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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재외한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인 디아스포라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재한 외국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재외 동포(在外同胞) 또는 한국계 동포(韓國系 同胞, 영어: Korean diaspora)는 외국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거나,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 또는 한국계 자계를 뜻한다. 재외 동포'와 관련된 자료로서, 대한민국 외교부에 따르면 재외동포의 규모는 초기 한반도에서 이주한 인구의 감소와 최근 증가한 이주민을 합하여 대략 700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거의 5분의 4가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일본 3개 나라에서 거주하고 있다.[1] 중화인민공화국에 2.5백만 미국에 2.1백만 일본에 9십만의 동포들이 거주중이다. 재외 동포가 전체 인구의 0.1% 이상인 나라는 미국, 일본, 캐나다, 카자흐스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화인민공화국, 우즈베키스탄이다. 법적으로는 재외동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자 또는 영주할 목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와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를 말한다. 재외한국인(在外韓國人)이란 표현은 재외동포와 거의 같은 뜻이나, 좁게는 대한민국 국적보유자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한국 외의 국가에 거주하는 재외 동포 또는 그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목차 1 역사 1.1 중국 1.2 미국 1.3 일본 1.4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1.5 동남아시아 2 통계 2.1 자격별 2.2 국가별 2.3 대륙별 3 관련 항목 4 각주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중국[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중동포입니다. 재중동포의 유래는 청 이전부터도 있었으나 급속적으로 늘어났던 때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 간도지역과 그 밖의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한국인이 급격히 늘었다 알려진다. 1930년 12월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총 수는 간도 전체인구의 76%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9년에 중국 정부가 한국인 대거 거주지역인 연변에 한국인의 자치를 허용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중국에 남게 되었다. 재중 한국인들은 1992년 한중수교이후 사업,유학,결혼등으로 입국한 한국인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재중 한국인들은 주로 베이징 왕징지역에 다수가 거주하고있으며 상하이,광저우,칭다오등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있다. 미국[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미 동포입니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초에 한국인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 샌프란시스코의 건설 노동자로서 이주하면서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한국인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후에도 결혼, 입양 등의 이유로 미국에 한국인이 유입되었다. 일본[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일 동포입니다. 일본의 경우, 일제 강점기 때 노동자 등으로 한국인이 일본에 유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이어서 GHQ 방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등으로 말미암아 모든 한국인이 일본 국적을 잃었다. 이로써 약 140만 명의 한국인이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계 이민자 일부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극소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남북 갈등과 관련하여 재일 동포들은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을 겪었다. 재일 동포는 일본 사회와 불화를 겪었다. 그나마 1991년 1월 10일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향상 및 처우개선에 대한 합의사항〉에서 재일 동포 3세의 영주권 허가, 지문날인 제도 철폐, 국·공립학교 교원 임용기회 획득,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임용기회 확대 등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인입니다. 구 소련 붕괴 후의 독립국가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19세기부터 조선의 농민들은 연해주로 이주하여 마을과 농장을 세웠다. 이후에도 독립 운동 등을 이유로 연해주로 다수 이주하였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내의 172,000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이주한 지방은 대개 척박하여 생활에 곤란을 겪었다. 동남아시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베트남 동포 및 재필리핀 동포입니다. 주로 다양한 나라들에 거주하나, 특히 베트남과 필리핀을 중심으로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통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지역별 재외한인 현황입니다. 2016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외교부가 "영주권자"와 더불어 "유학생"과 "일정기간(90일)이상의 거주자"와 "시민권자"를 모두 합산한 기준으로 집계한 재외 동포의 국가별 자료와 기타 통계 자료는 아래와 같다. 각 재외공관에서 작성된 재외동포현황과 각국 인구 관련 통계자료, 한인회 등의 동포단체 조사자료, 공관민원 처리기록, 직접 조사 등을 근거로 삼았다.[2] 참고로 이 통계는 2년마다 한번씩 이루어지며, 2019년 하반기에 업데이트될 예정이다.[2] 자격별[편집] 자격별 재외동포 영주권자 1,049,209 14.11% 일반체류자(90일 이상) 1,354,330 18.22% 유학생 260,323 3.50% 재외 동포 총합 2,672,202 35.96% 시민권자 4,758,486 64.04% 총계 7,430,688 100% 국가별[편집] 다음 통계는 재외동포 인구순 국가 목록이다. 현재 전세계 194개국에 재외동포 인구가 등록되어 있다.[2] 일본 재외동포 통계의 경우 일본 법무성에서 귀화 허가자로 인정하고 있는 '귀화자'의 인구를 포함한 것으로, 조선적 역시 포함되어 있다. 아래 표에서는 귀화자 인구까지 포함하였으며, 귀화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재외공관 집계 기준으로는 453,096명에 달한다.[2] 대륙 국가 외교부 통계 (2017)[2] 재외동포 비율 아시아 중화인민공화국 2,548,030 36.7% 아메리카 미국 2,492,252 29.82% 아시아 일본 818,626 12.73% 아메리카 캐나다 240,942 2.94% 아시아 우즈베키스탄 181,077 2.48%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180,004 2.24% 유럽/아시아 러시아 169,638 2.52% 아시아 베트남 124,458 1.23% 아시아 카자흐스탄 109,133 1.5% 아시아 필리핀 93,093 1.26% 아메리카 브라질 51,531 0.71% 유럽 독일 40,170 0.48% 유럽 영국 39,934 0.64% 오세아니아 뉴질랜드 33,403 0.44% 아시아 인도네시아 31,091 0.57%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23,194 0.32% 아시아 태국 20,500 0.29% 아시아 싱가포르 20,346 0.29% 아시아 키르기스스탄 19,035 0.26% 유럽 프랑스 16,251 0.2% 아시아 말레이시아 13,122 0.2% 유럽 우크라이나 13,070 0.19% 아메리카 멕시코 11,673 0.16% 아시아 아랍에미리트 10,852 0.14% 아시아 캄보디아 10,089 0.06% 아시아 인도 10,390 0.15% 아시아 중화민국 6,293 0.06% 아메리카 과테말라 5,312 0.18% 아메리카 파라과이 5,090 0.07% 아시아 스페인 4,520 0.07% 기타 87,529 1.1% 전체 7,430,688 100% 대륙별[편집] 대륙, 국가 외교통상부 통계, 2017[2] 재외동포 비율 동북아시아 3,366,656 56.36% 중화인민공화국 2,548,030 36.7% 일본 818,626 12.73% 남아시아·태평양 557,791 북미 2,297,425 32.76% 미국 2,492,252 29.82% 캐나다 240,942 2.94% 중남미 106,794 1.59% 유럽 630,693 8.78% 아프리카 10,853 0.15% 중동 24,707 0.36% 전체 7,430,688 100% 관련 항목[편집] 재외동포법 한국문화원 한국학교 북아메리카(북미) 한국계 미국인 재미 동포 재하와이 동포(en:Korean immigration to Hawaii) 한국계 캐나다인 재멕시코 동포 재과테말라 동포(en:Koreans in Guatemala) 한국계 쿠바인(en:Korean Cuban) 동북아시아 재중 동포 재중 한국인 재대만 동포 재일 동포 한국계 일본인 재몽골 동포(en:Koreans in Mongolia)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CIS) 고려인 사할린 한인 동남아시아 재베트남 동포 - 동남아 국가중 가장 많은 재외 동포 재필리핀 동포 - 동남아 국가중 두 번째로 많은 재외 동포 재인도네시아 동포 - 동남아 국가중 세 번째로 많은 재외 동포 재태국 동포(en:Koreans in Thailand) 재말레이시아 동포(en:Koreans in Malaysia) 재싱가포르 동포(en:Koreans in Singapore) 중동 및 남아시아 재인도 동포(en:Koreans in India) 재네팔 동포(en:Koreans in Nepal) 재스리랑카 동포(en:Koreans in Sri Lanka) 재이란 동포(en:Koreans in Iran) 재아랍 동포(en:Koreans in the Arab world) 오세아니아 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한국계 뉴질랜드인 유럽 재영국 동포(en:Koreans in the United Kingdom) 재프랑스 동포 재독 동포 재이탈리아 동포 재스페인 동포 아프리카 재아프리카 동포(en:Koreans in Africa) 재남아공 동포(en:Koreans in South Africa) 코리아타운 이민 재외국민국내거소신고증 외국국적동포국내거소신고증 외국인등록증 각주[편집] ↑ 2013년 재외동포현황 Archived [날짜 없음], - Archive.is 대한민국 외교부 ↑ 가 나 다 라 마 바 http://www.mofa.go.kr/www/brd/m_3454/view.do?seq=356334&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page=1 외부 링크[편집] 재외동포재단(OKF; Overseas Koreans Foundation) 코리안넷(Korean.Net) 재외동포신문(dongponews.net) 재일본대한민국민단중앙본부 vdeh재외한인아시아 재대만 한국인 재일한인/ 재일 조선인 조선적 북조선국적 한국국적 일본국적 재중한인 재중동포 한국국적 고려인 사할린 한인 재베트남 한국인 재필리핀 한국인 재인도네시아 한국인 아메리카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캐나다인 재멕시코 한국인 유럽 재독 한국인 재스페인 한국인 오세아니아 한국계 뉴질랜드인 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방언 재중 한국어 중앙아시아 한국어 재일 한국어 재미 한국어 관련 항목 코리아타운 한국인 입양아 한국학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재외한인&oldid=22903566" 분류: 웹아카이브 틀 archiveis 링크재외한인한민족숨은 분류: 웹아카이브 틀 경고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Bahasa IndonesiaҚазақша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19: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재외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재외한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인 디아스포라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재한 외국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재외 동포(在外同胞) 또는 한국계 동포(韓國系 同胞, 영어: Korean diaspora)는 외국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거나,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 또는 한국계 자계를 뜻한다. 재외 동포'와 관련된 자료로서, 대한민국 외교부에 따르면 재외동포의 규모는 초기 한반도에서 이주한 인구의 감소와 최근 증가한 이주민을 합하여 대략 700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거의 5분의 4가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일본 3개 나라에서 거주하고 있다.[1] 중화인민공화국에 2.5백만 미국에 2.1백만 일본에 9십만의 동포들이 거주중이다. 재외 동포가 전체 인구의 0.1% 이상인 나라는 미국, 일본, 캐나다, 카자흐스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화인민공화국, 우즈베키스탄이다. 법적으로는 재외동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자 또는 영주할 목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와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를 말한다. 재외한국인(在外韓國人)이란 표현은 재외동포와 거의 같은 뜻이나, 좁게는 대한민국 국적보유자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한국 외의 국가에 거주하는 재외 동포 또는 그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목차 1 역사 1.1 중국 1.2 미국 1.3 일본 1.4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1.5 동남아시아 2 통계 2.1 자격별 2.2 국가별 2.3 대륙별 3 관련 항목 4 각주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중국[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중동포입니다. 재중동포의 유래는 청 이전부터도 있었으나 급속적으로 늘어났던 때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 간도지역과 그 밖의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한국인이 급격히 늘었다 알려진다. 1930년 12월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총 수는 간도 전체인구의 76%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9년에 중국 정부가 한국인 대거 거주지역인 연변에 한국인의 자치를 허용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중국에 남게 되었다. 재중 한국인들은 1992년 한중수교이후 사업,유학,결혼등으로 입국한 한국인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재중 한국인들은 주로 베이징 왕징지역에 다수가 거주하고있으며 상하이,광저우,칭다오등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있다. 미국[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미 동포입니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초에 한국인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 샌프란시스코의 건설 노동자로서 이주하면서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한국인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후에도 결혼, 입양 등의 이유로 미국에 한국인이 유입되었다. 일본[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일 동포입니다. 일본의 경우, 일제 강점기 때 노동자 등으로 한국인이 일본에 유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이어서 GHQ 방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등으로 말미암아 모든 한국인이 일본 국적을 잃었다. 이로써 약 140만 명의 한국인이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계 이민자 일부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극소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남북 갈등과 관련하여 재일 동포들은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을 겪었다. 재일 동포는 일본 사회와 불화를 겪었다. 그나마 1991년 1월 10일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향상 및 처우개선에 대한 합의사항〉에서 재일 동포 3세의 영주권 허가, 지문날인 제도 철폐, 국·공립학교 교원 임용기회 획득,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임용기회 확대 등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인입니다. 구 소련 붕괴 후의 독립국가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19세기부터 조선의 농민들은 연해주로 이주하여 마을과 농장을 세웠다. 이후에도 독립 운동 등을 이유로 연해주로 다수 이주하였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내의 172,000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이주한 지방은 대개 척박하여 생활에 곤란을 겪었다. 동남아시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베트남 동포 및 재필리핀 동포입니다. 주로 다양한 나라들에 거주하나, 특히 베트남과 필리핀을 중심으로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통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지역별 재외한인 현황입니다. 2016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외교부가 "영주권자"와 더불어 "유학생"과 "일정기간(90일)이상의 거주자"와 "시민권자"를 모두 합산한 기준으로 집계한 재외 동포의 국가별 자료와 기타 통계 자료는 아래와 같다. 각 재외공관에서 작성된 재외동포현황과 각국 인구 관련 통계자료, 한인회 등의 동포단체 조사자료, 공관민원 처리기록, 직접 조사 등을 근거로 삼았다.[2] 참고로 이 통계는 2년마다 한번씩 이루어지며, 2019년 하반기에 업데이트될 예정이다.[2] 자격별[편집] 자격별 재외동포 영주권자 1,049,209 14.11% 일반체류자(90일 이상) 1,354,330 18.22% 유학생 260,323 3.50% 재외 동포 총합 2,672,202 35.96% 시민권자 4,758,486 64.04% 총계 7,430,688 100% 국가별[편집] 다음 통계는 재외동포 인구순 국가 목록이다. 현재 전세계 194개국에 재외동포 인구가 등록되어 있다.[2] 일본 재외동포 통계의 경우 일본 법무성에서 귀화 허가자로 인정하고 있는 '귀화자'의 인구를 포함한 것으로, 조선적 역시 포함되어 있다. 아래 표에서는 귀화자 인구까지 포함하였으며, 귀화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재외공관 집계 기준으로는 453,096명에 달한다.[2] 대륙 국가 외교부 통계 (2017)[2] 재외동포 비율 아시아 중화인민공화국 2,548,030 36.7% 아메리카 미국 2,492,252 29.82% 아시아 일본 818,626 12.73% 아메리카 캐나다 240,942 2.94% 아시아 우즈베키스탄 181,077 2.48%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180,004 2.24% 유럽/아시아 러시아 169,638 2.52% 아시아 베트남 124,458 1.23% 아시아 카자흐스탄 109,133 1.5% 아시아 필리핀 93,093 1.26% 아메리카 브라질 51,531 0.71% 유럽 독일 40,170 0.48% 유럽 영국 39,934 0.64% 오세아니아 뉴질랜드 33,403 0.44% 아시아 인도네시아 31,091 0.57%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23,194 0.32% 아시아 태국 20,500 0.29% 아시아 싱가포르 20,346 0.29% 아시아 키르기스스탄 19,035 0.26% 유럽 프랑스 16,251 0.2% 아시아 말레이시아 13,122 0.2% 유럽 우크라이나 13,070 0.19% 아메리카 멕시코 11,673 0.16% 아시아 아랍에미리트 10,852 0.14% 아시아 캄보디아 10,089 0.06% 아시아 인도 10,390 0.15% 아시아 중화민국 6,293 0.06% 아메리카 과테말라 5,312 0.18% 아메리카 파라과이 5,090 0.07% 아시아 스페인 4,520 0.07% 기타 87,529 1.1% 전체 7,430,688 100% 대륙별[편집] 대륙, 국가 외교통상부 통계, 2017[2] 재외동포 비율 동북아시아 3,366,656 56.36% 중화인민공화국 2,548,030 36.7% 일본 818,626 12.73% 남아시아·태평양 557,791 북미 2,297,425 32.76% 미국 2,492,252 29.82% 캐나다 240,942 2.94% 중남미 106,794 1.59% 유럽 630,693 8.78% 아프리카 10,853 0.15% 중동 24,707 0.36% 전체 7,430,688 100% 관련 항목[편집] 재외동포법 한국문화원 한국학교 북아메리카(북미) 한국계 미국인 재미 동포 재하와이 동포(en:Korean immigration to Hawaii) 한국계 캐나다인 재멕시코 동포 재과테말라 동포(en:Koreans in Guatemala) 한국계 쿠바인(en:Korean Cuban) 동북아시아 재중 동포 재중 한국인 재대만 동포 재일 동포 한국계 일본인 재몽골 동포(en:Koreans in Mongolia)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CIS) 고려인 사할린 한인 동남아시아 재베트남 동포 - 동남아 국가중 가장 많은 재외 동포 재필리핀 동포 - 동남아 국가중 두 번째로 많은 재외 동포 재인도네시아 동포 - 동남아 국가중 세 번째로 많은 재외 동포 재태국 동포(en:Koreans in Thailand) 재말레이시아 동포(en:Koreans in Malaysia) 재싱가포르 동포(en:Koreans in Singapore) 중동 및 남아시아 재인도 동포(en:Koreans in India) 재네팔 동포(en:Koreans in Nepal) 재스리랑카 동포(en:Koreans in Sri Lanka) 재이란 동포(en:Koreans in Iran) 재아랍 동포(en:Koreans in the Arab world) 오세아니아 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한국계 뉴질랜드인 유럽 재영국 동포(en:Koreans in the United Kingdom) 재프랑스 동포 재독 동포 재이탈리아 동포 재스페인 동포 아프리카 재아프리카 동포(en:Koreans in Africa) 재남아공 동포(en:Koreans in South Africa) 코리아타운 이민 재외국민국내거소신고증 외국국적동포국내거소신고증 외국인등록증 각주[편집] ↑ 2013년 재외동포현황 Archived [날짜 없음], - Archive.is 대한민국 외교부 ↑ 가 나 다 라 마 바 http://www.mofa.go.kr/www/brd/m_3454/view.do?seq=356334&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page=1 외부 링크[편집] 재외동포재단(OKF; Overseas Koreans Foundation) 코리안넷(Korean.Net) 재외동포신문(dongponews.net) 재일본대한민국민단중앙본부 vdeh재외한인아시아 재대만 한국인 재일한인/ 재일 조선인 조선적 북조선국적 한국국적 일본국적 재중한인 재중동포 한국국적 고려인 사할린 한인 재베트남 한국인 재필리핀 한국인 재인도네시아 한국인 아메리카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캐나다인 재멕시코 한국인 유럽 재독 한국인 재스페인 한국인 오세아니아 한국계 뉴질랜드인 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방언 재중 한국어 중앙아시아 한국어 재일 한국어 재미 한국어 관련 항목 코리아타운 한국인 입양아 한국학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재외한인&oldid=22903566" 분류: 웹아카이브 틀 archiveis 링크재외한인한민족숨은 분류: 웹아카이브 틀 경고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Bahasa IndonesiaҚазақша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19: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재외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재외한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인 디아스포라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재한 외국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재외 동포(在外同胞) 또는 한국계 동포(韓國系 同胞, 영어: Korean diaspora)는 외국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거나,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 또는 한국계 자계를 뜻한다. 재외 동포'와 관련된 자료로서, 대한민국 외교부에 따르면 재외동포의 규모는 초기 한반도에서 이주한 인구의 감소와 최근 증가한 이주민을 합하여 대략 700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거의 5분의 4가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일본 3개 나라에서 거주하고 있다.[1] 중화인민공화국에 2.5백만 미국에 2.1백만 일본에 9십만의 동포들이 거주중이다. 재외 동포가 전체 인구의 0.1% 이상인 나라는 미국, 일본, 캐나다, 카자흐스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화인민공화국, 우즈베키스탄이다. 법적으로는 재외동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자 또는 영주할 목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와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를 말한다. 재외한국인(在外韓國人)이란 표현은 재외동포와 거의 같은 뜻이나, 좁게는 대한민국 국적보유자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한국 외의 국가에 거주하는 재외 동포 또는 그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목차 1 역사 1.1 중국 1.2 미국 1.3 일본 1.4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1.5 동남아시아 2 통계 2.1 자격별 2.2 국가별 2.3 대륙별 3 관련 항목 4 각주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중국[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중동포입니다. 재중동포의 유래는 청 이전부터도 있었으나 급속적으로 늘어났던 때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 간도지역과 그 밖의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한국인이 급격히 늘었다 알려진다. 1930년 12월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총 수는 간도 전체인구의 76%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9년에 중국 정부가 한국인 대거 거주지역인 연변에 한국인의 자치를 허용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중국에 남게 되었다. 재중 한국인들은 1992년 한중수교이후 사업,유학,결혼등으로 입국한 한국인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재중 한국인들은 주로 베이징 왕징지역에 다수가 거주하고있으며 상하이,광저우,칭다오등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있다. 미국[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미 동포입니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초에 한국인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 샌프란시스코의 건설 노동자로서 이주하면서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한국인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후에도 결혼, 입양 등의 이유로 미국에 한국인이 유입되었다. 일본[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일 동포입니다. 일본의 경우, 일제 강점기 때 노동자 등으로 한국인이 일본에 유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이어서 GHQ 방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등으로 말미암아 모든 한국인이 일본 국적을 잃었다. 이로써 약 140만 명의 한국인이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계 이민자 일부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극소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남북 갈등과 관련하여 재일 동포들은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을 겪었다. 재일 동포는 일본 사회와 불화를 겪었다. 그나마 1991년 1월 10일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향상 및 처우개선에 대한 합의사항〉에서 재일 동포 3세의 영주권 허가, 지문날인 제도 철폐, 국·공립학교 교원 임용기회 획득,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임용기회 확대 등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인입니다. 구 소련 붕괴 후의 독립국가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19세기부터 조선의 농민들은 연해주로 이주하여 마을과 농장을 세웠다. 이후에도 독립 운동 등을 이유로 연해주로 다수 이주하였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내의 172,000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이주한 지방은 대개 척박하여 생활에 곤란을 겪었다. 동남아시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재베트남 동포 및 재필리핀 동포입니다. 주로 다양한 나라들에 거주하나, 특히 베트남과 필리핀을 중심으로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통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지역별 재외한인 현황입니다. 2016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외교부가 "영주권자"와 더불어 "유학생"과 "일정기간(90일)이상의 거주자"와 "시민권자"를 모두 합산한 기준으로 집계한 재외 동포의 국가별 자료와 기타 통계 자료는 아래와 같다. 각 재외공관에서 작성된 재외동포현황과 각국 인구 관련 통계자료, 한인회 등의 동포단체 조사자료, 공관민원 처리기록, 직접 조사 등을 근거로 삼았다.[2] 참고로 이 통계는 2년마다 한번씩 이루어지며, 2019년 하반기에 업데이트될 예정이다.[2] 자격별[편집] 자격별 재외동포 영주권자 1,049,209 14.11% 일반체류자(90일 이상) 1,354,330 18.22% 유학생 260,323 3.50% 재외 동포 총합 2,672,202 35.96% 시민권자 4,758,486 64.04% 총계 7,430,688 100% 국가별[편집] 다음 통계는 재외동포 인구순 국가 목록이다. 현재 전세계 194개국에 재외동포 인구가 등록되어 있다.[2] 일본 재외동포 통계의 경우 일본 법무성에서 귀화 허가자로 인정하고 있는 '귀화자'의 인구를 포함한 것으로, 조선적 역시 포함되어 있다. 아래 표에서는 귀화자 인구까지 포함하였으며, 귀화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재외공관 집계 기준으로는 453,096명에 달한다.[2] 대륙 국가 외교부 통계 (2017)[2] 재외동포 비율 아시아 중화인민공화국 2,548,030 36.7% 아메리카 미국 2,492,252 29.82% 아시아 일본 818,626 12.73% 아메리카 캐나다 240,942 2.94% 아시아 우즈베키스탄 181,077 2.48%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180,004 2.24% 유럽/아시아 러시아 169,638 2.52% 아시아 베트남 124,458 1.23% 아시아 카자흐스탄 109,133 1.5% 아시아 필리핀 93,093 1.26% 아메리카 브라질 51,531 0.71% 유럽 독일 40,170 0.48% 유럽 영국 39,934 0.64% 오세아니아 뉴질랜드 33,403 0.44% 아시아 인도네시아 31,091 0.57%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23,194 0.32% 아시아 태국 20,500 0.29% 아시아 싱가포르 20,346 0.29% 아시아 키르기스스탄 19,035 0.26% 유럽 프랑스 16,251 0.2% 아시아 말레이시아 13,122 0.2% 유럽 우크라이나 13,070 0.19% 아메리카 멕시코 11,673 0.16% 아시아 아랍에미리트 10,852 0.14% 아시아 캄보디아 10,089 0.06% 아시아 인도 10,390 0.15% 아시아 중화민국 6,293 0.06% 아메리카 과테말라 5,312 0.18% 아메리카 파라과이 5,090 0.07% 아시아 스페인 4,520 0.07% 기타 87,529 1.1% 전체 7,430,688 100% 대륙별[편집] 대륙, 국가 외교통상부 통계, 2017[2] 재외동포 비율 동북아시아 3,366,656 56.36% 중화인민공화국 2,548,030 36.7% 일본 818,626 12.73% 남아시아·태평양 557,791 북미 2,297,425 32.76% 미국 2,492,252 29.82% 캐나다 240,942 2.94% 중남미 106,794 1.59% 유럽 630,693 8.78% 아프리카 10,853 0.15% 중동 24,707 0.36% 전체 7,430,688 100% 관련 항목[편집] 재외동포법 한국문화원 한국학교 북아메리카(북미) 한국계 미국인 재미 동포 재하와이 동포(en:Korean immigration to Hawaii) 한국계 캐나다인 재멕시코 동포 재과테말라 동포(en:Koreans in Guatemala) 한국계 쿠바인(en:Korean Cuban) 동북아시아 재중 동포 재중 한국인 재대만 동포 재일 동포 한국계 일본인 재몽골 동포(en:Koreans in Mongolia)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CIS) 고려인 사할린 한인 동남아시아 재베트남 동포 - 동남아 국가중 가장 많은 재외 동포 재필리핀 동포 - 동남아 국가중 두 번째로 많은 재외 동포 재인도네시아 동포 - 동남아 국가중 세 번째로 많은 재외 동포 재태국 동포(en:Koreans in Thailand) 재말레이시아 동포(en:Koreans in Malaysia) 재싱가포르 동포(en:Koreans in Singapore) 중동 및 남아시아 재인도 동포(en:Koreans in India) 재네팔 동포(en:Koreans in Nepal) 재스리랑카 동포(en:Koreans in Sri Lanka) 재이란 동포(en:Koreans in Iran) 재아랍 동포(en:Koreans in the Arab world) 오세아니아 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한국계 뉴질랜드인 유럽 재영국 동포(en:Koreans in the United Kingdom) 재프랑스 동포 재독 동포 재이탈리아 동포 재스페인 동포 아프리카 재아프리카 동포(en:Koreans in Africa) 재남아공 동포(en:Koreans in South Africa) 코리아타운 이민 재외국민국내거소신고증 외국국적동포국내거소신고증 외국인등록증 각주[편집] ↑ 2013년 재외동포현황 Archived [날짜 없음], - Archive.is 대한민국 외교부 ↑ 가 나 다 라 마 바 http://www.mofa.go.kr/www/brd/m_3454/view.do?seq=356334&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page=1 외부 링크[편집] 재외동포재단(OKF; Overseas Koreans Foundation) 코리안넷(Korean.Net) 재외동포신문(dongponews.net) 재일본대한민국민단중앙본부 vdeh재외한인아시아 재대만 한국인 재일한인/ 재일 조선인 조선적 북조선국적 한국국적 일본국적 재중한인 재중동포 한국국적 고려인 사할린 한인 재베트남 한국인 재필리핀 한국인 재인도네시아 한국인 아메리카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캐나다인 재멕시코 한국인 유럽 재독 한국인 재스페인 한국인 오세아니아 한국계 뉴질랜드인 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방언 재중 한국어 중앙아시아 한국어 재일 한국어 재미 한국어 관련 항목 코리아타운 한국인 입양아 한국학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재외한인&oldid=22903566" 분류: 웹아카이브 틀 archiveis 링크재외한인한민족숨은 분류: 웹아카이브 틀 경고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Bahasa IndonesiaҚазақша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19: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현대 (기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현대 (기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현대現代HYUNDAI 창립자 정주영 국가 대한민국 현대 (기업) 개정 로마자 표기: Hyeondae 공식 표기: HYUNDAI 현대(現代)는 정주영이 세운 대한민국의 기업집단으로, 구조조정과 경영권 분쟁등을 겪으면서 현대그룹에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목차 1 현대 계열 분리 1.1 경영권 분쟁 2 범 현대가 3 가계도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현대 계열 분리[편집] 현대계열의 그룹사들간의 분리는 IMF 구제금융사건이 발생한 이후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며 완전히 분리되었다.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이 아들들에게 각 계열사별로 지분을 승계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소위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분쟁 등이 발생하면서 계열사들간 그룹의 분리가 심화되었다. 경영권 분쟁[편집] 정주영이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1998년에 정몽헌이 정몽구와 함께 그룹 공동회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둘 사이의 경영권 분쟁은 심화되었다. 당시 정몽헌은 그룹 주요 계열사인 현대전자, 현대상선, 현대건설, 현대종합상사 등 현대의 주요 계열사들을 차례대로 맡아오면서 그룹 내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고 세간에서는 사실상 현대그룹의 후계자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추측했다.[1] 현대정공, 현대산업개발 등을 맡고 있던 정몽구는 1999년 기아자동차 인수 후 이듬해 현대산업개발을 정세영에게 넘기는 대신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현대그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양측의 경쟁은, 2000년 당시 현대증권 이익치 CEO의 인사문제로 인해 심화되었다. 정몽헌이 해외출장 중일때 금융업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정몽구 측이 일방적으로 정몽헌의 측근이었던 이익치를 고려산업개발로 전보하는 인사를 발표했으나 정주영에 의해 계획이 무산되었고, 결국 이 사건으로 정몽구가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정몽헌이 현대그룹의 단독회장이 됨으로 인해 경영권 분쟁이 종료되었다. 범 현대가[편집] 범 현대가를 보면 현대그룹,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한라그룹, KCC그룹, HDC그룹,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등이 존재한다. KCC그룹은 정주영의 막내동생인 정상영이 명예회장으로 있다. 한국프랜지공업은 현대그룹은 아니지만 정주영의 여동생의 남편이 운영했었다. 현대그룹의 계열사는 아니었지만 범 현대가라 할 만하다. 현대오일뱅크는 외국자본에 인수되었으나 2009년 11월 국제중재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현대중공업그룹으로 다시 편입되었다. 현대그룹 :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 현대무벡스, 현대투자파트너스,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인재개발원 현대자동차그룹 :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현대로템, 현대엔지비,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이노션, 현대글로비스, 전북 현대 모터스, 기아 타이거스 현대중공업그룹 :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현대오일뱅크, 아산나눔재단, 울산 현대 현대백화점그룹 : 현대백화점, 현대홈쇼핑, 현대HCN, 현대미디어, 현대드림투어, 현대그린푸드, 현대LED, 현대F&G, 현대DSF, 현대쇼핑, 한섬, 현대리바트, 현대L&C HDC그룹 : HDC현대산업개발, HDC현대EP, HDC아이파크몰, 호텔HDC, HDC영창, HDC아이콘트롤스, HDC자산운용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해상손해사정, 현대HDS, 현대C&R,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한라그룹 : 한라, 만도, 한라스택플, 한라마이스터, 한라엔컴, 한라I&C KCC그룹 : KCC, KCC건설, 금강레저, 코리아오토글라스, 전주 KCC 이지스 한국프랜지공업 현대종합금속 가계도[편집] 창립자 정주영 :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장남 정몽필 : 전 인천제철 회장 차남 정몽구 :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손녀 정성이 : 현대자동차그룹 이노션 고문 손녀 정명이 :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커머셜 고문 손자 정의선 :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자동차 부회장 손녀 정윤이 : 현대자동차그룹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전무 삼남 정몽근 :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 손자 정지선 :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손자 정교선 :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 사남 정몽우 :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 손자 정일선 : 현대자동차그룹 현대비앤지스틸 사장 손자 정문선 : 현대자동차그룹 현대비앤지스틸 전무 손자 정대선 : 현대비에스앤씨 대표이사 오남 정몽헌 : 전 현대그룹 회장 자부 현정은 : 현대그룹 회장 육남 정몽준 : 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 손자 정기선 : 현대중공업그룹 현대중공업 부장 칠남 정몽윤 :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손자 정경선 : 루트임팩트 대표 팔남 정몽일 : 현대기업금융 회장 남동생 정인영 : 전 한라그룹 명예회장 조카 정몽국 :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조카 정몽원 : 한라그룹 회장 남동생 정순영 : 전 성우그룹 명예회장 조카 정몽석 : 현대종합금속 회장 조카 정몽훈 : 성우전자 회장 조카 정몽용 : 현대성우오토모티브코리아 회장 여동생 정희영 매제 김영주 : 전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서한그룹) 조카 김윤수 : 한국프랜지공업 회장 조카 김근수 : 후성그룹 후성 회장 남동생 정세영 : 전 HDC그룹 HDC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조카 정몽규 : HDC그룹 HDC현대산업개발 회장 남동생 정신영 : 전 동아일보 기자 제수 장정자 : 현대학원 이사장 조카 정몽혁 : 현대종합상사 회장 남동생 정상영 : KCC그룹 명예회장 조카 정몽진 : KCC그룹 KCC 회장 조카 정몽익 : KCC그룹 KCC 사장 조카 정몽열 : KCC그룹 KCC건설 사장 같이 보기[편집] 정주영 현대그룹 각주[편집] ↑ 현대, 파란의 가족史 Archived 2006년 3월 1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03. 8. 4. 주간동아, 2000. 4. 6. 228호 특집:현대그룹 '왕자의난' 1.‘정몽구의 쿠데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2.“주스 치우고 맥주파티 열어!” 3.“한 뭉치 떼줄게 분가해 살아!” 외부 링크[편집] 현대그룹 홈페이지 현대자동차그룹 홈페이지 현대중공업그룹 홈페이지 현대백화점그룹 홈페이지 HDC현대산업개발 홈페이지 현대해상화재보험 홈페이지 KCC 홈페이지 vdeh현대그룹관광 현대아산 에이블현대호텔앤리조트 현대종합연수원 제조업 현대엘리베이터 연구원· 자원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인재개발원 현대투자네트워크 이전 계열사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자원개발 현대상선 인천제철 현대미포조선 현대엔지니어링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종합상사 현대정공 현투증권 현대투자신탁운용 현대캐피탈 현대오토넷 현대정유 금강 금강개발산업 기아자동차 동서산업 고려산업개발 하이닉스반도체 한국프랜지 한라건설 이미지퀘스트 문화일보 현대방송 현대로지스틱스 현대코스코로지스틱스 현대증권 현대저축은행 현대자산운용 동해해운 해영선박 현대부산신항만 대한알루미늄공업 현대시멘트 현대양행 방계기업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HDC그룹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KCC그룹 한라그룹 서한그룹 기타 현대고등학교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현대차 컨벤션 호텔 관련 항목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왕자의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현대_(기업)&oldid=24453874" 분류: 현대 (기업)정주영대한민국의 제조 기업대한민국의 전자 기업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تۆرکجه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atviešuBahasa MelayuNāhuatlPolskiРусскийScotsSlovenčina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0일 (목) 07: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12-13 시작년도 1891년 국가 아르헨티나 하위 리그 프리메라 B 나시오날 참가 팀 수 20 국내 리그 순위 1 최근 우승 팀 (2012 클라우수라) 아르세날 최다 우승 팀 리버 플레이트 (33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Primera División de Argentina)은 아르헨티나의 프로축구 1부리그이다. 현재 20개 팀이 리그 방식으로 경기를 치른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and Statistics) 자료 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리그는 현재 세계 상위권 프로 축구 리그 중 하나에 속한다.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로 꼽히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그리고 포르투갈 리가 등 많은 리그에서 아르헨티나 리그 출신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다. 목차 1 리그 진행 방식 1.1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1.2 승강제 2 국제 대회 참가 2.1 코파 수다메리카나 3 2012/13 시즌 참가팀 4 역대 기록 4.1 아마추어 대회 우승 기록 4.2 프로 리그 우승 기록 4.2.1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31 ~ 1966 4.2.2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나시오날 (Torneo Metropolitano/Nacional) : 1967 ~ 1985 4.2.3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85/86 ~ 1990/91 4.2.4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Torneo Apertura/Clausura) : 1991/92 ~ 2012/13 4.2.5 기타 공식 대회 4.2.6 팀별 우승 횟수 4.3 역대 득점왕 4.4 통산 득점 기록 4.5 참고사항 5 아르헨티나 클럽의 국제대회 성적 5.1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5.2 코파 수다메리카나 5.3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리그 진행 방식[편집] 2012/13 시즌부터 프리메라 디비시온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하고 하나의 우승 팀을 정하는 새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입니다. 2011/12 시즌까지 프리메라 디비시온에는 전기리그인 아페르투라 (Apertura, 8월~12월)와 후기리그인 클라우수라 (Clausura, 2월~6월)로 나누어 진행했다. 각각의 리그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 아니라 싱글 라운드(single-round) 방식으로 진행하였고, 그 때문에 유럽의 축구리그들과는 달리 1년에 두 개의 챔피언이 존재했다. 아르헨티나에는 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컵 대회가 없다.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는 각각 '개막'(opening)와 '폐막'(closing)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같은 방식은 북반구, 특히 유럽의 축구 시즌과 비슷한 기간에 시즌을 전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예: 프리메라리가 2007-08) 승강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프리메라 B 나시오날 § 승격과 강등입니다. 승강제는 지난 3년간의 리그 성적을 합산해 다음 아페르투라가 시작할 때 이루어진다. 프리메라 디비시온 3년간 평균 성적(평균승률) 최하위 두 팀은 2부리그인 프리메라 B 나시오날 최상위 두 팀과 바로 교체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3년 평균 성적이 17위와 18위인 팀은 프로모시온 (promoción)이라 불리는 별도의 플레이오프를 프리메라 B 나시오날 4위와 3위 팀과 갖게 된다. 프로모시온에서 이긴 두 팀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있게 되므로, 승강이 이뤄지는 팀의 숫자는 2개 팀에서 4개 팀까지 변할 수 있다. 조금 복잡한 이 승강제 방식은 빅 클럽들의 강등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리그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두 클럽 리버 플레이트와 보카 주니어스 역시 강등 위기에 처한 적이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역시 빅 클럽인 산로렌소의 강등(1981년)으로 인해 생긴 제도이다. 국제 대회 참가[편집] 과거에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에서 두 팀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해 왔다. 그런데, 1987년부터 CONMEBOL에선 여러 클럽 선수권 대회를 만들고 폐지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페르코파. 코파 CONMEBOL, 그리고 코파 메르코수르 등이 바로 그런 클럽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들은 지금 코파 수다메리카나로 통합되었다. 또한 CONMEBOL이 각국의 리그 수준에 따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권을 다르게 배정하면서 아르헨티나 축구팀은 다섯 팀이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자격을 얻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남미의 모든 클럽축구 대회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거두어왔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 수다메리카나,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등 오늘날 존재하는 주요 대회뿐 아니라 이전의 클럽 대회에서도 가장 많은 우승컵을 가져갔다. 그러한 성과는 유럽 리그에 비해 좋지 못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축구 리그 중 하나로 꼽게 하는 근거가 되어왔다. 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코파 수다메리카나에 여섯 장의 출전권을 확보하고 있다. 2009년 대회까지 CONMEBOL에선 대회의 흥행을 위해 논란을 무릅쓰고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에게 성적과 관계 없이 초청팀으로써의 자동 출전권을 부여했다. 나머지 네 팀은 직전 시즌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 통합 승점 상위 네 팀으로 결정했는데, 몇년간 보카와 리베르의 성적이 좋지 못하면서 2010년 대회부터는 초청팀 참가권을 회수하고, 리그 성적만으로 출전팀을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참가팀 결정하는 시즌이 서로 다르고 여러 팀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동시에 출전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2012년 대회부터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같은 성적 합산 테이블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하는 다음 순위 팀들이 출전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성적 합산 테이블에서 1위부터 5위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하게 되면, 6위부터 10위가 코파 수다메리카나에 출전하는 식이다. (나머지 한 장의 출전권은 새로 시작된 코파 아르헨티나 우승 팀이 갖게 된다.)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역시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둬왔으며, 대회가 시작된 2002년부터 지금까지 2006년 대회를 제외하곤 모두 결승전에 올라 네 번의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2012/13 시즌 참가팀[편집] 고도이크루스 (C.D. Godoy Cruz) 뉴얼스 올드 보이스 (C.A. Newell's Old Boys) 라누스 (C.A. Lanús) 라싱 클럽 (Racing Club de Avellaneda) 리버 플레이트 (C.A. River Plate) 반필드 (C.A. Banfield) 보카 주니어스 (C.A. Boca Juniors) 벨레스 사르스필드 (C.A. Vélez Sársfield) 산로렌소 (C.A. San Lorenzo) 아르세날 (Arsenal F.C. de Sarandí)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A.A. Argentinos Juniors) 에스투디안테스 (Club Estudiantes de La Plata) 올림포 (Olimpo de Bahía Blanca) - 승격팀 올보이스 (C.A. All Boys) - 승격팀 우라칸 (C.A. Huracán) 인데펜디엔테 (C.A. Independiente) 콜론 산타페 (C.A. Colón de Santa Fe) 킬메스 (Quilmes Atlético Club) - 승격팀 티그레 (C.A. Tigre) 힘나시아 라 플라타 (Club de Gimnasia y Esgrima de La Plata) 역대 기록[편집] 아르헨티나 리그는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를 제외한 가장 오래된 축구 리그로써 1891년 영국인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최초의 우승 팀은 약간 논란이 있긴 하지만 세인트 앤드루스(Saint Andrews)로 기록되어 있다.[1] 여러 클럽들이 프로화되면서 1931년부터 캄페오나토(Campeonato)라는 이름으로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현재 아르헨티나 리그에는 축구 협회에서 주관하는 컵대회 또는 리그컵 대회가 없지만, 통합 우승 팀을 결정하거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같은 국제 대회 참가팀을 결정할 목적 등으로 몇몇 대회가 한시적으로 생기곤 했다. 아마추어 대회 우승 기록[편집] 1900년대 최강팀이었던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0년) 연도 대회 우승 189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1 세인트 앤드루스[1] 1892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우승 팀 없음. 1893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4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5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6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7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8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9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0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2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3 아르헨티나 축구협회2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4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5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6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7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8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9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0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1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2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킬메스 아르헨티나 축구연맹3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13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에스투디안테스 라 플라타 1914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15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6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7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8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9 아마추어 축구협회4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0 아마추어 축구협회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1 아마추어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2 아마추어 축구협회 인데펜디엔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3 아마추어 축구협회 산로렌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4 아마추어 축구협회 산로렌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5 아마추어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6 아마추어 축구협회 인데펜디엔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7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5 산로렌소 1928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우라칸 1929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힘나시아 라 플라타 1930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31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6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32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1933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스포르티보 독 수드 1934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Argentina Association Football League) 2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Asociación Argentina de Football) 3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Federación Argentina de Football) 4 아마추어 축구협회 (Asociación Amateurs de Football) 5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Asociación Amateurs Argentina de Football) 6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Asociación de Football Amateurs y Profesionales) 프로 리그 우승 기록[편집]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31 ~ 1966[편집] 1940~50년대 라 마키나라는 전술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로 꼽히는 리버 플레이트 (1941년) 시즌 우승 준우승 3위 1931 보카 주니어스 (50) 산로렌소 (45) 에스투디안테스 (44) 1932 리버 플레이트 (50)[2] 인데펜디엔테 (50) 라싱 클럽 (49) 1933 산로렌소 (50) 보카 주니어스 (49) 라싱 클럽 (48) 1934 보카 주니어스 (55) 인데펜디엔테 (54) 산로렌소 (51) 1935 보카 주니어스 (58) 인데펜디엔테 (55) 산로렌소 (49) 1936 리버 플레이트[3][4] 산로렌소[5] 라싱 클럽[6] 1937 리버 플레이트 (58) 인데펜디엔테 (52) 보카 주니어스 (45) 1938 인데펜디엔테 (53) 리버 플레이트 (51) 산로렌소 (43) 1939 인데펜디엔테 (56) 리버 플레이트, 우라칸 (50)[7] 1940 보카 주니어스 (55) 인데펜디엔테 (47) 리버 플레이트 (42) 1941 리버 플레이트 (44) 산로렌소 (40) 뉴얼스 올드 보이스 (38) 1942 리버 플레이트 (46) 산로렌소 (40) 우라칸 (37) 1943 보카 주니어스 (45) 리버 플레이트 (44) 산로렌소 (35) 1944 보카 주니어스 (46) 리버 플레이트 (44) 에스투디안테스 (39) 1945 리버 플레이트 (46) 보카 주니어스 (42) 인데펜디엔테 (41) 1946 산로렌소 (46) 보카 주니어스 (42) 리버 플레이트 (41) 1947 리버 플레이트 (48) 보카 주니어스 (42) 인데펜디엔테 (41) 1948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7) 에스투디안테스 (36) 1949 라싱 클럽 (49) 리버 플레이트 (43) 플라텐세 (43) 1950 라싱 클럽 (47) 보카 주니어스 (39) 인데펜디엔테 (39) 1951 라싱 클럽 (44)[8] 반필드 (44) 리버 플레이트 (43) 1952 리버 플레이트 (40) 라싱 클럽 (39) 인데펜디엔테 (35) 1953 리버 플레이트 (43)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라싱 클럽 (39) 1954 보카 주니어스 (45)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8) 1955 리버 플레이트 (45) 라싱 클럽 (38) 보카 주니어스 (37) 1956 리버 플레이트 (43) 라누스 (41) 보카 주니어스 (40) 1957 리버 플레이트 (46) 산로렌소 (38) 라싱 클럽 (36) 1958 라싱 클럽 (41) 보카 주니어스 (38) 산로렌소 (38) 1959 산로렌소 (45) 라싱 클럽 (38) 인데펜디엔테 (33) 1960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9)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39) 1961 라싱 클럽 (47) 산로렌소 (40) 리버 플레이트 (38) 1962 보카 주니어스 (43) 리버 플레이트 (41) 힘나시아 라 플라타 (38) 1963 인데펜디엔테 (37) 리버 플레이트 (35) 라싱 클럽 (39) 1964 보카 주니어스 (44) 인데펜디엔테 (38) 리버 플레이트 (37) 1965 보카 주니어스 (50) 리버 플레이트 (49)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1966 라싱 클럽 (61) 리버 플레이트 (56) 보카 주니어스 (48)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나시오날 (Torneo Metropolitano/Nacional) : 1967 ~ 1985[편집] 시즌 메트로폴리타노 나시오날 우승 준우승 우승 준우승 1967 에스투디안테스[9] 라싱 클럽 인데펜디엔테 (26) 에스투디안테스 (24) 1968 산로렌소[10] 에스투디안테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22)[11] 리버 플레이트 (22) 1969 차카리타 주니어스[12] 리버 플레이트 보카 주니어스 (29) 리버 플레이트 (27) 1970 인데펜디엔테 (27)[13] 리버 플레이트 (27) 보카 주니어스[14] 로사리오 센트랄 1971 인데펜디엔테 (50) 벨레스 사르스필드 (49) 로사리오 센트랄[15] 산로렌소 1972 산로렌소 (49) 라싱 클럽 (43) 산로렌소[16] 리버 플레이트 1973 우라칸 (46) 보카 주니어스 (42) 로사리오 센트랄 (5)[17] 리버 플레이트 (3) 1974 뉴얼스 올드 보이스 (5)[17] 로사리오 센트랄 (3) 산로렌소 (11)[18] 로사리오 센트랄 (10) 1975 리버 플레이트 (55) 우라칸 (51) 리버 플레이트 (12)[18] 에스투디안테스 (11) 1976 보카 주니어스 (19)[19] 우라칸 (16) 보카 주니어스[20] 리버 플레이트 1977 리버 플레이트 (63) 인데펜디엔테 (61) 인데펜디엔테[21] 타예레스 1978 킬메스 (54) 보카 주니어스 (53) 인데펜디엔테[22] 리버 플레이트 1979 리버 플레이트[23] 벨레스 사르스필드 리버 플레이트[24] 우니온 데 산타페 1980 리버 플레이트 (51)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42) 로사리오 센트랄[25] 라싱 코르도바 1981 보카 주니어스 (50) 페로 카릴 오에스테 (49) 리버 플레이트[26] 페로 카릴 오에스테 ↓ 1982년부터 나시오날이 전반기, 메트로폴리타노가 후반기로 전환됨. (단년제에서 연년제 리그로 전환.) ↓ 1982 에스투디안테스 (54) 인데펜디엔테 (52) 페로 카릴 오에스테[27] 킬메스 1983 인데펜디엔테 (48) 산로렌소 (47) 에스투디안테스[28] 인데펜디엔테 1984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51) 페로 카릴 오에스테 (50) 페로 카릴 오에스테[29] 리버 플레이트 1985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가 열리지 않음.[30]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31] 벨레스 사르스필드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85/86 ~ 1990/91[편집] 시즌 우승 준우승 3위 1985/86 리버 플레이트 (56) 뉴얼스 올드 보이스 (46)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46) 1986/87 로사리오 센트랄 (49) 뉴얼스 올드 보이스 (48) 인데펜디엔테 (47) 1987/88 뉴얼스 올드 보이스 (55) 산로렌소 (49) 라싱 클럽 (48) 1988/89[32] 인데펜디엔테 (84) 보카 주니어스 (76)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68) 1989/90 리버 플레이트 (53) 인데펜디엔테 (46) 보카 주니어스 (43) 1990/91[33] 뉴얼스 올드 보이스[34][35] 보카 주니어스[36] -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Torneo Apertura/Clausura) : 1991/92 ~ 2012/13[편집] 시즌 아페르투라 클라우수라 우승 준우승 우승 준우승 1991/92 리버 플레이트 (31) 보카 주니어스 (24) 뉴얼스 올드 보이스 (29) 벨레스 사르스필드 (27) 1992/93 보카 주니어스 (27) 리버 플레이트 (23) 벨레스 사르스필드 (27) 인데펜디엔테 (24) 1993/94 리버 플레이트 (24) 벨레스 사르스필드 (23) 인데펜디엔테 (26) 우라칸 (25) 1994/95 리버 플레이트 (31) 산로렌소 (26) 산로렌소 (30) 힘나시아 라 플라타 (29) 1995/96[37] 벨레스 사르스필드 (41) 라싱 클럽 (35)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힘나시아 라 플라타 (39) 1996/97 리버 플레이트 (46) 인데펜디엔테 (37) 리버 플레이트 (41) 콜론 산타페 (35) 1997/98 리버 플레이트 (45) 보카 주니어스(44) 벨레스 사르스필드 (46) 라누스 (40) 1998/99 보카 주니어스 (45) 힘나시아 라 플라타 (36) 보카 주니어스 (44) 리버 플레이트 (37) 1999/2000 리버 플레이트 (44) 로사리오 센트랄 (43) 리버 플레이트 (42) 인데펜디엔테 (36) 2000/01 보카 주니어스 (41) 리버 플레이트 (37) 산로렌소 (47) 리버 플레이트 (41) 2001/02 라싱 클럽 (42) 리버 플레이트 (41) 리버 플레이트 (43) 힘나시아 라 플라타 (37) 2002/03 인데펜디엔테 (43) 보카 주니어스 (40) 리버 플레이트 (43) 보카 주니어스 (39) 2003/04 보카 주니어스 (39) 산로렌소 (36) 리버 플레이트 (40) 보카 주니어스 (36) 2004/05 뉴얼스 올드 보이스 (36) 벨레스 사르스필드 (34)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반필드 (33) 2005/06 보카 주니어스 (40) 힘나시아 라 플라타 (37) 보카 주니어스 (43) 라누스 (35) 2006/07 에스투디안테스 (44)[38] 보카 주니어스 (44) 산로렌소 (45) 보카 주니어스 (39) 2007/08 라누스 (38) 티그레 (34) 리버 플레이트 (43) 보카 주니어스 (39) 2008/09 보카 주니어스 (39)[39] 티그레 (39)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우라칸 (38) 2009/10 반필드 (41) 뉴얼스 (39)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41) 에스투디안테스 (40) 2010/11 에스투디안테스 (45) 벨레스 사르스필드 (43)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라누스 (35) 2011/12 보카 주니어스 (43) 라싱 클럽 (31) 아르세날 (38) 티그레 (36) 기타 공식 대회[편집] 시즌 컵 명칭 우승 준우승 1958 코파 수에시아[40] 아틀란타 라싱 클럽 1969 코파 아르헨티나[41] 보카 주니어스 아틀란타 1993 코파 센테나리오[42] 힘나시아 라 플라타 리버 플레이트 팀별 우승 횟수[편집] 팀명(Equipo) 우승(Campeón) 준우승(Subcampeón) 3위[43](Tercero) 리버 플레이트 33 25 11 보카 주니어스 24 18 22 인데펜디엔테 14 14 6 산로렌소 10 11 14 벨레스 사르스필드 8 8 10 라싱 클럽 7 7 10 에스투디안테스 5 4 7 뉴얼스 올드 보이스 5 3 3 로사리오 센트랄 4 4 2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3 1 1 페로 카릴 오에스테 2 3 1 우라칸 1 5 2 라누스 1 4 4 반필드 1 2 2 킬메스 1 1 0 아르세날 1 0 1 차카리타 주니어스 1 0 1 힘나시아 라 플라타 0 5 3 티그레 0 3 0 콜론 산타페 0 1 2 타예레스 0 1 2 우니온 데 산타페 0 1 1 라싱 코르도바 0 1 0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0 0 3 고도이크루스 0 0 2 아틀란타 0 0 1 플라텐세 0 0 1 아틀레티코 투쿠만 0 0 1 템펄레이 0 0 1 역대 득점왕[편집] 대회 선수 소속팀 골 1931 알베르토 소사야 에스투디안테스 33 1932 베르나베 페데이라 리버 플레이트 43 1933 프란시스코 바라조 보카 주니어스 34 1934 에바리스토 바레라 라싱 클럽 34 1935 아구스틴 코소 벨레스 사르스필드 33 1936 에바리스토 바레라 라싱 클럽 32 1937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7 1938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3 1939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0 1940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 라싱 클럽 33 이시드로 랑가라 산로렌소 33 1941 호세 칸텔리 뉴얼스 올드 보이스 30 1942 리날도 마르티노 산로렌소 25 1943 루이스 아리에타 라누스 23 라울 프루토스 플라텐세 23 앙헬 라브루나 리버 플레이트 23 1944 아틸리오 메조네 우라칸 26 1945 앙헬 라브루나 리버 플레이트 24 1946 마리오 보제 보카 주니어스 24 1947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리버 플레이트 27 1948 베냐민 산토스 로사리오 센트랄 21 1949 자밀 시메스 라싱 클럽 26 후안 호세 피수티 반필드 26 1950 마리오 파파 산로렌소 24 1951 산티아고 베르나사 리버 플레이트 22 1952 에두아르도 리카그니 우라칸 28 1953 후안 호세 피수티 라싱 클럽 22 후안 아르만도 베나비데스 산로렌소 22 1954 앙헬 베르니 산로렌소 19 호세 보레조 보카 주니어스 19 노르베르토 콘데 벨레스 사르스필드 19 1955 오스카르 마세이 로사리오 센트랄 21 1956 후안 알베르토 카스트로 로사리오 센트랄 17 에르네스토 그리조 인데펜디엔테 17 1957 로베르토 사라테 리버 플레이트 22 1958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28 1959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31 1960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34 1961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26 1962 루이스 아르티메 리버 플레이트 25 1963 루이스 아르티메 리버 플레이트 25 1964 엑토르 베이라 산로렌소 17 1965 후안 카를로스 카로네 벨레스 사르스필드 19 1966 루이스 아르티메 인데펜디엔테 23 1967 메트로폴리타노 베르나르도 아코스타 라누스 18 1967 나시오날 루이스 아르티메 인데펜디엔테 11 1968 메트로폴리타노 알프레도 오베르티[44] 로스 안데스 13 1968 나시오날 오마르 웨베 벨레스 사르스필드 13 1969 메트로폴리타노 왈테르 마차두 다 시우바 라싱 클럽 14 1969 나시오날 로돌포 피셔 산로렌소 14 카를로스 부자 플라텐세 14 1970 메트로폴리타노 오스카르 마스 리버 플레이트 16 1970 나시오날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18 1971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36 1971 나시오날 알프레도 오베르티 뉴얼스 올드보이스 10 호세 루니스 후벤투드 안토니아나 10 1972 메트로폴리타노 미겔 앙헬 브린디시 우라칸 21 1972 나시오날 카를로스 모레테 리버 플레이트 14 1973 메트로폴리타노 오스카르 마스 리버 플레이트 17 우고 쿠리오니 보카 주니어스 17 이그나시오 페냐 에스투디안테스 (LP) 17 1973 나시오날 후안 고메스 보글리노 아틀란타 18 1974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모레테 리버 플레이트 18 1974 나시오날 마리오 알베르토 켐페스 로사리오 센트랄 25 1975 메트로폴리타노 엑토르 스코타 산로렌소 32 1975 나시오날 엑토르 스코타 산로렌소 28 1976 메트로폴리타노 마리오 알베르토 켐페스 로사리오 센트랄 21 1976 나시오날 노르베르토 에레수마 산로렌소 마르델플라타 12 루이스 루데냐 타예레스 12 1977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알바레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7 1977 나시오날 알프레도 레타누 에스투디안테스 (LP) 13 1978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2 루이스 안드레우치 킬메스 22 1978 나시오날 호세 레이날디 타예레스 18 1979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4 세르히오 포르투나토 에스투디안테스 (LP) 14 1979 나시오날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2 1980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5 1980 나시오날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7 1981 메트로폴리타노 라울 데라크루스 차파로 인스티투토 코르도바 20 1981 나시오날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15 1982 나시오날 미겔 앙헬 후아레스 페로 카릴 오에스테 22 1982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모레테 인데펜디엔테 20 1983 나시오날 아르만도 우시조스 로마 네그라 11 1983 메트로폴리타노 빅토르 라모스 뉴얼스 올드보이스 30 1984 나시오날 페드로 파스쿠지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9 1984 메트로폴리타노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24 1985 나시오날 호르헤 코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1985/86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25 1986/87 오마르 아르날도 팔마 로사리오 센트랄 20 1987/88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18 1988/89 오스카르 데르티시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0 네스토르 고로시토 산로렌소 20 1989/90 아리엘 코소니 뉴얼스 올드보이스 23 1990/91 에스테반 곤살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8 1991 아페르투라 라몬 앙헬 디아스 리버 플레이트 14 1992 클라우수라 디에고 라토레 보카 주니어스 9 다리오 스코토 플라텐세 9 1992 아페르투라 알베르토 아코스타 산로렌소 12 1993 클라우수라 루벤 다 실바 리버 플레이트 13 1993 아페르투라 세르히오 마르티네스 보카 주니어스 12 1994 클라우수라 에르난 크레스포 리버 플레이트 11 마르셀로 에스피나 플라텐세 11 1994 아페르투라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12 1995 클라우수라 호세 오스카르 플로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4 1995 아페르투라 호세 루이스 칼데론 에스투디안테스 (LP) 13 1996 클라우수라 아리엘 로페스 라누스 12 1996 아페르투라 구스타보 레히 페로 카릴 오에스테 11 1997 클라우수라 세르히오 마르티네스 보카 주니어스 15 1997 아페르투라 루벤 다 실바 로사리오 센트랄 15 1998 클라우수라 로베르토 소사 힘나시아 라 플라타 16 1998 아페르투라 마르틴 팔레르모 보카 주니어스 20 1999 클라우수라 호세 루이스 칼데론 인데펜디엔테 17 1999 아페르투라 하비에르 사비올라 리버 플레이트 15 2000 클라우수라 에스테반 푸에르테스 콜론 산타페 17 2000 아페르투라 후안 파블로 앙헬 리버 플레이트 13 2001 클라우수라 베르나르도 로메오 산로렌소 15 2001 아페르투라 마르틴 카르데티 리버 플레이트 17 2002 클라우수라 페르나르도 카베나기 리버 플레이트 15 2002 아페르투라 안드레스 실베라 인데펜디엔테 16 2003 클라우수라 루시아노 피게로아 로사리오 센트랄 17 2003 아페르투라 에르네스토 파리아스 에스투디안테스 (LP) 12 2004 클라우수라 로날도 사라테 벨레스 사르스필드 13 2004 아페르투라 리산드로 로페스 라싱 클럽 12 2005 클라우수라 마리아노 파보네 에스투디안테스 (LP) 16 2005 아페르투라 하비에르 캄포라 티로 페데랄 13 2006 클라우수라 곤살로 바르가스 힘나시아 라 플라타 12 2006 아페르투라 로드리고 팔라시오 보카 주니어스 12 마우로 사라테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2007 클라우수라 마르틴 팔레르모 보카 주니어스 11 2007 아페르투라 헤르만 데니스 인데펜디엔테 18 2008 클라우수라 다리오 츠비타니치 반필드 13 2008 아페르투라 호세 산드 라누스 15 2009 클라우수라 호세 산드 라누스 13 2009 아페르투라 산티아고 실바 반필드 14 2010 클라우수라 마우로 보세지 에스투디안테스 (LP) 13 2010 아페르투라 데니스 스트라콸루르시 티그레 12 산티아고 실바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2011 클라우수라 하비에르 캄포라 우라칸 11 테오필로 구티에레스 라싱 클럽 11 2011 아페르투라 루벤 라미레스 고도이 크루스 12 2012 클라우수라 카를로스 루나 티그레 12 통산 득점 기록[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참고사항[편집] ↑ 가 나 첫 대회는 다섯 개 팀이 참가해 팀 별로 8 경기를 벌였고, 올드 칼레도니언스(Old Caledonians)와 세인트 앤드루스가 공동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곧 이뤄진 플레이오프에서 세인트 앤드루스가 이겨 AFA 기록에 최종 우승 팀으로 되어 있다. [1]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3 - 0 인데펜디엔테. ↑ 코파 데 오로(Copa de Oro)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4 - 2 산로렌소. ↑ 코파 캄페오나토 우승자. ↑ 부에노스아이레스 코파 데 오노르(Copa de Honor de municipalidad Buenos Aires). ↑ 코파 캄페오나토 3위. ↑ 결정전: 리버 플레이트 3 - 3 우라칸. 공동 준우승. ↑ 결승전: 라싱 클럽 0 - 0 반필드; 라싱 클럽 1 - 0 반필드. ↑ 결승전: 에스투디안테스 3 - 0 라싱 클럽. ↑ 결승전: 산로렌소 2 - 1 에스투디안테스.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2 - 0 라싱 클럽; 리버 플레이트 1 - 1 벨레스 사르스필드; 벨레스 사르스필드 4 - 2 라싱 클럽. ↑ 결승: 차카리타 주니어스 4 - 1 리버 플레이트. ↑ 다득점으로 우승자 결정: 인데펜디엔테(43득점) - 리버 플레이트(42득점).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2 - 1 로사리오 센트랄. ↑ 결승전: 로사리오 센트랄 2 - 1 산로렌소. ↑ 결승전: 산로렌소 1 - 0 리버 플레이트. ↑ 가 나 두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두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가 나 네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두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두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여섯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1 - 0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인데펜디엔테 1 - 1 타예레스; 타예레스 2 - 2 인데펜디엔테.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0 - 0 인데펜디엔테; 인데펜디엔테 2 - 0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벨레스 사르스필드 0 - 2 리버 플레이트; 리버 플레이트 5 - 1 벨레스 사르스필드. ↑ 결승전: 우니온 데 산타페 1 - 1 리버 플레이트; 리버 플레이트 0 - 0 우니온 데 산타페. ↑ 결승전: 로사리오 센트랄 5 - 1 라싱 코르도바; 라싱 코르도바 2 - 0 로사리오 센트랄.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1 - 0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0 - 1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킬메스 0 - 0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2 - 0 킬메스. ↑ 결승전: 에스투디안테스 2 - 0 인데펜디엔테; 인데펜디엔테 2 - 1 에스투디안테스.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0 - 3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1 - 0 리버 플레이트. ↑ 본래 메트로폴리타노는 전반기, 나시오날은 후반기에 진행되었지만, 1982년부터 순서가 바뀌었다. 1985년 나시오날을 끝으로 메트로폴리타노와 나시오날이 폐지되고, 유럽 리그처럼 연년제 방식의 리그가 시작되었다. ↑ 결승전: 벨레스 사르스필드 1 - 2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이 시즌에서 각 경기 승자는 승점 3점을 얻었는데, 무승부인 경우엔 승부차기를 통해 승자는 2점, 패자는 1점을 얻었다. 그 때문에 각 팀의 승점이 다른 시즌보다 훨씬 높았다. ↑ 1990/91 시즌에 처음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가 도입되었는데, 뉴얼스 올드 보이스와 보카 주니어스가 각각 우승하였다. AFA에서는 두 팀간의 경기를 통해 통합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기로 하였고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펼쳤다. 승부차기 끝에 뉴얼스 올드 보이스가 결국 우승자로 결정되었다. 챔피언 결정전은 국가대표팀이 칠레에서 열렸던 코파 아메리카에 참여하는 중에 열렸기 때문에 대표팀에 소속된 양팀 선수들만큼 새로운 선수를 충원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1991/92 시즌에도 유사한 챔피언 결정전이 열렸는데, 그것은 실제로 챔피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3 조별 예선으로써, 본선 진출팀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3에서는 진출팀을 각 나라별로 묶어 조별 예선을 진행하였다.) ↑ 결승전: 뉴얼스 올드 보이스 1 - 0 보카 주니어스; 보카 주니어스 1 (1) - (3) 0 뉴얼스 올드 보이스 (승부차기). ↑ 토르네오 아페르투라 우승. ↑ 토르네오 클라우수라 우승. ↑ 이 시즌부터 각 경기 승자에게 승점 3점씩 부여하기 시작했다.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1 - 2 에스투디안테스. ↑ 아페르투라가 종료된 시점에서 산로렌소와 보카 주니어스, 그리고 티그레의 승점이 39점으로 같았기 때문에 세 팀은 3자간 캄페온 결정전을 벌였다. 모든 팀이 각각 1승 1패를 거두었지만 골득실에서 앞선 보카가 우승 팀, 티그레가 준우승 팀이 되었다. ↑ 코파 수에시아(Copa Suecia):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공식 컵대회. 결승전: 아틀란타 3 - 1 라싱 클럽 ↑ 코파 아르헨티나(Copa Argentina de Fútbol):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데 클루베스(*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와는 다른 대회)에 출전할 팀을 선발하기 위해 만들었던 컵 대회.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3 - 1 아틀란타; 아틀란타 1 - 0 보카 주니어스. ↑ 코파 센테나리오(Copa Centenario):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창설 100주년 기념 컵 대회 [2]. 결승전: 힘나시아 라 플라타 3 - 1 리버 플레이트 ↑ 3위 또는 4강: 토르네오 나시오날이나 메트로폴리타노에서는 리그전이 아닌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회가 진행되기도 했으며, 이경우 별도의 3,4위 결정전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 RSSSFGoles argentinos Archived 2012년 11월 15일 - 웨이백 머신 ESPN Deportes Universo Fútbol La Bombonera Archived 2012년 10월 24일 - 웨이백 머신Somos cuervos Archived 2012년 1월 12일 - 웨이백 머신 아르헨티나 클럽의 국제대회 성적[편집] 코파 리베르타도레스[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인데펜디엔테 7 0 1964, 1965, 1972, 1973, 1974, 1975, 1984 보카 주니어스 6 3 1977, 1978, 2000, 2001, 2003, 2007 1963, 1979, 2004 에스투디안테스 4 1 1968, 1969, 1970, 2009 1971 리버 플레이트 2 2 1986, 1996 1966, 1976 라싱 클럽 1 0 1967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 0 1985 벨레스 사르스필드 1 0 1994 뉴얼스 올드 보이스 0 2 1988, 1992 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보카 주니어스 2 0 2004, 2005 산로렌소 1 0 2002 아르세날 1 0 2007 리버 플레이트 0 1 2003 레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보카 주니어스 4 1 1990, 2005, 2006, 2008 2004 인데펜디엔테 1 1 1995 1996 벨레스 사르스필드 1 1 1997 1995 리버 플레이트 0 2 1997, 1998 라싱 클럽 0 1 1989 산로렌소 0 1 2003 아르세날 0 1 2008 같이 보기[편집]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시스템 프리메라 B 나시오날 토르네오 데 베라노 외부 링크[편집] (스페인어/영어)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 공식 홈페이지 (스페인어) Base de Datos del Futbol Argentino (스페인어) Universo Futbol: 각 디비시온과 경기 통계 및 정보 (영어) RSSSF: Final Tables Argentina since 1891 vdeh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16/17) 고도이크루스 뉴얼스 올드 보이스 데펜사 이 후스티시아 라누스 라싱 라파엘라 로사리오 센트랄 리버 플레이트 반피엘드 벨그라노 벨레스 사르스피엘드 보카 주니어스 사르미엔토 산로렌소 아르세날 알도시비 에스투디안테스 올림포 우라칸 인데펜디엔테 콜론 킬메스 템페를레이 투쿠만 타예레스 티그레 파트로나토 힘나시아 라플라타 vdeh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시즌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1991 ~) 1991/92 1992/93 1993/94 1994/95 1995/96 1996/97 1997/98 1998/99 1999/2000 2000/01 2001/02 2002/03 2003/04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8/09 2009/10 vdeh 아르헨티나의 축구대표팀 국가대표팀 여자 국가대표팀 U-20 U-17 국내 리그남자 프리메라 디비시온 프리메라 B 나시오날 프리메라 B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A 프리메라 C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B 프리메라 D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C 여자 캄페오나토 데 푸트볼 페메니노 기타 문서 축구 협회 축구팀 목록 경기장 목록 축구 선수 목록 리그 시스템 vdeh남아메리카의 축구 1부 리그 (CONMEBOL)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르헨티나_프리메라_디비시온&oldid=24183435" 분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남아메리카의 축구 1부 리그1891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숨은 분류: 스페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3: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12-13 시작년도 1891년 국가 아르헨티나 하위 리그 프리메라 B 나시오날 참가 팀 수 20 국내 리그 순위 1 최근 우승 팀 (2012 클라우수라) 아르세날 최다 우승 팀 리버 플레이트 (33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Primera División de Argentina)은 아르헨티나의 프로축구 1부리그이다. 현재 20개 팀이 리그 방식으로 경기를 치른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and Statistics) 자료 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리그는 현재 세계 상위권 프로 축구 리그 중 하나에 속한다.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로 꼽히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그리고 포르투갈 리가 등 많은 리그에서 아르헨티나 리그 출신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다. 목차 1 리그 진행 방식 1.1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1.2 승강제 2 국제 대회 참가 2.1 코파 수다메리카나 3 2012/13 시즌 참가팀 4 역대 기록 4.1 아마추어 대회 우승 기록 4.2 프로 리그 우승 기록 4.2.1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31 ~ 1966 4.2.2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나시오날 (Torneo Metropolitano/Nacional) : 1967 ~ 1985 4.2.3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85/86 ~ 1990/91 4.2.4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Torneo Apertura/Clausura) : 1991/92 ~ 2012/13 4.2.5 기타 공식 대회 4.2.6 팀별 우승 횟수 4.3 역대 득점왕 4.4 통산 득점 기록 4.5 참고사항 5 아르헨티나 클럽의 국제대회 성적 5.1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5.2 코파 수다메리카나 5.3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리그 진행 방식[편집] 2012/13 시즌부터 프리메라 디비시온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하고 하나의 우승 팀을 정하는 새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입니다. 2011/12 시즌까지 프리메라 디비시온에는 전기리그인 아페르투라 (Apertura, 8월~12월)와 후기리그인 클라우수라 (Clausura, 2월~6월)로 나누어 진행했다. 각각의 리그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 아니라 싱글 라운드(single-round) 방식으로 진행하였고, 그 때문에 유럽의 축구리그들과는 달리 1년에 두 개의 챔피언이 존재했다. 아르헨티나에는 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컵 대회가 없다.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는 각각 '개막'(opening)와 '폐막'(closing)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같은 방식은 북반구, 특히 유럽의 축구 시즌과 비슷한 기간에 시즌을 전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예: 프리메라리가 2007-08) 승강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프리메라 B 나시오날 § 승격과 강등입니다. 승강제는 지난 3년간의 리그 성적을 합산해 다음 아페르투라가 시작할 때 이루어진다. 프리메라 디비시온 3년간 평균 성적(평균승률) 최하위 두 팀은 2부리그인 프리메라 B 나시오날 최상위 두 팀과 바로 교체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3년 평균 성적이 17위와 18위인 팀은 프로모시온 (promoción)이라 불리는 별도의 플레이오프를 프리메라 B 나시오날 4위와 3위 팀과 갖게 된다. 프로모시온에서 이긴 두 팀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있게 되므로, 승강이 이뤄지는 팀의 숫자는 2개 팀에서 4개 팀까지 변할 수 있다. 조금 복잡한 이 승강제 방식은 빅 클럽들의 강등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리그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두 클럽 리버 플레이트와 보카 주니어스 역시 강등 위기에 처한 적이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역시 빅 클럽인 산로렌소의 강등(1981년)으로 인해 생긴 제도이다. 국제 대회 참가[편집] 과거에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에서 두 팀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해 왔다. 그런데, 1987년부터 CONMEBOL에선 여러 클럽 선수권 대회를 만들고 폐지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페르코파. 코파 CONMEBOL, 그리고 코파 메르코수르 등이 바로 그런 클럽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들은 지금 코파 수다메리카나로 통합되었다. 또한 CONMEBOL이 각국의 리그 수준에 따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권을 다르게 배정하면서 아르헨티나 축구팀은 다섯 팀이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자격을 얻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남미의 모든 클럽축구 대회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거두어왔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 수다메리카나,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등 오늘날 존재하는 주요 대회뿐 아니라 이전의 클럽 대회에서도 가장 많은 우승컵을 가져갔다. 그러한 성과는 유럽 리그에 비해 좋지 못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축구 리그 중 하나로 꼽게 하는 근거가 되어왔다. 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코파 수다메리카나에 여섯 장의 출전권을 확보하고 있다. 2009년 대회까지 CONMEBOL에선 대회의 흥행을 위해 논란을 무릅쓰고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에게 성적과 관계 없이 초청팀으로써의 자동 출전권을 부여했다. 나머지 네 팀은 직전 시즌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 통합 승점 상위 네 팀으로 결정했는데, 몇년간 보카와 리베르의 성적이 좋지 못하면서 2010년 대회부터는 초청팀 참가권을 회수하고, 리그 성적만으로 출전팀을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참가팀 결정하는 시즌이 서로 다르고 여러 팀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동시에 출전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2012년 대회부터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같은 성적 합산 테이블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하는 다음 순위 팀들이 출전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성적 합산 테이블에서 1위부터 5위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하게 되면, 6위부터 10위가 코파 수다메리카나에 출전하는 식이다. (나머지 한 장의 출전권은 새로 시작된 코파 아르헨티나 우승 팀이 갖게 된다.)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역시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둬왔으며, 대회가 시작된 2002년부터 지금까지 2006년 대회를 제외하곤 모두 결승전에 올라 네 번의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2012/13 시즌 참가팀[편집] 고도이크루스 (C.D. Godoy Cruz) 뉴얼스 올드 보이스 (C.A. Newell's Old Boys) 라누스 (C.A. Lanús) 라싱 클럽 (Racing Club de Avellaneda) 리버 플레이트 (C.A. River Plate) 반필드 (C.A. Banfield) 보카 주니어스 (C.A. Boca Juniors) 벨레스 사르스필드 (C.A. Vélez Sársfield) 산로렌소 (C.A. San Lorenzo) 아르세날 (Arsenal F.C. de Sarandí)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A.A. Argentinos Juniors) 에스투디안테스 (Club Estudiantes de La Plata) 올림포 (Olimpo de Bahía Blanca) - 승격팀 올보이스 (C.A. All Boys) - 승격팀 우라칸 (C.A. Huracán) 인데펜디엔테 (C.A. Independiente) 콜론 산타페 (C.A. Colón de Santa Fe) 킬메스 (Quilmes Atlético Club) - 승격팀 티그레 (C.A. Tigre) 힘나시아 라 플라타 (Club de Gimnasia y Esgrima de La Plata) 역대 기록[편집] 아르헨티나 리그는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를 제외한 가장 오래된 축구 리그로써 1891년 영국인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최초의 우승 팀은 약간 논란이 있긴 하지만 세인트 앤드루스(Saint Andrews)로 기록되어 있다.[1] 여러 클럽들이 프로화되면서 1931년부터 캄페오나토(Campeonato)라는 이름으로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현재 아르헨티나 리그에는 축구 협회에서 주관하는 컵대회 또는 리그컵 대회가 없지만, 통합 우승 팀을 결정하거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같은 국제 대회 참가팀을 결정할 목적 등으로 몇몇 대회가 한시적으로 생기곤 했다. 아마추어 대회 우승 기록[편집] 1900년대 최강팀이었던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0년) 연도 대회 우승 189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1 세인트 앤드루스[1] 1892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우승 팀 없음. 1893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4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5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6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7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8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9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0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2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3 아르헨티나 축구협회2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4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5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6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7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8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9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0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1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2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킬메스 아르헨티나 축구연맹3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13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에스투디안테스 라 플라타 1914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15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6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7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8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9 아마추어 축구협회4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0 아마추어 축구협회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1 아마추어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2 아마추어 축구협회 인데펜디엔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3 아마추어 축구협회 산로렌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4 아마추어 축구협회 산로렌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5 아마추어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6 아마추어 축구협회 인데펜디엔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7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5 산로렌소 1928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우라칸 1929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힘나시아 라 플라타 1930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31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6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32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1933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스포르티보 독 수드 1934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Argentina Association Football League) 2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Asociación Argentina de Football) 3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Federación Argentina de Football) 4 아마추어 축구협회 (Asociación Amateurs de Football) 5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Asociación Amateurs Argentina de Football) 6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Asociación de Football Amateurs y Profesionales) 프로 리그 우승 기록[편집]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31 ~ 1966[편집] 1940~50년대 라 마키나라는 전술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로 꼽히는 리버 플레이트 (1941년) 시즌 우승 준우승 3위 1931 보카 주니어스 (50) 산로렌소 (45) 에스투디안테스 (44) 1932 리버 플레이트 (50)[2] 인데펜디엔테 (50) 라싱 클럽 (49) 1933 산로렌소 (50) 보카 주니어스 (49) 라싱 클럽 (48) 1934 보카 주니어스 (55) 인데펜디엔테 (54) 산로렌소 (51) 1935 보카 주니어스 (58) 인데펜디엔테 (55) 산로렌소 (49) 1936 리버 플레이트[3][4] 산로렌소[5] 라싱 클럽[6] 1937 리버 플레이트 (58) 인데펜디엔테 (52) 보카 주니어스 (45) 1938 인데펜디엔테 (53) 리버 플레이트 (51) 산로렌소 (43) 1939 인데펜디엔테 (56) 리버 플레이트, 우라칸 (50)[7] 1940 보카 주니어스 (55) 인데펜디엔테 (47) 리버 플레이트 (42) 1941 리버 플레이트 (44) 산로렌소 (40) 뉴얼스 올드 보이스 (38) 1942 리버 플레이트 (46) 산로렌소 (40) 우라칸 (37) 1943 보카 주니어스 (45) 리버 플레이트 (44) 산로렌소 (35) 1944 보카 주니어스 (46) 리버 플레이트 (44) 에스투디안테스 (39) 1945 리버 플레이트 (46) 보카 주니어스 (42) 인데펜디엔테 (41) 1946 산로렌소 (46) 보카 주니어스 (42) 리버 플레이트 (41) 1947 리버 플레이트 (48) 보카 주니어스 (42) 인데펜디엔테 (41) 1948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7) 에스투디안테스 (36) 1949 라싱 클럽 (49) 리버 플레이트 (43) 플라텐세 (43) 1950 라싱 클럽 (47) 보카 주니어스 (39) 인데펜디엔테 (39) 1951 라싱 클럽 (44)[8] 반필드 (44) 리버 플레이트 (43) 1952 리버 플레이트 (40) 라싱 클럽 (39) 인데펜디엔테 (35) 1953 리버 플레이트 (43)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라싱 클럽 (39) 1954 보카 주니어스 (45)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8) 1955 리버 플레이트 (45) 라싱 클럽 (38) 보카 주니어스 (37) 1956 리버 플레이트 (43) 라누스 (41) 보카 주니어스 (40) 1957 리버 플레이트 (46) 산로렌소 (38) 라싱 클럽 (36) 1958 라싱 클럽 (41) 보카 주니어스 (38) 산로렌소 (38) 1959 산로렌소 (45) 라싱 클럽 (38) 인데펜디엔테 (33) 1960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9)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39) 1961 라싱 클럽 (47) 산로렌소 (40) 리버 플레이트 (38) 1962 보카 주니어스 (43) 리버 플레이트 (41) 힘나시아 라 플라타 (38) 1963 인데펜디엔테 (37) 리버 플레이트 (35) 라싱 클럽 (39) 1964 보카 주니어스 (44) 인데펜디엔테 (38) 리버 플레이트 (37) 1965 보카 주니어스 (50) 리버 플레이트 (49)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1966 라싱 클럽 (61) 리버 플레이트 (56) 보카 주니어스 (48)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나시오날 (Torneo Metropolitano/Nacional) : 1967 ~ 1985[편집] 시즌 메트로폴리타노 나시오날 우승 준우승 우승 준우승 1967 에스투디안테스[9] 라싱 클럽 인데펜디엔테 (26) 에스투디안테스 (24) 1968 산로렌소[10] 에스투디안테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22)[11] 리버 플레이트 (22) 1969 차카리타 주니어스[12] 리버 플레이트 보카 주니어스 (29) 리버 플레이트 (27) 1970 인데펜디엔테 (27)[13] 리버 플레이트 (27) 보카 주니어스[14] 로사리오 센트랄 1971 인데펜디엔테 (50) 벨레스 사르스필드 (49) 로사리오 센트랄[15] 산로렌소 1972 산로렌소 (49) 라싱 클럽 (43) 산로렌소[16] 리버 플레이트 1973 우라칸 (46) 보카 주니어스 (42) 로사리오 센트랄 (5)[17] 리버 플레이트 (3) 1974 뉴얼스 올드 보이스 (5)[17] 로사리오 센트랄 (3) 산로렌소 (11)[18] 로사리오 센트랄 (10) 1975 리버 플레이트 (55) 우라칸 (51) 리버 플레이트 (12)[18] 에스투디안테스 (11) 1976 보카 주니어스 (19)[19] 우라칸 (16) 보카 주니어스[20] 리버 플레이트 1977 리버 플레이트 (63) 인데펜디엔테 (61) 인데펜디엔테[21] 타예레스 1978 킬메스 (54) 보카 주니어스 (53) 인데펜디엔테[22] 리버 플레이트 1979 리버 플레이트[23] 벨레스 사르스필드 리버 플레이트[24] 우니온 데 산타페 1980 리버 플레이트 (51)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42) 로사리오 센트랄[25] 라싱 코르도바 1981 보카 주니어스 (50) 페로 카릴 오에스테 (49) 리버 플레이트[26] 페로 카릴 오에스테 ↓ 1982년부터 나시오날이 전반기, 메트로폴리타노가 후반기로 전환됨. (단년제에서 연년제 리그로 전환.) ↓ 1982 에스투디안테스 (54) 인데펜디엔테 (52) 페로 카릴 오에스테[27] 킬메스 1983 인데펜디엔테 (48) 산로렌소 (47) 에스투디안테스[28] 인데펜디엔테 1984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51) 페로 카릴 오에스테 (50) 페로 카릴 오에스테[29] 리버 플레이트 1985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가 열리지 않음.[30]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31] 벨레스 사르스필드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85/86 ~ 1990/91[편집] 시즌 우승 준우승 3위 1985/86 리버 플레이트 (56) 뉴얼스 올드 보이스 (46)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46) 1986/87 로사리오 센트랄 (49) 뉴얼스 올드 보이스 (48) 인데펜디엔테 (47) 1987/88 뉴얼스 올드 보이스 (55) 산로렌소 (49) 라싱 클럽 (48) 1988/89[32] 인데펜디엔테 (84) 보카 주니어스 (76)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68) 1989/90 리버 플레이트 (53) 인데펜디엔테 (46) 보카 주니어스 (43) 1990/91[33] 뉴얼스 올드 보이스[34][35] 보카 주니어스[36] -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Torneo Apertura/Clausura) : 1991/92 ~ 2012/13[편집] 시즌 아페르투라 클라우수라 우승 준우승 우승 준우승 1991/92 리버 플레이트 (31) 보카 주니어스 (24) 뉴얼스 올드 보이스 (29) 벨레스 사르스필드 (27) 1992/93 보카 주니어스 (27) 리버 플레이트 (23) 벨레스 사르스필드 (27) 인데펜디엔테 (24) 1993/94 리버 플레이트 (24) 벨레스 사르스필드 (23) 인데펜디엔테 (26) 우라칸 (25) 1994/95 리버 플레이트 (31) 산로렌소 (26) 산로렌소 (30) 힘나시아 라 플라타 (29) 1995/96[37] 벨레스 사르스필드 (41) 라싱 클럽 (35)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힘나시아 라 플라타 (39) 1996/97 리버 플레이트 (46) 인데펜디엔테 (37) 리버 플레이트 (41) 콜론 산타페 (35) 1997/98 리버 플레이트 (45) 보카 주니어스(44) 벨레스 사르스필드 (46) 라누스 (40) 1998/99 보카 주니어스 (45) 힘나시아 라 플라타 (36) 보카 주니어스 (44) 리버 플레이트 (37) 1999/2000 리버 플레이트 (44) 로사리오 센트랄 (43) 리버 플레이트 (42) 인데펜디엔테 (36) 2000/01 보카 주니어스 (41) 리버 플레이트 (37) 산로렌소 (47) 리버 플레이트 (41) 2001/02 라싱 클럽 (42) 리버 플레이트 (41) 리버 플레이트 (43) 힘나시아 라 플라타 (37) 2002/03 인데펜디엔테 (43) 보카 주니어스 (40) 리버 플레이트 (43) 보카 주니어스 (39) 2003/04 보카 주니어스 (39) 산로렌소 (36) 리버 플레이트 (40) 보카 주니어스 (36) 2004/05 뉴얼스 올드 보이스 (36) 벨레스 사르스필드 (34)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반필드 (33) 2005/06 보카 주니어스 (40) 힘나시아 라 플라타 (37) 보카 주니어스 (43) 라누스 (35) 2006/07 에스투디안테스 (44)[38] 보카 주니어스 (44) 산로렌소 (45) 보카 주니어스 (39) 2007/08 라누스 (38) 티그레 (34) 리버 플레이트 (43) 보카 주니어스 (39) 2008/09 보카 주니어스 (39)[39] 티그레 (39)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우라칸 (38) 2009/10 반필드 (41) 뉴얼스 (39)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41) 에스투디안테스 (40) 2010/11 에스투디안테스 (45) 벨레스 사르스필드 (43)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라누스 (35) 2011/12 보카 주니어스 (43) 라싱 클럽 (31) 아르세날 (38) 티그레 (36) 기타 공식 대회[편집] 시즌 컵 명칭 우승 준우승 1958 코파 수에시아[40] 아틀란타 라싱 클럽 1969 코파 아르헨티나[41] 보카 주니어스 아틀란타 1993 코파 센테나리오[42] 힘나시아 라 플라타 리버 플레이트 팀별 우승 횟수[편집] 팀명(Equipo) 우승(Campeón) 준우승(Subcampeón) 3위[43](Tercero) 리버 플레이트 33 25 11 보카 주니어스 24 18 22 인데펜디엔테 14 14 6 산로렌소 10 11 14 벨레스 사르스필드 8 8 10 라싱 클럽 7 7 10 에스투디안테스 5 4 7 뉴얼스 올드 보이스 5 3 3 로사리오 센트랄 4 4 2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3 1 1 페로 카릴 오에스테 2 3 1 우라칸 1 5 2 라누스 1 4 4 반필드 1 2 2 킬메스 1 1 0 아르세날 1 0 1 차카리타 주니어스 1 0 1 힘나시아 라 플라타 0 5 3 티그레 0 3 0 콜론 산타페 0 1 2 타예레스 0 1 2 우니온 데 산타페 0 1 1 라싱 코르도바 0 1 0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0 0 3 고도이크루스 0 0 2 아틀란타 0 0 1 플라텐세 0 0 1 아틀레티코 투쿠만 0 0 1 템펄레이 0 0 1 역대 득점왕[편집] 대회 선수 소속팀 골 1931 알베르토 소사야 에스투디안테스 33 1932 베르나베 페데이라 리버 플레이트 43 1933 프란시스코 바라조 보카 주니어스 34 1934 에바리스토 바레라 라싱 클럽 34 1935 아구스틴 코소 벨레스 사르스필드 33 1936 에바리스토 바레라 라싱 클럽 32 1937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7 1938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3 1939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0 1940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 라싱 클럽 33 이시드로 랑가라 산로렌소 33 1941 호세 칸텔리 뉴얼스 올드 보이스 30 1942 리날도 마르티노 산로렌소 25 1943 루이스 아리에타 라누스 23 라울 프루토스 플라텐세 23 앙헬 라브루나 리버 플레이트 23 1944 아틸리오 메조네 우라칸 26 1945 앙헬 라브루나 리버 플레이트 24 1946 마리오 보제 보카 주니어스 24 1947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리버 플레이트 27 1948 베냐민 산토스 로사리오 센트랄 21 1949 자밀 시메스 라싱 클럽 26 후안 호세 피수티 반필드 26 1950 마리오 파파 산로렌소 24 1951 산티아고 베르나사 리버 플레이트 22 1952 에두아르도 리카그니 우라칸 28 1953 후안 호세 피수티 라싱 클럽 22 후안 아르만도 베나비데스 산로렌소 22 1954 앙헬 베르니 산로렌소 19 호세 보레조 보카 주니어스 19 노르베르토 콘데 벨레스 사르스필드 19 1955 오스카르 마세이 로사리오 센트랄 21 1956 후안 알베르토 카스트로 로사리오 센트랄 17 에르네스토 그리조 인데펜디엔테 17 1957 로베르토 사라테 리버 플레이트 22 1958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28 1959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31 1960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34 1961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26 1962 루이스 아르티메 리버 플레이트 25 1963 루이스 아르티메 리버 플레이트 25 1964 엑토르 베이라 산로렌소 17 1965 후안 카를로스 카로네 벨레스 사르스필드 19 1966 루이스 아르티메 인데펜디엔테 23 1967 메트로폴리타노 베르나르도 아코스타 라누스 18 1967 나시오날 루이스 아르티메 인데펜디엔테 11 1968 메트로폴리타노 알프레도 오베르티[44] 로스 안데스 13 1968 나시오날 오마르 웨베 벨레스 사르스필드 13 1969 메트로폴리타노 왈테르 마차두 다 시우바 라싱 클럽 14 1969 나시오날 로돌포 피셔 산로렌소 14 카를로스 부자 플라텐세 14 1970 메트로폴리타노 오스카르 마스 리버 플레이트 16 1970 나시오날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18 1971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36 1971 나시오날 알프레도 오베르티 뉴얼스 올드보이스 10 호세 루니스 후벤투드 안토니아나 10 1972 메트로폴리타노 미겔 앙헬 브린디시 우라칸 21 1972 나시오날 카를로스 모레테 리버 플레이트 14 1973 메트로폴리타노 오스카르 마스 리버 플레이트 17 우고 쿠리오니 보카 주니어스 17 이그나시오 페냐 에스투디안테스 (LP) 17 1973 나시오날 후안 고메스 보글리노 아틀란타 18 1974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모레테 리버 플레이트 18 1974 나시오날 마리오 알베르토 켐페스 로사리오 센트랄 25 1975 메트로폴리타노 엑토르 스코타 산로렌소 32 1975 나시오날 엑토르 스코타 산로렌소 28 1976 메트로폴리타노 마리오 알베르토 켐페스 로사리오 센트랄 21 1976 나시오날 노르베르토 에레수마 산로렌소 마르델플라타 12 루이스 루데냐 타예레스 12 1977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알바레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7 1977 나시오날 알프레도 레타누 에스투디안테스 (LP) 13 1978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2 루이스 안드레우치 킬메스 22 1978 나시오날 호세 레이날디 타예레스 18 1979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4 세르히오 포르투나토 에스투디안테스 (LP) 14 1979 나시오날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2 1980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5 1980 나시오날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7 1981 메트로폴리타노 라울 데라크루스 차파로 인스티투토 코르도바 20 1981 나시오날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15 1982 나시오날 미겔 앙헬 후아레스 페로 카릴 오에스테 22 1982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모레테 인데펜디엔테 20 1983 나시오날 아르만도 우시조스 로마 네그라 11 1983 메트로폴리타노 빅토르 라모스 뉴얼스 올드보이스 30 1984 나시오날 페드로 파스쿠지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9 1984 메트로폴리타노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24 1985 나시오날 호르헤 코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1985/86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25 1986/87 오마르 아르날도 팔마 로사리오 센트랄 20 1987/88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18 1988/89 오스카르 데르티시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0 네스토르 고로시토 산로렌소 20 1989/90 아리엘 코소니 뉴얼스 올드보이스 23 1990/91 에스테반 곤살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8 1991 아페르투라 라몬 앙헬 디아스 리버 플레이트 14 1992 클라우수라 디에고 라토레 보카 주니어스 9 다리오 스코토 플라텐세 9 1992 아페르투라 알베르토 아코스타 산로렌소 12 1993 클라우수라 루벤 다 실바 리버 플레이트 13 1993 아페르투라 세르히오 마르티네스 보카 주니어스 12 1994 클라우수라 에르난 크레스포 리버 플레이트 11 마르셀로 에스피나 플라텐세 11 1994 아페르투라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12 1995 클라우수라 호세 오스카르 플로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4 1995 아페르투라 호세 루이스 칼데론 에스투디안테스 (LP) 13 1996 클라우수라 아리엘 로페스 라누스 12 1996 아페르투라 구스타보 레히 페로 카릴 오에스테 11 1997 클라우수라 세르히오 마르티네스 보카 주니어스 15 1997 아페르투라 루벤 다 실바 로사리오 센트랄 15 1998 클라우수라 로베르토 소사 힘나시아 라 플라타 16 1998 아페르투라 마르틴 팔레르모 보카 주니어스 20 1999 클라우수라 호세 루이스 칼데론 인데펜디엔테 17 1999 아페르투라 하비에르 사비올라 리버 플레이트 15 2000 클라우수라 에스테반 푸에르테스 콜론 산타페 17 2000 아페르투라 후안 파블로 앙헬 리버 플레이트 13 2001 클라우수라 베르나르도 로메오 산로렌소 15 2001 아페르투라 마르틴 카르데티 리버 플레이트 17 2002 클라우수라 페르나르도 카베나기 리버 플레이트 15 2002 아페르투라 안드레스 실베라 인데펜디엔테 16 2003 클라우수라 루시아노 피게로아 로사리오 센트랄 17 2003 아페르투라 에르네스토 파리아스 에스투디안테스 (LP) 12 2004 클라우수라 로날도 사라테 벨레스 사르스필드 13 2004 아페르투라 리산드로 로페스 라싱 클럽 12 2005 클라우수라 마리아노 파보네 에스투디안테스 (LP) 16 2005 아페르투라 하비에르 캄포라 티로 페데랄 13 2006 클라우수라 곤살로 바르가스 힘나시아 라 플라타 12 2006 아페르투라 로드리고 팔라시오 보카 주니어스 12 마우로 사라테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2007 클라우수라 마르틴 팔레르모 보카 주니어스 11 2007 아페르투라 헤르만 데니스 인데펜디엔테 18 2008 클라우수라 다리오 츠비타니치 반필드 13 2008 아페르투라 호세 산드 라누스 15 2009 클라우수라 호세 산드 라누스 13 2009 아페르투라 산티아고 실바 반필드 14 2010 클라우수라 마우로 보세지 에스투디안테스 (LP) 13 2010 아페르투라 데니스 스트라콸루르시 티그레 12 산티아고 실바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2011 클라우수라 하비에르 캄포라 우라칸 11 테오필로 구티에레스 라싱 클럽 11 2011 아페르투라 루벤 라미레스 고도이 크루스 12 2012 클라우수라 카를로스 루나 티그레 12 통산 득점 기록[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참고사항[편집] ↑ 가 나 첫 대회는 다섯 개 팀이 참가해 팀 별로 8 경기를 벌였고, 올드 칼레도니언스(Old Caledonians)와 세인트 앤드루스가 공동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곧 이뤄진 플레이오프에서 세인트 앤드루스가 이겨 AFA 기록에 최종 우승 팀으로 되어 있다. [1]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3 - 0 인데펜디엔테. ↑ 코파 데 오로(Copa de Oro)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4 - 2 산로렌소. ↑ 코파 캄페오나토 우승자. ↑ 부에노스아이레스 코파 데 오노르(Copa de Honor de municipalidad Buenos Aires). ↑ 코파 캄페오나토 3위. ↑ 결정전: 리버 플레이트 3 - 3 우라칸. 공동 준우승. ↑ 결승전: 라싱 클럽 0 - 0 반필드; 라싱 클럽 1 - 0 반필드. ↑ 결승전: 에스투디안테스 3 - 0 라싱 클럽. ↑ 결승전: 산로렌소 2 - 1 에스투디안테스.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2 - 0 라싱 클럽; 리버 플레이트 1 - 1 벨레스 사르스필드; 벨레스 사르스필드 4 - 2 라싱 클럽. ↑ 결승: 차카리타 주니어스 4 - 1 리버 플레이트. ↑ 다득점으로 우승자 결정: 인데펜디엔테(43득점) - 리버 플레이트(42득점).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2 - 1 로사리오 센트랄. ↑ 결승전: 로사리오 센트랄 2 - 1 산로렌소. ↑ 결승전: 산로렌소 1 - 0 리버 플레이트. ↑ 가 나 두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두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가 나 네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두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두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여섯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1 - 0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인데펜디엔테 1 - 1 타예레스; 타예레스 2 - 2 인데펜디엔테.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0 - 0 인데펜디엔테; 인데펜디엔테 2 - 0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벨레스 사르스필드 0 - 2 리버 플레이트; 리버 플레이트 5 - 1 벨레스 사르스필드. ↑ 결승전: 우니온 데 산타페 1 - 1 리버 플레이트; 리버 플레이트 0 - 0 우니온 데 산타페. ↑ 결승전: 로사리오 센트랄 5 - 1 라싱 코르도바; 라싱 코르도바 2 - 0 로사리오 센트랄.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1 - 0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0 - 1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킬메스 0 - 0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2 - 0 킬메스. ↑ 결승전: 에스투디안테스 2 - 0 인데펜디엔테; 인데펜디엔테 2 - 1 에스투디안테스.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0 - 3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1 - 0 리버 플레이트. ↑ 본래 메트로폴리타노는 전반기, 나시오날은 후반기에 진행되었지만, 1982년부터 순서가 바뀌었다. 1985년 나시오날을 끝으로 메트로폴리타노와 나시오날이 폐지되고, 유럽 리그처럼 연년제 방식의 리그가 시작되었다. ↑ 결승전: 벨레스 사르스필드 1 - 2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이 시즌에서 각 경기 승자는 승점 3점을 얻었는데, 무승부인 경우엔 승부차기를 통해 승자는 2점, 패자는 1점을 얻었다. 그 때문에 각 팀의 승점이 다른 시즌보다 훨씬 높았다. ↑ 1990/91 시즌에 처음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가 도입되었는데, 뉴얼스 올드 보이스와 보카 주니어스가 각각 우승하였다. AFA에서는 두 팀간의 경기를 통해 통합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기로 하였고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펼쳤다. 승부차기 끝에 뉴얼스 올드 보이스가 결국 우승자로 결정되었다. 챔피언 결정전은 국가대표팀이 칠레에서 열렸던 코파 아메리카에 참여하는 중에 열렸기 때문에 대표팀에 소속된 양팀 선수들만큼 새로운 선수를 충원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1991/92 시즌에도 유사한 챔피언 결정전이 열렸는데, 그것은 실제로 챔피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3 조별 예선으로써, 본선 진출팀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3에서는 진출팀을 각 나라별로 묶어 조별 예선을 진행하였다.) ↑ 결승전: 뉴얼스 올드 보이스 1 - 0 보카 주니어스; 보카 주니어스 1 (1) - (3) 0 뉴얼스 올드 보이스 (승부차기). ↑ 토르네오 아페르투라 우승. ↑ 토르네오 클라우수라 우승. ↑ 이 시즌부터 각 경기 승자에게 승점 3점씩 부여하기 시작했다.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1 - 2 에스투디안테스. ↑ 아페르투라가 종료된 시점에서 산로렌소와 보카 주니어스, 그리고 티그레의 승점이 39점으로 같았기 때문에 세 팀은 3자간 캄페온 결정전을 벌였다. 모든 팀이 각각 1승 1패를 거두었지만 골득실에서 앞선 보카가 우승 팀, 티그레가 준우승 팀이 되었다. ↑ 코파 수에시아(Copa Suecia):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공식 컵대회. 결승전: 아틀란타 3 - 1 라싱 클럽 ↑ 코파 아르헨티나(Copa Argentina de Fútbol):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데 클루베스(*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와는 다른 대회)에 출전할 팀을 선발하기 위해 만들었던 컵 대회.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3 - 1 아틀란타; 아틀란타 1 - 0 보카 주니어스. ↑ 코파 센테나리오(Copa Centenario):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창설 100주년 기념 컵 대회 [2]. 결승전: 힘나시아 라 플라타 3 - 1 리버 플레이트 ↑ 3위 또는 4강: 토르네오 나시오날이나 메트로폴리타노에서는 리그전이 아닌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회가 진행되기도 했으며, 이경우 별도의 3,4위 결정전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 RSSSFGoles argentinos Archived 2012년 11월 15일 - 웨이백 머신 ESPN Deportes Universo Fútbol La Bombonera Archived 2012년 10월 24일 - 웨이백 머신Somos cuervos Archived 2012년 1월 12일 - 웨이백 머신 아르헨티나 클럽의 국제대회 성적[편집] 코파 리베르타도레스[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인데펜디엔테 7 0 1964, 1965, 1972, 1973, 1974, 1975, 1984 보카 주니어스 6 3 1977, 1978, 2000, 2001, 2003, 2007 1963, 1979, 2004 에스투디안테스 4 1 1968, 1969, 1970, 2009 1971 리버 플레이트 2 2 1986, 1996 1966, 1976 라싱 클럽 1 0 1967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 0 1985 벨레스 사르스필드 1 0 1994 뉴얼스 올드 보이스 0 2 1988, 1992 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보카 주니어스 2 0 2004, 2005 산로렌소 1 0 2002 아르세날 1 0 2007 리버 플레이트 0 1 2003 레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보카 주니어스 4 1 1990, 2005, 2006, 2008 2004 인데펜디엔테 1 1 1995 1996 벨레스 사르스필드 1 1 1997 1995 리버 플레이트 0 2 1997, 1998 라싱 클럽 0 1 1989 산로렌소 0 1 2003 아르세날 0 1 2008 같이 보기[편집]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시스템 프리메라 B 나시오날 토르네오 데 베라노 외부 링크[편집] (스페인어/영어)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 공식 홈페이지 (스페인어) Base de Datos del Futbol Argentino (스페인어) Universo Futbol: 각 디비시온과 경기 통계 및 정보 (영어) RSSSF: Final Tables Argentina since 1891 vdeh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16/17) 고도이크루스 뉴얼스 올드 보이스 데펜사 이 후스티시아 라누스 라싱 라파엘라 로사리오 센트랄 리버 플레이트 반피엘드 벨그라노 벨레스 사르스피엘드 보카 주니어스 사르미엔토 산로렌소 아르세날 알도시비 에스투디안테스 올림포 우라칸 인데펜디엔테 콜론 킬메스 템페를레이 투쿠만 타예레스 티그레 파트로나토 힘나시아 라플라타 vdeh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시즌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1991 ~) 1991/92 1992/93 1993/94 1994/95 1995/96 1996/97 1997/98 1998/99 1999/2000 2000/01 2001/02 2002/03 2003/04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8/09 2009/10 vdeh 아르헨티나의 축구대표팀 국가대표팀 여자 국가대표팀 U-20 U-17 국내 리그남자 프리메라 디비시온 프리메라 B 나시오날 프리메라 B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A 프리메라 C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B 프리메라 D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C 여자 캄페오나토 데 푸트볼 페메니노 기타 문서 축구 협회 축구팀 목록 경기장 목록 축구 선수 목록 리그 시스템 vdeh남아메리카의 축구 1부 리그 (CONMEBOL)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르헨티나_프리메라_디비시온&oldid=24183435" 분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남아메리카의 축구 1부 리그1891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숨은 분류: 스페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3: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12-13 시작년도 1891년 국가 아르헨티나 하위 리그 프리메라 B 나시오날 참가 팀 수 20 국내 리그 순위 1 최근 우승 팀 (2012 클라우수라) 아르세날 최다 우승 팀 리버 플레이트 (33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Primera División de Argentina)은 아르헨티나의 프로축구 1부리그이다. 현재 20개 팀이 리그 방식으로 경기를 치른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and Statistics) 자료 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리그는 현재 세계 상위권 프로 축구 리그 중 하나에 속한다.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로 꼽히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그리고 포르투갈 리가 등 많은 리그에서 아르헨티나 리그 출신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다. 목차 1 리그 진행 방식 1.1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1.2 승강제 2 국제 대회 참가 2.1 코파 수다메리카나 3 2012/13 시즌 참가팀 4 역대 기록 4.1 아마추어 대회 우승 기록 4.2 프로 리그 우승 기록 4.2.1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31 ~ 1966 4.2.2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나시오날 (Torneo Metropolitano/Nacional) : 1967 ~ 1985 4.2.3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85/86 ~ 1990/91 4.2.4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Torneo Apertura/Clausura) : 1991/92 ~ 2012/13 4.2.5 기타 공식 대회 4.2.6 팀별 우승 횟수 4.3 역대 득점왕 4.4 통산 득점 기록 4.5 참고사항 5 아르헨티나 클럽의 국제대회 성적 5.1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5.2 코파 수다메리카나 5.3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리그 진행 방식[편집] 2012/13 시즌부터 프리메라 디비시온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하고 하나의 우승 팀을 정하는 새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입니다. 2011/12 시즌까지 프리메라 디비시온에는 전기리그인 아페르투라 (Apertura, 8월~12월)와 후기리그인 클라우수라 (Clausura, 2월~6월)로 나누어 진행했다. 각각의 리그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 아니라 싱글 라운드(single-round) 방식으로 진행하였고, 그 때문에 유럽의 축구리그들과는 달리 1년에 두 개의 챔피언이 존재했다. 아르헨티나에는 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컵 대회가 없다.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는 각각 '개막'(opening)와 '폐막'(closing)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같은 방식은 북반구, 특히 유럽의 축구 시즌과 비슷한 기간에 시즌을 전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예: 프리메라리가 2007-08) 승강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프리메라 B 나시오날 § 승격과 강등입니다. 승강제는 지난 3년간의 리그 성적을 합산해 다음 아페르투라가 시작할 때 이루어진다. 프리메라 디비시온 3년간 평균 성적(평균승률) 최하위 두 팀은 2부리그인 프리메라 B 나시오날 최상위 두 팀과 바로 교체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3년 평균 성적이 17위와 18위인 팀은 프로모시온 (promoción)이라 불리는 별도의 플레이오프를 프리메라 B 나시오날 4위와 3위 팀과 갖게 된다. 프로모시온에서 이긴 두 팀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있게 되므로, 승강이 이뤄지는 팀의 숫자는 2개 팀에서 4개 팀까지 변할 수 있다. 조금 복잡한 이 승강제 방식은 빅 클럽들의 강등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리그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두 클럽 리버 플레이트와 보카 주니어스 역시 강등 위기에 처한 적이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역시 빅 클럽인 산로렌소의 강등(1981년)으로 인해 생긴 제도이다. 국제 대회 참가[편집] 과거에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에서 두 팀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해 왔다. 그런데, 1987년부터 CONMEBOL에선 여러 클럽 선수권 대회를 만들고 폐지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페르코파. 코파 CONMEBOL, 그리고 코파 메르코수르 등이 바로 그런 클럽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들은 지금 코파 수다메리카나로 통합되었다. 또한 CONMEBOL이 각국의 리그 수준에 따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권을 다르게 배정하면서 아르헨티나 축구팀은 다섯 팀이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자격을 얻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남미의 모든 클럽축구 대회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거두어왔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 수다메리카나,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등 오늘날 존재하는 주요 대회뿐 아니라 이전의 클럽 대회에서도 가장 많은 우승컵을 가져갔다. 그러한 성과는 유럽 리그에 비해 좋지 못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축구 리그 중 하나로 꼽게 하는 근거가 되어왔다. 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코파 수다메리카나에 여섯 장의 출전권을 확보하고 있다. 2009년 대회까지 CONMEBOL에선 대회의 흥행을 위해 논란을 무릅쓰고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에게 성적과 관계 없이 초청팀으로써의 자동 출전권을 부여했다. 나머지 네 팀은 직전 시즌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 통합 승점 상위 네 팀으로 결정했는데, 몇년간 보카와 리베르의 성적이 좋지 못하면서 2010년 대회부터는 초청팀 참가권을 회수하고, 리그 성적만으로 출전팀을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참가팀 결정하는 시즌이 서로 다르고 여러 팀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동시에 출전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2012년 대회부터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같은 성적 합산 테이블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하는 다음 순위 팀들이 출전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성적 합산 테이블에서 1위부터 5위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하게 되면, 6위부터 10위가 코파 수다메리카나에 출전하는 식이다. (나머지 한 장의 출전권은 새로 시작된 코파 아르헨티나 우승 팀이 갖게 된다.)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역시 아르헨티나 클럽들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둬왔으며, 대회가 시작된 2002년부터 지금까지 2006년 대회를 제외하곤 모두 결승전에 올라 네 번의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2012/13 시즌 참가팀[편집] 고도이크루스 (C.D. Godoy Cruz) 뉴얼스 올드 보이스 (C.A. Newell's Old Boys) 라누스 (C.A. Lanús) 라싱 클럽 (Racing Club de Avellaneda) 리버 플레이트 (C.A. River Plate) 반필드 (C.A. Banfield) 보카 주니어스 (C.A. Boca Juniors) 벨레스 사르스필드 (C.A. Vélez Sársfield) 산로렌소 (C.A. San Lorenzo) 아르세날 (Arsenal F.C. de Sarandí)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A.A. Argentinos Juniors) 에스투디안테스 (Club Estudiantes de La Plata) 올림포 (Olimpo de Bahía Blanca) - 승격팀 올보이스 (C.A. All Boys) - 승격팀 우라칸 (C.A. Huracán) 인데펜디엔테 (C.A. Independiente) 콜론 산타페 (C.A. Colón de Santa Fe) 킬메스 (Quilmes Atlético Club) - 승격팀 티그레 (C.A. Tigre) 힘나시아 라 플라타 (Club de Gimnasia y Esgrima de La Plata) 역대 기록[편집] 아르헨티나 리그는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를 제외한 가장 오래된 축구 리그로써 1891년 영국인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최초의 우승 팀은 약간 논란이 있긴 하지만 세인트 앤드루스(Saint Andrews)로 기록되어 있다.[1] 여러 클럽들이 프로화되면서 1931년부터 캄페오나토(Campeonato)라는 이름으로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현재 아르헨티나 리그에는 축구 협회에서 주관하는 컵대회 또는 리그컵 대회가 없지만, 통합 우승 팀을 결정하거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같은 국제 대회 참가팀을 결정할 목적 등으로 몇몇 대회가 한시적으로 생기곤 했다. 아마추어 대회 우승 기록[편집] 1900년대 최강팀이었던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0년) 연도 대회 우승 189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1 세인트 앤드루스[1] 1892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우승 팀 없음. 1893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4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5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6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7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8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로마스 애슬레틱 1899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0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2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3 아르헨티나 축구협회2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4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5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6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7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08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벨그라노 애슬레틱 1909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0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1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영국 고등학교 졸업생팀 1912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킬메스 아르헨티나 축구연맹3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13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에스투디안테스 라 플라타 1914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15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6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7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8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라싱 클럽 1919 아마추어 축구협회4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0 아마추어 축구협회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1 아마추어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2 아마추어 축구협회 인데펜디엔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3 아마추어 축구협회 산로렌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4 아마추어 축구협회 산로렌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5 아마추어 축구협회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우라칸 1926 아마추어 축구협회 인데펜디엔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27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5 산로렌소 1928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우라칸 1929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힘나시아 라 플라타 1930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보카 주니어스 1931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6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32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1933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스포르티보 독 수드 1934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Argentina Association Football League) 2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Asociación Argentina de Football) 3 아르헨티나 축구연맹 (Federación Argentina de Football) 4 아마추어 축구협회 (Asociación Amateurs de Football) 5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축구협회 (Asociación Amateurs Argentina de Football) 6 아마추어/프로 축구협회 (Asociación de Football Amateurs y Profesionales) 프로 리그 우승 기록[편집]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31 ~ 1966[편집] 1940~50년대 라 마키나라는 전술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로 꼽히는 리버 플레이트 (1941년) 시즌 우승 준우승 3위 1931 보카 주니어스 (50) 산로렌소 (45) 에스투디안테스 (44) 1932 리버 플레이트 (50)[2] 인데펜디엔테 (50) 라싱 클럽 (49) 1933 산로렌소 (50) 보카 주니어스 (49) 라싱 클럽 (48) 1934 보카 주니어스 (55) 인데펜디엔테 (54) 산로렌소 (51) 1935 보카 주니어스 (58) 인데펜디엔테 (55) 산로렌소 (49) 1936 리버 플레이트[3][4] 산로렌소[5] 라싱 클럽[6] 1937 리버 플레이트 (58) 인데펜디엔테 (52) 보카 주니어스 (45) 1938 인데펜디엔테 (53) 리버 플레이트 (51) 산로렌소 (43) 1939 인데펜디엔테 (56) 리버 플레이트, 우라칸 (50)[7] 1940 보카 주니어스 (55) 인데펜디엔테 (47) 리버 플레이트 (42) 1941 리버 플레이트 (44) 산로렌소 (40) 뉴얼스 올드 보이스 (38) 1942 리버 플레이트 (46) 산로렌소 (40) 우라칸 (37) 1943 보카 주니어스 (45) 리버 플레이트 (44) 산로렌소 (35) 1944 보카 주니어스 (46) 리버 플레이트 (44) 에스투디안테스 (39) 1945 리버 플레이트 (46) 보카 주니어스 (42) 인데펜디엔테 (41) 1946 산로렌소 (46) 보카 주니어스 (42) 리버 플레이트 (41) 1947 리버 플레이트 (48) 보카 주니어스 (42) 인데펜디엔테 (41) 1948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7) 에스투디안테스 (36) 1949 라싱 클럽 (49) 리버 플레이트 (43) 플라텐세 (43) 1950 라싱 클럽 (47) 보카 주니어스 (39) 인데펜디엔테 (39) 1951 라싱 클럽 (44)[8] 반필드 (44) 리버 플레이트 (43) 1952 리버 플레이트 (40) 라싱 클럽 (39) 인데펜디엔테 (35) 1953 리버 플레이트 (43)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라싱 클럽 (39) 1954 보카 주니어스 (45)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8) 1955 리버 플레이트 (45) 라싱 클럽 (38) 보카 주니어스 (37) 1956 리버 플레이트 (43) 라누스 (41) 보카 주니어스 (40) 1957 리버 플레이트 (46) 산로렌소 (38) 라싱 클럽 (36) 1958 라싱 클럽 (41) 보카 주니어스 (38) 산로렌소 (38) 1959 산로렌소 (45) 라싱 클럽 (38) 인데펜디엔테 (33) 1960 인데펜디엔테 (41) 리버 플레이트 (39)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39) 1961 라싱 클럽 (47) 산로렌소 (40) 리버 플레이트 (38) 1962 보카 주니어스 (43) 리버 플레이트 (41) 힘나시아 라 플라타 (38) 1963 인데펜디엔테 (37) 리버 플레이트 (35) 라싱 클럽 (39) 1964 보카 주니어스 (44) 인데펜디엔테 (38) 리버 플레이트 (37) 1965 보카 주니어스 (50) 리버 플레이트 (49)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1966 라싱 클럽 (61) 리버 플레이트 (56) 보카 주니어스 (48)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나시오날 (Torneo Metropolitano/Nacional) : 1967 ~ 1985[편집] 시즌 메트로폴리타노 나시오날 우승 준우승 우승 준우승 1967 에스투디안테스[9] 라싱 클럽 인데펜디엔테 (26) 에스투디안테스 (24) 1968 산로렌소[10] 에스투디안테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22)[11] 리버 플레이트 (22) 1969 차카리타 주니어스[12] 리버 플레이트 보카 주니어스 (29) 리버 플레이트 (27) 1970 인데펜디엔테 (27)[13] 리버 플레이트 (27) 보카 주니어스[14] 로사리오 센트랄 1971 인데펜디엔테 (50) 벨레스 사르스필드 (49) 로사리오 센트랄[15] 산로렌소 1972 산로렌소 (49) 라싱 클럽 (43) 산로렌소[16] 리버 플레이트 1973 우라칸 (46) 보카 주니어스 (42) 로사리오 센트랄 (5)[17] 리버 플레이트 (3) 1974 뉴얼스 올드 보이스 (5)[17] 로사리오 센트랄 (3) 산로렌소 (11)[18] 로사리오 센트랄 (10) 1975 리버 플레이트 (55) 우라칸 (51) 리버 플레이트 (12)[18] 에스투디안테스 (11) 1976 보카 주니어스 (19)[19] 우라칸 (16) 보카 주니어스[20] 리버 플레이트 1977 리버 플레이트 (63) 인데펜디엔테 (61) 인데펜디엔테[21] 타예레스 1978 킬메스 (54) 보카 주니어스 (53) 인데펜디엔테[22] 리버 플레이트 1979 리버 플레이트[23] 벨레스 사르스필드 리버 플레이트[24] 우니온 데 산타페 1980 리버 플레이트 (51)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42) 로사리오 센트랄[25] 라싱 코르도바 1981 보카 주니어스 (50) 페로 카릴 오에스테 (49) 리버 플레이트[26] 페로 카릴 오에스테 ↓ 1982년부터 나시오날이 전반기, 메트로폴리타노가 후반기로 전환됨. (단년제에서 연년제 리그로 전환.) ↓ 1982 에스투디안테스 (54) 인데펜디엔테 (52) 페로 카릴 오에스테[27] 킬메스 1983 인데펜디엔테 (48) 산로렌소 (47) 에스투디안테스[28] 인데펜디엔테 1984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51) 페로 카릴 오에스테 (50) 페로 카릴 오에스테[29] 리버 플레이트 1985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가 열리지 않음.[30]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31] 벨레스 사르스필드 캄페오나토 (Campeonato) : 1985/86 ~ 1990/91[편집] 시즌 우승 준우승 3위 1985/86 리버 플레이트 (56) 뉴얼스 올드 보이스 (46)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46) 1986/87 로사리오 센트랄 (49) 뉴얼스 올드 보이스 (48) 인데펜디엔테 (47) 1987/88 뉴얼스 올드 보이스 (55) 산로렌소 (49) 라싱 클럽 (48) 1988/89[32] 인데펜디엔테 (84) 보카 주니어스 (76)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68) 1989/90 리버 플레이트 (53) 인데펜디엔테 (46) 보카 주니어스 (43) 1990/91[33] 뉴얼스 올드 보이스[34][35] 보카 주니어스[36] -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Torneo Apertura/Clausura) : 1991/92 ~ 2012/13[편집] 시즌 아페르투라 클라우수라 우승 준우승 우승 준우승 1991/92 리버 플레이트 (31) 보카 주니어스 (24) 뉴얼스 올드 보이스 (29) 벨레스 사르스필드 (27) 1992/93 보카 주니어스 (27) 리버 플레이트 (23) 벨레스 사르스필드 (27) 인데펜디엔테 (24) 1993/94 리버 플레이트 (24) 벨레스 사르스필드 (23) 인데펜디엔테 (26) 우라칸 (25) 1994/95 리버 플레이트 (31) 산로렌소 (26) 산로렌소 (30) 힘나시아 라 플라타 (29) 1995/96[37] 벨레스 사르스필드 (41) 라싱 클럽 (35)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힘나시아 라 플라타 (39) 1996/97 리버 플레이트 (46) 인데펜디엔테 (37) 리버 플레이트 (41) 콜론 산타페 (35) 1997/98 리버 플레이트 (45) 보카 주니어스(44) 벨레스 사르스필드 (46) 라누스 (40) 1998/99 보카 주니어스 (45) 힘나시아 라 플라타 (36) 보카 주니어스 (44) 리버 플레이트 (37) 1999/2000 리버 플레이트 (44) 로사리오 센트랄 (43) 리버 플레이트 (42) 인데펜디엔테 (36) 2000/01 보카 주니어스 (41) 리버 플레이트 (37) 산로렌소 (47) 리버 플레이트 (41) 2001/02 라싱 클럽 (42) 리버 플레이트 (41) 리버 플레이트 (43) 힘나시아 라 플라타 (37) 2002/03 인데펜디엔테 (43) 보카 주니어스 (40) 리버 플레이트 (43) 보카 주니어스 (39) 2003/04 보카 주니어스 (39) 산로렌소 (36) 리버 플레이트 (40) 보카 주니어스 (36) 2004/05 뉴얼스 올드 보이스 (36) 벨레스 사르스필드 (34)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반필드 (33) 2005/06 보카 주니어스 (40) 힘나시아 라 플라타 (37) 보카 주니어스 (43) 라누스 (35) 2006/07 에스투디안테스 (44)[38] 보카 주니어스 (44) 산로렌소 (45) 보카 주니어스 (39) 2007/08 라누스 (38) 티그레 (34) 리버 플레이트 (43) 보카 주니어스 (39) 2008/09 보카 주니어스 (39)[39] 티그레 (39) 벨레스 사르스필드 (40) 우라칸 (38) 2009/10 반필드 (41) 뉴얼스 (39)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41) 에스투디안테스 (40) 2010/11 에스투디안테스 (45) 벨레스 사르스필드 (43) 벨레스 사르스필드 (39) 라누스 (35) 2011/12 보카 주니어스 (43) 라싱 클럽 (31) 아르세날 (38) 티그레 (36) 기타 공식 대회[편집] 시즌 컵 명칭 우승 준우승 1958 코파 수에시아[40] 아틀란타 라싱 클럽 1969 코파 아르헨티나[41] 보카 주니어스 아틀란타 1993 코파 센테나리오[42] 힘나시아 라 플라타 리버 플레이트 팀별 우승 횟수[편집] 팀명(Equipo) 우승(Campeón) 준우승(Subcampeón) 3위[43](Tercero) 리버 플레이트 33 25 11 보카 주니어스 24 18 22 인데펜디엔테 14 14 6 산로렌소 10 11 14 벨레스 사르스필드 8 8 10 라싱 클럽 7 7 10 에스투디안테스 5 4 7 뉴얼스 올드 보이스 5 3 3 로사리오 센트랄 4 4 2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3 1 1 페로 카릴 오에스테 2 3 1 우라칸 1 5 2 라누스 1 4 4 반필드 1 2 2 킬메스 1 1 0 아르세날 1 0 1 차카리타 주니어스 1 0 1 힘나시아 라 플라타 0 5 3 티그레 0 3 0 콜론 산타페 0 1 2 타예레스 0 1 2 우니온 데 산타페 0 1 1 라싱 코르도바 0 1 0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0 0 3 고도이크루스 0 0 2 아틀란타 0 0 1 플라텐세 0 0 1 아틀레티코 투쿠만 0 0 1 템펄레이 0 0 1 역대 득점왕[편집] 대회 선수 소속팀 골 1931 알베르토 소사야 에스투디안테스 33 1932 베르나베 페데이라 리버 플레이트 43 1933 프란시스코 바라조 보카 주니어스 34 1934 에바리스토 바레라 라싱 클럽 34 1935 아구스틴 코소 벨레스 사르스필드 33 1936 에바리스토 바레라 라싱 클럽 32 1937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7 1938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3 1939 아르세니오 에리코 인데펜디엔테 40 1940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 라싱 클럽 33 이시드로 랑가라 산로렌소 33 1941 호세 칸텔리 뉴얼스 올드 보이스 30 1942 리날도 마르티노 산로렌소 25 1943 루이스 아리에타 라누스 23 라울 프루토스 플라텐세 23 앙헬 라브루나 리버 플레이트 23 1944 아틸리오 메조네 우라칸 26 1945 앙헬 라브루나 리버 플레이트 24 1946 마리오 보제 보카 주니어스 24 1947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리버 플레이트 27 1948 베냐민 산토스 로사리오 센트랄 21 1949 자밀 시메스 라싱 클럽 26 후안 호세 피수티 반필드 26 1950 마리오 파파 산로렌소 24 1951 산티아고 베르나사 리버 플레이트 22 1952 에두아르도 리카그니 우라칸 28 1953 후안 호세 피수티 라싱 클럽 22 후안 아르만도 베나비데스 산로렌소 22 1954 앙헬 베르니 산로렌소 19 호세 보레조 보카 주니어스 19 노르베르토 콘데 벨레스 사르스필드 19 1955 오스카르 마세이 로사리오 센트랄 21 1956 후안 알베르토 카스트로 로사리오 센트랄 17 에르네스토 그리조 인데펜디엔테 17 1957 로베르토 사라테 리버 플레이트 22 1958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28 1959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31 1960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34 1961 호세 산필리포 산로렌소 26 1962 루이스 아르티메 리버 플레이트 25 1963 루이스 아르티메 리버 플레이트 25 1964 엑토르 베이라 산로렌소 17 1965 후안 카를로스 카로네 벨레스 사르스필드 19 1966 루이스 아르티메 인데펜디엔테 23 1967 메트로폴리타노 베르나르도 아코스타 라누스 18 1967 나시오날 루이스 아르티메 인데펜디엔테 11 1968 메트로폴리타노 알프레도 오베르티[44] 로스 안데스 13 1968 나시오날 오마르 웨베 벨레스 사르스필드 13 1969 메트로폴리타노 왈테르 마차두 다 시우바 라싱 클럽 14 1969 나시오날 로돌포 피셔 산로렌소 14 카를로스 부자 플라텐세 14 1970 메트로폴리타노 오스카르 마스 리버 플레이트 16 1970 나시오날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18 1971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36 1971 나시오날 알프레도 오베르티 뉴얼스 올드보이스 10 호세 루니스 후벤투드 안토니아나 10 1972 메트로폴리타노 미겔 앙헬 브린디시 우라칸 21 1972 나시오날 카를로스 모레테 리버 플레이트 14 1973 메트로폴리타노 오스카르 마스 리버 플레이트 17 우고 쿠리오니 보카 주니어스 17 이그나시오 페냐 에스투디안테스 (LP) 17 1973 나시오날 후안 고메스 보글리노 아틀란타 18 1974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모레테 리버 플레이트 18 1974 나시오날 마리오 알베르토 켐페스 로사리오 센트랄 25 1975 메트로폴리타노 엑토르 스코타 산로렌소 32 1975 나시오날 엑토르 스코타 산로렌소 28 1976 메트로폴리타노 마리오 알베르토 켐페스 로사리오 센트랄 21 1976 나시오날 노르베르토 에레수마 산로렌소 마르델플라타 12 루이스 루데냐 타예레스 12 1977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알바레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7 1977 나시오날 알프레도 레타누 에스투디안테스 (LP) 13 1978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2 루이스 안드레우치 킬메스 22 1978 나시오날 호세 레이날디 타예레스 18 1979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4 세르히오 포르투나토 에스투디안테스 (LP) 14 1979 나시오날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2 1980 메트로폴리타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5 1980 나시오날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7 1981 메트로폴리타노 라울 데라크루스 차파로 인스티투토 코르도바 20 1981 나시오날 카를로스 비안치 벨레스 사르스필드 15 1982 나시오날 미겔 앙헬 후아레스 페로 카릴 오에스테 22 1982 메트로폴리타노 카를로스 모레테 인데펜디엔테 20 1983 나시오날 아르만도 우시조스 로마 네그라 11 1983 메트로폴리타노 빅토르 라모스 뉴얼스 올드보이스 30 1984 나시오날 페드로 파스쿠지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9 1984 메트로폴리타노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24 1985 나시오날 호르헤 코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1985/86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25 1986/87 오마르 아르날도 팔마 로사리오 센트랄 20 1987/88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18 1988/89 오스카르 데르티시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0 네스토르 고로시토 산로렌소 20 1989/90 아리엘 코소니 뉴얼스 올드보이스 23 1990/91 에스테반 곤살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8 1991 아페르투라 라몬 앙헬 디아스 리버 플레이트 14 1992 클라우수라 디에고 라토레 보카 주니어스 9 다리오 스코토 플라텐세 9 1992 아페르투라 알베르토 아코스타 산로렌소 12 1993 클라우수라 루벤 다 실바 리버 플레이트 13 1993 아페르투라 세르히오 마르티네스 보카 주니어스 12 1994 클라우수라 에르난 크레스포 리버 플레이트 11 마르셀로 에스피나 플라텐세 11 1994 아페르투라 엔소 프란세스콜리 리버 플레이트 12 1995 클라우수라 호세 오스카르 플로레스 벨레스 사르스필드 14 1995 아페르투라 호세 루이스 칼데론 에스투디안테스 (LP) 13 1996 클라우수라 아리엘 로페스 라누스 12 1996 아페르투라 구스타보 레히 페로 카릴 오에스테 11 1997 클라우수라 세르히오 마르티네스 보카 주니어스 15 1997 아페르투라 루벤 다 실바 로사리오 센트랄 15 1998 클라우수라 로베르토 소사 힘나시아 라 플라타 16 1998 아페르투라 마르틴 팔레르모 보카 주니어스 20 1999 클라우수라 호세 루이스 칼데론 인데펜디엔테 17 1999 아페르투라 하비에르 사비올라 리버 플레이트 15 2000 클라우수라 에스테반 푸에르테스 콜론 산타페 17 2000 아페르투라 후안 파블로 앙헬 리버 플레이트 13 2001 클라우수라 베르나르도 로메오 산로렌소 15 2001 아페르투라 마르틴 카르데티 리버 플레이트 17 2002 클라우수라 페르나르도 카베나기 리버 플레이트 15 2002 아페르투라 안드레스 실베라 인데펜디엔테 16 2003 클라우수라 루시아노 피게로아 로사리오 센트랄 17 2003 아페르투라 에르네스토 파리아스 에스투디안테스 (LP) 12 2004 클라우수라 로날도 사라테 벨레스 사르스필드 13 2004 아페르투라 리산드로 로페스 라싱 클럽 12 2005 클라우수라 마리아노 파보네 에스투디안테스 (LP) 16 2005 아페르투라 하비에르 캄포라 티로 페데랄 13 2006 클라우수라 곤살로 바르가스 힘나시아 라 플라타 12 2006 아페르투라 로드리고 팔라시오 보카 주니어스 12 마우로 사라테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2007 클라우수라 마르틴 팔레르모 보카 주니어스 11 2007 아페르투라 헤르만 데니스 인데펜디엔테 18 2008 클라우수라 다리오 츠비타니치 반필드 13 2008 아페르투라 호세 산드 라누스 15 2009 클라우수라 호세 산드 라누스 13 2009 아페르투라 산티아고 실바 반필드 14 2010 클라우수라 마우로 보세지 에스투디안테스 (LP) 13 2010 아페르투라 데니스 스트라콸루르시 티그레 12 산티아고 실바 벨레스 사르스필드 12 2011 클라우수라 하비에르 캄포라 우라칸 11 테오필로 구티에레스 라싱 클럽 11 2011 아페르투라 루벤 라미레스 고도이 크루스 12 2012 클라우수라 카를로스 루나 티그레 12 통산 득점 기록[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참고사항[편집] ↑ 가 나 첫 대회는 다섯 개 팀이 참가해 팀 별로 8 경기를 벌였고, 올드 칼레도니언스(Old Caledonians)와 세인트 앤드루스가 공동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곧 이뤄진 플레이오프에서 세인트 앤드루스가 이겨 AFA 기록에 최종 우승 팀으로 되어 있다. [1]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3 - 0 인데펜디엔테. ↑ 코파 데 오로(Copa de Oro)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4 - 2 산로렌소. ↑ 코파 캄페오나토 우승자. ↑ 부에노스아이레스 코파 데 오노르(Copa de Honor de municipalidad Buenos Aires). ↑ 코파 캄페오나토 3위. ↑ 결정전: 리버 플레이트 3 - 3 우라칸. 공동 준우승. ↑ 결승전: 라싱 클럽 0 - 0 반필드; 라싱 클럽 1 - 0 반필드. ↑ 결승전: 에스투디안테스 3 - 0 라싱 클럽. ↑ 결승전: 산로렌소 2 - 1 에스투디안테스.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2 - 0 라싱 클럽; 리버 플레이트 1 - 1 벨레스 사르스필드; 벨레스 사르스필드 4 - 2 라싱 클럽. ↑ 결승: 차카리타 주니어스 4 - 1 리버 플레이트. ↑ 다득점으로 우승자 결정: 인데펜디엔테(43득점) - 리버 플레이트(42득점).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2 - 1 로사리오 센트랄. ↑ 결승전: 로사리오 센트랄 2 - 1 산로렌소. ↑ 결승전: 산로렌소 1 - 0 리버 플레이트. ↑ 가 나 두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두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가 나 네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두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두 그룹으로 나누어 리그를 진행하고, 그룹별 상위 여섯 팀씩 결선리그를 벌였다.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1 - 0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인데펜디엔테 1 - 1 타예레스; 타예레스 2 - 2 인데펜디엔테.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0 - 0 인데펜디엔테; 인데펜디엔테 2 - 0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벨레스 사르스필드 0 - 2 리버 플레이트; 리버 플레이트 5 - 1 벨레스 사르스필드. ↑ 결승전: 우니온 데 산타페 1 - 1 리버 플레이트; 리버 플레이트 0 - 0 우니온 데 산타페. ↑ 결승전: 로사리오 센트랄 5 - 1 라싱 코르도바; 라싱 코르도바 2 - 0 로사리오 센트랄.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1 - 0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0 - 1 리버 플레이트. ↑ 결승전: 킬메스 0 - 0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2 - 0 킬메스. ↑ 결승전: 에스투디안테스 2 - 0 인데펜디엔테; 인데펜디엔테 2 - 1 에스투디안테스. ↑ 결승전: 리버 플레이트 0 - 3 페로 카릴 오에스테; 페로 카릴 오에스테 1 - 0 리버 플레이트. ↑ 본래 메트로폴리타노는 전반기, 나시오날은 후반기에 진행되었지만, 1982년부터 순서가 바뀌었다. 1985년 나시오날을 끝으로 메트로폴리타노와 나시오날이 폐지되고, 유럽 리그처럼 연년제 방식의 리그가 시작되었다. ↑ 결승전: 벨레스 사르스필드 1 - 2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이 시즌에서 각 경기 승자는 승점 3점을 얻었는데, 무승부인 경우엔 승부차기를 통해 승자는 2점, 패자는 1점을 얻었다. 그 때문에 각 팀의 승점이 다른 시즌보다 훨씬 높았다. ↑ 1990/91 시즌에 처음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가 도입되었는데, 뉴얼스 올드 보이스와 보카 주니어스가 각각 우승하였다. AFA에서는 두 팀간의 경기를 통해 통합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기로 하였고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펼쳤다. 승부차기 끝에 뉴얼스 올드 보이스가 결국 우승자로 결정되었다. 챔피언 결정전은 국가대표팀이 칠레에서 열렸던 코파 아메리카에 참여하는 중에 열렸기 때문에 대표팀에 소속된 양팀 선수들만큼 새로운 선수를 충원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1991/92 시즌에도 유사한 챔피언 결정전이 열렸는데, 그것은 실제로 챔피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3 조별 예선으로써, 본선 진출팀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3에서는 진출팀을 각 나라별로 묶어 조별 예선을 진행하였다.) ↑ 결승전: 뉴얼스 올드 보이스 1 - 0 보카 주니어스; 보카 주니어스 1 (1) - (3) 0 뉴얼스 올드 보이스 (승부차기). ↑ 토르네오 아페르투라 우승. ↑ 토르네오 클라우수라 우승. ↑ 이 시즌부터 각 경기 승자에게 승점 3점씩 부여하기 시작했다. ↑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1 - 2 에스투디안테스. ↑ 아페르투라가 종료된 시점에서 산로렌소와 보카 주니어스, 그리고 티그레의 승점이 39점으로 같았기 때문에 세 팀은 3자간 캄페온 결정전을 벌였다. 모든 팀이 각각 1승 1패를 거두었지만 골득실에서 앞선 보카가 우승 팀, 티그레가 준우승 팀이 되었다. ↑ 코파 수에시아(Copa Suecia):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공식 컵대회. 결승전: 아틀란타 3 - 1 라싱 클럽 ↑ 코파 아르헨티나(Copa Argentina de Fútbol):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데 클루베스(*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와는 다른 대회)에 출전할 팀을 선발하기 위해 만들었던 컵 대회. 결승전: 보카 주니어스 3 - 1 아틀란타; 아틀란타 1 - 0 보카 주니어스. ↑ 코파 센테나리오(Copa Centenario):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창설 100주년 기념 컵 대회 [2]. 결승전: 힘나시아 라 플라타 3 - 1 리버 플레이트 ↑ 3위 또는 4강: 토르네오 나시오날이나 메트로폴리타노에서는 리그전이 아닌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회가 진행되기도 했으며, 이경우 별도의 3,4위 결정전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 RSSSFGoles argentinos Archived 2012년 11월 15일 - 웨이백 머신 ESPN Deportes Universo Fútbol La Bombonera Archived 2012년 10월 24일 - 웨이백 머신Somos cuervos Archived 2012년 1월 12일 - 웨이백 머신 아르헨티나 클럽의 국제대회 성적[편집] 코파 리베르타도레스[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인데펜디엔테 7 0 1964, 1965, 1972, 1973, 1974, 1975, 1984 보카 주니어스 6 3 1977, 1978, 2000, 2001, 2003, 2007 1963, 1979, 2004 에스투디안테스 4 1 1968, 1969, 1970, 2009 1971 리버 플레이트 2 2 1986, 1996 1966, 1976 라싱 클럽 1 0 1967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 0 1985 벨레스 사르스필드 1 0 1994 뉴얼스 올드 보이스 0 2 1988, 1992 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보카 주니어스 2 0 2004, 2005 산로렌소 1 0 2002 아르세날 1 0 2007 리버 플레이트 0 1 2003 레코파 수다메리카나[편집] 팀명 우승 준우승 우승년도 준우승년도 보카 주니어스 4 1 1990, 2005, 2006, 2008 2004 인데펜디엔테 1 1 1995 1996 벨레스 사르스필드 1 1 1997 1995 리버 플레이트 0 2 1997, 1998 라싱 클럽 0 1 1989 산로렌소 0 1 2003 아르세날 0 1 2008 같이 보기[편집]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시스템 프리메라 B 나시오날 토르네오 데 베라노 외부 링크[편집] (스페인어/영어)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 공식 홈페이지 (스페인어) Base de Datos del Futbol Argentino (스페인어) Universo Futbol: 각 디비시온과 경기 통계 및 정보 (영어) RSSSF: Final Tables Argentina since 1891 vdeh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16/17) 고도이크루스 뉴얼스 올드 보이스 데펜사 이 후스티시아 라누스 라싱 라파엘라 로사리오 센트랄 리버 플레이트 반피엘드 벨그라노 벨레스 사르스피엘드 보카 주니어스 사르미엔토 산로렌소 아르세날 알도시비 에스투디안테스 올림포 우라칸 인데펜디엔테 콜론 킬메스 템페를레이 투쿠만 타예레스 티그레 파트로나토 힘나시아 라플라타 vdeh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시즌 토르네오 아페르투라/클라우수라 (1991 ~) 1991/92 1992/93 1993/94 1994/95 1995/96 1996/97 1997/98 1998/99 1999/2000 2000/01 2001/02 2002/03 2003/04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8/09 2009/10 vdeh 아르헨티나의 축구대표팀 국가대표팀 여자 국가대표팀 U-20 U-17 국내 리그남자 프리메라 디비시온 프리메라 B 나시오날 프리메라 B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A 프리메라 C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B 프리메라 D 메트로폴리타나 / 토르네오 아르헨티노 C 여자 캄페오나토 데 푸트볼 페메니노 기타 문서 축구 협회 축구팀 목록 경기장 목록 축구 선수 목록 리그 시스템 vdeh남아메리카의 축구 1부 리그 (CONMEBOL)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르헨티나_프리메라_디비시온&oldid=24183435" 분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남아메리카의 축구 1부 리그1891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숨은 분류: 스페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3: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일본 농림수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일본 농림수산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일본 농무성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농림수산성農林水産省 농림수산성 청사 농림수산성 청사 설립일 1978년 7월 5일 전신 농림성 소재지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 1쵸메 2번 1호 직원 수 23,337명 예산 2조 387억 9,900만 엔[1] 기관장 요시카와 다카모리 농림수산상 산하기관 임야청 수산청 웹사이트 일본 농림수산성 - 공식 웹사이트 농림수산성(일본어: 農林水産省 노린스이산쇼[*], The Ministry of Agriculture, Forestry and Fisheries, 약칭: MAFF)은 일본의 행정기관으로 대한민국 농림수산식품부 격이다. 경마를 감독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어, 일부 경마대회의 정식 명칭에는 "농림수산성상전"이 붙어있는 경우도 있다. 목차 1 설치 근거 및 소관 업무 1.1 설치 근거 1.2 소관 업무 2 연혁 3 조직 3.1 간부 3.2 내부부국 3.2.1 대신관방 3.2.1.1 국제부 3.2.1.2 통계부 3.2.1.3 검사부 3.2.2 소비·안전국 3.2.3 식료산업국 3.2.4 생산국 3.2.4.1 농산부 3.2.4.2 축산부 3.2.5 경영국 3.2.6 농촌진흥국[2] 3.2.6.1 농촌정책부 3.2.6.2 정비부 3.3 심의회 3.4 시설등기관 3.5 특별 기관 3.6 지방지분부국 3.6.1 지방농정국 3.7 외국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설치 근거 및 소관 업무[편집] 설치 근거[편집] 농림수산성설치법 제2조 소관 업무[편집] 식료의 안정제공 확보 농림수산업의 발전 농림어업 종사자의 복지 증진 농산어촌 및 중산간 지역등의 진흥 농업의 다면에 걸친 기능 발휘 삼림의 보속배양 및 삼림생산력의 증진 수산자원의 적절한 보존 및 관리 연혁[편집] 1881년(메이지 14년) 4월 7일: 농상무성을 설치. 1925년(다이쇼 14년) 4월 1일: 농상무성을 분리하여, 농림성과 상공성을 설치. 1943년(쇼와 18년) 11월 1일: 농림성과 상공성을 통합하여, 농상성을 설치. 1945년(쇼와 20년) 8월 26일: 농상성을 농림성으로 개편. 1978년(쇼와 53년) 7월 5일: 농림성을 농림수산성으로 개편. 조직[편집] 간부[편집] 대신 1인 부대신 2인 대신정무관 2인 사무차관 1인 심의관 1인 내부부국[편집]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대신관방[편집] 총무과 정책과 비서과 문서과 예산과 경리과 후생과 지방과 평가개선과 식료안전보장과 환경정책과 국제부[편집] 국제정책과 국제경제과 국제협력과 통계부[편집] 관리과 경영·구조통계과 생산유통소비통계과 검사부[편집] 조정과 검사과 소비·안전국[편집] 총무과 소비·안전정책과 표시·규격과 농산안전관리과 축수산안전관리과 식물방역과 동물위생과 식료산업국[편집] 총무과 기획과 신사업창출과 산업연계과 바이오매스순환자원과 식품소매서비스과 식품제조도매과 생산국[편집] 총무과 농산부[편집] 농산기획과 곡물과 무역업무과 원예작물과 지역작물과 기술보급과 농업환경대책과 축산부[편집] 축산기획과 축산진흥과 우유유제품과 식육계란과 경마감독과 경영국[편집] 총무과 경영정책과 농지정책과 취농·여성과 협동조직과 금융조정과 보험과 농촌진흥국[2][편집] 총무과 농촌정책부[편집] 농촌계획과 중산간지역진흥과 도시농촌교류과 농촌환경과 정비부[편집] 설계과 토지개량기획과 수자원과 농지자원과 방재과 심의회[편집] 농림물자규격조사회 시설등기관[편집] 동물의약품검사소 농림수산연수소 농림수산정책연구소 특별 기관[편집] 농림수산기술회의 지방지분부국[편집] 지방농정국[편집] 도호쿠농정국 간토농정국 호쿠리쿠농정국 도카이농정국 긴키농정국 주고쿠시코쿠농정국 규슈농정국 외국[편집] 임야청 수산청 같이 보기[편집] 농림수산대신 농림수산부대신 농림수산대신정무관 농림수산사무차관 농림수산심의관 대한민국 농림축산식품부 각주[편집] ↑ `12 기준. ↑ 별도로 차장을 둔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일본 농림수산성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일본어/영어) 농림수산성 공식 홈페이지 일본의 행정기관 내각 내각관방 내각법제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인사원 내각부 (궁내청 | 공정거래위원회 | 국가공안위원회·경찰청 | 특정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금융청 | 소비자청) | 부흥청 총무성 법무성 외무성 재무성 문부과학성 후생노동성 농림수산성 경제산업성 국토교통성 환경성 방위성 공해등조정위원회 소방청 검찰청 공안심사위원회 공안조사청 국세청 스포츠청 문화청 중앙노동위원회 임야청 수산청 자원에너지청 특허청 중소기업청 관광청 기상청 해상보안청 운수안전위원회 원자력규제위원회 방위장비청 회계검사원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23708761 LCCN: n50000507 ISNI: 0000 0001 0738 3612 GND: 252934-8 NLA: 36156828 NDL: 00259773 NKC: uzp201050427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일본_농림수산성&oldid=24528754" 분류: 일본 농림수산성도쿄도 소재의 관공서1978년 설립일본의 농업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עבריתItaliano日本語Lietuvių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5일 (금) 16: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혜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혜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혜순 출생 1955년경상북도 울진군 직업 작가, 평론가, 교육인 국적 대한민국 장르 시, 문학평론 김혜순(1955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1979년 시단에 등단했다. 1998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에 임용되었다. 2019년 6월 6일(현지시간) 시집 《죽음의 자서전》(영문제목 ‘Autobiography of Death’)으로 대한민국 최초로 캐나다 최고 권위의 그리핀 시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을 수상했다.[1] 목차 1 생애 2 학력 3 경력 4 가족 5 수상 6 저서 6.1 시집 6.1.1 인용 6.2 기타 7 참고자료 7.1 각주 생애[편집]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상하여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가을호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6월 6일 저녁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시집 <죽음의 자서전>으로 시집을 영역한 번역가 최돈미와 함께 그리핀 시문학상 인터내셔널 부문 상을 수상하여 65,000 캐나다달러를 상금(저자 40%와 번역자 60%)으로 받았다.[2] 학력[편집]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건국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 석사 건국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경력[편집] 1998.06 ~ :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0.06 ~ : 시전문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2002.12 ~ : 문학계간지 파라21 편집위원 가족[편집] 남편 : 극작가 이강백 수상[편집]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2000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 2018년 그리핀 시문학상 저서[편집] 시집[편집] 《또 다른 별에서》(문학과지성사, 1981)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 1985) 《어느 별의 지옥》(청하, 1988)(문학동네, 1997)(문학과지성사, 2017) 《우리들의 陰畵》(문학과지성사, 1990)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사 1994) ISBN 893200689X 《불쌍한 사랑 기계》(문학과지성사, 1997) ISBN 8932009155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사, 2000) ISBN 8932011591 《한 잔의 붉은 거울》(문학과지성사, 2004) ISBN 8932014957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2008) ISBN 978-89-320-1849-2 《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사, 2011) ISBN 978-89-320-2241-3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 ISBN 978-89-320-2850-7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ISBN|979-11-956-2271-9}}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 인용[편집] 《또 다른 별에서》이 시집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맹렬하게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이 말을 걸고 싶다, 간절한 내용을 담아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진정코 한번 멋드러지게 폭발하고 싶다. 그래서 이 껍질을 벗고 한 줌의 영혼만으로 저 공중 드높이…… 《어느 별의 지옥》꼴뚜기 같은 내 시들아. 저기 저 어둔 고래를 먹어치우자. 부디. 1997년 판.울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침을 뱉지.눈물은 그렇게 다루는 법. 《우리들의 陰畵》지난 시절엔 왜 그리도 자주 젊은 시신들이 땅 속에서, 물 속에서 떠오르던지. 나는 그만 죽음에 휘둘려셔. 사인불명의 퉁퉁 불은 시신을 앞에 놓고 우리는 왜 그리 또 손바닥이 붉어지던지.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시는 아마 길로 뭉쳐진 내 몸을 찬찬히 풀어,다시 그대에게 길 내어주는,그런 언술의 길인가보다.나는 다시 내 엉킨 몸을 풀어그대 발 아래 삼겹 사겹의 길을…… 《불쌍한 사랑 기계》나는 시라는 운명을 벗어나려는, 그러나 한사코 시 안에 있으려는, 그런 시를 쓸 때가 좋았다. 그 팽팽한 형식적 긴장이 나를 시쓰게 했다. 양수막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태아처럼.자루에 갇힌 고양이처럼.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그런데 왜 우리는 만날 때마다 태초를 다시 시작하고헤어질 때마다 종말의 나날을 견뎌야 하는지시와 사랑의 무늬그 바깥의 시간들을 나 어찌 다 견디고 살꼬? 《한 잔의 붉은 거울》얼음을 담요에 싸안고폭염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그렇게 이 시간들을 떨었다.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한 줄기 차디찬 핏물이신발을 적실 것처럼. 기타[편집] 작가론 《김수영》(건국대학교출판부, 1995) 산문집 《들끓는 사랑》(학고재, 1996)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문학동네, 2002)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문학동네, 2016) 참고자료[편집] 김혜순 (2003년 1월 21일). “44. 시인 김혜순 - "詩는 내 胎안의 모성을 깨우고 출산하는 행위"”. 한국일보. 2007년 12월 15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각주[편집] ↑ 한소범. 김혜순 시인 “아시아 여자라 그리핀 시문학상 못 받는 줄 알았다”. 한국일보. 2019년 6월 25일. ↑ [1]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5039845 LCCN: n87852481 ISNI: 0000 0000 7865 6481 GND: 12283835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혜순&oldid=24497836" 분류: 대한민국의 시인1955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서울예술대학교 교수울진군 출신건국대학교 동문강원대학교 동문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대산문학상 수상자미당문학상 수상자소월시문학상 수상자현대시작품상 수상자20세기 시인21세기 시인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9일 (토) 09: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진공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공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진공관 전자공학에서 진공관(眞空管, 영어: vacuum tube)은 일반적으로 진공의 공간에서 전자의 운동을 조종함으로써 신호를 증폭하거나 변경하는 데 사용하는 장치이다. 진공관이라는 이름 말고도 전자관(Electronic tube), 열전자관(Thermionic valve), 라디오 밸브(Radio valve)로 부르기도 한다. 한 때 대부분의 전자 장치에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의 전자 장치에서 더 작고 더 값싼 트랜지스터 또는 반도체, 집적회로 등으로 대체되었으며, 진공관은 높은 주파의 큰 전력을 사용하는 전자 장치에만 쓰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이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면밀히 말하자면 컴퓨터의 플로피 디스크 격이다). 목차 1 역사 1.1 1904 ~ 1926년 1.2 1960 ~ 1970년대 1.3 현재 2 형태 3 분류 3.1 구조별 분류 4 외형별 분류 5 특징 5.1 장점 5.2 단점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04 ~ 1926년[편집] 에디슨이 전구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전구에 전극을 하나 더 넣었는데, 전극이 양전하를 띄면 전구에 불이 들어올때 필라멘트에서 전극으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발견하였다. 1884년에 이 현상을 에디슨이 발견했기 때문에 에디슨 효과라고 불리었으나, 에디슨은 백열전구의 효율 개선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이 현상을 실용화하지 않았다. 이 에디슨 효과가 단서가 되어 영국의 플레밍이 1904년에 최초의 진공관인 이극 진공관을 발명했고, 미국의 디포리스트가 1906년 삼극진공관을 발명했다. 1912년 해럴드 아놀드는 진공관의 내부 구조를 바꾸고 진공관 내부의 공기를 최대한 빼서 부분 진공 상태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후 1914년에 장거리 전화선에서 증폭기로 진공관이 사용되었다. 이후 1910년대에 독일의 물리학자 쇼트키가 사극진공관을 실험하였고, 미국의 공학자 힐이 이를 토대로 실용적인 사극진공관을 개발했다. 네덜란드의 공학자 밴저민 델레겐은 1926년에 오극진공관을 발명했다. 1960 ~ 1970년대[편집]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자 1960년대 들어 진공관은 점차 트랜지스터로 교체되었다. 진공관으로는 원리상 단극성인 것밖에 만들 수 없지만 트랜지스터로는 양극성 소자를 만들 수있다는 점 이외에도, 진공관보단 트랜지스터쪽이 제조가 용이하며, 가격이 트랜지스터 쪽이 낮았기 때문에, 주 회로에 진공관을 사용한 텔레비전 수상기나 라디오 수신기는 1970년대에 들어가면 생산이 중지되기에 이른다. 현재[편집] 다이오드와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이후 진공관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지만, 일부 트랜지스터로 대제하지 못하는 분야에서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높은 주파의 큰 전력(10GHz·1 킬로와트 이상)의 용도에서는 현재에도 진공관이 쓰이고 있는데, AM 라디오 방송 (중파방송, 단파방송) 송신에서 100kW~1000kW 급 출력을 낼때 30kV의 고전압도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진공관이 널리 사용된다.(FM 라디오 방송이나 디지털 방송의 경우 평균 500W~1kW로 높은 출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반도체가 사용되고 있다.) 트랜지스터의 경우 지능형 전력 모듈(IPM) 소자의 경우 대역폭이 20kHz에 최대 작동 전압이 2kV 정도이고, 절연 게이트 양극성 트랜지스터(IGBT) 소자는 6.6kV까지 낼수 있으나 제어 주파수가 매우 낮다. 단, LORAN-C 시스템의 경우 트랜지스터로 출력을 높이기 위해 작은 모듈들을 병렬로 연결하여 고전류로 구동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브라운관과 일본에서 발명된 진공 형광 디스플레이는 디스플레이 장치로 사용되며, 강력한 전자파를 만들어내는 자전관은 레이다나 전자레인지에 쓰이고 있다. 최근엔 브라운관대신 평면디스플레이를 사용하게되어 자전관이 대량생산이 되는 유일한 진공관이 되었다. 진공관을 오디오 앰프의 증폭용 소자로 사용할 경우 독특한 음질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오디오 매니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고급 오디오 앰프등 한정된 용도에서도 쓰이고 있다. 진공관을 증폭용 소자로 사용한 앰프는 트랜지스터 앰프에 비해 구조가 단순하고 만들기 쉽기 때문에, 개인이 진공관 앰프를 자작한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디오용 진공관은 중국 등에서는 아직도 제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방송국, 의료기기용으로 극소수로 제조되기도 한다. 형태[편집] 2극 진공관의 구조3극 진공관의 구조 진공관은 바깥의 유리관(Glass tube)과 그 안에 금속으로 된 전극이 있다. 일부 군용이나 특수용도로 된 진공관은 철을 유리로 밀봉한 형태의 금속관을 사용하기도 한다. 전극은 관 속에서 전자의 흐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진공관의 전극은 캐소드와 플레이트와 그리드로 구성된다. 캐소드(Cathode) : 백열전구에 있는 것과 같은 필라멘트(또는 히터(heater))가 있는데, 전류가 캐소드로 흘러 들어가서 캐소드가 가열되면 열과 함께 전자가 방출된다. 캐소드의 열은 플레이트의 금속 표면층을 가열시키고 전자를 보낸다. 캐소드는 음전하(-)를 띄는데, 전자 역시 음전하를 띄고 있다. 같은 성질을 가진 두 전하는 항상 서로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므로, 방출된 전자를 캐소드가 밀어내게 된다. 캐소드는 필라멘트 자체가 캐소드의 역할을 하는 '직열식'과 별도의 히터가 캐소드를 가열시키는 '방열식'이 있다. 플레이트(Plate) 또는 어노드(Anode) : 큰 판 모양의 금속 부품으로 되어 있다. 캐소드에서 방출한 전자를 플레이트가 받아서 이동된다. 플레이트는 양전하(+)를 띄는데, 반대 성질을 가진 두 전하는 항상 서로 잡아당기는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캐소드가 밀어낸 전자를 받아들여 전류가 흐르게 한다. 플레이트의 형태는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일부 특수한 관은 망으로 싸인 형태인 것도 있다. 그리드(Grid) : 3극 이상의 진공관에 들어있다. 플레이트와 캐소드 사이에 가는 전선을 망이나 그물 형태로 감겨놓은 형태의 부품이다. 캐소드와 플레이트 사이에 있으며 진공관에 흐르는 전자의 양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드가 강한 음전하(-)를 띄는 경우 플레이트에 다다르는 전자 양이 적어지고, 그리드의 음전하가 약해지면 플레이트에 다다르는 전자 양이 많아진다. 그리드가 띄고 있는 전하의 세기는 진공관으로 들어가는 전자 신호의 세기와 동일하다. 4극 진공관에는 스크린(screen), 5극 진공관에는 서프레서(suppressor)가 추가로 들어간다. 게터(Getter) : 진공관을 밀봉할 때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기체를 흡수해주는 물질이다. 게터는 형태에 따라 게터 미러(Getter mirror)와 게터 링(Getter Ring)이 있다. 게터 미러는 진공관 안쪽에 산화 바륨을 바른 것으로 거울 처럼 빛나보이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게터 링은 게터 미러 부근에 작은 고리나 금속판 같은 것을 철사에 달아놓은 평태의 부품이다. 게터는 구조에 따라 플레이트 구조물 위에 있거나, 아래 혹은 베이스 밑부분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진공관의 상태를 알아볼때 게터 미러의 상태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데, 게터 미러가 변색되거나 줄어들 경우 수명이 다되어 감을 의미한다. 단, 진공관의 상태와 관계없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계측기를 이용해서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있다. 스페이서(spacer) : 진공관 안쪽에 들어간 얇은 원형의 절연체로, 플레이트 구조물이 유리관의 벽에 닿지 않게 하고, 부품간이 서로 붙지 않도록 절연을 유지해주는 부품이다. 베이스(Base) : 진공관 아래 부분의 부품으로, 진공관의 핀이 위치해있다. 재질은 금속이 대부분이나 플라스틱, 운모 판등도 존재한다. 미니어처관이나 서브미니어처관은 베이스가 없이 전체가 유리로 밀봉되어 있으며 유리에서 바로 핀이 노출된 형태로 되어있다. 분류[편집] 구조별 분류[편집] 2극 진공관 다이오드(Diode)라고도 부른다. 원래 다이오드는 2극 진공관을 가리켰다. 캐소드와 플레이트만으로 이루어진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로 정류기나 검파기으로 활용된다. 최초 등장시에는 전신기에 사용되었다. 정류기는 교류 전류를 직류 전류로 바꾸어주는 장치인데, 교류를 2극 진공관에 보내면 캐소드가 음전하를 띌 때만 전류가 통과되므로, 특정 방향으로 흐를 때만 2극 진공관을 통과할 수 있으며, 통과후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직류 전류가 된다. 이것을 정류 작용이라고 한다. 검파기에서는 2극 진공관이 전파의 약한 교류를 직류로 바꾸고, 이 직류를 통하여 수신기에서 소리와 영상을 내보낸다. 3극 진공관 트라이오드(Triode)라고도 부른다. 2극 진공관에 그리드가 추가된 형태로, 이 그리드가 전류의 흐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처음 그리드에 전압을 걸어주면 전자가 그리드에서 되돌아가서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 여기에 그리드의 전압을 낮추면 낮출수록, 플레이트로 흐르는 전자의 양이 많아지게 되고 진공관을 흐르는 전류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드의 작은 전압의 변화가 플레이트 전류의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를 증폭 작용이라고 한다. 증폭 작용 이외에 고주파 전류를 만들어내는 발진 작용, 고주파 전류에 포함되어 있는 주파수가 적은 저주파 전류를 가려내는 검파 작용도 한다. 4극 진공관 테트로드(Tetrode)라고도 부르는데. 그리드와 플레이트 사이에 스크린(screen) 그리드가 있는 형태다. 여기에 양전압(+)을 걸면 전자가 가속되는 효과가 나온다. 다만, 스크린 그리드를 통해 가속된 전자가 플레이트와 충돌하여 2차 전자가 방출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5극 진공관 펜토드(Pentode)라고도 부르며, 서프레서(suppressor) 그리드가 더 추가된 형태이다. 서프레서에 음전압을 걸어 2차 전자를 플레이트로 돌려내는 형태를 가진다. 4극관의 문제를 개선한 형태로 전력 증폭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빔관 빔 테트로드(Beam Tetrode)라고 부른다. 1936년에 RCA가 발표하였다. 5극관과 달리 서프레서 그리드가 캐소드와 연결된 형태로 2차 전자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5극 진공관보다 더 효율이 좋아서 오디오용 고출력으로 많이 쓰인다. 음극선관 브라운관이라고도 부른다. 진공관의 원리를 응용하여 시각을 표현해주는 장비이다. 음극선관의 앞면은 원형과 사각형의 큰 화면이고, 반대편은 좁은 부분으로 전자총이 있다. 전자총에서 나간 전자가 자기장에 의해 휘어서 그림자 마스크의 한 부분에 부딪히면서 빛을 낸다. 마이크로파 진공관 고주파수의 전자기파를 만들고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마이크로파진공관은 클라이스트론, 마그네트론, 진행파관 등이 있다. 가스진공관 진공관 안에 아르곤, 수은 증기, 네온 등의 기체가 소량으로 들어있는데, 이 기체는 진공관에 흐르는 전자의 양을 높인다. 기체의 원자에 있는 전자가 빠져나가 이온화되면 양전화를 띄게 되어 더 많은 전자가 이동된다. 가스진공관의 예로 사이러트론 등이 있다. 외형별 분류[편집] 이 문단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나스관       1930년대까지 에스티관      1930년대~1950년대 ST 관 지티관       1940년대~1950년대 GT 관 미니어쳐관     1950년대 말 mT 관 서브 미니어처 관  1960년대 말 특징[편집] 이 문단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장점[편집] 캐리어 이동도가 높다. (자유 공간 안의 전자) 구조에 따라서는 높은 내압을 확보할 수 있다. 구조가 단순하고, 절연 파괴 등에 따른 불가역 손상이 적다. 한편, 트랜지스터 등의 반도체는 절연 파괴시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더불어 전자기 펄스(EMP)에도 트랜지스터에 비해 비교적 강한 편이다. 단점[편집] 진공관은 백열등의 구조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백열등이 가지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원리적으로 열전자원(필라멘트나 히터)이 필요해서 소비 전력이 크고, 열이 많이 난다. 이 때문에 진공관을 이용하는 장치에서 장시간 가동을 하기 위해서 별도의 냉각장치를 달아놓기도 한다. 열전자원의 수명이 비교적 짧다. (수천 시간 정도) 그래서 기판에 바로 장착 하는 방식이 아닌 소켓을 이용하여 교환이 가능하도록 장착하는 방식을 써야했고, 작동중에 진공관을 교체하는 일이 빈번하다. 크기를 줄이기 쉽지 않고 내진성에 문제가 있다. 특히 고출력을 내는 진공관은 크기가 매우 커지기 때문에, 과거 진공관을 통해 컴퓨터를 제조했을때 어마어마한 크기를 요구하였다. 외부환경에 매우 취약하다. 열전자원을 가열할 때 겨울 등 저온 환경에서는 가열이 제대로 안되어 작동을 못하기도 하고, 여름 등 고온 환경에서는 과열되어 진공관이 쉽게 파손되기도 한다. 트랜지스터에 견주어 소자 단가가 비싸다. 같이 보기[편집] 음극 선관 전자공학 광전 증폭관 앰프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진공관 http://www.cfp-radio.com/realisations/rea03/rea03.html - (FR) How to build a vacuum tube tester. How vacuum tubes really work - Thermionic emission and vacuum tube theory, using introductory college-level mathematics. The Vacuum Tube FAQ - FAQ from rec.audio The invention of the thermionic valve. Fleming discovers the thermionic (or oscillation) valve, or 'diode'. Tubes Vs. Transistors : Is There An Audible Difference? - 1972 AES paper on audible differences in sound quality between vacuum tubes and transistors. The Virtual Valve Museum The cathode ray tube site O'Neill's Electronic museum - vacuum tube museum Vacuum tubes for beginners -- Japanese Version NJ7P Tube Database - Data manual for tubes used in North America. Vacuum tube data sheet locator Characteristics and datasheets Video of amateur radio operator making his own vacuum tube triodes Tuning eye tubes. Archive film of Mullard factory Blackburn [1] - Tube basics vdeh전자 부품반도체 소자 사태 다이오드 배레터 접합형 트랜지스터 달링턴 트랜지스터 다이악 다이오드 장효과 트랜지스터 헤테로구조 장벽 버랙터 절연 게이트 양극선 트랜지스터 집적 회로 접합형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 발광 다이오드 메미스터 메리스터 MOSFET 광검출기 PIN 다이오드 쇼트키 다이오드 반도체 제어 정류기 사이리스터 트랜지스터 TRIAC 단일접합 트랜지스터 바리캡 다이오드 제너 다이오드 진공관 오디언 Beam tetrode 컴팩트론 진공 다이오드 플레밍 밸브 오격자 변환관 Nonode 뉴비스터 오극관 광전자 배증관 Selectron tube 사극관 삼극관 윌리엄스관 RF 진공관 후진파 발진관 자전관 교차계자 증폭관 자이로트론 유도 출력관 속도변조관 메이저 광전관 진행파관 음극선관 빔 편향관 문자 표시관 송상관 동조지시관 모노스코프 축적관 촬상관 방전관 냉음극관 크로사트론 데카트론 이그나이트론 크라이트론 수은 정류기 네온등 닉시관 사이러트론 트리가트론 정전압방전관 가변부품 가변저항 가변축전기 수동소자 접속기 영상 및 음성 콘센트 고주파 접속기 전해 검출기 아철산염 자심 퓨즈 저항기 서미스터 배리스터 변압기 울러스턴선 리액티브 축전기 자기 공진자 결정 진동자 유도자 전거 통제 LCCN: sh85141746 GND: 4014330-2 BNF: cb119777227 (데이터) NDL: 0057106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진공관&oldid=23767641" 분류: 진공관전자 부품잉글랜드의 발명품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미완성 문단이 포함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Oromoo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Svenskaதமிழ்తెలుగు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5일 (월) 11: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진공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공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진공관 전자공학에서 진공관(眞空管, 영어: vacuum tube)은 일반적으로 진공의 공간에서 전자의 운동을 조종함으로써 신호를 증폭하거나 변경하는 데 사용하는 장치이다. 진공관이라는 이름 말고도 전자관(Electronic tube), 열전자관(Thermionic valve), 라디오 밸브(Radio valve)로 부르기도 한다. 한 때 대부분의 전자 장치에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의 전자 장치에서 더 작고 더 값싼 트랜지스터 또는 반도체, 집적회로 등으로 대체되었으며, 진공관은 높은 주파의 큰 전력을 사용하는 전자 장치에만 쓰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이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면밀히 말하자면 컴퓨터의 플로피 디스크 격이다). 목차 1 역사 1.1 1904 ~ 1926년 1.2 1960 ~ 1970년대 1.3 현재 2 형태 3 분류 3.1 구조별 분류 4 외형별 분류 5 특징 5.1 장점 5.2 단점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04 ~ 1926년[편집] 에디슨이 전구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전구에 전극을 하나 더 넣었는데, 전극이 양전하를 띄면 전구에 불이 들어올때 필라멘트에서 전극으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발견하였다. 1884년에 이 현상을 에디슨이 발견했기 때문에 에디슨 효과라고 불리었으나, 에디슨은 백열전구의 효율 개선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이 현상을 실용화하지 않았다. 이 에디슨 효과가 단서가 되어 영국의 플레밍이 1904년에 최초의 진공관인 이극 진공관을 발명했고, 미국의 디포리스트가 1906년 삼극진공관을 발명했다. 1912년 해럴드 아놀드는 진공관의 내부 구조를 바꾸고 진공관 내부의 공기를 최대한 빼서 부분 진공 상태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후 1914년에 장거리 전화선에서 증폭기로 진공관이 사용되었다. 이후 1910년대에 독일의 물리학자 쇼트키가 사극진공관을 실험하였고, 미국의 공학자 힐이 이를 토대로 실용적인 사극진공관을 개발했다. 네덜란드의 공학자 밴저민 델레겐은 1926년에 오극진공관을 발명했다. 1960 ~ 1970년대[편집]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자 1960년대 들어 진공관은 점차 트랜지스터로 교체되었다. 진공관으로는 원리상 단극성인 것밖에 만들 수 없지만 트랜지스터로는 양극성 소자를 만들 수있다는 점 이외에도, 진공관보단 트랜지스터쪽이 제조가 용이하며, 가격이 트랜지스터 쪽이 낮았기 때문에, 주 회로에 진공관을 사용한 텔레비전 수상기나 라디오 수신기는 1970년대에 들어가면 생산이 중지되기에 이른다. 현재[편집] 다이오드와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이후 진공관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지만, 일부 트랜지스터로 대제하지 못하는 분야에서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높은 주파의 큰 전력(10GHz·1 킬로와트 이상)의 용도에서는 현재에도 진공관이 쓰이고 있는데, AM 라디오 방송 (중파방송, 단파방송) 송신에서 100kW~1000kW 급 출력을 낼때 30kV의 고전압도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진공관이 널리 사용된다.(FM 라디오 방송이나 디지털 방송의 경우 평균 500W~1kW로 높은 출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반도체가 사용되고 있다.) 트랜지스터의 경우 지능형 전력 모듈(IPM) 소자의 경우 대역폭이 20kHz에 최대 작동 전압이 2kV 정도이고, 절연 게이트 양극성 트랜지스터(IGBT) 소자는 6.6kV까지 낼수 있으나 제어 주파수가 매우 낮다. 단, LORAN-C 시스템의 경우 트랜지스터로 출력을 높이기 위해 작은 모듈들을 병렬로 연결하여 고전류로 구동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브라운관과 일본에서 발명된 진공 형광 디스플레이는 디스플레이 장치로 사용되며, 강력한 전자파를 만들어내는 자전관은 레이다나 전자레인지에 쓰이고 있다. 최근엔 브라운관대신 평면디스플레이를 사용하게되어 자전관이 대량생산이 되는 유일한 진공관이 되었다. 진공관을 오디오 앰프의 증폭용 소자로 사용할 경우 독특한 음질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오디오 매니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고급 오디오 앰프등 한정된 용도에서도 쓰이고 있다. 진공관을 증폭용 소자로 사용한 앰프는 트랜지스터 앰프에 비해 구조가 단순하고 만들기 쉽기 때문에, 개인이 진공관 앰프를 자작한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디오용 진공관은 중국 등에서는 아직도 제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방송국, 의료기기용으로 극소수로 제조되기도 한다. 형태[편집] 2극 진공관의 구조3극 진공관의 구조 진공관은 바깥의 유리관(Glass tube)과 그 안에 금속으로 된 전극이 있다. 일부 군용이나 특수용도로 된 진공관은 철을 유리로 밀봉한 형태의 금속관을 사용하기도 한다. 전극은 관 속에서 전자의 흐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진공관의 전극은 캐소드와 플레이트와 그리드로 구성된다. 캐소드(Cathode) : 백열전구에 있는 것과 같은 필라멘트(또는 히터(heater))가 있는데, 전류가 캐소드로 흘러 들어가서 캐소드가 가열되면 열과 함께 전자가 방출된다. 캐소드의 열은 플레이트의 금속 표면층을 가열시키고 전자를 보낸다. 캐소드는 음전하(-)를 띄는데, 전자 역시 음전하를 띄고 있다. 같은 성질을 가진 두 전하는 항상 서로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므로, 방출된 전자를 캐소드가 밀어내게 된다. 캐소드는 필라멘트 자체가 캐소드의 역할을 하는 '직열식'과 별도의 히터가 캐소드를 가열시키는 '방열식'이 있다. 플레이트(Plate) 또는 어노드(Anode) : 큰 판 모양의 금속 부품으로 되어 있다. 캐소드에서 방출한 전자를 플레이트가 받아서 이동된다. 플레이트는 양전하(+)를 띄는데, 반대 성질을 가진 두 전하는 항상 서로 잡아당기는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캐소드가 밀어낸 전자를 받아들여 전류가 흐르게 한다. 플레이트의 형태는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일부 특수한 관은 망으로 싸인 형태인 것도 있다. 그리드(Grid) : 3극 이상의 진공관에 들어있다. 플레이트와 캐소드 사이에 가는 전선을 망이나 그물 형태로 감겨놓은 형태의 부품이다. 캐소드와 플레이트 사이에 있으며 진공관에 흐르는 전자의 양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드가 강한 음전하(-)를 띄는 경우 플레이트에 다다르는 전자 양이 적어지고, 그리드의 음전하가 약해지면 플레이트에 다다르는 전자 양이 많아진다. 그리드가 띄고 있는 전하의 세기는 진공관으로 들어가는 전자 신호의 세기와 동일하다. 4극 진공관에는 스크린(screen), 5극 진공관에는 서프레서(suppressor)가 추가로 들어간다. 게터(Getter) : 진공관을 밀봉할 때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기체를 흡수해주는 물질이다. 게터는 형태에 따라 게터 미러(Getter mirror)와 게터 링(Getter Ring)이 있다. 게터 미러는 진공관 안쪽에 산화 바륨을 바른 것으로 거울 처럼 빛나보이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게터 링은 게터 미러 부근에 작은 고리나 금속판 같은 것을 철사에 달아놓은 평태의 부품이다. 게터는 구조에 따라 플레이트 구조물 위에 있거나, 아래 혹은 베이스 밑부분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진공관의 상태를 알아볼때 게터 미러의 상태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데, 게터 미러가 변색되거나 줄어들 경우 수명이 다되어 감을 의미한다. 단, 진공관의 상태와 관계없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계측기를 이용해서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있다. 스페이서(spacer) : 진공관 안쪽에 들어간 얇은 원형의 절연체로, 플레이트 구조물이 유리관의 벽에 닿지 않게 하고, 부품간이 서로 붙지 않도록 절연을 유지해주는 부품이다. 베이스(Base) : 진공관 아래 부분의 부품으로, 진공관의 핀이 위치해있다. 재질은 금속이 대부분이나 플라스틱, 운모 판등도 존재한다. 미니어처관이나 서브미니어처관은 베이스가 없이 전체가 유리로 밀봉되어 있으며 유리에서 바로 핀이 노출된 형태로 되어있다. 분류[편집] 구조별 분류[편집] 2극 진공관 다이오드(Diode)라고도 부른다. 원래 다이오드는 2극 진공관을 가리켰다. 캐소드와 플레이트만으로 이루어진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로 정류기나 검파기으로 활용된다. 최초 등장시에는 전신기에 사용되었다. 정류기는 교류 전류를 직류 전류로 바꾸어주는 장치인데, 교류를 2극 진공관에 보내면 캐소드가 음전하를 띌 때만 전류가 통과되므로, 특정 방향으로 흐를 때만 2극 진공관을 통과할 수 있으며, 통과후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직류 전류가 된다. 이것을 정류 작용이라고 한다. 검파기에서는 2극 진공관이 전파의 약한 교류를 직류로 바꾸고, 이 직류를 통하여 수신기에서 소리와 영상을 내보낸다. 3극 진공관 트라이오드(Triode)라고도 부른다. 2극 진공관에 그리드가 추가된 형태로, 이 그리드가 전류의 흐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처음 그리드에 전압을 걸어주면 전자가 그리드에서 되돌아가서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 여기에 그리드의 전압을 낮추면 낮출수록, 플레이트로 흐르는 전자의 양이 많아지게 되고 진공관을 흐르는 전류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드의 작은 전압의 변화가 플레이트 전류의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를 증폭 작용이라고 한다. 증폭 작용 이외에 고주파 전류를 만들어내는 발진 작용, 고주파 전류에 포함되어 있는 주파수가 적은 저주파 전류를 가려내는 검파 작용도 한다. 4극 진공관 테트로드(Tetrode)라고도 부르는데. 그리드와 플레이트 사이에 스크린(screen) 그리드가 있는 형태다. 여기에 양전압(+)을 걸면 전자가 가속되는 효과가 나온다. 다만, 스크린 그리드를 통해 가속된 전자가 플레이트와 충돌하여 2차 전자가 방출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5극 진공관 펜토드(Pentode)라고도 부르며, 서프레서(suppressor) 그리드가 더 추가된 형태이다. 서프레서에 음전압을 걸어 2차 전자를 플레이트로 돌려내는 형태를 가진다. 4극관의 문제를 개선한 형태로 전력 증폭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빔관 빔 테트로드(Beam Tetrode)라고 부른다. 1936년에 RCA가 발표하였다. 5극관과 달리 서프레서 그리드가 캐소드와 연결된 형태로 2차 전자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5극 진공관보다 더 효율이 좋아서 오디오용 고출력으로 많이 쓰인다. 음극선관 브라운관이라고도 부른다. 진공관의 원리를 응용하여 시각을 표현해주는 장비이다. 음극선관의 앞면은 원형과 사각형의 큰 화면이고, 반대편은 좁은 부분으로 전자총이 있다. 전자총에서 나간 전자가 자기장에 의해 휘어서 그림자 마스크의 한 부분에 부딪히면서 빛을 낸다. 마이크로파 진공관 고주파수의 전자기파를 만들고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마이크로파진공관은 클라이스트론, 마그네트론, 진행파관 등이 있다. 가스진공관 진공관 안에 아르곤, 수은 증기, 네온 등의 기체가 소량으로 들어있는데, 이 기체는 진공관에 흐르는 전자의 양을 높인다. 기체의 원자에 있는 전자가 빠져나가 이온화되면 양전화를 띄게 되어 더 많은 전자가 이동된다. 가스진공관의 예로 사이러트론 등이 있다. 외형별 분류[편집] 이 문단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나스관       1930년대까지 에스티관      1930년대~1950년대 ST 관 지티관       1940년대~1950년대 GT 관 미니어쳐관     1950년대 말 mT 관 서브 미니어처 관  1960년대 말 특징[편집] 이 문단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장점[편집] 캐리어 이동도가 높다. (자유 공간 안의 전자) 구조에 따라서는 높은 내압을 확보할 수 있다. 구조가 단순하고, 절연 파괴 등에 따른 불가역 손상이 적다. 한편, 트랜지스터 등의 반도체는 절연 파괴시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더불어 전자기 펄스(EMP)에도 트랜지스터에 비해 비교적 강한 편이다. 단점[편집] 진공관은 백열등의 구조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백열등이 가지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원리적으로 열전자원(필라멘트나 히터)이 필요해서 소비 전력이 크고, 열이 많이 난다. 이 때문에 진공관을 이용하는 장치에서 장시간 가동을 하기 위해서 별도의 냉각장치를 달아놓기도 한다. 열전자원의 수명이 비교적 짧다. (수천 시간 정도) 그래서 기판에 바로 장착 하는 방식이 아닌 소켓을 이용하여 교환이 가능하도록 장착하는 방식을 써야했고, 작동중에 진공관을 교체하는 일이 빈번하다. 크기를 줄이기 쉽지 않고 내진성에 문제가 있다. 특히 고출력을 내는 진공관은 크기가 매우 커지기 때문에, 과거 진공관을 통해 컴퓨터를 제조했을때 어마어마한 크기를 요구하였다. 외부환경에 매우 취약하다. 열전자원을 가열할 때 겨울 등 저온 환경에서는 가열이 제대로 안되어 작동을 못하기도 하고, 여름 등 고온 환경에서는 과열되어 진공관이 쉽게 파손되기도 한다. 트랜지스터에 견주어 소자 단가가 비싸다. 같이 보기[편집] 음극 선관 전자공학 광전 증폭관 앰프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진공관 http://www.cfp-radio.com/realisations/rea03/rea03.html - (FR) How to build a vacuum tube tester. How vacuum tubes really work - Thermionic emission and vacuum tube theory, using introductory college-level mathematics. The Vacuum Tube FAQ - FAQ from rec.audio The invention of the thermionic valve. Fleming discovers the thermionic (or oscillation) valve, or 'diode'. Tubes Vs. Transistors : Is There An Audible Difference? - 1972 AES paper on audible differences in sound quality between vacuum tubes and transistors. The Virtual Valve Museum The cathode ray tube site O'Neill's Electronic museum - vacuum tube museum Vacuum tubes for beginners -- Japanese Version NJ7P Tube Database - Data manual for tubes used in North America. Vacuum tube data sheet locator Characteristics and datasheets Video of amateur radio operator making his own vacuum tube triodes Tuning eye tubes. Archive film of Mullard factory Blackburn [1] - Tube basics vdeh전자 부품반도체 소자 사태 다이오드 배레터 접합형 트랜지스터 달링턴 트랜지스터 다이악 다이오드 장효과 트랜지스터 헤테로구조 장벽 버랙터 절연 게이트 양극선 트랜지스터 집적 회로 접합형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 발광 다이오드 메미스터 메리스터 MOSFET 광검출기 PIN 다이오드 쇼트키 다이오드 반도체 제어 정류기 사이리스터 트랜지스터 TRIAC 단일접합 트랜지스터 바리캡 다이오드 제너 다이오드 진공관 오디언 Beam tetrode 컴팩트론 진공 다이오드 플레밍 밸브 오격자 변환관 Nonode 뉴비스터 오극관 광전자 배증관 Selectron tube 사극관 삼극관 윌리엄스관 RF 진공관 후진파 발진관 자전관 교차계자 증폭관 자이로트론 유도 출력관 속도변조관 메이저 광전관 진행파관 음극선관 빔 편향관 문자 표시관 송상관 동조지시관 모노스코프 축적관 촬상관 방전관 냉음극관 크로사트론 데카트론 이그나이트론 크라이트론 수은 정류기 네온등 닉시관 사이러트론 트리가트론 정전압방전관 가변부품 가변저항 가변축전기 수동소자 접속기 영상 및 음성 콘센트 고주파 접속기 전해 검출기 아철산염 자심 퓨즈 저항기 서미스터 배리스터 변압기 울러스턴선 리액티브 축전기 자기 공진자 결정 진동자 유도자 전거 통제 LCCN: sh85141746 GND: 4014330-2 BNF: cb119777227 (데이터) NDL: 0057106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진공관&oldid=23767641" 분류: 진공관전자 부품잉글랜드의 발명품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미완성 문단이 포함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Oromoo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Svenskaதமிழ்తెలుగు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5일 (월) 11: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튜링 기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튜링 기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공지능의 정도를 판별하는 테스트에 대해서는 튜링 테스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튜링 기계의 작동 방식을 묘사하는 그림 이론 전산학에서, 튜링 기계(영어: Turing machine)는 긴 테이프에 쓰여있는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꾸는 기계이다.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계는 적당한 규칙과 기호를 입력한다면 일반적인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컴퓨터 CPU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1936년 앨런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고 [1] 이 장치에 영어 단어인 automatic의 a를 따서 "a-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가 바로 나중에 창시자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서 튜링 기계라 불리게 되었다. 1948년 "똑똑한 기계"라는 글에서 앨런 튜링은 자신의 "a-기계"를 간결히 정의하였다.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성 문제에의 응용"을 언급하며 튜링기계(이 글에서는 논리적 계산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무한한 저장공간은 무한한 길이의 테이프로 나타나는데 이 테이프는 하나의 기호를 인쇄할 수 있는 크기의 정사각형들로 쪼개져있다. 언제든지 기계속에는 하나의 기호가 들어가있고 이를 "읽힌 기호"라고 한다. 이 기계는 "읽힌 기호"를 바꿀 수 있는데 그 기계의 행동은 오직 읽힌 기호만이 결정한다. 테이프는 앞뒤로 움직일 수 있어서 모든 기호들은 적어도 한번씩은 기계에게 읽힐 것이다. ”   — (튜링, 1948, p.61) 목차 1 개론 2 정의 2.1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 2.2 다른 정의들 2.3 상태 2.4 튜링 기계의 “상태” 모식도 3 튜링 머신과 동치인 다른 모델들 4 범용 튜링 기계 5 실제 기계와의 비교 5.1 튜링 기계의 한계(시간 복잡도 이론) 6 역사 6.1 역사적 배경 : 계산 기계 6.2 판정문제 6.3 앨런 튜링의 a-기계 6.4 1937-1970 :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 6.5 1970-현재 : 계산 모델로서의 튜링 기계 7 같이 보기 8 참고 9 참고 문헌 9.1 1차 저서, 재출판, 편집 9.2 계산 이론 9.3 처치-튜링 명제 9.4 작은 튜링 기계 9.5 기타 10 외부 링크 개론[편집] 튜링 기계는 수학적 모형의 일종으로, 특수한 테이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튜링 기계가 사용하는 테이프 위에는 테이프 머릿기호를 바탕으로 기계가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기호들이 있다. 작동 방식은, “42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쓴다.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7번째 상태로 간다. 17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쓰고,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6번째 상태로 간다”와 같이 유한한 개수의 기초적 지시문으로 이루어진다. 원문(“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에 따르면 튜링이 상상한 것은 이러한 연산을 특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라 불릴 사람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테이프 : 테이프는 서로 연속한 단위 구간들로 나뉜다. 각각의 구간은 알파벳을 가지고, 특정 알파벳은 비어있음을 나타낸다. 테이프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임의적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한번도 쓰이지 않은 구간은 비어있다는 기호로 표시된다. 어떤 테이프는 왼쪽을 고정시키고 오른쪽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반직선의 형태로 되어있다. 머리 : 기계가 머리를 읽으면 테이프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한 칸 (오직 한 칸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모델에서는 머리가 움직이고 테이프가 고정되기도 한다. 상태 기록기는 튜링 기계의 유한히 많은 상태 중 하나를 기록한다. ‘개시 상태’는 상태 기록기를 초기화시키는 특별한 상태이다. 유한한 표 (또는 행동표)는 특정한 상태(qi)에 있는 기계가 어떠한 기호(aj)를 읽을 때 해야 할 행동을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5튜플). 기호를 지우거나 적고 (aj를 aj1으로 치환) 머리를 옮긴다 (‘L’은 왼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R’은 오른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N’은 정지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같은 상태나 새로운 상태로 간다 (qi에서 qi1으로) 튜링 기계가 가진 기호와 상태, 그리고 행동은 모두 유한하고 이산적이며, 구분 가능하다. 정의[편집] 호프크로프트와 일맨은 7투플의 단일 테이프 튜링 기계를 M = ⟨ Q , Γ , b , Σ , δ , q 0 , F ⟩ {\displaystyle M=\left\langle Q,\Gamma ,b,\Sigma ,\delta ,q_{0},F\right\rangle } 로 정의했다. 각 변수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Q {\displaystyle Q}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상태들의 집합 Γ {\displaystyle \Gamma }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기호와 알파벳들의 집합 b ∈ Γ {\displaystyle b\in \Gamma } 는 비어있음을 알려주는 기호 (테이프 위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게 나타날 수 있는 기호) Σ ⊆ Γ ∖ { b } {\displaystyle \Sigma \subseteq \Gamma \backslash \left\{b\right\}} 는 입력가능한 기호들의 집합 q 0 ∈ Q {\displaystyle q_{0}\in Q} 는 초기상태 F ⊆ Q {\displaystyle F\subseteq Q} 는 최종상태, 또는 수락 상태 δ : Q ∖ F × Γ → Q × Γ × { L , R } {\displaystyle \delta :Q\backslash F\times \Gamma \rightarrow Q\times \Gamma \times \left\{L,R\right\}} 는 부분함수 이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튜링 기계라고 불린다.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편집] 반 엠데 보아스(1990)에 따르면, “7투플의 이론적 구상은 기계의 행동과 계산의 극히 단적인 부분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기호들을 실제로 결정하는 데 많은 과정이 소모될 것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은 머리가 테이프 위에서 이동하게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튜링 기계를 만들 때 테이프가 머리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테이프는 유한하지만 필요한 만큼 비어있는 상태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테이프가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고 유한한 분열의 머리가 채워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른 정의들[편집] 정의들은 설명을 위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항상 같은 계산력을 가지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집합 { L , R } {\displaystyle \left\{L,R\right\}} 를 { L , R , N } {\displaystyle \left\{L,R,N\right\}} 로 바꾸는 연산은 기계의 계산력을 높여주지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튜링 기계의 지시를 튜링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9개의 5투플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 126-127과 데이비스(2000) p. 152) (정의 1) : (qj, Sj, Sk/E/N, L/R/N, qm) (현재의 상태 qj, 읽혀진 기호 Sj,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새로운 상태 qm) 다른 저자들 (민스키(1967), p. 119, 호프크로프트와 일맨 (1979) p. 158, 스톤 (1972) p. 9)은 새로운상태 qm이 읽혀진 기호 Sj의 바로 뒤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의를 취했다. (정의 2) : (qj, Sj, qm, Sk/E/N, L/R/N) (현재의 상태 qi, 읽혀진 기호 Sj, 새로운 상태 qm,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 1” (튜링/데이비스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 예시 : 3-상태 2-기호의 아주 바쁜 기계를 5투플로 표현한 상태표 현재 상태 읽혀진 기호 쓰이는 기호 이동 종류 최종(다음) 상태 5투플 표현 A 0 1 R B (A, 0, 1, R, B) 1 1 L C (A, 1, 1, L, C) B 0 1 L A (B, 0, 1, L, A) 1 1 R B (B, 1, 1, R, B) C 0 1 L B (C, 0, 1, L, B) 1 1 N H (C, 1, 1, N, H)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튜링의 본래 모델은 N1, N2, N3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행동만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읽혀진 구간의 지우기를 0번째 기호인 S0=”지움” 또는 “비어있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기호 Sk를 인쇄한다” 또는 “지운다”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어들은 튜링이 만든 것인데, 튜링의 원문이 나온 이후 기계 모델은 9가지의 5투플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m-배형(튜링 상태) 테이프 기호 인쇄 테이프 행동 최종 m-배형(튜링 상태) 5투플 5투플 주석 4투플 N1 qi Sj Print(Sk) Left L qm (qi, Sj, Sk, L, qm) "blank" = S0, 1=S1, etc. N2 qi Sj Print(Sk) Right R qm (qi, Sj, Sk, R, qm) "blank" = S0, 1=S1, etc. N3 qi Sj Print(Sk) None N qm (qi, Sj, Sk, N, qm) "blank" = S0, 1=S1, etc. (qi, Sj, Sk, qm) 4 qi Sj None N Left L qm (qi, Sj, N, L, qm) (qi, Sj, L, qm) 5 qi Sj None N Right R qm (qi, Sj, N, R, qm) (qi, Sj, R, qm) 6 qi Sj None N None N qm (qi, Sj, N, N, qm) Direct "jump" (qi, Sj, N, qm) 7 qi Sj Erase Left L qm (qi, Sj, E, L, qm) 8 qi Sj Erase Right R qm (qi, Sj, E, R, qm) 9 qi Sj Erase None N qm (qi, Sj, E, N, qm) (qi, Sj, E, qm) 어떠한 종류의 튜링표도 위의 아홉 개의 5투플로부터 조합될 수 있다. 