A. 만도 56' 승부차기 실 오콘 키트너 머스캣 바비치 스탠턴 5 : 4 F. 만도 알칼리파 가에브 압둘 라자크 라마단 시바이 1991년 6월 23일21:30 스페인 1 : 3 소련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관중수: 13,0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우르사이스 85' 리포트 셰르바코프 35', 64'만드레코 80' 준결승전[편집] 1991년 6월 26일18:30 브라질 3 : 0 소련 이스타디우 D. 아폰수 엔히크스 (기마랑이스) 관중수: 22,000명 심판: 라울 도밍게스 (미국) 마르키뉴스 15'카스트루 18'에우베르 32' 리포트 1991년 6월 26일21:30 포르투갈 1 : 0 오스트레일리아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112,000명 심판: 풀 샨도르 (헝가리) 후이 코스타 31' 리포트 3·4위전[편집] 1991년 6월 29일21:30 오스트레일리아 1 : 1 (연장) 소련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관중수: 6,000명 심판: 이드리사 사르 (모리타니) 실 87' 리포트 셰르바코프 39' (페널티골) 승부차기 실 오콘 코리카 바비치 포포비치 스탠턴 4 : 5 포흘레바예우 부시마노프 바발라랸 맘추르 셰르바코프 민코 결승전[편집] 1991년 6월 30일19:00 포르투갈 0 : 0 (연장) 브라질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관중수: 127,000명 심판: 프란시스코 라몰리나 (아르헨티나) 리포트 승부차기 조르즈 코스타 피구 토흐스 후이 코스타 4 : 2 하몽 에우베르 안드레이 마르키뉴스 우승[편집]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팀 포르투갈2번째 우승 수상[편집] 골든 슈 골든 볼 페어 플레이상 세르게이 셰르바코프 이밀리우 페이시 소련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포르투갈 6 5 1 0 9 1 +8 11 2 브라질 6 4 2 0 14 4 +10 10 3 소련 6 3 1 2 9 6 +3 7 4 오스트레일리아 6 3 2 1 6 3 +3 8 5 스페인 4 2 1 1 8 3 +5 5 6 시리아 4 1 3 0 5 4 +1 5 7 멕시코 4 1 2 1 7 5 +2 4 8 코리아 4 1 1 2 3 7 -4 3 9 이집트 3 1 0 2 6 2 +4 2 10 스웨덴 3 1 0 2 4 6 -2 2 11 잉글랜드 3 0 2 1 3 4 -1 2 12 아일랜드 3 0 2 1 3 5 -2 2 13 코트디부아르 3 0 1 2 3 7 -4 1 14 아르헨티나 3 0 1 2 2 6 -4 1 15 우루과이 3 0 1 2 0 7 -7 1 16 트리니다드 토바고 3 0 0 3 0 12 -12 0 vdeh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U-20 월드컵본선 튀니지 1977년 일본 1979년 오스트레일리아 1981년 멕시코 1983년 소련 1985년 칠레 1987년 사우디아라비아 1989년 포르투갈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1993년 카타르 1995년 말레이시아 1997년 나이지리아 1999년 아르헨티나 2001년 아랍에미리트 2003년 네덜란드 2005년 캐나다 2007년 이집트 2009년 콜롬비아 2011년 터키 2013년 뉴질랜드 2015년 대한민국 2017년 폴란드 2019년 미정 2021년 예선 AFC CAF CONCACAF CONMEBOL OFC UEFA 선수 명단 1977년 1979년 1981년 1983년 1985년 1987년 1989년 1991년 1993년 1995년 1997년 1999년 2001년 2003년 2005년 2007년 2009년 2011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91년_FIFA_세계_청소년_축구_선수권_대회&oldid=24490415" 분류: FIFA U-20 월드컵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1991년 청소년 축구1991년 6월1991년 포르투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14:1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라응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라응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글의 정확성과 사실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0년 10월 13일) 라응찬출생 1938년 11월 25일(1938-11-25) (80세)국적 대한민국 경상북도 상주 본관 안정학력 상주초등학교 졸업상주중학교 졸업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직업 기업인소속 前 신한금융그룹 대표이사 회장상훈 1987년 국민훈장 목련장(4등급)1996년 국민훈장 목단장(현 모란장, 2등급)2003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라응찬(羅應燦, 1938년 11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목차 1 경력 2 수상 3 차명계좌 논란 4 각주 경력[편집] 2001년 8월~2010년 10월 - 신한금융그룹 대표이사 회장 2000년 5월~2001년 8월 - 신한은행 비상근 회장 1999년 8월 - 제9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경제과학분과 위원장 1999년 2월~2000년 5월 - 신한은행 부회장 1998년 4월~현재 -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1991년 2월~1999년 2월 - 신한은행 은행장 1988년 2월 - 신한은행 전무이사 1982년 7월 - 신한은행 상무이사 1979년 2월 - 제일투자금융(현 신한은행) 상무이사 1977년 7월 - 제일투자금융 이사 1975년 - 대구은행 지점장, 비서실장 1959년 - 1977년 - 농업은행 입사, 근무 수상[편집] 2009년 언스트앤영 최우수기업가상 금융서비스부문상 2007년 월간조선 2007 대한민국 경제리더 대상 2003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99년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 1996년 국민훈장 목단장(현 모란장, 2등급) 1995년 산업포장 1987년 국민훈장 목련장(4등급) 차명계좌 논란[편집] 2010년 9월 2일, 신한은행이 신상훈 신한금융그룹 사장을 의해 횡령, 배임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는 것으로 논란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9일, 라응찬은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과 이백순 신한은행장과 함께 일본 나고야로 출국하였다. 이어 13일, 라응찬 회장은 5개의 시민 단체들에 의해 2007년 3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50억원을 송금하는 등 금융거래실명제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여 고발되었다. 16일에 사내 게시판을 통해 사태를 설명하는 글을 올렸고, 신한금융은 일간지를 통하여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10월 7일, 금융감독원은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라응찬 회장에 대한 중징계를 통보하였다.[1] 라응찬 회장은 27일에 귀국하려던 일정을 단축하여 25일 오후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대한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에 당도하였다.[2] 결국 10월 30일에 라응찬 회장은 공식 사퇴하고, 류시열 이사가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다.[3] 금융감독원에 의해 3개월 직무정치가 처분되었다. 각주[편집] ↑ `신한금융사태 일지`..라응찬 회장 사퇴까지 ↑ '빈손 귀국' 라응찬 자진사퇴 수순? 30일 이사회서 거취 표명 여부 촉각 ↑ 라응찬 회장 사퇴...류시열 직무대행 선임 이 글은 금융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라응찬&oldid=24220734" 분류: 193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은행가상주중학교 (경북) 동문상주초등학교 (경북) 동문선린상업고등학교 동문상주시 출신안정 라씨숨은 분류: 정확성에 논란이 있는 글/2010년 10월정확성에 논란이 있는 모든 글금융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4일 (화) 17: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Deli Spice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Deli Spice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Deli Spice델리스파이스의 정규 음반발매일 1997년 8월 8일2005년 12월 7일 (재발매)녹음 1997년장르 모던 록인디록길이 44:23레이블 뮤직디자인(전)디앤씨뮤직(후)프로듀서 델리스파이스델리스파이스 연표 Deli Spice(1997년) Welcome To The Delihouse(1999년) 《Deli Spice》는 1997년 8월 8일에 발매된 델리스파이스의 데뷔 및 첫 번째 정규 앨범이다. 총 11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타이틀 곡은 2번 트랙인 〈가면〉이다. 3번 트랙 〈차우차우〉가 2002년에 개봉된 영화 《후아유》의 삽입곡으로 쓰이면서 밴드의 이름이 알리지게 되었는데, 영화에 삽입된 판은 보컬을 맡았던 김민규의 목소리가 낮춰지는 대신 현악기의 음색이 강조되어 있다. 밴드의 리더인 김민규에 의해 음반의 판권이 뮤직디자인에서 문라이즈로 이양되면서, 디앤씨뮤직을 통해 2005년 12월 7일에 재발매되었다. 목차 1 음반 소개 2 수록곡 3 만든 사람들 4 각주 5 외부 링크 음반 소개[편집] 델리스파이스의 시그니쳐송을 넘어 올타임 클래식이 된 ‘챠우챠우’는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 혹은 R.E.M.의 ‘Losing My Religion’에 대한 국내 인디의 서정적인 대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안문화의 붐이 일던 1990년대의 특수성이 깃들어 있고, 영향받았으되 온전히 로컬한 문화적 감수성으로 재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당시 라디오와 공연을 관람한 이들의 입소문으로 호응을 얻었던 ‘챠우챠우’는 같은 프레이즈가 반복되는 형식이면서도 ‘(아무리 애를 쓰고 귀를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전부인 단조로운 가사를 신선한 연주와 아름다운 멜로디로 뛰어넘은 특별한 노래가 되었다. ‘인디펜던트’ 이전에 ‘언더그라운드’가 추구하던 헤비메탈 밴드의 스타일을 탈피, U2나 R.E.M.이나 스미스로부터 영향받았을 찰랑거리는 기타 위주의 유미적인 노래를 선보였던 델리스파이스는 도발적인 펑크의 축을 담당한 크라잉 넛이나 노브레인과 함께 국내 인디 문화의 시작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당시 델리의 초기 멤버는 김민규, 윤준호, 이승기, 오인록으로, 통신 모임 하이텔에서 구인을 통해 만났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수록곡 중 ‘No Carrier’는 통신상에서 접속 불능을 의미하는 표시다.[1] 수록곡[편집] Disk 1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노 캐리어 윤준호윤준호 4:13 2. 가면 김민규김민규 4:07 3. 챠우챠우-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민규김민규 4:28 4. 콘 후레이크 김민규김민규 3:01 5. 기쁨이 들리지 않는 거리 김민규김민규 4:37 6. 저승 탐방기 김민규김민규 3:19 7. 귀향 김민규김민규 3:40 8. 누가? 김민규김민규, 오인록 4:00 9. 투명인간 김민규김민규 2:57 10. 오랜만의 외출 김민규김민규 3:32 11. 사수자리 김민규김민규 6:29 총 재생 시간: 44:23 만든 사람들[편집] 프로듀서: 델리스파이스 레코딩 엔지니어: 변성복, 배진호 믹싱 엔지니어: 변성복 기획사: 뮤직디자인 레코딩 스튜디오: 광화문 스튜디오 마스터링 스튜디오: 지구스튜디오 믹싱: 광화문 스튜디오 보컬, 기타: 김민규 보컬, 베이스: 윤준호 키보드: 이승기 드럼: 오인록 각주[편집] ↑ 평론가 이민희 K-POP 아카이브 외부 링크[편집] 9위 델리스파이스 《Deli spice》 경향신문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8위 9위Deli Spice - 델리스파이스 10위 멀고 먼 길 - 한대수 공무도하가 - 이상은 vdeh델리스파이스 김민규 윤준호 이전 구성원: 최재혁 정규 음반 1집 Deli Spice 2집 Welcome To The Delihouse 3집 《슬프지만 진실...》 4집 D 5집 Espresso 6집 Bombom 7집 Open Your Eyes 참여 음반 A Tribute To 들국화 EP 연(聯) 대표곡 〈차우차우〉, 〈고백〉, 〈항상 엔진을 켜둘게〉 소속사 문라이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Deli_Spice&oldid=23680327" 분류: 델리스파이스의 음반1997년 음반모던 록 음반1997년 데뷔 음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2월 11일 (월) 02: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긴조 다쓰히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긴조 다쓰히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긴조 다쓰히코金城 龍彦 Tatsuhiko Kinjoh 요미우리 자이언츠 No.74 긴조 다쓰히코(2015년) 기본 정보 국적 일본 생년월일 1976년 7월 27일(1976-07-27) (42세) 출신지 오사카부 오사카 시 히가시나리 구 신장 177 cm 체중 80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양타 수비 위치 외야수, 3루수 프로 입단 연도 1998년 드래프트 순위 5순위 첫 출장 1999년 10월 3일 마지막 경기 2015년 경력 선수 경력 스미토모 금속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1999 ~ 2014) 요미우리 자이언츠(2015) 코치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2016 ~ ) 일본 국가대표팀 WBC 2006년 긴조 다쓰히코 일본어식 한자 표기: 金城 龍彦 가나 표기: きんじょう たつひこ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긴조 다쓰히코 통용 표기: 킨죠우 타츠히코 로마자: Tatsuhiko Kinjoh 메달 기록 일본의 선수 남자 야구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금 2006 샌디에이고 2006 WBC 긴조 다쓰히코(일본어: 金城 龍彦, 1976년 7월 27일 ~ )은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귀화 전 한국명은 '김용언(金龍彦)'이다. 현역 시절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했고 2015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016년부터는 요미우리의 3군 타격 코치를 맡고 있다. 목차 1 인물 1.1 프로 입단 전 1.2 프로 입단 후 1.2.1 1999년 ~ 2002년 1.2.2 2003년 ~ 2005년 1.2.3 2006년 ~ 2007년 1.2.4 2008년 1.2.5 2009년 ~ 2010년 1.2.6 2011년 1.2.7 2012년 2 상세 정보 2.1 출신 학교 2.2 선수 경력 2.3 지도자 경력 2.4 수상·타이틀 경력 2.4.1 타이틀 2.4.2 수상 2.5 개인 기록 2.5.1 첫 기록 2.5.2 기록 달성 경력 2.5.3 기타 2.6 등번호 2.7 연도별 타격 성적 2.8 연도별 수비 성적 3 같이 보기 4 외부 링크 인물[편집] 프로 입단 전[편집]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2년간 뛰었던 긴조 아키요(한국명: 김황세, 金晃世)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재일 한국인 3세 출신이며 한국 이름은 김용언(金龍彦)이고, 2000년에 결혼과 동시에 일본으로 귀화했다. 긴키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재학할 당시 2학년 때인 하계 오사카 대회 결승전에서 마쓰이 가즈오, 후쿠도메 고스케가 소속된 PL가쿠엔 고등학교에 승리하여 고시엔 대회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고시엔 대회에서는 가네코 마코토가 소속된 조소가쿠인 고등학교에게 패했고 당시 포지션은 투수였는데 후지이 아키히토와 함께 배터리를 짜고 있었다. 1994년에는 재일동포 선수단의 일원으로 동대문운동장에 내한했던 적도 있다. 고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스미토모 금속에 소속되었고 속구와 크게 구부러지는 커브를 주무기로 활약하는 등 팀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우승으로 이끌면서 1997년에는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5순위 지명으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 입단했다. 프로 입단 후[편집] 1999년 ~ 2002년[편집] 프로에 입문함과 동시에 타자로 전향했고 스위치 히터에 도전했던 것도 이 때가 처음이다. 1년째인 1999년 10월 3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 처음으로 출전했고 이듬해 2000년에는 뚜렷한 결과를 남기지 않으면 2군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프로 데뷔 1호 홈런이 되는 대타 홈런을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기록했다. 이것을 계기로 타격 능력을 키우며 주전 3루수를 차지해 8월 18일의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규정 타석을 채웠다. 그 해에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수위타자와 신인왕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하면서 요코하마의 선수가 신인왕이 되는 것은 사이토 아키오 이래 23년 만이었고 타율은 일시 4할을 넘고 있었다. 그 해에 결혼함과 동시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3루수로서는 눈에 띈 실책이나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2001년부터 본격적인 외야수로 전향해 타율은 크게 떨어졌지만 구단 기록이 되는 43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 2002년에는 타율이 1할 대로 떨어질 정도의 극심한 부진을 겪으면서 38개의 안타를 기록하는 데에만 그쳤다. 2003년 ~ 2005년[편집] 2003년에는 1번 타자로서 3할 대의 타율과 16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장타력도 몸에 익히는 등 슬럼프에서 벗어났고 1경기에서 좌우 양타석에 홈런을 두 차례나 달성했다. 외야수로 전향한 후에는 주로 중견수를 지키고 있었지만 2004년부터 종합적으로 수비력이 높은 다무라 히토시가 중견수에 들어가면서 자신도 우익수를 지키게 되었다. 동시에 타순도 6번 타자가 되었지만 2년 연속으로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2005년에 타순은 3번 타자가 되면서 로버트 로즈가 수립한 구단 기록(192안타)에 1개 차가 되는 191개의 안타를 날려내 타점도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게다가 수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다음해 2006년 3월에 개최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다. 2006년 ~ 2007년[편집] 2006년에는 작년에 이어 3번·우익수로서 출전했지만 후반기가 되면서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7번 타자로서도 뛰는 등 시즌 타율은 2할 6푼 8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팀에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와중에 144경기에 출전하여 호수비로 몇 차례나 위기를 구했다. 2007년에 다무라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이적했기 때문에 다시 중견수로 돌아와 전반기에는 타격이 좋지는 않았지만 후반기에 타율을 2할 8푼대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통산 두 번째가 되는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08년[편집] 4월에 맹타상을 3차례나 기록하는 등의 순조로운 시작을 보였지만 5월 이후에는 거듭된 부진으로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타율은 2할 4푼 7리로 침체되었고 홈런도 9개에 그치는 등 두 자릿수에는 이르지 않았다. FA를 취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즌 종료 후 향후 거취에 대한 관심이 쏠렸지만 FA를 행사하지 않고 잔류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2년 간의 재계약을 맺었다. 2009년 ~ 2010년[편집] 2009년 이후에는 선발 출전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대수비나 대타로서 출전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듬해 2010년 시즌 종료 후 FA를 행사했지만 타 구단으로부터의 영입 제의는 없었고 연봉 5,000만 엔의 1년 재계약으로 요코하마에 잔류했다. 2011년[편집] 그 해에는 체중을 수위타자를 차지할 당시에 되돌리면서 재기를 건 시즌이 되었다. 개막전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지만 4월 15일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대타로 출전해 히다카 료로부터 결승 홈런이 되는 역전 3점 홈런을 때려내고 나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등 선발 출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서 극심한 부진에 시달려 선발에서 제외되는 일이 많아졌는데도 안정된 성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9월 2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주루 플레이 도중에 왼발을 다쳐 심각한 부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대로 1군에 복귀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8경기에 출전하는 등 팀의 90패를 저지하는 활약을 보였다. 2012년[편집] 개막전에 선발로 출전했고 4월 1일의 개막 3경기째가 되는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그 해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라는 팀 이름이 변경된 이후 팀으로서는 제1호 홈런을 때려냈다. 9월 14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의 야쿠르트전에서 무라나카 교헤이로부터 이 날 두 번째 안타를 기록하면서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선발 출전의 기회는 많았지만 대타로서의 타율이 3할 대를 기록했고 득점권 타율이 1할 3푼 2리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11월 21일에 40%가 삭감된 3000만 엔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긴키 대학 부속 고등학교 선수 경력[편집] 사회인 시대 스미토모 금속 프로팀 경력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1999년 ~ 201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2015년) 국가 대표 경력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지도자 경력[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타격 코치(201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외야 수비 주루코치(2017년 ~ )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수위 타자 : 1회(2000년) 수상[편집] 신인왕(2000년) 골든 글러브상 : 2회(2005년, 2007년) JA 전농 Go·Go상 : 2회(2001년, 2007년 9월) 월간 MVP : 1회(2000년 7월) 올스타전 MVP : 1회(2005년 1차전) 개인 기록[편집] 첫 기록[편집] 첫 출장 : 1999년 10월 3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7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말에 가와하라 류이치의 대타로 출장 첫 타석 : 상동, 8회말에 나카야마 히로아키 앞에서 2루 땅볼 병살타 첫 선발 출장 : 1999년 10월 1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4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번·3루수로서 선발 출장, 4타수 무안타 첫 안타·첫 타점 : 1999년 10월 15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7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6회말에 다카기 고지로부터 우전 적시타 첫 홈런 : 2000년 4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도쿄 돔), 9회초에 모리나카 마사오의 대타로 출장,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첫 도루 : 2000년 7월 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6회초에 2루 안착(투수 : 야마사키 겐, 포수 : 세토 데루노부) 기록 달성 경력[편집] 통산 1000안타 : 2007년 6월 3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2차전(스카이마크 스타디움), 2회초에 유키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246번째 통산 1000경기 출장 : 2007년 7월 28일, 대 한신 타이거스 1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3번·중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420번째 통산 1500경기 출장 : 2011년 8월 2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7차전(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6번·중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72번째 통산 1500안타 : 2012년 9월 14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7회초에 무라나카 교헤이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112번째 통산 100홈런 : 2013년 5월 25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5회말에 나루세 요시히사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268번째(스위치 히터로는 7번째) 기타[편집] 올스타전 출장 : 3회(2003년, 2005년, 2006년) 시즌 타율 : 0.34606(2000년) ※스위치 히터로서는 역대 최고 시즌 희생타 : 43개(2001년)※구단 기록 시즌 안타 : 191개(2005년) ※스위치 타자로서는 니시오카 쓰요시, 마쓰이 가즈오를 뒤를 이은 역대 3위 끝내기 안타 : 8개 ※구단 타이 기록 선두 타자 홈런 : 총 7개 좌우 양타석 홈런 ※역대 16번째(같은 기록 3차례 이상은 역대 6번째이자 센트럴 리그에서는 처음) 일시 상대팀 구장 이닝 타석 상대 투수 이닝 타석 상대 투수 1 2003년 8월 13일 한신 22차전 삿포로 돔 4회말 좌 야부 게이이치 9회말 우 제프 윌리엄스 2 2003년 8월 16일 히로시마 17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초 좌 사사오카 신지 4회초 우 니시카와 신이치 3 2006년 8월 19일 히로시마 15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4회말 좌 후안 펠리치아노 7회말 우 다카하시 겐 등번호[편집] 37(1999년 ~ 2000년) 2(2001년) 1(2002년 ~ 2014년) 33(2015년) 9(2006년 WBC) 103(2016년 ~ 2017년) 71(2018년) 74(2019년 ~ )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루자 희생번 희생플 볼넷 고의사구 몸맞 삼진 병살타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1999년 요코하마DeNA 6 11 11 1 2 0 0 0 2 1 0 0 0 0 0 0 0 0 2 .182 .182 .182 .364 2000년 110 475 419 60 145 18 3 3 178 36 8 7 17 0 37 0 2 58 6 .346 .402 .425 .827 2001년 138 579 480 68 130 19 2 3 162 49 10 10 43 0 56 0 0 57 6 .271 .347 .338 .685 2002년 111 258 224 13 38 8 1 0 48 13 5 0 14 3 14 2 3 35 2 .170 .225 .214 .440 2003년 136 592 549 78 166 26 1 16 242 40 4 13 2 4 33 3 4 60 7 .302 .344 .441 .785 2004년 133 527 486 53 147 15 2 13 205 52 0 5 6 0 29 3 6 74 12 .302 .349 .422 .771 2005년 144 642 590 70 191 30 1 12 259 87 1 2 5 8 32 1 7 63 6 .324 .361 .439 .800 2006년 144 618 552 60 148 22 2 11 207 59 2 1 8 3 48 7 7 57 14 .268 .333 .375 .708 2007년 139 580 511 66 145 27 2 14 218 66 2 2 12 4 49 1 4 64 11 .284 .349 .427 .775 2008년 136 532 489 44 121 16 1 9 166 41 0 4 6 2 32 1 3 64 11 .247 .297 .339 .636 2009년 118 341 312 37 88 21 2 9 140 34 1 3 5 1 18 6 5 44 6 .282 .330 .449 .779 2010년 96 149 130 9 27 7 0 1 37 10 0 0 4 0 15 1 0 17 3 .208 .290 .285 .575 2011년 108 354 324 24 88 13 1 3 112 29 1 0 6 5 16 0 3 35 8 .272 .307 .346 .653 2012년 129 331 294 29 70 11 0 3 90 18 2 1 3 2 26 0 6 37 1 .238 .311 .306 .617 2013년 118 334 306 33 89 12 1 6 121 36 3 0 2 1 17 2 8 40 8 .291 .343 .395 .739 2014년 90 175 160 9 32 6 0 0 38 11 0 1 1 0 13 2 1 21 3 .200 .264 .238 .502 2015년 요미우리 36 95 90 9 21 3 0 1 27 10 1 0 1 0 3 0 1 11 0 .233 .266 .300 .566 통산 : 17년 1892 6593 5927 663 1648 254 19 104 2252 592 40 49 135 33 438 29 60 737 106 .278 .332 .380 .714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요코하마(요코하마 베이스타스)는 2012년에 DeNA(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로 구단명을 변경 연도별 수비 성적[편집] 연도 2루 3루 유격 외야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1999 - 3 1 6 1 0 .875 3 0 0 0 0 ---- - 2000 1 2 1 0 1 1.000 83 69 130 12 9 .943 - 25 39 2 0 0 1.000 2001 - - - 137 281 14 5 1 .983 2002 - - - 102 136 7 3 1 .979 2003 - - - 136 268 15 5 1 .983 2004 - 1 0 0 1 0 .000 - 133 216 7 4 1 .982 2005 - - - 144 290 11 1 4 .997 2006 - - - 144 274 8 4 2 .986 2007 - - - 137 257 10 4 2 .985 2008 - - - 132 223 2 2 0 .991 2009 - - - 97 146 3 0 1 1.000 2010 - - - 47 66 2 1 0 .986 2011 - - - 94 166 5 0 1 1.000 2012 - - - 95 122 3 0 0 1.000 2013 - - - 87 122 0 1 0 .992 2014 - - - 61 59 0 0 0 1.000 통산 1 2 1 0 1 1.000 87 70 136 14 9 .936 3 0 0 0 0 ---- 1571 2665 89 31 14 .989 2014년 시즌 종료 기준. 같이 보기[편집] 가네모토 도모아키 아라이 다카히로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긴조 다쓰히코 (일본어) 공식 홈페이지 Kinjoh-1.com (일본어) 개인 연도별 성적 - 긴조 다쓰히코 - 일본 야구 기구 공식 홈페이지 vdeh센트럴 리그 신인왕1950년대 1950: 오시마 노부오 1951: 마쓰다 기요시 1952: 사토 다카오 1953: 곤도 마사토시 1954: 히로오카 다쓰로 1955: 니시무라 가즈노리 1956: 아키야마 노보루 1957: 후지타 모토시 1958: 나가시마 시게오 1959: 구와타 다케시 1960년대 1960: 호리모토 리쓰오 1961: 곤도 히로시 1962: 조노우치 구니오 1964: 다카하시 시게유키 1966: 호리우치 쓰네오 1967: 다케가미 시로 1968: 다카다 시게루 1969: 다부치 고이치 1970년대 1970: 야자와 겐이치 1971: 세키모토 시토시 1972: 야스다 다케시 1974: 후지나미 유키오 1976: 다오 야스시 1977: 사이토 아키오 1978: 스미 미쓰오 1979: 후지사와 기미야 1980년대 1980: 오카다 아키노부 1981: 하라 다쓰노리 1982: 쓰다 쓰네미 1983: 마키하라 히로미 1984: 고바야카와 다케히코 1985: 가와바타 준 1986: 나가토미 히로시 1987: 아라이 유키오 1988: 다쓰나미 가즈요시 1989: 도마시노 겐지 1990년대 1990: 요다 쓰요시 1991: 모리타 고이치 1992: 구지 데루요시 1993: 이토 도모히토 1994: 야부 게이이치 1995: 야마우치 야스유키 1996: 니시 도시히사 1997: 사와자키 도시카즈 1998: 가와카미 겐신 1999: 우에하라 고지 2000년대 2000: 긴조 다쓰히코 2001: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2: 이시카와 마사노리 2003: 기사누키 히로시 2004: 가와시마 료 2005: 아오키 노리치카 2006: 소요기 에이신 2007: 우에조노 게이지 2008: 야마구치 데쓰야 2009: 마쓰모토 데쓰야 2010년대 2010: 조노 히사요시 2011: 사와무라 히로카즈 2012: 노무라 유스케 2013: 오가와 야스히로 2014: 오세라 다이치 2015: 야마사키 야스아키 2016: 다카야마 슌 2017: 교다 요타 2018: 아즈마 가쓰키 ※상기 이외의 연도는 수상자 없음 vdeh센트럴 리그 수위 타자1950년대 1950: 후지무라 후미오 1951: 가와카미 데쓰하루 1952: 니시자와 미치오 1953: 가와카미 데쓰하루 1954: 요나미네 가나메 1955: 가와카미 데쓰하루 1956: 요나미네 가나메 1957: 요나미네 가나메 1958: 다미야 겐지로 1959: 나가시마 시게오 1960년대 1960: 나가시마 시게오 1961: 나가시마 시게오 1962: 모리나가 가쓰하루 1963: 나가시마 시게오 1964: 에토 신이치 1965: 에토 신이치 1966: 나가시마 시게오 1967: 나카 아키오 1968: 오 사다하루 1969: 오 사다하루 1970년대 1970: 오 사다하루 1971: 나가시마 시게오 1972: 와카마쓰 쓰토무 1973: 오 사다하루 1974: 오 사다하루 1975: 야마모토 고지 1976: 야자와 겐이치 1977: 와카마쓰 쓰토무 1978: 미즈타니 지쓰오 1979: 펠릭스 미얀 1980년대 1980: 야자와 겐이치 1981: 후지타 다이라 1982: 나가사키 게이지 1983: 마유미 아키노부 1984: 시노즈카 도시오 1985: 랜디 바스 1986: 랜디 바스 1987: 시노즈카 도시오, 쇼다 고조 1988: 쇼다 고조 1989: 워렌 크로마티 1990년대 1990: 짐 파치오렉 1991: 후루타 아쓰야 1992: 잭 하웰 1993: 토머스 오말리 1994: 알론조 파웰 1995: 알론조 파웰 1996: 알론조 파웰 1997: 스즈키 다카노리 1998: 스즈키 다카노리 1999: 로버트 로즈 2000년대 2000: 긴조 다쓰히코 2001: 마쓰이 히데키 2002: 후쿠도메 고스케 2003: 이마오카 마코토 2004: 시마 시게노부 2005: 아오키 노리치카 2006: 후쿠도메 고스케 2007: 아오키 노리치카 2008: 우치카와 세이이치 2009: 알렉스 라미레스 2010년대 2010: 아오키 노리치카 2011: 조노 히사요시 2012: 아베 신노스케 2013: 토니 블랑코 2014: 맷 머턴 2015: 가와바타 신고 2016: 사카모토 하야토 2017: 미야자키 도시로 2018: 다얀 비시에도 vdeh센트럴 리그 골든 글러브상 (외야수 부문)1970년대 1972: 다카다 시게루,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1973: 다카다 시게루,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1974: 다카다 시게루,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1975: 야마모토 고지, 다카다 시게루, 론 우즈 1976: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이케베 이와오 1977: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와카마쓰 쓰토무 1978: 야마모토 고지, 와카마쓰 쓰토무, 짐 라이틀 1979: 야마모토 고지, 존 스콧, 짐 라이틀 1980년대 1980: 야마모토 고지, 짐 라이틀, 존 스콧 1981: 짐 라이틀, 야마모토 고지, 마쓰모토 다다시 1982: 히라노 겐, 마쓰모토 다다시, 기타무라 데루후미 1983: 기타무라 데루후미, 나가시마 기요유키, 마쓰모토 다다시 1984: 야시키 가나메, 나가시마 기요유키, 야마사키 류조 1985: 야시키 가나메, 야마사키 류조, 히라노 겐 1986: 히라노 겐, 야시키 가나메, 나가시마 기요유키 1987: 야시키 가나메, 야마사키 류조, 나가시마 기요유키 1988: 야시키 가나메, 야마사키 류조, 히코노 도시카쓰 1989: 히코노 도시카쓰, 야마자키 겐이치, 구리야마 히데키 1990년대 1990: 히코노 도시카쓰, 야마자키 겐이치, 야나다 고이치 1991: R. J. 레이놀즈, 마에다 도모노리, 이이다 데쓰야 1992: 이이다 데쓰야, 마에다 도모노리, 가메야마 쓰토무 1993: 마에다 도모노리, 신조 쓰요시, 이이다 데쓰야 1994: 마에다 도모노리, 이이다 데쓰야, 신조 쓰요시 1995: 이이다 데쓰야, 오가타 고이치, 오토 시게키 1996: 오가타 고이치, 이이다 데쓰야, 신조 쓰요시 1997: 이이다 데쓰야, 오가타 고이치, 신조 쓰요시 1998: 다카하시 요시노부, 오가타 고이치, 신조 쓰요시 1999: 다카하시 요시노부, 오가타 고이치, 신조 쓰요시 2000년대 2000: 신조 쓰요시, 다카하시 요시노부, 마쓰이 히데키 2001: 다카하시 요시노부, 마쓰이 히데키,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2: 마쓰이 히데키, 다카하시 요시노부, 후쿠도메 고스케 2003: 아카호시 노리히로, 후쿠도메 고스케, 다카하시 요시노부 2004: 알렉스 오초아, 히데노리,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5: 후쿠도메 고스케, 아카호시 노리히로, 긴조 다쓰히코 2006: 후쿠도메 고스케, 아오키 노리치카,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7: 아오키 노리치카, 다카하시 요시노부, 긴조 다쓰히코 2008: 아오키 노리치카, 아카호시 노리히로, 스즈키 다카히로 2009: 아오키 노리치카, 마쓰모토 데쓰야, 가메이 요시유키 2010년대 2010: 아오키 노리치카, 히로세 준, 아카마쓰 마사토 2011: 아오키 노리치카, 조노 히사요시, 오시마 요헤이 2012: 오시마 요헤이, 조노 히사요시, 아라나미 쇼 2013: 조노 히사요시, 마루 요시히로, 아라나미 쇼 2014: 마루 요시히로, 오시마 요헤이, 야마토 2015: 후쿠도메 고스케, 마루 요시히로, 오시마 요헤이 2016: 마루 요시히로, 오시마 요헤이, 스즈키 세이야 2017: 마루 요시히로, 스즈키 세이야, 구와하라 마사유키 2018: 마루 요시히로, 오시마 요헤이, 히라타 료스케 ※1972년부터 1985년까지는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vdeh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 감독89 오 사다하루코치 84 다케다 가즈히로(투수) 85 쓰지 하쓰히코(내야 수비 주루) 86 가토리 요시타카(투수) 87 오시마 야스노리(타격) 88 히로타 스미오(외야 수비 주루) 투수 11 시미즈 나오유키 12 후지타 소이치 15 구보타 도모유키 18 마쓰자카 다이스케 19 우에하라 고지 20 야부타 야스히코 21 와다 쓰요시 24 후지카와 규지 31 와타나베 슌스케 40 오쓰카 아키노리 41 고바야시 히로유키 47 스기우치 도시야 61 이시이 히로토시(중도 이탈) 61 마하라 다카히로(추가 소집) 포수 22 사토자키 도모야 27 다니시게 모토노부 59 아이카와 료지 내야수 1 이와무라 아키노리 2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3 마쓰나카 노부히코 7 니시오카 쓰요시 8 이마에 도시아키 10 미야모토 신야 25 아라이 다카히로 52 가와사키 무네노리 외야수 5 와다 가즈히로 6 다무라 히토시 9 긴조 다쓰히코 17 후쿠도메 고스케 23 아오키 노리치카 51 이치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긴조_다쓰히코&oldid=24370238" 분류: 1976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일본의 야구 선수일본 프로 야구 외야수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선수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선수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 수상자오사카시 출신한국계 일본인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연도별 타격 성적을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8: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긴조 다쓰히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긴조 다쓰히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긴조 다쓰히코金城 龍彦 Tatsuhiko Kinjoh 요미우리 자이언츠 No.74 긴조 다쓰히코(2015년) 기본 정보 국적 일본 생년월일 1976년 7월 27일(1976-07-27) (42세) 출신지 오사카부 오사카 시 히가시나리 구 신장 177 cm 체중 80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양타 수비 위치 외야수, 3루수 프로 입단 연도 1998년 드래프트 순위 5순위 첫 출장 1999년 10월 3일 마지막 경기 2015년 경력 선수 경력 스미토모 금속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1999 ~ 2014) 요미우리 자이언츠(2015) 코치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2016 ~ ) 일본 국가대표팀 WBC 2006년 긴조 다쓰히코 일본어식 한자 표기: 金城 龍彦 가나 표기: きんじょう たつひこ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긴조 다쓰히코 통용 표기: 킨죠우 타츠히코 로마자: Tatsuhiko Kinjoh 메달 기록 일본의 선수 남자 야구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금 2006 샌디에이고 2006 WBC 긴조 다쓰히코(일본어: 金城 龍彦, 1976년 7월 27일 ~ )은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귀화 전 한국명은 '김용언(金龍彦)'이다. 현역 시절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했고 2015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016년부터는 요미우리의 3군 타격 코치를 맡고 있다. 목차 1 인물 1.1 프로 입단 전 1.2 프로 입단 후 1.2.1 1999년 ~ 2002년 1.2.2 2003년 ~ 2005년 1.2.3 2006년 ~ 2007년 1.2.4 2008년 1.2.5 2009년 ~ 2010년 1.2.6 2011년 1.2.7 2012년 2 상세 정보 2.1 출신 학교 2.2 선수 경력 2.3 지도자 경력 2.4 수상·타이틀 경력 2.4.1 타이틀 2.4.2 수상 2.5 개인 기록 2.5.1 첫 기록 2.5.2 기록 달성 경력 2.5.3 기타 2.6 등번호 2.7 연도별 타격 성적 2.8 연도별 수비 성적 3 같이 보기 4 외부 링크 인물[편집] 프로 입단 전[편집]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2년간 뛰었던 긴조 아키요(한국명: 김황세, 金晃世)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재일 한국인 3세 출신이며 한국 이름은 김용언(金龍彦)이고, 2000년에 결혼과 동시에 일본으로 귀화했다. 긴키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재학할 당시 2학년 때인 하계 오사카 대회 결승전에서 마쓰이 가즈오, 후쿠도메 고스케가 소속된 PL가쿠엔 고등학교에 승리하여 고시엔 대회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고시엔 대회에서는 가네코 마코토가 소속된 조소가쿠인 고등학교에게 패했고 당시 포지션은 투수였는데 후지이 아키히토와 함께 배터리를 짜고 있었다. 1994년에는 재일동포 선수단의 일원으로 동대문운동장에 내한했던 적도 있다. 고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스미토모 금속에 소속되었고 속구와 크게 구부러지는 커브를 주무기로 활약하는 등 팀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우승으로 이끌면서 1997년에는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5순위 지명으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 입단했다. 프로 입단 후[편집] 1999년 ~ 2002년[편집] 프로에 입문함과 동시에 타자로 전향했고 스위치 히터에 도전했던 것도 이 때가 처음이다. 1년째인 1999년 10월 3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 처음으로 출전했고 이듬해 2000년에는 뚜렷한 결과를 남기지 않으면 2군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프로 데뷔 1호 홈런이 되는 대타 홈런을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기록했다. 이것을 계기로 타격 능력을 키우며 주전 3루수를 차지해 8월 18일의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규정 타석을 채웠다. 그 해에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수위타자와 신인왕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하면서 요코하마의 선수가 신인왕이 되는 것은 사이토 아키오 이래 23년 만이었고 타율은 일시 4할을 넘고 있었다. 그 해에 결혼함과 동시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3루수로서는 눈에 띈 실책이나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2001년부터 본격적인 외야수로 전향해 타율은 크게 떨어졌지만 구단 기록이 되는 43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 2002년에는 타율이 1할 대로 떨어질 정도의 극심한 부진을 겪으면서 38개의 안타를 기록하는 데에만 그쳤다. 2003년 ~ 2005년[편집] 2003년에는 1번 타자로서 3할 대의 타율과 16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장타력도 몸에 익히는 등 슬럼프에서 벗어났고 1경기에서 좌우 양타석에 홈런을 두 차례나 달성했다. 외야수로 전향한 후에는 주로 중견수를 지키고 있었지만 2004년부터 종합적으로 수비력이 높은 다무라 히토시가 중견수에 들어가면서 자신도 우익수를 지키게 되었다. 동시에 타순도 6번 타자가 되었지만 2년 연속으로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2005년에 타순은 3번 타자가 되면서 로버트 로즈가 수립한 구단 기록(192안타)에 1개 차가 되는 191개의 안타를 날려내 타점도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게다가 수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다음해 2006년 3월에 개최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다. 2006년 ~ 2007년[편집] 2006년에는 작년에 이어 3번·우익수로서 출전했지만 후반기가 되면서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7번 타자로서도 뛰는 등 시즌 타율은 2할 6푼 8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팀에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와중에 144경기에 출전하여 호수비로 몇 차례나 위기를 구했다. 2007년에 다무라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이적했기 때문에 다시 중견수로 돌아와 전반기에는 타격이 좋지는 않았지만 후반기에 타율을 2할 8푼대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통산 두 번째가 되는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08년[편집] 4월에 맹타상을 3차례나 기록하는 등의 순조로운 시작을 보였지만 5월 이후에는 거듭된 부진으로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타율은 2할 4푼 7리로 침체되었고 홈런도 9개에 그치는 등 두 자릿수에는 이르지 않았다. FA를 취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즌 종료 후 향후 거취에 대한 관심이 쏠렸지만 FA를 행사하지 않고 잔류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2년 간의 재계약을 맺었다. 2009년 ~ 2010년[편집] 2009년 이후에는 선발 출전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대수비나 대타로서 출전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듬해 2010년 시즌 종료 후 FA를 행사했지만 타 구단으로부터의 영입 제의는 없었고 연봉 5,000만 엔의 1년 재계약으로 요코하마에 잔류했다. 2011년[편집] 그 해에는 체중을 수위타자를 차지할 당시에 되돌리면서 재기를 건 시즌이 되었다. 