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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로 (광양 하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산업로 (광양 하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산업로 (하동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일반 국도 59 산업로 국도 제59호선의 일부 총연장 10.281km 개통년 1995년 12월 27일 기점 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 주요경유지 전라남도 광양시경상남도 하동군 종점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주요교차도로 남해고속도로국도 제2호선국도 제19호선 2001년 이전 고속국도 노선(기종점은 2001년 8월 24일 이전을 기준으로 함) 노선 기호와 사용 연도 1995년 ~ 1996년 노선명 남해고속도로제3지선(고속국도 제6-3호선) 기점 경상남도 하동군 종점 전라남도 광양시 산업로(産業路)는 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 태인교 북단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하동 나들목 (계천사거리)을 잇는 왕복 4차선의 도로이다. 1995년 12월 27일 남해고속도로제3지선(고속국도 제6-3호선)으로 개통했으나 도로 구조 상 고속도로로 관리하기 어렵다는 사유로 1996년 7월 1일 고속도로에서 해제되고 국도 제59호선으로 지정되었다. 섬진대교를 기준으로 서쪽 광양시 구간은 태인로(太仁路), 동쪽 하동군 구간은 산업대로(産業大路)로 명명되었다가 2009년 7월 10일 산업로로 통일하였다. 목차 1 연혁 2 주요 경유지 3 노선 4 주요 건물 및 시설 5 특이 사항 6 각주 7 외부 링크 연혁[편집] 1991년 11월 9일 : 전 구간 착공 1992년 4월 29일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 전라남도 동광양시 태인동 구간을 고속국도 제6호의3호선 남해제3지선으로 지정[1] 1992년 6월 9일 : 남해제3지선 하동 ~ 광양 구간 신설을 위해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계천리 ~ 전라남도 동광양시 태인동 7.5km 구간 도로구역 결정[2] 1995년 1월 1일 : 종점을 '전라남도 동광양시 태인동'에서 '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으로 변경[3] 1995년 1월 18일 : 1995년 12월까지 영업소 건설을 위해 경상남도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 240m 구간 도로구역 변경[4] 1995년 12월 27일 : 향후 4차선 확장을 대비한 왕복 2차선의 형태로 전 구간 개통[5][6] 1996년 7월 1일 : 도로 구조상 고속도로로 관리하기 어려워 고속도로 노선 지정 폐지[7], 동시에 섬진대교를 경계로 산업대로와 태인로로 분리 및 국도 제59호선으로 지정[8] 2001년 8월 25일 : 국도 제59호선이 광양 ~ 양양 구간으로 확대되면서 국도 제59호선의 일부구간이 됨[9] 2009년 7월 10일 : 2개 이상 시·도에 걸쳐 있는 도로로 산업로를 고시[10] 주요 경유지[편집] 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 경상남도 하동군 (금성면 - 금남면) 노선[편집] 이름[11] 접속 노선 소재지 비고 태인교 북단 국도 제2호선(백운1로)삼봉산로 광양시 태인동 섬진대교삼거리 국도 제59호선(태인4길) 국도 제59호선 구간 섬진대교 하동군 금성면 갈사사거리 (이름 없음) 금성로 진정천교 금남면 하동 나들목(계천사거리) 10호선 남해고속도로국도 제19호선(섬진강대로) 주요 건물 및 시설[편집] 조선내화 (전라남도 광양시 산업로 55) 특이 사항[편집] 이 도로가 고속도로로 존재했던 기간은 약 반년 정도에 불과하나, 고속도로 개통 당시에 설치되었던 표지판은 현재도 적지않은 수가 남아있으며, 대부분 '고속도로 제6-3호선'표기를 '국도 제59호선'으로만 바꿔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12][13] 각주[편집] ↑ 대통령령 제13636호 고속국도노선지정령, 1992년 4월 29일 일부개정. ↑ 건설부고시 제1992-284호, 1992년 6월 9일. ↑ 대통령령 제14486호, 1994년 12월 31일 타법개정. ↑ 건설교통부고시 제1995-6호, 1995년 1월 18일. ↑ 건설교통부공고 제1995-400호, 1995년 12월 28일. ↑ 옥포~내서 하동~광양 고속도 내일 확장개통, 《경향신문》 1995년 12월 26일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 대통령령 제15102호 고속국도노선지정령, 1996년 7월 1일 일부개정. ↑ 대통령령 제15101호 일반국도노선지정령 (1996년 7월 1일) ↑ 대통령령 제17348호 일반국도노선지정령 (2001년 5월 24일) ↑ 행정안전부고시 제2009-30호, 2009년 7월 10일. ↑ 교차로와 나들목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건물 및 시설 등도 포함 ↑ 국토해양부 도로표지 안내시스템 - 용포마을 부근표지판은 전체적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 쓰였던 형식으로, '고속도로 제6-3호선' 표기가 있던 자리는 '국도 제59호선'으로, '고속도로 제6호선' 표기가 있던 자리는 '고속도로 제10호선'으로 각각 바뀌었다. ↑ 국토해양부 도로표지 안내시스템 - 진정마을 부근의 표지판으로, 기존 '고속도로 제6-3호선' 표기 자리에 '국도 제59호선'을 덧붙인 흔적이 보인다. 옛 표지판에서 사용하던 형식의 서체(굴림체에 가까운 서체)인 것으로 보아 국도 격하 직후에 변경한 이후 지금까지 사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 외부 링크[편집] 산업로 (광양 하동) (전남 광양시) 산업로 (광양 하동) (경남 하동군) vdeh 대한민국의 고속도로남북 [1] 경부 () [15] 서해안 [17] 평택파주 [25] 호남 논산천안 [27] 순천완주 [29] 세종포천 [35] 통영대전 중부 [37] 제2중부 [45] 중부내륙 [55] 중앙 [65] 동해 동서 [10] 남해 [12] 무안광주 광주대구 [16] 울산 [20] 새만금포항 [30] 당진영덕 [32] 아산청주 [40] 평택제천 [50] 영동 [52] 광주원주 [60] 서울양양 순환 [100] 서울외곽순환 [300] 대전남부순환 [400] 수도권제2순환 [600] 부산외곽순환 경인 [110] 제2경인 [120] 경인 [130] 인천국제공항 지선 [102] 남해제1지선 [104] 남해제2지선 [105] 남해제3지선 [151] 서천공주 [153] 평택시흥 [171] 오산화성 용인서울 [204] 새만금포항지선 [251] 호남지선 [253] 고창담양 [301] 상주영천 [451] 중부내륙지선 [551] 중앙지선 예정 [14] 함양울산 [17] 익산평택 [173] 익산평택지선 [202] 새만금포항지선 [255] 강진광주 [500] 광주외곽순환 [700] 대구외곽순환 폐지 [1] 양재 - 한남 [2] 신월 - 양평 [6] 덕천 - 구포 [6-3] 남해제3지선 [7-2] 구마지선 [15] 목포 - 죽림 [22] 김천영천 [120] 인천 - 서인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산업로_(광양_하동)&oldid=24185687" 분류: 전라남도의 도로경상남도의 도로광양시의 교통하동군의 교통국도 제59호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3: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일장신대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일장신대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5° 45′ 48.7″ 동경 127° 12′ 23.4″ / 북위 35.763528° 동경 127.206500°  / 35.763528; 127.206500 한일장신대학교Hanil University and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종류 사립설립 1922년종교 개신교 (예장통합)총장 구춘서학부생 수 869명 (2017년)[1]교직원 수 96명 (2017년)[1]국가 대한민국위치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왜목로 726-15웹사이트 공식 사이트 한일장신대학교의 위치 한일장신대학교(韓一長神大學校, Hanil University and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는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왜목로 726-15에 있는 사립 대학이다. 목차 1 역사 2 개설 학과 2.1 학부 과정 2.2 대학원 과정 3 교내 운동부 4 학교 동문 5 역대 역임 교수 6 외부 링크 7 각주 역사[편집] 한일장신대학교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시작한다. 1922년 6월 2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견한 선교사 엘리자베스 조해너 셰핑(Elizabeth Johanna Shepping, 한국 이름 서서평)이 광주에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Bible woman) 양성학교인 이일성경학교[2]를 세웠고, 1923년 9월 4일에는 매티 잉골드 테이트(Mattie Ingold Tate) 선교사가 전주에 여성성경학교를 세웠다.[3] 그 뒤 여성성경학교는 전주한예정성경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중화산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40년에 신사참배 강요의 거부로 광주와 전주의 성경학교가 폐교되며 문을 닫았다.[4] 1947년 9월 전주한예정성경학교가 다시 문을 열였으며, 1948년 9월에는 이일성경학교가 다시 문을 열였다.[3] 1952년 전주한예정성경학교는 전주고등성경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56년에는 전주한예정성서신학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라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고등학교령에 의한 각종학교로 허가를 받았다.[4] 1961년 4월 1일 전주한예정성서신학원과 이일성경학교가 합병됐고, 각 학교 이름의 첫 글짜를 따서 한일신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4] 1967년 7월 전라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한일여자신학교로 변경 인가를 받았으며,[4] 1973년 11월 14일에는 대학령에 의한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았고,[3] 1978년 9월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에서 지방 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4] 1980년 2월 21일 대한민국 문교부로부터 4년제 학칭 변경 인가를 받았고, 1982년에는 한일신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남녀공학 신입생을 모집했으며, 1984년 11월 16일 문교부가 한일신학교를 4년제 대학 학력 인정 학교로 인정했다.[3] 1994년 12월 교육부로부터 4년제 정규 대학으로 승인을 받았으며,[4] 1995년 3월 1일에 한일신학대학교로 학교 이름을 바꾸었고 1996년 11월 4일에 대학원 설립 승인을 받았다.[3] 199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에서 총회직영신학대학으로 허락받고 이름을 오늘날의 한일장신대학교로 바꾸었다.[3] 개설 학과[편집] 학부 과정[편집] 한일장신대학교 개설 학과 목록 신학부 사회복지학부 인문사회과학부 음악학부 심리상담학부 간호학과 계약학과 사회복지학부 대학원 과정[편집]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과정 학과 목록 일반대학원 특수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아시아태평양국제신학대학원 NGO정책대학원 심리치료대학원 교내 운동부[편집] 한일장신대학교는 야구부와 양궁부를 운영하고 있다. 야구부는 2003년 처음 창단했다가 2013년에 해체했었고, 2018년 3월 6일에 폐교된 서남대학교의 야구부를 인수해 재창단했다.[5] 학교 동문[편집] 분류:한일장신대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역대 역임 교수[편집] 분류:한일장신대학교 교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외부 링크[편집] 한일장신대학교 홈페이지 각주[편집] ↑ 가 나 “대학알리미 공시정보”. 2018년 4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5월 10일에 확인함.  ↑ 김종표 (2017년 9월 6일). “한일장신대, 개교 95주년 기념식·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전북일보. 2018년 5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한일장신대학교 연혁”. 2018년 5월 1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바 “한일장신대학교 역사”. 2018년 5월 10일에 확인함.  ↑ 임충식 (2018년 3월 6일). “한일장신대 야구부 재창단…‘폐교‘ 서남대 야구팀 인수”. 뉴스1. 2018년 5월 10일에 확인함.  이 글은 대학교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기독교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vdeh 전라북도의 대학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국립 군산대학교 전북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한국농수산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전북지역대학) 사립 예수대학교 예원예술대학교 (전북희망캠퍼스) 우석대학교 (전주캠퍼스) 원광대학교 전주대학교 한일장신대학교 호원대학교 전문대학 군산간호대학교 군장대학교 백제예술대학교 서해대학 원광보건대학교 전북과학대학교 전주기전대학 전주비전대학교 한국폴리텍Ⅴ대학 (김제캠퍼스·익산캠퍼스) 대학원대학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사이버대학 원광디지털대학교 (익산캠퍼스·전주캠퍼스)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vdeh대한민국의 대학교 야구부 고등학교 대학교 한국대학야구연맹서울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부산 경성대학교 동아대학교 동의대학교 대구 계명대학교 인천 인천재능대학교 인하대학교 광주 동강대학교 송원대학교 세종 홍익대학교 경기 경희대학교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세계사이버대학 중앙대학교 강원 강릉영동대학교 충북 건국대학교 유원대학교 충남 단국대학교 전북 원광대학교 한일장신대학교 호원대학교 전남 세한대학교 경북 영남대학교 경남 경남대학교 제주 제주관광대학교 제주국제대학교 한국대학야구협회 가천대학교 평생교육원 세종대학교 평생교육원 인천대학교 평생교육원 KBS스포츠예술과학원 농구부 야구부 축구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일장신대학교&oldid=24125788" 분류: 대한민국의 대학교 야구부1923년 개교전라북도의 대학교완주군의 학교대한민국의 사립 대학대한민국의 신학교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대학교에 관한 토막글기독교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30일 (화) 16: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대성 (가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성 (가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성 2012년 3월, 'K-Collection fashion show 2012' 공연중인 대성.기본 정보본명 강대성 (姜大聲)출생 1989년 4월 26일(1989-04-26) (30세)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직업 가수, 배우장르 발라드활동 시기 2006년 8월 19일 ~ 현재 종교 개신교레이블 YG PLUS, YGEX소속사 YG 엔터테인먼트소속 그룹 빅뱅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 대성(본명: 강대성, 1989년 4월 26일 ~ )은[1] 대한민국의 보이 그룹 빅뱅에서 리드보컬을 맡고 있다. 대성은 YG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6개월여간 연습생 기간을 거친 후, BIGBANG의 멤버로 데뷔하였다. 그의 해외 활동시 사용되는 이름은 D-LITE으로 기쁨, 즐거움, 환희, 유쾌함을 의미하는 'Delight'라는 단어의 약술이다. 목차 1 생애 1.1 어린시절과 데뷔 과정 1.2 2006–07: 빅뱅 데뷔와 초기 활동 1.3 2008–09: 트로트 솔로, 패밀리가 떴다, 캣츠와 교통사고 부상 1.4 2010: 추가적인 솔로 활동, 왓츠업, 밤이면 밤마다 1.5 2011-13: 빅뱅 컴백과 D'scover 1.6 2014: D'slove와 Delight 1.7 2015-현재: "앵콜 !! 3D Tour [D-LITE DLive D'slove]" 2 학력 3 음반 목록 4 음반 외 활동 4.1 드라마 4.2 예능 (고정) 4.3 뮤지컬 4.4 영화 4.5 광고 출연 5 투어 6 사건 및 사고 6.1 2009년 사고 6.2 2011년 사건 7 각주 8 외부 링크 생애[편집] 어린시절과 데뷔 과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빅뱅 (음악 그룹)입니다. 대성(본명: 강대성)은 1989년 4월 26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가수의 꿈을 키우며 아버지의 반대를 뒤로 하고 MBC 아카데미에서 보컬수업을 받았고, 경인고등학교 재학 시절 YG 엔터테인먼트의 정식 오디션을 거쳐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2006년 곰TV·MTV 코리아에서 방송된 서바이벌 다큐 프로그램 《리얼다큐 빅뱅(BIGBANG)》을 통해 만장일치로 최종 멤버에 발탁이 되었으며, 지드래곤, 태양, T.O.P, 승리와 함께 YG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는 최초의 아이돌 힙합 그룹 BIGBANG의 멤버로 정식 합류하게 되었다. 2007년 9월 학교를 자퇴했었던 그는 2008년 5월 고졸 검정고시 합격해,[2][3] 그해 11월에는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음악학과에 수시모집에 합격해 09학번으로 입학했지만[4] 바쁜 연예 활동으로 국제사이버대학교 예체능학부 레저스포츠학과에 편입하였다. 대성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5][6] 2006–07: 빅뱅 데뷔와 초기 활동[편집] 빅뱅은  2006년 8월 19일 첫 싱글 〈Bigbang〉을 발표하였고, 같은 날 YG 패밀리 10주년 콘서트에서 첫 무대에 섰다. 2006년 9월 23일 음악 프로그램 《쇼! 음악중심》에서 공식 데뷔하였다. 대성은 세 번째 싱글 음반 〈Bigbang 03〉에 수록 된 "웃어본다"로 첫 솔로 곡을 불렀다. 이 곡은 그해 12월에 발매 된 빅뱅의 첫 번째 정규 음반 《BIGBANG Vol.1》에 수록되었다. 빅뱅은 2007년 그들의 첫 번째 EP 《Always》의 발매와 동시에 타이틀 곡 "거짓말"은 엄청난 메가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두 번째 EP 《Hot Issue》의 "마지막 인사"와 세 번째 EP 《Stand Up》의 "하루하루"가 연이어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최정상의 대세 그룹으로 우뚝 섰다.[7][8] 빅뱅의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대성은 성대 결절 진단을 받았다. 거의 몇년 동안, 그는 자신의 성대 및 대인기피증과 무대 공포증으로 고생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같은 소속사의 선배 가수 거미의 도움으로 극복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전에 빅뱅의 두 번째 앨범 발매 전에, 대성은 상태가 크게 개선되었다.[출처 필요] 2008–09: 트로트 솔로, 패밀리가 떴다, 캣츠와 교통사고 부상[편집] 빅뱅은 본격적인 일본 데뷔를 앞서, 멤버의 개인 활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2008년 대성은 그의 첫 번째 트로트 싱글 음반 〈날 봐, 귀순〉을 발표했다.[9] 그는 이 음반이 그룹 활동에 안좋은 영향을 줄까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차별화 되는 다른 무언가를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언급했다.[10] 그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 《일요일이 좋다 - 패밀리가 떴다》의 고정 진행자로 출연했다. 그해 한국 버전으로 공연 되는 뮤지컬 《캣츠》에서 '럼텀터거' 역할로 출연했다.[11] 대성은 그룹의 멤버 승리와 함께 MBC 음악 프로그램 《쇼! 음악중심》의 진행을 맡았다. 2009년 초, 대성은 그의 두 번째 트로트 싱글 음반 〈대박이야〉을 발표했다.[10] 그는 당초 승리와 뮤지컬 《샤우팅》에 출연할 예정이였다.[12] 하지만 뮤지컬 공연을 앞둔 8월, 갑작스런 교통사고 부상으로 출연이 무산 되었고, 고정중이던 프로그램에서는 임시 하차 되었다.[13][14] 대성은 빅뱅으로 멤버로서 2009년 10월, 드림 콘서트를 통해 복귀하였다.[15] 2010: 추가적인 솔로 활동, 왓츠업, 밤이면 밤마다[편집] YG 엔터테인먼트는 2010년 대성과 그룹의 멤버 T.O.P과 솔로 음반을 발매한다고 발표했다. 대성은 2010년 1월, 새로운 디지털 싱글 〈솜사탕〉을 발매했다.[16] 이 곡의 가사는 대성이 직접 썼다.[17] 그러나 추가적인 앨범은 발매 되지 않았다. 2011년 초, YG 엔터테인먼트는 한해동안 대성과 승리의 왕성한 활동을 예고했지만 대성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승리는 2011년 1월 EP 음반을 발매했다. 2010년 대성은 MBC에서 사전제작하는 송지나 작가의 텔레비전 드라마 《왓츠업》의 출연을 확정 지었다. 드라마 촬영은 2011년 2월에 마무리 되었다. 2010년 11월, 그는 버라이어티 토크쇼 《밤이면 밤마다》 에 고정 진행자로 출연했다. 그해 대성은 이효리의 새로운 앨범 《H-Logic》의 수록곡 "How Did We Get"에 피처링에 참여했다. 2011-13: 빅뱅 컴백과 D'scover[편집] 2012년 9월, Alive World Tour 공연 중인 대성. 2011년 4월, 대성은 빅뱅의 네 번째 EP 《BIGBANG MINI 4》에 수록 된 솔로 곡 "Baby Don't Cry"를 발표했다. 이 곡은 Big Show 2011 콘서트에서 첫 공연 되었고, 음반의 타이틀 곡과 함께 여러 음원 차트에 진입했다. 그해 5월 31일, 대성은 자신의 아우디 차량을 운전하던 중 음주운전 추돌사고로 양화대교에 쓰러져 있던 오토바이 운전자를 역과,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교통사고 치사사건)에 연루되었다.[18] 그는 검찰 조사 결과 혐의 없음 처분을 받긴 했지만,[19] 그러나 당시의 후유증으로 마음을 추스리며 개인 활동과 동시에 빅뱅의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20] 대성은 2011년 11월 6일,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열린 MTV 유럽 뮤직 어워드(EMA)에 참석하며 첫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1년 12월과 2012년 1월,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YG 패밀리 콘서트에 합류했다.[21][22] 그의 뮤지컬 드라마 《왓츠업》이 MBN에서 2011년 12월 3일 방송을 시작했다. 대성은 드라마의 OST에 직접 참여해 "Lunatic"을 불렀다.[23] 대성은 2012년 3월, 컴백한 빅뱅의 다섯 번째 EP 《Alive》의 수록곡이자 그의 솔로 곡 "날개"을 발표했다. 대성은 2013년 2월 27일, 일본에서 그의 첫 솔로 정규 음반 《D'scover》을 발표했다. 그의 솔로 음반은 12곡을 모두 일본어로 불렀으며, "Baby Don't Cry"와 "날개"는 일본어로 새롭게 녹음했다. 이 음반은 오리콘 앨범 데일리 차트 2위로 데뷔했고,[24][25] 오리콘 앨범 위클리 차트 2위를 차지했다.[26] 성공적인 솔로 데뷔와 동시에 그는 일본 솔로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3월 23일과 24일에 고베 월드 기념관에서, 3월 30일과 31일에 도쿄 니혼 부도칸에서 투어를 시작했다.[27] 당초, 대성은 고베와 도쿄에서 음반 홍보를 위한 총 4회의 콘서트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2월 28일에, 그 계획은 팬들의 뜨거운 요청들로 인해, 17개 도시 21회 콘서트에서 추가가 된 18개 도시 25회 콘서트로 변경 되었다고 재발표되었다. 이 콘서트 투어는 3월 23일 고베의 월드 기념관에서 시작되어, 6월 18일 카나가와의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막을 내렸다.[28] 2014: D'slove와 Delight[편집] 2014년 2월, YGEX는 2013년에 발매 된 대성의 솔로 음반 《D'scover》과 2014년 7월에 발매 되는 새로운 음반의 연속적인 성공을 기원하고자 6월과 7월에 7개 도시에서 12회 공연을 갖는 대성의 일본 솔로 아레나 투어(DLITE DLive 2014 in Japan)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그해 3월 29일, YGEX는 추가적으로 DLITE DLive 2014의 도쿄 니혼 부도칸 공연(7월 18일)을 추가했다고 발표했다. 4월 15일, YGEX는 대성의 DLITE DLive 2014의 오사카 성홀 공연(7월 26일과 27일)을 추가해 총 8개 도시에서 15회 공연을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5월 7일, 대성의 아레나 투어 제목은 [DLITE DLive 2014 in Japan ~D’slove~]으로 정식 발표 되었다. 대성은 그의 솔로 아레나 "D-LITE DLive Tour 2014 in Japan"를 기념하는 총 4곡이 수록 된 미니 디지털 음반 《RAINY RAINY》을 6월 11일에 발표했다. 이 음반은 일본 실시간 차트를 포함한 아이튠즈 1위와 뮤모 차트 4위를 차지했다.[29] 대성의 첫 일본어 오리지널 솔로 음반 《D'slove》는 7월 16일에 발매 되어, 30,090장을 팔아 오리콘 앨범 데일리 차트 1위로 데뷔했다.[30] 이 음반은 오리콘 앨범 위클리 차트 2위를 기록했다. 대성은 일본 아레나 투어 [D-LITE DLive Tour 2014 in Japan - D'slove]의 오사카 성홀 공연을 7월 27일에 개최하며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그는 8개 도시 15회 공연으로 170,000명의 관객수를 동원했으며, 이는 2년 연속 일본 투어에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최초의 한국 솔로 가수의 기록을 세웠다.[31][32][33] 9월 18일, YGEX는 대성의 일본 아레나 투어 공연 실황을 담은 DVD [D-LITE DLive Tour 2014 in Japan - D'slove]를 10월 22일 발매한다고 발표했고,[34] 연말 시즌을 기념하는 엔카 미니 음반 《でぃらいと》를 10월 29일에 발매 한다고 발표했다.[35][36][37] 이 음반은 9가지 버전의 4곡과 이전에 한국에서 발표한 트로트 2곡을 일본어 엔카 곡으로 커버했다. 그의 오리지날 두 곡은 좋은 찬사를 받아,[38][39] 65,048장을 팔아 오리콘 앨범 데일리 차트 1위를 차지했다.[40][41][42] 오리콘 앨범 위클리 차트에서는 68,335장의 판매량으로 1위를 기록했다.[43][44][45] 오리콘 앨범 연간 차트에서는 64위를 기록했다. 2015-현재: "앵콜 !! 3D Tour [D-LITE DLive D'slove]"[편집] 2014년 10월 20일, YGEX는 대성의 솔로 투어 앵콜 공연 "Encore!! 3D Tour [D-LITE DLive D'slove]"을 2015년 1월 31일과 2월 1일에 요요기 국립경기장에서 2월 10일과 11일에 오사카 성홀에서 개최된다고 발표했다.[46][47][48][49][50] 대성은 성공적인 앙코르 콘서트로 일본 솔로 아레나 투어를 작년에 이어 성공리에 끝마쳤다.[51] 학력[편집] 풍향초등학교 두암중학교 → 오류중학교 (전학) 경인고등학교 (중퇴) → 대입검정고시 (합격)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예술·디자인대학 포스트모던음악학과 (중퇴) 국제사이버대학교 예체능학부 레저스포츠학과 음반 목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대성의 음반 목록입니다. 정규 음반 2013: D'scover 2014: D'slove 미니 음반 (EP) 2014: でぃらいと 2017: D-DAY 음반 외 활동[편집] 빅뱅으로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빅뱅의 음반 외 활동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드라마[편집] 년도 방송사 제목 역할 참고 2011 MBN 왓츠업 하도성 주연 예능 (고정)[편집] 년도 방송사 제목 역할 참고 2008-2009 MBC 쇼! 음악중심 진행자 with 승리 2008-2010 SBS 일요일이 좋다 - 패밀리가 떴다 진행자 with 유재석, 이효리, 김종국, 이천희, 박예진, 윤종신, 김수로 2010-2011 SBS 밤이면 밤마다 진행자 with 탁재훈, 박명수, 김제동, 정용화, 유이 2013 MTV 재팬 D'splay (디스플레이) 진행자 with VJ Boo 2013 MTV 재팬 D'splay Returns (디스플레이 리턴즈) 진행자 with VJ Boo 2018 넷플릭스 YG전자 with 승리, 유병재, 이재진, IKON, WINNER, 산다라박, 지누션, 블랙핑크, 원 뮤지컬[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2008 캣츠 럼텀터거 한국 버전 영화[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2010 새미의 어드벤쳐 새미 한국어 더빙, with 설리 광고 출연[편집] 빅뱅으로 출연한 것에 대해서는 빅뱅의 음반 외 활동 목록#광고 출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단독 광고 연도 기업명 브랜드명 종류 공동 출연 2009년 BHC 〈BHC 치킨〉 프랜차이즈 외식업체 투어[편집] 빅뱅의 솔로 콘서트 투어 목록#대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3: D-LITE D'scover TOUR 2013 IN JAPAN ∼DLIVE∼ 2014: D-LITE DLive 2014 in Japan~D'slove 2015: Encore!! 3D Tour [D-LITE DLive D'slove] 사건 및 사고[편집] 2009년 사고[편집] 2009년 8월 11일 오후 4시에 《패밀리가 떴다》 방송 촬영 후 괴산군에서 서울특별시로 가던 중 평택시 부근에서 빗길로 교통사고를 당했다.[52] 이 사고로 대성은 코뼈, 척추횡돌기, 왼쪽 눈뼈 골절 등으로 8주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진단을 받았으며,[53] 동승한 매니저는 오른팔에 경미한 부상을 입었고 코디네이터는 다리를 심하게 다쳐 수술을 받았다.[54] 이 사고로 인해 당시 대성이 출연하던 뮤지컬 '샤우팅'에서는 하차하고,[55] 《패밀리가 떴다》에서 임시 하차하고 승리가 대신 촬영에 참여했다.[56] 2011년 사건[편집] 2011년 5월 31일 새벽 1시 30분 경 대성은 부모님 집을 방문하기 위해 자신의 승용차를 몰던 중 양화대교 남단 방향 끝부분 내리막길 1차로에서, 대성의 차량에 앞서 달리던 택시가 길가에 쓰러져 있던 오토바이 운전자를 발견하고 오토바이 운전자 앞에 차를 세운 상황을 대성 차량 앞에 가던 또 다른 차가 먼저 발견, 비상등 없이 갑자기 비켜나가는 바람에 미쳐 보지 못하고 이미 혈중 알코올 0.165를 넘는 수치로 만취해서 가로등을 들이받고 쓰러져 있던 오토바이 운전자를 역과한 뒤 택시와 충돌했다.[57] 택시 운전기사는 큰 부상은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초 사고자인 오토바이 운전자는 숨진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58] 사고 직후 대성은 서울영등포경찰서에서 5시간 동안 1차 조사를 받고 6시 50분 경에 귀가하였고 쓰러져있던 오토바이 운전자를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59] 서울영등포경찰서는 1차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대성은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한 결과 음주상태는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지만[60] 규정속도 60 km/h 구간에서 80 km/h로 주행하던 중 전방 부주의에 의한 사고라고 밝혔고 오토바이 운전사의 정확한 사망 경위와 사망 시점을 확인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했다고 밝혔다.[61] 경찰의 1차 중간 수사 결과 발표 이후, YG 엔터테인먼트 측은 대성이 경찰서 진술에서 자신은 80 km/h로 주행했다고 진술하였으나 사고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택시 기사의 진술에 따르면 대성이 60 km/h 정도로 주행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62] 경찰은 전방주시 태만으로 사고가 발생하였고 규정속도(60km/h) 구간에서 80km/h로 달려서 사고가 난 것이기 때문에 규정속도 위반으로 사망 과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불구속 입건하였다고 밝혔다.[63] 2011년 8월 29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남부지검은 대성의 교통사고 사망사건에 대하여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64] 검찰은 오토바이 운전자가 대성의 승용차와 충돌 하기 전의 생존 여부를 명확히 밝힐 증거가 없다는 점, 사망한 오토바이 운전자가 대성이 운전하는 차량에 치이기 3분 전에 혈중알콜농도 0.186% 상태로 운전하다 가로등에 얼굴 부위를 들이받아 척수 손상을 동반한 흉부골절, 다발성 늑골 골절로 인한 폐파열, 과다출혈 등의 치명상을 입었던 점 등을 통해 대성의 차량과 추돌이 피해자 사망의 결정적 원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65] 이번 사건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결론을 내림에 따라 일부에서는 대성의 연예계 활동 복귀를 전망하였으나,[66] 검찰의 무혐의 결론과 관계없이 2011년 동안 대성의 연예계 활동 계획은 전혀 없고 교회에 다니는데에 열중할 것이라고 밝혔다.[67] 각주[편집] ↑ Mark Russell (2014년 4월 29일). 《K-Pop Now!: The Korean Music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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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 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양곤 관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양곤관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ရန်ကုန်တိုင်း양곤 관구 (MLCTS: yankun tuing/rankun tuing) 주도 양곤 지역 저지 면적 10,170 km² 인구 5,560,000 (2000) 민족 버마족, 카인족, 중국인, 인도인, 몬족 종교 불교, 크리스트교, 힌두교, 이슬람교 양곤 관구(버마어: ရန်ကုန်တိုင်း)는 미얀마의 행정 구역이다. 저지 미얀마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 바고 관구, 남쪽으로 마르타반 만, 서쪽으로 에야와디 관구와 접한다. 양곤 관구의 수도인 양곤은 미얀마의 옛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다른 중요한 도시로는 탄린과 트완테가 있다. 미얀마에서 가장 많이 개발된 지역이자 주요한 국제적 관문이다. 목차 1 역사 2 인구 3 경제 4 교통 역사[편집]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몬족이 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 지역은 1057년 이전에는 몬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1057년 이후에는 약간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북쪽의 버마족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지역의 지배권은 1287~1539년과 1740~1757년에 바고를 본거지로 하는 몬 왕국에게 되돌아왔다. 포르투갈인들은 1599~1613년까지 탄린(시리암)과 그 주변 지역을 지배하였다. 18세기 중반에 얼라웅퍼야 왕이 슈웨다곤 파고다 주변의 강 건너의 작은 어촌을 확장시키기로 하기 전까지, 탄린은 저지 미얀마의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였다. 영국은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때 양곤을 처음 점령하였으나 전쟁 후에 다시 버마족의 관할로 돌아왔다. 영국은 1852년의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 때 양곤과 저지 미얀마를 모두 점령하였고, 양곤을 영국령 버마의 상업과 정치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양곤은 영국령 버마와 오늘날의 양곤 관구와 바고 관구를 포함하는 한타와디 주의 수도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많은 인도인들을 데려와 노동자와 공무원으로 일하게 했다. 1930년대까지 인도인들은 양곤 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양곤은 버마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양곤 관구는 1942년 4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일본의 점령하에 있었다. 1948년 1월에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 한타웨이 주는 페구(바고) 관구로 개칭되었고 양곤은 그 수도가 되었다. 1964년에 양곤 관구가 바고 관구로부터 분리되었다. 바고 관구의 수도는 양곤에서 바고로 바뀌었다. 1974년 6월에 한타웨이와 흐모비가 바고 관구에서 양곤 관구로 편입되었다. 전쟁 후에 양곤은 크게 성장하였다. 미얀마 정부는 양곤 주변에 위성 도시들을 세웠다. 오늘날 양곤 관구는 본질적으로는 양곤 대도시권과 그를 둘러싼 배후지이다. 인구[편집] 2000년에 구의 인구는 556만 명, 양곤 대도시권에는 400만 명 이상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버마족, 카인족, 몬족과 같은 토착 미안먀인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구에는 또한 많은 수의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살고 있다. 주민의 대다수는 상좌부 불교도이고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가 뒤를 잇는다. 언어는 버마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된다. 영어는 양곤의 엘리트 사이의 주요 제2언어이다. 경제[편집] 양곤 관구는 미얀마에서 가장 잘 개발된 지역이다. 양곤은 저지 미얀마의 모든 상품의 교역의 중심이다. 바인나웅 시장은 쌀, 콩 등의 농산품이 거래되는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매 시장이다. 미얀마의 합법적인 수출입의 대부분은 미얀마에서 가장 크고 분주한 항구인 탄린의 틸라와 항을 통과한다. 양곤에는 최소한 14개의 경공업 지대가 있으며 수 천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양곤 도시권 밖은 벼농사가 지배적이다. 다른 작물로는 황마, 고무, 사탕수수, 땅콩이 있다. 교통[편집] 양곤 구는 미얀마에서 최고의 교통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미얀마의 다른 지역으로 가는 모든 운송수단은 양곤을 통과한다. 5개의 고속도로가 양곤과 미얀마의 다른 지역을 연결한다. 양곤 국제공항은 미얀마의 주요한 국제간의 관문이다. 양곤 중앙역은 5,068km의 미얀마 철도의 중심축이다. 양곤과 아예와디 관구를 연결하는 트완테 운하 또한 수송과 교역을 위해 널리 사용된다. 자동차는 값비싼 교통 수단이기 때문에 버스가 중요한 교통 수단이다. 2008년 1월 현재, 양곤 관구에는 거의 182,000개의 자동차가 있어, 나라 전체의 17.7%를 차지한다. vdeh 미얀마의 행정 구역관구 마궤 만달레이 바고 사가잉 양곤 에야와디 타닌타리 주 라카인 몬 샨 친 카야 카인 카친 자치구 나가 다누 파오 팔라웅 코캉 자치관구 와 연방령 네피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양곤_관구&oldid=18761366" 분류: 미얀마의 관구숨은 분류: 버마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기타 외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cèhالعربيةবাংলাCatalàCebuanoDeutschEnglishEestiفارسیSuomiFrançaisहिन्दी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Македонски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ၽႃႇသႃႇတႆး Svenskaதமிழ்ไทย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5월 17일 (수) 09: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하버드 대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버드 대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버드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하버드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하버드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표어 Veritas(라틴어:진리) 종류 사립설립 1636년총장 로렌스 바카우 (Lawrence Seldon Bacow)학부생 수 6,700대학원생 수 14,000교직원 수 교수: 4,671국가 미국위치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상징물 크림슨웹사이트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 하버드 대학교의 위치 메모리얼 처치 (Memorial Church)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는 미국의 아이비 리그 사립 대학이다. 하버드 대학교는 오랜 역사와 큰 영향력, 그리고 많은 재산으로 세계의 일류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1][2] 목차 1 개요 1.1 역사 1.1.1 미국 최초의 대학교 1.1.2 설립 1.1.3 종합대학교 1.2 캠퍼스 1.3 구성 1.4 학교 현황 1.5 입학 현황 1.6 평가 1.7 저명한 동문 1.8 대중문화 속 하버드 대학교 1.9 갤러리 1.10 같이 보기 1.11 각주 1.12 외부 링크 개요[편집] 하버드 대학교는 1636년에 매사추세츠 식민지 일반의회가 설립하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며, 처음에는 '새로운 대학'(New College) 또는 '새 도시 대학'(The college at New Towne)으로 불렸으나, 1639년 3월 13일에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라는 이름을 지었다. 젊은 청교도 성직자 존 하버드의 성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유언을 남겨서 4백여권의 책과 재산의 절반인 현금 779파운드를 학교에 기부하였다.[3] 훗날에 여러 학과와 전문대학원들이 통합되면서 하버드 대학교가 되었다. 지금도 학부는 하버드 칼리지라고 부른다. 찰스 윌리엄 엘리엇은 40년간 하버드 총장으로 일하면서 하버드 대학교를 근대 연구 대학으로 변모시켰다. 엘리엇의 개혁은 선택 과목, 소규모 강의 등에 관한 변화도 포함하고 있었다. 하버드 모델은 미국 교육에 영향을 끼쳤다. 하버드 대학교는 현재까지 졸업생과 교수를 포함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15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4] 또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존 F.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총 7명의 미국 대통령, 36명의 퓰리처상 수상자, 미국에서 가장 많은 21명의 연방 대법원 대법관과 7명의 세계은행 총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62명의 억만장자와 미국에서 가장 많은 335명의 로즈 장학생이 하버드를 졸업했다.[5][6] 세계 각국에 포진한 하버드 유학파들로 인해 하버드 출신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높은 권위를 자랑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학부는 4년제 과정이다. 학부 학생들은 의학, 법학, 경영학 등의 전문 분야는 공부할 수 없으며 자연과학, 응용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을 공부한다.[7] 전문대학원 과정에 메디컬 스쿨, 로스쿨, 비즈니스 스쿨과 케네디 스쿨 등을 두고 있다. 역사[편집] 캠퍼스 내 존 하버드 동상 미국 최초의 대학교[편집] 아이비리그 대학 중의 하나인 하버드 대학교는 기독교인은 지식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책과 현금을 기증한 영국 청교도 목사 존 하버드의 이름을 딴 미국 교육 역사에서 처음의 대학교이다. 설립[편집] 하버드 대학교는 1636년 메사추세츠 식민지 관할 의원회(Great and General Court of Massachusetts Bay Colony)의 투표를 거쳐 대학교 설립을 구체화시키게 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시작된 하버드 대학교는 처음에는 학생 아홉 명과 강사 한 명을 두고 목사 양성을 목적으로 출범했다고 한다.[8] 찰스턴 출신의 존 하버드 목사가 이곳에 정착한지 얼마되지 않은 1638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장서와 재산을 뉴 잉글랜드에 새로 세워진 대학교인 하버드 대학교에 기증함으로써, 하버드 대학교는 존 하버드 목사의 이름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1639년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로 명명되게 되었다. 1650년에 하버드 칼리지의 헌장(charter)이 수립되었다. 초기 하버드 대학교는 많은 청교도 목사를 양성했다. 비록 초교파적이었지만, 초기 학교는 회중교회와 유니테리안 성직자들을 교육시켰다. 종합대학교[편집] 1782년에 메디컬 스쿨(Harvard Medical School), 1816년에 신학대학원(Harvard Divinity School), 1817년에 로스쿨(Harvard Law School), 1867년에 치의학대학원(Harvard School of Dental Medicine), 1908년에 비즈니스 스쿨(Harvard Business School), 1920년에 교육대학원(Harvard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1922년에 공공보건대학원(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 그리고 1936년에 케네디 스쿨(Harvard Kennedy School)을 설립하면서 차츰 현대적인 종합대학이 됐다. 캠퍼스[편집] 하버드 홀 하버드 대학교의 메인 캠퍼스(main campus)는 중앙 케임브리지 시에 있는 하버드 야드(Harvard Yard) 중심에 있으며 그 인근에 있는 하버드 스퀘어(Harvard Square)까지 연장되어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과 하버드 스타디움(Harvard Stadium)을 포함한 많은 대학의 운동 시설들은 찰스 강의 다른 면인 하버드 스퀘어로부터 남서쪽 건너편에 있는 보스턴 올스턴 지역에 있다. 메인 캠퍼스에서 찰스 강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올스턴 지역까지 도보로 갈 수 있다. 하버드 메디컬 스쿨, 하버드 덴털 스쿨, 하버드 공공보건대학원은 보스턴 롱우드 메디컬 앤드 아카데믹 에리어(Longwood Medical and Academic Area)에 위치해 있다. 하버드 로스쿨은 하버드 야드 북쪽에 위치해 있다. 하버드 야드에는 중앙 관리 사무소, 대학교 메인 도서관들, 세버 홀(Sever Hall), 유니버시티 홀(University Hall)을 포함한 대학교 건물들, 메모리얼 교회(Memorial Church), 다수의 학부 1학년생 기숙사들이 있다. 학부 2학년생과 학부 3학년생과 학부 4학년생은 12개동의 기숙사(residential Houses)에 살며 그중에 9개동은 하버드 야드 남쪽이나 찰스 강 근처에 있고 나머지 3개동은 하버드대 학부 캠퍼스의 부분인 쿼드랭글(Quadrangle)에서 북서쪽으로 반마일 떨어진 래드클리프가 하버드 시스템에 통합될때까지 이전에 래드클리프 칼리지 학생들이 사용했던 거주지역에 위치해 있다. 각각 기숙사는 학부생, 사감, 교수를 위한 방 뿐만 아니라 식당, 도서관, 다양한 그밖에 학생시설들을 포함한다. 그 시설은 에드워드 하크니스(Edward Harkness)에 의해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의 선물로 만들어졌다. 이전 래드클리프 칼리지 캠퍼스의 중앙인 래드클리프 야드는 교육대학원과 캠브리지 공원에 인접해 있다. 구성[편집] 더들리 하우스 하버드 로스쿨 랑델 홀 열람실 하버드 대학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문리대학(Faculty of Arts and Sciences)에 부수하여 공학응용과학대학(School of Engineering and Applied Sciences)이 있다. 문리대학은 아래 과정을 함께 제공한다. 하버드 칼리지 학부과정(Harvard College) (1636) 일반대학원(Graduate School of Arts and Sciences) (1872) 평생교육원(Harvard Division of Continuing Education) 아래에 하버드 서머 스쿨 (Harvard Summer School) (1871), 하버드 익스텐션 스쿨(Harvard Extension School) (1910)이 있다. 의과대학원(Harvard Medical School) (1782) 치의학대학원(Harvard School of Dental Medicine) (1867). 신학대학원(Harvard Divinity School) (1816) 법과대학원(Harvard Law School) (1817) 경영대학원(Harvard Business School) (1908) 건축대학원(Graduate School of Design) (1914) 교육대학원(Harvard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1920) 공공보건대학원(School of Public Health) (1922) 케네디 행정대학원(Harvard Kennedy School of Government) (1936) 1999년 래드클리프 칼리지(Radcliffe College)가 래드클리프 대학원(Radcliff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모든 하버드 학생들은 소속 학위과정에 상관없이 다른 학과나 전문 전문대학원 혹은 이웃 MIT에서 일부 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 학교 현황[편집] 와이드너 도서관 하버드 대학은 세계 최고의 도서관 규모를 자랑한다.[9][10] 무려 1500만 권의 장서와 각종 자료가 약 90 여개 도서관에 비치돼 있다고 한다. 하버드 도서관은 서울 소재 대학 도서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버드의 투자 펀드 자산은 2009년 6월 기준 약 2백58억 달러(약 32조 원)이었다.[11] 입학 현황[편집] 하버드 야드 (Harvard Yard) 2018년 졸업예정으로 2014년 가을에 입학하는 학부 합격자 발표 현황에 따르면 총 34,295명 지원자중 2,023명만이 합격하여 합격률 5.89%를 기록했다.[12] 미국 종합대학 중 두번째로 낮은 합격률이었다.[13] 합격한 학생들의 등록률(yield rate)은 82%로 미국 종합대학 중 가장 높았다.[14] 미국에서 가장 많은 내셔날 메릿 장학생(National Merit Scholars)들이 하버드에 진학한다.[15] 일반대학원과 비즈니스 스쿨, 로스쿨, 메디컬 스쿨 등의 전문대학원들도 각 분야에서 입학 경쟁이 미국에서 가장 치열한 수준이다. 일반대학원의 경우 석사·박사 통합과정만 제공하는데 경제학, 영문학 등의 주요 분야 석사·박사 통합과정 합격률은 해마다 5% 이하이다.[16][17] 평가[편집] 하버드의 학부는 《U.S. 뉴스 & 월드 리포트》 미국 종합대학 학부 순위에서 언제나 3위권 안에 들었으며 최근 순위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18] 전문대학원의 경우 비즈니스 스쿨이 1위[19], 로스쿨이 2위[20], 메디컬 스쿨이 1위[21], 교육대학원이 3위[22], 건축대학원이 1위[23]를 기록했다. 또한 비즈니스 스쿨은 《파이낸셜 타임스》의 세계 경영대학원 순위에서 세계 1위[24], 로스쿨은 《QS》 세계 로스쿨 순위에서 세계 1위[25], 메디컬 스쿨은 《U.S. 뉴스 & 월드 리포트》 세계 메디컬 스쿨 순위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26] 일반대학원은 생물학, 화학, 경제학, 정치학, 영문학 등을 포함해서 모든 자연과학, 사회과학 및 인문학 분야에서 최상위권에 있다.[27][28] 공학의 경우 미국 내 20위 권으로 다른 학과들에 비해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소속 교수 및 박사과정 학생/졸업생들의 연구실적, 수상이력 등을 주로 평가하는 중국 세계 대학 학술 순위에서 해마다 1위[29], 학교 명성, 평판도를 주로 비교하는 《U.S. 뉴스 & 월드 리포트》 세계 대학 순위에서 해마다 1위[30], 영국 타임즈 고등교육 세계 대학 랭킹에서 현재 6위[31], 타임즈 고등교육 세계 대학 학계 평판도 순위에서 해마다 1위[32], 영국 QS 세계 대학 순위에서 현재 2위[33]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소속 교수들의 수상이력과 학계나 재계에서 유력한 졸업생 수를 주로 비교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세계대학랭킹센터(Center for World University Rankings)의 세계 대학 순위에서도 해마다 1위[34]를 기록하고 있다. 저명한 동문[편집] 조지 W. 부시 (비즈니스 스쿨 M.B.A. 1975), 버락 오바마 (로스쿨 J.D. 1991) 케네디 형제: 로버트 F. 케네디 (A.B. 1948), 에드워드 M. 케네디 (A.B. 1956), 존 F. 케네디 (S.B. 1940) en:Category:Harvard University alumni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는 미국 대통령 존 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 러더퍼드 헤이스, 시어도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 존 F. 케네디,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사인한 사람 존 핸콕, 전 부통령 앨 고어, 전 캐나다 총리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과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총독 데이비드 로이드 존스턴, 전 멕시코 대통령 미겔 데 라 마드리드,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비센테 폭스, 펠리페 칼데론, 전 칠레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 콜롬비아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 중화민국 총통 마잉주, 싱가포르 총리 리셴룽,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그리스 총리 안토니스 사마라스, 전 노르웨이 총리 그로 할렘 브룬틀란, 전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로빈슨, 라이베리아 대통령 엘런 존슨설리프,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밋 롬니, 전 뉴욕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 연방 대법원 대법원장 존 로버츠, 대법관 엘레나 케이건, 안토닌 스칼리아, 앤서니 케네디, 법무장관 로레타 린치, 전 국무장관 딘 애치슨과 헨리 키신저, 주일 대사 캐럴라인 케네디, 전 재무장관 로런스 서머스, 전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 의장 벤 버냉키, 세계은행 총재 김용, 잉글랜드 은행 총재 마크 카니, 자선 사업가 아가 칸 4세, 맥킨지 & 컴퍼니의 실질적인 설립자 마빈 바우어, 블랙스톤 그룹 설립자 스티븐 슈워츠먼, 골드만 삭스 회장 겸 CEO 로이드 블랭크파인, JP모간 체이스 회장 겸 CEO 제이미 다이먼,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 페이스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 휴렛 패커드 CEO 메그 휘트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 토머스 사전트,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 생리학/지리학/역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노벨 물리학자 셸던 리 글래쇼, 노벨 화학자 마틴 챌피, 로저 첸, 철학자이자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사상가이자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 작가 T. S. 엘리엇, 과학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 첼리스트 요요 마,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 배우 맷 데이먼, 나탈리 포트만, 토미 리 존스, 텔레비전 진행자 코넌 오브라이언, 농구선수 제러미 린 등이 있다. 한인 동문으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독립운동가 최기일, 한표욱, UN 사무총장 반기문, 전 국무총리 한덕수, 전 주미대사 함병춘, 전 기획재정부 장관 박재완 , 전 동력자원부 장관 서상철, 전 건설부 장관 서영택, 전 국회의원 박진, 권영세, 국회의원 김광림, 홍문종, 헤럴드 회장 홍정욱,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 김앤장 법률사무소 설립변호사 김영무, 네이버 대표이사 김상헌, 철학자 김용옥, 서울시립대학교 총장 이건,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백낙청, 프리랜서 방송 MC SBS 스포츠 아나운서 신아영 등이 있다. 대중문화 속 하버드 대학교[편집]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미국 영화, 드라마, 1973) 《러브 스토리》 (미국 소설, 1970, 영화, 1970) 《퀴즈 쇼》 (미국 영화, 1994) 《굿 윌 헌팅》 (미국 영화, 1997) 《아메리칸 사이코》 (미국 영화, 2000) 《금발이 너무해》 (미국 영화, 2001) 《다빈치 코드》 (미국 소설, 2003, 영화, 2006) 《소셜 네트워크》 (미국 영화, 2010) 《열정속으로 하버드 로스쿨》 (미국 회고록, 1977) 《앨리 맥빌》 (미국 드라마, 1997-2002) 《슈츠》 (미국 드라마, 2011-) 《웨스트 윙》 (미국 드라마, 1999-2006) 《NCIS》 (미국 드라마, 2003-) 《더 프랙티스》 (미국 드라마, 1997-2004) 《보스턴 리걸》 (미국 드라마, 2004-2009) 《블루 블러드》 (미국 드라마, 2010) 《하우스 오브 카드》 (미국 드라마, 2013-) 《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 (한국 드라마, 2004) 갤러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하버드 대학교 같이 보기[편집] 하버드 로스쿨 하버드 메디컬 스쿨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하버드 케네디 스쿨 래드클리프 칼리지 하버드-옌칭 연구소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 피커링의 하렘 와이드너 도서관 포그 미술관 각주[편집] ↑ Keller, Morton; Keller, Phyllis (2001). 《Making Harvard Modern: The Rise of America's University》. Oxford University Press. 463–481쪽. ISBN 0195144570. Harvard's professional schools... won world prestige of a sort rarely seen among social institutions. (...) Harvard's age, wealth, quality, and prestige may well shield it from any conceivable vicissitudes.  ↑ Spaulding, Christina (1989). 〈Sexual Shakedown〉. Trumpbour, John. 《How Harvard Rules: Reason in the Service of Empire》. South End Press. 326–336쪽. ISBN 0896082849. ...[Harvard's] tremendous institutional power and prestige (...) Within the nation's (arguably) most prestigious institution of higher learning...  ↑ “John Harvard (British minister)”. Enyclopedia Britannica. 2009년 7월 17일에 확인함. 그는 자기 돈의 반을 나누었고, 자신이 모은 고전과 신학 서적도 기증하였다....하버드의 선물은 학교의 지속적인 운영을 보장하였다.  ↑ 학교별 노벨상 수상기록. 현재까지 학생으로든 교수로든 하버드와 연고가 있는 노벨상 수상자 총 157명 중 총 73명이 하버드를 졸업했다. ↑ Billionaire universities Forbes ↑ Billionaire universities business insider ↑ 학부 학생들은 다른 대부분의 북미 대학과 마찬가지로 무전공으로 시작했다가 2학년 시작 전에 전공(concentration)을 정한다. 따라서 학부에서 어느 학과에 입학했다거나 어느 학과를 졸업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 “하버드 대학 웹사이트”. 2010년 7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8월 25일에 확인함.  ↑ Library Investment Index Summarizes Relative Size of ARL University Libraries for 2011–12 ↑ World's Largest University Library Centers Around Widener-Half of 3,600,000 Volumes ↑ 미국 보스턴 글로브 신문, The Boston Globe, 2009년 8월 6일자 ↑ College Admits Class of 2018 ↑ College Admissions: Ivy League Remains Elusive for Class of 2018 ↑ Class of 2018 Yield Rates ↑ Colleges With the Most Freshman Merit Scholars, 2009 ↑ The Harvard Crimson: And You Thought It Was Hard to Get into Harvard College! ↑ Harvard University - acceptance rates of all degree programs ↑ US News National Universities ↑ US News Business ↑ US News Law ↑ US News Medicine ↑ US News Education ↑ 2014 US Best Architecture Schools ↑ FT MBA World ↑ QS Law Rankings ↑ US News Clinical Medicine Rankings ↑ US News Graduate Schools ↑ Tilburg University Economics Ranking 2008-2012 ↑ ARWU Rankings ↑ U.S. News Best Global Universities Rankings ↑ THES Rankings ↑ THES Reputation Rankings ↑ QS Rankings ↑ “CWUR Rankings”. 2013년 7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1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영어) 하버드 대학교 공식 웹사이트 하버드 대학교 소개 동영상 vdeh 매사추세츠 주의 대학공립 매사추세츠 대학교 보스턴 애머스트 사립 뉴잉글랜드 음악원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버클리 음악 대학 벤틀리 대학교 보스턴 대학교 보스턴 칼리지 브랜다이스 대학교 서퍽 대학교 스미스 칼리지 애머스트 칼리지 웰즐리 칼리지 윌리엄스 칼리지 터프츠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대학 헐트 국제경영대학원 노스캐롤라이나 뉴욕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일리노이 캘리포니아 vdeh아이비 리그 다트머스 브라운 예일 컬럼비아 코넬 펜실베이니아 프린스턴 하버드 vdeh미국 대학 협회 (AAU)공립 대학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 뉴욕 주립 (버펄로 · 스토니브룩) · 럿거스 · 메릴랜드 · 미네소타 · 미시간 · 미시간 주립 · 미주리 · 버지니아 · 아이오와 · 아이오와 주립 · 애리조나 · 오리건 · 오하이오 주립 · 워싱턴 · 위스콘신, 매디슨 · 인디애나, 블루밍턴 · 일리노이, 어배너-섐페인 · 조지아 공과 · 캔자스 ·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 로스앤젤레스 · 버클리 · 샌디에이고 · 샌타바버라 · 어바인) · 콜로라도 · 텍사스, 오스틴 · 텍사스, A&M · 퍼듀 · 펜실베이니아 주립 · 플로리다 · 피츠버그사립 대학노스웨스턴 · 뉴욕 · 듀크 · 라이스 · 로체스터 · 매사추세츠 공과 · 밴더빌트 · 보스턴 · 브라운 · 브랜다이스 · 서던 캘리포니아 · 스탠포드 · 시카고 · 에모리 · 예일 · 워싱턴, 세인트루이 · 존스 홉킨스 · 카네기 멜런 · 캘리포니아 공과 · 컬럼비아 ·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 코넬 · 툴레인 · 펜실베이니아 · 프린스턴 · 하버드캐나다의 대학맥길 · 토론토 vdeh대학 연구 협회 (URA)미국 네브래스카, 링컨 노스이스턴 노던일리노이 노스웨스턴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노스텍사스 노터데임 뉴멕시코 뉴멕시코 주립 듀크 라이스 럿거스 로체스터 록펠러 메릴랜드 미네소타 미시간 미시간 주립 밴더빌트 버지니아 버지니아 공과 뉴욕 주립, 버펄로 보스턴 브라운 사우스캐롤라이나 스탠포드 스토니브룩 시러큐스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 아이오와 아이오와 주립 애리조나 애리조나 주립 앨라배마 서던메소디스트 루이지애나 주립 매사추세츠 공과 예일 오리건 오클라호마 오하이오 주립 워싱턴 워싱턴, 세인트루이스 웨인 주립 위스콘신, 매디슨 윌리엄 & 메리 캘리포니아, Davis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버클리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일리노이, 시카고 유타 인디애나, 블루밍턴 일리노이, 어배너-섐페인 존스 홉킨스 카네기 멜런 캘리포니아 공과 컬럼비아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코넬 콜로라도, 볼더 터프츠 테네시 텍사스, 댈러스 텍사스, 알링턴 텍사스, A&M 텍사스, 오스틴 툴레인 퍼듀 펜실베이니아 펜실베이니아 주립 프린스턴 플로리다 플로리다 주립 피츠버그 하버드 하와이, 마노아 휴스턴 국제 맥길 와세다 토론토 피사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28987800 LCCN: n78096930 ISNI: 0000 0004 1936 754X GND: 2012974-9 SUDOC: 026453169 BNF: cb118698578 (데이터) ULAN: 500312819 NLA: 35176433 NKC: kn2002032237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하버드_대학교&oldid=24440317" 분류: 아이비 리그하버드 대학교1636년 개교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주)의 대학교매사추세츠주의 대학교미국 대학 협회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Kaszëbsczi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ryskGaeilgeGàidhligGalegoAvañe'ẽ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KabɩyɛҚазақшаភាសាខ្មែរಕನ್ನಡКъарачай-малкъарKurdî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Lingua Franca Nova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ਪੰਜਾਬੀPapiamentuPolski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संस्कृतम्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ئۇيغۇرچە / Uyghurche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Winaray吴语ייִדישYorùbá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7일 (월) 13: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하버드 대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버드 대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버드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하버드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하버드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표어 Veritas(라틴어:진리) 종류 사립설립 1636년총장 로렌스 바카우 (Lawrence Seldon Bacow)학부생 수 6,700대학원생 수 14,000교직원 수 교수: 4,671국가 미국위치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상징물 크림슨웹사이트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 하버드 대학교의 위치 메모리얼 처치 (Memorial Church)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는 미국의 아이비 리그 사립 대학이다. 하버드 대학교는 오랜 역사와 큰 영향력, 그리고 많은 재산으로 세계의 일류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1][2] 목차 1 개요 1.1 역사 1.1.1 미국 최초의 대학교 1.1.2 설립 1.1.3 종합대학교 1.2 캠퍼스 1.3 구성 1.4 학교 현황 1.5 입학 현황 1.6 평가 1.7 저명한 동문 1.8 대중문화 속 하버드 대학교 1.9 갤러리 1.10 같이 보기 1.11 각주 1.12 외부 링크 개요[편집] 하버드 대학교는 1636년에 매사추세츠 식민지 일반의회가 설립하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며, 처음에는 '새로운 대학'(New College) 또는 '새 도시 대학'(The college at New Towne)으로 불렸으나, 1639년 3월 13일에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라는 이름을 지었다. 젊은 청교도 성직자 존 하버드의 성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유언을 남겨서 4백여권의 책과 재산의 절반인 현금 779파운드를 학교에 기부하였다.[3] 훗날에 여러 학과와 전문대학원들이 통합되면서 하버드 대학교가 되었다. 지금도 학부는 하버드 칼리지라고 부른다. 찰스 윌리엄 엘리엇은 40년간 하버드 총장으로 일하면서 하버드 대학교를 근대 연구 대학으로 변모시켰다. 엘리엇의 개혁은 선택 과목, 소규모 강의 등에 관한 변화도 포함하고 있었다. 하버드 모델은 미국 교육에 영향을 끼쳤다. 하버드 대학교는 현재까지 졸업생과 교수를 포함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15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4] 또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존 F.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총 7명의 미국 대통령, 36명의 퓰리처상 수상자, 미국에서 가장 많은 21명의 연방 대법원 대법관과 7명의 세계은행 총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62명의 억만장자와 미국에서 가장 많은 335명의 로즈 장학생이 하버드를 졸업했다.[5][6] 세계 각국에 포진한 하버드 유학파들로 인해 하버드 출신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높은 권위를 자랑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학부는 4년제 과정이다. 학부 학생들은 의학, 법학, 경영학 등의 전문 분야는 공부할 수 없으며 자연과학, 응용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을 공부한다.[7] 전문대학원 과정에 메디컬 스쿨, 로스쿨, 비즈니스 스쿨과 케네디 스쿨 등을 두고 있다. 역사[편집] 캠퍼스 내 존 하버드 동상 미국 최초의 대학교[편집] 아이비리그 대학 중의 하나인 하버드 대학교는 기독교인은 지식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책과 현금을 기증한 영국 청교도 목사 존 하버드의 이름을 딴 미국 교육 역사에서 처음의 대학교이다. 설립[편집] 하버드 대학교는 1636년 메사추세츠 식민지 관할 의원회(Great and General Court of Massachusetts Bay Colony)의 투표를 거쳐 대학교 설립을 구체화시키게 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시작된 하버드 대학교는 처음에는 학생 아홉 명과 강사 한 명을 두고 목사 양성을 목적으로 출범했다고 한다.[8] 찰스턴 출신의 존 하버드 목사가 이곳에 정착한지 얼마되지 않은 1638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장서와 재산을 뉴 잉글랜드에 새로 세워진 대학교인 하버드 대학교에 기증함으로써, 하버드 대학교는 존 하버드 목사의 이름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1639년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로 명명되게 되었다. 1650년에 하버드 칼리지의 헌장(charter)이 수립되었다. 초기 하버드 대학교는 많은 청교도 목사를 양성했다. 비록 초교파적이었지만, 초기 학교는 회중교회와 유니테리안 성직자들을 교육시켰다. 종합대학교[편집] 1782년에 메디컬 스쿨(Harvard Medical School), 1816년에 신학대학원(Harvard Divinity School), 1817년에 로스쿨(Harvard Law School), 1867년에 치의학대학원(Harvard School of Dental Medicine), 1908년에 비즈니스 스쿨(Harvard Business School), 1920년에 교육대학원(Harvard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1922년에 공공보건대학원(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 그리고 1936년에 케네디 스쿨(Harvard Kennedy School)을 설립하면서 차츰 현대적인 종합대학이 됐다. 캠퍼스[편집] 하버드 홀 하버드 대학교의 메인 캠퍼스(main campus)는 중앙 케임브리지 시에 있는 하버드 야드(Harvard Yard) 중심에 있으며 그 인근에 있는 하버드 스퀘어(Harvard Square)까지 연장되어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과 하버드 스타디움(Harvard Stadium)을 포함한 많은 대학의 운동 시설들은 찰스 강의 다른 면인 하버드 스퀘어로부터 남서쪽 건너편에 있는 보스턴 올스턴 지역에 있다. 메인 캠퍼스에서 찰스 강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올스턴 지역까지 도보로 갈 수 있다. 하버드 메디컬 스쿨, 하버드 덴털 스쿨, 하버드 공공보건대학원은 보스턴 롱우드 메디컬 앤드 아카데믹 에리어(Longwood Medical and Academic Area)에 위치해 있다. 하버드 로스쿨은 하버드 야드 북쪽에 위치해 있다. 하버드 야드에는 중앙 관리 사무소, 대학교 메인 도서관들, 세버 홀(Sever Hall), 유니버시티 홀(University Hall)을 포함한 대학교 건물들, 메모리얼 교회(Memorial Church), 다수의 학부 1학년생 기숙사들이 있다. 학부 2학년생과 학부 3학년생과 학부 4학년생은 12개동의 기숙사(residential Houses)에 살며 그중에 9개동은 하버드 야드 남쪽이나 찰스 강 근처에 있고 나머지 3개동은 하버드대 학부 캠퍼스의 부분인 쿼드랭글(Quadrangle)에서 북서쪽으로 반마일 떨어진 래드클리프가 하버드 시스템에 통합될때까지 이전에 래드클리프 칼리지 학생들이 사용했던 거주지역에 위치해 있다. 각각 기숙사는 학부생, 사감, 교수를 위한 방 뿐만 아니라 식당, 도서관, 다양한 그밖에 학생시설들을 포함한다. 그 시설은 에드워드 하크니스(Edward Harkness)에 의해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의 선물로 만들어졌다. 이전 래드클리프 칼리지 캠퍼스의 중앙인 래드클리프 야드는 교육대학원과 캠브리지 공원에 인접해 있다. 구성[편집] 더들리 하우스 하버드 로스쿨 랑델 홀 열람실 하버드 대학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문리대학(Faculty of Arts and Sciences)에 부수하여 공학응용과학대학(School of Engineering and Applied Sciences)이 있다. 문리대학은 아래 과정을 함께 제공한다. 하버드 칼리지 학부과정(Harvard College) (1636) 일반대학원(Graduate School of Arts and Sciences) (1872) 평생교육원(Harvard Division of Continuing Education) 아래에 하버드 서머 스쿨 (Harvard Summer School) (1871), 하버드 익스텐션 스쿨(Harvard Extension School) (1910)이 있다. 의과대학원(Harvard Medical School) (1782) 치의학대학원(Harvard School of Dental Medicine) (1867). 신학대학원(Harvard Divinity School) (1816) 법과대학원(Harvard Law School) (1817) 경영대학원(Harvard Business School) (1908) 건축대학원(Graduate School of Design) (1914) 교육대학원(Harvard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1920) 공공보건대학원(School of Public Health) (1922) 케네디 행정대학원(Harvard Kennedy School of Government) (1936) 1999년 래드클리프 칼리지(Radcliffe College)가 래드클리프 대학원(Radcliff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모든 하버드 학생들은 소속 학위과정에 상관없이 다른 학과나 전문 전문대학원 혹은 이웃 MIT에서 일부 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 학교 현황[편집] 와이드너 도서관 하버드 대학은 세계 최고의 도서관 규모를 자랑한다.[9][10] 무려 1500만 권의 장서와 각종 자료가 약 90 여개 도서관에 비치돼 있다고 한다. 하버드 도서관은 서울 소재 대학 도서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버드의 투자 펀드 자산은 2009년 6월 기준 약 2백58억 달러(약 32조 원)이었다.[11] 입학 현황[편집] 하버드 야드 (Harvard Yard) 2018년 졸업예정으로 2014년 가을에 입학하는 학부 합격자 발표 현황에 따르면 총 34,295명 지원자중 2,023명만이 합격하여 합격률 5.89%를 기록했다.[12] 미국 종합대학 중 두번째로 낮은 합격률이었다.[13] 합격한 학생들의 등록률(yield rate)은 82%로 미국 종합대학 중 가장 높았다.[14] 미국에서 가장 많은 내셔날 메릿 장학생(National Merit Scholars)들이 하버드에 진학한다.[15] 일반대학원과 비즈니스 스쿨, 로스쿨, 메디컬 스쿨 등의 전문대학원들도 각 분야에서 입학 경쟁이 미국에서 가장 치열한 수준이다. 일반대학원의 경우 석사·박사 통합과정만 제공하는데 경제학, 영문학 등의 주요 분야 석사·박사 통합과정 합격률은 해마다 5% 이하이다.[16][17] 평가[편집] 하버드의 학부는 《U.S. 뉴스 & 월드 리포트》 미국 종합대학 학부 순위에서 언제나 3위권 안에 들었으며 최근 순위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18] 전문대학원의 경우 비즈니스 스쿨이 1위[19], 로스쿨이 2위[20], 메디컬 스쿨이 1위[21], 교육대학원이 3위[22], 건축대학원이 1위[23]를 기록했다. 또한 비즈니스 스쿨은 《파이낸셜 타임스》의 세계 경영대학원 순위에서 세계 1위[24], 로스쿨은 《QS》 세계 로스쿨 순위에서 세계 1위[25], 메디컬 스쿨은 《U.S. 뉴스 & 월드 리포트》 세계 메디컬 스쿨 순위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26] 일반대학원은 생물학, 화학, 경제학, 정치학, 영문학 등을 포함해서 모든 자연과학, 사회과학 및 인문학 분야에서 최상위권에 있다.[27][28] 공학의 경우 미국 내 20위 권으로 다른 학과들에 비해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소속 교수 및 박사과정 학생/졸업생들의 연구실적, 수상이력 등을 주로 평가하는 중국 세계 대학 학술 순위에서 해마다 1위[29], 학교 명성, 평판도를 주로 비교하는 《U.S. 뉴스 & 월드 리포트》 세계 대학 순위에서 해마다 1위[30], 영국 타임즈 고등교육 세계 대학 랭킹에서 현재 6위[31], 타임즈 고등교육 세계 대학 학계 평판도 순위에서 해마다 1위[32], 영국 QS 세계 대학 순위에서 현재 2위[33]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소속 교수들의 수상이력과 학계나 재계에서 유력한 졸업생 수를 주로 비교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세계대학랭킹센터(Center for World University Rankings)의 세계 대학 순위에서도 해마다 1위[34]를 기록하고 있다. 저명한 동문[편집] 조지 W. 부시 (비즈니스 스쿨 M.B.A. 1975), 버락 오바마 (로스쿨 J.D. 1991) 케네디 형제: 로버트 F. 케네디 (A.B. 1948), 에드워드 M. 케네디 (A.B. 1956), 존 F. 케네디 (S.B. 1940) en:Category:Harvard University alumni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는 미국 대통령 존 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 러더퍼드 헤이스, 시어도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 존 F. 케네디,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사인한 사람 존 핸콕, 전 부통령 앨 고어, 전 캐나다 총리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과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총독 데이비드 로이드 존스턴, 전 멕시코 대통령 미겔 데 라 마드리드,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비센테 폭스, 펠리페 칼데론, 전 칠레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 콜롬비아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 중화민국 총통 마잉주, 싱가포르 총리 리셴룽,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그리스 총리 안토니스 사마라스, 전 노르웨이 총리 그로 할렘 브룬틀란, 전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로빈슨, 라이베리아 대통령 엘런 존슨설리프,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밋 롬니, 전 뉴욕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 연방 대법원 대법원장 존 로버츠, 대법관 엘레나 케이건, 안토닌 스칼리아, 앤서니 케네디, 법무장관 로레타 린치, 전 국무장관 딘 애치슨과 헨리 키신저, 주일 대사 캐럴라인 케네디, 전 재무장관 로런스 서머스, 전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 의장 벤 버냉키, 세계은행 총재 김용, 잉글랜드 은행 총재 마크 카니, 자선 사업가 아가 칸 4세, 맥킨지 & 컴퍼니의 실질적인 설립자 마빈 바우어, 블랙스톤 그룹 설립자 스티븐 슈워츠먼, 골드만 삭스 회장 겸 CEO 로이드 블랭크파인, JP모간 체이스 회장 겸 CEO 제이미 다이먼,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 페이스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 휴렛 패커드 CEO 메그 휘트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 토머스 사전트,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 생리학/지리학/역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노벨 물리학자 셸던 리 글래쇼, 노벨 화학자 마틴 챌피, 로저 첸, 철학자이자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사상가이자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 작가 T. S. 엘리엇, 과학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 첼리스트 요요 마,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 배우 맷 데이먼, 나탈리 포트만, 토미 리 존스, 텔레비전 진행자 코넌 오브라이언, 농구선수 제러미 린 등이 있다. 한인 동문으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독립운동가 최기일, 한표욱, UN 사무총장 반기문, 전 국무총리 한덕수, 전 주미대사 함병춘, 전 기획재정부 장관 박재완 , 전 동력자원부 장관 서상철, 전 건설부 장관 서영택, 전 국회의원 박진, 권영세, 국회의원 김광림, 홍문종, 헤럴드 회장 홍정욱,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 김앤장 법률사무소 설립변호사 김영무, 네이버 대표이사 김상헌, 철학자 김용옥, 서울시립대학교 총장 이건,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백낙청, 프리랜서 방송 MC SBS 스포츠 아나운서 신아영 등이 있다. 대중문화 속 하버드 대학교[편집]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미국 영화, 드라마, 1973) 《러브 스토리》 (미국 소설, 1970, 영화, 1970) 《퀴즈 쇼》 (미국 영화, 1994) 《굿 윌 헌팅》 (미국 영화, 1997) 《아메리칸 사이코》 (미국 영화, 2000) 《금발이 너무해》 (미국 영화, 2001) 《다빈치 코드》 (미국 소설, 2003, 영화, 2006) 《소셜 네트워크》 (미국 영화, 2010) 《열정속으로 하버드 로스쿨》 (미국 회고록, 1977) 《앨리 맥빌》 (미국 드라마, 1997-2002) 《슈츠》 (미국 드라마, 2011-) 《웨스트 윙》 (미국 드라마, 1999-2006) 《NCIS》 (미국 드라마, 2003-) 《더 프랙티스》 (미국 드라마, 1997-2004) 《보스턴 리걸》 (미국 드라마, 2004-2009) 《블루 블러드》 (미국 드라마, 2010) 《하우스 오브 카드》 (미국 드라마, 2013-) 《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 (한국 드라마, 2004) 갤러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하버드 대학교 같이 보기[편집] 하버드 로스쿨 하버드 메디컬 스쿨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하버드 케네디 스쿨 래드클리프 칼리지 하버드-옌칭 연구소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 피커링의 하렘 와이드너 도서관 포그 미술관 각주[편집] ↑ Keller, Morton; Keller, Phyllis (2001). 《Making Harvard Modern: The Rise of America's University》. Oxford University Press. 463–481쪽. ISBN 0195144570. Harvard's professional schools... won world prestige of a sort rarely seen among social institutions. (...) Harvard's age, wealth, quality, and prestige may well shield it from any conceivable vicissitudes.  ↑ Spaulding, Christina (1989). 〈Sexual Shakedown〉. Trumpbour, John. 《How Harvard Rules: Reason in the Service of Empire》. South End Press. 326–336쪽. ISBN 0896082849. ...[Harvard's] tremendous institutional power and prestige (...) Within the nation's (arguably) most prestigious institution of higher learning...  ↑ “John Harvard (British minister)”. Enyclopedia Britannica. 2009년 7월 17일에 확인함. 그는 자기 돈의 반을 나누었고, 자신이 모은 고전과 신학 서적도 기증하였다....하버드의 선물은 학교의 지속적인 운영을 보장하였다.  ↑ 학교별 노벨상 수상기록. 현재까지 학생으로든 교수로든 하버드와 연고가 있는 노벨상 수상자 총 157명 중 총 73명이 하버드를 졸업했다. ↑ Billionaire universities Forbes ↑ Billionaire universities business insider ↑ 학부 학생들은 다른 대부분의 북미 대학과 마찬가지로 무전공으로 시작했다가 2학년 시작 전에 전공(concentration)을 정한다. 따라서 학부에서 어느 학과에 입학했다거나 어느 학과를 졸업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 “하버드 대학 웹사이트”. 2010년 7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8월 25일에 확인함.  ↑ Library Investment Index Summarizes Relative Size of ARL University Libraries for 2011–12 ↑ World's Largest University Library Centers Around Widener-Half of 3,600,000 Volumes ↑ 미국 보스턴 글로브 신문, The Boston Globe, 2009년 8월 6일자 ↑ College Admits Class of 2018 ↑ College Admissions: Ivy League Remains Elusive for Class of 2018 ↑ Class of 2018 Yield Rates ↑ Colleges With the Most Freshman Merit Scholars, 2009 ↑ The Harvard Crimson: And You Thought It Was Hard to Get into Harvard College! ↑ Harvard University - acceptance rates of all degree programs ↑ US News National Universities ↑ US News Business ↑ US News Law ↑ US News Medicine ↑ US News Education ↑ 2014 US Best Architecture Schools ↑ FT MBA World ↑ QS Law Rankings ↑ US News Clinical Medicine Rankings ↑ US News Graduate Schools ↑ Tilburg University Economics Ranking 2008-2012 ↑ ARWU Rankings ↑ U.S. News Best Global Universities Rankings ↑ THES Rankings ↑ THES Reputation Rankings ↑ QS Rankings ↑ “CWUR Rankings”. 2013년 7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1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영어) 하버드 대학교 공식 웹사이트 하버드 대학교 소개 동영상 vdeh 매사추세츠 주의 대학공립 매사추세츠 대학교 보스턴 애머스트 사립 뉴잉글랜드 음악원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버클리 음악 대학 벤틀리 대학교 보스턴 대학교 보스턴 칼리지 브랜다이스 대학교 서퍽 대학교 스미스 칼리지 애머스트 칼리지 웰즐리 칼리지 윌리엄스 칼리지 터프츠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대학 헐트 국제경영대학원 노스캐롤라이나 뉴욕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일리노이 캘리포니아 vdeh아이비 리그 다트머스 브라운 예일 컬럼비아 코넬 펜실베이니아 프린스턴 하버드 vdeh미국 대학 협회 (AAU)공립 대학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 뉴욕 주립 (버펄로 · 스토니브룩) · 럿거스 · 메릴랜드 · 미네소타 · 미시간 · 미시간 주립 · 미주리 · 버지니아 · 아이오와 · 아이오와 주립 · 애리조나 · 오리건 · 오하이오 주립 · 워싱턴 · 위스콘신, 매디슨 · 인디애나, 블루밍턴 · 일리노이, 어배너-섐페인 · 조지아 공과 · 캔자스 ·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 로스앤젤레스 · 버클리 · 샌디에이고 · 샌타바버라 · 어바인) · 콜로라도 · 텍사스, 오스틴 · 텍사스, A&M · 퍼듀 · 펜실베이니아 주립 · 플로리다 · 피츠버그사립 대학노스웨스턴 · 뉴욕 · 듀크 · 라이스 · 로체스터 · 매사추세츠 공과 · 밴더빌트 · 보스턴 · 브라운 · 브랜다이스 · 서던 캘리포니아 · 스탠포드 · 시카고 · 에모리 · 예일 · 워싱턴, 세인트루이 · 존스 홉킨스 · 카네기 멜런 · 캘리포니아 공과 · 컬럼비아 ·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 코넬 · 툴레인 · 펜실베이니아 · 프린스턴 · 하버드캐나다의 대학맥길 · 토론토 vdeh대학 연구 협회 (URA)미국 네브래스카, 링컨 노스이스턴 노던일리노이 노스웨스턴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노스텍사스 노터데임 뉴멕시코 뉴멕시코 주립 듀크 라이스 럿거스 로체스터 록펠러 메릴랜드 미네소타 미시간 미시간 주립 밴더빌트 버지니아 버지니아 공과 뉴욕 주립, 버펄로 보스턴 브라운 사우스캐롤라이나 스탠포드 스토니브룩 시러큐스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 아이오와 아이오와 주립 애리조나 애리조나 주립 앨라배마 서던메소디스트 루이지애나 주립 매사추세츠 공과 예일 오리건 오클라호마 오하이오 주립 워싱턴 워싱턴, 세인트루이스 웨인 주립 위스콘신, 매디슨 윌리엄 & 메리 캘리포니아, Davis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버클리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일리노이, 시카고 유타 인디애나, 블루밍턴 일리노이, 어배너-섐페인 존스 홉킨스 카네기 멜런 캘리포니아 공과 컬럼비아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코넬 콜로라도, 볼더 터프츠 테네시 텍사스, 댈러스 텍사스, 알링턴 텍사스, A&M 텍사스, 오스틴 툴레인 퍼듀 펜실베이니아 펜실베이니아 주립 프린스턴 플로리다 플로리다 주립 피츠버그 하버드 하와이, 마노아 휴스턴 국제 맥길 와세다 토론토 피사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28987800 LCCN: n78096930 ISNI: 0000 0004 1936 754X GND: 2012974-9 SUDOC: 026453169 BNF: cb118698578 (데이터) ULAN: 500312819 NLA: 35176433 NKC: kn2002032237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하버드_대학교&oldid=24440317" 분류: 아이비 리그하버드 대학교1636년 개교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주)의 대학교매사추세츠주의 대학교미국 대학 협회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Kaszëbsczi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ryskGaeilgeGàidhligGalegoAvañe'ẽ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KabɩyɛҚазақшаភាសាខ្មែរಕನ್ನಡКъарачай-малкъарKurdî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Lingua Franca Nova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ਪੰਜਾਬੀPapiamentuPolski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संस्कृतम्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ئۇيغۇرچە / Uyghurche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Winaray吴语ייִדישYorùbá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7일 (월) 13: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국프로농구 포스트시즌 2011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프로농구 포스트시즌 2011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0~2011 대한민국 프로 농구 포스트시즌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0-2011 현대모비스 프로 농구의 포스트시즌은 2011년 3월 25일부터 시작하여 4월 중순까지 진행된다. 부산 KT 소닉붐이 창단 처음으로 정규리그를 우승했으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는 정규 시즌 2위를 차지 하면서 4강에 직행하였다. 한편 6강 플레이오프 대진은 지난 09-10시즌 대진에 리벤지매치가 되면서 화제가 되었으며, 4강에서는 1,2위팀이 모두 떨어지는 결과가 나온 끝에 정규시즌 3위 KCC와 4위 동부가 7전 4선승제로 경기를 치러 4승 2패로 KCC가 우승을 차지 하였다. 목차 1 순위 1.1 정규 시즌 1.2 최종 순위 2 토너먼트표 3 6강 플레이오프 3.1 1차전 3.2 2차전 3.3 3차전 4 4강 플레이오프 4.1 4강 플레이오프 (A조) 4.2 4강 플레이오프 (B조) 5 챔피언 결정전 6 트리비아 7 각주 순위[편집] 정규 시즌[편집] 성적 팀 경기수 승 패 승률 승차 비고 1 부산 KT 소닉붐 54 41 13 0.759 - 4강 PO 직행 2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54 38 16 0.704 3 3 전주 KCC 이지스 54 34 20 0.630 7 6강 PO 진출 4 원주 동부 프로미 54 31 23 0.574 10 5 창원 LG 세이커스 54 28 26 0.519 13 6 서울 삼성 썬더스 54 27 27 0.500 14 7 서울 SK 나이츠 54 20 34 0.370 21 진출실패 8 울산 모비스 피버스 54 20 34 0.370 21 9 안양 한국인삼공사 54 16 38 0.296 25 10 대구 오리온스 54 15 39 0.278 26 최종 순위[편집] 성적 팀 경기수 승 패 승률 승차 비고 1 전주 KCC 이지스 54 34 20 0.630 7 챔피언전 우승 2 원주 동부 프로미 54 31 23 0.574 10 챔피언전 준우승 3 부산 KT 소닉붐 54 41 13 0.759 0 4강 PO 진출 4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54 38 16 0.704 3 5 창원 LG 세이커스 54 28 26 0.519 13 6강 PO 진출 6 서울 삼성 썬더스 54 27 27 0.500 14 7 서울 SK 나이츠 54 20 34 0.370 21 진출실패 8 울산 모비스 피버스 54 20 34 0.370 21 9 안양 한국인삼공사 54 16 38 0.296 25 10 대구 오리온스 54 15 39 0.278 26 토너먼트표[편집]   6강 플레이오프     4강 플레이오프     챔피언 결정전                                     1  부산 KT 1     4  원주 동부 3     4  원주 동부 3       5  창원 LG 0         4  원주 동부 2       3  전주 KCC 4         2  인천 전자랜드 1       3  전주 KCC 3     3  전주 KCC 3     6  서울 삼성 0   6강 플레이오프[편집] 1차전[편집] 2011년 3월 25일원주 치악체육관 원주 동부 프로미 65 18 (1Q) 1314 (2Q) 1320 (3Q) 1513 (4Q) 14 55 창원 LG 세이커스 경기 내용 1쿼터 초반은 LG의 분위기. LG는 알렉산더가 착실한 골밑 득점을 올리며 기선을 제압했다. 문태영은 2점에 그쳤지만 김주성을 무득점으로 묶으며 수비에 집중했다. 2-6으로 끌려가던 동부의 공격은 곧 살아났다. 박지현이 잇따라 그물망을 흔들며 7점을 올렸고 윤호영이 5점을 보탰다. 벤슨은 리바운드 4개를 따내며 골밑을 장악했다. 1쿼터는 18-13 동부의 근소한 우세. 2쿼터는 팽팽했다. 동부는 박지현 윤호영이, LG는 알렉산더 문태영 등이 공격을 주도했다. 하지만 큰 경기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양 팀의 공격은 원활하지 못했다. 2쿼터 5분이 지난 시점에서 두 팀이 기록한 턴오버는 10개나 됐다. 3쿼터는 벤슨의 독무대였다. 잠잠하던 벤슨은 3쿼터 시작과 함께 호쾌한 덩크슛으로 포효했다. 이어 LG가 무득점으로 묶인 사이 혼자서 4점을 올렸다. 점수는 순식각에 10점차. 여기에 김주성의 골밑슛까지 터졌다. LG는 문태영이 김주성에게 철철히 막히고 알렉산더의 득점포도 가동되지 않으며 답답한 경기를 이어갔다. 그나마 교체 투입된 루이스가 골밑서 고군분투했지만 나머지 선수들의 득점 지원이 없었다. 3쿼터 까지 동부가 52-41로 앞섰다. 반격에 나선 LG는 침묵했던 3점포가 터지며 경기 분위기를 가져왔다. 박형철, 문태영이 연달아 그물망을 흔들었고 이현준의 자유투까지 이어졌다. 점수는 순식간에 56-53. 동부는 턴오버를 남발하며 경기를 내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때 LG의 분위기는 다시 급격히 가라앉았다. 에이스 문태영이 5반칙으로 물러난 것. 경기 내내 심판 판정에 불만을 보였던 문태영은 4쿼터 4분 18초를 남기고 김주성과 더블 파울을 당하며 5반칙 퇴장했다. 분위기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 동부는 이후 황진원의 3점포, 중거리포가 터지며 점수차를 벌렸다. 이날 19점을 올린 황진원은 벤슨, 김주성, 윤호영에게 상대 수비가 집중되는 틈을 타 깜짝 활약을 펼쳤다. 결국 LG는 문태영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6강 플레이오프 1차전을 동부에게 내줬다. 문태영은 김주성의 두터운 수비에도 13점 7리바운드로 비교적 선전했지만 경기 막판 퇴장 당하며 이날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 2011년 3월 26일전주 실내 체육관 전주 KCC 이지스 105 23 (1Q) 16 27 (2Q) 19 25 (3Q) 16 30 (4Q) 26 77 서울 삼성 썬더스 경기 내용 전반전부터 완전히 KCC의 것이었다. 1쿼터 초반만 해도 삼성이 이정석과 이승준의 중거리슛에 힘입어 1x점으로 근소하게 앞섰으나 추승균이 연속 득점으로 따라잡더니 강병현이 내곽포를 터뜨리면서 역전했다. 추승균이 3점포로 힘을 보탰고 1쿼터 종료 50초전 강병현도 외곽포까지 터뜨리면서 리드를 잡아갔다. 2쿼터 들어서자마자 임재현이 외곽포를 연이어 작렬하며 삼성의 기선을 꺾어놨다. 벌어지는 점수차를 삼성의 이정석이 외곽포로 간신히 한자릿 수 까지 좁혔지만 하승진이 골밑 공격으로 다시 점수차를 벌려놨다. 강은식마저도 외곽포를 터뜨리면서 멤버 모두가 고루 점수를 낸 KCC는 전반전을 완전히 우세한 상태로 50-35로 앞선 채 끝냈다. 후반 들어서 KCC는 다시 심기일전한 삼성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3분 30초 가량 점수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전반에서도 활약했던 강병현이 골밑을 꾸준히 파고든 덕에 점수를 터뜨렸다. 여기에 다니엘스가 덩크를 꽂아넣으며 점수차를 더 벌이기 시작했다. 이어 다니엘스는 내곽에서도 점수를 더 냈으며 리바운드까지 성공하면서 3쿼터에만 10점을 뽑아냈다. 다른 용병 에릭 도슨도 자유투 4개를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팀 승리에 힘을 보탠 결과 3쿼터를 15점 차로 앞선 채 끝냈다. 마지막 쿼터에서는 임재현과 유병재가 외곽포가 연이어 림을 갈라 점수차를 27점까지 벌렸다. 하승진도 삼성의 수비를 뚫고 높이를 내세워 덩크슛을 넣었다. 여기에 완연한 기세를 탄 강병현이 3점포를 성공시키며 이날 경기의 23득점째를 성공했다. 다니엘스의 득점으로 KCC의 득점은 101점을 넘기 시작했고 삼성과의 점수차는 30점 이상이 되면서 더 이상의 삼성의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2차전[편집] 2011년 3월 27일원주 치악체육관 원주 동부 프로미 76 19 (1Q) 13 21 (2Q) 19 17 (3Q) 19 19 (4Q) 12 63 창원 LG 세이커스 경기 내용 동부는 1쿼터 초반부터 강하게 몰아쳤다. 동부의 압박에 LG는 1쿼터 시작 후 3분 여 동안 득점을 하지 못했다. 반면 동부는 8득점하며 앞서갔다. 동부는 1쿼터 종료 1분 30여 초를 남기고 김주성이 3번째 반칙을 저지르는 바람에 잠시 코트를 떠났지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리드를 유지해 19-13으로 1쿼터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쉽게 당할 LG가 아니었다. LG는 2쿼터 들어 주포 문태영(9득점)을 이용해 조금씩 점수차를 좁혔다. 2쿼터 종료 3분 여를 남겼을 때 LG는 26-29까지 추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LG는 동점을 눈 앞에 두고 달성하지 못했다. 동부가 황진원과 김주성의 연속 득점에 힘입어 달아난 것. 전반이 끝났을 때 양 팀의 점수차는 40-32으로 8점차였다. 양 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3쿼터에 더 치열해졌다. 동부는 벤슨이 6점, 황진원과 김주성이 각각 4점씩을 기록하며 총 17득점을 올리며 달아났다. 그렇지만 LG는 3점슛 3개를 꽂아 넣으며 추격의 발판을 만들었다. 거기에 문태영이 6득점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총 19득점을 기록했다. 양 팀의 점수차는 6점으로 좁혀졌다. 치열한 접전의 승리자는 동부였다. 4쿼터 초반 LG의 공격을 4차례나 차단한 동부는 자신들의 찬스에서는 꾸준히 득점을 올리며 점수차를 벌렸다. 동부는 4쿼터 중반 벤슨과 윤호영이 잇달아 5반칙 퇴장을 당하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리드를 유지한 동부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2011년 3월 28일전주 실내 체육관 전주 KCC 이지스 104 19 (1Q) 28 25 (2Q) 19 15 (3Q) 22 23 (4Q) 13 22 (연장[1]) 16 98 서울 삼성 썬더스 경기 내용 1쿼터 초반만 해도 삼성은 1차전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 가는 듯 했다. 1쿼터 시작 후 2분이 지났을 무렵 KCC에 0-8로 뒤진 것.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삼성다운 농구가 펼쳐졌다. 이승준과 애론 헤인즈가 각각 8점씩을 기록하며 살아났고, 3점슛도 4개나 터지며 무려 28득점에 성공한 것. KCC는 추승균이 9득점으로 분전했지만 19득점에 그쳤다. 그렇지만 KCC는 2쿼터 들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9점의 점수차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2쿼터 중반 하승진이 강혁과 볼 다툼 도중 쓰러져 어깨를 잡고 코트를 떠났지만, 전태풍이 잇달아 3점포를 터트리며 31-30으로 역전시킨 것. 그러나 삼성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2쿼터 막판 이규섭과 이원수가 연이어 3점슛을 성공시키며 다시 점수차를 벌렸다. 그 결과 삼성은 47-44로 전반을 마칠 수 있었다. 3쿼터 막판 연이은 3점슛으로 분위기를 내주지 않은 탓일까? 3쿼터 삼성은 KCC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 KCC가 공격에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슛 난조로 15득점에 그친 것. 하승진이 어깨에 붕대를 감고 출전했지만 2득점에 그친 것이 가장 아쉬웠다. 반면 삼성은 헤인즈(10득점)가 공격의 중심에 서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모두 득점으로 연결하며 22점을 올렸다. 4쿼터 시작 전만 해도 삼성이 리드하던 10점의 점수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좁혀져 4쿼터 중반 2점차가 됐다. 그렇지만 삼성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2분 30여초를 남기고 80-80으로 동점을 허용한 것. 그리고 종료 19.8초를 남기고 시도한 회심의 공격에 실패하며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 접전 끝에 웃은 것은 KCC였다. KCC는 2차 연장 초반 다니엘스의 골밑 득점과 추승균의 3점포로 승부에 쐐기를 박으며 분위기를 가져왔고, 결국 승리를 차지했다. 3차전[편집] 2011년 3월 29일창원 실내체육관 창원 LG 세이커스 68 16 (1Q) 28 19 (2Q) 15 19 (3Q) 14 14 (4Q) 19 76 원주 동부 프로미 원주 동부 프로미, 4시즌 연속 4강 플레이오프 진출 경기 내용 동부는 경기 초반 상대의 골밑을 집중 공략했다. 김주성은 1쿼터서 7개의 슛을 모두 성공시키며 15점을 넣었다. LG는 기승호(8점)와 크리스 알렉산더(7점)의 공격력이 살아나며 2쿼터를 19-15로 앞섰다. 전반전은 동부가 43-35로 리드. LG는 후반서 폭발적인 공격력을 앞세워 동부를 맹추격했다. 루이스가 골팀서 연속 득점을 올리며 기세를 올린 LG는 3쿼터 중반 기승호가 3점슛 2개를 성공시키며 51-54까지 따라붙었다. 이어 LG는 3쿼터 1분 53초를 남기고 루이스가 골밑 득점을 올리며 54-54로 경기를 처음으로 동점으로 만들었다. 동부는 김주성의 골밑 공격에 이은 득점으로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57-54서 4쿼터를 맞았고 양 팀은 5점 안쪽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펼쳤다. 위기에 상황서 동부를 이끈 것은 골밑의 우위였다. 윤호영과 김주성은 골밑서 확률 높은 2점슛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점수 차를 좁혀주지 않았다. 김주성은 72-66서 종료 1분 10여 초를 남겨 놓고 공격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상대에게 추격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김주성은 종료 44초를 남기고 드리블 돌파에 이은 골밑슛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2011년 3월 30일서울 잠실 서울 삼성 썬더스 81 22 (1Q) 28 15 (2Q) 26 24 (3Q) 20 20 (4Q) 23 97 전주 KCC 이지스 전주 KCC 이지스, 4시즌 연속 4강 플레이오프 진출 경기 내용 4강 플레이오프[편집] 4강 플레이오프 (A조)[편집] 1차전 2011년 4월 4일부산 사직체육관 부산 KT 소닉붐 73 17 (1Q) 1721 (2Q) 916 (3Q) 2424 (4Q) 18 68 원주 동부 프로미 2차전 2011년 4월 6일부산 사직체육관 부산 KT 소닉붐 70 25 (1Q) 1612 (2Q) 2012 (3Q) 1621 (4Q) 23 75 원주 동부 프로미 3차전 2011년 4월 8일원주 치악체육관 원주 동부 프로미 58 18 (1Q) 1011 (2Q) 197 (3Q) 1222 (4Q) 16 57 부산 KT 소닉붐 4차전 2011년 4월 10일원주 치악체육관 원주 동부 프로미 81 29 (1Q) 1820 (2Q) 1426 (3Q) 216 (4Q) 15 68 부산 KT 소닉붐 4강 플레이오프 (B조)[편집] 1차전 2011년 4월 5일인천 삼산월드체육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94 17 (1Q) 2216 (2Q) 2019 (3Q) 2023 (4Q) 13 91 전주 KCC 이지스 2차전 2011년 4월 7일19:00 인천 전자랜드 vs. 전주 KCC 인천삼산월드체육관 3차전 2011년 4월 9일15:00 전주 KCC vs. 인천 전자랜드 전주실내체육관 4차전 2011년 4월 11일19:00 전주 KCC vs. 인천 전자랜드 전주실내체육관 챔피언 결정전[편집] 2010~2011 현대모비스 프로 농구 챔피언 결정전(2011 KBL FINALS)은 2011년 4월 16일부터 정규시즌 4위 원주 동부 프로미와 3위 전주 KCC 이지스가 7전 4선승제로 진행하여 전주 KCC 이지스가 4승 2패로 통산 5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1차전 2011년 4월 16일14:30 전주 KCC 이지스 vs. 원주 동부 프로미 전주실내체육관 2차전 2011년 4월 17일14:15 전주 KCC 이지스 vs. 원주 동부 프로미 전주실내체육관 3차전 2011년 4월 20일18:30 원주 동부 프로미 vs. 전주 KCC 이지스 원주실내체육관 4차전 2011년 4월 22일17:50 원주 동부 프로미 vs. 전주 KCC 이지스 원주실내체육관 5차전 2011년 4월 24일14:30 원주 동부 프로미 vs. 전주 KCC 이지스 잠실실내체육관 6차전 2011년 4월 26일18:30 전주 KCC 이지스 vs. 원주 동부 프로미 잠실실내체육관 2010-2011프로농구 우승 전주 KCC 이지스다섯 번째 우승 트리비아[편집]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 팀 중 모비스만 유일하게 올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최초로 지난 시즌 우승팀만 플레이오프에 올라가지 못하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웠다. KT는 정규리그 우승을 하면서 팀 창단 처음으로 2년 연속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고, 전자랜드역시 팀 창단 처음으로 정규리그 준우승을 하면서 2003~2004 시즌 이후 7년 만에 4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였다. 6강 플레이오프 대진표가 지난 시즌과 똑같은 매치업이었다.(동부 VS LG는 순위만 바뀌었음.) 그리고 양팀간의 경기가 모두 3:0으로 끝이 났다. KCC 하승진은 2008~2009 시즌 올스타전에 이어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도 3점슛을 성공시켜 화제가 되었다. 삼성이 6강 플레이오프에서 3:0으로 떨어지자, 3월 31일 안준호 감독은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하였다. 차기 감독으로 김상준 중앙대 감독이 확정되었다. 2011년 한국 프로 야구 개막으로 인해 MBC 스포츠 플러스와 SBS ESPN이 야구중계를 하면서 일부 경기는 MBC 게임과 디원TV에서 방송하기도 했다. 이는 최초로 비스포츠 방송에서 농구 플레이오프 중계를 한 첫 번째 사례이다. 동부가 챔피언 결정전에 올라가면서, 2008~2009 시즌 이후 2년 만에 정규리그 4위팀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였다. KT는 2008~2009 시즌 모비스와 똑같이 정규리그 우승을 하고도 4강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로 떨어졌다, 이는 08-09의 모비스 이후 두 번째로 정규리그 우승팀이 챔프전에 올라가지 못하는 사례이다. LG도 6강 플레이오프 탈락 후, 강을준감독이 사퇴하고 2009년 12월 17일 SK 감독에서 사퇴한 김진 감독이 취임하였다. 프로 농구 사상 두 번째로 정규 시즌 1~2위 팀이 4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였다(첫 번째는 2008~2009시즌). KCC가 3년 연속으로 챔피언결정전에 오르면서 정규리그 3위팀이 5시즌 연속으로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정규리그 3위팀이 챔프전에 진출한 횟수는 총 8번으로 이는 정규리그 2위팀이 챔프전에 진출한 횟수 7번의 기록을 깼다. KCC는 챔피언결정전 3차전에서 역대 챔프전 최소 득점(54점) 패전과 역대 챔프전 전반 최소득점(1,2쿼터 합계 20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특히 3점슛은 10개 시도에 단 1개만 들어갔다. KCC는 이번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역대 챔프전 3위팀으로는 3번째 우승이자 KBL 통산 최다 우승기록인 5회 우승의 대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각주[편집] ↑ 2차 연장까지 진행 vdeh KBL 플레이오프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프로농구_포스트시즌_2011&oldid=23962794" 분류: 한국프로농구 시즌2011년 농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3일 (수) 22: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사할린 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할린 한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할린 한민족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사할린 한인 총인구 약 5만 5,000 명 언어 러시아어, 한국어 종교 동방 정교회, 개신교 민족계통 사할린 한인(러시아어: Сахалинские корейцы, 영어: Sakhalin Koreans)은 사할린 섬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말한다. 목차 1 역사 2 거주 지역 2.1 관련 방송매체 3 사할린 한인 학살 4 관련 항목 5 각주 역사[편집] 19세기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 섬 북부로 넘어간 경우가 있었다. 또한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사할린 섬 남부를 차지하여 가라후토 청이 형성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가라후토로 건너간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인원은 소수였으며,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까지 일제에 의해 사할린 섬으로 강제 징용되면서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사할린 이동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시 상황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가라후토로 강제 징용하여 이들을 탄광·군수공장 등에서 혹사시켰다. 일제는 1937년 만주전쟁에서 군수산업 부문의 노동력이 부족하자 1939년부터 모집의 형태로, 1942년부터는 관 알선 방식으로,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의 형태로 조선인들을 끌고 갔다. 이중징용(二重徵用)이란 강제동원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다. 사할린에 있는 군수공장으로 해상 연료운반사업이 어렵게 되자 일본 본토 내의 석탄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할린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 1만여 명을 다시 본토로 끌고 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할린 고려인 이산가족이 생겼다. 1944년 8~9월에 걸쳐 이중징용된 3200여명의 조선인들의 생사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1]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가라후토는 소련에 반환되었다. 이에 따라 가라후토의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송환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을 방치했다. 광복 이후의 혼란으로 대한민국은 이들을 송환할 여력이 없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냉전으로 대한민국과 소련이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의 한인들은 대한민국과 소련, 일본 세 나라의 무관심 속에서 무국적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이들을 회유하기도 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경상도·전라도 등 한국 남부 출신으로 대한민국에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일부는 소련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으로 귀환을 바라던 1세대들은 계속 무국적자로 남아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1988년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이들의 고향 방문이 추진되어 일부가 대한민국을 찾기도 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에 정착을 희망하여 사할린 교포 정착촌이 조성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세대의 귀환만 지원하고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할린 동포사이에서 태어난 2세 이하 자녀들을 한국인으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러나 한국법원은 소련국적을 취득하지 않아 사실상 무국적이었던 사할린 한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는 대한민국 국적자라고 판결했다.[2] 거주 지역[편집] 러시아 사할린주에 3만여 명이 살고 있으며, 이 중 50%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거주한다. 러시아 외에 대한민국에 3,500여 명이 귀환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1,000여 명이 귀환했다. 관련 방송매체[편집] 사할린 우리말 방송국 새고려신문 사할린 한인 학살[편집]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일본의 학살은 미즈호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한인 27명을 학살한 사건 외에는 그동안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2008년에 러시아의 연방보안국(FSB) 간부가 조선인 학살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출간하면서 일본의 사할린 한인 학살이 추가로 알려졌다.[3] 2012년에는 일본이 사할린 한인들을 대량학살했을 것이라는 1946년의 소련 정부 보고서 초안이 공개되었다.[4] 관련 항목[편집] 한국인 사할린 한인 쿠릴 열도 분쟁 징용 가라후토 청 각주[편집] ↑ “망향의 섬 사할린, 우린 잊고 있었다”. 내 마음속의 굴렁쇠. 2008년 8월 15일에 확인함.  ↑ 사할린 강제징용 동포 2세 ‘대한민국 국적 맞다’ ↑ 러 FSB 간부가 日 사할린 한인학살 다룬 소설 출간 ↑ "日, 종전후 사할린 한인 학살했다" vdeh재외한인아시아 재대만 한국인 재일한인/ 재일 조선인 조선적 북조선국적 한국국적 일본국적 재중한인 재중동포 한국국적 고려인 사할린 한인 재베트남 한국인 재필리핀 한국인 재인도네시아 한국인 아메리카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캐나다인 재멕시코 한국인 유럽 재독 한국인 재스페인 한국인 오세아니아 한국계 뉴질랜드인 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방언 재중 한국어 중앙아시아 한국어 재일 한국어 재미 한국어 관련 항목 코리아타운 한국인 입양아 한국학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할린_한인&oldid=24108416" 분류: 러시아의 민족사할린섬한국계 러시아인소련-한국 관계러시아-한국 관계일본-한국 관계소련-일본 관계숨은 분류: 러시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Русский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7일 (토) 13: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야요이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야요이 시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야요이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야요이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일본의 역사日本史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35,000~14,000 BC 조몬 시대 14,000~300 BC 야요이 시대 300 BC~250 AD 선주민(하야토·야마토·에조) 고대 고훈 시대 250~538 야마토 왕권 야마타이국 아스카 시대 538~710 다이카 개신 642 다이호 율령 701년 나라 시대 710~794 헤이안 시대 794~1185 섭관정치 헤이시 정권 1167~1185 중세 가마쿠라 시대 1185~1336 가마쿠라 막부 1192~1333 겐무 신정 1333~1336 무로마치 시대 1336~1573 난보쿠초 시대 1336~1392 남조 북조 무로마치 막부 1336~1573 센고쿠 시대 1467~1573 호소카와 정권 1493~1549 미요시 정권 1549~1568 근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1603 오다 정권 1573~1583 도요토미 정권 1585~1603 에도 시대 1603~1868 에도 막부 1603~1868 막말 1853~1868 근현대 메이지 시대 1868~1912 메이지 유신 다이쇼 시대 1912~1926 쇼와 시대 1927~1989 군정기 1945~1952 전후 쇼와 시대 1952~1989 헤이세이 시대 1989~2019 잃어버린 10년 1991~2000 레이와 시대 2019~ 목록 일본 제국 ("전전") 1868~1947 일본국 ("전후") 1945~현재 주제별 역사 일본의 과학사 일본의 경제사 일본의 군사사 v • d • e • h 야요이 시대(일본어: 弥生時代;미생시대)는, 홋카이도,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열도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조몬시대에 후에 이어지며, 고훈시대의 전에 해당하는 약 기원전 3세기 부터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시대의 명칭이다. 조몬 시대에 한반도로부터 큐슈를 지나서 일본으로 들어온 도래인들인 야요이인들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사용하며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일본 열도 각지,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큐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을 한반도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1] :18 야요이 문화는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한반도에서 기원(起原)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들이 성립되었다.[2]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처음 한반도에서부터 큐슈 북부로 수전경작기술을 중심으로 한 생활 체계가 전해지고, 기원전 3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큐슈, 시코쿠, 혼슈를 지나 토호쿠 북부까지 전해졌다. 초기의 논은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에 있는 이타즈케 유적과 사가현 가라쓰 시의 나바타케 유적과 같이 큐슈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이다. 죠몬인들이 살던 죠몬 시대후기부터, 대규모 관개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업과 수렵을 대부분이 하였고 밭에 심는 벼의 재배(陸稻耕作)은 매우 소규모로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彌生)시대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도입되었다. 목차 1 수도경작(水稻耕作) 2 한반도의 야요이인 일본진출 3 명칭 4 농경 5 석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수도경작(水稻耕作)[편집] 수도경작(水稻耕作)은 대륙에선 볼 수 없는 한반도에서 기원한 경작의 형태로 야요이 시대에는 특히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도입되어 곡물의 비축이 가능해지면서 잉여작물의 생산과 축적이 발달하여, 이것이 부(富)에 연결되어 가지는 것과 가지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빈부의 차와 상하관계가 생겨났다. 또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한다 벼농사 기술의 도입에 의해 개간과 농업용수의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다. 대형화된 집단 사이에서는 부와 경작지, 수리권(水利権)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싸움을 통한 집단의 통합, 상하관계가 진전된 결과 각지의 조그만 나라가 생기고 3세기 중엽에 왜국의 야마타이코쿠의 여왕 히미코가 대륙에 조공을 했다는 중국사서 기록이 있으나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고사기와 외국사서등에서는 히미코를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의 무분별한 외국 조공 기록들에 의심을 가지고 있어서 히미코가 실존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며 실존자체가 확실치 않다. 덧붙여 이 무렵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에서 왜라고 불렸다. 한반도의 야요이인 일본진출[편집] 한반도 야요이인 일본진출에 대해선 (韓半島の弥生人日本進出) 야요이 시대를 나타내는 묘제(墓制)의 용어에는 지석묘(支石墓),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라고 하는 이장시설의 외부구조로 구분하는 것이 있고 목관묘(木棺墓),토광묘(土壙墓)같이 이장시설 내부에 있는 형태로 구분하는 것이 있다. 특히 야요이인들이 한반도 북부와 남부에 살고 있던 한반도 도래인(韓半島渡來人)이라는 증거는 야요이의 묘제(墓制)에서 찾아볼 수 있다.야요이인의 묘제로서 목관묘는 한반도에서 도래된 묘제로서 야요이 시대 전기말(弥生時代前期末)까지 서일본(西日本)에 널리 퍼져 특히 기나이 지방(畿内)에 주로 방형주구묘 내부의 주체부로서 목관묘가 쓰여졌다. 일본에서 카메칸보(甕棺墓)라고 불리는 옹관묘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해져서 이토시마반도(糸島半島), 시마바라반도(島原半島)의 후쿠오카시,사가현 칸자키군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지석묘(支石墓)의 경우에는 규슈의 이토시마반도, 시마바라반도에 퍼져갔다.[3] 또한 한반도 남부에서만 대량으로 발견되는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는 야요이인의 방형주구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방형주구묘를 만들었던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도래(渡來)하여 일본에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전파(傳播)되었고 방형주구묘는 일본의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슈 북부에서부터 방형주구묘가 발견되며 특히 일본 간사이 긴키 지방(近畿地方)까지 퍼져 긴키 지방에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야요이 시대 중기에는 한반도(韓半島)의 방형주구묘가 일본열도의 주부 지방, 간토지방(中部地方,関東地方)까지 도래하게 된다.[4] 명칭[편집] 야요이 시대의 야요이 토기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발견지인 도쿄 시 분쿄 구 야요이 초의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에 연유해 야요이식 토기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그 후 도시화의 진행으로 정확한 발견지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야요이식 토기를 사용한 시대라는 의미에서 〈야요이식 시대〉라고 부르고, 그 후 ‘식’을 생략하는 호칭이 일반화되었다. 야요이 시대라는 명칭의 기원이 된 야요이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현재의 토기편년 상에서 고훈시대 전기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한반도 도래인은 농경민족이었고 때문에 일본에 수전농경문화가 전파된 계기는 한반도 도래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시작된것이다. 농경[편집] 수도경작(水稻耕作)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한반도에서만 사용되었다. 기존에는 무거동과 마전리 유적을 통해 기원전 7~5세기를 최상한 연대로 보았으나, 2015년 5월 세종시에서 약 4000평 가량의 논농사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12~13세기(B.C.13~B.C.12)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세기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이 이동하였는데[5] 이들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경작(水稻耕作)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6] 또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그러한 주장이 고고학적으로도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이타즈케에서 시작한 벼농사와 한민족으로 부터 전수받은 청동기를 특징으로 한 야요이 문화는 세토 내해를 통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현재 후쿠오카와 가라쓰, 요시노가리, 그리고 세토 내해의 오카야마, 킨기 지방의 나라 분지에 전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쿠니들이 세워졌다. 수도경작은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와 도호쿠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도호쿠 북부까지 수도경작의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1] :18~19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고인돌이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7] 석기[편집] 야요이 시대의 석기는 크게 조몬 시대에서 내려온 타제석기와 당시 한반도의 민무늬토기 시대로부터 전해진 마제석기 (대륙계간석기)등으로 구분된다. 각주[편집] ↑ 가 나 구태훈 (2009), 《일본사 파노라마》 ↑ 〈일본의 역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BC 3세기경에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弥生) 문화가 서(西)일본에서 일어나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  ↑ 崎谷満『DNA・考古・言語の学際研究が示す新・日本列島史』(勉誠出版 2009年) ↑ 「前方後円墳の成立と変遷」近藤義郎 『考古学研究』15-1、1968年 ↑ 강성현 (2005).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가람기획. 156쪽. ISBN 89-8435-224-1. 김달수의 《일본 열도에 흐르는 한국 혼》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일본의 이른바 야요이(彌生)시대부터였다고 한다.  ↑ Dennis Normile (2003년 5월 30일). “Earlier Start for Japanese Rice Cultivation”. Sciencemag. 2013년 6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11일에 확인함. One theory holds that immigrants fleeing the turmoil of China's Warring States period, beginning about 450 B.C., took the technology overland to present-day Korea, then across the relatively narrow Korea Strait to Japan's Kyushu Island. An alternative theory is that seafaring traders carried the technique to lands bordering the Yellow and East China seas around 1000 B.C. or earlier.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쪽. ISBN 89-86142-81-3.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지석묘가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외부 링크[편집] 국립민속박물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야요이_시대&oldid=24470344" 분류: 야요이 시대일본의 역사일본의 고대사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বাংলাBrezhoneg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Lietuvių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3일 (일) 16: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야요이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야요이 시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야요이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야요이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일본의 역사日本史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35,000~14,000 BC 조몬 시대 14,000~300 BC 야요이 시대 300 BC~250 AD 선주민(하야토·야마토·에조) 고대 고훈 시대 250~538 야마토 왕권 야마타이국 아스카 시대 538~710 다이카 개신 642 다이호 율령 701년 나라 시대 710~794 헤이안 시대 794~1185 섭관정치 헤이시 정권 1167~1185 중세 가마쿠라 시대 1185~1336 가마쿠라 막부 1192~1333 겐무 신정 1333~1336 무로마치 시대 1336~1573 난보쿠초 시대 1336~1392 남조 북조 무로마치 막부 1336~1573 센고쿠 시대 1467~1573 호소카와 정권 1493~1549 미요시 정권 1549~1568 근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1603 오다 정권 1573~1583 도요토미 정권 1585~1603 에도 시대 1603~1868 에도 막부 1603~1868 막말 1853~1868 근현대 메이지 시대 1868~1912 메이지 유신 다이쇼 시대 1912~1926 쇼와 시대 1927~1989 군정기 1945~1952 전후 쇼와 시대 1952~1989 헤이세이 시대 1989~2019 잃어버린 10년 1991~2000 레이와 시대 2019~ 목록 일본 제국 ("전전") 1868~1947 일본국 ("전후") 1945~현재 주제별 역사 일본의 과학사 일본의 경제사 일본의 군사사 v • d • e • h 야요이 시대(일본어: 弥生時代;미생시대)는, 홋카이도,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열도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조몬시대에 후에 이어지며, 고훈시대의 전에 해당하는 약 기원전 3세기 부터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시대의 명칭이다. 조몬 시대에 한반도로부터 큐슈를 지나서 일본으로 들어온 도래인들인 야요이인들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사용하며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일본 열도 각지,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큐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을 한반도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1] :18 야요이 문화는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한반도에서 기원(起原)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들이 성립되었다.[2]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처음 한반도에서부터 큐슈 북부로 수전경작기술을 중심으로 한 생활 체계가 전해지고, 기원전 3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큐슈, 시코쿠, 혼슈를 지나 토호쿠 북부까지 전해졌다. 초기의 논은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에 있는 이타즈케 유적과 사가현 가라쓰 시의 나바타케 유적과 같이 큐슈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이다. 죠몬인들이 살던 죠몬 시대후기부터, 대규모 관개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업과 수렵을 대부분이 하였고 밭에 심는 벼의 재배(陸稻耕作)은 매우 소규모로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彌生)시대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도입되었다. 목차 1 수도경작(水稻耕作) 2 한반도의 야요이인 일본진출 3 명칭 4 농경 5 석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수도경작(水稻耕作)[편집] 수도경작(水稻耕作)은 대륙에선 볼 수 없는 한반도에서 기원한 경작의 형태로 야요이 시대에는 특히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도입되어 곡물의 비축이 가능해지면서 잉여작물의 생산과 축적이 발달하여, 이것이 부(富)에 연결되어 가지는 것과 가지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빈부의 차와 상하관계가 생겨났다. 또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한다 벼농사 기술의 도입에 의해 개간과 농업용수의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다. 대형화된 집단 사이에서는 부와 경작지, 수리권(水利権)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싸움을 통한 집단의 통합, 상하관계가 진전된 결과 각지의 조그만 나라가 생기고 3세기 중엽에 왜국의 야마타이코쿠의 여왕 히미코가 대륙에 조공을 했다는 중국사서 기록이 있으나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고사기와 외국사서등에서는 히미코를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의 무분별한 외국 조공 기록들에 의심을 가지고 있어서 히미코가 실존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며 실존자체가 확실치 않다. 덧붙여 이 무렵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에서 왜라고 불렸다. 한반도의 야요이인 일본진출[편집] 한반도 야요이인 일본진출에 대해선 (韓半島の弥生人日本進出) 야요이 시대를 나타내는 묘제(墓制)의 용어에는 지석묘(支石墓),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라고 하는 이장시설의 외부구조로 구분하는 것이 있고 목관묘(木棺墓),토광묘(土壙墓)같이 이장시설 내부에 있는 형태로 구분하는 것이 있다. 특히 야요이인들이 한반도 북부와 남부에 살고 있던 한반도 도래인(韓半島渡來人)이라는 증거는 야요이의 묘제(墓制)에서 찾아볼 수 있다.야요이인의 묘제로서 목관묘는 한반도에서 도래된 묘제로서 야요이 시대 전기말(弥生時代前期末)까지 서일본(西日本)에 널리 퍼져 특히 기나이 지방(畿内)에 주로 방형주구묘 내부의 주체부로서 목관묘가 쓰여졌다. 일본에서 카메칸보(甕棺墓)라고 불리는 옹관묘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해져서 이토시마반도(糸島半島), 시마바라반도(島原半島)의 후쿠오카시,사가현 칸자키군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지석묘(支石墓)의 경우에는 규슈의 이토시마반도, 시마바라반도에 퍼져갔다.[3] 또한 한반도 남부에서만 대량으로 발견되는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는 야요이인의 방형주구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방형주구묘를 만들었던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도래(渡來)하여 일본에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전파(傳播)되었고 방형주구묘는 일본의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슈 북부에서부터 방형주구묘가 발견되며 특히 일본 간사이 긴키 지방(近畿地方)까지 퍼져 긴키 지방에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야요이 시대 중기에는 한반도(韓半島)의 방형주구묘가 일본열도의 주부 지방, 간토지방(中部地方,関東地方)까지 도래하게 된다.[4] 명칭[편집] 야요이 시대의 야요이 토기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발견지인 도쿄 시 분쿄 구 야요이 초의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에 연유해 야요이식 토기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그 후 도시화의 진행으로 정확한 발견지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야요이식 토기를 사용한 시대라는 의미에서 〈야요이식 시대〉라고 부르고, 그 후 ‘식’을 생략하는 호칭이 일반화되었다. 야요이 시대라는 명칭의 기원이 된 야요이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현재의 토기편년 상에서 고훈시대 전기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한반도 도래인은 농경민족이었고 때문에 일본에 수전농경문화가 전파된 계기는 한반도 도래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시작된것이다. 농경[편집] 수도경작(水稻耕作)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한반도에서만 사용되었다. 기존에는 무거동과 마전리 유적을 통해 기원전 7~5세기를 최상한 연대로 보았으나, 2015년 5월 세종시에서 약 4000평 가량의 논농사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12~13세기(B.C.13~B.C.12)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세기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이 이동하였는데[5] 이들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경작(水稻耕作)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6] 또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그러한 주장이 고고학적으로도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이타즈케에서 시작한 벼농사와 한민족으로 부터 전수받은 청동기를 특징으로 한 야요이 문화는 세토 내해를 통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현재 후쿠오카와 가라쓰, 요시노가리, 그리고 세토 내해의 오카야마, 킨기 지방의 나라 분지에 전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쿠니들이 세워졌다. 수도경작은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와 도호쿠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도호쿠 북부까지 수도경작의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1] :18~19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고인돌이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7] 석기[편집] 야요이 시대의 석기는 크게 조몬 시대에서 내려온 타제석기와 당시 한반도의 민무늬토기 시대로부터 전해진 마제석기 (대륙계간석기)등으로 구분된다. 각주[편집] ↑ 가 나 구태훈 (2009), 《일본사 파노라마》 ↑ 〈일본의 역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BC 3세기경에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弥生) 문화가 서(西)일본에서 일어나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  ↑ 崎谷満『DNA・考古・言語の学際研究が示す新・日本列島史』(勉誠出版 2009年) ↑ 「前方後円墳の成立と変遷」近藤義郎 『考古学研究』15-1、1968年 ↑ 강성현 (2005).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가람기획. 156쪽. ISBN 89-8435-224-1. 김달수의 《일본 열도에 흐르는 한국 혼》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일본의 이른바 야요이(彌生)시대부터였다고 한다.  ↑ Dennis Normile (2003년 5월 30일). “Earlier Start for Japanese Rice Cultivation”. Sciencemag. 2013년 6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11일에 확인함. One theory holds that immigrants fleeing the turmoil of China's Warring States period, beginning about 450 B.C., took the technology overland to present-day Korea, then across the relatively narrow Korea Strait to Japan's Kyushu Island. An alternative theory is that seafaring traders carried the technique to lands bordering the Yellow and East China seas around 1000 B.C. or earlier.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쪽. ISBN 89-86142-81-3.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지석묘가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외부 링크[편집] 국립민속박물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야요이_시대&oldid=24470344" 분류: 야요이 시대일본의 역사일본의 고대사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বাংলাBrezhoneg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Lietuvių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3일 (일) 16: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야요이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야요이 시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야요이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야요이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일본의 역사日本史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35,000~14,000 BC 조몬 시대 14,000~300 BC 야요이 시대 300 BC~250 AD 선주민(하야토·야마토·에조) 고대 고훈 시대 250~538 야마토 왕권 야마타이국 아스카 시대 538~710 다이카 개신 642 다이호 율령 701년 나라 시대 710~794 헤이안 시대 794~1185 섭관정치 헤이시 정권 1167~1185 중세 가마쿠라 시대 1185~1336 가마쿠라 막부 1192~1333 겐무 신정 1333~1336 무로마치 시대 1336~1573 난보쿠초 시대 1336~1392 남조 북조 무로마치 막부 1336~1573 센고쿠 시대 1467~1573 호소카와 정권 1493~1549 미요시 정권 1549~1568 근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1603 오다 정권 1573~1583 도요토미 정권 1585~1603 에도 시대 1603~1868 에도 막부 1603~1868 막말 1853~1868 근현대 메이지 시대 1868~1912 메이지 유신 다이쇼 시대 1912~1926 쇼와 시대 1927~1989 군정기 1945~1952 전후 쇼와 시대 1952~1989 헤이세이 시대 1989~2019 잃어버린 10년 1991~2000 레이와 시대 2019~ 목록 일본 제국 ("전전") 1868~1947 일본국 ("전후") 1945~현재 주제별 역사 일본의 과학사 일본의 경제사 일본의 군사사 v • d • e • h 야요이 시대(일본어: 弥生時代;미생시대)는, 홋카이도,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열도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조몬시대에 후에 이어지며, 고훈시대의 전에 해당하는 약 기원전 3세기 부터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시대의 명칭이다. 조몬 시대에 한반도로부터 큐슈를 지나서 일본으로 들어온 도래인들인 야요이인들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사용하며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일본 열도 각지,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큐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을 한반도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1] :18 야요이 문화는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한반도에서 기원(起原)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들이 성립되었다.[2]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처음 한반도에서부터 큐슈 북부로 수전경작기술을 중심으로 한 생활 체계가 전해지고, 기원전 3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큐슈, 시코쿠, 혼슈를 지나 토호쿠 북부까지 전해졌다. 초기의 논은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에 있는 이타즈케 유적과 사가현 가라쓰 시의 나바타케 유적과 같이 큐슈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이다. 죠몬인들이 살던 죠몬 시대후기부터, 대규모 관개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업과 수렵을 대부분이 하였고 밭에 심는 벼의 재배(陸稻耕作)은 매우 소규모로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彌生)시대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도입되었다. 목차 1 수도경작(水稻耕作) 2 한반도의 야요이인 일본진출 3 명칭 4 농경 5 석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수도경작(水稻耕作)[편집] 수도경작(水稻耕作)은 대륙에선 볼 수 없는 한반도에서 기원한 경작의 형태로 야요이 시대에는 특히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도입되어 곡물의 비축이 가능해지면서 잉여작물의 생산과 축적이 발달하여, 이것이 부(富)에 연결되어 가지는 것과 가지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빈부의 차와 상하관계가 생겨났다. 또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한다 벼농사 기술의 도입에 의해 개간과 농업용수의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다. 대형화된 집단 사이에서는 부와 경작지, 수리권(水利権)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싸움을 통한 집단의 통합, 상하관계가 진전된 결과 각지의 조그만 나라가 생기고 3세기 중엽에 왜국의 야마타이코쿠의 여왕 히미코가 대륙에 조공을 했다는 중국사서 기록이 있으나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고사기와 외국사서등에서는 히미코를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의 무분별한 외국 조공 기록들에 의심을 가지고 있어서 히미코가 실존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며 실존자체가 확실치 않다. 덧붙여 이 무렵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에서 왜라고 불렸다. 한반도의 야요이인 일본진출[편집] 한반도 야요이인 일본진출에 대해선 (韓半島の弥生人日本進出) 야요이 시대를 나타내는 묘제(墓制)의 용어에는 지석묘(支石墓),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라고 하는 이장시설의 외부구조로 구분하는 것이 있고 목관묘(木棺墓),토광묘(土壙墓)같이 이장시설 내부에 있는 형태로 구분하는 것이 있다. 특히 야요이인들이 한반도 북부와 남부에 살고 있던 한반도 도래인(韓半島渡來人)이라는 증거는 야요이의 묘제(墓制)에서 찾아볼 수 있다.야요이인의 묘제로서 목관묘는 한반도에서 도래된 묘제로서 야요이 시대 전기말(弥生時代前期末)까지 서일본(西日本)에 널리 퍼져 특히 기나이 지방(畿内)에 주로 방형주구묘 내부의 주체부로서 목관묘가 쓰여졌다. 일본에서 카메칸보(甕棺墓)라고 불리는 옹관묘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해져서 이토시마반도(糸島半島), 시마바라반도(島原半島)의 후쿠오카시,사가현 칸자키군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지석묘(支石墓)의 경우에는 규슈의 이토시마반도, 시마바라반도에 퍼져갔다.[3] 또한 한반도 남부에서만 대량으로 발견되는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는 야요이인의 방형주구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방형주구묘를 만들었던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도래(渡來)하여 일본에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전파(傳播)되었고 방형주구묘는 일본의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슈 북부에서부터 방형주구묘가 발견되며 특히 일본 간사이 긴키 지방(近畿地方)까지 퍼져 긴키 지방에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야요이 시대 중기에는 한반도(韓半島)의 방형주구묘가 일본열도의 주부 지방, 간토지방(中部地方,関東地方)까지 도래하게 된다.[4] 명칭[편집] 야요이 시대의 야요이 토기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발견지인 도쿄 시 분쿄 구 야요이 초의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에 연유해 야요이식 토기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그 후 도시화의 진행으로 정확한 발견지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야요이식 토기를 사용한 시대라는 의미에서 〈야요이식 시대〉라고 부르고, 그 후 ‘식’을 생략하는 호칭이 일반화되었다. 야요이 시대라는 명칭의 기원이 된 야요이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현재의 토기편년 상에서 고훈시대 전기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한반도 도래인은 농경민족이었고 때문에 일본에 수전농경문화가 전파된 계기는 한반도 도래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시작된것이다. 농경[편집] 수도경작(水稻耕作)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한반도에서만 사용되었다. 기존에는 무거동과 마전리 유적을 통해 기원전 7~5세기를 최상한 연대로 보았으나, 2015년 5월 세종시에서 약 4000평 가량의 논농사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12~13세기(B.C.13~B.C.12)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세기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이 이동하였는데[5] 이들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경작(水稻耕作)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6] 또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그러한 주장이 고고학적으로도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이타즈케에서 시작한 벼농사와 한민족으로 부터 전수받은 청동기를 특징으로 한 야요이 문화는 세토 내해를 통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현재 후쿠오카와 가라쓰, 요시노가리, 그리고 세토 내해의 오카야마, 킨기 지방의 나라 분지에 전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쿠니들이 세워졌다. 수도경작은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와 도호쿠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도호쿠 북부까지 수도경작의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1] :18~19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고인돌이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7] 석기[편집] 야요이 시대의 석기는 크게 조몬 시대에서 내려온 타제석기와 당시 한반도의 민무늬토기 시대로부터 전해진 마제석기 (대륙계간석기)등으로 구분된다. 각주[편집] ↑ 가 나 구태훈 (2009), 《일본사 파노라마》 ↑ 〈일본의 역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BC 3세기경에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弥生) 문화가 서(西)일본에서 일어나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  ↑ 崎谷満『DNA・考古・言語の学際研究が示す新・日本列島史』(勉誠出版 2009年) ↑ 「前方後円墳の成立と変遷」近藤義郎 『考古学研究』15-1、1968年 ↑ 강성현 (2005).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가람기획. 156쪽. ISBN 89-8435-224-1. 김달수의 《일본 열도에 흐르는 한국 혼》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일본의 이른바 야요이(彌生)시대부터였다고 한다.  ↑ Dennis Normile (2003년 5월 30일). “Earlier Start for Japanese Rice Cultivation”. Sciencemag. 2013년 6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11일에 확인함. One theory holds that immigrants fleeing the turmoil of China's Warring States period, beginning about 450 B.C., took the technology overland to present-day Korea, then across the relatively narrow Korea Strait to Japan's Kyushu Island. An alternative theory is that seafaring traders carried the technique to lands bordering the Yellow and East China seas around 1000 B.C. or earlier.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쪽. ISBN 89-86142-81-3.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지석묘가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외부 링크[편집] 국립민속박물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야요이_시대&oldid=24470344" 분류: 야요이 시대일본의 역사일본의 고대사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বাংলাBrezhoneg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Lietuvių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3일 (일) 16: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숙의 박씨 (순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숙의 박씨 (순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숙의 박씨 지위 숙의 이름 별호 궁인 박씨 (宮人 朴氏)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조선 사망일 1854년 음력 6월 30일 사망지 조선 매장지 숙의박씨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왕조 조선 배우자 조선 순조 자녀 영온옹주 숙의 박씨(淑儀 朴氏, ? ~ 1854년 음력 6월 30일)는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의 후궁이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3 숙의 박씨가 등장한 작품 4 출처 5 외부 링크 생애[편집] 본관은 밀양이다[1]. 원래 궁인 신분으로, 순조의 승은을 입은 후 1817년(순조 17년) 10월 11일 새벽 딸(영온옹주)을 낳아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2]. 그러나 유일한 소생인 영온옹주는 태어난 후 병을 자주 앓고 말을 잘 하지 못하였고[3], 1829년(순조 29년) 음력 4월 8일 1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4]. 한편 박씨는 1854년(철종 5년) 음력 6월 30일에 사망하였다[5]. 사후 효창원(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에 장지를 마련하였다. 이곳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인근인데, 일제 강점기 말엽인 1945년 3월에 강제 이장되어 현재 박씨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그녀의 묘는 서삼릉 전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될 때 함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1]. 가족 관계[편집] 남편 : 순조 (純祖, 1790년~1834년, 재위:1800년~1834년) 딸 : 영온옹주 (永溫翁主, 1817년~1829년) 숙의 박씨가 등장한 작품[편집] 《구르미 그린 달빛》(2016년, KBS, 배역:전미선) 출처[편집] ↑ 가 나 숙의박씨묘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조선왕조실록》순조 20권, 17년(1817 정축 / 청 가경 22년) 10월 11일(신사) 1번째기사 ↑ 《조선왕조실록》순조 31권, 30년(1830 경인 / 청 도광 10년) 7월 15일(경오) 3번째기사 ↑ 《조선왕조실록》순조 30권, 29년(1829 기축 / 청 도광 9년) 4월 8일(신미) 1번째기사 ↑ 《승정원일기》 123책 (탈초본 2555책) 철종 5년 6월 30일 정유 22/30 기사 외부 링크[편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vdeh 조선의 후비와 대한제국의 후비4대조추존 목조 효공왕후 이씨 추존 익조 정숙왕후 최씨 부인 손씨 추존 도조 경순왕후 박씨 후궁 조씨 추존 환조 의혜왕후 최씨 부인 이씨 정빈 김씨 조선후비태조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찬덕 주씨 정종 정안왕후 김씨 성빈 지씨 숙의 지씨 숙의 기씨 숙의 문씨 숙의 이씨 숙의 윤씨 초궁장 태종 원경왕후 민씨 효빈 김씨 신빈 신씨 선빈 안씨 명빈 김씨 의빈 권씨 소빈 노씨 정빈 고씨 숙의 최씨 숙공궁주 김씨 의정궁주 조씨 혜순궁주 이씨 신순궁주 이씨 덕숙옹주 이씨 혜선옹주 홍씨 순혜옹주 장씨 서경옹주 세종 소헌왕후 심씨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귀인 박씨 귀인 최씨 숙의 조씨 소용 홍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 사기 차씨 문종 현덕왕후 권씨 폐 휘빈 김씨 폐 순빈 봉씨 숙빈 홍씨 소의 류씨 숙의 문씨 소용 권씨 소용 정씨 소용 윤씨 상궁 장씨 사칙 양씨 단종 정순왕후 송씨 숙의 김씨 숙의 권씨 세조 정희왕후 윤씨 근빈 박씨 폐 소용 박씨 추존 덕종 소혜왕후 한씨 귀인 권씨 귀인 윤씨 숙의 신씨 예종 장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 공빈 최씨 상궁 기씨 후궁 이씨 성종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제헌왕후) 정현왕후 윤씨 명빈 김씨 귀인 정씨 귀인 엄씨 귀인 권씨 귀인 남씨 소의 이씨 숙의 하씨 숙의 홍씨 숙용 심씨 숙용 권씨 숙원 윤씨 연산군 거창군부인 신씨 숙의 곽씨 숙의 이씨 숙의 윤씨 숙의 권씨 숙의 민씨 숙용 장씨 숙용 전씨 숙용 조씨 숙원 최씨 숙원 김씨 숙화 김씨 궁인 안씨 내인 정금 중종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귀인 한씨 숙의 나씨 숙의 김씨 숙의 홍씨 숙의 이씨 숙원 이씨 숙원 권씨 인종 인성왕후 박씨 숙빈 윤씨 혜빈 정씨 귀인 정씨 양제 윤씨 명종 인순왕후 심씨 경빈 이씨 순빈 정씨 소의 신씨 숙의 한씨 숙의 신씨 숙의 정씨 숙의 정씨 선조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공빈 김씨(공성왕후) 인빈 김씨 순빈 김씨 정빈 민씨 정빈 홍씨 온빈 한씨 귀인 정씨 숙의 정씨 소원 윤씨 광해군 문성군부인 류씨 소의 윤씨 소의 홍씨 숙의 허씨 숙의 원씨 숙의 권씨 소용 정씨 소용 임씨 소원 신씨 상궁 이씨 상궁 최씨 궁인 조씨 궁인 변씨 추존 원종 인헌왕후 구씨 후궁 김씨 인조 인렬왕후 한씨 장렬왕후 조씨 폐 귀인 조씨 귀인 장씨 숙의 나씨 숙원 장씨 상궁 이씨 효종 인선왕후 장씨 안빈 이씨 숙의 김씨 숙원 정씨 현종 명성왕후 김씨 숙종 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희빈 장씨 화경숙빈 최씨 명빈 박씨 영빈 김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 경종 단의왕후 심씨 선의왕후 어씨 영조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 귀인 조씨 폐 숙의 문씨 추존 진종 효순왕후 조씨 추존 장조 헌경왕후 홍씨 숙빈 임씨 경빈 박씨 양제 가선 정조 효의왕후 김씨 의빈 성씨 수빈 박씨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순조 순원왕후 김씨 숙의 박씨 추존 문조 신정왕후 조씨 헌종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 경빈 김씨 정빈 윤씨 숙의 김씨 철종 철인왕후 김씨 귀인 박씨 귀인 조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숙의 김씨 궁인 이씨 궁인 박씨 대한제국후비고종태황제 명성태황후 민씨 순헌황귀비 엄씨 영보당 이씨 귀인 장씨 광화당 이씨 보현당 정씨 내안당 이씨 복녕당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 궁인 서씨 궁인 김씨 궁인 장씨 순종효황제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이 글은 조선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숙의_박씨_(순조)&oldid=19421525" 분류: 생몰년 미상밀양 박씨조선의 후궁조선 순조숨은 분류: 조선에 관한 토막글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8월 27일 (일) 13: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중국국가고속공로망 징시 고속공로 자오신댠 나들목 부근(2004년 7월 촬영)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는 중국국가고속공로망(중국어 간체자: 中国国家高速公路网, 정체자: 中國國家高速公路網, 병음: Zhōngguó Guójiā Gāosùgōnglù wǎng 중궈 궈자 가오쑤궁루 왕[*])으로 부른다. 