기술적인 이유로 세 개의 “N” 지시는 무시되기도 한다. 반면, 4투플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튜링 지시를 단순화할 때 사용된다. 상태[편집] 튜링 기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태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지시의 이름이나 내용을 뜻한다(상태 기록기에 저장된 정보). 하지만 튜링 (1936)은 계산과정 상에서 기계의 m배열과 기계의 진행 상태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튜링이 “상태식”이라 표현했던 것은 현재의 지시와 테이프 상의 모든 기호들을 포함한다. “ 따라서 튜링 기계가 수행하는 모든 단계에서 계산의 진행 상태는 지시와 테이프의 기호에 따라 결정된다. 즉, 시스템의 상태는 테이프 위에 존재하는 기호들의 나열로 표현된 하나의 식과 지시로 표현된다. 이 식을 “상태식”이라고 부른다. ”   — 해독불가능에 관해서, p.139-140, 강조가 포함됨 튜링 기계의 “상태” 모식도[편집] 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상태표 (“P”=1을 인쇄하거나 씀) 테이프 기호 현재 상태 A 현재 상태 B 현재 상태 C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0 P R B P L A P L B 1 P L C P R B P R HALT 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튜링 기계를 유한 오토마타에 입각해 표현해본 것. 각각의 원은 표의 상태를 나타내고, m배열, 지시, 또는 명령은 화살표로 표현된다. 화살표 위의 표식은 특정한 변화를 야기하는 ‘읽히는 기호’를 결정하고 슬래쉬 뒤의 동작은 따라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맥클럭시(1965), 부스(1967), 힐 그리고 피터슨에 의해 보여졌다. 이러한 모식도들은 일련의 계산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바쁜 기계는 작동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하지만 다른 유사한 기계의 경우에는 아닐 수도 있다. 튜링 머신과 동치인 다른 모델들[편집] 단순한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높은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상 기계들은 결국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홉크로프트와 울만, p. 159, cf Minsky(1967)). 그 기계들이 더 높은 속도와 적은 저장 공간을 가질지언정,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많은 수학적 함수들을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처치-튜링 명제는 모든 기계가 이러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 역 역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몇 개의 다른 모델들도 튜링 기계와 동일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다중 테이프 튜링 기계, 다중 트랙 튜링 기계, 입력과 출력이 있는 튜링 기계,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등이 있다. 범용 튜링 기계[편집] 튜링은 미결정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계산 가능한 수열을 계산하는 단일 기계를 만들 수 있다. 만약 이 기계 U에 들어온 테이프의 처음 부분이 어떤 계산기계 M이 처리한 세미콜론(;)으로 분할된 5-튜플이라면 U는 M과 똑같은 계산 과정을 거치게 된다. ” 지금은 이 발견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1936)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튜링이 범용 기계(Universal Machine)"이라고 부른 이 계산 모델이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 튜링의 논문은...기본적으로 현대 컴퓨터와 관련된 일부 프로그래밍 기술의 발견을 서술하고 있다. ”   — 민스키(1967) p.104 계산복잡도의 측면에서 보면 다중테이프 튜링 기계는 이 기계가 시뮬레이트하는 기계에 비해 로그 인수만큼 느려야 한다. 이 결과는 1966년에 F.C. 헨리와 R.E. 스턴에의해 얻어졌다.(아오라와 바락, 2009, 정리 1.9) 실제 기계와의 비교[편집] 흔히들 튜링 기계는 다른 오토마타와 다르게 실제 기계만큼 강력하고 실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연산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 기계는 유한개의 배형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실제 기계"는 선형 구속 오토마타에 그친다. 그에 비해 튜링 기계는 연산을 위한 무한한 저장 공간을 가진 기계이다. 튜링 기계는 컴퓨터를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연산 자체를 모델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내부 저장장치를 이용해 연산하는 컴퓨터는 튜링 기계보다 훨씬 나중에 개발되었다.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제 컴퓨터의 모형으로서 상당히 유용하다. 실제 컴퓨터가 연산할 수 있다면 튜링 기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튜링 기계의 한계는 곧 실제 컴퓨터에도 적용된다. 실제 컴퓨터와 튜링 기계의 차이점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다. 튜링 기계의 경우 무한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나, 실제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유한하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에서는 튜링 기계도 실제 기계처럼 유한한 양의 데이터만 조작 가능하다. 튜링 기계처럼 실제 기계도 하드 디스크와 같은 기타 저장 매체들을 이용해 저장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저장 매체들이 구하기 힘들어진다면 튜링 기계와 실제 기계의 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연산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저장 공간의 작은 크기가 아닌 느린 연산 속도이다. 실제 기계를 설명할 때 더 단순하고 추상적인 모델을 사용한 실제 설명보다 튜링 기계를 이용한 설명이 더욱 간단하다. 만약 튜링 기계가 하나의 알고리즘을 설명하는데 몇 백개 정도의 상태가 필요하다면 같은 설명을 하는데 결정적 유한 오토마타는 수 천조의 상태가 필요하다. 튜링 기계는 얼마나 많은 메모리를 사용하는지에 관계없이 알고리즘을 설명할 수 있다. 튜링 기계는 실제 기계의 발전과 전혀 관계 없이 알고리즘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튜링 기계는 알고리즘의 설명을 간단케 한다. 튜링 동치인 추상적 기계를 사용하여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것은 실제 기계보다 훨씬 일반적이다. 실제 기계에는 메모리 공간 부족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며 또 자료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튜링 기계도 어떤 경우에는 실제 프로그램에 대한 좋지 못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운영 체제나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경우에는 시간에 따라 무한한 입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튜링 기계는 그러한 무한한 연산의 경우 모델링이 힘들다.(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인 과정들은 모델링할 수 있다.) 튜링 기계의 한계(시간 복잡도 이론)[편집] 튜링 기계의 한계는 일부 배열들의 능력을 잘 모델링하지 못한다. 현대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들은 추상적인 랜덤 접근 저장 프로그램 기계(Random Access Store Program Machine, RASP machine)들의 실질적인 예이다.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이 RASP는 무한개의 구분 가능한, 동시에 셀 수 있지만 무한한 레지스터(정수를 하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공간)를 가지고 있다. RASP의 유한 상태 기계는 하나의 레지스터가 다른 레지스터의 주소를 포함 하는 등 간접적으로 주소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RASP의 프로그램은 레지스터 배열에 있는 다른 레지스터를 호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모리 인덱스를 이용한 연산의 최적화가 튜링 기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튜링 기계로 모델링 할 때 일부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간복잡도의 잘못된 하한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의 경우 튜링 기계 모델보단 RASP 모델로 훨씬 더 빠르게 연산이 가능하다. 역사[편집] 알고리즘, 처치-튜링 명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역사적 배경 : 계산 기계[편집] 앨런 튜링(1912-1954)의 제자이자 평생의 친구인 로빈 간디(1919-1995)는 '계산 기계(calculatng machine)'의 관념의 기원을 배비지에서 찾았으며 실제로 배비지 이론을 제안했다. 간디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을 다섯 개의 연산으로 묘사했다. 산술적 함수 +, -, × (이 때의 -는 y≥0 일 때 x-y=0이 되는 적절한 뺄셈이다.) 그 어떤 일련의 연산도 하나의 연산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반복 (연산 P를 n번 반복) 조건부 반복 (시험 T가 성공한다는 조건 하에 연산 P를 n번 반복) 조건부 이동 (결과값에 따라 계산 순서가 변경) 간디는 1, 2, 4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했다. 판정문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판정문제입니다. 1900년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제안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열 번째 문제는 그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거의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했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10.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풀이 가능성을 결정하라.임의의 주어진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정수해를 유한한 연산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가? 1928년 힐베르트는 다음의 세 물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만들었다. 수학은 완전한가? 수학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가? 수학은 결정 가능한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1930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해결되었으나, 세 번째 문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앨런 튜링의 a-기계[편집] 1935년 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튜링은 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논리학자 뉴먼의 강의에 자극을 받았으며, 결정 문제에 대한 괴델의 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뉴먼은 '기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1955년 튜링의 부고에 뉴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기계적' 과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튜링은 '기계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 Gandy, p.74 튜링은 그의 일생동안 기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튜링은 그의 박사후과정 동안 불 논리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그의 박사후과정 논문인 'Systems of Logic Based on Ordinal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담고 있다. “ 우리는 어떤 함수의 값이 순수한 기계적 과정을 통해 계산될 수 있을 때 그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한다. ”   — Turing(1939) in The Undecidable, p.160 튜링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 the Enigma'를 해독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1970 :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편집] 1937년, 그의 박사후 과정을 위해 프린스턴에서 연구하는 동안 튜링은 전기-기계식 릴레이를 이용해 디지털(Boolean-logic)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튜링의 발명은 단순한 호기심과 실험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연구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과 주축국의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하오 왕과 마빈 민스키는 튜링 기계를 좀 더 간단한 형태로 바꾸었다. 동시에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신식의 전자 컴퓨터를 현재의 튜링 기계인 '컴퓨터와 같은 이론적 오브젝트'로 환원시켜 생각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멜자크와 레벡(1961), 민스키(1961), 셰퍼슨과 스터기스(1961) 등의 유럽 연구자들은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튜링 기계를 좀 더 친숙하고 컴퓨터와 같은 '셈 기계 counter machine'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에는 엘곳과 로빈슨(1964), 할트마니스(1971), 쿡과 렉하우(1973) 등은 이 연구를 진척시켜 '기록 기계 register machine'와 RAM의 모델로 발전시켰다. 1970-현재 : 계산 모델로서의 튜링 기계[편집] 오늘날의 셈 기계, 기록 기계, 그리고 RAM은 그 근간을 튜링 기계에 두고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은 계산 이론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튜링 기계를 사용한다. 특히 계산 복잡도 이론의 경우 튜링 기계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같이 보기[편집] 확률적 튜링 기계 양자 튜링 기계 교대 튜링 기계 범용 튜링 기계(UTM, en:Universal Turing machine) 참고[편집] ↑ 1935년 중반, 막스 뉴만은 그의 강의에서 "과연 수학적 표현에 적용되어 그 표현이 증명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방법이(뉴만은 이를 기계적 과정이라고 표현하였다.) 존재하는가?"(호지스 1983:93)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강의를 들고 튜링은 그 가상의 장치를 생각해내었다고 한다.(더 자세한 사실은 역사부분을 참조하시오) 그는 이 논문을 런던 수학회지에 1936년 5월 31일에 제출하였으나(참고: 호지스 1983:112), 정작 이 논문이 출판된 것은 1937년 초였고, 그 해 2월이 다 돼서야 발췌 인쇄가 가능해졌다.(참고: 호지스 1983:129) 참고 문헌[편집] 1차 저서, 재출판, 편집[편집] B. Jack Copeland ed. (2004), The Essential Turing: Seminal Writings in Computing, Logic, Philosophy, Artificial Intelligence, and Artificial Life plus The Secrets of Enigma, Clarendon Pres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UK, ISBN 0-19-825079-7. Contains the Turing papers plus a draft letter to Emil Post re his criticism of "Turing's convention", and Donald W. Davies' Corrections to Turing's Universal Computing Machine 마틴 데이비스 (ed.) (1965),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Raven Press, Hewlett, NY. 에밀 포스트 (1936), "Finite Combinatory Processes—Formulation 1", Journal of Symbolic Logic, 1, 103–105, 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에 재출판됨. pp. 289ff. 에밀 포스트 (1947), "Recursive Unsolvability of a Problem of Thue", Journal of Symbolic Logic, vol. 12, pp. 1–11.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재출판됨. pp. 293ff. In the Appendix of this paper Post comments on and gives corrections to Turing's paper of 1936–1937. In particular see the footnotes 11 with corrections to the universal computing machine coding and footnote 14 with comments on Turing's first and second proofs. 튜링, A.M. (1936). “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 《런던수학회지》. 2 (1937) 42: 230–65. doi:10.1112/plms/s2-42.1.230.  (and 튜링, A.M. (1938). “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 수정판”. 《런던수학회지》. 2 (1937) 43 (6): 544–6. doi:10.1112/plms/s2-43.6.544. ). Reprinted in many collections, e.g. in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p. 115–154; available on the web in many places, e.g. at Scribd. 앨런 튜링, 1948, "Intelligent Machinery." Reprinted in "Cybernetics: Key Papers." Ed. C.R. Evans and A.D.J. Robertson. Baltimore: University Park Press, 1968. p. 31. F. C. Hennie and R. E. Stearns. Two-tape simulation of multitape Turing machines. JACM, 13(4):533–546, 1966. 계산 이론[편집] 불로스, 조지; 리차드 제퍼리 (1989, 1999). 《Computability and Logic》 3판.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20402-X.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불로스, 조지; 존 부르게스, 리차드 제퍼리, (2002). 《Computability and Logic》 4판.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00758-5 (pb.)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Some parts have been significantly rewritten by Burgess. Presentation of Turing machines in context of Lambek "abacus machines" (cf Register machine) and recursive functions, showing their equivalence. 테일러 L. 부스 (1967), Sequential Machines and Automata Theory, John Wiley and Sons, Inc., New York. 공대 졸업생 수준의 책.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루며 9장 튜링 기계는 재귀 이론에 대해서 조금 다루고 있다. 마틴 데이비스 (1958). 《Computability and Unsolvability》. McGraw-Hill Book Company, Inc, New York. . On pages 12–20 he gives examples of 5-tuple tables for Addition, The Successor Function, Subtraction (x ≥ y), Proper Subtraction (0 if x < y), The Identity Function and various identity functions, and Multiplication. 데이비스, 마틴; 론 시갈, 엘레인 J. 웨커 (1994). 《Computability, Complexity, and Languages and Logic: Fundamentals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2판. San Diego: Academic Press, Harcourt, Brace & Company. ISBN 0-12-206382-1.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Hennie, Fredrick (1977). 《Introduction to Computability》. Addison–Wesley, Reading, Mass.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unused_data= (도움말). On pages 90–103 Hennie discusses the UTM with examples and flow-charts, but no actual 'code'. 존 홉크로프트와 제퍼리 울만, (1979). 《Introduction to Automata Theory, Languages and Computation》 1판. Addison–Wesley, Reading Mass. ISBN 0-201-02988-X.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A difficult book. Centered around the issues of machine-interpretation of "languages", NP-completeness, etc. Hopcroft, John E.; Rajeev Motwani, Jeffrey D. Ullman (2001). 《Introduction to Automata Theory, Languages, and Computation》 2판. Reading Mass: Addison–Wesley. ISBN 0-201-44124-1.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Distinctly different and less intimidating than the first edition. Stephen Kleene (1952), Introduction to Metamathematics,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Amsterdam Netherlands, 10th impression (with corrections of 6th reprint 1971). Graduate level text; most of Chapter XIII Computable functions is on Turing machine proofs of computability of recursive functions, etc. Knuth, Donald E. (1973). 《Volume 1/Fundamental Algorithms: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 2판. Reading, Mass.: Addison–Wesley Publishing Company. . With reference to the role of Turing machines in the development of computation (both hardware and software) see 1.4.5 History and Bibliography pp. 225ff and 2.6 History and Bibliographypp. 456ff. Zohar Manna, 1974, Mathematical Theory of Computation. Reprinted, Dover, 2003. ISBN 978-0-486-43238-0 마빈 민스키, Computation: Finite and Infinite Machines, Prentice–Hall, Inc., N.J., 1967. See Chapter 8, Section 8.2 "Unsolvability of the Halting Problem." 초보자도 읽을만 하며 재밌는 부분도 있다. Christos Papadimitriou (1993). 《Computational Complexity》 1판. Addison Wesley. ISBN 0-201-53082-1.  Chapter 2: Turing machines, pp. 19–56. Michael Sipser (1997). 《Introduction to the Theory of Computation》. PWS Publishing. ISBN 0-534-94728-X.  Chapter 3: The Church–Turing Thesis, pp. 125–149. 스톤, 해롤드 S. (1972). 《Introduction to Computer Organization and Data Structures》 1판. New York: McGraw–Hill Book Company. ISBN 0-07-061726-0.  Peter van Emde Boas 1990, Machine Models and Simulations, pp. 3–66, in Jan van Leeuwen, ed., Handbook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Volume A: Algorithms and Complexity, The MIT Press/Elsevier, [place?], ISBN 0-444-88071-2 (Volume A). QA76.H279 1990. Valuable survey, with 141 references. 처치-튜링 명제[편집] Nachum Dershowitz; Yuri Gurevich (2008년 9월). “A natural axiomatization of computability and proof of Church's Thesis” (PDF). 《Bulletin of Symbolic Logic》 14 (3). 2008년 10월 15일에 확인함.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Roger Penrose (1989, 1990). 《The Emperor's New Mind》 2판.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ISBN 0-19-851973-7.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작은 튜링 기계[편집] Rogozhin, Yurii, 1998, "A Universal Turing Machine with 22 States and 2 Symbols", Romanian Journal Of Information Science and Technology, 1(3), 259–265, 1998. (surveys known results about small universal Turing machines) Stephen Wolfram, 2002, A New Kind of Science, Wolfram Media, ISBN 1-57955-008-8 Brunfiel, Geoff, Student snags maths prize, Nature, October 24. 2007. Jim Giles (2007), Simplest 'universal computer' wins student $25,000, New Scientist, October 24, 2007. Alex Smith, Universality of Wolfram’s 2, 3 Turing Machine, Submission for the Wolfram 2, 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 Vaughan Pratt, 2007, "Simple Turing machines, Universality, Encodings, etc.",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 마틴 데이비스, 2007, "Smallest universal machine", and Definition of universal Turing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27, 2007. Alasdair Urquhart, 2007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 2007. Hector Zenil (Wolfram Research), 2007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 Todd Rowland, 2007, "Confusion on FOM", Wolfram Science message board, October 30, 2007. 기타[편집] 마틴 데이비스 (2000). 《Engines of Logic: Mathematicians and the origin of the Computer》 1판. W. W. Norton & Company, New York. ISBN 0-393-32229-7 pbk.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로빈 간디, "The Confluence of Ideas in 1936", pp. 51–102 in Rolf Herken, see below. 스티븐 호킹 (editor), 2005, God Created the Integers: The Mathematical Breakthroughs that Changed History, Running Press, Philadelphia, ISBN 978-0-7624-1922-7. Includes Turing's 1936–1937 paper, with brief commentary and biography of Turing as written by Hawking. Rolf Herken (1995). 《The Universal Turing Machine—A Half-Century Survey》. Springer Verlag. ISBN 3-211-82637-8.  앤드류 호지스, Alan Turing: The Enigma, Simon and Schuster, New York. Cf Chapter "The Spirit of Truth" for a history leading to, and a discussion of, his proof. Ivars Peterson (1988). 《The Mathematical Tourist: Snapshots of Modern Mathematics》 1판. W. H. Freeman and Company, New York. ISBN 0-7167-2064-7 (pbk.)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Paul Strathern (1997). 《Turing and the Computer—The Big Idea》. Anchor Books/Doubleday. ISBN 0-385-49243-X.  Hao Wang, "A variant to Turing's theory of computing machines", Journal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JACM) 4, 63–92 (1957). Charles Petzold, Petzold, Charles, The Annotated Turing, John Wiley & Sons, Inc., ISBN 0-470-22905-5 Arora, Sanjeev; Barak, Boaz, "Complexity Theory: A Modern Approa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ISBN 978-0-521-42426-4, section 1.4, "Machines as strings and the universal Turing machine" and 1.7, "Proof of theorem 1.9" Isaiah Pinchas Kantorovitz, "A note on turing machine computability of rule driven systems", ACM SIGACT News December 2005.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튜링 기계 Turing Machine 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etailed info on the Church–Turing Hypothesi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uring Machine-Like Models in Molecular Biology, to understand life mechanisms with a DNA-tape processor. The Turing machine—Summary about the Turing machine, its functionality and historical facts The Wolfram 2,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Stephen Wolfram's $25,000 prize for the proof or disproof of the universality of the potentially smallest universal Turing Machine. The contest has ended, with the proof affirming the machine's universality. "Turing Machine Causal Networks" by Enrique Zeleny, Wolfram Demonstrations Project. (영어) Turing Machines - Curlie (DMOZ 기반) Purely mechanical Turing Machine vdeh오토마타 이론: 형식 언어 및 형식 문법 촘스키 위계0유형(없음)1유형2유형3유형 형식 문법무제약 문법재귀 문법문맥 의존 문법문맥 자유 문법정규 문법 형식 언어재귀 열거 언어재귀 언어문맥 의존 언어문맥 자유 언어정규 언어 오토마타튜링 기계판정자선형유한 오토마타내리누름 오토마타유한 상태 기계 각 언어 및 문법은 바로 윗줄의 진부분집합이다. 또한 각 기계와 문법은 바로 윗줄의 기계와 문법으로 동등하게 기술될 수 있다. 전거 통제 LCCN: sh85138778 GND: 4203525-9 SUDOC: 027831655 BNF: cb11978871z (데이터) NDL: 00573533 BNE: XX55036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튜링_기계&oldid=22352535" 분류: 이론 전산학앨런 튜링계산 모형정형 기법계산 가능성 이론잉글랜드의 발명품오토마타 이론형식 언어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인용 오류 - 날짜인용 오류 - ISBN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urlan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GĩkũyũLatinaLëtzebuergeschLumbaart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Mirandés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2일 (수) 10: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튜링 기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튜링 기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공지능의 정도를 판별하는 테스트에 대해서는 튜링 테스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튜링 기계의 작동 방식을 묘사하는 그림 이론 전산학에서, 튜링 기계(영어: Turing machine)는 긴 테이프에 쓰여있는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꾸는 기계이다.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계는 적당한 규칙과 기호를 입력한다면 일반적인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컴퓨터 CPU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1936년 앨런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고 [1] 이 장치에 영어 단어인 automatic의 a를 따서 "a-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가 바로 나중에 창시자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서 튜링 기계라 불리게 되었다. 1948년 "똑똑한 기계"라는 글에서 앨런 튜링은 자신의 "a-기계"를 간결히 정의하였다.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성 문제에의 응용"을 언급하며 튜링기계(이 글에서는 논리적 계산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무한한 저장공간은 무한한 길이의 테이프로 나타나는데 이 테이프는 하나의 기호를 인쇄할 수 있는 크기의 정사각형들로 쪼개져있다. 언제든지 기계속에는 하나의 기호가 들어가있고 이를 "읽힌 기호"라고 한다. 이 기계는 "읽힌 기호"를 바꿀 수 있는데 그 기계의 행동은 오직 읽힌 기호만이 결정한다. 테이프는 앞뒤로 움직일 수 있어서 모든 기호들은 적어도 한번씩은 기계에게 읽힐 것이다. ”   — (튜링, 1948, p.61) 목차 1 개론 2 정의 2.1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 2.2 다른 정의들 2.3 상태 2.4 튜링 기계의 “상태” 모식도 3 튜링 머신과 동치인 다른 모델들 4 범용 튜링 기계 5 실제 기계와의 비교 5.1 튜링 기계의 한계(시간 복잡도 이론) 6 역사 6.1 역사적 배경 : 계산 기계 6.2 판정문제 6.3 앨런 튜링의 a-기계 6.4 1937-1970 :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 6.5 1970-현재 : 계산 모델로서의 튜링 기계 7 같이 보기 8 참고 9 참고 문헌 9.1 1차 저서, 재출판, 편집 9.2 계산 이론 9.3 처치-튜링 명제 9.4 작은 튜링 기계 9.5 기타 10 외부 링크 개론[편집] 튜링 기계는 수학적 모형의 일종으로, 특수한 테이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튜링 기계가 사용하는 테이프 위에는 테이프 머릿기호를 바탕으로 기계가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기호들이 있다. 작동 방식은, “42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쓴다.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7번째 상태로 간다. 17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쓰고,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6번째 상태로 간다”와 같이 유한한 개수의 기초적 지시문으로 이루어진다. 원문(“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에 따르면 튜링이 상상한 것은 이러한 연산을 특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라 불릴 사람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테이프 : 테이프는 서로 연속한 단위 구간들로 나뉜다. 각각의 구간은 알파벳을 가지고, 특정 알파벳은 비어있음을 나타낸다. 테이프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임의적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한번도 쓰이지 않은 구간은 비어있다는 기호로 표시된다. 어떤 테이프는 왼쪽을 고정시키고 오른쪽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반직선의 형태로 되어있다. 머리 : 기계가 머리를 읽으면 테이프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한 칸 (오직 한 칸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모델에서는 머리가 움직이고 테이프가 고정되기도 한다. 상태 기록기는 튜링 기계의 유한히 많은 상태 중 하나를 기록한다. ‘개시 상태’는 상태 기록기를 초기화시키는 특별한 상태이다. 유한한 표 (또는 행동표)는 특정한 상태(qi)에 있는 기계가 어떠한 기호(aj)를 읽을 때 해야 할 행동을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5튜플). 기호를 지우거나 적고 (aj를 aj1으로 치환) 머리를 옮긴다 (‘L’은 왼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R’은 오른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N’은 정지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같은 상태나 새로운 상태로 간다 (qi에서 qi1으로) 튜링 기계가 가진 기호와 상태, 그리고 행동은 모두 유한하고 이산적이며, 구분 가능하다. 정의[편집] 호프크로프트와 일맨은 7투플의 단일 테이프 튜링 기계를 M = ⟨ Q , Γ , b , Σ , δ , q 0 , F ⟩ {\displaystyle M=\left\langle Q,\Gamma ,b,\Sigma ,\delta ,q_{0},F\right\rangle } 로 정의했다. 각 변수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Q {\displaystyle Q}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상태들의 집합 Γ {\displaystyle \Gamma }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기호와 알파벳들의 집합 b ∈ Γ {\displaystyle b\in \Gamma } 는 비어있음을 알려주는 기호 (테이프 위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게 나타날 수 있는 기호) Σ ⊆ Γ ∖ { b } {\displaystyle \Sigma \subseteq \Gamma \backslash \left\{b\right\}} 는 입력가능한 기호들의 집합 q 0 ∈ Q {\displaystyle q_{0}\in Q} 는 초기상태 F ⊆ Q {\displaystyle F\subseteq Q} 는 최종상태, 또는 수락 상태 δ : Q ∖ F × Γ → Q × Γ × { L , R } {\displaystyle \delta :Q\backslash F\times \Gamma \rightarrow Q\times \Gamma \times \left\{L,R\right\}} 는 부분함수 이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튜링 기계라고 불린다.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편집] 반 엠데 보아스(1990)에 따르면, “7투플의 이론적 구상은 기계의 행동과 계산의 극히 단적인 부분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기호들을 실제로 결정하는 데 많은 과정이 소모될 것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은 머리가 테이프 위에서 이동하게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튜링 기계를 만들 때 테이프가 머리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테이프는 유한하지만 필요한 만큼 비어있는 상태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테이프가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고 유한한 분열의 머리가 채워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른 정의들[편집] 정의들은 설명을 위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항상 같은 계산력을 가지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집합 { L , R } {\displaystyle \left\{L,R\right\}} 를 { L , R , N } {\displaystyle \left\{L,R,N\right\}} 로 바꾸는 연산은 기계의 계산력을 높여주지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튜링 기계의 지시를 튜링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9개의 5투플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 126-127과 데이비스(2000) p. 152) (정의 1) : (qj, Sj, Sk/E/N, L/R/N, qm) (현재의 상태 qj, 읽혀진 기호 Sj,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새로운 상태 qm) 다른 저자들 (민스키(1967), p. 119, 호프크로프트와 일맨 (1979) p. 158, 스톤 (1972) p. 9)은 새로운상태 qm이 읽혀진 기호 Sj의 바로 뒤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의를 취했다. (정의 2) : (qj, Sj, qm, Sk/E/N, L/R/N) (현재의 상태 qi, 읽혀진 기호 Sj, 새로운 상태 qm,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 1” (튜링/데이비스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 예시 : 3-상태 2-기호의 아주 바쁜 기계를 5투플로 표현한 상태표 현재 상태 읽혀진 기호 쓰이는 기호 이동 종류 최종(다음) 상태 5투플 표현 A 0 1 R B (A, 0, 1, R, B) 1 1 L C (A, 1, 1, L, C) B 0 1 L A (B, 0, 1, L, A) 1 1 R B (B, 1, 1, R, B) C 0 1 L B (C, 0, 1, L, B) 1 1 N H (C, 1, 1, N, H)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튜링의 본래 모델은 N1, N2, N3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행동만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읽혀진 구간의 지우기를 0번째 기호인 S0=”지움” 또는 “비어있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기호 Sk를 인쇄한다” 또는 “지운다”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어들은 튜링이 만든 것인데, 튜링의 원문이 나온 이후 기계 모델은 9가지의 5투플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m-배형(튜링 상태) 테이프 기호 인쇄 테이프 행동 최종 m-배형(튜링 상태) 5투플 5투플 주석 4투플 N1 qi Sj Print(Sk) Left L qm (qi, Sj, Sk, L, qm) "blank" = S0, 1=S1, etc. N2 qi Sj Print(Sk) Right R qm (qi, Sj, Sk, R, qm) "blank" = S0, 1=S1, etc. N3 qi Sj Print(Sk) None N qm (qi, Sj, Sk, N, qm) "blank" = S0, 1=S1, etc. (qi, Sj, Sk, qm) 4 qi Sj None N Left L qm (qi, Sj, N, L, qm) (qi, Sj, L, qm) 5 qi Sj None N Right R qm (qi, Sj, N, R, qm) (qi, Sj, R, qm) 6 qi Sj None N None N qm (qi, Sj, N, N, qm) Direct "jump" (qi, Sj, N, qm) 7 qi Sj Erase Left L qm (qi, Sj, E, L, qm) 8 qi Sj Erase Right R qm (qi, Sj, E, R, qm) 9 qi Sj Erase None N qm (qi, Sj, E, N, qm) (qi, Sj, E, qm) 어떠한 종류의 튜링표도 위의 아홉 개의 5투플로부터 조합될 수 있다. 기술적인 이유로 세 개의 “N” 지시는 무시되기도 한다. 반면, 4투플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튜링 지시를 단순화할 때 사용된다. 상태[편집] 튜링 기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태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지시의 이름이나 내용을 뜻한다(상태 기록기에 저장된 정보). 하지만 튜링 (1936)은 계산과정 상에서 기계의 m배열과 기계의 진행 상태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튜링이 “상태식”이라 표현했던 것은 현재의 지시와 테이프 상의 모든 기호들을 포함한다. “ 따라서 튜링 기계가 수행하는 모든 단계에서 계산의 진행 상태는 지시와 테이프의 기호에 따라 결정된다. 즉, 시스템의 상태는 테이프 위에 존재하는 기호들의 나열로 표현된 하나의 식과 지시로 표현된다. 이 식을 “상태식”이라고 부른다. ”   — 해독불가능에 관해서, p.139-140, 강조가 포함됨 튜링 기계의 “상태” 모식도[편집] 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상태표 (“P”=1을 인쇄하거나 씀) 테이프 기호 현재 상태 A 현재 상태 B 현재 상태 C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0 P R B P L A P L B 1 P L C P R B P R HALT 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튜링 기계를 유한 오토마타에 입각해 표현해본 것. 각각의 원은 표의 상태를 나타내고, m배열, 지시, 또는 명령은 화살표로 표현된다. 화살표 위의 표식은 특정한 변화를 야기하는 ‘읽히는 기호’를 결정하고 슬래쉬 뒤의 동작은 따라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맥클럭시(1965), 부스(1967), 힐 그리고 피터슨에 의해 보여졌다. 이러한 모식도들은 일련의 계산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바쁜 기계는 작동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하지만 다른 유사한 기계의 경우에는 아닐 수도 있다. 튜링 머신과 동치인 다른 모델들[편집] 단순한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높은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상 기계들은 결국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홉크로프트와 울만, p. 159, cf Minsky(1967)). 그 기계들이 더 높은 속도와 적은 저장 공간을 가질지언정,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많은 수학적 함수들을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처치-튜링 명제는 모든 기계가 이러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 역 역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몇 개의 다른 모델들도 튜링 기계와 동일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다중 테이프 튜링 기계, 다중 트랙 튜링 기계, 입력과 출력이 있는 튜링 기계,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등이 있다. 범용 튜링 기계[편집] 튜링은 미결정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계산 가능한 수열을 계산하는 단일 기계를 만들 수 있다. 만약 이 기계 U에 들어온 테이프의 처음 부분이 어떤 계산기계 M이 처리한 세미콜론(;)으로 분할된 5-튜플이라면 U는 M과 똑같은 계산 과정을 거치게 된다. ” 지금은 이 발견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1936)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튜링이 범용 기계(Universal Machine)"이라고 부른 이 계산 모델이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 튜링의 논문은...기본적으로 현대 컴퓨터와 관련된 일부 프로그래밍 기술의 발견을 서술하고 있다. ”   — 민스키(1967) p.104 계산복잡도의 측면에서 보면 다중테이프 튜링 기계는 이 기계가 시뮬레이트하는 기계에 비해 로그 인수만큼 느려야 한다. 이 결과는 1966년에 F.C. 헨리와 R.E. 스턴에의해 얻어졌다.(아오라와 바락, 2009, 정리 1.9) 실제 기계와의 비교[편집] 흔히들 튜링 기계는 다른 오토마타와 다르게 실제 기계만큼 강력하고 실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연산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 기계는 유한개의 배형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실제 기계"는 선형 구속 오토마타에 그친다. 그에 비해 튜링 기계는 연산을 위한 무한한 저장 공간을 가진 기계이다. 튜링 기계는 컴퓨터를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연산 자체를 모델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내부 저장장치를 이용해 연산하는 컴퓨터는 튜링 기계보다 훨씬 나중에 개발되었다.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제 컴퓨터의 모형으로서 상당히 유용하다. 실제 컴퓨터가 연산할 수 있다면 튜링 기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튜링 기계의 한계는 곧 실제 컴퓨터에도 적용된다. 실제 컴퓨터와 튜링 기계의 차이점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다. 튜링 기계의 경우 무한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나, 실제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유한하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에서는 튜링 기계도 실제 기계처럼 유한한 양의 데이터만 조작 가능하다. 튜링 기계처럼 실제 기계도 하드 디스크와 같은 기타 저장 매체들을 이용해 저장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저장 매체들이 구하기 힘들어진다면 튜링 기계와 실제 기계의 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연산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저장 공간의 작은 크기가 아닌 느린 연산 속도이다. 실제 기계를 설명할 때 더 단순하고 추상적인 모델을 사용한 실제 설명보다 튜링 기계를 이용한 설명이 더욱 간단하다. 만약 튜링 기계가 하나의 알고리즘을 설명하는데 몇 백개 정도의 상태가 필요하다면 같은 설명을 하는데 결정적 유한 오토마타는 수 천조의 상태가 필요하다. 튜링 기계는 얼마나 많은 메모리를 사용하는지에 관계없이 알고리즘을 설명할 수 있다. 튜링 기계는 실제 기계의 발전과 전혀 관계 없이 알고리즘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튜링 기계는 알고리즘의 설명을 간단케 한다. 튜링 동치인 추상적 기계를 사용하여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것은 실제 기계보다 훨씬 일반적이다. 실제 기계에는 메모리 공간 부족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며 또 자료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튜링 기계도 어떤 경우에는 실제 프로그램에 대한 좋지 못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운영 체제나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경우에는 시간에 따라 무한한 입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튜링 기계는 그러한 무한한 연산의 경우 모델링이 힘들다.(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인 과정들은 모델링할 수 있다.) 튜링 기계의 한계(시간 복잡도 이론)[편집] 튜링 기계의 한계는 일부 배열들의 능력을 잘 모델링하지 못한다. 현대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들은 추상적인 랜덤 접근 저장 프로그램 기계(Random Access Store Program Machine, RASP machine)들의 실질적인 예이다.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이 RASP는 무한개의 구분 가능한, 동시에 셀 수 있지만 무한한 레지스터(정수를 하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공간)를 가지고 있다. RASP의 유한 상태 기계는 하나의 레지스터가 다른 레지스터의 주소를 포함 하는 등 간접적으로 주소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RASP의 프로그램은 레지스터 배열에 있는 다른 레지스터를 호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모리 인덱스를 이용한 연산의 최적화가 튜링 기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튜링 기계로 모델링 할 때 일부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간복잡도의 잘못된 하한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의 경우 튜링 기계 모델보단 RASP 모델로 훨씬 더 빠르게 연산이 가능하다. 역사[편집] 알고리즘, 처치-튜링 명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역사적 배경 : 계산 기계[편집] 앨런 튜링(1912-1954)의 제자이자 평생의 친구인 로빈 간디(1919-1995)는 '계산 기계(calculatng machine)'의 관념의 기원을 배비지에서 찾았으며 실제로 배비지 이론을 제안했다. 간디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을 다섯 개의 연산으로 묘사했다. 산술적 함수 +, -, × (이 때의 -는 y≥0 일 때 x-y=0이 되는 적절한 뺄셈이다.) 그 어떤 일련의 연산도 하나의 연산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반복 (연산 P를 n번 반복) 조건부 반복 (시험 T가 성공한다는 조건 하에 연산 P를 n번 반복) 조건부 이동 (결과값에 따라 계산 순서가 변경) 간디는 1, 2, 4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했다. 판정문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판정문제입니다. 1900년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제안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열 번째 문제는 그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거의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했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10.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풀이 가능성을 결정하라.임의의 주어진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정수해를 유한한 연산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가? 1928년 힐베르트는 다음의 세 물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만들었다. 수학은 완전한가? 수학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가? 수학은 결정 가능한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1930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해결되었으나, 세 번째 문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앨런 튜링의 a-기계[편집] 1935년 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튜링은 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논리학자 뉴먼의 강의에 자극을 받았으며, 결정 문제에 대한 괴델의 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뉴먼은 '기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1955년 튜링의 부고에 뉴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기계적' 과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튜링은 '기계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 Gandy, p.74 튜링은 그의 일생동안 기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튜링은 그의 박사후과정 동안 불 논리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그의 박사후과정 논문인 'Systems of Logic Based on Ordinal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담고 있다. “ 우리는 어떤 함수의 값이 순수한 기계적 과정을 통해 계산될 수 있을 때 그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한다. ”   — Turing(1939) in The Undecidable, p.160 튜링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 the Enigma'를 해독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1970 :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편집] 1937년, 그의 박사후 과정을 위해 프린스턴에서 연구하는 동안 튜링은 전기-기계식 릴레이를 이용해 디지털(Boolean-logic)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튜링의 발명은 단순한 호기심과 실험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연구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과 주축국의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하오 왕과 마빈 민스키는 튜링 기계를 좀 더 간단한 형태로 바꾸었다. 동시에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신식의 전자 컴퓨터를 현재의 튜링 기계인 '컴퓨터와 같은 이론적 오브젝트'로 환원시켜 생각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멜자크와 레벡(1961), 민스키(1961), 셰퍼슨과 스터기스(1961) 등의 유럽 연구자들은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튜링 기계를 좀 더 친숙하고 컴퓨터와 같은 '셈 기계 counter machine'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에는 엘곳과 로빈슨(1964), 할트마니스(1971), 쿡과 렉하우(1973) 등은 이 연구를 진척시켜 '기록 기계 register machine'와 RAM의 모델로 발전시켰다. 1970-현재 : 계산 모델로서의 튜링 기계[편집] 오늘날의 셈 기계, 기록 기계, 그리고 RAM은 그 근간을 튜링 기계에 두고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은 계산 이론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튜링 기계를 사용한다. 특히 계산 복잡도 이론의 경우 튜링 기계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같이 보기[편집] 확률적 튜링 기계 양자 튜링 기계 교대 튜링 기계 범용 튜링 기계(UTM, en:Universal Turing machine) 참고[편집] ↑ 1935년 중반, 막스 뉴만은 그의 강의에서 "과연 수학적 표현에 적용되어 그 표현이 증명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방법이(뉴만은 이를 기계적 과정이라고 표현하였다.) 존재하는가?"(호지스 1983:93)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강의를 들고 튜링은 그 가상의 장치를 생각해내었다고 한다.(더 자세한 사실은 역사부분을 참조하시오) 그는 이 논문을 런던 수학회지에 1936년 5월 31일에 제출하였으나(참고: 호지스 1983:112), 정작 이 논문이 출판된 것은 1937년 초였고, 그 해 2월이 다 돼서야 발췌 인쇄가 가능해졌다.(참고: 호지스 1983:129) 참고 문헌[편집] 1차 저서, 재출판, 편집[편집] B. Jack Copeland ed. (2004), The Essential Turing: Seminal Writings in Computing, Logic, Philosophy, Artificial Intelligence, and Artificial Life plus The Secrets of Enigma, Clarendon Pres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UK, ISBN 0-19-825079-7. Contains the Turing papers plus a draft letter to Emil Post re his criticism of "Turing's convention", and Donald W. Davies' Corrections to Turing's Universal Computing Machine 마틴 데이비스 (ed.) (1965),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Raven Press, Hewlett, NY. 에밀 포스트 (1936), "Finite Combinatory Processes—Formulation 1", Journal of Symbolic Logic, 1, 103–105, 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에 재출판됨. pp. 289ff. 에밀 포스트 (1947), "Recursive Unsolvability of a Problem of Thue", Journal of Symbolic Logic, vol. 12, pp. 1–11.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재출판됨. pp. 293ff. In the Appendix of this paper Post comments on and gives corrections to Turing's paper of 1936–1937. In particular see the footnotes 11 with corrections to the universal computing machine coding and footnote 14 with comments on Turing's first and second proofs. 튜링, A.M. (1936). “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 《런던수학회지》. 2 (1937) 42: 230–65. doi:10.1112/plms/s2-42.1.230.  (and 튜링, A.M. (1938). “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 수정판”. 《런던수학회지》. 2 (1937) 43 (6): 544–6. doi:10.1112/plms/s2-43.6.544. ). Reprinted in many collections, e.g. in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p. 115–154; available on the web in many places, e.g. at Scribd. 앨런 튜링, 1948, "Intelligent Machinery." Reprinted in "Cybernetics: Key Papers." Ed. C.R. Evans and A.D.J. Robertson. Baltimore: University Park Press, 1968. p. 31. F. C. Hennie and R. E. Stearns. Two-tape simulation of multitape Turing machines. JACM, 13(4):533–546, 1966. 계산 이론[편집] 불로스, 조지; 리차드 제퍼리 (1989, 1999). 《Computability and Logic》 3판.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20402-X.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불로스, 조지; 존 부르게스, 리차드 제퍼리, (2002). 《Computability and Logic》 4판.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00758-5 (pb.)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Some parts have been significantly rewritten by Burgess. Presentation of Turing machines in context of Lambek "abacus machines" (cf Register machine) and recursive functions, showing their equivalence. 테일러 L. 부스 (1967), Sequential Machines and Automata Theory, John Wiley and Sons, Inc., New York. 공대 졸업생 수준의 책.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루며 9장 튜링 기계는 재귀 이론에 대해서 조금 다루고 있다. 마틴 데이비스 (1958). 《Computability and Unsolvability》. McGraw-Hill Book Company, Inc, New York. . On pages 12–20 he gives examples of 5-tuple tables for Addition, The Successor Function, Subtraction (x ≥ y), Proper Subtraction (0 if x < y), The Identity Function and various identity functions, and Multiplication. 데이비스, 마틴; 론 시갈, 엘레인 J. 웨커 (1994). 《Computability, Complexity, and Languages and Logic: Fundamentals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2판. San Diego: Academic Press, Harcourt, Brace & Company. ISBN 0-12-206382-1.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Hennie, Fredrick (1977). 《Introduction to Computability》. Addison–Wesley, Reading, Mass.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unused_data= (도움말). On pages 90–103 Hennie discusses the UTM with examples and flow-charts, but no actual 'code'. 존 홉크로프트와 제퍼리 울만, (1979). 《Introduction to Automata Theory, Languages and Computation》 1판. Addison–Wesley, Reading Mass. ISBN 0-201-02988-X.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A difficult book. Centered around the issues of machine-interpretation of "languages", NP-completeness, etc. Hopcroft, John E.; Rajeev Motwani, Jeffrey D. Ullman (2001). 《Introduction to Automata Theory, Languages, and Computation》 2판. Reading Mass: Addison–Wesley. ISBN 0-201-44124-1.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Distinctly different and less intimidating than the first edition. Stephen Kleene (1952), Introduction to Metamathematics,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Amsterdam Netherlands, 10th impression (with corrections of 6th reprint 1971). Graduate level text; most of Chapter XIII Computable functions is on Turing machine proofs of computability of recursive functions, etc. Knuth, Donald E. (1973). 《Volume 1/Fundamental Algorithms: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 2판. Reading, Mass.: Addison–Wesley Publishing Company. . With reference to the role of Turing machines in the development of computation (both hardware and software) see 1.4.5 History and Bibliography pp. 225ff and 2.6 History and Bibliographypp. 456ff. Zohar Manna, 1974, Mathematical Theory of Computation. Reprinted, Dover, 2003. ISBN 978-0-486-43238-0 마빈 민스키, Computation: Finite and Infinite Machines, Prentice–Hall, Inc., N.J., 1967. See Chapter 8, Section 8.2 "Unsolvability of the Halting Problem." 초보자도 읽을만 하며 재밌는 부분도 있다. Christos Papadimitriou (1993). 《Computational Complexity》 1판. Addison Wesley. ISBN 0-201-53082-1.  Chapter 2: Turing machines, pp. 19–56. Michael Sipser (1997). 《Introduction to the Theory of Computation》. PWS Publishing. ISBN 0-534-94728-X.  Chapter 3: The Church–Turing Thesis, pp. 125–149. 스톤, 해롤드 S. (1972). 《Introduction to Computer Organization and Data Structures》 1판. New York: McGraw–Hill Book Company. ISBN 0-07-061726-0.  Peter van Emde Boas 1990, Machine Models and Simulations, pp. 3–66, in Jan van Leeuwen, ed., Handbook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Volume A: Algorithms and Complexity, The MIT Press/Elsevier, [place?], ISBN 0-444-88071-2 (Volume A). QA76.H279 1990. Valuable survey, with 141 references. 처치-튜링 명제[편집] Nachum Dershowitz; Yuri Gurevich (2008년 9월). “A natural axiomatization of computability and proof of Church's Thesis” (PDF). 《Bulletin of Symbolic Logic》 14 (3). 2008년 10월 15일에 확인함.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Roger Penrose (1989, 1990). 《The Emperor's New Mind》 2판.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ISBN 0-19-851973-7.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작은 튜링 기계[편집] Rogozhin, Yurii, 1998, "A Universal Turing Machine with 22 States and 2 Symbols", Romanian Journal Of Information Science and Technology, 1(3), 259–265, 1998. (surveys known results about small universal Turing machines) Stephen Wolfram, 2002, A New Kind of Science, Wolfram Media, ISBN 1-57955-008-8 Brunfiel, Geoff, Student snags maths prize, Nature, October 24. 2007. Jim Giles (2007), Simplest 'universal computer' wins student $25,000, New Scientist, October 24, 2007. Alex Smith, Universality of Wolfram’s 2, 3 Turing Machine, Submission for the Wolfram 2, 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 Vaughan Pratt, 2007, "Simple Turing machines, Universality, Encodings, etc.",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 마틴 데이비스, 2007, "Smallest universal machine", and Definition of universal Turing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27, 2007. Alasdair Urquhart, 2007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 2007. Hector Zenil (Wolfram Research), 2007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 Todd Rowland, 2007, "Confusion on FOM", Wolfram Science message board, October 30, 2007. 기타[편집] 마틴 데이비스 (2000). 《Engines of Logic: Mathematicians and the origin of the Computer》 1판. W. W. Norton & Company, New York. ISBN 0-393-32229-7 pbk.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로빈 간디, "The Confluence of Ideas in 1936", pp. 51–102 in Rolf Herken, see below. 스티븐 호킹 (editor), 2005, God Created the Integers: The Mathematical Breakthroughs that Changed History, Running Press, Philadelphia, ISBN 978-0-7624-1922-7. Includes Turing's 1936–1937 paper, with brief commentary and biography of Turing as written by Hawking. Rolf Herken (1995). 《The Universal Turing Machine—A Half-Century Survey》. Springer Verlag. ISBN 3-211-82637-8.  앤드류 호지스, Alan Turing: The Enigma, Simon and Schuster, New York. Cf Chapter "The Spirit of Truth" for a history leading to, and a discussion of, his proof. Ivars Peterson (1988). 《The Mathematical Tourist: Snapshots of Modern Mathematics》 1판. W. H. Freeman and Company, New York. ISBN 0-7167-2064-7 (pbk.)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Paul Strathern (1997). 《Turing and the Computer—The Big Idea》. Anchor Books/Doubleday. ISBN 0-385-49243-X.  Hao Wang, "A variant to Turing's theory of computing machines", Journal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JACM) 4, 63–92 (1957). Charles Petzold, Petzold, Charles, The Annotated Turing, John Wiley & Sons, Inc., ISBN 0-470-22905-5 Arora, Sanjeev; Barak, Boaz, "Complexity Theory: A Modern Approa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ISBN 978-0-521-42426-4, section 1.4, "Machines as strings and the universal Turing machine" and 1.7, "Proof of theorem 1.9" Isaiah Pinchas Kantorovitz, "A note on turing machine computability of rule driven systems", ACM SIGACT News December 2005.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튜링 기계 Turing Machine 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etailed info on the Church–Turing Hypothesi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uring Machine-Like Models in Molecular Biology, to understand life mechanisms with a DNA-tape processor. The Turing machine—Summary about the Turing machine, its functionality and historical facts The Wolfram 2,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Stephen Wolfram's $25,000 prize for the proof or disproof of the universality of the potentially smallest universal Turing Machine. The contest has ended, with the proof affirming the machine's universality. "Turing Machine Causal Networks" by Enrique Zeleny, Wolfram Demonstrations Project. (영어) Turing Machines - Curlie (DMOZ 기반) Purely mechanical Turing Machine vdeh오토마타 이론: 형식 언어 및 형식 문법 촘스키 위계0유형(없음)1유형2유형3유형 형식 문법무제약 문법재귀 문법문맥 의존 문법문맥 자유 문법정규 문법 형식 언어재귀 열거 언어재귀 언어문맥 의존 언어문맥 자유 언어정규 언어 오토마타튜링 기계판정자선형유한 오토마타내리누름 오토마타유한 상태 기계 각 언어 및 문법은 바로 윗줄의 진부분집합이다. 또한 각 기계와 문법은 바로 윗줄의 기계와 문법으로 동등하게 기술될 수 있다. 전거 통제 LCCN: sh85138778 GND: 4203525-9 SUDOC: 027831655 BNF: cb11978871z (데이터) NDL: 00573533 BNE: XX55036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튜링_기계&oldid=22352535" 분류: 이론 전산학앨런 튜링계산 모형정형 기법계산 가능성 이론잉글랜드의 발명품오토마타 이론형식 언어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인용 오류 - 날짜인용 오류 - ISBN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urlan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GĩkũyũLatinaLëtzebuergeschLumbaart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Mirandés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2일 (수) 10: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나일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일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일 강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나일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나일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좌표: 북위 30° 10′ 동경 31° 6′  / 북위 30.167° 동경 31.100°  / 30.167; 31.100 나일강 Nile (지리 유형: 강) 이집트에서의 나일강 어원: "나일(Nile, 아랍어 닐)"은 그리스어 "네일로스(Νεῖλος)"에서 유래한다 나라 에티오피아 · 이집트 · 남부 수단 · 수단 · 우간다 · 콩고 민주 공화국 · 탄자니아 · 케냐 · 르완다 도시 우간다의 진자 · 남부 수단의 주바 · 수단의 하르툼 · 이집트의 카이로 주 발원지 백나일강  - 위치 우간다·케냐·탄자니아의 국경에 있는 빅토리아 호  - 고도 2,700m (8,858ft)  - 좌표 남위 2° 16′ 55.92″ 동경 29° 19′ 52.32″ / 남위 2.2822000° 동경 29.3312000°  / -2.2822000; 29.3312000 2차 발원지 청나일강  - 위치 에티오피아의 타나 호(Lake Tana)  - 좌표 북위 12° 2′ 8.8″ 동경 37° 15′ 53.11″ / 북위 12.035778° 동경 37.2647528°  / 12.035778; 37.2647528 합류점 수단의 하르툼 부근  - 좌표 북위 15° 37′ 59″ 동경 32° 31′ 59″ / 북위 15.63306° 동경 32.53306°  / 15.63306; 32.53306 하구 이집트의 지중해를 면한 곳  - 고도 0m (0ft)  - 좌표 북위 30° 10′ 동경 31° 6′  / 북위 30.167° 동경 31.100°  / 30.167; 31.100[1] 길이 6650 (6695) 폭 8km (5mi) 면적 3,400,000km² (1,312,747sq mi) 유량  - 평균 2,830m³/s (99,941cu ft/s) 나일강(영어: Nile, 아랍어: النيل an-nīl 안닐[*], 문화어: 닐강)은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총 길이는 6,650km(6,695km)이며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집트를 흐르는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기 때문에, 범람이 끝난 후 농지를 원래대로 복구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는 측량과 기하학이 특히 발달했다. 수해를 막기 위해 아스완 댐, 아스완 하이 댐 등이 건설되었다. 목차 1 이름 2 지리 3 지도 4 각주 5 외부 링크 이름[편집] 나일강을 뜻하는 고대 이집트어 이테루의 신성 문자 표기 itrw. ‘나일(영어: Nile)’이라는 명칭은 ‘강’이라는 뜻의 고대 셈어 '나할(nahal)'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역시 히브리어로 강을 뜻하는 나찰(히브리어: נח"ל nachal‎)의 어원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나일강을 이테루(iteru)라고 불렀는데, ‘큰 강’이란 뜻이다. 지리[편집] 나일강은 빅토리아 호와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이집트의 지중해로 유입되는 강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불리기도 하며, 나일은 본류가 여러 개인 몇 안 되는 하천 중의 하나이다. 가장 긴 흐름은 백나일로 빅토리아 호의 북쪽 끝에서 시작하는데 동아프리카 지구대로 떨어지는 머치슨 폭포까지는 빅토리아 나일이라고도 부른다. 강은 앨버트 호를 가로 질러(이 구간은 앨버트 나일이라고 부른다.) 연속되는 협곡을 지나 남수단의 수드 평원의 넓은 습지대로 흘러간다. 하르툼에서 백나일은 청나일과 합류한다. 청나일은 에티오피아 고원의 타나 호에서 발원한다. 하르툼에서 이집트 남부까지 6개의 대형 폭포를 지나고, 이후에는 사막의 급경사면을 따라 좁고 길게 흘러 카이로에 이르러 넓은 삼각주에 도달한다. 이 삼각주 지역과 나일강의 좁고 긴 녹색 띠 지역은 이집트 전체 면적의 3% 밖에 안 되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고 농업의 전체를 담당한다. 백나일과 청나일 두 지류 덕분에 나일강의 유량은 안정적으로 흐르면서 비옥한 퇴적물이 공급된다. 백나일은 하르툼 하류를 흐르는 유량의 16%만을 공급하지만 상류가 적도의 열대우림 지대에서 흐르기 때문에 나일강의 수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청나일은 84%의 유량을 공급하면서 나일강 유량 변화를 주도한다.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해 비옥한 미립질의 검은 토양이 하류의 충적지대에 공급되는데 이 범람은 에티오피아 고원의 겨울철 강우와 눈 녹은 물 때문이다. 범람의 시작은 하르툼의 경우 4월이며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늦어져서 카이로에서는 10월에 최고조에 달한다. 1970년에 준공된 아스완하이 댐은 수단 국경지역까지 형성된 거대한 인공호수인 나세르 호를 만들었다. 댐 건설로 나일강 하류의 유량 변화는 상당한 정도로 안정되었다. [2] 지도[편집] 나일강의 두 지류인 백나일과 청나일을 함께 보여주는 지도 각주[편집] ↑ GEOnet 네임 서버의 Nile River ↑ James F. Luhr (2009). 《Smithsonian Institution Earth》. Smithsonian Institution. 229쪽. ISBN 978-0-7566-6115-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나일강 나일강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나일강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다음백과 미러) vdeh고대 이집트 나일강 연대기 역사 왕조 언어 종교 미술 건축 문화 농업 요리 피라미드 파피루스 미라 몰약 전거 통제 VIAF: 129365562 LCCN: sh85091951 GND: 4042339-6 NDL: 00628842 NKC: ge17138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나일강&oldid=24514845" 분류: 나일강이집트의 강수단의 강남수단의 강우간다의 강아프리카의 국제 하천이집트의 국립공원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아랍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히브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Адыгабзэ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ܐܪܡܝܐمصرىঅসমীয়া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भोजपुरीBislamaবাংলা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Mìng-dĕ̤ng-ngṳ̄НохчийнCebuanoᏣᎳᎩکوردیCorsuQırımtatarca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ThuɔŋjäŋDolnoserbskiडोटेली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EstremeñuفارسیFulfuldeSuomiVõroFøroysktFrançaisNordfriiskFryskGaeilge贛語GàidhligGalegoAvañe'ẽBahasa HulontaloગુજરાતીHausaעבריתहिन्दीFiji HindiHrvatskiHornjoserbsce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lokanoГӀалгӀайÍslenskaItaliano日本語PatoisLa .lojban.JawaქართულიQaraqalpaqshaTaqbaylitАдыгэбзэKabɩyɛKongoҚазақшаಕನ್ನಡПерем КомиKurdîKernowekКыргызчаLatinaLadinoLëtzebuergeschЛезгиLingua Franca NovaLimburgsLumbaartLingálaلۊری شومالیLietuviųLatviešuमैथिलीОлык марийBaso Minangkaba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irandésမြန်မာဘာသာЭрзяньDorerin NaoeroNāhuatlNapulitanoPlattdüütschNedersaksiesनेपाली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Sesotho sa LeboaChi-ChewaOccitanLivvinkarjalaOromooИронਪੰਜਾਬੀPolskiPiemontèisپنجابیΠοντιακάPortuguêsRuna SimiRumantschRomânăArmãneashtiTarandíne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Kinyarwandaसंस्कृतम्Саха тылаᱥᱟᱱᱛᱟᱲᱤSicilianuScots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ChiShonaSoomaalig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SvenskaKiswahiliŚlůnskiதமிழ்తెలుగుТоҷикӣไทยTürkmençe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дмурт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Vepsän kel’Tiếng ViệtVolapükWinaray吴语IsiXhosa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2일 (화) 19: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금강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금강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풍악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산에 관한 것입니다.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비슷한 이름의 금강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금강산 봄 금강산(金剛山), 여름 봉래산(蓬萊山)가을 풍악산(楓嶽山), 겨울 개골산(皆骨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고성군 금강군 통천군 등높이 1,638 m위치 산맥 태백산맥, 백두대간좌표 북위 38° 31′ 34″ 동경 128° 03′ 06″ / 북위 38.526111° 동경 128.051667°  / 38.526111; 128.051667좌표: 북위 38° 31′ 34″ 동경 128° 03′ 06″ / 북위 38.526111° 동경 128.051667°  / 38.526111; 128.051667 동악 금강산서악 묘향산남악 지리산북악 백두산중악 삼각산토함산 (동악)계룡산 (서악)태백산 (북악)팔공산 (중악) v • d • e • h한국의 오악과 신라의 오악 (파란색): 지리산은 한국의 남악이면서 또한 신라의 남악이다 금강산(金剛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 · 고성군 · 통천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한 높이 1,638m의 이 산의 이름 금강은 불교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금강은 불퇴전(不退轉), 즉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을 뜻한다. 금강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지라(산스크리트어: वज्र, 번개와 금강석을 모두 가리킨다)를 훈역(訓譯)한 단어이다. 대한민국의 강원도 속초시와는 약 50 km 떨어져 있다. 목차 1 개요 2 명칭 3 형성 4 산의 지리 4.1 내금강 4.2 외금강 4.2.1 금강산 온천 4.3 해금강 4.4 신금강 5 기후 6 생태 6.1 솔잎혹파리 6.2 화재 방지 7 사찰 8 관련 문화 9 관광 9.1 일제 강점기 이전 9.2 한국 전쟁 이후 9.2.1 금강산 관광 9.3 미래 10 같이 보기 10.1 북한 지역의 명산 11 출처 12 외부 링크 개요[편집] 구룡연으로 가는 길 금강산은 예로부터 국내외에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대대로 많은 예술가들의 표현 대상이 되었다. 봄의 이름인 금강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현재는 대개 금강산이라 불리며,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신선이 사는 산 중 하나),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1] 단풍 든 큰 산, 楓岳山[2] 단풍 언덕 산),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바위 뼈 산)으로 불렸다.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수많은 봉우리, 오랜 기간의 지질 활동과 풍화 작용으로 생긴 기암괴석 및 폭포, 바다를 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흔히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뉘며, 때로는 외금강의 남쪽 지역이 신금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3] 1998년부터 잘 알려진 3개 코스가 외부에 개방되었으며, 점차 개방되는 코스가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아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관리 및 개발 중에 있다. 해마다 외부 관광객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여러 방면에서 단순히 관광 이외에도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풀이된다.[4] 금강산 관광을 위해서는 현대아산 혹은 대리점에서 예약을 하고 화진포 아산 휴게소에서 수속을 마쳐야 한다. 2008년 7월 11일에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일어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으며 남북 관계의 악화로 인해 사실상 무기한 재개 불능 상태이다. 명칭[편집]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 오랜 옛날부터 이미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국내외로 유명하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으로 알려졌다.[5] 또한 전국의 명산, 명소들이 금강산에 빗대어 별명이 붙여지기도 하였다.[5] 각종 문헌과 기록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별칭은 모두 9가지[5] 이며, 대체로 계절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다. 금강은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일 때인 봄의 이름이며, 여름에는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일천 이만 봉이 단풍으로 물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낙엽이 져서 바위들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불린다.[5] 하지만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진 산이 금강산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곳이 불교의 영지(靈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5] ‘금강’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이아라(번개와 다이아몬드)와 통한다. 형성[편집] 금강산을 만든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기후와 특유의 지질 활동과 관련이 깊다.[6] 금강산 일대는 비와 눈이 비교적 많이 내리는 지역으로, 고도와 심지어 동서의 위치에 따라서도 기후가 다르며,[6] 금강산의 지질층은 태고계로부터 신생계에 걸친 오랜 지질시대에 속하는 여러 종류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7] 가장 널리 분표된 암석은 두 종류(운모가 섞인 것과 얼룩이 진 것)의 화강암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화강-편마암 수정 지대가 형성돼 있다.[8] 암석들은 가로세로로 나고 가지가지 방향으로 절리가 생겨 특이한 지형과 기이한 바위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지각활동과 풍화작용으로 침식, 삭박됨에 따라 형성되었다.[6][7][8] 이들 작용은 1천만 년 전부터 현세까지 진행된 궁융상지괴응기 운동으로 형성되었다.[6] 산의 지리[편집] 해금강 금강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에 걸쳐 있으며, 또한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 강원도 인제군까지 걸쳐 있고[5],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있다. 주분서령을 기준으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분류한다. 또한 외금강 동쪽에 있는 지역은 해금강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며, 1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는 무려 60여 개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모두 합치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선조들은 일만 이천 봉이라 했다.[5] 이 지역의 많은 명승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고도 한다.[9] 탐승 구역은 외금강 11개, 내금강 8개, 해금강 3개가 있는데[3][7], 아직 이들 모두가 개방되지는 않았다. 내금강[편집] 예로부터 금강이라 하면 주로 내금강을 뜻했으며[10][11], 주분서령의 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여러 폭포가 있다. 내금강은 만폭동(萬瀑洞) 구역, 태상동 구역, 백운대 구역, 비로봉 구역, 명경대 구역, 망군대 구역, 구성동 구역 등으로 나뉜다.[12] 내금강에 있는 봉은 비로봉 외에 영랑봉(1,601m), 중향성(1,520m), 영추봉·백운대(969m), 향로봉(1,030m), 법기봉·혈망봉(1,372m) 등이 있으며, 백천동·태상동·구성동 골짜기 등의 유명한 폭포가 많다. 주변 경관뿐만 아니라 표훈사(表訓寺)로 가는 길목 길가의 큰 자연석에 미륵, 석가, 아미타불 상존입상을 조각한 특이한 구성으로 고려 시대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삼불암, 높이가 40미터나 되는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인 묘길상, 팔담의 하나인 분설담 위에 세워진 독특한 암자인 보덕암(普德庵) 등의 중요한 역사 유적이 있다.[10] 이 지역은 군사 보안을 이유로 개방되지 않다가[13] 2007년 6월부터 외부에 개방되었다.[10][14] 외금강[편집] 구룡폭포 겨울의 금강산 구룡연 내금강의 동쪽에 있으며,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포괄한다. 크게 구룡연, 만물상, 수정봉, 천불동, 선하 구역으로 나뉘며, 수정봉(773m)을 비롯한 문주봉(1,027m), 호봉(1,264m), 상등봉(1,227m), 옥녀봉(1,424m), 세존봉(1,160m), 채하봉(1,588m), 집선봉(1,351m) 등의 산봉우리가 있다. 구룡연(九龍淵)에 있는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에 있는 대승폭포와 더불어 조선 3대 폭포로 꼽히며,[13] 높이는 74미터, 너비 4미터에 달한다.[12] 폭포 절벽과 바닥이 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12] 비봉폭포는 이것보다 더 높은 139미터에 달하며, 장쾌한 물줄기로 이름나 있다.[12] 만물상 구역에는 삼선암, 독선암, 귀면암 등의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으며, 여러 바위마다 독특한 전설을 담고 있다.[12] 수정봉 구역은 외금강과 동해의 절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며[15], 천불동 구역에는 3단 폭포, 선인굴, 육선암, 연주폭포, 금강천지(金剛天池) 등 저마다 독특함을 자랑한다.[12] 선하 구역에는 용바위, 흔들바위, 선하폭포, 백련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 다리, 집선봉 등이 있다.[12] 금강산 온천[편집] 금강산(또는 온정리) 온천은 외금강에 있으며, 신라 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오래된 온천이다.[7]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데, 왕족이나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7] 함유 물질로는 라돈, 메타규산이 광천의 한계량 이상 들어 있으며, 탄산 및 염소 이온과 나트륨, 칼슘 이온도 들어 있다.[1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 22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16], 관광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해금강[편집] 삼일포의 전경 이 지역은 대해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지 30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숙종 24년(1698년) 고성 군수로 있던 남택하(南宅夏)가 찾아내고 “금강산의 얼굴빛과 같다.” 하여 해금강이라 이름 붙였다.[13] 본래 해안 암벽, 바위섬, 자연호, 모래사장, 하천이 어우러진 경승지다. 이중 개방된 곳은 삼일포와 향로봉이며, 관동 팔경의 하나인 총석정은 개방되어 있지 않다.[17] 삼일포는 남한의 화진포와 송지호같이 석호(潟湖)이며, 총 넓이는 0.79km2에 달한다.[12] 이 호수에는 전설에 따르면 신선 또는 화랑들이 경치가 너무 좋아 3일 동안 머물고 갔기 때문에 삼일포라 한다.[5][13][18] 봉래대에서 삼일포 전경을 볼 수 있다. 소가 누운 모양이라고 해서 와우섬이라 이름 붙은 큰 섬을 비롯해, 3개의 작은 섬이 떠있다.[17] 또한 삼일포 기슭에는 4명의 신선이 놀고 간 것을 기념해 세웠다는 사선정터가 있다.[5] 향로봉은 바다의 해만물상이라 불리며, 바닷가에 육지와는 거리를 두고 홀로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17] 비바람에 씻기고 바닷물에 깎이어 독특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5] 신금강[편집]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 칭하기도 한다.[3] 이곳은 전체적으로 전나무와 소나무로 구성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에 있는 십이폭포는 금강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폭포로 수직 높이는 289미터, 폭포 길이 390미터, 너비는 약 4미터에 달한다.[12] 그밖에도 온선대, 칠보대, 직류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다리, 송림굴, 소연소, 구룡소, 선담, 유점사, 반야암 등의 볼거리가 있다.[12] 기후[편집] 고산 지대에 속하여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며, 7~8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쏟아진다.[6] 동서차가 심한 편으로, 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많아지지만, 푄현상으로 내금강부터는 적어진다. 또한 한국의 전반적 기후에 대비하여 볼 때 따뜻하고 습하다.[6] 하지만 고도에 따라서 겨울에는 영하 10도에서 30도의 혹한의 날씨가 이어지기도 하며, 지역에 따라 빠르면 10월부터 눈이 내리는 다설 지역이다.[5] 이러한 기후 조건으로 북부 계열의 식물과 남부 계열의 식물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6] 생태[편집] 금강산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특수한 기후 조건 때문에 무려 1,125종의 식물과 3백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며 1백40여 가지의 고유식물이 분포하고 있다.[5] 고유식물로는 금강초롱, 금강인가목(금강국수나무), 금강봄맞이꽃, 금강제비꽃, 금강애기나리, 만리화 등이 있으며, 이중 금강초롱과 금강인가목은 희귀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7][12] 산록 원시림 지대에는 주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의 울창한 단순림이 펼쳐져 있고 계곡 교목지대에는 침엽수와 자작나무, 산목련나무, 박달나무, 느티나무, 가래나무, 조간주나무, 고로쇠나무, 피나무 등의 각종 활엽수로 혼성림을 이루고 있으며, 봉우리의 고산 지대는 누운잣나무, 누운향나무, 철쭉, 진달래 따위의 키작은 나무들이 자란다.[5] 금강산 외에는 민둥산이 이어지다 보니 동물들의 중요한 서식처로 자리잡았다.[19] 식물에 비해 많지 않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68종의 짐승류와 2백 여 종의 조류, 9종의 파충류, 10종의 양서류, 여러 계곡에는 30여 종류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다.[5] 희귀동물 중에는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산양 등이 있다.[5] 솔잎혹파리[편집] 대한민국 측 연구기관들은 1998년에서 1999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강원도 지역 소나무 5만 헥타르 가운데 1만 헥타르가 솔잎혹파리 피해를 입고 있다고 추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방제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공동 방제를 실시하게 되었다.[20] 그 결과 구룡연과 삼일포 일대의 소나무를 87에서 94퍼센트 정도 보호해낸 것으로 보고되었다.[20] 화재 방지[편집] 해마다 증가하는 관광객 수를 대비하기 위해 소방 시설의 설치가 제안되었으며, 그에 따라 소방서가 2007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가 2008년 7월 8일에 문을 열었다.[21] 현대아산이 위탁운영을 하고, 전직 소방관들이 근무할 예정이다.[21] 사찰[편집] 신계사 삼층석탑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강산에는 총 108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22] 또 기록에 나오는 암자들의 이름을 종합해 보면 무려 180여 개나 되며, 하대신라 때부터 많이 건립되고 고려 때 절정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은 유점사로 전해져 있다.[23] 하지만 신계사,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같은 금강산 4대 사찰[24] 이외에는 조선 왕조의 불교 억압 정책 등의 이유로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 4대 사찰도 한국전쟁 도중 대부분은 파괴되어[23], 남은 것은 내금강에 있는 표훈사뿐이었다.[10] 때문에 파괴된 사찰이나 불교 관련 문화재의 복원이 추진되고 있으며, 신계사 복원 공사가 2004년 4월에 착공해 2007년 10월에 완료 되었다.[24] 관련 문화[편집] 《대동여지도》에 묘사된 금강산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나지 배가 고파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한국어 속담이 있다. 북송대의 시인 소식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였다.[3]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금강산 소개 구절이 나온다. “ 이 산은 천 개의 봉우리가 눈처럼 서서, 높고 절묘함이 으뜸이며, 또한 불서(佛書)에 담무갈보살이 거하던 곳이란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인간정토(人間淨土)라 이른다. 전하기로는, 중국 사람들이 또한 이르기를, “고려국에 나서 친히 보기를 원한다.” 하였다. ” 此山千峯雪立, 高竣奇絶, 又爲之冠. 且以佛書有曇無竭菩薩所住之說, 世遂謂人間淨土, 諺傳中國人亦云: “願生高麗國, 親見之.” 선조 때의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관동팔경과 금강산 일대의 절경을 노래하였다.[25] 영조 때의 정선은 금강산의 풍경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13]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1890년 금강산을 여행 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여기 11마일에 걸친 금강산의 자태는 세계 여느 명산의 아름다움을 초월하고 있다. 대협곡은 너무나 황홀해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지경이다.[3] ” 이광수는 〈금강산유기〉에서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라고 내금강을 표현했다.[26]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의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있다.[27]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동요 〈금강산〉도 있다.[2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민요 《금강산타령》과 함께 성악곡 《가고싶은 금강산》, 영화《금강산을 찾아서》가 있다. 관광[편집] 1945년 전에 존재한 내금강역 일제 강점기 이전[편집] 일제 강점기까지는 민간이 운용하는 내금강과 철원을 연결하는 금강산전철이 있었으나, 이제는 단절되어 기능을 상실했다.[29] 이를 복원하려는 계획이 있으나,[30][31] 경의선 및 경원선, 동해선에게 순위에 밀려 진척 속도가 느리다.[31] 한국 전쟁 이후[편집] 2002년 10월 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채택한 ‘금강산 관광지구법’에 따라 금강산은 엄격히 보호되고 있다. 이는 관광을 계속하는 동시에 금강산을 철저히 보호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32] 이에 따라 개발자가 관광지의 나무, 경치, 천연기념물을 훼손하는 행위가 금지되며(11조), 필수적인 오·폐수의 정화(14조), 또한 관광객도 역사유적, 천연기념물, 온천 등을 보호하도록 명시(19조 7항)하고 있다.[32] 이 법을 반영하듯이 단순한 흙이나 조약돌 채취도 엄격하게 처벌받는다. 이를 어긴 자에게의 처벌 조항도 명시돼 있는데, 대개는 손해보상 같은 제재이지만, 제28조에 따라 엄중한 경우는 추방까지 가능하다.[32] 하지만 금강산에 산재하는 바위에는 김일성 일가를 찬양하는 글이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명산을 휴양소 뿐만 아니라 혁명 이념을 교육하는 장소로 여기는 국내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33] 따라서 이것들이 경관을 해친다는 일부 의견이 있으며, 여러 대학교 교수들의 생태 답사결과 금강산의 보존 상태에는 모두 긍정적인 의견을 보았으나, 일부 답사자들은 암벽에 새겨져 있는 선전 문구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34] 금강산 관광[편집]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이 1989년 방북하여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체결한 9년 뒤인 1998년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함으로써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2001년 1월 6일부터 3년 동안 한국 최초의 호텔식 테마 여객선 설봉호를 이용하여 해로 관광이 가능해졌다. 금강산 지역은 2002년 11월 23일에 금강산관광지구라는 특별행정구역으로 명명되었다.[35] 2003년 2월 14일 DMZ를 통과하는 역사적인 육로 관광이 시범 운영된 뒤로 육로 관광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이 육로 관광은 버스를 이용하여 금강산으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매년 관광객 수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4] 도중에 몇 차례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정몽헌의 자살[36], 사스 사태[36], 민간인 민영미 억류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36][37] 이중 억류 사건은, 관광 세칙과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를 체결한 후 일단락되었다.[37] 2008년 3월부터는 자가용을 이용한 승용차관광도 할 수 있게 되었다.[38] 현대아산 측은 2005년 6월에 금강산 관광객이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39] 했으며, 2008년 말 기준으로 통산 관광객 수는 195만 명에 달한다.[4] 개방된 이후로 금강산 권역을 개발하려는 계획이 현대아산 측에서 제안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과 2006년 2월 10일에 합의했다.[40] 이 계획은 해금강에서 원산까지 총 109킬로미터, 약 6억 평에 이르는 관광 특구로 조성한다는 종합계획으로 투자금이 총 22억6천만 달러(2조2천억 원)에 이른다. 1단계로 오는 2010년까지 해금강에서 통천까지, 2단계로 원산까지 관광지역을 확대한다는 예정이다.[41] 대한민국 국민 외의 외국인도 관광할 수 있으나, 관광 자체가 외국인을 위해 특별히 기획되어 있지는 않아 아직 적은 편이다. 한편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미국인에게 가기 힘든 절경지로 금강산을 1위로 선정하기도 하였다.[42] 금강산 관광으로 인한 효과는 긍정적과 부정적으로 나뉜다. 현재 이 지역은 남북의 주요 회담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4] 단순한 관광 산업 이외에도 한반도 긴장 완화, 국가 신인도 제고, 남북 교류 활성화 등에 기여했다는 의견[4] 도 있지만, 한편에 현재 관광에 드는 비용이 많다는 것[43] 과 이 사업이 김정일 정권의 유지에 필요한 돈을 대어 준다는 견해도 있다.[44]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8년 7월 11일에는, 금강산 내에서 한 대한민국 관광객이 새벽에 해변 산책을 하다가 금지된 구역에 접근하게 되어 북측 군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45]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이튿날인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하였다.[46] 미래[편집] 현재 금강산 관광은 개별적이 아닌 일정에 따라 가이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형태이면서 모든 코스가 개방된 것은 아니지만, 1998년 외금강 코스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내금강 코스 개방을 통해 서서히 공개되는 실정이며, 제한적이나마 자가용 자동차 관광을 추진하는 등 자유도가 높아질 기미는 있다. 도중에 남북 관계가 약화될 때나 정권 교체의 와중에도 금강산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47] 이며, 이는 개방 지역의 확산과 그에 따른 경쟁력 강화로 풀이된다.[47] 해마다 관광객 증가에 따라 금강산의 보존 상태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지만[48], 금강산 직접 개발은 피한다는 현대아산의 방침과[4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엄격한 보호 정책으로[32]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남측 강원도는 2008년 7월 DMZ 관광청을 발족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 관청의 계획에는 설악산과 금강산을 묶어 세계적인 관광지대로 가꾸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50] 같이 보기[편집] 한국의 산 설악산 철도 금강산선 금강산청년선 지명 금강군 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 노토콘고 (能登金剛, 일본 이시카와현의 북부, 노토 지방(能登地方)에 있는 경승지이다. 금강산이 이곳의 이름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영화 금강산 대활동 - 1919년에 제작상영된 금강산을 주제로 한 무성 다큐멘터리 영화 기업 현대아산 훼미리마트 - 우리나라의 현지법인(現地法人)이 금강산관광지구(金剛山觀光地區)에 들어서고 있다. 인물 정몽헌 북한 지역의 명산[편집] 백두산(白頭山) 구월산(九月山) 묘향산(妙香山) 칠보산(七寶山) 지이산(智異山) 옥련산(玉蓮山) 장수산(長壽山) 출처[편집] ↑ 다음 한자사전 ↑ 楓岳山이라는 이름이 쓰이는 문헌은 다음과 같다. 이이, 〈楓岳行 풍악행〉, 《율곡전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가 나 다 라 마 “〈국내여행〉 만 이천 봉 곳곳마다 그리움 사무쳐”. 매일경제. 2004년 6월 27일.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현정은 시대 5년 'New 현대'〉 현대아산 금강산 관광 사업 10돌”. 서울경제. 2008년 6월 18일. 2011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21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금강산”. 2008년 6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가야할 산하 금강산이 부른다”.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금강산 온천”. 2008년 6월 20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금강산소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금강산 기행을 시작하면서(1)”. 2013년 4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금강산 내금강의 풍경”.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북강원 금강산 생태탐사②〉 2. 초여름 금강산 식물”. 강원일보. 2008년 6월 19일.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금강산”. 2007년 10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해금강' 수천만 년 파도가 만든 또 하나의 일만이천봉”.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6월부터 내금강 관광 간다”. 세계일보. 2007년 4월 25일.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 “외금강*탐승”. 2004년 12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가 나 “금강산온천”. 2008년 7월 7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해금강을 못보고 금강산을 보았다 하랴”. 오마이뉴스. 2005년 3월 18일.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추천여행〉 삼일포ㆍ해금강, 돌아가는 것을 잊다”. 매일경제. 2008년 2월 3일. 2014년 3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북강원 금강산 생태탐사②〉 3.여름 내금강에서 만난 새”. 강원일보. 2008년 7월 4일. 2008년 7월 4일에 확인함.  ↑ 가 나 “〈강원〉南北 힘합쳐 금강산 솔잎혹파리 잡았다”. 동아일보. 2004년 6월 9일. 2008년 6월 21일에 확인함.  ↑ 가 나 “금강산에도 소방서 생긴다”. 아시아 경제. 2008년 7월 4일. 2008년 7월 4일에 확인함.  ↑ 이행·윤은보·신공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서울. 권 47 회양도호부쪽. : ↑ 가 나 다 “"금강산이야말로 진짜 부처의 경지"”. 오마이뉴스. 2005년 3월 11일. 2008년 6월 17일에 확인함.  ↑ 가 나 “금강산 `4대 사찰` 신계사 … 남·북이 손잡고 되살렸다”. 중앙일보. 2007년 10월 15일.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송강의 여정이 서린 '태백문화권'”. 2005년 9월 29일.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내금강, 천하절경 짙고 푸르른 '천년의 숲' 비경”. 조선일보. 2007년 6월 6일. 2007년 9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한눈에 볼 수 있는 인천 문화예술 60년사>”. 연합뉴스. 2005년 4월 8일. 2008년 6월 21일에 확인함.  ↑ “'예술 속의 금강산'을 찾아서…대구문인협회 금강산 기행”. 매일신문. 2007년 7월 16일. 2008년 6월 21일에 확인함.  ↑ “금강산전기철도에 대하여(金剛山電気鉄道について)” (일본어).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금강산선 복원계획”. 국토해양부.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금강산선 남북연결”. 미래철도DB. 2008년 6월 17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자연·환경보호 엄격한 금강산法”. 경향신문. 2002년 11월 25일.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금강산에서 본 북한 노래”. 오마이뉴스. 2005년 4월 1일.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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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금강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풍악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산에 관한 것입니다.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비슷한 이름의 금강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금강산 봄 금강산(金剛山), 여름 봉래산(蓬萊山)가을 풍악산(楓嶽山), 겨울 개골산(皆骨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고성군 금강군 통천군 등높이 1,638 m위치 산맥 태백산맥, 백두대간좌표 북위 38° 31′ 34″ 동경 128° 03′ 06″ / 북위 38.526111° 동경 128.051667°  / 38.526111; 128.051667좌표: 북위 38° 31′ 34″ 동경 128° 03′ 06″ / 북위 38.526111° 동경 128.051667°  / 38.526111; 128.051667 동악 금강산서악 묘향산남악 지리산북악 백두산중악 삼각산토함산 (동악)계룡산 (서악)태백산 (북악)팔공산 (중악) v • d • e • h한국의 오악과 신라의 오악 (파란색): 지리산은 한국의 남악이면서 또한 신라의 남악이다 금강산(金剛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 · 고성군 · 통천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한 높이 1,638m의 이 산의 이름 금강은 불교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금강은 불퇴전(不退轉), 즉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을 뜻한다. 금강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지라(산스크리트어: वज्र, 번개와 금강석을 모두 가리킨다)를 훈역(訓譯)한 단어이다. 대한민국의 강원도 속초시와는 약 50 km 떨어져 있다. 목차 1 개요 2 명칭 3 형성 4 산의 지리 4.1 내금강 4.2 외금강 4.2.1 금강산 온천 4.3 해금강 4.4 신금강 5 기후 6 생태 6.1 솔잎혹파리 6.2 화재 방지 7 사찰 8 관련 문화 9 관광 9.1 일제 강점기 이전 9.2 한국 전쟁 이후 9.2.1 금강산 관광 9.3 미래 10 같이 보기 10.1 북한 지역의 명산 11 출처 12 외부 링크 개요[편집] 구룡연으로 가는 길 금강산은 예로부터 국내외에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대대로 많은 예술가들의 표현 대상이 되었다. 봄의 이름인 금강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현재는 대개 금강산이라 불리며,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신선이 사는 산 중 하나),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1] 단풍 든 큰 산, 楓岳山[2] 단풍 언덕 산),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바위 뼈 산)으로 불렸다.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수많은 봉우리, 오랜 기간의 지질 활동과 풍화 작용으로 생긴 기암괴석 및 폭포, 바다를 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흔히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뉘며, 때로는 외금강의 남쪽 지역이 신금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3] 1998년부터 잘 알려진 3개 코스가 외부에 개방되었으며, 점차 개방되는 코스가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아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관리 및 개발 중에 있다. 해마다 외부 관광객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여러 방면에서 단순히 관광 이외에도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풀이된다.[4] 금강산 관광을 위해서는 현대아산 혹은 대리점에서 예약을 하고 화진포 아산 휴게소에서 수속을 마쳐야 한다. 2008년 7월 11일에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일어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으며 남북 관계의 악화로 인해 사실상 무기한 재개 불능 상태이다. 명칭[편집]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 오랜 옛날부터 이미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국내외로 유명하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으로 알려졌다.[5] 또한 전국의 명산, 명소들이 금강산에 빗대어 별명이 붙여지기도 하였다.[5] 각종 문헌과 기록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별칭은 모두 9가지[5] 이며, 대체로 계절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다. 금강은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일 때인 봄의 이름이며, 여름에는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일천 이만 봉이 단풍으로 물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낙엽이 져서 바위들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불린다.[5] 하지만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진 산이 금강산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곳이 불교의 영지(靈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5] ‘금강’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이아라(번개와 다이아몬드)와 통한다. 형성[편집] 금강산을 만든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기후와 특유의 지질 활동과 관련이 깊다.[6] 금강산 일대는 비와 눈이 비교적 많이 내리는 지역으로, 고도와 심지어 동서의 위치에 따라서도 기후가 다르며,[6] 금강산의 지질층은 태고계로부터 신생계에 걸친 오랜 지질시대에 속하는 여러 종류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7] 가장 널리 분표된 암석은 두 종류(운모가 섞인 것과 얼룩이 진 것)의 화강암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화강-편마암 수정 지대가 형성돼 있다.[8] 암석들은 가로세로로 나고 가지가지 방향으로 절리가 생겨 특이한 지형과 기이한 바위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지각활동과 풍화작용으로 침식, 삭박됨에 따라 형성되었다.[6][7][8] 이들 작용은 1천만 년 전부터 현세까지 진행된 궁융상지괴응기 운동으로 형성되었다.[6] 산의 지리[편집] 해금강 금강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에 걸쳐 있으며, 또한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 강원도 인제군까지 걸쳐 있고[5],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있다. 주분서령을 기준으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분류한다. 또한 외금강 동쪽에 있는 지역은 해금강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며, 1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는 무려 60여 개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모두 합치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선조들은 일만 이천 봉이라 했다.[5] 이 지역의 많은 명승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고도 한다.[9] 탐승 구역은 외금강 11개, 내금강 8개, 해금강 3개가 있는데[3][7], 아직 이들 모두가 개방되지는 않았다. 내금강[편집] 예로부터 금강이라 하면 주로 내금강을 뜻했으며[10][11], 주분서령의 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여러 폭포가 있다. 내금강은 만폭동(萬瀑洞) 구역, 태상동 구역, 백운대 구역, 비로봉 구역, 명경대 구역, 망군대 구역, 구성동 구역 등으로 나뉜다.[12] 내금강에 있는 봉은 비로봉 외에 영랑봉(1,601m), 중향성(1,520m), 영추봉·백운대(969m), 향로봉(1,030m), 법기봉·혈망봉(1,372m) 등이 있으며, 백천동·태상동·구성동 골짜기 등의 유명한 폭포가 많다. 주변 경관뿐만 아니라 표훈사(表訓寺)로 가는 길목 길가의 큰 자연석에 미륵, 석가, 아미타불 상존입상을 조각한 특이한 구성으로 고려 시대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삼불암, 높이가 40미터나 되는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인 묘길상, 팔담의 하나인 분설담 위에 세워진 독특한 암자인 보덕암(普德庵) 등의 중요한 역사 유적이 있다.[10] 이 지역은 군사 보안을 이유로 개방되지 않다가[13] 2007년 6월부터 외부에 개방되었다.[10][14] 외금강[편집] 구룡폭포 겨울의 금강산 구룡연 내금강의 동쪽에 있으며,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포괄한다. 크게 구룡연, 만물상, 수정봉, 천불동, 선하 구역으로 나뉘며, 수정봉(773m)을 비롯한 문주봉(1,027m), 호봉(1,264m), 상등봉(1,227m), 옥녀봉(1,424m), 세존봉(1,160m), 채하봉(1,588m), 집선봉(1,351m) 등의 산봉우리가 있다. 구룡연(九龍淵)에 있는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에 있는 대승폭포와 더불어 조선 3대 폭포로 꼽히며,[13] 높이는 74미터, 너비 4미터에 달한다.[12] 폭포 절벽과 바닥이 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12] 비봉폭포는 이것보다 더 높은 139미터에 달하며, 장쾌한 물줄기로 이름나 있다.[12] 만물상 구역에는 삼선암, 독선암, 귀면암 등의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으며, 여러 바위마다 독특한 전설을 담고 있다.[12] 수정봉 구역은 외금강과 동해의 절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며[15], 천불동 구역에는 3단 폭포, 선인굴, 육선암, 연주폭포, 금강천지(金剛天池) 등 저마다 독특함을 자랑한다.[12] 선하 구역에는 용바위, 흔들바위, 선하폭포, 백련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 다리, 집선봉 등이 있다.[12] 금강산 온천[편집] 금강산(또는 온정리) 온천은 외금강에 있으며, 신라 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오래된 온천이다.[7]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데, 왕족이나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7] 함유 물질로는 라돈, 메타규산이 광천의 한계량 이상 들어 있으며, 탄산 및 염소 이온과 나트륨, 칼슘 이온도 들어 있다.[1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 22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16], 관광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해금강[편집] 삼일포의 전경 이 지역은 대해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지 30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숙종 24년(1698년) 고성 군수로 있던 남택하(南宅夏)가 찾아내고 “금강산의 얼굴빛과 같다.” 하여 해금강이라 이름 붙였다.[13] 본래 해안 암벽, 바위섬, 자연호, 모래사장, 하천이 어우러진 경승지다. 이중 개방된 곳은 삼일포와 향로봉이며, 관동 팔경의 하나인 총석정은 개방되어 있지 않다.[17] 삼일포는 남한의 화진포와 송지호같이 석호(潟湖)이며, 총 넓이는 0.79km2에 달한다.[12] 이 호수에는 전설에 따르면 신선 또는 화랑들이 경치가 너무 좋아 3일 동안 머물고 갔기 때문에 삼일포라 한다.[5][13][18] 봉래대에서 삼일포 전경을 볼 수 있다. 소가 누운 모양이라고 해서 와우섬이라 이름 붙은 큰 섬을 비롯해, 3개의 작은 섬이 떠있다.[17] 또한 삼일포 기슭에는 4명의 신선이 놀고 간 것을 기념해 세웠다는 사선정터가 있다.[5] 향로봉은 바다의 해만물상이라 불리며, 바닷가에 육지와는 거리를 두고 홀로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17] 비바람에 씻기고 바닷물에 깎이어 독특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5] 신금강[편집]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 칭하기도 한다.[3] 이곳은 전체적으로 전나무와 소나무로 구성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에 있는 십이폭포는 금강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폭포로 수직 높이는 289미터, 폭포 길이 390미터, 너비는 약 4미터에 달한다.[12] 그밖에도 온선대, 칠보대, 직류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다리, 송림굴, 소연소, 구룡소, 선담, 유점사, 반야암 등의 볼거리가 있다.[12] 기후[편집] 고산 지대에 속하여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며, 7~8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쏟아진다.[6] 동서차가 심한 편으로, 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많아지지만, 푄현상으로 내금강부터는 적어진다. 또한 한국의 전반적 기후에 대비하여 볼 때 따뜻하고 습하다.[6] 하지만 고도에 따라서 겨울에는 영하 10도에서 30도의 혹한의 날씨가 이어지기도 하며, 지역에 따라 빠르면 10월부터 눈이 내리는 다설 지역이다.[5] 이러한 기후 조건으로 북부 계열의 식물과 남부 계열의 식물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6] 생태[편집] 금강산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특수한 기후 조건 때문에 무려 1,125종의 식물과 3백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며 1백40여 가지의 고유식물이 분포하고 있다.[5] 고유식물로는 금강초롱, 금강인가목(금강국수나무), 금강봄맞이꽃, 금강제비꽃, 금강애기나리, 만리화 등이 있으며, 이중 금강초롱과 금강인가목은 희귀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7][12] 산록 원시림 지대에는 주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의 울창한 단순림이 펼쳐져 있고 계곡 교목지대에는 침엽수와 자작나무, 산목련나무, 박달나무, 느티나무, 가래나무, 조간주나무, 고로쇠나무, 피나무 등의 각종 활엽수로 혼성림을 이루고 있으며, 봉우리의 고산 지대는 누운잣나무, 누운향나무, 철쭉, 진달래 따위의 키작은 나무들이 자란다.[5] 금강산 외에는 민둥산이 이어지다 보니 동물들의 중요한 서식처로 자리잡았다.[19] 식물에 비해 많지 않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68종의 짐승류와 2백 여 종의 조류, 9종의 파충류, 10종의 양서류, 여러 계곡에는 30여 종류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다.[5] 희귀동물 중에는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산양 등이 있다.[5] 솔잎혹파리[편집] 대한민국 측 연구기관들은 1998년에서 1999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강원도 지역 소나무 5만 헥타르 가운데 1만 헥타르가 솔잎혹파리 피해를 입고 있다고 추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방제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공동 방제를 실시하게 되었다.[20] 그 결과 구룡연과 삼일포 일대의 소나무를 87에서 94퍼센트 정도 보호해낸 것으로 보고되었다.[20] 화재 방지[편집] 해마다 증가하는 관광객 수를 대비하기 위해 소방 시설의 설치가 제안되었으며, 그에 따라 소방서가 2007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가 2008년 7월 8일에 문을 열었다.[21] 현대아산이 위탁운영을 하고, 전직 소방관들이 근무할 예정이다.[21] 사찰[편집] 신계사 삼층석탑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강산에는 총 108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22] 또 기록에 나오는 암자들의 이름을 종합해 보면 무려 180여 개나 되며, 하대신라 때부터 많이 건립되고 고려 때 절정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은 유점사로 전해져 있다.[23] 하지만 신계사,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같은 금강산 4대 사찰[24] 이외에는 조선 왕조의 불교 억압 정책 등의 이유로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 4대 사찰도 한국전쟁 도중 대부분은 파괴되어[23], 남은 것은 내금강에 있는 표훈사뿐이었다.[10] 때문에 파괴된 사찰이나 불교 관련 문화재의 복원이 추진되고 있으며, 신계사 복원 공사가 2004년 4월에 착공해 2007년 10월에 완료 되었다.[24] 관련 문화[편집] 《대동여지도》에 묘사된 금강산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나지 배가 고파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한국어 속담이 있다. 북송대의 시인 소식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였다.[3]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금강산 소개 구절이 나온다. “ 이 산은 천 개의 봉우리가 눈처럼 서서, 높고 절묘함이 으뜸이며, 또한 불서(佛書)에 담무갈보살이 거하던 곳이란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인간정토(人間淨土)라 이른다. 전하기로는, 중국 사람들이 또한 이르기를, “고려국에 나서 친히 보기를 원한다.” 하였다. ” 此山千峯雪立, 高竣奇絶, 又爲之冠. 且以佛書有曇無竭菩薩所住之說, 世遂謂人間淨土, 諺傳中國人亦云: “願生高麗國, 親見之.” 선조 때의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관동팔경과 금강산 일대의 절경을 노래하였다.[25] 영조 때의 정선은 금강산의 풍경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13]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1890년 금강산을 여행 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여기 11마일에 걸친 금강산의 자태는 세계 여느 명산의 아름다움을 초월하고 있다. 대협곡은 너무나 황홀해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지경이다.[3] ” 이광수는 〈금강산유기〉에서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라고 내금강을 표현했다.[26]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의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있다.[27]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동요 〈금강산〉도 있다.[2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민요 《금강산타령》과 함께 성악곡 《가고싶은 금강산》, 영화《금강산을 찾아서》가 있다. 관광[편집] 1945년 전에 존재한 내금강역 일제 강점기 이전[편집] 일제 강점기까지는 민간이 운용하는 내금강과 철원을 연결하는 금강산전철이 있었으나, 이제는 단절되어 기능을 상실했다.[29] 이를 복원하려는 계획이 있으나,[30][31] 경의선 및 경원선, 동해선에게 순위에 밀려 진척 속도가 느리다.[31] 한국 전쟁 이후[편집] 2002년 10월 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채택한 ‘금강산 관광지구법’에 따라 금강산은 엄격히 보호되고 있다. 이는 관광을 계속하는 동시에 금강산을 철저히 보호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32] 이에 따라 개발자가 관광지의 나무, 경치, 천연기념물을 훼손하는 행위가 금지되며(11조), 필수적인 오·폐수의 정화(14조), 또한 관광객도 역사유적, 천연기념물, 온천 등을 보호하도록 명시(19조 7항)하고 있다.[32] 이 법을 반영하듯이 단순한 흙이나 조약돌 채취도 엄격하게 처벌받는다. 이를 어긴 자에게의 처벌 조항도 명시돼 있는데, 대개는 손해보상 같은 제재이지만, 제28조에 따라 엄중한 경우는 추방까지 가능하다.[32] 하지만 금강산에 산재하는 바위에는 김일성 일가를 찬양하는 글이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명산을 휴양소 뿐만 아니라 혁명 이념을 교육하는 장소로 여기는 국내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33] 따라서 이것들이 경관을 해친다는 일부 의견이 있으며, 여러 대학교 교수들의 생태 답사결과 금강산의 보존 상태에는 모두 긍정적인 의견을 보았으나, 일부 답사자들은 암벽에 새겨져 있는 선전 문구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34] 금강산 관광[편집]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이 1989년 방북하여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체결한 9년 뒤인 1998년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함으로써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2001년 1월 6일부터 3년 동안 한국 최초의 호텔식 테마 여객선 설봉호를 이용하여 해로 관광이 가능해졌다. 금강산 지역은 2002년 11월 23일에 금강산관광지구라는 특별행정구역으로 명명되었다.[35] 2003년 2월 14일 DMZ를 통과하는 역사적인 육로 관광이 시범 운영된 뒤로 육로 관광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이 육로 관광은 버스를 이용하여 금강산으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매년 관광객 수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4] 도중에 몇 차례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정몽헌의 자살[36], 사스 사태[36], 민간인 민영미 억류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36][37] 이중 억류 사건은, 관광 세칙과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를 체결한 후 일단락되었다.[37] 2008년 3월부터는 자가용을 이용한 승용차관광도 할 수 있게 되었다.[38] 현대아산 측은 2005년 6월에 금강산 관광객이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39] 했으며, 2008년 말 기준으로 통산 관광객 수는 195만 명에 달한다.[4] 개방된 이후로 금강산 권역을 개발하려는 계획이 현대아산 측에서 제안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과 2006년 2월 10일에 합의했다.[40] 이 계획은 해금강에서 원산까지 총 109킬로미터, 약 6억 평에 이르는 관광 특구로 조성한다는 종합계획으로 투자금이 총 22억6천만 달러(2조2천억 원)에 이른다. 1단계로 오는 2010년까지 해금강에서 통천까지, 2단계로 원산까지 관광지역을 확대한다는 예정이다.[41] 대한민국 국민 외의 외국인도 관광할 수 있으나, 관광 자체가 외국인을 위해 특별히 기획되어 있지는 않아 아직 적은 편이다. 한편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미국인에게 가기 힘든 절경지로 금강산을 1위로 선정하기도 하였다.[42] 금강산 관광으로 인한 효과는 긍정적과 부정적으로 나뉜다. 현재 이 지역은 남북의 주요 회담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4] 단순한 관광 산업 이외에도 한반도 긴장 완화, 국가 신인도 제고, 남북 교류 활성화 등에 기여했다는 의견[4] 도 있지만, 한편에 현재 관광에 드는 비용이 많다는 것[43] 과 이 사업이 김정일 정권의 유지에 필요한 돈을 대어 준다는 견해도 있다.[44]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8년 7월 11일에는, 금강산 내에서 한 대한민국 관광객이 새벽에 해변 산책을 하다가 금지된 구역에 접근하게 되어 북측 군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45]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이튿날인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하였다.[46] 미래[편집] 현재 금강산 관광은 개별적이 아닌 일정에 따라 가이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형태이면서 모든 코스가 개방된 것은 아니지만, 1998년 외금강 코스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내금강 코스 개방을 통해 서서히 공개되는 실정이며, 제한적이나마 자가용 자동차 관광을 추진하는 등 자유도가 높아질 기미는 있다. 도중에 남북 관계가 약화될 때나 정권 교체의 와중에도 금강산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47] 이며, 이는 개방 지역의 확산과 그에 따른 경쟁력 강화로 풀이된다.[47] 해마다 관광객 증가에 따라 금강산의 보존 상태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지만[48], 금강산 직접 개발은 피한다는 현대아산의 방침과[4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엄격한 보호 정책으로[32]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남측 강원도는 2008년 7월 DMZ 관광청을 발족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 관청의 계획에는 설악산과 금강산을 묶어 세계적인 관광지대로 가꾸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50] 같이 보기[편집] 한국의 산 설악산 철도 금강산선 금강산청년선 지명 금강군 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 노토콘고 (能登金剛, 일본 이시카와현의 북부, 노토 지방(能登地方)에 있는 경승지이다. 금강산이 이곳의 이름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영화 금강산 대활동 - 1919년에 제작상영된 금강산을 주제로 한 무성 다큐멘터리 영화 기업 현대아산 훼미리마트 - 우리나라의 현지법인(現地法人)이 금강산관광지구(金剛山觀光地區)에 들어서고 있다. 인물 정몽헌 북한 지역의 명산[편집] 백두산(白頭山) 구월산(九月山) 묘향산(妙香山) 칠보산(七寶山) 지이산(智異山) 옥련산(玉蓮山) 장수산(長壽山) 출처[편집] ↑ 다음 한자사전 ↑ 楓岳山이라는 이름이 쓰이는 문헌은 다음과 같다. 이이, 〈楓岳行 풍악행〉, 《율곡전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가 나 다 라 마 “〈국내여행〉 만 이천 봉 곳곳마다 그리움 사무쳐”. 매일경제. 2004년 6월 27일.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현정은 시대 5년 'New 현대'〉 현대아산 금강산 관광 사업 10돌”. 서울경제. 2008년 6월 18일. 2011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21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금강산”. 2008년 6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가야할 산하 금강산이 부른다”.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금강산 온천”. 2008년 6월 20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금강산소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금강산 기행을 시작하면서(1)”. 2013년 4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금강산 내금강의 풍경”.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북강원 금강산 생태탐사②〉 2. 초여름 금강산 식물”. 강원일보. 2008년 6월 19일.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금강산”. 2007년 10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해금강' 수천만 년 파도가 만든 또 하나의 일만이천봉”.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6월부터 내금강 관광 간다”. 세계일보. 2007년 4월 25일.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 “외금강*탐승”. 2004년 12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가 나 “금강산온천”. 2008년 7월 7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해금강을 못보고 금강산을 보았다 하랴”. 오마이뉴스. 2005년 3월 18일.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추천여행〉 삼일포ㆍ해금강, 돌아가는 것을 잊다”. 매일경제. 2008년 2월 3일. 2014년 3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북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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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금강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풍악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산에 관한 것입니다.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비슷한 이름의 금강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금강산 봄 금강산(金剛山), 여름 봉래산(蓬萊山)가을 풍악산(楓嶽山), 겨울 개골산(皆骨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고성군 금강군 통천군 등높이 1,638 m위치 산맥 태백산맥, 백두대간좌표 북위 38° 31′ 34″ 동경 128° 03′ 06″ / 북위 38.526111° 동경 128.051667°  / 38.526111; 128.051667좌표: 북위 38° 31′ 34″ 동경 128° 03′ 06″ / 북위 38.526111° 동경 128.051667°  / 38.526111; 128.051667 동악 금강산서악 묘향산남악 지리산북악 백두산중악 삼각산토함산 (동악)계룡산 (서악)태백산 (북악)팔공산 (중악) v • d • e • h한국의 오악과 신라의 오악 (파란색): 지리산은 한국의 남악이면서 또한 신라의 남악이다 금강산(金剛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 · 고성군 · 통천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한 높이 1,638m의 이 산의 이름 금강은 불교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금강은 불퇴전(不退轉), 즉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을 뜻한다. 금강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지라(산스크리트어: वज्र, 번개와 금강석을 모두 가리킨다)를 훈역(訓譯)한 단어이다. 대한민국의 강원도 속초시와는 약 50 km 떨어져 있다. 목차 1 개요 2 명칭 3 형성 4 산의 지리 4.1 내금강 4.2 외금강 4.2.1 금강산 온천 4.3 해금강 4.4 신금강 5 기후 6 생태 6.1 솔잎혹파리 6.2 화재 방지 7 사찰 8 관련 문화 9 관광 9.1 일제 강점기 이전 9.2 한국 전쟁 이후 9.2.1 금강산 관광 9.3 미래 10 같이 보기 10.1 북한 지역의 명산 11 출처 12 외부 링크 개요[편집] 구룡연으로 가는 길 금강산은 예로부터 국내외에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대대로 많은 예술가들의 표현 대상이 되었다. 봄의 이름인 금강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현재는 대개 금강산이라 불리며,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신선이 사는 산 중 하나),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1] 단풍 든 큰 산, 楓岳山[2] 단풍 언덕 산),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바위 뼈 산)으로 불렸다.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수많은 봉우리, 오랜 기간의 지질 활동과 풍화 작용으로 생긴 기암괴석 및 폭포, 바다를 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흔히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뉘며, 때로는 외금강의 남쪽 지역이 신금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3] 1998년부터 잘 알려진 3개 코스가 외부에 개방되었으며, 점차 개방되는 코스가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아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관리 및 개발 중에 있다. 해마다 외부 관광객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여러 방면에서 단순히 관광 이외에도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풀이된다.[4] 금강산 관광을 위해서는 현대아산 혹은 대리점에서 예약을 하고 화진포 아산 휴게소에서 수속을 마쳐야 한다. 2008년 7월 11일에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일어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으며 남북 관계의 악화로 인해 사실상 무기한 재개 불능 상태이다. 명칭[편집]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 오랜 옛날부터 이미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국내외로 유명하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으로 알려졌다.[5] 또한 전국의 명산, 명소들이 금강산에 빗대어 별명이 붙여지기도 하였다.[5] 각종 문헌과 기록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별칭은 모두 9가지[5] 이며, 대체로 계절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다. 금강은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일 때인 봄의 이름이며, 여름에는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일천 이만 봉이 단풍으로 물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낙엽이 져서 바위들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불린다.[5] 하지만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진 산이 금강산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곳이 불교의 영지(靈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5] ‘금강’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이아라(번개와 다이아몬드)와 통한다. 형성[편집] 금강산을 만든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기후와 특유의 지질 활동과 관련이 깊다.[6] 금강산 일대는 비와 눈이 비교적 많이 내리는 지역으로, 고도와 심지어 동서의 위치에 따라서도 기후가 다르며,[6] 금강산의 지질층은 태고계로부터 신생계에 걸친 오랜 지질시대에 속하는 여러 종류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7] 가장 널리 분표된 암석은 두 종류(운모가 섞인 것과 얼룩이 진 것)의 화강암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화강-편마암 수정 지대가 형성돼 있다.[8] 암석들은 가로세로로 나고 가지가지 방향으로 절리가 생겨 특이한 지형과 기이한 바위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지각활동과 풍화작용으로 침식, 삭박됨에 따라 형성되었다.[6][7][8] 이들 작용은 1천만 년 전부터 현세까지 진행된 궁융상지괴응기 운동으로 형성되었다.[6] 산의 지리[편집] 해금강 금강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에 걸쳐 있으며, 또한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 강원도 인제군까지 걸쳐 있고[5],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있다. 주분서령을 기준으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분류한다. 또한 외금강 동쪽에 있는 지역은 해금강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며, 1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는 무려 60여 개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모두 합치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선조들은 일만 이천 봉이라 했다.[5] 이 지역의 많은 명승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고도 한다.[9] 탐승 구역은 외금강 11개, 내금강 8개, 해금강 3개가 있는데[3][7], 아직 이들 모두가 개방되지는 않았다. 내금강[편집] 예로부터 금강이라 하면 주로 내금강을 뜻했으며[10][11], 주분서령의 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여러 폭포가 있다. 내금강은 만폭동(萬瀑洞) 구역, 태상동 구역, 백운대 구역, 비로봉 구역, 명경대 구역, 망군대 구역, 구성동 구역 등으로 나뉜다.[12] 내금강에 있는 봉은 비로봉 외에 영랑봉(1,601m), 중향성(1,520m), 영추봉·백운대(969m), 향로봉(1,030m), 법기봉·혈망봉(1,372m) 등이 있으며, 백천동·태상동·구성동 골짜기 등의 유명한 폭포가 많다. 주변 경관뿐만 아니라 표훈사(表訓寺)로 가는 길목 길가의 큰 자연석에 미륵, 석가, 아미타불 상존입상을 조각한 특이한 구성으로 고려 시대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삼불암, 높이가 40미터나 되는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인 묘길상, 팔담의 하나인 분설담 위에 세워진 독특한 암자인 보덕암(普德庵) 등의 중요한 역사 유적이 있다.[10] 이 지역은 군사 보안을 이유로 개방되지 않다가[13] 2007년 6월부터 외부에 개방되었다.[10][14] 외금강[편집] 구룡폭포 겨울의 금강산 구룡연 내금강의 동쪽에 있으며,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포괄한다. 크게 구룡연, 만물상, 수정봉, 천불동, 선하 구역으로 나뉘며, 수정봉(773m)을 비롯한 문주봉(1,027m), 호봉(1,264m), 상등봉(1,227m), 옥녀봉(1,424m), 세존봉(1,160m), 채하봉(1,588m), 집선봉(1,351m) 등의 산봉우리가 있다. 구룡연(九龍淵)에 있는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에 있는 대승폭포와 더불어 조선 3대 폭포로 꼽히며,[13] 높이는 74미터, 너비 4미터에 달한다.[12] 폭포 절벽과 바닥이 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12] 비봉폭포는 이것보다 더 높은 139미터에 달하며, 장쾌한 물줄기로 이름나 있다.[12] 만물상 구역에는 삼선암, 독선암, 귀면암 등의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으며, 여러 바위마다 독특한 전설을 담고 있다.[12] 수정봉 구역은 외금강과 동해의 절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며[15], 천불동 구역에는 3단 폭포, 선인굴, 육선암, 연주폭포, 금강천지(金剛天池) 등 저마다 독특함을 자랑한다.[12] 선하 구역에는 용바위, 흔들바위, 선하폭포, 백련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 다리, 집선봉 등이 있다.[12] 금강산 온천[편집] 금강산(또는 온정리) 온천은 외금강에 있으며, 신라 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오래된 온천이다.[7]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데, 왕족이나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7] 함유 물질로는 라돈, 메타규산이 광천의 한계량 이상 들어 있으며, 탄산 및 염소 이온과 나트륨, 칼슘 이온도 들어 있다.[1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 22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16], 관광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해금강[편집] 삼일포의 전경 이 지역은 대해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지 30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숙종 24년(1698년) 고성 군수로 있던 남택하(南宅夏)가 찾아내고 “금강산의 얼굴빛과 같다.” 하여 해금강이라 이름 붙였다.[13] 본래 해안 암벽, 바위섬, 자연호, 모래사장, 하천이 어우러진 경승지다. 이중 개방된 곳은 삼일포와 향로봉이며, 관동 팔경의 하나인 총석정은 개방되어 있지 않다.[17] 삼일포는 남한의 화진포와 송지호같이 석호(潟湖)이며, 총 넓이는 0.79km2에 달한다.[12] 이 호수에는 전설에 따르면 신선 또는 화랑들이 경치가 너무 좋아 3일 동안 머물고 갔기 때문에 삼일포라 한다.[5][13][18] 봉래대에서 삼일포 전경을 볼 수 있다. 소가 누운 모양이라고 해서 와우섬이라 이름 붙은 큰 섬을 비롯해, 3개의 작은 섬이 떠있다.[17] 또한 삼일포 기슭에는 4명의 신선이 놀고 간 것을 기념해 세웠다는 사선정터가 있다.[5] 향로봉은 바다의 해만물상이라 불리며, 바닷가에 육지와는 거리를 두고 홀로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17] 비바람에 씻기고 바닷물에 깎이어 독특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5] 신금강[편집]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 칭하기도 한다.[3] 이곳은 전체적으로 전나무와 소나무로 구성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에 있는 십이폭포는 금강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폭포로 수직 높이는 289미터, 폭포 길이 390미터, 너비는 약 4미터에 달한다.[12] 그밖에도 온선대, 칠보대, 직류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다리, 송림굴, 소연소, 구룡소, 선담, 유점사, 반야암 등의 볼거리가 있다.[12] 기후[편집] 고산 지대에 속하여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며, 7~8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쏟아진다.[6] 동서차가 심한 편으로, 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많아지지만, 푄현상으로 내금강부터는 적어진다. 또한 한국의 전반적 기후에 대비하여 볼 때 따뜻하고 습하다.[6] 하지만 고도에 따라서 겨울에는 영하 10도에서 30도의 혹한의 날씨가 이어지기도 하며, 지역에 따라 빠르면 10월부터 눈이 내리는 다설 지역이다.[5] 이러한 기후 조건으로 북부 계열의 식물과 남부 계열의 식물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6] 생태[편집] 금강산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특수한 기후 조건 때문에 무려 1,125종의 식물과 3백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며 1백40여 가지의 고유식물이 분포하고 있다.[5] 고유식물로는 금강초롱, 금강인가목(금강국수나무), 금강봄맞이꽃, 금강제비꽃, 금강애기나리, 만리화 등이 있으며, 이중 금강초롱과 금강인가목은 희귀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7][12] 산록 원시림 지대에는 주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의 울창한 단순림이 펼쳐져 있고 계곡 교목지대에는 침엽수와 자작나무, 산목련나무, 박달나무, 느티나무, 가래나무, 조간주나무, 고로쇠나무, 피나무 등의 각종 활엽수로 혼성림을 이루고 있으며, 봉우리의 고산 지대는 누운잣나무, 누운향나무, 철쭉, 진달래 따위의 키작은 나무들이 자란다.[5] 금강산 외에는 민둥산이 이어지다 보니 동물들의 중요한 서식처로 자리잡았다.[19] 식물에 비해 많지 않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68종의 짐승류와 2백 여 종의 조류, 9종의 파충류, 10종의 양서류, 여러 계곡에는 30여 종류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다.[5] 희귀동물 중에는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산양 등이 있다.[5] 솔잎혹파리[편집] 대한민국 측 연구기관들은 1998년에서 1999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강원도 지역 소나무 5만 헥타르 가운데 1만 헥타르가 솔잎혹파리 피해를 입고 있다고 추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방제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공동 방제를 실시하게 되었다.[20] 그 결과 구룡연과 삼일포 일대의 소나무를 87에서 94퍼센트 정도 보호해낸 것으로 보고되었다.[20] 화재 방지[편집] 해마다 증가하는 관광객 수를 대비하기 위해 소방 시설의 설치가 제안되었으며, 그에 따라 소방서가 2007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가 2008년 7월 8일에 문을 열었다.[21] 현대아산이 위탁운영을 하고, 전직 소방관들이 근무할 예정이다.[21] 사찰[편집] 신계사 삼층석탑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강산에는 총 108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22] 또 기록에 나오는 암자들의 이름을 종합해 보면 무려 180여 개나 되며, 하대신라 때부터 많이 건립되고 고려 때 절정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은 유점사로 전해져 있다.[23] 하지만 신계사,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같은 금강산 4대 사찰[24] 이외에는 조선 왕조의 불교 억압 정책 등의 이유로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 4대 사찰도 한국전쟁 도중 대부분은 파괴되어[23], 남은 것은 내금강에 있는 표훈사뿐이었다.[10] 때문에 파괴된 사찰이나 불교 관련 문화재의 복원이 추진되고 있으며, 신계사 복원 공사가 2004년 4월에 착공해 2007년 10월에 완료 되었다.[24] 관련 문화[편집] 《대동여지도》에 묘사된 금강산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나지 배가 고파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한국어 속담이 있다. 북송대의 시인 소식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였다.[3]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금강산 소개 구절이 나온다. “ 이 산은 천 개의 봉우리가 눈처럼 서서, 높고 절묘함이 으뜸이며, 또한 불서(佛書)에 담무갈보살이 거하던 곳이란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인간정토(人間淨土)라 이른다. 전하기로는, 중국 사람들이 또한 이르기를, “고려국에 나서 친히 보기를 원한다.” 하였다. ” 此山千峯雪立, 高竣奇絶, 又爲之冠. 且以佛書有曇無竭菩薩所住之說, 世遂謂人間淨土, 諺傳中國人亦云: “願生高麗國, 親見之.” 선조 때의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관동팔경과 금강산 일대의 절경을 노래하였다.[25] 영조 때의 정선은 금강산의 풍경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13]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1890년 금강산을 여행 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여기 11마일에 걸친 금강산의 자태는 세계 여느 명산의 아름다움을 초월하고 있다. 대협곡은 너무나 황홀해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지경이다.[3] ” 이광수는 〈금강산유기〉에서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라고 내금강을 표현했다.[26]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의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있다.[27]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동요 〈금강산〉도 있다.[2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민요 《금강산타령》과 함께 성악곡 《가고싶은 금강산》, 영화《금강산을 찾아서》가 있다. 관광[편집] 1945년 전에 존재한 내금강역 일제 강점기 이전[편집] 일제 강점기까지는 민간이 운용하는 내금강과 철원을 연결하는 금강산전철이 있었으나, 이제는 단절되어 기능을 상실했다.[29] 이를 복원하려는 계획이 있으나,[30][31] 경의선 및 경원선, 동해선에게 순위에 밀려 진척 속도가 느리다.[31] 한국 전쟁 이후[편집] 2002년 10월 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채택한 ‘금강산 관광지구법’에 따라 금강산은 엄격히 보호되고 있다. 이는 관광을 계속하는 동시에 금강산을 철저히 보호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32] 이에 따라 개발자가 관광지의 나무, 경치, 천연기념물을 훼손하는 행위가 금지되며(11조), 필수적인 오·폐수의 정화(14조), 또한 관광객도 역사유적, 천연기념물, 온천 등을 보호하도록 명시(19조 7항)하고 있다.[32] 이 법을 반영하듯이 단순한 흙이나 조약돌 채취도 엄격하게 처벌받는다. 이를 어긴 자에게의 처벌 조항도 명시돼 있는데, 대개는 손해보상 같은 제재이지만, 제28조에 따라 엄중한 경우는 추방까지 가능하다.[32] 하지만 금강산에 산재하는 바위에는 김일성 일가를 찬양하는 글이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명산을 휴양소 뿐만 아니라 혁명 이념을 교육하는 장소로 여기는 국내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33] 따라서 이것들이 경관을 해친다는 일부 의견이 있으며, 여러 대학교 교수들의 생태 답사결과 금강산의 보존 상태에는 모두 긍정적인 의견을 보았으나, 일부 답사자들은 암벽에 새겨져 있는 선전 문구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34] 금강산 관광[편집]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이 1989년 방북하여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체결한 9년 뒤인 1998년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함으로써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2001년 1월 6일부터 3년 동안 한국 최초의 호텔식 테마 여객선 설봉호를 이용하여 해로 관광이 가능해졌다. 금강산 지역은 2002년 11월 23일에 금강산관광지구라는 특별행정구역으로 명명되었다.[35] 2003년 2월 14일 DMZ를 통과하는 역사적인 육로 관광이 시범 운영된 뒤로 육로 관광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이 육로 관광은 버스를 이용하여 금강산으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매년 관광객 수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4] 도중에 몇 차례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정몽헌의 자살[36], 사스 사태[36], 민간인 민영미 억류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36][37] 이중 억류 사건은, 관광 세칙과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를 체결한 후 일단락되었다.[37] 2008년 3월부터는 자가용을 이용한 승용차관광도 할 수 있게 되었다.[38] 현대아산 측은 2005년 6월에 금강산 관광객이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39] 했으며, 2008년 말 기준으로 통산 관광객 수는 195만 명에 달한다.[4] 개방된 이후로 금강산 권역을 개발하려는 계획이 현대아산 측에서 제안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과 2006년 2월 10일에 합의했다.[40] 이 계획은 해금강에서 원산까지 총 109킬로미터, 약 6억 평에 이르는 관광 특구로 조성한다는 종합계획으로 투자금이 총 22억6천만 달러(2조2천억 원)에 이른다. 1단계로 오는 2010년까지 해금강에서 통천까지, 2단계로 원산까지 관광지역을 확대한다는 예정이다.[41] 대한민국 국민 외의 외국인도 관광할 수 있으나, 관광 자체가 외국인을 위해 특별히 기획되어 있지는 않아 아직 적은 편이다. 한편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미국인에게 가기 힘든 절경지로 금강산을 1위로 선정하기도 하였다.[42] 금강산 관광으로 인한 효과는 긍정적과 부정적으로 나뉜다. 현재 이 지역은 남북의 주요 회담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4] 단순한 관광 산업 이외에도 한반도 긴장 완화, 국가 신인도 제고, 남북 교류 활성화 등에 기여했다는 의견[4] 도 있지만, 한편에 현재 관광에 드는 비용이 많다는 것[43] 과 이 사업이 김정일 정권의 유지에 필요한 돈을 대어 준다는 견해도 있다.[44]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8년 7월 11일에는, 금강산 내에서 한 대한민국 관광객이 새벽에 해변 산책을 하다가 금지된 구역에 접근하게 되어 북측 군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45]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이튿날인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하였다.[46] 미래[편집] 현재 금강산 관광은 개별적이 아닌 일정에 따라 가이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형태이면서 모든 코스가 개방된 것은 아니지만, 1998년 외금강 코스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내금강 코스 개방을 통해 서서히 공개되는 실정이며, 제한적이나마 자가용 자동차 관광을 추진하는 등 자유도가 높아질 기미는 있다. 도중에 남북 관계가 약화될 때나 정권 교체의 와중에도 금강산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47] 이며, 이는 개방 지역의 확산과 그에 따른 경쟁력 강화로 풀이된다.[47] 해마다 관광객 증가에 따라 금강산의 보존 상태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지만[48], 금강산 직접 개발은 피한다는 현대아산의 방침과[4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엄격한 보호 정책으로[32]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남측 강원도는 2008년 7월 DMZ 관광청을 발족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 관청의 계획에는 설악산과 금강산을 묶어 세계적인 관광지대로 가꾸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50] 같이 보기[편집] 한국의 산 설악산 철도 금강산선 금강산청년선 지명 금강군 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 노토콘고 (能登金剛, 일본 이시카와현의 북부, 노토 지방(能登地方)에 있는 경승지이다. 금강산이 이곳의 이름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영화 금강산 대활동 - 1919년에 제작상영된 금강산을 주제로 한 무성 다큐멘터리 영화 기업 현대아산 훼미리마트 - 우리나라의 현지법인(現地法人)이 금강산관광지구(金剛山觀光地區)에 들어서고 있다. 인물 정몽헌 북한 지역의 명산[편집] 백두산(白頭山) 구월산(九月山) 묘향산(妙香山) 칠보산(七寶山) 지이산(智異山) 옥련산(玉蓮山) 장수산(長壽山) 출처[편집] ↑ 다음 한자사전 ↑ 楓岳山이라는 이름이 쓰이는 문헌은 다음과 같다. 이이, 〈楓岳行 풍악행〉, 《율곡전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가 나 다 라 마 “〈국내여행〉 만 이천 봉 곳곳마다 그리움 사무쳐”. 매일경제. 2004년 6월 27일.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현정은 시대 5년 'New 현대'〉 현대아산 금강산 관광 사업 10돌”. 서울경제. 2008년 6월 18일. 2011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21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금강산”. 2008년 6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가야할 산하 금강산이 부른다”.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금강산 온천”. 2008년 6월 20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금강산소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금강산 기행을 시작하면서(1)”. 2013년 4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금강산 내금강의 풍경”.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북강원 금강산 생태탐사②〉 2. 초여름 금강산 식물”. 강원일보. 2008년 6월 19일. 2008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금강산”. 2007년 10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해금강' 수천만 년 파도가 만든 또 하나의 일만이천봉”.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6월부터 내금강 관광 간다”. 세계일보. 2007년 4월 25일.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 “외금강*탐승”. 2004년 12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가 나 “금강산온천”. 2008년 7월 7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해금강을 못보고 금강산을 보았다 하랴”. 오마이뉴스. 2005년 3월 18일.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추천여행〉 삼일포ㆍ해금강, 돌아가는 것을 잊다”. 매일경제. 2008년 2월 3일. 2014년 3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 “〈북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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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희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 희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 희공(齊僖公, ? ~ 기원전 698년, 재위 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는 중국 제나라의 제13대 후작이다. 이름은 녹보(祿甫)다. 《사기》에서는 저자의 할아버지 사마희를 피휘하여 희공(釐公)으로 표기했다. 목차 1 사적 1.1 초 · 중기 1.2 노 · 기와 대립 1.3 후사 2 가정 3 각주 4 참고 문헌 사적[편집] 초 · 중기[편집] 희공 11년(기원전 720년) 12월, 정 장공과 석문에서 결맹하였다.[1] 희공 16년(기원전 715년), 정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는 송나라와 위나라를 정나라와 강화시키고자 하여, 7월에 송 상공, 위 선공과 온에서 만나 와옥에서 결맹하고 마침내 화해시켰다. 8월에 정 장공과 함께 주 환왕을 조현했다.[1] 희공 17년(기원전 714년), 정 장공은 왕명으로 송나라 토벌을 선언했고, 희공은 이에 함께하고자 하여 노 은공과 회견했다. 희공 18년(기원전 713년), 희공은 정 장공, 노 은공과 회견하고 송나라를 쳤다. 채나라, 위나라, 성나라가 정 장공이 선포한 왕명을 받들지 않자, 희공은 정나라와 함께 성나라를 쳤다. 희공 19년(기원전 712년), 연합군은 7월에 허나라를 공격하여 허장공을 위나라로 달아나게 하고 그 도성을 취했다. 희공은 허나라를 노 은공에게 주려 했으나 사양했으므로 정 장공에게 주었다.[1] 희공 21년(기원전 710년), 송나라에서 화독이 임금 송 상공과 대부 공보를 죽이는 변이 일어나자, 희공은 정 장공, 노 환공, 진 환공과 함께 송나라의 반란을 평정시키고자 했으나, 뇌물을 받아먹고 송나라에 화씨 정권을 세워줬다.[2] 희공 22년(기원전 709년), 노 환공에게 딸 문강을 시집보냈다.[2] 희공 25년(기원전 706년), 북융이 제나라를 쳤다. 정나라에서는 태자 홀(후의 정 소공)을 보내 제나라를 구원해 대승을 거두고 대장과 갑병들의 목을 제나라에 바쳤다. 희공은 예전에 홀에게 딸 문강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번에 북융을 격파하자 또 사위를 삼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3][2] 희공 26년기원전 705년), 맹 · 향 두 고을이 정나라를 배반하자 정나라를 도와 이 고을을 공격했다.[2] 노 · 기와 대립[편집] 북융과의 싸움 후 노나라가 정나라를 작위에 따라 대접하자 홀이 공훈이 높으므로 노나라에 원한을 품었고, 제나라는 희공 29년(기원전 702년)에 정 장공, 위 선공과 함께 노나라와 싸웠으며 이듬해에는 정나라, 위나라에 송나라까지 끌어들여 회맹을 맺었다. 한편, 희공은 재위 24년(기원전 707년)에 7세 전의 원수 기나라를 멸망시키고자 정 장공과 함께 기나라에 조현했으나 속셈을 들켰다.[2] 기나라는 노나라와 우호를 맺고 제나라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즈음 송 장공이 정 소공을 쫓아내고 정 여공을 세우고서는 정나라에 감당할 수 없는 뇌물을 요구하여 송나라와 정나라의 사이가 벌어졌고, 노 환공의 중재를 송 장공이 계속 거부했으므로 정나라는 노나라와 사이가 가까워졌다. 희공 32년(기원전 699년), 제나라는 한편인 송나라 · 위나라에 연나라까지 끌어들여 노나라 · 정나라 · 기나라 연합군과 전쟁했으나 제 · 송 · 위 · 연 연합군이 대패했다.[2] 희공 33년(기원전 698년) 12월에 죽었다.[2] 후사[편집] 희공은 아들 제아를 태자로 세웠으나, 조카 공손 무지를 총애하여 그 대우를 태자와 같게 했다. 제아는 무지와 사이가 좋지 못해, 임금(제 양공)이 된 뒤로 무지의 대우를 깎았고, 무지는 양공을 원망했다. 훗날 양공은 무지에게 죽임을 당했다.[3] 가정[편집] 제 장공 (아버지) 제 희공 제 양공 (아들) 공자 규 제 환공 선강 (딸) 문강 이중년 (아우) 공손무지 (이중년의 아들) 각주[편집] ↑ 가 나 다 《춘추좌씨전》 제1권 은공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춘추좌씨전》 제2권 환공 ↑ 가 나 사마천: 《사기》 제태공세가제2 참고 문헌[편집] 좌구명: 《춘추좌씨전》 1권, 정태현 옮김 · 주석, 전통문화연구회, 2009년, ISBN 89-85395-72-6 94140 사마천 : 《사기》 권32 제태공세가 (중문 위키소스 위치: [1]) 전 임장공 제13대 제나라 후작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 후 임양공 제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_희공&oldid=22204902" 분류: 생년 미상기원전 8세기 태어남기원전 7세기 죽음기원전 698년 죽음제나라 군주춘추 시대의 군주기원전 8세기 중국 사람기원전 7세기 중국 사람기원전 8세기 중국의 군주기원전 7세기 중국의 군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Tiếng Việt中文文言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4일 (화) 15: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최유정 (법조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유정 (법조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최유정출생 1970년 (48–49세)대한민국 전라북도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사직업 변호사 최유정 출생 1970년전라북도 고창군 혐의 변호사법 제30조 위반변호사법 제33조 위반자료 파기·횡령공무집행방해 현황 수감중 수감처 서울서초경찰서(5월 9일)서울구치소(5월 10일) 최유정(崔有晶, 1970년 ~ )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제3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27기를 수료한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 연구회 출신의 부장판사를 지낸 변호사이다.[1] 2017년 1월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제명안이 확정되어 변호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경력 4 주요 판결 5 사건 5.1 당사자와의 맞소송 5.2 피고인에 의한 폭행사건 5.3 변호사법 위반 6 수상 7 같이 보기 8 각주 생애[편집] 의뢰인인 정운호를 64회에 걸쳐 접견하면서 정운호가 최유정 변호사에게 한 발언 내용을 모두 보이스펜으로 녹음한 것은 물론 주요 내용을 자신의 노트에 메모를 하여 보관할 정도로 메모광[2]인 최유정은 수원지방법원에서 근무하던 2006년에 자신이 겪은 어린 시절 이야기, 재판 과정의 경험들과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묶어 솔직하고 담담하게 쓴 '바그다드 카페와 콜링 유'라는 수필을 대법원이 펴내는 월간지 '법원사람들'에 기고하여 문예대상을 받았으며, 피고인석에 선 청소년에게 "돈보다 훨씬 귀한 것을 네가 가졌다 너는 부자다"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3] 서울중앙지법원에 재직 중이던 2007년 사법부의 신뢰회복을 위하여 "문턱을 낮추고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법원의 노력의 일환으로 "판사가 잘 듣고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판단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많이 노력합니다."고 밝힌 바가 있고[4][5] 법원도서관에 재직 중이던 2010년에는 간결한 판결문 사례집 집필에 참여하면서 “판결문을 간결하게 쓰면 국민들이 이해하기 쉽고 판사들도 작성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며 “사례집은 불필요한 표현, 지나치게 어려운 용어 등을 최소화해 누구나 빨리 이해할 수 있고 또 판결에 승복하는 판결문을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6] 하지만 항소심 변론을 맡은 피고인과의 구치소 폭행 사건 이후 대립하는 과정에서 직무상 알게 된 사실들을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이 문제가 되어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최유정은 자신이 이숨투자자문을 대리해 금융감독원의 불법적인 현장 조사를 이유로 금융감독원 직원들에 대한 1억여원의 급여 채권 가압류를 이끌어 내 기업이 금융감독원을 상대로 법정 다툼에서 이긴 첫 사례를 언론을 통해 부각시켜 국회에 입성하는 그림을 그리며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 공천을 신청하기 위해 준비하기도 했다.[7]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정운호가 최유정 변호사에 대하여 진정서를 접수한 이후 '과다 수임료'에 대하여 진상조사에 나섰으며 정운호 대표가 "최유정 변호사가 보석으로 석방시켜주겠다며 50억 원의 수임료를 요구했다"는 취지의 답변서를 제출한 반면, 최유정 변호사는 "정운호 대표로부터 20억 원의 수임료를 받았지만 정운호 대표의 원정 도박 사건 뿐만 아니라 10여 건의 다른 사건을 위해 썼다"고 주장하는 답변서를 서울지방변호사회에 제출했다.[8] 최유정은 검찰조사에서는 이숨투자자문 대표 송씨로부터 50억 원의 수임료를 받은 혐의에 대해서 "직접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정운호가 100억 원대 원정도박을 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등을 조건으로 수십억 원을 최유정 변호사에게 건넸지만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이 선고되자 구치소에서 정운호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최유정이 "폭행을 당했다"며 정 운호를 고소하면서 법조계 로비 의혹이 드러난 가운데 검찰은 5월 3일과 4일 최유정 변호사의 사무실과 관할 세무서, 서울변호사협회 등을 압수수색 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이원석 부장검사)는 2016년 5월 9일 오후 9시께 전주 모처에서 최유정 변호사를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면서 사무장인 권모씨도 증거인멸 혐의로 함께 체포했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최유정은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했다. 재판부에 로비한다는 명목으로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52)와 유사수신업체 이숨투자자문 대표인 송창수씨(40)로부터 각 50억원씩 받은 혐의(변호사법 위반)로 기소된 최유정 변호사(47·사법연수원 27기)에 징역 6년에 추징금 45억원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현용선 부장판사)는 최유정 변호사에 대해 “재판부 등과 밖에서 만나 식사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 석방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을 믿은 유사수신업체 이숨투자자문 대표인 송창수씨(40)와 전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52)로부터 50억을 수수한 사실 모두 인정된다”며 "피고인의 그릇된 욕심과 행동으로 인해 무너져버린 사법 신뢰를 회복하고, 최 변호사가 정직한 사회인으로 다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장기간 실형에 처해 엄히 벌한다"는 이유로 징역 6년에 추징금 45억원을 선고했다. 이에 최유정은 항소심 첫 공판에서 “나의 오만함과 능력에 대한 과신이 가져온 어마어마한 사태로 상처 입은 국민과 옛 동료들께 고개 숙여 사죄한다 처음 기소됐을 때 제 이름이나 사진을 TV와 신문에서만 봐도 호흡이 곤란해져서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1심 선고를 받고 재판이 없는 지난 두 달여 동안 사건을 차분히 바라보고 제가 저지른 모든 행동과 결과에 놀랐다 존경하고 사랑했던 옛 동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후회스럽다 추징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해 가석방도 없는 6년형을 살 생각을 하면 까마득하고 막막하나 여기(구치소)에서 제 삶의 방향을 찾고자 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처음 법조인이 되려고 했던 초심을 인제야 마주치게 됐다 언제 사회에 복귀할지 모르겠으나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엄하게 처벌해주십시오"라는 최후진술을 한 항소심에서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부장판사 김인겸)는 2017년 7월 21일 변호사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최유정 변호사에게 원심과 같이 징역 6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1부(주심 박상옥 대법관)은 2017년 12월 22일 변호사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최유정의 상고심에서 “정운호 전 대표로부터 받은 20억 원과 관련한 용역의 공급 시기는 지난해 3월이며 관련 부가가치세 신고·납부기한은 지난해 7월”이라며 “최 변호사는 정 전 대표의 상습도박 항소심 사건을 수임하고 변호활동을 하다가 그해 3월 사임했다”고 하면서“최유정은 2016년 4월 20억원의 매출과 관련해 전자세금계산서를 발급했다 이와 관련한 부가가치세를 포탈했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징역 6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보냈다. 한편 성균관대학교 사물함에 한국돈 5만 원권과 미화 100달러로 모두 2억원을 서류 봉투에 담아서 숨긴 최유정의 남편을 범죄수익 은닉 혐의로 입건됐다. 2018년 10월 25일 대법원 1부는 변호사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최유정 변호사의 재상고심에서 징역 5년6개월에 추징금 43억1천250만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9] 학력[편집] 전북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사 경력[편집] 1995년 제37회 사법시험 합격 ~ 1998년 제27기 사법연수원 2000년 4월 1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예비판사 ~ 2005년 전주지방법원 2005년 ~ 수원지방법원 2007년 ~ 서울중앙지방법원 2009년 ~ 2010년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 2010년 ~ 2013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2013년 ~ 2014년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부장판사 2014년 ~ 2014년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 2014년 12월 ~ 변호사 최유정 법률사무소 변호사 주요 판결[편집] 2004년 5월 사기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하여 최유정 판사는 "피고인이 범행전력이 수 회 있고, 그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며, 변론 종결 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 하는 등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보호관찰 사회봉사명령 80시간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고 대신 무고한 사람이 법정구속되었다.[10] 사건[편집] 당사자와의 맞소송[편집] 송창수(40) 전 이숨투자자문 대표의 1300억원대 투자 사기 관련 사건으로 2015년 10월 송창수가 구속되자 송창수의 전 운전기사 김모씨가 “펜션의 실소유주는 송창수”라고 진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기 피해자들은 송창수 어머니 명의의 펜션에 대해 가압류를 신청해 법원에서 인용 결정을 받았으나 최유정 변호사 측은 서울 강남경찰서에 “김씨가 송씨의 돈 1억원과 뒤에 짝퉁으로 드러난 명품시계 위블로 2점(7000만원 상당)을 훔쳐갔다”는 진정서를 제출해 처벌받게 하였고 이숨 투자자문이 2015년 8월 현장 검사를 위해 들이닥친 금융감독원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인 뒤 “금감원 직원 2명의 급여 1억여원을 가압류해 달라”고 낸 신청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받아들여져 이어서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최유정 변호사가 대리했다.[11] 그러나 금감원 직원들은 법원의 가압류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법원은 이 이의를 받아들여 "금감원에서 제출한 반대자료의 취지를 보면 이숨투자자문이 받은 손해를 (금감원 검사직원으로부터) 보전받아야 한다는 권리를 인정할 근거가 빈약하다"며 2016년 2월 결국 가압류결정을 취소, 기각하였다.[12] 피고인에 의한 폭행사건[편집] 2016년 4월 12일 “수임료 20억원 중 10억원을 돌려달라”는 정운호를 접견하기 위하여 서울구치소로 찾아가 언쟁을 벌인 최유정 변호사가 정운호에 의하여 손목을 비트는 등 폭행을 당해 전치 3주의 손목 관절 부상을 당하여 3일 뒤 감금폭행치상 혐의로 서울강남경찰서에 고소하였다. 고소장을 접수받은 경찰은 피고소인 조사를 위해 정운호를 두 차례 찾았으나 조사를 거부하다가 이후 경찰과 만나 구두로 “손목을 잡아 앉힌 것은 인정한다. 최유정 변호사가 오면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13] 변호사법 위반[편집] 최유정은 2015년 10월 100억원대 상습도박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1년의 실형이 선고된 정운호(51)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항소심 변호사를 맡으면서 "보석 또는 집행유예로 나올 수 있도록 해주겠다"면서 50억원의 수임료를 받았다가 보석이 기각된 데 이어 구형량을 줄이고자 사법연수원 동기인 서울중앙지검 S부장검사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항소이유서를 추가 제출하면서 변론재개결정을 이끌어 내 선고공판 연기를 위해 노력한[14] 항소심도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자 착수금 명목인 20억원을 챙기고 30억원을 돌려줬고, 1천300억원대 투자 사기 혐의로 구속기소 되어 1심에서 징역13년이 선고된 송창수(40) 전 이숨투자자문 대표의 사기사건도 맡아 정식 선임계를 내지 않고 '전화 변론'을 하면서 50억원을 받은 것이 드러났다. 송창수는 앞서 2015년 8월에도 인베스트 투자 사기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최유정이 변론을 맡은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아 석방됐었다.[15] 이에 변호사법 위반 혐의에 대하여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은 최유정을 신장 치료를 목적으로 입원한 지인이 운영하는 전북 전주의 한 정형외과 병원의 5층 특실에서 체포하는 경찰관의 얼굴을 할퀴고 팔을 물어뜯는 등 격렬히 저항하고 체포영장을 집행한 검찰 관계자에게도 욕설과 폭언을 하는 와중에[16] 5월 9일 밤 9시에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인 권모씨(39)와 함께 긴급체포되었고,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이원석)는 5월 11일 최유정에 대하여 판사·검사 등에 대한 교제나 청탁 등 로비 명목으로 100억원대 수임료를 챙겨 불법 변론하고 최유정의 ‘사실혼 배우자’라고 주장한 이숨투자자문의 전 이사 이동찬(44)씨가 1300억원대 투자 사기로 복역 중인 송창수(40) 이숨 전 대표로부터 거액을 받아 챙긴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최유정은“‘보석이나 집행유예를 약속하고 100억원의 수임료를 받았다’는 혐의를 부인하면서 법조 관행 가운데 하나인 ‘섭외 변호사'라며 "정운호 대표의 수임료 20억원을 모두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17] 있음에도‘국민여론상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서 실질심사를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이유로 구속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포기했으며[18][19]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5월 12일 밤, 최유정 변호사의 수사 기록과 증거자료를 토대로 서류 심사를 거쳐 재판부와의 친분을 과시해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법 30조 연고 관계 등의 선전 금지 위반과 보석을 조건으로 30억원의 수임료를 더 받은 변호사법 33조 독직행위 금지 위반에 해당한다는 "범죄사실의 소명이 있고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검찰이 청구한 영장을 발부하였다. 이숨 사건 전의 '인베스트 투자 사기'로 2013년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2015년 10월 '피해 회복'을 인정받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과 같이 새로운 투자 사기를 저질러 챙긴 돈으로 앞선 사건의 피해자들한테 돈을 갚은 뒤 '피해를 회복해 줬다'며 법원에 정상참작을 요청해 선처를 받는 등 동종전과 6범인 정운호에게“내가 원하는 판사를 2심 재판장으로 배당할 수 있다"고 하여 항소심 재판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액의 수임료를 받고 변호사 선임계약을 하였다. 변호사 선임계약 이후 항소심 재판을 맡게 된 L모 판사가 브로커 이민희씨(56·수배 중)와의 접촉을 이유로 회피 신청을 해, 새로운 판사가 배당되자 “오히려 잘됐다. 나랑 더 친한 판사다”라며 정 대표를 안심시키기도 했다.[20][21] 검찰은 최유정이 정운호에 대한 법조 게이트가 불거지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고액의 수임료를 받기 직전에 개설한 "은행 대여금고에서 돈을 빼라"고 말한 정황을 포착하고 5월 11일과 5월 16일 최유정의 서울시 강남구 자택에서 수사에 필요한 각종 서류와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최유정과 가족들의 대여금고를 압수수색해 현금과 수표 등 13억원을 압수했다.[22][23] 이 사건과 관련하여 대법원도 5월 17일 학계, 언론계 등 외부 인사가 다수 참여하는 법원감사위원회를 열고 최유정 변호사와 관련해 제기된 의혹에 관해 논의했다. 수상[편집] 2006년 문예대상: 대법원 월간지 '법원사람들'에 기고한 '바그다드 카페와 콜링 유'라는 수필[24] 같이 보기[편집] 정운호 홍만표 각주[편집] ↑ ‘수임료 100억’ 최유정 변호사 구속 ↑ 브로커 이동찬 육성 최초공개 (上) 최유정 측근 이동찬 “정운호가 써준 글 공개되면 네이처 망해”] ↑ 최유정 변호사, '문학 판사' 별칭 있던 법조인? 어린 피고인에게 "돈보다 훨씬 귀해" ↑ "쉽고 편한 재판 합시다!" ↑ "삼척동자도 독립을 바라는데..." ↑ 복잡하고 여려운 판결문은 NO, 간편하게 읽기 쉬운 판결문은 YES ↑ 정치 꿈꿨던 최유정 변호사 결국 철창행 ↑ 과다 수임료 의혹’ 최유정 변호사 해명 답변서 제출 ↑ 대법, '100억 부당 수임료' 최유정 변호사 징역 5년6개월 확정(종합) ↑ 무고사범에 농락 당하다 ↑ 수임료 여왕’ 최유정, 분쟁 상대 압박하려 민형사 소송도 ↑ 금감원, 이숨투자자문 제기 월급가압류訴 승소 ↑ 정운호, 구속된 최유정 변호사 향해 사의…"손목 잡아 앉힌 것 인정, 사과하고 싶다" ↑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항소심 선고 연기 ↑ '법조로비 100억 수임' 최유정 변호사 구속…"범죄 소명"(종합) ↑ "할퀴고 물어뜯고"…최유정 체포 당시 '격렬히 저항' ↑ 최유정 변호사, '섭외 변호사' 주장… 사법처리 어떻게 될까 ↑ ‘100억대 수임료’ 최유정 변호사 영장 ↑ “영장실질심사 포기”. 2016년 6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5월 12일에 확인함.  ↑ 檢 '동종전과 6범에 구명 약속' 최유정 사기죄 검토 ↑ 최유정, 정운호에게 “내가 원하는 판사 배당할 수 있다” 말해 ↑ 최유정 압수수색 ↑ 최유정, 대여금고에 거액 보관…가족에 "돈 빼라" 전화 ↑ 최유정 변호사, '문학 판사' 별칭 있던 법조인? 어린 피고인에게 "돈보다 훨씬 귀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최유정_(법조인)&oldid=24432702" 분류: 1970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판사대한민국의 변호사대한민국의 범죄인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동문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고창군 출신대한민국의 조세 범죄 기결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15일 (토) 18: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세계 박람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계 박람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0년 세계 박람회의 BIE와 참가한 나라 깃발 세계 박람회(世界博覽會, 영어: World's Fair) 혹은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는 19세기 중반부터 열리고 있는 세계 최대 공공 박람회로 승격에 따라 개최지를 바꾸어 열린다. 목차 1 참가 2 용어 3 종류 4 역사 5 역대 세계 박람회 6 각주 7 외부 링크 참가[편집] 가장 큰 볼거리는 참가국에서 꾸미는 국가별 전시관으로, 1928년부터 어떤 나라라도 참여할 수 있는데, 2012년 5월 현재, 미국, 인도를 제외한 세계 160개 나라에서 참여하고 있다.[1] 용어[편집] 국제박람회기구(BIE, 프랑스어: 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 영어: International Exhibitions Bureau)에서 주관하며, 흔히 엑스포(Expo, 영어: exposition의 줄임말), 세계 엑스포(영어: world expo)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만국 박람회(萬國博覽會, Universal Expositions)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더이상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다. 종류[편집]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다루는 등록 박람회(Registered Expositions)와 보다 제한되고 분명한 주제를 가진 인정 박람회(Recognized Expositions)로 나누고 있다. 등록 박람회와 인정 박람회는 모두 국제박람회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세계 박람회이나, 등록 박람회는 보통 6주에서 6개월까지로 개최기간이 길며, 5년 주기로 개최하게 되어 있다. 반면 인정 박람회는 개최 기간이 3주에서 3개월로 상대적으로 짧고, 등록 박람회 주기 사이에 1회 열리게 되며, 개최장은 25 헥타르 이내로 제한된다. 그리고 등록 박람회의 전시관은 참가국에서 부담해 설치하지만, 인정 박람회에서는 주최국이 건축해서 참가국에 무상 임대하는 것이 보통이다. 1970년 오사카 세계 박람회, 2000년 하노버 세계 박람회, 2010년 상하이 세계 박람회는 등록 박람회이며, 1986년 밴쿠버 세계 박람회, 1993년 대전 세계 박람회, 2012년 여수 세계 박람회는 인정 박람회이다. 역사[편집] 1851년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Hyde Park)내에 지어진 수정궁에서 첫 엑스포가 열린 이후, 수많은 국제박람회들이 열렸다. 국제박람회의 질을 높일 필요에 따라 1928년 파리 협약으로 개최장소 및 개최 횟수 등의 조절하는 국제박람회기구 (BIE)가 조직되었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이고 이 조직이 설립된 이후 엑스포는 인정엑스포와 등록박람회로 나뉘었다. 또한 BIE에서는 1960년부터 일부 원예박람회도 엑스포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가장 최근에 열렸던 인정엑스포는 여수세계박람회이며 등록엑스포는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가 가장 최근에 개최되었다. 또한, BIE인정 원예박람회는 2012년 네덜란드 벤로(Venlo)에서 열린 Floriade[2]이며 차기 인정원예박람회는 2015년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다. 차후 2015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등록엑스포가 개최되고, 2017년 인정엑스포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개최된다. 2020년 등록엑스포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두바이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역대 세계 박람회[편집] 연도 개최국 개최지 비고 1851년 영국 런던 1855년 프랑스 파리 1862년 영국 런던 1867년 프랑스 파리 187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 1878년 프랑스 파리 1880년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188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1889년 프랑스 파리 1893년 미국 시카고 조선의 만국박람회 첫 참여(국호 : 대조선(大朝鮮)) 1897년 벨기에 브뤼셀 1900년 프랑스 파리 대한제국에서 민영찬을 특파대사로 파견1900년 하계 올림픽이 부속 대회로 개최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1904년 하계 올림픽이 부속 대회로 개최 1905년 벨기에 리에주 1906년 이탈리아 밀라노 1910년 벨기에 브뤼셀 1913년 벨기에 겐트 19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192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1933년 미국 시카고 1935년 벨기에 브뤼셀 1936년 스웨덴 스톡홀름 1937년 프랑스 파리 1938년 핀란드 헬싱키 1939년 벨기에 리에주 1939년 미국 뉴욕 시 1947년 프랑스 파리 1949년 스웨덴 스톡홀름 1949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1949년 프랑스 리옹 1951년 프랑스 릴 1953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1953년 이탈리아 로마 1954년 이탈리아 나폴리 1955년 이탈리아 토리노 1955년 스웨덴 헬싱보리 1956년 이스라엘 베이트 다곤 1957년 서독 베를린 1958년 벨기에 브뤼셀 1961년 이탈리아 토리노 1962년 미국 시애틀 1965년 서독 뮌헨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1968년 미국 샌안토니오 1970년 일본 오사카 197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1974년 미국 스포캔 1975년 일본 오키나와 1981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1982년 미국 녹스빌 1984년 미국 뉴올리언스 1985년 일본 쓰쿠바 1985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1986년 캐나다 밴쿠버 1988년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 1991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1992년 이탈리아 제노바 1992년 스페인 세비야 1993년 대한민국 대전 1998년 포르투갈 리스본 2000년 독일 하노버 2005년 일본 아이치 2008년 스페인 사라고사 2010년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2012년 대한민국 여수 2015년 이탈리아 밀라노 2017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3] 2020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202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2025년 일본 오사카 비고      등록 박람회      인정 박람회 각주[편집] ↑ “List of Member States”. BIE. 2012년 5월 25일에 확인함.  ↑ Floriade는 네덜란드에서 10년마다 열리는 원예박람회이다. ↑ “Candidatures International Expo 2017”. 2012년 5월 2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세계 박람회 (영어/프랑스어) 국제박람회기구 공식누리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세계_박람회&oldid=24045968" 분류: 세계 박람회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مازِرونی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6일 (화) 23: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세계 박람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계 박람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0년 세계 박람회의 BIE와 참가한 나라 깃발 세계 박람회(世界博覽會, 영어: World's Fair) 혹은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는 19세기 중반부터 열리고 있는 세계 최대 공공 박람회로 승격에 따라 개최지를 바꾸어 열린다. 목차 1 참가 2 용어 3 종류 4 역사 5 역대 세계 박람회 6 각주 7 외부 링크 참가[편집] 가장 큰 볼거리는 참가국에서 꾸미는 국가별 전시관으로, 1928년부터 어떤 나라라도 참여할 수 있는데, 2012년 5월 현재, 미국, 인도를 제외한 세계 160개 나라에서 참여하고 있다.[1] 용어[편집] 국제박람회기구(BIE, 프랑스어: 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 영어: International Exhibitions Bureau)에서 주관하며, 흔히 엑스포(Expo, 영어: exposition의 줄임말), 세계 엑스포(영어: world expo)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만국 박람회(萬國博覽會, Universal Expositions)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더이상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다. 종류[편집]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다루는 등록 박람회(Registered Expositions)와 보다 제한되고 분명한 주제를 가진 인정 박람회(Recognized Expositions)로 나누고 있다. 등록 박람회와 인정 박람회는 모두 국제박람회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세계 박람회이나, 등록 박람회는 보통 6주에서 6개월까지로 개최기간이 길며, 5년 주기로 개최하게 되어 있다. 반면 인정 박람회는 개최 기간이 3주에서 3개월로 상대적으로 짧고, 등록 박람회 주기 사이에 1회 열리게 되며, 개최장은 25 헥타르 이내로 제한된다. 그리고 등록 박람회의 전시관은 참가국에서 부담해 설치하지만, 인정 박람회에서는 주최국이 건축해서 참가국에 무상 임대하는 것이 보통이다. 1970년 오사카 세계 박람회, 2000년 하노버 세계 박람회, 2010년 상하이 세계 박람회는 등록 박람회이며, 1986년 밴쿠버 세계 박람회, 1993년 대전 세계 박람회, 2012년 여수 세계 박람회는 인정 박람회이다. 역사[편집] 1851년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Hyde Park)내에 지어진 수정궁에서 첫 엑스포가 열린 이후, 수많은 국제박람회들이 열렸다. 국제박람회의 질을 높일 필요에 따라 1928년 파리 협약으로 개최장소 및 개최 횟수 등의 조절하는 국제박람회기구 (BIE)가 조직되었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이고 이 조직이 설립된 이후 엑스포는 인정엑스포와 등록박람회로 나뉘었다. 또한 BIE에서는 1960년부터 일부 원예박람회도 엑스포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가장 최근에 열렸던 인정엑스포는 여수세계박람회이며 등록엑스포는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가 가장 최근에 개최되었다. 또한, BIE인정 원예박람회는 2012년 네덜란드 벤로(Venlo)에서 열린 Floriade[2]이며 차기 인정원예박람회는 2015년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다. 차후 2015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등록엑스포가 개최되고, 2017년 인정엑스포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개최된다. 2020년 등록엑스포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두바이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역대 세계 박람회[편집] 연도 개최국 개최지 비고 1851년 영국 런던 1855년 프랑스 파리 1862년 영국 런던 1867년 프랑스 파리 187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 1878년 프랑스 파리 1880년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188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1889년 프랑스 파리 1893년 미국 시카고 조선의 만국박람회 첫 참여(국호 : 대조선(大朝鮮)) 1897년 벨기에 브뤼셀 1900년 프랑스 파리 대한제국에서 민영찬을 특파대사로 파견1900년 하계 올림픽이 부속 대회로 개최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1904년 하계 올림픽이 부속 대회로 개최 1905년 벨기에 리에주 1906년 이탈리아 밀라노 1910년 벨기에 브뤼셀 1913년 벨기에 겐트 19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192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1933년 미국 시카고 1935년 벨기에 브뤼셀 1936년 스웨덴 스톡홀름 1937년 프랑스 파리 1938년 핀란드 헬싱키 1939년 벨기에 리에주 1939년 미국 뉴욕 시 1947년 프랑스 파리 1949년 스웨덴 스톡홀름 1949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1949년 프랑스 리옹 1951년 프랑스 릴 1953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1953년 이탈리아 로마 1954년 이탈리아 나폴리 1955년 이탈리아 토리노 1955년 스웨덴 헬싱보리 1956년 이스라엘 베이트 다곤 1957년 서독 베를린 1958년 벨기에 브뤼셀 1961년 이탈리아 토리노 1962년 미국 시애틀 1965년 서독 뮌헨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1968년 미국 샌안토니오 1970년 일본 오사카 197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1974년 미국 스포캔 1975년 일본 오키나와 1981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1982년 미국 녹스빌 1984년 미국 뉴올리언스 1985년 일본 쓰쿠바 1985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1986년 캐나다 밴쿠버 1988년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 1991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1992년 이탈리아 제노바 1992년 스페인 세비야 1993년 대한민국 대전 1998년 포르투갈 리스본 2000년 독일 하노버 2005년 일본 아이치 2008년 스페인 사라고사 2010년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2012년 대한민국 여수 2015년 이탈리아 밀라노 2017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3] 2020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202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2025년 일본 오사카 비고      등록 박람회      인정 박람회 각주[편집] ↑ “List of Member States”. BIE. 2012년 5월 25일에 확인함.  ↑ Floriade는 네덜란드에서 10년마다 열리는 원예박람회이다. ↑ “Candidatures International Expo 2017”. 2012년 5월 2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세계 박람회 (영어/프랑스어) 국제박람회기구 공식누리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세계_박람회&oldid=24045968" 분류: 세계 박람회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مازِرونی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6일 (화) 23: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핑크 팬더 (등장인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핑크 팬더 (등장인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는 동명의 단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분홍색 표범이다. 핑크팬더는 1963년에 제작된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였다. 이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얻은 핑크팬더는 A Shot in the Dark, Inspactor Clouseau를 제외한 전 핑크 팬더 영화에 등장하였다. 핑크 팬더는 124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영화와 TV방송용을 다 포함), 10개의 텔레비전 쇼, 3개의 텔레비전 특별판에 등장하였다. 목차 1 DePatie-Freleng /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제작한 만화 2 The Pink Panther Show 3 그 후의 텔레비전 시리즈와 특별판 4 참고 문헌 5 외부 링크 DePatie-Freleng /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제작한 만화[편집] 최초의 핑크 팬더는 영화제목 부분에 등장하였으며, Friz Freleng가 감독하였다. 관객들이 이 만화에 호응을 가지자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측에서는 Friz Freleng과 그가 다니던 DePatie-Freleng Enterprises 스튜디오를 고용하여 몇년간의 극장판 단편 핑크팬더 만화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1964년 핑크팬더가 시작되었을때(Pink Phink)에서 핑크팬더는 작고 코가 긴 하얀사람의 페인트 칠을 방해하는 걸로 나왔는데, 사실 이 남자는 Friz Freleng의 캐리커쳐였다. (이 등장인물은 공식적으로 "사람, The Man"으로 알려졌다.[1]) Pink Phink에서 하얀 사람은 열심히 푸른색으로 집을 색칠하지만, 핑크팬더는 열심히 핑크색을 칠함으로 그를 방해한다. 이 Pink Phink는 1964년 단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하였으며, 핑크팬더와 하얀 사람과의 대립을 다룬 이야기는 성공적으로 개봉되었다. 초기 핑크 팬더 만화에서, 핑크팬더는 보통 조용하지만 Sink Pink와 Pink Ice 두 에피소드에선 말을 하는데, 원 영화의 데이비드 니벤을 모델로 하여 리치 리틀이 목소리를 맡았다. 나중에 리틀은 Trail of the Pink Panther과 Curse of the Pink Panther에서 니벤의 목소리를 맡았다. 모든 핑크팬더 만화에는 Henry Mancini가 1963년 작곡한 독특한 재즈풍의 주제곡과 더불어 Walter Greene 혹은 William Lava가 작곡한 음악이 들어가 있다. The Pink Panther Show[편집] 1969년 가을, 핑크팬더 만화는 토요일 저녁에 NBC에서 핑크팬더 쇼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었다. 핑크팬더 단편 만화는 처음에 방송에서 먼저 내보내고 나중에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측에서 극장으로 내놓는 형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쇼에선 The Ant and the Aardvark, Tijuana Toads, Hoot Kloot, Misterjaw, The Inspector같은 다른 자매 프로그램도 방송되었다. 1976년, 반시간짜리 프로그램이 90분짜리로 늘어나면서 The Pink Panther Laugh and a Half Hour and a Half Show란 이름으로 바꾸게 되나, 1977년 다시 30분짜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의 텔레비전 시리즈와 특별판[편집] 핑크팬더 극장판이 다 끝난후, DePatie-Freleng에서는 ABC에서 방영할 텔레비전 특별판인 "A Pink Christmas", "Olympinks", "Pink At First Sight"등을 제작하게 된다. 이 스튜디오는 마벨 코믹스에서 1981년에 인수하였으며, Hanna-Barbera 프로덕션에서는 라이선스를 받아 1984년 토요일 아침을 겨냥한 Pink Panther and Sons을 내놓게 된다. 1993년, MGM에서 핑크 팬더 만화를 내놓게 되고, 핑크팬더의 목소리는 Matt Frewer가 맡았다. 2007년 6월, MGM과 루비콘 애니메이션이 공동작업하여 젊은 핑크 팬더와 친구들와 베리와 핑크팬더가 등장하는 Pink Panther and Pals, Pink Ancient Momomiya 내놓게 된다. 26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2009년 가을부터 카툰네트워크에서 방송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초기에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인수한 MGM측에서는 핑크팬더 프랜차이즈의 부수적인 저작권과 등록 상표를 가지고 있다. 1993년 10월 18일부터 1995년 4월 12일까지 MBC에서 방영되었다. 참고 문헌[편집] ↑ “"Struttin' with the Pink Panther" - Interview with Jerry Beck, by T.S. Warren”. 《Ottawa XPress》. 2009년 2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8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Owens Corning website with The Pink Panther character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핑크_팬더_(등장인물)&oldid=24542931" 분류: 가공의 포유류핑크 팬더1963년 창조된 가공인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Català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Hrvatski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8일 (월) 12: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테니스 코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테니스 코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테니스 코트의 규격. 테니스 코트(tennis court)는 테니스 경기가 이루어지는 직사각형 공간이다. 세로 길이는 23.77m이며 가로 길이는 복식 경기의 경우 10.97m, 단식 경기의 경우 8.23m이다. 코트 중앙에는 네트가 세워진다. 코트 표면의 재질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그 종류에 따라 공이 바운드 되는 속도가 달라진다. 목차 1 테니스 코트의 종류 1.1 잔디 코트 1.2 클레이 코트 1.3 하드 코트 1.4 실내 코트 1.5 소형 코트 2 각주 3 외부 링크 테니스 코트의 종류[편집] 같이 보기: 테니스#코트의 종류 테니스 코트의 종류는 그 재질에 따라 크게 클레이 코트, 하드 코트, 잔디 코트, 그리고 실내 코트(카펫, 고무 또는 우드)의 4가지로 나뉜다. 각각의 코트는 고유의 특성을 가지며 이에 따라 경기의 양상도 달라지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테니스 대회인 그랜드 슬램 대회의 경우, 호주 오픈과 US 오픈은 하드 코트에서 열리며, 프랑스 오픈은 클레이 코트에서, 그리고 윔블던의 잔디 코트에서 개최된다. 잔디 코트[편집] 대표적인 잔디 코트 대회인 윔블던의 코트 모습. 이 부분의 본문은 잔디 코트입니다. 잔디 코트는 단단하게 다져진 토양 위에 잔디를 심어 만들어진 코트이다. 잔디의 종류, 발육 상태, 길이, 그리고 경기에 따른 마모 및 손상 정도에 따라 바운드가 달라진다. 잔디 코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코트 종류 중 바운드가 가장 빠르다(아스트로터프 재질이 더 빠르기는 하나 이는 범용적인 코트 재질은 아니다). 잔디 코트에서는 공이 낮고 빠르게 바운드 되기 때문에 매 포인트가 상당히 빨리 진행되며, 특히 서브의 위력이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잔디 코트는 서브 앤드 발리 스타일의 플레이를 구사하는 선수들에게 유리하다. 잔디 코트에서의 서브 앤드 발리 플레이가 특히 뛰어났던 선수들로는 남자 중에서는 존 메켄로와 피트 샘프라스, 그리고 여자 중에서는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등이 유명하다. 한편, 가장 권위있는 잔디 코트 대회인 윔블던에서는 2001년부터 공이 좀 더 느리게 바운드 되도록 매년 잔디를 조절하여 왔다. 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코트의 바운드가 예전보다 더 느리고 무거워졌으며, 높게 튄다고 말한다.[1] 대회 주최측은 2001년부터 코트의 잔디를 100% 다년생 종자로 교체하고 토양 또한 더 단단하고 조밀하게 다져서 공이 더 높게 바운드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그 전까지 윔블던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서브 앤드 발리 스타일의 플레이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윔블던에서도 대부분의 선수들이 베이스라인 위주의 플레이를 펼친다. 과거 한때는 잔디 코트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코트 종류였으나, 유지에 드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일부 지역에서만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클레이 코트[편집] 대표적인 클레이 코트 대회인 프랑스 오픈의 코트 모습. 이 부분의 본문은 클레이 코트입니다. 클레이 코트는 가늘게 간 셰일이나 암석, 또는 벽돌로 표면을 덮은 코트이다. 레드 클레이와 그린 클레이의 두 종류가 있으며, 레드 클레이가 그린 클레이에 비해 바운드 속도가 더 느리다. 프랑스 오픈이 그랜드 슬램 중 유일하게 클레이 코트에서 개최된다. 클레이 코트는 표면의 마찰력이 높아 잔디 코트나 하드 코트에 비해 공의 바운드를 상대적으로 느리고 높게 만드는 성질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강한 서브를 가진 선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클레이 코트는 초기 가설 비용은 다른 종류의 코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소요되지만 유지관리 비용은 하드 코트보다 많이 든다. 클레이 코트는 표면을 평평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수시로 롤링을 해주어야 하며, 코트가 너무 마르거나 젖지 않도록 적당한 수준의 수분도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 클레이 코트는 유럽과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하드 코트[편집] 대표적인 하드 코트 대회인 US 오픈의 코트 모습. 하드 코트는 아크릴이나 아스팔트 등의 재질로 만들어진 코트이다. 하드 코트에서의 바운드는 잔디 코트보다는 느리지만 클레이 코트보다는 빠르다. 공이 비교적 빠르게 바운드되기 때문에 하드 코트는 플랫성의 공격적인 스트로크를 구사하는 선수에게 다소 유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바운드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지 않기 때문에 하드 코트는 비교적 모든 플레이 스타일에 고루 공평한 코트로 여겨진다. 하드 코트의 바운드 속도는 코트 표면의 도장재에 포함된 모래 입자의 양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2] 코트 표면에 포함된 모래 입자의 양이 많을 수록 마찰력이 커져 공이 더 느리게 바운드 된다. 만일 표면에 모래 성분이 전혀 들어가지 않을 경우 하드 코트는 어떤 종류의 코트 재질 보다도 바운드가 오히려 빨라지게 된다. 실내 코트[편집] 실내 코트의 모습. 실내 코트에서는 다양한 재질의 코트가 사용된다. 완충 효과가 뛰어난 카펫 코트는 오직 실내용으로만 사용된다. 유지관리가 손쉬운 플라스틱 타일 코트는 실내 및 실외 코트에서 모두 사용된다. 우드 코트는 바운드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오늘날 테니스 코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나, 테니스와 약간 다른 종류의 스포츠인 리얼 테니스에서는 우드 코트가 널리 쓰이는 편이다. 소형 코트[편집] ITF에서는 '플레이 앤드 스테이'(Play and Stay)라는 캠페인을 통해 테니스 인구를 늘려나가는 전 세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캠페인의 핵심은 테니스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경기 규칙을 더 쉽게 전달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정식 코트보다 작은 크기의 소형 코트에서 바운드가 느린 빨간색, 오렌지색, 초록색의 공을 사용하는 간이 경기 방식을 고안하였다. 이를 통해 경기자는 약간의 레슨만으로도 좀 더 쉽게 공을 컨트롤하여 넘길 수 있다.[3] 각주[편집] ↑ (영어) “The Grass is Always Slower”.  ↑ (영어) http://www.tennisuniversal.com/Data/product_search_res.asp?SearchCateg=050206&ProductCateg=0500&SubCateg1=0502&SubCateg2=050206This Archived 2011년 7월 16일 - 웨이백 머신 ↑ (영어) ITF Play and Stay 외부 링크[편집] (영어) 테니스 코트의 세부 규격 (영어) 테니스 용어 사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테니스_코트&oldid=22973300" 분류: 테니스 코트의 종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Чӑвашла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עברית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КыргызчаLietuviųМакедонски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Тоҷикӣ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1일 (일) 05: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테니스 코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테니스 코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테니스 코트의 규격. 테니스 코트(tennis court)는 테니스 경기가 이루어지는 직사각형 공간이다. 세로 길이는 23.77m이며 가로 길이는 복식 경기의 경우 10.97m, 단식 경기의 경우 8.23m이다. 코트 중앙에는 네트가 세워진다. 코트 표면의 재질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그 종류에 따라 공이 바운드 되는 속도가 달라진다. 목차 1 테니스 코트의 종류 1.1 잔디 코트 1.2 클레이 코트 1.3 하드 코트 1.4 실내 코트 1.5 소형 코트 2 각주 3 외부 링크 테니스 코트의 종류[편집] 같이 보기: 테니스#코트의 종류 테니스 코트의 종류는 그 재질에 따라 크게 클레이 코트, 하드 코트, 잔디 코트, 그리고 실내 코트(카펫, 고무 또는 우드)의 4가지로 나뉜다. 각각의 코트는 고유의 특성을 가지며 이에 따라 경기의 양상도 달라지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테니스 대회인 그랜드 슬램 대회의 경우, 호주 오픈과 US 오픈은 하드 코트에서 열리며, 프랑스 오픈은 클레이 코트에서, 그리고 윔블던의 잔디 코트에서 개최된다. 잔디 코트[편집] 대표적인 잔디 코트 대회인 윔블던의 코트 모습. 이 부분의 본문은 잔디 코트입니다. 잔디 코트는 단단하게 다져진 토양 위에 잔디를 심어 만들어진 코트이다. 잔디의 종류, 발육 상태, 길이, 그리고 경기에 따른 마모 및 손상 정도에 따라 바운드가 달라진다. 잔디 코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코트 종류 중 바운드가 가장 빠르다(아스트로터프 재질이 더 빠르기는 하나 이는 범용적인 코트 재질은 아니다). 잔디 코트에서는 공이 낮고 빠르게 바운드 되기 때문에 매 포인트가 상당히 빨리 진행되며, 특히 서브의 위력이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잔디 코트는 서브 앤드 발리 스타일의 플레이를 구사하는 선수들에게 유리하다. 잔디 코트에서의 서브 앤드 발리 플레이가 특히 뛰어났던 선수들로는 남자 중에서는 존 메켄로와 피트 샘프라스, 그리고 여자 중에서는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등이 유명하다. 한편, 가장 권위있는 잔디 코트 대회인 윔블던에서는 2001년부터 공이 좀 더 느리게 바운드 되도록 매년 잔디를 조절하여 왔다. 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코트의 바운드가 예전보다 더 느리고 무거워졌으며, 높게 튄다고 말한다.[1] 대회 주최측은 2001년부터 코트의 잔디를 100% 다년생 종자로 교체하고 토양 또한 더 단단하고 조밀하게 다져서 공이 더 높게 바운드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그 전까지 윔블던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서브 앤드 발리 스타일의 플레이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윔블던에서도 대부분의 선수들이 베이스라인 위주의 플레이를 펼친다. 과거 한때는 잔디 코트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코트 종류였으나, 유지에 드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일부 지역에서만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클레이 코트[편집] 대표적인 클레이 코트 대회인 프랑스 오픈의 코트 모습. 이 부분의 본문은 클레이 코트입니다. 클레이 코트는 가늘게 간 셰일이나 암석, 또는 벽돌로 표면을 덮은 코트이다. 레드 클레이와 그린 클레이의 두 종류가 있으며, 레드 클레이가 그린 클레이에 비해 바운드 속도가 더 느리다. 프랑스 오픈이 그랜드 슬램 중 유일하게 클레이 코트에서 개최된다. 클레이 코트는 표면의 마찰력이 높아 잔디 코트나 하드 코트에 비해 공의 바운드를 상대적으로 느리고 높게 만드는 성질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강한 서브를 가진 선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클레이 코트는 초기 가설 비용은 다른 종류의 코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소요되지만 유지관리 비용은 하드 코트보다 많이 든다. 클레이 코트는 표면을 평평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수시로 롤링을 해주어야 하며, 코트가 너무 마르거나 젖지 않도록 적당한 수준의 수분도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 클레이 코트는 유럽과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하드 코트[편집] 대표적인 하드 코트 대회인 US 오픈의 코트 모습. 하드 코트는 아크릴이나 아스팔트 등의 재질로 만들어진 코트이다. 하드 코트에서의 바운드는 잔디 코트보다는 느리지만 클레이 코트보다는 빠르다. 공이 비교적 빠르게 바운드되기 때문에 하드 코트는 플랫성의 공격적인 스트로크를 구사하는 선수에게 다소 유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바운드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지 않기 때문에 하드 코트는 비교적 모든 플레이 스타일에 고루 공평한 코트로 여겨진다. 하드 코트의 바운드 속도는 코트 표면의 도장재에 포함된 모래 입자의 양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2] 코트 표면에 포함된 모래 입자의 양이 많을 수록 마찰력이 커져 공이 더 느리게 바운드 된다. 만일 표면에 모래 성분이 전혀 들어가지 않을 경우 하드 코트는 어떤 종류의 코트 재질 보다도 바운드가 오히려 빨라지게 된다. 실내 코트[편집] 실내 코트의 모습. 실내 코트에서는 다양한 재질의 코트가 사용된다. 완충 효과가 뛰어난 카펫 코트는 오직 실내용으로만 사용된다. 유지관리가 손쉬운 플라스틱 타일 코트는 실내 및 실외 코트에서 모두 사용된다. 