개막전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지만 4월 15일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대타로 출전해 히다카 료로부터 결승 홈런이 되는 역전 3점 홈런을 때려내고 나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등 선발 출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서 극심한 부진에 시달려 선발에서 제외되는 일이 많아졌는데도 안정된 성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9월 2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주루 플레이 도중에 왼발을 다쳐 심각한 부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대로 1군에 복귀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8경기에 출전하는 등 팀의 90패를 저지하는 활약을 보였다. 2012년[편집] 개막전에 선발로 출전했고 4월 1일의 개막 3경기째가 되는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그 해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라는 팀 이름이 변경된 이후 팀으로서는 제1호 홈런을 때려냈다. 9월 14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의 야쿠르트전에서 무라나카 교헤이로부터 이 날 두 번째 안타를 기록하면서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선발 출전의 기회는 많았지만 대타로서의 타율이 3할 대를 기록했고 득점권 타율이 1할 3푼 2리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11월 21일에 40%가 삭감된 3000만 엔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긴키 대학 부속 고등학교 선수 경력[편집] 사회인 시대 스미토모 금속 프로팀 경력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1999년 ~ 201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2015년) 국가 대표 경력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지도자 경력[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타격 코치(201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외야 수비 주루코치(2017년 ~ )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수위 타자 : 1회(2000년) 수상[편집] 신인왕(2000년) 골든 글러브상 : 2회(2005년, 2007년) JA 전농 Go·Go상 : 2회(2001년, 2007년 9월) 월간 MVP : 1회(2000년 7월) 올스타전 MVP : 1회(2005년 1차전) 개인 기록[편집] 첫 기록[편집] 첫 출장 : 1999년 10월 3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7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말에 가와하라 류이치의 대타로 출장 첫 타석 : 상동, 8회말에 나카야마 히로아키 앞에서 2루 땅볼 병살타 첫 선발 출장 : 1999년 10월 1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4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번·3루수로서 선발 출장, 4타수 무안타 첫 안타·첫 타점 : 1999년 10월 15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7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6회말에 다카기 고지로부터 우전 적시타 첫 홈런 : 2000년 4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도쿄 돔), 9회초에 모리나카 마사오의 대타로 출장,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첫 도루 : 2000년 7월 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6회초에 2루 안착(투수 : 야마사키 겐, 포수 : 세토 데루노부) 기록 달성 경력[편집] 통산 1000안타 : 2007년 6월 3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2차전(스카이마크 스타디움), 2회초에 유키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246번째 통산 1000경기 출장 : 2007년 7월 28일, 대 한신 타이거스 1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3번·중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420번째 통산 1500경기 출장 : 2011년 8월 2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7차전(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6번·중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72번째 통산 1500안타 : 2012년 9월 14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7회초에 무라나카 교헤이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112번째 통산 100홈런 : 2013년 5월 25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5회말에 나루세 요시히사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268번째(스위치 히터로는 7번째) 기타[편집] 올스타전 출장 : 3회(2003년, 2005년, 2006년) 시즌 타율 : 0.34606(2000년) ※스위치 히터로서는 역대 최고 시즌 희생타 : 43개(2001년)※구단 기록 시즌 안타 : 191개(2005년) ※스위치 타자로서는 니시오카 쓰요시, 마쓰이 가즈오를 뒤를 이은 역대 3위 끝내기 안타 : 8개 ※구단 타이 기록 선두 타자 홈런 : 총 7개 좌우 양타석 홈런 ※역대 16번째(같은 기록 3차례 이상은 역대 6번째이자 센트럴 리그에서는 처음) 일시 상대팀 구장 이닝 타석 상대 투수 이닝 타석 상대 투수 1 2003년 8월 13일 한신 22차전 삿포로 돔 4회말 좌 야부 게이이치 9회말 우 제프 윌리엄스 2 2003년 8월 16일 히로시마 17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초 좌 사사오카 신지 4회초 우 니시카와 신이치 3 2006년 8월 19일 히로시마 15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4회말 좌 후안 펠리치아노 7회말 우 다카하시 겐 등번호[편집] 37(1999년 ~ 2000년) 2(2001년) 1(2002년 ~ 2014년) 33(2015년) 9(2006년 WBC) 103(2016년 ~ 2017년) 71(2018년) 74(2019년 ~ )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루자 희생번 희생플 볼넷 고의사구 몸맞 삼진 병살타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1999년 요코하마DeNA 6 11 11 1 2 0 0 0 2 1 0 0 0 0 0 0 0 0 2 .182 .182 .182 .364 2000년 110 475 419 60 145 18 3 3 178 36 8 7 17 0 37 0 2 58 6 .346 .402 .425 .827 2001년 138 579 480 68 130 19 2 3 162 49 10 10 43 0 56 0 0 57 6 .271 .347 .338 .685 2002년 111 258 224 13 38 8 1 0 48 13 5 0 14 3 14 2 3 35 2 .170 .225 .214 .440 2003년 136 592 549 78 166 26 1 16 242 40 4 13 2 4 33 3 4 60 7 .302 .344 .441 .785 2004년 133 527 486 53 147 15 2 13 205 52 0 5 6 0 29 3 6 74 12 .302 .349 .422 .771 2005년 144 642 590 70 191 30 1 12 259 87 1 2 5 8 32 1 7 63 6 .324 .361 .439 .800 2006년 144 618 552 60 148 22 2 11 207 59 2 1 8 3 48 7 7 57 14 .268 .333 .375 .708 2007년 139 580 511 66 145 27 2 14 218 66 2 2 12 4 49 1 4 64 11 .284 .349 .427 .775 2008년 136 532 489 44 121 16 1 9 166 41 0 4 6 2 32 1 3 64 11 .247 .297 .339 .636 2009년 118 341 312 37 88 21 2 9 140 34 1 3 5 1 18 6 5 44 6 .282 .330 .449 .779 2010년 96 149 130 9 27 7 0 1 37 10 0 0 4 0 15 1 0 17 3 .208 .290 .285 .575 2011년 108 354 324 24 88 13 1 3 112 29 1 0 6 5 16 0 3 35 8 .272 .307 .346 .653 2012년 129 331 294 29 70 11 0 3 90 18 2 1 3 2 26 0 6 37 1 .238 .311 .306 .617 2013년 118 334 306 33 89 12 1 6 121 36 3 0 2 1 17 2 8 40 8 .291 .343 .395 .739 2014년 90 175 160 9 32 6 0 0 38 11 0 1 1 0 13 2 1 21 3 .200 .264 .238 .502 2015년 요미우리 36 95 90 9 21 3 0 1 27 10 1 0 1 0 3 0 1 11 0 .233 .266 .300 .566 통산 : 17년 1892 6593 5927 663 1648 254 19 104 2252 592 40 49 135 33 438 29 60 737 106 .278 .332 .380 .714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요코하마(요코하마 베이스타스)는 2012년에 DeNA(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로 구단명을 변경 연도별 수비 성적[편집] 연도 2루 3루 유격 외야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1999 - 3 1 6 1 0 .875 3 0 0 0 0 ---- - 2000 1 2 1 0 1 1.000 83 69 130 12 9 .943 - 25 39 2 0 0 1.000 2001 - - - 137 281 14 5 1 .983 2002 - - - 102 136 7 3 1 .979 2003 - - - 136 268 15 5 1 .983 2004 - 1 0 0 1 0 .000 - 133 216 7 4 1 .982 2005 - - - 144 290 11 1 4 .997 2006 - - - 144 274 8 4 2 .986 2007 - - - 137 257 10 4 2 .985 2008 - - - 132 223 2 2 0 .991 2009 - - - 97 146 3 0 1 1.000 2010 - - - 47 66 2 1 0 .986 2011 - - - 94 166 5 0 1 1.000 2012 - - - 95 122 3 0 0 1.000 2013 - - - 87 122 0 1 0 .992 2014 - - - 61 59 0 0 0 1.000 통산 1 2 1 0 1 1.000 87 70 136 14 9 .936 3 0 0 0 0 ---- 1571 2665 89 31 14 .989 2014년 시즌 종료 기준. 같이 보기[편집] 가네모토 도모아키 아라이 다카히로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긴조 다쓰히코 (일본어) 공식 홈페이지 Kinjoh-1.com (일본어) 개인 연도별 성적 - 긴조 다쓰히코 - 일본 야구 기구 공식 홈페이지 vdeh센트럴 리그 신인왕1950년대 1950: 오시마 노부오 1951: 마쓰다 기요시 1952: 사토 다카오 1953: 곤도 마사토시 1954: 히로오카 다쓰로 1955: 니시무라 가즈노리 1956: 아키야마 노보루 1957: 후지타 모토시 1958: 나가시마 시게오 1959: 구와타 다케시 1960년대 1960: 호리모토 리쓰오 1961: 곤도 히로시 1962: 조노우치 구니오 1964: 다카하시 시게유키 1966: 호리우치 쓰네오 1967: 다케가미 시로 1968: 다카다 시게루 1969: 다부치 고이치 1970년대 1970: 야자와 겐이치 1971: 세키모토 시토시 1972: 야스다 다케시 1974: 후지나미 유키오 1976: 다오 야스시 1977: 사이토 아키오 1978: 스미 미쓰오 1979: 후지사와 기미야 1980년대 1980: 오카다 아키노부 1981: 하라 다쓰노리 1982: 쓰다 쓰네미 1983: 마키하라 히로미 1984: 고바야카와 다케히코 1985: 가와바타 준 1986: 나가토미 히로시 1987: 아라이 유키오 1988: 다쓰나미 가즈요시 1989: 도마시노 겐지 1990년대 1990: 요다 쓰요시 1991: 모리타 고이치 1992: 구지 데루요시 1993: 이토 도모히토 1994: 야부 게이이치 1995: 야마우치 야스유키 1996: 니시 도시히사 1997: 사와자키 도시카즈 1998: 가와카미 겐신 1999: 우에하라 고지 2000년대 2000: 긴조 다쓰히코 2001: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2: 이시카와 마사노리 2003: 기사누키 히로시 2004: 가와시마 료 2005: 아오키 노리치카 2006: 소요기 에이신 2007: 우에조노 게이지 2008: 야마구치 데쓰야 2009: 마쓰모토 데쓰야 2010년대 2010: 조노 히사요시 2011: 사와무라 히로카즈 2012: 노무라 유스케 2013: 오가와 야스히로 2014: 오세라 다이치 2015: 야마사키 야스아키 2016: 다카야마 슌 2017: 교다 요타 2018: 아즈마 가쓰키 ※상기 이외의 연도는 수상자 없음 vdeh센트럴 리그 수위 타자1950년대 1950: 후지무라 후미오 1951: 가와카미 데쓰하루 1952: 니시자와 미치오 1953: 가와카미 데쓰하루 1954: 요나미네 가나메 1955: 가와카미 데쓰하루 1956: 요나미네 가나메 1957: 요나미네 가나메 1958: 다미야 겐지로 1959: 나가시마 시게오 1960년대 1960: 나가시마 시게오 1961: 나가시마 시게오 1962: 모리나가 가쓰하루 1963: 나가시마 시게오 1964: 에토 신이치 1965: 에토 신이치 1966: 나가시마 시게오 1967: 나카 아키오 1968: 오 사다하루 1969: 오 사다하루 1970년대 1970: 오 사다하루 1971: 나가시마 시게오 1972: 와카마쓰 쓰토무 1973: 오 사다하루 1974: 오 사다하루 1975: 야마모토 고지 1976: 야자와 겐이치 1977: 와카마쓰 쓰토무 1978: 미즈타니 지쓰오 1979: 펠릭스 미얀 1980년대 1980: 야자와 겐이치 1981: 후지타 다이라 1982: 나가사키 게이지 1983: 마유미 아키노부 1984: 시노즈카 도시오 1985: 랜디 바스 1986: 랜디 바스 1987: 시노즈카 도시오, 쇼다 고조 1988: 쇼다 고조 1989: 워렌 크로마티 1990년대 1990: 짐 파치오렉 1991: 후루타 아쓰야 1992: 잭 하웰 1993: 토머스 오말리 1994: 알론조 파웰 1995: 알론조 파웰 1996: 알론조 파웰 1997: 스즈키 다카노리 1998: 스즈키 다카노리 1999: 로버트 로즈 2000년대 2000: 긴조 다쓰히코 2001: 마쓰이 히데키 2002: 후쿠도메 고스케 2003: 이마오카 마코토 2004: 시마 시게노부 2005: 아오키 노리치카 2006: 후쿠도메 고스케 2007: 아오키 노리치카 2008: 우치카와 세이이치 2009: 알렉스 라미레스 2010년대 2010: 아오키 노리치카 2011: 조노 히사요시 2012: 아베 신노스케 2013: 토니 블랑코 2014: 맷 머턴 2015: 가와바타 신고 2016: 사카모토 하야토 2017: 미야자키 도시로 2018: 다얀 비시에도 vdeh센트럴 리그 골든 글러브상 (외야수 부문)1970년대 1972: 다카다 시게루,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1973: 다카다 시게루,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1974: 다카다 시게루,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1975: 야마모토 고지, 다카다 시게루, 론 우즈 1976: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이케베 이와오 1977: 야마모토 고지, 시바타 이사오, 와카마쓰 쓰토무 1978: 야마모토 고지, 와카마쓰 쓰토무, 짐 라이틀 1979: 야마모토 고지, 존 스콧, 짐 라이틀 1980년대 1980: 야마모토 고지, 짐 라이틀, 존 스콧 1981: 짐 라이틀, 야마모토 고지, 마쓰모토 다다시 1982: 히라노 겐, 마쓰모토 다다시, 기타무라 데루후미 1983: 기타무라 데루후미, 나가시마 기요유키, 마쓰모토 다다시 1984: 야시키 가나메, 나가시마 기요유키, 야마사키 류조 1985: 야시키 가나메, 야마사키 류조, 히라노 겐 1986: 히라노 겐, 야시키 가나메, 나가시마 기요유키 1987: 야시키 가나메, 야마사키 류조, 나가시마 기요유키 1988: 야시키 가나메, 야마사키 류조, 히코노 도시카쓰 1989: 히코노 도시카쓰, 야마자키 겐이치, 구리야마 히데키 1990년대 1990: 히코노 도시카쓰, 야마자키 겐이치, 야나다 고이치 1991: R. J. 레이놀즈, 마에다 도모노리, 이이다 데쓰야 1992: 이이다 데쓰야, 마에다 도모노리, 가메야마 쓰토무 1993: 마에다 도모노리, 신조 쓰요시, 이이다 데쓰야 1994: 마에다 도모노리, 이이다 데쓰야, 신조 쓰요시 1995: 이이다 데쓰야, 오가타 고이치, 오토 시게키 1996: 오가타 고이치, 이이다 데쓰야, 신조 쓰요시 1997: 이이다 데쓰야, 오가타 고이치, 신조 쓰요시 1998: 다카하시 요시노부, 오가타 고이치, 신조 쓰요시 1999: 다카하시 요시노부, 오가타 고이치, 신조 쓰요시 2000년대 2000: 신조 쓰요시, 다카하시 요시노부, 마쓰이 히데키 2001: 다카하시 요시노부, 마쓰이 히데키,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2: 마쓰이 히데키, 다카하시 요시노부, 후쿠도메 고스케 2003: 아카호시 노리히로, 후쿠도메 고스케, 다카하시 요시노부 2004: 알렉스 오초아, 히데노리,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5: 후쿠도메 고스케, 아카호시 노리히로, 긴조 다쓰히코 2006: 후쿠도메 고스케, 아오키 노리치카,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7: 아오키 노리치카, 다카하시 요시노부, 긴조 다쓰히코 2008: 아오키 노리치카, 아카호시 노리히로, 스즈키 다카히로 2009: 아오키 노리치카, 마쓰모토 데쓰야, 가메이 요시유키 2010년대 2010: 아오키 노리치카, 히로세 준, 아카마쓰 마사토 2011: 아오키 노리치카, 조노 히사요시, 오시마 요헤이 2012: 오시마 요헤이, 조노 히사요시, 아라나미 쇼 2013: 조노 히사요시, 마루 요시히로, 아라나미 쇼 2014: 마루 요시히로, 오시마 요헤이, 야마토 2015: 후쿠도메 고스케, 마루 요시히로, 오시마 요헤이 2016: 마루 요시히로, 오시마 요헤이, 스즈키 세이야 2017: 마루 요시히로, 스즈키 세이야, 구와하라 마사유키 2018: 마루 요시히로, 오시마 요헤이, 히라타 료스케 ※1972년부터 1985년까지는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vdeh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 감독89 오 사다하루코치 84 다케다 가즈히로(투수) 85 쓰지 하쓰히코(내야 수비 주루) 86 가토리 요시타카(투수) 87 오시마 야스노리(타격) 88 히로타 스미오(외야 수비 주루) 투수 11 시미즈 나오유키 12 후지타 소이치 15 구보타 도모유키 18 마쓰자카 다이스케 19 우에하라 고지 20 야부타 야스히코 21 와다 쓰요시 24 후지카와 규지 31 와타나베 슌스케 40 오쓰카 아키노리 41 고바야시 히로유키 47 스기우치 도시야 61 이시이 히로토시(중도 이탈) 61 마하라 다카히로(추가 소집) 포수 22 사토자키 도모야 27 다니시게 모토노부 59 아이카와 료지 내야수 1 이와무라 아키노리 2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3 마쓰나카 노부히코 7 니시오카 쓰요시 8 이마에 도시아키 10 미야모토 신야 25 아라이 다카히로 52 가와사키 무네노리 외야수 5 와다 가즈히로 6 다무라 히토시 9 긴조 다쓰히코 17 후쿠도메 고스케 23 아오키 노리치카 51 이치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긴조_다쓰히코&oldid=24370238" 분류: 1976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일본의 야구 선수일본 프로 야구 외야수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선수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선수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 수상자오사카시 출신한국계 일본인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연도별 타격 성적을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8: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카이 프로리그 2004 1라운드SKY PROLEAGUE 2004 1R 대회 정보차수 제3회 대회기간 2004년 4월 17일 ~ 2004년 7월 18일주관방송사 온게임넷스폰서 SKY참가팀 11팀 슈마 G.O 투나 SG → SG 패밀리 한빛 스타즈 SouL KOR KTF 매직엔스 SK텔레콤 T1 헥사트론 드림팀 KTEC 플러스 P.O.S 삼성전자 칸공식맵 Nostalgia (3시즌)Neo Guillotine (수정, 3시즌)Requiem (신규)XENO SKY (신규)바람의 계곡 (신규, 시즌중 퇴출)Huntress (팀플레이, 3시즌)Vertigo Plus (팀플레이, 2시즌)경기장소 서울 삼성동 코엑스 메가스튜디오 결승전장소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해설 전용준 (캐스터) 김동수 (해설) 김도형 (해설)최종 순위우승 한빛 스타즈 (1번째 우승)준우승 SK텔레콤 T13위 SG 패밀리4위 슈마 G.O개인수상 및 통계MVP 강도경Z (한빛 스타즈)총 8승 5패팀플레이 8승 5패결승MVP 김선기T (한빛 스타즈)결승 개인전 1승 0패 (제5경기 승리 vs 임요환T)나도현T (한빛 스타즈)결승 개인전 1승 0패 (제7경기 승리 vs 김현진T)최다승 차재욱T (KOR)개인전 5승 0패감독상 이재균 (한빛 스타즈)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네오위즈 피망컵 2003 SKY 2004 2R →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SKY Pro League 2004 1Round) 는 프로리그의 3번째 시즌이며, 2004 시즌 첫 리그이다. 프로리그를 상징하는 파란색별 로고(SKY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까지 사용)가 도입된 시즌이기도 했다. 목차 1 개요 2 순위 3 경기 기록 4 결승전 5 대회 결과 6 결승전 7 각주 8 외부 링크 개요[편집] 리그기간 : 2004년 4월 17일 ~ 2004년 7월 17일 이번 시즌에서 3라운드 시즌까지 동족전 제어를 위한 특단의 조치로 동일 종족 동일 맵 연속 출전 금지규정을 적용하였다. 이는 지난 시즌이었던 피망컵 프로리그의 'Another Day' 맵 때문이었다. 이 맵에서의 경기가 테테전만(테란 대 저그전이 두 번 정도 제외하곤 테테전만 진행)나오자 결국 동족전 제어를 위해 시행되었다. 이 규정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A팀이 레퀴엠 맵에 테란을 출전시키면 그다음 경기에서는 레퀴엠에 테란을 내보낼 수 없다. 즉, 어떤 팀에서 특정종족이 특정 맵에 나오면 다음 경기에서는 그맵에 다른 종족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들의 용병술의 제약이 뒤따르자 2005 시즌에는 폐지되었다 순위[편집] 순위기준: 다승 → 승점 → 승자승 순 순위 팀 경기수 승 패 승률 승점 벌점 진출여부 1 한빛 스타즈 10 8 2 80% 10 결승진출 2 SK텔레콤 T1 10 7 3 70% 7 1 결승진출 3 SG 패밀리 10 7 3 70% 5 4 슈마 GO 10 6 4 60% 4 1 5 KOR 10 5 5 50% 0 6 SouL 10 5 5 50% -1 7 KTF 매직엔스 10 5 5 50% -4 2 8 POS 10 4 6 40% -5 2 9 헥사트론 드림팀 10 3 7 30% -6 10 삼성전자 칸 10 3 7 30% -6 11 Plus 10 2 8 20% -12 2 2라운드 탈락 경기 기록[편집] 1라운드 경기 기록 주차 경기일 승리 패배 점수 1 4월 17일 슈마 GO 헥사트론 드림팀 2-0 SouL 삼성전자 칸 2-1 4월 21일 투나 SG Plus 2-1 KOR KTF 메직엔스 2-0 2 4월 24일 한빛 스타즈 SKT T1 2-0 POS SouL 2-0 4월 28일 KTF 메직엔스 헥사트론 드림팀 2-1 투나 SG 슈마 GO 2-0 3 5월 1일 Plus POS 2 - 1 한빛 스타즈 삼성전자 칸 2 - 1 5월 5일 SouL KOR 2-1 KTF 매직엔스 SK텔레콤 T1 2 - 1 4 5월 8일 헥사트론 드림팀 삼성전자 칸 2 - 0 투나 SG POS 2 - 1 5월 12일 KOR Plus 2 - 0 한빛 스타즈 슈마 GO 2 - 1 5 5월 15일 투나 SG 2 - 0 삼성전자 칸 SK텔레콤 T1 SouL 2 - 0 5월 19일 SouL KTF 매직엔스 2 - 0 슈마 GO 1 - 2 KOR 한빛 스타즈 POS 2-0[1] 6 5월 22일 Soul Plus 2-0 헥사트론 드림팀 SK텔레콤 T1 2-0 5월 26일 POS KOR 2-0 헥사트론 드림팀 한빛 스타즈 1-2 삼성전자 칸 KTF 메직엔스 2-1[1] 7 5월 15일 Plus 슈마 GO 0 - 2 SK텔레콤 T1 KOR 2 - 0 6월 2일 삼성전자 칸 SK텔레콤 T1 2-0 슈마 GO 2 - 0 Plus POS 헥사트론 드림팀 2-1[1] KTF 메직엔스 투나 SG 2-1[1] 8 6월 5일 한빛 스타즈 SouL 2 - 0 SK텔레콤 T1 2 - 0 슈마 GO 6월 9일 투나 SG 0 - 2 한빛 스타즈 슈마 GO 2 - 0 POS KOR 삼성전자 칸 2-1 KTF 매직엔스 Plus 2-1 9 6월 16일 헥사트론 드림팀 0 - 2 SG 패밀리 SK텔레콤 T1 2 - 0 POS 10 6월 19일 Plus 한빛 스타즈 2-1 KTF 매직엔스 슈마 GO 1-2 헥사트론 드림팀 KOR 2-1[1] 6월 23일 한빛 스타즈 1 - 2 KTF 매직엔스 Plus 2 - 0 헥사트론 드림팀 삼성전자 칸 POS 2-0[1] SG 패밀리 KOR 2-1[1] 11 6월 26일 SouL 2 - 0 헥사트론 드림팀 Plus 0 - 2 SK텔레콤 T1 6월 30일 SK텔레콤 T1 2 - 0 SG 패밀리 POS 2 - 0 KTF 매직엔스 슈마 GO 삼성전자 칸 2-0[1] 12 7월 3일 Plus 삼성전자 칸 2-0 한빛 스타즈 KOR 2-1 SG 패밀리 SouL 2-1[1] 순위 팀 경기수 승 패 승률 승점 벌점 1 한빛 스타즈 10 8 2 80% 10 2 SK텔레콤 T1 10 7 3 70% 7 1 3 SG 패밀리 10 7 3 70% 5 4 슈마 GO 10 6 4 60% 4 1 5 KOR 10 5 5 50% 0 6 SouL 10 5 5 50% -1 7 KTF 매직엔스 10 5 5 50% -4 2 8 POS 10 4 6 40% -5 2 9 헥사트론 드림팀 10 3 7 30% -6 10 삼성전자 칸 10 3 7 30% -6 11 Plus 10 2 8 20% -12 2 결승전[편집] 2004년 7월 18일 한빛 스타즈 4 - 3 SK텔레콤 T1 광안리 해수욕장 관중수: 10만명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결승전 경기 목록 순 선수 맵 선수 1 박경락 승 노스탤지아 패 박용욱 2 강도경, 나도현 패 버티고 플러스 승 이창훈, 임요환 3 박영민 패 레퀴엠 승 최연성 4 강도경, 박영민 패 헌트리스 승 김성제, 이창훈 5 김선기 승 네오 기요틴 패 임요환 6 강도경, 조형근 승 버티고 플러스 패 김성제, 이창훈 7 나도현 승 제노스카이 패 김현진 대회 결과[편집] 최종결과 우승 : 한빛 스타즈 , 준우승 : SK텔레콤 T1 결승전[편집] SKY 프로리그 2004의 결승전은 2004년 7월 17일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치러졌으며 같은 날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 관중 1만 5천명을 훨씬 압도하는 10만관중이 몰려 세계적으로 E-스포츠의 위상을 크게 보여주었다. 경기 결과 4:3로 한빛 스타즈가 우승했다. 입장 관객수는 약 10만명(추산).[2]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방송되지 않은 경기 ↑ 스타 프로리그 결승 10만관객 영광 회복하나(2007년 8월 3일 일자 조이뉴스24 스포츠면 기사) 외부 링크[편집] 오프닝 결승전 오프닝 KeSPA 프로리그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Neowiz Pmang컵 온게임넷 프로리그(2003.10.11 ~ 2004.02.29) SKY 프로리그 2004 1Round(2004.04.17 ~ 2004.07.17) SKY 프로리그 2004 2Round(2004.08.11 ~ 2004.10.30) vdeh 역대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2003년~2005년 2003 KTF EVER(예선) 2003 Neowiz Pmang(예선) 2004 SKY 1라운드 2004 SKY 2라운드 2004 SKY 3라운드 2004 SKY 그랜드 파이널 2005년~2007년 SKY 2005 전기 SKY 2005 후기 SKY 2005 그랜드파이널 SKY 2006 전기 SKY 2006 후기 SKY 2006 통합챔피언전 2007년~2008년 2007 신한은행 전기 2007 신한은행 후기 신한은행 2007 통합챔피언전 2008 신한은행 2008년~2011년 08-09 신한은행 09-10 신한은행 10-11 신한은행 2011년~2013년 11-12 SK플래닛 2012 SK플래닛 12-13 SK플래닛 2013년~2016년 2014 SK텔레콤 2015 SK텔레콤 2016 SK텔레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SKY_프로리그_2004_1라운드&oldid=22797053" 분류: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2004년 이스포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0월 15일 (월) 18: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카이 프로리그 2004 1라운드SKY PROLEAGUE 2004 1R 대회 정보차수 제3회 대회기간 2004년 4월 17일 ~ 2004년 7월 18일주관방송사 온게임넷스폰서 SKY참가팀 11팀 슈마 G.O 투나 SG → SG 패밀리 한빛 스타즈 SouL KOR KTF 매직엔스 SK텔레콤 T1 헥사트론 드림팀 KTEC 플러스 P.O.S 삼성전자 칸공식맵 Nostalgia (3시즌)Neo Guillotine (수정, 3시즌)Requiem (신규)XENO SKY (신규)바람의 계곡 (신규, 시즌중 퇴출)Huntress (팀플레이, 3시즌)Vertigo Plus (팀플레이, 2시즌)경기장소 서울 삼성동 코엑스 메가스튜디오 결승전장소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해설 전용준 (캐스터) 김동수 (해설) 김도형 (해설)최종 순위우승 한빛 스타즈 (1번째 우승)준우승 SK텔레콤 T13위 SG 패밀리4위 슈마 G.O개인수상 및 통계MVP 강도경Z (한빛 스타즈)총 8승 5패팀플레이 8승 5패결승MVP 김선기T (한빛 스타즈)결승 개인전 1승 0패 (제5경기 승리 vs 임요환T)나도현T (한빛 스타즈)결승 개인전 1승 0패 (제7경기 승리 vs 김현진T)최다승 차재욱T (KOR)개인전 5승 0패감독상 이재균 (한빛 스타즈)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네오위즈 피망컵 2003 SKY 2004 2R →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SKY Pro League 2004 1Round) 는 프로리그의 3번째 시즌이며, 2004 시즌 첫 리그이다. 프로리그를 상징하는 파란색별 로고(SKY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까지 사용)가 도입된 시즌이기도 했다. 목차 1 개요 2 순위 3 경기 기록 4 결승전 5 대회 결과 6 결승전 7 각주 8 외부 링크 개요[편집] 리그기간 : 2004년 4월 17일 ~ 2004년 7월 17일 이번 시즌에서 3라운드 시즌까지 동족전 제어를 위한 특단의 조치로 동일 종족 동일 맵 연속 출전 금지규정을 적용하였다. 이는 지난 시즌이었던 피망컵 프로리그의 'Another Day' 맵 때문이었다. 이 맵에서의 경기가 테테전만(테란 대 저그전이 두 번 정도 제외하곤 테테전만 진행)나오자 결국 동족전 제어를 위해 시행되었다. 이 규정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A팀이 레퀴엠 맵에 테란을 출전시키면 그다음 경기에서는 레퀴엠에 테란을 내보낼 수 없다. 즉, 어떤 팀에서 특정종족이 특정 맵에 나오면 다음 경기에서는 그맵에 다른 종족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들의 용병술의 제약이 뒤따르자 2005 시즌에는 폐지되었다 순위[편집] 순위기준: 다승 → 승점 → 승자승 순 순위 팀 경기수 승 패 승률 승점 벌점 진출여부 1 한빛 스타즈 10 8 2 80% 10 결승진출 2 SK텔레콤 T1 10 7 3 70% 7 1 결승진출 3 SG 패밀리 10 7 3 70% 5 4 슈마 GO 10 6 4 60% 4 1 5 KOR 10 5 5 50% 0 6 SouL 10 5 5 50% -1 7 KTF 매직엔스 10 5 5 50% -4 2 8 POS 10 4 6 40% -5 2 9 헥사트론 드림팀 10 3 7 30% -6 10 삼성전자 칸 10 3 7 30% -6 11 Plus 10 2 8 20% -12 2 2라운드 탈락 경기 기록[편집] 1라운드 경기 기록 주차 경기일 승리 패배 점수 1 4월 17일 슈마 GO 헥사트론 드림팀 2-0 SouL 삼성전자 칸 2-1 4월 21일 투나 SG Plus 2-1 KOR KTF 메직엔스 2-0 2 4월 24일 한빛 스타즈 SKT T1 2-0 POS SouL 2-0 4월 28일 KTF 메직엔스 헥사트론 드림팀 2-1 투나 SG 슈마 GO 2-0 3 5월 1일 Plus POS 2 - 1 한빛 스타즈 삼성전자 칸 2 - 1 5월 5일 SouL KOR 2-1 KTF 매직엔스 SK텔레콤 T1 2 - 1 4 5월 8일 헥사트론 드림팀 삼성전자 칸 2 - 0 투나 SG POS 2 - 1 5월 12일 KOR Plus 2 - 0 한빛 스타즈 슈마 GO 2 - 1 5 5월 15일 투나 SG 2 - 0 삼성전자 칸 SK텔레콤 T1 SouL 2 - 0 5월 19일 SouL KTF 매직엔스 2 - 0 슈마 GO 1 - 2 KOR 한빛 스타즈 POS 2-0[1] 6 5월 22일 Soul Plus 2-0 헥사트론 드림팀 SK텔레콤 T1 2-0 5월 26일 POS KOR 2-0 헥사트론 드림팀 한빛 스타즈 1-2 삼성전자 칸 KTF 메직엔스 2-1[1] 7 5월 15일 Plus 슈마 GO 0 - 2 SK텔레콤 T1 KOR 2 - 0 6월 2일 삼성전자 칸 SK텔레콤 T1 2-0 슈마 GO 2 - 0 Plus POS 헥사트론 드림팀 2-1[1] KTF 메직엔스 투나 SG 2-1[1] 8 6월 5일 한빛 스타즈 SouL 2 - 0 SK텔레콤 T1 2 - 0 슈마 GO 6월 9일 투나 SG 0 - 2 한빛 스타즈 슈마 GO 2 - 0 POS KOR 삼성전자 칸 2-1 KTF 매직엔스 Plus 2-1 9 6월 16일 헥사트론 드림팀 0 - 2 SG 패밀리 SK텔레콤 T1 2 - 0 POS 10 6월 19일 Plus 한빛 스타즈 2-1 KTF 매직엔스 슈마 GO 1-2 헥사트론 드림팀 KOR 2-1[1] 6월 23일 한빛 스타즈 1 - 2 KTF 매직엔스 Plus 2 - 0 헥사트론 드림팀 삼성전자 칸 POS 2-0[1] SG 패밀리 KOR 2-1[1] 11 6월 26일 SouL 2 - 0 헥사트론 드림팀 Plus 0 - 2 SK텔레콤 T1 6월 30일 SK텔레콤 T1 2 - 0 SG 패밀리 POS 2 - 0 KTF 매직엔스 슈마 GO 삼성전자 칸 2-0[1] 12 7월 3일 Plus 삼성전자 칸 2-0 한빛 스타즈 KOR 2-1 SG 패밀리 SouL 2-1[1] 순위 팀 경기수 승 패 승률 승점 벌점 1 한빛 스타즈 10 8 2 80% 10 2 SK텔레콤 T1 10 7 3 70% 7 1 3 SG 패밀리 10 7 3 70% 5 4 슈마 GO 10 6 4 60% 4 1 5 KOR 10 5 5 50% 0 6 SouL 10 5 5 50% -1 7 KTF 매직엔스 10 5 5 50% -4 2 8 POS 10 4 6 40% -5 2 9 헥사트론 드림팀 10 3 7 30% -6 10 삼성전자 칸 10 3 7 30% -6 11 Plus 10 2 8 20% -12 2 결승전[편집] 2004년 7월 18일 한빛 스타즈 4 - 3 SK텔레콤 T1 광안리 해수욕장 관중수: 10만명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결승전 경기 목록 순 선수 맵 선수 1 박경락 승 노스탤지아 패 박용욱 2 강도경, 나도현 패 버티고 플러스 승 이창훈, 임요환 3 박영민 패 레퀴엠 승 최연성 4 강도경, 박영민 패 헌트리스 승 김성제, 이창훈 5 김선기 승 네오 기요틴 패 임요환 6 강도경, 조형근 승 버티고 플러스 패 김성제, 이창훈 7 나도현 승 제노스카이 패 김현진 대회 결과[편집] 최종결과 우승 : 한빛 스타즈 , 준우승 : SK텔레콤 T1 결승전[편집] SKY 프로리그 2004의 결승전은 2004년 7월 17일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치러졌으며 같은 날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 관중 1만 5천명을 훨씬 압도하는 10만관중이 몰려 세계적으로 E-스포츠의 위상을 크게 보여주었다. 경기 결과 4:3로 한빛 스타즈가 우승했다. 입장 관객수는 약 10만명(추산).[2]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방송되지 않은 경기 ↑ 스타 프로리그 결승 10만관객 영광 회복하나(2007년 8월 3일 일자 조이뉴스24 스포츠면 기사) 외부 링크[편집] 오프닝 결승전 오프닝 KeSPA 프로리그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Neowiz Pmang컵 온게임넷 프로리그(2003.10.11 ~ 2004.02.29) SKY 프로리그 2004 1Round(2004.04.17 ~ 2004.07.17) SKY 프로리그 2004 2Round(2004.08.11 ~ 2004.10.30) vdeh 역대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2003년~2005년 2003 KTF EVER(예선) 2003 Neowiz Pmang(예선) 2004 SKY 1라운드 2004 SKY 2라운드 2004 SKY 3라운드 2004 SKY 그랜드 파이널 2005년~2007년 SKY 2005 전기 SKY 2005 후기 SKY 2005 그랜드파이널 SKY 2006 전기 SKY 2006 후기 SKY 2006 통합챔피언전 2007년~2008년 2007 신한은행 전기 2007 신한은행 후기 신한은행 2007 통합챔피언전 2008 신한은행 2008년~2011년 08-09 신한은행 09-10 신한은행 10-11 신한은행 2011년~2013년 11-12 SK플래닛 2012 SK플래닛 12-13 SK플래닛 2013년~2016년 2014 SK텔레콤 2015 SK텔레콤 2016 SK텔레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SKY_프로리그_2004_1라운드&oldid=22797053" 분류: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2004년 이스포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0월 15일 (월) 18: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카롤리나 코스트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롤리나 코스트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글의 정확성과 사실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0년 1월 23일) 카롤리나 코스트너Carolina Kostner 2007년 네벨혼트로피 시상식의 카롤리나 코스트너출생 1987년 2월 8일(1987-02-08) (32세)이탈리아 볼차노국적 이탈리아 메달 기록 이탈리아의 선수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올림픽 동 2014년 소치 여자 싱글 ISU 세계선수권 금 2012년 니스 은 2013년 런던 은 2008년 예테보리 동 2011년 모스코바 동 2005년 모스크바 동 2014년 사이타마 ISU 유럽선수권 금 2013년 자그레브 금 2012년 셰필드 금 2010년 탈린 금 2008년 자그레브 금 2007년 바르샤바 은 2011년 베른 은 2009년 헬싱키 동 2014년 부다페스트 동 2006년 리옹 ISU 그랑프리 파이널 금 2011년 퀘벡 은 2010년 베이징 동 2008년 고양 동 2007년 토리노 카롤리나 코스트너(독일어: Carolina Kostner, 1987년 2월 8일 ~ )는 이탈리아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이탈리아 선수로는 최초로 2014년 소치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ISU 유럽선수권 대회 5회 우승자이며, 2011년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 2012년 피겨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자이다. 목차 1 기본정보 2 개인 생활 3 경력 4 스케이팅 기술 5 주요 대회 기록 6 각주 7 외부 링크 기본정보[편집] 생년월일: 1987년 2월 8일(1987-02-08) (32세) 신장: 169cm[1] 출생지: 이탈리아 볼차노 거주지: 이탈리아 오르티세이(Ortisei) 학력 : 토리노 대학교 세계랭킹: 10위[2] 좋아하는 선수: 스테판 랑비엘 코치: 미하엘 후트 안무가: 로리 니콜 전지훈련지: 독일 오베르스도르프 ISU 공인 개인 최고 기록 쇼트프로그램: 80.24 (2018 세계선수권) 프리스케이팅: 142.61 (2014 소치동계올림픽) 총점: 216.73 (2014 소치동계올림픽) 개인 생활[편집] 카롤리나 코스트너의 집안은 동계스포츠로 유명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 참가한 이탈리아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였으며, 두 명의 남자 형제도 독일, 핀란드 등지에서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해 오고 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의 알파인스키 은메달 수상자인 이졸데 코스트네르의 사촌이기도 하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이 많은 남티롤의 볼차노에서 태어난 그는 이 지방의 소수민족 언어인 라딘어를 구사하며, 동시에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으며, 영어와 프랑스어도 할 수 있다. 한편 코스트네르는 2008년 하계 올림픽 경보에서 금메달을 딴 세계적인 경보 선수인 알렉스 슈바처와 연인 관계이다.[3] 소치올림픽 이후 연인 슈바처가 도핑문제로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자 코스트너 본인도 검사를 받고 연인 슈바처의 도핑사실을 묵인한 죄로 선수생활을 정지당했으나, 2016-2017시즌 복귀 예정에 있다. 경력[편집] 2005-2006 시즌, 토리노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부문 여자싱글 이탈리아 대표, 총점 9위를 기록했다. (우승자는 일본의 아라카와 시즈카.) 2006-2007시즌, 유럽선수권대회 우승. 2007-2008시즌, 07-08 시즌에 참가하는 첫 국제대회인 그랑프리 3차 대회 컵 오브 차이나에서 쇼트 1위를 기록하나 프리에서의 실수로 김연아(1위)와 2007년 주니어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캐롤라인 장(2위)의 뒤를 이어 총점 3위를 기록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 후 일본에서 열리는 6차 그랑프리 시리즈인 NHK 트로피에서 안도 미키(4위) 등의 라이벌들을 누르며 총점 1위를 기록, 금메달을 획득해 자국인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리는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권을 획득했는데 NHK 트로피에서 스텝 레벨 4를 기록했다. 토리노 그랑프리 파이널 쇼트에서는 1위 김연아, 2위 캐롤라인 장의 뒤를 이어 3위를 기록, 프리와의 총점에서는 김연아(우승)와 아사다 마오(2위)의 뒤를 이어 동메달을 획득한다. 그 뒤 유럽선수권에서는 2006-2007에서처럼 1위를 차지 유럽선수권 2연패를 기록했다. 또 200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쇼트 1위를 기록하나 프리에서의 잦은 실수로 아사다 마오(우승)에 이어 2위를 차지, 은메달을 획득하며 본인의 세계선수권대회 최고 순위를 경신했다. 2008-2009시즌, 참가하는 첫 국제대회인 그랑프리 2차 대회 Skate Canada에서 쇼트에서 난조를 보이며 7위를 기록하고 프리에서 점수를 만회해 4위를 기록했다.(우승자는 캐나다의 조아니 로셰트.) 두 번째 국제대회인 컵 오브 러시아,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점프 후 착지 불안 등과 같은 작은 실수로 일본의 수구리 후미에의 뒤를 이어 2위를 기록했고 프리 스케이팅에서는 역전하여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대한민국 고양시에서 열린 2008-2009 시즌 그랑프리 파이널, 컴비네이션 점프로 예정한 첫 점프에서 넘어져 2번째 점프를 연결하지 못하는 등, 김연아, 아사다 마오, 나카노 유카리의 뒤를 이어 쇼트 프로그램 4위를 기록했고 프리 스케이팅에서의 경기 후 총점 3위를 기록해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2009-2010시즌, 그랑프리 첫 대회인 Trophee Eric Bompard와 그랑프리 3차대회 Cup of China에서 모두 6위를 기록하며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유럽선수권에서 1위에 올라 부진을 씻는 듯 했으나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는 프리 스케이팅에서 난조를 보이며 16위에 머물렀다. 시즌 마지막의 세계선수권에서는 6위에 올랐다. 2010-2011시즌, 그랑프리 1차대회에서 1위, 4차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여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해 일본의 무라카미 가나코 선수를 0.01점 차이로 누르며 2위에 올랐다. 유럽선수권에서는 2위, 세계선수권에서는 안도 미키, 김연아 선수에 이어 3위에 올랐다. 2011-2012시즌, 그랑프리 세 개 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를 기록하여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였고, 파이널에서도 1위에 오른다. 유럽선수권에서도 1위에 올라 4번의 우승을 기록하였고, 세계선수권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1위에 올라 첫 세계챔피언에 오른다. 2012-2013시즌, 그랑프리 시리즈 두 개 대회에 배정되었으나,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은퇴를 번복하고 2012년 하반기에 복귀하였으며, 2013년 1월에 열린 유럽선수권에 참가하여 다시 우승하였다. 유럽선수권 통산 5차례 우승이며, 8회 연속 입상이었다. 그리고 세계선수권에서 프리 프로그램과 총점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김연아에 이어 준우승하였다. 하지만 그 해 세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에서 난도가 가장 낮은 연결점프인 트리플 토룹+트리플 토룹에서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출전 선수 중 프로그램 구성점수부문(PCS)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2013-2014시즌, 컵 오브 차이나 대회에서 3위, 컵 오브 러시아 대회에서 2위에 올랐으나,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자격은 얻지 못했다. 2014년 1월 유럽 선수권에서 동메달을 얻어, 유럽선수권 9회 연속 입상을 기록했다. 2014년 동계 올림픽 단체전과 여자 싱글에 참가했으며, 단체전에서는 이탈리아 팀이 4위를 했으며, 여자 싱글에서 아델리나 소트니코바, 김연아에 이어 3위에 올라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탈리아 여자 싱글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얻은 것이었다. 현재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금지약물 복용 의혹을 받고 있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은메달로 승계된다. 스케이팅 기술[편집] 왼손잡이이기 때문에 보통의 선수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회전한다(오른쪽→왼쪽). 3회전의 러츠, 플립, 룹, 살코, 토룹을 구사할 수 있다. 2006-2007시즌과 2007-2008 시즌에 3회전 플립+3회전 토룹의 연결점프를 프로그램에 넣었으며 성공하였다. 그러나 현재 2009-2010 시즌에는 3회전+3회전 점프를 프로그램에 넣지 않으며, 대신 3회전 플립+2회전 토룹 점프를 프로그램에 포함 시키고 있다. 2010-2011시즌 이후 다시 3회전+3회전 연결점프를 실전에서 구성하고 있으나 트리플 플립, 트리플 러츠에서 이어지는 고난이도 3회전+3회전이 아니라, 점수상으로 가장 난이도가 낮은 3회전+3회전인 트리플 토룹+트리플 토룹을 구성하고 있다. 2011-2012시즌 이후 점프 구성에서 트리플 러츠를 제외하였다. 2012-2013시즌 세계선수권 부터 소치올림픽까지 프리 스케이팅에서 트리플 러츠 1회를 수행 하였다. 주요 대회 기록[편집] 대회/시즌 00-01 01-02 02-03 03-04 04-05 05-06 06-07 07-08 08-09 09-10 10-11 11-12 12-13 13-14 동계올림픽 9 16 3 세계선수권 10 5 3 12 6 2 12 6 3 1 2 3 유럽 선수권 4 5 7 3 1 1 2 1 2 1 1 3 이탈리아 선수권 1 J. 1 2 1 1 1 1 1 2 1 WD 1 그랑프리 파이널 3 3 2 1 컵 오브 러시아 2 7 1 2 스케이트 캐나다 5 7 4 컵 오브 차이나 3 6 1 3 NHK 트로피 6 1 트로피 에릭 봉파르 2 6 2 스케이트 아메리카 9 3 2 주니어 세계선수권 11 10 3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2 주니어 그랑프리 중국 4 주니어 그랑프리 프랑스 1 주니어 그랑프리 노르웨이 9 주니어 그랑프리 독일 7 핀란디아 트로피 4 3 네벨혼 트로피 1 1 J.(주니어) 13세 이상 각주[편집] ↑ “Biography”. 국제빙상연맹. ↑ “ISU World Standings for Single Ladies”. 국제빙상연맹. 2014년 12월 현재 ↑ “'카롤리나의 연인' 슈바처, 도핑으로 올림픽 퇴출”. OSEN.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카롤리나 코스트너 (영어/독일어/이탈리아어) 카롤리나 코스트너 공식 웹사이트 (영어) 카롤리나 코스트너 - 국제 빙상 연맹 전거 통제 WorldCat VIAF: 232600358 LCCN: no2015082095 ICCU: IT\ICCU\LO1V\35626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카롤리나_코스트너&oldid=24463983" 분류: 1987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이탈리아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독일계 이탈리아인이탈리아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메달리스트이탈리아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2014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2006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2010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2014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2018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숨은 분류: 정확성에 논란이 있는 글/2010년 1월정확성에 논란이 있는 모든 글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B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SuomiFrançaisHrvatskiMagyarՀայերենIdoItaliano日本語LatviešuമലയാളംМонгол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Vèneto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2일 (토) 12: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미네르바 맥고나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네르바 맥고나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해리 포터》 등장인물 미네르바 맥고나걸 성별 여 학교 호그와트 기숙사 그리핀도르 배우 매기 스미스 최초 등장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미네르바 맥고나걸(Minerva McGonagall)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1] 을 기준으로 41년째 호그와트의 교수를 맡고 있는[2] 마녀이며 현재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사감과 변신술 수업을 맡고 있으며 덤블도어가 죽기 전엔 교감을 맡았었다. 또한 볼드모트와 죽음을 먹는 자들에 대항하는 조직인 불사조 기사단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또한 얼룩고양이로 변신이 가능한 애니마구스이기도 하다. 후에 교장으로 승차한다. 목차 1 해리 포터와의 관계 2 각 권에 나오는 맥고나걸의 모습 2.1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2.2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2.3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2.4 해리 포터와 불의 잔 2.5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2.6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2.7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3 각주 해리 포터와의 관계[편집] 기본적으로는 해리 포터와 사제 지간이지만 실제로는 해리의 부모인 제임스 포터와 릴리 포터, 그리고 해리의 대부인 시리우스 블랙과도 아는 사이였으며[3] 호그와트의 전투에서 해리 포터가 호크룩스를 찾는 동안 시간을 벌어주기도 한다. 각 권에 나오는 맥고나걸의 모습[편집]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편집] 얼룩고양이로서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더즐리 가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서 시작해 덤블도어의 도착 이후 해리가 더즐리 가에 맡겨지는 모습을 지켜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못된 머글이라고 덤블도어에게 반대를 하고 흉터도 없애면 안 되냐고 묻기도 한다. 해리가 입학한 이후엔 교칙에 엄격하고 까다로운 마녀로서의 모습을 보이나[4] 중간중간에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5] 또한 마법사의 돌을 지키기 위해 변신술 주문을 이용해 살아 있는 거대 체스 말을 만들어 설치하기도 했다.