현재 중국은 세계유수의 고속도로망이 정비된 나라 중 하나이다. 목차 1 개요 2 역사 3 건설비 4 고속도로의 호칭 4.1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 4.2 고속도로에 관한 법규 4.3 고속도로 표지 4.4 나들목의 번호 붙임 5 고속도로 요금과 차입금 5.1 과금방법 6 고속도로망 6.1 5종 7횡 6.2 7918망 7 각주 8 외부 링크 개요[편집] 중국의 고속도로의 총연장은 2012년 말 97,355 km였는데, 그 해에만 12,409 km가 건설되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에 해당한다. 최근[모호한 표현][언제?] 한 해 평균 약 6,000 km 이상의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있다. 역사[편집] 고속도로가 존재하지 않은 중국에서 최초에 개통한 것은 1988년에 상하이 시에서 개통한 호가 고속공로이다. 그 후 베이징과 허베이성의 스자좡을 연결하는 징시 고속공로가 개통했지만 이후 1993년까지 건설된 고속도로는 거의 없었다. 1992년 이후 중국에서는 2010년까지 35,000 km의 중국 국가고속공로망을 구축하는 계획(5종 7횡)이 입안 및 실시되어 5개의 남북방향의 도로와 7개의 동서의 도로로부터 이루어지는 12의 고규격간선도로의 구축이 목표로 여겨졌다. 계획은 앞당겨져 2009년 말에는 이미 65,000 km의 고속도로를 포함하는 382만 km의 도로가 완성되어 있었다.[1] 2005년 1월 13일 교통부 부장이었던 장춘샨(张春贤)은 5종 7횡 구상의 다음 구상으로 이후 30년 간으로 인구 20만 명 이상의 모든 지방중핵도시를 서로 연락하는 85,000 km의 고속도로 네트워크(7918구상)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베이징에서 방사상에 자라는 7개의 노선과 국내를 남북에 묶는 9노선, 동서에 잇는 18노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구상으로 전장 가운데의 68,000 km은 간선도로 17,000 km이 5개의 지방환상도로이다.(단,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지배하에 없는 타이완의 계획선도 이론상으로만 포함된다) 또 2개의 평행 루트와 30개 이상의 상호접속노선이 포함된다. 이 구상에서는 32,000 km의 고속도로가 화중 및 서부지방에서 구축되게 된다. 1989년 1월 1일의 단계에서 147 km만의 정비에 머무르고 있었던 중국의 고속도로이지만 2009년 12월 31일에는 총연장 65,000 km의 고속도로망이 정비되어 2007년에는 8,300 km가 건설되고 있다. 고속도로망은 2020년까지 100,000 km, 미국을 넘어 세계 제1위의 규모에 확대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건설비[편집] 고속공로 네트워크 구축의 총 예산은 2조 위안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의 연간 투자액은 약 1400억 위안에서 1,500억 위안, 2010년부터 2020년까지의 연간 투자액은 약 1,000억 위안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속도로의 호칭[편집] 징시 고속공로의 표지판. 구표기는 Jingshi Freeway로 되어 있었다.(2004년 촬영) 징선 고속공로의 출구안내표지(2004년 촬영) 중국에서는 예전에 "모터웨이(Motorway)"도 "하이웨이(Highway)"도 맞춰서 "프리웨이(Freeway)"라고 칭했다. "프리"는 교통이 자유롭게 흐르고 있는 즉 교차지점은 각 차선이 분리되어 고속도로상의 교통은 신호기나 일시정지 표식과 같은 교통 제어 시설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통행요금을 징수하는 고속도로인 것에도 관련되지 않고 "프리"를 "무료"로 오해했기 때문 1990년대에 "익스프레스웨이(Expressway)"의 명칭으로 일치되었다. 현재 사용되는 "하이웨이"는 고속도로를 의미하지 않는 단어로서 사용되고 있다.(중화인민공화국의 국도를 참조) 또 중국에서는 쾌속공로(快速公路)와 고속공로(高速公路)라고 하는 구분도 존재한다. 양자는 거의 동일하지만 쾌속공로는 주로 도시부에 정비된 고규격도로이다. 본문중에서는 양자를 고속도로로서 다루는 것으로 한다.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편집] 중화인민공화국 도로교통안전법은 2004년 5월 1일에 전국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를 110 km/h에서 120 km/h로 변경했다. 그러나 지방의 고속도로에서는 제한속도변경에 시간이 걸리고 있는 개소도 있어 일부에서는 종래의 110 km/h가 되고 있다. 최저속도제한은 70 km/h이지만 추월 차선의 최저속도 제한은 100 km/h로부터 110 km/h와 달리 정해져 있다. 최저속도위반 및 최고속도위반은 교통법규위반으로 여겨진다. 고속도로에 관한 법규[편집] 1990년대 중반까지 면허 취득 1년 미만인 운전자는 고속도로의 운전이 금지되고 있었지만 2004년 5월 1일 현재에서는 허가되고 있다. 오른쪽에서의 추월, 속도위반, 비상통행대(갓길)의 불법주행 등의 위반자는 교통법규위반으로 여겨지고 특히 오른쪽에서의 추월은 엄격하게 경고된다. 고속도로 표지[편집] 중국의 고속도로에서는 간체자 중국어 및 영어에 의한 도로 표지가 정비되고 있다.(징시 고속공로의 일부는 제외) 중국의 고속도로의 표지는 한국, 일본, 스위스, 미국의 고속도로와 같이 녹지에 흰문자를 사용해서 표기된다. 나들목의 안내표지는 각각 출구의 3,000 m, 2,000 m, 1,000 m와 5,00 m 앞 출구 직전 출구자체에 있어 나들목의 앞에서부터 표시되고 있다. 각 나들목에는 다음 나들목까지의 거리의 안내 표지도 있다. 휴게소 및 간이 휴게소는 교통량이 많은 고속도로에서는 고밀도에 설치되고 있으며, 특히 주유소의 밀도는 높다. 표지는 나들목, 요금소, 휴게소 및 주차구역, 분기점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와 같이 "차간거리확인"의 표지판도 설치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법률에서는 적어도 100m의 차간거를 보유하기 위한 것인다. 속도감시구간에 있어서 단속개소에는 많은 경우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징선 고속공로의 베이징 구간에는 카메라 위에도 경고 표지가 설치되어 있음) 이 속도단속장치의 더미도 존재하고 있다. 또 운전자에게 감속을 촉구하는 표식, 비탈진 길에 관한 경고, 비상통행대(갓길 혹은 노견)의 통행금지, 혹은 노면의 이상에 관한 표지판이 존재한다. 또 추월 차로를 나타내는 표지도 설치되고 있다. 영어표기는 대부분은 문제 없지만 때때로 잘못된 표기도 보인다. 고속도로에서는 디지털 표시기의 정비가 진행되어, 속도 초과에 대하여 주의 환기, 도로공사 상황, 교통정체 정보, 날씨 정보, 우회로 등을 표시한다. 나들목의 번호 붙임[편집] 중국 고속도로의 나들목에는 번호가 첨부되어 있으며, 기점을 1번으로 한 통과 번호가 보통이다. 그러나 장시 고속공로에서는 허베이 성에 0번 나들목이 존재한다. 나들목의 일부에는 보조 나들목(예:No. 14A, 14B)을 병설하고 있다. 고속도로 요금과 차입금[편집] 징스 고속공로의 도우디안 나들목의 요금표(2004년 촬영) 고속도로는 거의 모두 유료이다. 요금은 1 km 당 약 0.5중국원에서 최저요금(예를 들면 5위안)은 거리에 관계 없이 적용된다. 고속도로에 의한 표준적인 금액보다 높을 경우(진찌 고속공로는 1 km당 0.66위안)이나 저렴한 경우(징시 고속공로는 1 km당 0.33위안)도 존재한다. 통행요금에 관련되지 않고 고속도로는 고규격으로 건설되어 또 정체의 발생과도 관계가 없다. 고속도로 계획은 교통부에 의해 계획되고 건설된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성 정부에 의한 직접 투자를 채용하지 않고 은행 혹은 예정되는 통행요금수입을 담보에 증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 영리의 기업(관민 일체가 된 기업체)에 의한 건설 및 운영된다. 이방식을 채용할 이유로서는 지방 정부의 세입이 한정적이어서 자금조달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고속도로 건설은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의 정책이 불일치가 된 희유한 예 중 하나이다. 1990년대 말에 휘발유세에 의해 공공의 간선도로의 건설 자금을 조달하는 입법화가 요구되었지만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의해 부결되었다. 과금방법[편집] 대부분의 고속도로는 카드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다. 고속도로 (혹은 고속도로의 유료구간)에의 입구에서는 입선 카드가 운전자에게 넘겨줘진다. 지불되는 요금은 고속도로에서 나갈 때에 운전수가 출구요금소에 입선 카드를 반환할 때에 주행거리에 의해 결정된다. 징퉁 고속공로 등의 일부의 고속도로에서는 정액제를 채용해 증가하는 교통 유량에 대응하고 있지만 수입면에서 불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일부 고속도로는 전자 요금 징수 시스템(ETC)을 채용하고 있다. 현재 통행요금의 지불에는 현금만이 인정을 받고 있다. 고속도로망[편집] 5종 7횡[편집] 1992년에 입안된 중국 고속공로 계획에서는 남북방향에 5개와 동서방향에 7개의 계12개의 고속도로(5종 7횡)을 만드는 계획이었다. 번호의 머리에는 "국도"(Guodao)의 머리 문자인 "G"의 문자를 붙일 수 있다. 세로(남북방향)에는 G010, G020, G030, G040, G050의 번호가 옆(동서방향)에는 G015, G025, G035, G045, G055, G065, G075의 번호가 배정되었고, 일반국도에는 G101에서 G112, G20에서 G228, G301에서 G330까지의 번호가 배정되었다. 5종 7횡의 고속도로망은 2005년에 발표된 "7918망"에 의해 일부에 재편되었다. 5종 퉁싼 고속공로(010) : 퉁장(헤이룽장 성) - 싼야(하이난 성) 징푸 고속공로(020) : 베이징 - 푸저우 징주 고속공로(030) : 베이징 - 주하이 얼허 고속공로(040) : 얼롄하오터 - 허커우(윈난 성) 위잔 고속공로(050) : 충칭 - 잔장(광둥 성) 7횡 쑤만 고속공로(015) : 쑤이펀 - 만저우리 단라 고속공로(025) : 단둥 - 라싸 칭인 고속공로(035) : 칭다오 - 인촨 롄훠 고속공로(045) : 롄윈강 - 훠얼궈쓰 후룽 고속공로(055) : 상하이 - 청두 후루이 고속공로(065) : 상하이 - 루이리 헝쿤 고속공로(075) : 헝양 - 쿤밍 7918망[편집] 2005년 1월 13일, 교통부가 공포한 "국가고속공로망규화"로 채용된 방사상 고속도로와 종횡의 고속도로망을 조합시킨 정비 계획이며, 수도에서 방사선 7개, 9개의 남북종관선, 18개의 동서횡단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7918망"이라고 칭해졌다. 번호의 맨 앞자리에는 "국도" (Guodao)의 머리 문자인 "G"라는 문자로 되어 있다. 방사선에는 1에서 9까지(실제로는 7까지)의 번호가, 남북방향에는 11에서 89까지의 홀수번호로, 동서방향에는 10에서 90까지의 짝수번호로 되어있다. 91에서 99까지의 숫자는 각 지방(분지, 도시권, 섬 등)을 순환하여 연결되는 도로의 숫자이다. 간선도로에 부속되는 연락선에는 간선 번호의 뒤에 1이 있고 또 1로부터 시작되는 숫자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G15 선하이 고속공로의 연락선으로 취급되는 르자오 - 란카오간 고속도로에는 G1511이라는 번호로 되어 있다. 이후의 연락선은 G1512, G1513으로 되어 있다.) 도시순환고속도로에는 접속하는 간선도로의 번호의 뒤에 0이 있고 또 1로부터 시작되는 숫자로 되어 있다.(예를 들면 G15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 G1501, G1502 등) 또 간선도로에 병행되는 노선에는 방위(방각)의 영어 머리 문자인 N·E·W·S의 문자를 붙일 수 있다.(예를 들면 G15에 병행되는 창수 - 타이저우간 고속도로에는 G15W의 번호로 되어 있다.) 수도방사선 7개 노선 G1 (징하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G2 (징후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상하이 시 G3 (징타이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타이완 성 신베이 시 G4 (징강아오 고속공로) 베이징 시 ~ 광둥 성 선전 시 G4W (강아오 고속공로) 광둥 성 광저우 시 ~ 마카오 G5 (징쿤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윈난 성 쿤밍 시 G6 (징짱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티베트 자치구 라싸 시 G7 (징신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 시 남북종관선 9개 노선 G11 (허다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허강 시 ~ 랴오닝 성 다롄 시 G1111 (허하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허강 시 ~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G1112 (지솽 고속공로) 지린 성 지안 시 ~ 지린 성 솽랴오 시 G1113 (단푸 고속공로) 랴오닝 성 단둥 시 ~ 랴오닝 성 푸신 시 G15 (선하이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15W (창타이 고속공로) 장쑤 성 창수 시 ~ 저장 성 타이저우 시 G1511 (르란 고속공로) 산둥 성 르자오 시 ~ 허난 성 카이펑 시 G1512 (용진 고속공로) 저장 성 닝보 시 ~ 저장 성 진화 시 G1513 (원리 고속공로) 저장 성 원저우 시 ~ 저장 성 리수이 시 G1514 (닝상 고속공로) 푸젠 성 닝더 시 ~ 장시 성 상라오 시 G25 (창선 고속공로) 지린 성 창춘 시 ~ 광둥 성 선전 시 G2511 (신루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내몽골 자치구 퉁랴오 시 G2512 (푸진 고속공로) 랴오닝 성 푸신 시 ~ 랴오닝 성 진저우 시 G2513 (화이쉬 고속공로) 장쑤 성 화이안 시 ~ 장쑤 성 쉬저우 시 G35 (지광 고속공로) 산둥 성 지난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45 (다광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다칭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4511 (룽허 고속공로) 장시 성 간저우 시 ~ 광둥 성 허위안 시 G55 (얼광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얼롄하오터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5511 (지아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 시 ~ 내몽골 자치구 우란차부 시 G5512 (진신 고속공로) 산시 성 진청 시 ~ 허난 성 신샹 시 G5513 (창장 고속공로) 후난 성 창사 시 ~ 후난 성 장자제 시 G65 (바오마오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 시 ~ 광둥 성 마오밍 시 G75 (란하이 고속공로) 간쑤 성 란저우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7511 (친둥 고속공로) 광시 좡족 자치구 친저우 시 ~ 광시 좡족 자치구 둥싱 시 G85 (유쿤 고속공로) 충칭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511 (쿤모 고속공로) 윈난 성 쿤밍 시 ~ 윈난 성 시솽반나 다이족 자치주 동서종관선 18개 노선 G10 (쑤이만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쑤이펀허 시 ~ 내몽골 자치구 만저우리 시 G1011 (하이퉁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 헤이룽장 성 자무쓰 시 G12 (훈우 고속공로) 지린 성 훈춘 시 ~ 내몽골 자치구 우란하오터 시 G1211 (지헤 고속공로) 지린 성 지린 시 ~ 헤이룽장 성 헤이허 시 G1212 (선지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지린 성 지린 시 G16 (단시 고속공로) 지린 성 단둥 시 ~ 내몽골 자치구 시린하오터 시 G18 (룽우 고속공로) 산둥 성 룽청 시 ~ 내몽골 자치구 우하이 시 G1811 (황스 고속공로) 허베이 성 창저우 시 ~ 허베이 성 스자좡 시 G20 (칭인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 시 G2011 (칭신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산둥 성 칭다오 시 G2012 (딩우 고속공로) 산시 성) 위린 시 ~ 간쑤 성 우웨이 시 G22 (칭란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간쑤 성 란저우 시 G30 (롄훠 고속공로) 장쑤 성 롄윈강 시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011 (류거 고속공로) 간쑤 성 주취안 시 ~ 칭하이 성 하이시 몽골족 티베트족 자치주 G3012 (투허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 지구 ~ 신장 위구르 자치구 허톈 지구 G3013 (카이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카스 지구 ~ 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선 G3014 (쿠이아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015 (쿠이타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청 지구 G3016 (칭이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6 (닝뤄 고속공로) 장쑤 성 난징 시 ~ 허난 성 뤄양 시 G40 (후산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산시 성 시안 시 G4011 (양리 고속공로) 장쑤 성 양저우 시 ~ 장쑤 성 창저우 시 G42 (후룽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쓰촨 성 청두 시 G4211 (닝우 고속공로) 장쑤 성 난징 시 ~ 안후이 성 우후 시 G4212 (허안 고속공로) 안후이 성 허페이 시 ~ 안후이 성 안칭 시 G50 (후유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충칭 시 G5011 (우허 고속공로) 안후이 성 우후 시 ~ 안후이 성 허페이 시 G56 (항루이 고속공로) 저장 성 항저우 시 ~ 윈난 성 루이리 시 G5611 (다리 고속공로) 윈난 성 다리 시 ~ 윈난 성 리장 시 G60 (후쿤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윈난 성 쿤밍 시 G70 (푸인 고속공로) 푸젠 성 푸저우 시 ~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 시 G7011 (스톈 고속공로) 후베이 성 스옌 시 ~ 간쑤 성 톈수이 시 G72 (취안난 고속공로) 푸젠 성 취안저우 시 ~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 시 G7211 (난유 고속공로)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 시 ~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선 G76 (샤룽 고속공로) 푸젠 성 샤먼 시 ~ 쓰촨 성 청두 시 G78 (산쿤 고속공로) 광둥 성 산터우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0 (광쿤 고속공로) 광둥 성 광저우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011 (카이허 고속공로) 윈난 성 훙허 하니족 이족 자치주 ~ 윈난 성 훙허 하니족 이족 자치주 지역순환선 6개 노선 G91 (랴오중 순환 고속공로) 랴오닝 성 번시 시 ~ 랴오닝 성 푸순 시 G92 (항저우 만 순환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저장 성 닝보 시 G9211 (용저우 고속공로) 저장 성 닝보 시 ~ 저장 성 저우산 시 G93 (청유 순환 고속공로) 쓰촨 성 청두 시 ~ 충칭 시 ~ 쓰촨 성 청두 시 G94 (주강 삼각주 순환 고속공로) 광둥 성 선전 시 ~ 홍콩 ~ 마카오 ~ 광둥 성 선전 시 G9411 (관포 고속공로) 광둥 성 둥관 시 ~ 광둥 성 포산 시 G98 (하이난 순환 고속공로)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 하이난 성 싼야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99 (타이완 순환 고속공로) 타이완 성 타이베이 시 ~ 타이완 성 가오슝 시 ~ 타이완 성 타이베이 시 (타이완은 중국 대륙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므로 서류상으로만 존재) 각주[편집] ↑ Xubo, Liu. Highway development. Archived 2007년 8월 19일 - 웨이백 머신 Ministry of Communications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5 November 2005.MacLeod, Calum. China's highways go the distance. USA TODAY, 29 January 2006.Li, Lin. Expressways being built at frenetic pace. SINA English, 4 April 2006. 외부 링크[편집] (Very Big!!) Map of the 2020 "7918" expressway network from the chinese Ministry of Transport China Motor Way network maps (in English and more compact) vdeh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수도방사선주선 G1 G2 G3 G4 G5 G6 G7 병행선 G4W 남북종관선주선 G11 G15 G25 G35 G45 G55 G65 G75 G85 병행선 G15W 연락선 G1111 G1112 G1113 G1511 G1512 G1513 G1514 G2511 G2512 G2513 G4511 G5511 G5512 G5513 G7511 G8511 동서종관선주선 G10 G12 G16 G18 G20 G22 G30 G36 G40 G42 G50 G56 G60 G70 G72 G76 G78 G80 연락선 G1011 G1211 G1212 G1811 G2011 G2012 G3011 G3012 G3013 G3014 G3015 G3016 G4011 G4211 G4212 G5011 G5611 G7011 G7211 G8011 지역순환선주선 G91 G92 G93 G94 G98 G99(¹) 연락선 G9211 G9411 도시순환선순환선 G0401 G1001 G1101 G1501(푸저우) G1501(광저우) G1501(하이커우) G1501(닝보) G1501(칭다오) G1501(상하이) G1501(선양) G1501(샤먼) G2001(지난) G2001(스자좡) G2001(타이위안) G2001(인촨) G2501(창춘) G2501(항저우) G2501(난징) G2501(선전) G2501(톈진) G3001(란저우) G3001(우루무치) G3001(시안) G3001(정저우) G4001 G4201 G4201 G4501 G5001 G5601 G6001(구이양) G6001(후허하오터) G6001(라싸) G6001(난창) G6001(시닝) G7201 (1)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타이완 지역에 정하고 있는 명목상의 도로명칭. 타이완의 일반 국도를 참조. vdeh아시아의 고속도로독립국 네팔 대한민국 동티모르[* 1] 라오스 러시아[* 2] 레바논 말레이시아 몰디브 몽골 미얀마 바레인 방글라데시 베트남 부탄 브루나이 사우디아라비아 스리랑카 시리아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아르메니아[* 3] 아제르바이잔[* 2] 아프가니스탄 예멘 오만 요르단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이집트[* 4] 인도 인도네시아[* 5] 일본[*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지아[* 2]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카자흐스탄[* 2]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키르기스스탄 키프로스[* 3] 타지키스탄 태국 터키[* 2]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필리핀 속령 마카오[* 6] 차고스 제도 [* 7] 티베트[* 8] 동튀르케스탄[* 8] 홍콩[* 6] 미승인 국가 아르차흐 공화국[* 3] 남오세티야[* 2] 북키프로스 압하지야[* 2] ↑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국가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일부 영토가 유럽에도 속한다. ↑ 가 나 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역사적·문화적 이유로 종종 유럽으로 분류한다. ↑ 일부 영토가 아프리카에도 속한다. ↑ 가 나 일부 영토가 오세아니아에도 속한다. ↑ 가 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이다. ↑ 영국령 인도양 지역의 일부이다. ↑ 가 나 나라 목록 206개 국가에 포함되지 않는 나라이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중화인민공화국의_고속도로&oldid=22408464" 분류: 나라별 고속도로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숨은 분류: 중국어 정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모호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지적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DeutschEnglishEuskaraSuomiFrançaisעברית日本語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ไทย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5일 (토) 19: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중국국가고속공로망 징시 고속공로 자오신댠 나들목 부근(2004년 7월 촬영)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는 중국국가고속공로망(중국어 간체자: 中国国家高速公路网, 정체자: 中國國家高速公路網, 병음: Zhōngguó Guójiā Gāosùgōnglù wǎng 중궈 궈자 가오쑤궁루 왕[*])으로 부른다. 현재 중국은 세계유수의 고속도로망이 정비된 나라 중 하나이다. 목차 1 개요 2 역사 3 건설비 4 고속도로의 호칭 4.1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 4.2 고속도로에 관한 법규 4.3 고속도로 표지 4.4 나들목의 번호 붙임 5 고속도로 요금과 차입금 5.1 과금방법 6 고속도로망 6.1 5종 7횡 6.2 7918망 7 각주 8 외부 링크 개요[편집] 중국의 고속도로의 총연장은 2012년 말 97,355 km였는데, 그 해에만 12,409 km가 건설되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에 해당한다. 최근[모호한 표현][언제?] 한 해 평균 약 6,000 km 이상의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있다. 역사[편집] 고속도로가 존재하지 않은 중국에서 최초에 개통한 것은 1988년에 상하이 시에서 개통한 호가 고속공로이다. 그 후 베이징과 허베이성의 스자좡을 연결하는 징시 고속공로가 개통했지만 이후 1993년까지 건설된 고속도로는 거의 없었다. 1992년 이후 중국에서는 2010년까지 35,000 km의 중국 국가고속공로망을 구축하는 계획(5종 7횡)이 입안 및 실시되어 5개의 남북방향의 도로와 7개의 동서의 도로로부터 이루어지는 12의 고규격간선도로의 구축이 목표로 여겨졌다. 계획은 앞당겨져 2009년 말에는 이미 65,000 km의 고속도로를 포함하는 382만 km의 도로가 완성되어 있었다.[1] 2005년 1월 13일 교통부 부장이었던 장춘샨(张春贤)은 5종 7횡 구상의 다음 구상으로 이후 30년 간으로 인구 20만 명 이상의 모든 지방중핵도시를 서로 연락하는 85,000 km의 고속도로 네트워크(7918구상)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베이징에서 방사상에 자라는 7개의 노선과 국내를 남북에 묶는 9노선, 동서에 잇는 18노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구상으로 전장 가운데의 68,000 km은 간선도로 17,000 km이 5개의 지방환상도로이다.(단,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지배하에 없는 타이완의 계획선도 이론상으로만 포함된다) 또 2개의 평행 루트와 30개 이상의 상호접속노선이 포함된다. 이 구상에서는 32,000 km의 고속도로가 화중 및 서부지방에서 구축되게 된다. 1989년 1월 1일의 단계에서 147 km만의 정비에 머무르고 있었던 중국의 고속도로이지만 2009년 12월 31일에는 총연장 65,000 km의 고속도로망이 정비되어 2007년에는 8,300 km가 건설되고 있다. 고속도로망은 2020년까지 100,000 km, 미국을 넘어 세계 제1위의 규모에 확대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건설비[편집] 고속공로 네트워크 구축의 총 예산은 2조 위안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의 연간 투자액은 약 1400억 위안에서 1,500억 위안, 2010년부터 2020년까지의 연간 투자액은 약 1,000억 위안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속도로의 호칭[편집] 징시 고속공로의 표지판. 구표기는 Jingshi Freeway로 되어 있었다.(2004년 촬영) 징선 고속공로의 출구안내표지(2004년 촬영) 중국에서는 예전에 "모터웨이(Motorway)"도 "하이웨이(Highway)"도 맞춰서 "프리웨이(Freeway)"라고 칭했다. "프리"는 교통이 자유롭게 흐르고 있는 즉 교차지점은 각 차선이 분리되어 고속도로상의 교통은 신호기나 일시정지 표식과 같은 교통 제어 시설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통행요금을 징수하는 고속도로인 것에도 관련되지 않고 "프리"를 "무료"로 오해했기 때문 1990년대에 "익스프레스웨이(Expressway)"의 명칭으로 일치되었다. 현재 사용되는 "하이웨이"는 고속도로를 의미하지 않는 단어로서 사용되고 있다.(중화인민공화국의 국도를 참조) 또 중국에서는 쾌속공로(快速公路)와 고속공로(高速公路)라고 하는 구분도 존재한다. 양자는 거의 동일하지만 쾌속공로는 주로 도시부에 정비된 고규격도로이다. 본문중에서는 양자를 고속도로로서 다루는 것으로 한다.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편집] 중화인민공화국 도로교통안전법은 2004년 5월 1일에 전국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를 110 km/h에서 120 km/h로 변경했다. 그러나 지방의 고속도로에서는 제한속도변경에 시간이 걸리고 있는 개소도 있어 일부에서는 종래의 110 km/h가 되고 있다. 최저속도제한은 70 km/h이지만 추월 차선의 최저속도 제한은 100 km/h로부터 110 km/h와 달리 정해져 있다. 최저속도위반 및 최고속도위반은 교통법규위반으로 여겨진다. 고속도로에 관한 법규[편집] 1990년대 중반까지 면허 취득 1년 미만인 운전자는 고속도로의 운전이 금지되고 있었지만 2004년 5월 1일 현재에서는 허가되고 있다. 오른쪽에서의 추월, 속도위반, 비상통행대(갓길)의 불법주행 등의 위반자는 교통법규위반으로 여겨지고 특히 오른쪽에서의 추월은 엄격하게 경고된다. 고속도로 표지[편집] 중국의 고속도로에서는 간체자 중국어 및 영어에 의한 도로 표지가 정비되고 있다.(징시 고속공로의 일부는 제외) 중국의 고속도로의 표지는 한국, 일본, 스위스, 미국의 고속도로와 같이 녹지에 흰문자를 사용해서 표기된다. 나들목의 안내표지는 각각 출구의 3,000 m, 2,000 m, 1,000 m와 5,00 m 앞 출구 직전 출구자체에 있어 나들목의 앞에서부터 표시되고 있다. 각 나들목에는 다음 나들목까지의 거리의 안내 표지도 있다. 휴게소 및 간이 휴게소는 교통량이 많은 고속도로에서는 고밀도에 설치되고 있으며, 특히 주유소의 밀도는 높다. 표지는 나들목, 요금소, 휴게소 및 주차구역, 분기점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와 같이 "차간거리확인"의 표지판도 설치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법률에서는 적어도 100m의 차간거를 보유하기 위한 것인다. 속도감시구간에 있어서 단속개소에는 많은 경우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징선 고속공로의 베이징 구간에는 카메라 위에도 경고 표지가 설치되어 있음) 이 속도단속장치의 더미도 존재하고 있다. 또 운전자에게 감속을 촉구하는 표식, 비탈진 길에 관한 경고, 비상통행대(갓길 혹은 노견)의 통행금지, 혹은 노면의 이상에 관한 표지판이 존재한다. 또 추월 차로를 나타내는 표지도 설치되고 있다. 영어표기는 대부분은 문제 없지만 때때로 잘못된 표기도 보인다. 고속도로에서는 디지털 표시기의 정비가 진행되어, 속도 초과에 대하여 주의 환기, 도로공사 상황, 교통정체 정보, 날씨 정보, 우회로 등을 표시한다. 나들목의 번호 붙임[편집] 중국 고속도로의 나들목에는 번호가 첨부되어 있으며, 기점을 1번으로 한 통과 번호가 보통이다. 그러나 장시 고속공로에서는 허베이 성에 0번 나들목이 존재한다. 나들목의 일부에는 보조 나들목(예:No. 14A, 14B)을 병설하고 있다. 고속도로 요금과 차입금[편집] 징스 고속공로의 도우디안 나들목의 요금표(2004년 촬영) 고속도로는 거의 모두 유료이다. 요금은 1 km 당 약 0.5중국원에서 최저요금(예를 들면 5위안)은 거리에 관계 없이 적용된다. 고속도로에 의한 표준적인 금액보다 높을 경우(진찌 고속공로는 1 km당 0.66위안)이나 저렴한 경우(징시 고속공로는 1 km당 0.33위안)도 존재한다. 통행요금에 관련되지 않고 고속도로는 고규격으로 건설되어 또 정체의 발생과도 관계가 없다. 고속도로 계획은 교통부에 의해 계획되고 건설된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성 정부에 의한 직접 투자를 채용하지 않고 은행 혹은 예정되는 통행요금수입을 담보에 증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 영리의 기업(관민 일체가 된 기업체)에 의한 건설 및 운영된다. 이방식을 채용할 이유로서는 지방 정부의 세입이 한정적이어서 자금조달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고속도로 건설은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의 정책이 불일치가 된 희유한 예 중 하나이다. 1990년대 말에 휘발유세에 의해 공공의 간선도로의 건설 자금을 조달하는 입법화가 요구되었지만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의해 부결되었다. 과금방법[편집] 대부분의 고속도로는 카드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다. 고속도로 (혹은 고속도로의 유료구간)에의 입구에서는 입선 카드가 운전자에게 넘겨줘진다. 지불되는 요금은 고속도로에서 나갈 때에 운전수가 출구요금소에 입선 카드를 반환할 때에 주행거리에 의해 결정된다. 징퉁 고속공로 등의 일부의 고속도로에서는 정액제를 채용해 증가하는 교통 유량에 대응하고 있지만 수입면에서 불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일부 고속도로는 전자 요금 징수 시스템(ETC)을 채용하고 있다. 현재 통행요금의 지불에는 현금만이 인정을 받고 있다. 고속도로망[편집] 5종 7횡[편집] 1992년에 입안된 중국 고속공로 계획에서는 남북방향에 5개와 동서방향에 7개의 계12개의 고속도로(5종 7횡)을 만드는 계획이었다. 번호의 머리에는 "국도"(Guodao)의 머리 문자인 "G"의 문자를 붙일 수 있다. 세로(남북방향)에는 G010, G020, G030, G040, G050의 번호가 옆(동서방향)에는 G015, G025, G035, G045, G055, G065, G075의 번호가 배정되었고, 일반국도에는 G101에서 G112, G20에서 G228, G301에서 G330까지의 번호가 배정되었다. 5종 7횡의 고속도로망은 2005년에 발표된 "7918망"에 의해 일부에 재편되었다. 5종 퉁싼 고속공로(010) : 퉁장(헤이룽장 성) - 싼야(하이난 성) 징푸 고속공로(020) : 베이징 - 푸저우 징주 고속공로(030) : 베이징 - 주하이 얼허 고속공로(040) : 얼롄하오터 - 허커우(윈난 성) 위잔 고속공로(050) : 충칭 - 잔장(광둥 성) 7횡 쑤만 고속공로(015) : 쑤이펀 - 만저우리 단라 고속공로(025) : 단둥 - 라싸 칭인 고속공로(035) : 칭다오 - 인촨 롄훠 고속공로(045) : 롄윈강 - 훠얼궈쓰 후룽 고속공로(055) : 상하이 - 청두 후루이 고속공로(065) : 상하이 - 루이리 헝쿤 고속공로(075) : 헝양 - 쿤밍 7918망[편집] 2005년 1월 13일, 교통부가 공포한 "국가고속공로망규화"로 채용된 방사상 고속도로와 종횡의 고속도로망을 조합시킨 정비 계획이며, 수도에서 방사선 7개, 9개의 남북종관선, 18개의 동서횡단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7918망"이라고 칭해졌다. 번호의 맨 앞자리에는 "국도" (Guodao)의 머리 문자인 "G"라는 문자로 되어 있다. 방사선에는 1에서 9까지(실제로는 7까지)의 번호가, 남북방향에는 11에서 89까지의 홀수번호로, 동서방향에는 10에서 90까지의 짝수번호로 되어있다. 91에서 99까지의 숫자는 각 지방(분지, 도시권, 섬 등)을 순환하여 연결되는 도로의 숫자이다. 간선도로에 부속되는 연락선에는 간선 번호의 뒤에 1이 있고 또 1로부터 시작되는 숫자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G15 선하이 고속공로의 연락선으로 취급되는 르자오 - 란카오간 고속도로에는 G1511이라는 번호로 되어 있다. 이후의 연락선은 G1512, G1513으로 되어 있다.) 도시순환고속도로에는 접속하는 간선도로의 번호의 뒤에 0이 있고 또 1로부터 시작되는 숫자로 되어 있다.(예를 들면 G15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 G1501, G1502 등) 또 간선도로에 병행되는 노선에는 방위(방각)의 영어 머리 문자인 N·E·W·S의 문자를 붙일 수 있다.(예를 들면 G15에 병행되는 창수 - 타이저우간 고속도로에는 G15W의 번호로 되어 있다.) 수도방사선 7개 노선 G1 (징하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G2 (징후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상하이 시 G3 (징타이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타이완 성 신베이 시 G4 (징강아오 고속공로) 베이징 시 ~ 광둥 성 선전 시 G4W (강아오 고속공로) 광둥 성 광저우 시 ~ 마카오 G5 (징쿤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윈난 성 쿤밍 시 G6 (징짱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티베트 자치구 라싸 시 G7 (징신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 시 남북종관선 9개 노선 G11 (허다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허강 시 ~ 랴오닝 성 다롄 시 G1111 (허하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허강 시 ~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G1112 (지솽 고속공로) 지린 성 지안 시 ~ 지린 성 솽랴오 시 G1113 (단푸 고속공로) 랴오닝 성 단둥 시 ~ 랴오닝 성 푸신 시 G15 (선하이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15W (창타이 고속공로) 장쑤 성 창수 시 ~ 저장 성 타이저우 시 G1511 (르란 고속공로) 산둥 성 르자오 시 ~ 허난 성 카이펑 시 G1512 (용진 고속공로) 저장 성 닝보 시 ~ 저장 성 진화 시 G1513 (원리 고속공로) 저장 성 원저우 시 ~ 저장 성 리수이 시 G1514 (닝상 고속공로) 푸젠 성 닝더 시 ~ 장시 성 상라오 시 G25 (창선 고속공로) 지린 성 창춘 시 ~ 광둥 성 선전 시 G2511 (신루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내몽골 자치구 퉁랴오 시 G2512 (푸진 고속공로) 랴오닝 성 푸신 시 ~ 랴오닝 성 진저우 시 G2513 (화이쉬 고속공로) 장쑤 성 화이안 시 ~ 장쑤 성 쉬저우 시 G35 (지광 고속공로) 산둥 성 지난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45 (다광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다칭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4511 (룽허 고속공로) 장시 성 간저우 시 ~ 광둥 성 허위안 시 G55 (얼광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얼롄하오터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5511 (지아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 시 ~ 내몽골 자치구 우란차부 시 G5512 (진신 고속공로) 산시 성 진청 시 ~ 허난 성 신샹 시 G5513 (창장 고속공로) 후난 성 창사 시 ~ 후난 성 장자제 시 G65 (바오마오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 시 ~ 광둥 성 마오밍 시 G75 (란하이 고속공로) 간쑤 성 란저우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7511 (친둥 고속공로) 광시 좡족 자치구 친저우 시 ~ 광시 좡족 자치구 둥싱 시 G85 (유쿤 고속공로) 충칭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511 (쿤모 고속공로) 윈난 성 쿤밍 시 ~ 윈난 성 시솽반나 다이족 자치주 동서종관선 18개 노선 G10 (쑤이만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쑤이펀허 시 ~ 내몽골 자치구 만저우리 시 G1011 (하이퉁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 헤이룽장 성 자무쓰 시 G12 (훈우 고속공로) 지린 성 훈춘 시 ~ 내몽골 자치구 우란하오터 시 G1211 (지헤 고속공로) 지린 성 지린 시 ~ 헤이룽장 성 헤이허 시 G1212 (선지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지린 성 지린 시 G16 (단시 고속공로) 지린 성 단둥 시 ~ 내몽골 자치구 시린하오터 시 G18 (룽우 고속공로) 산둥 성 룽청 시 ~ 내몽골 자치구 우하이 시 G1811 (황스 고속공로) 허베이 성 창저우 시 ~ 허베이 성 스자좡 시 G20 (칭인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 시 G2011 (칭신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산둥 성 칭다오 시 G2012 (딩우 고속공로) 산시 성) 위린 시 ~ 간쑤 성 우웨이 시 G22 (칭란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간쑤 성 란저우 시 G30 (롄훠 고속공로) 장쑤 성 롄윈강 시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011 (류거 고속공로) 간쑤 성 주취안 시 ~ 칭하이 성 하이시 몽골족 티베트족 자치주 G3012 (투허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 지구 ~ 신장 위구르 자치구 허톈 지구 G3013 (카이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카스 지구 ~ 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선 G3014 (쿠이아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015 (쿠이타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청 지구 G3016 (칭이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6 (닝뤄 고속공로) 장쑤 성 난징 시 ~ 허난 성 뤄양 시 G40 (후산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산시 성 시안 시 G4011 (양리 고속공로) 장쑤 성 양저우 시 ~ 장쑤 성 창저우 시 G42 (후룽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쓰촨 성 청두 시 G4211 (닝우 고속공로) 장쑤 성 난징 시 ~ 안후이 성 우후 시 G4212 (허안 고속공로) 안후이 성 허페이 시 ~ 안후이 성 안칭 시 G50 (후유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충칭 시 G5011 (우허 고속공로) 안후이 성 우후 시 ~ 안후이 성 허페이 시 G56 (항루이 고속공로) 저장 성 항저우 시 ~ 윈난 성 루이리 시 G5611 (다리 고속공로) 윈난 성 다리 시 ~ 윈난 성 리장 시 G60 (후쿤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윈난 성 쿤밍 시 G70 (푸인 고속공로) 푸젠 성 푸저우 시 ~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 시 G7011 (스톈 고속공로) 후베이 성 스옌 시 ~ 간쑤 성 톈수이 시 G72 (취안난 고속공로) 푸젠 성 취안저우 시 ~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 시 G7211 (난유 고속공로)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 시 ~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선 G76 (샤룽 고속공로) 푸젠 성 샤먼 시 ~ 쓰촨 성 청두 시 G78 (산쿤 고속공로) 광둥 성 산터우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0 (광쿤 고속공로) 광둥 성 광저우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011 (카이허 고속공로) 윈난 성 훙허 하니족 이족 자치주 ~ 윈난 성 훙허 하니족 이족 자치주 지역순환선 6개 노선 G91 (랴오중 순환 고속공로) 랴오닝 성 번시 시 ~ 랴오닝 성 푸순 시 G92 (항저우 만 순환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저장 성 닝보 시 G9211 (용저우 고속공로) 저장 성 닝보 시 ~ 저장 성 저우산 시 G93 (청유 순환 고속공로) 쓰촨 성 청두 시 ~ 충칭 시 ~ 쓰촨 성 청두 시 G94 (주강 삼각주 순환 고속공로) 광둥 성 선전 시 ~ 홍콩 ~ 마카오 ~ 광둥 성 선전 시 G9411 (관포 고속공로) 광둥 성 둥관 시 ~ 광둥 성 포산 시 G98 (하이난 순환 고속공로)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 하이난 성 싼야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99 (타이완 순환 고속공로) 타이완 성 타이베이 시 ~ 타이완 성 가오슝 시 ~ 타이완 성 타이베이 시 (타이완은 중국 대륙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므로 서류상으로만 존재) 각주[편집] ↑ Xubo, Liu. Highway development. Archived 2007년 8월 19일 - 웨이백 머신 Ministry of Communications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5 November 2005.MacLeod, Calum. China's highways go the distance. USA TODAY, 29 January 2006.Li, Lin. Expressways being built at frenetic pace. SINA English, 4 April 2006. 외부 링크[편집] (Very Big!!) Map of the 2020 "7918" expressway network from the chinese Ministry of Transport China Motor Way network maps (in English and more compact) vdeh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수도방사선주선 G1 G2 G3 G4 G5 G6 G7 병행선 G4W 남북종관선주선 G11 G15 G25 G35 G45 G55 G65 G75 G85 병행선 G15W 연락선 G1111 G1112 G1113 G1511 G1512 G1513 G1514 G2511 G2512 G2513 G4511 G5511 G5512 G5513 G7511 G8511 동서종관선주선 G10 G12 G16 G18 G20 G22 G30 G36 G40 G42 G50 G56 G60 G70 G72 G76 G78 G80 연락선 G1011 G1211 G1212 G1811 G2011 G2012 G3011 G3012 G3013 G3014 G3015 G3016 G4011 G4211 G4212 G5011 G5611 G7011 G7211 G8011 지역순환선주선 G91 G92 G93 G94 G98 G99(¹) 연락선 G9211 G9411 도시순환선순환선 G0401 G1001 G1101 G1501(푸저우) G1501(광저우) G1501(하이커우) G1501(닝보) G1501(칭다오) G1501(상하이) G1501(선양) G1501(샤먼) G2001(지난) G2001(스자좡) G2001(타이위안) G2001(인촨) G2501(창춘) G2501(항저우) G2501(난징) G2501(선전) G2501(톈진) G3001(란저우) G3001(우루무치) G3001(시안) G3001(정저우) G4001 G4201 G4201 G4501 G5001 G5601 G6001(구이양) G6001(후허하오터) G6001(라싸) G6001(난창) G6001(시닝) G7201 (1)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타이완 지역에 정하고 있는 명목상의 도로명칭. 타이완의 일반 국도를 참조. vdeh아시아의 고속도로독립국 네팔 대한민국 동티모르[* 1] 라오스 러시아[* 2] 레바논 말레이시아 몰디브 몽골 미얀마 바레인 방글라데시 베트남 부탄 브루나이 사우디아라비아 스리랑카 시리아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아르메니아[* 3] 아제르바이잔[* 2] 아프가니스탄 예멘 오만 요르단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이집트[* 4] 인도 인도네시아[* 5] 일본[*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지아[* 2]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카자흐스탄[* 2]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키르기스스탄 키프로스[* 3] 타지키스탄 태국 터키[* 2]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필리핀 속령 마카오[* 6] 차고스 제도 [* 7] 티베트[* 8] 동튀르케스탄[* 8] 홍콩[* 6] 미승인 국가 아르차흐 공화국[* 3] 남오세티야[* 2] 북키프로스 압하지야[* 2] ↑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국가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일부 영토가 유럽에도 속한다. ↑ 가 나 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역사적·문화적 이유로 종종 유럽으로 분류한다. ↑ 일부 영토가 아프리카에도 속한다. ↑ 가 나 일부 영토가 오세아니아에도 속한다. ↑ 가 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이다. ↑ 영국령 인도양 지역의 일부이다. ↑ 가 나 나라 목록 206개 국가에 포함되지 않는 나라이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중화인민공화국의_고속도로&oldid=22408464" 분류: 나라별 고속도로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숨은 분류: 중국어 정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모호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지적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DeutschEnglishEuskaraSuomiFrançaisעברית日本語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ไทย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5일 (토) 19: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중국국가고속공로망 징시 고속공로 자오신댠 나들목 부근(2004년 7월 촬영)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는 중국국가고속공로망(중국어 간체자: 中国国家高速公路网, 정체자: 中國國家高速公路網, 병음: Zhōngguó Guójiā Gāosùgōnglù wǎng 중궈 궈자 가오쑤궁루 왕[*])으로 부른다. 현재 중국은 세계유수의 고속도로망이 정비된 나라 중 하나이다. 목차 1 개요 2 역사 3 건설비 4 고속도로의 호칭 4.1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 4.2 고속도로에 관한 법규 4.3 고속도로 표지 4.4 나들목의 번호 붙임 5 고속도로 요금과 차입금 5.1 과금방법 6 고속도로망 6.1 5종 7횡 6.2 7918망 7 각주 8 외부 링크 개요[편집] 중국의 고속도로의 총연장은 2012년 말 97,355 km였는데, 그 해에만 12,409 km가 건설되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에 해당한다. 최근[모호한 표현][언제?] 한 해 평균 약 6,000 km 이상의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있다. 역사[편집] 고속도로가 존재하지 않은 중국에서 최초에 개통한 것은 1988년에 상하이 시에서 개통한 호가 고속공로이다. 그 후 베이징과 허베이성의 스자좡을 연결하는 징시 고속공로가 개통했지만 이후 1993년까지 건설된 고속도로는 거의 없었다. 1992년 이후 중국에서는 2010년까지 35,000 km의 중국 국가고속공로망을 구축하는 계획(5종 7횡)이 입안 및 실시되어 5개의 남북방향의 도로와 7개의 동서의 도로로부터 이루어지는 12의 고규격간선도로의 구축이 목표로 여겨졌다. 계획은 앞당겨져 2009년 말에는 이미 65,000 km의 고속도로를 포함하는 382만 km의 도로가 완성되어 있었다.[1] 2005년 1월 13일 교통부 부장이었던 장춘샨(张春贤)은 5종 7횡 구상의 다음 구상으로 이후 30년 간으로 인구 20만 명 이상의 모든 지방중핵도시를 서로 연락하는 85,000 km의 고속도로 네트워크(7918구상)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베이징에서 방사상에 자라는 7개의 노선과 국내를 남북에 묶는 9노선, 동서에 잇는 18노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구상으로 전장 가운데의 68,000 km은 간선도로 17,000 km이 5개의 지방환상도로이다.(단,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지배하에 없는 타이완의 계획선도 이론상으로만 포함된다) 또 2개의 평행 루트와 30개 이상의 상호접속노선이 포함된다. 이 구상에서는 32,000 km의 고속도로가 화중 및 서부지방에서 구축되게 된다. 1989년 1월 1일의 단계에서 147 km만의 정비에 머무르고 있었던 중국의 고속도로이지만 2009년 12월 31일에는 총연장 65,000 km의 고속도로망이 정비되어 2007년에는 8,300 km가 건설되고 있다. 고속도로망은 2020년까지 100,000 km, 미국을 넘어 세계 제1위의 규모에 확대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건설비[편집] 고속공로 네트워크 구축의 총 예산은 2조 위안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의 연간 투자액은 약 1400억 위안에서 1,500억 위안, 2010년부터 2020년까지의 연간 투자액은 약 1,000억 위안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속도로의 호칭[편집] 징시 고속공로의 표지판. 구표기는 Jingshi Freeway로 되어 있었다.(2004년 촬영) 징선 고속공로의 출구안내표지(2004년 촬영) 중국에서는 예전에 "모터웨이(Motorway)"도 "하이웨이(Highway)"도 맞춰서 "프리웨이(Freeway)"라고 칭했다. "프리"는 교통이 자유롭게 흐르고 있는 즉 교차지점은 각 차선이 분리되어 고속도로상의 교통은 신호기나 일시정지 표식과 같은 교통 제어 시설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통행요금을 징수하는 고속도로인 것에도 관련되지 않고 "프리"를 "무료"로 오해했기 때문 1990년대에 "익스프레스웨이(Expressway)"의 명칭으로 일치되었다. 현재 사용되는 "하이웨이"는 고속도로를 의미하지 않는 단어로서 사용되고 있다.(중화인민공화국의 국도를 참조) 또 중국에서는 쾌속공로(快速公路)와 고속공로(高速公路)라고 하는 구분도 존재한다. 양자는 거의 동일하지만 쾌속공로는 주로 도시부에 정비된 고규격도로이다. 본문중에서는 양자를 고속도로로서 다루는 것으로 한다.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편집] 중화인민공화국 도로교통안전법은 2004년 5월 1일에 전국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를 110 km/h에서 120 km/h로 변경했다. 그러나 지방의 고속도로에서는 제한속도변경에 시간이 걸리고 있는 개소도 있어 일부에서는 종래의 110 km/h가 되고 있다. 최저속도제한은 70 km/h이지만 추월 차선의 최저속도 제한은 100 km/h로부터 110 km/h와 달리 정해져 있다. 최저속도위반 및 최고속도위반은 교통법규위반으로 여겨진다. 고속도로에 관한 법규[편집] 1990년대 중반까지 면허 취득 1년 미만인 운전자는 고속도로의 운전이 금지되고 있었지만 2004년 5월 1일 현재에서는 허가되고 있다. 오른쪽에서의 추월, 속도위반, 비상통행대(갓길)의 불법주행 등의 위반자는 교통법규위반으로 여겨지고 특히 오른쪽에서의 추월은 엄격하게 경고된다. 고속도로 표지[편집] 중국의 고속도로에서는 간체자 중국어 및 영어에 의한 도로 표지가 정비되고 있다.(징시 고속공로의 일부는 제외) 중국의 고속도로의 표지는 한국, 일본, 스위스, 미국의 고속도로와 같이 녹지에 흰문자를 사용해서 표기된다. 나들목의 안내표지는 각각 출구의 3,000 m, 2,000 m, 1,000 m와 5,00 m 앞 출구 직전 출구자체에 있어 나들목의 앞에서부터 표시되고 있다. 각 나들목에는 다음 나들목까지의 거리의 안내 표지도 있다. 휴게소 및 간이 휴게소는 교통량이 많은 고속도로에서는 고밀도에 설치되고 있으며, 특히 주유소의 밀도는 높다. 표지는 나들목, 요금소, 휴게소 및 주차구역, 분기점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와 같이 "차간거리확인"의 표지판도 설치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법률에서는 적어도 100m의 차간거를 보유하기 위한 것인다. 속도감시구간에 있어서 단속개소에는 많은 경우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징선 고속공로의 베이징 구간에는 카메라 위에도 경고 표지가 설치되어 있음) 이 속도단속장치의 더미도 존재하고 있다. 또 운전자에게 감속을 촉구하는 표식, 비탈진 길에 관한 경고, 비상통행대(갓길 혹은 노견)의 통행금지, 혹은 노면의 이상에 관한 표지판이 존재한다. 또 추월 차로를 나타내는 표지도 설치되고 있다. 영어표기는 대부분은 문제 없지만 때때로 잘못된 표기도 보인다. 고속도로에서는 디지털 표시기의 정비가 진행되어, 속도 초과에 대하여 주의 환기, 도로공사 상황, 교통정체 정보, 날씨 정보, 우회로 등을 표시한다. 나들목의 번호 붙임[편집] 중국 고속도로의 나들목에는 번호가 첨부되어 있으며, 기점을 1번으로 한 통과 번호가 보통이다. 그러나 장시 고속공로에서는 허베이 성에 0번 나들목이 존재한다. 나들목의 일부에는 보조 나들목(예:No. 14A, 14B)을 병설하고 있다. 고속도로 요금과 차입금[편집] 징스 고속공로의 도우디안 나들목의 요금표(2004년 촬영) 고속도로는 거의 모두 유료이다. 요금은 1 km 당 약 0.5중국원에서 최저요금(예를 들면 5위안)은 거리에 관계 없이 적용된다. 고속도로에 의한 표준적인 금액보다 높을 경우(진찌 고속공로는 1 km당 0.66위안)이나 저렴한 경우(징시 고속공로는 1 km당 0.33위안)도 존재한다. 통행요금에 관련되지 않고 고속도로는 고규격으로 건설되어 또 정체의 발생과도 관계가 없다. 고속도로 계획은 교통부에 의해 계획되고 건설된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성 정부에 의한 직접 투자를 채용하지 않고 은행 혹은 예정되는 통행요금수입을 담보에 증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 영리의 기업(관민 일체가 된 기업체)에 의한 건설 및 운영된다. 이방식을 채용할 이유로서는 지방 정부의 세입이 한정적이어서 자금조달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고속도로 건설은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의 정책이 불일치가 된 희유한 예 중 하나이다. 1990년대 말에 휘발유세에 의해 공공의 간선도로의 건설 자금을 조달하는 입법화가 요구되었지만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의해 부결되었다. 과금방법[편집] 대부분의 고속도로는 카드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다. 고속도로 (혹은 고속도로의 유료구간)에의 입구에서는 입선 카드가 운전자에게 넘겨줘진다. 지불되는 요금은 고속도로에서 나갈 때에 운전수가 출구요금소에 입선 카드를 반환할 때에 주행거리에 의해 결정된다. 징퉁 고속공로 등의 일부의 고속도로에서는 정액제를 채용해 증가하는 교통 유량에 대응하고 있지만 수입면에서 불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일부 고속도로는 전자 요금 징수 시스템(ETC)을 채용하고 있다. 현재 통행요금의 지불에는 현금만이 인정을 받고 있다. 고속도로망[편집] 5종 7횡[편집] 1992년에 입안된 중국 고속공로 계획에서는 남북방향에 5개와 동서방향에 7개의 계12개의 고속도로(5종 7횡)을 만드는 계획이었다. 번호의 머리에는 "국도"(Guodao)의 머리 문자인 "G"의 문자를 붙일 수 있다. 세로(남북방향)에는 G010, G020, G030, G040, G050의 번호가 옆(동서방향)에는 G015, G025, G035, G045, G055, G065, G075의 번호가 배정되었고, 일반국도에는 G101에서 G112, G20에서 G228, G301에서 G330까지의 번호가 배정되었다. 5종 7횡의 고속도로망은 2005년에 발표된 "7918망"에 의해 일부에 재편되었다. 5종 퉁싼 고속공로(010) : 퉁장(헤이룽장 성) - 싼야(하이난 성) 징푸 고속공로(020) : 베이징 - 푸저우 징주 고속공로(030) : 베이징 - 주하이 얼허 고속공로(040) : 얼롄하오터 - 허커우(윈난 성) 위잔 고속공로(050) : 충칭 - 잔장(광둥 성) 7횡 쑤만 고속공로(015) : 쑤이펀 - 만저우리 단라 고속공로(025) : 단둥 - 라싸 칭인 고속공로(035) : 칭다오 - 인촨 롄훠 고속공로(045) : 롄윈강 - 훠얼궈쓰 후룽 고속공로(055) : 상하이 - 청두 후루이 고속공로(065) : 상하이 - 루이리 헝쿤 고속공로(075) : 헝양 - 쿤밍 7918망[편집] 2005년 1월 13일, 교통부가 공포한 "국가고속공로망규화"로 채용된 방사상 고속도로와 종횡의 고속도로망을 조합시킨 정비 계획이며, 수도에서 방사선 7개, 9개의 남북종관선, 18개의 동서횡단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7918망"이라고 칭해졌다. 번호의 맨 앞자리에는 "국도" (Guodao)의 머리 문자인 "G"라는 문자로 되어 있다. 방사선에는 1에서 9까지(실제로는 7까지)의 번호가, 남북방향에는 11에서 89까지의 홀수번호로, 동서방향에는 10에서 90까지의 짝수번호로 되어있다. 91에서 99까지의 숫자는 각 지방(분지, 도시권, 섬 등)을 순환하여 연결되는 도로의 숫자이다. 간선도로에 부속되는 연락선에는 간선 번호의 뒤에 1이 있고 또 1로부터 시작되는 숫자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G15 선하이 고속공로의 연락선으로 취급되는 르자오 - 란카오간 고속도로에는 G1511이라는 번호로 되어 있다. 이후의 연락선은 G1512, G1513으로 되어 있다.) 도시순환고속도로에는 접속하는 간선도로의 번호의 뒤에 0이 있고 또 1로부터 시작되는 숫자로 되어 있다.(예를 들면 G15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 G1501, G1502 등) 또 간선도로에 병행되는 노선에는 방위(방각)의 영어 머리 문자인 N·E·W·S의 문자를 붙일 수 있다.(예를 들면 G15에 병행되는 창수 - 타이저우간 고속도로에는 G15W의 번호로 되어 있다.) 수도방사선 7개 노선 G1 (징하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G2 (징후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상하이 시 G3 (징타이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타이완 성 신베이 시 G4 (징강아오 고속공로) 베이징 시 ~ 광둥 성 선전 시 G4W (강아오 고속공로) 광둥 성 광저우 시 ~ 마카오 G5 (징쿤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윈난 성 쿤밍 시 G6 (징짱 고속공로) 베이징 시 ~ 티베트 자치구 라싸 시 G7 (징신 고속공로) 베이징 시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 시 남북종관선 9개 노선 G11 (허다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허강 시 ~ 랴오닝 성 다롄 시 G1111 (허하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허강 시 ~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G1112 (지솽 고속공로) 지린 성 지안 시 ~ 지린 성 솽랴오 시 G1113 (단푸 고속공로) 랴오닝 성 단둥 시 ~ 랴오닝 성 푸신 시 G15 (선하이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15W (창타이 고속공로) 장쑤 성 창수 시 ~ 저장 성 타이저우 시 G1511 (르란 고속공로) 산둥 성 르자오 시 ~ 허난 성 카이펑 시 G1512 (용진 고속공로) 저장 성 닝보 시 ~ 저장 성 진화 시 G1513 (원리 고속공로) 저장 성 원저우 시 ~ 저장 성 리수이 시 G1514 (닝상 고속공로) 푸젠 성 닝더 시 ~ 장시 성 상라오 시 G25 (창선 고속공로) 지린 성 창춘 시 ~ 광둥 성 선전 시 G2511 (신루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내몽골 자치구 퉁랴오 시 G2512 (푸진 고속공로) 랴오닝 성 푸신 시 ~ 랴오닝 성 진저우 시 G2513 (화이쉬 고속공로) 장쑤 성 화이안 시 ~ 장쑤 성 쉬저우 시 G35 (지광 고속공로) 산둥 성 지난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45 (다광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다칭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4511 (룽허 고속공로) 장시 성 간저우 시 ~ 광둥 성 허위안 시 G55 (얼광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얼롄하오터 시 ~ 광둥 성 광저우 시 G5511 (지아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 시 ~ 내몽골 자치구 우란차부 시 G5512 (진신 고속공로) 산시 성 진청 시 ~ 허난 성 신샹 시 G5513 (창장 고속공로) 후난 성 창사 시 ~ 후난 성 장자제 시 G65 (바오마오 고속공로)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 시 ~ 광둥 성 마오밍 시 G75 (란하이 고속공로) 간쑤 성 란저우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7511 (친둥 고속공로) 광시 좡족 자치구 친저우 시 ~ 광시 좡족 자치구 둥싱 시 G85 (유쿤 고속공로) 충칭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511 (쿤모 고속공로) 윈난 성 쿤밍 시 ~ 윈난 성 시솽반나 다이족 자치주 동서종관선 18개 노선 G10 (쑤이만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쑤이펀허 시 ~ 내몽골 자치구 만저우리 시 G1011 (하이퉁 고속공로)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 헤이룽장 성 자무쓰 시 G12 (훈우 고속공로) 지린 성 훈춘 시 ~ 내몽골 자치구 우란하오터 시 G1211 (지헤 고속공로) 지린 성 지린 시 ~ 헤이룽장 성 헤이허 시 G1212 (선지 고속공로) 랴오닝 성 선양 시 ~ 지린 성 지린 시 G16 (단시 고속공로) 지린 성 단둥 시 ~ 내몽골 자치구 시린하오터 시 G18 (룽우 고속공로) 산둥 성 룽청 시 ~ 내몽골 자치구 우하이 시 G1811 (황스 고속공로) 허베이 성 창저우 시 ~ 허베이 성 스자좡 시 G20 (칭인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 시 G2011 (칭신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산둥 성 칭다오 시 G2012 (딩우 고속공로) 산시 성) 위린 시 ~ 간쑤 성 우웨이 시 G22 (칭란 고속공로) 산둥 성 칭다오 시 ~ 간쑤 성 란저우 시 G30 (롄훠 고속공로) 장쑤 성 롄윈강 시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011 (류거 고속공로) 간쑤 성 주취안 시 ~ 칭하이 성 하이시 몽골족 티베트족 자치주 G3012 (투허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 지구 ~ 신장 위구르 자치구 허톈 지구 G3013 (카이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카스 지구 ~ 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선 G3014 (쿠이아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015 (쿠이타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청 지구 G3016 (칭이 고속공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G36 (닝뤄 고속공로) 장쑤 성 난징 시 ~ 허난 성 뤄양 시 G40 (후산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산시 성 시안 시 G4011 (양리 고속공로) 장쑤 성 양저우 시 ~ 장쑤 성 창저우 시 G42 (후룽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쓰촨 성 청두 시 G4211 (닝우 고속공로) 장쑤 성 난징 시 ~ 안후이 성 우후 시 G4212 (허안 고속공로) 안후이 성 허페이 시 ~ 안후이 성 안칭 시 G50 (후유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충칭 시 G5011 (우허 고속공로) 안후이 성 우후 시 ~ 안후이 성 허페이 시 G56 (항루이 고속공로) 저장 성 항저우 시 ~ 윈난 성 루이리 시 G5611 (다리 고속공로) 윈난 성 다리 시 ~ 윈난 성 리장 시 G60 (후쿤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윈난 성 쿤밍 시 G70 (푸인 고속공로) 푸젠 성 푸저우 시 ~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 시 G7011 (스톈 고속공로) 후베이 성 스옌 시 ~ 간쑤 성 톈수이 시 G72 (취안난 고속공로) 푸젠 성 취안저우 시 ~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 시 G7211 (난유 고속공로)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 시 ~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선 G76 (샤룽 고속공로) 푸젠 성 샤먼 시 ~ 쓰촨 성 청두 시 G78 (산쿤 고속공로) 광둥 성 산터우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0 (광쿤 고속공로) 광둥 성 광저우 시 ~ 윈난 성 쿤밍 시 G8011 (카이허 고속공로) 윈난 성 훙허 하니족 이족 자치주 ~ 윈난 성 훙허 하니족 이족 자치주 지역순환선 6개 노선 G91 (랴오중 순환 고속공로) 랴오닝 성 번시 시 ~ 랴오닝 성 푸순 시 G92 (항저우 만 순환 고속공로) 상하이 시 ~ 저장 성 닝보 시 G9211 (용저우 고속공로) 저장 성 닝보 시 ~ 저장 성 저우산 시 G93 (청유 순환 고속공로) 쓰촨 성 청두 시 ~ 충칭 시 ~ 쓰촨 성 청두 시 G94 (주강 삼각주 순환 고속공로) 광둥 성 선전 시 ~ 홍콩 ~ 마카오 ~ 광둥 성 선전 시 G9411 (관포 고속공로) 광둥 성 둥관 시 ~ 광둥 성 포산 시 G98 (하이난 순환 고속공로)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 하이난 성 싼야 시 ~ 하이난 성 하이커우 시 G99 (타이완 순환 고속공로) 타이완 성 타이베이 시 ~ 타이완 성 가오슝 시 ~ 타이완 성 타이베이 시 (타이완은 중국 대륙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므로 서류상으로만 존재) 각주[편집] ↑ Xubo, Liu. Highway development. Archived 2007년 8월 19일 - 웨이백 머신 Ministry of Communications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5 November 2005.MacLeod, Calum. China's highways go the distance. USA TODAY, 29 January 2006.Li, Lin. Expressways being built at frenetic pace. SINA English, 4 April 2006. 외부 링크[편집] (Very Big!!) Map of the 2020 "7918" expressway network from the chinese Ministry of Transport China Motor Way network maps (in English and more compact) vdeh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수도방사선주선 G1 G2 G3 G4 G5 G6 G7 병행선 G4W 남북종관선주선 G11 G15 G25 G35 G45 G55 G65 G75 G85 병행선 G15W 연락선 G1111 G1112 G1113 G1511 G1512 G1513 G1514 G2511 G2512 G2513 G4511 G5511 G5512 G5513 G7511 G8511 동서종관선주선 G10 G12 G16 G18 G20 G22 G30 G36 G40 G42 G50 G56 G60 G70 G72 G76 G78 G80 연락선 G1011 G1211 G1212 G1811 G2011 G2012 G3011 G3012 G3013 G3014 G3015 G3016 G4011 G4211 G4212 G5011 G5611 G7011 G7211 G8011 지역순환선주선 G91 G92 G93 G94 G98 G99(¹) 연락선 G9211 G9411 도시순환선순환선 G0401 G1001 G1101 G1501(푸저우) G1501(광저우) G1501(하이커우) G1501(닝보) G1501(칭다오) G1501(상하이) G1501(선양) G1501(샤먼) G2001(지난) G2001(스자좡) G2001(타이위안) G2001(인촨) G2501(창춘) G2501(항저우) G2501(난징) G2501(선전) G2501(톈진) G3001(란저우) G3001(우루무치) G3001(시안) G3001(정저우) G4001 G4201 G4201 G4501 G5001 G5601 G6001(구이양) G6001(후허하오터) G6001(라싸) G6001(난창) G6001(시닝) G7201 (1)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타이완 지역에 정하고 있는 명목상의 도로명칭. 타이완의 일반 국도를 참조. vdeh아시아의 고속도로독립국 네팔 대한민국 동티모르[* 1] 라오스 러시아[* 2] 레바논 말레이시아 몰디브 몽골 미얀마 바레인 방글라데시 베트남 부탄 브루나이 사우디아라비아 스리랑카 시리아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아르메니아[* 3] 아제르바이잔[* 2] 아프가니스탄 예멘 오만 요르단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이집트[* 4] 인도 인도네시아[* 5] 일본[*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지아[* 2]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카자흐스탄[* 2]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키르기스스탄 키프로스[* 3] 타지키스탄 태국 터키[* 2]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필리핀 속령 마카오[* 6] 차고스 제도 [* 7] 티베트[* 8] 동튀르케스탄[* 8] 홍콩[* 6] 미승인 국가 아르차흐 공화국[* 3] 남오세티야[* 2] 북키프로스 압하지야[* 2] ↑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국가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일부 영토가 유럽에도 속한다. ↑ 가 나 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역사적·문화적 이유로 종종 유럽으로 분류한다. ↑ 일부 영토가 아프리카에도 속한다. ↑ 가 나 일부 영토가 오세아니아에도 속한다. ↑ 가 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이다. ↑ 영국령 인도양 지역의 일부이다. ↑ 가 나 나라 목록 206개 국가에 포함되지 않는 나라이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중화인민공화국의_고속도로&oldid=22408464" 분류: 나라별 고속도로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숨은 분류: 중국어 정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모호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지적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DeutschEnglishEuskaraSuomiFrançaisעברית日本語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ไทย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5일 (토) 19: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직무유기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직무유기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직무유기죄(職務遺棄罪)는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그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그 직무를 유기하는 죄이다.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대한민국 형법 제122조). 모든 공무원은 '법령을 준수하여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국공 56조. 지공 48조)'. 그리고 공무원이 이러한 직무에 위배되는 일을 하였을 때에는 파면(罷免)·감봉(減俸)·견책(譴責)의 징계처분을 받게 되는 것이나(국공 78조), 형법은 더 나아가 이에 대하여 형사상 책임까지도 물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본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주관적으로 직무를 버린다는 인식과 객관적으로 직무 또는 직장을 벗어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직무수행과 관련하여 태만(怠慢)·분망(奔忙)·착각(錯覺) 기타 일신상 또는 객관적인 사정으로 말미암아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 것에 불과한 경우에는 직무유기죄는 성립되지 않는다.[1] 목차 1 판례 1.1 직무유기가 성립하는 경우 1.2 직무유기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 2 각주 3 같이 보기 판례[편집] 서울 강남경찰서 교통과 팀장 송모씨(54·경위)이 2015년 11월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에서 교통 단속을 할 때 같은 경찰서 동료 경찰관에게서 “논현파출소장 지인이 음주운전에 단속됐으니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음주 혐의로 세워둔 운전자에 대해 음주 측정을 하거나 진술을 받지 않고 보내줬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1심인 서울중앙지법 형사단독 판사는 "동료 경찰관들이 적발한 음주운전 혐의자에 대해 음주측정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대로 순찰차에 태워 귀가하도록 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직무를 유기한 것은 경찰공무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 3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지만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하자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5부(재판장 장일혁 부장판사)가 2017년 6월 30일 "25년 동안 성실히 근무했고 이 사건으로 송씨가 이미 해임됐으며 금전적 대가나 이득을 취한 것이 아니다"는 이유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피고인 변호사가 박모씨가 몇년 전에 부장판사에서 퇴직한 변호사로 전관예우 논란이 있은 가운데[2]검찰총장은 2017년 9월 18일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하였고[3]대법원은 2017년 12월 5일에 벌금형을 파기했지만 피고인에게 미치는 효력은 없다.[4] 직무유기가 성립하는 경우[편집] 경찰관이 불법체류자임을 알면서도 이들의 신병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인계하지 않고 본서인 수원중부경찰서 외사계에조차도 보고하지 않고 훈방하면서 이들의 인적 사항조차 기재해 두지 않은 경우[5] 직무유기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편집] 전매공무원인 피고인이 외제담배를 긴급압수한 후 도주한 범칙자를 찾는 데 급급하여 미처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지 못한 이 사건에서와 같이 직무수행과 관련하여 태만, 분망, 착각 등 일신상 또는 객관적 사유로 인하여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 것에 불과한 경우에는 직무유기죄는 성립하지 않는다.[6] 경찰관이 검사로부터 범인을 검거하라는 지시를 받고서도 그 직무상의 의무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범인에게 전화로 도피하라고 권유하여 그를 도피하게 한 경우 작위범인 범인도피죄만이 성립하고 부작위범인 직무유기죄는 따로 성립하지 아니한다.[7] 행정공무원이 신축건물에 대한 착공 및 준공검사를 마치고 관계서류를 작성함에 있어 그 허가조건 위배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허위의 복명서를 작성, 행사한 경우는 작위범인 허위공문서작성 및 동행사죄만 성립하고 부작위범인 직무유기죄는 따로 성립하지 아니한다.[8] 각주[편집]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직무유기죄〉 ↑ 직무유기 경찰에 법에 없는 벌금형 선고… 대법원 "위법" ↑ 직무유기 경찰관 징역형 아닌 벌금형에… 검찰총장, 비상상고 ↑ [1] ↑ 2005도4202 ↑ 82도1633 ↑ 96도51 ↑ 2002도5004 같이 보기[편집]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범죄 대한민국 형법 제122조 직무유기죄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법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직무유기죄&oldid=20830995" 분류: 법률형법공무원 직무에 관한 죄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법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2월 27일 (화) 11: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렉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렉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렉스(Rex)는 "왕"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목차 1 생물학 2 컴퓨터 과학 3 정치 4 인명 4.1 가공의 인물 생물학[편집]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yrannosaurus rex) 고양이 품종: 코니시 렉스, 데번 렉스 컴퓨터 과학[편집] REXX: 프로그래밍 언어 정치[편집] 렉스당은 벨기에의 파시즘 정당이다. 인명[편집] 렉스 해리슨: 영국의 배우 렉스 루거: 미국의 프로레슬링선수 DJ 렉스: 대한민국의 힙합 DJ 렉스 틸러슨: 미국의 엔지니어이자 기업가 렉스 린: 미국의 배우 타일러 렉스: 미국의 남자 프로레슬링선수 사이먼 렉스: 미국의 배우 렉스 리: 미국의 배우 렉스 일리오르: 영어의 주니어 렉스 스타우트: 미국의 소설가 가공의 인물[편집] 렉스는 토이스토리의 등장 인물이다. 렉스는 공룡킹 어드벤처의 등장 인물이다. 렉스 루터: DC 코믹스 세계관에 등장하는 슈퍼빌런 이 문서는 명칭은 같지만 대상이 다를 때에 쓰이는 동음이의어 문서입니다.어떤 링크가 이 문서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링크를 알맞게 고쳐 주세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렉스&oldid=23682133" 분류: 동음이의어 문서숨은 분류: 모든 동음이의어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Cebuano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Latina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1일 (월) 14: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대전 시티즌 2018 시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전 시티즌 2018 시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전 시티즌 2018 시즌연고지 대전광역시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구단주 이재관[1] (~6/30) 허태정 (7/2~)사장 김호감독 고종수K리그 챌린지 4위 최다득점자 리그: 키쭈 (11골)시즌: 키쭈 (11골) 홈 유니폼 원정 유니폼 ← 2017 2019 → 대전 시티즌 2018 시즌은 대전의 21번째 시즌이자 K리그2에서는 4번째 시즌이다. 대표이사로 과거 팀의 감독이였던 김호가 선임되었고, 원래는 이기범 감독이 대전의 제 11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면서 고종수 감독이 대전의 11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목차 1 전지 훈련 2 정규 시즌 2.1 겨울 이적시장 (시즌 전) 2.2 시즌 전반기 2.3 여름 이적시장 2.4 시즌 후반기 3 경기 결과 3.1 K리그2 3.2 FA컵 3.3 친선 경기 4 선수단 4.1 선수 명단 4.2 현재 선수 명단 4.3 영구 결번 4.4 코칭스태프 4.5 프로팀 5 선수 이적 5.1 영입 5.2 신인 5.3 방출 5.4 임대 및 군입대 6 관련 항목 7 각주 전지 훈련[편집] 대전 시티즌은 1월 2일부터1월 12일까지 경상남도 통영시로 1차 전지훈련을 떠났으며,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터키 안탈리아로 2차 전지훈련을 떠났고, 2월 11일부터 2월 24일까지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3차 전지훈련을 가졌다. 하지만 전지훈련 용역업체 선정 공고를 통해 선정한 용역업체가 김호 대표 이사의 측근인 K씨가 운영하는 AI스포츠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었다.[2] 또한 2차 전지훈련의 경우 33명만이 터키로 떠났고, 20명은 경남 창녕군에서 훈련 했다. 정규 시즌[편집] 겨울 이적시장 (시즌 전)[편집] 2017년 11월 1일 김호 前 대전 시티즌 감독을 윤정섭 대표 이사의 후임 대표 이사로 선임하였으나 과거 대전 감독 시절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퇴진했고, 최근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있던 인물인 김호의 대표 이사 선임에 많은 팬들이 반발하였으며,[3] 김호 대표 이사와 함께 용인시축구센터 출신인 이기범 신갈고등학교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내정하였지만,[4] 이기범 역시 김호와 마찬가지로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있었고, 프로팀 감독 경력이 전무한 사람일 뿐더러 팬들의 그 어떤 동의없이 이루어진 선임이라는 이유로 감독 선임 문제 역시 팬들의 반발을 샀다.[5] 구단주이자 대전광역시장인 권선택 시장이 시장직을 상실하면서 이재관 시장 권한대행이 대전 시티즌의 구단주 대행이 되었다.[6] 2017년 11월 24일 이기범 감독 선임을 철회하고 前 대전 구단의 선수였던 고종수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였으나,[7] 하지만 이기범이건 고종수건 둘 다 김호의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고종수 선임 역시 김호가 자기 자신의 말을 잘들을 자기 사람 심기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아무래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기범보다는 선수 시절 활약이나 이름값이 훨씬 높은 고종수를 선임하면서 이기범 감독 선임으로 좋지 못했던 여론을 무마하려고 하던 것이 아니냐며 팬들로부터 비난을 샀다. 12월 1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취임식을 통해 고종수 감독이 공식 취임하였으며,[8] 자신을 보좌할 수석 코치로는 과거 수원 삼성 시절 동료있던 김진우 코치를 내정했는데, 이를 두고 대전팬들은 지나치게 많은 수원 삼성 출신 인물들이 대전 구단에서 자리잡는 것이 아니냐며 반발하였으며, 결국 불만을 참지 못한 대전팬들이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는 사태로 까지 이르렀다.[9] “ 대전시티즌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저니스타, 대전의아들 대표해 글을 올립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과 같은 시기를 지내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리그 순위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서로에게 예의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졌지만 잘 싸웠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홈경기가 열리는 날 경기장에는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활기가 돌지 않습니다. 그렇게 패배는 우리의 일상에 너무 익숙하게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은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믿어야만 했습니다. 더 내려갈 데가 없으니 남은 건 다시 올라갈 일뿐이라고. 우린 안 될 거야, 라며 비관론을 입에 올리던 사람들에게 한 방 먹여줄 날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때마다 기대는 늘 실망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기존의 실망과는 차원이 다른 절망이 이미 다음 시즌을 예약해 놓고 있습니다. 새로운 감독에 대한 소식과 사장선임에 대한 뉴스는 저희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내년엔 올해보다는 나아지리라는 관성적인 희망조차 사치가 돼가고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 대전시티즌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최악의 상황입니다. 구단은 성적 부진과, 프런트와의 마찰, 특정 에이전트와의 유착 의혹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김호 전 감독을 지난달 대전시티즌 대표이사로 선임했습니다. 그가 대전시티즌의 사령탑으로 있던 시절 팀이 어떤 모습으로 추락했는지 우리는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프로감독 경력이 전무하고 구단과의 마찰을 일으키며 대전을 떠난 고종수 수원삼성 코치를 대전시티즌의 사령탑으로 선임하고 심지어는 연령별 유소년팀 지도자들이 능력과 인성 모든 면에서 낙제점인 전 감독 후보 이기범과 대표이사, 감독 라인으로 교체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촌극이 벌어지는 배경에는 전문성은커녕 축구에 애정조차 없는 대전시 공무원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환부는 이미 곪아 터졌지만, 적폐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패배가 익숙해지고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질수록 과거의 폐단들은 최소한의 상식조차 잊은 채 버젓이 구단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득을 볼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불편해할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방향대로 대전시티즌이 또 새해를 맞이한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희망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다음엔 구단의 존폐를 입에 올려야 할지 모릅니다. 변화가 없다면 절망은 예정대로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대전 팬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든 시티즌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의 참여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중지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모든 대전 팬들이 함께 모여서 힘을 합치자고 감히 제안 드립니다. 정상화 방안을 모색하고 논의합시다. 대전시티즌 정상화를 위하여 다양한 방안들에 대한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구단운영에 간섭하여 현 상태를 만든 대전시문체부 담당자들에 대한 법적 대응, 사장의 퇴진운동, 유소년 문제 등 팀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안들을 함께 논의합시다. 누구든 좋습니다. 어디라도 좋습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 두 단체에서 시작하여 진행하지만 퍼플크루와 일반 팬들의 동참 역시 부탁드립니다.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은 모임 개최를 맡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모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필요한 집행 및 운영 조직 구성은 참여하신 모임이나 팬들 중에서 선출, 지원을 통해 이뤄지길 바랍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은 모임의 참여자로서 함께 해나가겠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대전시티즌 모든 팬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현 추진 중인 모임의 가칭은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로 정한 상황입니다. 이 글을 확인하시는 어떠한 커뮤니티나 SNS상에라도 댓글로 관심을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심이 모아진다면 추후 다시 공지하여 오프라인 모임을 빠른 시일 내로 개최하도록 하겠습니다. (EX. 모인다면 참석하고 싶다. 나의 의견은 어떻다. 한다면 언제 어디서 하는 게 좋겠다. 등등의 답글을 남겨주세요) 이 모임에 대해 고견이 있으시거나, 지난 김호 감독체제에서의 어떤 한 부정한 일이라도 알고 계시다면 fdt.taejon@gmail.com 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단결합시다! 우리들의 팀을 지키기 위해! 대저니스타, 대전의아들 일동 ” 또 업친데 덥친격으로 대전시티즌 구단이 새롭게 꾸려가는 과정에서 새 사무국장 내정설이 돈 것은 물론 사무국장 신규 채용공고를 특정 구인사이트에만 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었다.[10] 12월 16일 김진규가 은퇴를 선언하고 광주 FC 코치로 부임한다고 보도되었으나,[11] 이에 김진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코치 부임설을 일축하였다.[12] 12월 19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FA 취득 선수 명단을 공지하였으며, 대전은 김해식, 김태봉, 김태은, 이현승, 황지웅, 문진용 김기용, 김성수, 조상범 총 9명의 선수가 취득하였으며, 그 중 황지웅과 김태봉, 김해식 FA 보상금이 발생하게 된다. 12월 22일 브라질 용병 페드루 엔히키 지 산타나 아우메이다를 영입하였다.[13] 하지만 영입 과정에서 선수의 나이를 잘못 보도하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14] 12월 26일 우선지명과 자유선발로 김세윤과 이지솔, 문용휘를 영입하였다.[15] 12월 27일 우선지명으로 KC대학교의 공격수 유해성을 영입하였다.[16] 12월 29일 포항 스틸러스로부터 골키퍼 김진영을 영입하였다.[17] 12월 31일 부천 FC 1995로부터 올림픽 대표팀 수비수 고명석을 영입하였다.[18] 2018년 1월 2일 이영창이 자신의 SNS를 통해 부천 FC 1995 이적을 밝혔다. 1월 3일 김태은과 이현승이 각각 대전 입단 전 소속팀이였던 부천 FC와 서울 이랜드에 재입단하였으며,[19][20] 이영익 前 감독은 경남 FC의 수석 코치로 재부임하였다.[21] 1월 4일 성남 FC로부터 외국인 공격수 필리프 흘로호우스키를 영입하였다.[22] 1월 5일 골키퍼 전수현이 FC 안양으로 이적하였다.[23] 1월 5일 김호 사장이 대전에서 2018시즌까지 뛰는 것으로 계약을 연장했던 브루노에게 방출 통보를 날리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면서 이에 브루노 측은 FIFA의 선수 보호 규정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라며 반발해 FIFA에 제소를 비롯해 계약된 올 시즌까지의 잔여 연봉을 요구할 것임을 밝히면서 논란이 일었다.[24] 1월 8일 제주 유나이티드와 수원 삼성, 강원 FC로부터 박수창과 고민성, 백종환을 영입하였다.[25][26] 1월 9일 조상범이 자유 계약으로 수원 FC로 이적하였으며,[27] 전남 드래곤즈에서 임민혁과 김성주를 임대로, 대구 FC에서 조귀범을 자유 계약으로 영입하였다.[28] 1월 11일 대전 시티즌 주장 출신 안상현을 성남 FC로부터 장준영과 트레이드로 재영입하였으며,[29]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트레이드도 감행하여 이호석을 내주고 박명수를 영입하였다.[30] 1월 12일 성남 FC로부터 오장은과 안재준을 영입하였다.[31] 광주 FC 코치 부임설이 나돌던 김진규가 은퇴를 선언하고 오산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하였었다. 1월 15일 신갈고등학교 출신 신인 안주형과 김성익을 영입하였다.[32] 1월 18일 김승섭, 강수병 등 신인 선수 7명에 이준호, 강한빛 등 K3리그 출신 선수까지 총 9명을 영입하였지만,[33] 50명 넘는 수준의 지나치게 큰 선수단 규모로 팬들의 우려를 낳았으며, 또한 일부 선수들에게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계약 해지를 강요하고 숙소 입소와 훈련 등에 배재하면서 7,8명의 대전 선수들이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에 제소를 하면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34] 2018시즌 팀의 주장으로는 오장은, 부주장으로는 안상현이 선임되었다.[35]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으로 지난해 반년간 임대를 떠났던 김정주가 강릉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36] 2월 9일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가 대전시티즌 정상화 추진위윈회로 단체명을 변경하고 김호와 고종수의 과거 사건을 비롯한 논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소명 요청서를 서면으로 제출하며 본격적으로 단체 행동에 돌입하였다.[37][38] 김해식과 황지웅이 자유 계약으로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39] 2월 15일, 구단 측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논란이 있었던 브루노가 결국 FC 안양으로 이적했다.[40] 대전 시티즌이 팀의 2군 감독인 이기범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를 영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일었다.[41] 시즌 전반기[편집] 3월 3일 부천 FC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대전은 윌리앙 포프에게 선취골을 허용했지만, 이후 프리킥에서 윤준성이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지만, 후반 막판 집중력과 체력 저하의 한계를 드러내며 추가골을 허용, 1:2로 패했다.[42] 한편 이날 경기에서 대전팬들은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수원 레전드", "간담회를 개최하라" "이런 팀을 응원할 수 없다." 등의 김호를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도 내걸었다.[43] 이기범 2군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가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44] 3월 7일 분데스리가 TSG 1899 호펜하임으로부터 박인혁을 영입하였다.[45] 3월 11일 안산 그리너스 FC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상대가 2명이나 퇴장당했음에도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하면서 후반 막판 극장골을 허용, 2:3로 패하며 리그 2연패를 기록하였다.[46] 3월 17일 분요드코르로부터 미드필더 쇼흐루흐 가도예프를 영입하였다.[47] 3월 18일 서울 이랜드와의 홈경기에서 대전은 상대가 2명이나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페드로의 패널티킥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면서 고종수 감독은 데뷔승을 거두었다.[48] 한편 이날 경기 역시 대전 팬들은 3경기 연속으로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대전 구단을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었다.[49] 3월 25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홈경기에서 대전은 골키퍼 김진영이 퇴장당하는 수적 열세 속에 1:0 패배를 거두었다.[50] 3월 28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성남 FC와의 FA컵 3라운드 경기서 대전은 무랄랴에게 선취골을 실점하며 1:0 패배, FA컵에서 탈락했다.[51] 3월 30일 루마니아 국적의 아우렐리안 키추를 영입하였다.[52] 4월 1일 광주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상대가 1명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쇼흐루흐 가도예프의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었다.[53] 4월 7일 FC 안양과의 원정 경기에서 대전은 전반에 선취골을 허용했지만, 이후 상대가 1명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박수창의 골을 앞세워 1:1 무승부를 거두었다.[54] 4월 14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홈경기서 대전은 아산과 팽팽히 맞섰고, 김승섭이 프로 데뷔골까지 성공시켰지만 2:1로 패했다.[55] 한편 이날 경기 종료 후에는 김호 대표 이사가 심판에게 욕설을 퍼붙고 심판실에 난입해 고성을 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논란이 일었고,[56] 대전 구단은 제재금 2000만원 징계를 받게 되었다. 4월 21일 성남 FC와의 홈경기서 대전은 전반에 패널티킥을 내주며 끌려갔지만, 후반 들어 키쭈가 K리그 데뷔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지만, 후반 막판 패스 미스를 범하며 추가골을 내주면서 2:1로 패했다.[57] 한편 이날 경기에서는 대전 팬들이 김호의 2000만원 제재금 징계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의 옷을 입으며 대전 구단의 혈세 낭비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58] 4월 29일 수원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후반들어 박재우의 2어시스트를 바탕으로 한 박인혁과 쇼흐루흐 가도예프의 골을 앞세워 2:1 승리를 거두었다.[59] 5월 12일 FC 안양과의 홈 경기서 대전은 가도에프의 멀티골과 키쭈의 골을 앞세워 3:2 승리를 거두며 시즌 첫 연승을 거두었다.[60] 5월 19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김진영의 슈퍼 세이브와 안상현의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기록, 3연승을 거두었다.[61] 여름 이적시장[편집] 5월 부진한 활약을 보여주던 페드로가 대전 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시즌 후반기[편집] 경기 결과[편집] K리그2[편집] 1 2018년 3월 3일 대전 시티즌 1:2 부천 FC 1995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윤준성  34' 포프  13' 공민현  85' 관중 수: 2,172 심판: 서동진 MVP: 공민현 2 2018년 3월 11일 안산 그리너스 FC 3:2 대전 시티즌 안산와~스타디움   15:00 이건  11' 박준희  66' 장혁진  90' 박수창  9' (PK) 세쿠 코네  52' (OG) 관중 수: 5,532 3 2018년 3월 18일 대전 시티즌 1:0 서울 이랜드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페드로  76' (PK) 관중 수: 1,158 심판: 김영수 4 2018년 3월 25일 대전 시티즌 0:1 부산 아이파크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이동준  10' 관중 수: 1,197 심판: 최영호 5 2018년 4월 1일 광주 FC 0:1 대전 시티즌 광주월드컵경기장   15:00 가도에프  61' 관중 수: 874 6 2018년 4월 7일 FC 안양 1:1 대전 시티즌 안양종합운동장   15:00 정희웅  19' 박수창  83' 관중 수: 405 7 2018년 4월 14일 대전 시티즌 1:2 아산 무궁화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김승섭  32' 김민균  22' 허범산  82' 관중 수: 418 8 2018년 4월 21일 대전 시티즌 1:2 성남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정성민  26' (PK)서보민  86' 키쭈  57' 관중 수: 587 9 2018년 4월 29일 수원 FC 1:2 대전 시티즌 수원종합운동장   16:00 마테우스  90+4' 박인혁  48'가도에프  53' 관중 수: 2,375 10 2018년 5월 12일 대전 시티즌 3:2 FC 안양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가도에프  29',  49'키쭈  45+1' 알렉스  46',  90+2' (PK) 관중 수: 956 11 2018년 5월 19일 아산 무궁화 FC 0:1 대전 시티즌 이순신종합운동장   19:00 안상현  49' 관중 수: 1,427 12 2018년 5월 26일 성남 FC v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9:00 13 2018년 6월 3일 대전 시티즌 v 광주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14 2018년 6월 6일 대전 시티즌 v 안산 그리너스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15 2018년 6월 9일 부천 FC 1995 0:2 대전 시티즌 부천종합운동장   19:00 박인혁01' 박인혁41' 관중 수: 1,082 MVP: 박인혁 16 2018년 7월 1일 부산 아이파크 v 대전 시티즌 구덕종합운동장   19:00 17 2018년 7월 9일 대전 시티즌 v 수원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18 2018년 7월 14일 아산 무궁화 FC v 대전 시티즌 이순신종합운동장   19:00 19 2018년 7월 22일 대전 시티즌 v 성남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0 2018년 7월 28일 서울 이랜드 v 대전 시티즌 잠실올림픽주경기장   19:00 21 2018년 8월 4일 대전 시티즌 v 광주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2 2018년 8월 11일 FC 안양 v 대전 시티즌 안양종합운동장   19:00 23 2018년 8월 15일 서울 이랜드 v 대전 시티즌 잠실올림픽주경기장   19:00 24 2018년 8월 20일 부천 FC 1995 v 대전 시티즌 부천종합운동장   19:30 25 2018년 8월 26일 대전 시티즌 v 안산 그리너스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6 2018년 9월 3일 대전 시티즌 v 수원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27 2018년 9월 8일 부산 아이파크 v 대전 시티즌 구덕종합운동장   19:00 28 2018년 9월 15일 대전 시티즌 v 서울 이랜드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9 2018년 9월 23일 광주 FC v 대전 시티즌 광주월드컵경기장   15:00 30 2018년 9월 29일 안산 그리너스 FC v 대전 시티즌 안산와~스타디움   15:00 31 2018년 10월 6일 대전 시티즌 v 아산 무궁화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2 2018년 10월 13일 수원 FC v 대전 시티즌 수원종합운동장   15:00 33 2018년 10월 21일 대전 시티즌 v 부산 아이파크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4 2018년 10월 27일 성남 FC v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5:00 35 2018년 11월 3일 대전 시티즌 v 부천 FC 1995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6 2018년 11월 11일 대전 시티즌 v FC 안양 대전월드컵경기장   14:00 FA컵[편집] 3라운드 2018년 3월 28일 성남 FC 1:0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9:30 무랄랴  56' 관중 수: 885 심판: 송민석 친선 경기[편집] 선수단[편집] 선수 명단[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번호 국적 이름 입단 연도 전 소속팀 군대 골키퍼 1 김진영 2018 포항 스틸러스 미필 31 문용휘 2018 신인 미필 36 임민혁 2018 전남 드래곤즈 미필 62 한호동 2018 더스파구사쓰 군마 미필 90 박주원 2013[62] 신인 군필 92 박준혁 2018 성남 FC 군필 수비수 2 김예성 2018 신인 미필 3 황재훈 2018 수원 FC 군필 4 윤준성 2015[63] 포항 스틸러스 군필 5 권영호 2018 후지에다 MYFC 미필 6 안재준 2018 성남 FC 군필 15 조귀범 2018 대구 FC 미필 22 윤신영 2017 레노파 야마구치 군필 23 전상훈 2017 경남 FC 군필 24 황재원 2018 대구 FC 면제 25 고명석 2018 부천 FC 1995 미필 26 박재우 2015 신인 미필 34 박명수 2018 인천 유나이티드 미필 35 조태근 2018 이스턴 SC 면제 38 장원석 2017 제주 유나이티드 군필 44 이지솔 2018 신인 미필 48 강수병 2018 신인 미필 51 윤경보 2018 신인 미필 52 황재정 2017 신인 미필 57 김성훈 2018 신인 미필 66 박수일 2018 김해시청 미필 77 백종환 2018 강원 FC 군필 미드필더 7 오장은 2018 성남 FC 면제 13 신학영 2017 경남 FC 미필 17 고민성 2018 수원 삼성 블루윙즈 미필 20 안상현 2018 성남 FC 군필 27 키쭈 2018 FC 비토룰 콘스탄차 해당 없음 28 김민성 2018 신인 미필 30 가도예프 2018 분요드코르 해당 없음 39 조예찬 2016[64]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미필 41 강윤성 2018 신인 미필 42 공용훈 2017[65] 김해시청 미필 46 김성익 2018 신인 미필 49 박태현 2018 서울 유나이티드 미필 96 황인범 2015[66] 신인 군필[67] 공격수 8 박수창 2018 제주 유나이티드 군필 9 뚜르스노프 2018 분요드코르 해당 없음 11 김승섭 2018 신인 미필 12 강한빛 2018 화성 FC 미필 14 유해성 2018 신인 미필 16 박대훈 2016 신인 미필 19 김찬희 2017 포천 시민축구단 군필 32 유진석 2018 포천 시민축구단 미필 33 김성주 2018 전남 드래곤즈 미필 40 남윤재 2015[68]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미필 43 김세윤 2018 신인 미필 45 안주형 2018 신인 미필 50 이준호 2018 청주City FC 미필 53 임준식 2016 신인 미필 54 안동민 2018 신인 미필 64 박인혁 2018 TSG 1899 호펜하임 미필 65 송인학 2018 신인 미필 88 이건철 2018 제주 유나이티드 미필 시즌 중 이적 9 정민우 2017 수원 FC 미필 10 필립 2018 성남 FC 해당 없음 55 이지호 2018 신인 미필 56 서정호 2018 신인 미필 91 페드로 2018 ACS 폴리 티미쇼아라 해당 없음 2018 시즌 종료 당시 기준 영구 결번[편집]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헌정 기간 18 FW 김은중 18년 (2016-2034) 21 GK 최은성 21년 (2012-2033) 코칭스태프[편집] 프로팀[편집] 직위 이름 부임연도 구단주 허태정 2018 대표 이사 김호 2018 사무국장 권헌규 2018 감독 고종수 2018 수석 코치 김진우 2018 스카우트 김영근 2014 박철 2017 이정래[69] 2018 2군 감독 이기범 2018 2군 코치 황연석 2018 피지컬 코치 디노 2018 선수 이적[편집] 영입[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적 구단 이적 유형 이적 시기 1 김정주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2 남윤재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3 조예찬 M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4 공용훈 MF 김해시청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5 페드로 FW ACS 폴리 티미쇼아라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6 김진영 GK 포항 스틸러스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7 고명석 DF 부천 FC 1995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8 필립 D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9 박수창 MF 제주 유나이티드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0 고민성 MF 수원 삼성 임대 겨울 이적시장 11 백종환 DF 강원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2 조귀범 FW 대구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3 임민혁 GK 전남 드래곤즈 임대 겨울 이적시장 14 김성주 MF 전남 드래곤즈 임대 겨울 이적시장 15 안상현 MF 성남 FC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6 박명수 DF 인천 유나이티드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7 오장은 M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8 안재준 D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9 강한빛 FW 화성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0 이준호 MF 청주City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1 유진석 FW 포천 시민축구단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2 박태현 DF 서울 유나이티드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3 조태근 DF 이스턴 S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4 권영호 DF 후지에다 MY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5 한호동 GK 더스파구사쓰 군마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6 박인혁 FW TSG 1899 호펜하임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7 가도에프 MF 분요드코르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8 키쭈 MF FC 비토룰 콘스탄차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9 박준혁 GK 성남 FC 자유 게약 여름 이적시장 30 이건철 FW 제주 유나이티드 임대 여름 이적시장 31 뚜르느소프 MF 알카라이티야트 SC 완전 영입 여름 이적시장 신인[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전 구단 지명 유형 비고 1 김세윤 FW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2 최재원 GK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3 이태극 D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4 변승환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5 고범준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6 박지호 FW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7 홍유진 D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8 김현진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9 이지솔 DF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0 문용휘 GK 용인대학교 자유 선발 11 유해성 FW KC대학교 자유 선발 12 안주형 FW 신갈고등학교 자유 선발 13 김성익 MF 신갈고등학교 자유 선발 14 김승엽 FW 경희대학교 자유 선발 15 강수병 DF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6 김민성 FW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7 윤경보 DF 호남대학교 자유 선발 18 김예성 DF 광주대학교 자유 선발 19 안동민 Fw 신평고등학교 자유 선발 20 이지호 Fw 예원예술대학교 자유 선발 방출[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적 구단 이적 유형 이적 시기 1 레반 FW AFC 튀비즈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2 이영창 GK 부천 FC 1995 완전 이적 겨울 이적시장 3 김태은 DF 서울 이랜드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4 이현승 FW 부천 FC 1995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5 김태봉 D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6 김해식 D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7 김기용 GK 화성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8 조상범 MF 수원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9 황지웅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0 문진용 DF 강릉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1 김성수 MF 청주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2 크리스찬 FW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3 김진규 DF 은퇴 겨울 이적시장 14 전수현 GK FC 안양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5 장준영 DF 성남 FC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6 이호석 FW 인천 유나이티드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7 김정주 FW 강릉시청 완전 이적 겨울 이적시장 18 김대열 MF 천안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9 브루노 FW FC 안양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0 박우정 DF 강릉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1 페드로 FW 사나트 나프트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2 정민우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완전 이적 여름 이적시장 23 서정호 FW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4 한의권 FW 수원 삼성 블루윙즈 완전 이적 여름 이적시장 25 이지호 FW 제주 유나이티드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6 필립 FW FO ŽP 슈포르트 포드브레조바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임대 및 군입대[편집] # 이름 포지션 임대 구단 이적 시기 임대 기간 1 박주원 GK 아산 무궁화 겨울 이적시장 21개월 2 황인범 MF 아산 무궁화 겨울 이적시장 21개월 관련 항목[편집] 대전 시티즌 각주[편집] ↑ 대전광역시장 권한대행 ↑ “대전시티즌 김호 사장, K 씨와 '유착'”. 대전 뉴스. 2017년 12월 18일.  ↑ 구창민 (2017년 11월 6일). “김호 대전시티즌 대표이사 취임, 지역축구계 우려 빗발”. 중도일보.  ↑ 한준 (2017년 11월 1일). “대전 시티즌, ‘전설’ 김호 대표이사 내정…감독은 이기범”. SPOTV NEWS.  ↑ 윤희섭 (2017년 11월 8일). “팬들 “대전시티즌 감독선임 소통해야”… 이기범 신갈고 감독 하마평”. 충청투데이.  ↑ “권선택 역대 대전시장 가운데 '최초' 중도 낙마”. MBN 뉴스. 2017년 11월 14일.  ↑ 박찬준 (2017년 11월 24일). “고종수, 대전 감독 내정 '김호 대표와 8년만의 재회'”. 스포츠조선.  ↑ 김진엽 (2017년 12월 1일). “고종수 취임식, 고종수 감독, “대전 클래식 승격이 최우선 목표”. 스포탈코리아.  ↑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 ↑ 윤희섭 (2017년 12월 6일). “대전시티즌 사무국장 채용문제 ‘시끌’”. 충청투데이.  ↑ 남장현 (2017년 12월 16일). “광주FC, 박진섭 감독-김진규 코치 확정…코치진 인선완료!”. 스포츠동아.  ↑ 김현회 (2017년 12월 16일). “‘광주 코치설’ 김진규, “처음 듣는 이야기… 현역 이어가고파”!”. 스포츠니어스.  ↑ 이상필 (2017년 12월 22일). “대전시티즌, 브라질 공격수 페드로 영입”. 스포츠 투데이.  ↑ 서동영 (2017년 12월 22일). “새 외국인선수 나이도 틀리게 발표한 대전”. 축구저널.  ↑ 김우종 (2017년 12월 26일). “'고종수호' 대전, 미래 밝힐 김세윤·이지솔·문용휘 영입”. 스타뉴스.  ↑ 박수진 (2017년 12월 27일). “'고종수호' 대전, 신인 FW 유해성 추가 영입”. 스타뉴스.  ↑ 김우종 (2017년 12월 29일). “'고종수호' 대전, '前포항 195cm GK' 김진영 영입”. 스타뉴스.  ↑ 이균재 (2017년 12월 31일). “대전, 중앙 수비수 고명석 영입”. OSEN.  ↑ 김성진 (2018년 1월 3일). “이현승, 3년 만에 부천 재입단”. 스포탈코리아.  ↑ 박상경 (2018년 1월 3일). “서울 이랜드, DF 김태은 재영입”. 스포츠조선.  ↑ 정성인 (2018년 1월 3일). “경남FC, 클래식 걸맞게 코치 구성도 탄탄하게”. 경남도민일보.  ↑ 박수진 (2018년 1월 4일). “'고종수호' 대전, 슬로바키아 출신 FW 홀로홉스키 영입”. 스타뉴스.  ↑ 송치훈 (2018년 1월 5일). “FC안양, 대전서 GK 전수현 FA 영입”. 스포츠동아.  ↑ 김호 사장의 독불장군식 운영, 혈세 낭비 자초 ↑ 이균재 (2018년 1월 8일). “대전, 미드필더 박수창-고민성 영입”. OSEN.  ↑ 윤승재 (2018년 1월 8일). “베테랑 수비수 백종환, 고종수 품에 안겼다”. STN.  ↑ 박주성 (2018년 1월 9일). “수원FC, 대전서 멀티 플레이어 조상범 영입”. 인터풋볼.  ↑ 김달호 (2018년 1월 9일). “대전시티즌, 임민혁·김성주 임대, 조귀범 영입”. 대전일보.  ↑ 이균재 (2018년 1월 11일). “대전, 트레이드로 베테랑 MF 안상현 영입”. OSEN.  ↑ “인천UTD, 측면 공격수 이호석 영입…박명수와 맞트레이드”. 인천유나이티드. 2018년 1월 11일.  ↑ 윤승재 (2018년 1월 12일). “'베테랑 폭풍 영입' 대전, 오장은-안재준 영입”. STN.  ↑ 이형주 (2018년 1월 15일). “'고종수호' 대전, 박명수‧김성익‧안주형 영입”. STN.  ↑ 송치훈 (2018년 1월 18일). “대전시티즌, 2018시즌 신인선수 9명 영입”. 스포츠동아.  ↑ 박찬준 (2018년 1월 19일). “'김 호-고종수 체제' 대전, 이번엔 선수계약 문제로 '구설'”. 스포츠조선.  ↑ 김유미 (2018년 1월 22일). “대전 시티즌, 2018시즌 주장 오장은·부주장 안상현”. 베스트일레븐.  ↑ 장영우 (2018년 1월 23일). “전력보강 강릉시청 새 시즌 키워드는 '명예회복'”. 한국실업축구연맹.  ↑ 금상진 (2018년 2월 8일). “대전시티즌 팬 본격 단체행동 돌입, 시티즌 정상화 요구”. 중도일보.  ↑ 지상현 (2018년 2월 9일). “대전시티즌 팬들, 김호향해 11대 의혹 해명요구”. 디트뉴스.  ↑ 장영우 (2018년 2월 9일). ““2018시즌 기대하세요!” 8개 구단 2차 전지훈련 한창”. 내셔널리그.  ↑ 김진엽 (2018년 2월 15일). “FC안양, 대전시티즌에서 브라질 FW 브루노 영입”. 스포탈코리아.  ↑ 대전시티즌, 감독 아들과 계약 ↑ 승격 노리는 부천, 끈적한 고종수의 대전보다 강했다 ↑ 대전시티즌 팬들, 개막전 '현수막 게릴라 시위' ↑ 대전시티즌, 감독 아들과 계약 ↑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382&aid=0000630126 대전시티즌, 분데스리가 호펜하임 출신 공격수 박인혁 영입 ↑ 대전시티즌 9명이 싸운 안산에 2-3역전패 ↑ 대전시티즌, 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 출신 MF 가도에프 영입 ↑ '초보 사령탑' 고종수 대전 시티즌 감독, 2연패 끝 첫 승 ↑ 성난 대전시티즌 팬들, 3경기째 게릴라 시위 ↑ 대전시티즌 부산에 아쉬운 0-1패배, 2연승 실패 ↑ '대전 격파' 성남, 166일만에 짜릿한 홈 승리 ↑ 대전 시티즌, 루마니아 출신 미드필더 키쭈 영입 ↑ 대전, 광주 원정서 1-0 승… 6위로 상승 ↑ 대전시티즌 안양과 1-1무승부, 승점1점 추가로 리그5위로 올라 ↑ 대전시티즌 강팀 아산에 잘 싸웠으나 1-2 아쉬운 패배 ↑ 김호 대표, 심판 대기실 난입 밀치고.폭언… 축구 원로의 막무가내 판정 불복 ↑ 집중력 부족했던 대전시티즌, 성남에 1-2패배 ↑ ‘김호 사퇴’ 외치는 대전 서포터스 ↑ 대전시티즌, 박인혁 데뷔골로 수원FC 2-1로 제압 ↑ 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8051216474308&section_code=10&cp=se&gomb=1 '가도에프 2골' 대전, 안양에 3-2 승...시즌 첫 연승] ↑ '안상현 결승골' 대전, 아산에 1-0 승...3연승+5위 등극 ↑ 군 복무 기간 제외 ↑ 군 복무 기간 제외 ↑ 임대 기간 제외 ↑ 임대 기간 제외 ↑ 군 복무 기간 제외 ↑ 2018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에 따른 조기 전역 ↑ 임대 기간 제외 ↑ 공식 직함은 스카우트지만 사실상 골키퍼 코치 역할 수행 vdeh대전 시티즌 창단: 1997년 연고: 대전광역시 구단 역사 선수 감독 유소년클럽 U-18 U-15 U-12 시즌 통계 현재 시즌 홈 구장 한밭종합운동장 (1997년~2002년) 대전월드컵경기장 (2001년~현재) 훈련장 덕암축구센터 친선경기 It's Daejeon 축구대회 미디어 CMB 대전방송 관련 항목 대전광역시 퍼플 크루 대저니스타 시즌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영구결번 18-김은중 21-최은성 우승 K리그 챌린지 2014 FA컵 2001 웹사이트: dcfc.co.kr vdeh 2018년 대한민국 축구 « 2017 2019 » 국내 리그 K리그 K리그1 (경기 결과) K리그2 R리그 승강PO 이적시장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K3리그 어드밴스 K3리그 베이직 WK리그 국내 컵 FA컵 결승전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챌린저스 컵 유소년 대학 리그 K리그 주니어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고등 중등 초등 아시안 대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결선 토너먼트 결승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풋살FK리그 (2016-17  · 2017-18)  · FK컵클럽 시즌K리그 클래식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광주 FC 대전 시티즌 부산 아이파크 부천 FC 1995 서울 이랜드 FC 성남 FC 수원 FC 아산 경찰청 안산 그리너스 FC FC 안양 대한민국 축구 협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전_시티즌_2018_시즌&oldid=24193130" 분류: 대전 시티즌 시즌대한민국 축구단 2018 시즌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7: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대전 시티즌 2018 시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전 시티즌 2018 시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전 시티즌 2018 시즌연고지 대전광역시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구단주 이재관[1] (~6/30) 허태정 (7/2~)사장 김호감독 고종수K리그 챌린지 4위 최다득점자 리그: 키쭈 (11골)시즌: 키쭈 (11골) 홈 유니폼 원정 유니폼 ← 2017 2019 → 대전 시티즌 2018 시즌은 대전의 21번째 시즌이자 K리그2에서는 4번째 시즌이다. 대표이사로 과거 팀의 감독이였던 김호가 선임되었고, 원래는 이기범 감독이 대전의 제 11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면서 고종수 감독이 대전의 11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목차 1 전지 훈련 2 정규 시즌 2.1 겨울 이적시장 (시즌 전) 2.2 시즌 전반기 2.3 여름 이적시장 2.4 시즌 후반기 3 경기 결과 3.1 K리그2 3.2 FA컵 3.3 친선 경기 4 선수단 4.1 선수 명단 4.2 현재 선수 명단 4.3 영구 결번 4.4 코칭스태프 4.5 프로팀 5 선수 이적 5.1 영입 5.2 신인 5.3 방출 5.4 임대 및 군입대 6 관련 항목 7 각주 전지 훈련[편집] 대전 시티즌은 1월 2일부터1월 12일까지 경상남도 통영시로 1차 전지훈련을 떠났으며,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터키 안탈리아로 2차 전지훈련을 떠났고, 2월 11일부터 2월 24일까지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3차 전지훈련을 가졌다. 하지만 전지훈련 용역업체 선정 공고를 통해 선정한 용역업체가 김호 대표 이사의 측근인 K씨가 운영하는 AI스포츠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었다.[2] 또한 2차 전지훈련의 경우 33명만이 터키로 떠났고, 20명은 경남 창녕군에서 훈련 했다. 정규 시즌[편집] 겨울 이적시장 (시즌 전)[편집] 2017년 11월 1일 김호 前 대전 시티즌 감독을 윤정섭 대표 이사의 후임 대표 이사로 선임하였으나 과거 대전 감독 시절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퇴진했고, 최근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있던 인물인 김호의 대표 이사 선임에 많은 팬들이 반발하였으며,[3] 김호 대표 이사와 함께 용인시축구센터 출신인 이기범 신갈고등학교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내정하였지만,[4] 이기범 역시 김호와 마찬가지로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있었고, 프로팀 감독 경력이 전무한 사람일 뿐더러 팬들의 그 어떤 동의없이 이루어진 선임이라는 이유로 감독 선임 문제 역시 팬들의 반발을 샀다.[5] 구단주이자 대전광역시장인 권선택 시장이 시장직을 상실하면서 이재관 시장 권한대행이 대전 시티즌의 구단주 대행이 되었다.[6] 2017년 11월 24일 이기범 감독 선임을 철회하고 前 대전 구단의 선수였던 고종수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였으나,[7] 하지만 이기범이건 고종수건 둘 다 김호의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고종수 선임 역시 김호가 자기 자신의 말을 잘들을 자기 사람 심기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아무래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기범보다는 선수 시절 활약이나 이름값이 훨씬 높은 고종수를 선임하면서 이기범 감독 선임으로 좋지 못했던 여론을 무마하려고 하던 것이 아니냐며 팬들로부터 비난을 샀다. 12월 1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취임식을 통해 고종수 감독이 공식 취임하였으며,[8] 자신을 보좌할 수석 코치로는 과거 수원 삼성 시절 동료있던 김진우 코치를 내정했는데, 이를 두고 대전팬들은 지나치게 많은 수원 삼성 출신 인물들이 대전 구단에서 자리잡는 것이 아니냐며 반발하였으며, 결국 불만을 참지 못한 대전팬들이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는 사태로 까지 이르렀다.[9] “ 대전시티즌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저니스타, 대전의아들 대표해 글을 올립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과 같은 시기를 지내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리그 순위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서로에게 예의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졌지만 잘 싸웠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홈경기가 열리는 날 경기장에는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활기가 돌지 않습니다. 그렇게 패배는 우리의 일상에 너무 익숙하게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은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믿어야만 했습니다. 더 내려갈 데가 없으니 남은 건 다시 올라갈 일뿐이라고. 우린 안 될 거야, 라며 비관론을 입에 올리던 사람들에게 한 방 먹여줄 날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때마다 기대는 늘 실망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기존의 실망과는 차원이 다른 절망이 이미 다음 시즌을 예약해 놓고 있습니다. 새로운 감독에 대한 소식과 사장선임에 대한 뉴스는 저희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내년엔 올해보다는 나아지리라는 관성적인 희망조차 사치가 돼가고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 대전시티즌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최악의 상황입니다. 구단은 성적 부진과, 프런트와의 마찰, 특정 에이전트와의 유착 의혹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김호 전 감독을 지난달 대전시티즌 대표이사로 선임했습니다. 그가 대전시티즌의 사령탑으로 있던 시절 팀이 어떤 모습으로 추락했는지 우리는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프로감독 경력이 전무하고 구단과의 마찰을 일으키며 대전을 떠난 고종수 수원삼성 코치를 대전시티즌의 사령탑으로 선임하고 심지어는 연령별 유소년팀 지도자들이 능력과 인성 모든 면에서 낙제점인 전 감독 후보 이기범과 대표이사, 감독 라인으로 교체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촌극이 벌어지는 배경에는 전문성은커녕 축구에 애정조차 없는 대전시 공무원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환부는 이미 곪아 터졌지만, 적폐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패배가 익숙해지고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질수록 과거의 폐단들은 최소한의 상식조차 잊은 채 버젓이 구단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득을 볼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불편해할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방향대로 대전시티즌이 또 새해를 맞이한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희망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다음엔 구단의 존폐를 입에 올려야 할지 모릅니다. 변화가 없다면 절망은 예정대로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대전 팬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든 시티즌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의 참여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중지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모든 대전 팬들이 함께 모여서 힘을 합치자고 감히 제안 드립니다. 정상화 방안을 모색하고 논의합시다. 대전시티즌 정상화를 위하여 다양한 방안들에 대한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구단운영에 간섭하여 현 상태를 만든 대전시문체부 담당자들에 대한 법적 대응, 사장의 퇴진운동, 유소년 문제 등 팀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안들을 함께 논의합시다. 누구든 좋습니다. 어디라도 좋습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 두 단체에서 시작하여 진행하지만 퍼플크루와 일반 팬들의 동참 역시 부탁드립니다.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은 모임 개최를 맡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모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필요한 집행 및 운영 조직 구성은 참여하신 모임이나 팬들 중에서 선출, 지원을 통해 이뤄지길 바랍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은 모임의 참여자로서 함께 해나가겠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대전시티즌 모든 팬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현 추진 중인 모임의 가칭은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로 정한 상황입니다. 이 글을 확인하시는 어떠한 커뮤니티나 SNS상에라도 댓글로 관심을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심이 모아진다면 추후 다시 공지하여 오프라인 모임을 빠른 시일 내로 개최하도록 하겠습니다. (EX. 모인다면 참석하고 싶다. 나의 의견은 어떻다. 한다면 언제 어디서 하는 게 좋겠다. 등등의 답글을 남겨주세요) 이 모임에 대해 고견이 있으시거나, 지난 김호 감독체제에서의 어떤 한 부정한 일이라도 알고 계시다면 fdt.taejon@gmail.com 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단결합시다! 우리들의 팀을 지키기 위해! 대저니스타, 대전의아들 일동 ” 또 업친데 덥친격으로 대전시티즌 구단이 새롭게 꾸려가는 과정에서 새 사무국장 내정설이 돈 것은 물론 사무국장 신규 채용공고를 특정 구인사이트에만 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었다.[10] 12월 16일 김진규가 은퇴를 선언하고 광주 FC 코치로 부임한다고 보도되었으나,[11] 이에 김진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코치 부임설을 일축하였다.[12] 12월 19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FA 취득 선수 명단을 공지하였으며, 대전은 김해식, 김태봉, 김태은, 이현승, 황지웅, 문진용 김기용, 김성수, 조상범 총 9명의 선수가 취득하였으며, 그 중 황지웅과 김태봉, 김해식 FA 보상금이 발생하게 된다. 12월 22일 브라질 용병 페드루 엔히키 지 산타나 아우메이다를 영입하였다.[13] 하지만 영입 과정에서 선수의 나이를 잘못 보도하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14] 12월 26일 우선지명과 자유선발로 김세윤과 이지솔, 문용휘를 영입하였다.[15] 12월 27일 우선지명으로 KC대학교의 공격수 유해성을 영입하였다.[16] 12월 29일 포항 스틸러스로부터 골키퍼 김진영을 영입하였다.[17] 12월 31일 부천 FC 1995로부터 올림픽 대표팀 수비수 고명석을 영입하였다.[18] 2018년 1월 2일 이영창이 자신의 SNS를 통해 부천 FC 1995 이적을 밝혔다. 1월 3일 김태은과 이현승이 각각 대전 입단 전 소속팀이였던 부천 FC와 서울 이랜드에 재입단하였으며,[19][20] 이영익 前 감독은 경남 FC의 수석 코치로 재부임하였다.[21] 1월 4일 성남 FC로부터 외국인 공격수 필리프 흘로호우스키를 영입하였다.[22] 1월 5일 골키퍼 전수현이 FC 안양으로 이적하였다.[23] 1월 5일 김호 사장이 대전에서 2018시즌까지 뛰는 것으로 계약을 연장했던 브루노에게 방출 통보를 날리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면서 이에 브루노 측은 FIFA의 선수 보호 규정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라며 반발해 FIFA에 제소를 비롯해 계약된 올 시즌까지의 잔여 연봉을 요구할 것임을 밝히면서 논란이 일었다.[24] 1월 8일 제주 유나이티드와 수원 삼성, 강원 FC로부터 박수창과 고민성, 백종환을 영입하였다.[25][26] 1월 9일 조상범이 자유 계약으로 수원 FC로 이적하였으며,[27] 전남 드래곤즈에서 임민혁과 김성주를 임대로, 대구 FC에서 조귀범을 자유 계약으로 영입하였다.[28] 1월 11일 대전 시티즌 주장 출신 안상현을 성남 FC로부터 장준영과 트레이드로 재영입하였으며,[29]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트레이드도 감행하여 이호석을 내주고 박명수를 영입하였다.[30] 1월 12일 성남 FC로부터 오장은과 안재준을 영입하였다.[31] 광주 FC 코치 부임설이 나돌던 김진규가 은퇴를 선언하고 오산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하였었다. 1월 15일 신갈고등학교 출신 신인 안주형과 김성익을 영입하였다.[32] 1월 18일 김승섭, 강수병 등 신인 선수 7명에 이준호, 강한빛 등 K3리그 출신 선수까지 총 9명을 영입하였지만,[33] 50명 넘는 수준의 지나치게 큰 선수단 규모로 팬들의 우려를 낳았으며, 또한 일부 선수들에게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계약 해지를 강요하고 숙소 입소와 훈련 등에 배재하면서 7,8명의 대전 선수들이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에 제소를 하면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34] 2018시즌 팀의 주장으로는 오장은, 부주장으로는 안상현이 선임되었다.[35]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으로 지난해 반년간 임대를 떠났던 김정주가 강릉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36] 2월 9일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가 대전시티즌 정상화 추진위윈회로 단체명을 변경하고 김호와 고종수의 과거 사건을 비롯한 논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소명 요청서를 서면으로 제출하며 본격적으로 단체 행동에 돌입하였다.[37][38] 김해식과 황지웅이 자유 계약으로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39] 2월 15일, 구단 측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논란이 있었던 브루노가 결국 FC 안양으로 이적했다.[40] 대전 시티즌이 팀의 2군 감독인 이기범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를 영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일었다.[41] 시즌 전반기[편집] 3월 3일 부천 FC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대전은 윌리앙 포프에게 선취골을 허용했지만, 이후 프리킥에서 윤준성이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지만, 후반 막판 집중력과 체력 저하의 한계를 드러내며 추가골을 허용, 1:2로 패했다.[42] 한편 이날 경기에서 대전팬들은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수원 레전드", "간담회를 개최하라" "이런 팀을 응원할 수 없다." 등의 김호를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도 내걸었다.[43] 이기범 2군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가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44] 3월 7일 분데스리가 TSG 1899 호펜하임으로부터 박인혁을 영입하였다.[45] 3월 11일 안산 그리너스 FC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상대가 2명이나 퇴장당했음에도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하면서 후반 막판 극장골을 허용, 2:3로 패하며 리그 2연패를 기록하였다.[46] 3월 17일 분요드코르로부터 미드필더 쇼흐루흐 가도예프를 영입하였다.[47] 3월 18일 서울 이랜드와의 홈경기에서 대전은 상대가 2명이나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페드로의 패널티킥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면서 고종수 감독은 데뷔승을 거두었다.[48] 한편 이날 경기 역시 대전 팬들은 3경기 연속으로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대전 구단을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었다.[49] 3월 25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홈경기에서 대전은 골키퍼 김진영이 퇴장당하는 수적 열세 속에 1:0 패배를 거두었다.[50] 3월 28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성남 FC와의 FA컵 3라운드 경기서 대전은 무랄랴에게 선취골을 실점하며 1:0 패배, FA컵에서 탈락했다.[51] 3월 30일 루마니아 국적의 아우렐리안 키추를 영입하였다.[52] 4월 1일 광주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상대가 1명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쇼흐루흐 가도예프의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었다.[53] 4월 7일 FC 안양과의 원정 경기에서 대전은 전반에 선취골을 허용했지만, 이후 상대가 1명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박수창의 골을 앞세워 1:1 무승부를 거두었다.[54] 4월 14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홈경기서 대전은 아산과 팽팽히 맞섰고, 김승섭이 프로 데뷔골까지 성공시켰지만 2:1로 패했다.[55] 한편 이날 경기 종료 후에는 김호 대표 이사가 심판에게 욕설을 퍼붙고 심판실에 난입해 고성을 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논란이 일었고,[56] 대전 구단은 제재금 2000만원 징계를 받게 되었다. 4월 21일 성남 FC와의 홈경기서 대전은 전반에 패널티킥을 내주며 끌려갔지만, 후반 들어 키쭈가 K리그 데뷔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지만, 후반 막판 패스 미스를 범하며 추가골을 내주면서 2:1로 패했다.[57] 한편 이날 경기에서는 대전 팬들이 김호의 2000만원 제재금 징계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의 옷을 입으며 대전 구단의 혈세 낭비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58] 4월 29일 수원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후반들어 박재우의 2어시스트를 바탕으로 한 박인혁과 쇼흐루흐 가도예프의 골을 앞세워 2:1 승리를 거두었다.[59] 5월 12일 FC 안양과의 홈 경기서 대전은 가도에프의 멀티골과 키쭈의 골을 앞세워 3:2 승리를 거두며 시즌 첫 연승을 거두었다.[60] 5월 19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김진영의 슈퍼 세이브와 안상현의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기록, 3연승을 거두었다.[61] 여름 이적시장[편집] 5월 부진한 활약을 보여주던 페드로가 대전 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시즌 후반기[편집] 경기 결과[편집] K리그2[편집] 1 2018년 3월 3일 대전 시티즌 1:2 부천 FC 1995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윤준성  34' 포프  13' 공민현  85' 관중 수: 2,172 심판: 서동진 MVP: 공민현 2 2018년 3월 11일 안산 그리너스 FC 3:2 대전 시티즌 안산와~스타디움   15:00 이건  11' 박준희  66' 장혁진  90' 박수창  9' (PK) 세쿠 코네  52' (OG) 관중 수: 5,532 3 2018년 3월 18일 대전 시티즌 1:0 서울 이랜드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페드로  76' (PK) 관중 수: 1,158 심판: 김영수 4 2018년 3월 25일 대전 시티즌 0:1 부산 아이파크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이동준  10' 관중 수: 1,197 심판: 최영호 5 2018년 4월 1일 광주 FC 0:1 대전 시티즌 광주월드컵경기장   15:00 가도에프  61' 관중 수: 874 6 2018년 4월 7일 FC 안양 1:1 대전 시티즌 안양종합운동장   15:00 정희웅  19' 박수창  83' 관중 수: 405 7 2018년 4월 14일 대전 시티즌 1:2 아산 무궁화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김승섭  32' 김민균  22' 허범산  82' 관중 수: 418 8 2018년 4월 21일 대전 시티즌 1:2 성남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정성민  26' (PK)서보민  86' 키쭈  57' 관중 수: 587 9 2018년 4월 29일 수원 FC 1:2 대전 시티즌 수원종합운동장   16:00 마테우스  90+4' 박인혁  48'가도에프  53' 관중 수: 2,375 10 2018년 5월 12일 대전 시티즌 3:2 FC 안양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가도에프  29',  49'키쭈  45+1' 알렉스  46',  90+2' (PK) 관중 수: 956 11 2018년 5월 19일 아산 무궁화 FC 0:1 대전 시티즌 이순신종합운동장   19:00 안상현  49' 관중 수: 1,427 12 2018년 5월 26일 성남 FC v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9:00 13 2018년 6월 3일 대전 시티즌 v 광주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14 2018년 6월 6일 대전 시티즌 v 안산 그리너스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15 2018년 6월 9일 부천 FC 1995 0:2 대전 시티즌 부천종합운동장   19:00 박인혁01' 박인혁41' 관중 수: 1,082 MVP: 박인혁 16 2018년 7월 1일 부산 아이파크 v 대전 시티즌 구덕종합운동장   19:00 17 2018년 7월 9일 대전 시티즌 v 수원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18 2018년 7월 14일 아산 무궁화 FC v 대전 시티즌 이순신종합운동장   19:00 19 2018년 7월 22일 대전 시티즌 v 성남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0 2018년 7월 28일 서울 이랜드 v 대전 시티즌 잠실올림픽주경기장   19:00 21 2018년 8월 4일 대전 시티즌 v 광주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2 2018년 8월 11일 FC 안양 v 대전 시티즌 안양종합운동장   19:00 23 2018년 8월 15일 서울 이랜드 v 대전 시티즌 잠실올림픽주경기장   19:00 24 2018년 8월 20일 부천 FC 1995 v 대전 시티즌 부천종합운동장   19:30 25 2018년 8월 26일 대전 시티즌 v 안산 그리너스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6 2018년 9월 3일 대전 시티즌 v 수원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27 2018년 9월 8일 부산 아이파크 v 대전 시티즌 구덕종합운동장   19:00 28 2018년 9월 15일 대전 시티즌 v 서울 이랜드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9 2018년 9월 23일 광주 FC v 대전 시티즌 광주월드컵경기장   15:00 30 2018년 9월 29일 안산 그리너스 FC v 대전 시티즌 안산와~스타디움   15:00 31 2018년 10월 6일 대전 시티즌 v 아산 무궁화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2 2018년 10월 13일 수원 FC v 대전 시티즌 수원종합운동장   15:00 33 2018년 10월 21일 대전 시티즌 v 부산 아이파크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4 2018년 10월 27일 성남 FC v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5:00 35 2018년 11월 3일 대전 시티즌 v 부천 FC 1995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6 2018년 11월 11일 대전 시티즌 v FC 안양 대전월드컵경기장   14:00 FA컵[편집] 3라운드 2018년 3월 28일 성남 FC 1:0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9:30 무랄랴  56' 관중 수: 885 심판: 송민석 친선 경기[편집] 선수단[편집] 선수 명단[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번호 국적 이름 입단 연도 전 소속팀 군대 골키퍼 1 김진영 2018 포항 스틸러스 미필 31 문용휘 2018 신인 미필 36 임민혁 2018 전남 드래곤즈 미필 62 한호동 2018 더스파구사쓰 군마 미필 90 박주원 2013[62] 신인 군필 92 박준혁 2018 성남 FC 군필 수비수 2 김예성 2018 신인 미필 3 황재훈 2018 수원 FC 군필 4 윤준성 2015[63] 포항 스틸러스 군필 5 권영호 2018 후지에다 MYFC 미필 6 안재준 2018 성남 FC 군필 15 조귀범 2018 대구 FC 미필 22 윤신영 2017 레노파 야마구치 군필 23 전상훈 2017 경남 FC 군필 24 황재원 2018 대구 FC 면제 25 고명석 2018 부천 FC 1995 미필 26 박재우 2015 신인 미필 34 박명수 2018 인천 유나이티드 미필 35 조태근 2018 이스턴 SC 면제 38 장원석 2017 제주 유나이티드 군필 44 이지솔 2018 신인 미필 48 강수병 2018 신인 미필 51 윤경보 2018 신인 미필 52 황재정 2017 신인 미필 57 김성훈 2018 신인 미필 66 박수일 2018 김해시청 미필 77 백종환 2018 강원 FC 군필 미드필더 7 오장은 2018 성남 FC 면제 13 신학영 2017 경남 FC 미필 17 고민성 2018 수원 삼성 블루윙즈 미필 20 안상현 2018 성남 FC 군필 27 키쭈 2018 FC 비토룰 콘스탄차 해당 없음 28 김민성 2018 신인 미필 30 가도예프 2018 분요드코르 해당 없음 39 조예찬 2016[64]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미필 41 강윤성 2018 신인 미필 42 공용훈 2017[65] 김해시청 미필 46 김성익 2018 신인 미필 49 박태현 2018 서울 유나이티드 미필 96 황인범 2015[66] 신인 군필[67] 공격수 8 박수창 2018 제주 유나이티드 군필 9 뚜르스노프 2018 분요드코르 해당 없음 11 김승섭 2018 신인 미필 12 강한빛 2018 화성 FC 미필 14 유해성 2018 신인 미필 16 박대훈 2016 신인 미필 19 김찬희 2017 포천 시민축구단 군필 32 유진석 2018 포천 시민축구단 미필 33 김성주 2018 전남 드래곤즈 미필 40 남윤재 2015[68]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미필 43 김세윤 2018 신인 미필 45 안주형 2018 신인 미필 50 이준호 2018 청주City FC 미필 53 임준식 2016 신인 미필 54 안동민 2018 신인 미필 64 박인혁 2018 TSG 1899 호펜하임 미필 65 송인학 2018 신인 미필 88 이건철 2018 제주 유나이티드 미필 시즌 중 이적 9 정민우 2017 수원 FC 미필 10 필립 2018 성남 FC 해당 없음 55 이지호 2018 신인 미필 56 서정호 2018 신인 미필 91 페드로 2018 ACS 폴리 티미쇼아라 해당 없음 2018 시즌 종료 당시 기준 영구 결번[편집]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헌정 기간 18 FW 김은중 18년 (2016-2034) 21 GK 최은성 21년 (2012-2033) 코칭스태프[편집] 프로팀[편집] 직위 이름 부임연도 구단주 허태정 2018 대표 이사 김호 2018 사무국장 권헌규 2018 감독 고종수 2018 수석 코치 김진우 2018 스카우트 김영근 2014 박철 2017 이정래[69] 2018 2군 감독 이기범 2018 2군 코치 황연석 2018 피지컬 코치 디노 2018 선수 이적[편집] 영입[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적 구단 이적 유형 이적 시기 1 김정주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2 남윤재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3 조예찬 M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4 공용훈 MF 김해시청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5 페드로 FW ACS 폴리 티미쇼아라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6 김진영 GK 포항 스틸러스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7 고명석 DF 부천 FC 1995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8 필립 D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9 박수창 MF 제주 유나이티드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0 고민성 MF 수원 삼성 임대 겨울 이적시장 11 백종환 DF 강원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2 조귀범 FW 대구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3 임민혁 GK 전남 드래곤즈 임대 겨울 이적시장 14 김성주 MF 전남 드래곤즈 임대 겨울 이적시장 15 안상현 MF 성남 FC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6 박명수 DF 인천 유나이티드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7 오장은 M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8 안재준 D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9 강한빛 FW 화성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0 이준호 MF 청주City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1 유진석 FW 포천 시민축구단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2 박태현 DF 서울 유나이티드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3 조태근 DF 이스턴 S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4 권영호 DF 후지에다 MY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5 한호동 GK 더스파구사쓰 군마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6 박인혁 FW TSG 1899 호펜하임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7 가도에프 MF 분요드코르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8 키쭈 MF FC 비토룰 콘스탄차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9 박준혁 GK 성남 FC 자유 게약 여름 이적시장 30 이건철 FW 제주 유나이티드 임대 여름 이적시장 31 뚜르느소프 MF 알카라이티야트 SC 완전 영입 여름 이적시장 신인[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전 구단 지명 유형 비고 1 김세윤 FW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2 최재원 GK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3 이태극 D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4 변승환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5 고범준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6 박지호 FW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7 홍유진 D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8 김현진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9 이지솔 DF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0 문용휘 GK 용인대학교 자유 선발 11 유해성 FW KC대학교 자유 선발 12 안주형 FW 신갈고등학교 자유 선발 13 김성익 MF 신갈고등학교 자유 선발 14 김승엽 FW 경희대학교 자유 선발 15 강수병 DF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6 김민성 FW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7 윤경보 DF 호남대학교 자유 선발 18 김예성 DF 광주대학교 자유 선발 19 안동민 Fw 신평고등학교 자유 선발 20 이지호 Fw 예원예술대학교 자유 선발 방출[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적 구단 이적 유형 이적 시기 1 레반 FW AFC 튀비즈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2 이영창 GK 부천 FC 1995 완전 이적 겨울 이적시장 3 김태은 DF 서울 이랜드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4 이현승 FW 부천 FC 1995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5 김태봉 D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6 김해식 D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7 김기용 GK 화성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8 조상범 MF 수원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9 황지웅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0 문진용 DF 강릉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1 김성수 MF 청주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2 크리스찬 FW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3 김진규 DF 은퇴 겨울 이적시장 14 전수현 GK FC 안양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5 장준영 DF 성남 FC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6 이호석 FW 인천 유나이티드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7 김정주 FW 강릉시청 완전 이적 겨울 이적시장 18 김대열 MF 천안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9 브루노 FW FC 안양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0 박우정 DF 강릉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1 페드로 FW 사나트 나프트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2 정민우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완전 이적 여름 이적시장 23 서정호 FW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4 한의권 FW 수원 삼성 블루윙즈 완전 이적 여름 이적시장 25 이지호 FW 제주 유나이티드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6 필립 FW FO ŽP 슈포르트 포드브레조바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임대 및 군입대[편집] # 이름 포지션 임대 구단 이적 시기 임대 기간 1 박주원 GK 아산 무궁화 겨울 이적시장 21개월 2 황인범 MF 아산 무궁화 겨울 이적시장 21개월 관련 항목[편집] 대전 시티즌 각주[편집] ↑ 대전광역시장 권한대행 ↑ “대전시티즌 김호 사장, K 씨와 '유착'”. 대전 뉴스. 2017년 12월 18일.  ↑ 구창민 (2017년 11월 6일). “김호 대전시티즌 대표이사 취임, 지역축구계 우려 빗발”. 중도일보.  ↑ 한준 (2017년 11월 1일). “대전 시티즌, ‘전설’ 김호 대표이사 내정…감독은 이기범”. SPOTV NEWS.  ↑ 윤희섭 (2017년 11월 8일). “팬들 “대전시티즌 감독선임 소통해야”… 이기범 신갈고 감독 하마평”. 충청투데이.  ↑ “권선택 역대 대전시장 가운데 '최초' 중도 낙마”. MBN 뉴스. 2017년 11월 14일.  ↑ 박찬준 (2017년 11월 24일). “고종수, 대전 감독 내정 '김호 대표와 8년만의 재회'”. 스포츠조선.  ↑ 김진엽 (2017년 12월 1일). “고종수 취임식, 고종수 감독, “대전 클래식 승격이 최우선 목표”. 스포탈코리아.  ↑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 ↑ 윤희섭 (2017년 12월 6일). “대전시티즌 사무국장 채용문제 ‘시끌’”. 충청투데이.  ↑ 남장현 (2017년 12월 16일). “광주FC, 박진섭 감독-김진규 코치 확정…코치진 인선완료!”. 스포츠동아.  ↑ 김현회 (2017년 12월 16일). “‘광주 코치설’ 김진규, “처음 듣는 이야기… 현역 이어가고파”!”. 스포츠니어스.  ↑ 이상필 (2017년 12월 22일). “대전시티즌, 브라질 공격수 페드로 영입”. 스포츠 투데이.  ↑ 서동영 (2017년 12월 22일). “새 외국인선수 나이도 틀리게 발표한 대전”. 축구저널.  ↑ 김우종 (2017년 12월 26일). “'고종수호' 대전, 미래 밝힐 김세윤·이지솔·문용휘 영입”. 스타뉴스.  ↑ 박수진 (2017년 12월 27일). “'고종수호' 대전, 신인 FW 유해성 추가 영입”. 스타뉴스.  ↑ 김우종 (2017년 12월 29일). “'고종수호' 대전, '前포항 195cm GK' 김진영 영입”. 스타뉴스.  ↑ 이균재 (2017년 12월 31일). “대전, 중앙 수비수 고명석 영입”. OSEN.  ↑ 김성진 (2018년 1월 3일). “이현승, 3년 만에 부천 재입단”. 스포탈코리아.  ↑ 박상경 (2018년 1월 3일). “서울 이랜드, DF 김태은 재영입”. 스포츠조선.  ↑ 정성인 (2018년 1월 3일). “경남FC, 클래식 걸맞게 코치 구성도 탄탄하게”. 경남도민일보.  ↑ 박수진 (2018년 1월 4일). “'고종수호' 대전, 슬로바키아 출신 FW 홀로홉스키 영입”. 스타뉴스.  ↑ 송치훈 (2018년 1월 5일). “FC안양, 대전서 GK 전수현 FA 영입”. 스포츠동아.  ↑ 김호 사장의 독불장군식 운영, 혈세 낭비 자초 ↑ 이균재 (2018년 1월 8일). “대전, 미드필더 박수창-고민성 영입”. OSEN.  ↑ 윤승재 (2018년 1월 8일). “베테랑 수비수 백종환, 고종수 품에 안겼다”. STN.  ↑ 박주성 (2018년 1월 9일). “수원FC, 대전서 멀티 플레이어 조상범 영입”. 인터풋볼.  ↑ 김달호 (2018년 1월 9일). “대전시티즌, 임민혁·김성주 임대, 조귀범 영입”. 대전일보.  ↑ 이균재 (2018년 1월 11일). “대전, 트레이드로 베테랑 MF 안상현 영입”. OSEN.  ↑ “인천UTD, 측면 공격수 이호석 영입…박명수와 맞트레이드”. 인천유나이티드. 2018년 1월 11일.  ↑ 윤승재 (2018년 1월 12일). “'베테랑 폭풍 영입' 대전, 오장은-안재준 영입”. STN.  ↑ 이형주 (2018년 1월 15일). “'고종수호' 대전, 박명수‧김성익‧안주형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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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시티즌 2018 시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전 시티즌 2018 시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전 시티즌 2018 시즌연고지 대전광역시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구단주 이재관[1] (~6/30) 허태정 (7/2~)사장 김호감독 고종수K리그 챌린지 4위 최다득점자 리그: 키쭈 (11골)시즌: 키쭈 (11골) 홈 유니폼 원정 유니폼 ← 2017 2019 → 대전 시티즌 2018 시즌은 대전의 21번째 시즌이자 K리그2에서는 4번째 시즌이다. 대표이사로 과거 팀의 감독이였던 김호가 선임되었고, 원래는 이기범 감독이 대전의 제 11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면서 고종수 감독이 대전의 11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목차 1 전지 훈련 2 정규 시즌 2.1 겨울 이적시장 (시즌 전) 2.2 시즌 전반기 2.3 여름 이적시장 2.4 시즌 후반기 3 경기 결과 3.1 K리그2 3.2 FA컵 3.3 친선 경기 4 선수단 4.1 선수 명단 4.2 현재 선수 명단 4.3 영구 결번 4.4 코칭스태프 4.5 프로팀 5 선수 이적 5.1 영입 5.2 신인 5.3 방출 5.4 임대 및 군입대 6 관련 항목 7 각주 전지 훈련[편집] 대전 시티즌은 1월 2일부터1월 12일까지 경상남도 통영시로 1차 전지훈련을 떠났으며,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터키 안탈리아로 2차 전지훈련을 떠났고, 2월 11일부터 2월 24일까지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3차 전지훈련을 가졌다. 하지만 전지훈련 용역업체 선정 공고를 통해 선정한 용역업체가 김호 대표 이사의 측근인 K씨가 운영하는 AI스포츠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었다.[2] 또한 2차 전지훈련의 경우 33명만이 터키로 떠났고, 20명은 경남 창녕군에서 훈련 했다. 정규 시즌[편집] 겨울 이적시장 (시즌 전)[편집] 2017년 11월 1일 김호 前 대전 시티즌 감독을 윤정섭 대표 이사의 후임 대표 이사로 선임하였으나 과거 대전 감독 시절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퇴진했고, 최근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있던 인물인 김호의 대표 이사 선임에 많은 팬들이 반발하였으며,[3] 김호 대표 이사와 함께 용인시축구센터 출신인 이기범 신갈고등학교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내정하였지만,[4] 이기범 역시 김호와 마찬가지로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있었고, 프로팀 감독 경력이 전무한 사람일 뿐더러 팬들의 그 어떤 동의없이 이루어진 선임이라는 이유로 감독 선임 문제 역시 팬들의 반발을 샀다.[5] 구단주이자 대전광역시장인 권선택 시장이 시장직을 상실하면서 이재관 시장 권한대행이 대전 시티즌의 구단주 대행이 되었다.[6] 2017년 11월 24일 이기범 감독 선임을 철회하고 前 대전 구단의 선수였던 고종수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였으나,[7] 하지만 이기범이건 고종수건 둘 다 김호의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고종수 선임 역시 김호가 자기 자신의 말을 잘들을 자기 사람 심기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아무래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기범보다는 선수 시절 활약이나 이름값이 훨씬 높은 고종수를 선임하면서 이기범 감독 선임으로 좋지 못했던 여론을 무마하려고 하던 것이 아니냐며 팬들로부터 비난을 샀다. 12월 1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취임식을 통해 고종수 감독이 공식 취임하였으며,[8] 자신을 보좌할 수석 코치로는 과거 수원 삼성 시절 동료있던 김진우 코치를 내정했는데, 이를 두고 대전팬들은 지나치게 많은 수원 삼성 출신 인물들이 대전 구단에서 자리잡는 것이 아니냐며 반발하였으며, 결국 불만을 참지 못한 대전팬들이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는 사태로 까지 이르렀다.[9] “ 대전시티즌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저니스타, 대전의아들 대표해 글을 올립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과 같은 시기를 지내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리그 순위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서로에게 예의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졌지만 잘 싸웠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홈경기가 열리는 날 경기장에는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활기가 돌지 않습니다. 그렇게 패배는 우리의 일상에 너무 익숙하게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은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믿어야만 했습니다. 더 내려갈 데가 없으니 남은 건 다시 올라갈 일뿐이라고. 우린 안 될 거야, 라며 비관론을 입에 올리던 사람들에게 한 방 먹여줄 날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때마다 기대는 늘 실망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기존의 실망과는 차원이 다른 절망이 이미 다음 시즌을 예약해 놓고 있습니다. 새로운 감독에 대한 소식과 사장선임에 대한 뉴스는 저희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내년엔 올해보다는 나아지리라는 관성적인 희망조차 사치가 돼가고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 대전시티즌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최악의 상황입니다. 구단은 성적 부진과, 프런트와의 마찰, 특정 에이전트와의 유착 의혹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김호 전 감독을 지난달 대전시티즌 대표이사로 선임했습니다. 그가 대전시티즌의 사령탑으로 있던 시절 팀이 어떤 모습으로 추락했는지 우리는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프로감독 경력이 전무하고 구단과의 마찰을 일으키며 대전을 떠난 고종수 수원삼성 코치를 대전시티즌의 사령탑으로 선임하고 심지어는 연령별 유소년팀 지도자들이 능력과 인성 모든 면에서 낙제점인 전 감독 후보 이기범과 대표이사, 감독 라인으로 교체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촌극이 벌어지는 배경에는 전문성은커녕 축구에 애정조차 없는 대전시 공무원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환부는 이미 곪아 터졌지만, 적폐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패배가 익숙해지고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질수록 과거의 폐단들은 최소한의 상식조차 잊은 채 버젓이 구단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득을 볼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불편해할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방향대로 대전시티즌이 또 새해를 맞이한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희망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다음엔 구단의 존폐를 입에 올려야 할지 모릅니다. 변화가 없다면 절망은 예정대로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대전 팬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든 시티즌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의 참여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중지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모든 대전 팬들이 함께 모여서 힘을 합치자고 감히 제안 드립니다. 정상화 방안을 모색하고 논의합시다. 대전시티즌 정상화를 위하여 다양한 방안들에 대한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구단운영에 간섭하여 현 상태를 만든 대전시문체부 담당자들에 대한 법적 대응, 사장의 퇴진운동, 유소년 문제 등 팀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안들을 함께 논의합시다. 누구든 좋습니다. 어디라도 좋습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 두 단체에서 시작하여 진행하지만 퍼플크루와 일반 팬들의 동참 역시 부탁드립니다.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은 모임 개최를 맡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모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필요한 집행 및 운영 조직 구성은 참여하신 모임이나 팬들 중에서 선출, 지원을 통해 이뤄지길 바랍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은 모임의 참여자로서 함께 해나가겠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대전시티즌 모든 팬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현 추진 중인 모임의 가칭은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로 정한 상황입니다. 이 글을 확인하시는 어떠한 커뮤니티나 SNS상에라도 댓글로 관심을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심이 모아진다면 추후 다시 공지하여 오프라인 모임을 빠른 시일 내로 개최하도록 하겠습니다. (EX. 모인다면 참석하고 싶다. 나의 의견은 어떻다. 한다면 언제 어디서 하는 게 좋겠다. 등등의 답글을 남겨주세요) 이 모임에 대해 고견이 있으시거나, 지난 김호 감독체제에서의 어떤 한 부정한 일이라도 알고 계시다면 fdt.taejon@gmail.com 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단결합시다! 우리들의 팀을 지키기 위해! 대저니스타, 대전의아들 일동 ” 또 업친데 덥친격으로 대전시티즌 구단이 새롭게 꾸려가는 과정에서 새 사무국장 내정설이 돈 것은 물론 사무국장 신규 채용공고를 특정 구인사이트에만 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었다.[10] 12월 16일 김진규가 은퇴를 선언하고 광주 FC 코치로 부임한다고 보도되었으나,[11] 이에 김진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코치 부임설을 일축하였다.[12] 12월 19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FA 취득 선수 명단을 공지하였으며, 대전은 김해식, 김태봉, 김태은, 이현승, 황지웅, 문진용 김기용, 김성수, 조상범 총 9명의 선수가 취득하였으며, 그 중 황지웅과 김태봉, 김해식 FA 보상금이 발생하게 된다. 12월 22일 브라질 용병 페드루 엔히키 지 산타나 아우메이다를 영입하였다.[13] 하지만 영입 과정에서 선수의 나이를 잘못 보도하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14] 12월 26일 우선지명과 자유선발로 김세윤과 이지솔, 문용휘를 영입하였다.[15] 12월 27일 우선지명으로 KC대학교의 공격수 유해성을 영입하였다.[16] 12월 29일 포항 스틸러스로부터 골키퍼 김진영을 영입하였다.[17] 12월 31일 부천 FC 1995로부터 올림픽 대표팀 수비수 고명석을 영입하였다.[18] 2018년 1월 2일 이영창이 자신의 SNS를 통해 부천 FC 1995 이적을 밝혔다. 1월 3일 김태은과 이현승이 각각 대전 입단 전 소속팀이였던 부천 FC와 서울 이랜드에 재입단하였으며,[19][20] 이영익 前 감독은 경남 FC의 수석 코치로 재부임하였다.[21] 1월 4일 성남 FC로부터 외국인 공격수 필리프 흘로호우스키를 영입하였다.[22] 1월 5일 골키퍼 전수현이 FC 안양으로 이적하였다.[23] 1월 5일 김호 사장이 대전에서 2018시즌까지 뛰는 것으로 계약을 연장했던 브루노에게 방출 통보를 날리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면서 이에 브루노 측은 FIFA의 선수 보호 규정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라며 반발해 FIFA에 제소를 비롯해 계약된 올 시즌까지의 잔여 연봉을 요구할 것임을 밝히면서 논란이 일었다.[24] 1월 8일 제주 유나이티드와 수원 삼성, 강원 FC로부터 박수창과 고민성, 백종환을 영입하였다.[25][26] 1월 9일 조상범이 자유 계약으로 수원 FC로 이적하였으며,[27] 전남 드래곤즈에서 임민혁과 김성주를 임대로, 대구 FC에서 조귀범을 자유 계약으로 영입하였다.[28] 1월 11일 대전 시티즌 주장 출신 안상현을 성남 FC로부터 장준영과 트레이드로 재영입하였으며,[29]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트레이드도 감행하여 이호석을 내주고 박명수를 영입하였다.[30] 1월 12일 성남 FC로부터 오장은과 안재준을 영입하였다.[31] 광주 FC 코치 부임설이 나돌던 김진규가 은퇴를 선언하고 오산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하였었다. 1월 15일 신갈고등학교 출신 신인 안주형과 김성익을 영입하였다.[32] 1월 18일 김승섭, 강수병 등 신인 선수 7명에 이준호, 강한빛 등 K3리그 출신 선수까지 총 9명을 영입하였지만,[33] 50명 넘는 수준의 지나치게 큰 선수단 규모로 팬들의 우려를 낳았으며, 또한 일부 선수들에게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계약 해지를 강요하고 숙소 입소와 훈련 등에 배재하면서 7,8명의 대전 선수들이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에 제소를 하면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34] 2018시즌 팀의 주장으로는 오장은, 부주장으로는 안상현이 선임되었다.[35]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으로 지난해 반년간 임대를 떠났던 김정주가 강릉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36] 2월 9일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가 대전시티즌 정상화 추진위윈회로 단체명을 변경하고 김호와 고종수의 과거 사건을 비롯한 논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소명 요청서를 서면으로 제출하며 본격적으로 단체 행동에 돌입하였다.[37][38] 김해식과 황지웅이 자유 계약으로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39] 2월 15일, 구단 측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논란이 있었던 브루노가 결국 FC 안양으로 이적했다.[40] 대전 시티즌이 팀의 2군 감독인 이기범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를 영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일었다.[41] 시즌 전반기[편집] 3월 3일 부천 FC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대전은 윌리앙 포프에게 선취골을 허용했지만, 이후 프리킥에서 윤준성이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지만, 후반 막판 집중력과 체력 저하의 한계를 드러내며 추가골을 허용, 1:2로 패했다.[42] 한편 이날 경기에서 대전팬들은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수원 레전드", "간담회를 개최하라" "이런 팀을 응원할 수 없다." 등의 김호를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도 내걸었다.[43] 이기범 2군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가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44] 3월 7일 분데스리가 TSG 1899 호펜하임으로부터 박인혁을 영입하였다.[45] 3월 11일 안산 그리너스 FC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상대가 2명이나 퇴장당했음에도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하면서 후반 막판 극장골을 허용, 2:3로 패하며 리그 2연패를 기록하였다.[46] 3월 17일 분요드코르로부터 미드필더 쇼흐루흐 가도예프를 영입하였다.[47] 3월 18일 서울 이랜드와의 홈경기에서 대전은 상대가 2명이나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페드로의 패널티킥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면서 고종수 감독은 데뷔승을 거두었다.[48] 한편 이날 경기 역시 대전 팬들은 3경기 연속으로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대전 구단을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었다.[49] 3월 25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홈경기에서 대전은 골키퍼 김진영이 퇴장당하는 수적 열세 속에 1:0 패배를 거두었다.[50] 3월 28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성남 FC와의 FA컵 3라운드 경기서 대전은 무랄랴에게 선취골을 실점하며 1:0 패배, FA컵에서 탈락했다.[51] 3월 30일 루마니아 국적의 아우렐리안 키추를 영입하였다.[52] 4월 1일 광주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상대가 1명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쇼흐루흐 가도예프의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었다.[53] 4월 7일 FC 안양과의 원정 경기에서 대전은 전반에 선취골을 허용했지만, 이후 상대가 1명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박수창의 골을 앞세워 1:1 무승부를 거두었다.[54] 4월 14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홈경기서 대전은 아산과 팽팽히 맞섰고, 김승섭이 프로 데뷔골까지 성공시켰지만 2:1로 패했다.[55] 한편 이날 경기 종료 후에는 김호 대표 이사가 심판에게 욕설을 퍼붙고 심판실에 난입해 고성을 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논란이 일었고,[56] 대전 구단은 제재금 2000만원 징계를 받게 되었다. 4월 21일 성남 FC와의 홈경기서 대전은 전반에 패널티킥을 내주며 끌려갔지만, 후반 들어 키쭈가 K리그 데뷔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지만, 후반 막판 패스 미스를 범하며 추가골을 내주면서 2:1로 패했다.[57] 한편 이날 경기에서는 대전 팬들이 김호의 2000만원 제재금 징계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의 옷을 입으며 대전 구단의 혈세 낭비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58] 4월 29일 수원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후반들어 박재우의 2어시스트를 바탕으로 한 박인혁과 쇼흐루흐 가도예프의 골을 앞세워 2:1 승리를 거두었다.[59] 5월 12일 FC 안양과의 홈 경기서 대전은 가도에프의 멀티골과 키쭈의 골을 앞세워 3:2 승리를 거두며 시즌 첫 연승을 거두었다.[60] 5월 19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김진영의 슈퍼 세이브와 안상현의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기록, 3연승을 거두었다.[61] 여름 이적시장[편집] 5월 부진한 활약을 보여주던 페드로가 대전 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시즌 후반기[편집] 경기 결과[편집] K리그2[편집] 1 2018년 3월 3일 대전 시티즌 1:2 부천 FC 1995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윤준성  34' 포프  13' 공민현  85' 관중 수: 2,172 심판: 서동진 MVP: 공민현 2 2018년 3월 11일 안산 그리너스 FC 3:2 대전 시티즌 안산와~스타디움   15:00 이건  11' 박준희  66' 장혁진  90' 박수창  9' (PK) 세쿠 코네  52' (OG) 관중 수: 5,532 3 2018년 3월 18일 대전 시티즌 1:0 서울 이랜드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페드로  76' (PK) 관중 수: 1,158 심판: 김영수 4 2018년 3월 25일 대전 시티즌 0:1 부산 아이파크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이동준  10' 관중 수: 1,197 심판: 최영호 5 2018년 4월 1일 광주 FC 0:1 대전 시티즌 광주월드컵경기장   15:00 가도에프  61' 관중 수: 874 6 2018년 4월 7일 FC 안양 1:1 대전 시티즌 안양종합운동장   15:00 정희웅  19' 박수창  83' 관중 수: 405 7 2018년 4월 14일 대전 시티즌 1:2 아산 무궁화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김승섭  32' 김민균  22' 허범산  82' 관중 수: 418 8 2018년 4월 21일 대전 시티즌 1:2 성남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정성민  26' (PK)서보민  86' 키쭈  57' 관중 수: 587 9 2018년 4월 29일 수원 FC 1:2 대전 시티즌 수원종합운동장   16:00 마테우스  90+4' 박인혁  48'가도에프  53' 관중 수: 2,375 10 2018년 5월 12일 대전 시티즌 3:2 FC 안양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가도에프  29',  49'키쭈  45+1' 알렉스  46',  90+2' (PK) 관중 수: 956 11 2018년 5월 19일 아산 무궁화 FC 0:1 대전 시티즌 이순신종합운동장   19:00 안상현  49' 관중 수: 1,427 12 2018년 5월 26일 성남 FC v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9:00 13 2018년 6월 3일 대전 시티즌 v 광주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14 2018년 6월 6일 대전 시티즌 v 안산 그리너스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15 2018년 6월 9일 부천 FC 1995 0:2 대전 시티즌 부천종합운동장   19:00 박인혁01' 박인혁41' 관중 수: 1,082 MVP: 박인혁 16 2018년 7월 1일 부산 아이파크 v 대전 시티즌 구덕종합운동장   19:00 17 2018년 7월 9일 대전 시티즌 v 수원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18 2018년 7월 14일 아산 무궁화 FC v 대전 시티즌 이순신종합운동장   19:00 19 2018년 7월 22일 대전 시티즌 v 성남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0 2018년 7월 28일 서울 이랜드 v 대전 시티즌 잠실올림픽주경기장   19:00 21 2018년 8월 4일 대전 시티즌 v 광주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2 2018년 8월 11일 FC 안양 v 대전 시티즌 안양종합운동장   19:00 23 2018년 8월 15일 서울 이랜드 v 대전 시티즌 잠실올림픽주경기장   19:00 24 2018년 8월 20일 부천 FC 1995 v 대전 시티즌 부천종합운동장   19:30 25 2018년 8월 26일 대전 시티즌 v 안산 그리너스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6 2018년 9월 3일 대전 시티즌 v 수원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27 2018년 9월 8일 부산 아이파크 v 대전 시티즌 구덕종합운동장   19:00 28 2018년 9월 15일 대전 시티즌 v 서울 이랜드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9 2018년 9월 23일 광주 FC v 대전 시티즌 광주월드컵경기장   15:00 30 2018년 9월 29일 안산 그리너스 FC v 대전 시티즌 안산와~스타디움   15:00 31 2018년 10월 6일 대전 시티즌 v 아산 무궁화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2 2018년 10월 13일 수원 FC v 대전 시티즌 수원종합운동장   15:00 33 2018년 10월 21일 대전 시티즌 v 부산 아이파크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4 2018년 10월 27일 성남 FC v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5:00 35 2018년 11월 3일 대전 시티즌 v 부천 FC 1995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6 2018년 11월 11일 대전 시티즌 v FC 안양 대전월드컵경기장   14:00 FA컵[편집] 3라운드 2018년 3월 28일 성남 FC 1:0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9:30 무랄랴  56' 관중 수: 885 심판: 송민석 친선 경기[편집] 선수단[편집] 선수 명단[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번호 국적 이름 입단 연도 전 소속팀 군대 골키퍼 1 김진영 2018 포항 스틸러스 미필 31 문용휘 2018 신인 미필 36 임민혁 2018 전남 드래곤즈 미필 62 한호동 2018 더스파구사쓰 군마 미필 90 박주원 2013[62] 신인 군필 92 박준혁 2018 성남 FC 군필 수비수 2 김예성 2018 신인 미필 3 황재훈 2018 수원 FC 군필 4 윤준성 2015[63] 포항 스틸러스 군필 5 권영호 2018 후지에다 MYFC 미필 6 안재준 2018 성남 FC 군필 15 조귀범 2018 대구 FC 미필 22 윤신영 2017 레노파 야마구치 군필 23 전상훈 2017 경남 FC 군필 24 황재원 2018 대구 FC 면제 25 고명석 2018 부천 FC 1995 미필 26 박재우 2015 신인 미필 34 박명수 2018 인천 유나이티드 미필 35 조태근 2018 이스턴 SC 면제 38 장원석 2017 제주 유나이티드 군필 44 이지솔 2018 신인 미필 48 강수병 2018 신인 미필 51 윤경보 2018 신인 미필 52 황재정 2017 신인 미필 57 김성훈 2018 신인 미필 66 박수일 2018 김해시청 미필 77 백종환 2018 강원 FC 군필 미드필더 7 오장은 2018 성남 FC 면제 13 신학영 2017 경남 FC 미필 17 고민성 2018 수원 삼성 블루윙즈 미필 20 안상현 2018 성남 FC 군필 27 키쭈 2018 FC 비토룰 콘스탄차 해당 없음 28 김민성 2018 신인 미필 30 가도예프 2018 분요드코르 해당 없음 39 조예찬 2016[64]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미필 41 강윤성 2018 신인 미필 42 공용훈 2017[65] 김해시청 미필 46 김성익 2018 신인 미필 49 박태현 2018 서울 유나이티드 미필 96 황인범 2015[66] 신인 군필[67] 공격수 8 박수창 2018 제주 유나이티드 군필 9 뚜르스노프 2018 분요드코르 해당 없음 11 김승섭 2018 신인 미필 12 강한빛 2018 화성 FC 미필 14 유해성 2018 신인 미필 16 박대훈 2016 신인 미필 19 김찬희 2017 포천 시민축구단 군필 32 유진석 2018 포천 시민축구단 미필 33 김성주 2018 전남 드래곤즈 미필 40 남윤재 2015[68]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미필 43 김세윤 2018 신인 미필 45 안주형 2018 신인 미필 50 이준호 2018 청주City FC 미필 53 임준식 2016 신인 미필 54 안동민 2018 신인 미필 64 박인혁 2018 TSG 1899 호펜하임 미필 65 송인학 2018 신인 미필 88 이건철 2018 제주 유나이티드 미필 시즌 중 이적 9 정민우 2017 수원 FC 미필 10 필립 2018 성남 FC 해당 없음 55 이지호 2018 신인 미필 56 서정호 2018 신인 미필 91 페드로 2018 ACS 폴리 티미쇼아라 해당 없음 2018 시즌 종료 당시 기준 영구 결번[편집]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헌정 기간 18 FW 김은중 18년 (2016-2034) 21 GK 최은성 21년 (2012-2033) 코칭스태프[편집] 프로팀[편집] 직위 이름 부임연도 구단주 허태정 2018 대표 이사 김호 2018 사무국장 권헌규 2018 감독 고종수 2018 수석 코치 김진우 2018 스카우트 김영근 2014 박철 2017 이정래[69] 2018 2군 감독 이기범 2018 2군 코치 황연석 2018 피지컬 코치 디노 2018 선수 이적[편집] 영입[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적 구단 이적 유형 이적 시기 1 김정주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2 남윤재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3 조예찬 M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4 공용훈 MF 김해시청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5 페드로 FW ACS 폴리 티미쇼아라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6 김진영 GK 포항 스틸러스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7 고명석 DF 부천 FC 1995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8 필립 D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9 박수창 MF 제주 유나이티드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0 고민성 MF 수원 삼성 임대 겨울 이적시장 11 백종환 DF 강원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2 조귀범 FW 대구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3 임민혁 GK 전남 드래곤즈 임대 겨울 이적시장 14 김성주 MF 전남 드래곤즈 임대 겨울 이적시장 15 안상현 MF 성남 FC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6 박명수 DF 인천 유나이티드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7 오장은 M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8 안재준 D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9 강한빛 FW 화성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0 이준호 MF 청주City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1 유진석 FW 포천 시민축구단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2 박태현 DF 서울 유나이티드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3 조태근 DF 이스턴 S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4 권영호 DF 후지에다 MY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5 한호동 GK 더스파구사쓰 군마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6 박인혁 FW TSG 1899 호펜하임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7 가도에프 MF 분요드코르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8 키쭈 MF FC 비토룰 콘스탄차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9 박준혁 GK 성남 FC 자유 게약 여름 이적시장 30 이건철 FW 제주 유나이티드 임대 여름 이적시장 31 뚜르느소프 MF 알카라이티야트 SC 완전 영입 여름 이적시장 신인[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전 구단 지명 유형 비고 1 김세윤 FW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2 최재원 GK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3 이태극 D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4 변승환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5 고범준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6 박지호 FW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7 홍유진 D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8 김현진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9 이지솔 DF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0 문용휘 GK 용인대학교 자유 선발 11 유해성 FW KC대학교 자유 선발 12 안주형 FW 신갈고등학교 자유 선발 13 김성익 MF 신갈고등학교 자유 선발 14 김승엽 FW 경희대학교 자유 선발 15 강수병 DF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6 김민성 FW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7 윤경보 DF 호남대학교 자유 선발 18 김예성 DF 광주대학교 자유 선발 19 안동민 Fw 신평고등학교 자유 선발 20 이지호 Fw 예원예술대학교 자유 선발 방출[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적 구단 이적 유형 이적 시기 1 레반 FW AFC 튀비즈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2 이영창 GK 부천 FC 1995 완전 이적 겨울 이적시장 3 김태은 DF 서울 이랜드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4 이현승 FW 부천 FC 1995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5 김태봉 D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6 김해식 D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7 김기용 GK 화성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8 조상범 MF 수원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9 황지웅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0 문진용 DF 강릉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1 김성수 MF 청주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2 크리스찬 FW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3 김진규 DF 은퇴 겨울 이적시장 14 전수현 GK FC 안양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5 장준영 DF 성남 FC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6 이호석 FW 인천 유나이티드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7 김정주 FW 강릉시청 완전 이적 겨울 이적시장 18 김대열 MF 천안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9 브루노 FW FC 안양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0 박우정 DF 강릉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1 페드로 FW 사나트 나프트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2 정민우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완전 이적 여름 이적시장 23 서정호 FW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4 한의권 FW 수원 삼성 블루윙즈 완전 이적 여름 이적시장 25 이지호 FW 제주 유나이티드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6 필립 FW FO ŽP 슈포르트 포드브레조바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임대 및 군입대[편집] # 이름 포지션 임대 구단 이적 시기 임대 기간 1 박주원 GK 아산 무궁화 겨울 이적시장 21개월 2 황인범 MF 아산 무궁화 겨울 이적시장 21개월 관련 항목[편집] 대전 시티즌 각주[편집] ↑ 대전광역시장 권한대행 ↑ “대전시티즌 김호 사장, K 씨와 '유착'”. 대전 뉴스. 2017년 12월 18일.  ↑ 구창민 (2017년 11월 6일). “김호 대전시티즌 대표이사 취임, 지역축구계 우려 빗발”. 중도일보.  ↑ 한준 (2017년 11월 1일). “대전 시티즌, ‘전설’ 김호 대표이사 내정…감독은 이기범”. SPOTV NEWS.  ↑ 윤희섭 (2017년 11월 8일). “팬들 “대전시티즌 감독선임 소통해야”… 이기범 신갈고 감독 하마평”. 충청투데이.  ↑ “권선택 역대 대전시장 가운데 '최초' 중도 낙마”. MBN 뉴스. 2017년 11월 14일.  ↑ 박찬준 (2017년 11월 24일). “고종수, 대전 감독 내정 '김호 대표와 8년만의 재회'”. 스포츠조선.  ↑ 김진엽 (2017년 12월 1일). “고종수 취임식, 고종수 감독, “대전 클래식 승격이 최우선 목표”. 스포탈코리아.  ↑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 ↑ 윤희섭 (2017년 12월 6일). “대전시티즌 사무국장 채용문제 ‘시끌’”. 충청투데이.  ↑ 남장현 (2017년 12월 16일). “광주FC, 박진섭 감독-김진규 코치 확정…코치진 인선완료!”. 스포츠동아.  ↑ 김현회 (2017년 12월 16일). “‘광주 코치설’ 김진규, “처음 듣는 이야기… 현역 이어가고파”!”. 스포츠니어스.  ↑ 이상필 (2017년 12월 22일). “대전시티즌, 브라질 공격수 페드로 영입”. 스포츠 투데이.  ↑ 서동영 (2017년 12월 22일). “새 외국인선수 나이도 틀리게 발표한 대전”. 축구저널.  ↑ 김우종 (2017년 12월 26일). “'고종수호' 대전, 미래 밝힐 김세윤·이지솔·문용휘 영입”. 스타뉴스.  ↑ 박수진 (2017년 12월 27일). “'고종수호' 대전, 신인 FW 유해성 추가 영입”. 스타뉴스.  ↑ 김우종 (2017년 12월 29일). “'고종수호' 대전, '前포항 195cm GK' 김진영 영입”. 스타뉴스.  ↑ 이균재 (2017년 12월 31일). “대전, 중앙 수비수 고명석 영입”. OSEN.  ↑ 김성진 (2018년 1월 3일). “이현승, 3년 만에 부천 재입단”. 스포탈코리아.  ↑ 박상경 (2018년 1월 3일). “서울 이랜드, DF 김태은 재영입”. 스포츠조선.  ↑ 정성인 (2018년 1월 3일). “경남FC, 클래식 걸맞게 코치 구성도 탄탄하게”. 경남도민일보.  ↑ 박수진 (2018년 1월 4일). “'고종수호' 대전, 슬로바키아 출신 FW 홀로홉스키 영입”. 스타뉴스.  ↑ 송치훈 (2018년 1월 5일). “FC안양, 대전서 GK 전수현 FA 영입”. 스포츠동아.  ↑ 김호 사장의 독불장군식 운영, 혈세 낭비 자초 ↑ 이균재 (2018년 1월 8일). “대전, 미드필더 박수창-고민성 영입”. OSEN.  ↑ 윤승재 (2018년 1월 8일). “베테랑 수비수 백종환, 고종수 품에 안겼다”. STN.  ↑ 박주성 (2018년 1월 9일). “수원FC, 대전서 멀티 플레이어 조상범 영입”. 인터풋볼.  ↑ 김달호 (2018년 1월 9일). “대전시티즌, 임민혁·김성주 임대, 조귀범 영입”. 대전일보.  ↑ 이균재 (2018년 1월 11일). “대전, 트레이드로 베테랑 MF 안상현 영입”. OSEN.  ↑ “인천UTD, 측면 공격수 이호석 영입…박명수와 맞트레이드”. 인천유나이티드. 2018년 1월 11일.  ↑ 윤승재 (2018년 1월 12일). “'베테랑 폭풍 영입' 대전, 오장은-안재준 영입”. STN.  ↑ 이형주 (2018년 1월 15일). “'고종수호' 대전, 박명수‧김성익‧안주형 영입”. STN.  ↑ 송치훈 (2018년 1월 18일). “대전시티즌, 2018시즌 신인선수 9명 영입”. 스포츠동아.  ↑ 박찬준 (2018년 1월 19일). “'김 호-고종수 체제' 대전, 이번엔 선수계약 문제로 '구설'”. 스포츠조선.  ↑ 김유미 (2018년 1월 22일). “대전 시티즌, 2018시즌 주장 오장은·부주장 안상현”. 베스트일레븐.  ↑ 장영우 (2018년 1월 23일). “전력보강 강릉시청 새 시즌 키워드는 '명예회복'”. 한국실업축구연맹.  ↑ 금상진 (2018년 2월 8일). “대전시티즌 팬 본격 단체행동 돌입, 시티즌 정상화 요구”. 중도일보.  ↑ 지상현 (2018년 2월 9일). “대전시티즌 팬들, 김호향해 11대 의혹 해명요구”. 디트뉴스.  ↑ 장영우 (2018년 2월 9일). ““2018시즌 기대하세요!” 8개 구단 2차 전지훈련 한창”. 내셔널리그.  ↑ 김진엽 (2018년 2월 15일). “FC안양, 대전시티즌에서 브라질 FW 브루노 영입”. 스포탈코리아.  ↑ 대전시티즌, 감독 아들과 계약 ↑ 승격 노리는 부천, 끈적한 고종수의 대전보다 강했다 ↑ 대전시티즌 팬들, 개막전 '현수막 게릴라 시위' ↑ 대전시티즌, 감독 아들과 계약 ↑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382&aid=0000630126 대전시티즌, 분데스리가 호펜하임 출신 공격수 박인혁 영입 ↑ 대전시티즌 9명이 싸운 안산에 2-3역전패 ↑ 대전시티즌, 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 출신 MF 가도에프 영입 ↑ '초보 사령탑' 고종수 대전 시티즌 감독, 2연패 끝 첫 승 ↑ 성난 대전시티즌 팬들, 3경기째 게릴라 시위 ↑ 대전시티즌 부산에 아쉬운 0-1패배, 2연승 실패 ↑ '대전 격파' 성남, 166일만에 짜릿한 홈 승리 ↑ 대전 시티즌, 루마니아 출신 미드필더 키쭈 영입 ↑ 대전, 광주 원정서 1-0 승… 6위로 상승 ↑ 대전시티즌 안양과 1-1무승부, 승점1점 추가로 리그5위로 올라 ↑ 대전시티즌 강팀 아산에 잘 싸웠으나 1-2 아쉬운 패배 ↑ 김호 대표, 심판 대기실 난입 밀치고.폭언… 축구 원로의 막무가내 판정 불복 ↑ 집중력 부족했던 대전시티즌, 성남에 1-2패배 ↑ ‘김호 사퇴’ 외치는 대전 서포터스 ↑ 대전시티즌, 박인혁 데뷔골로 수원FC 2-1로 제압 ↑ 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8051216474308&section_code=10&cp=se&gomb=1 '가도에프 2골' 대전, 안양에 3-2 승...시즌 첫 연승] ↑ '안상현 결승골' 대전, 아산에 1-0 승...3연승+5위 등극 ↑ 군 복무 기간 제외 ↑ 군 복무 기간 제외 ↑ 임대 기간 제외 ↑ 임대 기간 제외 ↑ 군 복무 기간 제외 ↑ 2018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에 따른 조기 전역 ↑ 임대 기간 제외 ↑ 공식 직함은 스카우트지만 사실상 골키퍼 코치 역할 수행 vdeh대전 시티즌 창단: 1997년 연고: 대전광역시 구단 역사 선수 감독 유소년클럽 U-18 U-15 U-12 시즌 통계 현재 시즌 홈 구장 한밭종합운동장 (1997년~2002년) 대전월드컵경기장 (2001년~현재) 훈련장 덕암축구센터 친선경기 It's Daejeon 축구대회 미디어 CMB 대전방송 관련 항목 대전광역시 퍼플 크루 대저니스타 시즌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영구결번 18-김은중 21-최은성 우승 K리그 챌린지 2014 FA컵 2001 웹사이트: dcfc.co.kr vdeh 2018년 대한민국 축구 « 2017 2019 » 국내 리그 K리그 K리그1 (경기 결과) K리그2 R리그 승강PO 이적시장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K3리그 어드밴스 K3리그 베이직 WK리그 국내 컵 FA컵 결승전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챌린저스 컵 유소년 대학 리그 K리그 주니어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고등 중등 초등 아시안 대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결선 토너먼트 결승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풋살FK리그 (2016-17  · 2017-18)  · FK컵클럽 시즌K리그 클래식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광주 FC 대전 시티즌 부산 아이파크 부천 FC 1995 서울 이랜드 FC 성남 FC 수원 FC 아산 경찰청 안산 그리너스 FC FC 안양 대한민국 축구 협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전_시티즌_2018_시즌&oldid=24193130" 분류: 대전 시티즌 시즌대한민국 축구단 2018 시즌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7: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대전 시티즌 2018 시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전 시티즌 2018 시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전 시티즌 2018 시즌연고지 대전광역시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구단주 이재관[1] (~6/30) 허태정 (7/2~)사장 김호감독 고종수K리그 챌린지 4위 최다득점자 리그: 키쭈 (11골)시즌: 키쭈 (11골) 홈 유니폼 원정 유니폼 ← 2017 2019 → 대전 시티즌 2018 시즌은 대전의 21번째 시즌이자 K리그2에서는 4번째 시즌이다. 대표이사로 과거 팀의 감독이였던 김호가 선임되었고, 원래는 이기범 감독이 대전의 제 11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면서 고종수 감독이 대전의 11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목차 1 전지 훈련 2 정규 시즌 2.1 겨울 이적시장 (시즌 전) 2.2 시즌 전반기 2.3 여름 이적시장 2.4 시즌 후반기 3 경기 결과 3.1 K리그2 3.2 FA컵 3.3 친선 경기 4 선수단 4.1 선수 명단 4.2 현재 선수 명단 4.3 영구 결번 4.4 코칭스태프 4.5 프로팀 5 선수 이적 5.1 영입 5.2 신인 5.3 방출 5.4 임대 및 군입대 6 관련 항목 7 각주 전지 훈련[편집] 대전 시티즌은 1월 2일부터1월 12일까지 경상남도 통영시로 1차 전지훈련을 떠났으며,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터키 안탈리아로 2차 전지훈련을 떠났고, 2월 11일부터 2월 24일까지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3차 전지훈련을 가졌다. 하지만 전지훈련 용역업체 선정 공고를 통해 선정한 용역업체가 김호 대표 이사의 측근인 K씨가 운영하는 AI스포츠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었다.[2] 또한 2차 전지훈련의 경우 33명만이 터키로 떠났고, 20명은 경남 창녕군에서 훈련 했다. 정규 시즌[편집] 겨울 이적시장 (시즌 전)[편집] 2017년 11월 1일 김호 前 대전 시티즌 감독을 윤정섭 대표 이사의 후임 대표 이사로 선임하였으나 과거 대전 감독 시절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퇴진했고, 최근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있던 인물인 김호의 대표 이사 선임에 많은 팬들이 반발하였으며,[3] 김호 대표 이사와 함께 용인시축구센터 출신인 이기범 신갈고등학교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내정하였지만,[4] 이기범 역시 김호와 마찬가지로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있었고, 프로팀 감독 경력이 전무한 사람일 뿐더러 팬들의 그 어떤 동의없이 이루어진 선임이라는 이유로 감독 선임 문제 역시 팬들의 반발을 샀다.[5] 구단주이자 대전광역시장인 권선택 시장이 시장직을 상실하면서 이재관 시장 권한대행이 대전 시티즌의 구단주 대행이 되었다.[6] 2017년 11월 24일 이기범 감독 선임을 철회하고 前 대전 구단의 선수였던 고종수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였으나,[7] 하지만 이기범이건 고종수건 둘 다 김호의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고종수 선임 역시 김호가 자기 자신의 말을 잘들을 자기 사람 심기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아무래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기범보다는 선수 시절 활약이나 이름값이 훨씬 높은 고종수를 선임하면서 이기범 감독 선임으로 좋지 못했던 여론을 무마하려고 하던 것이 아니냐며 팬들로부터 비난을 샀다. 12월 1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취임식을 통해 고종수 감독이 공식 취임하였으며,[8] 자신을 보좌할 수석 코치로는 과거 수원 삼성 시절 동료있던 김진우 코치를 내정했는데, 이를 두고 대전팬들은 지나치게 많은 수원 삼성 출신 인물들이 대전 구단에서 자리잡는 것이 아니냐며 반발하였으며, 결국 불만을 참지 못한 대전팬들이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는 사태로 까지 이르렀다.[9] “ 대전시티즌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저니스타, 대전의아들 대표해 글을 올립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과 같은 시기를 지내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리그 순위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서로에게 예의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졌지만 잘 싸웠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홈경기가 열리는 날 경기장에는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활기가 돌지 않습니다. 그렇게 패배는 우리의 일상에 너무 익숙하게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은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믿어야만 했습니다. 더 내려갈 데가 없으니 남은 건 다시 올라갈 일뿐이라고. 우린 안 될 거야, 라며 비관론을 입에 올리던 사람들에게 한 방 먹여줄 날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때마다 기대는 늘 실망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기존의 실망과는 차원이 다른 절망이 이미 다음 시즌을 예약해 놓고 있습니다. 새로운 감독에 대한 소식과 사장선임에 대한 뉴스는 저희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내년엔 올해보다는 나아지리라는 관성적인 희망조차 사치가 돼가고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 대전시티즌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최악의 상황입니다. 구단은 성적 부진과, 프런트와의 마찰, 특정 에이전트와의 유착 의혹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김호 전 감독을 지난달 대전시티즌 대표이사로 선임했습니다. 그가 대전시티즌의 사령탑으로 있던 시절 팀이 어떤 모습으로 추락했는지 우리는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프로감독 경력이 전무하고 구단과의 마찰을 일으키며 대전을 떠난 고종수 수원삼성 코치를 대전시티즌의 사령탑으로 선임하고 심지어는 연령별 유소년팀 지도자들이 능력과 인성 모든 면에서 낙제점인 전 감독 후보 이기범과 대표이사, 감독 라인으로 교체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촌극이 벌어지는 배경에는 전문성은커녕 축구에 애정조차 없는 대전시 공무원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환부는 이미 곪아 터졌지만, 적폐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패배가 익숙해지고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질수록 과거의 폐단들은 최소한의 상식조차 잊은 채 버젓이 구단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득을 볼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불편해할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방향대로 대전시티즌이 또 새해를 맞이한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희망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다음엔 구단의 존폐를 입에 올려야 할지 모릅니다. 변화가 없다면 절망은 예정대로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대전 팬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든 시티즌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의 참여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중지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모든 대전 팬들이 함께 모여서 힘을 합치자고 감히 제안 드립니다. 정상화 방안을 모색하고 논의합시다. 대전시티즌 정상화를 위하여 다양한 방안들에 대한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구단운영에 간섭하여 현 상태를 만든 대전시문체부 담당자들에 대한 법적 대응, 사장의 퇴진운동, 유소년 문제 등 팀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안들을 함께 논의합시다. 누구든 좋습니다. 어디라도 좋습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 두 단체에서 시작하여 진행하지만 퍼플크루와 일반 팬들의 동참 역시 부탁드립니다.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은 모임 개최를 맡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모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필요한 집행 및 운영 조직 구성은 참여하신 모임이나 팬들 중에서 선출, 지원을 통해 이뤄지길 바랍니다. 대저니스타와 대전의아들은 모임의 참여자로서 함께 해나가겠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대전시티즌 모든 팬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현 추진 중인 모임의 가칭은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로 정한 상황입니다. 이 글을 확인하시는 어떠한 커뮤니티나 SNS상에라도 댓글로 관심을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심이 모아진다면 추후 다시 공지하여 오프라인 모임을 빠른 시일 내로 개최하도록 하겠습니다. (EX. 모인다면 참석하고 싶다. 나의 의견은 어떻다. 한다면 언제 어디서 하는 게 좋겠다. 등등의 답글을 남겨주세요) 이 모임에 대해 고견이 있으시거나, 지난 김호 감독체제에서의 어떤 한 부정한 일이라도 알고 계시다면 fdt.taejon@gmail.com 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단결합시다! 우리들의 팀을 지키기 위해! 대저니스타, 대전의아들 일동 ” 또 업친데 덥친격으로 대전시티즌 구단이 새롭게 꾸려가는 과정에서 새 사무국장 내정설이 돈 것은 물론 사무국장 신규 채용공고를 특정 구인사이트에만 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었다.[10] 12월 16일 김진규가 은퇴를 선언하고 광주 FC 코치로 부임한다고 보도되었으나,[11] 이에 김진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코치 부임설을 일축하였다.[12] 12월 19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FA 취득 선수 명단을 공지하였으며, 대전은 김해식, 김태봉, 김태은, 이현승, 황지웅, 문진용 김기용, 김성수, 조상범 총 9명의 선수가 취득하였으며, 그 중 황지웅과 김태봉, 김해식 FA 보상금이 발생하게 된다. 12월 22일 브라질 용병 페드루 엔히키 지 산타나 아우메이다를 영입하였다.[13] 하지만 영입 과정에서 선수의 나이를 잘못 보도하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14] 12월 26일 우선지명과 자유선발로 김세윤과 이지솔, 문용휘를 영입하였다.[15] 12월 27일 우선지명으로 KC대학교의 공격수 유해성을 영입하였다.[16] 12월 29일 포항 스틸러스로부터 골키퍼 김진영을 영입하였다.[17] 12월 31일 부천 FC 1995로부터 올림픽 대표팀 수비수 고명석을 영입하였다.[18] 2018년 1월 2일 이영창이 자신의 SNS를 통해 부천 FC 1995 이적을 밝혔다. 1월 3일 김태은과 이현승이 각각 대전 입단 전 소속팀이였던 부천 FC와 서울 이랜드에 재입단하였으며,[19][20] 이영익 前 감독은 경남 FC의 수석 코치로 재부임하였다.[21] 1월 4일 성남 FC로부터 외국인 공격수 필리프 흘로호우스키를 영입하였다.[22] 1월 5일 골키퍼 전수현이 FC 안양으로 이적하였다.[23] 1월 5일 김호 사장이 대전에서 2018시즌까지 뛰는 것으로 계약을 연장했던 브루노에게 방출 통보를 날리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면서 이에 브루노 측은 FIFA의 선수 보호 규정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라며 반발해 FIFA에 제소를 비롯해 계약된 올 시즌까지의 잔여 연봉을 요구할 것임을 밝히면서 논란이 일었다.[24] 1월 8일 제주 유나이티드와 수원 삼성, 강원 FC로부터 박수창과 고민성, 백종환을 영입하였다.[25][26] 1월 9일 조상범이 자유 계약으로 수원 FC로 이적하였으며,[27] 전남 드래곤즈에서 임민혁과 김성주를 임대로, 대구 FC에서 조귀범을 자유 계약으로 영입하였다.[28] 1월 11일 대전 시티즌 주장 출신 안상현을 성남 FC로부터 장준영과 트레이드로 재영입하였으며,[29]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트레이드도 감행하여 이호석을 내주고 박명수를 영입하였다.[30] 1월 12일 성남 FC로부터 오장은과 안재준을 영입하였다.[31] 광주 FC 코치 부임설이 나돌던 김진규가 은퇴를 선언하고 오산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하였었다. 1월 15일 신갈고등학교 출신 신인 안주형과 김성익을 영입하였다.[32] 1월 18일 김승섭, 강수병 등 신인 선수 7명에 이준호, 강한빛 등 K3리그 출신 선수까지 총 9명을 영입하였지만,[33] 50명 넘는 수준의 지나치게 큰 선수단 규모로 팬들의 우려를 낳았으며, 또한 일부 선수들에게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계약 해지를 강요하고 숙소 입소와 훈련 등에 배재하면서 7,8명의 대전 선수들이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에 제소를 하면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34] 2018시즌 팀의 주장으로는 오장은, 부주장으로는 안상현이 선임되었다.[35]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으로 지난해 반년간 임대를 떠났던 김정주가 강릉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36] 2월 9일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가 대전시티즌 정상화 추진위윈회로 단체명을 변경하고 김호와 고종수의 과거 사건을 비롯한 논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소명 요청서를 서면으로 제출하며 본격적으로 단체 행동에 돌입하였다.[37][38] 김해식과 황지웅이 자유 계약으로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39] 2월 15일, 구단 측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논란이 있었던 브루노가 결국 FC 안양으로 이적했다.[40] 대전 시티즌이 팀의 2군 감독인 이기범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를 영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일었다.[41] 시즌 전반기[편집] 3월 3일 부천 FC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대전은 윌리앙 포프에게 선취골을 허용했지만, 이후 프리킥에서 윤준성이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지만, 후반 막판 집중력과 체력 저하의 한계를 드러내며 추가골을 허용, 1:2로 패했다.[42] 한편 이날 경기에서 대전팬들은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수원 레전드", "간담회를 개최하라" "이런 팀을 응원할 수 없다." 등의 김호를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도 내걸었다.[43] 이기범 2군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가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44] 3월 7일 분데스리가 TSG 1899 호펜하임으로부터 박인혁을 영입하였다.[45] 3월 11일 안산 그리너스 FC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상대가 2명이나 퇴장당했음에도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하면서 후반 막판 극장골을 허용, 2:3로 패하며 리그 2연패를 기록하였다.[46] 3월 17일 분요드코르로부터 미드필더 쇼흐루흐 가도예프를 영입하였다.[47] 3월 18일 서울 이랜드와의 홈경기에서 대전은 상대가 2명이나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페드로의 패널티킥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면서 고종수 감독은 데뷔승을 거두었다.[48] 한편 이날 경기 역시 대전 팬들은 3경기 연속으로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대전 구단을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었다.[49] 3월 25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홈경기에서 대전은 골키퍼 김진영이 퇴장당하는 수적 열세 속에 1:0 패배를 거두었다.[50] 3월 28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성남 FC와의 FA컵 3라운드 경기서 대전은 무랄랴에게 선취골을 실점하며 1:0 패배, FA컵에서 탈락했다.[51] 3월 30일 루마니아 국적의 아우렐리안 키추를 영입하였다.[52] 4월 1일 광주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상대가 1명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쇼흐루흐 가도예프의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두었다.[53] 4월 7일 FC 안양과의 원정 경기에서 대전은 전반에 선취골을 허용했지만, 이후 상대가 1명 퇴장당하는 수적 우위 속에 박수창의 골을 앞세워 1:1 무승부를 거두었다.[54] 4월 14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홈경기서 대전은 아산과 팽팽히 맞섰고, 김승섭이 프로 데뷔골까지 성공시켰지만 2:1로 패했다.[55] 한편 이날 경기 종료 후에는 김호 대표 이사가 심판에게 욕설을 퍼붙고 심판실에 난입해 고성을 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논란이 일었고,[56] 대전 구단은 제재금 2000만원 징계를 받게 되었다. 4월 21일 성남 FC와의 홈경기서 대전은 전반에 패널티킥을 내주며 끌려갔지만, 후반 들어 키쭈가 K리그 데뷔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지만, 후반 막판 패스 미스를 범하며 추가골을 내주면서 2:1로 패했다.[57] 한편 이날 경기에서는 대전 팬들이 김호의 2000만원 제재금 징계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의 옷을 입으며 대전 구단의 혈세 낭비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58] 4월 29일 수원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후반들어 박재우의 2어시스트를 바탕으로 한 박인혁과 쇼흐루흐 가도예프의 골을 앞세워 2:1 승리를 거두었다.[59] 5월 12일 FC 안양과의 홈 경기서 대전은 가도에프의 멀티골과 키쭈의 골을 앞세워 3:2 승리를 거두며 시즌 첫 연승을 거두었다.[60] 5월 19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원정 경기서 대전은 김진영의 슈퍼 세이브와 안상현의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기록, 3연승을 거두었다.[61] 여름 이적시장[편집] 5월 부진한 활약을 보여주던 페드로가 대전 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시즌 후반기[편집] 경기 결과[편집] K리그2[편집] 1 2018년 3월 3일 대전 시티즌 1:2 부천 FC 1995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윤준성  34' 포프  13' 공민현  85' 관중 수: 2,172 심판: 서동진 MVP: 공민현 2 2018년 3월 11일 안산 그리너스 FC 3:2 대전 시티즌 안산와~스타디움   15:00 이건  11' 박준희  66' 장혁진  90' 박수창  9' (PK) 세쿠 코네  52' (OG) 관중 수: 5,532 3 2018년 3월 18일 대전 시티즌 1:0 서울 이랜드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페드로  76' (PK) 관중 수: 1,158 심판: 김영수 4 2018년 3월 25일 대전 시티즌 0:1 부산 아이파크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이동준  10' 관중 수: 1,197 심판: 최영호 5 2018년 4월 1일 광주 FC 0:1 대전 시티즌 광주월드컵경기장   15:00 가도에프  61' 관중 수: 874 6 2018년 4월 7일 FC 안양 1:1 대전 시티즌 안양종합운동장   15:00 정희웅  19' 박수창  83' 관중 수: 405 7 2018년 4월 14일 대전 시티즌 1:2 아산 무궁화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김승섭  32' 김민균  22' 허범산  82' 관중 수: 418 8 2018년 4월 21일 대전 시티즌 1:2 성남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정성민  26' (PK)서보민  86' 키쭈  57' 관중 수: 587 9 2018년 4월 29일 수원 FC 1:2 대전 시티즌 수원종합운동장   16:00 마테우스  90+4' 박인혁  48'가도에프  53' 관중 수: 2,375 10 2018년 5월 12일 대전 시티즌 3:2 FC 안양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가도에프  29',  49'키쭈  45+1' 알렉스  46',  90+2' (PK) 관중 수: 956 11 2018년 5월 19일 아산 무궁화 FC 0:1 대전 시티즌 이순신종합운동장   19:00 안상현  49' 관중 수: 1,427 12 2018년 5월 26일 성남 FC v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9:00 13 2018년 6월 3일 대전 시티즌 v 광주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14 2018년 6월 6일 대전 시티즌 v 안산 그리너스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15 2018년 6월 9일 부천 FC 1995 0:2 대전 시티즌 부천종합운동장   19:00 박인혁01' 박인혁41' 관중 수: 1,082 MVP: 박인혁 16 2018년 7월 1일 부산 아이파크 v 대전 시티즌 구덕종합운동장   19:00 17 2018년 7월 9일 대전 시티즌 v 수원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18 2018년 7월 14일 아산 무궁화 FC v 대전 시티즌 이순신종합운동장   19:00 19 2018년 7월 22일 대전 시티즌 v 성남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0 2018년 7월 28일 서울 이랜드 v 대전 시티즌 잠실올림픽주경기장   19:00 21 2018년 8월 4일 대전 시티즌 v 광주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2 2018년 8월 11일 FC 안양 v 대전 시티즌 안양종합운동장   19:00 23 2018년 8월 15일 서울 이랜드 v 대전 시티즌 잠실올림픽주경기장   19:00 24 2018년 8월 20일 부천 FC 1995 v 대전 시티즌 부천종합운동장   19:30 25 2018년 8월 26일 대전 시티즌 v 안산 그리너스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6 2018년 9월 3일 대전 시티즌 v 수원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9:30 27 2018년 9월 8일 부산 아이파크 v 대전 시티즌 구덕종합운동장   19:00 28 2018년 9월 15일 대전 시티즌 v 서울 이랜드 대전월드컵경기장   19:00 29 2018년 9월 23일 광주 FC v 대전 시티즌 광주월드컵경기장   15:00 30 2018년 9월 29일 안산 그리너스 FC v 대전 시티즌 안산와~스타디움   15:00 31 2018년 10월 6일 대전 시티즌 v 아산 무궁화 FC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2 2018년 10월 13일 수원 FC v 대전 시티즌 수원종합운동장   15:00 33 2018년 10월 21일 대전 시티즌 v 부산 아이파크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4 2018년 10월 27일 성남 FC v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5:00 35 2018년 11월 3일 대전 시티즌 v 부천 FC 1995 대전월드컵경기장   15:00 36 2018년 11월 11일 대전 시티즌 v FC 안양 대전월드컵경기장   14:00 FA컵[편집] 3라운드 2018년 3월 28일 성남 FC 1:0 대전 시티즌 탄천종합운동장   19:30 무랄랴  56' 관중 수: 885 심판: 송민석 친선 경기[편집] 선수단[편집] 선수 명단[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번호 국적 이름 입단 연도 전 소속팀 군대 골키퍼 1 김진영 2018 포항 스틸러스 미필 31 문용휘 2018 신인 미필 36 임민혁 2018 전남 드래곤즈 미필 62 한호동 2018 더스파구사쓰 군마 미필 90 박주원 2013[62] 신인 군필 92 박준혁 2018 성남 FC 군필 수비수 2 김예성 2018 신인 미필 3 황재훈 2018 수원 FC 군필 4 윤준성 2015[63] 포항 스틸러스 군필 5 권영호 2018 후지에다 MYFC 미필 6 안재준 2018 성남 FC 군필 15 조귀범 2018 대구 FC 미필 22 윤신영 2017 레노파 야마구치 군필 23 전상훈 2017 경남 FC 군필 24 황재원 2018 대구 FC 면제 25 고명석 2018 부천 FC 1995 미필 26 박재우 2015 신인 미필 34 박명수 2018 인천 유나이티드 미필 35 조태근 2018 이스턴 SC 면제 38 장원석 2017 제주 유나이티드 군필 44 이지솔 2018 신인 미필 48 강수병 2018 신인 미필 51 윤경보 2018 신인 미필 52 황재정 2017 신인 미필 57 김성훈 2018 신인 미필 66 박수일 2018 김해시청 미필 77 백종환 2018 강원 FC 군필 미드필더 7 오장은 2018 성남 FC 면제 13 신학영 2017 경남 FC 미필 17 고민성 2018 수원 삼성 블루윙즈 미필 20 안상현 2018 성남 FC 군필 27 키쭈 2018 FC 비토룰 콘스탄차 해당 없음 28 김민성 2018 신인 미필 30 가도예프 2018 분요드코르 해당 없음 39 조예찬 2016[64]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미필 41 강윤성 2018 신인 미필 42 공용훈 2017[65] 김해시청 미필 46 김성익 2018 신인 미필 49 박태현 2018 서울 유나이티드 미필 96 황인범 2015[66] 신인 군필[67] 공격수 8 박수창 2018 제주 유나이티드 군필 9 뚜르스노프 2018 분요드코르 해당 없음 11 김승섭 2018 신인 미필 12 강한빛 2018 화성 FC 미필 14 유해성 2018 신인 미필 16 박대훈 2016 신인 미필 19 김찬희 2017 포천 시민축구단 군필 32 유진석 2018 포천 시민축구단 미필 33 김성주 2018 전남 드래곤즈 미필 40 남윤재 2015[68]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미필 43 김세윤 2018 신인 미필 45 안주형 2018 신인 미필 50 이준호 2018 청주City FC 미필 53 임준식 2016 신인 미필 54 안동민 2018 신인 미필 64 박인혁 2018 TSG 1899 호펜하임 미필 65 송인학 2018 신인 미필 88 이건철 2018 제주 유나이티드 미필 시즌 중 이적 9 정민우 2017 수원 FC 미필 10 필립 2018 성남 FC 해당 없음 55 이지호 2018 신인 미필 56 서정호 2018 신인 미필 91 페드로 2018 ACS 폴리 티미쇼아라 해당 없음 2018 시즌 종료 당시 기준 영구 결번[편집]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헌정 기간 18 FW 김은중 18년 (2016-2034) 21 GK 최은성 21년 (2012-2033) 코칭스태프[편집] 프로팀[편집] 직위 이름 부임연도 구단주 허태정 2018 대표 이사 김호 2018 사무국장 권헌규 2018 감독 고종수 2018 수석 코치 김진우 2018 스카우트 김영근 2014 박철 2017 이정래[69] 2018 2군 감독 이기범 2018 2군 코치 황연석 2018 피지컬 코치 디노 2018 선수 이적[편집] 영입[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적 구단 이적 유형 이적 시기 1 김정주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2 남윤재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3 조예찬 M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4 공용훈 MF 김해시청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5 페드로 FW ACS 폴리 티미쇼아라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6 김진영 GK 포항 스틸러스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7 고명석 DF 부천 FC 1995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8 필립 D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9 박수창 MF 제주 유나이티드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0 고민성 MF 수원 삼성 임대 겨울 이적시장 11 백종환 DF 강원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2 조귀범 FW 대구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3 임민혁 GK 전남 드래곤즈 임대 겨울 이적시장 14 김성주 MF 전남 드래곤즈 임대 겨울 이적시장 15 안상현 MF 성남 FC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6 박명수 DF 인천 유나이티드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7 오장은 M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8 안재준 DF 성남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19 강한빛 FW 화성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0 이준호 MF 청주City FC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1 유진석 FW 포천 시민축구단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2 박태현 DF 서울 유나이티드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3 조태근 DF 이스턴 S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4 권영호 DF 후지에다 MY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5 한호동 GK 더스파구사쓰 군마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6 박인혁 FW TSG 1899 호펜하임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7 가도에프 MF 분요드코르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8 키쭈 MF FC 비토룰 콘스탄차 완전 영입 겨울 이적시장 29 박준혁 GK 성남 FC 자유 게약 여름 이적시장 30 이건철 FW 제주 유나이티드 임대 여름 이적시장 31 뚜르느소프 MF 알카라이티야트 SC 완전 영입 여름 이적시장 신인[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전 구단 지명 유형 비고 1 김세윤 FW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2 최재원 GK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3 이태극 D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4 변승환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5 고범준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6 박지호 FW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7 홍유진 D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8 김현진 MF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우선 지명 대학 진학 9 이지솔 DF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0 문용휘 GK 용인대학교 자유 선발 11 유해성 FW KC대학교 자유 선발 12 안주형 FW 신갈고등학교 자유 선발 13 김성익 MF 신갈고등학교 자유 선발 14 김승엽 FW 경희대학교 자유 선발 15 강수병 DF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6 김민성 FW 언남고등학교 자유 선발 17 윤경보 DF 호남대학교 자유 선발 18 김예성 DF 광주대학교 자유 선발 19 안동민 Fw 신평고등학교 자유 선발 20 이지호 Fw 예원예술대학교 자유 선발 방출[편집] # 이름 포지션 이적 구단 이적 유형 이적 시기 1 레반 FW AFC 튀비즈 임대 복귀 겨울 이적시장 2 이영창 GK 부천 FC 1995 완전 이적 겨울 이적시장 3 김태은 DF 서울 이랜드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4 이현승 FW 부천 FC 1995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5 김태봉 D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6 김해식 DF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7 김기용 GK 화성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8 조상범 MF 수원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9 황지웅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0 문진용 DF 강릉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1 김성수 MF 청주 FC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2 크리스찬 FW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3 김진규 DF 은퇴 겨울 이적시장 14 전수현 GK FC 안양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5 장준영 DF 성남 FC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6 이호석 FW 인천 유나이티드 트레이드 겨울 이적시장 17 김정주 FW 강릉시청 완전 이적 겨울 이적시장 18 김대열 MF 천안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19 브루노 FW FC 안양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0 박우정 DF 강릉시청 자유 계약 겨울 이적시장 21 페드로 FW 사나트 나프트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2 정민우 FW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완전 이적 여름 이적시장 23 서정호 FW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4 한의권 FW 수원 삼성 블루윙즈 완전 이적 여름 이적시장 25 이지호 FW 제주 유나이티드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26 필립 FW FO ŽP 슈포르트 포드브레조바 자유 계약 여름 이적시장 임대 및 군입대[편집] # 이름 포지션 임대 구단 이적 시기 임대 기간 1 박주원 GK 아산 무궁화 겨울 이적시장 21개월 2 황인범 MF 아산 무궁화 겨울 이적시장 21개월 관련 항목[편집] 대전 시티즌 각주[편집] ↑ 대전광역시장 권한대행 ↑ “대전시티즌 김호 사장, K 씨와 '유착'”. 대전 뉴스. 2017년 12월 18일.  ↑ 구창민 (2017년 11월 6일). “김호 대전시티즌 대표이사 취임, 지역축구계 우려 빗발”. 중도일보.  ↑ 한준 (2017년 11월 1일). “대전 시티즌, ‘전설’ 김호 대표이사 내정…감독은 이기범”. SPOTV NEWS.  ↑ 윤희섭 (2017년 11월 8일). “팬들 “대전시티즌 감독선임 소통해야”… 이기범 신갈고 감독 하마평”. 충청투데이.  ↑ “권선택 역대 대전시장 가운데 '최초' 중도 낙마”. MBN 뉴스. 2017년 11월 14일.  ↑ 박찬준 (2017년 11월 24일). “고종수, 대전 감독 내정 '김호 대표와 8년만의 재회'”. 스포츠조선.  ↑ 김진엽 (2017년 12월 1일). “고종수 취임식, 고종수 감독, “대전 클래식 승격이 최우선 목표”. 스포탈코리아.  ↑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 ↑ 윤희섭 (2017년 12월 6일). “대전시티즌 사무국장 채용문제 ‘시끌’”. 충청투데이.  ↑ 남장현 (2017년 12월 16일). “광주FC, 박진섭 감독-김진규 코치 확정…코치진 인선완료!”. 스포츠동아.  ↑ 김현회 (2017년 12월 16일). “‘광주 코치설’ 김진규, “처음 듣는 이야기… 현역 이어가고파”!”. 스포츠니어스.  ↑ 이상필 (2017년 12월 22일). “대전시티즌, 브라질 공격수 페드로 영입”. 스포츠 투데이.  ↑ 서동영 (2017년 12월 22일). “새 외국인선수 나이도 틀리게 발표한 대전”. 축구저널.  ↑ 김우종 (2017년 12월 26일). “'고종수호' 대전, 미래 밝힐 김세윤·이지솔·문용휘 영입”. 스타뉴스.  ↑ 박수진 (2017년 12월 27일). “'고종수호' 대전, 신인 FW 유해성 추가 영입”. 스타뉴스.  ↑ 김우종 (2017년 12월 29일). “'고종수호' 대전, '前포항 195cm GK' 김진영 영입”. 스타뉴스.  ↑ 이균재 (2017년 12월 31일). “대전, 중앙 수비수 고명석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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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슈티르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막스 슈티르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막스 슈티르너 요한 카스파 슈미트(Johann Kaspar Schmidt) (1806년 10월 25일 – 1856년 6월 26일), 필명인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로 더욱 잘 알려진 독일 철학자이다. 그는 허무주의, 실존주의, 정신분석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나키즘, 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1][2] 슈티르너의 주저는 유일자와 그 소유(The ego and its own, 독일어: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in German, 직역하면 유일한 자와 그의 것)이며, 이 책은 1845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다. 목차 1 생애 2 철학 2.1 에고이즘 2.2 아나키즘 2.2.1 에고이스트 연합 2.2.2 혁명 2.3 헤겔의 가능한 영향 3 저작 3.1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 3.2 예술과 종교 3.3 유일자와 그 소유 3.4 슈티르너의 비평가들 3.5 철학적 반동 3.6 반동의 역사 4 비평 5 동시대인의 코멘트 6 영향 6.1 맑스와 엥겔스 6.2 슈티르너와 포스트-구조주의 6.3 니체에 대한 연관의 가능성 6.4 루돌프 슈타이너 6.5 아나키즘 6.6 자유연애, 동성애, 그리고 여성주의 7 같이 보기 8 노트 9 참고 10 더 읽을거리 11 외부 링크 11.1 일반 11.2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 11.3 텍스트 생애[편집] 막스 슈티르너의 출생지인 바이로이트의 모습 슈티르너는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얼마되지 않는 그의 삶에 대해서는 슈티르너의 전기를 쓴 스코틀랜드계 독일 작가인 존 헨리 맥케이에 의한 것이다. 그의 전기(Max Stirner – sein Leben und sein Werk)는 1898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됐고, 영어로는 2005년 에서야 번역되었다. 슈티르너는 알버트 크리스티앙 하인리히 슈미트( Albert Christian Heinrich Schmidt, 1769-1807)와 소피아 엘레오노라 라인라인(Sophia Eleonora Reinlein, 1778–1839)의 유일한 자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1807년 4월 19일, 37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3] 그의 어머니는 약사였던 하인리히 발러슈테트(Heinrich Ballerstedt)와 재혼 했고, 서프로이센의 클룸(Kulm, 오늘날의 Chełmno)에 정착했다. 슈티르너가 20살이 되었을때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진학했고,[3] 그곳에서 문헌학,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헤겔의 강의에 참석하게 된다.[4] 그는 철학의 역사, 종교와 철학 그리고 주관적 정신에 대한 헤겔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슈티르너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로 옴겨가게 되는데, 이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것과 동일한 시간대 였다.[5] 슈티르너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사 자격증을 얻지만, 프로이센 정부로 부터 전임 교사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6] 1841년 베를린에 머무를 동안, 젊은 철학자들의 모임인 프라이엔(자유인)에 참여하게 되고, 이 모임은 이후 청년헤겔학파로 분류되게 된다.19세기 문학과 철학에서 유명한 몇몇의 인물들이 이그룹에 참여 했는데,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브루노 바우어, 그리고 아놀드 루게 같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통념과는 달리 포이어바흐는 헤겔좌파의 담론에 열정적으로 참여 했지만, 프라이엔의 멤버는 아니였다.프라이엔의 멤버는 아니였지만 다른 헤겔좌파와 관련된 유명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하일 바쿠닌이있다. 바쿠닌은 1840년 베를린에서의 유학중에 헤겔좌파를 만나게 되고 급격한 사상의 변화를 경험하게된다. 이후 당대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나키즘에 도달한다. 이와 관련한 사상의 변화는 그가 1842년에 작성한 독일에서의 반동이라는 글에서 잘 나타 나는데, 이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의 유명한 '파괴의 열정은 창조의 열정이다'라는 문구가 등장했다.[7]헤겔학파의 몇몇의 멤버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을 열정적으로 이용해 세계를 분석했고, 헤겔의 결론에도 변증법적인 변화를 시도하다가 결국 헤겔좌파는 점차적으로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포이어바흐와 바우노가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다. 토론은 자주 프리드리히거리 히펠 주점에서 벌어졌으며, 맑스와 엥겔스 같은 이들도 참여 했는데, 이들은 당시까지 포이어바흐 이론의 지지자였다. 슈티르너는 엥겔스와 자주 교류했으며, 엥겔스는 그를 좋은 친구라고 불렀다.[8] 하지만 맑스와 슈티르너가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내성적인 성격의 슈티르너는 주점 내에서의 논쟁에 자주 참여 하지는 않았지만, 클럽의 충실한 멤버이자 세심한 청중이였다.[9] 현재 남아있는 그의 초상화는 슈티르너의 전기 작가인 맥케이의 부탁으로 프라이엔 이후 40년의 시간이 흐른뒤 엥겔스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히펠 주점에서의 프라이엔에 대한 스케치는 슈티르너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유일한 그림이다. 이후 슈티르너는 그로피우스여학교에서[10] 일하게 되고, 그동한 주저인 유일자와 그 소유를 쓰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상가인 바우노와 포이어바흐, 빌헬름 바이틀링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authoritarian socialism), 그리고 프루동과 같은 이들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844년 10월 책의 출판으로 인한 논쟁에 참여하기 위해 그는 교직에서 사임한다. 슈티르너는 결혼을 두번하게 된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가정부 였고 그가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진 이였지만, 결혼후 얼마 되지 않은 1838년 임신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이후 1843년 프라이엔에서 지적 교류를 하던 마리 댄하르트와 재혼하지만, 1846년 이혼하게 된다.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나의 연인 마리 댄하르트에게"라며 헌정한다. 이후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902년 런던에서 사망한다. 교직을 그만둔 뒤, 슈티르너는 그의 연인 댄하르트와 함께 청년헤겔학파가 소유하고 협력의 원칙에 때라 운영되는 우유배달 사업을 계획했다. 사업을 실패했는데 낙농가에서 잘입은 지식인이였던 그에게 의구심을 품었고, 우유가게 치곤 과도하게 잘꾸며진 인테리어가 주는 거부감 때문이였다. 유일자와 그 소유 이후, 그는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을 써서 논쟁에 반박을 했고, 생활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담 스미스와 장 바스티세의 글을 번역한다. 이후 1852는 반동의 역사(History of Reaction)라는 글을 썼고, 1856년 벌레에 물린뒤 열병을 앓다가 그해 6월 26일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브루노 바우어가 참석했었으며, 그의 시신은 Friedhof II der Sophiengemeinde Berlin 묘지에 안장된다. 철학[편집]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년 ~ 1895년)에 의해 그려진 프라이엔에서의 막스 슈티르너의 모습 슈티르너의 철학은 니힐리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나키즘에(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포스트아나키즘,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슈티르너의 주저는 유일자와 그 소유(독일어: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번역하면 유일한 자와 그의 것)이다. 에고이즘[편집] 슈티르너는 자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하며, '창조적 무' 언어의 종점이라 묘사한다. 슈티르너는 대체로 심리적 에고이즘과 윤리적 에고이즘의 지지자로 이해된다. 후자의 경우 분쟁의 여지가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슈티르너의 글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그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억누르는 새로운 고정관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흥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것을 비합리적이라고 간주한 것에 의해, 합리적 에고이스트로 간주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익이란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규범을 모두 포함하여 반드시 주관성이 중심이어야 하는것이다. 개인의 자기 실현은 각 개인의 그의 욕망에 따라 에고이즘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 마지못해 행해지는 에고이즘과 기꺼이 행해지는 에고이즘의 차이는, 전자는 '공허한' 관념에 사로잡혀 더욱 높은 이유에 따라 행동 해야 한다고 믿으며, 사소한 행복과 안전을 바라며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다. 반면 후자는, 자신의 가려진 욕망을 전적으로 인식하며 그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는 자이다. 신성한 것이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에게만 존재한다... 요컨데 에고이스트이고자 하지 않는 에고이스트, 자신을 떨쳐버리는 이(그의 에고이즘을 억누르며),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버리는 것은 오로지 고귀해 짐으로서 그의 에고이즘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에고이스트임을 그만두고자 하기에, 그는 천상과 지상에서 그가 마땅히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는 더 높은 존재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그가 동요하고 자신을 억누른다 하더라고 결국엔 모두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니... 이를 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매 순간 너는 너 자신을 잃고자 하지 않는 창조자인, 너 자신의 창조물이다. 너 보다 더욱 높은 존재로서의 너, 너를 능가하는 너... 바로 이가 너가 인식하지 못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이다. 따라서 너의 더 높은 본질이란, 소외의 본질이다.... 소외는 "신성한 것"의 기준이다. — The Ego and its Own, Cambridge edition, pp. 37–8 자유주의(liberalism)가 인간을 선언한 이래로, 이것이 오직 기독교의 마지막 결과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독교는 본래 “인간”과 “진짜 인간”을 실현하는 것 외에 다른 사명을 가지지 않았다. 이로써 기독교가 나에 대하여 불멸의 교리와 목가적 보살핌의 대상으로서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주장의 속임수가 밝혀진다. 이는 나를 오직 인간으로서만 소중히 여길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불멸하며, 내가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나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는 자유주의가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처럼 누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영원함이란, 이 평등이란, 내가 아닌 내 안의 인류만을 말할 뿐이다. 인류의 운반자이자 껍데기로서의 나만이 죽지 않는다. 모두가 “왕은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알고 있듯이 루드비히는 죽지만 왕은 남는다. 나는 죽지만 정신은, 인간은 남게 된다. 이제 나를 완전히 인간과 동일하게 만들기 위하여 누군가는 “진짜 유적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개발했다.[11] 인간 이라는 종교는 기독교의 마지막 변형일 뿐이다. 자유주의라는 종교는 나의 본질을 나에게서 분리해 그것을 나 위에 놓는다. 이것은 다른 종교가 그들의 신이나 우상을 찬양하는 것과 동일하게 “인류”를 찬양한다. 이것은 나의 것과 나의 특질과 나의 소유에서 벗어난 소외된 무언가를 나의 “본질”로 만듦으로써 나의 것을 다른 세계의 무언가로 바꿔 버린다. 요컨대 이것은 나를 인간 아래에 놓고 그리함으로써 나에 대해 소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the unique and its property" pp. 188-189[12] 그의 철학에서 자발적 에고이스트는 그 자신의 사상의 소유자로서(그의 저서의 제목처럼)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는 반대로 소유 당하는 이로서 대조적으로 묘사된다. 오로지 그가 법, 권리, 도덕, 종교등의 '신성한' 진리가 단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개념임을 인식하고, 이에 복종하길 거부할때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자유의 추구란 창조자와 창조물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창조자로서 기성 질서를 거부하고, 그로서 기존 질서에서 거부되었던 것이 창조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파괴가 창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힘은 에고이즘의 방법론이다. 그는 힘을 이용해 얻은 재산만이 오직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나키즘[편집] 슈티르너는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사회제도 – 국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권, 자연권 그리고 사회 그 자체 마져도 – 단지 환상이며 인간의 마음을 돌아다니는 유령(spook)으로[13] 간주하고 이의 권위를 부정한다.[14] 그는 무도덕주의의 측면에서 에고이즘을 옹호 했고, 각 개인은 오직 그의 순수한 욕구에 따라 '에고이스트 연합'으로서 단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란 단지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쟁취하는 것을 아는 자,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소유는 주어진다." 그리고, "내가 나의 힘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나의 것이다. 내가 소유자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나는 그것의 소유자이다." 그는 또한 말했다, "나는 너의 소유 앞에서 수줍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존중심도 없이 언제나 나의 소유로 여길 것이다. "[15]슈티르너는 사람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을 도덕적 제약 없이 – 그 권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16] 그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익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한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행위의 유일하게 적합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고정된 사회를 실체없는 유령으로 간주 했고, 개인이 실체라고 했다. 에고이스트 연합[편집]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연합 이라는 개념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처음 등장했다. 연합은 비체계적인 협회로 간주되며, 국가에 대조하여 주장되었다.[17] 연합은 당사자들의 지지를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에고이스트들 간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18]연합은 당사자들 모두가 의식적인 에고이즘으로 부터 참여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당사자들중 누군가 고통을 겪음에도 이의 겉모습을 유지하려 한다면, 연합은 퇴락하여 다른 무언가로 변모하고 만다.[18] 이 연합은 사람의 뜻을 넘어서는 권위가 나타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에고이즘은 사상에 반대하지도 사랑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달콤함의 적이 아니며, 헌신과 희생의 적도 아니다. 친밀한 따스함의 적이 아니며, 또한 비판이나 사회주의의 적도 아니다. 요컨대 에고이즘은 특정한 관심사의 적이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관심사의 배제가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무심함과 무관심에 대항할 뿐이다. 사랑에 반대하지 않으나, 신성한 사랑에 대한 반대이며, 사상의 반대가 아니라 신성한 사상에 대한 반대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신성한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마치 자신을 고립시키고, 유리시키며, 고독에 빠져들길 원하는 처럼 보이는 에고이스트의 배타성이란, 오로지 무관심의 배제를 통하여 관심사에 대한 완전한 참여를 하기 위한 것이다. — Max Stirner. Stirner’s Critics[19] 그러나 내가 왜 공공선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공공선은 나의 선이 아니며, 단지 자기부정의 최악의 형태일 뿐이다. 내가 “굴복” 할 때만이 공공선이 번영할 것이며, 내가 굶주릴 때만이 국가가 화려해 질 것이다…… 인민은 발언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입이 없는 자가 발언을 할 수 있다니! 오직 개인만이 발언권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 언론의 자유의 모든 문제가 “인민의 자유”라는 형태를 취할 때, 모든 것이 뒤집어진다. 이것은 오직 개인의 권리이자, 개인의 더 나은 힘일 뿐이다. 만일 인민이 언론의 자유를 가진다면, 인민의 가운데서도 나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인민의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며, 인민의 자유로서 언론의 자유는 반드시 나에게 적대하는 언론의 법과 함께 나타날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의 자유에 대한 노력에 대항하며 선언되어야 한다. 인민의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다! 인민의 자유, 인민의 권리라는 이 범주를 허용해 보자. 예를 들어, 인민의 권리로서 모두는 무장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중에 권리를 박탈당한 자가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 그 자신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지만, 나에게 속한 권리가 아닌 인민에게 속한 권리로서 그것을 박탈당할 것이다.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나는 감금될 수 있으며, 죄수로서 무장할 권리를 잃는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민의 자유, 공동체의 자유, “사회”의, 보편의, 인류의, 인류의 이상의, 인민의, 공동체의, 발언권을 가진 “사회”의 창조에 대한 마지막 시도로 나타난다. 개인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인민은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 자유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닌, 인민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더욱 자유로워 지면, 개인은 더욱 구속된다. 아테네의 인민은 정확히 그들이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에, 도편추방제를 만들었고 무신론자들을 추방했으며, 가장 현명한 사상가를 독살했다…… 모든 신성한 것은 구속이자, 족쇄다. 신성한 모든 것들은 법의 파괴자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시대는 모든 영역에서 이 파괴자의 무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법을 위해 이 법을 어길 준비를 하고 있다…… 인민은 강한 시민을 추방하고, 교회의 이단자들에 대한 종교 재판을 자행하며, 국가의 반역자에 대한 종교재판을 행함으로써 그 자신의 왕권 위에 서려는 자들을 억압할 것이다. 인민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주장일 뿐이다. 이것은 모두에게서 “애국적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모두는 그 자신으로서는 다르지 않으며 무의미하고, 그가 그 스스로 해야 하는 것들, 즉 자신을 실현하게 하는 것들은 할 수도 없으며 허용될 수조차 없다. 모든 인민, 모든 국가는 개인에게 불의다…… 내가 헌법, 헌장, 법률에 자신을 가두어 “내 몸과 마음을 인민에게 바친다”라고 선언해야 한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 능력이 “사회의 조화를 방해하지 말라”라는 그들의 규율 안에서만 허용되고 개발될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일 수 있겠는가? 인민과 인류의 몰락은 나를 나의 부흥으로 이끌 것이다. 들어보라, 내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우리의 사랑스러운 독일 존재의 1000년을 기념하는 내일의 축제를 위한 종소리가 시작되고 있다. 이 종소리는 이 장례식의 장송곡의 소리다!... 독일 민족과 독일 인민들은 그들 뒤에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기나긴 삶인가! 그러니 가서 잠들어 다신 깨어나지 말아라, 그렇게 네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슬로 묶어왔던 모든 이들이 이로써 자유로워 질 것이다. 인민은 죽었다. 나여 영원하라! 오, 그대 너무도 고통받는 독일 인민이여 너의 고통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상이 그 자신의 육신을 만들지 못하는 고통이며 새벽이 가기 전에 무로서 사라져 버릴 유령 들린 정신의 고통 이건만, 너는 아직 구원과 성취를 갈망하구나. 그대 친애하는 사상이여, 그대 친애하는 유령이여, 너는 내 안에서도 오랫동안 살아왔다. 나는 너의 구원을 위한 말을 거의 발견했다고 상상했었고, 배회하는 정신을 위한 살과 뼈를 발견했었다. 그리고 나는 너의 영원한 안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가며, 마지막 사랑도 사라져갔다. 그리고 나서 나는 황량한 죽은 자의 집에서 빠져나와 산자들을 부른다.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권리를 지닌다. 잘 가거라, 그대 수백만의 꿈이여, 잘 가거라, 그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천년의 폭정이여! 내일 그들은 너를 무덤으로 데려갈 것이다. 곧 너의 자매들과 너의 인민들이 너를 따르리라. 그러나 그들 모두가 뒤따랐을 때, 인류는 매장될 것이고, 나 자신은, 웃고 있는 상속자일 것이다! — Max Stirner. The Unique and Its Property pp. 225-229[20] 모든 운동과 이데올로기에는 권리의 주체가 되는 일종의 정체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그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정체성(성, 인종, 민족 등)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의 집단 정체성(혹은 그것의 도덕성)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며, 이렇게 사람은 세계를 그 자신으로서 직접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 개인은 이에올로기에 연계하지 않고서는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 누군가 그 정체성에서 벗어난다면(혹은 쫓겨난다면) 그는 곧 이데올로기가 그에게 약속한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할 것이다. 결국 사람은 그 정신에 복종하는한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이를 정신의 지배로서 파악한다. 이에 맞서서 등장한 개념이 어떠한 정신의 지배와도 연계하지 않은 고유한 개인(혹은 유일자)이 그들의 공통된 욕망을 위해 상호적으로 교류하는 연합체인 에고이스트 연합이다. 혁명[편집] 슈티르너는 전통적인 형태의 혁명의 모델을 비판했다. 그러한 운동은 암묵적으로 국가주의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고전적인 혁명이 결국에는 체제를 전복하더라도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티르너는 전위대가 주도하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변화인 정치혁명을 비판하고,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개인들이 주도하는 아래서 위로 향하는 혁명, 즉 사회혁명을 주장한다. 특정한 자유를 향한 갈망은 언제나 새로운 지배를 목표로 한다. 혁명이 그래왔던 것 처럼 "그것의 옹호자들에게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특정한 자유만을 쫓았기 때문에 새로운 지배인 "법에 의한 지배"를 만들어 낸다. 네가 그토록 자유를 원한다면, 어째서 자유의 적음과 많음의 정도에 대하여 언쟁하는가? 자유는 오직 모든 자유일 수 밖에 없다. 조각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너는 모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가능성에 절망하고 있다. 아니면 심지어 이것을 바라는 것조차 광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환상을 떨쳐버리고, '도달할 수 없는 것' 보다 나은것에 고통을 쏟으며 살으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45[21] 특정한 자유(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을 소유할 자유등)은 그것을 강제할 권력을 필요로 한다. 그 권력이 바로 국가다. 국가는 법과 경찰이라는 모습으로 그 질서를 강제하고, 그 질서를 방해하는 것은 범죄라 칭한다. 이러한 질서에서는 자유의 수호자인 국가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시민만이 자유로운 인간이며, 거역하는 이는 무법자라는 역설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런 위선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사라진다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 또한 사라질 것이다. 혁명과 반역은 결코 동의어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전자는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의 단순한 위치의 전복이며,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행위이다. 반면 후자는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환경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는 그것을 위한 목적이 아닌 개인의 불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무장봉기가 아니라, 그것이 초래할 협약을 고려치 않는 개인의 반역이다. 혁명은 새로운 협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하나, 반역은 우리를 더이상 지배 받지 않을 길로 이끌며, 단지 우리 자신과 약속하게 만든다. 또한 더이상 제도에 의존하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이것은 확립된 것과의 싸움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지금은 번영할 지라도, 내가 그것으로 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만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붕괴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확립된 것에서 떠나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쇠락하며 죽어갈 것이다. 이제 나의 목표는 단지 확립된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다. 나의 목표와 행위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에고이스트적 행위이자 목적이다.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p. 420–421 부르주아는 국가의 은혜를 통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는 국가의 권력이 붕괴되면 모든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어떨까? 그는 잃을 것이 없기에, “그 없는 것”에 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국가의 보호를 받는 이들에게서 그 보호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이로써 무언가를 얻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가지지 못한 이들은 국가를 가진 자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권력이며 자신들에게서는 고혈을 뽑아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국가는 부르주아의 국가이며, 부르주아의 재산이다. 국가는 인간을 노동에 따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종(충성)에 따라, 국가가 그에게 하달한 권리가 국가의 법에 알맞게 집행되었는가에 따라 그를 보호한다. 부르주아 체제하에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국가의 영역(국가의 영역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국가에 속하며, 개인이 가진 것은 봉토일 뿐이다.), 특히 돈과 땅에 대한 처분권이 있는 소유주, 즉 자본가들의 손에 떨어진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이 소비자에게 갖는 가치의 범위까지 도달하는 것을 실현할 수 없다. 노동이 착취되고, 자본가들은 이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는다. 좋은 급료를 받는 이들은 오직 국가의 지배와 화려함을 드높이며, 국가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노동일뿐이다. 국가는 그들의 “선량한 시민”인 소유주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낮은 급료를 지불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국가는“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좋은 급료로서 “경찰”(헌병에서부터 사법 기관과 교육체계 등의 모든 종류의 공무직, 이를테면 "국가라는 기계" 그 전체)이라는 권력의 종들을 확보하고, 그“선량한 시민”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하기 위해 기꺼이 더욱 많은 세금을 지불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본질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국가에 적대적인 힘으로 남게 된다. 소유주의 국가, 이 “시민 왕”은 그의 원칙에서 노동을 그 자체의 가치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착취되고, 소유주라는 적의 전리품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은 가장 강력한 힘을 그들 손아귀에 쥐고 있다. 만일 그들이 의식적으로 이것을 한번 사용 한다면, 무엇도 이에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노동을 멈추고서 그들 노동의 생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향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 도처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노동쟁의이다. 국가는 노동의 노예제에 기초해 있다. 만일 노동이 해방된다면, 국가는 소멸하리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05[22] 노동자들이 노동의 힘을 주체적으로 소유한다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헤겔의 가능한 영향[편집] 카를 뢰비트나 로렌스 스테폴로비치같은 학자는 헤겔은 유일자와 그 소유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스테플로비치는 유일자와 그 소유는 분명히 전반적으로 비헤겔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헤겔의 세계와 자아에 대한 결론에 대한 적의가 가득하지만, 이것이 헤겔이 헤겔에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헤겔과 슈티르너가 이어지는 주요 시점은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지로 향햐는 현상학적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발견된다. 슈티르너의 작품은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태를 취할때 가장 명확히 이해된다. 무엇이 일련의 가짜 지식을 지나 절대지에 도달하도록 의식을 일깨우는가? — Lawrence Stepelevich, "Max Stirner as Hegelia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15, pp. 597–614 (1985). 헤겔을 넘어서고 그에 맞서기위해 진정한 변증법적 방식으로 헤겔의 프로젝트를 이어갔으며, 스테폴로비치는 슈티르너의 이러한 노력으로 헤겔의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스테플로비치는 헤겔의 현상학의 의도를 요약한 장 이폴리트를 인용하며 결론 지었다. "세계의 역사는 완료되었고, 이제 필요한 것은 특정한 개인이 그 자신을 재발견 하는 것이다." 유일자로서 슈티르너는 자신을 특정한 개인에 놓았고, 이후 헤겔주의자로서 자기의식과 그의 결정인 대상과의 유희를 통한 이론적 재발견에 의한 유용한 결론을 제시한다. "우상은 오직 나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내가 오직 그들이 재생산 되는 것을 중단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신성한 권력'은 내가 자신을 억누르고 그것을 찬양할때만이 존재한다. 세계와 나의 교류는 나의 향유로서 구성되며, 나는 이를 자기향유를 위해 소비한다." (Ego, 319) — Lawrence Stepelevich, "Max Stirner as Hegelian" 더글라스 모가치, 위드카인드 디 리더(Widukind De Ridder)같은 학자는 슈티르너는 분명히 동시대인인 포이어바흐나 바우노처럼 헤겔의 제자였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를 헤겔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헤겔주의자와는 반대로, 헤겔의 내재적 비판과 계몽주의의 모든 시도를 경멸했고, 포이어바흐와 바우노의 해방의 주장도 거부했다. 합리성의 체현이 불완전하게 내제하고 있다는 헤겔과는 달리, 슈티르너는 이를 변환해야 하는 것이 아닌 단지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대로 남겼으며 오로지 유일자의 향유이자 소모물일 뿐이었다.[23] 모가치에 의하면 슈티르너는 헤겔을 넘어간 것이아니라. 그 자체의 철학을 남겼다. 슈티르너는 인간 자아의 개념화를 거부하고, 모든 종류의 합리성 혹은 보편적 기준이 결여된 것으로서 제시했다. 자아는 더욱이 행동의 영역에서 '구체화 되지 않는 나'로 간주되었다. '나'는 실현해야될 어떠한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며 삶은 자기해소의 과정인 것이다. 인본주의자인 헤겔학파가 주체성에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임무를 부여한 것과 달리 슈티르너는 유일자를 개념화할 수 있는 모든 시도에서 거리를 두었다 : ‘유일자의 개념에 대한 더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어떠한 철학 체계도 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내거나, 끄집어 내거나 생각할 수 없을것이다. 차라리 이것은 개념으로서의 발전 자체를 중단했다. — Douglas Moggach & Widukind De Ridder, "Hegelianism in Restoration Prussia,1841–1848: Freedom, Humanism and ‘Anti-Humanism’ in Young Hegelian Thought.", In: 'Hegel's Thought in Europe: Currents, Crosscurrents and Undercurrents', ed. Lisa Herzog (pp. 71-92).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p. 75 저작[편집]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편집] 1842년 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 (우리교육의 잘못된 원칙) 맑스가 편집을 맡았던 라인 신문을 통해 출간 되었다.[24] 글은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하인시우스(Otto Friedrich Theodor Heinsius)의 인본주의 vs. 현실주의(Humanism vs. Realism)라는 논문에 반박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슈티르너는 교육은 적통적인 인본주의적 방법이든 실용적인 현실주의적 방법이든 여전히 진정한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교육이란 개인의 고유성을 보존하고 자아를 실현할수 있는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술과 종교[편집] Kunst und Religion (예술과 종교)역시 라인 신문을 통하여 1846년 6월 14에 출간 되었다. 이것은 브루노 바우어와 그의 헤겔에 대한 비판글인 '헤겔의 종교적 교리와 신앙의 관점에서 예술 판단'을 다루었다. 바우어는 헤겔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관계를 뒤집으면서 예술은 통용되는 확정성과 명쾌함 그리고 보편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종교보다 철학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슈티르너는 헤겔과 바우노의 비판을 넘어서 예술은 오히러 종교에 대한 대상을 만들어 내기에 슈티르너가 철학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 헤겔 바우노와는 달리 - 될 수 없었다. [철학]은 종교처럼 대상에 반대하는 것도, 예술처럼 그것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러 이는 대상과 대상이 만들어 지는 행위가 자유의 공기로 호홉 하도록 분쇄를 하는 것이다. 철학의 정신인 이성은 순전히 그 자신과 연관되며 문제는 대상없이 스스로 끝나게 된다. — Max Stirner, 'Kunst und Religion, p. 110. 슈티르너는 철학은 종교처럼 대상을 귀찮게 하지도, 예술처럼 대상을 만들어 내지도 않다는 하며 신중히 변증법적 삼인조(예술-종교-철학)에서 철학을 빼내 왔다. 사실 슈티르너와 관련해서 철학이란 예술과 철학에 모두 무심한 것이였다. 이로서 슈티르너는 바우노의 종교 비판을 무시하고 그것을 급진화 하였다.[23] 유일자와 그 소유[편집] 슈티르너의 주저 유일자와 그 소유(독:Der Einzige und sein Eigenthum, 영:The Ego and Its Own)은 1844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출간 되었다.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슈티르너는 반권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프러시아 사회와 근대 서구 문명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언어와 현실을 넘어선 '창조하는 무'로서 여기는 접근 방식을 제공했다. 이책은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들이 공허한 개념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 권위를 주장하는 사회 기관, 국가, 사법기관, 교회, 대학같은 교육체계 까지 이와 같은 개념에 기초하여 있다고 주장한다. 슈티르너의 논의는 주로 동시대 인들을 향해 비판의 한계를 확장했다. 특히 포이어바흐, 종교, 자유주의, 인본주의(포이어바흐의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존재다' 라는 주장을 신이라 불렸던 것의 위치에 인간을 대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구조는 여전히 종교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족주의,국가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까지 당시 사상의 전 영역을 공격했다. 정신의 시대에 사상들은 그들을 만들어낸 나의 머리위로 높이 솟아올아, 고열로 인한 환각처럼 주위를 맴돌며 전율케 하는 무서운 힘을 얻게 되었다. 한낱 사상에 지나지 않던 유령은 이제 그 자신의 육신을 지니게 되어 신, 황제, 교황, 조국이 되었다. 만일 내가 그들의 육체를 파괴하고 나의 것을 돌려 받아 "나만이 육신을 지닌 자이다"이라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이제 세계를 나로서, 나의 것으로서, 나의 소유로서, 모든것이 나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얻게 되리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5. 슈티르너의 비평가들[편집]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은 1845년 9월 위겐즈 피어텔야르스쉬리프트(Wigands Vierteljahrsschrift)를 통해 출간 되었다. 그의 저서에 비판한 3인의 글들,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M. 헤스의 '최후의 철학자들', 셀리가의 'M.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 소유'에 비판하기 위한 것이였는데 여기서 슈티르너는 그 자신을 3인칭화 해서 설명한다. 철학적 반동[편집] 철학적 반동'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은 1847년 오토 비간트가 편집하는 저널인 Die Epigonen를 통해 라이프치히에서 발간 되었다. 그 시점에서 비간트는 이미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발간했고, 슈티르너가 번역한 아담 스미스와 장 바스티세의 저작들 까지 출간이 완료된 상태였다. 제목이 표시해 주듯이 철학적 반동은 쿠노 피셔(Kuno Fischer, 1824–1907)의 Die Moderne Sophisten(1847)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글은 G. Edward 라고 서명 되어 있었는데 이때문에 존 헨리 맥케이가 조심스럽게 이를 슈티르너의 컬렉션에 포함할때 까지 저작자에 대한 분쟁이 있었다. 이글은 2011에서야 영어로 번역 되었으며,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맥케이는 이 글이 슈티르너가 피셔의 유일자 비판을 반박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G. Edward와 슈티르너를 동일인으로 식별했다. 글은 ‘Ein Apologet der Sophistik und “ein Philosophischer Reactionäre” 제목과 Die Philosophischen Reactionäre라는 제목으로도 출간 되었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비간트가 인적 사항을 거짓으로 기입했던 Edward의 글을 연이어 출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맥케이가 주장 했듯이 슈티르너가 이에 대해 부정한 적은없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시시한 근거가 슈티르너를 작가로서 인식 되게 할만큼 적당한가라는 문제를 남긴다. 이러한 정황증거들로 인하여 몇몇의 학자들이 Die Philosophischen Reactionäre의 내용과 스타일을 기반으로 의심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확실이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것은 유일자가 작성되고 3년 뒤, 청년헤겔학파가 시들어버리고난 뒤에 쓰여졌다는 것이다.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90 (2011). 글의 대부분은 피셔의 궤변의 정의에 대해 다뤄지고 있다. 많은 재치와 함께, 피셔의 궤변 비판이 가진 자기 모순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피셔는 철학과 궤변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을 만들었고, 동시에 궤변을 "철학의 거울상"으로 간주하였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의 공기"에서 호흡하며 "변증법적으로 형식적인 유창함을 이끌어낸다.". 슈티르너의 대답이 눈에 띈다. 당신들 철학자들은 자신의 무기로 해를 입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당신이 단지 변증법적으로 상정한 것을 내가 변증법적으로 사라지게 한다면, 당신의 상식은 무엇이라 답할것인가. 당신은 나를 모든 것을 무로서, 무를 유로서, 흑을 백으로서, 백을 흑으로서 만드는데 유창한 이라고 묘사한다. 내가 당신의 순수한 예술을 돌려 보낼때 당신은 나에 대해 무엇을 할것인가?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99 (2011). 다시 유일자로 돌아가 슈티르너는 주장한다. 슈티르너는 스스로 그에 책에 대하여, 어느정도는 그가 바라는 것에 대하여 서투른 표현을 했다고 묘사했다. 이것은 인생 최고의 순간에서의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부분적으로 서툴다고 불렀다. 그는 철학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국가와 종교, 신자들에의해 학대 되었어며, 관념이 자행하는 혼돈으로 부터 폐허가 되어버린 언어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104 (2011). 반동의 역사[편집] 반동의 역사는 1851년 얼마뒤 오스트리아에서 금지 되는 Allgemeine Deutsche Verlags-Anstalt 에서 2부분으로 나눠 출간 되었다.[3]이것은 최근에 벌어근 1848년 독일 혁명에 대한 글이었고, 주로 슈티르너가 수집하여 번역한 글들의 컬렉션이였다. 서문과 몇몇 부분은 슈티르너가 직접 작성한 글이였는데 에드먼드 버크와 오귀스트 콩트를 혁명에 반하는 두 인물로서 인용한다. 비평[편집] 슈티르너의 저작은 그의 동시대 인들에게선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슈티르너는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를 중심으로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그를 논쟁으로 끌어 들였다. 모스헤스(그시절에 맑스와 가까웠던) 그리고 셀리가( 바우노의 지지자였던 Franz Zychlin von Zychlinski의 필명)또한 슈티르너에 응답하였다. 슈티르너는 이에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 1845년 9월)'로서 답변한다. 이는 책의 몇가지 요점을 독자들에게 명확히 설명하고자하는 목적이 강했는데 특히 포이어바흐와 관련하여 그러한 설명이 강조 되었다. 동시대인의 코멘트[편집] 슈티르너의 저서가 쓰여진뒤 20년 후 작가 프리드리히 랑게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슈티르너는 그의 악명높은 글,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모든 도덕 관념을 부정하기 까지 했다.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부정 되었다. 외부적 힘, 믿은 혹은 단지 관념 마져도 사람의 위에서 그의 변덕을 억누르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슈티르너의 부정이란 그의 증오의 한계와 같은 것 이였다. 긍정적인 두번째 부분이 추가 되지 못한 얼마나 가련한 책인가. 그랬다면 이것은 셸링의 철학의 경우보단 쉬웠을 겄이다. 제약 없는 자아를 해방해서 모든 종류의 이상주의를 나의 의지와 나의 이상으로서 계속해서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슈티르너는 의지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인간 본성적 힘의 원천 이듯이 그려냈다. 이것은 우리에게 쇼펜하우어를 떠올리게 한다. — History of Materialism, ii. 256 (1865) 어떤 이들은 책의 두번째 부분이 슈티르너가 아닌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하여 곧 추가될 것이라고 믿었다.프리드리히 니체와 막스 슈티르너의 관계는 이로서 더욱 복잡하게 될것이라 여겨졌다.[25] 조지 j. 스탁( George J. Stack)의 Lange and Nietzsche에 따르면[26] 니체는 랑게의 History of Materialism을 계속해서 여러번 읽었고 때문에 슈티르너에게 관해 익숙했을 것이라고 한다. 영향[편집] 유일자는 성공적인 반응을 얻고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반응을 이끌었지만, 곧 절판되고 그는 죽을때까지 서서히 잊혀져가는 인물이였다.[27] 슈티르너는 헤겔좌파에 파멸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그의 철학은 맑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철학은 '유럽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기초를 정립한 것으로 평가 된다.[27] 에드문트 후설 한번 소규모 청중들에게 유일자의 '매혹적인 힘'에 대하여 언급했다.[28] 미술 평론가이자 슈티르너주의자인 하버트 리드는 그의 저서는 유럽 문명이 최초로 등장한 이래 모래 주머니안에 갇혀 남아있다고 언급했다.[29] 루돌프 슈타이너, 구스타프 란다우어, 빅토르 세르주,[30]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많은 사상가 들이 젊은 시절에 유일자를 읽고 감동을 했다. 몇몇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사상에 대한 영향을 밝혔다[31] 에른스트 융거'의 저서 en:Eumeswil,에선 Anarch가 슈티르너의 유일자에 기초하여 묘사된다.[32]카뮈의 저서 반항하는 인간(The rebel)에서도 유일자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외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는 대표적으로 벤자민 터커, 제임스 후네커,[33] 도라 마즈던, 렌조 노바토레, 엠마 골드먼,[34] 게오르그 브란데스, 존 쿠퍼 포이스,[35] 마르틴 부버 ,[36] Sidney Hook,[37] 로버트 앤턴 윌슨, 호스트 마타이 크엘러, 엔리코 아리고니, 마르셀 뒤샹, 라울 바네겜을 포함한 몇몇의 상황주의 작가들[38] 그리고 막스 에른스트. 또한 유일자와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주의 아래서의 인간의 영혼에서 유사성이 관측 되는데, 몇몇의 역사가들은 그게 유일자에 익숙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39] 1844년 유일자가 출간된 이래 책은 정치적 학술적 관심에 의해 간헐적으로 인기를 얻어 부활하곤 했다. 오늘날 그의 많은 아이디어들은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타협하지 않는 개인주의라는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는 여러 고정된 관념 예를 들면 성 역할등을 유령으로 간주해 그 권위를 부정한 것에서 개인주의적 여성주의의 선구자로 간주 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아이디어는 포스트-아나키즘의 중요한 이론가인 사울 뉴먼에의해 많은 동감을 얻으며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게 된다. 맑스와 엥겔스[편집]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그려진 프라이엔의 모임을 묘사한 그림 엥겔스는 프라이엔에서의 슈티르너의 모습을 시로 묘사했다. 슈티르너를 보라, 그를 보라, 모든 억압의 조용한 적. 그 순간, 그는 여전히 맥주를 들이키지만, 머지않아 피를 물처럼 마시게 될 것이다. 모두가 사납게 "왕을 타도하라" 외칠때 슈티르너는 즉시 "법 또한 타도하라" 답한다. 슈티르너 존엄히 선포 하니 네가 자신을 굽히고 감히 자유롭다 칭할 때 너는 곧 노예제에 익숙해지리니 교조주의를 타도하고, 법마저 타도하라.[40] 그는 슈티르너를 좋은 친구라고 부르곤 했다.[8] 1844년 11월 엥겔스는 맑스에게 편지를 썻다. 그는 쾰른에서 모세 헤스와의 방문을 보고하고 이것은 그에게서 막스 슈티르너의 새책인 유일자를 얻기 위한 것이였다고 전했다.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엥겔스는 맑스에게 유일자 사본을 보내줄 것을 약속하며 슈티르너는 "분명히 자유인들중 가장 재능있고, 독창이며, 근면한 이" 라고 표현하며 그의 글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8]책에대한 열정을 가지고 엥겔스는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했다.:그러나 무엇이 진실이느냐 하는 그의 원칙에 대해선, 우리 역시도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하는 사실이네. 어떠한 이유에 따라 행동하기 이전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 스스로의 에고이스트적인 이유를 만들어내야 하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떠한 물질적 기대는 치워 버리고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에고이즘의 미덕으로서 단지 개인이 아닌 인간이길 원하네[41] 나중에 맑스와 엥겔스는 슈티르너의 저작에 대한 주요한 비판을 작성한다. 독일이데올로기의 2/3가량의 슈티르너를 비판하는데 할애한 성 막스라는 장인데, 이는 슈티르너의 전체 저작의 양을 초과하는 분량이었다.[42] 이사야 벌린이 묘사했듯이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이 슈티르너를 조롱하기 위해 할애되어 있었다.[43] 책은 1845-1846년 사이 작성 되었지만 1932년이 될때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슈티르너를 향한 맑스의 길고 사나운 논쟁은, 맑스가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간주된다. 맑스는 공산주의와 슈티르너의 도덕적 니힐리즘을 화해 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결과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안하게 된다.[44] 슈티르너와 포스트-구조주의[편집] Post-anarchism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영향력있는 포스트 구조주의 사상가인 쟈크 데레다는 그의 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맑스와 슈티르너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었고 슈티르너의 개념인 망령(specters)과 유령(spooks)등을 분석했다[45]포스트구조주의의 또다른 주요한 사상가인 질 들뢰즈는 그의 저서인 '감각의 논리'에서 슈티르너를 언급했다.[46] 사울 뉴먼은 슈티르너는 최초의 포스트 아나키스트라 칭했다 한편으론 푸코, 라캉, 들뢰즈 그리고 데레다등을 앞질렀으며 한편으론 그들에겐 불가능했던 비본질주의적 측면에서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들이미 초월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특히 슈티르너가 자아는 '창조적 무'다 라고 하며 이데올로기의 얽매임을 거부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점에서 들어난다고 주장한다. 니체에 대한 연관의 가능성[편집] 슈티르너와 니체의 생각은 많은 면에서 비교되며, 많은 작가들은 그들의 사상의 명백한 유사성에 대하여 토론하고, 몇몇은 그들의 영향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곤 한다.[47]독일에서 니체가 잘 알려지기 시작한 초기에 연관된 사상가에 대한 토론은 슈티르너 보단 쇼펜하우어에 관한 것이었다.[48] 니체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인 랑게의 'History of Materialism'과 하르트만의 Philosophy of the Unconscious에 의하면 니체가 유일자를 읽었다는 것은 확실하다.[49] 그러나 니체의 글 어디에서도 슈티르너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는다.[50] 2002년 발견된 전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니체는 랑게와 하르트만을 만나기 이전인 1865년 10월에, 1840년대 슈티르너의 친구였던 Eduard Mushacke를 만남으로서 슈티르너의 저작을 이미 읽었을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저작은 광범하게 퍼졌고, 그가 슈티르너에게 이론적인 빚을 지고 있는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 되었다. 1891년초(니체가 죽진 않았으나 정신적인 문제에 시다라리던 기간) 하르트만은 니체가 슈티르너를 표절했다고 주장하기 까지 했다.[52] 세기의 전환점에서 니체가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광범하게 퍼졌고 평범한 것이 되었다. 적어도 독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관측되었다. " 현대 독일에서의 슈티르너의 영향력 놀라울 정도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니체와 동일선상에 놓여진다. 두 사상가는 본질적으로 같은 철학의 주창자로 간주된다.[53] 니체가 슈티르너로 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시작될 때부터 큰 논쟁으로 분류도긴 했지만 곧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게 된다[54] .[55]20세기 중엽에 슈티르너가 니체에 가한 영향에 대한 언급은 무조건 기각 되거나, 대답할수 없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56] 그러나 니체가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주장은 그들의 글쓰기가 유사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제기 되었다.[57]어쨋든 슈티르너가 니체에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가장 중대한 문제는 니체가 읽었는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58] abissonichilista라는 아나키스트는 슈티르너와 니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유일자는 초인이 아니며,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도 아니다. 유일자는 그 자신의 삶과 사상과 행동을 소유한 실천적 에고이스트다. 인간에겐 갈구해야 할 외부적 목표가 없으며, 그 외부의 중대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과 의미는 사람에 의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파괴되고, 재창조되고, 무시된다. 니체는 신의 죽음과 삶의 본질적인 의미의 부족에 의해 괴롭힘을 받았다. 그는 이를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도덕성으로서 재창조하길 원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신은 죽지 않았으며, 인간성(Humanity)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을 뿐이다. 인류(Humanity)는 근대성의 최고의 존재다. 슈티르너는 문화와 사회기관에 의한 의미와 목표의 부과에 반대한다. 개인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전유하고 소비할 수 있다. 자기해방은 미리 조립된 의미를 발견하거나, 초인이 그것을 제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완전함과 개선은 해방의 척도가 아니며, 이 또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외부의 이미지일 뿐이다. 소유(Ownness)는 그 자신이 살기 위해 어떤 이미지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의 행위이자 특질이다. 변증법적 에고이즘은 외부에서 비롯된 가치의 척도와 의미와 목적 없이 살아가기 위한 철학이다. 이것은 엄격함이 온화함 보다, 의무가 선택 보다, 필요가 자유 보다, 완전함이 불완전함 보다 낫다는 개념에 도전한다. 슈티르너는 새로운 도덕성, 새로운 영적 이상이나 새롭고 향상된 인간 집단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경멸하지 않았으며, 사회 제도와 국가 그리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마음의 지배"를 경멸했다. 슈티르너는 모든 숭고함과 신비로운 본질을 부정했다.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인간성은 "유령(spook)"이다 초인 또한 유령이다.[59] ” 루돌프 슈타이너[편집] 루돌프 슈타이너가 1900년 신학자로 변모하기 이전 그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방향은 슈티르너의 자아에 대한 것과 강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철학적 기반에 영향을 주었다[60] 아나키즘[편집] 아나키즘 역사 및 상징 스페인 분리주의 혁명(1873) 미국 헤이마켓 사건(1886) 바르셀로나 비극의 열흘(1909) 멕시코 혁명(1910)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반란(1920) 러시아 크론시타트 반란(1921) 스페인 제2공화국(1931) 스페인 내전(1936)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프랑스 68혁명(1968) 로마 국제회의 국제 아나키스트 암스테르담 회의 행덕사건 16 인권 선언 자유영역분쟁 아마카스 사건 붉은 역삼각 프로보 전선 WTO시위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 관련 분파 사회적 아나키즘 정강주의 반역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 상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실존주의적 아나키즘 여성주의적 아나키즘 초월주의적 아나키즘 인식론적 아나키즘 크립토 아나키즘 기독교 아나키즘 불교 아나키즘 민족아나키즘 아나르코자본주의 아나코-코뮤니즘 아나코 신디칼리즘 퀴어 아나키즘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 관계 개념 무신론 고전적 반국가주의 어피너티 그룹 직접 민주주의 자유지상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탈민족주의 반제국주의 후기구조주의 국제주의 반전주의 불법주의 상호주의 수평주의 이성주의 평화주의 반파시즘 반파쇼 자유연합론 양심적 병역 거부 무정부·무군대 예시적 정치 자생적 질서 계급 투쟁 자유사상 자유연애 불가지론 이신론 반신론 회의론 니힐리즘 실존주의 인본주의 시민 불복종 직접행동 노동조합 협동조합 스쾃 파업 불매동맹 포스트모더니즘 다다이즘 사이버펑크 P2P 핵티비즘 자연법 실정법 일리걸리즘 개인주의 자기소유권 관련 텍스트 《조선혁명선언》 《허무당선언》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 《카탈로니아 찬가》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일반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관한 고찰》 《재산이란 무엇인가》 《경제적 여러 모순의 체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능력에대해서》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국가와 무정부》 《신과 국가》 《상호부조론》 《이 책을 훔쳐라》 국제 조직 제1인터네셔널 국제 여단 국제노동자협회 (1992년) 청년국제당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전국노동자연합 아나키스트 블랙 크로스 과거 국내 조직 의열단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이천자유회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선자유노동자조합 조선인신진회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에스페란토문화사 조선동흥노동동맹 조선노동동흥회 함흠정진청년회 선구독서회 진우연맹 본능아연맹 우리계 다물단 불령사 흑색청년자유연합회 흑로회 흑색공포단 흑전사 흑도회 흑기연맹 흑우연맹 관련 인터넷 조직 Anarkismo.net 코피미즘 선교 교회 스웨덴 해적당 독일 해적당 해적당 인터네셔널 파이러트베이 어나니머스 관련 목록 아나키스트들의 상징 아나코 펑크 밴드 아나키스트 커뮤니티 아나키스트 소설 유대인 아나키스트 러시아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 음악가 아나키스트 조직 아나키스트 간행물 아나키스트 시인 아나키스트 영화 관련 경제 산업 혁명 경제 불균형 카르텔 석유 노동가치설 자본론 21세기 자본 제국주의론 자본축적론 기본소득 은 본위제 금 본위제 검은 목요일 브레튼 우즈 체제 스미소니언 협정 킹스턴 체제 변동 환율제 신자유주의 빈곤 노동 빈곤층 모기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유럽 국가부채위기 신용파산스왑 중앙은행 본원통화 통화승수 연방준비제도 지급준비제도 전자화폐 비트코인 관련 인물 고드윈 프루동 크로포트킨 바쿠닌 말라테스타 쿠르베 골드만 버크만 소로 소렐 마흐노 두루티 톨스토이 오웰 파이어아벤트 슈티르너 렌조 노바토레 촘스키 터커 몬슨 푸코 워드 카밀로 촐고츠 호프만 루빈 북친 후미코 슈스이 사카에 김원봉 하기락 백정기 신채호 이회영 이규창 유림 유자명 정화암 김산 홍형의 김종진 원심창 오면직 황상규 박열 나월환 조약골 v • d • e • h 슈티르너의 철학은 근대 아나키즘 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나키즘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지만 사회적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만 그리고 페데리카 몬세니를 비롯한 많은 사회적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유럽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그는 이후 나타난 지지자들인 에밀 아망드, 한 라이너, 렌조 노바토레, 존 헨리 맥케이, 미구엘 기메네즈 이구알라다, 그리고 레프 체르니 같은 이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미국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그는 벤자민 터커와 그의 매거진 리버티에서 자주 논해 졌었다. 터는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아 자연권을 버리고 에고이즘으로 대체하게 된다.[61] 리버티의 몇몇의 글들은 분명히 에고에즘의 경향이 나타났다. 영국에선 하버트 리드가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에고이즘을 일종의 실존주의로 묘사했다. 이후 1960년대 다니엘 게렝의 '아나키즘: 이론에서 실천까지'에서 게랭은 슈티르너를 헤겔주의의 반개인주의가 사상계를 지배하던 시절에 개별성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 했다[62] 1970년대 미국에선 상황주의자들의 집단인 'for ourselves에서 '탐욕할 권리: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의 실질적인 필요성에 대한 논문' 을 썼는데 그들은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아 에고이즘적 공산주의를(egoist-communism, 혹은 communist-egoism) 주장하게 된다.[63] 이후 미국에서 슈티르너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영향을 받아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이 등장한다. 제이슨 멕퀸은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내가 이데올로기를 비판할때 이는 막스 슈티르너의 회의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에 뿌리를 둔다"[64] 그리고 밥 블랙과 '페럴 폰/울피 랜드스트라이커' 같은 이들역시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포스트-구조주의와, 아나키즘의 혼합물인 포스트 아나키즘 이론가인 사울 뉴먼역시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고 슈티르너의 철학과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한 글을 썼다. 반역 아나키즘 역시 슈티르너에게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반역 아나키즘 이론가인 울피 랜드스트라이커와 알프레도 보나노역시 슈티르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보나노는 슈티르너와 관련해 Max Stirner 그리고 "Max Stirner und der Anarchismus"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65] 자유연애, 동성애, 그리고 여성주의[편집] “ 만일 슈티르너가 말했다면: 너는 살아있는 본질이나 동물 이상이다. 이것은 너는 여전히 동물이라는 것이지만, 그 동물성은 네가 누구인지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말한다: "너는 인간 이상의 존재지만, 또한 인간이기도 하다. 너는 남성 이상의 존재지만, 또한 남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인간성과 남성성은 너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너를 '진정한 인간성'이나 '진정한 남성성'으로 묶어두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무관심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이로 인해 언제나 고문을 당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가식적인 의무로서 너 자신을 괴롭혀왔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거룩한 인민은 너를 그들과 함께 묶어두고자 한다." ”   — 막스 슈티르너, Stirner’s Critics(1845)[66] 독일 슈티르너주의자이자 양성애자였던 아돌프 브랜드는 1896년 동성애에 관련된 간행물인 en:Der Eigene(유일자)을 간행하게 되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동성애 관련 출판물 이였으며 1931년까지 간행 되었다.[67] 간행물의 이름은 슈티르너의 저서인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비롯된 것이었다. 또 다른 초기 성소수자 운동가로는 슈티르너의 전기 작가이자 게이였던 존 헨리 맥케이가 있다.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는 여성주의자는 대표적으로 en:The Freewoman과 en:The New Freewoman을 편집했던 도라 마즈던과 엠마 골드만 같은 이들이 있었다. 슈티르너는 또한 자유 연애와 폴리아모리의 전파자인 에밀 아망드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68] 같이 보기[편집] 앙리 아르봉 자유로운 사람들 노트[편집] ↑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 Goodway, David. Anarchist Seeds Beneath the Snow.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6, p. 99. ↑ 가 나 다 John Henry Mackay: Max Stirner – Sein Leben und sein Werk Archived 2016년 11월 9일 - 웨이백 머신 p. 28 ↑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ume 8, The Macmillan Company and The Free Press, New York 1967. ↑ Stepelevich, Lawrence (Oct–Dec 1985). “Max Stirner as Hegelia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 JSTOR 경유 (구독 필요)》 46 (4): 602.  ↑ Marshall, Peter (1992). 《Demanding the Impossible》. Harper Collins. 221쪽. ISBN 0002178559.  ↑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mikhail-bakunin-the-reaction-in-germany ↑ 가 나 다 Lawrence L Stepelevich, The revival of Max Stirner ↑ Gide, Charles & Rist, Charles. A History of Economic Doctrines from the Time of the Physiocrats to the Present Day. Harrap 1956, p. 612 ↑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ume 8, The Macmillan Company and The Free Press, New York 1967 ↑ Karl Marx, "On the Jewish Question" Deutsch-franzosische ]ahrbucher, ed. Arnold Ruge (Paris, 1 844), p. 197. ↑ https://libcom.org/library/unique-its-property ↑ 울피 랜드스트라이커(Wolfi Landstreicher)의 2017년 번역본에서는 phantasm으로 번역되었다. ↑ Heider, Ulrike. Anarchism: Left, Right and Green,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94, pp. 95–96 ↑ Stirner, Max. The Ego and Its Own, p. 248 ↑ Moggach, Douglas. The New Hegeli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 194 ↑ Thomas, Paul (1985). 《Karl Marx and the Anarchists》. London: Routledge/Kegan Paul. 142쪽. ISBN 0-7102-0685-2.  ↑ 가 나 Nyberg, Svein Olav. “The union of egoists” (PDF). 《Non Serviam》 (Oslo, Norway: Svein Olav Nyberg) 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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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despair of the possibility of obtaining the whole of freedom, freedom from everything — yes, you consider it insanity even to wish this? — Well, then leave off chasing after the phantom, and spend your pains on something better than the — unattainable. ↑ The commoner is what he is through the protection of the State, through the State’s grace. He would necessarily be afraid of losing everything if the State’s power were broken. But how is it with him who has nothing to lose, how with the proletarian? As he has nothing to lose, he does not need the protection of the State for his “nothing.” He may gain, on the contrary, if that protection of the State is withdrawn from the protégé. Therefore the non-possessor will regard the State as a power protecting the possessor, which privileges the latter, but does nothing for him, the non-possessor, but to — suck his blood. The State is a — commoners’ State, is the estate of the commonalty. It protects man not according to his labor, but according to his tractableness (“loyalty”) — to wit, according to whether the rights entrusted to him by the State are enjoyed and managed in accordance with the will, i. e., laws, of the State. Under the regime of the commonalty the laborers always fall into the hands of the possessors, of those who have at their disposal some bit of the State domains (and everything possessible in State domain, belongs to the State, and is only a fief of the individual), especially money and land; of the capitalists, therefore. The laborer cannot realize on his labor to the extent of the value that it has for the consumer. “Labor is badly paid!” The capitalist has the greatest profit from it. — Well paid, and more than well paid, are only the labors of those who heighten the splendor and dominion of the State, the labors of high State servants. The State pays well that its “good citizens,” the possessors, may be able to pay badly without danger; it secures to itself by good payment its servants, out of whom it forms a protecting power, a “police” (to the police belong soldiers, officials of all kinds, e.g. those of justice, education, etc. — in short, the whole “machinery of the State”) for the “good citizens,” and the “good citizens” gladly pay high tax-rates to it in order to pay so much lower rates to their laborers. But the class of laborers, because unprotected in what they essentially are (for they do not enjoy the protection of the State as laborers, but as its subjects they have a share in the enjoyment of the police, a so-called protection of the law), remains a power hostile to this State, this State of possessors, this “citizen kingship.” Its principle, labor, is not recognized as to its value; it is exploited,[ausgebeutet] a spoil [Kriegsbeute] of the possessors, the enemy. The laborers have the most enormous power in their hands, and, if they once became thoroughly conscious of it and used it, nothing would withstand them; they would only have to stop labor, regard the product of labor as theirs, and enjoy it. This is the sense of the labor disturbances which show themselves here and there. The State rests on the — slavery of labor. If labor becomes free. the State is lost. The Ego and its Own ↑ 가 나 Moggach, Douglas & De Ridder, Widukind. Hegelianism in Restoration Prussia,1841–1848: Freedom, Humanism and ‘Anti-Humanism’ in Young Hegelian Thought. In: 'Hegel's Thought in Europe: Currents, Crosscurrents and Undercurrents', ed. Lisa Herzog (pp. 71-92).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pp. 82-83 ↑ Encyclopaedia of Philosophy, The Macmillan company Press, New York, 1967 ↑ See Bernd A. Laska: Nietzsche's initial crisis. In: Germanic Notes and Reviews, vol. 33, n. 2, fall/Herbst 2002, pp. 109–133 ↑ George J. Stack, Lange and Nietzsche, Walter de Gruyter, Berlin, New York, 1983, p. 12, ISBN 978-3-11-008866-3 ↑ 가 나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 Max Stirner, a durable dissident – in a nutshell ↑ Quoted in Read's book, "The Contrary Experience", Faber and Faber, 1963. ↑ See Memoirs of a revolutionary, 1901–1941 by Victor Serge. Publisher Oxford U.P., 1967 ↑ See Bernd A. Laska: Ein dauerhafter Dissident. Nürnberg: LSR-Verlag 1996 (online) ↑ See Bernd A. Laska: Katechon und Anarch. Nürnberg: LSR-Verlag 1997 (online) ↑ Huneker's book Egoists, a Book of Supermen (1909)contains an essay on Stirner. ↑ See Goldman, Anarchism and Other Essays, p. 50. ↑ Wilson, A N (2004년 11월 1일). “World of books”. 《The Daily Telegraph》 (London). 2010년 5월 12일에 확인함.  ↑ Between Man and Man by Martin Buber, Beacon Press, 1955. ↑ From Hegel to Marx by Sidney Hook, London, 1936. ↑ "The long revolution is preparing to write works in the ink of action whose unknown or nameless authors will flock to join Sade, Fourier, Babeuf, Marx, Lacenaire, Stirner, Lautréamont, L’hautier, Vaillant, Henry, Villa, Zapata, Makhno, the Communards, the insurrectionaries of Hamburg, Kiel, Kronstadt, Asturias – all those who have not yet played their last card in a game which we have only just joined: the great gamble whose stake is freedom." Raoul Vaneigem. The Revolution of Everyday Life ↑ David Goodway, Anarchist Seeds Beneath the Snow,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6 (pg.75). ↑ Henri Arvon, Aux sources de 1'existentialisme Max Stirner (Paris, 1954), p. 14 ↑ Zwischen 18 and 25, pp. 237–238. ↑ "Chapter Sankt Max in Die deutsche Ideologie ↑ I. Berlin, Karl Marx (New York, 1963), 143. ↑ G. Stedman-Jones, 'Introduction' in K. Marx & F.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London, 2002) ↑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Routledge. 1994 ↑ "Human or divine, as Stirner said, the predicates are the same whether they belong analytically to the divine being, or whether they are synthetically bound to the human form" (Gilles Deleuze. The Logic of Sense. Continuum. 