우드 코트는 바운드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오늘날 테니스 코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나, 테니스와 약간 다른 종류의 스포츠인 리얼 테니스에서는 우드 코트가 널리 쓰이는 편이다. 소형 코트[편집] ITF에서는 '플레이 앤드 스테이'(Play and Stay)라는 캠페인을 통해 테니스 인구를 늘려나가는 전 세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캠페인의 핵심은 테니스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경기 규칙을 더 쉽게 전달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정식 코트보다 작은 크기의 소형 코트에서 바운드가 느린 빨간색, 오렌지색, 초록색의 공을 사용하는 간이 경기 방식을 고안하였다. 이를 통해 경기자는 약간의 레슨만으로도 좀 더 쉽게 공을 컨트롤하여 넘길 수 있다.[3] 각주[편집] ↑ (영어) “The Grass is Always Slower”.  ↑ (영어) http://www.tennisuniversal.com/Data/product_search_res.asp?SearchCateg=050206&ProductCateg=0500&SubCateg1=0502&SubCateg2=050206This Archived 2011년 7월 16일 - 웨이백 머신 ↑ (영어) ITF Play and Stay 외부 링크[편집] (영어) 테니스 코트의 세부 규격 (영어) 테니스 용어 사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테니스_코트&oldid=22973300" 분류: 테니스 코트의 종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Чӑвашла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עברית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КыргызчаLietuviųМакедонски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Тоҷикӣ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1일 (일) 05: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오페라 미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페라 미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오페라 미니 개발자 오페라 소프트웨어 발표일 2005년 8월 10일 프로그래밍 언어 C++, 자바, 파이크[1] 플랫폼 자바 ME, 안드로이드, 윈도우 모바일,윈도우 폰, iOS, 블랙베리 OS, UIQ3, 심비안, 지보 언어 다국어[2] 종류 모바일 웹 브라우저 라이선스 사유 - 프리웨어 웹사이트 www.opera.com/mini 오페라 미니(Opera Mini)는 휴대전화, 스마트폰, PDA용으로 디자인된 웹 브라우저다. 버전 4까지는 자바 ME 플랫폼을 사용해서 모바일 장치가 자바 ME 애플리케이션을 작동할 수 있어야 했었다. 버전 5부터는 네이티브 윈도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사용 가능해 졌다. 오페라 미니는 무료로 제공된다.[3] 오페라 미니는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오페라 브라우저에 기반해 있다. 오페라 미니는 유럽에서 제한된 공개를 하다가, 2006년 1월 24일 전 세계로 출시되었다. 오페라 미니는 오페라 소프트웨어의 서버를 통해서 웹 페이지를 요청한다. 오페라 소프트웨어의 서버는 휴대전화로 요청한 웹 페이지를 전송하기 전 웹 페이지를 압축해서, 페이지를 모바일에 맞게 렌더링하고, 데이터 사용량을 효율적으로 감축한다. 목차 1 역사 2 작동 원리 2.1 자바스크립트 지원 3 기능 3.1 프라이버시와 보안 3.2 표준 지원 3.3 데이터 센터 4 각주 5 같이 보기 6 외부 링크 역사[편집] 전 세계의 오페라 미니 사용자가 2006년부터 2008년 중반까지 사용한 데이터 (테라바이트 단위) 오페라 미니의 베타 버전은 2005년 10월 20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용으로 만들어졌다.[4] 그 후 최종 버전은 독일용으로 2005년 11월 10일 공개되었다.[5] 그해 12월, 오페라 미니는 모든 나라로 공개되었다. 이 브라우저는 2006년 1월 24일 공식적으로 출시되었다.[6] 2006년 5월 3일, 오페라 미니 2.0이 출시되었다. 이 버전은 파일 다운로드, 스킨, 검색 엔진 설정 옵션, 새로운 검색 엔진, 스피드 다이얼등이 추가되었다.[7] 2006년 11월 1일, 오페라 미니 3의 베타 버전이 보안 브라우징, RSS 피드, 사진 업로딩등의 기능을 추가하고 공개되었다.[8] 그해 11월 22일 두 번째 베타 버전이 공개되었고,[9] 11월 28일 오페라 미니 3의 최종 버전이 출시되었다.[10] 오페라 미니 4는 오페라 브라우저와 오페라 미니를 동기화 할 수 있는 기능 외에도 상당히 많은 기능을 추가했다. 오페라 미니 4의 이전 버전은 고사양용 오페라 미니 어드벤스드, 저사양용 오페라 미니 베이직으로 나뉘어 출시되었지만, 오페라 미니 4는 오페라 미니 어드벤스드 버전만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때문에 사용자는 오페라 미니 4와 오페라 미니 3 베이직을 선택해서 받을 수 있었다.[11][12][13] 원래 오페라 미니의 기본 검색 엔진은 구글이었지만,[14]2007년 1월 8일, 오페라 소프트웨어와 야후는 기본 검색 엔진을 야후로 바꾸겠다는 파트너쉽을 체결했다.[15] 하지만 2008년 2월 27일, 오페라 소프트웨어는 오페라 미니와 오페라 모바일의 기본 검색 엔진을 야후에서 다시 구글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2008년 4월 10일, 오페라 미니는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로 개발되었다고 오페라 소프트웨어는 발표했다. 2009년 8월 16일, 오페라 소프트웨어는 오페라 미니 5.0 베타를 발표했다. 새로운 버전은 탭 브라우징, 비밀번호 관리자, 향상된 터치 스크린 지원,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데스크탑용 오페라 브라우저와 유사한 비주얼 스피드 다이얼 등을 포함했다.[16] 2009년 10월 20일부터 중국 사용자들에게서 오페라 미니를 사용할 때 오페라 미니 중국용 버전을 다운로드 하라는 에러 페이지가 연결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중국 정부가 오페라 미니로 "만리장성 방화벽"을 우회하는 것이 두려워서 고의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17] 오페라 소프트웨어는 iOS용 오페라 미니를 2010년 3월 23일 애플 앱 스토어에 등록 신청 했다. 이 애플리케이션은 2010년 4월 13일 승인되었다.[18][19] 작동 원리[편집] 다른 일반 웹 브라우저와 달리, 오페라 미니는 모든 콘텐츠를 프록시 서버를 통하여 받고, 웹 페이지를 작은 스크린에 맞게 재생성한다.[20] 페이지는 압축된 상태로 OBML(오페라 바이너리 마크업 언어)이라는 마크업 언어로 제공된다. 이 압축 단계는 전송 시간을 2~3배 정도 더 빠르게 하며, 모바일 폰에 최적화되지 않은 웹 페이지와의 호환성을 높여준다.[21] 오페라 소프트웨어는 현재 오페라 미니의 트래픽을 감당하기 위해 100개 정도의 프록시 서버를 운영하고 있다.[6] 자바스크립트 지원[편집] 오페라 미니는 자바스크립트에 대한 제한적 지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스크립트는 2초의 실행 시간을 주고, setInterval과 setTimeout 함수는 비활성화 되어 있다. 따라서 긴 시간을 요구하는 스크립트는 2초가 지나면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22] 만약 스크립트가 끝났거나 2초가 지나서 실행이 멈췄을때, 모든 스크립트는 중단되고 페이지는 압축된 상태로 모바일 장치로 전송된다. 장치에서는 몇몇 이벤트만이 스크립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기능[편집] 스크롤링은 해당 장치의 방향 키나 번호 키, 혹은 스타일러스나 손가락 터치로 가능하다.[23] 이미지 품질은 "낮음", "중간", "높음"으로 설정될 수 있다. 품질이 높을 수록 로딩 속도가 오래 걸리고 더 많은 데이터가 전송된다.[24] 그 외에도 오페라 미니는 검색 바를 이용해서 몇몇 기본 검색 엔진으로 검색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사용자는 추가 검색 엔진을 추가 할 수도 있다. 기본 검색 엔진은 구글과 위키백과다.[25] 그 외에 오페라 미니는 단축 키, 스킨, 북마크 저장 기능, 파일 다운로드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프라이버시와 보안[편집] 오페라 미니 4.0이나 3.0 어드밴스드를 사용할 경우, 모바일 장치와 프록시 서버와의 연결은 언제나 암호화되어 있다. 만약 오페라 미니 3.0 베이직을 사용할 경우 연결은 암호화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오페라 미니는 이미 암호화된 사이트인 페이팔 등의 사이트를 접속할 경우, 암호화를 풀고 다시 암호화를 해서 완전한 보안을 풀어버린다.[26][27] 표준 지원[편집] 버전 4까지의 오페라 미니는 오페라 9.5에 포함된 동일한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한다.[28] 이것은 오페라 미니가 오페라 9.5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웹 표준을 지원한다는 말이다. 데이터 센터[편집] 오페라 미니는 웹 페이지를 휴대전화에 압축된 바이너리 폼으로 전송하는 과정해서 다음과 같은 데이터 센터에 의존한다. 노르웨이의 데이터 센터 일본의 데이터 센터 미국의 데이터 센터 폴란드의 데이터 센터[29] 각주[편집] ↑ Lextrait, Vincent (2010년 1월). “The Programming Languages Beacon, v10.0”. 2010년 3월 14일에 확인함.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 “Opera Mini translated into over 50 languages; 15 more to come later this month”. 2007년 11월 7일. 2008년 1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29일에 확인함.  ↑ Goldman, Daniel (2008년 2월 27일). “Back to Google on Opera Mini and Opera Mobile”. 《Opera Watch》. 2008년 4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1일에 확인함.  ↑ http://www.opera.com/pressreleases/en/2005/10/20/ ↑ http://www.opera.com/pressreleases/en/2005/11/10/ ↑ 가 나 http://www.pcworld.com/article/id,124473-page,1/article.html ↑ http://www.opera.com/pressreleases/en/2006/05/03/ ↑ Goldman, Daniel (2006년 11월 1일). “Limited testing of Opera Mini 3 beta”. 《Opera Watch》. 2011년 8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21일에 확인함.  ↑ Spilling, Marianne (2006년 11월 22일). “Opera Mini 3.0 Beta 2”. 오페라 소프트웨어. 2006년 11월 26일에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21일에 확인함.  ↑ http://www.opera.com/pressreleases/en/2006/11/28/ ↑ “What are the differences between the "Basic (MIDP 1)" and the "Advanced (MIDP 2)" versions?”. 《Opera Mini FAQ》. 오페라 소프트웨어. 2011년 8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Generic Advanced MIDP 2”. 《Download Opera Mini》. 오페라 소프트웨어. 2007년 10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Generic Basic MIDP 1”. 《Download Opera Mini》. 오페라 소프트웨어. 2007년 10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보관된 사본”. 2007년 9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1일에 확인함.  ↑ “보관 된 사본”. 2007년 10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11일에 확인함.  ↑ http://www.opera.com/press/releases/2009/09/16/ ↑ “Opera Mini国际版屏蔽国内用户” (중국어). Solidot. 2009년 11월 21일. 2009년 11월 25일에 확인함.  ↑ “Opera Mini Submitted to App Store”.  ↑ “Opera Mini Approved for App Store”.  ↑ “Developer case study: Managing Java fragmentation, Opera Software's Java ME browser client: About Opera Mini”. 소니 에릭슨. 2006년 6월 23일. 2011년 8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9일에 확인함.  |title=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보관 된 사본”. 2008년 6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1일에 확인함.  ↑ Mills, Chris (2007년 10월 25일). “JavaScript support in Opera Mini 4”. 오페라 소프트웨어. 2011년 8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29일에 확인함.  ↑ Angel (2005년 8월 17일). “Review of Opera Mini on the Treo 650”. treo Addicts. 2007년 12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24일에 확인함.  ↑ Goldman, Daniel (2007년 8월 15일). “How to get higher quality images with Opera Mini?”. 《Opera Watch》. 2008년 1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월 4일에 확인함.  ↑ “Configuring search engines”. 《Opera Mini Features》. 오페라 소프트웨어. 2008년 1월 4일에 확인함.  ↑ “Recommendation for Mobile Banking Vendors & An Update on Opera Browsers”. 2007년 10월 14일. 2007년 12월 10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 “Why does the page information say that the connection is not secure when you said all traffic is encrypted?”. 《Opera Mini FAQ》. Opera Software. 2011년 8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0일에 확인함.  ↑ Storey, David (2007년 6월 18일). “CSS3 Selectors support on your phone”. 2007년 6월 22일에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22일에 확인함.  ↑ “Serving up more Opera Mini in Europe: Opera opens new data center in Poland”. 2009년 6월 30일.  같이 보기[편집] 오페라 모바일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오페라 미니 공식 오페라 미니 웹사이트 오페라 미니 시뮬레이터 오페라 미니가 지원하는 기기 오페라 미니가 지원하는 기능 오페라 미니와 모바일의 비교 표 vdeh오페라회사 오페라 소프트웨어 텔레노르 소프트웨어 오페라 (역사 특징 오페라 메일) 오페라 모바일 오페라 미니 닌텐도 DS 브라우저 인터넷 채널 프레스토 오페라 쇼 포맷 웹사이트 마이 오페라 관련 프로그램 오퍼레이터 YAPO vdeh웹 브라우저 비교 가벼운 웹 브라우저 역사 목록 유닉스용 연표 시장 점유율 기능 광고 차단 증강 브라우징 북마크 북마크릿 라이브 북마크 스마트 북마크 브라우저 확장 브라우저 보안 브라우저 동기화 비교 쿠키 다운로드 관리자 파비콘 증분 검색 플러그인 프라이버시 모드 탭 유니버설 편집 버튼 웹 표준 Acid 테스트 종속형 시트 HTML HTML5 자바스크립트 MathML OCSP SVG WebGL XHTML 관련 주제 BrowserChoice.eu CRL HTTP HTTPS iLoo 인터넷 스위트 맨 인 더 브라우저 모바일 웹 오프라인 리더 PAC Pwn2Own 리치 인터넷 애플리케이션 사이트 특화 브라우저 SPDY SSL/TLS 웹소켓 위젯 월드 와이드 웹 WPAD XML 데스크톱블링크 기반 크로미엄 브레이브 크롬 드래곤 오페라 슬레이프니르 슬림젯 SR웨어 아이언 UC 브라우저 비발디 얀덱스 브라우저 Sputnik 세이프존 네이버 웨일 게코 기반 AT&T 포고* 아방트 카미노* 모질라 파이어폭스 Conkeror GNU 아이스캣 아이스드래곤 스위프트폭스* Swiftweasel* 텐포폭스 팀버울프 토르 브라우저 워터폭스 XB 브라우저* Galeon* Ghostzilla* K-멜레온 가제하카세* Kirix Strata 로터스 심포니* 루나스케이프 모질라* Beonex Communicator* Classilla 넷스케이프* 시몽키 트라이던트 기반 AOL 익스플로러* 아방트 딥넷 익스플로러* 그린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 루나스케이프 맥스톤 미디어브라우저* 메뉴박스 네오플래닛* 넷캡터* 슬림브라우저 스페이스타임 울트라브라우저* 웹IE ZAC 브라우저 웹킷 기반 Arora* 아방트 Dooble 에픽 플로크* 플루이드 아이캡 캉커러 루나스케이프 맥스톤 미도리 옴니웹 Origyn Web Browser* Otter Browser QtWeb QupZilla rekonq 사파리 시이라* 슬림보트 surf Torch 유즈블 웹 웹포지티브 xombrero 텍스트 기반 ELinks Emacs/W3* 라인 모드 브라우저* 링크 링크스 W3m 기타 abaco 어마야* 아라크네* 아레나* 카론 딜로 eww Gazelle 핫자바* IBM 홈 페이지 리더* 아이브라우즈* KidZui 마이크로소프트 엣지 모자이크* Mothra* 넷포지티브* 넷서프 페일 문 모바일블링크 기반 안드로이드 브라우저 크로미엄 브레이브 크롬 오페라 모바일 실크 게코 기반 파이어폭스 모바일 MicroB* 미니모* 프레스토 기반 오페라 미니 삼지창 기반 맥스톤 웹킷 기반 BOLT 돌핀 브라우저 파이어폭스 포 iOS 맥스톤 머큐리 브라우저 S60용 웹 브라우저 Rockmelt 사파리 스틸 기타 블레이저 CM 브라우저 딥피시* ibisBrowser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 아이리스 브라우저* 캉커러 임베디드 마이크로소프트 엣지 넷프론트 노키아 Xpress* Skweezer* 스카이파이어* 티샤크* 선더호크 UC 브라우저 비전 WinWAP 스무즈 Wire 브라우저 텔레비전 및 비디오 게임 콘솔게코 기반 Kylo 프레스토 기반 인터넷 채널 웹킷 기반 구글 TV 닌텐도 3DS 인터넷 브라우저 닌텐도 DS 브라우저 넷프론트 스팀 오버레이 Wii U 인터넷 브라우저 기타 MSN TV* 별표(*)로 된 부분은 더 이상 개발 중이 아닌 소프트웨어를 의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오페라_미니&oldid=24184809" 분류: 오페라 소프트웨어크로스 플랫폼 소프트웨어자바 플랫폼 소프트웨어IOS 소프트웨어안드로이드 소프트웨어블랙베리윈도우 모바일 소프트웨어윈도우 폰 소프트웨어모바일 웹 브라우저안드로이드용 웹 브라우저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CS1 - 중국어 인용 (zh)인용 오류 - 보이지 않는 문자인용 오류 - 저자 또는 편집자 없음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भोजपुरीবাংলা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हिन्दी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മലയാളംBahasa Melayu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RomânăРусскийසිංහලSvenskaதமிழ்Tagalog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1: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원시 자료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원시 자료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원시 자료형은 컴퓨터 과학에서 프로그래밍 언어가 제공하는 자료형 중 하나다. 원시형은 또한 내장형이나 기본형으로도 불린다. 언어와 그 구현에 따라서, 원시형은 메모리 상에 일대일로 대응되는 개체(Object)를 가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원시형은 언어 구조체 중 가장 빨리 연산처리 된다. 예를 들어, 정수형의 덧셈은 단 하나의 기계식 연산(machine instruction)으로 처리 될 수 있다.일부 중앙 처리 장치(CPU)는 한 번의 연산으로 문자들의 시퀀스 처리를 수행해주는 특별한 연산을 제공한다. 일부 C에서는 "'plain' int 객체는 실행 환경의 아키텍처가 제공하는 기본 사이즈를 갖는다"고 한다. 이것은 int는 32-bit 아키텍처에서는 32 bits long과 같은 사이즈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원시형의 값은 상태(state)를 공유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언어들은 프로그램에 의한 원시형의 조작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몰토크와 같은 예외적인 언어들은 프로그램 내에서 원시형을 확장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도 한다. 스몰토크에서는 원시형에 대한 연산을 추가하거나 심지어는 빌트인 연산(내장형 연산)을 재정의할 수도 있다. 목차 1 개요 2 분류 2.1 정수형 숫자 2.2 불린 2.3 부동 소수점 수 2.4 고정 소수점 수 2.5 문자형과 문자열 2.6 숫자형 데이터의 범위 3 같이 보기 4 각주 개요[편집] 실제 원시형의 범위는 프로그래밍 언어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C에서는 문자열은 조합형이지만, 베이직과 자바스크립트에서는 기본형으로 취급된다. 일반적으로 원시형은 다음과 같다. 문자 (character, char); 다양한 산술 정밀도를 갖는 정수 (integer, int, short, long, byte); 부동소수점수 (float, double, real, double precision); 다양한 정밀도와 프로그래머가 지정 가능한 크기를 갖는 고정소수점수 (fixed). 불린 '참(true)'과 '거짓(false)' 값을 갖는다. 참조 (포인터 또는 핸들로 불림), 다른 개체(Object)의 메모리상 주소를 참조하는 값. 보다 복잡한 형도 다음과 같은 원시형이 될 수 있다. 튜플: ML, 파이썬 링크드 리스트: 리스프 복소수: 포트란, C (C99), 리스프, 파이썬 유리수: 리스프 해시 테이블: 리스프, 파이썬, Lua First class function, closure, continuation: 리스프, ML와 같은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편집] 정수형 숫자[편집] 정수형은 소숫점을 제외한 모든 숫자값을 가질 수 있다. 정수형은 (음수형을 가질 수 있는) signed와 음수형을 가질 수 없는 unsigned로 구분된다. 일반적인 정수형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크기 이름 signed unsigned 8 bits Byte -128 ~ +127 0 ~ 255 16 bits Word, short int -32,768 ~ +32,767 0 ~ 65 535 32 bits Double Word, long int -2,147,483,648 ~ +2,147,483,647 0 ~ 4,294,967,295 64 bits long long (C), long (자바) –9,223,372,036,854,775,808 ~ +9,223,372,036,854,775,807 0 ~ 18,446,744,073,709,551,615 unlimited Bignum 정수를 위한 리터럴(상수)는 숫자로 이뤄진다. 거의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는 자리수를 표시하기 위해 ,(쉼표)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포트란은 내장된 공백(embedded space)을 허용하고, 펄(Perl), 루비 그리고 D는 내장된 '_(밑줄)'을 허용한다. (포트란 77과 포트란 90 이상의 버전에서는 고정 자리수를 지원한다. 하지만 포트란에서도 임의의 자리수를 지정할 수는 없다.) 음수는 숫자값 앞에 음수 기호(-)를 붙여서 표시한다. 정수형 표기법 예: 42 10000 -233000 불린[편집] 일반적으로 "bool"이나 "boolean"으로 표시되는 불린 자료형은 단일비트 타입이다. 그 값은 "true" (1) 또는 "false" (0)로 제한되어 있다. C++과 같은 몇몇 언어에서는 불린값들은 암시적으로 정수형으로 변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true + true"에 대한 연산값은 2일 수 있다. 그러나 자바와 파스칼 같은 다른 언어에서는 이러한 형변환을 허용하지 않는다. 부동 소수점 수[편집] 부동 소수점 수는 소수점 값을 포함한 실수를 표현한다. 이 숫자는 지수법, 이진법, 간혹 십진법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부동 소수점 수는 제한된 자릿수를 갖기 때문에, 모든 값은 근사적으로 표시된다. 많은 언어들은 "float"라고 부르는 single precision과 double precision 타입을 갖는다. 소수점을 포함한 부동 소수점 수를 위한 리터럴은 일반적으로 지수를 표기하기 위해서 "e"를 사용한다. 다음의 부동 소수점 표기를 참조. 20.0005 99.9 -5000.12 6.02e23 포트란 같은 일부 언어에서는 추가로 복소수(complex number) 타입을 갖는다. 이 복소수 타입은 실수부와 허수부으로 이뤄져 있다. 고정 소수점 수[편집] 고정 소수점 수는 소수 부분을 갖고 있는 실수를 표현한다. 이 수는 내부적으로 scaled-integer 폼으로, 일반적으로 이진법으로 하지만 가끔 십진법으로 저장된다. 고정 소수점 수는 오직 제한된 자릿 수만을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값은 근사적으로만 표기될 수 있다. 고정 소수점 수는 제한된 범위의 값을 가지므로, 프로그래머는 반드시 그 값이 오버플로우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문자형과 문자열[편집] 일반적으로 "char"라 쓰는 문자 타입은 하나의 문자, 숫자, 문장 부호 혹은 제어 문자를 갖는다. 언어에 따라서 아스키 코드(ASCII) 문자를 위한 단일바이트 형과 유니코드 문자를 위한 복수바이트 형을 갖기도 한다. 문자의 조합이 문자열이다. 문자열 데이터는 숫자와 다른 숫자 기호를 가질 수 있지만 (숫자형이 아닌) 텍스트형으로 처리된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문자열은 문자의 배열(array)와 동치이나, 자바에서는 별개의 타입으로 처리된다. (파이썬과 베이직의 표기방법) 같은 그 밖의 언어에서는 별도의 문자형은 없다. 문자와 문자열을 위한 표기 방법은 따옴표로 해당 문자를 감싸는 것이 보통이다. 종종, 문자는 작은 따옴표로 문자열은 큰 따옴표로 감싼다. C에서의 문자 표기법 'A' '4' '$' '\t' (탭 문자) C에서의 문자열 표기법 "A" "Hello World" "I am 6000 years old" 숫자형 데이터의 범위[편집] 각 숫자형 데이터는 최솟값과 최댓값으로 제한된 범위를 갖는다.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는 숫자가 생긴다면 컴파일 에러나 런타임 에러를 마주하게 되거나, 운이 없다면 (버림 처리로 인한) 잘 못된 연산값을 얻게 될 것이다. 이는 사용된 언어에 따라 결정된다. 변수의 범위는 그 값을 저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이트 수에 따라 달라진다. 정수형 데이터는 일반적으로 (2의 n승) 값을 저장할 수 있으며, 여기서 n {\displaystyle n} 값은 비트수[1] 이다. 부동 소수점 값과 같은 다른 데이터형을 위한 범위는 더 복잡해지며 보다 그 값을 저장하는 방식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여기에서도 역시 모든 바이트를 사용하지 않는 데이터형이 있다. 예를 들어 불린은 (비록 일 바이트를 차지하고 나머지 일곱 비트를 낭비하긴 하지만,) 단 하나의 비트만 필요로하고 이진법 값을 표현한다. Ada와 파스칼과 같은 일부 언어에서는 정반대의 접근방식을 허용하기도 한다. 즉, 프로그래머는 숫자의 범위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밀도를 정의하고, 컴파일러는 가장 적절한 정수나 부동 소수형을 자동으로 적용한다. 같이 보기[편집] 자료형 각주[편집] ↑ 패리티 체크와 같은, 다른 용도를 위해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비트가 선점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vdeh자료형공통 비트 바이트 트리트(삼진법) 트라이트 워드 수치 정수형 고정소수점 부동소수점 Complex Bignum 구간 십진 연산 플레인 텍스트 문자 문자열 포인터 주소 참조 복합 자료형 대수적 자료형 (GADT) 배열 연관 배열 클래스 리스트 객체 옵션 타입 프로덕트 타입 레코드 집합 공용체 기타 불린 자료형 보텀형 수집 열거형 예외 처리 함수형 불투명 자료형 재귀 자료형 세마포어 스트림 톱형 타입 클래스 유닛형 Void 관련 항목 추상적 자료형 자료 구조 인터페이스 원시 자료형 파생형 탬플릿 형 구성체 다형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원시_자료형&oldid=18995526" 분류: 자료형원시 자료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EspañolMagyar日本語Қазақша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6월 28일 (수) 13:5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원시 자료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원시 자료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원시 자료형은 컴퓨터 과학에서 프로그래밍 언어가 제공하는 자료형 중 하나다. 원시형은 또한 내장형이나 기본형으로도 불린다. 언어와 그 구현에 따라서, 원시형은 메모리 상에 일대일로 대응되는 개체(Object)를 가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원시형은 언어 구조체 중 가장 빨리 연산처리 된다. 예를 들어, 정수형의 덧셈은 단 하나의 기계식 연산(machine instruction)으로 처리 될 수 있다.일부 중앙 처리 장치(CPU)는 한 번의 연산으로 문자들의 시퀀스 처리를 수행해주는 특별한 연산을 제공한다. 일부 C에서는 "'plain' int 객체는 실행 환경의 아키텍처가 제공하는 기본 사이즈를 갖는다"고 한다. 이것은 int는 32-bit 아키텍처에서는 32 bits long과 같은 사이즈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원시형의 값은 상태(state)를 공유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언어들은 프로그램에 의한 원시형의 조작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몰토크와 같은 예외적인 언어들은 프로그램 내에서 원시형을 확장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도 한다. 스몰토크에서는 원시형에 대한 연산을 추가하거나 심지어는 빌트인 연산(내장형 연산)을 재정의할 수도 있다. 목차 1 개요 2 분류 2.1 정수형 숫자 2.2 불린 2.3 부동 소수점 수 2.4 고정 소수점 수 2.5 문자형과 문자열 2.6 숫자형 데이터의 범위 3 같이 보기 4 각주 개요[편집] 실제 원시형의 범위는 프로그래밍 언어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C에서는 문자열은 조합형이지만, 베이직과 자바스크립트에서는 기본형으로 취급된다. 일반적으로 원시형은 다음과 같다. 문자 (character, char); 다양한 산술 정밀도를 갖는 정수 (integer, int, short, long, byte); 부동소수점수 (float, double, real, double precision); 다양한 정밀도와 프로그래머가 지정 가능한 크기를 갖는 고정소수점수 (fixed). 불린 '참(true)'과 '거짓(false)' 값을 갖는다. 참조 (포인터 또는 핸들로 불림), 다른 개체(Object)의 메모리상 주소를 참조하는 값. 보다 복잡한 형도 다음과 같은 원시형이 될 수 있다. 튜플: ML, 파이썬 링크드 리스트: 리스프 복소수: 포트란, C (C99), 리스프, 파이썬 유리수: 리스프 해시 테이블: 리스프, 파이썬, Lua First class function, closure, continuation: 리스프, ML와 같은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편집] 정수형 숫자[편집] 정수형은 소숫점을 제외한 모든 숫자값을 가질 수 있다. 정수형은 (음수형을 가질 수 있는) signed와 음수형을 가질 수 없는 unsigned로 구분된다. 일반적인 정수형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크기 이름 signed unsigned 8 bits Byte -128 ~ +127 0 ~ 255 16 bits Word, short int -32,768 ~ +32,767 0 ~ 65 535 32 bits Double Word, long int -2,147,483,648 ~ +2,147,483,647 0 ~ 4,294,967,295 64 bits long long (C), long (자바) –9,223,372,036,854,775,808 ~ +9,223,372,036,854,775,807 0 ~ 18,446,744,073,709,551,615 unlimited Bignum 정수를 위한 리터럴(상수)는 숫자로 이뤄진다. 거의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는 자리수를 표시하기 위해 ,(쉼표)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포트란은 내장된 공백(embedded space)을 허용하고, 펄(Perl), 루비 그리고 D는 내장된 '_(밑줄)'을 허용한다. (포트란 77과 포트란 90 이상의 버전에서는 고정 자리수를 지원한다. 하지만 포트란에서도 임의의 자리수를 지정할 수는 없다.) 음수는 숫자값 앞에 음수 기호(-)를 붙여서 표시한다. 정수형 표기법 예: 42 10000 -233000 불린[편집] 일반적으로 "bool"이나 "boolean"으로 표시되는 불린 자료형은 단일비트 타입이다. 그 값은 "true" (1) 또는 "false" (0)로 제한되어 있다. C++과 같은 몇몇 언어에서는 불린값들은 암시적으로 정수형으로 변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true + true"에 대한 연산값은 2일 수 있다. 그러나 자바와 파스칼 같은 다른 언어에서는 이러한 형변환을 허용하지 않는다. 부동 소수점 수[편집] 부동 소수점 수는 소수점 값을 포함한 실수를 표현한다. 이 숫자는 지수법, 이진법, 간혹 십진법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부동 소수점 수는 제한된 자릿수를 갖기 때문에, 모든 값은 근사적으로 표시된다. 많은 언어들은 "float"라고 부르는 single precision과 double precision 타입을 갖는다. 소수점을 포함한 부동 소수점 수를 위한 리터럴은 일반적으로 지수를 표기하기 위해서 "e"를 사용한다. 다음의 부동 소수점 표기를 참조. 20.0005 99.9 -5000.12 6.02e23 포트란 같은 일부 언어에서는 추가로 복소수(complex number) 타입을 갖는다. 이 복소수 타입은 실수부와 허수부으로 이뤄져 있다. 고정 소수점 수[편집] 고정 소수점 수는 소수 부분을 갖고 있는 실수를 표현한다. 이 수는 내부적으로 scaled-integer 폼으로, 일반적으로 이진법으로 하지만 가끔 십진법으로 저장된다. 고정 소수점 수는 오직 제한된 자릿 수만을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값은 근사적으로만 표기될 수 있다. 고정 소수점 수는 제한된 범위의 값을 가지므로, 프로그래머는 반드시 그 값이 오버플로우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문자형과 문자열[편집] 일반적으로 "char"라 쓰는 문자 타입은 하나의 문자, 숫자, 문장 부호 혹은 제어 문자를 갖는다. 언어에 따라서 아스키 코드(ASCII) 문자를 위한 단일바이트 형과 유니코드 문자를 위한 복수바이트 형을 갖기도 한다. 문자의 조합이 문자열이다. 문자열 데이터는 숫자와 다른 숫자 기호를 가질 수 있지만 (숫자형이 아닌) 텍스트형으로 처리된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문자열은 문자의 배열(array)와 동치이나, 자바에서는 별개의 타입으로 처리된다. (파이썬과 베이직의 표기방법) 같은 그 밖의 언어에서는 별도의 문자형은 없다. 문자와 문자열을 위한 표기 방법은 따옴표로 해당 문자를 감싸는 것이 보통이다. 종종, 문자는 작은 따옴표로 문자열은 큰 따옴표로 감싼다. C에서의 문자 표기법 'A' '4' '$' '\t' (탭 문자) C에서의 문자열 표기법 "A" "Hello World" "I am 6000 years old" 숫자형 데이터의 범위[편집] 각 숫자형 데이터는 최솟값과 최댓값으로 제한된 범위를 갖는다.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는 숫자가 생긴다면 컴파일 에러나 런타임 에러를 마주하게 되거나, 운이 없다면 (버림 처리로 인한) 잘 못된 연산값을 얻게 될 것이다. 이는 사용된 언어에 따라 결정된다. 변수의 범위는 그 값을 저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이트 수에 따라 달라진다. 정수형 데이터는 일반적으로 (2의 n승) 값을 저장할 수 있으며, 여기서 n {\displaystyle n} 값은 비트수[1] 이다. 부동 소수점 값과 같은 다른 데이터형을 위한 범위는 더 복잡해지며 보다 그 값을 저장하는 방식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여기에서도 역시 모든 바이트를 사용하지 않는 데이터형이 있다. 예를 들어 불린은 (비록 일 바이트를 차지하고 나머지 일곱 비트를 낭비하긴 하지만,) 단 하나의 비트만 필요로하고 이진법 값을 표현한다. Ada와 파스칼과 같은 일부 언어에서는 정반대의 접근방식을 허용하기도 한다. 즉, 프로그래머는 숫자의 범위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밀도를 정의하고, 컴파일러는 가장 적절한 정수나 부동 소수형을 자동으로 적용한다. 같이 보기[편집] 자료형 각주[편집] ↑ 패리티 체크와 같은, 다른 용도를 위해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비트가 선점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vdeh자료형공통 비트 바이트 트리트(삼진법) 트라이트 워드 수치 정수형 고정소수점 부동소수점 Complex Bignum 구간 십진 연산 플레인 텍스트 문자 문자열 포인터 주소 참조 복합 자료형 대수적 자료형 (GADT) 배열 연관 배열 클래스 리스트 객체 옵션 타입 프로덕트 타입 레코드 집합 공용체 기타 불린 자료형 보텀형 수집 열거형 예외 처리 함수형 불투명 자료형 재귀 자료형 세마포어 스트림 톱형 타입 클래스 유닛형 Void 관련 항목 추상적 자료형 자료 구조 인터페이스 원시 자료형 파생형 탬플릿 형 구성체 다형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원시_자료형&oldid=18995526" 분류: 자료형원시 자료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EspañolMagyar日本語Қазақша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6월 28일 (수) 13:5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솜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솜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솜 전투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솜 전투 중 영국군 체셔 연대의 참호날짜1916년 7월 1일 ~ 11월 18일장소프랑스의 솜, 피카르디결과 연합국의 승리교전국 프랑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버뮤다 인도 제국 남로디지아 뉴펀들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독일 제국지휘관 조제프 조프르 페르디낭 포슈 에밀 파욜레 조제프 미셸러 더글러스 헤이그 헨리 로린슨 휴버르트 고흐 바이에른 왕자 루프레츠트 막스 폰 갈비츠프리츠 폰 뷜로프병력 시작 - 영국군 13개 사단, 프랑스군 11개 사단 종료 - 영국군 51개 사단, 프랑스군 48개 사단 시작 - 10.5개 사단 종료 - 50개 사단 vdeh서부 전선 1914년 벨기에 하엘렌 리에주 디낭 나뮈르 공성전 국경지대 샤를루아 몽스 대후퇴 1차 마른 1차 엔 안트베르펜 바다로의 경주 이제르 1차 이프르 동계 작전 1차 아르투아 1차 샹파뉴 1915년 하르트만스바일러코프 누브샤펠 2차 이프르 2차 아르투아 2차 샹파뉴 루스 3차 아르투아 1916년 베르됭 솜 1917년 아라스 2차 엔 3차 샹파뉴 메신 3차 이프르 니벨 공세 라말메종 1차 캉브레 1918년 춘계 공세 미카엘 작전 4차 이프르 3차 엔 벨로 숲 아멜 2차 마른 100일 공세 아미앵 2차 솜 스카르페 몽생퀴엔틴 아브린쿠르 생미히엘 이페이 뒤노르 생퀴엔틴 뫼즈-아르곤 5차 이프르 2차 캉브레 쿠르트레 셀 발랑시엔 2차 상브르 1916년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는 전투 첫날 58,000여명에 달하는 영국군 사상자(그때까지 하루 사상자 기록으로는 최고 기록이었으며 이 중 3분의 1이 전사자였다)로 인해 잘 알려진 전투다. 이 전투는 1916년 7월 1일 아라스와 알메르트 사이의 솜 강 북쪽 30km에 걸친 전선에서 시작되어 11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목차 1 배경 2 전투 경과 3 희생자 4 출처 배경[편집] 원래 전투는 1915년말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합동작전으로 계획되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군 최고사령관 조제프 조프르에 의해 입안되었는데 영토 탈환보다는 독일의 예비 병력을 소모시켜 독일군의 전체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소모전의 목적을 띠고 계획되었다. 이 계획은 1915년 12월 19일에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더글러스 헤이그가 동의하였고 그는 영국정부에 1916년의 이 대규모 공세에 대한 허가를 받아낸다. 이 전투를 위해 영국군은 공격을 위한 부대를 편성하였고 프랑스군과 더불어 우세한 병력과 장비를 집중시켜 공격에 나서려고 했으나 독일의 베르됭 전투로 인해 많은 프랑스군의 대부분이 이 지역으로 파견되어 원래와는 다른 성격을 띤 전투를 치르게 된다. 결국 작전은 변경되고 프랑스측의 요구로 8월 1일로 계획되었던 작전이 7월 1일로 당겨지게 된다. 이는 베르됭에 대한 독일의 압박을 줄이기 위한 의도였다. 헤이그는 조프르로부터 이 작전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는다. 헤이그는 꼼꼼하게 작전준비를 준비하고 선봉부대 지휘관인 롤리손 장군과 함께 세부 작전을 수립한다. 전투 경과[편집] 솜 전투 진행도. 1916년 1월 ~11월 6월 26일 독일군 진지에 대한 5일 동안의 영국군의 대규모 포격으로 작전이 시작된다. 이는 독일이 베르됭 공격에서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포격으로 독일군 병력을 괴멸시킨 뒤 보병을 무인지대를 거쳐 적의 참호로 돌격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특히 주안점은 기관총과 철조망의 제거였다. 이 포격에는 영국군의 1,500문의 대포가 동원되었고 거의 비슷한 숫자의 프랑스군 대포도 합세하였다. 대규모 포격 뒤에 보병의 돌격이 시작되었고 포병의 지원사격이 계속되었다. 이는 보병이 첫 번째 독일군 참호라인으로 돌격하는 동안 포병은 2번째 세 번째의 방어선을 포격하는 형식으로 영국 포병은 잘 짜인 통신망과 관측으로 정확하게 포격을 계속하였다. 즉 전방의 전선상황에 따라 계속 포격의 대상을 바꾼 것이었다. 작전 지역 서쪽은 헨리 롤리손의 이러한 대규모 포격 진격전의 결과로 중앙부의 헤이그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들은 어느 정도 전진한 뒤 그 곳의 진지를 강화했다. 롤리손의 부대는 이 작전을 위해 많은 보급품과 전투 물자를 투입한다. 그러는 동안 영국 제4군의 나머지부대가 있는 북쪽에서는 제3군의 1개 군단이 합류한 뒤 기병 돌격전과 함께 독일 전선 돌파를 위해 돌격한다. 뉴펀들랜드군 병사 또한 헤이그의 후위에 있던 7 왕립경기병대가 독일군의 라인을 분리시키기기 위해 돌격하고 같은 시간 남쪽의 프랑스 제6군의 1개 군단이 작전계획대로 전진을 시작한다. 27개 사단이 이 전투에 동원되었고 그 중 80%가 영국군이었다. 연합국은 750,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그에 비해 독일군은 제2군 예하의 16개 사단이 전부였다. 이는 명확히 연합군에게 우세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의 대규모 포격은 독일군의 잘짜여진 철조망과 견고하게 지어진 벙커들을 파괴하는 데 실패하였고 결국 연합국은 많은 수의 포탄을 낭비한 결과만을 초래한다.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포탄에 불발탄이 많이 발생했다. 뇌관의 문제도 있었지만, 지상에 떨어진 포탄이 충격으로 뇌관이 작동하여 터지기에는 너무 물렁해서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간 채 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서부전선의 농부들은 이때의 벙커나 전투 흔적을 발견할 정도로 잘 구축된 방어선이었다. 연합군의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독일군들은 벙커나 방공호에 숨어있었고 연합국은 엄청난 포격으로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데 실패하게 된다. 7월 1일 아침 7시 30분 대규모 17개의 지하 부설 지뢰 폭파와 함께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데 사실 최초의 지뢰폭파는 10분 전인 7시20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뢰 폭파를 통한 공격방식은 오늘날에도 보인다. 7월 1일, 영국군 보병대의 공격 방향 첫 번째 대규모 돌격이 감행되었고 사실 이는 독일군들에게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독일군들은 지난 8일간의 포격으로 이미 연합국의 대공세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 대규모 포격의 실패로 인해 영국군은 첫 주 동안 아주 짧은 구간의 전진만을 성공시킨다. 무엇보다 내심 제거되었을 것으로 기대했던 철조망 지대와 기관총 진지들이 상당수가 여전히 포격 전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사실 보다 성공적인 돌격은 남부라인의 끝자락에 위치한 프랑스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랑스군은 돌격전 몇시간 포격을 계속하였고 갑작스런 기습으로 독일군을 혼란에 빠트린 것이다. 또한 독일군들은 베르됭에서의 엄청난 피해로인해 프랑스군이 대규모 공격을 이지역에서 감행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전투 초반 그들의 계획을 거의 모두 달성한다. 하지만 영국군은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원래의 진지로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또 많은 수의 보병들이 느린 속도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향해 전진하였는데 이는 독일 기관총 사수들에게 좋은 표적이 될 뿐이었다. 따라서 많은 영국군이 무인지대에서 전사한다. 첫날의 58,000명에 달하는 영국군 희생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다음날 다시 진격을 명령한다. 이는 성공하긴 하지만 많은 피해와 함께 결국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진 못한다. 아무튼 7월11일 영국군은 독일의 첫 번째 방어 진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날 독일군은 베르됭전투에서 15개 사단을 이 지역으로 보내 방어를 강화한다. 독일군의 시체 7월 19일 지역의 독일군은 재편되고 방어를 더욱 강화하게된다. 헤이그는 이 공세를 여름을 지나 11월까지 계속하게 된다. 비록 독일군의 포지어 장군을 사로잡는 등의 몇번의 괄목한만한 성과도 있었지만 전선은 다시 고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9월 초순 프랑스 제10군이 이 공세에 합류하고 산발적인 공세를 계속한다. 특히 후반에는 전차가 전선에 등장해 영국군의 15개 사단에서 이 탱크를 사용하게 된다. 이 첫 번째 탱크의 등장은 처음에 50대로 시작하였는데 기관총 중대에 배속되어 3, 4소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9월 솜에 도착하는데 기계적 결함과 고장으로 인해 탱크의 숫자는 24대로 줄어있었다. 이 탱크의 등장은 독일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활약도 했지만 이 초반의 탱크들은 많은 결함과 고장으로 그리 신뢰받지는 못하였다. 9월 15일 처음으로 탱크가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 날의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로윌슨의 부대는 프랑스의 제6군이 영국 주력의 우익으로터 독일군의 공세를 막으며 이를 격파하는동안 전 참호를 돌파하는 데 성공한다. 그동안 캐나다군은 그들의 7대의 전차와 함께 Courcelette를 점령하고 제15스코틀랜드 사단은 Martinpuich를 점령한다. 이는 모두 탱크의 활약에 힘입는다. 그러나 동남부에서는 독일군들에게 탱크를 노획당하기도 한다. 9월 25일에서 27일사이 헤이그는 새로운 공세를 시작한다. 그 후 영국군은 여러번의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 성과는 그리 크지 못했다. 프랑스군도 이 공세에 가담한다. 프랑스의 조프르 장군은 헤이그에게 공세를 계속할 것을 주문하는데 이 당시 프랑스군은 베르됭에서 공격을 계속해 잃은 땅을 계속해서 되찾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공세의 중단으로 솜의 독일군이 베르됭으로 다시 배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1월 13일 영국군은 마지막 공세를 취해 독일군의 Beaumont Hamel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솜전투는 11월 18일 폭설로 인해 중단된다. 희생자[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솜 전투 이 공세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군은 15km의 전진을 하게 되는데 이 땅을 위해 42만 명의 영국군과 20만 명의 프랑스군이 다치거나 전사하고 독일군도 5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기록한다. 구체적인 수치는 다음과 같다. 국가 총 사상자 전사 / 실종 포로 영국 360,000명 이상 - - 캐나다 25,000명 - - 오스트레일리아 23,000명   < 200 뉴질랜드 7,408명 - - 남아프리카 연방 3,000명 이상 - - 뉴펀들랜드 자치령 2,000명 + - - 소계 419,654명 95,675명 - 프랑스 204,253명 50,756명 - 연합군 총계 623,907명 146,431명 - 독일 제국 465,000명 ~ 600,000명 164,055명 31,000명 출처[편집] Books Bond,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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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LC 439730254. 2009년 9월 9일에 확인함.  vdeh제1차 세계 대전 국내 전선 전장유럽 전구 발칸반도 전선 서부 전선 동부 전선 이탈리아 전선 중동 전역 갈리폴리 전역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 캅카스 전역 메소포타미아 전역 페르시아 전역 남아라비아 전역 아프리카 전구 남서아프리카 전역 서아프리카 전역 동아프리카 전역 북아프리카 전역 아시아-태평양 전역 칭다오 전투 독일령 사모아 해상 전역 대서양 지중해 북해 발트해 남반구 해전 코코스 제도 코로넬 포클랜드 참전국(주요 인물)협상국 아르메니아 브라질 중화민국 프랑스 식민 제국 프랑스 알제리 튀니지 베트남 벨기에 대영제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인도 뉴질랜드 뉴펀들랜드 자치령 남아프리카 남로디지아 영국 그리스 이탈리아 일본 몬테네그로 포르투갈 루마니아 러시아 제국 (1914년~1917년) 러시아 공화국 (1917년) 세르비아 시암 미국 동맹국 독일 제국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독일령 카메룬 토골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자발 샴마르 토후국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 연표전쟁 이전 충돌 아프리카 분할 (1880년~1914년) 러일 전쟁 (1905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1906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1912년) 프랑스의 모로코 점령 (1911년~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서막 원인 사라예보 사건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 7월 위기 1914년 가을 국경 전투 세르 전투 1차 마른 전투 칭다오 전투 타넨베르크 전투 갈리치아 전투 1차 마수리아 호 전투 콜루바라 전투 사리카미스 전투 바다로의 경주 1차 이프르 전투 1915년 2차 마수리아 호 전투 2차 이프르 전투 갈리폴리 전투 이손초 전투 러시아의 대후퇴 2차 샹파뉴 전투 코보소 공세 쿠트 포위전 루스 전투 1916년 에르주룸 공세 베르됭 전투 나로흐 호 공세 트렌티노 공세 유틀란트 해전 솜 전투 브루실로프 공세 바라노비치 공세 로마니 전투 모나스티르 공세 트란실바니아 전투 1917년 바그다드 전투 1차 가자 전투 2차 아라스 전투 케렌스키 공세 3차 이프르 전투 (파스샹달) 마라세스티 전투 카포레토 전투 남부 팔레스타인 공세 캄브라이 전투 에르진잔 휴전 1918년 파우스트시량 작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춘계 공세 2차 마른 전투 바쿠 전투 100일 공세 바르다르 공세 메기도 전투 3차 트랜스요르단 공격 뫼즈-아라곤 공세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알레포 전투 무드로스 휴전 빌라 지우스티 휴전 콩피에뉴 휴전 기타 충돌 멕시코 혁명 (1910년~1920년) 소말릴란드 전역 (1910년~1920년) 리비아 레지스탕스 운동 (1911년~1943년) 마리츠 반란 (1914년~1915년) 자이안 전쟁 (1914년~1921년) 힌두-게르만계의 음모 (1914년~1919년) 세누시 전역 (1915년~1916년) 볼타-바니 전쟁 1915년~1917년 부활절 봉기 (1916년) 영국-이집트의 다르푸르 탐험 (1916년) 카오첸 봉기 (1916년~1917년) 러시아 혁명 (1917년) 핀란드 내전 (1918년) 전후 충돌 러시아 내전 (1917년~1921년)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전쟁 (1917년~1921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1918년~1920년) 조지아-아르메니아 전쟁 (1918년) 독일 11월 혁명 (1918년~1919년) 헝가리 혁명과 개입 (1918년~1920년) 루마니아-헝가리 전쟁 (1918년~1919년) 폴란드 대봉기 (1918~1919년)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1918년~1920년) 라트비아 독립 전쟁 (1918년~1920년)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 (1918년~1920년)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919년) 이집트 혁명 (1919년)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1918년~1919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1919년~1921년) 아일랜드 독립 전쟁 (1919년~1921년) 터키 독립 전쟁 그리스-터키 전쟁 (1919년~1923년) 아르메니아-터키 전쟁 (1920년) 이라크 봉기 (192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1920년) 블로라 전쟁 (1920년) 시리아-프랑스 전쟁 (1920년) 조지아-소비에트 전쟁 (1921년) 아일랜드 내전 (1922년~1923년) 양상개발 슐리펜 계획 (독일) 17번 계획 (프랑스) 전투 교전 해상 전역 호송 전단 공중전 암호 말의 이용 화학전 철도 전략 폭격 기술 발전 참호전 총력전 크리스마스 정전 최후의 참전용사 여파잔혹 행위포로 사상자 경제 역사 스페인 독감 칼리시 파괴 벨기에의 강간 독일의 벨기에 점령기 독일의 룩셈부르크 점령기 독일의 러시아 점령기 오스만 사상자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아시리아 집단학살 그리스 집단학살 독일 봉쇄 여성 (오스트레일리아) 대중 문화 미국의 독일인 전쟁 포로 협정 오스만 제국의 분할 사이크스 피코 협정 셍진드마우리네 협성 프랑스-아르메니아 협정 다마스쿠스 협약 파리 강화 회의 베니젤로스-티토니 협정 조약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로잔 조약 런던 조약 뇌이 조약 생제르맹 조약 세브르 조약 트리아농 조약 베르사유 조약 결과 여파 14개조 평화 원칙 국제 연맹 제1차 세계 대전 추도 100주년 추도 기념 행사 분류 위키낱말사전 문서 위키책 문서 위키인용집 문서 위키문헌 문서 위키공용의 그림과 동영상 위키뉴스 문서 전거 통제 LCCN: sh85124800 GND: 4181782-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솜_전투&oldid=24510179" 분류: 1916년 분쟁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투프랑스의 전투영국의 전투뉴질랜드의 전투오스트레일리아의 전투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투캐나다의 전투독일의 전투1916년 프랑스1916년 11월솜주의 역사숨은 분류: 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eilgeGàidhlig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1일 (월) 19: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리사 켈리 (방송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리사 켈리 (방송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리사 켈리 국적 미국 출생 1979년 (39–40세) 활동 기간 1997년 ~ 현재 종교 개신교(침례회) 데뷔작 1997년 EBS 《Hello English》 리사 켈리(Lisa Kelley, 1979년 ~ )는 한국계 미국인 영어 강사이자 방송인이다. 목차 1 생애 2 약력 3 경력 3.1 안내방송 3.2 기타 4 저서 5 같이 보기 6 인용 및 각주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미국인 아버지와 대한민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미국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이던 1992년에 우연찮게 모델을 하게 된 것이 방송 활동의 시작이었다고 한다[1]. 영어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약력[편집] 한국철도공사 일반열차 차내 안내방송 출발 안내방송 Welcome aboard the ○○○ Train. Departing for ○○. The train will soon be departing. Please make sure you have correct tickets for this train. Thank you.[2] 도착 안내방송 We will soon be arriving at ○○ Station. Please make sure you have all your belongings with you. When leaving the train. Thank you.[3] 종착 안내방송 We will soon be arriving at ○○ Station. The final destination of this train. Please make sure you have all your belongings with you. When leaving the train. Thank you for traveling with KORAIL.[4] 그 외 한국철도공사의 KTX 영어 안내방송도 담당하고 있다.참고로 KTX 한국인 성우는 고구인 성우이다 경력[편집] 안내방송[편집] 코레일 일반열차 차내 안내방송 (2014년 ~ 현재) 서울메트로 차내 안내방송 (2002년 ~ 2003년) 부산교통공사 승강장 안내방송 (2011년~ 2016년) 서울메트로 차내 안내방송 (2002년 ~ 2003년) 서울교통공사, 코레일 승강장 안내방송 (2011년 ~ 2017년) 아시아나항공 기내 안전수칙 안내방송 기타[편집] 《English Cafe》(EBS) - 발음 교정 담당 및 진행자 《Kid's Quiz Camp》(EBS) 《Vocabulary 마법사》(EBS) 《Go Go Giggles》(EBS) 《Kid’s Talk Talk "Storytime"》(SkyLife) 《Hello English》(EBS) 《Magic English》(EBS) 《수능 포트리스》(EBS) 《포포의 알파벳 세상》(JEI 재능방송) 《Evening Groove》(아리랑 라디오) 《Travel Bug》(아리랑 라디오) 《Venture Plaza》(아리랑 TV) 《Let's Speak Korean》(아리랑 TV) - 진행자 《Morning Special》(EBS) - 2부 진행자 《생방송 아침햇살》(TBS) - 1부 진행자 2008년 '제 1회 부산국제광고제' 폐막식 사회자[5] 아리랑 TV 뉴스 진행 및 리포터 《챌린지 퀴즈챔프》(제주방송-KCTV제주) 《국민행복시대》(KTV) 《KTV 10》(KTV) 저서[편집] 《Have Fun in California》 문단열의 영어 회화 과외방 같이 보기[편집] 제니퍼 클라이드(Jennifer Clyde) 제니퍼 영 위스너(Jennifer Young Wisner) 김디에나(Deanna Yong Hendrickson, Kim Deanna) 리아(Leah Kim Thompson) 인용 및 각주[편집] ↑ “큰 소리로 반복해 연습하세요”. 중앙일보. 2007년 3월 6일. 2009년 10월 19일에 확인함.  ↑ 이 안내의 한글 성우는 조예신이다. ↑ 이 안내의 한글 성우는 조예신이다. ↑ 이 안내의 한글 성우는 조예신이다. ↑ “'제 1회 부산국제광고제' 24일 성황리에 폐막”. 연합뉴스. 2008년 11월 3일. 2009년 11월 16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EBS Morning Special 홈페이지 이 글은 성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방송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리사_켈리_(방송인)&oldid=24227714" 분류: 197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한국계 미국인대한민국의 방송인미국의 침례교도대한민국에 거주한 미국인비디오 자키대한민국의 학원 강사숨은 분류: 성우에 관한 토막글방송인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5일 (수) 21: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익현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익현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익현군 이련(翼峴君 李璉, 1431년 ~ 1463년 5월 4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서자이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지(光之)이다. 다른 이름은 이관(李璭)이다. 목차 1 생애 1.1 사후 2 가족관계 3 출처 생애[편집] 세종의 14남으로, 생모는 신빈 김씨(愼嬪 金氏)이며, 아내는 김제군부인 평양 조씨(金堤郡夫人 平壤 趙氏)이다. 아들 괴산군 강회공 지(槐山君 康懷公 漬)과 딸 이씨 등 1남 1녀를 낳았다. 성격이 윗사람의 뜻을 잘 맞추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을 도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정되었다. 1456년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을 공신에게 종으로 나눠줄 때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 등을 받았다. 1458년에는 병석에 누웠는데 세조가 내의(內醫) 김길호(金吉浩)를 남양(南陽)에 보내 그를 간호하게 했다. 형 계양군 증(桂陽君 璔)과 더불어 간사한 사람들과 어울려 술꾼이 되어 밤에는 여염집에서 창기(娼妓)를 불러 술을 자주 마시다가 술병을 얻어 죽었다.[1] 죽기 전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다. 이때 세조는 '이것은 모두 계양군(桂陽君)의 허물이다. 의창군(義昌君)이 술로써 죽었는데, 익현군(翼峴君)도 또한 술로써 죽으니 매우 슬프다.' 하였다. 사후[편집] 바로 시호를 충성(忠成)이라 하고, 조회를 2일간 철조하였다 한다. 가족관계[편집] 모 : 신빈 김씨(愼嬪金氏) 형 : 계양군 증 (桂陽君 璔, 1427년-1464년) 형 : 의창군 공 (義昌君 玒, 1428년-1460년) 형 : 밀성군 침 (密城君 琛, 1430년-1479년) 동생 : 영해군 당 (寧海君 瑭, 1435년-1477년) 동생 : 담양군 거 (潭陽君 璖, 1439년-1450년) 정부인 : 김제군부인 평양 조씨(金堤郡夫人 平壤趙氏) - 소윤 증찬성 조철산(趙鐵山)의 딸 장남 : 괴산군 강회공 지(槐山君 康懷公 李漬, ?-1467년 6월 10일) 장녀 출처[편집]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익현군 vdeh조선과 대한제국의 왕자/황자 목록추존왕 목조 소생 안천대군 어선 안원대군 진 안풍대군 정 익조 행리 안창대군 매불 안흥대군 구수 추존왕 익조 소생 함녕대군 안 함창대군 장 함원대군 송 도조 춘 함천대군 원 함릉대군 고태 함양대군 전 함성대군 응거 추존왕 도조 소생 완창대군 자흥 환조 자춘 완원대군 자선 완천대군 평 완성대군 종 이완자불화 이나해 추존왕 환조 소생 태조 성계 완풍대군 원계 영성대군 천계 의안대군 화 태조 소생 진안대군 방우 영안대군 방과 → 정종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정안대군 방원 → 태종 덕안대군 방연 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정종 소생 의평군 원생 순평군 군생 금평군 의생 선성군 무생 종의군 귀생 진남군 종생 수도군 덕생 임언군 녹생 석보군 복생 덕천군 후생 임성군 호생 도평군 말생 장천군 보생 정석군 융생 무림군 선생 태종 소생 양녕대군 제 효령대군 보 충녕대군 도 → 세종 성녕대군 종 경녕군 비 함녕군 인 온녕군 정 익녕군 치 근녕군 농 희령군 타 후령군 간 혜령군 지 세종 소생 왕세자 향 → 문종 수양대군 유 → 세조 안평대군 용 임영대군 구 광평대군 여 금성대군 유 평원대군 임 영응대군 염 화의군 영 계양군 증 의창군 공 밀성군 침 익현군 연 영해군 당 담양군 거 한남군 어 수춘군 현 영풍군 전 문종 소생 왕세자 홍위 → 단종 단종 소생세조 소생 의경세자 장 → 추존왕 덕종 해양대군 황 → 예종 덕원군 서 창원군 성 추존왕 덕종 소생 월산대군 정 잘산대군 혈 → 성종 예종 소생 인성대군 분 제안대군 현 성종 소생 왕세자 융 → 연산군 진성대군 역 → 중종 무산군 종 안양군 항 봉안군 봉 전성군 변 계성군 순 완원군 수 회산군 념 견성군 돈 익양군 회 경명군 침 운천군 인 양원군 희 이성군 관 영산군 전 연산군 소생 폐세자 황 창녕대군 성 이인수 이영수 이총수 양평군 인 이돈수 중종 소생 왕세자 호 → 인종 경원대군 환 → 명종 복성군 미 금원군 영 봉성군 완 영양군 거 덕흥군 초 → 덕흥대원군 해안군 희 덕양군 기 인종 소생명종 소생 순회세자 부 선조(양자) 선조 소생 영창대군 의 임해군 진 광해군 혼 의안군 성 신성군 후 정원군 부 → 추존왕 원종 의창군 광 순화군 보 인성군 공 인흥군 영 경창군 주 흥안군 제 경평군 늑 영성군 계 광해군 소생 폐세자 지 추존왕 원종 소생 능양대군 종 → 인조 능원대군 보 능창대군 전 능풍군 명 인조 소생 소현세자 왕 봉림대군 호 → 효종 인평대군 요 용성대군 곤 숭선군 징 낙선군 숙 효종 소생 왕세자 연 → 현종 현종 소생 왕세자 순 → 숙종 숙종 소생 왕세자 균 → 경종 성수 영수 연잉군 금 → 영조 연령군 훤 경종 소생영조 소생 효장세자 행 → 추존왕 진종 장헌세자 선 → 추존왕 장조 추존왕 진종 소생 정조(양자) 추존왕 장조 소생 의소세손 정 왕세손 산 → 정조 은언군 인 은신군 진 은전군 찬 정조 소생 문효세자 순 왕세자 공 → 순조 상계군 담(양자) 순조 소생 효명세자 영 → 추존왕 문조 철종(양자) 추존왕 문조 소생 왕세손 환 → 헌종 고종(양자) 헌종 소생철종 소생 원자 융준 고종 소생 왕세자 척 → 순종 완친왕 선 의친왕 강 의민황태자 은 순종 소생의민황태자 소생 원손 진 왕세자 구 이 글은 조선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익현군&oldid=24499350" 분류: 1431년 태어남1463년 죽음조선의 왕자조선의 왕족조선 세종조선 세조전주 이씨조선의 공신알콜 독으로 죽은 사람숨은 분류: 조선에 관한 토막글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29일 (토) 15: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목차 1 연도별 시험 목록 1.1 5차 교육과정 (1994학년도~1998학년도) 1.1.1 1994학년도 1.1.2 1995학년도 1.1.3 1996학년도 1.1.4 1997학년도 1.1.5 1998학년도 1.2 6차 교육과정 (1999학년도~2004학년도) 1.2.1 1999학년도 1.2.2 2000학년도 1.2.3 2001학년도 1.2.4 2002학년도 1.2.5 2003학년도 1.2.6 2004학년도 1.3 7차 교육과정 (2005학년도~2011학년도) 1.3.1 2005학년도 1.3.2 2006학년도 1.3.3 2007학년도 1.3.4 2008학년도 1.3.5 2009학년도 1.3.6 2010학년도 1.3.7 2011학년도 1.4 2007 개정 교육과정 (2012학년도~2016학년도) 1.4.1 2012학년도 1.4.2 2013학년도 1.4.3 2014학년도 1.4.4 2015학년도 1.4.5 2016학년도 1.5 2009 개정 교육과정 (2017학년도~) 1.5.1 2017학년도 1.5.2 2018학년도 1.5.3 2019학년도 2 예정된 시험 목록 2.1 2020학년도 2.2 2021학년도 3 각주 3.1 내용주 3.2 참조주 연도별 시험 목록[편집] 5차 교육과정 (1994학년도~1998학년도)[편집] 1994학년도[편집] 위키책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1994학년도 1차 대학수학능력시험 1993년 8월 20일 금요일과 11월 16일 화요일, 시험을 두 번 시행했다. 1982학년도부터 전년도(1993학년도)까지 시행되었던 학력고사의 문제 유형과는 상당히 차별화된 유형을 선보였다. 당시에는 문과, 이과 구분과 선택 과목 없이, 모든 수험생이 똑같은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2회 시행에 따른 난이도 조정 실패라는 문제점이 노출되어 다음 년도부터는 연 1회의 시험만 시행하게 되었다. 당시 영역별 배점은 언어 60, 수리탐구Ⅰ 40, 수리탐구Ⅱ 60(사탐 27/과탐 33), 외국어 40이었으며, 총 200점 만점이었다. 성적은 각각 9월 23일, 12월 20일에 통지되었다. 당시 1차 수능에서 대구 성광고등학교 배호필 학생이 198점(200점 만점)을 획득,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당시 2차 수능에서 서울과학고등학교 윤건수 학생이 191점(200점 만점)을 획득, 최고 성적을 차지하였다. 1995학년도[편집] 1994년 11월 23일에 시행했다. 이 수능부터 2006학년도 수능까지 수능은 수요일에 치뤄졌다. 19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전년도에 실시된 시험과 달리 단 1회만 시행하였다. 또 이 해부터 계열별 분리 출제가 이루어졌다. 언어 영역과 외국어(영어) 영역은 계열에 관계 없이 공통 출제하였고, 수리 영역과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에서는 약 25% 정도가 계열별로 구분 출제되었다. 계열별 출제로는 인문계에 사회문화, 세계지리, 자연계에 수학Ⅱ, 물리, 화학이 추가되었다. 또한, 문항당 배점을 다양화하여 언어 영역과 수리 · 탐구 영역Ⅱ는 0.8, 1, 1.2점, 수리 · 탐구 영역Ⅰ은 1, 1.5, 2점, 외국어(영어) 영역은 0.6, 0.8, 1점으로 하였다.[1] 성적은 12월 21일에 통지되었다. 당시 부산과학고등학교(현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정성택 학생이 194점(200점 만점)을 획득, 전체 수석을 차지하였으며,[2] 수험번호를 잘못 부여하는 행정 착오로 수험생의 성적이 뒤바뀌어 통보되는 '해프닝'도 있었다.[3] 1996학년도[편집] 1995년 11월 22일에 시행했다. 본고사 체제하의 마지막 수능이자, 200점 만점 체제하의 마지막 수능이다. 성적은 12월 22일에 통지되었다.[4] 당시 전국수석을 차지하여 자연계열에 응시한 서울과학고등학교 이정원 학생이었다. 1997학년도[편집] 1996년 11월 13일에 시행했다.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1994학년도부터 전년도(1996학년도)까지 시행되었던 대학 본고사가 폐지되고 수시모집이 신설되었기 때문에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수능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다. 또한 전년도(1996학년도)의 배점이 200점 만점에 언어 60, 수리탐구 Ⅰ 40, 수리탐구 Ⅱ 60, 외국어 40 이었던 데 반면 1997학년도부터는 총점이 두 배인 400점 만점으로 늘어났고, 각 과목당 배점 역시 두배로 늘어났다. 그외에도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작된 이래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까지 치뤄진 13차례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시험이었다.[5] 수능 최초로 수리탐구Ⅰ 영역에서 주관식 단답형 문제가 출제[6] 되고, 외국어 영역 듣기평가도 종전 10문제에서 17문제로 늘어났으며, 시사적인 내용을 다루는 문제나 여러 교과가 연결된 통합교과형 문제가 다량 출제[7]되어 특히 상위권에서 점수폭 하락이 컸다[6]. 당시 자연계열로 응시해 400점 만점에 373.3점을 획득한, 제주 대기고등학교 서준호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고, 당시 자연계열 응시해 364.1점을 획득한, 서울 한성과학고등학교 나정임 학생이 자연계 여자 전체차석을 차지하였으며, 당시 인문계열에 응시해 314.1점을 획득한, 서울 신목고등학교 신상영 학생이 전국 차석을 차지하였으며, 성적은 12월 7일에 통지되었다. 1998학년도[편집] 1997년 11월 19일에 시행했다. 이 날은 대한민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기로 결정된 날이기도 하다. 또한 5차 교육과정에 따른 마지막 수능이자 국립교육평가원(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한 마지막 수능이었으며, 전체적으로 수능 응시인원이 이전에 치뤄진 수능들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전까지 치러진 역대 수능들보다 훨씬 쉬웠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만점자는 나오지 않았다. 성적은 12월 20일에 통지되었다. 6차 교육과정 (1999학년도~2004학년도)[편집] 1999학년도[편집] 1998년 11월 18일에 시행했다. 처음으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주관한 시험이며, 6차 교육과정에 따른 최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상대적으로 입시에서 수학의 비중이 낮은 예·체능계 학생을 위한 수리·탐구 Ⅰ 영역에 예·체능계를 추가했다. 또한 인문계와 자연계에 한해, 수리·탐구 Ⅱ 영역에 선택과목 제도[주 1]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표준점수제도 같이 도입되었다. 19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문제를 쉽게 내는 출제경향이 이어져 전년도보다 쉽게 출제되었으며,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최초로 만점(당시 400점)자가 배출되었다. 만점자는 당시 한성과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오승은 학생이었다.[8] 최초의 대입수능시험 만점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당시 오승은 학생의 이름을 딴 수능 시험 참고서 등이 많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2000학년도[편집] 1999년 11월 17일에 시행했다.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많았던 시험이다. 성적은 12월 17일에 통지되었으며,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사상 2번째 만점자가 배출되었다.[8] 만점자는 당시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혜진 학생이었다.[9] 2001학년도[편집] 2000년 11월 15일에 시행했다. 난이도가 전년도에 비해 굉장히 많이 하락했던 대표적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세간에서 "물수능"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매우 쉬운 난이도를 보였다. 당시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자가 66명이나 배출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N수생들이 서울, 수도권 대학에 낙방하는 기이한 일도 발생하였다. 특히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최초로 대학수학능력시험 만점자가 내신과 제2외국어영역 변환표준점수 상의 불이익으로 서울대학교의 특차전형에 떨어지는 일도 발생하였다.[10]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사회적 목적과 기능, 난이도와 관련해 진보 보수 진영의 입장이 양분되어 당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수학 등의 과목에서 쉬운 문제에 높은 배점을 하고, 어려운 문제에 낮은 배점을 하는 소위 '역배점'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11] 또한,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제2외국어 영역[주 2]이 추가된 최초의 수능시험이다. 성적은 12월 12일에 통지되었다. 2002학년도[편집] 2001년 11월 7일에 시행했다. 6차 교육과정 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험이며, 난이도가 대폭 하락했던 전년도와 달리 이번에는 난이도가 매우 높아져서 세간에서 '불수능'이라는 별칭을 붙인 수능시험이었다. 1997학년도 이후 가장 어려운 수능이었다. 그 여파로 2002학년도부터 2008학년도까지 만점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수능 응시인원이 많이 줄었으며, 전체 수험생의 평균점수가 66.5점, 상위 50%가 66.8점으로 폭락하였다. 한편, 수능시험의 특차 전형이 폐지되었으며, 총점 대신 수능 9등급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당시 수능을 치루었던 학생들은 특정 분야만 우수하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의 정책에 피해를 입었다며 자신들을 '이해찬 세대'로 명명하기도 했다. 성적은 12월 3일에 통지되었다. 전국수석을 차지하여 자연계열에 응시한 대구 덕원고등학교 재수생인 박기범 학생, 인문계에 수석을 차지한 익산 남성고등학교 윤석준 학생이었다. 2003학년도[편집] 2002년 11월 6일에 시행했다. 2003학년도 수능까지는 수험생에게는 원점수만 소수점까지 표기해 통보하고 대학에는 수험생의 원점수, 표준점수, 백분위점수 등을 모두 반올림해 제공했다가 점수 역전 현상으로 인한 당락의 역전 현상이 발생하여 당시 사회적 문제가 되어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2004학년도부터는 소수점 배점 문제가 모두 폐지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인 2007년, 대법원은 수능 점수 반올림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및 평가원의 재량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판결하였다.[12] 한편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인문계열 전국차석, 전체여자수석을 392.3점을 차지한 경기 안성 안법고등학교 우아라 학생, 전국 수석을 차지하여 응시한 서현고등학교 윤재희 학생이었다. 2004학년도[편집] 2003년 11월 5일에 시행했다. 6차 교육과정 마지막 수능이였으며, 역대 수능시험 사상 복수정답이 인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당시 원장 이종승)은 언어영역 17번 문제의 복수정답(기존의 정답은 3번이었으나 5번도 정답으로 인정)을 인정했으며, 또한 수능시험 출제자 명단이 사전에 유출되는 파문이 일어나 수능 관리 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가 빗발쳤으며, 예상 문제가 그대로 출제된 논란도 있었다.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전국 수석은 청석고등학교 재수생인 채희동 학생이었다. 한편, 2004년 7월 28일 처음의 정답 3번을 선택했던 수험생 460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낸 복수정답 인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13] 또한, 전년도에 있었던 소숫점 배점 논란으로 인해, 이 수능부터 배점을 정수로만 매긴다. 7차 교육과정 (2005학년도~2011학년도)[편집] 2005학년도[편집] 2004년 11월 17일에 시행했다. 2005학년도 수능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 이유는 7차 교육과정에 따른 최초의 수능 시험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로는 점수 배점으로, 기존의 영역별 120, 80, 120, 80, 400점 만점의 제도에서 100, 100, 100, 50(과목별), 500점 만점으로 변경되었고, 표준 점수는 그 배로 하며(기존에는 440점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음), 표준편차를 20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선택제 수능의 도입으로 인해 성적표에도 원점수를 없애고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으로만 기재한다. 또한, 인문계, 자연계, 예·체능계로 구분된 계열을 없애고, 6차 교육과정의 수능시험에서는 3교시에 시행되었던 수리·탐구 영역 Ⅱ, 즉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과 4교시에 시행되었던 외국어 영역의 시험 시간이 서로 맞바뀌었고, 수리 영역의 경우 수준에 따라 가형[주 3]과 나형[주 4] 으로 구분되고, 고등학교 2, 3학년때 배우는 심화 선택 과목에서만 직접적으로 출제하며(국민 기본 공통 과정인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은 간접적으로 출제), 가형에 선택과목(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이산수학)[주 5]이 도입되고, 주관식 문제도 종전의 6문제에서 9문제로 늘리고, 정답도 최대 3자리로 늘리고, 음수 정답과 소숫점 정답을 삭제했으며, 제2외국어 과목은 선택 과목을 8개로 늘리는 (기존의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에 한문과 아랍어 추가) 동시에,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은 기존의 공통부분(자기 과의 과목은 72점, 그 반대는 48점으로 부여)을 없애고, 사회탐구면 사회탐구만, 과학탐구면 과학탐구만 선택하게 하였으며[주 6], 사회탐구는 11개 과목 (한국지리, 정치, 경제, 법과 사회, 사회·문화, 세계사, 윤리, 국사, 세계지리, 한국근·현대사, 경제지리), 과학탐구는 8개 과목(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각각 I,II) 중에서 4과목씩 선택(단, 과학탐구는 II과목을 2개로 제한)하게 하였다. 또한 대학 진학을 위한 특성화 고교생을 위해 직업탐구 영역(17과목)을 신설하여 3과목(컴퓨터 4개 중 1과목, 전공 13개 중 2과목)씩 선택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이로 인해 점수가 낮았던 수리 (수학)와 영어가 강해졌으며, 언어는 쉬워지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2005학년도 수능을 시행한 결과 언어와 수리는 쉬운 가운데, 영어는 어려워지는 현상을 보이고, 탐구 영역은 각 과목에 따라 점수가 균일하지 못한 문제점을 보였다. 그리고 제2외국어 아랍어의 경우 표준 점수 100점 득점자가 나오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아랍어를 시험친 학생들의 수준 차가 매우 커서 일어난 현상이다.) 또한 2005학년도 수능에는 역대 수능 사상 최초로 휴대폰을 이용한 조직적인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수험생 314명은 수능부정으로 시험결과가 무효처리되었다. 이를 교훈삼아 이후 수능에는 부정행위 단속을 더욱 강화했다. 성적은 12월 14일에 통지되었다.[14] 그리고 전년도에 있었던 언어 영역 복수정답 사건으로 인해, 이 수능부터 오답 이의제기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2006학년도[편집] 2005년 11월 17일에 시행할 예정이였으나, 부산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관계로 당초 계획보다 일주일 정도 늦춰진 2005년 11월 23일에 시행했다. 이 수능은 수요일에 실시한 마지막 수능이며, 지나치게 쉬워진 난이도로 많은 학생들이 피해를 보았는데, 언어 영역의 경우 100점 만점 중 95점 이상이 12% 이상을 차지하는 등 변별력에 큰 문제가 생겼다. 수리 영역의 경우, '가'형과 '나'형의 난이도 차이로 인해 서로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았다. 외국어 영역은 전년도 수능에 비하여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탐구 영역은 선택 과목 간의 지나친 난이도 차이로 인하여 '로또수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전년도의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 때문에 이번 수능부터 휴대폰, MP3 플레이어를 포함한 모든 전자기기(시각 표시 기능만을 가진 시계는 제외)를 소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대리시험 방지용으로 수능 샤프와 OMR 답안지 필적 확인이 처음 도입되었다. 성적은 12월 16일에 통지되었다. 2007학년도[편집] 2006년 11월 16일에 시행했다. 목요일에 실시된 첫 번째 수능이다. 외국어 영역과 수리 나형은 쉽게 출제된 반면, 언어 영역과 수리 가형 그리고 탐구 영역은 어렵게 출제되었다. 성적은 12월 13일에 통지되었다. 2008학년도[편집] 2007년 11월 15일에 시행했다. 2008학년도에는 수능 성적표에 표시되는 항목이 대폭 줄어들었다. 성적표에 표준점수와 백분위를 삭제하고, 9개의 등급만 표기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으로 인해 2008학년도 수능은 2018학년도 수능 이전까지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적었다. 언어 영역 전체 문항이 기존 60문항에서 50문항으로 줄어들었으며(듣기 평가는 6문항에서 5문항으로 축소), 이에 따라 언어 영역의 시험 시간도 전년도보다 10분 단축되었다. 바뀐 수능 시험 시간과 문항수는 2007년 3월부터 각 교육청 주관 전국연합학력평가와 사설 학원의 모의고사, 평가원 주관의 모의평가에 반영되었다. 종로학원, 메가스터디 등 입시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언어, 수리 나형, 외국어 영역은 예년보다 조금 어려웠으며, 수리 가형은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탐구 영역은 대체로 평이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12월 12일에 성적을 통지하기로 하였지만, 등급 제도의 불안등을 이유로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는 발표를 5일 앞당겨 12월 7일 공식적으로 성적을 통지하였다. 수능 이후 등급제 수능에 대한 수험생들의 불만이 잇따랐다. 단 1점 차이로 등급이 갈려 결국 점수 차이가 1점의 수 배에 이르게 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고 일부 영역에서는 한 문제만 틀렸음에도 1등급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일부에서는 행정 재판까지 준비하였다. 이에 대해 교육인적자원부는 등급제 수능은 장기간의 사회적 합의를 거쳐 도입된 제도로서 제도 초기에 다소간의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 등급제를 유지할 것이라 밝혔다.[15] 12월 22일, 한국물리학회가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 물리Ⅱ 11번 문제에 대해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16] 같은 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한국물리학회가 내놓은 입장에 대해 "물리학회는 수험생들이 배우는 고교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고려하지 않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능은 고교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에 따라 출제한다는 원칙에 따라야 하고 그 원칙에 비춰 이 문항은 이상이 없다"라며, 정답에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17] 그러나 9종중 4종의 교과서에 문제와 관련된 개념(다원자 분자의 개념)이 포함된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18] 결국, 이틀 뒤인 12월 24일, 교육과정평가원은 물리Ⅱ 복수 정답을 인정했고 평가원장이 사임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19] 복수정답으로 물리Ⅱ의 등급이 조정된 사람은 1,016명으로 조사되었고, 그들에 한해 12월 26일에 성적표를 다시 배부했다. 2009학년도[편집] 2008년 11월 13일에 실시되었다. 사회탐구 영역 중 국사[주 7] 과목에 한해 2005 개정 교육과정이 처음 도입된 시험이기도 하다.[주 8]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주 9] 전 영역 시험의 난이도가 전년도 시험와 비교하여 상당히 높아졌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제 2외국어에서 아랍어 열풍이 처음으로 분 수능이기도 하다. 2009학년도 수능부터는 2008학년도 수능에 시행되었던 수능 등급 단독 표기제가 다시 폐지되어, 2005~2007학년도 수능과 같이 성적표에 원점수를 제외한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이 모두 표기되었으며, 이 체제는 이후 수능 시험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2월 10일에 성적을 통지했으며, 2001학년도 수능시험 이후 약 8년만의 수능 전 영역 만점자인 환일고등학교의 박창희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다. 2010학년도[편집] 2009년 11월 12일에 시행했다. 예년 수능과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달랐으며, 1학기 수시모집을 폐지해 예년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수능 시험에 응시했다. 외국과 마찬가지로 수능 시험에 응시한 1991년생들이 매우 많았고, 난이도는 속칭 물수능이라 불릴 정도로 약간 쉬웠으나 3영역, 전영역 만점자는 없었다. 이번 수능에서는 종로학원, 메가스터디 등의 입시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외국어 영역이 지난 해보다 매우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언어영역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으로 출제되었으며, 수리영역은 가형과 나형 모두 지난해보다 약간 쉽게 출제되었다.[20] 과학탐구 영역은 지난해보다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으며, 제2외국어·한문 영역은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도 수능에서는 2004년도 수능처럼 복수정답이 인정되는 사태가 다시 발생하였다. 지구과학I 19번 문제가 복수 정답이 인정되었다.[21] 2010학년도 수능부터 미리 풀기 방지용으로 문제지의 겉표지를 도입하였다. 한편, 성적은 본래 12월 9일에 통지할 예정이었으나 하루 앞당겨 12월 8일에 통지했다. 2011학년도[편집] 당초 2010년 11월 11일에 시행할 예정이었지만, 서울 G20 정상회의 개최 날짜와 겹치는 바람에 일주일 후인 2010년 11월 18일로 순연하였다. 2011학년도 수능은 에코 베이비붐 세대의 최고점인 1992년생이 응시한 것으로 지원자는 712,777명, 응시자는 668,339명으로 집계되어, 제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적용된 2005학년도 수능 이래로 최다 응시자였다. 수리 영역에 한해 7차 교육과정 마지막 시험이였으며,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율은 70% 이상이었으며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쉬운 문항과 어려운 문항을 적절히 안배하여 변별력과 연계율을 모두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어 영역, 수리 영역 가형, 외국어 영역이 굉장히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특히 수리 영역 가형의 경우에는 역대 최저 원점수 평균을 기록하였다. 전영역 만점자는 없었으나, 3과목 영역 만점자가 1명이 나오기도 했다.[주 10] 그러나 표준편차가 컸기 때문에 원점수 100점을 획득한 수험생이 얻는 표준점수, 즉 표준점수 최고점은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보다 1점이 낮았다. 이외에도 언어 영역, 수리 영역 가형, 외국어 영역은 역대 최저 만점자, 역대 최저 만점자 비율을 기록하며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시행된 제 7차 교육과정의 수능에서 가장 어려웠다. 그러나 수리영역 나형은 전년도보다는 어렵게 출제되었지만, 객관적으로는 평이한 수능으로 출제되었다. 한편,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아랍어Ⅰ의 응시자가 처음으로 감소세에 들어섰으나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 3회 연속으로 해당 영역 최다 응시자 과목을 차지하였으나 표준점수 최고점이 기존 100점에서 90점으로 10점 하락했다. 그 동안 최저 응시자였던 러시아어Ⅰ은 독일어Ⅰ보다 약간 명이 더 응시하여 최저 응시자 과목이 뒤바뀌었다. 성적은 12월 8일에 통지되었다. 시험은 일주일 연기되었지만 대입 전형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OMR판독기의 추가 도입, 성적 통지 방식 개선 등으로 성적 통지를 예정대로 하였다. 이전 시험인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과 2011학년도 6월과 9월의 대수능 모의평가에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오프라인 종이 성적표를 발송하였으나, 2011학년도 수능부터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온라인으로 통보를 하고 학생들은 응시 원서를 제출한 학교나 지역 교육청에서 온라인으로 통보된 성적 자료를 출력 받아 배부 받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전 30일 가량 걸리던 성적 통지가 20일 가량으로 단축되었다. 2007 개정 교육과정 (2012학년도~2016학년도)[편집] 2012학년도[편집] 2011년 11월 10일에 시행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으로 시행된 첫 번째 수능이다.[주 11] 작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유지되었다. 2012학년도 수능의 가장 큰 변화는 수리 영역 범위 조정과 탐구 영역 과목 수의 축소이다. 2012학년도 수능부터 수리 영역에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어 가형은 선택 과목이 폐지되고 공통적으로 수학Ⅰ, 수학Ⅱ, 적분과 통계, 기하와 벡터 과목을, 나형은 수학I과 미적분과 통계 기본 과목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탐구 영역 최대 선택과목 수가 4과목에서 3과목으로 축소되었으며 과학탐구의 경우 Ⅱ과목 선택 수 제한이 사라졌다. 또한, 2012학년도 수능부터는 채점방식이 OMR 판독기 방식이 아닌 이미지 스캐너 방식으로 변경되었으므로, 예비마킹을 비롯한 모든 필기구의 흔적이 인식되어 그 흔적은 중복표기로 처리되기 때문에 예비마킹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2012학년도 수능 도중 한 학생이 트위터로 수능을 생중계하는 사건도 있었다. 봇 프로그램(자동예약전송)을 사용했고 이 학생은 업무방해혐의로 형사고발당했지만, 경찰은 단순한 장난으로 인정하고 훈방조치했다. 이 학생은 휴대폰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행위로 적발되지 않았다. 2012학년도 수능은 언어와 수리 가형은 어려웠고, 수리 나형과 외국어는 평이한 경향을 보였다. 특히, 언어와 외국어의 난이도는 6월과 9월에 시행된 모의평가와는 완전히 다른 경향을 보였으며, 외국어는 당시 역대 수능 중에서 가장 쉬운 것으로 기록되었다. 평가원에서는 "수능 난이도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영역별 만점자를 1%로 만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밝혔으나, 실제 수능에서는 언어(0.28%)와 수리 가형(0.31%)은 만점자가 훨씬 적었고, 외국어 영역(2.67%)은 만점자가 매우 많았으며, 수리 나형만이 만점자가 1%에 약간 근접하였다(0.97%). 그리고 탐구 영역과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만점자 비율이 과목별로 들쑥날쑥했다. 사회탐구의 경우 한국지리가 6.38%로 만점자 비율이 가장 높았고, 한국 근·현대사가 1.03%로 만점자 비율이 가장 적었다. 과학탐구의 경우 지구과학Ⅱ가 5.68%로 최고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고, 생물I이 0.46%로 최저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다. 직업탐구의 경우 수산 일반과 해사 일반에서 만점자가 없었으며, 컴퓨터 일반의 만점자 비율이 무려 4.37%로 최고를 기록했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중국어I이 2.96%로 최고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고, 스페인어I이 0.12%로 최저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정부가 공언했던 만점자 1%는 사실상 실패했으며,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애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서 수험생에게 혼란만 주었다."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입시업체에 따르면 수능 전 영역 만점자는 총 30명으로 집계되었으며[22], 수능 문제와 정답에는 이상은 없었고, 성적은 11월 30일에 통지했다. 2013학년도[편집] 2012년 11월 8일에 시행했다.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와 만점자 1% 달성 목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2013학년도 수능에서도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였다. 언어가 어렵고 외국어가 쉬웠던 작년과 반대로 이번에는 언어가 지나치게 쉬워져(만점자 약 14,000여명, 2.36%) 한 문제를 틀려도 1등급을 못 받을 정도였으며 반대로 외국어는 작년보다 난이도가 높아졌다. 수리 영역 가형은 작년에 비해 만점자 비율이 소폭 상승했으나 여전히 1%에 크게 못 미쳤다. 그나마 수리 영역 나형이 만점자 비율이 1%에 거의 근접하였다. 탐구 영역과 제2외국어/한문 영역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난이도가 들쑥날쑥했다. 사회탐구에서는 3.15%의 만점자를 배출한 윤리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이 만점자 비율이 1%를 넘지 못했으며, 특히 경제지리에서는 0.15%의 만점자에 그쳤다. 과학탐구에서는 지구과학I은 응시자의 8%에 가까운 만점자가 나온 반면 생물Ⅱ는 0.1%에도 못 미쳤다. 직업탐구에서는 인간 발달에서 7%를 조금 넘는 만점자가 나온 반면, 농업 기초 기술, 수산 일반, 해사 일반에서 만점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못했으며, 특히 수산 일반과 해사 일반에서는 전년도에 이어 만점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 같은 경우 아랍어Ⅰ에서 2.65%의 만점자가 나온데 비해, 러시아어Ⅰ에서는 0.05%의 만점자가 나오는데 그쳤다. 따라서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만점자 1% 달성 목표는 실패했으며, 객관적으로는 전반적으로 불수능도 물수능도 아닌 평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입시업체에 따르면 수능 전 영역 만점자는 총 6명으로 집계되었으며[23], 성적은 11월 28일에 통지되었다. 2014학년도[편집] 2013년 11월 7일에 시행했다. 수학과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 한해 처음으로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도입되었다. 난이도 조절 실패 논란으로 인해 만점자 1% 정책은 폐기되었으나,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014학년도 수능은 종전의 수능과 달라진 점이 있는데, 달라진 점은 영역의 명칭이 교과목에 맞게 변경되었으며(언어 영역→국어 영역, 수리 영역→수학 영역, 외국어(영어) 영역→영어 영역), A형과 B형으로 나뉜 수준별 문제지를 제공한다. 또한, 국어 영역과 영어 영역 문제수를 50문제에서 5문제가 줄어든 45문제로 축소했고(시험 시간은 변화 없음), 국어 영역 듣기 평가가 폐지되는 반면, 영어 영역 듣기 평가는 종전의 17문제에서 5문제가 늘어난 22문제로 확대했다. 이외에도, 탐구 영역에서 최대 선택과목 수를 3과목에서 2과목으로 축소하고, 선택과목 일부가 조정되었으며,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 기초 베트남어 과목[주 12]이 신설되었다. 인문·사회과학 계열은 대다수가 BAB를, 자연과학·공학·의학 계열은 ABB를 선택하였다. 국어, 수학, 영어 영역 같은 경우, 난이도가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왔으며, 탐구 영역도 선택 과목에 따라 난이도 차이가 컸다. 전 영역 만점자는 BAB(문과) 32명, ABB(이과) 1명으로 총 33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공식 발표를 한 것이 아니라, 각 학교와 학원 별로 만점자를 그들의 홍보 차원에서 공개하면서 비롯된 것이다.[24]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선택형 수능'이 도입돼 '총점'이란 것이 사라졌기에, 원점수 만점자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25]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목포홍일고등학교 출신 삼수생 전봉열이 원점수 400점 만점을 받아 전국에서 유일무이하게 자연계 만점으로 전국 수석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적은 11월 27일에 통지되었다. 세계지리 8번 문제가 오류로 인해 논란이 있었다. 당초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문제에 이상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한 수험생들이 소송을 걸었으나, 1심에서 패소하였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수험생들은 등급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등 이에 항소하였다.[26] 그러다가 이듬해인 2014년 10월 16일에 2심 재판이 열렸고, 1심 재판과는 달리 문항에 오류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27] 판결이 내려진 후 교육부도 잘못을 인정하였으며, 해당 문제는 전원 정답 처리되어 성적도 다시 산출되었다. 한편, 오답으로 인해 피해를 본 학생들에게는 추가 합격 및 정원 외 입학 등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2017년에는 피해를 입었던 수험생들에게 국가가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28] 2015학년도[편집] 2014년 11월 13일에 시행했다. 전년도와 달리, 영어 영역에서 난이도에 따른 수준별 시험은 폐지되었으며, 듣기 평가도 22문항에서 다시 5문항이 줄어든 17문항으로 출제되었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수학 영역, 영어 영역 난이도가 매우 쉬웠으며, 국어 영역 B형 및 사회탐구 영역과 과학탐구 영역은 전반적으로 어려웠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2015학년도 수능 만점자는 총 29명으로, 인문계열(문과) 8명, 자연계열(이과) 21명으로 확인되었으며, 대구 경신고등학교와 서울 은광여자고등학교에서는 수능 만점자가 4명씩 배출되기도 하였다. 성적은 12월 3일에 통지되었다. 영어 영역 25번 문항, 생명과학Ⅱ 8번 문항에서 복수정답 논란이 있었다. 결국, 11월 24일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영어 영역 25번 문항, 생명과학Ⅱ 8번 문항에 대해서 복수 정답 처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며, 김성훈 평가원장이 수능 문제 출제 오류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도 하였다. 2016학년도[편집] 2015년 11월 12일에 시행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으로 시행된 마지막 수능이며,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모의평가와 작년 수능에 비해서는 어려워졌으나 전체적으로 적절한 변별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입시 기관등에 따르면 전 영역 만점자는 16명으로 집계되었다.[29]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2009 개정 교육과정 (2017학년도~)[편집] 2017학년도[편집] 2016년 11월 17일에 시행했으며, 전체적으로 2009 개정 교육과정[주 13]으로 시행된 첫 번째 수능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2017학년도 수능은 종전의 수능과 달라진 점이 있는데, 국어 영역에서 난이도에 따른 수준별 시험은 폐지되었으며, 수학 영역에서 교과과정이 개정되었고 난이도도 종전의 A/B형에서 가/나형으로 변경되었다. 수학 영역에서 가형의 경우 미적분Ⅱ, 확률과 통계, 기하와 벡터에서 출제하였으며, 나형의 경우 수학Ⅱ, 확률과 통계, 미적분Ⅰ에서 출제되었다.[30] 또한, 한국사가 사회탐구 영역에서 분리되었고 다시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31] 한국사 영역은 다른 영역과 달리 40점 이상을 1등급으로 하고 1등급 내려갈 때마다 5점씩 등급컷이 낮아지는 형식으로 총 9등급의 절대평가로 성적을 매기며, 응시하지 않을 경우 시험 성적 전체가 무효 처리된다. 이외에도 직업탐구 영역 선택 과목 일부가 조정되었으며, 최대 응시 과목 수도 2개로 확대되었다. 난이도는 전반적으로 어려웠다고 평가되었다. 입시 기관 등에 따르면 전 영역 만점자는 3명이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32] 성적은 12월 7일에 통지되었다. 한국사 영역 14번 문항, 물리Ⅱ 9번 문항에서 복수정답 논란이 있었다. 결국, 11월 25일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한국사 영역 14번 문항에 대해서는 복수 정답 처리를, 물리Ⅱ 9번 문항에 대해서는 전원 정답 처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33] 2018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당초 2017년 11월 16일에 시행할 예정이었지만, 바로 전날인 11월 15일에 발생한 포항 지진의 여파로 인해, 일주일 후인 2017년 11월 23일로 순연되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이 시험부터 영어 영역에 총 9등급의 절대평가가 도입되었으며, 다른 영역과 달리 90점 이상을 1등급으로 하고 1등급 내려갈 때마다 10점씩 등급컷이 낮아지는 형식으로 총 9등급의 절대평가로 성적을 매긴다.[34]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만점자는 총 15명이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35] 만점자인 경기 오산 세마고등학교의 최동욱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다.성적은 12월 12일에 통지되었다. 2019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2018년 11월 15일에 시행했으며,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적은 시험이다. 성적은 12월 5일에 통지되었다.[36] 예정된 시험 목록[편집] 2020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2019년 11월 14일에 시행할 예정이며, 성적은 12월 4일에 통지될 예정이다.[37] 2021학년도[편집] 2020년 11월 19일에 시행할 예정이며, 성적은 12월 9일에 통지할 예정이다.[38]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인문계의 경우, 사회탐구에서 정치, 경제, 사회·문화, 세계사, 세계지리가 선택과목으로 나왔고, 자연계는 과학탐구에서 물리 Ⅱ, 화학 Ⅱ, 생물 Ⅱ, 지구과학 Ⅱ가 선택과목으로 나왔다. ↑ 당시 제2외국어 영역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과목은 독일어 Ⅰ, 프랑스어 Ⅰ, 스페인어 Ⅰ, 중국어 Ⅰ, 일본어 Ⅰ, 러시아어 Ⅰ으로 6과목이었다. ↑ 당시 가형에는 수학 Ⅰ이 12문제, 수학 Ⅱ가 13문제, 선택과목 (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이산수학) 5문제가 출제되었다. ↑ 당시 나형에 출제되었던 모든 문항은 수학 Ⅰ에서만 출제되었다. ↑ 당시 수능 수리 가형에서 선택과목은 5문제만 출제되었다. ↑ 이로 인해 문과생이 과학탐구를, 이과생이 사회탐구를 선택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다만 이런 경우는 0에 수렴한다. ↑ 현재의 한국사 ↑ 종전의 국사가 전(前)근대사까지만 포함되어 있어 역사 교육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있자, 2006년부터 국사 과목에 근현대사 부분을 새로 추가하였다. ↑ 사회탐구/과학탐구/직업탐구 ↑ 3과목 영역에서 만점을 받은 행운의 주인공은 당시 충렬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임수현 학생이였다. ↑ 수학과 영어 영역에 한정되었으며, 이외 나머지 과목은 7차 교육과정을 따른다. ↑ 기초 베트남어는 2011년 부분 개정된 교육과정을 따른다. ↑ 2011년에 부분 개정되었다. 참조주[편집] ↑ 국립교육평가원, "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해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4년 7월 1일 ↑ 대학 수능 전체 수석 정성택군 <부산과학고>1994-12-21《매일경제신문》 ↑ 뒤바뀐 수능 성적 1995-01-14 《동아일보》 ↑ 국립교육평가원, "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해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5년 7월 1일 ↑ {공부야 놀자} 지난 12년 수능 경향 살펴보니 Archived 2006년 2월 7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05년 3월 20일 ↑ 가 나 “<해설(解說)> 97학년도 수능시험 채점결과 분석”. 연합뉴스. 1996년 12월 6일.  ↑ “<`97 수능시험 영역별 출제경향>(종합)”. 연합뉴스. 1996년 11월 13일.  ↑ 가 나 올 수능만점자 상당수 나올듯 인터넷한겨레 2000.11.16 ↑ '수능 만점'대원외고 박혜진양 1999-12-16《연합뉴스》 ↑ [1] ↑ "어려운 문제 풀고도 점수 낮다니…" 2000-11-15《동아일보》 ↑ 대법원 "02~03학년도 수능 점수 반올림 정당" Archived 2007년 12월 18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16일 ↑ “작년 언어영역 17번 문제 복수 정답 인정” 판결, Archived 2004년 10월 15일 - 웨이백 머신 국민일보, 2004년 7월 8일 ↑ '수능부정' 314명 시험 무효 처리, 《SBS》, 2004년 12월 13일 ↑ 교육부 "수능 등급제 계속 유지할 것" 2007-12-12《노컷뉴스》 ↑ 물리학회 "수능 물리II 11번, 복수 정답 가능" Archived 2007년 12월 25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2일 ↑ 교육과정평가원 "수능 물리 II 정답 이상 없다" Archived 2007년 12월 25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2일 ↑ [2] ↑ 교육과정평가원 "수능 물리 II 복수정답 인정" Archived 2007년 12월 27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4일 ↑ "수능, 언어 내리고 수리(가형)는 내리고, 수리(나형)는 오르고 외국어 내리고", CNB News 김미영 기자 2009-11-16 14:44:39 ↑ "수능 또 복수정답…성적에 영향은", 시민일보 2009-11-24 15:46:46 ↑ 작년 수능 만점자 20개 고교서 30명《조선일보》2012년 9월 10일 안석배 기자 ↑ 수능 만점자 4명 서울대·2명 연세대 입학《뉴스1》2013년 2월 20일 김정욱 기자 ↑ 2014학년도 수능 만점자 수 8명 → 33명 변동 왜? ↑ 수능 만점-표준점수 최고점 뭐가 다를까?… 아리송 ↑ 수험생들 ‘수능 세계지리 출제 오류’ 항소《경향신문》 2013년 12월 23일, 김지원 기자 ↑ 교육부, 수능 세계지리 오류 인정…실효성 의문《세계일보》 2014년 11월 1일 ↑ 2014 수능 세계지리 오류, 수험생에게 배상해야 ↑ 2016 수능, 만점자 16명에 그쳐..지난해보다 '뚝' 떨어졌다 ↑ (2017학년도 수능 개편안 문답)현 중3부터 한국사 필수… 첫해는 쉽게 출제할 듯 ↑ '한국사 필수' 등 2017학년도 수능 기본계획 확정 ↑ 수능 만점자, 지난해 16명에서 올해 3명으로 줄어···‘불수능’ 맞네 ↑ 수능 ‘한 해 두 문항 오류’ 불명예…“한국사 복수정답·물리Ⅱ는 정답없어” ↑ 現 중3 대학입시부터 수능 영어 '절대평가' 도입 ↑ “올 수능 만점자 15명으로 가채점 11명보다 많아” ↑ 2019학년도 수능, 국어·수학 입시 비중 커질 듯 ↑ 2020학년도 수능일 2019년 11월14일…현 수능과 같은 체제 ↑ '2021 수능' 11월 19일…수학 가형 '기하' 제외 vdeh대학수학능력시험역대 시험 (학년도)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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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목차 1 연도별 시험 목록 1.1 5차 교육과정 (1994학년도~1998학년도) 1.1.1 1994학년도 1.1.2 1995학년도 1.1.3 1996학년도 1.1.4 1997학년도 1.1.5 1998학년도 1.2 6차 교육과정 (1999학년도~2004학년도) 1.2.1 1999학년도 1.2.2 2000학년도 1.2.3 2001학년도 1.2.4 2002학년도 1.2.5 2003학년도 1.2.6 2004학년도 1.3 7차 교육과정 (2005학년도~2011학년도) 1.3.1 2005학년도 1.3.2 2006학년도 1.3.3 2007학년도 1.3.4 2008학년도 1.3.5 2009학년도 1.3.6 2010학년도 1.3.7 2011학년도 1.4 2007 개정 교육과정 (2012학년도~2016학년도) 1.4.1 2012학년도 1.4.2 2013학년도 1.4.3 2014학년도 1.4.4 2015학년도 1.4.5 2016학년도 1.5 2009 개정 교육과정 (2017학년도~) 1.5.1 2017학년도 1.5.2 2018학년도 1.5.3 2019학년도 2 예정된 시험 목록 2.1 2020학년도 2.2 2021학년도 3 각주 3.1 내용주 3.2 참조주 연도별 시험 목록[편집] 5차 교육과정 (1994학년도~1998학년도)[편집] 1994학년도[편집] 위키책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1994학년도 1차 대학수학능력시험 1993년 8월 20일 금요일과 11월 16일 화요일, 시험을 두 번 시행했다. 1982학년도부터 전년도(1993학년도)까지 시행되었던 학력고사의 문제 유형과는 상당히 차별화된 유형을 선보였다. 당시에는 문과, 이과 구분과 선택 과목 없이, 모든 수험생이 똑같은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2회 시행에 따른 난이도 조정 실패라는 문제점이 노출되어 다음 년도부터는 연 1회의 시험만 시행하게 되었다. 당시 영역별 배점은 언어 60, 수리탐구Ⅰ 40, 수리탐구Ⅱ 60(사탐 27/과탐 33), 외국어 40이었으며, 총 200점 만점이었다. 성적은 각각 9월 23일, 12월 20일에 통지되었다. 당시 1차 수능에서 대구 성광고등학교 배호필 학생이 198점(200점 만점)을 획득,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당시 2차 수능에서 서울과학고등학교 윤건수 학생이 191점(200점 만점)을 획득, 최고 성적을 차지하였다. 1995학년도[편집] 1994년 11월 23일에 시행했다. 이 수능부터 2006학년도 수능까지 수능은 수요일에 치뤄졌다. 19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전년도에 실시된 시험과 달리 단 1회만 시행하였다. 또 이 해부터 계열별 분리 출제가 이루어졌다. 언어 영역과 외국어(영어) 영역은 계열에 관계 없이 공통 출제하였고, 수리 영역과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에서는 약 25% 정도가 계열별로 구분 출제되었다. 계열별 출제로는 인문계에 사회문화, 세계지리, 자연계에 수학Ⅱ, 물리, 화학이 추가되었다. 또한, 문항당 배점을 다양화하여 언어 영역과 수리 · 탐구 영역Ⅱ는 0.8, 1, 1.2점, 수리 · 탐구 영역Ⅰ은 1, 1.5, 2점, 외국어(영어) 영역은 0.6, 0.8, 1점으로 하였다.[1] 성적은 12월 21일에 통지되었다. 당시 부산과학고등학교(현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정성택 학생이 194점(200점 만점)을 획득, 전체 수석을 차지하였으며,[2] 수험번호를 잘못 부여하는 행정 착오로 수험생의 성적이 뒤바뀌어 통보되는 '해프닝'도 있었다.[3] 1996학년도[편집] 1995년 11월 22일에 시행했다. 본고사 체제하의 마지막 수능이자, 200점 만점 체제하의 마지막 수능이다. 성적은 12월 22일에 통지되었다.[4] 당시 전국수석을 차지하여 자연계열에 응시한 서울과학고등학교 이정원 학생이었다. 1997학년도[편집] 1996년 11월 13일에 시행했다.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1994학년도부터 전년도(1996학년도)까지 시행되었던 대학 본고사가 폐지되고 수시모집이 신설되었기 때문에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수능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다. 또한 전년도(1996학년도)의 배점이 200점 만점에 언어 60, 수리탐구 Ⅰ 40, 수리탐구 Ⅱ 60, 외국어 40 이었던 데 반면 1997학년도부터는 총점이 두 배인 400점 만점으로 늘어났고, 각 과목당 배점 역시 두배로 늘어났다. 그외에도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작된 이래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까지 치뤄진 13차례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시험이었다.[5] 수능 최초로 수리탐구Ⅰ 영역에서 주관식 단답형 문제가 출제[6] 되고, 외국어 영역 듣기평가도 종전 10문제에서 17문제로 늘어났으며, 시사적인 내용을 다루는 문제나 여러 교과가 연결된 통합교과형 문제가 다량 출제[7]되어 특히 상위권에서 점수폭 하락이 컸다[6]. 당시 자연계열로 응시해 400점 만점에 373.3점을 획득한, 제주 대기고등학교 서준호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고, 당시 자연계열 응시해 364.1점을 획득한, 서울 한성과학고등학교 나정임 학생이 자연계 여자 전체차석을 차지하였으며, 당시 인문계열에 응시해 314.1점을 획득한, 서울 신목고등학교 신상영 학생이 전국 차석을 차지하였으며, 성적은 12월 7일에 통지되었다. 1998학년도[편집] 1997년 11월 19일에 시행했다. 이 날은 대한민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기로 결정된 날이기도 하다. 또한 5차 교육과정에 따른 마지막 수능이자 국립교육평가원(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한 마지막 수능이었으며, 전체적으로 수능 응시인원이 이전에 치뤄진 수능들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전까지 치러진 역대 수능들보다 훨씬 쉬웠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만점자는 나오지 않았다. 성적은 12월 20일에 통지되었다. 6차 교육과정 (1999학년도~2004학년도)[편집] 1999학년도[편집] 1998년 11월 18일에 시행했다. 처음으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주관한 시험이며, 6차 교육과정에 따른 최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상대적으로 입시에서 수학의 비중이 낮은 예·체능계 학생을 위한 수리·탐구 Ⅰ 영역에 예·체능계를 추가했다. 또한 인문계와 자연계에 한해, 수리·탐구 Ⅱ 영역에 선택과목 제도[주 1]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표준점수제도 같이 도입되었다. 19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문제를 쉽게 내는 출제경향이 이어져 전년도보다 쉽게 출제되었으며,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최초로 만점(당시 400점)자가 배출되었다. 만점자는 당시 한성과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오승은 학생이었다.[8] 최초의 대입수능시험 만점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당시 오승은 학생의 이름을 딴 수능 시험 참고서 등이 많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2000학년도[편집] 1999년 11월 17일에 시행했다.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많았던 시험이다. 성적은 12월 17일에 통지되었으며,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사상 2번째 만점자가 배출되었다.[8] 만점자는 당시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혜진 학생이었다.[9] 2001학년도[편집] 2000년 11월 15일에 시행했다. 난이도가 전년도에 비해 굉장히 많이 하락했던 대표적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세간에서 "물수능"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매우 쉬운 난이도를 보였다. 당시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자가 66명이나 배출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N수생들이 서울, 수도권 대학에 낙방하는 기이한 일도 발생하였다. 특히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최초로 대학수학능력시험 만점자가 내신과 제2외국어영역 변환표준점수 상의 불이익으로 서울대학교의 특차전형에 떨어지는 일도 발생하였다.[10]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사회적 목적과 기능, 난이도와 관련해 진보 보수 진영의 입장이 양분되어 당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수학 등의 과목에서 쉬운 문제에 높은 배점을 하고, 어려운 문제에 낮은 배점을 하는 소위 '역배점'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11] 또한,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제2외국어 영역[주 2]이 추가된 최초의 수능시험이다. 성적은 12월 12일에 통지되었다. 2002학년도[편집] 2001년 11월 7일에 시행했다. 6차 교육과정 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험이며, 난이도가 대폭 하락했던 전년도와 달리 이번에는 난이도가 매우 높아져서 세간에서 '불수능'이라는 별칭을 붙인 수능시험이었다. 1997학년도 이후 가장 어려운 수능이었다. 그 여파로 2002학년도부터 2008학년도까지 만점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수능 응시인원이 많이 줄었으며, 전체 수험생의 평균점수가 66.5점, 상위 50%가 66.8점으로 폭락하였다. 한편, 수능시험의 특차 전형이 폐지되었으며, 총점 대신 수능 9등급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당시 수능을 치루었던 학생들은 특정 분야만 우수하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의 정책에 피해를 입었다며 자신들을 '이해찬 세대'로 명명하기도 했다. 성적은 12월 3일에 통지되었다. 전국수석을 차지하여 자연계열에 응시한 대구 덕원고등학교 재수생인 박기범 학생, 인문계에 수석을 차지한 익산 남성고등학교 윤석준 학생이었다. 2003학년도[편집] 2002년 11월 6일에 시행했다. 2003학년도 수능까지는 수험생에게는 원점수만 소수점까지 표기해 통보하고 대학에는 수험생의 원점수, 표준점수, 백분위점수 등을 모두 반올림해 제공했다가 점수 역전 현상으로 인한 당락의 역전 현상이 발생하여 당시 사회적 문제가 되어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2004학년도부터는 소수점 배점 문제가 모두 폐지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인 2007년, 대법원은 수능 점수 반올림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및 평가원의 재량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판결하였다.[12] 한편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인문계열 전국차석, 전체여자수석을 392.3점을 차지한 경기 안성 안법고등학교 우아라 학생, 전국 수석을 차지하여 응시한 서현고등학교 윤재희 학생이었다. 2004학년도[편집] 2003년 11월 5일에 시행했다. 6차 교육과정 마지막 수능이였으며, 역대 수능시험 사상 복수정답이 인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당시 원장 이종승)은 언어영역 17번 문제의 복수정답(기존의 정답은 3번이었으나 5번도 정답으로 인정)을 인정했으며, 또한 수능시험 출제자 명단이 사전에 유출되는 파문이 일어나 수능 관리 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가 빗발쳤으며, 예상 문제가 그대로 출제된 논란도 있었다.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전국 수석은 청석고등학교 재수생인 채희동 학생이었다. 한편, 2004년 7월 28일 처음의 정답 3번을 선택했던 수험생 460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낸 복수정답 인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13] 또한, 전년도에 있었던 소숫점 배점 논란으로 인해, 이 수능부터 배점을 정수로만 매긴다. 7차 교육과정 (2005학년도~2011학년도)[편집] 2005학년도[편집] 2004년 11월 17일에 시행했다. 2005학년도 수능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 이유는 7차 교육과정에 따른 최초의 수능 시험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로는 점수 배점으로, 기존의 영역별 120, 80, 120, 80, 400점 만점의 제도에서 100, 100, 100, 50(과목별), 500점 만점으로 변경되었고, 표준 점수는 그 배로 하며(기존에는 440점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음), 표준편차를 20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선택제 수능의 도입으로 인해 성적표에도 원점수를 없애고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으로만 기재한다. 또한, 인문계, 자연계, 예·체능계로 구분된 계열을 없애고, 6차 교육과정의 수능시험에서는 3교시에 시행되었던 수리·탐구 영역 Ⅱ, 즉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과 4교시에 시행되었던 외국어 영역의 시험 시간이 서로 맞바뀌었고, 수리 영역의 경우 수준에 따라 가형[주 3]과 나형[주 4] 으로 구분되고, 고등학교 2, 3학년때 배우는 심화 선택 과목에서만 직접적으로 출제하며(국민 기본 공통 과정인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은 간접적으로 출제), 가형에 선택과목(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이산수학)[주 5]이 도입되고, 주관식 문제도 종전의 6문제에서 9문제로 늘리고, 정답도 최대 3자리로 늘리고, 음수 정답과 소숫점 정답을 삭제했으며, 제2외국어 과목은 선택 과목을 8개로 늘리는 (기존의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에 한문과 아랍어 추가) 동시에,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은 기존의 공통부분(자기 과의 과목은 72점, 그 반대는 48점으로 부여)을 없애고, 사회탐구면 사회탐구만, 과학탐구면 과학탐구만 선택하게 하였으며[주 6], 사회탐구는 11개 과목 (한국지리, 정치, 경제, 법과 사회, 사회·문화, 세계사, 윤리, 국사, 세계지리, 한국근·현대사, 경제지리), 과학탐구는 8개 과목(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각각 I,II) 중에서 4과목씩 선택(단, 과학탐구는 II과목을 2개로 제한)하게 하였다. 또한 대학 진학을 위한 특성화 고교생을 위해 직업탐구 영역(17과목)을 신설하여 3과목(컴퓨터 4개 중 1과목, 전공 13개 중 2과목)씩 선택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이로 인해 점수가 낮았던 수리 (수학)와 영어가 강해졌으며, 언어는 쉬워지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2005학년도 수능을 시행한 결과 언어와 수리는 쉬운 가운데, 영어는 어려워지는 현상을 보이고, 탐구 영역은 각 과목에 따라 점수가 균일하지 못한 문제점을 보였다. 그리고 제2외국어 아랍어의 경우 표준 점수 100점 득점자가 나오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아랍어를 시험친 학생들의 수준 차가 매우 커서 일어난 현상이다.) 또한 2005학년도 수능에는 역대 수능 사상 최초로 휴대폰을 이용한 조직적인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수험생 314명은 수능부정으로 시험결과가 무효처리되었다. 이를 교훈삼아 이후 수능에는 부정행위 단속을 더욱 강화했다. 성적은 12월 14일에 통지되었다.[14] 그리고 전년도에 있었던 언어 영역 복수정답 사건으로 인해, 이 수능부터 오답 이의제기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2006학년도[편집] 2005년 11월 17일에 시행할 예정이였으나, 부산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관계로 당초 계획보다 일주일 정도 늦춰진 2005년 11월 23일에 시행했다. 이 수능은 수요일에 실시한 마지막 수능이며, 지나치게 쉬워진 난이도로 많은 학생들이 피해를 보았는데, 언어 영역의 경우 100점 만점 중 95점 이상이 12% 이상을 차지하는 등 변별력에 큰 문제가 생겼다. 수리 영역의 경우, '가'형과 '나'형의 난이도 차이로 인해 서로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았다. 외국어 영역은 전년도 수능에 비하여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탐구 영역은 선택 과목 간의 지나친 난이도 차이로 인하여 '로또수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전년도의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 때문에 이번 수능부터 휴대폰, MP3 플레이어를 포함한 모든 전자기기(시각 표시 기능만을 가진 시계는 제외)를 소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대리시험 방지용으로 수능 샤프와 OMR 답안지 필적 확인이 처음 도입되었다. 성적은 12월 16일에 통지되었다. 2007학년도[편집] 2006년 11월 16일에 시행했다. 목요일에 실시된 첫 번째 수능이다. 외국어 영역과 수리 나형은 쉽게 출제된 반면, 언어 영역과 수리 가형 그리고 탐구 영역은 어렵게 출제되었다. 성적은 12월 13일에 통지되었다. 2008학년도[편집] 2007년 11월 15일에 시행했다. 2008학년도에는 수능 성적표에 표시되는 항목이 대폭 줄어들었다. 성적표에 표준점수와 백분위를 삭제하고, 9개의 등급만 표기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으로 인해 2008학년도 수능은 2018학년도 수능 이전까지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적었다. 언어 영역 전체 문항이 기존 60문항에서 50문항으로 줄어들었으며(듣기 평가는 6문항에서 5문항으로 축소), 이에 따라 언어 영역의 시험 시간도 전년도보다 10분 단축되었다. 바뀐 수능 시험 시간과 문항수는 2007년 3월부터 각 교육청 주관 전국연합학력평가와 사설 학원의 모의고사, 평가원 주관의 모의평가에 반영되었다. 종로학원, 메가스터디 등 입시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언어, 수리 나형, 외국어 영역은 예년보다 조금 어려웠으며, 수리 가형은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탐구 영역은 대체로 평이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12월 12일에 성적을 통지하기로 하였지만, 등급 제도의 불안등을 이유로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는 발표를 5일 앞당겨 12월 7일 공식적으로 성적을 통지하였다. 수능 이후 등급제 수능에 대한 수험생들의 불만이 잇따랐다. 단 1점 차이로 등급이 갈려 결국 점수 차이가 1점의 수 배에 이르게 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고 일부 영역에서는 한 문제만 틀렸음에도 1등급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일부에서는 행정 재판까지 준비하였다. 이에 대해 교육인적자원부는 등급제 수능은 장기간의 사회적 합의를 거쳐 도입된 제도로서 제도 초기에 다소간의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 등급제를 유지할 것이라 밝혔다.[15] 12월 22일, 한국물리학회가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 물리Ⅱ 11번 문제에 대해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16] 같은 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한국물리학회가 내놓은 입장에 대해 "물리학회는 수험생들이 배우는 고교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고려하지 않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능은 고교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에 따라 출제한다는 원칙에 따라야 하고 그 원칙에 비춰 이 문항은 이상이 없다"라며, 정답에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17] 그러나 9종중 4종의 교과서에 문제와 관련된 개념(다원자 분자의 개념)이 포함된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18] 결국, 이틀 뒤인 12월 24일, 교육과정평가원은 물리Ⅱ 복수 정답을 인정했고 평가원장이 사임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19] 복수정답으로 물리Ⅱ의 등급이 조정된 사람은 1,016명으로 조사되었고, 그들에 한해 12월 26일에 성적표를 다시 배부했다. 2009학년도[편집] 2008년 11월 13일에 실시되었다. 사회탐구 영역 중 국사[주 7] 과목에 한해 2005 개정 교육과정이 처음 도입된 시험이기도 하다.[주 8]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주 9] 전 영역 시험의 난이도가 전년도 시험와 비교하여 상당히 높아졌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제 2외국어에서 아랍어 열풍이 처음으로 분 수능이기도 하다. 2009학년도 수능부터는 2008학년도 수능에 시행되었던 수능 등급 단독 표기제가 다시 폐지되어, 2005~2007학년도 수능과 같이 성적표에 원점수를 제외한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이 모두 표기되었으며, 이 체제는 이후 수능 시험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2월 10일에 성적을 통지했으며, 2001학년도 수능시험 이후 약 8년만의 수능 전 영역 만점자인 환일고등학교의 박창희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다. 2010학년도[편집] 2009년 11월 12일에 시행했다. 예년 수능과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달랐으며, 1학기 수시모집을 폐지해 예년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수능 시험에 응시했다. 외국과 마찬가지로 수능 시험에 응시한 1991년생들이 매우 많았고, 난이도는 속칭 물수능이라 불릴 정도로 약간 쉬웠으나 3영역, 전영역 만점자는 없었다. 이번 수능에서는 종로학원, 메가스터디 등의 입시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외국어 영역이 지난 해보다 매우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언어영역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으로 출제되었으며, 수리영역은 가형과 나형 모두 지난해보다 약간 쉽게 출제되었다.[20] 과학탐구 영역은 지난해보다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으며, 제2외국어·한문 영역은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도 수능에서는 2004년도 수능처럼 복수정답이 인정되는 사태가 다시 발생하였다. 지구과학I 19번 문제가 복수 정답이 인정되었다.[21] 2010학년도 수능부터 미리 풀기 방지용으로 문제지의 겉표지를 도입하였다. 한편, 성적은 본래 12월 9일에 통지할 예정이었으나 하루 앞당겨 12월 8일에 통지했다. 2011학년도[편집] 당초 2010년 11월 11일에 시행할 예정이었지만, 서울 G20 정상회의 개최 날짜와 겹치는 바람에 일주일 후인 2010년 11월 18일로 순연하였다. 2011학년도 수능은 에코 베이비붐 세대의 최고점인 1992년생이 응시한 것으로 지원자는 712,777명, 응시자는 668,339명으로 집계되어, 제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적용된 2005학년도 수능 이래로 최다 응시자였다. 수리 영역에 한해 7차 교육과정 마지막 시험이였으며,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율은 70% 이상이었으며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쉬운 문항과 어려운 문항을 적절히 안배하여 변별력과 연계율을 모두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어 영역, 수리 영역 가형, 외국어 영역이 굉장히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특히 수리 영역 가형의 경우에는 역대 최저 원점수 평균을 기록하였다. 전영역 만점자는 없었으나, 3과목 영역 만점자가 1명이 나오기도 했다.[주 10] 그러나 표준편차가 컸기 때문에 원점수 100점을 획득한 수험생이 얻는 표준점수, 즉 표준점수 최고점은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보다 1점이 낮았다. 이외에도 언어 영역, 수리 영역 가형, 외국어 영역은 역대 최저 만점자, 역대 최저 만점자 비율을 기록하며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시행된 제 7차 교육과정의 수능에서 가장 어려웠다. 그러나 수리영역 나형은 전년도보다는 어렵게 출제되었지만, 객관적으로는 평이한 수능으로 출제되었다. 한편,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아랍어Ⅰ의 응시자가 처음으로 감소세에 들어섰으나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 3회 연속으로 해당 영역 최다 응시자 과목을 차지하였으나 표준점수 최고점이 기존 100점에서 90점으로 10점 하락했다. 그 동안 최저 응시자였던 러시아어Ⅰ은 독일어Ⅰ보다 약간 명이 더 응시하여 최저 응시자 과목이 뒤바뀌었다. 성적은 12월 8일에 통지되었다. 시험은 일주일 연기되었지만 대입 전형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OMR판독기의 추가 도입, 성적 통지 방식 개선 등으로 성적 통지를 예정대로 하였다. 이전 시험인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과 2011학년도 6월과 9월의 대수능 모의평가에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오프라인 종이 성적표를 발송하였으나, 2011학년도 수능부터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온라인으로 통보를 하고 학생들은 응시 원서를 제출한 학교나 지역 교육청에서 온라인으로 통보된 성적 자료를 출력 받아 배부 받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전 30일 가량 걸리던 성적 통지가 20일 가량으로 단축되었다. 2007 개정 교육과정 (2012학년도~2016학년도)[편집] 2012학년도[편집] 2011년 11월 10일에 시행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으로 시행된 첫 번째 수능이다.[주 11] 작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유지되었다. 2012학년도 수능의 가장 큰 변화는 수리 영역 범위 조정과 탐구 영역 과목 수의 축소이다. 2012학년도 수능부터 수리 영역에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어 가형은 선택 과목이 폐지되고 공통적으로 수학Ⅰ, 수학Ⅱ, 적분과 통계, 기하와 벡터 과목을, 나형은 수학I과 미적분과 통계 기본 과목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탐구 영역 최대 선택과목 수가 4과목에서 3과목으로 축소되었으며 과학탐구의 경우 Ⅱ과목 선택 수 제한이 사라졌다. 또한, 2012학년도 수능부터는 채점방식이 OMR 판독기 방식이 아닌 이미지 스캐너 방식으로 변경되었으므로, 예비마킹을 비롯한 모든 필기구의 흔적이 인식되어 그 흔적은 중복표기로 처리되기 때문에 예비마킹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2012학년도 수능 도중 한 학생이 트위터로 수능을 생중계하는 사건도 있었다. 봇 프로그램(자동예약전송)을 사용했고 이 학생은 업무방해혐의로 형사고발당했지만, 경찰은 단순한 장난으로 인정하고 훈방조치했다. 이 학생은 휴대폰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행위로 적발되지 않았다. 2012학년도 수능은 언어와 수리 가형은 어려웠고, 수리 나형과 외국어는 평이한 경향을 보였다. 특히, 언어와 외국어의 난이도는 6월과 9월에 시행된 모의평가와는 완전히 다른 경향을 보였으며, 외국어는 당시 역대 수능 중에서 가장 쉬운 것으로 기록되었다. 평가원에서는 "수능 난이도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영역별 만점자를 1%로 만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밝혔으나, 실제 수능에서는 언어(0.28%)와 수리 가형(0.31%)은 만점자가 훨씬 적었고, 외국어 영역(2.67%)은 만점자가 매우 많았으며, 수리 나형만이 만점자가 1%에 약간 근접하였다(0.97%). 그리고 탐구 영역과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만점자 비율이 과목별로 들쑥날쑥했다. 사회탐구의 경우 한국지리가 6.38%로 만점자 비율이 가장 높았고, 한국 근·현대사가 1.03%로 만점자 비율이 가장 적었다. 과학탐구의 경우 지구과학Ⅱ가 5.68%로 최고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고, 생물I이 0.46%로 최저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다. 직업탐구의 경우 수산 일반과 해사 일반에서 만점자가 없었으며, 컴퓨터 일반의 만점자 비율이 무려 4.37%로 최고를 기록했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중국어I이 2.96%로 최고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고, 스페인어I이 0.12%로 최저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정부가 공언했던 만점자 1%는 사실상 실패했으며,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애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서 수험생에게 혼란만 주었다."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입시업체에 따르면 수능 전 영역 만점자는 총 30명으로 집계되었으며[22], 수능 문제와 정답에는 이상은 없었고, 성적은 11월 30일에 통지했다. 2013학년도[편집] 2012년 11월 8일에 시행했다.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와 만점자 1% 달성 목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2013학년도 수능에서도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였다. 언어가 어렵고 외국어가 쉬웠던 작년과 반대로 이번에는 언어가 지나치게 쉬워져(만점자 약 14,000여명, 2.36%) 한 문제를 틀려도 1등급을 못 받을 정도였으며 반대로 외국어는 작년보다 난이도가 높아졌다. 수리 영역 가형은 작년에 비해 만점자 비율이 소폭 상승했으나 여전히 1%에 크게 못 미쳤다. 그나마 수리 영역 나형이 만점자 비율이 1%에 거의 근접하였다. 탐구 영역과 제2외국어/한문 영역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난이도가 들쑥날쑥했다. 사회탐구에서는 3.15%의 만점자를 배출한 윤리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이 만점자 비율이 1%를 넘지 못했으며, 특히 경제지리에서는 0.15%의 만점자에 그쳤다. 과학탐구에서는 지구과학I은 응시자의 8%에 가까운 만점자가 나온 반면 생물Ⅱ는 0.1%에도 못 미쳤다. 직업탐구에서는 인간 발달에서 7%를 조금 넘는 만점자가 나온 반면, 농업 기초 기술, 수산 일반, 해사 일반에서 만점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못했으며, 특히 수산 일반과 해사 일반에서는 전년도에 이어 만점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 같은 경우 아랍어Ⅰ에서 2.65%의 만점자가 나온데 비해, 러시아어Ⅰ에서는 0.05%의 만점자가 나오는데 그쳤다. 따라서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만점자 1% 달성 목표는 실패했으며, 객관적으로는 전반적으로 불수능도 물수능도 아닌 평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입시업체에 따르면 수능 전 영역 만점자는 총 6명으로 집계되었으며[23], 성적은 11월 28일에 통지되었다. 2014학년도[편집] 2013년 11월 7일에 시행했다. 수학과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 한해 처음으로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도입되었다. 난이도 조절 실패 논란으로 인해 만점자 1% 정책은 폐기되었으나,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014학년도 수능은 종전의 수능과 달라진 점이 있는데, 달라진 점은 영역의 명칭이 교과목에 맞게 변경되었으며(언어 영역→국어 영역, 수리 영역→수학 영역, 외국어(영어) 영역→영어 영역), A형과 B형으로 나뉜 수준별 문제지를 제공한다. 또한, 국어 영역과 영어 영역 문제수를 50문제에서 5문제가 줄어든 45문제로 축소했고(시험 시간은 변화 없음), 국어 영역 듣기 평가가 폐지되는 반면, 영어 영역 듣기 평가는 종전의 17문제에서 5문제가 늘어난 22문제로 확대했다. 이외에도, 탐구 영역에서 최대 선택과목 수를 3과목에서 2과목으로 축소하고, 선택과목 일부가 조정되었으며,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 기초 베트남어 과목[주 12]이 신설되었다. 인문·사회과학 계열은 대다수가 BAB를, 자연과학·공학·의학 계열은 ABB를 선택하였다. 국어, 수학, 영어 영역 같은 경우, 난이도가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왔으며, 탐구 영역도 선택 과목에 따라 난이도 차이가 컸다. 전 영역 만점자는 BAB(문과) 32명, ABB(이과) 1명으로 총 33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공식 발표를 한 것이 아니라, 각 학교와 학원 별로 만점자를 그들의 홍보 차원에서 공개하면서 비롯된 것이다.[24]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선택형 수능'이 도입돼 '총점'이란 것이 사라졌기에, 원점수 만점자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25]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목포홍일고등학교 출신 삼수생 전봉열이 원점수 400점 만점을 받아 전국에서 유일무이하게 자연계 만점으로 전국 수석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적은 11월 27일에 통지되었다. 세계지리 8번 문제가 오류로 인해 논란이 있었다. 당초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문제에 이상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한 수험생들이 소송을 걸었으나, 1심에서 패소하였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수험생들은 등급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등 이에 항소하였다.[26] 그러다가 이듬해인 2014년 10월 16일에 2심 재판이 열렸고, 1심 재판과는 달리 문항에 오류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27] 판결이 내려진 후 교육부도 잘못을 인정하였으며, 해당 문제는 전원 정답 처리되어 성적도 다시 산출되었다. 한편, 오답으로 인해 피해를 본 학생들에게는 추가 합격 및 정원 외 입학 등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2017년에는 피해를 입었던 수험생들에게 국가가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28] 2015학년도[편집] 2014년 11월 13일에 시행했다. 전년도와 달리, 영어 영역에서 난이도에 따른 수준별 시험은 폐지되었으며, 듣기 평가도 22문항에서 다시 5문항이 줄어든 17문항으로 출제되었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수학 영역, 영어 영역 난이도가 매우 쉬웠으며, 국어 영역 B형 및 사회탐구 영역과 과학탐구 영역은 전반적으로 어려웠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2015학년도 수능 만점자는 총 29명으로, 인문계열(문과) 8명, 자연계열(이과) 21명으로 확인되었으며, 대구 경신고등학교와 서울 은광여자고등학교에서는 수능 만점자가 4명씩 배출되기도 하였다. 성적은 12월 3일에 통지되었다. 영어 영역 25번 문항, 생명과학Ⅱ 8번 문항에서 복수정답 논란이 있었다. 결국, 11월 24일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영어 영역 25번 문항, 생명과학Ⅱ 8번 문항에 대해서 복수 정답 처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며, 김성훈 평가원장이 수능 문제 출제 오류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도 하였다. 2016학년도[편집] 2015년 11월 12일에 시행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으로 시행된 마지막 수능이며,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모의평가와 작년 수능에 비해서는 어려워졌으나 전체적으로 적절한 변별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입시 기관등에 따르면 전 영역 만점자는 16명으로 집계되었다.[29]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2009 개정 교육과정 (2017학년도~)[편집] 2017학년도[편집] 2016년 11월 17일에 시행했으며, 전체적으로 2009 개정 교육과정[주 13]으로 시행된 첫 번째 수능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2017학년도 수능은 종전의 수능과 달라진 점이 있는데, 국어 영역에서 난이도에 따른 수준별 시험은 폐지되었으며, 수학 영역에서 교과과정이 개정되었고 난이도도 종전의 A/B형에서 가/나형으로 변경되었다. 수학 영역에서 가형의 경우 미적분Ⅱ, 확률과 통계, 기하와 벡터에서 출제하였으며, 나형의 경우 수학Ⅱ, 확률과 통계, 미적분Ⅰ에서 출제되었다.[30] 또한, 한국사가 사회탐구 영역에서 분리되었고 다시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31] 한국사 영역은 다른 영역과 달리 40점 이상을 1등급으로 하고 1등급 내려갈 때마다 5점씩 등급컷이 낮아지는 형식으로 총 9등급의 절대평가로 성적을 매기며, 응시하지 않을 경우 시험 성적 전체가 무효 처리된다. 이외에도 직업탐구 영역 선택 과목 일부가 조정되었으며, 최대 응시 과목 수도 2개로 확대되었다. 난이도는 전반적으로 어려웠다고 평가되었다. 입시 기관 등에 따르면 전 영역 만점자는 3명이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32] 성적은 12월 7일에 통지되었다. 한국사 영역 14번 문항, 물리Ⅱ 9번 문항에서 복수정답 논란이 있었다. 결국, 11월 25일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한국사 영역 14번 문항에 대해서는 복수 정답 처리를, 물리Ⅱ 9번 문항에 대해서는 전원 정답 처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33] 2018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당초 2017년 11월 16일에 시행할 예정이었지만, 바로 전날인 11월 15일에 발생한 포항 지진의 여파로 인해, 일주일 후인 2017년 11월 23일로 순연되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이 시험부터 영어 영역에 총 9등급의 절대평가가 도입되었으며, 다른 영역과 달리 90점 이상을 1등급으로 하고 1등급 내려갈 때마다 10점씩 등급컷이 낮아지는 형식으로 총 9등급의 절대평가로 성적을 매긴다.[34]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만점자는 총 15명이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35] 만점자인 경기 오산 세마고등학교의 최동욱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다.성적은 12월 12일에 통지되었다. 2019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2018년 11월 15일에 시행했으며,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적은 시험이다. 성적은 12월 5일에 통지되었다.[36] 예정된 시험 목록[편집] 2020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2019년 11월 14일에 시행할 예정이며, 성적은 12월 4일에 통지될 예정이다.[37] 2021학년도[편집] 2020년 11월 19일에 시행할 예정이며, 성적은 12월 9일에 통지할 예정이다.[38]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인문계의 경우, 사회탐구에서 정치, 경제, 사회·문화, 세계사, 세계지리가 선택과목으로 나왔고, 자연계는 과학탐구에서 물리 Ⅱ, 화학 Ⅱ, 생물 Ⅱ, 지구과학 Ⅱ가 선택과목으로 나왔다. ↑ 당시 제2외국어 영역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과목은 독일어 Ⅰ, 프랑스어 Ⅰ, 스페인어 Ⅰ, 중국어 Ⅰ, 일본어 Ⅰ, 러시아어 Ⅰ으로 6과목이었다. ↑ 당시 가형에는 수학 Ⅰ이 12문제, 수학 Ⅱ가 13문제, 선택과목 (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이산수학) 5문제가 출제되었다. ↑ 당시 나형에 출제되었던 모든 문항은 수학 Ⅰ에서만 출제되었다. ↑ 당시 수능 수리 가형에서 선택과목은 5문제만 출제되었다. ↑ 이로 인해 문과생이 과학탐구를, 이과생이 사회탐구를 선택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다만 이런 경우는 0에 수렴한다. ↑ 현재의 한국사 ↑ 종전의 국사가 전(前)근대사까지만 포함되어 있어 역사 교육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있자, 2006년부터 국사 과목에 근현대사 부분을 새로 추가하였다. ↑ 사회탐구/과학탐구/직업탐구 ↑ 3과목 영역에서 만점을 받은 행운의 주인공은 당시 충렬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임수현 학생이였다. ↑ 수학과 영어 영역에 한정되었으며, 이외 나머지 과목은 7차 교육과정을 따른다. ↑ 기초 베트남어는 2011년 부분 개정된 교육과정을 따른다. ↑ 2011년에 부분 개정되었다. 참조주[편집] ↑ 국립교육평가원, "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해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4년 7월 1일 ↑ 대학 수능 전체 수석 정성택군 <부산과학고>1994-12-21《매일경제신문》 ↑ 뒤바뀐 수능 성적 1995-01-14 《동아일보》 ↑ 국립교육평가원, "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해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5년 7월 1일 ↑ {공부야 놀자} 지난 12년 수능 경향 살펴보니 Archived 2006년 2월 7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05년 3월 20일 ↑ 가 나 “<해설(解說)> 97학년도 수능시험 채점결과 분석”. 연합뉴스. 1996년 12월 6일.  ↑ “<`97 수능시험 영역별 출제경향>(종합)”. 연합뉴스. 1996년 11월 13일.  ↑ 가 나 올 수능만점자 상당수 나올듯 인터넷한겨레 2000.11.16 ↑ '수능 만점'대원외고 박혜진양 1999-12-16《연합뉴스》 ↑ [1] ↑ "어려운 문제 풀고도 점수 낮다니…" 2000-11-15《동아일보》 ↑ 대법원 "02~03학년도 수능 점수 반올림 정당" Archived 2007년 12월 18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16일 ↑ “작년 언어영역 17번 문제 복수 정답 인정” 판결, Archived 2004년 10월 15일 - 웨이백 머신 국민일보, 2004년 7월 8일 ↑ '수능부정' 314명 시험 무효 처리, 《SBS》, 2004년 12월 13일 ↑ 교육부 "수능 등급제 계속 유지할 것" 2007-12-12《노컷뉴스》 ↑ 물리학회 "수능 물리II 11번, 복수 정답 가능" Archived 2007년 12월 25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2일 ↑ 교육과정평가원 "수능 물리 II 정답 이상 없다" Archived 2007년 12월 25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2일 ↑ [2] ↑ 교육과정평가원 "수능 물리 II 복수정답 인정" Archived 2007년 12월 27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4일 ↑ "수능, 언어 내리고 수리(가형)는 내리고, 수리(나형)는 오르고 외국어 내리고", CNB News 김미영 기자 2009-11-16 14:44:39 ↑ "수능 또 복수정답…성적에 영향은", 시민일보 2009-11-24 15:46:46 ↑ 작년 수능 만점자 20개 고교서 30명《조선일보》2012년 9월 10일 안석배 기자 ↑ 수능 만점자 4명 서울대·2명 연세대 입학《뉴스1》2013년 2월 20일 김정욱 기자 ↑ 2014학년도 수능 만점자 수 8명 → 33명 변동 왜? ↑ 수능 만점-표준점수 최고점 뭐가 다를까?… 아리송 ↑ 수험생들 ‘수능 세계지리 출제 오류’ 항소《경향신문》 2013년 12월 23일, 김지원 기자 ↑ 교육부, 수능 세계지리 오류 인정…실효성 의문《세계일보》 2014년 11월 1일 ↑ 2014 수능 세계지리 오류, 수험생에게 배상해야 ↑ 2016 수능, 만점자 16명에 그쳐..지난해보다 '뚝' 떨어졌다 ↑ (2017학년도 수능 개편안 문답)현 중3부터 한국사 필수… 첫해는 쉽게 출제할 듯 ↑ '한국사 필수' 등 2017학년도 수능 기본계획 확정 ↑ 수능 만점자, 지난해 16명에서 올해 3명으로 줄어···‘불수능’ 맞네 ↑ 수능 ‘한 해 두 문항 오류’ 불명예…“한국사 복수정답·물리Ⅱ는 정답없어” ↑ 現 중3 대학입시부터 수능 영어 '절대평가' 도입 ↑ “올 수능 만점자 15명으로 가채점 11명보다 많아” ↑ 2019학년도 수능, 국어·수학 입시 비중 커질 듯 ↑ 2020학년도 수능일 2019년 11월14일…현 수능과 같은 체제 ↑ '2021 수능' 11월 19일…수학 가형 '기하' 제외 vdeh대학수학능력시험역대 시험 (학년도)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그 외 5차 교육과정 6차 교육과정 7차 교육과정 2007 2009 2015 대한민국의 교육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교과목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 제도 음영표시는 가까운 시기에 있는 시험입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연도별_대학수학능력시험&oldid=24125914" 분류: 대한민국의 교육대학수학능력시험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30일 (화) 16: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연도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목차 1 연도별 시험 목록 1.1 5차 교육과정 (1994학년도~1998학년도) 1.1.1 1994학년도 1.1.2 1995학년도 1.1.3 1996학년도 1.1.4 1997학년도 1.1.5 1998학년도 1.2 6차 교육과정 (1999학년도~2004학년도) 1.2.1 1999학년도 1.2.2 2000학년도 1.2.3 2001학년도 1.2.4 2002학년도 1.2.5 2003학년도 1.2.6 2004학년도 1.3 7차 교육과정 (2005학년도~2011학년도) 1.3.1 2005학년도 1.3.2 2006학년도 1.3.3 2007학년도 1.3.4 2008학년도 1.3.5 2009학년도 1.3.6 2010학년도 1.3.7 2011학년도 1.4 2007 개정 교육과정 (2012학년도~2016학년도) 1.4.1 2012학년도 1.4.2 2013학년도 1.4.3 2014학년도 1.4.4 2015학년도 1.4.5 2016학년도 1.5 2009 개정 교육과정 (2017학년도~) 1.5.1 2017학년도 1.5.2 2018학년도 1.5.3 2019학년도 2 예정된 시험 목록 2.1 2020학년도 2.2 2021학년도 3 각주 3.1 내용주 3.2 참조주 연도별 시험 목록[편집] 5차 교육과정 (1994학년도~1998학년도)[편집] 1994학년도[편집] 위키책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1994학년도 1차 대학수학능력시험 1993년 8월 20일 금요일과 11월 16일 화요일, 시험을 두 번 시행했다. 1982학년도부터 전년도(1993학년도)까지 시행되었던 학력고사의 문제 유형과는 상당히 차별화된 유형을 선보였다. 당시에는 문과, 이과 구분과 선택 과목 없이, 모든 수험생이 똑같은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2회 시행에 따른 난이도 조정 실패라는 문제점이 노출되어 다음 년도부터는 연 1회의 시험만 시행하게 되었다. 당시 영역별 배점은 언어 60, 수리탐구Ⅰ 40, 수리탐구Ⅱ 60(사탐 27/과탐 33), 외국어 40이었으며, 총 200점 만점이었다. 성적은 각각 9월 23일, 12월 20일에 통지되었다. 당시 1차 수능에서 대구 성광고등학교 배호필 학생이 198점(200점 만점)을 획득,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당시 2차 수능에서 서울과학고등학교 윤건수 학생이 191점(200점 만점)을 획득, 최고 성적을 차지하였다. 1995학년도[편집] 1994년 11월 23일에 시행했다. 이 수능부터 2006학년도 수능까지 수능은 수요일에 치뤄졌다. 19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전년도에 실시된 시험과 달리 단 1회만 시행하였다. 또 이 해부터 계열별 분리 출제가 이루어졌다. 언어 영역과 외국어(영어) 영역은 계열에 관계 없이 공통 출제하였고, 수리 영역과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에서는 약 25% 정도가 계열별로 구분 출제되었다. 계열별 출제로는 인문계에 사회문화, 세계지리, 자연계에 수학Ⅱ, 물리, 화학이 추가되었다. 또한, 문항당 배점을 다양화하여 언어 영역과 수리 · 탐구 영역Ⅱ는 0.8, 1, 1.2점, 수리 · 탐구 영역Ⅰ은 1, 1.5, 2점, 외국어(영어) 영역은 0.6, 0.8, 1점으로 하였다.[1] 성적은 12월 21일에 통지되었다. 당시 부산과학고등학교(현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정성택 학생이 194점(200점 만점)을 획득, 전체 수석을 차지하였으며,[2] 수험번호를 잘못 부여하는 행정 착오로 수험생의 성적이 뒤바뀌어 통보되는 '해프닝'도 있었다.[3] 1996학년도[편집] 1995년 11월 22일에 시행했다. 본고사 체제하의 마지막 수능이자, 200점 만점 체제하의 마지막 수능이다. 성적은 12월 22일에 통지되었다.[4] 당시 전국수석을 차지하여 자연계열에 응시한 서울과학고등학교 이정원 학생이었다. 1997학년도[편집] 1996년 11월 13일에 시행했다.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1994학년도부터 전년도(1996학년도)까지 시행되었던 대학 본고사가 폐지되고 수시모집이 신설되었기 때문에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수능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다. 또한 전년도(1996학년도)의 배점이 200점 만점에 언어 60, 수리탐구 Ⅰ 40, 수리탐구 Ⅱ 60, 외국어 40 이었던 데 반면 1997학년도부터는 총점이 두 배인 400점 만점으로 늘어났고, 각 과목당 배점 역시 두배로 늘어났다. 그외에도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작된 이래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까지 치뤄진 13차례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시험이었다.[5] 수능 최초로 수리탐구Ⅰ 영역에서 주관식 단답형 문제가 출제[6] 되고, 외국어 영역 듣기평가도 종전 10문제에서 17문제로 늘어났으며, 시사적인 내용을 다루는 문제나 여러 교과가 연결된 통합교과형 문제가 다량 출제[7]되어 특히 상위권에서 점수폭 하락이 컸다[6]. 당시 자연계열로 응시해 400점 만점에 373.3점을 획득한, 제주 대기고등학교 서준호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고, 당시 자연계열 응시해 364.1점을 획득한, 서울 한성과학고등학교 나정임 학생이 자연계 여자 전체차석을 차지하였으며, 당시 인문계열에 응시해 314.1점을 획득한, 서울 신목고등학교 신상영 학생이 전국 차석을 차지하였으며, 성적은 12월 7일에 통지되었다. 1998학년도[편집] 1997년 11월 19일에 시행했다. 이 날은 대한민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기로 결정된 날이기도 하다. 또한 5차 교육과정에 따른 마지막 수능이자 국립교육평가원(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한 마지막 수능이었으며, 전체적으로 수능 응시인원이 이전에 치뤄진 수능들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전까지 치러진 역대 수능들보다 훨씬 쉬웠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만점자는 나오지 않았다. 성적은 12월 20일에 통지되었다. 6차 교육과정 (1999학년도~2004학년도)[편집] 1999학년도[편집] 1998년 11월 18일에 시행했다. 처음으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주관한 시험이며, 6차 교육과정에 따른 최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상대적으로 입시에서 수학의 비중이 낮은 예·체능계 학생을 위한 수리·탐구 Ⅰ 영역에 예·체능계를 추가했다. 또한 인문계와 자연계에 한해, 수리·탐구 Ⅱ 영역에 선택과목 제도[주 1]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표준점수제도 같이 도입되었다. 19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문제를 쉽게 내는 출제경향이 이어져 전년도보다 쉽게 출제되었으며,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최초로 만점(당시 400점)자가 배출되었다. 만점자는 당시 한성과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오승은 학생이었다.[8] 최초의 대입수능시험 만점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당시 오승은 학생의 이름을 딴 수능 시험 참고서 등이 많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2000학년도[편집] 1999년 11월 17일에 시행했다.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많았던 시험이다. 성적은 12월 17일에 통지되었으며,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사상 2번째 만점자가 배출되었다.[8] 만점자는 당시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혜진 학생이었다.[9] 2001학년도[편집] 2000년 11월 15일에 시행했다. 난이도가 전년도에 비해 굉장히 많이 하락했던 대표적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세간에서 "물수능"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매우 쉬운 난이도를 보였다. 당시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자가 66명이나 배출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N수생들이 서울, 수도권 대학에 낙방하는 기이한 일도 발생하였다. 특히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최초로 대학수학능력시험 만점자가 내신과 제2외국어영역 변환표준점수 상의 불이익으로 서울대학교의 특차전형에 떨어지는 일도 발생하였다.[10]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사회적 목적과 기능, 난이도와 관련해 진보 보수 진영의 입장이 양분되어 당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수학 등의 과목에서 쉬운 문제에 높은 배점을 하고, 어려운 문제에 낮은 배점을 하는 소위 '역배점'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11] 또한,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제2외국어 영역[주 2]이 추가된 최초의 수능시험이다. 성적은 12월 12일에 통지되었다. 2002학년도[편집] 2001년 11월 7일에 시행했다. 6차 교육과정 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험이며, 난이도가 대폭 하락했던 전년도와 달리 이번에는 난이도가 매우 높아져서 세간에서 '불수능'이라는 별칭을 붙인 수능시험이었다. 1997학년도 이후 가장 어려운 수능이었다. 그 여파로 2002학년도부터 2008학년도까지 만점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수능 응시인원이 많이 줄었으며, 전체 수험생의 평균점수가 66.5점, 상위 50%가 66.8점으로 폭락하였다. 한편, 수능시험의 특차 전형이 폐지되었으며, 총점 대신 수능 9등급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당시 수능을 치루었던 학생들은 특정 분야만 우수하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의 정책에 피해를 입었다며 자신들을 '이해찬 세대'로 명명하기도 했다. 성적은 12월 3일에 통지되었다. 전국수석을 차지하여 자연계열에 응시한 대구 덕원고등학교 재수생인 박기범 학생, 인문계에 수석을 차지한 익산 남성고등학교 윤석준 학생이었다. 2003학년도[편집] 2002년 11월 6일에 시행했다. 2003학년도 수능까지는 수험생에게는 원점수만 소수점까지 표기해 통보하고 대학에는 수험생의 원점수, 표준점수, 백분위점수 등을 모두 반올림해 제공했다가 점수 역전 현상으로 인한 당락의 역전 현상이 발생하여 당시 사회적 문제가 되어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2004학년도부터는 소수점 배점 문제가 모두 폐지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인 2007년, 대법원은 수능 점수 반올림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및 평가원의 재량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판결하였다.[12] 한편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인문계열 전국차석, 전체여자수석을 392.3점을 차지한 경기 안성 안법고등학교 우아라 학생, 전국 수석을 차지하여 응시한 서현고등학교 윤재희 학생이었다. 2004학년도[편집] 2003년 11월 5일에 시행했다. 6차 교육과정 마지막 수능이였으며, 역대 수능시험 사상 복수정답이 인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당시 원장 이종승)은 언어영역 17번 문제의 복수정답(기존의 정답은 3번이었으나 5번도 정답으로 인정)을 인정했으며, 또한 수능시험 출제자 명단이 사전에 유출되는 파문이 일어나 수능 관리 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가 빗발쳤으며, 예상 문제가 그대로 출제된 논란도 있었다.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전국 수석은 청석고등학교 재수생인 채희동 학생이었다. 한편, 2004년 7월 28일 처음의 정답 3번을 선택했던 수험생 460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낸 복수정답 인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13] 또한, 전년도에 있었던 소숫점 배점 논란으로 인해, 이 수능부터 배점을 정수로만 매긴다. 7차 교육과정 (2005학년도~2011학년도)[편집] 2005학년도[편집] 2004년 11월 17일에 시행했다. 2005학년도 수능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 이유는 7차 교육과정에 따른 최초의 수능 시험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로는 점수 배점으로, 기존의 영역별 120, 80, 120, 80, 400점 만점의 제도에서 100, 100, 100, 50(과목별), 500점 만점으로 변경되었고, 표준 점수는 그 배로 하며(기존에는 440점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음), 표준편차를 20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선택제 수능의 도입으로 인해 성적표에도 원점수를 없애고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으로만 기재한다. 또한, 인문계, 자연계, 예·체능계로 구분된 계열을 없애고, 6차 교육과정의 수능시험에서는 3교시에 시행되었던 수리·탐구 영역 Ⅱ, 즉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과 4교시에 시행되었던 외국어 영역의 시험 시간이 서로 맞바뀌었고, 수리 영역의 경우 수준에 따라 가형[주 3]과 나형[주 4] 으로 구분되고, 고등학교 2, 3학년때 배우는 심화 선택 과목에서만 직접적으로 출제하며(국민 기본 공통 과정인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은 간접적으로 출제), 가형에 선택과목(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이산수학)[주 5]이 도입되고, 주관식 문제도 종전의 6문제에서 9문제로 늘리고, 정답도 최대 3자리로 늘리고, 음수 정답과 소숫점 정답을 삭제했으며, 제2외국어 과목은 선택 과목을 8개로 늘리는 (기존의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에 한문과 아랍어 추가) 동시에,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은 기존의 공통부분(자기 과의 과목은 72점, 그 반대는 48점으로 부여)을 없애고, 사회탐구면 사회탐구만, 과학탐구면 과학탐구만 선택하게 하였으며[주 6], 사회탐구는 11개 과목 (한국지리, 정치, 경제, 법과 사회, 사회·문화, 세계사, 윤리, 국사, 세계지리, 한국근·현대사, 경제지리), 과학탐구는 8개 과목(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각각 I,II) 중에서 4과목씩 선택(단, 과학탐구는 II과목을 2개로 제한)하게 하였다. 또한 대학 진학을 위한 특성화 고교생을 위해 직업탐구 영역(17과목)을 신설하여 3과목(컴퓨터 4개 중 1과목, 전공 13개 중 2과목)씩 선택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이로 인해 점수가 낮았던 수리 (수학)와 영어가 강해졌으며, 언어는 쉬워지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2005학년도 수능을 시행한 결과 언어와 수리는 쉬운 가운데, 영어는 어려워지는 현상을 보이고, 탐구 영역은 각 과목에 따라 점수가 균일하지 못한 문제점을 보였다. 그리고 제2외국어 아랍어의 경우 표준 점수 100점 득점자가 나오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아랍어를 시험친 학생들의 수준 차가 매우 커서 일어난 현상이다.) 또한 2005학년도 수능에는 역대 수능 사상 최초로 휴대폰을 이용한 조직적인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수험생 314명은 수능부정으로 시험결과가 무효처리되었다. 이를 교훈삼아 이후 수능에는 부정행위 단속을 더욱 강화했다. 성적은 12월 14일에 통지되었다.[14] 그리고 전년도에 있었던 언어 영역 복수정답 사건으로 인해, 이 수능부터 오답 이의제기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2006학년도[편집] 2005년 11월 17일에 시행할 예정이였으나, 부산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관계로 당초 계획보다 일주일 정도 늦춰진 2005년 11월 23일에 시행했다. 이 수능은 수요일에 실시한 마지막 수능이며, 지나치게 쉬워진 난이도로 많은 학생들이 피해를 보았는데, 언어 영역의 경우 100점 만점 중 95점 이상이 12% 이상을 차지하는 등 변별력에 큰 문제가 생겼다. 수리 영역의 경우, '가'형과 '나'형의 난이도 차이로 인해 서로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았다. 외국어 영역은 전년도 수능에 비하여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탐구 영역은 선택 과목 간의 지나친 난이도 차이로 인하여 '로또수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전년도의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 때문에 이번 수능부터 휴대폰, MP3 플레이어를 포함한 모든 전자기기(시각 표시 기능만을 가진 시계는 제외)를 소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대리시험 방지용으로 수능 샤프와 OMR 답안지 필적 확인이 처음 도입되었다. 성적은 12월 16일에 통지되었다. 2007학년도[편집] 2006년 11월 16일에 시행했다. 목요일에 실시된 첫 번째 수능이다. 외국어 영역과 수리 나형은 쉽게 출제된 반면, 언어 영역과 수리 가형 그리고 탐구 영역은 어렵게 출제되었다. 성적은 12월 13일에 통지되었다. 2008학년도[편집] 2007년 11월 15일에 시행했다. 2008학년도에는 수능 성적표에 표시되는 항목이 대폭 줄어들었다. 성적표에 표준점수와 백분위를 삭제하고, 9개의 등급만 표기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으로 인해 2008학년도 수능은 2018학년도 수능 이전까지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적었다. 언어 영역 전체 문항이 기존 60문항에서 50문항으로 줄어들었으며(듣기 평가는 6문항에서 5문항으로 축소), 이에 따라 언어 영역의 시험 시간도 전년도보다 10분 단축되었다. 바뀐 수능 시험 시간과 문항수는 2007년 3월부터 각 교육청 주관 전국연합학력평가와 사설 학원의 모의고사, 평가원 주관의 모의평가에 반영되었다. 종로학원, 메가스터디 등 입시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언어, 수리 나형, 외국어 영역은 예년보다 조금 어려웠으며, 수리 가형은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탐구 영역은 대체로 평이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12월 12일에 성적을 통지하기로 하였지만, 등급 제도의 불안등을 이유로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는 발표를 5일 앞당겨 12월 7일 공식적으로 성적을 통지하였다. 수능 이후 등급제 수능에 대한 수험생들의 불만이 잇따랐다. 단 1점 차이로 등급이 갈려 결국 점수 차이가 1점의 수 배에 이르게 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고 일부 영역에서는 한 문제만 틀렸음에도 1등급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일부에서는 행정 재판까지 준비하였다. 이에 대해 교육인적자원부는 등급제 수능은 장기간의 사회적 합의를 거쳐 도입된 제도로서 제도 초기에 다소간의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 등급제를 유지할 것이라 밝혔다.[15] 12월 22일, 한국물리학회가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 물리Ⅱ 11번 문제에 대해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16] 같은 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한국물리학회가 내놓은 입장에 대해 "물리학회는 수험생들이 배우는 고교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고려하지 않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능은 고교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에 따라 출제한다는 원칙에 따라야 하고 그 원칙에 비춰 이 문항은 이상이 없다"라며, 정답에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17] 그러나 9종중 4종의 교과서에 문제와 관련된 개념(다원자 분자의 개념)이 포함된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18] 결국, 이틀 뒤인 12월 24일, 교육과정평가원은 물리Ⅱ 복수 정답을 인정했고 평가원장이 사임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19] 복수정답으로 물리Ⅱ의 등급이 조정된 사람은 1,016명으로 조사되었고, 그들에 한해 12월 26일에 성적표를 다시 배부했다. 2009학년도[편집] 2008년 11월 13일에 실시되었다. 사회탐구 영역 중 국사[주 7] 과목에 한해 2005 개정 교육과정이 처음 도입된 시험이기도 하다.[주 8]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주 9] 전 영역 시험의 난이도가 전년도 시험와 비교하여 상당히 높아졌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제 2외국어에서 아랍어 열풍이 처음으로 분 수능이기도 하다. 2009학년도 수능부터는 2008학년도 수능에 시행되었던 수능 등급 단독 표기제가 다시 폐지되어, 2005~2007학년도 수능과 같이 성적표에 원점수를 제외한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이 모두 표기되었으며, 이 체제는 이후 수능 시험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2월 10일에 성적을 통지했으며, 2001학년도 수능시험 이후 약 8년만의 수능 전 영역 만점자인 환일고등학교의 박창희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다. 2010학년도[편집] 2009년 11월 12일에 시행했다. 예년 수능과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달랐으며, 1학기 수시모집을 폐지해 예년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수능 시험에 응시했다. 외국과 마찬가지로 수능 시험에 응시한 1991년생들이 매우 많았고, 난이도는 속칭 물수능이라 불릴 정도로 약간 쉬웠으나 3영역, 전영역 만점자는 없었다. 이번 수능에서는 종로학원, 메가스터디 등의 입시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외국어 영역이 지난 해보다 매우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언어영역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으로 출제되었으며, 수리영역은 가형과 나형 모두 지난해보다 약간 쉽게 출제되었다.[20] 과학탐구 영역은 지난해보다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으며, 제2외국어·한문 영역은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도 수능에서는 2004년도 수능처럼 복수정답이 인정되는 사태가 다시 발생하였다. 지구과학I 19번 문제가 복수 정답이 인정되었다.[21] 2010학년도 수능부터 미리 풀기 방지용으로 문제지의 겉표지를 도입하였다. 한편, 성적은 본래 12월 9일에 통지할 예정이었으나 하루 앞당겨 12월 8일에 통지했다. 2011학년도[편집] 당초 2010년 11월 11일에 시행할 예정이었지만, 서울 G20 정상회의 개최 날짜와 겹치는 바람에 일주일 후인 2010년 11월 18일로 순연하였다. 2011학년도 수능은 에코 베이비붐 세대의 최고점인 1992년생이 응시한 것으로 지원자는 712,777명, 응시자는 668,339명으로 집계되어, 제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적용된 2005학년도 수능 이래로 최다 응시자였다. 수리 영역에 한해 7차 교육과정 마지막 시험이였으며,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율은 70% 이상이었으며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쉬운 문항과 어려운 문항을 적절히 안배하여 변별력과 연계율을 모두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어 영역, 수리 영역 가형, 외국어 영역이 굉장히 어렵게 출제되었으며 특히 수리 영역 가형의 경우에는 역대 최저 원점수 평균을 기록하였다. 전영역 만점자는 없었으나, 3과목 영역 만점자가 1명이 나오기도 했다.[주 10] 그러나 표준편차가 컸기 때문에 원점수 100점을 획득한 수험생이 얻는 표준점수, 즉 표준점수 최고점은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보다 1점이 낮았다. 이외에도 언어 영역, 수리 영역 가형, 외국어 영역은 역대 최저 만점자, 역대 최저 만점자 비율을 기록하며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시행된 제 7차 교육과정의 수능에서 가장 어려웠다. 그러나 수리영역 나형은 전년도보다는 어렵게 출제되었지만, 객관적으로는 평이한 수능으로 출제되었다. 한편,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아랍어Ⅰ의 응시자가 처음으로 감소세에 들어섰으나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 3회 연속으로 해당 영역 최다 응시자 과목을 차지하였으나 표준점수 최고점이 기존 100점에서 90점으로 10점 하락했다. 그 동안 최저 응시자였던 러시아어Ⅰ은 독일어Ⅰ보다 약간 명이 더 응시하여 최저 응시자 과목이 뒤바뀌었다. 성적은 12월 8일에 통지되었다. 시험은 일주일 연기되었지만 대입 전형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OMR판독기의 추가 도입, 성적 통지 방식 개선 등으로 성적 통지를 예정대로 하였다. 이전 시험인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과 2011학년도 6월과 9월의 대수능 모의평가에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오프라인 종이 성적표를 발송하였으나, 2011학년도 수능부터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온라인으로 통보를 하고 학생들은 응시 원서를 제출한 학교나 지역 교육청에서 온라인으로 통보된 성적 자료를 출력 받아 배부 받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전 30일 가량 걸리던 성적 통지가 20일 가량으로 단축되었다. 2007 개정 교육과정 (2012학년도~2016학년도)[편집] 2012학년도[편집] 2011년 11월 10일에 시행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으로 시행된 첫 번째 수능이다.[주 11] 작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유지되었다. 2012학년도 수능의 가장 큰 변화는 수리 영역 범위 조정과 탐구 영역 과목 수의 축소이다. 2012학년도 수능부터 수리 영역에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어 가형은 선택 과목이 폐지되고 공통적으로 수학Ⅰ, 수학Ⅱ, 적분과 통계, 기하와 벡터 과목을, 나형은 수학I과 미적분과 통계 기본 과목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탐구 영역 최대 선택과목 수가 4과목에서 3과목으로 축소되었으며 과학탐구의 경우 Ⅱ과목 선택 수 제한이 사라졌다. 또한, 2012학년도 수능부터는 채점방식이 OMR 판독기 방식이 아닌 이미지 스캐너 방식으로 변경되었으므로, 예비마킹을 비롯한 모든 필기구의 흔적이 인식되어 그 흔적은 중복표기로 처리되기 때문에 예비마킹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2012학년도 수능 도중 한 학생이 트위터로 수능을 생중계하는 사건도 있었다. 봇 프로그램(자동예약전송)을 사용했고 이 학생은 업무방해혐의로 형사고발당했지만, 경찰은 단순한 장난으로 인정하고 훈방조치했다. 이 학생은 휴대폰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행위로 적발되지 않았다. 2012학년도 수능은 언어와 수리 가형은 어려웠고, 수리 나형과 외국어는 평이한 경향을 보였다. 특히, 언어와 외국어의 난이도는 6월과 9월에 시행된 모의평가와는 완전히 다른 경향을 보였으며, 외국어는 당시 역대 수능 중에서 가장 쉬운 것으로 기록되었다. 평가원에서는 "수능 난이도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영역별 만점자를 1%로 만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밝혔으나, 실제 수능에서는 언어(0.28%)와 수리 가형(0.31%)은 만점자가 훨씬 적었고, 외국어 영역(2.67%)은 만점자가 매우 많았으며, 수리 나형만이 만점자가 1%에 약간 근접하였다(0.97%). 그리고 탐구 영역과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만점자 비율이 과목별로 들쑥날쑥했다. 사회탐구의 경우 한국지리가 6.38%로 만점자 비율이 가장 높았고, 한국 근·현대사가 1.03%로 만점자 비율이 가장 적었다. 과학탐구의 경우 지구과학Ⅱ가 5.68%로 최고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고, 생물I이 0.46%로 최저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다. 직업탐구의 경우 수산 일반과 해사 일반에서 만점자가 없었으며, 컴퓨터 일반의 만점자 비율이 무려 4.37%로 최고를 기록했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는 중국어I이 2.96%로 최고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고, 스페인어I이 0.12%로 최저의 만점자 비율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정부가 공언했던 만점자 1%는 사실상 실패했으며,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애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서 수험생에게 혼란만 주었다."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입시업체에 따르면 수능 전 영역 만점자는 총 30명으로 집계되었으며[22], 수능 문제와 정답에는 이상은 없었고, 성적은 11월 30일에 통지했다. 2013학년도[편집] 2012년 11월 8일에 시행했다.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와 만점자 1% 달성 목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2013학년도 수능에서도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였다. 언어가 어렵고 외국어가 쉬웠던 작년과 반대로 이번에는 언어가 지나치게 쉬워져(만점자 약 14,000여명, 2.36%) 한 문제를 틀려도 1등급을 못 받을 정도였으며 반대로 외국어는 작년보다 난이도가 높아졌다. 수리 영역 가형은 작년에 비해 만점자 비율이 소폭 상승했으나 여전히 1%에 크게 못 미쳤다. 그나마 수리 영역 나형이 만점자 비율이 1%에 거의 근접하였다. 탐구 영역과 제2외국어/한문 영역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난이도가 들쑥날쑥했다. 사회탐구에서는 3.15%의 만점자를 배출한 윤리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이 만점자 비율이 1%를 넘지 못했으며, 특히 경제지리에서는 0.15%의 만점자에 그쳤다. 과학탐구에서는 지구과학I은 응시자의 8%에 가까운 만점자가 나온 반면 생물Ⅱ는 0.1%에도 못 미쳤다. 직업탐구에서는 인간 발달에서 7%를 조금 넘는 만점자가 나온 반면, 농업 기초 기술, 수산 일반, 해사 일반에서 만점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못했으며, 특히 수산 일반과 해사 일반에서는 전년도에 이어 만점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 같은 경우 아랍어Ⅰ에서 2.65%의 만점자가 나온데 비해, 러시아어Ⅰ에서는 0.05%의 만점자가 나오는데 그쳤다. 따라서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만점자 1% 달성 목표는 실패했으며, 객관적으로는 전반적으로 불수능도 물수능도 아닌 평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입시업체에 따르면 수능 전 영역 만점자는 총 6명으로 집계되었으며[23], 성적은 11월 28일에 통지되었다. 2014학년도[편집] 2013년 11월 7일에 시행했다. 수학과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 한해 처음으로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도입되었다. 난이도 조절 실패 논란으로 인해 만점자 1% 정책은 폐기되었으나,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014학년도 수능은 종전의 수능과 달라진 점이 있는데, 달라진 점은 영역의 명칭이 교과목에 맞게 변경되었으며(언어 영역→국어 영역, 수리 영역→수학 영역, 외국어(영어) 영역→영어 영역), A형과 B형으로 나뉜 수준별 문제지를 제공한다. 또한, 국어 영역과 영어 영역 문제수를 50문제에서 5문제가 줄어든 45문제로 축소했고(시험 시간은 변화 없음), 국어 영역 듣기 평가가 폐지되는 반면, 영어 영역 듣기 평가는 종전의 17문제에서 5문제가 늘어난 22문제로 확대했다. 이외에도, 탐구 영역에서 최대 선택과목 수를 3과목에서 2과목으로 축소하고, 선택과목 일부가 조정되었으며,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 기초 베트남어 과목[주 12]이 신설되었다. 인문·사회과학 계열은 대다수가 BAB를, 자연과학·공학·의학 계열은 ABB를 선택하였다. 국어, 수학, 영어 영역 같은 경우, 난이도가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왔으며, 탐구 영역도 선택 과목에 따라 난이도 차이가 컸다. 전 영역 만점자는 BAB(문과) 32명, ABB(이과) 1명으로 총 33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공식 발표를 한 것이 아니라, 각 학교와 학원 별로 만점자를 그들의 홍보 차원에서 공개하면서 비롯된 것이다.[24]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선택형 수능'이 도입돼 '총점'이란 것이 사라졌기에, 원점수 만점자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25]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목포홍일고등학교 출신 삼수생 전봉열이 원점수 400점 만점을 받아 전국에서 유일무이하게 자연계 만점으로 전국 수석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적은 11월 27일에 통지되었다. 세계지리 8번 문제가 오류로 인해 논란이 있었다. 당초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문제에 이상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한 수험생들이 소송을 걸었으나, 1심에서 패소하였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수험생들은 등급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등 이에 항소하였다.[26] 그러다가 이듬해인 2014년 10월 16일에 2심 재판이 열렸고, 1심 재판과는 달리 문항에 오류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27] 판결이 내려진 후 교육부도 잘못을 인정하였으며, 해당 문제는 전원 정답 처리되어 성적도 다시 산출되었다. 한편, 오답으로 인해 피해를 본 학생들에게는 추가 합격 및 정원 외 입학 등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2017년에는 피해를 입었던 수험생들에게 국가가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28] 2015학년도[편집] 2014년 11월 13일에 시행했다. 전년도와 달리, 영어 영역에서 난이도에 따른 수준별 시험은 폐지되었으며, 듣기 평가도 22문항에서 다시 5문항이 줄어든 17문항으로 출제되었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의 연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수학 영역, 영어 영역 난이도가 매우 쉬웠으며, 국어 영역 B형 및 사회탐구 영역과 과학탐구 영역은 전반적으로 어려웠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2015학년도 수능 만점자는 총 29명으로, 인문계열(문과) 8명, 자연계열(이과) 21명으로 확인되었으며, 대구 경신고등학교와 서울 은광여자고등학교에서는 수능 만점자가 4명씩 배출되기도 하였다. 성적은 12월 3일에 통지되었다. 영어 영역 25번 문항, 생명과학Ⅱ 8번 문항에서 복수정답 논란이 있었다. 결국, 11월 24일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영어 영역 25번 문항, 생명과학Ⅱ 8번 문항에 대해서 복수 정답 처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며, 김성훈 평가원장이 수능 문제 출제 오류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도 하였다. 2016학년도[편집] 2015년 11월 12일에 시행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으로 시행된 마지막 수능이며,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모의평가와 작년 수능에 비해서는 어려워졌으나 전체적으로 적절한 변별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입시 기관등에 따르면 전 영역 만점자는 16명으로 집계되었다.[29] 성적은 12월 2일에 통지되었다. 2009 개정 교육과정 (2017학년도~)[편집] 2017학년도[편집] 2016년 11월 17일에 시행했으며, 전체적으로 2009 개정 교육과정[주 13]으로 시행된 첫 번째 수능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2017학년도 수능은 종전의 수능과 달라진 점이 있는데, 국어 영역에서 난이도에 따른 수준별 시험은 폐지되었으며, 수학 영역에서 교과과정이 개정되었고 난이도도 종전의 A/B형에서 가/나형으로 변경되었다. 수학 영역에서 가형의 경우 미적분Ⅱ, 확률과 통계, 기하와 벡터에서 출제하였으며, 나형의 경우 수학Ⅱ, 확률과 통계, 미적분Ⅰ에서 출제되었다.[30] 또한, 한국사가 사회탐구 영역에서 분리되었고 다시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31] 한국사 영역은 다른 영역과 달리 40점 이상을 1등급으로 하고 1등급 내려갈 때마다 5점씩 등급컷이 낮아지는 형식으로 총 9등급의 절대평가로 성적을 매기며, 응시하지 않을 경우 시험 성적 전체가 무효 처리된다. 이외에도 직업탐구 영역 선택 과목 일부가 조정되었으며, 최대 응시 과목 수도 2개로 확대되었다. 난이도는 전반적으로 어려웠다고 평가되었다. 입시 기관 등에 따르면 전 영역 만점자는 3명이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32] 성적은 12월 7일에 통지되었다. 한국사 영역 14번 문항, 물리Ⅱ 9번 문항에서 복수정답 논란이 있었다. 결국, 11월 25일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한국사 영역 14번 문항에 대해서는 복수 정답 처리를, 물리Ⅱ 9번 문항에 대해서는 전원 정답 처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33] 2018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당초 2017년 11월 16일에 시행할 예정이었지만, 바로 전날인 11월 15일에 발생한 포항 지진의 여파로 인해, 일주일 후인 2017년 11월 23일로 순연되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이 시험부터 영어 영역에 총 9등급의 절대평가가 도입되었으며, 다른 영역과 달리 90점 이상을 1등급으로 하고 1등급 내려갈 때마다 10점씩 등급컷이 낮아지는 형식으로 총 9등급의 절대평가로 성적을 매긴다.[34]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만점자는 총 15명이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35] 만점자인 경기 오산 세마고등학교의 최동욱 학생이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다.성적은 12월 12일에 통지되었다. 2019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2018년 11월 15일에 시행했으며,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육방송공사와 연계되었다. 역대 수능에서 응시자가 가장 적은 시험이다. 성적은 12월 5일에 통지되었다.[36] 예정된 시험 목록[편집] 2020학년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입니다. 2019년 11월 14일에 시행할 예정이며, 성적은 12월 4일에 통지될 예정이다.[37] 2021학년도[편집] 2020년 11월 19일에 시행할 예정이며, 성적은 12월 9일에 통지할 예정이다.[38]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인문계의 경우, 사회탐구에서 정치, 경제, 사회·문화, 세계사, 세계지리가 선택과목으로 나왔고, 자연계는 과학탐구에서 물리 Ⅱ, 화학 Ⅱ, 생물 Ⅱ, 지구과학 Ⅱ가 선택과목으로 나왔다. ↑ 당시 제2외국어 영역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과목은 독일어 Ⅰ, 프랑스어 Ⅰ, 스페인어 Ⅰ, 중국어 Ⅰ, 일본어 Ⅰ, 러시아어 Ⅰ으로 6과목이었다. ↑ 당시 가형에는 수학 Ⅰ이 12문제, 수학 Ⅱ가 13문제, 선택과목 (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이산수학) 5문제가 출제되었다. ↑ 당시 나형에 출제되었던 모든 문항은 수학 Ⅰ에서만 출제되었다. ↑ 당시 수능 수리 가형에서 선택과목은 5문제만 출제되었다. ↑ 이로 인해 문과생이 과학탐구를, 이과생이 사회탐구를 선택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다만 이런 경우는 0에 수렴한다. ↑ 현재의 한국사 ↑ 종전의 국사가 전(前)근대사까지만 포함되어 있어 역사 교육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있자, 2006년부터 국사 과목에 근현대사 부분을 새로 추가하였다. ↑ 사회탐구/과학탐구/직업탐구 ↑ 3과목 영역에서 만점을 받은 행운의 주인공은 당시 충렬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임수현 학생이였다. ↑ 수학과 영어 영역에 한정되었으며, 이외 나머지 과목은 7차 교육과정을 따른다. ↑ 기초 베트남어는 2011년 부분 개정된 교육과정을 따른다. ↑ 2011년에 부분 개정되었다. 참조주[편집] ↑ 국립교육평가원, "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해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4년 7월 1일 ↑ 대학 수능 전체 수석 정성택군 <부산과학고>1994-12-21《매일경제신문》 ↑ 뒤바뀐 수능 성적 1995-01-14 《동아일보》 ↑ 국립교육평가원, "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해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5년 7월 1일 ↑ {공부야 놀자} 지난 12년 수능 경향 살펴보니 Archived 2006년 2월 7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05년 3월 20일 ↑ 가 나 “<해설(解說)> 97학년도 수능시험 채점결과 분석”. 연합뉴스. 1996년 12월 6일.  ↑ “<`97 수능시험 영역별 출제경향>(종합)”. 연합뉴스. 1996년 11월 13일.  ↑ 가 나 올 수능만점자 상당수 나올듯 인터넷한겨레 2000.11.16 ↑ '수능 만점'대원외고 박혜진양 1999-12-16《연합뉴스》 ↑ [1] ↑ "어려운 문제 풀고도 점수 낮다니…" 2000-11-15《동아일보》 ↑ 대법원 "02~03학년도 수능 점수 반올림 정당" Archived 2007년 12월 18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16일 ↑ “작년 언어영역 17번 문제 복수 정답 인정” 판결, Archived 2004년 10월 15일 - 웨이백 머신 국민일보, 2004년 7월 8일 ↑ '수능부정' 314명 시험 무효 처리, 《SBS》, 2004년 12월 13일 ↑ 교육부 "수능 등급제 계속 유지할 것" 2007-12-12《노컷뉴스》 ↑ 물리학회 "수능 물리II 11번, 복수 정답 가능" Archived 2007년 12월 25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2일 ↑ 교육과정평가원 "수능 물리 II 정답 이상 없다" Archived 2007년 12월 25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2일 ↑ [2] ↑ 교육과정평가원 "수능 물리 II 복수정답 인정" Archived 2007년 12월 27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2007년 12월 24일 ↑ "수능, 언어 내리고 수리(가형)는 내리고, 수리(나형)는 오르고 외국어 내리고", CNB News 김미영 기자 2009-11-16 14:44:39 ↑ "수능 또 복수정답…성적에 영향은", 시민일보 2009-11-24 15:46:46 ↑ 작년 수능 만점자 20개 고교서 30명《조선일보》2012년 9월 10일 안석배 기자 ↑ 수능 만점자 4명 서울대·2명 연세대 입학《뉴스1》2013년 2월 20일 김정욱 기자 ↑ 2014학년도 수능 만점자 수 8명 → 33명 변동 왜? ↑ 수능 만점-표준점수 최고점 뭐가 다를까?… 아리송 ↑ 수험생들 ‘수능 세계지리 출제 오류’ 항소《경향신문》 2013년 12월 23일, 김지원 기자 ↑ 교육부, 수능 세계지리 오류 인정…실효성 의문《세계일보》 2014년 11월 1일 ↑ 2014 수능 세계지리 오류, 수험생에게 배상해야 ↑ 2016 수능, 만점자 16명에 그쳐..지난해보다 '뚝' 떨어졌다 ↑ (2017학년도 수능 개편안 문답)현 중3부터 한국사 필수… 첫해는 쉽게 출제할 듯 ↑ '한국사 필수' 등 2017학년도 수능 기본계획 확정 ↑ 수능 만점자, 지난해 16명에서 올해 3명으로 줄어···‘불수능’ 맞네 ↑ 수능 ‘한 해 두 문항 오류’ 불명예…“한국사 복수정답·물리Ⅱ는 정답없어” ↑ 現 중3 대학입시부터 수능 영어 '절대평가' 도입 ↑ “올 수능 만점자 15명으로 가채점 11명보다 많아” ↑ 2019학년도 수능, 국어·수학 입시 비중 커질 듯 ↑ 2020학년도 수능일 2019년 11월14일…현 수능과 같은 체제 ↑ '2021 수능' 11월 19일…수학 가형 '기하' 제외 vdeh대학수학능력시험역대 시험 (학년도)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그 외 5차 교육과정 6차 교육과정 7차 교육과정 2007 2009 2015 대한민국의 교육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교과목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 제도 음영표시는 가까운 시기에 있는 시험입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연도별_대학수학능력시험&oldid=24125914" 분류: 대한민국의 교육대학수학능력시험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30일 (화) 16: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국통합물류협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통합물류협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국통합물류협회(韓國統合物流協會, Korea Integrate Logistics Association, 약칭 KILA)는 물류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회원사의 물류선진화 및 권익신장을 위하여 기존의 물류관련단체들을 통합하여 설립된 특수법인이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용답동 235-2 금풍빌딩 7층에 위치하고 있다. 목차 1 설립 근거 2 연혁 2.1 사단법인 한국물류협회 2.2 사단법인 한국물류창고업협회 2.3 한국통합물류협회 3 조직 3.1 회장 3.1.1 전무이사 3.1.2 경영지원팀 3.1.2.1 협력사업추진실 3.1.2.2 회원지원실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설립 근거[편집] 물류정책기본법 제55조[1] 연혁[편집] 사단법인 한국물류협회[편집] 1984년 09월 01일 한국물류관리연구원 설립. 초대 안태호 회장 취임(인하대 교수) 1990년 02월 14일 사단법인 한국물류관리협의회 설립인가(경제기획원) 1995년 05월 사단법인 한국물류관리협의회에서 사단법인 한국물류협회로 명칭 변경(재정경제원) 1995년 09월 26일 사단법인 한국물류협회 설립허가(건설교통부) 1997년 01월 15일 제2대 김여환 회장 취임(대한통운 사장) 1997년 05월 물류관리사자격시험 관리위탁(건설교통부) 1997년 09월 27일 제1회 물류관리사자격시험 시행 2000년 03월 제3대 서병륜 회장 취임(한국파렛트풀, 한국컨테이너풀 사장) 2005년 07월 물류분야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 구성 및 운영 사단법인 한국물류창고업협회[편집] 2005년 06월 10일 한국물류창고협회 발기인대회 개최 2005년 07월 14일 한국물류창고협회 창립 2006년 12월 06일 사단법인 한국물류창고업협회 설립인가(건설교통부) 2007년 03월 02일 국제창고협회연맹(IFWLA) 가입 한국통합물류협회[편집] 2008년 12월 24일 물류관련협회 통합기본계획안 수립 2009년 04월 22일 통합물류협회 설립 양해각서(MOU) 체결 - 한국물류협회, 한국물류창고업협회, 인증종합물류기업협의회, 컨테이너운송CY사업자협의회, 택배사업자협의회 2009년 06월 25일 특수법인 한국통합물류협회 출범 및 창립총회 개최. 초대 김진일 회장 취임(해우지엘에스 회장) 2009년 07월 21일 법인 설립 인가(국토해양부) 2010년 02월 01일 장종식 상근부회장 취임(前 국토해양부 항공정책관) 2010년 02월 22일 정기이사회 개최 2010년 02월 26일 정기총회 개최 2010년 06월 09일 항공물류위원회 출범 2010년 08월 29일 사무실 이전(여의도동 → 용답동) 2010년 10월 29일 물류컨설팅센터 신설 2010년 12월 23일 임시이사회 개최 2011년 02월 25일 정기이사회 및 정기총회 개최. 제2대 석태수 회장 취임(한진 대표이사) 2017년 01월 25일 정기이사회 및 정기총회 개최. 제5대 박근태 회장 취임(CJ대한통운 대표이사) 조직[편집] 회장[편집] 상임고문 전문위원회 종합물류위원회 택배위원회 컨테이너운송위원회 물류시설위원회 전무이사[편집] 경영지원팀[편집] 협력사업추진실[편집] 대외협력팀 교육팀 회원지원실[편집] 회원관리팀 회원서비스팀 같이 보기[편집] 국가물류정책위원회 한국국제물류주선업협회 한국무역협회 각주[편집] ↑ 물류정책기본법 제55조(물류관련협회 등) ① 물류기업, 화주기업, 그 밖에 물류활동과 관련된 자는 물류체계를 효율화하고 업계의 건전한 발전 및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필요할 경우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협회(이하 "물류관련협회"라 한다)를 설립할 수 있다. 다만, 다른 법률에서 달리 정하고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 ② 물류관련협회를 설립하려는 경우에는 해당 협회의 회원이 될 자격이 있는 기업 100개 이상이 발기인으로 정관을 작성하여 해당 협회의 회원이 될 자격이 있는 기업 200개 이상이 참여한 창립총회의 의결을 거친 후 소관에 따라 국토교통부장관 또는 해양수산부장관의 설립인가를 받아야 한다. ③ 물류관련협회는 제2항에 따른 설립인가를 받아 설립등기를 함으로써 성립한다. ④ 물류관련협회는 법인으로 한다. ⑤ 물류관련협회에 관하여 이 법에 규정한 것 외에는 「민법」 중 사단법인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⑥ 국토교통부장관 및 해양수산부장관은 물류관련협회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물류관련협회를 행정적·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 ⑦ 물류관련협회의 업무 및 정관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외부 링크[편집] 한국통합물류협회 - 공식 웹사이트 vdeh 대한민국 국토교통부 기재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안부 문체부 농식품부 산업부 복지부 환경부 고용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중기부 본부 소속 장관 차관(2인) 국토교통인재개발원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중앙토지수용위원회 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회 국토지리정보원 우주측지관측센터 항공교통본부 인천항공교통관제소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소속 위원회 목록) 지방국토관리청서울지방국토관리청 의정부국토관리사무소 수원국토관리사무소 강화출장소 원주지방국토관리청 홍천국토관리사무소 강릉국토관리사무소 양양출장소 정선국토관리사무소 대전지방국토관리청 논산국토관리사무소 충주국토관리사무소 보은국토관리사무소 예산국토관리사무소 서천출장소 익산지방국토관리청 광주국토관리사무소 해남출장소 남원국토관리사무소 무주출장소 순천국토관리사무소 보성출장소 전주국토관리사무소 부산지방국토관리청 진주국토관리사무소 거창출장소 포항국토관리사무소 울진출장소 영주국토관리사무소 진영국토관리사무소 대구국토관리사무소 상주출장소 지방항공청 제주지방항공청 서울지방항공청 김포항공관리사무소 양양공항출장소 원주공항출장소 군산공항출장소 청주공항출장소 비행점검센터 부산지방항공청 여수공항출장소 울산공항출장소 대구공항출장소 무안공항출장소 포항공항출장소 광주공항출장소 사천공항출장소 울진공항출장소 철도특별사법경찰대 대전센터 천안센터 오송센터 서대전센터 서울지방철도특별사법경찰대 서울센터 수서센터 청량리센터 영등포센터 용산센터 수원센터 광명센터 부평센터 남춘천센터 부산지방철도특별사법경찰대 부산센터 동대구센터 신경주센터 구포센터 구미센터 광주지방철도특별사법경찰대 익산센터 광주송정센터 목포센터 순천센터 영주지방철도특별사법경찰대 제천센터 안동센터 서원주센터 강릉센터 산하 공공기관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인천국제공항공사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주택관리공단 주택도시보증공사 코레일관광개발 코레일네트웍스 코레일로지스 코레일유통 코레일테크 한국감정원 한국건설관리공사 한국공항공사 한국교통안전공단 한국국토정보공사 한국도로공사 한국시설안전공단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시설공단 한국토지주택공사 한국토지신탁 항공안전기술원 소관기관 국가건설기준센터 국가공간정보센터 공공주택본부 동서남해안및내륙권발전기획단 공간정보산업진흥원 대한건설협회 대한건축사협회 대한전문건설협회 공간정보산업협회 한국감정평가사협회 한국건설기술관리협회 한국공인중개사협회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한국철도협회 한국통합물류협회 한국항공협회 해외건설협회 건설공제조합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중앙토지수용위원회 위원장은 국토교통부 장관이 겸임하고 동서남해안및내륙권발전기획단장은 국토교통부 제1차관이 겸임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통합물류협회&oldid=24368688" 분류: 특수법인 (국토교통부 소관)서울특별시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5: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군주온라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군주온라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군주온라인은 2004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엔도어즈에서 개발하고 자체적으로 서비스중 밸로프로 이전된온라인 게임 MMORPG이다. 목차 1 도움말 2 캐릭터 2.1 기본캐릭터 2.2 전직캐릭터 3 레벨 4 기술레벨 5 마을과 사냥터 5.1 마을 5.2 사냥터 6 외부 링크 도움말[편집] 군주온라인은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퀘스트를 완료하거나, 물건을 팔아서 돈 또는 경험치를 얻는다. 앞처럼 되면 일정한 경험치가 올라가고, 경험치가 100% 올라가면 레벨이 1단계 올라간다. 최대 레벨은 300레벨이다. 군주온라인의 독특한 제도는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통하여 서버를 운영할 군주를 선출하고, 선출된 군주는 6조판서를 임명하여 서버를 운영한다. 또한, 군주 및 판서진은 고유의복 착용시 주위 유저들에게 자신의 레벨에 비례한 공격력, 방어력 향상 오오라를 제공한다. 기본적으로 군주와 판서, 수호천사, 포교는 서버에 대한 봉사를 위해 지원하는 경우가 많으나, 간혹 권력남용으로 인해 운영자에 의해 제명되는 군주 및 판서가 존재한다. 군주 - 현재의 대통령 또는 수상, 총리에 해당하며 전반적인 국정을 총괄한다. 고유복식으로 면류관(대수머리)과 면복(적의)을 착용할 수 있다. (고유 명령어(고유의복 착용): /king 할말 (서버공지), /recall 아이디 (해당 아이디 유저 소환), /guri (보안관 소환)을 사용할 수 있으며, 권력남용시 제명될 수 있다. 또한, 특정 판서 1인에게 서버공지 권한을 부여할 수 있으며, 군주력 12월 31일(현실시간 약 12일)마다 각 마을 배당금의 일정부분을 군주급여로 받는다.) 판서 - 판서는 현재의 장관, 대신에 해당하며 군주를 도와 국정 전반을 처리한다. 고유복식으로 사모와 판서복을 착용할 수 있다. 이조판서 - 현재의 안전행정부장관, 선박구입비율, 관세결정 등의 권한을 갖는다. 호조판서 - 현재의 여성가족부장관, 마을 총 주민수를 결정한다. 예조판서 - 현재의 교육부, 외교부장관 수호천사를 임명하고 교육시키며 양이전쟁의 양이 수를 결정한다. 병조판서 - 현재의 국방부장관 각 마을간의 공성전을 총괄하는 장관이며, 백두대간(현재는 활성화되어 있지 않음)에 상장군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형조판서 - 현재의 법무부장관 유저를 소환, 수감하는 권한을 가지며 매크로, 사기 등의 범법자를 처벌한다. (형조판서만 순간이동이 무한정으로 제공된다.) 공조판서 - 현재의 노동부, 환경부, 농림축산식품부, 국토교통부 장관 장인무기제조인센티브를 결정한다. 수호천사 - 예조판서를 보좌하며, 초보자 도우미의 역할을 한다. (150레벨 이하 사냥터에서 수호천사모자 착용 시 레벨에 비례한 공격력, 방어력 향상 오로라를 주위 유저에게 준다.) 포교 - 형조판서를 보좌하며, 매크로 순찰을 실시한다. 또한, 군주온라인은 사냥 외에 물품제조시스템인 장인활동이 두드러지게 들어난다. 다른 게임과 달리 군주온라인은 사냥을 통하여 획득하는 전리품이 장비류가 아닌 재료들이다. 많은 유저들은 재료를 모아 팔아 수익을 올리며, 장인들은 재료를 구입하여 물건을 제작한다. 일반 물건은 그리 가치가 높지 않지만, 적은 확률로 만들어지는 다음과 같은 물건들은 가치가 높아진다. (고급품 호품 명품 신품) 일반적으로 고급품 이상의 아이템은 제련의부적을 사용하여 제련이 가능해 지는데, 고급품 호품 명품 신품은 각각 제련을 할 수 있는 맥시엄 퍼센트가 다르다. 그래서 신품으로 갈수록 물품의 가치가 올라가고 값비싼 가격에 거래가 된다. 캐릭터[편집] 군주온라인의 캐릭터는 총 7명이며, 3명의 기본 캐릭터와 4명의 전직 캐릭터가 있다. 다음은 군주온라인의 7명 캐릭터이다. 기본캐릭터[편집] 견이(Kyon-i): 나이 16세 / 고향 한양 연이(Yeon-i): 나이 12세 / 고향 대전 신이(Shin-i): 나이 17세 / 고향 상해 전직캐릭터[편집] 리카: 나이 19세 / 고향 로테르담 시아: 나이 20세 / 고향 안트베르펜 달이: 나이 18세 / 고향 별이: 나이 17세 / 고향 레벨[편집] 군주온라인의 레벨은 300레벨 까지이다. 레벨 업: EXP 프로그래스바가 100%가 될 때 레벨이 1씩 올라간다. 기술레벨[편집] 군주온라인에서는 레벨 외에 기술레벨 이라는게 존재한다. 특정무기로 사냥 또는 제작을 통해 무기술 및 장인기술 경험치가 올라간다. 책으로 올릴 수 있는 한도치는 30이 최댕이며, 경험으로 올릴 수 있는 한도치는 100이다. 마을과 사냥터[편집] 군주온라인에는 현재 82개의 마을과 32개의 사냥터가 있다. 마을[편집] 군주온라인에는 현재 82개의 마을이 있다. 한양 수원 개성 보령 풍산 고령 경기도 광주 경기도 충남 대전 사냥터[편집] 군주온라인에는 현재 32곳의 사냥터가 있다. 초보자사냥터 출입 가능 조건: 레벨 10 미만 출현몬스터 구리댁, 꽃돼지, 송이모자, 얌체토끼 남한산성 남한산성 - 1층 출입 가능 조건: 레벨 5 이상 출현 몬스터 철퇴병사, 명중궁수, 선풍도차 남한산성 - 2층 철퇴병사, 선풍도차, 회전포차 남한산성 - 지하감옥 단도범, 조두목, 장차 남한산성 - 수어장대 명중궁수, 회전포차, 선풍도차, 철퇴병사, 도끼장군 (보스) 웅녀동굴 - 1층 마늘대왕, 병자호랑 웅녀동굴 - 2층 웅양, 마늘대왕 웅녀동굴 - 마늘소굴 웅양, 마늘대왕, 병자호랑, 마늘장갑차 (보스) 군주온라인에 오신것을 환영하오 외부 링크[편집] 엔도어즈 이관신청을 하여 밸로프로 이동 밸로프 공식 홈페이지 이 글은 비디오 게임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군주온라인&oldid=23742683" 분류: 2007년 비디오 게임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윈도우 게임대한민국의 비디오 게임숨은 분류: 비디오 게임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1일 (목) 01: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무오사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오사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무오사화戊午士禍/戊午史禍참가자 연산군·유자광 등 훈구파장소 조선날짜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사망자 김일손 등의 사림파원인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음결과 김종직 부관참시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목차 1 배경 2 사건의 흐름 2.1 김일손의 사초 2.2 사초의 발견 2.3 이극돈과 유자광, 신수근 2.4 처벌 2.5 영향 3 같이 보기 4 각주 5 참고 자료 배경[편집]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는 성종 때부터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김종직을 중심으로한 사림파를 주로 삼사[1]를 중심으로 기용한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말년의 성종까지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 아들 연산군은 이런 사림파의 행태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사림파도 연산군의 국정방식이 못마땅했고 그 결과 삼사는 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2]로 국왕과의 대립이 있었다. 사건의 흐름[편집] 김일손의 사초[편집]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 등용되어 춘추관에 사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당시 쓰던 사초에서 상당히 문제의 소지가 많고 신빙성도 매우 부족한 기록을 자주 실었는데 그렇게 기록한 사초중 특히 위험했던 사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조가 아들의 후궁 권귀인을 불러 불륜을 시도했지만 권귀인이 이를 거부했다는 내용과 다른 후궁인 소훈 윤씨와의 불륜을 암시하는 기록[3] 둘다 허반(許磐)을 통해 들은 일[3]로, 그 허반은 수십년 전인 14살때에 홍태손(洪泰孫)과 허반(許磻-동명이인)이 하던 대화를 기억해 말해준 것이다. 무엇보다 허반이 말해준 원래 이야기는 권씨의 경우 의경세자의 장례 후 시아버지 세조가 고기를 권하자 예법에 따라 거부했는데 세조가 화를 내자 도망간일을 두고, 윤씨는 세조가 선물을 많이준 것과 궁궐로 초대할 때 타고올 가마로 왕이 쓰는 어가를 보내준 일을 두고 이렇게 썼다.[4] 증거의 신빙성도 부족하고 주장의 비약이 매우 심각하며, 더불어 정황상 세조는 후궁이 거의없을 정도로 여색에 무심한 사람이라 이런 불륜을 저지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소릉(昭陵)의 무덤을 파서 유해를 바닷가에 버렸다.'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은 일로[3], 그러나 정작 단종의 어머니의 묘는 이장되어 격하면 되었지 무덤은 남마있는 상황이라 완전히 틀린 기록이다. 그리고 무오사화 이전에 김일손은 소릉이 바다에 버려지지 않았음을 알았고 소릉의 복구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이를 볼때 김일손이 이렇게 중요하고 위험한 글을 쓰면서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승려 학조가 술법으로 궁궐을 조종하고, 왕족 부인들과 불륜을 저지르며, 그 중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와 군장사(窘長寺)에서 불륜을 저질렀다. 학조가 전횡을 저지르는것을 과장해서 썼고 왕자의 부인들이 학조에게 선물을 많이 주는 것을 간통으로 모함했으며, 그중 송씨의 불륜은 박경이 말해주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박경이 말해준것은 동대문에 송씨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비방서가 전부였다.[3] 계유정난때 황보숭과 김종직이 살해당한 것을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라고 기록 김종직이 두사람이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선 두사람은 절개를 지킬수도 없이 갑자기 암살되어 인물에 대한 평가가 틀린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이부분이 세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기록이라 위험한 기록이었다. "노산(魯山-단종의 격하된 군호)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 최맹한에게 들은 일로[5] 후대에 단종릉을 찾을 때의 기록으로 보아 어느정도 사실관계와 유사하다. 그리고 세조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이라 연산군과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사초였다.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기 위해 쓴 조의제문 바로 위에 단종의 시신 기사 바로 뒤에 쓴 글로 김일손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직은 이걸 써서 (세조에게)분노했다고 증언했으며, 적어도 만약 김종직이 그럴의도가 없었어도 김일손은 스승의 시를 세조를 비판하기 위해 사초에 기록한다. 모두 조선왕실을 모욕하거나 정통성을 공격하는 내용들로 그중 상당수가 신빙성이 부족하거나 사실이 아닌 기록들이 많았다. 때문에 연산군도 다른 부분보다 실록의 사초에 허위사실을 기록한 부분을 먼저 지적할 정도로 김일손 사초의 신빙성 문제는 심각했다. 사초의 발견[편집] 한편 이 김일손의 사초는 생각보다 오랜기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성중엄, 윤효손등 편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손이 사초를 너무 형식에 맞지 않고 뒤죽박죽 써버렸고 위의 문제된 기록외에도 신빙성 없는 기록들이 너무 많아서[3] 상관들이나 편수관들이 조잡한 김일손의 사초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 사망후 성종실록을 쓰기위해 모든 사초를 모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도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 김일손은 훗날 증언에서 이시기에 이극돈이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을 사초에서 삭제해줄 것을 부탁했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고 중종때 사관들은 이것때문에 이극돈이 원한을 가지고 김일손 사초를 공개했다고 주장한다. 일단 김일손이 이극돈을 비난하는 사초를 쓴거는 이극돈의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부분이지만 이극돈이 사초의 삭제를 부탁했다는 주장은 김일손의 착각이거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은게, 앞에서 말한대로 당시 김일손의 사초는 (문제적인 내용과는 별개로)매우 조잡해서 실록편수관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던 사초였고, 무엇보다 사초의 사사로운 수정은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해야하는 중범죄로, 특히 이극돈은 예종시절에 실록청에서 일하면서 부하와 동료들이 사초를 함부로 수정하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극돈은 사초의 공개를 막으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전부가져오라는 국왕 연산군의 지시에 처음에는 후대에 공정성을 위해 반대했고 뒤이어 연산이 윽박을 지르자 간신히 문제되는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수습했던 인물이다. 만약 이극돈 등이 막지 않았더라면 김일손의 사초가 전부 열람되어 무오사화는 더 크고 잔혹한 사화로 확대되었을 것이고 특히 김일손의 사초내용이 역모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극돈과 당상들은 사화의 확대를 막기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특이한 부분이 있는데 당시 무오사화 직전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군에 요양중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초를 발췌해서 확인한 날짜가 11일이었는데 김일손은 바로 다음날인 12일에 한양으로 잡혀와서 심문을 받는다. 조선시대 기준으로라면 한양에서 청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십수일이 걸리는 거리인데 이말인 즉슨 이극돈 이하 실록청 관리들이 사초를 발췌해 전부터 김일손을 잡기위해 미리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다. 실제 실록에서(작성중) 이극돈과 유자광, 신수근[편집] 실록[6]을 따르면 그 일의 발단은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적에 ‘극돈과 성준이 윗분의 뜻이라 하여 장차 우(牛)·이(李)의 당(黨)을 이루려 하네.’[7]라며 다소 깔보는 투로 이극돈(李克墩)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며 올렸던 소(蔬)였다. 이극돈은 중도보수의 점잖은 관료로 사림과 훈구의 대립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김일손으로부터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받고나서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분노한 이극돈이 이에 실록청을 열어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史草)를 들여보니, 자신의 모자란 점을 썼을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적 일을 들추고 있었다. 그는 유자광에게 찾아가 의논을 하였고, 유자광은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에게 가 세조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그들에게 합류를 요청했다[8]. 이처럼 국왕을 제외하면,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성종 때 김종직과 해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때마침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해 상의를 해오자 민첩하게 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지금은 조정을 개혁하는 시기니 크게 처벌해야지,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고, 사건의 확대와 엄벌을 주도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대로 사건이 전개되지 않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들고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하며 즉시 주석을 달고 구절마다 해석해 국왕이 쉽게 알도록 했다.[9] 신수근은 김종직이나 김일손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출세를 반대한 것이 삼사(사림)였기에, 김종직, 김일손과 함께 사림을 숙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두 사람과 합류를 하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또한 즉위 이후 삼사와의 대립으로, 유자광의 말을 듣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 여겨 죄인을 심문하라 명했다. 그러나 사화의 확대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노사신(盧思愼)은 유자광과 국왕을 말렸지만, 결국 연산군은 유자광의 손을 들어주기에 이른다. 처벌[편집]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과 관련자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우선 이 일파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을 비방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다.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영향[편집]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실록청 당상관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숙청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져 훗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이 어려워졌으며 이는 연산군이 폐위된 까닭인 연산군의 측근정치를 가속화시킨다. 같이 보기[편집] 김종직 조의제문 각주[편집] ↑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 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p.135 ↑ 가 나 다 라 마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2일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5일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3일  ↑ 연산 4년 7월 29일 2번째기사 ↑ 앞과 같음, 交相傾軋, 將成牛、李之黨。 ↑ 연산군일기, 4.7.29계해 ↑ 연산군일기, 4.7.29계해 참고 자료[편집] 이덕일, 능지처참에 부관참시, 그 사관의 길 - 훈구파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34살에 죽은 김일손 《한겨레21》 제657호 (2007.4.26)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조선시대 4대 사화 및 기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정미사화) (신사사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무오사화&oldid=24372265" 분류: 1498년 한국사화무오사화필화 사건조선 연산군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4일 (화) 00: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무오사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오사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무오사화戊午士禍/戊午史禍참가자 연산군·유자광 등 훈구파장소 조선날짜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사망자 김일손 등의 사림파원인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음결과 김종직 부관참시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목차 1 배경 2 사건의 흐름 2.1 김일손의 사초 2.2 사초의 발견 2.3 이극돈과 유자광, 신수근 2.4 처벌 2.5 영향 3 같이 보기 4 각주 5 참고 자료 배경[편집]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는 성종 때부터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김종직을 중심으로한 사림파를 주로 삼사[1]를 중심으로 기용한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말년의 성종까지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 아들 연산군은 이런 사림파의 행태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사림파도 연산군의 국정방식이 못마땅했고 그 결과 삼사는 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2]로 국왕과의 대립이 있었다. 사건의 흐름[편집] 김일손의 사초[편집]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 등용되어 춘추관에 사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당시 쓰던 사초에서 상당히 문제의 소지가 많고 신빙성도 매우 부족한 기록을 자주 실었는데 그렇게 기록한 사초중 특히 위험했던 사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조가 아들의 후궁 권귀인을 불러 불륜을 시도했지만 권귀인이 이를 거부했다는 내용과 다른 후궁인 소훈 윤씨와의 불륜을 암시하는 기록[3] 둘다 허반(許磐)을 통해 들은 일[3]로, 그 허반은 수십년 전인 14살때에 홍태손(洪泰孫)과 허반(許磻-동명이인)이 하던 대화를 기억해 말해준 것이다. 무엇보다 허반이 말해준 원래 이야기는 권씨의 경우 의경세자의 장례 후 시아버지 세조가 고기를 권하자 예법에 따라 거부했는데 세조가 화를 내자 도망간일을 두고, 윤씨는 세조가 선물을 많이준 것과 궁궐로 초대할 때 타고올 가마로 왕이 쓰는 어가를 보내준 일을 두고 이렇게 썼다.[4] 증거의 신빙성도 부족하고 주장의 비약이 매우 심각하며, 더불어 정황상 세조는 후궁이 거의없을 정도로 여색에 무심한 사람이라 이런 불륜을 저지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소릉(昭陵)의 무덤을 파서 유해를 바닷가에 버렸다.'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은 일로[3], 그러나 정작 단종의 어머니의 묘는 이장되어 격하면 되었지 무덤은 남마있는 상황이라 완전히 틀린 기록이다. 그리고 무오사화 이전에 김일손은 소릉이 바다에 버려지지 않았음을 알았고 소릉의 복구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이를 볼때 김일손이 이렇게 중요하고 위험한 글을 쓰면서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승려 학조가 술법으로 궁궐을 조종하고, 왕족 부인들과 불륜을 저지르며, 그 중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와 군장사(窘長寺)에서 불륜을 저질렀다. 학조가 전횡을 저지르는것을 과장해서 썼고 왕자의 부인들이 학조에게 선물을 많이 주는 것을 간통으로 모함했으며, 그중 송씨의 불륜은 박경이 말해주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박경이 말해준것은 동대문에 송씨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비방서가 전부였다.[3] 계유정난때 황보숭과 김종직이 살해당한 것을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라고 기록 김종직이 두사람이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선 두사람은 절개를 지킬수도 없이 갑자기 암살되어 인물에 대한 평가가 틀린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이부분이 세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기록이라 위험한 기록이었다. "노산(魯山-단종의 격하된 군호)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 최맹한에게 들은 일로[5] 후대에 단종릉을 찾을 때의 기록으로 보아 어느정도 사실관계와 유사하다. 그리고 세조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이라 연산군과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사초였다.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기 위해 쓴 조의제문 바로 위에 단종의 시신 기사 바로 뒤에 쓴 글로 김일손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직은 이걸 써서 (세조에게)분노했다고 증언했으며, 적어도 만약 김종직이 그럴의도가 없었어도 김일손은 스승의 시를 세조를 비판하기 위해 사초에 기록한다. 모두 조선왕실을 모욕하거나 정통성을 공격하는 내용들로 그중 상당수가 신빙성이 부족하거나 사실이 아닌 기록들이 많았다. 때문에 연산군도 다른 부분보다 실록의 사초에 허위사실을 기록한 부분을 먼저 지적할 정도로 김일손 사초의 신빙성 문제는 심각했다. 사초의 발견[편집] 한편 이 김일손의 사초는 생각보다 오랜기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성중엄, 윤효손등 편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손이 사초를 너무 형식에 맞지 않고 뒤죽박죽 써버렸고 위의 문제된 기록외에도 신빙성 없는 기록들이 너무 많아서[3] 상관들이나 편수관들이 조잡한 김일손의 사초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 사망후 성종실록을 쓰기위해 모든 사초를 모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도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 김일손은 훗날 증언에서 이시기에 이극돈이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을 사초에서 삭제해줄 것을 부탁했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고 중종때 사관들은 이것때문에 이극돈이 원한을 가지고 김일손 사초를 공개했다고 주장한다. 일단 김일손이 이극돈을 비난하는 사초를 쓴거는 이극돈의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부분이지만 이극돈이 사초의 삭제를 부탁했다는 주장은 김일손의 착각이거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은게, 앞에서 말한대로 당시 김일손의 사초는 (문제적인 내용과는 별개로)매우 조잡해서 실록편수관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던 사초였고, 무엇보다 사초의 사사로운 수정은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해야하는 중범죄로, 특히 이극돈은 예종시절에 실록청에서 일하면서 부하와 동료들이 사초를 함부로 수정하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극돈은 사초의 공개를 막으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전부가져오라는 국왕 연산군의 지시에 처음에는 후대에 공정성을 위해 반대했고 뒤이어 연산이 윽박을 지르자 간신히 문제되는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수습했던 인물이다. 만약 이극돈 등이 막지 않았더라면 김일손의 사초가 전부 열람되어 무오사화는 더 크고 잔혹한 사화로 확대되었을 것이고 특히 김일손의 사초내용이 역모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극돈과 당상들은 사화의 확대를 막기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특이한 부분이 있는데 당시 무오사화 직전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군에 요양중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초를 발췌해서 확인한 날짜가 11일이었는데 김일손은 바로 다음날인 12일에 한양으로 잡혀와서 심문을 받는다. 조선시대 기준으로라면 한양에서 청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십수일이 걸리는 거리인데 이말인 즉슨 이극돈 이하 실록청 관리들이 사초를 발췌해 전부터 김일손을 잡기위해 미리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다. 실제 실록에서(작성중) 이극돈과 유자광, 신수근[편집] 실록[6]을 따르면 그 일의 발단은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적에 ‘극돈과 성준이 윗분의 뜻이라 하여 장차 우(牛)·이(李)의 당(黨)을 이루려 하네.’[7]라며 다소 깔보는 투로 이극돈(李克墩)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며 올렸던 소(蔬)였다. 이극돈은 중도보수의 점잖은 관료로 사림과 훈구의 대립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김일손으로부터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받고나서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분노한 이극돈이 이에 실록청을 열어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史草)를 들여보니, 자신의 모자란 점을 썼을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적 일을 들추고 있었다. 그는 유자광에게 찾아가 의논을 하였고, 유자광은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에게 가 세조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그들에게 합류를 요청했다[8]. 