[6]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편집] 맥고나걸은 여전히 엄격한 모습을 보이며 아서 위즐리의 날아다니는 차로 학교에 도착한 해리 포터와 론 위즐리에 대해 징계를 내리는 한편 약간의 인간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7] 또한 바실리스크의 공격 속에서도 맥고나걸이 감정을 드러내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8]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냉정을 잃지 않는 모습이 두드러진다.[9]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편집]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맥고나걸의 비중이 매우 적은 편이다. 먼저 디멘터에 의해 기절한 해리를 걱정해 주는 모습이 나왔으며[10] 3학년 첫 학기에 헤르미온느 그레인저에게 거꾸로 가는 시계를 주기도 한다.[11][12] 그리고 제임스 포터와 시리우스 블랙의 관계를 알려주기도 한다.(주석 3 참조) 아즈카반의 죄수에선 맥고나걸이 트릴로니를 경멸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13] 해리 포터와 불의 잔[편집] 불의 잔에서 맥고나걸은 편집증 환자인 은퇴한 오러 앨러스터 무디[14] 와 보바통과 덤스트랭의 방문, 해리의 챔피언 선정 등으로 인해 다른권보다 유달리 곤경을 겪는 경우가 많다. 불의 잔 첫 등장에선 소리의 요정 피브스때문에 곤경을 겪었고[15] 무디가 말포이를 변신술로 혼내는 바람에[16] 당황하기도 하며 5학년때 치르게 될 표준 마법사 수준 테스트인 O.W.L과 보바통, 덤스트랭의 방문 등으로 다른권 보다 다소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17] 또한 여전히 세베루스 스네이프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며(주석 5 참조) 덤블도어를 옹호 하기도 한다.[18] 또한 해리를 걱정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19] 그리고 트리위저드 시합을 위해 마법을 걸기도 한다.[20] 또한 덤블도어의 지시에 따르는 모습도 보였으며[21] 중간에 당시 마법부 장관이었던 코넬리우스 퍼지의 만행으로 분노하기도 한다.[22]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편집] 불사조 기사단에서는O.W.L시험을 위해 해리의 진로 상담을 조언해주고 해리의 악몽을 걱정해 주고 믿어준다. 하지만 엄브릿지의 만행을 경멸하게 싫어하고 맞서기도 한다. 엄브릿지 일당이 해그리드의 오두막으로 가 기절마법을 쏘려고 하는 것에 실패하여 O.W.L시험을 보고 있던 학생들과 맥고나걸 교수가 이를 목격을 하게 되고 그녀는 해그리드를 피신시키기 위해 달려가다가 엄브릿지 일당에 의해 기절마법에 맞아 성 뭉고 병원으로 이송되며 엄브릿지가 해임된 후 호그와트로 돌아왔다.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편집] 해리가 오러가 되기 위해 진로와 과목 성적을 걱정을 해주고 해리가 싫어하던 마법약 수업을 매일 듣기를 권유한다. 6월에 알버스 덤블도어가 스네이프에게 암살되자 교장실에서 그녀는 해리에게 "그동안 너에게 모든 걸 바치고 너를 아꼈고 널 위해 희생된 죽음이니 잊지 마라"라고 충고한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편집] 마지막 편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맥고나걸 교수의 재밌는 면을 잠깐 볼 수 있다. 캐로우 남매와 다툴 때 해리를 보호하고 애정이 있는 마음을 보여준다. 호그와트 전투를 위해 복도에 있는 갑옷 동상과 각 물건에 주문을 걸어 전투를 진행하고 신입생과 재학생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다. 해리가 남은 호크룩스를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다. 마지막에서 슬러그혼,킹슬리와 함께 3:1로 볼드모트에 맞서는 모습이 보이며, 전투에서 승리 후 그녀는 호그와트 교장으로 오르게 되었다. 각주[편집] ↑ 이 문서의 주석에 달린 해리포터 시리즈는 모두 2000년도 이후의 문학수첩에서 낸 한글판 해리포터 시리즈를 기준으로 했다. ↑ 불사조 기사단에서 맥고나걸이 엄브릿지의 수업 참관 과정에서 '올 12월이면 39년'이 된다고 했다. 죽음의 성물은 그로부터 2년 뒤이므로 41년이 맞다. 다만 에필로그인 19년 후를 기준으로 한다면 미네르바 맥고나걸이 아직 재직중이라는 가정하에서 12월에 60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Ⅱ p253 ↑ 마법사의 돌 중에서 맥고나걸은 '릴리와 제임스'라는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른다. 이는 포터 부부와 맥고나걸이 서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해그리드가 뒤늦게 도착했을때 아즈카반의 죄수를 보게 되면 맥고나걸이 제임스 포터와 릴리 포터의 학창시절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왔으며 불사조 기사단 이후에 나오는 제임스 포터나 시리우스 블랙에 대한 부분을 볼때 미네르바와 제임스 포터, 시리우스는 이전부터 같은 불사조 기사단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릴리 포터 역시 기사단일 가능성이 있으나 제임스 포터와는 달리 릴리 포터가 불사조 기사단 인원이었다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Ⅰ p26,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Ⅰ p265~273 ↑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Ⅰ p190~191,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Ⅱ p118~120 ↑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Ⅰ p212~215←이 대목에선 슬리데린과 기숙사 사감 세베루스 스네이프 교수를 싫어한다는 내용도 나와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Ⅱ p66, p153 ↑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Ⅱ p171~175 ↑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Ⅰ p115~119 ↑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Ⅱ P109~111, p153 ↑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Ⅱ p147, p159~162 ↑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Ⅰ p120~122 ↑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Ⅰ p122,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Ⅱ p227~228 ↑ 거꾸로 가는 시계는 아즈카반의 죄수 편에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핵심 소재이다. ↑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Ⅰ p145, p297~299 ↑ 하지만 불의 잔 Ⅳ을 보게 되면 결국 학교에 온 무디는 가짜로 밝혀졌다. ↑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Ⅰ p272~273 ↑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Ⅱ p29~31 ↑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Ⅱ p73~74, p78, p86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Ⅲ p11~15 ↑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Ⅱ p140 ↑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Ⅱ p247~248, p261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Ⅳ p203 ↑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Ⅲ p211 ↑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Ⅳ p204, p224~225, p256 ↑ 해리포터와 불의 잔 Ⅳ p239~242, p248 vdeh해리 포터 (저자: J.K. 롤링)소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해리 포터와 불의 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영화 시리즈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해리 포터와 불의 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사운드 트랙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해리 포터와 불의 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비디오 게임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해리 포터와 불의 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관련 출연 배우들 등장인물주연 해리 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볼드모트 알버스 덤블도어 세베루스 스네이프 루베우스 해그리드 드레이코 말포이 조연 지니 위즐리 시리우스 블랙 미네르바 맥고나걸 돌로레스 엄브릿지 세드릭 디고리 초 챙 네빌 롱바텀 루나 러브굿 리무스 루핀 불사조 기사단 덤블도어의 군대 죽음을 먹는 자 세계 호그와트 마법 목록 마법 생물 마법 물체 마법부 머글 장소 마법 약 퀴디치 호크룩스 관련된 작품 신비한 동물 사전 퀴디치의 역사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 해리 포터 프리퀄 포터모어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호그와트: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는 가이드 게임과 장난감 해리 포터: 퀴디치 월드컵 레고 해리 포터 레고 크리에이터: 해리 포터 레고 해리 포터: 이어스 1-4 레고 해리 포터: 이어스 5-7 마법 약 책 마법 주문 책 해리 포터 트레이딩 카드 게임 액션 피겨 명소 더 위저딩 월드 오브 해리 포터(올랜도,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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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존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필 존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필 존스 개인 정보전체 이름 Philip Anthony Jones출생일 1992년 2월 21일(1992-02-21) (27세)출생지 잉글랜드, 프레스턴키 186 cm포지션 센터백, 라이트 백, 수비형 미드필더클럽 정보현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등번호 4청소년 클럽 기록2002-2009 블랙번 로버스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2009-2011 2011- 블랙번 로버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035 00(0) 127 00(2)국가대표팀 기록‡2009-2010 2010-2011 2011- 잉글랜드 U-19 잉글랜드 U-21 잉글랜드 004 00(0) 009 00(0) 023 00(0)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7년 9월 17일 기준이다.‡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17년 9월 4일 기준이다. 필립 앤서니 존스(영어: Philip Anthony Jones, 1992년 2월 21일 ~ )은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이다. 포지션은 센터백이고,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기 전에 블랙번 로버스의 유소년과 성인 팀에서 뛰었다. 목차 1 클럽 경력 1.1 블랙번 로버스 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 국가대표 경력 3 기록 3.1 클럽 4 각주 5 외부 링크 클럽 경력[편집] 블랙번 로버스[편집] 존스는 프레스턴에서 태어났고, 2002년 블랙번 로버스의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1] 이후 2009-10 시즌을 앞두고 블랙번과 2년 프로 계약을 맺은 후 성인 팀 소속으로 뛰기 시작했다.[2] 그리고 28번 등번호를 받았다. 그는 2009년 9월 22일 노팅엄 포리스트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는 블랙번이 1-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3] 2010년 3월 21일에는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을 치렀는데, 홈인 이우드 파크에서 첼시를 만나 1-1 무승부를 기록하였다.[4] 2010년 5월 4일, 존스는 블랙번 로버스와 새로운 5년 계약을 체결했다.[5] 프리미어리그 2010-11 시즌 초에 존스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2010년 12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전에서 당한 무릎 부상으로 약 5개월 동안 경기를 뛰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편집] 2010-11 시즌이 끝난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존스와의 계약에 관심이 있었다. 블랙번 로버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간의 이적료 협상에서 블랙번은 이적 허용 조항인 1600만 파운드를 요구했다.[7] 이때 존스는 잉글랜드 대표로 2011 UEFA 유러피언 U-21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덴마크로 떠난 상태였다. 2011년 6월 1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존스와의 국가대표 소집이 끝난 후에 계약을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필 존스의 이적료로 1600만 파운드(약 270억 원)를 지불하려했지만. 블랙번이 갑자기 거절하여 맨유는 100억가까이되는 돈을 더지불하여 총 350억의 이적료로 존스를 영업하였다. 존스는 그 후 이적하였고 맨체스터의 주전 센터백 비디치와 리오 퍼디난드의 부상으로 주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풀백과 중앙 미드필더 등 수비의 모든 위치를 가리지 않고 뛸 수 있다. 등번호는 과거 하그리브스가 썼던 4번을 받았으며, 맨유에서 4시즌 동안 128경기를 출전하였다. 그리고, 필 존스는 2015년 6월 30일. 맨유와 2019년 7월까지 재계약을 맺었다. 국가대표 경력[편집] 존스는 2009년 11월 17일 터키 U-19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U-19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경기는 3-1로 승리했다. 2010년 8월 4일, 존스는 잉글랜드 U-21 대표에 차출되었다. 8월 10일,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선발로 첫 출전하였고, 46분 마틴 켈리와 교체될 때까지 뛰었다.[8] 기록[편집] 클럽[편집] 2011년 5월 30일 기준 클럽 시즌 리그 국내 컵 리그 컵 대륙 대회 통산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블랙번 로버스 2009-10 9 0 1 0 2 0 - 12 0 2010-11 26 0 0 0 2 0 - 28 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11-12 29 1 1 0 1 0 9 1 41 2 2012-13 17 0 4 0 0 0 3 0 24 0 통산 80 1 6 0 5 0 12 1 105 2 각주[편집] ↑ “Manchester United secure deal for Blackburn's Phil Jones”. BBC Sports. 2011년 6월 13일. ↑ “Jones Signs 2-year Deal at Rovers”. Blackburn FC. 2009년 9월 4일. 2009년 9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6월 15일에 확인함. ↑ “Nottm Forest 0–1 Blackburn”. BBC Sports. 2009년 9월 22일. ↑ Mark Ashenden (2010년 3월 21일). “Blackburn 1–1 Chelsea”. BBC Sports. ↑ Andy Cryer (2010년 5월 4일). “Jones signs new five-year deal at Blackburn Rovers”. Lancashire Telegraph. ↑ “Blackburn defender Phil Jones faces lengthy absence”. BBC Sport. 2010년 12월 21일. ↑ Andy Hunter (2010년 12월 21일). “Ashley Young heads to Manchester United but Phil Jones deal stalls”. The Guardian. ↑ Jamie Bradbury (2010년 8월 10일). “Rose and Kelly on the mark”. The FA. 외부 링크[편집] 필 존스 - 사커베이스 vdeh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현재 명단 1 데 헤아 2 린델뢰프 3 바이 4 존스 6 포그바 7 산체스 8 마타 9 루카쿠 10 래시퍼드 11 마르시알 12 스몰링 13 그랜트 14 린가드 15 페레이라 16 로호 17 프레드 18 영 20 달로트 21 에레라 22 로메로 23 쇼 25 발렌시아 27 펠라이니 31 마티치 36 다르미안 39 맥토미니 -- 완비사카 -- 제임스 감독: 솔셰르 vdeh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2012 1 하트 2 존슨 3 콜 4 제라드 (주장) 5 켈리 6 테리 7 월컷 8 핸더슨 9 캐럴 10 루니 11 영 12 베인스 13 그린 14 존스 15 레스콧 16 밀너 17 파커 18 자기엘카 19 다우닝 20 체임벌린 21 디포 22 웰벡 23 버틀런드 감독: 호지슨 vdeh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2014년 FIFA 월드컵 1 하트 2 존슨 3 베인스 4 제라드 (주장) 5 케이힐 6 자기엘카 7 윌셔 8 램파드 9 스터리지 10 루니 11 웰벡 12 스몰링 13 B. 포스터 14 헨더슨 15 체임벌린 16 존스 17 밀너 18 램버트 19 스털링 20 랄라나 21 바클리 22 F. 포스터 23 쇼 감독: 호지슨 vdeh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2018년 FIFA 월드컵 4위 1 픽퍼드 2 워커 3 로즈 4 다이어 5 스톤스 6 매과이어 7 린가드 8 헨더슨 9 케인 (주장) 10 스털링 11 바디 12 트리피어 13 버틀런드 14 웰벡 15 케이힐 16 존스 17 델프 18 영 19 래시퍼드 20 알리 21 로프터스치크 22 알렉산더아널드 23 포프 감독: 사우스게이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필_존스&oldid=23525774" 분류: 199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잉글랜드의 축구 선수블랙번 로버스 FC의 축구 선수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축구 수비수UEFA 유로 2012 참가 선수201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잉글랜드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잉글랜드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201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मैथिलीMalagasy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alti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संस्कृतम्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Volapük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4일 (목) 09: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필 존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필 존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필 존스 개인 정보전체 이름 Philip Anthony Jones출생일 1992년 2월 21일(1992-02-21) (27세)출생지 잉글랜드, 프레스턴키 186 cm포지션 센터백, 라이트 백, 수비형 미드필더클럽 정보현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등번호 4청소년 클럽 기록2002-2009 블랙번 로버스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2009-2011 2011- 블랙번 로버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035 00(0) 127 00(2)국가대표팀 기록‡2009-2010 2010-2011 2011- 잉글랜드 U-19 잉글랜드 U-21 잉글랜드 004 00(0) 009 00(0) 023 00(0)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7년 9월 17일 기준이다.‡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17년 9월 4일 기준이다. 필립 앤서니 존스(영어: Philip Anthony Jones, 1992년 2월 21일 ~ )은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이다. 포지션은 센터백이고,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기 전에 블랙번 로버스의 유소년과 성인 팀에서 뛰었다. 목차 1 클럽 경력 1.1 블랙번 로버스 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 국가대표 경력 3 기록 3.1 클럽 4 각주 5 외부 링크 클럽 경력[편집] 블랙번 로버스[편집] 존스는 프레스턴에서 태어났고, 2002년 블랙번 로버스의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1] 이후 2009-10 시즌을 앞두고 블랙번과 2년 프로 계약을 맺은 후 성인 팀 소속으로 뛰기 시작했다.[2] 그리고 28번 등번호를 받았다. 그는 2009년 9월 22일 노팅엄 포리스트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는 블랙번이 1-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3] 2010년 3월 21일에는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을 치렀는데, 홈인 이우드 파크에서 첼시를 만나 1-1 무승부를 기록하였다.[4] 2010년 5월 4일, 존스는 블랙번 로버스와 새로운 5년 계약을 체결했다.[5] 프리미어리그 2010-11 시즌 초에 존스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2010년 12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전에서 당한 무릎 부상으로 약 5개월 동안 경기를 뛰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편집] 2010-11 시즌이 끝난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존스와의 계약에 관심이 있었다. 블랙번 로버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간의 이적료 협상에서 블랙번은 이적 허용 조항인 1600만 파운드를 요구했다.[7] 이때 존스는 잉글랜드 대표로 2011 UEFA 유러피언 U-21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덴마크로 떠난 상태였다. 2011년 6월 1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존스와의 국가대표 소집이 끝난 후에 계약을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필 존스의 이적료로 1600만 파운드(약 270억 원)를 지불하려했지만. 블랙번이 갑자기 거절하여 맨유는 100억가까이되는 돈을 더지불하여 총 350억의 이적료로 존스를 영업하였다. 존스는 그 후 이적하였고 맨체스터의 주전 센터백 비디치와 리오 퍼디난드의 부상으로 주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풀백과 중앙 미드필더 등 수비의 모든 위치를 가리지 않고 뛸 수 있다. 등번호는 과거 하그리브스가 썼던 4번을 받았으며, 맨유에서 4시즌 동안 128경기를 출전하였다. 그리고, 필 존스는 2015년 6월 30일. 맨유와 2019년 7월까지 재계약을 맺었다. 국가대표 경력[편집] 존스는 2009년 11월 17일 터키 U-19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U-19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경기는 3-1로 승리했다. 2010년 8월 4일, 존스는 잉글랜드 U-21 대표에 차출되었다. 8월 10일,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선발로 첫 출전하였고, 46분 마틴 켈리와 교체될 때까지 뛰었다.[8] 기록[편집] 클럽[편집] 2011년 5월 30일 기준 클럽 시즌 리그 국내 컵 리그 컵 대륙 대회 통산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블랙번 로버스 2009-10 9 0 1 0 2 0 - 12 0 2010-11 26 0 0 0 2 0 - 28 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11-12 29 1 1 0 1 0 9 1 41 2 2012-13 17 0 4 0 0 0 3 0 24 0 통산 80 1 6 0 5 0 12 1 105 2 각주[편집] ↑ “Manchester United secure deal for Blackburn's Phil Jones”. BBC Sports. 2011년 6월 13일. ↑ “Jones Signs 2-year Deal at Rovers”. Blackburn FC. 2009년 9월 4일. 2009년 9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6월 15일에 확인함. ↑ “Nottm Forest 0–1 Blackburn”. BBC Sports. 2009년 9월 22일. ↑ Mark Ashenden (2010년 3월 21일). “Blackburn 1–1 Chelsea”. BBC Sports. ↑ Andy Cryer (2010년 5월 4일). “Jones signs new five-year deal at Blackburn Rovers”. Lancashire Telegraph. ↑ “Blackburn defender Phil Jones faces lengthy absence”. BBC Sport. 2010년 12월 21일. ↑ Andy Hunter (2010년 12월 21일). “Ashley Young heads to Manchester United but Phil Jones deal stalls”. The Guardian. ↑ Jamie Bradbury (2010년 8월 10일). “Rose and Kelly on the mark”. The FA. 외부 링크[편집] 필 존스 - 사커베이스 vdeh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현재 명단 1 데 헤아 2 린델뢰프 3 바이 4 존스 6 포그바 7 산체스 8 마타 9 루카쿠 10 래시퍼드 11 마르시알 12 스몰링 13 그랜트 14 린가드 15 페레이라 16 로호 17 프레드 18 영 20 달로트 21 에레라 22 로메로 23 쇼 25 발렌시아 27 펠라이니 31 마티치 36 다르미안 39 맥토미니 -- 완비사카 -- 제임스 감독: 솔셰르 vdeh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2012 1 하트 2 존슨 3 콜 4 제라드 (주장) 5 켈리 6 테리 7 월컷 8 핸더슨 9 캐럴 10 루니 11 영 12 베인스 13 그린 14 존스 15 레스콧 16 밀너 17 파커 18 자기엘카 19 다우닝 20 체임벌린 21 디포 22 웰벡 23 버틀런드 감독: 호지슨 vdeh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2014년 FIFA 월드컵 1 하트 2 존슨 3 베인스 4 제라드 (주장) 5 케이힐 6 자기엘카 7 윌셔 8 램파드 9 스터리지 10 루니 11 웰벡 12 스몰링 13 B. 포스터 14 헨더슨 15 체임벌린 16 존스 17 밀너 18 램버트 19 스털링 20 랄라나 21 바클리 22 F. 포스터 23 쇼 감독: 호지슨 vdeh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2018년 FIFA 월드컵 4위 1 픽퍼드 2 워커 3 로즈 4 다이어 5 스톤스 6 매과이어 7 린가드 8 헨더슨 9 케인 (주장) 10 스털링 11 바디 12 트리피어 13 버틀런드 14 웰벡 15 케이힐 16 존스 17 델프 18 영 19 래시퍼드 20 알리 21 로프터스치크 22 알렉산더아널드 23 포프 감독: 사우스게이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필_존스&oldid=23525774" 분류: 199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잉글랜드의 축구 선수블랙번 로버스 FC의 축구 선수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축구 수비수UEFA 유로 2012 참가 선수201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잉글랜드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잉글랜드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201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मैथिलीMalagasy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alti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संस्कृतम्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Volapük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4일 (목) 09: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센히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센히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센히메 초상화 히메지 성의 센히메 모형 센히메(千姫, 게이초 2년 4월 11일(1597년 5월 26일) - 간분 6년 2월 6일(1666년 3월 11일))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의 인물로, 에도 바쿠후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장녀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손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후의 혼다 다다토키(本多忠刻)의 정실이다. 원호는 덴주인(天樹院)이다.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정쟁에 휘말려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된 그녀의 일생은 각종 소설, 영화,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 있다. 목차 1 일생 1.1 첫 결혼 1.2 혼다 다다토키와의 재혼 2 같이 보기 3 외부 링크 일생[편집] 첫 결혼[편집] 게이초 2년(1597년) 야마시로 국(山城国) 후시미 성(伏見城)의 도쿠가와 저택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그의 정실 에요(江与)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유모는 교부쿄노 쓰보네(刑部卿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게이초 8년(1603년) 3월 24일 센히메의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 휘하의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도요토미 가문을 제치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취임하여 에도에 바쿠후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센히메는 7세의 나이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외아들이자 도요토미 가문의 당주인 히데요리(秀頼)와 혼인하여 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히데요리의 생모는 센히메의 생모 에요의 언니인 요도도노(淀殿; 차차)로, 히데요리와 센히메는 사촌 남매간이기도 하였다. 두 부부 관계는 원만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녀는 없었다. 게이초 10년(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고쇼(大御所)로 물러나고 센히메의 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게이초 19년(1614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결별하면서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였다. 게이초 19년의 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 게이초 20년의 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를 거치면서 패배한 도요토미 가문은 당주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히데요리의 생모 요도도노가 함께 자살하면서 멸망하였으나 센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측실 사이에서 출생한 나아히메(奈阿姫)가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센히메는 나아히메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구하기도 하였다. 나아히메는 덴슈니(天秀尼)라는 법명을 받고 불문에 귀의한 뒤 1645년 36세로 자녀 없이 요절하여 도요토미 가문은 단절되었다. 혼다 다다토키와의 재혼[편집] 겐나 2년(1616년) 구와나 번(桑名藩)의 번주이자 혼다 다다카쓰(本多忠勝)의 손자인 혼다 다다토키와 재혼하였고 동시에 화장비 명목으로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 때 쓰와노 번(津和野藩)의 번주인 사카자키 나오모리(坂崎直盛)가 구와나 번으로 향하는 센히메의 혼례 행렬을 덮쳐 센히메의 가마를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당하여 사카자키 나오모리는 할복하고 사카자키씨는 개역(改易) 처분을 당하는 센히메 사건(千姫事件)이 발생하였다. 이후 쓰와노 번은 시카노 번주였던 가메이 마사노리가 수여받게 된다. 히메지 성 겐나 3년(1617년) 혼다 가문이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로 영지가 변경되면서 남편 혼다 다다토키와 함께 8월 28일 히메지 성(姫路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인 겐나 4년(1618년)에는 장녀 가쓰히메(勝姫), 겐나 5년(1619년) 장남 고치요(幸千代)가 태어나는 등 혼다 다다토키와 센히메는 금슬도 좋았지만, 겐나 7년(1621년) 아들 고치요가 세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간에이 3년(1626년) 남편 혼다 다다토키와 어머니 에요가 연이어 사망하자 딸 가쓰히메와 함께 혼다 가문을 나와 친정 에도 성(江戸城)으로 되돌아왔다. 불교에 입문하여 덴주인이라는 법명을 받은 센히메는 가쓰히메와 함께 에도의 다케바시 저택에서 거처하였다. 가쓰히메는 간에이 5년(1628년) 외조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가 되어 이케다 미쓰마사(池田光政)와 혼인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도요토미 히데요리 외부 링크[편집] 桑名の殿様御台所祭・千姫折鶴祭 전거 통제 WorldCat VIAF: 28426666 LCCN: n82143048 ISNI: 0000 0000 2654 8147 NDL: 0062475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센히메&oldid=24481865" 분류: 1597년 태어남1666년 죽음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여자헤이하치로 혼다씨도쿠가와씨도요토미씨구와나번 사람히메지번 사람17세기 일본 사람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5일 (화) 17: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홍윤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윤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영해 홍윤성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산부원군 홍윤성仁山府院君 洪允成 前 조선국 의정부 영의정(前 朝鮮國 議政府 領議政) 임기 1469년 8월 22일 ~ 1470년 4월 6일 군주 조선 예종 이황조선 성종 이혈 섭정 귀성군 이준한명회정희대왕대비 파평 윤씨 前 조선국 상급 국상 부원위(前 朝鮮國 上級 國相 府院位) 임기 1470년 5월 31일 ~ 1471년 12월 5일 군주 조선 성종 이혈 섭정 정희대왕대비 파평 윤씨 전임 구치관 후임 한백륜 신상정보 국적 조선 출생일 1425년 출생지 조선 충청도 보은군 회인현 사망일 1475년 음력 9월 8일 (51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본관 회인 학력 1450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정당 훈구파 세력 부모 홍제년(부) 형제 홍대성(형) 배우자 부인 3명 자녀 홍진(아들) 친인척 홍용(할아버지) 홍연보(증조부) 남육(장인) 김자모(장인) 별명 초명(初名) 홍우성(洪禹成) 자(字) 수옹(守翁) 호(號) 영해(領海)·경해(傾海)·경음당(鯨飮堂) 시호(諡號) 위평(威平) 종교 유교(성리학) 홍윤성(洪允成, 1425년 ~ 1475년 음력 9월 8일[1])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회인(懷仁). 초명은 우성(禹成), 자(字)는 수옹(守翁)이고, 호(號)는 영해(領海)·경해(傾海), 경음당(鯨飮堂)이다. 1450년(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는 데 협력하여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5년 세조 반정 직후 좌익공신 3등이 되고 예조판서 등을 거쳐 모린위 여진족의 난과 건주위 여진족의 난을 토벌하고 우의정을 지냈다. 예종 즉위 후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예종 사후에는 성종을 지지한 공로로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리공신 1등이 되었다. 성질이 사나워 권세를 얻은 뒤에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기세(氣勢)로써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가노(家奴)를 놓아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숙부까지 살해했으나, 세조는 가볍게 처벌하였고, 그가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으로 세조반정의 원훈(元勳)인 이유로써 단지 책망만 하고 처벌은 가하지 않았다. 시호(諡號)는 위평(威平)이다. 그의 유해는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에 있다. 목차 1 생애 1.1 초기 삶 1.1.1 출생과 가계 1.1.2 청년 시절 1.2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2.1 관료생활 초반 1.2.2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 1.2.3 외교, 군사 활동 1.2.4 권력 남용 1.3 생애 후반 1.3.1 예종, 성종 즉위 전후 1.3.2 최후 1.4 사후 2 작품 3 가족 관계 4 대중문화에 나타난 홍윤성 4.1 드라마 4.2 영화 4.3 문학 5 연보 6 기타 7 같이 보기 8 관련 서적 9 각주 10 외부 링크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영해 홍윤성은 1425년 충청도 보은군 회인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인(懷仁)이다. 증조부는 홍연보(洪延甫)이고, 할아버지는 홍용(洪容)이며, 아버지는 홍제년(洪齊年)이다. 초명은 우성(禹成)이고 자는 수옹(守翁)이며 뒤에 윤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충청북도 회인현 교동(현, 보은군 회인면 부수리) 출신이다. 청년 시절[편집] 그의 초기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전설에 의하면 세종 때 충청도 회인에 살던 그는 형 대성(大成)은 주점을 하는 설패두의 데릴사위가 되고, 자신은 군관이 되어 공주감영으로 갔고, 공주감영의 토포군관(討捕軍官)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태만석의 유혹에 넘어간 형수 설씨가 병든 그의 형 홍대성을 독약으로 독살하자 그가 돌아와 형이 갑작스러운 죽음이 독살이며 형수 설씨와 태만석이 살해했음을 밝혀내고 태만석과 설씨를 죽여 복수한다. 곧 충청도관찰사부에까지 올라가 심문 끝에 사형은 면하여 양산으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추풍령에 이르러 태만석의 아우 태만흥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춘달의 술청을 부수었으며 백성들의 민심을 현혹하던 양산군 통도사의 괴승 청월을 처단하고, 밀양의 어느 양인 노인의 딸을 재취로 데려다 주막집 시킨다는 이춘달을 살해하고 풀어주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뒤 경상북도 청도에 있다가 밀양을 거쳐 충청북도 황간의 당숙의 집에까지 갔으나 공교롭게 당숙모가 원수 태만석의 누이임이 밝혀져 영동 마니산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근거로 1925년 소설가 이해조(李海朝)는 홍장군전을 쓰기도 했다.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편집] 관료생활 초반[편집] 세종 때 음보로 출사하여 군관이 되었다. 는 일찍이 한강 제주정(濟州亭)에서 수양대군과 겨루다가 그와 가까워졌다. 수양대군은 널리 인재를 찾아서 심복에 두었고, 제주정에서 활쏘기를 겨루다가 그를 만나서 자신의 측근으로 두게 되었다. 그 뒤 공주 토포군관을 거쳐 교도(敎導)로 재직 중 1450년(세종 3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무인의 기질이 있어 사복시(司僕寺) 직을 겸하였으며 사복시주부에 올랐다. 1450년 승문원 정자, 사복시 주부, 한성부 참군, 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 1451년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에 임명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문종의 명을 받아 《진서 陣書》를 찬술할 때 좌랑으로서 참여하였으며,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에게 임금이 나이가 어리다며 수양대군에게 집권을 건의하였다. 그는 단종의 나이가 어리고 나라가 위태하니 정국(政局)을 바로잡을 큰 일을 일으켜야 된다고 진언(進言)하고는 권람(權擥)을 모사(謀士)로 천거하였다. 그의 권고를 받아들인 수양대군은 권람을 통해 다시 신숙주, 정인지를 얻게 된다.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편집] 계유정난, 세조반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53년 수양 대군을 옹위하여 정난의 공을 세우고 수양대군이 절재 김종서를 베러 갈 때 동참하였으며[2]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제거하는 등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2등관(輸忠衛社協贊 靖難功臣 二等管)이 되었으며 이어 사복시판관에 승진되고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455년 초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1455년(단종 3년)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세조가 즉위 직후 성주군 월항에 있는 세종대왕의 왕자들의 태실비 중 세조의 태봉비문을 지어 비석으로 세웠다. 그러나 후대에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세조 즉위 초반, 홍윤성의 종들이 횡포를 자행하자 포도청 사졸이던 전림(田霖)이 밤에 홍윤성의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그의 종들을 묶어서 체포한 뒤 엄히 다스리고, 아침에 홍윤성의 집으로 데리고 가 항의했다. 홍윤성은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나중에 전림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술과 음식을 주니, 전림은 많은 음식을 단 번에 먹어 치웠다. 전림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는데, 그의 재주를 본 홍윤성은 전림을 칭찬하고 왕에게 선전관으로 추천하였으며, 이때부터 전림은 홍윤성의 측근이 되어 수시로 홍윤성의 집을 출입했다 한다. 한 번은 홍윤성이 화를 참지 못하고 여자 종을 나무에 묶은 뒤 활로 쏘려 하자, 전림이 청하여 죽이지 말고 자신의 첩으로 달라고 하여 평생을 데리고 살았다 한다. 외교, 군사 활동[편집] 좌익공신, 여진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해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 佐翼功臣) 3등관에 책록되었다. 이어 참판에 승진, 인산군(仁山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예조판서, 를 거쳐 경상우도 도절제사로 나갔다. 1457년(세조 3) 도진무(都鎭撫)를 거쳐, 문무과의 초시를 주관하였다. 1457년 사신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해 다시 예조판서, 경상우도도절제사를 거쳐 1459년(세조 5)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자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다녀왔다. 1460년 모린위(毛憐衛) 여진족이 국경지대를 침입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자 대장(大將) 신숙주(申叔舟)의 부장(副將)으로 출정, 이를 토벌하고 돌아와 숭정대부로 승진했으며, 다시 인산군(仁山君)에 봉군되었다. 권력 남용[편집]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재산인 논밭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땅을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홍윤성은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돌로 때려 죽인 후 시신을 길곁에 버려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했다.[2] 이조판서로 있을 때 홍윤성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그는 논 20두락을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렵게 살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가'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타살한 후 후원에 암매장했다.[2]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받기를 꺼려했으며 사헌부에서도 듣지 않았다 한다.[2] 세조가 온양의 온궁으로 행차한다는 소식을 들은 홍윤성의 숙모는 세조가 도착하기 전날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어가가 나타나자 나무 위에서 길게 호곡했다.[2] 세조가 관리를 시켜 묻자 그의 숙모는 '공신에 관계된 것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그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어가를 멈추고 말하라고 하자 그때서야 홍윤성의 만행을 호소했다.[2] 또한 자기 집 앞을 흐르는 한강변에 말을 목욕시키면 쫓아가서 쳐 죽였고,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하마하지 않고 말을 타고 지나가도 역시 죽여버렸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세조는 그의 행동들에 크게 불쾌해하고 노하였으나 지난날의 공로가 크다 하여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탐하고 횡포한 성질이 있어 온양(溫陽)에 땅을 많이 장만하고 종을 많이 부리면서 심히 학대하고 함부로 죽이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세조가 듣고 크게 노했으나 역시 지난날 그의 공이 크다 하여 윤성의 부하 두목들과 집 노비 등 10여 명을 대신 국문,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생애 후반[편집] 예종, 성종 즉위 전후[편집] 1467년 우의정이 되고,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阮相)의 한 사람으로 서정(庶政)을 처리하고 정사를 수습하였다. 1469년(예종 2)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로 연경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곧 영의정이 되었다. 1469년(예종 2년) 예종이 병사하자 영의정으로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함께 다시 원상의 한사람이 되어 혼란을 수습하고 정무를 처결하였다. 이때 왕위 계승자 후보자를 낙점할 때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 혈을 지지하였다. 홍윤성은 여러 차례 훈적(勳籍)에 참가하였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러 세력이 막강, 조정에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자, 이를 심히 불쾌하게 여긴 왕족 오산군이 그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비오는 날 조정에 나가는 홍윤성에게 비에 관복이 흠뻑 젖어 관복을 갈아 입도록 하는 굴욕을 안겨줌으로써 욕을 보이기도 하였다.[3] 최후[편집] 만년에는 충청도 부여로 낙향,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하마하지 않거나 거만한 기색을 보이는 자는 반드시 불이익을 가했다. 한편 이웃 사람이 좋은 이야기를 들러주면 홍윤성은 많은 재물을 아끼지 않고 상으로 주는 등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고도 한다. 1471년(성종 2) 성종을 지지하고 구성군(龜城君)을 숙청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의 호를 받고,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밝히고, 성격은 횡포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았으나 세조, 예종, 성종의 비호를 받았으므로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1475년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편집] 사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敬屯里) 정수터(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산56-1 경수터)에 안장되었다. 위평(威平)의 시호(諡號)가 추서되었다. 후에 계실 고령김씨는 그의 묘소 앞에 매장되었다. 신도비문은 김수온(金守溫)이 지었다.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그는 포악무도한 인물이며 권력남용을 이유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탄받았다. 그의 저서와 작품들은 성주군 세조대왕태실비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유실, 실전되었다. 묘소는 방치되었고, 묘비문과 신도비는 마멸되어 해석이 불가능하며, 부인의 묘비는 깨져 있었다. 후에 신도비와 묘비, 부인의 묘비 등을 다시 세웠다. 홍윤성의 묘소와 부인 묘소, 그의 신도비를 포함한 묘역은 후일 대한민국에 와서 부여군 향토유적 제49호로 지정되었다. 