2004). p. 122. ↑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Robert Schellwien, Max Stirner and Friedrich Nietzsche, 1892; H.L. Mencken, The Philosophy of Friedrich Nietzsche, 1908; K. Löwith, From Hegel To Nietzsche New York, 1964, p187;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4–37; T. A. Riley, "Anti-Statism in German Literature, as Exemplified by the Work of John Henry Mackay", in PMLA, Vol. 62, No. 3, Sep., 1947, pp. 828–843; Seth Taylor, Left Wing Nietzscheans, The Politics of German Expressionism 1910–1920, p144, 1990,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rk;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y,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2; R. C. Solomon & K. M. Higgins, The Age of German Idealism, p300, Routledge, 1993 ↑ While discussion of possible influence has never ceased entirely, the period of most intense discussion occurred between 1892 and 1900 in the German-speaking world. During this time, the most comprehensive account of Nietzsche's reception in the German language, the 4 volume work of Richard Frank Krummel: Nietzsche und der deutsche Geist indicates 83 entries discussing Stirner and Nietzsche. The only thinker more frequently discussed in connection with Nietzsche during this time is Schopenhauer, with about twice the number of entries. Discussion steadily declines thereafter, but is still significant. Nietzsche and Stirner show 58 entries between 1901 and 1918. From 1919 to 1945 there are 28 entries regarding Nietzsche and Stirner. ↑ "Apart from the information which can be gained from the annotations, the library (and the books Nietzsche read) shows us the extent, and the bias, of Nietzsche's knowledge of many fields, such as evolution and cosmology. Still more obvious, the library shows us the extent and the bias of Nietzsche's knowledge about many persons to whom he so often refers with ad hominem statements in his works. This includes not only such important figures as Mill, Kant, and Pascal but also such minor ones (for Nietzsche) as Max Stirner and William James who are both discussed in books Nietzsche read." T. H. Brobjer, "Nietzsche's Reading and Private Library", 1885–1889, i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58, No. 4, Oct., 1997, pp. 663–693; Stack believes it is doubtful that Nietzsche read Stirner, but notes "he was familiar with the summary of his theory he found in Lange's history." George J. Stack, Lange and Nietzsche, Walter de Gruyter, 1983, p 276 ↑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 Bernd A. Laska: Nietzsche's initial crisis. In: Germanic Notes and Reviews, vol. 33, n. 2, fall/Herbst 2002, pp. 109–133 ↑ Eduard von Hartmann, Nietzsches "neue Moral", in Preussische Jahrbücher, 67. Jg., Heft 5, Mai 1891, S. 501–521; augmented version with more express reproach of plagiarism in: Ethische Studien, Leipzig, Haacke 1898, pp. 34–69 ↑ This author believes that one should be careful in comparing the two men. However, he notes: "It is this intensive nuance of individualism that appeared to point from Nietzsche to Max Stirner, the author of the remarkable work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Stirner's influence in modern Germany has assumed astonishing proportions, and moves in general parallel with that of Nietzsche. The two thinkers are regarded as exponents of essentially the same philosophy." O. Ewald, "German Philosophy in 1907", in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17, No. 4, Jul., 1908, pp. 400–426 ↑ [in the last years of the 19th century] "The question of whether Nietzsche had read Stirner was the subject of great debate"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9–30 ↑ Levy pointed out in 1904 that the similarities in the writing of the two men appeared superficial.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4–37 ↑ "Stirner, like Nietzsche, who was clearly influenced by him, has been interpreted in many different ways", Saul Newman, From Bakunin to Lacan: Anti-authoritarianism and the Dislocation of Power, Lexington Books, 2001, p 56; "We do not even know for sure that Nietzsche had read Stirner. Yet, the similarities are too striking to be explained away." R. A. Samek, The Meta Phenomenon, p70, New York, 1981; Tom Goyens, (referring to Stirner's book The Ego and His Own) "The book influenced Friedrich Nietzsche, and even Marx and Engels devoted some attention to it." T. Goyens, Beer and Revolution: The German Anarchist Movement In New York City, p197, Illinois, 2007 ↑ "We have every reason to suppose that Nietzsche had a profound knowledge of the Hegelian movement, from Hegel to Stirner himself. The philosophical learning of an author is not assessed by the number of quotations, nor by the always fanciful and conjectural check lists of libraries, but by the apologetic or polemical directions of his work itself." Gilles Deleuze (translated by Hugh Tomlinson), Nietzsche and Philosophy, 1962 (2006 reprint, pp. 153–154) ↑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abissonichilista-the-unique-one-meets-the-overhuman ↑ Guido Giacomo Preparata, "Perishable Money in a Threefold Commonwealth: Rudolf Steiner and the Social Economics of an Anarchist Utopia". Review of Radical Economics 38/4 (Fall 2006). pp. 619–648 ↑ "Only the influence of the German philosopher of egoism, Max Stirner (né Johann Kaspar Schmidt, 1806–1856), as expressed through The Ego and His Own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compared with that of Proudhon. In adopting Stirnerite egoism (1886), Tucker rejected natural rights which had long been considered the foundation of libertarianism. This rejection galvanized the movement into fierce debates, with the natural rights proponents accusing the egoists of destroying libertarianism itself. So bitter was the conflict that a number of natural rights proponents withdrew from the pages of Liberty in protest even though they had hitherto been among its frequent contributors. Thereafter, Liberty championed egoism although its general content did not change significantly."Wendy Mcelroy. "Benjamin Tucker, Individualism, & Liberty: Not the Daughter but the Mother of Order" ↑ Daniel Guérin,Anarchism: From Theory to Practice ↑ Four Ourselves, The Right To Be Greedy: Theses On The Practical Necessity Of Demanding Everything ↑ "What is Ideology?" by Jason McQuinn ↑ “BONANNO, Alfredo Maria”. 2009년 7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10일에 확인함.  ↑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max-stirner-stirner-s-critics If Stirner had said: You are more than a living essence or animal, this would mean, you are still an animal, but animality does not exhaust what you are...... ↑ Karl Heinrich Ulrichs had begun a journal called Prometheus in 1870, but only one issue was published. (Kennedy, Hubert, Karl Heinrich Ulrichs: First Theorist of Homosexuality, In: 'Science and Homosexualities', ed. Vernon Rosario. New York: Routledge, 1997, pp. 26–45.) ↑ "La insumisión voluntaria. El anarquismo individualista español durante la dictadura y la Segunda República" by Xavier Díez 참고[편집] Stirner, Max: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845 [October 1844]). Stuttgart: Reclam-Verlag, 1972ff; engl. trans. The Ego and Its Own (1907), ed. David Leopold, Cambridge/ New York: CUP 1995 Stirner, Max: "Recensenten Stirners" (September 1845). In: Parerga, Kritiken, Repliken, Bernd A. Laska, ed., Nürnberg: LSR-Verlag, 1986; engl. trans. Stirner's Critics (abridged), see below Max Stirner, Political Liberalism (1845) 더 읽을거리[편집] Max Stirner's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im Spiegel der zeitgenössischen deutschen Kritik. Eine Textauswahl (1844–1856). Hg. Kurt W. Fleming. Leipzig: Verlag Max-Stirner-Archiv 2001 (Stirneriana) Arena, Leonardo V., Note ai margini del nulla, ebook, 2013. Arvon, Henri, Aux Sources de l'existentialisme, Paris: P.U.F. 1954 Essbach, Wolfgang, Gegenzüge. Der Materialismus des Selbst. Eine Studie über die Kontroverse zwischen Max Stirner und Karl 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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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1-4129-6580-4. LCCN 2008009151. OCLC 750831024.  Di Mascio, Carlo, Stirner Giuspositivista. Rileggendo l'Unico e la sua proprietà, 2 ed., Edizioni Del Faro, Trento, 2015, pp. 253, ISBN 978-88-6537-378-1 외부 링크[편집] 틀:Wikisource author-inline 위키인용집에 막스 슈티르너 관련 문서가 있습니다. 위키미디어 공용에 막스 슈티르너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일반[편집]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an extensive introduction Svein Olav Nybergs website on Max Stirner, with extensive links to texts and references Max Stirner within the LSR project (English section) Max Stirner Project by H. Ibrahim Türkdogan Archive of texts on Stirner at the Anarchist Library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편집] Max Stirner, a durable dissident, 'How Marx and Nietzsche suppressed their colleague Max Stirner and why he has intellectually survived them' Stirner Delighted in His Construction – "loves miracles, but can only perform a logical miracle", by Karl Marx Nietzsche's initial crisis due to an encounter with Stirner's "The Ego", by Bernd A. Laska (2002) Max Stirner As Hegelian, By Lawrence S. Stepelevich "At the End of the Path of Doubt: Max Stirner", By Lawrence S. Stepelevich (Owl of Minerva 41:1–2 (2009–10) pp. 85–106) 텍스트[편집] Max Stirner의 작품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작품 정보 막스 슈티르너 - 인터넷 아카이브 막스 슈티르너의 작품 - 리브리복스 (퍼블릭 도메인 오디오북) Online book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The complete original text in German of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The complete English edition of "The Ego and his Own", in the translation of Steven T. Byington. Some of Stirner's illuminating "Shorter Essays", translated into English Recensenten Stirners / Stirner's Critics bilingual: full text in German / abridged text in English (trans. Frederick M. Gordon) Archive of the 4 works of Stirner translated into English including a 2011 complete translation of Stirner´s Critics (translated by Wolfi Landstreicher at the Anarchist Library)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1780445 LCCN: n79054586 ISNI: 0000 0001 2132 8572 GND: 118618261 SELIBR: 199381 SUDOC: 033430586 BNF: cb124296680 (데이터) NLA: 35481082 NDL: 00457765 NKC: skuk0001335 BNE: XX90223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막스_슈티르너&oldid=24409003" 분류: 1806년 태어남1856년 죽음독일의 철학자독일의 무신론자독일의 아나키스트무신론 철학자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종교 비평가허무주의자필명오버프랑켄 현 출신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동문동물 공격으로 죽은 사람19세기 독일 사람19세기 철학자서프로이센 출신숨은 분류: 구독이 필요한 링크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ragoné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Italiano日本語KurdîКыргызчаLatinaLatviešuMalagasyNederlandsNorsk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VènetoWalonWinaray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1일 (화) 01: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막스 슈티르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막스 슈티르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막스 슈티르너 요한 카스파 슈미트(Johann Kaspar Schmidt) (1806년 10월 25일 – 1856년 6월 26일), 필명인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로 더욱 잘 알려진 독일 철학자이다. 그는 허무주의, 실존주의, 정신분석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나키즘, 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1][2] 슈티르너의 주저는 유일자와 그 소유(The ego and its own, 독일어: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in German, 직역하면 유일한 자와 그의 것)이며, 이 책은 1845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다. 목차 1 생애 2 철학 2.1 에고이즘 2.2 아나키즘 2.2.1 에고이스트 연합 2.2.2 혁명 2.3 헤겔의 가능한 영향 3 저작 3.1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 3.2 예술과 종교 3.3 유일자와 그 소유 3.4 슈티르너의 비평가들 3.5 철학적 반동 3.6 반동의 역사 4 비평 5 동시대인의 코멘트 6 영향 6.1 맑스와 엥겔스 6.2 슈티르너와 포스트-구조주의 6.3 니체에 대한 연관의 가능성 6.4 루돌프 슈타이너 6.5 아나키즘 6.6 자유연애, 동성애, 그리고 여성주의 7 같이 보기 8 노트 9 참고 10 더 읽을거리 11 외부 링크 11.1 일반 11.2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 11.3 텍스트 생애[편집] 막스 슈티르너의 출생지인 바이로이트의 모습 슈티르너는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얼마되지 않는 그의 삶에 대해서는 슈티르너의 전기를 쓴 스코틀랜드계 독일 작가인 존 헨리 맥케이에 의한 것이다. 그의 전기(Max Stirner – sein Leben und sein Werk)는 1898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됐고, 영어로는 2005년 에서야 번역되었다. 슈티르너는 알버트 크리스티앙 하인리히 슈미트( Albert Christian Heinrich Schmidt, 1769-1807)와 소피아 엘레오노라 라인라인(Sophia Eleonora Reinlein, 1778–1839)의 유일한 자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1807년 4월 19일, 37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3] 그의 어머니는 약사였던 하인리히 발러슈테트(Heinrich Ballerstedt)와 재혼 했고, 서프로이센의 클룸(Kulm, 오늘날의 Chełmno)에 정착했다. 슈티르너가 20살이 되었을때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진학했고,[3] 그곳에서 문헌학,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헤겔의 강의에 참석하게 된다.[4] 그는 철학의 역사, 종교와 철학 그리고 주관적 정신에 대한 헤겔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슈티르너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로 옴겨가게 되는데, 이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것과 동일한 시간대 였다.[5] 슈티르너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사 자격증을 얻지만, 프로이센 정부로 부터 전임 교사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6] 1841년 베를린에 머무를 동안, 젊은 철학자들의 모임인 프라이엔(자유인)에 참여하게 되고, 이 모임은 이후 청년헤겔학파로 분류되게 된다.19세기 문학과 철학에서 유명한 몇몇의 인물들이 이그룹에 참여 했는데,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브루노 바우어, 그리고 아놀드 루게 같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통념과는 달리 포이어바흐는 헤겔좌파의 담론에 열정적으로 참여 했지만, 프라이엔의 멤버는 아니였다.프라이엔의 멤버는 아니였지만 다른 헤겔좌파와 관련된 유명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하일 바쿠닌이있다. 바쿠닌은 1840년 베를린에서의 유학중에 헤겔좌파를 만나게 되고 급격한 사상의 변화를 경험하게된다. 이후 당대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나키즘에 도달한다. 이와 관련한 사상의 변화는 그가 1842년에 작성한 독일에서의 반동이라는 글에서 잘 나타 나는데, 이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의 유명한 '파괴의 열정은 창조의 열정이다'라는 문구가 등장했다.[7]헤겔학파의 몇몇의 멤버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을 열정적으로 이용해 세계를 분석했고, 헤겔의 결론에도 변증법적인 변화를 시도하다가 결국 헤겔좌파는 점차적으로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포이어바흐와 바우노가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다. 토론은 자주 프리드리히거리 히펠 주점에서 벌어졌으며, 맑스와 엥겔스 같은 이들도 참여 했는데, 이들은 당시까지 포이어바흐 이론의 지지자였다. 슈티르너는 엥겔스와 자주 교류했으며, 엥겔스는 그를 좋은 친구라고 불렀다.[8] 하지만 맑스와 슈티르너가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내성적인 성격의 슈티르너는 주점 내에서의 논쟁에 자주 참여 하지는 않았지만, 클럽의 충실한 멤버이자 세심한 청중이였다.[9] 현재 남아있는 그의 초상화는 슈티르너의 전기 작가인 맥케이의 부탁으로 프라이엔 이후 40년의 시간이 흐른뒤 엥겔스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히펠 주점에서의 프라이엔에 대한 스케치는 슈티르너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유일한 그림이다. 이후 슈티르너는 그로피우스여학교에서[10] 일하게 되고, 그동한 주저인 유일자와 그 소유를 쓰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상가인 바우노와 포이어바흐, 빌헬름 바이틀링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authoritarian socialism), 그리고 프루동과 같은 이들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844년 10월 책의 출판으로 인한 논쟁에 참여하기 위해 그는 교직에서 사임한다. 슈티르너는 결혼을 두번하게 된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가정부 였고 그가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진 이였지만, 결혼후 얼마 되지 않은 1838년 임신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이후 1843년 프라이엔에서 지적 교류를 하던 마리 댄하르트와 재혼하지만, 1846년 이혼하게 된다.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나의 연인 마리 댄하르트에게"라며 헌정한다. 이후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902년 런던에서 사망한다. 교직을 그만둔 뒤, 슈티르너는 그의 연인 댄하르트와 함께 청년헤겔학파가 소유하고 협력의 원칙에 때라 운영되는 우유배달 사업을 계획했다. 사업을 실패했는데 낙농가에서 잘입은 지식인이였던 그에게 의구심을 품었고, 우유가게 치곤 과도하게 잘꾸며진 인테리어가 주는 거부감 때문이였다. 유일자와 그 소유 이후, 그는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을 써서 논쟁에 반박을 했고, 생활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담 스미스와 장 바스티세의 글을 번역한다. 이후 1852는 반동의 역사(History of Reaction)라는 글을 썼고, 1856년 벌레에 물린뒤 열병을 앓다가 그해 6월 26일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브루노 바우어가 참석했었으며, 그의 시신은 Friedhof II der Sophiengemeinde Berlin 묘지에 안장된다. 철학[편집]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년 ~ 1895년)에 의해 그려진 프라이엔에서의 막스 슈티르너의 모습 슈티르너의 철학은 니힐리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나키즘에(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포스트아나키즘,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슈티르너의 주저는 유일자와 그 소유(독일어: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번역하면 유일한 자와 그의 것)이다. 에고이즘[편집] 슈티르너는 자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하며, '창조적 무' 언어의 종점이라 묘사한다. 슈티르너는 대체로 심리적 에고이즘과 윤리적 에고이즘의 지지자로 이해된다. 후자의 경우 분쟁의 여지가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슈티르너의 글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그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억누르는 새로운 고정관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흥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것을 비합리적이라고 간주한 것에 의해, 합리적 에고이스트로 간주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익이란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규범을 모두 포함하여 반드시 주관성이 중심이어야 하는것이다. 개인의 자기 실현은 각 개인의 그의 욕망에 따라 에고이즘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 마지못해 행해지는 에고이즘과 기꺼이 행해지는 에고이즘의 차이는, 전자는 '공허한' 관념에 사로잡혀 더욱 높은 이유에 따라 행동 해야 한다고 믿으며, 사소한 행복과 안전을 바라며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다. 반면 후자는, 자신의 가려진 욕망을 전적으로 인식하며 그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는 자이다. 신성한 것이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에게만 존재한다... 요컨데 에고이스트이고자 하지 않는 에고이스트, 자신을 떨쳐버리는 이(그의 에고이즘을 억누르며),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버리는 것은 오로지 고귀해 짐으로서 그의 에고이즘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에고이스트임을 그만두고자 하기에, 그는 천상과 지상에서 그가 마땅히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는 더 높은 존재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그가 동요하고 자신을 억누른다 하더라고 결국엔 모두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니... 이를 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매 순간 너는 너 자신을 잃고자 하지 않는 창조자인, 너 자신의 창조물이다. 너 보다 더욱 높은 존재로서의 너, 너를 능가하는 너... 바로 이가 너가 인식하지 못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이다. 따라서 너의 더 높은 본질이란, 소외의 본질이다.... 소외는 "신성한 것"의 기준이다. — The Ego and its Own, Cambridge edition, pp. 37–8 자유주의(liberalism)가 인간을 선언한 이래로, 이것이 오직 기독교의 마지막 결과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독교는 본래 “인간”과 “진짜 인간”을 실현하는 것 외에 다른 사명을 가지지 않았다. 이로써 기독교가 나에 대하여 불멸의 교리와 목가적 보살핌의 대상으로서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주장의 속임수가 밝혀진다. 이는 나를 오직 인간으로서만 소중히 여길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불멸하며, 내가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나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는 자유주의가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처럼 누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영원함이란, 이 평등이란, 내가 아닌 내 안의 인류만을 말할 뿐이다. 인류의 운반자이자 껍데기로서의 나만이 죽지 않는다. 모두가 “왕은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알고 있듯이 루드비히는 죽지만 왕은 남는다. 나는 죽지만 정신은, 인간은 남게 된다. 이제 나를 완전히 인간과 동일하게 만들기 위하여 누군가는 “진짜 유적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개발했다.[11] 인간 이라는 종교는 기독교의 마지막 변형일 뿐이다. 자유주의라는 종교는 나의 본질을 나에게서 분리해 그것을 나 위에 놓는다. 이것은 다른 종교가 그들의 신이나 우상을 찬양하는 것과 동일하게 “인류”를 찬양한다. 이것은 나의 것과 나의 특질과 나의 소유에서 벗어난 소외된 무언가를 나의 “본질”로 만듦으로써 나의 것을 다른 세계의 무언가로 바꿔 버린다. 요컨대 이것은 나를 인간 아래에 놓고 그리함으로써 나에 대해 소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the unique and its property" pp. 188-189[12] 그의 철학에서 자발적 에고이스트는 그 자신의 사상의 소유자로서(그의 저서의 제목처럼)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는 반대로 소유 당하는 이로서 대조적으로 묘사된다. 오로지 그가 법, 권리, 도덕, 종교등의 '신성한' 진리가 단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개념임을 인식하고, 이에 복종하길 거부할때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자유의 추구란 창조자와 창조물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창조자로서 기성 질서를 거부하고, 그로서 기존 질서에서 거부되었던 것이 창조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파괴가 창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힘은 에고이즘의 방법론이다. 그는 힘을 이용해 얻은 재산만이 오직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나키즘[편집] 슈티르너는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사회제도 – 국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권, 자연권 그리고 사회 그 자체 마져도 – 단지 환상이며 인간의 마음을 돌아다니는 유령(spook)으로[13] 간주하고 이의 권위를 부정한다.[14] 그는 무도덕주의의 측면에서 에고이즘을 옹호 했고, 각 개인은 오직 그의 순수한 욕구에 따라 '에고이스트 연합'으로서 단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란 단지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쟁취하는 것을 아는 자,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소유는 주어진다." 그리고, "내가 나의 힘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나의 것이다. 내가 소유자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나는 그것의 소유자이다." 그는 또한 말했다, "나는 너의 소유 앞에서 수줍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존중심도 없이 언제나 나의 소유로 여길 것이다. "[15]슈티르너는 사람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을 도덕적 제약 없이 – 그 권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16] 그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익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한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행위의 유일하게 적합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고정된 사회를 실체없는 유령으로 간주 했고, 개인이 실체라고 했다. 에고이스트 연합[편집]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연합 이라는 개념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처음 등장했다. 연합은 비체계적인 협회로 간주되며, 국가에 대조하여 주장되었다.[17] 연합은 당사자들의 지지를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에고이스트들 간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18]연합은 당사자들 모두가 의식적인 에고이즘으로 부터 참여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당사자들중 누군가 고통을 겪음에도 이의 겉모습을 유지하려 한다면, 연합은 퇴락하여 다른 무언가로 변모하고 만다.[18] 이 연합은 사람의 뜻을 넘어서는 권위가 나타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에고이즘은 사상에 반대하지도 사랑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달콤함의 적이 아니며, 헌신과 희생의 적도 아니다. 친밀한 따스함의 적이 아니며, 또한 비판이나 사회주의의 적도 아니다. 요컨대 에고이즘은 특정한 관심사의 적이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관심사의 배제가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무심함과 무관심에 대항할 뿐이다. 사랑에 반대하지 않으나, 신성한 사랑에 대한 반대이며, 사상의 반대가 아니라 신성한 사상에 대한 반대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신성한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마치 자신을 고립시키고, 유리시키며, 고독에 빠져들길 원하는 처럼 보이는 에고이스트의 배타성이란, 오로지 무관심의 배제를 통하여 관심사에 대한 완전한 참여를 하기 위한 것이다. — Max Stirner. Stirner’s Critics[19] 그러나 내가 왜 공공선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공공선은 나의 선이 아니며, 단지 자기부정의 최악의 형태일 뿐이다. 내가 “굴복” 할 때만이 공공선이 번영할 것이며, 내가 굶주릴 때만이 국가가 화려해 질 것이다…… 인민은 발언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입이 없는 자가 발언을 할 수 있다니! 오직 개인만이 발언권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 언론의 자유의 모든 문제가 “인민의 자유”라는 형태를 취할 때, 모든 것이 뒤집어진다. 이것은 오직 개인의 권리이자, 개인의 더 나은 힘일 뿐이다. 만일 인민이 언론의 자유를 가진다면, 인민의 가운데서도 나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인민의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며, 인민의 자유로서 언론의 자유는 반드시 나에게 적대하는 언론의 법과 함께 나타날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의 자유에 대한 노력에 대항하며 선언되어야 한다. 인민의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다! 인민의 자유, 인민의 권리라는 이 범주를 허용해 보자. 예를 들어, 인민의 권리로서 모두는 무장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중에 권리를 박탈당한 자가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 그 자신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지만, 나에게 속한 권리가 아닌 인민에게 속한 권리로서 그것을 박탈당할 것이다.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나는 감금될 수 있으며, 죄수로서 무장할 권리를 잃는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민의 자유, 공동체의 자유, “사회”의, 보편의, 인류의, 인류의 이상의, 인민의, 공동체의, 발언권을 가진 “사회”의 창조에 대한 마지막 시도로 나타난다. 개인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인민은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 자유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닌, 인민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더욱 자유로워 지면, 개인은 더욱 구속된다. 아테네의 인민은 정확히 그들이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에, 도편추방제를 만들었고 무신론자들을 추방했으며, 가장 현명한 사상가를 독살했다…… 모든 신성한 것은 구속이자, 족쇄다. 신성한 모든 것들은 법의 파괴자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시대는 모든 영역에서 이 파괴자의 무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법을 위해 이 법을 어길 준비를 하고 있다…… 인민은 강한 시민을 추방하고, 교회의 이단자들에 대한 종교 재판을 자행하며, 국가의 반역자에 대한 종교재판을 행함으로써 그 자신의 왕권 위에 서려는 자들을 억압할 것이다. 인민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주장일 뿐이다. 이것은 모두에게서 “애국적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모두는 그 자신으로서는 다르지 않으며 무의미하고, 그가 그 스스로 해야 하는 것들, 즉 자신을 실현하게 하는 것들은 할 수도 없으며 허용될 수조차 없다. 모든 인민, 모든 국가는 개인에게 불의다…… 내가 헌법, 헌장, 법률에 자신을 가두어 “내 몸과 마음을 인민에게 바친다”라고 선언해야 한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 능력이 “사회의 조화를 방해하지 말라”라는 그들의 규율 안에서만 허용되고 개발될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일 수 있겠는가? 인민과 인류의 몰락은 나를 나의 부흥으로 이끌 것이다. 들어보라, 내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우리의 사랑스러운 독일 존재의 1000년을 기념하는 내일의 축제를 위한 종소리가 시작되고 있다. 이 종소리는 이 장례식의 장송곡의 소리다!... 독일 민족과 독일 인민들은 그들 뒤에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기나긴 삶인가! 그러니 가서 잠들어 다신 깨어나지 말아라, 그렇게 네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슬로 묶어왔던 모든 이들이 이로써 자유로워 질 것이다. 인민은 죽었다. 나여 영원하라! 오, 그대 너무도 고통받는 독일 인민이여 너의 고통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상이 그 자신의 육신을 만들지 못하는 고통이며 새벽이 가기 전에 무로서 사라져 버릴 유령 들린 정신의 고통 이건만, 너는 아직 구원과 성취를 갈망하구나. 그대 친애하는 사상이여, 그대 친애하는 유령이여, 너는 내 안에서도 오랫동안 살아왔다. 나는 너의 구원을 위한 말을 거의 발견했다고 상상했었고, 배회하는 정신을 위한 살과 뼈를 발견했었다. 그리고 나는 너의 영원한 안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가며, 마지막 사랑도 사라져갔다. 그리고 나서 나는 황량한 죽은 자의 집에서 빠져나와 산자들을 부른다.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권리를 지닌다. 잘 가거라, 그대 수백만의 꿈이여, 잘 가거라, 그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천년의 폭정이여! 내일 그들은 너를 무덤으로 데려갈 것이다. 곧 너의 자매들과 너의 인민들이 너를 따르리라. 그러나 그들 모두가 뒤따랐을 때, 인류는 매장될 것이고, 나 자신은, 웃고 있는 상속자일 것이다! — Max Stirner. The Unique and Its Property pp. 225-229[20] 모든 운동과 이데올로기에는 권리의 주체가 되는 일종의 정체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그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정체성(성, 인종, 민족 등)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의 집단 정체성(혹은 그것의 도덕성)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며, 이렇게 사람은 세계를 그 자신으로서 직접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 개인은 이에올로기에 연계하지 않고서는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 누군가 그 정체성에서 벗어난다면(혹은 쫓겨난다면) 그는 곧 이데올로기가 그에게 약속한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할 것이다. 결국 사람은 그 정신에 복종하는한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이를 정신의 지배로서 파악한다. 이에 맞서서 등장한 개념이 어떠한 정신의 지배와도 연계하지 않은 고유한 개인(혹은 유일자)이 그들의 공통된 욕망을 위해 상호적으로 교류하는 연합체인 에고이스트 연합이다. 혁명[편집] 슈티르너는 전통적인 형태의 혁명의 모델을 비판했다. 그러한 운동은 암묵적으로 국가주의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고전적인 혁명이 결국에는 체제를 전복하더라도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티르너는 전위대가 주도하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변화인 정치혁명을 비판하고,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개인들이 주도하는 아래서 위로 향하는 혁명, 즉 사회혁명을 주장한다. 특정한 자유를 향한 갈망은 언제나 새로운 지배를 목표로 한다. 혁명이 그래왔던 것 처럼 "그것의 옹호자들에게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특정한 자유만을 쫓았기 때문에 새로운 지배인 "법에 의한 지배"를 만들어 낸다. 네가 그토록 자유를 원한다면, 어째서 자유의 적음과 많음의 정도에 대하여 언쟁하는가? 자유는 오직 모든 자유일 수 밖에 없다. 조각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너는 모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가능성에 절망하고 있다. 아니면 심지어 이것을 바라는 것조차 광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환상을 떨쳐버리고, '도달할 수 없는 것' 보다 나은것에 고통을 쏟으며 살으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45[21] 특정한 자유(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을 소유할 자유등)은 그것을 강제할 권력을 필요로 한다. 그 권력이 바로 국가다. 국가는 법과 경찰이라는 모습으로 그 질서를 강제하고, 그 질서를 방해하는 것은 범죄라 칭한다. 이러한 질서에서는 자유의 수호자인 국가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시민만이 자유로운 인간이며, 거역하는 이는 무법자라는 역설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런 위선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사라진다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 또한 사라질 것이다. 혁명과 반역은 결코 동의어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전자는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의 단순한 위치의 전복이며,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행위이다. 반면 후자는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환경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는 그것을 위한 목적이 아닌 개인의 불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무장봉기가 아니라, 그것이 초래할 협약을 고려치 않는 개인의 반역이다. 혁명은 새로운 협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하나, 반역은 우리를 더이상 지배 받지 않을 길로 이끌며, 단지 우리 자신과 약속하게 만든다. 또한 더이상 제도에 의존하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이것은 확립된 것과의 싸움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지금은 번영할 지라도, 내가 그것으로 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만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붕괴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확립된 것에서 떠나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쇠락하며 죽어갈 것이다. 이제 나의 목표는 단지 확립된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다. 나의 목표와 행위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에고이스트적 행위이자 목적이다.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p. 420–421 부르주아는 국가의 은혜를 통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는 국가의 권력이 붕괴되면 모든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어떨까? 그는 잃을 것이 없기에, “그 없는 것”에 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국가의 보호를 받는 이들에게서 그 보호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이로써 무언가를 얻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가지지 못한 이들은 국가를 가진 자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권력이며 자신들에게서는 고혈을 뽑아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국가는 부르주아의 국가이며, 부르주아의 재산이다. 국가는 인간을 노동에 따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종(충성)에 따라, 국가가 그에게 하달한 권리가 국가의 법에 알맞게 집행되었는가에 따라 그를 보호한다. 부르주아 체제하에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국가의 영역(국가의 영역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국가에 속하며, 개인이 가진 것은 봉토일 뿐이다.), 특히 돈과 땅에 대한 처분권이 있는 소유주, 즉 자본가들의 손에 떨어진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이 소비자에게 갖는 가치의 범위까지 도달하는 것을 실현할 수 없다. 노동이 착취되고, 자본가들은 이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는다. 좋은 급료를 받는 이들은 오직 국가의 지배와 화려함을 드높이며, 국가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노동일뿐이다. 국가는 그들의 “선량한 시민”인 소유주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낮은 급료를 지불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국가는“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좋은 급료로서 “경찰”(헌병에서부터 사법 기관과 교육체계 등의 모든 종류의 공무직, 이를테면 "국가라는 기계" 그 전체)이라는 권력의 종들을 확보하고, 그“선량한 시민”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하기 위해 기꺼이 더욱 많은 세금을 지불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본질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국가에 적대적인 힘으로 남게 된다. 소유주의 국가, 이 “시민 왕”은 그의 원칙에서 노동을 그 자체의 가치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착취되고, 소유주라는 적의 전리품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은 가장 강력한 힘을 그들 손아귀에 쥐고 있다. 만일 그들이 의식적으로 이것을 한번 사용 한다면, 무엇도 이에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노동을 멈추고서 그들 노동의 생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향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 도처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노동쟁의이다. 국가는 노동의 노예제에 기초해 있다. 만일 노동이 해방된다면, 국가는 소멸하리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05[22] 노동자들이 노동의 힘을 주체적으로 소유한다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헤겔의 가능한 영향[편집] 카를 뢰비트나 로렌스 스테폴로비치같은 학자는 헤겔은 유일자와 그 소유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스테플로비치는 유일자와 그 소유는 분명히 전반적으로 비헤겔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헤겔의 세계와 자아에 대한 결론에 대한 적의가 가득하지만, 이것이 헤겔이 헤겔에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헤겔과 슈티르너가 이어지는 주요 시점은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지로 향햐는 현상학적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발견된다. 슈티르너의 작품은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태를 취할때 가장 명확히 이해된다. 무엇이 일련의 가짜 지식을 지나 절대지에 도달하도록 의식을 일깨우는가? — Lawrence Stepelevich, "Max Stirner as Hegelia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15, pp. 597–614 (1985). 헤겔을 넘어서고 그에 맞서기위해 진정한 변증법적 방식으로 헤겔의 프로젝트를 이어갔으며, 스테폴로비치는 슈티르너의 이러한 노력으로 헤겔의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스테플로비치는 헤겔의 현상학의 의도를 요약한 장 이폴리트를 인용하며 결론 지었다. "세계의 역사는 완료되었고, 이제 필요한 것은 특정한 개인이 그 자신을 재발견 하는 것이다." 유일자로서 슈티르너는 자신을 특정한 개인에 놓았고, 이후 헤겔주의자로서 자기의식과 그의 결정인 대상과의 유희를 통한 이론적 재발견에 의한 유용한 결론을 제시한다. "우상은 오직 나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내가 오직 그들이 재생산 되는 것을 중단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신성한 권력'은 내가 자신을 억누르고 그것을 찬양할때만이 존재한다. 세계와 나의 교류는 나의 향유로서 구성되며, 나는 이를 자기향유를 위해 소비한다." (Ego, 319) — Lawrence Stepelevich, "Max Stirner as Hegelian" 더글라스 모가치, 위드카인드 디 리더(Widukind De Ridder)같은 학자는 슈티르너는 분명히 동시대인인 포이어바흐나 바우노처럼 헤겔의 제자였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를 헤겔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헤겔주의자와는 반대로, 헤겔의 내재적 비판과 계몽주의의 모든 시도를 경멸했고, 포이어바흐와 바우노의 해방의 주장도 거부했다. 합리성의 체현이 불완전하게 내제하고 있다는 헤겔과는 달리, 슈티르너는 이를 변환해야 하는 것이 아닌 단지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대로 남겼으며 오로지 유일자의 향유이자 소모물일 뿐이었다.[23] 모가치에 의하면 슈티르너는 헤겔을 넘어간 것이아니라. 그 자체의 철학을 남겼다. 슈티르너는 인간 자아의 개념화를 거부하고, 모든 종류의 합리성 혹은 보편적 기준이 결여된 것으로서 제시했다. 자아는 더욱이 행동의 영역에서 '구체화 되지 않는 나'로 간주되었다. '나'는 실현해야될 어떠한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며 삶은 자기해소의 과정인 것이다. 인본주의자인 헤겔학파가 주체성에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임무를 부여한 것과 달리 슈티르너는 유일자를 개념화할 수 있는 모든 시도에서 거리를 두었다 : ‘유일자의 개념에 대한 더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어떠한 철학 체계도 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내거나, 끄집어 내거나 생각할 수 없을것이다. 차라리 이것은 개념으로서의 발전 자체를 중단했다. — Douglas Moggach & Widukind De Ridder, "Hegelianism in Restoration Prussia,1841–1848: Freedom, Humanism and ‘Anti-Humanism’ in Young Hegelian Thought.", In: 'Hegel's Thought in Europe: Currents, Crosscurrents and Undercurrents', ed. Lisa Herzog (pp. 71-92).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p. 75 저작[편집]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편집] 1842년 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 (우리교육의 잘못된 원칙) 맑스가 편집을 맡았던 라인 신문을 통해 출간 되었다.[24] 글은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하인시우스(Otto Friedrich Theodor Heinsius)의 인본주의 vs. 현실주의(Humanism vs. Realism)라는 논문에 반박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슈티르너는 교육은 적통적인 인본주의적 방법이든 실용적인 현실주의적 방법이든 여전히 진정한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교육이란 개인의 고유성을 보존하고 자아를 실현할수 있는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술과 종교[편집] Kunst und Religion (예술과 종교)역시 라인 신문을 통하여 1846년 6월 14에 출간 되었다. 이것은 브루노 바우어와 그의 헤겔에 대한 비판글인 '헤겔의 종교적 교리와 신앙의 관점에서 예술 판단'을 다루었다. 바우어는 헤겔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관계를 뒤집으면서 예술은 통용되는 확정성과 명쾌함 그리고 보편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종교보다 철학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슈티르너는 헤겔과 바우노의 비판을 넘어서 예술은 오히러 종교에 대한 대상을 만들어 내기에 슈티르너가 철학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 헤겔 바우노와는 달리 - 될 수 없었다. [철학]은 종교처럼 대상에 반대하는 것도, 예술처럼 그것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러 이는 대상과 대상이 만들어 지는 행위가 자유의 공기로 호홉 하도록 분쇄를 하는 것이다. 철학의 정신인 이성은 순전히 그 자신과 연관되며 문제는 대상없이 스스로 끝나게 된다. — Max Stirner, 'Kunst und Religion, p. 110. 슈티르너는 철학은 종교처럼 대상을 귀찮게 하지도, 예술처럼 대상을 만들어 내지도 않다는 하며 신중히 변증법적 삼인조(예술-종교-철학)에서 철학을 빼내 왔다. 사실 슈티르너와 관련해서 철학이란 예술과 철학에 모두 무심한 것이였다. 이로서 슈티르너는 바우노의 종교 비판을 무시하고 그것을 급진화 하였다.[23] 유일자와 그 소유[편집] 슈티르너의 주저 유일자와 그 소유(독:Der Einzige und sein Eigenthum, 영:The Ego and Its Own)은 1844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출간 되었다.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슈티르너는 반권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프러시아 사회와 근대 서구 문명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언어와 현실을 넘어선 '창조하는 무'로서 여기는 접근 방식을 제공했다. 이책은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들이 공허한 개념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 권위를 주장하는 사회 기관, 국가, 사법기관, 교회, 대학같은 교육체계 까지 이와 같은 개념에 기초하여 있다고 주장한다. 슈티르너의 논의는 주로 동시대 인들을 향해 비판의 한계를 확장했다. 특히 포이어바흐, 종교, 자유주의, 인본주의(포이어바흐의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존재다' 라는 주장을 신이라 불렸던 것의 위치에 인간을 대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구조는 여전히 종교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족주의,국가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까지 당시 사상의 전 영역을 공격했다. 정신의 시대에 사상들은 그들을 만들어낸 나의 머리위로 높이 솟아올아, 고열로 인한 환각처럼 주위를 맴돌며 전율케 하는 무서운 힘을 얻게 되었다. 한낱 사상에 지나지 않던 유령은 이제 그 자신의 육신을 지니게 되어 신, 황제, 교황, 조국이 되었다. 만일 내가 그들의 육체를 파괴하고 나의 것을 돌려 받아 "나만이 육신을 지닌 자이다"이라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이제 세계를 나로서, 나의 것으로서, 나의 소유로서, 모든것이 나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얻게 되리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5. 슈티르너의 비평가들[편집]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은 1845년 9월 위겐즈 피어텔야르스쉬리프트(Wigands Vierteljahrsschrift)를 통해 출간 되었다. 그의 저서에 비판한 3인의 글들,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M. 헤스의 '최후의 철학자들', 셀리가의 'M.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 소유'에 비판하기 위한 것이였는데 여기서 슈티르너는 그 자신을 3인칭화 해서 설명한다. 철학적 반동[편집] 철학적 반동'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은 1847년 오토 비간트가 편집하는 저널인 Die Epigonen를 통해 라이프치히에서 발간 되었다. 그 시점에서 비간트는 이미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발간했고, 슈티르너가 번역한 아담 스미스와 장 바스티세의 저작들 까지 출간이 완료된 상태였다. 제목이 표시해 주듯이 철학적 반동은 쿠노 피셔(Kuno Fischer, 1824–1907)의 Die Moderne Sophisten(1847)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글은 G. Edward 라고 서명 되어 있었는데 이때문에 존 헨리 맥케이가 조심스럽게 이를 슈티르너의 컬렉션에 포함할때 까지 저작자에 대한 분쟁이 있었다. 이글은 2011에서야 영어로 번역 되었으며,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맥케이는 이 글이 슈티르너가 피셔의 유일자 비판을 반박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G. Edward와 슈티르너를 동일인으로 식별했다. 글은 ‘Ein Apologet der Sophistik und “ein Philosophischer Reactionäre” 제목과 Die Philosophischen Reactionäre라는 제목으로도 출간 되었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비간트가 인적 사항을 거짓으로 기입했던 Edward의 글을 연이어 출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맥케이가 주장 했듯이 슈티르너가 이에 대해 부정한 적은없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시시한 근거가 슈티르너를 작가로서 인식 되게 할만큼 적당한가라는 문제를 남긴다. 이러한 정황증거들로 인하여 몇몇의 학자들이 Die Philosophischen Reactionäre의 내용과 스타일을 기반으로 의심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확실이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것은 유일자가 작성되고 3년 뒤, 청년헤겔학파가 시들어버리고난 뒤에 쓰여졌다는 것이다.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90 (2011). 글의 대부분은 피셔의 궤변의 정의에 대해 다뤄지고 있다. 많은 재치와 함께, 피셔의 궤변 비판이 가진 자기 모순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피셔는 철학과 궤변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을 만들었고, 동시에 궤변을 "철학의 거울상"으로 간주하였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의 공기"에서 호흡하며 "변증법적으로 형식적인 유창함을 이끌어낸다.". 슈티르너의 대답이 눈에 띈다. 당신들 철학자들은 자신의 무기로 해를 입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당신이 단지 변증법적으로 상정한 것을 내가 변증법적으로 사라지게 한다면, 당신의 상식은 무엇이라 답할것인가. 당신은 나를 모든 것을 무로서, 무를 유로서, 흑을 백으로서, 백을 흑으로서 만드는데 유창한 이라고 묘사한다. 내가 당신의 순수한 예술을 돌려 보낼때 당신은 나에 대해 무엇을 할것인가?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99 (2011). 다시 유일자로 돌아가 슈티르너는 주장한다. 슈티르너는 스스로 그에 책에 대하여, 어느정도는 그가 바라는 것에 대하여 서투른 표현을 했다고 묘사했다. 이것은 인생 최고의 순간에서의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부분적으로 서툴다고 불렀다. 그는 철학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국가와 종교, 신자들에의해 학대 되었어며, 관념이 자행하는 혼돈으로 부터 폐허가 되어버린 언어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104 (2011). 반동의 역사[편집] 반동의 역사는 1851년 얼마뒤 오스트리아에서 금지 되는 Allgemeine Deutsche Verlags-Anstalt 에서 2부분으로 나눠 출간 되었다.[3]이것은 최근에 벌어근 1848년 독일 혁명에 대한 글이었고, 주로 슈티르너가 수집하여 번역한 글들의 컬렉션이였다. 서문과 몇몇 부분은 슈티르너가 직접 작성한 글이였는데 에드먼드 버크와 오귀스트 콩트를 혁명에 반하는 두 인물로서 인용한다. 비평[편집] 슈티르너의 저작은 그의 동시대 인들에게선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슈티르너는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를 중심으로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그를 논쟁으로 끌어 들였다. 모스헤스(그시절에 맑스와 가까웠던) 그리고 셀리가( 바우노의 지지자였던 Franz Zychlin von Zychlinski의 필명)또한 슈티르너에 응답하였다. 슈티르너는 이에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 1845년 9월)'로서 답변한다. 이는 책의 몇가지 요점을 독자들에게 명확히 설명하고자하는 목적이 강했는데 특히 포이어바흐와 관련하여 그러한 설명이 강조 되었다. 동시대인의 코멘트[편집] 슈티르너의 저서가 쓰여진뒤 20년 후 작가 프리드리히 랑게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슈티르너는 그의 악명높은 글,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모든 도덕 관념을 부정하기 까지 했다.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부정 되었다. 외부적 힘, 믿은 혹은 단지 관념 마져도 사람의 위에서 그의 변덕을 억누르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슈티르너의 부정이란 그의 증오의 한계와 같은 것 이였다. 긍정적인 두번째 부분이 추가 되지 못한 얼마나 가련한 책인가. 그랬다면 이것은 셸링의 철학의 경우보단 쉬웠을 겄이다. 제약 없는 자아를 해방해서 모든 종류의 이상주의를 나의 의지와 나의 이상으로서 계속해서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슈티르너는 의지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인간 본성적 힘의 원천 이듯이 그려냈다. 이것은 우리에게 쇼펜하우어를 떠올리게 한다. — History of Materialism, ii. 256 (1865) 어떤 이들은 책의 두번째 부분이 슈티르너가 아닌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하여 곧 추가될 것이라고 믿었다.프리드리히 니체와 막스 슈티르너의 관계는 이로서 더욱 복잡하게 될것이라 여겨졌다.[25] 조지 j. 스탁( George J. Stack)의 Lange and Nietzsche에 따르면[26] 니체는 랑게의 History of Materialism을 계속해서 여러번 읽었고 때문에 슈티르너에게 관해 익숙했을 것이라고 한다. 영향[편집] 유일자는 성공적인 반응을 얻고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반응을 이끌었지만, 곧 절판되고 그는 죽을때까지 서서히 잊혀져가는 인물이였다.[27] 슈티르너는 헤겔좌파에 파멸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그의 철학은 맑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철학은 '유럽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기초를 정립한 것으로 평가 된다.[27] 에드문트 후설 한번 소규모 청중들에게 유일자의 '매혹적인 힘'에 대하여 언급했다.[28] 미술 평론가이자 슈티르너주의자인 하버트 리드는 그의 저서는 유럽 문명이 최초로 등장한 이래 모래 주머니안에 갇혀 남아있다고 언급했다.[29] 루돌프 슈타이너, 구스타프 란다우어, 빅토르 세르주,[30]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많은 사상가 들이 젊은 시절에 유일자를 읽고 감동을 했다. 몇몇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사상에 대한 영향을 밝혔다[31] 에른스트 융거'의 저서 en:Eumeswil,에선 Anarch가 슈티르너의 유일자에 기초하여 묘사된다.[32]카뮈의 저서 반항하는 인간(The rebel)에서도 유일자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외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는 대표적으로 벤자민 터커, 제임스 후네커,[33] 도라 마즈던, 렌조 노바토레, 엠마 골드먼,[34] 게오르그 브란데스, 존 쿠퍼 포이스,[35] 마르틴 부버 ,[36] Sidney Hook,[37] 로버트 앤턴 윌슨, 호스트 마타이 크엘러, 엔리코 아리고니, 마르셀 뒤샹, 라울 바네겜을 포함한 몇몇의 상황주의 작가들[38] 그리고 막스 에른스트. 또한 유일자와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주의 아래서의 인간의 영혼에서 유사성이 관측 되는데, 몇몇의 역사가들은 그게 유일자에 익숙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39] 1844년 유일자가 출간된 이래 책은 정치적 학술적 관심에 의해 간헐적으로 인기를 얻어 부활하곤 했다. 오늘날 그의 많은 아이디어들은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타협하지 않는 개인주의라는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는 여러 고정된 관념 예를 들면 성 역할등을 유령으로 간주해 그 권위를 부정한 것에서 개인주의적 여성주의의 선구자로 간주 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아이디어는 포스트-아나키즘의 중요한 이론가인 사울 뉴먼에의해 많은 동감을 얻으며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게 된다. 맑스와 엥겔스[편집]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그려진 프라이엔의 모임을 묘사한 그림 엥겔스는 프라이엔에서의 슈티르너의 모습을 시로 묘사했다. 슈티르너를 보라, 그를 보라, 모든 억압의 조용한 적. 그 순간, 그는 여전히 맥주를 들이키지만, 머지않아 피를 물처럼 마시게 될 것이다. 모두가 사납게 "왕을 타도하라" 외칠때 슈티르너는 즉시 "법 또한 타도하라" 답한다. 슈티르너 존엄히 선포 하니 네가 자신을 굽히고 감히 자유롭다 칭할 때 너는 곧 노예제에 익숙해지리니 교조주의를 타도하고, 법마저 타도하라.[40] 그는 슈티르너를 좋은 친구라고 부르곤 했다.[8] 1844년 11월 엥겔스는 맑스에게 편지를 썻다. 그는 쾰른에서 모세 헤스와의 방문을 보고하고 이것은 그에게서 막스 슈티르너의 새책인 유일자를 얻기 위한 것이였다고 전했다.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엥겔스는 맑스에게 유일자 사본을 보내줄 것을 약속하며 슈티르너는 "분명히 자유인들중 가장 재능있고, 독창이며, 근면한 이" 라고 표현하며 그의 글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8]책에대한 열정을 가지고 엥겔스는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했다.:그러나 무엇이 진실이느냐 하는 그의 원칙에 대해선, 우리 역시도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하는 사실이네. 어떠한 이유에 따라 행동하기 이전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 스스로의 에고이스트적인 이유를 만들어내야 하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떠한 물질적 기대는 치워 버리고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에고이즘의 미덕으로서 단지 개인이 아닌 인간이길 원하네[41] 나중에 맑스와 엥겔스는 슈티르너의 저작에 대한 주요한 비판을 작성한다. 독일이데올로기의 2/3가량의 슈티르너를 비판하는데 할애한 성 막스라는 장인데, 이는 슈티르너의 전체 저작의 양을 초과하는 분량이었다.[42] 이사야 벌린이 묘사했듯이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이 슈티르너를 조롱하기 위해 할애되어 있었다.[43] 책은 1845-1846년 사이 작성 되었지만 1932년이 될때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슈티르너를 향한 맑스의 길고 사나운 논쟁은, 맑스가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간주된다. 맑스는 공산주의와 슈티르너의 도덕적 니힐리즘을 화해 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결과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안하게 된다.[44] 슈티르너와 포스트-구조주의[편집] Post-anarchism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영향력있는 포스트 구조주의 사상가인 쟈크 데레다는 그의 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맑스와 슈티르너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었고 슈티르너의 개념인 망령(specters)과 유령(spooks)등을 분석했다[45]포스트구조주의의 또다른 주요한 사상가인 질 들뢰즈는 그의 저서인 '감각의 논리'에서 슈티르너를 언급했다.[46] 사울 뉴먼은 슈티르너는 최초의 포스트 아나키스트라 칭했다 한편으론 푸코, 라캉, 들뢰즈 그리고 데레다등을 앞질렀으며 한편으론 그들에겐 불가능했던 비본질주의적 측면에서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들이미 초월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특히 슈티르너가 자아는 '창조적 무'다 라고 하며 이데올로기의 얽매임을 거부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점에서 들어난다고 주장한다. 니체에 대한 연관의 가능성[편집] 슈티르너와 니체의 생각은 많은 면에서 비교되며, 많은 작가들은 그들의 사상의 명백한 유사성에 대하여 토론하고, 몇몇은 그들의 영향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곤 한다.[47]독일에서 니체가 잘 알려지기 시작한 초기에 연관된 사상가에 대한 토론은 슈티르너 보단 쇼펜하우어에 관한 것이었다.[48] 니체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인 랑게의 'History of Materialism'과 하르트만의 Philosophy of the Unconscious에 의하면 니체가 유일자를 읽었다는 것은 확실하다.[49] 그러나 니체의 글 어디에서도 슈티르너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는다.[50] 2002년 발견된 전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니체는 랑게와 하르트만을 만나기 이전인 1865년 10월에, 1840년대 슈티르너의 친구였던 Eduard Mushacke를 만남으로서 슈티르너의 저작을 이미 읽었을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저작은 광범하게 퍼졌고, 그가 슈티르너에게 이론적인 빚을 지고 있는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 되었다. 1891년초(니체가 죽진 않았으나 정신적인 문제에 시다라리던 기간) 하르트만은 니체가 슈티르너를 표절했다고 주장하기 까지 했다.[52] 세기의 전환점에서 니체가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광범하게 퍼졌고 평범한 것이 되었다. 적어도 독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관측되었다. " 현대 독일에서의 슈티르너의 영향력 놀라울 정도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니체와 동일선상에 놓여진다. 두 사상가는 본질적으로 같은 철학의 주창자로 간주된다.[53] 니체가 슈티르너로 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시작될 때부터 큰 논쟁으로 분류도긴 했지만 곧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게 된다[54] .[55]20세기 중엽에 슈티르너가 니체에 가한 영향에 대한 언급은 무조건 기각 되거나, 대답할수 없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56] 그러나 니체가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주장은 그들의 글쓰기가 유사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제기 되었다.[57]어쨋든 슈티르너가 니체에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가장 중대한 문제는 니체가 읽었는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58] abissonichilista라는 아나키스트는 슈티르너와 니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유일자는 초인이 아니며,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도 아니다. 유일자는 그 자신의 삶과 사상과 행동을 소유한 실천적 에고이스트다. 인간에겐 갈구해야 할 외부적 목표가 없으며, 그 외부의 중대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과 의미는 사람에 의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파괴되고, 재창조되고, 무시된다. 니체는 신의 죽음과 삶의 본질적인 의미의 부족에 의해 괴롭힘을 받았다. 그는 이를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도덕성으로서 재창조하길 원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신은 죽지 않았으며, 인간성(Humanity)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을 뿐이다. 인류(Humanity)는 근대성의 최고의 존재다. 슈티르너는 문화와 사회기관에 의한 의미와 목표의 부과에 반대한다. 개인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전유하고 소비할 수 있다. 자기해방은 미리 조립된 의미를 발견하거나, 초인이 그것을 제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완전함과 개선은 해방의 척도가 아니며, 이 또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외부의 이미지일 뿐이다. 소유(Ownness)는 그 자신이 살기 위해 어떤 이미지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의 행위이자 특질이다. 변증법적 에고이즘은 외부에서 비롯된 가치의 척도와 의미와 목적 없이 살아가기 위한 철학이다. 이것은 엄격함이 온화함 보다, 의무가 선택 보다, 필요가 자유 보다, 완전함이 불완전함 보다 낫다는 개념에 도전한다. 슈티르너는 새로운 도덕성, 새로운 영적 이상이나 새롭고 향상된 인간 집단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경멸하지 않았으며, 사회 제도와 국가 그리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마음의 지배"를 경멸했다. 슈티르너는 모든 숭고함과 신비로운 본질을 부정했다.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인간성은 "유령(spook)"이다 초인 또한 유령이다.[59] ” 루돌프 슈타이너[편집] 루돌프 슈타이너가 1900년 신학자로 변모하기 이전 그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방향은 슈티르너의 자아에 대한 것과 강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철학적 기반에 영향을 주었다[60] 아나키즘[편집] 아나키즘 역사 및 상징 스페인 분리주의 혁명(1873) 미국 헤이마켓 사건(1886) 바르셀로나 비극의 열흘(1909) 멕시코 혁명(1910)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반란(1920) 러시아 크론시타트 반란(1921) 스페인 제2공화국(1931) 스페인 내전(1936)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프랑스 68혁명(1968) 로마 국제회의 국제 아나키스트 암스테르담 회의 행덕사건 16 인권 선언 자유영역분쟁 아마카스 사건 붉은 역삼각 프로보 전선 WTO시위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 관련 분파 사회적 아나키즘 정강주의 반역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 상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실존주의적 아나키즘 여성주의적 아나키즘 초월주의적 아나키즘 인식론적 아나키즘 크립토 아나키즘 기독교 아나키즘 불교 아나키즘 민족아나키즘 아나르코자본주의 아나코-코뮤니즘 아나코 신디칼리즘 퀴어 아나키즘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 관계 개념 무신론 고전적 반국가주의 어피너티 그룹 직접 민주주의 자유지상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탈민족주의 반제국주의 후기구조주의 국제주의 반전주의 불법주의 상호주의 수평주의 이성주의 평화주의 반파시즘 반파쇼 자유연합론 양심적 병역 거부 무정부·무군대 예시적 정치 자생적 질서 계급 투쟁 자유사상 자유연애 불가지론 이신론 반신론 회의론 니힐리즘 실존주의 인본주의 시민 불복종 직접행동 노동조합 협동조합 스쾃 파업 불매동맹 포스트모더니즘 다다이즘 사이버펑크 P2P 핵티비즘 자연법 실정법 일리걸리즘 개인주의 자기소유권 관련 텍스트 《조선혁명선언》 《허무당선언》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 《카탈로니아 찬가》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일반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관한 고찰》 《재산이란 무엇인가》 《경제적 여러 모순의 체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능력에대해서》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국가와 무정부》 《신과 국가》 《상호부조론》 《이 책을 훔쳐라》 국제 조직 제1인터네셔널 국제 여단 국제노동자협회 (1992년) 청년국제당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전국노동자연합 아나키스트 블랙 크로스 과거 국내 조직 의열단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이천자유회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선자유노동자조합 조선인신진회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에스페란토문화사 조선동흥노동동맹 조선노동동흥회 함흠정진청년회 선구독서회 진우연맹 본능아연맹 우리계 다물단 불령사 흑색청년자유연합회 흑로회 흑색공포단 흑전사 흑도회 흑기연맹 흑우연맹 관련 인터넷 조직 Anarkismo.net 코피미즘 선교 교회 스웨덴 해적당 독일 해적당 해적당 인터네셔널 파이러트베이 어나니머스 관련 목록 아나키스트들의 상징 아나코 펑크 밴드 아나키스트 커뮤니티 아나키스트 소설 유대인 아나키스트 러시아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 음악가 아나키스트 조직 아나키스트 간행물 아나키스트 시인 아나키스트 영화 관련 경제 산업 혁명 경제 불균형 카르텔 석유 노동가치설 자본론 21세기 자본 제국주의론 자본축적론 기본소득 은 본위제 금 본위제 검은 목요일 브레튼 우즈 체제 스미소니언 협정 킹스턴 체제 변동 환율제 신자유주의 빈곤 노동 빈곤층 모기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유럽 국가부채위기 신용파산스왑 중앙은행 본원통화 통화승수 연방준비제도 지급준비제도 전자화폐 비트코인 관련 인물 고드윈 프루동 크로포트킨 바쿠닌 말라테스타 쿠르베 골드만 버크만 소로 소렐 마흐노 두루티 톨스토이 오웰 파이어아벤트 슈티르너 렌조 노바토레 촘스키 터커 몬슨 푸코 워드 카밀로 촐고츠 호프만 루빈 북친 후미코 슈스이 사카에 김원봉 하기락 백정기 신채호 이회영 이규창 유림 유자명 정화암 김산 홍형의 김종진 원심창 오면직 황상규 박열 나월환 조약골 v • d • e • h 슈티르너의 철학은 근대 아나키즘 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나키즘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지만 사회적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만 그리고 페데리카 몬세니를 비롯한 많은 사회적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유럽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그는 이후 나타난 지지자들인 에밀 아망드, 한 라이너, 렌조 노바토레, 존 헨리 맥케이, 미구엘 기메네즈 이구알라다, 그리고 레프 체르니 같은 이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미국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그는 벤자민 터커와 그의 매거진 리버티에서 자주 논해 졌었다. 터는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아 자연권을 버리고 에고이즘으로 대체하게 된다.[61] 리버티의 몇몇의 글들은 분명히 에고에즘의 경향이 나타났다. 영국에선 하버트 리드가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에고이즘을 일종의 실존주의로 묘사했다. 이후 1960년대 다니엘 게렝의 '아나키즘: 이론에서 실천까지'에서 게랭은 슈티르너를 헤겔주의의 반개인주의가 사상계를 지배하던 시절에 개별성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 했다[62] 1970년대 미국에선 상황주의자들의 집단인 'for ourselves에서 '탐욕할 권리: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의 실질적인 필요성에 대한 논문' 을 썼는데 그들은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아 에고이즘적 공산주의를(egoist-communism, 혹은 communist-egoism) 주장하게 된다.[63] 이후 미국에서 슈티르너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영향을 받아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이 등장한다. 제이슨 멕퀸은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내가 이데올로기를 비판할때 이는 막스 슈티르너의 회의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에 뿌리를 둔다"[64] 그리고 밥 블랙과 '페럴 폰/울피 랜드스트라이커' 같은 이들역시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포스트-구조주의와, 아나키즘의 혼합물인 포스트 아나키즘 이론가인 사울 뉴먼역시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고 슈티르너의 철학과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한 글을 썼다. 반역 아나키즘 역시 슈티르너에게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반역 아나키즘 이론가인 울피 랜드스트라이커와 알프레도 보나노역시 슈티르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보나노는 슈티르너와 관련해 Max Stirner 그리고 "Max Stirner und der Anarchismus"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65] 자유연애, 동성애, 그리고 여성주의[편집] “ 만일 슈티르너가 말했다면: 너는 살아있는 본질이나 동물 이상이다. 이것은 너는 여전히 동물이라는 것이지만, 그 동물성은 네가 누구인지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말한다: "너는 인간 이상의 존재지만, 또한 인간이기도 하다. 너는 남성 이상의 존재지만, 또한 남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인간성과 남성성은 너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너를 '진정한 인간성'이나 '진정한 남성성'으로 묶어두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무관심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이로 인해 언제나 고문을 당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가식적인 의무로서 너 자신을 괴롭혀왔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거룩한 인민은 너를 그들과 함께 묶어두고자 한다." ”   — 막스 슈티르너, Stirner’s Critics(1845)[66] 독일 슈티르너주의자이자 양성애자였던 아돌프 브랜드는 1896년 동성애에 관련된 간행물인 en:Der Eigene(유일자)을 간행하게 되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동성애 관련 출판물 이였으며 1931년까지 간행 되었다.[67] 간행물의 이름은 슈티르너의 저서인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비롯된 것이었다. 또 다른 초기 성소수자 운동가로는 슈티르너의 전기 작가이자 게이였던 존 헨리 맥케이가 있다.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는 여성주의자는 대표적으로 en:The Freewoman과 en:The New Freewoman을 편집했던 도라 마즈던과 엠마 골드만 같은 이들이 있었다. 슈티르너는 또한 자유 연애와 폴리아모리의 전파자인 에밀 아망드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68] 같이 보기[편집] 앙리 아르봉 자유로운 사람들 노트[편집] ↑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 Goodwa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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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despair of the possibility of obtaining the whole of freedom, freedom from everything — yes, you consider it insanity even to wish this? — Well, then leave off chasing after the phantom, and spend your pains on something better than the — unattainable. ↑ The commoner is what he is through the protection of the State, through the State’s grace. He would necessarily be afraid of losing everything if the State’s power were broken. But how is it with him who has nothing to lose, how with the proletarian? As he has nothing to lose, he does not need the protection of the State for his “nothing.” He may gain, on the contrary, if that protection of the State is withdrawn from the protégé. Therefore the non-possessor will regard the State as a power protecting the possessor, which privileges the latter, but does nothing for him, the non-possessor, but to — suck his blood. The State is a — commoners’ State, is the estate of the commonalty. It protects man not according to his labor, but according to his tractableness (“loyalty”) — to wit, according to whether the rights entrusted to him by the State are enjoyed and managed in accordance with the will, i. e., laws, of the State. Under the regime of the commonalty the laborers always fall into the hands of the possessors, of those who have at their disposal some bit of the State domains (and everything possessible in State domain, belongs to the State, and is only a fief of the individual), especially money and land; of the capitalists, therefore. The laborer cannot realize on his labor to the extent of the value that it has for the consumer. “Labor is badly paid!” The capitalist has the greatest profit from it. — Well paid, and more than well paid, are only the labors of those who heighten the splendor and dominion of the State, the labors of high State servants. The State pays well that its “good citizens,” the possessors, may be able to pay badly without danger; it secures to itself by good payment its servants, out of whom it forms a protecting power, a “police” (to the police belong soldiers, officials of all kinds, e.g. those of justice, education, etc. — in short, the whole “machinery of the State”) for the “good citizens,” and the “good citizens” gladly pay high tax-rates to it in order to pay so much lower rates to their laborers. But the class of laborers, because unprotected in what they essentially are (for they do not enjoy the protection of the State as laborers, but as its subjects they have a share in the enjoyment of the police, a so-called protection of the law), remains a power hostile to this State, this State of possessors, this “citizen kingship.” Its principle, labor, is not recognized as to its value; it is exploited,[ausgebeutet] a spoil [Kriegsbeute] of the possessors, the enemy. The laborers have the most enormous power in their hands, and, if they once became thoroughly conscious of it and used it, nothing would withstand them; they would only have to stop labor, regard the product of labor as theirs, and enjoy it. This is the sense of the labor disturbances which show themselves here and there. The State rests on the — slavery of labor. If labor becomes free. the State is lost. The Ego and its Own ↑ 가 나 Moggach, Douglas & De Ridder, Widukind. Hegelianism in Restoration Prussia,1841–1848: Freedom, Humanism and ‘Anti-Humanism’ in Young Hegelian Thought. In: 'Hegel's Thought in Europe: Currents, Crosscurrents and Undercurrents', ed. Lisa Herzog (pp. 71-92).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pp. 82-83 ↑ Encyclopaedia of Philosophy, The Macmillan company Press, New York, 1967 ↑ See Bernd A. Laska: Nietzsche's initial crisis. In: Germanic Notes and Reviews, vol. 33, n. 2, fall/Herbst 2002, pp. 109–133 ↑ George J. Stack, Lange and Nietzsche, Walter de Gruyter, Berlin, New York, 1983, p. 12, ISBN 978-3-11-008866-3 ↑ 가 나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 Max Stirner, a durable dissident – in a nutshell ↑ Quoted in Read's book, "The Contrary Experience", Faber and Faber, 1963. ↑ See Memoirs of a revolutionary, 1901–1941 by Victor Serge. Publisher Oxford U.P., 1967 ↑ See Bernd A. Laska: Ein dauerhafter Dissident. Nürnberg: LSR-Verlag 1996 (online) ↑ See Bernd A. Laska: Katechon und Anarch. Nürnberg: LSR-Verlag 1997 (online) ↑ Huneker's book Egoists, a Book of Supermen (1909)contains an essay on Stirner. ↑ See Goldman, Anarchism and Other Essays, p. 50. ↑ Wilson, A N (2004년 11월 1일). “World of books”. 《The Daily Telegraph》 (London). 2010년 5월 12일에 확인함.  ↑ Between Man and Man by Martin Buber, Beacon Press, 1955. ↑ From Hegel to Marx by Sidney Hook, London, 1936. ↑ "The long revolution is preparing to write works in the ink of action whose unknown or nameless authors will flock to join Sade, Fourier, Babeuf, Marx, Lacenaire, Stirner, Lautréamont, L’hautier, Vaillant, Henry, Villa, Zapata, Makhno, the Communards, the insurrectionaries of Hamburg, Kiel, Kronstadt, Asturias – all those who have not yet played their last card in a game which we have only just joined: the great gamble whose stake is freedom." Raoul Vaneigem. The Revolution of Everyday Life ↑ David Goodway, Anarchist Seeds Beneath the Snow,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6 (pg.75). ↑ Henri Arvon, Aux sources de 1'existentialisme Max Stirner (Paris, 1954), p. 14 ↑ Zwischen 18 and 25, pp. 237–238. ↑ "Chapter Sankt Max in Die deutsche Ideologie ↑ I. Berlin, Karl Marx (New York, 1963), 143. ↑ G. Stedman-Jones, 'Introduction' in K. Marx & F.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London, 2002) ↑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Routledge. 1994 ↑ "Human or divine, as Stirner said, the predicates are the same whether they belong analytically to the divine being, or whether they are synthetically bound to the human form" (Gilles Deleuze. The Logic of Sense. Continuum. 2004). p. 122. ↑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Robert Schellwien, Max Stirner and Friedrich Nietzsche, 1892; H.L. Mencken, The Philosophy of Friedrich Nietzsche, 1908; K. Löwith, From Hegel To Nietzsche New York, 1964, p187;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4–37; T. A. Riley, "Anti-Statism in German Literature, as Exemplified by the Work of John Henry Mackay", in PMLA, Vol. 62, No. 3, Sep., 1947, pp. 828–843; Seth Taylor, Left Wing Nietzscheans, The Politics of German Expressionism 1910–1920, p144, 1990,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rk;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y,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2; R. C. Solomon & K. M. Higgins, The Age of German Idealism, p300, Routledge, 1993 ↑ While discussion of possible influence has never ceased entirely, the period of most intense discussion occurred between 1892 and 1900 in the German-speaking world. During this time, the most comprehensive account of Nietzsche's reception in the German language, the 4 volume work of Richard Frank Krummel: Nietzsche und der deutsche Geist indicates 83 entries discussing Stirner and Nietzsche. The only thinker more frequently discussed in connection with Nietzsche during this time is Schopenhauer, with about twice the number of entries. Discussion steadily declines thereafter, but is still significant. Nietzsche and Stirner show 58 entries between 1901 and 1918. From 1919 to 1945 there are 28 entries regarding Nietzsche and Stirner. ↑ "Apart from the information which can be gained from the annotations, the library (and the books Nietzsche read) shows us the extent, and the bias, of Nietzsche's knowledge of many fields, such as evolution and cosmology. Still more obvious, the library shows us the extent and the bias of Nietzsche's knowledge about many persons to whom he so often refers with ad hominem statements in his works. This includes not only such important figures as Mill, Kant, and Pascal but also such minor ones (for Nietzsche) as Max Stirner and William James who are both discussed in books Nietzsche read." T. H. Brobjer, "Nietzsche's Reading and Private Library", 1885–1889, i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58, No. 4, Oct., 1997, pp. 663–693; Stack believes it is doubtful that Nietzsche read Stirner, but notes "he was familiar with the summary of his theory he found in Lange's history." George J. Stack, Lange and Nietzsche, Walter de Gruyter, 1983, p 276 ↑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 Bernd A. Laska: Nietzsche's initial crisis. In: Germanic Notes and Reviews, vol. 33, n. 2, fall/Herbst 2002, pp. 109–133 ↑ Eduard von Hartmann, Nietzsches "neue Moral", in Preussische Jahrbücher, 67. Jg., Heft 5, Mai 1891, S. 501–521; augmented version with more express reproach of plagiarism in: Ethische Studien, Leipzig, Haacke 1898, pp. 34–69 ↑ This author believes that one should be careful in comparing the two men. However, he notes: "It is this intensive nuance of individualism that appeared to point from Nietzsche to Max Stirner, the author of the remarkable work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Stirner's influence in modern Germany has assumed astonishing proportions, and moves in general parallel with that of Nietzsche. The two thinkers are regarded as exponents of essentially the same philosophy." O. Ewald, "German Philosophy in 1907", in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17, No. 4, Jul., 1908, pp. 400–426 ↑ [in the last years of the 19th century] "The question of whether Nietzsche had read Stirner was the subject of great debate"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9–30 ↑ Levy pointed out in 1904 that the similarities in the writing of the two men appeared superficial.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4–37 ↑ "Stirner, like Nietzsche, who was clearly influenced by him, has been interpreted in many different ways", Saul Newman, From Bakunin to Lacan: Anti-authoritarianism and the Dislocation of Power, Lexington Books, 2001, p 56; "We do not even know for sure that Nietzsche had read Stirner. Yet, the similarities are too striking to be explained away." R. A. Samek, The Meta Phenomenon, p70, New York, 1981; Tom Goyens, (referring to Stirner's book The Ego and His Own) "The book influenced Friedrich Nietzsche, and even Marx and Engels devoted some attention to it." T. Goyens, Beer and Revolution: The German Anarchist Movement In New York City, p197, Illinois, 2007 ↑ "We have every reason to suppose that Nietzsche had a profound knowledge of the Hegelian movement, from Hegel to Stirner himself. The philosophical learning of an author is not assessed by the number of quotations, nor by the always fanciful and conjectural check lists of libraries, but by the apologetic or polemical directions of his work itself." Gilles Deleuze (translated by Hugh Tomlinson), Nietzsche and Philosophy, 1962 (2006 reprint, pp. 153–154) ↑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abissonichilista-the-unique-one-meets-the-overhuman ↑ Guido Giacomo Preparata, "Perishable Money in a Threefold Commonwealth: Rudolf Steiner and the Social Economics of an Anarchist Utopia". Review of Radical Economics 38/4 (Fall 2006). pp. 619–648 ↑ "Only the influence of the German philosopher of egoism, Max Stirner (né Johann Kaspar Schmidt, 1806–1856), as expressed through The Ego and His Own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compared with that of Proudhon. In adopting Stirnerite egoism (1886), Tucker rejected natural rights which had long been considered the foundation of libertarianism. This rejection galvanized the movement into fierce debates, with the natural rights proponents accusing the egoists of destroying libertarianism itself. So bitter was the conflict that a number of natural rights proponents withdrew from the pages of Liberty in protest even though they had hitherto been among its frequent contributors. Thereafter, Liberty championed egoism although its general content did not change significantly."Wendy Mcelroy. "Benjamin Tucker, Individualism, & Liberty: Not the Daughter but the Mother of Order" ↑ Daniel Guérin,Anarchism: From Theory to Practice ↑ Four Ourselves, The Right To Be Greedy: Theses On The Practical Necessity Of Demanding Everything ↑ "What is Ideology?" by Jason McQuinn ↑ “BONANNO, Alfredo Maria”. 2009년 7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10일에 확인함.  ↑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max-stirner-stirner-s-critics If Stirner had said: You are more than a living essence or animal, this would mean, you are still an animal, but animality does not exhaust what you are...... ↑ Karl Heinrich Ulrichs had begun a journal called Prometheus in 1870, but only one issue was published. (Kennedy, Hubert, Karl Heinrich Ulrichs: First Theorist of Homosexuality, In: 'Science and Homosexualities', ed. Vernon Rosario. New York: Routledge, 1997, pp. 26–45.) ↑ "La insumisión voluntaria. El anarquismo individualista español durante la dictadura y la Segunda República" by Xavier Díez 참고[편집] Stirner, Max: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845 [October 1844]). Stuttgart: Reclam-Verlag, 1972ff; engl. trans. The Ego and Its Own (1907), ed. David Leopold, Cambridge/ New York: CUP 1995 Stirner, Max: "Recensenten Stirners" (September 1845). In: Parerga, Kritiken, Repliken, Bernd A. Laska, ed., Nürnberg: LSR-Verlag, 1986; engl. trans. Stirner's Critics (abridged), see below Max Stirner, Political Liberalism (1845) 더 읽을거리[편집] Max Stirner's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im Spiegel der zeitgenössischen deutschen Kritik. Eine Textauswahl (1844–1856). Hg. Kurt W. Fleming. Leipzig: Verlag Max-Stirner-Archiv 2001 (Stirneriana) Arena, Leonardo V., Note ai margini del nulla, ebook, 2013. Arvon, Henri, Aux Sources de l'existentialisme, Paris: P.U.F. 1954 Essbach, Wolfgang, Gegenzüge. Der Materialismus des Selbst. Eine Studie über die Kontroverse zwischen Max Stirner und Karl Marx. Frankfurt: Materialis 1982 Helms, Hans G, Die Ideologie der anonymen Gesellschaft. Max Stirner 'Einziger' und der Fortschritt des demokratischen Selbstbewusstseins vom Vormärz bis zur Bundesrepublik, Köln: Du Mont Schauberg, 1966 Koch, Andrew M., "Max Stirner: The Last Hegelian or the First Poststructuralist". In: Anarchist Studies, vol. 5 (1997) pp. 95–108 Laska, Bernd A., Ein dauerhafter Dissident. Eine Wirkungsgeschichte des Einzigen, Nürnberg: LSR-Verlag 1996 (TOC, index) Laska, Bernd A., Ein heimlicher Hit. Editionsgeschichte des "Einzigen". Nürnberg: LSR-Verlag 1994 (abstract) Marshall, Peter H. "Max Stirner" in "Demanding the Impossible: A History of Anarchism "(London: HarperCollins, 1992). Moggach, Douglas & De Ridder, Widukind, "Hegelianism in Restoration Prussia,1841–1848: Freedom, Humanism and ‘Anti-Humanism’ in Young Hegelian Thought". In: Herzog, Lisa (ed.): Hegel's Thought in Europe: Currents, Crosscurrents and Undercurrents.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pp. 71–92 (Google Books)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1 (full book) Newman, Saul, Power and Politics in Poststructural Thought.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5 Paterson, R.W.K., The Nihilistic Egoist: Max Stirn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1 Stepelevich, Lawrence S., Max Stirner As Hegelian. I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46, nr. 4, pp. 597–614 Stepelevich, Lawrence S., Ein Menschenleben. Hegel and Stirner". In: Moggach, Douglas (ed.): The New Hegelians. Philosophy and Politics in the Hegelian Schoo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p. 166–176 Welsh, John F. Max Stirner's Dialectical Egoism: A New Interpretation. Lexington Books. 2010. Wilkinson, Will (2008). 〈Stirner, Max (1806–1856)〉. Hamowy, Ronald. 《The Encyclopedia of Libertarianism》. Thousand Oaks, CA: SAGE; Cato Institute. 493–5쪽. ISBN 978-1-4129-6580-4. LCCN 2008009151. OCLC 750831024.  Di Mascio, Carlo, Stirner Giuspositivista. Rileggendo l'Unico e la sua proprietà, 2 ed., Edizioni Del Faro, Trento, 2015, pp. 253, ISBN 978-88-6537-378-1 외부 링크[편집] 틀:Wikisource author-inline 위키인용집에 막스 슈티르너 관련 문서가 있습니다. 위키미디어 공용에 막스 슈티르너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일반[편집]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an extensive introduction Svein Olav Nybergs website on Max Stirner, with extensive links to texts and references Max Stirner within the LSR project (English section) Max Stirner Project by H. Ibrahim Türkdogan Archive of texts on Stirner at the Anarchist Library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편집] Max Stirner, a durable dissident, 'How Marx and Nietzsche suppressed their colleague Max Stirner and why he has intellectually survived them' Stirner Delighted in His Construction – "loves miracles, but can only perform a logical miracle", by Karl Marx Nietzsche's initial crisis due to an encounter with Stirner's "The Ego", by Bernd A. Laska (2002) Max Stirner As Hegelian, By Lawrence S. Stepelevich "At the End of the Path of Doubt: Max Stirner", By Lawrence S. Stepelevich (Owl of Minerva 41:1–2 (2009–10) pp. 85–106) 텍스트[편집] Max Stirner의 작품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작품 정보 막스 슈티르너 - 인터넷 아카이브 막스 슈티르너의 작품 - 리브리복스 (퍼블릭 도메인 오디오북) Online book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The complete original text in German of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The complete English edition of "The Ego and his Own", in the translation of Steven T. Byington. Some of Stirner's illuminating "Shorter Essays", translated into English Recensenten Stirners / Stirner's Critics bilingual: full text in German / abridged text in English (trans. Frederick M. Gordon) Archive of the 4 works of Stirner translated into English including a 2011 complete translation of Stirner´s Critics (translated by Wolfi Landstreicher at the Anarchist Library)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1780445 LCCN: n79054586 ISNI: 0000 0001 2132 8572 GND: 118618261 SELIBR: 199381 SUDOC: 033430586 BNF: cb124296680 (데이터) NLA: 35481082 NDL: 00457765 NKC: skuk0001335 BNE: XX90223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막스_슈티르너&oldid=24409003" 분류: 1806년 태어남1856년 죽음독일의 철학자독일의 무신론자독일의 아나키스트무신론 철학자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종교 비평가허무주의자필명오버프랑켄 현 출신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동문동물 공격으로 죽은 사람19세기 독일 사람19세기 철학자서프로이센 출신숨은 분류: 구독이 필요한 링크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ragoné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Italiano日本語KurdîКыргызчаLatinaLatviešuMalagasyNederlandsNorsk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VènetoWalonWinaray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1일 (화) 01: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막스 슈티르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막스 슈티르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막스 슈티르너 요한 카스파 슈미트(Johann Kaspar Schmidt) (1806년 10월 25일 – 1856년 6월 26일), 필명인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로 더욱 잘 알려진 독일 철학자이다. 그는 허무주의, 실존주의, 정신분석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나키즘, 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1][2] 슈티르너의 주저는 유일자와 그 소유(The ego and its own, 독일어: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in German, 직역하면 유일한 자와 그의 것)이며, 이 책은 1845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다. 목차 1 생애 2 철학 2.1 에고이즘 2.2 아나키즘 2.2.1 에고이스트 연합 2.2.2 혁명 2.3 헤겔의 가능한 영향 3 저작 3.1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 3.2 예술과 종교 3.3 유일자와 그 소유 3.4 슈티르너의 비평가들 3.5 철학적 반동 3.6 반동의 역사 4 비평 5 동시대인의 코멘트 6 영향 6.1 맑스와 엥겔스 6.2 슈티르너와 포스트-구조주의 6.3 니체에 대한 연관의 가능성 6.4 루돌프 슈타이너 6.5 아나키즘 6.6 자유연애, 동성애, 그리고 여성주의 7 같이 보기 8 노트 9 참고 10 더 읽을거리 11 외부 링크 11.1 일반 11.2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 11.3 텍스트 생애[편집] 막스 슈티르너의 출생지인 바이로이트의 모습 슈티르너는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얼마되지 않는 그의 삶에 대해서는 슈티르너의 전기를 쓴 스코틀랜드계 독일 작가인 존 헨리 맥케이에 의한 것이다. 그의 전기(Max Stirner – sein Leben und sein Werk)는 1898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됐고, 영어로는 2005년 에서야 번역되었다. 슈티르너는 알버트 크리스티앙 하인리히 슈미트( Albert Christian Heinrich Schmidt, 1769-1807)와 소피아 엘레오노라 라인라인(Sophia Eleonora Reinlein, 1778–1839)의 유일한 자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1807년 4월 19일, 37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3] 그의 어머니는 약사였던 하인리히 발러슈테트(Heinrich Ballerstedt)와 재혼 했고, 서프로이센의 클룸(Kulm, 오늘날의 Chełmno)에 정착했다. 슈티르너가 20살이 되었을때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진학했고,[3] 그곳에서 문헌학,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헤겔의 강의에 참석하게 된다.[4] 그는 철학의 역사, 종교와 철학 그리고 주관적 정신에 대한 헤겔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슈티르너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로 옴겨가게 되는데, 이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것과 동일한 시간대 였다.[5] 슈티르너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사 자격증을 얻지만, 프로이센 정부로 부터 전임 교사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6] 1841년 베를린에 머무를 동안, 젊은 철학자들의 모임인 프라이엔(자유인)에 참여하게 되고, 이 모임은 이후 청년헤겔학파로 분류되게 된다.19세기 문학과 철학에서 유명한 몇몇의 인물들이 이그룹에 참여 했는데,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브루노 바우어, 그리고 아놀드 루게 같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통념과는 달리 포이어바흐는 헤겔좌파의 담론에 열정적으로 참여 했지만, 프라이엔의 멤버는 아니였다.프라이엔의 멤버는 아니였지만 다른 헤겔좌파와 관련된 유명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하일 바쿠닌이있다. 바쿠닌은 1840년 베를린에서의 유학중에 헤겔좌파를 만나게 되고 급격한 사상의 변화를 경험하게된다. 이후 당대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나키즘에 도달한다. 이와 관련한 사상의 변화는 그가 1842년에 작성한 독일에서의 반동이라는 글에서 잘 나타 나는데, 이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의 유명한 '파괴의 열정은 창조의 열정이다'라는 문구가 등장했다.[7]헤겔학파의 몇몇의 멤버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을 열정적으로 이용해 세계를 분석했고, 헤겔의 결론에도 변증법적인 변화를 시도하다가 결국 헤겔좌파는 점차적으로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포이어바흐와 바우노가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다. 토론은 자주 프리드리히거리 히펠 주점에서 벌어졌으며, 맑스와 엥겔스 같은 이들도 참여 했는데, 이들은 당시까지 포이어바흐 이론의 지지자였다. 슈티르너는 엥겔스와 자주 교류했으며, 엥겔스는 그를 좋은 친구라고 불렀다.[8] 하지만 맑스와 슈티르너가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내성적인 성격의 슈티르너는 주점 내에서의 논쟁에 자주 참여 하지는 않았지만, 클럽의 충실한 멤버이자 세심한 청중이였다.[9] 현재 남아있는 그의 초상화는 슈티르너의 전기 작가인 맥케이의 부탁으로 프라이엔 이후 40년의 시간이 흐른뒤 엥겔스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히펠 주점에서의 프라이엔에 대한 스케치는 슈티르너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유일한 그림이다. 이후 슈티르너는 그로피우스여학교에서[10] 일하게 되고, 그동한 주저인 유일자와 그 소유를 쓰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상가인 바우노와 포이어바흐, 빌헬름 바이틀링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authoritarian socialism), 그리고 프루동과 같은 이들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844년 10월 책의 출판으로 인한 논쟁에 참여하기 위해 그는 교직에서 사임한다. 슈티르너는 결혼을 두번하게 된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가정부 였고 그가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진 이였지만, 결혼후 얼마 되지 않은 1838년 임신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이후 1843년 프라이엔에서 지적 교류를 하던 마리 댄하르트와 재혼하지만, 1846년 이혼하게 된다.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나의 연인 마리 댄하르트에게"라며 헌정한다. 이후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902년 런던에서 사망한다. 교직을 그만둔 뒤, 슈티르너는 그의 연인 댄하르트와 함께 청년헤겔학파가 소유하고 협력의 원칙에 때라 운영되는 우유배달 사업을 계획했다. 사업을 실패했는데 낙농가에서 잘입은 지식인이였던 그에게 의구심을 품었고, 우유가게 치곤 과도하게 잘꾸며진 인테리어가 주는 거부감 때문이였다. 유일자와 그 소유 이후, 그는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을 써서 논쟁에 반박을 했고, 생활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담 스미스와 장 바스티세의 글을 번역한다. 이후 1852는 반동의 역사(History of Reaction)라는 글을 썼고, 1856년 벌레에 물린뒤 열병을 앓다가 그해 6월 26일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브루노 바우어가 참석했었으며, 그의 시신은 Friedhof II der Sophiengemeinde Berlin 묘지에 안장된다. 철학[편집]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년 ~ 1895년)에 의해 그려진 프라이엔에서의 막스 슈티르너의 모습 슈티르너의 철학은 니힐리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나키즘에(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포스트아나키즘,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슈티르너의 주저는 유일자와 그 소유(독일어: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번역하면 유일한 자와 그의 것)이다. 에고이즘[편집] 슈티르너는 자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하며, '창조적 무' 언어의 종점이라 묘사한다. 슈티르너는 대체로 심리적 에고이즘과 윤리적 에고이즘의 지지자로 이해된다. 후자의 경우 분쟁의 여지가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슈티르너의 글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그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억누르는 새로운 고정관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흥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것을 비합리적이라고 간주한 것에 의해, 합리적 에고이스트로 간주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익이란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규범을 모두 포함하여 반드시 주관성이 중심이어야 하는것이다. 개인의 자기 실현은 각 개인의 그의 욕망에 따라 에고이즘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 마지못해 행해지는 에고이즘과 기꺼이 행해지는 에고이즘의 차이는, 전자는 '공허한' 관념에 사로잡혀 더욱 높은 이유에 따라 행동 해야 한다고 믿으며, 사소한 행복과 안전을 바라며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다. 반면 후자는, 자신의 가려진 욕망을 전적으로 인식하며 그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는 자이다. 신성한 것이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에게만 존재한다... 요컨데 에고이스트이고자 하지 않는 에고이스트, 자신을 떨쳐버리는 이(그의 에고이즘을 억누르며),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버리는 것은 오로지 고귀해 짐으로서 그의 에고이즘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에고이스트임을 그만두고자 하기에, 그는 천상과 지상에서 그가 마땅히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는 더 높은 존재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그가 동요하고 자신을 억누른다 하더라고 결국엔 모두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니... 이를 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매 순간 너는 너 자신을 잃고자 하지 않는 창조자인, 너 자신의 창조물이다. 너 보다 더욱 높은 존재로서의 너, 너를 능가하는 너... 바로 이가 너가 인식하지 못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이다. 따라서 너의 더 높은 본질이란, 소외의 본질이다.... 소외는 "신성한 것"의 기준이다. — The Ego and its Own, Cambridge edition, pp. 37–8 자유주의(liberalism)가 인간을 선언한 이래로, 이것이 오직 기독교의 마지막 결과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독교는 본래 “인간”과 “진짜 인간”을 실현하는 것 외에 다른 사명을 가지지 않았다. 이로써 기독교가 나에 대하여 불멸의 교리와 목가적 보살핌의 대상으로서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주장의 속임수가 밝혀진다. 이는 나를 오직 인간으로서만 소중히 여길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불멸하며, 내가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나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는 자유주의가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처럼 누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영원함이란, 이 평등이란, 내가 아닌 내 안의 인류만을 말할 뿐이다. 인류의 운반자이자 껍데기로서의 나만이 죽지 않는다. 모두가 “왕은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알고 있듯이 루드비히는 죽지만 왕은 남는다. 나는 죽지만 정신은, 인간은 남게 된다. 이제 나를 완전히 인간과 동일하게 만들기 위하여 누군가는 “진짜 유적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개발했다.[11] 인간 이라는 종교는 기독교의 마지막 변형일 뿐이다. 자유주의라는 종교는 나의 본질을 나에게서 분리해 그것을 나 위에 놓는다. 이것은 다른 종교가 그들의 신이나 우상을 찬양하는 것과 동일하게 “인류”를 찬양한다. 이것은 나의 것과 나의 특질과 나의 소유에서 벗어난 소외된 무언가를 나의 “본질”로 만듦으로써 나의 것을 다른 세계의 무언가로 바꿔 버린다. 요컨대 이것은 나를 인간 아래에 놓고 그리함으로써 나에 대해 소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the unique and its property" pp. 188-189[12] 그의 철학에서 자발적 에고이스트는 그 자신의 사상의 소유자로서(그의 저서의 제목처럼)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는 반대로 소유 당하는 이로서 대조적으로 묘사된다. 오로지 그가 법, 권리, 도덕, 종교등의 '신성한' 진리가 단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개념임을 인식하고, 이에 복종하길 거부할때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자유의 추구란 창조자와 창조물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창조자로서 기성 질서를 거부하고, 그로서 기존 질서에서 거부되었던 것이 창조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파괴가 창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힘은 에고이즘의 방법론이다. 그는 힘을 이용해 얻은 재산만이 오직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나키즘[편집] 슈티르너는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사회제도 – 국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권, 자연권 그리고 사회 그 자체 마져도 – 단지 환상이며 인간의 마음을 돌아다니는 유령(spook)으로[13] 간주하고 이의 권위를 부정한다.[14] 그는 무도덕주의의 측면에서 에고이즘을 옹호 했고, 각 개인은 오직 그의 순수한 욕구에 따라 '에고이스트 연합'으로서 단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란 단지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쟁취하는 것을 아는 자,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소유는 주어진다." 그리고, "내가 나의 힘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나의 것이다. 내가 소유자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나는 그것의 소유자이다." 그는 또한 말했다, "나는 너의 소유 앞에서 수줍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존중심도 없이 언제나 나의 소유로 여길 것이다. "[15]슈티르너는 사람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을 도덕적 제약 없이 – 그 권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16] 그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익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한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행위의 유일하게 적합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고정된 사회를 실체없는 유령으로 간주 했고, 개인이 실체라고 했다. 에고이스트 연합[편집]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연합 이라는 개념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처음 등장했다. 연합은 비체계적인 협회로 간주되며, 국가에 대조하여 주장되었다.[17] 연합은 당사자들의 지지를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에고이스트들 간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18]연합은 당사자들 모두가 의식적인 에고이즘으로 부터 참여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당사자들중 누군가 고통을 겪음에도 이의 겉모습을 유지하려 한다면, 연합은 퇴락하여 다른 무언가로 변모하고 만다.[18] 이 연합은 사람의 뜻을 넘어서는 권위가 나타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에고이즘은 사상에 반대하지도 사랑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달콤함의 적이 아니며, 헌신과 희생의 적도 아니다. 친밀한 따스함의 적이 아니며, 또한 비판이나 사회주의의 적도 아니다. 요컨대 에고이즘은 특정한 관심사의 적이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관심사의 배제가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무심함과 무관심에 대항할 뿐이다. 사랑에 반대하지 않으나, 신성한 사랑에 대한 반대이며, 사상의 반대가 아니라 신성한 사상에 대한 반대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신성한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마치 자신을 고립시키고, 유리시키며, 고독에 빠져들길 원하는 처럼 보이는 에고이스트의 배타성이란, 오로지 무관심의 배제를 통하여 관심사에 대한 완전한 참여를 하기 위한 것이다. — Max Stirner. Stirner’s Critics[19] 그러나 내가 왜 공공선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공공선은 나의 선이 아니며, 단지 자기부정의 최악의 형태일 뿐이다. 내가 “굴복” 할 때만이 공공선이 번영할 것이며, 내가 굶주릴 때만이 국가가 화려해 질 것이다…… 인민은 발언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입이 없는 자가 발언을 할 수 있다니! 오직 개인만이 발언권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 언론의 자유의 모든 문제가 “인민의 자유”라는 형태를 취할 때, 모든 것이 뒤집어진다. 이것은 오직 개인의 권리이자, 개인의 더 나은 힘일 뿐이다. 만일 인민이 언론의 자유를 가진다면, 인민의 가운데서도 나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인민의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며, 인민의 자유로서 언론의 자유는 반드시 나에게 적대하는 언론의 법과 함께 나타날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의 자유에 대한 노력에 대항하며 선언되어야 한다. 인민의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다! 인민의 자유, 인민의 권리라는 이 범주를 허용해 보자. 예를 들어, 인민의 권리로서 모두는 무장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중에 권리를 박탈당한 자가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 그 자신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지만, 나에게 속한 권리가 아닌 인민에게 속한 권리로서 그것을 박탈당할 것이다.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나는 감금될 수 있으며, 죄수로서 무장할 권리를 잃는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민의 자유, 공동체의 자유, “사회”의, 보편의, 인류의, 인류의 이상의, 인민의, 공동체의, 발언권을 가진 “사회”의 창조에 대한 마지막 시도로 나타난다. 개인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인민은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 자유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닌, 인민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더욱 자유로워 지면, 개인은 더욱 구속된다. 아테네의 인민은 정확히 그들이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에, 도편추방제를 만들었고 무신론자들을 추방했으며, 가장 현명한 사상가를 독살했다…… 모든 신성한 것은 구속이자, 족쇄다. 신성한 모든 것들은 법의 파괴자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시대는 모든 영역에서 이 파괴자의 무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법을 위해 이 법을 어길 준비를 하고 있다…… 인민은 강한 시민을 추방하고, 교회의 이단자들에 대한 종교 재판을 자행하며, 국가의 반역자에 대한 종교재판을 행함으로써 그 자신의 왕권 위에 서려는 자들을 억압할 것이다. 인민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주장일 뿐이다. 이것은 모두에게서 “애국적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모두는 그 자신으로서는 다르지 않으며 무의미하고, 그가 그 스스로 해야 하는 것들, 즉 자신을 실현하게 하는 것들은 할 수도 없으며 허용될 수조차 없다. 모든 인민, 모든 국가는 개인에게 불의다…… 내가 헌법, 헌장, 법률에 자신을 가두어 “내 몸과 마음을 인민에게 바친다”라고 선언해야 한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 능력이 “사회의 조화를 방해하지 말라”라는 그들의 규율 안에서만 허용되고 개발될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일 수 있겠는가? 인민과 인류의 몰락은 나를 나의 부흥으로 이끌 것이다. 들어보라, 내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우리의 사랑스러운 독일 존재의 1000년을 기념하는 내일의 축제를 위한 종소리가 시작되고 있다. 이 종소리는 이 장례식의 장송곡의 소리다!... 독일 민족과 독일 인민들은 그들 뒤에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기나긴 삶인가! 그러니 가서 잠들어 다신 깨어나지 말아라, 그렇게 네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슬로 묶어왔던 모든 이들이 이로써 자유로워 질 것이다. 인민은 죽었다. 나여 영원하라! 오, 그대 너무도 고통받는 독일 인민이여 너의 고통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상이 그 자신의 육신을 만들지 못하는 고통이며 새벽이 가기 전에 무로서 사라져 버릴 유령 들린 정신의 고통 이건만, 너는 아직 구원과 성취를 갈망하구나. 그대 친애하는 사상이여, 그대 친애하는 유령이여, 너는 내 안에서도 오랫동안 살아왔다. 나는 너의 구원을 위한 말을 거의 발견했다고 상상했었고, 배회하는 정신을 위한 살과 뼈를 발견했었다. 그리고 나는 너의 영원한 안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가며, 마지막 사랑도 사라져갔다. 그리고 나서 나는 황량한 죽은 자의 집에서 빠져나와 산자들을 부른다.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권리를 지닌다. 잘 가거라, 그대 수백만의 꿈이여, 잘 가거라, 그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천년의 폭정이여! 내일 그들은 너를 무덤으로 데려갈 것이다. 곧 너의 자매들과 너의 인민들이 너를 따르리라. 그러나 그들 모두가 뒤따랐을 때, 인류는 매장될 것이고, 나 자신은, 웃고 있는 상속자일 것이다! — Max Stirner. The Unique and Its Property pp. 225-229[20] 모든 운동과 이데올로기에는 권리의 주체가 되는 일종의 정체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그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정체성(성, 인종, 민족 등)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의 집단 정체성(혹은 그것의 도덕성)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며, 이렇게 사람은 세계를 그 자신으로서 직접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 개인은 이에올로기에 연계하지 않고서는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 누군가 그 정체성에서 벗어난다면(혹은 쫓겨난다면) 그는 곧 이데올로기가 그에게 약속한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할 것이다. 결국 사람은 그 정신에 복종하는한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이를 정신의 지배로서 파악한다. 이에 맞서서 등장한 개념이 어떠한 정신의 지배와도 연계하지 않은 고유한 개인(혹은 유일자)이 그들의 공통된 욕망을 위해 상호적으로 교류하는 연합체인 에고이스트 연합이다. 혁명[편집] 슈티르너는 전통적인 형태의 혁명의 모델을 비판했다. 그러한 운동은 암묵적으로 국가주의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고전적인 혁명이 결국에는 체제를 전복하더라도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티르너는 전위대가 주도하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변화인 정치혁명을 비판하고,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개인들이 주도하는 아래서 위로 향하는 혁명, 즉 사회혁명을 주장한다. 특정한 자유를 향한 갈망은 언제나 새로운 지배를 목표로 한다. 혁명이 그래왔던 것 처럼 "그것의 옹호자들에게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특정한 자유만을 쫓았기 때문에 새로운 지배인 "법에 의한 지배"를 만들어 낸다. 네가 그토록 자유를 원한다면, 어째서 자유의 적음과 많음의 정도에 대하여 언쟁하는가? 자유는 오직 모든 자유일 수 밖에 없다. 조각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너는 모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가능성에 절망하고 있다. 아니면 심지어 이것을 바라는 것조차 광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환상을 떨쳐버리고, '도달할 수 없는 것' 보다 나은것에 고통을 쏟으며 살으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45[21] 특정한 자유(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을 소유할 자유등)은 그것을 강제할 권력을 필요로 한다. 그 권력이 바로 국가다. 국가는 법과 경찰이라는 모습으로 그 질서를 강제하고, 그 질서를 방해하는 것은 범죄라 칭한다. 이러한 질서에서는 자유의 수호자인 국가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시민만이 자유로운 인간이며, 거역하는 이는 무법자라는 역설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런 위선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사라진다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 또한 사라질 것이다. 혁명과 반역은 결코 동의어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전자는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의 단순한 위치의 전복이며,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행위이다. 반면 후자는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환경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는 그것을 위한 목적이 아닌 개인의 불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무장봉기가 아니라, 그것이 초래할 협약을 고려치 않는 개인의 반역이다. 혁명은 새로운 협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하나, 반역은 우리를 더이상 지배 받지 않을 길로 이끌며, 단지 우리 자신과 약속하게 만든다. 또한 더이상 제도에 의존하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이것은 확립된 것과의 싸움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지금은 번영할 지라도, 내가 그것으로 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만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붕괴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확립된 것에서 떠나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쇠락하며 죽어갈 것이다. 이제 나의 목표는 단지 확립된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다. 나의 목표와 행위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에고이스트적 행위이자 목적이다.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p. 420–421 부르주아는 국가의 은혜를 통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는 국가의 권력이 붕괴되면 모든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어떨까? 그는 잃을 것이 없기에, “그 없는 것”에 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국가의 보호를 받는 이들에게서 그 보호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이로써 무언가를 얻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가지지 못한 이들은 국가를 가진 자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권력이며 자신들에게서는 고혈을 뽑아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국가는 부르주아의 국가이며, 부르주아의 재산이다. 국가는 인간을 노동에 따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종(충성)에 따라, 국가가 그에게 하달한 권리가 국가의 법에 알맞게 집행되었는가에 따라 그를 보호한다. 부르주아 체제하에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국가의 영역(국가의 영역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국가에 속하며, 개인이 가진 것은 봉토일 뿐이다.), 특히 돈과 땅에 대한 처분권이 있는 소유주, 즉 자본가들의 손에 떨어진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이 소비자에게 갖는 가치의 범위까지 도달하는 것을 실현할 수 없다. 노동이 착취되고, 자본가들은 이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는다. 좋은 급료를 받는 이들은 오직 국가의 지배와 화려함을 드높이며, 국가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노동일뿐이다. 국가는 그들의 “선량한 시민”인 소유주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낮은 급료를 지불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국가는“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좋은 급료로서 “경찰”(헌병에서부터 사법 기관과 교육체계 등의 모든 종류의 공무직, 이를테면 "국가라는 기계" 그 전체)이라는 권력의 종들을 확보하고, 그“선량한 시민”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하기 위해 기꺼이 더욱 많은 세금을 지불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본질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국가에 적대적인 힘으로 남게 된다. 소유주의 국가, 이 “시민 왕”은 그의 원칙에서 노동을 그 자체의 가치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착취되고, 소유주라는 적의 전리품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은 가장 강력한 힘을 그들 손아귀에 쥐고 있다. 만일 그들이 의식적으로 이것을 한번 사용 한다면, 무엇도 이에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노동을 멈추고서 그들 노동의 생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향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 도처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노동쟁의이다. 국가는 노동의 노예제에 기초해 있다. 만일 노동이 해방된다면, 국가는 소멸하리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05[22] 노동자들이 노동의 힘을 주체적으로 소유한다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헤겔의 가능한 영향[편집] 카를 뢰비트나 로렌스 스테폴로비치같은 학자는 헤겔은 유일자와 그 소유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스테플로비치는 유일자와 그 소유는 분명히 전반적으로 비헤겔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헤겔의 세계와 자아에 대한 결론에 대한 적의가 가득하지만, 이것이 헤겔이 헤겔에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헤겔과 슈티르너가 이어지는 주요 시점은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지로 향햐는 현상학적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발견된다. 슈티르너의 작품은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태를 취할때 가장 명확히 이해된다. 무엇이 일련의 가짜 지식을 지나 절대지에 도달하도록 의식을 일깨우는가? — Lawrence Stepelevich, "Max Stirner as Hegelia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15, pp. 597–614 (1985). 헤겔을 넘어서고 그에 맞서기위해 진정한 변증법적 방식으로 헤겔의 프로젝트를 이어갔으며, 스테폴로비치는 슈티르너의 이러한 노력으로 헤겔의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스테플로비치는 헤겔의 현상학의 의도를 요약한 장 이폴리트를 인용하며 결론 지었다. "세계의 역사는 완료되었고, 이제 필요한 것은 특정한 개인이 그 자신을 재발견 하는 것이다." 유일자로서 슈티르너는 자신을 특정한 개인에 놓았고, 이후 헤겔주의자로서 자기의식과 그의 결정인 대상과의 유희를 통한 이론적 재발견에 의한 유용한 결론을 제시한다. "우상은 오직 나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내가 오직 그들이 재생산 되는 것을 중단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신성한 권력'은 내가 자신을 억누르고 그것을 찬양할때만이 존재한다. 세계와 나의 교류는 나의 향유로서 구성되며, 나는 이를 자기향유를 위해 소비한다." (Ego, 319) — Lawrence Stepelevich, "Max Stirner as Hegelian" 더글라스 모가치, 위드카인드 디 리더(Widukind De Ridder)같은 학자는 슈티르너는 분명히 동시대인인 포이어바흐나 바우노처럼 헤겔의 제자였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를 헤겔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헤겔주의자와는 반대로, 헤겔의 내재적 비판과 계몽주의의 모든 시도를 경멸했고, 포이어바흐와 바우노의 해방의 주장도 거부했다. 합리성의 체현이 불완전하게 내제하고 있다는 헤겔과는 달리, 슈티르너는 이를 변환해야 하는 것이 아닌 단지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대로 남겼으며 오로지 유일자의 향유이자 소모물일 뿐이었다.[23] 모가치에 의하면 슈티르너는 헤겔을 넘어간 것이아니라. 그 자체의 철학을 남겼다. 슈티르너는 인간 자아의 개념화를 거부하고, 모든 종류의 합리성 혹은 보편적 기준이 결여된 것으로서 제시했다. 자아는 더욱이 행동의 영역에서 '구체화 되지 않는 나'로 간주되었다. '나'는 실현해야될 어떠한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며 삶은 자기해소의 과정인 것이다. 인본주의자인 헤겔학파가 주체성에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임무를 부여한 것과 달리 슈티르너는 유일자를 개념화할 수 있는 모든 시도에서 거리를 두었다 : ‘유일자의 개념에 대한 더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어떠한 철학 체계도 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내거나, 끄집어 내거나 생각할 수 없을것이다. 차라리 이것은 개념으로서의 발전 자체를 중단했다. — Douglas Moggach & Widukind De Ridder, "Hegelianism in Restoration Prussia,1841–1848: Freedom, Humanism and ‘Anti-Humanism’ in Young Hegelian Thought.", In: 'Hegel's Thought in Europe: Currents, Crosscurrents and Undercurrents', ed. Lisa Herzog (pp. 71-92).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p. 75 저작[편집]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편집] 1842년 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 (우리교육의 잘못된 원칙) 맑스가 편집을 맡았던 라인 신문을 통해 출간 되었다.[24] 글은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하인시우스(Otto Friedrich Theodor Heinsius)의 인본주의 vs. 현실주의(Humanism vs. Realism)라는 논문에 반박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슈티르너는 교육은 적통적인 인본주의적 방법이든 실용적인 현실주의적 방법이든 여전히 진정한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교육이란 개인의 고유성을 보존하고 자아를 실현할수 있는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술과 종교[편집] Kunst und Religion (예술과 종교)역시 라인 신문을 통하여 1846년 6월 14에 출간 되었다. 이것은 브루노 바우어와 그의 헤겔에 대한 비판글인 '헤겔의 종교적 교리와 신앙의 관점에서 예술 판단'을 다루었다. 바우어는 헤겔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관계를 뒤집으면서 예술은 통용되는 확정성과 명쾌함 그리고 보편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종교보다 철학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슈티르너는 헤겔과 바우노의 비판을 넘어서 예술은 오히러 종교에 대한 대상을 만들어 내기에 슈티르너가 철학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 헤겔 바우노와는 달리 - 될 수 없었다. [철학]은 종교처럼 대상에 반대하는 것도, 예술처럼 그것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러 이는 대상과 대상이 만들어 지는 행위가 자유의 공기로 호홉 하도록 분쇄를 하는 것이다. 철학의 정신인 이성은 순전히 그 자신과 연관되며 문제는 대상없이 스스로 끝나게 된다. — Max Stirner, 'Kunst und Religion, p. 110. 슈티르너는 철학은 종교처럼 대상을 귀찮게 하지도, 예술처럼 대상을 만들어 내지도 않다는 하며 신중히 변증법적 삼인조(예술-종교-철학)에서 철학을 빼내 왔다. 사실 슈티르너와 관련해서 철학이란 예술과 철학에 모두 무심한 것이였다. 이로서 슈티르너는 바우노의 종교 비판을 무시하고 그것을 급진화 하였다.[23] 유일자와 그 소유[편집] 슈티르너의 주저 유일자와 그 소유(독:Der Einzige und sein Eigenthum, 영:The Ego and Its Own)은 1844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출간 되었다.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슈티르너는 반권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프러시아 사회와 근대 서구 문명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언어와 현실을 넘어선 '창조하는 무'로서 여기는 접근 방식을 제공했다. 이책은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들이 공허한 개념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 권위를 주장하는 사회 기관, 국가, 사법기관, 교회, 대학같은 교육체계 까지 이와 같은 개념에 기초하여 있다고 주장한다. 슈티르너의 논의는 주로 동시대 인들을 향해 비판의 한계를 확장했다. 특히 포이어바흐, 종교, 자유주의, 인본주의(포이어바흐의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존재다' 라는 주장을 신이라 불렸던 것의 위치에 인간을 대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구조는 여전히 종교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족주의,국가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까지 당시 사상의 전 영역을 공격했다. 정신의 시대에 사상들은 그들을 만들어낸 나의 머리위로 높이 솟아올아, 고열로 인한 환각처럼 주위를 맴돌며 전율케 하는 무서운 힘을 얻게 되었다. 한낱 사상에 지나지 않던 유령은 이제 그 자신의 육신을 지니게 되어 신, 황제, 교황, 조국이 되었다. 