이처럼 국왕을 제외하면,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성종 때 김종직과 해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때마침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해 상의를 해오자 민첩하게 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지금은 조정을 개혁하는 시기니 크게 처벌해야지,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고, 사건의 확대와 엄벌을 주도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대로 사건이 전개되지 않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들고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하며 즉시 주석을 달고 구절마다 해석해 국왕이 쉽게 알도록 했다.[9] 신수근은 김종직이나 김일손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출세를 반대한 것이 삼사(사림)였기에, 김종직, 김일손과 함께 사림을 숙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두 사람과 합류를 하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또한 즉위 이후 삼사와의 대립으로, 유자광의 말을 듣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 여겨 죄인을 심문하라 명했다. 그러나 사화의 확대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노사신(盧思愼)은 유자광과 국왕을 말렸지만, 결국 연산군은 유자광의 손을 들어주기에 이른다. 처벌[편집]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과 관련자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우선 이 일파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을 비방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다.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영향[편집]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실록청 당상관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숙청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져 훗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이 어려워졌으며 이는 연산군이 폐위된 까닭인 연산군의 측근정치를 가속화시킨다. 같이 보기[편집] 김종직 조의제문 각주[편집] ↑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 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p.135 ↑ 가 나 다 라 마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2일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5일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3일  ↑ 연산 4년 7월 29일 2번째기사 ↑ 앞과 같음, 交相傾軋, 將成牛、李之黨。 ↑ 연산군일기, 4.7.29계해 ↑ 연산군일기, 4.7.29계해 참고 자료[편집] 이덕일, 능지처참에 부관참시, 그 사관의 길 - 훈구파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34살에 죽은 김일손 《한겨레21》 제657호 (2007.4.26)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조선시대 4대 사화 및 기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정미사화) (신사사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무오사화&oldid=24372265" 분류: 1498년 한국사화무오사화필화 사건조선 연산군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4일 (화) 00: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무오사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오사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무오사화戊午士禍/戊午史禍참가자 연산군·유자광 등 훈구파장소 조선날짜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사망자 김일손 등의 사림파원인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음결과 김종직 부관참시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목차 1 배경 2 사건의 흐름 2.1 김일손의 사초 2.2 사초의 발견 2.3 이극돈과 유자광, 신수근 2.4 처벌 2.5 영향 3 같이 보기 4 각주 5 참고 자료 배경[편집]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는 성종 때부터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김종직을 중심으로한 사림파를 주로 삼사[1]를 중심으로 기용한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말년의 성종까지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 아들 연산군은 이런 사림파의 행태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사림파도 연산군의 국정방식이 못마땅했고 그 결과 삼사는 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2]로 국왕과의 대립이 있었다. 사건의 흐름[편집] 김일손의 사초[편집]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 등용되어 춘추관에 사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당시 쓰던 사초에서 상당히 문제의 소지가 많고 신빙성도 매우 부족한 기록을 자주 실었는데 그렇게 기록한 사초중 특히 위험했던 사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조가 아들의 후궁 권귀인을 불러 불륜을 시도했지만 권귀인이 이를 거부했다는 내용과 다른 후궁인 소훈 윤씨와의 불륜을 암시하는 기록[3] 둘다 허반(許磐)을 통해 들은 일[3]로, 그 허반은 수십년 전인 14살때에 홍태손(洪泰孫)과 허반(許磻-동명이인)이 하던 대화를 기억해 말해준 것이다. 무엇보다 허반이 말해준 원래 이야기는 권씨의 경우 의경세자의 장례 후 시아버지 세조가 고기를 권하자 예법에 따라 거부했는데 세조가 화를 내자 도망간일을 두고, 윤씨는 세조가 선물을 많이준 것과 궁궐로 초대할 때 타고올 가마로 왕이 쓰는 어가를 보내준 일을 두고 이렇게 썼다.[4] 증거의 신빙성도 부족하고 주장의 비약이 매우 심각하며, 더불어 정황상 세조는 후궁이 거의없을 정도로 여색에 무심한 사람이라 이런 불륜을 저지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소릉(昭陵)의 무덤을 파서 유해를 바닷가에 버렸다.'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은 일로[3], 그러나 정작 단종의 어머니의 묘는 이장되어 격하면 되었지 무덤은 남마있는 상황이라 완전히 틀린 기록이다. 그리고 무오사화 이전에 김일손은 소릉이 바다에 버려지지 않았음을 알았고 소릉의 복구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이를 볼때 김일손이 이렇게 중요하고 위험한 글을 쓰면서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승려 학조가 술법으로 궁궐을 조종하고, 왕족 부인들과 불륜을 저지르며, 그 중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와 군장사(窘長寺)에서 불륜을 저질렀다. 학조가 전횡을 저지르는것을 과장해서 썼고 왕자의 부인들이 학조에게 선물을 많이 주는 것을 간통으로 모함했으며, 그중 송씨의 불륜은 박경이 말해주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박경이 말해준것은 동대문에 송씨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비방서가 전부였다.[3] 계유정난때 황보숭과 김종직이 살해당한 것을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라고 기록 김종직이 두사람이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선 두사람은 절개를 지킬수도 없이 갑자기 암살되어 인물에 대한 평가가 틀린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이부분이 세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기록이라 위험한 기록이었다. "노산(魯山-단종의 격하된 군호)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 최맹한에게 들은 일로[5] 후대에 단종릉을 찾을 때의 기록으로 보아 어느정도 사실관계와 유사하다. 그리고 세조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이라 연산군과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사초였다.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기 위해 쓴 조의제문 바로 위에 단종의 시신 기사 바로 뒤에 쓴 글로 김일손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직은 이걸 써서 (세조에게)분노했다고 증언했으며, 적어도 만약 김종직이 그럴의도가 없었어도 김일손은 스승의 시를 세조를 비판하기 위해 사초에 기록한다. 모두 조선왕실을 모욕하거나 정통성을 공격하는 내용들로 그중 상당수가 신빙성이 부족하거나 사실이 아닌 기록들이 많았다. 때문에 연산군도 다른 부분보다 실록의 사초에 허위사실을 기록한 부분을 먼저 지적할 정도로 김일손 사초의 신빙성 문제는 심각했다. 사초의 발견[편집] 한편 이 김일손의 사초는 생각보다 오랜기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성중엄, 윤효손등 편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손이 사초를 너무 형식에 맞지 않고 뒤죽박죽 써버렸고 위의 문제된 기록외에도 신빙성 없는 기록들이 너무 많아서[3] 상관들이나 편수관들이 조잡한 김일손의 사초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 사망후 성종실록을 쓰기위해 모든 사초를 모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도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 김일손은 훗날 증언에서 이시기에 이극돈이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을 사초에서 삭제해줄 것을 부탁했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고 중종때 사관들은 이것때문에 이극돈이 원한을 가지고 김일손 사초를 공개했다고 주장한다. 일단 김일손이 이극돈을 비난하는 사초를 쓴거는 이극돈의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부분이지만 이극돈이 사초의 삭제를 부탁했다는 주장은 김일손의 착각이거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은게, 앞에서 말한대로 당시 김일손의 사초는 (문제적인 내용과는 별개로)매우 조잡해서 실록편수관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던 사초였고, 무엇보다 사초의 사사로운 수정은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해야하는 중범죄로, 특히 이극돈은 예종시절에 실록청에서 일하면서 부하와 동료들이 사초를 함부로 수정하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극돈은 사초의 공개를 막으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전부가져오라는 국왕 연산군의 지시에 처음에는 후대에 공정성을 위해 반대했고 뒤이어 연산이 윽박을 지르자 간신히 문제되는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수습했던 인물이다. 만약 이극돈 등이 막지 않았더라면 김일손의 사초가 전부 열람되어 무오사화는 더 크고 잔혹한 사화로 확대되었을 것이고 특히 김일손의 사초내용이 역모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극돈과 당상들은 사화의 확대를 막기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특이한 부분이 있는데 당시 무오사화 직전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군에 요양중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초를 발췌해서 확인한 날짜가 11일이었는데 김일손은 바로 다음날인 12일에 한양으로 잡혀와서 심문을 받는다. 조선시대 기준으로라면 한양에서 청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십수일이 걸리는 거리인데 이말인 즉슨 이극돈 이하 실록청 관리들이 사초를 발췌해 전부터 김일손을 잡기위해 미리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다. 실제 실록에서(작성중) 이극돈과 유자광, 신수근[편집] 실록[6]을 따르면 그 일의 발단은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적에 ‘극돈과 성준이 윗분의 뜻이라 하여 장차 우(牛)·이(李)의 당(黨)을 이루려 하네.’[7]라며 다소 깔보는 투로 이극돈(李克墩)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며 올렸던 소(蔬)였다. 이극돈은 중도보수의 점잖은 관료로 사림과 훈구의 대립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김일손으로부터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받고나서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분노한 이극돈이 이에 실록청을 열어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史草)를 들여보니, 자신의 모자란 점을 썼을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적 일을 들추고 있었다. 그는 유자광에게 찾아가 의논을 하였고, 유자광은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에게 가 세조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그들에게 합류를 요청했다[8]. 이처럼 국왕을 제외하면,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성종 때 김종직과 해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때마침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해 상의를 해오자 민첩하게 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지금은 조정을 개혁하는 시기니 크게 처벌해야지,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고, 사건의 확대와 엄벌을 주도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대로 사건이 전개되지 않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들고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하며 즉시 주석을 달고 구절마다 해석해 국왕이 쉽게 알도록 했다.[9] 신수근은 김종직이나 김일손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출세를 반대한 것이 삼사(사림)였기에, 김종직, 김일손과 함께 사림을 숙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두 사람과 합류를 하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또한 즉위 이후 삼사와의 대립으로, 유자광의 말을 듣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 여겨 죄인을 심문하라 명했다. 그러나 사화의 확대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노사신(盧思愼)은 유자광과 국왕을 말렸지만, 결국 연산군은 유자광의 손을 들어주기에 이른다. 처벌[편집]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과 관련자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우선 이 일파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을 비방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다.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영향[편집]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실록청 당상관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숙청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져 훗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이 어려워졌으며 이는 연산군이 폐위된 까닭인 연산군의 측근정치를 가속화시킨다. 같이 보기[편집] 김종직 조의제문 각주[편집] ↑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 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p.135 ↑ 가 나 다 라 마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2일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5일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3일  ↑ 연산 4년 7월 29일 2번째기사 ↑ 앞과 같음, 交相傾軋, 將成牛、李之黨。 ↑ 연산군일기, 4.7.29계해 ↑ 연산군일기, 4.7.29계해 참고 자료[편집] 이덕일, 능지처참에 부관참시, 그 사관의 길 - 훈구파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34살에 죽은 김일손 《한겨레21》 제657호 (2007.4.26)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조선시대 4대 사화 및 기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정미사화) (신사사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무오사화&oldid=24372265" 분류: 1498년 한국사화무오사화필화 사건조선 연산군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4일 (화) 00: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무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무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무관 Kim Mu-Kwan SK 와이번스 No.72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55년 3월 2일(1955-03-02) (64세) 출신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신장 173 cm 체중 80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내야수 프로 입단 연도 1982년 드래프트 순위 프로 원년 선수 첫 출장 KBO / 1982년 마지막 경기 KBO / 1985년 경력 선수 경력 한일은행 (실업)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 1985년) 청보 핀토스 (1985년) 코치 경력 청보 핀토스 주루코치 (1986년) 청보 핀토스 타격코치 (1987년) 태평양 돌핀스 코치 (1988년) 롯데 자이언츠 코치 (1990년 ~ 1991년) 태평양 돌핀스 코치 (1992년 ~ 1994년) 현대 유니콘스 코치 (1998년 ~ 2000년) 롯데 자이언츠 코치 (2001년 ~ 2003년) 인천고등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2004년 ~ 2005년) 2006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코치 롯데 자이언츠 타격코치 (2006년 ~ 2011년) LG 트윈스 타격코치 (2012년 ~ 2014년) SK 와이번스 타격코치 (2014년 ~ 2015년, 2019년)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15년 ~ 2016년) SK 와이번스 루키팀 야수총괄코치 (2019년 ~ 현재) 감독 경력 현대 유니콘스 2군 감독 (1996년 ~ 1997년) LG 트윈스 2군 감독 (2014년)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7년 ~ 2018년) 프런트 경력 태평양 돌핀스 스카우트 (1995년) 김무관(金武寬, 1953년 11월 29일 ~ )은 전 KBO 리그 청보 핀토스의 내야수이자, 현재 KBO 리그 SK 와이번스에서 루키팀 야수총괄코치이다. 목차 1 선수 시절 1.1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1.2 청보 핀토스 시절 2 야구선수 은퇴 후 3 트리비아 4 출신 학교 5 통산 기록 6 각주 7 외부 링크 선수 시절[편집]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편집] 건국대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 한일은행을 거쳐 원년 멤버로 입단하였다.[1] 청보 핀토스 시절[편집] 1985년에 입단하였다. 통산 121경기에 출장해 1할대 타율, 1홈런, 20타점을 기록했다.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의 팀 사정상 많은 포지션들을 맡았다. 야구선수 은퇴 후[편집] 1986년부터 청보 핀토스의 주루코치로 활동했다.[2] 이듬해부터 청보의 타격코치로 일하면서부터 1년을 쉰 1989년, 스카우트 및 2군 감독을 맡았던 1995년과 1997년 사이를 제외하고 계속 타격코치로 활동했다. 2001년 시즌 전 롯데 자이언츠의 타격코치로 부임해 포수 최기문을 스위치 히터로 전향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루수 이대호를 강타자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2003년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와 재계약에 실패해 인천고등학교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았다가 2006년 롯데 자이언츠에 복귀했다. 2011년 플레이오프가 끝난 후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2014년 시즌 후 당시 감독이었던 김용희의 요청으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했으나, 2015년 6월 5일 팀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2군 타격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다. 2016 시즌 후 2군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2019년부터 1군 타격코치를 다시 맡았으나, 팀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다시 루키팀 야수총괄코치로 보직을 바꿨다. 트리비아[편집] 전지훈련이나 개인적인 일로 미국이나 일본에 가게 되면 반드시 원서로 된 야구 이론서를 구입했으며, 귀국했을 때 번역을 맡긴 뒤 번역된 이론서를 통해 지도자 생활 때 많은 지식을 쌓았다.[3] 출신 학교[편집] 인천숭의초등학교 상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 건국대학교 통산 기록[편집] 연도 팀명 타율 경기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실 볼넷 사구 삼진 병살 실책 1982 삼미 0.217 69 254 33 55 11 0 1 69 14 5 7 24 7 29 5 7 1983 0.156 23 45 1 7 1 0 0 8 4 0 0 2 1 10 3 3 1984 0.000 4 7 0 0 0 0 0 0 0 0 0 0 0 2 0 0 1985 청보 0.150 25 20 1 3 0 0 0 3 2 1 0 0 0 4 1 2 통산 4시즌 0.199 121 326 35 65 12 0 1 80 20 6 7 26 8 45 9 12 각주[편집] ↑ 롯데 김무관 타격코치의 타자론 《스포츠서울》, 2006년 8월 18일 ↑ 우리 시대 新 라이벌 열전 - 김용달 vs 김무관 《스포츠조선》, 2006년 8월 22일 ↑ LG 김무관 타격코치 “당신이 뭘 가르쳐?”…그 말이 나를 키웠다 - 스포츠동아 외부 링크[편집] 김무관 - KBO 타자별 기록 vdehSK 와이번스 - 현재 명단감독 85 염경엽 코치 80 박경완 (수석/타격) 74 최상덕 (투수) 75 손지환 (수비) 76 박재상 (타격보조) 81 장재중 (배터리) 83 손혁 (투수) 84 조동화 (1루 주루) 86 정수성 (작전/주루) -- 김상용 (컨디셔닝) -- 박창민 (컨디셔닝) -- 이형삼 (컨디셔닝) 퓨처스 감독 73 이종운 퓨처스 코치 87 김석연 (수석/타격) 70 서한규 (작전/주루) 71 김경태 (투수) 77 백재호 (타격) 78 김일경 (수비) 82 김필중 (배터리) 89 제춘모 (투수) -- 고윤형 (컨디셔닝) -- 최현석 (컨디셔닝) 루키팀 코치 72 김무관 (야수총괄) 79 최창호 (책임/투수) 88 이대수 (수비) 90 전병두 (재활) -- 김기태 (컨디셔닝) -- 조문성 (컨디셔닝) 투수 00 정혁진 01 허민혁 03 서상준 06 장민익 1 김택형 11 신재웅 12 정재원 13 하재훈 15 산체스 18 정영일 19 윤희상 21 최진호 22 서진용 29 김광현 32 박정배 39 백승건 41 박민호 42 문승원 43 김정민 45 채병용 46 백인식 47 박희수 49 김정우 50 박종훈 51 김태훈 52 조영우 55 이승진 57 신동민 59 김주한 60 김성민 61 소사 63 이원준 65 서동민 66 신동훈 91 유상화 92 전종훈 93 최재성 94 이재관 96 이채호 97 이케빈 98 이희재 99 강지광 113 유호식 -- 정영광 포수 16 허도환 20 이재원(주장) 33 이현석 53 이동근 69 전경원 내야수 05 전진우 07 강인호 08 박준영 2 임재현 3 나주환 4 최항 6 김성현 7 정현 10 최승준 14 최정 25 김창평 27 로맥 31 남태혁 34 안상현 36 박정권 54 하성진 58 최경모 67 조성모 68 최준우 112 강동권 114 임석진 외야수 0 김강민 8 김재현 9 정진기 17 노수광 23 배영섭 24 최민재 30 류효용 37 정의윤 38 고종욱 40 오준혁 44 윤정우 56 채현우 62 한동민 64 김민재 95 최상민 96 박광명 09 김규남 군입대 선수 강효빈 권기영 김제성 김정빈 김정훈 김찬호 김주온 김표승 나세원 박계현 박성한 박인성 박철우 봉민호 유상화 유서준 유영하 이건욱 이재록 이정범 이홍구 전종훈 정동윤 조성훈 최경태 최민준 최수빈 허웅 2020년 신인지명 선수 -- 오원석(1차지명) vdeh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2006년 아시안 게임 동메달 감독 70 김재박 코치 72 김무관 · 75 정진호 · 79 양상문투수 20 윤석민 · 21 오승환 · 23 신철인 · 37 정민혁 · 51 류현진 · 55 장원삼 · 59 이혜천 · 61 손민한 · 67 우규민포수 44 조인성 · 47 강민호내야수 1 장성호 · 7 박진만 · 8 정근우 · 10 이대호 · 16 박기혁 · 66 조동찬외야수 9 이병규 · 15 이용규 · 31 이택근 · 35 이진영 · 62 박재홍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무관&oldid=24414934" 분류: 195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인천광역시 출신KBO 리그 내야수KBO 리그 2루수KBO 리그 3루수삼미 슈퍼스타즈 선수청보 핀토스 선수인천숭의초등학교 동문상인천중학교 동문인천고등학교 동문건국대학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12일 (수) 11: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무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무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무관 Kim Mu-Kwan SK 와이번스 No.72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55년 3월 2일(1955-03-02) (64세) 출신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신장 173 cm 체중 80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내야수 프로 입단 연도 1982년 드래프트 순위 프로 원년 선수 첫 출장 KBO / 1982년 마지막 경기 KBO / 1985년 경력 선수 경력 한일은행 (실업)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 1985년) 청보 핀토스 (1985년) 코치 경력 청보 핀토스 주루코치 (1986년) 청보 핀토스 타격코치 (1987년) 태평양 돌핀스 코치 (1988년) 롯데 자이언츠 코치 (1990년 ~ 1991년) 태평양 돌핀스 코치 (1992년 ~ 1994년) 현대 유니콘스 코치 (1998년 ~ 2000년) 롯데 자이언츠 코치 (2001년 ~ 2003년) 인천고등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2004년 ~ 2005년) 2006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코치 롯데 자이언츠 타격코치 (2006년 ~ 2011년) LG 트윈스 타격코치 (2012년 ~ 2014년) SK 와이번스 타격코치 (2014년 ~ 2015년, 2019년)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15년 ~ 2016년) SK 와이번스 루키팀 야수총괄코치 (2019년 ~ 현재) 감독 경력 현대 유니콘스 2군 감독 (1996년 ~ 1997년) LG 트윈스 2군 감독 (2014년)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7년 ~ 2018년) 프런트 경력 태평양 돌핀스 스카우트 (1995년) 김무관(金武寬, 1953년 11월 29일 ~ )은 전 KBO 리그 청보 핀토스의 내야수이자, 현재 KBO 리그 SK 와이번스에서 루키팀 야수총괄코치이다. 목차 1 선수 시절 1.1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1.2 청보 핀토스 시절 2 야구선수 은퇴 후 3 트리비아 4 출신 학교 5 통산 기록 6 각주 7 외부 링크 선수 시절[편집]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편집] 건국대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 한일은행을 거쳐 원년 멤버로 입단하였다.[1] 청보 핀토스 시절[편집] 1985년에 입단하였다. 통산 121경기에 출장해 1할대 타율, 1홈런, 20타점을 기록했다.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의 팀 사정상 많은 포지션들을 맡았다. 야구선수 은퇴 후[편집] 1986년부터 청보 핀토스의 주루코치로 활동했다.[2] 이듬해부터 청보의 타격코치로 일하면서부터 1년을 쉰 1989년, 스카우트 및 2군 감독을 맡았던 1995년과 1997년 사이를 제외하고 계속 타격코치로 활동했다. 2001년 시즌 전 롯데 자이언츠의 타격코치로 부임해 포수 최기문을 스위치 히터로 전향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루수 이대호를 강타자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2003년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와 재계약에 실패해 인천고등학교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았다가 2006년 롯데 자이언츠에 복귀했다. 2011년 플레이오프가 끝난 후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2014년 시즌 후 당시 감독이었던 김용희의 요청으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했으나, 2015년 6월 5일 팀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2군 타격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다. 2016 시즌 후 2군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2019년부터 1군 타격코치를 다시 맡았으나, 팀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다시 루키팀 야수총괄코치로 보직을 바꿨다. 트리비아[편집] 전지훈련이나 개인적인 일로 미국이나 일본에 가게 되면 반드시 원서로 된 야구 이론서를 구입했으며, 귀국했을 때 번역을 맡긴 뒤 번역된 이론서를 통해 지도자 생활 때 많은 지식을 쌓았다.[3] 출신 학교[편집] 인천숭의초등학교 상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 건국대학교 통산 기록[편집] 연도 팀명 타율 경기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실 볼넷 사구 삼진 병살 실책 1982 삼미 0.217 69 254 33 55 11 0 1 69 14 5 7 24 7 29 5 7 1983 0.156 23 45 1 7 1 0 0 8 4 0 0 2 1 10 3 3 1984 0.000 4 7 0 0 0 0 0 0 0 0 0 0 0 2 0 0 1985 청보 0.150 25 20 1 3 0 0 0 3 2 1 0 0 0 4 1 2 통산 4시즌 0.199 121 326 35 65 12 0 1 80 20 6 7 26 8 45 9 12 각주[편집] ↑ 롯데 김무관 타격코치의 타자론 《스포츠서울》, 2006년 8월 18일 ↑ 우리 시대 新 라이벌 열전 - 김용달 vs 김무관 《스포츠조선》, 2006년 8월 22일 ↑ LG 김무관 타격코치 “당신이 뭘 가르쳐?”…그 말이 나를 키웠다 - 스포츠동아 외부 링크[편집] 김무관 - KBO 타자별 기록 vdehSK 와이번스 - 현재 명단감독 85 염경엽 코치 80 박경완 (수석/타격) 74 최상덕 (투수) 75 손지환 (수비) 76 박재상 (타격보조) 81 장재중 (배터리) 83 손혁 (투수) 84 조동화 (1루 주루) 86 정수성 (작전/주루) -- 김상용 (컨디셔닝) -- 박창민 (컨디셔닝) -- 이형삼 (컨디셔닝) 퓨처스 감독 73 이종운 퓨처스 코치 87 김석연 (수석/타격) 70 서한규 (작전/주루) 71 김경태 (투수) 77 백재호 (타격) 78 김일경 (수비) 82 김필중 (배터리) 89 제춘모 (투수) -- 고윤형 (컨디셔닝) -- 최현석 (컨디셔닝) 루키팀 코치 72 김무관 (야수총괄) 79 최창호 (책임/투수) 88 이대수 (수비) 90 전병두 (재활) -- 김기태 (컨디셔닝) -- 조문성 (컨디셔닝) 투수 00 정혁진 01 허민혁 03 서상준 06 장민익 1 김택형 11 신재웅 12 정재원 13 하재훈 15 산체스 18 정영일 19 윤희상 21 최진호 22 서진용 29 김광현 32 박정배 39 백승건 41 박민호 42 문승원 43 김정민 45 채병용 46 백인식 47 박희수 49 김정우 50 박종훈 51 김태훈 52 조영우 55 이승진 57 신동민 59 김주한 60 김성민 61 소사 63 이원준 65 서동민 66 신동훈 91 유상화 92 전종훈 93 최재성 94 이재관 96 이채호 97 이케빈 98 이희재 99 강지광 113 유호식 -- 정영광 포수 16 허도환 20 이재원(주장) 33 이현석 53 이동근 69 전경원 내야수 05 전진우 07 강인호 08 박준영 2 임재현 3 나주환 4 최항 6 김성현 7 정현 10 최승준 14 최정 25 김창평 27 로맥 31 남태혁 34 안상현 36 박정권 54 하성진 58 최경모 67 조성모 68 최준우 112 강동권 114 임석진 외야수 0 김강민 8 김재현 9 정진기 17 노수광 23 배영섭 24 최민재 30 류효용 37 정의윤 38 고종욱 40 오준혁 44 윤정우 56 채현우 62 한동민 64 김민재 95 최상민 96 박광명 09 김규남 군입대 선수 강효빈 권기영 김제성 김정빈 김정훈 김찬호 김주온 김표승 나세원 박계현 박성한 박인성 박철우 봉민호 유상화 유서준 유영하 이건욱 이재록 이정범 이홍구 전종훈 정동윤 조성훈 최경태 최민준 최수빈 허웅 2020년 신인지명 선수 -- 오원석(1차지명) vdeh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2006년 아시안 게임 동메달 감독 70 김재박 코치 72 김무관 · 75 정진호 · 79 양상문투수 20 윤석민 · 21 오승환 · 23 신철인 · 37 정민혁 · 51 류현진 · 55 장원삼 · 59 이혜천 · 61 손민한 · 67 우규민포수 44 조인성 · 47 강민호내야수 1 장성호 · 7 박진만 · 8 정근우 · 10 이대호 · 16 박기혁 · 66 조동찬외야수 9 이병규 · 15 이용규 · 31 이택근 · 35 이진영 · 62 박재홍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무관&oldid=24414934" 분류: 195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인천광역시 출신KBO 리그 내야수KBO 리그 2루수KBO 리그 3루수삼미 슈퍼스타즈 선수청보 핀토스 선수인천숭의초등학교 동문상인천중학교 동문인천고등학교 동문건국대학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12일 (수) 11: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인병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병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병선印炳善 출생 1935년 6월 26일(1935-06-26) (84세)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용강 필명 아호는 추경(秋憬) 직업 민속학자, 짚풀문화학자, 시인 언어 한국어 국적 대한민국 소속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 학력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전문학사 모교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활동기간 1956년 ~ 현재 장르 시문학 수상내역 2005년 대한민국문화유산상 2009년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부모 인정식(부), 노미석(모) 배우자 신동엽 자녀 신정섭, 신좌섭, 신우섭(1녀 2남) 웹사이트 짚풀문화박물관 인병선(印炳善, 1935년 6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을 지내고 있는 짚풀문화학자, 민속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교동(喬桐)이고, 호는 추경(秋憬)이다. 목차 1 생애 1.1 출생 1.2 결혼 1.3 학력 1.4 짚풀과 만남 2 경력 3 작품 3.1 산문집 3.2 문화교양서 3.3 시모음집 3.4 고증 및 자료제공 4 인물전 5 각주 6 함께보기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출생[편집] 짚풀문화학자 인병선은 1935년 6월 26일 평안남도 룡강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정식은 농업경제학 권위자이자 동국대학교 교수이다. 그녀는 평양에서 11살까지 '보통국민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오빠는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아버지는 납북되었다. 당시 중 2년생 이였던 인병선은 1·4 후퇴 직전 피난대열에 섞여 어머니와 단 둘이서만 제주도로 피난 왔으며, 제주시 기상대 바로 아랫집에 세 들어 살면서 중3에서 고2까지 제주도 오현중 마당 천막학교를 다녔다. 당시 인병선의 어머니는 피난 올 때 가져온 재봉틀로 누런 광목을 표백해서 적삼을 만들어 팔아 생활했다. 그런 모습을 본 인병선은 군용 담요를 사와 멜빵 바지를 만들어 판 적도 있었다고 한다.학교에서는 '빨갱이 딸'이라고 따돌림 당했다. 문학을 꿈꾸며 바닷가에 나가 늘 혼자 놀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고1때 교수가 중앙대학 신학대학 청강을 권해 히브리어와 종교사를 배워 그 영향으로 나중에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결혼[편집] 1953년 겨울 서울 돈암동 네거리 고서점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단발머리 소녀는 철학계열 전문서적을 찾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는 모르지만 이런 책은 어떨까요?" 하는 소리에 돌아보다가, "크고 빛나는 눈"을 발견하고 신동엽 시인에게 운명처럼 빠져들었다고 한다. 인병선(필명 추경[秋憬])은 신동엽(필명 석림[石林])과 연애편지를 주고 받다가, 다니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하고 1957년 결혼하여 신동엽의 고향으로 가서, 그 해 맏딸 신정섭을 낳았다. [1] 이때 인병선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열었다. 신동엽은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인병선은 애들을 데리고 서울 돈암동 친정으로 올라갔다. 결혼한지 13년 되던해 1969년 4월 7일 신동엽은 간암으로 숨을 거두게 되고, 인병선은 출판사에서 번역 등을 하며 혼자 1녀 2남(신좌섭, 신우섭)을 키운다. 신동엽 생가에 걸린 현판, 인병선글/신영복글씨 학력[편집] 서울대학교 철학과 중퇴 (이후 1991년 서울대 철학과 명예 학사 학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전문학사 짚풀과 만남[편집] 인병선은 남편 신동엽의 죽음 이후 그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가 우연히 무지렁이로 천대받던 우리네 백성들의 전통, 짚풀문화를 만나게 되었다. 일년 내 힘들게 일하고도 어렵게 살던 농민들의 분신 같은 그것들이 급속하게 사라진다는 것이 그를 사로잡았다. 1978년부터 전국 답사하며 짚풀 문화를 조사, 채록했고 오키나와 국립민족학박물관 연구원을 역임했다. 계간 민속지 ‘생활용구’를 창간했다. 일본 중국 등 동남아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짚풀문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다니면서 짚풀문화와 관련한 자료수집과 연구로 짚풀문화가로서 입지를 세우게 되었다. 인병선 관장이 설립한 짚풀생활사박물관은 1993년 문화관광부에 등록,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서 운영하다가, 2001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으로 이전하였으며, 짚풀 특히 볏짚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설립한 박물관으로는 세계에 유일하다. 짚을 삼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으며, 짚풀문화연구회를 통해 교육도 하고 있다. 2008년 자신이 운영하던 짚풀 생활사 박물관에 대한 사적인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평생 수집해온 유물을 온 국민이 함께 뜻 모아 관리하는 체제로 가게 하기 위해 '짚풀문화재단'을 만들어 비영리 재단법인화하였다. [2]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사단법인 짚풀문화연구회 회장으로 있으며,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전문위원(8년간), 한국박물관교육학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경력[편집] 1991년 '짚풀 문화 특별전' 개최 국립민속박물관, 문화부 문화가족상 ‘화전’ 수상 1993년 '짚풀 생활사 박물관'[1] 설립,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전문위원 역임, '망, 망태,망태기전' 개최 1994년 '100주년 기념 동학농민전쟁민속전', '맥간공예-보리짚, 밀짚 특별전' 개최 1995년 '중국 운남성 소수민족생활문화전' 개최 1999년 '한국 사립박물관학회' 창립 초대회장[3] 2005년 '제2회 대한민국문화유산상' 수상 2007년 '신동엽 시인 유품전'[4] 2009년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수상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 주관 제12회 전국박물관인대회) 작품[편집] 산문집[편집] 인병선 (1991). 《벼랑끝에하늘: 인병선산문집》. 창작과 비평사.  문화교양서[편집] 인병선 (1989). 《짚 문화》. 대원사.  인병선 (1991). 《풀문화》. 대원사.  인병선 (199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짚풀문화》. 현암사. ISBN 8932308330.  인병선 (1998). 《팽글팽글 팽이 이야기》. 현암사. ISBN 8932309361.  인병선 (2000). 《풀코스 짚문화여행》. 현암사. ISBN 8932306478.  인병선 (2005). 《우리 종이 오리기(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현암사. ISBN 8932313334.  인병선 (2005). 《우리 짚풀문화(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현암사. ISBN 8932313482.  인병선 (2006). 《짚과 풀로 만들기》. 우리교육. ISBN 8980404182.  인병선 (2010). 《짚풀 생활사박물관(신나는 교과연계 체험학습 28)》. 주니어김영사. ISBN 8934927003.  시모음집[편집] 인병선 (1987). 《들풀이되어라》. 풀빛. [5] 고증 및 자료제공[편집] 김응교(인병선 감수) (2005). 《시인 신동엽》. 현암사. ISBN 893231375X.  인물전[편집] 정란희 (2007). 《짚처럼 풀처럼(우리 인물 이야기 17)》. 우리교육. ISBN 8980407386.  각주[편집] ↑ “‘시인 신동엽’ 펴낸 부인 인병선씨 “이 책으로 남편의 그늘과 ‘이혼’ 입니다””. 한겨레. 2006년 3월 2일. 2010년 2월 26일에 확인함.  ↑ “1세대 수집가들, 주저 말고 유물을 사회에 내놓자”. 프레시안. 2008년 12월 19일. 2010년 5월 17일에 확인함.  ↑ “한국 사립박물관학회 창립 초대회장에 인병선 회장”. 문화일보. 1999년 7월 14일. 2010년 5월 16일에 확인함.  ↑ “신동엽 시인 유품전 연 아내 인병선씨”. 동아일보. 2007년 10월 4일. 2010년 5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5월 17일에 확인함.  ↑ “들풀이 된 여류시인, 인병선”. 오마이뉴스. 2003년 6월 9일. 2010년 5월 17일에 확인함.  함께보기[편집] 신동엽 신동엽문학상 짚풀생활사박물관 외부 링크[편집] 짚풀생활사박물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인병선&oldid=24424891" 분류: 1935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교동 인씨룡강군 출신대한민국의 시인대한민국의 수필가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20세기 대한민국 사람21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서울예술대학교 교수안동대학교 교수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문서라벌예술대학 동문오현중학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08: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르센 벵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르센 벵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르센 벵거 개인 정보로마자 표기 Arsène Wenger출생일 1949년 10월 22일(1949-10-22) (69세)출생지 프랑스 알자스 스트라스부르키 191 cm포지션 감독 (선수시절 미드필더)청소년 클럽 기록1963-19691969-1973 FC 두틀렌하임 뮈치크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69-19731973-19751975-19781978-1981 합계 뮈치크뮐루즈 ASPV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 056 00(4)011 00(0)067 00(4)지도자 기록1978-19811981-19831983-19841984-19871987-19941995-19961996-2018 스트라스부르 (2군 플레잉코치) 스트라스부르 (유소년팀 감독) 칸 (수석 코치) 낭시모나코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아스널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아르센 벵거(프랑스어: Arsène Charles Ernest Wenger, IPA: [aʁsɛn vɛŋ(ɡ)ɛʁ], 1949년 10월 22일~)는 프랑스의 축구 감독이다. 최근까지 아스널 FC의 감독을 맡았다. 아스널 FC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이자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른 감독이다. 일명 "교수(The Professor)"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선수들에겐 "보스(Boss)"라고 불리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바 있다.[1] 벵거는 2003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명예 OBE훈장(외국인대상 명예훈장)을 받았다. 목차 1 이름 표기 2 지도자 경력 2.1 경력 초기 2.2 AS 모나코 2.3 나고야 그램퍼스 2.4 아스널 FC 2.5 감독 경력 통계 3 수상 내역 4 각주 5 외부 링크 이름 표기[편집] 아르센 벵거는 프랑스의 북동쪽 독일 접경 지역인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출신이다. 그를 웽거라 부르는 것은 영어식 발음이므로 외래어의 한글 표기법상 본토 발음에 우선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 그 지방은 역사적인 연유로 프랑스와 독일, 양쪽 문화의 영향을 같이 받았다. 그 지역의 역사는 알자스-로렌 문제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벵거 자신도 인터뷰를 통해 "벵거"라고 부르는 쪽이 옳다고 밝힌 바 있다.[2] 그러나 '벵거'도 엄밀히 말하면 영어 /ng/의 발음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ng/가 받침 /ㅇ/으로만 발음되는 독일어의 특성을 따르다면 '벵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캐나다에 거주하여 아무래도 영어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프랑스어 사용 남성 누리꾼 poboxy는 '벵거', Wenger의 고향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사는 여성 누리꾼 fowl은 '벵어'라고 발음하고 있다. 지도자 경력[편집] 경력 초기[편집] 1970년대 중반 알자스의 인기 구단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으로 부임한 힐트는 벵거를 스트라스부르의 2군팀 플레잉코치(선수와 코치 생활을 병행하는 사람)로 초빙했다. 1981년 스트라스부르 구단은 힐트 감독 밑에서 착실하게 지도자 수업을 받은 벵거를 유소년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전략, 전술, 선수관리, 언어 등 다방면에서 지식을 지닌 벵거는 구단의 미래 재산인 유소년팀 선수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983년 AS 칸 구단은 그를 수석 코치로 영입했다. 불과 1년 후인 1984년 AS 낭시는 벵거를 1군 감독으로 임명했다. AS 낭시는 프랑스의 축구 영웅 미셸 플라니티 현 유럽 축구 연맹 회장이 몸담았던 구단으로 유명했다. .[3] AS 모나코[편집] 1987년 프랑스 최고의 인기구단 AS 모나코는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AS 낭시 구단주는 1부리그 잔류 정도의 성적을 원했지만 AS 모나코는 리그 1 우승을 기대하는 팀이었다. 저평가 유망주를 발굴해 슈퍼스타로 키우는 벵거의 능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프랑스에 넘쳐나던 아프리카 출신 유망주에 불과하던 라이베리아 출신의 스트라이커 조지 웨아는 벵거의 지휘하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며 1990년대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았다.또한, 1993~94년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에 다소 치중한 나머지 그 다음해 자국 리그에서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1994~95년 시즌 초반 극심한 성적 부진에 시달린 AS 모나코는 벵거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나고야 그램퍼스[편집] 1995년 일본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이 되었다. 나고야 그램퍼스의 오너인 도요타 그룹은 그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천했다. 결과물은 곧 나타났다. 벵거 이전 리그 하위권이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1995년 시즌 천황배에서 우승했다. 1921년 시작된 이 경기에서 나고야가 우승한 건 사상 처음이었다. 다음해인 1996년 시즌에는 J리그 2위 및 슈퍼컵 우승을 이뤘다. 그 후 세계 각국의 명문 구단이 그를 주시했다. 아스널 FC, 토트넘 홋스퍼, 스트라스부르 등이 물밑 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자 벵거는 아스날 FC을 택했다. 그의 성과에 흡족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계약기간이 4개월가량 남았음에도 벵거를 풀어줬다. 아스널 FC[편집] 1996년 10월 1일 벵거는 아스날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됐다.[4] 그는 2-0으로 이긴 블랙번 로버스 FC와의 어웨이 경기에서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후, 1997-1998 시즌에서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더블을 달성한 외국인 감독이 되었다. 2003-2004 시즌에는 26승 12무의 성적으로 리그 무패우승을 달성하였으며, 이전에 무패우승 기록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가 1888/89시즌 18승 4무로 무패우승을 달성한 전력이 있으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가 무패우승 할 당시보다 16경기나 더치렀으며, 그시절에는 사실상 전술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이므로 아스날의 무패우승은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며, 그렇기에 아스날의 무패우승은 가치를 매길수 없을정도로 값진 기록이다. 그는 유망주 육성정책으로도 유명한데, 벵거의 유명한 명언으로 "다른 팀들은 슈퍼스타를 사지만, 우리는 슈퍼스타를 만든다" 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그의 스타를 키우는 능력과 유망주를 보는 안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에마뉘엘 프티를 800만 파운드에 영입해서 FC 바르셀로나에 3200만 파운드에 판 것과 니콜라 아넬카를 50만파운드에 영입하여 2230만 파운드에 레알 마드리드 CF에 판매한 것은 유명한 사례이다. 또한 그는 유벤투스 FC의 벤치에서 무능한 공격수라 평가되던 티에리 앙리를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키우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박주영 영입으로도 많이 알려졌는데, 300만 파운드에 영입을 했으나 실제 출전 문제와 군문제로 인한 추가 지급금 등을 고려했을 때 실패한 영입 사례로 꼽힌다. 이적료의 경우, 처음에 300만 파운드를 지불했었지만 군문제 해결 시 200만파운드를 추가로 지급하기로 되어 총 500만 파운드가 지급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영국언론 런던이브닝스탠다드에서는 박주영 영입건을 500만 파운드(약 88억원)손실로 분류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014년, 푸마 등과의 새로운 커머셜 딜이 성사됨에 따라 클럽 상황이 나아졌고 벵거도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완성된 선수 영입 및 팀 스쿼드 강화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미 2013/14 시즌에 메수트 외질을 영입하며 변화의 조짐을 보였고[5], 2014/15 시즌에도 FC 바르셀로나에서 알렉시스 산체스를 영입한 것을 필두로 마티유 드뷔시, 다비드 오스피나와 같은 완성된 선수 영입을 계속하고 있고, 칼럼 챔버스, 대니 웰백과 같은 잉글랜드의 유망한 선수 영입에도 신경쓰고 있다.[6] 2018년 4월 20일, 시즌 종료 후 22년 동안 감독직을 재임했던 아스널에서 떠난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감독 경력 통계[편집] 2018년 5월 14일 기준 구단 취임 해임 기록 전 승 무 패 승률(%) AS 낭시 1984년 7월 1일 1987년 7월 1일 7002114000000000000♠114 7001330000000000000♠33 7001300000000000000♠30 7001510000000000000♠51 07001289500000000000♠28.95 AS 모나코 1987년 7월 1일 1994년 9월 17일 7002266000000000000♠266 7002130000000000000♠130 7001530000000000000♠53 7001830000000000000♠83 07001488700000000000♠48.87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1995년 2월 1일 1996년 9월 30일 7001870000000000000♠87 7001490000000000000♠49 7000400000000000000♠4 7001340000000000000♠34 07001563200000000000♠56.32 아스널 1996년 10월 1일 2018년 6월 30일 7003123500000000000♠1,235 7002707000000000000♠707 7002280000000000000♠280 7002248000000000000♠248 07001572500000000000♠57.25 합계 7003170200000000000♠1,702 7002919000000000000♠919 7002367000000000000♠367 7002416000000000000♠416 7001540000000000000♠54.00 수상 내역[편집] AS 모나코 리그 1 우승: 1988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991 올해의 감독상: 1988 나고야 그램퍼스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995 일본 슈퍼컵 우승: 1996 올해의 감독상: 1995 아스널 FC 프리미어리그 우승: 1998, 2002, 2004 잉글랜드 FA컵 우승: 1998, 2002, 2003, 2005, 2014, 2015, 2017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1998, 1999, 2002, 2004, 2014, 2015, 2017 올해의 감독상: 1998, 2002, 2004 각주[편집] ↑ “Arsene Wenger”. 2010년 2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2월 24일에 확인함.  다음 글자 무시됨: ‘ News ’ (도움말) ↑ Arsène Wenger pronunciation: How to pronounce Arsène Wenger in French ↑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dongA.com. 2012년 6월에 확인함.  ↑ “Arsène Wenger Profile”. Arsenal.com.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 “아스날, 역대 최고액에 외질과 5년 계약”. osen.mt.co.kr. 2013년 9월 3일.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 “Arsenal Transfers”. 스카이스포츠.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아르센 벵거 Arsène Wenger profile on Arsenal.com Arsène Wenger profile on BBC Sport vdeh나고야 그램퍼스 감독 히라키 (1992–93) Milne (1994) 미우라 (1994) 벵거 (1995–96) Costa (1996) 케이로스 (1996–97) 다나카 (1997–99) Sanchez (1999) Mazarópi (1999) João Carlos (1999–01) 미우라 (2001) Verdenik (2002–03) 네우시뉴 (2003–05) 나카타 (2005) Vergoossen (2006–07) 스토이코비치 (2008–13) 니시노 (2014–15) 오구라 (2016) Gjurovski (2016) 가자마 (2017–) vdeh아스널 FC 감독 미첼 (1897–1898) 엘코트 (1898–1899) 브래드쇼 (1899–1904) 켈소 (1904–1908) 모렐 (1908–1915) 맥어윈C (1915–1919) 나이턴 (1919–1925) 채프먼 (1925–1934) 쇼C (1934) 앨리슨 (1934–1947) 휘테커 (1947–1956) 크레이스턴 (1956–1958) 스윈딘 (1958–1962) 라이트 (1962–1966) 미 (1966–1976) 닐 (1976–1983) 하우 (1983–1986) 버텐쇼C (1986) 그레이엄 (1986–1995) 휴스턴C (1995) 리오츠 (1995–1996) 휴스턴C (1996) 라이스C (1996) 벵거 (1996–2018) 에메리 (2018–) C: 대행 감독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4345926 LCCN: nb2001045490 ISNI: 0000 0001 1444 4049 GND: 1061961710 SUDOC: 074161644 BNF: cb14025280c (데이터) NDL: 00671510 NKC: xx020354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르센_벵거&oldid=24007236" 분류: 194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프랑스의 축구 선수프랑스의 축구 감독FC 뮐루즈의 축구 선수RC 스트라스부르의 축구 선수AS 낭시의 축구 감독AS 모나코 FC의 축구 감독나고야 그램퍼스의 축구 감독아스널 FC의 축구 감독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동문스트라스부르 출신독일계 프랑스인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프리미어리그의 축구 감독일본의 외국인 축구 감독잉글랜드의 외국인 축구 감독리그 1의 축구 선수리그 1의 축구 감독J1리그의 축구 감독일본에 거주한 프랑스인잉글랜드에 거주한 프랑스인프랑스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이름 없는 변수가 사용됨인용 오류 - 외부 링크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oomaalig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0일 (수) 22: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르센 벵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르센 벵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르센 벵거 개인 정보로마자 표기 Arsène Wenger출생일 1949년 10월 22일(1949-10-22) (69세)출생지 프랑스 알자스 스트라스부르키 191 cm포지션 감독 (선수시절 미드필더)청소년 클럽 기록1963-19691969-1973 FC 두틀렌하임 뮈치크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69-19731973-19751975-19781978-1981 합계 뮈치크뮐루즈 ASPV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 056 00(4)011 00(0)067 00(4)지도자 기록1978-19811981-19831983-19841984-19871987-19941995-19961996-2018 스트라스부르 (2군 플레잉코치) 스트라스부르 (유소년팀 감독) 칸 (수석 코치) 낭시모나코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아스널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아르센 벵거(프랑스어: Arsène Charles Ernest Wenger, IPA: [aʁsɛn vɛŋ(ɡ)ɛʁ], 1949년 10월 22일~)는 프랑스의 축구 감독이다. 최근까지 아스널 FC의 감독을 맡았다. 아스널 FC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이자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른 감독이다. 일명 "교수(The Professor)"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선수들에겐 "보스(Boss)"라고 불리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바 있다.[1] 벵거는 2003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명예 OBE훈장(외국인대상 명예훈장)을 받았다. 목차 1 이름 표기 2 지도자 경력 2.1 경력 초기 2.2 AS 모나코 2.3 나고야 그램퍼스 2.4 아스널 FC 2.5 감독 경력 통계 3 수상 내역 4 각주 5 외부 링크 이름 표기[편집] 아르센 벵거는 프랑스의 북동쪽 독일 접경 지역인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출신이다. 그를 웽거라 부르는 것은 영어식 발음이므로 외래어의 한글 표기법상 본토 발음에 우선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 그 지방은 역사적인 연유로 프랑스와 독일, 양쪽 문화의 영향을 같이 받았다. 그 지역의 역사는 알자스-로렌 문제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벵거 자신도 인터뷰를 통해 "벵거"라고 부르는 쪽이 옳다고 밝힌 바 있다.[2] 그러나 '벵거'도 엄밀히 말하면 영어 /ng/의 발음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ng/가 받침 /ㅇ/으로만 발음되는 독일어의 특성을 따르다면 '벵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캐나다에 거주하여 아무래도 영어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프랑스어 사용 남성 누리꾼 poboxy는 '벵거', Wenger의 고향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사는 여성 누리꾼 fowl은 '벵어'라고 발음하고 있다. 지도자 경력[편집] 경력 초기[편집] 1970년대 중반 알자스의 인기 구단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으로 부임한 힐트는 벵거를 스트라스부르의 2군팀 플레잉코치(선수와 코치 생활을 병행하는 사람)로 초빙했다. 1981년 스트라스부르 구단은 힐트 감독 밑에서 착실하게 지도자 수업을 받은 벵거를 유소년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전략, 전술, 선수관리, 언어 등 다방면에서 지식을 지닌 벵거는 구단의 미래 재산인 유소년팀 선수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983년 AS 칸 구단은 그를 수석 코치로 영입했다. 불과 1년 후인 1984년 AS 낭시는 벵거를 1군 감독으로 임명했다. AS 낭시는 프랑스의 축구 영웅 미셸 플라니티 현 유럽 축구 연맹 회장이 몸담았던 구단으로 유명했다. .[3] AS 모나코[편집] 1987년 프랑스 최고의 인기구단 AS 모나코는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AS 낭시 구단주는 1부리그 잔류 정도의 성적을 원했지만 AS 모나코는 리그 1 우승을 기대하는 팀이었다. 저평가 유망주를 발굴해 슈퍼스타로 키우는 벵거의 능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프랑스에 넘쳐나던 아프리카 출신 유망주에 불과하던 라이베리아 출신의 스트라이커 조지 웨아는 벵거의 지휘하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며 1990년대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았다.또한, 1993~94년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에 다소 치중한 나머지 그 다음해 자국 리그에서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1994~95년 시즌 초반 극심한 성적 부진에 시달린 AS 모나코는 벵거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나고야 그램퍼스[편집] 1995년 일본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이 되었다. 나고야 그램퍼스의 오너인 도요타 그룹은 그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천했다. 결과물은 곧 나타났다. 벵거 이전 리그 하위권이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1995년 시즌 천황배에서 우승했다. 1921년 시작된 이 경기에서 나고야가 우승한 건 사상 처음이었다. 다음해인 1996년 시즌에는 J리그 2위 및 슈퍼컵 우승을 이뤘다. 그 후 세계 각국의 명문 구단이 그를 주시했다. 아스널 FC, 토트넘 홋스퍼, 스트라스부르 등이 물밑 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자 벵거는 아스날 FC을 택했다. 그의 성과에 흡족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계약기간이 4개월가량 남았음에도 벵거를 풀어줬다. 아스널 FC[편집] 1996년 10월 1일 벵거는 아스날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됐다.[4] 그는 2-0으로 이긴 블랙번 로버스 FC와의 어웨이 경기에서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후, 1997-1998 시즌에서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더블을 달성한 외국인 감독이 되었다. 2003-2004 시즌에는 26승 12무의 성적으로 리그 무패우승을 달성하였으며, 이전에 무패우승 기록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가 1888/89시즌 18승 4무로 무패우승을 달성한 전력이 있으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가 무패우승 할 당시보다 16경기나 더치렀으며, 그시절에는 사실상 전술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이므로 아스날의 무패우승은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며, 그렇기에 아스날의 무패우승은 가치를 매길수 없을정도로 값진 기록이다. 그는 유망주 육성정책으로도 유명한데, 벵거의 유명한 명언으로 "다른 팀들은 슈퍼스타를 사지만, 우리는 슈퍼스타를 만든다" 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그의 스타를 키우는 능력과 유망주를 보는 안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에마뉘엘 프티를 800만 파운드에 영입해서 FC 바르셀로나에 3200만 파운드에 판 것과 니콜라 아넬카를 50만파운드에 영입하여 2230만 파운드에 레알 마드리드 CF에 판매한 것은 유명한 사례이다. 또한 그는 유벤투스 FC의 벤치에서 무능한 공격수라 평가되던 티에리 앙리를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키우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박주영 영입으로도 많이 알려졌는데, 300만 파운드에 영입을 했으나 실제 출전 문제와 군문제로 인한 추가 지급금 등을 고려했을 때 실패한 영입 사례로 꼽힌다. 이적료의 경우, 처음에 300만 파운드를 지불했었지만 군문제 해결 시 200만파운드를 추가로 지급하기로 되어 총 500만 파운드가 지급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영국언론 런던이브닝스탠다드에서는 박주영 영입건을 500만 파운드(약 88억원)손실로 분류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014년, 푸마 등과의 새로운 커머셜 딜이 성사됨에 따라 클럽 상황이 나아졌고 벵거도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완성된 선수 영입 및 팀 스쿼드 강화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미 2013/14 시즌에 메수트 외질을 영입하며 변화의 조짐을 보였고[5], 2014/15 시즌에도 FC 바르셀로나에서 알렉시스 산체스를 영입한 것을 필두로 마티유 드뷔시, 다비드 오스피나와 같은 완성된 선수 영입을 계속하고 있고, 칼럼 챔버스, 대니 웰백과 같은 잉글랜드의 유망한 선수 영입에도 신경쓰고 있다.[6] 2018년 4월 20일, 시즌 종료 후 22년 동안 감독직을 재임했던 아스널에서 떠난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감독 경력 통계[편집] 2018년 5월 14일 기준 구단 취임 해임 기록 전 승 무 패 승률(%) AS 낭시 1984년 7월 1일 1987년 7월 1일 7002114000000000000♠114 7001330000000000000♠33 7001300000000000000♠30 7001510000000000000♠51 07001289500000000000♠28.95 AS 모나코 1987년 7월 1일 1994년 9월 17일 7002266000000000000♠266 7002130000000000000♠130 7001530000000000000♠53 7001830000000000000♠83 07001488700000000000♠48.87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1995년 2월 1일 1996년 9월 30일 7001870000000000000♠87 7001490000000000000♠49 7000400000000000000♠4 7001340000000000000♠34 07001563200000000000♠56.32 아스널 1996년 10월 1일 2018년 6월 30일 7003123500000000000♠1,235 7002707000000000000♠707 7002280000000000000♠280 7002248000000000000♠248 07001572500000000000♠57.25 합계 7003170200000000000♠1,702 7002919000000000000♠919 7002367000000000000♠367 7002416000000000000♠416 7001540000000000000♠54.00 수상 내역[편집] AS 모나코 리그 1 우승: 1988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991 올해의 감독상: 1988 나고야 그램퍼스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995 일본 슈퍼컵 우승: 1996 올해의 감독상: 1995 아스널 FC 프리미어리그 우승: 1998, 2002, 2004 잉글랜드 FA컵 우승: 1998, 2002, 2003, 2005, 2014, 2015, 2017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1998, 1999, 2002, 2004, 2014, 2015, 2017 올해의 감독상: 1998, 2002, 2004 각주[편집] ↑ “Arsene Wenger”. 2010년 2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2월 24일에 확인함.  다음 글자 무시됨: ‘ News ’ (도움말) ↑ Arsène Wenger pronunciation: How to pronounce Arsène Wenger in French ↑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dongA.com. 2012년 6월에 확인함.  ↑ “Arsène Wenger Profile”. Arsenal.com.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 “아스날, 역대 최고액에 외질과 5년 계약”. osen.mt.co.kr. 2013년 9월 3일.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 “Arsenal Transfers”. 스카이스포츠.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아르센 벵거 Arsène Wenger profile on Arsenal.com Arsène Wenger profile on BBC Sport vdeh나고야 그램퍼스 감독 히라키 (1992–93) Milne (1994) 미우라 (1994) 벵거 (1995–96) Costa (1996) 케이로스 (1996–97) 다나카 (1997–99) Sanchez (1999) Mazarópi (1999) João Carlos (1999–01) 미우라 (2001) Verdenik (2002–03) 네우시뉴 (2003–05) 나카타 (2005) Vergoossen (2006–07) 스토이코비치 (2008–13) 니시노 (2014–15) 오구라 (2016) Gjurovski (2016) 가자마 (2017–) vdeh아스널 FC 감독 미첼 (1897–1898) 엘코트 (1898–1899) 브래드쇼 (1899–1904) 켈소 (1904–1908) 모렐 (1908–1915) 맥어윈C (1915–1919) 나이턴 (1919–1925) 채프먼 (1925–1934) 쇼C (1934) 앨리슨 (1934–1947) 휘테커 (1947–1956) 크레이스턴 (1956–1958) 스윈딘 (1958–1962) 라이트 (1962–1966) 미 (1966–1976) 닐 (1976–1983) 하우 (1983–1986) 버텐쇼C (1986) 그레이엄 (1986–1995) 휴스턴C (1995) 리오츠 (1995–1996) 휴스턴C (1996) 라이스C (1996) 벵거 (1996–2018) 에메리 (2018–) C: 대행 감독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4345926 LCCN: nb2001045490 ISNI: 0000 0001 1444 4049 GND: 1061961710 SUDOC: 074161644 BNF: cb14025280c (데이터) NDL: 00671510 NKC: xx020354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르센_벵거&oldid=24007236" 분류: 194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프랑스의 축구 선수프랑스의 축구 감독FC 뮐루즈의 축구 선수RC 스트라스부르의 축구 선수AS 낭시의 축구 감독AS 모나코 FC의 축구 감독나고야 그램퍼스의 축구 감독아스널 FC의 축구 감독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동문스트라스부르 출신독일계 프랑스인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프리미어리그의 축구 감독일본의 외국인 축구 감독잉글랜드의 외국인 축구 감독리그 1의 축구 선수리그 1의 축구 감독J1리그의 축구 감독일본에 거주한 프랑스인잉글랜드에 거주한 프랑스인프랑스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이름 없는 변수가 사용됨인용 오류 - 외부 링크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oomaalig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0일 (수) 22: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르센 벵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르센 벵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르센 벵거 개인 정보로마자 표기 Arsène Wenger출생일 1949년 10월 22일(1949-10-22) (69세)출생지 프랑스 알자스 스트라스부르키 191 cm포지션 감독 (선수시절 미드필더)청소년 클럽 기록1963-19691969-1973 FC 두틀렌하임 뮈치크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69-19731973-19751975-19781978-1981 합계 뮈치크뮐루즈 ASPV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 056 00(4)011 00(0)067 00(4)지도자 기록1978-19811981-19831983-19841984-19871987-19941995-19961996-2018 스트라스부르 (2군 플레잉코치) 스트라스부르 (유소년팀 감독) 칸 (수석 코치) 낭시모나코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아스널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아르센 벵거(프랑스어: Arsène Charles Ernest Wenger, IPA: [aʁsɛn vɛŋ(ɡ)ɛʁ], 1949년 10월 22일~)는 프랑스의 축구 감독이다. 최근까지 아스널 FC의 감독을 맡았다. 아스널 FC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이자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른 감독이다. 일명 "교수(The Professor)"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선수들에겐 "보스(Boss)"라고 불리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바 있다.[1] 벵거는 2003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명예 OBE훈장(외국인대상 명예훈장)을 받았다. 목차 1 이름 표기 2 지도자 경력 2.1 경력 초기 2.2 AS 모나코 2.3 나고야 그램퍼스 2.4 아스널 FC 2.5 감독 경력 통계 3 수상 내역 4 각주 5 외부 링크 이름 표기[편집] 아르센 벵거는 프랑스의 북동쪽 독일 접경 지역인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출신이다. 그를 웽거라 부르는 것은 영어식 발음이므로 외래어의 한글 표기법상 본토 발음에 우선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 그 지방은 역사적인 연유로 프랑스와 독일, 양쪽 문화의 영향을 같이 받았다. 그 지역의 역사는 알자스-로렌 문제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벵거 자신도 인터뷰를 통해 "벵거"라고 부르는 쪽이 옳다고 밝힌 바 있다.[2] 그러나 '벵거'도 엄밀히 말하면 영어 /ng/의 발음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ng/가 받침 /ㅇ/으로만 발음되는 독일어의 특성을 따르다면 '벵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캐나다에 거주하여 아무래도 영어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프랑스어 사용 남성 누리꾼 poboxy는 '벵거', Wenger의 고향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사는 여성 누리꾼 fowl은 '벵어'라고 발음하고 있다. 지도자 경력[편집] 경력 초기[편집] 1970년대 중반 알자스의 인기 구단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으로 부임한 힐트는 벵거를 스트라스부르의 2군팀 플레잉코치(선수와 코치 생활을 병행하는 사람)로 초빙했다. 1981년 스트라스부르 구단은 힐트 감독 밑에서 착실하게 지도자 수업을 받은 벵거를 유소년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전략, 전술, 선수관리, 언어 등 다방면에서 지식을 지닌 벵거는 구단의 미래 재산인 유소년팀 선수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983년 AS 칸 구단은 그를 수석 코치로 영입했다. 불과 1년 후인 1984년 AS 낭시는 벵거를 1군 감독으로 임명했다. AS 낭시는 프랑스의 축구 영웅 미셸 플라니티 현 유럽 축구 연맹 회장이 몸담았던 구단으로 유명했다. .[3] AS 모나코[편집] 1987년 프랑스 최고의 인기구단 AS 모나코는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AS 낭시 구단주는 1부리그 잔류 정도의 성적을 원했지만 AS 모나코는 리그 1 우승을 기대하는 팀이었다. 저평가 유망주를 발굴해 슈퍼스타로 키우는 벵거의 능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프랑스에 넘쳐나던 아프리카 출신 유망주에 불과하던 라이베리아 출신의 스트라이커 조지 웨아는 벵거의 지휘하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며 1990년대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았다.또한, 1993~94년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에 다소 치중한 나머지 그 다음해 자국 리그에서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1994~95년 시즌 초반 극심한 성적 부진에 시달린 AS 모나코는 벵거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나고야 그램퍼스[편집] 1995년 일본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이 되었다. 나고야 그램퍼스의 오너인 도요타 그룹은 그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천했다. 결과물은 곧 나타났다. 벵거 이전 리그 하위권이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1995년 시즌 천황배에서 우승했다. 1921년 시작된 이 경기에서 나고야가 우승한 건 사상 처음이었다. 다음해인 1996년 시즌에는 J리그 2위 및 슈퍼컵 우승을 이뤘다. 그 후 세계 각국의 명문 구단이 그를 주시했다. 아스널 FC, 토트넘 홋스퍼, 스트라스부르 등이 물밑 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자 벵거는 아스날 FC을 택했다. 그의 성과에 흡족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계약기간이 4개월가량 남았음에도 벵거를 풀어줬다. 아스널 FC[편집] 1996년 10월 1일 벵거는 아스날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됐다.[4] 그는 2-0으로 이긴 블랙번 로버스 FC와의 어웨이 경기에서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후, 1997-1998 시즌에서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더블을 달성한 외국인 감독이 되었다. 2003-2004 시즌에는 26승 12무의 성적으로 리그 무패우승을 달성하였으며, 이전에 무패우승 기록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가 1888/89시즌 18승 4무로 무패우승을 달성한 전력이 있으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가 무패우승 할 당시보다 16경기나 더치렀으며, 그시절에는 사실상 전술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이므로 아스날의 무패우승은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며, 그렇기에 아스날의 무패우승은 가치를 매길수 없을정도로 값진 기록이다. 그는 유망주 육성정책으로도 유명한데, 벵거의 유명한 명언으로 "다른 팀들은 슈퍼스타를 사지만, 우리는 슈퍼스타를 만든다" 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그의 스타를 키우는 능력과 유망주를 보는 안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에마뉘엘 프티를 800만 파운드에 영입해서 FC 바르셀로나에 3200만 파운드에 판 것과 니콜라 아넬카를 50만파운드에 영입하여 2230만 파운드에 레알 마드리드 CF에 판매한 것은 유명한 사례이다. 또한 그는 유벤투스 FC의 벤치에서 무능한 공격수라 평가되던 티에리 앙리를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키우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박주영 영입으로도 많이 알려졌는데, 300만 파운드에 영입을 했으나 실제 출전 문제와 군문제로 인한 추가 지급금 등을 고려했을 때 실패한 영입 사례로 꼽힌다. 이적료의 경우, 처음에 300만 파운드를 지불했었지만 군문제 해결 시 200만파운드를 추가로 지급하기로 되어 총 500만 파운드가 지급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영국언론 런던이브닝스탠다드에서는 박주영 영입건을 500만 파운드(약 88억원)손실로 분류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014년, 푸마 등과의 새로운 커머셜 딜이 성사됨에 따라 클럽 상황이 나아졌고 벵거도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완성된 선수 영입 및 팀 스쿼드 강화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미 2013/14 시즌에 메수트 외질을 영입하며 변화의 조짐을 보였고[5], 2014/15 시즌에도 FC 바르셀로나에서 알렉시스 산체스를 영입한 것을 필두로 마티유 드뷔시, 다비드 오스피나와 같은 완성된 선수 영입을 계속하고 있고, 칼럼 챔버스, 대니 웰백과 같은 잉글랜드의 유망한 선수 영입에도 신경쓰고 있다.[6] 2018년 4월 20일, 시즌 종료 후 22년 동안 감독직을 재임했던 아스널에서 떠난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감독 경력 통계[편집] 2018년 5월 14일 기준 구단 취임 해임 기록 전 승 무 패 승률(%) AS 낭시 1984년 7월 1일 1987년 7월 1일 7002114000000000000♠114 7001330000000000000♠33 7001300000000000000♠30 7001510000000000000♠51 07001289500000000000♠28.95 AS 모나코 1987년 7월 1일 1994년 9월 17일 7002266000000000000♠266 7002130000000000000♠130 7001530000000000000♠53 7001830000000000000♠83 07001488700000000000♠48.87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1995년 2월 1일 1996년 9월 30일 7001870000000000000♠87 7001490000000000000♠49 7000400000000000000♠4 7001340000000000000♠34 07001563200000000000♠56.32 아스널 1996년 10월 1일 2018년 6월 30일 7003123500000000000♠1,235 7002707000000000000♠707 7002280000000000000♠280 7002248000000000000♠248 07001572500000000000♠57.25 합계 7003170200000000000♠1,702 7002919000000000000♠919 7002367000000000000♠367 7002416000000000000♠416 7001540000000000000♠54.00 수상 내역[편집] AS 모나코 리그 1 우승: 1988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991 올해의 감독상: 1988 나고야 그램퍼스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995 일본 슈퍼컵 우승: 1996 올해의 감독상: 1995 아스널 FC 프리미어리그 우승: 1998, 2002, 2004 잉글랜드 FA컵 우승: 1998, 2002, 2003, 2005, 2014, 2015, 2017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1998, 1999, 2002, 2004, 2014, 2015, 2017 올해의 감독상: 1998, 2002, 2004 각주[편집] ↑ “Arsene Wenger”. 2010년 2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2월 24일에 확인함.  다음 글자 무시됨: ‘ News ’ (도움말) ↑ Arsène Wenger pronunciation: How to pronounce Arsène Wenger in French ↑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dongA.com. 2012년 6월에 확인함.  ↑ “Arsène Wenger Profile”. Arsenal.com.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 “아스날, 역대 최고액에 외질과 5년 계약”. osen.mt.co.kr. 2013년 9월 3일.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 “Arsenal Transfers”. 스카이스포츠. 2014년 9월 7일에 확인함.  |출판사=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아르센 벵거 Arsène Wenger profile on Arsenal.com Arsène Wenger profile on BBC Sport vdeh나고야 그램퍼스 감독 히라키 (1992–93) Milne (1994) 미우라 (1994) 벵거 (1995–96) Costa (1996) 케이로스 (1996–97) 다나카 (1997–99) Sanchez (1999) Mazarópi (1999) João Carlos (1999–01) 미우라 (2001) Verdenik (2002–03) 네우시뉴 (2003–05) 나카타 (2005) Vergoossen (2006–07) 스토이코비치 (2008–13) 니시노 (2014–15) 오구라 (2016) Gjurovski (2016) 가자마 (2017–) vdeh아스널 FC 감독 미첼 (1897–1898) 엘코트 (1898–1899) 브래드쇼 (1899–1904) 켈소 (1904–1908) 모렐 (1908–1915) 맥어윈C (1915–1919) 나이턴 (1919–1925) 채프먼 (1925–1934) 쇼C (1934) 앨리슨 (1934–1947) 휘테커 (1947–1956) 크레이스턴 (1956–1958) 스윈딘 (1958–1962) 라이트 (1962–1966) 미 (1966–1976) 닐 (1976–1983) 하우 (1983–1986) 버텐쇼C (1986) 그레이엄 (1986–1995) 휴스턴C (1995) 리오츠 (1995–1996) 휴스턴C (1996) 라이스C (1996) 벵거 (1996–2018) 에메리 (2018–) C: 대행 감독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4345926 LCCN: nb2001045490 ISNI: 0000 0001 1444 4049 GND: 1061961710 SUDOC: 074161644 BNF: cb14025280c (데이터) NDL: 00671510 NKC: xx020354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르센_벵거&oldid=24007236" 분류: 194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프랑스의 축구 선수프랑스의 축구 감독FC 뮐루즈의 축구 선수RC 스트라스부르의 축구 선수AS 낭시의 축구 감독AS 모나코 FC의 축구 감독나고야 그램퍼스의 축구 감독아스널 FC의 축구 감독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동문스트라스부르 출신독일계 프랑스인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프리미어리그의 축구 감독일본의 외국인 축구 감독잉글랜드의 외국인 축구 감독리그 1의 축구 선수리그 1의 축구 감독J1리그의 축구 감독일본에 거주한 프랑스인잉글랜드에 거주한 프랑스인프랑스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이름 없는 변수가 사용됨인용 오류 - 외부 링크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oomaalig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0일 (수) 22: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린지 (가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린지 (가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린지 기본 정보본명 임민지 (林珉志)출생 1989년 10월 22일(1989-10-22) (29세)대한민국 인천광역시직업 가수, 뮤지컬배우장르 K-pop, 댄스 팝활동 시기 2012년 ~ 현재 소속사 윌엔터테인먼트관련 활동 피에스타 린지(Linzy, 본명: 임민지(林珉志); 1989년 10월 22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뮤지컬배우로, 과거 피에스타의 메인보컬이였다. 목차 1 출연 작품 1.1 드라마 1.2 영화 1.3 뮤지컬 2 외부 링크 출연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2014년 《멘탈사수》 - 린지 역 2018년 《체크 메이트》 - 희연 역 영화[편집] 《마차 타고 고래고래》 (2017년) - 제인 역 뮤지컬[편집] 《하이스쿨 뮤지컬》 (2013년) - 샤페이 역 《페스트》 (2016년) - 타루 역 《오!캐롤》 (2017년) - 마지 역 《광화문연가》 (2017년) - 젊은수아 역 《삼총사》 (2018년) - 콘스탄스 역 《광화문연가》 (2018년) - 젊은수아 역 《영웅》 (2019년) - 설희 역 외부 링크[편집] 린지 - 트위터 린지 - 인스타그램 vdeh윌 엔터테인먼트경영진 손지현 (대표이사) 소속 배우남성 김범진 온주완 김선웅 주상욱 양승호 여호민 김재원 신민철 신현수 윤희석 정근 진이한 방준호 정승길 여성 권민중 김소은 린지 이지인 이정은 전수경 한소영 오소연 윤지원 오산하 하다영 과거 소속 배우남성 조민기 이진욱 류수영 최정원 김도성 안태영 여성 김정은 이보영 이지아 최강희 최하나 강래연 왕빛나 유인영 강소라 윤빛나 박주하 송재인 이규정 손승우 vdeh카카오엠음원 유통카카오엠 유통 음반 목록콘텐츠 제작메가몬스터 하트 투 하트 울지 않는 새 가화만사성 우리 헤어졌어요 붉은 달 푸른 해 진심이 닿다 크리스피 스튜디오 [썸-명서] [네 남자의 푸드트럭] [뒷TALKS] [취중젠담] [취중젠담 시즌 2] [오늘도 무사히] [오늘도 무사히 시즌 2] [카카오멜론] [My Ex Diary] [크리스피 스튜디오 X 데일리 호텔] [크리스피 스튜디오 X 나일론 코리아] [이나뷰티] [낮술남녀] [Work & Love Balance] 매니지먼트카카오엠 아이유 지아 플레이엠 엔터테인먼트 허각 에이핑크 (박초롱, 윤보미, 정은지, 손나은, 김남주, 오하영) 빅톤 (한승우, 강승식, 허찬, 임세준, 도한세, 최병찬, 정수빈) 송경일 나도균 김시형 장이정 원태연 원더나인 (전도염, 이승환, 정진성) 임지민 크래커 엔터테인먼트 더보이즈 (상연, 제이콥, 영훈, 현재, 주연, 케빈, 뉴, 큐, 주학년, 활, 선우, 에릭) 문화인 박정현 우효 윤현상 유라 크래커 앤츠 (최유, 도재) 알레프 서교동의 밤 로지 헤이맨 (도영, 공탄, 테리킴) 에버루아 한음파 (이정훈, 장혁조, 김윤태, 윤수영) 아일 (주지훈, 지한결, 이명욱, 김유찬) 민채 롱디 (한민세, 민샥) 크림 이나 젊은이 재니 글로잉독 콜렉티브아츠 (이원우, 윤지영, 박재우, 김강산, 김현창) E&T 스토리 엔터테인먼트 김소현 박한들 스타쉽 엔터테인먼트스타쉽 엔터테인먼트 케이윌 소유 다솜 듀에토 (백인태, 유슬기) 마인드유 (고닥, 김재희) 몬스타엑스 (셔누, 원호, 민혁, 기현, 형원, 주헌, 아이엠) 우주소녀 (엑시, 설아, 보나, 수빈, 루다, 다원, 은서, 성소, 선의, 미기, 여름, 다영, 연정) 정세운 아이즈원 (안유진, 장원영) 스타쉽 엑스 유승우 샵건 브라더수 주영 킹콩 by 스타쉽 김범 김지원 박희순 송승헌 송하윤 유연석 이광수 이동욱 이미연 임수정 조윤희 채수빈 최원명 강은아 박민우 오아연 오혜원 이종화 조윤우 지일주 한민 이엘리야 정준원 장정연 최희진 신승호 정주연 정원창 김민지 지우 하이라인 엔터테인먼트 DJ소다 키겐 dress DJ Vanto 장석훈 leon fka 송민재 BH 엔터테인먼트 이병헌 유지태 고수 진구 박성훈 이희준 션 리차드 변우석 우효광 박해수 박정우 이진욱 한효주 한가인 한지민 김고은 추자현 이지아 김용지 카라타 에리카 공승연 안소희 박지후 매니지먼트 숲 공유 공효진 김재욱 서현진 이천희 전도연 정유미 남지현 유민규 이재준 정가람 김지수 김태금 전소니 최우식 배수지 제이와이드 컴퍼니 이상윤 이보영 김소연 강예원 김태리 백진희 정혜성 최다니엘 천호진 배종옥 김태우 김희정 배해선 조달환 이영은 오민석 손여은 이미도 김진우 민성욱 김사희 전여빈 신재하 전재형 진현빈 임지현 한지선 홍경 유수빈 최수인 허정은 박정화 와이드에스 컴퍼니 김영광 이도겸 최태환 관련 항목 YBM SK그룹 카카오 메가몬스터 크리스피 스튜디오 레디 엔터테인먼트 나일론코리아미디어 플레이엠엔터테인먼트 문화인 이앤티스토리 엔터테인먼트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킹콩 엔터테인먼트 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 숲 제이와이드컴퍼니 와이드에스컴퍼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린지_(가수)&oldid=24536562" 분류: 198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대한민국의 팝 가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대한민국의 아이돌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K-pop 가수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7월 7일 (일) 06: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제로 (비디오 게임 시리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로 (비디오 게임 시리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로는 테크모에서 제작한 공포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로서, 동양적 공포 게임의 대표작이다. 일본에서 3편까지 제작되어 발매되었으며, 한국에는 1편과 2편이 발매되어 있다. 주인공은 영(靈)의 힘을 가두는 능력이 있는 사영기를 이용하여 혼령들과 싸워나가며, 오랜 옛날 일어난 비극에 얽힌 비밀들을 풀어나가는 게임이다. 다른 이름: 零("제로", 일본), Fatal Frame(북미), Project Zero(유럽) 목차 1 시리즈 1.1 제로 1.2 제로 붉은 나비 1.3 제로 문신의 목소리 시리즈[편집] 제로[편집] 1986년 9월 26일, 히나사키 마후유는 자신의 은인인 행방불명된 작가 타카미네 준세이씨를 찾아 히무로 저택에 들어가나, 그 역시 행방불명이 된다. 그 후, 마후유의 유일한 가족인 여동생 미쿠는 오빠의 행방을 찾아 히무로 저택을 찾는다. 제령 능력을 지닌 카메라를 손에 든 미쿠는 저택 안에서 보이는 오빠의 뒷모습을 쫓는다. 이 게임은 일본의 히무로 저택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저택에서는 수십 년 전 한 가족과 친구들의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 게임은 플레이스테이션2 용으로 제작되었으며, Xbox로도 이식되어 발매되었다. Xbox용 버전은 주인공의 기모노 의상과 새로운 엔딩이 추가되었으며, 그래픽적으로 개선이 있었다. 일본과 국내에 발매된 Xbox용은 북미버전 제목인 Fatal Frame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매된 원작은 일본어 음성으로 제작되어 있으나, 국내에 발매된 버전은 북미버전을 기준으로 제작되어 영어 음성만을 수록하고 있으며, 주인공 미쿠의 신장 및 복장이 북미버전과 동일하다. 국내에는 SCEK에서 제로 라는 제목으로 플레이스테이션2용을 발매하였으며, 한글 자막이 포함되어 있다. Xbox버전은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발매하였으며, 영어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 제로 붉은 나비[편집] 쌍둥이 자매 마유와 미오는 어렸을 적 놀았던 골짜기를 찾아 온다. 이 골짜기는 댐 건설로 인해 곧 사라질 예정이었다. 어렸을 때 마유는 이 부근에서 발을 헛디뎌, 그때까지도 그 부상으로 다리를 절고 있었다. 옛날 일을 생각하던 미오가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 마유는 한 붉은 나비에 이끌려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유를 쫓아 미오가 들어간 곳은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 미나카미였다. 주인공인 미쿠 혼자서 게임을 진행하는 1편과 달리, 2편에서는 플레이어는 주인공 미오를 조종하지만 쌍둥이 언니인 마유와 함께 스토리를 진행하는 때가 많다. 마유는 미오를 따라다니며, 영과의 전투가 벌어질 때에 영이 마유를 공격할 수 있으므로 미오가 보호해 주어야 한다. 사영기는 기본적으로 1편과 동일하나, 1편의 사영기는 영을 오랫동안 바라보아 영력을 축적하는 데 반해 2편에서는 축적 시간이 거의 없이 셔터 타이밍으로 제령 능력이 결정되어 전투의 페이스가 빨라졌다. 사영기의 특수능력은 업그레이드시 포인트와 염주를 사용하며, 특수능력의 사용시에는 제령시 축적한 영력을 사용하도록 변경되었다. 쌍둥이 언니와 함께 다니는 것과, 영의 등장시에 프리렌더링 동영상을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인해 1편에 비해 무섭지 않다는 평이 많다. 엔딩은 난이도에 따라 두 가지가 있다. 엔딩곡의 제목은 "蝶"(접:나비)이며, 가수 아마노 츠키코가 작사 및 작곡하였다. 일본에서 맥시 싱글 앨범 "蝶"에 수록되어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도 발매된 "천룡" 앨범에도 수록되어 있다. 플레이스테이션2용은 일본에서 2003년 11월 27일에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는 2004년 6월 24일에 발매되었다. 한국판은 SCEK에서 발매하였으며, 일어 음성에 한글 자막을 사용하였다. Xbox용으로 이식되어 "감독판"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는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발매하였다. 국내용 Xbox 버전은 영어 음성과 영어 자막을 사용하였다. Xbox용 버전에는 많은 복장들이 추가되었으며, FPS모드, 새로운 영, 새로운 엔딩이 추가되었다. 다른 이름: 零〜紅い蝶〜(일본, 플레이스테이션2용), Fatal Frame II: Crimson Butterfly (북미, 플레이스테이션2용), Project Zero II: Crimson Butterfly (유럽), Fatal Frame II: Crimson Butterfly Director's Cut (일본&북미, Xbox용) 제로 문신의 목소리[편집] 사진가인 쿠로사와 레이는 귀신이 나온다는 저택의 취재를 의뢰받고 조수 히나사키 미쿠와 함께 저택 안의 사진을 찍는다. 저택의 복도의 사진을 찍던 중, 레이는 죽은 애인인 유우의 모습을 보게 된다. 유우의 모습을 쫓아 저택안을 헤매이는 레이에게 알 수 없는 영상들이 나타난다. 백일몽에서 깨어난 레이는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현상한 필름에는 유우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레이는 잠 들 때마다 똑같은 저택의 꿈을 꾸게 되고, 잠에서 깰 때마다 레이의 몸에는 격렬한 아픔과 함께 문신의 모양이 점점 퍼져 나간다... 제로 시리즈의 3편인 이 작품은 여전히 1,2편에서 사용된 사영기를 사용하고 있다. 사영기의 제령방식은 1편과 2편의 방식을 모두 취하고 있어, 사영기로 영을 바라보는 동안 영력이 사영기에 축적되며, 셔터 타이밍에 따라 제령 능력이 높이 올라가고 콤보 공격이 가능해진다. 주인공은 이번 작에서 새로 등장한 쿠로사와 레이로서, 자신이 운전하던 차의 사고로 애인과 사별한 사진가이다. 게임의 진행에 따라 레이 외에 두 명의 캐릭터로 플레이할 수 있는데, 한 명은 레이의 조수이자 1편의 주인공인 히나사키 미쿠이며, 또 한 명은 유우의 친구인 아마쿠라 케이이다. 케이는 2편의 주인공인 미오,마유 자매의 삼촌이며, 3편에서 조카 마유의 실종을 조사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미쿠는 제령능력이 레이보다 높으며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의 특수기능이 적고, 케이는 영과 전투를 벌이는 제령능력은 매우 낮으며, 영을 피해 숨거나 무거운 물건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엔딩은 두 가지가 있으며, 두 번째 엔딩은 게임을 한 번 클리어 한 후 2회차 플레이시부터 볼 수 있다. 두 번째 엔딩을 보려면 게임내의 특수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며, 난이도 선택과는 관련없이 볼 수 있다. 엔딩곡의 제목은 "聲"(목소리)이며, 가수 아마노 츠키코가 작사 및 작곡하였다. 엔딩곡은 맥시 싱글 "聲"에 수록되었으며, 게임 발매 하루 전인 2005년 7월 27일에 발매되었다. 2005년 7월 28일에 일본에서 플레이스테이션2용으로 발매되었다. 국내에의 발매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편과는 달리 Xbox용 이식 계획도 없는 것으로 잡지 인터뷰에 나타나 있다. 북미지역에는 2005년내에 발매될 예정이다. 일본판의 제목은 零〜刺青ノ聲〜이며, 제로 문신의 목소리 는 이를 번역한 것이다. 그외에도 닌텐도 Wii로 발매된 '월식의 가면' 과 붉은 나비 리메이트 버전인 '진홍의 나비가' 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로_(비디오_게임_시리즈)&oldid=18579416" 분류: 비디오 게임 시리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LietuviųNederlands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4월 9일 (일) 02: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제로 (비디오 게임 시리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로 (비디오 게임 시리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로는 테크모에서 제작한 공포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로서, 동양적 공포 게임의 대표작이다. 일본에서 3편까지 제작되어 발매되었으며, 한국에는 1편과 2편이 발매되어 있다. 주인공은 영(靈)의 힘을 가두는 능력이 있는 사영기를 이용하여 혼령들과 싸워나가며, 오랜 옛날 일어난 비극에 얽힌 비밀들을 풀어나가는 게임이다. 다른 이름: 零("제로", 일본), Fatal Frame(북미), Project Zero(유럽) 목차 1 시리즈 1.1 제로 1.2 제로 붉은 나비 1.3 제로 문신의 목소리 시리즈[편집] 제로[편집] 1986년 9월 26일, 히나사키 마후유는 자신의 은인인 행방불명된 작가 타카미네 준세이씨를 찾아 히무로 저택에 들어가나, 그 역시 행방불명이 된다. 그 후, 마후유의 유일한 가족인 여동생 미쿠는 오빠의 행방을 찾아 히무로 저택을 찾는다. 제령 능력을 지닌 카메라를 손에 든 미쿠는 저택 안에서 보이는 오빠의 뒷모습을 쫓는다. 이 게임은 일본의 히무로 저택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저택에서는 수십 년 전 한 가족과 친구들의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 게임은 플레이스테이션2 용으로 제작되었으며, Xbox로도 이식되어 발매되었다. Xbox용 버전은 주인공의 기모노 의상과 새로운 엔딩이 추가되었으며, 그래픽적으로 개선이 있었다. 일본과 국내에 발매된 Xbox용은 북미버전 제목인 Fatal Frame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매된 원작은 일본어 음성으로 제작되어 있으나, 국내에 발매된 버전은 북미버전을 기준으로 제작되어 영어 음성만을 수록하고 있으며, 주인공 미쿠의 신장 및 복장이 북미버전과 동일하다. 국내에는 SCEK에서 제로 라는 제목으로 플레이스테이션2용을 발매하였으며, 한글 자막이 포함되어 있다. Xbox버전은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발매하였으며, 영어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 제로 붉은 나비[편집] 쌍둥이 자매 마유와 미오는 어렸을 적 놀았던 골짜기를 찾아 온다. 이 골짜기는 댐 건설로 인해 곧 사라질 예정이었다. 어렸을 때 마유는 이 부근에서 발을 헛디뎌, 그때까지도 그 부상으로 다리를 절고 있었다. 옛날 일을 생각하던 미오가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 마유는 한 붉은 나비에 이끌려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유를 쫓아 미오가 들어간 곳은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 미나카미였다. 주인공인 미쿠 혼자서 게임을 진행하는 1편과 달리, 2편에서는 플레이어는 주인공 미오를 조종하지만 쌍둥이 언니인 마유와 함께 스토리를 진행하는 때가 많다. 마유는 미오를 따라다니며, 영과의 전투가 벌어질 때에 영이 마유를 공격할 수 있으므로 미오가 보호해 주어야 한다. 사영기는 기본적으로 1편과 동일하나, 1편의 사영기는 영을 오랫동안 바라보아 영력을 축적하는 데 반해 2편에서는 축적 시간이 거의 없이 셔터 타이밍으로 제령 능력이 결정되어 전투의 페이스가 빨라졌다. 사영기의 특수능력은 업그레이드시 포인트와 염주를 사용하며, 특수능력의 사용시에는 제령시 축적한 영력을 사용하도록 변경되었다. 쌍둥이 언니와 함께 다니는 것과, 영의 등장시에 프리렌더링 동영상을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인해 1편에 비해 무섭지 않다는 평이 많다. 엔딩은 난이도에 따라 두 가지가 있다. 엔딩곡의 제목은 "蝶"(접:나비)이며, 가수 아마노 츠키코가 작사 및 작곡하였다. 일본에서 맥시 싱글 앨범 "蝶"에 수록되어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도 발매된 "천룡" 앨범에도 수록되어 있다. 플레이스테이션2용은 일본에서 2003년 11월 27일에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는 2004년 6월 24일에 발매되었다. 한국판은 SCEK에서 발매하였으며, 일어 음성에 한글 자막을 사용하였다. Xbox용으로 이식되어 "감독판"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는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발매하였다. 국내용 Xbox 버전은 영어 음성과 영어 자막을 사용하였다. Xbox용 버전에는 많은 복장들이 추가되었으며, FPS모드, 새로운 영, 새로운 엔딩이 추가되었다. 다른 이름: 零〜紅い蝶〜(일본, 플레이스테이션2용), Fatal Frame II: Crimson Butterfly (북미, 플레이스테이션2용), Project Zero II: Crimson Butterfly (유럽), Fatal Frame II: Crimson Butterfly Director's Cut (일본&북미, Xbox용) 제로 문신의 목소리[편집] 사진가인 쿠로사와 레이는 귀신이 나온다는 저택의 취재를 의뢰받고 조수 히나사키 미쿠와 함께 저택 안의 사진을 찍는다. 저택의 복도의 사진을 찍던 중, 레이는 죽은 애인인 유우의 모습을 보게 된다. 유우의 모습을 쫓아 저택안을 헤매이는 레이에게 알 수 없는 영상들이 나타난다. 백일몽에서 깨어난 레이는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현상한 필름에는 유우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레이는 잠 들 때마다 똑같은 저택의 꿈을 꾸게 되고, 잠에서 깰 때마다 레이의 몸에는 격렬한 아픔과 함께 문신의 모양이 점점 퍼져 나간다... 제로 시리즈의 3편인 이 작품은 여전히 1,2편에서 사용된 사영기를 사용하고 있다. 사영기의 제령방식은 1편과 2편의 방식을 모두 취하고 있어, 사영기로 영을 바라보는 동안 영력이 사영기에 축적되며, 셔터 타이밍에 따라 제령 능력이 높이 올라가고 콤보 공격이 가능해진다. 주인공은 이번 작에서 새로 등장한 쿠로사와 레이로서, 자신이 운전하던 차의 사고로 애인과 사별한 사진가이다. 게임의 진행에 따라 레이 외에 두 명의 캐릭터로 플레이할 수 있는데, 한 명은 레이의 조수이자 1편의 주인공인 히나사키 미쿠이며, 또 한 명은 유우의 친구인 아마쿠라 케이이다. 케이는 2편의 주인공인 미오,마유 자매의 삼촌이며, 3편에서 조카 마유의 실종을 조사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미쿠는 제령능력이 레이보다 높으며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의 특수기능이 적고, 케이는 영과 전투를 벌이는 제령능력은 매우 낮으며, 영을 피해 숨거나 무거운 물건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엔딩은 두 가지가 있으며, 두 번째 엔딩은 게임을 한 번 클리어 한 후 2회차 플레이시부터 볼 수 있다. 두 번째 엔딩을 보려면 게임내의 특수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며, 난이도 선택과는 관련없이 볼 수 있다. 엔딩곡의 제목은 "聲"(목소리)이며, 가수 아마노 츠키코가 작사 및 작곡하였다. 엔딩곡은 맥시 싱글 "聲"에 수록되었으며, 게임 발매 하루 전인 2005년 7월 27일에 발매되었다. 2005년 7월 28일에 일본에서 플레이스테이션2용으로 발매되었다. 국내에의 발매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편과는 달리 Xbox용 이식 계획도 없는 것으로 잡지 인터뷰에 나타나 있다. 북미지역에는 2005년내에 발매될 예정이다. 일본판의 제목은 零〜刺青ノ聲〜이며, 제로 문신의 목소리 는 이를 번역한 것이다. 그외에도 닌텐도 Wii로 발매된 '월식의 가면' 과 붉은 나비 리메이트 버전인 '진홍의 나비가' 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로_(비디오_게임_시리즈)&oldid=18579416" 분류: 비디오 게임 시리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LietuviųNederlands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4월 9일 (일) 02: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송훈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훈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송훈석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50년 10월 8일(1950-10-08) (68세)대한민국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본관 여산(礪山)학력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학사직업 정치인 군복무 육군 대위 전역의원 선수 3의원 대수 15·16·18정당 바른미래당지역구 前 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 송훈석(宋勳錫, 1950년 10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정치인이다. 제15·16·18대 국회의원이다. 목차 1 학력 2 경력 3 의정 활동 4 논란 4.1 철새 관련 논란 5 역대 선거 결과 6 참고 자료 7 외부 링크 학력[편집] 오호초등학교 졸업 동광중학교 졸업 경동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학사 경력[편집]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육군 대위 예편(법무관) 서울지검 북부지청 검사 춘천지검 속초지청장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부장검사 변호사 개업 운봉장회회 이사장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 의정 활동[편집] 15, 16, 18대 국회의원(강원 속초 고성 양양군) 2002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18대 전반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 18대 후반기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 위원 논란[편집] 철새 관련 논란[편집] 처음 당선 때는 신한국당(한나라당) 소속이었으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정계개편 때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역풍으로 인해 3위로 낙선했고 이후 한동안 정계를 떠나있다가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는 민주당을 탈당해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으나, 1998년 당시의 탈당 전력이 문제가 되어 입당이 거부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3선에 성공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입당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의원중 한명으로 송훈석이 지목됐으나, 정작 송훈석은 외려 이명박 정부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결국 2011년 4월 2일 민주당에 입당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정문헌 전 의원에 밀려 낙선했으며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로도 계속해서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가 2015년 12월 30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5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인제군) 15대 신한국당 34.1% 29,544표 1위 제16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인제군) 16대 새천년민주당 42.2% 35,576표 1위 제17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 17대 새천년민주당 21.57% 14,087표 3위 낙선 제18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 18대 무소속 41.0% 24,239표 1위 제19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 19대 민주통합당 36.0% 22,964표 2위 낙선 참고 자료[편집] 송훈석 - 대한민국헌정회 외부 링크[편집] 전 임 (속초·고성)정재철(명주·양양)최욱철(춘천군·양구·인제)이민섭 제15대 국회의원(속초시·양양군·고성군·인제군)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신한국당 → 한나라당 →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후 임 송훈석 전 임 송훈석 제16대 국회의원(속초시·양양군·고성군·인제군)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새천년민주당 후 임 정문헌(속초·양양·고성)박세환(철원·화천·양구·인제) 전 임 정문헌 제18대 국회의원(속초시·양양군·고성군)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무소속 → 민주당 → 무소속 → 민주통합당 → 무소속 → 민주통합당 후 임 정문헌 vdeh대한민국 제18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명단후반기위원장정병국 → 전재희(새)새누리당 허원제(간사) 강승규 김성동 김을동 김장수 심재철 안경률 안형환 유정현 이경재 이병석 이윤성 이철우 정수성 조윤선 조진형 진수희 한선교 홍사덕 민주통합당 김재윤(간사) 김부겸 장병완 전병헌 전혜숙 정동영 정장선 천정배 최종원 비교섭단체 조순형(선진통일당) 이용경(창조한국당) 김창수(무소속) 진성호(무소속) 전반기위원장고흥길(한)한나라당 나경원(간사) 강승규 김금래 김장수 김효재 나성린 성윤환 안형환 이경재 이은재 이정현 이혜훈 정병국 주호영 진성호 최구식 한선교 허원제 홍사덕 민주당 전병헌(간사) 김동철 김부겸 변재일 서갑원 장세환 조영택 천정배 최문순 비교섭단체 김을동(친박연대) 김창수(자유선진당) 이용경(창조한국당) 송훈석(무소속)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송훈석&oldid=24179456" 분류: 대한민국의 제15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6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8대 국회의원1950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변호사대한민국의 검사대한민국 육군 대위고려대학교 동문동광중학교 (강원) 동문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당원새한국당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 당원새정치국민회의신한국당 당원20세기 대한민국 사람21세기 대한민국 사람한나라당의 정치인새천년민주당 당원열린우리당의 정치인민주당 (대한민국, 2007년) 당원대통합민주신당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의 정치인옛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국민의당의 정치인바른미래당의 정치인오호초등학교 동문경동고등학교 동문고성군 (남) 출신여산 송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15: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송훈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훈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송훈석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50년 10월 8일(1950-10-08) (68세)대한민국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본관 여산(礪山)학력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학사직업 정치인 군복무 육군 대위 전역의원 선수 3의원 대수 15·16·18정당 바른미래당지역구 前 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 송훈석(宋勳錫, 1950년 10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정치인이다. 제15·16·18대 국회의원이다. 목차 1 학력 2 경력 3 의정 활동 4 논란 4.1 철새 관련 논란 5 역대 선거 결과 6 참고 자료 7 외부 링크 학력[편집] 오호초등학교 졸업 동광중학교 졸업 경동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학사 경력[편집]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육군 대위 예편(법무관) 서울지검 북부지청 검사 춘천지검 속초지청장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부장검사 변호사 개업 운봉장회회 이사장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 의정 활동[편집] 15, 16, 18대 국회의원(강원 속초 고성 양양군) 2002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18대 전반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 18대 후반기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 위원 논란[편집] 철새 관련 논란[편집] 처음 당선 때는 신한국당(한나라당) 소속이었으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정계개편 때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역풍으로 인해 3위로 낙선했고 이후 한동안 정계를 떠나있다가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는 민주당을 탈당해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으나, 1998년 당시의 탈당 전력이 문제가 되어 입당이 거부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3선에 성공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입당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의원중 한명으로 송훈석이 지목됐으나, 정작 송훈석은 외려 이명박 정부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결국 2011년 4월 2일 민주당에 입당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정문헌 전 의원에 밀려 낙선했으며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로도 계속해서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가 2015년 12월 30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5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인제군) 15대 신한국당 34.1% 29,544표 1위 제16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인제군) 16대 새천년민주당 42.2% 35,576표 1위 제17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 17대 새천년민주당 21.57% 14,087표 3위 낙선 제18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 18대 무소속 41.0% 24,239표 1위 제19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 19대 민주통합당 36.0% 22,964표 2위 낙선 참고 자료[편집] 송훈석 - 대한민국헌정회 외부 링크[편집] 전 임 (속초·고성)정재철(명주·양양)최욱철(춘천군·양구·인제)이민섭 제15대 국회의원(속초시·양양군·고성군·인제군)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신한국당 → 한나라당 → 무소속 → 새천년민주당 후 임 송훈석 전 임 송훈석 제16대 국회의원(속초시·양양군·고성군·인제군)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새천년민주당 후 임 정문헌(속초·양양·고성)박세환(철원·화천·양구·인제) 전 임 정문헌 제18대 국회의원(속초시·양양군·고성군)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무소속 → 민주당 → 무소속 → 민주통합당 → 무소속 → 민주통합당 후 임 정문헌 vdeh대한민국 제18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명단후반기위원장정병국 → 전재희(새)새누리당 허원제(간사) 강승규 김성동 김을동 김장수 심재철 안경률 안형환 유정현 이경재 이병석 이윤성 이철우 정수성 조윤선 조진형 진수희 한선교 홍사덕 민주통합당 김재윤(간사) 김부겸 장병완 전병헌 전혜숙 정동영 정장선 천정배 최종원 비교섭단체 조순형(선진통일당) 이용경(창조한국당) 김창수(무소속) 진성호(무소속) 전반기위원장고흥길(한)한나라당 나경원(간사) 강승규 김금래 김장수 김효재 나성린 성윤환 안형환 이경재 이은재 이정현 이혜훈 정병국 주호영 진성호 최구식 한선교 허원제 홍사덕 민주당 전병헌(간사) 김동철 김부겸 변재일 서갑원 장세환 조영택 천정배 최문순 비교섭단체 김을동(친박연대) 김창수(자유선진당) 이용경(창조한국당) 송훈석(무소속)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송훈석&oldid=24179456" 분류: 대한민국의 제15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6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8대 국회의원1950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변호사대한민국의 검사대한민국 육군 대위고려대학교 동문동광중학교 (강원) 동문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당원새한국당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 당원새정치국민회의신한국당 당원20세기 대한민국 사람21세기 대한민국 사람한나라당의 정치인새천년민주당 당원열린우리당의 정치인민주당 (대한민국, 2007년) 당원대통합민주신당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의 정치인옛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국민의당의 정치인바른미래당의 정치인오호초등학교 동문경동고등학교 동문고성군 (남) 출신여산 송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15: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고려의 교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려의 교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고려의 교육은 고려 시대 동안 행해진 교육을 의미하며, 연대적으로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이다. 목차 1 시대적 특징 2 고려의 학교 교육 2.1 국자감 3 발전 과정 4 평가 5 각주 6 같이 보기 7 참고 자료 시대적 특징[편집]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이전의 고대 국가를 운영하던 원리에서 탈피하여 중세 국가로서의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원리들을 채택하였으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교’였다. 태조는 특히 훈요 10조를 통하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학습하여 옛일을 교훈으로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치에 임할 것을 후대 왕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런데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통치이념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불교가 바로 수신을 위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보다는 상하 간의 질서를 강조하고 있는 유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적합한 이념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통치이념으로서 유교가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교육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교를 존수하는 군주였던 고려의 역대 왕들은 유교적 국가로서 손색이 없도록 문물제도의 정비에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교육제도의 완비를 국가의 최우선적 과제로 인식하였다. 또한 고려의 교육은 과거 제도와 유리되어서는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광종 때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과거 제도는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재를 관리로 선발하고, 귀족들 간에 경쟁관계를 조성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길러 과거를 통해 선발한다.”라는 교시가 시사하는 것처럼 고려의 교육제도는 과거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특히 당대의 과거제도는 교육제도의 뒷받침 없이는 원활하게 운영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의 역대 왕들은 교육제도 확충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한편 고려는 여러 호족 세력들을 기반으로 성립되었던 관계로 태조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호족 세력들은 특권층으로 자리 잡아 갔고, 고려 왕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부담스런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세력을 어떻게 회유하느냐 하는 것은 왕권 안정의 관건이었던 것이며, 고려의 지방 교육제도 성립은 이러한 호족들을 회유하고 통제하는데 주 목적이 있었다. 고려의 학교 교육[편집] 국자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국자감입니다. 국자감은 고려의 대표적인 관학이자 당시 최고학부였다. 국자감의 설립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여겨진다. 먼저, 유교 군주의 지상과제인 교화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화란 국민들을 유교적 이념에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으로서, 유교사회에서 학교는 교화의 근원으로 여겨짐에 따라 유교 국가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것은 당위였다. 다음으로는 학교가 과거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당시 왕들의 생각 때문이었다. 과거 제도는 유능한 인재선발을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권 안정을 위한 장치로 인식되었는데 만일 학교가 없었다면 학생들은 공부할 기회 자체가 없게 되어 과거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과 제도는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고려의 왕들은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끊임 없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국자감의 특징으로서는 먼저 묘학제(廟學制)가 있다. 국자감에는 공자를 위시한 유교 성현들을 제사 지내기 위한 장소인 문묘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한 학당이 별도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문묘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학당 안에 부설되어 있었던 통일신라의 국학 과는 다른 점이었다. 이런 문묘 종사와 학술기관의 융합 기능은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진다. 국자감은 ‘6학 4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국자감은 6개의 학교와 4등급의 입학자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 그 자세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국자학 :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 태학 :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사문학 : 문무관 7품 이상의 자손 율학ㆍ서학ㆍ산학 : 문무관 8품 이하 아들과 서인[1] 위와 같이 국자감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개 학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학교의 입학자격은 위와 같은 4단계로 위계화 되어 있었다. 국자감의 정원은 300인이었지만, 율학ㆍ서학ㆍ산학의 입학 정원은 일정하지 아니하였다. 수업 연한은 유교 경전을 가르쳤던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9년, 기술교육을 담당했던 율학ㆍ서학ㆍ산학은 6년이었다. 국자감의 교육과정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에서는 《논어》와 《효경》을 선수과목으로 이수하게 하였으며, 경서들을 3개 영역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1개의 경전씩을 학습하도록 하였다. 그 3개 영역은 아래와 같다. 《상서》, 《공양전》[2], 《곡량전》[3](각 경전 별로 2년 6개월에 걸쳐 이수) 《주역》, 《모시》[4], 《주례》, 《의례》(각 경전 별로 2년에 걸쳐 이수) 《예기》, 《좌전》(각 경전 별로 3년에 걸쳐 이수) 또한 국자감에서는 경전의 학습과 함께 정치적 식견을 진술하는 시무책을 익히게 하였으며, 여가가 있을 경우에는 글씨를 연습시키되 하루에 한 장씩 쓰게 하였고, 《국어》, 《설문》, 《자림(字林)》[5], 《삼창(三倉)》[6], 《이아》 등의 서적을 읽게 하였다. 한편, 기능교육분야의 경우엔 율학은 법령, 서학은 팔서, 산학은 산술을 교육하였다. 국자감의 교원은 박사와 조교로, 극 직급은 국자박사가 정7품, 태학박사가 종7품, 사문박사가 정8품, 율학박사가 정8품, 서학 및 산학박사가 종9품으로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조교의 직급은 분명하지 아니하며 다만 기록에 율학조교가 종9품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려의 국자감은 대체로 당의 국자감과 유사하였다. 차이점이었다고 한다면 학생 인원 측면이 있을 것이나, 이는 당시 인구 차이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7]. 다음으로 입학자격을 비교해 보면 특히 두 나라의 사문학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당의 사문학은 서민들에게까지 개방되었던 것에 비해 고려는 문무관 7품이상의 지위를 가진 자의 후손에 한하여 입학을 허락하였다. 이는 고려 국자감이 당의 국자감에 비해서 폐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의 국자감 조직은 예종 4년(1109)에 국학에 7재(齋)가 설치되면서 변화하게 된다. ‘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반(班)과 같은 것으로서, 7재는 7개의 전공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재의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택재 - 《주역》전공 대빙재 - 《상서》전공 경덕재 - 《모시》전공 구인재 - 《주례》전공 복응재 - 《대례》 또는 《예기》전공 양정재 - 《춘추》전공 강예재 - 무술 전공 여택재에서 양정재까지는 유학 전공반이었고, 강예재는 무술 전공반이었다. 즉, 이전의 기술학부가 없어지고, 무예학부가 생긴 것이다. 강예재와 같은 무술 전공 과정을 국가의 최고학부에 설치한 것은 한국 역사 상 고려의 국자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조선의 성균관이 오로지 유학부만이 존재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한편, 예종 14년(1119)에는 장학재단인 양현고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충렬왕 때에 이르러 양현고의 재원이 고갈되자 안향이 관료들로부터 기금을 모금하여 섬학전을 양현고에 설립하였다. 이 섬학전은 양현고의 재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부를 해주고 받는 금리수입으로써 학생의 후생경비를 확보하였다. 고려시대의 국자감의 강화는 왕권 강화와도 맞물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격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여러 왕들은 국정 쇄신을 위한 노력 중에서 국자감의 정비를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발전 과정[편집] 고려의 교육제도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무력적 통치에서가 아니라 문치주의에 입각한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하면서 호족(豪族)과 백성을 회유·통제하려 하면서 시작·본격화되었다. 평가[편집] 고려시대의 교육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고려의 교육제도는 유교정치의 일환으로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확립되었다. 특히 과거제도의 발달로 교육의 기능은 그 준비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였고, 불교의 발달에 따라 사원 역시 민간교육에 큰 기여를 하였다. 둘째, 관·사학으로 나뉜 것으로 볼 때, 고려의 교육제도는 관학이 위주였으며, 특히 국자감이 교육기관의 최고장소였다. 여기는 잡학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입학자격이 계급별로 달랐으므로 귀족위주의 계급교육이었다. 특히 교육재단·교육시설 등이 구비되었고, 예종·충렬왕 때에 각각 커다란 혁신과 발전이 있었다. 셋째, 고려말에 이르러 주자학의 도입으로 본격화된 교육제도는 관리양성소의 기능은 물론, 전문교육기관이라는 학문 연구소로서의 기능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여말의 성균관은 조선의 성균관으로 발전되어 고대교육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각주[편집] ↑ 원래의 입학 자격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율ㆍ서ㆍ산학의 입학 자격인 8품 ‘이상’이 ‘이하’로 정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 기록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고려교육제도사 연구》, 신천식 저, 도서출판 형설, 1983. 103~104페이지. ↑ 중국 고전의 삼전 중 하나로, 노(魯)나라의 공양고가 공자의 《춘추》를 해석한 주해서. 모두 11권이다. ↑ 유교의 경전인 《춘추》의 주석서로, 전국 시대 자하의 제자 곡량적이 저술하였다. ↑ 《시경》에 대한 주석서로, 한나라 때의 모형과 모장에 의하여 전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현존하는 《시경》의 내용은 이 책에 바탕을 두고 있다. ↑ 한자를 모아서 부수와 획수에 따라 배열하고 글자 하나하나의 뜻과 음을 풀이한 책. ↑ 중국 한(漢) 나라 때에 편찬되었던 사전으로, 창힐편(蒼頡篇)ㆍ원력편(爰歷篇)ㆍ박학편(博學篇)의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 당의 국자감 정원은 국자학 300인, 태학 500인, 사문학 1,300인이었다. 같이 보기[편집] 한국의 교육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고려시대의 교육〔서설〕"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려의_교육&oldid=24182817" 분류: 고려한국의 교육사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2: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고려의 교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려의 교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고려의 교육은 고려 시대 동안 행해진 교육을 의미하며, 연대적으로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이다. 목차 1 시대적 특징 2 고려의 학교 교육 2.1 국자감 3 발전 과정 4 평가 5 각주 6 같이 보기 7 참고 자료 시대적 특징[편집]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이전의 고대 국가를 운영하던 원리에서 탈피하여 중세 국가로서의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원리들을 채택하였으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교’였다. 태조는 특히 훈요 10조를 통하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학습하여 옛일을 교훈으로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치에 임할 것을 후대 왕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런데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통치이념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불교가 바로 수신을 위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보다는 상하 간의 질서를 강조하고 있는 유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적합한 이념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통치이념으로서 유교가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교육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교를 존수하는 군주였던 고려의 역대 왕들은 유교적 국가로서 손색이 없도록 문물제도의 정비에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교육제도의 완비를 국가의 최우선적 과제로 인식하였다. 또한 고려의 교육은 과거 제도와 유리되어서는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광종 때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과거 제도는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재를 관리로 선발하고, 귀족들 간에 경쟁관계를 조성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길러 과거를 통해 선발한다.”라는 교시가 시사하는 것처럼 고려의 교육제도는 과거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특히 당대의 과거제도는 교육제도의 뒷받침 없이는 원활하게 운영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의 역대 왕들은 교육제도 확충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한편 고려는 여러 호족 세력들을 기반으로 성립되었던 관계로 태조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호족 세력들은 특권층으로 자리 잡아 갔고, 고려 왕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부담스런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세력을 어떻게 회유하느냐 하는 것은 왕권 안정의 관건이었던 것이며, 고려의 지방 교육제도 성립은 이러한 호족들을 회유하고 통제하는데 주 목적이 있었다. 고려의 학교 교육[편집] 국자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국자감입니다. 국자감은 고려의 대표적인 관학이자 당시 최고학부였다. 국자감의 설립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여겨진다. 먼저, 유교 군주의 지상과제인 교화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화란 국민들을 유교적 이념에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으로서, 유교사회에서 학교는 교화의 근원으로 여겨짐에 따라 유교 국가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것은 당위였다. 다음으로는 학교가 과거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당시 왕들의 생각 때문이었다. 과거 제도는 유능한 인재선발을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권 안정을 위한 장치로 인식되었는데 만일 학교가 없었다면 학생들은 공부할 기회 자체가 없게 되어 과거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과 제도는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고려의 왕들은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끊임 없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국자감의 특징으로서는 먼저 묘학제(廟學制)가 있다. 국자감에는 공자를 위시한 유교 성현들을 제사 지내기 위한 장소인 문묘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한 학당이 별도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문묘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학당 안에 부설되어 있었던 통일신라의 국학 과는 다른 점이었다. 이런 문묘 종사와 학술기관의 융합 기능은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진다. 국자감은 ‘6학 4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국자감은 6개의 학교와 4등급의 입학자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 그 자세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국자학 :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 태학 :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사문학 : 문무관 7품 이상의 자손 율학ㆍ서학ㆍ산학 : 문무관 8품 이하 아들과 서인[1] 위와 같이 국자감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개 학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학교의 입학자격은 위와 같은 4단계로 위계화 되어 있었다. 국자감의 정원은 300인이었지만, 율학ㆍ서학ㆍ산학의 입학 정원은 일정하지 아니하였다. 수업 연한은 유교 경전을 가르쳤던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9년, 기술교육을 담당했던 율학ㆍ서학ㆍ산학은 6년이었다. 국자감의 교육과정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에서는 《논어》와 《효경》을 선수과목으로 이수하게 하였으며, 경서들을 3개 영역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1개의 경전씩을 학습하도록 하였다. 그 3개 영역은 아래와 같다. 《상서》, 《공양전》[2], 《곡량전》[3](각 경전 별로 2년 6개월에 걸쳐 이수) 《주역》, 《모시》[4], 《주례》, 《의례》(각 경전 별로 2년에 걸쳐 이수) 《예기》, 《좌전》(각 경전 별로 3년에 걸쳐 이수) 또한 국자감에서는 경전의 학습과 함께 정치적 식견을 진술하는 시무책을 익히게 하였으며, 여가가 있을 경우에는 글씨를 연습시키되 하루에 한 장씩 쓰게 하였고, 《국어》, 《설문》, 《자림(字林)》[5], 《삼창(三倉)》[6], 《이아》 등의 서적을 읽게 하였다. 한편, 기능교육분야의 경우엔 율학은 법령, 서학은 팔서, 산학은 산술을 교육하였다. 국자감의 교원은 박사와 조교로, 극 직급은 국자박사가 정7품, 태학박사가 종7품, 사문박사가 정8품, 율학박사가 정8품, 서학 및 산학박사가 종9품으로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조교의 직급은 분명하지 아니하며 다만 기록에 율학조교가 종9품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려의 국자감은 대체로 당의 국자감과 유사하였다. 차이점이었다고 한다면 학생 인원 측면이 있을 것이나, 이는 당시 인구 차이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7]. 다음으로 입학자격을 비교해 보면 특히 두 나라의 사문학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당의 사문학은 서민들에게까지 개방되었던 것에 비해 고려는 문무관 7품이상의 지위를 가진 자의 후손에 한하여 입학을 허락하였다. 이는 고려 국자감이 당의 국자감에 비해서 폐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의 국자감 조직은 예종 4년(1109)에 국학에 7재(齋)가 설치되면서 변화하게 된다. ‘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반(班)과 같은 것으로서, 7재는 7개의 전공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재의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택재 - 《주역》전공 대빙재 - 《상서》전공 경덕재 - 《모시》전공 구인재 - 《주례》전공 복응재 - 《대례》 또는 《예기》전공 양정재 - 《춘추》전공 강예재 - 무술 전공 여택재에서 양정재까지는 유학 전공반이었고, 강예재는 무술 전공반이었다. 즉, 이전의 기술학부가 없어지고, 무예학부가 생긴 것이다. 강예재와 같은 무술 전공 과정을 국가의 최고학부에 설치한 것은 한국 역사 상 고려의 국자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조선의 성균관이 오로지 유학부만이 존재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한편, 예종 14년(1119)에는 장학재단인 양현고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충렬왕 때에 이르러 양현고의 재원이 고갈되자 안향이 관료들로부터 기금을 모금하여 섬학전을 양현고에 설립하였다. 이 섬학전은 양현고의 재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부를 해주고 받는 금리수입으로써 학생의 후생경비를 확보하였다. 고려시대의 국자감의 강화는 왕권 강화와도 맞물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격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여러 왕들은 국정 쇄신을 위한 노력 중에서 국자감의 정비를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발전 과정[편집] 고려의 교육제도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무력적 통치에서가 아니라 문치주의에 입각한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하면서 호족(豪族)과 백성을 회유·통제하려 하면서 시작·본격화되었다. 평가[편집] 고려시대의 교육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고려의 교육제도는 유교정치의 일환으로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확립되었다. 특히 과거제도의 발달로 교육의 기능은 그 준비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였고, 불교의 발달에 따라 사원 역시 민간교육에 큰 기여를 하였다. 둘째, 관·사학으로 나뉜 것으로 볼 때, 고려의 교육제도는 관학이 위주였으며, 특히 국자감이 교육기관의 최고장소였다. 여기는 잡학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입학자격이 계급별로 달랐으므로 귀족위주의 계급교육이었다. 특히 교육재단·교육시설 등이 구비되었고, 예종·충렬왕 때에 각각 커다란 혁신과 발전이 있었다. 셋째, 고려말에 이르러 주자학의 도입으로 본격화된 교육제도는 관리양성소의 기능은 물론, 전문교육기관이라는 학문 연구소로서의 기능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여말의 성균관은 조선의 성균관으로 발전되어 고대교육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각주[편집] ↑ 원래의 입학 자격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율ㆍ서ㆍ산학의 입학 자격인 8품 ‘이상’이 ‘이하’로 정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 기록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고려교육제도사 연구》, 신천식 저, 도서출판 형설, 1983. 103~104페이지. ↑ 중국 고전의 삼전 중 하나로, 노(魯)나라의 공양고가 공자의 《춘추》를 해석한 주해서. 모두 11권이다. ↑ 유교의 경전인 《춘추》의 주석서로, 전국 시대 자하의 제자 곡량적이 저술하였다. ↑ 《시경》에 대한 주석서로, 한나라 때의 모형과 모장에 의하여 전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현존하는 《시경》의 내용은 이 책에 바탕을 두고 있다. ↑ 한자를 모아서 부수와 획수에 따라 배열하고 글자 하나하나의 뜻과 음을 풀이한 책. ↑ 중국 한(漢) 나라 때에 편찬되었던 사전으로, 창힐편(蒼頡篇)ㆍ원력편(爰歷篇)ㆍ박학편(博學篇)의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 당의 국자감 정원은 국자학 300인, 태학 500인, 사문학 1,300인이었다. 같이 보기[편집] 한국의 교육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고려시대의 교육〔서설〕"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려의_교육&oldid=24182817" 분류: 고려한국의 교육사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2: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우루과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루과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우루과이강 동안공화국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국기 국장 표어 Libertad o Muerte(스페인어: 자유냐 죽음이냐)국가 동방인들이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수도 몬테비데오 남위 34° 53′ 00″ 서경 56° 10′ 00″ / 남위 34.883333° 서경 56.166667°  / -34.883333; -56.166667 몬테비데오 정치공용어 사실상 스페인어정치체제 공화제, 단일국가, 대통령중심제대통령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루시아 토포란스키역사독립 스페인, 브라질로 부터 독립 • 스페인 제국 • 브라질 제국에서 독립 1814년 8월 14일1825년 8월 25일1828년 8월 28일지리면적 176,215km2 (90 위)내수면 비율 1.5%시간대 UYT (UTC-3)DST UYST (UTC-2)인구2015년 어림 3,404,189명 (136위)인구 밀도 19명/km2 (156위)경제GDP(PPP) 2010년 어림값 • 전체 $407.14억 • 일인당 $16,351HDI 0.792 (51위, 2012년 조사)통화 페소 (UYU)기타ISO 3166-1 858, UY, URY도메인 .uy국제 전화 +598 우루과이 동방공화국(우루과이 東方 共和國, 스페인어: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레푸블리카 오리엔탈 델 우루과이[*]), 약칭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 남동부에 있는 공화국이다.주요 도시로는 리베라 등이 있다. 우루과이강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국명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남서쪽에는 라플라타 강의 하류와 맞닿아 있어 강 사이로 아르헨티나와 만나며, 남동쪽 해안에는 대서양이 있다.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수리남 다음으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원래 시스플라티나 주라는 이름으로 브라질의 속주였던 우루과이는 1825~1828년 사이 3년간 브라질 제국을 상대로 저항했고,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받아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었다. 이로 인하여 우루과이는 독립과 동시에 아르헨티나와 영원한 우방국이 되었다. 우루과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다. 우루과이 경제는 주로 농업(GDP의 10%이며, 주요 수출품)과 정부 부문 기반을 두고 있다. 국제 투명성 기구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칠레와 더불어)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이며, 정치적/노동 조건도 이 대륙에서 가장 자유롭다. 인구의 94.6%가 유럽계이다. 우루과이 전체 인구는 경상남도와 비슷하다. 목차 1 자연 환경 1.1 지리 1.2 기후 2 행정 구역 3 역사 3.1 콜럼버스 이전 시대와 식민 시대 3.2 독립 투쟁 4 우루과이 내전 4.1 삼국동맹전쟁 4.2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발전 4.3 20세기 4.4 최근 5 인구 6 사람과 언어 7 스포츠 8 정치 9 경제 10 군사 11 외교 11.1 대한관계 12 관련 사진/그림 13 각주 14 외부 링크 자연 환경[편집] 지리[편집] 이 나라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는 나라이다. 국토는 팜파스 지대의 연장으로 대부분의 면적이 초원이며, 높은 산이 없고 숲이 거의 없는 편이다.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작은 독립국이다. 우루과이의 지리적 특징 때문에 낮은 평원과 언덕이 이어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바닷가에는 비옥한 평야지대가 분포한다. 강을 비롯해 지류가 발달하여 전 국토에 수륙이 발달되어 있고 분지와 삼각지도 많은 편이다. 라플라타 강, 우루과이 강, 네그로 강 등이 있다. 여러 석호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발달하였는데 라 플라타 강이 남서쪽에 있고 우루과이 강이 서쪽 국경을 이룬다. 우루과이의 대척점 근처에는 한반도가 있으며 몬테비데오와 여수가 서로 대척점이다. 기후[편집] 우루과이의 기후는 온화한 편이여서 극도로 덥거나 극도로 추운 날이 거의 없는 편이다.(온대기후) 가장 추운 달은 6월로 1월이 가장 따뜻하다. 강수량은 연중 내내 고루 내리는 편이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 (1913, 1918, 1963, 1989, 1992, 2007년에만 눈이 왔다.) 행정 구역[편집] 우루과이 행정 구역도 우루과이는 19개의 주(departamento)로 이루어져 있다. 주 면적 (square kilometres) 인구[1] 주도 아르티가스 11,928 79,317 아르티가스 카넬로네스 4,536 509,095 카넬로네스 세로라르고 13,648 89,383 멜로 콜로니아 6,106 120,855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   두라스노 11,643 60,926 두라스노 플로레스 5,144 25,609 트리니다드 플로리다 10,417 69,968 플로리다 라바예하 10,016 61,883 미나스 말도나도 4,793 147,391 말도나도 몬테비데오 530 1,342,474 몬테비데오 파이산두 13,922 115,623 파이산두 리오네그로 9,282 55,657 프라이벤토스 리베라 9,370 109,267 리베라 로차 10,551 70,614 로차 살토 14,163 126,745 살토 산호세 4,992 107,644 산호세데마요 소리아노 9,008 87,073 메르세데스 타콰렘보 15,438 94,613 타콰렘보 트레인타이트레스   9,676 49,769 트레인타이트레스 역사[편집] 콜럼버스 이전 시대와 식민 시대[편집] 우루과이의 원주민 그림. 헨드릭 오트센 저널. 1603년. 유럽 식민화 이전 우루과이에 기록상 남아있는 거주민은 차루아족으로, 파라과이의 과라니족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작은 부족이었다. 차망가 등지에 원주민이 남긴 고대 암각화가 있다. 1516년 현 우루과이 땅에 에스파냐인들이 들어왔다. 원주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게다가 이 곳에는 금이나 은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와 17세기에 이곳에 식민 정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1603년 에스파냐는 우루과이에 가축을 들여왔고 축산업은 이 지역 부의 원천이 되었다. 우루과이 땅에 첫 영구 식민 정착지는 1624년 에스파냐인들이 리오네그로의 소리아노에 세웠다. 1669~71년에 포르투갈인들은 사크라멘토 식민지 요새를 건설했다.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의 브라질 경계 밖 진출을 막으려고 하면서 이 지역의 에스파냐 식민화도 진척됐다. 18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은 포르투갈에 대항할 군사 요새를 세울 목적으로 몬테비데오를 건설했다. 몬테비데오는 곧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경쟁하는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19세기 초 우루과이는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과 계속 전쟁을 치렀으며,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지역의 식민 지배 세력과 싸웠다. 1806년과 1807년에 영국군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점령하려고 했는데, 1807년 초 몬테비데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공격하던 10,000여명의 영국군 병력에 같은 해 중순까지 점령되었다. 독립 투쟁[편집]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 시스플라티나 주의 기. 우루과이로서 독립하기 전에 사용되었으며 아르헨티나(과거 리오 데 라 플라타 합주국)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5월의 태양을 이용하여 우루과이의 국기를 제작한 이후 폐기되었다. 1811년 우루과이의 국민 영웅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에스파냐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라스 피에드라스 전투에서 같은 해 5월 18일에 식민지배자를 격퇴했다. 1814년 그는 연방 연합을 조직했으며, 여기서 그는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공화주의적인 연방 연합의 영향력과 명성이 계속 커지면서 포르투갈은 이에 우려했고, 호세 아르티가스와 그의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1816년 8월 그들은 (아르헨티나와는 암묵적으로 공모하여) 동부 주를 침략했다. 포르투갈군은 수적, 물질적 우위로 1817년 1월 20일 몬테비데오를 점령했으며, 3년간 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해 결국 타콰렘보 전투에서 아르티가스를 패배시켰다. 1821년 리오 데 라 플라타의 동부 주(Provincia Oriental del Río de la Plata, 오늘날의 우루과이)는 브라질에 병합되어 시스플라티나 주가 되었다.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동방의 33인이 리오 데 라 플라타 합주국(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500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우루과이인들이 자신의 영토를 되찾었을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군대가 브라질 본토까지 쳐들어가는 상황에서 1828년 영국이 중재 아래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고 우루과이를 독립시켜, 우루과이강 동안공화국(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이 건국됐다. 우루과이의 첫 헌법은 1830년 7월 18일에 제정됐다. 이후 19세기에 우루과이는 이웃 국가의 개입과 갈등, 정치·경제적 동요, 대규모 유럽인들의 이주를 겪는다. 이 시기에 리오그란데(현재의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가 시스플라티나와 동시에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며 자주국임을 선언했지만 리오그란데는 끝내 독립에 실패해서 현재까지 브라질의 주로 남아 있다. 우루과이 내전[편집] 독립 후 초대 대통령 후루투오소 리베라의 콜로라도당[赤黨]과 2대 대통령 M. 오리베의 블랑코당[白黨]이 날카 롭게 대립해서 내분이 계속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의 대립장소가 되어 정국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이와 같은 내분 속에서 ‘대전쟁'(1843∼1851)이라고 불리는 내전이 일어났다. 영국·프랑스는 콜로라도당을 지지하고 아르헨티나는 블랑코당을 지지하여 몬테비데오 공방전을 벌인 끝에, 결국 블랑코당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 후에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두 대국 사이에 끼여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었다. 1865년 콜로라도당의 군인 독재자 카우딜로 프로레스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양국의 지원을 얻어 집권했고 이후 군인 출신 독재자가 연이어 부패된 권력 정치를 감행하게 된다. 삼국동맹전쟁[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발전[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20세기[편집] 1926년 우루과이는 쥘 리메에게 초대월드컵은 자국에서 개최하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2] 가장 좋은 월드컵 유치 조건을 내걸어 1930년 우루과이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첫 월드컵을 개최했다. 기간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 노인연금, 교육제도의 개혁, 정교분리(政敎分離) 등 오늘날 우루과이가 자랑하는 민주적·사회복지적 모든 제도는 오르도녜스 집권 시기에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정책을 실시하는 데에는 곤란한 점이 있었으므로 1917년 대통령제를 대신하는 집정협의회제의 일부가 실시되었다. 1934년 세계공황을 배경으로 대통령 하브리엘 테라의 쿠데타가 일어나 이 제도는 한때 중단되고 독재정치로 바뀌었으나 1952년 신헌법이 승인되어 9인 집정협의회에 의한 합의정치가 확립되었다. 1958년의 선거에서 93년간 정권의 권좌를 누렸던 콜로라도당은 블랑코당에게 패하였으나 이후 거듭되는 인플레이션 등 경제 혼란이 일어나 그 수습에 실패한 블랑코당 정권은 1966년 11월 선거에서 패하여 콜로라도당이 재차 정권을 장악하였다. 또 9인 집정협의회에 대해서 독재적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1967년 3월 대통령제로 복귀하였다. 대통령 오르도녜스 이후의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으로 남아메리카에서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는 민주적인 여러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남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충실한 사회정책을 실시하였지만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게릴라 제압의 주역을 담당한 군부의 정치 개입이 시작되고 언론통제 등이 행해져 정국은 어두워지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이 국민생활을 위협하고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이 제때에 실시되지 못하고 노동운동이 격화하는 가운데 행해진 대통령선거에 공산당, 사회당, 전국노동자회의(CNT), 그밖의 좌익정치세력 등이 집결하여 확대전선을 결성하고 리베르 세레그니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결과는 콜로라도당의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가 승리하여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확대전선으로 결집된 좌익세력의 힘은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보르다베리 정권은 급속하게 우경화하였으며 도시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 인민해방운동의 박멸을 구실로 군사독재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1972년 4월 국회 승인을 얻어 1952년의 헌법을 정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72년 말까지 게릴라를 진압한 군은 1973년 6월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군사정권을 구축하였으며, 사회당·공산당, 그밖의 반정부 세력의 결사(結社)를 금지하였다. 국제적인 인권옹호조직 국제사면위원회는 보르다베리 정권의 정치범에 대한 고문 등의 인권억압을 고발하였다. 좌익세력을 힘으로 억압하였지만 여전히 정국은 불안이 계속되었다. 1976년 차기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정권 담당자 간의 대립이 격심해지자 대통령 보르다베리는 파면당했고, 같은 해 6월 국가평의회 의장 알베르토 데미첼리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7월에는 군부가 주도하는 국민평의회가 블랑코당의 아파리시오 멘데스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멘데스는 1977년 8월 신헌법을 1980년까지 제정하기로 하고, 1981년 11월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정(民政)으로 이관하는 등의 단계적 민주화 방침을 결정하였다. 1984년 11월 총선거에서 콜로라도당의 후안 마리아 상기네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5년 3월 군정에서 민정으로 정권이 이양되었다. 1989년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가 대통령으로 당선, 정권을 승계하면서 많은 정치범들이 풀려나고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되찾았다. 최근[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인구[편집] 우루과이 연령별 인구 구조 (2015년) 우루과이의 총인구는 2015년 현재 3,431,555명이다. 인구증가율은 0.34%(2010년~2015년)이며 1965년 이후 1% 미만의 낮은 증가율을 지속하고 있다. 인구밀도는 19.6명/km²이며 세계 평균인 56.5명/km²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은 수준이며 전체 인구의 95.3%(2014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중위연령은 34.9세이며 2015년 노인인구비율이 14.13%에 이르러 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3] 사람과 언어[편집]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처럼 전 인구 중 백인이 88%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계통의 주민이 가장 많으며, 독일,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서 온 이민들의 계통도 소수로 있다. 그 외 메스티소가 8%, 흑인이 4%이며 소수의 인디오들도 있다. 언어는 이웃국인 아르헨티나 처럼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며, 브라질에서 건너온 이민자 중에서는 포르투갈어도 소수 사용자가 있다. 영어는 대도시, 호텔을 제외하고는 거의 통용이 되지않는다. 스포츠[편집]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축구 강팀으로, 1924년 하계 올림픽 및 1928년 하계 올림픽에 연속으로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했으며, 1930년 초대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1950년 제 4회 월드컵에서 스페인, 스웨덴, 브라질을 누르고 우승했다. 1954년 FIFA 월드컵, 1970년 FIFA 월드컵,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4위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15차례나 우승하여 대회 역사상 가장 성공한 팀으로 꼽힌다. 그러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한 하향세를 보이며 1974년 FIFA 월드컵 이후 16강 이상 오르지 못하고 있으며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월드컵도 무려 5회(1978년 FIFA 월드컵, 1982년 FIFA 월드컵, 1994년 FIFA 월드컵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에 밀려 탈락), 1998년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콜롬비아, 칠레, 페루, 에콰도르에 밀려 탈락), 2006년 FIFA 월드컵 (오스트레일리아에 밀려 탈락))에 달할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오르고(4위를 기록)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상승세를 타고있다. 우루과이는 1930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로서 FIFA 월드컵의 아버지인 쥘 리메는 몬테비데오의 센테나리오 경기장을 축구의 성지라 칭한 바 있다. 우루과이 정부는 FIFA월드컵 개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30년 FIFA 월드컵을 아르헨티나와 같이 공동개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4] 정치[편집] 이 나라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제이며 부통령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러닝메이트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모든 정치적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다. 임기는 5년 단임제이며 연임은 금지되어 있지만 훌리오 마리아 산기네띠가 1번 연임하여 2번의 임기를 가진 적이 있으며 민주화시대 이후 現 대통령인 타바레 바스케스가 2014년 3월 1일에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前 대통령인 호세 무히카는 2015년 3월 1일에 퇴임하여 정권을 이양받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거하여 2번의 임기를 채운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민주화시대 이후의 좌파 계열 대통령으론 최초의 연임이다. 또한 現 부통령은 라울 센디크이다. 경제[편집] 우루과이는 스위스와 같이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 우루과이는 남미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한다. 군사[편집] 인구 1000명당 상비군 병력 수는 7.1 명으로, 우루과이는 모병제를 함에도 불구하고 군인의 비율이 웬만한 징병제 국가보다도 훨씬 높다. 이 나라는 구형 전차를 모두 퇴역시켰고, 대체 무기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를 보유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포병이 없다. 외교[편집] 아르헨티나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브라질을 상대로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을 벌여 승리로 이끌어서 독립한 국가가 우루과이기 때문에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영원한 우방국이다. 대한관계[편집] 대한민국과는 1964년 10월 7일에 수교했다.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및 국제무대에서 전통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오고 있다. 2008년 9월, 우루과이의 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가 한국을 방문했다. 양국간 문화[5], 어업, 무역, 경제과학기술, 사증면제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한국은 몬테비데오에 상주 대사관을 두고 있고, 우루과이는 2002년 11월 30일, 우루과이의 경제위기로 주한 대사관을 잠정폐쇄한 바 있으나 2006년 2월에 다시 열었다. 2007년 양국간 교역규모가 1억 1200만 미국달러이고 50여척의 한국 어선이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항을 전진기지로 해 남대서양에서 조업하고 있으며, 현재 50여가구 150여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6] 2010년 남아공월드컵 에서는 16강전에서 대한민국과 겨루어 2:1로 승리를 거두었다. 서울 올림픽 때 14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한일 월드컵, 대구 육상 선수권대회 등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대회 때 선수를 보낸 적이 있다. 한국과 우루과이를 직접 연결하는 항공편이 없기 때문에 우루과이에 가려면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경유 국가로는 브라질과 스페인이 있고, 대체로 브라질을 경유한다. 아직까지 우루과이에서는 중등 교육에 한국어 수업을 개설하지 않았다. 관련 사진/그림[편집] 우루과이 지도 우루과이 지형도 말도나도 만 파이산두 각주[편집] ↑ 2007년 기준 ↑ 예를 들면 참가국 대표팀 전원의 여행비용, 숙박비용 및 식비 등 모든 체류비용을 우루과이 정부에서 지급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등 ↑ UN 경제사회국 인구분과 UN 세계 인구 추계 2015년판 ↑ "100주년 월드컵을 남미에서", 연합뉴스 2009-11-19 08:21 ↑ 대한민국 정부와 우루과이 정부간의 문화협정(Cultural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Government of the Oriental Republic of Uruguay) 1971년 5월 14일 서명, 1974년 9월 13일 발효 (대한민국의 조약 513호) http://www.impo.com.uy/bases/decretos-ley-internacional/14228-1974 (스페인어 버전) ↑ “공관장 인사”. 《주 우루과이 대사관》. 2011년 11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1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우루과이 우루과이 정부포털 우루과이 대통령 홈페이지 우루과이 의회 공식 홈페이지 우루과이 한인회 주우루과이 대한민국 대사관 vdeh 우루과이의 주 두라스노주 라바예하주 로차주 리베라주 리오네그로주 말도나도주 몬테비데오주 산호세주 살토주 세로라르고주 소리아노주 아르티가스주 카넬로네스주 콜로니아주 타콰렘보주 트레인타이트레스주 파이산두주 플로레스주 플로리다주 vdeh남아메리카의 나라독립국 가이아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수리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나마¹ 파라과이 페루 속령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포클랜드 제도² 프랑스령 기아나 아루바 퀴라소 ¹ 일부가 북아메리카에도 속한다. ² 영토 분쟁 지역. vdeh미주기구(OAS)회원국 가이아나 과테말라 그레나다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연방 멕시코 미국 바베이도스 바하마 베네수엘라 벨리즈 볼리비아 브라질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세인트키츠 네비스 수리남 아르헨티나 아이티 앤티가 바부다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자메이카 칠레 캐나다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트리니다드 토바고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산하기구 정무서기처 다차원안보서기처 총회 여성위원회 인권위원회 인권재판소 범미주연합건물 정치 헌장 상호원조조약 보고타 선언 산호세 협약 범미주회담 미주정상회담 vdeh 남미 국가 연합 (UNASUR) 가이아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수리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vdeh라틴 연합정회원국스페인어 스페인 멕시코 필리핀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니카라과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파나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페루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포르투갈어 포르투갈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동티모르 마카오 프랑스어 프랑스 모나코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아이티 이탈리아어 이탈리아 산마리노 루마니아어 루마니아 몰도바 카탈루냐어 안도라 준회원국 아르헨티나 바티칸 시국 몰타 기사단 공용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카탈루냐어 vdeh메르코수르회원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자격 정지) 준회원국 볼리비아 칠레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 옵서버 회원국 멕시코 vdeh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 (AIIB)일대일로 · 브릭스 · 아시아 개발은행 ·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 남남 협력회원국역내 회원국 중화인민공화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라오스 브루나이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인도 대한민국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몰디브 터키 몽골 이스라엘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키르기스스탄 이란 아랍에미리트 필리핀 태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아프가니스탄 말레이시아 홍콩 동티모르 키프로스 피지 바누아투 사모아 바레인 역외 회원국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몰타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스웨덴 폴란드 덴마크 헝가리 스페인 아일랜드 루마니아 벨라루스 수단 이집트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 캐나다 예상 회원국역내 회원국 쿠웨이트 아르메니아 레바논 통가 쿡 제도 파푸아뉴기니 역외 회원국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볼리비아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 페루 남아프리카 공화국 코트디부아르 알제리 모로코 리비아 튀니지 가나 케냐 기니 토고 벨기에 그리스 세르비아 참여 희망국 체코 일본 (불확실) 이라크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우크라이나 vdeh중남미·카리브 해 국가 공동체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세인트루시아 멕시코 니카라과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브라질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앤티가 바부다 바하마 바베이도스 벨리즈 도미니카 연방 그레나다 가이아나 자메이카 수리남 아이티 세인트키츠 네비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vdeh프랑코포니 회원국회원국 가나^ 가봉 그리스^ 기니 기니비사우^ 니제르* 도미니카 연방^ 라오스* 레바논*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르완다* 마다가스카르* 말리 모나코 모로코^ 모리셔스^ 모리타니^ 몰도바^ 바누아투* 베냉 베트남^ 벨기에* 부룬디* 부르키나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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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루과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우루과이강 동안공화국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국기 국장 표어 Libertad o Muerte(스페인어: 자유냐 죽음이냐)국가 동방인들이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수도 몬테비데오 남위 34° 53′ 00″ 서경 56° 10′ 00″ / 남위 34.883333° 서경 56.166667°  / -34.883333; -56.166667 몬테비데오 정치공용어 사실상 스페인어정치체제 공화제, 단일국가, 대통령중심제대통령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루시아 토포란스키역사독립 스페인, 브라질로 부터 독립 • 스페인 제국 • 브라질 제국에서 독립 1814년 8월 14일1825년 8월 25일1828년 8월 28일지리면적 176,215km2 (90 위)내수면 비율 1.5%시간대 UYT (UTC-3)DST UYST (UTC-2)인구2015년 어림 3,404,189명 (136위)인구 밀도 19명/km2 (156위)경제GDP(PPP) 2010년 어림값 • 전체 $407.14억 • 일인당 $16,351HDI 0.792 (51위, 2012년 조사)통화 페소 (UYU)기타ISO 3166-1 858, UY, URY도메인 .uy국제 전화 +598 우루과이 동방공화국(우루과이 東方 共和國, 스페인어: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레푸블리카 오리엔탈 델 우루과이[*]), 약칭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 남동부에 있는 공화국이다.주요 도시로는 리베라 등이 있다. 우루과이강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국명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남서쪽에는 라플라타 강의 하류와 맞닿아 있어 강 사이로 아르헨티나와 만나며, 남동쪽 해안에는 대서양이 있다.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수리남 다음으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원래 시스플라티나 주라는 이름으로 브라질의 속주였던 우루과이는 1825~1828년 사이 3년간 브라질 제국을 상대로 저항했고,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받아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었다. 이로 인하여 우루과이는 독립과 동시에 아르헨티나와 영원한 우방국이 되었다. 우루과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다. 우루과이 경제는 주로 농업(GDP의 10%이며, 주요 수출품)과 정부 부문 기반을 두고 있다. 국제 투명성 기구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칠레와 더불어)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이며, 정치적/노동 조건도 이 대륙에서 가장 자유롭다. 인구의 94.6%가 유럽계이다. 우루과이 전체 인구는 경상남도와 비슷하다. 목차 1 자연 환경 1.1 지리 1.2 기후 2 행정 구역 3 역사 3.1 콜럼버스 이전 시대와 식민 시대 3.2 독립 투쟁 4 우루과이 내전 4.1 삼국동맹전쟁 4.2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발전 4.3 20세기 4.4 최근 5 인구 6 사람과 언어 7 스포츠 8 정치 9 경제 10 군사 11 외교 11.1 대한관계 12 관련 사진/그림 13 각주 14 외부 링크 자연 환경[편집] 지리[편집] 이 나라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는 나라이다. 국토는 팜파스 지대의 연장으로 대부분의 면적이 초원이며, 높은 산이 없고 숲이 거의 없는 편이다.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작은 독립국이다. 우루과이의 지리적 특징 때문에 낮은 평원과 언덕이 이어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바닷가에는 비옥한 평야지대가 분포한다. 강을 비롯해 지류가 발달하여 전 국토에 수륙이 발달되어 있고 분지와 삼각지도 많은 편이다. 라플라타 강, 우루과이 강, 네그로 강 등이 있다. 여러 석호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발달하였는데 라 플라타 강이 남서쪽에 있고 우루과이 강이 서쪽 국경을 이룬다. 우루과이의 대척점 근처에는 한반도가 있으며 몬테비데오와 여수가 서로 대척점이다. 기후[편집] 우루과이의 기후는 온화한 편이여서 극도로 덥거나 극도로 추운 날이 거의 없는 편이다.(온대기후) 가장 추운 달은 6월로 1월이 가장 따뜻하다. 강수량은 연중 내내 고루 내리는 편이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 (1913, 1918, 1963, 1989, 1992, 2007년에만 눈이 왔다.) 행정 구역[편집] 우루과이 행정 구역도 우루과이는 19개의 주(departamento)로 이루어져 있다. 주 면적 (square kilometres) 인구[1] 주도 아르티가스 11,928 79,317 아르티가스 카넬로네스 4,536 509,095 카넬로네스 세로라르고 13,648 89,383 멜로 콜로니아 6,106 120,855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   두라스노 11,643 60,926 두라스노 플로레스 5,144 25,609 트리니다드 플로리다 10,417 69,968 플로리다 라바예하 10,016 61,883 미나스 말도나도 4,793 147,391 말도나도 몬테비데오 530 1,342,474 몬테비데오 파이산두 13,922 115,623 파이산두 리오네그로 9,282 55,657 프라이벤토스 리베라 9,370 109,267 리베라 로차 10,551 70,614 로차 살토 14,163 126,745 살토 산호세 4,992 107,644 산호세데마요 소리아노 9,008 87,073 메르세데스 타콰렘보 15,438 94,613 타콰렘보 트레인타이트레스   9,676 49,769 트레인타이트레스 역사[편집] 콜럼버스 이전 시대와 식민 시대[편집] 우루과이의 원주민 그림. 헨드릭 오트센 저널. 1603년. 유럽 식민화 이전 우루과이에 기록상 남아있는 거주민은 차루아족으로, 파라과이의 과라니족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작은 부족이었다. 차망가 등지에 원주민이 남긴 고대 암각화가 있다. 1516년 현 우루과이 땅에 에스파냐인들이 들어왔다. 원주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게다가 이 곳에는 금이나 은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와 17세기에 이곳에 식민 정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1603년 에스파냐는 우루과이에 가축을 들여왔고 축산업은 이 지역 부의 원천이 되었다. 우루과이 땅에 첫 영구 식민 정착지는 1624년 에스파냐인들이 리오네그로의 소리아노에 세웠다. 1669~71년에 포르투갈인들은 사크라멘토 식민지 요새를 건설했다.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의 브라질 경계 밖 진출을 막으려고 하면서 이 지역의 에스파냐 식민화도 진척됐다. 18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은 포르투갈에 대항할 군사 요새를 세울 목적으로 몬테비데오를 건설했다. 몬테비데오는 곧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경쟁하는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19세기 초 우루과이는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과 계속 전쟁을 치렀으며,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지역의 식민 지배 세력과 싸웠다. 1806년과 1807년에 영국군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점령하려고 했는데, 1807년 초 몬테비데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공격하던 10,000여명의 영국군 병력에 같은 해 중순까지 점령되었다. 독립 투쟁[편집]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 시스플라티나 주의 기. 우루과이로서 독립하기 전에 사용되었으며 아르헨티나(과거 리오 데 라 플라타 합주국)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5월의 태양을 이용하여 우루과이의 국기를 제작한 이후 폐기되었다. 1811년 우루과이의 국민 영웅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에스파냐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라스 피에드라스 전투에서 같은 해 5월 18일에 식민지배자를 격퇴했다. 1814년 그는 연방 연합을 조직했으며, 여기서 그는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공화주의적인 연방 연합의 영향력과 명성이 계속 커지면서 포르투갈은 이에 우려했고, 호세 아르티가스와 그의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1816년 8월 그들은 (아르헨티나와는 암묵적으로 공모하여) 동부 주를 침략했다. 포르투갈군은 수적, 물질적 우위로 1817년 1월 20일 몬테비데오를 점령했으며, 3년간 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해 결국 타콰렘보 전투에서 아르티가스를 패배시켰다. 1821년 리오 데 라 플라타의 동부 주(Provincia Oriental del Río de la Plata, 오늘날의 우루과이)는 브라질에 병합되어 시스플라티나 주가 되었다.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동방의 33인이 리오 데 라 플라타 합주국(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500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우루과이인들이 자신의 영토를 되찾었을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군대가 브라질 본토까지 쳐들어가는 상황에서 1828년 영국이 중재 아래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고 우루과이를 독립시켜, 우루과이강 동안공화국(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이 건국됐다. 우루과이의 첫 헌법은 1830년 7월 18일에 제정됐다. 이후 19세기에 우루과이는 이웃 국가의 개입과 갈등, 정치·경제적 동요, 대규모 유럽인들의 이주를 겪는다. 이 시기에 리오그란데(현재의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가 시스플라티나와 동시에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며 자주국임을 선언했지만 리오그란데는 끝내 독립에 실패해서 현재까지 브라질의 주로 남아 있다. 우루과이 내전[편집] 독립 후 초대 대통령 후루투오소 리베라의 콜로라도당[赤黨]과 2대 대통령 M. 오리베의 블랑코당[白黨]이 날카 롭게 대립해서 내분이 계속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의 대립장소가 되어 정국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이와 같은 내분 속에서 ‘대전쟁'(1843∼1851)이라고 불리는 내전이 일어났다. 영국·프랑스는 콜로라도당을 지지하고 아르헨티나는 블랑코당을 지지하여 몬테비데오 공방전을 벌인 끝에, 결국 블랑코당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 후에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두 대국 사이에 끼여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었다. 1865년 콜로라도당의 군인 독재자 카우딜로 프로레스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양국의 지원을 얻어 집권했고 이후 군인 출신 독재자가 연이어 부패된 권력 정치를 감행하게 된다. 삼국동맹전쟁[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발전[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20세기[편집] 1926년 우루과이는 쥘 리메에게 초대월드컵은 자국에서 개최하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2] 가장 좋은 월드컵 유치 조건을 내걸어 1930년 우루과이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첫 월드컵을 개최했다. 기간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 노인연금, 교육제도의 개혁, 정교분리(政敎分離) 등 오늘날 우루과이가 자랑하는 민주적·사회복지적 모든 제도는 오르도녜스 집권 시기에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정책을 실시하는 데에는 곤란한 점이 있었으므로 1917년 대통령제를 대신하는 집정협의회제의 일부가 실시되었다. 1934년 세계공황을 배경으로 대통령 하브리엘 테라의 쿠데타가 일어나 이 제도는 한때 중단되고 독재정치로 바뀌었으나 1952년 신헌법이 승인되어 9인 집정협의회에 의한 합의정치가 확립되었다. 1958년의 선거에서 93년간 정권의 권좌를 누렸던 콜로라도당은 블랑코당에게 패하였으나 이후 거듭되는 인플레이션 등 경제 혼란이 일어나 그 수습에 실패한 블랑코당 정권은 1966년 11월 선거에서 패하여 콜로라도당이 재차 정권을 장악하였다. 또 9인 집정협의회에 대해서 독재적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1967년 3월 대통령제로 복귀하였다. 대통령 오르도녜스 이후의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으로 남아메리카에서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는 민주적인 여러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남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충실한 사회정책을 실시하였지만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게릴라 제압의 주역을 담당한 군부의 정치 개입이 시작되고 언론통제 등이 행해져 정국은 어두워지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이 국민생활을 위협하고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이 제때에 실시되지 못하고 노동운동이 격화하는 가운데 행해진 대통령선거에 공산당, 사회당, 전국노동자회의(CNT), 그밖의 좌익정치세력 등이 집결하여 확대전선을 결성하고 리베르 세레그니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결과는 콜로라도당의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가 승리하여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확대전선으로 결집된 좌익세력의 힘은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보르다베리 정권은 급속하게 우경화하였으며 도시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 인민해방운동의 박멸을 구실로 군사독재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1972년 4월 국회 승인을 얻어 1952년의 헌법을 정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72년 말까지 게릴라를 진압한 군은 1973년 6월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군사정권을 구축하였으며, 사회당·공산당, 그밖의 반정부 세력의 결사(結社)를 금지하였다. 국제적인 인권옹호조직 국제사면위원회는 보르다베리 정권의 정치범에 대한 고문 등의 인권억압을 고발하였다. 좌익세력을 힘으로 억압하였지만 여전히 정국은 불안이 계속되었다. 1976년 차기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정권 담당자 간의 대립이 격심해지자 대통령 보르다베리는 파면당했고, 같은 해 6월 국가평의회 의장 알베르토 데미첼리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7월에는 군부가 주도하는 국민평의회가 블랑코당의 아파리시오 멘데스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멘데스는 1977년 8월 신헌법을 1980년까지 제정하기로 하고, 1981년 11월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정(民政)으로 이관하는 등의 단계적 민주화 방침을 결정하였다. 1984년 11월 총선거에서 콜로라도당의 후안 마리아 상기네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5년 3월 군정에서 민정으로 정권이 이양되었다. 1989년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가 대통령으로 당선, 정권을 승계하면서 많은 정치범들이 풀려나고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되찾았다. 최근[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인구[편집] 우루과이 연령별 인구 구조 (2015년) 우루과이의 총인구는 2015년 현재 3,431,555명이다. 인구증가율은 0.34%(2010년~2015년)이며 1965년 이후 1% 미만의 낮은 증가율을 지속하고 있다. 인구밀도는 19.6명/km²이며 세계 평균인 56.5명/km²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은 수준이며 전체 인구의 95.3%(2014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중위연령은 34.9세이며 2015년 노인인구비율이 14.13%에 이르러 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3] 사람과 언어[편집]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처럼 전 인구 중 백인이 88%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계통의 주민이 가장 많으며, 독일,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서 온 이민들의 계통도 소수로 있다. 그 외 메스티소가 8%, 흑인이 4%이며 소수의 인디오들도 있다. 언어는 이웃국인 아르헨티나 처럼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며, 브라질에서 건너온 이민자 중에서는 포르투갈어도 소수 사용자가 있다. 영어는 대도시, 호텔을 제외하고는 거의 통용이 되지않는다. 스포츠[편집]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축구 강팀으로, 1924년 하계 올림픽 및 1928년 하계 올림픽에 연속으로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했으며, 1930년 초대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1950년 제 4회 월드컵에서 스페인, 스웨덴, 브라질을 누르고 우승했다. 1954년 FIFA 월드컵, 1970년 FIFA 월드컵,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4위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15차례나 우승하여 대회 역사상 가장 성공한 팀으로 꼽힌다. 그러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한 하향세를 보이며 1974년 FIFA 월드컵 이후 16강 이상 오르지 못하고 있으며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월드컵도 무려 5회(1978년 FIFA 월드컵, 1982년 FIFA 월드컵, 1994년 FIFA 월드컵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에 밀려 탈락), 1998년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콜롬비아, 칠레, 페루, 에콰도르에 밀려 탈락), 2006년 FIFA 월드컵 (오스트레일리아에 밀려 탈락))에 달할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오르고(4위를 기록)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상승세를 타고있다. 우루과이는 1930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로서 FIFA 월드컵의 아버지인 쥘 리메는 몬테비데오의 센테나리오 경기장을 축구의 성지라 칭한 바 있다. 우루과이 정부는 FIFA월드컵 개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30년 FIFA 월드컵을 아르헨티나와 같이 공동개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4] 정치[편집] 이 나라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제이며 부통령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러닝메이트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모든 정치적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다. 임기는 5년 단임제이며 연임은 금지되어 있지만 훌리오 마리아 산기네띠가 1번 연임하여 2번의 임기를 가진 적이 있으며 민주화시대 이후 現 대통령인 타바레 바스케스가 2014년 3월 1일에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前 대통령인 호세 무히카는 2015년 3월 1일에 퇴임하여 정권을 이양받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거하여 2번의 임기를 채운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민주화시대 이후의 좌파 계열 대통령으론 최초의 연임이다. 또한 現 부통령은 라울 센디크이다. 경제[편집] 우루과이는 스위스와 같이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 우루과이는 남미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한다. 군사[편집] 인구 1000명당 상비군 병력 수는 7.1 명으로, 우루과이는 모병제를 함에도 불구하고 군인의 비율이 웬만한 징병제 국가보다도 훨씬 높다. 이 나라는 구형 전차를 모두 퇴역시켰고, 대체 무기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를 보유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포병이 없다. 외교[편집] 아르헨티나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브라질을 상대로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을 벌여 승리로 이끌어서 독립한 국가가 우루과이기 때문에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영원한 우방국이다. 대한관계[편집] 대한민국과는 1964년 10월 7일에 수교했다.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및 국제무대에서 전통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오고 있다. 2008년 9월, 우루과이의 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가 한국을 방문했다. 양국간 문화[5], 어업, 무역, 경제과학기술, 사증면제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한국은 몬테비데오에 상주 대사관을 두고 있고, 우루과이는 2002년 11월 30일, 우루과이의 경제위기로 주한 대사관을 잠정폐쇄한 바 있으나 2006년 2월에 다시 열었다. 2007년 양국간 교역규모가 1억 1200만 미국달러이고 50여척의 한국 어선이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항을 전진기지로 해 남대서양에서 조업하고 있으며, 현재 50여가구 150여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6] 2010년 남아공월드컵 에서는 16강전에서 대한민국과 겨루어 2:1로 승리를 거두었다. 서울 올림픽 때 14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한일 월드컵, 대구 육상 선수권대회 등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대회 때 선수를 보낸 적이 있다. 한국과 우루과이를 직접 연결하는 항공편이 없기 때문에 우루과이에 가려면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경유 국가로는 브라질과 스페인이 있고, 대체로 브라질을 경유한다. 아직까지 우루과이에서는 중등 교육에 한국어 수업을 개설하지 않았다. 관련 사진/그림[편집] 우루과이 지도 우루과이 지형도 말도나도 만 파이산두 각주[편집] ↑ 2007년 기준 ↑ 예를 들면 참가국 대표팀 전원의 여행비용, 숙박비용 및 식비 등 모든 체류비용을 우루과이 정부에서 지급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등 ↑ UN 경제사회국 인구분과 UN 세계 인구 추계 2015년판 ↑ "100주년 월드컵을 남미에서", 연합뉴스 2009-11-19 08:21 ↑ 대한민국 정부와 우루과이 정부간의 문화협정(Cultural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Government of the Oriental Republic of Uruguay) 1971년 5월 14일 서명, 1974년 9월 13일 발효 (대한민국의 조약 513호) http://www.impo.com.uy/bases/decretos-ley-internacional/14228-1974 (스페인어 버전) ↑ “공관장 인사”. 《주 우루과이 대사관》. 2011년 11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1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우루과이 우루과이 정부포털 우루과이 대통령 홈페이지 우루과이 의회 공식 홈페이지 우루과이 한인회 주우루과이 대한민국 대사관 vdeh 우루과이의 주 두라스노주 라바예하주 로차주 리베라주 리오네그로주 말도나도주 몬테비데오주 산호세주 살토주 세로라르고주 소리아노주 아르티가스주 카넬로네스주 콜로니아주 타콰렘보주 트레인타이트레스주 파이산두주 플로레스주 플로리다주 vdeh남아메리카의 나라독립국 가이아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수리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나마¹ 파라과이 페루 속령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포클랜드 제도² 프랑스령 기아나 아루바 퀴라소 ¹ 일부가 북아메리카에도 속한다. ² 영토 분쟁 지역. vdeh미주기구(OAS)회원국 가이아나 과테말라 그레나다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연방 멕시코 미국 바베이도스 바하마 베네수엘라 벨리즈 볼리비아 브라질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세인트키츠 네비스 수리남 아르헨티나 아이티 앤티가 바부다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자메이카 칠레 캐나다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트리니다드 토바고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산하기구 정무서기처 다차원안보서기처 총회 여성위원회 인권위원회 인권재판소 범미주연합건물 정치 헌장 상호원조조약 보고타 선언 산호세 협약 범미주회담 미주정상회담 vdeh 남미 국가 연합 (UNASUR) 가이아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수리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vdeh라틴 연합정회원국스페인어 스페인 멕시코 필리핀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니카라과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파나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페루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포르투갈어 포르투갈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동티모르 마카오 프랑스어 프랑스 모나코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아이티 이탈리아어 이탈리아 산마리노 루마니아어 루마니아 몰도바 카탈루냐어 안도라 준회원국 아르헨티나 바티칸 시국 몰타 기사단 공용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카탈루냐어 vdeh메르코수르회원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자격 정지) 준회원국 볼리비아 칠레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 옵서버 회원국 멕시코 vdeh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 (AIIB)일대일로 · 브릭스 · 아시아 개발은행 ·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 남남 협력회원국역내 회원국 중화인민공화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라오스 브루나이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인도 대한민국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몰디브 터키 몽골 이스라엘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키르기스스탄 이란 아랍에미리트 필리핀 태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아프가니스탄 말레이시아 홍콩 동티모르 키프로스 피지 바누아투 사모아 바레인 역외 회원국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몰타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스웨덴 폴란드 덴마크 헝가리 스페인 아일랜드 루마니아 벨라루스 수단 이집트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 캐나다 예상 회원국역내 회원국 쿠웨이트 아르메니아 레바논 통가 쿡 제도 파푸아뉴기니 역외 회원국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볼리비아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 페루 남아프리카 공화국 코트디부아르 알제리 모로코 리비아 튀니지 가나 케냐 기니 토고 벨기에 그리스 세르비아 참여 희망국 체코 일본 (불확실) 이라크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우크라이나 vdeh중남미·카리브 해 국가 공동체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세인트루시아 멕시코 니카라과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브라질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앤티가 바부다 바하마 바베이도스 벨리즈 도미니카 연방 그레나다 가이아나 자메이카 수리남 아이티 세인트키츠 네비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vdeh프랑코포니 회원국회원국 가나^ 가봉 그리스^ 기니 기니비사우^ 니제르* 도미니카 연방^ 라오스* 레바논*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르완다* 마다가스카르* 말리 모나코 모로코^ 모리셔스^ 모리타니^ 몰도바^ 바누아투* 베냉 베트남^ 벨기에* 부룬디* 부르키나파소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상투메 프린시페^ 세네갈 세이셸* 세인트루시아^ 스위스* 아르메니아^ 아이티* 안도라* 알바니아^ 이집트^ 적도 기니*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지부티* 차드* 카메룬* 카보베르데^ 카타르^ 캄보디아^ 캐나다* 코모로* 코트디부아르 콩고 공화국 콩고 민주 공화국 키프로스^ 토고 튀니지^ 프랑스 참관국 대한민국^ 도미니카 공화국^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멕시코^ 모잠비크^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아랍에미리트^ 아르헨티나^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우루과이^ 우크라이나^ 조지아^ 체코^ 코소보^ 코스타리카^ 크로아티아^ 태국^ 폴란드^ 헝가리^ * 프랑스어 이외에 공용어가 존재하는 나라^ 프랑스어가 공용어가 아닌 나라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29569873 LCCN: n50000647 ISNI: 0000 0001 2238 4648 GND: 4062186-8 SUDOC: 026404834 BNF: cb118658308 (데이터) HDS: 3400 NDL: 00574054 NKC: ge13121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우루과이&oldid=24078288" 분류: 우루과이유엔 회원국스페인어권미주 기구 회원국숨은 분류: 스페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뉴스 인쇄/내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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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루과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우루과이강 동안공화국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국기 국장 표어 Libertad o Muerte(스페인어: 자유냐 죽음이냐)국가 동방인들이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수도 몬테비데오 남위 34° 53′ 00″ 서경 56° 10′ 00″ / 남위 34.883333° 서경 56.166667°  / -34.883333; -56.166667 몬테비데오 정치공용어 사실상 스페인어정치체제 공화제, 단일국가, 대통령중심제대통령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루시아 토포란스키역사독립 스페인, 브라질로 부터 독립 • 스페인 제국 • 브라질 제국에서 독립 1814년 8월 14일1825년 8월 25일1828년 8월 28일지리면적 176,215km2 (90 위)내수면 비율 1.5%시간대 UYT (UTC-3)DST UYST (UTC-2)인구2015년 어림 3,404,189명 (136위)인구 밀도 19명/km2 (156위)경제GDP(PPP) 2010년 어림값 • 전체 $407.14억 • 일인당 $16,351HDI 0.792 (51위, 2012년 조사)통화 페소 (UYU)기타ISO 3166-1 858, UY, URY도메인 .uy국제 전화 +598 우루과이 동방공화국(우루과이 東方 共和國, 스페인어: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레푸블리카 오리엔탈 델 우루과이[*]), 약칭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 남동부에 있는 공화국이다.주요 도시로는 리베라 등이 있다. 우루과이강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국명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남서쪽에는 라플라타 강의 하류와 맞닿아 있어 강 사이로 아르헨티나와 만나며, 남동쪽 해안에는 대서양이 있다.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수리남 다음으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원래 시스플라티나 주라는 이름으로 브라질의 속주였던 우루과이는 1825~1828년 사이 3년간 브라질 제국을 상대로 저항했고,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받아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었다. 이로 인하여 우루과이는 독립과 동시에 아르헨티나와 영원한 우방국이 되었다. 우루과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다. 우루과이 경제는 주로 농업(GDP의 10%이며, 주요 수출품)과 정부 부문 기반을 두고 있다. 국제 투명성 기구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칠레와 더불어)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이며, 정치적/노동 조건도 이 대륙에서 가장 자유롭다. 인구의 94.6%가 유럽계이다. 우루과이 전체 인구는 경상남도와 비슷하다. 목차 1 자연 환경 1.1 지리 1.2 기후 2 행정 구역 3 역사 3.1 콜럼버스 이전 시대와 식민 시대 3.2 독립 투쟁 4 우루과이 내전 4.1 삼국동맹전쟁 4.2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발전 4.3 20세기 4.4 최근 5 인구 6 사람과 언어 7 스포츠 8 정치 9 경제 10 군사 11 외교 11.1 대한관계 12 관련 사진/그림 13 각주 14 외부 링크 자연 환경[편집] 지리[편집] 이 나라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는 나라이다. 국토는 팜파스 지대의 연장으로 대부분의 면적이 초원이며, 높은 산이 없고 숲이 거의 없는 편이다.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작은 독립국이다. 우루과이의 지리적 특징 때문에 낮은 평원과 언덕이 이어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바닷가에는 비옥한 평야지대가 분포한다. 강을 비롯해 지류가 발달하여 전 국토에 수륙이 발달되어 있고 분지와 삼각지도 많은 편이다. 라플라타 강, 우루과이 강, 네그로 강 등이 있다. 여러 석호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발달하였는데 라 플라타 강이 남서쪽에 있고 우루과이 강이 서쪽 국경을 이룬다. 우루과이의 대척점 근처에는 한반도가 있으며 몬테비데오와 여수가 서로 대척점이다. 기후[편집] 우루과이의 기후는 온화한 편이여서 극도로 덥거나 극도로 추운 날이 거의 없는 편이다.(온대기후) 가장 추운 달은 6월로 1월이 가장 따뜻하다. 강수량은 연중 내내 고루 내리는 편이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 (1913, 1918, 1963, 1989, 1992, 2007년에만 눈이 왔다.) 행정 구역[편집] 우루과이 행정 구역도 우루과이는 19개의 주(departamento)로 이루어져 있다. 주 면적 (square kilometres) 인구[1] 주도 아르티가스 11,928 79,317 아르티가스 카넬로네스 4,536 509,095 카넬로네스 세로라르고 13,648 89,383 멜로 콜로니아 6,106 120,855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   두라스노 11,643 60,926 두라스노 플로레스 5,144 25,609 트리니다드 플로리다 10,417 69,968 플로리다 라바예하 10,016 61,883 미나스 말도나도 4,793 147,391 말도나도 몬테비데오 530 1,342,474 몬테비데오 파이산두 13,922 115,623 파이산두 리오네그로 9,282 55,657 프라이벤토스 리베라 9,370 109,267 리베라 로차 10,551 70,614 로차 살토 14,163 126,745 살토 산호세 4,992 107,644 산호세데마요 소리아노 9,008 87,073 메르세데스 타콰렘보 15,438 94,613 타콰렘보 트레인타이트레스   9,676 49,769 트레인타이트레스 역사[편집] 콜럼버스 이전 시대와 식민 시대[편집] 우루과이의 원주민 그림. 헨드릭 오트센 저널. 1603년. 유럽 식민화 이전 우루과이에 기록상 남아있는 거주민은 차루아족으로, 파라과이의 과라니족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작은 부족이었다. 차망가 등지에 원주민이 남긴 고대 암각화가 있다. 1516년 현 우루과이 땅에 에스파냐인들이 들어왔다. 원주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게다가 이 곳에는 금이나 은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와 17세기에 이곳에 식민 정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1603년 에스파냐는 우루과이에 가축을 들여왔고 축산업은 이 지역 부의 원천이 되었다. 우루과이 땅에 첫 영구 식민 정착지는 1624년 에스파냐인들이 리오네그로의 소리아노에 세웠다. 1669~71년에 포르투갈인들은 사크라멘토 식민지 요새를 건설했다.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의 브라질 경계 밖 진출을 막으려고 하면서 이 지역의 에스파냐 식민화도 진척됐다. 18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은 포르투갈에 대항할 군사 요새를 세울 목적으로 몬테비데오를 건설했다. 몬테비데오는 곧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경쟁하는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19세기 초 우루과이는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과 계속 전쟁을 치렀으며,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지역의 식민 지배 세력과 싸웠다. 1806년과 1807년에 영국군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점령하려고 했는데, 1807년 초 몬테비데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공격하던 10,000여명의 영국군 병력에 같은 해 중순까지 점령되었다. 독립 투쟁[편집]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 시스플라티나 주의 기. 우루과이로서 독립하기 전에 사용되었으며 아르헨티나(과거 리오 데 라 플라타 합주국)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5월의 태양을 이용하여 우루과이의 국기를 제작한 이후 폐기되었다. 1811년 우루과이의 국민 영웅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에스파냐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라스 피에드라스 전투에서 같은 해 5월 18일에 식민지배자를 격퇴했다. 1814년 그는 연방 연합을 조직했으며, 여기서 그는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공화주의적인 연방 연합의 영향력과 명성이 계속 커지면서 포르투갈은 이에 우려했고, 호세 아르티가스와 그의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1816년 8월 그들은 (아르헨티나와는 암묵적으로 공모하여) 동부 주를 침략했다. 포르투갈군은 수적, 물질적 우위로 1817년 1월 20일 몬테비데오를 점령했으며, 3년간 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해 결국 타콰렘보 전투에서 아르티가스를 패배시켰다. 1821년 리오 데 라 플라타의 동부 주(Provincia Oriental del Río de la Plata, 오늘날의 우루과이)는 브라질에 병합되어 시스플라티나 주가 되었다.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동방의 33인이 리오 데 라 플라타 합주국(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500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우루과이인들이 자신의 영토를 되찾었을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군대가 브라질 본토까지 쳐들어가는 상황에서 1828년 영국이 중재 아래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고 우루과이를 독립시켜, 우루과이강 동안공화국(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이 건국됐다. 우루과이의 첫 헌법은 1830년 7월 18일에 제정됐다. 이후 19세기에 우루과이는 이웃 국가의 개입과 갈등, 정치·경제적 동요, 대규모 유럽인들의 이주를 겪는다. 이 시기에 리오그란데(현재의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가 시스플라티나와 동시에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며 자주국임을 선언했지만 리오그란데는 끝내 독립에 실패해서 현재까지 브라질의 주로 남아 있다. 우루과이 내전[편집] 독립 후 초대 대통령 후루투오소 리베라의 콜로라도당[赤黨]과 2대 대통령 M. 오리베의 블랑코당[白黨]이 날카 롭게 대립해서 내분이 계속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의 대립장소가 되어 정국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이와 같은 내분 속에서 ‘대전쟁'(1843∼1851)이라고 불리는 내전이 일어났다. 영국·프랑스는 콜로라도당을 지지하고 아르헨티나는 블랑코당을 지지하여 몬테비데오 공방전을 벌인 끝에, 결국 블랑코당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 후에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두 대국 사이에 끼여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었다. 1865년 콜로라도당의 군인 독재자 카우딜로 프로레스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양국의 지원을 얻어 집권했고 이후 군인 출신 독재자가 연이어 부패된 권력 정치를 감행하게 된다. 삼국동맹전쟁[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발전[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20세기[편집] 1926년 우루과이는 쥘 리메에게 초대월드컵은 자국에서 개최하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2] 가장 좋은 월드컵 유치 조건을 내걸어 1930년 우루과이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첫 월드컵을 개최했다. 기간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 노인연금, 교육제도의 개혁, 정교분리(政敎分離) 등 오늘날 우루과이가 자랑하는 민주적·사회복지적 모든 제도는 오르도녜스 집권 시기에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정책을 실시하는 데에는 곤란한 점이 있었으므로 1917년 대통령제를 대신하는 집정협의회제의 일부가 실시되었다. 1934년 세계공황을 배경으로 대통령 하브리엘 테라의 쿠데타가 일어나 이 제도는 한때 중단되고 독재정치로 바뀌었으나 1952년 신헌법이 승인되어 9인 집정협의회에 의한 합의정치가 확립되었다. 1958년의 선거에서 93년간 정권의 권좌를 누렸던 콜로라도당은 블랑코당에게 패하였으나 이후 거듭되는 인플레이션 등 경제 혼란이 일어나 그 수습에 실패한 블랑코당 정권은 1966년 11월 선거에서 패하여 콜로라도당이 재차 정권을 장악하였다. 또 9인 집정협의회에 대해서 독재적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1967년 3월 대통령제로 복귀하였다. 대통령 오르도녜스 이후의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으로 남아메리카에서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는 민주적인 여러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남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충실한 사회정책을 실시하였지만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게릴라 제압의 주역을 담당한 군부의 정치 개입이 시작되고 언론통제 등이 행해져 정국은 어두워지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이 국민생활을 위협하고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이 제때에 실시되지 못하고 노동운동이 격화하는 가운데 행해진 대통령선거에 공산당, 사회당, 전국노동자회의(CNT), 그밖의 좌익정치세력 등이 집결하여 확대전선을 결성하고 리베르 세레그니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결과는 콜로라도당의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가 승리하여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확대전선으로 결집된 좌익세력의 힘은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보르다베리 정권은 급속하게 우경화하였으며 도시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 인민해방운동의 박멸을 구실로 군사독재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1972년 4월 국회 승인을 얻어 1952년의 헌법을 정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72년 말까지 게릴라를 진압한 군은 1973년 6월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군사정권을 구축하였으며, 사회당·공산당, 그밖의 반정부 세력의 결사(結社)를 금지하였다. 국제적인 인권옹호조직 국제사면위원회는 보르다베리 정권의 정치범에 대한 고문 등의 인권억압을 고발하였다. 좌익세력을 힘으로 억압하였지만 여전히 정국은 불안이 계속되었다. 1976년 차기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정권 담당자 간의 대립이 격심해지자 대통령 보르다베리는 파면당했고, 같은 해 6월 국가평의회 의장 알베르토 데미첼리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7월에는 군부가 주도하는 국민평의회가 블랑코당의 아파리시오 멘데스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멘데스는 1977년 8월 신헌법을 1980년까지 제정하기로 하고, 1981년 11월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정(民政)으로 이관하는 등의 단계적 민주화 방침을 결정하였다. 1984년 11월 총선거에서 콜로라도당의 후안 마리아 상기네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5년 3월 군정에서 민정으로 정권이 이양되었다. 1989년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가 대통령으로 당선, 정권을 승계하면서 많은 정치범들이 풀려나고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되찾았다. 최근[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인구[편집] 우루과이 연령별 인구 구조 (2015년) 우루과이의 총인구는 2015년 현재 3,431,555명이다. 인구증가율은 0.34%(2010년~2015년)이며 1965년 이후 1% 미만의 낮은 증가율을 지속하고 있다. 인구밀도는 19.6명/km²이며 세계 평균인 56.5명/km²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은 수준이며 전체 인구의 95.3%(2014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중위연령은 34.9세이며 2015년 노인인구비율이 14.13%에 이르러 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3] 사람과 언어[편집]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처럼 전 인구 중 백인이 88%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계통의 주민이 가장 많으며, 독일,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서 온 이민들의 계통도 소수로 있다. 그 외 메스티소가 8%, 흑인이 4%이며 소수의 인디오들도 있다. 언어는 이웃국인 아르헨티나 처럼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며, 브라질에서 건너온 이민자 중에서는 포르투갈어도 소수 사용자가 있다. 영어는 대도시, 호텔을 제외하고는 거의 통용이 되지않는다. 스포츠[편집]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축구 강팀으로, 1924년 하계 올림픽 및 1928년 하계 올림픽에 연속으로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했으며, 1930년 초대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1950년 제 4회 월드컵에서 스페인, 스웨덴, 브라질을 누르고 우승했다. 1954년 FIFA 월드컵, 1970년 FIFA 월드컵,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4위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15차례나 우승하여 대회 역사상 가장 성공한 팀으로 꼽힌다. 그러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한 하향세를 보이며 1974년 FIFA 월드컵 이후 16강 이상 오르지 못하고 있으며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월드컵도 무려 5회(1978년 FIFA 월드컵, 1982년 FIFA 월드컵, 1994년 FIFA 월드컵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에 밀려 탈락), 1998년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콜롬비아, 칠레, 페루, 에콰도르에 밀려 탈락), 2006년 FIFA 월드컵 (오스트레일리아에 밀려 탈락))에 달할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오르고(4위를 기록)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상승세를 타고있다. 우루과이는 1930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로서 FIFA 월드컵의 아버지인 쥘 리메는 몬테비데오의 센테나리오 경기장을 축구의 성지라 칭한 바 있다. 우루과이 정부는 FIFA월드컵 개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30년 FIFA 월드컵을 아르헨티나와 같이 공동개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4] 정치[편집] 이 나라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제이며 부통령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러닝메이트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모든 정치적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다. 임기는 5년 단임제이며 연임은 금지되어 있지만 훌리오 마리아 산기네띠가 1번 연임하여 2번의 임기를 가진 적이 있으며 민주화시대 이후 現 대통령인 타바레 바스케스가 2014년 3월 1일에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前 대통령인 호세 무히카는 2015년 3월 1일에 퇴임하여 정권을 이양받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거하여 2번의 임기를 채운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민주화시대 이후의 좌파 계열 대통령으론 최초의 연임이다. 또한 現 부통령은 라울 센디크이다. 경제[편집] 우루과이는 스위스와 같이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 우루과이는 남미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한다. 군사[편집] 인구 1000명당 상비군 병력 수는 7.1 명으로, 우루과이는 모병제를 함에도 불구하고 군인의 비율이 웬만한 징병제 국가보다도 훨씬 높다. 이 나라는 구형 전차를 모두 퇴역시켰고, 대체 무기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를 보유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포병이 없다. 외교[편집] 아르헨티나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브라질을 상대로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을 벌여 승리로 이끌어서 독립한 국가가 우루과이기 때문에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영원한 우방국이다. 대한관계[편집] 대한민국과는 1964년 10월 7일에 수교했다.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및 국제무대에서 전통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오고 있다. 2008년 9월, 우루과이의 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가 한국을 방문했다. 양국간 문화[5], 어업, 무역, 경제과학기술, 사증면제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한국은 몬테비데오에 상주 대사관을 두고 있고, 우루과이는 2002년 11월 30일, 우루과이의 경제위기로 주한 대사관을 잠정폐쇄한 바 있으나 2006년 2월에 다시 열었다. 2007년 양국간 교역규모가 1억 1200만 미국달러이고 50여척의 한국 어선이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항을 전진기지로 해 남대서양에서 조업하고 있으며, 현재 50여가구 150여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6] 2010년 남아공월드컵 에서는 16강전에서 대한민국과 겨루어 2:1로 승리를 거두었다. 서울 올림픽 때 14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한일 월드컵, 대구 육상 선수권대회 등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대회 때 선수를 보낸 적이 있다. 한국과 우루과이를 직접 연결하는 항공편이 없기 때문에 우루과이에 가려면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경유 국가로는 브라질과 스페인이 있고, 대체로 브라질을 경유한다. 아직까지 우루과이에서는 중등 교육에 한국어 수업을 개설하지 않았다. 관련 사진/그림[편집] 우루과이 지도 우루과이 지형도 말도나도 만 파이산두 각주[편집] ↑ 2007년 기준 ↑ 예를 들면 참가국 대표팀 전원의 여행비용, 숙박비용 및 식비 등 모든 체류비용을 우루과이 정부에서 지급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등 ↑ UN 경제사회국 인구분과 UN 세계 인구 추계 2015년판 ↑ "100주년 월드컵을 남미에서", 연합뉴스 2009-11-19 08:21 ↑ 대한민국 정부와 우루과이 정부간의 문화협정(Cultural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Government of the Oriental Republic of Uruguay) 1971년 5월 14일 서명, 1974년 9월 13일 발효 (대한민국의 조약 513호) http://www.impo.com.uy/bases/decretos-ley-internacional/14228-1974 (스페인어 버전) ↑ “공관장 인사”. 《주 우루과이 대사관》. 