2003년에는 홍윤성의 묘소 앞 장명등이 도난되는 수난도 있었다.[4] 작품[편집] 성주 세조대왕태실비문 가족 관계[편집] 증조부 : 홍연보(洪延甫) 할아버지 : 홍용(洪容) 숙부 : 이름 미상 아버지 : 홍제년(洪齊年) 어머니 : 이름 미상 형님 : 홍대성(洪大成) 본처 : 남씨 후처 : 정경부인 고령 김씨 아들 : 홍진(洪珍) 측실 : 이름 미상, 양주군 좌수의 딸[출처 필요] 장인 : 남륙(南陸) 장인 : 김자모(金子謀) 대중문화에 나타난 홍윤성[편집] 드라마[편집]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이대근) 《파천무》 (KBS, 1990년 배우:백인철) 《한명회》 (KBS, 1994년~1994년 배우:김형일) 《왕과 비》 (KBS, 1998년~2000년 배우:김형일) 《인수대비》 (JTBC, 2012년~2013년 배우:박정학) 영화[편집] 《칠삭동이의 설중매》(1988년, 배우:김희라) 《관상》(2013년, 배우:유상재) 문학[편집] 홍윤성전 (洪允成傳) - 조선시대 역사소설로 작가와 시대 미상 홍윤성전 (洪允成傳) - 1925년, 이해조 작 연보[편집] 음서로 출사하여 군관, 공주 토포관, 교도 등을 역임 1450년(세종 32) 교도 재직 중, 문과에 급제 1450년 승문원 정자 사복시 주부·한성부 참군·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을 도와 김종서, 황보인을 척살 1453년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靖難功臣 二等)이 되다. 사헌부장령을 거쳐 판사복시사에 올랐다. 1455년(단종 3)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가 됨 1455년 좌익공신 3등으로 책록되고 참판에 승진, 인산군에 봉군되었다. 예조판서, 경상우도 도절제사를 역임, 1460년(세조 5) 신숙주(申叔舟)의 부장이 되어 모련위 여진족의 반란을 토벌 1460년 숭정대부로 승진, 다시 인산군에 봉군됨 1467년(세조 12) 의정부우의정에 승진 1469년(예종 2) 좌의정 1469년 영의정 1470년(성종 1) 좌리공신 1등에 녹훈되고 인산부원군으로 진봉 기타[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6년 2월 22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권세를 얻은 뒤에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친척과 친지들을 외면하였으며 기세(氣勢)로써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가노(家奴)를 시켜서 사람들을 함부로 잡아 죽이기도 하였으나 세조는 가볍게 처벌할 뿐 그가 정난(靖難)과 반정공의 원훈(元勳)인 이유로써 단지 책망하거나 그 노비들을 데려다가 가볍게 처벌할 뿐 그에게는 처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본처 남씨와 후처 김씨 이외에 기녀 또는 평민 출신의 부인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경기도 양주군의 좌수의 딸이라고도 하고,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의 기녀 모란(牧丹)이라고도 한다. 좌수의 딸이라는 설에 따르면, 양주로 행차했던 그가 좌수의 딸의 미모를 보고, 그를 첩으로 삼으려 하자 좌수의 딸이 자신을 정실로 거두지 않으면 자결하겠다고 하여 그가 정식으로 혼례를 하고 데려온 것이라 한다. 순창 기녀 설에 따르면, 야밤에 어느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한 기녀 모란을 그가 호랑이를 화살로 맞추어 구해주고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그가 병조판서로 재직할 당시 세조가 그의 집 잔치에 미복으로 참석했는데, 그의 사연을 듣고 형수라 하여 그를 정처(正妻)로 인정하였다 한다. 후일 그 여자가 자신은 정식으로 데려온 부인이라 하자 김씨가 항소하니, 평민 여자는 세조가 자신을 형수라 했다 하여 왕조실록과 승정원 기록에 세조가 방문하자 부인이 술을 따랐다는 구절을 찾아서 제시했다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세조 계유정난 세조 반정 신숙주 성삼문 하위지 한명회 정창손 이개 김질 홍달손 곽연성 폐비 윤씨 양정 정보 황보인 김종서 한계미 한치형 한보 신면 신정 신용개 윤사흔 윤사분 윤필상 인수대비 정희왕후 윤곤 관련 서적[편집]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이가원, 《이조명인열전》(을유문화사, 1965) 각주[편집] ↑ 성종실록 59권, 성종 6년 9월 8일 갑인 4번째기사 ↑ 가 나 다 라 마 바 조선을 망친 것은 공신들이었다 Archived 2003년 10월 1일 - 웨이백 머신 동아일보역사산책 - 이덕일 ↑ 오산군 ↑ 문화재청 홍윤성의 묘 장명등 도난 공지사항 외부 링크[편집] 홍윤성 조선을 망친 것은 공신들이었다 동아일보 역사산책 홍윤성전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임구치관 조선의 상급 국상1470년 5월 31일 ~ 1471년 12월 5일 후임한백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홍윤성&oldid=23807388" 분류: 1425년 태어남1475년 죽음회인 홍씨보은군 출신과거 급제자조선의 문신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외교관조선의 작가조선의 시인조선의 서예가조선의 군인육군 장군한국의 장군정난공신좌익공신좌리공신영의정훈구파가족 살해자조선 세조조선 단종한명회신숙주병사한 사람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6년 2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5일 (화) 01: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홍윤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윤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영해 홍윤성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산부원군 홍윤성仁山府院君 洪允成 前 조선국 의정부 영의정(前 朝鮮國 議政府 領議政) 임기 1469년 8월 22일 ~ 1470년 4월 6일 군주 조선 예종 이황조선 성종 이혈 섭정 귀성군 이준한명회정희대왕대비 파평 윤씨 前 조선국 상급 국상 부원위(前 朝鮮國 上級 國相 府院位) 임기 1470년 5월 31일 ~ 1471년 12월 5일 군주 조선 성종 이혈 섭정 정희대왕대비 파평 윤씨 전임 구치관 후임 한백륜 신상정보 국적 조선 출생일 1425년 출생지 조선 충청도 보은군 회인현 사망일 1475년 음력 9월 8일 (51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본관 회인 학력 1450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정당 훈구파 세력 부모 홍제년(부) 형제 홍대성(형) 배우자 부인 3명 자녀 홍진(아들) 친인척 홍용(할아버지) 홍연보(증조부) 남육(장인) 김자모(장인) 별명 초명(初名) 홍우성(洪禹成) 자(字) 수옹(守翁) 호(號) 영해(領海)·경해(傾海)·경음당(鯨飮堂) 시호(諡號) 위평(威平) 종교 유교(성리학) 홍윤성(洪允成, 1425년 ~ 1475년 음력 9월 8일[1])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회인(懷仁). 초명은 우성(禹成), 자(字)는 수옹(守翁)이고, 호(號)는 영해(領海)·경해(傾海), 경음당(鯨飮堂)이다. 1450년(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는 데 협력하여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5년 세조 반정 직후 좌익공신 3등이 되고 예조판서 등을 거쳐 모린위 여진족의 난과 건주위 여진족의 난을 토벌하고 우의정을 지냈다. 예종 즉위 후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예종 사후에는 성종을 지지한 공로로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리공신 1등이 되었다. 성질이 사나워 권세를 얻은 뒤에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기세(氣勢)로써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가노(家奴)를 놓아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숙부까지 살해했으나, 세조는 가볍게 처벌하였고, 그가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으로 세조반정의 원훈(元勳)인 이유로써 단지 책망만 하고 처벌은 가하지 않았다. 시호(諡號)는 위평(威平)이다. 그의 유해는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에 있다. 목차 1 생애 1.1 초기 삶 1.1.1 출생과 가계 1.1.2 청년 시절 1.2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2.1 관료생활 초반 1.2.2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 1.2.3 외교, 군사 활동 1.2.4 권력 남용 1.3 생애 후반 1.3.1 예종, 성종 즉위 전후 1.3.2 최후 1.4 사후 2 작품 3 가족 관계 4 대중문화에 나타난 홍윤성 4.1 드라마 4.2 영화 4.3 문학 5 연보 6 기타 7 같이 보기 8 관련 서적 9 각주 10 외부 링크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영해 홍윤성은 1425년 충청도 보은군 회인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인(懷仁)이다. 증조부는 홍연보(洪延甫)이고, 할아버지는 홍용(洪容)이며, 아버지는 홍제년(洪齊年)이다. 초명은 우성(禹成)이고 자는 수옹(守翁)이며 뒤에 윤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충청북도 회인현 교동(현, 보은군 회인면 부수리) 출신이다. 청년 시절[편집] 그의 초기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전설에 의하면 세종 때 충청도 회인에 살던 그는 형 대성(大成)은 주점을 하는 설패두의 데릴사위가 되고, 자신은 군관이 되어 공주감영으로 갔고, 공주감영의 토포군관(討捕軍官)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태만석의 유혹에 넘어간 형수 설씨가 병든 그의 형 홍대성을 독약으로 독살하자 그가 돌아와 형이 갑작스러운 죽음이 독살이며 형수 설씨와 태만석이 살해했음을 밝혀내고 태만석과 설씨를 죽여 복수한다. 곧 충청도관찰사부에까지 올라가 심문 끝에 사형은 면하여 양산으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추풍령에 이르러 태만석의 아우 태만흥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춘달의 술청을 부수었으며 백성들의 민심을 현혹하던 양산군 통도사의 괴승 청월을 처단하고, 밀양의 어느 양인 노인의 딸을 재취로 데려다 주막집 시킨다는 이춘달을 살해하고 풀어주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뒤 경상북도 청도에 있다가 밀양을 거쳐 충청북도 황간의 당숙의 집에까지 갔으나 공교롭게 당숙모가 원수 태만석의 누이임이 밝혀져 영동 마니산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근거로 1925년 소설가 이해조(李海朝)는 홍장군전을 쓰기도 했다.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편집] 관료생활 초반[편집] 세종 때 음보로 출사하여 군관이 되었다. 는 일찍이 한강 제주정(濟州亭)에서 수양대군과 겨루다가 그와 가까워졌다. 수양대군은 널리 인재를 찾아서 심복에 두었고, 제주정에서 활쏘기를 겨루다가 그를 만나서 자신의 측근으로 두게 되었다. 그 뒤 공주 토포군관을 거쳐 교도(敎導)로 재직 중 1450년(세종 3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무인의 기질이 있어 사복시(司僕寺) 직을 겸하였으며 사복시주부에 올랐다. 1450년 승문원 정자, 사복시 주부, 한성부 참군, 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 1451년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에 임명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문종의 명을 받아 《진서 陣書》를 찬술할 때 좌랑으로서 참여하였으며,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에게 임금이 나이가 어리다며 수양대군에게 집권을 건의하였다. 그는 단종의 나이가 어리고 나라가 위태하니 정국(政局)을 바로잡을 큰 일을 일으켜야 된다고 진언(進言)하고는 권람(權擥)을 모사(謀士)로 천거하였다. 그의 권고를 받아들인 수양대군은 권람을 통해 다시 신숙주, 정인지를 얻게 된다.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편집] 계유정난, 세조반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53년 수양 대군을 옹위하여 정난의 공을 세우고 수양대군이 절재 김종서를 베러 갈 때 동참하였으며[2]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제거하는 등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2등관(輸忠衛社協贊 靖難功臣 二等管)이 되었으며 이어 사복시판관에 승진되고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455년 초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1455년(단종 3년)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세조가 즉위 직후 성주군 월항에 있는 세종대왕의 왕자들의 태실비 중 세조의 태봉비문을 지어 비석으로 세웠다. 그러나 후대에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세조 즉위 초반, 홍윤성의 종들이 횡포를 자행하자 포도청 사졸이던 전림(田霖)이 밤에 홍윤성의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그의 종들을 묶어서 체포한 뒤 엄히 다스리고, 아침에 홍윤성의 집으로 데리고 가 항의했다. 홍윤성은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나중에 전림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술과 음식을 주니, 전림은 많은 음식을 단 번에 먹어 치웠다. 전림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는데, 그의 재주를 본 홍윤성은 전림을 칭찬하고 왕에게 선전관으로 추천하였으며, 이때부터 전림은 홍윤성의 측근이 되어 수시로 홍윤성의 집을 출입했다 한다. 한 번은 홍윤성이 화를 참지 못하고 여자 종을 나무에 묶은 뒤 활로 쏘려 하자, 전림이 청하여 죽이지 말고 자신의 첩으로 달라고 하여 평생을 데리고 살았다 한다. 외교, 군사 활동[편집] 좌익공신, 여진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해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 佐翼功臣) 3등관에 책록되었다. 이어 참판에 승진, 인산군(仁山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예조판서, 를 거쳐 경상우도 도절제사로 나갔다. 1457년(세조 3) 도진무(都鎭撫)를 거쳐, 문무과의 초시를 주관하였다. 1457년 사신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해 다시 예조판서, 경상우도도절제사를 거쳐 1459년(세조 5)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자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다녀왔다. 1460년 모린위(毛憐衛) 여진족이 국경지대를 침입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자 대장(大將) 신숙주(申叔舟)의 부장(副將)으로 출정, 이를 토벌하고 돌아와 숭정대부로 승진했으며, 다시 인산군(仁山君)에 봉군되었다. 권력 남용[편집]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재산인 논밭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땅을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홍윤성은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돌로 때려 죽인 후 시신을 길곁에 버려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했다.[2] 이조판서로 있을 때 홍윤성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그는 논 20두락을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렵게 살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가'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타살한 후 후원에 암매장했다.[2]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받기를 꺼려했으며 사헌부에서도 듣지 않았다 한다.[2] 세조가 온양의 온궁으로 행차한다는 소식을 들은 홍윤성의 숙모는 세조가 도착하기 전날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어가가 나타나자 나무 위에서 길게 호곡했다.[2] 세조가 관리를 시켜 묻자 그의 숙모는 '공신에 관계된 것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그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어가를 멈추고 말하라고 하자 그때서야 홍윤성의 만행을 호소했다.[2] 또한 자기 집 앞을 흐르는 한강변에 말을 목욕시키면 쫓아가서 쳐 죽였고,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하마하지 않고 말을 타고 지나가도 역시 죽여버렸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세조는 그의 행동들에 크게 불쾌해하고 노하였으나 지난날의 공로가 크다 하여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탐하고 횡포한 성질이 있어 온양(溫陽)에 땅을 많이 장만하고 종을 많이 부리면서 심히 학대하고 함부로 죽이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세조가 듣고 크게 노했으나 역시 지난날 그의 공이 크다 하여 윤성의 부하 두목들과 집 노비 등 10여 명을 대신 국문,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생애 후반[편집] 예종, 성종 즉위 전후[편집] 1467년 우의정이 되고,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阮相)의 한 사람으로 서정(庶政)을 처리하고 정사를 수습하였다. 1469년(예종 2)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로 연경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곧 영의정이 되었다. 1469년(예종 2년) 예종이 병사하자 영의정으로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함께 다시 원상의 한사람이 되어 혼란을 수습하고 정무를 처결하였다. 이때 왕위 계승자 후보자를 낙점할 때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 혈을 지지하였다. 홍윤성은 여러 차례 훈적(勳籍)에 참가하였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러 세력이 막강, 조정에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자, 이를 심히 불쾌하게 여긴 왕족 오산군이 그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비오는 날 조정에 나가는 홍윤성에게 비에 관복이 흠뻑 젖어 관복을 갈아 입도록 하는 굴욕을 안겨줌으로써 욕을 보이기도 하였다.[3] 최후[편집] 만년에는 충청도 부여로 낙향,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하마하지 않거나 거만한 기색을 보이는 자는 반드시 불이익을 가했다. 한편 이웃 사람이 좋은 이야기를 들러주면 홍윤성은 많은 재물을 아끼지 않고 상으로 주는 등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고도 한다. 1471년(성종 2) 성종을 지지하고 구성군(龜城君)을 숙청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의 호를 받고,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밝히고, 성격은 횡포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았으나 세조, 예종, 성종의 비호를 받았으므로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1475년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편집] 사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敬屯里) 정수터(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산56-1 경수터)에 안장되었다. 위평(威平)의 시호(諡號)가 추서되었다. 후에 계실 고령김씨는 그의 묘소 앞에 매장되었다. 신도비문은 김수온(金守溫)이 지었다.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그는 포악무도한 인물이며 권력남용을 이유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탄받았다. 그의 저서와 작품들은 성주군 세조대왕태실비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유실, 실전되었다. 묘소는 방치되었고, 묘비문과 신도비는 마멸되어 해석이 불가능하며, 부인의 묘비는 깨져 있었다. 후에 신도비와 묘비, 부인의 묘비 등을 다시 세웠다. 홍윤성의 묘소와 부인 묘소, 그의 신도비를 포함한 묘역은 후일 대한민국에 와서 부여군 향토유적 제49호로 지정되었다. 2003년에는 홍윤성의 묘소 앞 장명등이 도난되는 수난도 있었다.[4] 작품[편집] 성주 세조대왕태실비문 가족 관계[편집] 증조부 : 홍연보(洪延甫) 할아버지 : 홍용(洪容) 숙부 : 이름 미상 아버지 : 홍제년(洪齊年) 어머니 : 이름 미상 형님 : 홍대성(洪大成) 본처 : 남씨 후처 : 정경부인 고령 김씨 아들 : 홍진(洪珍) 측실 : 이름 미상, 양주군 좌수의 딸[출처 필요] 장인 : 남륙(南陸) 장인 : 김자모(金子謀) 대중문화에 나타난 홍윤성[편집] 드라마[편집]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이대근) 《파천무》 (KBS, 1990년 배우:백인철) 《한명회》 (KBS, 1994년~1994년 배우:김형일) 《왕과 비》 (KBS, 1998년~2000년 배우:김형일) 《인수대비》 (JTBC, 2012년~2013년 배우:박정학) 영화[편집] 《칠삭동이의 설중매》(1988년, 배우:김희라) 《관상》(2013년, 배우:유상재) 문학[편집] 홍윤성전 (洪允成傳) - 조선시대 역사소설로 작가와 시대 미상 홍윤성전 (洪允成傳) - 1925년, 이해조 작 연보[편집] 음서로 출사하여 군관, 공주 토포관, 교도 등을 역임 1450년(세종 32) 교도 재직 중, 문과에 급제 1450년 승문원 정자 사복시 주부·한성부 참군·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을 도와 김종서, 황보인을 척살 1453년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靖難功臣 二等)이 되다. 사헌부장령을 거쳐 판사복시사에 올랐다. 1455년(단종 3)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가 됨 1455년 좌익공신 3등으로 책록되고 참판에 승진, 인산군에 봉군되었다. 예조판서, 경상우도 도절제사를 역임, 1460년(세조 5) 신숙주(申叔舟)의 부장이 되어 모련위 여진족의 반란을 토벌 1460년 숭정대부로 승진, 다시 인산군에 봉군됨 1467년(세조 12) 의정부우의정에 승진 1469년(예종 2) 좌의정 1469년 영의정 1470년(성종 1) 좌리공신 1등에 녹훈되고 인산부원군으로 진봉 기타[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6년 2월 22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권세를 얻은 뒤에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친척과 친지들을 외면하였으며 기세(氣勢)로써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가노(家奴)를 시켜서 사람들을 함부로 잡아 죽이기도 하였으나 세조는 가볍게 처벌할 뿐 그가 정난(靖難)과 반정공의 원훈(元勳)인 이유로써 단지 책망하거나 그 노비들을 데려다가 가볍게 처벌할 뿐 그에게는 처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본처 남씨와 후처 김씨 이외에 기녀 또는 평민 출신의 부인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경기도 양주군의 좌수의 딸이라고도 하고,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의 기녀 모란(牧丹)이라고도 한다. 좌수의 딸이라는 설에 따르면, 양주로 행차했던 그가 좌수의 딸의 미모를 보고, 그를 첩으로 삼으려 하자 좌수의 딸이 자신을 정실로 거두지 않으면 자결하겠다고 하여 그가 정식으로 혼례를 하고 데려온 것이라 한다. 순창 기녀 설에 따르면, 야밤에 어느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한 기녀 모란을 그가 호랑이를 화살로 맞추어 구해주고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그가 병조판서로 재직할 당시 세조가 그의 집 잔치에 미복으로 참석했는데, 그의 사연을 듣고 형수라 하여 그를 정처(正妻)로 인정하였다 한다. 후일 그 여자가 자신은 정식으로 데려온 부인이라 하자 김씨가 항소하니, 평민 여자는 세조가 자신을 형수라 했다 하여 왕조실록과 승정원 기록에 세조가 방문하자 부인이 술을 따랐다는 구절을 찾아서 제시했다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세조 계유정난 세조 반정 신숙주 성삼문 하위지 한명회 정창손 이개 김질 홍달손 곽연성 폐비 윤씨 양정 정보 황보인 김종서 한계미 한치형 한보 신면 신정 신용개 윤사흔 윤사분 윤필상 인수대비 정희왕후 윤곤 관련 서적[편집]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이가원, 《이조명인열전》(을유문화사, 1965) 각주[편집] ↑ 성종실록 59권, 성종 6년 9월 8일 갑인 4번째기사 ↑ 가 나 다 라 마 바 조선을 망친 것은 공신들이었다 Archived 2003년 10월 1일 - 웨이백 머신 동아일보역사산책 - 이덕일 ↑ 오산군 ↑ 문화재청 홍윤성의 묘 장명등 도난 공지사항 외부 링크[편집] 홍윤성 조선을 망친 것은 공신들이었다 동아일보 역사산책 홍윤성전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임구치관 조선의 상급 국상1470년 5월 31일 ~ 1471년 12월 5일 후임한백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홍윤성&oldid=23807388" 분류: 1425년 태어남1475년 죽음회인 홍씨보은군 출신과거 급제자조선의 문신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외교관조선의 작가조선의 시인조선의 서예가조선의 군인육군 장군한국의 장군정난공신좌익공신좌리공신영의정훈구파가족 살해자조선 세조조선 단종한명회신숙주병사한 사람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6년 2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5일 (화) 01: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메구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메구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메구리めぐり출생 1989년 5월 4일(1989-05-04) (30세)일본 도쿄도다른 이름 후지우라 메구신체 수치 (2015년[1] 기준)키 / 몸무게 158 cm / ― kg치수 95 - 60 - 88 cm 단위변환키 / 몸무게 5′ 3″ / ― lb치수 37 - 24 - 35 in 인물 정보 활동 분야 성인 비디오다른 분야 그라비아활동 기간 2009년 ~ 2017년웹사이트 트위터공식 블로그 메구리의 섹시한 비키니 몸매 메구리(일본어: めぐり, 1989년 5월 4일 ~ )는 후지우라 메구(藤浦めぐ)라는 예명으로 데뷔했던 그라비아 아이돌과 섹시한 성인 비디오 여배우이며, 동시에 AV 여배우들로 구성된 세 걸그룹 에비스 마스캇츠, BRW108, me-me의 멤버이기도 했다. 소속사가 핑키넷이었을때의 프로필과 현재 프로필이 상이한데, 연예계 데뷔 초기에는 1990년 5월 2일생, 이바라키현, A형이었으며,[2] 곧 도쿄 도 출신에 O형으로 변경되었고[3] 프로필에서 생년이 사라졌다.[4] 현재의 프로필과 비슷해진 시기는 2008년 말로서 이는 DMM.com에 고지된것이다.[5] 2017년에 AV 업계에서 은퇴하였다. 목차 1 경력 2 출연 작품 3 각주 3.1 주해 3.2 참조 4 외부 링크 경력[편집] 2007년 착에로[주 1] 계열의 연예기획사 핑키넷과 계약을 맺고 그라비아 아이돌로 데뷔했다. 당시 착에로아이돌로서 괄목할만한 DVD판매량을 기록해 "착에로 No.1"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6] 이듬해 소속사를 POPSTAR그룹으로 옮겼고,[7] 2009년 1월 1일에 연예인을 전문적으로 캐스팅하는 AV 제작사 MUTEKI에서 발매한 《드림》을 통해 성인 비디오에 진출했다.[6] 이 작품을 촬영한 이후 S1 NO.1 STYLE과 계약을 맺고 전속 배우로서 활동하였고,[6] 2008년 11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아이돌 그룹 에비스 마스캇츠의 멤버로서 방송과 음반에 참여했다. 2010년 3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초대형 AV 여배우 그룹 BMW108의 결성 멤버이기도 했다.[8] 그해 9월 블로그에서 휴업을 알렸으며, 12월 은퇴를 선언하고 블로그와 게시물들을 전부 삭제했다.[9][10] 2011년 5월, 소속사를 T-powers로 옮겼고 메구리로 개명해 활동을 재개했다.[11] 7월 SOD create의 레이블인 SOD-ACE와 전속 계약을 맺고 AV 여배우로서 다시 데뷔했다. 그해 11월 MOODYZ로 이적했고, 12월에 Maika, 나루세 코코미, 메구리, 사쿠라 코코미, 카미사키 시오리로 이루어진, T-powers소속의 AV 여배우들로 5인조 걸 그룹 me-me(밈)이 결성되었다.[12] 2012년 2월 me-me의 첫 라이브 공연을 가졌으며, 2012년 9월 13일 계약상의 이유를 들어 그룹을 탈퇴했다.[12][13] 2013년 10월 OPPAI로 이적하였고 이후 키카탄으로 전향한 후 2017년까지 활동하다 은퇴하였다. 출연 작품[편집] 2016년 일본 《신입거유녀의 세발 명중》 ... 주연 2016년 한국 《형의 여자》 ... 주연 2014년 일본 《변태투명인간-팬티가좋아》 ... 주연 2014년 일본 《색정여왕게임-너는 견딜 수 있을까?》 ... 조연 2014년 일본 《나쁜 여자는 맛있다》 ... 주연 각주[편집] 주해[편집] ↑ 착에로(着エロ)는 착의에서 오는 에로티시즘을 의미하는 조어다. 이 계열의 작품에 참여하는 모델은 티팬티나 유두, 음모 등이 비쳐보이는 의상을 주로 착용한다. 참조[편집] ↑ “OPPAI めぐり特設ページ” (일본어). OPPAI. 2015년 6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6일에 확인함. ↑ “藤浦めぐプロフィール” (일본어). 핑키넷. 2007년 4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藤浦めぐプロフィール” (일본어). 핑키넷. 2007년 5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藤浦めぐプロフィール” (일본어). 핑키넷. 2007년 11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DMMアダルト 藤浦めぐ情報” (일본어). DMM.com. 2008년 12월 29일에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오츠보 케무타 (2009년 3월 23일). “世界のフジメグ、AV界のフジメグへ!” (일본어). All About. 2011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所属モデル” (일본어). 팝스타그룹. 2009년 4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BRW108デビュー記念イベント特設ページ” (일본어). BRW108. 2010년 2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藤浦めぐ AV引退作品 「ふたりの父に犯された娘 -逆らうことの許されない悲劇の運命- 藤浦めぐ」 1/7 リリース” (일본어). sexynews24. 2010년 12월 21일. 藤浦めぐ AV引退作品 「ふたりの父に犯された娘 -逆らうことの許されない悲劇の運命- 藤浦めぐ」 1/7 リリース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rchive-date= (도움말) ↑ “人気巨乳セクシータレントの藤浦めぐ引退” (일본어). 2ch. 2010년 12월 9일. 2016년 1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めぐり公式ブログ” (일본어). 공식 블로그. 2011년 5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가 나 “セクシー女優ユニット me-meのデビューライブに700人のファンが殺到! アリス十番&麻友美も祝福” (일본어). Girls News. 2012년 2월 12일. 2012년 6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메구리 (2012년 9월 13일). “ご報告” (일본어). 공식 블로그. 2016년 1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일본어) 메구리 - 트위터 (일본어) 메구리 - 인스타그램 (일본어) 공식 블로그 마스캇토 시리즈정보시리즈제1기 1. 오네가이! 마스캇토 2. 오네다리!! 마스캇토 3. 쵸이토 마스캇토! 4. 오네다리 마스캇토DX! 5. 오네다리 마스캇토SP! 제2기 6. 마스캇토 나이트 7. 마스캇토 나이트 피버!!! 8. 에비스 마스캇츠 요코쵸! 9. 에비스 마스캇츠 1.5 한밤의 와이드쇼 10. 에비스 마스캇츠의 스포 스포츠 SPORTS 출연자제1기부터 계속 오쿠보 카요코(오아시즈) 제1~2기 도중 오기야하기(오기 히로아키 야하기 켄) 제2기부터 참가 미츠우라 야스코(오아시즈) 쿠로자와 카즈코(모리산츄) 제2기 아사가야자매(와타나베 에미코 키무라 미호) 오라키오 관련 항목 에비스 마스캇츠의 콘서트 투어 목록 TV 도쿄 TV 오사카 유니버설 뮤직 재팬 포니 캐년 맥코이 사이토 제1세대 에비스 마스캇츠 (구성원) (2008 ~ 2013)구성원 Rio 나가사쿠 아이리 니시노 쇼 루카와 리나 사야마 아이 사카모토 리온 사쿠라기 린 사토미 유리아 시노하라 사에미 아사미 유마 아오이 소라 안도 아이카 안조 안나 야마구치 마나미 야마나카 아야코 오가와 아사미 오시카와 유리 요시자와 아키호 유이 카스미 카호 코다마 나나코 키시 아이노 카와무라 리카 카와무라 에나 쿠리야마 무이 키자키 제시카 키지마 아이리 하루나 하나 하츠네 미노리 이전 구성원 Ami KONAN 나가세 유미 나기사 코토미 나츠미 카호 마시로 안 메구미 케이 모모세 에미루 모카 미나모토 미나 미사키 미유 미즈키 우루하 미즈타마 레몬 미히로 사쿠라 코코미 사쿠라이 코즈에 소노다 마키 쇼지 유코 스기하라 모모카 시바타 쇼코 아가와 노조미 아노아 루루 아마미 츠바사 아사카와 코토미 오구라 하루카 오리이 하루나 오자와 마리아 오카 에리 오카모토 유이 오하시 사요코 와카스기 나츠키 요코야마 미유키 우에하라 카에라 유리사 유키 마코토 이치조 마오 츠키미 시오리 카네시로 마오 카스미 리사 카타오카 사키 쿠루미 히나 쿠리바야시 리리 키리노 미오 키리하라 에리카 토다 레이 하나조노 우라라 하라다 아키에 하루나 하나 하야시다 유리아 호조 마미 후지사키 아카네 후지우라 메구 후쿠니시 나츠키 활동싱글 앨범 1. 〈바나나 망고 하이 스쿨/하나 둘 셋 넷에 울어줘 with 눈물 네 자매〉 2. 〈OECURA MAMBO/내 맘보〉 3. 〈치요코레이토/귀여운 고시엔〉 4. 〈스프링 홀리데이/말다툼하지 말아줘♪〉 5. 〈롯폰폰☆판타지〉 6. 〈허니 트랩♪〉 7. 〈불효 베이베〉 8. 〈역주♡아이돌〉 9. 〈ABAYO〉 정규 앨범 1. 《더 마스캇츠 ~할리우드에서 안녕~》 2. 《졸업 앨범》 제2세대 에비스 마스캇츠 (2015 ~ 2017)구성원 나츠메 하나미 마츠오카 린 모모노기 카나 미나토 리쿠 미카미 유아 미타 우이 사쿠라 유라 스브 시라이시 마리나 아스카 키라라 아오이 츠카사 요시자와 유키 유메 카나 이시오카 마이 이치카와 마사미 카미사키 시오리 카와카미 나나미 칸자키 사에 쿠루사와 미레이 코가와 이오리 코지마 미나미 타모리 미사키 타츠미 시나 티아 후지와라 아키노 이전 구성원 나가세 아야 리레이 사쿠라 유라 아마츠카 모에 아야노 나나 아야미 슌카 오키타 안리 우에하라 아이 우스이 리카 우스이 아이카 츠지모토 안 하세가와 루이 호시노 나미 활동싱글 앨범 1. 〈TOKYO 섹시 나이트〉 2. 〈Sexy Beach Honeymoon〉 유닛 앨범 1. 〈ASKA마네〉 정규 앨범 1. 《희노애락》 제1.5세대 에비스 마스캇츠 (2017 ~ 현재)구성원 나나미 티나 나라 아유미 나츠메 하나미 나츠키 마츠모토 윤 마츠오카 린 모모노기 카나 미나토 리쿠 미야무라 나나코 미카미 유아 미타 우이 미히로 사쿠라 모코 시라후지 유카 야마나카 마유미 요시자와 유키 유메 카나 이시오카 마이 이치카와 마사미 카노 유사 카스야 마이 카와카미 나나미 칸자키 사에 쿠루사와 미레이 코바야시 히로미 키사라기 사야 타츠미 시나 토모다 아야카 후지와라 아키노 후지이 마리 이전 구성원 나츠메 하나미 미나토 리쿠 스브 시라이시 마리나 아스카 키라라 아오이 츠카사 진구지 카난 카미사키 시오리 코가와 이오리 코지마 미나미 타모리 미사키 티아 히나나 하논 PTA Rio 아사미 유마 아오이 소라 활동싱글 앨범 1. 〈EBISU ANIMAL ANTHEM〉 뮤직 카드 1. 〈지야리길/호프 스텝 백〉 2. 〈쟌쟌바레/파라다이스 BAD라인/길들이기〉 3. 〈EBISU ANIMAL ANTHEM/하지만 사랑이란건/바츠완〉 전거 통제 뮤직브레인즈: e4e5ad36-9ba3-4908-83d4-3115f84815ff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메구리&oldid=24170418" 분류: 1989년 태어남도쿄도 출신일본의 여자 포르노 배우에비스 마스캇츠의 일원BMW108의 일원살아있는 사람그라비아 아이돌일본의 여자 영화 배우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CS1 - 일본어 인용 (ja)인용 오류 - 날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مصرىفارسی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01: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광주무진중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주무진중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5° 08′ 44″ 동경 126° 53′ 58″ / 북위 35.1455298° 동경 126.8995662° / 35.1455298; 126.8995662 광주무진중학교光州武珍中學校Gwangju Mujin Middle School 교훈 성실 개교 1951년 설립형태 공립 교장 이경옥 교감 오현숙 국가 대한민국 위치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 7 (월산동) 학생 수 327 명 (2018년 5월 1일 기준) 교직원 수 51 명 (2018년 5월 1일 기준) 상징 교목: 히말라야시다, 교화: 철쭉 관할관청 광주광역시서부교육지원청 웹사이트 http://www.mujin.ms.kr 광주무진중학교(光州武珍中學校)는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에 있는 공립 중학교이다. 목차 1 학교 연혁 2 학교 동문 3 참고 자료 4 외부 링크 학교 연혁[편집] 1951년 9월 1일 : 초대 송재철 교장 취임 1951년 9월 1일 : 광주무진중학교 설립 인가(15학급) 1952년 3월 27일 : 교명을 광주남중학교로 개명 1960년 4월 16일 : 전남상업고등학교 병설 인가 1966년 8월 9일 : 신관 18교실 및 부속 건물 준공 1970년 3월 1일 : 교명을 광주무진중학교로 개명 1971년 2월 28일 : 전남상업고등학교 폐교 1997년 1월 15일 : 신관 28교실 준공 2003년 2월 10일 : 제53회 졸업 2017년 3월 1일 : 제23대 이경옥 교장 취임 학교 동문[편집] 분류:광주무진중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참고 자료[편집] 광주무진중학교 - 한국교육학술정보원 학교알리미 외부 링크[편집] 광주무진중학교 - 공식 웹사이트 vdeh 광주광역시의 중학교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광산구 광산중학교 광주진흥중학교 금구중학교 봉산중학교 비아중학교 산정중학교 선운중학교 성덕중학교 송광중학교 송정중학교 수완중학교 수완하나중학교 신가중학교 신창중학교 영천중학교 운남중학교 월계중학교 월곡중학교 월봉중학교 임곡중학교 장덕중학교 정광중학교 천곡중학교 첨단중학교 평동중학교 하남중학교 남구 광주동성여자중학교 광주동성중학교 광주무진중학교 광주서광중학교 광주송원중학교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 금당중학교 대성여자중학교 대촌중학교 동아여자중학교 문성중학교 봉선중학교 숭의중학교 주월중학교 진남중학교 효천중학교 동구 광주충장중학교 무등중학교 살레시오여자중학교 운림중학교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 조선대학교 여자중학교 북구 각화중학교 고려중학교 광주경신중학교 광주동신여자중학교 광주동신중학교 광주북성중학교 광주숭일중학교 광주체육중학교 금호중앙중학교 두암중학교 문산중학교 문화중학교 문흥중학교 살레시오중학교 서강중학교 신광중학교 신용중학교 양산중학교 용두중학교 용봉중학교 우산중학교 운암중학교 일곡중학교 일동중학교 일신중학교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지산중학교 서구 광덕중학교 광주동명중학교 광주서석중학교 광주중학교 광주화정중학교 광주효광중학교 금호중학교 대자중학교 상무중학교 상일중학교 운리중학교 유덕중학교 전남중학교 치평중학교 풍암중학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광주무진중학교&oldid=24027066" 분류: 광주 남구의 중학교1951년 개교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14일 (일) 05: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AV 그랑프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AV 그랑프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AV 그랑프리 (일본어: エーブイグランプリ)는 2008년과 2009년에 잠시 개최되었던 성인 비디오 산업의 시상식이다. 목차 1 역사 2 2008년 2.1 개요 2.2 수상 2.2.1 대상 2.2.2 매출 부문상 2.2.3 패키지상 2.2.4 부문상 2.2.5 기타 3 2009년 3.1 개요 3.2 수상 3.2.1 대상 3.2.2 매출 부문상 3.2.3 패키지상 3.2.4 부문상 3.2.5 기타 4 각주 5 함께 보기 역사[편집] 원래는 도쿄 스포츠와 소프트 온 디맨드 (SOD)가 개최하고 있던 《AV OPEN》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 예정이었던 시상식의 하나로서, SOD와는 경쟁 관계에 있던 호쿠토와 DMM.com을 중심으로 〈AV 그랑프리 사무국〉을 설립해 만든 대회이다. 첫 해인 2008년에 77개 업체, 이듬해에는 97개 업체가 참여했다. AV OPEN이 AV OPEN과 챌린지 스테이지의 두 부문으로 이루어져있던 것과 달리, AV 그랑프리는 다양한 부문으로 구성되어있었다. 2009년 대회에서는 하기와라 나가레와 호노카가 메인 서포터가 되었다.[1] 하지만 AV 그랑프리도 AV OPEN과 마찬가지로 2회에서 중단되고 말았으며(AV OPEN은 후에 다시 재개된다.), DMM.com이 주최하는 DMM 성인 어워드가 후계로서 이어받게 된다. 2008년[편집] 개요[편집] 수상자는 작품의 판매량에 고객의 투표를 더해 선정되었다. 매장에서의 판매량과 웹사이트에서의 판매량이 합쳐졌다. 각 회사는 대회에 참가할 작품을 하나 고를 수 있었으며, 대회는 2007년 12월 1일부터 2008년 1월 31일까지 열렸다. AV OPEN과 마찬가지로 참가한 작품들은 특수한 라벨과 ID 번호를 부여받았다. 총 77개 회사가 참여했다. 결과는 2008년 2월 21일 발표되었으며, 대상인 〈AV그랑프리 최우수작품상〉은 500만 엔, 그보다 한단계 아래의 상인 〈그랑프리 스테이지 최우수작품상〉과 〈마니아 스테이지 최우수작품상〉에는 300만 엔, 나머지 상들엔 100만 엔이 수여되었다. (우수작품상은 50만 엔)[2][3] [4] [5] 수상[편집] 수상자와 작품은 아래와 같다.[6][7] 대상[편집] AV 그랑프리 최우수작품상 : kawaii* special (kawaii* special ギザカワユス!, 코사카 유리 / 오하시 미쿠, kawaii*) 매출 부문상[편집] 그랑프리 스테이지 최우수작품상 :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了解×了解×ギリギリモザイク Wギリギリモザイク, 하츠네 미노리 / 미즈키 나오, S1 No.1 Style) 마니아 스테이지 최우수작품상 : 여체 고문 연구소11 (女体拷問研究所 11, 나가사와 리카 / YOKO, Baby Entertainment) 통신매출상 : 여체 고문 연구소11 (女体拷問研究所 11, 나가사와 리카 / YOKO, Baby Entertainment) 패키지상[편집] 패키지디자인상 최우수상 :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了解×了解×ギリギリモザイク Wギリギリモザイク, 하츠네 미노리 / 미즈키 나오, S1 No.1 Style) 우수상 현역 레이스 퀸 절정 시오후키 AV 데뷔 (現役レースクイーン絶頂潮吹きAVデビュー!! 冬月かえで, 후유츠키 카에데, PRIMIUM) 태어나 처음으로 질내사정과 제모 (生まれてはじめての中出しとパイパン 沢尻アヤカ, 사와지리 아야카, 완즈 팩토리) 부문상[편집] SM · 능욕 부문 최우수상 : 혹독히 사람을 묶다 (人間酷包 友田真希, 토모다 마키, 밀) 우수상 : M 드래그 스페셜 (Mドラッグ・スペシャル 女体肉便器ベスト, 호시즈키 마유라 / 하세가와 치히로 / 나카무라 모모 / 이즈미 마린, 도그마) 여배우 부문 최우수상 : 현역 레이스 퀸 절정 시오후키 AV 데뷔 (現役レースクイーン絶頂潮吹きAVデビュー!! 冬月かえで, 후유츠키 카에데, PRIMIUM) 우수상 kawaii* special (kawaii* special ギザカワユス!, 코사카 유리 / 오하시 미쿠, kawaii*)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了解×了解×ギリギリモザイク Wギリギリモザイク, 하츠네 미노리 / 미즈키 나오, S1 No.1 Style) 이야라시 (외설스럽다) (癒らし。持田茜, 시지미, 아우다스 재팬) 숙녀 부문 최우수상 : 노예 의붓어머니 (義母奴隷 白石さゆり, 시라이시 사유리, 타메이케 고로) 우수상 모녀와 내연남 (世間によくある禁親相姦 嫁いだ後も続く娘と義父の肉欲 母娘と内縁の夫, 유이 / 오이카와 히나타 / 시부야 아카네, 시네마 코퍼레이션) 온천 마사지 숙박 (温浴マッサージのお宿《翔田亭》 翔田千里 吉澤レイカ, 쇼다 치사토 / 요시자와 레이카, 아로마 기획) 헌팅 · 아마추어 부문 최우수상 : 마리코 파이널 (まり子 ファイナル, 마리코, HMJM) 우수상 매직 미러호 역헌팅 in 쇼난 (マジックミラー号 逆ナンパin湘南 170cm以上の極上ボディSPECIAL!, 미우라 아사히 / 야마시로 미키 / 오이시 모에 / 스미카와 로아, DEEP'S) 만취 치한대 (泥酔痴漢隊 飲ませて酔わせて勝手に中出しまでしちゃいました。4時間DX, 로터스) 버라이어티 부문 최우수상 : 자지가 3cm 커지는 DVD (チンチンが3cm大きくなるDVD 気持ちいいオナニーで大きくなれる(秘)トレーニング指南, 카스미 카호 / 사쿠라이 유코 / 오이시 모에 / 나가사와 리카 / 사에키 나나 / 스즈키 안리, SOD 크리에이트) 우수상 헤픈 여자 20명이 남탕을 하이재킹 (ヤリマンの私たち20人が男湯をジャックする, 카코이!) 아마추어 헌팅 금발 여자 질내사정 in L.A. (素人ナンパ金髪娘生中出しinL.A. 4時間SP, 피터스) 패티쉬 부문 최우수상 : 비일상적 팬티 스타킹 유희 제 1장 (非日常的パンスト遊戯 第一章, 사에키 나나 / 오이시 모에, AVS) 모에 부문 최우수상 : 아스카2 (あすか2, 아스카, 무구) 옴니버스 부문 최우수상 : 시미켄의 7명의 여자와 사적인 섹스 (しみけんのプライベート7FUCK, 하라 치히로 / 아이다 유아 / 사쿠라가와 미츠키 / 네네 / 아키나 카에데 / 스기사키 나츠키 / Marin, 아이디어 포켓) 레즈비언 부문 최우수상 : 능욕 레즈비언 조교 (陵辱レズ調教 羞恥と快楽に溺れゆく女達。, 쇼다 치사토 / 히토미 렌 / 나카야마 리오 / 아조 미사키, U&K) 기타[편집] 보도상 : 마리코 파이널 (まり子 ファイナル, 마리코, HMJM) 판매점상 :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了解×了解×ギリギリモザイク Wギリギリモザイク, 하츠네 미노리 / 미즈키 나오, S1 No.1 Style) 2009년[편집] 개요[편집] 2009년에 열린 그랑프리에는 총 97개 업체가 참여했으며, 개최 기간은 2008년 11월 22일부터 2009년 2월이었다.[8] 총 3000만 엔의 상금이 걸려 있었으며 상은 DMM 웹사이트를 통해 투표로 결정되었다. 주요 상은 AV 그랑프리(97개 업체 참여), 통신판매상(97개), 판매매출상(97개)이 있었다. 또 부문상은 여배우 부문(14개), SM · 능욕 부문(15개), 숙녀 부문(15개), 아마추어 부문(16개), 버라이어티 부문(14개), 페티시 부문(17개), 모에 부문(7개)으로 세분화되었다. 마지막으로 판매점과 뉴스 보도, 패키지, 서포터 상도 시상이 있었다.[1][9][10] 수상[편집] 수상자와 작품은 아래와 같다.[6][7] 대상[편집] AV 그랑프리 최우수작품상 :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Rio와 유마 (Wギリモザ Rioとゆま, Rio / 아사미 유마, S1 No.1 Style) 매출 부문상[편집] 통신판매상 : 구토 관장 엑스터시X (ゲロ浣腸エクスタシー X, 호시즈키 마유라 / 아라이 에리, 도그마) 판매매출상 :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Rio와 유마 (Wギリモザ Rioとゆま, Rio / 아사미 유마, S1 No.1 Style) 패키지상[편집] 패키지 디자인상 최우수상 :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Rio와 유마 (Wギリモザ Rioとゆま, Rio / 아사미 유마, S1 No.1 Style) 부문상[편집] SM · 능욕 부문 최우수상 : THE QUEEN OF DAS! (THE QUEEN OF DAS!小澤マリア, 오자와 마리아, 다스) 우수상 격정 M 음란포박조교 (激情M淫縛調教 縄好き美乳マゾ, 아트 비디오) 전동 마사지기 퇴마의식 (電マ悪魔祓い儀式, ZONE (켄신 아트)) DEATH LOOP Vol.1 (DEATH LOOP Vol.1 人生最悪の屈辱達磨!! 野垂れイキ痙攣女王, BLACK BABY) 여배우 부문 최우수상 :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Rio와 유마 (Wギリモザ Rioとゆま, Rio / 아사미 유마, S1 No.1 Style) 우수상 E-BODY SPECIAL (E-BODY SPECIAL かすみりさ, 카스미 리사, E-BODY SPECIAL) 빨리는 VENUS (おしゃぶりVENUS, M's Video Group(MVG)) 숙녀 부문 최우수상 : 근친상간 모자 스왑 (近親相姦母子スワップ 僕の母親を抱かせてやるから、キミの母さんをヤらせてくれ。, 키타하라 나츠미 / 나카모리 레이코, 다카라 영상) 우수상 노예 의붓어머니 (義母奴隷 浅倉彩音, 아사쿠라 아야네, 타메이케 고로) 일하는 아내 파트 타임 러브 (働く人妻 パートタイムラブ, 빅 모칼) 범해진 여교사 (犯された女教師 牧原れい子, 마키하라 레이코, Madonna) 헌팅 · 아마추어 부문 최우수상 : S-Cute ex Special (ICHIKA / 츠보미 / 미카 메리에 / 카와이 안리 / 이지마 쿠라라 / 코사카 미미, S-CUTE) 우수상 시오후키 거유 피아노 강사 (潮吹き巨乳ピアノ講師 かすみ24歳, 카스미, 토요히코) 남자친구의 자지를 여자친구의 보지에 대고 봐라2 (彼ちんスペシャル!!カップルなら!彼氏のチ○ポ彼女のマ○コ当ててみろ!!2, 하지메 기획) H컵 아마추어 질내사정 (Hカップボイン素人ナマ中出し きょうこ, 쿄코, 무네큥 킷사) 버라이어티 부문 최우수상 : 제복 무모 미소녀학원 (制服パイパン美少女学園, 키타지마 레이 / 유키 사나 / 쿠도 레이카 / 나나미, 이에로) 우수상 GAL CIR3 (아이디어 포켓) 헌팅 그랑프리 (ナンパグランプリ, 하야부사) 레즈비언 뱀파이어 (レズビアンヴァンパイア, U&K) 페티쉬 부문 최우수상 : 데카 엉덩이 여고생의 피스톤 기승위 DX (デカ尻JKのピストン騎乗位DX, 이나모리 케이토 / 코다마 유이 / 사나다 리사 / 야자와 루이 / 아이나 리나 / 이토 아오바 / 나가세 아키 / 스즈키 아리사, 아로마 기획) 우수상 AV 무리 (AV無理, 사쿠라 코코미, 미만) 가슴왕 (乳王 ~爆乳天使2009アワード8人勢揃い!!!~, 모모타로 영상 출판) 꽃망울(츠보미)에 떨어지는 야만적인 액체 蕾に滴る野蛮な汁 つぼみ, 츠보미, 와프 엔터테인먼트) 모에 부문 최우수상 : 테라 자지 (テラちんぽ, 오오사와 유카, 밀키프린♪) 우수상 : 로터 미소녀와 섹스 앨리스 (ロ●ータ美少女と性交 アリス, 드림 티켓) 기타[편집] 보도상 : 텔레클럽 캐논볼 2009 (テレクラキャノンボール2009 賞品はまり子*Gカップ, 마리코, HMJM) 판매점상 : 더블 아슬아슬 모자이크 Rio와 유마 (Wギリモザ Rioとゆま, Rio / 아사미 유마, S1 No.1 Style) 메인 서포터상 : 근친상간 쇼와 금단의 혈족 (近親相姦 昭和禁断血族「母さん、この家は狂ってます」, 나나세 카스미 / 키타하라 나츠미 / 야마구치 레이코, 글로리 퀘스트) 각주[편집] ↑ 가 나 “AVGP 2009 Result announcement” (일본어). www.av-gp.com. 2009년 3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11월 17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全77メーカー参加!AVグランプリ開催決定” (일본어). All About. 