만일 내가 그들의 육체를 파괴하고 나의 것을 돌려 받아 "나만이 육신을 지닌 자이다"이라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이제 세계를 나로서, 나의 것으로서, 나의 소유로서, 모든것이 나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얻게 되리라. — Max Stirner, 'The Ego and Its Own, p 15. 슈티르너의 비평가들[편집]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은 1845년 9월 위겐즈 피어텔야르스쉬리프트(Wigands Vierteljahrsschrift)를 통해 출간 되었다. 그의 저서에 비판한 3인의 글들,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M. 헤스의 '최후의 철학자들', 셀리가의 'M.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 소유'에 비판하기 위한 것이였는데 여기서 슈티르너는 그 자신을 3인칭화 해서 설명한다. 철학적 반동[편집] 철학적 반동'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은 1847년 오토 비간트가 편집하는 저널인 Die Epigonen를 통해 라이프치히에서 발간 되었다. 그 시점에서 비간트는 이미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발간했고, 슈티르너가 번역한 아담 스미스와 장 바스티세의 저작들 까지 출간이 완료된 상태였다. 제목이 표시해 주듯이 철학적 반동은 쿠노 피셔(Kuno Fischer, 1824–1907)의 Die Moderne Sophisten(1847)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글은 G. Edward 라고 서명 되어 있었는데 이때문에 존 헨리 맥케이가 조심스럽게 이를 슈티르너의 컬렉션에 포함할때 까지 저작자에 대한 분쟁이 있었다. 이글은 2011에서야 영어로 번역 되었으며,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맥케이는 이 글이 슈티르너가 피셔의 유일자 비판을 반박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G. Edward와 슈티르너를 동일인으로 식별했다. 글은 ‘Ein Apologet der Sophistik und “ein Philosophischer Reactionäre” 제목과 Die Philosophischen Reactionäre라는 제목으로도 출간 되었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비간트가 인적 사항을 거짓으로 기입했던 Edward의 글을 연이어 출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맥케이가 주장 했듯이 슈티르너가 이에 대해 부정한 적은없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시시한 근거가 슈티르너를 작가로서 인식 되게 할만큼 적당한가라는 문제를 남긴다. 이러한 정황증거들로 인하여 몇몇의 학자들이 Die Philosophischen Reactionäre의 내용과 스타일을 기반으로 의심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확실이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것은 유일자가 작성되고 3년 뒤, 청년헤겔학파가 시들어버리고난 뒤에 쓰여졌다는 것이다.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90 (2011). 글의 대부분은 피셔의 궤변의 정의에 대해 다뤄지고 있다. 많은 재치와 함께, 피셔의 궤변 비판이 가진 자기 모순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피셔는 철학과 궤변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을 만들었고, 동시에 궤변을 "철학의 거울상"으로 간주하였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의 공기"에서 호흡하며 "변증법적으로 형식적인 유창함을 이끌어낸다.". 슈티르너의 대답이 눈에 띈다. 당신들 철학자들은 자신의 무기로 해를 입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당신이 단지 변증법적으로 상정한 것을 내가 변증법적으로 사라지게 한다면, 당신의 상식은 무엇이라 답할것인가. 당신은 나를 모든 것을 무로서, 무를 유로서, 흑을 백으로서, 백을 흑으로서 만드는데 유창한 이라고 묘사한다. 내가 당신의 순수한 예술을 돌려 보낼때 당신은 나에 대해 무엇을 할것인가?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99 (2011). 다시 유일자로 돌아가 슈티르너는 주장한다. 슈티르너는 스스로 그에 책에 대하여, 어느정도는 그가 바라는 것에 대하여 서투른 표현을 했다고 묘사했다. 이것은 인생 최고의 순간에서의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부분적으로 서툴다고 불렀다. 그는 철학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국가와 종교, 신자들에의해 학대 되었어며, 관념이 자행하는 혼돈으로 부터 폐허가 되어버린 언어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 Max Stirner, "The Philosophical Reactionaries: 'The Modern Sophists' by Kuno Fischer",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p. 104 (2011). 반동의 역사[편집] 반동의 역사는 1851년 얼마뒤 오스트리아에서 금지 되는 Allgemeine Deutsche Verlags-Anstalt 에서 2부분으로 나눠 출간 되었다.[3]이것은 최근에 벌어근 1848년 독일 혁명에 대한 글이었고, 주로 슈티르너가 수집하여 번역한 글들의 컬렉션이였다. 서문과 몇몇 부분은 슈티르너가 직접 작성한 글이였는데 에드먼드 버크와 오귀스트 콩트를 혁명에 반하는 두 인물로서 인용한다. 비평[편집] 슈티르너의 저작은 그의 동시대 인들에게선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슈티르너는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를 중심으로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그를 논쟁으로 끌어 들였다. 모스헤스(그시절에 맑스와 가까웠던) 그리고 셀리가( 바우노의 지지자였던 Franz Zychlin von Zychlinski의 필명)또한 슈티르너에 응답하였다. 슈티르너는 이에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 1845년 9월)'로서 답변한다. 이는 책의 몇가지 요점을 독자들에게 명확히 설명하고자하는 목적이 강했는데 특히 포이어바흐와 관련하여 그러한 설명이 강조 되었다. 동시대인의 코멘트[편집] 슈티르너의 저서가 쓰여진뒤 20년 후 작가 프리드리히 랑게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슈티르너는 그의 악명높은 글,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모든 도덕 관념을 부정하기 까지 했다.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부정 되었다. 외부적 힘, 믿은 혹은 단지 관념 마져도 사람의 위에서 그의 변덕을 억누르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슈티르너의 부정이란 그의 증오의 한계와 같은 것 이였다. 긍정적인 두번째 부분이 추가 되지 못한 얼마나 가련한 책인가. 그랬다면 이것은 셸링의 철학의 경우보단 쉬웠을 겄이다. 제약 없는 자아를 해방해서 모든 종류의 이상주의를 나의 의지와 나의 이상으로서 계속해서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슈티르너는 의지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인간 본성적 힘의 원천 이듯이 그려냈다. 이것은 우리에게 쇼펜하우어를 떠올리게 한다. — History of Materialism, ii. 256 (1865) 어떤 이들은 책의 두번째 부분이 슈티르너가 아닌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하여 곧 추가될 것이라고 믿었다.프리드리히 니체와 막스 슈티르너의 관계는 이로서 더욱 복잡하게 될것이라 여겨졌다.[25] 조지 j. 스탁( George J. Stack)의 Lange and Nietzsche에 따르면[26] 니체는 랑게의 History of Materialism을 계속해서 여러번 읽었고 때문에 슈티르너에게 관해 익숙했을 것이라고 한다. 영향[편집] 유일자는 성공적인 반응을 얻고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반응을 이끌었지만, 곧 절판되고 그는 죽을때까지 서서히 잊혀져가는 인물이였다.[27] 슈티르너는 헤겔좌파에 파멸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그의 철학은 맑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철학은 '유럽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기초를 정립한 것으로 평가 된다.[27] 에드문트 후설 한번 소규모 청중들에게 유일자의 '매혹적인 힘'에 대하여 언급했다.[28] 미술 평론가이자 슈티르너주의자인 하버트 리드는 그의 저서는 유럽 문명이 최초로 등장한 이래 모래 주머니안에 갇혀 남아있다고 언급했다.[29] 루돌프 슈타이너, 구스타프 란다우어, 빅토르 세르주,[30]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많은 사상가 들이 젊은 시절에 유일자를 읽고 감동을 했다. 몇몇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사상에 대한 영향을 밝혔다[31] 에른스트 융거'의 저서 en:Eumeswil,에선 Anarch가 슈티르너의 유일자에 기초하여 묘사된다.[32]카뮈의 저서 반항하는 인간(The rebel)에서도 유일자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외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는 대표적으로 벤자민 터커, 제임스 후네커,[33] 도라 마즈던, 렌조 노바토레, 엠마 골드먼,[34] 게오르그 브란데스, 존 쿠퍼 포이스,[35] 마르틴 부버 ,[36] Sidney Hook,[37] 로버트 앤턴 윌슨, 호스트 마타이 크엘러, 엔리코 아리고니, 마르셀 뒤샹, 라울 바네겜을 포함한 몇몇의 상황주의 작가들[38] 그리고 막스 에른스트. 또한 유일자와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주의 아래서의 인간의 영혼에서 유사성이 관측 되는데, 몇몇의 역사가들은 그게 유일자에 익숙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39] 1844년 유일자가 출간된 이래 책은 정치적 학술적 관심에 의해 간헐적으로 인기를 얻어 부활하곤 했다. 오늘날 그의 많은 아이디어들은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타협하지 않는 개인주의라는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는 여러 고정된 관념 예를 들면 성 역할등을 유령으로 간주해 그 권위를 부정한 것에서 개인주의적 여성주의의 선구자로 간주 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아이디어는 포스트-아나키즘의 중요한 이론가인 사울 뉴먼에의해 많은 동감을 얻으며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게 된다. 맑스와 엥겔스[편집]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그려진 프라이엔의 모임을 묘사한 그림 엥겔스는 프라이엔에서의 슈티르너의 모습을 시로 묘사했다. 슈티르너를 보라, 그를 보라, 모든 억압의 조용한 적. 그 순간, 그는 여전히 맥주를 들이키지만, 머지않아 피를 물처럼 마시게 될 것이다. 모두가 사납게 "왕을 타도하라" 외칠때 슈티르너는 즉시 "법 또한 타도하라" 답한다. 슈티르너 존엄히 선포 하니 네가 자신을 굽히고 감히 자유롭다 칭할 때 너는 곧 노예제에 익숙해지리니 교조주의를 타도하고, 법마저 타도하라.[40] 그는 슈티르너를 좋은 친구라고 부르곤 했다.[8] 1844년 11월 엥겔스는 맑스에게 편지를 썻다. 그는 쾰른에서 모세 헤스와의 방문을 보고하고 이것은 그에게서 막스 슈티르너의 새책인 유일자를 얻기 위한 것이였다고 전했다.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엥겔스는 맑스에게 유일자 사본을 보내줄 것을 약속하며 슈티르너는 "분명히 자유인들중 가장 재능있고, 독창이며, 근면한 이" 라고 표현하며 그의 글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8]책에대한 열정을 가지고 엥겔스는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했다.:그러나 무엇이 진실이느냐 하는 그의 원칙에 대해선, 우리 역시도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하는 사실이네. 어떠한 이유에 따라 행동하기 이전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 스스로의 에고이스트적인 이유를 만들어내야 하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떠한 물질적 기대는 치워 버리고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에고이즘의 미덕으로서 단지 개인이 아닌 인간이길 원하네[41] 나중에 맑스와 엥겔스는 슈티르너의 저작에 대한 주요한 비판을 작성한다. 독일이데올로기의 2/3가량의 슈티르너를 비판하는데 할애한 성 막스라는 장인데, 이는 슈티르너의 전체 저작의 양을 초과하는 분량이었다.[42] 이사야 벌린이 묘사했듯이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이 슈티르너를 조롱하기 위해 할애되어 있었다.[43] 책은 1845-1846년 사이 작성 되었지만 1932년이 될때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슈티르너를 향한 맑스의 길고 사나운 논쟁은, 맑스가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간주된다. 맑스는 공산주의와 슈티르너의 도덕적 니힐리즘을 화해 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결과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안하게 된다.[44] 슈티르너와 포스트-구조주의[편집] Post-anarchism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영향력있는 포스트 구조주의 사상가인 쟈크 데레다는 그의 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맑스와 슈티르너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었고 슈티르너의 개념인 망령(specters)과 유령(spooks)등을 분석했다[45]포스트구조주의의 또다른 주요한 사상가인 질 들뢰즈는 그의 저서인 '감각의 논리'에서 슈티르너를 언급했다.[46] 사울 뉴먼은 슈티르너는 최초의 포스트 아나키스트라 칭했다 한편으론 푸코, 라캉, 들뢰즈 그리고 데레다등을 앞질렀으며 한편으론 그들에겐 불가능했던 비본질주의적 측면에서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들이미 초월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특히 슈티르너가 자아는 '창조적 무'다 라고 하며 이데올로기의 얽매임을 거부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점에서 들어난다고 주장한다. 니체에 대한 연관의 가능성[편집] 슈티르너와 니체의 생각은 많은 면에서 비교되며, 많은 작가들은 그들의 사상의 명백한 유사성에 대하여 토론하고, 몇몇은 그들의 영향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곤 한다.[47]독일에서 니체가 잘 알려지기 시작한 초기에 연관된 사상가에 대한 토론은 슈티르너 보단 쇼펜하우어에 관한 것이었다.[48] 니체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인 랑게의 'History of Materialism'과 하르트만의 Philosophy of the Unconscious에 의하면 니체가 유일자를 읽었다는 것은 확실하다.[49] 그러나 니체의 글 어디에서도 슈티르너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는다.[50] 2002년 발견된 전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니체는 랑게와 하르트만을 만나기 이전인 1865년 10월에, 1840년대 슈티르너의 친구였던 Eduard Mushacke를 만남으로서 슈티르너의 저작을 이미 읽었을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저작은 광범하게 퍼졌고, 그가 슈티르너에게 이론적인 빚을 지고 있는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 되었다. 1891년초(니체가 죽진 않았으나 정신적인 문제에 시다라리던 기간) 하르트만은 니체가 슈티르너를 표절했다고 주장하기 까지 했다.[52] 세기의 전환점에서 니체가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광범하게 퍼졌고 평범한 것이 되었다. 적어도 독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관측되었다. " 현대 독일에서의 슈티르너의 영향력 놀라울 정도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니체와 동일선상에 놓여진다. 두 사상가는 본질적으로 같은 철학의 주창자로 간주된다.[53] 니체가 슈티르너로 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시작될 때부터 큰 논쟁으로 분류도긴 했지만 곧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게 된다[54] .[55]20세기 중엽에 슈티르너가 니체에 가한 영향에 대한 언급은 무조건 기각 되거나, 대답할수 없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56] 그러나 니체가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주장은 그들의 글쓰기가 유사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제기 되었다.[57]어쨋든 슈티르너가 니체에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가장 중대한 문제는 니체가 읽었는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58] abissonichilista라는 아나키스트는 슈티르너와 니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유일자는 초인이 아니며,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도 아니다. 유일자는 그 자신의 삶과 사상과 행동을 소유한 실천적 에고이스트다. 인간에겐 갈구해야 할 외부적 목표가 없으며, 그 외부의 중대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과 의미는 사람에 의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파괴되고, 재창조되고, 무시된다. 니체는 신의 죽음과 삶의 본질적인 의미의 부족에 의해 괴롭힘을 받았다. 그는 이를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도덕성으로서 재창조하길 원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신은 죽지 않았으며, 인간성(Humanity)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을 뿐이다. 인류(Humanity)는 근대성의 최고의 존재다. 슈티르너는 문화와 사회기관에 의한 의미와 목표의 부과에 반대한다. 개인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전유하고 소비할 수 있다. 자기해방은 미리 조립된 의미를 발견하거나, 초인이 그것을 제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완전함과 개선은 해방의 척도가 아니며, 이 또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외부의 이미지일 뿐이다. 소유(Ownness)는 그 자신이 살기 위해 어떤 이미지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의 행위이자 특질이다. 변증법적 에고이즘은 외부에서 비롯된 가치의 척도와 의미와 목적 없이 살아가기 위한 철학이다. 이것은 엄격함이 온화함 보다, 의무가 선택 보다, 필요가 자유 보다, 완전함이 불완전함 보다 낫다는 개념에 도전한다. 슈티르너는 새로운 도덕성, 새로운 영적 이상이나 새롭고 향상된 인간 집단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경멸하지 않았으며, 사회 제도와 국가 그리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마음의 지배"를 경멸했다. 슈티르너는 모든 숭고함과 신비로운 본질을 부정했다.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인간성은 "유령(spook)"이다 초인 또한 유령이다.[59] ” 루돌프 슈타이너[편집] 루돌프 슈타이너가 1900년 신학자로 변모하기 이전 그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방향은 슈티르너의 자아에 대한 것과 강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철학적 기반에 영향을 주었다[60] 아나키즘[편집] 아나키즘 역사 및 상징 스페인 분리주의 혁명(1873) 미국 헤이마켓 사건(1886) 바르셀로나 비극의 열흘(1909) 멕시코 혁명(1910)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반란(1920) 러시아 크론시타트 반란(1921) 스페인 제2공화국(1931) 스페인 내전(1936)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프랑스 68혁명(1968) 로마 국제회의 국제 아나키스트 암스테르담 회의 행덕사건 16 인권 선언 자유영역분쟁 아마카스 사건 붉은 역삼각 프로보 전선 WTO시위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 관련 분파 사회적 아나키즘 정강주의 반역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 상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실존주의적 아나키즘 여성주의적 아나키즘 초월주의적 아나키즘 인식론적 아나키즘 크립토 아나키즘 기독교 아나키즘 불교 아나키즘 민족아나키즘 아나르코자본주의 아나코-코뮤니즘 아나코 신디칼리즘 퀴어 아나키즘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 관계 개념 무신론 고전적 반국가주의 어피너티 그룹 직접 민주주의 자유지상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탈민족주의 반제국주의 후기구조주의 국제주의 반전주의 불법주의 상호주의 수평주의 이성주의 평화주의 반파시즘 반파쇼 자유연합론 양심적 병역 거부 무정부·무군대 예시적 정치 자생적 질서 계급 투쟁 자유사상 자유연애 불가지론 이신론 반신론 회의론 니힐리즘 실존주의 인본주의 시민 불복종 직접행동 노동조합 협동조합 스쾃 파업 불매동맹 포스트모더니즘 다다이즘 사이버펑크 P2P 핵티비즘 자연법 실정법 일리걸리즘 개인주의 자기소유권 관련 텍스트 《조선혁명선언》 《허무당선언》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 《카탈로니아 찬가》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일반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관한 고찰》 《재산이란 무엇인가》 《경제적 여러 모순의 체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능력에대해서》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국가와 무정부》 《신과 국가》 《상호부조론》 《이 책을 훔쳐라》 국제 조직 제1인터네셔널 국제 여단 국제노동자협회 (1992년) 청년국제당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전국노동자연합 아나키스트 블랙 크로스 과거 국내 조직 의열단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이천자유회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선자유노동자조합 조선인신진회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에스페란토문화사 조선동흥노동동맹 조선노동동흥회 함흠정진청년회 선구독서회 진우연맹 본능아연맹 우리계 다물단 불령사 흑색청년자유연합회 흑로회 흑색공포단 흑전사 흑도회 흑기연맹 흑우연맹 관련 인터넷 조직 Anarkismo.net 코피미즘 선교 교회 스웨덴 해적당 독일 해적당 해적당 인터네셔널 파이러트베이 어나니머스 관련 목록 아나키스트들의 상징 아나코 펑크 밴드 아나키스트 커뮤니티 아나키스트 소설 유대인 아나키스트 러시아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 음악가 아나키스트 조직 아나키스트 간행물 아나키스트 시인 아나키스트 영화 관련 경제 산업 혁명 경제 불균형 카르텔 석유 노동가치설 자본론 21세기 자본 제국주의론 자본축적론 기본소득 은 본위제 금 본위제 검은 목요일 브레튼 우즈 체제 스미소니언 협정 킹스턴 체제 변동 환율제 신자유주의 빈곤 노동 빈곤층 모기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유럽 국가부채위기 신용파산스왑 중앙은행 본원통화 통화승수 연방준비제도 지급준비제도 전자화폐 비트코인 관련 인물 고드윈 프루동 크로포트킨 바쿠닌 말라테스타 쿠르베 골드만 버크만 소로 소렐 마흐노 두루티 톨스토이 오웰 파이어아벤트 슈티르너 렌조 노바토레 촘스키 터커 몬슨 푸코 워드 카밀로 촐고츠 호프만 루빈 북친 후미코 슈스이 사카에 김원봉 하기락 백정기 신채호 이회영 이규창 유림 유자명 정화암 김산 홍형의 김종진 원심창 오면직 황상규 박열 나월환 조약골 v • d • e • h 슈티르너의 철학은 근대 아나키즘 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나키즘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지만 사회적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만 그리고 페데리카 몬세니를 비롯한 많은 사회적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유럽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그는 이후 나타난 지지자들인 에밀 아망드, 한 라이너, 렌조 노바토레, 존 헨리 맥케이, 미구엘 기메네즈 이구알라다, 그리고 레프 체르니 같은 이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미국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그는 벤자민 터커와 그의 매거진 리버티에서 자주 논해 졌었다. 터는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아 자연권을 버리고 에고이즘으로 대체하게 된다.[61] 리버티의 몇몇의 글들은 분명히 에고에즘의 경향이 나타났다. 영국에선 하버트 리드가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에고이즘을 일종의 실존주의로 묘사했다. 이후 1960년대 다니엘 게렝의 '아나키즘: 이론에서 실천까지'에서 게랭은 슈티르너를 헤겔주의의 반개인주의가 사상계를 지배하던 시절에 개별성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 했다[62] 1970년대 미국에선 상황주의자들의 집단인 'for ourselves에서 '탐욕할 권리: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의 실질적인 필요성에 대한 논문' 을 썼는데 그들은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아 에고이즘적 공산주의를(egoist-communism, 혹은 communist-egoism) 주장하게 된다.[63] 이후 미국에서 슈티르너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영향을 받아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이 등장한다. 제이슨 멕퀸은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내가 이데올로기를 비판할때 이는 막스 슈티르너의 회의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에 뿌리를 둔다"[64] 그리고 밥 블랙과 '페럴 폰/울피 랜드스트라이커' 같은 이들역시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포스트-구조주의와, 아나키즘의 혼합물인 포스트 아나키즘 이론가인 사울 뉴먼역시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고 슈티르너의 철학과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한 글을 썼다. 반역 아나키즘 역시 슈티르너에게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반역 아나키즘 이론가인 울피 랜드스트라이커와 알프레도 보나노역시 슈티르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보나노는 슈티르너와 관련해 Max Stirner 그리고 "Max Stirner und der Anarchismus"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65] 자유연애, 동성애, 그리고 여성주의[편집] “ 만일 슈티르너가 말했다면: 너는 살아있는 본질이나 동물 이상이다. 이것은 너는 여전히 동물이라는 것이지만, 그 동물성은 네가 누구인지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말한다: "너는 인간 이상의 존재지만, 또한 인간이기도 하다. 너는 남성 이상의 존재지만, 또한 남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인간성과 남성성은 너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너를 '진정한 인간성'이나 '진정한 남성성'으로 묶어두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무관심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이로 인해 언제나 고문을 당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가식적인 의무로서 너 자신을 괴롭혀왔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거룩한 인민은 너를 그들과 함께 묶어두고자 한다." ”   — 막스 슈티르너, Stirner’s Critics(1845)[66] 독일 슈티르너주의자이자 양성애자였던 아돌프 브랜드는 1896년 동성애에 관련된 간행물인 en:Der Eigene(유일자)을 간행하게 되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동성애 관련 출판물 이였으며 1931년까지 간행 되었다.[67] 간행물의 이름은 슈티르너의 저서인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비롯된 것이었다. 또 다른 초기 성소수자 운동가로는 슈티르너의 전기 작가이자 게이였던 존 헨리 맥케이가 있다.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는 여성주의자는 대표적으로 en:The Freewoman과 en:The New Freewoman을 편집했던 도라 마즈던과 엠마 골드만 같은 이들이 있었다. 슈티르너는 또한 자유 연애와 폴리아모리의 전파자인 에밀 아망드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68] 같이 보기[편집] 앙리 아르봉 자유로운 사람들 노트[편집] ↑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 Goodway, David. Anarchist Seeds Beneath the Snow.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6, p. 99. ↑ 가 나 다 John Henry Mackay: Max Stirner – Sein Leben und sein Werk Archived 2016년 11월 9일 - 웨이백 머신 p. 28 ↑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ume 8, The Macmillan Company and The Free Press, New York 1967. ↑ Stepelevich, Lawrence (Oct–Dec 1985). “Max Stirner as Hegelia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 JSTOR 경유 (구독 필요)》 46 (4): 602.  ↑ Marshall, Peter (1992). 《Demanding the Impossible》. Harper Collins. 221쪽. ISBN 0002178559.  ↑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mikhail-bakunin-the-reaction-in-germany ↑ 가 나 다 Lawrence L Stepelevich, The revival of Max Stirner ↑ Gide, Charles & Rist, Charles. A History of Economic Doctrines from the Time of the Physiocrats to the Present Day. Harrap 1956, p. 612 ↑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ume 8, The Macmillan Company and The Free Press, New York 1967 ↑ Karl Marx, "On the Jewish Question" Deutsch-franzosische ]ahrbucher, ed. Arnold Ruge (Paris, 1 844), p. 197. ↑ https://libcom.org/library/unique-its-property ↑ 울피 랜드스트라이커(Wolfi Landstreicher)의 2017년 번역본에서는 phantasm으로 번역되었다. ↑ Heider, Ulrike. Anarchism: Left, Right and Green,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94, pp. 95–96 ↑ Stirner, Max. The Ego and Its Own, p. 248 ↑ Moggach, Douglas. The New Hegeli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 194 ↑ Thomas, Paul (1985). 《Karl Marx and the Anarchists》. London: Routledge/Kegan Paul. 142쪽. ISBN 0-7102-0685-2.  ↑ 가 나 Nyberg, Svein Olav. “The union of egoists” (PDF). 《Non Serviam》 (Oslo, Norway: Svein Olav Nyberg) 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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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despair of the possibility of obtaining the whole of freedom, freedom from everything — yes, you consider it insanity even to wish this? — Well, then leave off chasing after the phantom, and spend your pains on something better than the — unattainable. ↑ The commoner is what he is through the protection of the State, through the State’s grace. He would necessarily be afraid of losing everything if the State’s power were broken. But how is it with him who has nothing to lose, how with the proletarian? As he has nothing to lose, he does not need the protection of the State for his “nothing.” He may gain, on the contrary, if that protection of the State is withdrawn from the protégé. Therefore the non-possessor will regard the State as a power protecting the possessor, which privileges the latter, but does nothing for him, the non-possessor, but to — suck his blood. The State is a — commoners’ State, is the estate of the commonalty. It protects man not according to his labor, but according to his tractableness (“loyalty”) — to wit, according to whether the rights entrusted to him by the State are enjoyed and managed in accordance with the will, i. e., laws, of the State. Under the regime of the commonalty the laborers always fall into the hands of the possessors, of those who have at their disposal some bit of the State domains (and everything possessible in State domain, belongs to the State, and is only a fief of the individual), especially money and land; of the capitalists, therefore. The laborer cannot realize on his labor to the extent of the value that it has for the consumer. “Labor is badly paid!” The capitalist has the greatest profit from it. — Well paid, and more than well paid, are only the labors of those who heighten the splendor and dominion of the State, the labors of high State servants. The State pays well that its “good citizens,” the possessors, may be able to pay badly without danger; it secures to itself by good payment its servants, out of whom it forms a protecting power, a “police” (to the police belong soldiers, officials of all kinds, e.g. those of justice, education, etc. — in short, the whole “machinery of the State”) for the “good citizens,” and the “good citizens” gladly pay high tax-rates to it in order to pay so much lower rates to their laborers. But the class of laborers, because unprotected in what they essentially are (for they do not enjoy the protection of the State as laborers, but as its subjects they have a share in the enjoyment of the police, a so-called protection of the law), remains a power hostile to this State, this State of possessors, this “citizen kingship.” Its principle, labor, is not recognized as to its value; it is exploited,[ausgebeutet] a spoil [Kriegsbeute] of the possessors, the enemy. The laborers have the most enormous power in their hands, and, if they once became thoroughly conscious of it and used it, nothing would withstand them; they would only have to stop labor, regard the product of labor as theirs, and enjoy it. This is the sense of the labor disturbances which show themselves here and there. The State rests on the — slavery of labor. If labor becomes free. the State is lost. The Ego and its Own ↑ 가 나 Moggach, Douglas & De Ridder, Widukind. Hegelianism in Restoration Prussia,1841–1848: Freedom, Humanism and ‘Anti-Humanism’ in Young Hegelian Thought. In: 'Hegel's Thought in Europe: Currents, Crosscurrents and Undercurrents', ed. Lisa Herzog (pp. 71-92).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pp. 82-83 ↑ Encyclopaedia of Philosophy, The Macmillan company Press, New York, 1967 ↑ See Bernd A. Laska: Nietzsche's initial crisis. In: Germanic Notes and Reviews, vol. 33, n. 2, fall/Herbst 2002, pp. 109–133 ↑ George J. Stack, Lange and Nietzsche, Walter de Gruyter, Berlin, New York, 1983, p. 12, ISBN 978-3-11-008866-3 ↑ 가 나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 Max Stirner, a durable dissident – in a nutshell ↑ Quoted in Read's book, "The Contrary Experience", Faber and Faber, 1963. ↑ See Memoirs of a revolutionary, 1901–1941 by Victor Serge. Publisher Oxford U.P., 1967 ↑ See Bernd A. Laska: Ein dauerhafter Dissident. Nürnberg: LSR-Verlag 1996 (online) ↑ See Bernd A. Laska: Katechon und Anarch. Nürnberg: LSR-Verlag 1997 (online) ↑ Huneker's book Egoists, a Book of Supermen (1909)contains an essay on Stirner. ↑ See Goldman, Anarchism and Other Essays, p. 50. ↑ Wilson, A N (2004년 11월 1일). “World of books”. 《The Daily Telegraph》 (London). 2010년 5월 12일에 확인함.  ↑ Between Man and Man by Martin Buber, Beacon Press, 1955. ↑ From Hegel to Marx by Sidney Hook, London, 1936. ↑ "The long revolution is preparing to write works in the ink of action whose unknown or nameless authors will flock to join Sade, Fourier, Babeuf, Marx, Lacenaire, Stirner, Lautréamont, L’hautier, Vaillant, Henry, Villa, Zapata, Makhno, the Communards, the insurrectionaries of Hamburg, Kiel, Kronstadt, Asturias – all those who have not yet played their last card in a game which we have only just joined: the great gamble whose stake is freedom." Raoul Vaneigem. The Revolution of Everyday Life ↑ David Goodway, Anarchist Seeds Beneath the Snow,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6 (pg.75). ↑ Henri Arvon, Aux sources de 1'existentialisme Max Stirner (Paris, 1954), p. 14 ↑ Zwischen 18 and 25, pp. 237–238. ↑ "Chapter Sankt Max in Die deutsche Ideologie ↑ I. Berlin, Karl Marx (New York, 1963), 143. ↑ G. Stedman-Jones, 'Introduction' in K. Marx & F.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London, 2002) ↑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Routledge. 1994 ↑ "Human or divine, as Stirner said, the predicates are the same whether they belong analytically to the divine being, or whether they are synthetically bound to the human form" (Gilles Deleuze. The Logic of Sense. Continuum. 2004). p. 122. ↑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Robert Schellwien, Max Stirner and Friedrich Nietzsche, 1892; H.L. Mencken, The Philosophy of Friedrich Nietzsche, 1908; K. Löwith, From Hegel To Nietzsche New York, 1964, p187;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4–37; T. A. Riley, "Anti-Statism in German Literature, as Exemplified by the Work of John Henry Mackay", in PMLA, Vol. 62, No. 3, Sep., 1947, pp. 828–843; Seth Taylor, Left Wing Nietzscheans, The Politics of German Expressionism 1910–1920, p144, 1990,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rk;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y,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2; R. C. Solomon & K. M. Higgins, The Age of German Idealism, p300, Routledge, 1993 ↑ While discussion of possible influence has never ceased entirely, the period of most intense discussion occurred between 1892 and 1900 in the German-speaking world. During this time, the most comprehensive account of Nietzsche's reception in the German language, the 4 volume work of Richard Frank Krummel: Nietzsche und der deutsche Geist indicates 83 entries discussing Stirner and Nietzsche. The only thinker more frequently discussed in connection with Nietzsche during this time is Schopenhauer, with about twice the number of entries. Discussion steadily declines thereafter, but is still significant. Nietzsche and Stirner show 58 entries between 1901 and 1918. From 1919 to 1945 there are 28 entries regarding Nietzsche and Stirner. ↑ "Apart from the information which can be gained from the annotations, the library (and the books Nietzsche read) shows us the extent, and the bias, of Nietzsche's knowledge of many fields, such as evolution and cosmology. Still more obvious, the library shows us the extent and the bias of Nietzsche's knowledge about many persons to whom he so often refers with ad hominem statements in his works. This includes not only such important figures as Mill, Kant, and Pascal but also such minor ones (for Nietzsche) as Max Stirner and William James who are both discussed in books Nietzsche read." T. H. Brobjer, "Nietzsche's Reading and Private Library", 1885–1889, i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58, No. 4, Oct., 1997, pp. 663–693; Stack believes it is doubtful that Nietzsche read Stirner, but notes "he was familiar with the summary of his theory he found in Lange's history." George J. Stack, Lange and Nietzsche, Walter de Gruyter, 1983, p 276 ↑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 Bernd A. Laska: Nietzsche's initial crisis. In: Germanic Notes and Reviews, vol. 33, n. 2, fall/Herbst 2002, pp. 109–133 ↑ Eduard von Hartmann, Nietzsches "neue Moral", in Preussische Jahrbücher, 67. Jg., Heft 5, Mai 1891, S. 501–521; augmented version with more express reproach of plagiarism in: Ethische Studien, Leipzig, Haacke 1898, pp. 34–69 ↑ This author believes that one should be careful in comparing the two men. However, he notes: "It is this intensive nuance of individualism that appeared to point from Nietzsche to Max Stirner, the author of the remarkable work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Stirner's influence in modern Germany has assumed astonishing proportions, and moves in general parallel with that of Nietzsche. The two thinkers are regarded as exponents of essentially the same philosophy." O. Ewald, "German Philosophy in 1907", in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17, No. 4, Jul., 1908, pp. 400–426 ↑ [in the last years of the 19th century] "The question of whether Nietzsche had read Stirner was the subject of great debate"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9–30 ↑ Levy pointed out in 1904 that the similarities in the writing of the two men appeared superficial.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 ↑ R.A. Nicholls, "Beginnings of the Nietzsche Vogue in Germany", in Modern Philology, Vol. 56, No. 1, Aug., 1958, pp. 24–37 ↑ "Stirner, like Nietzsche, who was clearly influenced by him, has been interpreted in many different ways", Saul Newman, From Bakunin to Lacan: Anti-authoritarianism and the Dislocation of Power, Lexington Books, 2001, p 56; "We do not even know for sure that Nietzsche had read Stirner. Yet, the similarities are too striking to be explained away." R. A. Samek, The Meta Phenomenon, p70, New York, 1981; Tom Goyens, (referring to Stirner's book The Ego and His Own) "The book influenced Friedrich Nietzsche, and even Marx and Engels devoted some attention to it." T. Goyens, Beer and Revolution: The German Anarchist Movement In New York City, p197, Illinois, 2007 ↑ "We have every reason to suppose that Nietzsche had a profound knowledge of the Hegelian movement, from Hegel to Stirner himself. The philosophical learning of an author is not assessed by the number of quotations, nor by the always fanciful and conjectural check lists of libraries, but by the apologetic or polemical directions of his work itself." Gilles Deleuze (translated by Hugh Tomlinson), Nietzsche and Philosophy, 1962 (2006 reprint, pp. 153–154) ↑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abissonichilista-the-unique-one-meets-the-overhuman ↑ Guido Giacomo Preparata, "Perishable Money in a Threefold Commonwealth: Rudolf Steiner and the Social Economics of an Anarchist Utopia". Review of Radical Economics 38/4 (Fall 2006). pp. 619–648 ↑ "Only the influence of the German philosopher of egoism, Max Stirner (né Johann Kaspar Schmidt, 1806–1856), as expressed through The Ego and His Own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compared with that of Proudhon. In adopting Stirnerite egoism (1886), Tucker rejected natural rights which had long been considered the foundation of libertarianism. This rejection galvanized the movement into fierce debates, with the natural rights proponents accusing the egoists of destroying libertarianism itself. So bitter was the conflict that a number of natural rights proponents withdrew from the pages of Liberty in protest even though they had hitherto been among its frequent contributors. Thereafter, Liberty championed egoism although its general content did not change significantly."Wendy Mcelroy. "Benjamin Tucker, Individualism, & Liberty: Not the Daughter but the Mother of Order" ↑ Daniel Guérin,Anarchism: From Theory to Practice ↑ Four Ourselves, The Right To Be Greedy: Theses On The Practical Necessity Of Demanding Everything ↑ "What is Ideology?" by Jason McQuinn ↑ “BONANNO, Alfredo Maria”. 2009년 7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10일에 확인함.  ↑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max-stirner-stirner-s-critics If Stirner had said: You are more than a living essence or animal, this would mean, you are still an animal, but animality does not exhaust what you are...... ↑ Karl Heinrich Ulrichs had begun a journal called Prometheus in 1870, but only one issue was published. (Kennedy, Hubert, Karl Heinrich Ulrichs: First Theorist of Homosexuality, In: 'Science and Homosexualities', ed. Vernon Rosario. New York: Routledge, 1997, pp. 26–45.) ↑ "La insumisión voluntaria. El anarquismo individualista español durante la dictadura y la Segunda República" by Xavier Díez 참고[편집] Stirner, Max: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845 [October 1844]). Stuttgart: Reclam-Verlag, 1972ff; engl. trans. The Ego and Its Own (1907), ed. David Leopold, Cambridge/ New York: CUP 1995 Stirner, Max: "Recensenten Stirners" (September 1845). In: Parerga, Kritiken, Repliken, Bernd A. Laska, ed., Nürnberg: LSR-Verlag, 1986; engl. trans. Stirner's Critics (abridged), see below Max Stirner, Political Liberalism (1845) 더 읽을거리[편집] Max Stirner's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im Spiegel der zeitgenössischen deutschen Kritik. Eine Textauswahl (1844–1856). Hg. Kurt W. Fleming. Leipzig: Verlag Max-Stirner-Archiv 2001 (Stirneriana) Arena, Leonardo V., Note ai margini del nulla, ebook, 2013. Arvon, Henri, Aux Sources de l'existentialisme, Paris: P.U.F. 1954 Essbach, Wolfgang, Gegenzüge. Der Materialismus des Selbst. Eine Studie über die Kontroverse zwischen Max Stirner und Karl Marx. Frankfurt: Materialis 1982 Helms, Hans G, Die Ideologie der anonymen Gesellschaft. Max Stirner 'Einziger' und der Fortschritt des demokratischen Selbstbewusstseins vom Vormärz bis zur Bundesrepublik, Köln: Du Mont Schauberg, 1966 Koch, Andrew M., "Max Stirner: The Last Hegelian or the First Poststructuralist". In: Anarchist Studies, vol. 5 (1997) pp. 95–108 Laska, Bernd A., Ein dauerhafter Dissident. Eine Wirkungsgeschichte des Einzigen, Nürnberg: LSR-Verlag 1996 (TOC, index) Laska, Bernd A., Ein heimlicher Hit. Editionsgeschichte des "Einzigen". Nürnberg: LSR-Verlag 1994 (abstract) Marshall, Peter H. "Max Stirner" in "Demanding the Impossible: A History of Anarchism "(London: HarperCollins, 1992). Moggach, Douglas & De Ridder, Widukind, "Hegelianism in Restoration Prussia,1841–1848: Freedom, Humanism and ‘Anti-Humanism’ in Young Hegelian Thought". In: Herzog, Lisa (ed.): Hegel's Thought in Europe: Currents, Crosscurrents and Undercurrents.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pp. 71–92 (Google Books) Newman, Saul (ed.), Max Stirner (Critical Explorations in Contemporary Political Thought),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1 (full book) Newman, Saul, Power and Politics in Poststructural Thought.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5 Paterson, R.W.K., The Nihilistic Egoist: Max Stirn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1 Stepelevich, Lawrence S., Max Stirner As Hegelian. I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46, nr. 4, pp. 597–614 Stepelevich, Lawrence S., Ein Menschenleben. Hegel and Stirner". In: Moggach, Douglas (ed.): The New Hegelians. Philosophy and Politics in the Hegelian Schoo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p. 166–176 Welsh, John F. Max Stirner's Dialectical Egoism: A New Interpretation. Lexington Books. 2010. Wilkinson, Will (2008). 〈Stirner, Max (1806–1856)〉. Hamowy, Ronald. 《The Encyclopedia of Libertarianism》. Thousand Oaks, CA: SAGE; Cato Institute. 493–5쪽. ISBN 978-1-4129-6580-4. LCCN 2008009151. OCLC 750831024.  Di Mascio, Carlo, Stirner Giuspositivista. Rileggendo l'Unico e la sua proprietà, 2 ed., Edizioni Del Faro, Trento, 2015, pp. 253, ISBN 978-88-6537-378-1 외부 링크[편집] 틀:Wikisource author-inline 위키인용집에 막스 슈티르너 관련 문서가 있습니다. 위키미디어 공용에 막스 슈티르너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일반[편집] (영어) 막스 슈티르너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an extensive introduction Svein Olav Nybergs website on Max Stirner, with extensive links to texts and references Max Stirner within the LSR project (English section) Max Stirner Project by H. Ibrahim Türkdogan Archive of texts on Stirner at the Anarchist Library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편집] Max Stirner, a durable dissident, 'How Marx and Nietzsche suppressed their colleague Max Stirner and why he has intellectually survived them' Stirner Delighted in His Construction – "loves miracles, but can only perform a logical miracle", by Karl Marx Nietzsche's initial crisis due to an encounter with Stirner's "The Ego", by Bernd A. Laska (2002) Max Stirner As Hegelian, By Lawrence S. Stepelevich "At the End of the Path of Doubt: Max Stirner", By Lawrence S. Stepelevich (Owl of Minerva 41:1–2 (2009–10) pp. 85–106) 텍스트[편집] Max Stirner의 작품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작품 정보 막스 슈티르너 - 인터넷 아카이브 막스 슈티르너의 작품 - 리브리복스 (퍼블릭 도메인 오디오북) Online book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The complete original text in German of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The complete English edition of "The Ego and his Own", in the translation of Steven T. Byington. Some of Stirner's illuminating "Shorter Essays", translated into English Recensenten Stirners / Stirner's Critics bilingual: full text in German / abridged text in English (trans. Frederick M. Gordon) Archive of the 4 works of Stirner translated into English including a 2011 complete translation of Stirner´s Critics (translated by Wolfi Landstreicher at the Anarchist Library)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1780445 LCCN: n79054586 ISNI: 0000 0001 2132 8572 GND: 118618261 SELIBR: 199381 SUDOC: 033430586 BNF: cb124296680 (데이터) NLA: 35481082 NDL: 00457765 NKC: skuk0001335 BNE: XX90223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막스_슈티르너&oldid=24409003" 분류: 1806년 태어남1856년 죽음독일의 철학자독일의 무신론자독일의 아나키스트무신론 철학자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종교 비평가허무주의자필명오버프랑켄 현 출신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동문동물 공격으로 죽은 사람19세기 독일 사람19세기 철학자서프로이센 출신숨은 분류: 구독이 필요한 링크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ragoné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Italiano日本語KurdîКыргызчаLatinaLatviešuMalagasyNederlandsNorsk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VènetoWalonWinaray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1일 (화) 01: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고효율 비디오 코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효율 비디오 코딩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HEVC의 블록 다이어그램 비디오 성능 비교[1] 비디오코딩표준 평균 비트레이트 감소율(H.264/MPEG-4 AVC HP 대비) 480p 720p 1080p 2160p HEVC 52% 56% 62% 64% 고효율 비디오 코딩(HEVC/H265)(영어: High Efficiency Video Coding)는 H.264/MPEG-4 AVC의 성공에 힘입어 개발에 착수한 차세대 동영상 부호화 기술이다. 기존에 H.264/MPEG-4 AVC를 개발했던 ISO/IEC MPEG과 ITU-T의 영상 부호화 전문가 그룹(Video Coding Experts Group)이 Joint Collaborative Team on Video Coding (JCT-VC)[2]으로서 2010년 1월 팀을 결성하여 표준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2013년 1월 25일, ITU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HEVC를 차세대 최종 표준안으로 승인하였다.[3] ISO/IEC 표준 번호는 ISO/IEC 23008-2, ITU-T 표준 번호는 H.265이며, 2015년에 개정판이 발행되었다. 현재 이를 기반으로 한 다시점 부호화(Multi-view video coding)와 가변적 부호화(Scalable video coding), 3D 비디오 부호화 기술이 Annex로서 포함되어 있다. 목차 1 개요 1.1 명칭 1.2 성능 2 특징 2.1 프로파일, 티어 와 레벨 2.2 주요 기술 2.2.1 블록 구조 2.2.2 예측 모드 2.2.3 차영상 부호화 2.2.4 인루프 필터 2.2.5 병렬화 지원 3 같이 보기 4 각주 개요[편집] 명칭[편집] HEVC는 ISO/IEC 표준번호 23008 part 2의 명칭으로, MPEG측에서 사용하는 명칭이고, ITU-T는 H.265로 2013년 4월 13일에 표준번호를 승인하였다. H.26L에서 출발하여 ITU-T측의 이름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던 H.264와 달리, 팀 결성시부터 HEVC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왔다. 성능[편집] 중심이 되는 프로파일인 Main Profile은 H264/AVC 방식의 인코딩을 했을 때와 대비해 Full HD 이상의 해상도의 경우 동일 조건 하에서 같은 화질에 절반 이하의 용량만 차지한다. 실제 사용에서는 인코더와 디코더의 세팅,영상 소스,모니터,케이블에 따라 변수가 있지만 약간 나은 화질에 60~80% 정도의 용량을 차지한다. 또한 H.264보다 압축 알고리즘이 복잡하여 인코딩과 디코딩시 같은 PC사양 기준으로 H.264 대비 1.2~2배정도 PC의 리소스를 추가적으로 요구한다.[4]. 특징[편집] 프로파일, 티어 와 레벨[편집] HEVC에서는 H.264/AVC에서와 같이 프로파일과 레벨 구조를 사용하고 있으며 추가적으로 티어라는 명세를 더 가지고 있다. 프로파일은 사용되는 기술에 대한 제약 사항을 나타내며, 레벨과 티어는 복호화 시에 필요한 사양을 정의하고 있다. 프로파일은 H.264/AVC에서와 같이 사용 영역에 맞게 특정 기술들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 해 둔 명세이다. 현재는 Main 프로파일과 그에 맞추어 정의된 10비트용 Main 프로파일(Main 10), 정지 영상 부호화용 프로파일(Main Still Picture)있다. 티어는 새롭게 정의된 명세 사항으로, Main Tier 및 High Tier가 있다. High Tier는 고화질 영상을 부호화 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넉넉한 사양을 규정하고 있다. 레벨은 기존 H.264/AVC에서와 유사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화질 영상을 부호화 하는데 유리하도록 조금 더 여유있게 설정되었다. 1 ~ 6.2레벨까지 정의되어 있다. 1레벨은 QCIF(176x144)를 초당 15프레임 정도로 복호화 할 수 있는 사양을 이야기 하며, 레벨이 오를수록 사양이 높아져 가장 높은 레벨인 6.2에서는 8K영상을 초당 120프레임 재생 할 수 있도록 정의되어 있다. 주요 기술[편집] HEVC에서는 여러 방향에서 부호화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술을 적용했다. 기존 압축 표준인 H.264와 비교하여 특징적인 기술들은 다음과 같다. 블록 구조[편집] 고해상도 영상을 잘 부호화 할 수 있도록 64x64크기의 블록을 기반으로 트리구조로 쪼개 내려가도록 하였으며, 예측 모드를 저장하는 단위와 차영상을 부호화 하는 단위를 분리하였다. 트리 구조에 따라 예측 모드는 최소 4x4에서 최대 64x64단위까지 부호화 할 수 있다. 예측 모드[편집] 화면 내 예측의 경우 35개의 모드 중 선택 할 수 있도록 하여 기존에 비하여 크게 늘렸다. 화면간 예측에서는 예상 움직임 벡터를 최대 5개 중에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소수점 단위 움직임 예측에 필요한 보간필터도 1/4 픽셀 단위까지 정의되었다(기존 H.264에서는 1/4 픽셀 단위에서는 선형보간을 사용했다.). 차영상 부호화[편집] 32x32부터 4x4까지 다양한 사이즈의 부호화를 지원한다. 화면내 부호화의 경우, 모드에 따라 4x4 단위에서는 DCT대신에 DST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인루프 필터[편집] 블록 경계에서 발생하는 계단 현상을 줄여주는 디블로킹 필터 뿐 아니라 오차 패턴을 보상 해 줄 수 있도록 Sample Adaptive Offset기술을 도입하였다. 병렬화 지원[편집] 하나의 화면을 가상의 슬라이스로 분할하여 병렬로 부호화/복호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기술이 추가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코덱 H.264 각주[편집] ↑ TK Tan; Marta Mrak; Vittorio Baroncini; Naeem Ramzan (2014년 5월 18일). “Report on HEVC compression performance verification testing”. JCT-VC. 2014년 5월 25일에 확인함.  ↑ JCT-VC. “JCT-VC official page”. www.itu.int. 2010년 5월 25일에 확인함.  ↑ 디지털타임스, 기 다리던 '초고화질 영상기술' 드디어... ↑ Ohm, J.; G.J. Sullivan, H. Schwarz, T.K. Tan, T. Wiegand (2012년 12월). “Comparison of the Coding Efficiency of Video Coding Standards—Including High Efficiency Video Coding (HEVC)”. 《Circuits and Systems for Video Technology, IEEE Transactions on》 22 (12): 1669–1684. ISSN 1051-8215. doi:10.1109/TCSVT.2012.2221192.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vdehMPEG MPEG-1 2 3 4 7 21 A B C D E H V M U MPEG-1 파트 파트 1: 시스템 (프로그램 스트림) 파트 2: 비디오 (H.261 기반) 파트 3: 오디오 (레이어 I 레이어 II 레이어 III) MPEG-2 파트 파트 1: 시스템 (H.222.0) (트랜스포트 스트림 프로그램 스트림) 파트 2: 비디오 (H.262) 파트 3: 오디오 (레이어 I 레이어 II 레이어 III MPEG 멀티채널) 파트 6: DSM CC 파트 7: 고급 오디오 부호화 MPEG-4 파트 파트 2: 비디오 (H.263 기반) 파트 3: 오디오 파트 6: DMIF 파트 10: 고급 비디호 부호화(H.264) 파트 11: 장면 기술 파트 12: ISO 기반 미디어 파일 포맷 파트 14: MP4 파일 포맷 파트 17: 스트리밍 텍스트 포맷 파트 20: LASeR MPEG-7 파트 파트 2: 기술 정의 언어 MPEG-21 파트 파트 2, 3, 9: 디지털 항목 파트 5: 권리 표현 언어 MPEG-D 파트 파트 1: MPEG 서라운드 파트 3: 음성 오디오 결합 부호화 MPEG-H 파트 파트 2: 고효율 비디오 부호화(H.265) 기타 MPEG-DASH vdeh멀티미디어 압축 형식영상 압축ISO/IEC 모션 JPEG 모션 JPEG 2000 MPEG-1 MPEG-2(파트 2) MPEG-4(파트 2/ASP 파트 10/AVC) HEVC ITU-T H.120 H.261 H.262 H.263 H.264 HEVC 기타 AMV AVS Bink Dirac DV Indeo 마이크로소프트 비디오1 Pixlet 리얼비디오 RTVideo SheerVideo 스매커 비디오 Theora VC-1 VP6 VP7 VP8 VP9 WMV Xvid 오디오 압축ISO/IEC MPEG-1 레이어 III (MP3) MPEG-1 레이어 II MPEG-1 레이어 I AAC HE-AAC ITU-T G.711 G.718 G.719 G.722 G.722.1 G.722.2 G.723 G.723.1 G.726 G.728 G.729 G.729.1 G.729a 기타 AC3 AMR 애플 무손실 ATRAC FLAC iLBC Monkey's Audio μ-law Musepack OptimFROG 리얼오디오 RTAudio SHN Siren Speex Vorbis WavPack WMA TAK TTA 이미지 압축ISO/IEC/ITU-T JPEG XR JPEG JPEG 2000 무손실 JPEG JBIG JBIG2 PNG WBMP 기타 APNG BMP EXR GIF ICER ILBM MNG PCX PGF TGA TIFF DNG SVG WebP 미디어 컨테이너일반 3GP ASF AVI Bink BXF DivX 미디어 포맷 DPX EVO FLV 마트료시카 MPEG-PS MPEG-TS MP4 MXF Ogg Ogg 미디어 퀵타임 리얼미디어 스매커 RIFF VOB WebM 오디오만 지원 AIFF AU WAV 방식에 대해서는 압축 방식을, 코덱에 대해서는 데이터 압축 구현을 참고하십시오. vdehISO 표준 목록: ISO 표준 목록 ISO 로마자 표기법 목록 IEC 표준 목록 분류: 분류:ISO 표준 분류:OSI 프로토콜 1~9999 1 2 3 4 5 6 7 9 16 31 -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28 216 217 226 228 233 259 269 302 306 428 518 519 639 -1 -2 -3 -5 -6 646 690 732 764 843 898 965 1000 1004 1007 1073-1 1413 1538 1745 1989 2014 2015 2022 2047 2108 2145 2146 2240 2281 2709 2711 2788 2848 2852 3029 3103 3166 -1 -2 -3 3297 3307 3602 3864 3901 3977 4031 4157 4217 4909 5218 5428 5775 5776 5800 5964 6166 6344 6346 6385 6425 6429 6438 6523 6709 7001 7002 7098 7185 7200 7498 7736 7810 7811 7812 7813 7816 8000 8178 8217 8571 8583 8601 8632 8652 8691 8807 8820-5 885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8879 9000 9075 9126 9241 9293 9362 9407 9506 9529 9564 9594 9660 9897 9945 9984 9985 9995 10000~19999 10005 10006 10007 10116 10118-3 10160 10161 10165 10179 10206 10218 10303 -11 -21 -22 -28 -238 10383 10487 10585 10589 10646 10664 10746 10861 10957 10962 10967 11073 11170 11179 11404 11544 11783 11784 11785 11801 11898 11940 11941 11941 (TR) 11992 12006 12182:1998 12207 12234-2 13211 -1 -2 13216 13250 13399 13406-2 13407 13450 13485 13490 13567 13568 13584 13616 14000 14031 14224 14289 14396 14443 14496 -10 1-14 14644 -1 -2 -3 -4 -5 -6 -7 -8 -9 14649 14651 14698 14698-2 14750 14882 14971 15022 15189 15288 15291 15292 15408 15444 15445 15438 15504 15511 15686 15693 15706 15706-2 15707 15897 15919 15924 15926 15926 WIP 15930 16023 16262 16750 17024 17025 17369 17799 18000 18004 18014 18245 18629 18916 19005 19011 19092-1 19092-2 19114 19115 19125 19136 19439 19501:2005 19752 19757 19770 19775-1 19794-5 20000+ 20000 20022 21000 21047 21827:2002 22000 23008-2 23270 23360 24613 24707 25178 26000 26300 26324 27000 관련 27000 27001 27002 27003 27004 27005 27006 27007 27729 27799 28000 29110 29199-2 29500 31000 32000 38500 42010 80000 같이 보기: "ISO"로 시작하는 전체 문서 vdeh그래픽 파일 포맷래스터 ANI ANIM APNG ART BMP BPG BSAVE CAL CIN CPC CPT DDS DPX ECW EXR FITS FLIC FLIF FPX GIF HDRi HEVC ICER ICNS ICO / CUR ICS ILBM JBIG JBIG2 JNG JPEG JPEG 2000 JPEG-LS JPEG XR KRA MNG MIFF NRRD ORA PAM PBM / PGM / PPM / PNM PCX PGF PICtor PNG PSD / PSB PSP QTVR RAS RBE JPEG-HDR Logluv TIFF SGI TGA TIFF TIFF/EP TIFF/IT UFO/ UFP WBMP WebP XBM XCF XPM XWD Raw CIFF DNG 벡터 AI CDR CGM DXF EVA EMF 거버 HVIF IGES PGML SVG VML WMF Xar 복합 CDF DjVu EPS PDF PICT PS SWF (파일 형식) XAML 관련 항목 교환 이미지 파일 형식 (Exif) Extensible Metadata Platform (XMP) 분류 비교 이 글은 기술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효율_비디오_코딩&oldid=23967785" 분류: ISO 표준MPEG손실 압축 알고리즘영상 압축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기술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Italiano日本語NorskPolskiРусский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Yorùbá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4일 (목) 18: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사랑앵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랑앵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사랑앵무 사랑앵무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조강 목: 앵무목 과: 목도리앵무과 족: 사랑앵무족(Melopsittacini) 속: 사랑앵무속(Melopsittacus) 종: 사랑앵무(M. undulatus) 학명 Melopsittacus undulatusShaw, 1805 사랑앵무 또는 잉꼬(←일본어: 鸚哥 인코[*])는 앵무새의 일종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건조한 지역 원산이며, 몸길이는 18 cm, 몸무게는 30~40 g 가량 된다. 몸은 녹색, 꼬리는 푸른색, 머리는 노란색이며, 날개는 녹색을 띤 검은색 깃털과 검은색 칼깃으로 되어 있다. 다리는 분홍색이나 회색으로 된 대지족이다. 부리는 분홍빛을 띤 갈색이며 다 자란 수컷에게는 푸르스름한 납막이 있다. 하지만 흰색 등의 변종이 있다. 나무나 풀이 우거진 탁 트인 곳의 관목과 같은 곳에서 산다. 구멍이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4~7개의 알을 18일간 품는다. 깨어난 새끼가 30일 동안 자라면 독립한다. 새끼를 기를 때가 아니면 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사는 곳을 옮겨다니는 편이다. 이 때문에 철새처럼 이주를 하기도 한다. 목차 1 사랑앵무의 구분 1.1 키우는 사랑앵무 1.2 대화하는 사랑앵무 2 사랑앵무 기르기 2.1 잉꼬 기르기 준비 2.1.1 새장 2.1.2 목욕 2.2 잉꼬 돌보기 2.3 잉꼬 모이 주기 2.4 잉꼬 길들이기 2.4.1 손타기잉꼬(손노리개) 길들이기 2.4.2 말하는잉꼬 길들이기 2.4.3 잉꼬의 알 2.5 잉꼬의 새끼 낳기 3 같이 보기 사랑앵무의 구분[편집] 키우는 사랑앵무[편집] 사랑앵무는 많이 선호하는 야생동물 중 하나이다. 1850년대부터 교배가 이루어져 색깔별로 품종이 있다. 과장된 머릿깃이 시야를 가려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근친 교배 때문에 빨리 죽기도 한다. 키우는 사랑앵무의 수명은 품종과 건강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4년에서 15년 정도이다. 사랑앵무의 지능은 다른 앵무새와 비슷하며, 훈련을 시켜 말과 행동을 하는 방법 등을 가르칠 수 있다. 대화하는 사랑앵무[편집] 2001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사는 라이언 레드놀즈(Ryan B. Rednolds)는 2000년에 죽은 사랑앵무 빅터(Victor)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사랑앵무가 10 마리 가량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과학으로서는 그의 주장을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 사랑앵무 기르기[편집] 앵무새의 품종은 수백 종이 있는데, 그중 사랑앵무는 깃털이 화려하고 다양하며 사람의 말을 흉내낼 줄 알아 사람들에게 애완동물로서 인기가 있다. 잉꼬 기르기 준비[편집] 새장[편집] 넓은 방에서 기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새장으로 기르는 경우라면 되도록 커다란 것을 준비한다. 적어도 양 날개를 펼쳐서 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는 되어야 한다. 새장은 실내의 안정된 곳에 설치하고 모이 주는 기구와 새장 바닥을 까는 깔개, 새장 덮개 등이 필요하다. 새장망이 가로로 엮어져 있으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운동을 할 수 있다. 지름 1cm 이상의 가지를 구해 홰(횃대)를 만들어 주면 편히 쉴 수 있어 좋다. 종이와 톱밥을 구입하여 새장 바닥에 깔아 주거나 새용 모래깔개나 모래를 깔아 주어도 괜찮다. 목욕[편집] 잉꼬는 놀기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장난감을 넣어 주고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몸무게를 측정할 저울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새장이 크고 넓다면 여러 마리를 함께 키울 수 있다. 잉꼬는 목욕하기를 좋아하므로 물 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덮개가 있는 욕조와 플라스틱 통 안에서 물을 뿌릴 수 있는 분무기도 준비해 둔다. 그리고 혹시나 있을 탈출에 대비하여 창문과 벽난로를 막을 수 있는 촘촘한 그물과 벽에 홰를 고정시킬 수 있는 고무빨판을 구한다. 사랑앵무새는 건조한 지역에 살던 새로서 목욕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앵무를 억지로 목욕을 시켜서 귀에 물이 들어가게 하면 머리가 기우는 사경현상이 일어 날 수 있다. 잉꼬 돌보기[편집] 잉꼬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므로 일주일에 한 번씩 먹이통과 홰 등을 떼어낸 후 철망에 부착된 이물질을 제거하고 뜨거운 비눗물로 잘 닦아 준다. 그리고 휴지로 잘 닦은 후 소독약제를 뿌리고 깔개를 넣기 전에 말린다. 먹이통에 남아 있는 씨앗은 버리고 깨끗이 닦아 신선한 먹이를 담아 준다. 마실 물, 푸성귀 등도 교환해 주며 굴껍질(석분)은 일주일에 한두 번 새것을 넣어 준다. 가루로 된 굴껍질은 좋아하지 않으므로 주의한다. 잉꼬는 일 년에 한 번씩 깃털을 가는데 이때 손상되거나 부러진 깃털은 새 깃털로 교환된다. 털갈이를 할 때는 병든 것처럼 보이나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 잉꼬를 기르다 보면 부리로 자신의 몸을 다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몸을 다듬는 동안 꼬리 밑에 있는 선에서 나오는 기름을 깃털에 얇게 바름으로써 방수 효과를 얻는다. 잉꼬 모이 주기[편집] 모이의 배합은 피 6, 좁쌀 3, 수수 1이 보통이다. 여름에는 피 6, 좁쌀 4와 같이 담백한 배합으로 해서 준다. 푸성귀 종류는 무엇이든 잘 먹는데 특히 줄기가 딱딱한 것을 좋아한다. 신선한 것으로 조금씩, 4-5일에 한 번 정도 주면 된다. 잉꼬는 이가 없기 때문에 굴껍질과 같은 석분을 섭취하여야 위에서 거친 씨앗을 소화할 수가 있다. 또 갑오징어뼈를 철사로 고정시켜 매달아 주면 갉아 먹는데 이것은 칼슘 보충을 위해 필요하다. 잉꼬 길들이기[편집] 손타기잉꼬(손노리개) 길들이기[편집] 잉꼬를 길들이려면 야생보다는 사람을 잘 따르는 손노리개가 더 편하며, 손노리개는 날개깃을 자르면 훈련시키기가 더 쉽다. 이것을 윙컷 또는 윙트리밍이라 하는데, 날개가 아니라 날개깃을 자르는 것이라 잉꼬한테는 아픔을 주지 않는다. 또 6개월 정도 자라면 다시 날개깃이 자라난다. 먼저 잉꼬에게 시킬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훈련은 손가락에 앉도록 하는 것이다. 이 훈련은 반복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먼저 먹이를 자주 주면서 잉꼬와 친해진다. 잉꼬는 점차 주인의 손이 가까이 오는 것에 겁을 내지 않는다. 이때쯤 먹이가 달린 홰를 가까이 가져가 홰에 걸터앉아 먹이를 먹도록 한다. 다음으로 잉꼬가 홰 대신 손가락에 앉는 훈련으로 들어간다. 천천히 집게손가락을 새의 배로 가까이 접근시킨다. 올라오지 않을 경우에는 살살 문질러준다. 잉꼬는 곧 주인의 손가락에 앉는 것을 즐거워하게 된다. 주인의 손가락에 즐겁게 앉아 놀게 되면 이제는 그 상태 그대로 새장 밖으로 옮길 수도 있다. 잉꼬가 적응이 되면 어깨 위에 올려 놓아 본다. 잘 길들여진 잉꼬는 사람 어깨에 앉아 머리카락을 물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잉꼬와 친밀해지는 방법 중 하나는 볼을 긁어주는 것이다. 볼을 긁어주는 것은 잉꼬 사이에서는 애정표현으로, 손가락을 볼 옆에 살짝 갖다대면 잉꼬가 털을 부풀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잉꼬가 사람의 손가락을 무서워 하는 것으로 이것은 또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 이 상태에서 살며시 긁어주면 금세 눈을 감으며 좋아한다. 또한 손에서 직접 먹이를 주는 것도 잉꼬를 길들이는 데에 좋은 방법이다. 잉꼬가 사람의 손가락을 무서워 할 경우에는 새가 무서워하지 않는 거리에서 천천히 다가간다. 오랫동안 반복하면 잉꼬는 손가락이 무섭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반대로 잉꼬를 손으로 잡거나 심한 장난을 칠 경우에는 스트레스를 받아 손가락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좋다. 말하는잉꼬 길들이기[편집] 잉꼬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은 힘든 기술이어서 끈기가 따라야 한다. 먼저 손가락 위에 올려 놓고 입을 가까이 대어 쉬운 말부터 가르친다. 말은 수컷이 좀 더 잘 하는 편인데, 처음에는 발음하기 쉬운 낱말부터 시작한다. 낱말 하나를 다 외울 때까지 계속해서 그 낱말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완전하게 외운 뒤에 다음 낱말을 가르치도록 하고, 점점 긴 낱말도 가르친다. 이따금 전에 외운 낱말을 외우게 하여 복습을 시킨다. 되도록이면 계속 같은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좋다. 특히 음색이나 악센트도 그대로 외우기 때문에 듣기 좋은 낱말을 가르치도록 한다. 잉꼬의 알[편집] 잉꼬의 알은 연한 핑크색이다. 2,3일에 걸쳐 한마리씩 낳는다. 잉꼬의 새끼 낳기[편집] 잉꼬의 암컷은 하루나 이틀에 하나씩 4-6개의 알을 지속적으로 낳는다. 암컷은 이 알을 17-18일 동안 따뜻하게 품어 부화시킨다.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데 사람이 이를 보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경우에는 알을 포기해 버린다. 새끼는 부리 끝의 작은 끌처럼 생긴 난치를 이용하여 껍질을 깨고 나온다. 갓 나온 새끼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 위에 머리를 얹고 쉰다. 이후 새끼는 어미가 소화된 먹이를 입으로 나누어 주는 것을 받아먹고 빠른 속도로 자란다. 부화된 새끼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서로 얽혀서 붙어 있다. 17일 정도 지나면 새끼는 성숙한 새의 깃털을 갖기 시작하고 생후 21일이 되면 복실복실한 모습으로 단장을 한다. 생후 6주가 되면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집에 들어갈 채비를 하는데 이때 스스로 씨앗을 쪼아먹을 수 있으며 아직 완전한 비행은 할 수 없으나 홰에 불안한 자세로 설 수도 있다. 4개월이 되면 처음으로 깃털을 갈게 되는데 그 깃털은 끝이 뾰족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깃털이 생겨난다. 이때 잉꼬는 구부러진 깃털을 바로 펴기 위해 몸을 잘 다듬는다. 털갈이가 끝나면 완전히 성숙해지고 5개월 정도 지나면 스스로 알을 품을 줄도 알고 홰에서 불안해하며 서 있는 모습도 보여 준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사랑앵무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집에서 키우는 사랑앵무 말하는 새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LCCN: sh85017599 GND: 4065320-1 BNF: cb11946979w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랑앵무&oldid=22752829" 분류: 목도리앵무과애완조1805년 기재된 동물오스트레일리아의 새숨은 분류: 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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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앵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랑앵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사랑앵무 사랑앵무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조강 목: 앵무목 과: 목도리앵무과 족: 사랑앵무족(Melopsittacini) 속: 사랑앵무속(Melopsittacus) 종: 사랑앵무(M. undulatus) 학명 Melopsittacus undulatusShaw, 1805 사랑앵무 또는 잉꼬(←일본어: 鸚哥 인코[*])는 앵무새의 일종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건조한 지역 원산이며, 몸길이는 18 cm, 몸무게는 30~40 g 가량 된다. 몸은 녹색, 꼬리는 푸른색, 머리는 노란색이며, 날개는 녹색을 띤 검은색 깃털과 검은색 칼깃으로 되어 있다. 다리는 분홍색이나 회색으로 된 대지족이다. 부리는 분홍빛을 띤 갈색이며 다 자란 수컷에게는 푸르스름한 납막이 있다. 하지만 흰색 등의 변종이 있다. 나무나 풀이 우거진 탁 트인 곳의 관목과 같은 곳에서 산다. 구멍이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4~7개의 알을 18일간 품는다. 깨어난 새끼가 30일 동안 자라면 독립한다. 새끼를 기를 때가 아니면 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사는 곳을 옮겨다니는 편이다. 이 때문에 철새처럼 이주를 하기도 한다. 목차 1 사랑앵무의 구분 1.1 키우는 사랑앵무 1.2 대화하는 사랑앵무 2 사랑앵무 기르기 2.1 잉꼬 기르기 준비 2.1.1 새장 2.1.2 목욕 2.2 잉꼬 돌보기 2.3 잉꼬 모이 주기 2.4 잉꼬 길들이기 2.4.1 손타기잉꼬(손노리개) 길들이기 2.4.2 말하는잉꼬 길들이기 2.4.3 잉꼬의 알 2.5 잉꼬의 새끼 낳기 3 같이 보기 사랑앵무의 구분[편집] 키우는 사랑앵무[편집] 사랑앵무는 많이 선호하는 야생동물 중 하나이다. 1850년대부터 교배가 이루어져 색깔별로 품종이 있다. 과장된 머릿깃이 시야를 가려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근친 교배 때문에 빨리 죽기도 한다. 키우는 사랑앵무의 수명은 품종과 건강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4년에서 15년 정도이다. 사랑앵무의 지능은 다른 앵무새와 비슷하며, 훈련을 시켜 말과 행동을 하는 방법 등을 가르칠 수 있다. 대화하는 사랑앵무[편집] 2001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사는 라이언 레드놀즈(Ryan B. Rednolds)는 2000년에 죽은 사랑앵무 빅터(Victor)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사랑앵무가 10 마리 가량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과학으로서는 그의 주장을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 사랑앵무 기르기[편집] 앵무새의 품종은 수백 종이 있는데, 그중 사랑앵무는 깃털이 화려하고 다양하며 사람의 말을 흉내낼 줄 알아 사람들에게 애완동물로서 인기가 있다. 잉꼬 기르기 준비[편집] 새장[편집] 넓은 방에서 기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새장으로 기르는 경우라면 되도록 커다란 것을 준비한다. 적어도 양 날개를 펼쳐서 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는 되어야 한다. 새장은 실내의 안정된 곳에 설치하고 모이 주는 기구와 새장 바닥을 까는 깔개, 새장 덮개 등이 필요하다. 새장망이 가로로 엮어져 있으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운동을 할 수 있다. 지름 1cm 이상의 가지를 구해 홰(횃대)를 만들어 주면 편히 쉴 수 있어 좋다. 종이와 톱밥을 구입하여 새장 바닥에 깔아 주거나 새용 모래깔개나 모래를 깔아 주어도 괜찮다. 목욕[편집] 잉꼬는 놀기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장난감을 넣어 주고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몸무게를 측정할 저울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새장이 크고 넓다면 여러 마리를 함께 키울 수 있다. 잉꼬는 목욕하기를 좋아하므로 물 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덮개가 있는 욕조와 플라스틱 통 안에서 물을 뿌릴 수 있는 분무기도 준비해 둔다. 그리고 혹시나 있을 탈출에 대비하여 창문과 벽난로를 막을 수 있는 촘촘한 그물과 벽에 홰를 고정시킬 수 있는 고무빨판을 구한다. 사랑앵무새는 건조한 지역에 살던 새로서 목욕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앵무를 억지로 목욕을 시켜서 귀에 물이 들어가게 하면 머리가 기우는 사경현상이 일어 날 수 있다. 잉꼬 돌보기[편집] 잉꼬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므로 일주일에 한 번씩 먹이통과 홰 등을 떼어낸 후 철망에 부착된 이물질을 제거하고 뜨거운 비눗물로 잘 닦아 준다. 그리고 휴지로 잘 닦은 후 소독약제를 뿌리고 깔개를 넣기 전에 말린다. 먹이통에 남아 있는 씨앗은 버리고 깨끗이 닦아 신선한 먹이를 담아 준다. 마실 물, 푸성귀 등도 교환해 주며 굴껍질(석분)은 일주일에 한두 번 새것을 넣어 준다. 가루로 된 굴껍질은 좋아하지 않으므로 주의한다. 잉꼬는 일 년에 한 번씩 깃털을 가는데 이때 손상되거나 부러진 깃털은 새 깃털로 교환된다. 털갈이를 할 때는 병든 것처럼 보이나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 잉꼬를 기르다 보면 부리로 자신의 몸을 다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몸을 다듬는 동안 꼬리 밑에 있는 선에서 나오는 기름을 깃털에 얇게 바름으로써 방수 효과를 얻는다. 잉꼬 모이 주기[편집] 모이의 배합은 피 6, 좁쌀 3, 수수 1이 보통이다. 여름에는 피 6, 좁쌀 4와 같이 담백한 배합으로 해서 준다. 푸성귀 종류는 무엇이든 잘 먹는데 특히 줄기가 딱딱한 것을 좋아한다. 신선한 것으로 조금씩, 4-5일에 한 번 정도 주면 된다. 잉꼬는 이가 없기 때문에 굴껍질과 같은 석분을 섭취하여야 위에서 거친 씨앗을 소화할 수가 있다. 또 갑오징어뼈를 철사로 고정시켜 매달아 주면 갉아 먹는데 이것은 칼슘 보충을 위해 필요하다. 잉꼬 길들이기[편집] 손타기잉꼬(손노리개) 길들이기[편집] 잉꼬를 길들이려면 야생보다는 사람을 잘 따르는 손노리개가 더 편하며, 손노리개는 날개깃을 자르면 훈련시키기가 더 쉽다. 이것을 윙컷 또는 윙트리밍이라 하는데, 날개가 아니라 날개깃을 자르는 것이라 잉꼬한테는 아픔을 주지 않는다. 또 6개월 정도 자라면 다시 날개깃이 자라난다. 먼저 잉꼬에게 시킬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훈련은 손가락에 앉도록 하는 것이다. 이 훈련은 반복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먼저 먹이를 자주 주면서 잉꼬와 친해진다. 잉꼬는 점차 주인의 손이 가까이 오는 것에 겁을 내지 않는다. 이때쯤 먹이가 달린 홰를 가까이 가져가 홰에 걸터앉아 먹이를 먹도록 한다. 다음으로 잉꼬가 홰 대신 손가락에 앉는 훈련으로 들어간다. 천천히 집게손가락을 새의 배로 가까이 접근시킨다. 올라오지 않을 경우에는 살살 문질러준다. 잉꼬는 곧 주인의 손가락에 앉는 것을 즐거워하게 된다. 주인의 손가락에 즐겁게 앉아 놀게 되면 이제는 그 상태 그대로 새장 밖으로 옮길 수도 있다. 잉꼬가 적응이 되면 어깨 위에 올려 놓아 본다. 잘 길들여진 잉꼬는 사람 어깨에 앉아 머리카락을 물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잉꼬와 친밀해지는 방법 중 하나는 볼을 긁어주는 것이다. 볼을 긁어주는 것은 잉꼬 사이에서는 애정표현으로, 손가락을 볼 옆에 살짝 갖다대면 잉꼬가 털을 부풀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잉꼬가 사람의 손가락을 무서워 하는 것으로 이것은 또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 이 상태에서 살며시 긁어주면 금세 눈을 감으며 좋아한다. 또한 손에서 직접 먹이를 주는 것도 잉꼬를 길들이는 데에 좋은 방법이다. 잉꼬가 사람의 손가락을 무서워 할 경우에는 새가 무서워하지 않는 거리에서 천천히 다가간다. 오랫동안 반복하면 잉꼬는 손가락이 무섭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반대로 잉꼬를 손으로 잡거나 심한 장난을 칠 경우에는 스트레스를 받아 손가락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좋다. 말하는잉꼬 길들이기[편집] 잉꼬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은 힘든 기술이어서 끈기가 따라야 한다. 먼저 손가락 위에 올려 놓고 입을 가까이 대어 쉬운 말부터 가르친다. 말은 수컷이 좀 더 잘 하는 편인데, 처음에는 발음하기 쉬운 낱말부터 시작한다. 낱말 하나를 다 외울 때까지 계속해서 그 낱말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완전하게 외운 뒤에 다음 낱말을 가르치도록 하고, 점점 긴 낱말도 가르친다. 이따금 전에 외운 낱말을 외우게 하여 복습을 시킨다. 되도록이면 계속 같은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좋다. 특히 음색이나 악센트도 그대로 외우기 때문에 듣기 좋은 낱말을 가르치도록 한다. 잉꼬의 알[편집] 잉꼬의 알은 연한 핑크색이다. 2,3일에 걸쳐 한마리씩 낳는다. 잉꼬의 새끼 낳기[편집] 잉꼬의 암컷은 하루나 이틀에 하나씩 4-6개의 알을 지속적으로 낳는다. 암컷은 이 알을 17-18일 동안 따뜻하게 품어 부화시킨다.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데 사람이 이를 보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경우에는 알을 포기해 버린다. 새끼는 부리 끝의 작은 끌처럼 생긴 난치를 이용하여 껍질을 깨고 나온다. 갓 나온 새끼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 위에 머리를 얹고 쉰다. 이후 새끼는 어미가 소화된 먹이를 입으로 나누어 주는 것을 받아먹고 빠른 속도로 자란다. 부화된 새끼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서로 얽혀서 붙어 있다. 17일 정도 지나면 새끼는 성숙한 새의 깃털을 갖기 시작하고 생후 21일이 되면 복실복실한 모습으로 단장을 한다. 생후 6주가 되면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집에 들어갈 채비를 하는데 이때 스스로 씨앗을 쪼아먹을 수 있으며 아직 완전한 비행은 할 수 없으나 홰에 불안한 자세로 설 수도 있다. 4개월이 되면 처음으로 깃털을 갈게 되는데 그 깃털은 끝이 뾰족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깃털이 생겨난다. 이때 잉꼬는 구부러진 깃털을 바로 펴기 위해 몸을 잘 다듬는다. 털갈이가 끝나면 완전히 성숙해지고 5개월 정도 지나면 스스로 알을 품을 줄도 알고 홰에서 불안해하며 서 있는 모습도 보여 준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사랑앵무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집에서 키우는 사랑앵무 말하는 새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LCCN: sh85017599 GND: 4065320-1 BNF: cb11946979w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랑앵무&oldid=22752829" 분류: 목도리앵무과애완조1805년 기재된 동물오스트레일리아의 새숨은 분류: 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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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앵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랑앵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사랑앵무 사랑앵무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조강 목: 앵무목 과: 목도리앵무과 족: 사랑앵무족(Melopsittacini) 속: 사랑앵무속(Melopsittacus) 종: 사랑앵무(M. undulatus) 학명 Melopsittacus undulatusShaw, 1805 사랑앵무 또는 잉꼬(←일본어: 鸚哥 인코[*])는 앵무새의 일종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건조한 지역 원산이며, 몸길이는 18 cm, 몸무게는 30~40 g 가량 된다. 몸은 녹색, 꼬리는 푸른색, 머리는 노란색이며, 날개는 녹색을 띤 검은색 깃털과 검은색 칼깃으로 되어 있다. 다리는 분홍색이나 회색으로 된 대지족이다. 부리는 분홍빛을 띤 갈색이며 다 자란 수컷에게는 푸르스름한 납막이 있다. 하지만 흰색 등의 변종이 있다. 나무나 풀이 우거진 탁 트인 곳의 관목과 같은 곳에서 산다. 구멍이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4~7개의 알을 18일간 품는다. 깨어난 새끼가 30일 동안 자라면 독립한다. 새끼를 기를 때가 아니면 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사는 곳을 옮겨다니는 편이다. 이 때문에 철새처럼 이주를 하기도 한다. 목차 1 사랑앵무의 구분 1.1 키우는 사랑앵무 1.2 대화하는 사랑앵무 2 사랑앵무 기르기 2.1 잉꼬 기르기 준비 2.1.1 새장 2.1.2 목욕 2.2 잉꼬 돌보기 2.3 잉꼬 모이 주기 2.4 잉꼬 길들이기 2.4.1 손타기잉꼬(손노리개) 길들이기 2.4.2 말하는잉꼬 길들이기 2.4.3 잉꼬의 알 2.5 잉꼬의 새끼 낳기 3 같이 보기 사랑앵무의 구분[편집] 키우는 사랑앵무[편집] 사랑앵무는 많이 선호하는 야생동물 중 하나이다. 1850년대부터 교배가 이루어져 색깔별로 품종이 있다. 과장된 머릿깃이 시야를 가려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근친 교배 때문에 빨리 죽기도 한다. 키우는 사랑앵무의 수명은 품종과 건강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4년에서 15년 정도이다. 사랑앵무의 지능은 다른 앵무새와 비슷하며, 훈련을 시켜 말과 행동을 하는 방법 등을 가르칠 수 있다. 대화하는 사랑앵무[편집] 2001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사는 라이언 레드놀즈(Ryan B. Rednolds)는 2000년에 죽은 사랑앵무 빅터(Victor)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사랑앵무가 10 마리 가량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과학으로서는 그의 주장을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 사랑앵무 기르기[편집] 앵무새의 품종은 수백 종이 있는데, 그중 사랑앵무는 깃털이 화려하고 다양하며 사람의 말을 흉내낼 줄 알아 사람들에게 애완동물로서 인기가 있다. 잉꼬 기르기 준비[편집] 새장[편집] 넓은 방에서 기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새장으로 기르는 경우라면 되도록 커다란 것을 준비한다. 적어도 양 날개를 펼쳐서 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는 되어야 한다. 새장은 실내의 안정된 곳에 설치하고 모이 주는 기구와 새장 바닥을 까는 깔개, 새장 덮개 등이 필요하다. 새장망이 가로로 엮어져 있으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운동을 할 수 있다. 지름 1cm 이상의 가지를 구해 홰(횃대)를 만들어 주면 편히 쉴 수 있어 좋다. 종이와 톱밥을 구입하여 새장 바닥에 깔아 주거나 새용 모래깔개나 모래를 깔아 주어도 괜찮다. 목욕[편집] 잉꼬는 놀기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장난감을 넣어 주고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몸무게를 측정할 저울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새장이 크고 넓다면 여러 마리를 함께 키울 수 있다. 잉꼬는 목욕하기를 좋아하므로 물 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덮개가 있는 욕조와 플라스틱 통 안에서 물을 뿌릴 수 있는 분무기도 준비해 둔다. 그리고 혹시나 있을 탈출에 대비하여 창문과 벽난로를 막을 수 있는 촘촘한 그물과 벽에 홰를 고정시킬 수 있는 고무빨판을 구한다. 사랑앵무새는 건조한 지역에 살던 새로서 목욕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앵무를 억지로 목욕을 시켜서 귀에 물이 들어가게 하면 머리가 기우는 사경현상이 일어 날 수 있다. 잉꼬 돌보기[편집] 잉꼬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므로 일주일에 한 번씩 먹이통과 홰 등을 떼어낸 후 철망에 부착된 이물질을 제거하고 뜨거운 비눗물로 잘 닦아 준다. 그리고 휴지로 잘 닦은 후 소독약제를 뿌리고 깔개를 넣기 전에 말린다. 먹이통에 남아 있는 씨앗은 버리고 깨끗이 닦아 신선한 먹이를 담아 준다. 마실 물, 푸성귀 등도 교환해 주며 굴껍질(석분)은 일주일에 한두 번 새것을 넣어 준다. 가루로 된 굴껍질은 좋아하지 않으므로 주의한다. 잉꼬는 일 년에 한 번씩 깃털을 가는데 이때 손상되거나 부러진 깃털은 새 깃털로 교환된다. 털갈이를 할 때는 병든 것처럼 보이나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 잉꼬를 기르다 보면 부리로 자신의 몸을 다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몸을 다듬는 동안 꼬리 밑에 있는 선에서 나오는 기름을 깃털에 얇게 바름으로써 방수 효과를 얻는다. 잉꼬 모이 주기[편집] 모이의 배합은 피 6, 좁쌀 3, 수수 1이 보통이다. 여름에는 피 6, 좁쌀 4와 같이 담백한 배합으로 해서 준다. 푸성귀 종류는 무엇이든 잘 먹는데 특히 줄기가 딱딱한 것을 좋아한다. 신선한 것으로 조금씩, 4-5일에 한 번 정도 주면 된다. 잉꼬는 이가 없기 때문에 굴껍질과 같은 석분을 섭취하여야 위에서 거친 씨앗을 소화할 수가 있다. 또 갑오징어뼈를 철사로 고정시켜 매달아 주면 갉아 먹는데 이것은 칼슘 보충을 위해 필요하다. 잉꼬 길들이기[편집] 손타기잉꼬(손노리개) 길들이기[편집] 잉꼬를 길들이려면 야생보다는 사람을 잘 따르는 손노리개가 더 편하며, 손노리개는 날개깃을 자르면 훈련시키기가 더 쉽다. 이것을 윙컷 또는 윙트리밍이라 하는데, 날개가 아니라 날개깃을 자르는 것이라 잉꼬한테는 아픔을 주지 않는다. 또 6개월 정도 자라면 다시 날개깃이 자라난다. 먼저 잉꼬에게 시킬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훈련은 손가락에 앉도록 하는 것이다. 이 훈련은 반복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먼저 먹이를 자주 주면서 잉꼬와 친해진다. 잉꼬는 점차 주인의 손이 가까이 오는 것에 겁을 내지 않는다. 이때쯤 먹이가 달린 홰를 가까이 가져가 홰에 걸터앉아 먹이를 먹도록 한다. 다음으로 잉꼬가 홰 대신 손가락에 앉는 훈련으로 들어간다. 천천히 집게손가락을 새의 배로 가까이 접근시킨다. 올라오지 않을 경우에는 살살 문질러준다. 잉꼬는 곧 주인의 손가락에 앉는 것을 즐거워하게 된다. 주인의 손가락에 즐겁게 앉아 놀게 되면 이제는 그 상태 그대로 새장 밖으로 옮길 수도 있다. 잉꼬가 적응이 되면 어깨 위에 올려 놓아 본다. 잘 길들여진 잉꼬는 사람 어깨에 앉아 머리카락을 물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잉꼬와 친밀해지는 방법 중 하나는 볼을 긁어주는 것이다. 볼을 긁어주는 것은 잉꼬 사이에서는 애정표현으로, 손가락을 볼 옆에 살짝 갖다대면 잉꼬가 털을 부풀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잉꼬가 사람의 손가락을 무서워 하는 것으로 이것은 또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 이 상태에서 살며시 긁어주면 금세 눈을 감으며 좋아한다. 또한 손에서 직접 먹이를 주는 것도 잉꼬를 길들이는 데에 좋은 방법이다. 잉꼬가 사람의 손가락을 무서워 할 경우에는 새가 무서워하지 않는 거리에서 천천히 다가간다. 오랫동안 반복하면 잉꼬는 손가락이 무섭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반대로 잉꼬를 손으로 잡거나 심한 장난을 칠 경우에는 스트레스를 받아 손가락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좋다. 말하는잉꼬 길들이기[편집] 잉꼬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은 힘든 기술이어서 끈기가 따라야 한다. 먼저 손가락 위에 올려 놓고 입을 가까이 대어 쉬운 말부터 가르친다. 말은 수컷이 좀 더 잘 하는 편인데, 처음에는 발음하기 쉬운 낱말부터 시작한다. 낱말 하나를 다 외울 때까지 계속해서 그 낱말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완전하게 외운 뒤에 다음 낱말을 가르치도록 하고, 점점 긴 낱말도 가르친다. 이따금 전에 외운 낱말을 외우게 하여 복습을 시킨다. 되도록이면 계속 같은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좋다. 특히 음색이나 악센트도 그대로 외우기 때문에 듣기 좋은 낱말을 가르치도록 한다. 잉꼬의 알[편집] 잉꼬의 알은 연한 핑크색이다. 2,3일에 걸쳐 한마리씩 낳는다. 잉꼬의 새끼 낳기[편집] 잉꼬의 암컷은 하루나 이틀에 하나씩 4-6개의 알을 지속적으로 낳는다. 암컷은 이 알을 17-18일 동안 따뜻하게 품어 부화시킨다.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데 사람이 이를 보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경우에는 알을 포기해 버린다. 새끼는 부리 끝의 작은 끌처럼 생긴 난치를 이용하여 껍질을 깨고 나온다. 갓 나온 새끼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 위에 머리를 얹고 쉰다. 이후 새끼는 어미가 소화된 먹이를 입으로 나누어 주는 것을 받아먹고 빠른 속도로 자란다. 부화된 새끼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서로 얽혀서 붙어 있다. 17일 정도 지나면 새끼는 성숙한 새의 깃털을 갖기 시작하고 생후 21일이 되면 복실복실한 모습으로 단장을 한다. 생후 6주가 되면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집에 들어갈 채비를 하는데 이때 스스로 씨앗을 쪼아먹을 수 있으며 아직 완전한 비행은 할 수 없으나 홰에 불안한 자세로 설 수도 있다. 4개월이 되면 처음으로 깃털을 갈게 되는데 그 깃털은 끝이 뾰족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깃털이 생겨난다. 이때 잉꼬는 구부러진 깃털을 바로 펴기 위해 몸을 잘 다듬는다. 털갈이가 끝나면 완전히 성숙해지고 5개월 정도 지나면 스스로 알을 품을 줄도 알고 홰에서 불안해하며 서 있는 모습도 보여 준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사랑앵무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집에서 키우는 사랑앵무 말하는 새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LCCN: sh85017599 GND: 4065320-1 BNF: cb11946979w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랑앵무&oldid=22752829" 분류: 목도리앵무과애완조1805년 기재된 동물오스트레일리아의 새숨은 분류: 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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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부쿠로 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케부쿠로 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케부쿠로 역사 동쪽 야마노테 선 6번 승강장 개괄 관할 기관 동일본 여객철도 소재지 일본 도쿄도 도시마 구 미나미이케부쿠로 1초메 28-2 좌표 북위 35° 43′ 44″ 동경 139° 42′ 37″ / 북위 35.728925° 동경 139.71038°  / 35.728925; 139.71038 개업일 1902년 5월 10일 승강장 구조 4면 8선 노선 ■ 야마노테 선 시나가와 기점 15.4 km ← 메지로 (1.2 km) 오쓰카 →(1.8 km) ■ 아카바네 선 (운행 계통상 사이쿄 선) 이케부쿠로 기점 0.0 km 이타바시 →(1.8 km) 이케부쿠로 세이부 이케부쿠로 선 승강장 개괄 관할 기관 세이부 철도 소재지 일본 도쿄도 도시마 구 미나미이케부쿠로 1초메 28-1 좌표 북위 35° 43′ 44″ 동경 139° 42′ 42″ / 북위 35.728838° 동경 139.711719°  / 35.728838; 139.711719 개업일 1915년 4월 15일 역 번호 SI 01 승강장 구조 4면 4선 노선 이케부쿠로 선 이케부쿠로 기점 0.0 km 시나마치 SI02 →(1.9 km) 이케부쿠로 도부 본선 승강장 개괄 관할 기관 도부 철도 소재지 일본 도쿄도 도시마 구 니시이케부쿠로 1초메 1-21 좌표 북위 35° 43′ 49″ 동경 139° 42′ 38″ / 북위 35.730332° 동경 139.710447°  / 35.730332; 139.710447 개업일 1914년 5월 1일 역 번호 ■ TJ-01 승강장 구조 3면 3선 노선 도조 본선 이케부쿠로 기점 0.0 km 기타이케부쿠로 TJ-02 →(1.2 km) 이케부쿠로 마루노우치 선 승강장 개괄 관할 기관 도쿄 메트로 소재지 일본 도쿄도 도시마 구 니시이케부쿠로 3초메 28-14 (후쿠토신 선) 미나미이케부쿠로 3초메 28-1 (마루노우치 선) 니시이케부쿠로 1초메 12-1 (유라쿠초 선) 좌표 북위 35° 43′ 49″ 동경 139° 42′ 41″ / 북위 35.730262° 동경 139.711365°  / 35.730262; 139.711365 (마루노우치 선) 북위 35° 43′ 46″ 동경 139° 42′ 38″ / 북위 35.729352° 동경 139.710512°  / 35.729352; 139.710512 (유라쿠초 선, 후쿠토신 선) 개업일 1954년 1월 20일 역 번호 M 25 (마루노우치 선) Y 09 (유라쿠초 선) F 09 (후쿠토신 선) 승강장 구조 3면 6선 노선 마루노우치 선 오기쿠보 기점 24.2 km ← M 24 신오쓰카 (1.8 km) 유라쿠초 선 와코시 기점 11.5 km ← Y 08 가나메초 (1.2 km) 히가시이케부쿠로 Y 10 →(0.9 km) 후쿠토신 선 와코시 기점 11.3 km ← F 08 가나메초 (0.9 km) 조시가야 F 10 →(1.8 km) 이케부쿠로 역(일본어: 池袋駅, いけぶくろえき)은 일본 도쿄도 도시마 구에 있는 철도역이다. 목차 1 운행 노선 2 타는 곳 2.1 동일본 여객철도 2.2 세이부 철도 2.3 도부 철도 2.4 도쿄 지하철 2.4.1 도쿄 지하철 마루노우치 선 2.4.2 도쿄 지하철 유라쿠초 선 2.4.3 후쿠토신 선 2.4.3.1 신선 이케부쿠로 역 3 출구 정보 4 역사 5 사진 6 인접 역 운행 노선[편집] JR 동일본 야마노테 선 사이쿄 선 쇼난 신주쿠 라인 세이부 철도 이케부쿠로 선 도부 철도 도조 본선 도쿄 지하철 주식회사 마루노우치 선 유라쿠초 선 후쿠토신 선 타는 곳[편집] 동일본 여객철도[편집] ↑ 신주쿠, 메지로 | 12 | | 34 | | 5 6 | | 7 8 | 이타바시, 아카바네, 오쓰카 ↓ 1 ■ 사이쿄 선 신주쿠·시부야·오사키·(린카이 선 직결)신키바 방면 2 ■ 쇼난 신주쿠 라인(도카이도 선 직통) 신주쿠·시부야·오사키·요코하마·오후나·오다와라 방면 ■ 쇼난 신주쿠 라인(요코스카 선 직통) 신주쿠·시부야·오사키·요코하마·오후나·즈시 방면 ■ 특급「나리타 익스프레스」 신주쿠·도쿄·나리타 공항 방면 ■ 특급「슈퍼 뷰 오도리코」 신주쿠·요코하마·오후나·오다와라·아타미·이즈큐시모다 방면 3 ■ 우츠노미야 선 아카바네·오미야·오야마·우츠노미야 방면 ■ 다카사키 선 아카바네·오미야·구마가야·다카사키 방면 ■ 특급 스페셜 닛코·기누가와·스페시아기메가와(도부 선직결) 도부닛코·기누가와 온천 방면 ■ 사이쿄 선 아카바네·무사시우라와·오미야·가와고에 방면(이른 아침·심야시간대에 출발) 4 ■ 사이쿄 선 아카바네·무사시우라와·오미야·가와고에 방면 5 ■ 야마노테 선 내선 순환 다카다노바바·신주쿠·시부야·오사키·시나가와 방면(당역 출발) 6 ■ 야마노테 선 내선 순환 다카다노바바·신주쿠·시부야·오사키·시나가와 방면 7 ■ 야마노테 선 외선 순환 다바타·우에노·도쿄 방면 8 ■ 야마노테 선 외선 순환 다바타·우에노·도쿄 방면(당역 출발) 세이부 철도[편집] | 7 6 | 5 4 | 3 2 | 1 시나마치 ↓ 네리마·샤쿠지이공원·히바리가오카·도코로자와·고테사시·이루마 시·한노·아가노·세이부 치치부·치치부 본선 미츠미네구치·나가토로 방면 1 하차전용 2 보통 3 주로보통·준급·통근준급·쾌속 4 하차전용 5 주로 급행·쾌속급행 6 하차전용 7 주로 보통·준급·급행·임시열차(출퇴근·야간)※특급열차 통과 선 특급 특급 타는 곳(7번 승강장과 선로가 이어져 있음. 도착하거나 출발할 때 7번 승강장을 통과). 도부 철도[편집] | 1 2 | 3 4 | 5 기타이케부쿠로 ↓ 나리마스·시키·가와고에·신린코엔·오가와마치 방면 1 ■ 도조 선 준급타는 곳 ※평일8:51출발은급행으로도 발차 2 ■ 도조 선 급행·특급타는 곳 ※평일8시대까지는하차전용 평일23:36출발、주말·휴일23:30출발부터는준급도 발차 3 ■ 도조 선 하차전용 ※평일8시대、주말·휴일6시대까지는보통도 발차 평일24:44발 준급、주말·휴일24:35발보통도 발차 4 ■ 도조 선 보통 타는 곳 5 ■ 도조 선 하차 전용 도쿄 지하철[편집] 도쿄 지하철 마루노우치 선[편집] ↑ 신오쓰카 | 2 1 | 1·2 마루노우치 선 긴자·신주쿠·오기쿠보 방면 도쿄 지하철 유라쿠초 선[편집] ↑ 가나메초 | 4 3 | 히가시이케부쿠로 ↓ 3 유라쿠초 선 이다바시·나가타초·신키바 방면 4 유라쿠초 선 고타케무카이하라·와코시·신린코엔·한노 방면 후쿠토신 선[편집] ↑ 가나메초 | 6 5 | 조시가야 ↓ 5 후쿠토신 선 시부야 방면 6 후쿠토신 선 고타케무카이하라·와코시·고테사시 방면 신선 이케부쿠로 역[편집] 후쿠토신 선이 개통되기 전인 1994년 12월 7일에 고타케무카이하라에서 이 역까지의 구간이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의 노선 이름은 도쿄 지하철 유라쿠초 신선(일본어: 東京地下鉄有楽町線新線, とうきょうちかてつゆうらくちょうせんしんせん)이었으며, 역 번호는 유라쿠초 선과 동일한 Y 09이었다. 정식 이름은 이케부쿠로 역이나, 유라쿠초 선(본선)의 이케부쿠로 역과 구별하기 위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일문표기로는 新線池袋駅, (新線)池袋駅, 또는 池袋(新線)駅로 하였으며, 영문표기는 'NEW LINE IKEBUKURO', 또는 'IKEBUKURO (NEW LINE)'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2008년 6월 13일에 후쿠토신 선이 개통함으로써 이 노선의 이케부쿠로 역으로 운영되고 있다. 신선 이케부쿠로 역 당시의 타는 곳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1・2 유라쿠초 신선 고타케무카이하라・와코 시・신린코엔・한노 방면 출구 정보[편집] 동쪽 출입구(東口) 도시마 구청 데이코쿠헤이세이 대학 세이부 백화점 본점 슈쿠토쿠 대학 빜 카메라 야마다 전기 LABI1 일본 종본사 선샤인시티 애니메이트 본점 서쪽 출입구(西口) 도부 백화점 본점(이케부쿠로 동부) 릿쿄 대학 도쿄 교통 단기 대학 남쪽 출입구(南口) 준쿠도 서점 본점 북쪽 출입구(北口) 도부 백화점 본점(본관) 역사[편집] 1902년 5월 10일 : 일본 철도 시나가와 선 이케부쿠로 신호소로 개업. 1903년 4월 1일 : 보통역으로 승격. 도시마 선(당역 - 다바타) 개통. 1906년 10월 23일 : 화물 영업 개시. 1906년 11월 1일 국유화. 1914년 5월 1일 : 도부 철도 소속역 개업. 1915년 4월 15일 : 무사시노 철도(현 세이부 철도) 소속역 개업. 1945년 4월 13일 : 태평양 전쟁중 공습으로 역사 및 차량 전소(전동차 151량, 객차 13량, 화차 12량, 기관차 2량). 1954년 1월 20일 : 영단 지하철 마루노우치 선 개통. 1963년 : 사설 철도 사상 최초로 10량 편성 열차 운행 개시.(세이부 철도) 1974년 10월 30일 : 영단 지하철 유라쿠초 선 개통. 1980년 5월 20일 : 일본 국유 철도 화물영업 중단. 세이부 철도 역사 증축. 1983년 : 일본 국유 철도 타는 곳 증설. 1985년 9월 30일 : 사이쿄 선 운행 개시. 1987년 4월 1일 : 일본 국유 철도 민영화(동일본 여객철도 출범) 1988년 3월 13일 : 도호쿠 본선, 다카사키 선 일부 열차 운행 실시. 동일본 여객 철도 타는 곳 증설. 1991년 3월 19일 : 나리타 익스프레스 운행 개시. 1994년 : 세이부 철도 특급 승강장 시공. 1994년 12월 7일 : 영단 지하철 유라쿠초 신선 개통(신선 이케부쿠로 역) 2001년 12월 1일 : 쇼난 신주쿠 라인 운행 개시. 2004년 4월 1일 : 영단 지하철 민영화(도쿄 지하철) 2004년 6월 : 사이쿄 선, 쇼난 신주쿠 라인 타는 곳 변경. B1, B4번 승강장이 사이쿄 선 승강장, B2, B3번 승강장이 쇼난 신주쿠 라인 승강장. 2005년 12월 1일 : 세이부철도 1,2번 타는 곳 증축. 2006년 : 마루노우치 선 타는 곳에 스크린도어 설치. 2006년 3월 18일 : 도부 철도 직결 특급 닛코 기누가와 호 운행 개시.(도부 도조 본선이 아닌 동일본 여객철도에만 해당.) 2007년 3월 18일 : 세이부 철도 PASMO 사용 개시. 2008년 4월 1일 : 신선이케부쿠로 역에 스크린도어 설치. 2008년 6월 14일 : 후쿠토신 선 개통으로 신선이케부쿠로 역에서 이케부쿠로 역으로 개칭. 2011년 1월 22일 : 유라쿠초 선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가동 개시. 2011년 2월 25일 : 유라쿠초 선 승강장에서의 발차 멜로디 사용 개시. 2011년 3월 12일 : 역을 경유하는 2구간 정기권이 출시. 2013년 3월 2일 : 야마노테 선 B6, B7번 승강장에 스크린도어 가동 개시. B5, B8번 승강장은 열차 운행 횟수가 적기 때문에 미설치. 사진[편집] 신선 이케부쿠로 역이었을 당시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기 전에 찍은 사진. 2005년 12월 18일 촬영. 후쿠토신 선의 이케부쿠로 역 모습. 2008년 6월 18일 촬영. 유라쿠초 선 승강장 모습 후쿠토신 선 승강장 모습 인접 역[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이케부쿠로 역 동일본 여객철도 야마노테 선 JY 14 메지로내선 순환 야마노테 선 JY 12 오쓰카외선 순환 동일본 여객철도 아카바네 선 · 야마노테 선 신주쿠오사키 방면 사이쿄 선 이타바시가와고에 방면 동일본 여객철도 도호쿠 본선 · 야마노테 선 신주쿠오다와라 · 즈시 방면 쇼난 신주쿠 라인 아카바네다카사키 · 우쓰노미야 방면 세이부 철도 이케부쿠로 선 시·종착역 이케부쿠로 선쾌속급행 · 급행 · 통근급행 샤쿠지이 공원한노 · 세이부 지치부 방면 시·종착역 이케부쿠로 선쾌속 · 준급 · 통근준급 네리마한노 방면 시·종착역 이케부쿠로 선보통 시나마치한노 방면 도부 철도 도조 본선 시·종착역 도조 본선TJ 라이너 후지미노오가와마치 방면 시·종착역 도조 본선쾌속급행 와코시오가와마치 방면 시·종착역 도조 본선급행 · 통근급행 · 준급 나리마스오가와마치 방면 시·종착역 도조 본선보통 기타이케부쿠로오가와마치 방면 도쿄 메트로 4호선 M24 신오쓰카오기쿠보 방면 마루노우치 선 시·종착역 도쿄 메트로 8호선 Y06 고타케무카이하라와코시 방면 유라쿠초 선준급 Y10 히가시이케부쿠로신키바 방면 Y08 가나메초와코시 방면 유라쿠초 선보통 Y10 히가시이케부쿠로신키바 방면 도쿄 메트로 13호선 F06 고타케무카이하라와코시 방면 후쿠토신 선급행 · 통근급행 F13 신주쿠 3초메시부야 방면 F08 가나메초와코시 방면 후쿠토신 선보통 F10 조시가야시부야 방면 운행 노선 및 역 목록 vdeh 야마노테선시나가와 - 오사키 - 고탄다 - 메구로 - 에비스 - 시부야 - 하라주쿠 - 요요기 - 신주쿠 - 신오쿠보 - 다카다노바바 - 메지로 - 이케부쿠로 - 오쓰카 - 스가모 - 고마고메 - 다바타 - 니시닛포리 - 닛포리 - 우구이스다니 - 우에노 - 오카치마치 - 아키하바라 - 간다 - 도쿄 - 유라쿠초 - 신바시 - 하마마쓰초 - 다마치 - 시나가와 vdeh 사이쿄 선·가와고에 선(신키바 방면←) 오사키 - 에비스 - 시부야 - 신주쿠 - 이케부쿠로 - 이타바시 - 주조 - 아카바네 - 기타아카바네 - 우키마후나도 - 도다코엔 - 도다 - 기타토다 - 무사시우라와 - 나카우라와 - 미나미요노 - 요노혼마치 - 기타요노 - 오미야 - 닛신 - 니시오미야 - 사시오기 - 미나미후루야 - 가와고에 (→고마가와 방면) vdeh 쇼난 신주쿠 라인다카사키 선도카이도 선마에바시 - 신마에바시 - 이노 - 다카사키톤야마치 - 다카사키 - 구라가노 - 신마치 - 진보하라 - 혼조 - 오카베 - 후카야 - 가고하라 - 구마가야 - 교다 - 후키아게 - 기타코노스 - 고노스 - 기타모토 - 오케가와 - 기타아게오 - 아게오 - 미야하라 - 오미야 - 우라와 - 아카바네 - 이케부쿠로 - 신주쿠 - 시부야 - 에비스 - 오사키 - 무사시코스기 - 요코하마 - 도쓰카 - 오후나 - 후지사와 - 쓰지도 - 지가사키 - 히라쓰카 - 오이소 - 니노미야 - 고즈 - 가모노미야 - 오다와라우쓰노미야 선요코스카 선우쓰노미야 - 스즈메노미야 - 이시바시 - 지치이다이 - 고가네이 - 오야마 - 마마다 - 노기 - 고가 - 구리하시 - 히가시와시노미야 - 구키 - 신시라오카 - 시라오카 - 하스다 - 히가시오미야 - 도로 - 오미야 - 우라와 - 아카바네 - 이케부쿠로 - 신주쿠 - 시부야 - 에비스 - 오사키 - 니시오이 - 무사시코스기 - 신카와사키 - 요코하마 - 호도가야 - 히가시토쓰카 - 도쓰카 - 오후나 - 기타카마쿠라 - 가마쿠라 - 즈시 vdeh 세이부 철도 이케부쿠로선 · 지치부선 · 도시마선이케부쿠로 - 시나마치 - 히가시나가사키 - 에코다 - 사쿠라다이 - (고타케무카이하라,신키바,시부야 방면←) 네리마 (→도시마엔 방면) - 나카무라바시 - 후지미다이 - 네리마타카노다이 - 샤쿠지이코엔 - 오이즈미가쿠엔 - 호야 - 히바리가오카 - 히가시쿠루메 - 기요세 - 아키쓰 - 도코로자와 - 니시토코로자와 (→세이부 구장 방면) - 고테사시 - 사야마가오카 - 무사시후지사와 - 이나리야마코엔 - 이루마시 - 부시 - 모토카지 - 한노 - 히가시한노 - (기타한노 신호장) - (무사시가오카 신호장) - 고마 - 무사시요코테 - 히가시아가노 - 아가노 - 니시아가노 - 쇼마루 - (쇼마루 터널 신호장) - 아시가쿠보 - 요코제 (→나가토로 방면) - 세이부 지치부 (→가게모리·미쓰미네구치 방면) vdeh도부 철도 도조 본선이케부쿠로 - 기타이케부쿠로 - 시모이타바시 - 오야마 - 나카이타바시 - 도키와다이 - 가미이타바시 - 도부 네리마 - 시모아카쓰카 - 나리마스 - (신키바·시부야 방면←) 와코시 - 아사카 - 아사카다이 - 시키 - 야나세가와 - 미즈호다이 - 쓰루세 - 후지미노 - 가미후쿠오카 - 신가시 - 가와고에 - 가와고에시 - 가스미가세키 - 쓰루가시마 - 와카바 - 사카도 - 기타사카도 - 다카사카 - 히가시마쓰야마 - 신린코엔 - 쓰키노와 - 무사시란잔 - (란잔 신호장) - 오가와마치 - 도부 다케자와 - 오부스마 - 하치가타 - 다마요도 - 요리이 vdeh 도쿄 메트로 마루노우치 선 본선오기쿠보 - 미나미아사가야 - 신코엔지 - 히가시코엔지 - 신나카노 - 나카노사카우에 - 니시신주쿠 - 신주쿠 - 신주쿠 3초메 - 신주쿠교엔마에 - 요쓰야 3초메 - 요쓰야 - 아카사카미쓰케 - 곳카이기지도마에 - 가스미가세키 - 긴자 - 도쿄 - 오테마치 - 아와지초 - 오차노미즈 - 혼고 3초메 - 고라쿠엔 - 묘가다니 - 신오쓰카 - 이케부쿠로호난초 지선호난초 - 나카노후지미초 - 나카노신바시 - 나카노사카우에 vdeh 도쿄 메트로 유라쿠초 선 (시키·가와고에 방면←) 와코시 - 지카테쓰나리마스 - 지카테쓰아카쓰카 - 헤이와다이 - 히카와다이 - (네리마 방면←)고타케무카이하라 - 센카와 - 가나메초 - 이케부쿠로 - 히가시이케부쿠로 - 고코쿠지 - 에도가와바시 - 이다바시 - 이치가야 - 고지마치 - 나가타초 - 사쿠라다몬 - 유라쿠초 - 긴자 1초메 - 신토미초 - 쓰키시마 - 도요스 - 다쓰미 - 신키바 vdeh 도쿄 메트로 후쿠토신 선 (시키·가와고에 방면 ←) 와코시 - 지카테쓰나리마스 - 지카테쓰아카쓰카 - 헤이와다이 - 히카와다이 - (네리마 방면 ←)고타케무카이하라 - 센카와 - 가나메초 - 이케부쿠로 - 조시가야 - 니시와세다 - 히가시신주쿠 - 신주쿠 3초메 - 기타산도 - 메이지진구마에 - 시부야(→ 요코하마 방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케부쿠로_역&oldid=22066271" 분류: 도쿄 메트로 마루노우치 선도쿄 지하철역동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도부 철도의 철도역이케부쿠로도시마구의 철도역야마노테 선도쿄 메트로 유라쿠초 선1903년 개업한 철도역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세이부 철도의 철도역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Français贛語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မြန်မာဘာသာNederlandsРусскийไทย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8월 22일 (수) 12: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닛산 바네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닛산 바네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닛산 바네트대우 바네트 (대한민국) 차종 트럭, 밴 제조사 닛산 자동차대우자동차 생산년도 1978년~2010년1986년~1992년 (대한민국) 조립 일본 닛산 자동차 (1978년~2010년) 대한민국 대우자동차(1986년~1992년) 차체형식 트럭원 박스 카 구동방식 후륜구동 차대 모노코크 연료 디젤 설계자 닛산 자동차 C22형 바네트 승합차. 대우 바네트 승합차의 원형이기도 하다. C22형 바네트 트럭. 대우 바네트 트럭의 원형이기도 하다. 대우 바네트의 경우 1989년에 전조등을 승합차 모델과 같은 것으로 바꾸었다. 닛산 바네트(Nissan Vanette, 日産・バネット)는 1978년부터 2010년까지 일본 닛산 자동차에서 * 생산된 트럭과 9인승 미니밴 중 하나로서, 또한 닛산-써니 바네트(Nissan Sunny-Vanette) 혹은 닛산 밴(Nissan Van)으로도 판매되었다. 나중에는 OEM 형식으로 생산된 마쓰다 봉고(혹은 E-시리즈)를 바네트로 판매하였다. 닛산 바네트의 후속 차종은 2009년에 발매된 NV200이다. 후속 차종이 발매되기 이전 경쟁 차종은 마쓰다 봉고 브로니(Mazda Bongo Brawny), 미쓰비시 델리카(Mitsubishi Delica), 스즈키 솔리오(Suzuki Solio) 등이 있었다. 1세대형 바네트는 C120형으로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생산되었고, 2세대형 바네트는 C22형으로 1985년부터 1994년까지 생산되었다. 3세대형은 S20형으로,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생산되었고, 4세대형은 S21형으로 1999년부터 2010년까지 생산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우자동차가 2세대형인 C22형에서 운전석 위치만 바꾸고 들여와서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끝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대우 바네트로 생산하였다. 다만, 차명 '바네트'는 1990년에 '슈퍼 X'라는 새로운 차명과 병행 사용하다가 1991년에는 차명이 '바네트'라는 네임이 사라지고 '슈퍼 X'만 남았다. 또, 일본 바네트와는 달리 대우 바네트에는 12인승 코치형 모델도 존재하였다. 일본 모델과의 차이점은 일본에서는 닛산 4기통 가솔린 엔진 및 LD20 디젤 엔진을 사용하였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닛산 LD20 엔진 대신 대우중공업에서 이스즈의 C-223 엔진[1]을 면허 생산한 DC23 엔진을 사용하였다. 이 엔진은 1세대 코란도에서 1991년까지 사용한 엔진인데, 현대자동차에서 면허 생산한 미쓰비시 D4B 계열 엔진이나 기아자동차의 R2 계열 엔진에 비해 연비가 좋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바네트의 경우 트럭 모델은 포터, 봉고와 달리 슈퍼캡 모델과 더블캡 모델이 없었고, 정비 효율이 떨어져서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코치 & 밴 모델 역시 그레이스, 베스타, 토픽에 비해 연비가 좋지 못하여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변속기도 달랐는데, 타사 동급 모델에서는 일반적인 플로어식 기어(말뚝형 기어)를 채용한 것과 달리 유독 바네트만 칼럼식 기어를 채용[2]하였다. 결국 트럭 차종과 코치 / 밴 차종은 1992년에 후속 차종 없이 단종되어, 지금까지 구 대우자동차 및 한국 GM(쉐보레)의 라인업에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바네트 코치 / 밴 모델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트럭형 모델도 한국에서 2대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목차 1 라인업 1.1 일본 1.2 대한민국 2 제원 2.1 일본 2.2 대한민국 2.2.1 승합형 3 1세대 4 2세대 5 3세대 6 4세대 7 경쟁 차종 8 각주 라인업[편집] 일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대한민국[편집] 덤프 트럭 (1986년 12월) 믹서 트럭 (1986년 12월) 2.5톤 고상 카고 트럭 (1986년 12월) 2.5톤 고상 더블켑 카고 트럭 (1986년 12월) 2톤 저상 카고트럭 (1986년 12월) 1.4톤 고상 카고 트럭 (1986년 12월) 1.4톤 고상 더블켑 카고 트럭 (1986년 12월) 1.4톤 저상 카고 트럭 (1986년 12월) 1톤 싱글캡 슈퍼(단축) 1톤 싱글캡 슈퍼X(장축) 3인승 밴(단축) 3인승 밴(장축 코치) 6인승 밴(장축 코치) 9인승 코치 12인승 코치 15인승 코치 제원[편집] 일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대한민국[편집] 승합형[편집] 전장(mm) : 4,050 전폭(mm) : 1,635 전고(mm) : 1,980 축거(mm) : 2,075 윤거(전, mm) : 윤거(후, mm) : 승차정원 : 3명(밴)/6명(밴)/9명(코치)/12명(코치) 변속기 : 5단 수동변속기 구동형식 : 후륜구동 구분 2.2ℓ 엔진 형식 DC23 연료 디젤 배기량(cc) 2,200 최고출력(ps/rpm) 최대토크(kg*m/rpm) 연비(km/l) 1세대[편집] 1세대 승합 모델(전면) 2세대[편집] 승합 모델 중기형(전면) 승합 모델 중기형(후면) 승합 모델 후기형(전면) 승합 모델 후기형(후면)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바네트 승합 모델은 2세대 중기형과 비슷하다. 3세대[편집] 4세대[편집] 경쟁 차종[편집] 현대자동차 - 포터, 리베로, 그레이스, 스타렉스, 쏠라티 기아자동차 - 봉고, 프레지오, 베스타 아시아자동차공업 - 토픽 쌍용자동차 - 이스타나 각주[편집] ↑ 이스즈 트루퍼에 사용되었던 4기통 2,200cc 디젤 엔진이다. ↑ 1990년에 연식 변경과 함께 일반적인 플로어식 기어로 변경되었다. vdeh닛산 자동차승용차 블루버드 리프 세피로 마치 티아나 알티마 피가로 맥시마 큐브 센트라 오티 노트 스테이지아 스카이라인 푸가 시마 Be-1 프레지던트 세드릭 글로리아 로렐 베르사 티다 알메라 프리메라 펄사 써니 스탄자 실피 라티오 모코 SUV 무라노 로그 패스파인더 알마다 엑스테라 사파리 쥬크 패트롤 X-트레일 X-테라 캐시카이 테라노 아마다 스카이라인 크로스오버 스포츠카 240SX 200SX 180SX GT-R MID4 스카이라인 페어레이디 Z 실비아 픽업 타이탄 프론티어 써니 MPV/밴 퀘스트 라페스타 세레나 엘그란드 캐러밴 NV200 NV3500 리비나 바네트 클리버 프레리 윙로드 룩스 트럭 클리퍼 바네트 아틀라스 버스 시빌리언 기타 요코하마 F. 마리노스 vdeh신진자동차(1955~1972)/GM코리아(1972~1976)/새한자동차(1976~1983)/대우자동차(1983~2002)/대우중공업(대우국민차)승용차 마티즈 레간자 프린스 제미니 시보레 1700 레코드 카미나 캬라반 누비라 에스페로 레조 르망 아카디아 브로엄 로얄 매그너스 넥시아 씨에로 티코 맵시 맵시-나 슈퍼 살롱 칼로스 라노스 임페리얼 트럭/승합차 바네트 다마스 라보 엘프 차세대 트럭 새마을 트럭 맥스 대형트럭 버스 BM BR BS BC BV BH BF BU BL BD vdeh한국GM의 흐름, 1955년~ Type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경차 퍼블리카/퍼블리카 왜건 티코 마티즈/마티즈 Ⅱ 올 뉴 마티즈/마티즈 클래식 마티즈 크리에이티브/스파크/스파크 EV 더 넥스트 스파크/더 뉴 스파크 소형차 새나라/신성호 시보레 1700/카미나/캬라반 제미니/맵시/맵시-나 르망/씨에로/넥시아 라노스/라노스 Ⅱ 칼로스/젠트라 아베오 준중형차 로얄 디젤/로얄 XQ/로얄 듀크 에스페로 누비라/누비라 Ⅱ 라세티 라세티 프리미어/크루즈/어메이징 뉴 크루즈 올 뉴 크루즈 볼트 중형차 코로나 레코드/레코드 로얄 로얄 프린스/프린스/뉴 프린스 레간자 매그너스(이글&클래식)/토스카 말리부 올 뉴 말리부/더 뉴 말리부 준대형차 로얄 살롱/로얄 살롱 슈퍼/슈퍼 살롱/브로엄 알페온 임팔라 대형차 크라운 임페리얼 아카디아 체어맨 스테이츠맨 베리타스 스포츠카 G2X 카마로 카마로 콜벳 MPV 레조/뉴 레조 올란도 소형 SUV 시발 트랙스/더 뉴 트랙스 준중형 SUV 코란도 윈스톰 맥스 중형 SUV 뉴 무쏘 윈스톰/캡티바 승합차 에이스 미니버스 바네트 코치 이스타나 픽업트럭 랜드크루저 픽업 새마을 트럭 맥스 경상용차 다마스/라보 소형 트럭 에이스 트럭 바네트 트럭/슈퍼 X 준중형 트럭 시보레 2.5톤 트럭 엘프 엘프 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닛산_바네트&oldid=24534653" 분류: 닛산 자동차의 차종대우자동차의 차종후륜구동승합차화물자동차1970년대 자동차1980년대 자동차1990년대 자동차2000년대 자동차2010년대 자동차1978년 도입된 자동차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Português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6일 (토) 19: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닛산 바네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닛산 바네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닛산 바네트대우 바네트 (대한민국) 차종 트럭, 밴 제조사 닛산 자동차대우자동차 생산년도 1978년~2010년1986년~1992년 (대한민국) 조립 일본 닛산 자동차 (1978년~2010년) 대한민국 대우자동차(1986년~1992년) 차체형식 트럭원 박스 카 구동방식 후륜구동 차대 모노코크 연료 디젤 설계자 닛산 자동차 C22형 바네트 승합차. 대우 바네트 승합차의 원형이기도 하다. C22형 바네트 트럭. 대우 바네트 트럭의 원형이기도 하다. 대우 바네트의 경우 1989년에 전조등을 승합차 모델과 같은 것으로 바꾸었다. 닛산 바네트(Nissan Vanette, 日産・バネット)는 1978년부터 2010년까지 일본 닛산 자동차에서 * 생산된 트럭과 9인승 미니밴 중 하나로서, 또한 닛산-써니 바네트(Nissan Sunny-Vanette) 혹은 닛산 밴(Nissan Van)으로도 판매되었다. 나중에는 OEM 형식으로 생산된 마쓰다 봉고(혹은 E-시리즈)를 바네트로 판매하였다. 닛산 바네트의 후속 차종은 2009년에 발매된 NV200이다. 후속 차종이 발매되기 이전 경쟁 차종은 마쓰다 봉고 브로니(Mazda Bongo Brawny), 미쓰비시 델리카(Mitsubishi Delica), 스즈키 솔리오(Suzuki Solio) 등이 있었다. 1세대형 바네트는 C120형으로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생산되었고, 2세대형 바네트는 C22형으로 1985년부터 1994년까지 생산되었다. 3세대형은 S20형으로,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생산되었고, 4세대형은 S21형으로 1999년부터 2010년까지 생산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우자동차가 2세대형인 C22형에서 운전석 위치만 바꾸고 들여와서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끝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대우 바네트로 생산하였다. 다만, 차명 '바네트'는 1990년에 '슈퍼 X'라는 새로운 차명과 병행 사용하다가 1991년에는 차명이 '바네트'라는 네임이 사라지고 '슈퍼 X'만 남았다. 또, 일본 바네트와는 달리 대우 바네트에는 12인승 코치형 모델도 존재하였다. 일본 모델과의 차이점은 일본에서는 닛산 4기통 가솔린 엔진 및 LD20 디젤 엔진을 사용하였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닛산 LD20 엔진 대신 대우중공업에서 이스즈의 C-223 엔진[1]을 면허 생산한 DC23 엔진을 사용하였다. 이 엔진은 1세대 코란도에서 1991년까지 사용한 엔진인데, 현대자동차에서 면허 생산한 미쓰비시 D4B 계열 엔진이나 기아자동차의 R2 계열 엔진에 비해 연비가 좋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바네트의 경우 트럭 모델은 포터, 봉고와 달리 슈퍼캡 모델과 더블캡 모델이 없었고, 정비 효율이 떨어져서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코치 & 밴 모델 역시 그레이스, 베스타, 토픽에 비해 연비가 좋지 못하여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변속기도 달랐는데, 타사 동급 모델에서는 일반적인 플로어식 기어(말뚝형 기어)를 채용한 것과 달리 유독 바네트만 칼럼식 기어를 채용[2]하였다. 결국 트럭 차종과 코치 / 밴 차종은 1992년에 후속 차종 없이 단종되어, 지금까지 구 대우자동차 및 한국 GM(쉐보레)의 라인업에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바네트 코치 / 밴 모델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트럭형 모델도 한국에서 2대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목차 1 라인업 1.1 일본 1.2 대한민국 2 제원 2.1 일본 2.2 대한민국 2.2.1 승합형 3 1세대 4 2세대 5 3세대 6 4세대 7 경쟁 차종 8 각주 라인업[편집] 일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대한민국[편집] 덤프 트럭 (1986년 12월) 믹서 트럭 (1986년 12월) 2.5톤 고상 카고 트럭 (1986년 12월) 2.5톤 고상 더블켑 카고 트럭 (1986년 12월) 2톤 저상 카고트럭 (1986년 12월) 1.4톤 고상 카고 트럭 (1986년 12월) 1.4톤 고상 더블켑 카고 트럭 (1986년 12월) 1.4톤 저상 카고 트럭 (1986년 12월) 1톤 싱글캡 슈퍼(단축) 1톤 싱글캡 슈퍼X(장축) 3인승 밴(단축) 3인승 밴(장축 코치) 6인승 밴(장축 코치) 9인승 코치 12인승 코치 15인승 코치 제원[편집] 일본[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대한민국[편집] 승합형[편집] 전장(mm) : 4,050 전폭(mm) : 1,635 전고(mm) : 1,980 축거(mm) : 2,075 윤거(전, mm) : 윤거(후, mm) : 승차정원 : 3명(밴)/6명(밴)/9명(코치)/12명(코치) 변속기 : 5단 수동변속기 구동형식 : 후륜구동 구분 2.2ℓ 엔진 형식 DC23 연료 디젤 배기량(cc) 2,200 최고출력(ps/rpm) 최대토크(kg*m/rpm) 연비(km/l) 1세대[편집] 1세대 승합 모델(전면) 2세대[편집] 승합 모델 중기형(전면) 승합 모델 중기형(후면) 승합 모델 후기형(전면) 승합 모델 후기형(후면)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바네트 승합 모델은 2세대 중기형과 비슷하다. 3세대[편집] 4세대[편집] 경쟁 차종[편집] 현대자동차 - 포터, 리베로, 그레이스, 스타렉스, 쏠라티 기아자동차 - 봉고, 프레지오, 베스타 아시아자동차공업 - 토픽 쌍용자동차 - 이스타나 각주[편집] ↑ 이스즈 트루퍼에 사용되었던 4기통 2,200cc 디젤 엔진이다. ↑ 1990년에 연식 변경과 함께 일반적인 플로어식 기어로 변경되었다. vdeh닛산 자동차승용차 블루버드 리프 세피로 마치 티아나 알티마 피가로 맥시마 큐브 센트라 오티 노트 스테이지아 스카이라인 푸가 시마 Be-1 프레지던트 세드릭 글로리아 로렐 베르사 티다 알메라 프리메라 펄사 써니 스탄자 실피 라티오 모코 SUV 무라노 로그 패스파인더 알마다 엑스테라 사파리 쥬크 패트롤 X-트레일 X-테라 캐시카이 테라노 아마다 스카이라인 크로스오버 스포츠카 240SX 200SX 180SX GT-R MID4 스카이라인 페어레이디 Z 실비아 픽업 타이탄 프론티어 써니 MPV/밴 퀘스트 라페스타 세레나 엘그란드 캐러밴 NV200 NV3500 리비나 바네트 클리버 프레리 윙로드 룩스 트럭 클리퍼 바네트 아틀라스 버스 시빌리언 기타 요코하마 F. 마리노스 vdeh신진자동차(1955~1972)/GM코리아(1972~1976)/새한자동차(1976~1983)/대우자동차(1983~2002)/대우중공업(대우국민차)승용차 마티즈 레간자 프린스 제미니 시보레 1700 레코드 카미나 캬라반 누비라 에스페로 레조 르망 아카디아 브로엄 로얄 매그너스 넥시아 씨에로 티코 맵시 맵시-나 슈퍼 살롱 칼로스 라노스 임페리얼 트럭/승합차 바네트 다마스 라보 엘프 차세대 트럭 새마을 트럭 맥스 대형트럭 버스 BM BR BS BC BV BH BF BU BL BD vdeh한국GM의 흐름, 1955년~ Type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경차 퍼블리카/퍼블리카 왜건 티코 마티즈/마티즈 Ⅱ 올 뉴 마티즈/마티즈 클래식 마티즈 크리에이티브/스파크/스파크 EV 더 넥스트 스파크/더 뉴 스파크 소형차 새나라/신성호 시보레 1700/카미나/캬라반 제미니/맵시/맵시-나 르망/씨에로/넥시아 라노스/라노스 Ⅱ 칼로스/젠트라 아베오 준중형차 로얄 디젤/로얄 XQ/로얄 듀크 에스페로 누비라/누비라 Ⅱ 라세티 라세티 프리미어/크루즈/어메이징 뉴 크루즈 올 뉴 크루즈 볼트 중형차 코로나 레코드/레코드 로얄 로얄 프린스/프린스/뉴 프린스 레간자 매그너스(이글&클래식)/토스카 말리부 올 뉴 말리부/더 뉴 말리부 준대형차 로얄 살롱/로얄 살롱 슈퍼/슈퍼 살롱/브로엄 알페온 임팔라 대형차 크라운 임페리얼 아카디아 체어맨 스테이츠맨 베리타스 스포츠카 G2X 카마로 카마로 콜벳 MPV 레조/뉴 레조 올란도 소형 SUV 시발 트랙스/더 뉴 트랙스 준중형 SUV 코란도 윈스톰 맥스 중형 SUV 뉴 무쏘 윈스톰/캡티바 승합차 에이스 미니버스 바네트 코치 이스타나 픽업트럭 랜드크루저 픽업 새마을 트럭 맥스 경상용차 다마스/라보 소형 트럭 에이스 트럭 바네트 트럭/슈퍼 X 준중형 트럭 시보레 2.5톤 트럭 엘프 엘프 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닛산_바네트&oldid=24534653" 분류: 닛산 자동차의 차종대우자동차의 차종후륜구동승합차화물자동차1970년대 자동차1980년대 자동차1990년대 자동차2000년대 자동차2010년대 자동차1978년 도입된 자동차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Português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6일 (토) 19: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모두! 초능력자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모두! 초능력자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모두! 초능력자야!みんな!エスパーだよ! 장르 SF 코미디 만화 출판사 고단샤 연재 잡지 주간 영 매거진 연재 기간 2009년 ~ 발매일 2010년 7월 29일 ~ 권수 6 틀 - 토론 《모두! 초능력자야!》 (みんな!エスパーだよ! 민나! 에스파다요![*])는 와카스기 기미노리의 일본 만화이다. 《플래닛 웨이브스》라는 제목으로 주간 영 매거진 2009년 33호부터 단기 집중 연재를 시작하였다. 2010년 34호 게재분부터 제목을 변경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발행된 단행본 1권도 새로 바뀐 제목으로 발행되었다. 2013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목차 1 줄거리 2 텔레비전 프로그램 2.1 등장 인물 2.2 에피소드 2.3 스핀오프 드라마 3 웹드라마 4 외부 링크 줄거리[편집] 오이타현 노츠 정에 사는 고등학생 요시로는 어느 날 텔레파시 능력을 갖게 된다. '사회와 사람들을 위해' 초능력을 사용하겠다고 결심한 요시로는 마을에 자신 말고도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되지만, 다른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편집] 모두! 초능력자야! 장르 SF 코미디다크 코미디종말물 방송 국가 일본 방송 채널 TV 도쿄 방송 기간 2013년 4월 12일 ~ 7월 5일 방송 시간 오전 12시 12분 ~ 12시 52분 방송 분량 40분 방송 횟수 12 감독 소노 시온이리에 유 극본 다나카 신이치 출연자 소메타니 쇼타카호마노 에리나 여는 곡 《(Where's)THE SILENT MAJORITY?》(타카하시 유우) 음성 스테레오 자막 문자 다중 방송 데이터 방송 실시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모두! 초능력자야!》는 일본에서 텔레비전 드라마화 되었는데, 2013년 4월 12일부터 TV 도쿄의 드라마 24 시간대에 방송되었다. 무대가 원작의 오이타 현에서 아이치 현 히가시미카와로 변경되었으며 촬영도 이루어졌다. 등장 인물[편집] 카모카와 요시로 – 소메타니 쇼타 수업 중 갑자기 선생님 마음속의 소리가 들리게 된다. 히라노 미유키 – 카호 요시로의 소꿉친구로 요시로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아사미 사에 – 마노 에리나 한 달 전 도쿄에서 전학온 요시로의 같은 반 친구. 에노모토 요스케 – 후카미 모토키 야스 - 에모토 토키오 요시로의 친구. 카야마 – 나카오 아키요시 에자키 선배 – 타케다 코헤이 에피소드[편집] 각 화 방송일 부제 각본 감독 제1화 2013년 4월 12일 어째서 나에게 초능력이? 버스정류장의 바람, 대작전! 소노 시온다나카 신이치 소노 시온 제2화 2013년 4월 19일 마음의 소리를 들어! 러브 호텔에서 구출하라, 대작전! 이리에 유 제3화 2013년 4월 26일 알몸으로 다이빙? 휴대 전화를 구출하라, 대작전! 다나카 신이치 제4화 2013년 5월 03일 세상은 검정 아니면 핑크로 이루어져있어, 대작전! 스즈키 타이치 제5화 2013년 5월 10일 설마했던 통곡!? 어머니의 마음을 느껴라, 대작전! 제6화 2013년 5월 24일 초능력자 항쟁 발발? 묶인 그 아이를 구하라, 대작전! 소노 시온다나카 신이치 소노 시온 제7화 2013년 5월 31일 금단의 커피!? "섹시녀" 대량 생산을 막아라, 대작전! 소노 시온 제8화 2013년 6월 07일 진실한 사랑? 빼앗긴 에로의 등불을 끄지마, 대작전! 다나카 신이치 츠키카와 쇼 제9화 2013년 6월 14일 100만 번의 고백!? 각성의 키스, 대작전! 제10화 2013년 6월 21일 (최종장・서)사랑의 죄!? 모닝 커피는 당신과 함께! 소노 시온 제11화 2013년 6월 28일 (최종장・파)때가 왔다! 선과 악의 최종결전…팀 에스퍼 해산!? 제12화 2013년 7월 05일 (최종화・청춘의 꿈)내가 세계를 구하는 거야! 원원원(왕왕왕) 대작전!? 평균 시청률 2.8%(시청률은 간토 지구・비디오 리서치 조사) 2013년 5월 17일은세계탁구2013방송을 위해 결방. 스핀오프 드라마[편집] 스핀오프 드라마 《모두! 초능력자야! 번외편~에스퍼, 도시에 가다》가 2015년 4월 3일에 특집으로 방송됐다. 웹드라마[편집] 《모두! 초능력자야! ~욕망 투성이의 러브 워즈~》는 dTV에서 2015년 8월 19일부터 총 3회 배달. 외부 링크[편집] 모두! 초능력자야! - 트위터 vdehTV 도쿄 드라마 242000년대 《양왕》 《2nd 하우스》 《시모키타 GLORY DAYS》 《원한 해결 사무소》 《큐피트의 장난 홍옥》 《Xenos》 《엘리트 양키 사부로》 《BOYS 에스테》 《사화장사 엠바머 마미야 신쥬로》 《코스프레 유령 홍련녀》 《비서의 거울》 《워킹☆버터플라이》 《맨☆돌~잘나가는 아이돌~》 《세레브리 3》 《수증기 스나이퍼》 《원한 해결 사무소 REBOOT》 《양왕 Virgin》 2010년대 《마지스카 학원》 《트러블맨》 《모테키》 《양왕 3》 《카라의 이중생활》 《마지스카 학원 2》 《용사 요시히코와 마왕의 성》 《여기가 소문의 엘파라시오》 《찍지 말아 주세요!! 그라비아 아이돌 뒷이야기》 《클로버》 《마지스카 학원 3》 《용사 요시히코와 악령의 열쇠》 《마호로 역전 번외지》 《모두! 초능력자야!》 《리미트》 《살인 여왕벌》 《수수께끼의 전학생》 《리버스 에지 오카와바타 탐정사》 《아오이 호노오》 《타마가와 구청 OF THE DEAD》 《괴기 연애 작전》 《불편한 심부름센터》 《하츠모리 베머즈》 《고독한 미식가 Season5》 《도쿄 센티멘탈》 《나이트 히어로 NAOTO》 《협반 ~남자의 밥~》 《용사 요시히코와 인도하는 7인》 《바이플레이어즈~만약 6인의 명조연이 셰어하우스에서 산다면~》 《고독한 미식가 Season6》 《시모키타자와 다이하드》 《신주쿠 세븐》 《오 마이 점프! ~소년 점프가 지구를 구한다〜》 《고독한 미식가 Season7》 《GIVER 복수의 증여자》 《망각의 사치코》 《프루츠 택배》 《어제 뭐 먹었어?》 《I턴》 플래닛 웨이브스에 관한 분류: 일본의 만화모두! 초능력자야! 번외편~에스퍼, 도시에 가다~에 관한 분류: 2015년 드라마  |  도쿄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  텔레비전 프로그램 파생작 모두! 초능력자야!~욕망 투성이의 러브 워즈~에 관한 분류: 일본의 웹드라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모두!_초능력자야!&oldid=24151844" 분류: 주간 영 매거진 만화 작품코미디 만화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만화초능력을 소재로 한 만화초능력을 소재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2013년 드라마드라마 24만화의 텔레비전 드라마화 작품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아이치현을 배경으로 한 작품아이치현을 배경으로 한 영화코미디 드라마오이타현을 배경으로 한 작품심리 스릴러 영화TV 도쿄 제작 영화도호 제작의 영화 작품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영화화 작품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초능력을 소재로 한 영화일본의 코미디 영화일본의 SF 영화소노 시온 감독 영화가가 제작 영화갸오 영화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Tagalog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5일 (일) 16: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닌텐도 게임큐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닌텐도 게임큐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Nintendo GameCube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6월) 닌텐도 게임큐브 개발사 닌텐도세대 6세대출시일 2001년 9월 14일[1] 2001년 11월 18일[2] 2002년 5월 3일[3] 2002년 5월 17일 2002년 2002년 2002년 2002년 2002년 2002년 많이 팔린 게임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DX, 슈퍼 마리오 선샤인이전 기종 닌텐도 64후속 기종 Wii 닌텐도 포털 닌텐도 게임큐브({영어: Nintendo GameCube, 일본어: ニンテンドーゲームキューブ 닌텐도 게무큐부[*])는 2001년 9월 14일에 닌텐도가 발매한 가정용 게임기이다. 줄여서 GC 또는 NGC라고 부르기도 하며 북미 및 유럽 지역에서는 GC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대원씨아이가 발매하였다. 그라데이션 의지는 2001 만 그라디언트에 세가에 의해 발표되었다. 2007년에 개발이 중단되었다.[4] 목차 1 개요 1.1 컨트롤러 1.2 디스크 2 그 외 3 대표적인 게임 4 각주 5 외부 링크 개요[편집] 닌텐도의 게임기로서는 처음으로 게임 소프트웨어 매체로 광 디스크를 채용하였다. 닌텐도와 파나소닉이 DVD를 기반으로 공동 개발하였으며, 디스크의 직경은 8센티미터이다. CAV 방식으로 빠른 데이터 전송 속도를 실현했다. CPU는 파워PC 750을 기반으로 IBM이 개발한 겍코를, 메모리는 1 T-SRAM을 채용해 고속의 접근 속도를 실현하고 있다. 그래픽 칩 플리퍼는 실리콘 그래픽스 사에서 닌텐도 64의 그래픽 칩을 담당한 엔지니어가 설립한 ArtX에서 개발하였다. ArtX가 ATI에 매수되어 플리퍼가 ATI제가 됨에 따라서 게임큐브에는 ATI 및 IBM의 로고가 인쇄되고 있다. 컨트롤러[편집] 닌텐도 64의 컨트롤러보다 작아졌고, 소니의 플레이 스테이션용 컨트롤러와 비슷한 모양이다. 왼쪽에는 십자 키와 측면의 L 트리거 버튼, 오른쪽에는 커다란 A 버튼을 중심으로 B·X·Y 버튼과 3D 스틱과 같은 구조의 C 스틱, 측면의 R 트리거 버튼, Z 트리거 버튼이, 중앙에는 스타트 버튼이 배치되어 있다. L·R 트리거 버튼은 압력을 감지하며, 모터가 내장되어 있어 컨트롤러가 진동을 한다. 디스크[편집] 게임 소프트웨어 디스크는 직격 8센티미터의 광 디스크로 파나소닉의 저작권 보호 기술이 사용됐으며 데이터 용량은 약 1.5기가바이트에 달한다. 게임큐브와 게임보이 어드밴스의 연동 그 외[편집] 일본에서의 판매량은 약 404만대, 일본 이외에서는 약 1,770만대, 전 세계 누적 판매량은 약 2,174만대이다. 닌텐도 64의 실패를 바탕으로 순간 최대 성능을 높이기보다는 안정적으로 높은 성능을 발휘하면서 게임을 만들기 쉬운 하드웨어로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다. 하드웨어의 설계 이념이 게임 개발사의 지지를 받았지만 발매 시점에서 플레이 스테이션 2를 앞지를 수 있었던 것이 영향을 주어 닌텐도 64와 같이 닌텐도 자사 게임이 매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저연령층을 중심으로 일정한 시장 점유율을 획득했지만, 세계적으로는 엑스박스에게도 밀리게 되었다. 초기의 플레이 스테이션 2는 소음으로 인해 소비자들 사이에서 악평을 들었지만, 게임큐브는 소음이 적고 매끄러운 그래픽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그래픽 성능은 엑스박스보다는 낮고 플레이 스테이션 2보다는 뛰어나며, 기본적인 성능보다는 게임보이 어드밴스와 연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판매 전략으로 내세웠다. 멀티 플랫폼 전략을 취하는 코나미, 허드슨, 남코, 캡콤, EA 등의 대기업 게임 개발사가 있기 때문에 플레이 스테이션 2와 중복 발매되는 게임이 비교적 많다. 당초 게임큐브로만 발매를 결정한 게임이 매상 부진에 의한 방침 전환으로 플레이 스테이션 2로의 이식을 단행한 경우도 있다. 바이오 해저드 시리즈와 테일즈 오브 심포니아가 그 예이다. 게임큐브 메인메뉴 음악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시작음을 길게 늘린 것이다. 또 일본에서는 파나소닉에서 게임큐브에다가 DVD플레이어를 탑재한 파나소닉 Q가 출시된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게임[편집] 슈퍼 마리오 선샤인 바이오 해저드 시리즈 소닉 시리즈 테일즈 오브 심포니아 젤다의 전설 시리즈 포켓몬 시리즈(본편 시리즈가 아님.DX, 박스-루비&사파이어, 콜로세움 등)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DX 메트로이드 프라임 이터널 다크니스 마리오 카트 더블 대시!! 뷰티풀 죠 루이지 맨션 스타워즈 로그 스쿼드론 시리즈 이카루가 피크민 시리즈 마리오 파티 시리즈 동키콩 시리즈 파이어 엠블렘 창염의 궤적 메탈 기어 솔리드 트윈 스네이크(메탈 기어 솔리드 1 리메이크) 슈퍼 로봇 대전 GC 동물의 숲 스타폭스 어썰트 각주[편집] ↑ Martyn Williams. “CNN.com – Nintendo unveils Gamecube launch plans – August 24, 2001”. Edition.cnn.com. 2013년 3월 16일에 확인함.  ↑ “Nintendo reports record GameCube launch – CNET News”. News.cnet.com. 2013년 3월 16일에 확인함.  ↑ “NEW MEDIA | GameCube price dropped”. BBC News. 2002년 4월 22일. 2013년 3월 16일에 확인함.  ↑ “Nintendo ends GameCube support”. 《Market for Home Computing and Video Games》. 2007년 2월 22일. 2016년 6월 1일에 보존된 문서. 2011년 1월 16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닌텐도 게임큐브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닌텐도 게임큐브 - 공식 웹사이트 vdeh닌텐도 게임기가정용 게임기 컬러 TV 게임 패미컴/NES 디스크 시스템 슈퍼 패미컴 닌텐도 64 iQue 닌텐도 게임큐브 Wii Wii Mini Wii U 닌텐도 스위치 휴대용 게임기 게임 앤드 워치 게임보이/포켓/라이트 게임보이 컬러 버추얼 보이 게임보이 어드밴스/SP/미크로 포켓몬 미니 닌텐도 DS/DSL DSi/DSi XL 닌텐도 3DS/XL/닌텐도 2DS 뉴 닌텐도 3DS/XL/뉴 닌텐도 2DS XL 아케이드 닌텐도 클래식 닌텐도 Vs. 시스템 플레이초이스-10 닌텐도 슈퍼 시스템 트라이포스 주변기기 슈퍼 게임보이 사테라뷰 64DD e-Reader 게임보이 플레이어 플레이얀 와이파이 USB 커넥터 Wii 리모컨 조이콘 vdeh가정용 게임기의 역사1세대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쉬어즈 홈 퐁 콜레코 텔스타 컬러 TV 게임 APF TV Fun 비디오 핀볼 테레비테니스 2세대 아타리 2600 인터턴 VC 4000 페어차일드 채널 F 오디세이² 인텔리비전 RCA 스튜디오 II 컬러 TV 게임 2.5세대 아타리 5200 콜레코비전 아카디아 2001 벡트렉스 카세트 비전 3세대 패밀리 컴퓨터 SG-1000/SG-1000 마크 II/세가 마크 III/세가 마스터 시스템 아타리 7800 슈퍼 카세트 비전 4세대 CD-i PC 엔진 메가 드라이브 네오지오 슈퍼 패미컴 4.5세대 아타리 재규어 애플 반다이 피핀 3DO PC-FX 아미가 CD32 카시오 루피 플레이디아 5세대 세가 새턴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64 6세대 플레이스테이션 2 닌텐도 게임큐브 엑스박스 드림캐스트 7세대 Wii 플레이스테이션 3 엑스박스 360 Zeebo OnLive FC Twin Retro Duo 8세대 Wii U 플레이스테이션 4 엑스박스 원 Ouya 넥서스 플레이어 Fire TV Stick vdeh비디오 게임 콘솔 (6세대)유형 가정용 게임기 목록 휴대용 게임기 목록 마이크로콘솔 목록 전용 콘솔 목록 세대 1세대 (1972-80) 2세대 (1976-92) 3세대 (1983-2003) 4세대 (1987-2004) 5세대 (1993-2005) 6세대 (1998-2013) 7세대 (2005-) 8세대 (2012-) 6세대가정용 DISCover 드림캐스트 닌텐도 게임큐브 파나소닉 Q 누온 플레이스테이션 2 V.Smile 엑스박스 핸드헬드 게임보이 어드밴스 계열 게임보이 어드밴스 어드밴스 SP 미크로 GP32 N-게이지 QD 네오지오 포켓 컬러 탭웨이브 조디악 원더스완 전용 포켓 드림 콘솔 ← 5세대 7세대 → 에뮬레이터 게임 목록 제조업체 타임라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닌텐도_게임큐브&oldid=22819661" 분류: 2001년 도입가정용 게임기닌텐도의 하드웨어파워 아키텍처닌텐도 게임큐브6세대 게임기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6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오래된 그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Беларуская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umbaart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0일 (토) 09: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Ms.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Ms.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MS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Ms" 또는 "Ms." (보통 미즈 /ˈmɪz/, 그리고 강세를 받지 않을 때는 머즈 /məz/, 또는 머스 /məs/로 발음되기도 함[1][2])는 성과 함께 사용되거나 여성의 전체 이름과 함께 사용되는 영국식 호칭이다. 이 말은 여성의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을 호칭하는 기본적인 형태를 의도로 한다.[3] "Miss"와 "Mrs."와 같이, "Ms."라는 말은 한때 모든 여성들에게 사용되었던 여성의 영국식 호칭인 그 기원을 “미스트리스”(Mistress)에서 가진다. 이 용어는 20세기에 들어 다시 고안되었고(재생되었고, 재창조되었다.[4][1] Mss.", "Mses.", 그리고 Mmes.과 같은 여러가지 복수형이 사용되고 있다.[5] 목차 1 용어의 시작 그리고 부활의 역사 2 사용법 3 노트 4 외부 링크 용어의 시작 그리고 부활의 역사[편집] "Ms."는 17세기에 벌써 당시 격식을 갖춘 ‘미스트리스’(Mistress)에서 파생된 호칭으로서 ‘미스’(Miss.)와 ‘미시즈’(Mrs.)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미스터’(Mr.)와 같이 원래부터 결혼여부를 따지지 않는 것이었다.[6][7] 그러나 "Ms."는 다른 두 호칭의 선호로 인해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며, 20세기까지 부활하지 못했다.[8][9] 호칭으로서 Ms.의 현대적 부활에 대해 알려진 최초의 제안은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의 《더 리퍼블리컨》(The Republican)에서 1901년 11월 10일 등장한다. 영어에는 우리가 조심스레 메꿔야할 틈이 있다. 일부 여성들의 지위를 모를 때 모든 사람이 당황하게 된다. 더 낮은 호칭인 Miss.로 홀로 된 부인을 부르는 것은 기혼여성을 모욕하는 것보다 더 나쁜 단지 그늘일 뿐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이제 명백히 필요한 것은 내부적 상황에 대해 어떠한 견해도 표출하지 않는, 그리고 두 의심스런 용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압보다 더 단순해질 수 있고, 보다 논리적이 될 수 있는 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이해가 더 쉬운 용어이다. 약자 Ms는 단순하고, 쓰기 쉬우며, 관계자들은 상황에 따라 더 적절하게 번역할 수 있다. 말로 Mizz라고 표현하면, 이것은 많은 시골 지역에서 오랫동안 보편적인 관행이었으며, 그곳에서는 Mis’는 Miss와 Mrs 모두에게 유사한 존중의 표현이었다.[4] 이 용어는 다시 비즈니스 서식을 쓰는 이들에게 《미국 비즈니스 작문 협회 공보》(Bulletin of the American Business Writing Association, 1951)나 전국 사무 관리 협회가 1952년 출간한 《간략 서신》(The Simplified Letter)과 같은 출판물에 의해 편의상 제안되었다.[10] 1961년, 쉴라 마이클즈는 그녀의 룸메이트에게 배달된 한 부의 《뉴스 & 레터스》(News & Letters)의 주소란에 인쇄 오류라고 그녀가 생각했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하려고 시도를 하게 된다.[11][12] 마이클즈는 남성에게 귀속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호칭을 찾고 있었다.[13] 그녀는 현재는 흔한 용어인 Miss와 Mrs.의 구분이 Mistress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을 알았지만, 이제는 평판이 나쁜 뜻을 내포한 원래의 호칭을 여성들이 사용하는 것을 누구도 제안하지 못했다.[14] 새로운 호칭 사용을 장려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처음에는 무시당했다.[15] 1971년경, 여성운동가 집단과 WBAI 라디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마이클즈는 Ms.의 사용을 제안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한 친구가 그 인터뷰를 듣고서, 그녀의 새로운 잡지명으로 그 이름을 제안했다. 《미즈 매거진》의 인기는 마침내 그 용어를 널리 사용하게 만들었다.[16] 1972년 2월, 미국 정부 인쇄국은 정부 공문서에서 Ms.의 사용을 승인하였다.