2011년 11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1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우루과이 우루과이 정부포털 우루과이 대통령 홈페이지 우루과이 의회 공식 홈페이지 우루과이 한인회 주우루과이 대한민국 대사관 vdeh 우루과이의 주 두라스노주 라바예하주 로차주 리베라주 리오네그로주 말도나도주 몬테비데오주 산호세주 살토주 세로라르고주 소리아노주 아르티가스주 카넬로네스주 콜로니아주 타콰렘보주 트레인타이트레스주 파이산두주 플로레스주 플로리다주 vdeh남아메리카의 나라독립국 가이아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수리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나마¹ 파라과이 페루 속령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포클랜드 제도² 프랑스령 기아나 아루바 퀴라소 ¹ 일부가 북아메리카에도 속한다. ² 영토 분쟁 지역. vdeh미주기구(OAS)회원국 가이아나 과테말라 그레나다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연방 멕시코 미국 바베이도스 바하마 베네수엘라 벨리즈 볼리비아 브라질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세인트키츠 네비스 수리남 아르헨티나 아이티 앤티가 바부다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자메이카 칠레 캐나다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트리니다드 토바고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산하기구 정무서기처 다차원안보서기처 총회 여성위원회 인권위원회 인권재판소 범미주연합건물 정치 헌장 상호원조조약 보고타 선언 산호세 협약 범미주회담 미주정상회담 vdeh 남미 국가 연합 (UNASUR) 가이아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수리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vdeh라틴 연합정회원국스페인어 스페인 멕시코 필리핀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니카라과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파나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페루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포르투갈어 포르투갈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동티모르 마카오 프랑스어 프랑스 모나코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아이티 이탈리아어 이탈리아 산마리노 루마니아어 루마니아 몰도바 카탈루냐어 안도라 준회원국 아르헨티나 바티칸 시국 몰타 기사단 공용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카탈루냐어 vdeh메르코수르회원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자격 정지) 준회원국 볼리비아 칠레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 옵서버 회원국 멕시코 vdeh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 (AIIB)일대일로 · 브릭스 · 아시아 개발은행 ·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 남남 협력회원국역내 회원국 중화인민공화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라오스 브루나이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인도 대한민국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몰디브 터키 몽골 이스라엘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키르기스스탄 이란 아랍에미리트 필리핀 태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아프가니스탄 말레이시아 홍콩 동티모르 키프로스 피지 바누아투 사모아 바레인 역외 회원국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몰타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스웨덴 폴란드 덴마크 헝가리 스페인 아일랜드 루마니아 벨라루스 수단 이집트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 캐나다 예상 회원국역내 회원국 쿠웨이트 아르메니아 레바논 통가 쿡 제도 파푸아뉴기니 역외 회원국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볼리비아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 페루 남아프리카 공화국 코트디부아르 알제리 모로코 리비아 튀니지 가나 케냐 기니 토고 벨기에 그리스 세르비아 참여 희망국 체코 일본 (불확실) 이라크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우크라이나 vdeh중남미·카리브 해 국가 공동체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세인트루시아 멕시코 니카라과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브라질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앤티가 바부다 바하마 바베이도스 벨리즈 도미니카 연방 그레나다 가이아나 자메이카 수리남 아이티 세인트키츠 네비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vdeh프랑코포니 회원국회원국 가나^ 가봉 그리스^ 기니 기니비사우^ 니제르* 도미니카 연방^ 라오스* 레바논*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르완다* 마다가스카르* 말리 모나코 모로코^ 모리셔스^ 모리타니^ 몰도바^ 바누아투* 베냉 베트남^ 벨기에* 부룬디* 부르키나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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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퀸시 애덤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존 퀸시 애덤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존퀸시애덤스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존 퀸시 애덤스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임기 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4일 부통령 존 C. 컬훈 전임: 제임스 먼로(제5대)후임: 앤드루 잭슨(제7대) 신상정보 출생일 1767년 7월 11일(1767-07-11) 출생지 대영 제국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퀸시 사망일 1848년 2월 23일 (80세) 사망지 미국 워싱턴 D.C. 학력 하버드 대학교 정당 민주공화당 → 국민공화당 배우자 루이사 캐서린 존슨 자녀 루이사 애덤스조지 워싱턴 애덤스존 애덤스 3세찰스 프란시스 애덤스 종교 유니테리언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767년 7월 11일 ~ 1848년 2월 23일, 문화어: 죤 퀸씨 아담즈)는 미국의 6번째 대통령(1825~29)이다. 북서 태평양 지역의 영토인 워싱턴 준주와 플로리다 준주를 매입했다. 먼로 독트린을 만들자고 먼로에게 앞장섰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에게 패한 뒤 20년 간 죽을 때까지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목차 1 초기 생애 1.1 교육 2 정치적 경력 2.1 외교관 시절 2.2 애덤스의 가족 2.3 미국 상원 시절 2.4 또다시 외교관 2.5 국무부 장관 3 1820년 대통령 선거 3.1 1824년 대통령 선거 4 대통령 임기 4.1 민주공화당의 분열 4.2 의회에 의한 거절 4.3 증오의 관세 4.4 1828년 대통령 선거 5 의회로 복귀 5.1 하원 선거 5.2 토론 금지령 5.3 아미스타드호 사건 6 사망 7 일화 8 참고 자료 9 외부 링크 초기 생애[편집]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자녀 중에 둘째이자 맏아들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퀸시에서 태어났다. 1770년대에 부친은 대륙 의회에 참석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가족에게서 떠나있었다. 1778년 의회는 존 애덤스를 프랑스로 보냈다. 교육[편집] 부친이 외교관으로 지내면서 존 퀸시 애덤스는 파리, 암스테르담, 레이던에 있는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4세 때에 러시아 주재 초대 공사 프랜시스 데이나의 비밀서기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갔다. 1783년 부친에 다시 가담하여 부친의 비밀서기를 지냈다. 부친은 영국 주재 공사가 되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 존 퀸시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1787년에 졸업하였다. 애덤스는 3년 동안 법률을 읽고 1790년 변호사 실습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뢰인들이 몇명 밖에 안 되어 정치적 저널리즘으로 전향하였다. 정치적 경력[편집] 외교관 시절[편집] 1794년 조지 워싱턴은 애덤스를 네덜란드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다. 애덤스가 도착한 지 3일 후에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침입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런던에서 특별 지위에 있을 때 런던의 미국 영사가 된 상인의 딸 루이사 캐서린 존슨(1775~1852)을 만났다. 1796년 워싱턴은 그를 포르투갈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으며, 그가 리스본으로 떠나기 전에 부친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에 부친에 의하여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다. 애덤스의 가족[편집]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에 애덤스는 1797년 루이사와 결혼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서 4년 이상을 지냈다. 애덤스 부부는 4명의 자식들을 두었다 - 루이사 캐서린, 조지 워싱턴, 존 3세, 찰스 프랜시스. 루이사 캐서린은 유년기에 사망하였고, 맏아들 조지 워싱턴 애덤스는 아버지의 대통령 임기 말기인 1829년에 사망하였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존 애덤스 3세는 5년 후에 사망하였다. 찰스 프랜시스는 남북 전쟁 중에 영국 주재 대사를 지냈다. 미국 상원 시절[편집]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애덤스는 곧 귀국하여 1802년 매사추세츠 주의 상원에 선출되었다. 1803년 연방당원들은 미국 상원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애덤스를 선택하였다. 연방당원에 불구하고 그는 가끔 민주공화당과 함께 투표를 하였다. 1807년 의회가 〈엠바고 법령〉을 통과시키자 자신의 당을 깨뜨렸다. 뉴잉글랜드의 연방당원들은 영국과 통상을 원하였으나, 전체로서 국가에 이익을 얻는 데 믿었던 엠바고를 지지하였다. 매사추세츠 주의 연방당 지도자들은 애덤스가 자기들을 배신한 느낌이 들었다. 1808년 선거가 열리기 몇달 전에 그들은 다른 이를 그의 상원석을 채우는 데 선출하였다. 애덤스는 즉시 사임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사학의 교수로서 경력을 준비하였다. 또다시 외교관[편집] 1809년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애덤스를 러시아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다. 1814년 중순부터 1815년 초순까지 애덤스는 1812년 미영 전쟁을 끝내는 데 영국과 헨트 조약에 협상한 미국의 위원들 중의 하나로 지냈다. 협상은 미국은 물론 외교관으로서 애덤스를 위한 신임을 얻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그를 영국 주재 대사로 임명하였다. 런던에 있는 동안 애덤스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오대호 지역에서 요새들과 군함들의 이용을 멈추는 데 동의하였고, 두 나라들의 국경 지방을 무방비로 놔두었다. 국무부 장관[편집] 1817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애덤스를 자신의 국무부 장관으로 불러드렸다. 대업스는 영국과 오리건 지방을 공동으로 점령하는 데 합의했다. 그는 조용한 스페인이 노스웨스트 준주에 영토를 주장하는 조약을 협상하였고 플로리다주를 합쳤다. 그러나 국무부 장관으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먼로 독트린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 일이다. 애덤스는 이 정책의 첫 선언을 1823년 7월에 실시했다. 그는 러시아 공사에게 "아메리카 대륙은 더 이상 새로운 유럽의 식민지 설립을 위한 주체가 아니다"고 말하였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는 1815년 나폴레옹 제국이 무너진 후 신성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 전쟁들이 일어난 후에 중앙아메리카과 남아메리카의 나라들이 스페인 통치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1823년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 왕좌를 다시 얻을 때 많은 나라들은 신성 동맹이 스페인에 전 식민지들이 다시 정복당할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영국의 외무 장관 조지 캐닝은 이런 여러 운동에 대항하는것에 미국이 동참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애덤스는 미국은 자신들의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20년 대통령 선거[편집] 1820년, 존 퀸시 애덤스는 민주공화당의 또다른 후보로 나가서 제임스 먼로에게 무려 231:1의 엄청난 대패를 당하고 대통령의 꿈을 접었으나, 4년뒤인 1824년 대통령 선거때 또다시 후보로 나가게 된다. 1824년 대통령 선거[편집]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많은 미국인들은 애덤스가 대통령으로서 먼로를 따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매디슨과 먼로는 둘다 국무부 장관을 지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애덤스는 또한 자신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느꼈으나 투표를 몰려드는 데 약갼의 일을 하였다. 4명의 민주공화당원들 - 존 C. 칼훈, 헨리 클레이, 윌리엄 H. 크로포드와 앤드루 잭슨이 애덤스를 반대하였다. 칼훈은 빠져나가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잭슨은 99개의 선거 투표를 얻었고, 애덤스는 84개, 크로포드는 41개, 클레이는 37개의 투표를 얻었다. 아무도 다수를 가지지 못하자, 미국 하원은 첫 3명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였다. 클레이는 자신의 지지를 애덤스에게 던지자, 애덤스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 임기[편집] 민주공화당의 분열[편집] 하원이 애덤스를 선출하기 전에 잭슨의 부하들은 애덤스가 자신의 지지를 위하여 돌아오는 데 클레이에게 내각 직위를 약속한 것에 고소하였다. 애덤스가 클레이를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할 때 의회에서 잭슨의 강력한 부하들은 두 사람을 "부패 계약"을 만든 것에 고발하였다. 이 일은 민주공화당을 분열시켜 애덤스의 단체 "국민공화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잭슨의 단체는 다음 4년 동안 애덤스와 싸웠다. 의회에 의한 거절[편집] 애덤스는 완공되지 않은 캐피톨의 상원 의회에서 취임 연설을 가졌다. 이 연설과 의회에 첫 전갈에서 그는 국내 향상들의 야망적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고속도로, 운하, 기상 관측소와 국립 대학들의 건설을 포함하였다. 그는 만약 의회가 모든 국민들의 이익을 위한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지 않았다면에 절규하였다. 그러나 의회의 다수는 동의하지 않았다. 정부와 과학의 협력을 위한 애덤스의 희망들은 그의 일생 이후까지 현실되지 않았다. 증오의 관세[편집] 1828년 수많은 뉴잉글랜드의 주들에서 제조업이 농업을 가장 최고의 활동으로 대신하였다. 이 주들은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찬성하였다. 그러나 높은 관세는 남부의 농부들이 수입품에 더 많이 낼 것으로 예상되었다. 남부의 지도자들은 낮은 관세와 자유 무역을 원하였다. 의회에서 잭슨의 지지자들은 제조품에 높은 임무들을 놓은 관세 의안을 썼다. 그 의안은 뉴잉글랜드 주민들마저 반대하는 데 기대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원료에 임무를 늘이기도 하였다. 모두를 위해 놀랍게 충분한 뉴잉글랜드 주민들이 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투표하였다. 이 "증오의 관세"는 남부에서 독한 노여움을 발생시켰다. 1828년 대통령 선거[편집] 애덤스는 인기를 얻지 못하였으며, 아마 그의 냉담한 매너의 이유였으라 숙고된다. 그는 잭슨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을 공격할 때 자신을 방어하는 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잭슨이 위대한 인기를 얻었으며,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과 러닝메이트 칼훈 부통령이 178석의 투표를 얻었다. 애덤스와 재무 장관 리처드 러시는 83석에 그쳤다. 의회로 복귀[편집] 하원 선거[편집] 애덤스는 다시 퇴직 생활을 계획하였으나, 퀸시의 시민들은 그가 1830년 의회를 위한 선거에 나가길 원하였다. 1831년 하원에 선출되어 17년 동안 그 직에 있었다. 애덤스는 하원의 외교 정세 위원회와 제조업 위원회의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당 정치의 독립을 남겼다. 그는 미국의 두 번째 은행에 반대하는 잭슨 대통령에 대항하였다. 그는 잭슨의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정책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덤스는 잭슨의 외교 정책과 주가 국가의 법률에 따르지 않음에 엄격한 저항을 하였다. 토론 금지령[편집] 애덤스의 가장 위대한 공동적 역할은 노예 제도에 관한 토론이 열릴 동안에 있었을 것이다. 노예 폐지론자들은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주장을 하는 데 의회에 많은 청원서들을 보냈다. 이 청원서들은 법률 창시자들의 시기들을 수없이 가져갔다. 1836년 하원은 청원서들이 바닥에서 읽혀지는 데 "토론 금지령"이라 불리는 결의들 중에 처음을 도입하였다. 애덤스는 이 법률들이 자유적인 연설과 청원의 헌법적인 권리들에 폭력이 가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하원에서 토론 금지령을 반대하는 것에 대항 강하게 비난하였으나, 그는 결국 1844년 그것들이 폐지되는 데 성공하였다. 애덤스는 전쟁 중에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정부의 권리를 역설한 첫 의원이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애덤스의 논의에 노예 해방 선언 기초를 두었다. 아미스타드호 사건[편집] 애덤스는 1841년 미국 대법원 앞에서 아미스타드호 사건을 변호함으로써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신념을 보였다. 반란자들은 백인 노예상인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된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1839년 그들은 카리브 해에서 "라 아미스타드"라고 불리는 배에서 노예사냥꾼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두 명의 백인들을 죽이고,노예선을 장악하였다. 흑인노예들은 살인과 폭동으로 체포되었다. 그들의 재판은 대법원에서 열였으며, 애덤스 변호사는 강하게 피고를 변호하고 모든 사람들은 신체의 자유가 있다고 논의하였다. 반란자들은 무죄가 선언되었다. 사망[편집] 1848년 2월 21일 애덤스는 하원 탁자에서 타격을 겪었다. 건물에서 옮겨지기에 너무 아팠던 그는 연설자의 방으로 옮겨졌다가 이틀 후에 사망하였다. 향년 81세. 그는 매사추세츠 주 퀸시의 퍼스트 유니테리언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부인 루이사 여사도 1852년 5월 15일에 사망하여 남편 곁에 묻혔다. 후에 그들의 유해는 교회의 토굴로 옮겨졌다. 일화[편집] 그는 대통령 재임시절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낙타와 지렁이를 키웠다고 전해진다.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존 퀸시 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의 작품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영어) 존 퀸시 애덤스 - 미국 의회 인명 사전 제6대 미국 대통령 전 임제임스 먼로 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4일 후 임앤드루 잭슨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 vdeh위대한 미국인 명예의 전당 그로버 클리블랜드 길버트 스튜어트 너새니얼 호손 대니얼 분 대니얼 웹스터 데이비드 패러것 랠프 월도 에머슨 로버트 E. 리 로버트 풀턴 로저 윌리엄스 루이스 브랜다이스 루이스 아가시 루터 버뱅크 루푸스 초트 릴리언 왈드 마리아 미첼 마크 트웨인 마크 홉킨스 매뉴 퐁텐 모리 메리 라이언 벤저민 프랭클린 부커 T. 워싱턴 사이먼 뉴컴 새뮤얼 모스 샬럿 쿠시만 수전 B. 앤서니 토머스 잭슨 스티븐 포스터 시드니 라니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실바누스 세이어 아사 그레이 아우구스투스 세인트고던즈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알렉산더 해밀턴 앤드루 잭슨 앤드루 카네기 앨리스 프리먼 팔머 앨버트 A. 마이켈슨 에드거 앨런 포 에드워드 맥다월 에드윈 부스 에이브러햄 링컨 엘리 휘트니 엘리아스 하위 에마 윌러드 오빌 라이트 올리버 웬델 홈스 시니어 올리버 웬델 홈스 주니어 요시야 윌러드 기브스 우드로 윌슨 워싱턴 어빙 월터 리드 월트 휘트먼 윌리엄 C. 고거스 윌리엄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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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퀸시 애덤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존 퀸시 애덤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존퀸시애덤스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존 퀸시 애덤스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임기 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4일 부통령 존 C. 컬훈 전임: 제임스 먼로(제5대)후임: 앤드루 잭슨(제7대) 신상정보 출생일 1767년 7월 11일(1767-07-11) 출생지 대영 제국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퀸시 사망일 1848년 2월 23일 (80세) 사망지 미국 워싱턴 D.C. 학력 하버드 대학교 정당 민주공화당 → 국민공화당 배우자 루이사 캐서린 존슨 자녀 루이사 애덤스조지 워싱턴 애덤스존 애덤스 3세찰스 프란시스 애덤스 종교 유니테리언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767년 7월 11일 ~ 1848년 2월 23일, 문화어: 죤 퀸씨 아담즈)는 미국의 6번째 대통령(1825~29)이다. 북서 태평양 지역의 영토인 워싱턴 준주와 플로리다 준주를 매입했다. 먼로 독트린을 만들자고 먼로에게 앞장섰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에게 패한 뒤 20년 간 죽을 때까지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목차 1 초기 생애 1.1 교육 2 정치적 경력 2.1 외교관 시절 2.2 애덤스의 가족 2.3 미국 상원 시절 2.4 또다시 외교관 2.5 국무부 장관 3 1820년 대통령 선거 3.1 1824년 대통령 선거 4 대통령 임기 4.1 민주공화당의 분열 4.2 의회에 의한 거절 4.3 증오의 관세 4.4 1828년 대통령 선거 5 의회로 복귀 5.1 하원 선거 5.2 토론 금지령 5.3 아미스타드호 사건 6 사망 7 일화 8 참고 자료 9 외부 링크 초기 생애[편집]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자녀 중에 둘째이자 맏아들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퀸시에서 태어났다. 1770년대에 부친은 대륙 의회에 참석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가족에게서 떠나있었다. 1778년 의회는 존 애덤스를 프랑스로 보냈다. 교육[편집] 부친이 외교관으로 지내면서 존 퀸시 애덤스는 파리, 암스테르담, 레이던에 있는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4세 때에 러시아 주재 초대 공사 프랜시스 데이나의 비밀서기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갔다. 1783년 부친에 다시 가담하여 부친의 비밀서기를 지냈다. 부친은 영국 주재 공사가 되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 존 퀸시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1787년에 졸업하였다. 애덤스는 3년 동안 법률을 읽고 1790년 변호사 실습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뢰인들이 몇명 밖에 안 되어 정치적 저널리즘으로 전향하였다. 정치적 경력[편집] 외교관 시절[편집] 1794년 조지 워싱턴은 애덤스를 네덜란드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다. 애덤스가 도착한 지 3일 후에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침입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런던에서 특별 지위에 있을 때 런던의 미국 영사가 된 상인의 딸 루이사 캐서린 존슨(1775~1852)을 만났다. 1796년 워싱턴은 그를 포르투갈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으며, 그가 리스본으로 떠나기 전에 부친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에 부친에 의하여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다. 애덤스의 가족[편집]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에 애덤스는 1797년 루이사와 결혼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서 4년 이상을 지냈다. 애덤스 부부는 4명의 자식들을 두었다 - 루이사 캐서린, 조지 워싱턴, 존 3세, 찰스 프랜시스. 루이사 캐서린은 유년기에 사망하였고, 맏아들 조지 워싱턴 애덤스는 아버지의 대통령 임기 말기인 1829년에 사망하였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존 애덤스 3세는 5년 후에 사망하였다. 찰스 프랜시스는 남북 전쟁 중에 영국 주재 대사를 지냈다. 미국 상원 시절[편집]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애덤스는 곧 귀국하여 1802년 매사추세츠 주의 상원에 선출되었다. 1803년 연방당원들은 미국 상원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애덤스를 선택하였다. 연방당원에 불구하고 그는 가끔 민주공화당과 함께 투표를 하였다. 1807년 의회가 〈엠바고 법령〉을 통과시키자 자신의 당을 깨뜨렸다. 뉴잉글랜드의 연방당원들은 영국과 통상을 원하였으나, 전체로서 국가에 이익을 얻는 데 믿었던 엠바고를 지지하였다. 매사추세츠 주의 연방당 지도자들은 애덤스가 자기들을 배신한 느낌이 들었다. 1808년 선거가 열리기 몇달 전에 그들은 다른 이를 그의 상원석을 채우는 데 선출하였다. 애덤스는 즉시 사임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사학의 교수로서 경력을 준비하였다. 또다시 외교관[편집] 1809년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애덤스를 러시아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다. 1814년 중순부터 1815년 초순까지 애덤스는 1812년 미영 전쟁을 끝내는 데 영국과 헨트 조약에 협상한 미국의 위원들 중의 하나로 지냈다. 협상은 미국은 물론 외교관으로서 애덤스를 위한 신임을 얻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그를 영국 주재 대사로 임명하였다. 런던에 있는 동안 애덤스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오대호 지역에서 요새들과 군함들의 이용을 멈추는 데 동의하였고, 두 나라들의 국경 지방을 무방비로 놔두었다. 국무부 장관[편집] 1817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애덤스를 자신의 국무부 장관으로 불러드렸다. 대업스는 영국과 오리건 지방을 공동으로 점령하는 데 합의했다. 그는 조용한 스페인이 노스웨스트 준주에 영토를 주장하는 조약을 협상하였고 플로리다주를 합쳤다. 그러나 국무부 장관으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먼로 독트린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 일이다. 애덤스는 이 정책의 첫 선언을 1823년 7월에 실시했다. 그는 러시아 공사에게 "아메리카 대륙은 더 이상 새로운 유럽의 식민지 설립을 위한 주체가 아니다"고 말하였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는 1815년 나폴레옹 제국이 무너진 후 신성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 전쟁들이 일어난 후에 중앙아메리카과 남아메리카의 나라들이 스페인 통치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1823년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 왕좌를 다시 얻을 때 많은 나라들은 신성 동맹이 스페인에 전 식민지들이 다시 정복당할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영국의 외무 장관 조지 캐닝은 이런 여러 운동에 대항하는것에 미국이 동참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애덤스는 미국은 자신들의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20년 대통령 선거[편집] 1820년, 존 퀸시 애덤스는 민주공화당의 또다른 후보로 나가서 제임스 먼로에게 무려 231:1의 엄청난 대패를 당하고 대통령의 꿈을 접었으나, 4년뒤인 1824년 대통령 선거때 또다시 후보로 나가게 된다. 1824년 대통령 선거[편집]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많은 미국인들은 애덤스가 대통령으로서 먼로를 따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매디슨과 먼로는 둘다 국무부 장관을 지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애덤스는 또한 자신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느꼈으나 투표를 몰려드는 데 약갼의 일을 하였다. 4명의 민주공화당원들 - 존 C. 칼훈, 헨리 클레이, 윌리엄 H. 크로포드와 앤드루 잭슨이 애덤스를 반대하였다. 칼훈은 빠져나가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잭슨은 99개의 선거 투표를 얻었고, 애덤스는 84개, 크로포드는 41개, 클레이는 37개의 투표를 얻었다. 아무도 다수를 가지지 못하자, 미국 하원은 첫 3명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였다. 클레이는 자신의 지지를 애덤스에게 던지자, 애덤스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 임기[편집] 민주공화당의 분열[편집] 하원이 애덤스를 선출하기 전에 잭슨의 부하들은 애덤스가 자신의 지지를 위하여 돌아오는 데 클레이에게 내각 직위를 약속한 것에 고소하였다. 애덤스가 클레이를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할 때 의회에서 잭슨의 강력한 부하들은 두 사람을 "부패 계약"을 만든 것에 고발하였다. 이 일은 민주공화당을 분열시켜 애덤스의 단체 "국민공화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잭슨의 단체는 다음 4년 동안 애덤스와 싸웠다. 의회에 의한 거절[편집] 애덤스는 완공되지 않은 캐피톨의 상원 의회에서 취임 연설을 가졌다. 이 연설과 의회에 첫 전갈에서 그는 국내 향상들의 야망적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고속도로, 운하, 기상 관측소와 국립 대학들의 건설을 포함하였다. 그는 만약 의회가 모든 국민들의 이익을 위한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지 않았다면에 절규하였다. 그러나 의회의 다수는 동의하지 않았다. 정부와 과학의 협력을 위한 애덤스의 희망들은 그의 일생 이후까지 현실되지 않았다. 증오의 관세[편집] 1828년 수많은 뉴잉글랜드의 주들에서 제조업이 농업을 가장 최고의 활동으로 대신하였다. 이 주들은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찬성하였다. 그러나 높은 관세는 남부의 농부들이 수입품에 더 많이 낼 것으로 예상되었다. 남부의 지도자들은 낮은 관세와 자유 무역을 원하였다. 의회에서 잭슨의 지지자들은 제조품에 높은 임무들을 놓은 관세 의안을 썼다. 그 의안은 뉴잉글랜드 주민들마저 반대하는 데 기대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원료에 임무를 늘이기도 하였다. 모두를 위해 놀랍게 충분한 뉴잉글랜드 주민들이 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투표하였다. 이 "증오의 관세"는 남부에서 독한 노여움을 발생시켰다. 1828년 대통령 선거[편집] 애덤스는 인기를 얻지 못하였으며, 아마 그의 냉담한 매너의 이유였으라 숙고된다. 그는 잭슨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을 공격할 때 자신을 방어하는 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잭슨이 위대한 인기를 얻었으며,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과 러닝메이트 칼훈 부통령이 178석의 투표를 얻었다. 애덤스와 재무 장관 리처드 러시는 83석에 그쳤다. 의회로 복귀[편집] 하원 선거[편집] 애덤스는 다시 퇴직 생활을 계획하였으나, 퀸시의 시민들은 그가 1830년 의회를 위한 선거에 나가길 원하였다. 1831년 하원에 선출되어 17년 동안 그 직에 있었다. 애덤스는 하원의 외교 정세 위원회와 제조업 위원회의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당 정치의 독립을 남겼다. 그는 미국의 두 번째 은행에 반대하는 잭슨 대통령에 대항하였다. 그는 잭슨의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정책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덤스는 잭슨의 외교 정책과 주가 국가의 법률에 따르지 않음에 엄격한 저항을 하였다. 토론 금지령[편집] 애덤스의 가장 위대한 공동적 역할은 노예 제도에 관한 토론이 열릴 동안에 있었을 것이다. 노예 폐지론자들은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주장을 하는 데 의회에 많은 청원서들을 보냈다. 이 청원서들은 법률 창시자들의 시기들을 수없이 가져갔다. 1836년 하원은 청원서들이 바닥에서 읽혀지는 데 "토론 금지령"이라 불리는 결의들 중에 처음을 도입하였다. 애덤스는 이 법률들이 자유적인 연설과 청원의 헌법적인 권리들에 폭력이 가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하원에서 토론 금지령을 반대하는 것에 대항 강하게 비난하였으나, 그는 결국 1844년 그것들이 폐지되는 데 성공하였다. 애덤스는 전쟁 중에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정부의 권리를 역설한 첫 의원이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애덤스의 논의에 노예 해방 선언 기초를 두었다. 아미스타드호 사건[편집] 애덤스는 1841년 미국 대법원 앞에서 아미스타드호 사건을 변호함으로써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신념을 보였다. 반란자들은 백인 노예상인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된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1839년 그들은 카리브 해에서 "라 아미스타드"라고 불리는 배에서 노예사냥꾼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두 명의 백인들을 죽이고,노예선을 장악하였다. 흑인노예들은 살인과 폭동으로 체포되었다. 그들의 재판은 대법원에서 열였으며, 애덤스 변호사는 강하게 피고를 변호하고 모든 사람들은 신체의 자유가 있다고 논의하였다. 반란자들은 무죄가 선언되었다. 사망[편집] 1848년 2월 21일 애덤스는 하원 탁자에서 타격을 겪었다. 건물에서 옮겨지기에 너무 아팠던 그는 연설자의 방으로 옮겨졌다가 이틀 후에 사망하였다. 향년 81세. 그는 매사추세츠 주 퀸시의 퍼스트 유니테리언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부인 루이사 여사도 1852년 5월 15일에 사망하여 남편 곁에 묻혔다. 후에 그들의 유해는 교회의 토굴로 옮겨졌다. 일화[편집] 그는 대통령 재임시절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낙타와 지렁이를 키웠다고 전해진다.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존 퀸시 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의 작품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영어) 존 퀸시 애덤스 - 미국 의회 인명 사전 제6대 미국 대통령 전 임제임스 먼로 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4일 후 임앤드루 잭슨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 vdeh위대한 미국인 명예의 전당 그로버 클리블랜드 길버트 스튜어트 너새니얼 호손 대니얼 분 대니얼 웹스터 데이비드 패러것 랠프 월도 에머슨 로버트 E. 리 로버트 풀턴 로저 윌리엄스 루이스 브랜다이스 루이스 아가시 루터 버뱅크 루푸스 초트 릴리언 왈드 마리아 미첼 마크 트웨인 마크 홉킨스 매뉴 퐁텐 모리 메리 라이언 벤저민 프랭클린 부커 T. 워싱턴 사이먼 뉴컴 새뮤얼 모스 샬럿 쿠시만 수전 B. 앤서니 토머스 잭슨 스티븐 포스터 시드니 라니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실바누스 세이어 아사 그레이 아우구스투스 세인트고던즈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알렉산더 해밀턴 앤드루 잭슨 앤드루 카네기 앨리스 프리먼 팔머 앨버트 A. 마이켈슨 에드거 앨런 포 에드워드 맥다월 에드윈 부스 에이브러햄 링컨 엘리 휘트니 엘리아스 하위 에마 윌러드 오빌 라이트 올리버 웬델 홈스 시니어 올리버 웬델 홈스 주니어 요시야 윌러드 기브스 우드로 윌슨 워싱턴 어빙 월터 리드 월트 휘트먼 윌리엄 C. 고거스 윌리엄 T. G. 모턴 윌리엄 엘러리 채닝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 윌리엄 테쿰세 셔먼 윌리엄 펜 윌버 라이트 율리시스 S. 그랜트 제인 애덤스 제임스 러셀 로웰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제임스 뷰캐넌 이즈 제임스 애봇 맥닐 위스틀러 제임스 켄트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조너선 에드워즈 조지 밴크로프트 조지 워싱턴 카버 조지 워싱턴 조지 웨스팅하우스 조지 피바디 조지프 스토리 조지프 헨리 존 그린리프 휘티어 존 로드롭 모틀리 존 마셜 존 애덤스 존 제임스 오듀본 존 퀸시 애덤스 존 폴 존스 존 필립 수사 클래라 바턴 토머스 앨바 에디슨 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파인 패트릭 헨리 프란세스 윌러드 프랜시스 파크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피터 쿠퍼 필립스 브룩스 해리엇 비처 스토 헨리 데이비드 소로 헨리 워드 비처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헨리 클레이 호러스 맨 전거 통제 WorldCat VIAF: 36980021 LCCN: n79140988 ISNI: 0000 0001 2128 2017 GND: 118643789 SELIBR: 206577 SUDOC: 027551482 BNF: cb12284310j (데이터) ULAN: 500353262 NLA: 36311662 NKC: jn20011211222 US Congress: A000041 BNE: XX157215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존_퀸시_애덤스&oldid=24187234" 분류: 존 퀸시 애덤스1767년 태어남1848년 죽음레이던 대학교 동문매사추세츠주 출신 정치인미국의 국무장관미국의 대통령미국의 변호사미국의 외교관영국 주재 미국 대사하버드 대학교 동문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존 퀸시 애덤스 행정부1820년 미국 대통령 후보1824년 미국 대통령 후보1828년 미국 대통령 후보매사추세츠주의 연방 상원의원매사추세츠주의 연방 하원의원애덤스가하버드 대학교 교수잉글랜드계 미국인제임스 먼로 행정부의 각료미국의 보수주의네덜란드 주재 미국 대사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ymar aruAzərbaycancaتۆرکجه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islama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CebuanoCorsu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àidhligGalegoGaelgעבריתहिन्दी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RipoarischKurdîKernowekLatinaLëtzebuergeschLingua Franca NovaLumbaart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مازِرونیPlattdüütsch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ਪੰਜਾਬੀKapampangan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Kinyarwanda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ไทยTürkmençe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Yorùbá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8: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국예술종합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36′ 19.8″ 동경 127° 3′ 21.8″ / 북위 37.605500° 동경 127.056056°  / 37.605500; 127.056056 한국예술종합학교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종류 국립 특수대학설립 1991년 12월 30일총장 김봉렬국가 대한민국위치 석관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서초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웹사이트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위치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 한국예술종합학교(韓國藝術綜合學校,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대학교이다. 1993년 국가정책 차원에서 예술 실기 전문 교육을 실시하여 전문적인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개교한 4년제 국립 특수대학으로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등의 예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목차 1 설립 1.1 교명 변경 1.2 학교 이전 2 특징 3 편제 3.1 학과 4 위치 5 부속 시설 5.1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5.2 한국예술영재교육원 5.3 한국예술연구소 5.4 문화예술교육센터 5.5 음악원 5.5.1 고음악연구소 5.5.2 컴퓨터음악연구소 5.5.3 한국작곡가연구소 5.6 연극원 5.6.1 극단 돌곶이 5.6.2 무대기술연구소 5.7 영상원 5.7.1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5.8 무용원 5.8.1 세계민족무용연구소 5.8.1.1 연혁 5.9 미술원 5.9.1 조형연구소 5.9.2 UA-SA 도시/건축연구소 5.9.3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 6 사건·사고 및 논란 6.1 한예종 사태 6.2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 6.2.1 발족 6.2.2 해체 6.3 음악원 부정입학 7 역대 총장 8 동문 9 각주 10 외부 링크 설립[편집]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4년제 국립 대학으로서 기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건 '대한민국 문화발전 10년 계획' 중 '세계적 국립예술대학 설립 공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990년 12월 25일 문화부 발전계획에 포함된 전문화된 국립예술대학으로의 설립이 계획되었고 1991년 12월 30일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이 제정 및 발효되었다. 1992년 10월 30일 직제를 확정하고 교학처와 사무국을 설치함으로써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그해 11월에 초대로 이강숙 총장이 부임하였으며 이후 1993년 음악원 개원을 시작으로 이후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차례대로 개원하였다. 교명 변경[편집] 국립한국예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려 했으나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되어 현재까지도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영문명은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에서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로 줄임말은 KNUA에서 K'Arts로 변경됐다) 학교 이전[편집]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의릉에 위치한 석관동 교사의 이전을 문화재청이 요청함에 따라 석관동 교사와 서초동 교사를 통합하여 이전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강남구 세곡동, 경기도 과천시, 고양시 등이 후보지로 이름을 올렸으나 이중에는 주민들이 유치를 반대하는 지역도 있고 부지가 다른 사업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어 이전 문제는 더욱 불투명하게 됐다. 학교 재정 문제 상 당장 이전을 추진하기도 어려워 해답이 보이지 않고 있다. 특징[편집]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대학으로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를 양성하여 대한민국의 문화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 개인의 충분한 창의적 재능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정원에 미달되어도 선발하지 않는 원칙을 통해 창의적 신인재를 발굴해낸다는 독특한 입시제도는 진정한 예술적 재능과 잠재적 가능성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창조적 소수를 지향하는 교육 철학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 대학과의 경쟁을 뛰어넘어 세계정상급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유학 없이 세계 최정상급의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설립취지답게 각종 국제 대회에서 영국왕립음악학교, 줄리아드 스쿨, 카네기 멜론 대학, 파리국립음악원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수한 수상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ALIA를 결성하여 국제교류도 하고 있다. 편제[편집] 1998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소관 부처가 교육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변경됐다. 1999년 학칙개정으로 예술사 과정을 수료하면 일반 대학의 학사 학위에 대응하는 예술사 학위가 수여되고 예술전문사 과정을 수료하면 석사 학위에 준하는 예술전문사 증서를 수여하게 되었다. 다만 박사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과[편집] 원 예술사 (학사) 실기과 이론과 음악원 성악과 · 기악과 · 작곡과 · 지휘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연극학과 · 연극학과 예술경영전공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이론과 · 이론과 예술경영전공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음악작곡과 한국예술학과 원 예술전문사 (석사) 학과 음악원 오페라과 · 가곡 및 오라토리오과 · 기악과 · 작곡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 지휘과 ·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 연극학과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 이론과 · 예술경영과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예술학과 협동과정 음악극창작과 위치[편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의릉에 대학 본부, 영상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연극원이 있고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음악원과 무용원이 위치해있다. 석관동 교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 서초동 교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 부속 시설[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2008년 8월 영재교육진흥법 제8조에 근거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로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국가 차원의 예술영재 조기 발굴 및 양성체계 구축을 설립목적으로 음악, 무용, 전통예술분야의 우수한 학생들(초3~고3)을 전액 장학금으로 교육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설립목적 잠재력 있는 예술영재의 조기 발굴 및 양성 예술영재 양성 체계 구축 및 양질의 예술영재교육 도모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예술교육을 활용한 예술영재교육의 모범사례 정립 교육개요 음악(기악, 성악, 작곡) 발레 전통예술(음악(기악, 성악), 무용, 연희) 교육대상 각 분야의 예술적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이 뛰어난 전국의 초·중·고등 학령기 아동 및 청소년 (분야 및 세부 전공에 따라 다름) 한국예술영재교육원 홈페이지 한국예술연구소[편집] 문화예술교육센터[편집] 음악원[편집] 고음악연구소[편집] 2005년 설립된 음악원 부설 고음악연구소. 한국의 여러 음악 분야중 고음악 분야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연구되고 있어 오자경소장(한예종 음악원 기악과 교수)을 중심으로 고음악에 대한 많은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매해 고음악에 대한 특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헤이그 음악 왕립 음대 학장인 Jan Kleinbussienk, Brabant Conservatorium 소속 “칸투스 모달리스”의 리더인 Dr. Rebecca Stewart의 특강과 일본의 바로크 댄스 전문가인 호나미 코가와 기요타카 야요시를 초청하여 바로크 시대의 춤과 음악에 대한 워크샵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컴퓨터음악연구소[편집] 음악원 부설 컴퓨터 음악 연구소는 컴퓨터를 사용한 음악 및 음향을 연구하며 알고리즘, 컨트롤링등 다양한 컴퓨터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경주 문화 EXPO 2000의 가상현실과 영상음악 및 음향 작업(KIST 협력 사업), 벤처 기업인 OrAndIf와의 논리 게임 "하비스의 진자” 음향 및 음악 제작, LG 전자의 핸드폰 벨 소리 개발 등 산학협력 프로젝트들이 있으며, MBC Radio PD 및 음향 기술자 연수 등의 교육 사업도 수행했다. 또한 한국전자음악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본 연구소는 ACC 2008(Osaka Geidai) 초청 음악회, Next Wave Concert 2008(KNUA) 등 컴퓨터음악 공연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한국작곡가연구소[편집] 무용원 부설 한국작곡가연구소는 창작음악에 대해 체계적인 관리가 안되는 현실에 맞춰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가들에 대한 분류, 연구, 교육분야를 중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원[편집] 극단 돌곶이[편집] 극단 돌곶이는 연극원 부설 극단으로 연극원에서 수학한 많은 학생들이 모체가 되어 문화 소외지역이나 일반인들에게 학교에서 배우고 경험한 다양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문화적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해외 각 국 연극학교, 학과와 교류하며 해외 연극제에도 참여하여 한국 연극계를 알리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01년 창단 준비공연 <봄이 눈뜰때>(베데킨트 작/조태준 연출)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리기 시작하여 2002년 창단공연 <우리나라 우투리>(김광림 작/연출)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올렸으며, 그 후 <미생자>(윤영선 작/이상우 연출), <쑥부쟁이>(추민주 작/연출),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최은이, 민준호 작/민준호 연출), <김종욱 찾기>(장유정 작/연출), <다리, The Bridge>(Peter. W. Willson 작/연출), <무거운 물>(윤정섭 작/연출), <비무장지대로 날아간 새>(Eli Simon, 김석만 각색/연출), (David Pledger 각색/연출), <당신이야기>(고재귀 작/김현우 연출), <당신의 의미>(김태형 작/이종성 연출), <모범생들>(지이선 작/김태형 연출), <바람속에 던져진 꽃>(이지홍 작/조규상 연출)을 공연하였다. 무대기술연구소[편집] 영상원[편집]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편집] 무용원[편집] 세계민족무용연구소[편집] 국가 문화정책에 기여하고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연구기관으로, 세계 각 국의 민족무용연구와 교류를 통해 우리 민족무용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발전시켜 학술적 체계를 정립함과 아울러 세계민족무용공연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2000년 9월 6일 개소한 연구기관이다. 연혁[편집] 세계무형문화재 초청공연 시리즈 1999년 9월 ‘일본 전통무용 노가쿠’ 초청공연 2000년 6월 인도사원예술의 진수 ‘쿠티야탐’ 한국 초연 2001년 6월 필리핀 민족무용 ‘신화 역사 그리고 통과의례의 몸짓’ 2002년 6월 ‘모쓰지(毛越寺) 엔넨(延年)의 춤’ 2003년 5월 ‘동양 춤 속의 여형’ 2004년 5월 ‘경극, 그 우아한 격정의 세계’ 2004년 5월 ‘천상의 무용, 방글라데시’ 2005년 5월 일본 무용 ‘우아함과 화려함, 그 양면성의 조화’ 2006년 5월 인도 무용 ‘떼얌: 고대 인도의 무속 춤’ 2007년 5월 캄보디아 왕립무용단 ‘땅과 물, 자연 속의 몸짓’ 2008년 5월 몽골 국립가무단 Tumen-Ekh ‘초원의 이야기’ 2009년 7월 일본 무용: 축제의 꿈 ‘에도 사토카구라’ 와카야마 다네오 2010년 8월 인도 무용: 신화의 몸짓 ‘카타칼리 Khatakali’ 2011년 9월 중국 소수 민족 춤 ‘불과 바람, 화합의 춤’ 2012년 9월 오키나와 류큐 궁중 무용: 남국의 풍정 2013년 9월 열대의 풍요로움, 신명고 환열의 춤: 말레이시아 민족무용 2014년 9월 세계 민족무용의 몸말 한국 전통 무용 국내 및 국외 공연 2000년 10월 한국 전통 명무전 시리즈 ‘진주명무전’ 2003년 9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4년 11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5년 9월 UCLA ‘세계종교음악축제’ 2005년 10월 한・일 명류(名流) 무용 감상회 및 한국 음악 감상회 2006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1차(창덕궁 연경당) 2007년 2월 필리핀 국립대학 한국 불교 무용과 음악공연 2007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2차(창덕궁 연경당) 2008년 10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3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4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세계민족무용연구소 개소 10주년 기념행사 ‘․참 춤’ 한・일 전통문화 교류 2000년 9월 ‘하야치네카구라 오오츠구나이’ -국립국악원 우면당 2000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0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1년 3월 일본 고전예능 ‘분라쿠(文樂)’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5월 인간문화재 한국고전예능 -시츠오카 음악당 2001년 10월 일본 고전예능 ‘노(能)’ 워크숍 및 공연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1-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2년 8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2-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8년 11월 세계교류공연 ‘한・일 고전예능의 명작’-일본 요코하마 노악당 2010년 8월 한국문화원 요츠야 청사 개원 1주년 공연 ‘한국의 풍경 : 한국 전통 예술과 未完의 大器들 -도쿄 한국문화원 한마당 홀 세미나, 심포지엄, 전시회 개최 2001년 12월 북한공훈예술가 리철우 초청 특별 세미나 2003년 5월 제1회 민족무용 사진전시회 개최 2004년 5월 한・중・일 궁중무용의 변천과 전승 국제학술회의 2006년 8월 한국 근・현대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육화대」・「처용무」 복원공연을 중심으로 학술발표회 2012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전통 춤이란 무엇인가 2012년 1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합 국제 심포지엄 2013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악무사상과 의례 2014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일본 전통 악무와 의례문화 2014년 9월 개소 15주년 기념 심포지엄 : 전통문화 재연과 문화콘텐츠를 위한 담론 학술지 발간 2002년 8월 민족무용 1호 발간 2002년 12월 민족무용 2호 발간 2003년 7월 민족무용 3호 발간 2003년 12월 민족무용 4호 발간 2004년 8월 민족무용 5호 발간 2004년 12월 민족무용 6호 발간 2005년 2월 민족무용 7호 발간 2005년 8월 민족무용 8호 발간 2006년 2월 민족무용 9호 발간 2006년 8월 민족무용 10호 발간 2007년 2월 민족무용 11호 발간 2007년 11월 민족무용 12호 발간 2009년 5월 민족무용 13호 발간 2010년 12월 민족무용 14호 발간 2011년 6월 민족무용 15호 발간 2012년 8월 민족무용 16호 발간 2013년 8월 민족무용 17호 발간 2014년 8월 민족무용 18호 발간 연구 총서 및 자료집 발간 2001년 12월 아시아 무용 음악 자료 해제집 발간 2005년 6월 학술총서: 1 완역집성 정재무도 홀기 발간 2005년 7월 학술총서: 2 한국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발간 2006년 11월 학술총서: 3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발간 2009년 9월 학술총서: 5 순조조 연경당 진작례 발간 2011년 8월 학술총서: 4 전통 무용의 변모와 현대적 계승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8 춘앵전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9 처용무 발간 2014년 6월 학술총서:10 일본 예악무의 융합적 연구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1 한국여악자료집-조선왕조실록편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2 선진악론집요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3 양한악론집요 발간 석학 초청 특강 2006년 10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브랜드로서의 한류」 2006년 11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정신적 항체: 문화자본주의」 2006년 12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한류: 리얼리즘」 2007년 3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Ⅰ」 2007년 4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Ⅱ」 2007년 5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Ⅲ」 2007년 6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유・불・도의 전통 미학」 연구과제 수행 2003년 8월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 인문사회분야 선정 2011년 12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선정(2011.12-2020.8) 미술원[편집] 조형연구소[편집] UA-SA 도시/건축연구소[편집]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편집] 사건·사고 및 논란[편집] 한예종 사태[편집] 직접적으로는 '황지우 총장의 퇴출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소요 사건'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내막에 대해 진보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이후 기존의 명문예술대학들이 점유하고 있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독점적 지위는 차츰 누그러져가던 상황이었다. 이들 명문예술대학들은 자신들의 연대와 대립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견제를 날로 강화해갔고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10년만의 정권교체 후 들어선 새 정부는 기존 문화 예술 기관장들의 교체를 시도하였으며 이에는 참여정부 말기 임명된 황지우 총장도 해당되었다. 따라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총장을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하고 한예종을 보수적 문화예술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자 '한예종에 대한 대대적 감사'를 시도했다는 것이 진보 언론계의 분석이다. 새 정부와 뜻을 같이하는 보수적 문화단체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황지우 총장이 진보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시인이었다는 점과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되었다는 점, 그리고 한예종의 주요 교수진들이 새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좌파 엘리트의 온상'으로 지명하고 한예종 전체에 '좌파' 낙인을 찍어버리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미 본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득권 명문예술대학 연합단체는 연일 '한예종 해체'를 주장하며 한예종의 기능을 축소시키려 했다는 것. 이러한 방침에 대한 저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파 정권에서는 우파 총장이 나와야 한다'는 신재민 문화부 차관의 발언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감사상의 부적격 조건을 들어 퇴출된 황지우 총장에 이어 뉴라이트 싱크넷의 발기인을 맡았던 박종원 총장이 교수진 투표를 통해 취임하게 되었고 협동과정원은 2011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총장의 사퇴와 문화부 감사 결과 이행으로 인해 현재는 한예종 사태가 일단락된 듯 보인다. 하지만 본교의 미래는 현 정부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존 사학재단들의 기득권이 엄연한 현 시점에서, 그리고 매 정권마다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된 이제까지의 상황에 비추어서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전망이다.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편집] 발족[편집] 2007년 ‘유비쿼터스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증가된 예술과 과학기술의 접속 기회를 예술교육의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고자 다양한 분야 학문(Multi-disciplinary) 혹은 통섭(通攝)학문 연구 사업의 추진을 위해 2008년 3월 미래교육준비단을 만들었다. 이에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대(포스텍)와 함께 U-AT(Ubiquitous-Art & Technology)와도 통섭 연구사업을 시작했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U-AT사업은 우선 9개의 Lab을 통해 기초 연구를 시작하고 2010년에는 한예종 내에 ‘통섭원’ 과정을 설립하여 한예종의 축적된 예술 교육의 성과를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창의적 예술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4년으로 계획된 이 연구사업은 1차년인 2008년 40억의 국가 예산이 배정되어 이중 30여억원이 집행되었고 예술과 과학기술 통섭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인 isAT2008 개최, 2008년 2학기 8개의 통섭시범교과 운영, 30여권의 교재및 연구 보고서, 총서 출간등의 성과가 있다. 참여 교수는 심광현(단장, AT-미디어 교육랩, 영상원 영상이론과교수), 전수환(부단장, 협동과정 예술경영과교수), 박현철(디지털 아카이빙랩, 영상원 영화과 교수), 이동연(예술과 놀이랩,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교수), 양승무(예술과 놀이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윤정섭(U 스마트시티랩,연극원장), 박인석(몰입경험문화디자인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장재호(특수음향 알고리즘랩, 음악원 뮤직테크놀로지과 교수),원일(디지털악가무랩, 전통예술원 음악과), 박세형(디지털모션그래픽스랩,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진중권(객원교수, 예술과 놀이랩 자문교수)이 있다. 해체[편집] 그러나 2008년 말 문화체육관광부의 결정에 따라 2009년 당초 예정된 예산 전액이 삭감되어 연구사업은 중지되었고 현재 협동과정내 단일 연구소(AT Lab)로 축소 5개의 시범교과를 운영중에 있다. 2008년 진행된 U-AT통섭사업에 대해 뚜렷이 드러난 성과가 약하거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근거였다. 한편 2009년 5월 1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예종에 대한 종합 감사 결과로 황지우총장의 중징계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 한예종의 일부 학과 축소및 폐지, AT Lab 교육 사업 중지, U-AT 관련 교수 징계 등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황지우 총장은 '정당한 학습권과 교권을 침해하는 반교육적 감사결과'임을 주장하며 2009년 5월 19일 총장직 사퇴를 선언하여 논란이 되었다.[1][2] 한편 통섭교육 사업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파행을 문제삼아 학교로부터 정직 3개월 처분된 심광현 교수가 2011년 4월 20일 서울행정법원에서의 행정소송에서 승소하여 1심 취소처분 판결을 받았다. 음악원 부정입학[편집] 2012년 4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음대 입시준비생들에게 불법으로 교습을 해 주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부정 입학시킨 혐의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이모 교수(44)를 구속했다고 밝혔다.[3][4] 이 교수는 제자 김모씨(22)를 한예종 음악원에 입학시켜주는 김씨 부모로부터 합격 사례비 명목으로 총 2억6000만원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0년 3월부터 10월까지 김씨를 상대로 시간당 15만원을 받고 40여 차례 불법 교습을 하는 등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한예종 음악원 입시생 13명을 상대로 불법레슨을 하고 4000만원 상당의 교습비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실기시험 채점자였던 이 교수는 제자 19명에게 최고점을 줘 한예종 음악원에 최종 합격시키기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5][6][7] 역대 총장[편집] 대수 임기 이름 1대 1992 ~ 2002 이강숙 2대 1992 ~ 2002 이강숙 3대 1992 ~ 2002 이강숙 4대 2002 ~ 2006 이건용 5대 2006 ~ 2009 황지우 6대 2009 ~ 2013 박종원 7대 2013 ~ 김봉렬 동문[편집] 분류: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각주[편집] ↑ 김범규 기자, 이득수 기자 (2009년 3월 19일). “진중권 참여 프로젝트, 30억대 사업부실 및 공금유용 의혹”. 《OURNEWS》. 2009년 5월 2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노형석기자 (2009년 5월 19일). “황지우 “한예종 구조개편 겨냥 표적감사 당했다” 총장직 사퇴…문화계 ‘진보성향 기관장 솎아내기’ 반발”. 한겨레.  ↑ 부정입학 뇌물 수수 한예종 교수 구속[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MBC》2012년 4월 28일 최기화 기자 ↑ 제자 입학시키고 돈 받은 한예종 교수 구속《YTN》2012년 4월 28일 조임정 기자 ↑ 불법과외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검거《민중의소리》2012년 4월 23일 최지현 기자 ↑ 부정입학·불법과외… 추악한 한예종 교수《서울신문》2012년 4월 28일 신진호 기자 ↑ 불법교습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구속《경향신문》2012년 4월 28일 외부 링크[편집]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 제20740호) vdeh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기재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안부 문체부 농식품부 산업부 복지부 환경부 고용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중기부 본부 소속 장관 차관(2인) 차관보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국어원 해외문화홍보원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중앙극장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정책방송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위원회 목록) 국립국악고등학교 국립국악중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중학교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 국립익산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자료보존연구센터 국립장애인도서관 국립세종도서관 국립국악원 민속국악원 남도국악원 부산국악원   산하 외청 문화재청 산하 공공기관 게임물관리위원회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국민체육진흥공단 국악방송 국제방송교류재단 그랜드코리아레저 대한장애인체육회 대한체육회 세종학당재단 아시아문화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의전당 정동극장 태권도진흥재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국관광공사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한국문학번역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정보원 한국문화진흥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저작권보호원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체육산업개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소관기관 국기원 뉴스통신진흥회 대한민국예술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언론중재위원회 한국관광협회중앙회 한국도핑방지위원회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한국문화원연합회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급으로 임명된다. 국립국악고등학교 및 국악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및 전통예술학교의 설립·운영권한을 문화체육관광부가 교육부로부터 위탁받았다.[1] 재외 한국문화원[2]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외교부 재외공관 부설기관으로 설치되며 해당 재외공관장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vdeh대한민국의 국립 대학 국립 공립 일반대학 강릉원주대학교 강원대학교4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북대학교4 경상대학교4 공주대학교 군산대학교 금오공과대학교 목포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대학교4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대학교1 4 순천대학교 안동대학교 인천대학교1 전남대학교4 전북대학교4 제주대학교4 창원대학교 충남대학교4 충북대학교4 한경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한밭대학교 교육대학 경인교육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대구교육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특수대학 광주과학기술원2 대구경북과학기술원2 울산과학기술원2 한국과학기술원2 한국예술종합학교3 한국전통문화대학교3 대학원대학 국립암센터국제암대학원대학교2 한국학대학원2 전문대학 한국농수산대학 한국복지대학교 방송통신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국립대법인 2특별법법인 3특별법국립 4거점국립대학교 vdeh 서울특별시의 대학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국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연건캠퍼스) 육군사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서울캠퍼스·도곡캠퍼스)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공립 서울시립대학교 사립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성신교정) 감리교신학대학교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광운대학교 국민대학교 케이씨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동덕여자대학교 명지대학교 (인문캠퍼스) 삼육대학교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 서강대학교 서경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성신여자대학교 세종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이화여자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 추계예술대학교 한국성서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한성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서울한영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전문대학 동양미래대학교 명지전문대학 배화여자대학교 삼육보건대학교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서일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인덕대학교 한국폴리텍Ⅰ대학 (서울강서캠퍼스·서울정수캠퍼스) 한양여자대학교 전공대학 국제예술대학교 백석예술대학교 정화예술대학교 대학원대학 개신대학원대학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북한대학원대학교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순복음대학원대학교 예명대학원대학교 용문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사이버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본부·서울지역대학) 경희사이버대학교 고려사이버대학교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서울캠퍼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서울캠퍼스·대학로캠퍼스·서초캠퍼스)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디지털대학교 (강서캠퍼스) 서울사이버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서울캠퍼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한양사이버대학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예술종합학교&oldid=23758629" 분류: 한국예술종합학교1993년 개교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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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36′ 19.8″ 동경 127° 3′ 21.8″ / 북위 37.605500° 동경 127.056056°  / 37.605500; 127.056056 한국예술종합학교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종류 국립 특수대학설립 1991년 12월 30일총장 김봉렬국가 대한민국위치 석관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서초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웹사이트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위치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 한국예술종합학교(韓國藝術綜合學校,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대학교이다. 1993년 국가정책 차원에서 예술 실기 전문 교육을 실시하여 전문적인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개교한 4년제 국립 특수대학으로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등의 예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목차 1 설립 1.1 교명 변경 1.2 학교 이전 2 특징 3 편제 3.1 학과 4 위치 5 부속 시설 5.1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5.2 한국예술영재교육원 5.3 한국예술연구소 5.4 문화예술교육센터 5.5 음악원 5.5.1 고음악연구소 5.5.2 컴퓨터음악연구소 5.5.3 한국작곡가연구소 5.6 연극원 5.6.1 극단 돌곶이 5.6.2 무대기술연구소 5.7 영상원 5.7.1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5.8 무용원 5.8.1 세계민족무용연구소 5.8.1.1 연혁 5.9 미술원 5.9.1 조형연구소 5.9.2 UA-SA 도시/건축연구소 5.9.3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 6 사건·사고 및 논란 6.1 한예종 사태 6.2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 6.2.1 발족 6.2.2 해체 6.3 음악원 부정입학 7 역대 총장 8 동문 9 각주 10 외부 링크 설립[편집]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4년제 국립 대학으로서 기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건 '대한민국 문화발전 10년 계획' 중 '세계적 국립예술대학 설립 공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990년 12월 25일 문화부 발전계획에 포함된 전문화된 국립예술대학으로의 설립이 계획되었고 1991년 12월 30일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이 제정 및 발효되었다. 1992년 10월 30일 직제를 확정하고 교학처와 사무국을 설치함으로써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그해 11월에 초대로 이강숙 총장이 부임하였으며 이후 1993년 음악원 개원을 시작으로 이후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차례대로 개원하였다. 교명 변경[편집] 국립한국예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려 했으나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되어 현재까지도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영문명은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에서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로 줄임말은 KNUA에서 K'Arts로 변경됐다) 학교 이전[편집]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의릉에 위치한 석관동 교사의 이전을 문화재청이 요청함에 따라 석관동 교사와 서초동 교사를 통합하여 이전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강남구 세곡동, 경기도 과천시, 고양시 등이 후보지로 이름을 올렸으나 이중에는 주민들이 유치를 반대하는 지역도 있고 부지가 다른 사업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어 이전 문제는 더욱 불투명하게 됐다. 학교 재정 문제 상 당장 이전을 추진하기도 어려워 해답이 보이지 않고 있다. 특징[편집]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대학으로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를 양성하여 대한민국의 문화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 개인의 충분한 창의적 재능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정원에 미달되어도 선발하지 않는 원칙을 통해 창의적 신인재를 발굴해낸다는 독특한 입시제도는 진정한 예술적 재능과 잠재적 가능성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창조적 소수를 지향하는 교육 철학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 대학과의 경쟁을 뛰어넘어 세계정상급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유학 없이 세계 최정상급의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설립취지답게 각종 국제 대회에서 영국왕립음악학교, 줄리아드 스쿨, 카네기 멜론 대학, 파리국립음악원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수한 수상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ALIA를 결성하여 국제교류도 하고 있다. 편제[편집] 1998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소관 부처가 교육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변경됐다. 1999년 학칙개정으로 예술사 과정을 수료하면 일반 대학의 학사 학위에 대응하는 예술사 학위가 수여되고 예술전문사 과정을 수료하면 석사 학위에 준하는 예술전문사 증서를 수여하게 되었다. 다만 박사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과[편집] 원 예술사 (학사) 실기과 이론과 음악원 성악과 · 기악과 · 작곡과 · 지휘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연극학과 · 연극학과 예술경영전공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이론과 · 이론과 예술경영전공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음악작곡과 한국예술학과 원 예술전문사 (석사) 학과 음악원 오페라과 · 가곡 및 오라토리오과 · 기악과 · 작곡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 지휘과 ·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 연극학과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 이론과 · 예술경영과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예술학과 협동과정 음악극창작과 위치[편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의릉에 대학 본부, 영상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연극원이 있고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음악원과 무용원이 위치해있다. 석관동 교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 서초동 교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 부속 시설[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2008년 8월 영재교육진흥법 제8조에 근거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로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국가 차원의 예술영재 조기 발굴 및 양성체계 구축을 설립목적으로 음악, 무용, 전통예술분야의 우수한 학생들(초3~고3)을 전액 장학금으로 교육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설립목적 잠재력 있는 예술영재의 조기 발굴 및 양성 예술영재 양성 체계 구축 및 양질의 예술영재교육 도모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예술교육을 활용한 예술영재교육의 모범사례 정립 교육개요 음악(기악, 성악, 작곡) 발레 전통예술(음악(기악, 성악), 무용, 연희) 교육대상 각 분야의 예술적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이 뛰어난 전국의 초·중·고등 학령기 아동 및 청소년 (분야 및 세부 전공에 따라 다름) 한국예술영재교육원 홈페이지 한국예술연구소[편집] 문화예술교육센터[편집] 음악원[편집] 고음악연구소[편집] 2005년 설립된 음악원 부설 고음악연구소. 한국의 여러 음악 분야중 고음악 분야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연구되고 있어 오자경소장(한예종 음악원 기악과 교수)을 중심으로 고음악에 대한 많은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매해 고음악에 대한 특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헤이그 음악 왕립 음대 학장인 Jan Kleinbussienk, Brabant Conservatorium 소속 “칸투스 모달리스”의 리더인 Dr. Rebecca Stewart의 특강과 일본의 바로크 댄스 전문가인 호나미 코가와 기요타카 야요시를 초청하여 바로크 시대의 춤과 음악에 대한 워크샵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컴퓨터음악연구소[편집] 음악원 부설 컴퓨터 음악 연구소는 컴퓨터를 사용한 음악 및 음향을 연구하며 알고리즘, 컨트롤링등 다양한 컴퓨터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경주 문화 EXPO 2000의 가상현실과 영상음악 및 음향 작업(KIST 협력 사업), 벤처 기업인 OrAndIf와의 논리 게임 "하비스의 진자” 음향 및 음악 제작, LG 전자의 핸드폰 벨 소리 개발 등 산학협력 프로젝트들이 있으며, MBC Radio PD 및 음향 기술자 연수 등의 교육 사업도 수행했다. 또한 한국전자음악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본 연구소는 ACC 2008(Osaka Geidai) 초청 음악회, Next Wave Concert 2008(KNUA) 등 컴퓨터음악 공연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한국작곡가연구소[편집] 무용원 부설 한국작곡가연구소는 창작음악에 대해 체계적인 관리가 안되는 현실에 맞춰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가들에 대한 분류, 연구, 교육분야를 중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원[편집] 극단 돌곶이[편집] 극단 돌곶이는 연극원 부설 극단으로 연극원에서 수학한 많은 학생들이 모체가 되어 문화 소외지역이나 일반인들에게 학교에서 배우고 경험한 다양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문화적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해외 각 국 연극학교, 학과와 교류하며 해외 연극제에도 참여하여 한국 연극계를 알리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01년 창단 준비공연 <봄이 눈뜰때>(베데킨트 작/조태준 연출)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리기 시작하여 2002년 창단공연 <우리나라 우투리>(김광림 작/연출)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올렸으며, 그 후 <미생자>(윤영선 작/이상우 연출), <쑥부쟁이>(추민주 작/연출),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최은이, 민준호 작/민준호 연출), <김종욱 찾기>(장유정 작/연출), <다리, The Bridge>(Peter. W. Willson 작/연출), <무거운 물>(윤정섭 작/연출), <비무장지대로 날아간 새>(Eli Simon, 김석만 각색/연출), (David Pledger 각색/연출), <당신이야기>(고재귀 작/김현우 연출), <당신의 의미>(김태형 작/이종성 연출), <모범생들>(지이선 작/김태형 연출), <바람속에 던져진 꽃>(이지홍 작/조규상 연출)을 공연하였다. 무대기술연구소[편집] 영상원[편집]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편집] 무용원[편집] 세계민족무용연구소[편집] 국가 문화정책에 기여하고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연구기관으로, 세계 각 국의 민족무용연구와 교류를 통해 우리 민족무용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발전시켜 학술적 체계를 정립함과 아울러 세계민족무용공연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2000년 9월 6일 개소한 연구기관이다. 연혁[편집] 세계무형문화재 초청공연 시리즈 1999년 9월 ‘일본 전통무용 노가쿠’ 초청공연 2000년 6월 인도사원예술의 진수 ‘쿠티야탐’ 한국 초연 2001년 6월 필리핀 민족무용 ‘신화 역사 그리고 통과의례의 몸짓’ 2002년 6월 ‘모쓰지(毛越寺) 엔넨(延年)의 춤’ 2003년 5월 ‘동양 춤 속의 여형’ 2004년 5월 ‘경극, 그 우아한 격정의 세계’ 2004년 5월 ‘천상의 무용, 방글라데시’ 2005년 5월 일본 무용 ‘우아함과 화려함, 그 양면성의 조화’ 2006년 5월 인도 무용 ‘떼얌: 고대 인도의 무속 춤’ 2007년 5월 캄보디아 왕립무용단 ‘땅과 물, 자연 속의 몸짓’ 2008년 5월 몽골 국립가무단 Tumen-Ekh ‘초원의 이야기’ 2009년 7월 일본 무용: 축제의 꿈 ‘에도 사토카구라’ 와카야마 다네오 2010년 8월 인도 무용: 신화의 몸짓 ‘카타칼리 Khatakali’ 2011년 9월 중국 소수 민족 춤 ‘불과 바람, 화합의 춤’ 2012년 9월 오키나와 류큐 궁중 무용: 남국의 풍정 2013년 9월 열대의 풍요로움, 신명고 환열의 춤: 말레이시아 민족무용 2014년 9월 세계 민족무용의 몸말 한국 전통 무용 국내 및 국외 공연 2000년 10월 한국 전통 명무전 시리즈 ‘진주명무전’ 2003년 9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4년 11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5년 9월 UCLA ‘세계종교음악축제’ 2005년 10월 한・일 명류(名流) 무용 감상회 및 한국 음악 감상회 2006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1차(창덕궁 연경당) 2007년 2월 필리핀 국립대학 한국 불교 무용과 음악공연 2007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2차(창덕궁 연경당) 2008년 10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3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4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세계민족무용연구소 개소 10주년 기념행사 ‘․참 춤’ 한・일 전통문화 교류 2000년 9월 ‘하야치네카구라 오오츠구나이’ -국립국악원 우면당 2000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0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1년 3월 일본 고전예능 ‘분라쿠(文樂)’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5월 인간문화재 한국고전예능 -시츠오카 음악당 2001년 10월 일본 고전예능 ‘노(能)’ 워크숍 및 공연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1-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2년 8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2-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8년 11월 세계교류공연 ‘한・일 고전예능의 명작’-일본 요코하마 노악당 2010년 8월 한국문화원 요츠야 청사 개원 1주년 공연 ‘한국의 풍경 : 한국 전통 예술과 未完의 大器들 -도쿄 한국문화원 한마당 홀 세미나, 심포지엄, 전시회 개최 2001년 12월 북한공훈예술가 리철우 초청 특별 세미나 2003년 5월 제1회 민족무용 사진전시회 개최 2004년 5월 한・중・일 궁중무용의 변천과 전승 국제학술회의 2006년 8월 한국 근・현대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육화대」・「처용무」 복원공연을 중심으로 학술발표회 2012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전통 춤이란 무엇인가 2012년 1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합 국제 심포지엄 2013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악무사상과 의례 2014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일본 전통 악무와 의례문화 2014년 9월 개소 15주년 기념 심포지엄 : 전통문화 재연과 문화콘텐츠를 위한 담론 학술지 발간 2002년 8월 민족무용 1호 발간 2002년 12월 민족무용 2호 발간 2003년 7월 민족무용 3호 발간 2003년 12월 민족무용 4호 발간 2004년 8월 민족무용 5호 발간 2004년 12월 민족무용 6호 발간 2005년 2월 민족무용 7호 발간 2005년 8월 민족무용 8호 발간 2006년 2월 민족무용 9호 발간 2006년 8월 민족무용 10호 발간 2007년 2월 민족무용 11호 발간 2007년 11월 민족무용 12호 발간 2009년 5월 민족무용 13호 발간 2010년 12월 민족무용 14호 발간 2011년 6월 민족무용 15호 발간 2012년 8월 민족무용 16호 발간 2013년 8월 민족무용 17호 발간 2014년 8월 민족무용 18호 발간 연구 총서 및 자료집 발간 2001년 12월 아시아 무용 음악 자료 해제집 발간 2005년 6월 학술총서: 1 완역집성 정재무도 홀기 발간 2005년 7월 학술총서: 2 한국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발간 2006년 11월 학술총서: 3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발간 2009년 9월 학술총서: 5 순조조 연경당 진작례 발간 2011년 8월 학술총서: 4 전통 무용의 변모와 현대적 계승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8 춘앵전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9 처용무 발간 2014년 6월 학술총서:10 일본 예악무의 융합적 연구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1 한국여악자료집-조선왕조실록편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2 선진악론집요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3 양한악론집요 발간 석학 초청 특강 2006년 10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브랜드로서의 한류」 2006년 11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정신적 항체: 문화자본주의」 2006년 12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한류: 리얼리즘」 2007년 3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Ⅰ」 2007년 4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Ⅱ」 2007년 5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Ⅲ」 2007년 6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유・불・도의 전통 미학」 연구과제 수행 2003년 8월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 인문사회분야 선정 2011년 12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선정(2011.12-2020.8) 미술원[편집] 조형연구소[편집] UA-SA 도시/건축연구소[편집]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편집] 사건·사고 및 논란[편집] 한예종 사태[편집] 직접적으로는 '황지우 총장의 퇴출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소요 사건'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내막에 대해 진보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이후 기존의 명문예술대학들이 점유하고 있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독점적 지위는 차츰 누그러져가던 상황이었다. 이들 명문예술대학들은 자신들의 연대와 대립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견제를 날로 강화해갔고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10년만의 정권교체 후 들어선 새 정부는 기존 문화 예술 기관장들의 교체를 시도하였으며 이에는 참여정부 말기 임명된 황지우 총장도 해당되었다. 따라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총장을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하고 한예종을 보수적 문화예술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자 '한예종에 대한 대대적 감사'를 시도했다는 것이 진보 언론계의 분석이다. 새 정부와 뜻을 같이하는 보수적 문화단체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황지우 총장이 진보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시인이었다는 점과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되었다는 점, 그리고 한예종의 주요 교수진들이 새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좌파 엘리트의 온상'으로 지명하고 한예종 전체에 '좌파' 낙인을 찍어버리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미 본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득권 명문예술대학 연합단체는 연일 '한예종 해체'를 주장하며 한예종의 기능을 축소시키려 했다는 것. 이러한 방침에 대한 저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파 정권에서는 우파 총장이 나와야 한다'는 신재민 문화부 차관의 발언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감사상의 부적격 조건을 들어 퇴출된 황지우 총장에 이어 뉴라이트 싱크넷의 발기인을 맡았던 박종원 총장이 교수진 투표를 통해 취임하게 되었고 협동과정원은 2011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총장의 사퇴와 문화부 감사 결과 이행으로 인해 현재는 한예종 사태가 일단락된 듯 보인다. 하지만 본교의 미래는 현 정부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존 사학재단들의 기득권이 엄연한 현 시점에서, 그리고 매 정권마다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된 이제까지의 상황에 비추어서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전망이다.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편집] 발족[편집] 2007년 ‘유비쿼터스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증가된 예술과 과학기술의 접속 기회를 예술교육의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고자 다양한 분야 학문(Multi-disciplinary) 혹은 통섭(通攝)학문 연구 사업의 추진을 위해 2008년 3월 미래교육준비단을 만들었다. 이에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대(포스텍)와 함께 U-AT(Ubiquitous-Art & Technology)와도 통섭 연구사업을 시작했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U-AT사업은 우선 9개의 Lab을 통해 기초 연구를 시작하고 2010년에는 한예종 내에 ‘통섭원’ 과정을 설립하여 한예종의 축적된 예술 교육의 성과를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창의적 예술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4년으로 계획된 이 연구사업은 1차년인 2008년 40억의 국가 예산이 배정되어 이중 30여억원이 집행되었고 예술과 과학기술 통섭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인 isAT2008 개최, 2008년 2학기 8개의 통섭시범교과 운영, 30여권의 교재및 연구 보고서, 총서 출간등의 성과가 있다. 참여 교수는 심광현(단장, AT-미디어 교육랩, 영상원 영상이론과교수), 전수환(부단장, 협동과정 예술경영과교수), 박현철(디지털 아카이빙랩, 영상원 영화과 교수), 이동연(예술과 놀이랩,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교수), 양승무(예술과 놀이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윤정섭(U 스마트시티랩,연극원장), 박인석(몰입경험문화디자인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장재호(특수음향 알고리즘랩, 음악원 뮤직테크놀로지과 교수),원일(디지털악가무랩, 전통예술원 음악과), 박세형(디지털모션그래픽스랩,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진중권(객원교수, 예술과 놀이랩 자문교수)이 있다. 해체[편집] 그러나 2008년 말 문화체육관광부의 결정에 따라 2009년 당초 예정된 예산 전액이 삭감되어 연구사업은 중지되었고 현재 협동과정내 단일 연구소(AT Lab)로 축소 5개의 시범교과를 운영중에 있다. 2008년 진행된 U-AT통섭사업에 대해 뚜렷이 드러난 성과가 약하거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근거였다. 한편 2009년 5월 1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예종에 대한 종합 감사 결과로 황지우총장의 중징계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 한예종의 일부 학과 축소및 폐지, AT Lab 교육 사업 중지, U-AT 관련 교수 징계 등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황지우 총장은 '정당한 학습권과 교권을 침해하는 반교육적 감사결과'임을 주장하며 2009년 5월 19일 총장직 사퇴를 선언하여 논란이 되었다.[1][2] 한편 통섭교육 사업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파행을 문제삼아 학교로부터 정직 3개월 처분된 심광현 교수가 2011년 4월 20일 서울행정법원에서의 행정소송에서 승소하여 1심 취소처분 판결을 받았다. 음악원 부정입학[편집] 2012년 4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음대 입시준비생들에게 불법으로 교습을 해 주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부정 입학시킨 혐의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이모 교수(44)를 구속했다고 밝혔다.[3][4] 이 교수는 제자 김모씨(22)를 한예종 음악원에 입학시켜주는 김씨 부모로부터 합격 사례비 명목으로 총 2억6000만원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0년 3월부터 10월까지 김씨를 상대로 시간당 15만원을 받고 40여 차례 불법 교습을 하는 등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한예종 음악원 입시생 13명을 상대로 불법레슨을 하고 4000만원 상당의 교습비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실기시험 채점자였던 이 교수는 제자 19명에게 최고점을 줘 한예종 음악원에 최종 합격시키기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5][6][7] 역대 총장[편집] 대수 임기 이름 1대 1992 ~ 2002 이강숙 2대 1992 ~ 2002 이강숙 3대 1992 ~ 2002 이강숙 4대 2002 ~ 2006 이건용 5대 2006 ~ 2009 황지우 6대 2009 ~ 2013 박종원 7대 2013 ~ 김봉렬 동문[편집] 분류: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각주[편집] ↑ 김범규 기자, 이득수 기자 (2009년 3월 19일). “진중권 참여 프로젝트, 30억대 사업부실 및 공금유용 의혹”. 《OURNEWS》. 2009년 5월 2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노형석기자 (2009년 5월 19일). “황지우 “한예종 구조개편 겨냥 표적감사 당했다” 총장직 사퇴…문화계 ‘진보성향 기관장 솎아내기’ 반발”. 한겨레.  ↑ 부정입학 뇌물 수수 한예종 교수 구속[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MBC》2012년 4월 28일 최기화 기자 ↑ 제자 입학시키고 돈 받은 한예종 교수 구속《YTN》2012년 4월 28일 조임정 기자 ↑ 불법과외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검거《민중의소리》2012년 4월 23일 최지현 기자 ↑ 부정입학·불법과외… 추악한 한예종 교수《서울신문》2012년 4월 28일 신진호 기자 ↑ 불법교습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구속《경향신문》2012년 4월 28일 외부 링크[편집]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 제20740호) vdeh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기재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안부 문체부 농식품부 산업부 복지부 환경부 고용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중기부 본부 소속 장관 차관(2인) 차관보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국어원 해외문화홍보원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중앙극장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정책방송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위원회 목록) 국립국악고등학교 국립국악중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중학교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 국립익산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자료보존연구센터 국립장애인도서관 국립세종도서관 국립국악원 민속국악원 남도국악원 부산국악원   산하 외청 문화재청 산하 공공기관 게임물관리위원회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국민체육진흥공단 국악방송 국제방송교류재단 그랜드코리아레저 대한장애인체육회 대한체육회 세종학당재단 아시아문화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의전당 정동극장 태권도진흥재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국관광공사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한국문학번역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정보원 한국문화진흥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저작권보호원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체육산업개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소관기관 국기원 뉴스통신진흥회 대한민국예술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언론중재위원회 한국관광협회중앙회 한국도핑방지위원회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한국문화원연합회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급으로 임명된다. 국립국악고등학교 및 국악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및 전통예술학교의 설립·운영권한을 문화체육관광부가 교육부로부터 위탁받았다.[1] 재외 한국문화원[2]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외교부 재외공관 부설기관으로 설치되며 해당 재외공관장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vdeh대한민국의 국립 대학 국립 공립 일반대학 강릉원주대학교 강원대학교4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북대학교4 경상대학교4 공주대학교 군산대학교 금오공과대학교 목포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대학교4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대학교1 4 순천대학교 안동대학교 인천대학교1 전남대학교4 전북대학교4 제주대학교4 창원대학교 충남대학교4 충북대학교4 한경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한밭대학교 교육대학 경인교육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대구교육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특수대학 광주과학기술원2 대구경북과학기술원2 울산과학기술원2 한국과학기술원2 한국예술종합학교3 한국전통문화대학교3 대학원대학 국립암센터국제암대학원대학교2 한국학대학원2 전문대학 한국농수산대학 한국복지대학교 방송통신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국립대법인 2특별법법인 3특별법국립 4거점국립대학교 vdeh 서울특별시의 대학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국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연건캠퍼스) 육군사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서울캠퍼스·도곡캠퍼스)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공립 서울시립대학교 사립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성신교정) 감리교신학대학교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광운대학교 국민대학교 케이씨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동덕여자대학교 명지대학교 (인문캠퍼스) 삼육대학교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 서강대학교 서경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성신여자대학교 세종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이화여자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 추계예술대학교 한국성서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한성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서울한영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전문대학 동양미래대학교 명지전문대학 배화여자대학교 삼육보건대학교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서일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인덕대학교 한국폴리텍Ⅰ대학 (서울강서캠퍼스·서울정수캠퍼스) 한양여자대학교 전공대학 국제예술대학교 백석예술대학교 정화예술대학교 대학원대학 개신대학원대학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북한대학원대학교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순복음대학원대학교 예명대학원대학교 용문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사이버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본부·서울지역대학) 경희사이버대학교 고려사이버대학교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서울캠퍼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서울캠퍼스·대학로캠퍼스·서초캠퍼스)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디지털대학교 (강서캠퍼스) 서울사이버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서울캠퍼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한양사이버대학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예술종합학교&oldid=23758629" 분류: 한국예술종합학교1993년 개교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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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36′ 19.8″ 동경 127° 3′ 21.8″ / 북위 37.605500° 동경 127.056056°  / 37.605500; 127.056056 한국예술종합학교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종류 국립 특수대학설립 1991년 12월 30일총장 김봉렬국가 대한민국위치 석관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서초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웹사이트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위치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 한국예술종합학교(韓國藝術綜合學校,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대학교이다. 1993년 국가정책 차원에서 예술 실기 전문 교육을 실시하여 전문적인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개교한 4년제 국립 특수대학으로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등의 예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목차 1 설립 1.1 교명 변경 1.2 학교 이전 2 특징 3 편제 3.1 학과 4 위치 5 부속 시설 5.1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5.2 한국예술영재교육원 5.3 한국예술연구소 5.4 문화예술교육센터 5.5 음악원 5.5.1 고음악연구소 5.5.2 컴퓨터음악연구소 5.5.3 한국작곡가연구소 5.6 연극원 5.6.1 극단 돌곶이 5.6.2 무대기술연구소 5.7 영상원 5.7.1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5.8 무용원 5.8.1 세계민족무용연구소 5.8.1.1 연혁 5.9 미술원 5.9.1 조형연구소 5.9.2 UA-SA 도시/건축연구소 5.9.3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 6 사건·사고 및 논란 6.1 한예종 사태 6.2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 6.2.1 발족 6.2.2 해체 6.3 음악원 부정입학 7 역대 총장 8 동문 9 각주 10 외부 링크 설립[편집]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4년제 국립 대학으로서 기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건 '대한민국 문화발전 10년 계획' 중 '세계적 국립예술대학 설립 공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990년 12월 25일 문화부 발전계획에 포함된 전문화된 국립예술대학으로의 설립이 계획되었고 1991년 12월 30일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이 제정 및 발효되었다. 1992년 10월 30일 직제를 확정하고 교학처와 사무국을 설치함으로써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그해 11월에 초대로 이강숙 총장이 부임하였으며 이후 1993년 음악원 개원을 시작으로 이후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차례대로 개원하였다. 교명 변경[편집] 국립한국예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려 했으나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되어 현재까지도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영문명은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에서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로 줄임말은 KNUA에서 K'Arts로 변경됐다) 학교 이전[편집]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의릉에 위치한 석관동 교사의 이전을 문화재청이 요청함에 따라 석관동 교사와 서초동 교사를 통합하여 이전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강남구 세곡동, 경기도 과천시, 고양시 등이 후보지로 이름을 올렸으나 이중에는 주민들이 유치를 반대하는 지역도 있고 부지가 다른 사업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어 이전 문제는 더욱 불투명하게 됐다. 학교 재정 문제 상 당장 이전을 추진하기도 어려워 해답이 보이지 않고 있다. 특징[편집]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대학으로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를 양성하여 대한민국의 문화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 개인의 충분한 창의적 재능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정원에 미달되어도 선발하지 않는 원칙을 통해 창의적 신인재를 발굴해낸다는 독특한 입시제도는 진정한 예술적 재능과 잠재적 가능성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창조적 소수를 지향하는 교육 철학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 대학과의 경쟁을 뛰어넘어 세계정상급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유학 없이 세계 최정상급의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설립취지답게 각종 국제 대회에서 영국왕립음악학교, 줄리아드 스쿨, 카네기 멜론 대학, 파리국립음악원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수한 수상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ALIA를 결성하여 국제교류도 하고 있다. 편제[편집] 1998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소관 부처가 교육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변경됐다. 1999년 학칙개정으로 예술사 과정을 수료하면 일반 대학의 학사 학위에 대응하는 예술사 학위가 수여되고 예술전문사 과정을 수료하면 석사 학위에 준하는 예술전문사 증서를 수여하게 되었다. 다만 박사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과[편집] 원 예술사 (학사) 실기과 이론과 음악원 성악과 · 기악과 · 작곡과 · 지휘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연극학과 · 연극학과 예술경영전공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이론과 · 이론과 예술경영전공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음악작곡과 한국예술학과 원 예술전문사 (석사) 학과 음악원 오페라과 · 가곡 및 오라토리오과 · 기악과 · 작곡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 지휘과 ·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 연극학과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 이론과 · 예술경영과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예술학과 협동과정 음악극창작과 위치[편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의릉에 대학 본부, 영상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연극원이 있고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음악원과 무용원이 위치해있다. 석관동 교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 서초동 교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 부속 시설[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2008년 8월 영재교육진흥법 제8조에 근거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로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국가 차원의 예술영재 조기 발굴 및 양성체계 구축을 설립목적으로 음악, 무용, 전통예술분야의 우수한 학생들(초3~고3)을 전액 장학금으로 교육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설립목적 잠재력 있는 예술영재의 조기 발굴 및 양성 예술영재 양성 체계 구축 및 양질의 예술영재교육 도모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예술교육을 활용한 예술영재교육의 모범사례 정립 교육개요 음악(기악, 성악, 작곡) 발레 전통예술(음악(기악, 성악), 무용, 연희) 교육대상 각 분야의 예술적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이 뛰어난 전국의 초·중·고등 학령기 아동 및 청소년 (분야 및 세부 전공에 따라 다름) 한국예술영재교육원 홈페이지 한국예술연구소[편집] 문화예술교육센터[편집] 음악원[편집] 고음악연구소[편집] 2005년 설립된 음악원 부설 고음악연구소. 한국의 여러 음악 분야중 고음악 분야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연구되고 있어 오자경소장(한예종 음악원 기악과 교수)을 중심으로 고음악에 대한 많은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매해 고음악에 대한 특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헤이그 음악 왕립 음대 학장인 Jan Kleinbussienk, Brabant Conservatorium 소속 “칸투스 모달리스”의 리더인 Dr. Rebecca Stewart의 특강과 일본의 바로크 댄스 전문가인 호나미 코가와 기요타카 야요시를 초청하여 바로크 시대의 춤과 음악에 대한 워크샵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컴퓨터음악연구소[편집] 음악원 부설 컴퓨터 음악 연구소는 컴퓨터를 사용한 음악 및 음향을 연구하며 알고리즘, 컨트롤링등 다양한 컴퓨터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경주 문화 EXPO 2000의 가상현실과 영상음악 및 음향 작업(KIST 협력 사업), 벤처 기업인 OrAndIf와의 논리 게임 "하비스의 진자” 음향 및 음악 제작, LG 전자의 핸드폰 벨 소리 개발 등 산학협력 프로젝트들이 있으며, MBC Radio PD 및 음향 기술자 연수 등의 교육 사업도 수행했다. 또한 한국전자음악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본 연구소는 ACC 2008(Osaka Geidai) 초청 음악회, Next Wave Concert 2008(KNUA) 등 컴퓨터음악 공연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한국작곡가연구소[편집] 무용원 부설 한국작곡가연구소는 창작음악에 대해 체계적인 관리가 안되는 현실에 맞춰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가들에 대한 분류, 연구, 교육분야를 중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원[편집] 극단 돌곶이[편집] 극단 돌곶이는 연극원 부설 극단으로 연극원에서 수학한 많은 학생들이 모체가 되어 문화 소외지역이나 일반인들에게 학교에서 배우고 경험한 다양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문화적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해외 각 국 연극학교, 학과와 교류하며 해외 연극제에도 참여하여 한국 연극계를 알리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01년 창단 준비공연 <봄이 눈뜰때>(베데킨트 작/조태준 연출)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리기 시작하여 2002년 창단공연 <우리나라 우투리>(김광림 작/연출)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올렸으며, 그 후 <미생자>(윤영선 작/이상우 연출), <쑥부쟁이>(추민주 작/연출),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최은이, 민준호 작/민준호 연출), <김종욱 찾기>(장유정 작/연출), <다리, The Bridge>(Peter. W. Willson 작/연출), <무거운 물>(윤정섭 작/연출), <비무장지대로 날아간 새>(Eli Simon, 김석만 각색/연출), (David Pledger 각색/연출), <당신이야기>(고재귀 작/김현우 연출), <당신의 의미>(김태형 작/이종성 연출), <모범생들>(지이선 작/김태형 연출), <바람속에 던져진 꽃>(이지홍 작/조규상 연출)을 공연하였다. 무대기술연구소[편집] 영상원[편집]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편집] 무용원[편집] 세계민족무용연구소[편집] 국가 문화정책에 기여하고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연구기관으로, 세계 각 국의 민족무용연구와 교류를 통해 우리 민족무용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발전시켜 학술적 체계를 정립함과 아울러 세계민족무용공연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2000년 9월 6일 개소한 연구기관이다. 연혁[편집] 세계무형문화재 초청공연 시리즈 1999년 9월 ‘일본 전통무용 노가쿠’ 초청공연 2000년 6월 인도사원예술의 진수 ‘쿠티야탐’ 한국 초연 2001년 6월 필리핀 민족무용 ‘신화 역사 그리고 통과의례의 몸짓’ 2002년 6월 ‘모쓰지(毛越寺) 엔넨(延年)의 춤’ 2003년 5월 ‘동양 춤 속의 여형’ 2004년 5월 ‘경극, 그 우아한 격정의 세계’ 2004년 5월 ‘천상의 무용, 방글라데시’ 2005년 5월 일본 무용 ‘우아함과 화려함, 그 양면성의 조화’ 2006년 5월 인도 무용 ‘떼얌: 고대 인도의 무속 춤’ 2007년 5월 캄보디아 왕립무용단 ‘땅과 물, 자연 속의 몸짓’ 2008년 5월 몽골 국립가무단 Tumen-Ekh ‘초원의 이야기’ 2009년 7월 일본 무용: 축제의 꿈 ‘에도 사토카구라’ 와카야마 다네오 2010년 8월 인도 무용: 신화의 몸짓 ‘카타칼리 Khatakali’ 2011년 9월 중국 소수 민족 춤 ‘불과 바람, 화합의 춤’ 2012년 9월 오키나와 류큐 궁중 무용: 남국의 풍정 2013년 9월 열대의 풍요로움, 신명고 환열의 춤: 말레이시아 민족무용 2014년 9월 세계 민족무용의 몸말 한국 전통 무용 국내 및 국외 공연 2000년 10월 한국 전통 명무전 시리즈 ‘진주명무전’ 2003년 9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4년 11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5년 9월 UCLA ‘세계종교음악축제’ 2005년 10월 한・일 명류(名流) 무용 감상회 및 한국 음악 감상회 2006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1차(창덕궁 연경당) 2007년 2월 필리핀 국립대학 한국 불교 무용과 음악공연 2007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2차(창덕궁 연경당) 2008년 10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3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4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세계민족무용연구소 개소 10주년 기념행사 ‘․참 춤’ 한・일 전통문화 교류 2000년 9월 ‘하야치네카구라 오오츠구나이’ -국립국악원 우면당 2000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0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1년 3월 일본 고전예능 ‘분라쿠(文樂)’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5월 인간문화재 한국고전예능 -시츠오카 음악당 2001년 10월 일본 고전예능 ‘노(能)’ 워크숍 및 공연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1-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2년 8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2-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8년 11월 세계교류공연 ‘한・일 고전예능의 명작’-일본 요코하마 노악당 2010년 8월 한국문화원 요츠야 청사 개원 1주년 공연 ‘한국의 풍경 : 한국 전통 예술과 未完의 大器들 -도쿄 한국문화원 한마당 홀 세미나, 심포지엄, 전시회 개최 2001년 12월 북한공훈예술가 리철우 초청 특별 세미나 2003년 5월 제1회 민족무용 사진전시회 개최 2004년 5월 한・중・일 궁중무용의 변천과 전승 국제학술회의 2006년 8월 한국 근・현대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육화대」・「처용무」 복원공연을 중심으로 학술발표회 2012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전통 춤이란 무엇인가 2012년 1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합 국제 심포지엄 2013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악무사상과 의례 2014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일본 전통 악무와 의례문화 2014년 9월 개소 15주년 기념 심포지엄 : 전통문화 재연과 문화콘텐츠를 위한 담론 학술지 발간 2002년 8월 민족무용 1호 발간 2002년 12월 민족무용 2호 발간 2003년 7월 민족무용 3호 발간 2003년 12월 민족무용 4호 발간 2004년 8월 민족무용 5호 발간 2004년 12월 민족무용 6호 발간 2005년 2월 민족무용 7호 발간 2005년 8월 민족무용 8호 발간 2006년 2월 민족무용 9호 발간 2006년 8월 민족무용 10호 발간 2007년 2월 민족무용 11호 발간 2007년 11월 민족무용 12호 발간 2009년 5월 민족무용 13호 발간 2010년 12월 민족무용 14호 발간 2011년 6월 민족무용 15호 발간 2012년 8월 민족무용 16호 발간 2013년 8월 민족무용 17호 발간 2014년 8월 민족무용 18호 발간 연구 총서 및 자료집 발간 2001년 12월 아시아 무용 음악 자료 해제집 발간 2005년 6월 학술총서: 1 완역집성 정재무도 홀기 발간 2005년 7월 학술총서: 2 한국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발간 2006년 11월 학술총서: 3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발간 2009년 9월 학술총서: 5 순조조 연경당 진작례 발간 2011년 8월 학술총서: 4 전통 무용의 변모와 현대적 계승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8 춘앵전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9 처용무 발간 2014년 6월 학술총서:10 일본 예악무의 융합적 연구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1 한국여악자료집-조선왕조실록편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2 선진악론집요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3 양한악론집요 발간 석학 초청 특강 2006년 10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브랜드로서의 한류」 2006년 11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정신적 항체: 문화자본주의」 2006년 12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한류: 리얼리즘」 2007년 3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Ⅰ」 2007년 4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Ⅱ」 2007년 5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Ⅲ」 2007년 6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유・불・도의 전통 미학」 연구과제 수행 2003년 8월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 인문사회분야 선정 2011년 12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선정(2011.12-2020.8) 미술원[편집] 조형연구소[편집] UA-SA 도시/건축연구소[편집]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편집] 사건·사고 및 논란[편집] 한예종 사태[편집] 직접적으로는 '황지우 총장의 퇴출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소요 사건'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내막에 대해 진보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이후 기존의 명문예술대학들이 점유하고 있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독점적 지위는 차츰 누그러져가던 상황이었다. 이들 명문예술대학들은 자신들의 연대와 대립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견제를 날로 강화해갔고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10년만의 정권교체 후 들어선 새 정부는 기존 문화 예술 기관장들의 교체를 시도하였으며 이에는 참여정부 말기 임명된 황지우 총장도 해당되었다. 따라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총장을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하고 한예종을 보수적 문화예술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자 '한예종에 대한 대대적 감사'를 시도했다는 것이 진보 언론계의 분석이다. 새 정부와 뜻을 같이하는 보수적 문화단체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황지우 총장이 진보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시인이었다는 점과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되었다는 점, 그리고 한예종의 주요 교수진들이 새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좌파 엘리트의 온상'으로 지명하고 한예종 전체에 '좌파' 낙인을 찍어버리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미 본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득권 명문예술대학 연합단체는 연일 '한예종 해체'를 주장하며 한예종의 기능을 축소시키려 했다는 것. 이러한 방침에 대한 저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파 정권에서는 우파 총장이 나와야 한다'는 신재민 문화부 차관의 발언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감사상의 부적격 조건을 들어 퇴출된 황지우 총장에 이어 뉴라이트 싱크넷의 발기인을 맡았던 박종원 총장이 교수진 투표를 통해 취임하게 되었고 협동과정원은 2011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총장의 사퇴와 문화부 감사 결과 이행으로 인해 현재는 한예종 사태가 일단락된 듯 보인다. 하지만 본교의 미래는 현 정부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존 사학재단들의 기득권이 엄연한 현 시점에서, 그리고 매 정권마다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된 이제까지의 상황에 비추어서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전망이다.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편집] 발족[편집] 2007년 ‘유비쿼터스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증가된 예술과 과학기술의 접속 기회를 예술교육의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고자 다양한 분야 학문(Multi-disciplinary) 혹은 통섭(通攝)학문 연구 사업의 추진을 위해 2008년 3월 미래교육준비단을 만들었다. 이에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대(포스텍)와 함께 U-AT(Ubiquitous-Art & Technology)와도 통섭 연구사업을 시작했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U-AT사업은 우선 9개의 Lab을 통해 기초 연구를 시작하고 2010년에는 한예종 내에 ‘통섭원’ 과정을 설립하여 한예종의 축적된 예술 교육의 성과를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창의적 예술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4년으로 계획된 이 연구사업은 1차년인 2008년 40억의 국가 예산이 배정되어 이중 30여억원이 집행되었고 예술과 과학기술 통섭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인 isAT2008 개최, 2008년 2학기 8개의 통섭시범교과 운영, 30여권의 교재및 연구 보고서, 총서 출간등의 성과가 있다. 참여 교수는 심광현(단장, AT-미디어 교육랩, 영상원 영상이론과교수), 전수환(부단장, 협동과정 예술경영과교수), 박현철(디지털 아카이빙랩, 영상원 영화과 교수), 이동연(예술과 놀이랩,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교수), 양승무(예술과 놀이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윤정섭(U 스마트시티랩,연극원장), 박인석(몰입경험문화디자인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장재호(특수음향 알고리즘랩, 음악원 뮤직테크놀로지과 교수),원일(디지털악가무랩, 전통예술원 음악과), 박세형(디지털모션그래픽스랩,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진중권(객원교수, 예술과 놀이랩 자문교수)이 있다. 해체[편집] 그러나 2008년 말 문화체육관광부의 결정에 따라 2009년 당초 예정된 예산 전액이 삭감되어 연구사업은 중지되었고 현재 협동과정내 단일 연구소(AT Lab)로 축소 5개의 시범교과를 운영중에 있다. 2008년 진행된 U-AT통섭사업에 대해 뚜렷이 드러난 성과가 약하거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근거였다. 한편 2009년 5월 1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예종에 대한 종합 감사 결과로 황지우총장의 중징계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 한예종의 일부 학과 축소및 폐지, AT Lab 교육 사업 중지, U-AT 관련 교수 징계 등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황지우 총장은 '정당한 학습권과 교권을 침해하는 반교육적 감사결과'임을 주장하며 2009년 5월 19일 총장직 사퇴를 선언하여 논란이 되었다.[1][2] 한편 통섭교육 사업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파행을 문제삼아 학교로부터 정직 3개월 처분된 심광현 교수가 2011년 4월 20일 서울행정법원에서의 행정소송에서 승소하여 1심 취소처분 판결을 받았다. 음악원 부정입학[편집] 2012년 4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음대 입시준비생들에게 불법으로 교습을 해 주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부정 입학시킨 혐의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이모 교수(44)를 구속했다고 밝혔다.[3][4] 이 교수는 제자 김모씨(22)를 한예종 음악원에 입학시켜주는 김씨 부모로부터 합격 사례비 명목으로 총 2억6000만원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0년 3월부터 10월까지 김씨를 상대로 시간당 15만원을 받고 40여 차례 불법 교습을 하는 등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한예종 음악원 입시생 13명을 상대로 불법레슨을 하고 4000만원 상당의 교습비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실기시험 채점자였던 이 교수는 제자 19명에게 최고점을 줘 한예종 음악원에 최종 합격시키기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5][6][7] 역대 총장[편집] 대수 임기 이름 1대 1992 ~ 2002 이강숙 2대 1992 ~ 2002 이강숙 3대 1992 ~ 2002 이강숙 4대 2002 ~ 2006 이건용 5대 2006 ~ 2009 황지우 6대 2009 ~ 2013 박종원 7대 2013 ~ 김봉렬 동문[편집] 분류: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각주[편집] ↑ 김범규 기자, 이득수 기자 (2009년 3월 19일). “진중권 참여 프로젝트, 30억대 사업부실 및 공금유용 의혹”. 《OURNEWS》. 2009년 5월 2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노형석기자 (2009년 5월 19일). “황지우 “한예종 구조개편 겨냥 표적감사 당했다” 총장직 사퇴…문화계 ‘진보성향 기관장 솎아내기’ 반발”. 한겨레.  ↑ 부정입학 뇌물 수수 한예종 교수 구속[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MBC》2012년 4월 28일 최기화 기자 ↑ 제자 입학시키고 돈 받은 한예종 교수 구속《YTN》2012년 4월 28일 조임정 기자 ↑ 불법과외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검거《민중의소리》2012년 4월 23일 최지현 기자 ↑ 부정입학·불법과외… 추악한 한예종 교수《서울신문》2012년 4월 28일 신진호 기자 ↑ 불법교습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구속《경향신문》2012년 4월 28일 외부 링크[편집]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 제20740호) vdeh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기재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안부 문체부 농식품부 산업부 복지부 환경부 고용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중기부 본부 소속 장관 차관(2인) 차관보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국어원 해외문화홍보원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중앙극장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정책방송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위원회 목록) 국립국악고등학교 국립국악중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중학교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 국립익산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자료보존연구센터 국립장애인도서관 국립세종도서관 국립국악원 민속국악원 남도국악원 부산국악원   산하 외청 문화재청 산하 공공기관 게임물관리위원회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국민체육진흥공단 국악방송 국제방송교류재단 그랜드코리아레저 대한장애인체육회 대한체육회 세종학당재단 아시아문화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의전당 정동극장 태권도진흥재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국관광공사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한국문학번역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정보원 한국문화진흥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저작권보호원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체육산업개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소관기관 국기원 뉴스통신진흥회 대한민국예술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언론중재위원회 한국관광협회중앙회 한국도핑방지위원회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한국문화원연합회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급으로 임명된다. 국립국악고등학교 및 국악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및 전통예술학교의 설립·운영권한을 문화체육관광부가 교육부로부터 위탁받았다.[1] 재외 한국문화원[2]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외교부 재외공관 부설기관으로 설치되며 해당 재외공관장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vdeh대한민국의 국립 대학 국립 공립 일반대학 강릉원주대학교 강원대학교4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북대학교4 경상대학교4 공주대학교 군산대학교 금오공과대학교 목포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대학교4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대학교1 4 순천대학교 안동대학교 인천대학교1 전남대학교4 전북대학교4 제주대학교4 창원대학교 충남대학교4 충북대학교4 한경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한밭대학교 교육대학 경인교육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대구교육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특수대학 광주과학기술원2 대구경북과학기술원2 울산과학기술원2 한국과학기술원2 한국예술종합학교3 한국전통문화대학교3 대학원대학 국립암센터국제암대학원대학교2 한국학대학원2 전문대학 한국농수산대학 한국복지대학교 방송통신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국립대법인 2특별법법인 3특별법국립 4거점국립대학교 vdeh 서울특별시의 대학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국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연건캠퍼스) 육군사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서울캠퍼스·도곡캠퍼스)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공립 서울시립대학교 사립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성신교정) 감리교신학대학교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광운대학교 국민대학교 케이씨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동덕여자대학교 명지대학교 (인문캠퍼스) 삼육대학교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 서강대학교 서경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성신여자대학교 세종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이화여자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 추계예술대학교 한국성서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한성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서울한영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전문대학 동양미래대학교 명지전문대학 배화여자대학교 삼육보건대학교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서일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인덕대학교 한국폴리텍Ⅰ대학 (서울강서캠퍼스·서울정수캠퍼스) 한양여자대학교 전공대학 국제예술대학교 백석예술대학교 정화예술대학교 대학원대학 개신대학원대학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북한대학원대학교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순복음대학원대학교 예명대학원대학교 용문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사이버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본부·서울지역대학) 경희사이버대학교 고려사이버대학교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서울캠퍼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서울캠퍼스·대학로캠퍼스·서초캠퍼스)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디지털대학교 (강서캠퍼스) 서울사이버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서울캠퍼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한양사이버대학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예술종합학교&oldid=23758629" 분류: 한국예술종합학교1993년 개교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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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36′ 19.8″ 동경 127° 3′ 21.8″ / 북위 37.605500° 동경 127.056056°  / 37.605500; 127.056056 한국예술종합학교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종류 국립 특수대학설립 1991년 12월 30일총장 김봉렬국가 대한민국위치 석관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서초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웹사이트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위치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 한국예술종합학교(韓國藝術綜合學校,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대학교이다. 1993년 국가정책 차원에서 예술 실기 전문 교육을 실시하여 전문적인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개교한 4년제 국립 특수대학으로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등의 예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목차 1 설립 1.1 교명 변경 1.2 학교 이전 2 특징 3 편제 3.1 학과 4 위치 5 부속 시설 5.1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5.2 한국예술영재교육원 5.3 한국예술연구소 5.4 문화예술교육센터 5.5 음악원 5.5.1 고음악연구소 5.5.2 컴퓨터음악연구소 5.5.3 한국작곡가연구소 5.6 연극원 5.6.1 극단 돌곶이 5.6.2 무대기술연구소 5.7 영상원 5.7.1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5.8 무용원 5.8.1 세계민족무용연구소 5.8.1.1 연혁 5.9 미술원 5.9.1 조형연구소 5.9.2 UA-SA 도시/건축연구소 5.9.3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 6 사건·사고 및 논란 6.1 한예종 사태 6.2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 6.2.1 발족 6.2.2 해체 6.3 음악원 부정입학 7 역대 총장 8 동문 9 각주 10 외부 링크 설립[편집]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4년제 국립 대학으로서 기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건 '대한민국 문화발전 10년 계획' 중 '세계적 국립예술대학 설립 공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990년 12월 25일 문화부 발전계획에 포함된 전문화된 국립예술대학으로의 설립이 계획되었고 1991년 12월 30일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이 제정 및 발효되었다. 1992년 10월 30일 직제를 확정하고 교학처와 사무국을 설치함으로써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그해 11월에 초대로 이강숙 총장이 부임하였으며 이후 1993년 음악원 개원을 시작으로 이후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차례대로 개원하였다. 교명 변경[편집] 국립한국예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려 했으나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되어 현재까지도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영문명은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에서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로 줄임말은 KNUA에서 K'Arts로 변경됐다) 학교 이전[편집]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의릉에 위치한 석관동 교사의 이전을 문화재청이 요청함에 따라 석관동 교사와 서초동 교사를 통합하여 이전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강남구 세곡동, 경기도 과천시, 고양시 등이 후보지로 이름을 올렸으나 이중에는 주민들이 유치를 반대하는 지역도 있고 부지가 다른 사업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어 이전 문제는 더욱 불투명하게 됐다. 학교 재정 문제 상 당장 이전을 추진하기도 어려워 해답이 보이지 않고 있다. 특징[편집]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대학으로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를 양성하여 대한민국의 문화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 개인의 충분한 창의적 재능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정원에 미달되어도 선발하지 않는 원칙을 통해 창의적 신인재를 발굴해낸다는 독특한 입시제도는 진정한 예술적 재능과 잠재적 가능성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창조적 소수를 지향하는 교육 철학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 대학과의 경쟁을 뛰어넘어 세계정상급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유학 없이 세계 최정상급의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설립취지답게 각종 국제 대회에서 영국왕립음악학교, 줄리아드 스쿨, 카네기 멜론 대학, 파리국립음악원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수한 수상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ALIA를 결성하여 국제교류도 하고 있다. 편제[편집] 1998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소관 부처가 교육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변경됐다. 1999년 학칙개정으로 예술사 과정을 수료하면 일반 대학의 학사 학위에 대응하는 예술사 학위가 수여되고 예술전문사 과정을 수료하면 석사 학위에 준하는 예술전문사 증서를 수여하게 되었다. 다만 박사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과[편집] 원 예술사 (학사) 실기과 이론과 음악원 성악과 · 기악과 · 작곡과 · 지휘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연극학과 · 연극학과 예술경영전공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이론과 · 이론과 예술경영전공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음악작곡과 한국예술학과 원 예술전문사 (석사) 학과 음악원 오페라과 · 가곡 및 오라토리오과 · 기악과 · 작곡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 지휘과 ·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 연극학과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 이론과 · 예술경영과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예술학과 협동과정 음악극창작과 위치[편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의릉에 대학 본부, 영상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연극원이 있고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음악원과 무용원이 위치해있다. 석관동 교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 서초동 교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 부속 시설[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2008년 8월 영재교육진흥법 제8조에 근거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로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국가 차원의 예술영재 조기 발굴 및 양성체계 구축을 설립목적으로 음악, 무용, 전통예술분야의 우수한 학생들(초3~고3)을 전액 장학금으로 교육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설립목적 잠재력 있는 예술영재의 조기 발굴 및 양성 예술영재 양성 체계 구축 및 양질의 예술영재교육 도모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예술교육을 활용한 예술영재교육의 모범사례 정립 교육개요 음악(기악, 성악, 작곡) 발레 전통예술(음악(기악, 성악), 무용, 연희) 교육대상 각 분야의 예술적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이 뛰어난 전국의 초·중·고등 학령기 아동 및 청소년 (분야 및 세부 전공에 따라 다름) 한국예술영재교육원 홈페이지 한국예술연구소[편집] 문화예술교육센터[편집] 음악원[편집] 고음악연구소[편집] 2005년 설립된 음악원 부설 고음악연구소. 한국의 여러 음악 분야중 고음악 분야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연구되고 있어 오자경소장(한예종 음악원 기악과 교수)을 중심으로 고음악에 대한 많은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매해 고음악에 대한 특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헤이그 음악 왕립 음대 학장인 Jan Kleinbussienk, Brabant Conservatorium 소속 “칸투스 모달리스”의 리더인 Dr. Rebecca Stewart의 특강과 일본의 바로크 댄스 전문가인 호나미 코가와 기요타카 야요시를 초청하여 바로크 시대의 춤과 음악에 대한 워크샵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컴퓨터음악연구소[편집] 음악원 부설 컴퓨터 음악 연구소는 컴퓨터를 사용한 음악 및 음향을 연구하며 알고리즘, 컨트롤링등 다양한 컴퓨터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경주 문화 EXPO 2000의 가상현실과 영상음악 및 음향 작업(KIST 협력 사업), 벤처 기업인 OrAndIf와의 논리 게임 "하비스의 진자” 음향 및 음악 제작, LG 전자의 핸드폰 벨 소리 개발 등 산학협력 프로젝트들이 있으며, MBC Radio PD 및 음향 기술자 연수 등의 교육 사업도 수행했다. 또한 한국전자음악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본 연구소는 ACC 2008(Osaka Geidai) 초청 음악회, Next Wave Concert 2008(KNUA) 등 컴퓨터음악 공연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한국작곡가연구소[편집] 무용원 부설 한국작곡가연구소는 창작음악에 대해 체계적인 관리가 안되는 현실에 맞춰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가들에 대한 분류, 연구, 교육분야를 중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원[편집] 극단 돌곶이[편집] 극단 돌곶이는 연극원 부설 극단으로 연극원에서 수학한 많은 학생들이 모체가 되어 문화 소외지역이나 일반인들에게 학교에서 배우고 경험한 다양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문화적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해외 각 국 연극학교, 학과와 교류하며 해외 연극제에도 참여하여 한국 연극계를 알리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01년 창단 준비공연 <봄이 눈뜰때>(베데킨트 작/조태준 연출)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리기 시작하여 2002년 창단공연 <우리나라 우투리>(김광림 작/연출)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올렸으며, 그 후 <미생자>(윤영선 작/이상우 연출), <쑥부쟁이>(추민주 작/연출),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최은이, 민준호 작/민준호 연출), <김종욱 찾기>(장유정 작/연출), <다리, The Bridge>(Peter. W. Willson 작/연출), <무거운 물>(윤정섭 작/연출), <비무장지대로 날아간 새>(Eli Simon, 김석만 각색/연출), (David Pledger 각색/연출), <당신이야기>(고재귀 작/김현우 연출), <당신의 의미>(김태형 작/이종성 연출), <모범생들>(지이선 작/김태형 연출), <바람속에 던져진 꽃>(이지홍 작/조규상 연출)을 공연하였다. 무대기술연구소[편집] 영상원[편집]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편집] 무용원[편집] 세계민족무용연구소[편집] 국가 문화정책에 기여하고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연구기관으로, 세계 각 국의 민족무용연구와 교류를 통해 우리 민족무용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발전시켜 학술적 체계를 정립함과 아울러 세계민족무용공연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2000년 9월 6일 개소한 연구기관이다. 연혁[편집] 세계무형문화재 초청공연 시리즈 1999년 9월 ‘일본 전통무용 노가쿠’ 초청공연 2000년 6월 인도사원예술의 진수 ‘쿠티야탐’ 한국 초연 2001년 6월 필리핀 민족무용 ‘신화 역사 그리고 통과의례의 몸짓’ 2002년 6월 ‘모쓰지(毛越寺) 엔넨(延年)의 춤’ 2003년 5월 ‘동양 춤 속의 여형’ 2004년 5월 ‘경극, 그 우아한 격정의 세계’ 2004년 5월 ‘천상의 무용, 방글라데시’ 2005년 5월 일본 무용 ‘우아함과 화려함, 그 양면성의 조화’ 2006년 5월 인도 무용 ‘떼얌: 고대 인도의 무속 춤’ 2007년 5월 캄보디아 왕립무용단 ‘땅과 물, 자연 속의 몸짓’ 2008년 5월 몽골 국립가무단 Tumen-Ekh ‘초원의 이야기’ 2009년 7월 일본 무용: 축제의 꿈 ‘에도 사토카구라’ 와카야마 다네오 2010년 8월 인도 무용: 신화의 몸짓 ‘카타칼리 Khatakali’ 2011년 9월 중국 소수 민족 춤 ‘불과 바람, 화합의 춤’ 2012년 9월 오키나와 류큐 궁중 무용: 남국의 풍정 2013년 9월 열대의 풍요로움, 신명고 환열의 춤: 말레이시아 민족무용 2014년 9월 세계 민족무용의 몸말 한국 전통 무용 국내 및 국외 공연 2000년 10월 한국 전통 명무전 시리즈 ‘진주명무전’ 2003년 9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4년 11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5년 9월 UCLA ‘세계종교음악축제’ 2005년 10월 한・일 명류(名流) 무용 감상회 및 한국 음악 감상회 2006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1차(창덕궁 연경당) 2007년 2월 필리핀 국립대학 한국 불교 무용과 음악공연 2007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2차(창덕궁 연경당) 2008년 10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3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4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세계민족무용연구소 개소 10주년 기념행사 ‘․참 춤’ 한・일 전통문화 교류 2000년 9월 ‘하야치네카구라 오오츠구나이’ -국립국악원 우면당 2000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0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1년 3월 일본 고전예능 ‘분라쿠(文樂)’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5월 인간문화재 한국고전예능 -시츠오카 음악당 2001년 10월 일본 고전예능 ‘노(能)’ 워크숍 및 공연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1-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2년 8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2-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8년 11월 세계교류공연 ‘한・일 고전예능의 명작’-일본 요코하마 노악당 2010년 8월 한국문화원 요츠야 청사 개원 1주년 공연 ‘한국의 풍경 : 한국 전통 예술과 未完의 大器들 -도쿄 한국문화원 한마당 홀 세미나, 심포지엄, 전시회 개최 2001년 12월 북한공훈예술가 리철우 초청 특별 세미나 2003년 5월 제1회 민족무용 사진전시회 개최 2004년 5월 한・중・일 궁중무용의 변천과 전승 국제학술회의 2006년 8월 한국 근・현대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육화대」・「처용무」 복원공연을 중심으로 학술발표회 2012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전통 춤이란 무엇인가 2012년 1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합 국제 심포지엄 2013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악무사상과 의례 2014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일본 전통 악무와 의례문화 2014년 9월 개소 15주년 기념 심포지엄 : 전통문화 재연과 문화콘텐츠를 위한 담론 학술지 발간 2002년 8월 민족무용 1호 발간 2002년 12월 민족무용 2호 발간 2003년 7월 민족무용 3호 발간 2003년 12월 민족무용 4호 발간 2004년 8월 민족무용 5호 발간 2004년 12월 민족무용 6호 발간 2005년 2월 민족무용 7호 발간 2005년 8월 민족무용 8호 발간 2006년 2월 민족무용 9호 발간 2006년 8월 민족무용 10호 발간 2007년 2월 민족무용 11호 발간 2007년 11월 민족무용 12호 발간 2009년 5월 민족무용 13호 발간 2010년 12월 민족무용 14호 발간 2011년 6월 민족무용 15호 발간 2012년 8월 민족무용 16호 발간 2013년 8월 민족무용 17호 발간 2014년 8월 민족무용 18호 발간 연구 총서 및 자료집 발간 2001년 12월 아시아 무용 음악 자료 해제집 발간 2005년 6월 학술총서: 1 완역집성 정재무도 홀기 발간 2005년 7월 학술총서: 2 한국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발간 2006년 11월 학술총서: 3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발간 2009년 9월 학술총서: 5 순조조 연경당 진작례 발간 2011년 8월 학술총서: 4 전통 무용의 변모와 현대적 계승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8 춘앵전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9 처용무 발간 2014년 6월 학술총서:10 일본 예악무의 융합적 연구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1 한국여악자료집-조선왕조실록편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2 선진악론집요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3 양한악론집요 발간 석학 초청 특강 2006년 10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브랜드로서의 한류」 2006년 11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정신적 항체: 문화자본주의」 2006년 12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한류: 리얼리즘」 2007년 3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Ⅰ」 2007년 4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Ⅱ」 2007년 5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Ⅲ」 2007년 6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유・불・도의 전통 미학」 연구과제 수행 2003년 8월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 인문사회분야 선정 2011년 12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선정(2011.12-2020.8) 미술원[편집] 조형연구소[편집] UA-SA 도시/건축연구소[편집]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편집] 사건·사고 및 논란[편집] 한예종 사태[편집] 직접적으로는 '황지우 총장의 퇴출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소요 사건'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내막에 대해 진보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이후 기존의 명문예술대학들이 점유하고 있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독점적 지위는 차츰 누그러져가던 상황이었다. 이들 명문예술대학들은 자신들의 연대와 대립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견제를 날로 강화해갔고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10년만의 정권교체 후 들어선 새 정부는 기존 문화 예술 기관장들의 교체를 시도하였으며 이에는 참여정부 말기 임명된 황지우 총장도 해당되었다. 따라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총장을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하고 한예종을 보수적 문화예술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자 '한예종에 대한 대대적 감사'를 시도했다는 것이 진보 언론계의 분석이다. 새 정부와 뜻을 같이하는 보수적 문화단체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황지우 총장이 진보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시인이었다는 점과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되었다는 점, 그리고 한예종의 주요 교수진들이 새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좌파 엘리트의 온상'으로 지명하고 한예종 전체에 '좌파' 낙인을 찍어버리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미 본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득권 명문예술대학 연합단체는 연일 '한예종 해체'를 주장하며 한예종의 기능을 축소시키려 했다는 것. 이러한 방침에 대한 저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파 정권에서는 우파 총장이 나와야 한다'는 신재민 문화부 차관의 발언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감사상의 부적격 조건을 들어 퇴출된 황지우 총장에 이어 뉴라이트 싱크넷의 발기인을 맡았던 박종원 총장이 교수진 투표를 통해 취임하게 되었고 협동과정원은 2011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총장의 사퇴와 문화부 감사 결과 이행으로 인해 현재는 한예종 사태가 일단락된 듯 보인다. 하지만 본교의 미래는 현 정부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존 사학재단들의 기득권이 엄연한 현 시점에서, 그리고 매 정권마다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된 이제까지의 상황에 비추어서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전망이다.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편집] 발족[편집] 2007년 ‘유비쿼터스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증가된 예술과 과학기술의 접속 기회를 예술교육의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고자 다양한 분야 학문(Multi-disciplinary) 혹은 통섭(通攝)학문 연구 사업의 추진을 위해 2008년 3월 미래교육준비단을 만들었다. 이에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대(포스텍)와 함께 U-AT(Ubiquitous-Art & Technology)와도 통섭 연구사업을 시작했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U-AT사업은 우선 9개의 Lab을 통해 기초 연구를 시작하고 2010년에는 한예종 내에 ‘통섭원’ 과정을 설립하여 한예종의 축적된 예술 교육의 성과를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창의적 예술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4년으로 계획된 이 연구사업은 1차년인 2008년 40억의 국가 예산이 배정되어 이중 30여억원이 집행되었고 예술과 과학기술 통섭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인 isAT2008 개최, 2008년 2학기 8개의 통섭시범교과 운영, 30여권의 교재및 연구 보고서, 총서 출간등의 성과가 있다. 참여 교수는 심광현(단장, AT-미디어 교육랩, 영상원 영상이론과교수), 전수환(부단장, 협동과정 예술경영과교수), 박현철(디지털 아카이빙랩, 영상원 영화과 교수), 이동연(예술과 놀이랩,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교수), 양승무(예술과 놀이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윤정섭(U 스마트시티랩,연극원장), 박인석(몰입경험문화디자인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장재호(특수음향 알고리즘랩, 음악원 뮤직테크놀로지과 교수),원일(디지털악가무랩, 전통예술원 음악과), 박세형(디지털모션그래픽스랩,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진중권(객원교수, 예술과 놀이랩 자문교수)이 있다. 해체[편집] 그러나 2008년 말 문화체육관광부의 결정에 따라 2009년 당초 예정된 예산 전액이 삭감되어 연구사업은 중지되었고 현재 협동과정내 단일 연구소(AT Lab)로 축소 5개의 시범교과를 운영중에 있다. 2008년 진행된 U-AT통섭사업에 대해 뚜렷이 드러난 성과가 약하거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근거였다. 한편 2009년 5월 1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예종에 대한 종합 감사 결과로 황지우총장의 중징계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 한예종의 일부 학과 축소및 폐지, AT Lab 교육 사업 중지, U-AT 관련 교수 징계 등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황지우 총장은 '정당한 학습권과 교권을 침해하는 반교육적 감사결과'임을 주장하며 2009년 5월 19일 총장직 사퇴를 선언하여 논란이 되었다.[1][2] 한편 통섭교육 사업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파행을 문제삼아 학교로부터 정직 3개월 처분된 심광현 교수가 2011년 4월 20일 서울행정법원에서의 행정소송에서 승소하여 1심 취소처분 판결을 받았다. 음악원 부정입학[편집] 2012년 4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음대 입시준비생들에게 불법으로 교습을 해 주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부정 입학시킨 혐의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이모 교수(44)를 구속했다고 밝혔다.[3][4] 이 교수는 제자 김모씨(22)를 한예종 음악원에 입학시켜주는 김씨 부모로부터 합격 사례비 명목으로 총 2억6000만원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0년 3월부터 10월까지 김씨를 상대로 시간당 15만원을 받고 40여 차례 불법 교습을 하는 등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한예종 음악원 입시생 13명을 상대로 불법레슨을 하고 4000만원 상당의 교습비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실기시험 채점자였던 이 교수는 제자 19명에게 최고점을 줘 한예종 음악원에 최종 합격시키기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5][6][7] 역대 총장[편집] 대수 임기 이름 1대 1992 ~ 2002 이강숙 2대 1992 ~ 2002 이강숙 3대 1992 ~ 2002 이강숙 4대 2002 ~ 2006 이건용 5대 2006 ~ 2009 황지우 6대 2009 ~ 2013 박종원 7대 2013 ~ 김봉렬 동문[편집] 분류: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각주[편집] ↑ 김범규 기자, 이득수 기자 (2009년 3월 19일). “진중권 참여 프로젝트, 30억대 사업부실 및 공금유용 의혹”. 《OURNEWS》. 2009년 5월 2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노형석기자 (2009년 5월 19일). “황지우 “한예종 구조개편 겨냥 표적감사 당했다” 총장직 사퇴…문화계 ‘진보성향 기관장 솎아내기’ 반발”. 한겨레.  ↑ 부정입학 뇌물 수수 한예종 교수 구속[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MBC》2012년 4월 28일 최기화 기자 ↑ 제자 입학시키고 돈 받은 한예종 교수 구속《YTN》2012년 4월 28일 조임정 기자 ↑ 불법과외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검거《민중의소리》2012년 4월 23일 최지현 기자 ↑ 부정입학·불법과외… 추악한 한예종 교수《서울신문》2012년 4월 28일 신진호 기자 ↑ 불법교습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구속《경향신문》2012년 4월 28일 외부 링크[편집]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 제20740호) vdeh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기재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안부 문체부 농식품부 산업부 복지부 환경부 고용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중기부 본부 소속 장관 차관(2인) 차관보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국어원 해외문화홍보원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중앙극장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정책방송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위원회 목록) 국립국악고등학교 국립국악중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중학교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 국립익산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자료보존연구센터 국립장애인도서관 국립세종도서관 국립국악원 민속국악원 남도국악원 부산국악원   산하 외청 문화재청 산하 공공기관 게임물관리위원회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국민체육진흥공단 국악방송 국제방송교류재단 그랜드코리아레저 대한장애인체육회 대한체육회 세종학당재단 아시아문화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의전당 정동극장 태권도진흥재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국관광공사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한국문학번역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정보원 한국문화진흥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저작권보호원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체육산업개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소관기관 국기원 뉴스통신진흥회 대한민국예술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언론중재위원회 한국관광협회중앙회 한국도핑방지위원회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한국문화원연합회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급으로 임명된다. 국립국악고등학교 및 국악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및 전통예술학교의 설립·운영권한을 문화체육관광부가 교육부로부터 위탁받았다.[1] 재외 한국문화원[2]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외교부 재외공관 부설기관으로 설치되며 해당 재외공관장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vdeh대한민국의 국립 대학 국립 공립 일반대학 강릉원주대학교 강원대학교4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북대학교4 경상대학교4 공주대학교 군산대학교 금오공과대학교 목포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대학교4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대학교1 4 순천대학교 안동대학교 인천대학교1 전남대학교4 전북대학교4 제주대학교4 창원대학교 충남대학교4 충북대학교4 한경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한밭대학교 교육대학 경인교육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대구교육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특수대학 광주과학기술원2 대구경북과학기술원2 울산과학기술원2 한국과학기술원2 한국예술종합학교3 한국전통문화대학교3 대학원대학 국립암센터국제암대학원대학교2 한국학대학원2 전문대학 한국농수산대학 한국복지대학교 방송통신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국립대법인 2특별법법인 3특별법국립 4거점국립대학교 vdeh 서울특별시의 대학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국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연건캠퍼스) 육군사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서울캠퍼스·도곡캠퍼스)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공립 서울시립대학교 사립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성신교정) 감리교신학대학교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광운대학교 국민대학교 케이씨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동덕여자대학교 명지대학교 (인문캠퍼스) 삼육대학교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 서강대학교 서경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성신여자대학교 세종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이화여자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 추계예술대학교 한국성서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한성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서울한영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전문대학 동양미래대학교 명지전문대학 배화여자대학교 삼육보건대학교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서일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인덕대학교 한국폴리텍Ⅰ대학 (서울강서캠퍼스·서울정수캠퍼스) 한양여자대학교 전공대학 국제예술대학교 백석예술대학교 정화예술대학교 대학원대학 개신대학원대학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북한대학원대학교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순복음대학원대학교 예명대학원대학교 용문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사이버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본부·서울지역대학) 경희사이버대학교 고려사이버대학교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서울캠퍼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서울캠퍼스·대학로캠퍼스·서초캠퍼스)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디지털대학교 (강서캠퍼스) 서울사이버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서울캠퍼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한양사이버대학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예술종합학교&oldid=23758629" 분류: 한국예술종합학교1993년 개교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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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36′ 19.8″ 동경 127° 3′ 21.8″ / 북위 37.605500° 동경 127.056056°  / 37.605500; 127.056056 한국예술종합학교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종류 국립 특수대학설립 1991년 12월 30일총장 김봉렬국가 대한민국위치 석관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서초동캠퍼스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웹사이트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위치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 한국예술종합학교(韓國藝術綜合學校,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대학교이다. 1993년 국가정책 차원에서 예술 실기 전문 교육을 실시하여 전문적인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개교한 4년제 국립 특수대학으로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등의 예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목차 1 설립 1.1 교명 변경 1.2 학교 이전 2 특징 3 편제 3.1 학과 4 위치 5 부속 시설 5.1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5.2 한국예술영재교육원 5.3 한국예술연구소 5.4 문화예술교육센터 5.5 음악원 5.5.1 고음악연구소 5.5.2 컴퓨터음악연구소 5.5.3 한국작곡가연구소 5.6 연극원 5.6.1 극단 돌곶이 5.6.2 무대기술연구소 5.7 영상원 5.7.1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5.8 무용원 5.8.1 세계민족무용연구소 5.8.1.1 연혁 5.9 미술원 5.9.1 조형연구소 5.9.2 UA-SA 도시/건축연구소 5.9.3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 6 사건·사고 및 논란 6.1 한예종 사태 6.2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 6.2.1 발족 6.2.2 해체 6.3 음악원 부정입학 7 역대 총장 8 동문 9 각주 10 외부 링크 설립[편집]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4년제 국립 대학으로서 기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건 '대한민국 문화발전 10년 계획' 중 '세계적 국립예술대학 설립 공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990년 12월 25일 문화부 발전계획에 포함된 전문화된 국립예술대학으로의 설립이 계획되었고 1991년 12월 30일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이 제정 및 발효되었다. 1992년 10월 30일 직제를 확정하고 교학처와 사무국을 설치함으로써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그해 11월에 초대로 이강숙 총장이 부임하였으며 이후 1993년 음악원 개원을 시작으로 이후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차례대로 개원하였다. 교명 변경[편집] 국립한국예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려 했으나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되어 현재까지도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영문명은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에서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로 줄임말은 KNUA에서 K'Arts로 변경됐다) 학교 이전[편집]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의릉에 위치한 석관동 교사의 이전을 문화재청이 요청함에 따라 석관동 교사와 서초동 교사를 통합하여 이전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강남구 세곡동, 경기도 과천시, 고양시 등이 후보지로 이름을 올렸으나 이중에는 주민들이 유치를 반대하는 지역도 있고 부지가 다른 사업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어 이전 문제는 더욱 불투명하게 됐다. 학교 재정 문제 상 당장 이전을 추진하기도 어려워 해답이 보이지 않고 있다. 특징[편집]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대학으로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를 양성하여 대한민국의 문화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 개인의 충분한 창의적 재능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정원에 미달되어도 선발하지 않는 원칙을 통해 창의적 신인재를 발굴해낸다는 독특한 입시제도는 진정한 예술적 재능과 잠재적 가능성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창조적 소수를 지향하는 교육 철학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 대학과의 경쟁을 뛰어넘어 세계정상급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유학 없이 세계 최정상급의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설립취지답게 각종 국제 대회에서 영국왕립음악학교, 줄리아드 스쿨, 카네기 멜론 대학, 파리국립음악원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수한 수상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ALIA를 결성하여 국제교류도 하고 있다. 편제[편집] 1998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소관 부처가 교육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변경됐다. 1999년 학칙개정으로 예술사 과정을 수료하면 일반 대학의 학사 학위에 대응하는 예술사 학위가 수여되고 예술전문사 과정을 수료하면 석사 학위에 준하는 예술전문사 증서를 수여하게 되었다. 다만 박사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과[편집] 원 예술사 (학사) 실기과 이론과 음악원 성악과 · 기악과 · 작곡과 · 지휘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연극학과 · 연극학과 예술경영전공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이론과 · 이론과 예술경영전공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음악작곡과 한국예술학과 원 예술전문사 (석사) 학과 음악원 오페라과 · 가곡 및 오라토리오과 · 기악과 · 작곡과 · 음악테크놀러지과 · 지휘과 · 음악학과 연극원 극작과 · 무대미술과 · 연기과 · 연출과 · 연극학과 영상원 영화과 · 방송영상과 · 멀티미디어영상과 · 애니메이션과 · 영상이론과 무용원 실기과 · 창작과 · 이론과 · 예술경영과 미술원 조형예술과 · 디자인과 · 건축과 · 미술이론과 전통예술원 음악과 · 무용과 · 연희과 · 한국예술학과 협동과정 음악극창작과 위치[편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의릉에 대학 본부, 영상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연극원이 있고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음악원과 무용원이 위치해있다. 석관동 교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 서초동 교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374 부속 시설[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편집]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2008년 8월 영재교육진흥법 제8조에 근거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로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국가 차원의 예술영재 조기 발굴 및 양성체계 구축을 설립목적으로 음악, 무용, 전통예술분야의 우수한 학생들(초3~고3)을 전액 장학금으로 교육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설립목적 잠재력 있는 예술영재의 조기 발굴 및 양성 예술영재 양성 체계 구축 및 양질의 예술영재교육 도모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예술교육을 활용한 예술영재교육의 모범사례 정립 교육개요 음악(기악, 성악, 작곡) 발레 전통예술(음악(기악, 성악), 무용, 연희) 교육대상 각 분야의 예술적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이 뛰어난 전국의 초·중·고등 학령기 아동 및 청소년 (분야 및 세부 전공에 따라 다름) 한국예술영재교육원 홈페이지 한국예술연구소[편집] 문화예술교육센터[편집] 음악원[편집] 고음악연구소[편집] 2005년 설립된 음악원 부설 고음악연구소. 한국의 여러 음악 분야중 고음악 분야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연구되고 있어 오자경소장(한예종 음악원 기악과 교수)을 중심으로 고음악에 대한 많은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매해 고음악에 대한 특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헤이그 음악 왕립 음대 학장인 Jan Kleinbussienk, Brabant Conservatorium 소속 “칸투스 모달리스”의 리더인 Dr. Rebecca Stewart의 특강과 일본의 바로크 댄스 전문가인 호나미 코가와 기요타카 야요시를 초청하여 바로크 시대의 춤과 음악에 대한 워크샵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컴퓨터음악연구소[편집] 음악원 부설 컴퓨터 음악 연구소는 컴퓨터를 사용한 음악 및 음향을 연구하며 알고리즘, 컨트롤링등 다양한 컴퓨터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경주 문화 EXPO 2000의 가상현실과 영상음악 및 음향 작업(KIST 협력 사업), 벤처 기업인 OrAndIf와의 논리 게임 "하비스의 진자” 음향 및 음악 제작, LG 전자의 핸드폰 벨 소리 개발 등 산학협력 프로젝트들이 있으며, MBC Radio PD 및 음향 기술자 연수 등의 교육 사업도 수행했다. 또한 한국전자음악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본 연구소는 ACC 2008(Osaka Geidai) 초청 음악회, Next Wave Concert 2008(KNUA) 등 컴퓨터음악 공연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한국작곡가연구소[편집] 무용원 부설 한국작곡가연구소는 창작음악에 대해 체계적인 관리가 안되는 현실에 맞춰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가들에 대한 분류, 연구, 교육분야를 중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원[편집] 극단 돌곶이[편집] 극단 돌곶이는 연극원 부설 극단으로 연극원에서 수학한 많은 학생들이 모체가 되어 문화 소외지역이나 일반인들에게 학교에서 배우고 경험한 다양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문화적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해외 각 국 연극학교, 학과와 교류하며 해외 연극제에도 참여하여 한국 연극계를 알리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01년 창단 준비공연 <봄이 눈뜰때>(베데킨트 작/조태준 연출)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리기 시작하여 2002년 창단공연 <우리나라 우투리>(김광림 작/연출)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올렸으며, 그 후 <미생자>(윤영선 작/이상우 연출), <쑥부쟁이>(추민주 작/연출),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최은이, 민준호 작/민준호 연출), <김종욱 찾기>(장유정 작/연출), <다리, The Bridge>(Peter. W. Willson 작/연출), <무거운 물>(윤정섭 작/연출), <비무장지대로 날아간 새>(Eli Simon, 김석만 각색/연출), (David Pledger 각색/연출), <당신이야기>(고재귀 작/김현우 연출), <당신의 의미>(김태형 작/이종성 연출), <모범생들>(지이선 작/김태형 연출), <바람속에 던져진 꽃>(이지홍 작/조규상 연출)을 공연하였다. 무대기술연구소[편집] 영상원[편집]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편집] 무용원[편집] 세계민족무용연구소[편집] 국가 문화정책에 기여하고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연구기관으로, 세계 각 국의 민족무용연구와 교류를 통해 우리 민족무용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발전시켜 학술적 체계를 정립함과 아울러 세계민족무용공연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2000년 9월 6일 개소한 연구기관이다. 연혁[편집] 세계무형문화재 초청공연 시리즈 1999년 9월 ‘일본 전통무용 노가쿠’ 초청공연 2000년 6월 인도사원예술의 진수 ‘쿠티야탐’ 한국 초연 2001년 6월 필리핀 민족무용 ‘신화 역사 그리고 통과의례의 몸짓’ 2002년 6월 ‘모쓰지(毛越寺) 엔넨(延年)의 춤’ 2003년 5월 ‘동양 춤 속의 여형’ 2004년 5월 ‘경극, 그 우아한 격정의 세계’ 2004년 5월 ‘천상의 무용, 방글라데시’ 2005년 5월 일본 무용 ‘우아함과 화려함, 그 양면성의 조화’ 2006년 5월 인도 무용 ‘떼얌: 고대 인도의 무속 춤’ 2007년 5월 캄보디아 왕립무용단 ‘땅과 물, 자연 속의 몸짓’ 2008년 5월 몽골 국립가무단 Tumen-Ekh ‘초원의 이야기’ 2009년 7월 일본 무용: 축제의 꿈 ‘에도 사토카구라’ 와카야마 다네오 2010년 8월 인도 무용: 신화의 몸짓 ‘카타칼리 Khatakali’ 2011년 9월 중국 소수 민족 춤 ‘불과 바람, 화합의 춤’ 2012년 9월 오키나와 류큐 궁중 무용: 남국의 풍정 2013년 9월 열대의 풍요로움, 신명고 환열의 춤: 말레이시아 민족무용 2014년 9월 세계 민족무용의 몸말 한국 전통 무용 국내 및 국외 공연 2000년 10월 한국 전통 명무전 시리즈 ‘진주명무전’ 2003년 9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4년 11월 미국 L.A. ‘불교 무용, 음악과의 만남’ 공연 2005년 9월 UCLA ‘세계종교음악축제’ 2005년 10월 한・일 명류(名流) 무용 감상회 및 한국 음악 감상회 2006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1차(창덕궁 연경당) 2007년 2월 필리핀 국립대학 한국 불교 무용과 음악공연 2007년 6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2차(창덕궁 연경당) 2008년 10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3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 행사 4차(창덕궁 연경당) 2009년 9월 세계민족무용연구소 개소 10주년 기념행사 ‘․참 춤’ 한・일 전통문화 교류 2000년 9월 ‘하야치네카구라 오오츠구나이’ -국립국악원 우면당 2000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0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1년 3월 일본 고전예능 ‘분라쿠(文樂)’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5월 인간문화재 한국고전예능 -시츠오카 음악당 2001년 10월 일본 고전예능 ‘노(能)’ 워크숍 및 공연 -한예종 크누아홀 2001년 12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1-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2년 8월 한일 고전예능제 2002-국립국악원 예악당, 요코하마 노가쿠도 2008년 11월 세계교류공연 ‘한・일 고전예능의 명작’-일본 요코하마 노악당 2010년 8월 한국문화원 요츠야 청사 개원 1주년 공연 ‘한국의 풍경 : 한국 전통 예술과 未完의 大器들 -도쿄 한국문화원 한마당 홀 세미나, 심포지엄, 전시회 개최 2001년 12월 북한공훈예술가 리철우 초청 특별 세미나 2003년 5월 제1회 민족무용 사진전시회 개최 2004년 5월 한・중・일 궁중무용의 변천과 전승 국제학술회의 2006년 8월 한국 근・현대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육화대」・「처용무」 복원공연을 중심으로 학술발표회 2012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전통 춤이란 무엇인가 2012년 1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합 국제 심포지엄 2013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동아시아 악무사상과 의례 2014년 5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심포지엄 : 일본 전통 악무와 의례문화 2014년 9월 개소 15주년 기념 심포지엄 : 전통문화 재연과 문화콘텐츠를 위한 담론 학술지 발간 2002년 8월 민족무용 1호 발간 2002년 12월 민족무용 2호 발간 2003년 7월 민족무용 3호 발간 2003년 12월 민족무용 4호 발간 2004년 8월 민족무용 5호 발간 2004년 12월 민족무용 6호 발간 2005년 2월 민족무용 7호 발간 2005년 8월 민족무용 8호 발간 2006년 2월 민족무용 9호 발간 2006년 8월 민족무용 10호 발간 2007년 2월 민족무용 11호 발간 2007년 11월 민족무용 12호 발간 2009년 5월 민족무용 13호 발간 2010년 12월 민족무용 14호 발간 2011년 6월 민족무용 15호 발간 2012년 8월 민족무용 16호 발간 2013년 8월 민족무용 17호 발간 2014년 8월 민족무용 18호 발간 연구 총서 및 자료집 발간 2001년 12월 아시아 무용 음악 자료 해제집 발간 2005년 6월 학술총서: 1 완역집성 정재무도 홀기 발간 2005년 7월 학술총서: 2 한국 전통무용의 변천과 전승 발간 2006년 11월 학술총서: 3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발간 2009년 9월 학술총서: 5 순조조 연경당 진작례 발간 2011년 8월 학술총서: 4 전통 무용의 변모와 현대적 계승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8 춘앵전 발간 2012년 7월 학술총서: 9 처용무 발간 2014년 6월 학술총서:10 일본 예악무의 융합적 연구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1 한국여악자료집-조선왕조실록편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2 선진악론집요 발간 2014년 6월 학술자료집: 3 양한악론집요 발간 석학 초청 특강 2006년 10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브랜드로서의 한류」 2006년 11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정신적 항체: 문화자본주의」 2006년 12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한류: 리얼리즘」 2007년 3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Ⅰ」 2007년 4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Ⅱ」 2007년 5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Ⅲ」 2007년 6월 김지하 석좌교수 특강 「유・불・도의 전통 미학」 연구과제 수행 2003년 8월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 인문사회분야 선정 2011년 12월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선정(2011.12-2020.8) 미술원[편집] 조형연구소[편집] UA-SA 도시/건축연구소[편집] 아시아문화디자인연구소[편집] 사건·사고 및 논란[편집] 한예종 사태[편집] 직접적으로는 '황지우 총장의 퇴출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소요 사건'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내막에 대해 진보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이후 기존의 명문예술대학들이 점유하고 있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독점적 지위는 차츰 누그러져가던 상황이었다. 이들 명문예술대학들은 자신들의 연대와 대립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견제를 날로 강화해갔고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10년만의 정권교체 후 들어선 새 정부는 기존 문화 예술 기관장들의 교체를 시도하였으며 이에는 참여정부 말기 임명된 황지우 총장도 해당되었다. 따라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총장을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하고 한예종을 보수적 문화예술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자 '한예종에 대한 대대적 감사'를 시도했다는 것이 진보 언론계의 분석이다. 새 정부와 뜻을 같이하는 보수적 문화단체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황지우 총장이 진보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시인이었다는 점과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되었다는 점, 그리고 한예종의 주요 교수진들이 새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좌파 엘리트의 온상'으로 지명하고 한예종 전체에 '좌파' 낙인을 찍어버리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미 본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득권 명문예술대학 연합단체는 연일 '한예종 해체'를 주장하며 한예종의 기능을 축소시키려 했다는 것. 이러한 방침에 대한 저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파 정권에서는 우파 총장이 나와야 한다'는 신재민 문화부 차관의 발언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감사상의 부적격 조건을 들어 퇴출된 황지우 총장에 이어 뉴라이트 싱크넷의 발기인을 맡았던 박종원 총장이 교수진 투표를 통해 취임하게 되었고 협동과정원은 2011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총장의 사퇴와 문화부 감사 결과 이행으로 인해 현재는 한예종 사태가 일단락된 듯 보인다. 하지만 본교의 미래는 현 정부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존 사학재단들의 기득권이 엄연한 현 시점에서, 그리고 매 정권마다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된 이제까지의 상황에 비추어서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전망이다. 미래교육준비단 (U-AT Lab)의 발족과 해체[편집] 발족[편집] 2007년 ‘유비쿼터스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증가된 예술과 과학기술의 접속 기회를 예술교육의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고자 다양한 분야 학문(Multi-disciplinary) 혹은 통섭(通攝)학문 연구 사업의 추진을 위해 2008년 3월 미래교육준비단을 만들었다. 이에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대(포스텍)와 함께 U-AT(Ubiquitous-Art & Technology)와도 통섭 연구사업을 시작했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U-AT사업은 우선 9개의 Lab을 통해 기초 연구를 시작하고 2010년에는 한예종 내에 ‘통섭원’ 과정을 설립하여 한예종의 축적된 예술 교육의 성과를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창의적 예술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4년으로 계획된 이 연구사업은 1차년인 2008년 40억의 국가 예산이 배정되어 이중 30여억원이 집행되었고 예술과 과학기술 통섭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인 isAT2008 개최, 2008년 2학기 8개의 통섭시범교과 운영, 30여권의 교재및 연구 보고서, 총서 출간등의 성과가 있다. 참여 교수는 심광현(단장, AT-미디어 교육랩, 영상원 영상이론과교수), 전수환(부단장, 협동과정 예술경영과교수), 박현철(디지털 아카이빙랩, 영상원 영화과 교수), 이동연(예술과 놀이랩,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교수), 양승무(예술과 놀이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윤정섭(U 스마트시티랩,연극원장), 박인석(몰입경험문화디자인랩,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장재호(특수음향 알고리즘랩, 음악원 뮤직테크놀로지과 교수),원일(디지털악가무랩, 전통예술원 음악과), 박세형(디지털모션그래픽스랩,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진중권(객원교수, 예술과 놀이랩 자문교수)이 있다. 해체[편집] 그러나 2008년 말 문화체육관광부의 결정에 따라 2009년 당초 예정된 예산 전액이 삭감되어 연구사업은 중지되었고 현재 협동과정내 단일 연구소(AT Lab)로 축소 5개의 시범교과를 운영중에 있다. 2008년 진행된 U-AT통섭사업에 대해 뚜렷이 드러난 성과가 약하거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근거였다. 한편 2009년 5월 1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예종에 대한 종합 감사 결과로 황지우총장의 중징계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 한예종의 일부 학과 축소및 폐지, AT Lab 교육 사업 중지, U-AT 관련 교수 징계 등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황지우 총장은 '정당한 학습권과 교권을 침해하는 반교육적 감사결과'임을 주장하며 2009년 5월 19일 총장직 사퇴를 선언하여 논란이 되었다.[1][2] 한편 통섭교육 사업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파행을 문제삼아 학교로부터 정직 3개월 처분된 심광현 교수가 2011년 4월 20일 서울행정법원에서의 행정소송에서 승소하여 1심 취소처분 판결을 받았다. 음악원 부정입학[편집] 2012년 4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음대 입시준비생들에게 불법으로 교습을 해 주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부정 입학시킨 혐의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이모 교수(44)를 구속했다고 밝혔다.[3][4] 이 교수는 제자 김모씨(22)를 한예종 음악원에 입학시켜주는 김씨 부모로부터 합격 사례비 명목으로 총 2억6000만원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0년 3월부터 10월까지 김씨를 상대로 시간당 15만원을 받고 40여 차례 불법 교습을 하는 등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한예종 음악원 입시생 13명을 상대로 불법레슨을 하고 4000만원 상당의 교습비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실기시험 채점자였던 이 교수는 제자 19명에게 최고점을 줘 한예종 음악원에 최종 합격시키기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5][6][7] 역대 총장[편집] 대수 임기 이름 1대 1992 ~ 2002 이강숙 2대 1992 ~ 2002 이강숙 3대 1992 ~ 2002 이강숙 4대 2002 ~ 2006 이건용 5대 2006 ~ 2009 황지우 6대 2009 ~ 2013 박종원 7대 2013 ~ 김봉렬 동문[편집] 분류: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각주[편집] ↑ 김범규 기자, 이득수 기자 (2009년 3월 19일). “진중권 참여 프로젝트, 30억대 사업부실 및 공금유용 의혹”. 《OURNEWS》. 2009년 5월 2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노형석기자 (2009년 5월 19일). “황지우 “한예종 구조개편 겨냥 표적감사 당했다” 총장직 사퇴…문화계 ‘진보성향 기관장 솎아내기’ 반발”. 한겨레.  ↑ 부정입학 뇌물 수수 한예종 교수 구속[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MBC》2012년 4월 28일 최기화 기자 ↑ 제자 입학시키고 돈 받은 한예종 교수 구속《YTN》2012년 4월 28일 조임정 기자 ↑ 불법과외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검거《민중의소리》2012년 4월 23일 최지현 기자 ↑ 부정입학·불법과외… 추악한 한예종 교수《서울신문》2012년 4월 28일 신진호 기자 ↑ 불법교습에 부정입학까지…한예종 교수 구속《경향신문》2012년 4월 28일 외부 링크[편집]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 (대통령령 제20740호) vdeh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기재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안부 문체부 농식품부 산업부 복지부 환경부 고용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중기부 본부 소속 장관 차관(2인) 차관보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국어원 해외문화홍보원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중앙극장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정책방송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위원회 목록) 국립국악고등학교 국립국악중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중학교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 국립익산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자료보존연구센터 국립장애인도서관 국립세종도서관 국립국악원 민속국악원 남도국악원 부산국악원   산하 외청 문화재청 산하 공공기관 게임물관리위원회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국민체육진흥공단 국악방송 국제방송교류재단 그랜드코리아레저 대한장애인체육회 대한체육회 세종학당재단 아시아문화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의전당 정동극장 태권도진흥재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국관광공사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한국문학번역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정보원 한국문화진흥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저작권보호원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체육산업개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소관기관 국기원 뉴스통신진흥회 대한민국예술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언론중재위원회 한국관광협회중앙회 한국도핑방지위원회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한국문화원연합회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급으로 임명된다. 국립국악고등학교 및 국악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및 전통예술학교의 설립·운영권한을 문화체육관광부가 교육부로부터 위탁받았다.[1] 재외 한국문화원[2]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외교부 재외공관 부설기관으로 설치되며 해당 재외공관장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vdeh대한민국의 국립 대학 국립 공립 일반대학 강릉원주대학교 강원대학교4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북대학교4 경상대학교4 공주대학교 군산대학교 금오공과대학교 목포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대학교4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대학교1 4 순천대학교 안동대학교 인천대학교1 전남대학교4 전북대학교4 제주대학교4 창원대학교 충남대학교4 충북대학교4 한경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한밭대학교 교육대학 경인교육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대구교육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특수대학 광주과학기술원2 대구경북과학기술원2 울산과학기술원2 한국과학기술원2 한국예술종합학교3 한국전통문화대학교3 대학원대학 국립암센터국제암대학원대학교2 한국학대학원2 전문대학 한국농수산대학 한국복지대학교 방송통신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국립대법인 2특별법법인 3특별법국립 4거점국립대학교 vdeh 서울특별시의 대학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국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연건캠퍼스) 육군사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서울캠퍼스·도곡캠퍼스)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공립 서울시립대학교 사립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성신교정) 감리교신학대학교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광운대학교 국민대학교 케이씨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동덕여자대학교 명지대학교 (인문캠퍼스) 삼육대학교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 서강대학교 서경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성신여자대학교 세종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이화여자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 추계예술대학교 한국성서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한성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서울한영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전문대학 동양미래대학교 명지전문대학 배화여자대학교 삼육보건대학교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서일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인덕대학교 한국폴리텍Ⅰ대학 (서울강서캠퍼스·서울정수캠퍼스) 한양여자대학교 전공대학 국제예술대학교 백석예술대학교 정화예술대학교 대학원대학 개신대학원대학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북한대학원대학교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순복음대학원대학교 예명대학원대학교 용문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사이버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본부·서울지역대학) 경희사이버대학교 고려사이버대학교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서울캠퍼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서울캠퍼스·대학로캠퍼스·서초캠퍼스)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디지털대학교 (강서캠퍼스) 서울사이버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서울캠퍼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한양사이버대학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예술종합학교&oldid=23758629" 분류: 한국예술종합학교1993년 개교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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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 (후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제 (후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제(張濟)출생 무위군 조려사망 196년남양군 양현사인 전사국적 후한 경력 교위 → 진동장군 → 표기장군직업 장군작위 평양후친척 장수(조카)관련 활동 동탁 사후 독자 세력화 장제(張濟, ? ~ 196년)는 중국 후한 말의 장군으로 양주 무위군 조려현(祖厲縣) 사람이다. 동탁 사후 이각, 곽사, 번조와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따로 홍농군에 주둔하였다. 헌제가 낙양으로 탈출한 뒤 상황이 어려워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형주를 침략했다가 전사하였다. 남은 군세는 조카인 장수가 물려받았다. 목차 1 생애 1.1 왕윤을 잡아라 1.2 헌제를 잡아라 2 삼국지연의 3 가계 4 각주 5 참고 문헌 생애[편집] 왕윤을 잡아라[편집] 중앙군에서 교위(校尉)로 복무하였다. 192년(초평 3년)[1] 주준이 낙양 동쪽의 중모(中牟)에 자리하고 동탁을 칠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 홍농군 섬현(陝縣)에 주둔하고 있던 동탁의 사위 우보는 이각, 곽사, 장제에게 수만 명을 줘 주준을 막게 했다. 영격해 온 주준을 물리치고 진류, 영천의 여러 현들을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니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2] 4월(음력) 동탁이 왕윤, 여포 등에게 주살당했다. 사면이 거부당한 이각, 곽사, 장제 등의 양주 사람들은 가후의 진언에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여 수도 장안을 점령하였다. 9월 거기장군 이각, 후장군 곽사, 우장군 번조가 조정을 장악할 동안 진동장군(鎭東將軍), 평양후(平陽侯)[3] 장제는 장안을 나와 홍농을 수비하였다. 195년(흥평 2년) 2월 이각이 번조를 살해하고 곽사와도 사이가 벌어져 내전을 벌이는 통에 황제 가까이까지 화살이 날아다니고 만여 명이 죽었다. 6월 장제가 가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동시에 헌제를 잠시 홍농에 모시자고 제안하였다. 헌제도 옛 수도 낙양이 떠올라 누차 떠나기를 청하니 이각이 허락하였다. 헌제를 잡아라[편집] 7월(음력) 마침내 헌제가 동쪽으로 길을 나서고 장제는 표기장군에 올라 먼저 섬현으로 돌아갔다. 11월 어가가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끝에 홍농현에 당도하였다. 장제는 승여를 호송해온 양봉, 동승과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헌제를 머무르게 하려 했는데 그들은 거절하고 더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에 이각, 곽사와 손잡고 헌제 일행을 습격하였다. 백관과 장병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죽이고 그 부녀자와 치중을 쓸어 담는 대승을 거뒀다. 젖먹이까지도 동사하여 물 위를 떠다닐 정도였는데[4] 정작 헌제는 놓치고 말았다. 12월 황하 건너의 안읍(安邑, 지금의 산시성 샤 현)으로 들어간 헌제가 시중 사치(史跱)·태복 한융을 보내와 궁인, 공경 이하 관리, 부녀, 황실 물품, 수레와 말 등을 돌려달라 하기에 그렇게 하였다.[5] 196년(건안 원년)[6] 장제군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형주 남양군의 양성(穰城, 지금의 허난성 덩저우 시)을 공격하다 유시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 뒤는 큰형의 아들인 장수가 이었다. 형주목 유표는 장수를 받아들여 완성(宛城)에 근거지를 마련해주었다.[7] 아내가 절세가인이었다.[8] 삼국지연의[편집]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량에 있던 동탁이 환관을 주살하려는 하진의 부름에 응해 낙양으로 나서는 장면에서 이각, 곽사, 장제, 번조 4인방 세트가 이를 수행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정권을 차지한 동탁이 왕윤 무리에게 속아 선양을 받는 줄 알고 궁궐로 들어갈 때 4인방은 미오(郿塢)에서 대기하다가 동탁이 죽자 양주로 도피한다. 사면이 거부당한 4인방은 가후의 진언에 따라 장안으로 쳐들어가고 여포가 맞서온다. 이각이 작전을 구사하여 이각·곽사군이 여포군을 상대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장제·번조군이 장안을 직공한다. 결국 여포를 패퇴시키고 장안을 점령한다. 헌제를 시해하려는 이각과 곽사를 장제와 번조가 말린다. 4인방은 적당히 벼슬자리를 챙기고 장제는 홍농에 주둔한다. 4인방은 마등과 한수의 장안 공성도 저지한다. 장제가 마등을 추격해 심대한 타격을 주지만 마초의 결사 항전에 부딪혀 잡지는 못한다. 번조는 한수를 놓아준 것이 책잡혀 이각에게 목숨을 잃고 남은 군사를 장제가 아우른다. 시간이 흐른 후 이각과 곽사가 서로 피 흘리며 싸우자 ‘그만두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며 화해시키고 헌제에게는 홍농으로 옮길 것을 청한다. 이후 행적은 생략되었다. 최후는 사서와 같으며 아내에게는 추씨(鄒)라는 성이 부여되었다. 가계[편집] 조카 : 장수 - 장제는 장수의 막내 삼촌인데 그 형제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각주[편집] ↑ 《자치통감》60권 한기 제52 헌제 초평 3년 ↑ 《후한서》71권 열전 제61 주준 ↑ 《삼국지》6권 위서 제6 동탁, 《삼국지》에서는 진동장군을 빠트렸다. ↑ 《헌제전》 ; 이현 주석,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에서 인용 ↑ 《헌제춘추》 ; 《태평어람》92권 황왕부 제17 효헌황제에서 인용 ↑ 《후한서》74권下 열전 제64下 유표 ↑ 《삼국지》8권 위서 제8 장수 ↑ 원굉, 《후한기》29권 참고 문헌[편집]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vdeh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군주한 영제 소제 헌제 위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촉 유비 유선 오 손견 손책 손권 손량 손휴 손호 진 사마염 기타 공손연 공손찬 도겸 동탁 마등 여포 원소 원술 유언 유장 유표 장각 장로 한수 참모 문관한 공융 교현 양표 왕윤 채옹 위 가후 곽가 곽회 동소 사마사 사마소 사마의 순욱 순유 양수 왕랑 왕숙 유엽 정욱 종요 종회 진군 화흠 촉 간옹 동윤 등지 마량 마속 미축 방통 법정 비의 손건 양의 유파 이적 장완 제갈량 진지 오 감택 고옹 노숙 반준 보즐 여범 우번 육손 장굉 장소 장제 제갈각 제갈근 주유 진 가충 순욱 장화 진수 기타 곽도 괴량 괴월 봉기 심배 이유 장송 저수 전풍 진궁 채모 허유 무장한 노식 동승 주준 하진 황보숭 위 가규 등애 방덕 만총 서황 손례 악진 우금 이전 장합 장료 전예 전위 조인 조진 조창 조홍 조휴 하후돈 하후연 학소 허저 촉 강유 관우 관평 마대 마초 엄안 오의 왕평 요화 위연 이엄 장비 장익 조운 주창 진도 하후패 황권 황충 오 감녕 능통 미방 반장 서성 육항 여몽 장흠 전종 정보 정봉 제갈정 주치 주태 주환 진무 태사자 하제 한당 황개 진 두예 문앙 문호 석포 양호 왕준 기타 고순 곽사 기령 맹달 문추 안량 양봉 이각 장임 제갈탄 화웅 여인한 당희 동태후 하태후 초선 헌목황후 위 견황후 곽귀인 양휘유 왕원희 장춘화 하후휘 촉 감부인 미부인 목황후 황월영 오 대교 소교 보연사 손노반 손부인 오부인 진 양염 양지 기타 채부인 채염 축융부인 비한족 가비능(선비) 구력거(오환) 답돈(오환) 동천왕(고구려) 맹획(남만) 어부라(흉노) 히미코(일본) 기타 관로 남화노선 사마휘 예형 우길 좌자 화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제_(후한)&oldid=24213903" 분류: 2세기 태어남196년 죽음후한의 표기장군동탁과 주변 인물작전 중 사망자간쑤성 출신바이인시 출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English日本語ไทย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3일 (월) 14: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장제 (후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제 (후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제(張濟)출생 무위군 조려사망 196년남양군 양현사인 전사국적 후한 경력 교위 → 진동장군 → 표기장군직업 장군작위 평양후친척 장수(조카)관련 활동 동탁 사후 독자 세력화 장제(張濟, ? ~ 196년)는 중국 후한 말의 장군으로 양주 무위군 조려현(祖厲縣) 사람이다. 동탁 사후 이각, 곽사, 번조와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따로 홍농군에 주둔하였다. 헌제가 낙양으로 탈출한 뒤 상황이 어려워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형주를 침략했다가 전사하였다. 남은 군세는 조카인 장수가 물려받았다. 목차 1 생애 1.1 왕윤을 잡아라 1.2 헌제를 잡아라 2 삼국지연의 3 가계 4 각주 5 참고 문헌 생애[편집] 왕윤을 잡아라[편집] 중앙군에서 교위(校尉)로 복무하였다. 192년(초평 3년)[1] 주준이 낙양 동쪽의 중모(中牟)에 자리하고 동탁을 칠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 홍농군 섬현(陝縣)에 주둔하고 있던 동탁의 사위 우보는 이각, 곽사, 장제에게 수만 명을 줘 주준을 막게 했다. 영격해 온 주준을 물리치고 진류, 영천의 여러 현들을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니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2] 4월(음력) 동탁이 왕윤, 여포 등에게 주살당했다. 사면이 거부당한 이각, 곽사, 장제 등의 양주 사람들은 가후의 진언에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여 수도 장안을 점령하였다. 9월 거기장군 이각, 후장군 곽사, 우장군 번조가 조정을 장악할 동안 진동장군(鎭東將軍), 평양후(平陽侯)[3] 장제는 장안을 나와 홍농을 수비하였다. 195년(흥평 2년) 2월 이각이 번조를 살해하고 곽사와도 사이가 벌어져 내전을 벌이는 통에 황제 가까이까지 화살이 날아다니고 만여 명이 죽었다. 6월 장제가 가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동시에 헌제를 잠시 홍농에 모시자고 제안하였다. 헌제도 옛 수도 낙양이 떠올라 누차 떠나기를 청하니 이각이 허락하였다. 헌제를 잡아라[편집] 7월(음력) 마침내 헌제가 동쪽으로 길을 나서고 장제는 표기장군에 올라 먼저 섬현으로 돌아갔다. 11월 어가가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끝에 홍농현에 당도하였다. 장제는 승여를 호송해온 양봉, 동승과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헌제를 머무르게 하려 했는데 그들은 거절하고 더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에 이각, 곽사와 손잡고 헌제 일행을 습격하였다. 백관과 장병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죽이고 그 부녀자와 치중을 쓸어 담는 대승을 거뒀다. 젖먹이까지도 동사하여 물 위를 떠다닐 정도였는데[4] 정작 헌제는 놓치고 말았다. 12월 황하 건너의 안읍(安邑, 지금의 산시성 샤 현)으로 들어간 헌제가 시중 사치(史跱)·태복 한융을 보내와 궁인, 공경 이하 관리, 부녀, 황실 물품, 수레와 말 등을 돌려달라 하기에 그렇게 하였다.[5] 196년(건안 원년)[6] 장제군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형주 남양군의 양성(穰城, 지금의 허난성 덩저우 시)을 공격하다 유시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 뒤는 큰형의 아들인 장수가 이었다. 형주목 유표는 장수를 받아들여 완성(宛城)에 근거지를 마련해주었다.[7] 아내가 절세가인이었다.[8] 삼국지연의[편집]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량에 있던 동탁이 환관을 주살하려는 하진의 부름에 응해 낙양으로 나서는 장면에서 이각, 곽사, 장제, 번조 4인방 세트가 이를 수행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정권을 차지한 동탁이 왕윤 무리에게 속아 선양을 받는 줄 알고 궁궐로 들어갈 때 4인방은 미오(郿塢)에서 대기하다가 동탁이 죽자 양주로 도피한다. 사면이 거부당한 4인방은 가후의 진언에 따라 장안으로 쳐들어가고 여포가 맞서온다. 이각이 작전을 구사하여 이각·곽사군이 여포군을 상대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장제·번조군이 장안을 직공한다. 결국 여포를 패퇴시키고 장안을 점령한다. 헌제를 시해하려는 이각과 곽사를 장제와 번조가 말린다. 4인방은 적당히 벼슬자리를 챙기고 장제는 홍농에 주둔한다. 4인방은 마등과 한수의 장안 공성도 저지한다. 장제가 마등을 추격해 심대한 타격을 주지만 마초의 결사 항전에 부딪혀 잡지는 못한다. 번조는 한수를 놓아준 것이 책잡혀 이각에게 목숨을 잃고 남은 군사를 장제가 아우른다. 시간이 흐른 후 이각과 곽사가 서로 피 흘리며 싸우자 ‘그만두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며 화해시키고 헌제에게는 홍농으로 옮길 것을 청한다. 이후 행적은 생략되었다. 최후는 사서와 같으며 아내에게는 추씨(鄒)라는 성이 부여되었다. 가계[편집] 조카 : 장수 - 장제는 장수의 막내 삼촌인데 그 형제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각주[편집] ↑ 《자치통감》60권 한기 제52 헌제 초평 3년 ↑ 《후한서》71권 열전 제61 주준 ↑ 《삼국지》6권 위서 제6 동탁, 《삼국지》에서는 진동장군을 빠트렸다. ↑ 《헌제전》 ; 이현 주석,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에서 인용 ↑ 《헌제춘추》 ; 《태평어람》92권 황왕부 제17 효헌황제에서 인용 ↑ 《후한서》74권下 열전 제64下 유표 ↑ 《삼국지》8권 위서 제8 장수 ↑ 원굉, 《후한기》29권 참고 문헌[편집]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vdeh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군주한 영제 소제 헌제 위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촉 유비 유선 오 손견 손책 손권 손량 손휴 손호 진 사마염 기타 공손연 공손찬 도겸 동탁 마등 여포 원소 원술 유언 유장 유표 장각 장로 한수 참모 문관한 공융 교현 양표 왕윤 채옹 위 가후 곽가 곽회 동소 사마사 사마소 사마의 순욱 순유 양수 왕랑 왕숙 유엽 정욱 종요 종회 진군 화흠 촉 간옹 동윤 등지 마량 마속 미축 방통 법정 비의 손건 양의 유파 이적 장완 제갈량 진지 오 감택 고옹 노숙 반준 보즐 여범 우번 육손 장굉 장소 장제 제갈각 제갈근 주유 진 가충 순욱 장화 진수 기타 곽도 괴량 괴월 봉기 심배 이유 장송 저수 전풍 진궁 채모 허유 무장한 노식 동승 주준 하진 황보숭 위 가규 등애 방덕 만총 서황 손례 악진 우금 이전 장합 장료 전예 전위 조인 조진 조창 조홍 조휴 하후돈 하후연 학소 허저 촉 강유 관우 관평 마대 마초 엄안 오의 왕평 요화 위연 이엄 장비 장익 조운 주창 진도 하후패 황권 황충 오 감녕 능통 미방 반장 서성 육항 여몽 장흠 전종 정보 정봉 제갈정 주치 주태 주환 진무 태사자 하제 한당 황개 진 두예 문앙 문호 석포 양호 왕준 기타 고순 곽사 기령 맹달 문추 안량 양봉 이각 장임 제갈탄 화웅 여인한 당희 동태후 하태후 초선 헌목황후 위 견황후 곽귀인 양휘유 왕원희 장춘화 하후휘 촉 감부인 미부인 목황후 황월영 오 대교 소교 보연사 손노반 손부인 오부인 진 양염 양지 기타 채부인 채염 축융부인 비한족 가비능(선비) 구력거(오환) 답돈(오환) 동천왕(고구려) 맹획(남만) 어부라(흉노) 히미코(일본) 기타 관로 남화노선 사마휘 예형 우길 좌자 화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제_(후한)&oldid=24213903" 분류: 2세기 태어남196년 죽음후한의 표기장군동탁과 주변 인물작전 중 사망자간쑤성 출신바이인시 출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English日本語ไทย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3일 (월) 14: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국립 경기장 (도쿄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립 경기장 (도쿄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1958년에 개장하여 2015년 폐쇄된 국립 경기장에 관한 것입니다. 2019년에 개장하는 새로운 국립 경기장에 대해서는 신국립 경기장 (도쿄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국립 경기장 2004년 야마자키 나비스코 컵 결승전 전체 이름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원어 이름 国立競技場 소재지 도쿄도 신주쿠 구 가스미가오카 정 좌표 북위 35° 40′ 41″ 동경 139° 42′ 53″ / 북위 35.67806° 동경 139.71472°  / 35.67806; 139.71472 기공 1957년 1월 건설 기간 14개월 개장 1958년 3월 보수 1991년 폐장 2014년 5월 철거 2015년 5월 소유 일본 스포츠 진흥센터 (NAASH) 표면 천연잔디 설계 가타야마 미쓰오 (片山光生) 사용처 각종 스포츠 대회 및 콘서트 수용인원 50,339명 (최다:2014년3월21일・22일 L'Arc~en~Ciel 80,000명) 규모 잔디 면적 107×71 m, 육상 트랙 400 m × 8레인 국립 경기장(일본어: 国立競技場 고쿠리쓰쿄기조[*])은 일본 도쿄도 신주쿠 구의 스포츠 컴플렉스인 국립 가스미가오카 경기장에 위치한 다목적 경기장이다. 