2007년 10월 5일. 2008년 12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3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AV Grand Prix 2008 Grand Prix Stage” (일본어). www.dmm.co.jp. 2008년 10월 21일에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5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AV Grand Prix 2008 Mania Stage” (일본어). www.dmm.co.jp. 2008년 9월 22일에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5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JAVCollections AV Grand Prix 2008”. javcollections.com. 2008년 10월 12일에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5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가 나 “AVグランプリ2008 結果発表”. 2013년 9월 27일에 확인함. ↑ 가 나 “AVグランプリ2009 結果発表”. 2013년 9월 27일에 확인함. ↑ “Maker Introduction” (일본어). www.av-gp.com. 2009년 2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23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AVGP 2009 Official Site” (일본어). www.av-gp.com. 2008년 10월 23일에 보존된 문서. 2013년 11월 17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AVGP 2009” (일본어). www.dmm.co.jp. 2008년 10월 23일에 보존된 문서. 2013년 11월 17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함께 보기[편집] AV OPEN 무디즈 연말 대감사제 일본의 메이저 성인비디오상 이전 대회 AV 그랑프리(2008년 ~ 2009년) 다음 대회 AV OPEN DMM ADULT AWARDAV OPEN vdehAV 그랑프리AV OPEN | AV 그랑프리 | DMM성인상 | 스카파! 성인방송대상최우수작품상08 코사카 유리 · 오하시 미쿠 | 09 Rio · 아사미 유마매출부문상그랑프리 스테이지 최우수작품상08 하츠네 미노리 · 미즈키 나오마니아 스테이지 최우수작품상08 나가사와 리카 · YOKO통신매출상08 나가사와 리카 · YOKO | 09 호시츠키 마유라 · 아라이 에리판매매출상09 Rio · 아사미 유마패키지디자인상09 Rio · 아사미 유마SM · 능욕부문상08 토모다 마키(최우수), 호시즈키 마유라 · 하세가와 치히로 · 나카무라 모모 · 이즈미 마린(우수) | 09 오자와 마리아여배우부문상08 휴유츠키 카에데(최우수), 코사카 유리 · 오하시 미쿠 / 하츠네 미노리 · 오하시 미쿠 / 시지미(우수) | 09 Rio · 아사미 유마(최우수), 카스미 리사(우수)숙녀부문상08 시라이시 사유리(최우수), 유이 · 오이카와 히나타 / 쇼다 치사토 · 요시자와 레이카(우수) | 09 키타하라 나츠미 · 나카모리 레이코(최우수), 아사쿠라 아야네 / 마키하라 레이코(우수)헌팅 · 아마추어부문상08 마리코(최우수), 미우라 아사히 · 야마시로 미키 · 오이시 모에 · 스미카와 로아(우수) | 09 이치카 · 츠보미 · 미카 메리에 · 카와이 안리 · 이지마 쿠라라 · 코사카 미미(최우수), 카스미 / 쿄코(우수)버라이어티 부문08 카스미 카호 · 사쿠라이 유코 · 오이시 모에 · 나가사와 리카 · 사에키 나나 · 스즈키 안리 | 09 키타지마 레이 · 유키 사나 · 쿠도 레이카 · 나나미 이에로페티쉬부문상08 사에키 나나 | 09 이나모리 케이토 · 코다마 유이 · 사나다 리사 · 야자와 루이 · 아이나 리나 · 이토 아오바 · 나가세 아키 · 스즈키 아리사(최우수), 사쿠라 코코미 / 츠보미(우수)모에부문상08 아스카 | 09 오오사와 유카옴니버스부문08 하라 치히로 · 아이다 유아 · 사쿠라가와 미츠키 · 네네 · 아키나 카에데 · 스기사키 나츠키 · Marin레즈비언부문08 쇼다 치사토 · 히토미 렌 · 나카야마 리오 · 아조 미사키보도상08 마리코 | 09 마리코판매점상08 하츠네 미노리 · 미즈키 나오 | 09 Rio · 아사미 유마메인서포터상09 나나세 카스미 · 키타하라 나츠미 · 야마구치 레이코※ 수상 작품 중에서 여배우가 명시되어 있는 것에 한해서 표기하였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AV_그랑프리&oldid=24191753" 분류: 어덜트 비디오일본의 포르노 영화상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외부 링크CS1 - 일본어 인용 (ja)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5:3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실성 마립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실성 마립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실성 이사금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실성 이사금 지위 신라의 제18대 국왕 재위 402년 ~ 417년 전임자 내물 이사금 후임자 눌지 마립간 부왕 김대서지(大西知) 이름 휘 김실성(金實聖), 다른 이름은 실주왕(實主王), 보주(寶主), 보금(寶金) 신상정보 부친 김대서지(大西知) 모친 이리부인(伊利夫人) 배우자 아류부인(阿留夫人), 석씨 실성 이사금(實聖 泥師今, ? ~ 417년, 재위 402년 ~ 417년)은 신라의 제18대 임금이며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와 석씨 이리(伊利) 부인의 아들로, 그의 왕비는 아류부인 김씨(阿留夫人 金氏)로 내물 이사금(奈勿泥師今)의 딸이었다. 다른 이름은 실주왕(實主王), 보주(寶主), 보금(寶金)이다. 목차 1 생애 2 가계 3 실성 마립간이 등장한 작품 4 참고 5 각주 생애[편집] 아버지 김대서지는 김알지의 후손이라 하나 정확한 세대는 알수 없고,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라 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의 설을 따르면 그는 미추 이사금및 말구의 동생이고, 구도(仇道)갈문왕의 아들이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아버지 대서지는 알지의 먼 후손으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 되었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고 한다. 부인은 내물 이사금의 딸 아루부인 김씨이다. 내물 이사금이 죽고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 실성이 대신 왕으로 옹립되었다.[1] 원년인 402년 음력 3월 왜와 우호를 맺고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냈다.[2] 403년 음력 7월 백제가 침입했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405년 음력 4월 왜가 침입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깨트리지 못했고, 이사금이 기병을 거느리고 퇴로를 막아 3백여 명의 왜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3] 왜는 407년 음력 3월과 6월에 동쪽과 남쪽으로 다시 침입하여 노략질을 해 일백여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408년 음력 2월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실성 마립간은 선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서불한 미사품이 " '무기란 흉하며, 싸움이란 위험하다'란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치다가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해 두었다가 그들이 오면 막아 우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유리할 때 나가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남을 이용하며 이용당하지 않는 계략으로, 대책 가운데 으뜸일 것입니다." 라고 조언하여 실성 마립간이 그의 말을 좇았다. 이가 곧 신라의 대왜 방위전력이 되었다. 412년 실성 마립간은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고, 415년 음력 8월 왜인들과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실성마립간은 복호에 이어 내물 마립간의 또 다른 아들 눌지까지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려다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눌지가 반기를 들어, 결국 눌지에게 처형되고, 눌지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으로써 김씨의 왕위 계승이 이어지게 되었다. 가계[편집] 왕비인 아류부인 김씨는 내물 이사금의 딸이라 하며, 일설에는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아버지 : 이찬 김대서지(金大西知) 어머니 : 이리부인 석씨(伊利夫人 昔氏) - 아간 석등보(昔登保), 혹은 석등야(昔登也)의 딸 왕후 : 아류부인 김씨(阿留夫人 金氏) - 내물 이사금(奈勿泥師今)의 딸. 딸 : 아로부인 김씨(阿孝夫人 金氏) - 눌지 마립간의 왕비. 외손자 : 자비 마립간 딸 : 치술공주 김씨(鵄述公主 金氏) - 박제상의 아내, 박제상 사후 눌지 마립간의 후궁 외손녀 : 박씨(朴氏), 미사흔(未斯欣)의 처 아들 : 김치휴(金鵄休) - 아간, 이름과 관직만 전하고 행적은 알려져있지 않다. 후궁 : 석씨, 흘해 이사금의 딸 또는 후손 실성 마립간이 등장한 작품[편집] 《근초고왕》(KBS, 2010년~2011년, 배우:김하균) 《광개토태왕》(KBS, 2011년~2012년, 배우:조재완) 참고[편집] 고구려 광개토왕 (391년 - 413년) 장수왕 (413년 - 491년) 백제 아신왕 (392년 - 405년) 전지왕 (405년 - 420년) 각주[편집] ↑ 김부식 (1145). 〈본기 권3 실성 이사금〉. 《삼국사기》. 實聖尼師今立 閼智裔孫 大西知伊湌之子 母伊利夫人 伊一作企 昔登保阿干之女 妃味鄒王女也 實聖身長七尺五寸 明達有遠識 奈勿薨 其子幼少 國人立實聖繼位(실성 이사금(實聖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알지(閼智)의 후손으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리부인(伊利夫人) <이(伊)를 또는 기(企)로도 썼다.>으로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實聖)은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지혜가 밝고 사리에 통달하여 앞 일을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왕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실성 이사금〉. 《삼국사기》.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원년 3월에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았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실성 이사금〉. 《삼국사기》. 四年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4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들이 와서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려 다시 한 번 그들을 격파함으로써 3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 전 대내물 마립간 제18대 신라 국왕402년 - 417년 후 대눌지 마립간 vdeh신라의 역대 국왕상대(B.C. 57년 ~ A.D. 654년) (1) 혁거세 거서간 (2) 남해 차차웅(3) 유리 이사금 (4) 탈해 이사금 (5) 파사 이사금 (6) 지마 이사금 (7) 일성 이사금 (8) 아달라 이사금 (9) 벌휴 이사금 (10) 내해 이사금 (11) 조분 이사금 (12) 첨해 이사금 (13) 미추 이사금 (14) 유례 이사금 (15) 기림 이사금 (16) 흘해 이사금 (17) 내물 마립간 (18) 실성 마립간 (19) 눌지 마립간 (20) 자비 마립간 (21) 소지 마립간 (22) 지증왕 (23) 법흥왕 (24) 진흥왕 (25) 진지왕 (26) 진평왕 (27) 선덕여왕 (28) 진덕여왕 중대(654년 ~ 780년) (29) 태종무열왕 (30) 문무왕 (31) 신문왕 (32) 효소왕 (33) 성덕왕 (34) 효성왕 (35) 경덕왕 (36) 혜공왕 하대(780년 ~ 935년) (37) 선덕왕 (38) 원성왕 (39) 소성왕 (40) 애장왕 (41) 헌덕왕 (42) 흥덕왕 (43) 희강왕 (44) 민애왕 (45) 신무왕 (46) 문성왕 (47) 헌안왕 (48) 경문왕 (49) 헌강왕 (50) 정강왕 (51) 진성여왕 (52) 효공왕 (53) 신덕왕 (54) 경명왕 (55) 경애왕 (56) 경순왕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후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실성_마립간&oldid=23951830" 분류: 신라의 왕생년 미상417년 죽음살해된 사람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마립간이사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کوردیEnglishفارسیBahasa Indonesia日本語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ไทย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일 (화) 06: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엔딩크레딧 (노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엔딩크레딧 (노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엔딩크레딧 네미시스의 노래 음반 정규 3집 part.1 발매일 2011년 10월 22일 장르 클래시컬 팝 록,인디 록, 프로그레시브 록 언어 한국어 레이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작곡가 하세빈 정규 3집 part.1의 곡 목록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 Last Scene + 엔딩크레딧 - 패러글라이딩 Paragliding - 꿈을 꾸지 않았으면 - 악플 - 보너스트랙: 오빠가 잘못했어- Ending Credit (MR) 《엔딩크레딧》는 대한민국의 록 밴드 네미시스의 정규3집 ‘피아노(The Piano)’ part.1의 활동곡이다. 앨범제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정규 3집 ' 피아노(The piano)'는 네미시스가 추구하는 음악이 피아노가 주를 이루는 클래식한 분위기가 가미된 팝 록을 지향한다는 음악적 정의와도 같으며, 활동곡 '엔딩 크레딧'은 빠른 드럼비트를 바탕으로 노승호의 감성 보이스와 풍부한 화성의 피아노 멜로디를 전면에 부각시킨 곡이다.[1] '엔딩크레딧'(Closing Credits)은 사랑이 끝나 흩어져가는 것을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에 투영한 곡으로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 라스트 신 - 엔딩크레딧’이 영화를 테마로 하나로 이어지며 네미시스가 가진 프로그레시브 록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곡이다. 1집에 수록된 순정만화 같은 사랑을 표현한 베르사이유의 장미 의 속곡으로 3집의 ‘엔딩크레딧’은 영화같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으며 2001년,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곡이지만 새롭게 작업한 결과 기존의 네미시스 스타일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여겨져 3집의 활동곡으로 선택되었다.[2] 목차 1 활동 사항 2 음반 정보 3 각주 4 외부 링크 활동 사항[편집] 정규 3집 ‘피아노(The piano) part.1’은 2009년, 발매된 정규2집 ‘LoveSick’이후 2년여 만에 발매되는 앨범으로 녹음실이 비로 침수돼 원래 하던 방식인 드럼부터 녹음을 하지못하고 보컬부터 녹음을 하여 재수정을 거쳐야만했고 복구공사와 함께 진행된 탓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2011년 8월 23일, 정상 발매되었다. 서른 곡을 준비해도 활동곡 단 한 곡만이 부각되는 근래 가요시장의 특성으로 인해 정규 앨범을 내기 위해 두 파트로 나눠 발매 되었으며 정규3집은 피아노를 바탕으로 하는 클래시컬 록 밴드인만큼 피아노를 부각하였으며 파트1은 기존의 창작풍을 굳혀 지금까지 해왔던 스타일에서 빠른비트의 곡들을 담았고 파트2는 보다 감성적인 성향의 감각있는 곡들로 담을 계획이다.[3] 음반 정보[편집] The Piano 정규3집 풍부한 화성을 가진 피아노 연주의 부각으로 보다 짙어진 클래시컬하면서도 질주감있는 네미시스의 음악적 색체와 보다 성숙해진 네미시스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앨범이다. The Piano Part.1 (2011) 우리는 사랑일까 + 라스트씬(Last Scene) +' 엔딩크레딧(Closing Credits)'이 영화를 테마로 세곡이 하나로 이어지며 기존의 색깔을 확고하는 네곡의 팝락들이 한곡씩 담겨있다. 앨범 음반 정보 정규3집 발매일 : 2011년 10월 22일 활동곡 : 엔딩크레딧 트랙 리스트 영화를 테마로 세곡이 하나로 이어지는 1. 피아노 연주곡 [우리는 사랑일까] + 2. 이별을 선언하는 [Last Scene]+ 3. 영화처럼 사랑이 끝나는 [Ending Credit] 4. 어쿠스틱 기타가 경쾌한 [Paragliding] 5. 지나간 사랑에 대한 꿈 [꿈을 꾸지 않았으면] 6. 사회적 문제인 악플을 다룬 강렬한 [악플] 7. 토라진 애인을 달래는 최성우 작사 [오빠가 잘못했어] 각주[편집] ↑ “'드라마틱 록밴드 네미시스, 3집 더 피아노 발표해”. 유니온프레스. 2011년 8월 29일. ↑ “네미시스 정규 3집 Part.1 THE PIANO 발매”. 아시아투데이. 2011년 8월 22일. ↑ “네미시스, 물난리로 녹음 스케줄 취소…애먹었어요”. 포커스신문. 2011년 9월 28일.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네미시스 ' 엔딩크레딧' 뮤직비디오(2011) 공식 웹사이트 앨범소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벅스 The Piano(피아노) Part.1 vdeh네미시스 노승호 (보컬) 전귀승 (기타 코러스) 하세빈 (피아노 기타) 정의석 (드럼) 최성우 (베이스) 타이틀 곡 < 베르사이유의 장미 > 정규1집 < 슬픈 사랑의 왈츠 > 정규2집 < 엔딩크레딧 > 정규3집-1 정규 음반 < La Rose de Versailles > (2005. 9. 15) < LoveSick > (2009. 10. 22) < The Piano Part.1 > (2011. 8. 23) 싱글 음반< 사랑에 빠졌어 > (2009. 6. 22)참여 음반 도로시를 찾아라 OST 전곡제작 (2006. 08. 25) Orandge Revolution Festival 컴필레이션 음반 - Memory 수록 (2012.10. 1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엔딩크레딧_(노래)&oldid=22953307" 분류: 네미시스대한민국의 팝 노래팝 록 노래2011년 노래한국어 노래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1월 8일 (목) 18: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스키니 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키니 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7년 12월) 몸매를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 타이트하게 꽉 붙는 청바지스타일 스키니 진(영어: skinny jeans, slim-fit pants, skinnies)은 피부와 같은 밀착감을 가진 청바지란 의미다. 스키니 진의 별명은 슈퍼 슬림 진(super slim jeans)이다. 스키니 진은 1950년대 중반 쯤부터 보이기 시작했으며, 현재의 스키니 진은 디올 옴므 등에서 슬림핏을 강조한 의류들을 출시하기 시작한 2004년 쯤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1] 목차 1 개요 1.1 역사 1.1.1 1950년대 1.1.2 1960년대 1.1.3 1970년대 1.1.4 1980년대 1.1.5 1990년대 1.1.6 2000년대 1.1.7 2010년 이후 2 의학적 문제 3 같이 보기 4 각주 개요[편집] 스키니(Skinny)와 진(Jean)이 몸에 딱 붙게 디자인 된 Skinny 란 말과 Jean 의 청바지를 합해져 만들어진 합성어이며,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몸에 꼭 맞게 입는 청바지의 일종을 이르는 말이다. 특히 종아리 단이 좁아 발목을 휘감게 되어 폭이 좁고, 허벅지 부위와 엉덩이를 청바지가 받쳐주는 역할을 하여 여성들로부터 체형이 예쁘게 보이는 효과로 인해 많은 인기를 받고 있다. 남자도 스키니핏까지 가진 않더라도 2천년대보단 확실히 좁은 슬림핏을 선호하는 추세이다. 역사[편집] 1950년대[편집]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 의류를 처음으로 착용했다. 1960년대[편집] 1960년대 중반, 비틀즈, 롤링 스톤즈와 밥 딜런 그리고 당시 패션 아이콘이었던 오드리 햅번 또한 이 의류를 착용했다. 1970년대[편집] 1970년대 초반, 미국과 영국 서양의 유명한 연예인들이 이 의류를 착용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편집] 1980년대에는 헤비메탈 벤드들이 흰색의 색상으로 디자인 된 스키니 진을 착용했다. 1990년대[편집] 1995년까지도 몇몇 가수들이 이 의류를 꾸준히 착용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힙합 패션 등의 영향으로 인기가 점점 추락하였다.(2003년까지) 2000년대[편집] 헐렁한 바지를 입는 추세가 점점 감소하면서 여성 중에서는 스키니 진과 함께 주로 가죽 부츠를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부터는 청소년, 어린이, 젊은 층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남성용으로 디자인된 스키니 진은 허리를 좀 넉넉한 사이즈로 맞춰 생산되고 있다. 2010년 이후[편집] 여성의 리얼 스키니 진, 스키니팬츠가 계속 유행하고 있으며 여성미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핏 특유의 감각이 있다보니 유행을 넘어 꾸준히 보편화, 일반화되는 흐름도 이어지고 있다.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선 나팔바지 등이 다시 유행하며 일선 유행에선 후퇴했지만, 이미 여성 하의 중 하나로 보편화된 모양새라 스키니진 라인의 출시가 중단될 일은 없어보인다. 타이트한 원단에 신축성을 추가하여 처음 고안된 스키니진은 소재의 신축성이 작아 활동성에 불편함이 있었으나, 소재 개발이 계속 되어 현재는 신축성이 좋은 소재를 사용한 체형 보정 효과까지 이뤄지고 있다. 몸매를 그대로 신축성 소재가 받쳐주기 때문에 뒤태의 아름다움을 강조할 수 있다. 다만 체형에 따라선 과한 살집이 노출될 수 있는 등 착용에 주의도 필요하다. 의학적 문제[편집] 일부 의사들은 타이트한 바지가 신경의 압박으로 인해 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상감각성 대퇴신경통 상태에서 외측 허벅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21세기 한국 의사들의 연구에 따르면 스키니 진은 정맥류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 타이트한 바지가 고환의 과열화로 정액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 2015년에서 스키니 진이 횡문근 융해증, 양측 비골 신경증, 경골 신경증을 일으키는 사례를 기록했다. 같이 보기[편집] 바지 청바지 각주[편집] ↑ 네이버 지식백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키니_진&oldid=24089688" 분류: 청바지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7년 12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EsperantoEspañolFrançaisNederlandsSimple English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3일 (화) 09: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샨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샨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샨족(တႆး) 민족상징기 총인구 약 600만 명 언어 샨어, 버마어 종교 상좌부 불교, 애니미즘 민족계통 근연민족 타이족 샨족(샨어: တႆး, 버마어: ရှမ်းလူမျိုးို့, 중국어: 掸族, 병음: Shànzú)은 동남아시아의 타이계 민족 집단이다. 샨족은 주로 미얀마의 샨 주에 살지만, 일부는 만달레이 구, 카친 주, 카인 주와 중국과 태국의 접경 지역에도 산다. 비록 신뢰할만한 인구 조사는 1935년 이래로 행해진 적이 없지만 샨족의 수는 약 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샨 주의 수도는 인구 약 15만 명의 작은 도시인 타웅지이다. 다른 주요 도시로는 시바우, 라시오, 켕퉁, 타치레이가 있다. 목차 1 민족성 2 역사 3 문화 4 생활 5 종교 민족성[편집] 샨족은 4개의 주요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타이야이(တႆးယႂ်ႇ): 샨 주에 산다. 타이루에(တႆးလိုဝ်ႉ): 중국의 시솽반나와 샨 주 동부에 산다. 타이쿠엔(တႆးၶိုၼ်): 켕퉁에 많이 산다. 타이네와(တႆးၼိူဝ်): 대개 중국의 더훙 다이족 징포족 자치주에 산다. 역사[편집] 타이-샨족은 중국의 윈난 성에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샨족은 타이롱 또는 타이야이로 알려진 오래된 타이족 분파의 후손이다. 타이-샨족은 남쪽으로 이주해 오늘날의 라오스와 태국에 정착해 타이노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샨족은 10세기부터 샨 고원 및 미얀마의 다른 지역에 살았다. 몽 마오의 샨족왕은 10세기 무렵부터 존재했지만 바간왕조의 아나우라타 왕(1044~1077) 치세 때 버마족의 속국이 되었다. 바간이 1287년에 몽골에게 멸망한 후에 타이-샨족은 재빨리 동남아시아 전역에 지배권을 획득했다. 13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미얀마 역사에서 많은 아바와 페구의 왕들이 샨족의 후손이었다. 아바의 왕과 페구의 왕은 이라와디 강 계곡의 지배권을 놓고 다퉜다. 많은 샨족 국가와 아바가 고지 미얀마의 지배권을 놓고 다퉜다. 몽양과 모가웅은 샨족 국가들 중 가장 강력했다. 1527년에 몽양은 아바를 격퇴시켰고 1555년까지 고지 미얀마 전역을 지배했다. 버마의 왕 바인나웅은 1557년에 모든 샨족 국가들을 정복했다. 비록 샨족 국가들은 이라와디 계곡의 버마족 왕국에게 공물을 바치게 되었지만, 샨족의 사오파들은 고도의 자치권을 유지했다. 샨족 국가들은 버마족 왕에게 많은 인력을 공급했다. 샨족의 인력 없이 버마족 홀로 저지 미얀마, 시암 등에서 승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샨족은 1824~1826년의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때 버마군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용감하게 싸웠다. 1885년의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이후 영국은 샨족 국가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2차 대전 이후 판롱 회의에서 샨족과 다른 소수민족 지도자들은 주요 버마족 지도자들과 협상하여 미얀마 연방의 일부로서 영국에 독립하는데 동의하였다. 1948년에 샨족 국가들은 새롭게 독립한 버마의 일부인 샨 주가 되었다. 네 윈 장군이 1962년에 쿠데타로 민주 정부를 전복시킨 후에 샨족의 사오파 체제는 폐지되었다. 문화[편집] 대부분의 샨족은 상좌부 불교를 믿으며, 미얀마의 4개 주요 불교 민족(버마족, 몬족, 라카인족, 샨족)의 하나를 이룬다. 샨족의 대부분은 샨어와 버마어를 둘 다 사용한다. 샨어는 약 500~600만 명이 사용하고, 태국어, 라오어와 관련이 있으며, 타이어파의 일부이다. 샨어는 미얀마의 샨 주와 카친 주의 일부, 사가잉 구의 일부, 윈난 성의 일부, 매홍손 주와 치앙마이 주를 포함하는 북서부 태국의 일부에서 사용된다. 두 개의 주요 방언은 성조가 다르다. 센위 샨은 6개의 성조가 있지만 몽나이 샨은 5개가 있다. 샨 문자는 몬 문자를 개조한 것이다. 생활[편집]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 농경민으로서 인공관개시설을 두고 물소의 노동력으로 쟁기를 끌어 경작한다. 벼 외에 옥수수나 두류, 사탕수수나 과일의 재배도 활발하다. 집은 모두 동남아시아 특유의 항상가옥(抗上家屋)이며, 마루밑은 축사로 많이 이용된다. 종교[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샨족 버마족·타이족·라오족 등처럼 상좌부 불교를 믿으며 촌락에는 반드시 와트라는 사원이 있다. 샨족의 남성은 원칙적으로 평생 한 번은 승려로서 수행을 하게 되어 있으며, 승려의 권력도 매우 세다. 불교 외에 정령신앙도 깊다. 과거 남자에겐 문신을 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사라졌다. 전거 통제 LCCN: sh85121119 GND: 4105799-5 NDL: 0057565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샨족&oldid=23919453" 분류: 미얀마의 민족태국의 민족캄보디아의 민족베트남의 민족중국의 미식별 민족숨은 분류: 오래된 그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기타 외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버마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uskaraSuomiFrançaisहिन्दी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ລາວLietuvių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ၽႃႇသႃႇတႆး 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6일 (화) 18: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에어서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어서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에어서울 에어서울의 에어버스 A321-200 IATA ICAO 항공사 콜사인 RS ASV AIR SEOUL 창립일 2015년 4월 7일 운항개시일 2016년 7월 11일 허브 공항 인천국제공항 보유 항공기 7대 취항지 수 19개 슬로건 It's Mint time 본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A동 (공평동, 센트로폴리스) (본사) 인천광역시 중구 공항로 272, 2층 2090호 (운서동, 인천국제공항) (본점) 핵심 인물 조규영(사장) 자본금 15,000,000,000원 (2018.1) 매출액 56,063,857,095원 (2018.1) 영업 이익 1,835,032,428원 (2018.1) 모기업 아시아나항공 웹사이트 https://flyairseoul.com/CW/ko/main.do 에어서울(영어: Air Seoul)은 대한민국의 6번째 저비용항공사이자 아시아나항공이 출자한 두 번째 저비용 항공사이다. 목차 1 개요 2 역사 2.1 2015년 2.2 2016년 2.3 2017년 2.4 2018년 2.5 2019년 3 좌석 구분 3.1 이코노미 클래스 4 취항지 5 코드쉐어 협정 6 보유 기종 6.1 현재 보유중인 기종 7 서비스 7.1 기내서비스 7.2 민트팀 서비스 8 사진 9 같이 보기 10 각주 개요[편집] 기존 아시아나항공이 출자한 저비용항공사, 에어부산의 경우 부산을 허브로 하고있어 서울발 항공편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지난 2014년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후, 2015년 운항승인을 받아 2016년 7월 11일 정기편 신규취항을 하였다. 또한 서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글 ㅅ과 ㅇ을 사용한 로고를 도입하였으며 김포발 제주행 노선을 시작으로 2016년 10월, 국제선 노선에도 취항하였다. 이 국제선은 아시아나항공이 운항하였으나 단항한 노선을 주로 운항했고 현재 단기간 흑자전환을 위해 오사카,홍콩,도쿄,괌에 취항하였다. 2017년 아시아나항공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제2 저비용항공(LCC) 에어서울이 재무구조 개선 작업에 나섰다. 아시아나항공은 증자 등을 통한 자금 지원을 고려하고 있으나 아시아나항공 역시 유동성 악화를 겪고 있어 동반 부실 우려가 있다.따라서 에어서울은 결손보전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3대1 감자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에어서울의 자본금은 350억 원에서 150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에어서울은 올 3분기 매출액 671억 원, 순손실 216억 원의 실적을 기록했다. 총 부채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311억 원이다.2018년 에어서울은 1분기 매출 560억원, 영업이익 18억원을 올렸지만 2분기에는 고유가 영향을 받아 매출 484억원, 영업손실 53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성수기 시즌인 3분기 영업이익이 105억원 증가하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에어서울의 노선 탑승률은 80~90% 수준이다.또한 항공사 최초로 ‘공짜 마케팅’을 실시, 연간 항공권 ‘민트패스’(일정 금액을 내고 원하는 노선을 골라 수차례 여행이 가능하도록 한 프로모션) 등과 같은 파격적인 프로모션도 선보였다. 2019년 1분기 매출액 740억원, 영업이익 110억원 흑자로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전년 동기(551억원)대비 34.3%,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24억원) 대비 350.1%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전년 동기(4.4%)에서 14.8%로 10.4%포인트 증가했다, 에어서울은 1분기 역대 최대 실적과 관련 “공격적인 인기 노선의 취항과 최저가의 파격 프로모션을 통해 인지도 확대, 조직 운영 효율화 및 비용 절감 등이 실적 개선을 이끈 요인”이 1분기 흑자전환에 도움주었다. 역사[편집] 2015년[편집] 3월 25일 : 에어서울 설립 결의 4월 7일 : 인천광역시 중구 공항로에서 에어서울 주식회사 법인 설립. (자본금 500,000,000원) 10월 14일 : 자본금을 15,000,000,000원으로 증액. 10월 23일 : 신입사원 공개채용 모집 12월 4일 : 공식 CI 출범 12월 28일 : 항공운송면허 & 국제항공운송면허 발급 2016년[편집] 7월 6일 : 항공안전운항증명서(AOC) 발급 7월 11일 : 서울(김포) - 제주 임시취항 7월 28일 : 나가사키, 다카마쓰, 시즈오카, 히로시마, 요나고, 도야마, 마카오, 씨엠립, 코타키나발루 지점 설치. 8월 20일 : 자본금을 35,000,000,000원으로 증액. 10월 5일 : 1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8255) 10월 7일 : 서울(인천) - 다카마쓰 신규취항 10월 8일 서울(인천) - 시즈오카 신규취항 서울(인천) - 씨엠립 신규취항 10월 15일 : 2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8280) 10월 18일 서울(인천) - 나가사키 신규취항 서울(인천) - 코타키나발루 신규취항 10월 20일 : 서울(인천) - 히로시마 신규취항 10월 21일 : 3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8281) 10월 22일 : 서울(인천) - 마카오 신규취항 10월 23일 : 서울(인천) - 요나고 신규취항 10월 31일 : 서울(인천) - 도야마 신규취항 11월 25일 : 우베지점 설치. 11월 28일 : 서울(인천) - 야마구치/우베 신규취항 2017년[편집] 4월 2일 : 서울(인천) - 구마모토 신규취항 7월 9일 : 4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7790) 8월 14일 : 괌, 홍콩, 오사카지점 설치. 8월 30일 : 동경지점 설치. 9월 12일 서울(인천) - 괌 신규취항 서울(인천) - 오사카(간사이) 신규취항 10월 31일 5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8266) 서울(인천) - 도쿄(나리타) 신규취항 서울(인천) - 홍콩(첵랍콕) 신규취항 12월 4일 : 구마모토, 칼리보지점 설치. 12월 20일 : 6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SL, HL7212) 12월 22일 : 서울(인천) - 칼리보 신규취항 2018년[편집] 1월 17일 : 광명역 도심공항터미널 탑승수속 서비스 개시 3월 8일 : 서울(인천) - 마카오 단항 4월 2일 : 인천국제공항 자동 수하물위탁 서비스 개시 4월 26일 : 서울(인천) - 칼리보 무기한 단항 5월 18일 : 서울(인천) - 다낭 신규취항 8월 27일 : 서울(인천) - 후쿠오카 신규취항 9월 21일 : 서울(인천) - 오키나와 신규취항 11월 26일 : 7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7789) 11월 26일 서울(인천) - 칼리보 재취항 서울(인천) - 삿포로 신규취항 2019년[편집] 4월 21일 : 서울(인천) - 나가사키 단항 좌석 구분[편집] 이코노미 클래스[편집] 에어서울의 이코노미 클래스에는 세 종류가 있으며, "PREMIUM ZONE", "MINT ZONE", "A,B구역"으로 구분된다. PREMIUM ZONE의 경우, 좌석 배열이 기존배열 (3-3)가 아닌 비지니스 좌석배열 (2-2)형태로 배치되어 있어 기존과는 달리 더 넓은 좌석이다. 또한 USB포트 등이 장착되어 있다. 이는 일반 이코노미석에도 장착되어있는 기구이다. 또한 접이식 팔걸이와 다용도 수납장 역시 설치되어있다. MINT ZONE의 경우, 항공기의 앞줄 이거나 비상구 좌석이다, 일반 이코노미 좌석이랑 동일하지만 앞뒤 간격이 일반 이코노미보다 더 넓다. A,B구역의 경우 우리가 아는 이코노미 클래스이다. PREMIUM ZONE 좌석간격 40inch, AVOD 모니터장착 A321-200: HL7789 MINT ZONE 좌석간격 35inch, AVOD 모니터 장착 A321-200: HL8255 HL8280 HL8281 HL8266 HL7790 HL7212 HL7789 A,B구역 좌석간격 31~33inch, AVOD 모니터 장착 A321-200 : HL8255 HL8280 HL8281 HL8266 HL7790 HL7789 A321-200 : HL7212 (AVOD 모니터 미장착) 취항지[편집] 허브 취항 예정지 단항지 도시 공항IATA 공항ICAO 공항 이름 주석 및 비고 운항 횟수 서울/인천 ICN RKSI 인천 허브 서울 GMP RKSS 김포 [1] 일 4회 운항, 제주국제공항 행 제주 CJU RKPC 제주 [2] 일 4회 운항, 김포국제공항 발 도쿄 NRT RJAA 나리타 [3] 일 2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구마모토 KMJ RJFT 구마모토 [4]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나가사키 NGS RJFU 나가사키 [5][6]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다카마쓰 TAK RJOT 다카마쓰 [7] 주 5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도야마 TOY RJNT 도야마 [8]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삿포로 CTS RJCC 신치토세 [9]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시즈오카 FSZ RJNS 시즈오카 [10] 일 1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오사카 KIX RJBB 간사이 [11] 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오키나와 OKA ROAH 나하 [12] 주 5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요나고 YGJ RJOH 미호 [13]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우베(야마구치) UBJ RJDC 야마구치 우베 [14]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후쿠오카 FUK RJFF 후쿠오카 [15] 주 6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히로시마 HIJ RJOA 히로시마 [16] 주 5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마카오 MFM VMMC 마카오 [17][18]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홍콩 HKG VHHH 홍콩 [19]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다낭 DAD VVDN 다낭 [20]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코타키나발루 BKI WBKK 코타키나발루 [21] 일 1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시엠레아프 REP VDSR 시엠레아프 [22] 주 4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칼리보 KLO RPVK 칼리보 [23]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괌 GUM PGUM 앤토니오 B. 원 팻 [24]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코드쉐어 협정[편집] 에어서울은 모회사 아시아나항공과 코드쉐어 협정을 체결하였다. 아시아나항공 보유 기종[편집] 에어서울은 2019년 6월 기준으로 다음의 항공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에어버스 A320 Family의 경우 초기분은 아시아나항공에서 사용하던 기체를 인수받았으나 현재는 에어부산과 같이 에어버스로부터 직접 인도받는 중이다. 현재 보유중인 기종[편집] 에어서울의 보유 기종 기종 대수 주문 탑승 승객수 기타 E+ E 합계 각주 에어버스 A321-200 7 0 12 159 171 [25] 6기는 구. 아시아나항공 소속 항공기1기는 신규구매로 도입 0 195 195 0 220 220 서비스[편집] 기내서비스[편집] 노선별로 고객에게 맞춘 꼭 필요한 맞춤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기내식은 아시아나항공에서 항공편 구매시 무료로 제공한다, 저비용항공사 최초로 기내 영상물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민트팀 서비스[편집] 에어서울 국제선 기내에서 승무원들의 재능 나눔 이벤트를 준비 중이며 특화팀 서비스와 비행 스케줄은 준비되는 대로 홈페이지를 통해 안내 사진[편집] 에어서울의 에어버스 A321-200 에어서울의 에어버스 A321-200 같이 보기[편집] 금호아시아나그룹 아시아나항공 - 모회사 아시아나에어포트 - 그룹 계열 조업사 에어부산 - 동일 모기업 산하 자회사 비행기 타고 가요[26] 각주[편집] ↑ “에어서울, 김포-제주 국내선 첫 취항”. 2016년 7월 11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김포-제주 국내선 첫 취항”. 2016년 7월 11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신생 LCC 에어서울, 오사카 등 신규취항… “2018년 흑자 전환 원년” 기염”. 2017년 6월 2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부정기편 '인천~구마모토' 내달부터 정규취항 전환”. 2017년 6월 27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인천~나가사키 단독 노선 신규 취항”. 2016년 10월 18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막내의 반란' 에어서울, 수익성 개선 위해 '투트랙' 전략”. 2019년 5월 21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국제선 첫 취항…日 다카마쓰 하늘길 열었다”. 2016년 10월 7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일본의 스위스' 도야마 첫 취항”. 2016년 11월 1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다음달 26일 日 삿포로 노선 신규 취항”. 2018-1010.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저비용항공사 에어서울 "일본 7곳 유일하게 날아요"”. 2016년 10월 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인기노선 오사카·괌 신규 취항”. 2017년 9월 1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9월 21일 오키나와 신규 취항”. 2018년 7월 1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저비용항공사 에어서울 "일본 7곳 유일하게 날아요"”. 2016년 10월 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저비용항공사 에어서울 "일본 7곳 유일하게 날아요"”. 2016년 10월 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8월 후쿠오카 신규 취항…연내 오키나와·삿포로도 취항”. 2016년 6월 28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저비용항공사 에어서울 "일본 7곳 유일하게 날아요"”. 2016년 10월 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마카오 신규 취항 주7회 운항”. 2016년 10월 2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조규영, 에어서울 흑자전환 달성 위해 체질개선 총력전”. 2018년 2월 18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신생 LCC 에어서울, 오사카 등 신규취항… “2018년 흑자 전환 원년” 기염”. 2017년 6월 2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도 5월부터 서울-다낭 취항”. 2018년 4월 9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국제선 취항…저가항공, 무한경쟁 돌입”. 2016년 10월 1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국제선 취항…저가항공, 무한경쟁 돌입”. 2016년 10월 1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12월 인천~칼리보 단독 취항”. 2017년 9월 19일. ↑ “에어서울, 9월 12일 인천~괌 노선 '신규취항'... LCC '괌 혈투' 예고”. 2017년 6월 1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A321-200 좌석배치도”. 2018년 11월 15일. ↑ 채널A 프로그램으로서 에어서울이 제작 지원을 했다. vdeh금호아시아나그룹계열사 금호고속 유스퀘어 금호고속 금호고속관광(경기법인) 금호산업 제2외곽순환고속도로 금호티앤아이 금호고속관광(서울법인) 금호속리산고속 에스티엠 금호리조트 아시아나항공 아시아나항공 카고 아시아나에어포트 아시아나세이버 아시아나개발 아시아나IDT 에어부산 에어서울 충주보라매 청정목포환경 기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금호음악인상 금호아시아나인재개발원 금호아트홀 금호미술관 죽호학원 금호고등학교 금호중앙여자고등학교 금파공업고등학교 금호중앙중학교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이전 계열사 금호에이엠씨 금호케미칼 금호알에이시 대한통운 금호타이어 대우건설 삼화고속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금호종합금융 금호생명 금호전기 금호석유화학 금호피앤비화학 금호폴리켐 금호미쓰이화학 금호개발상사 금호티앤엘 관련 항목 박인천 박성용 박정구 박삼구 박찬구 박종구 웹사이트: kumhoasiana.co.kr vdeh 대한민국의 항공사대형 항공사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저비용 항공사 에어부산 에어서울 이스타항공 제주항공 진에어 티웨이항공 소형항공운송사업자 코리아 익스프레스 에어 하이에어 화물 항공사 대한항공 카고 아시아나항공 카고 에어인천 항공기사용사업자 블루에어라인 신한항공 에어팰리스 에이스항공 통일항공 헬리코리아 홍익항공 유아이헬리제트 설립 추진 항공사 플라이 강원 에어로케이 에어프레미아 에어대구 폐업 및 무산된 항공사 극동항공 대한국민항공 범한항공 세기항공 에어울산 에어포항 에어필립 영남에어 유스카이항공 이스트아시아에어라인 인천타이거항공 코스타항공 프라임항공 플라이 양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에어서울&oldid=24419239" 분류: 아시아나항공2015년 설립인천광역시의 기업대한민국의 항공사저비용 항공사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인용 오류 - 날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GalegoItaliano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3일 (목) 10: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에어서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어서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에어서울 에어서울의 에어버스 A321-200 IATA ICAO 항공사 콜사인 RS ASV AIR SEOUL 창립일 2015년 4월 7일 운항개시일 2016년 7월 11일 허브 공항 인천국제공항 보유 항공기 7대 취항지 수 19개 슬로건 It's Mint time 본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A동 (공평동, 센트로폴리스) (본사) 인천광역시 중구 공항로 272, 2층 2090호 (운서동, 인천국제공항) (본점) 핵심 인물 조규영(사장) 자본금 15,000,000,000원 (2018.1) 매출액 56,063,857,095원 (2018.1) 영업 이익 1,835,032,428원 (2018.1) 모기업 아시아나항공 웹사이트 https://flyairseoul.com/CW/ko/main.do 에어서울(영어: Air Seoul)은 대한민국의 6번째 저비용항공사이자 아시아나항공이 출자한 두 번째 저비용 항공사이다. 목차 1 개요 2 역사 2.1 2015년 2.2 2016년 2.3 2017년 2.4 2018년 2.5 2019년 3 좌석 구분 3.1 이코노미 클래스 4 취항지 5 코드쉐어 협정 6 보유 기종 6.1 현재 보유중인 기종 7 서비스 7.1 기내서비스 7.2 민트팀 서비스 8 사진 9 같이 보기 10 각주 개요[편집] 기존 아시아나항공이 출자한 저비용항공사, 에어부산의 경우 부산을 허브로 하고있어 서울발 항공편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지난 2014년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후, 2015년 운항승인을 받아 2016년 7월 11일 정기편 신규취항을 하였다. 또한 서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글 ㅅ과 ㅇ을 사용한 로고를 도입하였으며 김포발 제주행 노선을 시작으로 2016년 10월, 국제선 노선에도 취항하였다. 이 국제선은 아시아나항공이 운항하였으나 단항한 노선을 주로 운항했고 현재 단기간 흑자전환을 위해 오사카,홍콩,도쿄,괌에 취항하였다. 2017년 아시아나항공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제2 저비용항공(LCC) 에어서울이 재무구조 개선 작업에 나섰다. 아시아나항공은 증자 등을 통한 자금 지원을 고려하고 있으나 아시아나항공 역시 유동성 악화를 겪고 있어 동반 부실 우려가 있다.따라서 에어서울은 결손보전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3대1 감자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에어서울의 자본금은 350억 원에서 150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에어서울은 올 3분기 매출액 671억 원, 순손실 216억 원의 실적을 기록했다. 총 부채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311억 원이다.2018년 에어서울은 1분기 매출 560억원, 영업이익 18억원을 올렸지만 2분기에는 고유가 영향을 받아 매출 484억원, 영업손실 53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성수기 시즌인 3분기 영업이익이 105억원 증가하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에어서울의 노선 탑승률은 80~90% 수준이다.