[17] 윌리엄 새파이어와 같이 성을 가지지 않은 말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일부도 여성 상원의원 제럴딘 페라로의 사례와 같이 Ms.가 마침내 영어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84년 미국 부통령 후보였던 페라로는 남편의 성(자카로, Zaccaro)를 사용하기보다는 그녀의 본래 성을 사용해 왔던 기혼여성이었다. 새파이어는 그녀를 ‘미스 페라로’(Miss Ferraro, 결혼을 했기 때문에)나 ‘미시즈 페라로’(Mrs. Ferraro, 그녀의 남편이 Mr. 페라로가 아니었기 때문에)로 호칭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게다가 그녀를 ‘미시즈 자카로’(Mrs. Zaccaro)로 부르는 것도 독자에게 혼란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18] 사용법[편집] 《미국 헤리티지 영어 범례서》(The American Heritage Book of English Usage)에서는 Ms.를 사용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Mrs.나 Miss로 불러야할 지를 알아내려고 고민할 필요를 없게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Ms.를 사용하게 되면 당신이 대화를 하려는 상대가 기혼인지, 미혼인지 또는 이름을 개명했는 지 여부를 틀릴이유가 없으며, Ms.는 항상 올바른 호칭이 된다.[19] 영국의 잡지 《더 타임즈》는 스타일 가이드를 통해, 오늘날 기혼인지, 미혼인지 확실히 알지 못할 때, Ms는 여성들을 그렇게 부르는데 흡족히 수용된다고 언급하고 있다.[20] 비중있는 글을 실을 때 호칭의 사용을 제한하는 《더 가디언》도 스타일 가이드를 통해 Miss나 Mrs라고 어느 쪽을 불리기를 원하는 지 말하지 않으면, 여성들에게는 Ms를 기본적으로 이용하라고 언급하고 있다.[21] 비즈니스 영역에서 Ms.는 상대방이 특별히 호칭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면, 성인여성을 부르는 표준적인 기본 호칭으로 여겨지고 있다. Ms.의 기본 이용은 주디스 마틴(a.k.a. "Miss Manners")을 비롯한 수 많은 에티켓 저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22] 노트[편집] ↑ 가 나 옥스포드 영어 사전 온라인, Ms, n.2. 어원: An orthographic and phonetic blend of Mrs n.1 and miss n.2 Compare mizz n. 마지막의 /-z/ 발음은 이 단어와 미스(Miss)를 구분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의 결과로서 대두된 것처럼 보인다. n.2; compare mizz n., and perhaps also Miz n.1 -- [mizz n.: 어원: Representing the spoken realization of Ms n.2 (see discussion at that entry).] Accessed 2012-07-25 ↑ Wells, John C. (1990). 《롱맨 발음 사전》. Harlow, England: 롱맨. 463쪽. ISBN 0-582-05383-8.  "Ms" 항목. 강세를 받으면, 슈와와 함께 발음되기도 한다. ↑ “Emily Post's Guide to Addressing Correspondence: Addressing a Woman”. The Emily Post Institute. 2010년 2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Zimmer, Ben (2009년 6월 23일). “Hunting the Elusive First 'Ms.'”. 《Word Routes》. The Visual Thesaurus. 2009년 6월 23일에 확인함.  ↑ 전통적인 프랑스어 기반의 복수형인 Mesdames에서 파생되었으며, "Mrs."에 사용된 형태와 동일 ↑ Spender, Dale (1981). 《Man Made Language》.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ISBN 978-0-7100-0675-2.  ↑ Stannard, Una (1977). 《Mrs Man》. San Francisco: Germainbooks. ISBN 978-0-914142-02-7.  ↑ Martin, Judith (2009년 10월 11일). “What’s in a name?”. Miss Manners. 《Buffalo News》. 2009년 10월 14일에 보존된 문서. 2009년 12월 12일에 확인함.  ↑ Martin, Judith. 《Miss Manners' Guide for the Turn of the Millennium》. 뉴욕: Simon & Schuster. 10쪽. ISBN 0-671-72228-X.  ↑ “Ms.”.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Houghton Mifflin Company. 2009.  ↑ Jeffs, Angela (2000년 11월 5일). “Missing piece of puzzle in story of 'Ms.'”. 《The Japan Times Online》. 2012년 7월 13일에 보존된 문서. 2009년 12월 12일에 확인함.  ↑ Michaels, Sheila (2008년 3월~4월). “Forty Years of Defying the Odds”. 《Solidarity Webzine》. Solidarity. 2009년 11월 9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Kay, Eve (2007년 6월 28일). “Call Me Ms”. 《The Guardian》. 2007년 8월 20일에 확인함.  ↑ Fishko, Sara (2012년 6월 28일). “Fishko Files: Ms.”. WNYC. 2013년 3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2일에 확인함.  ↑ Fishko, Sara (2012년 6월 28일). “Fishko Files: Ms.”. WNYC. 2013년 3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2일에 확인함.  ↑ Zimmer, Ben (2009년 10월 25일). “On Language: Ms.”. 《뉴욕 타임즈》. 2009년 11월 16일에 확인함.  ↑ Frum, David (2000). 《How We Got Here: The '70s》. 뉴욕: Basic Books. 246쪽. ISBN 0-465-04195-7.  ↑ Safire, William. "On Language: Goodbye Sex, Hello Gender", 뉴욕 타임즈, 1984년 8월 5일, Section 6 p. 8. ↑ “The American Heritage Book of English Usage”. 2007년 10월 31일. 2008년 12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The Times Online Style Guide”. Timesonline.co.uk. 2011년 9월 24일에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2일에 확인함.  ↑ “가디언 스타일 가이드: Mr, Ms, Mrs, Miss”. 더 가디언. 2009년 8월. 2013년 3월 12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Martin, Judith. “Miss Manners: How and When To Use "Ms." in Business Correspondence”. 《Lifestyle》. MSN. 2012년 3월 15일에 보존된 문서. 2011년 4월 2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Ms. 더 타임즈 스타일 가이드 더 가디언 스타일 가이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Ms.&oldid=24214870" 분류: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경어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estiFrançaisहिन्दीItaliano日本語РусскийSvenskaTürkçe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3일 (월) 16: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Ms.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Ms.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MS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Ms" 또는 "Ms." (보통 미즈 /ˈmɪz/, 그리고 강세를 받지 않을 때는 머즈 /məz/, 또는 머스 /məs/로 발음되기도 함[1][2])는 성과 함께 사용되거나 여성의 전체 이름과 함께 사용되는 영국식 호칭이다. 이 말은 여성의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을 호칭하는 기본적인 형태를 의도로 한다.[3] "Miss"와 "Mrs."와 같이, "Ms."라는 말은 한때 모든 여성들에게 사용되었던 여성의 영국식 호칭인 그 기원을 “미스트리스”(Mistress)에서 가진다. 이 용어는 20세기에 들어 다시 고안되었고(재생되었고, 재창조되었다.[4][1] Mss.", "Mses.", 그리고 Mmes.과 같은 여러가지 복수형이 사용되고 있다.[5] 목차 1 용어의 시작 그리고 부활의 역사 2 사용법 3 노트 4 외부 링크 용어의 시작 그리고 부활의 역사[편집] "Ms."는 17세기에 벌써 당시 격식을 갖춘 ‘미스트리스’(Mistress)에서 파생된 호칭으로서 ‘미스’(Miss.)와 ‘미시즈’(Mrs.)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미스터’(Mr.)와 같이 원래부터 결혼여부를 따지지 않는 것이었다.[6][7] 그러나 "Ms."는 다른 두 호칭의 선호로 인해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며, 20세기까지 부활하지 못했다.[8][9] 호칭으로서 Ms.의 현대적 부활에 대해 알려진 최초의 제안은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의 《더 리퍼블리컨》(The Republican)에서 1901년 11월 10일 등장한다. 영어에는 우리가 조심스레 메꿔야할 틈이 있다. 일부 여성들의 지위를 모를 때 모든 사람이 당황하게 된다. 더 낮은 호칭인 Miss.로 홀로 된 부인을 부르는 것은 기혼여성을 모욕하는 것보다 더 나쁜 단지 그늘일 뿐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이제 명백히 필요한 것은 내부적 상황에 대해 어떠한 견해도 표출하지 않는, 그리고 두 의심스런 용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압보다 더 단순해질 수 있고, 보다 논리적이 될 수 있는 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이해가 더 쉬운 용어이다. 약자 Ms는 단순하고, 쓰기 쉬우며, 관계자들은 상황에 따라 더 적절하게 번역할 수 있다. 말로 Mizz라고 표현하면, 이것은 많은 시골 지역에서 오랫동안 보편적인 관행이었으며, 그곳에서는 Mis’는 Miss와 Mrs 모두에게 유사한 존중의 표현이었다.[4] 이 용어는 다시 비즈니스 서식을 쓰는 이들에게 《미국 비즈니스 작문 협회 공보》(Bulletin of the American Business Writing Association, 1951)나 전국 사무 관리 협회가 1952년 출간한 《간략 서신》(The Simplified Letter)과 같은 출판물에 의해 편의상 제안되었다.[10] 1961년, 쉴라 마이클즈는 그녀의 룸메이트에게 배달된 한 부의 《뉴스 & 레터스》(News & Letters)의 주소란에 인쇄 오류라고 그녀가 생각했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하려고 시도를 하게 된다.[11][12] 마이클즈는 남성에게 귀속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호칭을 찾고 있었다.[13] 그녀는 현재는 흔한 용어인 Miss와 Mrs.의 구분이 Mistress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을 알았지만, 이제는 평판이 나쁜 뜻을 내포한 원래의 호칭을 여성들이 사용하는 것을 누구도 제안하지 못했다.[14] 새로운 호칭 사용을 장려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처음에는 무시당했다.[15] 1971년경, 여성운동가 집단과 WBAI 라디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마이클즈는 Ms.의 사용을 제안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한 친구가 그 인터뷰를 듣고서, 그녀의 새로운 잡지명으로 그 이름을 제안했다. 《미즈 매거진》의 인기는 마침내 그 용어를 널리 사용하게 만들었다.[16] 1972년 2월, 미국 정부 인쇄국은 정부 공문서에서 Ms.의 사용을 승인하였다.[17] 윌리엄 새파이어와 같이 성을 가지지 않은 말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일부도 여성 상원의원 제럴딘 페라로의 사례와 같이 Ms.가 마침내 영어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84년 미국 부통령 후보였던 페라로는 남편의 성(자카로, Zaccaro)를 사용하기보다는 그녀의 본래 성을 사용해 왔던 기혼여성이었다. 새파이어는 그녀를 ‘미스 페라로’(Miss Ferraro, 결혼을 했기 때문에)나 ‘미시즈 페라로’(Mrs. Ferraro, 그녀의 남편이 Mr. 페라로가 아니었기 때문에)로 호칭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게다가 그녀를 ‘미시즈 자카로’(Mrs. Zaccaro)로 부르는 것도 독자에게 혼란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18] 사용법[편집] 《미국 헤리티지 영어 범례서》(The American Heritage Book of English Usage)에서는 Ms.를 사용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Mrs.나 Miss로 불러야할 지를 알아내려고 고민할 필요를 없게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Ms.를 사용하게 되면 당신이 대화를 하려는 상대가 기혼인지, 미혼인지 또는 이름을 개명했는 지 여부를 틀릴이유가 없으며, Ms.는 항상 올바른 호칭이 된다.[19] 영국의 잡지 《더 타임즈》는 스타일 가이드를 통해, 오늘날 기혼인지, 미혼인지 확실히 알지 못할 때, Ms는 여성들을 그렇게 부르는데 흡족히 수용된다고 언급하고 있다.[20] 비중있는 글을 실을 때 호칭의 사용을 제한하는 《더 가디언》도 스타일 가이드를 통해 Miss나 Mrs라고 어느 쪽을 불리기를 원하는 지 말하지 않으면, 여성들에게는 Ms를 기본적으로 이용하라고 언급하고 있다.[21] 비즈니스 영역에서 Ms.는 상대방이 특별히 호칭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면, 성인여성을 부르는 표준적인 기본 호칭으로 여겨지고 있다. Ms.의 기본 이용은 주디스 마틴(a.k.a. "Miss Manners")을 비롯한 수 많은 에티켓 저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22] 노트[편집] ↑ 가 나 옥스포드 영어 사전 온라인, Ms, n.2. 어원: An orthographic and phonetic blend of Mrs n.1 and miss n.2 Compare mizz n. 마지막의 /-z/ 발음은 이 단어와 미스(Miss)를 구분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의 결과로서 대두된 것처럼 보인다. n.2; compare mizz n., and perhaps also Miz n.1 -- [mizz n.: 어원: Representing the spoken realization of Ms n.2 (see discussion at that entry).] Accessed 2012-07-25 ↑ Wells, John C. (1990). 《롱맨 발음 사전》. Harlow, England: 롱맨. 463쪽. ISBN 0-582-05383-8.  "Ms" 항목. 강세를 받으면, 슈와와 함께 발음되기도 한다. ↑ “Emily Post's Guide to Addressing Correspondence: Addressing a Woman”. The Emily Post Institute. 2010년 2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Zimmer, Ben (2009년 6월 23일). “Hunting the Elusive First 'Ms.'”. 《Word Routes》. The Visual Thesaurus. 2009년 6월 23일에 확인함.  ↑ 전통적인 프랑스어 기반의 복수형인 Mesdames에서 파생되었으며, "Mrs."에 사용된 형태와 동일 ↑ Spender, Dale (1981). 《Man Made Language》.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ISBN 978-0-7100-0675-2.  ↑ Stannard, Una (1977). 《Mrs Man》. San Francisco: Germainbooks. ISBN 978-0-914142-02-7.  ↑ Martin, Judith (2009년 10월 11일). “What’s in a name?”. Miss Manners. 《Buffalo News》. 2009년 10월 14일에 보존된 문서. 2009년 12월 12일에 확인함.  ↑ Martin, Judith. 《Miss Manners' Guide for the Turn of the Millennium》. 뉴욕: Simon & Schuster. 10쪽. ISBN 0-671-72228-X.  ↑ “Ms.”.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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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더 타임즈 스타일 가이드 더 가디언 스타일 가이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Ms.&oldid=24214870" 분류: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경어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estiFrançaisहिन्दीItaliano日本語РусскийSvenskaTürkçe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3일 (월) 16: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뱅 앤 올룹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뱅 앤 올룹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뱅 앤 올룹슨Bang & Olufsen A/S 창립 1925년 창립자 피터 뱅, 스벤드 올룹슨 국가 덴마크 본사 소재지 덴마크스트루어 핵심 인물 덴마크어: Jørgen Worning 회장, 덴마크어: Kalle Hvidt Nielsen CEO 매출액 43억 7천 6백만 덴마크 크로네 (2006-07년) 순이익 5억 2천 4백만 덴마크 크로네 (2006-07년)[1] 종업원 2520명 (2007년) 웹사이트 bang-olufsen.com 뱅 앤 올룹슨 매장 피렌체의 뱅 앤 올룹슨 매장 베오리트 39. 1938년. B&O의 Beolit 39. 베이클라이트 소재의 B&O 최초의 라디오. 뱅 & 올룹슨(덴마크어: Bang & Olufsen, B&O)은 고가의 고급형 오디오 기기를 설계 및 제조하는 덴마크의 전자 회사이다. 이외에도 텔레비전, 전화기를 설계 및 제조한다. 목차 1 개요 2 기존 출시 제품들 3 현재 3.1 오디오 기기를 넘어 3.2 도전에 직면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25년 피터 뱅(덴마크어: Peter Boas Bang)과 스벤드 올룹슨(덴마크어: Svend Olufsen)이 이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의 최초의 이노베이션은 교류에서 작동하는 라디오였다. 당시 대부분의 라디오는 축전지를 썼다. 그들은 라디오 및 라우드 스피커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뒤,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그들의 제품들은 "정직한" 음악적 재현(reproduction)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덴마크어로 이 원칙은 덴마크어: 'Ærlig musikgengivelse'라고 불린다. B&O의 세트와 스피커들에서 나오는 음악이 기술적 한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서 그대로 사용자에 귀에 들려야 한다는 이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품의 설계 및 테스트 과정에 있어서, 기구적인 테스팅 대신, 제품의 인지 음향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뱅 & 올룹슨은 제품 디자인 면에 있어서, 최신 산업 디자인 경향을 곧잘 반영하곤 한다. 뱅 & 올룹슨 회사 내에는 디자이너가 없다. 대신 디자이너로 하여금 회사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해 주는 편이었다. 1970년대 및 1980년대 디자이너 자콥 젠슨이 B&O의 제품들을 많이 디자인하였다.[2] 현재 B&O의 수석 디자이너는 David Lewis로 바뀌어 있다. 기존 출시 제품들[편집] 자세한 B&O의 기존 출시 제품 목록은 아래 외부 링크에 있는 웹페이지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보통 B&O는 "베오"란 명칭을 제품명 앞에 붙인다. 베오코드(Beocord)는 카세트 덱 제품이다. 돌비 HX 프로 설계에도 관여하는 등 B&O는 카세트 기술 분야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베오마스터(Beomaster)는 리시버 제품이다. 5000 시리즈에서 7000 시리즈까지는 "마스터 콘트롤 패널"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리모콘과 양방향 통신을 할 수 있다. 베오그람(Beogram)은 축음기 제품이다. 훗날 CD 플레이어 제품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최근의 베오그람 턴테이블은 직선운동형 톤 암(tangential tone arm)을 자주 채택하곤 하였다. 베오랩(Beolab)은 앰프와 액티브 라우드스피커(앰프 내장형 라우드스피커) 제품을 일컫는 말이다. 베오복스(Beovox)는 패시브 라우드스피커를 일컫는 말이다. (내장 앰프가 없는 스피커) 베오리트(Beolit)는 휴대용 라디오 제품이다. 베오시스템(Beosystem)은 콤포넌트 묶음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베오마스터, 베오그람, 베오코드를 조화시켜 함께 작동시킬 수 있게 묶어 놓은 것이다. 베오센터(Beocenter)는 원피스(one-piece) 오디오 시스템 제품이다. B&O는 한 때 리시버, 턴테이블, 카세트 덱 등을 조합시켜 놓은 베오센터라는 제품을 팔기도 하였다. 베오콤(Beocom)은 전화기 및 전화기 액세서리(자동응답기 등) 제품이다. 베오비전(Beovision)은 텔레비전 제품이다. 베오사운드(Beosound)은 오디오 기기 시스템을 일컫는다. 현재[편집] 1990년대 들어 뱅 & 올룹슨은 뱅 & 올룹슨 기기 전문점을 많이 열었다. 소매점을 통해 물건을 유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직접 물건을 파는 방식이었다. 미니 타입 오디오 시스템이 인기가 높아지자 오디오를 콤포넌트별로 파는 것을 중단하였다. 현재도 뱅 & 올룹슨은 그들 제품의 현대적인 디자인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오디오를 콤포넌트 별로 파는 것은 중단했지만, 하이 퍼포먼스 라우드스피커 제조 부문에 있어서아직 B&O는 시장의 주요 업체로 남아 있다. 주력 스피커인, 베오랩 5(BeoLab 5)는 디지털 신호 처리 기술을 이용해 스피커가 설치된 방의 특성에 맞게 주파수 응답을 조절한다. 중간 대역과 높은 주파수 대역 드라이버들은 웨이브가이드를 채택하였다. 중간에서 높은 대역의 주파수가 천장이나 바닥에 부딪혀서 반사되어 사용자에 귀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술은 1987년 Phönix Klangsäulen가 발명한 기존의 기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4] 현재도 뱅 & 올룹슨은 비표준 기기를 고집하는 면이 남아 있다. 홈 시어터 기기로서 많이 쓰이고 있는 THX 인증기기들과는 달리 THX를 지원하지 않는다. 오디오 기기를 넘어[편집] 소비자용 제품 외에도, 초정밀 알루미늄 제조 시설을 뱅 & 올룹슨은 갖추고 있다.[5] 뱅 & 올룹슨도 또한 알루미늄 소재를 그들 제품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99년 뱅 & 올룹슨과 Karsten Nielsen 박사가 모여, ICEpower A/S라는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는 클래스 D 앰플리파이어를 전문적으로 제조 개발하는 업체이다.[6] 클래스 D 앰플리파이어는, 클래스 A, AB, B 오디오 앰플리파이어에 비해 효율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들어, 뱅 & 올룹슨은 "A8" 이어폰을 성공시켰다. 이 이어폰은 앤더스 헤르만센이 디자인한 것이었다. 애플의 아이팟이 유행하던 때, 애플 스토어에서 팔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여러 휴대전화 제조 업체와 손잡기도 하였다. 필립스, 에릭슨과 협력하기도 하였다. 삼성전자와 합작해 세린(Serene)이라는 휴대폰을 개발하였다. 2007년 12월에는 세레나타라는 휴대폰을 개발하였다. [7] 또한, 아우디의 최고급 승용차인 A8 및 아우디 S8의 전용오디오를 개발하였다. 아우디 A4, A5, A6, Q7, A8, R8 모델에 오디오를 공급하고 있다. [8] 도전에 직면[편집] 최근들어 MP3 플레이어들이 뱅 & 올룹슨을 어렵게 하고 있다. 뱅 & 올룹슨은 뒤늦게 베오사운드 2라는 플레이어를 갖고 MP3 플레이어 시장에 뛰어들었다.[9] 저명한 리뷰인 CNET 리뷰는 이 기기에 10점 만점에 겨우 4.3점을 주었다. 매우 비싸고, DRM으로 보호된 WMA를 플레이하지 못하고, LCD도 없으며, 내장 메모리도 없는 최악의 기기라고 평했다. 대신 음질은 꽤 괜찮으며, 케이스가 튼튼하다고 밝혔다. 같이 보기[편집] 베오사운드 2 베오사운드 4 베오링크 베오포트 각주[편집] ↑ “Bang & Olufsen A/S Koncernen; Årsrapport 2006/07” (PDF) (덴마크어). 2008년 4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2월 18일에 확인함.  ↑ Jacob Jensen Web Site ↑ “보관 된 사본” (PDF). 2008년 4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Phönix Klangsäulen”. 2008년 6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B&O webpage on aluminium”. 2006년 8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ICEpower partnership”. 2008년 6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탁상훈 기자 (2007년 6월 7일). “소렌슨 ‘뱅앤올룹슨’ CEO 인터뷰”. 《조선일보》 (chosun.com). 2007년 6월 17일에 확인함.  ↑ Bang & Olufsen (2008년 6월 13일). “Audi A8/S8”. 2008년 6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CNET Review 외부 링크[편집] (영어) 공식 웹사이트 (영어) 베오월드 - B&O에 대한 비공식 웹사이트. (영어) 토거슨 - 한 수집가의 웹사이트. 수십 년간의 B&O 제품들을 다루고 있다. (영어) 베오센트럴 - B&O 장비에 대한 사진과 설명.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뱅_앤_올룹슨&oldid=24281229" 분류: 1925년 설립덴마크의 기업덴마크의 브랜드음향기기 제조 기업덴마크의 다국적 기업숨은 분류: CS1 - 덴마크어 인용 (da)오래된 그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덴마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08: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뱅 앤 올룹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뱅 앤 올룹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뱅 앤 올룹슨Bang & Olufsen A/S 창립 1925년 창립자 피터 뱅, 스벤드 올룹슨 국가 덴마크 본사 소재지 덴마크스트루어 핵심 인물 덴마크어: Jørgen Worning 회장, 덴마크어: Kalle Hvidt Nielsen CEO 매출액 43억 7천 6백만 덴마크 크로네 (2006-07년) 순이익 5억 2천 4백만 덴마크 크로네 (2006-07년)[1] 종업원 2520명 (2007년) 웹사이트 bang-olufsen.com 뱅 앤 올룹슨 매장 피렌체의 뱅 앤 올룹슨 매장 베오리트 39. 1938년. B&O의 Beolit 39. 베이클라이트 소재의 B&O 최초의 라디오. 뱅 & 올룹슨(덴마크어: Bang & Olufsen, B&O)은 고가의 고급형 오디오 기기를 설계 및 제조하는 덴마크의 전자 회사이다. 이외에도 텔레비전, 전화기를 설계 및 제조한다. 목차 1 개요 2 기존 출시 제품들 3 현재 3.1 오디오 기기를 넘어 3.2 도전에 직면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25년 피터 뱅(덴마크어: Peter Boas Bang)과 스벤드 올룹슨(덴마크어: Svend Olufsen)이 이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의 최초의 이노베이션은 교류에서 작동하는 라디오였다. 당시 대부분의 라디오는 축전지를 썼다. 그들은 라디오 및 라우드 스피커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뒤,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그들의 제품들은 "정직한" 음악적 재현(reproduction)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덴마크어로 이 원칙은 덴마크어: 'Ærlig musikgengivelse'라고 불린다. B&O의 세트와 스피커들에서 나오는 음악이 기술적 한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서 그대로 사용자에 귀에 들려야 한다는 이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품의 설계 및 테스트 과정에 있어서, 기구적인 테스팅 대신, 제품의 인지 음향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뱅 & 올룹슨은 제품 디자인 면에 있어서, 최신 산업 디자인 경향을 곧잘 반영하곤 한다. 뱅 & 올룹슨 회사 내에는 디자이너가 없다. 대신 디자이너로 하여금 회사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해 주는 편이었다. 1970년대 및 1980년대 디자이너 자콥 젠슨이 B&O의 제품들을 많이 디자인하였다.[2] 현재 B&O의 수석 디자이너는 David Lewis로 바뀌어 있다. 기존 출시 제품들[편집] 자세한 B&O의 기존 출시 제품 목록은 아래 외부 링크에 있는 웹페이지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보통 B&O는 "베오"란 명칭을 제품명 앞에 붙인다. 베오코드(Beocord)는 카세트 덱 제품이다. 돌비 HX 프로 설계에도 관여하는 등 B&O는 카세트 기술 분야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베오마스터(Beomaster)는 리시버 제품이다. 5000 시리즈에서 7000 시리즈까지는 "마스터 콘트롤 패널"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리모콘과 양방향 통신을 할 수 있다. 베오그람(Beogram)은 축음기 제품이다. 훗날 CD 플레이어 제품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최근의 베오그람 턴테이블은 직선운동형 톤 암(tangential tone arm)을 자주 채택하곤 하였다. 베오랩(Beolab)은 앰프와 액티브 라우드스피커(앰프 내장형 라우드스피커) 제품을 일컫는 말이다. 베오복스(Beovox)는 패시브 라우드스피커를 일컫는 말이다. (내장 앰프가 없는 스피커) 베오리트(Beolit)는 휴대용 라디오 제품이다. 베오시스템(Beosystem)은 콤포넌트 묶음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베오마스터, 베오그람, 베오코드를 조화시켜 함께 작동시킬 수 있게 묶어 놓은 것이다. 베오센터(Beocenter)는 원피스(one-piece) 오디오 시스템 제품이다. B&O는 한 때 리시버, 턴테이블, 카세트 덱 등을 조합시켜 놓은 베오센터라는 제품을 팔기도 하였다. 베오콤(Beocom)은 전화기 및 전화기 액세서리(자동응답기 등) 제품이다. 베오비전(Beovision)은 텔레비전 제품이다. 베오사운드(Beosound)은 오디오 기기 시스템을 일컫는다. 현재[편집] 1990년대 들어 뱅 & 올룹슨은 뱅 & 올룹슨 기기 전문점을 많이 열었다. 소매점을 통해 물건을 유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직접 물건을 파는 방식이었다. 미니 타입 오디오 시스템이 인기가 높아지자 오디오를 콤포넌트별로 파는 것을 중단하였다. 현재도 뱅 & 올룹슨은 그들 제품의 현대적인 디자인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오디오를 콤포넌트 별로 파는 것은 중단했지만, 하이 퍼포먼스 라우드스피커 제조 부문에 있어서아직 B&O는 시장의 주요 업체로 남아 있다. 주력 스피커인, 베오랩 5(BeoLab 5)는 디지털 신호 처리 기술을 이용해 스피커가 설치된 방의 특성에 맞게 주파수 응답을 조절한다. 중간 대역과 높은 주파수 대역 드라이버들은 웨이브가이드를 채택하였다. 중간에서 높은 대역의 주파수가 천장이나 바닥에 부딪혀서 반사되어 사용자에 귀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술은 1987년 Phönix Klangsäulen가 발명한 기존의 기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4] 현재도 뱅 & 올룹슨은 비표준 기기를 고집하는 면이 남아 있다. 홈 시어터 기기로서 많이 쓰이고 있는 THX 인증기기들과는 달리 THX를 지원하지 않는다. 오디오 기기를 넘어[편집] 소비자용 제품 외에도, 초정밀 알루미늄 제조 시설을 뱅 & 올룹슨은 갖추고 있다.[5] 뱅 & 올룹슨도 또한 알루미늄 소재를 그들 제품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99년 뱅 & 올룹슨과 Karsten Nielsen 박사가 모여, ICEpower A/S라는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는 클래스 D 앰플리파이어를 전문적으로 제조 개발하는 업체이다.[6] 클래스 D 앰플리파이어는, 클래스 A, AB, B 오디오 앰플리파이어에 비해 효율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들어, 뱅 & 올룹슨은 "A8" 이어폰을 성공시켰다. 이 이어폰은 앤더스 헤르만센이 디자인한 것이었다. 애플의 아이팟이 유행하던 때, 애플 스토어에서 팔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여러 휴대전화 제조 업체와 손잡기도 하였다. 필립스, 에릭슨과 협력하기도 하였다. 삼성전자와 합작해 세린(Serene)이라는 휴대폰을 개발하였다. 2007년 12월에는 세레나타라는 휴대폰을 개발하였다. [7] 또한, 아우디의 최고급 승용차인 A8 및 아우디 S8의 전용오디오를 개발하였다. 아우디 A4, A5, A6, Q7, A8, R8 모델에 오디오를 공급하고 있다. [8] 도전에 직면[편집] 최근들어 MP3 플레이어들이 뱅 & 올룹슨을 어렵게 하고 있다. 뱅 & 올룹슨은 뒤늦게 베오사운드 2라는 플레이어를 갖고 MP3 플레이어 시장에 뛰어들었다.[9] 저명한 리뷰인 CNET 리뷰는 이 기기에 10점 만점에 겨우 4.3점을 주었다. 매우 비싸고, DRM으로 보호된 WMA를 플레이하지 못하고, LCD도 없으며, 내장 메모리도 없는 최악의 기기라고 평했다. 대신 음질은 꽤 괜찮으며, 케이스가 튼튼하다고 밝혔다. 같이 보기[편집] 베오사운드 2 베오사운드 4 베오링크 베오포트 각주[편집] ↑ “Bang & Olufsen A/S Koncernen; Årsrapport 2006/07” (PDF) (덴마크어). 2008년 4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2월 18일에 확인함.  ↑ Jacob Jensen Web Site ↑ “보관 된 사본” (PDF). 2008년 4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Phönix Klangsäulen”. 2008년 6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B&O webpage on aluminium”. 2006년 8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ICEpower partnership”. 2008년 6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탁상훈 기자 (2007년 6월 7일). “소렌슨 ‘뱅앤올룹슨’ CEO 인터뷰”. 《조선일보》 (chosun.com). 2007년 6월 17일에 확인함.  ↑ Bang & Olufsen (2008년 6월 13일). “Audi A8/S8”. 2008년 6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CNET Review 외부 링크[편집] (영어) 공식 웹사이트 (영어) 베오월드 - B&O에 대한 비공식 웹사이트. (영어) 토거슨 - 한 수집가의 웹사이트. 수십 년간의 B&O 제품들을 다루고 있다. (영어) 베오센트럴 - B&O 장비에 대한 사진과 설명.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뱅_앤_올룹슨&oldid=24281229" 분류: 1925년 설립덴마크의 기업덴마크의 브랜드음향기기 제조 기업덴마크의 다국적 기업숨은 분류: CS1 - 덴마크어 인용 (da)오래된 그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덴마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08: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뱅 앤 올룹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뱅 앤 올룹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뱅 앤 올룹슨Bang & Olufsen A/S 창립 1925년 창립자 피터 뱅, 스벤드 올룹슨 국가 덴마크 본사 소재지 덴마크스트루어 핵심 인물 덴마크어: Jørgen Worning 회장, 덴마크어: Kalle Hvidt Nielsen CEO 매출액 43억 7천 6백만 덴마크 크로네 (2006-07년) 순이익 5억 2천 4백만 덴마크 크로네 (2006-07년)[1] 종업원 2520명 (2007년) 웹사이트 bang-olufsen.com 뱅 앤 올룹슨 매장 피렌체의 뱅 앤 올룹슨 매장 베오리트 39. 1938년. B&O의 Beolit 39. 베이클라이트 소재의 B&O 최초의 라디오. 뱅 & 올룹슨(덴마크어: Bang & Olufsen, B&O)은 고가의 고급형 오디오 기기를 설계 및 제조하는 덴마크의 전자 회사이다. 이외에도 텔레비전, 전화기를 설계 및 제조한다. 목차 1 개요 2 기존 출시 제품들 3 현재 3.1 오디오 기기를 넘어 3.2 도전에 직면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25년 피터 뱅(덴마크어: Peter Boas Bang)과 스벤드 올룹슨(덴마크어: Svend Olufsen)이 이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의 최초의 이노베이션은 교류에서 작동하는 라디오였다. 당시 대부분의 라디오는 축전지를 썼다. 그들은 라디오 및 라우드 스피커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뒤,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그들의 제품들은 "정직한" 음악적 재현(reproduction)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덴마크어로 이 원칙은 덴마크어: 'Ærlig musikgengivelse'라고 불린다. B&O의 세트와 스피커들에서 나오는 음악이 기술적 한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서 그대로 사용자에 귀에 들려야 한다는 이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품의 설계 및 테스트 과정에 있어서, 기구적인 테스팅 대신, 제품의 인지 음향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뱅 & 올룹슨은 제품 디자인 면에 있어서, 최신 산업 디자인 경향을 곧잘 반영하곤 한다. 뱅 & 올룹슨 회사 내에는 디자이너가 없다. 대신 디자이너로 하여금 회사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해 주는 편이었다. 1970년대 및 1980년대 디자이너 자콥 젠슨이 B&O의 제품들을 많이 디자인하였다.[2] 현재 B&O의 수석 디자이너는 David Lewis로 바뀌어 있다. 기존 출시 제품들[편집] 자세한 B&O의 기존 출시 제품 목록은 아래 외부 링크에 있는 웹페이지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보통 B&O는 "베오"란 명칭을 제품명 앞에 붙인다. 베오코드(Beocord)는 카세트 덱 제품이다. 돌비 HX 프로 설계에도 관여하는 등 B&O는 카세트 기술 분야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베오마스터(Beomaster)는 리시버 제품이다. 5000 시리즈에서 7000 시리즈까지는 "마스터 콘트롤 패널"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리모콘과 양방향 통신을 할 수 있다. 베오그람(Beogram)은 축음기 제품이다. 훗날 CD 플레이어 제품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최근의 베오그람 턴테이블은 직선운동형 톤 암(tangential tone arm)을 자주 채택하곤 하였다. 베오랩(Beolab)은 앰프와 액티브 라우드스피커(앰프 내장형 라우드스피커) 제품을 일컫는 말이다. 베오복스(Beovox)는 패시브 라우드스피커를 일컫는 말이다. (내장 앰프가 없는 스피커) 베오리트(Beolit)는 휴대용 라디오 제품이다. 베오시스템(Beosystem)은 콤포넌트 묶음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베오마스터, 베오그람, 베오코드를 조화시켜 함께 작동시킬 수 있게 묶어 놓은 것이다. 베오센터(Beocenter)는 원피스(one-piece) 오디오 시스템 제품이다. B&O는 한 때 리시버, 턴테이블, 카세트 덱 등을 조합시켜 놓은 베오센터라는 제품을 팔기도 하였다. 베오콤(Beocom)은 전화기 및 전화기 액세서리(자동응답기 등) 제품이다. 베오비전(Beovision)은 텔레비전 제품이다. 베오사운드(Beosound)은 오디오 기기 시스템을 일컫는다. 현재[편집] 1990년대 들어 뱅 & 올룹슨은 뱅 & 올룹슨 기기 전문점을 많이 열었다. 소매점을 통해 물건을 유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직접 물건을 파는 방식이었다. 미니 타입 오디오 시스템이 인기가 높아지자 오디오를 콤포넌트별로 파는 것을 중단하였다. 현재도 뱅 & 올룹슨은 그들 제품의 현대적인 디자인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오디오를 콤포넌트 별로 파는 것은 중단했지만, 하이 퍼포먼스 라우드스피커 제조 부문에 있어서아직 B&O는 시장의 주요 업체로 남아 있다. 주력 스피커인, 베오랩 5(BeoLab 5)는 디지털 신호 처리 기술을 이용해 스피커가 설치된 방의 특성에 맞게 주파수 응답을 조절한다. 중간 대역과 높은 주파수 대역 드라이버들은 웨이브가이드를 채택하였다. 중간에서 높은 대역의 주파수가 천장이나 바닥에 부딪혀서 반사되어 사용자에 귀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술은 1987년 Phönix Klangsäulen가 발명한 기존의 기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4] 현재도 뱅 & 올룹슨은 비표준 기기를 고집하는 면이 남아 있다. 홈 시어터 기기로서 많이 쓰이고 있는 THX 인증기기들과는 달리 THX를 지원하지 않는다. 오디오 기기를 넘어[편집] 소비자용 제품 외에도, 초정밀 알루미늄 제조 시설을 뱅 & 올룹슨은 갖추고 있다.[5] 뱅 & 올룹슨도 또한 알루미늄 소재를 그들 제품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99년 뱅 & 올룹슨과 Karsten Nielsen 박사가 모여, ICEpower A/S라는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는 클래스 D 앰플리파이어를 전문적으로 제조 개발하는 업체이다.[6] 클래스 D 앰플리파이어는, 클래스 A, AB, B 오디오 앰플리파이어에 비해 효율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들어, 뱅 & 올룹슨은 "A8" 이어폰을 성공시켰다. 이 이어폰은 앤더스 헤르만센이 디자인한 것이었다. 애플의 아이팟이 유행하던 때, 애플 스토어에서 팔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여러 휴대전화 제조 업체와 손잡기도 하였다. 필립스, 에릭슨과 협력하기도 하였다. 삼성전자와 합작해 세린(Serene)이라는 휴대폰을 개발하였다. 2007년 12월에는 세레나타라는 휴대폰을 개발하였다. [7] 또한, 아우디의 최고급 승용차인 A8 및 아우디 S8의 전용오디오를 개발하였다. 아우디 A4, A5, A6, Q7, A8, R8 모델에 오디오를 공급하고 있다. [8] 도전에 직면[편집] 최근들어 MP3 플레이어들이 뱅 & 올룹슨을 어렵게 하고 있다. 뱅 & 올룹슨은 뒤늦게 베오사운드 2라는 플레이어를 갖고 MP3 플레이어 시장에 뛰어들었다.[9] 저명한 리뷰인 CNET 리뷰는 이 기기에 10점 만점에 겨우 4.3점을 주었다. 매우 비싸고, DRM으로 보호된 WMA를 플레이하지 못하고, LCD도 없으며, 내장 메모리도 없는 최악의 기기라고 평했다. 대신 음질은 꽤 괜찮으며, 케이스가 튼튼하다고 밝혔다. 같이 보기[편집] 베오사운드 2 베오사운드 4 베오링크 베오포트 각주[편집] ↑ “Bang & Olufsen A/S Koncernen; Årsrapport 2006/07” (PDF) (덴마크어). 2008년 4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2월 18일에 확인함.  ↑ Jacob Jensen Web Site ↑ “보관 된 사본” (PDF). 2008년 4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Phönix Klangsäulen”. 2008년 6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B&O webpage on aluminium”. 2006년 8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ICEpower partnership”. 2008년 6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탁상훈 기자 (2007년 6월 7일). “소렌슨 ‘뱅앤올룹슨’ CEO 인터뷰”. 《조선일보》 (chosun.com). 2007년 6월 17일에 확인함.  ↑ Bang & Olufsen (2008년 6월 13일). “Audi A8/S8”. 2008년 6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13일에 확인함.  ↑ CNET Review 외부 링크[편집] (영어) 공식 웹사이트 (영어) 베오월드 - B&O에 대한 비공식 웹사이트. (영어) 토거슨 - 한 수집가의 웹사이트. 수십 년간의 B&O 제품들을 다루고 있다. (영어) 베오센트럴 - B&O 장비에 대한 사진과 설명.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뱅_앤_올룹슨&oldid=24281229" 분류: 1925년 설립덴마크의 기업덴마크의 브랜드음향기기 제조 기업덴마크의 다국적 기업숨은 분류: CS1 - 덴마크어 인용 (da)오래된 그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덴마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08: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11년 레바논 반정부 시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1년 레바논 반정부 시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레바논 개혁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1년 레바논 반정부 시위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은 시위이다. 주요 시위는 레바논 정치의 신조주의에 반하는 새로운 정치개혁을 요구한다. 목차 1 배경 1.1 정치적 체계 1.2 2011 신정부 2 각주 배경[편집] 정치적 체계[편집] 레바논은 의회를 구성한 공화국으로 신조주의에 입각하여 각 종교 지파의 대표자가 비례 대표로서 고위직을 모두 차지하는 형식을 취한다. 레바논 헌법은 정부에 대한 신임 권리를 국민에 인정하지만 1970년 중반부터 1992년 선거까지 레바논 내전으로 해당 권리를 시민들이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다. 헌법에 따르면 직접 선거는 의회 구성원 선거 목적으로 4년 만에 열려야 하며 2009년 선거가 가장 최근의 것이다.[1] 신임 정부 수립에는 6개월이 걸렸으며 의회는 임명되면 대통령을 6년 임기로, 즉 6년 마다 새로선출해 임명한다. 이 때 임명된 대통령은 연임이 애초에 불가능하며 2008년 레바논 선거에서 대통령과 의회는 후에 총리를 임명하며 3월 8일 연합이거나 3월 14일 연맹 둘 중의 하나에서 선출돼야 한다. 이는 진보사회당이 교섭권 상실로 3월 8일 연합 측에 기운 행태를 보이면서 굳어진 것이다. 레바논의 종교는 수니, 시아파 이슬람, 기독교로 나뉜다. 더군다나 통계치는 1932년 이후 산출된 적도 없어서 국가의 일촉즉발 상황에 대해서 예지하기도 힘들며 추산치만 내놓고 있는 상태다.[2] 2011 신정부[편집] 2011년 1월 12일 정부는 에너지 장관 게브란 바실의 발표에 따라 실각한다. 헤즈볼라가 더 이상 숨지 않고 활동을 재개할 것이며 전 국무총리 라픽 하리리의 암살에 대해 헤즈볼라에 대해 기소장을 지속적으로 요구할 시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경고를 지속적으로 보내왔다. 이에 따라 에너지부 장관과 10명의 모든 야당 장관이 사퇴하면서 신정부에 큰 혼란이 야기된다.[3] 예비 기소장은 1월 17일 예상대로 발부됐으며[4]) 대통령 미쉘 술레이만은 국무 장관에 아드나 사이드 후세인을 발탁했으나[5] 후에 사임하면서 총 11명의 장관 퇴임으로 정부가 파국에 치닫는다. 뉴욕타임스는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중재한 레바논 평화협상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불안이 더욱 촉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장관들의 사임은 하리리 총리의 피살 이후 설립된 레바논 특별재판소와의 협조 철회 논의를 위한 긴급 내각 수립에 총리가 거부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됐다.[6][7] 헌법상 새 정부 출범의 열쇠를 쥐고 있는 술레이만은 사임을 수용하면서 헌법 69항에 의거해 총 정부 내각의 1/3이상이 사퇴할 경우 남은 정부 구성원은 임시정부로서 역할하며 새 정부 출범 때까지 기능한다는 조항을 말했다.[8] 6월 13일 신정부가 발표돼 출범한 상태다. 각주[편집] ↑ Pro-Western coalition declares victory in Lebanon - The Globe and Mail ↑ http://www.country-studies.com/lebanon/population.html ↑ [http://www.bbc.co.uk/news/world-middle-east-12170608 Hezbollah and allies topple Lebanese unity government 2011-01-02 ↑ Hariri indictments set for Monday - Middle East - Al Jazeera English ↑ [http://www.nytimes.com/2011/01/13/world/middleeast/13lebanon.html?pagewanted=1&_r=1 Resignations Deepen Crisis for Lebanon 2011-01-02 ↑ Lebanese government falls 2011-01-14 ↑ US welcomes Hariri indictment - Middle East - Al Jazeera English ↑ "http://www.almanar.com.lb/newssite/NewsDetails.aspx?id=169956&language=en[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vdeh아랍의 봄“인민은 정권 타도를 원한다”국가별 사건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혁명 · 과도기) 이라크 이란의 쿠제스탄 이스라엘의 국경 요르단 쿠웨이트 레바논 리비아 (내전 · 과도기) 모리타니 모로코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시리아 튀니지 서사하라 예멘 집단바레인 알 웨파크 2월 14일 연합 이집트 4월 6일 운동 키파야 무슬림 형제단 변혁을 위한 전국 협의회 국민민주당 혁명적 사회주의자 리비아 인민해방군 국가과도위원회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운전 운동 CDHRAP 개발과 변화를 위한 사회 시리아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지역 사령부 · 국가 사령부) 자유 시리아군 시리아 혁명위원회 시리아 국가 위원회 전국민주혁명협조위원회 튀니지 입헌민주연합 서사하라 폴리사리오 전선 예멘 예멘 부족 연합 알이슬라 하시드 주요 인물알제리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바레인 하마드 빈 이사 알할리파 하산 무샤이마 알리 살만 알리 자와드 알셰이크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우마르 술레이만 와엘 고님 칼레드 모하메드 사이드 기기 이브라힘 에삼 샤라프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요르단 압둘라 2세 마루프 알바히트 사미르 리파이 리비아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이프 이슬람 카다피 무스타파 압둘 잘릴 마무드 지브릴 모하메드 나부스 모로코 무함마드 6세 아바스 엘파시 사우디아라비아 할레드 알조하니 마날 알샤리프 수단 하산 알투라비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부르한 갈리운 함지 알리 알하티브 튀니지 제인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무함마드 부아지지 아랍에미리트 UAE Five 예멘 알리 압둘라 살레 압드 라부 만수르 알하디 타우왁쿨 카르만 압둘 마지드 알진다니 알리 모흐센 알아흐마르 사디크 알아흐마르 영향점거 운동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부르키나파소 크로아티아 지부티 조지아 그리스 인도 이란 이라크 쿠르디스탄 몰디브 멕시코 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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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레바논 반정부 시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1년 레바논 반정부 시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레바논 개혁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1년 레바논 반정부 시위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은 시위이다. 주요 시위는 레바논 정치의 신조주의에 반하는 새로운 정치개혁을 요구한다. 목차 1 배경 1.1 정치적 체계 1.2 2011 신정부 2 각주 배경[편집] 정치적 체계[편집] 레바논은 의회를 구성한 공화국으로 신조주의에 입각하여 각 종교 지파의 대표자가 비례 대표로서 고위직을 모두 차지하는 형식을 취한다. 레바논 헌법은 정부에 대한 신임 권리를 국민에 인정하지만 1970년 중반부터 1992년 선거까지 레바논 내전으로 해당 권리를 시민들이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다. 헌법에 따르면 직접 선거는 의회 구성원 선거 목적으로 4년 만에 열려야 하며 2009년 선거가 가장 최근의 것이다.[1] 신임 정부 수립에는 6개월이 걸렸으며 의회는 임명되면 대통령을 6년 임기로, 즉 6년 마다 새로선출해 임명한다. 이 때 임명된 대통령은 연임이 애초에 불가능하며 2008년 레바논 선거에서 대통령과 의회는 후에 총리를 임명하며 3월 8일 연합이거나 3월 14일 연맹 둘 중의 하나에서 선출돼야 한다. 이는 진보사회당이 교섭권 상실로 3월 8일 연합 측에 기운 행태를 보이면서 굳어진 것이다. 레바논의 종교는 수니, 시아파 이슬람, 기독교로 나뉜다. 더군다나 통계치는 1932년 이후 산출된 적도 없어서 국가의 일촉즉발 상황에 대해서 예지하기도 힘들며 추산치만 내놓고 있는 상태다.[2] 2011 신정부[편집] 2011년 1월 12일 정부는 에너지 장관 게브란 바실의 발표에 따라 실각한다. 헤즈볼라가 더 이상 숨지 않고 활동을 재개할 것이며 전 국무총리 라픽 하리리의 암살에 대해 헤즈볼라에 대해 기소장을 지속적으로 요구할 시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경고를 지속적으로 보내왔다. 이에 따라 에너지부 장관과 10명의 모든 야당 장관이 사퇴하면서 신정부에 큰 혼란이 야기된다.[3] 예비 기소장은 1월 17일 예상대로 발부됐으며[4]) 대통령 미쉘 술레이만은 국무 장관에 아드나 사이드 후세인을 발탁했으나[5] 후에 사임하면서 총 11명의 장관 퇴임으로 정부가 파국에 치닫는다. 뉴욕타임스는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중재한 레바논 평화협상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불안이 더욱 촉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장관들의 사임은 하리리 총리의 피살 이후 설립된 레바논 특별재판소와의 협조 철회 논의를 위한 긴급 내각 수립에 총리가 거부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됐다.[6][7] 헌법상 새 정부 출범의 열쇠를 쥐고 있는 술레이만은 사임을 수용하면서 헌법 69항에 의거해 총 정부 내각의 1/3이상이 사퇴할 경우 남은 정부 구성원은 임시정부로서 역할하며 새 정부 출범 때까지 기능한다는 조항을 말했다.[8] 6월 13일 신정부가 발표돼 출범한 상태다. 각주[편집] ↑ Pro-Western coalition declares victory in Lebanon - The Globe and Mail ↑ http://www.country-studies.com/lebanon/population.html ↑ [http://www.bbc.co.uk/news/world-middle-east-12170608 Hezbollah and allies topple Lebanese unity government 2011-01-02 ↑ Hariri indictments set for Monday - Middle East - Al Jazeera English ↑ [http://www.nytimes.com/2011/01/13/world/middleeast/13lebanon.html?pagewanted=1&_r=1 Resignations Deepen Crisis for Lebanon 2011-01-02 ↑ Lebanese government falls 2011-01-14 ↑ US welcomes Hariri indictment - Middle East - Al Jazeera English ↑ "http://www.almanar.com.lb/newssite/NewsDetails.aspx?id=169956&language=en[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vdeh아랍의 봄“인민은 정권 타도를 원한다”국가별 사건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혁명 · 과도기) 이라크 이란의 쿠제스탄 이스라엘의 국경 요르단 쿠웨이트 레바논 리비아 (내전 · 과도기) 모리타니 모로코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시리아 튀니지 서사하라 예멘 집단바레인 알 웨파크 2월 14일 연합 이집트 4월 6일 운동 키파야 무슬림 형제단 변혁을 위한 전국 협의회 국민민주당 혁명적 사회주의자 리비아 인민해방군 국가과도위원회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운전 운동 CDHRAP 개발과 변화를 위한 사회 시리아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지역 사령부 · 국가 사령부) 자유 시리아군 시리아 혁명위원회 시리아 국가 위원회 전국민주혁명협조위원회 튀니지 입헌민주연합 서사하라 폴리사리오 전선 예멘 예멘 부족 연합 알이슬라 하시드 주요 인물알제리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바레인 하마드 빈 이사 알할리파 하산 무샤이마 알리 살만 알리 자와드 알셰이크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우마르 술레이만 와엘 고님 칼레드 모하메드 사이드 기기 이브라힘 에삼 샤라프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요르단 압둘라 2세 마루프 알바히트 사미르 리파이 리비아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이프 이슬람 카다피 무스타파 압둘 잘릴 마무드 지브릴 모하메드 나부스 모로코 무함마드 6세 아바스 엘파시 사우디아라비아 할레드 알조하니 마날 알샤리프 수단 하산 알투라비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부르한 갈리운 함지 알리 알하티브 튀니지 제인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무함마드 부아지지 아랍에미리트 UAE Five 예멘 알리 압둘라 살레 압드 라부 만수르 알하디 타우왁쿨 카르만 압둘 마지드 알진다니 알리 모흐센 알아흐마르 사디크 알아흐마르 영향점거 운동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부르키나파소 크로아티아 지부티 조지아 그리스 인도 이란 이라크 쿠르디스탄 몰디브 멕시코 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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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디모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디모인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디모인 주도 Des Moines 시기 디모인북위 41° 35′ 27″ 서경 93° 37′ 15″ / 북위 41.59083° 서경 93.62083°  / 41.59083; -93.62083좌표: 북위 41° 35′ 27″ 서경 93° 37′ 15″ / 북위 41.59083° 서경 93.62083°  / 41.59083; -93.62083 행정 나라 미국 행정구역 아이오와주 자치구 포크 군, 워런 군 역사 설립 1843 인구 인구 2,010 명 (215,472년) 인구밀도 978.0 명/km2 광역인구 634,725 명 지리 면적 213.93 km2 세부면적 233.3 km2 해발 291 m 기타 시간대 UTC-6UTC-5 (서머) 우편번호 50301-50340-50310 지역번호 515 http://www.dmgov.org/ 디모인(Des Moines)은 미국 아이오와주 중부에 있는 아이오와 주의 주도이며, 포크 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워런 군까지 확장되는 작은 군으로[1], 1851년 9월 22일에 포트 디모인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고, 1857년에 디모인으로 줄였다.[2] 도시의 이름은 디모인 강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강의 이름은 이 지역에 인디언들이 흙무더기를 쌓고 강을 모앙고나(흙무더기의 강)이라고 불렀던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수도사들이 강 어귀 근처에 살고 있었던 후에 무아느(프랑스어로 수도사의 뜻)란 뜻에서 이름이 나온 것으로 믿는 편이다. 황금 천장의 주 의사당이 동쪽으로부터 도시의 다운타운을 바라보고 있고, 다운타운에는 801 그랜드라고 불리는 아이오와 주에서 가장 큰 건물의 대지이다. 그 건물은 192 미터이다. 도시의 주요 건물로는 디모인 미술관, 관청, 집회소, 아이오와 과학 센터, 주립 역사 박물관, 주지사의 저택 테라스 힐과 농업의 역사를 설명하는 운영 농장인 생활 역사 농장 등이 있다. 매년 8월마다 열리는 아이오와 주 품평회가 많은 손님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디모인의 교육 기관으로는 드레이크 대학교, 디모인 대학교, 그랜드 뷰 칼리지 등이 있다. 목차 1 경제 2 역사 3 지리 3.1 기후 4 자매 도시 5 각주 6 외부 링크 경제[편집] 디모인은 아이오와 주의 주요 상업의 중심지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보험업의 중심지들 중의 하나이다. 50개가 넘는 보험회사들이 디모인에 본부를 가지고 있다. 주정부와 의료산업은 도시의 다른 큰 고용주들이다. 도시 지역에는 약 400개의 공장들이 있다. 식품 가공업이 제일 큰 산업이며, 금속, 농기구, 플라스틱과 고무 제품 등을 생산한다. 많은 수출입 회사들이 운영되기도 한다. 역사[편집] 백인 정착자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소크와 폭스 인디언들이 이 지역에 살고 있었다. 1843년 미국 육군이 현재 도시가 뻗어있는 곳에 주둔지를 설립하였다. 군대는 인디언들로부터 사들인 땅에 포트 디모인을 지었다. 1845년에 인디언들이 그들의 지방 권리를 포기하였다. 1853년 요새를 둘러싼 정착은 포트 디모인을 읍으로 합병하였다. 1857년에는 현재와 같은 디모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같은 해, 아이오와 주 정부는 주 안에서 중앙에 자리잡은 지역을 주도로 삼는 데, 디모인을 선택하였다. 그 후에 디모인은 번창하였고, 인구가 1860년 3,965명에서 1890년 50,093명으로 늘었다. 디모인은 후에 군사 훈련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중에 도시에는 국립 위병 기지가 있었다. 1902년 디모인 요새라고 불리는 기병지가 설립되었다. 그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훈련 기지로 쓰이기도 하였다. 1942년에는 여성 육군 부대가 설립되었고, 디모인 요새가 2차 대전이 끝날 즈음에 그 훈련지였다. 디모인의 인구는 1960년대에 많은 주민들이 외곽으로 빠져나가 감소하였다. 다운타운 지역의 비즈니스들이 고통을 겪었다. 1980년대 초반에 디모인은 도시의 중앙 비즈니스 구역을 재수리하였다. 주요 건설 프로젝트는 새로운 사무실 초고층 빌딩, 쇼핑 몰, 주택 단지, 유흥과 집회의 장소 등을 포함하였다. 수많은 주요 건물을 연결하는 데, 유리로 둘러싸인 높은 통로인 스카이워크가 지어지기도 하였다. 지리[편집] 디모인은 북위 41도 35 분 27초 서경 93도 37분 15초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는 아이오와주의 중심부에 위치한 시카고에서 서쪽으로 약 540km, 미니애폴리스 - 세인트폴에서 남쪽으로 약 390km, 캔자스 시티에서 북쪽으로 약 310km, 오마하에서 동쪽으로 약 220km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의 고도는 291m이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디모인 시는 2000년 기준으로 총면적 200.1km²였다. 그 중 196.3km²이 육지이고, 3.8km²가 수역이었다. 수역은 총 면적의 1.88%를 차지하고 있었다. 2005년 11월, 디모인 시는 북동부, 남동부와 남부에 소한 미정 지역을 합병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합병은 2009년 6월 26일에 이뤄졌고, 그 결과 시역 면적은 약 20.9km² 넓어졌으며, 인구는 868명이 증가했다. 디모인은 시역 대부분이 속한 포크 카운티를 중심으로 워렌 카운티, 오클라호마 카운티, 댈러스 카운티, 그리고 소설 ·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알려진 매디슨 카운티의 5군으로 구성된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디모인 광역 도시권은 디모인 도시권 스토리 카운티, 재스퍼 카운티 및 분 카운티를 추가한 8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후[편집] 디모인의 기후 도표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25   -10 -1     33   -7 2     58   -1 9     99   5 17     119   11 22     125   17 28     114   19 30     104   18 29     79   13 25     66   6 17     56   -1 9     36   -8 1 기온 단위: 섭씨(℃) / 강수량 단위: 밀리미터(mm)출처: Weatherbase.com 디모인의 기후는 무더운 여름과 건조하고 추위가 심한 겨울이 온다는 특징이 있으며, 기온의 연교차가 큰 내륙형 기후이다. 여름날에는 종종 섭씨 30도 이상, 섭씨 35도에 달할 수 있다. 봄과 여름에는 습도가 높고, 오후가 되면 뇌우가 발생하기 쉽다. 가을은 비교적 쾌적한 계절이며, 단풍도 볼 수 있다. 겨울에는 영하까지 내려가는 날이 계속되고, 영하 15도를 밑돌기도 한다. 연간 강수량은 910mm 정도이지만, 봄 · 여름의 월평균 강수량은 겨울의 약 4-5배이다. 강설은 11월부터 4월까지 볼 수 있으며, 특히 12월에서 3월 사이에 강설량은 월간 13-22cm로, 연간 90cm에 달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디모인은 냉대 습윤 기후(Dfa)에 속한다. Des Moines International Airport, Iowa (1981–2010 normals,[a] extremes 1878–present[b])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F (°C) 67 (19) 78 (26) 91 (33) 93 (34) 105 (41) 103 (39) 110 (43) 110 (43) 101 (38) 95 (35) 82 (28) 69 (21) 110 (43) 평균최대기온 °F (°C) 53.1 (11.7) 59.1 (15.1) 75.0 (23.9) 84.0 (28.9) 87.6 (30.9) 93.2 (34) 96.3 (35.7) 95.2 (35.1) 90.4 (32.4) 82.4 (28) 69.1 (20.6) 55.8 (13.2) 97.8 (36.6) 평균최고기온 °F (°C) 31.0 (−0.6) 36.1 (2.3) 49.0 (9.4) 62.3 (16.8) 72.4 (22.4) 81.6 (27.6) 85.7 (29.8) 83.8 (28.8) 76.1 (24.5) 63.1 (17.3) 47.9 (8.8) 34.0 (1.1) 60.4 (15.8) 평균최저기온 °F (°C) 14.3 (−9.8) 18.8 (−7.3) 29.7 (−1.3) 41.1 (5.1) 52.2 (11.2) 62.0 (16.7) 66.8 (19.3) 64.8 (18.2) 55.2 (12.9) 43.0 (6.1) 30.5 (−0.8) 18.0 (−7.8) 41.5 (5.3) 평균최소기온 °F (°C) −7.8 (−22.1) −4.1 (−20.1) 9.5 (−12.5) 23.7 (−4.6) 37.6 (3.1) 49.1 (9.5) 56.3 (13.5) 53.5 (11.9) 38.0 (3.3) 26.2 (−3.2) 12.4 (−10.9) −3.6 (−19.8) −12.8 (−24.9) 최저기온기록 °F (°C) −30 (−34) −26 (−32) −22 (−30) 9 (−13) 26 (−3) 37 (3) 47 (8) 40 (4) 26 (−3) 7 (−14) −10 (−23) −22 (−30) −30 (−34) 평균 강수량 인치 (mm) 1.00 (25) 1.28 (33) 2.30 (58) 3.86 (98) 4.74 (120) 4.94 (125) 4.47 (114) 4.13 (105) 3.05 (77) 2.64 (67) 2.19 (56) 1.42 (36) 36.02 (915) 평균 강설량 인치 (cm) 8.5 (22) 7.9 (20) 5.2 (13) 1.8 (5) 0 (0) 0 (0) 0 (0) 0 (0) 0 (0) 0.4 (1) 2.5 (6) 9.0 (23) 35.3 (90) 평균강수일수 (≥ 0.01 in) 7.5 7.8 9.7 11.2 12.5 11.5 10.1 9.1 8.4 8.9 8.3 8.4 113.4 평균강설일수 (≥ 0.1 in) 6.5 5.6 3.2 1.0 0 0 0 0 0 0.3 2.0 6.2 24.8 평균 상대 습도 (%) 71.0 71.3 67.9 63.2 63.0 64.8 67.7 70.0 70.9 66.5 71.0 74.6 68.5 평균 월간 일조시간 157.7 163.3 206.0 222.2 276.0 312.1 337.8 297.9 239.8 210.0 138.5 129.2 2,690.5 가능 일조율 53 55 56 56 61 69 73 70 64 61 47 45 60 출처: NOAA (relative humidity and sun 1961−1990)[3][4][5] 자매 도시[편집] 일본 고후 시 (1958년) 멕시코 나우칼판 (1972년) 프랑스 생테티엔 (1985년) 중국 스자좡 시 (1985년) 러시아 스타브로폴 (1992년) 이탈리아 카탄자로 주 (2006년) 각주[편집] ↑ “Subcounty population estimates: Iowa 2000–2006”. 미국 인구조사국, Population Division. 2007년 6월 28일. 2008년 3월 5일에 원본 문서 (CSV)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8일에 확인함.  ↑ City of Des Moines. “City of Des Moines Action Center: City History”. 2006년 12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6년 12월 20일에 확인함.  ↑ “NowData - NOAA Online Weather Data”. 미국 해양대기청. 2012년 1월 6일에 확인함.  ↑ “Station Name: IA DES MOINES INTL AP”.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2016년 9월 12일에 확인함.  ↑ “WMO Climate Normals for DES MOINES/MUNICIPAL, IA 1961–1990”.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2014년 3월 10일에 확인함.  내용주 ↑ Mean monthly maxima and minima (i.e. the expected highest and lowest temperature readings at any point during the year or given month) calculated based on data at said location from 1981 to 2010. ↑ Official records for Des Moines kept August 1878 to August 1939 at downtown and at Des Moines Int'l since September 1939. For more information, see Threadex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Des Moines 위키문헌에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글 Des Moines의 본문이 있습니다. 위키여행에 이 글과관련된 기사가 있습니다. Des Moines 디모인 - 공식 웹사이트 Greater Des Moines Convention & Visitors Bureau The Des Moines Register Des Moines weather (영어) 디모인 - Curlie (DMOZ 기반) City Data Comprehensive Statistical Data and more about Des Moines, Iowa Des Moines Featured on NPR's vdeh 미국의 주도    네바다주 - 카슨시티 네브래스카주 - 링컨 노스다코타주 - 비즈마크 노스캐롤라이나주 - 롤리 뉴멕시코주 - 샌타페이 뉴욕주 - 올버니 뉴저지주 - 트렌턴 뉴햄프셔주 - 콩코드 델라웨어주 - 도버 로드아일랜드주 - 프로비던스 루이지애나주 - 배턴루지 매사추세츠주 - 보스턴 메릴랜드주 - 아나폴리스 메인주 - 오거스타 몬태나주 - 헬레나 미네소타주 - 세인트폴 미시간주 - 랜싱 미시시피주 - 잭슨 미주리주 - 제퍼슨시티 버지니아주 - 리치먼드 버몬트주 - 몬트필리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 컬럼비아 사우스다코타주 - 피어 아이다호주 - 보이시 아이오와주 - 디모인 아칸소주 - 리틀록 알래스카주 - 주노 애리조나주 - 피닉스 앨라배마주 - 몽고메리 오리건주 - 세일럼 오클라호마주 - 오클라호마시티 오하이오주 - 콜럼버스 와이오밍주 - 샤이엔 워싱턴주 - 올림피아 웨스트버지니아주 - 찰스턴 위스콘신주 - 매디슨 유타주 - 솔트레이크시티 인디애나주 - 인디애나폴리스 일리노이주 - 스프링필드 조지아주 - 애틀랜타 캔자스주 - 토피카 캘리포니아주 - 새크라멘토 켄터키주 - 프랭크퍼트 코네티컷주 - 하트퍼드 콜로라도주- 덴버 테네시주 - 내슈빌 텍사스주 - 오스틴 펜실베이니아주 - 해리스버그 플로리다주 - 탤러해시 하와이주 - 호놀룰루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39010753 LCCN: n79081388 GND: 4294593-8 BNF: cb12036743q (데이터) NKC: xx011719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디모인&oldid=24373142" 분류: 디모인아이오와주의 도시미국의 주도아이오와주의 군청 소재지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같은 위키공용분류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Aragoné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islamaBrezhonegBosanskiCatalàНохчийнCebuanoCorsu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Estremeñu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eilgeGàidhlig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KurdîKernowekКыргызчаLatinaLigureLumbaart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मराठीКырык марыBahasa MelayuMirandés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Diné bizaadOccitanИронKapampanganपालि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संस्कृतम्Sardu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Ślůnski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Volapük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4일 (화) 07: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국민대표회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민대표회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중국 상하이 인민정부대례당에서 개최된 한국의 독립운동 계파간의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 모인 국내외 단체의 대표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목차 1 배경 1.1 임시정부를 둘러싼 갈등 1.2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 2 경과 2.1 국민대표회준비회 2.2 국민대표회의 개최 2.3 국민대표회의 내 갈등 2.3.1 창조파와 개조파 2.3.2 조파의 탈퇴 3 국민대표회의 폐회 4 각주 배경[편집] 임시정부를 둘러싼 갈등[편집]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념과 출신지역에 따른 파벌로 인해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계, 무장독립론을 주장한 박용만계, 실력양성론을 내세운 안창호계로 대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또한 지역색에 따라 기호파와 서북파 등으로도 나뉘었다. 게다가 임시정부 자체의 대표성 또한 문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의 한성정부의 '승인'·'개조' 문제는 이후 임시정부의 분열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1]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동휘·박용만·문창범·안창호 등 각지의 명망가들을 각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채호·김숙·박용만등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로,문창범은 한성정부의 '승인'·'개조' 문제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임시정부는 민족운동세력을 전부 포함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하던 이동휘가 1921년 탈퇴하고 뒤이어 안창호·남형우·김규식등도 탈퇴하여 임시정부는 사실상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2]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편집] 국민대표준비위원회 위원 명단[3] 이름 생몰년 본적 소속 대표 준비회직책 세력별 강구우 1885- 함북 북경군사통일회 북간도 특파원 고려공산당(상) 김위택 1883- 평북 천진기성회 함경 흥사단 김철 1886-1934 전남 상해기성회 전남 회계 임정 나용균 1895-1984 전북 상해기성회 전북 서기 임시의정원 남공선 1888-1924 함남 북경군사통일회 亞頒 대한국민의회 남형우 1875-1943 경북 상해기성회 경상 위원장 대한국민회,임정 송병조 1877-1942 평북 상해기성회 평안 조사원 임시의정원,흥사단 신숙 1885-1967 경기 북경군사통일회 충청 원세훈 1887-1959 함남 상해기성회 함경 회계 대한국민의회,고려공산당(이) 이탁 1889-1983 평남 상해기성회 평안 조사위원 흥사단,임정 최대갑 함남 동녕현기성회 남만주 교통원 1921년 2월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독립운동가 15인이 1921년 2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이 격문에서는 무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무장투쟁세력을 포함한 통일적인 정부와 독립운동방향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4] 이에 대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을 정부패궤운동이라고 규정하고 반발하였다.[5] 한 편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던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 대표들은 1920년 9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한다. 여기에 참가한 하와이 독립단 대표 권성근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폭로하고, 이로써 군사통일회는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하게 된다. 곧이어 이들은 임시정부 불신임에 따른 제반문제를 논의하고 국내외의 독립군을 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5명의 준비위원을 뽑았다. 이어 1921년 5월 6일에는 만주지역의 김동삼·이탁·여준등이 액목현(額穆縣)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개혁안>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한다. 이렇게 국외 각지에서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개조하자는 요구가 이어지자 상하이에서도 여운형·안창호 등에 의해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가 제기된 후 국민대표회의 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토대로 1921년 8월 '국민대표회준비회'가 성립되었다.[4] 경과[편집] 국민대표회준비회[편집] 그러나 국민대표회준비회의 활동은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옹호파의 반대, 대회경비에 따른 자금난 등으로 인해 부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은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두 회의 개최 기간 중에는 일시 중단되었다.[6] 그러나 두 국제회의에서 예상과 달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결국 국민대표회준비회는 1922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개최[편집] 임시의장 안창호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준비회는 소집 선언서를 발표하고 9월 1일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이후 각처에서 국민대표회의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일에 개막하였다. 여기에는 국내·상하이·만주일대·북경·간도일대·노령·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최종적으로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었다.[7] 먼저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 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8] 국민대표회 본회의에서는 먼저 주비위원장 남형우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곧이어 회의를 진행할 의장단 선출에 들어갔다. 의장단의 구성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독립운동단체들의 지역적 기반을 고려하여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윤해·안창호 등을 뽑았다. 본회의는 회의규정 및 일정을 마련하고 독립운동방침을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군사·재무·외교·생계·교육·노동 등 6개 분과를 두었다. 회의는 분과를 중심으로 제반 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시국문제, 즉 임시정부에 관한 의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의견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9] 국민대표회의 내 갈등[편집] 창조파와 개조파[편집] 시국문제 입장별 대표수[10] 그룹명칭 대표총수 그중 공산주의자 향후참가거부 그중 공산주의자 개조파 57 23 57 23 창조파 32 13 0 0 중립파 7 7 7 7 대회 중간 소환 19 6 19 6 대회분열 뒤 불참 4 2 4 2 국민위원회 조직 때 탈퇴 6 3 6 3 총계 125 54 93 41 1923년 3월 9일 본회의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조 제의안(시국문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회의는 크게 창조파(創造派), 개조파(改造派)로 분열되었다. 먼저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자는 입장으로 북경과 노령에 기반을 둔 신채호·문창범·윤해 등이 중심이었다. 무장독립론을 주장했던 이동휘도 개조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6] 반면 노선의 일치보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모인 개조파의 안창호•여운형·김동삼 등은 상하이와 만주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전 민족적 운동인 3.1운동의 결과물이며 현재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성립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 왔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1] 조파의 탈퇴[편집] 창조파는 1923년 3월 21일 의장이 개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본회의에서 탈퇴하였다. 창조파의 탈퇴로 본회의 개최가 불가능해지자 28일부터는 창조파와 개조파가 참여하는 비공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시국문제 토론을 유보할 것과 개조파인 안창호, 김철수 등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도록 설득할 것을 합의되었다. 4월 11일부터 다시 정식회의가 개회되었으나 '개조'와 '창조'를 둘러싼 시국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 때 서로 군정서군과 한족회는 각각 대표소환을 지시하여 당시 만주대표로 활동하던 개조파의 김동삼·배천택·김형식·이진산 등이 결국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했다(1923년 5월 15일).[12] 국민대표회의 폐회[편집] 국민대표회의 개조파 성명서 이후 6월 3일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새로운 기관을 세워 국호를 '한(韓)'으로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창조파는 6월 7일 새로운 헌법 제정과 함께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 폐회를 선언하였다.[13]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이에 반대하여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일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중심의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어 새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대표회의 내에는 창조파와 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서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하던 인사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고, 이후 회의는 6개월간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인 안건을 처리하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6]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임시정부는 자신의 법통성을 부인하고 새로운 통일기관의 결성을 지지하여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앞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려 시도했던 국민대표회의의 목표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각주[편집] ↑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24쪽 ↑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25쪽 ↑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47쪽 ↑ 가 나 강만길 외 173명, 국민대표회 개최과정, «한국사», 한길사 ↑ 곽지연, 국민대표회 반대세력 연구 (1921-1922),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8, 6쪽 ↑ 가 나 다 Hdic http://hdic.kr/wiki3/index.php/국민_대표_회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윤대원,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조파의 정국쇄신운동과 국무령제의 성립, «역사연구 제7호», 76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web.dll?TRX?str=13892&ty=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강만길 외 173명, 창조-개조파의 대립, «한국사», 한길사 ↑ 이동휘, 제3공산주의인터네셔널 집행위원회에 보내는 보고, 1923;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56쪽 재인용 ↑ 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0쪽 ↑ 강만길 외 173명, 국민대표회의 결렬, «한국사», 한길사 ↑ 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7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국민대표회의&oldid=24283028" 분류: 한국의 독립운동대한민국 임시 정부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13: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국민대표회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민대표회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중국 상하이 인민정부대례당에서 개최된 한국의 독립운동 계파간의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 모인 국내외 단체의 대표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목차 1 배경 1.1 임시정부를 둘러싼 갈등 1.2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 2 경과 2.1 국민대표회준비회 2.2 국민대표회의 개최 2.3 국민대표회의 내 갈등 2.3.1 창조파와 개조파 2.3.2 조파의 탈퇴 3 국민대표회의 폐회 4 각주 배경[편집] 임시정부를 둘러싼 갈등[편집]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념과 출신지역에 따른 파벌로 인해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계, 무장독립론을 주장한 박용만계, 실력양성론을 내세운 안창호계로 대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또한 지역색에 따라 기호파와 서북파 등으로도 나뉘었다. 게다가 임시정부 자체의 대표성 또한 문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의 한성정부의 '승인'·'개조' 문제는 이후 임시정부의 분열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1]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동휘·박용만·문창범·안창호 등 각지의 명망가들을 각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채호·김숙·박용만등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로,문창범은 한성정부의 '승인'·'개조' 문제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임시정부는 민족운동세력을 전부 포함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하던 이동휘가 1921년 탈퇴하고 뒤이어 안창호·남형우·김규식등도 탈퇴하여 임시정부는 사실상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2]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편집] 국민대표준비위원회 위원 명단[3] 이름 생몰년 본적 소속 대표 준비회직책 세력별 강구우 1885- 함북 북경군사통일회 북간도 특파원 고려공산당(상) 김위택 1883- 평북 천진기성회 함경 흥사단 김철 1886-1934 전남 상해기성회 전남 회계 임정 나용균 1895-1984 전북 상해기성회 전북 서기 임시의정원 남공선 1888-1924 함남 북경군사통일회 亞頒 대한국민의회 남형우 1875-1943 경북 상해기성회 경상 위원장 대한국민회,임정 송병조 1877-1942 평북 상해기성회 평안 조사원 임시의정원,흥사단 신숙 1885-1967 경기 북경군사통일회 충청 원세훈 1887-1959 함남 상해기성회 함경 회계 대한국민의회,고려공산당(이) 이탁 1889-1983 평남 상해기성회 평안 조사위원 흥사단,임정 최대갑 함남 동녕현기성회 남만주 교통원 1921년 2월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독립운동가 15인이 1921년 2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이 격문에서는 무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무장투쟁세력을 포함한 통일적인 정부와 독립운동방향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4] 이에 대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을 정부패궤운동이라고 규정하고 반발하였다.[5] 한 편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던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 대표들은 1920년 9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한다. 여기에 참가한 하와이 독립단 대표 권성근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폭로하고, 이로써 군사통일회는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하게 된다. 곧이어 이들은 임시정부 불신임에 따른 제반문제를 논의하고 국내외의 독립군을 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5명의 준비위원을 뽑았다. 이어 1921년 5월 6일에는 만주지역의 김동삼·이탁·여준등이 액목현(額穆縣)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개혁안>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한다. 이렇게 국외 각지에서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개조하자는 요구가 이어지자 상하이에서도 여운형·안창호 등에 의해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가 제기된 후 국민대표회의 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토대로 1921년 8월 '국민대표회준비회'가 성립되었다.[4] 경과[편집] 국민대표회준비회[편집] 그러나 국민대표회준비회의 활동은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옹호파의 반대, 대회경비에 따른 자금난 등으로 인해 부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은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두 회의 개최 기간 중에는 일시 중단되었다.[6] 그러나 두 국제회의에서 예상과 달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결국 국민대표회준비회는 1922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개최[편집] 임시의장 안창호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준비회는 소집 선언서를 발표하고 9월 1일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이후 각처에서 국민대표회의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일에 개막하였다. 여기에는 국내·상하이·만주일대·북경·간도일대·노령·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최종적으로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었다.[7] 먼저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 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8] 국민대표회 본회의에서는 먼저 주비위원장 남형우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곧이어 회의를 진행할 의장단 선출에 들어갔다. 의장단의 구성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독립운동단체들의 지역적 기반을 고려하여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윤해·안창호 등을 뽑았다. 본회의는 회의규정 및 일정을 마련하고 독립운동방침을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군사·재무·외교·생계·교육·노동 등 6개 분과를 두었다. 회의는 분과를 중심으로 제반 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시국문제, 즉 임시정부에 관한 의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의견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9] 국민대표회의 내 갈등[편집] 창조파와 개조파[편집] 시국문제 입장별 대표수[10] 그룹명칭 대표총수 그중 공산주의자 향후참가거부 그중 공산주의자 개조파 57 23 57 23 창조파 32 13 0 0 중립파 7 7 7 7 대회 중간 소환 19 6 19 6 대회분열 뒤 불참 4 2 4 2 국민위원회 조직 때 탈퇴 6 3 6 3 총계 125 54 93 41 1923년 3월 9일 본회의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조 제의안(시국문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회의는 크게 창조파(創造派), 개조파(改造派)로 분열되었다. 먼저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자는 입장으로 북경과 노령에 기반을 둔 신채호·문창범·윤해 등이 중심이었다. 무장독립론을 주장했던 이동휘도 개조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6] 반면 노선의 일치보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모인 개조파의 안창호•여운형·김동삼 등은 상하이와 만주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전 민족적 운동인 3.1운동의 결과물이며 현재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성립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 왔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1] 조파의 탈퇴[편집] 창조파는 1923년 3월 21일 의장이 개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본회의에서 탈퇴하였다. 창조파의 탈퇴로 본회의 개최가 불가능해지자 28일부터는 창조파와 개조파가 참여하는 비공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시국문제 토론을 유보할 것과 개조파인 안창호, 김철수 등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도록 설득할 것을 합의되었다. 4월 11일부터 다시 정식회의가 개회되었으나 '개조'와 '창조'를 둘러싼 시국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 때 서로 군정서군과 한족회는 각각 대표소환을 지시하여 당시 만주대표로 활동하던 개조파의 김동삼·배천택·김형식·이진산 등이 결국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했다(1923년 5월 15일).[12] 국민대표회의 폐회[편집] 국민대표회의 개조파 성명서 이후 6월 3일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새로운 기관을 세워 국호를 '한(韓)'으로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창조파는 6월 7일 새로운 헌법 제정과 함께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 폐회를 선언하였다.[13]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이에 반대하여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일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중심의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어 새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대표회의 내에는 창조파와 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서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하던 인사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고, 이후 회의는 6개월간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인 안건을 처리하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6]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임시정부는 자신의 법통성을 부인하고 새로운 통일기관의 결성을 지지하여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앞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려 시도했던 국민대표회의의 목표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각주[편집] ↑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24쪽 ↑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25쪽 ↑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47쪽 ↑ 가 나 강만길 외 173명, 국민대표회 개최과정, «한국사», 한길사 ↑ 곽지연, 국민대표회 반대세력 연구 (1921-1922),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8, 6쪽 ↑ 가 나 다 Hdic http://hdic.kr/wiki3/index.php/국민_대표_회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윤대원,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조파의 정국쇄신운동과 국무령제의 성립, «역사연구 제7호», 76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web.dll?TRX?str=13892&ty=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강만길 외 173명, 창조-개조파의 대립, «한국사», 한길사 ↑ 이동휘, 제3공산주의인터네셔널 집행위원회에 보내는 보고, 1923;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56쪽 재인용 ↑ 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0쪽 ↑ 강만길 외 173명, 국민대표회의 결렬, «한국사», 한길사 ↑ 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7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국민대표회의&oldid=24283028" 분류: 한국의 독립운동대한민국 임시 정부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6일 (일) 13: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국의 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불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국의 불교 역사 삼국 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 고려 조선 현대 사상 이제합명 불국토 호국 일심 화쟁 무애 화엄 유식 정토 교관 정혜 무심 돈오점수 돈오돈수 인물 승랑 원광 자장 원효 의상 원측 제관 의천 지눌 나옹 휴정 경허 성철 숭산 종파 · 목록 5교9산 5교양종 선교양종 조계종 조동종 진각종 진언종 천태종 태고종 대장경 · 소의경전 고려대장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논서 · 주석서 간화결의 금강삼매 기신론소 직지심체 정혜결사 천태사교 해심밀경소 법계도 사찰 삼보사찰 오대총림 분황사 황룡사 v • d • e • h 한국의 불교는 기원후 4세기와 5세기경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동진 시대(317-420)와 남북조 시대(439-589)의 중국을 거쳐 들어온 종교로서 한국 민족과 더불어 자라온 중요한 종교 사상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160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 불교는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 특성을 지닌 종교 사상이 되었다. 목차 1 한국 불교의 특성 2 한국 불교의 역사 3 사찰 현황 3.1 대한민국 전통 사찰 현황 3.1.1 종단별 사찰 현황 4 한국의 불교 종단 5 같이 보기 6 각주 7 참고 문헌 한국 불교의 특성[원본 편집] 삼국 시대에 전래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불교는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 특성을 지닌 종교 사상이 되었는데, 그 특성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불교는 인도나 중국에서 분화되었던 사상을 융합하려는 통불교적 성격의 노력이 컸다. 이는 원효의 화쟁사상, 의천의 교관겸수, 지눌의 정혜쌍수의 사상 등에서 보듯이 교종에 속하더라도 선정 수행을 중시하고 선종에 속하더라도 교가의 공부를 경시하지 않았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둘째, 사상 체계를 요약하여 수행을 통해 자심(自心)을 밝히는 것을 중시하였다. 이는 원효의 일심사상, 신라말기와 고려초의 선종 구산, 고려 중기 이후의 오교 양종, 조선 시대의 선교 양종, 현대의 조계종의 출현, 성철의 돈오돈수 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잘 나타난다. 셋째, 위태로운 때를 당하면 불교에 의지하려는 생각이 깊었는데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사상적 명맥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호국불교의 사상은 자장의 불국토 사상,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립, 팔만대장경의 성립, 임진왜란 때의 승병의 활동 등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 불교의 역사[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 불교의 역사입니다. 한국의 불교는 1,600년 전인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사상으로서 한국민족과 자라온 중요한 종교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삼국시대에 육상 경로와 해상 경로를 통해 전해졌다. 기록 상 최초의 불교 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소수림왕 전 시기에 불교가 상당 부분 고구려 각처에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나라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율령체제 정비와 그 궤를 같이한다. 불교는 도입된 이래 삼(사)국의 주요 통치 이념이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정치 이념이었던 유교와 함께 가장 강력한 통치 이념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불교 교리의 실천을 망각하고 권력화하여 타락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몰락으로 이끈 경향이 짙었고, 조선 초의 배불 숭유 정책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불교의 영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김수온 등의 건의로 이를 부흥시켰다. 남북국시대 신라 말기에 중국의 선종이 전파되었으며 고려 시대 이후 한국 불교는 선종을 중심으로 한 통불교, 즉 선-교 양종의 통합 불교가 주축을 이루었다. 근세 이후 한국 불교의 주류는 선종이다. 해방이후 비구-대처분쟁이후 비구 종단은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정립되었고, 조계종은 현재까지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이다. 불교 대승 종단은 소의 경전을 중심으로 나눌 수 있다.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 v • d • e • h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한·중·일   천태종 · 정토종 · 일련종 밀교 · 진언종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범례:   = 상좌부 불교 전통   = 대승불교 전통   = 밀교·금강승 전통 사찰 현황[원본 편집] 불영사 전경 대한민국 전통 사찰 현황[원본 편집] 문화체육관광부의 2014년 12월 자료[1]에 따르면, 대한민국에는 944개의 전통 사찰(대다수의 법당이 도심에 있는 진각종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천태종도 구인사만 집계되어 있다.)이 있으며 종단별 현황은 다음과 같다. 종단별 사찰 현황[원본 편집] 종단 사찰수 대한불교조계종 754 (80%) 한국불교태고종 100 (11%) 재단법인 선학원 28 (3%) 대한불교법화종 18 (2%) 대한불교원효종 3 (1%) 기타 41 (4%) 한국의 불교 종단[원본 편집] 한국의 불교 종단은 2008년 현재 총 106개이며, 그 이상일 수도 있다. vdeh 대한민국의 불교 종단 국제불교 일화종 국제불교 조계종 대승불교 관음종 대승불교 달마종 대승불교 법왕종 대중불교 조계종 대한불교 관음종 대한불교 교화선종 대한불교 달마선종 대한불교 대각종 대한불교 대명종 대한불교 대승연화종 대한불교 대승종 대한불교 대원종 대한불교 대한일월종 대한불교 무량종 대한불교 미륵대종 대한불교 미륵선종 대한불교 미륵용화종 대한불교 미륵종 대한불교 미타종 대한불교 법륜종 대한불교 법사종 대한불교 법상종 대한불교 법안종 대한불교 법천종 대한불교 법화본종 대한불교 법화종 대한불교 보문종 대한불교 본원종 대한불교 불입종 대한불교 삼론종 대한불교 선교종 대한불교 선화종 대한불교 성도종 대한불교 연화불종 대한불교 연화종 대한불교 열반종 대한불교 영산법화종 대한불교 용화미륵종 대한불교 용화종 대한불교 원각선교종 대한불교 원융종 대한불교 원효종 대한불교 일광종 대한불교 일붕선교종 대한불교 일승종 대한불교 자비종 대한불교 정토종 대한불교 조계선종 대한불교 조계종 대한불교 조동종 대한불교 진각종 대한불교 진언종 대한불교 천지종 대한불교 천태종 대한불교 초심교종 대한불교 총화종 대한불교 태선종 대한불교 해동달마종 대한불교 해동종 대한불교 해동평화종 대한불교 해인종 대한불교 해탈종 대한불교 화엄종 대한불법 안명산 묘법사 대한신불교 천우종 대한연합불교 조계종 도솔천 유마종 미주불교 법화종 보국불교 염불종 불교 총지종 불승종 선학원 세계불교 법륜종 세계불교 법왕종 세계불교 법왕청토속금강종 세계불교 일화종 세계불교 지장종 세계불교 평화종 용화불교 유법종 진언불교 지송종 천화불교 한국SGI 한국근본불교 조계종 한국대승불교 여래종 한국불교 금강종 한국불교 금강종 한국불교 달마종 한국불교 법화종 한국불교 원각종 한국불교 원효종 한국불교 일월무량종 한국불교 정토종 한국불교 조선종 한국불교 조화세계종 한국불교 천일종 한국불교 태고종 한국불교 토속금강종 한국토속불교 미타정토종 한민족불교 한세계인류 성도종 해동불교 정토종 해동불교 조계종 해동불교 평화종 같이 보기[원본 편집] 원불교 한국 불교의 사상 한국 불교의 역사 한국 불교의 종파 각주[원본 편집] ↑ http://www.mcst.go.kr/web/s_data/statistics/statView.jsp?pSeq=732 참고 문헌[원본 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서설〕"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한국의 불교 vdeh아시아의 불교독립국 네팔 대한민국 동티모르[* 1] 라오스 러시아[* 2] 레바논 말레이시아 몰디브 몽골 미얀마 바레인 방글라데시 베트남 부탄 브루나이 사우디아라비아 스리랑카 시리아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아르메니아[* 3] 아제르바이잔[* 2] 아프가니스탄 예멘 오만 요르단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이집트[* 4] 인도 인도네시아[* 5] 일본[*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지아[* 2]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카자흐스탄[* 2]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키르기스스탄 키프로스[* 3] 타지키스탄 태국 터키[* 2]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필리핀 속령 마카오[* 6] 차고스 제도 [* 7] 티베트[* 8] 동튀르케스탄[* 8] 홍콩[* 6] 미승인 국가 아르차흐 공화국[* 3] 남오세티야[* 2] 북키프로스 압하지야[* 2] ↑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국가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일부 영토가 유럽에도 속한다. ↑ 가 나 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역사적·문화적 이유로 종종 유럽으로 분류한다. ↑ 일부 영토가 아프리카에도 속한다. ↑ 가 나 일부 영토가 오세아니아에도 속한다. ↑ 가 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이다. ↑ 영국령 인도양 지역의 일부이다. ↑ 가 나 나라 목록 206개 국가에 포함되지 않는 나라이다. vdeh 불교 붓다 여래 탄생일 사문유관 삼십이상호 가족 《슈도다나(아버지) 마야 부인(어머니) 야소다라(부인) 라후라(아들)》 기본 사상 윤회 깨달음 《 해탈 열반 반야 보리 성불》 삼보 《 불 법 승》 사성제 팔정도 중도 세계관삼계 욕계 색계 무색계 십법계미계(迷界) 3계 내의 육도 윤회: 지옥도 축생도 아귀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 오계(悟界) 성문계 연각계 보살계 불계 경전삼장 경장 율장 논장 대장경 팔리어 대장경 한역대장경 고려대장경 신수대장경 티베트 대장경 경장 금강경 능가경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승만경 율장 사분율 논장 구사론 대비바사론 대승기신론 대지도론 중론 유가사지론 청정도론 부처님 당시붓다와* 십대제자 고타마 붓다 ① 가전연 ② 대가섭 ③ 나후라 ④ 목건련 ⑤ 부루나 ⑥ 사리불 ⑦ 수보리 ⑧ 아나률 ⑨ 아난타 ⑩ 우바리 부처 과거 칠불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연등불》 석가모니불 보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기타 인물 난타 마하파자파티 참마 우파라반나 부다고사 나가세나 종파 원시 불교 상좌부 부파 불교 대승 《일련종 정토종 중관파 유가행파 천태종》 선종 《임제종 조동종》 금강승 《티베트 불교 진언종》 수행수행 일반수행 귀의 신심 신행 공덕 진언 염불 참배 기도 삼십칠도품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사무량심 자 비 희 사 삼학 계 정 혜 계율 오계 사홍서원 출가계율 소승 불교상좌부 불교 마음챙김 사마타 위빠사나 바와나 위빠사나 까마타나 수념(隨念) 안반수의 부파 불교 아비달마 십바라밀 보시 지계 출리 지혜 정진 인욕 진실 결의 자애 평온 대승 불교대승 불교 지관(止觀) 육바라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지혜) 십바라밀 방편 원 역 지 최상승선 불교간화선 선(禪)수행 참선 간화선·화두 공안 좌선 그 외 묵조선 염불선 국가별 수행법티베트 불교 탄트라 만다라 스마라나 통렌 수행 계위각자(覺者) 성문불 연각불 보살 부처 사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상가사부중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칠부중 사미 식차마나 사미니 역사 연표 결집 인도불교사 인도 불교의 쇠퇴 아소카 대왕 간다라 불교 불교와 로마 제국 비단길을 통한 불교의 전파 불교 탄압 문화건축 사찰 사원(왓) 탑파 기념일 부처님 오신 날 마카부차 포살 미술 간다라 미술 불상 탱화 포대화상 상징 깃발 법륜 윤회의 바퀴 인 성지 룸비니(탄생) 부다가야(성도) 녹야원(설법) 쿠시나가르(열반) 마하보디 사원 보리수 수행과 생활 가사 기도통 달력 안거 염주 음식 《채식주의》 진언 《옴 마니 파드메 훔》 기타 시 음악 국가별 네팔 라오스 러시아 말레이시아 몽골 미얀마 방글라데시 베트남 부탄 스리랑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인도 일본 중국 중동 《이란》 캄보디아 타이완 태국 티베트 파키스탄 한국 서양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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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중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중권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39년 3월 29일(1939-03-29) (80세)일제 강점기 강원도 울진군 후포면(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 후포면)본관 김해학력 단국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경력 청주지방법원 판사서울고등법원 판사새정치국민회의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제21대 대통령비서실장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새천년민주당 마포구 갑 지구당위원장열린우리당 법률행정특임고문대통합민주신당 법률행정특임고문민주통합당 상임고문명지대학교 법학과 겸임교수청주대학교 법학과 겸임교수 배우자 홍기명자녀 슬하 1남 2녀군복무 육군 대위 전역의원 선수 3의원 대수 11·12·13정당 무소속지역구 前 경북 울진군 김중권(金重權, 1939년 3월 29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일화 3.1 민정계의 이론가 3.2 김대중과의 인연 3.3 신주류의 중심 4 역대 선거 결과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김중권은 1939년 3월 29일에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1962년에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뒤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재임하던 1981년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3선을 재임하였다. 이후 청와대 정무수석을 역임하였으나 상도동계의 5공 청산을 명분으로 민자당에서 제명되었다. 1996년 1월에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의 권유에 따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1997년에 실시된 제15대 대선에서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호남에 기반을 둔 새정치국민회의의 영남 정치인으로서 최초의 호남 출신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하였다. 이로써 김중권은 동교동계가 되었고 김대중 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에 발탁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극복에 크게 기여했으며 동교동계 주류의 정책 개입을 강력히 견제하여 측근들의 비리를 시전에 방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의 신임을 바탕으로 여권의 강력한 대권후보로 떠올라 "국민화합"과 "영남 후보론"을 내세우며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나 지역 기반이 비슷한 노무현에게 밀려 경선과정에서 사퇴한다. 2003년 말 다수의 당내 의원들이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하며 분당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김중권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제17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제18대 총선에서도 무소속으로, 제19대 총선에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연달아 낙선하자 정계를 은퇴하였다. 학력[편집] 1952년 평해국민학교 졸업 1955년 평해중학교 졸업 1958년 후포고등학교 졸업 1963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LL.B. 1965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0기 1969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법학 석사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일화[편집] 민정계의 이론가[편집] 1980년에 전두환을 미화하는 논문과 칼럼들이 발행됐던 민정당보에 당시 민주정의당의 이론가였던 법조인 출신인 김중권의 글도 가끔 등장했다. 6공시절인 1989년 말 '민정논단'을 통해 제법 정연한 논리로 야당을 공박하기도 하는데, 3김이 이끄는 야당의 5공청산 투쟁을 "선명경쟁으로 '한풀이식'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김대중과의 인연[편집] 1992년에 노태우의 중립선거관리 선언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선거 자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정무수석이던 김중권이 김대중에게 이를 전달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김대중 후보는 김중권이 여권의 사정에 밝고 기획, 실천력이 탁월한 점을 주목하게 되고, 김중권도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는 김대중을 준비된 대통령 후보로 인지하고 지지하게 된다. 이후 1996년에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권유를 받아 영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호남에 기반을 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1997년에는 제15대 대선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대선을 주도하며 영남 지역의 지지를 받아내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헌신한다. 신주류의 중심[편집] 김대중 정부 시절 김대중의 강력한 신임을 바탕으로 당시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김영배 총재권한대행, 한화갑 원내총무와 더불어 '3각 편대'로 불리며 정권의 신실세로 군림하며 동교동계 신주류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반면 권노갑, 박지원 등을 비롯한 구주류와는 여러 차례 갈등을 빚기도 했으며, 여권의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영남 지역의 대표성을 놓고 노무현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1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청송군·영덕군·울진군) 11대 민주정의당 41.08% 49,144표 1위 제12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청송군·영덕군·울진군) 12대 민주정의당 42.89% 51,624표 1위 제13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울진군) 13대 민주정의당 54.78% 23,484표 1위 제14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울진군) 14대 민주자유당 38.50% 14,285표 2위 낙선 제15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영양군·봉화군·울진군) 15대 무당파국민연합 35.13% 19,182표 2위 낙선 제16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봉화군·울진군) 16대 새천년민주당 49.98% 28,702표 2위 낙선 제17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17대 무소속 27.94% 23,824표 2위 낙선 제18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18대 무소속 38.90% 31,592표 2위 낙선 제19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19대 무소속 35.98% 28,171표 2위 낙선 참고 자료[편집] 김중권 - 대한민국헌정회 외부 링크[편집] 전임김용태 제21대 대통령비서실장1998년 2월 25일 ~ 1999년 11월 23일 후임한광옥 전임서영훈 제3대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2000년 12월 20일 ~ 2001년 11월 8일 후임한광옥 전 임 문태준·황병우 제11대 국회의원(경북 청송군·영덕군·울진군) 1981년 4월 11일 ~ 1985년 4월 10일 민주정의당 김찬우 후 임 김중권·황병우 전 임 김중권·김찬우 제12대 국회의원(경북 청송군·영덕군·울진군) 1985년 4월 11일 ~ 1988년 5월 29일 민주정의당 황병우 후 임 (청송군·영덕군)황병우(울진군)김중권 전 임 (청송군·영덕군·울진군)김중권·황병우 제13대 국회의원(경북 울진군)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후 임 이학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중권&oldid=23826238" 분류: 대한민국의 제11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2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3대 국회의원193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울진군 출신평해초등학교 동문평해중학교 동문후포고등학교 동문고려대학교 동문국방대학교 동문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동문단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 당원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당원김해 김씨열린우리당 당원대통합민주신당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동교동계대한민국 육군 대위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청주대학교 교수명지대학교 교수대한민국의 법조인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3월 8일 (금) 18: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중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중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중권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39년 3월 29일(1939-03-29) (80세)일제 강점기 강원도 울진군 후포면(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 후포면)본관 김해학력 단국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경력 청주지방법원 판사서울고등법원 판사새정치국민회의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제21대 대통령비서실장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새천년민주당 마포구 갑 지구당위원장열린우리당 법률행정특임고문대통합민주신당 법률행정특임고문민주통합당 상임고문명지대학교 법학과 겸임교수청주대학교 법학과 겸임교수 배우자 홍기명자녀 슬하 1남 2녀군복무 육군 대위 전역의원 선수 3의원 대수 11·12·13정당 무소속지역구 前 경북 울진군 김중권(金重權, 1939년 3월 29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일화 3.1 민정계의 이론가 3.2 김대중과의 인연 3.3 신주류의 중심 4 역대 선거 결과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김중권은 1939년 3월 29일에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1962년에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뒤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재임하던 1981년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3선을 재임하였다. 이후 청와대 정무수석을 역임하였으나 상도동계의 5공 청산을 명분으로 민자당에서 제명되었다. 1996년 1월에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의 권유에 따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1997년에 실시된 제15대 대선에서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호남에 기반을 둔 새정치국민회의의 영남 정치인으로서 최초의 호남 출신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하였다. 이로써 김중권은 동교동계가 되었고 김대중 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에 발탁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극복에 크게 기여했으며 동교동계 주류의 정책 개입을 강력히 견제하여 측근들의 비리를 시전에 방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의 신임을 바탕으로 여권의 강력한 대권후보로 떠올라 "국민화합"과 "영남 후보론"을 내세우며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나 지역 기반이 비슷한 노무현에게 밀려 경선과정에서 사퇴한다. 2003년 말 다수의 당내 의원들이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하며 분당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김중권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제17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제18대 총선에서도 무소속으로, 제19대 총선에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연달아 낙선하자 정계를 은퇴하였다. 학력[편집] 1952년 평해국민학교 졸업 1955년 평해중학교 졸업 1958년 후포고등학교 졸업 1963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LL.B. 1965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0기 1969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법학 석사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일화[편집] 민정계의 이론가[편집] 1980년에 전두환을 미화하는 논문과 칼럼들이 발행됐던 민정당보에 당시 민주정의당의 이론가였던 법조인 출신인 김중권의 글도 가끔 등장했다. 6공시절인 1989년 말 '민정논단'을 통해 제법 정연한 논리로 야당을 공박하기도 하는데, 3김이 이끄는 야당의 5공청산 투쟁을 "선명경쟁으로 '한풀이식'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김대중과의 인연[편집] 1992년에 노태우의 중립선거관리 선언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선거 자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정무수석이던 김중권이 김대중에게 이를 전달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김대중 후보는 김중권이 여권의 사정에 밝고 기획, 실천력이 탁월한 점을 주목하게 되고, 김중권도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는 김대중을 준비된 대통령 후보로 인지하고 지지하게 된다. 이후 1996년에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권유를 받아 영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호남에 기반을 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1997년에는 제15대 대선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대선을 주도하며 영남 지역의 지지를 받아내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헌신한다. 신주류의 중심[편집] 김대중 정부 시절 김대중의 강력한 신임을 바탕으로 당시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김영배 총재권한대행, 한화갑 원내총무와 더불어 '3각 편대'로 불리며 정권의 신실세로 군림하며 동교동계 신주류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반면 권노갑, 박지원 등을 비롯한 구주류와는 여러 차례 갈등을 빚기도 했으며, 여권의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영남 지역의 대표성을 놓고 노무현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1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청송군·영덕군·울진군) 11대 민주정의당 41.08% 49,144표 1위 제12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청송군·영덕군·울진군) 12대 민주정의당 42.89% 51,624표 1위 제13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울진군) 13대 민주정의당 54.78% 23,484표 1위 제14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울진군) 14대 민주자유당 38.50% 14,285표 2위 낙선 제15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영양군·봉화군·울진군) 15대 무당파국민연합 35.13% 19,182표 2위 낙선 제16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봉화군·울진군) 16대 새천년민주당 49.98% 28,702표 2위 낙선 제17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17대 무소속 27.94% 23,824표 2위 낙선 제18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18대 무소속 38.90% 31,592표 2위 낙선 제19대 총선 국회의원(경북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19대 무소속 35.98% 28,171표 2위 낙선 참고 자료[편집] 김중권 - 대한민국헌정회 외부 링크[편집] 전임김용태 제21대 대통령비서실장1998년 2월 25일 ~ 1999년 11월 23일 후임한광옥 전임서영훈 제3대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2000년 12월 20일 ~ 2001년 11월 8일 후임한광옥 전 임 문태준·황병우 제11대 국회의원(경북 청송군·영덕군·울진군) 1981년 4월 11일 ~ 1985년 4월 10일 민주정의당 김찬우 후 임 김중권·황병우 전 임 김중권·김찬우 제12대 국회의원(경북 청송군·영덕군·울진군) 1985년 4월 11일 ~ 1988년 5월 29일 민주정의당 황병우 후 임 (청송군·영덕군)황병우(울진군)김중권 전 임 (청송군·영덕군·울진군)김중권·황병우 제13대 국회의원(경북 울진군)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후 임 이학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중권&oldid=23826238" 분류: 대한민국의 제11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2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13대 국회의원193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울진군 출신평해초등학교 동문평해중학교 동문후포고등학교 동문고려대학교 동문국방대학교 동문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동문단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 당원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당원김해 김씨열린우리당 당원대통합민주신당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동교동계대한민국 육군 대위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청주대학교 교수명지대학교 교수대한민국의 법조인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3월 8일 (금) 18: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항공자유화조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항공자유화조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항공자유화조약 서명일 1992년 3월 24일서명장소 헬싱키서명자 34개국발효일 2002년 1월 1일 대리인 캐나다, 헝가리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미국 공군이 3대를 운용중인 146톤 OC-135B 오픈 스카이 항공자유화조약(Treaty on Open Skies)은 회원국간에 자유로운 비무장 공중 정찰 비행을 허용하는 다자조약이다. 1992년 3월 24일 체결되었으며, 2002년 1월 1일 발효되었다. 현재는 34개국이 가입했다. 항공자유화조약(open sky treaty)은 군사조약으로서, 민간의 항공자유화협정(open sky agreement)과는 다르다. 목차 1 회원국 2 영공 3 관측기 4 센서 5 정보 공유 6 쿼터 7 더 보기 회원국[편집] 항공자유화조약에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중국은 가입하지 않았다. 현재 34개국이 회원국이다: 벨라루스, 벨기에, 보스니아, 불가리아, 캐나다, 크로아티아, 체코, 덴마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프랑스, 조지아, 독일, 그리스, 헝가리,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포르투갈, 루마니아, 러시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스페인, 스웨덴, 터키, 우크라이나, 영국, 미국. 카자흐스탄은 서명은 했으나 비준이 완료되지 않았다. 영공[편집] 동 조약은 회원국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영공에 대한 관측기(정찰기)의 관측을 허용한다. 관측 비행은 오직 비행 자체의 안정성에 대한 이유로만 제한될 수 있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해서는 관측 비행이 제한될 수 없다. 미국의 OC-135B 오픈 스카이 정찰기는 4대의 카메라를 싣고 있는데, 3개는 900 m 저공비행용 카메라이며, 1개는 10,000 m 중고도 비행용 카메라이다. 관측기[편집] 스웨덴이 2004년 부터 오픈 스카이 관측기로 사용하는 13톤 사브 340 기종. 한국의 최신 정찰기인 18톤 팰콘정찰기 보다 저성능이다. 북한 고려항공의 Tu-204 여객기. 러시아는 Tu-204를 개조한 100톤 Tu-214ON 2대를 오픈 스카이 관측기로 2012년, 2013년에 인도받았다. 회원국의 관측기(Observation aircraft, 정찰기)는 타 회원국에 제공될 수 있다. 택시 옵션(1회용 사용을 의미?)도 가능하다. 모든 관측기와 관측장비는 개별 인증(specific certification)과 비행전 검사(pre-flight inspection)를 관련 기준에 따라 통과해야만 한다. 미국 공군은 OC-135B 오픈 스카이를 사용중이다. 조약의 이름(오픈 스카이 트리티)을 땄다. 캐나다는 C-130 허큘리스 수송기에 "SAMSON" 센서 포드를 장착했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캐나다,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이 샘슨 포드를 공유한다. 샘슨 포드 관측기의 유지비는 각 국가의 비행 쿼터와 실제 사용량에 비례해서 분담한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안토노프 An-30을 관측기로 사용한다. 체코도 사용했는데, 2003년 모두 퇴역했다. 러시아는 Tu-154M-ON Monitoring Aircraft를 사용한다. 독일도 1997년 사고로 추락하기 전 까지 이 기종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스웨덴은 2004년 13톤 사브 340인 OS-100을 관측기로 인증받았다. 센서[편집] 오픈 스카이 비행기는 주간용인 비디오 카메라, 파노라마 카메라, 프레임 카메라, 주야간용인 적외선 카메라, 주야간과 악천후용인 합성개구레이다(SAR)를 장착할 수 있다. 사진 영상 품질은 군사용 품질까지 허용된다. 예를 들면, 탱크와 트럭을 식별할 수 있는 수준까지 허용된다. 이것은 회원국간 군사력 보유 현황과 군사 활동의 투명성을 보장해 준다. 센서 카테고리는 회원국들의 동의하에 추가될 수 있다. 모든 센서는 모든 회원국들에게 상업적으로 판매중이어야만 한다. 이미지 해상도는 30 cm 까지 허용된다. 사진의 1개의 점이 30 cm x 30 cm이다. 록히드 U-2, 글로벌 호크, 금강정찰기, 팰콘정찰기의 합성개구레이다(SAR) 해상도가 30 cm이다. 정보 공유[편집] 오픈 스카이 임무로 수집된 영상정보는 타 회원국에게 유료로 공유된다. 따라서 회원국이 사용가능한 데이터는 이 조약의 쿼터에 의한 할당량 보다 훨씬 많다. 쿼터[편집] 관측 비행은 무제한이 아니라 각 회원국에 부여된 일정한 쿼터량에 따라 비행할 수 있다. 더 보기[편집] 항공자유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항공자유화조약&oldid=24166472" 분류: 냉전기의 조약1990년 체결된 조약2002년 발효된 조약1990년 핀란드군사 조약항공 협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ItalianoКыргызчаNorsk nynorskNorskPolski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8일 (수) 10:1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노래에 대해서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노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비틀즈의 정규 음반발매일 1967년 6월 1일 (1967-06-01)녹음 1966년 11월 24일 - 1967년 4월 21일EMI 스튜디오, 런던의 리전트 사운드 스튜디오장르 록 팝 사이키델릭 아트 록 바로크 팝 프로토-프로그레시브 길이 39:52레이블 팔로폰 (영국)캐피틀 (미국)프로듀서 조지 마틴비틀즈 연표 《A Collection of Beatles Oldies》(1966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년) 《The Beatles》(1968년) 비틀즈 북미 연표 《Revolver》(1966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년) 《Magical Mystery Tour》(1967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영국의 록 밴드 비틀즈의 여덟 번째 정규 음반이다. 1967년 5월 26일 영국에서, 1967년 6월 2일 미국에서 출시되었다. 그와 동시에 상업적 및 비평적으로 즉각적으로 성공해 영국 음반 차트에서 27주간 정상을, 미국에서는 15주간 정상을 차지했다. 발표 뒤로 거의 모든 평론가는 음반의 혁신적인 음악 프로덕션과 송라이팅, 대중음악과 고급예술 간 격차를 메운 시각 디자인과 동시대 반문화와 베이비 붐 세대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점을 극찬했다. 음반은 1968년 개최된 그래미 어워드에서 록 음반으로서는 처음 수여되는 올해의 음반을 포함한 네 부문을 수상했다. 1966년 8월, 비틀즈는 투어와 영원히 결별하고 세 달의 기간 동안 녹음에서 멀어져 휴가를 보낸다. 11월, 런던으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폴 매카트니는 에드워드 시대와 관계있는 군사 밴드라는 곡의 아이디어를 구상했고, 이는 최종적으로 《페퍼상사》 콘셉트의 촉매제 구실을 했다. 비틀즈의 여덟 번째 정규 음반의 세션이 열린 날짜와 장소는 11월 24일의 제2 애비 로드 스튜디오였으며, 이들 자신의 유년기에서 영감을 얻은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Penny Lane〉라는 두 개의 작곡을 녹음했지만, EMI의 압박으로 인해 이 두 개의 곡은 더블 A 싱글로서 출시되었고 또한 음반에서는 미수록됐다. 1967년 2월, 노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녹음 뒤 매카트니는 비틀즈에게 음반 전체를 가상의 밴드인 페퍼 상사의 밴드의 공연으로 묘사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 다른 자아는 그룹에게 자유와 음악적 실험을 부여했다. 녹음 세션에서 밴드는 1966년도 음반 《Revolver》에서 보여준 기술적 실험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들은 자신들이 트랙을 라이브로 재현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곡과 녹음에서는 실험적인 접근을 도입했다. 그런 실험이 적용된 예시로는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A Day in the Life〉 등이 있다. 프로듀서 조지 마틴과 엔지니어 제프 에머릭은 음의 형태를 변화하는 신호 처리를 자유롭게 통용하고 우연적인 크레센도를 연주하는 40인조 관현악단를 사용해 음반녹음에서 신기원을 이뤄냈다. 녹음은 1967년 4월 21일 마무리되었다. 비틀즈를 한 무리의 유명인 및 역사적 인물들의 정중앙에 배치한 광경을 묘사한 표지는 영국 팝 아티스트 피터 블레이크와 잰 하워스가 디자인했다. 음악학 연구가는 《페퍼상사》가 비틀즈의 이전 음반에서 보이는 예술적 성숙을 지속한 것이며, 대중 음악의 확장된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이를 진보시켰고, 또한 콘셉트 음반의 초기 시도로도 간주했다. 음반은 극초기 아트 록 LP 중 하나이며 프로그레시브 록의 개발에 이바지했고, 음반 시대의 포문을 연 공헌이 있다고 평가된다. 또한 음반은 보드빌, 서커스, 뮤직 홀, 아방가르드, 웨스턴, 인도 고전 음악 등의 스타일의 영향을 통합한 영국 사이키델릭의 중요 작품 중 하나이다. 2003년, 미국 의회 도서관은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술적 중대성"이 있는 작품으로서 국립 녹음 등재목록에 포함시켰다.[1] 같은 해 《롤링 스톤》 지는 역대 가장 위대한 500개 음반에서 1위에 올려놓았다. 2011년이 되어서는 3,2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케빈 J. 데트마 교수는 《영국 문화에 대한 옥스퍼드 사전》에서 음반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중대한 로큰롤 음반"이라고 썼다.[2] 목차 1 배경 2 콘셉트와 영감 3 녹음 및 제작 4 커버 삽화 5 곡 목록 6 차트 6.1 주간 차트 6.2 연말 차트 7 각주 8 참고 자료 9 외부 링크 배경[편집] 저흰 비틀즈로 사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그 빌어먹을 더벅머리 꼬맹이 네 명이서 재롱을 떠는 게 정말 싫었어요. 우린 어린애가 아니라, 어른이었어요... 그리고 자신을 공연인이 아닌 예술가로 생각했습니다.[3] – 폴 매카트니 1966년, 비틀즈는 라이브 공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4] 존 레논은 "밀랍 인형 4개가 무대에 올라가면... 관중은 그걸로 만족하는 거야. 비틀즈 콘서트는 이제 음악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그저 지독한 부족 의식일 뿐이지."[5]란 말을 남겼다. 6월, 음반 《Revolver》 작업을 마무리한 뒤 2일 후, 그룹은 투어를 시작하기 위해 독일로 출발했다.[6] 함부르크에 있을 때, 그들은 "도쿄에는 가지마. 네 목숨이 위험해."라는 내용의 익명 전보를 받는다.[7] 일본에서 투어 중, 비틀즈는 일본무도관에서의 공연을 반대하는 종교, 보수단체의 위협을 받는다.[7] 추가 예방 조치로, 35,000여명의 경찰이 호텔에서 콘서트 장소로 이동하는 비틀즈를 지키기 위해 동원되었다. 일본의 침착한 청중들에 의해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졌고, 밴드는 자신들의 좋지 못한 라이브 공연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8] 게다가 필리핀에 도착해서는, 필리핀의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민들에게 위협을 받았다.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일정을 지키지 못했다며 기분이 좋지 못했다.[9] 런던으로 돌아온 후,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의 장기계획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희는 2주 정도 회복할 시간을 가질 겁니다. 미국에 가서 미국인들에게 얻어 맞기 전에요."[10] 그의 말은 존 레논의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 발언으로 현실이 되었다. 공식 사과로 긴장은 누그러졌지만, 1966년 9월 미국 투어는 절반만 찬 경기장과 수준 이하의 공연으로 끝났고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가 되었다.[11] 비틀즈가 영국으로 돌아오자, 그들이 해체를 결정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12] 해리슨은 엡스타인에게 밴드를 떠난다는 말을 전하지만, 더 이상 투어는 없을 것이라고 설득하여 남게 되었다.[10] 그룹은 7주 동안 각자의 일에 집중하며 지냈다. 해리슨은 6주 동안 인도에 가서 라비 샹카르의 교육 하에 시타르를 배우기 시작했다.[13] 그와 더불어 힌두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도 증가했다.[14] 폴 매카트니는 조지 마틴과 《패밀리 웨이》의 사운드 트랙을 작업했다.[15] 레논은 영화 《하우 아이 원 더 워》에 출연했고, 런던의 인디카 갤러리에서 미래의 아내 오노 요코를 만나게 된다.[16] 링고 스타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17] 콘셉트와 영감[편집] 1966년 11월, 비틀즈의 투어 매니저 말 에반스와 폴 매카트니는 케냐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 "Sgt. Pepper" 콘셉트의 추동력이 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13] 그의 아이디어는 에드워드 시대의 군악대와 관련되어 있었고, 이렇게 에반스가 만든 이름은 동시대의 샌프란시스코 소재 그룹인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와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와 같은 스타일이었다.[18] 1967년 4월, 매카트니는 비틀즈에게 음반 전체를 가공의 밴드의 공연으로 표현해 볼 것을 제안한다.[19] 이 또다른 밴드는 그들에게 자유와 음악적 실험을 가능케 했다. 매카트니가 설명하길 "전 생각했어요, 우리 자신이 되지 말고. 다른 자아를 개발하자."[20] 마틴은 이렇게 회고했다. “ "페퍼 상사" 자체는 앨범을 반쯤 제작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폴의 곡이었다. 평범한 록 음악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걸 끝냈을 때, 폴이 말했다, "앨범을 페퍼가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페퍼 상사가 녹음한 것 처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효과를 넣어서 말이야." 난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고, 그 순간부터 페퍼는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21] ” 1966년, 미국의 음악가이자 비치 보이스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은 녹음의 미학과 음반 프로듀서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 그리고 비틀즈의 음반 《Rubber Soul》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의 제작 실력과 완벽한 구성, 편곡을 보여주는 음반 《Pet Sounds》가 나오게끔 한다. 매카트니는 《Pet Sounds》를 듣자 큰 충격을 받았고, 음반에 부단한 영향을 주게 된다. 조지 마틴은 "펫 사운즈가 아니였다면, 페퍼 상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퍼는 펫 사운즈와 견주기 위한 시도였다."라고 말한다.[22] 더 머더스 오브 인벤션의 음반 《Freak Out!》 또한 페퍼 상사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언급된다.[23] 저자 필립 노만에 따르면, 페퍼 상사의 녹음 세션 중 매카트니는 계속해서 "이건 우리의 《Freak Out!》이야"이라 말했다고 한다. 음악 저널리스트 쳇 플리포는 매카트니가 첫 콘셉트 앨범으로 여겨지는 《Freak Out!》을 들은 후, 콘셉트 앨범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24] 녹음 및 제작[편집] 페퍼 상사의 대부분의 곡을 녹음했던 제2 애비 로드 스튜디오[25] 음악학 연구가 월터 에버렛은, 페퍼 상사가 비틀즈 내 매카트니의 창조적 힘을 우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카트니는 음반의 곡 반 이상을 작사했고, 그 곡의 녹음을 통제했다. 그는 이때부터 음반이 나아갈 예술적 방향을 제시한다.[26] 1966년 11월 24일,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9월 이후 처음으로 모인 비틀즈는 세션을 시작한다.[27]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녹음 예산 덕분에, 원하는 만큼 세션을 할 수 있었다.[28]EMI owned the Beatles' recordings and Abbey Road Studios, so they did not deduct fees for studio time from the band's royalty payments during the recording and production of Sgt. Pepper.[28]}} 음반 녹음에 앞서, 그들은 스스로의 어린 시절과 연결되어 있는 〈Strawberry Fields Forever〉, 〈When I'm Sixty-Four〉 그리고 〈Penny Lane〉의 녹음을 시작했다.[29] 첫 세션에서는 새로운 키보드 악기 멜로트론이 소개된다.[30] 이것은 다양한 악기의 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한 후, 건반을 눌러 그 소리를 내게 하는게 가능했다.[31] 매카트니는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도입부에 플루트 연주를 넣었다.[30] 트랙은 다른 템포와 높낮이가 녹음된 두 테이크를 이어붙이는 식으로 복잡하게 제작되었다.[32] 오디오 엔지니어 에머릭은 《Revolver》를 녹음할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고, 비틀즈의 사전에 '못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33] 마틴은 페퍼 상사가 "리볼버에서 자연스럽게 생겼고", "거의 계속되는 기술적 실험의 기간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Penny Lane〉은 본래 음반용으로 녹음되었으나 EMI와 엡스타인이 마틴을 압박하여 1967년 2월에 더블 A 싱글로 발매된다. 영국에서 1위에 오르지 못하자, 영국의 통신사는 "비틀즈가 정상에 오르지 못하다", "4년만에 처음 있는 일" 그리고 "거품이 붕괴되는가?" 등의 헤드라인을 걸어 그룹의 성공이 막을 내리는 것으로 점쳤다. 발매 이후 엠스타인은 싱글이 LP에 수록되지 않을 거라 고집했다. 마틴은 나중에 이 두 곡을 놓인 것에 대해 "내 프로로서의 삶에서 가장 큰 실수"라고 묘사했다. 그의 이러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그와 밴드는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55시간 동안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음반 전체에 대한 안건을 정했다. 그는 "라이브로 공연할 수 없을 곡을 녹음할 생각이였다. 그들은 제작사가 될 정도로 디자인했고 거기엔 차이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매카트니의 목적은 아직까지 만들지 못한 최고의 비틀즈 음반을 만드는 것이였고, "이제 우리의 공연이 그 레코드야"라고 언명한다.[60] 1966년 11월 6일, 그룹은 음반에 수록될 〈When I'm Sixty-Four〉의 녹음을 시작한다. 페퍼 상사를 녹음할 때 쓰였던 스튜더 J37 포 트랙 머신.[34] 페퍼 상사는 포 트랙 녹음기를 이용하여 녹음했다. 에이트 트랙 테이프 녹음기가 미국에 있긴 했지만, 1967년 말까지 런던의 상업 스튜디오에서는 가동이 불가능했다. 이전의 비틀즈 음반처럼, 페퍼 상사는 하나에서 네 개까지의 트랙을 하나의 녹음기에서 믹스하고 더빙하는 포 트랙 녹음기로, 리덕션 믹싱이라고 알려진 기술을 범용했다. 이런 준 멀티 트랙 스튜디오는 애비 로드의 엔지니어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EMI의 스튜더 J37 포 트랙 머신은 제작 중 발생하는 소음을 최소화하여 높은 품질의 레코딩을 할 수 있었기에, 리덕션 믹싱에 적합했다. 매카트니는 자신의 베이스 파트를 마지막에 오버더빙하는 것을 선호했고, 곡의 백 트랙을 녹음하고 있을 때,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에게 곡의 최종 편곡을 보완하기 위해, 작사와 선율적 베이스라인을 녹음하는데 필요한 여분의 시간을 주었다. 〈A Day in the Life〉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녹음할 때, 마틴은 비틀즈가 연주한 반주와 오케스트라 오버더빙 테이프를 동기했다. 엔지니어 켄 타운센드는 두 머신 사이의 50 Hz 제어 신호를 사용하여 이를 달성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페퍼 상사의 눈여겨 볼 점은 마틴과 에머릭이 다이나믹 레인지 컴프레서로 신호 처리를 사용해 자유자재로 곡의 소리 모양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비교적 새로운 모듈형 효과 유닛인, 레슬리 스피커와 같은 것으로, 음성과 악기를 통하게 하였다. 커버 삽화[편집] 페퍼 상사의 커버는 팝 아트 작가 피터 블레이크와 잔 하워스가 매카트니의 잉크 드로잉을 바탕으로 디자인했다. 아트 디렉터는 로버트 프레이저와 마이클 쿠퍼가 맡았다. LP의 앞면에는 비틀즈가 색색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밴드 코스튬을 입고, 판지를 잘라 만든 실물 크기의 유명인들과 함께 서있다. 곡 목록[편집] 사이드 1 # 제목보컬 재생 시간 1.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폴 매카트니 2:02 2.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링고 스타 2:44 3.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존 레논 3:28 4. Getting Better  폴 매카트니 2:48 5. Fixing a Hole  매카트니 2:36 6. She's Leaving Home  폴 매카트니, 존 레논 3:35 7. Being for the Benefit of Mr. Kite!  존 레논 2:37 사이드 2 # 제목보컬 재생 시간 1. Within You Without You  조지 해리슨 5:04 2. When I'm Sixty-Four  폴 매카트니 2:37 3. Lovely Rita  폴 매카트니 2:42 4. Good Morning Good Morning  존 레논 2:41 5.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Reprise)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1:19 6. A Day in the Life  존 레논, 폴 매카트니 5:39 차트[편집] 주간 차트[편집] 원 발매 차트 순위 Australian Kent Music Report[35] 1 Canadian RPM Top LPs[36] 1 Norwegian Albums Chart[37] 1 Swedish Kvällstoppen Chart[38] 1 UK Albums Chart[39][40] 1 US Billboard Top LPs[41] 1 West German Media Control Albums Chart[42] 1 1987년 재발매 차트 순위 Dutch Mega Albums Chart[43] 2 Japanese Albums Chart[44] 3 UK Albums Chart[45] 3 2009 재발매 차트 순위 Australian Albums Chart[46] 16 Belgian Albums Chart (Wallonia)[47] 22 Brazilian Albums Chart[48] 20 Danish Albums Chart[49] 20 Finnish Albums Chart[50] 9 Italian Albums Chart[51] 9 Japanese Albums Chart[52] 20 New Zealand Albums Chart[53] 12 Norwegian Albums Chart[54] 31 Portuguese Albums Chart[55] 4 Spanish Albums Chart[56] 22 Swedish Albums Chart[57] 8 UK Albums Chart[58] 5 연말 차트[편집] 차트 (1967) 순위 Australian Albums Chart[35] 1 UK Albums Chart[59] 1 US Billboard Year-End[60] 10 차트 (1968) 순위 Australian Albums Chart[35] 3 US Billboard Year-End[61] 6 각주[편집] ↑ "The National Recording Registry 2003". Library of Congress. 2003 ↑ Kastan 2006, 139쪽. ↑ Miles 1997, 303쪽. ↑ Lewisohn 1992, 210쪽. ↑ The Beatles 2000, 229쪽. ↑ MacDonald 2005, 212쪽. ↑ 가 나 Martin & Pearson 1994, 7쪽. ↑ Lewisohn 1992, 211쪽; Martin & Pearson 1994, 7쪽. ↑ MacDonald 2005, 212–213쪽. ↑ 가 나 MacDonald 2005, 213쪽. ↑ Lewisohn 1992, 210: the Beatles grew tired of touring, 230: the Beatles' final commercial performance쪽; MacDonald 2005, 213쪽 ↑ Julien 2008b, 1쪽. ↑ 가 나 Julien 2008b, 2쪽. ↑ Everett 1999, 71쪽. ↑ Blaney 2007, 8쪽. ↑ Womack 2007, 158, 160–161쪽. ↑ Harry 2000, 323, 333쪽; Julien 2008b, 2쪽. ↑ Womack 2007, 168쪽. ↑ Moore 1997, 20–21쪽. ↑ Miles 1997, 303–304쪽. ↑ Martin 1994, 202쪽. ↑ Crowe, Jerry (1997년 11월 1일). “'Pet Sounds Sessions': Body of Influence Put in a Box”. 《Los Angeles Times》. 2014년 4월 9일에 확인함.  ↑ Julien 2008c, 160쪽. ↑ Miles, Barry (2014). 《Frank Zappa》. Atlantic Books.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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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Reprise)〉 〈A Day in the Life〉 아웃테이크 〈Strawberry Fields Forever〉 〈Penny Lane〉 〈Only a Northern Song〉 〈Carnival of Light〉 관련 문서 List of images on the cover of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표지의 사진 목록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영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사운드트랙)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on the Road》 옐로 섬머린 비틀즈의 음반 목록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Tina in the Sky with Diamonds〉 《Please Please Me》 《With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 《Beatles for Sale》 《Help!》 《Rubber Soul》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Magical Mystery Tour》 《The Beatles (White Album)》 《Yellow Submarine》 《Abbey Road》 《Let It Be》 vdeh비틀즈의 음반 목록주요 음반은 볼드체로 표시.정규 음반 《Please Please Me》 《With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 《Beatles for Sale》 《Help!》 《Rubber Soul》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The Beatles (White Album)》 《Yellow Submarine》 《Abbey Road》 《Let It Be》 미국 음반 《Introducing... The Beatles》 《Meet the Beatles!》 《The Beatles' Second Album》 《A Hard Day's Night》 《Something New》 《The Beatles' Story》 《Beatles '65》 《The Early Beatles》 《Beatles VI》 《Help!》 《Rubber Soul》 《Yesterday and Today》 《Revolver》 《Magical Mystery Tour》 《Yellow Submarine》 《Hey Jude》 캐나다 음반 《Beatlemania! With the Beatles》 《Twist and Shout》 《The Beatles' Long Tall Sally》 EP 《Twist and Shout》 《The Beatles' Hits》 《The Beatles (No. 1)》 《All My Loving》 《Souvenir of Their Visit to America》 《Four by the Beatles》 《Long Tall Sally》 《Extracts from the Film A Hard Day's Night》 《Extracts from the Album A Hard Day's Night》 《4-by the Beatles》 《Beatles for Sale》 《Beatles for Sale (No. 2)》 《The Beatles' Million Sellers》 《Yesterday》 《Nowhere Man》 《Magical Mystery Tour》 라이브 음반 《Live! at the Star-Club in Hamburg, Germany; 1962》 《The Beatles at the Hollywood Bowl》 《First Live Recordings》 《Live at the BBC》 《On Air – Live at the BBC Volume 2》 컴필레이션 《From Then To You / The Beatles' Christmas Album》 《The Songs Lennon and McCartney Gave Away》 《1962–1966》 《1967–1970》 《Sessions》 《Past Masters》 《앤솔로지》 (1, 2, 3) 《I Saw Her Standing There》 《The Beatles Bootleg Recordings 1963》 리믹스 《Yellow Submarine Songtrack》 《Let It Be... Naked》 《Love》 박스 세트 《The Beatles Collection》 《The Beatles: The Collection》 《The Beatles Box》 《The Beatles Box Set》 《The Capitol Albums》 vol. 1 2 《The Beatles in Mono》 《The Beatles (The Original Studio Recordings)》 《The U.S. Albums》 《The Japan Box》 vdeh그래미상 올해의 앨범1959–1975 《The Music from Peter Gunn》 – 헨리 맨시니 (1959) 《Come Dance with Me!》 – 프랭크 시나트라 (1960) 《The Button-Down Mind of Bob Newhart》 – 밥 뉴하트 (1961) 《Judy at Carnegie Hall》 – 주디 갈런드 (1962) 《The First Family》 – 본 미더 (1963) 《The Barbra Streisand Album》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1964) 《Getz/Gilberto》 – 스탠 게츠, 주앙 지우베르투 (1965) 《September of My Years》 – 프랭크 시나트라 (1966) 《A Man and His Music》 – 프랭크 시나트라 (1967)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비틀즈 (1968) 《By the Time I Get to Phoenix》 – 글렌 캠벨 (1969) 《Blood, Sweat & Tears》 – 블러드, 스웻 & 티어스 (1970) 《Bridge over Troubled Water》 – 사이먼 & 가펑클 (1971) 《Tapestry》 – 캐럴 킹 (1972) 《The Concert for Bangladesh》 – 다양한 음악가들(1973) 《Innervisions》 – 스티비 원더 (1974) 《Fulfillingness' First Finale》 – 스티비 원더 (1975) 1976–2000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 – 폴 사이먼 (1976) 《Songs in the Key of Life》 – 스티비 원더 (1977) 《Rumours》 – 플리트우드 맥 (1978) 《Saturday Night Fever》 – 다양한 음악가들 (1979) 《52nd Street》 – 빌리 조엘 (1980) 《Christopher Cross》 – 크리스토퍼 크로스 (1981) 《Double Fantasy》 – 존 레논 & 오노 요코 (1982) 《Toto IV》 – 토토 (1983) 《Thriller》 – 마이클 잭슨 (1984) 《Can't Slow Down》 – 라이어널 리치 (1985) 《No Jacket Required》 – 필 콜린스 (1986) 《Graceland》 – 폴 사이먼 (1987) 《The Joshua Tree》 – U2 (1988) 《Faith》 – 조지 마이클 (1989) 《Nick of Time》 – 보니 레잇 (1990) 《Back on the Block》 – 퀸시 존스 외 다양한 음악가 (1991) 《Unforgettable... with Love》 – 내털리 콜 (1992) 《Unplugged》 – 에릭 클랩튼 (1993) 《영화 《보디가드》 사운드트랙》 – 휘트니 휴스턴 (1994) 《MTV Unplugged》 – 토니 베넷 (1995) 《Jagged Little Pill》 – 앨러니스 모리세트 (1996) 《Falling into You》 – 셀린 디옹 (1997) 《Time Out of Mind》 – 밥 딜런 (1998)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 로린 힐 (1999) 《Supernatural》 – 산타나 (2000) 2001–현재 《Two Against Nature》 – 스틸리 댄 (2001) 《O Brother, Where Art Thou? 사운드트랙》 (2002) 《Come Away with Me》 – 노라 존스 (2003) 《Speakerboxxx/The Love Below》 – 아웃캐스트 (2004) 《Genius Loves Company》 – 레이 찰스 외 다양한 음악가 (2005)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 – U2 (2006) 《Taking the Long Way》 – 딕시 칙스 (2007) 《River: The Joni Letters》 – 허비 행콕 (2008) 《Raising Sand》 – 로버트 플랜트 & 앨리슨 크라우스 (2009) 《Fearless》 – 테일러 스위프트 (2010) 《The Suburbs》 – 아케이드 파이어 (2011) 《21》 – 아델 (2012) 《Babel》 – 멈퍼드 & 선스 (2013) 《Random Access Memories》 – 다프트 펑크 (2014) 《Morning Phase》 – 벡 (2015) 《1989》 – 테일러 스위프트 (2016) 《25》 – 아델 (2017) 《24K Magic》 - 브루노 마스 (2018) 《Golden Hour》 -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 (2019) vdeh올해의 브릿 어워드 영국 앨범상1977-1999 비틀즈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77) 애덤 앤 디 앤츠 - Kings of the Wild Frontier (1982)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Memories (1983) 마이클 잭슨 - Thriller (1984) 샤데이 - Diamond Life (1985) 필 콜린스 - No Jacket Required (1986) 다이어 스트레이츠 - Brothers in Arms (1987) 스팅 - ...Nothing Like the Sun (1988) 페어그라운드 어트랙션 - The First of a Million Kisses (1989) 파인 영 캐니벌스 - The Raw & the Cooked (1990) 조지 마이클 - Listen Without Prejudice Vol. 1 (1991) 씰 - Seal (1992) 애니 레녹스 - Diva (1993) 스테레오 MC's - Connected (1994) 블러 - Parklife (1995) 오아시스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1996)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 Everything Must Go (1997) 버브 - Urban Hymns (1998)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 This Is My Truth Tell Me Yours (1999) 2000-2020 트래비스 - The Man Who (2000) 콜드플레이 - Parachutes (2001) 다이도 - No Angel (2002) 콜드플레이 - A Rush of Blood to the Head (2003) 더 다크니스 - Permission to Land (2004) 킨 - Hopes and Fears (2005) 콜드플레이 - X&Y (2006) 악틱 몽키즈 - Whatever People Say I Am, That's What I'm Not (2007) 악틱 몽키즈 - Favourite Worst Nightmare (2008) 더피 - Rockferry (2009) 플로렌스 앤 더 머신 - Lungs (2010) 멈퍼드 & 선스 - Sigh No More (2011) 아델 - 21 (2012) 에밀리 산데 - Our Version of Events (2013) 악틱 몽키즈 - AM (2014) 에드 시런 - x (2015) 아델 - 25 (2016) 데이비드 보위 - Blackstar (2017) 스톰지 - Gang Signs & Prayer (2018) The 1975 - A Brief Inquiry into Online Relationships (201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Sgt._Pepper%27s_Lonely_Hearts_Club_Band&oldid=24138430" 분류: 1967년 음반비틀즈의 음반캐피틀 레코드 음반팔로폰 음반콘셉트 음반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음반그래미상 올해의 앨범상 수상작숨은 분류: CS1 - 스웨덴어 인용 (sv)CS1 - 독일어 인용 (de)CS1 - 네덜란드어 인용 (nl)CS1 - 프랑스어 인용 (fr)CS1 - 일본어 인용 (ja)인용 오류 - URL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GaeilgeGàidhlig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КыргызчаLatinaLietuviųLatviešu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ardu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일 (목) 18: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화 (성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화 (성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화(花, 化)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목차 1 꽃 화 花 2 될 화 化 3 인물 4 각주 꽃 화 花[편집] 화(花)씨는 중국 백가성 제55위이다. 될 화 化[편집] 화(化)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5명으로 조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화(化)씨는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여황(艅艎)의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1] 《조선씨족통보》에 복룡·여황 2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전라도 나주목에 속해 있던 지명이다. 현재 조사되는 본관은 진양(晋陽), 나주(羅州), 복룡(伏龍), 여황(餘艎) 등 4본이 있다. 진양 화씨(晋陽化氏)의 시조 화명신(化明臣)은 중국 명(明)나라 낭야(瑯琊) 사람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선에 귀화했다. 화명신의 본래의 성은 화(花)씨이며 본래의 이름은 화광신(花光新) 였다고 한다. 그는 명나라 중엽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만주의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북경을 점령한 청군(淸軍)이 낭야(瑯琊)에까지 밀려들자 화명신(化明臣)은 "어진 사람은 기회를 알고 행(行)한다"며 '예의의 나라' 조선으로 일가를 이끌고 망명하여 광주(廣州) 교외의 소영대(沼靈臺)에 터를 잡고 정착, 이름도 성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 성종이 "중국의 화(花)씨가 조선에 귀화한 것은 향화(向化)의 의리"라며 화(化)씨를 성으로 내리고 경성군(慶城君)에 봉하였다고 한다. 그는 도승지(都承旨)에 기용됐다. 그러나 득성(得姓) 시조 화명신 이후 사성보첩(賜姓譜牒)을 잃었다. 헌종 때 후손들이 안동부(安東府)에 보존돼 있는 족보를 가까스로 찾아냈으나 원본이 크게 훼손돼 정확한 선계(先系)를 밝히지는 못하고 화명신(化明臣)의 6대손 화섭(化燮)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화섭은 영월(寧越)에서 진주(晉州)로 이주하여 진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모두 39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진주에 23가구, 의령에 3가구 등 모두 경상남도에만 살고 있었다. 1960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246명이었고, 1985년 조사에서는 495가구, 1,990명으로 성씨 인구 144위였다. 2000년에는 진양 화씨 252가구, 824명, 나주 화씨 29가구, 101명, 복룡 화씨 4가구, 11명, 여황 화씨 7명 등 286가구, 945명이다. 인물[편집] 화강윤 : SBS 기자 각주[편집] ↑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나주목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화_(성씨)&oldid=20819112" 분류: 한국의 성씨중국의 성씨화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2월 25일 (일) 11:1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스페인의 정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페인의 정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페인의 정치는 양원 의회로 구성되며 입헌군주제를 취한다. 스페인의 군주는 국가의 수반이며 총리가 내각의 수장으로서 양당제 하에 구성된다. 중앙 입법 기구는 양원으로 구성되며 내각이 견고해야 해당 정부도 지속될 수 있다. 목차 1 왕권 2 내각 권한 3 입법기구 4 사법부 5 행정구역 5.1 지역 6 국적 논쟁 7 에타와 그라포 8 이슬람 근본주의의 형태 9 각주 왕권[편집] 헌법 1항 3조에서는 스페인의 정치적 개혁은 양원 군주제의 개혁에 해당한 것으로 적었다.[1] 56항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국왕은 국가의 수장이자 최고통수권자이며 번영과 통합의 상징이다. 그는 조정자이자 여러 기구의 원만한 작업을 돕는 사람으로서 스페인의 가장 높은 지위를 국제 관계에서 대표하며 같은 역사적 맥락에 포함된 곳에도 해당한다.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그에게 여러 자격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2. 그의 직함은 스페인의 군주(왕)이며 그는 왕위에 부속단 다른 직함을 취할 수 있다. 3. 왕의 권한은 불가침 영역이며 책임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은 64조에 명기된대로 반드시 부서를 거쳐야 한다. 부서 단계를 거치지 않은 조치는 유효하지 않으며 65조 2항만이 예외를 명기한다. 57항의 내용이다: 1. 스페인 국왕은 부르봉 왕가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후손으로 역사적 정당성이 있는 왕가의 적통 후손을 따른다. 왕위로의 계승은 장자상속제와 그 순위에 따라 규정되며 다음과 같이 정해진다 ; 같은 서열의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동성일 경우 연장자가 연소자보다 우위에 있다 62항은 국왕의 재임에 대해 명기한다: a) 법령에 대한 규제 및 반포; b) 의회 소집 및 해산 및 선거 실시; c) 헌법 개정 발의; d) 내각 대표 후보 발의; 내각 임명 및 해임권; e) 정부 관료의 임명 및 해임; f) 내각회의에 따른 칙령 발의 및 치안과 군사 행동 발의권, 국장과 칭호 수여 g) 국가 내정에 대한 보고, 이런 목적으로 언제든지 내각회의에 주재할 권리; h)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권리; i) 사면권 행사; j) 왕실 산하의 사관학교에 대한 지원 63조가 적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왕은 외국에 대사와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도록 한다. 스페인의 외교사절단은 그로부터 임명된 자들이다. 2. 조약을 통한 국제적 협약 이행에 대한 문제는 국가의 승인이 왕이 서명한다. 3. 전쟁 선포와 강화조약에 있어 의회가 허가한 후에는 왕이 의무적으로 서명한다. 내각 권한[편집]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 내각의 권한은 내각 회의(Consejo de Ministros)에 기초한다. 국왕이 임명한 내각의 수장이 선도하며 일단 하원에서 선거를 거쳐 뽑은 뒤에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이다. 후보자가 지명되면 1차 투표에서 하원의 대다수의 표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 실패할 경우 2차 투표에서는 과반의 표만 얻으면 된다. 총리는 다른 내각의 구성원을 임명하여 그 후에 왕이 이를 승인한다. 정부의 수장으로서 총리는 여러 부통령을 임명할 수 있으며 이는 의무 사항은 아니다. 또한 정부 기구의 고문 역할을 하는 국가위원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입법기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의회입니다. 국가 수준에서 스페인은 직접적으로 의회의 대표를 선출하며 양원제로 구성되어 상원과 하원으로 나뉜다. 상하원은 거의 동일한 기간 동안 재직하며 최대 4년이다. 양원은 극명하게 다른 두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선출 관행이다. 두 곳 모두 지역 단위로 선출한다. 인구에 따라 의석이 배분된다. 그러나 각 주의 의석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아니고 2석씩 일괄 배정이여서 인구가 적은 과소 지자체를 좀 더 대변하는 현상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지적되어 개헌에 대한 요구가 있다. 상하원의 큰 차이는 대부분의 법이 하원의 승인 하에 공표된다는 데 있기도 하다. 상원이 이를 거부할 수 있으나 모든 상원의 거부권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강하다. 사법부[편집] 스페인 사법부는 재판관과 치안 판사가 권한을 행사하며 각 사법 절차에 따라 다른 법원의 구조를 갖고 있다. 최고 법원은 스페인 대법원이다. 사법부의 역할은 스페인 사법위원회가 결정하며 의장은 대법원장이 겸임한다. 위원회는 12명의 재판관과 8명의 배심원으로 이뤄지며 이들은 3/5 대다수가 선출한 의회 의원들에서 선출된 것이다. 행정구역[편집] 스페인은 17개의 지방; 안달루시아, 아라곤, 아스투리앗, 발레아레스 제도, 카나리아 제도, 카스티야라만차, 카스티야 이 레온, 카탈루냐, 발렌시아, 에스트레마두라, 갈리시아, 라리오하, 마드리드, 무르시아, 나바라, 바스크 지방;으로 나뉜다. 주의 모로코 근처에 스페인 령 5곳이 분포한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자치 도시이며 다른 도시들보다 자치권이 더 강하지만 자치 지방보다는 그 권한이 약하다. 차파리나스 섬과 페뇽데벨레스데라고메라 섬, 페뇽 데 알우세마스 섬은 스페인 연방정부가 직접 관리한다. 지역[편집] 1978년 헌법은 지방의 분권화 탄생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1985년경 17곳의 지방(카나리아 제도와 발레아레스 제도 포함)에 대한 의결이 지방자치제도 헌장에 의해 의결되었다. 1979년 최초의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바스크와 카탈루냐에서 일어났으며 가장 극렬한 민족주의 및 지방주의 운동이 일어났던 곳에 해당한다. 이후로 여러 자치 정부는 각기의 정부를 꾸리고 있다. 중앙 정부는 지방 정부에 권력 이양을 지속적으로 행하려 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보건과 교육, 사회 프로그램 등에 대해서도 완전한 의결권 및 책임을 이양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스페인 헌법 149항에 의해서 독점적인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제한이 되기도 한다. 모든 자치 지방의 정부는 단원제 의회가 선출한 정부에 의해 구성된다. 스페인은 형식적으로 보았을 때 지방자치제를 운영하고 있고 또한 단일 국가이지만 사실상으로는 연방제 국가이다. 각 지방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권한은 조금씩 다르며 연방정부와 함께 운용하는 건강보험과 교육제도가 있어 공용어를 설정하고 특별한 전통 문화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행하는 곳도 있다. 이러한 체계에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으며 연방에서 각 말단 단위의 행정 자치 단체로 분권화가 이양된 것이라 각 지방이 균등하게 제정하거나 계획하는 것의 형태는 아니다. 법률도 이에 해당한다. 일부 지방 정부는 특별히 지역주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이 강할 경우 더욱 국가 대 국가의 형태로 지방 정부를 운용하려는 움직임을 연방 정부에 보내고 있다. 지방 분권화와 권력 이양화가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 것은 공동입헌주의(coconstitutionalism)라는 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1997년 영국에서 도입된 권력 분권제와 흡사하다. 동시에 스페인은 유럽 연합으로 더 나아간 통합을 주도적으로 실현하려 하고 있어 연방정부 기관에서 유럽 연합의 공식 기관이나 단체에 연방 정부의 권한을 넘기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국적 논쟁[편집] 정치적인 상황과 논쟁에 대해서 스페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한다. 좌파이냐 우파이냐와 연방제 단일 국가인가와 다국적인가에 대한 주제이다. 정당들의 계획과 개개인의 시민이 가지고 있는 의견은 두 경우를 다 돌이켜봐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스페인 왕국의 헌법은 1)통합 국가이며 2)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지역이 합쳐진 것이다라 적고 있다. 이 서술은 정치 이론 상으로 Nationality와 Nation의 의미가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모순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지지하는 정당과 각 지역의 다국적 체제를 인정하는 정당과의 균형을 맞추려는 서술이라는 데 의견이 맞춰진다. 스페인의 자치 지방을 토대로 한 영토의 구성은 헌법적으로도 이러한 과거 역사와 각 지방주의의 상황을 적절히 배합해 안배한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연방제를 지지하는 정당들은 스페인이 단일 국가이며 지방 분권화를 추진하되 좀 더 강력한 연방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갈리시아 지역주의 정치이론가들은 그들 스스로 각가의 국가를 이루고 있으며 스페인 왕국의 일원으로 구성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러한 정당들은 스페인 왕국이 4개의 왕국-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 그리고 카스티야스페인 왕국-이 합쳐져 전체 연방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는 주장에 동조한다. 이들 중 일부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이탈리아 국적자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스위스를 하나의 모티프로 보아서 독립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러한 관념이 관개되어 있지는 하지만 현재의 행정 구역이 갖는 경계와는 관념이 다르다. 현재의 상황은 두 가지 역사적 실패가 결합되어 이뤄진 것이다; 1) 연방제 정당은 통합된 관념으로서 국가를 프랑스처럼 구성할 수 없었고 스페인의 정치, 영토의 구성과 기구들은 분화되어 나타났다. 2)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방제 반발 운동에서 스페인이 자유롭지 못했던 탓이다. 에타와 그라포[편집] 스페인 정부는 바스크 분리독립운동인 ETA에 대한 오랜 반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1959년 설립되어 무장 투쟁을 하고 있는 에타는 프랑코에 반대하고자 설립되어 바스크의 독립을 폭력적인 수단으로라도 사용해 독립을 쟁취하려 한다. 게릴라전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며 국제적으로는 테러리스트 지위에 올라 있다. 애초에 무력을 쓴 것은 아니었고 바스크 지방조차도 폭력과 유혈 사태 조장을 용인하고 있지 않으나 다른 접근법으로 독립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존재하고 있어 연방 정부와 대립각이 여전하다. 최초에 ETA는 스페인 안보세력과 군부, 고위 관료를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군부와 저명한 정치인들이 치안을 더욱 강화하려 하면서 에타는 점진적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으로 눈을 돌려 관광객을 위협하는 것이 정부를 압박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경제적인 피해를 주려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바스크 지방정부에 대한 경제적인 위기가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악용한 것이기도 하다. 스페인 정부 기관과 재계 건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여러 공격이 있었으며 1995년 야당 지도자 아스나르에 대한 자동차 폭탄 테러를 포함하여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아스나르는 이 사고로 VIP 자동차가 파괴되기는 했으나 크게 다치지 않았다. 에타의 테러 동안 80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스페인 정부는 보고 있다. 2005년 5월 17일 모든 하원의 정당(PP 제외)은 연방정부의 평화교섭안을 통과시켰다. 정치적 교착상태를 더욱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움직임임과 동시에 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였다. 여러 정당과 연립 정당을 이루던 교섭단체들은 192표를 내어 찬성표를 던졌고 PP 의원들은 147표의 반대표를 냈다. 에타는 2006년 3월 24일부터 "영구적인 휴전"을 선언했지만 2006년 12월 30일 바하라스 T4 국제공항 폭탄테러가 일어나 전복됐다. 계속적으로 영구적인 휴전을 주장하고 있어 연방 정부는 사실상 통제에 상당한 힘을 얻게 되었으며 프랑스 당국과 협조하여 얻은 성과도 일부 포함되고 있다. 스페인은 막시즘 저항 단체인 그라포와도 대립 중이다. 10월 1일의 혁명 단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그라포는 도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그 장소는 갈리시아의 비고였다. 스페인 정부의 전복과 막시즘-레닌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목표에서다. 나토와 미국의 스페인 등장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으며 오랜 동안 폭탄 테러와 은행 강도, 암살, 납치를 하며 1970년대와 80년대 스페인의 국익과 배치되는 일을 저질렀다. 2000년 6월 바르셀로나에서 두 대의 소형차 폭파 사고가 있었고 그라포는 이 사건이 자신들이 행한 것이라며 이 사건 뿐 아니라 여러 사건에 대해 자신들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사건으로는 두 건의 실패한 무장자동차 강도사건이 포함되었으며 1대에서는 1명의 치안보안관이 사망하고 1999-2000 선거전에서는 정당 건물에 4건의 폭파사건이 있었다. 2002년 스페인 정부는 대대적인 그라포 회원 숙청과 발본색원에 나서 일부 지도자급 인사를 포함한 여러 명을 체포했다. 현재에는 주요 인사이던 자들이 체포되거나 국외에 있어 예전만큼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형태[편집] 알카에다는 스페인에서 여러 지부를 운용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다른 여타 국가들에서의 작전을 지원하는 한편 스페인 국내에서도 여러 공격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 스페인 수사 당국과 사법 부서는 적극적으로 이들을 체포하고 수색하고자 하고 있으며 2003년 1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전가를 올렸다. 그러한 노력으로 스페인 당국은 16명의 테러 용의범을 체포하는 한편 폭탄과 다른 화학전 사용 가능 물질을 압수했다. 스페인은 활동적으로 다른 국가의 정부와 함께 테러 위협을 없애려는 데 힘쓰고 있다. 스페인은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공격으로 급작스런 공격을 당해 출근하던 무고한 시민 191명이 희생되었다. 알카에다가 주 용의자로 지목된 가운데 일부는 아스나르 정부의 폐단이 낳은 결과로 보기도 했다. 그의 정부가 실각하자 2004년 선거가 일어나기 단 4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부와 미디어가 에타가 저지를 일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유권자들의 아스나르 정부와 관영매체의 보도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으며 이슬람 단체가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은 더욱 커졌다. 그 배경으로는 스페인이 이라크 전쟁을 지원하면서 국내에 테러가 일어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스나르 정부가 꾸몄다는 추측에서이며 많은 스페인인들이 정부의 속임수로 여기고 있다. 각주[편집] ↑ Article 1.3. of the Spanish Constitution of 1.978 lays down that "the political form of the Spanish State is that of a Parliamentary Monarchy"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페인의_정치&oldid=24358410" 분류: 스페인의 정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Françaisעבריתहिन्दीItalianoLatviešu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일 (토) 22: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스페인의 정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페인의 정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페인의 정치는 양원 의회로 구성되며 입헌군주제를 취한다. 스페인의 군주는 국가의 수반이며 총리가 내각의 수장으로서 양당제 하에 구성된다. 중앙 입법 기구는 양원으로 구성되며 내각이 견고해야 해당 정부도 지속될 수 있다. 목차 1 왕권 2 내각 권한 3 입법기구 4 사법부 5 행정구역 5.1 지역 6 국적 논쟁 7 에타와 그라포 8 이슬람 근본주의의 형태 9 각주 왕권[편집] 헌법 1항 3조에서는 스페인의 정치적 개혁은 양원 군주제의 개혁에 해당한 것으로 적었다.[1] 56항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국왕은 국가의 수장이자 최고통수권자이며 번영과 통합의 상징이다. 그는 조정자이자 여러 기구의 원만한 작업을 돕는 사람으로서 스페인의 가장 높은 지위를 국제 관계에서 대표하며 같은 역사적 맥락에 포함된 곳에도 해당한다.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그에게 여러 자격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2. 그의 직함은 스페인의 군주(왕)이며 그는 왕위에 부속단 다른 직함을 취할 수 있다. 3. 왕의 권한은 불가침 영역이며 책임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은 64조에 명기된대로 반드시 부서를 거쳐야 한다. 부서 단계를 거치지 않은 조치는 유효하지 않으며 65조 2항만이 예외를 명기한다. 57항의 내용이다: 1. 스페인 국왕은 부르봉 왕가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후손으로 역사적 정당성이 있는 왕가의 적통 후손을 따른다. 왕위로의 계승은 장자상속제와 그 순위에 따라 규정되며 다음과 같이 정해진다 ; 같은 서열의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동성일 경우 연장자가 연소자보다 우위에 있다 62항은 국왕의 재임에 대해 명기한다: a) 법령에 대한 규제 및 반포; b) 의회 소집 및 해산 및 선거 실시; c) 헌법 개정 발의; d) 내각 대표 후보 발의; 내각 임명 및 해임권; e) 정부 관료의 임명 및 해임; f) 내각회의에 따른 칙령 발의 및 치안과 군사 행동 발의권, 국장과 칭호 수여 g) 국가 내정에 대한 보고, 이런 목적으로 언제든지 내각회의에 주재할 권리; h)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권리; i) 사면권 행사; j) 왕실 산하의 사관학교에 대한 지원 63조가 적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왕은 외국에 대사와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도록 한다. 스페인의 외교사절단은 그로부터 임명된 자들이다. 2. 조약을 통한 국제적 협약 이행에 대한 문제는 국가의 승인이 왕이 서명한다. 3. 전쟁 선포와 강화조약에 있어 의회가 허가한 후에는 왕이 의무적으로 서명한다. 내각 권한[편집]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 내각의 권한은 내각 회의(Consejo de Ministros)에 기초한다. 국왕이 임명한 내각의 수장이 선도하며 일단 하원에서 선거를 거쳐 뽑은 뒤에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이다. 후보자가 지명되면 1차 투표에서 하원의 대다수의 표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 실패할 경우 2차 투표에서는 과반의 표만 얻으면 된다. 총리는 다른 내각의 구성원을 임명하여 그 후에 왕이 이를 승인한다. 정부의 수장으로서 총리는 여러 부통령을 임명할 수 있으며 이는 의무 사항은 아니다. 또한 정부 기구의 고문 역할을 하는 국가위원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입법기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의회입니다. 국가 수준에서 스페인은 직접적으로 의회의 대표를 선출하며 양원제로 구성되어 상원과 하원으로 나뉜다. 상하원은 거의 동일한 기간 동안 재직하며 최대 4년이다. 양원은 극명하게 다른 두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선출 관행이다. 두 곳 모두 지역 단위로 선출한다. 인구에 따라 의석이 배분된다. 그러나 각 주의 의석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아니고 2석씩 일괄 배정이여서 인구가 적은 과소 지자체를 좀 더 대변하는 현상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지적되어 개헌에 대한 요구가 있다. 상하원의 큰 차이는 대부분의 법이 하원의 승인 하에 공표된다는 데 있기도 하다. 상원이 이를 거부할 수 있으나 모든 상원의 거부권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강하다. 사법부[편집] 스페인 사법부는 재판관과 치안 판사가 권한을 행사하며 각 사법 절차에 따라 다른 법원의 구조를 갖고 있다. 최고 법원은 스페인 대법원이다. 사법부의 역할은 스페인 사법위원회가 결정하며 의장은 대법원장이 겸임한다. 위원회는 12명의 재판관과 8명의 배심원으로 이뤄지며 이들은 3/5 대다수가 선출한 의회 의원들에서 선출된 것이다. 행정구역[편집] 스페인은 17개의 지방; 안달루시아, 아라곤, 아스투리앗, 발레아레스 제도, 카나리아 제도, 카스티야라만차, 카스티야 이 레온, 카탈루냐, 발렌시아, 에스트레마두라, 갈리시아, 라리오하, 마드리드, 무르시아, 나바라, 바스크 지방;으로 나뉜다. 주의 모로코 근처에 스페인 령 5곳이 분포한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자치 도시이며 다른 도시들보다 자치권이 더 강하지만 자치 지방보다는 그 권한이 약하다. 차파리나스 섬과 페뇽데벨레스데라고메라 섬, 페뇽 데 알우세마스 섬은 스페인 연방정부가 직접 관리한다. 지역[편집] 1978년 헌법은 지방의 분권화 탄생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1985년경 17곳의 지방(카나리아 제도와 발레아레스 제도 포함)에 대한 의결이 지방자치제도 헌장에 의해 의결되었다. 1979년 최초의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바스크와 카탈루냐에서 일어났으며 가장 극렬한 민족주의 및 지방주의 운동이 일어났던 곳에 해당한다. 이후로 여러 자치 정부는 각기의 정부를 꾸리고 있다. 중앙 정부는 지방 정부에 권력 이양을 지속적으로 행하려 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보건과 교육, 사회 프로그램 등에 대해서도 완전한 의결권 및 책임을 이양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스페인 헌법 149항에 의해서 독점적인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제한이 되기도 한다. 모든 자치 지방의 정부는 단원제 의회가 선출한 정부에 의해 구성된다. 스페인은 형식적으로 보았을 때 지방자치제를 운영하고 있고 또한 단일 국가이지만 사실상으로는 연방제 국가이다. 각 지방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권한은 조금씩 다르며 연방정부와 함께 운용하는 건강보험과 교육제도가 있어 공용어를 설정하고 특별한 전통 문화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행하는 곳도 있다. 이러한 체계에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으며 연방에서 각 말단 단위의 행정 자치 단체로 분권화가 이양된 것이라 각 지방이 균등하게 제정하거나 계획하는 것의 형태는 아니다. 법률도 이에 해당한다. 일부 지방 정부는 특별히 지역주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이 강할 경우 더욱 국가 대 국가의 형태로 지방 정부를 운용하려는 움직임을 연방 정부에 보내고 있다. 지방 분권화와 권력 이양화가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 것은 공동입헌주의(coconstitutionalism)라는 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1997년 영국에서 도입된 권력 분권제와 흡사하다. 동시에 스페인은 유럽 연합으로 더 나아간 통합을 주도적으로 실현하려 하고 있어 연방정부 기관에서 유럽 연합의 공식 기관이나 단체에 연방 정부의 권한을 넘기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국적 논쟁[편집] 정치적인 상황과 논쟁에 대해서 스페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한다. 좌파이냐 우파이냐와 연방제 단일 국가인가와 다국적인가에 대한 주제이다. 정당들의 계획과 개개인의 시민이 가지고 있는 의견은 두 경우를 다 돌이켜봐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스페인 왕국의 헌법은 1)통합 국가이며 2)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지역이 합쳐진 것이다라 적고 있다. 이 서술은 정치 이론 상으로 Nationality와 Nation의 의미가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모순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지지하는 정당과 각 지역의 다국적 체제를 인정하는 정당과의 균형을 맞추려는 서술이라는 데 의견이 맞춰진다. 스페인의 자치 지방을 토대로 한 영토의 구성은 헌법적으로도 이러한 과거 역사와 각 지방주의의 상황을 적절히 배합해 안배한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연방제를 지지하는 정당들은 스페인이 단일 국가이며 지방 분권화를 추진하되 좀 더 강력한 연방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갈리시아 지역주의 정치이론가들은 그들 스스로 각가의 국가를 이루고 있으며 스페인 왕국의 일원으로 구성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러한 정당들은 스페인 왕국이 4개의 왕국-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 그리고 카스티야스페인 왕국-이 합쳐져 전체 연방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는 주장에 동조한다. 이들 중 일부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이탈리아 국적자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스위스를 하나의 모티프로 보아서 독립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러한 관념이 관개되어 있지는 하지만 현재의 행정 구역이 갖는 경계와는 관념이 다르다. 현재의 상황은 두 가지 역사적 실패가 결합되어 이뤄진 것이다; 1) 연방제 정당은 통합된 관념으로서 국가를 프랑스처럼 구성할 수 없었고 스페인의 정치, 영토의 구성과 기구들은 분화되어 나타났다. 2)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방제 반발 운동에서 스페인이 자유롭지 못했던 탓이다. 에타와 그라포[편집] 스페인 정부는 바스크 분리독립운동인 ETA에 대한 오랜 반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1959년 설립되어 무장 투쟁을 하고 있는 에타는 프랑코에 반대하고자 설립되어 바스크의 독립을 폭력적인 수단으로라도 사용해 독립을 쟁취하려 한다. 게릴라전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며 국제적으로는 테러리스트 지위에 올라 있다. 애초에 무력을 쓴 것은 아니었고 바스크 지방조차도 폭력과 유혈 사태 조장을 용인하고 있지 않으나 다른 접근법으로 독립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존재하고 있어 연방 정부와 대립각이 여전하다. 최초에 ETA는 스페인 안보세력과 군부, 고위 관료를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군부와 저명한 정치인들이 치안을 더욱 강화하려 하면서 에타는 점진적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으로 눈을 돌려 관광객을 위협하는 것이 정부를 압박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경제적인 피해를 주려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바스크 지방정부에 대한 경제적인 위기가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악용한 것이기도 하다. 스페인 정부 기관과 재계 건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여러 공격이 있었으며 1995년 야당 지도자 아스나르에 대한 자동차 폭탄 테러를 포함하여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아스나르는 이 사고로 VIP 자동차가 파괴되기는 했으나 크게 다치지 않았다. 에타의 테러 동안 80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스페인 정부는 보고 있다. 2005년 5월 17일 모든 하원의 정당(PP 제외)은 연방정부의 평화교섭안을 통과시켰다. 정치적 교착상태를 더욱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움직임임과 동시에 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였다. 여러 정당과 연립 정당을 이루던 교섭단체들은 192표를 내어 찬성표를 던졌고 PP 의원들은 147표의 반대표를 냈다. 에타는 2006년 3월 24일부터 "영구적인 휴전"을 선언했지만 2006년 12월 30일 바하라스 T4 국제공항 폭탄테러가 일어나 전복됐다. 계속적으로 영구적인 휴전을 주장하고 있어 연방 정부는 사실상 통제에 상당한 힘을 얻게 되었으며 프랑스 당국과 협조하여 얻은 성과도 일부 포함되고 있다. 스페인은 막시즘 저항 단체인 그라포와도 대립 중이다. 10월 1일의 혁명 단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그라포는 도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그 장소는 갈리시아의 비고였다. 스페인 정부의 전복과 막시즘-레닌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목표에서다. 나토와 미국의 스페인 등장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으며 오랜 동안 폭탄 테러와 은행 강도, 암살, 납치를 하며 1970년대와 80년대 스페인의 국익과 배치되는 일을 저질렀다. 2000년 6월 바르셀로나에서 두 대의 소형차 폭파 사고가 있었고 그라포는 이 사건이 자신들이 행한 것이라며 이 사건 뿐 아니라 여러 사건에 대해 자신들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사건으로는 두 건의 실패한 무장자동차 강도사건이 포함되었으며 1대에서는 1명의 치안보안관이 사망하고 1999-2000 선거전에서는 정당 건물에 4건의 폭파사건이 있었다. 2002년 스페인 정부는 대대적인 그라포 회원 숙청과 발본색원에 나서 일부 지도자급 인사를 포함한 여러 명을 체포했다. 현재에는 주요 인사이던 자들이 체포되거나 국외에 있어 예전만큼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형태[편집] 알카에다는 스페인에서 여러 지부를 운용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다른 여타 국가들에서의 작전을 지원하는 한편 스페인 국내에서도 여러 공격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 스페인 수사 당국과 사법 부서는 적극적으로 이들을 체포하고 수색하고자 하고 있으며 2003년 1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전가를 올렸다. 그러한 노력으로 스페인 당국은 16명의 테러 용의범을 체포하는 한편 폭탄과 다른 화학전 사용 가능 물질을 압수했다. 스페인은 활동적으로 다른 국가의 정부와 함께 테러 위협을 없애려는 데 힘쓰고 있다. 스페인은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공격으로 급작스런 공격을 당해 출근하던 무고한 시민 191명이 희생되었다. 알카에다가 주 용의자로 지목된 가운데 일부는 아스나르 정부의 폐단이 낳은 결과로 보기도 했다. 그의 정부가 실각하자 2004년 선거가 일어나기 단 4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부와 미디어가 에타가 저지를 일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유권자들의 아스나르 정부와 관영매체의 보도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으며 이슬람 단체가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은 더욱 커졌다. 그 배경으로는 스페인이 이라크 전쟁을 지원하면서 국내에 테러가 일어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스나르 정부가 꾸몄다는 추측에서이며 많은 스페인인들이 정부의 속임수로 여기고 있다. 각주[편집] ↑ Article 1.3. of the Spanish Constitution of 1.978 lays down that "the political form of the Spanish State is that of a Parliamentary Monarchy"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페인의_정치&oldid=24358410" 분류: 스페인의 정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Françaisעבריתहिन्दीItalianoLatviešu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일 (토) 22: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스페인의 정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페인의 정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페인의 정치는 양원 의회로 구성되며 입헌군주제를 취한다. 스페인의 군주는 국가의 수반이며 총리가 내각의 수장으로서 양당제 하에 구성된다. 중앙 입법 기구는 양원으로 구성되며 내각이 견고해야 해당 정부도 지속될 수 있다. 목차 1 왕권 2 내각 권한 3 입법기구 4 사법부 5 행정구역 5.1 지역 6 국적 논쟁 7 에타와 그라포 8 이슬람 근본주의의 형태 9 각주 왕권[편집] 헌법 1항 3조에서는 스페인의 정치적 개혁은 양원 군주제의 개혁에 해당한 것으로 적었다.[1] 56항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국왕은 국가의 수장이자 최고통수권자이며 번영과 통합의 상징이다. 그는 조정자이자 여러 기구의 원만한 작업을 돕는 사람으로서 스페인의 가장 높은 지위를 국제 관계에서 대표하며 같은 역사적 맥락에 포함된 곳에도 해당한다.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그에게 여러 자격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2. 그의 직함은 스페인의 군주(왕)이며 그는 왕위에 부속단 다른 직함을 취할 수 있다. 3. 왕의 권한은 불가침 영역이며 책임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은 64조에 명기된대로 반드시 부서를 거쳐야 한다. 부서 단계를 거치지 않은 조치는 유효하지 않으며 65조 2항만이 예외를 명기한다. 57항의 내용이다: 1. 스페인 국왕은 부르봉 왕가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후손으로 역사적 정당성이 있는 왕가의 적통 후손을 따른다. 왕위로의 계승은 장자상속제와 그 순위에 따라 규정되며 다음과 같이 정해진다 ; 같은 서열의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동성일 경우 연장자가 연소자보다 우위에 있다 62항은 국왕의 재임에 대해 명기한다: a) 법령에 대한 규제 및 반포; b) 의회 소집 및 해산 및 선거 실시; c) 헌법 개정 발의; d) 내각 대표 후보 발의; 내각 임명 및 해임권; e) 정부 관료의 임명 및 해임; f) 내각회의에 따른 칙령 발의 및 치안과 군사 행동 발의권, 국장과 칭호 수여 g) 국가 내정에 대한 보고, 이런 목적으로 언제든지 내각회의에 주재할 권리; h)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권리; i) 사면권 행사; j) 왕실 산하의 사관학교에 대한 지원 63조가 적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왕은 외국에 대사와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도록 한다. 스페인의 외교사절단은 그로부터 임명된 자들이다. 2. 조약을 통한 국제적 협약 이행에 대한 문제는 국가의 승인이 왕이 서명한다. 3. 전쟁 선포와 강화조약에 있어 의회가 허가한 후에는 왕이 의무적으로 서명한다. 내각 권한[편집]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 내각의 권한은 내각 회의(Consejo de Ministros)에 기초한다. 국왕이 임명한 내각의 수장이 선도하며 일단 하원에서 선거를 거쳐 뽑은 뒤에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이다. 후보자가 지명되면 1차 투표에서 하원의 대다수의 표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 실패할 경우 2차 투표에서는 과반의 표만 얻으면 된다. 총리는 다른 내각의 구성원을 임명하여 그 후에 왕이 이를 승인한다. 정부의 수장으로서 총리는 여러 부통령을 임명할 수 있으며 이는 의무 사항은 아니다. 또한 정부 기구의 고문 역할을 하는 국가위원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입법기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의회입니다. 국가 수준에서 스페인은 직접적으로 의회의 대표를 선출하며 양원제로 구성되어 상원과 하원으로 나뉜다. 상하원은 거의 동일한 기간 동안 재직하며 최대 4년이다. 양원은 극명하게 다른 두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선출 관행이다. 두 곳 모두 지역 단위로 선출한다. 인구에 따라 의석이 배분된다. 그러나 각 주의 의석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아니고 2석씩 일괄 배정이여서 인구가 적은 과소 지자체를 좀 더 대변하는 현상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지적되어 개헌에 대한 요구가 있다. 상하원의 큰 차이는 대부분의 법이 하원의 승인 하에 공표된다는 데 있기도 하다. 상원이 이를 거부할 수 있으나 모든 상원의 거부권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강하다. 사법부[편집] 스페인 사법부는 재판관과 치안 판사가 권한을 행사하며 각 사법 절차에 따라 다른 법원의 구조를 갖고 있다. 최고 법원은 스페인 대법원이다. 사법부의 역할은 스페인 사법위원회가 결정하며 의장은 대법원장이 겸임한다. 위원회는 12명의 재판관과 8명의 배심원으로 이뤄지며 이들은 3/5 대다수가 선출한 의회 의원들에서 선출된 것이다. 행정구역[편집] 스페인은 17개의 지방; 안달루시아, 아라곤, 아스투리앗, 발레아레스 제도, 카나리아 제도, 카스티야라만차, 카스티야 이 레온, 카탈루냐, 발렌시아, 에스트레마두라, 갈리시아, 라리오하, 마드리드, 무르시아, 나바라, 바스크 지방;으로 나뉜다. 주의 모로코 근처에 스페인 령 5곳이 분포한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자치 도시이며 다른 도시들보다 자치권이 더 강하지만 자치 지방보다는 그 권한이 약하다. 차파리나스 섬과 페뇽데벨레스데라고메라 섬, 페뇽 데 알우세마스 섬은 스페인 연방정부가 직접 관리한다. 지역[편집] 1978년 헌법은 지방의 분권화 탄생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1985년경 17곳의 지방(카나리아 제도와 발레아레스 제도 포함)에 대한 의결이 지방자치제도 헌장에 의해 의결되었다. 1979년 최초의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바스크와 카탈루냐에서 일어났으며 가장 극렬한 민족주의 및 지방주의 운동이 일어났던 곳에 해당한다. 이후로 여러 자치 정부는 각기의 정부를 꾸리고 있다. 중앙 정부는 지방 정부에 권력 이양을 지속적으로 행하려 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보건과 교육, 사회 프로그램 등에 대해서도 완전한 의결권 및 책임을 이양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스페인 헌법 149항에 의해서 독점적인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제한이 되기도 한다. 모든 자치 지방의 정부는 단원제 의회가 선출한 정부에 의해 구성된다. 스페인은 형식적으로 보았을 때 지방자치제를 운영하고 있고 또한 단일 국가이지만 사실상으로는 연방제 국가이다. 각 지방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권한은 조금씩 다르며 연방정부와 함께 운용하는 건강보험과 교육제도가 있어 공용어를 설정하고 특별한 전통 문화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행하는 곳도 있다. 이러한 체계에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으며 연방에서 각 말단 단위의 행정 자치 단체로 분권화가 이양된 것이라 각 지방이 균등하게 제정하거나 계획하는 것의 형태는 아니다. 법률도 이에 해당한다. 일부 지방 정부는 특별히 지역주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이 강할 경우 더욱 국가 대 국가의 형태로 지방 정부를 운용하려는 움직임을 연방 정부에 보내고 있다. 지방 분권화와 권력 이양화가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 것은 공동입헌주의(coconstitutionalism)라는 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1997년 영국에서 도입된 권력 분권제와 흡사하다. 동시에 스페인은 유럽 연합으로 더 나아간 통합을 주도적으로 실현하려 하고 있어 연방정부 기관에서 유럽 연합의 공식 기관이나 단체에 연방 정부의 권한을 넘기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국적 논쟁[편집] 정치적인 상황과 논쟁에 대해서 스페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한다. 좌파이냐 우파이냐와 연방제 단일 국가인가와 다국적인가에 대한 주제이다. 정당들의 계획과 개개인의 시민이 가지고 있는 의견은 두 경우를 다 돌이켜봐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스페인 왕국의 헌법은 1)통합 국가이며 2)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지역이 합쳐진 것이다라 적고 있다. 이 서술은 정치 이론 상으로 Nationality와 Nation의 의미가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모순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지지하는 정당과 각 지역의 다국적 체제를 인정하는 정당과의 균형을 맞추려는 서술이라는 데 의견이 맞춰진다. 스페인의 자치 지방을 토대로 한 영토의 구성은 헌법적으로도 이러한 과거 역사와 각 지방주의의 상황을 적절히 배합해 안배한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연방제를 지지하는 정당들은 스페인이 단일 국가이며 지방 분권화를 추진하되 좀 더 강력한 연방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갈리시아 지역주의 정치이론가들은 그들 스스로 각가의 국가를 이루고 있으며 스페인 왕국의 일원으로 구성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러한 정당들은 스페인 왕국이 4개의 왕국-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 그리고 카스티야스페인 왕국-이 합쳐져 전체 연방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는 주장에 동조한다. 이들 중 일부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이탈리아 국적자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스위스를 하나의 모티프로 보아서 독립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러한 관념이 관개되어 있지는 하지만 현재의 행정 구역이 갖는 경계와는 관념이 다르다. 현재의 상황은 두 가지 역사적 실패가 결합되어 이뤄진 것이다; 1) 연방제 정당은 통합된 관념으로서 국가를 프랑스처럼 구성할 수 없었고 스페인의 정치, 영토의 구성과 기구들은 분화되어 나타났다. 2)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방제 반발 운동에서 스페인이 자유롭지 못했던 탓이다. 에타와 그라포[편집] 스페인 정부는 바스크 분리독립운동인 ETA에 대한 오랜 반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1959년 설립되어 무장 투쟁을 하고 있는 에타는 프랑코에 반대하고자 설립되어 바스크의 독립을 폭력적인 수단으로라도 사용해 독립을 쟁취하려 한다. 게릴라전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며 국제적으로는 테러리스트 지위에 올라 있다. 애초에 무력을 쓴 것은 아니었고 바스크 지방조차도 폭력과 유혈 사태 조장을 용인하고 있지 않으나 다른 접근법으로 독립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존재하고 있어 연방 정부와 대립각이 여전하다. 최초에 ETA는 스페인 안보세력과 군부, 고위 관료를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군부와 저명한 정치인들이 치안을 더욱 강화하려 하면서 에타는 점진적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으로 눈을 돌려 관광객을 위협하는 것이 정부를 압박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경제적인 피해를 주려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바스크 지방정부에 대한 경제적인 위기가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악용한 것이기도 하다. 스페인 정부 기관과 재계 건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여러 공격이 있었으며 1995년 야당 지도자 아스나르에 대한 자동차 폭탄 테러를 포함하여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아스나르는 이 사고로 VIP 자동차가 파괴되기는 했으나 크게 다치지 않았다. 에타의 테러 동안 80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스페인 정부는 보고 있다. 2005년 5월 17일 모든 하원의 정당(PP 제외)은 연방정부의 평화교섭안을 통과시켰다. 정치적 교착상태를 더욱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움직임임과 동시에 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였다. 여러 정당과 연립 정당을 이루던 교섭단체들은 192표를 내어 찬성표를 던졌고 PP 의원들은 147표의 반대표를 냈다. 에타는 2006년 3월 24일부터 "영구적인 휴전"을 선언했지만 2006년 12월 30일 바하라스 T4 국제공항 폭탄테러가 일어나 전복됐다. 계속적으로 영구적인 휴전을 주장하고 있어 연방 정부는 사실상 통제에 상당한 힘을 얻게 되었으며 프랑스 당국과 협조하여 얻은 성과도 일부 포함되고 있다. 스페인은 막시즘 저항 단체인 그라포와도 대립 중이다. 10월 1일의 혁명 단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그라포는 도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그 장소는 갈리시아의 비고였다. 스페인 정부의 전복과 막시즘-레닌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목표에서다. 나토와 미국의 스페인 등장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으며 오랜 동안 폭탄 테러와 은행 강도, 암살, 납치를 하며 1970년대와 80년대 스페인의 국익과 배치되는 일을 저질렀다. 2000년 6월 바르셀로나에서 두 대의 소형차 폭파 사고가 있었고 그라포는 이 사건이 자신들이 행한 것이라며 이 사건 뿐 아니라 여러 사건에 대해 자신들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사건으로는 두 건의 실패한 무장자동차 강도사건이 포함되었으며 1대에서는 1명의 치안보안관이 사망하고 1999-2000 선거전에서는 정당 건물에 4건의 폭파사건이 있었다. 2002년 스페인 정부는 대대적인 그라포 회원 숙청과 발본색원에 나서 일부 지도자급 인사를 포함한 여러 명을 체포했다. 현재에는 주요 인사이던 자들이 체포되거나 국외에 있어 예전만큼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형태[편집] 알카에다는 스페인에서 여러 지부를 운용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다른 여타 국가들에서의 작전을 지원하는 한편 스페인 국내에서도 여러 공격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 스페인 수사 당국과 사법 부서는 적극적으로 이들을 체포하고 수색하고자 하고 있으며 2003년 1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전가를 올렸다. 그러한 노력으로 스페인 당국은 16명의 테러 용의범을 체포하는 한편 폭탄과 다른 화학전 사용 가능 물질을 압수했다. 스페인은 활동적으로 다른 국가의 정부와 함께 테러 위협을 없애려는 데 힘쓰고 있다. 스페인은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공격으로 급작스런 공격을 당해 출근하던 무고한 시민 191명이 희생되었다. 알카에다가 주 용의자로 지목된 가운데 일부는 아스나르 정부의 폐단이 낳은 결과로 보기도 했다. 그의 정부가 실각하자 2004년 선거가 일어나기 단 4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부와 미디어가 에타가 저지를 일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유권자들의 아스나르 정부와 관영매체의 보도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으며 이슬람 단체가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은 더욱 커졌다. 그 배경으로는 스페인이 이라크 전쟁을 지원하면서 국내에 테러가 일어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스나르 정부가 꾸몄다는 추측에서이며 많은 스페인인들이 정부의 속임수로 여기고 있다. 각주[편집] ↑ Article 1.3. of the Spanish Constitution of 1.978 lays down that "the political form of the Spanish State is that of a Parliamentary Monarchy"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페인의_정치&oldid=24358410" 분류: 스페인의 정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Françaisעבריתहिन्दीItalianoLatviešu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일 (토) 22: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소련의 경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련의 경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소련의 경제 1932년 완공된 드네프르 수력 발전소는 소련 경제력의 상징이었다.순위 2위 (명목) / 2위 (PPP) (1938년 ~ 1990년)통화 소련 루블 (SUR)회계 년도 역년무역 기구 경제상호원조회의, 아시아 태평양 경제 사회 위원회[1]통계GDP 명목: 2조 2000억 $ (1985년)PPP: 2조 7985억 $ (1990년)GDP 성장률 +1.5% (1989년)[2]+1.4% (1990년)[3]-2.4% (1991년)1인당 GDP 명목: 7,211$ (1990년, 30위)[4]PPP: 9,300$ (1990년, 28위)[5] 인플레이션 (CPI) 5% (1989년)6% (1990년)[6]14% (1991년)빈곤선 미만 인구 1.5% (1989년)1.7% (1990년)14.4% (1991년)[7][8]지니 계수 0.21 (매우 낮음, 1985년)0.238 (매우 낮음, 1988년)0.26 (낮음, 1989년)0.24 (매우 낮음, 1990년)[9]0.289 (낮음, 1991년)[10]노동인구 1억 5230만 명1차산업:20%2차산업:47%3차산업:33% (1990년)[11]실업률 1% 미만 (1982년 ~ 1990년)[12][13]1.2% (1991년)주요 산업 석유 산업, 군수 산업, 중공업, 자동차 산업, 항공우주 산업, 화학 산업, 철강 산업, 식품 산업, 가구 산업, 전자·전기 산업무역수출 1,107억 $(9위, 1989년)[14]수출 품목 공장 부품, 석유 및 석유제품, 천연가스, 광물 및 금속 장비, 가구, 특산 농작물, 무기주요 수출국가 동구권 49%, 미국 및 제3세계 21%, 서유럽 14%, 기타 공산권 11%, 쿠바 5% (1988년)수입 1,147억 $ (10위, 1989년)[15]수입 품목 농작물, 광물, 소비재, 경공업 공산품주요 수입국가 동구권 54%, 기타 공산권 20%, 서유럽 11%, 미국 및 제3세계 15% (1988년)총 외채 273억 $ (1990년 평균)[16]국가 재정국가 부채 250억 $, GDP의 1% (1990년)800억 $, GDP의 3.1% (1991년)[17]수익 4,226억 $ (5위, 1990년)[18]지출 5,210억 $ (2위, 1990년)[19]경제 원조 1,476억 $ (1988년)[20] 주요 내용 출처:CIA World Fact Book모든 값은 달리 명시하지 않는 한 미국 달러입니다 이 문서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경제에 관한 것이다. 소련은 1989년 3월까지 국유화, 사회주의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영했다. 소련 경제의 특징은 국가의 투자 통제와 산업 자산에 대한 직접적인 소유였다. 목차 1 개요 1.1 역사 1.1.1 초기(1918년 ~ 1921년) 1.1.2 신경제정책 및 국가자본주의 시기(1921년 ~ 1928년) 1.1.3 소비에트 계획 경제 시기(1928년 ~ 1965년) 1.1.4 코시긴 개혁 및 브레즈네프 시기(1965년 ~ 1986년) 1.1.5 페레스트로이카 시기(1986년 ~ 1989년) 1.1.6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전환 시기(1989년 ~ 1991년) 2 각주 3 참고 자료 개요[편집] 소련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가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기 이전까지 소련의 경제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 계획 경제였다. 소련의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하였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을 했다. 1920년대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이 부분적으로 시장요소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1930년대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여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소련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소련은 1950년대에도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소련 말기 경제 침체는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경제 침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대개 1970년대 초로 생각되고 있다. 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소련의 초대 대통령)는 관료적 비효율이 날로 커지는 것을 보고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은 뒤, 경제적 자유화가 계속되어 소련의 경제는 시장지향적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했으나, 시장 경제 개혁은 오히려 소련 경제에 악영향을 줬다.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오히려 1989년, 급진적인 자본주의 경제 정책을 시행했으며,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1991년 소련은 붕괴했다. 국가 전체의 경제 방침은 1928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5개년 계획들로 결정되었다. 소련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강국으로 탈바꿈했다.[21] 소련의 신속한 변화 능력(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것을 두고 “후진국을 신속하게 근대화와 산업화의 위기를 거치게 할 수 있는 검증된 능력”이라고 했다)은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22] 특히 제1차에서 제3차에 이르는 5개년 계획(1928년 ~ 1940년)이 서방의 대공황 시기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이런 기대는 더욱 심화되었다.[23] 독소전쟁 발발 당시에도 소련인들은 빈곤했다는 주장도 있다.[24] 스탈린 시대부터 브레즈네프 시대 초기까지 소련은 고도성장을 하였다. 1950년 당시 GDP 수준은(단위: 1십억 1990년 달러) 소련이 510 (100%), 일본이 161 (100%), 미국이 1465 (100%)였다. 1965년이 되면 수치는 다시 소련, 일본, 미국이 각각 1011 (198%), 587 (365%), 그리고 2607 (179%)였다.[25] 주요 산업 생산품은 석유, 철강, 자동차, 항공우주, 통신, 화학, 전자, 식품가공, 벌목, 채광, 방위산업 등이었다. 1978년 소련은 총 1280만 대의 자동차를 보유했으며, 이중에 승용차는 660만 대, 트럭과 버스는 620만 대였다. 당시 미국은 총 1억4880만 대의 자동차를 보유했으며, 승용차는 1억 1660만 대, 버스와 트럭은 3220만 대였다. 인구비로 비교하면 소련의 승용차 보급 사정은 더욱 열악하여, 1978년 소련인 40명당 승용차1대를 보유한데 비해 미국은 1.9명당 1대, 프랑스는 3명당 1대, 헝가리는 14명당 1대로써 소련의 승용차 보급이 자본주의 선진국들에 비해 월등히 뒤져 있었다. 소련의 승용차 보급 수준은 과테말라, 칠레, 이란, 요르단, 코트디부아르 등 당시의 후진국들과 비슷했다.[26] 역사[편집] 소련 경제사는 크게 다섯 갈래로 구분된다고 알려져있으나 1989년, 몰타 회담 이후 소련은 1986년에 시행되었던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정책에 비해 훨씬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을 받아들임으로 사실상 1989년에 새로운 경제 체체로 전환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섯 갈래로 구분될 수 있다. 초기(1918년 ~ 1921년)[편집] 러시아 공화국이 10월 혁명으로 붕괴하고난 후인 1917년 말기에서 혁명이 끝나는 1921년까지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 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러시아 제국 시절 당시의 1차 대전 여파, 케렌스키 임시정부 시절에는 각종 혼란스러운 정치 투쟁과 끝나지 않은 전쟁의 부정적인 효과, 혁명 이후 러시아 내에 잔존한 반동주의자들과의 내전(러시아 내전) 등과 기존에 발달하지 못한 러시아의 산업 시스템, 동시에 문맹률과 빈곤율은 매우 높았으며, 도시화는 18%에 불과했다. 이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곧바로 시작된 내전에 전시공산주의라는 체제를 선포했는데, 이는 기존에 볼셰비키 공동체에서 행했던 계획 경제 정책을 더욱 급진적으로 실행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내전 중에 체제 결속력과 더불어, 경제도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27] 볼셰비키의 계획 경제 정책은 '생산수단 공동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작업지와 탁아소, 거주지를 최대한 가깝게 해놓는 것과 근로시간을 대폭 줄여 주 48시간 근로제로 바꾸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경제 정책이 포함되었다. 1910년대 유럽 노동자들의 평균 근로시간은 주 70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이는 매우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근로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지 않았고, 급여는 공평했다. 농업의 경우는 토지를 지주로부터 모두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였고, 생산된 작물은 중앙당국에서 모두 걷은 다음, 공평하게 분배했다. 물론, 농민들은 생산한 작물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체제 결속력을 유지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줬지만, 전반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경제 체제였다. 특히, 농업의 부실화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서 큰 문제였다. 강대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원조를 받던 러시아 백군과 달리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후원국, 후원단체가 없었다. 내전으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자, 레닌은 농업 생산성의 극대화를 목표로 1921년에 니콜라이 부하린과 경제 정책 초안을 만들어,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28] 신경제정책 및 국가자본주의 시기(1921년 ~ 1928년)[편집] 1921년에 벌어진 대기근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1921년 초기에 계획되고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경제정책은 경작지에서 나온 일부의 작물을 농민이 스스로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고, 국가 분배가 아닌 농업 시장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낮은 농업 생산력은 단번에 높여주었다. 신경제정책은 농업 정책에만 국한되어 시행된 정책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는 다른 경영 시스템을 내포하고 있었다. 1917년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에 기초적인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이 도입되었을 때,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경제 운용 방식의 일종인 '노동자 자주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은 공동으로 경영체(생산수단)을 운영할 지식이 없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1918년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은 노동자 독재 시스템을 축소하고 중앙당에서 경영인을 파견하는,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을 부활시켰다. 당시, 레프 트로츠키와 같은 극좌 그룹은 이에 대해 반대했었다. 이러한 반대로 인해 블라디미르 레닌은 트로츠키와 협의 끝에 고스플란이라는 경제 계획 중앙기구를 만들었으며, 이 기구는 신경제정책 시기 하에서 벌어지는 여러 경제 활동이 소비에트 지역을 자본주의화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29] 하지만, 1918년에 저러한 파견경영인 위주의 경영 방식은 고착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당시 수많은 생산수단은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신경제정책은 파견경영인이 생산수단을 경영하는 것에 대해 좀더 유화적인 입장으로 일관했으며, 시장 경제적 요소를 대거 도입하여 농업을 포함한 기타 소비재 상품의 거래가 활발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즉, 혁명 이후 주를 차지했던 노동자 독재 경영 시스템의 종말을 의미했다. 1921년부터 1928년을 거쳐 노동자 독재 경영 시스템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 당시에 다시 부유층이 된 계급이나 경영인들을 '네프맨'이라고 불렀으며, 농업 생산물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을 허용하자 곧바로 부농계급이 발생했다.[30]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전시공산주의를 지지했던 볼셰비키 내 극좌파들에게 반대를 당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스스로 "국가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공산주의 도달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경제사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제정책 끝에 러시아 내전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스탈린이 소련의 정권을 잡고 약 4년 간 신경제정책 기조는 유지되었다. 소비에트 계획 경제 시기(1928년 ~ 1965년)[편집] 1928년까지 진행된 신경제정책은 사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행해야 할 경제 정책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블라디미르 레닌도 또한 신경제정책을 내전 시기에 경제 안정화를 위한 임시수단으로 여겼을 뿐, 무산계급 독재 체제에서 장기적이고 보편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정치·경제 체제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에 국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내전 상태에서 벗어나 약 4년 간 경제적 회복기를 거쳤던 소련은, 체제 내부의 안정성만을 찾았을 뿐, 제국주의자들의 경제 공격에는 버티기 어려운(외부의 공격을 뜻함) 상태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주장했던 일국사회주의의 정책 기조와는 맞는 것이었다. 내전에서 4년 간의 회복기를 거친 소련은 아직도 공업 생산력이 높지 못했으며, 기술력도 또한 없었다. 스탈린은 산업 발전 초기, 공업 생산력의 증대와 기술력의 발전은 철두철미한 계획 경제의 요소가 들어가야 실행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31]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에 신경제정책을 폐지했다. 그가 주장한 5개년 경제 계획안은 주로 경제의 집산화와 거대 중공업의 발전, 계획 경제 하에서 농업 생산력 안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았다. 1938년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 그는 이 중에서 농업의 집단화를 중시했다. 신경제정책은 '부농계급'을 부활시켰고, 이러한 부농계급이 고착화된다면, 소비에트 정부의 정당성이 무효화 됨에 더불어, 스탈린의 경제 계획안이 성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의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자유 시장'의 규모는 커지고, 그만큼 소비에트 정부가 제어할 수 있는 선이 낮아진다. 소비에트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경제 선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재들의 소비와 공급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스탈린에 있어서 매우 해로운 상태에 해당했다. 특히 농업은 식량공급의 원천이며, 이것이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 아래 없으면 안된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는 모든 경영 활동이 중앙 경제 계획 당국에서 이루어지길 바랐고, 모든 경제 활동을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고 봤다.[32] 스탈린 정부는 경제를 집산화시키고 모든 자원 생산지를 국유화했다. 이는 직접 기간산업에도 예외가 없었다. 계획 경제로 도시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되자, 막 도시화가 된 곳은 노동력 부족 문제에 부딪혔다. 스탈린은 농업 종사자들을 강제로 도시에 이주시켰고, 그들을 공장의 생산 노동자로 변환시켰다. 그는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 농업 국유화도 매우 급진적으로 실행했는데, 이에 반발한 부농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작물을 불태웠고, 자살을 기도하거나 도주를 시도했다. 작물이 불태워지고, 경작지가 내팽겨지자 소련의 농업 생산력은 매우 낮아지게 되었고 이는 1932년 대기근인 홀로도모르를 불러왔다. 이 당시 아사자는 약 200-300만 명에 달한다고 알려졌다.[33] 1930년대 소련의 트렉터 공장 1930년대 소비 정책으로는, 자국의 생산품의 소비를 장려했고, 수입품 억제와 함께 수출에 특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공정을 대량 생산하여 수출 증대에 힘썼다. 스티하노프 운동을 통해서 개개인의 생산성을 중요시한 동시에 개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억압하고, 집단의 발전을 목표로 둔 상태에서 급진적인 국유화 산업투자를 통하여 거대한 경제지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수출을 경제의 목표로 둔 만큼 노동 계급의 생활 수준은 열악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이 당시 급진적인 산업화로 인해 산업재해가 심하게 발생했으며, 이는 곧 정치적 반대파를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스탈린 정부는 어떠한 공정에서 문제가 생겨 비판받을 때 파견경영인들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방식으로 정치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경제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제철산업의 규모와 생산력은 1928년에 비해 약 5배, 경공업은 약 3배, 전력 시스템은 약 10배, 기타 화학공업의 규모는 5배가 늘어났다. 또한 국가 정책 위주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많이 한 끝에 운송수단에 있어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1938년에는 경제 발전에 힘입어 2차 경제 계획안을 계획하지만, 독소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추축군은 소련 도시에 있던 공장 지역 수만, 수천곳과 농경작지를 파괴했지만 종전 이후 소련은 2년 안에 빠르게 전후복구를 마쳤다. 1947년에는 화폐 개혁을 실시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 권력투쟁으로 권력에 오른 흐루쇼프는 스탈린 시대에 행해졌던 일부 계획 경제 시스템을 수정했는데, 제일 크게 평가받는 것이 중공업 생산 위주에서 경공업 생산 위주로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1955년부터 생산수단 지대에서 노동자들의 경영 운영 권리를 증대시켰으며, 동시에 파견경영인의 의사결정권도 강화했다. 이 시기에 소련 국민의 생활 수준은 상승했다. 특히,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도시화로 인해 도시에 고질적으로 주거가 부족했던 점을 흐루쇼프카로 해결했는데, 주택보급률이 1955년에서 1964년까지 약 40%가 증가했으며, 그 면적 또한 2.3배가 증가했다. 하지만 경공업 위주의 생산 방식을 전면에 내놓는 것은 1955년 소련 정치국위원회에서 통과되지 못했으므로, 근본적인 개혁은 진행되지 못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을 활성화시켜서 경제 성장에 몰두하기보단 소비재, 경공업을 발전시켜 대중 계층의 삶을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스탈린 시대 당시에는 경제 성장률이 급상승했지만, 그만큼 노동자들의 삶 수준은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공업을 우대하는 정책을 일부 펼쳤으나, 중공업에 대한 투자는 줄지 않았기 때문에, 1964년은 1955년에 비해 중공업 부문 생산량이 85% 정도 증가했다.[34] 소비에트 계획 경제 개혁이 시작된 1928년에는 1917년 대비 1인당 국민 소득이 10%높은데 그쳤으나, 이후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1928년부터 1937년까지 공식 경제성장율은 연간 16.5%이나 실제로는 4.8%로 추정되고 있다.[35] 코시긴 개혁 및 브레즈네프 시기(1965년 ~ 1986년)[편집] 1980년대 소련의 수출 비중[36] 196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 소련의 경제 성장률은 점점 낮아졌다. 니키타 흐루쇼프 시기에는 이 문제가 소련 내에서 공론화 될 정도로 문제시되지는 않았지만, 경제 전문가들에겐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기존의 소비에트 계획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대표적인 전문가가 바로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총리를 지낸 알렉세이 코시긴이었다. 그는 1965년에 '1965년 소련 경제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주 내용은 기업 내 문제에 대해 수지대응을 경영인이 쉽게 할 수 있도록 기업체의 독립채산권을 인정하는 것, 상품 공급량 증대, 노동 동기유발 방법론에 대한 다양화 등이었다.[37] 특히 기업 독립채산제의 시행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불완전하고 사회주의적인 독립채산제지만, 경제 계획을 중앙당국이 아닌 생산수단 내의 경영인에게 모두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당의 영향력이 약해질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는 과거 1920년대에서 1930년대처럼 경제 규모가 낮았던 상태에서는 집산주의 경제 정책이 잘 발휘될 수 있으나, 어느정도 규모가 커진 경제 상태에서 집산주의 경제 정책은 관료적 비효율성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생산수단이 경제 계획을 담당하는 중앙당국에 보고되는 시간부터, 특정 생산수단이 어느 방향으로 생산방향을 바꿔야 할 지에 대해 결정되는 모든 과정까지 관료적 비효율화가 들어가지 않은 게 없다며 비판했다.[38] 코시긴의 정책은 시행된 초기에만 소련의 경제성장률을 약 1% 정도 상승시킨 것에 그쳤다. 그가 시행한 독립채산제 정책으로 계획 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은 감소했지만, 자본주의적 지령 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이 새로 생기게 되었다. 코시긴 개혁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기업 파견경영인들의 사업이 수익성이 있는 지 검토하고 그에 비례한 산업지원금을 지급했지만, 생산수단의 파견경영인들은 사적 이익을 위해서 자신이 관리하는 생산 수단에 관련된 사업의 수익성을 거짓으로 올려서 보고했고,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정부는 수익성이 없는 사업에 높은 수준의 산업보조금을 지급했다. 또한 경영인의 지위가 높아져서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노동 착취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소련은 여전히 소비에트 사회주의 특유의 국유화 경제 틀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자본주의 국가로 변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나, 하지만 앞서 언급된 문제는 오히려 소련 경제 성장률을 저해하는 결과를 보였다. 정책이 시행된 후 1966년에서 1970년까지의 GDP 성장률은 7.7%, 1971년에서 1975년까지의 성장률은 5.7%, 1975년에서 1979년 사이는 4.4%로 지속적으로 내려갔다. 생산력도 같은 수준이었다. 1960년의 총 수출 계수를 100이라고 했을 때, 정책이 완전히 시행되기 전인 1965년에는 총 수출 계수가 148,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오래인 1970년에는 163으로 올라갔지만, 1975년에는 오히려 137, 1979년에는 116으로 낮아졌으며, 고정생산자산도 오히려 낮아졌다. 하지만 동시에 실업률 해결은 큰 성과를 보였다. 1985년 소련의 전자상품가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중동에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1979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예상 외의 장기전을 맞이했는데 이것은 소련 경제에 크나큰 악재를 가져왔다. 이미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전부터, 냉전 구도에서 전쟁 억지력을 갖추기 위해 소련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GDP의 약 12%를 군비에 투자했으며, 흐루쇼프의 국방 정책이었던 '비대칭무기 증대'를 폐기하고 T-72, BTR-70, MiG-25-7 등의 재래식 무기의 생산량을 대폭 늘리고, 병력의 총원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이렇다 할 경제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경제 성장 동력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생산, 그리고 소비 활동, 소련의 특유의 복지 체제로 인해서 소련 국민들은 별 다른 문제점을 느낄 수 없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린 소련 공산당 또한 개혁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39] 몇몇 경제학자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를 코시긴 개혁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소련의 경제 인프라는 1960년대 중반에 확실히 완성되었는데, 인프라가 완성된 경제 하에서는 그 전에 인프라를 구축하던 시기의 경제 성장률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경제학 상식이다. 그러나 코시긴은 이러한 문제를 공통적인 문제점으로 보지 않았고, 제도의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의 인프라가 해당 국가의 특성에 맞게 정비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길은 2차와 3차 산업 노동인력의 움직임이 몇년 간 지속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1차 산업의 노동인력이 적어질 때 알 수 있는데, 1965년 당시 1차 산업 종사자의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31%, 2차 산업의 경우는 44%, 3차 산업의 경우는 25%였다. 이것이 1970년에는 1차 산업은 25%, 2차 산업은 46%, 3차 산업은 29%로 변하는데, 차이가 크지 않다. 하지만 인프라가 완전히 구축되기 전인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는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50% 이상을 차지했으므로, 그 차이가 높았다. 2차 산업과 3차 산업 종사자의 증가는 곧 경제 인프라의 완성을 의미하며, 코시긴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가 사회주의 체제에 시장 경제적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비교적 쉽게 관리할 수 있는 수준높은 경제-기술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 특성상의 문제라고 보는 학자들도 존재한다.[40] 페레스트로이카 시기(1986년 ~ 1989년)[편집] 1982년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이후에 취임한 유리 안드로포프나 체르넨코같은 후임 서기장들은 각각 약 1년의 임기만 채운 뒤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소련 공산당은 1985년에 개혁파에 속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당의 서기장으로 앉혔다. 1986년에 있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정치 지도층 뿐만이 아니라 소련 국민들에게도 관료주의 개혁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주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는 관료적 비효율성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1985년 4월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계획하고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1986년 초기에는 국유기업이 아닌 '민간개별기업'의 구성을 일부 허용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1986년부터 시작된 국제유가 하락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소련 경제에 있어서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던 고르바초프는 소련 사회에서 '개혁'과 동의어로 보였던 '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 정책을 하나씩 실행해나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추천한 리가초프의 경우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옐친과 달리 급진적인 정책을 쓰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제공받는 사회적 배당, 사회주의적 복지 체계를 바꾸지는 않을뿐,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국유기업이 아닌 개별기업이 창출한 이익을 국가가 대부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흔히,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존재하는 '법인세'의 개념을 도입, 동시에 세금 정책 구도를 자본주의 국가와 거의 비슷하게 바꾸었다. 1987년 1월 1일부턴 1965년 당시의 독립채산제 시행에 비해 훨씬 급진적인 독립채산제를 실시했다. 경공업, 자동차공업, 기계공업 등 6개 부(部)의 산하 국유기업들 그리고 콜호스에 독립채산제가 실시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사회적 임금을 대폭 줄이는 한편, 직접 임금 개혁을 단행하여 노동자의 임금을 25%, 관리자의 임금을 30% 인상했다. 또한 합작기업법을 공포해 외국과의 합작 투자를 허용했다. 이어서 같은 해 5월부터는 소비재 가내 생산과 자동차 수리업 및 주택 수리업, 그리고 가구 제조업 등을 포함한 29개의 업종에 대해 경영, 법인자유화를 전면 선언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해서 러시아 경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로 개혁하려고 했다."고 평가된다. 거래자유화, 경영자유화 정책을 펼쳤지만, 이 당시에는 아직 국유화 되어있는 경제 집단(은행, 분배위원회, 지역소비에트, 중앙 경제 계획기구)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남겨둔 결과로 소련은 아직 사회주의 국가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경제·사회적 안전망이 해체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이어서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의 무역을 담당하던 중앙당국 기관을 폐지했으며, 소련 내 기업 문제를 관리·감독하던 계획 경제 기구들의 역할도 대거 축소했다. 이러한 리가초프는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 기조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고, 당 내에서 보수파를 자처했다.[41]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급진적인 정책은 1986년 후반과 1987년의 6분기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후부터 다시 문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국가기업법을 새로 만들어서 기업의 독자적인 가격 결정을 허용했으나,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으로 인해서 빈부격차 문제가 생겼을 뿐만이 아니라, 정경유착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기업의 사적소유권을 인정해주면서, 정치 권력 일부와 기업의 경영인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발전하지 못한 소련 경제에 있어서 매우 당연한 문제였다. 게다가 자본주의 강대국들과의 무역 자유화는 오히려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산업권에 소련 경제를 맡기는 상태가 되었다. 평균 1.2% ~ 1.3%의 경제 성장률을 보여줬던 1986년과 1987년에 비해, 1988년 ~ 1989년에 들어서는 약 0.2% ~ 0.4%의 경제 성장률을 보이게 되었다. 동시에 고르바초프가 실시한 금주령으로 인해 포도주 산업과 포도 생산산업에 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42]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전환 시기(1989년 ~ 1991년)[편집] 또한 국가기업법으로 인해서 투자 자유도가 높아지고, 경영 자유화가 가속화되자, 고르바초프 정부는 자금 흐름 및 창출에 유동성을 더하기 위해서 대량의 통화를 풀었다. 하지만, 이는 극심한 인플레를 가져왔으며, 오히려 증가한 통화량에 비해서 투자율, 기업자금유동성이 증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동성 함정으로 인한 사중손실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89년 3월 정치국원(대의원) 선거에서 자본주의로의 개혁을 주장하는 급진파가 의회의 다수파를 차지하므로 자본주의 정책은 더욱 심화되었다. 공적 소유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적 소유를 허용해줬기 때문에 소련 사회엔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양극화가 뿌리내렸으며, 심지어 실업률이 1%대로 올라갔다. 동시에 다당제를 허용하고 '글라스노스트'라는 개방 정책을 실행함으로 정치적 혼란에 대응하기 어려운 기조로 바뀌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반공주의 또는 분리주의 성향의 시위대가 지역 노동자와 파업을 실행하는 것을 쉽게 만드는 등, 신-경영인의 생산수단(또는 기업체) 내 권한이 강력해진 동시에 사적 소유가 일부 허용됨에 따라, 지역 소비에트에 포함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운영 방향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이로 인한 불만으로도 파업이 생기게 되었다.[43] 오랫동안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의 경제를 개혁한 결과로 1990년에 올리가르히(페레스트로이카 기간에 발생한 독점자본계급)라는 새로운 계급이 나타났다. 심지어, 1990년부터는 모스크바에서는 노숙자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노숙자, 실업자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만 나온다는 당시 소련인들에게는 충격을 주었다. 1989년 중후반부터 소비에트주의의 틀이 파괴되면서, 밀거래와 불법거래 등을 소련 정부가 제대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렀다. 파업과, 정치적 혼란, 정경유착, 비윤리적인 경제 활동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소련 경제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소련 생산품은 1940년대에서 1988년까지 세계 시장 점유율이 약 20%였지만, 1989년에는 4분의 3 수준인 13%에 그쳤다. 1990년 당시의 GDP 성장률은 1.4%, 경제 성장률은 0.2%를 기록함으로 저성장을 보였다. 1991년에는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함으로 경제도 사실상 마비되었다. 소련 경제에 있어서 재정 건전성은 강력한 무기로 떠올랐으나, 1991년 여러 분기에 걸쳐, 재정 적자를 겪어야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급진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일정 기간에 발생한 수익을 모두 소유하고 그것을 적당하게 분배했기 때문에 재정 적자를 면할 수 있었지만, 경영인의 사적 소유권을 일부 인정하면서, 수익으로 인해 생긴 자본을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복리증진 사업에 관해서 투자의지가 전혀 없는 법인에게 수익이 몰리게 된 구조는, 정부 주도의 복지(마르크스주의적 복지)가 진행되었던 소련에게는 큰 치명타가 되었다. 이로인해 정부에서 제공한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주거, 지역공동체 활동지원금 등은 모두 적자를 맞았으며, 특히 의료의 경우는 적자가 심해서 의료물품 배급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렸다. 이렇듯, 소련의 자본주의 개혁으로 인한 경제 위기는 이러한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44] 각주[편집] ↑ 소련 경제 무역기구 정보 ↑ 1989년 GDP 성장률 정보 ↑ 1990년 - 1991년 GDP 성장률 정보 ↑ Martin Myant 저 《Transition Economies: Political Economy in Russia, Eastern Europe, and Central Asia》 p. 185 참조 ↑ ppp GDP 정보 ↑ 소련 인플레 정보 ↑ 임금이 205 루블 이하인 국민을 기준으로 한다. ↑ 빈곤율 정보 ↑ 동구권 지니계수 ↑ http://data.worldbank.org/indicator/SI.POV.GINI?page=5&order=wbapi_data_value_1990%20wbapi_data_value&sort=asc ↑ 소련 노동력 정보 ↑ 소련 경제 실업률 정보1 ↑ 소련 경제 실업률 정보2 ↑ 소련 1989년 수출액 정보 ↑ 소련 1989년 수입액 정보 ↑ 소련 외채 정보 ↑ 소련 국가 부채 정보1 ↑ 소련 수출 수익 정보 ↑ 소련 지출 정보 ↑ 소련 경제원조 지출액 정보 ↑ Davies 1998, p. 1, 3. ↑ Peck 2006, p. 47.여기에 있어 대표적인 사람이 자와할랄 네루이다. 그는 “1920년대 말에 소련을 방문하고 소비에트의 산업 진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Bradley 2010, pp. 475–6. 참조. ↑ Allen 2003, p. 153. ↑ Harrison 1996, p. 123 ↑ Angus Maddison, The World Economy: A Millennial Perspective (2001) pp 274, 275, 298 ↑ The Contemporary Soviet City edited by Henry W. Morton, Robert C. Stuart, M.E. Sharpe, 1984, pp.194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25 ~ p. 68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71 ~ p. 73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74 ~ p. 92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94 ~ p. 121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130 ~ p. 172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173 ~ p. 193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194 ~ p. 217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218 ~ p. 264 참조 ↑ Bergson A., Kuznets S., eds. Economic Trends in the Soviet Union. Cambr.,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3, p. 36, 155, 208 참조 ↑ “80년대 소련 수출 비중 정보” (PDF). 2018년 10월 2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8월 24일에 확인함.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286 ~ p. 310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311 ~ p. 333 참조 ↑ 브레즈네프 시대의 경제 정보 ↑ Churchwood, L. G. 저 《Soviet Socialism: Social and Political Essays. London: Routledge》 p. 30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337 ~ p. 342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343 ~ p. 367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368 ~ p. 405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406 ~ p. 430 참조 참고 자료[편집] Allen, Robert C. (2003). Farm to Factory: A Reinterpretation of the Soviet Industrial Revolu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Bradley, Mark Philip (2010). "Decolonization, the global South, and the Cold War, 1919–1962". In Melvyn P. Leffler and Odd Arne Westad,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ume 1: Origins (pp. 464–485).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83719-4. Daniels, Robert Vince (1993). The End of the Communist Revolution. London: Routledge. Davies, R.W. (1998). Soviet Economic Development from Lenin to Khrushchev.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Davies, R. W. ed. From Tsarism to the New Economic Policy: Continuity and Change in the Economy of the USSR (London, 1990) Davies, R. W.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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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5-699-07591-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련의_경제&oldid=24498905" 분류: 소련의 경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atviešuNederlands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9일 (토) 13: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소련의 경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련의 경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소련의 경제 1932년 완공된 드네프르 수력 발전소는 소련 경제력의 상징이었다.순위 2위 (명목) / 2위 (PPP) (1938년 ~ 1990년)통화 소련 루블 (SUR)회계 년도 역년무역 기구 경제상호원조회의, 아시아 태평양 경제 사회 위원회[1]통계GDP 명목: 2조 2000억 $ (1985년)PPP: 2조 7985억 $ (1990년)GDP 성장률 +1.5% (1989년)[2]+1.4% (1990년)[3]-2.4% (1991년)1인당 GDP 명목: 7,211$ (1990년, 30위)[4]PPP: 9,300$ (1990년, 28위)[5] 인플레이션 (CPI) 5% (1989년)6% (1990년)[6]14% (1991년)빈곤선 미만 인구 1.5% (1989년)1.7% (1990년)14.4% (1991년)[7][8]지니 계수 0.21 (매우 낮음, 1985년)0.238 (매우 낮음, 1988년)0.26 (낮음, 1989년)0.24 (매우 낮음, 1990년)[9]0.289 (낮음, 1991년)[10]노동인구 1억 5230만 명1차산업:20%2차산업:47%3차산업:33% (1990년)[11]실업률 1% 미만 (1982년 ~ 1990년)[12][13]1.2% (1991년)주요 산업 석유 산업, 군수 산업, 중공업, 자동차 산업, 항공우주 산업, 화학 산업, 철강 산업, 식품 산업, 가구 산업, 전자·전기 산업무역수출 1,107억 $(9위, 1989년)[14]수출 품목 공장 부품, 석유 및 석유제품, 천연가스, 광물 및 금속 장비, 가구, 특산 농작물, 무기주요 수출국가 동구권 49%, 미국 및 제3세계 21%, 서유럽 14%, 기타 공산권 11%, 쿠바 5% (1988년)수입 1,147억 $ (10위, 1989년)[15]수입 품목 농작물, 광물, 소비재, 경공업 공산품주요 수입국가 동구권 54%, 기타 공산권 20%, 서유럽 11%, 미국 및 제3세계 15% (1988년)총 외채 273억 $ (1990년 평균)[16]국가 재정국가 부채 250억 $, GDP의 1% (1990년)800억 $, GDP의 3.1% (1991년)[17]수익 4,226억 $ (5위, 1990년)[18]지출 5,210억 $ (2위, 1990년)[19]경제 원조 1,476억 $ (1988년)[20] 주요 내용 출처:CIA World Fact Book모든 값은 달리 명시하지 않는 한 미국 달러입니다 이 문서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경제에 관한 것이다. 소련은 1989년 3월까지 국유화, 사회주의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영했다. 소련 경제의 특징은 국가의 투자 통제와 산업 자산에 대한 직접적인 소유였다. 목차 1 개요 1.1 역사 1.1.1 초기(1918년 ~ 1921년) 1.1.2 신경제정책 및 국가자본주의 시기(1921년 ~ 1928년) 1.1.3 소비에트 계획 경제 시기(1928년 ~ 1965년) 1.1.4 코시긴 개혁 및 브레즈네프 시기(1965년 ~ 1986년) 1.1.5 페레스트로이카 시기(1986년 ~ 1989년) 1.1.6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전환 시기(1989년 ~ 1991년) 2 각주 3 참고 자료 개요[편집] 소련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가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기 이전까지 소련의 경제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 계획 경제였다. 소련의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하였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을 했다. 1920년대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이 부분적으로 시장요소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1930년대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여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소련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소련은 1950년대에도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소련 말기 경제 침체는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경제 침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대개 1970년대 초로 생각되고 있다. 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소련의 초대 대통령)는 관료적 비효율이 날로 커지는 것을 보고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은 뒤, 경제적 자유화가 계속되어 소련의 경제는 시장지향적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했으나, 시장 경제 개혁은 오히려 소련 경제에 악영향을 줬다.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오히려 1989년, 급진적인 자본주의 경제 정책을 시행했으며,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1991년 소련은 붕괴했다. 국가 전체의 경제 방침은 1928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5개년 계획들로 결정되었다. 소련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강국으로 탈바꿈했다.[21] 소련의 신속한 변화 능력(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것을 두고 “후진국을 신속하게 근대화와 산업화의 위기를 거치게 할 수 있는 검증된 능력”이라고 했다)은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22] 특히 제1차에서 제3차에 이르는 5개년 계획(1928년 ~ 1940년)이 서방의 대공황 시기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이런 기대는 더욱 심화되었다.[23] 독소전쟁 발발 당시에도 소련인들은 빈곤했다는 주장도 있다.[24] 스탈린 시대부터 브레즈네프 시대 초기까지 소련은 고도성장을 하였다. 1950년 당시 GDP 수준은(단위: 1십억 1990년 달러) 소련이 510 (100%), 일본이 161 (100%), 미국이 1465 (100%)였다. 1965년이 되면 수치는 다시 소련, 일본, 미국이 각각 1011 (198%), 587 (365%), 그리고 2607 (179%)였다.[25] 주요 산업 생산품은 석유, 철강, 자동차, 항공우주, 통신, 화학, 전자, 식품가공, 벌목, 채광, 방위산업 등이었다. 1978년 소련은 총 1280만 대의 자동차를 보유했으며, 이중에 승용차는 660만 대, 트럭과 버스는 620만 대였다. 당시 미국은 총 1억4880만 대의 자동차를 보유했으며, 승용차는 1억 1660만 대, 버스와 트럭은 3220만 대였다. 인구비로 비교하면 소련의 승용차 보급 사정은 더욱 열악하여, 1978년 소련인 40명당 승용차1대를 보유한데 비해 미국은 1.9명당 1대, 프랑스는 3명당 1대, 헝가리는 14명당 1대로써 소련의 승용차 보급이 자본주의 선진국들에 비해 월등히 뒤져 있었다. 소련의 승용차 보급 수준은 과테말라, 칠레, 이란, 요르단, 코트디부아르 등 당시의 후진국들과 비슷했다.[26] 역사[편집] 소련 경제사는 크게 다섯 갈래로 구분된다고 알려져있으나 1989년, 몰타 회담 이후 소련은 1986년에 시행되었던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정책에 비해 훨씬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을 받아들임으로 사실상 1989년에 새로운 경제 체체로 전환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섯 갈래로 구분될 수 있다. 초기(1918년 ~ 1921년)[편집] 러시아 공화국이 10월 혁명으로 붕괴하고난 후인 1917년 말기에서 혁명이 끝나는 1921년까지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 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러시아 제국 시절 당시의 1차 대전 여파, 케렌스키 임시정부 시절에는 각종 혼란스러운 정치 투쟁과 끝나지 않은 전쟁의 부정적인 효과, 혁명 이후 러시아 내에 잔존한 반동주의자들과의 내전(러시아 내전) 등과 기존에 발달하지 못한 러시아의 산업 시스템, 동시에 문맹률과 빈곤율은 매우 높았으며, 도시화는 18%에 불과했다. 이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곧바로 시작된 내전에 전시공산주의라는 체제를 선포했는데, 이는 기존에 볼셰비키 공동체에서 행했던 계획 경제 정책을 더욱 급진적으로 실행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내전 중에 체제 결속력과 더불어, 경제도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27] 볼셰비키의 계획 경제 정책은 '생산수단 공동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작업지와 탁아소, 거주지를 최대한 가깝게 해놓는 것과 근로시간을 대폭 줄여 주 48시간 근로제로 바꾸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경제 정책이 포함되었다. 1910년대 유럽 노동자들의 평균 근로시간은 주 70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이는 매우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근로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지 않았고, 급여는 공평했다. 농업의 경우는 토지를 지주로부터 모두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였고, 생산된 작물은 중앙당국에서 모두 걷은 다음, 공평하게 분배했다. 물론, 농민들은 생산한 작물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체제 결속력을 유지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줬지만, 전반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경제 체제였다. 특히, 농업의 부실화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서 큰 문제였다. 강대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원조를 받던 러시아 백군과 달리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후원국, 후원단체가 없었다. 내전으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자, 레닌은 농업 생산성의 극대화를 목표로 1921년에 니콜라이 부하린과 경제 정책 초안을 만들어,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28] 신경제정책 및 국가자본주의 시기(1921년 ~ 1928년)[편집] 1921년에 벌어진 대기근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1921년 초기에 계획되고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경제정책은 경작지에서 나온 일부의 작물을 농민이 스스로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고, 국가 분배가 아닌 농업 시장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낮은 농업 생산력은 단번에 높여주었다. 신경제정책은 농업 정책에만 국한되어 시행된 정책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는 다른 경영 시스템을 내포하고 있었다. 1917년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에 기초적인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이 도입되었을 때,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경제 운용 방식의 일종인 '노동자 자주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은 공동으로 경영체(생산수단)을 운영할 지식이 없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1918년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은 노동자 독재 시스템을 축소하고 중앙당에서 경영인을 파견하는,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을 부활시켰다. 당시, 레프 트로츠키와 같은 극좌 그룹은 이에 대해 반대했었다. 이러한 반대로 인해 블라디미르 레닌은 트로츠키와 협의 끝에 고스플란이라는 경제 계획 중앙기구를 만들었으며, 이 기구는 신경제정책 시기 하에서 벌어지는 여러 경제 활동이 소비에트 지역을 자본주의화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29] 하지만, 1918년에 저러한 파견경영인 위주의 경영 방식은 고착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당시 수많은 생산수단은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신경제정책은 파견경영인이 생산수단을 경영하는 것에 대해 좀더 유화적인 입장으로 일관했으며, 시장 경제적 요소를 대거 도입하여 농업을 포함한 기타 소비재 상품의 거래가 활발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즉, 혁명 이후 주를 차지했던 노동자 독재 경영 시스템의 종말을 의미했다. 1921년부터 1928년을 거쳐 노동자 독재 경영 시스템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 당시에 다시 부유층이 된 계급이나 경영인들을 '네프맨'이라고 불렀으며, 농업 생산물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을 허용하자 곧바로 부농계급이 발생했다.[30]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전시공산주의를 지지했던 볼셰비키 내 극좌파들에게 반대를 당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스스로 "국가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공산주의 도달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경제사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제정책 끝에 러시아 내전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스탈린이 소련의 정권을 잡고 약 4년 간 신경제정책 기조는 유지되었다. 소비에트 계획 경제 시기(1928년 ~ 1965년)[편집] 1928년까지 진행된 신경제정책은 사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행해야 할 경제 정책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블라디미르 레닌도 또한 신경제정책을 내전 시기에 경제 안정화를 위한 임시수단으로 여겼을 뿐, 무산계급 독재 체제에서 장기적이고 보편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정치·경제 체제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에 국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내전 상태에서 벗어나 약 4년 간 경제적 회복기를 거쳤던 소련은, 체제 내부의 안정성만을 찾았을 뿐, 제국주의자들의 경제 공격에는 버티기 어려운(외부의 공격을 뜻함) 상태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주장했던 일국사회주의의 정책 기조와는 맞는 것이었다. 내전에서 4년 간의 회복기를 거친 소련은 아직도 공업 생산력이 높지 못했으며, 기술력도 또한 없었다. 스탈린은 산업 발전 초기, 공업 생산력의 증대와 기술력의 발전은 철두철미한 계획 경제의 요소가 들어가야 실행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31]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에 신경제정책을 폐지했다. 그가 주장한 5개년 경제 계획안은 주로 경제의 집산화와 거대 중공업의 발전, 계획 경제 하에서 농업 생산력 안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았다. 1938년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 그는 이 중에서 농업의 집단화를 중시했다. 신경제정책은 '부농계급'을 부활시켰고, 이러한 부농계급이 고착화된다면, 소비에트 정부의 정당성이 무효화 됨에 더불어, 스탈린의 경제 계획안이 성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의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자유 시장'의 규모는 커지고, 그만큼 소비에트 정부가 제어할 수 있는 선이 낮아진다. 소비에트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경제 선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재들의 소비와 공급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스탈린에 있어서 매우 해로운 상태에 해당했다. 특히 농업은 식량공급의 원천이며, 이것이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 아래 없으면 안된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는 모든 경영 활동이 중앙 경제 계획 당국에서 이루어지길 바랐고, 모든 경제 활동을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고 봤다.[32] 스탈린 정부는 경제를 집산화시키고 모든 자원 생산지를 국유화했다. 이는 직접 기간산업에도 예외가 없었다. 계획 경제로 도시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되자, 막 도시화가 된 곳은 노동력 부족 문제에 부딪혔다. 스탈린은 농업 종사자들을 강제로 도시에 이주시켰고, 그들을 공장의 생산 노동자로 변환시켰다. 그는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 농업 국유화도 매우 급진적으로 실행했는데, 이에 반발한 부농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작물을 불태웠고, 자살을 기도하거나 도주를 시도했다. 작물이 불태워지고, 경작지가 내팽겨지자 소련의 농업 생산력은 매우 낮아지게 되었고 이는 1932년 대기근인 홀로도모르를 불러왔다. 이 당시 아사자는 약 200-300만 명에 달한다고 알려졌다.[33] 1930년대 소련의 트렉터 공장 1930년대 소비 정책으로는, 자국의 생산품의 소비를 장려했고, 수입품 억제와 함께 수출에 특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공정을 대량 생산하여 수출 증대에 힘썼다. 스티하노프 운동을 통해서 개개인의 생산성을 중요시한 동시에 개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억압하고, 집단의 발전을 목표로 둔 상태에서 급진적인 국유화 산업투자를 통하여 거대한 경제지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수출을 경제의 목표로 둔 만큼 노동 계급의 생활 수준은 열악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이 당시 급진적인 산업화로 인해 산업재해가 심하게 발생했으며, 이는 곧 정치적 반대파를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스탈린 정부는 어떠한 공정에서 문제가 생겨 비판받을 때 파견경영인들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방식으로 정치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경제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제철산업의 규모와 생산력은 1928년에 비해 약 5배, 경공업은 약 3배, 전력 시스템은 약 10배, 기타 화학공업의 규모는 5배가 늘어났다. 또한 국가 정책 위주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많이 한 끝에 운송수단에 있어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1938년에는 경제 발전에 힘입어 2차 경제 계획안을 계획하지만, 독소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추축군은 소련 도시에 있던 공장 지역 수만, 수천곳과 농경작지를 파괴했지만 종전 이후 소련은 2년 안에 빠르게 전후복구를 마쳤다. 1947년에는 화폐 개혁을 실시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 권력투쟁으로 권력에 오른 흐루쇼프는 스탈린 시대에 행해졌던 일부 계획 경제 시스템을 수정했는데, 제일 크게 평가받는 것이 중공업 생산 위주에서 경공업 생산 위주로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1955년부터 생산수단 지대에서 노동자들의 경영 운영 권리를 증대시켰으며, 동시에 파견경영인의 의사결정권도 강화했다. 이 시기에 소련 국민의 생활 수준은 상승했다. 특히,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도시화로 인해 도시에 고질적으로 주거가 부족했던 점을 흐루쇼프카로 해결했는데, 주택보급률이 1955년에서 1964년까지 약 40%가 증가했으며, 그 면적 또한 2.3배가 증가했다. 하지만 경공업 위주의 생산 방식을 전면에 내놓는 것은 1955년 소련 정치국위원회에서 통과되지 못했으므로, 근본적인 개혁은 진행되지 못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을 활성화시켜서 경제 성장에 몰두하기보단 소비재, 경공업을 발전시켜 대중 계층의 삶을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스탈린 시대 당시에는 경제 성장률이 급상승했지만, 그만큼 노동자들의 삶 수준은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공업을 우대하는 정책을 일부 펼쳤으나, 중공업에 대한 투자는 줄지 않았기 때문에, 1964년은 1955년에 비해 중공업 부문 생산량이 85% 정도 증가했다.[34] 소비에트 계획 경제 개혁이 시작된 1928년에는 1917년 대비 1인당 국민 소득이 10%높은데 그쳤으나, 이후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1928년부터 1937년까지 공식 경제성장율은 연간 16.5%이나 실제로는 4.8%로 추정되고 있다.[35] 코시긴 개혁 및 브레즈네프 시기(1965년 ~ 1986년)[편집] 1980년대 소련의 수출 비중[36] 196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 소련의 경제 성장률은 점점 낮아졌다. 니키타 흐루쇼프 시기에는 이 문제가 소련 내에서 공론화 될 정도로 문제시되지는 않았지만, 경제 전문가들에겐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기존의 소비에트 계획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대표적인 전문가가 바로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총리를 지낸 알렉세이 코시긴이었다. 그는 1965년에 '1965년 소련 경제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주 내용은 기업 내 문제에 대해 수지대응을 경영인이 쉽게 할 수 있도록 기업체의 독립채산권을 인정하는 것, 상품 공급량 증대, 노동 동기유발 방법론에 대한 다양화 등이었다.[37] 특히 기업 독립채산제의 시행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불완전하고 사회주의적인 독립채산제지만, 경제 계획을 중앙당국이 아닌 생산수단 내의 경영인에게 모두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당의 영향력이 약해질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는 과거 1920년대에서 1930년대처럼 경제 규모가 낮았던 상태에서는 집산주의 경제 정책이 잘 발휘될 수 있으나, 어느정도 규모가 커진 경제 상태에서 집산주의 경제 정책은 관료적 비효율성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생산수단이 경제 계획을 담당하는 중앙당국에 보고되는 시간부터, 특정 생산수단이 어느 방향으로 생산방향을 바꿔야 할 지에 대해 결정되는 모든 과정까지 관료적 비효율화가 들어가지 않은 게 없다며 비판했다.[38] 코시긴의 정책은 시행된 초기에만 소련의 경제성장률을 약 1% 정도 상승시킨 것에 그쳤다. 그가 시행한 독립채산제 정책으로 계획 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은 감소했지만, 자본주의적 지령 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이 새로 생기게 되었다. 코시긴 개혁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기업 파견경영인들의 사업이 수익성이 있는 지 검토하고 그에 비례한 산업지원금을 지급했지만, 생산수단의 파견경영인들은 사적 이익을 위해서 자신이 관리하는 생산 수단에 관련된 사업의 수익성을 거짓으로 올려서 보고했고,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정부는 수익성이 없는 사업에 높은 수준의 산업보조금을 지급했다. 또한 경영인의 지위가 높아져서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노동 착취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소련은 여전히 소비에트 사회주의 특유의 국유화 경제 틀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자본주의 국가로 변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나, 하지만 앞서 언급된 문제는 오히려 소련 경제 성장률을 저해하는 결과를 보였다. 정책이 시행된 후 1966년에서 1970년까지의 GDP 성장률은 7.7%, 1971년에서 1975년까지의 성장률은 5.7%, 1975년에서 1979년 사이는 4.4%로 지속적으로 내려갔다. 생산력도 같은 수준이었다. 1960년의 총 수출 계수를 100이라고 했을 때, 정책이 완전히 시행되기 전인 1965년에는 총 수출 계수가 148,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오래인 1970년에는 163으로 올라갔지만, 1975년에는 오히려 137, 1979년에는 116으로 낮아졌으며, 고정생산자산도 오히려 낮아졌다. 하지만 동시에 실업률 해결은 큰 성과를 보였다. 1985년 소련의 전자상품가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중동에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1979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예상 외의 장기전을 맞이했는데 이것은 소련 경제에 크나큰 악재를 가져왔다. 이미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전부터, 냉전 구도에서 전쟁 억지력을 갖추기 위해 소련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GDP의 약 12%를 군비에 투자했으며, 흐루쇼프의 국방 정책이었던 '비대칭무기 증대'를 폐기하고 T-72, BTR-70, MiG-25-7 등의 재래식 무기의 생산량을 대폭 늘리고, 병력의 총원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이렇다 할 경제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경제 성장 동력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생산, 그리고 소비 활동, 소련의 특유의 복지 체제로 인해서 소련 국민들은 별 다른 문제점을 느낄 수 없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린 소련 공산당 또한 개혁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39] 몇몇 경제학자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를 코시긴 개혁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소련의 경제 인프라는 1960년대 중반에 확실히 완성되었는데, 인프라가 완성된 경제 하에서는 그 전에 인프라를 구축하던 시기의 경제 성장률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경제학 상식이다. 그러나 코시긴은 이러한 문제를 공통적인 문제점으로 보지 않았고, 제도의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의 인프라가 해당 국가의 특성에 맞게 정비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길은 2차와 3차 산업 노동인력의 움직임이 몇년 간 지속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1차 산업의 노동인력이 적어질 때 알 수 있는데, 1965년 당시 1차 산업 종사자의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31%, 2차 산업의 경우는 44%, 3차 산업의 경우는 25%였다. 이것이 1970년에는 1차 산업은 25%, 2차 산업은 46%, 3차 산업은 29%로 변하는데, 차이가 크지 않다. 하지만 인프라가 완전히 구축되기 전인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는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50% 이상을 차지했으므로, 그 차이가 높았다. 2차 산업과 3차 산업 종사자의 증가는 곧 경제 인프라의 완성을 의미하며, 코시긴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가 사회주의 체제에 시장 경제적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비교적 쉽게 관리할 수 있는 수준높은 경제-기술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 특성상의 문제라고 보는 학자들도 존재한다.[40] 페레스트로이카 시기(1986년 ~ 1989년)[편집] 1982년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이후에 취임한 유리 안드로포프나 체르넨코같은 후임 서기장들은 각각 약 1년의 임기만 채운 뒤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소련 공산당은 1985년에 개혁파에 속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당의 서기장으로 앉혔다. 1986년에 있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정치 지도층 뿐만이 아니라 소련 국민들에게도 관료주의 개혁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주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는 관료적 비효율성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1985년 4월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계획하고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1986년 초기에는 국유기업이 아닌 '민간개별기업'의 구성을 일부 허용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1986년부터 시작된 국제유가 하락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소련 경제에 있어서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던 고르바초프는 소련 사회에서 '개혁'과 동의어로 보였던 '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 정책을 하나씩 실행해나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추천한 리가초프의 경우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옐친과 달리 급진적인 정책을 쓰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제공받는 사회적 배당, 사회주의적 복지 체계를 바꾸지는 않을뿐,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국유기업이 아닌 개별기업이 창출한 이익을 국가가 대부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흔히,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존재하는 '법인세'의 개념을 도입, 동시에 세금 정책 구도를 자본주의 국가와 거의 비슷하게 바꾸었다. 1987년 1월 1일부턴 1965년 당시의 독립채산제 시행에 비해 훨씬 급진적인 독립채산제를 실시했다. 경공업, 자동차공업, 기계공업 등 6개 부(部)의 산하 국유기업들 그리고 콜호스에 독립채산제가 실시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사회적 임금을 대폭 줄이는 한편, 직접 임금 개혁을 단행하여 노동자의 임금을 25%, 관리자의 임금을 30% 인상했다. 또한 합작기업법을 공포해 외국과의 합작 투자를 허용했다. 이어서 같은 해 5월부터는 소비재 가내 생산과 자동차 수리업 및 주택 수리업, 그리고 가구 제조업 등을 포함한 29개의 업종에 대해 경영, 법인자유화를 전면 선언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해서 러시아 경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로 개혁하려고 했다."고 평가된다. 거래자유화, 경영자유화 정책을 펼쳤지만, 이 당시에는 아직 국유화 되어있는 경제 집단(은행, 분배위원회, 지역소비에트, 중앙 경제 계획기구)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남겨둔 결과로 소련은 아직 사회주의 국가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경제·사회적 안전망이 해체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이어서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의 무역을 담당하던 중앙당국 기관을 폐지했으며, 소련 내 기업 문제를 관리·감독하던 계획 경제 기구들의 역할도 대거 축소했다. 이러한 리가초프는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 기조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고, 당 내에서 보수파를 자처했다.[41]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급진적인 정책은 1986년 후반과 1987년의 6분기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후부터 다시 문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국가기업법을 새로 만들어서 기업의 독자적인 가격 결정을 허용했으나,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으로 인해서 빈부격차 문제가 생겼을 뿐만이 아니라, 정경유착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기업의 사적소유권을 인정해주면서, 정치 권력 일부와 기업의 경영인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발전하지 못한 소련 경제에 있어서 매우 당연한 문제였다. 게다가 자본주의 강대국들과의 무역 자유화는 오히려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산업권에 소련 경제를 맡기는 상태가 되었다. 평균 1.2% ~ 1.3%의 경제 성장률을 보여줬던 1986년과 1987년에 비해, 1988년 ~ 1989년에 들어서는 약 0.2% ~ 0.4%의 경제 성장률을 보이게 되었다. 동시에 고르바초프가 실시한 금주령으로 인해 포도주 산업과 포도 생산산업에 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42]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전환 시기(1989년 ~ 1991년)[편집] 또한 국가기업법으로 인해서 투자 자유도가 높아지고, 경영 자유화가 가속화되자, 고르바초프 정부는 자금 흐름 및 창출에 유동성을 더하기 위해서 대량의 통화를 풀었다. 하지만, 이는 극심한 인플레를 가져왔으며, 오히려 증가한 통화량에 비해서 투자율, 기업자금유동성이 증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동성 함정으로 인한 사중손실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89년 3월 정치국원(대의원) 선거에서 자본주의로의 개혁을 주장하는 급진파가 의회의 다수파를 차지하므로 자본주의 정책은 더욱 심화되었다. 공적 소유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적 소유를 허용해줬기 때문에 소련 사회엔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양극화가 뿌리내렸으며, 심지어 실업률이 1%대로 올라갔다. 동시에 다당제를 허용하고 '글라스노스트'라는 개방 정책을 실행함으로 정치적 혼란에 대응하기 어려운 기조로 바뀌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반공주의 또는 분리주의 성향의 시위대가 지역 노동자와 파업을 실행하는 것을 쉽게 만드는 등, 신-경영인의 생산수단(또는 기업체) 내 권한이 강력해진 동시에 사적 소유가 일부 허용됨에 따라, 지역 소비에트에 포함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운영 방향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이로 인한 불만으로도 파업이 생기게 되었다.[43] 오랫동안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의 경제를 개혁한 결과로 1990년에 올리가르히(페레스트로이카 기간에 발생한 독점자본계급)라는 새로운 계급이 나타났다. 심지어, 1990년부터는 모스크바에서는 노숙자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노숙자, 실업자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만 나온다는 당시 소련인들에게는 충격을 주었다. 1989년 중후반부터 소비에트주의의 틀이 파괴되면서, 밀거래와 불법거래 등을 소련 정부가 제대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렀다. 파업과, 정치적 혼란, 정경유착, 비윤리적인 경제 활동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소련 경제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소련 생산품은 1940년대에서 1988년까지 세계 시장 점유율이 약 20%였지만, 1989년에는 4분의 3 수준인 13%에 그쳤다. 1990년 당시의 GDP 성장률은 1.4%, 경제 성장률은 0.2%를 기록함으로 저성장을 보였다. 1991년에는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함으로 경제도 사실상 마비되었다. 소련 경제에 있어서 재정 건전성은 강력한 무기로 떠올랐으나, 1991년 여러 분기에 걸쳐, 재정 적자를 겪어야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급진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일정 기간에 발생한 수익을 모두 소유하고 그것을 적당하게 분배했기 때문에 재정 적자를 면할 수 있었지만, 경영인의 사적 소유권을 일부 인정하면서, 수익으로 인해 생긴 자본을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복리증진 사업에 관해서 투자의지가 전혀 없는 법인에게 수익이 몰리게 된 구조는, 정부 주도의 복지(마르크스주의적 복지)가 진행되었던 소련에게는 큰 치명타가 되었다. 이로인해 정부에서 제공한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주거, 지역공동체 활동지원금 등은 모두 적자를 맞았으며, 특히 의료의 경우는 적자가 심해서 의료물품 배급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렸다. 이렇듯, 소련의 자본주의 개혁으로 인한 경제 위기는 이러한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44] 각주[편집] ↑ 소련 경제 무역기구 정보 ↑ 1989년 GDP 성장률 정보 ↑ 1990년 - 1991년 GDP 성장률 정보 ↑ Martin Myant 저 《Transition Economies: Political Economy in Russia, Eastern Europe, and Central Asia》 p. 185 참조 ↑ ppp GDP 정보 ↑ 소련 인플레 정보 ↑ 임금이 205 루블 이하인 국민을 기준으로 한다. ↑ 빈곤율 정보 ↑ 동구권 지니계수 ↑ http://data.worldbank.org/indicator/SI.POV.GINI?page=5&order=wbapi_data_value_1990%20wbapi_data_value&sort=asc ↑ 소련 노동력 정보 ↑ 소련 경제 실업률 정보1 ↑ 소련 경제 실업률 정보2 ↑ 소련 1989년 수출액 정보 ↑ 소련 1989년 수입액 정보 ↑ 소련 외채 정보 ↑ 소련 국가 부채 정보1 ↑ 소련 수출 수익 정보 ↑ 소련 지출 정보 ↑ 소련 경제원조 지출액 정보 ↑ Davies 1998, p. 1, 3. ↑ Peck 2006, p. 47.여기에 있어 대표적인 사람이 자와할랄 네루이다. 그는 “1920년대 말에 소련을 방문하고 소비에트의 산업 진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Bradley 2010, pp. 475–6. 참조. ↑ Allen 2003, p. 153. ↑ Harrison 1996, p. 123 ↑ Angus Maddison, The World Economy: A Millennial Perspective (2001) pp 274, 275, 298 ↑ The Contemporary Soviet City edited by Henry W. Morton, Robert C. Stuart, M.E. Sharpe, 1984, pp.194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25 ~ p. 68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71 ~ p. 73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74 ~ p. 92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94 ~ p. 121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130 ~ p. 172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173 ~ p. 193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194 ~ p. 217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218 ~ p. 264 참조 ↑ Bergson A., Kuznets S., eds. Economic Trends in the Soviet Union. Cambr.,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3, p. 36, 155, 208 참조 ↑ “80년대 소련 수출 비중 정보” (PDF). 2018년 10월 2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8월 24일에 확인함.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286 ~ p. 310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311 ~ p. 333 참조 ↑ 브레즈네프 시대의 경제 정보 ↑ Churchwood, L. G. 저 《Soviet Socialism: Social and Political Essays. London: Routledge》 p. 30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337 ~ p. 342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343 ~ p. 367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368 ~ p. 405 참조 ↑ 알렉 노브 저, 《소련경제사》 p. 406 ~ p. 430 참조 참고 자료[편집] Allen, Robert C. (2003). Farm to Factory: A Reinterpretation of the Soviet Industrial Revolu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Bradley, Mark Philip (2010). "Decolonization, the global South, and the Cold War, 1919–1962". In Melvyn P. Leffler and Odd Arne Westad,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ume 1: Origins (pp. 464–485).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83719-4. Daniels, Robert Vince (1993). The End of the Communist Revolution. London: Routledge. Davies, R.W. (1998). Soviet Economic Development from Lenin to Khrushchev.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Davies, R. W. ed. From Tsarism to the New Economic Policy: Continuity and Change in the Economy of the USSR (London, 1990) Davies, R. W.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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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5-699-07591-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련의_경제&oldid=24498905" 분류: 소련의 경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atviešuNederlands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9일 (토) 13: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소닉 어드벤처 2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닉 어드벤처 2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소닉 어드벤처 2개발사 소닉 팀배급사 세가디자이너 나카 유지(프로듀서)이이즈카 타카시(감독/레벨 디자이너)작곡가 세노우에 준 (음악 감독) 케니치 토코이 쿠마타니 푸미 오타니 토마야 엔진 카나토 테슈 (메인 프로그래머)플랫폼 드림캐스트, 닌텐도 게임큐브,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 엑스박스 라이브, PC출시일 드림캐스트 2001년 6월 19일 2001년 6월 23일 2001년 6월 23일닌텐도 게임큐브 2001년 12월 20일 2002년 2월 11일 2002년 5월 3일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 2012년 10월 2일 2012년 10월 3일 2012년 10월 4일엑스박스 라이브 2012년 10월 5일PC 다운로드 2012년 11월 19일장르 플랫폼모드 싱글플레이, 멀티플레이 (2인 플레이)미디어 GD-ROM, 닌텐도 옵티컬 드라이브입력장치 게임 컨트롤러이전작 소닉 어드벤처후속작 소닉 히어로즈 소닉 어드벤처 2(일본어: ソニックアドベンチャー2,영어: Sonic Adventure 2)는 2001년 6월 23일에 세가의 간판 게임 시리즈인 소닉의 1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게임이다. 세가에서 발매하였고 제작은 소닉팀이 담당하였다. 이 게임은 드림캐스트 게임으로 발매되었다. 목차 1 개요 2 줄거리 2.1 히어로 사이드 2.2 다크 사이드 2.3 라스트 사이드 3 캐릭터 3.1 히어로 사이드 3.2 다크 사이드 4 게임 시스템 4.1 싱글플레이 4.2 멀티플레이 4.3 챠오 월드 5 스테이지 6 소닉 어드벤처 2 : 배틀 7 Origianal Sound Track 8 각주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소닉 어드벤처의 속편이나, 전작과의 내용상 관련은 거의 없다. (대사 중에 전작과 연관되어 있는 내용이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정도고 스테이지 중간중간에 빅이 재미거리로 나온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6명이지만, 2p 플레이에서는 좀 더 늘어난다. 어드벤처 필드는 삭제되었다. 또한 새로운 캐릭터로 섀도우 더 헤지호그와 루즈 더 벳이 등장하였다. 줄거리[편집] 히어로 사이드[편집] 소닉은 길을 걸어가다 영문을 모른 채 G.U.N(Guardian Units of Nation)에게 헬기로 감옥으로 수송되던 도중, 간신히 헬기를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도망치다, 자신과 닮아서 감옥에 갇히게 만든 범인 섀도우 더 헤지호그를 만나게 된다. 그는 소닉에게 자기 소개를 하다 G.U.N이 오자, 카오스 컨트롤로 도망치게 되고, 결국 소닉은 다시 잡혀서 감옥에 수감되게 된다. 그러나 테일즈가 감옥 바깥의 에그맨을 무찌르고, 에이미가 감옥에 쳐들어와서 소닉을 탈옥시킨다. 감옥이 있는 그 섬을 도망치다가, 섀도 더 헤지호그를 만나게 되었고, 둘이 겨루다 에그맨의 호출로 인해 섬을 폭발시킬 것임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들은 섬을 탈출하였고, 에그맨의 위협 방송을 듣고, 저지하러 ARK로 간다.[1] 다크 사이드[편집] 에그맨은 G.U.N.의 네트워크를 해킹한 이후, G.U.N에게 비밀 병기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G.U.N.의 기지로 쳐들어가서 비밀 병기 캡슐의 봉인을 해제했으나, 소닉인 줄 알고 착각하였지만, 그것이 아님(말하자면 섀도우)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섀도우는 에그맨을 생포하려는 로봇을 부수고 별을 파괴하는 기계인 ARK가 존재함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에그맨은 별을 부술 수 있을 정도의 카오스 에메랄드를 모아 사막의 발사 기지로 가서 ARK로 이동해간다. 그리고는 ARK에서는 달을 반쯤 부수는 내용을 포함한 방송을 지구 상에 내보내 위협을 한다. 그리고 에그맨은 지상으로 내려와 GUN의 기지인 프리즌 아일랜드를 파괴하고 ARK로 카오스 에메랄드를 가져온다.[2][3] 라스트 사이드[편집] 에그맨은 자신이 모은 모든 카오스 에메랄드를 ARK에 넣는다. 그러자마자, ARK가 지구를 향해 발사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제럴드 교수가 카오스 에메랄드를 모두 모으면 ARK가 지구를 부수도록 설계했던 것을 알아차버린 에그맨은 소닉과 함께 캐논즈 코어에 가서 막기 시작한다. 그러나, 섀도우는 캐논즈 코어에 가서 그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미가 섀도우를 설득해서, 결국 섀도우는 함께 바이오리자드를 공격해 바이오리자드를 막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바이오리자드가 바이오하자드로 진화하기 시작했고, 섀도우는 소닉과 함께 슈퍼 섀도우와 슈퍼 소닉으로 변신해 바이오하자드를 사망시켜, 지구를 파괴시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섀도우는 소닉과 함께 카오스 컨트롤로 추락하는 ARK를 이동시킨다. 그 뒤, 섀도우는 기력이 다해 지구로 떨어졌다(정황상으로 봐서 낙사했을 가능성이 높음).[4][5] 캐릭터[편집] 히어로 사이드[편집] 소닉 더 헤지호그 성우 - 카네마루 준이치/라이언 드러먼드 마일즈 "테일즈" 파우어 성우 - 무라타 아츠키/코너 브링거스 너클즈 디 에키드나 성우 - 칸나 노부토시/스콧 드리어 다크 사이드[편집] 섀도 더 헤지호그 성우 - 유사 코지/데이비드 험프리 닥터 에그맨 성우 - 오오츠카 치카오/딤 브리스토 루즈 더 뱃 성우 - 오치아이 루미/레니 미넬라 게임 시스템[편집] 싱글플레이[편집] 스토리 모드에서는 히어로 사이드와 다크 사이드의 어느 한 진영을 선택하여 진행해 나가게 된다. 히어로 사이드에는 소닉, 테일즈, 너클즈가, 다크 사이드에서는 섀도, Dr.에그맨, 루즈가 각각 소속되어 있으며, 게임 진행에 따라 조작 캐릭터는 자동으로 바뀐다. 소닉과 섀도는 전형적인 소닉 시리즈의 진행방식이며, 테일즈, 에그맨은 록온을 하며 스테이지를 클리어 해가는 전작의 감마와 비슷한 형식이다. 하지만, 시간 제한은 없다. 너클즈와 루즈는 전작과 같이 너클즈가 깨버린 에메랄드를 모으는 식으로 스테이지를 클리어 해간다. 소닉 어드벤처2에 있는 모든 엠블럼을 모으면 스페셜 스테이지인 그린 힐(영어: Green Hill)이 열린다.[6] 그리고 다크 진영과 히어로 진영을 모두 클리어하면 라스트 진영이 열린다. 멀티플레이[편집] 멀티플레이는 2인 플레이만 지원된다. 각 캐릭터마다 승부를 겨루는 방식이 다른 데, 닥터 에그맨과 테일즈는 누가 먼저 쓰러뜨리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루즈와 너클즈는 누가 먼저 카오스 에메랄드를 모두 찾아내는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또한 소닉과 섀도는 누가 먼저 골에 도착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7] 멀티플레이 시에만 사용 가능한 캐릭터[8] 또한 존재한데, 성능은 같으나 소닉 어드벤처 2 : 배틀에서는 성능이 바뀐다. 챠오 월드[편집] 소닉 어드벤쳐 1와 DX는 타운에서 챠오 가든으로 가야 챠오를 키울수 있는데 이 게임에서는 스테이지에서 키를 얻어야만 한다. 키는 챠오박스에 있다. 스테이지[편집] 히어로 사이드- City Escape(소닉) Wild Canyon(너클즈) Prison Lane(테일즈) Metal Harbor(소닉) Green Forest(소닉) Pumpkin Hill(너클즈) Mission Street(테일즈) Aquatic Mine(너클즈) Route 101(테일즈) Hidden Base(테일즈) Pyramid Cave(소닉) Death Chamber(너클즈) Eternal Engine(테일즈) Meteor Herd(너클즈) Crazy Gadget(소닉) Final Rush(소닉) 다크 사이드- Iron Gate(에그맨) Dry Laggon(루즈) Sand Ocean(에그맨) Radical Highway(섀도) Egg Quarter(루즈) Lost Colony(에그맨) Weapons Bed(에그맨) Security Hall(루즈) White Jungle(섀도) Route 280(루즈) Sky rail(섀도) Mad Space(루즈) Cosmic Wall(에그맨) Fianl Chase(섀도) 소닉 어드벤처 2 : 배틀[편집] 소닉 어드벤처 2: 배틀은 게임큐브판으로 리메이크한 게임이다. 전작과 차이점이 있다면 배틀 기능 강화, 스테이지 부분 수정, 그래픽 성능 향상 등이 있다. 또한 GBA로 발매된 소닉 어드밴스와 연동하면 챠오 월드에 있는 챠오를 데리고 갈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Origianal Sound Track[편집] 1.It Doesn't Matter 2.Let's Make it! 3.Escape From The City 4.Vengence Is Mine 5.Lovely Gate 3 6.Unknown From M.E. 7.This Way Out 8.I'm A Spy 9.That's The Way I Like it 10.Rhythm And Balance 11.Won't Stop, Just Go! 12.E.G.G.M.A.N 13.Dive Into The Mellow 14.Rumbling HWY 15.Fly In The Freedom 16.SA2 17.Space Trip Steps 18.Soarin' Over The Space 19.Believe In Myself 20.Highway In The Sky 21.Throw It All Away 22.Deep Inside Of... 23.Supporting Me 24.The Last Scene 25.Live&Learn 26.Chao Race Extended Remix 평가통합 점수통합사점수메타크리틱89/100[9]평론 점수평론사점수에지7/10[10]게임프로4.5/5[11]게임 레볼루션B[12]게임스팟8.6/10[13]IGN9.4/10[14] 각주[편집] ↑ “Sonic Retro, Sonic Adventure 2 Hero Journal”. 2010년 2월 23일에 확인함.  ↑ “Sonic Retro, Sonic Adventure 2 Dark Journal”. 2010년 2월 23일에 확인함.  ↑ “Sonic Adventure 2: Battle [Dark Story] - Part 1”. 2010년 2월 23일에 확인함.  ↑ “Sonic Retro, Sonic Adventure 2 Last Journal”. 2010년 2월 23일에 확인함.  ↑ “Youtube, Sonic Adventure 2 Last Story Part 1”. 2010년 2월 23일에 확인함.  ↑ 그린 힐은 소닉으로만 플레이 가능하다. ↑ “Sonic Adventure 2 - 2-Player Mode”. 2010년 3월 19일 (금)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도움말) ↑ 에이미 로즈, 메탈 소닉, 챠오 워커, 다크 챠오 워커, 티칼 더 에키드나, 카오스 ↑ “Sonic Adventure 2 for Dreamcast Reviews”. Metacritic. 2014년 11월 25일.  ↑ “Sonic Adventure 2”. Edge. February 8, 2002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December 28, 2014에 확인함.  ↑ Four-Eyed Dragon (June 19, 2001). “Sonic Adventure 2”. GamePro. January 2, 2006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February 9, 2014에 확인함.  ↑ Liu, Johnny (2001년 7월 1일). “Sonic Adventure 2 Review”. Game Revolution. 2014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Ahmed, Shahed (2001년 6월 19일). “Sonic Adventure 2 Review”. GameSpot. 2013년 5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12월 27일에 확인함.  ↑ Chau, Anthony (2001년 6월 22일). “Sonic Adventure 2 Review”. IGN. 2014년 11월 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소닉 어드벤처 2 공식 홈페이지 소닉 어드벤처 2: 배틀 공식 홈페이지 vdeh소닉 더 헤지호그메인 게임콘솔용 소닉 더 헤지호그 (1991) 소닉 2 소닉 CD 소닉 3 소닉 & 너클즈 3D 블래스트 어드벤처 어드벤처 2 히어로즈 소닉 더 헤지호그 (2006) 언리쉬드 소닉 4: 에피소드 1 컬러즈 제너레이션즈 소닉 4: 에피소드 2 로스트 월드 포시즈 매니아 휴대용 소닉 1 소닉 2 카오스 트리플 트러블 블래스트 포켓 어드벤처 어드밴스 어드밴스 2 어드밴스 3 러시 라이벌즈 러시 어드벤처 라이벌즈 2 컬러즈 제너레이션즈 로스트 월드 외전플랫포머소닉 붐 라이즈 오브 리릭 새터드 크리스털 파이어 & 아이스 기타 너클즈 카오틱스 래버린스 테일즈 스카이패트롤 테일즈 어드벤처 섀도 더 헤지호그 비밀의 링 암흑의 기사 레이싱 드리프트 드리프트 2 소닉 R 라이더즈 라이더즈: 제로 그래비티 세가 올스타즈 레이싱 프리 라이더즈 올스타즈 레이싱 트랜스폼드 모바일 점프 (피버) 대시 러너즈 대시 2 아케이드 코스모 파이터즈 소닉 패트롤 카 세가소닉 더 헤지호그 팝콘 숍 파이터즈 애틸릭스 대시 익스트림 마리오와소닉 베이징 올림픽 밴쿠버 동계올림픽 런던 올림픽 소치 동계올림픽 리우 올림픽 기타 이레이저 스핀볼 민 빈 머신 창조적 스튜디오 게임월드 테일즈 앤 뮤직 메이커 스쿨하우스 셔플 핀볼 파티 배틀 크로니클즈 합본 소닉 잼 소닉 컬렉션 소닉 앤 너클즈 컬렉션 메가 컬렉션 젬즈 컬렉션 얼티밋 제네시스 컬렉션 취소된 게임 크래커스 엑스트림 익스트림 등장인물 소닉 더 헤지호그 마일즈 "테일즈" 파우어 너클즈 디 에키드나 에이미 로즈 닥터 에그맨 섀도우 더 헤지호그 애니메이션 바람돌이 소닉 고슴도치 소닉 OVA 언더그라운드 소닉 X 소닉 툰 영화 관련 게임 플리키 리스타 기타 세가 소닉 팀 그린 힐 존 인물 나카 유지 오오시마 나오토 나카무라 마사토 마이크 폴록 세가타 산시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닉_어드벤처_2&oldid=24186206" 분류: 액션 게임드림캐스트 게임게임큐브 게임2001년 비디오 게임달을 배경으로 한 작품플레이스테이션 3 게임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 게임윈도우 게임엑스박스 360 라이브 아케이드 게임3차원 플랫폼 게임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단일 플랫폼 모드로 비디오 게임 평점 틀을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吴语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4: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월요기획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월요기획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월요기획 장르 DO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KBS 1TV 방송 기간 아래 참조 방송 시간 아래 참조 방송 분량 아래 참조 음성 1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자막 방송중 HD 방송 여부 HD 외부 링크  KBS 월요기획 공식 홈페이지 《월요기획》은 KBS 1TV에서 매주 월요일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다. 목차 1 기획 의도 2 방송 시간 3 방송 회차 3.1 1기 (1980~1986년) 3.2 2기 (2017~2018년) 4 같이 보기 5 외부 링크 기획 의도[편집] 우리 사회의 곳곳에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현상과 삶의 모습들이 있다. 