일본에서는 단순히 국립 경기장 혹은 다른 국립 경기장과 구분을 위해 필요할때 등등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일본어: 国立霞ヶ丘陸上競技場)이라고도 부른다. 1958년에 완공되었으며 1958년 아시안 게임과 1964년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또한 1980년부터 2001년까지 인터콘티넨털컵 일명 도요타컵 축구 대회가 열린 경기장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는 스포츠 팀은 없지만, 보통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과 일본 럭비 국가대표팀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잉글랜드 런던의 웸블리 경기장처럼 중립 지대에서 열리는 J리그 경기가 필요한 경우에 사용되기도 한다. 매년 1월 1일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는 관례적으로 이곳에서 열린다. 또한 일본 고등학교 축구의 성지로서,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의 개막전과 결승전도 이곳에서 열린다. 그 때문에 일본 야구에서 고시엔 경기장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4년 초부터 2020년 도쿄 하계 올림픽 준비를 위해 폐쇄되었으며, 2016년 12월부터 도쿄 신국립 경기장으로의 재건축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목차 1 역사 2 주요 스포츠 대회 및 행사 2.1 과거의 주요 스포츠 대회 및 행사 3 외부 링크 역사[편집] 원래 메이지 신궁의 외원 경기장(明治神宮外苑競技場 메이지진쿠가이엔쿄우기죠우[*])이 이곳에 있었으나, 1958년 아시안 게임과 1964년 하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가에 양도되었다. 그 후, 일본의 각종 육상, 축구, 럭비 경기가 열려 일본 스포츠의 상징과 같은 곳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하지만, 50여 년간 사용하면서 경기장 시설이 노후하고, 2002년 FIFA 월드컵 등 각종 대회의 요구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큰 대회의 경우엔 요코하마 국제 종합 경기장 등에 양보하는 사례가 많았다. 1980년부터 인터콘티넨털컵(도요타컵)이 이 곳에서 열렸는데, 겨울철 잔디 생육 문제나 경기장 시설로 인해 참가 팀들의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1991년 도쿄에서 열린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하고 한지형 잔디를 생육하여 축구팀들의 신뢰를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2006년 FIFA 클럽 월드컵, 전북 현대와 클럽 아메리카의 경기 2006년 FIFA 클럽 월드컵 당시 몇몇 경기는 이곳에서 치러지기도 했다. 주요 스포츠 대회 및 행사[편집] 일본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최근에는 지방 순환 개최가 많다) 일본 학생 육상 경기 학교 대항 선수권 대회 도쿄 국제 여자 마라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A매치, 올림픽 평가전 등) 일본 슈퍼컵(제록스 슈퍼컵) J리그 컵(야마자키 나비스코컵) 결승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준결승 1경기, 결승전 전일본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 전일본 대학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 개막전, 준결승, 결승전 전국 대학 럭비 풋볼 선수권 대회 준결승, 결승전 간토 대학 럭비 대항전 : 와세다 대학 대 메이지 대학(早明戦, 조명전) 과거의 주요 스포츠 대회 및 행사[편집] 1958년 : 제3회 아시아 경기대회 1964년 : 제18회 도쿄 올림픽 1967년 : 제5회 하계 유니버시아드 1981년 - 2001년 : 인터콘티넨털컵 (2002년부터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에서 개최) 1983년 - 1989년 : 라이스볼 (1990년부터 도쿄돔에서 개최) 1985년 : 국제 청년의 해 기념 『ALL TOGETHER NOW by LION』(사상 최초의 음악 콘서트) 1991년 : 제 3회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1993년 : J리그 개막전(요미우리 베르디와 닛산 FC 요코하마 마리노스) 1996년 :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세계 3대 테너 콘서트(사상 유일한 테너 콘서트) 1998년 : 1000만 명 라디오 체조제 중앙 대회(NHK와 우정성 간이보험국, 전국라디오 체조연맹 주최, 라디오 체조 탄생 70주년 기념) 2002년 : 프로레슬링·격투기 이벤트 『Dynamite! 사상 최대의 격투기 월드컵』 2003년 : 재팬 럭비 톱리그 개막전 2005년 - 2008년 : FIFA 클럽 월드컵 2005년 : 『SMAPとイク? SMAP SAMPLE TOUR FOR 62 DAYS』(사상 최초의 단독 콘서트) 2006년 : 『Pop Up!SMAP-飛びます!トビ出す!トビスマ?TOUR2006』(SMAP의 CD 데뷔 15주년 기념) 2006년 : 『GOAL! 재팬 프리미어』 2007년 : 『사상 최강의 이동 유원지 DREAMS COME TRUE WONDERLAND 2007』 2008년 : JOMO컵 한일 프로축구 올스타전 2008년 : 『Arashi marks ARASHI AROUND ASIA 2008』 2009년 : 『ARASHI Anniversary Tour 5X10』(사상 최초 3일 연속 공연) 2009년 : AFC 챔피언스리그 2009 결승전 포항 스틸러스(대한민국)와 알 이티하드(사우디 아라비아) 2010년 : AFC 챔피언스리그 2010 결승전 성남 일화 천마(대한민국)와 조브 아한(이란) 2010년 : 『ARASHI 10-11 TOUR Scene ~君と僕の見ている風景~ STADIUM』(사상 최초 4일 공연) 2011년 : 『ARASHI LIVE TOUR Beautiful World』 2012년 : 『L'Arc~en~Ciel 20th L'Anniversary WORLD TOUR 2012 THE FINAL LIVE at 국립 경기장』(록 밴드그룹 최초의 단독 콘서트) 2012년 : 『ARASHI アラフェス NATIONAL STADIUM 2012』 2013년 : 『ARASHI アラフェス NATIONAL STADIUM 2013』(사상 최다 횟수의 단독 콘서트) 2014년 : 『모모쿠로 봄의 일대사 2014 국립 경기장대회 ~NEVER ENDING ADVENTURE 꿈의 저편에~』(여성그룹 최초의 단독 콘서트, 최연소 기록<18.6세>, 데뷔로부터 최단 기록<약 3년 10개월>) 2014년 : 『L'Arc~en~Ciel LIVE 2014 at 국립 경기장』(사상 최다 관중 동원 기록, 하루에 8만 명씩, 이틀 동안 16만 명 동원) 2014년 : 『AKB48 단독 & 그룹 봄콘 in 국립 경기장 ~추억은 이곳에 전부 버려!~』(오오시마 유코 졸업 콘서트) 외부 링크[편집] 도쿄 국립 경기장 공식 홈페이지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국립 경기장 vdeh하계 올림픽 스타디움 1896년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 1900년 파리 (벨로드롬 드 뱅센) 1904년 세인트루이스 (프랜시스 필드) 1908년 런던 (화이트시티 스타디움) 1912년 스톡홀름 (스톡홀름 올림픽 스타디움) 1920년 안트베르펜 (안트베르펜 올림픽 스타디움) 1924년 파리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1928년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올림픽 스타디움) 1932년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1936년 베를린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1948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1952년 헬싱키 (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움) 1956년 멜버른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 1960년 로마 (스타디오 올림피코) 1964년 도쿄 (도쿄 국립경기장) 1968년 멕시코시티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우니베르시타리오) 1972년 뮌헨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 1976년 몬트리올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 1980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1988년 서울 (서울올림픽주경기장) 1992년 바르셀로나 (에스타디 올림픽 류이스 콤파니스) 1996년 애틀란타 (센테니얼 올림픽 스타디움) 2000년 시드니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 2004년 아테네 (스피로스 루이스 경기장) 2008년 베이징 (베이징올림픽 주 경기장) 2012년 런던 (런던 올림픽 스타디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2020년 도쿄 (도쿄 신국립경기장) 2024년 파리 (스타드 드 프랑스) 2028년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vdeh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개최 경기장 1983: 올림피아스타디온 1987: 스타디오 올림피코 1991: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1993: 고틀리프-다임러-슈타디온 1995: 울레비 1997: 올림피아코 스타디오 1999: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데 라 카르투하 2001: 코먼웰스 스타디움 2003: 스타드 드 프랑스 2005: 올림피아스타디온 2007: 나가이 육상 경기장 2009: 올림피아스타디온 2011: 대구스타디움 2013: 루즈니키 스타디움 2015: 베이징 국립 경기장 2017: 올림픽 스타디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국립_경기장_(도쿄도)&oldid=24261016" 분류: 1958년 설립2014년 폐지일본의 축구 경기 시설일본의 럭비 경기장일본의 육상 경기장도쿄도의 스포츠 시설신주쿠구의 건축물올림픽 스타디움국립 경기장1964년 하계 올림픽 경기장1958년 완공된 스포츠 시설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20: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야간비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야간비행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야간 비행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73년 영화에 대해서는 야간비행 (1973년 영화) 문서를, 2014년 영화에 대해서는 야간비행 (2014년 영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야간비행》(프랑스어: Vol de Nuit)은 생텍쥐페리의 두 번째 소설이다. 1931년에 출판되었으며, 같은 해에 페미나 상을 수상하였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 목차 1 배경 2 줄거리 3 출처 4 외부 링크 배경[편집] 이 책의 내용은 항공 우편 조종사와 아르헨티나에 있는 아르헨티나 항공 우편 회사(Aeroposta Argentina Company)의 관리직으로서 일했던 작가 생텍쥐페리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등장인물도 생텍쥐페리가 남아메리카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뚜렷하지는 않지만 막연한 연관성이 있으며, 특히 책에 나오는 리비에르 라는 인물은 항공 운항 감독이었던 디디에르 다우레트(Didier Daurat)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생텍쥐페리의 회고록인 《바람, 모래와 별들》(1939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줄거리[편집] 야간항공 우편의 창설기에 용감한 비행사들이 불충분한 계기에 의존하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우편을 배달하고 있다. 어느 저녁 무렵 비행사 파비앵은 파타고니아를 날아가서 아름다운 저녁 하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하고 있다. 파타고니아, 칠레, 파라과이로부터 우편기로 운반되어 오는 우편을 즉시 유럽으로 운반하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항공 우편국 지배인 리비에르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 조그만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엄격한 인간이다. 나이 많은 베테랑 정비사의 사소한 잘못에도 엄격하게 벌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존경은 받고 있어도 호감은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을 향해 전진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엄격하고 때로는 비인간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믿고 있다. 곧, 칠레에서 우편기가 도착한다. 다른 두 비행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파비앵의 비행기는 예상하지 못한 태풍 속에 들어가게 된다. 파비앵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바람에 흘러간다. 리비에르도 이 태풍이 있는 것을 알고 파비앵의 비행기를 무전으로 안전한 장소로 인도하지만 태풍의 범위가 넓어 적당한 장소가 없다. 그 사이에 파비앵의 귀환을 기다리던 아내가 비행장으로 전화를 걸어온다. 그러나 리비에르는 대답하지 않는다. 파비앵은 간신히 태풍권에서 벗어나 조용한 빛속을 비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비행기 연료는 곧 떨어지게 되어 있다. 리비에르도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절망한다. 그러나 리비에르는 명령한다. 파라과이에서의 우편기가 도착하면 유럽행 우편기를 즉시 출발시키라고. 출처[편집] ↑ Saint Exupéry: A Biography by Stacy Schiff, page 210 외부 링크[편집] 생텍쥐페리 전기 (영어)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야간비행"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소설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야간비행&oldid=24358625" 분류: 1931년 책밤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한 소설1931년 소설숨은 분류: 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소설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کوردی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lovenčin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일 (토) 23: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마초 (촉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초 (촉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마초(馬超) 출생 176년우부풍 무릉사망 222년 (47세)사인 병사국적 후한 → 촉나라 별칭 자(字)는 맹기(孟起)시호는 위후(威侯)경력 독군종사 → 편장군 → 정서장군 겸 병주목(자칭) → 평서장군 → 좌장군 → 표기장군 겸 양주목직업 장군작위 도정후 → 태향후적수 염행, 조조, 허저, 양부부모 마등친척 마대(종제)관련 활동 관중십장 중 한 명동관 전투, 기성 전투, 한중 공방전 등 마초(馬超, 176년 ~ 222년)는 후한, 촉한의 장군으로 자는 맹기(孟起)이며 사례 우부풍 무릉현(茂陵縣) 사람이다. 마원의 후손이자 마등의 장남으로 그 세력을 물려받았다. 관서에서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관중십장 중 한 명이라 불렸다. 조조에게 처절할 정도로 대항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가문만 몰살당하였다. 유비에게 망명하여 좌장군을 거쳐 표기장군까지 올랐다. 용맹함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민족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목차 1 생애 1.1 마등의 장남 1.2 관중십장의 위기감 공유 1.3 이간계에 빠져 1.4 재기 1.5 양주를 잃고 1.6 유비에게 망명 2 동관 전투 패배 후 재차 거병한 시기 3 평가 4 일화 5 삼국지연의 6 가계 7 각주 8 참고 문헌 생애[편집] 마등의 장남[편집] 어렸을 때부터 건장하였다. 아버지 마등은 정서장군으로서 관서 지역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한 세력가 중 한 명이었다. 건안 초, 마등이 양주에서 진서장군(鎭西―) 한수와 전쟁을 벌였다. 한수의 장수 염행도 마초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났기에 서로 겨루었다. 염행이 모로 마초를 찌르려 했는데 모가 부러졌다. 염행이 당황하지 않고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가격해 마초는 죽음의 문턱을 다녀왔다.[1]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을 화해시켰다. 202년 원담·원상 형제가 곽원과 고간을 보내 하동군을 찔렀다. 마초는 종요의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그 토벌을 도왔다. 평양현(平陽縣)에서 맞붙어 유시에 맞은 다리를 자루로 싸매면서까지 분전한 끝에 격파하였다. 곽원의 머리는 마초의 부장 방덕이 취하였다. 이윽고 서주자사를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208년[2] 마등은 위위를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다. 마초가 편장군(偏將軍)에 도정후(都亭侯)를 받고 마등의 세력을 통솔하였다. 동생 마휴와 마철도 각기 봉거도위(奉車都尉)와 기도위에 임명되어 가족들과 업으로 이주하고 마초만이 남았다.[3] 관중십장의 위기감 공유[편집] 211년 3월(음력, 이하 모두 음력) 장로가 다스리던 한중으로 조조가 군을 움직였다. 관서에서 각자의 영역을 점유하고 있던 관중십장은 자신들을 노리는 것이 아닌지 술렁거렸다. 마초가 한수에게 “예전에 종요가 저더러 장군을 치라고 했을 정도로 관동 사람들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저는 아버지를 버리고 장군을 아버지로 여기겠으니 장군도 자식을 포기하고 저를 자식처럼 대하십시오.”라며 설득하였다.[1] 한수는 자식이 조정에 가있었다.[4] 결국 양추, 이감, 성의 등 관중십장은 동시에 군을 일으켜 동관(潼關)으로 진군하였다. 관서의 군대는 긴 모를 능숙히 다루는 정예 강군이었다.[5] 조조의 재종형제 조인은 싸움에 응하지 않고 수비만 굳혔다. 가을, 비로소 조조가 와서는 동관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관서군도 이에 대응해 황하 서쪽의 병력을 동관으로 집결시키자 조조가 서황과 주령으로 하여금 기습적으로 포판진(蒲阪津, 하동군 포판현 소재)을 건너게 해 황하 서쪽을 점거하였다. 이어서 조조의 본대도 황하 북쪽으로 도하하였다. 이를 만여 명으로 들이쳤으나 허저가 충용 무쌍하게 조조를 호위한 데다[6] 정비(丁斐)가 풀어버린 소와 말에 군사들의 정신이 팔려 조조를 놓치고 말았다. 조조군이 황하의 서안을 확보했으므로 관서군은 위구(渭口)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몰래 위수로 진출하고 그 남쪽에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관서군도 위수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이간계에 빠져[편집] 9월, 마초는 조조군이 도강해오는 것을 기병으로 저지하였다. 강가엔 모래도 많아 조조군은 보루를 쌓지 못했는데 누규가 ‘날씨가 차니 모래에 물을 붓자’고 하여 하룻밤 만에 위수의 남안에 성을 축조하고는 기어이 넘어왔다.[7] 이에 마초 등이 수차례 건드렸는데 조조군은 자리만 지킬 뿐 응전하지 않았다. 마음이 풀어진 관서군은 조조에게 자신들의 영토만 보전해준다면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과정에서 한수·마초가 조조와 필마단기로 회담하였다. 마초는 자신의 힘을 믿어 그 자리에서 조조를 붙잡을 생각이었는데 허저가 조조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기에 헛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조조는 가후의 계책을 활용해 관서군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조조는 한수의 아버지와 같은 해에 효렴으로 천거됐으며, 한수와는 동년배이기도 하였다. 한수의 요청에 서로 회담하면서도 군사에 관한 일은 꺼내지 않고 사사로이 담소만 나누었다. 파한 후 마초 등 관중십장이 한수에게 조조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다. ‘별 말 없었다’는 대답에 자연히 의심이 생겨났다. 다른 날 조조가 한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고치고 지운 흔적이 많아 마치 한수가 그런 것처럼 보인지라 관중십장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마침내 조조가 벌인 회전에서 대패하여 마초는 서융으로 달아났다. 재기[편집] 조조는 안정까지 추격했다가 소백(蘇伯) 등이 일으킨 하간에서의 반란으로 인해 환군하였다. 양부가 마초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방비를 철저히 해야한다고 진언했으나 급히 가느라 그러지 못하였다. 212년 혹은 213년[8] 과연 마초는 강족 등 호인(胡人)들과 함께 농산(隴山) 일대를 습격하였다. 다수의 군현이 이에 호응하였고 한중의 장로도 양앙을 보내 지원하였다. 양주자사 위강과 한양태수는 치소인 기현(冀縣)만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만여 명으로 공성에 들어갔다.[9] 몇 겹으로 포위하고 치열하게 싸우던 어느 날, 누군가가 성에서 몰래 나온 흔적이 발견되었다. 사람을 풀어 추적하니 현친현(顯親縣) 경에서 양주별가(―別駕) 염온(閻溫)이 붙잡혀왔다. 위강이 장안을 진수하고 있던 하후연에게 위급함을 알리고자 밀파한 것이었다. 그 포승을 풀어주며 회유하는 동시에 ‘원병이 없을 거란 사실을 성을 향해 외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염온은 오히려 3일 만에 원군이 당도할 것이라며 힘내라고 소리치니 성에서는 만세 소리가 터져나왔다. 목숨이 아깝지 않냐고 화를 냈지만 염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끈질기게 달랬음에도 죽음만이 있을 뿐 두 마음은 없다며 굽히지 않아 그 생을 마감시켜주었다.[10] 8월, 전의를 상실한 위강이 성문을 열면서 정월부터 시작한 전투가 끝났다. 약속과 달리 양앙을 시켜 위강과 태수를 살해하였다.[9] 뒤늦게 위강을 구하러 달려오던 하후연도 200여 리 거리에서 요격해 물리쳤다.[11] 이로써 농우를 장악하고 정서장군 겸 병주목, 독양주군사를 자칭하였다. 양주를 잃고[편집] 9월, 양부와 강서(姜敍)가 노성(鹵城)에서, 윤봉과 조앙이 기산(祁山)에서 마초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를 응징하러 친히 출격하니 이번엔 양관(梁寬)과 조구(趙衢)가 본거지인 기성을 걸어 잠그고 마초의 처자를 효수하였다. 알고 보니 양부, 강서, 강은(姜隱), 조앙, 윤봉, 요경(姚瓊), 공신(孔信), 이준(李俊), 왕령(王靈), 양관, 조구, 방공(龐恭)이 마초를 몰아내려고 계획한 것이었다.[9] 진퇴양난에 빠져 할 수 없이 한중으로 도주하는 길에 역성(歷城)에 닿았다. 역성에서는 마초군을 강서군이라 오인하여 문을 열어주었다. 마초는 강서의 어머니와 자식들의 목숨을 빼앗고 성에 불을 질렀다.[12] 마초의 아버지와 동생 등 일족 200명은 마초의 죄에 연좌되어 이미 212년 5월에 처형당한 후였다.[13] 장로를 의지하였다. 장로가 마초를 도강좨주(都講祭酒)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려다가 ‘피붙이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겠냐’는 얘기가 나와 그만두었다. 정월 초하루, 첩 동씨(董氏)의 동생 동충(董种)이 장수를 빌자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며 “온 집안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같은 운명을 맞았는데 새해를 경축하겠는가!”라 애통해 하였다.[3] 214년, 장로로부터 병사를 받아 다시 기산을 공격하였다. 이번엔 하후연이 재가도 받지 않고 재빠르게 원군으로 출동하였다. 그 선발대 장합의 군세를 보고는 싸우지 않고 철수하였다.[11] 유비에게 망명[편집] 장로와는 큰일을 이룰 수 없다고 답답해 했으며 양백 등 장로의 장수들은 그런 마초를 싫어하였다. 유비가 성도의 유장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유비에게 밀서를 보내 망명을 청하고 무도군을 통해 촉나라로 들어갔다.[3] 유비의 환영을 받으며 성도 아래에 주둔하니 성은 두려움에 떨었고 얼마 안 가 항복하였다. 평서장군(平西―)에 임명되고 남군 임저현(臨沮縣)을 수비했으며 작위는 도정후를 유지하였다. 217년 장비, 오란, 뇌동[14] 과 같이 무도군 하변현(下辯縣)으로 전진했다가 218년, 조홍에게 깨지고 유비의 한중 전선에 합류하였다. 219년(건안 24년)[14]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다. 마초는 좌장군에 가절(假節)을 받아 관우, 장비, 황충과 나란히 사방장군이 되었다. 221년(장무 원년) 표기장군으로 승진하고 양주목을 겸했으며 태향후(斄鄕侯)로 진봉되었다. 222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유비에게 ‘가문의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마대 등 얼마 남지 않은 일족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260년(경요 3년) 관우, 장비, 방통, 황충과 함께 시호를 받아[15] 위후(威侯)라 하였다. 동관 전투 패배 후 재차 거병한 시기[편집] 각 기록마다 그 시기가 다르다. 《삼국지》 양부전과 《후한서》 효헌제기에서는 위강이 마초로부터 피살당한 때를 212년 8월이라 하였으며 《삼국지》 양부전에서는 그해 9월에 강서가 노성에서 마초에 대항하였다고 적었다. 한편 《삼국지》 무제기에서는 마초가 213년에 한양군에서 거병하였고 214년 정월에 조구와 윤봉이 마초의 처자를 효수하였다고 썼다. 《삼국지》 하후연전과 《후한서》 동탁전에서도 214년에 양부 등이 마초를 한중으로 쫓아냈다고 서술하였다. 이에 대해 사마광은 《삼국지》 무제기의 기술로 보아 《삼국지》 양부전의 연대는 오류이며 마초의 축출이 214년으로 밀린 것은 그 소식이 수도에 다다르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일 것이라 보고 《자치통감》에 모두 213년의 기사로 처리하였다.[16] 어느 기술이 맞는지는 더 이상의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확신할 수 없다. 남아있는 기록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가설은 대략 세 가지이다. 마초가 기성을 공격한 것부터 장로에게 도피한 것은 모두 212년의 일이다. 마초의 기성 공성은 212년, 양부·강서 등의 반발은 213년에 일어났다. 마초의 기성 공격부터 장로에게 피신한 것까지 몽땅 213년에 있었다. 평가[편집] 진수 : 서융과 용력에 의지하다가 자신의 일족을 망쳤으니 애석하도다![17] 양부 : 한신이나 영포처럼 용맹하고 강인(羌人)과 호인(胡人)들의 마음까지 크게 얻고 있습니다. 정벌군이 돌아가고 대비를 철저히 하지 않는다면 농산 일대는 국가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제갈량 : 문무를 겸비했으며 남보다도 웅렬한 한 시대의 호걸로서 경포(=영포), 팽월과도 같은 부류입니다. 응당 장비와 나란히 말달리며 그 선두를 다툴 자입니다.[18] 일화[편집]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서는 유비가 마초를 후하게 대해준 것을 계기로 마초가 유비를 낮추어 부르자 관우와 장비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어느 날 마초와 유비가 만나는 자리에서 유비의 양쪽에 관우와 장비가 칼을 차고 지키는 것을 본 마초는 이내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이후 태도를 바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배송지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마초는 궁박해져 유비에 귀의하여 그의 작위를 받았는데 어찌 오만하게 유비의 자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유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진수하게 했으니 관우는 일찍이 익주 땅에 있은 적이 없다. 그래서 관우는 마초가 투항했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주는 누구에 비견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으로 이 책(산양공재기)이 말하는 바대로가 아니니, 관우가 어찌 장비와 함께 곧게 서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무릇 사람이 일을 행할 때는 모두 그것이 가능하다 하여도 불가함을 알면 이를 행하지 않는 법이다. 과연 마초가 유비의 자를 불렀다면 또한 이치로 볼 때 의당 그리해도 된다고 여겨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관우가 마초를 죽일 것을 청했다 하더라도 마초는 이를 듣지 못했는데, 단지 두 사람이 곧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슨 까닭으로 이내 (자신이 유비의) 자를 불렀기 때문임을 알아채고는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고 말했겠는가? 말이 이치에 닿지 않음이 너무 심해 가히 분질(忿疾-분노하고 미워함)에 이르는구나. 원위(袁暐-헌제춘추의 지은이), 악자(樂資-산양공재기의 지은이) 등이 기재한 여러 대목은 추잡하고 헛되고 그릇되니(穢雜虛謬) 이와 같은 부류가 거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다. 삼국지연의[편집]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마등의 용맹무쌍한 장남으로 나오는데 미남이라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마등과 한수가 이각·곽사·장제·번조 4인방과 싸울 때 17세의 소년 장수로 첫 등장하여 왕방을 찔러 죽이고 이몽을 생포한다. 마등이 가공의 인물 황규와 손잡고 조조에 대한 반란을 기도하다 처형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조조와 싸움을 벌인다. 허저와 일대일로 격돌한다. 사자 투구와 은갑옷, 하얀색 도포를 갖추고 가맹관(葭萌關)에 이른다. 그 비범한 차림새와 재주에 유비가 ‘사람들이 금마초(錦馬超)라 부른 게 허명이 아니었다’며 감탄한다. 장비와 호각지세로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회의 설득에 응해 귀순한다. 한중왕으로 등극한 유비가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을 오호대장군에 봉한다. 가계[편집] 아버지 : 마등 동생 : 마휴, 마철 아들 : 마추(馬秋) - 첩 동씨(董氏)와의 자식으로 마초가 입촉할 때 한중에 남았다. 조조가 한중을 정복하면서 동씨는 염포에게, 마추는 장로에게 주었는데 장로가 죽였다.[3] 아들 : 마승(馬承) - 오직 후사를 이었다는 기록만이 남았고 나머지는 미상이다. 딸 : 유비의 아들 안평왕(安平王) 유리에게 시집갔다. 각주[편집] ↑ 가 나 어환, 《위략》 ; 배송지 주석, 《삼국지》15권 위서 제15 장기에서 인용 ↑ 건안 15년은 오기이다. ↑ 가 나 다 라 어환, 《전략》(典略) ; 배송지 주석, 《삼국지》36권 촉서 제6 마초에서 인용 ↑ 《삼국지》13권 위서 제13 종요 ↑ 왕침 등, 《위서》 ; 배송지 주석,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에서 인용 ↑ 《삼국지》18권 위서 제18 허저 ↑ 《조만전》(曹瞞傳) ; 배송지 주석,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에서 인용 ↑ 212년은 《삼국지》 양부전과 《후한서》 효헌제기. 213년은 《삼국지》 무제기와 《자치통감》 ↑ 가 나 다 《삼국지》25권 위서 제25 양부 ↑ 《삼국지》18권 위서 제18 염온 ↑ 가 나 《삼국지》9권 위서 제9 하후연 ↑ 황보밀, 《열녀전》 ; 배송지 주석, 《삼국지》25권 위서 제25 양부에서 인용 ↑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건안 17년 ↑ 가 나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 《삼국지》33권 촉서 제3 후주 유선 경요 3년 ↑ 《자치통감고이》3권 ↑ 《삼국지》36권 촉서 제6 조운 ↑ 《삼국지》36권 촉서 제6 관우 참고 문헌[편집] 《삼국지》36권 촉서 제6 마초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전임-(촉한 건국) 촉한의 표기장군221년 ~ 222년 후임?(230년부터 이엄) vdeh오호대장군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vdeh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군주한 영제 소제 헌제 위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촉 유비 유선 오 손견 손책 손권 손량 손휴 손호 진 사마염 기타 공손연 공손찬 도겸 동탁 마등 여포 원소 원술 유언 유장 유표 장각 장로 한수 참모 문관한 공융 교현 양표 왕윤 채옹 위 가후 곽가 곽회 동소 사마사 사마소 사마의 순욱 순유 양수 왕랑 왕숙 유엽 정욱 종요 종회 진군 화흠 촉 간옹 동윤 등지 마량 마속 미축 방통 법정 비의 손건 양의 유파 이적 장완 제갈량 진지 오 감택 고옹 노숙 반준 보즐 여범 우번 육손 장굉 장소 장제 제갈각 제갈근 주유 진 가충 순욱 장화 진수 기타 곽도 괴량 괴월 봉기 심배 이유 장송 저수 전풍 진궁 채모 허유 무장한 노식 동승 주준 하진 황보숭 위 가규 등애 방덕 만총 서황 손례 악진 우금 이전 장합 장료 전예 전위 조인 조진 조창 조홍 조휴 하후돈 하후연 학소 허저 촉 강유 관우 관평 마대 마초 엄안 오의 왕평 요화 위연 이엄 장비 장익 조운 주창 진도 하후패 황권 황충 오 감녕 능통 미방 반장 서성 육항 여몽 장흠 전종 정보 정봉 제갈정 주치 주태 주환 진무 태사자 하제 한당 황개 진 두예 문앙 문호 석포 양호 왕준 기타 고순 곽사 기령 맹달 문추 안량 양봉 이각 장임 제갈탄 화웅 여인한 당희 동태후 하태후 초선 헌목황후 위 견황후 곽귀인 양휘유 왕원희 장춘화 하후휘 촉 감부인 미부인 목황후 황월영 오 대교 소교 보연사 손노반 손부인 오부인 진 양염 양지 기타 채부인 채염 축융부인 비한족 가비능(선비) 구력거(오환) 답돈(오환) 동천왕(고구려) 맹획(남만) 어부라(흉노) 히미코(일본) 기타 관로 남화노선 사마휘 예형 우길 좌자 화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마초_(촉한)&oldid=23140067" 분류: 176년 태어남222년 죽음병사한 사람유비 휘하의 장군삼국지 촉나라의 표기장군좌장군마등과 주변 인물장로와 주변 인물산시성 (섬서성) 출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NorskPortuguê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ไทยTiếng Việt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3일 (월) 17: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윈도우 드라이버 모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윈도우 드라이버 모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윈도우 드라이버 모델 (Windows Driver Model, WDM)은 컴퓨팅에서 윈도우 95, 윈도우 3.1, 윈도우 NT 드라이버 모델과 같은 오래된 버전의 윈도우에서 쓰였던 VxD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윈도우 95, 윈도우 2000에 도입된 장치 드라이버를 위한 프레임워크이다. Win32 드라이버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목차 1 개요 1.1 장치 기능 드라이버 1.2 버스 드라이버 1.3 필터 드라이버 2 VxD, WDM, 그리고 윈도우 98 3 비판 4 참조 5 같이 보기 6 외부 링크 개요[편집] WDM 드라이버는 복잡한 계층으로 되어 있고 입출력 요청 패킷 (IRP)을 통해 서로 통신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드라이버 모델은 기록되어야 하는 코드의 양을 줄이고 요구 사항을 표준화함으로써 윈도우 98과 윈도우 2000 운영 체제를 위한 통합 드라이버 모델을 정의하였다. WDM 드라이버는 윈도우 98, 윈도우 2000 이전의 운영 체제, 다시 말해 윈도우 95, 윈도우 NT 4.0, 윈도우 3.1 등에서는 동작하지 않는다. WDM을 따르게 되면 x86 기반의 컴퓨터에서 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Me, 윈도우 2000,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비스타 (하위 호환성을 위함)에 걸쳐 이진 코드 호환성과 소스 호환성을 보장한다. WDM은 상위 호환성을 전제로 만들어졌으므로 WDM 드라이버는 드라이버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보다 더 새로 나온 윈도우의 버전에서도 동작할 수 있지만 새로운 버전의 운영 체제에 도입된 새로운 기능의 이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WDM은 일반적으로 하위 호환성은 제공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WDM 드라이버는 더 오래된 버전의 윈도우에서 동작하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윈도우 XP는 윈도우 2000용으로 작성된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으나 윈도우 XP에 도입된 어느 새로운 WDM 기능도 이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윈도우 XP용으로 쓰여진 드라이버는 윈도우 2000에서 사용할 수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WDM은 윈도우 2000 커널 모드 드라이버들의 중재 계층에 존재하며 윈도우의 드라이버 기록을 쉽게 하고 기능을 증가시킬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WDM이 윈도우 98 계열부터 윈도우 2000 계열에 이르기까지 주로 이진 코드 호환성과 소스 호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이것이 반드시 선호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한 드라이버는 그 둘 중 하나의 운영 체제에 맞추어서 개발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WDM 드라이버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장치 기능 드라이버[편집] 기능 드라이버는 장치를 위한 주된 드라이버이다. 기능 드라이버는 일반적으로 장치 제조업체가 만들어내며 (드라이버가 원본 모드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면) 필수적이다. 기능 드라이버는 하나 이상의 장치를 도와줄 수 있다. 클래스 드라이버: 기능 드라이버의 일종으로, 미니포트와 기타 클래스 드라이버를 맨 위층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내장 프레임워크 드라이버로 생각할 수 있다. 클래스 드라이버는 서로 다른 수준의 WDM 아키텍처 사이에서 상호 작용한다. 다른 드라이버 클래스 사이의 공통 기능은 클래스 드라이버 안에다 기록할 수 있으며 다른 클래스와 미니포트 드라이버가 이를 사용한다. 낮은 수준의 클래스 드라이버는 미니포트 드라이버에 노출된 저만의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지만 높은 수준의 클래스 드라이버는 운영 체제에 따른다. 클래스 드라이버는 원하는 대로 동적으로 로드하거나 언로드할 수 있다. 이들은 하드웨어나 버스에 따르지 않는 클래스 고유 기능으로, 실제로 열거(Enumeration)와 같이 클래스 고유 기능만 다루는 경우도 있다. 미니포트 드라이버: USB, 오디오, SCSI, 네트워크 어댑터를 위한 기능 드라이버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윈도우 98에서 윈도우 2000에 이르기까지의 소스 호환성과 이진 호환성을 보장하지만 특정한 버스 클래스 드라이버를 통해 하드웨어로의 접근을 제어한다. 버스 드라이버[편집] 버스 드라이버는 버스 컨트롤러, 어댑터, 브리지를 도와 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I, PnPISA, SCSI, USB, IEEE1394와 같은 가장 일반적인 버스를 위한 버스 드라이버를 제공한다. 각 소프트웨어 제조업체는 필요하다면 저만의 버스 드라이버를 만들 수 있다. 버스 드라이버는 컴퓨터에 같은 종류의, 하나 이상의 버스가 일을 경우 하나 이상의 버스를 도와 줄 수 있다. 필터 드라이버[편집] 필터 드라이버는 선택적인 드라이버로서, 장치의 동작에 값을 더하거나 수정하는 역할을 하며 비장치 드라이버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필터 드라이버는 하나 이상의 장치를 도와 줄 수 있다. 상위 수준의 필터 드라이버는 기능 드라이버를 위한 기본 드라이버 위에 놓일 수 있지만 하위 수준의 필터 드라이버는 기능 드라이버 아래와 버스 드라이버 위에 놓일 수 있다. 장치 서비스: 이것은 윈도우 서비스로 추가된, 커널 수준의 필터 드라이버의 일종이며 응용 프로그램들이 장치와 함께 동작할 수 있게 도와 준다. VxD, WDM, 그리고 윈도우 98[편집] 윈도우 98 기반 운영 체제(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Me)는 WDM와 VxD 드라이버 표준을 둘 다 사용할 수 있다. 이 드라이버들은 둘 다 같은 하드웨어에 통일되고도 각기 다른 기능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더 새로운 WDM 표준은 더 많은 기능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VxD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TV 수신 카드는 384 x 288 화소의 해상도로 영상을 캡처할 수 있지만 같은 TV 수신 카드에 WDM 드라이버를 사용하게 되면 768 x 576 화소의 해상도로 캡처할 수 있다. 이는 WDM의 일부인 새로운 브로드캐스트 드라이버 아키텍처 (BDA)의 도움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 비판[편집] 윈도우 드라이버 모델은 드라이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부터 비평을 받아왔으며 다음과 같은 사항이 주를 이룬다[1]: WDM은 매우 가파른 학습 곡선이 있다. 전원 관리 이벤트와 플러그 앤 플레이의 상호 작용이 쉽지 않다. 입출력 취소가 거의 불가능하다. 지원 코드의 수천 개의 라인이 드라이버마다 요구된다. 순수 사용자 모드 드라이버 기록을 지원하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제공한 문서의 품질과 샘플에 대한 수많은 문제도 거론되었다. 이러한 문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WDM을 대체할 새로운 프레임워크인 윈도우 드라이버 파운데이션(WDF)을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커널 모드 드라이버 파운데이션 (KMDF)와 사용자 모드 드라이버 파운데이션 (UMDF)를 포함하고 있다. 윈도우 비스타 이상의 운영 체제에서는 WDM과 더 새로운 윈도우 드라이버 파운데이션을 둘 다 제공하고 있다. KMDF는 윈도우 2000/XP용으로도 제공되지만 UMDF는 윈도우 XP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참조[편집] Finnel, Lynn (2000년). MCSE Exam 70-215, Microsoft Windows 2000 Server. Microsoft Press. ISBN 1-57231-903-8. Oney, Walter (2003년). Programming the Windows Driver Model, Microsoft Press, ISBN 0-7356-1803-8. 같이 보기[편집] 윈도우 드라이버 파운데이션 커널 모드 드라이버 프레임워크 사용자 모드 드라이버 프레임워크 외부 링크[편집] 윈도우 드라이버 API의 기본 - 이 문서는 WDM, ASIO, MME, DirectX와 같은 사운드카드 드라이버에 숨겨진 기본 정보를 제공한다. Channel 9 Video - 주로 플러그 앤 플레이를 아우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장치 관리, 설치 인터뷰. vdeh마이크로소프트 API와 프레임워크그래픽스 데스크톱 창 관리자 Direct2D Direct3D D3D (확장 기능) GDI / GDI+ WPF 실버라이트 WinRT XAML 윈도우 컬러 시스템 윈도우 이미지 애퀴지션 윈도우 이미징 컴포넌트 DirectX 그래픽스 인프라스트럭처 (DXGI) 윈도우 고급 래스터화 플랫폼 (WARP) WinG 오디오 다이렉트뮤직 다이렉트사운드 DirectX 플러그인 XACT 음성 API XAudio2 멀티미디어 DirectX 미디어 오브젝트 비디오 가속 Xinput 다이렉트인풋 다이렉트쇼 이미지 마스터링 API 매니지드 DirectX 미디어 파운데이션 XNA 윈도우 미디어 비디오 포 윈도우 웹 MSHTML RSS 플랫폼 J스크립트 VB스크립트 BHO XDR 사이드바 가젯 타입스크립트 데이터 액세스 데이터 액세스 컴포넌트 (MDAC) ADO ADO.NET ODBC OLE DB Extensible Storage Engine 엔티티 프레임워크 싱크 프레임워크 제트 엔진 MSXML OPC 네트워크 윈속 LSP 윈속 커널 필터링 플랫폼 NDIS 윈도우 랠리 BITS P2P API MSMQ MS MPI 다이렉트플레이 통신 메시징 API 텔레포니 API WCF 관리 Win32 콘솔 윈도우 스크립트 호스트 WMI (확장 기능) 윈도우 파워셸 작업 스케줄러 오프라인 파일 섀도 복사본 윈도우 인스톨러 오류 보고 이벤트 로그 공통 로그 파일 시스템 컴포넌트 모델 COM COM+ 액티브X 분산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 닷넷 프레임워크 라이브러리 프레임워크 클래스 라이브러리 마이크로소프트 파운데이션 클래스 (MFC) 액티브 탬플릿 라이브러리 (ATL) 윈도우 탬플릿 라이브러리 (WTL) 장치 드라이버 WDM WDF KMDF UMDF WDDM NDIS UAA BDA VxD 보안 Crypto API CAPICOM 윈도우 카드스페이스 데이터 보호 API 보안 지원 제공자 인터페이스 (SSPI) 닷넷 ASP.NET ADO.NET 리모팅 실버라이트 TPL WCF WCS WPF WF 소프트웨어 팩토리 EFx 팩토리 엔터프라이즈 라이브러리 컴포짓 UI CCF CSF IPC MSRPC 동적 데이터 교환 (DDE) 리모팅 WCF 접근성 액티브 액세서빌리티 UI 자동화 텍스트 및 멀티미디어지원 다이렉트라이트 텍스트 서비스 프레임워크 텍스트 오브젝트 모델 입력 방식 편집기 언어 인터페이스 팩 다중 언어 사용자 인터페이스 유니스크라이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윈도우_드라이버_모델&oldid=21295621" 분류: 장치 드라이버마이크로소프트 API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ansk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5월 18일 (금) 11: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미안해, 고마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안해, 고마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미안해, 고마워 감독 임순례, 오점균, 송일곤, 박흥식 제작 보리픽쳐스 배급사 키노아이 개봉일 2011년 5월 26일 시간 1시간 55분 국가 대한민국 언어 한국어 《미안해, 고마워》는 2011년 5월 26일에 대한민국에서 개봉된 영화이다. 목차 1 줄거리 2 캐스팅 2.1 고마워, 미안해 2.2 쭈쭈 2.3 내 동생 2.4 고양이 키스 줄거리[편집] 아빠처럼 나를 돌봐주었고, 외로운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동생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예쁜 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동물들과의 포근한 스킨쉽!!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선물 <고마워 미안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 아버지가 오랫동안 길러온 반려견 '수철이'를 통해 사랑하는 딸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기는데... 갈 곳 없는 나의 유일한 친구 <쭈쭈> 유기견 '쭈쭈'를 분양 받은 노숙자 '영진'. 세상에서 내몰린 이 둘은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 가며 사람과의 우정보다 더 깊고 진한 공감을 맛보게 되는데... 6살 소녀에게 찾아온 생애 첫 번째 이별 <내 동생> 강아지 '보리'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6살 소녀 보은에게 진짜 동생이 생기면서 갑작스럽게 '보리'와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게 되는데... 티격태격 부녀의 서툰 화해 <고양이 키스> 집 없는 고양이를 끔찍이 돌보는 딸과 고양이라면 질색하는 아버지. 사사건건 부딪혀온 부녀는 길 고양이를 돌보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데... 캐스팅[편집] 고마워, 미안해[편집] 김지호 : 오수영 역 남명렬 : 오명철 역 서태화 : 남편 역 안서현 : 린이 역 하늘이 : 오수철 역 쭈쭈[편집] 김영민 : 영진 역 사랑이 : 쭈쭈 역 손종학 : 현규 역 이소윤 : 혜원 역 내 동생[편집] 김수안 : 보은 역(문정희 : 성인 보은 역) 조아진 : 보리 역 전수지 : 엄마 역 성열석 : 아빠 역 최혁 : 동물병원 조수 역 고양이 키스[편집] 최보광 : 혜원 역 전국환 : 아버지 역 천보근 : 민준 역 vdeh임순례 감독 영화 《우중산책》(1994, 단편) 《세 친구》(1996)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소중한 사람》(2002) 《여섯 개의 시선》(2003)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날아라 펭귄》(2008)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2010) 《미안해, 고마워》(2011) 《남쪽으로 튀어》(2013) 《제보자》(2014) 《리틀 포레스트》(201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안해,_고마워&oldid=24259892" 분류: 2011년 영화대한민국의 영화 작품대한민국의 드라마 영화임순례 감독 영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13: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프리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만화 드래곤볼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프리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름 도감번호 성비 한국어 일본어 영어 프리져 フリーザー Articuno 전국 144성도 240 없음 포켓몬 타입 분류 신장 체중 프리져 얼음 / 비행 냉동 포켓몬 1.7m 55.4kg 특성(숨겨진 특성은 *) 프레셔 자신에게 기술을 쓴 상대방의 포켓몬의 기술 PP가 1씩 더 감소한다. *눈숨기 날씨가 싸라기눈일 때 회피율이 오른다. 《프리져》(フリーザー 후리자[*])는 포켓몬스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가공의 캐릭터(몬스터) 이다. 목차 1 특징 2 게임에서의 프리져 3 애니메이션에서의 프리져 4 그 외에서의 프리져 5 관련 항목 특징[편집] 전설의 새 포켓몬. 공기 중의 수분을 얼려 눈보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눈산에서 조난당하면 눈앞에 프리져가 나타나 구해준다는 전설이 있다. 프리져가 방문한 마을에는 한 발 앞서 겨울이 온다. 게임에서의 프리져[편집] 《포켓몬스터 적·녹·청·피카츄》, 《포켓몬스터 파이어 레드·리프 그린》, 《포켓몬스터 하트 골드·소울 실버》에서는 쌍둥이섬의 심층부에 서식하고 있다. 《포켓몬스터 기라티나》에서는 전국도감을 얻은 후, 팔파크에서 오박사를 만나고 영원시티에 있는 오박사의 집에가서 오박사에게 말을 걸면, 프리져, 썬더, 파이어가 도로를 돌아다닌다. 프리져, 썬더, 파이어는 포획에 실패하면 도망가는데, 특성이 그림자밟기 (마자, 마자용)인 포켓몬을 이용하거나 도망 못가게 하는 기술을 쓰든가 마스터볼을 많이 얻어서 마스터볼로 한 방에 잡는 것이 포획 성공의 지름길이다. 잡으려면 잠재워서 잡는 것을 권한다. (다크홀, 풀피리, 악마의키스, 노래하기, 수면가루, 버섯포자, 최면술, 하품) 프리져는 pt 기라티나의 배틀타워에서 처음부터 맥이 가지고 있으면 만날 수 있다.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DX》에서는 몬스터 볼에서 낮은 확률로 등장한다. 포켓몬고 포켓몬고에서는 2017년 7월 후반 경 한국에 레이드로 루기아와 함께 첫 전설포켓몬으로 출시되었다. 현재 나온 전설 포켓몬중 엔 cp가 34000정도로 제일 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명이상의 플레이어들이 모여 협공을 해야 잡기가 쉬워진다. 포켓몬스터 시간,어둠의 탐험대에서는 7개의 비보중 하나인 얼음플루트를 지키는 포켓몬이다. 애니메이션에서의 프리져[편집] 《포켓몬스터》190화에 등장. 《포켓몬스터 AG》135, 136화에 프론티어 브레인 다투라의 친구로 등장. 지우의 리자몽과 시합하지만 패한다. 《포켓몬스터 디 오리진》4화에서 레드에게 포획되어 뮤츠를 잡을때 사용되었다. 그 외에서의 프리져[편집] 극장판 《루기아의 탄생》에 등장. 관련 항목[편집] 포켓몬스터 vdeh포켓몬 목록1세대 미싱노 피카츄 이상해씨 파이리 리자몽 꼬부기 피죤투 나옹 프테라 프리져 썬더 파이어 망나뇽 뮤츠 뮤 2세대 치코리타 브케인 리아코 루기아 칠색조 세레비 3세대 나무지기 아차모 물짱이 보만다 메타그로스 가이오가 그란돈 레쿠쟈 지라치 테오키스 4세대 모부기 불꽃숭이 팽도리 한카리아스 루카리오 디아루가 펄기아 기라티나 마나피 쉐이미 아르세우스 5세대 비크티니 주리비얀 뚜꾸리 수댕이 레시라무 제크로무 큐레무 케르디오 메로엣타 게노세크트 6세대 도치마론 푸호꼬 개구마르 제르네아스 이벨타르 지가르데 디안시 후파 볼케니온 7세대 나몰빼미 냐오불 누리공 폭거북스 솔가레오 루나아라 네크로즈마 마기아나 마샤도 제라오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리져&oldid=21629007" 분류: 가공의 새얼음 포켓몬전설 포켓몬비행 포켓몬제1세대 포켓몬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BosanskiCatalàEnglishHrvatskiBahasa IndonesiaItaliano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rtuguês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6월 24일 (일) 10:1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신해혁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해혁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해 혁명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해혁명1911년 신해혁명 당시 상하이 시내 (난징동로)날짜1911년 10월 10일 ~ 1912년 2월 12일장소청 제국결과 중국 동맹회의 승리 청 제국의 몰락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외몽골 및 티베트의 독립 선언 위안스카이의 임시 대총통 집권과 쿠테타로 독재정권 시작 청나라 소조정의 설립교전국 청나라 중국 동맹회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군정부 후베이군 도독부 지휘관 순친왕 위안스카이 펑궈장 돤치루이 마안량 양증신 마기 쑨원[주해 1] 황싱 쑹자오런 천치메이 리위안훙 병력 200,000여 명 100,000여 명피해 규모 170,000여 명 ~ 50,000여 명 다른 뜻에 대해서는 신해혁명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이라고도 불린다. 목차 1 개요 2 배경 2.1 쓰러져 가는 청나라 2.1.1 양무운동 2.1.2 변법자강운동 2.1.3 의화단운동 2.2 청조의 개혁 2.2.1 과거제도 폐지와 학당 설립 개혁 2.2.2 군사제도 개혁 2.2.3 입헌군주제 추진 2.3 당시 중국 내 상황 3 혁명 조직 결성 3.1 쑨원의 혁명 운동 3.2 중국동맹회 결성 3.2.1 동맹회 지부 설치 3.3 혁명 참가자의 구성원 3.3.1 신흥지식인 참여 3.3.2 비밀결사 참가자 참여 3.3.3 해외 화교의 참여 3.3.4 신군 참여 3.3.5 신사층의 참여 3.3.6 외국인 참여 4 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 4.1 동맹회 활동 4.2 주요사건 4.2.1 안휘 신군 봉기 4.2.2 경술 신군 봉기 4.2.3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4.2.4 황화강 사건 4.3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활동 5 혁명의 전야 5.1 보로운동의 확산과 쓰촨 폭동 5.1.1 배경 5.1.2 청조의 철도국유화령 5.1.3 보로운동 확산 6 혁명의 전개 6.1 우창 봉기 6.2 각 성의 호응과 독립 6.3 청조의 대응과 위안스카이의 등장 6.4 북양군의 혁명군 진압 6.5 남북의화 7 중화민국의 수립 7.1 중화민국임시정부조직대강 7.2 쑨원의 귀국과 초대 임시대총통 취임 7.3 임시참의원과 임시약법 8 청 멸망과 중화민국 초기 8.1 선통제 퇴위·청조 멸망 8.2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과 독재정치 9 영향 9.1 국외상 영향 9.2 국내상 영향 10 평가 11 논쟁 12 영화·문학속에서의 신해혁명 13 같이 보기 14 각주 15 참고 자료 16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00년의 의화단운동 이후 열강들의 침략이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청 조정은 정치개혁을 꾀하는 소위 '신정' 운동을 일으켰으나 납세 거부와 기독교 배척을 위시한 대중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1] 이런 정세하에서 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일변 혁명파를 지휘,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1] 1911년 청나라가 철도 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쓰촨봉기로 결국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0월 10일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한 달 만에 14 성(省)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고[2] 12월 말에는 17개 성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하였다.[3] 1912년 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조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선통제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1] 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라서 신해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곧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제제(帝制)의 야심을 품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일편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1913년 7월 국민당에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려는 운동하면서 혁명을 호소하여 봉기했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고 하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1]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5년 일본의 '21개 조 요구' 수락을 위시해 매판성을 드러내어 이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민중은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고 부르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내전과 군벌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1]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월 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쌍십절”로 기념한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배경[편집] 쓰러져 가는 청나라[편집] 양무운동[편집] 양무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서구의 무기를 주목하게 된 청의 관리들이 1860년대 중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수산업을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차츰 민수 부문으로 확산되어 근대 특징이 될 만한 경향이 있는 광공업의 발전, 전신선과 철도 부설, 해군 양성과 유학생 파견, 신식 교육기관 설립까지 광범위하게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다. 양무운동 초기에는 청조가 반란 진압에 성공하여 “同治中興”이라고까지 회자됐지만 부국강병의 결과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양무운동 기간에 있었던 대외 전쟁(1884년 청불전쟁, 1894년 청일전쟁)에서 군사상으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양무 기업 대다수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할 무렵에는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4] 양무운동 실패 요인과 한계는 관리의 기업 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에 속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점이 주류였다. 특히 개혁을 지향하는 관리들이 지방에 분산된 채 통일하는 계획 없이 사업을 추진했으므로 급변하는 정세 변화에 효율로 대처하지 못한 점이 커다란 문제였다.[4] 변법자강운동[편집] 변법자강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캉유웨이 청일전쟁을 계기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자 그동안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상 개혁을 주장해 온 변법론이 힘을 얻었다. 변법을 주장하는 하급관리 캉유웨이(강유위)의 개혁 주장이 광서제에게 알려지면서 광서제가 주도하여 1898년 4월 하순에 약 100일에 거쳐 소위 ‘무술변법’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4] 캉유웨이는 본래 부강하려면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우선 개혁을 추진할 새로운 기구(제도국) 마련에 착수하고자 했다.[4] 그러나 새로운 기구 마련과 개혁을 지향하는 하급관리 임용,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 등 개혁 구상조차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려는 관리들과 서태후에게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였다. 특히 ‘자신의 개혁이야 말로 공자의 정신을 계승한 것’(공자개제론)이라는 캉유웨이의 주장은 수구파의 공격을 불러왔다. 결국 변법파가 영국, 일본과 연합하는 외교 방침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을 방문해 광서제를 만나자 서태후 측과 수구파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서태후가 訓政을 재개하여 변법자강운동은 실패하였다.[4] 의화단운동[편집] 의화단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신축 조약 체결서. 1899년-1900년 기간 산둥 성에서 반기독교 폭동을 계기로 화북 일대에 퍼진 반제국주의 농민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의화단운동이라 한다. 중심 세력인 의화단은 백련교 일파로 불리는 종교 비밀결사로서 당시 사회 모순, 기독교 전파, 독일 진출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을 부르짖으면서 무력으로써 배외 운동을 전개했다.[5] 1899년 산둥 성 서부에서 의화단은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박해했고 청조에서도 이를 선동해 폭동이 확대하였다.[5] 1900년에는 베이징에까지 들어와 관군과 함께 11개국 공사관[주해 2] 을 공격했으나, 영국,러시아,독일,미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8개국 연합군에게 격파되었다. 1901년 9월 베이징 의정서의 성립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으나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 조약 내용은 청의 면모를 크게 실추시키면서 식민지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5] 청조의 개혁[편집] 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와 수구파 탓에 실패했으나 의화단 운동의 참혹한 결과로 국내상으로는 막대한 세금 징수로 민심의 동요와 불만, 국외상으로는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가 증폭하여 청 조정은 내정과 외교 총체가 위기에 처하였다. 특히, 상층도 청조에 불만이어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위기였다. 1901년 1월 청의 실권자 서태후는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려 부강을 꾀한다”는 방침하에 고위 관료들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上申하라고 명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청 정부는 생존하려는 ‘新政’을 개시했는데 이를 서태후의 존호인 慈禧를 따 ‘慈禧新政’[주해 3] 이라고 한다. 직례총독 위안스카이,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이 추진한 신정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6] 36개 사단의 新軍[주해 4] 건설을 중심으로 한 군대 근대화 商部[주해 5] 신설, 회사 설립 장려, 상법 제정을 이용한 실업 진흥. 과거제도 폐지, 교육 개혁, 외국 특히 일본으로 유학생 대거 파견 과거제도 폐지와 학당 설립 개혁[편집] 정부 주도하에 이뤄진 개혁 중 최요하고 시급한 개혁이 교육이었다. 청조는 국외 유학을 장려하고 전국의 학당(서원)을 신식 학교로 바꾸도록 하여 점차 과거 시험 준비 기관이었던 재래식 학당이 신식 학교로 바뀌어 갔다.[7] 그러나 이 교육 개혁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하급수로 학교 수와 학생 수는 늘어갔지만 정작 가르칠 신식 교사는 태부족하여 전체 교사의 반이 신식 교육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구식 교원들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로 사립학교든 공립학교든 간판만 바꿔 단 과거 학당이었고 그 설립자나 운영자는 거의 신사층, 즉 향토 지식인으로 이들은 근본으로 과거 제도 폐지를 반대하여 신식 학교의 설립도, 국외 유학도 반대해 왔던 세력이다.[7] 이들은 교육 개혁에 따라 과거 학당 존재가 위험해져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학당을 신식 학교로 개조해 교묘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므로 외양만 바꾸었지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은 허울 좋은 교육개혁이었을 뿐 신식 학교도 과거 준비라는 과거 기능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7] 그래서 청조는 1905년 과거제도를 완벽히 폐지하였으나 청조가 시행한 교육개혁은 여러 한계점이 속속 드러났는데 예컨대 신식 학교로 바뀌긴 했어도 가르치는 내용에 과거 교과가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 학업의 기본이 유학이었고 일주일 수업시간 30시간 중 12시간을 유교 경전 학습에 할당했을 정도였다.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외국어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고 중국어의 순수를 유지하려고 외래어 사용을 일절 금하였으며 여성 교육도 금지되어 있다가 러일 전쟁 후 1907년이 되어서야 허용되었다.[7] 정부가 주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으로 교육하려는 학교가 대대로 늘어나고 과거 시험 준비 학당이 마지못해 신식 학교로 변신하긴 했어도 청조는 개혁의 본의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청조의 교육개혁은 실효가 전무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청조를 성토하고 열렬히 비판하였다.[7]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서 중국인 유학생들 간에서 청조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목소리가 고조됐고 일본 내 중국 유학생 단체들이 반청, 공화 혁명 주창에 영향을 미쳤다.[7] 군사제도 개혁[편집] 북양신군 훈련. 산둥 성 순무 시절 위안스카이. 의화단 운동 이후 급부상해 실권자로 대두했다. 청조에서 주도한 교육개혁은 여러 가지 한계점이 보였는데 군사제도 개혁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제1차와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시작해 청불 전쟁, 청일 전쟁, 의화단 운동 등 전쟁마다 패배를 거듭해 온 청은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의화단운동 이후 주력 군대는 무위우군만 남고 나머지는 해산되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급부상하고 출세 지향 일로를 달리던 위안스카이가 직례총독이 되어 무위우군을 이끌고 톈진에 주둔하였다.[8] 청조도 기존 군대의 부패와 무능을 알고 1901년 8월에 무과의 과거제를 폐지하고 각 성에 명령하여 북양(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 新建陸軍)과 양강(장지동의 자강군)을 모방해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기존 군대를 해산시키고 상비군을 새로 편성 훈련하도록 지시하였다.[8] 1901년 위안스카이가 주축이 되어 서양식 군대인 ‘신건육군, 약칭 '신군'이 36개 사단으로 재조직되었다. 특히 ‘자희신정’의 결과로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인 위안스카이를 영수로 하는 북양 군벌이 급성장해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1905년에 북양 군벌은 병력 약 7만, 사단 6개 규모로 구성된 북양 신군을 보유하였다. 이중 사단 4개는 즈리 성, 나머지 사단 2개는 만주와 산둥 성에 배치됐으며, 군사권 실질 권한자로 급부상한 위안스카이[주해 6] 는 교통은행을 설립하고 영국의 지지하에 철도 운수 부문 실권도 장악했다.[9] 기존 청조는 사농공상 신분 차별에 문관을 숭상하고 무관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나 잇단 전쟁 패배와 군대 필요성이 절박지자 군사 개혁을 서둘러 착수했다. 청조가 ‘신군’(신건육군)을 조직하고 군사제도 개혁을 착수한 결과, 군의 위상이 과거와 크게 달라져 무관의 위상이 문관과 동등해질 정도로 높아졌으며 일본에 파견된 군관들은 중국인 유학생 사이에 널리 퍼진 혁명 사상에 영향받아 후일 ‘공화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7] 입헌군주제 추진[편집] 신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청조를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국가 부흥을 꾀하자는 입헌 운동도 전개됐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사태를 계기로 “아시아인도 입헌하면 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양계초의 주장이 널리 호응을 얻었다. 실업 진흥 기치하에 민족자본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 발전하기는 했으나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해서 신흥 자본가 계층은 입헌 개혁을 지지했다. 입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퍼져가는 가운데 대세를 관망하던 위안스카이는 1905년에 황족과 귀족을 국외에 파견해 정치를 시찰시키면서 입헌하려는 준비해야 한다고 황실에 상주했다. 서태후의 측근 대신들도 “입헌해야 군권(君權)이 영구히 굳건해진다”고 서태후를 설득했다.[10] 청 조정은 1905년 7월 헌정시찰단을 유럽, 미국, 일본에 파견했고 1906년에는 9년 뒤에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는 ‘상유(上諭)’를 선포했으며, 1908년 8월에는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공포하여 9년 후에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10] 이 《흠정헌법대강》은 일본 제국의 메이지 헌법을 모형으로 하여 황제의 만세일계(萬世一係)와 신성불가침, 황제의 광범위하고 강대한 권한을 규정했으나 입헌군주제를 추진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1908년 11월 14일에 청 제11대 황제 광서제가 죽었다. 서태후는 당일로 광서제 조카로 나이가 3살밖에 안 된 푸이를 황제로 선포하고 그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 다음날인 11월 15일 서태후도 급사했다.[10] 푸이가 즉위하니 그가 청 최후 황제인 선통제다. 섭정인 순친왕은 1909년 1월 위안스카이를 해임했다.[주해 7] 선통제가 즉위한 후 입헌파는 국회를 조기에 개설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를 계기로 청조를 타도하려는 혁명파의 입지가 강화하였다.[10] 당시 중국 내 상황[편집] 청조가 추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 학교가 설립되고 유학생이 대거 파견된 결과로 전통 독서인과 유형이 다른 지식 계층이 탄생했다. 1908년에는 전국에 학교 47,000여 개가 있었고 학생은 약 130만 인, 교원은 약 63,500여 인에 달했다. 이들 새로운 지식 계층은 차츰 혁명 사상과 입헌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을 간 중국인 유학생들은 급속하게 입헌 사상과 혁명 사상을 수용했다.[10] 일변 중국 내 경제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청 조정은 1900년에 있었던 의화단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양 열강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주해 8]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신정’ 실행에도 많은 재원이 필요하여 각종 세금이 새로 생겨나 민중 고통이 상당히 심해졌다. 농민 봉기가 1906년에 199회, 1907년에 188회, 1909년에 112회, 1910년에 266회나 일어날 정도로 만연했고 1911년 이후에는 더욱 급속히 증가했다.[10] 혁명 조직 결성[편집] 쑨원의 혁명 운동[편집] 쑨원, 흥중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쑨원(1900년 8월) 중국 공화 혁명의 시초는 1894년 쑨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청조를 타도하자!’는 취지로 미주 하와이에서 ‘흥중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쑨원은 다음해 1895년 홍콩에서도 흥중회를 만들어 기층 민중을 동원해 광저우를 무장으로써 점령하려는 최초 반청 봉기를 계획했으나 이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후 망명했고 영국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에 억류되었다.[주해 9] 쑨원은 이 사건으로 국제상으로 저명해졌고 억류에서 석방된 후에는 대영박물관에 드나들면서 삼민주의 사상 기초를 닦았고 1897년 전후로 쑨원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와이,베트남,타이,싱가포르를 순회하면서 화교와 유학생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봉기하려는 자금 모금에 나선다.[11] 1900년 의화단운동을 전후해 쑨원은 이홍장을 황제로 추대해 양광지방을 독립시키려는 모의하다가 실패했다. 이어 광둥 성 혜주에서 조직한 봉기도 한때 2만 여 인이나 모을 수 있었으나 외부 지원 두절로 실패했고 다시 망명했다. 이렇게 쑨원이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도를 정한 봉기를 도모하던 중에 일어난 의화단운동은 청조 존재 근거에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일본 유학생을 위시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혁명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11] 1905년 화흥회 요인들. 앞줄 왼쪽 첫 번째가 황싱,네번째가 쑹자오런, 뒷줄 오른쪽 끝이 류보. 대러시아 저항운동은 사회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에게 ‘청조 타도 정당성’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의화단 진압 후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청조에 새로운 요구 조건을 제시해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하에 두려고 했다.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중국인 유학생들은 러시아에 저항하려는 의용대를 결성하고 학생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많은 유학생에게 호응받았으나 청조는 “대러시아 저항을 구실로 혁명을 꾀한다”고 하여 탄압했다.[11] 이 저항운동이 청조 탄압 탓에 실패한 후 일본 유학생계에는 혁명 운동 기운이 본격으로 싹텄다.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조직한 단체가 모태가 되어 국내 반청 혁명단체인 화흥회[주해 10] 와 광복회[주해 11] 가 뒤에 성립되었으며, 종래 반제국주의의 선전이 반청 혁명을 집중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추용의 ‘혁명군’같은 선전책자가 널리 읽혀 급진적인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1] 장병린이 ‘혁명군’[주해 12] 을 소개하는 글을 ‘소보’(蘇報)라는 잡지에 실었다가 추용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는 필화사건으로 이 책자는 한층 널리 알려졌다. 또 화흥회 회원인 진천화[주해 13] 가 지은 ‘경세종’, ‘맹회두’와 같은 선전책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부가 중국인 유학생을 단속하는 규칙을 만든 데 항의해 진천화가 바다에 투신해 죽은 사건은 그의 혁명주장을 더욱 인상 깊게 했다. 이들의 주장은 청조가 대외적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중국이 멸망할 위기에 놓여있으므로 청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1] 중국동맹회 결성[편집] 중국동맹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국동맹회 기관지 《민보》. 1906년 발행되었다. 각지에서 혁명 단체가 결성되자 쑨원의 흥중회를 비롯하여 화흥회, 광복회 등 여러 혁명단체들이 “통합하여 혁명운동을 더욱 강화하자”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1907년 7월 혁명의 선구자 쑨원이 유럽에서 일본에 들렀을 때 이 움직임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12] 쑨원은 혁명의 동지 황싱과 혁명 제단체의 연합을 제창한 끝에 호응을 얻었다. 대표들은 쑨원을 주석으로 추대할 것, 새로 결성되는 단체의 이름은 중국동맹회로 할 것, 쑨원이 제창하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창립하여 지권을 평균한다’는 4개 강령을 동맹회의 강령으로 결정하였다. 이 혁명파의 지도적 인물로는 쑨원, 황싱, 장병린 등이 있었다. 그들은 1906년 공동으로 전략을 세워 혁명 봉기 후의 정권 수립에 대비한다는 데 합의하였다.[12] 동맹회 지부 설치[편집] 중국동맹회는 본부를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국내외에 8개 지부를 두도록 했다. 국내에 5부 즉 상하이에 설치한 동부는 장쑤 성, 저장 성, 안후이 성 3개 성을 관할하며, 충칭에 설치한 서부는 간쑤 성, 쓰촨 성, 티베트, 신장, 구이저우 성 5개 성을 관할하고, 홍콩에 설치한 남부는 푸젠 성, 광둥 성, 광시, 윈난 성 4개 성을 관할하고, 연대에 설치한 북부는 산둥 성, 산시 성(산서성), 산시 성(섬서성), 몽골, 즈리 성, 동삼성의 8성을 관할하도록 하였다.[13] 한편 해외에는 미국 호놀룰루에 설치한 하와이 지부,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한 미주 지부, 유럽 벨기에의 브뤼셀에는 구주 지부, 상가포르에는 남양 지부 등 4개 지부를 설치했다.[13] 혁명 참가자의 구성원[편집] 신해혁명은 일본에서 귀국한 유학생,지식인 뿐만 아닌 여러 단체에 참가한 일반 군중들, 해외 화교, 신군 병사, 신사층, 농민 등 폭넓은 계층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었다.[14] 신흥지식인 참여[편집] 신흥 지식인들은 해외(주로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운 유학생과 신식 학당(學堂)에서 배운 학생이 주체였다. 과거제도 폐지 후, 청조는 서구식 교육을 도입 함과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했다. 타오청장의 제창 아래, 서석린을 비롯해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해 최신의 군사 교육을 받아 귀국했다.[14] 1900년대, 청조에서는 일본 유학열이 높아져, 신해혁명 직전에는 수만명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의 주변에는 혁명 사상에 고취되었는데, 1905년 중국 동맹회가 도쿄에서 성립했을 때 90%이상의 회원이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들이었다. 일본 유학한 학생들은 신해혁명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지도자 쑨원을 비롯해 황싱, 쑹자오런, 후한민, 왕징웨이등 혁명 지도자들 대부분이 일본 망명객 내지는 유학의 경험자였다.[14] 비밀결사 참가자 참여[편집] 청조 말기, 각지에서 홍문회(洪門会), 가로회(哥老会), 치공당(致公堂), 삼합회(三合会), 홍강회(洪江会) 등의 비밀결사 단체가 결성되어 반청(反淸)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결사에는 신사층,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사상을 제창했다.[14] 비밀결사에서 가로회는 화흥회를, 청방(青幇)은 광복회를, 삼합회는 흥중회와 각각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는데 쑨원도 이전에는 홍문치공당(洪門致公堂)의 회원이었다. 1908년 이전, 혁명파 인사들은 이러한 비밀결사 단체 세력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고, 이러한 배경 아래 무장 봉기의 준비를 진행시켜 청조 타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해외 화교의 참여[편집] 해외 화교도 신해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외 화교는 해외 각지의 거주지에서 동맹회에 대한 자금 원조를 지원해준 것과 동시에, 귀국후 출신지에서 혁명 단체를 조직, 많은 무장 봉기에 참가했다. 1894년 11월,쑨원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중회를 결성했을 때에는 20명의 화교가 참여했었다. 또한, 황화강 봉기 당시 죽은 '72명의 열사'가운데 해외 화교가 29명을 차지하는 등, 많은 화교들이 혁명활동에 참가했다.[14] 신군 참여[편집] 1908년 이후, 혁명파의 혁명 운동은 군대 내의 신군(신건육군)의 혁명활동 동조자 포섭에 중점으로 옮겨, 혁명파 인사들은 신군 내에서 비밀리에 혁명 사상 보급에 노력했다. 과거제도의 폐지와 청조의 군대개혁 등에 의해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당시 신군에 많이 있어 이들이 혁명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이끌어 낸다.[14] 신사층의 참여[편집] 1907년 9월부터 10월, 청조는 입헌운동을 추진하고자 자정원과 자의국을 설치하여 신사층의 참정권을 제공했다. 1909년, 각 성(省)에 자의국이 설치되어 많은 신사층들이 선거에 의해 자의국에 선출되었다. 지방 신사층의 정치력은 지방정치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했다.[14] 이러한 신사층들은 본래는 입헌파를 지지했으나 청조는 입헌 운동에 소극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1911년 5월에 경친왕을 필두로 발족한 내각 정책에 신사층은 대실망했고 우창봉기 이후 신사층을 비롯한 입헌파 세력도 신해혁명에 참여하였다.[14] 외국인 참여[편집] 이밖에 신해혁명에는 중국 동맹회를 비롯한 혁명활동에 가담한 중국인 이외 참여한 외국인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었는데 특히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미야자키 도텐 등의 일본인들 지원이 현저하게 많았다.[15]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성립된 중국동맹회를 비롯한 많은 혁명단체가 일본에서 조직 운영되었는데, 여기서 기타 잇키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 다수가 동맹회에 참여하였고 이들은 뒷날 1911년 우창 봉기,신해혁명에도 참가한다.[16] 그 밖에 한국인으로는 신규식이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할 때 동맹회 기관지 《민립보(民立報)》[주해 14] 기자 서혈아(徐血兒)를 만나 서혈아의 소개로 천치메이와 황싱 등 중국동맹회 간부들과 접선하고 친교를 맺어 1911년 3월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이후 신규식은 10월 우창봉기에 가담, 신해혁명에 참여했다.[17][18] 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편집] 중국동맹회#신해혁명 이전 활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동맹회 활동[편집] 중국동맹회는 같은 처지로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세력인 캉유웨이의 입헌파와 사상적인 논쟁을 전개하면서도 혁명운동의 구심체로서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맹회의 활동은 입헌파에 비해 훨씬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혁명 활동이란 비밀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중국 국내에는 동맹회 세력의 본부를 설치할 곳이 없었다.[19] 한편, 동맹회의 혁명이란 무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므로 무력 또한 물질적인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혁명당은 각지의 회당과 군대에게 연락하여 이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19] 쑨원의 전략은 해외에서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혁명 세력을 본토에 침투시켜 전국 규모의 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이었다.[20] 그는 삼민주의를 내세워 군법,약법,헌법의 순서로 혁명을 전개한다는 3단계 혁명방안을 구상했다. 쑨원의 동맹회는 선전활동 외에 반청 무장봉기를 1905년~1911년 우창봉기 이전까지 수십여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9] 그 가운데 1908년 10월에 일으킨 ‘안휘성 신군 봉기’와 1910년 2월에 일으킨 ‘경술 신군 봉기’, 그리고 1911년 4월에 일으킨 황화강 봉기등이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러한 무장봉기 실패들은 동맹회에 커다란 타격을 받기도 했다.[21] 동맹회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는 계속 실패해왔으나 국내에서의 혁명적 정세는 계속 확산되어가고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21] 주요사건[편집] 안휘 신군 봉기[편집] 1908년 10월 안휘 성에서 ‘신군 사건’(新軍事件)이 발생했는데, 이를 ‘안휘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22] 신군은 위안스카이가 새로 편성한 신식 육군으로 신군의 청년 장병 가운데에는 쑨원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악왕회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한족 국가 건설의 결의를 다졌다. 1908년 10월 23일 악왕회의 간부인 범전갑은 광서제와 서태후의 죽음 소식을 듣고 10월 26일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각 진영의 간부와 연락하여 웅성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22] 이렇게 해서 성 밖에 있던 신군은 일제히 봉기하였으나 탄약의 부족과 성 안의 군대가 내응하지 않고 해군 또한 봉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주동자였던 범전갑은 체포, 처형되고 웅성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그 후 웅성기는 다시 청나라에 잠입하여 유럽에서 귀국하는 섭정왕의 두 동생 재도(載濤)와 재순(載洵)을 하얼빈 역에서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22] 경술 신군 봉기[편집] 1910년 2월, 광둥 성의 신군이 구정을 기해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신군 봉기는 주로 혁명파가 신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 광둥의 경우는 혁명파의 청년들이 신군 가운데 잠입하여 봉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혁명파 청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노련한 감시자의 눈에 띄기가 쉬웠다.[22] 봉기 계획을 알아차린 신군의 수뇌들은 무기고에 있던 탄약을 모두 감추어 버렸다.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신군의 보병 200여명이 무기고로 달려갔으나 탄약은 하나도 없었다. 봉기는 결국 실패했다. 이번 봉기에는 왕조명이나 호한민이 홍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담할 예정이었으나 탄약을 구하지 못해 신군이 해산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경술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 봉기의 주동자 예영전은 전사하고 신군 34표(標, 1표는 200명 단위)의 책임자 조성(趙聲)은 어렵게 탈출하였다.[22]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편집] 혁명 봉기가 실패를 거듭하자 입헌파의 기관지 《신민총보》[주해 15] 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까지도 ‘혁명파의 수령들은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하고 애매한 대중만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주해 16][22] 동맹회 기관지 《민보》의 격렬한 비난에 분통을 터뜨린 왕조명은 《민보》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실증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혁명 투사들뿐 아니라 자신도 혁명을 위하여는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베이징에 올라온 왕조명은 웅성기가 하얼빈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한 바 있는 두 황족을 베이징 도착 때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22] 그러나 두 황족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출영 인파로 그들을 분별할 길이 없어 예정을 변경하였다. 왕조명은 섭정왕인 순친왕을 폭살할 계획으로 순친왕이 자주 통과하는 다리 밑에 폭탄을 장치하였으나 이것마저 사전에 통행인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수색 끝에 폭탄 표피를 만든 대장간이 적발됨으로써 왕조명도 체포되어 무기형에 처해졌다.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사건은 1910년 4월의 일이었다.[22] 황화강 사건[편집] 황화강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10월 쑨원과 황싱, 조성(趙聲) 등 중국동맹회 지도층 간부들이 남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자금을 모집해 동맹회원 500인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신군(新軍)을 주체로 반청 단체들과 연합해 광저우에서 재차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봉기에 성공하면 광저우를 근거지로 삼고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북벌하되, 한 갈래는 황싱이 거느리고 호남을 거쳐 우창을 점령하며, 다른 한 갈래는 조성이 거느리고 강서를 거쳐 난징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두 군이 회합해 양자 강을 건너 곧장 베이징으로 향하기로 했다.[23] 그 해 1910년 10월 황싱, 조성은 홍콩에 봉기조직부를 설립하고 광저우로 사람을 보내 비밀 연락 지점을 38곳이나 세웠다. 이듬해 1911년 3월 5일 황싱과 조성은 봉기 날짜를 3월 15일로 의결했다가 다시 28일로 고쳤다. 황싱과 조성은 광저우에 도착하자 봉기 총지휘부를 설립했는데 무기가 미처 도착하지 않아 봉기를 하루 연기해 29일(4월 27일)에 일으키기로 하고 원래 정해놓은 열 갈래를 네 갈래로 통합하고 각각 광저우의 총독부와 북문,순경교련소,남대문 등을 공략하기로 했다.[23] 황화강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힌 72열사들의 묘. 3월 29일 오후 5시 반에 황싱이 100여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는데, 나머지 세 갈래 봉기군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하지 못하고 신군도 성 밖에 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황싱은 자신이 이끄는 100여명을 거느리고 계획대로 총독부를 점령했으나 신임 총독 장명기가 이미 도주해 총독부에 불을 지르고 나오다 수사제독(水師提督) 이준(李準)의 친병대대에 맞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대오를 흐트러뜨리고 말았다. 황싱은 이 전투에서 오른쪽 손가락을 두 마디나 잘렸으나 완강히 싸우다 후에 그의 처가 된 서종한의 권고에 못 이겨 의복을 갈아입고 그녀의 호위 아래 홍콩으로 몸을 숨겼다.[23] 이 봉기도 실패해 봉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붙잡혀 살해된 사람까지 모두 86명이었다. 4일 후 유지인사들이 나서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72구 찾아 황화강(黃花岡)이라는 곳에 집단 안장했는데, 이를 황화강 72열사라고 부른다.[23]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활동[편집] 1911년 12월 16일, 쑨원과 그의 군사 고문 호머 리 (Homer Lea, 荷馬李)는 싱가포르의 골든벨 맨션 (Goldenbell Mansion)에 머물렀다. 이 기간은 쑨원이 우창봉기 소식을 듣고 미국->유럽을 경유해 싱가포르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기간이다.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 활동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신해혁명과 관련된 활동을 가리키는데, 쑨원은 1906년부터 1910년 기간동안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외에서의 자금을 얻기 위한 활동과 혁명사상 전파 활동을 하였다. 이 무렵 말레이 반도는 중국 본토를 제외하면 화교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으며, 화교의 경제적 위치도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쑨원은 수차에 걸쳐 말레이 반도를 방문해 현지의 화교들에게 혁명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고 화교 다수에게서 조언을 얻는 등 화교들에게 혁명을 호응받았으므로 말레이 반도는 혁명 운동의 주요 활동 지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24] 혁명의 전야[편집] 보로운동의 확산과 쓰촨 폭동[편집] 보로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배경[편집] 청조는 1898년 이래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등 막대한 이권을 외국인의 손에 넘겨주어 이 시기 철도 부설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민간에서 이권 회수 운동이 일어나 철도도 스스로 자금을 마련해서 부설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호남, 호북, 쓰촨, 광둥에서 적극적으로 이 운동이 일어나 주식을 판매하여 자금을 모아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은 자금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철도 부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25] 청조의 철도국유화령[편집] 청조 황족 고위 내각관료들(중앙에 경친왕 혁광). 이들 내각은 ‘철도국유화’를 추진해 민중들로부터 격분하게 만들었다. 1911년 5월에 청 조정은 ‘신정’(新政)의 일환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13명의 각료를 임명했다.[26] 그러나 문제는 이 13명의 각료 중 한족 출신은 4명뿐이고 나머지 9명은 만주족이었으며 그 9명 중 6명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내각인사였다.[26] 더 커다란 문제는 이 내각에서 우전부대신 성선회가 ‘철도를 국유화 하여 국가에 건설하자’고 건의하여 청조정은 즉각 철도 국유화령을 내렸다.[25] 이는 건설이 예정된 쓰촨 ~ 한커우, 한커우 ~ 광저우 간 철도를 정부가 외국의 차관을 얻어 건설할 것이며 이미 사업에 투자한 민간인들에게는 공채를 발행해 보상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미 판매한 주식 대금에 대한 보상이었는데 보상할 능력이 없었던 정부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철도 건설이 완성된 다음에 보상해 주기로 하였기 때문에 투자자들만 피해를 입게 되었다.[25][26] 보로운동 확산[편집] 보로운동 희생자 추모비 청조의 이러한 조처는 결정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격분시켰다.[26] 우선 내각이 의회에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한 사항이었고 정부가 약속한 민주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했고 만주족이 독점한 내각에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은 당시 중국 민족주의의 정서에 크게 거스르는 결정이었으며 이미 투자한 민간인들의 이권을 박탈하는 조처였다. 그리하여 피해를 입은 지역 가운데 호남 장사(長沙)에서 처음으로 국유화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였다.[25][26] 또, 조세에 항거하자는 상인의 철시와 동맹휴학도 일어났다. 이후 6월 17일 ‘보로 동지회’가 조직되어 호북과 양광에서도 보로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제일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 쓰촨 성이었다.[25] 쓰촨 성의 주요도시인 성도에 ‘쓰촨 보로 동지회’가 조직되었으며, 각 주현에 분회를 조직하고, 동맹 휴학과 납세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쓰촨 성 총독 조이풍은 보로운동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므로 철도의 민영화를 건의하여 입헌파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성선회 등으로부터 질책받고 조정의 강경책이 나오자 태도를 바꾸어 그 때까지 취했던 완화정책 대신에 적극적인 진압 정책을 펴게 되었다.[25] 이 과정에서 진압하는 군대가 군중들에게 총을 발사하여 20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터졌고 이는 후에 1911년 9월, 무장 폭동으로 번졌다. 쓰촨 성 총독 조이풍은 성도 전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쓰촨 성 전 지역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저지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때는 이미 ‘쓰촨 혁명당’이 조직한 ‘보로동지군’이 성도를 포위하는 상황이었고 또 10여 주와 현을 점령하고 있어서 그 기세가 강해 청나라는 진압할 형편이 못 되었다.[25] 청조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즉시 각 성(省)에 연락하여 쓰촨 성에 진압할 군대를 파병했다. 그런데 진압군대를 이끌던 단방(端方)이 쓰촨 성의 자주(資州)에 이르렀을때 그가 이끄는 호북 신군이 그를 살해하고 시위대에 가담했다. 여기에 전임총독 잠춘훤도 '쓰촨 성으로 가 조이풍(쓰촨성 총독)과 사태를 수습하라'는 중앙 정부의 명령을 받고 우한까지 왔으나 사태가 심각하다는것을 보고 쓰촨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결국 성도는 '보로 동지군'에게 점령당하고 청조가 진압하지 못한 채 우창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27] 혁명의 전개[편집] 우창 봉기[편집] 우창 봉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장이우(왼쪽)와 쑨우(오른쪽). 이들은 각각 문학사와 공진회를 이끌었던 동맹회 회원 혁명파로 우창봉기를 계획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우창봉기 당시 우창성 지도. 빨간색 화살표는 봉기를 일으킨 혁명군, 파란색 화살표는 청군이다. 봉기를 일으킨 신군(新軍) 포병들. 1911년 10월 11일 ‘호북 군정부’ 수립. 공화혁명으로 가장 먼저 수립된 호북 군정부는 청조의 고위장교였던 리위안훙을 군정부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쓰촨 성의 사태가 급해지자 청조에서는 호북의 신군(新軍)을 쓰촨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당시 우창에는 일부의 신군만 남아있게 되어 혁명파들에게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당시 우창에는 이미 혁명당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가 활동[주해 17] 하고 있어서 신군 안에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또한 1911년 7월에 쑹자오런을 중심으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가 성립되어 우창으로 사람을 보내 이들 단체들과 연합하고 있었다.[28] 1911년 가을 무렵에 이르면 우창의 신군 15,000명 가운데 1/3규모에 해당하는 5,000여 명의 신군이 혁명파에 가담한 상태가 된다. 그 해 9월 문학사와 공진회는 연석 회의를 개최하고 통합 지휘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문학사 지도자인 장이우(蔣翊武)가 총사령관으로, 공진회 회장 쑨우(孫武)가 참모장으로 추천되었다. 그들은 헌장을 제정하고 깃발을 만들고 폭탄을 제조하는 등 봉기에 필요한 준비 작업 및 계획에 들어갔다. 그리고 상하이에 사람을 보내 쑹자오런, 황싱을 우창으로 오도록 하여 봉기 후 각 성과의 연락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추석인 10월 16일에 봉기하기로 날짜를 정했다.[3] 그러나 10월 9일 한커우의 러시아 조계 안에서 봉기에 필요한 폭탄을 만들다 화약이 폭발하여 봉기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기치, 선언, 명단 등이 적발되었다.[주해 18] 따라서 이를 준비하던 사람이 체포되어 다음 날 처형되고 계엄령 아래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체포당하게 되었다.[3] 이에 혁명당인들이 연락하여 봉기를 앞당겨 일으켰다. 봉기는 우창의 신군부 공병 제8대대의 부사관과 병[29] 들이 가장 먼저 일으켰고, 이어서 보병ㆍ포병 부대와 군사학교 사관생도도 이에 가세했다.[3] 이 때 호광총독 서징은 봉기군에 진압할 형편이 되지못하고 위세에 밀려 창황히 도망해서 봉기한 혁명군은 당일 우창성을 점령하고 ‘호북 군정부’를 수립했다. 혁명군은 혁명파와는 관계가 없는 신군의 여단장 리위안훙을 군정부의 도독으로 선출했다.[주해 19] 그리고 그 날 밤에 한양(漢陽)을, 다음 날 아침에 한커우를 함락하여 이른바 ‘무한 3진’(武漢三鎭)을 확보하였다. 이처럼 혁명은 우창에서 처음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우창 봉기, 우창수의, 우창기의, 제1차 혁명이라고 부른다.[28] 간기로 신해년(辛亥年)이어서 ‘신해혁명’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이 날이 10월 10일이어서 오늘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쌍십절이라 불러 기념하고 있다.[3][28] 각 성의 호응과 독립[편집] 10월 22일 - 호남, 섬서에서 처음으로 우창 봉기에 호응해 봉기가 일어났다. 호남에서 혁명당의 초달봉(焦達峰)은 회당과 신군을 발동하여 장사(長沙)를 공격했다. 이에 순무 여성격(余誠格)은 숨어버리고, 초달봉은 ‘호남 군정부’를 수립하여 자신이 도독이 되었다. 같은 날 섬서에서도 동맹회원이 회당, 신군과 연합하여 봉기를 일으켜 ‘섬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원래 일지회(日知會) 회원이었던 신군의 장봉홰(張鳳翽)가 도독이 되었다. 10월 23일 - 강서에서는 구강(九江)에서, 31일에 남창(南昌)에서 봉기가 일어나 ‘강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동맹회 회원 이열군(李烈鈞)이 도독이 되었다. 10월 29일 - 산서의 신군 혁명당원이 봉기를 일으켜 ‘산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신군의 협통인 옌시산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0월 30일 - 운남의 동맹회 회원 이근원(李根源)은 신군의 협통 차이어(蔡鍔)와 연락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운남 군정부’를 조직, 차이어를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3일 - 상하이는 중국동맹회 중부총회가 봉기를 일으켜 동맹회 회원 천치메이가 ‘상하이 군정부’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11월 4일 - 절강은 상하이의 지원아래 혁명당원이 신군과 연락하여 항저우를 점령하고 입헌파의 탕수잠(湯壽潛)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같은 날 귀저우에서도 혁명당은 신군 및 육군학당의 학생들과 함께 봉기하여 귀양(貴陽)을 점령하고 신군의 장교 양진성(楊盡誠)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5일 - 강소에 입헌파들이 신상(紳商), 관료들과 함께 순무 정덕전(程德全)에게 독립을 선포하도록 요구하여 청조의 순무가 새로운 군정부의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날 안휘에서도 동맹회 회원과 회당(會黨)이 함께 일어나자 입헌파들은 순무에게 독립을 선포하도록 요구하여 순무인 주가보(朱家寶)가 독립을 선포하고 도독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주가보는 안휘 성을 떠나 손육군(孫毓筠), 백문울(柏文蔚)이 차례로 도독이 되었다. 11월 6일 - 광서는 광서 자의국에서 정정에서 벗어나자고 결의하여 다음날 독립을 선포하였는데, 육영정(陸榮廷)이 정변을 일으켜 도독에 올랐다. 11월 9일 - 광둥도 독립을 선포하고 호한민(胡漢民)이 도독이 되었다. 같은 날 복건에서도 복주의 동맹회 회원 허숭지(許崇智)가 봉기를 일으켜 제10진 통제(統制) 손도인(孫道仁)을 ‘복건 군정부’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13일 - 산둥에서도 독립을 선포하고 순무인 손보기(孫寶琦)가 도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스스로 독립을 취소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혁명당원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11월 27일 - 쓰촨도 성도에서 독립을 선포하여 입헌파의 포전준(浦殿俊)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혁명군에게 투항하는 청군 우창 봉기에 이어 호남, 섬서, 강서, 산서, 상하이, 절강, 광둥 등 여러 지역에서 동맹회 회원들이 우창 봉기에 자극받아 일제히 봉기하여 11월 하순에는 24성 가운데 14성이 청조의 지배로부터 이탈, 독립하게 된다.[3][30]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은 통일 혁명중앙정부의 수립을 위해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혁명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동맹회 등 통일된 혁명세력이 각 성의 무장봉기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일률적인 규율이나 지도체제가 없었다.[3] 일단 청조와 구체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입헌파든 공화파든 가리지 않고 무장봉기에 나섰기 때문에 봉기가 성공하여도 실제 지배권은 입헌파등 반동세력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3][31] 청조의 대응과 위안스카이의 등장[편집]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萨镇冰) 내각총리대신 시절의 위안스카이 한편, 베이징의 청조에선 '우창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10월 11일 오후에 알게되었다. 당황한 청조는 그 이튿날인 10월 12일 우창에서 도망쳐온 총독 서징을 파면하고 육군부 대신 음창과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萨镇冰)으로 하여금 혁명군을 제압하도록 하였다.[32]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서징에게 전가하고 철도국유화 정책을 추진하던 우전부 대신 성선회를 '민란의 책임자'로 몰아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청조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있던 고관들을 파직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혁명파를 진압하기 위해 2년 전에 축출한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청조가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려했던 이유는 혁명군 토벌을 명령받은 음창과 살진빙이 제대로 청군을 통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 정부로서는 봉기를 일으킨 혁명군을 진압할려면 최정예부대인 북양 신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돤치루이, 펑궈장 등 북양 신군의 고급 지휘관들이 위안스카이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 위안스카이는 ‘북양 신군’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자였다. 청조는 그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여 혁명군을 토벌토록 명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 자신은 청조에서 다시 부르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꾀병을 내어 움직이지 않았다. 청조 내각에서는 “위안스카이를 다시 불러 혁명군을 진압하자”는 논의를 가졌는데, 청의 황족 가운데 일부는 위안스카이를 “사마중달과 같은 자”라고 비난하면서 “범을 불러 집을 지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위안스카이를 부르는 것을 반대했으나 청 정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31] 10월 27일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하고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호북반란 진압군과 양자 강 해군을 총지휘하게 했다.[31] 11월 1일에는 내각총리인 경친왕 혁광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의 요구대로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이 됐다.[3] 순친왕은 위안스카이의 요구로 섭정에서 물러나야했다. 그리고 11월 3일에 청조는 《헌법신조 19조》를 발표하여 황제의 대권을 대폭 삭제하여 헌법에 규정된 권한만을 갖게 하고 황족은 내각총리대신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위안스카이는 내각총리로 청나라의 군정(軍政)대권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호북의 혁명군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31] 북양군의 혁명군 진압[편집] 위안스카이는 청조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북양군의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서 혁명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2일에 청군이 한커우로 진입해 들어와 대결하면서 혁명군과 청군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혁명군은 한양(漢陽)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3] 11월 17일 혁명군의 황싱은 한커우를 공격하고 한때 한커우를 수복하는 등 공세를 벌이기도 했었으나 재차 잃어버리고 나아가 11월 27일에 한양마저 돤치루이군에게 함락 당하여 황싱은 우창으로 갔다. 그런데 우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처럼 혁명군은 북양군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혁명군은 학생,농민,노동자,의용군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구성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훈련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직력면에서도 화력에서도 북양군과 비교될 수 없었다.[3][33] 남북의화[편집] 남북의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남북의화 교섭. 왼쪽이 탕사오이, 오른쪽이 오정방. 중앙은 중개역의 영국인 상인 리틀(Edward Selby Little). 위안스카이는 청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북양군의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동원하여 혁명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혁명군과 전투를 치룰 의사가 없었으므로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존 조던(Jordan, John)에게 부탁하여 혁명군과 화의를 모색했다.[3][31] 당시 혁명군의 활동 지역은 양자 강 중류 지역으로 영국의 세력 범위였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도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바라지 않아, 영국 영사관 조던은 상하이 주재 영국 영사에게 지시하여 쌍방의 화의를 주선하게 되었다. 한편, 이무렵 혁명군은 한양(漢陽)을 빼앗긴 직후로 수세에 몰렸던 상황이었다. 이에 한커우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 영사의 중재로 ‘남북의화’를 제안했고, ‘호북 군정부’ 도독인 리위안훙도 정전(停戰)을 요청하는 뜻을 전국에 알렸다. 12월 2일 한커우에 모인 각 성의 대표들은 위안스카이가 반정(反正)한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3][31] 영국 영사의 중재 주선하에 그 결과 위안스카이를 대표하여 탕사오이와 혁명군을 대표하여 오정방이 상하이 영국 영사관에서 만나, 우선 12월 3일에 남북 양측이 3일간 정전하기로 합의했다.[3][31] 이러한 협상은 남북의화(南北議和)라고 하는데 혁명세력이 강했던 남부지방과 위안스카이 등 청조세력의 북부지방의 협상을 의미한다. 혁명군은 이러한 정치적 타협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혁명군은 자체적인 통일성과, 단결성이 결여되었음 위안스카이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 및 서구 등 열강의 지지 군사적 열세로 일단 위안을 이용하여 청조를 타도하자는 전략 등. 이런 정전과 타협의 움직임은 중국 신해혁명의 전개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2월 3일부터 시작된 남북간의 정전이 지속됨에 따라 신해혁명은 무장투쟁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전환됐다. 12월 5일 각 성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청 왕조 타도와 공화정부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의화강요》(議和綱要)가 통과되고 청 왕조와의 협상이 결의되었다.[3][31] 정전 기간은 당초 12월 2일부터 3일간으로 되어 있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요청으로 2번이나 연장되어 정전기간은 무려 15일간에 이르렀다.[3] 남북의화는 상하이에서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양측 대표의 협상 중 12월 29일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세우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조건부로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한 후 협상이 지속되었다. 정전에 이어 강화교섭이 시작되어 혁명군측에서 오정방, 청조측에서 탕사오이가 각각 대표로 선출되어 12월 18일 1차 교섭에서 오정방은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만청 정부의 폐지 공화 정부의 수립 청국 황제의 우대 가난한 만주인 후대[3] 그러나 1차 교섭에서 잠정적인 정전만 합의하고 12월 20일 다시 2차 교섭에 들어가 국체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오정방은 1차 교섭에서 주장한 대로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대하여 탕사오이는 '국민대회를 열어 정체 문제를 결정한다'는 선까지 양보했다. 이는 위안스카이가 모두 조종한 결과였다.[3]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의 자리를 꿈꾸고 있음이 분명하였고 우창회의에서 혁명파가 자기를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현실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입헌군주파를 설득, 무마하여 자기편으로 끌여들이고 혁명파와 강화교섭만 성공한다면 대총통 자리는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세계 열강은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는데, 위안스카이에 의해 남북 통일이 실현된다면 중화민국은 승인하지만 난징 임시정부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걸었고 경제적으로도 임시정부가 지배한 지역의 세관은 열강의 억제정책으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이 같은 모든 사태는 모두 위안스카이가 비밀리에 책동하였고 조종하고 있었다.[3] 중화민국의 수립[편집] 중화민국임시정부조직대강[편집] 혁명기간 동안 사용된 깃발들. 혁명 초기엔 3가지 깃발이 사용되었다. 남북화의가 진행되는 한편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함에 따라 정부 수립 문제가 논의되었다. 우선 상하이 지역의 혁명당인 각 성의 대표단을 상하이로 보내줄 것을 통전하여 각 성의 대표단이 상하이로 모였다. 하지만 우창에서도 이미 ‘호북 군정부’를 조직하였으므로, 이를 중앙 정부로 삼아 우창에서 정부수립을 위하여 각 성의 대표가 우창으로 올 것을 요구하였다.[34] 결국 상하이에 있던 대표들이 우창으로 가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 조직 대강》을 통과시켰다.[35] 이에 대하여 동맹회 중심의 상하이 대표들은 우창 회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혁명군이 12월 2일에 난징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이 날라왔다. 이 소식을 듣고 동맹회 중심의 상하이 대표들은 ‘난징에 중앙정부를 수립하자’고 하였다. 이에 우창의 대표가 불만을 표했었지만 결국 상하이, 우창의 대표가 난징으로 모이게 되고, 난징에서 총통 선거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했다.[35] 쑨원의 귀국과 초대 임시대총통 취임[편집]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건국 기념으로 출간된 달력. 1912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추대될 당시 쑨원 이러한 때에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에 있었다. 그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34] 쑨원은 “열강의 간섭이 없어야 혁명이 성공될 수 있다”고 보고, 먼저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청 정부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뒤 12월 21일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 정부 조직 문제를 협의하였다.[35] 남북화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난징에서 각 성 대표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12월 29일 17성 대표의 선거에 의해 쑨원은 ‘난징 임시정부’의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됐다.[31] 임시대총통에는 쑨원, 임시부총통에는 리위안훙으로 선출함으로써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은 난징으로 가 총통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선포, 1912년 1월 1일에는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34][35] 1월 3일, 쑨원은 대총통의 명의로 각성대표회에 국무원(國務院) 9부(部)의 총장 명단을 제출했는데, 그 명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군부 총장 - 황싱(黄興) 해군부 총장 - 황종영(黄鐘瑛) 외교부 총장 - 왕총혜(王寵恵) 사법부 총장 - 오정방(伍廷芳) 재정부 총장 - 진금도(陳錦濤) 교육부 총장 -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실업부 총장 - 장젠(張謇) 내무부 총장 - 정덕전(程徳全) 교통부 총장 - 탕수잠(湯壽潛)[34]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북쪽에는 아직 청나라 정부가 그대로 건재해있었고 내부에 입헌파와 구관료들은 위안스카이를 옹호하여 남북화의에서 동맹회가 약속한 대로 청 정부를 무너뜨린 사람이 대총통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은 수립되었어도 쑨원에게는 더 큰 과제가 가로막고 있었다.[34][35] 임시참의원과 임시약법[편집] 1912년 난징임시정부 내각회의 모습, 가운데가 쑨원. 1912년 1월 28일 난징임시정부 참의원들 쑨원은 난징임시정부(중화민국)를 조직한 다음에 즉시 임시참의원을 구성하였다.[34] 왜냐하면 각 성의 대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하였기 때문에 참의원을 조직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 1월 28일 임시정부조직대강의 규정에 의거 18성의 대표에 의해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각 성 대표회의는 해산했다. 참석자는 43명이었다. 이들의 구성은 동맹회 회원이 33명으로 전체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입헌파는 8명, 기타 2명으로 되어 1/4도 채 못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혁명파, 입헌파, 구관료의 연합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혁명파가 장악하였다.[34] 임시참의원이 성립한 후에 국회의 조직은 미국 의회제도를 따랐다.[34] 원로원과 대의원의 양원제를 채택하고 동시에 개회 및 폐회하기로 하였으며, 원로원은 2년마다 1/3을 다시 뽑고, 대의원의 의원은 임기가 4년이었다. 그리고 대의원의 수는 인구비례주의를 채택하였다. 임시참의원의 최대 임무는 ‘중화민국의 임시약법’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2월 7일에 기초위원회가 구성되고 1개월간의 토의 끝에 3월 11일에 마침내 임시약법을 공포하였다.[34] 제1조 - 중화민국은 중화인민이 이를 조직한다. 제2조 -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임시약법은 주권재민, 내각제도, 국민의 기본권을 정한 것으로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에 입각해 중화민국의 골격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탄생과 동시에 세계열강에 대한 대책에 부심해야 했고 위안스카이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34] 쑨원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기 전에 대총통의 자리를 둘러싸고 ‘중국이 분열되기 시작하면 안 된다’고 간주했으므로 대총통 지위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도할 의사를 밝혔다.[34] 청 멸망과 중화민국 초기[편집] 선통제 퇴위·청조 멸망[편집] 쑨원이 난징임시정부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어 한 취임을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청 왕조 타도에 적극 나섰다.[주해 20]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황태후에게 “황실 우대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면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처럼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17일에 열린 황족회의에서 공화정을 수용하라는 요구를 놓고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여 결론이 내려지지 못했다.[36] 1월 19일에 열린 황족회의에서 청 황실의 지도력 부재와 무능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위안스카이를 물리치고 혁명군에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입장이었던 공친왕이 반대파인 선통제의 숙부에게 “그대는 육군을 맡았으니 우리의 병력 상황이 어떠한 지 알겠지?”라고 질문했다. 얼마 전까지 육군을 관리했던 25세의 황숙(皇叔, 황제의 숙부)은 “나는 전쟁을 해보지 않아 알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36] 어전회의에서 결정이 나지 않자 위안스카이의 사주로 1월 26일 진압군 총사령관인 돤치루이 등 47인의 고위 지휘관들이 연명으로 공화정을 요구했다. 또한 이날 군주입헌유지회를 만들어 활발히 공화정 반대 운동을 벌이던 만주족 청년장교 양필(良弼)이 피격됐다(1월 28일 사망). 양필이 암살된 것은 청조에게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36] 1월 30일 어전회의에서 결론이 났고, 이에 따라 내각에 공화정 선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월 3일 청나라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그로 하여금 난징 임시정부(중화민국) 측과 퇴위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게 했다.[36] 일본은 처음에는 중국의 혁명에 대응해 입헌군주제로 내란을 수습하고, 요동반도의 조차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포함한 ‘만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자국에 유리하게 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영국과 협력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화중과 화남지역에 큰 권익을 갖고 있는 영국이 청조를 포기하고 위안스카이의 집권을 통해 내란을 조기에 수습하려고 했다. 미국도 영국에 동조하자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통해 청조를 존속시키려는 의도를 버렸다.[36][37] 2월 9일 대청황제에 대한 퇴위 후 우대조건 8개항이 확정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통제의 퇴위칙서 대청황제가 사위(辭位)한 뒤에도 그 존칭은 그대로 보존하며, 민국정부는 그를 외국 군주의 예로 대우한다. 대청황제가 사위한 뒤에 황실 세비는 400만 량으로 하고 민국이 지급한다. 대청황제는 사위한 뒤에 잠시 궁성(宮城)에 거처하다가 훗날 이화원으로 옮겨간다. 시위인(侍衛人)들은 이전대로 부릴 수 있다. 대청황제가 사위한 뒤에 그 종묘와 능묘는 영원히 봉사(奉祀)될 것이며, 민국이 위병(衛兵)을 배치해 적절히 보호한다. 덕종(德宗)의 숭릉(崇陵)의 아직 완성되지 못한 공정은 규정에 맞게 마무리할 것이며, 봉안예식은 옛 법도대로 한다. 그에 드는 실제 비용은 민국에서 지출한다. 이전에 궁전 안에서 부리던 여러 집사들은 이전대로 부릴 수 있다. 다만 앞으로 환관은 쓸 수 없다. 대청황제가 원래 갖고 있던 사유재산은 사위한 뒤에 민국이 특별히 보호한다. 원래 있던 궁중경비군은 민국 육군부(陸軍部)의 편제에 편입되며, 그 정원과 보수는 이전대로 한다.[36][37] 그 밖에 청나라 황족에 대한 대우규정 4개조와 만주족, 몽고족, 회족에 대한 대우규정 7개조도 아울러 확정됐다.[37] 2월 11일 황태후가 위와 같은 황실우대 조건을 받아들였고, 12일에 궁전안에 있는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朝會)가 열렸다. 황태후는 공화국체를 도입을 위하여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며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 5족으로 중화민국을 구성한다는 뜻을 담은 사위조서(辭位調書)를 외무부대신 호유덕에게 건네주고 공표하게 했다. 이로써 진나라의 진시황 이래 2천년 넘게 지속돼온 중국의 황제체제가 종식되고 청나라는 멸망했다.[36][37]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과 독재정치[편집] 쑹자오런, 국민당 (쑹자오런), 제2차 혁명, 21개조 요구, 중화제국, 호국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화민국의 탄생을 알리는 포스터 1912년 2월 15일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가운데) 2월 13일 쑨원은 약속대로 난징 임시정부 임시대총통직을 사임했고 2월 15일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어 무력에 한계가 있었던 혁명군은 위안스카이의 내응(內應)을 얻어 가장 우려하던 열강 무력 간섭을 겪지 않고 공화정체 성립에 성공했다. 이때 쑨원은 자신이 임시대총통직을 사직하는 조건으로 난징을 임시정부 수도로 정하라고 위안스카이에 요구했으나 위안스카이는 2월 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을 구실로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36]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4월 5일 임시공화정부 의회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을 결의로써 혁명파가 위안스카이를 난징에서 견제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36]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혁명파를 무력화시켰다. 군사적 기반을 잃은 혁명파에게 남은 길은 국회와 정당을 통해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는 것 뿐이었다. 이에 따라 쑹자오런의 주도로 ‘중국혁명동맹회’가 개조되어 1912년 8월 25일 국민당이 창설됐다.[36] 국민당은 1913년 1월과 2월에 걸쳐 시행된 국회선거에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의 내각을 꺼린 위안스카이는 암살범을 보내 3월 20일 국무총리로 예정된 쑹자오런을 저격, 3월 22일 쑹자오런은 숨을 거두었다. 위안스카이는 이어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3년 4월 25일 5개국(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는 협정을 체결하여 독재를 위한 재정기반을 확보했다.[36][38] 6월에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계열의 도독 3인을 파면하자 쑨원, 천치메이등을 비롯한 국민당 세력이 봉기(제2차 혁명)를 호소했으며, 1913년 6월 9일 한 봉기는 6월 9일에서 7월 12일까지 양자 강 중류와 하류 지역 일대에서 전투가 일어났으나나 당시 전란 재발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크게 호응받지 못했고 1913년 9월 위안스카이의 압도적인 무력에 완벽히 결국 진압됐고, 쑨원은 7월 일본 도쿄로 망명했다. 거기서 쑨원은 1914년 7월에 ‘중화 혁명당’을 결성해 국외에서 위안스카이 군벌 정부에 저항했다.[39][주해 21] 10월에 국회는 ‘공민단’이라 자칭하는 폭도에게 협박받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를 정식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곧 이어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해산을 명하고 대총통 권한을 대폭 강화시킨 ‘신약법’을 제정했다. 결국 ‘위안스카이를 배려한 혁명’이 되어버렸다.[36] 이후 일본이 위안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21개조 요구’를 들어달라”고 요구하자 ‘황제 등극’을 원했던 위안스카이는 이를 수용[40] 하여 1915년 12월 ‘황제 제도’의 부활을 시도했다가 군중에게 지탄받아 실패하고(제3차 혁명), 1916년 6월 위안스카이는 사망했다.[41]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 정부에서는 패권을 차지하려는 군벌 세력들(직예파, 안휘파)간에 혼전이 시작되었고 남부 광둥 지역에서는 쑨원이 귀국해 1917년 광저우에서 서남군벌 세력들과 연합하여 ‘호법정부’(護法政府)를 조직해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분단과 혼란 시대에 돌입한 중국 정세를 뜻했고 공화제가 결국 명목상으로만 남게 되었다.[42] 영향[편집] 국외상 영향[편집]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1911년 12월 말에 그동안 청에 복속하던 외몽고와 티베트가 혁명에 영향받아 독립을 선언했다.[43] 외몽고가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와 일본은 외몽고를 제외한 북중국에서 양국 간 동서분계가 필요하여 1912년 7월 8일 일본과 러시아 간에 한 ‘제3차 러일협약’에서 양국은 베이징을 지나는 경도선을 경계로 동서를 각각 특수이익지역으로 규정했다.[43] 일변, 티베트는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티베트인들이 각지에 봉기해 중국군을 축출하고 13대 달라이라마인 아왕 로상 툽텐 갸초의 지도 아래 티베트인들은 1917년에 티베트 영토의 거의 전부를 수복했다.[44] 이어 달라이라마는 영국에 원조받아 국왕 겸 교주로서 정교일치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티베트에 겉으로는 회유책을 구사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분쟁을 일으켰다.[44] 청조 발상지였던 만주도 청조 몰락과 함께 열강이 쟁탈하는 대상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중앙정부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지방군벌이 만주를 차지하자 열강은 이 지역에 명목상으로는 중국 영토로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무주공산 일종이라고 인식했다. 일본은 만주에서 정치상ㆍ경제상 기반을 꾸준히 확충해 나아갔다.[43] 이 밖에 신강 지역에는 신해혁명 발발 당시 양증신이 도독이 되어 신강을 지배하여 독립을 선포했다.[44][주해 22] 국내상 영향[편집] 중화민국 성립으로 황제 체제가 무너지면서 혁명 영향은 민주주의와 자유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45] 집권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 통치와 복고 풍조와 ‘존공(尊孔) 운동’이 게시를 떨친 데다가 위안스카의 사후 베이징 군벌 행정부를 장악하려는 여러 군벌 세력 간 혼전이 만성화하였다. 중국 정치 중심지는 군벌 세력 간 혼전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하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국내 문제와 대외 문제는 모두 불안정한 상황이 끓어오르다가 넘쳐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시기가 이어졌다.[46] 그런데 신해혁명을 계기로 국내에서 사상과 문화는 대변한다.[45] 천두슈를 위시한 지식인들은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여 기존 유교 비판과 문화혁명, 서구 ‘과학과 민주주의’ 숭배를 주창해 특히 학생과 청년층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동향은 사상계와 문화계에서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45] 평가[편집] 우창에 있는 쑨원의 동상. 이 자리는 우창 봉기 당시 ‘호북 군정부’가 수립되었던 자리로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은 현재 신해혁명 기념박물관이다. 쑨원을 중심으로 한 중국동맹회가 주축이 되어 신해혁명을 일으켰으나 혁명 성공은 오직 혁명당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입헌파를 중심으로 신군, 화교, 회당을 비롯하여 구관료가 참여가 있어서 성공하였으므로 처음부터 철저한 혁명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47] 혁명당 목표였던 삼민주의 이념 중 민족주의를 보더라도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는데 혁명 후 만주족 청 조정을 타도하기는 하였으나 곧 5족(族) 평등을 내세워 그 뜻이 약화했고 제국주의의 반식민지 하에 있는 중국 위상을 바꾸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쑨원은 혁명 성공을 목적하여 제국주의와 손잡고 청조 당시에 한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인정하여야 했다.[47] 그리고 민권주의는 우선 중국사 이래 전제군주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간주할 수 있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첫 번째이면서 평화스럽게 황제를 물러나게 하였던 점은 큰 의의가 있으나 마지막 황제를 향한 예우를 비롯해 소위 ‘황실우대조건’은 혁명 의의를 반감시켰다.[47] 또한, 민생주의가 내세우는 자본의 절제와 지권의 평균 문제는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이를 강령으로 제정할 당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해서 혁명 후 삼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란 더욱 어려웠다.[47] 혁명 후 새로운 공화국의 임시대총통이었던 쑨원은 무엇보다도 평화스럽게 청 황제를 퇴위시키면서 중국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스스로 그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 결과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구 관료가 그대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주었고 혁명세력 약화를 초래해 ‘반쪽짜리 혁명’으로 전락해서 신해혁명이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도를 이룩하였다 하여도 중국 사회와 경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은 한계가 있다. 즉, 신해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 통치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어 아시아 각국 민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48], 실상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성을 근본으로 바꾸지 못했다.[47] 논쟁[편집] 오늘날 분단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와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중국 공산당의 견해는 '자산계급 부르주아에 의하여 이루어진 혁명'이라고 하여 이를 구(舊) 민주주의 혁명으로 성격을 규정짓고 있으며, 나아가 최근에는 '신해혁명은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에 불과하다'[49] 고 혁명의 의의를 낮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공산당, 즉 무산계급 주도아래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을 내세울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47] 반면, 중화민국 학계와 중국 국민당에서는 중공이 신해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폄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론을 내세우고 있다. 즉, 혁명의 중심이었던 쑨원만 하더라도 부르주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확실히 쑨원은 부르주아 출신이 아닌 농민 출신이며 그것도 중농이하의 가정 출신이었다. 그리고 혁명에 참여한 계층은 회당(會黨)을 비롯하여 신지식인, 화교, 신군(新軍) 등 중국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기 때문에,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을 이른 바 '전민혁명'(全民革命)'으로 규정하였다. 이렇듯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중국 공산당에서 주장하는 '구민주주의, 자산계급 부르주아 혁명'이란 설에 대한 반론으로 '전민혁명'을 내세우고 있다.[47] 영화·문학속에서의 신해혁명[편집] 영화 작품 《마지막 황제》(1988년) 《8인 최후의 결사단》(2009년) 《신해혁명》(2011년)[50] 문학 작품 《아큐정전》 - 루쉰 저. 《광인일기》 - 루쉰 저. 《야초》 - 루쉰 저. 같이 보기[편집] 캉유웨이 국민당 광서 신정 남북의화 다이쇼 데모크라시 독일 혁명 러시아 혁명 리위안훙 미야자키 도텐 북양 정부 변법자강 운동 보로운동 순친왕 쑨원 쑹자오런 신건육군 신규식 신아동제사 양무 운동 우창 봉기 위안스카이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혁명 제3차 혁명 중국 동맹회 중국의 역사 중국 국민당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역사 천치메이 청나라 추근 폐지된 군주제 터키 혁명 황화강 사건 화흥회 황싱 흥중회 21개조 요구 5.4 운동 북벌 각주[편집] 내용주 ↑ 혁명 발발 당시, 쑨원이 정국을 주도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쑨원은 이름만 빌려줬을 뿐이고 몸은 미국에 가 있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p547 ↑ 영국,러시아,독일,미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벨기에,네덜란드,에스파냐 ↑ 동시에 ‘光緖新政’이라고도 한다. ↑ ‘新建陸軍’의 약칭. 청일전쟁 패배 후 톈진의 교외에서 독일 육군을 모방한 조직이다. ↑ 상공부를 지칭 ↑ 위안스카이는 변법자강운동 당시 초기에는 변법파에 있었으나 뒤에 배신하고 서태후를 위시한 수구파와 손잡아 ‘무술정변’을 일으켰고 의화단 운동 당시 의화단을 진압한 공로로 이후 청의 실권자로 급부상했었다. -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참조 ↑ 순친왕은 정계에 급부상한 위안스카이를 두려워해 그를 해임시키고 숙청하려고 했다. 위안스카이는 낙향해 칩거한다. -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참고. ↑ 1901년에 체결한 베이징 의정서에서 열강에 배상금을 1940년까지 지급해야 했다. - 《객관적 20세기 전반기史》,이윤섭 저. p26 참고 ↑ 영국 런던에서 쑨원은 청국 공사관에 강제로 잡혀갔는데 청으로 송환되기 직전 영국인 친구가 도와줘서 석방되었다. -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참고. ↑ 1903년 호남성 장사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 황싱, 쑹자오런 등이 설립한 혁명단체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부흥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비밀결사와 연락해 장사에서 봉기하려다 발각되어 중심인물 대부분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참고. ↑ 1904년 상해에서 차이위안페이,장병린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혁명단체로 ‘한족을 광복하고 우리 강산을 되돌려 받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강소ㆍ절강 지방에서 반청 혁명을 추진했고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p331 참고. ↑ 청조의 전제 지배를 벗어나 중국인이 천부의 자유평등권을 회복해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 진천화는 호남성 출신으로 화흥회를 거쳐 동맹회에 입회했다. 일본 유학중이던 1905년 12월 일본 문무성이 반포한 중국 유학생에 대한 단속규칙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에 대하여 아사히신문에서 방종하고 비열하다는 등의 비하 기사를 싣자 이에 분격하여 유서를 남기고 30세의 나이로 바다에 투신, 자살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 《민립보》(民立報)는 1910년 10월에 동맹회원 우우임(于右任)과 쑹자오런이 발간한 신문이었다. - 《시대를 앞서간 민족 혁명의 선각자 신규식》, p68 ↑ 신민총보는 캉유웨이를 비롯한 변법자강파 개혁파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발간하는 기관지로 이들은 ‘황제를 옹립해 중국을 개혁하자’고 보황운동을 주장했었다. - 《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p95 ↑ 한편, 이 무렵 쑨원은 광저우 봉기가 실패한 후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하자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모금을 위하여 세계 순례의 길에 오르고 있었다. -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 우창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중국동맹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쑹자오런은 1911년 7월 상하이에 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했었고, 호북 지방의 혁명파 청년지식인들도 우창의 신군병사들에게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신군 내부에 공진회,문학사 등의 혁명단체를 설립해 비밀리에 활동했었다. - 《세계각국사 중국사 (하)》 참고 ↑ 10월 9일에 쑨우가 러시아 조계 안에 있는 공진회에서 폭탄을 만들다가 부주의로 화약이 폭발하여 얼굴에 화상을 입고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러시아 순찰이 이 폭음을 듣고 이곳을 수색하여 봉기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기치, 도장, 선언문, 명단을 찾아내 청조 당국에게 넘긴 이 사건으로 사전에 혁명을 준비하던 신군 장교 3명이 체포되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참고. ↑ 리위안훙은 평소 혁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냈었고 오히려 반(反)혁명적 인사였지만 신군 안에서 비교적 군사를 알고 사병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때문에 그가 나서면 각 성도 동조를 표시할 것이고 외국인들도 가볍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추대되었다. 당시 리위안훙은 우창 봉기 당시 친구 집에 숨어있다 혁명군에게 들켜 할 수 없이 지휘관이 되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참고. ↑ 위안스카이의 야심은 청조를 쓰러뜨리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서로 필요한 처지였고 일단 ‘청조를 무너뜨리는 것’에 이해관계가 부합했다. -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1914년에 결성된 중화 혁명당은 뒷날, 1919년 10월 10일에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해 개편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신강에는 만주족, 몽고족, 한족 등도 혼재해 있어 민족ㆍ종교 관계로 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지역으로 특히 투르크 계통 종족(위구르)과 한족 간 대립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왔었다. 신강 지역 도독이 되어 독립을 선포한 양증신은 이런 대립 속에 뒷날 1928년에 암살당하고 그 후임으로 김수인(金樹仁)이 부임했다. 그 후 신강에는 소련의 입김과 영향에 강하게 미치게 된다(김수인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의존했는데 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원조를 요청하거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광범위한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史》,이윤섭 저. p109 참조주 ↑ 가 나 다 라 마 《한국근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년, p142 ↑ 《세계사 100장면》,실천문학사,박은봉 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신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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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423-2033-2.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해혁명 신해혁명 100년 …‘뿌’라고 외치는 중국[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신해혁명 - 중국은 왜 NO라고 말하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 쑨원에게 길을 다시 묻는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BS 세계사 - 신해혁명 辛亥革命(중국어)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 활동 정부당국 홈페이지(중국어) vdeh청나라역사 칠대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명청 전쟁 사르후 전투 영원성 전투 산해관 전투 천계령 삼번의 난 청-러시아 국경 분쟁 청-중가르 전쟁 청의 티베트 정복 전례 문제 제1차 묘족 반란 1750년 라사 폭동 십전무공 청-버마 전쟁 청-베트남 전쟁 청-네팔 전쟁 제2차 묘족 반란 백련교도의 난 제1차 아편 전쟁 청-시크 전쟁 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 천지회의 난 제3차 묘족 반란 네팔-티베트 전쟁 두문수의 난 제2차 아편 전쟁 신유정변 아무르 겸병 양무운동 둥간 혁명 미야코섬 조난 사건 톈진 교안 마거리 사건 정무기황 야쿱 벡의 난 청불 전쟁 시킴 원정 금단도 사건 청일 전쟁 공차상서 제2차 둥간 반란 무술변법 의화단 운동 홍정조 열강 8국 청말신정 영국의 티베트 원정 1905년 티베트 반란 청의 티베트 원정 (1910년) 보로 운동 신해혁명 우창 봉기 신해 라사 동란 몽골 국민혁명 신강의 신해혁명 장훈복벽 행정 황제 목록 가계도 국기 공금구 청나라의 귀족 작위 의정처 군기처 대청률례 종인부 주찰대신 흠차대신 내무부총관 이번원 우전부 보군통령 순무 제독 총독 직예 합감 양강 호광 사천 민절 양광 운귀 동삼성 총리아문 흠정헌법대강 군사 청나라의 군사 북양군벌 초군 팔기군 상승군 녹영군 회군 호신영 영시위 신건육군 신기영 수사영 무위군 상군 청 치하 만주 청 치하 몽골 행정 구역 청 치하 내륙아시아 청 치하 대만 대만포정사사아문 청 치하 티베트 금병체첨 흠차주장판사대신 청 치하 신강 총통이리등처장군 궁성과 능묘 자금성 심양궁 피서산장 원명원 이화원 청동릉 청서릉 복릉 명·청의 황릉 사회문화사 보이 아하 상주학파 지보 사왕 고금도서집성 명사 청나라와 이슬람교 강희자전 고증학 문자의 옥 만한전석 패문운부 어제오체청문감 청대관모 청나라의 시문학 전당시 변발 만주원류고 성유광훈 청나라의 샤머니즘 사고전서 사고전서총목제요 조약 캬흐타 네르친스크 불평등 조약 신축 벌링게임 지부 티베트 홍콩 베이징 톈진 러청 포르투갈 아이훈 후먼 광동 쿨자 난징 일리 시모노세키 타르바가타이 톈진 왕샤 황푸 기타 아이신기오로 할라 반청복명 광동 체제 틈관동 청사고 추선 만주족 청나라의 국명 신청사 청 정복 이론 반청 반란 연표 조약항 유조변  « 명나라 청말민초 »  1616년–1924년 vdeh 중화민국의 역사와 군벌 시대 연대1912 ~ 1920 신해혁명 (1911~1912) 국민당 창당 (1912) 쑹자오런 암살 (1913. 3) 제2혁명 (1913. 6~9) 쑨원 망명 (1913. 7) 위안스카이, 국민당 해체 (1913. 10) 중화 혁명당 창당 (1914. 7) 일본의 21개조 요구(1915. 5) 중화 제국 (1915 ~ 1916) 호국 전쟁 (1915 ~ 1916) 위안 스카이 사망 (1916) 북양 정부 (1912 ~ 1928) 장쉰의 청왕조 복고 (1917) 헌법 보호 운동 (1917 ~ 1922) 호법 정부 (1917 ~ 1922)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1918 ~ 1920) 파리 강화 회의 (1919) 5.4 운동 (1919) 중국 국민당 재건 (1919. 10) 몽골 점유 (1919 ~ 1921) 1920 ~ 1930 직환 전쟁 (1920) 월계 전쟁 (1920 ~ 1921) 제1차 직봉 전쟁 (1922) 제2차 직봉 전쟁 (1924) 베이징 정변 (1924) 제1차 국공합작(1924) 운계 전쟁 (1925) 5·30 사건 (1925) 중산함 사건 (1926) 반봉 전쟁 (1925 ~ 1926) 국민당의 북벌 (1926 ~ 1928) 4·12 사건 (1927. 4) 장쭤린 암살 사건 (1928) 만주 통합 (1928) 국민 정부 (1928 ~ 1949) 중원 대전 (1930) 북부 군벌 북양 군벌: 위안 스카이 안휘 군벌 직예 군벌 봉천 군벌 지방 군벌: 산서 군벌 서북 군벌 신강 군벌 남부 군벌 운남 군벌 구 광서 군벌 신 광서 군벌 사천 군벌 광동 군벌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 전거 통제 LCCN: sh85024103 NDL: 0057101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해혁명&oldid=24446508" 분류: 1911년 분쟁1912년 분쟁1911년 중국1912년 중국중국의 역사중화민국의 역사신해혁명중국의 혁명봉기쑨원청나라중화민국20세기 아시아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알찬 글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CS1 관리 - 여러 이름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تۆرکجهБуряад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贛語עבריתहिन्दी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hqipSvenska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8일 (화) 21: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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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 혁명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해혁명1911년 신해혁명 당시 상하이 시내 (난징동로)날짜1911년 10월 10일 ~ 1912년 2월 12일장소청 제국결과 중국 동맹회의 승리 청 제국의 몰락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외몽골 및 티베트의 독립 선언 위안스카이의 임시 대총통 집권과 쿠테타로 독재정권 시작 청나라 소조정의 설립교전국 청나라 중국 동맹회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군정부 후베이군 도독부 지휘관 순친왕 위안스카이 펑궈장 돤치루이 마안량 양증신 마기 쑨원[주해 1] 황싱 쑹자오런 천치메이 리위안훙 병력 200,000여 명 100,000여 명피해 규모 170,000여 명 ~ 50,000여 명 다른 뜻에 대해서는 신해혁명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이라고도 불린다. 목차 1 개요 2 배경 2.1 쓰러져 가는 청나라 2.1.1 양무운동 2.1.2 변법자강운동 2.1.3 의화단운동 2.2 청조의 개혁 2.2.1 과거제도 폐지와 학당 설립 개혁 2.2.2 군사제도 개혁 2.2.3 입헌군주제 추진 2.3 당시 중국 내 상황 3 혁명 조직 결성 3.1 쑨원의 혁명 운동 3.2 중국동맹회 결성 3.2.1 동맹회 지부 설치 3.3 혁명 참가자의 구성원 3.3.1 신흥지식인 참여 3.3.2 비밀결사 참가자 참여 3.3.3 해외 화교의 참여 3.3.4 신군 참여 3.3.5 신사층의 참여 3.3.6 외국인 참여 4 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 4.1 동맹회 활동 4.2 주요사건 4.2.1 안휘 신군 봉기 4.2.2 경술 신군 봉기 4.2.3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4.2.4 황화강 사건 4.3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활동 5 혁명의 전야 5.1 보로운동의 확산과 쓰촨 폭동 5.1.1 배경 5.1.2 청조의 철도국유화령 5.1.3 보로운동 확산 6 혁명의 전개 6.1 우창 봉기 6.2 각 성의 호응과 독립 6.3 청조의 대응과 위안스카이의 등장 6.4 북양군의 혁명군 진압 6.5 남북의화 7 중화민국의 수립 7.1 중화민국임시정부조직대강 7.2 쑨원의 귀국과 초대 임시대총통 취임 7.3 임시참의원과 임시약법 8 청 멸망과 중화민국 초기 8.1 선통제 퇴위·청조 멸망 8.2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과 독재정치 9 영향 9.1 국외상 영향 9.2 국내상 영향 10 평가 11 논쟁 12 영화·문학속에서의 신해혁명 13 같이 보기 14 각주 15 참고 자료 16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00년의 의화단운동 이후 열강들의 침략이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청 조정은 정치개혁을 꾀하는 소위 '신정' 운동을 일으켰으나 납세 거부와 기독교 배척을 위시한 대중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1] 이런 정세하에서 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일변 혁명파를 지휘,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1] 1911년 청나라가 철도 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쓰촨봉기로 결국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0월 10일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한 달 만에 14 성(省)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고[2] 12월 말에는 17개 성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하였다.[3] 1912년 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조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선통제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1] 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라서 신해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곧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제제(帝制)의 야심을 품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일편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1913년 7월 국민당에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려는 운동하면서 혁명을 호소하여 봉기했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고 하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1]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5년 일본의 '21개 조 요구' 수락을 위시해 매판성을 드러내어 이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민중은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고 부르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내전과 군벌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1]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월 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쌍십절”로 기념한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배경[편집] 쓰러져 가는 청나라[편집] 양무운동[편집] 양무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서구의 무기를 주목하게 된 청의 관리들이 1860년대 중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수산업을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차츰 민수 부문으로 확산되어 근대 특징이 될 만한 경향이 있는 광공업의 발전, 전신선과 철도 부설, 해군 양성과 유학생 파견, 신식 교육기관 설립까지 광범위하게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다. 양무운동 초기에는 청조가 반란 진압에 성공하여 “同治中興”이라고까지 회자됐지만 부국강병의 결과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양무운동 기간에 있었던 대외 전쟁(1884년 청불전쟁, 1894년 청일전쟁)에서 군사상으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양무 기업 대다수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할 무렵에는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4] 양무운동 실패 요인과 한계는 관리의 기업 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에 속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점이 주류였다. 특히 개혁을 지향하는 관리들이 지방에 분산된 채 통일하는 계획 없이 사업을 추진했으므로 급변하는 정세 변화에 효율로 대처하지 못한 점이 커다란 문제였다.[4] 변법자강운동[편집] 변법자강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캉유웨이 청일전쟁을 계기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자 그동안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상 개혁을 주장해 온 변법론이 힘을 얻었다. 변법을 주장하는 하급관리 캉유웨이(강유위)의 개혁 주장이 광서제에게 알려지면서 광서제가 주도하여 1898년 4월 하순에 약 100일에 거쳐 소위 ‘무술변법’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4] 캉유웨이는 본래 부강하려면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우선 개혁을 추진할 새로운 기구(제도국) 마련에 착수하고자 했다.[4] 그러나 새로운 기구 마련과 개혁을 지향하는 하급관리 임용,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 등 개혁 구상조차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려는 관리들과 서태후에게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였다. 특히 ‘자신의 개혁이야 말로 공자의 정신을 계승한 것’(공자개제론)이라는 캉유웨이의 주장은 수구파의 공격을 불러왔다. 결국 변법파가 영국, 일본과 연합하는 외교 방침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을 방문해 광서제를 만나자 서태후 측과 수구파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서태후가 訓政을 재개하여 변법자강운동은 실패하였다.[4] 의화단운동[편집] 의화단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신축 조약 체결서. 1899년-1900년 기간 산둥 성에서 반기독교 폭동을 계기로 화북 일대에 퍼진 반제국주의 농민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의화단운동이라 한다. 중심 세력인 의화단은 백련교 일파로 불리는 종교 비밀결사로서 당시 사회 모순, 기독교 전파, 독일 진출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을 부르짖으면서 무력으로써 배외 운동을 전개했다.[5] 1899년 산둥 성 서부에서 의화단은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박해했고 청조에서도 이를 선동해 폭동이 확대하였다.[5] 1900년에는 베이징에까지 들어와 관군과 함께 11개국 공사관[주해 2] 을 공격했으나, 영국,러시아,독일,미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8개국 연합군에게 격파되었다. 1901년 9월 베이징 의정서의 성립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으나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 조약 내용은 청의 면모를 크게 실추시키면서 식민지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5] 청조의 개혁[편집] 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와 수구파 탓에 실패했으나 의화단 운동의 참혹한 결과로 국내상으로는 막대한 세금 징수로 민심의 동요와 불만, 국외상으로는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가 증폭하여 청 조정은 내정과 외교 총체가 위기에 처하였다. 특히, 상층도 청조에 불만이어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위기였다. 1901년 1월 청의 실권자 서태후는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려 부강을 꾀한다”는 방침하에 고위 관료들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上申하라고 명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청 정부는 생존하려는 ‘新政’을 개시했는데 이를 서태후의 존호인 慈禧를 따 ‘慈禧新政’[주해 3] 이라고 한다. 직례총독 위안스카이,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이 추진한 신정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6] 36개 사단의 新軍[주해 4] 건설을 중심으로 한 군대 근대화 商部[주해 5] 신설, 회사 설립 장려, 상법 제정을 이용한 실업 진흥. 과거제도 폐지, 교육 개혁, 외국 특히 일본으로 유학생 대거 파견 과거제도 폐지와 학당 설립 개혁[편집] 정부 주도하에 이뤄진 개혁 중 최요하고 시급한 개혁이 교육이었다. 청조는 국외 유학을 장려하고 전국의 학당(서원)을 신식 학교로 바꾸도록 하여 점차 과거 시험 준비 기관이었던 재래식 학당이 신식 학교로 바뀌어 갔다.[7] 그러나 이 교육 개혁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하급수로 학교 수와 학생 수는 늘어갔지만 정작 가르칠 신식 교사는 태부족하여 전체 교사의 반이 신식 교육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구식 교원들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로 사립학교든 공립학교든 간판만 바꿔 단 과거 학당이었고 그 설립자나 운영자는 거의 신사층, 즉 향토 지식인으로 이들은 근본으로 과거 제도 폐지를 반대하여 신식 학교의 설립도, 국외 유학도 반대해 왔던 세력이다.[7] 이들은 교육 개혁에 따라 과거 학당 존재가 위험해져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학당을 신식 학교로 개조해 교묘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므로 외양만 바꾸었지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은 허울 좋은 교육개혁이었을 뿐 신식 학교도 과거 준비라는 과거 기능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7] 그래서 청조는 1905년 과거제도를 완벽히 폐지하였으나 청조가 시행한 교육개혁은 여러 한계점이 속속 드러났는데 예컨대 신식 학교로 바뀌긴 했어도 가르치는 내용에 과거 교과가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 학업의 기본이 유학이었고 일주일 수업시간 30시간 중 12시간을 유교 경전 학습에 할당했을 정도였다.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외국어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고 중국어의 순수를 유지하려고 외래어 사용을 일절 금하였으며 여성 교육도 금지되어 있다가 러일 전쟁 후 1907년이 되어서야 허용되었다.[7] 정부가 주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으로 교육하려는 학교가 대대로 늘어나고 과거 시험 준비 학당이 마지못해 신식 학교로 변신하긴 했어도 청조는 개혁의 본의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청조의 교육개혁은 실효가 전무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청조를 성토하고 열렬히 비판하였다.[7]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서 중국인 유학생들 간에서 청조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목소리가 고조됐고 일본 내 중국 유학생 단체들이 반청, 공화 혁명 주창에 영향을 미쳤다.[7] 군사제도 개혁[편집] 북양신군 훈련. 산둥 성 순무 시절 위안스카이. 의화단 운동 이후 급부상해 실권자로 대두했다. 청조에서 주도한 교육개혁은 여러 가지 한계점이 보였는데 군사제도 개혁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제1차와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시작해 청불 전쟁, 청일 전쟁, 의화단 운동 등 전쟁마다 패배를 거듭해 온 청은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의화단운동 이후 주력 군대는 무위우군만 남고 나머지는 해산되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급부상하고 출세 지향 일로를 달리던 위안스카이가 직례총독이 되어 무위우군을 이끌고 톈진에 주둔하였다.[8] 청조도 기존 군대의 부패와 무능을 알고 1901년 8월에 무과의 과거제를 폐지하고 각 성에 명령하여 북양(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 新建陸軍)과 양강(장지동의 자강군)을 모방해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기존 군대를 해산시키고 상비군을 새로 편성 훈련하도록 지시하였다.[8] 1901년 위안스카이가 주축이 되어 서양식 군대인 ‘신건육군, 약칭 '신군'이 36개 사단으로 재조직되었다. 특히 ‘자희신정’의 결과로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인 위안스카이를 영수로 하는 북양 군벌이 급성장해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1905년에 북양 군벌은 병력 약 7만, 사단 6개 규모로 구성된 북양 신군을 보유하였다. 이중 사단 4개는 즈리 성, 나머지 사단 2개는 만주와 산둥 성에 배치됐으며, 군사권 실질 권한자로 급부상한 위안스카이[주해 6] 는 교통은행을 설립하고 영국의 지지하에 철도 운수 부문 실권도 장악했다.[9] 기존 청조는 사농공상 신분 차별에 문관을 숭상하고 무관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나 잇단 전쟁 패배와 군대 필요성이 절박지자 군사 개혁을 서둘러 착수했다. 청조가 ‘신군’(신건육군)을 조직하고 군사제도 개혁을 착수한 결과, 군의 위상이 과거와 크게 달라져 무관의 위상이 문관과 동등해질 정도로 높아졌으며 일본에 파견된 군관들은 중국인 유학생 사이에 널리 퍼진 혁명 사상에 영향받아 후일 ‘공화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7] 입헌군주제 추진[편집] 신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청조를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국가 부흥을 꾀하자는 입헌 운동도 전개됐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사태를 계기로 “아시아인도 입헌하면 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양계초의 주장이 널리 호응을 얻었다. 실업 진흥 기치하에 민족자본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 발전하기는 했으나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해서 신흥 자본가 계층은 입헌 개혁을 지지했다. 입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퍼져가는 가운데 대세를 관망하던 위안스카이는 1905년에 황족과 귀족을 국외에 파견해 정치를 시찰시키면서 입헌하려는 준비해야 한다고 황실에 상주했다. 서태후의 측근 대신들도 “입헌해야 군권(君權)이 영구히 굳건해진다”고 서태후를 설득했다.[10] 청 조정은 1905년 7월 헌정시찰단을 유럽, 미국, 일본에 파견했고 1906년에는 9년 뒤에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는 ‘상유(上諭)’를 선포했으며, 1908년 8월에는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공포하여 9년 후에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10] 이 《흠정헌법대강》은 일본 제국의 메이지 헌법을 모형으로 하여 황제의 만세일계(萬世一係)와 신성불가침, 황제의 광범위하고 강대한 권한을 규정했으나 입헌군주제를 추진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1908년 11월 14일에 청 제11대 황제 광서제가 죽었다. 서태후는 당일로 광서제 조카로 나이가 3살밖에 안 된 푸이를 황제로 선포하고 그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 다음날인 11월 15일 서태후도 급사했다.[10] 푸이가 즉위하니 그가 청 최후 황제인 선통제다. 섭정인 순친왕은 1909년 1월 위안스카이를 해임했다.[주해 7] 선통제가 즉위한 후 입헌파는 국회를 조기에 개설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를 계기로 청조를 타도하려는 혁명파의 입지가 강화하였다.[10] 당시 중국 내 상황[편집] 청조가 추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 학교가 설립되고 유학생이 대거 파견된 결과로 전통 독서인과 유형이 다른 지식 계층이 탄생했다. 1908년에는 전국에 학교 47,000여 개가 있었고 학생은 약 130만 인, 교원은 약 63,500여 인에 달했다. 이들 새로운 지식 계층은 차츰 혁명 사상과 입헌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을 간 중국인 유학생들은 급속하게 입헌 사상과 혁명 사상을 수용했다.[10] 일변 중국 내 경제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청 조정은 1900년에 있었던 의화단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양 열강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주해 8]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신정’ 실행에도 많은 재원이 필요하여 각종 세금이 새로 생겨나 민중 고통이 상당히 심해졌다. 농민 봉기가 1906년에 199회, 1907년에 188회, 1909년에 112회, 1910년에 266회나 일어날 정도로 만연했고 1911년 이후에는 더욱 급속히 증가했다.[10] 혁명 조직 결성[편집] 쑨원의 혁명 운동[편집] 쑨원, 흥중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쑨원(1900년 8월) 중국 공화 혁명의 시초는 1894년 쑨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청조를 타도하자!’는 취지로 미주 하와이에서 ‘흥중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쑨원은 다음해 1895년 홍콩에서도 흥중회를 만들어 기층 민중을 동원해 광저우를 무장으로써 점령하려는 최초 반청 봉기를 계획했으나 이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후 망명했고 영국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에 억류되었다.[주해 9] 쑨원은 이 사건으로 국제상으로 저명해졌고 억류에서 석방된 후에는 대영박물관에 드나들면서 삼민주의 사상 기초를 닦았고 1897년 전후로 쑨원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와이,베트남,타이,싱가포르를 순회하면서 화교와 유학생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봉기하려는 자금 모금에 나선다.[11] 1900년 의화단운동을 전후해 쑨원은 이홍장을 황제로 추대해 양광지방을 독립시키려는 모의하다가 실패했다. 이어 광둥 성 혜주에서 조직한 봉기도 한때 2만 여 인이나 모을 수 있었으나 외부 지원 두절로 실패했고 다시 망명했다. 이렇게 쑨원이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도를 정한 봉기를 도모하던 중에 일어난 의화단운동은 청조 존재 근거에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일본 유학생을 위시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혁명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11] 1905년 화흥회 요인들. 앞줄 왼쪽 첫 번째가 황싱,네번째가 쑹자오런, 뒷줄 오른쪽 끝이 류보. 대러시아 저항운동은 사회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에게 ‘청조 타도 정당성’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의화단 진압 후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청조에 새로운 요구 조건을 제시해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하에 두려고 했다.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중국인 유학생들은 러시아에 저항하려는 의용대를 결성하고 학생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많은 유학생에게 호응받았으나 청조는 “대러시아 저항을 구실로 혁명을 꾀한다”고 하여 탄압했다.[11] 이 저항운동이 청조 탄압 탓에 실패한 후 일본 유학생계에는 혁명 운동 기운이 본격으로 싹텄다.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조직한 단체가 모태가 되어 국내 반청 혁명단체인 화흥회[주해 10] 와 광복회[주해 11] 가 뒤에 성립되었으며, 종래 반제국주의의 선전이 반청 혁명을 집중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추용의 ‘혁명군’같은 선전책자가 널리 읽혀 급진적인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1] 장병린이 ‘혁명군’[주해 12] 을 소개하는 글을 ‘소보’(蘇報)라는 잡지에 실었다가 추용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는 필화사건으로 이 책자는 한층 널리 알려졌다. 또 화흥회 회원인 진천화[주해 13] 가 지은 ‘경세종’, ‘맹회두’와 같은 선전책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부가 중국인 유학생을 단속하는 규칙을 만든 데 항의해 진천화가 바다에 투신해 죽은 사건은 그의 혁명주장을 더욱 인상 깊게 했다. 이들의 주장은 청조가 대외적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중국이 멸망할 위기에 놓여있으므로 청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1] 중국동맹회 결성[편집] 중국동맹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국동맹회 기관지 《민보》. 1906년 발행되었다. 각지에서 혁명 단체가 결성되자 쑨원의 흥중회를 비롯하여 화흥회, 광복회 등 여러 혁명단체들이 “통합하여 혁명운동을 더욱 강화하자”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1907년 7월 혁명의 선구자 쑨원이 유럽에서 일본에 들렀을 때 이 움직임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12] 쑨원은 혁명의 동지 황싱과 혁명 제단체의 연합을 제창한 끝에 호응을 얻었다. 대표들은 쑨원을 주석으로 추대할 것, 새로 결성되는 단체의 이름은 중국동맹회로 할 것, 쑨원이 제창하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창립하여 지권을 평균한다’는 4개 강령을 동맹회의 강령으로 결정하였다. 이 혁명파의 지도적 인물로는 쑨원, 황싱, 장병린 등이 있었다. 그들은 1906년 공동으로 전략을 세워 혁명 봉기 후의 정권 수립에 대비한다는 데 합의하였다.[12] 동맹회 지부 설치[편집] 중국동맹회는 본부를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국내외에 8개 지부를 두도록 했다. 국내에 5부 즉 상하이에 설치한 동부는 장쑤 성, 저장 성, 안후이 성 3개 성을 관할하며, 충칭에 설치한 서부는 간쑤 성, 쓰촨 성, 티베트, 신장, 구이저우 성 5개 성을 관할하고, 홍콩에 설치한 남부는 푸젠 성, 광둥 성, 광시, 윈난 성 4개 성을 관할하고, 연대에 설치한 북부는 산둥 성, 산시 성(산서성), 산시 성(섬서성), 몽골, 즈리 성, 동삼성의 8성을 관할하도록 하였다.[13] 한편 해외에는 미국 호놀룰루에 설치한 하와이 지부,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한 미주 지부, 유럽 벨기에의 브뤼셀에는 구주 지부, 상가포르에는 남양 지부 등 4개 지부를 설치했다.[13] 혁명 참가자의 구성원[편집] 신해혁명은 일본에서 귀국한 유학생,지식인 뿐만 아닌 여러 단체에 참가한 일반 군중들, 해외 화교, 신군 병사, 신사층, 농민 등 폭넓은 계층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었다.[14] 신흥지식인 참여[편집] 신흥 지식인들은 해외(주로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운 유학생과 신식 학당(學堂)에서 배운 학생이 주체였다. 과거제도 폐지 후, 청조는 서구식 교육을 도입 함과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했다. 타오청장의 제창 아래, 서석린을 비롯해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해 최신의 군사 교육을 받아 귀국했다.[14] 1900년대, 청조에서는 일본 유학열이 높아져, 신해혁명 직전에는 수만명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의 주변에는 혁명 사상에 고취되었는데, 1905년 중국 동맹회가 도쿄에서 성립했을 때 90%이상의 회원이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들이었다. 일본 유학한 학생들은 신해혁명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지도자 쑨원을 비롯해 황싱, 쑹자오런, 후한민, 왕징웨이등 혁명 지도자들 대부분이 일본 망명객 내지는 유학의 경험자였다.[14] 비밀결사 참가자 참여[편집] 청조 말기, 각지에서 홍문회(洪門会), 가로회(哥老会), 치공당(致公堂), 삼합회(三合会), 홍강회(洪江会) 등의 비밀결사 단체가 결성되어 반청(反淸)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결사에는 신사층,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사상을 제창했다.[14] 비밀결사에서 가로회는 화흥회를, 청방(青幇)은 광복회를, 삼합회는 흥중회와 각각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는데 쑨원도 이전에는 홍문치공당(洪門致公堂)의 회원이었다. 1908년 이전, 혁명파 인사들은 이러한 비밀결사 단체 세력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고, 이러한 배경 아래 무장 봉기의 준비를 진행시켜 청조 타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해외 화교의 참여[편집] 해외 화교도 신해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외 화교는 해외 각지의 거주지에서 동맹회에 대한 자금 원조를 지원해준 것과 동시에, 귀국후 출신지에서 혁명 단체를 조직, 많은 무장 봉기에 참가했다. 1894년 11월,쑨원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중회를 결성했을 때에는 20명의 화교가 참여했었다. 또한, 황화강 봉기 당시 죽은 '72명의 열사'가운데 해외 화교가 29명을 차지하는 등, 많은 화교들이 혁명활동에 참가했다.[14] 신군 참여[편집] 1908년 이후, 혁명파의 혁명 운동은 군대 내의 신군(신건육군)의 혁명활동 동조자 포섭에 중점으로 옮겨, 혁명파 인사들은 신군 내에서 비밀리에 혁명 사상 보급에 노력했다. 과거제도의 폐지와 청조의 군대개혁 등에 의해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당시 신군에 많이 있어 이들이 혁명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이끌어 낸다.[14] 신사층의 참여[편집] 1907년 9월부터 10월, 청조는 입헌운동을 추진하고자 자정원과 자의국을 설치하여 신사층의 참정권을 제공했다. 1909년, 각 성(省)에 자의국이 설치되어 많은 신사층들이 선거에 의해 자의국에 선출되었다. 지방 신사층의 정치력은 지방정치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했다.[14] 이러한 신사층들은 본래는 입헌파를 지지했으나 청조는 입헌 운동에 소극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1911년 5월에 경친왕을 필두로 발족한 내각 정책에 신사층은 대실망했고 우창봉기 이후 신사층을 비롯한 입헌파 세력도 신해혁명에 참여하였다.[14] 외국인 참여[편집] 이밖에 신해혁명에는 중국 동맹회를 비롯한 혁명활동에 가담한 중국인 이외 참여한 외국인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었는데 특히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미야자키 도텐 등의 일본인들 지원이 현저하게 많았다.[15]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성립된 중국동맹회를 비롯한 많은 혁명단체가 일본에서 조직 운영되었는데, 여기서 기타 잇키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 다수가 동맹회에 참여하였고 이들은 뒷날 1911년 우창 봉기,신해혁명에도 참가한다.[16] 그 밖에 한국인으로는 신규식이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할 때 동맹회 기관지 《민립보(民立報)》[주해 14] 기자 서혈아(徐血兒)를 만나 서혈아의 소개로 천치메이와 황싱 등 중국동맹회 간부들과 접선하고 친교를 맺어 1911년 3월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이후 신규식은 10월 우창봉기에 가담, 신해혁명에 참여했다.[17][18] 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편집] 중국동맹회#신해혁명 이전 활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동맹회 활동[편집] 중국동맹회는 같은 처지로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세력인 캉유웨이의 입헌파와 사상적인 논쟁을 전개하면서도 혁명운동의 구심체로서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맹회의 활동은 입헌파에 비해 훨씬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혁명 활동이란 비밀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중국 국내에는 동맹회 세력의 본부를 설치할 곳이 없었다.[19] 한편, 동맹회의 혁명이란 무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므로 무력 또한 물질적인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혁명당은 각지의 회당과 군대에게 연락하여 이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19] 쑨원의 전략은 해외에서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혁명 세력을 본토에 침투시켜 전국 규모의 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이었다.[20] 그는 삼민주의를 내세워 군법,약법,헌법의 순서로 혁명을 전개한다는 3단계 혁명방안을 구상했다. 쑨원의 동맹회는 선전활동 외에 반청 무장봉기를 1905년~1911년 우창봉기 이전까지 수십여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9] 그 가운데 1908년 10월에 일으킨 ‘안휘성 신군 봉기’와 1910년 2월에 일으킨 ‘경술 신군 봉기’, 그리고 1911년 4월에 일으킨 황화강 봉기등이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러한 무장봉기 실패들은 동맹회에 커다란 타격을 받기도 했다.[21] 동맹회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는 계속 실패해왔으나 국내에서의 혁명적 정세는 계속 확산되어가고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21] 주요사건[편집] 안휘 신군 봉기[편집] 1908년 10월 안휘 성에서 ‘신군 사건’(新軍事件)이 발생했는데, 이를 ‘안휘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22] 신군은 위안스카이가 새로 편성한 신식 육군으로 신군의 청년 장병 가운데에는 쑨원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악왕회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한족 국가 건설의 결의를 다졌다. 1908년 10월 23일 악왕회의 간부인 범전갑은 광서제와 서태후의 죽음 소식을 듣고 10월 26일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각 진영의 간부와 연락하여 웅성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22] 이렇게 해서 성 밖에 있던 신군은 일제히 봉기하였으나 탄약의 부족과 성 안의 군대가 내응하지 않고 해군 또한 봉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주동자였던 범전갑은 체포, 처형되고 웅성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그 후 웅성기는 다시 청나라에 잠입하여 유럽에서 귀국하는 섭정왕의 두 동생 재도(載濤)와 재순(載洵)을 하얼빈 역에서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22] 경술 신군 봉기[편집] 1910년 2월, 광둥 성의 신군이 구정을 기해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신군 봉기는 주로 혁명파가 신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 광둥의 경우는 혁명파의 청년들이 신군 가운데 잠입하여 봉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혁명파 청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노련한 감시자의 눈에 띄기가 쉬웠다.[22] 봉기 계획을 알아차린 신군의 수뇌들은 무기고에 있던 탄약을 모두 감추어 버렸다.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신군의 보병 200여명이 무기고로 달려갔으나 탄약은 하나도 없었다. 봉기는 결국 실패했다. 이번 봉기에는 왕조명이나 호한민이 홍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담할 예정이었으나 탄약을 구하지 못해 신군이 해산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경술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 봉기의 주동자 예영전은 전사하고 신군 34표(標, 1표는 200명 단위)의 책임자 조성(趙聲)은 어렵게 탈출하였다.[22]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편집] 혁명 봉기가 실패를 거듭하자 입헌파의 기관지 《신민총보》[주해 15] 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까지도 ‘혁명파의 수령들은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하고 애매한 대중만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주해 16][22] 동맹회 기관지 《민보》의 격렬한 비난에 분통을 터뜨린 왕조명은 《민보》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실증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혁명 투사들뿐 아니라 자신도 혁명을 위하여는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베이징에 올라온 왕조명은 웅성기가 하얼빈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한 바 있는 두 황족을 베이징 도착 때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22] 그러나 두 황족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출영 인파로 그들을 분별할 길이 없어 예정을 변경하였다. 왕조명은 섭정왕인 순친왕을 폭살할 계획으로 순친왕이 자주 통과하는 다리 밑에 폭탄을 장치하였으나 이것마저 사전에 통행인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수색 끝에 폭탄 표피를 만든 대장간이 적발됨으로써 왕조명도 체포되어 무기형에 처해졌다.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사건은 1910년 4월의 일이었다.[22] 황화강 사건[편집] 황화강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10월 쑨원과 황싱, 조성(趙聲) 등 중국동맹회 지도층 간부들이 남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자금을 모집해 동맹회원 500인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신군(新軍)을 주체로 반청 단체들과 연합해 광저우에서 재차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봉기에 성공하면 광저우를 근거지로 삼고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북벌하되, 한 갈래는 황싱이 거느리고 호남을 거쳐 우창을 점령하며, 다른 한 갈래는 조성이 거느리고 강서를 거쳐 난징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두 군이 회합해 양자 강을 건너 곧장 베이징으로 향하기로 했다.[23] 그 해 1910년 10월 황싱, 조성은 홍콩에 봉기조직부를 설립하고 광저우로 사람을 보내 비밀 연락 지점을 38곳이나 세웠다. 이듬해 1911년 3월 5일 황싱과 조성은 봉기 날짜를 3월 15일로 의결했다가 다시 28일로 고쳤다. 황싱과 조성은 광저우에 도착하자 봉기 총지휘부를 설립했는데 무기가 미처 도착하지 않아 봉기를 하루 연기해 29일(4월 27일)에 일으키기로 하고 원래 정해놓은 열 갈래를 네 갈래로 통합하고 각각 광저우의 총독부와 북문,순경교련소,남대문 등을 공략하기로 했다.[23] 황화강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힌 72열사들의 묘. 3월 29일 오후 5시 반에 황싱이 100여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는데, 나머지 세 갈래 봉기군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하지 못하고 신군도 성 밖에 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황싱은 자신이 이끄는 100여명을 거느리고 계획대로 총독부를 점령했으나 신임 총독 장명기가 이미 도주해 총독부에 불을 지르고 나오다 수사제독(水師提督) 이준(李準)의 친병대대에 맞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대오를 흐트러뜨리고 말았다. 황싱은 이 전투에서 오른쪽 손가락을 두 마디나 잘렸으나 완강히 싸우다 후에 그의 처가 된 서종한의 권고에 못 이겨 의복을 갈아입고 그녀의 호위 아래 홍콩으로 몸을 숨겼다.[23] 이 봉기도 실패해 봉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붙잡혀 살해된 사람까지 모두 86명이었다. 4일 후 유지인사들이 나서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72구 찾아 황화강(黃花岡)이라는 곳에 집단 안장했는데, 이를 황화강 72열사라고 부른다.[23]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활동[편집] 1911년 12월 16일, 쑨원과 그의 군사 고문 호머 리 (Homer Lea, 荷馬李)는 싱가포르의 골든벨 맨션 (Goldenbell Mansion)에 머물렀다. 이 기간은 쑨원이 우창봉기 소식을 듣고 미국->유럽을 경유해 싱가포르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기간이다.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 활동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신해혁명과 관련된 활동을 가리키는데, 쑨원은 1906년부터 1910년 기간동안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외에서의 자금을 얻기 위한 활동과 혁명사상 전파 활동을 하였다. 이 무렵 말레이 반도는 중국 본토를 제외하면 화교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으며, 화교의 경제적 위치도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쑨원은 수차에 걸쳐 말레이 반도를 방문해 현지의 화교들에게 혁명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고 화교 다수에게서 조언을 얻는 등 화교들에게 혁명을 호응받았으므로 말레이 반도는 혁명 운동의 주요 활동 지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24] 혁명의 전야[편집] 보로운동의 확산과 쓰촨 폭동[편집] 보로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배경[편집] 청조는 1898년 이래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등 막대한 이권을 외국인의 손에 넘겨주어 이 시기 철도 부설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민간에서 이권 회수 운동이 일어나 철도도 스스로 자금을 마련해서 부설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호남, 호북, 쓰촨, 광둥에서 적극적으로 이 운동이 일어나 주식을 판매하여 자금을 모아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은 자금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철도 부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25] 청조의 철도국유화령[편집] 청조 황족 고위 내각관료들(중앙에 경친왕 혁광). 이들 내각은 ‘철도국유화’를 추진해 민중들로부터 격분하게 만들었다. 1911년 5월에 청 조정은 ‘신정’(新政)의 일환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13명의 각료를 임명했다.[26] 그러나 문제는 이 13명의 각료 중 한족 출신은 4명뿐이고 나머지 9명은 만주족이었으며 그 9명 중 6명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내각인사였다.[26] 더 커다란 문제는 이 내각에서 우전부대신 성선회가 ‘철도를 국유화 하여 국가에 건설하자’고 건의하여 청조정은 즉각 철도 국유화령을 내렸다.[25] 이는 건설이 예정된 쓰촨 ~ 한커우, 한커우 ~ 광저우 간 철도를 정부가 외국의 차관을 얻어 건설할 것이며 이미 사업에 투자한 민간인들에게는 공채를 발행해 보상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미 판매한 주식 대금에 대한 보상이었는데 보상할 능력이 없었던 정부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철도 건설이 완성된 다음에 보상해 주기로 하였기 때문에 투자자들만 피해를 입게 되었다.[25][26] 보로운동 확산[편집] 보로운동 희생자 추모비 청조의 이러한 조처는 결정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격분시켰다.[26] 우선 내각이 의회에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한 사항이었고 정부가 약속한 민주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했고 만주족이 독점한 내각에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은 당시 중국 민족주의의 정서에 크게 거스르는 결정이었으며 이미 투자한 민간인들의 이권을 박탈하는 조처였다. 그리하여 피해를 입은 지역 가운데 호남 장사(長沙)에서 처음으로 국유화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였다.[25][26] 또, 조세에 항거하자는 상인의 철시와 동맹휴학도 일어났다. 이후 6월 17일 ‘보로 동지회’가 조직되어 호북과 양광에서도 보로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제일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 쓰촨 성이었다.[25] 쓰촨 성의 주요도시인 성도에 ‘쓰촨 보로 동지회’가 조직되었으며, 각 주현에 분회를 조직하고, 동맹 휴학과 납세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쓰촨 성 총독 조이풍은 보로운동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므로 철도의 민영화를 건의하여 입헌파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성선회 등으로부터 질책받고 조정의 강경책이 나오자 태도를 바꾸어 그 때까지 취했던 완화정책 대신에 적극적인 진압 정책을 펴게 되었다.[25] 이 과정에서 진압하는 군대가 군중들에게 총을 발사하여 20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터졌고 이는 후에 1911년 9월, 무장 폭동으로 번졌다. 쓰촨 성 총독 조이풍은 성도 전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쓰촨 성 전 지역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저지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때는 이미 ‘쓰촨 혁명당’이 조직한 ‘보로동지군’이 성도를 포위하는 상황이었고 또 10여 주와 현을 점령하고 있어서 그 기세가 강해 청나라는 진압할 형편이 못 되었다.[25] 청조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즉시 각 성(省)에 연락하여 쓰촨 성에 진압할 군대를 파병했다. 그런데 진압군대를 이끌던 단방(端方)이 쓰촨 성의 자주(資州)에 이르렀을때 그가 이끄는 호북 신군이 그를 살해하고 시위대에 가담했다. 여기에 전임총독 잠춘훤도 '쓰촨 성으로 가 조이풍(쓰촨성 총독)과 사태를 수습하라'는 중앙 정부의 명령을 받고 우한까지 왔으나 사태가 심각하다는것을 보고 쓰촨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결국 성도는 '보로 동지군'에게 점령당하고 청조가 진압하지 못한 채 우창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27] 혁명의 전개[편집] 우창 봉기[편집] 우창 봉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장이우(왼쪽)와 쑨우(오른쪽). 이들은 각각 문학사와 공진회를 이끌었던 동맹회 회원 혁명파로 우창봉기를 계획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우창봉기 당시 우창성 지도. 빨간색 화살표는 봉기를 일으킨 혁명군, 파란색 화살표는 청군이다. 봉기를 일으킨 신군(新軍) 포병들. 1911년 10월 11일 ‘호북 군정부’ 수립. 공화혁명으로 가장 먼저 수립된 호북 군정부는 청조의 고위장교였던 리위안훙을 군정부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쓰촨 성의 사태가 급해지자 청조에서는 호북의 신군(新軍)을 쓰촨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당시 우창에는 일부의 신군만 남아있게 되어 혁명파들에게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당시 우창에는 이미 혁명당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가 활동[주해 17] 하고 있어서 신군 안에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또한 1911년 7월에 쑹자오런을 중심으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가 성립되어 우창으로 사람을 보내 이들 단체들과 연합하고 있었다.[28] 1911년 가을 무렵에 이르면 우창의 신군 15,000명 가운데 1/3규모에 해당하는 5,000여 명의 신군이 혁명파에 가담한 상태가 된다. 그 해 9월 문학사와 공진회는 연석 회의를 개최하고 통합 지휘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문학사 지도자인 장이우(蔣翊武)가 총사령관으로, 공진회 회장 쑨우(孫武)가 참모장으로 추천되었다. 그들은 헌장을 제정하고 깃발을 만들고 폭탄을 제조하는 등 봉기에 필요한 준비 작업 및 계획에 들어갔다. 그리고 상하이에 사람을 보내 쑹자오런, 황싱을 우창으로 오도록 하여 봉기 후 각 성과의 연락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추석인 10월 16일에 봉기하기로 날짜를 정했다.[3] 그러나 10월 9일 한커우의 러시아 조계 안에서 봉기에 필요한 폭탄을 만들다 화약이 폭발하여 봉기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기치, 선언, 명단 등이 적발되었다.[주해 18] 따라서 이를 준비하던 사람이 체포되어 다음 날 처형되고 계엄령 아래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체포당하게 되었다.[3] 이에 혁명당인들이 연락하여 봉기를 앞당겨 일으켰다. 봉기는 우창의 신군부 공병 제8대대의 부사관과 병[29] 들이 가장 먼저 일으켰고, 이어서 보병ㆍ포병 부대와 군사학교 사관생도도 이에 가세했다.[3] 이 때 호광총독 서징은 봉기군에 진압할 형편이 되지못하고 위세에 밀려 창황히 도망해서 봉기한 혁명군은 당일 우창성을 점령하고 ‘호북 군정부’를 수립했다. 혁명군은 혁명파와는 관계가 없는 신군의 여단장 리위안훙을 군정부의 도독으로 선출했다.[주해 19] 그리고 그 날 밤에 한양(漢陽)을, 다음 날 아침에 한커우를 함락하여 이른바 ‘무한 3진’(武漢三鎭)을 확보하였다. 이처럼 혁명은 우창에서 처음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우창 봉기, 우창수의, 우창기의, 제1차 혁명이라고 부른다.[28] 간기로 신해년(辛亥年)이어서 ‘신해혁명’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이 날이 10월 10일이어서 오늘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쌍십절이라 불러 기념하고 있다.[3][28] 각 성의 호응과 독립[편집] 10월 22일 - 호남, 섬서에서 처음으로 우창 봉기에 호응해 봉기가 일어났다. 호남에서 혁명당의 초달봉(焦達峰)은 회당과 신군을 발동하여 장사(長沙)를 공격했다. 이에 순무 여성격(余誠格)은 숨어버리고, 초달봉은 ‘호남 군정부’를 수립하여 자신이 도독이 되었다. 같은 날 섬서에서도 동맹회원이 회당, 신군과 연합하여 봉기를 일으켜 ‘섬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원래 일지회(日知會) 회원이었던 신군의 장봉홰(張鳳翽)가 도독이 되었다. 10월 23일 - 강서에서는 구강(九江)에서, 31일에 남창(南昌)에서 봉기가 일어나 ‘강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동맹회 회원 이열군(李烈鈞)이 도독이 되었다. 10월 29일 - 산서의 신군 혁명당원이 봉기를 일으켜 ‘산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신군의 협통인 옌시산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0월 30일 - 운남의 동맹회 회원 이근원(李根源)은 신군의 협통 차이어(蔡鍔)와 연락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운남 군정부’를 조직, 차이어를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3일 - 상하이는 중국동맹회 중부총회가 봉기를 일으켜 동맹회 회원 천치메이가 ‘상하이 군정부’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11월 4일 - 절강은 상하이의 지원아래 혁명당원이 신군과 연락하여 항저우를 점령하고 입헌파의 탕수잠(湯壽潛)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같은 날 귀저우에서도 혁명당은 신군 및 육군학당의 학생들과 함께 봉기하여 귀양(貴陽)을 점령하고 신군의 장교 양진성(楊盡誠)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5일 - 강소에 입헌파들이 신상(紳商), 관료들과 함께 순무 정덕전(程德全)에게 독립을 선포하도록 요구하여 청조의 순무가 새로운 군정부의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날 안휘에서도 동맹회 회원과 회당(會黨)이 함께 일어나자 입헌파들은 순무에게 독립을 선포하도록 요구하여 순무인 주가보(朱家寶)가 독립을 선포하고 도독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주가보는 안휘 성을 떠나 손육군(孫毓筠), 백문울(柏文蔚)이 차례로 도독이 되었다. 11월 6일 - 광서는 광서 자의국에서 정정에서 벗어나자고 결의하여 다음날 독립을 선포하였는데, 육영정(陸榮廷)이 정변을 일으켜 도독에 올랐다. 11월 9일 - 광둥도 독립을 선포하고 호한민(胡漢民)이 도독이 되었다. 같은 날 복건에서도 복주의 동맹회 회원 허숭지(許崇智)가 봉기를 일으켜 제10진 통제(統制) 손도인(孫道仁)을 ‘복건 군정부’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13일 - 산둥에서도 독립을 선포하고 순무인 손보기(孫寶琦)가 도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스스로 독립을 취소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혁명당원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11월 27일 - 쓰촨도 성도에서 독립을 선포하여 입헌파의 포전준(浦殿俊)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혁명군에게 투항하는 청군 우창 봉기에 이어 호남, 섬서, 강서, 산서, 상하이, 절강, 광둥 등 여러 지역에서 동맹회 회원들이 우창 봉기에 자극받아 일제히 봉기하여 11월 하순에는 24성 가운데 14성이 청조의 지배로부터 이탈, 독립하게 된다.[3][30]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은 통일 혁명중앙정부의 수립을 위해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혁명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동맹회 등 통일된 혁명세력이 각 성의 무장봉기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일률적인 규율이나 지도체제가 없었다.[3] 일단 청조와 구체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입헌파든 공화파든 가리지 않고 무장봉기에 나섰기 때문에 봉기가 성공하여도 실제 지배권은 입헌파등 반동세력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3][31] 청조의 대응과 위안스카이의 등장[편집]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萨镇冰) 내각총리대신 시절의 위안스카이 한편, 베이징의 청조에선 '우창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10월 11일 오후에 알게되었다. 당황한 청조는 그 이튿날인 10월 12일 우창에서 도망쳐온 총독 서징을 파면하고 육군부 대신 음창과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萨镇冰)으로 하여금 혁명군을 제압하도록 하였다.[32]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서징에게 전가하고 철도국유화 정책을 추진하던 우전부 대신 성선회를 '민란의 책임자'로 몰아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청조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있던 고관들을 파직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혁명파를 진압하기 위해 2년 전에 축출한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청조가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려했던 이유는 혁명군 토벌을 명령받은 음창과 살진빙이 제대로 청군을 통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 정부로서는 봉기를 일으킨 혁명군을 진압할려면 최정예부대인 북양 신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돤치루이, 펑궈장 등 북양 신군의 고급 지휘관들이 위안스카이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 위안스카이는 ‘북양 신군’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자였다. 청조는 그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여 혁명군을 토벌토록 명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 자신은 청조에서 다시 부르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꾀병을 내어 움직이지 않았다. 청조 내각에서는 “위안스카이를 다시 불러 혁명군을 진압하자”는 논의를 가졌는데, 청의 황족 가운데 일부는 위안스카이를 “사마중달과 같은 자”라고 비난하면서 “범을 불러 집을 지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위안스카이를 부르는 것을 반대했으나 청 정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31] 10월 27일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하고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호북반란 진압군과 양자 강 해군을 총지휘하게 했다.[31] 11월 1일에는 내각총리인 경친왕 혁광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의 요구대로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이 됐다.[3] 순친왕은 위안스카이의 요구로 섭정에서 물러나야했다. 그리고 11월 3일에 청조는 《헌법신조 19조》를 발표하여 황제의 대권을 대폭 삭제하여 헌법에 규정된 권한만을 갖게 하고 황족은 내각총리대신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위안스카이는 내각총리로 청나라의 군정(軍政)대권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호북의 혁명군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31] 북양군의 혁명군 진압[편집] 위안스카이는 청조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북양군의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서 혁명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2일에 청군이 한커우로 진입해 들어와 대결하면서 혁명군과 청군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혁명군은 한양(漢陽)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3] 11월 17일 혁명군의 황싱은 한커우를 공격하고 한때 한커우를 수복하는 등 공세를 벌이기도 했었으나 재차 잃어버리고 나아가 11월 27일에 한양마저 돤치루이군에게 함락 당하여 황싱은 우창으로 갔다. 그런데 우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처럼 혁명군은 북양군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혁명군은 학생,농민,노동자,의용군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구성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훈련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직력면에서도 화력에서도 북양군과 비교될 수 없었다.[3][33] 남북의화[편집] 남북의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남북의화 교섭. 왼쪽이 탕사오이, 오른쪽이 오정방. 중앙은 중개역의 영국인 상인 리틀(Edward Selby Little). 위안스카이는 청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북양군의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동원하여 혁명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혁명군과 전투를 치룰 의사가 없었으므로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존 조던(Jordan, John)에게 부탁하여 혁명군과 화의를 모색했다.[3][31] 당시 혁명군의 활동 지역은 양자 강 중류 지역으로 영국의 세력 범위였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도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바라지 않아, 영국 영사관 조던은 상하이 주재 영국 영사에게 지시하여 쌍방의 화의를 주선하게 되었다. 한편, 이무렵 혁명군은 한양(漢陽)을 빼앗긴 직후로 수세에 몰렸던 상황이었다. 이에 한커우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 영사의 중재로 ‘남북의화’를 제안했고, ‘호북 군정부’ 도독인 리위안훙도 정전(停戰)을 요청하는 뜻을 전국에 알렸다. 12월 2일 한커우에 모인 각 성의 대표들은 위안스카이가 반정(反正)한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3][31] 영국 영사의 중재 주선하에 그 결과 위안스카이를 대표하여 탕사오이와 혁명군을 대표하여 오정방이 상하이 영국 영사관에서 만나, 우선 12월 3일에 남북 양측이 3일간 정전하기로 합의했다.[3][31] 이러한 협상은 남북의화(南北議和)라고 하는데 혁명세력이 강했던 남부지방과 위안스카이 등 청조세력의 북부지방의 협상을 의미한다. 혁명군은 이러한 정치적 타협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혁명군은 자체적인 통일성과, 단결성이 결여되었음 위안스카이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 및 서구 등 열강의 지지 군사적 열세로 일단 위안을 이용하여 청조를 타도하자는 전략 등. 이런 정전과 타협의 움직임은 중국 신해혁명의 전개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2월 3일부터 시작된 남북간의 정전이 지속됨에 따라 신해혁명은 무장투쟁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전환됐다. 12월 5일 각 성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청 왕조 타도와 공화정부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의화강요》(議和綱要)가 통과되고 청 왕조와의 협상이 결의되었다.[3][31] 정전 기간은 당초 12월 2일부터 3일간으로 되어 있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요청으로 2번이나 연장되어 정전기간은 무려 15일간에 이르렀다.[3] 남북의화는 상하이에서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양측 대표의 협상 중 12월 29일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세우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조건부로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한 후 협상이 지속되었다. 정전에 이어 강화교섭이 시작되어 혁명군측에서 오정방, 청조측에서 탕사오이가 각각 대표로 선출되어 12월 18일 1차 교섭에서 오정방은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만청 정부의 폐지 공화 정부의 수립 청국 황제의 우대 가난한 만주인 후대[3] 그러나 1차 교섭에서 잠정적인 정전만 합의하고 12월 20일 다시 2차 교섭에 들어가 국체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오정방은 1차 교섭에서 주장한 대로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대하여 탕사오이는 '국민대회를 열어 정체 문제를 결정한다'는 선까지 양보했다. 이는 위안스카이가 모두 조종한 결과였다.[3]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의 자리를 꿈꾸고 있음이 분명하였고 우창회의에서 혁명파가 자기를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현실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입헌군주파를 설득, 무마하여 자기편으로 끌여들이고 혁명파와 강화교섭만 성공한다면 대총통 자리는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세계 열강은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는데, 위안스카이에 의해 남북 통일이 실현된다면 중화민국은 승인하지만 난징 임시정부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걸었고 경제적으로도 임시정부가 지배한 지역의 세관은 열강의 억제정책으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이 같은 모든 사태는 모두 위안스카이가 비밀리에 책동하였고 조종하고 있었다.[3] 중화민국의 수립[편집] 중화민국임시정부조직대강[편집] 혁명기간 동안 사용된 깃발들. 혁명 초기엔 3가지 깃발이 사용되었다. 남북화의가 진행되는 한편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함에 따라 정부 수립 문제가 논의되었다. 우선 상하이 지역의 혁명당인 각 성의 대표단을 상하이로 보내줄 것을 통전하여 각 성의 대표단이 상하이로 모였다. 하지만 우창에서도 이미 ‘호북 군정부’를 조직하였으므로, 이를 중앙 정부로 삼아 우창에서 정부수립을 위하여 각 성의 대표가 우창으로 올 것을 요구하였다.[34] 결국 상하이에 있던 대표들이 우창으로 가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 조직 대강》을 통과시켰다.[35] 이에 대하여 동맹회 중심의 상하이 대표들은 우창 회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혁명군이 12월 2일에 난징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이 날라왔다. 이 소식을 듣고 동맹회 중심의 상하이 대표들은 ‘난징에 중앙정부를 수립하자’고 하였다. 이에 우창의 대표가 불만을 표했었지만 결국 상하이, 우창의 대표가 난징으로 모이게 되고, 난징에서 총통 선거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했다.[35] 쑨원의 귀국과 초대 임시대총통 취임[편집]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건국 기념으로 출간된 달력. 1912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추대될 당시 쑨원 이러한 때에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에 있었다. 그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34] 쑨원은 “열강의 간섭이 없어야 혁명이 성공될 수 있다”고 보고, 먼저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청 정부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뒤 12월 21일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 정부 조직 문제를 협의하였다.[35] 남북화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난징에서 각 성 대표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12월 29일 17성 대표의 선거에 의해 쑨원은 ‘난징 임시정부’의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됐다.[31] 임시대총통에는 쑨원, 임시부총통에는 리위안훙으로 선출함으로써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은 난징으로 가 총통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선포, 1912년 1월 1일에는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34][35] 1월 3일, 쑨원은 대총통의 명의로 각성대표회에 국무원(國務院) 9부(部)의 총장 명단을 제출했는데, 그 명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군부 총장 - 황싱(黄興) 해군부 총장 - 황종영(黄鐘瑛) 외교부 총장 - 왕총혜(王寵恵) 사법부 총장 - 오정방(伍廷芳) 재정부 총장 - 진금도(陳錦濤) 교육부 총장 -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실업부 총장 - 장젠(張謇) 내무부 총장 - 정덕전(程徳全) 교통부 총장 - 탕수잠(湯壽潛)[34]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북쪽에는 아직 청나라 정부가 그대로 건재해있었고 내부에 입헌파와 구관료들은 위안스카이를 옹호하여 남북화의에서 동맹회가 약속한 대로 청 정부를 무너뜨린 사람이 대총통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은 수립되었어도 쑨원에게는 더 큰 과제가 가로막고 있었다.[34][35] 임시참의원과 임시약법[편집] 1912년 난징임시정부 내각회의 모습, 가운데가 쑨원. 1912년 1월 28일 난징임시정부 참의원들 쑨원은 난징임시정부(중화민국)를 조직한 다음에 즉시 임시참의원을 구성하였다.[34] 왜냐하면 각 성의 대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하였기 때문에 참의원을 조직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 1월 28일 임시정부조직대강의 규정에 의거 18성의 대표에 의해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각 성 대표회의는 해산했다. 참석자는 43명이었다. 이들의 구성은 동맹회 회원이 33명으로 전체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입헌파는 8명, 기타 2명으로 되어 1/4도 채 못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혁명파, 입헌파, 구관료의 연합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혁명파가 장악하였다.[34] 임시참의원이 성립한 후에 국회의 조직은 미국 의회제도를 따랐다.[34] 원로원과 대의원의 양원제를 채택하고 동시에 개회 및 폐회하기로 하였으며, 원로원은 2년마다 1/3을 다시 뽑고, 대의원의 의원은 임기가 4년이었다. 그리고 대의원의 수는 인구비례주의를 채택하였다. 임시참의원의 최대 임무는 ‘중화민국의 임시약법’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2월 7일에 기초위원회가 구성되고 1개월간의 토의 끝에 3월 11일에 마침내 임시약법을 공포하였다.[34] 제1조 - 중화민국은 중화인민이 이를 조직한다. 제2조 -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임시약법은 주권재민, 내각제도, 국민의 기본권을 정한 것으로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에 입각해 중화민국의 골격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탄생과 동시에 세계열강에 대한 대책에 부심해야 했고 위안스카이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34] 쑨원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기 전에 대총통의 자리를 둘러싸고 ‘중국이 분열되기 시작하면 안 된다’고 간주했으므로 대총통 지위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도할 의사를 밝혔다.[34] 청 멸망과 중화민국 초기[편집] 선통제 퇴위·청조 멸망[편집] 쑨원이 난징임시정부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어 한 취임을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청 왕조 타도에 적극 나섰다.[주해 20]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황태후에게 “황실 우대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면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처럼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17일에 열린 황족회의에서 공화정을 수용하라는 요구를 놓고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여 결론이 내려지지 못했다.[36] 1월 19일에 열린 황족회의에서 청 황실의 지도력 부재와 무능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위안스카이를 물리치고 혁명군에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입장이었던 공친왕이 반대파인 선통제의 숙부에게 “그대는 육군을 맡았으니 우리의 병력 상황이 어떠한 지 알겠지?”라고 질문했다. 얼마 전까지 육군을 관리했던 25세의 황숙(皇叔, 황제의 숙부)은 “나는 전쟁을 해보지 않아 알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36] 어전회의에서 결정이 나지 않자 위안스카이의 사주로 1월 26일 진압군 총사령관인 돤치루이 등 47인의 고위 지휘관들이 연명으로 공화정을 요구했다. 또한 이날 군주입헌유지회를 만들어 활발히 공화정 반대 운동을 벌이던 만주족 청년장교 양필(良弼)이 피격됐다(1월 28일 사망). 양필이 암살된 것은 청조에게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36] 1월 30일 어전회의에서 결론이 났고, 이에 따라 내각에 공화정 선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월 3일 청나라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그로 하여금 난징 임시정부(중화민국) 측과 퇴위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게 했다.[36] 일본은 처음에는 중국의 혁명에 대응해 입헌군주제로 내란을 수습하고, 요동반도의 조차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포함한 ‘만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자국에 유리하게 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영국과 협력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화중과 화남지역에 큰 권익을 갖고 있는 영국이 청조를 포기하고 위안스카이의 집권을 통해 내란을 조기에 수습하려고 했다. 미국도 영국에 동조하자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통해 청조를 존속시키려는 의도를 버렸다.[36][37] 2월 9일 대청황제에 대한 퇴위 후 우대조건 8개항이 확정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통제의 퇴위칙서 대청황제가 사위(辭位)한 뒤에도 그 존칭은 그대로 보존하며, 민국정부는 그를 외국 군주의 예로 대우한다. 대청황제가 사위한 뒤에 황실 세비는 400만 량으로 하고 민국이 지급한다. 대청황제는 사위한 뒤에 잠시 궁성(宮城)에 거처하다가 훗날 이화원으로 옮겨간다. 시위인(侍衛人)들은 이전대로 부릴 수 있다. 대청황제가 사위한 뒤에 그 종묘와 능묘는 영원히 봉사(奉祀)될 것이며, 민국이 위병(衛兵)을 배치해 적절히 보호한다. 덕종(德宗)의 숭릉(崇陵)의 아직 완성되지 못한 공정은 규정에 맞게 마무리할 것이며, 봉안예식은 옛 법도대로 한다. 그에 드는 실제 비용은 민국에서 지출한다. 이전에 궁전 안에서 부리던 여러 집사들은 이전대로 부릴 수 있다. 다만 앞으로 환관은 쓸 수 없다. 대청황제가 원래 갖고 있던 사유재산은 사위한 뒤에 민국이 특별히 보호한다. 원래 있던 궁중경비군은 민국 육군부(陸軍部)의 편제에 편입되며, 그 정원과 보수는 이전대로 한다.[36][37] 그 밖에 청나라 황족에 대한 대우규정 4개조와 만주족, 몽고족, 회족에 대한 대우규정 7개조도 아울러 확정됐다.[37] 2월 11일 황태후가 위와 같은 황실우대 조건을 받아들였고, 12일에 궁전안에 있는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朝會)가 열렸다. 황태후는 공화국체를 도입을 위하여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며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 5족으로 중화민국을 구성한다는 뜻을 담은 사위조서(辭位調書)를 외무부대신 호유덕에게 건네주고 공표하게 했다. 이로써 진나라의 진시황 이래 2천년 넘게 지속돼온 중국의 황제체제가 종식되고 청나라는 멸망했다.[36][37]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과 독재정치[편집] 쑹자오런, 국민당 (쑹자오런), 제2차 혁명, 21개조 요구, 중화제국, 호국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화민국의 탄생을 알리는 포스터 1912년 2월 15일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가운데) 2월 13일 쑨원은 약속대로 난징 임시정부 임시대총통직을 사임했고 2월 15일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어 무력에 한계가 있었던 혁명군은 위안스카이의 내응(內應)을 얻어 가장 우려하던 열강 무력 간섭을 겪지 않고 공화정체 성립에 성공했다. 이때 쑨원은 자신이 임시대총통직을 사직하는 조건으로 난징을 임시정부 수도로 정하라고 위안스카이에 요구했으나 위안스카이는 2월 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을 구실로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36]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4월 5일 임시공화정부 의회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을 결의로써 혁명파가 위안스카이를 난징에서 견제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36]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혁명파를 무력화시켰다. 군사적 기반을 잃은 혁명파에게 남은 길은 국회와 정당을 통해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는 것 뿐이었다. 이에 따라 쑹자오런의 주도로 ‘중국혁명동맹회’가 개조되어 1912년 8월 25일 국민당이 창설됐다.[36] 국민당은 1913년 1월과 2월에 걸쳐 시행된 국회선거에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의 내각을 꺼린 위안스카이는 암살범을 보내 3월 20일 국무총리로 예정된 쑹자오런을 저격, 3월 22일 쑹자오런은 숨을 거두었다. 위안스카이는 이어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3년 4월 25일 5개국(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는 협정을 체결하여 독재를 위한 재정기반을 확보했다.[36][38] 6월에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계열의 도독 3인을 파면하자 쑨원, 천치메이등을 비롯한 국민당 세력이 봉기(제2차 혁명)를 호소했으며, 1913년 6월 9일 한 봉기는 6월 9일에서 7월 12일까지 양자 강 중류와 하류 지역 일대에서 전투가 일어났으나나 당시 전란 재발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크게 호응받지 못했고 1913년 9월 위안스카이의 압도적인 무력에 완벽히 결국 진압됐고, 쑨원은 7월 일본 도쿄로 망명했다. 거기서 쑨원은 1914년 7월에 ‘중화 혁명당’을 결성해 국외에서 위안스카이 군벌 정부에 저항했다.[39][주해 21] 10월에 국회는 ‘공민단’이라 자칭하는 폭도에게 협박받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를 정식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곧 이어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해산을 명하고 대총통 권한을 대폭 강화시킨 ‘신약법’을 제정했다. 결국 ‘위안스카이를 배려한 혁명’이 되어버렸다.[36] 이후 일본이 위안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21개조 요구’를 들어달라”고 요구하자 ‘황제 등극’을 원했던 위안스카이는 이를 수용[40] 하여 1915년 12월 ‘황제 제도’의 부활을 시도했다가 군중에게 지탄받아 실패하고(제3차 혁명), 1916년 6월 위안스카이는 사망했다.[41]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 정부에서는 패권을 차지하려는 군벌 세력들(직예파, 안휘파)간에 혼전이 시작되었고 남부 광둥 지역에서는 쑨원이 귀국해 1917년 광저우에서 서남군벌 세력들과 연합하여 ‘호법정부’(護法政府)를 조직해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분단과 혼란 시대에 돌입한 중국 정세를 뜻했고 공화제가 결국 명목상으로만 남게 되었다.[42] 영향[편집] 국외상 영향[편집]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1911년 12월 말에 그동안 청에 복속하던 외몽고와 티베트가 혁명에 영향받아 독립을 선언했다.[43] 외몽고가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와 일본은 외몽고를 제외한 북중국에서 양국 간 동서분계가 필요하여 1912년 7월 8일 일본과 러시아 간에 한 ‘제3차 러일협약’에서 양국은 베이징을 지나는 경도선을 경계로 동서를 각각 특수이익지역으로 규정했다.[43] 일변, 티베트는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티베트인들이 각지에 봉기해 중국군을 축출하고 13대 달라이라마인 아왕 로상 툽텐 갸초의 지도 아래 티베트인들은 1917년에 티베트 영토의 거의 전부를 수복했다.[44] 이어 달라이라마는 영국에 원조받아 국왕 겸 교주로서 정교일치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티베트에 겉으로는 회유책을 구사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분쟁을 일으켰다.[44] 청조 발상지였던 만주도 청조 몰락과 함께 열강이 쟁탈하는 대상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중앙정부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지방군벌이 만주를 차지하자 열강은 이 지역에 명목상으로는 중국 영토로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무주공산 일종이라고 인식했다. 일본은 만주에서 정치상ㆍ경제상 기반을 꾸준히 확충해 나아갔다.[43] 이 밖에 신강 지역에는 신해혁명 발발 당시 양증신이 도독이 되어 신강을 지배하여 독립을 선포했다.[44][주해 22] 국내상 영향[편집] 중화민국 성립으로 황제 체제가 무너지면서 혁명 영향은 민주주의와 자유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45] 집권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 통치와 복고 풍조와 ‘존공(尊孔) 운동’이 게시를 떨친 데다가 위안스카의 사후 베이징 군벌 행정부를 장악하려는 여러 군벌 세력 간 혼전이 만성화하였다. 중국 정치 중심지는 군벌 세력 간 혼전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하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국내 문제와 대외 문제는 모두 불안정한 상황이 끓어오르다가 넘쳐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시기가 이어졌다.[46] 그런데 신해혁명을 계기로 국내에서 사상과 문화는 대변한다.[45] 천두슈를 위시한 지식인들은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여 기존 유교 비판과 문화혁명, 서구 ‘과학과 민주주의’ 숭배를 주창해 특히 학생과 청년층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동향은 사상계와 문화계에서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45] 평가[편집] 우창에 있는 쑨원의 동상. 이 자리는 우창 봉기 당시 ‘호북 군정부’가 수립되었던 자리로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은 현재 신해혁명 기념박물관이다. 쑨원을 중심으로 한 중국동맹회가 주축이 되어 신해혁명을 일으켰으나 혁명 성공은 오직 혁명당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입헌파를 중심으로 신군, 화교, 회당을 비롯하여 구관료가 참여가 있어서 성공하였으므로 처음부터 철저한 혁명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47] 혁명당 목표였던 삼민주의 이념 중 민족주의를 보더라도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는데 혁명 후 만주족 청 조정을 타도하기는 하였으나 곧 5족(族) 평등을 내세워 그 뜻이 약화했고 제국주의의 반식민지 하에 있는 중국 위상을 바꾸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쑨원은 혁명 성공을 목적하여 제국주의와 손잡고 청조 당시에 한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인정하여야 했다.[47] 그리고 민권주의는 우선 중국사 이래 전제군주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간주할 수 있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첫 번째이면서 평화스럽게 황제를 물러나게 하였던 점은 큰 의의가 있으나 마지막 황제를 향한 예우를 비롯해 소위 ‘황실우대조건’은 혁명 의의를 반감시켰다.[47] 또한, 민생주의가 내세우는 자본의 절제와 지권의 평균 문제는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이를 강령으로 제정할 당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해서 혁명 후 삼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란 더욱 어려웠다.