또한 항공사 최초로 ‘공짜 마케팅’을 실시, 연간 항공권 ‘민트패스’(일정 금액을 내고 원하는 노선을 골라 수차례 여행이 가능하도록 한 프로모션) 등과 같은 파격적인 프로모션도 선보였다. 2019년 1분기 매출액 740억원, 영업이익 110억원 흑자로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전년 동기(551억원)대비 34.3%,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24억원) 대비 350.1%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전년 동기(4.4%)에서 14.8%로 10.4%포인트 증가했다, 에어서울은 1분기 역대 최대 실적과 관련 “공격적인 인기 노선의 취항과 최저가의 파격 프로모션을 통해 인지도 확대, 조직 운영 효율화 및 비용 절감 등이 실적 개선을 이끈 요인”이 1분기 흑자전환에 도움주었다. 역사[편집] 2015년[편집] 3월 25일 : 에어서울 설립 결의 4월 7일 : 인천광역시 중구 공항로에서 에어서울 주식회사 법인 설립. (자본금 500,000,000원) 10월 14일 : 자본금을 15,000,000,000원으로 증액. 10월 23일 : 신입사원 공개채용 모집 12월 4일 : 공식 CI 출범 12월 28일 : 항공운송면허 & 국제항공운송면허 발급 2016년[편집] 7월 6일 : 항공안전운항증명서(AOC) 발급 7월 11일 : 서울(김포) - 제주 임시취항 7월 28일 : 나가사키, 다카마쓰, 시즈오카, 히로시마, 요나고, 도야마, 마카오, 씨엠립, 코타키나발루 지점 설치. 8월 20일 : 자본금을 35,000,000,000원으로 증액. 10월 5일 : 1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8255) 10월 7일 : 서울(인천) - 다카마쓰 신규취항 10월 8일 서울(인천) - 시즈오카 신규취항 서울(인천) - 씨엠립 신규취항 10월 15일 : 2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8280) 10월 18일 서울(인천) - 나가사키 신규취항 서울(인천) - 코타키나발루 신규취항 10월 20일 : 서울(인천) - 히로시마 신규취항 10월 21일 : 3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8281) 10월 22일 : 서울(인천) - 마카오 신규취항 10월 23일 : 서울(인천) - 요나고 신규취항 10월 31일 : 서울(인천) - 도야마 신규취항 11월 25일 : 우베지점 설치. 11월 28일 : 서울(인천) - 야마구치/우베 신규취항 2017년[편집] 4월 2일 : 서울(인천) - 구마모토 신규취항 7월 9일 : 4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7790) 8월 14일 : 괌, 홍콩, 오사카지점 설치. 8월 30일 : 동경지점 설치. 9월 12일 서울(인천) - 괌 신규취항 서울(인천) - 오사카(간사이) 신규취항 10월 31일 5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8266) 서울(인천) - 도쿄(나리타) 신규취항 서울(인천) - 홍콩(첵랍콕) 신규취항 12월 4일 : 구마모토, 칼리보지점 설치. 12월 20일 : 6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SL, HL7212) 12월 22일 : 서울(인천) - 칼리보 신규취항 2018년[편집] 1월 17일 : 광명역 도심공항터미널 탑승수속 서비스 개시 3월 8일 : 서울(인천) - 마카오 단항 4월 2일 : 인천국제공항 자동 수하물위탁 서비스 개시 4월 26일 : 서울(인천) - 칼리보 무기한 단항 5월 18일 : 서울(인천) - 다낭 신규취항 8월 27일 : 서울(인천) - 후쿠오카 신규취항 9월 21일 : 서울(인천) - 오키나와 신규취항 11월 26일 : 7호기 도입 (에어버스 A321-200, HL7789) 11월 26일 서울(인천) - 칼리보 재취항 서울(인천) - 삿포로 신규취항 2019년[편집] 4월 21일 : 서울(인천) - 나가사키 단항 좌석 구분[편집] 이코노미 클래스[편집] 에어서울의 이코노미 클래스에는 세 종류가 있으며, "PREMIUM ZONE", "MINT ZONE", "A,B구역"으로 구분된다. PREMIUM ZONE의 경우, 좌석 배열이 기존배열 (3-3)가 아닌 비지니스 좌석배열 (2-2)형태로 배치되어 있어 기존과는 달리 더 넓은 좌석이다. 또한 USB포트 등이 장착되어 있다. 이는 일반 이코노미석에도 장착되어있는 기구이다. 또한 접이식 팔걸이와 다용도 수납장 역시 설치되어있다. MINT ZONE의 경우, 항공기의 앞줄 이거나 비상구 좌석이다, 일반 이코노미 좌석이랑 동일하지만 앞뒤 간격이 일반 이코노미보다 더 넓다. A,B구역의 경우 우리가 아는 이코노미 클래스이다. PREMIUM ZONE 좌석간격 40inch, AVOD 모니터장착 A321-200: HL7789 MINT ZONE 좌석간격 35inch, AVOD 모니터 장착 A321-200: HL8255 HL8280 HL8281 HL8266 HL7790 HL7212 HL7789 A,B구역 좌석간격 31~33inch, AVOD 모니터 장착 A321-200 : HL8255 HL8280 HL8281 HL8266 HL7790 HL7789 A321-200 : HL7212 (AVOD 모니터 미장착) 취항지[편집] 허브 취항 예정지 단항지 도시 공항IATA 공항ICAO 공항 이름 주석 및 비고 운항 횟수 서울/인천 ICN RKSI 인천 허브 서울 GMP RKSS 김포 [1] 일 4회 운항, 제주국제공항 행 제주 CJU RKPC 제주 [2] 일 4회 운항, 김포국제공항 발 도쿄 NRT RJAA 나리타 [3] 일 2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구마모토 KMJ RJFT 구마모토 [4]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나가사키 NGS RJFU 나가사키 [5][6]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다카마쓰 TAK RJOT 다카마쓰 [7] 주 5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도야마 TOY RJNT 도야마 [8]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삿포로 CTS RJCC 신치토세 [9]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시즈오카 FSZ RJNS 시즈오카 [10] 일 1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오사카 KIX RJBB 간사이 [11] 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오키나와 OKA ROAH 나하 [12] 주 5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요나고 YGJ RJOH 미호 [13]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우베(야마구치) UBJ RJDC 야마구치 우베 [14] 주 3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후쿠오카 FUK RJFF 후쿠오카 [15] 주 6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히로시마 HIJ RJOA 히로시마 [16] 주 5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마카오 MFM VMMC 마카오 [17][18]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홍콩 HKG VHHH 홍콩 [19]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다낭 DAD VVDN 다낭 [20]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코타키나발루 BKI WBKK 코타키나발루 [21] 일 1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시엠레아프 REP VDSR 시엠레아프 [22] 주 4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칼리보 KLO RPVK 칼리보 [23]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괌 GUM PGUM 앤토니오 B. 원 팻 [24] 주 7회 운항, 인천국제공항 발 코드쉐어 협정[편집] 에어서울은 모회사 아시아나항공과 코드쉐어 협정을 체결하였다. 아시아나항공 보유 기종[편집] 에어서울은 2019년 6월 기준으로 다음의 항공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에어버스 A320 Family의 경우 초기분은 아시아나항공에서 사용하던 기체를 인수받았으나 현재는 에어부산과 같이 에어버스로부터 직접 인도받는 중이다. 현재 보유중인 기종[편집] 에어서울의 보유 기종 기종 대수 주문 탑승 승객수 기타 E+ E 합계 각주 에어버스 A321-200 7 0 12 159 171 [25] 6기는 구. 아시아나항공 소속 항공기1기는 신규구매로 도입 0 195 195 0 220 220 서비스[편집] 기내서비스[편집] 노선별로 고객에게 맞춘 꼭 필요한 맞춤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기내식은 아시아나항공에서 항공편 구매시 무료로 제공한다, 저비용항공사 최초로 기내 영상물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민트팀 서비스[편집] 에어서울 국제선 기내에서 승무원들의 재능 나눔 이벤트를 준비 중이며 특화팀 서비스와 비행 스케줄은 준비되는 대로 홈페이지를 통해 안내 사진[편집] 에어서울의 에어버스 A321-200 에어서울의 에어버스 A321-200 같이 보기[편집] 금호아시아나그룹 아시아나항공 - 모회사 아시아나에어포트 - 그룹 계열 조업사 에어부산 - 동일 모기업 산하 자회사 비행기 타고 가요[26] 각주[편집] ↑ “에어서울, 김포-제주 국내선 첫 취항”. 2016년 7월 11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김포-제주 국내선 첫 취항”. 2016년 7월 11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신생 LCC 에어서울, 오사카 등 신규취항… “2018년 흑자 전환 원년” 기염”. 2017년 6월 2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부정기편 '인천~구마모토' 내달부터 정규취항 전환”. 2017년 6월 27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인천~나가사키 단독 노선 신규 취항”. 2016년 10월 18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막내의 반란' 에어서울, 수익성 개선 위해 '투트랙' 전략”. 2019년 5월 21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국제선 첫 취항…日 다카마쓰 하늘길 열었다”. 2016년 10월 7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일본의 스위스' 도야마 첫 취항”. 2016년 11월 1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다음달 26일 日 삿포로 노선 신규 취항”. 2018-1010.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저비용항공사 에어서울 "일본 7곳 유일하게 날아요"”. 2016년 10월 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인기노선 오사카·괌 신규 취항”. 2017년 9월 1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9월 21일 오키나와 신규 취항”. 2018년 7월 1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저비용항공사 에어서울 "일본 7곳 유일하게 날아요"”. 2016년 10월 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저비용항공사 에어서울 "일본 7곳 유일하게 날아요"”. 2016년 10월 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8월 후쿠오카 신규 취항…연내 오키나와·삿포로도 취항”. 2016년 6월 28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저비용항공사 에어서울 "일본 7곳 유일하게 날아요"”. 2016년 10월 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마카오 신규 취항 주7회 운항”. 2016년 10월 2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조규영, 에어서울 흑자전환 달성 위해 체질개선 총력전”. 2018년 2월 18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신생 LCC 에어서울, 오사카 등 신규취항… “2018년 흑자 전환 원년” 기염”. 2017년 6월 2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도 5월부터 서울-다낭 취항”. 2018년 4월 9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국제선 취항…저가항공, 무한경쟁 돌입”. 2016년 10월 1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국제선 취항…저가항공, 무한경쟁 돌입”. 2016년 10월 13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12월 인천~칼리보 단독 취항”. 2017년 9월 19일. ↑ “에어서울, 9월 12일 인천~괌 노선 '신규취항'... LCC '괌 혈투' 예고”. 2017년 6월 16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에어서울 A321-200 좌석배치도”. 2018년 11월 15일. ↑ 채널A 프로그램으로서 에어서울이 제작 지원을 했다. vdeh금호아시아나그룹계열사 금호고속 유스퀘어 금호고속 금호고속관광(경기법인) 금호산업 제2외곽순환고속도로 금호티앤아이 금호고속관광(서울법인) 금호속리산고속 에스티엠 금호리조트 아시아나항공 아시아나항공 카고 아시아나에어포트 아시아나세이버 아시아나개발 아시아나IDT 에어부산 에어서울 충주보라매 청정목포환경 기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금호음악인상 금호아시아나인재개발원 금호아트홀 금호미술관 죽호학원 금호고등학교 금호중앙여자고등학교 금파공업고등학교 금호중앙중학교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이전 계열사 금호에이엠씨 금호케미칼 금호알에이시 대한통운 금호타이어 대우건설 삼화고속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금호종합금융 금호생명 금호전기 금호석유화학 금호피앤비화학 금호폴리켐 금호미쓰이화학 금호개발상사 금호티앤엘 관련 항목 박인천 박성용 박정구 박삼구 박찬구 박종구 웹사이트: kumhoasiana.co.kr vdeh 대한민국의 항공사대형 항공사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저비용 항공사 에어부산 에어서울 이스타항공 제주항공 진에어 티웨이항공 소형항공운송사업자 코리아 익스프레스 에어 하이에어 화물 항공사 대한항공 카고 아시아나항공 카고 에어인천 항공기사용사업자 블루에어라인 신한항공 에어팰리스 에이스항공 통일항공 헬리코리아 홍익항공 유아이헬리제트 설립 추진 항공사 플라이 강원 에어로케이 에어프레미아 에어대구 폐업 및 무산된 항공사 극동항공 대한국민항공 범한항공 세기항공 에어울산 에어포항 에어필립 영남에어 유스카이항공 이스트아시아에어라인 인천타이거항공 코스타항공 프라임항공 플라이 양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에어서울&oldid=24419239" 분류: 아시아나항공2015년 설립인천광역시의 기업대한민국의 항공사저비용 항공사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인용 오류 - 날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GalegoItaliano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3일 (목) 10: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명륜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명륜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명륜 역명판 역사 개괄 관할 기관 부산교통공사 제1운영사업소 부산대관리역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중앙대로 1414 좌표 북위 35° 12′ 44″ 동경 129° 04′ 46″ / 북위 35.212327° 동경 129.0795364085° / 35.212327; 129.0795364085좌표: 북위 35° 12′ 44″ 동경 129° 04′ 46″ / 북위 35.212327° 동경 129.0795364085° / 35.212327; 129.0795364085 개업일 1985년 7월 19일 역 번호 126 승강장 구조 2면 2선 노선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다대포해수욕장 기점 32.1 km ← 동래 (0.8 km) 온천장 →(1.0 km) 명륜역(明倫驛)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 있는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의 지하철역이다. 목차 1 역사 2 역 구조 2.1 승강장 3 역 주변 4 승차량 변동 5 사진 6 인접한 역 7 각주 8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85년 7월 19일 : 부산 도시철도 1호선 개통과 함께 명륜동역으로 영업 개시 2010년 2월 24일 : 명륜역으로 역명 변경 역 구조[편집] 2면 2선 상대식 승강장이 있는 고가역이다. 다대포해수욕장 방향 승강장은 연결된 육교가 있어서 바로 개찰구를 통해 도로를 건너갈 수 있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5번 출구가 롯데백화점 동래점과 바로 육교로 연결된다. 울산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이 역까지 12번, 13번 양산 시내버스가 10분에 한 번씩 운행된다. 반대편횡단: 불가능 승강장[편집] 동래 ↑ 하 | | 상 ↓ 온천장 상행 ■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다대포해수욕장 방면 하행 온천장·부산대·범어사·노포 방면 역 주변[편집] 롯데백화점 동래점(구·부산동부시외버스터미널) 동래원예고등학교 동래우체국 동래중학교 동래구청 동래구 보건소 명륜동 행정복지센터 명륜초등학교 명륜쌍용예가 아파트 동래 SK뷰 아파트 온천삼익아파트 센트럴파크 하이츠 아파트 명륜동 SK뷰 아파트 승차량 변동[편집] 역 노선 승차 인원 주석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1호선 11529 9982 9022 8458 7994 7419 7926 9198 9753 10380 10421 10481 10883 10645 [1] 사진[편집] 승강장(명륜동역 시절, 스크린도어 설치 전) 인접한 역[편집] 부산 도시철도 1호선 125 동래다대포해수욕장 방면 ■ 부산 도시철도 1호선 127 온천장노포 방면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명륜역 각주[편집] ↑ 본 자료는 부산 도시철도 승객량 통계를 가공한 것이다. 외부 링크[편집] 부산교통공사 1호선 명륜역 소개 (철도 통합정보시스템) vdeh부산 도시철도 1호선다대포해수욕장 - 다대포항 - 낫개 - 신장림 - 장림 - 동매 - 신평 - 하단 - 당리 - 사하 - 괴정 - 대티 - 서대신 - 동대신 - 토성 - 자갈치 - 남포 - 중앙 - 부산역 - 초량 - 부산진 - 좌천 - 범일 - 범내골 - 서면 - 부전 - 양정 - 시청 - 연산 - 교대 - 동래 - 명륜 - 온천장 - 부산대 - 장전 - 구서 - 두실 - 남산 - 범어사 - 노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명륜역&oldid=24370713" 분류: 부산 도시철도 1호선부산 동래구의 전철역1985년 개업한 철도역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Русский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8: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AMD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23′ 12.016″ 서경 121° 59′ 55.550″ / 북위 37.38667111° 서경 121.99876389° / 37.38667111; -121.99876389 AMD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AMD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Advanced Micro Devices 산업 분야 반도체 창립 1969년 5월 1일 국가 미국 본사 소재지 미국서니베일 핵심 인물 창립자: 제리 샌더스, 에드윈 터니 등회장: 브루스 클래플린CEO: 리사 수 제품 마이크로프로세서주기판 칩셋그래픽 처리 장치 칩셋디지털 텔레비전 디코더 칩셋 매출액 10억 2700만 달러 (2016년 2분기) 영업이익 -800만 달러 (2016년 2분기) 순이익 6900만 달러 (2016년 2분기) 종업원 9,700명 (2015년 2월) 슬로건 Enabling today, Inspiring tomorrow 웹사이트 www.amd.com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 주식회사(Advanced Micro Devices, Inc.) 또는 AMD는 미국의 집적회로 제조사로,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에 위치하고 있다. 1969년 페어차일드 반도체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AMD는, 인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x86 아키텍처 호환 프로세서 제조사이며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도 주도적인 위치에 서 있다. 2008년 7월에 헥터 루이츠 박사(Dr. Héctor Ruiz)로부터 더크 마이어가 CEO 및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더크 마이어는 불도저 문제와 퀄컴에 Aderno 매각 등 문제로 이사회에서 해임되고, 로리 리드가 새로운 CEO가 되었다. 현재 CEO 및 회장은 리사 수 박사이다. AMD는 애슬론, 애슬론 64, 옵테론, 튜리온 64, 셈프론, 듀론 등의 x86-호환 프로세서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AMD는 지오드와 같은, 노트북에 쓰이기 쉬운 낮은 클럭의 모바일용 CPU도 제작하고 있다. 2006년 6월 24일, AMD는 54억 달러에 ATI를 인수 합병하기로 합의했다. 또, 2007년에는 페넘을 출시했으며, 페넘 II, 애슬론 II 등의 모델들이 출시하였다. 2011년 CPU와 GPU를 하나의 칩셋에 통합한 가속 처리 장치인 1세대 APU 라노와 새롭게 설계된 불도저를 출시, 2012년에는 불도저에서 약간 개선된 파일드라이버와 2세대 APU 트리니티를 선보였다. 또 2013년에는 2세대 APU 트리니티에서 CPU와GPU의 클럭을 높인 3세대 APU 리치랜드를 출시하고 파일드라이버기반의 기존제품에서 동작클럭만 증가시킨 FX-9XXX시리즈를 출시한다. 2014년에는 3세대 APU 리치랜드에서 CPU개선과 GCN으로의 GPU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스팀롤러 아키텍처기반 4세대 APU 카베리가 출시되었다. AMD는 (x86 기반) 개인용 컴퓨터 CPU 시장에서 인텔의 유일한 중대 라이벌이다. AMD가 ATI를 2006년 합병한 이후에 AMD는 그래픽 처리 장치(GPU,그래픽 카드) 시장에서도 높은 점유율을 얻고 있다 .[1] 캘리포니아 주 서니베일에 위치한 AMD 본사 목차 1 역사 2 제품 및 기술 2.1 CPU 2.2 그래픽 카드 2.3 AMD 칩셋 2.4 AMD 라이브 2.5 AMD 쿼드 FX 플랫폼 2.6 상용 플랫폼 2.7 데스크톱 플랫폼 2.8 임베디드 시스템 2.9 기타 이니셔티브 2.10 소프트웨어 3 같이 보기 4 각주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는 1969년 5월 1일에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동료들 중 7명과 함께 제리 샌더스가 설립하였다.[2][3] 리사 수를 CEO로 채용하였다. 1969년 9월, AMD는 캘리포니아 주 샌타클래라의 임시 거처에서 캘리포니아 주 서니베일로 이전하였다.[4] 즉시 고객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AMD는 처음에 페어차일드와 내셔널 세미컨덕터가 설계한 마이크로칩의 2차 공급원이 되었다.[5][6] AMD는 먼저 로직 칩 생산에 집중하였다.[7] 1969년 11월 회사는 1970년에 판매를 시작한 4비트 MSI 시프트 레지스터인 Am9300을 제조했으며 이것이 AMD 최초의 제품이다.[8][9] 또, 1970년, AMD는 최초의 사유 제품인 Am2501 로직 카운터를 생산했으며, 이 제품은 매우 성공적이었다.[10][11] 1971년에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은 Am2505이며, 이는 당시 가장 빠른 곱셈기였다.[10][12] 1971년, AMD는 64비트 양극 RAM인 Am3101을 기점으로 RAM 칩 시장에 뛰어들었다.[12][13] 그 해에 AMD는 상당한 양의 선형 집적 회로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그 해까지 회사의 총 판매 소득은 4,600,000 달러에 달했다.[10][14] AMD는 1972년 9월 공개 상장했다.[5][15][16] 제품 및 기술[편집] CPU[편집] 라이젠 AMD 가속 처리 장치 그래픽 카드[편집] AMD 그래픽 처리 장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라데온 파이어프로 파이어스트림 아이피니티 아이스피드 AMD 칩셋[편집] AMD 칩셋 비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AMD 라이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AMD 라이브!입니다. AMD 쿼드 FX 플랫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AMD 쿼드 FX 플랫폼입니다. 상용 플랫폼[편집] AMD 트리니티(Trinity) AMD 라이덴(Raiden) 토렌자(Torrenza) 다양한 인증 시스템 프로그램 및 플랫폼 데스크톱 플랫폼[편집] 2007년을 기점으로 AMD는 인텔에 이어 스파이더, 드래건과 같은 데스크톱 플랫폼의 코드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임베디드 시스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알케미 및 지오드입니다. 기타 이니셔티브[편집] 50x15 더 그린 그리드 SIMFIRE (코드 이름) 소프트웨어[편집] xSP (소프트웨어 병렬화 확장) 오픈솔라리스, 썬 xVM을 AMD 플랫폼에서 강화할 목적으로 썬 마이크로시스템과 작업하여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기여함. 오픈64 컴파일러 배포 관리. AMD 그래픽 카드의 드라이버 개발을 위해 그래픽 처리 장치의 낮은 수준의 프로그래밍 규격 공개 (X.Org 재단과 작업) 코어부트 개발 참여 AMD 코어 매스 라이브러리, AMD 퍼포먼스 라이브러리, 코드애널리스트 퍼포먼스 프로파일러. AMD 라데온 소프트웨어 크림슨 같이 보기[편집] AMD 라이브! 인텔 각주[편집] ↑ Lilly, Paul (2011년 5월 6일). “Nvidia Leads in Discrete Desktop GPU Market Share, AMD in Notebook Graphics”. 《Maximum PC》. 2012년 2월 18일에 확인함. ↑ The other founding members were Ed Turney, John Carey, Sven Simonsen, Jack Gifford and three members from Gifford's team: Frank Botte, Jim Giles, and Larry Stenger. ↑ Rodengen, p. 30. ↑ Rodengen, p. 36. ↑ 가 나 Pederson, Jay P. International Directory of Company Histories, Vol. 30. St. James Press, 2000. ↑ Rodengen, p. 35. ↑ Rodengen, pp. 37–38. ↑ AMD Corporation. Silicon Valley Historical Association. 2008. ↑ Rodengen, pp. 36, 38. ↑ 가 나 다 Lojek, Bo. History of Semiconductor Engineering.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07. p. 220. ↑ Our History. AMD.com. ↑ 가 나 Rodengen, p. 41. ↑ Electronic Design, Volume 19, Part 3. Hayden Publishing Company, 1971. p. 227. ↑ Rodengen, pp. 42, 43. ↑ Rodengen, p. 45. ↑ Walker, Rob. "Interview with W. Jerry Sanders" Archived 2014년 1월 2일 - 웨이백 머신. Silicon Genesis. Stanford University. October 18, 2002. 외부 링크[편집] (영어) AMD 공식 홈페이지 (영어) AMD CPU 차트 AMD 프로세서 사진과 설명 (영어) AMD K5, 상세한 프로세서 역사 (영어) 야후! - AMD사 정보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 (영어) 왜 AMD의 클록은 인텔의 클록과 같지 않은가 (영어) AMD가 인텔에게 건 미국 반독점법 소송 요약 (영어) AMD가 인텔에게 건 미국 반독점법 소송 전문(全文) (영어) AMD의 공식 ATi 합병 사이트 (영어) AMD Advanced Micro Devices, Inc. - Google Finance (영어) 델 - AMD CPU 채용 확인 vdehAMD의 프로세서AMD 마이크로프로세서 목록목록 마이크로아키텍처 칩셋 소켓 듀론 애슬론 XP 애슬론 64 X2 셈프론 페넘 라이젠 튜리온 옵테론 FX AMD APU (FX/Ax/Ex) 마이크로아키텍처IA-32 (32비트) K5 K6 애슬론/K7 x86-64 데스크톱 K8 K9 10h/K10 불도저 파일드라이버 스팀롤러 엑스카베이터 젠 젠+ 젠 2 x86-64 저전력 밥캣 재규어 푸마 ARM64 K12 판매 중인 제품IA-32 (32비트) 지오드 X86-64 (64비트) APU FX / A12 / A10 / A8 / A6 / A4 / E2 / E1 애슬론 X4 셈프론 2x0 FX 라이젠 Epyc 옵테론 X 시리즈 ARM64 옵테론 A 시리즈 단종된 제품초기 x86 (16비트) 인텔 80286 IA-32 (32비트) Am386 Am486 Am5x86 K5 K6 K6-2 K6-III 듀론 애슬론 XP MP X86-64 (64비트) 셈프론 애슬론 64 X2 II 페넘 II 튜리온 옵테론 기타 Am9080 Am2900 목록 Am29000 알케미 MIPS32 vdehAMD 그래픽스라데온 브랜드GPU 목록 (GPU 기능 틀) 및 APU 목록 (APU 기능 틀)고정 파이프라인 원더 마하 레이지 R100 R200 R300 R400 R500 All-in-Wonder 통합 셰이더테라스케일 HD 2000 HD 3000 HD 4000 HD 5000 HD 6000 통합 셰이더 & 메모리GCN HD 7000 HD 8000 Rx 200 Rx 300 400 500 베가 현행 기술 및 소프트웨어오디오/비디오 가속 통합 비디오 디코더 (UVD) 비디오 코딩 엔진 (VCE) 비디오 코어 넥스트 (VCN) 트루오디오 GPU 기술 아이피니티 프리싱크 파워튠 크로스파이어X 하이브리드 그래픽스 하이퍼메모리 HyperZ HSA 소프트웨어현재 AMD 라데온 소프트웨어 HD3D CodeXL GPU PerfStudio AMD APP SDK GPUOpen TressFX HLSL2GLSL 과거 카탈리스트 클로즈 투 메탈 CodeAnalyst 맨틀 기타 브랜드 및 제품워크스테이션 & 슈퍼컴퓨터 라데온 프로 라데온 인스팅트 파이어GL/파이어프로 파이어MV 파이어스트림 콘솔 플리퍼 (닌텐도 게임큐브) 제노스 (엑스박스 360) 할리우드 (Wii) 리버풀 (플레이스테이션 4) Durango (엑스박스 원) Neo (플레이스테이션 4) Scorpio (엑스박스 원) vdeh정보기술 분야 대기업컨설팅 및아웃소싱 액센츄어 아토스 부즈 앨런 해밀턴 BMC 소프트웨어 BT 글로벌 서비스 CACI 캡제미니 CGI 그룹 커니전트 딜로이트 후지쯔 HCL 테크널러지 히타치 컨설팅 IBM 글로벌 서비스 인드라 시스테머스 인포시스 인포르 KPMG 레이도스 닛폰 전기 NTT 데이터 오렌지 비즈니스 서비스 T-시스템 타타 컨설턴시 서비스 테크 마힌드라 유니시스 위프로 이미징 캐논 HP (기업) 코닥 후지필름 코니카 미놀타 교세라 렉스마크 니콘 올림푸스 파나소닉 리코 삼성전자 세이코 엡손 샤프 (기업) 소니 도시바 제록스 저장 매체 ADATA 델 테크놀로지스 델 EMC 후지쯔 히타치 데이터 시스템 휴렛 팩커드 엔터프라이즈 IBM 킹스톤 테크놀로지 레노버EMC 넷앱 오라클 플렉스터 삼성전자 시게이트 실리콘 파워 소니 도시바 트랜센드 웨스턴 디지털 (샌디스크) 인터넷 AOL 바이두 페이스북 구글 IAC/InterActiveCorp 마이크로소프트 네이버 넷이즈 넷플릭스 텐센트 트위터 우버 복스 미디어 야후! 얀덱스 클라우드 컴퓨팅 아카마이 테크놀로지스 아마존 웹 서비스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오라클 (기업) 랙스페이스 세일즈포스닷컴 전자 상거래 알리바바 그룹 아마존닷컴 이베이 플립카트 그루폰 징동닷컴 쇼피파이 라쿠텐 메인프레임 후지쯔 IBM 모바일 장치 에이서 아마존닷컴 애플 (기업) 에이수스 BBK 일렉트로닉스 (오포 일렉트로닉스, 원플러스, Vivo (브랜드)) 블랙베리 (기업) 하이신 HTC (기업) 화웨이 I-Mobile 카본 모바일 라바 모바일 (XOLO) 레노버 (모토로라 모빌리티) LG전자 메이주 마이크로맥스 인포매틱스 (YU 텔레벤처) 마이크로소프트 노키아 파나소닉 삼성전자 소니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스 TCL (기업) 트루 샤오미 ZTE 네트워크 장비 어바이어 시스코 시스템즈 에릭슨 후지쯔 휴렛 팩커드 엔터프라이즈 화웨이 주니퍼 네트웍스 모토로라 솔루션스 닛폰 전기 노키아 퀄컴 ZTE OEM 셀레스티카 콤팔 일렉트로닉스 플렉스트로닉스 폭스콘 재빌 서킷 페가트론 콴타 샌미나 코퍼레이션 TPV 테크놀로지 위스트론 PC / 서버 에이서 애플 에이수스 델 후지쯔 HP 레노버 LG전자 닛폰 전기 파나소닉 포시티보 삼성전자 도시바 서버 시스코 시스템즈 휴렛 팩커드 엔터프라이즈 인스퍼 오라클 (기업) 핀테크 유로넷 월드와이드 FIS 페이팔 피저브 잭 헨리 SWIFT 스퀘어 판매 카시오 NCR 파나소닉 삼성전자 세이코 엡손 샤프 (기업) 스타 마이크로닉스 도시바 윈커 닉스도프 반도체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 브로드컴 후지쯔 인피니온 테크놀로지스 인터그레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인텔 LG전자 마벨 테크놀로지 그룹 미디어텍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엔비디아 NXP반도체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 온 세미컨덕터 파나소닉 퀄컴 르네사스 테크놀로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소니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도시바 비아 테크놀로지스 파운더리 글로벌파운더리 TSMC 유나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SMIC 반도체 장비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KLA-텐커 램 리서치 도쿄 일렉트론 소프트웨어 어도비 시스템즈 아마데우스 IT 그룹 애플 오토데스크 BMC 소프트웨어 CA 테크놀로지스 FIS 구글 휴렛 팩커드 엔터프라이즈 IBM 인튜이트 인포르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세이지 그룹 SAP SE 시만텍 VM웨어 이동통신 아메리카 모빌 AT&T 벨 캐나다 베젝 바티 에어텔 인도국영통신 BT 그룹 센츄리링크 중국이동통신 중국전신 중국연합통신 중화전신 컴캐스트 도이체 텔레콤 허치슨 아시아 아이디어 셀룰러 KDDI KPN KT 마하나가 텔레폰 니감 MTN 그룹 MTS 일본전신전화 NTT 도코모 Oi 오랑주 (기업) PCCW 릴라이언스 쇼 싱텔 SK텔레콤 소프트뱅크 스파크 스프린트 (통신사) 스위스컴 타타 텔레서비스 텔레콤 이탈리아 텔레포니카 텔레노 텔러스 텔멕스 TPG 트루 튀르크 텔레콤 버라이즌 커뮤니케이션스 비텔 빔펠콤 비방디 보다폰 관광업 아마데우스 IT 그룹 세이버 코퍼레이션 트래블포트 비디오 게임 액티비전 블리자드 아타리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캡콤 일렉트로닉 아츠 루카스아츠 코에이 테크모 코나미 엔씨소프트 넥슨 닌텐도 PCCW 세가 게임스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스퀘어 에닉스 테이크-투 인터랙티브 텐센트 유비소프트 워너 브라더스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기준: FY 2014/15, 수익: 1-3, 6-12번째 문단 - 30억 달러 / 4번째 문단 - 20억 달러 / 5,13,16번째 문단 - 10억 달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어드밴스트_마이크로_디바이시스&oldid=24254946" 분류: AMD1969년 설립된 기업미국의 기업컴퓨터 하드웨어 기업샌타클래라 (캘리포니아주)의 기업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조사를 따로 지정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Qaraqalpaqshaಕನ್ನಡLietuviųLatviešu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1일 (화) 11: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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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역학 또는 양자 통계역학으로 구분한다. 목차 1 통계역학의 연구 대상 2 고전 통계역학 2.1 열역학과의 관계 2.2 양자역학과의 관계 3 양자 통계역학 3.1 페르미-디랙 통계 3.2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3.3 애니온 통계 4 참고 문헌 5 외부 링크 6 함께 보기 통계역학의 연구 대상[편집] 통계역학의 방법은 대상의 자유도(혹은 변수의 개수)가 무척 커서 정확한 해를 구할 수 없을 때 유용하게 쓰인다. 통계역학의 세부 분야나 파생 분야로는 비선형 동역학, 혼돈 이론, 플라즈마 물리학, 열역학, 유체역학 등이 있다. 통계역학의 문제 중 간단한 것은 항의 무더기 전개나 근사 방법을 통해 해석적으로 해를 구할 수 있으나, 최근의 복잡한 문제들은 방정식의 수치적인 해를 구하거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 결과를 얻는다. 복잡계의 문제를 푸는 방법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이 있다. 통계 물리학의 연구자들이 최근에 많이 연구하는 주제로는 네트워크 이론이 있다. 고전 통계역학[편집] 고전 통계역학은 볼츠만이 처음 정립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엔트로피에 대한 개념이 필요하다. 엔트로피는 쉽게 말해서 어떠한 계의 무질서도 또는 거시상태에 대응되는 미시상태의 가지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사위 3개를 던지는 계를 생각해보자. 3 주사위 눈의 합이 3인 경우는 각각의 주사위가 모두 1의 눈인 경우만 가능하다. 하지만, 주사위 눈의 합이 6인 경우는 총 10가지 경우가 있다. 따라서 위의 정의에 따라 주사위 눈의 합이 3인 거시상태는 합이 6인 거시상태보다 엔트로피가 낮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엔트로피가 높을수록 해당하는 거시상태가 나타날 확률은 높아진다. 볼츠만은 물리적인 계의 엔트로피를 계산하여 해당하는 계가 어떤 특정한 거시상태에 있을 확률을 유도하였다. 이에 에너지와 계의 온도를 변수로하는 볼츠만 인자를 도입하였다. 열역학과의 관계[편집] 열역학의 이론들은 경험적으로 발전된 것에 반해, 통계역학에서는 이 이론들을 계의 구성요소의 물리학적 성질로부터 유도한다. 그렇지만 열역학의 접근 방법이 물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며, 이 둘의 관계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관계와 같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양자역학과의 관계[편집] 통계역학은 19세기에 정립되었는데 이는 20세기 양자역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통계역학이 계를 확률적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계산 방법이 양자역학에 많이 사용되었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통계역학의 경로적분의 개념이 양자장론에 영향을 미쳤고 1970년대 케네스 G. 윌슨의 재규격화 이론이 입자물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자 통계역학[편집] 양자 통계역학에서는 고전적인 통계역학의 확률 분포인 볼츠만 분포에 양자역학적인 성질을 고려하여 확률 분포를 계산한다. 우선 페르미온과 보손이 보여주는 양자역학적 동일 입자(identical particle)의 성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개의 동일 입자들가 있을 때 이를 나타내는 확률파동함수를 ψ ( x 1 , x 2 , . . . x n ) {\displaystyle \psi (x_{1},x_{2},...x_{n})} 이라고 할 때에 입자 1과 입자 2을 서로 맞바꾸어도 제3의 관찰자로서는 아무런 차이를 감지 할 수 없다. 즉 ψ ( x 1 , x 2 , . . . x n ) = ψ ( x 2 , x 1 , . . . x n ) {\displaystyle \psi (x_{1},x_{2},...x_{n})=\psi (x_{2},x_{1},...x_{n})}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맞바꾸는 교환 작용자 χ {\displaystyle \chi } 에 대한 고윳값 r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χ 2 {\displaystyle \chi ^{2}} 는 두 번 맞바꾼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항등연산자이다. 그러므로 χ 2 {\displaystyle \chi ^{2}} 의 고윳값 r 2 {\displaystyle r^{2}} 는 1이 되고, r {\displaystyle r} 은 실수라 가정할 때에 당연히 +1 또는 -1이 될 것이다. 페르미-디랙 통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페르미-디랙 통계입니다. 페르미온은 맞바꾸는 교환 작용자 χ {\displaystyle \chi } 에 대한 고윳값 r = − 1 {\displaystyle r=-1} 인 경우이다. 따라서 χ ψ ( x 1 , x 2 , . . . x n ) = − ψ ( x 1 , x 2 , . . . x n ) {\displaystyle \chi \psi (x_{1},x_{2},...x_{n})=-\psi (x_{1},x_{2},...x_{n})} 이고, 위에서 언급한대로 맞바꾸기를 한 이후의 확률파동함수는 그 이전과 비교해서 구분할 수 없다. 즉, ψ ( x 1 , x 2 , . . . x n ) = − ψ ( x 1 , x 2 , . . . x n ) {\displaystyle \psi (x_{1},x_{2},...x_{n})=-\psi (x_{1},x_{2},...x_{n})} 이 된다. 따라서 앞의 식의 양변을 한쪽으로 옮기면 χ ψ ( x 1 , x 2 , . . . x n ) = 0 {\displaystyle \chi \psi (x_{1},x_{2},...x_{n})=0} 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한 개 보다 많은 복수의 페르미온이 동일한 상태에 존재 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특정한 에너지 ϵ {\displaystyle \epsilon } 를 갖는 페르미온에 대한 확률분포를 볼츠만 분포를 확장하여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상태1 ϵ {\displaystyle \epsilon } 의 에너지를 갖는 페르미온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의 볼츠만 인자는 1이다. 상태2 ϵ {\displaystyle \epsilon } 의 에너지를 갖는 페르미온이 하나 존재하는 경우의 볼츠만 인자는 e − ϵ k T {\displaystyle e^{-{\frac {\epsilon }{kT}}}} 이다. 이제 ϵ {\displaystyle \epsilon } 의 에너지를 갖는 페르미온이 '하나' 존재할 확률을 계산해 보면 e − ϵ k T 1 + e − ϵ k T {\displaystyle {\frac {e^{-{\frac {\epsilon }{kT}}}}{1+e^{-{\frac {\epsilon }{kT}}}}}} 이 된다. 보스-아인슈타인 통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보스-아인슈타인 통계입니다. 보손은 맞바꾸는 교환 작용자 χ {\displaystyle \chi } 에 대한 고윳값 r이 +1인 경우이다.이깨 기본 양자역학적인 대칭의 필요에서 어떤 두 알갱이를 바꿀 때, 총 파동함수 ψ {\displaystyle \psi } 가 대칭적이다(즉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기호로 ψ ( x 1 , x 2 , . . . x n ) = ψ ( x 1 , x 2 , . . . x n ) {\displaystyle \psi (x_{1},x_{2},...x_{n})=\psi (x_{1},x_{2},...x_{n})} 이다. 두 알갱이를 서로 바꾼다고 하여 전체 기체의 새로운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체의 구별되는 상태를 셀 때, 알갱이들이 정말로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대칭에 필요한 알갱이들은 보즈-아인쉬타인 통계를 따른다고 하며 그들을 보손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알갱이들은 구별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수 { n 1 , n 2 , n 3 , {\displaystyle n_{1},n_{2},n_{3},} ...}의 단순한 명시는 기체상태를 충분히 설명한다. 모든 가능한 값은 각 r에 대해서 n r = 0 , 1 , 2 , 3 , . . . {\displaystyle n_{r}=0,1,2,3,...} 에 대해 합하는 것만 필요하다. 즉 알갱이들이 구별이 안 되기 때문에 어떤 알갱이 수도 어떤 한 상태에 있을 수 있지만, 두 알갱이가 있을 때 들어가는 상태가 교환이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애니온 통계[편집] 애니온은 맞바꾸는 교환 작용자 χ {\displaystyle \chi } 에 대한 고윳값 r이 복소수로써 r 2 = 1 {\displaystyle r^{2}=1} 을 만족하는 경우이다. 참고 문헌[편집] 임경희 (2008년 3월 3일). 《통계 열역학》. 한티미디어. ISBN 978-899118249-3. 최상돈; 이연주, 강남룡 (2010년 2월 10일). 《응용과학 전공자를 위한 통계열역학》 2판. 청문각. ISBN 978-896364037-2.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Huang, Kerson (1987). 《Statistical mechanics》 (영어) 2판. New York: Wiley. ISBN 0-471-81518-7. 2014년 4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6일에 확인함.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Pathria, Raj K.; Paul D. Beale (2011년 2월). 《Statistical mechanics》 (영어) 3판. Academic Press. ISBN 978-0-12-382188-1. doi:10.1016/B978-0-12-382188-1.00020-7.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외부 링크[편집] 임경순 (2001년 2월 15일). 〈볼츠만과 통계역학의 출현〉. 《현대물리학의 선구자》. 다산. ISBN 978-897110170-4. 이구철. “주사위만 던져도 열물리의 기본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함께 보기[편집] 앙상블 열역학 퓨가시티 양자적 상태수 상전이 임계현상 vdeh물리학의 주요 분야분류 응용물리학 실험물리학 이론물리학 에너지운동 열역학 역학 고전역학 라그랑주 역학 해밀턴 역학 연속체 역학 천체역학 통계역학 유체역학 양자역학 파동장 중력 전자기학 양자장론 상대성이론 특수 상대성이론 일반 상대성이론 전문 분야 가속물리학 음향학 천체물리학 핵 천체물리학 항성물리학 헬리오 물리학 태양물리학 우주물리학 천체입자물리학 원자 분자 광 물리학 계산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 고체물리학 디지털 물리학 기초공학 재료물리학 수리물리학 핵물리학 광학 기하광학 물리광학 비선형 광학 양자광학 입자물리학 현상학 플라스마 고분자물리학 통계물리학 물리학과 다른 과학 생물리학 심장물리학 생물역학 의학물리학 신경물리학 농업물리학 토양물리학 대기물리학 화학물리학 경제물리학 지구물리학 정신물리학 전거 통제 LCCN: sh85127571 GND: 4056999-8 SUDOC: 027570711 BNF: cb11958255n (데이터) NDL: 00573177 BNE: XX52492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통계역학&oldid=22288697" 분류: 물리학통계역학물리학의 기본 개념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CS1 관리 - 추가 문구CS1 - 영어 인용 (en)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অসমীয়াAsturianu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Català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atina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8일 (토) 23:0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중력 상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력 상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만유인력 상수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슷한 이름의 가우스 인력상수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중력 상수 G {\displaystyle G} 종류: 물리 상수 값: 6.673 84(80) × 10−11 J·m/kg2 오차: ±0.000 0080 × 10−11 J·m/kg2 출처: CODATA 2010[1] 중력 상수(重力常數, gravitational constant, 기호 G), 만유인력 상수 또는 뉴턴 상수는 중력의 세기를 나타내는 기초 물리 상수다. 중력을 다루는 모든 이론,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등장한다. 과학 기술 데이터 위원회 2010년 자료[1] 에 따르면, 국제단위계에서의 값은 다음과 같다. G {\displaystyle G} = (6.673 84 ± 0.000 0080) ×10^−11 N m2 kg−2 = (6.673 84 ± 0.000 0080) ×10^−11 m3 kg−1 s−2 그 밖에 국제 천문 연맹에서 제공하는 자료도 권위가 있다. 목차 1 정의 2 중력 상수의 측정 3 "GM" 곱 4 플랑크 단위계 5 각주 정의[편집]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의 중력적 인력은 그 두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F = G m 1 m 2 r 2 {\displaystyle F=G{\frac {m_{1}m_{2}}{r^{2}}}} 이 식에서 비례 상수 G {\displaystyle G} 를 중력 상수라고 일컫는다. 중력은 자연의 다른 세 상호작용보다 상대적으로 약하다. 예를 들어 두 대의 3000 kg의 자동차가 각각의 질량 중심에 대해 3 m 떨어져 있을 때 두 자동차에 작용하는 중력은 약 67 µN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모래 알갱이의 무게 정도의 힘에 해당한다. 중력 상수의 측정[편집] 중력 상수는 헨리 캐번디시가 처음으로 측정하였다.[2] 실험을 위해 막대의 양 끝에 납으로 된 공을 매달고 이를 줄에 매달아 수평 방향으로만 회전하게 한다. 막대의 관성 모멘트는 막대가 복원력에 의해 진동하는 주기를 측정하여 알아낼 수 있다. 막대의 한쪽 끝에 다른 공을 가까이 대면 중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게 되고 막대가 회전한 각도를 측정하여 이 힘을 알아낼 수 있다. (캐번디시의 실험의 본 목적은 중력 상수의 측정이 아니라, 지구의 질량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지구 표면의 중력장은 쉽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지구의 크기와 중력 상수를 알면 지구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다.) 중력 상수의 측정은 캐번디시의 실험 이후로 점차 정확도가 향상되어 왔다. 중력이 다른 기본 상호 작용에 대해 매우 약하고, 다른 물체의 영향을 없애기 어렵기 때문에 중력 상수 G {\displaystyle {G}\ } 를 측정하는 것은 여러 모로 어렵다. 게다가 중력과 다른 상호 작용 사이에 알려진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이를 측정할 수 없다. 최근의 리뷰(Gilles, 1997)에 따르면, 중력 상수의 측정값은 크게 변해 왔고, 최근의 몇몇 측정값은 실제로는 서로 배타적이라고 한다. "GM" 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표준 중력 변수입니다. G M {\displaystyle GM} 곱 또는 표준 중력 변수는 여러가지 중력과 관계된 수식을 간단히 표현하는 데 자주 활용된다. 특히 태양계에 대해 중력 법칙을 이용할 때 매우 높은 정확도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빈번하게 사용된다. 중력 상수의 정확도가 높지 않은 데 반해 행성의 위치나 중력 가속도와 같은 양은 매우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따라서 중력 상수와 질량의 곱은 매우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따라서 지구나 태양의 질량의 측정값의 정확도는 중력 상수의 정확도에 의존한다.). 