[47] 혁명 후 새로운 공화국의 임시대총통이었던 쑨원은 무엇보다도 평화스럽게 청 황제를 퇴위시키면서 중국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스스로 그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 결과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구 관료가 그대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주었고 혁명세력 약화를 초래해 ‘반쪽짜리 혁명’으로 전락해서 신해혁명이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도를 이룩하였다 하여도 중국 사회와 경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은 한계가 있다. 즉, 신해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 통치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어 아시아 각국 민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48], 실상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성을 근본으로 바꾸지 못했다.[47] 논쟁[편집] 오늘날 분단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와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중국 공산당의 견해는 '자산계급 부르주아에 의하여 이루어진 혁명'이라고 하여 이를 구(舊) 민주주의 혁명으로 성격을 규정짓고 있으며, 나아가 최근에는 '신해혁명은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에 불과하다'[49] 고 혁명의 의의를 낮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공산당, 즉 무산계급 주도아래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을 내세울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47] 반면, 중화민국 학계와 중국 국민당에서는 중공이 신해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폄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론을 내세우고 있다. 즉, 혁명의 중심이었던 쑨원만 하더라도 부르주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확실히 쑨원은 부르주아 출신이 아닌 농민 출신이며 그것도 중농이하의 가정 출신이었다. 그리고 혁명에 참여한 계층은 회당(會黨)을 비롯하여 신지식인, 화교, 신군(新軍) 등 중국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기 때문에,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을 이른 바 '전민혁명'(全民革命)'으로 규정하였다. 이렇듯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중국 공산당에서 주장하는 '구민주주의, 자산계급 부르주아 혁명'이란 설에 대한 반론으로 '전민혁명'을 내세우고 있다.[47] 영화·문학속에서의 신해혁명[편집] 영화 작품 《마지막 황제》(1988년) 《8인 최후의 결사단》(2009년) 《신해혁명》(2011년)[50] 문학 작품 《아큐정전》 - 루쉰 저. 《광인일기》 - 루쉰 저. 《야초》 - 루쉰 저. 같이 보기[편집] 캉유웨이 국민당 광서 신정 남북의화 다이쇼 데모크라시 독일 혁명 러시아 혁명 리위안훙 미야자키 도텐 북양 정부 변법자강 운동 보로운동 순친왕 쑨원 쑹자오런 신건육군 신규식 신아동제사 양무 운동 우창 봉기 위안스카이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혁명 제3차 혁명 중국 동맹회 중국의 역사 중국 국민당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역사 천치메이 청나라 추근 폐지된 군주제 터키 혁명 황화강 사건 화흥회 황싱 흥중회 21개조 요구 5.4 운동 북벌 각주[편집] 내용주 ↑ 혁명 발발 당시, 쑨원이 정국을 주도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쑨원은 이름만 빌려줬을 뿐이고 몸은 미국에 가 있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p547 ↑ 영국,러시아,독일,미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벨기에,네덜란드,에스파냐 ↑ 동시에 ‘光緖新政’이라고도 한다. ↑ ‘新建陸軍’의 약칭. 청일전쟁 패배 후 톈진의 교외에서 독일 육군을 모방한 조직이다. ↑ 상공부를 지칭 ↑ 위안스카이는 변법자강운동 당시 초기에는 변법파에 있었으나 뒤에 배신하고 서태후를 위시한 수구파와 손잡아 ‘무술정변’을 일으켰고 의화단 운동 당시 의화단을 진압한 공로로 이후 청의 실권자로 급부상했었다. -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참조 ↑ 순친왕은 정계에 급부상한 위안스카이를 두려워해 그를 해임시키고 숙청하려고 했다. 위안스카이는 낙향해 칩거한다. -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참고. ↑ 1901년에 체결한 베이징 의정서에서 열강에 배상금을 1940년까지 지급해야 했다. - 《객관적 20세기 전반기史》,이윤섭 저. p26 참고 ↑ 영국 런던에서 쑨원은 청국 공사관에 강제로 잡혀갔는데 청으로 송환되기 직전 영국인 친구가 도와줘서 석방되었다. -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참고. ↑ 1903년 호남성 장사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 황싱, 쑹자오런 등이 설립한 혁명단체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부흥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비밀결사와 연락해 장사에서 봉기하려다 발각되어 중심인물 대부분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참고. ↑ 1904년 상해에서 차이위안페이,장병린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혁명단체로 ‘한족을 광복하고 우리 강산을 되돌려 받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강소ㆍ절강 지방에서 반청 혁명을 추진했고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p331 참고. ↑ 청조의 전제 지배를 벗어나 중국인이 천부의 자유평등권을 회복해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 진천화는 호남성 출신으로 화흥회를 거쳐 동맹회에 입회했다. 일본 유학중이던 1905년 12월 일본 문무성이 반포한 중국 유학생에 대한 단속규칙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에 대하여 아사히신문에서 방종하고 비열하다는 등의 비하 기사를 싣자 이에 분격하여 유서를 남기고 30세의 나이로 바다에 투신, 자살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 《민립보》(民立報)는 1910년 10월에 동맹회원 우우임(于右任)과 쑹자오런이 발간한 신문이었다. - 《시대를 앞서간 민족 혁명의 선각자 신규식》, p68 ↑ 신민총보는 캉유웨이를 비롯한 변법자강파 개혁파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발간하는 기관지로 이들은 ‘황제를 옹립해 중국을 개혁하자’고 보황운동을 주장했었다. - 《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p95 ↑ 한편, 이 무렵 쑨원은 광저우 봉기가 실패한 후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하자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모금을 위하여 세계 순례의 길에 오르고 있었다. -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 우창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중국동맹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쑹자오런은 1911년 7월 상하이에 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했었고, 호북 지방의 혁명파 청년지식인들도 우창의 신군병사들에게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신군 내부에 공진회,문학사 등의 혁명단체를 설립해 비밀리에 활동했었다. - 《세계각국사 중국사 (하)》 참고 ↑ 10월 9일에 쑨우가 러시아 조계 안에 있는 공진회에서 폭탄을 만들다가 부주의로 화약이 폭발하여 얼굴에 화상을 입고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러시아 순찰이 이 폭음을 듣고 이곳을 수색하여 봉기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기치, 도장, 선언문, 명단을 찾아내 청조 당국에게 넘긴 이 사건으로 사전에 혁명을 준비하던 신군 장교 3명이 체포되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참고. ↑ 리위안훙은 평소 혁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냈었고 오히려 반(反)혁명적 인사였지만 신군 안에서 비교적 군사를 알고 사병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때문에 그가 나서면 각 성도 동조를 표시할 것이고 외국인들도 가볍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추대되었다. 당시 리위안훙은 우창 봉기 당시 친구 집에 숨어있다 혁명군에게 들켜 할 수 없이 지휘관이 되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참고. ↑ 위안스카이의 야심은 청조를 쓰러뜨리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서로 필요한 처지였고 일단 ‘청조를 무너뜨리는 것’에 이해관계가 부합했다. -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1914년에 결성된 중화 혁명당은 뒷날, 1919년 10월 10일에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해 개편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신강에는 만주족, 몽고족, 한족 등도 혼재해 있어 민족ㆍ종교 관계로 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지역으로 특히 투르크 계통 종족(위구르)과 한족 간 대립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왔었다. 신강 지역 도독이 되어 독립을 선포한 양증신은 이런 대립 속에 뒷날 1928년에 암살당하고 그 후임으로 김수인(金樹仁)이 부임했다. 그 후 신강에는 소련의 입김과 영향에 강하게 미치게 된다(김수인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의존했는데 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원조를 요청하거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광범위한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史》,이윤섭 저. p109 참조주 ↑ 가 나 다 라 마 《한국근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년, p142 ↑ 《세계사 100장면》,실천문학사,박은봉 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신승하 (2005년 7월 16일). 《세계각국사 중국사 (하)》. 미래엔(대한교과서). p283~285 ↑ 가 나 다 라 마 《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저. p93 ↑ 가 나 다 《한국근현대사사전》,가람기획. p81 ↑ 이윤섭 (2010년 12월 5일).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p23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 (32) 청조의 개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52~p454 ↑ 이윤섭 (2010년 12월 5일).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p23~p24 ↑ 가 나 다 라 마 바 이윤섭 (2010년 12월 5일).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p24~26 ↑ 가 나 다 라 마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윤혜영 저. 서해문집 p330~331 ↑ 가 나 《이야기 중국사3》,청아출판사, 2006년. p471~472 ↑ 가 나 《중국근현대사 :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신승하 저. p485~486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일어 위키판 신해혁명 내용 ↑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④ 쑨원에게 길을 다시 묻는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기타 잇키》, 마츠모토 겐이치 저. 교양인 출판사. 2010년. p406~410 ↑ 《시대를 앞서간 민족 혁명의 선각자 신규식》,강영심 저. 역사공간. 2010년. p188 ↑ 1993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 ↑ 가 나 다 《중국근현대사 :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신승하 저. p487~492 ↑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 (34) 쑨원①[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가 나 《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p96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이야기 중국사3》,청아출판사,2006년. p472~475 ↑ 가 나 다 라 《중국을 말한다 15-포성속의 존엄》,허청웨이 총기획, 탕렌저 지음. 김동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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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해혁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해 혁명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해혁명1911년 신해혁명 당시 상하이 시내 (난징동로)날짜1911년 10월 10일 ~ 1912년 2월 12일장소청 제국결과 중국 동맹회의 승리 청 제국의 몰락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외몽골 및 티베트의 독립 선언 위안스카이의 임시 대총통 집권과 쿠테타로 독재정권 시작 청나라 소조정의 설립교전국 청나라 중국 동맹회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군정부 후베이군 도독부 지휘관 순친왕 위안스카이 펑궈장 돤치루이 마안량 양증신 마기 쑨원[주해 1] 황싱 쑹자오런 천치메이 리위안훙 병력 200,000여 명 100,000여 명피해 규모 170,000여 명 ~ 50,000여 명 다른 뜻에 대해서는 신해혁명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이라고도 불린다. 목차 1 개요 2 배경 2.1 쓰러져 가는 청나라 2.1.1 양무운동 2.1.2 변법자강운동 2.1.3 의화단운동 2.2 청조의 개혁 2.2.1 과거제도 폐지와 학당 설립 개혁 2.2.2 군사제도 개혁 2.2.3 입헌군주제 추진 2.3 당시 중국 내 상황 3 혁명 조직 결성 3.1 쑨원의 혁명 운동 3.2 중국동맹회 결성 3.2.1 동맹회 지부 설치 3.3 혁명 참가자의 구성원 3.3.1 신흥지식인 참여 3.3.2 비밀결사 참가자 참여 3.3.3 해외 화교의 참여 3.3.4 신군 참여 3.3.5 신사층의 참여 3.3.6 외국인 참여 4 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 4.1 동맹회 활동 4.2 주요사건 4.2.1 안휘 신군 봉기 4.2.2 경술 신군 봉기 4.2.3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4.2.4 황화강 사건 4.3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활동 5 혁명의 전야 5.1 보로운동의 확산과 쓰촨 폭동 5.1.1 배경 5.1.2 청조의 철도국유화령 5.1.3 보로운동 확산 6 혁명의 전개 6.1 우창 봉기 6.2 각 성의 호응과 독립 6.3 청조의 대응과 위안스카이의 등장 6.4 북양군의 혁명군 진압 6.5 남북의화 7 중화민국의 수립 7.1 중화민국임시정부조직대강 7.2 쑨원의 귀국과 초대 임시대총통 취임 7.3 임시참의원과 임시약법 8 청 멸망과 중화민국 초기 8.1 선통제 퇴위·청조 멸망 8.2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과 독재정치 9 영향 9.1 국외상 영향 9.2 국내상 영향 10 평가 11 논쟁 12 영화·문학속에서의 신해혁명 13 같이 보기 14 각주 15 참고 자료 16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00년의 의화단운동 이후 열강들의 침략이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청 조정은 정치개혁을 꾀하는 소위 '신정' 운동을 일으켰으나 납세 거부와 기독교 배척을 위시한 대중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1] 이런 정세하에서 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일변 혁명파를 지휘,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1] 1911년 청나라가 철도 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쓰촨봉기로 결국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0월 10일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한 달 만에 14 성(省)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고[2] 12월 말에는 17개 성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하였다.[3] 1912년 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조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선통제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1] 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라서 신해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곧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제제(帝制)의 야심을 품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일편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1913년 7월 국민당에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려는 운동하면서 혁명을 호소하여 봉기했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고 하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1]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5년 일본의 '21개 조 요구' 수락을 위시해 매판성을 드러내어 이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민중은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고 부르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내전과 군벌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1]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월 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쌍십절”로 기념한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배경[편집] 쓰러져 가는 청나라[편집] 양무운동[편집] 양무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서구의 무기를 주목하게 된 청의 관리들이 1860년대 중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수산업을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차츰 민수 부문으로 확산되어 근대 특징이 될 만한 경향이 있는 광공업의 발전, 전신선과 철도 부설, 해군 양성과 유학생 파견, 신식 교육기관 설립까지 광범위하게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다. 양무운동 초기에는 청조가 반란 진압에 성공하여 “同治中興”이라고까지 회자됐지만 부국강병의 결과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양무운동 기간에 있었던 대외 전쟁(1884년 청불전쟁, 1894년 청일전쟁)에서 군사상으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양무 기업 대다수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할 무렵에는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4] 양무운동 실패 요인과 한계는 관리의 기업 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에 속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점이 주류였다. 특히 개혁을 지향하는 관리들이 지방에 분산된 채 통일하는 계획 없이 사업을 추진했으므로 급변하는 정세 변화에 효율로 대처하지 못한 점이 커다란 문제였다.[4] 변법자강운동[편집] 변법자강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캉유웨이 청일전쟁을 계기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자 그동안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상 개혁을 주장해 온 변법론이 힘을 얻었다. 변법을 주장하는 하급관리 캉유웨이(강유위)의 개혁 주장이 광서제에게 알려지면서 광서제가 주도하여 1898년 4월 하순에 약 100일에 거쳐 소위 ‘무술변법’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4] 캉유웨이는 본래 부강하려면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우선 개혁을 추진할 새로운 기구(제도국) 마련에 착수하고자 했다.[4] 그러나 새로운 기구 마련과 개혁을 지향하는 하급관리 임용,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 등 개혁 구상조차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려는 관리들과 서태후에게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였다. 특히 ‘자신의 개혁이야 말로 공자의 정신을 계승한 것’(공자개제론)이라는 캉유웨이의 주장은 수구파의 공격을 불러왔다. 결국 변법파가 영국, 일본과 연합하는 외교 방침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을 방문해 광서제를 만나자 서태후 측과 수구파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서태후가 訓政을 재개하여 변법자강운동은 실패하였다.[4] 의화단운동[편집] 의화단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신축 조약 체결서. 1899년-1900년 기간 산둥 성에서 반기독교 폭동을 계기로 화북 일대에 퍼진 반제국주의 농민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의화단운동이라 한다. 중심 세력인 의화단은 백련교 일파로 불리는 종교 비밀결사로서 당시 사회 모순, 기독교 전파, 독일 진출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을 부르짖으면서 무력으로써 배외 운동을 전개했다.[5] 1899년 산둥 성 서부에서 의화단은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박해했고 청조에서도 이를 선동해 폭동이 확대하였다.[5] 1900년에는 베이징에까지 들어와 관군과 함께 11개국 공사관[주해 2] 을 공격했으나, 영국,러시아,독일,미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8개국 연합군에게 격파되었다. 1901년 9월 베이징 의정서의 성립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으나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 조약 내용은 청의 면모를 크게 실추시키면서 식민지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5] 청조의 개혁[편집] 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와 수구파 탓에 실패했으나 의화단 운동의 참혹한 결과로 국내상으로는 막대한 세금 징수로 민심의 동요와 불만, 국외상으로는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가 증폭하여 청 조정은 내정과 외교 총체가 위기에 처하였다. 특히, 상층도 청조에 불만이어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위기였다. 1901년 1월 청의 실권자 서태후는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려 부강을 꾀한다”는 방침하에 고위 관료들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上申하라고 명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청 정부는 생존하려는 ‘新政’을 개시했는데 이를 서태후의 존호인 慈禧를 따 ‘慈禧新政’[주해 3] 이라고 한다. 직례총독 위안스카이,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이 추진한 신정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6] 36개 사단의 新軍[주해 4] 건설을 중심으로 한 군대 근대화 商部[주해 5] 신설, 회사 설립 장려, 상법 제정을 이용한 실업 진흥. 과거제도 폐지, 교육 개혁, 외국 특히 일본으로 유학생 대거 파견 과거제도 폐지와 학당 설립 개혁[편집] 정부 주도하에 이뤄진 개혁 중 최요하고 시급한 개혁이 교육이었다. 청조는 국외 유학을 장려하고 전국의 학당(서원)을 신식 학교로 바꾸도록 하여 점차 과거 시험 준비 기관이었던 재래식 학당이 신식 학교로 바뀌어 갔다.[7] 그러나 이 교육 개혁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하급수로 학교 수와 학생 수는 늘어갔지만 정작 가르칠 신식 교사는 태부족하여 전체 교사의 반이 신식 교육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구식 교원들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로 사립학교든 공립학교든 간판만 바꿔 단 과거 학당이었고 그 설립자나 운영자는 거의 신사층, 즉 향토 지식인으로 이들은 근본으로 과거 제도 폐지를 반대하여 신식 학교의 설립도, 국외 유학도 반대해 왔던 세력이다.[7] 이들은 교육 개혁에 따라 과거 학당 존재가 위험해져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학당을 신식 학교로 개조해 교묘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므로 외양만 바꾸었지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은 허울 좋은 교육개혁이었을 뿐 신식 학교도 과거 준비라는 과거 기능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7] 그래서 청조는 1905년 과거제도를 완벽히 폐지하였으나 청조가 시행한 교육개혁은 여러 한계점이 속속 드러났는데 예컨대 신식 학교로 바뀌긴 했어도 가르치는 내용에 과거 교과가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 학업의 기본이 유학이었고 일주일 수업시간 30시간 중 12시간을 유교 경전 학습에 할당했을 정도였다.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외국어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고 중국어의 순수를 유지하려고 외래어 사용을 일절 금하였으며 여성 교육도 금지되어 있다가 러일 전쟁 후 1907년이 되어서야 허용되었다.[7] 정부가 주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으로 교육하려는 학교가 대대로 늘어나고 과거 시험 준비 학당이 마지못해 신식 학교로 변신하긴 했어도 청조는 개혁의 본의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청조의 교육개혁은 실효가 전무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청조를 성토하고 열렬히 비판하였다.[7]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서 중국인 유학생들 간에서 청조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목소리가 고조됐고 일본 내 중국 유학생 단체들이 반청, 공화 혁명 주창에 영향을 미쳤다.[7] 군사제도 개혁[편집] 북양신군 훈련. 산둥 성 순무 시절 위안스카이. 의화단 운동 이후 급부상해 실권자로 대두했다. 청조에서 주도한 교육개혁은 여러 가지 한계점이 보였는데 군사제도 개혁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제1차와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시작해 청불 전쟁, 청일 전쟁, 의화단 운동 등 전쟁마다 패배를 거듭해 온 청은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의화단운동 이후 주력 군대는 무위우군만 남고 나머지는 해산되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급부상하고 출세 지향 일로를 달리던 위안스카이가 직례총독이 되어 무위우군을 이끌고 톈진에 주둔하였다.[8] 청조도 기존 군대의 부패와 무능을 알고 1901년 8월에 무과의 과거제를 폐지하고 각 성에 명령하여 북양(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 新建陸軍)과 양강(장지동의 자강군)을 모방해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기존 군대를 해산시키고 상비군을 새로 편성 훈련하도록 지시하였다.[8] 1901년 위안스카이가 주축이 되어 서양식 군대인 ‘신건육군, 약칭 '신군'이 36개 사단으로 재조직되었다. 특히 ‘자희신정’의 결과로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인 위안스카이를 영수로 하는 북양 군벌이 급성장해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1905년에 북양 군벌은 병력 약 7만, 사단 6개 규모로 구성된 북양 신군을 보유하였다. 이중 사단 4개는 즈리 성, 나머지 사단 2개는 만주와 산둥 성에 배치됐으며, 군사권 실질 권한자로 급부상한 위안스카이[주해 6] 는 교통은행을 설립하고 영국의 지지하에 철도 운수 부문 실권도 장악했다.[9] 기존 청조는 사농공상 신분 차별에 문관을 숭상하고 무관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나 잇단 전쟁 패배와 군대 필요성이 절박지자 군사 개혁을 서둘러 착수했다. 청조가 ‘신군’(신건육군)을 조직하고 군사제도 개혁을 착수한 결과, 군의 위상이 과거와 크게 달라져 무관의 위상이 문관과 동등해질 정도로 높아졌으며 일본에 파견된 군관들은 중국인 유학생 사이에 널리 퍼진 혁명 사상에 영향받아 후일 ‘공화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7] 입헌군주제 추진[편집] 신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청조를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국가 부흥을 꾀하자는 입헌 운동도 전개됐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사태를 계기로 “아시아인도 입헌하면 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양계초의 주장이 널리 호응을 얻었다. 실업 진흥 기치하에 민족자본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 발전하기는 했으나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해서 신흥 자본가 계층은 입헌 개혁을 지지했다. 입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퍼져가는 가운데 대세를 관망하던 위안스카이는 1905년에 황족과 귀족을 국외에 파견해 정치를 시찰시키면서 입헌하려는 준비해야 한다고 황실에 상주했다. 서태후의 측근 대신들도 “입헌해야 군권(君權)이 영구히 굳건해진다”고 서태후를 설득했다.[10] 청 조정은 1905년 7월 헌정시찰단을 유럽, 미국, 일본에 파견했고 1906년에는 9년 뒤에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는 ‘상유(上諭)’를 선포했으며, 1908년 8월에는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공포하여 9년 후에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10] 이 《흠정헌법대강》은 일본 제국의 메이지 헌법을 모형으로 하여 황제의 만세일계(萬世一係)와 신성불가침, 황제의 광범위하고 강대한 권한을 규정했으나 입헌군주제를 추진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1908년 11월 14일에 청 제11대 황제 광서제가 죽었다. 서태후는 당일로 광서제 조카로 나이가 3살밖에 안 된 푸이를 황제로 선포하고 그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 다음날인 11월 15일 서태후도 급사했다.[10] 푸이가 즉위하니 그가 청 최후 황제인 선통제다. 섭정인 순친왕은 1909년 1월 위안스카이를 해임했다.[주해 7] 선통제가 즉위한 후 입헌파는 국회를 조기에 개설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를 계기로 청조를 타도하려는 혁명파의 입지가 강화하였다.[10] 당시 중국 내 상황[편집] 청조가 추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 학교가 설립되고 유학생이 대거 파견된 결과로 전통 독서인과 유형이 다른 지식 계층이 탄생했다. 1908년에는 전국에 학교 47,000여 개가 있었고 학생은 약 130만 인, 교원은 약 63,500여 인에 달했다. 이들 새로운 지식 계층은 차츰 혁명 사상과 입헌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을 간 중국인 유학생들은 급속하게 입헌 사상과 혁명 사상을 수용했다.[10] 일변 중국 내 경제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청 조정은 1900년에 있었던 의화단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양 열강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주해 8]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신정’ 실행에도 많은 재원이 필요하여 각종 세금이 새로 생겨나 민중 고통이 상당히 심해졌다. 농민 봉기가 1906년에 199회, 1907년에 188회, 1909년에 112회, 1910년에 266회나 일어날 정도로 만연했고 1911년 이후에는 더욱 급속히 증가했다.[10] 혁명 조직 결성[편집] 쑨원의 혁명 운동[편집] 쑨원, 흥중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쑨원(1900년 8월) 중국 공화 혁명의 시초는 1894년 쑨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청조를 타도하자!’는 취지로 미주 하와이에서 ‘흥중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쑨원은 다음해 1895년 홍콩에서도 흥중회를 만들어 기층 민중을 동원해 광저우를 무장으로써 점령하려는 최초 반청 봉기를 계획했으나 이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후 망명했고 영국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에 억류되었다.[주해 9] 쑨원은 이 사건으로 국제상으로 저명해졌고 억류에서 석방된 후에는 대영박물관에 드나들면서 삼민주의 사상 기초를 닦았고 1897년 전후로 쑨원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와이,베트남,타이,싱가포르를 순회하면서 화교와 유학생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봉기하려는 자금 모금에 나선다.[11] 1900년 의화단운동을 전후해 쑨원은 이홍장을 황제로 추대해 양광지방을 독립시키려는 모의하다가 실패했다. 이어 광둥 성 혜주에서 조직한 봉기도 한때 2만 여 인이나 모을 수 있었으나 외부 지원 두절로 실패했고 다시 망명했다. 이렇게 쑨원이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도를 정한 봉기를 도모하던 중에 일어난 의화단운동은 청조 존재 근거에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일본 유학생을 위시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혁명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11] 1905년 화흥회 요인들. 앞줄 왼쪽 첫 번째가 황싱,네번째가 쑹자오런, 뒷줄 오른쪽 끝이 류보. 대러시아 저항운동은 사회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에게 ‘청조 타도 정당성’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의화단 진압 후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청조에 새로운 요구 조건을 제시해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하에 두려고 했다.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중국인 유학생들은 러시아에 저항하려는 의용대를 결성하고 학생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많은 유학생에게 호응받았으나 청조는 “대러시아 저항을 구실로 혁명을 꾀한다”고 하여 탄압했다.[11] 이 저항운동이 청조 탄압 탓에 실패한 후 일본 유학생계에는 혁명 운동 기운이 본격으로 싹텄다.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조직한 단체가 모태가 되어 국내 반청 혁명단체인 화흥회[주해 10] 와 광복회[주해 11] 가 뒤에 성립되었으며, 종래 반제국주의의 선전이 반청 혁명을 집중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추용의 ‘혁명군’같은 선전책자가 널리 읽혀 급진적인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1] 장병린이 ‘혁명군’[주해 12] 을 소개하는 글을 ‘소보’(蘇報)라는 잡지에 실었다가 추용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는 필화사건으로 이 책자는 한층 널리 알려졌다. 또 화흥회 회원인 진천화[주해 13] 가 지은 ‘경세종’, ‘맹회두’와 같은 선전책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부가 중국인 유학생을 단속하는 규칙을 만든 데 항의해 진천화가 바다에 투신해 죽은 사건은 그의 혁명주장을 더욱 인상 깊게 했다. 이들의 주장은 청조가 대외적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중국이 멸망할 위기에 놓여있으므로 청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1] 중국동맹회 결성[편집] 중국동맹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국동맹회 기관지 《민보》. 1906년 발행되었다. 각지에서 혁명 단체가 결성되자 쑨원의 흥중회를 비롯하여 화흥회, 광복회 등 여러 혁명단체들이 “통합하여 혁명운동을 더욱 강화하자”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1907년 7월 혁명의 선구자 쑨원이 유럽에서 일본에 들렀을 때 이 움직임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12] 쑨원은 혁명의 동지 황싱과 혁명 제단체의 연합을 제창한 끝에 호응을 얻었다. 대표들은 쑨원을 주석으로 추대할 것, 새로 결성되는 단체의 이름은 중국동맹회로 할 것, 쑨원이 제창하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창립하여 지권을 평균한다’는 4개 강령을 동맹회의 강령으로 결정하였다. 이 혁명파의 지도적 인물로는 쑨원, 황싱, 장병린 등이 있었다. 그들은 1906년 공동으로 전략을 세워 혁명 봉기 후의 정권 수립에 대비한다는 데 합의하였다.[12] 동맹회 지부 설치[편집] 중국동맹회는 본부를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국내외에 8개 지부를 두도록 했다. 국내에 5부 즉 상하이에 설치한 동부는 장쑤 성, 저장 성, 안후이 성 3개 성을 관할하며, 충칭에 설치한 서부는 간쑤 성, 쓰촨 성, 티베트, 신장, 구이저우 성 5개 성을 관할하고, 홍콩에 설치한 남부는 푸젠 성, 광둥 성, 광시, 윈난 성 4개 성을 관할하고, 연대에 설치한 북부는 산둥 성, 산시 성(산서성), 산시 성(섬서성), 몽골, 즈리 성, 동삼성의 8성을 관할하도록 하였다.[13] 한편 해외에는 미국 호놀룰루에 설치한 하와이 지부,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한 미주 지부, 유럽 벨기에의 브뤼셀에는 구주 지부, 상가포르에는 남양 지부 등 4개 지부를 설치했다.[13] 혁명 참가자의 구성원[편집] 신해혁명은 일본에서 귀국한 유학생,지식인 뿐만 아닌 여러 단체에 참가한 일반 군중들, 해외 화교, 신군 병사, 신사층, 농민 등 폭넓은 계층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었다.[14] 신흥지식인 참여[편집] 신흥 지식인들은 해외(주로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운 유학생과 신식 학당(學堂)에서 배운 학생이 주체였다. 과거제도 폐지 후, 청조는 서구식 교육을 도입 함과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했다. 타오청장의 제창 아래, 서석린을 비롯해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해 최신의 군사 교육을 받아 귀국했다.[14] 1900년대, 청조에서는 일본 유학열이 높아져, 신해혁명 직전에는 수만명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의 주변에는 혁명 사상에 고취되었는데, 1905년 중국 동맹회가 도쿄에서 성립했을 때 90%이상의 회원이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들이었다. 일본 유학한 학생들은 신해혁명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지도자 쑨원을 비롯해 황싱, 쑹자오런, 후한민, 왕징웨이등 혁명 지도자들 대부분이 일본 망명객 내지는 유학의 경험자였다.[14] 비밀결사 참가자 참여[편집] 청조 말기, 각지에서 홍문회(洪門会), 가로회(哥老会), 치공당(致公堂), 삼합회(三合会), 홍강회(洪江会) 등의 비밀결사 단체가 결성되어 반청(反淸)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결사에는 신사층,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사상을 제창했다.[14] 비밀결사에서 가로회는 화흥회를, 청방(青幇)은 광복회를, 삼합회는 흥중회와 각각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는데 쑨원도 이전에는 홍문치공당(洪門致公堂)의 회원이었다. 1908년 이전, 혁명파 인사들은 이러한 비밀결사 단체 세력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고, 이러한 배경 아래 무장 봉기의 준비를 진행시켜 청조 타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해외 화교의 참여[편집] 해외 화교도 신해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외 화교는 해외 각지의 거주지에서 동맹회에 대한 자금 원조를 지원해준 것과 동시에, 귀국후 출신지에서 혁명 단체를 조직, 많은 무장 봉기에 참가했다. 1894년 11월,쑨원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중회를 결성했을 때에는 20명의 화교가 참여했었다. 또한, 황화강 봉기 당시 죽은 '72명의 열사'가운데 해외 화교가 29명을 차지하는 등, 많은 화교들이 혁명활동에 참가했다.[14] 신군 참여[편집] 1908년 이후, 혁명파의 혁명 운동은 군대 내의 신군(신건육군)의 혁명활동 동조자 포섭에 중점으로 옮겨, 혁명파 인사들은 신군 내에서 비밀리에 혁명 사상 보급에 노력했다. 과거제도의 폐지와 청조의 군대개혁 등에 의해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당시 신군에 많이 있어 이들이 혁명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이끌어 낸다.[14] 신사층의 참여[편집] 1907년 9월부터 10월, 청조는 입헌운동을 추진하고자 자정원과 자의국을 설치하여 신사층의 참정권을 제공했다. 1909년, 각 성(省)에 자의국이 설치되어 많은 신사층들이 선거에 의해 자의국에 선출되었다. 지방 신사층의 정치력은 지방정치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했다.[14] 이러한 신사층들은 본래는 입헌파를 지지했으나 청조는 입헌 운동에 소극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1911년 5월에 경친왕을 필두로 발족한 내각 정책에 신사층은 대실망했고 우창봉기 이후 신사층을 비롯한 입헌파 세력도 신해혁명에 참여하였다.[14] 외국인 참여[편집] 이밖에 신해혁명에는 중국 동맹회를 비롯한 혁명활동에 가담한 중국인 이외 참여한 외국인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었는데 특히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미야자키 도텐 등의 일본인들 지원이 현저하게 많았다.[15]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성립된 중국동맹회를 비롯한 많은 혁명단체가 일본에서 조직 운영되었는데, 여기서 기타 잇키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 다수가 동맹회에 참여하였고 이들은 뒷날 1911년 우창 봉기,신해혁명에도 참가한다.[16] 그 밖에 한국인으로는 신규식이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할 때 동맹회 기관지 《민립보(民立報)》[주해 14] 기자 서혈아(徐血兒)를 만나 서혈아의 소개로 천치메이와 황싱 등 중국동맹회 간부들과 접선하고 친교를 맺어 1911년 3월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이후 신규식은 10월 우창봉기에 가담, 신해혁명에 참여했다.[17][18] 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편집] 중국동맹회#신해혁명 이전 활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동맹회 활동[편집] 중국동맹회는 같은 처지로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세력인 캉유웨이의 입헌파와 사상적인 논쟁을 전개하면서도 혁명운동의 구심체로서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맹회의 활동은 입헌파에 비해 훨씬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혁명 활동이란 비밀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중국 국내에는 동맹회 세력의 본부를 설치할 곳이 없었다.[19] 한편, 동맹회의 혁명이란 무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므로 무력 또한 물질적인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혁명당은 각지의 회당과 군대에게 연락하여 이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19] 쑨원의 전략은 해외에서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혁명 세력을 본토에 침투시켜 전국 규모의 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이었다.[20] 그는 삼민주의를 내세워 군법,약법,헌법의 순서로 혁명을 전개한다는 3단계 혁명방안을 구상했다. 쑨원의 동맹회는 선전활동 외에 반청 무장봉기를 1905년~1911년 우창봉기 이전까지 수십여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9] 그 가운데 1908년 10월에 일으킨 ‘안휘성 신군 봉기’와 1910년 2월에 일으킨 ‘경술 신군 봉기’, 그리고 1911년 4월에 일으킨 황화강 봉기등이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러한 무장봉기 실패들은 동맹회에 커다란 타격을 받기도 했다.[21] 동맹회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는 계속 실패해왔으나 국내에서의 혁명적 정세는 계속 확산되어가고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21] 주요사건[편집] 안휘 신군 봉기[편집] 1908년 10월 안휘 성에서 ‘신군 사건’(新軍事件)이 발생했는데, 이를 ‘안휘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22] 신군은 위안스카이가 새로 편성한 신식 육군으로 신군의 청년 장병 가운데에는 쑨원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악왕회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한족 국가 건설의 결의를 다졌다. 1908년 10월 23일 악왕회의 간부인 범전갑은 광서제와 서태후의 죽음 소식을 듣고 10월 26일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각 진영의 간부와 연락하여 웅성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22] 이렇게 해서 성 밖에 있던 신군은 일제히 봉기하였으나 탄약의 부족과 성 안의 군대가 내응하지 않고 해군 또한 봉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주동자였던 범전갑은 체포, 처형되고 웅성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그 후 웅성기는 다시 청나라에 잠입하여 유럽에서 귀국하는 섭정왕의 두 동생 재도(載濤)와 재순(載洵)을 하얼빈 역에서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22] 경술 신군 봉기[편집] 1910년 2월, 광둥 성의 신군이 구정을 기해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신군 봉기는 주로 혁명파가 신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 광둥의 경우는 혁명파의 청년들이 신군 가운데 잠입하여 봉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혁명파 청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노련한 감시자의 눈에 띄기가 쉬웠다.[22] 봉기 계획을 알아차린 신군의 수뇌들은 무기고에 있던 탄약을 모두 감추어 버렸다.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신군의 보병 200여명이 무기고로 달려갔으나 탄약은 하나도 없었다. 봉기는 결국 실패했다. 이번 봉기에는 왕조명이나 호한민이 홍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담할 예정이었으나 탄약을 구하지 못해 신군이 해산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경술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 봉기의 주동자 예영전은 전사하고 신군 34표(標, 1표는 200명 단위)의 책임자 조성(趙聲)은 어렵게 탈출하였다.[22]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편집] 혁명 봉기가 실패를 거듭하자 입헌파의 기관지 《신민총보》[주해 15] 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까지도 ‘혁명파의 수령들은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하고 애매한 대중만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주해 16][22] 동맹회 기관지 《민보》의 격렬한 비난에 분통을 터뜨린 왕조명은 《민보》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실증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혁명 투사들뿐 아니라 자신도 혁명을 위하여는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베이징에 올라온 왕조명은 웅성기가 하얼빈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한 바 있는 두 황족을 베이징 도착 때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22] 그러나 두 황족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출영 인파로 그들을 분별할 길이 없어 예정을 변경하였다. 왕조명은 섭정왕인 순친왕을 폭살할 계획으로 순친왕이 자주 통과하는 다리 밑에 폭탄을 장치하였으나 이것마저 사전에 통행인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수색 끝에 폭탄 표피를 만든 대장간이 적발됨으로써 왕조명도 체포되어 무기형에 처해졌다.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사건은 1910년 4월의 일이었다.[22] 황화강 사건[편집] 황화강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10월 쑨원과 황싱, 조성(趙聲) 등 중국동맹회 지도층 간부들이 남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자금을 모집해 동맹회원 500인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신군(新軍)을 주체로 반청 단체들과 연합해 광저우에서 재차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봉기에 성공하면 광저우를 근거지로 삼고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북벌하되, 한 갈래는 황싱이 거느리고 호남을 거쳐 우창을 점령하며, 다른 한 갈래는 조성이 거느리고 강서를 거쳐 난징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두 군이 회합해 양자 강을 건너 곧장 베이징으로 향하기로 했다.[23] 그 해 1910년 10월 황싱, 조성은 홍콩에 봉기조직부를 설립하고 광저우로 사람을 보내 비밀 연락 지점을 38곳이나 세웠다. 이듬해 1911년 3월 5일 황싱과 조성은 봉기 날짜를 3월 15일로 의결했다가 다시 28일로 고쳤다. 황싱과 조성은 광저우에 도착하자 봉기 총지휘부를 설립했는데 무기가 미처 도착하지 않아 봉기를 하루 연기해 29일(4월 27일)에 일으키기로 하고 원래 정해놓은 열 갈래를 네 갈래로 통합하고 각각 광저우의 총독부와 북문,순경교련소,남대문 등을 공략하기로 했다.[23] 황화강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힌 72열사들의 묘. 3월 29일 오후 5시 반에 황싱이 100여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는데, 나머지 세 갈래 봉기군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하지 못하고 신군도 성 밖에 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황싱은 자신이 이끄는 100여명을 거느리고 계획대로 총독부를 점령했으나 신임 총독 장명기가 이미 도주해 총독부에 불을 지르고 나오다 수사제독(水師提督) 이준(李準)의 친병대대에 맞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대오를 흐트러뜨리고 말았다. 황싱은 이 전투에서 오른쪽 손가락을 두 마디나 잘렸으나 완강히 싸우다 후에 그의 처가 된 서종한의 권고에 못 이겨 의복을 갈아입고 그녀의 호위 아래 홍콩으로 몸을 숨겼다.[23] 이 봉기도 실패해 봉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붙잡혀 살해된 사람까지 모두 86명이었다. 4일 후 유지인사들이 나서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72구 찾아 황화강(黃花岡)이라는 곳에 집단 안장했는데, 이를 황화강 72열사라고 부른다.[23]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활동[편집] 1911년 12월 16일, 쑨원과 그의 군사 고문 호머 리 (Homer Lea, 荷馬李)는 싱가포르의 골든벨 맨션 (Goldenbell Mansion)에 머물렀다. 이 기간은 쑨원이 우창봉기 소식을 듣고 미국->유럽을 경유해 싱가포르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기간이다.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 활동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신해혁명과 관련된 활동을 가리키는데, 쑨원은 1906년부터 1910년 기간동안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외에서의 자금을 얻기 위한 활동과 혁명사상 전파 활동을 하였다. 이 무렵 말레이 반도는 중국 본토를 제외하면 화교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으며, 화교의 경제적 위치도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쑨원은 수차에 걸쳐 말레이 반도를 방문해 현지의 화교들에게 혁명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고 화교 다수에게서 조언을 얻는 등 화교들에게 혁명을 호응받았으므로 말레이 반도는 혁명 운동의 주요 활동 지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24] 혁명의 전야[편집] 보로운동의 확산과 쓰촨 폭동[편집] 보로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배경[편집] 청조는 1898년 이래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등 막대한 이권을 외국인의 손에 넘겨주어 이 시기 철도 부설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민간에서 이권 회수 운동이 일어나 철도도 스스로 자금을 마련해서 부설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호남, 호북, 쓰촨, 광둥에서 적극적으로 이 운동이 일어나 주식을 판매하여 자금을 모아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은 자금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철도 부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25] 청조의 철도국유화령[편집] 청조 황족 고위 내각관료들(중앙에 경친왕 혁광). 이들 내각은 ‘철도국유화’를 추진해 민중들로부터 격분하게 만들었다. 1911년 5월에 청 조정은 ‘신정’(新政)의 일환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13명의 각료를 임명했다.[26] 그러나 문제는 이 13명의 각료 중 한족 출신은 4명뿐이고 나머지 9명은 만주족이었으며 그 9명 중 6명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내각인사였다.[26] 더 커다란 문제는 이 내각에서 우전부대신 성선회가 ‘철도를 국유화 하여 국가에 건설하자’고 건의하여 청조정은 즉각 철도 국유화령을 내렸다.[25] 이는 건설이 예정된 쓰촨 ~ 한커우, 한커우 ~ 광저우 간 철도를 정부가 외국의 차관을 얻어 건설할 것이며 이미 사업에 투자한 민간인들에게는 공채를 발행해 보상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미 판매한 주식 대금에 대한 보상이었는데 보상할 능력이 없었던 정부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철도 건설이 완성된 다음에 보상해 주기로 하였기 때문에 투자자들만 피해를 입게 되었다.[25][26] 보로운동 확산[편집] 보로운동 희생자 추모비 청조의 이러한 조처는 결정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격분시켰다.[26] 우선 내각이 의회에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한 사항이었고 정부가 약속한 민주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했고 만주족이 독점한 내각에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은 당시 중국 민족주의의 정서에 크게 거스르는 결정이었으며 이미 투자한 민간인들의 이권을 박탈하는 조처였다. 그리하여 피해를 입은 지역 가운데 호남 장사(長沙)에서 처음으로 국유화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였다.[25][26] 또, 조세에 항거하자는 상인의 철시와 동맹휴학도 일어났다. 이후 6월 17일 ‘보로 동지회’가 조직되어 호북과 양광에서도 보로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제일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 쓰촨 성이었다.[25] 쓰촨 성의 주요도시인 성도에 ‘쓰촨 보로 동지회’가 조직되었으며, 각 주현에 분회를 조직하고, 동맹 휴학과 납세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쓰촨 성 총독 조이풍은 보로운동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므로 철도의 민영화를 건의하여 입헌파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성선회 등으로부터 질책받고 조정의 강경책이 나오자 태도를 바꾸어 그 때까지 취했던 완화정책 대신에 적극적인 진압 정책을 펴게 되었다.[25] 이 과정에서 진압하는 군대가 군중들에게 총을 발사하여 20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터졌고 이는 후에 1911년 9월, 무장 폭동으로 번졌다. 쓰촨 성 총독 조이풍은 성도 전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쓰촨 성 전 지역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저지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때는 이미 ‘쓰촨 혁명당’이 조직한 ‘보로동지군’이 성도를 포위하는 상황이었고 또 10여 주와 현을 점령하고 있어서 그 기세가 강해 청나라는 진압할 형편이 못 되었다.[25] 청조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즉시 각 성(省)에 연락하여 쓰촨 성에 진압할 군대를 파병했다. 그런데 진압군대를 이끌던 단방(端方)이 쓰촨 성의 자주(資州)에 이르렀을때 그가 이끄는 호북 신군이 그를 살해하고 시위대에 가담했다. 여기에 전임총독 잠춘훤도 '쓰촨 성으로 가 조이풍(쓰촨성 총독)과 사태를 수습하라'는 중앙 정부의 명령을 받고 우한까지 왔으나 사태가 심각하다는것을 보고 쓰촨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결국 성도는 '보로 동지군'에게 점령당하고 청조가 진압하지 못한 채 우창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27] 혁명의 전개[편집] 우창 봉기[편집] 우창 봉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장이우(왼쪽)와 쑨우(오른쪽). 이들은 각각 문학사와 공진회를 이끌었던 동맹회 회원 혁명파로 우창봉기를 계획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우창봉기 당시 우창성 지도. 빨간색 화살표는 봉기를 일으킨 혁명군, 파란색 화살표는 청군이다. 봉기를 일으킨 신군(新軍) 포병들. 1911년 10월 11일 ‘호북 군정부’ 수립. 공화혁명으로 가장 먼저 수립된 호북 군정부는 청조의 고위장교였던 리위안훙을 군정부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쓰촨 성의 사태가 급해지자 청조에서는 호북의 신군(新軍)을 쓰촨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당시 우창에는 일부의 신군만 남아있게 되어 혁명파들에게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당시 우창에는 이미 혁명당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가 활동[주해 17] 하고 있어서 신군 안에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또한 1911년 7월에 쑹자오런을 중심으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가 성립되어 우창으로 사람을 보내 이들 단체들과 연합하고 있었다.[28] 1911년 가을 무렵에 이르면 우창의 신군 15,000명 가운데 1/3규모에 해당하는 5,000여 명의 신군이 혁명파에 가담한 상태가 된다. 그 해 9월 문학사와 공진회는 연석 회의를 개최하고 통합 지휘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문학사 지도자인 장이우(蔣翊武)가 총사령관으로, 공진회 회장 쑨우(孫武)가 참모장으로 추천되었다. 그들은 헌장을 제정하고 깃발을 만들고 폭탄을 제조하는 등 봉기에 필요한 준비 작업 및 계획에 들어갔다. 그리고 상하이에 사람을 보내 쑹자오런, 황싱을 우창으로 오도록 하여 봉기 후 각 성과의 연락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추석인 10월 16일에 봉기하기로 날짜를 정했다.[3] 그러나 10월 9일 한커우의 러시아 조계 안에서 봉기에 필요한 폭탄을 만들다 화약이 폭발하여 봉기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기치, 선언, 명단 등이 적발되었다.[주해 18] 따라서 이를 준비하던 사람이 체포되어 다음 날 처형되고 계엄령 아래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체포당하게 되었다.[3] 이에 혁명당인들이 연락하여 봉기를 앞당겨 일으켰다. 봉기는 우창의 신군부 공병 제8대대의 부사관과 병[29] 들이 가장 먼저 일으켰고, 이어서 보병ㆍ포병 부대와 군사학교 사관생도도 이에 가세했다.[3] 이 때 호광총독 서징은 봉기군에 진압할 형편이 되지못하고 위세에 밀려 창황히 도망해서 봉기한 혁명군은 당일 우창성을 점령하고 ‘호북 군정부’를 수립했다. 혁명군은 혁명파와는 관계가 없는 신군의 여단장 리위안훙을 군정부의 도독으로 선출했다.[주해 19] 그리고 그 날 밤에 한양(漢陽)을, 다음 날 아침에 한커우를 함락하여 이른바 ‘무한 3진’(武漢三鎭)을 확보하였다. 이처럼 혁명은 우창에서 처음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우창 봉기, 우창수의, 우창기의, 제1차 혁명이라고 부른다.[28] 간기로 신해년(辛亥年)이어서 ‘신해혁명’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이 날이 10월 10일이어서 오늘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쌍십절이라 불러 기념하고 있다.[3][28] 각 성의 호응과 독립[편집] 10월 22일 - 호남, 섬서에서 처음으로 우창 봉기에 호응해 봉기가 일어났다. 호남에서 혁명당의 초달봉(焦達峰)은 회당과 신군을 발동하여 장사(長沙)를 공격했다. 이에 순무 여성격(余誠格)은 숨어버리고, 초달봉은 ‘호남 군정부’를 수립하여 자신이 도독이 되었다. 같은 날 섬서에서도 동맹회원이 회당, 신군과 연합하여 봉기를 일으켜 ‘섬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원래 일지회(日知會) 회원이었던 신군의 장봉홰(張鳳翽)가 도독이 되었다. 10월 23일 - 강서에서는 구강(九江)에서, 31일에 남창(南昌)에서 봉기가 일어나 ‘강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동맹회 회원 이열군(李烈鈞)이 도독이 되었다. 10월 29일 - 산서의 신군 혁명당원이 봉기를 일으켜 ‘산서 군정부’를 조직하고 신군의 협통인 옌시산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0월 30일 - 운남의 동맹회 회원 이근원(李根源)은 신군의 협통 차이어(蔡鍔)와 연락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운남 군정부’를 조직, 차이어를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3일 - 상하이는 중국동맹회 중부총회가 봉기를 일으켜 동맹회 회원 천치메이가 ‘상하이 군정부’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11월 4일 - 절강은 상하이의 지원아래 혁명당원이 신군과 연락하여 항저우를 점령하고 입헌파의 탕수잠(湯壽潛)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같은 날 귀저우에서도 혁명당은 신군 및 육군학당의 학생들과 함께 봉기하여 귀양(貴陽)을 점령하고 신군의 장교 양진성(楊盡誠)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5일 - 강소에 입헌파들이 신상(紳商), 관료들과 함께 순무 정덕전(程德全)에게 독립을 선포하도록 요구하여 청조의 순무가 새로운 군정부의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날 안휘에서도 동맹회 회원과 회당(會黨)이 함께 일어나자 입헌파들은 순무에게 독립을 선포하도록 요구하여 순무인 주가보(朱家寶)가 독립을 선포하고 도독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주가보는 안휘 성을 떠나 손육군(孫毓筠), 백문울(柏文蔚)이 차례로 도독이 되었다. 11월 6일 - 광서는 광서 자의국에서 정정에서 벗어나자고 결의하여 다음날 독립을 선포하였는데, 육영정(陸榮廷)이 정변을 일으켜 도독에 올랐다. 11월 9일 - 광둥도 독립을 선포하고 호한민(胡漢民)이 도독이 되었다. 같은 날 복건에서도 복주의 동맹회 회원 허숭지(許崇智)가 봉기를 일으켜 제10진 통제(統制) 손도인(孫道仁)을 ‘복건 군정부’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11월 13일 - 산둥에서도 독립을 선포하고 순무인 손보기(孫寶琦)가 도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스스로 독립을 취소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혁명당원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11월 27일 - 쓰촨도 성도에서 독립을 선포하여 입헌파의 포전준(浦殿俊)을 도독으로 선출하였다. 혁명군에게 투항하는 청군 우창 봉기에 이어 호남, 섬서, 강서, 산서, 상하이, 절강, 광둥 등 여러 지역에서 동맹회 회원들이 우창 봉기에 자극받아 일제히 봉기하여 11월 하순에는 24성 가운데 14성이 청조의 지배로부터 이탈, 독립하게 된다.[3][30]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은 통일 혁명중앙정부의 수립을 위해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혁명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동맹회 등 통일된 혁명세력이 각 성의 무장봉기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일률적인 규율이나 지도체제가 없었다.[3] 일단 청조와 구체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입헌파든 공화파든 가리지 않고 무장봉기에 나섰기 때문에 봉기가 성공하여도 실제 지배권은 입헌파등 반동세력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3][31] 청조의 대응과 위안스카이의 등장[편집]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萨镇冰) 내각총리대신 시절의 위안스카이 한편, 베이징의 청조에선 '우창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10월 11일 오후에 알게되었다. 당황한 청조는 그 이튿날인 10월 12일 우창에서 도망쳐온 총독 서징을 파면하고 육군부 대신 음창과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萨镇冰)으로 하여금 혁명군을 제압하도록 하였다.[32]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서징에게 전가하고 철도국유화 정책을 추진하던 우전부 대신 성선회를 '민란의 책임자'로 몰아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청조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있던 고관들을 파직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혁명파를 진압하기 위해 2년 전에 축출한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청조가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려했던 이유는 혁명군 토벌을 명령받은 음창과 살진빙이 제대로 청군을 통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 정부로서는 봉기를 일으킨 혁명군을 진압할려면 최정예부대인 북양 신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돤치루이, 펑궈장 등 북양 신군의 고급 지휘관들이 위안스카이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 위안스카이는 ‘북양 신군’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자였다. 청조는 그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여 혁명군을 토벌토록 명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 자신은 청조에서 다시 부르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꾀병을 내어 움직이지 않았다. 청조 내각에서는 “위안스카이를 다시 불러 혁명군을 진압하자”는 논의를 가졌는데, 청의 황족 가운데 일부는 위안스카이를 “사마중달과 같은 자”라고 비난하면서 “범을 불러 집을 지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위안스카이를 부르는 것을 반대했으나 청 정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31] 10월 27일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하고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호북반란 진압군과 양자 강 해군을 총지휘하게 했다.[31] 11월 1일에는 내각총리인 경친왕 혁광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의 요구대로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이 됐다.[3] 순친왕은 위안스카이의 요구로 섭정에서 물러나야했다. 그리고 11월 3일에 청조는 《헌법신조 19조》를 발표하여 황제의 대권을 대폭 삭제하여 헌법에 규정된 권한만을 갖게 하고 황족은 내각총리대신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위안스카이는 내각총리로 청나라의 군정(軍政)대권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호북의 혁명군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31] 북양군의 혁명군 진압[편집] 위안스카이는 청조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북양군의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서 혁명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2일에 청군이 한커우로 진입해 들어와 대결하면서 혁명군과 청군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혁명군은 한양(漢陽)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3] 11월 17일 혁명군의 황싱은 한커우를 공격하고 한때 한커우를 수복하는 등 공세를 벌이기도 했었으나 재차 잃어버리고 나아가 11월 27일에 한양마저 돤치루이군에게 함락 당하여 황싱은 우창으로 갔다. 그런데 우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처럼 혁명군은 북양군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혁명군은 학생,농민,노동자,의용군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구성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훈련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직력면에서도 화력에서도 북양군과 비교될 수 없었다.[3][33] 남북의화[편집] 남북의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남북의화 교섭. 왼쪽이 탕사오이, 오른쪽이 오정방. 중앙은 중개역의 영국인 상인 리틀(Edward Selby Little). 위안스카이는 청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북양군의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동원하여 혁명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혁명군과 전투를 치룰 의사가 없었으므로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존 조던(Jordan, John)에게 부탁하여 혁명군과 화의를 모색했다.[3][31] 당시 혁명군의 활동 지역은 양자 강 중류 지역으로 영국의 세력 범위였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도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바라지 않아, 영국 영사관 조던은 상하이 주재 영국 영사에게 지시하여 쌍방의 화의를 주선하게 되었다. 한편, 이무렵 혁명군은 한양(漢陽)을 빼앗긴 직후로 수세에 몰렸던 상황이었다. 이에 한커우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 영사의 중재로 ‘남북의화’를 제안했고, ‘호북 군정부’ 도독인 리위안훙도 정전(停戰)을 요청하는 뜻을 전국에 알렸다. 12월 2일 한커우에 모인 각 성의 대표들은 위안스카이가 반정(反正)한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3][31] 영국 영사의 중재 주선하에 그 결과 위안스카이를 대표하여 탕사오이와 혁명군을 대표하여 오정방이 상하이 영국 영사관에서 만나, 우선 12월 3일에 남북 양측이 3일간 정전하기로 합의했다.[3][31] 이러한 협상은 남북의화(南北議和)라고 하는데 혁명세력이 강했던 남부지방과 위안스카이 등 청조세력의 북부지방의 협상을 의미한다. 혁명군은 이러한 정치적 타협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혁명군은 자체적인 통일성과, 단결성이 결여되었음 위안스카이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 및 서구 등 열강의 지지 군사적 열세로 일단 위안을 이용하여 청조를 타도하자는 전략 등. 이런 정전과 타협의 움직임은 중국 신해혁명의 전개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2월 3일부터 시작된 남북간의 정전이 지속됨에 따라 신해혁명은 무장투쟁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전환됐다. 12월 5일 각 성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청 왕조 타도와 공화정부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의화강요》(議和綱要)가 통과되고 청 왕조와의 협상이 결의되었다.[3][31] 정전 기간은 당초 12월 2일부터 3일간으로 되어 있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요청으로 2번이나 연장되어 정전기간은 무려 15일간에 이르렀다.[3] 남북의화는 상하이에서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양측 대표의 협상 중 12월 29일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세우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조건부로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한 후 협상이 지속되었다. 정전에 이어 강화교섭이 시작되어 혁명군측에서 오정방, 청조측에서 탕사오이가 각각 대표로 선출되어 12월 18일 1차 교섭에서 오정방은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만청 정부의 폐지 공화 정부의 수립 청국 황제의 우대 가난한 만주인 후대[3] 그러나 1차 교섭에서 잠정적인 정전만 합의하고 12월 20일 다시 2차 교섭에 들어가 국체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오정방은 1차 교섭에서 주장한 대로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대하여 탕사오이는 '국민대회를 열어 정체 문제를 결정한다'는 선까지 양보했다. 이는 위안스카이가 모두 조종한 결과였다.[3]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의 자리를 꿈꾸고 있음이 분명하였고 우창회의에서 혁명파가 자기를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현실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입헌군주파를 설득, 무마하여 자기편으로 끌여들이고 혁명파와 강화교섭만 성공한다면 대총통 자리는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세계 열강은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는데, 위안스카이에 의해 남북 통일이 실현된다면 중화민국은 승인하지만 난징 임시정부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걸었고 경제적으로도 임시정부가 지배한 지역의 세관은 열강의 억제정책으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이 같은 모든 사태는 모두 위안스카이가 비밀리에 책동하였고 조종하고 있었다.[3] 중화민국의 수립[편집] 중화민국임시정부조직대강[편집] 혁명기간 동안 사용된 깃발들. 혁명 초기엔 3가지 깃발이 사용되었다. 남북화의가 진행되는 한편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함에 따라 정부 수립 문제가 논의되었다. 우선 상하이 지역의 혁명당인 각 성의 대표단을 상하이로 보내줄 것을 통전하여 각 성의 대표단이 상하이로 모였다. 하지만 우창에서도 이미 ‘호북 군정부’를 조직하였으므로, 이를 중앙 정부로 삼아 우창에서 정부수립을 위하여 각 성의 대표가 우창으로 올 것을 요구하였다.[34] 결국 상하이에 있던 대표들이 우창으로 가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 조직 대강》을 통과시켰다.[35] 이에 대하여 동맹회 중심의 상하이 대표들은 우창 회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혁명군이 12월 2일에 난징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이 날라왔다. 이 소식을 듣고 동맹회 중심의 상하이 대표들은 ‘난징에 중앙정부를 수립하자’고 하였다. 이에 우창의 대표가 불만을 표했었지만 결국 상하이, 우창의 대표가 난징으로 모이게 되고, 난징에서 총통 선거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했다.[35] 쑨원의 귀국과 초대 임시대총통 취임[편집]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건국 기념으로 출간된 달력. 1912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추대될 당시 쑨원 이러한 때에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에 있었다. 그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34] 쑨원은 “열강의 간섭이 없어야 혁명이 성공될 수 있다”고 보고, 먼저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청 정부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뒤 12월 21일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 정부 조직 문제를 협의하였다.[35] 남북화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난징에서 각 성 대표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12월 29일 17성 대표의 선거에 의해 쑨원은 ‘난징 임시정부’의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됐다.[31] 임시대총통에는 쑨원, 임시부총통에는 리위안훙으로 선출함으로써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은 난징으로 가 총통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선포, 1912년 1월 1일에는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34][35] 1월 3일, 쑨원은 대총통의 명의로 각성대표회에 국무원(國務院) 9부(部)의 총장 명단을 제출했는데, 그 명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군부 총장 - 황싱(黄興) 해군부 총장 - 황종영(黄鐘瑛) 외교부 총장 - 왕총혜(王寵恵) 사법부 총장 - 오정방(伍廷芳) 재정부 총장 - 진금도(陳錦濤) 교육부 총장 -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실업부 총장 - 장젠(張謇) 내무부 총장 - 정덕전(程徳全) 교통부 총장 - 탕수잠(湯壽潛)[34]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북쪽에는 아직 청나라 정부가 그대로 건재해있었고 내부에 입헌파와 구관료들은 위안스카이를 옹호하여 남북화의에서 동맹회가 약속한 대로 청 정부를 무너뜨린 사람이 대총통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은 수립되었어도 쑨원에게는 더 큰 과제가 가로막고 있었다.[34][35] 임시참의원과 임시약법[편집] 1912년 난징임시정부 내각회의 모습, 가운데가 쑨원. 1912년 1월 28일 난징임시정부 참의원들 쑨원은 난징임시정부(중화민국)를 조직한 다음에 즉시 임시참의원을 구성하였다.[34] 왜냐하면 각 성의 대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하였기 때문에 참의원을 조직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 1월 28일 임시정부조직대강의 규정에 의거 18성의 대표에 의해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각 성 대표회의는 해산했다. 참석자는 43명이었다. 이들의 구성은 동맹회 회원이 33명으로 전체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입헌파는 8명, 기타 2명으로 되어 1/4도 채 못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혁명파, 입헌파, 구관료의 연합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혁명파가 장악하였다.[34] 임시참의원이 성립한 후에 국회의 조직은 미국 의회제도를 따랐다.[34] 원로원과 대의원의 양원제를 채택하고 동시에 개회 및 폐회하기로 하였으며, 원로원은 2년마다 1/3을 다시 뽑고, 대의원의 의원은 임기가 4년이었다. 그리고 대의원의 수는 인구비례주의를 채택하였다. 임시참의원의 최대 임무는 ‘중화민국의 임시약법’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2월 7일에 기초위원회가 구성되고 1개월간의 토의 끝에 3월 11일에 마침내 임시약법을 공포하였다.[34] 제1조 - 중화민국은 중화인민이 이를 조직한다. 제2조 -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임시약법은 주권재민, 내각제도, 국민의 기본권을 정한 것으로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에 입각해 중화민국의 골격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탄생과 동시에 세계열강에 대한 대책에 부심해야 했고 위안스카이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34] 쑨원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기 전에 대총통의 자리를 둘러싸고 ‘중국이 분열되기 시작하면 안 된다’고 간주했으므로 대총통 지위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도할 의사를 밝혔다.[34] 청 멸망과 중화민국 초기[편집] 선통제 퇴위·청조 멸망[편집] 쑨원이 난징임시정부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어 한 취임을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청 왕조 타도에 적극 나섰다.[주해 20]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황태후에게 “황실 우대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면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처럼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17일에 열린 황족회의에서 공화정을 수용하라는 요구를 놓고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여 결론이 내려지지 못했다.[36] 1월 19일에 열린 황족회의에서 청 황실의 지도력 부재와 무능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위안스카이를 물리치고 혁명군에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입장이었던 공친왕이 반대파인 선통제의 숙부에게 “그대는 육군을 맡았으니 우리의 병력 상황이 어떠한 지 알겠지?”라고 질문했다. 얼마 전까지 육군을 관리했던 25세의 황숙(皇叔, 황제의 숙부)은 “나는 전쟁을 해보지 않아 알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36] 어전회의에서 결정이 나지 않자 위안스카이의 사주로 1월 26일 진압군 총사령관인 돤치루이 등 47인의 고위 지휘관들이 연명으로 공화정을 요구했다. 또한 이날 군주입헌유지회를 만들어 활발히 공화정 반대 운동을 벌이던 만주족 청년장교 양필(良弼)이 피격됐다(1월 28일 사망). 양필이 암살된 것은 청조에게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36] 1월 30일 어전회의에서 결론이 났고, 이에 따라 내각에 공화정 선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월 3일 청나라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그로 하여금 난징 임시정부(중화민국) 측과 퇴위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게 했다.[36] 일본은 처음에는 중국의 혁명에 대응해 입헌군주제로 내란을 수습하고, 요동반도의 조차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포함한 ‘만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자국에 유리하게 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영국과 협력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화중과 화남지역에 큰 권익을 갖고 있는 영국이 청조를 포기하고 위안스카이의 집권을 통해 내란을 조기에 수습하려고 했다. 미국도 영국에 동조하자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통해 청조를 존속시키려는 의도를 버렸다.[36][37] 2월 9일 대청황제에 대한 퇴위 후 우대조건 8개항이 확정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통제의 퇴위칙서 대청황제가 사위(辭位)한 뒤에도 그 존칭은 그대로 보존하며, 민국정부는 그를 외국 군주의 예로 대우한다. 대청황제가 사위한 뒤에 황실 세비는 400만 량으로 하고 민국이 지급한다. 대청황제는 사위한 뒤에 잠시 궁성(宮城)에 거처하다가 훗날 이화원으로 옮겨간다. 시위인(侍衛人)들은 이전대로 부릴 수 있다. 대청황제가 사위한 뒤에 그 종묘와 능묘는 영원히 봉사(奉祀)될 것이며, 민국이 위병(衛兵)을 배치해 적절히 보호한다. 덕종(德宗)의 숭릉(崇陵)의 아직 완성되지 못한 공정은 규정에 맞게 마무리할 것이며, 봉안예식은 옛 법도대로 한다. 그에 드는 실제 비용은 민국에서 지출한다. 이전에 궁전 안에서 부리던 여러 집사들은 이전대로 부릴 수 있다. 다만 앞으로 환관은 쓸 수 없다. 대청황제가 원래 갖고 있던 사유재산은 사위한 뒤에 민국이 특별히 보호한다. 원래 있던 궁중경비군은 민국 육군부(陸軍部)의 편제에 편입되며, 그 정원과 보수는 이전대로 한다.[36][37] 그 밖에 청나라 황족에 대한 대우규정 4개조와 만주족, 몽고족, 회족에 대한 대우규정 7개조도 아울러 확정됐다.[37] 2월 11일 황태후가 위와 같은 황실우대 조건을 받아들였고, 12일에 궁전안에 있는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朝會)가 열렸다. 황태후는 공화국체를 도입을 위하여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며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 5족으로 중화민국을 구성한다는 뜻을 담은 사위조서(辭位調書)를 외무부대신 호유덕에게 건네주고 공표하게 했다. 이로써 진나라의 진시황 이래 2천년 넘게 지속돼온 중국의 황제체제가 종식되고 청나라는 멸망했다.[36][37]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과 독재정치[편집] 쑹자오런, 국민당 (쑹자오런), 제2차 혁명, 21개조 요구, 중화제국, 호국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화민국의 탄생을 알리는 포스터 1912년 2월 15일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가운데) 2월 13일 쑨원은 약속대로 난징 임시정부 임시대총통직을 사임했고 2월 15일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어 무력에 한계가 있었던 혁명군은 위안스카이의 내응(內應)을 얻어 가장 우려하던 열강 무력 간섭을 겪지 않고 공화정체 성립에 성공했다. 이때 쑨원은 자신이 임시대총통직을 사직하는 조건으로 난징을 임시정부 수도로 정하라고 위안스카이에 요구했으나 위안스카이는 2월 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을 구실로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36]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4월 5일 임시공화정부 의회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을 결의로써 혁명파가 위안스카이를 난징에서 견제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36]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혁명파를 무력화시켰다. 군사적 기반을 잃은 혁명파에게 남은 길은 국회와 정당을 통해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는 것 뿐이었다. 이에 따라 쑹자오런의 주도로 ‘중국혁명동맹회’가 개조되어 1912년 8월 25일 국민당이 창설됐다.[36] 국민당은 1913년 1월과 2월에 걸쳐 시행된 국회선거에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의 내각을 꺼린 위안스카이는 암살범을 보내 3월 20일 국무총리로 예정된 쑹자오런을 저격, 3월 22일 쑹자오런은 숨을 거두었다. 위안스카이는 이어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3년 4월 25일 5개국(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는 협정을 체결하여 독재를 위한 재정기반을 확보했다.[36][38] 6월에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계열의 도독 3인을 파면하자 쑨원, 천치메이등을 비롯한 국민당 세력이 봉기(제2차 혁명)를 호소했으며, 1913년 6월 9일 한 봉기는 6월 9일에서 7월 12일까지 양자 강 중류와 하류 지역 일대에서 전투가 일어났으나나 당시 전란 재발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크게 호응받지 못했고 1913년 9월 위안스카이의 압도적인 무력에 완벽히 결국 진압됐고, 쑨원은 7월 일본 도쿄로 망명했다. 거기서 쑨원은 1914년 7월에 ‘중화 혁명당’을 결성해 국외에서 위안스카이 군벌 정부에 저항했다.[39][주해 21] 10월에 국회는 ‘공민단’이라 자칭하는 폭도에게 협박받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를 정식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곧 이어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해산을 명하고 대총통 권한을 대폭 강화시킨 ‘신약법’을 제정했다. 결국 ‘위안스카이를 배려한 혁명’이 되어버렸다.[36] 이후 일본이 위안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21개조 요구’를 들어달라”고 요구하자 ‘황제 등극’을 원했던 위안스카이는 이를 수용[40] 하여 1915년 12월 ‘황제 제도’의 부활을 시도했다가 군중에게 지탄받아 실패하고(제3차 혁명), 1916년 6월 위안스카이는 사망했다.[41]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 정부에서는 패권을 차지하려는 군벌 세력들(직예파, 안휘파)간에 혼전이 시작되었고 남부 광둥 지역에서는 쑨원이 귀국해 1917년 광저우에서 서남군벌 세력들과 연합하여 ‘호법정부’(護法政府)를 조직해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분단과 혼란 시대에 돌입한 중국 정세를 뜻했고 공화제가 결국 명목상으로만 남게 되었다.[42] 영향[편집] 국외상 영향[편집]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1911년 12월 말에 그동안 청에 복속하던 외몽고와 티베트가 혁명에 영향받아 독립을 선언했다.[43] 외몽고가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와 일본은 외몽고를 제외한 북중국에서 양국 간 동서분계가 필요하여 1912년 7월 8일 일본과 러시아 간에 한 ‘제3차 러일협약’에서 양국은 베이징을 지나는 경도선을 경계로 동서를 각각 특수이익지역으로 규정했다.[43] 일변, 티베트는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티베트인들이 각지에 봉기해 중국군을 축출하고 13대 달라이라마인 아왕 로상 툽텐 갸초의 지도 아래 티베트인들은 1917년에 티베트 영토의 거의 전부를 수복했다.[44] 이어 달라이라마는 영국에 원조받아 국왕 겸 교주로서 정교일치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티베트에 겉으로는 회유책을 구사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분쟁을 일으켰다.[44] 청조 발상지였던 만주도 청조 몰락과 함께 열강이 쟁탈하는 대상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중앙정부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지방군벌이 만주를 차지하자 열강은 이 지역에 명목상으로는 중국 영토로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무주공산 일종이라고 인식했다. 일본은 만주에서 정치상ㆍ경제상 기반을 꾸준히 확충해 나아갔다.[43] 이 밖에 신강 지역에는 신해혁명 발발 당시 양증신이 도독이 되어 신강을 지배하여 독립을 선포했다.[44][주해 22] 국내상 영향[편집] 중화민국 성립으로 황제 체제가 무너지면서 혁명 영향은 민주주의와 자유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45] 집권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 통치와 복고 풍조와 ‘존공(尊孔) 운동’이 게시를 떨친 데다가 위안스카의 사후 베이징 군벌 행정부를 장악하려는 여러 군벌 세력 간 혼전이 만성화하였다. 중국 정치 중심지는 군벌 세력 간 혼전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하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국내 문제와 대외 문제는 모두 불안정한 상황이 끓어오르다가 넘쳐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시기가 이어졌다.[46] 그런데 신해혁명을 계기로 국내에서 사상과 문화는 대변한다.[45] 천두슈를 위시한 지식인들은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여 기존 유교 비판과 문화혁명, 서구 ‘과학과 민주주의’ 숭배를 주창해 특히 학생과 청년층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동향은 사상계와 문화계에서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45] 평가[편집] 우창에 있는 쑨원의 동상. 이 자리는 우창 봉기 당시 ‘호북 군정부’가 수립되었던 자리로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은 현재 신해혁명 기념박물관이다. 쑨원을 중심으로 한 중국동맹회가 주축이 되어 신해혁명을 일으켰으나 혁명 성공은 오직 혁명당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입헌파를 중심으로 신군, 화교, 회당을 비롯하여 구관료가 참여가 있어서 성공하였으므로 처음부터 철저한 혁명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47] 혁명당 목표였던 삼민주의 이념 중 민족주의를 보더라도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는데 혁명 후 만주족 청 조정을 타도하기는 하였으나 곧 5족(族) 평등을 내세워 그 뜻이 약화했고 제국주의의 반식민지 하에 있는 중국 위상을 바꾸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쑨원은 혁명 성공을 목적하여 제국주의와 손잡고 청조 당시에 한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인정하여야 했다.[47] 그리고 민권주의는 우선 중국사 이래 전제군주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간주할 수 있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첫 번째이면서 평화스럽게 황제를 물러나게 하였던 점은 큰 의의가 있으나 마지막 황제를 향한 예우를 비롯해 소위 ‘황실우대조건’은 혁명 의의를 반감시켰다.[47] 또한, 민생주의가 내세우는 자본의 절제와 지권의 평균 문제는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이를 강령으로 제정할 당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해서 혁명 후 삼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란 더욱 어려웠다.[47] 혁명 후 새로운 공화국의 임시대총통이었던 쑨원은 무엇보다도 평화스럽게 청 황제를 퇴위시키면서 중국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스스로 그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 결과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구 관료가 그대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주었고 혁명세력 약화를 초래해 ‘반쪽짜리 혁명’으로 전락해서 신해혁명이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도를 이룩하였다 하여도 중국 사회와 경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은 한계가 있다. 즉, 신해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 통치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어 아시아 각국 민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48], 실상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성을 근본으로 바꾸지 못했다.[47] 논쟁[편집] 오늘날 분단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와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중국 공산당의 견해는 '자산계급 부르주아에 의하여 이루어진 혁명'이라고 하여 이를 구(舊) 민주주의 혁명으로 성격을 규정짓고 있으며, 나아가 최근에는 '신해혁명은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에 불과하다'[49] 고 혁명의 의의를 낮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공산당, 즉 무산계급 주도아래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을 내세울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47] 반면, 중화민국 학계와 중국 국민당에서는 중공이 신해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폄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론을 내세우고 있다. 즉, 혁명의 중심이었던 쑨원만 하더라도 부르주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확실히 쑨원은 부르주아 출신이 아닌 농민 출신이며 그것도 중농이하의 가정 출신이었다. 그리고 혁명에 참여한 계층은 회당(會黨)을 비롯하여 신지식인, 화교, 신군(新軍) 등 중국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기 때문에,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을 이른 바 '전민혁명'(全民革命)'으로 규정하였다. 이렇듯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중국 공산당에서 주장하는 '구민주주의, 자산계급 부르주아 혁명'이란 설에 대한 반론으로 '전민혁명'을 내세우고 있다.[47] 영화·문학속에서의 신해혁명[편집] 영화 작품 《마지막 황제》(1988년) 《8인 최후의 결사단》(2009년) 《신해혁명》(2011년)[50] 문학 작품 《아큐정전》 - 루쉰 저. 《광인일기》 - 루쉰 저. 《야초》 - 루쉰 저. 같이 보기[편집] 캉유웨이 국민당 광서 신정 남북의화 다이쇼 데모크라시 독일 혁명 러시아 혁명 리위안훙 미야자키 도텐 북양 정부 변법자강 운동 보로운동 순친왕 쑨원 쑹자오런 신건육군 신규식 신아동제사 양무 운동 우창 봉기 위안스카이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혁명 제3차 혁명 중국 동맹회 중국의 역사 중국 국민당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역사 천치메이 청나라 추근 폐지된 군주제 터키 혁명 황화강 사건 화흥회 황싱 흥중회 21개조 요구 5.4 운동 북벌 각주[편집] 내용주 ↑ 혁명 발발 당시, 쑨원이 정국을 주도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쑨원은 이름만 빌려줬을 뿐이고 몸은 미국에 가 있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p547 ↑ 영국,러시아,독일,미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벨기에,네덜란드,에스파냐 ↑ 동시에 ‘光緖新政’이라고도 한다. ↑ ‘新建陸軍’의 약칭. 청일전쟁 패배 후 톈진의 교외에서 독일 육군을 모방한 조직이다. ↑ 상공부를 지칭 ↑ 위안스카이는 변법자강운동 당시 초기에는 변법파에 있었으나 뒤에 배신하고 서태후를 위시한 수구파와 손잡아 ‘무술정변’을 일으켰고 의화단 운동 당시 의화단을 진압한 공로로 이후 청의 실권자로 급부상했었다. -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참조 ↑ 순친왕은 정계에 급부상한 위안스카이를 두려워해 그를 해임시키고 숙청하려고 했다. 위안스카이는 낙향해 칩거한다. -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참고. ↑ 1901년에 체결한 베이징 의정서에서 열강에 배상금을 1940년까지 지급해야 했다. - 《객관적 20세기 전반기史》,이윤섭 저. p26 참고 ↑ 영국 런던에서 쑨원은 청국 공사관에 강제로 잡혀갔는데 청으로 송환되기 직전 영국인 친구가 도와줘서 석방되었다. -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참고. ↑ 1903년 호남성 장사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 황싱, 쑹자오런 등이 설립한 혁명단체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부흥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비밀결사와 연락해 장사에서 봉기하려다 발각되어 중심인물 대부분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참고. ↑ 1904년 상해에서 차이위안페이,장병린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혁명단체로 ‘한족을 광복하고 우리 강산을 되돌려 받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강소ㆍ절강 지방에서 반청 혁명을 추진했고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p331 참고. ↑ 청조의 전제 지배를 벗어나 중국인이 천부의 자유평등권을 회복해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 진천화는 호남성 출신으로 화흥회를 거쳐 동맹회에 입회했다. 일본 유학중이던 1905년 12월 일본 문무성이 반포한 중국 유학생에 대한 단속규칙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에 대하여 아사히신문에서 방종하고 비열하다는 등의 비하 기사를 싣자 이에 분격하여 유서를 남기고 30세의 나이로 바다에 투신, 자살했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331 ↑ 《민립보》(民立報)는 1910년 10월에 동맹회원 우우임(于右任)과 쑹자오런이 발간한 신문이었다. - 《시대를 앞서간 민족 혁명의 선각자 신규식》, p68 ↑ 신민총보는 캉유웨이를 비롯한 변법자강파 개혁파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발간하는 기관지로 이들은 ‘황제를 옹립해 중국을 개혁하자’고 보황운동을 주장했었다. - 《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p95 ↑ 한편, 이 무렵 쑨원은 광저우 봉기가 실패한 후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하자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모금을 위하여 세계 순례의 길에 오르고 있었다. - 《이야기 중국사》,청아출판사. ↑ 우창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중국동맹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쑹자오런은 1911년 7월 상하이에 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했었고, 호북 지방의 혁명파 청년지식인들도 우창의 신군병사들에게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신군 내부에 공진회,문학사 등의 혁명단체를 설립해 비밀리에 활동했었다. - 《세계각국사 중국사 (하)》 참고 ↑ 10월 9일에 쑨우가 러시아 조계 안에 있는 공진회에서 폭탄을 만들다가 부주의로 화약이 폭발하여 얼굴에 화상을 입고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러시아 순찰이 이 폭음을 듣고 이곳을 수색하여 봉기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기치, 도장, 선언문, 명단을 찾아내 청조 당국에게 넘긴 이 사건으로 사전에 혁명을 준비하던 신군 장교 3명이 체포되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참고. ↑ 리위안훙은 평소 혁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냈었고 오히려 반(反)혁명적 인사였지만 신군 안에서 비교적 군사를 알고 사병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때문에 그가 나서면 각 성도 동조를 표시할 것이고 외국인들도 가볍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추대되었다. 당시 리위안훙은 우창 봉기 당시 친구 집에 숨어있다 혁명군에게 들켜 할 수 없이 지휘관이 되었다. -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참고. ↑ 위안스카이의 야심은 청조를 쓰러뜨리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서로 필요한 처지였고 일단 ‘청조를 무너뜨리는 것’에 이해관계가 부합했다. -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1914년에 결성된 중화 혁명당은 뒷날, 1919년 10월 10일에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해 개편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신강에는 만주족, 몽고족, 한족 등도 혼재해 있어 민족ㆍ종교 관계로 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지역으로 특히 투르크 계통 종족(위구르)과 한족 간 대립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왔었다. 신강 지역 도독이 되어 독립을 선포한 양증신은 이런 대립 속에 뒷날 1928년에 암살당하고 그 후임으로 김수인(金樹仁)이 부임했다. 그 후 신강에는 소련의 입김과 영향에 강하게 미치게 된다(김수인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의존했는데 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원조를 요청하거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광범위한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史》,이윤섭 저. p109 참조주 ↑ 가 나 다 라 마 《한국근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년, p142 ↑ 《세계사 100장면》,실천문학사,박은봉 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신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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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423-2033-2.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해혁명 신해혁명 100년 …‘뿌’라고 외치는 중국[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신해혁명 - 중국은 왜 NO라고 말하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 쑨원에게 길을 다시 묻는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BS 세계사 - 신해혁명 辛亥革命(중국어)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 활동 정부당국 홈페이지(중국어) vdeh청나라역사 칠대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명청 전쟁 사르후 전투 영원성 전투 산해관 전투 천계령 삼번의 난 청-러시아 국경 분쟁 청-중가르 전쟁 청의 티베트 정복 전례 문제 제1차 묘족 반란 1750년 라사 폭동 십전무공 청-버마 전쟁 청-베트남 전쟁 청-네팔 전쟁 제2차 묘족 반란 백련교도의 난 제1차 아편 전쟁 청-시크 전쟁 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 천지회의 난 제3차 묘족 반란 네팔-티베트 전쟁 두문수의 난 제2차 아편 전쟁 신유정변 아무르 겸병 양무운동 둥간 혁명 미야코섬 조난 사건 톈진 교안 마거리 사건 정무기황 야쿱 벡의 난 청불 전쟁 시킴 원정 금단도 사건 청일 전쟁 공차상서 제2차 둥간 반란 무술변법 의화단 운동 홍정조 열강 8국 청말신정 영국의 티베트 원정 1905년 티베트 반란 청의 티베트 원정 (1910년) 보로 운동 신해혁명 우창 봉기 신해 라사 동란 몽골 국민혁명 신강의 신해혁명 장훈복벽 행정 황제 목록 가계도 국기 공금구 청나라의 귀족 작위 의정처 군기처 대청률례 종인부 주찰대신 흠차대신 내무부총관 이번원 우전부 보군통령 순무 제독 총독 직예 합감 양강 호광 사천 민절 양광 운귀 동삼성 총리아문 흠정헌법대강 군사 청나라의 군사 북양군벌 초군 팔기군 상승군 녹영군 회군 호신영 영시위 신건육군 신기영 수사영 무위군 상군 청 치하 만주 청 치하 몽골 행정 구역 청 치하 내륙아시아 청 치하 대만 대만포정사사아문 청 치하 티베트 금병체첨 흠차주장판사대신 청 치하 신강 총통이리등처장군 궁성과 능묘 자금성 심양궁 피서산장 원명원 이화원 청동릉 청서릉 복릉 명·청의 황릉 사회문화사 보이 아하 상주학파 지보 사왕 고금도서집성 명사 청나라와 이슬람교 강희자전 고증학 문자의 옥 만한전석 패문운부 어제오체청문감 청대관모 청나라의 시문학 전당시 변발 만주원류고 성유광훈 청나라의 샤머니즘 사고전서 사고전서총목제요 조약 캬흐타 네르친스크 불평등 조약 신축 벌링게임 지부 티베트 홍콩 베이징 톈진 러청 포르투갈 아이훈 후먼 광동 쿨자 난징 일리 시모노세키 타르바가타이 톈진 왕샤 황푸 기타 아이신기오로 할라 반청복명 광동 체제 틈관동 청사고 추선 만주족 청나라의 국명 신청사 청 정복 이론 반청 반란 연표 조약항 유조변  « 명나라 청말민초 »  1616년–1924년 vdeh 중화민국의 역사와 군벌 시대 연대1912 ~ 1920 신해혁명 (1911~1912) 국민당 창당 (1912) 쑹자오런 암살 (1913. 3) 제2혁명 (1913. 6~9) 쑨원 망명 (1913. 7) 위안스카이, 국민당 해체 (1913. 10) 중화 혁명당 창당 (1914. 7) 일본의 21개조 요구(1915. 5) 중화 제국 (1915 ~ 1916) 호국 전쟁 (1915 ~ 1916) 위안 스카이 사망 (1916) 북양 정부 (1912 ~ 1928) 장쉰의 청왕조 복고 (1917) 헌법 보호 운동 (1917 ~ 1922) 호법 정부 (1917 ~ 1922)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1918 ~ 1920) 파리 강화 회의 (1919) 5.4 운동 (1919) 중국 국민당 재건 (1919. 10) 몽골 점유 (1919 ~ 1921) 1920 ~ 1930 직환 전쟁 (1920) 월계 전쟁 (1920 ~ 1921) 제1차 직봉 전쟁 (1922) 제2차 직봉 전쟁 (1924) 베이징 정변 (1924) 제1차 국공합작(1924) 운계 전쟁 (1925) 5·30 사건 (1925) 중산함 사건 (1926) 반봉 전쟁 (1925 ~ 1926) 국민당의 북벌 (1926 ~ 1928) 4·12 사건 (1927. 4) 장쭤린 암살 사건 (1928) 만주 통합 (1928) 국민 정부 (1928 ~ 1949) 중원 대전 (1930) 북부 군벌 북양 군벌: 위안 스카이 안휘 군벌 직예 군벌 봉천 군벌 지방 군벌: 산서 군벌 서북 군벌 신강 군벌 남부 군벌 운남 군벌 구 광서 군벌 신 광서 군벌 사천 군벌 광동 군벌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 전거 통제 LCCN: sh85024103 NDL: 0057101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해혁명&oldid=24446508" 분류: 1911년 분쟁1912년 분쟁1911년 중국1912년 중국중국의 역사중화민국의 역사신해혁명중국의 혁명봉기쑨원청나라중화민국20세기 아시아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알찬 글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CS1 관리 - 여러 이름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تۆرکجهБуряад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贛語עבריתहिन्दी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hqipSvenska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8일 (화) 21: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출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출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출혈 사람의 손가락으로부터 붉은 피가 흐르는 모습 ICD-10 R58 MeSH D006470 출혈(出血, 영어: bleeding, hemorrhaging, haemorrhaging)은 순환계로부터 피가 밖으로 빠져나오는 현상, 곧 피의 손실을 가리킨다.[1] 몸 안팎의 혈관으로부터 피가 새는 경우 몸 안에서 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이를테면 질, 입, 코, 항문과 같은 자연개구를 통해서나 피부 속이 갈라지는 현상 등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 피가 완전히 소실되는 현상을 사혈이라고 부른다.[2]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기 몸속 피의 10~15 퍼센트 정도의 손실을 후유증 없이 감당할 수 있으므로 헌혈을 통해 일반적으로 8~10%의 양을 채취한다. [3] 여자가 보통 사춘기부터 시작하는 월경도 출혈의 일종이다.[출처 필요] 목차 1 분류 1.1 출혈량에 따라 1.2 세계보건기구 2 같이 보기 3 각주 분류[편집] 결막하 출혈 위암으로 말미암은 출혈 증세. 출혈량에 따라[편집] ATLS(Advanced Trauma Life Support)가 분류한 출혈의 정도는 다음과 같다.[4] 클래스 I : 최대 15% 출혈 클래스 II : 15-30% 출혈 클래스 III : 30-40% 출혈 클래스 IV : 40% 이상 출혈 세계보건기구[편집] 세계보건기구는 출혈의 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표준 등급을 만들어놓았다.[5] 등급 0 출혈 없음 등급 1 점출혈 등급 2 중간 정도의 피 소실 등급 3 상당한 피 소실 (수혈 필요, 심각); 등급 4 쇠약할 정도의 상당한 피 소실 (레티놀 및 대뇌) 같이 보기[편집] 헌혈 수혈 각주[편집] ↑ “보관 된 사본”. 2011년 2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2월 13일에 확인함.  ↑ http://dictionary.reference.com/browse/exsanguination ↑ “보관 된 사본”. 2007년 9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9월 28일에 확인함.  ↑ Manning, JE "Fluid and Blood Resuscitation" in Emergency Medicine: A Comprehensive Study Guide. JE Tintinalli Ed. McGraw-Hill: New York 2004. p227 ↑ Webert KE, Cook RJ, Sigouin CS, et al. The risk of bleeding in thrombocytopenic patients with acute myeloid leukemia. haematologica 2006;91:1530-1537 전거 통제 LCCN: sh85060224 GND: 4139957-2 NDL: 0057238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출혈&oldid=22968096" 분류: 출혈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8월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ܐܪܡܝܐ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Patoisქართულიಕನ್ನಡLatina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తెలుగు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ייִדיש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0일 (토) 19: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조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조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에 대해서는 김조순 (양궁 선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조순金祖淳 조선국 영돈녕부사 임기 1800년 1월 31일 ~ 1811년 1월 9일 군주 정조 이산순조 이공 조선국 영돈녕부사 겸 섭정대신 임기 1803년 12월 ~ 1804년 3월 군주 순조 이공 조선국 금위대장 임기 1811년 1월 9일 ~ 1811년 2월 28일 군주 순조 이공 조선국 상급 국상 부원위 임기 1811년 1월 9일 ~ 1831년 1월 18일 군주 순조 이공 섭정 효명세자 이대(前) 신상정보 출생일 1765년 사망일 1832년 (68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본관 안동(安東) 학력 1785년 정시문과 병과 급제 정당 노론 세력 부모 김이중(부) 배우자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 자녀 김유근(장남) 김원근(차남) 순원왕후(딸) 김좌근(삼남) 친인척 김문근(조카) 김수근(조카) 김조근(조카) 별명 호(號)는 풍고(楓皐) 종교 유교(성리학) 김조순(金祖淳, 1765년 ~ 18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사원(士源), 호(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종묘의 정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목차 1 이력 2 생애 2.1 관료 생활 2.2 섭정이 되다 2.3 생애 후반 2.4 사후 3 인물평 4 저서 5 가계 6 같이 보기 7 각주 8 참고 문헌 이력[편집]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이며 서흥부사(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하였으며,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 순조 즉위 후 영돈녕부사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고 정순왕후 사후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풍고집이 있고 소설인 오대검협전을 쓰기도 했다. 생애[편집] 관료 생활[편집] 영조의 즉위를 추진하다가 사형당한 노론 4대신 김창집의 현손으로 태어났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과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다. 그는 노론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788년 규장각의 대교를 지낼 당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 1792년에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규장각 직각과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로부터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의 각신들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정조는 사망 직전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결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김조순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정조의 후계 작업이 미완성인 채 김조순의 지위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2] 대왕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새로 즉위한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정순왕후에 의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자,(1800년 음력 8월 2일)[3] 두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정순왕후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4][5]게다가, 정순왕후는 곧 그를 비변사 제조도 겸임하게 하였다(음력 8월 4일).[6] 정순왕후로서는 쉽사리 김조순을 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7]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관직 제수와 별개로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정권은 전방위적으로 김조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8] 즉, 노론 벽파의 사헌부 장령 이안묵(李安黙)이 시파의 서유린 형제를 탄핵했다.(1800년 12월 23일(음력 11월 8일))[9] 또한, 정순왕후가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림으로써(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10] 신유박해가 개시되었는데, 실제의 공격대상은 노론 시파, 소론, 남인에다 왕실인사까지 광범위했다.[11] 이때, 김조순의 친족인 천주교 신자 김건순[12]이 체포(4월 28일(음력 3월 16일) 및 처형( 6월 1일(음력 4월 20일))되었고, 김조순과 친분관계에 있던 김려(金鑢)도 이때 체포되었다.[13] 1801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딸(순원왕후)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자( 10월 2일 (음력 9월 6일))[14]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15] 정치인으로서 그는 결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16] 1802년에 다시금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에 제수되었으며 역시 같은 해인 1802년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도 제수되었으나 두 차례의 사직 상소를 올려 윤허(允許)되었고 같은 해에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섭정이 되다[편집] 마침내, 순조의 15세가 되는 시점을 앞두던 시절에 정순왕후가 갑작스레 수렴청정 체제를 거두고(1804년 2월 9일 (1803년 음력 12월 28일))[17]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그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에 오른 직후 노론 벽파의 지도자들을 대부분 정조 임금의 유지를 저버린 역적으로 단죄한 후 1804년 영의정이었던 이병모에게 1805년까지 1년간 섭정을 위임케 하고 이후 1805년에는 16세였던 사위 순조 임금에게 친정 체제를 부여케 하였다. 정순왕후가 승하(1805년 2월 11일 (음력 1월 12일))한 뒤, 정순왕후의 6촌으로서 함께 권력을 쥐고 있던 김관주가 귀양길에 병사(1806년)[18] 하는 등 정순왕후의 친정 가문 경주 김씨의 벽파가 대규모로 숙청되었다. 그리고, 김조순 자신과는 10촌 친척이지만, 벽파인 김달순도 사사되었다.(1806년)[19] 또한, 노론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 및 심환지(각각 이미 고인이었다)도 역시 선왕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들로 지목하여 추탈시켰다.[20] 여기에 남인 계열도 숙청되었다. 그러한 빈 자리에는 새로 과거로 뽑아들인 노론 청명당 및 노론 시파 계열 인사들과 일부 소론, 규장각에서 눈여겨봤던 각신들을 대거 발탁하여 조정의 요직에 배치했다.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등의 안동 김씨 시파도 등용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숙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1811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세 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윤허되었다. 1827년에는 관서 지방을 여행하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열악한 민간 실정을 순조에게 보고하여 경외(京外)에 위치한 각 아문(衙門)들의 절미(折米)와 형정(刑政), 인사, 대동미 등의 폐단을 정리하게 하였다. 아래는 김조순이 환곡과 대동미의 폐단을 순조에게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이다. 신이 이번 관서에 내려가 이미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의 구환(舊還)이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를 아울러 계산하면 6만 9천 3백여 석이 되는데, 그중 3만 9천여 석은 유망(流亡)한 호구에서 받아야 할 것이어서 지적해 받을 곳이 없으며, 2만 9천여 석은 현재 있는 호구에서 받을 것인데, 이른바 현재 남아 있는 호구라는 것은 바로 신미년(辛未年)과 임신년(壬申年)의 난리 후에 미처 도망하지 못한 고아와 과부를 억지로 현재 있는 호구로 기록한 자들이니, 원호(元戶)와 비교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법대로 징수해 받아들인다면 인족(隣族) 역시 조만간 화가 옮겨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의구(疑懼)하여 흩어질 마음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풍년이라는 말을 원하지 않기까지 합니다. 이제 아무 이로움이 없는 빈 장부(帳簿)를 가지고서 포흠낸 환곡을 징수할 것으로 여겨 고할 곳 없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독촉을 받게 하여 안도(安堵)했던 자들이 도리어 도망해 흩어지게 된다면 이미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가 아니며, 또 안정시키는 방도에 어긋납니다. 이는 묘당이나 방백이 경솔하게 거론할 것이 아니니, 신의 뜻으로는 주상께서 탕감하라고 특명하시어 한 도(道)의 잔민(殘民)과 실호(實戶)가 모두 조가(朝家)에서 다친 사람을 돌보아 주듯이 하는 덕을 입을 수 있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21] 생애 후반[편집] 1828년, 김조순의 아내인 청양부부인 심씨(靑陽府夫人 沈氏)가 사망하자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를 보내 직접 조문하게 하였으나 김조순이 “처음에는 놀라고 송구스러워하다가 이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나 이는 국조(國朝) 수백 년 내에는 아직까지 듣고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라며 사양하여 조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32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인 1832년 음력 4월 3일에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1년 뒤인 1833년 음력 4월에는 예조판서인 조만영(趙萬永)의 건의로 종묘(宗廟)의 정조대왕(正祖大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22] 사후[편집] 사후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에 증직되었다. 그 뒤에도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과 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생전에는 문장력이 뛰어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역임하였다. 그외에도 죽화(竹畵)를 잘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16권 8책으로 구성된 《풍고집》이 있다. 묘소 《풍고 김조순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207호)은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다. 인물평[편집]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조(正祖)의 깊이 알아줌을 받았다.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23] 저서[편집] 《풍고문집》 오대검협전 가계[편집] 증조부 : 김제겸(金濟謙), 김창집(金昌集)의 아들 조부 : 증 의정부좌찬성 김달행(金達行) 아버지 : 서흥부사(瑞興府使) 증 영의정 김이중(金履中) 어머니 : 부사 신사적(牧使 申思迪)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 아내 :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청송 심씨(靑松沈氏) - 호조정랑 심건지(沈健之)의 딸, 예조판서 심풍지(沈豊之)의 조카 장남 :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김유근(金逌根) 차남 :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김원근(金元根) 장녀 :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 사위 : 순조(純祖) 삼남 :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김좌근(金左根) 차녀 : 판관 남구순(南久淳)에게 출가 사위 : 이조판서 문정공(文貞公) 남병철(南秉哲) 삼녀 : 김씨 - 한성부윤 이겸재(李謙在)에게 출가 사녀 : 김씨 -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 같이 보기[편집] 세도 정치 홍국영 심환지 심상규 남공철 이만수 서영보 이병모 이상황 조만영 조인영 조엄 김조근 김문근 김좌근 김홍근 순원왕후 각주[편집] ↑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정치의 파탄〉, 김조순. ↑ 김태희 (2015) 19쪽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단 김조순에게 위기였다. 정조의 후계 작업이 미완성인 채 김조순의 지위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8월 2일 임자 1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8월 2일 임자 5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8월 3일 계축 2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8월 4일 갑인 11번째기사 ↑ 김태희 (2015) 19~20쪽 "정순왕후가 쉽사리 김조순을 내칠 수가 없었다. " ↑ 김태희 (2015) 19~20쪽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정권은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11월 8일 병술 2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2권, 순조 1년 1월 10일 정해 1번째기사 ↑ 김태희 (2015) 19~20쪽 "공격대상은 노론 시파, 소론, 남인에다 왕실인사까지 광범위했다." ↑ 둘은 모두 김상헌의 7대손이다. ↑ 김태희 (2015) 20쪽 "주문모의 체포로 金建淳 ・金鑢등이 체포되었는데, 각각 김조순과 가문관계와 친분관계가 있었다." ↑ 순조실록 (1838) 4권, 순조 2년 9월 6일 갑술 1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4권, 순조 2년 9월 6일 갑술 5번째기사 ↑ 김태희 (2015) 21쪽 "결정적 지위를 확보했다." ↑ 순조실록 (1838) 5권, 순조 3년 12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9권, 순조 6년 5월 6일 계축 2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8권, 순조 6년 4월 20일 정유 5번째기사 ↑ 김종수는 말년에 정조의 뜻을 알고 강경론에서 한발 후퇴한 반면, 심환지는 끝까지 노론 벽파의 당론을 고수했다. ↑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27권, 24년(1824 갑신 / 청 도광(道光) 4년) 9월 7일(병신) 1번째 기사. ↑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33권, 33년(1833 계사 / 청 도광(道光) 13년) 4월 12일(임자) 2번째 기사. ↑ 순조실록 (1838) 32권, 순조 32년 4월 3일 기묘 1번째기사 참고 문헌[편집] 춘추관 관원들 (1838). 《순조실록》.  김태희 (2015).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大東漢文學》 (대동한문학회) 제43집.  전임심환지 조선의 섭정1803년 12월 ~ 1804년 3월 후임이병모 전임심환지 조선의 상급 국상1811년 1월 9일 ~ 1831년 1월 18일 후임조만영 vdeh종묘배향공신 94현문묘 동시 배향 6현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종묘배향 94현 태조실: 조준 의안대군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정종실: 익안대군 태종실: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실: 황희 허조 최윤덕 신개 양녕대군 효령대군 이수 문종실: 하연 세조실: 한확 권람 한명회 예종실: 박원형 성종실: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정광필 인종실: 홍언필 김안국 명종실: 심연원 이언적 선조실: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실: 이원익 신흠 신경진 이귀 능원대군 이서 김류 효종실: 김상헌 김집 송시열 민정중 민유중 인평대군 현종실: 김좌명 정태화 김수항 김만기 숙종실: 남구만 윤지완 박세채 김만중 최석정 김석주 경종실: 이유 민진후 영조실: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실: 민백상 이종성 정조실: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실: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조만영 남연군 문조실: 남공철 김로 조병귀 헌종실: 이상황 조인영 철종실: 이헌구 김수근 익평군 고종실: 신응조 박규수 이돈우 민영환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조순&oldid=24469428" 분류: 1765년 태어남1832년 죽음종묘배향공신조선의 정치인한국의 섭정조선의 화가조선의 학자조선의 저술가조선의 작가안동 김씨 (신)조선 순조노론조선의 부원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3일 (일) 12: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조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조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에 대해서는 김조순 (양궁 선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조순金祖淳 조선국 영돈녕부사 임기 1800년 1월 31일 ~ 1811년 1월 9일 군주 정조 이산순조 이공 조선국 영돈녕부사 겸 섭정대신 임기 1803년 12월 ~ 1804년 3월 군주 순조 이공 조선국 금위대장 임기 1811년 1월 9일 ~ 1811년 2월 28일 군주 순조 이공 조선국 상급 국상 부원위 임기 1811년 1월 9일 ~ 1831년 1월 18일 군주 순조 이공 섭정 효명세자 이대(前) 신상정보 출생일 1765년 사망일 1832년 (68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본관 안동(安東) 학력 1785년 정시문과 병과 급제 정당 노론 세력 부모 김이중(부) 배우자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 자녀 김유근(장남) 김원근(차남) 순원왕후(딸) 김좌근(삼남) 친인척 김문근(조카) 김수근(조카) 김조근(조카) 별명 호(號)는 풍고(楓皐) 종교 유교(성리학) 김조순(金祖淳, 1765년 ~ 18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사원(士源), 호(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종묘의 정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목차 1 이력 2 생애 2.1 관료 생활 2.2 섭정이 되다 2.3 생애 후반 2.4 사후 3 인물평 4 저서 5 가계 6 같이 보기 7 각주 8 참고 문헌 이력[편집]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이며 서흥부사(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하였으며,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 순조 즉위 후 영돈녕부사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고 정순왕후 사후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풍고집이 있고 소설인 오대검협전을 쓰기도 했다. 생애[편집] 관료 생활[편집] 영조의 즉위를 추진하다가 사형당한 노론 4대신 김창집의 현손으로 태어났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과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다. 그는 노론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788년 규장각의 대교를 지낼 당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 1792년에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규장각 직각과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로부터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의 각신들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정조는 사망 직전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결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김조순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정조의 후계 작업이 미완성인 채 김조순의 지위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2] 대왕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새로 즉위한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정순왕후에 의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자,(1800년 음력 8월 2일)[3] 두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정순왕후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4][5]게다가, 정순왕후는 곧 그를 비변사 제조도 겸임하게 하였다(음력 8월 4일).[6] 정순왕후로서는 쉽사리 김조순을 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7]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관직 제수와 별개로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정권은 전방위적으로 김조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8] 즉, 노론 벽파의 사헌부 장령 이안묵(李安黙)이 시파의 서유린 형제를 탄핵했다.(1800년 12월 23일(음력 11월 8일))[9] 또한, 정순왕후가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림으로써(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10] 신유박해가 개시되었는데, 실제의 공격대상은 노론 시파, 소론, 남인에다 왕실인사까지 광범위했다.[11] 이때, 김조순의 친족인 천주교 신자 김건순[12]이 체포(4월 28일(음력 3월 16일) 및 처형( 6월 1일(음력 4월 20일))되었고, 김조순과 친분관계에 있던 김려(金鑢)도 이때 체포되었다.[13] 1801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딸(순원왕후)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자( 10월 2일 (음력 9월 6일))[14]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15] 정치인으로서 그는 결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16] 1802년에 다시금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에 제수되었으며 역시 같은 해인 1802년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도 제수되었으나 두 차례의 사직 상소를 올려 윤허(允許)되었고 같은 해에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섭정이 되다[편집] 마침내, 순조의 15세가 되는 시점을 앞두던 시절에 정순왕후가 갑작스레 수렴청정 체제를 거두고(1804년 2월 9일 (1803년 음력 12월 28일))[17]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그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에 오른 직후 노론 벽파의 지도자들을 대부분 정조 임금의 유지를 저버린 역적으로 단죄한 후 1804년 영의정이었던 이병모에게 1805년까지 1년간 섭정을 위임케 하고 이후 1805년에는 16세였던 사위 순조 임금에게 친정 체제를 부여케 하였다. 정순왕후가 승하(1805년 2월 11일 (음력 1월 12일))한 뒤, 정순왕후의 6촌으로서 함께 권력을 쥐고 있던 김관주가 귀양길에 병사(1806년)[18] 하는 등 정순왕후의 친정 가문 경주 김씨의 벽파가 대규모로 숙청되었다. 그리고, 김조순 자신과는 10촌 친척이지만, 벽파인 김달순도 사사되었다.(1806년)[19] 또한, 노론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 및 심환지(각각 이미 고인이었다)도 역시 선왕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들로 지목하여 추탈시켰다.[20] 여기에 남인 계열도 숙청되었다. 그러한 빈 자리에는 새로 과거로 뽑아들인 노론 청명당 및 노론 시파 계열 인사들과 일부 소론, 규장각에서 눈여겨봤던 각신들을 대거 발탁하여 조정의 요직에 배치했다.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등의 안동 김씨 시파도 등용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숙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1811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세 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윤허되었다. 1827년에는 관서 지방을 여행하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열악한 민간 실정을 순조에게 보고하여 경외(京外)에 위치한 각 아문(衙門)들의 절미(折米)와 형정(刑政), 인사, 대동미 등의 폐단을 정리하게 하였다. 아래는 김조순이 환곡과 대동미의 폐단을 순조에게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이다. 신이 이번 관서에 내려가 이미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의 구환(舊還)이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를 아울러 계산하면 6만 9천 3백여 석이 되는데, 그중 3만 9천여 석은 유망(流亡)한 호구에서 받아야 할 것이어서 지적해 받을 곳이 없으며, 2만 9천여 석은 현재 있는 호구에서 받을 것인데, 이른바 현재 남아 있는 호구라는 것은 바로 신미년(辛未年)과 임신년(壬申年)의 난리 후에 미처 도망하지 못한 고아와 과부를 억지로 현재 있는 호구로 기록한 자들이니, 원호(元戶)와 비교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법대로 징수해 받아들인다면 인족(隣族) 역시 조만간 화가 옮겨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의구(疑懼)하여 흩어질 마음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풍년이라는 말을 원하지 않기까지 합니다. 이제 아무 이로움이 없는 빈 장부(帳簿)를 가지고서 포흠낸 환곡을 징수할 것으로 여겨 고할 곳 없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독촉을 받게 하여 안도(安堵)했던 자들이 도리어 도망해 흩어지게 된다면 이미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가 아니며, 또 안정시키는 방도에 어긋납니다. 이는 묘당이나 방백이 경솔하게 거론할 것이 아니니, 신의 뜻으로는 주상께서 탕감하라고 특명하시어 한 도(道)의 잔민(殘民)과 실호(實戶)가 모두 조가(朝家)에서 다친 사람을 돌보아 주듯이 하는 덕을 입을 수 있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21] 생애 후반[편집] 1828년, 김조순의 아내인 청양부부인 심씨(靑陽府夫人 沈氏)가 사망하자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를 보내 직접 조문하게 하였으나 김조순이 “처음에는 놀라고 송구스러워하다가 이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나 이는 국조(國朝) 수백 년 내에는 아직까지 듣고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라며 사양하여 조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32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인 1832년 음력 4월 3일에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1년 뒤인 1833년 음력 4월에는 예조판서인 조만영(趙萬永)의 건의로 종묘(宗廟)의 정조대왕(正祖大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22] 사후[편집] 사후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에 증직되었다. 그 뒤에도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과 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생전에는 문장력이 뛰어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역임하였다. 그외에도 죽화(竹畵)를 잘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16권 8책으로 구성된 《풍고집》이 있다. 묘소 《풍고 김조순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207호)은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다. 인물평[편집]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조(正祖)의 깊이 알아줌을 받았다.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23] 저서[편집] 《풍고문집》 오대검협전 가계[편집] 증조부 : 김제겸(金濟謙), 김창집(金昌集)의 아들 조부 : 증 의정부좌찬성 김달행(金達行) 아버지 : 서흥부사(瑞興府使) 증 영의정 김이중(金履中) 어머니 : 부사 신사적(牧使 申思迪)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 아내 :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청송 심씨(靑松沈氏) - 호조정랑 심건지(沈健之)의 딸, 예조판서 심풍지(沈豊之)의 조카 장남 :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김유근(金逌根) 차남 :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김원근(金元根) 장녀 :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 사위 : 순조(純祖) 삼남 :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김좌근(金左根) 차녀 : 판관 남구순(南久淳)에게 출가 사위 : 이조판서 문정공(文貞公) 남병철(南秉哲) 삼녀 : 김씨 - 한성부윤 이겸재(李謙在)에게 출가 사녀 : 김씨 -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 같이 보기[편집] 세도 정치 홍국영 심환지 심상규 남공철 이만수 서영보 이병모 이상황 조만영 조인영 조엄 김조근 김문근 김좌근 김홍근 순원왕후 각주[편집] ↑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정치의 파탄〉, 김조순. ↑ 김태희 (2015) 19쪽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단 김조순에게 위기였다. 정조의 후계 작업이 미완성인 채 김조순의 지위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8월 2일 임자 1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8월 2일 임자 5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8월 3일 계축 2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8월 4일 갑인 11번째기사 ↑ 김태희 (2015) 19~20쪽 "정순왕후가 쉽사리 김조순을 내칠 수가 없었다. " ↑ 김태희 (2015) 19~20쪽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정권은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11월 8일 병술 2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2권, 순조 1년 1월 10일 정해 1번째기사 ↑ 김태희 (2015) 19~20쪽 "공격대상은 노론 시파, 소론, 남인에다 왕실인사까지 광범위했다." ↑ 둘은 모두 김상헌의 7대손이다. ↑ 김태희 (2015) 20쪽 "주문모의 체포로 金建淳 ・金鑢등이 체포되었는데, 각각 김조순과 가문관계와 친분관계가 있었다." ↑ 순조실록 (1838) 4권, 순조 2년 9월 6일 갑술 1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4권, 순조 2년 9월 6일 갑술 5번째기사 ↑ 김태희 (2015) 21쪽 "결정적 지위를 확보했다." ↑ 순조실록 (1838) 5권, 순조 3년 12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9권, 순조 6년 5월 6일 계축 2번째기사 ↑ 순조실록 (1838) 8권, 순조 6년 4월 20일 정유 5번째기사 ↑ 김종수는 말년에 정조의 뜻을 알고 강경론에서 한발 후퇴한 반면, 심환지는 끝까지 노론 벽파의 당론을 고수했다. ↑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27권, 24년(1824 갑신 / 청 도광(道光) 4년) 9월 7일(병신) 1번째 기사. ↑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33권, 33년(1833 계사 / 청 도광(道光) 13년) 4월 12일(임자) 2번째 기사. ↑ 순조실록 (1838) 32권, 순조 32년 4월 3일 기묘 1번째기사 참고 문헌[편집] 춘추관 관원들 (1838). 《순조실록》.  김태희 (2015).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大東漢文學》 (대동한문학회) 제43집.  전임심환지 조선의 섭정1803년 12월 ~ 1804년 3월 후임이병모 전임심환지 조선의 상급 국상1811년 1월 9일 ~ 1831년 1월 18일 후임조만영 vdeh종묘배향공신 94현문묘 동시 배향 6현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종묘배향 94현 태조실: 조준 의안대군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정종실: 익안대군 태종실: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실: 황희 허조 최윤덕 신개 양녕대군 효령대군 이수 문종실: 하연 세조실: 한확 권람 한명회 예종실: 박원형 성종실: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정광필 인종실: 홍언필 김안국 명종실: 심연원 이언적 선조실: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실: 이원익 신흠 신경진 이귀 능원대군 이서 김류 효종실: 김상헌 김집 송시열 민정중 민유중 인평대군 현종실: 김좌명 정태화 김수항 김만기 숙종실: 남구만 윤지완 박세채 김만중 최석정 김석주 경종실: 이유 민진후 영조실: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실: 민백상 이종성 정조실: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실: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조만영 남연군 문조실: 남공철 김로 조병귀 헌종실: 이상황 조인영 철종실: 이헌구 김수근 익평군 고종실: 신응조 박규수 이돈우 민영환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조순&oldid=24469428" 분류: 1765년 태어남1832년 죽음종묘배향공신조선의 정치인한국의 섭정조선의 화가조선의 학자조선의 저술가조선의 작가안동 김씨 (신)조선 순조노론조선의 부원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3일 (일) 12: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앨버트 푸홀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앨버트 푸홀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알버트 푸홀스 Alberto Pujols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No.5 기본 정보 국적 도미니카 공화국 생년월일 1980년 1월 16일(1980-01-16) (39세) 신장 191 cm 체중 104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1루수 프로 입단 연도 2001년 드래프트 순위 13라운드 402번픽(STL) 첫 출장 MLB / 2001년 4월 2일 쿠어스 필드 대 콜로라도전 연봉 1,600만 달러 경력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2001년 ~ 2011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2012년 ~ ) 도미니카 공화국 국가대표팀 WBC 2006년 호세 알베르토 푸홀스 알칸타라(José Alberto Pujols Alcántara, 1980년 1월 16일 ~ )는 알버트 푸홀스(Albert Pujols)란 이름으로 알려진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야구 선수이다. 원래는 3루수였고 좌익수를 거쳐 현재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의 1루수이다. 그는 마이너리거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1년 만에 마이너리그 과정을 전부 거치고 2001년 개막전부터 3루수로 선발출장한다. 2001년 데뷔하자마자 3루수로 주로 나와 161경기출장에 OPS 1.013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의 데뷔 시즌을 보낸다. 푸홀스는 내셔널리그 신인 최다 홈런, 최다 타점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만장일치로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획득하였다. 10년 남짓한 커리어에 이미 팬들에게 메이저 리그 역대 최고의 우타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지 기자들에게 역대 최고의 선수로 MLB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목차 1 현역 최고의 선수 2 MLB 공식기관으로부터의 주요수상 3 MLB 선수협회부터의 수상 4 MLB 공식기관으로부터의 기타수상 5 에피소드 6 결승홈런 7 연도별 타격 성적 8 미국 언론의 평가 9 한국 언론의 평가 10 MVP 역사 11 각주 12 외부 링크 현역 최고의 선수[편집] 알버트 푸홀스는 스포팅뉴스가 실시한 스탠 뮤지얼 등 명예의 전당에 이미 입성했거나 주요개인상을 다수 수상한 전설적인 선배선수 100명이 직접 뽑는 최고선수 투표에서 과반수인 55표를 싹쓸이 했다. '다저스의 심장' 토미 라소다로부터 그는 25세를 갓 넘긴 시점에서 클레멘스와 함께 현역 최고 선수로 평가받았으며 동료 메이저리거들로부터도 역시 과반수인 58%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투타를 통틀어 메이저 리그 최고의 선수 로 인정받았다. MLB 공식기관으로부터의 주요수상[편집] 2010 내셔널리그 실버슬러거 1루수부문 2010 내셔널리그 골드글러브 1루수부문 *2009 내셔널리그 MVP(만장일치) 2009 내셔널리그 행크아론상 2009 내셔널리그 실버슬러거 1루수부문 *2008 내셔널리그 MVP[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08 MLB.COM 올해의 타자상 2008 로베르토 클레멘테상 2008 내셔널리그 실버슬러거 1루수부문 2006 내셔널리그 골드글러브 1루수부문 *2005 내셔널리그 MVP *2004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NLCS) MVP 2004 내셔널리그 실버슬러거 1루수부문 2003 MLB.COM 올해의 타자상 2003 내셔널리그 실버슬러거 외야수부문 2003 내셔널리그 행크아론상 2001 내셔널리그 실버슬러거 3루수부문 *2001 내셔널리그 신인왕(만장일치) MLB 선수협회부터의 수상[편집] 2009 선수들의 선택상 올해의 선수상 2008 선수들의 선택상 올해의 선수상 2006 선수들의 선택상 마빈밀러상 2003 선수들의 선택상 올해의 선수상 2001 선수들의 선택상 내셔널리그 최우수신인상 MLB 공식기관으로부터의 기타수상[편집] 2009 하트 앤 허슬 상 2008 오스카 찰스턴상 에피소드[편집] 그는 2005년 NLCS 5차전에서 상대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마무리투수인 브래드 릿지를 상대로 9회초 2아웃에 역전 쓰리런 홈런을 쳐서 시리즈를 6차전까지 끌고 갔다. 당시 최고의 마무리투수 반열에 올랐던 릿지 는 이 홈런으로 인해 새가슴이라는 별명을 얻게 될 정도로 긴 슬럼프에 빠졌다. 이 홈런은 2000년대 포스트시즌 최고 플레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SIGNATURE PLAY 부분) 로 뽑혔다. 푸홀스의 이 홈런은 '역대 리그 챔피언십 사상 가장 극적이었던 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1] 결승홈런[편집] 2006년에 카디널스는 마무리 제이슨 이스링하우젠이 부진했고 시즌 말미에 애덤 웨인라이트를 마무리 투수로 임시 기용하는 등 불펜이 매우 불안했다. 결승홈런으로 기록되기 힘든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푸홀스의 49홈런 중 20홈런(약 41%)이 결승홈런으로 기록되었고 결국 푸홀스는 종전에 윌리 메이스가 갖고 있던 19개의 결승홈런을 넘어서는 메이저 리그 역대 단일시즌 최다 결승홈런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수많은 결승홈런 중 가장 중요한 홈런은 9월 28일 샌디에고와의 홈경기에서 우타킬러 불펜요원이던 클라 메레디쓰를 상대로 때린 대형 역전 쓰리런 홈런이었다. 팀의 7연패를 끊는 이 홈런으로 인해 맹추격하던 휴스턴을 제치고 카디널스는 NL 중부지구 우승을 굳혔고 결국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해 2006년 우승까지 거머쥘 수 있었다. 그리고 명대사를 남긴다."난 아직 배고프다. 치킨이 먹고싶다."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연도 소속 나이 출장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도루 도실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루타 병살타 몸맞 희타 희플 고4 2001 STL 21 161 676 590 112 194 47 4 37 130 1 3 69 93 .329 .403 .610 1.013 360 21 9 1 7 6 2002 22 157 675 590 118 185 40 2 34 127 2 4 72 69 .314 .394 .561 .955 331 20 9 0 4 13 2003 23 157 685 591 137 212 51 1 43 124 5 1 79 65 .359 .439 .667 1.106 394 13 10 0 5 12 2004 24 154 692 592 133 196 51 2 46 123 5 5 84 52 .331 .415 .657 1.072 389 21 7 0 9 12 2005 25 161 700 591 129 195 38 2 41 117 16 2 97 65 .330 .430 .609 1.039 360 19 9 0 3 27 2006 26 143 634 535 119 177 33 1 49 137 7 2 92 50 .331 .431 .671 1.102 359 20 4 0 3 28 2007 27 158 679 565 99 185 38 1 32 103 2 6 99 58 .327 .429 .568 .997 321 27 7 0 8 22 2008 28 148 641 524 100 187 44 0 37 116 7 3 104 54 .357 .462 .653 1.114 342 16 5 0 8 34 2009 29 160 700 568 124 186 45 1 47 135 16 4 115 64 .327 .443 .658 1.101 374 23 9 0 8 44 2010 30 159 700 587 115 183 39 1 42 118 14 4 103 76 .312 .414 .596 1.011 350 23 4 0 6 38 2011 31 147 651 579 105 173 29 0 37 99 9 1 61 58 .299 .366 .541 .906 313 29 4 0 7 15 2012 LAA 32 154 670 607 85 173 50 0 30 105 8 1 52 76 .285 .343 .516 .859 313 19 5 0 6 16 2013 33 99 443 391 49 101 19 0 17 64 1 1 40 55 .258 .330 .437 .767 171 18 5 0 7 8 2014 34 159 695 633 89 172 37 1 28 105 5 1 48 71 .272 .324 .466 .790 295 28 5 0 9 11 2015 35 157 661 602 85 147 22 0 40 95 5 3 50 72 .244 .307 .480 .787 289 15 6 0 3 10 2016 36 152 650 593 71 159 19 0 31 119 4 0 49 75 .268 .323 .457 .780 271 24 2 0 6 6 MLB 통산: 16년 2426 10552 9138 1670 2825 602 16 591 1817 107 41 1214 1053 .309 .392 .573 .965 5232 336 100 1 99 302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미국 언론의 평가[편집] 푸홀스, '전설의 홈런왕' 루스의 복사판 2006-08-23 푸홀스, 역대 6번째 '미스터 퍼펙트 2006-11-01 푸홀스, 감독들이 뽑은 가장 무서운 타자 2008-04-25 22:00 푸홀스가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ESPN.com 한글번역) 2009년 4월 25일 푸홀스는 역대 가장 완벽한 선수(CNN SI지) 2009-7-13 푸홀스는 완벽한 선수의 대명사(ESPN.com) July 13, 2009 ML 선수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타자는 푸홀스 2009-08-14 2000년대의 MVP는 앨버트 푸홀스(Sports illustrated) 2009.09.17 MLB 2000년대 최고선수는 푸홀스(Sporting News) Sep. 24, 2009 MLB 강타자 푸홀스, 2000년대 최고 선수(Sports illustrated) 2009-12-13 2000년대 최고선수는 푸홀스(ESPN.com) December 14, 2009 2000년대 최고 빅리거 설문...푸홀스 1위 2009-12-21 2000년대 최고의 야구황제는 푸홀스(로이터통신)[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09-12-21 2000년대 ML 최고의 1루 수비수는 푸홀스 2009-12-22 푸홀스는 00년대 압도적인 최우수선수(ESPN.com) December 23, 2009 2000년대 최고선수로 푸홀스를 선정 (MLB.COM 공식 홈페이지) 2009-12-30 앨버트 푸홀스의 가치는 연봉 5,000만달러(550억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0-04-28 한국 언론의 평가[편집] 세계 최고 선수 '푸홀스의 야구사' 2009-11-27 앨버트 푸홀스의 '위대한 10년' 2011-01-12 MVP 역사[편집] 푸홀스는 31세의 나이에 이미 MVP 3회 수상으로 역대 공동 2위이며 MVP 투표에서 2위에 오른 것도 4번으로 이 수치는 테드 윌리엄스 등과 함께 역대 공동 1위에 해당한다. 11시즌 중 7시즌동안 MVP 투표에서 1위 혹은 2위를 차지했으며 10시즌동안 MVP 투표 5위 내에 위치했다. 각주[편집] ↑ [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앨버트 푸홀스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영어) 경력 통계와 선수 정보 - MLB,  ESPN,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The Baseball Cube,  Baseball-Reference (Minors) vdeh루 게릭 메모리얼 어워드 1955: 다크 1956: 리즈 1957: 뮤지얼 1958: 맥도걸드 1959: 호지스 1960: 그로트 1961: 스판 1962: 로버츠 1963: 리처드슨 1964: 보이어 1965: 로 1966: 로빈슨 1967: 뱅크스 1968: 칼라인 1969: 로즈 1970: 에런 1971: 킬브루 1972: 파커 1973: 산토 1974: 스타젤 1975: 벤치 1976: 서턴 1977: 브록 1978: 케싱어 1979: 니크로 1980: 페레즈 1981: 존 1982: 세이 1983: 슈미트 1984: 가비 1985: 머피 1986: 브렛 1987: 섯클리프 1988: 벨 1989: 스미스 1990: 데이비스 1991: 허벡 1992: 립켄 주니어 1993: 매팅리 1994: 라킨 1995: 실링 1996: 버틀러 1997: 몰리터 1998: 그윈 1999: 맥과이어 2000: 스톨마이어 2001: 프랑코 2002: 그레이브스 2003: 모이어 2004: 토미 2005: 스몰츠 2006: 호프먼 2007: 팀린 2008: 빅토리노 2009: 푸홀스 2010: 지터 2011: 짐머맨 2012: 지토 2013: 해밀턴 2014: 벨트레 2015: 그랜더슨 2016: 알투베 2017: 보토 vdeh500 홈런 클럽 배리 본즈 행크 에런 베이브 루스 알렉스 로드리게스 윌리 메이스 앨버트 푸홀스1 켄 그리피 주니어 짐 토미 새미 소사 프랭크 로빈슨 마크 맥과이어 하먼 킬브루 라파엘 팔메이로 레지 잭슨 매니 라미레스 마이크 슈미트 데이비드 오르티스 미키 맨틀 지미 폭스 테드 윌리엄스 윌리 맥코비 프랭크 토마스 어니 뱅크스 에디 매슈스 멜 오트 게리 셰필드 에디 머레이 1 표시는 현역 선수들 전거 통제 WorldCat VIAF: 76048305 LCCN: no200504916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앨버트_푸홀스&oldid=24164297" 분류: 1980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선수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선수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해의 신인상 수상자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외야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3루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루수도미니카 공화국의 야구 선수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좌익수500 홈런 클럽골드글러브 수상자내셔널 리그 수위 타자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도미니카 공화국계 미국인아메리칸 리그 올스타내셔널 리그 올스타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최우수 선수산토도밍고 출신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HrvatskiItaliano日本語LatinaLatviešu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ščinaSvenska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7일 (화) 22: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소중화사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중화사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소중화사상의 화이질서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이다. 조선,일본,베트남과 중국을 정복한 정복왕조 등에서 발달하였다. 소중화 사상이란 중화사상이라는 사상을 외국 국가가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중화사상에서 중국 한족(漢族)들이 자신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주변국가들을 이민족으로 본 것처럼 자신들만이 문명국이며 주변의 이민족의 국가들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높다고 자부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한족의 중국 왕조를 이상화하기도 하였다. 중화사상이란 것은 일단 한족(漢族)이 먼저 시작했으나 소중화사상에 대해 얘기할 땐 소중화라는 것은 외국 국가들 (조선, 일본 등)이 자신들의 민족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외국 민족들은 외부 민족으로 보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중국 왕조의 경우에는 이민족들이 중국인(漢族)들을 정복하여 세운 정복왕조의 역사가 매우 길기 때문에 한족들의 경우 이민족에 복속된 백성들로서 이민족들의 지배를 흔쾌히 받아들여 받들며 지배자들인 이민족들에게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문화를 가진 한족 문화를 쓰기를 권장하였고 중국인들을 정복한 이민족들도 중국 한족(漢族)들이 사용한 문자 문화와 여러 문화들을 흡수하며 중화 사상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이민족이나 주변국가들이 소중화를 자처하는 일 그리고 중화라는 표현 자체가 민족을 지칭하는 것 보다는 자신들이 문명 국가라는 인식의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즉 이민족들이 중국인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면서 한족을 이상화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지배자들인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출신과 민족적인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자민족적 중심주의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잇다. 조선과 일본, 베트남과 같은 소중화사상을 가지던 나라에서도 이민족의 정복왕조들과 한족들의 중화사상을 비슷하게 따라하여 자국이 가장 문명화되어 있고 외국 민족들은 덜 문명화되어 있다고 여기게 된다. 중국인 한족 국가인 명나라가 여진족인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자 조선은 이전 소중화사상에서 자신들의 문명보다 낮았던 청나라의 여진족을 천시하고 자신들이 가장 문명국이라는 중화라는 생각을 계승한다. 이는 한국, 일본, 베트남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청나라와의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목차 1 나라별 소중화사상 1.1 한국 1.2 일본 1.2.1 고대 일본 1.3 베트남 2 참고 문헌 3 각주 나라별 소중화사상[편집] 한국[편집] 한국은 옛적부터 고조선 시절부터 흉노 국가와 한나라 등 외국들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조선 이후 성립된 삼국 시대의 각 국은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국 왕조들과 무역을 시도하였다. 특히 중국이 남북조 시대일 때는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북조와 교류하면서 후연, 북위 등과 전쟁을 하여 정복활동을 시작하였고 백제는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며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고 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왜국의 공격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고나서 부터 또한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나서부터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백제를 백잔(百殘) 신라를 신민(臣民), 동이(東夷)등으로 표현하는 등의 자국의 문명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볼 수 있다. 삼국이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과정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등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삼국 통일을 이룬 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나라를 물리쳤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 성립된 발해는 비교적 당나라에 대해 거리를 두고 독립 국가로서 이어져갔다. 이처럼 고대 국가들도 자신들의 문명이 가장 높고 이민족들은 문명이 낮은 것으로 보는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고려 역시 외왕내제의 체재를 썼다. 조선 때부터 조선의 신하로 있는 여진족의 문명은 낮게 보고 조선의 문명을 높이 평가하며 일본을 "동이"(東夷)라고 표현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인들을 유린하고 건국한 청나라는 예전부터 조선에 속하여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조선이야말로 중심이자 문명국가라는 사상의 계승자라고 생각하여 소중화를 자처하였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예전에 조선의 신하로 생각하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화사상을 내세울 때 이념적으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자신의 혈통을 관련없는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명나라의 인물들을 가져다가 소급하여 족보 제작도 조선 중기 이후 많아졌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외국과의 교류를 막기도 하였다. 소중화 사상이란 자신들만의 문화를 제일시 하며 다른 문화와 외국 민족은 천시하여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쇄국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편집] 일본 제국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대 일본[편집] 일본은 히미코 때 중국으로부터 왜왕의 지위를 하사받은 기록이 보이며, 중국 사서인 송서,남제서,남사서등에는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등 왜의 5왕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의 중화사상을 인정했다기 보다는 무역을 하면서 책봉을 받은 것이다. 쇼토쿠 태자 이전에는 한반도의 문화를 대대적으로 수용하였다. 쇼토쿠 태자가 제도를 고대 율령제국가으로 개혁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의 왕조들과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국문물의 도입과 함께 다이카 개신으로 소중화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쇼토쿠 태자는 수나라 양견에게 " 서쪽의 황제" "동쪽의 황제"라는 편지를 보냈었다. (천황 칭호의 사용 등) 이러한 소중화사상이 엿보이는 기록이 일본서기로 일본서기는 자국(야마토 조정)을 천하의 중심으로 서쪽의 신라에 대해서는 서번국(西蕃國;서쪽의 야만국), 야마토 조정에 복속하지 않은 당시 일본열도의 이족(異族)집단인 북쪽의 에미시에게는 蝦夷(털이 많은 오랑캐의 뜻)라는 표현을 썼고, 남 큐슈의 구마소(熊襲)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 蕃, 夷등은 중국왕조들이 주변국들에게 붙이던 멸칭들이다. 반면에, 일본서기에 따르면 중국 사신의 일본 파견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사신과 달리 객(客)이라 표현하고, 국호 역시 대당(大唐)으로 칭하고 있다.[1] 이는 수서에서 수나라가 왜나라를 만이(蠻夷)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후 중국 정권에서 일본 천황을 '왜국왕'으로 봉한 것과 비교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다이카 개신으로 인해 왕의 명칭이 "오오키미"에서부터 "덴노"(천황)으로 변한다. 정효운은 2006년 논문에서 일본서기가 편찬된 덴무 천황(天武天皇) 무렵부터 서서히 일본의 독자적인 세계관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일본은 왜나라라는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였으며(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따르면 670년, 구당서에 따르면 702년 이전),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격인 천황이라는 호칭도 이 무렵부터 사용되었다[2]. 정효운은 이어 일본서기 이후에 만들어진 속일본기가 일본식 소중화사상에도 계승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몬무 천황(文武天皇)과 쇼무 천황(聖武天皇) 대의 기사에는 야마토 정권에 편입되지 않은 일본 열도 내의 국가들이나, 신라와 발해를 자신들의 번국(蕃國)으로 인식하는 표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무역교류의 필요성에 의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1368~1394 재위)가 중국과 끊어진 공식적 교류를 회복하면서 명나라부터 일본국왕 원의만(日本国王源義滿)라는 칭호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 관계는 150년 가량 지속되었으나, 1547년 양국 관계는 단절됐다. 이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임진왜란)할 때 명나라 침략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입을 시도하는 한편, 대내적인 정권의 안정을 확보하려 했지만, 명나라의 거부로 이 시도는 좌절됐다.[3] 베트남[편집] 베트남 지역은 중국과 떨어져 있지만, 한나라 때에는 한나라에 속해 있었다. 베트남이라는 국명 역시 사마천의 사기 등에 나오는 월(越. 비엣)에서 비롯한 것이다. 중국의 중화사상이 베트남에 전파됨에 따라 베트남에서도 소중화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청나라가 중국인들을 지배한 이후 베트남의 여씨 왕조 역시 자신들이 중화 사상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소중화 사상을 보였다. 여씨 왕조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청나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자신의 "베트남 문명" 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베트남의 후기군주들은 대내적으로 황제의 호칭을 썼다. 참고 문헌[편집] 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사상의 기원 연구 각주[편집] ↑ 夏四月 小野臣妹子至自大唐 唐國號妹子臣曰蘇因高 卽大唐使人裴世淸.下客十 二人 從妹子臣至於筑紫 遣難波吉士雄成 召大唐客裴世淸等 爲唐客更造新?於難 波高麗?之上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16년조, 정효운, 2006에서 재인용. 참고로 당시 사신을 파견한 국가는 당나라가 아닌 수나라였으나, 일본서기에는 당나라로 표기되어 있다. ↑ 정효운, 2006에 따르면 천황이라는 호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682년이다. ↑ 박홍규, 17세기 도쿠가와 일본에 있어서 화이문제, 200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중화사상&oldid=24195570" 분류: 동아시아의 문화동아시아의 역사동아시아의 사상한국의 문화한국의 역사한국 철학조선의 문화조선의 사상일본의 문화일본의 역사일본의 사상베트남의 문화베트남의 역사베트남의 사상민족주의제국주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EnglishFrançais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1: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소중화사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중화사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소중화사상의 화이질서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이다. 조선,일본,베트남과 중국을 정복한 정복왕조 등에서 발달하였다. 소중화 사상이란 중화사상이라는 사상을 외국 국가가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중화사상에서 중국 한족(漢族)들이 자신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주변국가들을 이민족으로 본 것처럼 자신들만이 문명국이며 주변의 이민족의 국가들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높다고 자부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한족의 중국 왕조를 이상화하기도 하였다. 중화사상이란 것은 일단 한족(漢族)이 먼저 시작했으나 소중화사상에 대해 얘기할 땐 소중화라는 것은 외국 국가들 (조선, 일본 등)이 자신들의 민족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외국 민족들은 외부 민족으로 보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중국 왕조의 경우에는 이민족들이 중국인(漢族)들을 정복하여 세운 정복왕조의 역사가 매우 길기 때문에 한족들의 경우 이민족에 복속된 백성들로서 이민족들의 지배를 흔쾌히 받아들여 받들며 지배자들인 이민족들에게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문화를 가진 한족 문화를 쓰기를 권장하였고 중국인들을 정복한 이민족들도 중국 한족(漢族)들이 사용한 문자 문화와 여러 문화들을 흡수하며 중화 사상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이민족이나 주변국가들이 소중화를 자처하는 일 그리고 중화라는 표현 자체가 민족을 지칭하는 것 보다는 자신들이 문명 국가라는 인식의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즉 이민족들이 중국인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면서 한족을 이상화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지배자들인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출신과 민족적인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자민족적 중심주의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잇다. 조선과 일본, 베트남과 같은 소중화사상을 가지던 나라에서도 이민족의 정복왕조들과 한족들의 중화사상을 비슷하게 따라하여 자국이 가장 문명화되어 있고 외국 민족들은 덜 문명화되어 있다고 여기게 된다. 중국인 한족 국가인 명나라가 여진족인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자 조선은 이전 소중화사상에서 자신들의 문명보다 낮았던 청나라의 여진족을 천시하고 자신들이 가장 문명국이라는 중화라는 생각을 계승한다. 이는 한국, 일본, 베트남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청나라와의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목차 1 나라별 소중화사상 1.1 한국 1.2 일본 1.2.1 고대 일본 1.3 베트남 2 참고 문헌 3 각주 나라별 소중화사상[편집] 한국[편집] 한국은 옛적부터 고조선 시절부터 흉노 국가와 한나라 등 외국들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조선 이후 성립된 삼국 시대의 각 국은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국 왕조들과 무역을 시도하였다. 특히 중국이 남북조 시대일 때는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북조와 교류하면서 후연, 북위 등과 전쟁을 하여 정복활동을 시작하였고 백제는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며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고 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왜국의 공격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고나서 부터 또한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나서부터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백제를 백잔(百殘) 신라를 신민(臣民), 동이(東夷)등으로 표현하는 등의 자국의 문명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볼 수 있다. 삼국이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과정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등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삼국 통일을 이룬 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나라를 물리쳤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 성립된 발해는 비교적 당나라에 대해 거리를 두고 독립 국가로서 이어져갔다. 이처럼 고대 국가들도 자신들의 문명이 가장 높고 이민족들은 문명이 낮은 것으로 보는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고려 역시 외왕내제의 체재를 썼다. 조선 때부터 조선의 신하로 있는 여진족의 문명은 낮게 보고 조선의 문명을 높이 평가하며 일본을 "동이"(東夷)라고 표현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인들을 유린하고 건국한 청나라는 예전부터 조선에 속하여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조선이야말로 중심이자 문명국가라는 사상의 계승자라고 생각하여 소중화를 자처하였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예전에 조선의 신하로 생각하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화사상을 내세울 때 이념적으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자신의 혈통을 관련없는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명나라의 인물들을 가져다가 소급하여 족보 제작도 조선 중기 이후 많아졌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외국과의 교류를 막기도 하였다. 소중화 사상이란 자신들만의 문화를 제일시 하며 다른 문화와 외국 민족은 천시하여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쇄국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편집] 일본 제국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대 일본[편집] 일본은 히미코 때 중국으로부터 왜왕의 지위를 하사받은 기록이 보이며, 중국 사서인 송서,남제서,남사서등에는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등 왜의 5왕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의 중화사상을 인정했다기 보다는 무역을 하면서 책봉을 받은 것이다. 쇼토쿠 태자 이전에는 한반도의 문화를 대대적으로 수용하였다. 쇼토쿠 태자가 제도를 고대 율령제국가으로 개혁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의 왕조들과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국문물의 도입과 함께 다이카 개신으로 소중화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쇼토쿠 태자는 수나라 양견에게 " 서쪽의 황제" "동쪽의 황제"라는 편지를 보냈었다. (천황 칭호의 사용 등) 이러한 소중화사상이 엿보이는 기록이 일본서기로 일본서기는 자국(야마토 조정)을 천하의 중심으로 서쪽의 신라에 대해서는 서번국(西蕃國;서쪽의 야만국), 야마토 조정에 복속하지 않은 당시 일본열도의 이족(異族)집단인 북쪽의 에미시에게는 蝦夷(털이 많은 오랑캐의 뜻)라는 표현을 썼고, 남 큐슈의 구마소(熊襲)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 蕃, 夷등은 중국왕조들이 주변국들에게 붙이던 멸칭들이다. 반면에, 일본서기에 따르면 중국 사신의 일본 파견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사신과 달리 객(客)이라 표현하고, 국호 역시 대당(大唐)으로 칭하고 있다.[1] 이는 수서에서 수나라가 왜나라를 만이(蠻夷)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후 중국 정권에서 일본 천황을 '왜국왕'으로 봉한 것과 비교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다이카 개신으로 인해 왕의 명칭이 "오오키미"에서부터 "덴노"(천황)으로 변한다. 정효운은 2006년 논문에서 일본서기가 편찬된 덴무 천황(天武天皇) 무렵부터 서서히 일본의 독자적인 세계관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일본은 왜나라라는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였으며(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따르면 670년, 구당서에 따르면 702년 이전),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격인 천황이라는 호칭도 이 무렵부터 사용되었다[2]. 정효운은 이어 일본서기 이후에 만들어진 속일본기가 일본식 소중화사상에도 계승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몬무 천황(文武天皇)과 쇼무 천황(聖武天皇) 대의 기사에는 야마토 정권에 편입되지 않은 일본 열도 내의 국가들이나, 신라와 발해를 자신들의 번국(蕃國)으로 인식하는 표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무역교류의 필요성에 의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1368~1394 재위)가 중국과 끊어진 공식적 교류를 회복하면서 명나라부터 일본국왕 원의만(日本国王源義滿)라는 칭호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 관계는 150년 가량 지속되었으나, 1547년 양국 관계는 단절됐다. 이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임진왜란)할 때 명나라 침략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입을 시도하는 한편, 대내적인 정권의 안정을 확보하려 했지만, 명나라의 거부로 이 시도는 좌절됐다.[3] 베트남[편집] 베트남 지역은 중국과 떨어져 있지만, 한나라 때에는 한나라에 속해 있었다. 베트남이라는 국명 역시 사마천의 사기 등에 나오는 월(越. 비엣)에서 비롯한 것이다. 중국의 중화사상이 베트남에 전파됨에 따라 베트남에서도 소중화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청나라가 중국인들을 지배한 이후 베트남의 여씨 왕조 역시 자신들이 중화 사상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소중화 사상을 보였다. 여씨 왕조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청나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자신의 "베트남 문명" 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베트남의 후기군주들은 대내적으로 황제의 호칭을 썼다. 참고 문헌[편집] 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사상의 기원 연구 각주[편집] ↑ 夏四月 小野臣妹子至自大唐 唐國號妹子臣曰蘇因高 卽大唐使人裴世淸.下客十 二人 從妹子臣至於筑紫 遣難波吉士雄成 召大唐客裴世淸等 爲唐客更造新?於難 波高麗?之上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16년조, 정효운, 2006에서 재인용. 참고로 당시 사신을 파견한 국가는 당나라가 아닌 수나라였으나, 일본서기에는 당나라로 표기되어 있다. ↑ 정효운, 2006에 따르면 천황이라는 호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682년이다. ↑ 박홍규, 17세기 도쿠가와 일본에 있어서 화이문제, 200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중화사상&oldid=24195570" 분류: 동아시아의 문화동아시아의 역사동아시아의 사상한국의 문화한국의 역사한국 철학조선의 문화조선의 사상일본의 문화일본의 역사일본의 사상베트남의 문화베트남의 역사베트남의 사상민족주의제국주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EnglishFrançais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1: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현미 (정치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현미 (정치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현미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장관 임기 2017년 6월 21일 ~ 대통령 문재인 총리 이낙연 전임 강호인 신상정보 출생일 1962년 11월 29일(1962-11-29) (56세) 출생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읍 거주지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본관 김해 학력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경력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대통령비서실 국내언론 정무2비서관열린우리당 경기도당 위원장민주당 수석사무부총장더불어민주당 원내정책수석부대표제20대 국회 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제19대 국회의원(경기 고양시 일산서구)제20대 국회의원(경기 고양시 정)제4대 국토교통부 장관 정당 더불어민주당 소속기관 국토교통부 배우자 백정현 자녀 2남 종교 개신교(예장통합)[1] 웹사이트 김현미 홈페이지 김현미(金賢美, 1962년 11월 29일 전라북도 정읍시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17·19·20대 국회의원이자 제4대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목차 1 학력 2 경력 3 직무수행 3.1 부동산 관련 3.1.1 8·2 부동산 대책 : 다주택자 겨냥 3.1.2 취임 1년차 결과 : 부동산 양극화 3.1.3 9·13 부동산 대책 3.1.4 3기 신도시 및 수도권 광역교통망 대책 발표 3.1.5 2019년 국토교통부 공시지가 개입 논란 3.2 기타 4 논란 4.1 다주택자 겨냥 정책 내로남불 논란 5 전과 6 역대 선거 결과 7 각주 8 외부 링크 학력[편집] 신태인북초등학교 졸업 전주여자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경력[편집]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 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 2002 노무현 제16대 대통령 당선자 부대변인 2003.08 ~ 2003.12 대통령비서실 국내언론 정무2비서관 2004 열린우리당 공동대변인 2004.05 ~ 2008.05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 2005.04 ~ 2007.04 열린우리당 경기도당 위원장 2011.06 민주당 수석사무부총장 2012 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고양시 일산서구 지역위원회 위원장 2012.05 ~ 2016.05 제19대 국회의원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2012.07 ~ 2014.05 제19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간사 2014.06 ~ 2015.05 제19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14.06 ~ 2016.05 제19대 국회 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2014.05 ~ 2015.12 새정치민주연합 원내정책수석부대표 2014.08 ~ 2015.06 새정치민주연합 전략홍보본부장 2015.02 ~ 2015.06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비서실장 2015.12 더불어민주당 원내정책수석부대표 2016.04 ~ 2016.08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2016.05 ~ 제20대 국회의원 (경기 고양시 정, 더불어민주당) 2016.06 ~ 2017.05 제20대 국회 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2016.06 ~ 2017.07 제20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2017.07 ~ 2018.05 제20대 국회 전반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 2018.07 ~ 제20대 국회 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2017.06 ~ 제4대 국토교통부 장관[2][3] 2017년 6월 ~ :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당연직위원 2019년 5월 ~ :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정부) 직무수행[편집] 부동산 관련[편집]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문재인에 대한 비판#부동산 대책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7년에는 8·2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였고, 이후 2018년에는 9·13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였다. 2018년 말에는 3기 신도시를 발표하였다. 8·2 부동산 대책 : 다주택자 겨냥[편집] “ 이번 부동산 대책의 특징은 집 많이 가진 사람은 불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년 4월까지 시간을 드렸으니 자기가 사는 집이 아닌 집들은 좀 파셨으면 합니다. ”   — 2017년 8월 4일, 청와대 페이스북 인터뷰에서 다주택자를 집값 상승의 원인으로 보고, 집값 급등세를 잡기 위해 다주택자들을 규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8·2 부동산 대책에서 김현미 장관은 다주택자를 상대로 2018년 4월까지 집을 팔지 않으면 시세차익의 상당 부분을 양도세로 거둬들이겠다고 하였다. 동시에 은행 대출 규제 강화로 다주택자의 돈줄을 죄었다. 김현미 장관이 "앞으로는 대출 끼고 집 사는 게 제한돼 지금처럼 자유롭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4] 그러면서도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세제ㆍ금융 혜택을 준다"며 다주택자들을 향해 임대사업자 등록을 권유했다.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임대료 인상률은 연 5% 이내로 제한되며, 임대소득에 대한 세금도 내야 한다. 대신 장기보유특별공제 등 양도세 감면 혜택을 줬다. 세입자 주거안정과 공평 과세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 김 장관의 의도이다.[4] 취임 1년차 결과 : 부동산 양극화[편집] 김 장관이 국회에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집값 상승률(0.47%)은 지난 5년간 평균(0.61%)보다 낮아졌고, 전셋값 변동률(-0.99%)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4] 하지만 강남 집값은 올라가고 지방 집값은 내려가 부동산 양극화가 심화된 것으로 드러났다. 7월 29일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018년 6월 말 기준 서울 아파트값은 2017년 7월 말보다 평균 6.6% 상승했는데, 구별 결과를 보면 한강변에 있는 구들[5]의 아파트 값이 크게 상승한 반면 서울 외곽지역[6]은 최근 1년간 아파트값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 또한 지방 아파트값이 1년 전보다 평균 1.7% 하락했고, 지방의 빈집도 늘었다.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6월 지방 아파트 입주율은 76.1%로, 2017년 7월 입주율(81.4%)보다 5.3%포인트 하락했다. 지방의 새 아파트 4집 중 한 곳은 입주자가 없는 셈이다.[7] 김규정 NH투자증권 부동산연구위원은 "가뜩이나 지역경제 침체와 입주물량 부담 여파가 큰 지방에 정부 규제로 매수 심리가 더 위축됐다"며 "다주택자 규제가 서울 '수요 쏠림'을 강화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고준석 신한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장은 "서울 강남이나 도심권은 공급이 부족하고 '똘똘한 한 채' 선호 현상으로 수요가 꾸준하겠지만, 지방은 공급 과잉 등으로 집값 내림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7] 9·13 부동산 대책[편집] 2018년 9월 13일, 종합부동산세 대상을 확대하고, 임대사업의 세제 혜택을 없애는 등 다주택자들을 규제하는 대책을 내놓았다.[8] 이후 땅값 상승률이 둔화되고,[9]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최저를 기록하는[10] 등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3기 신도시 및 수도권 광역교통망 대책 발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3기 신도시입니다. 2018년 12월 남양주시 왕숙신도시, 하남시 교산신도시, 인천 계양구 계양신도시 3곳이 3기 신도시로 지정되었으며, 수도권 광역급행철도의 조속한 추진, 신안산선 착공, 신분당선 연장 등의 수도권 광역교통망 대책이 발표된 바 있다. 이어 2019년 5월 부천시 대장신도시, 고양시 창릉신도시 2곳이 추가로 3기 신도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2019년 5월 3기 신도시 추가 발표 이후, 자신의 지역구(고양시 정)인 일산신도시와 운정신도시, 검단신도시 주민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11] 2019년 국토교통부 공시지가 개입 논란[편집] 한국감정원이 2019년 1월 공개한 <2019년 표준지 공시지가>에 의하면, 2019년 공시지가는 2008년 이후 최대 폭인 6.02% 상승했다. 특히 명동, 강남, 홍대앞 등 서울시내 주요 상권의 2019년 공시지가는 올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급등했으며, 명동의 경우 1위인 네이처리퍼블릭 부지 · 2위인 우리은행 명동지점 · 3위인 유니클로 부지의 공시지가가 똑같이 전년 대비 100% 상승했다.[12][13] 이런 공시지가 상승을 두고, "정부가 평가 과정에 구두로 개입해 비싼 땅의 공시지가를 급등시키라는 지침을 내린 결과"라고 감정평가사들이 말했다. 국토부의 이런 개입에 대해 "행정권 남용"이라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법적으로 표준지 공시지가 산정은 감정평가사의 업무이며, 정부가 공시지가 산정에 사전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13] 공시지가 상승으로 인해 보유세 및 임대료 상승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되며,[12] 지역가입자 건강보험료의 상승 가능성 및 기초연급 수급 노인들의 수급권 박탈을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있다.[14] 기타[편집] 여의도 · 용산 개발, 그린벨트 해제 등과 관련하여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정책 엇박자 논란이 있었다. 2018년 7월 박원순 서울시장의 여의도 · 용산 통개발 발언으로 인해 서울 집값이 급상승하자 김 장관이 제동을 건 바 있으며, 이후 서울시 내 그린벨트 해제에 대해서 국토교통부(찬성)와 박원순 시장(반대)이 팽팽히 대립한 바 있다.[15] 임기 중 진에어 사태, BMW 화재 사건, KTX 강릉선 탈선사고 등이 발생했으며, 이와 관련해 국토교통부 책임론이 제기되었다.[15] 경의선 및 동해선 등 남북한의 도로 및 철도 연결을 추진하고 있다.[16] 2018년 9월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 김현미 장관과 유독 길게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으며,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 철도·도로 연결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17] 그러나 KTX 강릉선 탈선사고 이후 "북한 철도에만 신경쓰고 우리 철도에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김현미 장관, 오영식 철도공사 사장 등 고위 관계자가 북한에 철도를 놓는 것에만 관심을 가져 일어난 일"이라며 "국내 철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벌어진 사태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18] 논란[편집] 다주택자 겨냥 정책 내로남불 논란[편집] 정부는 2017년 다주택자에 대해 양도소득세 중과를 담은 8·2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고, 부동산 대책의 주무부처 수장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내년 4월까지 시간을 드렸으니 자기가 사는 집이 아닌 집은 좀 파시라"고 다주택자들을 겨냥하였다. 그러나 김 장관은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일산 아이파크(실거래가 5억~5억2000만원)와 배우자 명의로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단독주택(기준시가 9100만원)을 보유 중이다. 일산 아이파크는 여전히 김 장관 본인 명의로 돼 있고, 경기 연천군 단독주택도 주변 공인중개업소 여러 곳에 확인했지만 매물로 나온 사실이 없다고 한다.[19] 이후 연천군 단독주택을 처분하고 1주택자가 되었으나, 자신의 동생에게 주택을 처분한 것으로 드러났다.[20] 전과[편집] 공직선거법위반: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 - 2008년 12월 17일 선고, 2010년 8월 15일 특별복권[21]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총선 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열린우리당 8,145,824 표 38.26% 비례대표 11번 초선 총선 18대 국회의원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민주당 40,198 표 41.84% 2위 낙선 총선 19대 국회의원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민주통합당 63,432 표 50.64% 1위 재선 총선 20대 국회의원 경기 고양시 정 더불어민주당 66,959 표 49.15% 1위 3선 각주[편집] ↑ 기독인 당선자 18명 추가 확인… 20대 국회의원 모두 93명, 국민일보 ↑ 서미선 (2017년 6월 21일). “文대통령, 곧 김현미 장관 임명장 수여…첫 여성 국토장관”. 《뉴시스》 (서울). 2017년 7월 25일에 보존된 문서. 2017년 7월 26일에 확인함.  ↑ 전신 (2017년 6월 21일). “文대통령, 김현미 국토부 장관에 임명장 수여”. 《뉴시스》 (서울). 2017년 7월 25일에 보존된 문서. 2017년 7월 26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야전사령관' 김현미 ‘투기와 전면전’ 1년...절반의 성공”. 《중앙일보》. 2018년 7월 29일.  ↑ 송파구(13.56%), 강남구(10.52%), 강동구(9.7%), 광진구(9.33%), 용산구(8.44%), 마포구(8.25%) 등 ↑ 노원구(1.58%), 금천구(2.08%), 중랑구(2.46%), 도봉구(2.54%) 등 ↑ 가 나 “정부 "집값 잡겠다" 외친지 1년…강남 4억 뛰고 지방 불 꺼졌다”. 《중앙일보》. 2018년 7월 29일.  ↑ “[포스트]다시 뜯어보는 9.13 부동산대책”. 비즈니스워치. 2018년 9월 20일.  ↑ “9.13 영향 전국땅값 3분기 연속 상승폭 둔화…최고상승률 '용인 처인구'”. 뉴시스. 2019년 4월 25일.  ↑ “1분기 가계 빚 증가 속도 '15년만에 최저'…부동산 규제 약발 먹혔다”. 아시아경제. 2019년 5월 22일.  ↑ “3기 신도시 고양 ·부천 추가 발표-일산·파주·검단 주민 반발…교통대란 우려”. 매일경제. 2019년 5월 13일.  ↑ 가 나 “명동 공시지가 2배로… 토지도 '보유세 폭탄'”. 조선일보. 2018년 12월 28일.  ↑ 가 나 “"공시지가 2배 인상, 정부가 지침 내렸다"”. 조선일보. 2019년 1월 4일.  ↑ “공시지가 30% 오르면 지역가입자 건보료 4% 상승”. 뉴시스. 2019년 1월 8일.  ↑ 가 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북 김영철은 고속철 원해···양도세는 소득세인데 낮추자는 건 잘못””. 경향신문. 2019년 1월 5일.  ↑ “김현미 "경제이익 남북 공유" 北 "남 눈치 보면 안돼"”. 중앙일보. 2018년 12월 26일.  ↑ “‘철도장관’ 기억한 김정은…김현미와 길게 인사하며 나눈 말”. 서울신문. 2018년 9월 21일.  ↑ “김현미 장관 'KTX 사고' 사죄에도 "북한 철도만 생각하니 일어난 일" 비난 나와”. 에너지경제. 2018년 12월 9일.  ↑ ““김현미 장관도 집 안 내놔”…文정부 다주택 장관 10명, 안 팔고 버텨”. 2018년 7월 8일에 확인함.  ↑ 매경닷컴, 매일경제 부동산 센터 -. “[단독] `다주택자` 꼬리뗀 김현미 장관, 동생한테 팔았다 - 매일경제 부동산 뉴스”. 2018년 7월 8일에 확인함.  ↑ 이옥남·김도연 (2016년 4월). 4·13 총선국회의원 당선자 전과현황 (보고서). 바른사회시민회의.  외부 링크[편집] 김현미 - 대한민국헌정회 김현미 홈페이지 김현미 페이스북 김현미 트위터 전임강호인 제4대 국토교통부 장관2017년 6월 21일 ~ 후임(현직) 전 임 김영선 제19대 국회의원(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민주통합당 →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후 임 (고양시 갑)심상정(고양시 을)정재호(고양시 병)유은혜(고양시 정)김현미 전 임 (고양시 덕양구 갑)심상정(고양시 덕양구 을)김태원(고양시 일산동구)유은혜(고양시 일산서구)김현미 제20대 국회의원(경기 고양시 정) 2016년 5월 30일 ~ 더불어민주당 (고양시 갑)심상정(고양시 을)정재호(고양시 병)유은혜 후 임 (현직) vdeh통합민주당(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개칭 후 민주당과 흡수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으로 개편) 제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1번 장향숙 7번 홍미영 13번 김영주 19번 윤원호 25번 서혜석(승계) 2번 홍창선 8번 조성태 14번 조성래 20번 박홍수(사퇴) 26번 신명(승계) 3번 김명자 9번 박영선 15번 강혜숙 21번 유승희 27번 김영대(승계) 4번 김혁규(사퇴) 10번 정의용 16번 정덕구(사퇴) 22번 정동영(선거전 사퇴) 5번 이경숙 11번 김현미 17번 이은영 23번 장복심 6번 박찬석 12번 박명광 18번 민병두 24번 김재홍 vdeh 대한민국 중앙행정기관의 장원장 감사원장 최재형 국정원장 서훈 장관 기재부 장관 홍남기 교육부 장관 유은혜 과기정통부 장관 유영민 외교부 장관 강경화 통일부 장관 김연철 법무부 장관 박상기 국방부 장관 정경두 행안부 장관 진영 문체부 장관 박양우 농식품부 장관 이개호 산업부 장관 성윤모 복지부 장관 박능후 환경부 장관 조명래 고용부 장관 이재갑 여가부 장관 진선미 국토부 장관 김현미 해수부 장관 문성혁 중기부 장관 박영선 실장 대통령비서실장 노영민 국가안보실장 정의용 국무조정실장 노형욱 국무총리비서실장 정운현 위원장 방송통신위원장 이효성 공정거래위원장 김상조 금융위원장 최종구 국민권익위원장 박은정 원자력안전위원장 엄재식 처장 경호처장 주영훈 보훈처장 피우진 인사처장 황서종 법제처장 김형연 식약처장 이의경 외청장 국세청장 한승희 관세청장 김영문 조달청장 정무경 통계청장 강신욱 검찰총장 문무일 병무청장 기찬수 방사청장 왕정홍 경찰청장 민갑룡 소방청장 정문호 문화재청장 정재숙 농진청장 김경규 산림청장 김재현 특허청장 박원주 기상청장 김종석 행복청장 김진숙 새만금청장 김현숙 해경청장 조현배 감사원장, 기획재정부 장관 및 교육부 장관은 부총리급 대우를 받는다. 국무총리비서실장,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처장 및 외청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단, 국가보훈처장과 검찰총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그 외의 직책은 모두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현미_(정치인)&oldid=24440018" 분류: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7대 국회의원196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김해 김씨정읍시 출신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당원열린우리당 당원친노대통합민주신당 당원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친문더불어민주당 당원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장관문재인 정부의 국무위원대한민국의 장로교도전주여자고등학교 동문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7일 (월) 11: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세계인 장기 대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계인 장기 대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세계인 장기 대회는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909년 10월의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9년 10월에 열린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를 시작으로 열리는 국제 장기 기전이다. 세계의 한민족들이 살고 있는 주요 국가 및 지역에서 예선을 거쳐서 본선전에서 우승자를 가린다. 목차 1 대회 결과 2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 2.1 32강 진출국 및 진출 선수 2.2 입상자 3 제2회 세계인 장기 대회 3.1 32강 진출국 및 진출 선수 3.2 입상자 4 제3회 세계인 장기 대회 5 각주 대회 결과[편집]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입니다. 32강 진출국 및 진출 선수[편집] 대한민국 - 4명 김정수, 이창원, 김동학, 이남춘 중화인민공화국 - 25명 한성걸, 최영오, 방철학, 류상룡, 손철산, 도기룡, 한성필, 채광선, 허동렬, 김철호, 전승기, 리광룡, 김호, 손석찬, 안용일, 박광파, 정국봉, 리철남, 박석범, 윤희윤, 김길성, 김호철, 최승걸, 리세민, 조룡호 일본 - 2명 쇼시 가즈하루(所司和晴), 사카이 기요타카(酒井淸隆) 미국 - 1명 하여명 입상자[편집] 대회 순위 대회 입상자 1  조룡호 2  도기룡 3  정국봉 4 하여명 5 김동학 6 한성걸 7 허동렬 8 윤희윤 제2회 세계인 장기 대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2회 세계인 장기 대회입니다. 32강 진출국 및 진출 선수[편집] 1조 국가 이름 대한민국 최진호 대한민국 김동학 중화인민공화국 허강군 중화인민공화국 김창호 2조 국가 이름 대한민국 정원직 중화인민공화국 김 호 중화인민공화국 장춘호 중화인민공화국 허동렬 3조 국가 이름 중화인민공화국 정국봉 중화인민공화국 오정수 대한민국 이병현 중화인민공화국 렴광수 4조 국가 이름 대한민국 박영완 대한민국 성보경 중화인민공화국 방철학 중화인민공화국 김청송 5조 국가 이름 중화인민공화국 조룡호 중화인민공화국 김광엽 중화인민공화국 우남준 대한민국 김승래 6조 국가 이름 중화인민공화국 류상룡 중화인민공화국 김창남 중화인민공화국 최영호 대한민국 최완규 7조 국가 이름 미국 하여명 대한민국 강승희 중화인민공화국 리 근 중화인민공화국 한영찬 8조 국가 이름 중화인민공화국 박광파 중화인민공화국 위 화 대한민국 송은미 중화인민공화국 홍승일 입상자[편집] 대회 순위 대회 입상자 1  박영완 2  조룡호 3  하여명 4 위 화 5 김동학 6 정원직 7 최진호 8 우남준 제3회 세계인 장기 대회[편집] 제3회 세계인 장기 대회는 2017년 11월 25일 - 11월 26일에 열릴 예정이다.[1] 각주[편집] ↑ http://www.braintv.co.kr/community/notice/view.asp?menuSeq=1&seq=13708 vdeh장기 기전방송 기전 명인전 국수전 KBS 장기왕전 이체배 왕위전 장기 기성전 총재배 장기 최강자전 임금님매트배 장기 천하전 KBS 신춘 장기 최고수전 KBS 장기 고수전 햇터배 한국장기 프로리그 세계인 장기 대회 온라인 중계 기전 한게임 장기 챔피언스리그 한게임 장기 그랑프리 한게임 장기 프로리그 명인장기 전국 토너먼트 총재배 장기 최강자전 대한홍삼배 엠게임 프로리그 그외의 기전 천석배 프로 10걸전 전주시장배 진안홍삼배 제주도지사배 대한일보사배 주간경향배 경향신문사배 국수 수위전 기사회장배 진로배 이사장배 지부 대항전 한중 교류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세계인_장기_대회&oldid=24194325" 분류: 장기 기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9: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V-리그 포스트시즌 2008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V-리그 포스트시즌 2008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음은 NH농협 2007~2008 V-리그의 포스트시즌에 대한 내용이다. 목차 1 남자부 1.1 플레이오프 1.2 챔피언 결정전 2 여자부 2.1 플레이오프 2.2 챔피언 결정전 3 각주 남자부[편집] 플레이오프[편집] 경기 날짜 홈 팀 득점 어웨이 팀 장소 1차전 2008년 4월 3일 대한항공 3 - 0 현대캐피탈 인천도원시립체육관 2차전 2008년 4월 5일 현대캐피탈 3 - 1 대한항공 천안유관순체육관 3차전 2008년 4월 6일 대한항공 1 - 3 현대캐피탈 인천도원시립체육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챔피언 결정전 진출 남자부 플레이오프에는 정규리그 2위팀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와 3위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만났다. 두 팀은 2006~2007 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적이 있어 2년 연속으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2007~2008 시즌 정규리그에서 두 팀 간의 상대 전적은 총 7번을 싸워서 대한항공이 5승을 거두고 있었다. 대한항공의 홈구장 인천도원시립체육관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듀스 접전을 펼쳤으나, 마무리가 강했던 대한항공이 현대캐피탈을 3대 0으로 제압했다. 대한항공에서는 3세트 만에 26득점을 기록한 외국인 선수 보비와 결정적인 공격을 성공시킨 신영수가 활약했지만, 현대캐피탈이 시즌 후반에 뽑은 외국인 선수 로드리고는 이 경기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면 2차전과 3차전에서는 경기 초반 양팀이 한세트씩 주고받는 접전을 벌였으나 두 경기 모두 승부처였던 3세트를 현대캐피탈이 따내며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프로화 후, 4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인천 대한항공은 2차전과 3차전에서 팀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라 불리던 해결사가 없는 문제와 많은 범실로 인해 상대에게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2차전에서는 이선규가 가로막기 8개와 속공 공격을 통해 총 17득점을 올리며[1] 현대캐피탈이 경기를 따 냈으며, 3차전에서는 2차전에 뛰지 않았던 현대캐피탈의 박철우가 2 대 11로 팀이 크게 뒤지고 있던 3세트에 하경민과 함께 교체 투입되어 두 세트 동안 70.59%의 공격 성공률을 보이며[2] 경기를 반전시켜 역전승의 주역이 되며 팀을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시키는데에 기여했다. 두 선수는 2차전과 3차전에서 각각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챔피언 결정전[편집] 경기 날짜 홈 팀 득점 어웨이 팀 장소 1차전 2008년 4월 10일 삼성화재 3 - 1 현대캐피탈 대전충무체육관 2차전 2008년 4월 12일 삼성화재 3 - 1 현대캐피탈 대전충무체육관 3차전 2008년 4월 13일 현대캐피탈 1 - 3 삼성화재 천안유관순체육관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통합 우승 챔피언 결정전은 4년 연속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대결이 되었다. 두 팀의 상대 전적은 2007~2008 시즌 정규리그 7번의 맞대결에서 삼성화재가 현대캐피탈에게 5승을 거두며 우위를 점했지만, 프로 출범 이후 3번의 챔피언 결정전 맞대결에서는 현대캐피탈이 삼성화재를 꺾고 2번의 우승을 거둔 바 있다.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의 승부의 분수령은 세트 스코어 1 대 1로 맞선 3세트였다. 세트 초반부터 팽팽하게 맞서던 양 팀은 엎치락 뒤치락 듀스 접전을 벌이며 시소 게임을 펼쳤다. 결국 기나긴 접전 끝에 대전 삼성화재가 41 대 39로 3세트를 따내며 승부의 마침표를 찍었고 이 후 천안 현대캐피탈은 급격히 조직력이 무너지며 4세트마저 상대에게 헌납,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의 승리는 대전 삼성화재에게 돌아갔다. 이 날 3세트에서 양팀이 기록한 41 대 39 라는 스코어는 기존 기록인 2005년 3월 6일 한국전력과 대한항공 전 1세트의 38 대 36을 뛰어넘은 역대 통산 한 팀 최다 득점, 양 팀 합산 최다 득점 기록이며, 삼성화재의 63회 공격 시도 - 29점 득점, 현대캐피탈의 58회 공격 시도 - 27점 득점 기록 또한 역대 최다 공격 시도 - 득점 기록 1, 2위로 올라섰다. 또한 삼성화재가 보여 준 디그 39회 성공은 기존 기록인 32회보다 7회가 많은 성공 기록으로 최다 기록에 올랐으며 세트 성공 부문에서도 최태웅 세터가 27개를 성공시켜 이 부문 타이 기록을 세웠다. 또한 리시브 정확도 면에서도 기존 27개보다 3개가 많은 30개를 받아내 신기록을 세우며 볼거리와 기록이 풍성한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을 만들었다.[3] 또한 이 경기에서는 일본인 사카이데 오다무 심판이 부심으로 기용되었으며, 이어 남자부 챔피언 결정전 3차전의 주심으로도 기용되었다.[4] 챔피언 결정전 2차전의 승부는 공격 성공률과 범실에서 갈렸다. 범실 13개를 범하며 1세트를 내 준 대전 삼성화재는 2세트 들어 그동안 상대에 비해 열세로 여겨지던 가로막기 득점이 연이어 터지며 2세트를 가져갔다. 기세를 몰아 삼성화재는 현대캐피탈 주포인 후인정, 송인석, 박철우를 30% 내외의 낮은 공격 성공률로 묶고 안젤코의 활약에 힘입어 3세트마저 따내며 승부를 뒤집었고 현대캐피탈 선수들의 연이은 범실로 4세트마저 승리 경기를 가져가며 2연승으로 챔피언 등극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장소를 옮겨 천안 현대캐피탈의 홈인 천안 유관순 체육관에서 벌어진 3차전 또한 집중력과 결정력에서 앞선 대전 삼성화재의 승리로 돌아갔다. 1세트와 2세트를 먼저 따 낸 대전 삼성화재는 집중력과 조직력이 떨어지며 3세트를 박철우가 활약한 천안 현대캐피탈에게 내 주며 승부를 4세트로 끌고갔다. 이 경기의 승부의 분수령은 4세트 9 대 9 상황에서 나온 심판과 경기 감독관의 애매한 판정으로 인한 판정시비였다. 손재홍의 스파이크가 이선규의 블로킹에 맞고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을 후인정이 상대 진영까지 따라가 걷어 올렸다. 하지만 이날 주심을 맡은 일본인 사카이데 오다무가 사이드 아웃을 선언하자 현대캐피탈의 김호철 감독과 선수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김호철 감독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비디오 판독 상황에서 경기 감독관은 화면 불량으로 인해 판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노카운트를 선언했다. 이 상황에서 대전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과 프런트들은 비디오 판독 불가시 주심의 판정을 따라야 하지만 이를 독단적으로 번복한 경기 감독관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며 강하게 항의를 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주심의 결정을 존중하는 쪽으로 판정이 나기까지 10여분간 경기가 중단되며 경기의 흐름이 깨졌고 그 사이 분위기는 삼성화재쪽으로 넘어갔다.[5] 기세가 오른 삼성화재는 4세트를 25 대 16으로 따 내며 챔피언 결정전의 대미를 장식, 정규리그와 포스트시즌 통합 우승, 프로 통산 2회 우승, 팀 창단 후 10회 우승을 이루어냈다. 삼성화재의 안젤코는 높은 공격 성공률과 결정력을 앞세워 챔피언 결정전 MVP로 선발되었다.[6] 여자부[편집] 플레이오프[편집] 경기 날짜 홈 팀 득점 어웨이 팀 장소 1차전 2008년 3월 15일 KT&G 2 - 3 GS칼텍스 대전충무체육관 2차전 2008년 3월 16일 GS칼텍스 3 - 0 KT&G 인천도원시립체육관 인천 GS칼텍스 챔피언 결정전 진출 정규리그 2위팀 대전 KT&G 아리엘즈과 3위팀 인천 GS칼텍스의 플레이오프 1차전은 2008년 3월 15일 오후 5시에 KT&G의 홈구장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렸다. 이 경기에서 KT&G는 페르난다가 31득점을 올리며 분전했으나, GS칼텍스는 하께우, 김민지, 정대영이 골고루 활약하면서 2시간 11분 간의 접전 끝에 GS칼텍스가 KT&G에게 세트 스코어 3대 2로 승리를 거뒀다. 바로 다음 날 인천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역시 KT&G의 페르난다가 30득점을 올리는 등 놀라운 공격력을 보여줬지만, 고비 때마다 GS칼텍스의 정대영이 2점 후위 공격을 성공시키며 GS칼텍스가 세트 스코어 3대 0으로 KT&G에게 완승을 거뒀다. GS칼텍스는 프로화 출범 이후 처음으로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고, 여자부의 경우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에 승리를 거둔 팀이 챔피언 결정전에도 진출한다는 징크스는 4년째 깨지지 않게 되었다. 챔피언 결정전[편집] 경기 날짜 홈 팀 득점 어웨이 팀 장소 1차전 2008년 3월 22일 흥국생명 3 - 1 GS칼텍스 천안유관순체육관 2차전 2008년 3월 23일 흥국생명 2 - 3 GS칼텍스 천안유관순체육관 3차전 2008년 3월 26일 GS칼텍스 3 - 1 흥국생명 인천도원시립체육관 4차전 2008년 3월 29일 GS칼텍스 3 - 1 흥국생명 인천도원시립체육관 인천 GS칼텍스 우승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2007~2008 시즌 정규리그 우승 팀이자 3년 연속 통합 우승에 도전하는 천안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대전 KT&G 아리엘즈에게 2연승을 거두고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한 인천 GS칼텍스의 대결이 되었다. 상대 전적은 2007~2008 시즌 정규리그 7번의 맞대결에서 흥국생명이 GS칼텍스에게 6번을 승리하며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3월 22일 흥국생명의 홈구장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펼쳐진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는 김연경이 29득점, 황연주가 25득점을 기록하며 흥국생명이 세트 스코어 3대 1로 GS칼텍스를 제압했다. 특히 GS칼텍스에게 2세트를 빼앗기고 난 뒤, 황연주가 3세트에만 13점을 기록하는 등 활약을 보여줘 KBS n에서 선정한 수훈선수로 선정되었다. 다음 날 1차전과 마찬가지로 천안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는 풀 세트 경기끝에 GS칼텍스가 흥국생명에게 세트 스코어 3대 2로 승리를 거뒀다. 3세트까지 좋은 경기력을 보인 흥국생명은 이후 서브 리시브가 흔들리며 4세트를 GS칼텍스에게 16점차로 내줬고, 5세트에서도 총 6점만을 기록하며 2차전의 승리는 GS칼텍스에게 돌아갔다. 3차전은 3월 26일 GS칼텍스의 홈구장 인천도원시립체육관에서 있었다. 1세트를 따낸 GS칼텍스는 2세트를 흥국생명에게 내줬고, 23대 23으로 팽팽히 맞서던 3세트 후반 GS칼텍스의 정대영이 가로막기 득점을 기록하며 GS칼텍스가 세트 스코어 2대 1로 앞서 나갔다. 특히 GS칼텍스가 17대 21로 흥국생명에게 뒤지고 있던 4세트에서는 아껴 두었던 2점 백어택 2번을 정대영이 모두 성공시키며 23대 23을 만들었고, 이어 김민지가 2연속 득점을 기록하며 3차전도 GS칼텍스가 승리를 거뒀다. 4차전은 3월 29일 인천에서 열렸다. 챔피언 결정전 우승까지 1승만을 남긴 GS칼텍스는 흥국생명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감독이 퇴장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1세트 GS칼텍스가 18대 13으로 이기고 있던 상황에서 주심은 GS칼텍스 이숙자의 터치넷 반칙을 선언했고 이에 불복한 GS칼텍스 측에서 비디오 판독을 신청하였다. 비디오 판독 결과 흥국생명의 브라질 출신의 외국인 선수 마리의 터치넷 반칙으로 번복되자 흥국생명의 황현주 감독은 이에 강하게 항의하며 세트 퇴장을 당했고, 이후에도 계속 항의하다 경기 퇴장을 당했다. 황현주 감독은 이전 시즌에서도 수원 현대건설 그린폭스와의 챔피언 결정전 4차전에서 퇴장을 당한 바 있어 2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 퇴장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후 계속 진행된 2세트에서는 김연경의 공격이 살아나며 퇴장한 황현주 감독 대신 어창선 수석코치의 지휘 아래 흥국생명이 승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GS칼텍스는 3세트에서 승리를 차지했고, 3차전과 마찬가지로 GS칼텍스는 4세트 17대 21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정대영의 2점 백어택 등으로 흥국생명을 추격하여 23대 23을 만들었고, 나혜원이 블로킹 득점을 기록하며 경기를 끝냈다. 이로써 GS칼텍스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흥국생명에게 3승 1패를 거두며 성인배구 9년 만에, 프로 전환 후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고, 챔피언 결정전 MVP는 정대영이 차지했다. 한편 위암으로 투병 중인 GS칼텍스의 이희완 감독도 4차전에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과 기쁨을 함께 했다. 각주[편집] ↑ NH농협 2007~2008 V-리그 포스트시즌 남자부 플레이오프 2차전 선수 상세 기록 보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NH농협 2007~2008 V-리그 포스트시즌 남자부 플레이오프 3차전 선수 상세 기록 보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프로배구> 기록 모조리 갈아치운 '3세트 혈투' Archived 2008년 4월 17일 - 웨이백 머신 - 연합뉴스 ↑ <프로배구소식> 일본 심판, 부심으로 기용[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연합뉴스 ↑ <프로배구> 판정 시비로 또 얼룩진 챔피언결정전 - 연합뉴스 ↑ <삼성화재 V10> 우승주역 '복덩이' 안젤코, 현대캐피탈 '천적' - 뉴시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V-리그_포스트시즌_2008&oldid=22991715" 분류: V-리그 시즌2008년 배구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2일 (월) 16: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V-리그 포스트시즌 2008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V-리그 포스트시즌 2008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음은 NH농협 2007~2008 V-리그의 포스트시즌에 대한 내용이다. 목차 1 남자부 1.1 플레이오프 1.2 챔피언 결정전 2 여자부 2.1 플레이오프 2.2 챔피언 결정전 3 각주 남자부[편집] 플레이오프[편집] 경기 날짜 홈 팀 득점 어웨이 팀 장소 1차전 2008년 4월 3일 대한항공 3 - 0 현대캐피탈 인천도원시립체육관 2차전 2008년 4월 5일 현대캐피탈 3 - 1 대한항공 천안유관순체육관 3차전 2008년 4월 6일 대한항공 1 - 3 현대캐피탈 인천도원시립체육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챔피언 결정전 진출 남자부 플레이오프에는 정규리그 2위팀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와 3위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만났다. 두 팀은 2006~2007 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적이 있어 2년 연속으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2007~2008 시즌 정규리그에서 두 팀 간의 상대 전적은 총 7번을 싸워서 대한항공이 5승을 거두고 있었다. 대한항공의 홈구장 인천도원시립체육관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듀스 접전을 펼쳤으나, 마무리가 강했던 대한항공이 현대캐피탈을 3대 0으로 제압했다. 대한항공에서는 3세트 만에 26득점을 기록한 외국인 선수 보비와 결정적인 공격을 성공시킨 신영수가 활약했지만, 현대캐피탈이 시즌 후반에 뽑은 외국인 선수 로드리고는 이 경기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면 2차전과 3차전에서는 경기 초반 양팀이 한세트씩 주고받는 접전을 벌였으나 두 경기 모두 승부처였던 3세트를 현대캐피탈이 따내며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프로화 후, 4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인천 대한항공은 2차전과 3차전에서 팀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라 불리던 해결사가 없는 문제와 많은 범실로 인해 상대에게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2차전에서는 이선규가 가로막기 8개와 속공 공격을 통해 총 17득점을 올리며[1] 현대캐피탈이 경기를 따 냈으며, 3차전에서는 2차전에 뛰지 않았던 현대캐피탈의 박철우가 2 대 11로 팀이 크게 뒤지고 있던 3세트에 하경민과 함께 교체 투입되어 두 세트 동안 70.59%의 공격 성공률을 보이며[2] 경기를 반전시켜 역전승의 주역이 되며 팀을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시키는데에 기여했다. 두 선수는 2차전과 3차전에서 각각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챔피언 결정전[편집] 경기 날짜 홈 팀 득점 어웨이 팀 장소 1차전 2008년 4월 10일 삼성화재 3 - 1 현대캐피탈 대전충무체육관 2차전 2008년 4월 12일 삼성화재 3 - 1 현대캐피탈 대전충무체육관 3차전 2008년 4월 13일 현대캐피탈 1 - 3 삼성화재 천안유관순체육관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통합 우승 챔피언 결정전은 4년 연속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대결이 되었다. 두 팀의 상대 전적은 2007~2008 시즌 정규리그 7번의 맞대결에서 삼성화재가 현대캐피탈에게 5승을 거두며 우위를 점했지만, 프로 출범 이후 3번의 챔피언 결정전 맞대결에서는 현대캐피탈이 삼성화재를 꺾고 2번의 우승을 거둔 바 있다.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의 승부의 분수령은 세트 스코어 1 대 1로 맞선 3세트였다. 세트 초반부터 팽팽하게 맞서던 양 팀은 엎치락 뒤치락 듀스 접전을 벌이며 시소 게임을 펼쳤다. 결국 기나긴 접전 끝에 대전 삼성화재가 41 대 39로 3세트를 따내며 승부의 마침표를 찍었고 이 후 천안 현대캐피탈은 급격히 조직력이 무너지며 4세트마저 상대에게 헌납,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의 승리는 대전 삼성화재에게 돌아갔다. 이 날 3세트에서 양팀이 기록한 41 대 39 라는 스코어는 기존 기록인 2005년 3월 6일 한국전력과 대한항공 전 1세트의 38 대 36을 뛰어넘은 역대 통산 한 팀 최다 득점, 양 팀 합산 최다 득점 기록이며, 삼성화재의 63회 공격 시도 - 29점 득점, 현대캐피탈의 58회 공격 시도 - 27점 득점 기록 또한 역대 최다 공격 시도 - 득점 기록 1, 2위로 올라섰다. 또한 삼성화재가 보여 준 디그 39회 성공은 기존 기록인 32회보다 7회가 많은 성공 기록으로 최다 기록에 올랐으며 세트 성공 부문에서도 최태웅 세터가 27개를 성공시켜 이 부문 타이 기록을 세웠다. 또한 리시브 정확도 면에서도 기존 27개보다 3개가 많은 30개를 받아내 신기록을 세우며 볼거리와 기록이 풍성한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을 만들었다.[3] 또한 이 경기에서는 일본인 사카이데 오다무 심판이 부심으로 기용되었으며, 이어 남자부 챔피언 결정전 3차전의 주심으로도 기용되었다.[4] 챔피언 결정전 2차전의 승부는 공격 성공률과 범실에서 갈렸다. 범실 13개를 범하며 1세트를 내 준 대전 삼성화재는 2세트 들어 그동안 상대에 비해 열세로 여겨지던 가로막기 득점이 연이어 터지며 2세트를 가져갔다. 기세를 몰아 삼성화재는 현대캐피탈 주포인 후인정, 송인석, 박철우를 30% 내외의 낮은 공격 성공률로 묶고 안젤코의 활약에 힘입어 3세트마저 따내며 승부를 뒤집었고 현대캐피탈 선수들의 연이은 범실로 4세트마저 승리 경기를 가져가며 2연승으로 챔피언 등극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장소를 옮겨 천안 현대캐피탈의 홈인 천안 유관순 체육관에서 벌어진 3차전 또한 집중력과 결정력에서 앞선 대전 삼성화재의 승리로 돌아갔다. 1세트와 2세트를 먼저 따 낸 대전 삼성화재는 집중력과 조직력이 떨어지며 3세트를 박철우가 활약한 천안 현대캐피탈에게 내 주며 승부를 4세트로 끌고갔다. 이 경기의 승부의 분수령은 4세트 9 대 9 상황에서 나온 심판과 경기 감독관의 애매한 판정으로 인한 판정시비였다. 손재홍의 스파이크가 이선규의 블로킹에 맞고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을 후인정이 상대 진영까지 따라가 걷어 올렸다. 하지만 이날 주심을 맡은 일본인 사카이데 오다무가 사이드 아웃을 선언하자 현대캐피탈의 김호철 감독과 선수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김호철 감독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비디오 판독 상황에서 경기 감독관은 화면 불량으로 인해 판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노카운트를 선언했다. 이 상황에서 대전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과 프런트들은 비디오 판독 불가시 주심의 판정을 따라야 하지만 이를 독단적으로 번복한 경기 감독관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며 강하게 항의를 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주심의 결정을 존중하는 쪽으로 판정이 나기까지 10여분간 경기가 중단되며 경기의 흐름이 깨졌고 그 사이 분위기는 삼성화재쪽으로 넘어갔다.[5] 기세가 오른 삼성화재는 4세트를 25 대 16으로 따 내며 챔피언 결정전의 대미를 장식, 정규리그와 포스트시즌 통합 우승, 프로 통산 2회 우승, 팀 창단 후 10회 우승을 이루어냈다. 삼성화재의 안젤코는 높은 공격 성공률과 결정력을 앞세워 챔피언 결정전 MVP로 선발되었다.[6] 여자부[편집] 플레이오프[편집] 경기 날짜 홈 팀 득점 어웨이 팀 장소 1차전 2008년 3월 15일 KT&G 2 - 3 GS칼텍스 대전충무체육관 2차전 2008년 3월 16일 GS칼텍스 3 - 0 KT&G 인천도원시립체육관 인천 GS칼텍스 챔피언 결정전 진출 정규리그 2위팀 대전 KT&G 아리엘즈과 3위팀 인천 GS칼텍스의 플레이오프 1차전은 2008년 3월 15일 오후 5시에 KT&G의 홈구장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렸다. 이 경기에서 KT&G는 페르난다가 31득점을 올리며 분전했으나, GS칼텍스는 하께우, 김민지, 정대영이 골고루 활약하면서 2시간 11분 간의 접전 끝에 GS칼텍스가 KT&G에게 세트 스코어 3대 2로 승리를 거뒀다. 바로 다음 날 인천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역시 KT&G의 페르난다가 30득점을 올리는 등 놀라운 공격력을 보여줬지만, 고비 때마다 GS칼텍스의 정대영이 2점 후위 공격을 성공시키며 GS칼텍스가 세트 스코어 3대 0으로 KT&G에게 완승을 거뒀다. GS칼텍스는 프로화 출범 이후 처음으로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고, 여자부의 경우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에 승리를 거둔 팀이 챔피언 결정전에도 진출한다는 징크스는 4년째 깨지지 않게 되었다. 챔피언 결정전[편집] 경기 날짜 홈 팀 득점 어웨이 팀 장소 1차전 2008년 3월 22일 흥국생명 3 - 1 GS칼텍스 천안유관순체육관 2차전 2008년 3월 23일 흥국생명 2 - 3 GS칼텍스 천안유관순체육관 3차전 2008년 3월 26일 GS칼텍스 3 - 1 흥국생명 인천도원시립체육관 4차전 2008년 3월 29일 GS칼텍스 3 - 1 흥국생명 인천도원시립체육관 인천 GS칼텍스 우승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2007~2008 시즌 정규리그 우승 팀이자 3년 연속 통합 우승에 도전하는 천안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대전 KT&G 아리엘즈에게 2연승을 거두고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한 인천 GS칼텍스의 대결이 되었다. 상대 전적은 2007~2008 시즌 정규리그 7번의 맞대결에서 흥국생명이 GS칼텍스에게 6번을 승리하며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3월 22일 흥국생명의 홈구장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펼쳐진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는 김연경이 29득점, 황연주가 25득점을 기록하며 흥국생명이 세트 스코어 3대 1로 GS칼텍스를 제압했다. 특히 GS칼텍스에게 2세트를 빼앗기고 난 뒤, 황연주가 3세트에만 13점을 기록하는 등 활약을 보여줘 KBS n에서 선정한 수훈선수로 선정되었다. 다음 날 1차전과 마찬가지로 천안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는 풀 세트 경기끝에 GS칼텍스가 흥국생명에게 세트 스코어 3대 2로 승리를 거뒀다. 3세트까지 좋은 경기력을 보인 흥국생명은 이후 서브 리시브가 흔들리며 4세트를 GS칼텍스에게 16점차로 내줬고, 5세트에서도 총 6점만을 기록하며 2차전의 승리는 GS칼텍스에게 돌아갔다. 3차전은 3월 26일 GS칼텍스의 홈구장 인천도원시립체육관에서 있었다. 1세트를 따낸 GS칼텍스는 2세트를 흥국생명에게 내줬고, 23대 23으로 팽팽히 맞서던 3세트 후반 GS칼텍스의 정대영이 가로막기 득점을 기록하며 GS칼텍스가 세트 스코어 2대 1로 앞서 나갔다. 특히 GS칼텍스가 17대 21로 흥국생명에게 뒤지고 있던 4세트에서는 아껴 두었던 2점 백어택 2번을 정대영이 모두 성공시키며 23대 23을 만들었고, 이어 김민지가 2연속 득점을 기록하며 3차전도 GS칼텍스가 승리를 거뒀다. 4차전은 3월 29일 인천에서 열렸다. 챔피언 결정전 우승까지 1승만을 남긴 GS칼텍스는 흥국생명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감독이 퇴장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1세트 GS칼텍스가 18대 13으로 이기고 있던 상황에서 주심은 GS칼텍스 이숙자의 터치넷 반칙을 선언했고 이에 불복한 GS칼텍스 측에서 비디오 판독을 신청하였다. 비디오 판독 결과 흥국생명의 브라질 출신의 외국인 선수 마리의 터치넷 반칙으로 번복되자 흥국생명의 황현주 감독은 이에 강하게 항의하며 세트 퇴장을 당했고, 이후에도 계속 항의하다 경기 퇴장을 당했다. 황현주 감독은 이전 시즌에서도 수원 현대건설 그린폭스와의 챔피언 결정전 4차전에서 퇴장을 당한 바 있어 2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 퇴장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후 계속 진행된 2세트에서는 김연경의 공격이 살아나며 퇴장한 황현주 감독 대신 어창선 수석코치의 지휘 아래 흥국생명이 승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GS칼텍스는 3세트에서 승리를 차지했고, 3차전과 마찬가지로 GS칼텍스는 4세트 17대 21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정대영의 2점 백어택 등으로 흥국생명을 추격하여 23대 23을 만들었고, 나혜원이 블로킹 득점을 기록하며 경기를 끝냈다. 이로써 GS칼텍스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흥국생명에게 3승 1패를 거두며 성인배구 9년 만에, 프로 전환 후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고, 챔피언 결정전 MVP는 정대영이 차지했다. 한편 위암으로 투병 중인 GS칼텍스의 이희완 감독도 4차전에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과 기쁨을 함께 했다. 각주[편집] ↑ NH농협 2007~2008 V-리그 포스트시즌 남자부 플레이오프 2차전 선수 상세 기록 보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NH농협 2007~2008 V-리그 포스트시즌 남자부 플레이오프 3차전 선수 상세 기록 보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프로배구> 기록 모조리 갈아치운 '3세트 혈투' Archived 2008년 4월 17일 - 웨이백 머신 - 연합뉴스 ↑ <프로배구소식> 일본 심판, 부심으로 기용[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연합뉴스 ↑ <프로배구> 판정 시비로 또 얼룩진 챔피언결정전 - 연합뉴스 ↑ <삼성화재 V10> 우승주역 '복덩이' 안젤코, 현대캐피탈 '천적' - 뉴시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V-리그_포스트시즌_2008&oldid=22991715" 분류: V-리그 시즌2008년 배구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2일 (월) 16: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엄주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엄주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엄주환 출생 1950년 5월 13일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군 사망 2005년 8월 2일 (55세) 활동 기간 1972년 ~ 2005년 (KBS 14기) 종교 불교 소속 한국방송 성우극회 (프리랜서) 엄주환(嚴柱煥, 1950년 5월 13일 ~ 2005년 8월 2일)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1972년 KBS 14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2005년 8월 2일에 간암으로 인하여 55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1] 목차 1 출연작 1.1 애니메이션 1.2 전담 성우 1.3 영화 / 외화 1.4 방송 1.5 광고 2 각주 출연작[편집] 애니메이션[편집] 명탐정 번개(KBS) - 번개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KBS) 우주선장 율리시즈(KBS) 심슨 가족(MBC) - 번스시장 출동! 바이오 용사(KBS) - IQ 사이버탐험대 쟈니퀘스트(KBS) - 사이버요원 시튼동물기(KBS) - 어니스트 시튼 콤바트라V(VIDEO) - 준 / 해설 감바의 모험(VIDEO) - 해설 / 론리 돌북 특전대(VIDEO) 욤욤 공주와 도둑(VIDEO) - 압정 전담 성우[편집] 패트릭 스웨이지 시티 오브 조이(KBS) - 맥스 사랑과 영혼(KBS) - 샘 더티 댄싱(SBS) - 쟈니 남과 북(KBS)시리즈물 - 어리 메인 킬러가 보낸 편지(KBS) - 레이스 커트 러셀 툼 스톤(KBS) - 와이어트 어프 스타게이트(KBS) - 코닐 대령 애꾸눈 론 선장(KBS) - 론 선장 파이널 디씨전(KBS) - 그랜디 영화 / 외화[편집] 기동순찰대 (KBS) - 펀치 (에릭 에스트라다) 타워링(KBS) - 카를로스 (그레고리 시에라) 행복을 파는 기계(KBS) 늑대개(KBS) 스페셜리스트(SBS) - 토마스 레온 할로우 맨(KBS) - 크레머 박사 (윌리엄 디베인)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KBS) - 엘론드 (휴고 위빙) 스타워즈 에피소드4(KBS) - 한 솔로 (해리슨 포드) 블랙 독(SBS) - 잭 크루 오멘, 최후의 심판(SBS) - 데미안 (샘 닐) 피아노(KBS) - 스튜어트 (샘 닐) 다크 하프(SBS) - 테드 (티모시 휴튼) 취권2(SBS) - 황기영 (적 룡) 에일리언(SBS) - 댈러스 (톰 스커릿) 리플리컨트(SBS) - 복제인간 U-571(SBS) - 쿠난 소령 필라델피아 익스페리먼트2(SBS) - 데이비드 사선에서(KBS) - 마티 (토빈 벨) 미스터 베이스볼(KBS) - 잭 (톰 셀렉) 더 원(KBS) - 알드리치(제임스 모리슨) 셰익스피어 인 러브(KBS) - 버베이지(마틴 클룬즈) 다크니스(KBS) - 아빠 (이아인 글렌) 붉은 10월(KBS) - 배실리 (샘 닐) 라스트 택시(KBS) 프롬프터(KBS) - 프레드 (스벤 노딘) 뮤직 오브 하트(KBS) - 댄(제이 O. 샌더스) 줄리엣을 위하여(KBS)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KBS) - 하마무라 (호소카와 도시유키) 줄리엣을 위하여(KBS) 행복을 파는 기계(KBS) 콰이강의 다리(KBS) - 그로건(펄시 허버트) V(KBS) - 다니엘 번스타인 코튼 클럽(SBS) - 샌드맨 윌리암스 지옥의 묵시록(90년 더빙판/KBS) 코만도(KBS) - 에리어스 (덴 헤데야) (1988년 더빙) 프레데터(SBS) - 달튼 (칼 웨더스) 클리프 행어(SBS) - 핼 (마이클 루커) 나바론2(KBS) 쌍둥이 대소동(KBS) - 니컬라스 파커 (데니스 퀘이드) 프롬프터(KBS) - 프레드 (스벤 노딘) 코만도 (KBS) - 에리어스 (댄 해다야) 인터폴 특명 (SBS) - 덱스 (제프 파헤이) 슈퍼 볼케이노 (KBS) - 케니스(로버트 위스든) 방송[편집]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KBS 1TV) SBS 8 뉴스 오프닝 (SBS) (1시간 빠른 뉴스~ SBS 8시 뉴스!) (1997년 6월 30일 ~ 1998년 3월 29일) 긴급구조119 (KBS2) 광고[편집] 목화스폴침대 에넥스(SSK미러) 하이파이브 프로스펙스 LG하우시스 (유비알) (모노륨) (1990년) 카미노 부산진시장 명문제약 (벌모졸) 신풍제약 (디스토시드) 바로크가구 (리나쎈토침대) (1995년) 부산도시공사 (동삼절영아파트) 우방 (1995년) 삼성제약 (에프킬라 싹싹) (약수표마시는우황청심원) (판토A) 전자랜드 (1996년) 아티스탈렌즈 롯데미도파 (1995년) 한국전기안전공사 KT 파크랜드 기아자동차 (아벨라) (캐피탈) 명인제약 (이가탄:하일성편) (1991년) 삼일제약 (그래칼) (1992년) 털보네우동 신원에벤에셀 (베스띠벨리) (권희덕과 함께) 신한은행 하나은행 동국제약 (인사돌) 대웅제약 (베아제:비행기편) (1995년) 한독 (케토톱) 제철화학 (엘엘샤시) (1994년) 유니베라 (남양알로에) 린나이코리아 (린나이가스보일러) (1995년) 미라무역 (맨풀:이젠자신있습니다편) (1995년) 롯데기공 (16비트 롯데가스보일러) 상호저축은행중앙회 (1995년) 일동제약 (케노펜겔) 한국타이어 (노르딕) 동서식품 (동서벌꿀) 영일제약 (메모비스) (1991년) 롯데푸드 (롯데햄 에선뽀득,야채믹스100) (야채볶음밥) 부산광역시상수도사업본부 부산도시가스 한국토지공사 쌍용제지 (울트라큐티 파워슬림) 코웨이 (코웨이 냉온정수기) 한국가스안전공사 오뚜기 (옛날순우동,골드마요네스,후레쉬참치) 삼진제약 (안정액) 부산합동양조 (동동주) 동양도자기 (슈퍼차이나) 권희덕과 함께 코오롱제약 (비코사이드) (덴타돌) 한국야쿠르트 (야쿠르트에이스) 한미약품 (메디락비타) 서울신문 생명보험협회 롯데칠성음료 (홍삼드링크) (게토레이) 삼성전자 (비디오비전 커풀) (퍼펙트세탁기 신바람) (시네마TV) (위너VTR) (하이폰 전화기) (신휴먼테크) (퍼펙트 세탁기) (그린컴퓨터) 동원개발 (동원로얄듀크) 유한킴벌리 (비바),(하기스) 유한크로락스 (유한락스) 한국얀센 (니조랄) 공익광고협의회 합성세제 남편(1990년) 화합의 한마당 (1991년) 음식물 낭비 (1991년) 금권선거방지 (1992년) 93새출발 (1992년) 새다짐 새각오 (1993년) 신문고(1994년) 맑은공기 보존 (1994년) 노사는 동반자 (1995년) SK텔레콤 (디지털011) 광동제약 (광동다이어트,은록천) CJ헬스케어 (화이투벤에스) (비타메진에스) 체리부로 (처갓집양념통닭) 삼육식품 (뉴스타트) (삼육메론) 유한양행 (맥생) (알마겔에프) (실버칼) (정직과 신용의편) 아모레퍼시픽 (쾌백) (투웨이샴푸) (빨래박사) (헤어칼라린스) (설록차) (고려왕 드링크) 대일화학 (나리손) (40년의정직) (마즈렌에스) (인도팝) (미니팝) 현대약품 (시노카) 매일유업 (밀루파매일) (장에는GG) 동아제약 (박카스에프) (써큐란) (로얄디) 고려제약 (하벤 에프) (싼타볼) 헨켈홈케어코리아(컴베트골드,개미용컴배트,컴배트모기향) 한국투자신탁 애경산업 (뉴스파크) 진미식품 (기업PR) LG그룹 사명변경 및 CI 론칭 광고(1995년) 현대자동차 (스쿠프)(엑셀)(갤로퍼)(엑센트)(그레이스)(쏘나타2)(포터)(뉴포터)(리베로) 넥센타이어 (다크호스 2) 동원F&B (동원선물세트) (육쪽마늘) 동산C&G (금수강산 원더풀) 삼양식품 (삼양콩간장) (삼양라면) 금강 (리갈) (버팔로) 대우건설 대우건설기업PR-기업PR총론광고(1995년) 기업PR광고(1998년) 일양약품 노루모 대우전자 대우초간편VTR 초간편VTR딱한번 디지털셔틀VTR 셀프냉장고 세진컴퓨터랜드 팬택 디지털 시티맨(1997년) 멀티캡(1996년) 예써전화기 (1994년) 현대하이퍼줌카메라 (1997년) 시티맨2(1995년) 대상 불고기양념(1993년), 아스파(1994년-1995년) 대우그룹 기업광고PR광고-세계경영 전자,통신편(1993년) 기업광고PR광고-세계경영 자동차편(1994년) 대우전자 (탱크냉장고 냉기그물) (입체냉장고 탱크)(입체냉장고 탱크 2) (공기방울세탁기 파워) (공기방울세탁기 제트) (공기방울세탁기 올리고때리고) (공기방울세탁기 돌개물살) (탱크냉장고 신선은행) (공기방울세탁기 강스파이크) (공기방울세탁기 살균까지) 대우자동차 르망-스피드주행편(1991년) 르망-세계를달린다편(1993년) 에스페로 (1993년) 티코 (1995년) SK루브리컨츠 (구 유공)엔진오일 SD5000(1994년) 현대오일뱅크 (구 현대정유) 기업PR광고-사명변경 고지편(1993년) 종근당 펜잘-교통체증 편(1991년) SK 하이닉스 (구 현대전자)-기업PR(1994년) 대전 트랜스무빙 대전 쌍마트랜스 천광유지 (희드라스트롱) 미래에셋대우 각주[편집] ↑ KBS 극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성우협회》, 2005년 8월 24일 작성, 2011년 3월 11일 확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엄주환&oldid=24500955" 분류: 대한민국의 남자 성우1950년 태어남2005년 죽음간암으로 죽은 사람경주시 출신1972년 데뷔대한민국의 불교 신자영월 엄씨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29일 (토) 21: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낙하운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낙하운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6년 10월) 낙하운동(落下運動, motion of falling body)이란 중력에 의해서 물체가 지면을 향해서 떨어지는 운동을 말한다. 낙하운동은 보통 물체와 중력이라는 힘이 서로 상호작용을 한 뒤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목차 1 이론 1.1 x축 1.2 y축 2 갈릴레오의 낙하운동 실험 2.1 무게에 따른 낙하속도 2.1.1 참고 문헌 이론[편집] 지금 부터는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이동 방향을 x축과 y축으로 정하자. 물론 여기는 3차원 공간이지만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으니 x축을 z축으로도 정해놓자. x축[편집] 사실 낙하운동의 법칙을 정확하게 설명해낸 과학자 뉴턴의 공식이 정확하게 들어 맞을려면 현실 속의 저항이 하나도 없는 무저항 공간에서 실험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기의 저항이나, 관성력 등의 저항 때문에 정확한 실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을 감안해 두자. 낙하운동에서 x축과 y축은 각각 움직인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질량을 가진 물체가 x축을 45도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면, -y축으로 이동하는 중력은 x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그런데 x축은 왜 방향이 틀어지고, 속도가 변할까? 그것은 현실 세계의 저항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낙하 실험을 할 때에 바람이 불 면 그 결과는 공식과 같지 않을 수 있다. y축[편집] 이제는 y축을 알아보자. 중력의 방향은 -y축이다. 이때, 낙하하는 물체의 속력은 힘과 운동이라는 두 운동량으로 알 수 있다. 힘과 운동 방향이 나란할 때에는 물체의 속력만 바뀌는데, 힘과 운동방향이 반대될 때는 속력이 감소하고, 방향이 같을 때는 증가한다. 그런데, 만약 힘과 운동 방향이 나란하지 않을 경우에는 비스듬한 경우와 수직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수직인 경우에는 힘이 운동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운동방향이 바뀌지만, 비스듬한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바꾸어서 힘과 운동방향이 둘 다 감소하거나 증가하게 된다.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점은 물체의 질량과 힘의 크기에 따른 낙하운동하는 물체의 속도 변화이다. 예상이 가는 데로, 힘의 크기는 물체의 낙하속도와 비례한다. 그러나, 물체의 질량은 물체의 낙하속도와 반비례한다. 갈릴레오의 낙하운동 실험[편집] 이번에는 낙하운동을 발전시킨 과학자 갈릴레오의 실험들을 보자. 무게에 따른 낙하속도[편집]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일 수록 더 빨리 떨어진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우주의 중심, 즉 지구로 떨어지고 싶어 하였고, 무거운 물체는 그 성질을 더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의 생각을 부정하였다. 그는 물체가 탑에 부딪치지 않도록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에서, 무공과 쇠공을 떨어뜨렸다. 가속도 9.8m/s로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왜 쇠구슬과 깃털을 떨어뜨리면 쇠구슬이 먼저 떨어질까? 그것은 깃털의 표면이 쇠구슬보다 넓기 때문이다. 물체는 공기에 닿는 표면이 넓다면, 같은 질량이어도 더 느리게 낙하한다. 참고 문헌[편집] 자유낙하 질량 좌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낙하운동&oldid=23749559" 분류: 중력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6년 10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2월 22일 (금) 05: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낙하운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낙하운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6년 10월) 낙하운동(落下運動, motion of falling body)이란 중력에 의해서 물체가 지면을 향해서 떨어지는 운동을 말한다. 낙하운동은 보통 물체와 중력이라는 힘이 서로 상호작용을 한 뒤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목차 1 이론 1.1 x축 1.2 y축 2 갈릴레오의 낙하운동 실험 2.1 무게에 따른 낙하속도 2.1.1 참고 문헌 이론[편집] 지금 부터는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이동 방향을 x축과 y축으로 정하자. 물론 여기는 3차원 공간이지만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으니 x축을 z축으로도 정해놓자. x축[편집] 사실 낙하운동의 법칙을 정확하게 설명해낸 과학자 뉴턴의 공식이 정확하게 들어 맞을려면 현실 속의 저항이 하나도 없는 무저항 공간에서 실험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기의 저항이나, 관성력 등의 저항 때문에 정확한 실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을 감안해 두자. 낙하운동에서 x축과 y축은 각각 움직인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질량을 가진 물체가 x축을 45도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면, -y축으로 이동하는 중력은 x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그런데 x축은 왜 방향이 틀어지고, 속도가 변할까? 그것은 현실 세계의 저항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낙하 실험을 할 때에 바람이 불 면 그 결과는 공식과 같지 않을 수 있다. y축[편집] 이제는 y축을 알아보자. 중력의 방향은 -y축이다. 이때, 낙하하는 물체의 속력은 힘과 운동이라는 두 운동량으로 알 수 있다. 힘과 운동 방향이 나란할 때에는 물체의 속력만 바뀌는데, 힘과 운동방향이 반대될 때는 속력이 감소하고, 방향이 같을 때는 증가한다. 그런데, 만약 힘과 운동 방향이 나란하지 않을 경우에는 비스듬한 경우와 수직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수직인 경우에는 힘이 운동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운동방향이 바뀌지만, 비스듬한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바꾸어서 힘과 운동방향이 둘 다 감소하거나 증가하게 된다.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점은 물체의 질량과 힘의 크기에 따른 낙하운동하는 물체의 속도 변화이다. 예상이 가는 데로, 힘의 크기는 물체의 낙하속도와 비례한다. 그러나, 물체의 질량은 물체의 낙하속도와 반비례한다. 갈릴레오의 낙하운동 실험[편집] 이번에는 낙하운동을 발전시킨 과학자 갈릴레오의 실험들을 보자. 무게에 따른 낙하속도[편집]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일 수록 더 빨리 떨어진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우주의 중심, 즉 지구로 떨어지고 싶어 하였고, 무거운 물체는 그 성질을 더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의 생각을 부정하였다. 그는 물체가 탑에 부딪치지 않도록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에서, 무공과 쇠공을 떨어뜨렸다. 가속도 9.8m/s로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왜 쇠구슬과 깃털을 떨어뜨리면 쇠구슬이 먼저 떨어질까? 그것은 깃털의 표면이 쇠구슬보다 넓기 때문이다. 물체는 공기에 닿는 표면이 넓다면, 같은 질량이어도 더 느리게 낙하한다. 참고 문헌[편집] 자유낙하 질량 좌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낙하운동&oldid=23749559" 분류: 중력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6년 10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2월 22일 (금) 05: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틱 장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틱 장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틱 장애 ICD-10 F95 ICD-9 307.2 질병DB 33765 MeSH D013981 틱 장애(Tic disorder)는 신경 질환의 하나이다. 유아기에 발병하기 쉬우며, 청소년이나 어른들도 스트레스 때문에 틱장애인이 될 수 있다. 주된 증상은 몸(특히 손)의 흔들림으로, 유인은 스트레스에 의하는 것이 많고, 유전에 의한 가능성도 있다. 취미활동 등으로 스트레스가 완화되면 틱장애도 완화가 된다. 목차 1 증상 2 원인 3 치료 4 관련 항목 5 각주 6 참고 자료 증상 뚜렷한 목적 없이 특정한 근육에 일어나는 불수의적(不隨意的)인 운동이다. 아래와 같은 증상이 한 장소 안에 생기는 일도 있으나, 팔을 움찔 움직이고 얼굴을 찡그린다든가 하는 2개소 이상에 출현하는 일도 있고, 또한 연이어 장소가 옮겨 가는 경우도 있다.[1] 머리를 흔든다. 얼굴을 찡그린다. 눈을 계속 깜박거린다. 코를 킁킁거린다. 헛기침을 한다. 어깨나 팔·다리 등을 움찍거린다. 한숨을 쉰다. 이상한 소리(奇聲)를 발한다. 원인 틱병은 그 발단(發端)에 있어서는 목적을 가진 반사적 동작이었으나 후에는 불수의적(不隨意的)으로 반복하게 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결막염으로 눈을 깜박거리던 것이 후에 자동적이 되었다든지, 모자가 머리에 맞지 않아서 얼굴을 찡그리던 것이 후에까지 지속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기질적(器質的) 원인(뇌염의 후유증 등)도 있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치료 틱병은 치료가 어려우며, 특히 많은 증상을 갖는 경우가 그러하다. 먼저 틱병의 증상 그 자체를 금지시켜 본다든지 하는 일은 전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증상에 어린이의 주의를 더욱더 집중시키는 것이 되므로 한층 없어지기 어려워진다. 전문가에 의한 심리요법과 병행하여, 틱병을 발생시키고 지속시킨 어린이의 환경에 개재하는 문제점을 개선하여 어린이가 환경에 대해서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원조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2] 관련 항목 투렛증후군 모욕증 각주 ↑ 증상 -'틱병', 《글로벌 세계 대백과》 ↑ 치료 -'틱병',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고 자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GND: 4185414-7 NDL: 0057651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틱_장애&oldid=24490453" 분류: 소아기 및 청소년기에 주로 발병하는 기타 행동 및 정서장애어린이투렛 증후군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보기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Englishفارسی日本語NederlandsSvenska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14:1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빌리 그레이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빌리 그레이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본명 윌리엄 프랭클린 그레이엄 주니어(William Franklin Graham Jr.) 출생 1918년 11월 7일(1918-11-07)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사망 2018년 2월 21일 (99세)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직업 목사, 저술가 언어 영어 국적 미국 활동기간 1941년 ~ 2018년 장르 기독교역사학 저술 배우자 루스 그레이엄 (m.1943 –2007) 종교 침례교 웹사이트 BillyGraham.org 빌리 그레이엄(William Franklin Graham Jr., 혹은 Billy Graham, 문화어: 빌리 그라함, 1918년 11월 7일 ~ 2018년 2월 21일)은 미국의 남침례회 목사이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트럼프 대통령 시절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 조언자였다.[1] 그레이엄은 역사상 존재했던 개신교도 중에서 전 세계에 있는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한 목회자였다.[2] 그의 측근에 따르면, 1993년 한 해 동안 2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빌리 그레이엄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였다.[3] 라디오 청취와 텔레비전 시청을 포함해서 그레이엄의 생애 동안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22억명에 달한다.[2] 목차 1 생애 2 신학 3 전도집회 4 한국 관련 5 전도협회 6 논란 7 저서 8 출처 생애[편집] 빌리 그레이엄이 어렸을 때 살았던 집 1918년 11월 7일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샬럿 부근 농촌에서 Morrow Coffey 와 William Franklin Graham 의 아들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해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플로리다 성서신학교(Florida Bible Institute)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휘튼 대학교(Wheaton College)에 진학하였다. 1943년에 대학생시절 만난 루스 벨(Ruth Bell)과 결혼했다. 그들은 지지(Virginia (Gigi)); 앤(Anne); 루스(Ruth) 세 딸과 두 아들, 프랭크린(Franklin):네드( Ned)를 합쳐 모두 5명의 아이를 가졌다. 2018년 2월 21일에 소천하였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시신은 루이지애나 주립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만든 송판으로 만들어진 관에 누여 젔고 시신은 장례식 전 워싱턴 DC로 잠시 옮겨져 국회의사당 로턴다(원형 홀)에 이틀간 안치되어 일반 시민의 조문을 받았다. 일반의 조문을 마치고 시신은 3월 1일 고인의 고향 노스 캐롤라이나 샬럿으로 다시 옮겨 3월 2일 20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빌리 그레이엄 도서관 옆에 설치한 천막에서 장례식이 엄수됐다. 한국의 김장환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 장례식에 초청되어 외국 목사를 대표해서 조사를 낭독했다. 고인의 시신은 지난 2007년에 별세한 부인 고(故) 루스 그레이엄의 곁에 묻혔다. 일리노이주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로 부임 1950년대 복음주의 성격의 기독교잡지인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를 창간. 2018년 2월 21일 9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신학[편집] 빌리 그레이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임을 주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복음주의자이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복음주의운동을 통해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로마 가톨릭교회 및 진보적 그리스도인들과도 기꺼이 대화를 하였다. 우리시대의 위대한 설교자들(브니엘 펴냄)에 따르면 빌리 그레이엄은 결식아동을 돕는 자선활동도 하고 있는데, 자선활동이 빈곤을 퇴치하지 못함은 알지만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도집회[편집] 빌리 그레이엄은 일생동안 400번이 넘는 전도집회(Crusade)를 전세게 6개 대륙을 다니며 185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개최했다. 그의 첫 전도집회는 1947년 9월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Grand Rapids)에서 열었는데 6,000명의 청중이 모였다. 그때 그레이엄의 나이는 28세였다. 1954년 영국 런던에서는 12주동안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뉴욕에서는 1957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5주 동안 전도집회를 열어 최장기간의 집회가 되었다. 가장 많은 청중이 모인 집회는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집회로 110만명이 모였다.[4][5] 전도집회에서 그의 멧세지는 주로 하나님의 사랑과 회개를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간결하여 누구든지 이해하고 감동받기 쉽게 전달하였다. 한국 관련[편집] 그는 1952년 한국전쟁 때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6] 부산과 대구, 서울에서 한국인을 위해 집회를 열었고, 일선지구에 있는 미 장병을 위문하고 성탄 메시지를 전했다. 부산에서 12월17일 야외집회에는 함태영 부통령이 참석했다. 한경직 목사의 통역으로 집회를 열었고 12월18일 부산에서 마지막 집회에서는 8000명이 모였다. 서울집회는 한경직 목사가 담임하신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통역으로 갖었다.[7] 한국방문중에 쓴 일기를 "당신 아들을 전쟁터에서 보았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이듬해에 발간하여 책 판매에서 얻어진 수익 전액을 한국전쟁 구호금과 선교비로 한국에 보냈다.[8] 1958년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등 당시 정부 요인이 참관한 가운데 집회를 개최하였다. 1973년 한국전도 대회는 한경직목사가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하여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5일에 걸친 전도집회를 김장환 목사의 통역으로 개최했다. 마지막 날 집회에선 110만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집회 역사상 최다수가 모인 집회가 되었다. 1984년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도 여의도를 방문하여 설교를 하였다. 1992년과 1994년에 북한의 김일성 전 주석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하였다. 1997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인 루스 벨 그레이엄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초청받아 장녀 지지와 차남 네드를 대동하고 평양을 방문하였다.[9] 전도협회[편집]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50년에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BGEA)[10]를 설립했다. 전도협회 본부는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에서 시작했는데 1999년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샬럿(Charlotte, North Carolina)으로 옮겼다. 전도협회는 아래와 같은 사업을 했다. "결단의 시간" (Hour of Decision), 매주 전 세계로 나가는 라디오 방송으로 50년 넘게 운영[11] "나의 대답" (My Answer), 미국내 여러 신문에 개재된 고정 칼럼으로 트리뷴 미디어 서비스가 공급 "결단" (Decision), 전도협회 발행의 잡지 "크리스처니티 투데이" (Christianity Today), 1956년부터 발행한 복음주의 기독교 잡지[12] 논란[편집]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밋 롬니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는 이단이 아니라고 표명하여 미국 기독교계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였다.[13] 그의 구원론은 수용주의적인 면을 보여준다고 평가를 한다. 저서[편집] 빌리 그레이엄은 30권이 넘는 여러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많은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Angels;God's Secret Agents"(천사:하나님의 비밀 에이전트)는 출판한지 90일 만에 백만부를 넘어선 기록을 세웠다. 《Just As I Am》(내 모습 그대로,1997년작)- 빌리 그레이엄의 자서전이다. 베스트 셀러인 다섯권의 책중 하나이다. 《인생》:빌리 그레이엄의 설교집이다. 한국어판은 청림출판에서 출판하였다. 《I saw your sons at war》(당신 아들을 전쟁터에서 보았습니다, 1953년출판)-빌리 그레이엄은 1952년 12월 한국을 방문하여 일선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부산과 서울에서 한국인에게 전도집회를 열어 복음을 전하였다. 이 책은 한국 방문기간중에 일기형식으로 쓴 기행문이다.[14] 출처[편집] ↑ “힘 있는 목사: 빌리 그레이엄과 대통령들(Pastor to Power: Billy Graham and the Presidents)”. ABC news. 2009년 10월 25일에 확인함.  ↑ 가 나 “빌리 그레이엄: 사명을 감당한 사람(BILLY GRAHAM: A MAN WITH A MISSION.)(SPECIAL SECTION)”. Cincinnati Post. 2002년 6월 27일. 2011년 8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8월 18일에 확인함.  ↑ Time, God's Billy Pulpit Archived 2008년 4월 10일 - 웨이백 머신, November 15, 1993 ↑ “Prophecy and Politics”. Christianity Today. 2011년 11월 21일에 확인함.  ↑ 빌리 그래엄 목사, 한국 수 차례 방문 복음활동..1974년 여의도 110만 운집(한국일보) ↑ (1952년성탄절 한국방문 여정표:영문) Christmas in Korea-1952 Timeline Wheaton College ↑ [1] "빌리 그레이엄 목사: 그의 첫 한국방문과 알버커키", 광야의 소리 2018년3-4월호 (ilovenm.blogspot.com) ↑ [2] ("당신 아들을 전쟁터에서 보았습니다", 책 소개 :영문) "I saw your sons at war" ↑ Ruth Bell Graham concluded historic return trip to North Korea< ↑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공식 사이트(영문) ↑ Hour of Decision On Line ↑ On-Line Christianity Today ↑ [3] 크리스천투데이 2012.10.28. 롬니 공개 지지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 교계 비판 직면 ↑ [4] Korean war Educator "I saw your sons at war" 전거 통제 WorldCat VIAF: 99838169 LCCN: n79054798 ISNI: 0000 0000 8169 3670 GND: 118541390 SELIBR: 188541 SUDOC: 128939761 BNF: cb11905642n (데이터) BIBSYS: 90140902 뮤직브레인즈: a6ce211b-d6e0-4e6e-bd62-e7046194e6e6 NDL: 00441472 NKC: jn20000602250 BNE: XX114421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빌리_그레이엄&oldid=24381715" 분류: 1918년 태어남2018년 죽음스코틀랜드계 미국인미국의 목회자미국의 저술가미국의 반공주의자미국의 자서전 작가미국의 침례교도민주당 (미국)의 정치인공화당 (미국) 당원복음성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미국의 인도주의자숨은 분류: 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eilgeGalegoHausa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Malagasyമലയാളംमराठीمازِرونی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Zeêuws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12: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스푸트니크 충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푸트니크 충격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푸트니크 쇼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푸트니크 1호,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 스푸트니크 쇼크)은 1957년 10월 4일 소비에트 연방이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이 받은 과학기술 · 교육부문의 충격을 말한다. 목차 1 당시의 미 · 소의 관계 2 스푸트니크의 발사 이후 3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3.1 과학 3.2 교육 3.3 국방 4 같이 보기 5 외부 링크 당시의 미 · 소의 관계[편집] 1950년대 미국과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자본주의진영과 공산주의진영. 곧, 두 냉전 세계의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자본주의국가들은 소련을 미국에 대항할 만한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세계대전 내내 나치를 주로 상대하던 소련이었지만 미국이나 영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버티기 어려웠다고 여겼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장거리 미사일과 같은 무기체계와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서 당연히 자신들이 앞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푸트니크의 발사 이후[편집] 그런 와중에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소련의 흐루쇼프는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진영은 단순한 체제선전용 허풍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이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자본주의국가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대륙을 넘어설 수 있는 로켓 기술을 소련이 먼저 보유하면서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의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포와 위기감을 준 것이다. 게다가 소련은 뒤이어 스푸트니크 2호의 발사에도 성공하는데, 여기에는 라이카(Lika)라는 개를 실어 쏘아올렸다. 즉 생명체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의 무게는 500kg에 달했는데, 이것은 대용량의 수소폭탄을 실은 미사일을 쏘아올릴 만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자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1957년 벵가드 위성을 쏘아올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1.6kg에 불과한 벵가드는 1m 정도 올라간 뒤 폭발하여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다 1958년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하게 된다.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편집] 이렇게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진영에게 스푸트니크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바로 이것을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하는데, 미국은 우주개발이나 군비확장과 관련한 과학·기술 분야는 물론 교육 분야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과학[편집] 미 항공 우주국(NASA,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의 창설 《미 항공 우주국》(NASA)은 스푸트니크 쇼크를 계기로 1958년 창설된 미국의 대통령 직속 기구이다. 미 항공 우주국에서는 머큐리(1인승 인공위성 발사계획), 제미니(2인승 우주선 발사계획), 아폴로 계획(달에 인간을 착륙시키려는 계획)을 비롯한 많은 우주 탐사 계획을 진행시켰고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를 통해 인류 최초로 달에 사람을 내려보내기도 하였다. 아폴로 계획은 1972년 아폴로 17호까지 모두 6회에 걸쳐 달에 착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는 스카이랩(우주정거장 설치계획)이 진행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우주왕복선 계획을 진행하였으며 1990년대는 화성 등 행성탐사를 위해 무인 로봇탐사선들을 보냈고, 현재 다른 국가들과 함께 2008년 완성을 목표로 국제우주정거장(ISS)을 건설중이다. 인터넷의 개발 미국은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로 장거리 미사일의 공격에 위기감을 겪게 되었는데, 특히 소련이 핵미사일을 미국 본토에 퍼부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만약 소련의 미사일 공격으로 미국 본토의 주요 통신망이 파괴되는 경우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에 대비한 비상 수단으로 케이블이나 무선 데이터 통신망을 활용한 통신수단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최초의 인터넷인 알파넷(ARPANET,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Network)이며 군 기관과 국가 주요기관을 연결하는 통신수단이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이르러 알파넷은 군이 아닌 일반에게도 공개되어 미국 내 50여개 대학과 연구소들이 이 통신망으로 연결되었고, 그 활용도가 엄청나게 급증하여 일반인을 위한 알파넷을 따로 분리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인터넷이 된 것이다. 교육[편집] 기초학문의 교육을 중시(본질주의 교육의 득세) 스푸트니크 쇼크는 기초 학문의 교육을 중요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미국 교육을 장악하고 있던 진보주의 교육이 막을 내리고 본질주의 교육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진보주의 교육은 학습자의 〈창의성〉과 〈흥미〉를 중요시하는 교육이었는데, 학습에는 흥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보주의 교육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되고, 학습자의 흥미나 관심은 기초학문을 배우는 동안에는 유보되어야 한다는 본질주의 교육에 힘을 싣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초·중등학교의 교육과정에서 기초학문(셈하기와 같은), 특히 수학이나 과학 분야의 기초학문을 대단히 중요시하게 되었다. 또한 교사의 권위를 높이고 훈육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외국의 고급 인력에 대한 개방 정책 스푸트니크의 발사에 대항하는 미사일을 발사할 즈음, 미국은 세계대전 후 넘어온 독일 출신의 과학자들에게 그 연구를 맡기지 않았다. 미국 출신의 과학자들도 능히 해 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뱅가드가 실패하고 독일 출신의 과학자들에게 기회가 넘어갔으며 이후 성공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국수주의적인 태도가 미국의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고, 외국의 고급 인력에 대한 개방 정책을 펴게 된다. 지금도 일반 이민자는 입국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고급 인력의 경우 어렵지 않게 미국으로의 이민이 가능하다. 국방[편집] 미 국방부는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개발 계획인 폴라리스 계획을 시작했다. 또한 폴라리스 개발을 위해 복잡한 프로젝트를 상호 관련있는 간단한 작업까지 분해하여, 그 전후 관계 등 관련 사항을 확인하고 작업 견적 및 관리 방법인 퍼트(PERT)와 같은 프로젝트 관리 기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25일 특별 양원 합동 회의 석상에서 10년 이내에 인간을 달에 보낼 것이라고 선언하고, 아폴로 계획의 목표를 달 착륙으로 변경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스푸트니크 계획 외부 링크[편집] (영어) 로저 D. 로니어스: 스퓨트닉과 우주 시대의 기원, nasa.gov vdeh냉전USA  · USSR  · ANZUS  · NATO  · NAM  · SEATO  · WarPac 서방권  · 동구권1940년대 후크발라합 반란 데케므브리아나 얄타 회담 발트 3국 유격전 숲의 형제들 프리뵈 작전 정글 작전 발트 3국 점령 저주받은 병사들 언싱커블 작전 포츠담 회담 고젠코 사건 마스터돔 작전 빌리거 작전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1946년 이란 위기 그리스 내전 케르키라 해협 사건 터키 해협 위기 Restatement of Policy on Germany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트루먼 독트린 아시아 관계 회의 마셜 플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 티토-스탈린 결별 베를린 봉쇄 서구의 배신 철의 장막 동구권 서구권 제2차 국공 내전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알바니아 정부 전복 시도 1950년대 죽의 장막 한국 전쟁 매카시즘 1953년 이란 쿠데타 1953년 동독 폭동 사태 멕시코 더러운 전쟁 브리커 헌법 수정안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베트남 분할 1차 타이완 해협 위기 1955년 제네바 정상 회담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1956년 포즈난 시위 1956년 헝가리 혁명 수에즈 위기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글라디오 작전 아랍 냉전 1957년 시리아 위기 1958년 레바논 위기 이라크 7월 혁명 스푸트니크 충격 2차 타이완 해협 위기 쿠바 혁명 부엌 논쟁 중소 분쟁 1960년대 콩고 위기 U-2기 사건 피그스만 침공 1960년 터키 쿠데타 소련-알바니아 결별 베를린 장벽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앙골라 독립 전쟁 기니바사우 독립 전쟁 모잠비크 독립 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인도-중국 전쟁 사라왁 공산당 반란 이라크 라마단 혁명 1963년 시리아 쿠데타 베트남 전쟁 1964년 브라질 쿠데타 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 (1955년~1956년)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 인도네시아 신질서 전이 도미노 이론 ASEAN 선언 라오스 내전 1966년 시리아 쿠데타 아르헨티나 혁명 대한민국 DMZ 충돌 그리스 군사 정권 푸에블로 호 납치 사건 6일 전쟁 소모전 도파르 반란 1968년 시위 68 혁명 문화 대혁명 프라하의 봄 말레이시아 공산당 반란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라크 바트당 혁명 구야시 공산주의 중소 국경 분쟁 필리핀 공산주의자 반란 예멘 수정 운동 1970년대 데탕트 핵확산방지조약 검은 9월 1970년 시리아 수정 운동 캄보디아 내전 현실정치 핑퐁 외교 1971년 터키 쿠데타 이집트 수정 운동 베를린 4국 조약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1972년 북예멘-남예멘 전쟁 1973년 칠레 쿠데타 욤키푸르 전쟁 카네이션 혁명 전략 무기 제한 협상 로디지아 부시 전쟁 앙골라 내전 모잠비크 내전 오가단 전쟁 에티오피아 내전 레바논 내전 알바니아-중국 결별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중국-베트남 전쟁 이란 혁명 콘도르 작전 더러운 전쟁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사우르 혁명 뉴주얼 운동 1972년 헤라트 봉기 라인 강까지 7일 작전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80년 및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 1980년 터키 쿠데타 그레나다 침공 1986년 흑해 사건 1988년 흑해 충돌 사건 연대자유노조 소련의 반응 콘트라 반군 중앙아메리카 위기 RYAN 작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에이블 아처 83 전략방위구상 피플 파워 혁명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989년 톈안먼 사건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89년 혁명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1990년대 1990년 몽골 혁명 예멘의 통일 독일의 통일 알바니아 공산주의 정권 붕괴 유고슬라비아 해체 소련의 붕괴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동결분쟁 압하지아 문제 양안 문제 한반도 문제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 남오세티야 문제 트란스니스트리아 문제 인도-중국 국경 분쟁 대외 정책 트루먼 독트린 봉쇄 정책 아이젠하워 독트린 도미노 이론 할슈타인 독트린 케네디 독트린 평화적 공존 동방 정책 존슨 독트린 브레즈네프 독트린 닉슨 독트린 울브리히트 독트린 카터 독트린 레이건 독트린 롤백 정책 푸에르토리코 주권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시카고 학파 케인스 경제학 통화주의 신고전파 경제학 레이거노믹스 공급경제학 대처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레닌주의 카스트로주의 유럽공산주의 게바라주의 호자주의 주체사상 마오쩌둥주의 낙살리즘 스탈린주의 티토주의 호치민사상 트로츠키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조직 ASEAN CIA 코메콘 EEC KGB NAM SAARC 사파리 클럽 MI6 슈타지 프로파간다 적극적 조치 이즈베스티야 프라우다 자유의 십자군 자유유럽방송 적색공포 타스 미국의 소리 러시아의 소리 경쟁 군비 경쟁 핵 군비 경쟁 우주 경쟁 상호확증파괴 더 보기 벼랑끝전술 NATO-러시아 관계 미국의 소련 스파이 미국의 러시아 스파이 미국-소련 관계 미국-소련 정상 회담 신냉전 분류  · 위키공용 사진  · 연표  · 분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푸트니크_충격&oldid=20157001" 분류: 미국의 냉전사스푸트니크 계획1957년 10월1957년 미국미국-소련 관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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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을 쏘아올릴 만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자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1957년 벵가드 위성을 쏘아올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1.6kg에 불과한 벵가드는 1m 정도 올라간 뒤 폭발하여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다 1958년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하게 된다.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편집] 이렇게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진영에게 스푸트니크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바로 이것을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하는데, 미국은 우주개발이나 군비확장과 관련한 과학·기술 분야는 물론 교육 분야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과학[편집] 미 항공 우주국(NASA,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의 창설 《미 항공 우주국》(NASA)은 스푸트니크 쇼크를 계기로 1958년 창설된 미국의 대통령 직속 기구이다. 미 항공 우주국에서는 머큐리(1인승 인공위성 발사계획), 제미니(2인승 우주선 발사계획), 아폴로 계획(달에 인간을 착륙시키려는 계획)을 비롯한 많은 우주 탐사 계획을 진행시켰고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를 통해 인류 최초로 달에 사람을 내려보내기도 하였다. 아폴로 계획은 1972년 아폴로 17호까지 모두 6회에 걸쳐 달에 착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는 스카이랩(우주정거장 설치계획)이 진행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우주왕복선 계획을 진행하였으며 1990년대는 화성 등 행성탐사를 위해 무인 로봇탐사선들을 보냈고, 현재 다른 국가들과 함께 2008년 완성을 목표로 국제우주정거장(ISS)을 건설중이다. 인터넷의 개발 미국은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로 장거리 미사일의 공격에 위기감을 겪게 되었는데, 특히 소련이 핵미사일을 미국 본토에 퍼부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만약 소련의 미사일 공격으로 미국 본토의 주요 통신망이 파괴되는 경우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에 대비한 비상 수단으로 케이블이나 무선 데이터 통신망을 활용한 통신수단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최초의 인터넷인 알파넷(ARPANET,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Network)이며 군 기관과 국가 주요기관을 연결하는 통신수단이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이르러 알파넷은 군이 아닌 일반에게도 공개되어 미국 내 50여개 대학과 연구소들이 이 통신망으로 연결되었고, 그 활용도가 엄청나게 급증하여 일반인을 위한 알파넷을 따로 분리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인터넷이 된 것이다. 교육[편집] 기초학문의 교육을 중시(본질주의 교육의 득세) 스푸트니크 쇼크는 기초 학문의 교육을 중요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미국 교육을 장악하고 있던 진보주의 교육이 막을 내리고 본질주의 교육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진보주의 교육은 학습자의 〈창의성〉과 〈흥미〉를 중요시하는 교육이었는데, 학습에는 흥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보주의 교육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되고, 학습자의 흥미나 관심은 기초학문을 배우는 동안에는 유보되어야 한다는 본질주의 교육에 힘을 싣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초·중등학교의 교육과정에서 기초학문(셈하기와 같은), 특히 수학이나 과학 분야의 기초학문을 대단히 중요시하게 되었다. 또한 교사의 권위를 높이고 훈육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외국의 고급 인력에 대한 개방 정책 스푸트니크의 발사에 대항하는 미사일을 발사할 즈음, 미국은 세계대전 후 넘어온 독일 출신의 과학자들에게 그 연구를 맡기지 않았다. 미국 출신의 과학자들도 능히 해 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뱅가드가 실패하고 독일 출신의 과학자들에게 기회가 넘어갔으며 이후 성공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국수주의적인 태도가 미국의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고, 외국의 고급 인력에 대한 개방 정책을 펴게 된다. 지금도 일반 이민자는 입국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고급 인력의 경우 어렵지 않게 미국으로의 이민이 가능하다. 국방[편집] 미 국방부는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개발 계획인 폴라리스 계획을 시작했다. 또한 폴라리스 개발을 위해 복잡한 프로젝트를 상호 관련있는 간단한 작업까지 분해하여, 그 전후 관계 등 관련 사항을 확인하고 작업 견적 및 관리 방법인 퍼트(PERT)와 같은 프로젝트 관리 기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25일 특별 양원 합동 회의 석상에서 10년 이내에 인간을 달에 보낼 것이라고 선언하고, 아폴로 계획의 목표를 달 착륙으로 변경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스푸트니크 계획 외부 링크[편집] (영어) 로저 D. 로니어스: 스퓨트닉과 우주 시대의 기원, nasa.gov vdeh냉전USA  · USSR  · ANZUS  · NATO  · NAM  · SEATO  · WarPac 서방권  · 동구권1940년대 후크발라합 반란 데케므브리아나 얄타 회담 발트 3국 유격전 숲의 형제들 프리뵈 작전 정글 작전 발트 3국 점령 저주받은 병사들 언싱커블 작전 포츠담 회담 고젠코 사건 마스터돔 작전 빌리거 작전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1946년 이란 위기 그리스 내전 케르키라 해협 사건 터키 해협 위기 Restatement of Policy on Germany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트루먼 독트린 아시아 관계 회의 마셜 플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 티토-스탈린 결별 베를린 봉쇄 서구의 배신 철의 장막 동구권 서구권 제2차 국공 내전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알바니아 정부 전복 시도 1950년대 죽의 장막 한국 전쟁 매카시즘 1953년 이란 쿠데타 1953년 동독 폭동 사태 멕시코 더러운 전쟁 브리커 헌법 수정안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베트남 분할 1차 타이완 해협 위기 1955년 제네바 정상 회담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1956년 포즈난 시위 1956년 헝가리 혁명 수에즈 위기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글라디오 작전 아랍 냉전 1957년 시리아 위기 1958년 레바논 위기 이라크 7월 혁명 스푸트니크 충격 2차 타이완 해협 위기 쿠바 혁명 부엌 논쟁 중소 분쟁 1960년대 콩고 위기 U-2기 사건 피그스만 침공 1960년 터키 쿠데타 소련-알바니아 결별 베를린 장벽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앙골라 독립 전쟁 기니바사우 독립 전쟁 모잠비크 독립 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인도-중국 전쟁 사라왁 공산당 반란 이라크 라마단 혁명 1963년 시리아 쿠데타 베트남 전쟁 1964년 브라질 쿠데타 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 (1955년~1956년)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 인도네시아 신질서 전이 도미노 이론 ASEAN 선언 라오스 내전 1966년 시리아 쿠데타 아르헨티나 혁명 대한민국 DMZ 충돌 그리스 군사 정권 푸에블로 호 납치 사건 6일 전쟁 소모전 도파르 반란 1968년 시위 68 혁명 문화 대혁명 프라하의 봄 말레이시아 공산당 반란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라크 바트당 혁명 구야시 공산주의 중소 국경 분쟁 필리핀 공산주의자 반란 예멘 수정 운동 1970년대 데탕트 핵확산방지조약 검은 9월 1970년 시리아 수정 운동 캄보디아 내전 현실정치 핑퐁 외교 1971년 터키 쿠데타 이집트 수정 운동 베를린 4국 조약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1972년 북예멘-남예멘 전쟁 1973년 칠레 쿠데타 욤키푸르 전쟁 카네이션 혁명 전략 무기 제한 협상 로디지아 부시 전쟁 앙골라 내전 모잠비크 내전 오가단 전쟁 에티오피아 내전 레바논 내전 알바니아-중국 결별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중국-베트남 전쟁 이란 혁명 콘도르 작전 더러운 전쟁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사우르 혁명 뉴주얼 운동 1972년 헤라트 봉기 라인 강까지 7일 작전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80년 및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 1980년 터키 쿠데타 그레나다 침공 1986년 흑해 사건 1988년 흑해 충돌 사건 연대자유노조 소련의 반응 콘트라 반군 중앙아메리카 위기 RYAN 작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에이블 아처 83 전략방위구상 피플 파워 혁명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989년 톈안먼 사건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89년 혁명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1990년대 1990년 몽골 혁명 예멘의 통일 독일의 통일 알바니아 공산주의 정권 붕괴 유고슬라비아 해체 소련의 붕괴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동결분쟁 압하지아 문제 양안 문제 한반도 문제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 남오세티야 문제 트란스니스트리아 문제 인도-중국 국경 분쟁 대외 정책 트루먼 독트린 봉쇄 정책 아이젠하워 독트린 도미노 이론 할슈타인 독트린 케네디 독트린 평화적 공존 동방 정책 존슨 독트린 브레즈네프 독트린 닉슨 독트린 울브리히트 독트린 카터 독트린 레이건 독트린 롤백 정책 푸에르토리코 주권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시카고 학파 케인스 경제학 통화주의 신고전파 경제학 레이거노믹스 공급경제학 대처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레닌주의 카스트로주의 유럽공산주의 게바라주의 호자주의 주체사상 마오쩌둥주의 낙살리즘 스탈린주의 티토주의 호치민사상 트로츠키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조직 ASEAN CIA 코메콘 EEC KGB NAM SAARC 사파리 클럽 MI6 슈타지 프로파간다 적극적 조치 이즈베스티야 프라우다 자유의 십자군 자유유럽방송 적색공포 타스 미국의 소리 러시아의 소리 경쟁 군비 경쟁 핵 군비 경쟁 우주 경쟁 상호확증파괴 더 보기 벼랑끝전술 NATO-러시아 관계 미국의 소련 스파이 미국의 러시아 스파이 미국-소련 관계 미국-소련 정상 회담 신냉전 분류  · 위키공용 사진  · 연표  · 분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푸트니크_충격&oldid=20157001" 분류: 미국의 냉전사스푸트니크 계획1957년 10월1957년 미국미국-소련 관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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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불 수호 통상 조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 (大朝鮮國·大法民主國通商朝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112호 (1998년 12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제작시기 조선 고종 23년(1886년) 소유자 국립중앙도서관 조불 수호 통상 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또는 대조선국 대법민주국 통상 조약(大朝鮮國大法民主國通商朝約)[1]은 1886년(고종 23) 6월 4일(음력 5월 3일)에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이다.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1874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미국 등에 뒤이어서 프랑스와도 우호 통상 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조약에서 천주교의 포교가 직접 규정되지는 아니하였으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사실상 포교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과 세칙, 세칙장정, 선후속약의 1책 33장의 한문 필사본(국립귀 642, 청구기호 0234-2-11)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등록되어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목차 1 체결 경위 1.1 프랑스의 조선 식민지화 추진 1.2 병인양요 1.3 조선의 대외 조약 2 조약의 체결 3 내용 4 체결 이후 5 함께 보기 6 각주 체결 경위[편집] 프랑스의 조선 식민지화 추진[편집] 프랑스는 가톨릭 교회의 선교 자유를 앞세워 조선을 점령하여 식민지화 하려 하였다. 1855년 10월 프랑스 해군식민부 장관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건 및 기회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사명을 받은 게랭(Guérin,1796~1877) 제독은 비르지니호(Virginie)를 타고 1856년 7월~9월까지 조선 동해안 영흥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 덕적군도에 이르기까지 탐험하고 그 결과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아래와 같이 제기하였다. '모든 식민지화는 그 나라를 점령하는 것이어야 한다. 보병 6천, 마닐라에 상륙시킬 기마병 3백, 경포병 1중대로 이것을 점령하는데 족할 것이다. 가장 유리한 지점은 영흥일 것이다. 서해안의 항해를 아주 어렵게 하는 조류가 없고, 토지의 비옥, 정박상 안정, 수도와의 인접과 큰 강의 존재등이 이 지점을 선택하는 이유이다.'[2]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1846~1866년은 조선 천주교회에 평온기였기 때문에 양국 간에 충돌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 없었다. 또한 당시 조선 동쪽 해안 주변에는 어떠한 개항장도 없었고 동아시아 해역에서 프랑스의 해양 인프라 시설이나 선박의 수량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편 조선에 있는 신부 메스트르는 1857년 10월 15일 프랑스 정부에 조선의 수비 병력 등을 소상히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동아시아 해역에서 나타날 프랑스의 강한 역량이 조선을 프랑스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리라 소원하였다. 이에 북쪽으로부터 연안에 따라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입구에 관한 안내를 적어놓기도 하였다. 서울의 수비병은 5천~6천명인데 활과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왔기 때문에 프랑스군 한 부대면 전복할 수 있을 것이다.[3] 그러나 프랑스는 조선을 침략하는 대신 베트남의 코친차이나를 점령의 대상으로 채택했다. 이는 순전히 가톨릭 선교사들이 설득한 결과였다. 코친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는 이 곳에 해군 거점을 세우고 조선과 접촉하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4] 병인양요[편집] 1856년에 게랭 제독의 조선 해안 탐사 이후 프랑스는 중국과 베트남에서의 원정에 몰두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진격할 만한 여건도 부족했다.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은 철종 12년(1861) 초기부터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중 고종 3년(1866) 대금압령이 내려 12명의 선교사 중 9명이 학살되고 신도들도 수천명이 살해되었다. 천주교 탄압과 선교사 학살이야말로 프랑스에는 침략의 구실이 되었고 이는 병인양요로 발전하였다. 프랑스는 조선과 수차 국교를 맺으려 했으나 병인양요로 아직 감정이 좋지 않고, 종교 문제로 말미암은 오해와 마찰 때문에 국교가 지연되어 왔다.[5][6] 프랑스의 선교사들은 병인양요 이후 청나라로 탈출하여 교회의 재건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6] 흥선대원군이 하야(1874년)하고, 조선 내의 정세가 변동되자 다시 입국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종전보다 훨씬 완화되었다.[6] 흥선대원군이 실정하고 민씨정권이 수립되자 이듬해부터 블랑(Blanc) 외에 2명의 신부가 입국하였고, 고종 14년(1877)에는 리델 신부가 2명의 선교사를 인솔하고 재입국하였다. 리델신부 이하 선교사들이 다시 체포되기는 하였으나 국제적인 석방운동의 전개로 석방되었고, 이를 계기로 선교활동이 묵인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대외 조약[편집]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계기로 종래의 쇄국주의 정책에서 탈피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하게 될 기본 계기였던 서구제국과의 개국통상(開國通商) 관계의 길을 처음으로 트게 된다.[7] 문호가 개방되자 각국은 조선에 대한 통상을 요구하여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이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자, 이 사실은 유럽에도 알려져 영국(1882년)·독일(1883년)·러시아(1884년)·이탈리아(1884년)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프랑스도 조약을 맺기 위하여 서두르게 되었다.[6]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조영·조덕수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프랑스도 수교를 요청했으나, 단순히 통상조약의 차원이 아니고 신교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정식 교섭은 진전되지 못하였다. 북경에 주둔한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알베르 부레(Frédéric-Albert Bourée)는 한국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8] "늘 2선에 머물고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프랑스를 우회하거나 소외시킬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 정책의 골자였다.[8] 그는 텐진 영사관의 샤를르 디용(Charles Dillon)에게 사전 탐사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였다.[8]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1882년 5월 22일)된 직후인 1882년 6월 7일, 포함 루탱(Le Lutin) 호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샤를르 디용은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8] 그는 한국 지도층과 접견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영국인들과 체결한 조약과 유사한 조약 체결을 원하는 프랑스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쓰여 있다.[8] 따라서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정해지기 전에 기본원칙에 대한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8] 조약의 체결[편집]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아(러시아)수호통상조약·조일한성조약·청일천진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는 1886년(고종 23) 음력 3월에 중국 주재 프랑스 대사 코고르당(F. G. Cogordan : 과사당(戈司當))을 전권위원으로 인천에 파견하였고, 조선에서는 전권대신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督辨) 김만식(金晩植)과 회담하게 하여 음력 5월에 13관(款)으로 된 한불 수호 조약과 통상장정 및 선후속약(善後續約) 등에 조인을 완료했다.[6][9](→조선의 대외 관계) 1886년 6월 4일 마침내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5]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 및 세칙, 세칙장정, 선후속약으로 구성된 조약 내용은 한영 조약을 모방한 것으로서, 내용은 거의가 불평등조약이었다.[5][6] 조약 체결 시, 프랑스에서는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 위안스카이를 동원했으나, 고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10] 다만 조약을 맺을 때 제9관에 교회(敎誨)라는 2자와 학자든 통역이든 일꾼이든 조선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내용(제9관)을 어렵사리 삽입할 수 있었다.[10] 이것은 기존에 체결된 다른 나라와의 조약과 다른 점이었다. 프랑스 측은 이것으로서 선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해석하여, 선교 사업을 통한 교육 문화에 신국면을 타개한 것이다.[6] 한불 조약은 1887년(고종 24)에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 갈림덕(葛林德))가 와서 조선의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과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여 양국간의 정식수교가 수립되었다.[6] 내용[편집]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은 고종 23년(1886) 6월 4일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朝法修好通商條約)과 부속통상장정(附續通商章程)과 세칙(稅則), 세칙장정(稅則章程), 선후속약(善後續約)의 1책 33장의 한문 필사본(국립귀 642, 청구기호 0234-2-11)이다. 이 조약의 중요내용은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모방하였으나, 특기할 것은 전문 제9조 2항에 “교회(敎誨)”의 항목을 넣어 조선정부로부터 포교권을 인정받았다. 이 항목은 결국 최혜국(最惠國) 조관(條款)에 의거하여 미국과 구미제국에 불란서와 마찬가지로 포교는 물론 선교사업을 위한 교육기관도 운영할 수 있게 되어 조선의 선교사업을 통한 교육문화에 신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본문은 13조인데, 제1조는 양국간의 평화·친선·생명과 재산의 보호·조약 당사국과 제삼국간의 분쟁에 관한 조정건 등 2개항, 제2조는 양국의 외교대표 임명과 주재 등에 관련한 3개항, 제3조는 조선에 머무는 불란서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미치는 재판 관할권을 불란서 재판 당국에 위임하는 사항과 관련된 10개항, 제4조는 인천·원산·부산의 개항에 관련한 7개항, 제5조는 각국이 무역하는 상품의 관세에 대한 8개항, 제6조는 밀수입 상품에 대한 벌금과 위법행위 처벌에 관한 2개항, 제7조는 양국 선박중 난파선의 구조와 보호에 관한 5개항, 제8조는 양국의 군함이 각 항구에 입항시 그 처리와 관련한 4개항, 제9조는 양국의 교사와 통역의 임명과 학문교류, 포교에 관한 2개항, 제10조는 본 조약 실시일로부터 불란서인의 특권, 면제 및 수출입 관세에 관계되는 이권 등에 관한 사항, 제11조는 본 조약은 10년간의 유효성을 인정한 조항, 제12조는 본 조약은 불문과 한문으로 작성할 것과 불란서가 조선에 발송하는 일체의 공용통신에는 한역문(漢譯文)을 첨부할 것 등에 관한 2개항, 제13조는 서명·조인에 관한 비준서는 가능한 한 1년 이내에 한성에서 교환하기로 약정한 조항이다. 부속통상장정은 3조로 되어 있는 데, 제1조는 선박의 출입항 수속에 관한 7개항이고, 제2조는 하물의 양육(揚陸) 적재와 납세에 관한 10개항, 제3조는 세관 수입 보호에 관한 5개항으로 되어 있다. 세칙은 진구화(進口貨: Import Tariff)와 출구화(出口貨: Export Tariff)로 나누었다. 진구화는 6등급으로 나누어 제1등 면허화물, 제2등 치백추오화물(値百抽五貨物), 제3등 치백추칠오화물(値百抽七五貨物), 제4등 치백추십화물(値百抽十貨物), 제5등 치백추이십화물(値百抽二十貨物), 제6등 위금화물(違禁貨物)로 하였고, 출구화는 제1등 면세화물과 제2등 치백추오화물(値百抽五貨物)로 나누어 규정하였다. 세칙장정은 3조인데, 제1조는 수입품의 가격계산은 원산지 혹은 제조지에서의 현존가격에 적하와 보험 등의 비용을 부가한 것을 기초로 할 것, 제2조는 관세납부는 멕시코화 혹은 일본은원(日本銀圓)으로 납부할 것, 제3조는 수입과 수출에 관한 상기 관세표는 양국 관계당국간에 협약 후 처리할 것 등이다. 선후속약은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전권사절이 기재한 부록의 4개 조항인데, 제1조항은 조약전문 제2조에 대한 선언 내용으로, 체약대상국 중 일국이 개항 항구에 영사를 임명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영사의 기능을 제삼국관원에게 의뢰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제2조항은 조약전문 제3조에 의거하여 조선에 있는 불란서 국민에 대한 불란서 영사에게 인정된 재판권의 폐기에 대한 것이며, 제3조항은 조선과 이미 조약을 체결하였거나 장차 조약을 체결할 국가들이 해당 조약에 의거하여 그들의 국민에게 허여된 한양에서의 상업개설에 관한 허여된 권리를 양도한다면, 이 권리는 불란서 상인들을 위하여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 것이다. 제4조항은 본 조약의 제 조항은 불란서의 권력과 보호 아래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조약 전문과 권말에는 조인에 참여한 조선의 김만식과 법국의 데니(德尼: Owen Nickerson Denny)의 이름과 날짜가 명기되어 있다. 체결 이후[편집] 프랑스는 조선에 대한 외교 교섭 사무를 당분간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대리시켰으니 이것은 선교 사업(宣敎事業)을 중시하고 통상관계는 경시한 때문이다.[6] 조선은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 이후, 오스트리아(1892년)·벨기에·덴마크 등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7](→조선의 대외 관계) 조선은 천주교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는데도 이 조약을 계기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상복을 벗어 젖히고 자신들의 제복인 검은 수단 옷을 입고 개항장인 서울을 비롯해 원산, 용산, 인천, 부산 등지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10] 조약 체결 후 점차 개신교, 천주교에 대한 지금까지의 금압정책을 폐지하여 포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5] 함께 보기[편집] 병인양요 각주[편집] ↑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교회사연구소역《한불관계자료(1846~1856),(교회사연구1》한국교회사연구소,1977, P196 ↑ Cady,JohnK.《The Roots of French imperialism in EasternAsia》(Ithaca,N.Y, 1954)P191 ↑ 응웬응옥투이(NguyễnThịNgọcThủy), 〈19세기 조선-프랑스 관계와 베트남〉( 학위논문(석사)-- 인하대학교 대학원 일반대학원 : 한국학과 2014. 2) ↑ 가 나 다 라 송건호, 《송건호 전집 3 - 한국현대사 1》 한길사 (2002) 7쪽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불수호통상조약〉 ↑ 가 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구미 열강과의 관계〉 ↑ 가 나 다 라 마 바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저, 이향, 김정연 역,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 서양인이 본 한국인 800년》, 청년사(2001) 37쪽. ISBN 89-7278-348-X ↑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 기독신문.  ↑ 가 나 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 오백년 왕국의 종말》한길사 (2003) 106쪽 ISBN 89-356-5158-3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조불수호통상조약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열강세력 속의 조선〉"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문서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식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저작물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불_수호_통상_조약&oldid=24195100" 분류: 1886년 조약1886년 한국1886년 프랑스조선의 조약프랑스의 조약프랑스-한국 관계불평등 조약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국립중앙도서관 소장품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서울특별시 공개자료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0: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조불 수호 통상 조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 (大朝鮮國·大法民主國通商朝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112호 (1998년 12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제작시기 조선 고종 23년(1886년) 소유자 국립중앙도서관 조불 수호 통상 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또는 대조선국 대법민주국 통상 조약(大朝鮮國大法民主國通商朝約)[1]은 1886년(고종 23) 6월 4일(음력 5월 3일)에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이다.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1874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미국 등에 뒤이어서 프랑스와도 우호 통상 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조약에서 천주교의 포교가 직접 규정되지는 아니하였으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사실상 포교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과 세칙, 세칙장정, 선후속약의 1책 33장의 한문 필사본(국립귀 642, 청구기호 0234-2-11)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등록되어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목차 1 체결 경위 1.1 프랑스의 조선 식민지화 추진 1.2 병인양요 1.3 조선의 대외 조약 2 조약의 체결 3 내용 4 체결 이후 5 함께 보기 6 각주 체결 경위[편집] 프랑스의 조선 식민지화 추진[편집] 프랑스는 가톨릭 교회의 선교 자유를 앞세워 조선을 점령하여 식민지화 하려 하였다. 1855년 10월 프랑스 해군식민부 장관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건 및 기회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사명을 받은 게랭(Guérin,1796~1877) 제독은 비르지니호(Virginie)를 타고 1856년 7월~9월까지 조선 동해안 영흥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 덕적군도에 이르기까지 탐험하고 그 결과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아래와 같이 제기하였다. '모든 식민지화는 그 나라를 점령하는 것이어야 한다. 보병 6천, 마닐라에 상륙시킬 기마병 3백, 경포병 1중대로 이것을 점령하는데 족할 것이다. 가장 유리한 지점은 영흥일 것이다. 서해안의 항해를 아주 어렵게 하는 조류가 없고, 토지의 비옥, 정박상 안정, 수도와의 인접과 큰 강의 존재등이 이 지점을 선택하는 이유이다.'[2]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1846~1866년은 조선 천주교회에 평온기였기 때문에 양국 간에 충돌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 없었다. 또한 당시 조선 동쪽 해안 주변에는 어떠한 개항장도 없었고 동아시아 해역에서 프랑스의 해양 인프라 시설이나 선박의 수량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편 조선에 있는 신부 메스트르는 1857년 10월 15일 프랑스 정부에 조선의 수비 병력 등을 소상히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동아시아 해역에서 나타날 프랑스의 강한 역량이 조선을 프랑스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리라 소원하였다. 이에 북쪽으로부터 연안에 따라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입구에 관한 안내를 적어놓기도 하였다. 서울의 수비병은 5천~6천명인데 활과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왔기 때문에 프랑스군 한 부대면 전복할 수 있을 것이다.[3] 그러나 프랑스는 조선을 침략하는 대신 베트남의 코친차이나를 점령의 대상으로 채택했다. 이는 순전히 가톨릭 선교사들이 설득한 결과였다. 코친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는 이 곳에 해군 거점을 세우고 조선과 접촉하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4] 병인양요[편집] 1856년에 게랭 제독의 조선 해안 탐사 이후 프랑스는 중국과 베트남에서의 원정에 몰두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진격할 만한 여건도 부족했다.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은 철종 12년(1861) 초기부터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중 고종 3년(1866) 대금압령이 내려 12명의 선교사 중 9명이 학살되고 신도들도 수천명이 살해되었다. 천주교 탄압과 선교사 학살이야말로 프랑스에는 침략의 구실이 되었고 이는 병인양요로 발전하였다. 프랑스는 조선과 수차 국교를 맺으려 했으나 병인양요로 아직 감정이 좋지 않고, 종교 문제로 말미암은 오해와 마찰 때문에 국교가 지연되어 왔다.[5][6] 프랑스의 선교사들은 병인양요 이후 청나라로 탈출하여 교회의 재건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6] 흥선대원군이 하야(1874년)하고, 조선 내의 정세가 변동되자 다시 입국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종전보다 훨씬 완화되었다.[6] 흥선대원군이 실정하고 민씨정권이 수립되자 이듬해부터 블랑(Blanc) 외에 2명의 신부가 입국하였고, 고종 14년(1877)에는 리델 신부가 2명의 선교사를 인솔하고 재입국하였다. 리델신부 이하 선교사들이 다시 체포되기는 하였으나 국제적인 석방운동의 전개로 석방되었고, 이를 계기로 선교활동이 묵인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대외 조약[편집]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계기로 종래의 쇄국주의 정책에서 탈피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하게 될 기본 계기였던 서구제국과의 개국통상(開國通商) 관계의 길을 처음으로 트게 된다.[7] 문호가 개방되자 각국은 조선에 대한 통상을 요구하여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이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자, 이 사실은 유럽에도 알려져 영국(1882년)·독일(1883년)·러시아(1884년)·이탈리아(1884년)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프랑스도 조약을 맺기 위하여 서두르게 되었다.[6]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조영·조덕수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프랑스도 수교를 요청했으나, 단순히 통상조약의 차원이 아니고 신교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정식 교섭은 진전되지 못하였다. 북경에 주둔한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알베르 부레(Frédéric-Albert Bourée)는 한국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8] "늘 2선에 머물고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프랑스를 우회하거나 소외시킬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 정책의 골자였다.[8] 그는 텐진 영사관의 샤를르 디용(Charles Dillon)에게 사전 탐사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였다.[8]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1882년 5월 22일)된 직후인 1882년 6월 7일, 포함 루탱(Le Lutin) 호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샤를르 디용은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8] 그는 한국 지도층과 접견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영국인들과 체결한 조약과 유사한 조약 체결을 원하는 프랑스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쓰여 있다.[8] 따라서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정해지기 전에 기본원칙에 대한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8] 조약의 체결[편집]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아(러시아)수호통상조약·조일한성조약·청일천진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는 1886년(고종 23) 음력 3월에 중국 주재 프랑스 대사 코고르당(F. G. Cogordan : 과사당(戈司當))을 전권위원으로 인천에 파견하였고, 조선에서는 전권대신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督辨) 김만식(金晩植)과 회담하게 하여 음력 5월에 13관(款)으로 된 한불 수호 조약과 통상장정 및 선후속약(善後續約) 등에 조인을 완료했다.[6][9](→조선의 대외 관계) 1886년 6월 4일 마침내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5]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 및 세칙, 세칙장정, 선후속약으로 구성된 조약 내용은 한영 조약을 모방한 것으로서, 내용은 거의가 불평등조약이었다.[5][6] 조약 체결 시, 프랑스에서는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 위안스카이를 동원했으나, 고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10] 다만 조약을 맺을 때 제9관에 교회(敎誨)라는 2자와 학자든 통역이든 일꾼이든 조선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내용(제9관)을 어렵사리 삽입할 수 있었다.[10] 이것은 기존에 체결된 다른 나라와의 조약과 다른 점이었다. 프랑스 측은 이것으로서 선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해석하여, 선교 사업을 통한 교육 문화에 신국면을 타개한 것이다.[6] 한불 조약은 1887년(고종 24)에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 갈림덕(葛林德))가 와서 조선의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과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여 양국간의 정식수교가 수립되었다.[6] 내용[편집]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은 고종 23년(1886) 6월 4일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朝法修好通商條約)과 부속통상장정(附續通商章程)과 세칙(稅則), 세칙장정(稅則章程), 선후속약(善後續約)의 1책 33장의 한문 필사본(국립귀 642, 청구기호 0234-2-11)이다. 이 조약의 중요내용은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모방하였으나, 특기할 것은 전문 제9조 2항에 “교회(敎誨)”의 항목을 넣어 조선정부로부터 포교권을 인정받았다. 이 항목은 결국 최혜국(最惠國) 조관(條款)에 의거하여 미국과 구미제국에 불란서와 마찬가지로 포교는 물론 선교사업을 위한 교육기관도 운영할 수 있게 되어 조선의 선교사업을 통한 교육문화에 신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본문은 13조인데, 제1조는 양국간의 평화·친선·생명과 재산의 보호·조약 당사국과 제삼국간의 분쟁에 관한 조정건 등 2개항, 제2조는 양국의 외교대표 임명과 주재 등에 관련한 3개항, 제3조는 조선에 머무는 불란서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미치는 재판 관할권을 불란서 재판 당국에 위임하는 사항과 관련된 10개항, 제4조는 인천·원산·부산의 개항에 관련한 7개항, 제5조는 각국이 무역하는 상품의 관세에 대한 8개항, 제6조는 밀수입 상품에 대한 벌금과 위법행위 처벌에 관한 2개항, 제7조는 양국 선박중 난파선의 구조와 보호에 관한 5개항, 제8조는 양국의 군함이 각 항구에 입항시 그 처리와 관련한 4개항, 제9조는 양국의 교사와 통역의 임명과 학문교류, 포교에 관한 2개항, 제10조는 본 조약 실시일로부터 불란서인의 특권, 면제 및 수출입 관세에 관계되는 이권 등에 관한 사항, 제11조는 본 조약은 10년간의 유효성을 인정한 조항, 제12조는 본 조약은 불문과 한문으로 작성할 것과 불란서가 조선에 발송하는 일체의 공용통신에는 한역문(漢譯文)을 첨부할 것 등에 관한 2개항, 제13조는 서명·조인에 관한 비준서는 가능한 한 1년 이내에 한성에서 교환하기로 약정한 조항이다. 부속통상장정은 3조로 되어 있는 데, 제1조는 선박의 출입항 수속에 관한 7개항이고, 제2조는 하물의 양육(揚陸) 적재와 납세에 관한 10개항, 제3조는 세관 수입 보호에 관한 5개항으로 되어 있다. 세칙은 진구화(進口貨: Import Tariff)와 출구화(出口貨: Export Tariff)로 나누었다. 진구화는 6등급으로 나누어 제1등 면허화물, 제2등 치백추오화물(値百抽五貨物), 제3등 치백추칠오화물(値百抽七五貨物), 제4등 치백추십화물(値百抽十貨物), 제5등 치백추이십화물(値百抽二十貨物), 제6등 위금화물(違禁貨物)로 하였고, 출구화는 제1등 면세화물과 제2등 치백추오화물(値百抽五貨物)로 나누어 규정하였다. 세칙장정은 3조인데, 제1조는 수입품의 가격계산은 원산지 혹은 제조지에서의 현존가격에 적하와 보험 등의 비용을 부가한 것을 기초로 할 것, 제2조는 관세납부는 멕시코화 혹은 일본은원(日本銀圓)으로 납부할 것, 제3조는 수입과 수출에 관한 상기 관세표는 양국 관계당국간에 협약 후 처리할 것 등이다. 선후속약은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전권사절이 기재한 부록의 4개 조항인데, 제1조항은 조약전문 제2조에 대한 선언 내용으로, 체약대상국 중 일국이 개항 항구에 영사를 임명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영사의 기능을 제삼국관원에게 의뢰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제2조항은 조약전문 제3조에 의거하여 조선에 있는 불란서 국민에 대한 불란서 영사에게 인정된 재판권의 폐기에 대한 것이며, 제3조항은 조선과 이미 조약을 체결하였거나 장차 조약을 체결할 국가들이 해당 조약에 의거하여 그들의 국민에게 허여된 한양에서의 상업개설에 관한 허여된 권리를 양도한다면, 이 권리는 불란서 상인들을 위하여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 것이다. 제4조항은 본 조약의 제 조항은 불란서의 권력과 보호 아래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조약 전문과 권말에는 조인에 참여한 조선의 김만식과 법국의 데니(德尼: Owen Nickerson Denny)의 이름과 날짜가 명기되어 있다. 체결 이후[편집] 프랑스는 조선에 대한 외교 교섭 사무를 당분간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대리시켰으니 이것은 선교 사업(宣敎事業)을 중시하고 통상관계는 경시한 때문이다.[6] 조선은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 이후, 오스트리아(1892년)·벨기에·덴마크 등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7](→조선의 대외 관계) 조선은 천주교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는데도 이 조약을 계기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상복을 벗어 젖히고 자신들의 제복인 검은 수단 옷을 입고 개항장인 서울을 비롯해 원산, 용산, 인천, 부산 등지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10] 조약 체결 후 점차 개신교, 천주교에 대한 지금까지의 금압정책을 폐지하여 포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5] 함께 보기[편집] 병인양요 각주[편집] ↑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교회사연구소역《한불관계자료(1846~1856),(교회사연구1》한국교회사연구소,1977, P196 ↑ Cady,JohnK.《The Roots of French imperialism in EasternAsia》(Ithaca,N.Y, 1954)P191 ↑ 응웬응옥투이(NguyễnThịNgọcThủy), 〈19세기 조선-프랑스 관계와 베트남〉( 학위논문(석사)-- 인하대학교 대학원 일반대학원 : 한국학과 2014. 2) ↑ 가 나 다 라 송건호, 《송건호 전집 3 - 한국현대사 1》 한길사 (2002) 7쪽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불수호통상조약〉 ↑ 가 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구미 열강과의 관계〉 ↑ 가 나 다 라 마 바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저, 이향, 김정연 역,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 서양인이 본 한국인 800년》, 청년사(2001) 37쪽. ISBN 89-7278-348-X ↑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 기독신문.  ↑ 가 나 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 오백년 왕국의 종말》한길사 (2003) 106쪽 ISBN 89-356-5158-3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조불수호통상조약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열강세력 속의 조선〉"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문서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식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저작물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불_수호_통상_조약&oldid=24195100" 분류: 1886년 조약1886년 한국1886년 프랑스조선의 조약프랑스의 조약프랑스-한국 관계불평등 조약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국립중앙도서관 소장품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서울특별시 공개자료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0: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조불 수호 통상 조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 (大朝鮮國·大法民主國通商朝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112호 (1998년 12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제작시기 조선 고종 23년(1886년) 소유자 국립중앙도서관 조불 수호 통상 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또는 대조선국 대법민주국 통상 조약(大朝鮮國大法民主國通商朝約)[1]은 1886년(고종 23) 6월 4일(음력 5월 3일)에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이다.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1874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미국 등에 뒤이어서 프랑스와도 우호 통상 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조약에서 천주교의 포교가 직접 규정되지는 아니하였으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사실상 포교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과 세칙, 세칙장정, 선후속약의 1책 33장의 한문 필사본(국립귀 642, 청구기호 0234-2-11)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등록되어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목차 1 체결 경위 1.1 프랑스의 조선 식민지화 추진 1.2 병인양요 1.3 조선의 대외 조약 2 조약의 체결 3 내용 4 체결 이후 5 함께 보기 6 각주 체결 경위[편집] 프랑스의 조선 식민지화 추진[편집] 프랑스는 가톨릭 교회의 선교 자유를 앞세워 조선을 점령하여 식민지화 하려 하였다. 1855년 10월 프랑스 해군식민부 장관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건 및 기회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사명을 받은 게랭(Guérin,1796~1877) 제독은 비르지니호(Virginie)를 타고 1856년 7월~9월까지 조선 동해안 영흥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 덕적군도에 이르기까지 탐험하고 그 결과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아래와 같이 제기하였다. '모든 식민지화는 그 나라를 점령하는 것이어야 한다. 보병 6천, 마닐라에 상륙시킬 기마병 3백, 경포병 1중대로 이것을 점령하는데 족할 것이다. 가장 유리한 지점은 영흥일 것이다. 서해안의 항해를 아주 어렵게 하는 조류가 없고, 토지의 비옥, 정박상 안정, 수도와의 인접과 큰 강의 존재등이 이 지점을 선택하는 이유이다.'[2]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1846~1866년은 조선 천주교회에 평온기였기 때문에 양국 간에 충돌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 없었다. 또한 당시 조선 동쪽 해안 주변에는 어떠한 개항장도 없었고 동아시아 해역에서 프랑스의 해양 인프라 시설이나 선박의 수량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편 조선에 있는 신부 메스트르는 1857년 10월 15일 프랑스 정부에 조선의 수비 병력 등을 소상히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동아시아 해역에서 나타날 프랑스의 강한 역량이 조선을 프랑스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리라 소원하였다. 이에 북쪽으로부터 연안에 따라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입구에 관한 안내를 적어놓기도 하였다. 서울의 수비병은 5천~6천명인데 활과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왔기 때문에 프랑스군 한 부대면 전복할 수 있을 것이다.[3] 그러나 프랑스는 조선을 침략하는 대신 베트남의 코친차이나를 점령의 대상으로 채택했다. 이는 순전히 가톨릭 선교사들이 설득한 결과였다. 코친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는 이 곳에 해군 거점을 세우고 조선과 접촉하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4] 병인양요[편집] 1856년에 게랭 제독의 조선 해안 탐사 이후 프랑스는 중국과 베트남에서의 원정에 몰두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진격할 만한 여건도 부족했다.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은 철종 12년(1861) 초기부터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중 고종 3년(1866) 대금압령이 내려 12명의 선교사 중 9명이 학살되고 신도들도 수천명이 살해되었다. 천주교 탄압과 선교사 학살이야말로 프랑스에는 침략의 구실이 되었고 이는 병인양요로 발전하였다. 프랑스는 조선과 수차 국교를 맺으려 했으나 병인양요로 아직 감정이 좋지 않고, 종교 문제로 말미암은 오해와 마찰 때문에 국교가 지연되어 왔다.[5][6] 프랑스의 선교사들은 병인양요 이후 청나라로 탈출하여 교회의 재건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6] 흥선대원군이 하야(1874년)하고, 조선 내의 정세가 변동되자 다시 입국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종전보다 훨씬 완화되었다.[6] 흥선대원군이 실정하고 민씨정권이 수립되자 이듬해부터 블랑(Blanc) 외에 2명의 신부가 입국하였고, 고종 14년(1877)에는 리델 신부가 2명의 선교사를 인솔하고 재입국하였다. 리델신부 이하 선교사들이 다시 체포되기는 하였으나 국제적인 석방운동의 전개로 석방되었고, 이를 계기로 선교활동이 묵인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대외 조약[편집]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계기로 종래의 쇄국주의 정책에서 탈피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하게 될 기본 계기였던 서구제국과의 개국통상(開國通商) 관계의 길을 처음으로 트게 된다.[7] 문호가 개방되자 각국은 조선에 대한 통상을 요구하여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이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자, 이 사실은 유럽에도 알려져 영국(1882년)·독일(1883년)·러시아(1884년)·이탈리아(1884년)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프랑스도 조약을 맺기 위하여 서두르게 되었다.[6]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조영·조덕수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프랑스도 수교를 요청했으나, 단순히 통상조약의 차원이 아니고 신교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정식 교섭은 진전되지 못하였다. 북경에 주둔한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알베르 부레(Frédéric-Albert Bourée)는 한국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8] "늘 2선에 머물고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프랑스를 우회하거나 소외시킬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 정책의 골자였다.[8] 그는 텐진 영사관의 샤를르 디용(Charles Dillon)에게 사전 탐사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였다.[8]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1882년 5월 22일)된 직후인 1882년 6월 7일, 포함 루탱(Le Lutin) 호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샤를르 디용은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8] 그는 한국 지도층과 접견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영국인들과 체결한 조약과 유사한 조약 체결을 원하는 프랑스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쓰여 있다.[8] 따라서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정해지기 전에 기본원칙에 대한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8] 조약의 체결[편집]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아(러시아)수호통상조약·조일한성조약·청일천진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는 1886년(고종 23) 음력 3월에 중국 주재 프랑스 대사 코고르당(F. G. Cogordan : 과사당(戈司當))을 전권위원으로 인천에 파견하였고, 조선에서는 전권대신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督辨) 김만식(金晩植)과 회담하게 하여 음력 5월에 13관(款)으로 된 한불 수호 조약과 통상장정 및 선후속약(善後續約) 등에 조인을 완료했다.[6][9](→조선의 대외 관계) 1886년 6월 4일 마침내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5]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 및 세칙, 세칙장정, 선후속약으로 구성된 조약 내용은 한영 조약을 모방한 것으로서, 내용은 거의가 불평등조약이었다.[5][6] 조약 체결 시, 프랑스에서는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 위안스카이를 동원했으나, 고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10] 다만 조약을 맺을 때 제9관에 교회(敎誨)라는 2자와 학자든 통역이든 일꾼이든 조선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내용(제9관)을 어렵사리 삽입할 수 있었다.[10] 이것은 기존에 체결된 다른 나라와의 조약과 다른 점이었다. 프랑스 측은 이것으로서 선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해석하여, 선교 사업을 통한 교육 문화에 신국면을 타개한 것이다.[6] 한불 조약은 1887년(고종 24)에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 갈림덕(葛林德))가 와서 조선의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과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여 양국간의 정식수교가 수립되었다.[6] 내용[편집]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은 고종 23년(1886) 6월 4일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朝法修好通商條約)과 부속통상장정(附續通商章程)과 세칙(稅則), 세칙장정(稅則章程), 선후속약(善後續約)의 1책 33장의 한문 필사본(국립귀 642, 청구기호 0234-2-11)이다. 이 조약의 중요내용은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모방하였으나, 특기할 것은 전문 제9조 2항에 “교회(敎誨)”의 항목을 넣어 조선정부로부터 포교권을 인정받았다. 이 항목은 결국 최혜국(最惠國) 조관(條款)에 의거하여 미국과 구미제국에 불란서와 마찬가지로 포교는 물론 선교사업을 위한 교육기관도 운영할 수 있게 되어 조선의 선교사업을 통한 교육문화에 신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본문은 13조인데, 제1조는 양국간의 평화·친선·생명과 재산의 보호·조약 당사국과 제삼국간의 분쟁에 관한 조정건 등 2개항, 제2조는 양국의 외교대표 임명과 주재 등에 관련한 3개항, 제3조는 조선에 머무는 불란서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미치는 재판 관할권을 불란서 재판 당국에 위임하는 사항과 관련된 10개항, 제4조는 인천·원산·부산의 개항에 관련한 7개항, 제5조는 각국이 무역하는 상품의 관세에 대한 8개항, 제6조는 밀수입 상품에 대한 벌금과 위법행위 처벌에 관한 2개항, 제7조는 양국 선박중 난파선의 구조와 보호에 관한 5개항, 제8조는 양국의 군함이 각 항구에 입항시 그 처리와 관련한 4개항, 제9조는 양국의 교사와 통역의 임명과 학문교류, 포교에 관한 2개항, 제10조는 본 조약 실시일로부터 불란서인의 특권, 면제 및 수출입 관세에 관계되는 이권 등에 관한 사항, 제11조는 본 조약은 10년간의 유효성을 인정한 조항, 제12조는 본 조약은 불문과 한문으로 작성할 것과 불란서가 조선에 발송하는 일체의 공용통신에는 한역문(漢譯文)을 첨부할 것 등에 관한 2개항, 제13조는 서명·조인에 관한 비준서는 가능한 한 1년 이내에 한성에서 교환하기로 약정한 조항이다. 부속통상장정은 3조로 되어 있는 데, 제1조는 선박의 출입항 수속에 관한 7개항이고, 제2조는 하물의 양육(揚陸) 적재와 납세에 관한 10개항, 제3조는 세관 수입 보호에 관한 5개항으로 되어 있다. 세칙은 진구화(進口貨: Import Tariff)와 출구화(出口貨: Export Tariff)로 나누었다. 진구화는 6등급으로 나누어 제1등 면허화물, 제2등 치백추오화물(値百抽五貨物), 제3등 치백추칠오화물(値百抽七五貨物), 제4등 치백추십화물(値百抽十貨物), 제5등 치백추이십화물(値百抽二十貨物), 제6등 위금화물(違禁貨物)로 하였고, 출구화는 제1등 면세화물과 제2등 치백추오화물(値百抽五貨物)로 나누어 규정하였다. 세칙장정은 3조인데, 제1조는 수입품의 가격계산은 원산지 혹은 제조지에서의 현존가격에 적하와 보험 등의 비용을 부가한 것을 기초로 할 것, 제2조는 관세납부는 멕시코화 혹은 일본은원(日本銀圓)으로 납부할 것, 제3조는 수입과 수출에 관한 상기 관세표는 양국 관계당국간에 협약 후 처리할 것 등이다. 선후속약은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전권사절이 기재한 부록의 4개 조항인데, 제1조항은 조약전문 제2조에 대한 선언 내용으로, 체약대상국 중 일국이 개항 항구에 영사를 임명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영사의 기능을 제삼국관원에게 의뢰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제2조항은 조약전문 제3조에 의거하여 조선에 있는 불란서 국민에 대한 불란서 영사에게 인정된 재판권의 폐기에 대한 것이며, 제3조항은 조선과 이미 조약을 체결하였거나 장차 조약을 체결할 국가들이 해당 조약에 의거하여 그들의 국민에게 허여된 한양에서의 상업개설에 관한 허여된 권리를 양도한다면, 이 권리는 불란서 상인들을 위하여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 것이다. 제4조항은 본 조약의 제 조항은 불란서의 권력과 보호 아래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조약 전문과 권말에는 조인에 참여한 조선의 김만식과 법국의 데니(德尼: Owen Nickerson Denny)의 이름과 날짜가 명기되어 있다. 체결 이후[편집] 프랑스는 조선에 대한 외교 교섭 사무를 당분간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대리시켰으니 이것은 선교 사업(宣敎事業)을 중시하고 통상관계는 경시한 때문이다.[6] 조선은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 이후, 오스트리아(1892년)·벨기에·덴마크 등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7](→조선의 대외 관계) 조선은 천주교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는데도 이 조약을 계기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상복을 벗어 젖히고 자신들의 제복인 검은 수단 옷을 입고 개항장인 서울을 비롯해 원산, 용산, 인천, 부산 등지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10] 조약 체결 후 점차 개신교, 천주교에 대한 지금까지의 금압정책을 폐지하여 포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5] 함께 보기[편집] 병인양요 각주[편집] ↑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교회사연구소역《한불관계자료(1846~1856),(교회사연구1》한국교회사연구소,1977, P196 ↑ Cady,JohnK.《The Roots of French imperialism in EasternAsia》(Ithaca,N.Y, 1954)P191 ↑ 응웬응옥투이(NguyễnThịNgọcThủy), 〈19세기 조선-프랑스 관계와 베트남〉( 학위논문(석사)-- 인하대학교 대학원 일반대학원 : 한국학과 2014. 2) ↑ 가 나 다 라 송건호, 《송건호 전집 3 - 한국현대사 1》 한길사 (2002) 7쪽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불수호통상조약〉 ↑ 가 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구미 열강과의 관계〉 ↑ 가 나 다 라 마 바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저, 이향, 김정연 역,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 서양인이 본 한국인 800년》, 청년사(2001) 37쪽. ISBN 89-7278-348-X ↑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 기독신문.  ↑ 가 나 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 오백년 왕국의 종말》한길사 (2003) 106쪽 ISBN 89-356-5158-3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조불수호통상조약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열강세력 속의 조선〉"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문서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식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저작물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불_수호_통상_조약&oldid=24195100" 분류: 1886년 조약1886년 한국1886년 프랑스조선의 조약프랑스의 조약프랑스-한국 관계불평등 조약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국립중앙도서관 소장품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서울특별시 공개자료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0: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최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최권국적 대한민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2003년 ~ 현재소속사 키이스트 웹사이트 키이스트 최권 최권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목차 1 학력 2 출연 2.1 드라마 2.2 영화 3 바로 가기 학력[편집] 경민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출연[편집] 드라마[편집] 2019년 Netflix 《킹덤》 ... 동래 군관 역 2019년 MBC 《아이템》 ... 김대흥 역 2017년 KBS2 《최고의 한방》 ... 최우승을 취조하는 경찰 역 2016년 SBS 《푸른 바다의 전설》 ... 약선 역 2015년 KBS2 《프로듀사》 ... 신디 로드 매니저 역 2013년 MBC 《불의 여신 정이》 ... 강쇠 역 2013년 JTBC 《무정도시》 ... 신형사 역 2012년 SBS 《맛있는 인생》 ... 배삼봉 역 2012년 MBC 《더킹 투하츠》 ... 권영배 역 2012년 tvN 《노란 복수초》 ... 민경주 역 2009년 SBS 《그대, 웃어요》 ... 박경수 역 2007년 MBC 《김치 치즈 스마일》 ... 최권 역 2007년 tvN 《인어이야기》 ... 이 형사 역 2006년 MBC 《오버 더 레인보우》 ... 킹마트(최규호) 역 2005년 KBS 《이 죽일놈의 사랑》 영화[편집] 2017년 《리얼》 ... 백 실장 역 2014년 《살인자》 ... 청년 역 2013년 《뜨거운 안녕》 ... 광삼 역 2010년 《페스티발》 ... 인수 역 2009년 《거북이 달린다》 ... 표재석 역 2007년 《스카우트》 ... 절뚝 1학년 역 2006년 《원탁의 천사》 ... 김경수 역 2003년 《튜브》 ... 시장 경호 책임자 역 바로 가기[편집] 최권 공식 홈페이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싸이월드 최권 공식 홈페이지 이 글은 한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최권&oldid=23873838" 분류: 경민대학 동문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1981년 태어남2005년 데뷔대한민국의 남자 배우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한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7일 (일) 03: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이승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승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승열李承烈기본 정보출생 1970년 2월 15일(1970-02-15) (49세)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장르 모던 록, 얼터너티브 록악기 기타활동 시기 1994년 ~ 현재 가족 누이동생 2명학력 미국 헌터 음악대학원소속사 플럭서스 뮤직관련 활동 유앤미 블루 욜훈웹사이트 SY BLUE 공식 페이스북 이승열(李承烈, 1970년 2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록 음악가이다. 목차 1 내력 1.1 학력 2 음반 2.1 정규 음반 2.2 OST·참여 음반 2.3 제작에 도움을 준 노래 3 수상 4 각주 5 함께 보기 6 외부 링크 내력[편집] 미국 이민 생활 도중 동료 해외 유학생이었던 방준석과 함께 대한민국에 들어와 밴드 유앤미 블루를 결성해 1994년 데뷔 앨범 《Nothing`s Good Enough》와 1996년 2집 《Cry…Our Wanna Be Nation!》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여 1997년 밴드 활동이 중지됐다. 나중에야 ‘한국 최초의 모던 록 앨범’, ‘저주받은 걸작’ 등 뒤늦은 호평을 받았다. 2003년에 솔로 앨범 《이날, 이때, 이즈음에…》를 내면서 음악계에 다시 나왔다. 록 밴드 U2의 보컬 보노와 곧잘 비교될 정도로 묵직하고 힘이 넘치는 저음과 깨끗하게 뻗어나가는 고음이 특색 있다.[1] EBS English Book Cafe DJ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EBS 세계음악기행 진행자다. '한국 모던록의 대부' '한국의 보노' 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학력[편집] 미국 뉴욕 주립 대학교 빙엄턴 예술사학과 학사(1992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 석사(1996년) 미국 헌터 음악대학원 음악학 석사(2002년) 음반[편집] 정규 음반[편집] 유앤미 블루 《Nothing`s Good Enough》 (1994년) 《Cry…Our Wanna Be Nation!》 (1996년) 《U & Me Blue Live 95-97》 이승열 정규 1집《이날, 이때, 이즈음에》 (2003년 12월 19일) 정규 2집《In Exchange》 (2007년 5월 3일) 정규 3집《Why We Fail》 (2011년 8월 11일) 정규 4집《V》 (2013년 5월 23일) 정규 5집《SYX》 (2015년 7월 9일) 정규 6집《요새드림요새》 (2017년 7월 4일) OST·참여 음반[편집] 영화 《해안선 OST》 영화 《아이엔지(...ing) OST》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 OST》 영화 《얼굴 없는 미녀 OST》 영화 《형사 OST》 MBC 드라마 《케세라세라 OST》 음악여행 라라라 (Live) (2009년 4월 17일) 1. 〈Nobody〉 원곡: 원더걸스 MBC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 OST》 서울전자음악단 <Life Is Strange> 종소리 (Alternative ver.) (Vocal. 이승열) 서울전자음악단 <Life Is Strange> 고양이의 고향소리 (Alternative ver.) (Vocal. 이승열) Kayip (이우준) - 『Theory of Everything』- 1번 트랙 - Across 3번 트랙 - In the End 클래지(Clazzi)- 1집 INFANT (타이틀곡 - Love&Hate (With 이승열 / Rap MYK)) 애니메이션 <나루토 질풍전> 오프닝 (풍운) tvN 드라마 《미생 OST》 tvN 드라마 《시그널 OST》 제작에 도움을 준 노래[편집]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OST》 - 〈Be My Love (With 알렉스)〉 수상[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후보작 결과 2004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 이날, 이때, 이즈음에... 후보 올해의 음악인 (남자) 2008 올해의 음반 In Exchange 올해의 음악인 수상 최우수 모던 록 (음반) In Exchange 후보 최우수 모던 록 (노래) 아도나이 수상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 (모던 록) 후보 2012 올해의 음반 Why We Fail 올해의 노래 돌아오지 않아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모던 록 (음반) Why We Fail 수상 최우수 모던 록 (노래) 돌아오지 않아 수상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 (남자 아티스트) 후보 각주[편집] ↑ 서정민 (2005년 1월 6일). “이승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기분이었는데””. 한겨레신문. 2008년 11월 7일에 확인함.  함께 보기[편집] 방준석 전기현 송기철 이승해 이한철 이상미 이무영 외부 링크[편집] 네이버 데이터 SY blue 이승열 공식 사이트 maniadb vdeh이승열정규 음반 이날, 이때, 이즈음에 In Exchange Why We Fail V 싱글 라디라 그들의 Blues vdeh유앤미 블루 이승열 방준석 정규 음반 Nothing`s Good Enough Cry…Our Wanna Be Nation! 싱글 비와 당신 비정규 음반 Live Collection From 95 to 97 vdeh한국대중음악상 - 올해의 음악인상2000년대 2007: 이승열 2008: 토이 2009: 서울전자음악단 2010년대 2010: 갤럭시 익스프레스 2011: 장기하와 얼굴들 2012: 싸이 2013: 선우정아 2014: 이승환 2015: Deepflow 2016: 박재범 2017: 방탄소년단 2018: 방탄소년단 올해의 노래상 올해의 음반상 올해의 음악인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승열&oldid=24464588" 분류: 1970년 태어남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대한민국의 작사가1994년 데뷔대한민국의 작곡가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스페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록 기타 연주자비디오 자키20세기 대한민국 사람21세기 대한민국 사람뉴욕 주립 대학교 빙엄턴 동문홍익대학교 대학원 동문헌터 칼리지 동문플럭서스 뮤직의 음악가모던 록대한민국의 기업인한국대중음악상 수상 음악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2일 (토) 14:5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포항 나들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포항 나들목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연일 분기점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6° 2′ 29.61″ 동경 129° 18′ 59.48″ / 북위 36.0415583° 동경 129.3165222°  / 36.0415583; 129.3165222 포항 나들목 소재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대련리, 남구 연일읍 학전리, 이동, 지곡동 개통일 2009년 9월 30일 새만금포항고속도로 구조물 번호 26 대구 기점 69.08 km ← 학전 나들목 (1.32 km)포항종점 →(0.29 km) 접속노선 국도 제31호선희망대로 포항 나들목(Pohang IC)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대련리와 남구 연일읍 학전리, 이동, 그리고 지곡동에 걸쳐 설치된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26번 교차로이다.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종점은 포항 나들목에서 포항 방향으로 0.29 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흥해읍, 연일읍내로 진출할 수 있으며, 희망대로를 통해 포항시내로 진출할 수 있다. 본래는 포항 요금소와 국도 제7호선과 국도 제28호선, 국도 제31호선이 만나는 대련 교차로를 잇는 단순한 진입로에 불과하였으나, 포항 시내의 교통 분산의 목적으로 초창기 연일 분기점이라는 명칭으로 이 나들목의 건설 계획이 마련되었으며,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있었던 2009년 9월 30일에 도로의 이설로 완전한 형태의 입체 교차로를 갖춘 나들목의 형태로 정식으로 개통하게 되었다.[1][2] 목차 1 연혁 2 구조물 정보 3 접속하는 도로 4 교통량 정보 5 각주 연혁[편집] 2001년 9월 25일 : 나들목 건설을 위해 포항시 도시계획시설 교통광장에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학전리 일대를 고시[3] 2006년 1월 2일 : 2008년까지 나들목 건설을 위해 포항시 도시계획시설 교통광장에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학전리 일대를 연일(이동) 분기점으로 고시[4] 2009년 8월 4일 : 익산포항고속도로 포항 요금소/학전 나들목 ~ 포항 나들목 구간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5] 구조물 정보[편집] 위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대련리남구 연일읍 학전리, 이동, 지곡동 접속하는 도로[편집] 국도 제31호선 (영일만대로) 희망대로 간접 연결 : 국도 제7호선 (소티재로, 의현 교차로 이용), 국도 제28호선 (동해대로, 연화 교차로 이용) 교통량 정보[편집] 포항 요금소 기준 자료이다. 요금소 통행량 (대/일) 각주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포항 (폐쇄식) 12,087 9,522 9,670 10,466 10,486 11,196 12,518 12,819 13,523 14,212 [6] 요금소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포항 (폐쇄식) 14,824 15,503 16,339 16,255 각주[편집] ↑ 대구~포항고속도 포항IC 개통, 《중앙일보》 2009년 10월 1일 ↑ 대구∼포항고속도로 포항 나들목 조기 개통, 《매일신문》 2009년 10월 1일 ↑ 경상북도고시 제2001-228호, 2001년 9월 25일. ↑ 건설교통부고시 제2005-461호, 2006년 1월 2일. ↑ 국토해양부공고 제2009-705호, 2009년 8월 4일. ↑ 한국도로공사 > 고속도로안내 > 교통통계 > 통계자료 > 영업소이용차량 vdeh고속도로 제20호선 새만금포항고속도로새만금~장수 구간 (계획중) 진안 장수 장수JC 35 대구~포항 구간 팔공산TG 도동JC 1 55 청통와촌 화산JC 301 북영천 임고 서포항 포항TG 학전 포항 vdeh포항시의 교통철도노선 동해선 괴동선 역 포항역 효자역¹ 월포역 괴동역¹ ¹ : 여객취급을 하지 않는 역 고속도로노선 새만금포항 (20) 동해 (65, ) 새만금포항지선 (202) 나들목·분기점 포항 나들목 학전 나들목 서포항 나들목 남포항 나들목 북영일만 나들목 청하 나들목 북포항 나들목 일반도로국도 7호 14호 20호 28호 31호 국지도 20호 68호 69호 지방도 921호 929호 930호 주요 간선도로간선도로 북구 남구 시설물교량/터널 연일대교 섬안큰다리 유강대교 포스코대교 동빈큰다리 달전터널 유강터널 버스시내버스 시내버스 티머니 시외·고속버스 고속터미널 시외터미널 기타항공포항공항항구 (여객·물류)포항항 이 글은 도로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포항_나들목&oldid=24186746" 분류: 새만금포항고속도로국도 제31호선대한민국의 나들목경상북도의 도로 시설물포항시의 교통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도로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5: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점성술의 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점성술의 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점성술에서 각(角)또는 애스펙트(aspect)는 천궁도에서 행성이 다른 행성 뿐만 아니라 상승점과 중천점, 하강점 그리고 천저점과도 또한 점성학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다른 감응점 및 가상점과도 서로 맺는 각도이다. 각은 지구에서 볼때의 두 점 사이의 황경의 도와 분으로 표기되는 각거리로 측정된다. 점성술의 전통에 따르면, 그것들은 사람의 생애과 지구와 연관된 사건들에 있어서 발달상의 변화와 변천의 시점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만일 점성가가 한 사람의 출생시간의 천체의 외견상 위치를 보여주는 천궁도(출생 차트)를 뽑았는데, 화성과 금성과의 각거리가 92°라면, (사분위각은 90° 인데, 그 각도는 정확한 사분위각으로 부터 2°도 떨어져 있으므로) 그 차트는 2°의 범위로 "금성이 화성과 사분위각"을 맺고 있다고 본다. 더 정확한 각은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징이나 드러나는 변화에 있어서 더 강하며 더 유력하다. 이 출생 차트의 중심 원에서 사각(붉은색)과 삼각(파란색)과 같이 다른 각들 사이가 구분되는 다른 색상과 기호로 점성학적 각들이 표시되어 있다. 목차 1 접근법 2 주요각 2.1 합 2.2 육분위각 2.3 사분위각 2.4 삼분위각 2.5 충 3 보조각 3.1 오엽각 3.2 팔분위각 3.3 삼배팔분위각 3.4 십이분위각 3.5 오분위각 3.6 이배오분위각 4 삼진각 4.1 7분위 배수각 4.1.1 칠분위각 4.1.2 이배칠분위각 4.1.3 삼배칠분위각 4.2 9분위 배수각 4.2.1 구분위각 4.2.2 이배구분위각 4.2.3 사배구분위각 4.3 10분위 배수각 4.3.1 십분위각 4.3.2 삼배십분위각 4.3.3 이십분위각 4.4 11분위 배수각 4.4.1 십일분위각 4.5 14분위 배수각 4.5.1 십사분위각 4.5.2 삼배십사분위각 4.5.3 오배십사분위각 4.6 16분위 배수각 4.6.1 십육분위각 4.6.2 삼배십육분위각 4.7 24분위 배수각 4.7.1 이십사분위각 4.7.2 오배이십사분위각 4.7.3 칠배이십사분위각 4.7.4 십일배이십사분위각 4.8 적위 5 참고 문헌 및 더 보기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접근법[편집] 중세 점성술에서, 특정 행성들이 맺는 각은 호의적(유리함)이거나 비호의적(불리함이라고 여겨졌다. 현대의 각의 사용에 있어서는 그러한 숙명론적 구별과는 덜한 주안점이 부여된다. 점성학적 각에 대한 심리학과 경향에 더 기반하는 더 현대적인 접근법은 점성학적 화성학의 연구에 의해 예증되었는데, 그 학문에 대해 존 애디는 주요한 옹호자였으며, 요하네스 케플러가 1619년의 그의 저서 《세계의 조화(Harmonice Mundi)》에서 더 먼저 주창했다. 독일의 우라니아 점성술 학파와 그것의 파생적인 우주생태학은 각에 대해 전적으로 경험적인 접근법을 취하려는 시도가 되어오고 있으며, 별자리와 하우스의 전통적인 사용으로부터 대부분 벗어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다양한 각의 유형에서 발하는 힘과 효과에 대해서 전통적 점성술과는 다소 다른 결론을 도출했다. 우라니아 점성가들 사이에서는 때때로 점성술의 전통적 견해로부터 그들의 견해를 구별하고자 애스펙트라는 용어가 회피된다. 주로 라인홀드 에버틴의 《천체 효과의 조합(The Combination of Stellar Influences)》[1]을 통한 어려 가지의 행성 중심점에 대한 우주생명상관론의 소개는 점성가들 사이에서 폭넓은 수용을 불러일으켜오고 있다. 하지만, 우라니아 또는 함부르크의 공식 개념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수용은 있지 않다. 점성학적 차트에서의 행성 배치의 중요성에 대한 프랑소와즈와 미셸 고클랭의 연구는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이 전통적으로 "보조"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주요"각일 수도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아래의 각의 목록은 그것들의 값과 권장되는 범위(範圍, Orb)를 기술한다. 그 범위는 내용과 개인적 선호에 따라 변화한다. 주요각[편집]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의 1533년 인쇄본에 있는 도해로 여러 별자리의 사이점이 서로 어떻게 각을 맺는지를 보여준다.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3월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주요각(主要角, major aspect)은 1~2세기부터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정의되고 사용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프톨레마이오스의 각이라고 불린다. 그러한 각들은 합(거의 0~10°), 육분위각(60°), 사분위각(90°), 삼분위각(120°), 그리고 충(180°)이다. 거의 대부분의 점성가는 다른 각들에 비해서 합에는 넓은 범위를 부여하지만, 대체로 각을 계산하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점성가와 점성술 체계에 따라 (각으로 인정되는 정확한 각에서의 분리 도수인) 다른 범위 범위를 사용한다는 점에 유의를 요한다. 주요각은 360도에서 1과 6, 4, 3 그리고 2의 정수로 균분되어 정의되며 사용된다. (몇 가지 각의 한국어 명칭은 그러한 제수에 근거한다.) 합[편집] 카지미 (점성술의 각), 연소 (점성술의 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합(合) 또는 컨정션(conjunction, 축약형: Con)은 거의 0~10°의 각도이다. 합에는 일반적으로 10° 범위가 인정된다.[2] 그러나, 어떤 점성가들은 여기에 태양이나 달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0±08°까지를 합으로 본다. 합은 해당 행성들의 효과가 증폭되는 가장 강력한 각이며 차트에서 중대한 부분이 된다. 그러한 행성은 외견상으로 서로 고무하며 행동을 함께한다. 합의 본질적 특징은 각각의 행성이 서로 스스로의 본성을 조화시킨 특징을 발휘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함은 서로의 도움으로 완수될 수도 있는 반면, 그러한 과정이 각각의 해당 행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다소 상쇄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달과 수성의 합을 지니고 있다면, 그 또는 그녀는 감정(달)에 대해 말(수성)하기 수월하다고 합리화 시킬수 있다. 그러나, 그 합이 감정에 대해 지적인 접근이 이루어 진것으로 해석된다면, 감정은 깊이를 다소 상실하게 될 것이며,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격렬한 감정적 요구를 다룰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사고 절차(수성)에 감정(달)의 개입이 그러한 사람을 감성을 가지고 배려로서 고찰하며 소통하기 쉽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충절과 감정적 애착(달) 등에 치우친다면, 사고의 과정으로부터 객관성(수성)을 다소 제거케할 수도 있다. 이 융합이 "긍정적"이나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의 여부는 해당되는 행성에게 달려있다.: 금성과 목성 그리고 태양 사이에서의 조합은 (예를 들어, 1970년 11월 9~10일에 그 세 행성이 실제로 합을 이루었는데) 가장 호의적인 예언을 끌어낼 수 있는 반면, 가장 비호의적인 배치는 화성과 토성 그리고(또는) 달을 수반한다.(같은 연도 3월 10에 그 세 행성이 합을 이루었다.) 만일, 행성이 다른 배치로 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면, 합에 시련이 더해진다고 한다. 한 행성이 태양과 매우 가까운 합에 있다면, 그것은 카지미라고 불리며, 태양과 적당히 근접해 있다면, 연소된다고 한다. 매달마다 그믐달일 때에 태양과 달이 합에 있다. 육분위각[편집] 육분위각(六分位角) 또는 섹스타일(sextile, SXt 또는 Sex)는 60°(360° 의 황도의 1/6 또는 120°인 삼분위각의 1/2)의 각도이다. 육분위각에서는 60±04°의 범위가 고려된다. 전통적으로, 육분위각은 삼분위각과 유사한 효력을 지니지만, 그것보다는 덜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이 각은 연관된 두 요소 사이에 적합성을 지니며 화합하는 서로의 원활한 소통을 나타내지만,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이득을 얻기위한 노력을 요하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사분위각[편집] 사분위각(四分位角) 또는 스퀘어(square, SQr 또는 Squ)는 90°(360°의 황도의 1/4 또는 180°인 충의 1/2)의 각도이다. 일반적으로 5°도에서 10° 사이의 범위가 허용된다.[2] 육분위각과 삼분위각과 마찬가지로, 사분위각에서도 외행성이 내행성에 대해 효력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사분위각의 힘은 삼분위각의 것과 비슷하지만, 그 힘은 긴장된다고 하는 정도를 더한다. 예를 들어, 수성의 토성과의 사분위각은 실제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의견과 소통에 있어서의 신중함과 실용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그러한 각은 정신적인 계획이나 과업에 있어서 경고 표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행성들 사이의 사분위각은 심적 억제와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과도한 검열 그리고 일상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나타낸다. 그것은 염세주의와 삶에 대한 과장되고 지나치게 걱정어린 접근을 나타낸다. 사분위각은 긴장과 압력 그리고 좌절, 금지, 붕괴, 그리고 내적 갈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한계를 극복하고자 결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힘과 활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아래의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 참조. 사분위각은 직각이기도 하다. 삼분위각[편집] 삼분위각(三分位角) 또는 트라인(trine 또는 Tri)는 120° (황도의 360°의 1/3)이다. 삼분위각에는 120±04° 의 범위가 고려된다. 삼분위각은 두 요소가 서로 보강해 주면서 조화와 표현의 용이함을 나타낸다. 삼분위각은 본유적인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재능의 원천이다. 삼분위각의 본성은 불의 별자리(양자리와 사자자리 또는 양자리와 사수자리)의 관계와 같고 따라서, 고무적이다. 전통적으로, 삼분위각은 매우 유익한 것이며, 과분하더라도 편의성을 제공해 주지만, 나약한 성품의 사람에게는 '최소의 저항선'이 될 수 있다. 또한, 너무 많은 삼분위각은 사람을 나약하며 역경을 극복하기 어렵게 만든다. 안심과 만족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삼분위각이 마련해주는 조화로움으로 인해, 그러한 사람은 이 각이 선사한 재능을 계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이어서 그 사람은 욕구를 만족시키고 결핍된 것을 보충할 바람도 갖고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그 사람의 출생으로부터 이미 충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분위각의 본질적인 의미는 "탄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힘을 많이 쏟지 않아도 스스로 달성되려는 경향이 있는 지속되는 상황이나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축적이나 증가, 지속, 균형, 증진, 영구성 그리고 안정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삼분위각은 "온화롭다"거나 "좋다"고 여겨지는 각이지만, 만일 두 행성이 모두 본질적으로 유해한 성질을 지닌 것들이거나, 천궁도의 해석에 있어서 불완전한 조건에 놓여 있다고 판단되면, 그 각은 오히려 스스로 집요하게 존속되는 곤란한 상황을 나타낼 수도 있다. 삼분위각은 본연에 있어서 완전히 개인적이며 순전한 자기표현으로서 세상에서 자주적으로 역할하는 한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천적 재능을 나타낸다. 충[편집] 충(衝) 또는 어퍼지션(opposition 또는 Opp)은 180°(황도 360°의 1/2)의 각도이다. 일반적으로 5°에서 10° 사이의 범위가 허용된다.[2] 충은 서로 반대편에 있으므로 대립각(對立角)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두 번째로 강력한 각이라고 여겨진다. 충은 합처럼 통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의 차이점은 있지만, 과장은 야기한다는 점에서 고양되는 공통점이 있다. 충은 해당되는 행성들 사이에서의 역동적이고 고양된 힘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로 인해, 사분위각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해당되는 두 별자리가 구조상 다른 방향에 놓여 있다면, 그러함으로써 야기되는 양극성으로 인해, 긴장과 갈등이나 대립의 표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구조적으로 대립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개인은 이 각을 창조적이며 활동적인 힘의 원천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태양과 달이 충이되는 기간은 매월마다 보름달 동안이다. 보조각[편집] 점성학적 각의 측정 도구들 가운데 하나로써 사용되었던 코스몰라베의 16세기 묘사.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3월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보조각(補助角, minor aspect)은 16세기에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점성가인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것들은 오랜 동안 비교적 부차적인 중요성이 있다고 여겨졌지만, 많은 현대 점성가들은 그러함에 동의하지 않는다. 보조각에는 오엽각(150°)과 팔분위각(45°), 삼배팔분위각(135°), 십이분위각(30°), 오분위각(72°), 이배오분위각(144°)이 포함된다. 우주 생명 상관론 또는 우라니아 점성술(함부르크 점성술 학교)와 같은 더 진보적 연구지향의 학파들은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도 "주요"각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육분위각(60°)과 삼분위각(120°)이 효력에 있어서 "보조"각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그러함은 역사적 문헌이나 확신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연구에 근거한다. 우주생명상관론과 우라니아 또는 함부르크 점성술을 사용하는 점성가들은 1970년 이전부터 더 많은 보조각을 예를 들면 15° 의 배수각(15°, 75°, 105°, 165°)과 22.5°의 배수각(22.5°, 67.5°, 112.5°, 157.5°)도 사용해오고 있다. 육분위각과 오엽각은 주요각과 보조각 사이의 '경계'각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점성가는 육분위각(60°)을 주요각으로 여기는 반면, 매우 색다른 단체는 오엽각(150°)을 주요각으로 사용하며, 매우 소수의 비주류만이 십이분위각 (30°)을 주요각으로 여긴다. 주요각과 앞의 이 세 개의 '경계'각은 모두 프톨레아미오스의 각이라 불린다. 오엽각[편집] 오엽각(五葉角) 또는 퀸컹크스(quincunx) 또는 인컨정트(inconjunct 또는 Inc)는 150°의 각도로써 황도 360°의 5/12이므로 오배십이분위각(五倍十二分位角)이라 표기할 수도 있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표기가 가장 일반적이다. 오엽각에는 150±2°의 범위가 고려된다. 오엽각은 온건하지만 긴장을 유발하는 다소 예측할 수 없는 요력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비양립성의 요소들 간의 강제성으로 인한 어려움과 시련을 나타낸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에서 (특히 건강의 측면에서) 자기태만의 영역이나 한 사람에게 강요된 의무를 의미한다. 이 각은 때때로 불합(不合)의 뜻으로써 인컨정트(inconjunct)라고도 불리지만, 기술적으로 합의 반댓말로 보기는 어렵다. 팔분위각[편집] 팔분위각(八分位角)은 세미스퀘어(semi-square, SSq)는 45°의 각도인데, 사분위각(90°)의 1/2이므로 반직각(半直角)이라 할 수도 있다. 팔분위각에는 45±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사분위각의 약형이며 다소 어려운 환경을 나타낸다. 그것은 때때로 팔분위각으로써는 옥타일(octile)이나 사분위각의 반으로써는 세미쿼타일(semiquartile)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삼배팔분위각[편집] 삼배팔분위각(三倍八分位角) 또는 세스퀴쿼드레이트(sesquiquadrate 또는 Ses)는 135°의 각도로써, 팔분위각의 세배(45°×3)이며, 직각과 반직각의 합(90°+45°)이다. 삼배팔분위각에는 135±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다소 긴장된 상황을 나타낸다. 그것은 팔분위각과 유사한 효력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삼배팔분위각은 때때로 직각의 한배 반으로써 세스퀴스퀘어(sesquisquare)와 직각과 반(square-and-a-half), 사분위각과 반(quartile-and-a-half) 그리고 팔분위각의 세배로써 트리옥타일(trioctile)라고 부른다. 십이분위각[편집] 십이분위각(十二分位角) 또는 세미섹스타일(Semi-sextile 또는 SSx)은 30°의 각도 즉, 360°의 1/12 또는 육분위각의 절반(60°의 1/2)이다. 십위분위각에는 30±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것은 합과 오분위각을 제외한 모든 주요각의 기저가 된다. 이 각은 해당 행성들 사이에서 서로 동기를 부여해 주지만, 그런 만큼의 현실적 기여는 불충분한 온건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 각은 쟁점과 결과를 조화시키려는 중요한 실제적인 노력이 있게할 것이다. 별칭으로는 콘피니스(confinis)와 인컨정트(inconjunct)가 있다. 오분위각[편집] 오분위각(五分位角) 또는 퀸타일(quintile, 축약: QNt 또는 Qui)은 72°(360°의 1/5)이다. 이것은 오각(五分) 또는 오각형인 펜타곤(Pentagon)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의 중심에서 모서리까지의 한 내각이 72°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의 한 내각은 108˚라는 점에서 오분위각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오분위각은 72±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적당히 이롭다는 면에서) 십이분위각과 다소 유사하지만, 그것의 이득을 거둬들이기 위한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막연히 운 좋은 수완과 상황을 나타낼 뿐이다. 이배오분위각[편집] 이배오분위각(二倍五分位角) 또는 바이퀸타일(biquintile, 축약: BQt 또는 BQn)는 144° (오분위각(72°) x 2 = 144°)이다. 이배오분위각에는 144±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오분위각과 유사한 효과를 지닌다. 삼진각[편집] 삼진각(三進角, ternary aspect)은 점성술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부가적 각이다. 7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원의 7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다. 칠분위각[편집] 칠분위각(七分位角) 또는 셉타일(Septile, 축약형: Sep)은 황도대 원의 1/7인 약 51.428571° 또는 51°25'43"의 각도이다. 이것은 해당 구성 요소들 간에 불합리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것들의 숨은 근원적 본성과 심원한 숙명이 부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3] 이배칠분위각[편집] 이배칠분위각(二倍七分位角) 또는 바이셉타일(biseptile 또는 BSp)은 황도대 원의 2/7인 약 102.857143°이나 102°51'26"이다. 이 각은 외면화된 칠분위각으로 여겨진다. 삼배칠분위각[편집] 이배칠분위각(二倍七分位角) 또는 트리셉타일(triseptile, TSp)는 황도대 원의 3/7인 약 154.285714°,[4] 또는 154°17'09"의 각도이다. 9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 원의 9분할에 기저를 둔다. 구분위각[편집] 구분위각(九分位角) 또는 노바일(Novile, Nov)는 황도대 원의 1/9인 40°의 각도이다. 정구각형의 한 내각이 40°인데도 불구하고, 이 각은 구각(九角) 또는 노나곤(nonagon)으로도 알려져 있다.[5] 이배구분위각[편집] 이배구분위각(二倍九分位角) 또는 바이노바일(binovile, BNv)은 80°의 각도이다. 사배구분위각[편집] 사배구분위각(二倍九分位角) 또는 '쿼드노바일(quadnovile, QNv)은 160°의 각도이다. 이것은 구분위각(40°)의 네배라는 뜻의 쿼드리노바일(quadrinovile)이라고도 알려져 있다.[4] 10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원의 10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으며, 5분위 배수각(오분위각과 이배오분위각)과 관계 있다. 십분위각[편집] 십분위각(十分位角) 또는 데사일(Decile, Dec)(기호:⊥)는 황도대의 원의 1/10인 36°의 각도이다. 그것은 오분위각의 절반이라는 뜻의 세미퀸타일(semi-quintile)로도 알려져 있다. 이 각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다고 한다. 삼배십분위각[편집] 삼배십분위각(三倍十分位角) 또는 트리데사일(tridecile) 또는 세스퀴퀸타일(sesquiquintile)은 108°의 각도로써, 외면적인 독창성을 요하는 자기반성과 철회의 필요성 또는 사회적 창의성과 같은 의미가 부여된다. 이십분위각[편집] 이십분위각(二十分位角) 또는 비진타일(Vigintile, Vig) (기호: ∧)은 황도대의 원의 1/20 또는 십분위각의 절반인 18°의 각도이다. 11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 원의 11분할에 기저를 둔다. 십일분위각[편집] 십일분위각(十一分位角) 또는 언데사일(undecile, Und)은 황도대 원의 1/11 또는 약 32.727272°(32°43'38")의 각도이다. 이 각은 1/11이라는 뜻의 운데킴(undecim)으로도 알려져 있다. 게다가, 각각 황도대 원의 2/11과 3/11, 4/11 그리고 5/11을 의미하는 약 65.454545°나 65°27'16"인 이배십일분위각(二倍十一分位角) 또는 바이언데사일(biundecile)이나 비운데킴(biundecim)과 약 98.181816°나 98°10'55"인 삼배십일분위각(三倍十一分位角) 또는 트리언데사일(triundecile)이나 트리운데킴(triundecim), 약 130.90909°나 130°54'33"인 사배십일분위각(四倍十一分位角) 또는 쿼드리언데사일(quadriundecile)이나 콰드리운데시마(quadriundecima) 그리고 약 163.636363°나 163°38'11"인 오배십일분위각(五倍十一分位角) 또는 퀸퀘언데사일(quinqueundecile)이나 퀸퀘운데킴(quinqueundecim)도 있다. 십일분위각은 지나친 원조에 다다르는 능력과 사회적 의식하고 연관된다.[6] 14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14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드며 7분위 배수각(칠분위각과 이배칠분위각 그리고 삼배칠분위각)과 연관된다. 이 각들은 그 구조의 적절한 사용으로 야기되는 권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7] 십사분위각[편집] 십사분위각(十四分位角) 또는 (라틴어로 14를 뜻하는 콰투오르데킴(quattuordecim)에서 파생된 쿼터오데시멀(quattuordecimal)이라고도 불리는) 세미셉타일(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1/14 또는 칠분위각의 절반인 약 25.714286°의 각도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행동의 다음 주기로 옮겨가기 위해서 마쳐야할 무엇인가를 포기함을 나타낸다고 한다.[8] 삼배십사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三倍十四分位角) 또는 세스키세프틸레(sesquiseptile)이라고도 하는 트리세미셉타일( tre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3/14인 약 77.142858° (77°08'34")의 각도이다. 오배십사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五倍十四分位角) 또는 퀸세미셉타일(quin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5/14인 약 128.57143° (128°34'17")의 각도이다. 16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16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으며 8분위 배수각(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과 관련된다. 이 각들은 모두 "고난"이나 "시련"의 측면으로 여겨진다.[9] 많은 우라니아 점성가들은 삼배십육분위각과 오배십육분위각(112.5° 또는 112°30'), 칠배십육분위각과(157.5° 또는 157°30')을 포함하는 그것의 배수의 각들을 "보조각"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각들만을 사용한다. 십육분위각[편집] 십육분위각(十六分位角) 또는 세미옥타일(Semioctile)은 황도대 원의 1/16인 22.5°(22°30')의 각도이다. 삼배십육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三倍十六分位角) 또는 세스퀴옥타일(sesquioctile)은 황도대 원의 3/16인 또는 팔분위각(반직각) 더하기 반인 67.5° (67°30')의 각도이다. 24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24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다. 일부의 함부르크 학파 점성가들은 오배이십사분위각과 칠배이십사분위각 그리고 십일배이십사분위각을 포함한 이십사분위각의 배수각도 고려한다. 이십사분위각[편집] 이십사분위각(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쿼터오비진타일(quattuorvigintile)은 황도대 원의 1/24인 15°의 각도이다. 오배이십사분위각[편집] 오배이십사분위각(五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스콰일(Squile)은 황도대 원의 5/24 또는 2.5 개의 별자리의 도수인 75°의 각도로써, 팔분위각과 육분위각의 사이의 혼성으로 여겨진다. 칠배이십사분위각[편집] 칠배이십사분위각(七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스콰인(squine)은 황도대 원의 7/24 인 105°의 각도이며, 팔분위각과 삼분위각의 혼성으로 여겨진다. 십일배이십사분위각[편집] 십일배이십사분위각(十一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존드로(johndro)나 콘트라퀸데사일(contraquindecile)으로 알려진) 퀸데사일(quindecile)은 황도대 원의 11/24인 165°이다. 이 각은 붕괴와 격변을 야기하는 무자비하고 완고한 결정과 연관된다고 추정된다.[10] 리브스 씨의 한 논설에서는 그것이 사실인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르웰린 조지는 이 각을 24도라고 하는데, 그것은 15분할의 각도이다. 그 각은 그의 학술서 《A부터 Z까지의 천궁도 표시와 묘사(A to Z Horoscope Maker and Delineator)》에서 언급되었다.[11] 24분할에 의한 15도의 연속으로, 반원까지 차오르는 차오르는 각도들로는 15도와 30도, 45, 60, 75, 90, 105, 120, 135, 150, 165도 그리고 180도가 있으며, 반원을 이지르는 각도들로는 195도와 210, 225, 240, 255, 270, 285, 300, 315, 330, 345도 그리고 360도가 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OED)에서, quindecile(퀸데사일) 단어의 어원에 관련된 한정된 자료에 따르면, 그 단어는 15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 의미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이탈리어에서 반영된다. OED에는 퀸데사일(quindecile)을 이렇게 설명한다.: "행성의 각에 관한 것: 원의 1/15 또는 24도를 포함한다. 미국 점성가 연맹은 그 단어가 구식 용법임을 확증한다. 전통적으로, 점성술의 각에 대한 이름은 원의 분할 수로 이름지어진다. 360도의 1/15의 부분은 24도이며, 따라서,퀸데사일이 그 각도의 적절한 이름일 수도 있다. 삼배이십사분위각을 뜻하는 영어식 용어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한 사람의 이름을 딴 않은 명칭으로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165도에 대한 틸의 용법은 론 에드워드 존드로의 초기 저서를 반영한다. www.astrologycom.com 중에서, "존드로"라는 이름이 165도를 뜻한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대담한 한 점성술 소프트웨어에서는 "J"라는 기호로도 사용된다. 이 각에 대해 한자어로써 한글화한 십일배이십사분위각의 용어는 분명 165도이다. 적위[편집] 평행이나 역평행은 황도의 위나 아래의 적위의 도수를 참조하는 다른 두 가지의 각들이다. 이 각들에 대한 연구가 충분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평행(平行) 또는 패럴렐(Parallel): ± 1도12분. 이 각은 합과 유사하지만, 일반적으로 유익함을 제공한다. 역평행(逆平行) 또는 안티패럴렐(antiparallel) 혹은 콘트라패럴렐(contraparallel): 충에서 ± 1도12분. 충과 유사하지만, 보다 약하다. 참고 문헌 및 더 보기[편집] 영문 위키피디아: 점성술 서적 목록#점성술의 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Ebertin, Reinhold (1940). 《The Combination of Stellar Influences》. Tempe: American Federation of Astrologers. ISBN 9780866900874.  ↑ 가 나 다 Liz Greene의 사용, 참조: Astrodienst ↑ Septile - 7th harmonic aspect - astrological aspect ↑ 가 나 [http://www.khaldea.com/eon/eonintro.shtml Khaldea.com, Introduction - Planetary Phases and Aspects] ↑ Novile - 9th harmonic aspect · astrological aspect · astrology aspect/aspects→구분위각: 점성학적 각, 점성술의 각 또는 각들 ↑ Astrology Tribe Faqs ↑ Axial Harmonics Introduction ↑ Ciuboda.com ↑ Gemini 1992: Political Miscellany ↑ “Llewellyn.com”. 2008년 5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3일에 확인함.  ↑ George, Llewellyn (1910, 1913, 1923, 1928, 1935, 1937, 1939, 1943, 1946, 1950, 1954, 1960, 1962, 1964, 1966, 1967, 1967, 1968, 1968, 1969, 1969, 1969, 1969). 《A to Z Horoscope Maker and Delineator》 1~25판. St. Paul, Minnesota 55101, USA. Library of Congress Catalog Card Number: 44-1317, 92쪽.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같이 보기[편집] 합 충 우주 생명 상관론 함부르크 점성술 학교 우라니아 점성술 외부 링크[편집] An articles on the use of the aspects→각의 사용에 대한 논설 Online Ephemeris from Khaldea.com—600BC to 2400AD—Calculated for Midnight GMT; also with an Aspectarian included for years 1900 to 2005 →그리니치 평균시의 한밤 때에 맞춰 계산된 기원전 600년부터 기원후 2400년까지 온라인 천체력 vdeh점성술점성술의 역사 점성술의 역사 점성술과 천문학 천문학의 역사 우주의 음악 《테트라비블로스》 점성술사 나라별 점성술사 점성가 목록 점성술의 종류 전통 기독교와 점성술 마구스 독일 점성술 브루노 후버 우주생명상관론 장미십자회 함부르크 점성학파 메소아메리카 아즈텍 달력 마야 달력 바빌로니아 점성술 버마 점성술 베트남 점성술 아랍과 페르시아의 점성술 이슬람 점성술 유대 점성술 카발라 점성술 히브리 점성술 서양 점성술 스리랑카 점성술 이집트 점성술 중국 점성술 켈트 점성술 티벳 점성술 헬레니즘 점성술 힌두 점성술 나디 점성술 유형 금융 점성술 기상 점성술 농경 점성술 비전 점성술 연금술과 점성술 흙점 수상술 수비학과 점성학 관상학 타로점 세속 점성술 정치 점성술 순간 점성술 시작 점성술 심리 점성술 위치 점성술 천체동력학 중세 점성술 진화 점성술 천궁도 점성술 출생 점성술 출생 천궁도 태양궁 점성술 태양중심 점성술 택일 점성술 판별 점성술 항성황도대 점성술 회귀황도대 점성술 연관 주제 시간생물학 점성술과 고대 원소 점성술의 각 점성술의 기호 점성술의 별자리 점성술의 문화적 영향 점성술의 행성 점성학적 시대 천문고고학 천체력 황도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점성술의_각&oldid=22963811" 분류: 점성술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3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हिन्दीHrvatskiMagyarItaliano日本語Latina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 nynorsk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0일 (토) 03: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점성술의 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점성술의 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점성술에서 각(角)또는 애스펙트(aspect)는 천궁도에서 행성이 다른 행성 뿐만 아니라 상승점과 중천점, 하강점 그리고 천저점과도 또한 점성학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다른 감응점 및 가상점과도 서로 맺는 각도이다. 각은 지구에서 볼때의 두 점 사이의 황경의 도와 분으로 표기되는 각거리로 측정된다. 점성술의 전통에 따르면, 그것들은 사람의 생애과 지구와 연관된 사건들에 있어서 발달상의 변화와 변천의 시점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만일 점성가가 한 사람의 출생시간의 천체의 외견상 위치를 보여주는 천궁도(출생 차트)를 뽑았는데, 화성과 금성과의 각거리가 92°라면, (사분위각은 90° 인데, 그 각도는 정확한 사분위각으로 부터 2°도 떨어져 있으므로) 그 차트는 2°의 범위로 "금성이 화성과 사분위각"을 맺고 있다고 본다. 더 정확한 각은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징이나 드러나는 변화에 있어서 더 강하며 더 유력하다. 이 출생 차트의 중심 원에서 사각(붉은색)과 삼각(파란색)과 같이 다른 각들 사이가 구분되는 다른 색상과 기호로 점성학적 각들이 표시되어 있다. 목차 1 접근법 2 주요각 2.1 합 2.2 육분위각 2.3 사분위각 2.4 삼분위각 2.5 충 3 보조각 3.1 오엽각 3.2 팔분위각 3.3 삼배팔분위각 3.4 십이분위각 3.5 오분위각 3.6 이배오분위각 4 삼진각 4.1 7분위 배수각 4.1.1 칠분위각 4.1.2 이배칠분위각 4.1.3 삼배칠분위각 4.2 9분위 배수각 4.2.1 구분위각 4.2.2 이배구분위각 4.2.3 사배구분위각 4.3 10분위 배수각 4.3.1 십분위각 4.3.2 삼배십분위각 4.3.3 이십분위각 4.4 11분위 배수각 4.4.1 십일분위각 4.5 14분위 배수각 4.5.1 십사분위각 4.5.2 삼배십사분위각 4.5.3 오배십사분위각 4.6 16분위 배수각 4.6.1 십육분위각 4.6.2 삼배십육분위각 4.7 24분위 배수각 4.7.1 이십사분위각 4.7.2 오배이십사분위각 4.7.3 칠배이십사분위각 4.7.4 십일배이십사분위각 4.8 적위 5 참고 문헌 및 더 보기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접근법[편집] 중세 점성술에서, 특정 행성들이 맺는 각은 호의적(유리함)이거나 비호의적(불리함이라고 여겨졌다. 현대의 각의 사용에 있어서는 그러한 숙명론적 구별과는 덜한 주안점이 부여된다. 점성학적 각에 대한 심리학과 경향에 더 기반하는 더 현대적인 접근법은 점성학적 화성학의 연구에 의해 예증되었는데, 그 학문에 대해 존 애디는 주요한 옹호자였으며, 요하네스 케플러가 1619년의 그의 저서 《세계의 조화(Harmonice Mundi)》에서 더 먼저 주창했다. 독일의 우라니아 점성술 학파와 그것의 파생적인 우주생태학은 각에 대해 전적으로 경험적인 접근법을 취하려는 시도가 되어오고 있으며, 별자리와 하우스의 전통적인 사용으로부터 대부분 벗어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다양한 각의 유형에서 발하는 힘과 효과에 대해서 전통적 점성술과는 다소 다른 결론을 도출했다. 우라니아 점성가들 사이에서는 때때로 점성술의 전통적 견해로부터 그들의 견해를 구별하고자 애스펙트라는 용어가 회피된다. 주로 라인홀드 에버틴의 《천체 효과의 조합(The Combination of Stellar Influences)》[1]을 통한 어려 가지의 행성 중심점에 대한 우주생명상관론의 소개는 점성가들 사이에서 폭넓은 수용을 불러일으켜오고 있다. 하지만, 우라니아 또는 함부르크의 공식 개념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수용은 있지 않다. 점성학적 차트에서의 행성 배치의 중요성에 대한 프랑소와즈와 미셸 고클랭의 연구는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이 전통적으로 "보조"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주요"각일 수도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아래의 각의 목록은 그것들의 값과 권장되는 범위(範圍, Orb)를 기술한다. 그 범위는 내용과 개인적 선호에 따라 변화한다. 주요각[편집]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의 1533년 인쇄본에 있는 도해로 여러 별자리의 사이점이 서로 어떻게 각을 맺는지를 보여준다.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3월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주요각(主要角, major aspect)은 1~2세기부터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정의되고 사용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프톨레마이오스의 각이라고 불린다. 그러한 각들은 합(거의 0~10°), 육분위각(60°), 사분위각(90°), 삼분위각(120°), 그리고 충(180°)이다. 거의 대부분의 점성가는 다른 각들에 비해서 합에는 넓은 범위를 부여하지만, 대체로 각을 계산하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점성가와 점성술 체계에 따라 (각으로 인정되는 정확한 각에서의 분리 도수인) 다른 범위 범위를 사용한다는 점에 유의를 요한다. 주요각은 360도에서 1과 6, 4, 3 그리고 2의 정수로 균분되어 정의되며 사용된다. (몇 가지 각의 한국어 명칭은 그러한 제수에 근거한다.) 합[편집] 카지미 (점성술의 각), 연소 (점성술의 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합(合) 또는 컨정션(conjunction, 축약형: Con)은 거의 0~10°의 각도이다. 합에는 일반적으로 10° 범위가 인정된다.[2] 그러나, 어떤 점성가들은 여기에 태양이나 달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0±08°까지를 합으로 본다. 합은 해당 행성들의 효과가 증폭되는 가장 강력한 각이며 차트에서 중대한 부분이 된다. 그러한 행성은 외견상으로 서로 고무하며 행동을 함께한다. 합의 본질적 특징은 각각의 행성이 서로 스스로의 본성을 조화시킨 특징을 발휘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함은 서로의 도움으로 완수될 수도 있는 반면, 그러한 과정이 각각의 해당 행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다소 상쇄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달과 수성의 합을 지니고 있다면, 그 또는 그녀는 감정(달)에 대해 말(수성)하기 수월하다고 합리화 시킬수 있다. 그러나, 그 합이 감정에 대해 지적인 접근이 이루어 진것으로 해석된다면, 감정은 깊이를 다소 상실하게 될 것이며,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격렬한 감정적 요구를 다룰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사고 절차(수성)에 감정(달)의 개입이 그러한 사람을 감성을 가지고 배려로서 고찰하며 소통하기 쉽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충절과 감정적 애착(달) 등에 치우친다면, 사고의 과정으로부터 객관성(수성)을 다소 제거케할 수도 있다. 이 융합이 "긍정적"이나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의 여부는 해당되는 행성에게 달려있다.: 금성과 목성 그리고 태양 사이에서의 조합은 (예를 들어, 1970년 11월 9~10일에 그 세 행성이 실제로 합을 이루었는데) 가장 호의적인 예언을 끌어낼 수 있는 반면, 가장 비호의적인 배치는 화성과 토성 그리고(또는) 달을 수반한다.(같은 연도 3월 10에 그 세 행성이 합을 이루었다.) 만일, 행성이 다른 배치로 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면, 합에 시련이 더해진다고 한다. 한 행성이 태양과 매우 가까운 합에 있다면, 그것은 카지미라고 불리며, 태양과 적당히 근접해 있다면, 연소된다고 한다. 매달마다 그믐달일 때에 태양과 달이 합에 있다. 육분위각[편집] 육분위각(六分位角) 또는 섹스타일(sextile, SXt 또는 Sex)는 60°(360° 의 황도의 1/6 또는 120°인 삼분위각의 1/2)의 각도이다. 육분위각에서는 60±04°의 범위가 고려된다. 전통적으로, 육분위각은 삼분위각과 유사한 효력을 지니지만, 그것보다는 덜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이 각은 연관된 두 요소 사이에 적합성을 지니며 화합하는 서로의 원활한 소통을 나타내지만,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이득을 얻기위한 노력을 요하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사분위각[편집] 사분위각(四分位角) 또는 스퀘어(square, SQr 또는 Squ)는 90°(360°의 황도의 1/4 또는 180°인 충의 1/2)의 각도이다. 일반적으로 5°도에서 10° 사이의 범위가 허용된다.[2] 육분위각과 삼분위각과 마찬가지로, 사분위각에서도 외행성이 내행성에 대해 효력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사분위각의 힘은 삼분위각의 것과 비슷하지만, 그 힘은 긴장된다고 하는 정도를 더한다. 예를 들어, 수성의 토성과의 사분위각은 실제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의견과 소통에 있어서의 신중함과 실용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그러한 각은 정신적인 계획이나 과업에 있어서 경고 표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행성들 사이의 사분위각은 심적 억제와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과도한 검열 그리고 일상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나타낸다. 그것은 염세주의와 삶에 대한 과장되고 지나치게 걱정어린 접근을 나타낸다. 사분위각은 긴장과 압력 그리고 좌절, 금지, 붕괴, 그리고 내적 갈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한계를 극복하고자 결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힘과 활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아래의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 참조. 사분위각은 직각이기도 하다. 삼분위각[편집] 삼분위각(三分位角) 또는 트라인(trine 또는 Tri)는 120° (황도의 360°의 1/3)이다. 삼분위각에는 120±04° 의 범위가 고려된다. 삼분위각은 두 요소가 서로 보강해 주면서 조화와 표현의 용이함을 나타낸다. 삼분위각은 본유적인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재능의 원천이다. 삼분위각의 본성은 불의 별자리(양자리와 사자자리 또는 양자리와 사수자리)의 관계와 같고 따라서, 고무적이다. 전통적으로, 삼분위각은 매우 유익한 것이며, 과분하더라도 편의성을 제공해 주지만, 나약한 성품의 사람에게는 '최소의 저항선'이 될 수 있다. 또한, 너무 많은 삼분위각은 사람을 나약하며 역경을 극복하기 어렵게 만든다. 안심과 만족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삼분위각이 마련해주는 조화로움으로 인해, 그러한 사람은 이 각이 선사한 재능을 계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이어서 그 사람은 욕구를 만족시키고 결핍된 것을 보충할 바람도 갖고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그 사람의 출생으로부터 이미 충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분위각의 본질적인 의미는 "탄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힘을 많이 쏟지 않아도 스스로 달성되려는 경향이 있는 지속되는 상황이나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축적이나 증가, 지속, 균형, 증진, 영구성 그리고 안정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삼분위각은 "온화롭다"거나 "좋다"고 여겨지는 각이지만, 만일 두 행성이 모두 본질적으로 유해한 성질을 지닌 것들이거나, 천궁도의 해석에 있어서 불완전한 조건에 놓여 있다고 판단되면, 그 각은 오히려 스스로 집요하게 존속되는 곤란한 상황을 나타낼 수도 있다. 삼분위각은 본연에 있어서 완전히 개인적이며 순전한 자기표현으로서 세상에서 자주적으로 역할하는 한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천적 재능을 나타낸다. 충[편집] 충(衝) 또는 어퍼지션(opposition 또는 Opp)은 180°(황도 360°의 1/2)의 각도이다. 일반적으로 5°에서 10° 사이의 범위가 허용된다.[2] 충은 서로 반대편에 있으므로 대립각(對立角)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두 번째로 강력한 각이라고 여겨진다. 충은 합처럼 통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의 차이점은 있지만, 과장은 야기한다는 점에서 고양되는 공통점이 있다. 충은 해당되는 행성들 사이에서의 역동적이고 고양된 힘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로 인해, 사분위각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해당되는 두 별자리가 구조상 다른 방향에 놓여 있다면, 그러함으로써 야기되는 양극성으로 인해, 긴장과 갈등이나 대립의 표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구조적으로 대립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개인은 이 각을 창조적이며 활동적인 힘의 원천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태양과 달이 충이되는 기간은 매월마다 보름달 동안이다. 보조각[편집] 점성학적 각의 측정 도구들 가운데 하나로써 사용되었던 코스몰라베의 16세기 묘사.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3월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보조각(補助角, minor aspect)은 16세기에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점성가인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것들은 오랜 동안 비교적 부차적인 중요성이 있다고 여겨졌지만, 많은 현대 점성가들은 그러함에 동의하지 않는다. 보조각에는 오엽각(150°)과 팔분위각(45°), 삼배팔분위각(135°), 십이분위각(30°), 오분위각(72°), 이배오분위각(144°)이 포함된다. 우주 생명 상관론 또는 우라니아 점성술(함부르크 점성술 학교)와 같은 더 진보적 연구지향의 학파들은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도 "주요"각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육분위각(60°)과 삼분위각(120°)이 효력에 있어서 "보조"각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그러함은 역사적 문헌이나 확신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연구에 근거한다. 우주생명상관론과 우라니아 또는 함부르크 점성술을 사용하는 점성가들은 1970년 이전부터 더 많은 보조각을 예를 들면 15° 의 배수각(15°, 75°, 105°, 165°)과 22.5°의 배수각(22.5°, 67.5°, 112.5°, 157.5°)도 사용해오고 있다. 육분위각과 오엽각은 주요각과 보조각 사이의 '경계'각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점성가는 육분위각(60°)을 주요각으로 여기는 반면, 매우 색다른 단체는 오엽각(150°)을 주요각으로 사용하며, 매우 소수의 비주류만이 십이분위각 (30°)을 주요각으로 여긴다. 주요각과 앞의 이 세 개의 '경계'각은 모두 프톨레아미오스의 각이라 불린다. 오엽각[편집] 오엽각(五葉角) 또는 퀸컹크스(quincunx) 또는 인컨정트(inconjunct 또는 Inc)는 150°의 각도로써 황도 360°의 5/12이므로 오배십이분위각(五倍十二分位角)이라 표기할 수도 있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표기가 가장 일반적이다. 오엽각에는 150±2°의 범위가 고려된다. 오엽각은 온건하지만 긴장을 유발하는 다소 예측할 수 없는 요력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비양립성의 요소들 간의 강제성으로 인한 어려움과 시련을 나타낸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에서 (특히 건강의 측면에서) 자기태만의 영역이나 한 사람에게 강요된 의무를 의미한다. 이 각은 때때로 불합(不合)의 뜻으로써 인컨정트(inconjunct)라고도 불리지만, 기술적으로 합의 반댓말로 보기는 어렵다. 팔분위각[편집] 팔분위각(八分位角)은 세미스퀘어(semi-square, SSq)는 45°의 각도인데, 사분위각(90°)의 1/2이므로 반직각(半直角)이라 할 수도 있다. 팔분위각에는 45±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사분위각의 약형이며 다소 어려운 환경을 나타낸다. 그것은 때때로 팔분위각으로써는 옥타일(octile)이나 사분위각의 반으로써는 세미쿼타일(semiquartile)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삼배팔분위각[편집] 삼배팔분위각(三倍八分位角) 또는 세스퀴쿼드레이트(sesquiquadrate 또는 Ses)는 135°의 각도로써, 팔분위각의 세배(45°×3)이며, 직각과 반직각의 합(90°+45°)이다. 삼배팔분위각에는 135±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다소 긴장된 상황을 나타낸다. 그것은 팔분위각과 유사한 효력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삼배팔분위각은 때때로 직각의 한배 반으로써 세스퀴스퀘어(sesquisquare)와 직각과 반(square-and-a-half), 사분위각과 반(quartile-and-a-half) 그리고 팔분위각의 세배로써 트리옥타일(trioctile)라고 부른다. 십이분위각[편집] 십이분위각(十二分位角) 또는 세미섹스타일(Semi-sextile 또는 SSx)은 30°의 각도 즉, 360°의 1/12 또는 육분위각의 절반(60°의 1/2)이다. 십위분위각에는 30±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것은 합과 오분위각을 제외한 모든 주요각의 기저가 된다. 이 각은 해당 행성들 사이에서 서로 동기를 부여해 주지만, 그런 만큼의 현실적 기여는 불충분한 온건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 각은 쟁점과 결과를 조화시키려는 중요한 실제적인 노력이 있게할 것이다. 별칭으로는 콘피니스(confinis)와 인컨정트(inconjunct)가 있다. 오분위각[편집] 오분위각(五分位角) 또는 퀸타일(quintile, 축약: QNt 또는 Qui)은 72°(360°의 1/5)이다. 이것은 오각(五分) 또는 오각형인 펜타곤(Pentagon)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의 중심에서 모서리까지의 한 내각이 72°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의 한 내각은 108˚라는 점에서 오분위각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오분위각은 72±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적당히 이롭다는 면에서) 십이분위각과 다소 유사하지만, 그것의 이득을 거둬들이기 위한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막연히 운 좋은 수완과 상황을 나타낼 뿐이다. 이배오분위각[편집] 이배오분위각(二倍五分位角) 또는 바이퀸타일(biquintile, 축약: BQt 또는 BQn)는 144° (오분위각(72°) x 2 = 144°)이다. 이배오분위각에는 144±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오분위각과 유사한 효과를 지닌다. 삼진각[편집] 삼진각(三進角, ternary aspect)은 점성술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부가적 각이다. 7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원의 7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다. 칠분위각[편집] 칠분위각(七分位角) 또는 셉타일(Septile, 축약형: Sep)은 황도대 원의 1/7인 약 51.428571° 또는 51°25'43"의 각도이다. 이것은 해당 구성 요소들 간에 불합리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것들의 숨은 근원적 본성과 심원한 숙명이 부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3] 이배칠분위각[편집] 이배칠분위각(二倍七分位角) 또는 바이셉타일(biseptile 또는 BSp)은 황도대 원의 2/7인 약 102.857143°이나 102°51'26"이다. 이 각은 외면화된 칠분위각으로 여겨진다. 삼배칠분위각[편집] 이배칠분위각(二倍七分位角) 또는 트리셉타일(triseptile, TSp)는 황도대 원의 3/7인 약 154.285714°,[4] 또는 154°17'09"의 각도이다. 9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 원의 9분할에 기저를 둔다. 구분위각[편집] 구분위각(九分位角) 또는 노바일(Novile, Nov)는 황도대 원의 1/9인 40°의 각도이다. 정구각형의 한 내각이 40°인데도 불구하고, 이 각은 구각(九角) 또는 노나곤(nonagon)으로도 알려져 있다.[5] 이배구분위각[편집] 이배구분위각(二倍九分位角) 또는 바이노바일(binovile, BNv)은 80°의 각도이다. 사배구분위각[편집] 사배구분위각(二倍九分位角) 또는 '쿼드노바일(quadnovile, QNv)은 160°의 각도이다. 이것은 구분위각(40°)의 네배라는 뜻의 쿼드리노바일(quadrinovile)이라고도 알려져 있다.[4] 10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원의 10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으며, 5분위 배수각(오분위각과 이배오분위각)과 관계 있다. 십분위각[편집] 십분위각(十分位角) 또는 데사일(Decile, Dec)(기호:⊥)는 황도대의 원의 1/10인 36°의 각도이다. 그것은 오분위각의 절반이라는 뜻의 세미퀸타일(semi-quintile)로도 알려져 있다. 이 각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다고 한다. 삼배십분위각[편집] 삼배십분위각(三倍十分位角) 또는 트리데사일(tridecile) 또는 세스퀴퀸타일(sesquiquintile)은 108°의 각도로써, 외면적인 독창성을 요하는 자기반성과 철회의 필요성 또는 사회적 창의성과 같은 의미가 부여된다. 이십분위각[편집] 이십분위각(二十分位角) 또는 비진타일(Vigintile, Vig) (기호: ∧)은 황도대의 원의 1/20 또는 십분위각의 절반인 18°의 각도이다. 11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 원의 11분할에 기저를 둔다. 십일분위각[편집] 십일분위각(十一分位角) 또는 언데사일(undecile, Und)은 황도대 원의 1/11 또는 약 32.727272°(32°43'38")의 각도이다. 이 각은 1/11이라는 뜻의 운데킴(undecim)으로도 알려져 있다. 게다가, 각각 황도대 원의 2/11과 3/11, 4/11 그리고 5/11을 의미하는 약 65.454545°나 65°27'16"인 이배십일분위각(二倍十一分位角) 또는 바이언데사일(biundecile)이나 비운데킴(biundecim)과 약 98.181816°나 98°10'55"인 삼배십일분위각(三倍十一分位角) 또는 트리언데사일(triundecile)이나 트리운데킴(triundecim), 약 130.90909°나 130°54'33"인 사배십일분위각(四倍十一分位角) 또는 쿼드리언데사일(quadriundecile)이나 콰드리운데시마(quadriundecima) 그리고 약 163.636363°나 163°38'11"인 오배십일분위각(五倍十一分位角) 또는 퀸퀘언데사일(quinqueundecile)이나 퀸퀘운데킴(quinqueundecim)도 있다. 십일분위각은 지나친 원조에 다다르는 능력과 사회적 의식하고 연관된다.[6] 14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14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드며 7분위 배수각(칠분위각과 이배칠분위각 그리고 삼배칠분위각)과 연관된다. 이 각들은 그 구조의 적절한 사용으로 야기되는 권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7] 십사분위각[편집] 십사분위각(十四分位角) 또는 (라틴어로 14를 뜻하는 콰투오르데킴(quattuordecim)에서 파생된 쿼터오데시멀(quattuordecimal)이라고도 불리는) 세미셉타일(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1/14 또는 칠분위각의 절반인 약 25.714286°의 각도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행동의 다음 주기로 옮겨가기 위해서 마쳐야할 무엇인가를 포기함을 나타낸다고 한다.[8] 삼배십사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三倍十四分位角) 또는 세스키세프틸레(sesquiseptile)이라고도 하는 트리세미셉타일( tre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3/14인 약 77.142858° (77°08'34")의 각도이다. 오배십사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五倍十四分位角) 또는 퀸세미셉타일(quin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5/14인 약 128.57143° (128°34'17")의 각도이다. 16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16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으며 8분위 배수각(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과 관련된다. 이 각들은 모두 "고난"이나 "시련"의 측면으로 여겨진다.[9] 많은 우라니아 점성가들은 삼배십육분위각과 오배십육분위각(112.5° 또는 112°30'), 칠배십육분위각과(157.5° 또는 157°30')을 포함하는 그것의 배수의 각들을 "보조각"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각들만을 사용한다. 십육분위각[편집] 십육분위각(十六分位角) 또는 세미옥타일(Semioctile)은 황도대 원의 1/16인 22.5°(22°30')의 각도이다. 삼배십육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三倍十六分位角) 또는 세스퀴옥타일(sesquioctile)은 황도대 원의 3/16인 또는 팔분위각(반직각) 더하기 반인 67.5° (67°30')의 각도이다. 24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24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다. 일부의 함부르크 학파 점성가들은 오배이십사분위각과 칠배이십사분위각 그리고 십일배이십사분위각을 포함한 이십사분위각의 배수각도 고려한다. 이십사분위각[편집] 이십사분위각(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쿼터오비진타일(quattuorvigintile)은 황도대 원의 1/24인 15°의 각도이다. 오배이십사분위각[편집] 오배이십사분위각(五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스콰일(Squile)은 황도대 원의 5/24 또는 2.5 개의 별자리의 도수인 75°의 각도로써, 팔분위각과 육분위각의 사이의 혼성으로 여겨진다. 칠배이십사분위각[편집] 칠배이십사분위각(七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스콰인(squine)은 황도대 원의 7/24 인 105°의 각도이며, 팔분위각과 삼분위각의 혼성으로 여겨진다. 십일배이십사분위각[편집] 십일배이십사분위각(十一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존드로(johndro)나 콘트라퀸데사일(contraquindecile)으로 알려진) 퀸데사일(quindecile)은 황도대 원의 11/24인 165°이다. 이 각은 붕괴와 격변을 야기하는 무자비하고 완고한 결정과 연관된다고 추정된다.[10] 리브스 씨의 한 논설에서는 그것이 사실인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르웰린 조지는 이 각을 24도라고 하는데, 그것은 15분할의 각도이다. 그 각은 그의 학술서 《A부터 Z까지의 천궁도 표시와 묘사(A to Z Horoscope Maker and Delineator)》에서 언급되었다.[11] 24분할에 의한 15도의 연속으로, 반원까지 차오르는 차오르는 각도들로는 15도와 30도, 45, 60, 75, 90, 105, 120, 135, 150, 165도 그리고 180도가 있으며, 반원을 이지르는 각도들로는 195도와 210, 225, 240, 255, 270, 285, 300, 315, 330, 345도 그리고 360도가 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OED)에서, quindecile(퀸데사일) 단어의 어원에 관련된 한정된 자료에 따르면, 그 단어는 15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 의미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이탈리어에서 반영된다. OED에는 퀸데사일(quindecile)을 이렇게 설명한다.: "행성의 각에 관한 것: 원의 1/15 또는 24도를 포함한다. 미국 점성가 연맹은 그 단어가 구식 용법임을 확증한다. 전통적으로, 점성술의 각에 대한 이름은 원의 분할 수로 이름지어진다. 360도의 1/15의 부분은 24도이며, 따라서,퀸데사일이 그 각도의 적절한 이름일 수도 있다. 삼배이십사분위각을 뜻하는 영어식 용어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한 사람의 이름을 딴 않은 명칭으로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165도에 대한 틸의 용법은 론 에드워드 존드로의 초기 저서를 반영한다. www.astrologycom.com 중에서, "존드로"라는 이름이 165도를 뜻한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대담한 한 점성술 소프트웨어에서는 "J"라는 기호로도 사용된다. 이 각에 대해 한자어로써 한글화한 십일배이십사분위각의 용어는 분명 165도이다. 적위[편집] 평행이나 역평행은 황도의 위나 아래의 적위의 도수를 참조하는 다른 두 가지의 각들이다. 이 각들에 대한 연구가 충분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평행(平行) 또는 패럴렐(Parallel): ± 1도12분. 이 각은 합과 유사하지만, 일반적으로 유익함을 제공한다. 역평행(逆平行) 또는 안티패럴렐(antiparallel) 혹은 콘트라패럴렐(contraparallel): 충에서 ± 1도12분. 충과 유사하지만, 보다 약하다. 참고 문헌 및 더 보기[편집] 영문 위키피디아: 점성술 서적 목록#점성술의 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Ebertin, Reinhold (1940). 《The Combination of Stellar Influences》. Tempe: American Federation of Astrologers. ISBN 9780866900874.  ↑ 가 나 다 Liz Greene의 사용, 참조: Astrodienst ↑ Septile - 7th harmonic aspect - astrological aspect ↑ 가 나 [http://www.khaldea.com/eon/eonintro.shtml Khaldea.com, Introduction - Planetary Phases and Aspects] ↑ Novile - 9th harmonic aspect · astrological aspect · astrology aspect/aspects→구분위각: 점성학적 각, 점성술의 각 또는 각들 ↑ Astrology Tribe Faqs ↑ Axial Harmonics Introduction ↑ Ciuboda.com ↑ Gemini 1992: Political Miscellany ↑ “Llewellyn.com”. 2008년 5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3일에 확인함.  ↑ George, Llewellyn (1910, 1913, 1923, 1928, 1935, 1937, 1939, 1943, 1946, 1950, 1954, 1960, 1962, 1964, 1966, 1967, 1967, 1968, 1968, 1969, 1969, 1969, 1969). 《A to Z Horoscope Maker and Delineator》 1~25판. St. Paul, Minnesota 55101, USA. Library of Congress Catalog Card Number: 44-1317, 92쪽.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같이 보기[편집] 합 충 우주 생명 상관론 함부르크 점성술 학교 우라니아 점성술 외부 링크[편집] An articles on the use of the aspects→각의 사용에 대한 논설 Online Ephemeris from Khaldea.com—600BC to 2400AD—Calculated for Midnight GMT; also with an Aspectarian included for years 1900 to 2005 →그리니치 평균시의 한밤 때에 맞춰 계산된 기원전 600년부터 기원후 2400년까지 온라인 천체력 vdeh점성술점성술의 역사 점성술의 역사 점성술과 천문학 천문학의 역사 우주의 음악 《테트라비블로스》 점성술사 나라별 점성술사 점성가 목록 점성술의 종류 전통 기독교와 점성술 마구스 독일 점성술 브루노 후버 우주생명상관론 장미십자회 함부르크 점성학파 메소아메리카 아즈텍 달력 마야 달력 바빌로니아 점성술 버마 점성술 베트남 점성술 아랍과 페르시아의 점성술 이슬람 점성술 유대 점성술 카발라 점성술 히브리 점성술 서양 점성술 스리랑카 점성술 이집트 점성술 중국 점성술 켈트 점성술 티벳 점성술 헬레니즘 점성술 힌두 점성술 나디 점성술 유형 금융 점성술 기상 점성술 농경 점성술 비전 점성술 연금술과 점성술 흙점 수상술 수비학과 점성학 관상학 타로점 세속 점성술 정치 점성술 순간 점성술 시작 점성술 심리 점성술 위치 점성술 천체동력학 중세 점성술 진화 점성술 천궁도 점성술 출생 점성술 출생 천궁도 태양궁 점성술 태양중심 점성술 택일 점성술 판별 점성술 항성황도대 점성술 회귀황도대 점성술 연관 주제 시간생물학 점성술과 고대 원소 점성술의 각 점성술의 기호 점성술의 별자리 점성술의 문화적 영향 점성술의 행성 점성학적 시대 천문고고학 천체력 황도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점성술의_각&oldid=22963811" 분류: 점성술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3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हिन्दीHrvatskiMagyarItaliano日本語Latina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 nynorsk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0일 (토) 03: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점성술의 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점성술의 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점성술에서 각(角)또는 애스펙트(aspect)는 천궁도에서 행성이 다른 행성 뿐만 아니라 상승점과 중천점, 하강점 그리고 천저점과도 또한 점성학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다른 감응점 및 가상점과도 서로 맺는 각도이다. 각은 지구에서 볼때의 두 점 사이의 황경의 도와 분으로 표기되는 각거리로 측정된다. 점성술의 전통에 따르면, 그것들은 사람의 생애과 지구와 연관된 사건들에 있어서 발달상의 변화와 변천의 시점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만일 점성가가 한 사람의 출생시간의 천체의 외견상 위치를 보여주는 천궁도(출생 차트)를 뽑았는데, 화성과 금성과의 각거리가 92°라면, (사분위각은 90° 인데, 그 각도는 정확한 사분위각으로 부터 2°도 떨어져 있으므로) 그 차트는 2°의 범위로 "금성이 화성과 사분위각"을 맺고 있다고 본다. 더 정확한 각은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징이나 드러나는 변화에 있어서 더 강하며 더 유력하다. 이 출생 차트의 중심 원에서 사각(붉은색)과 삼각(파란색)과 같이 다른 각들 사이가 구분되는 다른 색상과 기호로 점성학적 각들이 표시되어 있다. 목차 1 접근법 2 주요각 2.1 합 2.2 육분위각 2.3 사분위각 2.4 삼분위각 2.5 충 3 보조각 3.1 오엽각 3.2 팔분위각 3.3 삼배팔분위각 3.4 십이분위각 3.5 오분위각 3.6 이배오분위각 4 삼진각 4.1 7분위 배수각 4.1.1 칠분위각 4.1.2 이배칠분위각 4.1.3 삼배칠분위각 4.2 9분위 배수각 4.2.1 구분위각 4.2.2 이배구분위각 4.2.3 사배구분위각 4.3 10분위 배수각 4.3.1 십분위각 4.3.2 삼배십분위각 4.3.3 이십분위각 4.4 11분위 배수각 4.4.1 십일분위각 4.5 14분위 배수각 4.5.1 십사분위각 4.5.2 삼배십사분위각 4.5.3 오배십사분위각 4.6 16분위 배수각 4.6.1 십육분위각 4.6.2 삼배십육분위각 4.7 24분위 배수각 4.7.1 이십사분위각 4.7.2 오배이십사분위각 4.7.3 칠배이십사분위각 4.7.4 십일배이십사분위각 4.8 적위 5 참고 문헌 및 더 보기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접근법[편집] 중세 점성술에서, 특정 행성들이 맺는 각은 호의적(유리함)이거나 비호의적(불리함이라고 여겨졌다. 현대의 각의 사용에 있어서는 그러한 숙명론적 구별과는 덜한 주안점이 부여된다. 점성학적 각에 대한 심리학과 경향에 더 기반하는 더 현대적인 접근법은 점성학적 화성학의 연구에 의해 예증되었는데, 그 학문에 대해 존 애디는 주요한 옹호자였으며, 요하네스 케플러가 1619년의 그의 저서 《세계의 조화(Harmonice Mundi)》에서 더 먼저 주창했다. 독일의 우라니아 점성술 학파와 그것의 파생적인 우주생태학은 각에 대해 전적으로 경험적인 접근법을 취하려는 시도가 되어오고 있으며, 별자리와 하우스의 전통적인 사용으로부터 대부분 벗어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다양한 각의 유형에서 발하는 힘과 효과에 대해서 전통적 점성술과는 다소 다른 결론을 도출했다. 우라니아 점성가들 사이에서는 때때로 점성술의 전통적 견해로부터 그들의 견해를 구별하고자 애스펙트라는 용어가 회피된다. 주로 라인홀드 에버틴의 《천체 효과의 조합(The Combination of Stellar Influences)》[1]을 통한 어려 가지의 행성 중심점에 대한 우주생명상관론의 소개는 점성가들 사이에서 폭넓은 수용을 불러일으켜오고 있다. 하지만, 우라니아 또는 함부르크의 공식 개념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수용은 있지 않다. 점성학적 차트에서의 행성 배치의 중요성에 대한 프랑소와즈와 미셸 고클랭의 연구는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이 전통적으로 "보조"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주요"각일 수도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아래의 각의 목록은 그것들의 값과 권장되는 범위(範圍, Orb)를 기술한다. 그 범위는 내용과 개인적 선호에 따라 변화한다. 주요각[편집]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의 1533년 인쇄본에 있는 도해로 여러 별자리의 사이점이 서로 어떻게 각을 맺는지를 보여준다.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3월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주요각(主要角, major aspect)은 1~2세기부터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정의되고 사용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프톨레마이오스의 각이라고 불린다. 그러한 각들은 합(거의 0~10°), 육분위각(60°), 사분위각(90°), 삼분위각(120°), 그리고 충(180°)이다. 거의 대부분의 점성가는 다른 각들에 비해서 합에는 넓은 범위를 부여하지만, 대체로 각을 계산하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점성가와 점성술 체계에 따라 (각으로 인정되는 정확한 각에서의 분리 도수인) 다른 범위 범위를 사용한다는 점에 유의를 요한다. 주요각은 360도에서 1과 6, 4, 3 그리고 2의 정수로 균분되어 정의되며 사용된다. (몇 가지 각의 한국어 명칭은 그러한 제수에 근거한다.) 합[편집] 카지미 (점성술의 각), 연소 (점성술의 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합(合) 또는 컨정션(conjunction, 축약형: Con)은 거의 0~10°의 각도이다. 합에는 일반적으로 10° 범위가 인정된다.[2] 그러나, 어떤 점성가들은 여기에 태양이나 달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0±08°까지를 합으로 본다. 합은 해당 행성들의 효과가 증폭되는 가장 강력한 각이며 차트에서 중대한 부분이 된다. 그러한 행성은 외견상으로 서로 고무하며 행동을 함께한다. 합의 본질적 특징은 각각의 행성이 서로 스스로의 본성을 조화시킨 특징을 발휘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함은 서로의 도움으로 완수될 수도 있는 반면, 그러한 과정이 각각의 해당 행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다소 상쇄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달과 수성의 합을 지니고 있다면, 그 또는 그녀는 감정(달)에 대해 말(수성)하기 수월하다고 합리화 시킬수 있다. 그러나, 그 합이 감정에 대해 지적인 접근이 이루어 진것으로 해석된다면, 감정은 깊이를 다소 상실하게 될 것이며,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격렬한 감정적 요구를 다룰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사고 절차(수성)에 감정(달)의 개입이 그러한 사람을 감성을 가지고 배려로서 고찰하며 소통하기 쉽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충절과 감정적 애착(달) 등에 치우친다면, 사고의 과정으로부터 객관성(수성)을 다소 제거케할 수도 있다. 이 융합이 "긍정적"이나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의 여부는 해당되는 행성에게 달려있다.: 금성과 목성 그리고 태양 사이에서의 조합은 (예를 들어, 1970년 11월 9~10일에 그 세 행성이 실제로 합을 이루었는데) 가장 호의적인 예언을 끌어낼 수 있는 반면, 가장 비호의적인 배치는 화성과 토성 그리고(또는) 달을 수반한다.(같은 연도 3월 10에 그 세 행성이 합을 이루었다.) 만일, 행성이 다른 배치로 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면, 합에 시련이 더해진다고 한다. 한 행성이 태양과 매우 가까운 합에 있다면, 그것은 카지미라고 불리며, 태양과 적당히 근접해 있다면, 연소된다고 한다. 매달마다 그믐달일 때에 태양과 달이 합에 있다. 육분위각[편집] 육분위각(六分位角) 또는 섹스타일(sextile, SXt 또는 Sex)는 60°(360° 의 황도의 1/6 또는 120°인 삼분위각의 1/2)의 각도이다. 육분위각에서는 60±04°의 범위가 고려된다. 전통적으로, 육분위각은 삼분위각과 유사한 효력을 지니지만, 그것보다는 덜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이 각은 연관된 두 요소 사이에 적합성을 지니며 화합하는 서로의 원활한 소통을 나타내지만,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이득을 얻기위한 노력을 요하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사분위각[편집] 사분위각(四分位角) 또는 스퀘어(square, SQr 또는 Squ)는 90°(360°의 황도의 1/4 또는 180°인 충의 1/2)의 각도이다. 일반적으로 5°도에서 10° 사이의 범위가 허용된다.[2] 육분위각과 삼분위각과 마찬가지로, 사분위각에서도 외행성이 내행성에 대해 효력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사분위각의 힘은 삼분위각의 것과 비슷하지만, 그 힘은 긴장된다고 하는 정도를 더한다. 예를 들어, 수성의 토성과의 사분위각은 실제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의견과 소통에 있어서의 신중함과 실용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그러한 각은 정신적인 계획이나 과업에 있어서 경고 표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행성들 사이의 사분위각은 심적 억제와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과도한 검열 그리고 일상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나타낸다. 그것은 염세주의와 삶에 대한 과장되고 지나치게 걱정어린 접근을 나타낸다. 사분위각은 긴장과 압력 그리고 좌절, 금지, 붕괴, 그리고 내적 갈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한계를 극복하고자 결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힘과 활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아래의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 참조. 사분위각은 직각이기도 하다. 삼분위각[편집] 삼분위각(三分位角) 또는 트라인(trine 또는 Tri)는 120° (황도의 360°의 1/3)이다. 삼분위각에는 120±04° 의 범위가 고려된다. 삼분위각은 두 요소가 서로 보강해 주면서 조화와 표현의 용이함을 나타낸다. 삼분위각은 본유적인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재능의 원천이다. 삼분위각의 본성은 불의 별자리(양자리와 사자자리 또는 양자리와 사수자리)의 관계와 같고 따라서, 고무적이다. 전통적으로, 삼분위각은 매우 유익한 것이며, 과분하더라도 편의성을 제공해 주지만, 나약한 성품의 사람에게는 '최소의 저항선'이 될 수 있다. 또한, 너무 많은 삼분위각은 사람을 나약하며 역경을 극복하기 어렵게 만든다. 안심과 만족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삼분위각이 마련해주는 조화로움으로 인해, 그러한 사람은 이 각이 선사한 재능을 계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이어서 그 사람은 욕구를 만족시키고 결핍된 것을 보충할 바람도 갖고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그 사람의 출생으로부터 이미 충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분위각의 본질적인 의미는 "탄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힘을 많이 쏟지 않아도 스스로 달성되려는 경향이 있는 지속되는 상황이나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축적이나 증가, 지속, 균형, 증진, 영구성 그리고 안정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삼분위각은 "온화롭다"거나 "좋다"고 여겨지는 각이지만, 만일 두 행성이 모두 본질적으로 유해한 성질을 지닌 것들이거나, 천궁도의 해석에 있어서 불완전한 조건에 놓여 있다고 판단되면, 그 각은 오히려 스스로 집요하게 존속되는 곤란한 상황을 나타낼 수도 있다. 삼분위각은 본연에 있어서 완전히 개인적이며 순전한 자기표현으로서 세상에서 자주적으로 역할하는 한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천적 재능을 나타낸다. 충[편집] 충(衝) 또는 어퍼지션(opposition 또는 Opp)은 180°(황도 360°의 1/2)의 각도이다. 일반적으로 5°에서 10° 사이의 범위가 허용된다.[2] 충은 서로 반대편에 있으므로 대립각(對立角)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두 번째로 강력한 각이라고 여겨진다. 충은 합처럼 통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의 차이점은 있지만, 과장은 야기한다는 점에서 고양되는 공통점이 있다. 충은 해당되는 행성들 사이에서의 역동적이고 고양된 힘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로 인해, 사분위각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해당되는 두 별자리가 구조상 다른 방향에 놓여 있다면, 그러함으로써 야기되는 양극성으로 인해, 긴장과 갈등이나 대립의 표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구조적으로 대립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개인은 이 각을 창조적이며 활동적인 힘의 원천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태양과 달이 충이되는 기간은 매월마다 보름달 동안이다. 보조각[편집] 점성학적 각의 측정 도구들 가운데 하나로써 사용되었던 코스몰라베의 16세기 묘사.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3월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보조각(補助角, minor aspect)은 16세기에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점성가인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것들은 오랜 동안 비교적 부차적인 중요성이 있다고 여겨졌지만, 많은 현대 점성가들은 그러함에 동의하지 않는다. 보조각에는 오엽각(150°)과 팔분위각(45°), 삼배팔분위각(135°), 십이분위각(30°), 오분위각(72°), 이배오분위각(144°)이 포함된다. 우주 생명 상관론 또는 우라니아 점성술(함부르크 점성술 학교)와 같은 더 진보적 연구지향의 학파들은 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도 "주요"각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육분위각(60°)과 삼분위각(120°)이 효력에 있어서 "보조"각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그러함은 역사적 문헌이나 확신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연구에 근거한다. 우주생명상관론과 우라니아 또는 함부르크 점성술을 사용하는 점성가들은 1970년 이전부터 더 많은 보조각을 예를 들면 15° 의 배수각(15°, 75°, 105°, 165°)과 22.5°의 배수각(22.5°, 67.5°, 112.5°, 157.5°)도 사용해오고 있다. 육분위각과 오엽각은 주요각과 보조각 사이의 '경계'각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점성가는 육분위각(60°)을 주요각으로 여기는 반면, 매우 색다른 단체는 오엽각(150°)을 주요각으로 사용하며, 매우 소수의 비주류만이 십이분위각 (30°)을 주요각으로 여긴다. 주요각과 앞의 이 세 개의 '경계'각은 모두 프톨레아미오스의 각이라 불린다. 오엽각[편집] 오엽각(五葉角) 또는 퀸컹크스(quincunx) 또는 인컨정트(inconjunct 또는 Inc)는 150°의 각도로써 황도 360°의 5/12이므로 오배십이분위각(五倍十二分位角)이라 표기할 수도 있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표기가 가장 일반적이다. 오엽각에는 150±2°의 범위가 고려된다. 오엽각은 온건하지만 긴장을 유발하는 다소 예측할 수 없는 요력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비양립성의 요소들 간의 강제성으로 인한 어려움과 시련을 나타낸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에서 (특히 건강의 측면에서) 자기태만의 영역이나 한 사람에게 강요된 의무를 의미한다. 이 각은 때때로 불합(不合)의 뜻으로써 인컨정트(inconjunct)라고도 불리지만, 기술적으로 합의 반댓말로 보기는 어렵다. 팔분위각[편집] 팔분위각(八分位角)은 세미스퀘어(semi-square, SSq)는 45°의 각도인데, 사분위각(90°)의 1/2이므로 반직각(半直角)이라 할 수도 있다. 팔분위각에는 45±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사분위각의 약형이며 다소 어려운 환경을 나타낸다. 그것은 때때로 팔분위각으로써는 옥타일(octile)이나 사분위각의 반으로써는 세미쿼타일(semiquartile)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삼배팔분위각[편집] 삼배팔분위각(三倍八分位角) 또는 세스퀴쿼드레이트(sesquiquadrate 또는 Ses)는 135°의 각도로써, 팔분위각의 세배(45°×3)이며, 직각과 반직각의 합(90°+45°)이다. 삼배팔분위각에는 135±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다소 긴장된 상황을 나타낸다. 그것은 팔분위각과 유사한 효력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삼배팔분위각은 때때로 직각의 한배 반으로써 세스퀴스퀘어(sesquisquare)와 직각과 반(square-and-a-half), 사분위각과 반(quartile-and-a-half) 그리고 팔분위각의 세배로써 트리옥타일(trioctile)라고 부른다. 십이분위각[편집] 십이분위각(十二分位角) 또는 세미섹스타일(Semi-sextile 또는 SSx)은 30°의 각도 즉, 360°의 1/12 또는 육분위각의 절반(60°의 1/2)이다. 십위분위각에는 30±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것은 합과 오분위각을 제외한 모든 주요각의 기저가 된다. 이 각은 해당 행성들 사이에서 서로 동기를 부여해 주지만, 그런 만큼의 현실적 기여는 불충분한 온건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 각은 쟁점과 결과를 조화시키려는 중요한 실제적인 노력이 있게할 것이다. 별칭으로는 콘피니스(confinis)와 인컨정트(inconjunct)가 있다. 오분위각[편집] 오분위각(五分位角) 또는 퀸타일(quintile, 축약: QNt 또는 Qui)은 72°(360°의 1/5)이다. 이것은 오각(五分) 또는 오각형인 펜타곤(Pentagon)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의 중심에서 모서리까지의 한 내각이 72°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의 한 내각은 108˚라는 점에서 오분위각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오분위각은 72±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적당히 이롭다는 면에서) 십이분위각과 다소 유사하지만, 그것의 이득을 거둬들이기 위한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막연히 운 좋은 수완과 상황을 나타낼 뿐이다. 이배오분위각[편집] 이배오분위각(二倍五分位角) 또는 바이퀸타일(biquintile, 축약: BQt 또는 BQn)는 144° (오분위각(72°) x 2 = 144°)이다. 이배오분위각에는 144±2°의 범위가 고려된다. 이 각은 오분위각과 유사한 효과를 지닌다. 삼진각[편집] 삼진각(三進角, ternary aspect)은 점성술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부가적 각이다. 7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원의 7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다. 칠분위각[편집] 칠분위각(七分位角) 또는 셉타일(Septile, 축약형: Sep)은 황도대 원의 1/7인 약 51.428571° 또는 51°25'43"의 각도이다. 이것은 해당 구성 요소들 간에 불합리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것들의 숨은 근원적 본성과 심원한 숙명이 부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3] 이배칠분위각[편집] 이배칠분위각(二倍七分位角) 또는 바이셉타일(biseptile 또는 BSp)은 황도대 원의 2/7인 약 102.857143°이나 102°51'26"이다. 이 각은 외면화된 칠분위각으로 여겨진다. 삼배칠분위각[편집] 이배칠분위각(二倍七分位角) 또는 트리셉타일(triseptile, TSp)는 황도대 원의 3/7인 약 154.285714°,[4] 또는 154°17'09"의 각도이다. 9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 원의 9분할에 기저를 둔다. 구분위각[편집] 구분위각(九分位角) 또는 노바일(Novile, Nov)는 황도대 원의 1/9인 40°의 각도이다. 정구각형의 한 내각이 40°인데도 불구하고, 이 각은 구각(九角) 또는 노나곤(nonagon)으로도 알려져 있다.[5] 이배구분위각[편집] 이배구분위각(二倍九分位角) 또는 바이노바일(binovile, BNv)은 80°의 각도이다. 사배구분위각[편집] 사배구분위각(二倍九分位角) 또는 '쿼드노바일(quadnovile, QNv)은 160°의 각도이다. 이것은 구분위각(40°)의 네배라는 뜻의 쿼드리노바일(quadrinovile)이라고도 알려져 있다.[4] 10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원의 10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으며, 5분위 배수각(오분위각과 이배오분위각)과 관계 있다. 십분위각[편집] 십분위각(十分位角) 또는 데사일(Decile, Dec)(기호:⊥)는 황도대의 원의 1/10인 36°의 각도이다. 그것은 오분위각의 절반이라는 뜻의 세미퀸타일(semi-quintile)로도 알려져 있다. 이 각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다고 한다. 삼배십분위각[편집] 삼배십분위각(三倍十分位角) 또는 트리데사일(tridecile) 또는 세스퀴퀸타일(sesquiquintile)은 108°의 각도로써, 외면적인 독창성을 요하는 자기반성과 철회의 필요성 또는 사회적 창의성과 같은 의미가 부여된다. 이십분위각[편집] 이십분위각(二十分位角) 또는 비진타일(Vigintile, Vig) (기호: ∧)은 황도대의 원의 1/20 또는 십분위각의 절반인 18°의 각도이다. 11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 원의 11분할에 기저를 둔다. 십일분위각[편집] 십일분위각(十一分位角) 또는 언데사일(undecile, Und)은 황도대 원의 1/11 또는 약 32.727272°(32°43'38")의 각도이다. 이 각은 1/11이라는 뜻의 운데킴(undecim)으로도 알려져 있다. 게다가, 각각 황도대 원의 2/11과 3/11, 4/11 그리고 5/11을 의미하는 약 65.454545°나 65°27'16"인 이배십일분위각(二倍十一分位角) 또는 바이언데사일(biundecile)이나 비운데킴(biundecim)과 약 98.181816°나 98°10'55"인 삼배십일분위각(三倍十一分位角) 또는 트리언데사일(triundecile)이나 트리운데킴(triundecim), 약 130.90909°나 130°54'33"인 사배십일분위각(四倍十一分位角) 또는 쿼드리언데사일(quadriundecile)이나 콰드리운데시마(quadriundecima) 그리고 약 163.636363°나 163°38'11"인 오배십일분위각(五倍十一分位角) 또는 퀸퀘언데사일(quinqueundecile)이나 퀸퀘운데킴(quinqueundecim)도 있다. 십일분위각은 지나친 원조에 다다르는 능력과 사회적 의식하고 연관된다.[6] 14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14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드며 7분위 배수각(칠분위각과 이배칠분위각 그리고 삼배칠분위각)과 연관된다. 이 각들은 그 구조의 적절한 사용으로 야기되는 권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7] 십사분위각[편집] 십사분위각(十四分位角) 또는 (라틴어로 14를 뜻하는 콰투오르데킴(quattuordecim)에서 파생된 쿼터오데시멀(quattuordecimal)이라고도 불리는) 세미셉타일(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1/14 또는 칠분위각의 절반인 약 25.714286°의 각도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행동의 다음 주기로 옮겨가기 위해서 마쳐야할 무엇인가를 포기함을 나타낸다고 한다.[8] 삼배십사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三倍十四分位角) 또는 세스키세프틸레(sesquiseptile)이라고도 하는 트리세미셉타일( tre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3/14인 약 77.142858° (77°08'34")의 각도이다. 오배십사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五倍十四分位角) 또는 퀸세미셉타일(quinsemiseptile)은 황도대 원의 5/14인 약 128.57143° (128°34'17")의 각도이다. 16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16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으며 8분위 배수각(팔분위각과 삼배팔분위각)과 관련된다. 이 각들은 모두 "고난"이나 "시련"의 측면으로 여겨진다.[9] 많은 우라니아 점성가들은 삼배십육분위각과 오배십육분위각(112.5° 또는 112°30'), 칠배십육분위각과(157.5° 또는 157°30')을 포함하는 그것의 배수의 각들을 "보조각"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각들만을 사용한다. 십육분위각[편집] 십육분위각(十六分位角) 또는 세미옥타일(Semioctile)은 황도대 원의 1/16인 22.5°(22°30')의 각도이다. 삼배십육분위각[편집] 삼배십사분위각(三倍十六分位角) 또는 세스퀴옥타일(sesquioctile)은 황도대 원의 3/16인 또는 팔분위각(반직각) 더하기 반인 67.5° (67°30')의 각도이다. 24분위 배수각[편집] 이 각들은 황도대의 24분할에 기저를 두고 있다. 일부의 함부르크 학파 점성가들은 오배이십사분위각과 칠배이십사분위각 그리고 십일배이십사분위각을 포함한 이십사분위각의 배수각도 고려한다. 이십사분위각[편집] 이십사분위각(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쿼터오비진타일(quattuorvigintile)은 황도대 원의 1/24인 15°의 각도이다. 오배이십사분위각[편집] 오배이십사분위각(五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스콰일(Squile)은 황도대 원의 5/24 또는 2.5 개의 별자리의 도수인 75°의 각도로써, 팔분위각과 육분위각의 사이의 혼성으로 여겨진다. 칠배이십사분위각[편집] 칠배이십사분위각(七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스콰인(squine)은 황도대 원의 7/24 인 105°의 각도이며, 팔분위각과 삼분위각의 혼성으로 여겨진다. 십일배이십사분위각[편집] 십일배이십사분위각(十一倍二十四六分位角) 또는 (존드로(johndro)나 콘트라퀸데사일(contraquindecile)으로 알려진) 퀸데사일(quindecile)은 황도대 원의 11/24인 165°이다. 이 각은 붕괴와 격변을 야기하는 무자비하고 완고한 결정과 연관된다고 추정된다.[10] 리브스 씨의 한 논설에서는 그것이 사실인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르웰린 조지는 이 각을 24도라고 하는데, 그것은 15분할의 각도이다. 그 각은 그의 학술서 《A부터 Z까지의 천궁도 표시와 묘사(A to Z Horoscope Maker and Delineator)》에서 언급되었다.[11] 24분할에 의한 15도의 연속으로, 반원까지 차오르는 차오르는 각도들로는 15도와 30도, 45, 60, 75, 90, 105, 120, 135, 150, 165도 그리고 180도가 있으며, 반원을 이지르는 각도들로는 195도와 210, 225, 240, 255, 270, 285, 300, 315, 330, 345도 그리고 360도가 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OED)에서, quindecile(퀸데사일) 단어의 어원에 관련된 한정된 자료에 따르면, 그 단어는 15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 의미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이탈리어에서 반영된다. OED에는 퀸데사일(quindecile)을 이렇게 설명한다.: "행성의 각에 관한 것: 원의 1/15 또는 24도를 포함한다. 미국 점성가 연맹은 그 단어가 구식 용법임을 확증한다. 전통적으로, 점성술의 각에 대한 이름은 원의 분할 수로 이름지어진다. 360도의 1/15의 부분은 24도이며, 따라서,퀸데사일이 그 각도의 적절한 이름일 수도 있다. 삼배이십사분위각을 뜻하는 영어식 용어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한 사람의 이름을 딴 않은 명칭으로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165도에 대한 틸의 용법은 론 에드워드 존드로의 초기 저서를 반영한다. www.astrologycom.com 중에서, "존드로"라는 이름이 165도를 뜻한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대담한 한 점성술 소프트웨어에서는 "J"라는 기호로도 사용된다. 이 각에 대해 한자어로써 한글화한 십일배이십사분위각의 용어는 분명 165도이다. 적위[편집] 평행이나 역평행은 황도의 위나 아래의 적위의 도수를 참조하는 다른 두 가지의 각들이다. 이 각들에 대한 연구가 충분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평행(平行) 또는 패럴렐(Parallel): ± 1도12분. 이 각은 합과 유사하지만, 일반적으로 유익함을 제공한다. 역평행(逆平行) 또는 안티패럴렐(antiparallel) 혹은 콘트라패럴렐(contraparallel): 충에서 ± 1도12분. 충과 유사하지만, 보다 약하다. 참고 문헌 및 더 보기[편집] 영문 위키피디아: 점성술 서적 목록#점성술의 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Ebertin, Reinhold (1940). 《The Combination of Stellar Influences》. Tempe: American Federation of Astrologers. ISBN 9780866900874.  ↑ 가 나 다 Liz Greene의 사용, 참조: Astrodienst ↑ Septile - 7th harmonic aspect - astrological aspect ↑ 가 나 [http://www.khaldea.com/eon/eonintro.shtml Khaldea.com, Introduction - Planetary Phases and Aspects] ↑ Novile - 9th harmonic aspect · astrological aspect · astrology aspect/aspects→구분위각: 점성학적 각, 점성술의 각 또는 각들 ↑ Astrology Tribe Faqs ↑ Axial Harmonics Introduction ↑ Ciuboda.com ↑ Gemini 1992: Political Miscellany ↑ “Llewellyn.com”. 2008년 5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3일에 확인함.  ↑ George, Llewellyn (1910, 1913, 1923, 1928, 1935, 1937, 1939, 1943, 1946, 1950, 1954, 1960, 1962, 1964, 1966, 1967, 1967, 1968, 1968, 1969, 1969, 1969, 1969). 《A to Z Horoscope Maker and Delineator》 1~25판. St. Paul, Minnesota 55101, USA. Library of Congress Catalog Card Number: 44-1317, 92쪽.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같이 보기[편집] 합 충 우주 생명 상관론 함부르크 점성술 학교 우라니아 점성술 외부 링크[편집] An articles on the use of the aspects→각의 사용에 대한 논설 Online Ephemeris from Khaldea.com—600BC to 2400AD—Calculated for Midnight GMT; also with an Aspectarian included for years 1900 to 2005 →그리니치 평균시의 한밤 때에 맞춰 계산된 기원전 600년부터 기원후 2400년까지 온라인 천체력 vdeh점성술점성술의 역사 점성술의 역사 점성술과 천문학 천문학의 역사 우주의 음악 《테트라비블로스》 점성술사 나라별 점성술사 점성가 목록 점성술의 종류 전통 기독교와 점성술 마구스 독일 점성술 브루노 후버 우주생명상관론 장미십자회 함부르크 점성학파 메소아메리카 아즈텍 달력 마야 달력 바빌로니아 점성술 버마 점성술 베트남 점성술 아랍과 페르시아의 점성술 이슬람 점성술 유대 점성술 카발라 점성술 히브리 점성술 서양 점성술 스리랑카 점성술 이집트 점성술 중국 점성술 켈트 점성술 티벳 점성술 헬레니즘 점성술 힌두 점성술 나디 점성술 유형 금융 점성술 기상 점성술 농경 점성술 비전 점성술 연금술과 점성술 흙점 수상술 수비학과 점성학 관상학 타로점 세속 점성술 정치 점성술 순간 점성술 시작 점성술 심리 점성술 위치 점성술 천체동력학 중세 점성술 진화 점성술 천궁도 점성술 출생 점성술 출생 천궁도 태양궁 점성술 태양중심 점성술 택일 점성술 판별 점성술 항성황도대 점성술 회귀황도대 점성술 연관 주제 시간생물학 점성술과 고대 원소 점성술의 각 점성술의 기호 점성술의 별자리 점성술의 문화적 영향 점성술의 행성 점성학적 시대 천문고고학 천체력 황도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점성술의_각&oldid=22963811" 분류: 점성술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3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हिन्दीHrvatskiMagyarItaliano日本語Latina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 nynorsk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0일 (토) 03: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미스 USA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스 USA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슷한 이름의 미스 아메리카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미스 USA 2018 - 사라 로즈 서머스 미스 USA (Miss USA) 대회는 미국의 미인 대회이며, 미스 유니버스 참가를 위한 미국 대표 참가자를 뽑는 대회 이다. 우승자는 1년간 유방암과 난소암 그리고 USO를 위한 봉사 활동을 펼치게 되며 각종 이벤트 참가와 임대 아파트에서 무상임대 로 거주할 수 있는 권리, 소정의 월급과 상품을 제공 받는다.[1] 목차 1 역사 2 최근 우승자 3 역대 우승자 사진 4 역대 우승 주 5 외부 링크 6 함께 보기 7 각주 역사[편집] 미스 아메리카 1950 이었던 욜란드 벳베스가 광고를 위한 수영복 차림의 사진 촬영을 거부하자, 수영복 제조업체 카탈리나 사 는 미스 아메리카 조직회의 스폰서쉽을 중단하고 새로운 라이벌 조직회를 만드는데, 그 조직회가 바로 미스 유니버스 조직회 이다. 미스 유니버스 조직회는 1952년 부터 제 1회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열기로 결정 하였으며,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미국 대표를 참가 시키기 위해 미스 USA 대회도 함께 만들게 되었고, 1983년에 미스 틴 USA 대회도 만들었다. 그 이후로 소유주는 걸프-웨스턴 컴퍼니, ITT 코퍼레이션을 거쳐 현재의 도널드 트럼프 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 회장은 폴라 슈가트 이다. 미스 USA 대회는 TV방송이 되지 않다가 1963년 부터 2002년 까지 CBS에서 방송 하였고, 2003년 부터 2014년 2015년 1월 미스유니버스 2014 대회 방송 까지 NBC 유니버설과 협력하여 방송 되고 있지만 2015년 부터 미국 중소기업 방송에 1년간 시작 했다가 2016년 부터 다른 방송사 FOX 로 이전하였다. 2016년 미스 USA 대회 운영 규정 개정 에 따라 51명중 1명 추가로 일반인 선발하여 52명 이 참가하는 미스 USA 대회를 개정하였다. 2017년 부터는 52명 대회 폐지하고 기존처럼 그대로 유지 하여 진행하고 있다. 최근 우승자[편집] 연도(year) 이름(Name) 주(States) 개최지(venue) 미스 유니버스 성적(placement in Miss Universe) 2019 체슬리 크리스트 노스캐롤라이나 네바다주 리노 2018 사라 로즈 서머스 네브래스카 루이지애나주 슈리브포트 20위 (Semi-Finallist) 2017 카라 매컬로 컬럼비아 네바다주,라스베이거스 10위(Semi-Finallist) 2016 디쇼나 바버 컬럼비아 네바다주,라스베이거스 9위 2015 올리비아 조던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배턴 루지 3위(2nd-Runup) 2014 니아 산체스 네바다 루이지애나,배턴 루지 2위(1st-Runup) 2013 에린 브래디 코네티컷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10위(Top 10 Semi-finallist) 2012 나나 메리우더 메릴랜드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왕관 물려받아 권한대행 2012 올리비아 컬포 로드아일랜드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우승 Miss Universe 2012 2011 앨리사 캄파넬라 캘리포니아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16위 (Top16 Semi-Finallist) 2010 리마 파키 미시간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준결승 실패 2009 크리스틴 돌턴 노스캐롤라이나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10위 역대 우승자 사진[편집] 미스 USA 2018사라 로즈 서머스 - 미스 네브라스카 USA 미스 USA 2017카라 매컬로 - 미스 컬럼비아 USA 미스 USA 2016디쇼나 바버 - 미스 컬럼비아 USA 미스 USA 2014니아 산체스 - 미스 네바다 USA 미스 USA 2013에린 브래디 - 미스 코네티컷 USA 미스 USA 2012올리비아 컬포 - 미스 로드아일랜드 USA 미스 USA 2011앨리사 캄파넬라 - 미스 캘리포니아 USA 미스 USA 2010리마 파키 - 미스 미시간 USA 미스 USA 2009크리스틴 돌턴 - 미스 노스캐롤라이나 USA 미스 USA 2008크리스틀 스튜어트 - 미스 텍사스 USA 미스 USA 2007레이첼 스미스 - 미스 테네시 USA 미스 USA 2006타라 코너 - 미스 켄터키 USA 미스 USA 2005첼시 쿨리 - 미스 노스캐롤라이나 USA 미스 USA 2004섄디 피네시 - 미스 미주리 USA 미스 USA 2003수지 카스티요 - 미스 매사추세츠 USA 미스 USA 2002션테이 힌튼 - 미스 워싱턴 D.C. USA 미스 USA 2001캔다스 크루저 - 미스 텍사스 USA 미스 유니버스 1997브룩 리 - 미스 하와이 USA 미스 USA 1996알리 랜드리 - 미스 루이지애나 USA 미스 USA 1995샤나 모클러 - 미스 뉴욕 USA 미스 USA 1987 미셸 로열 - 미스 텍사스 USA 미스 USA 1986크리스티 피처 - 미스 텍사스 USA 미스 USA 1985로라 해링 - 미스 텍사스 USA 미스 USA 1983줄리 헤이엑 - 미스 캘리포니아 USA 역대 우승 주[편집] 미스 USA 역대 우승 주 (우승자만 표기 됨) 주 역대 우승 수 연도 텍사스 9 1977 1985 1986 1987 1988 1989 1995※ 2001 2008 캘리포니아 6 1959 1966 1975 1983 1992 2011 뉴욕 4 1952 1979 1995‡ 1999 하와이 4 1962 1972 1978 1997※ 일리노이 4 1953 1963 1973 1974 미시간 3 1990 1993 2010 루이지애나 3 1958 1961 1996 사우스캐롤라이나 3 1954※ 1980※ 1994 노스캐롤라이나 3 2005 2009 2019 테네시 2 2000 2007 매사추세츠 2 1998 2003 워싱턴 D.C. 4 1964 2002 2016 2017 오하이오 2 1965 1981 버지니아 2 1969 1970 유타 2 1957^ 1960※ 오클라호마 1 2015 네바다 1 2014 코네티컷 1 2013 로드아일랜드 1 2012※ 켄터키 1 2006 미주리 1 2004 아이다호 1 1997‡ 캔자스 1 1991 뉴 멕시코 1 1984 아칸소 1 1982 애리조나 1 1980‡ 미네소타 1 1976 펜실베이니아 1 1971 워싱턴 1 1968 앨라배마 1 1967※ 플로리다 1 1967 메릴랜드 2 1957*2012‡ 아이오와 1 1956※ 버몬트 1 1955 네브래스카 1 2018 ※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 ‡ 1961년 부터 미스 USA 우승자가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우승 할 경우, 미스 USA 2위가 그 자리를 물려 받게 되었다. * 왕관을 박탈 당한 우승자 ^ 왕관을 박탈 당한 우승자에 의해 왕관을 물려 받은 2위 외부 링크[편집] 미스 USA 공식 웹사이트 미스 USA 공식 트위터 함께 보기[편집] 미스 유니버스 미스 유니버스 2007 미스 유니버스 2008 미스 유니버스 2009 미스 유니버스 2010 미스 유니버스 2011 브룩 리 로라 해링 리마 파키 앨리사 캄파넬라 미스 월드 미스코리아 미스터 월드 미스 틴 USA 각주[편집] ↑ http://www.missuniverse.com/missusa/charities/index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스_USA&oldid=24178019" 분류: 미인 대회미국의 미인 대회미국의 문화미국의 행사미국의 경연회NBC의 텔레비전 프로그램1952년 설립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13: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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