태양계에서의 중력을 계산할 때 거의 대부분의 계산에서 GM 값이 함께 붙어서 나오며, 대부분의 계산에서 이 둘을 따로 대입할 필요가 없어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표준 중력 변수의 값은 μ {\displaystyle \mu } 로도 표시하며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은 값을 갖는다. μ = G M = 398 , 600.4418 ± 0.0008 k m 3 ⋅ s − 2 {\displaystyle \mu =GM=398,600.4418\pm 0.0008\ \mathrm {km^{3}\cdot s^{-2}} } 천체 역학에서는 주로 국제단위계의 킬로그램보다 태양 질량을 기준으로 한 단위계를 사용하는 것이 계산에 편하다. 이 단위계로 쓴 중력 상수를 가우스 중력 상수(Gaussian gravitational constant) k 2 {\displaystyle k^{2}} 라 부르며,그 값은 다음과 같다. k = 0.01720209895 A 3 2 D − 1 S − 1 2 {\displaystyle {k=0.01720209895\ A^{\frac {3}{2}}\ D^{-1}\ S^{-{\frac {1}{2}}}}} 여기서 A {\displaystyle A} 는 천문 단위, D {\displaystyle D} 는 평균 태양일, 그리고 S {\displaystyle S} 는 태양의 질량이다. 플랑크 단위계[편집]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플랑크 단위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력 상수를 플랑크 상수와 광속을 이용하여, 임의적인 기본 단위가 전혀 없는 단위계를 만들 수 있다. 이를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따 플랑크 단위계라고 부른다. 플랑크 단위계에서 중력 상수는 플랑크 상수와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와 함께 모두 1로 맞추어진다. 각주[편집] ↑ 가 나 Mohr, Peter J.; Barry N. Taylor, David B. Newell (2010년 11월 13일). “CODATA Recommended Values of the Fundamental Physical Constants: 2010”. 《Reviews of Modern Physics》 84 (4): 1527–1605. Bibcode:2012RvMP...84.1527M. arXiv:1203.5425. doi:10.1103/RevModPhys.84.1527.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 Cavendish, H. (1798). “Experiments to determine the Density of the Earth”.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88: 469–526. doi:10.1098/rstl.1798.002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중력_상수&oldid=24548148" 분류: 중력물리 상수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9일 (화) 12: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은 1978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에서 감자 농민들이 농협과 영양군에서 알선받아 구매한 감자(시마바라 품종)가 불량이어서 농사를 망친 사건에서 시작된 일련의 사건이다. 가톨릭 농민회 회장 오원춘은 자신이 정부기관에의해 울릉도로 납치 되었다고 양심선언하였다. 그는 재판중 구속되어있던 교도소에서 한 양심선언을 통해 울릉도에는 여자친구와 놀러 간 것이라며 기존 양심선언 내용을 뒤집었다. 오원춘은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이후, 자신은 행방불명된 기간 동안 고문을 받고 울릉도로 납치되었고 긴급조치 재판중에도 고문을 받았다며 원래의 양심선언이 맞다고 밝혔고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되었다.[1][2] 목차 1 진행 2 이후 3 같이 보기 4 각주 5 외부 링크 진행[편집] 피해 농민들은 안동교구 가톨릭 농민회 임원 오원춘(吳元春)을 중심으로 하여 보상을 요구하였다. 농민들은 나중에 보상을 받게 되었지만 오원춘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오원춘은 정부에 의해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성명을 냈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성명을 냈다. 경찰은 안동교구와 오원춘이 허위사실을 유포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오원춘은 긴급조치 위반죄로 구속되었다. 또한 천주교 안동교구청 사무국장 정호경 신부 등 세 명이 허위 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3] 오원춘은 대구교도소에서 자신의 납치극은 조작한 것이라고 양심선언했다. 그의 양심선언 발표에는 오씨가 15일간 기거했던 울릉도의 식당 주인과, 함께 있었다는 모다방 종업원 이 모양 등 증인들과 국내외 언론과 학계, 종교계, 여성계 등 인사 5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다. 그는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성당 신부가 쓰라고 해서 썼다고 주장했으며 진실을 밝혀 후련하다고 밝혔다.[4] 상처에 대해서는 고문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울릉도로 가는 뱃길에 풍랑이 심해 부딪히면서 난 것이라고 해명했다. 가톨릭 안동교구측은 자체 조사 결과를 통해 오원춘에 대한 납치와 고문이 실제 있었으며 정부가 조작했다는 보고서를 냈다.[5]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0월 15일에 오원춘이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다음날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나고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긴급조치가 해제되어 출소하였다. 이후[편집] 오원춘은 박정희 사후 출소하였고 이후에도 농민 운동을 했다. 오원춘은 이후 2002년에는 경북도의원에 출마하기도했다. [6] 오원춘은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7] 같이 보기[편집] 오원춘 르네 뒤퐁 서경원 각주[편집] ↑ [1] ↑ [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긴급조치위반 허위사실 유포 신부 등 셋 구속” (경향신문). 1979년 8월10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도움말) ↑ “납치극은 조작” (경향신문). 1979년 8월23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도움말) ↑ [3] ↑ [4][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5][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디지털안동문화대전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안동교구_가톨릭농민회_사건&oldid=22886885" 분류: 1978년 대한민국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인용 오류 - 날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0월 31일 (수) 12: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홍난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난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홍난파 기본 정보본명 홍영후출생 1897년 4월 10일(1897-04-10) 대한제국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사망 1941년 8월 30일 (43세)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직업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인 음악평론가장르 서양 고전음악 배우자 김상운(사별), 이대형(재혼)가족 홍준(아버지) 전주 이씨 부인(어머니) 밀양 박씨 부인(계모) 홍석후(형) 홍옥임(조카딸) 홍성유(조카) 홍정임(장녀) 홍종임(차녀) 홍지유(양자)종교 개신교(장로교) 홍난파(洪蘭坡, 일본식 이름: 森川潤 모리카와 준[*], 1897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다. 본관은 남양 홍씨 토홍계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10여곡의 가곡과 〈고향의 봄〉, 〈나뭇잎〉, 〈개구리〉, 〈무지개〉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생애 초기 1.1.2 서양 음악에 입문하다 1.2 청년기 1.2.1 본격적 음악 활동의 시작 1.2.2 봉선화의 작곡과 소개 1.3 음악 활동 1.3.1 다시 유학길에 오르다 1.3.2 귀국 후 활동 1.3.3 친일 활동 1.4 죽음 2 작품 3 사후 3.1 기념관에 대한 논란 4 저서 5 가족 6 일화 7 미디어 7.1 기타 8 함께 보기 9 참고 자료 10 외부 링크 11 각주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생애 초기[편집] 난파 홍영후는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3]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많았던 관계로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다. 형 금파 홍석후는 구한 말의 양의사이기도 했다. 홍영후의 막내동생 민후는 해방 후 30여년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약사로서 평생 선업을 쌓아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약사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약값을 받지 않았고, 공짜로 약을 지어주며 '웬만하면 약 먹지 마셔요'로 처방하여 유명하였다. 또한, 홍난파는1933년 형 금파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했다. 트리오중 일찍 요절한 조카 홍성유(1908 ~ 1936)는 형 홍석후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서양 음악에 입문하다[편집]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그 또한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1911년에 세례를 받았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음악회 때에도 바이올린 연주를 통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4]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중학과 재학 중 그는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숫자보를 사용하여 '도레미법'을 터득하였고,[2] 중학과 재학 중에 고학과 아르바이트로 7원 50전이라는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연습을 시작했다. 1912년에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5], 당시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하고 그 해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졸업 및 기악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잠시 있었다.[5] 청년기[편집] 본격적 음악 활동의 시작[편집] 홍파동 월암공원에 있는 홍난파가 살던 집 1915년 조선 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해에 김상운과 18세의 나이로 결혼한다. 홍난파의 형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홍난파 또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1916년)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공연 무대로서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입학 1년 만에 중퇴하고 1917년 3년간 있던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듬해 1월 5일 장녀 홍숙임을 얻었으며 1918년 일본에 유학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삼광은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리고 그 해 홍난파는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2] 1919년 3월 그는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만다. 다시 귀국 후 그는 첫 작품의 작곡에 몰입한다. 1920년에 <애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봉선화>의 원곡이다. 그 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최초이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악회를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였다. 1925년에는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을 작곡하였으며, 연악회 주최로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6] 한편으로 생업에도 종사해야 했던 그는 1920년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6년 5월 13일 부인 김상운과 사별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다.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재학하면서 그는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한 뒤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했다. 봉선화의 작곡과 소개[편집] 1926년 홍영후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으로,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7]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7] 음악 활동[편집] 다시 유학길에 오르다[편집] 1931년 그는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을 하였다.[4]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다. 사실 이 때의 유학길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영후가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무렵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고, 그예 미국으로 모녀가 함께 돌아가자 그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6] 이 기간 동안 홍영후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당시 흥사단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였고, 미국에 있는 조선인의 가입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업을 받으며 내야 하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을 하며 생활해야 했고,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당하며 늑골을 다치고 말았다. 이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고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다. 이때 흥사단은 그가 셔우드 음악학교를 수료할 때 그를 축하해 주었고, 홍영후 또한 교통 사고를 당한 이후 "격려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 드리며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손해금을 받아 볼까 교섭중이다"는 편지로 화답하였다. 마침내 홍영후는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하게 된다.[8]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다. 1931년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귀국 후 활동[편집] 국내에 돌아와 그는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를 맡았고,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그 해 최초의 실내 악단이자 바이올린 3중주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난파 트리오는 홍영후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어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제과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3] 그러나 조카 홍성유가 1936년 8월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난파트리오는 해체되었다. 그는 1934년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하는 등 다시 국내에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그 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하였고, 많은 영화 음악이나 신민요, 가요 등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 적었다. 그 밖에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36년 그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을 가르쳤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하였다. 이 해 8월 18일 조카 홍성유가 29세로 요절하여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지만, 그는 다시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였다.[3] 친일 활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수양동우회 사건입니다. 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72일 동안에 걸친 옥고를 치른 후에 석방되었으나,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歌)>를 작곡하였다. 그 후 그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9년 당시 변절한 문학가 이광수의 시에 곡을 넣어 <희망의 아침>을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기도 했다. 또한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3] 일제 말기 전시 체제(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후로 일제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고,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들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전향서를 써야만 석방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그의 딸인 홍정임 여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 나던 날, 저의 아빠는 종로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 계신 저는 姙(임)자 돌림에다 정축년(丁丑年)에 태어났다고 丁(정) 자를 붙여서 丁姙(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 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이 피투성이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애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몸이 약하신데 제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되느냐고." 일본 경찰은 조롱된 어조로 "당신도 콩밥이 먹고 싶어?" 하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살이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지는 '늑막염' 이라는 무서운 병을 재발 시키면서 72일 만에 석방이 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압력의 쇠사슬에 묶이신 나의 아버지는 최후의 3년을 (석방 이후) 병마에 시달리면서 강제에 못 이겨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으시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들 이었습니다...(이하 생략)...[8] 1938년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음악산문집이자 음악 평론집이기도 했다. 죽음[편집] 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 해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끝내 경성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9]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작품[편집] 23세 때 작곡한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이 있다. 사후[편집]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5] 홍난파 노래비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6] 또한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 있었던 친일 행적으로 인해 홍난파는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지만 2009년 11월 26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유보 결정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홍난파의 행위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처분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말했다.[10] 2010년 11월 4일 홍난파의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선고(2010년 11월 5일)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소송 취하 의사를 밝혔고 행정안전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의 결정이 무효가 되었고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11] 기념관에 대한 논란[편집] 홍난파가 1898년 당시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나 기념사업 권리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화성시는 이번에는 단국대학교와 유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06년부터 181억 5천만원을 들여 활초동 4만5천270m2 부지에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기념관, 야외음악당, 공원 등을 갖춘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연고권을 들어 단국대학교 측에 유품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6] 하지만 단국대 측은 "홍난파의 유품을 화성시에 넘겨줄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단국대 관계자는 "2009년에 화성시가 한 차례 공문을 보내온 바 있지만 거절했다"며 "유품을 기증받아 지금까지 전시·보존을 해 왔고, 죽전캠퍼스에 박물관 증축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논란이 가중되자 단국대학교에서는 "기증받을 때 계셨던 학교 관계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거나 학교에 남아있지 않기에 기증자 몇명이 언제 어떤 이유로 유품을 학교에 전달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라고 밝히면서 유품들은 모두 학교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못을 박고 어이없는 요구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2] 또한 1984년 단국대학교 한남동 캠퍼스내 난파기념 음악관에서 유품을 전시할 때 홍난파 선생의 따님도 참석했었다고 전하면서 유품은 2007년 8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서 용인시로 이전되어 옮겨진 음악관이 확장되는대로 전시하기로 하였는데 단국대학교는 2013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신축한 캠퍼스에 전용 난파음악관을 마련하고 별실의 홍난파의 유품을 전시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개관했다. 유족으로 난파 선생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외손자 홍익표 전 연성대학 부총장 등이 참석하였다.[12][13][14]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 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상설 전시하게 된다.[14] 저서[편집] 《조선동요 100곡집》 음악산문집, 《음악만필》 가족[편집] 홍난파는 조선정악전습소를 졸업하던 해 김상운과 결혼하였고 김상운과 사별 후 경성보육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인 이대형과 재혼하였다. 두 번의 결혼에서 각각 딸을 하나씩 얻었다. 홍난파의 자손과 조카는 대부분 음악이나 의학에 종사하였다. 아버지 : 홍준 (洪埻, 1858년 ~ 별세) 어머니 : 전주이씨 (1858년 ~ 1908년) - 장남 석후(錫厚), 장녀 금후(錦厚), 차남 영후(永厚), 차녀 백후(帛厚) 출생. 계모 : 밀양박씨 (1886년 ~ 별세) - 삼녀 덕진, 삼남 계후(季厚), 사녀 옥진, 사남 민후(敏厚) 출생. 전처 : 김상운(金祥雲, 1898년 ~ 1926년) - 1915년 결혼 장녀 : 홍숙임(洪淑姙, 1918년 ~ 1984년) - 1941년 홍문길과 결혼 맏사위 : 홍문길(洪文吉, 1914년 ~ 1984년) 외손녀 : 홍옥표(洪玉杓) 외손녀 : 홍난표(洪蘭杓) -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피아노 전공 외손녀 : 홍선표(洪仙杓) 외손자 : 홍익표(洪益杓) 후처 : 이대형(李大亨, 1913년 ~ 2004년) 차녀 : 홍정임(洪丁姙, 1937년 ~ 생존) - 코리아 해럴드 편집자로 활동. 현재 미국 거주 형 : 홍석후(洪錫厚, 1883년 ~ 1940) - 제중원 1기 졸업생으로 조선인 최초 개업의, 이비인후과의사, 안과의사 형수 : 김은배(1881년 ~ 1942년) - 장남 재유(載裕), 차남 은유(恩裕), 삼남 성유(盛裕), 장녀 옥임(玉姙), 사남 지유(志裕) 출생. 형수 : 김씨(1898년 ~ 별세) - 오남 건유(建裕) 출생. 조카 : 홍재유(洪載裕, 1903년 ~ 별세)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 조카 : 홍은유(洪恩裕, 1906년 ~ 별세)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안양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하다 미국 이민 조카 : 홍성유(洪盛裕, 1908년 ~ 1936년) - 동경 고등음악학원(현 구니타치 음악대학) 졸업 후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교수로 활동. 피아니스트 김원복과 결혼 조카딸 : 홍옥임(洪玉姙, 1912년 ~ 1931년) - 이화여전 음악과(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재학 중 자살 조카 : 홍지유(洪志裕, 1913년 ~ 별세) - 동경 고등음악학원(현 구니타치 음악대학), 동경제국음악학교 졸업 후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숙부 영후(永厚) 양자로 출계 조카 : 홍건유(洪建裕, 1931년 ~ 생존) - 전 포스코 부회장 누나 : 홍금후(洪錦厚) 여동생 : 홍백후(洪帛厚) 여동생 : 홍옥진 남동생 : 홍계후(洪季厚, 1910년 ~ 1984년)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부산에서 안과의사,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 여동생 : 홍덕진 남동생 : 홍민후(洪敏厚, 1914년 ~ 별세) - 경성약전(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후 합천에서 백중약국 경영 일화[편집] 일화 하나, 계몽운동가 겸 교육자 윤치호는 그를 후원하던 후원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영후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윤치호를 알게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1921년 2월 6일(일요일)에 쓴 윤치호의 일기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이하 생략)[15]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윤치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15] 그러나 홍영후는 이때 느꼈던 구두쇠의 죄악과 부자에게 제한적으로 받았던 감정을 잊지못해 훗날 유언까지 남겨 유족은 생전의 약속대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홍난파의 유품 대부분은 단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12] 일화 둘, 홍난파가 경성중앙라디오방송국 양악부(洋樂部)의 총책임자로서 경성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그는 <조선동요100곡집>이라는 악곡집을 만들면서 음악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 사건의 관련자로서 수감되고, 1941년에서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교향악단의 초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초연 전 긴 옥살이와 병약한 심신에 건강이 나빠져 몸져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 "얼른 연미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이 무리임을 알자, "자신은 연미복을 입혀 화장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미디어[편집] 애수의 조선 1921년에 작곡되었고 홍난파가 1931년에 재녹음했다. 듣기에 문제가 있으면 미디어 도움말을 참조하세요. 기타[편집] 아들이 없던 홍영후는 큰형 홍석후의 넷째 아들 홍지유(洪志裕)를 양자로 입양했다.[출처 필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나라 잃은 서러움과 아품을 작곡했던 1941년 42세의 나이로 요절한 난파 홍영후는 애주가이기도 했다. 1930년대 국내 악단을 이끈 대한민국 클래식 1세대의 인물이기도 한 홍난파는 저서 '음악만필'에 '기막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코지마라는 여자는 대양금가(大洋琴家, 유명 피아니스트의 옛표기) 리스트의 딸로서, 최초에는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지휘자겸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의 제자임)의 아내가 되어서 어린애를 낳았습니다. 후일 작곡가 바그너(초기 리스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짐)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으로 크게 성공하자, 그 여자는 그만 자기 남편을 버리고 바그너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뷜로가 브람스의 교향곡을 지휘하여 굉장한 성공을 거두게 되자, 그는 자기의 딸(코지마의 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네 어머니한테 가서 이렇게 말해라. 얼른 브람스에게로 개가를 하라고..." 홍난파는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기막힌 이야기'였을듯 합니다"라고 짧은 평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대에서도 유모어를 잃지 않는 홍난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16] 함께 보기[편집] 이흥렬 현제명 안익태 윤치호 윤석중 참고 자료[편집]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홍난파 :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노동은)〉.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홍난파 한국음악협회 경기도지회 (난파음악제) 홍난파 - 역사광복운동본부 vdeh1992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전거 통제 WorldCat VIAF: 72802763 LCCN: n84181738 ISNI: 0000 0001 1670 8976 BNF: cb14018011h (데이터) 뮤직브레인즈: 2a4704a3-e3cf-47b5-ab40-a668431c5d17 NLA: 36630862 각주[편집] ↑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79~80쪽쪽. ISBN 978-89-85407-35-9. ↑ 가 나 다 홍난파 기념관 자료 발췌 ↑ 가 나 다 라 평화의 집/명곡해설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교회음악의 선구자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다 홍난파 - Daum 백과사전 ↑ 가 나 다 라 이창식 (2003년 8월 15일). 〈수원이 낳은 양악의 거성 홍난파〉. 《수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원문화원. ↑ 가 나 홍난파의 <봉선화>[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재미있는 홍영후 이야기7[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화성신문》 2007년 2월 2일 작성, 2009년 11월 12일 19:45 확인 ↑ 재미있는 홍난파 이야기9 - 홍난파의 죽음 Archived 2014년 2월 25일 - 웨이백 머신 《화성신문》 2007년 3월 3일, 2009년 11월 12일 20:31 확인 ↑ 법원 "홍난파 친일명단 포함 유보" 결정 《연합뉴스》 2009년 11월 26일 ↑ 홍난파 친일명단 오를듯…후손 행정소송 취하 《연합뉴스》 2010년 11월 9일 ↑ 가 나 다 김충령 기자 (2011년 10월 8일). “화성市와 단국대, 홍난파 유품 놓고 신경전 벌인다는데…”. 조선일보. 2012년 2월 17일에 확인함. ↑ 박동신, 채진근 PD (2013년 3월 15일). “단국대 죽전캠퍼스, ‘홍난파’ 유품 한 자리에..”. 파이낸셜뉴스.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김창욱 (2010년 10월 30일). 《홍난파 음악연구》. 민속원. ISBN 9788928500406. ↑ 가 나 조성관 편집위원 (2013년 1월 7일). “그는 왜 친일의 길을 걸었나(윤치호 일기로 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내면)”. 주간조선.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 김문관 기자 (2012년 1월 29일). “홍난파의 ′유모어′”. 아시아투데이. 2012년 2월 17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홍난파&oldid=24219324" 분류: 1898년 태어남1941년 죽음일제 강점기의 작곡가일제 강점기의 피아노 연주자일제 강점기의 바이올린 연주자20세기 클래식 작곡가일제 강점기의 지휘자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동요 작곡가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친일인명사전 수록자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화성시 출신남양 홍씨 (토홍)일제 강점기의 음악 평론가한국의 장로교도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오디오가 포함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3월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עבריתBahasa Indonesia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4일 (화) 15: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홍난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난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홍난파 기본 정보본명 홍영후출생 1897년 4월 10일(1897-04-10) 대한제국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사망 1941년 8월 30일 (43세)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직업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인 음악평론가장르 서양 고전음악 배우자 김상운(사별), 이대형(재혼)가족 홍준(아버지) 전주 이씨 부인(어머니) 밀양 박씨 부인(계모) 홍석후(형) 홍옥임(조카딸) 홍성유(조카) 홍정임(장녀) 홍종임(차녀) 홍지유(양자)종교 개신교(장로교) 홍난파(洪蘭坡, 일본식 이름: 森川潤 모리카와 준[*], 1897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다. 본관은 남양 홍씨 토홍계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10여곡의 가곡과 〈고향의 봄〉, 〈나뭇잎〉, 〈개구리〉, 〈무지개〉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생애 초기 1.1.2 서양 음악에 입문하다 1.2 청년기 1.2.1 본격적 음악 활동의 시작 1.2.2 봉선화의 작곡과 소개 1.3 음악 활동 1.3.1 다시 유학길에 오르다 1.3.2 귀국 후 활동 1.3.3 친일 활동 1.4 죽음 2 작품 3 사후 3.1 기념관에 대한 논란 4 저서 5 가족 6 일화 7 미디어 7.1 기타 8 함께 보기 9 참고 자료 10 외부 링크 11 각주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생애 초기[편집] 난파 홍영후는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3]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많았던 관계로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다. 형 금파 홍석후는 구한 말의 양의사이기도 했다. 홍영후의 막내동생 민후는 해방 후 30여년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약사로서 평생 선업을 쌓아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약사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약값을 받지 않았고, 공짜로 약을 지어주며 '웬만하면 약 먹지 마셔요'로 처방하여 유명하였다. 또한, 홍난파는1933년 형 금파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했다. 트리오중 일찍 요절한 조카 홍성유(1908 ~ 1936)는 형 홍석후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서양 음악에 입문하다[편집]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그 또한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1911년에 세례를 받았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음악회 때에도 바이올린 연주를 통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4]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중학과 재학 중 그는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숫자보를 사용하여 '도레미법'을 터득하였고,[2] 중학과 재학 중에 고학과 아르바이트로 7원 50전이라는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연습을 시작했다. 1912년에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5], 당시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하고 그 해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졸업 및 기악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잠시 있었다.[5] 청년기[편집] 본격적 음악 활동의 시작[편집] 홍파동 월암공원에 있는 홍난파가 살던 집 1915년 조선 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해에 김상운과 18세의 나이로 결혼한다. 홍난파의 형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홍난파 또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1916년)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공연 무대로서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입학 1년 만에 중퇴하고 1917년 3년간 있던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듬해 1월 5일 장녀 홍숙임을 얻었으며 1918년 일본에 유학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삼광은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리고 그 해 홍난파는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2] 1919년 3월 그는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만다. 다시 귀국 후 그는 첫 작품의 작곡에 몰입한다. 1920년에 <애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봉선화>의 원곡이다. 그 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최초이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악회를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였다. 1925년에는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을 작곡하였으며, 연악회 주최로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6] 한편으로 생업에도 종사해야 했던 그는 1920년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6년 5월 13일 부인 김상운과 사별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다.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재학하면서 그는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한 뒤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했다. 봉선화의 작곡과 소개[편집] 1926년 홍영후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으로,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7]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7] 음악 활동[편집] 다시 유학길에 오르다[편집] 1931년 그는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을 하였다.[4]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다. 사실 이 때의 유학길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영후가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무렵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고, 그예 미국으로 모녀가 함께 돌아가자 그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6] 이 기간 동안 홍영후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당시 흥사단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였고, 미국에 있는 조선인의 가입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업을 받으며 내야 하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을 하며 생활해야 했고,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당하며 늑골을 다치고 말았다. 이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고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다. 이때 흥사단은 그가 셔우드 음악학교를 수료할 때 그를 축하해 주었고, 홍영후 또한 교통 사고를 당한 이후 "격려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 드리며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손해금을 받아 볼까 교섭중이다"는 편지로 화답하였다. 마침내 홍영후는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하게 된다.[8]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다. 1931년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귀국 후 활동[편집] 국내에 돌아와 그는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를 맡았고,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그 해 최초의 실내 악단이자 바이올린 3중주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난파 트리오는 홍영후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어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제과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3] 그러나 조카 홍성유가 1936년 8월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난파트리오는 해체되었다. 그는 1934년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하는 등 다시 국내에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그 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하였고, 많은 영화 음악이나 신민요, 가요 등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 적었다. 그 밖에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36년 그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을 가르쳤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하였다. 이 해 8월 18일 조카 홍성유가 29세로 요절하여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지만, 그는 다시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였다.[3] 친일 활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수양동우회 사건입니다. 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72일 동안에 걸친 옥고를 치른 후에 석방되었으나,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歌)>를 작곡하였다. 그 후 그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9년 당시 변절한 문학가 이광수의 시에 곡을 넣어 <희망의 아침>을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기도 했다. 또한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3] 일제 말기 전시 체제(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후로 일제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고,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들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전향서를 써야만 석방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그의 딸인 홍정임 여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 나던 날, 저의 아빠는 종로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 계신 저는 姙(임)자 돌림에다 정축년(丁丑年)에 태어났다고 丁(정) 자를 붙여서 丁姙(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 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이 피투성이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애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몸이 약하신데 제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되느냐고." 일본 경찰은 조롱된 어조로 "당신도 콩밥이 먹고 싶어?" 하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살이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지는 '늑막염' 이라는 무서운 병을 재발 시키면서 72일 만에 석방이 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압력의 쇠사슬에 묶이신 나의 아버지는 최후의 3년을 (석방 이후) 병마에 시달리면서 강제에 못 이겨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으시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들 이었습니다...(이하 생략)...[8] 1938년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음악산문집이자 음악 평론집이기도 했다. 죽음[편집] 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 해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끝내 경성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9]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작품[편집] 23세 때 작곡한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이 있다. 사후[편집]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5] 홍난파 노래비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6] 또한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 있었던 친일 행적으로 인해 홍난파는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지만 2009년 11월 26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유보 결정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홍난파의 행위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처분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말했다.[10] 2010년 11월 4일 홍난파의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선고(2010년 11월 5일)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소송 취하 의사를 밝혔고 행정안전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의 결정이 무효가 되었고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11] 기념관에 대한 논란[편집] 홍난파가 1898년 당시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나 기념사업 권리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화성시는 이번에는 단국대학교와 유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06년부터 181억 5천만원을 들여 활초동 4만5천270m2 부지에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기념관, 야외음악당, 공원 등을 갖춘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연고권을 들어 단국대학교 측에 유품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6] 하지만 단국대 측은 "홍난파의 유품을 화성시에 넘겨줄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단국대 관계자는 "2009년에 화성시가 한 차례 공문을 보내온 바 있지만 거절했다"며 "유품을 기증받아 지금까지 전시·보존을 해 왔고, 죽전캠퍼스에 박물관 증축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논란이 가중되자 단국대학교에서는 "기증받을 때 계셨던 학교 관계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거나 학교에 남아있지 않기에 기증자 몇명이 언제 어떤 이유로 유품을 학교에 전달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라고 밝히면서 유품들은 모두 학교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못을 박고 어이없는 요구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2] 또한 1984년 단국대학교 한남동 캠퍼스내 난파기념 음악관에서 유품을 전시할 때 홍난파 선생의 따님도 참석했었다고 전하면서 유품은 2007년 8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서 용인시로 이전되어 옮겨진 음악관이 확장되는대로 전시하기로 하였는데 단국대학교는 2013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신축한 캠퍼스에 전용 난파음악관을 마련하고 별실의 홍난파의 유품을 전시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개관했다. 유족으로 난파 선생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외손자 홍익표 전 연성대학 부총장 등이 참석하였다.[12][13][14]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 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상설 전시하게 된다.[14] 저서[편집] 《조선동요 100곡집》 음악산문집, 《음악만필》 가족[편집] 홍난파는 조선정악전습소를 졸업하던 해 김상운과 결혼하였고 김상운과 사별 후 경성보육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인 이대형과 재혼하였다. 두 번의 결혼에서 각각 딸을 하나씩 얻었다. 홍난파의 자손과 조카는 대부분 음악이나 의학에 종사하였다. 아버지 : 홍준 (洪埻, 1858년 ~ 별세) 어머니 : 전주이씨 (1858년 ~ 1908년) - 장남 석후(錫厚), 장녀 금후(錦厚), 차남 영후(永厚), 차녀 백후(帛厚) 출생. 계모 : 밀양박씨 (1886년 ~ 별세) - 삼녀 덕진, 삼남 계후(季厚), 사녀 옥진, 사남 민후(敏厚) 출생. 전처 : 김상운(金祥雲, 1898년 ~ 1926년) - 1915년 결혼 장녀 : 홍숙임(洪淑姙, 1918년 ~ 1984년) - 1941년 홍문길과 결혼 맏사위 : 홍문길(洪文吉, 1914년 ~ 1984년) 외손녀 : 홍옥표(洪玉杓) 외손녀 : 홍난표(洪蘭杓) -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피아노 전공 외손녀 : 홍선표(洪仙杓) 외손자 : 홍익표(洪益杓) 후처 : 이대형(李大亨, 1913년 ~ 2004년) 차녀 : 홍정임(洪丁姙, 1937년 ~ 생존) - 코리아 해럴드 편집자로 활동. 현재 미국 거주 형 : 홍석후(洪錫厚, 1883년 ~ 1940) - 제중원 1기 졸업생으로 조선인 최초 개업의, 이비인후과의사, 안과의사 형수 : 김은배(1881년 ~ 1942년) - 장남 재유(載裕), 차남 은유(恩裕), 삼남 성유(盛裕), 장녀 옥임(玉姙), 사남 지유(志裕) 출생. 형수 : 김씨(1898년 ~ 별세) - 오남 건유(建裕) 출생. 조카 : 홍재유(洪載裕, 1903년 ~ 별세)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 조카 : 홍은유(洪恩裕, 1906년 ~ 별세)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안양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하다 미국 이민 조카 : 홍성유(洪盛裕, 1908년 ~ 1936년) - 동경 고등음악학원(현 구니타치 음악대학) 졸업 후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교수로 활동. 피아니스트 김원복과 결혼 조카딸 : 홍옥임(洪玉姙, 1912년 ~ 1931년) - 이화여전 음악과(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재학 중 자살 조카 : 홍지유(洪志裕, 1913년 ~ 별세) - 동경 고등음악학원(현 구니타치 음악대학), 동경제국음악학교 졸업 후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숙부 영후(永厚) 양자로 출계 조카 : 홍건유(洪建裕, 1931년 ~ 생존) - 전 포스코 부회장 누나 : 홍금후(洪錦厚) 여동생 : 홍백후(洪帛厚) 여동생 : 홍옥진 남동생 : 홍계후(洪季厚, 1910년 ~ 1984년)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부산에서 안과의사,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 여동생 : 홍덕진 남동생 : 홍민후(洪敏厚, 1914년 ~ 별세) - 경성약전(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후 합천에서 백중약국 경영 일화[편집] 일화 하나, 계몽운동가 겸 교육자 윤치호는 그를 후원하던 후원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영후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윤치호를 알게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1921년 2월 6일(일요일)에 쓴 윤치호의 일기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이하 생략)[15]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윤치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15] 그러나 홍영후는 이때 느꼈던 구두쇠의 죄악과 부자에게 제한적으로 받았던 감정을 잊지못해 훗날 유언까지 남겨 유족은 생전의 약속대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홍난파의 유품 대부분은 단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12] 일화 둘, 홍난파가 경성중앙라디오방송국 양악부(洋樂部)의 총책임자로서 경성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그는 <조선동요100곡집>이라는 악곡집을 만들면서 음악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 사건의 관련자로서 수감되고, 1941년에서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교향악단의 초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초연 전 긴 옥살이와 병약한 심신에 건강이 나빠져 몸져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 "얼른 연미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이 무리임을 알자, "자신은 연미복을 입혀 화장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미디어[편집] 애수의 조선 1921년에 작곡되었고 홍난파가 1931년에 재녹음했다. 듣기에 문제가 있으면 미디어 도움말을 참조하세요. 기타[편집] 아들이 없던 홍영후는 큰형 홍석후의 넷째 아들 홍지유(洪志裕)를 양자로 입양했다.[출처 필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나라 잃은 서러움과 아품을 작곡했던 1941년 42세의 나이로 요절한 난파 홍영후는 애주가이기도 했다. 1930년대 국내 악단을 이끈 대한민국 클래식 1세대의 인물이기도 한 홍난파는 저서 '음악만필'에 '기막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코지마라는 여자는 대양금가(大洋琴家, 유명 피아니스트의 옛표기) 리스트의 딸로서, 최초에는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지휘자겸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의 제자임)의 아내가 되어서 어린애를 낳았습니다. 후일 작곡가 바그너(초기 리스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짐)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으로 크게 성공하자, 그 여자는 그만 자기 남편을 버리고 바그너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뷜로가 브람스의 교향곡을 지휘하여 굉장한 성공을 거두게 되자, 그는 자기의 딸(코지마의 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네 어머니한테 가서 이렇게 말해라. 얼른 브람스에게로 개가를 하라고..." 홍난파는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기막힌 이야기'였을듯 합니다"라고 짧은 평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대에서도 유모어를 잃지 않는 홍난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16] 함께 보기[편집] 이흥렬 현제명 안익태 윤치호 윤석중 참고 자료[편집]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홍난파 :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노동은)〉.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홍난파 한국음악협회 경기도지회 (난파음악제) 홍난파 - 역사광복운동본부 vdeh1992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전거 통제 WorldCat VIAF: 72802763 LCCN: n84181738 ISNI: 0000 0001 1670 8976 BNF: cb14018011h (데이터) 뮤직브레인즈: 2a4704a3-e3cf-47b5-ab40-a668431c5d17 NLA: 36630862 각주[편집] ↑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79~80쪽쪽. ISBN 978-89-85407-35-9. ↑ 가 나 다 홍난파 기념관 자료 발췌 ↑ 가 나 다 라 평화의 집/명곡해설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교회음악의 선구자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다 홍난파 - Daum 백과사전 ↑ 가 나 다 라 이창식 (2003년 8월 15일). 〈수원이 낳은 양악의 거성 홍난파〉. 《수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원문화원. ↑ 가 나 홍난파의 <봉선화>[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재미있는 홍영후 이야기7[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화성신문》 2007년 2월 2일 작성, 2009년 11월 12일 19:45 확인 ↑ 재미있는 홍난파 이야기9 - 홍난파의 죽음 Archived 2014년 2월 25일 - 웨이백 머신 《화성신문》 2007년 3월 3일, 2009년 11월 12일 20:31 확인 ↑ 법원 "홍난파 친일명단 포함 유보" 결정 《연합뉴스》 2009년 11월 26일 ↑ 홍난파 친일명단 오를듯…후손 행정소송 취하 《연합뉴스》 2010년 11월 9일 ↑ 가 나 다 김충령 기자 (2011년 10월 8일). “화성市와 단국대, 홍난파 유품 놓고 신경전 벌인다는데…”. 조선일보. 2012년 2월 17일에 확인함. ↑ 박동신, 채진근 PD (2013년 3월 15일). “단국대 죽전캠퍼스, ‘홍난파’ 유품 한 자리에..”. 파이낸셜뉴스.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김창욱 (2010년 10월 30일). 《홍난파 음악연구》. 민속원. ISBN 9788928500406. ↑ 가 나 조성관 편집위원 (2013년 1월 7일). “그는 왜 친일의 길을 걸었나(윤치호 일기로 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내면)”. 주간조선.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 김문관 기자 (2012년 1월 29일). “홍난파의 ′유모어′”. 아시아투데이. 2012년 2월 17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홍난파&oldid=24219324" 분류: 1898년 태어남1941년 죽음일제 강점기의 작곡가일제 강점기의 피아노 연주자일제 강점기의 바이올린 연주자20세기 클래식 작곡가일제 강점기의 지휘자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동요 작곡가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친일인명사전 수록자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화성시 출신남양 홍씨 (토홍)일제 강점기의 음악 평론가한국의 장로교도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오디오가 포함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3월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עבריתBahasa Indonesia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4일 (화) 15: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홍난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난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홍난파 기본 정보본명 홍영후출생 1897년 4월 10일(1897-04-10) 대한제국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사망 1941년 8월 30일 (43세)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직업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인 음악평론가장르 서양 고전음악 배우자 김상운(사별), 이대형(재혼)가족 홍준(아버지) 전주 이씨 부인(어머니) 밀양 박씨 부인(계모) 홍석후(형) 홍옥임(조카딸) 홍성유(조카) 홍정임(장녀) 홍종임(차녀) 홍지유(양자)종교 개신교(장로교) 홍난파(洪蘭坡, 일본식 이름: 森川潤 모리카와 준[*], 1897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다. 본관은 남양 홍씨 토홍계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10여곡의 가곡과 〈고향의 봄〉, 〈나뭇잎〉, 〈개구리〉, 〈무지개〉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생애 초기 1.1.2 서양 음악에 입문하다 1.2 청년기 1.2.1 본격적 음악 활동의 시작 1.2.2 봉선화의 작곡과 소개 1.3 음악 활동 1.3.1 다시 유학길에 오르다 1.3.2 귀국 후 활동 1.3.3 친일 활동 1.4 죽음 2 작품 3 사후 3.1 기념관에 대한 논란 4 저서 5 가족 6 일화 7 미디어 7.1 기타 8 함께 보기 9 참고 자료 10 외부 링크 11 각주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생애 초기[편집] 난파 홍영후는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3]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많았던 관계로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다. 형 금파 홍석후는 구한 말의 양의사이기도 했다. 홍영후의 막내동생 민후는 해방 후 30여년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약사로서 평생 선업을 쌓아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약사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약값을 받지 않았고, 공짜로 약을 지어주며 '웬만하면 약 먹지 마셔요'로 처방하여 유명하였다. 또한, 홍난파는1933년 형 금파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했다. 트리오중 일찍 요절한 조카 홍성유(1908 ~ 1936)는 형 홍석후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서양 음악에 입문하다[편집]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그 또한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1911년에 세례를 받았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음악회 때에도 바이올린 연주를 통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4]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중학과 재학 중 그는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숫자보를 사용하여 '도레미법'을 터득하였고,[2] 중학과 재학 중에 고학과 아르바이트로 7원 50전이라는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연습을 시작했다. 1912년에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5], 당시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하고 그 해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졸업 및 기악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잠시 있었다.[5] 청년기[편집] 본격적 음악 활동의 시작[편집] 홍파동 월암공원에 있는 홍난파가 살던 집 1915년 조선 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해에 김상운과 18세의 나이로 결혼한다. 홍난파의 형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홍난파 또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1916년)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공연 무대로서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입학 1년 만에 중퇴하고 1917년 3년간 있던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듬해 1월 5일 장녀 홍숙임을 얻었으며 1918년 일본에 유학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삼광은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리고 그 해 홍난파는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2] 1919년 3월 그는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만다. 다시 귀국 후 그는 첫 작품의 작곡에 몰입한다. 1920년에 <애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봉선화>의 원곡이다. 그 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최초이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악회를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였다. 1925년에는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을 작곡하였으며, 연악회 주최로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6] 한편으로 생업에도 종사해야 했던 그는 1920년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6년 5월 13일 부인 김상운과 사별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다.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재학하면서 그는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한 뒤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했다. 봉선화의 작곡과 소개[편집] 1926년 홍영후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으로,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7]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7] 음악 활동[편집] 다시 유학길에 오르다[편집] 1931년 그는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을 하였다.[4]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다. 사실 이 때의 유학길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영후가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무렵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고, 그예 미국으로 모녀가 함께 돌아가자 그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6] 이 기간 동안 홍영후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당시 흥사단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였고, 미국에 있는 조선인의 가입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업을 받으며 내야 하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을 하며 생활해야 했고,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당하며 늑골을 다치고 말았다. 이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고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다. 이때 흥사단은 그가 셔우드 음악학교를 수료할 때 그를 축하해 주었고, 홍영후 또한 교통 사고를 당한 이후 "격려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 드리며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손해금을 받아 볼까 교섭중이다"는 편지로 화답하였다. 마침내 홍영후는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하게 된다.[8]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다. 1931년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귀국 후 활동[편집] 국내에 돌아와 그는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를 맡았고,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그 해 최초의 실내 악단이자 바이올린 3중주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난파 트리오는 홍영후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어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제과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3] 그러나 조카 홍성유가 1936년 8월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난파트리오는 해체되었다. 그는 1934년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하는 등 다시 국내에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그 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하였고, 많은 영화 음악이나 신민요, 가요 등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 적었다. 그 밖에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36년 그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을 가르쳤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하였다. 이 해 8월 18일 조카 홍성유가 29세로 요절하여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지만, 그는 다시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였다.[3] 친일 활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수양동우회 사건입니다. 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72일 동안에 걸친 옥고를 치른 후에 석방되었으나,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歌)>를 작곡하였다. 그 후 그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9년 당시 변절한 문학가 이광수의 시에 곡을 넣어 <희망의 아침>을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기도 했다. 또한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3] 일제 말기 전시 체제(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후로 일제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고,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들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전향서를 써야만 석방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그의 딸인 홍정임 여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 나던 날, 저의 아빠는 종로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 계신 저는 姙(임)자 돌림에다 정축년(丁丑年)에 태어났다고 丁(정) 자를 붙여서 丁姙(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 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이 피투성이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애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몸이 약하신데 제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되느냐고." 일본 경찰은 조롱된 어조로 "당신도 콩밥이 먹고 싶어?" 하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살이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지는 '늑막염' 이라는 무서운 병을 재발 시키면서 72일 만에 석방이 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압력의 쇠사슬에 묶이신 나의 아버지는 최후의 3년을 (석방 이후) 병마에 시달리면서 강제에 못 이겨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으시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들 이었습니다...(이하 생략)...[8] 1938년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음악산문집이자 음악 평론집이기도 했다. 죽음[편집] 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 해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끝내 경성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9]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작품[편집] 23세 때 작곡한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이 있다. 사후[편집]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5] 홍난파 노래비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6] 또한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 있었던 친일 행적으로 인해 홍난파는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지만 2009년 11월 26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유보 결정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홍난파의 행위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처분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말했다.[10] 2010년 11월 4일 홍난파의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선고(2010년 11월 5일)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소송 취하 의사를 밝혔고 행정안전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의 결정이 무효가 되었고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11] 기념관에 대한 논란[편집] 홍난파가 1898년 당시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나 기념사업 권리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화성시는 이번에는 단국대학교와 유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06년부터 181억 5천만원을 들여 활초동 4만5천270m2 부지에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기념관, 야외음악당, 공원 등을 갖춘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연고권을 들어 단국대학교 측에 유품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6] 하지만 단국대 측은 "홍난파의 유품을 화성시에 넘겨줄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단국대 관계자는 "2009년에 화성시가 한 차례 공문을 보내온 바 있지만 거절했다"며 "유품을 기증받아 지금까지 전시·보존을 해 왔고, 죽전캠퍼스에 박물관 증축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논란이 가중되자 단국대학교에서는 "기증받을 때 계셨던 학교 관계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거나 학교에 남아있지 않기에 기증자 몇명이 언제 어떤 이유로 유품을 학교에 전달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라고 밝히면서 유품들은 모두 학교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못을 박고 어이없는 요구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2] 또한 1984년 단국대학교 한남동 캠퍼스내 난파기념 음악관에서 유품을 전시할 때 홍난파 선생의 따님도 참석했었다고 전하면서 유품은 2007년 8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서 용인시로 이전되어 옮겨진 음악관이 확장되는대로 전시하기로 하였는데 단국대학교는 2013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신축한 캠퍼스에 전용 난파음악관을 마련하고 별실의 홍난파의 유품을 전시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개관했다. 유족으로 난파 선생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외손자 홍익표 전 연성대학 부총장 등이 참석하였다.[12][13][14]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 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상설 전시하게 된다.[14] 저서[편집] 《조선동요 100곡집》 음악산문집, 《음악만필》 가족[편집] 홍난파는 조선정악전습소를 졸업하던 해 김상운과 결혼하였고 김상운과 사별 후 경성보육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인 이대형과 재혼하였다. 두 번의 결혼에서 각각 딸을 하나씩 얻었다. 홍난파의 자손과 조카는 대부분 음악이나 의학에 종사하였다. 아버지 : 홍준 (洪埻, 1858년 ~ 별세) 어머니 : 전주이씨 (1858년 ~ 1908년) - 장남 석후(錫厚), 장녀 금후(錦厚), 차남 영후(永厚), 차녀 백후(帛厚) 출생. 계모 : 밀양박씨 (1886년 ~ 별세) - 삼녀 덕진, 삼남 계후(季厚), 사녀 옥진, 사남 민후(敏厚) 출생. 전처 : 김상운(金祥雲, 1898년 ~ 1926년) - 1915년 결혼 장녀 : 홍숙임(洪淑姙, 1918년 ~ 1984년) - 1941년 홍문길과 결혼 맏사위 : 홍문길(洪文吉, 1914년 ~ 1984년) 외손녀 : 홍옥표(洪玉杓) 외손녀 : 홍난표(洪蘭杓) -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피아노 전공 외손녀 : 홍선표(洪仙杓) 외손자 : 홍익표(洪益杓) 후처 : 이대형(李大亨, 1913년 ~ 2004년) 차녀 : 홍정임(洪丁姙, 1937년 ~ 생존) - 코리아 해럴드 편집자로 활동. 현재 미국 거주 형 : 홍석후(洪錫厚, 1883년 ~ 1940) - 제중원 1기 졸업생으로 조선인 최초 개업의, 이비인후과의사, 안과의사 형수 : 김은배(1881년 ~ 1942년) - 장남 재유(載裕), 차남 은유(恩裕), 삼남 성유(盛裕), 장녀 옥임(玉姙), 사남 지유(志裕) 출생. 형수 : 김씨(1898년 ~ 별세) - 오남 건유(建裕) 출생. 조카 : 홍재유(洪載裕, 1903년 ~ 별세)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 조카 : 홍은유(洪恩裕, 1906년 ~ 별세)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안양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하다 미국 이민 조카 : 홍성유(洪盛裕, 1908년 ~ 1936년) - 동경 고등음악학원(현 구니타치 음악대학) 졸업 후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교수로 활동. 피아니스트 김원복과 결혼 조카딸 : 홍옥임(洪玉姙, 1912년 ~ 1931년) - 이화여전 음악과(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재학 중 자살 조카 : 홍지유(洪志裕, 1913년 ~ 별세) - 동경 고등음악학원(현 구니타치 음악대학), 동경제국음악학교 졸업 후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숙부 영후(永厚) 양자로 출계 조카 : 홍건유(洪建裕, 1931년 ~ 생존) - 전 포스코 부회장 누나 : 홍금후(洪錦厚) 여동생 : 홍백후(洪帛厚) 여동생 : 홍옥진 남동생 : 홍계후(洪季厚, 1910년 ~ 1984년) -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부산에서 안과의사,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 여동생 : 홍덕진 남동생 : 홍민후(洪敏厚, 1914년 ~ 별세) - 경성약전(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후 합천에서 백중약국 경영 일화[편집] 일화 하나, 계몽운동가 겸 교육자 윤치호는 그를 후원하던 후원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영후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윤치호를 알게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1921년 2월 6일(일요일)에 쓴 윤치호의 일기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이하 생략)[15]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윤치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15] 그러나 홍영후는 이때 느꼈던 구두쇠의 죄악과 부자에게 제한적으로 받았던 감정을 잊지못해 훗날 유언까지 남겨 유족은 생전의 약속대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홍난파의 유품 대부분은 단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12] 일화 둘, 홍난파가 경성중앙라디오방송국 양악부(洋樂部)의 총책임자로서 경성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그는 <조선동요100곡집>이라는 악곡집을 만들면서 음악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 사건의 관련자로서 수감되고, 1941년에서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교향악단의 초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초연 전 긴 옥살이와 병약한 심신에 건강이 나빠져 몸져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 "얼른 연미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이 무리임을 알자, "자신은 연미복을 입혀 화장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미디어[편집] 애수의 조선 1921년에 작곡되었고 홍난파가 1931년에 재녹음했다. 듣기에 문제가 있으면 미디어 도움말을 참조하세요. 기타[편집] 아들이 없던 홍영후는 큰형 홍석후의 넷째 아들 홍지유(洪志裕)를 양자로 입양했다.[출처 필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나라 잃은 서러움과 아품을 작곡했던 1941년 42세의 나이로 요절한 난파 홍영후는 애주가이기도 했다. 1930년대 국내 악단을 이끈 대한민국 클래식 1세대의 인물이기도 한 홍난파는 저서 '음악만필'에 '기막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코지마라는 여자는 대양금가(大洋琴家, 유명 피아니스트의 옛표기) 리스트의 딸로서, 최초에는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지휘자겸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의 제자임)의 아내가 되어서 어린애를 낳았습니다. 후일 작곡가 바그너(초기 리스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짐)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으로 크게 성공하자, 그 여자는 그만 자기 남편을 버리고 바그너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뷜로가 브람스의 교향곡을 지휘하여 굉장한 성공을 거두게 되자, 그는 자기의 딸(코지마의 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네 어머니한테 가서 이렇게 말해라. 얼른 브람스에게로 개가를 하라고..." 홍난파는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기막힌 이야기'였을듯 합니다"라고 짧은 평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대에서도 유모어를 잃지 않는 홍난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16] 함께 보기[편집] 이흥렬 현제명 안익태 윤치호 윤석중 참고 자료[편집]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홍난파 :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노동은)〉.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홍난파 한국음악협회 경기도지회 (난파음악제) 홍난파 - 역사광복운동본부 vdeh1992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전거 통제 WorldCat VIAF: 72802763 LCCN: n84181738 ISNI: 0000 0001 1670 8976 BNF: cb14018011h (데이터) 뮤직브레인즈: 2a4704a3-e3cf-47b5-ab40-a668431c5d17 NLA: 36630862 각주[편집] ↑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79~80쪽쪽. ISBN 978-89-85407-35-9. ↑ 가 나 다 홍난파 기념관 자료 발췌 ↑ 가 나 다 라 평화의 집/명곡해설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교회음악의 선구자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다 홍난파 - Daum 백과사전 ↑ 가 나 다 라 이창식 (2003년 8월 15일). 〈수원이 낳은 양악의 거성 홍난파〉. 《수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원문화원. ↑ 가 나 홍난파의 <봉선화>[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재미있는 홍영후 이야기7[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화성신문》 2007년 2월 2일 작성, 2009년 11월 12일 19:45 확인 ↑ 재미있는 홍난파 이야기9 - 홍난파의 죽음 Archived 2014년 2월 25일 - 웨이백 머신 《화성신문》 2007년 3월 3일, 2009년 11월 12일 20:31 확인 ↑ 법원 "홍난파 친일명단 포함 유보" 결정 《연합뉴스》 2009년 11월 26일 ↑ 홍난파 친일명단 오를듯…후손 행정소송 취하 《연합뉴스》 2010년 11월 9일 ↑ 가 나 다 김충령 기자 (2011년 10월 8일). “화성市와 단국대, 홍난파 유품 놓고 신경전 벌인다는데…”. 조선일보. 2012년 2월 17일에 확인함. ↑ 박동신, 채진근 PD (2013년 3월 15일). “단국대 죽전캠퍼스, ‘홍난파’ 유품 한 자리에..”. 파이낸셜뉴스.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김창욱 (2010년 10월 30일). 《홍난파 음악연구》. 민속원. ISBN 9788928500406. ↑ 가 나 조성관 편집위원 (2013년 1월 7일). “그는 왜 친일의 길을 걸었나(윤치호 일기로 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내면)”. 주간조선.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 김문관 기자 (2012년 1월 29일). “홍난파의 ′유모어′”. 아시아투데이. 2012년 2월 17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홍난파&oldid=24219324" 분류: 1898년 태어남1941년 죽음일제 강점기의 작곡가일제 강점기의 피아노 연주자일제 강점기의 바이올린 연주자20세기 클래식 작곡가일제 강점기의 지휘자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동요 작곡가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친일인명사전 수록자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화성시 출신남양 홍씨 (토홍)일제 강점기의 음악 평론가한국의 장로교도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오디오가 포함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3월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עבריתBahasa Indonesia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4일 (화) 15: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인연만들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연만들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연 만들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연만들기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MBC 방송 기간 2009년 10월 10일 ~ 2010년 1월 24일 방송 시간 토요일, 일요일 저녁 7시 55분 ~ 밤 8시 55분 방송 분량 1시간 방송 횟수 31부작 원작 현고운 - 인연 찾기, 운명 사랑하기 기획 오현창 책임프로듀서 백광현 프로듀서 손옥현 제작자 올리브나인, 고대화, 임종원 연출 장근수, 이성준 조연출 윤재원, 박지현 극본 현고운 출연자 유진, 기태영, 김정난, 변우민 외 여는 곡 Love Forever - 추리 닫는 곡 사랑할 줄은 몰랐어 - V.O.S 음성 2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외부 링크 인연만들기 홈페이지 《인연만들기》는 2009년 10월 10일부터 2010년 1월 24일까지 방영된 문화방송 주말연속극이다. 현고운의 소설인 《인연 찾기》와 《운명 사랑하기》를 한 작품으로 각색하였으며,[1] 결혼에는 전혀 관심 없는 남자와 외국인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한국에 온 여자가 정혼으로 엮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2] 목차 1 등장 인물 1.1 주요 인물 1.2 상은이네 가족 1.3 여준이네 가족 1.4 그 외 인물 2 동시간대 드라마 3 각주 4 외부 링크 등장 인물[편집] 주요 인물[편집] 유진 : 한상은 역 10세 때 호주로 이민, 엄마 없이 외롭고 슬퍼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바라보며 속 안 썩이고 현명하게 대처할 줄 아는 장녀이다. 아버지의 철저한 한국식 교육과 서양교육을 적절하게 수용해서 어른들의 소원대로 미국에서 변호사 공부를 마친 재원이다. 미국에서 홈스테이했던 남자친구 알렉스를 집으로 데려갔다가 집안의 반대로 한국인 사위를 고집하시는 아버지때문에 결국 1년간 한국에서 지내는 걸로 타협을 하고 어린 시절의 정혼자 여준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기태영 : 김여준 역 철저한 가부장적인 집안의 장남으로 합리적이고 추진력있는 완벽주의자로 지는 게임은 절대로 안하는 정형외과 의사이다. 가족을 많이 생각하고 있으나 워낙에 귀하게 자란 탓에 자기 중심적인 성격도 나타난다. 그러던 중 얼굴도 모르는 여자랑 당장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의 황당한 명령으로 상은과 부모 몰래 계약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상은이네 가족[편집] 임현식 : 상은의 외할아버지, 윤석주 역 강남길 : 상은의 아버지, 한경태 역 강별 : 상은의 여동생, 한효은 역 여준이네 가족[편집] 김정난 : 여준의 누나, 김윤희 역 반효정 : 여준의 할머니, 정옥란 역 최상훈 : 여준의 아버지, 김택수 역 양희경 : 여준의 어머니, 박금자 역 이정훈 : 여준의 외삼촌, 박복만 역 황은혜 : 윤희의 딸, 김진주 역 그 외 인물[편집] 변우민 : 윤희의 첫사랑, 강해성 역 류상욱 : 상은의 소꿉친구, 강세원 역 심양홍 : 강해성, 강세원의 아버지 역 이희도 : 혜림의 아버지, 심대환 역 금보라 : 규한의 어머니, 신진희 역 이성민 : 심혜림 역 정석원 : 여준의 친구, 정규한 역 백종민 : 여준의 병원 후배, 민철호 역 올리비에 : 상은의 남자친구, 알렉스 역 동시간대 드라마[편집] 솔약국집 아들들 (KBS 2TV) 수상한 삼형제 (KBS 2TV) 천만번 사랑해 (SBS) 각주[편집] ↑ 송희진 (2009년 10월 15일). “[★포토]유진, 요정의 미소”.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2009년 10월 16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최우창 (2009년 10월 7일). “[포토엔]기태영, 여심 울릴 미소 이런거야”. 뉴스엔. 2009년 10월 16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외부 링크[편집] MBC 인연만들기 홈페이지 문화방송 주말연속극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탐나는도다(2009년 8월 8일 ~ 2009년 9월 27일) 인연만들기(2009년 10월 10일 ~ 2010년 1월 24일) 민들레 가족(2010년 1월 30일 ~ 2010년 7월 25일) vdeh 주말연속극1970년대후반 《왜 그러지》 《후회합니다》 《도련님》 《청춘의 덫》 《바람은 불어도》 《봄비》 《엄마, 아빠 좋아》 《산이 되고 강이 되고》 1980년대전반 《종점》 《딸》 《안녕하세요》 《성난 눈동자》 《아빠의 수염》 《야상곡》 《고백》 《미련》 《못 잊어》 《당신의 초상》 《저 별은 나의 별》 《아버지와 아들》 《사랑과 진실》 《바람속의 들꽃》(단막) 후반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남자의 계절》 《풀잎마다 이슬》 《사랑과 야망》 《세 여인》 《내일 잊으리》 《유산》 《행복한 여자》 1990년대전반 《배반의 장미》 《몽실언니》 《고개숙인 남자》 《산너머 저쪽》 《사랑이 뭐길래》 《마포 무지개》 《아들과 딸》 《엄마의 바다》 《남과 여》 《서울의 달》 《여울목》 후반 《사랑과 결혼》 《아파트》 《동기간》 《위험한 사랑》 《가슴을 열어라》 《사랑한다면》 《신데렐라》 《예스터데이》 《그대 그리고 나》 《마음이 고와야지》 《사랑과 성공》 《장미와 콩나물》 《사랑해 당신을》 《남의 속도 모르고》 2000년대전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엄마야 누나야》 《그 여자네 집》 《여우와 솜사탕》 《그대를 알고부터》 《맹가네 전성시대》 《죽도록 사랑해》 《회전목마》 《장미의 전쟁》 《사랑을 할꺼야》 《한강수타령》 후반 《떨리는 가슴》 《사랑찬가》 《결혼합시다》 《진짜 진짜 좋아해》 《누나》 《문희》 《깍두기》 《천하일색 박정금》 《내 인생의 황금기》 《잘했군 잘했어》 《탐나는도다》 《인연 만들기》 2010년대전반 《민들레 가족》 《글로리아》 《반짝반짝 빛나는》 《천 번의 입맞춤》 《무신》 《아들 녀석들》 《금 나와라, 뚝딱!》 《사랑해서 남주나》 《왔다! 장보리》 《장미빛 연인들》 후반 《여자를 울려》 《엄마》 《가화만사성》 《불어라 미풍아》 《당신은 너무합니다》 《밥상 차리는 남자》 《부잣집 아들》 《내사랑 치유기》 아침 | 일일 (일일 · 특별기획) | 월화 | 수목 | 금 | 예능 | 주말 (특별기획 · 연속극) | 시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인연만들기&oldid=23816413" 분류: 2009년 드라마2010년 드라마문화방송 주말연속극소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화 작품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현고운 시나리오 작품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보이지 않는 문자인용 오류 - 날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Bahasa MelayuTagalog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6일 (수) 19: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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