일반 대중의 삶에서부터 다양한 사회적인 이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의 시각으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 방송 시간[편집] 방송 채널 방송 기간 방송 시간 시리즈 구성 KBS 1TV 1981년 ~ 1985년 7월 1기 1985년 7월 ~ 1987년 2월 23일 매주 월요일 저녁 7:40 ~ 8:35 2017년 6월 5일 ~ 2017년 8월 28일 매주 월요일 밤 11:40 ~ 12:30 2기 2018년 2월 12일 2018년 4월 9일 ~ 2018년 4월 30일 2017년 9월 11일 매주 월요일 밤 10:40 ~ 11:30 2017년 10월 30일 2017년 9월 25일 ~ 10월 23일 매주 월요일 밤 11:10 ~ 12:00 2017년 11월 6일 2017년 11월 20일 ~ 12월 4일 2017년 12월 18일 2017년 11월 13일 매주 월요일 밤 11:25 ~ 12:15 2017년 12월 11일 매주 월요일 밤 11:15 ~ 12:05 2018년 2월 5일 매주 월요일 밤 11:30 ~ 12:20 2018년 3월 26일 ~ 4월 2일 2018년 3월 12일 매주 월요일 밤 11:05 ~ 11:55 방송 회차[편집] 1기 (1980~1986년)[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2기 (2017~2018년)[편집]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회차 방송일 부제 시청률 1회 2017년 6월 5일 이상의 밥, 학교급식의 변신 2.2% 2회 2017년 6월 12일 <한국 - 부탄 수교 30주년 특집다큐> 변화하는 부탄, 그곳에 가다 3.5% 3회 2017년 6월 19일 치명적 유혹, 마약 - 1편 가까이 다가온 마약 2.7% 4회 2017년 6월 26일 치명적 유혹, 마약 - 2편 마약국가에서 길을 찾다 2.6% 5회 2017년 7월 3일 무역전쟁, 최전선(最前線)의 사람들 2.6% 6회 2017년 7월 10일 치킨산업, 세계시장을 겨냥하다 2.7% 7회 2017년 7월 17일 더불어 숲, 행복으로 길을 내다 2.9% 8회 2017년 7월 24일 영상포엠, 아시아의 소리 - 1부 산, 생명의 소리를 품다 2.2% 9회 2017년 7월 31일 영상포엠, 아시아의 소리 - 2부 강으로 흐르는 영혼의 소리 2.3% 10회 2017년 8월 7일 영상포엠, 아시아의 소리 - 3부 땅이 빚어낸 풍요의 소리 2.3% 11회 2017년 9월 11일 파워농촌, 6차 산업이 뜬다 6.4% 12회 2017년 9월 25일 바다, 황금밭이 되다 3.2% 13회 2017년 10월 16일 댐의 재발견 3.1% 14회 2017년 10월 23일 행복한 나눔의 밥상, 푸드뱅크 3.1% 15회 2017년 10월 30일 루터, 시민정신에 날개를 달다 2.1% 16회 2017년 11월 6일 인삼, 세계를 매혹시키다 3.4% 17회 2017년 11월 13일 우리는 오늘도 김포공항에 간다 3.8% 18회 2017년 11월 20일 미래세대 제언 시민을 키우고 정치를 배운다 2.3% 19회 2017년 11월 27일 숲, 우리를 키우다 4.1% 20회 2017년 12월 4일 공공의 적, 보험사기 2.6% 21회 2017년 12월 11일 태권도, 다시 세계를 품다 1부 - 태권한류 미래를 심다! 2.6% 22회 2017년 12월 18일 태권도, 다시 세계를 품다 2부 - 무예를 넘어 문화가 되다! 3.0% 23회 2018년 1월 8일 자율주행차, 꿈을 달리다 미집계 24회 2018년 1월 22일 아름다운 8년, 에너지 한류가 되다 3.3% 25회 2018년 1월 29일 물, 첨단기술을 만나다 2.3% 26회 2018년 2월 5일 공항경쟁 시대, 세계의 하늘을 품어라 2.7% 27회 2018년 2월 12일 G-프렌즈 청춘의 꿈을 응원하다 2.6% 28회 2018년 2월 19일 어촌의 진화, 새길을 찾다 2.4% 29회 2018년 3월 12일 어촌의 진화, 새길을 찾다 2.4% 30회 2018년 3월 26일 엄마는 전쟁 중, 게임의 해법을 찾아라 3.0% 31회 2018년 4월 2일 노화를 막는 열쇠, 뿌리 미집계 32회 2018년 4월 9일 현장기록, 사회복지사가 만나는 세상 2.0% 33회 2018년 4월 16일 치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2% 34회 2018년 4월 23일 지진의 경고 - 1부 지진, 우리는 너무 몰랐다 2.2% 35회 2018년 4월 30일 지진의 경고 - 2부 지진 이후,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2.7% 같이 보기[편집] 수요기획 목요기획 금요기획 외부 링크[편집] KBS 월요기획 공식 홈페이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월요기획&oldid=24364293" 분류: 한국방송공사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월요일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01: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4년 아시안 게임 여자 축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는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의 세부 종목이다. 2014년 9월 14일부터 2014년 10월 1일까지 진행되었다. 개최국 대한민국 개최 도시 인천 개최 기간 2014년 9월 14일 - 10월 1일 경기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인천문학경기장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참가국 11팀개국 메달리스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번째 우승)  일본  대한민국 «  2010 광저우 2018 자카르타 » 2014년 아시안 게임축구   남자     여자 목차 1 경기장 2 조별 리그 2.1 A조 2.2 B조 2.3 C조 2.4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3 결선 토너먼트 3.1 8강전 3.2 준결승전 3.3 3,4위전 3.4 결승전 4 우승국 5 최종 순위 6 메달리스트 7 각주 경기장[편집] 도시 경기장 원어명 로마자 수용 인원 경기 주석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준결승전 동메달 결정전 고양 고양종합운동장 8강전 인천 인천문학경기장 여자 A조 여자 B조 결승전 안산 안산와스타디움 8강전 화성 화성종합경기타운 8강전 인천 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여자 A조여자 B조여자 C조 조별 리그[편집] A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대한민국 3 3 0 0 28 0 +28 9 태국 3 2 0 1 20 5 +15 6 인도 3 1 0 2 15 20 -5 3 몰디브 3 0 0 3 0 38 -38 0 9월 14일 14:00 인도 15 : 0 몰디브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나미 이마이즈미 말리크  5'  21'  26'  80'  88'윰남  18'  23'  31'  45+2'  65' 은간곰  20'  45+1'로이통밤  53' 벰벰  55' 이롬  90+4' 9월 14일 20:00 대한민국 5 : 0 태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왕 지아 정설빈  11'박희영  24'유영아  59'전가을  80'최유리  90+3' 9월 17일 14:00 태국 10 : 0 몰디브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손사이  23',  40',  45+2',  77' 롬옌  12',  24',  42' 브뚜앙  33' 스리마니  58' 시스라움  63' 9월 17일 20:00 대한민국 10 : 0 인도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K. 후지코 유영아  9',  45',  63',  65' 전가을  7',  40',  61' 정설빈  49',  79' 박희영  36' 9월 21일 17:00 몰디브 0 : 13 대한민국 인천 문학 경기장, 인천 심판: L. 주안 정설빈  8' 아미나스리자  22' (자책골) 이소담  32' 송수란  35' 박희영  37' 신담영  60' 전가을  62' 권하늘  65',  83' 유영아  68',  81' 조소현  74' 최유리  87' 9월 21일 17:00 태국 10 : 0 인도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MAI Hoang Trang Romyen Nisa  8',  9',  16',  39' Sung Ngoen Kanjana  24',  27',  28',  35' Sornsai Pitsamai  47' Seesraum Naphat  90+2' B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일본 3 2 1 0 15 0 +15 7 중국 3 2 1 0 9 0 +9 7 중화 타이베이 3 0 1 2 2 9 -7 1 요르단 3 0 1 2 2 19 -17 1 9월 15일 14:00 요르단 2 : 2 중화 타이베이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야리 시바 알나베르 45+7'즈바라 49' 린야한 19'왕 후에이 26' 9월 15일 20:00 일본 0 : 0 중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김숙희 9월 18일 14:00 중국 4 : 0 중화 타이베이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리베로 마리아 피에다데 한펑  6' 양리  12' 장루이  37' 마쥔  46' 9월 18일 20:00 일본 12 : 0 요르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마이 호앙 트랑 스가사와 유이카  12',  39',  41' 사카구치 미즈호  20',  22',  71' 가와스미 나호미  5',  81' 키라 치나츠  44',  49'미야마 아야  60' A. 다오드  36' (자책골) 9월 22일 20:00 중화 타이베이 0 : 3 일본 인천 문학 경기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Sakaguchi Mizuho  3' Kira Chinatsu  32' Kawasumi Nahomi  85' 9월 22일 20:00 중국 5 : 0 요르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김숙희 Yang Li  10',  13',  26',  42' Li Dongna  36' C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2 0 0 10 0 +10 6 베트남 2 1 0 1 5 5 0 3 홍콩 2 0 0 2 0 10 -10 0 9월 16일 17: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 : 0 베트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L.주안 김연미  5',  10' 김언주  21' 리예경  41' 정유리  84' 9월 20일 17:00 홍콩 0 :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위종심  8' 리예경  57',  64' 허은별  67' 리은심  83' 9월 23일 17:00 베트남 5 : 0 홍콩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편집] A, B조는 각 조의 최하위 팀과의 성적을 제외한 두 경기의 성적으로 각 조의 세 팀의 성적을 비교하여 두 팀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중화 타이베이 2 0 0 2 0 7 -7 0 홍콩 2 0 0 2 0 10 -10 0 인도 2 0 0 2 0 20 -20 0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9월 26일 - 인천           대한민국  1 9월 29일 - 인천   중화 타이베이  0     대한민국  1 9월 26일 - 안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10월 1일 - 인천   중국  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 9월 26일 - 화성     일본  1   일본  9 9월 29일 - 인천   홍콩  0     일본  3 3·4위전 9월 26일 - 고양     베트남  0     태국  1   대한민국  3   베트남  2     베트남  0 10월 1일 - 인천 8강전[편집] 9월 26일 16:00 태국 1 : 2 베트남 고양종합운동장, 고양 9월 26일 16: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 0 중국 안산와스타디움, 안산 9월 26일 20:00 일본 9 : 0 홍콩 화성종합경기타운, 화성 9월 26일 20:00 대한민국 1 : 0 중화 타이베이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준결승전[편집] 9월 29일 17:00 일본 3 : 0 베트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천 9월 29일 20:00 대한민국 1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3,4위전[편집] 10월 1일 17:00 대한민국 3 : 0 베트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천 결승전[편집] 10월 1일 20: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 : 1 일본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우승국[편집]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우승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번째 우승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 5 0 0 16 3 +13 15 2 일본 6 4 1 1 28 3 +25 13 3 대한민국 6 5 0 1 33 2 +31 15 4 베트남 5 2 0 3 7 12 -5 6 5 중국 4 2 1 1 9 1 +8 7 6 태국 4 2 0 2 21 7 +14 6 7 중화 타이베이 4 0 1 3 2 10 -8 1 8 홍콩 3 0 0 3 0 19 -19 0 9 인도 3 1 0 2 15 20 -5 3 10 요르단 3 0 1 2 2 19 -17 1 11 몰디브 3 0 0 3 0 38 -38 0 메달리스트[편집] 종목 금 은 동 여자 축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대한민국 각주[편집] vdeh2014년 아시안 게임 경기 종목 골프 공수도 근대5종 농구 다이빙 럭비 레슬링 배구 배드민턴 복싱 볼링 비치발리볼 사격 사이클 세팍타크로 소프트볼 수구 수영 스쿼시 승마 싱크로나이즈 야구 양궁 역도 요트 우슈 유도 육상 정구 조정 체조 축구 카누 카바디 크리켓 탁구 태권도 테니스 트라이애슬론 펜싱 하키 핸드볼 vdeh아시안 게임 축구 1951 1954 1958 1962 1966 1970 1974 1978 1982 1986 1990 (남・여) 1994 (남・여) 1998 (남・여) 2002 (남・여) 2006 (남・여) 2010 (남・여) 2014 (남・여) 2018 (남・여) 메달리스트 목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4년_아시안_게임_축구_여자&oldid=24353222" 분류: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Русский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16: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4년 아시안 게임 여자 축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는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의 세부 종목이다. 2014년 9월 14일부터 2014년 10월 1일까지 진행되었다. 개최국 대한민국 개최 도시 인천 개최 기간 2014년 9월 14일 - 10월 1일 경기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인천문학경기장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참가국 11팀개국 메달리스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번째 우승)  일본  대한민국 «  2010 광저우 2018 자카르타 » 2014년 아시안 게임축구   남자     여자 목차 1 경기장 2 조별 리그 2.1 A조 2.2 B조 2.3 C조 2.4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3 결선 토너먼트 3.1 8강전 3.2 준결승전 3.3 3,4위전 3.4 결승전 4 우승국 5 최종 순위 6 메달리스트 7 각주 경기장[편집] 도시 경기장 원어명 로마자 수용 인원 경기 주석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준결승전 동메달 결정전 고양 고양종합운동장 8강전 인천 인천문학경기장 여자 A조 여자 B조 결승전 안산 안산와스타디움 8강전 화성 화성종합경기타운 8강전 인천 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여자 A조여자 B조여자 C조 조별 리그[편집] A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대한민국 3 3 0 0 28 0 +28 9 태국 3 2 0 1 20 5 +15 6 인도 3 1 0 2 15 20 -5 3 몰디브 3 0 0 3 0 38 -38 0 9월 14일 14:00 인도 15 : 0 몰디브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나미 이마이즈미 말리크  5'  21'  26'  80'  88'윰남  18'  23'  31'  45+2'  65' 은간곰  20'  45+1'로이통밤  53' 벰벰  55' 이롬  90+4' 9월 14일 20:00 대한민국 5 : 0 태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왕 지아 정설빈  11'박희영  24'유영아  59'전가을  80'최유리  90+3' 9월 17일 14:00 태국 10 : 0 몰디브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손사이  23',  40',  45+2',  77' 롬옌  12',  24',  42' 브뚜앙  33' 스리마니  58' 시스라움  63' 9월 17일 20:00 대한민국 10 : 0 인도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K. 후지코 유영아  9',  45',  63',  65' 전가을  7',  40',  61' 정설빈  49',  79' 박희영  36' 9월 21일 17:00 몰디브 0 : 13 대한민국 인천 문학 경기장, 인천 심판: L. 주안 정설빈  8' 아미나스리자  22' (자책골) 이소담  32' 송수란  35' 박희영  37' 신담영  60' 전가을  62' 권하늘  65',  83' 유영아  68',  81' 조소현  74' 최유리  87' 9월 21일 17:00 태국 10 : 0 인도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MAI Hoang Trang Romyen Nisa  8',  9',  16',  39' Sung Ngoen Kanjana  24',  27',  28',  35' Sornsai Pitsamai  47' Seesraum Naphat  90+2' B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일본 3 2 1 0 15 0 +15 7 중국 3 2 1 0 9 0 +9 7 중화 타이베이 3 0 1 2 2 9 -7 1 요르단 3 0 1 2 2 19 -17 1 9월 15일 14:00 요르단 2 : 2 중화 타이베이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야리 시바 알나베르 45+7'즈바라 49' 린야한 19'왕 후에이 26' 9월 15일 20:00 일본 0 : 0 중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김숙희 9월 18일 14:00 중국 4 : 0 중화 타이베이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리베로 마리아 피에다데 한펑  6' 양리  12' 장루이  37' 마쥔  46' 9월 18일 20:00 일본 12 : 0 요르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마이 호앙 트랑 스가사와 유이카  12',  39',  41' 사카구치 미즈호  20',  22',  71' 가와스미 나호미  5',  81' 키라 치나츠  44',  49'미야마 아야  60' A. 다오드  36' (자책골) 9월 22일 20:00 중화 타이베이 0 : 3 일본 인천 문학 경기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Sakaguchi Mizuho  3' Kira Chinatsu  32' Kawasumi Nahomi  85' 9월 22일 20:00 중국 5 : 0 요르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김숙희 Yang Li  10',  13',  26',  42' Li Dongna  36' C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2 0 0 10 0 +10 6 베트남 2 1 0 1 5 5 0 3 홍콩 2 0 0 2 0 10 -10 0 9월 16일 17: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 : 0 베트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L.주안 김연미  5',  10' 김언주  21' 리예경  41' 정유리  84' 9월 20일 17:00 홍콩 0 :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위종심  8' 리예경  57',  64' 허은별  67' 리은심  83' 9월 23일 17:00 베트남 5 : 0 홍콩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편집] A, B조는 각 조의 최하위 팀과의 성적을 제외한 두 경기의 성적으로 각 조의 세 팀의 성적을 비교하여 두 팀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중화 타이베이 2 0 0 2 0 7 -7 0 홍콩 2 0 0 2 0 10 -10 0 인도 2 0 0 2 0 20 -20 0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9월 26일 - 인천           대한민국  1 9월 29일 - 인천   중화 타이베이  0     대한민국  1 9월 26일 - 안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10월 1일 - 인천   중국  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 9월 26일 - 화성     일본  1   일본  9 9월 29일 - 인천   홍콩  0     일본  3 3·4위전 9월 26일 - 고양     베트남  0     태국  1   대한민국  3   베트남  2     베트남  0 10월 1일 - 인천 8강전[편집] 9월 26일 16:00 태국 1 : 2 베트남 고양종합운동장, 고양 9월 26일 16: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 0 중국 안산와스타디움, 안산 9월 26일 20:00 일본 9 : 0 홍콩 화성종합경기타운, 화성 9월 26일 20:00 대한민국 1 : 0 중화 타이베이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준결승전[편집] 9월 29일 17:00 일본 3 : 0 베트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천 9월 29일 20:00 대한민국 1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3,4위전[편집] 10월 1일 17:00 대한민국 3 : 0 베트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천 결승전[편집] 10월 1일 20: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 : 1 일본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우승국[편집]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우승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번째 우승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 5 0 0 16 3 +13 15 2 일본 6 4 1 1 28 3 +25 13 3 대한민국 6 5 0 1 33 2 +31 15 4 베트남 5 2 0 3 7 12 -5 6 5 중국 4 2 1 1 9 1 +8 7 6 태국 4 2 0 2 21 7 +14 6 7 중화 타이베이 4 0 1 3 2 10 -8 1 8 홍콩 3 0 0 3 0 19 -19 0 9 인도 3 1 0 2 15 20 -5 3 10 요르단 3 0 1 2 2 19 -17 1 11 몰디브 3 0 0 3 0 38 -38 0 메달리스트[편집] 종목 금 은 동 여자 축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대한민국 각주[편집] vdeh2014년 아시안 게임 경기 종목 골프 공수도 근대5종 농구 다이빙 럭비 레슬링 배구 배드민턴 복싱 볼링 비치발리볼 사격 사이클 세팍타크로 소프트볼 수구 수영 스쿼시 승마 싱크로나이즈 야구 양궁 역도 요트 우슈 유도 육상 정구 조정 체조 축구 카누 카바디 크리켓 탁구 태권도 테니스 트라이애슬론 펜싱 하키 핸드볼 vdeh아시안 게임 축구 1951 1954 1958 1962 1966 1970 1974 1978 1982 1986 1990 (남・여) 1994 (남・여) 1998 (남・여) 2002 (남・여) 2006 (남・여) 2010 (남・여) 2014 (남・여) 2018 (남・여) 메달리스트 목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4년_아시안_게임_축구_여자&oldid=24353222" 분류: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Русский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16: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4년 아시안 게임 여자 축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는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의 세부 종목이다. 2014년 9월 14일부터 2014년 10월 1일까지 진행되었다. 개최국 대한민국 개최 도시 인천 개최 기간 2014년 9월 14일 - 10월 1일 경기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인천문학경기장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참가국 11팀개국 메달리스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번째 우승)  일본  대한민국 «  2010 광저우 2018 자카르타 » 2014년 아시안 게임축구   남자     여자 목차 1 경기장 2 조별 리그 2.1 A조 2.2 B조 2.3 C조 2.4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3 결선 토너먼트 3.1 8강전 3.2 준결승전 3.3 3,4위전 3.4 결승전 4 우승국 5 최종 순위 6 메달리스트 7 각주 경기장[편집] 도시 경기장 원어명 로마자 수용 인원 경기 주석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준결승전 동메달 결정전 고양 고양종합운동장 8강전 인천 인천문학경기장 여자 A조 여자 B조 결승전 안산 안산와스타디움 8강전 화성 화성종합경기타운 8강전 인천 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여자 A조여자 B조여자 C조 조별 리그[편집] A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대한민국 3 3 0 0 28 0 +28 9 태국 3 2 0 1 20 5 +15 6 인도 3 1 0 2 15 20 -5 3 몰디브 3 0 0 3 0 38 -38 0 9월 14일 14:00 인도 15 : 0 몰디브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나미 이마이즈미 말리크  5'  21'  26'  80'  88'윰남  18'  23'  31'  45+2'  65' 은간곰  20'  45+1'로이통밤  53' 벰벰  55' 이롬  90+4' 9월 14일 20:00 대한민국 5 : 0 태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왕 지아 정설빈  11'박희영  24'유영아  59'전가을  80'최유리  90+3' 9월 17일 14:00 태국 10 : 0 몰디브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손사이  23',  40',  45+2',  77' 롬옌  12',  24',  42' 브뚜앙  33' 스리마니  58' 시스라움  63' 9월 17일 20:00 대한민국 10 : 0 인도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K. 후지코 유영아  9',  45',  63',  65' 전가을  7',  40',  61' 정설빈  49',  79' 박희영  36' 9월 21일 17:00 몰디브 0 : 13 대한민국 인천 문학 경기장, 인천 심판: L. 주안 정설빈  8' 아미나스리자  22' (자책골) 이소담  32' 송수란  35' 박희영  37' 신담영  60' 전가을  62' 권하늘  65',  83' 유영아  68',  81' 조소현  74' 최유리  87' 9월 21일 17:00 태국 10 : 0 인도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MAI Hoang Trang Romyen Nisa  8',  9',  16',  39' Sung Ngoen Kanjana  24',  27',  28',  35' Sornsai Pitsamai  47' Seesraum Naphat  90+2' B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일본 3 2 1 0 15 0 +15 7 중국 3 2 1 0 9 0 +9 7 중화 타이베이 3 0 1 2 2 9 -7 1 요르단 3 0 1 2 2 19 -17 1 9월 15일 14:00 요르단 2 : 2 중화 타이베이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야리 시바 알나베르 45+7'즈바라 49' 린야한 19'왕 후에이 26' 9월 15일 20:00 일본 0 : 0 중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김숙희 9월 18일 14:00 중국 4 : 0 중화 타이베이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리베로 마리아 피에다데 한펑  6' 양리  12' 장루이  37' 마쥔  46' 9월 18일 20:00 일본 12 : 0 요르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마이 호앙 트랑 스가사와 유이카  12',  39',  41' 사카구치 미즈호  20',  22',  71' 가와스미 나호미  5',  81' 키라 치나츠  44',  49'미야마 아야  60' A. 다오드  36' (자책골) 9월 22일 20:00 중화 타이베이 0 : 3 일본 인천 문학 경기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Sakaguchi Mizuho  3' Kira Chinatsu  32' Kawasumi Nahomi  85' 9월 22일 20:00 중국 5 : 0 요르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김숙희 Yang Li  10',  13',  26',  42' Li Dongna  36' C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2 0 0 10 0 +10 6 베트남 2 1 0 1 5 5 0 3 홍콩 2 0 0 2 0 10 -10 0 9월 16일 17: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 : 0 베트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L.주안 김연미  5',  10' 김언주  21' 리예경  41' 정유리  84' 9월 20일 17:00 홍콩 0 :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위종심  8' 리예경  57',  64' 허은별  67' 리은심  83' 9월 23일 17:00 베트남 5 : 0 홍콩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편집] A, B조는 각 조의 최하위 팀과의 성적을 제외한 두 경기의 성적으로 각 조의 세 팀의 성적을 비교하여 두 팀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중화 타이베이 2 0 0 2 0 7 -7 0 홍콩 2 0 0 2 0 10 -10 0 인도 2 0 0 2 0 20 -20 0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9월 26일 - 인천           대한민국  1 9월 29일 - 인천   중화 타이베이  0     대한민국  1 9월 26일 - 안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10월 1일 - 인천   중국  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 9월 26일 - 화성     일본  1   일본  9 9월 29일 - 인천   홍콩  0     일본  3 3·4위전 9월 26일 - 고양     베트남  0     태국  1   대한민국  3   베트남  2     베트남  0 10월 1일 - 인천 8강전[편집] 9월 26일 16:00 태국 1 : 2 베트남 고양종합운동장, 고양 9월 26일 16: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 0 중국 안산와스타디움, 안산 9월 26일 20:00 일본 9 : 0 홍콩 화성종합경기타운, 화성 9월 26일 20:00 대한민국 1 : 0 중화 타이베이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준결승전[편집] 9월 29일 17:00 일본 3 : 0 베트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천 9월 29일 20:00 대한민국 1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3,4위전[편집] 10월 1일 17:00 대한민국 3 : 0 베트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천 결승전[편집] 10월 1일 20: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 : 1 일본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우승국[편집]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우승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번째 우승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 5 0 0 16 3 +13 15 2 일본 6 4 1 1 28 3 +25 13 3 대한민국 6 5 0 1 33 2 +31 15 4 베트남 5 2 0 3 7 12 -5 6 5 중국 4 2 1 1 9 1 +8 7 6 태국 4 2 0 2 21 7 +14 6 7 중화 타이베이 4 0 1 3 2 10 -8 1 8 홍콩 3 0 0 3 0 19 -19 0 9 인도 3 1 0 2 15 20 -5 3 10 요르단 3 0 1 2 2 19 -17 1 11 몰디브 3 0 0 3 0 38 -38 0 메달리스트[편집] 종목 금 은 동 여자 축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대한민국 각주[편집] vdeh2014년 아시안 게임 경기 종목 골프 공수도 근대5종 농구 다이빙 럭비 레슬링 배구 배드민턴 복싱 볼링 비치발리볼 사격 사이클 세팍타크로 소프트볼 수구 수영 스쿼시 승마 싱크로나이즈 야구 양궁 역도 요트 우슈 유도 육상 정구 조정 체조 축구 카누 카바디 크리켓 탁구 태권도 테니스 트라이애슬론 펜싱 하키 핸드볼 vdeh아시안 게임 축구 1951 1954 1958 1962 1966 1970 1974 1978 1982 1986 1990 (남・여) 1994 (남・여) 1998 (남・여) 2002 (남・여) 2006 (남・여) 2010 (남・여) 2014 (남・여) 2018 (남・여) 메달리스트 목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4년_아시안_게임_축구_여자&oldid=24353222" 분류: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Русский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16: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4년 아시안 게임 여자 축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여자는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의 세부 종목이다. 2014년 9월 14일부터 2014년 10월 1일까지 진행되었다. 개최국 대한민국 개최 도시 인천 개최 기간 2014년 9월 14일 - 10월 1일 경기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인천문학경기장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참가국 11팀개국 메달리스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번째 우승)  일본  대한민국 «  2010 광저우 2018 자카르타 » 2014년 아시안 게임축구   남자     여자 목차 1 경기장 2 조별 리그 2.1 A조 2.2 B조 2.3 C조 2.4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3 결선 토너먼트 3.1 8강전 3.2 준결승전 3.3 3,4위전 3.4 결승전 4 우승국 5 최종 순위 6 메달리스트 7 각주 경기장[편집] 도시 경기장 원어명 로마자 수용 인원 경기 주석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준결승전 동메달 결정전 고양 고양종합운동장 8강전 인천 인천문학경기장 여자 A조 여자 B조 결승전 안산 안산와스타디움 8강전 화성 화성종합경기타운 8강전 인천 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여자 A조여자 B조여자 C조 조별 리그[편집] A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대한민국 3 3 0 0 28 0 +28 9 태국 3 2 0 1 20 5 +15 6 인도 3 1 0 2 15 20 -5 3 몰디브 3 0 0 3 0 38 -38 0 9월 14일 14:00 인도 15 : 0 몰디브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나미 이마이즈미 말리크  5'  21'  26'  80'  88'윰남  18'  23'  31'  45+2'  65' 은간곰  20'  45+1'로이통밤  53' 벰벰  55' 이롬  90+4' 9월 14일 20:00 대한민국 5 : 0 태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왕 지아 정설빈  11'박희영  24'유영아  59'전가을  80'최유리  90+3' 9월 17일 14:00 태국 10 : 0 몰디브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손사이  23',  40',  45+2',  77' 롬옌  12',  24',  42' 브뚜앙  33' 스리마니  58' 시스라움  63' 9월 17일 20:00 대한민국 10 : 0 인도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K. 후지코 유영아  9',  45',  63',  65' 전가을  7',  40',  61' 정설빈  49',  79' 박희영  36' 9월 21일 17:00 몰디브 0 : 13 대한민국 인천 문학 경기장, 인천 심판: L. 주안 정설빈  8' 아미나스리자  22' (자책골) 이소담  32' 송수란  35' 박희영  37' 신담영  60' 전가을  62' 권하늘  65',  83' 유영아  68',  81' 조소현  74' 최유리  87' 9월 21일 17:00 태국 10 : 0 인도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MAI Hoang Trang Romyen Nisa  8',  9',  16',  39' Sung Ngoen Kanjana  24',  27',  28',  35' Sornsai Pitsamai  47' Seesraum Naphat  90+2' B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일본 3 2 1 0 15 0 +15 7 중국 3 2 1 0 9 0 +9 7 중화 타이베이 3 0 1 2 2 9 -7 1 요르단 3 0 1 2 2 19 -17 1 9월 15일 14:00 요르단 2 : 2 중화 타이베이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야리 시바 알나베르 45+7'즈바라 49' 린야한 19'왕 후에이 26' 9월 15일 20:00 일본 0 : 0 중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김숙희 9월 18일 14:00 중국 4 : 0 중화 타이베이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리베로 마리아 피에다데 한펑  6' 양리  12' 장루이  37' 마쥔  46' 9월 18일 20:00 일본 12 : 0 요르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마이 호앙 트랑 스가사와 유이카  12',  39',  41' 사카구치 미즈호  20',  22',  71' 가와스미 나호미  5',  81' 키라 치나츠  44',  49'미야마 아야  60' A. 다오드  36' (자책골) 9월 22일 20:00 중화 타이베이 0 : 3 일본 인천 문학 경기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Sakaguchi Mizuho  3' Kira Chinatsu  32' Kawasumi Nahomi  85' 9월 22일 20:00 중국 5 : 0 요르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김숙희 Yang Li  10',  13',  26',  42' Li Dongna  36' C조[편집]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2 0 0 10 0 +10 6 베트남 2 1 0 1 5 5 0 3 홍콩 2 0 0 2 0 10 -10 0 9월 16일 17: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 : 0 베트남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L.주안 김연미  5',  10' 김언주  21' 리예경  41' 정유리  84' 9월 20일 17:00 홍콩 0 :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심판: JACEWICZ Kathertine Margaret 위종심  8' 리예경  57',  64' 허은별  67' 리은심  83' 9월 23일 17:00 베트남 5 : 0 홍콩 남동 아시아드 럭비장, 인천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편집] A, B조는 각 조의 최하위 팀과의 성적을 제외한 두 경기의 성적으로 각 조의 세 팀의 성적을 비교하여 두 팀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중화 타이베이 2 0 0 2 0 7 -7 0 홍콩 2 0 0 2 0 10 -10 0 인도 2 0 0 2 0 20 -20 0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9월 26일 - 인천           대한민국  1 9월 29일 - 인천   중화 타이베이  0     대한민국  1 9월 26일 - 안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10월 1일 - 인천   중국  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 9월 26일 - 화성     일본  1   일본  9 9월 29일 - 인천   홍콩  0     일본  3 3·4위전 9월 26일 - 고양     베트남  0     태국  1   대한민국  3   베트남  2     베트남  0 10월 1일 - 인천 8강전[편집] 9월 26일 16:00 태국 1 : 2 베트남 고양종합운동장, 고양 9월 26일 16: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 0 중국 안산와스타디움, 안산 9월 26일 20:00 일본 9 : 0 홍콩 화성종합경기타운, 화성 9월 26일 20:00 대한민국 1 : 0 중화 타이베이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준결승전[편집] 9월 29일 17:00 일본 3 : 0 베트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천 9월 29일 20:00 대한민국 1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3,4위전[편집] 10월 1일 17:00 대한민국 3 : 0 베트남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천 결승전[편집] 10월 1일 20:0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 : 1 일본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우승국[편집]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우승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번째 우승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 5 0 0 16 3 +13 15 2 일본 6 4 1 1 28 3 +25 13 3 대한민국 6 5 0 1 33 2 +31 15 4 베트남 5 2 0 3 7 12 -5 6 5 중국 4 2 1 1 9 1 +8 7 6 태국 4 2 0 2 21 7 +14 6 7 중화 타이베이 4 0 1 3 2 10 -8 1 8 홍콩 3 0 0 3 0 19 -19 0 9 인도 3 1 0 2 15 20 -5 3 10 요르단 3 0 1 2 2 19 -17 1 11 몰디브 3 0 0 3 0 38 -38 0 메달리스트[편집] 종목 금 은 동 여자 축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대한민국 각주[편집] vdeh2014년 아시안 게임 경기 종목 골프 공수도 근대5종 농구 다이빙 럭비 레슬링 배구 배드민턴 복싱 볼링 비치발리볼 사격 사이클 세팍타크로 소프트볼 수구 수영 스쿼시 승마 싱크로나이즈 야구 양궁 역도 요트 우슈 유도 육상 정구 조정 체조 축구 카누 카바디 크리켓 탁구 태권도 테니스 트라이애슬론 펜싱 하키 핸드볼 vdeh아시안 게임 축구 1951 1954 1958 1962 1966 1970 1974 1978 1982 1986 1990 (남・여) 1994 (남・여) 1998 (남・여) 2002 (남・여) 2006 (남・여) 2010 (남・여) 2014 (남・여) 2018 (남・여) 메달리스트 목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4년_아시안_게임_축구_여자&oldid=24353222" 분류: 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Русский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16: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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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참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현장날짜 1994년 10월 21일시간 아침 7시 38분 (KST)[1]위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최초 보고자 서울성동소방서참여자 동아건설, 서울특별시청원인 부실공사 피해사망자 32명부상자 17명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聖水大橋崩壞事故)는 1994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의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져내려 일어난 사고다. 이 사고로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하여 총 49명의 사상자를 냈다. 목차 1 사고 내용 2 붕괴 원인 2.1 점검 부실 2.2 내부 결함 2.3 과적차량의 통과 3 피해 사항 4 사고 이후 4.1 서울특별시 대책본부 설치 4.2 구조 활동 4.3 교통 정리 4.4 서울특별시장의 경질 4.5 재건설 5 관련 작품 5.1 노래 5.2 영화 5.3 텔레비전 드라마 6 같이 보기 7 사진 8 각주 사고 내용[편집]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에 제5·6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약 50m가 붕괴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부분을 달리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2대는 현수 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 있던 승용차 2대는 물속으로 빠졌다. 지나가던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통과 도중 뒷바퀴가 붕괴 지점에 걸쳐있다가 차체가 뒤집혀 추락한 후, 떨어진 상판에 박혀 찌그러지는 바람에 등교길의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이 사고를 당하였다. 버스 추락으로 사망한 사람은 29명이다.[2] 사고 차량 중 승합차에는 제49주년 경찰의 날[3]을 맞아 우수 중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 위해 본대로 가던 의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고 발생후 전원 무사하여 헌신적으로 피해자들을 구조했다.[4] 붕괴 원인[편집] 점검 부실[편집] 성수대교는 건설될 당시, 트러스식 다리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트러스식 공법은 이음새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공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 시공인 이음새 핀 등의 세부 요소들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는데, 이러한 안전점검 조치를 소홀히 하였다.[5] 내부 결함[편집] 성수대교 건설 당시 다리 밑 부분을 이루고 있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연결 부분도 심하게 녹슬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새에도 결함이 있었다.[6] 공사 도중 볼트 삽입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볼트를 무리하게 집어넣다가 구멍의 모양이 변형되어 볼트의 강도가 약해졌다.[7] 과적차량의 통과[편집] 붕괴 전의 성수대교 설계 하중은 DB-18(총중량 32.1t)이었지만, 이를 초과하는 과적 차량들이 자주 통과하였다. 이로써 성수대교는 40t이 넘는 차량들의 압력을 받았기에 붕괴는 예견되어 있었다.[8] 특히, 붕괴되기 전 해였던 1993년 서울 동부간선도로(성수대교~의정부 구간)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은 더욱 폭증했으나, 서울시에서는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피해 사항[편집] 32명(남 16명, 여 16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을 입어 총 49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였다. 이 사고는 해외에도 크게 보도되어 건설업계에 큰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이미지도 크게 훼손되었다. 사망자 중에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대학생 1명, 필리핀인 아델 아이다 등으로 이 중 외국인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9] 사망자 중 한 명인 서울교육대학교 대학생은 장기를 의대생 실습용으로 기증하였다.[10] 사상자 현황 사망자 부상자 국적 인원 인원 대한민국 31 17 필리핀 1 - 합계 32 17 사고 이후[편집] 서울특별시 대책본부 설치[편집] 사고 발생 직후 서울특별시는 대책본부를 설치한 후 서울특별시장을 본부장으로 8개반을 편성 후 활동을 시작하였다.[11][12] 구조 활동[편집] 경찰에 의해 교통이 통제되고, 소방대와 119구조대는 구급차를 출동해 사상자를 구조하였다. 해난구조대는 잠수요원을 출동해 시신을 인양하고, 15개의 병원에 사망자를 안치, 6개의 병원에 부상자를 후송하였다.[13][14] [9] 교통 정리[편집] 성수대교 붕괴 이후 교통량 분산을 검토한 후 우회도로 안내판을 설치하여 영동대교, 동호대교로 교통량을 분산하고, 교통신호 주기를 조정하였다.[15][16][17] 또한,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시내버스 노선도 변경되었다.[18] 서울특별시장의 경질[편집] 사고 당일 오후 7시에 사고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고, 우명규 시장을 거쳐 11월 3일 최병렬이 시장으로 부임했다.[19] 또한 개원 중이던 국회가 일체 중지되었고, 24일 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 특별담화문을 전국 TV를 통해 발표하고 국민에게 사과하였다.[20] 재건설[편집] 붕괴 이후 토목학계는 무너지지 않은 부분을 그대로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으나,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새로 건설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1997년 7월 3일에 직선 차선만 완성되었으며 이후 확장공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램프를 건설하지 못하였다.확장공사는 1998년 12월 31일 폭과 길이 확장공사 진입램프 신설을 하고 2004년 9월 최종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21][22] 한편, 성수대교 붕괴 사고 여파로 인해 같은 트러스식 공법으로 시공된 당산철교도 안전 점검 후폭풍이 일게 되어 1997년 1월 1일부터 철거 및 재건설에 들어갔고, 1999년 11월 22일에 다시 개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련 작품[편집] 노래[편집] 〈성수대교〉 (1995년 5월) 가수 : DJ DOC 앨범 : 《2집 머피의 법칙》 영화[편집]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2012년 9월) 감독 : 김희정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드라마 스페셜 《딸기 아이스크림》 (2011년, KBS 2TV) 《감자별 2013QR3》 (2013년, tvN) 극중 나진아(하연수 분)는 이 사건으로 아버지(강남길 분)를 잃어 밤을 무서워하는 역으로 출연한다. 《시그널》 (2016년, tvN) 제5회에서 한영대교라는 이름으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연상되는 신이 등장한다. 같이 보기[편집] 성수대교 당산철교 신행주대교 붕괴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사진[편집] 각주[편집] ↑ “성수대교 붕괴”. 경향신문. 1994년 10월 21일. 2014년 12월 20일에 확인함.  ↑ '꽝'소리와함께 떨어진 출근길 날벼락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제49회 경찰의 날 기념식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1 (2012-06-10 확인) ↑ 다리와 함께 떨어진 의경들, 목숨건 구조활동 벌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MBC뉴스, 1994-10-21 (2012-05-15 확인) ↑ 성수대교 건설 공법과 붕괴사고 원인은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1 (2012-06-02 확인)성수대교, 정밀 안전점검 한번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MBC뉴스, 1994-10-21 (2012-06-02 확인) ↑ 검찰, 성수대교에 대한 현장검증 실시결과 이미 내정된 붕괴 Archived 2013년 11월 12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2 (2012-06-02 확인) ↑ 성수대교 붕괴원인, 상판 이음새의 연결핀 파손으로 추정 Archived 2013년 11월 12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2 (2012-06-02 확인) ↑ 성수대교, 설계통과하중 18t 이상 차량 통과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13 확인)〈緊急診斷〉성수대교 붕괴사고 전문가 진단(3)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13 확인) ↑ 가 나 성수대교 붕괴사고 사망자 32명 명단 : MBC뉴스, 1994-10-21 (2012-05-15 확인) ↑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숨진 딸의 장기 의대생실습용으로 기증 Archived 2014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2 (2012-06-02 확인) ↑ 서울시, 사고대책본부 구성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국회조사반 조사활동 착수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출근길 날벼락, 성수대교 붕괴사고 현장 늦장 구조활동 Archived 2014년 4월 19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1 (2012-05-15 확인) ↑ 李국방, 성수대교 사고 구조 작업 특별지시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영동대교.동호대교로 교통량 분산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성수대교 붕괴와 한강 다리 보수공사로 인한 연말 교통 대란 Archived 2014년 3월 14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2-02 (2012-06-01 확인) ↑ 서울 경찰청,서울시의 교통난 해소책 내놔 Archived 2014년 3월 14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2-15 (2012-06-01 확인) ↑ 성수대교 통과하던 시내버스 노선 변경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2 (2012-06-01 확인) ↑ 이원종 서울시장 경질 Archived 2014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1 (2012-05-15 확인) ↑ 김영삼대통령, 성수대교 참사와 관련한 대국민 사과문 발표 Archived 2014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3 (2012-05-15 확인) ↑ 성수대교 복구공사 착공 Archived 2014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5-04-26 (2012-05-15 확인) ↑ 한강 성수대교 붕괴된지 2년8개월만에 22일 재개통, 2등교에서 1등교로 탈바꿈 : MBC뉴스, 1997-06-21 (2012-05-15 확인) vdeh 대한민국의 도로 사고1950년대 오산 건널목 군용트럭 사고 (1954년) 1970년대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광진교 버스 추락 (1973년) 1980년대 천호대교 버스 추락 (1988년) 1990년대 섬강교 버스 추락 (1990년) 소양호 버스 추락 (1990년) 성수대교 붕괴 (1994년) 2000년대 진주 관광버스 추락 (2001년) 서해대교 연쇄 추돌 (2006년) 2010년대 인천대교 시외버스 추락 (2010년) 서울 시내버스 폭발 (2010년) 창원 시내버스 추락 (2014년) 레이디스 코드 교통 사고 (2014년) 청주 크림빵 뺑소니 사건 (2015년) 중앙고속도로 연쇄 추돌 사고 (2015년) 영종대교 연쇄 추돌 사고 (2015년) 지안 버스 추락 사고¹ (2015년) 남해고속도로 연쇄 추돌 사고 (2016년)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 사고 (2016년) 윤창호 사건 (2018년) 고양시 온수배관 파열사고 (2018년) 살인 사건 철도 사고 항공 사고 해양 사고 도로 사고 화재 사고 군사 사건 성범죄 사건 아동 학대 사건 폭발 사고 방송 사고 붕괴 사고 ¹: 대한민국 외 지역에서 발생한, 2인 이상 한국인이 연관된 사고 vdeh 대한민국의 붕괴 사고1960년대 대구 청구대 붕괴 사고 (1967년) 1970년대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1970년) 1980년대 서울 3호선 지하철 공사 현장 붕괴 사고 (1982년) 1990년대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사고 (1993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2000년대 대구 신남네거리 지하철 공사 현장 붕괴 사고 (2000년) 이천 물류창고 붕괴 사고 (2005년) 나산백화점 붕괴 사고 (2008년) 2010년대 노량진 배수지 수몰 사고 (2013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 (2014년) 판교 공연장 환풍구 붕괴 사고 (2014년) 사당종합체육관 공사장 붕괴 사고 (2015년) 용산 상가 붕괴 사고 (2018년) 살인 사건 철도 사고 항공 사고 해양 사고 도로 사고 화재 사고 군사 사건 성범죄 사건 아동 학대 사건 폭발 사고 붕괴 사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성수대교_붕괴_사고&oldid=24232658" 분류: 1994년 재난교량 사고1994년 대한민국서울 성동구의 역사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7일 (금) 03:0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성수대교 붕괴 사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수대교 붕괴 참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현장날짜 1994년 10월 21일시간 아침 7시 38분 (KST)[1]위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최초 보고자 서울성동소방서참여자 동아건설, 서울특별시청원인 부실공사 피해사망자 32명부상자 17명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聖水大橋崩壞事故)는 1994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의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져내려 일어난 사고다. 이 사고로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하여 총 49명의 사상자를 냈다. 목차 1 사고 내용 2 붕괴 원인 2.1 점검 부실 2.2 내부 결함 2.3 과적차량의 통과 3 피해 사항 4 사고 이후 4.1 서울특별시 대책본부 설치 4.2 구조 활동 4.3 교통 정리 4.4 서울특별시장의 경질 4.5 재건설 5 관련 작품 5.1 노래 5.2 영화 5.3 텔레비전 드라마 6 같이 보기 7 사진 8 각주 사고 내용[편집]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에 제5·6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약 50m가 붕괴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부분을 달리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2대는 현수 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 있던 승용차 2대는 물속으로 빠졌다. 지나가던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통과 도중 뒷바퀴가 붕괴 지점에 걸쳐있다가 차체가 뒤집혀 추락한 후, 떨어진 상판에 박혀 찌그러지는 바람에 등교길의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이 사고를 당하였다. 버스 추락으로 사망한 사람은 29명이다.[2] 사고 차량 중 승합차에는 제49주년 경찰의 날[3]을 맞아 우수 중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 위해 본대로 가던 의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고 발생후 전원 무사하여 헌신적으로 피해자들을 구조했다.[4] 붕괴 원인[편집] 점검 부실[편집] 성수대교는 건설될 당시, 트러스식 다리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트러스식 공법은 이음새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공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 시공인 이음새 핀 등의 세부 요소들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는데, 이러한 안전점검 조치를 소홀히 하였다.[5] 내부 결함[편집] 성수대교 건설 당시 다리 밑 부분을 이루고 있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연결 부분도 심하게 녹슬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새에도 결함이 있었다.[6] 공사 도중 볼트 삽입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볼트를 무리하게 집어넣다가 구멍의 모양이 변형되어 볼트의 강도가 약해졌다.[7] 과적차량의 통과[편집] 붕괴 전의 성수대교 설계 하중은 DB-18(총중량 32.1t)이었지만, 이를 초과하는 과적 차량들이 자주 통과하였다. 이로써 성수대교는 40t이 넘는 차량들의 압력을 받았기에 붕괴는 예견되어 있었다.[8] 특히, 붕괴되기 전 해였던 1993년 서울 동부간선도로(성수대교~의정부 구간)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은 더욱 폭증했으나, 서울시에서는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피해 사항[편집] 32명(남 16명, 여 16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을 입어 총 49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였다. 이 사고는 해외에도 크게 보도되어 건설업계에 큰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이미지도 크게 훼손되었다. 사망자 중에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대학생 1명, 필리핀인 아델 아이다 등으로 이 중 외국인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9] 사망자 중 한 명인 서울교육대학교 대학생은 장기를 의대생 실습용으로 기증하였다.[10] 사상자 현황 사망자 부상자 국적 인원 인원 대한민국 31 17 필리핀 1 - 합계 32 17 사고 이후[편집] 서울특별시 대책본부 설치[편집] 사고 발생 직후 서울특별시는 대책본부를 설치한 후 서울특별시장을 본부장으로 8개반을 편성 후 활동을 시작하였다.[11][12] 구조 활동[편집] 경찰에 의해 교통이 통제되고, 소방대와 119구조대는 구급차를 출동해 사상자를 구조하였다. 해난구조대는 잠수요원을 출동해 시신을 인양하고, 15개의 병원에 사망자를 안치, 6개의 병원에 부상자를 후송하였다.[13][14] [9] 교통 정리[편집] 성수대교 붕괴 이후 교통량 분산을 검토한 후 우회도로 안내판을 설치하여 영동대교, 동호대교로 교통량을 분산하고, 교통신호 주기를 조정하였다.[15][16][17] 또한,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시내버스 노선도 변경되었다.[18] 서울특별시장의 경질[편집] 사고 당일 오후 7시에 사고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고, 우명규 시장을 거쳐 11월 3일 최병렬이 시장으로 부임했다.[19] 또한 개원 중이던 국회가 일체 중지되었고, 24일 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 특별담화문을 전국 TV를 통해 발표하고 국민에게 사과하였다.[20] 재건설[편집] 붕괴 이후 토목학계는 무너지지 않은 부분을 그대로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으나,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새로 건설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1997년 7월 3일에 직선 차선만 완성되었으며 이후 확장공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램프를 건설하지 못하였다.확장공사는 1998년 12월 31일 폭과 길이 확장공사 진입램프 신설을 하고 2004년 9월 최종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21][22] 한편, 성수대교 붕괴 사고 여파로 인해 같은 트러스식 공법으로 시공된 당산철교도 안전 점검 후폭풍이 일게 되어 1997년 1월 1일부터 철거 및 재건설에 들어갔고, 1999년 11월 22일에 다시 개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련 작품[편집] 노래[편집] 〈성수대교〉 (1995년 5월) 가수 : DJ DOC 앨범 : 《2집 머피의 법칙》 영화[편집]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2012년 9월) 감독 : 김희정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드라마 스페셜 《딸기 아이스크림》 (2011년, KBS 2TV) 《감자별 2013QR3》 (2013년, tvN) 극중 나진아(하연수 분)는 이 사건으로 아버지(강남길 분)를 잃어 밤을 무서워하는 역으로 출연한다. 《시그널》 (2016년, tvN) 제5회에서 한영대교라는 이름으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연상되는 신이 등장한다. 같이 보기[편집] 성수대교 당산철교 신행주대교 붕괴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사진[편집] 각주[편집] ↑ “성수대교 붕괴”. 경향신문. 1994년 10월 21일. 2014년 12월 20일에 확인함.  ↑ '꽝'소리와함께 떨어진 출근길 날벼락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제49회 경찰의 날 기념식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1 (2012-06-10 확인) ↑ 다리와 함께 떨어진 의경들, 목숨건 구조활동 벌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MBC뉴스, 1994-10-21 (2012-05-15 확인) ↑ 성수대교 건설 공법과 붕괴사고 원인은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1 (2012-06-02 확인)성수대교, 정밀 안전점검 한번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MBC뉴스, 1994-10-21 (2012-06-02 확인) ↑ 검찰, 성수대교에 대한 현장검증 실시결과 이미 내정된 붕괴 Archived 2013년 11월 12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2 (2012-06-02 확인) ↑ 성수대교 붕괴원인, 상판 이음새의 연결핀 파손으로 추정 Archived 2013년 11월 12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2 (2012-06-02 확인) ↑ 성수대교, 설계통과하중 18t 이상 차량 통과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13 확인)〈緊急診斷〉성수대교 붕괴사고 전문가 진단(3)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13 확인) ↑ 가 나 성수대교 붕괴사고 사망자 32명 명단 : MBC뉴스, 1994-10-21 (2012-05-15 확인) ↑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숨진 딸의 장기 의대생실습용으로 기증 Archived 2014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2 (2012-06-02 확인) ↑ 서울시, 사고대책본부 구성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국회조사반 조사활동 착수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출근길 날벼락, 성수대교 붕괴사고 현장 늦장 구조활동 Archived 2014년 4월 19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1 (2012-05-15 확인) ↑ 李국방, 성수대교 사고 구조 작업 특별지시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영동대교.동호대교로 교통량 분산 : 네이버 뉴스, 1994-10-21 (2012-06-01 확인) ↑ 성수대교 붕괴와 한강 다리 보수공사로 인한 연말 교통 대란 Archived 2014년 3월 14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2-02 (2012-06-01 확인) ↑ 서울 경찰청,서울시의 교통난 해소책 내놔 Archived 2014년 3월 14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2-15 (2012-06-01 확인) ↑ 성수대교 통과하던 시내버스 노선 변경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2 (2012-06-01 확인) ↑ 이원종 서울시장 경질 Archived 2014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1 (2012-05-15 확인) ↑ 김영삼대통령, 성수대교 참사와 관련한 대국민 사과문 발표 Archived 2014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4-10-23 (2012-05-15 확인) ↑ 성수대교 복구공사 착공 Archived 2014년 10월 18일 - 웨이백 머신 : MBC뉴스, 1995-04-26 (2012-05-15 확인) ↑ 한강 성수대교 붕괴된지 2년8개월만에 22일 재개통, 2등교에서 1등교로 탈바꿈 : MBC뉴스, 1997-06-21 (2012-05-15 확인) vdeh 대한민국의 도로 사고1950년대 오산 건널목 군용트럭 사고 (1954년) 1970년대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광진교 버스 추락 (1973년) 1980년대 천호대교 버스 추락 (1988년) 1990년대 섬강교 버스 추락 (1990년) 소양호 버스 추락 (1990년) 성수대교 붕괴 (1994년) 2000년대 진주 관광버스 추락 (2001년) 서해대교 연쇄 추돌 (2006년) 2010년대 인천대교 시외버스 추락 (2010년) 서울 시내버스 폭발 (2010년) 창원 시내버스 추락 (2014년) 레이디스 코드 교통 사고 (2014년) 청주 크림빵 뺑소니 사건 (2015년) 중앙고속도로 연쇄 추돌 사고 (2015년) 영종대교 연쇄 추돌 사고 (2015년) 지안 버스 추락 사고¹ (2015년) 남해고속도로 연쇄 추돌 사고 (2016년)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 사고 (2016년) 윤창호 사건 (2018년) 고양시 온수배관 파열사고 (2018년) 살인 사건 철도 사고 항공 사고 해양 사고 도로 사고 화재 사고 군사 사건 성범죄 사건 아동 학대 사건 폭발 사고 방송 사고 붕괴 사고 ¹: 대한민국 외 지역에서 발생한, 2인 이상 한국인이 연관된 사고 vdeh 대한민국의 붕괴 사고1960년대 대구 청구대 붕괴 사고 (1967년) 1970년대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1970년) 1980년대 서울 3호선 지하철 공사 현장 붕괴 사고 (1982년) 1990년대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사고 (1993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2000년대 대구 신남네거리 지하철 공사 현장 붕괴 사고 (2000년) 이천 물류창고 붕괴 사고 (2005년) 나산백화점 붕괴 사고 (2008년) 2010년대 노량진 배수지 수몰 사고 (2013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 (2014년) 판교 공연장 환풍구 붕괴 사고 (2014년) 사당종합체육관 공사장 붕괴 사고 (2015년) 용산 상가 붕괴 사고 (2018년) 살인 사건 철도 사고 항공 사고 해양 사고 도로 사고 화재 사고 군사 사건 성범죄 사건 아동 학대 사건 폭발 사고 붕괴 사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성수대교_붕괴_사고&oldid=24232658" 분류: 1994년 재난교량 사고1994년 대한민국서울 성동구의 역사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7일 (금) 03:0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창녕 관룡사 약사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창녕 관룡사 약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창녕관룡사약사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창녕 관룡사 약사전(昌寧 觀龍寺 藥師殿) 대한민국의 보물 종목 보물 제146호 (1963년 1월 21일 지정)수량 1동시대 조선시대소유 관룡사위치 창녕 관룡사 약사전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좌표 북위 35° 31′ 54.74″ 동경 128° 33′ 14.14″ / 북위 35.5318722° 동경 128.5539278°  / 35.5318722; 128.5539278좌표: 북위 35° 31′ 54.74″ 동경 128° 33′ 14.14″ / 북위 35.5318722° 동경 128.5539278°  / 35.5318722; 128.5539278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창녕 관룡사 약사전(昌寧 觀龍寺 藥師殿)은 경상남도 창녕군, 관룡사 사찰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목차 1 개요 2 특징 3 사진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개요[편집]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임진왜란 때 약사전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약사전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하며, 건물 안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매우 작은 불당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간결한 형태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가진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좋은 비교가 된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징[편집] 관룡사는 '약사전 상량문'에 따르면 영화9년(353)으로 기록되어 그 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별지 연혁기록과 같이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하여 수리가 된 절이다. 이 건물은 위 '약사전 상량문'에 따르면 "영화9년 계축2일로 되었고, 대명정덕 2년 정묘(1507)에 중창하고 만력 37년(1609)에 또 중창하였다"하여 전기 사적기에서는 이 건물만이 임진왜란의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의 건축연대는 후술하는 가구의 특징 등을 종합하여 볼때 1507년인 조선초기의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중수와 수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재창 1507(중종 2년) 삼창 1609(광해군 1년) 단청 1713(숙종 39년) 수선 숙종연간 단청 1729(영조 5년) 사창 1821(순조 21년) 사찰의 남서편에 위치한 이 건물은 남측에서 보아 높이 마련된 자연석축 기단 위에 전면, 측면 공히 단칸으로 된 소규모의 주심포 맞배집으로 한눈으로 보아 측면의 박공이 주심에서 길게 나와 있음이 그 특징이다. 건축의 양식적인 측면에서 대체적으로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만든 초석위에 세운 기둥에는 고식의 배흘림을 갖고 있으며 건물의 전면은 궁창판 있는 정자살 사분합문을 하고 있고, 그 외의 벽체는 모두 심벽을 치고 있다. 내부 바닥은 변귀틀을 돌리고 동면 장귀틀을 하나 걸쳐 짠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가구가 잘 보이게 했으며 후면 중안에 좀 둔하게 느껴지는 좌대위에 석불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집의 가구는 전후 출목을 제외한 5량집이며 보는 한칸집으로 양측벽에서만 걸리는데 대량 위 양쪽 중간부에 판대공으로 된 동자주를 세우고 중종보를 걸치게 하였다. 이 중보는 그 양 끝이 주심도리 내측으로 우미량 처럼 휘어져 내려서 대량위에 닿았고 이 중종보 위에 종보가 얺혔는데 중종보 양측 상부에 소로를 2개씩 놓고 화반형 용마루도리 받침 대공을 올려 놓았다. 또 각 동자주와 대공에서는 첨차를 직각으로 올려 놓을 수 있게 소로를 놓고 그 위에서 우미량과 직각되게 쌍s형 첨차를 놓고 이 위에 다시 소로를 놓아 장여 또는 중도리를 받치고 있다. 특히 도리는 굴도리(원통형)인데 양측의 중도리만 납도리(사각방주)를 하고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올려놓고 그 밑에 기둥을 꿰뚫고 나온 창방 뺄목이 마치 헛첨차와 같은 모양을 하여 출목을 받치며 제공을 받고 있다. 제1살미는 외단이 익공과 같이 뾰족하며 내부로는 첨차형 단을 이루어 대량을 받는다. 또 대량의 뺄목 끝은 주심에서부터 수장폭으로 줄어 익공부리와 같은 조각이 되어 있다. 주심도리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뺄목을 두고있다. 또 측면 벽쪽에는 첨차와 장여 끝이 장식을 이루어 도리를 받치고 있다. 지붕 서까래는 장재를 써를 전후 장연을 한 번에 내리고 있고 그 끝에는 부연을 달고 있다.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과 첨차의 쌍s형 단조각, 살미의 부리, 우미량 납도리와 중도리, 배흘림을 한 기둥 등 조선초기의 기법을 보여 준다. 사진[편집] 약사전 내부 벽화 같이 보기[편집] 관룡사 창녕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참고 자료[편집] 창녕 관룡사 약사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창녕_관룡사_약사전&oldid=21615020" 분류: 경상남도의 보물창녕군의 문화재창녕군의 건축물조선의 건축물약사전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6월 22일 (금) 07: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알자지라 클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알자지라 클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알자지라 클럽 전체 이름 Al-Jazira Sports & Culture Club 리그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창단 연도 1974년 3월 19일 회장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하얀 감독 헹크 텐 카터 경기장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알자지라 모하메드 빈 자이드 경기장 수용 인원 40,000 2018–19 5위 홈 어웨이 알자지라 클럽(아랍어: نادي الجزيرة, 영어: Al Jazira Club)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축구 클럽으로, 현재 UAE 1부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다. 알자지라 클럽은 축구 팀 외에도 핸드볼, 배구, 수영, 볼링 팀도 운영하고 있다. 목차 1 역사 2 선수단 2.1 현재 선수 명단 3 클럽 기록 4 성적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74년 칼리디야 축구단과 알바틴 축구단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선수단[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2017년 1월 7일 기준 번호 포지션 이름 1 GK 모하메드 알누크비 2 DF 모하메드 파우지 5 DF 무살렘 파예즈 6 DF 사이프 칼판 7 FW 알리 맙쿠트 9 FW 아이우통 10 MF 므바르크 부수파 11 FW 아흐메드 라비 12 MF 살렘 라시드 오바이드 13 DF 술탄 알샴시 14 DF 에이사 알오타이바 15 MF 칼판 무바라크 16 DF 누하얀 하렙 18 DF 압둘라 무사 20 FW 에이사 와힙 21 MF 야쿱 알 호사니 22 DF 사이드 알라와히 번호 포지션 이름 23 DF 술탄 알소와이디 25 DF 모하메드 알하마디 26 DF 아흐메드 자밀 27 MF 살렘 압둘라 28 MF 후마이드 아흐메드 30 DF 주앙 카를루스 36 GK 칼레드 알세나니 37 MF 모하메드 알압둘리 39 FW 모하메드 라비 44 DF 파레스 주마 45 DF 사이드 히잠 50 MF 모하메드 자말 55 GK 알리 카시프 56 GK 압두라만 알암리 70 FW 아흐메드 알아타스 77 MF 술탄 바르가쉬 80 MF 살렘 알리 이브라힘 클럽 기록[편집] 2015년 2월 24일 기준 번호 이름 재임기간 ? 빈칸 빈칸 2 아흐메드 힐미 알나왈 1984-97 3 니콜라이 키셀리오프 1989-93, 1994-95 4 제말루딘 무쇼비치 1997-98 5 리누스 이스라엘 1998-99 ? 빈칸 빈칸 7 얀 페르스라이옌 2001-03 8 안드레 베첼 2004 9 세프 페르구센 2004-05 10 발테르 메위스 2005-06 11 얀 페르스라이옌 2006-97 12 라슬로 뵐뢰니 2007-08 13 아베우 브라가 2008-11 14 프랑키 페르카우터런 2011-12 15 카이우 주니오르 2012 16 파울루 보나미구 2012-13 17 루이스 미야 2013 18 발테르 젱가 2013-14 19 에릭 헤러츠 2014-15 20 아베우 브라가 2015 21 알리 알루나이미 2015-16 22 헹크 텐 카터 2016- 성적[편집]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우승 1회: 2010-11 UAE 연방컵 우승 1회: 2007 UAE 리그컵 우승 1회: 2010 준우승 1회: 2013 UAE 프레지던트컵 우승 3회: 2011, 2012, 2016 GCC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2007 외부 링크[편집] 공식 웹사이트 vdeh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2016-17) 디바 알푸자이라 바니야스 알나스르 알다프라 알샤르자 알샤바브 알아인 알아흘리 알이티하드 칼바 알 와슬 알와흐다 알자지라 에미리트 하타 클럽 AFC 챔피언스리그vdehAFC 챔피언스리그 2009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포항 스틸러스준우승 알이티하드4강 움살랄 · 나고야 그램퍼스8강 부뇨드코르 · 파흐타코르 · FC 서울 · 가와사키 프론탈레16강 알힐랄 · 알샤바브 · 알이티파크 · 페르세폴리스 · 감바 오사카 · 가시마 앤틀러스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뉴캐슬 제츠조별 예선 알아흘리 · 알샤르자 † · 알자지라 · 알샤바브 · 사바 배터리 · 에스테글랄 · 세파한 · 알가라파 · 울산 현대 · 베이징 궈안 · 산둥 루넝 · 상하이 선화 · 톈진 터다 · 스리위자야 · 싱가포르 암드 포스 ·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알샤르자는 4경기를 치른 이후에 기권했다.플레이오프 PSMS 메단 · 부리람 PEA · 뎀포 SC실격 빈즈엉 · 무하라크 클럽 · 사파 베이루트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0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성남 일화 천마준우승 조브 아한4강 알힐랄 · 알샤바브8강 알가라파 · 전북 현대 모터스 · 포항 스틸러스 · 수원 삼성 블루윙즈16강 에스테글랄 · 메스 케르만 · 부뇨드코르 · 파흐타코르 ·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 가시마 앤틀러스 · 감바 오사카 · 베이징 궈안조별 예선 세파한 · 알아흘리 · 알이티하드 · 알자지라 · 알와흐다 · 알아인 · 알아흘리 · 알사드 · 싱가포르 암드 포스 · 멜버른 빅토리 · 페르시푸라 · 산프레체 히로시마 · 가와사키 프론탈레 · 창춘 야타이 · 허난 젠예 · 산둥 루넝플레이오프 처칠 브라더스 · 알카라마 · 스리위자야 • 다낭 FC • 무앙통 유나이티드실격 쿠웨이트 SC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1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알사드 준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4강 알이티하드 수원 삼성 블루윙즈 8강 조브 아한 세파한 FC 서울 세레소 오사카 16강 부뇨드코르 알힐랄 알샤바브 알나스르 감바 오사카 가시마 앤틀러스 나고야 그램퍼스 톈진 터다 조별 예선 에스테글랄 페르세폴리스 알자지라 알와흐다 알아인 에미리트 알가라파 알라이얀 파흐타코르 제주 유나이티드 멜버른 빅토리 시드니 FC 아레마 말랑 항저우 뤼청 상하이 선화 산둥 루넝 플레이오프 뎀포 알이티하드 스리위자야 무앙통 유나이티드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2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17 | 2018 | 2019우승 울산 현대준우승 알아흘리4강 알이티하드 · 부뇨드코르8강 알힐랄 ·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 세파한 · 광저우 헝다16강 성남 일화 천마 · 바니야스 · 알자지라 · 에스테글랄 · 페르세폴리스 · 가시와 레이솔 · 나고야 그램퍼스 · FC 도쿄조별 예선 전북 현대 모터스 · 포항 스틸러스 · 알나스르 · 알샤바브 · 브리즈번 로어 ·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 나사프 카르시 · 파흐타코르 · 감바 오사카 · 베이징 궈안 · 톈진 터다 · 레크위야 · 알가라파 · 알라이얀 · 알아라비 · 부리람 유나이티드플레이오프 알이티파크 · 네프치 페르가나 · 조브 아한 · 페르시푸라 자야푸라 · 촌부리 FC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3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광저우 헝다준우승 FC 서울4강 에스테글랄 · 가시와 레이솔8강 알샤바브 · 알아흘리 · 레크위야 · 부리람 유나이티드16강 전북 현대 모터스 · 알힐랄 · 알샤바브 ·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 부뇨드코르 · 베이징 궈안 · 알가라파 · 엘자이시조별 예선 수원 삼성 블루윙즈 · 포항 스틸러스 · 알이티파크 · 알나스르 · 알아인 · 알자지라 ·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 세파한 · 트락토르 사지 · 베갈타 센다이 · 산프레체 히로시마 ·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드 · 구이저우 런허 · 장쑤 순톈 · 알라이얀 · 무앙통 유나이티드플레이오프 브리즈번 로어 ·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 사바 쿰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4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준우승 알힐랄4강 FC 서울 · 알아인8강 포항 스틸러스 · 이티하드 FC · 광저우 헝다 · 알사드16강 전북 현대 모터스 · 알샤바브 · 알자지라 · 부뇨드코르 · 풀라드 · 가와사키 프론탈레 · 산프레체 히로시마 · 세레소 오사카조별 예선 울산 현대 · 알파테흐 · 알아흘리 · 멜버른 빅토리 ·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 세파한 · 에스테글랄 · 트락토르 사지 ·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구이저우 런허 · 베이징 궈안 · 산둥 루넝 · 레크위야 · 알라이얀 · 엘자이시 · 부리람 유나이티드플레이오프 알히드 · 하노이 T&T · 탬피니스 로버스 · 바니야스 · 알수와이크 · 샤바브 알오르돈 · 나사프 카르시  ·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 알쇼르타 · 푸네 · 카디시야 · 쿠웨이트 SC · 무앙통 유나이티드 · 촌부리 · 사우스 차이나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5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광저우 헝다준우승 알아흘리4강 알힐랄 · 감바 오사카8강 전북 현대 모터스 · 나프트 테헤란 · 가시와 레이솔 · 레크위야16강 수원 삼성 블루윙즈 · 성남 FC · FC 서울 · 알아흘리 · 페르세폴리스 · 알아인 · 베이징 궈안 · 알사드조별 예선 알나스르 · 알샤바브 · 풀라드 · 트락토르 사지 · 우라와 레즈 · 가시마 앤틀러스 ·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 나사프 카르시 · 부뇨드코르 · 브리즈번 로어 ·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 · 산둥 루넝 · 광저우 푸리 · 부리람 유나이티드 · 빈즈엉 FC플레이오프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 알자지라 · 알와흐다 · 엘자이시 · 카디시야 · 알웨흐다트 · 촌부리 · 방콕 글라스 · 알나흐다 · 하노이 T&T · 리파 · 페르십 반둥 · 킷치 · 야다나본 · 조호르 다룰 탁짐 · 벵갈루루 · 워리어스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6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준우승 알아인 FC4강 FC 서울 · 엘자이시 SC8강 상하이 상강 · 산둥 루넝 ·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 알나스르16강 멜버른 빅토리 FC · 시드니 FC · FC 도쿄 ·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 알힐랄 · 트락토르 사지 · 조브 아한 · 레크위야조별 예선 파흐타코르 · 나사프 카르시 · 부뇨드코르 · 이티하드 · 알아흘리 · 알나스르 · 장쑤 쑤닝 · 광저우 헝다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포항 스틸러스 · 산프레체 히로시마 · 감바 오사카 · 빈즈엉 · 세파한 · 알자지라 · 부리람 유나이티드플레이오프 알웨흐다트 · 나프트 테헤란 · 알샤바브 · 알사드 · 모훈 바간 · 탬피니스 로버스 · 킷치 · 양곤 유나이티드 · 조호르 다룰 탁짐 · 하노이 T&T · 촌부리 · 무앙통 유나이티드 ·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이 글은 축구단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알자지라_클럽&oldid=24377558" 분류: 1974년 설립된 축구단알자지라 클럽아랍에미리트의 축구단숨은 분류: 아랍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축구단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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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지라 클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알자지라 클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알자지라 클럽 전체 이름 Al-Jazira Sports & Culture Club 리그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창단 연도 1974년 3월 19일 회장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하얀 감독 헹크 텐 카터 경기장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알자지라 모하메드 빈 자이드 경기장 수용 인원 40,000 2018–19 5위 홈 어웨이 알자지라 클럽(아랍어: نادي الجزيرة, 영어: Al Jazira Club)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축구 클럽으로, 현재 UAE 1부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다. 알자지라 클럽은 축구 팀 외에도 핸드볼, 배구, 수영, 볼링 팀도 운영하고 있다. 목차 1 역사 2 선수단 2.1 현재 선수 명단 3 클럽 기록 4 성적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74년 칼리디야 축구단과 알바틴 축구단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선수단[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2017년 1월 7일 기준 번호 포지션 이름 1 GK 모하메드 알누크비 2 DF 모하메드 파우지 5 DF 무살렘 파예즈 6 DF 사이프 칼판 7 FW 알리 맙쿠트 9 FW 아이우통 10 MF 므바르크 부수파 11 FW 아흐메드 라비 12 MF 살렘 라시드 오바이드 13 DF 술탄 알샴시 14 DF 에이사 알오타이바 15 MF 칼판 무바라크 16 DF 누하얀 하렙 18 DF 압둘라 무사 20 FW 에이사 와힙 21 MF 야쿱 알 호사니 22 DF 사이드 알라와히 번호 포지션 이름 23 DF 술탄 알소와이디 25 DF 모하메드 알하마디 26 DF 아흐메드 자밀 27 MF 살렘 압둘라 28 MF 후마이드 아흐메드 30 DF 주앙 카를루스 36 GK 칼레드 알세나니 37 MF 모하메드 알압둘리 39 FW 모하메드 라비 44 DF 파레스 주마 45 DF 사이드 히잠 50 MF 모하메드 자말 55 GK 알리 카시프 56 GK 압두라만 알암리 70 FW 아흐메드 알아타스 77 MF 술탄 바르가쉬 80 MF 살렘 알리 이브라힘 클럽 기록[편집] 2015년 2월 24일 기준 번호 이름 재임기간 ? 빈칸 빈칸 2 아흐메드 힐미 알나왈 1984-97 3 니콜라이 키셀리오프 1989-93, 1994-95 4 제말루딘 무쇼비치 1997-98 5 리누스 이스라엘 1998-99 ? 빈칸 빈칸 7 얀 페르스라이옌 2001-03 8 안드레 베첼 2004 9 세프 페르구센 2004-05 10 발테르 메위스 2005-06 11 얀 페르스라이옌 2006-97 12 라슬로 뵐뢰니 2007-08 13 아베우 브라가 2008-11 14 프랑키 페르카우터런 2011-12 15 카이우 주니오르 2012 16 파울루 보나미구 2012-13 17 루이스 미야 2013 18 발테르 젱가 2013-14 19 에릭 헤러츠 2014-15 20 아베우 브라가 2015 21 알리 알루나이미 2015-16 22 헹크 텐 카터 2016- 성적[편집]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우승 1회: 2010-11 UAE 연방컵 우승 1회: 2007 UAE 리그컵 우승 1회: 2010 준우승 1회: 2013 UAE 프레지던트컵 우승 3회: 2011, 2012, 2016 GCC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2007 외부 링크[편집] 공식 웹사이트 vdeh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2016-17) 디바 알푸자이라 바니야스 알나스르 알다프라 알샤르자 알샤바브 알아인 알아흘리 알이티하드 칼바 알 와슬 알와흐다 알자지라 에미리트 하타 클럽 AFC 챔피언스리그vdehAFC 챔피언스리그 2009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포항 스틸러스준우승 알이티하드4강 움살랄 · 나고야 그램퍼스8강 부뇨드코르 · 파흐타코르 · FC 서울 · 가와사키 프론탈레16강 알힐랄 · 알샤바브 · 알이티파크 · 페르세폴리스 · 감바 오사카 · 가시마 앤틀러스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뉴캐슬 제츠조별 예선 알아흘리 · 알샤르자 † · 알자지라 · 알샤바브 · 사바 배터리 · 에스테글랄 · 세파한 · 알가라파 · 울산 현대 · 베이징 궈안 · 산둥 루넝 · 상하이 선화 · 톈진 터다 · 스리위자야 · 싱가포르 암드 포스 ·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알샤르자는 4경기를 치른 이후에 기권했다.플레이오프 PSMS 메단 · 부리람 PEA · 뎀포 SC실격 빈즈엉 · 무하라크 클럽 · 사파 베이루트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0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성남 일화 천마준우승 조브 아한4강 알힐랄 · 알샤바브8강 알가라파 · 전북 현대 모터스 · 포항 스틸러스 · 수원 삼성 블루윙즈16강 에스테글랄 · 메스 케르만 · 부뇨드코르 · 파흐타코르 ·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 가시마 앤틀러스 · 감바 오사카 · 베이징 궈안조별 예선 세파한 · 알아흘리 · 알이티하드 · 알자지라 · 알와흐다 · 알아인 · 알아흘리 · 알사드 · 싱가포르 암드 포스 · 멜버른 빅토리 · 페르시푸라 · 산프레체 히로시마 · 가와사키 프론탈레 · 창춘 야타이 · 허난 젠예 · 산둥 루넝플레이오프 처칠 브라더스 · 알카라마 · 스리위자야 • 다낭 FC • 무앙통 유나이티드실격 쿠웨이트 SC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1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알사드 준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4강 알이티하드 수원 삼성 블루윙즈 8강 조브 아한 세파한 FC 서울 세레소 오사카 16강 부뇨드코르 알힐랄 알샤바브 알나스르 감바 오사카 가시마 앤틀러스 나고야 그램퍼스 톈진 터다 조별 예선 에스테글랄 페르세폴리스 알자지라 알와흐다 알아인 에미리트 알가라파 알라이얀 파흐타코르 제주 유나이티드 멜버른 빅토리 시드니 FC 아레마 말랑 항저우 뤼청 상하이 선화 산둥 루넝 플레이오프 뎀포 알이티하드 스리위자야 무앙통 유나이티드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2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17 | 2018 | 2019우승 울산 현대준우승 알아흘리4강 알이티하드 · 부뇨드코르8강 알힐랄 ·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 세파한 · 광저우 헝다16강 성남 일화 천마 · 바니야스 · 알자지라 · 에스테글랄 · 페르세폴리스 · 가시와 레이솔 · 나고야 그램퍼스 · FC 도쿄조별 예선 전북 현대 모터스 · 포항 스틸러스 · 알나스르 · 알샤바브 · 브리즈번 로어 ·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 나사프 카르시 · 파흐타코르 · 감바 오사카 · 베이징 궈안 · 톈진 터다 · 레크위야 · 알가라파 · 알라이얀 · 알아라비 · 부리람 유나이티드플레이오프 알이티파크 · 네프치 페르가나 · 조브 아한 · 페르시푸라 자야푸라 · 촌부리 FC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3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광저우 헝다준우승 FC 서울4강 에스테글랄 · 가시와 레이솔8강 알샤바브 · 알아흘리 · 레크위야 · 부리람 유나이티드16강 전북 현대 모터스 · 알힐랄 · 알샤바브 ·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 부뇨드코르 · 베이징 궈안 · 알가라파 · 엘자이시조별 예선 수원 삼성 블루윙즈 · 포항 스틸러스 · 알이티파크 · 알나스르 · 알아인 · 알자지라 ·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 세파한 · 트락토르 사지 · 베갈타 센다이 · 산프레체 히로시마 ·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드 · 구이저우 런허 · 장쑤 순톈 · 알라이얀 · 무앙통 유나이티드플레이오프 브리즈번 로어 ·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 사바 쿰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4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준우승 알힐랄4강 FC 서울 · 알아인8강 포항 스틸러스 · 이티하드 FC · 광저우 헝다 · 알사드16강 전북 현대 모터스 · 알샤바브 · 알자지라 · 부뇨드코르 · 풀라드 · 가와사키 프론탈레 · 산프레체 히로시마 · 세레소 오사카조별 예선 울산 현대 · 알파테흐 · 알아흘리 · 멜버른 빅토리 ·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 세파한 · 에스테글랄 · 트락토르 사지 ·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구이저우 런허 · 베이징 궈안 · 산둥 루넝 · 레크위야 · 알라이얀 · 엘자이시 · 부리람 유나이티드플레이오프 알히드 · 하노이 T&T · 탬피니스 로버스 · 바니야스 · 알수와이크 · 샤바브 알오르돈 · 나사프 카르시  ·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 알쇼르타 · 푸네 · 카디시야 · 쿠웨이트 SC · 무앙통 유나이티드 · 촌부리 · 사우스 차이나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5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광저우 헝다준우승 알아흘리4강 알힐랄 · 감바 오사카8강 전북 현대 모터스 · 나프트 테헤란 · 가시와 레이솔 · 레크위야16강 수원 삼성 블루윙즈 · 성남 FC · FC 서울 · 알아흘리 · 페르세폴리스 · 알아인 · 베이징 궈안 · 알사드조별 예선 알나스르 · 알샤바브 · 풀라드 · 트락토르 사지 · 우라와 레즈 · 가시마 앤틀러스 ·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 나사프 카르시 · 부뇨드코르 · 브리즈번 로어 ·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 · 산둥 루넝 · 광저우 푸리 · 부리람 유나이티드 · 빈즈엉 FC플레이오프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 알자지라 · 알와흐다 · 엘자이시 · 카디시야 · 알웨흐다트 · 촌부리 · 방콕 글라스 · 알나흐다 · 하노이 T&T · 리파 · 페르십 반둥 · 킷치 · 야다나본 · 조호르 다룰 탁짐 · 벵갈루루 · 워리어스 vdehAFC 챔피언스리그 2016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준우승 알아인 FC4강 FC 서울 · 엘자이시 SC8강 상하이 상강 · 산둥 루넝 ·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 알나스르16강 멜버른 빅토리 FC · 시드니 FC · FC 도쿄 ·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 알힐랄 · 트락토르 사지 · 조브 아한 · 레크위야조별 예선 파흐타코르 · 나사프 카르시 · 부뇨드코르 · 이티하드 · 알아흘리 · 알나스르 · 장쑤 쑤닝 · 광저우 헝다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포항 스틸러스 · 산프레체 히로시마 · 감바 오사카 · 빈즈엉 · 세파한 · 알자지라 · 부리람 유나이티드플레이오프 알웨흐다트 · 나프트 테헤란 · 알샤바브 · 알사드 · 모훈 바간 · 탬피니스 로버스 · 킷치 · 양곤 유나이티드 · 조호르 다룰 탁짐 · 하노이 T&T · 촌부리 · 무앙통 유나이티드 ·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이 글은 축구단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알자지라_클럽&oldid=24377558" 분류: 1974년 설립된 축구단알자지라 클럽아랍에미리트의 축구단숨은 분류: 아랍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축구단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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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유럽 그랑프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2년 유럽 그랑프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2년유럽그랑프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발렌시아 스트리트 서킷 2012년 유럽 그랑프리(2012 European Grand Prix)는 2012년 6월 24일에 스페인 발렌시아 스트리트 서킷에서 열린 포뮬러 원 2012 시즌 여덟 번째 대회이다. 목차 1 대회 결과 1.1 예선 1.2 결승 1.3 순위 2 각주 대회 결과[편집] 예선[편집] 순위 번호 운전자 팀 1차 2차 3차 출발 순서 1 1 제바스티안 페텔 레드불-르노 1:39.626 1:38.530 1:38.086 1 2 4 루이스 해밀턴 맥라렌-메르세데스 1:39.169 1:38.616 1:38.410 2 3 18 파스토르 말도나도 윌리엄스-르노 1:38.825 1:38.570 1:38.475 3 4 10 로만 그로장 로터스-르노 1:39.530 1:38.489 1:38.505 4 5 9 키미 래이쾨넨 로터스-르노 1:39.464 1:38.531 1:38.513 5 6 8 니코 로스베르크 메르세데스 1:39.061 1:38.504 1:38.623 6 7 14 고바야시 가무이 자우버-페라리 1:39.651 1:38.703 1:38.741 7 8 12 니코 휠켄베르크 포스 인디아-메르세데스 1:39.009 1:38.689 1:38.752 8 9 3 젠슨 버튼 맥라렌-메르세데스 1:39.622 1:38.563 1:38.801 9 10 11 폴 디 레스타 포스 인디아-메르세데스 1:38.858 1:38.519 1:38.992 10 11 5 페르난도 알론소 페라리 1:39.409 1:38.707 11 12 7 미하엘 슈마허 메르세데스 1:39.447 1:38.770 12 13 6 펠리피 마사 페라리 1:39.388 1:38.780 13 14 19 브루노 세나 윌리엄스-르노 1:39.449 1:39.207 14 15 15 세르히오 페레스 자우버-페라리 1:39.353 1:39.358 15 16 20 헤이키 코발라이넨 케이터햄-르노 1:40.087 1:40.295 16 17 16 다니엘 리카르도 토로 로소-페라리 1:39.924 1:40.358 17 18 17 장에릭 베르뉴 토로 로소-페라리 1:40.203 18 19 2 마크 웨버 레드불-르노 1:40.395 19 20 21 비탈리 페트로프 케이터햄-르노 1:40.457 20 21 22 페드로 데 라 로사 HRT-코스워스 1:42.171 21 22 23 나레인 카티케얀 HRT-코스워스 1:42.527 22 23 25 샤를 픽 마루시아-코스워스 1:42.675 23 예선 통과 시간 : 1:45.742 (107% 규정) DNS1 24 티모 글록 마루시아-코스워스 no time — 출처[1] 참고 ^1 — 글록은 질병으로 예선에 참여하지 못하였다.[2] 또한 글록은 경주에 참여할 수 있는 의료 허가를 거부하였다.[3] 결승[편집] 순위 번호 운전자 팀 랩 시간 · 리타이어 출발 순서 획득 점수 1 5 페르난도 알론소 페라리 57 1:44:16.649 11 25 2 9 키미 래이쾨넨 로터스-르노 57 +6.421 5 18 3 7 미하엘 슈마허 메르세데스 57 +12.639 12 15 4 2 마크 웨버 레드불-르노 57 +13.628 19 12 5 12 니코 휠켄베르크 포스 인디아-메르세데스 57 +19.993 8 10 6 8 니코 로스베르크 메르세데스 57 +21.176 6 8 7 11 폴 디 레스타 포스 인디아-메르세데스 57 +22.866 10 6 8 3 젠슨 버튼 맥라렌-메르세데스 57 +24.653 9 4 9 15 세르히오 페레스 자우버-페라리 57 +27.777 15 2 10 19 브루노 세나 윌리엄스-르노 57 +35.961 14 1 11 16 다니엘 리카르도 토로 로소-페라리 57 +37.041 17 12 18 파스토르 말도나도 윌리엄스-르노 57 +54.6301 3 13 21 비탈리 페트로프 케이터햄-르노 57 +1:15.871 20 14 20 헤이키 코발라이넨 케이터햄-르노 57 +1:34.654 16 15 25 샤를 픽 마루시아-코스워스 57 +1:36.551 23 16 6 펠리피 마사 페라리 56 +1 Lap 13 17 22 페드로 데 라 로사 HRT-코스워스 56 +1 Lap 21 18 23 나레인 카티케얀 HRT-코스워스 56 +1 Lap 22 19 4 루이스 해밀턴 맥라렌-메르세데스 55 충돌 2 Ret 10 로만 그로장 로터스-르노 40 교류 발전기 4 Ret 1 제바스티안 페텔 레드불-르노 33 교류 발전기 1 Ret 14 고바야시 가무이 자우버-페라리 33 충돌 7 Ret 17 장에릭 베르뉴 토로 로소-페라리 26 충돌 18 DNS 24 티모 글록 마루시아-코스워스 0 병가 출처[4] 참고 ^1 — 끝에서 두 번째 랩에서 해밀턴과의 충돌로 말도나도는 20초 추가 패널티를 받았다.[5] 순위[편집] 드라이버 챔피언십 순위 순위 운전자 점수 1 1 페르난도 알론소 111 2 2 마크 웨버 91 2 3 루이스 해밀턴 88 1 4 제바스티안 페텔 85 5 니코 로스베르크 75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순위 순위 컨스트럭터 점수 1 레드불-르노 176 2 맥라렌-메르세데스 137 3 로터스-르노 126 4 페라리 122 5 메르세데스 92 각주[편집] ↑ “2012 Formula 1 Grand Prix of Europe”. ESPN F1. 2014년 1월 24일에 확인함.  ↑ Noble, Jonathan (2012년 6월 23일). “Glock allowed to race by European GP stewards, but awaits medical clearance”. 《Autosport》 (Haymarket Publications). 2014년 1월 24일에 확인함.  ↑ Noble, Jonathan (2012년 6월 24일). “Timo Glock withdrawn from European Grand Prix because of intestinal infection”. 《Autosport》 (Haymarket Publications). 2014년 1월 24일에 확인함.  ↑ “Alonso becomes first double winner in 2012 with superb European GP victory”. 《Autosport》. 2012년 6월 24일. 2014년 1월 24일에 확인함.  ↑ “Maldonado penalised over Hamilton clash”. Formula One Management. 2014년 1월 24일에 확인함.  이 전 캐나다 그랑프리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 2012 시즌 다 음  영국 그랑프리  vdeh« 이전 포뮬러 원 그랑프리 (2010–14)2014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바레인 중국 스페인 모나코 캐나다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 헝가리 벨기에 이탈리아 싱가포르 일본 러시아 미국 브라질 아부다비 2013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중국 바레인 스페인 모나코 캐나다 영국 독일 헝가리 벨기에 이탈리아 싱가포르 대한민국 일본 인도 아부다비 미국 브라질 2012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중국 바레인 스페인 모나코 캐나다 유럽 영국 독일 헝가리 벨기에 이탈리아 싱가포르 일본 대한민국 인도 아부다비 미국 브라질 2011 바레인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중국 터키 스페인 모나코 캐나다 유럽 영국 독일 헝가리 벨기에 이탈리아 싱가포르 일본 대한민국 인도 아부다비 브라질 2010 바레인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중국 스페인 모나코 터키 캐나다 유럽 영국 독일 헝가리 벨기에 이탈리아 싱가포르 일본 대한민국 브라질 아부다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2년_유럽_그랑프리&oldid=22363199" 분류: 2012년 포뮬러 원 시즌유럽 그랑프리2012년 6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Galego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lovenčinaSlovenščinaSvenska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2일 (수) 17: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정소공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소공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정소공주 지위 공주 이름 별호 정혜공주 신상정보 출생일 1412년 사망일 1424년 음력 2월 25일 사망지 조선 능묘 왕자‧공주 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01-85 왕조 조선 왕조 부친 세종 모친 소헌왕후 청송 심씨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년 ~ 1424년 음력 2월 25일)는 조선시대 초기의 공주로,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장녀이며 문종과 세조의 누나이다. 아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목차 1 생애 2 일화 3 가족 관계 4 관련 작품 4.1 드라마 5 각주 6 참고 자료 생애[편집] 충녕대군(후의 세종)과 경숙옹주(후의 소헌왕후)사이의 첫째이자 장녀로서 태종 12년(1412년)에 태어났다. 그 이후 1418년 세자(양녕대군)가 폐위되고 아버지인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녀 아기씨[1] 로 신분이 격상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아버지인 충녕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다시 공주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관례를 치르기 전 해인 세종 6년(1424년) 완두창(마마)에 걸려 1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본래의 시호는 정혜(貞惠)였으나 태종의 딸 정혜옹주와 같아서 정소(貞昭)로 고쳤다.[2] 묘소는 고양현에 있다. 일화[편집] 그녀는 태종의 첫 손녀였기 때문에 태종과 원경왕후는 물론이고 다른 왕실어른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성장하였다. 세종은 유독 첫딸인 정소공주를 아꼈기 때문에, 세종이 바쁜 업무중에도 그녀를 찾아가 친히 학문을 가르쳤다. 그녀가 죽은 후 세종은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큰 상심에 빠졌으며, 그녀의 장례는 세명의 공신(功臣)과 육조의 당상관들이 성문 밖에까지 장송할 정도로 크게 대우해 주었다. 가족 관계[편집] 본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조부 : 제3대 태종대왕(太宗大王, 1367~1422, 재위: 1400~1418) 조모 : 원경왕후 여흥 민씨(元敬王后 驪興 閔氏, 1365~ 1420) 아버지 :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 외조부 : 영의정부사 청천부원군 심온(領議政府事 靑川府院君 沈溫, 1375~1418) 외조모 : 영돈녕 소의공 안천보(領敦寧 昭懿公 安天保, 1339~1425)의 딸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 安氏, ?~1444) 어머니 : 소헌왕후 청송 심씨(昭憲王后 靑松 沈氏, 1395~1446) 동생 : 제5대 문종대왕(文宗大王, 1414~1452, 재위: 1450~1452) 조카 : 경혜공주(敬惠公主, 1436~1474) 조카 : 제6대 단종대왕(端宗大王, 1441~1457, 재위: 1452~1455) 동생 :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 동생 : 제7대 세조대왕(世祖大王, 1417~1468, 재위: 1455~1468) 조카 : 추존 덕종대왕(德宗大王, 1438~1457) 조카 : 제8대 예종대왕(睿宗大王, 1450~1469, 재위: 1468~1469) 동생 : 장소공 안평대군 용(章昭公 安平大君 瑢, 1418~1453) 동생 : 정간공 임영대군 구(貞簡公 臨瀛大君 璆, 1420~1469) 조카 : 귀성군 준(龜城君 浚, 1441~1479) 조카 :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 - 신수근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어머니 질서 : 영의정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領議政 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 1436~1502) 동생 : 장의공 광평대군 여(章懿公 廣平大君 璵, 1425~1444) 동생 : 정민공 금성대군 유(貞愍公 錦城大君 瑜, 1426~1457) 동생 : 정헌공 평원대군 임(定憲公 平原大君 琳, 1427~1445) 동생 : 경효공 영응대군 염(敬孝公 永膺大君 琰, 1434~1467)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대왕 세종》(KBS, 2008년, 배우:주다영, 김지원) 각주[편집] ↑ 조선에서 세자의 적녀에게는 군주라는 칭호가 내려졌으나 위에 옹주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법제의 제정이 완벽하지 못하였기때문에 단순히 왕녀아기씨라는 단어를 이용했다 ↑ 《세종실록》6년(1424) 4월 4일 4번째 기사 참고 자료[편집] 정소공주 - 한국학중앙연구원 vdeh조선과 대한제국의 왕녀/황녀 목록추존왕 목조 소생-추존왕 익조 소생 안의공주 -추존왕 도조 소생 문혜공주 문숙공주 문의공주 -추존왕 환조 소생 정화공주 -태조 소생 경신공주 경선공주 경순공주 숙신옹주 의령옹주 정종 소생- 함양옹주 숙신옹주 상원옹주 인천옹주 덕천옹주 고성옹주 전산옹주 함안옹주 태종 소생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숙녕옹주 숙경옹주 숙근옹주 소신옹주 소숙옹주 경신옹주 정혜옹주 숙혜옹주 숙안옹주 숙순옹주 세종 소생 정소공주 정의공주 정안옹주 정현옹주 문종 소생 경혜공주 경숙옹주 단종 소생--세조 소생 의숙공주 -추존왕 덕종 소생 명숙공주 -예종 소생 현숙공주 혜순공주 -성종 소생 순숙공주 신숙공주 휘숙옹주 경숙옹주 휘정옹주 정혜옹주 공신옹주 혜숙옹주 정순옹주 정숙옹주 경순옹주 숙혜옹주 경휘옹주 연산군 소생 휘신공주 이복억 이영수 이함금 이복합 이정수 옹주 이씨 중종 소생 효혜공주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혜순옹주 혜정옹주 정신옹주 숙정옹주 정순옹주 효정옹주 인종 소생--명종 소생--선조 소생 정명공주 공주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 정정옹주 정화옹주 광해군 소생- 폐 옹주(단인 이씨) 추존왕 원종 소생--인조 소생 공주 효명옹주 효종 소생 숙신공주 숙안공주 숙명공주 숙휘공주 숙정공주 숙경공주 의순공주(양녀) 숙녕옹주 현종 소생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숙종 소생 공주 공주 -경종 소생--영조 소생- 화억옹주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덕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길옹주 화령옹주 추존왕 진종 소생--추존왕 장조 소생 청연공주 청선공주 청근옹주 정조 소생- 옹주 숙선옹주 순조 소생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영온옹주 헌종 소생 옹주 철종 소생- 영혜옹주 고종 소생 공주 덕혜옹주 순종 소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정소공주&oldid=21617947" 분류: 조선의 왕족1412년 태어남1424년 죽음조선의 공주조선 세종전주 이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6월 22일 (금) 19: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모토마치 역 (효고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모토마치 역 (효고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모토마치 개괄 관할 기관 서일본 여객철도(JR 서일본)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 소재지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주오 구 모토마치 역(일본어: 元町駅, もとまちえき)은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주오 구에 위치한 서일본 여객철도 (JR 서일본), 한신 전기 철도, 고베 고속 철도의 역이다. 고베 시영 지하철 카이간 선의 미나토모토마치 역은 인근에 위치한 다른 역이다. 목차 1 개요 2 이용 가능한 철도 노선 3 역 구조 3.1 JR 서일본 3.2 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 4 인접역 정보 개요[편집] 한신 전기 철도와 고베 고속 철도는 당역에서 상호 직통 운전을 시행하고 있으며, 같은 역을 공유하고 있다. 한신 본선은 당역이 종점이다. 당역 이서 구간은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이다. 지상의 JR 모토마치 역과 지하의 한신-고베 고속 철도의 모토마치 역은 통로로 연결되어있으나, 환승 개찰구나 환승 연락 취급이 없어 사실상 별도의 역이다. 다만, 고베역 이서에서 산노미야 경유로의 연락 운수에 관해서는 당역에서의 승계도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일찍이 한신 전철에서는 고베 시에 있어서 터미널 역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베 모토마치 역」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매년 12월에 주최하는 고베 루미나리에 축제가 열릴 때, 가장 가까운 역으로 안내되고 있다. 이용 가능한 철도 노선[편집] 서일본 여객철도 (JR 서일본) 도카이도 본선 (JR 고베 선) 한신 전기 철도 본선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 JR 서일본의 역은 어번 네트워크 구역에 속해 있다. 또한, 산노미야 역, 고베 역, 신나가타 역과 같이 산요 신칸센 신코베 역과의 연락 취급을 하고 있다. 역 구조[편집] JR 서일본[편집] 모토마치 플랫폼 개괄 관할 기관 서일본 여객철도 소재지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주오 구 모토마치코카도리 1-100 좌표 북위 34° 24′ 44″ 동경 135° 06′ 41″ / 북위 34.412244° 동경 135.111454°  / 34.412244; 135.111454 개업일 1934년 7월 20일 승강장 구조 섬식 2면 4선 비고 미도리노마도구치 있음. 노선 ■ 도카이도 본선 (JR 고베 선) 도쿄 기점 587.8km 오사카에서 31.4km ← 산노미야 (0.8 km) 고베 →(1.7 km) 2면 4선의 섬식 승강장이 있는 고가역이다. 개찰구는 동쪽과 서쪽에 2개소가 있다. 미도리노마도구치는 히가시구치에 있다. 타는 곳 1 ■ JR 고베 선 (상행 외측선) ■ 쾌속 (일부) 산노미야·아마가사키·오사카 방면 2 ■ JR 고베 선 (상행 내측선) ■ 보통·■ 쾌속 산노미야·아마가사키·오사카 방면 3 ■ JR 고베 선 (하행 내측선) ■ 보통·■ 쾌속 니시아카시·가코가와·히메지 방면 4 ■ JR 고베 선 (하행 외측선) ■ 쾌속 (일부) 니시아카시·가코가와·히메지 방면 정차하지 않는 신쾌속·특급과 영업 시간대의 화물열차는 1·4번 선으로 통과한다. 정차 열차는 후술의 열차를 제외하고는 2·3번선에 들어간다. 1·4번선은 기본적으로 로프로 막혀 있다. 1번 선 타는 곳에 정차하는 상행 열차는 평일 아침 러시아워 시간대의 모든 쾌속과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7 ~ 8시 대의 일부 쾌속이다. 4번 선 타는 곳에 정차하는 하행선 열차는 평일 아침 8시 대와 저녁 17 ~ 18시 대에 운행되는 쾌속 (저녁의 열차는 외측선·열차선 주행 때문에 스마·다루미·마이코는 통과. 덧붙여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에 4번선 타는 곳에 정차하는 열차는 아님)이다. 이전에는 중앙의 내측선 사이에 섬식 1면 2선의 홈이, 외측선에는 상대식 홈이 1면씩 설치되어 있는 혼합식이었지만, 1960년대에 현재의 형식으로 개조되었다.(상행 외측선의 홈은 고베 고속 철도 건설을 시작하면서 시가지 개개발로 인해 철거된 한편 하행 외측선의 홈은 JR이 출범한 이후 철거되었지만 뼈대의 일부는 히가시구치 남측 등에 현재에도 존재한다). 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편집] 모토마치 플랫폼 개괄 관할 기관 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 소재지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주오 구 모토마치도리 2초메 10-2 좌표 북위 34° 24′ 44″ 동경 135° 06′ 41″ / 북위 34.412202° 동경 135.111342°  / 34.412202; 135.111342 개업일 1936년 3월 18일 승강장 구조 섬식 1면 2선 비고 공동사용역. (관리 주체는 한신) *노선은 상호 직통 운전 실시 노선 한신 전기 철도 본선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 우메다 기점 32.1km ← 산노미야 (0.9 km) 니시모토마치 →(0.8 km) 1면 2선의 섬식 승강장이 있는 지하역으로, 개찰구는 동쪽과 서쪽에 2개소가 있다. 공동 사용역으로, 역 관리는 한신 전기 철도가 담당하며, 역 주체는 고베 고속 철도로 되어있다. 인근의 산노미야 역에는 상행 열차의 승강 홈이 분리 되어있는 관계 상 직통 특급 등의 경우 각역정차 열차로의 환승을 당역에서 실시하도록 차장이 안내방송 한다. 이전에는 한신의 대부분의 보통 열차는 당역에서 오리카에시 했지만 (대부분이 2번 선 승강장에서 오리카에시하여 발차), 현재는 조조 시간대 1편성·심야 시간대 2편성을 제외하고 고속 고베 역 (일부는 산요 전기 철도 히가시스마 역) 까지 운행되고 있다 또, 이전의 한신 막차 중에는 당역에 서는 특급이나 급행의 설정이 있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카게 역 종착). 역은 일본 중앙 경마회 윈즈 고베 A관의 바로 밑에 있다. 덧붙여 한신 모토마치 - 한신 산노미야 간은 한신 본선(한신 전철의 관할 구간)이지만, 병행하는 고베 고속 철도의 하나쿠마 역 - 한큐 산노미야 역과의 정합을 도모하기 위해 특정 운임이 적용되고 있어 최초 승차 구간 운임은 고베 고속 철도와 같은 120엔이다. 또, 니시모토마치 이서로부터의 경우, 고베 고속 철도 - 한신 간 상호 연락운임은 당역이 아닌 한신 산노미야 역이 경계가 된다 (덧붙여, 가스가노미치 역 이동으로부터의 경우는 이 역이 경계). 타는 곳 1 ■■ 한신 전철 본선 산노미야·고시엔·아마가사키·오사카 (우메다) 방면 2 ■■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 (산요 전기 철도 본선 직통) 신카이치·스마·아카시·히메지 방면 인접역 정보[편집] 서일본 여객철도 도카이도 본선 산노미야교토·오사카 방면 ● JR 고베 선■ 쾌속·■ 보통 고베히메지 방면 ● 한신 전기 철도 본선·●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 산노미야우메다 방면 ■ 직통 특급·■ S특급 고속 고베산요 히메지 방면 산노미야우메다 방면 ■직통 특급 (산노미야 - 산요 스마간 각역정차)·■ 산요 특급·■ 한신 특급·■■ 보통 니시모토마치산요 히메지 방면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모토마치 역 vdeh JR 고베 선 (도카이도 본선 · 산요 본선)(교토 방면 ←) 오사카 - 쓰카모토 - (교바시 방면 ←) 아마가사키 (→ 다카라즈카·후쿠치야마 방면) - 다치바나 - 고시엔구치 - 니시노미야 - 사쿠라슈쿠가와 - 아시야 - 고난야마테 - 셋쓰모토야마 - 스미요시 - 롯코미치 - 마야 - 나다 - 산노미야 - 모토마치 - 고베 - 효고 - 신나가타 - 다카토리·고베 화물 터미널 - 스마카이힌코엔 - 스마 - 시오야 - 다루미 - 마이코 - 아사기리 - 아카시 - 니시아카시 - 오쿠보 - 우오즈미 - 쓰치야마 - 히가시카코가와 - 가코가와 - 호덴 - 소네 - 히메지벳쇼·히메지 화물 - 고차쿠 - 히가시히메지 - 히메지 (→ 가미고리·오카야마·반슈아코 방면)와다미사키 선: 효고 - 와다미사키홋포 화물선: (스이타 신호장 - ) 스이타 - 미야하라 조차장 - 아마가사키화물지선 (1980년 폐지 구간) : 아마가사키 - (화물) 아마가사키시조 / 화물지선 (1979년 폐지 구간) : 히메지 - (화물) 히메지시조 vdeh 한신 전기 철도 본선우메다 - 후쿠시마 - 노다 - 요도가와 - 히메지마 - 지부네 - (지부네 신호장) - 구이세 - 다이모쓰 - (니시쿠조·오사카 난바·오사카우에혼마치·긴테쓰나라 방면) - 아마가사키 - 데야시키 - 아마가사키 센터풀마에 - 무코가와 - (무코가와 신호장) - 나루오 - 고시엔 - 구스가와 - 이마즈 - (니시노미야히가시구치) - 니시노미야 - 고로엔 - (호리키리 신호장) - 우치데 - 아시야 - 후카에 - 오기 - 우오자키 - 스미요시 - 미카게 - 이시야가와 - 신자이케 - 오이시 - 니시나다 - 이와야 - 가스가노미치 - 산노미야 - 모토마치(→고속 고베·스마우라 공원 방면) vdeh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한신 전기 철도 및 산요 전기 철도 방면(한신 우메다 방면 ←)모토마치 - 니시모토마치 - 고속 고베 - 신카이치 - 다이카이 - 고속 나가타 - 니시다이(→ 산요 히메지 방면)한큐 전철 방면(한큐 우메다 방면 ←)한큐 산노미야 - 하나쿠마 - 고속 고베( - 신카이치 → 니시다이·스마우라 공원 방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모토마치_역_(효고현)&oldid=22078595" 분류: 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서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고베시의 철도역1905년 개업한 철도역1934년 개업한 철도역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한신 전기 철도의 철도역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eranto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8월 23일 (목) 12: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모토마치 역 (효고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모토마치 역 (효고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모토마치 개괄 관할 기관 서일본 여객철도(JR 서일본)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 소재지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주오 구 모토마치 역(일본어: 元町駅, もとまちえき)은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주오 구에 위치한 서일본 여객철도 (JR 서일본), 한신 전기 철도, 고베 고속 철도의 역이다. 고베 시영 지하철 카이간 선의 미나토모토마치 역은 인근에 위치한 다른 역이다. 목차 1 개요 2 이용 가능한 철도 노선 3 역 구조 3.1 JR 서일본 3.2 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 4 인접역 정보 개요[편집] 한신 전기 철도와 고베 고속 철도는 당역에서 상호 직통 운전을 시행하고 있으며, 같은 역을 공유하고 있다. 한신 본선은 당역이 종점이다. 당역 이서 구간은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이다. 지상의 JR 모토마치 역과 지하의 한신-고베 고속 철도의 모토마치 역은 통로로 연결되어있으나, 환승 개찰구나 환승 연락 취급이 없어 사실상 별도의 역이다. 다만, 고베역 이서에서 산노미야 경유로의 연락 운수에 관해서는 당역에서의 승계도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일찍이 한신 전철에서는 고베 시에 있어서 터미널 역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베 모토마치 역」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매년 12월에 주최하는 고베 루미나리에 축제가 열릴 때, 가장 가까운 역으로 안내되고 있다. 이용 가능한 철도 노선[편집] 서일본 여객철도 (JR 서일본) 도카이도 본선 (JR 고베 선) 한신 전기 철도 본선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 JR 서일본의 역은 어번 네트워크 구역에 속해 있다. 또한, 산노미야 역, 고베 역, 신나가타 역과 같이 산요 신칸센 신코베 역과의 연락 취급을 하고 있다. 역 구조[편집] JR 서일본[편집] 모토마치 플랫폼 개괄 관할 기관 서일본 여객철도 소재지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주오 구 모토마치코카도리 1-100 좌표 북위 34° 24′ 44″ 동경 135° 06′ 41″ / 북위 34.412244° 동경 135.111454°  / 34.412244; 135.111454 개업일 1934년 7월 20일 승강장 구조 섬식 2면 4선 비고 미도리노마도구치 있음. 노선 ■ 도카이도 본선 (JR 고베 선) 도쿄 기점 587.8km 오사카에서 31.4km ← 산노미야 (0.8 km) 고베 →(1.7 km) 2면 4선의 섬식 승강장이 있는 고가역이다. 개찰구는 동쪽과 서쪽에 2개소가 있다. 미도리노마도구치는 히가시구치에 있다. 타는 곳 1 ■ JR 고베 선 (상행 외측선) ■ 쾌속 (일부) 산노미야·아마가사키·오사카 방면 2 ■ JR 고베 선 (상행 내측선) ■ 보통·■ 쾌속 산노미야·아마가사키·오사카 방면 3 ■ JR 고베 선 (하행 내측선) ■ 보통·■ 쾌속 니시아카시·가코가와·히메지 방면 4 ■ JR 고베 선 (하행 외측선) ■ 쾌속 (일부) 니시아카시·가코가와·히메지 방면 정차하지 않는 신쾌속·특급과 영업 시간대의 화물열차는 1·4번 선으로 통과한다. 정차 열차는 후술의 열차를 제외하고는 2·3번선에 들어간다. 1·4번선은 기본적으로 로프로 막혀 있다. 1번 선 타는 곳에 정차하는 상행 열차는 평일 아침 러시아워 시간대의 모든 쾌속과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7 ~ 8시 대의 일부 쾌속이다. 4번 선 타는 곳에 정차하는 하행선 열차는 평일 아침 8시 대와 저녁 17 ~ 18시 대에 운행되는 쾌속 (저녁의 열차는 외측선·열차선 주행 때문에 스마·다루미·마이코는 통과. 덧붙여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에 4번선 타는 곳에 정차하는 열차는 아님)이다. 이전에는 중앙의 내측선 사이에 섬식 1면 2선의 홈이, 외측선에는 상대식 홈이 1면씩 설치되어 있는 혼합식이었지만, 1960년대에 현재의 형식으로 개조되었다.(상행 외측선의 홈은 고베 고속 철도 건설을 시작하면서 시가지 개개발로 인해 철거된 한편 하행 외측선의 홈은 JR이 출범한 이후 철거되었지만 뼈대의 일부는 히가시구치 남측 등에 현재에도 존재한다). 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편집] 모토마치 플랫폼 개괄 관할 기관 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 소재지 일본 효고현 고베 시 주오 구 모토마치도리 2초메 10-2 좌표 북위 34° 24′ 44″ 동경 135° 06′ 41″ / 북위 34.412202° 동경 135.111342°  / 34.412202; 135.111342 개업일 1936년 3월 18일 승강장 구조 섬식 1면 2선 비고 공동사용역. (관리 주체는 한신) *노선은 상호 직통 운전 실시 노선 한신 전기 철도 본선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 우메다 기점 32.1km ← 산노미야 (0.9 km) 니시모토마치 →(0.8 km) 1면 2선의 섬식 승강장이 있는 지하역으로, 개찰구는 동쪽과 서쪽에 2개소가 있다. 공동 사용역으로, 역 관리는 한신 전기 철도가 담당하며, 역 주체는 고베 고속 철도로 되어있다. 인근의 산노미야 역에는 상행 열차의 승강 홈이 분리 되어있는 관계 상 직통 특급 등의 경우 각역정차 열차로의 환승을 당역에서 실시하도록 차장이 안내방송 한다. 이전에는 한신의 대부분의 보통 열차는 당역에서 오리카에시 했지만 (대부분이 2번 선 승강장에서 오리카에시하여 발차), 현재는 조조 시간대 1편성·심야 시간대 2편성을 제외하고 고속 고베 역 (일부는 산요 전기 철도 히가시스마 역) 까지 운행되고 있다 또, 이전의 한신 막차 중에는 당역에 서는 특급이나 급행의 설정이 있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카게 역 종착). 역은 일본 중앙 경마회 윈즈 고베 A관의 바로 밑에 있다. 덧붙여 한신 모토마치 - 한신 산노미야 간은 한신 본선(한신 전철의 관할 구간)이지만, 병행하는 고베 고속 철도의 하나쿠마 역 - 한큐 산노미야 역과의 정합을 도모하기 위해 특정 운임이 적용되고 있어 최초 승차 구간 운임은 고베 고속 철도와 같은 120엔이다. 또, 니시모토마치 이서로부터의 경우, 고베 고속 철도 - 한신 간 상호 연락운임은 당역이 아닌 한신 산노미야 역이 경계가 된다 (덧붙여, 가스가노미치 역 이동으로부터의 경우는 이 역이 경계). 타는 곳 1 ■■ 한신 전철 본선 산노미야·고시엔·아마가사키·오사카 (우메다) 방면 2 ■■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 (산요 전기 철도 본선 직통) 신카이치·스마·아카시·히메지 방면 인접역 정보[편집] 서일본 여객철도 도카이도 본선 산노미야교토·오사카 방면 ● JR 고베 선■ 쾌속·■ 보통 고베히메지 방면 ● 한신 전기 철도 본선·● 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 산노미야우메다 방면 ■ 직통 특급·■ S특급 고속 고베산요 히메지 방면 산노미야우메다 방면 ■직통 특급 (산노미야 - 산요 스마간 각역정차)·■ 산요 특급·■ 한신 특급·■■ 보통 니시모토마치산요 히메지 방면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모토마치 역 vdeh JR 고베 선 (도카이도 본선 · 산요 본선)(교토 방면 ←) 오사카 - 쓰카모토 - (교바시 방면 ←) 아마가사키 (→ 다카라즈카·후쿠치야마 방면) - 다치바나 - 고시엔구치 - 니시노미야 - 사쿠라슈쿠가와 - 아시야 - 고난야마테 - 셋쓰모토야마 - 스미요시 - 롯코미치 - 마야 - 나다 - 산노미야 - 모토마치 - 고베 - 효고 - 신나가타 - 다카토리·고베 화물 터미널 - 스마카이힌코엔 - 스마 - 시오야 - 다루미 - 마이코 - 아사기리 - 아카시 - 니시아카시 - 오쿠보 - 우오즈미 - 쓰치야마 - 히가시카코가와 - 가코가와 - 호덴 - 소네 - 히메지벳쇼·히메지 화물 - 고차쿠 - 히가시히메지 - 히메지 (→ 가미고리·오카야마·반슈아코 방면)와다미사키 선: 효고 - 와다미사키홋포 화물선: (스이타 신호장 - ) 스이타 - 미야하라 조차장 - 아마가사키화물지선 (1980년 폐지 구간) : 아마가사키 - (화물) 아마가사키시조 / 화물지선 (1979년 폐지 구간) : 히메지 - (화물) 히메지시조 vdeh 한신 전기 철도 본선우메다 - 후쿠시마 - 노다 - 요도가와 - 히메지마 - 지부네 - (지부네 신호장) - 구이세 - 다이모쓰 - (니시쿠조·오사카 난바·오사카우에혼마치·긴테쓰나라 방면) - 아마가사키 - 데야시키 - 아마가사키 센터풀마에 - 무코가와 - (무코가와 신호장) - 나루오 - 고시엔 - 구스가와 - 이마즈 - (니시노미야히가시구치) - 니시노미야 - 고로엔 - (호리키리 신호장) - 우치데 - 아시야 - 후카에 - 오기 - 우오자키 - 스미요시 - 미카게 - 이시야가와 - 신자이케 - 오이시 - 니시나다 - 이와야 - 가스가노미치 - 산노미야 - 모토마치(→고속 고베·스마우라 공원 방면) vdeh고베 고속 철도 도자이 선한신 전기 철도 및 산요 전기 철도 방면(한신 우메다 방면 ←)모토마치 - 니시모토마치 - 고속 고베 - 신카이치 - 다이카이 - 고속 나가타 - 니시다이(→ 산요 히메지 방면)한큐 전철 방면(한큐 우메다 방면 ←)한큐 산노미야 - 하나쿠마 - 고속 고베( - 신카이치 → 니시다이·스마우라 공원 방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모토마치_역_(효고현)&oldid=22078595" 분류: 한신 전기 철도고베 고속 철도서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고베시의 철도역1905년 개업한 철도역1934년 개업한 철도역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한신 전기 철도의 철도역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eranto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8월 23일 (목) 12: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올림피아코스 FC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올림피아코스 FC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본 클럽의 모태 종합클럽에 대해서는 올림피아코스 CFP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올림피아코스 전체 이름 ΠΑΕ ΟΛΥΜΠΙΑΚΟ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παιώς 별칭 Θπύλος (전설) Επυθπόλευκοι (적백) Δαφνοστεφανωμένος (월계관을 씌운) 리그 수페르리가 엘라다 창단 연도 1925년 [3월 10일 구단주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회장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감독 페드루 마르팅스 경기장 그리스 피레아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수용 인원 32,115[1] 웹사이트 http://www.olympiacos.org/ 2018-19 2위 홈 어웨이 서드 최근 시즌 PAE 올림피아코스 (그리스어: ΠΑΕ Ολυμπιακός) 는 흔히 줄여서 올림피아코스, (Ολυμπιακός) 올림피아코스 피레아스 (Ολυμπιακός Πειραιάς) 로 알려져 있으며, 공식명칭이 올림피아코스 신데스모스 필라틀로스 피레아스 (그리스어: Oλυμπιακό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 인 그리스의 프로 축구 클럽이자, 아테네 도시권인 피레아스를 연고로 하는 종합 스포츠 클럽 올림피아코스 CFP의 축구부이다.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으로,[2] 그리스 리그를 41번,[3] 그리스 컵을 26번[4] 우승해 더블을 16번 달성했고,[5] 그리스 슈퍼컵도 4번 우승해 국내대회에서 총 71회의 우승을 거두었고, 모든 부문에서 최다 기록을 내고 있다. 올림피아코스의 압도적인 성공은 다른 그리스 클럽들의 리그 우승 횟수를 합치면 총 37회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6]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리그 최다 연속 우승 기록을 지니고 있는데, 리그 7연패 (알파 에트니키 1996-97 시즌부터 2002-03 시즌) 로 종전의 6연패 (1953-54 시즌부터 1958-59 시즌) 기록을 경신했다.[7] 더 나아가서 파나티나이코스, PAOK와 더불어 그리스 축구 1부리그에서 강등 경험이 없는 세 구단들 중 하나이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8] 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9] 에서 8강에 진출했었다. 또한, 올림피아코스는 유럽 클럽 협회의 창립 멤버이다.[10] 올림피아코스의 홈구장은 피레아스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이다.[11]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으로,[12][13][14][15][16] 국내에 250만명이, 전세계 그리스계 해외 거주민들 중 100만명이 지지하고 있다.[17][18][19][20][21][22] 올림피아코스는 2006년에 4월 기준으로 83,000명의 유료 회원이 등록 되어 유료 회원 수에 따른 클럽 목록에서 9위에 랭크되었다.[23] 2014년, 유료 회원수는 98,000명으로 증가되었다.[24] 올림피아코스는 파나티나이코스와 오랜 기간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두 클럽간의 경기는 영원한 적들의 더비로 불린다. 목차 1 역사 1.1 초창기와 국내 무대에서의 성공 1.2 간간한 성공과 굴란드리스 시대 1.3 성공기 1.4 2010년대 2 문양과 유니폼 3 스폰서와 유니폼 제작사 4 홈구장 5 7번 출입구 참사 6 서포터 6.1 연계 구단 7 응원가 7.1 원문 7.2 발음 7.3 해석 8 라이벌전 9 통계 9.1 유럽대항전 기록 9.1.1 최고 성적 9.1.2 최다 점수차 승리 9.2 리그 기록 10 역대 성적 10.1 국내 대회 10.2 유럽대항전 11 선수 11.1 현재 선수 명단 11.2 임대 선수 명단 11.3 U-20팀 선수 명단 11.4 과거 선수 12 스태프 12.1 보드진 12.2 코칭스태프 및 의료진 13 역대 감독 14 올림피아코스 역대 회장 15 각주 16 외부 링크 역사[편집] 초창기와 국내 무대에서의 성공[편집] 1925년 초창기 팀 노티스 캄페로스는 클럽의 명칭과 문양에 영감을 주었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3월 10일, 피레아스 항에서 창단되었는데,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 (Πειραιάκός Ποδοσφαιρικός Όμιλος) 의 회원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회원들의 병합 결정에 의해 일어났고,[25] 통합된 새 클럽은 고대 올림픽 우승자를 나타내는 문양을 도입했다. 노티스 캄페로스가 올림피아코스 (Ολυμπιακός) 라는 명칭을 제안했고, 미할리스 마누스코스가 현재의 명칭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 (Oλυμπιακό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클럽의 명성을 쌓게 해 주고, 현재의 영광으로 이끈건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로,[26] 상류층 가문의 일원이었던 그들은 그리스 전국에 올림피아코스라는 이름을 알렸다.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 중 얀니스, 디노스, 요르고스, 그리고 바실리스가 초창기에 이 클럽에서 활동했다. 5형제들 중 막내였던 레오니다스는 나중에 합류하여 클럽에서 장기간 활동했다. (1927-1935) 클럽의 초창기 공격진은 5형제로 이루어졌고, 이후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올림피아코스는 즉시 지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팀의 팬은 홈구장인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 인근의 노동층을 기반으로 되어 있었고, 이 곳은 현재 홈구장인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으로 옮기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1926년, 1927년에 피레아스 지역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27] 안드레아스 무라티스는 올림피아코스의 상징적인 주장으로 1945년과 1955년 사이 295번의 경기에 출전했다 1926년, 그리스 축구 협회가 창립되었고, 1927-28 시즌에 범그리스 리그가 출범했다. 이 리그가 국내 최초의 전국 리그로, EPSA 리그, (아테네) EPSP 리그, (피레아스) 그리고 EPSM 리그 (테살로니키) 의 지역 우승팀들이 플레이오프에서 국가 리그 타이틀을 걸고 경쟁하였고, 아리스가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범그리스 리그는 이 형식으로 1958-59 시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시즌인 1928-29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협회와의 불화로 인해 불참을 결정했고, 파나티나이코스와 AEK도 올림피아코스의 결정을 따랐다. 같은 시즌, 이 클럽들간 친선전을 치렀고, 중부 그리스 축구 구단 (Ποδοσφαιρικές Ομάδες Κέντρου, Π. Ο. Κ.) 을 조직했다. 범그리스 리그의 4번째 시즌이 1930-31 시즌에 열렸고, 올림피아코스는 이 시즌에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이 우승을 계기로 올림피아코스는 성공기의 개막을 알렸다. 1940년대에 들어, 올림피아코스는 11시즌동안 무려 6번 우승을 거두었고,[26] 1960년대에 들어서는 23시즌 안에 15번의 리그는 물론 그리스 컵도 9번 거미쥐었다. 1950년대 전설적인 올림피아코스 팀은 안드레아스 무라티스, 일리아스 로시디스, 코스타스 폴리흐로니우, 타나시스 베비스, 일리아스 이판티스, 바비스 코트리디스, 요르고스 다리바스, 바비스 드로소스, 그리고 사바스 테오도리디스로 구성되었고, 1953-54 시즌과 1958-59 시즌까지 리그 6연패를 달성한 것은 물론, 1956-57 시즌, 1957-58 시즌, 그리고 1958-59 시즌에는 컵도 들어올려 그리스 축구에 전례 없는 업적을 달성했다. 올림피아코스가 수많은 우승을 거둔 1950년대를 기점으로, 클럽은 "전설" (Θρύλος, 트릴로스로 발음) 이라는 별칭을 획득했다.[26][28] 간간한 성공과 굴란드리스 시대[편집] 전설적인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 (왼쪽부터) 얀니스, 디노스, 요르고스, 바실리스, 그리고 레오니다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28년 올림피아코스 선수단 국내 1부 리그인 알파 에트니키 (Α΄ Εθνική) 가 출범했고, 1959-60 시즌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나, 60년대와 70년대는 올림피아코스가 그리 많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시대로, 리그를 2회, 컵을 6회 우승하는데 그쳤다. 1972년, 니코스 굴란드리스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다. 그는 라키스 페트로풀로스를 감독으로 내정하고, 게오르요스 델리카리스, 이브 트리안타필로스, 훌리오 로사다, 밀톤 비에라, 미할리스 크리티코풀로스, 로맹 알지루대, 마이크 갈라코스, 라키스 글레조스, 코스타스 다불리스, 이오아니스 키라스타스, 그리고 페터 페르시디스와 같은 톱클래스 선수들을 영입했다. 굴란드리스 회장의 임기에, 올림피아코스는 1972-73 시즌부터 1974-75 시즌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같은 시기에 컵도 3연패를 달성했다.[26] 이 시기에 최고의 해는 1973-74 시즌으로 손꼽히는데, 올림피아코스는 이 시즌에 최다 승점 (59점) 과 최다 득점 (102골) 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1975년, 굴란드리스가 회장직에서 사임한 후, 팀은 1970년대말에 상대적으로 많은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초, 리그가 프로 리그로 전향되자, 올림피아코스는 또다시 그리스 축구에서 압도적인 존재로 부상했는데, 리그 4연패 (1979-80 시즌, 1980-81 시즌, 1981-82 시즌, 1982-83 시즌) 를 거두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공격수 니코스 아나스토풀로스, 미드필더 타소스 미트로풀로스, 그리고 니코스 사르가니스 수문장이 있었다. 그리스 국가대표팀과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알케타스 파나굴리아스는 팀을 1981년과 1983년 사이와 1986-87 시즌에 지휘하여 1981-82 시즌, 1982-83 시즌, 그리고 1986-87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26] 올림피아코스는 1980년대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암흑기를 보냈다. 80년대 중반,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사업가 게오르게 코스코타스가 휘어잡았으나, 나중에 횡령 혐의로 고발되고 유죄 선고가 내려졌으며, 올림피아코스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라운드에서, 팀은, 세심한 경영 없이 1987-88 시즌부터 1995-96 시즌까지 9시즌을 리그 무관으로 보냈다. 이 시기는 올림피아코스의 암흑기로 불리며,[29] 이중 1987-88 시즌은 올림피아코스 최악의 시즌으로, 팀은 리그를 8위로 마감했다. 성공기[편집] 올림피아코스의 성공기는 국제 무대의 거물 선수들인 즐라트코 자호비치, 지우바니, 그리고 FIFA 월드컵 챔피언 히바우두와 크리스티앙 카랑뵈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리그 7연패를 달성하며, 종전에 선배들이 달성한 6연패의 기록을 넘었으며, 1998-99 시즌에는 두샨 바예비치 감독의 지도 하에 더블을 달성하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유럽대항전 최고 성적인 8강 진출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바예비치가 1999년에 경질 당했고, 이어지는 시기 (1999년에서 2004년) 동안, 올림피아코스는 무려 8명의 감독을 교체했다. 이들 중에는 이오아니스 마추라키스, 타키스 레모니스, 트론 솔리에, 올레흐 프로타소우, 그리고 시니샤 고기치가 있었다. 잦은 감독 교체와 수뇌부의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올림피아코스는 감독을 세번 교체해 준우승을 거두었던 2003-04 시즌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우승을 거두었다. 2004년, 올림피아코스는 두샨 바예비치를 다시 감독으로 재선임하였고, 1999년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히바우두를 영입했다. 시즌 종료 후,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더블을 거두었으나, 바예비치는 사임했다. 그의 자리는 노르웨이의 트론 솔리에가 재선임되면서 대체되었다.[30] 클럽은 라이벌 구단 파나티나이코스에서 키프로스 스트라이커 미할리스 콘스탄티누를 영입했다. 2005-06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1972-73 시즌 이래 처음으로 주 라이벌인 파나티나이코스와 AEK와의 주요 라이벌 경기에서 모두 이겼다. 올림피아코스는 이 4번의 경기에서 11득점 3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그리스 컵 결승전에서는 AEK를 3-0으로 꺾으면서 2시즌 연속 더블을 달성했고, 리그 16연승 기록을 세워, 클럽 선배들이 세웠던 종전 기록을 경신했다. 기록을 경신한 시즌 후, 2006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트론 솔리에는 7명의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러나, 솔리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2006-07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2006년 말에 타키스 레모니스에게 지휘봉을 내 주었다. 레모니스는 영건 바실리스 토로시디스를 클럽으로 데려 왔고, 비록 레모니스가 올림피아코스의 리그 3연패를 달성하게 했으나, 그리스 컵에서 PAS 얀니나에게 충격패를 당해 탈락하면서 컵대회 우승에 실패했다. 프레드라그 조르제비치는 올림피아코스에서 12차례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는 기록을 세웠고, 344경기에 출전해 126골을 득점해 클럽의 외국인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히바우두 2007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다르코 코바체비치와 루시아노 가예티를 고액에 영입하였고, 스트라이커 겸 미드필더인 네리 카스티요를 우크라이나 클럽 샤흐타르 도네츠크에 €20M에 매각해 그리스 축구 역사상 최고액 이적료 기록을 세웠다.[31] 카스티요의 계약 조항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15M을 받았고, 나머지 €5M은 선수에게 즉시 주어졌다.[32] 더 나아가, 올림피아코스 성공에 히바우두가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크게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피아코스가 선수와의 재계약을 원치 않으나, 히바우두와 클럽 사이에 논란이 불거졌다. 일리야 이비치 클럽의 전 선수가 팀의 축구 디렉터로 취임했다. 팀은 그리스 리그에서 실망적인 시작을 했으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에서 조 1위를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와 승점에서 11점으로 동률을 이르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33] 그러나, 팀은 리그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는데,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첼시에게 패한 것과 엮여서 소크라티스 코칼리스 구단주가 타키스 레모니스 감독을 경질하게 이르었고, 팀의 수석코치였던 호세 세구라가 시즌 잔여 기간동안 감독직을 대행했다. 비록 올림피아코스가 리그와 컵 더블을 달성했으나, 세구라는 본래 지위인 수석 코치직으로 복귀했다. 2008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지오구 루이스 산투, 아브람 파파도풀로스, 그리고 두두 세아렌세를 영입하고, 에르네스토 발베르데와 €6M짜리 3년 계약을 체결하고 새 감독으로 내정했다.[34] 2008-09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부진하게 시즌을 시작했는데, 초반의 공식경기 몇경기를 패하였는데, 아노르토시스 파마구스타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전에서 패해 UEFA컵 1라운드로 내려앉았는데, 여기서 올림피아코스는 노르셸란을 꺾고 조별 리그에 진출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수페르리가 엘라다 2008-09에서의 우수한 활약을 바탕으로 홈경기에서 매번 승리했으나, 원정 경기에서 고전했다. 홈경기에서 UEFA컵 경기를 훌륭히 치른 후, 팀은 32강에 진출해 프랑스의 생테티엔을 상대했다. 2009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유벤투스의 올로프 멜베리를 €2.5M에,[35] 잉글랜드 스트라이커 맷 더비셔를 블랙번 로버스에서, 미드필더 자우아드 자이리를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에서, 그리고 엔초 마레스카를 세비야에서 영입했다. 많은 선수들이 임대에서 복귀했는데, 예를 들어 게오르요스 카치코얀니스, 전 레알 마드리드 수비수 라울 브라보, 그리고 아르헨티나 미드필더 크리스티안 라울 레데스마가 있었다. 올림피아코스는 브라질 전설 지쿠를 감독으로 내정해 2009-10 시즌을 성공적으로 시작했으며, 다수의 1군 선수들을 부상으로 잃고 임했으나, H조에서 조 선두 아스널에 승점 3점을 밀려 2위로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행에 성공했다.[36] 팀은 16강에서 보르도를 상대해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0-1로 패했다. 2차전에서, 보르도가 초반에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올림피아코스는 동점골을 넣었고, 추가골 찬스를 번번히 놓치나가, 막판 실점으로 패했다. (1-2) 국내 무대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라이벌 구단 파나티나이코스와의 더비전에서 콘스탄티노스 미트로글루의 2골에 힘입어 2-0으로 이겼다.[37] 2010년대[편집] 미첼은 2013-14 시즌에 리그 역대 최단기간 우승을 달성했다. 케빈 미라야스 2010년, 운송업의 거물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가 소크라티스 코칼리스로부터 팀을 인수했다. 마리나키스는 회장 임기 원년에 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에르네스토 발베르데를 감독으로 재선임했고, (발베르데는 1기에서처럼 2기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선수들인 알베르트 리에라, 아리엘 이바가사, 케빈 미라야스, 마르코 판텔리치, 그리고 프랑수아 모데스토를 영입했다. 그 결과 올림피아코스는 2위 파나티나이코스를 무려 13점차로 제치고 수페르리가 통산 38회 우승을 거두었다. 2011-12 시즌, 장 마쿤, 파블로 오르바이스, 이반 마르카노, 라피크 제부르, 그리고 자멜 압둔 등의 선수로 선수단을 강화했고, 에르네스토 발베르데가 2년 사령탑을 맡으면서,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수페르리가와 그리스 컵을 모두 우승하면서 통산 15번째 국내 더블을 달성했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아스널, 마르세유, 그리고 도르트문트로 구성된 F조에 편성되어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아스널과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홈에서 승리 (각각 3-1의 점수로 승리) 를 거두어 F조에서 9점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세유가 도르트문트 적지에서 펼친 6라운드 경기에서 0-2로 밀렸다가 막판 5분에 2골로 논란의 2-3 역전승을 거두면서 16강 진출이 안타깝게 좌절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UEFA 유로파리그에 계속 출전하여 루빈 카잔을 상대했다. 그리스 챔피언은 러시아 클럽을 상대로 2연승 (카잔과 피레아스에서 모두 1-0으로 승리) 을 거두고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와 16강에서 붙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1차전에서 다비드 푸스테르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이겼으나, 2차전에서 초반 선제골을 넣고도 수 차례 골찬스를 날리면서 (전반전에 골대를 두번 맞추었다) 막판 9분에 2골을 실점하고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올로프 멜베리 시즌 종료 후, 에르네스토 발베르데는 스페인 복귀 결정을 내려, 올림피아코스에서의 성공적인 2시즌을 마무리했다. 클럽은 포르투갈의 리우나르두 자르딩을 신임 감독으로 앉혔다. 팀은 그리스 리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B조에서 아스널전 (2-1 홈) 및 몽펠리에전 (2-1 원정) 승리로 9점을 모으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리우나르두 자르딩은 스페인 국적의 감독이자 레알 마드리드 전설 미첼에게 지휘봉을 내주어야 했다. 팀은 2위 PAOK를 15점 차로 제치고 40번째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고,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와의 결승전에서 승리로 26번째 그리스 컵 우승을 거두면서 16번째 더블을 이룩했다. 올림피아코스는 40번째 그리스 리그 우승으로 클럽, 특히 팬들의 목표였던 4번째 별을 클럽 문양 위에 달게 되었다. 조엘 캠벨, 로베르토, 알레한드로 도밍게스, 블라디미르 베이스, 델빈 은딩가, 레안드루 살리누,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하비에르 사비올라를 영입하면서 2013-14 시즌의 기대치는 매우 높았다.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벤피카, 파리 생제르맹, 안데를레흐트와 함께 UEFA 챔피언스리그 2013-14에서 C조에 편성되었다. 조별 리그가 끝난 후, 올림피아코스는 승점 10점을 적립해 벤피카 (피레아스에서 1-0 승리, 리스본에서 1-1 무승부) 와 안데를레흐트 (브뤼셀에서 3-0 승리, 피레아스에서 3-1 승리) 를 너머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격돌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인상적인 활약으로 1차전에서 2-0으로 편안한 승리 (도밍게스 38분, 캠벨 55분) 를 거두었는데, 같은 경기에서 분위기를 지배하고 골찬스를 놓치고도 두골차 리드를 가졌다. 이 2골의 이점을 지키지 못하고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 0-3으로 패했고, 40분에 골찬스를 또 놓치면서 1999년 이래 사상 최초의 8강행을 앞두고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그리스 챔피언은 막판 10분에 원정골을 기록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별 무효과였다. 비록 8강 진출권을 손앞에서 놓쳤으나, 올림피아코스는 시즌 내내 우수한 활약을 펼치며 6년 안에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전 (16강) 진출을 3번 (2007-08 시즌, 2009-10 시즌, 2013-14 시즌) 달성해, 유럽 무대에서 성공했다. 국내 무대에서, 올림피아코스는 2위 PAOK를 17점차로 제치고 역사적인 41번째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문양과 유니폼[편집] 2008-09 시즌의 올림피아코스 유니폼 1925년, 피레아스의 두 클럽인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이 합병되었을 때,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도덕성, 경쟁심, 그리고 광채로부터 영감을 받아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으로 명명되었다. 그 결과 ,클럽은 월계관을 쓴 청소년을 문양으로 도입했고, 이는 올림픽 우승자를 상징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의 작은 변화를 거쳤다. 적색과 백색은 문양의 색상으로 사용된다. 적색은 열정을, 백색은 도덕성을 상징한다.[38][39] 팀의 유니폼은 흔히 적색과 백색의 세로 줄무늬로 되어 있으며, 적색 하의와 백색 양말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유니폼은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했는데, 주로 유니폼의 줄무늬 두께에 변화가 있었다. 그 다음 흔하게 사용된 유니폼은 올 적색이나 올 백색의 유니폼이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세월을 거쳐 원정 유니폼과 써드킷에 다른 색상들을 사용해 왔고, 가장 인상적으로 꼽히는 유니폼은 흑색이나 은색 유니폼이다. 가장 흔했던 올림피아코스의 당시 유니폼은 아래와 같다. (하단의 연도는 해당 유니폼이 사용된 연도를 의미한다) 1950 1978 1979 1985 2000–01 2008–09 2009–10 2010–11 2013–14 스폰서와 유니폼 제작사[편집] 그리스에서 축구가 프로화된 1979년을 기점으로, 올림피아코스는 1982년 이래 특정 유니폼 제작사와 계약을 시작했고, 다음과 같은 유니폼 제작사를 두었다. 다음 차트는 유니폼 제작사와 스폰서의 역대 변천사를 나타낸다: 유니폼 제작사 연도 제작사 1979 엄브로 1980 푸마 1980–1984 아식스 타이거 1984–1992 푸마 1992–1993 엄브로 1993–1994 로토 1994–1995 아디다스 1995–2000 푸마 2000–2005 엄브로 2005–2015 푸마 2015– 아디다스 스폰서 연도 스폰서 1982–1983 피아트 1984 트래블 플랜 1984–1988 시티즌 홀딩스 1988 도요타 1989 크레타 은행 1989–1990 아테네 '96 1990–1994 디아나 1994–1997 에트노카르타 마스터카드 1997–2000 아스피스 프로노이아 2000–2005 지멘스 모바일 2005–2006 지멘스 2006–2009 보다폰 2009–2010 씨티 은행 2010–2013 파메 스토익시마 2013– 유니세프 홈구장[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입니다. 올림피아코스와 아스널간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경기 (1-0) 를 앞둔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그리스어: Γήπεδο Γεώργιος Καραϊσκάκης) 은, 그리스 피레아스의 팔리로 구에 위치해 있으며, 올림피아코스의 전통적인 홈구장이자 현재 홈구장이다. 그리스 독립 전쟁 영웅인 게오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의 이름을 땄으며, 올림피아코스의 대부분 홈경기를 유치했다.[40] 1895년, 이 경기장은 아테네에서 열린 1896년 하계 올림픽의 사이클 경기를 열기 위한 경륜장으로 개장되었다. 공식 경기장 명칭은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 (그리스어: Ποδηλατοδρόμιο Νέου Φαλήρου) 으로, 피치가 자전거 경륜트랙으로 둘러쌓였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창립할때를 기점으로 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64년, 경기장이 리모델링 된 후,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2003년까지 그라운드 주변에 육상 / 경륜 트랙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41]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장으로, 1969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와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1971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 경기를 주최했다.[42] 올림피아코스는 1984년에 잠시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을 떠나, 홈경기를 새로 지어진 스피로스 루이스에서 치르기도 했다. 5년동안 그리스 최대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른 클럽은 전통적인 홈구장으로 복귀해 1997년까지 사용했다. 그 후, 올림피아코스는 스피로스 루이스로 다시 돌아가 또다시 그곳에 5년을 머물렀다. 2002년, 스피로스 루이스가 2004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리모델링을 목적으로 폐장됨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아폴론 스미르니의 홈구장인 아테네 리주폴리 구의 게오르요스 카마라스 경기장으로 이전해 2년을 머물렀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은 황폐해진채 2003년 4월에 올림피아코스에 넘겨졌다. 클럽은 그 자리에 축구 전용 구장을 지을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 구장은 2004년 하계 올림픽의 축구 경기를 주최했다.[43]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올림피아코스는 2052년까지 경기장의 전적인 사용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보수비를 모두 충당하며 주 정부에 수익의 15%를 지불하게 되었다. 구 홈구장은 2003년 봄에 철거되었고, 새 구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14개월이라는 기록적인 기간이 소요되었다. 경기장은 €60M의 가격을 들여 2004년 6월 30일에 완공되었다.[44] 현재,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구장들 중 하나로, 올림피아코스 박물관[45] 과 여러 시설을 운영한다. 7번 출입구 참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참사입니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과 올림피아코스는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참사로 그리스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경험했다. 1981년 2월 8일, 올림피아코스는 AEK와의 리그 홈경기를 치러, 전례 없는 피레아스 연고 홈팀의 6-0 대승으로 끝냈다. 경기 막판, 7번 출입구 인근의 올림피아코스 팬들 수천명이 경기장 정문으로 가 선수들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출입구를 향해 썰물같이 빠져나갔는데, 문은 거의 폐쇄된 구조의 회전문이 놓여 출구로 나가기 어려운 형태였다.[46]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스탠드에서 계속 내려오는 와중에, 위에서는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결국 7번 출입구는 죽음의 함정이 되었다. 아래쪽의 사람들이 눌리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중상을 당했으며, 21명의 젊은이들이 사망했는데, 이들의 사망 주 원인은 질식이었다.[47] 서포터[편집] 7번 출입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홈경기는 물론이고 원정 경기에서도 극도의 열정을 불어넣는다. 이 사진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홈에서 첼시를 상대한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의 토너먼트전 당시 촬영되었다. 베오그라드 스타디온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촬영된 벽화로, 올림피아코스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간의 형제같은 우애를 상징한다. 올림피아코스의 전통적인 팬층은 클럽의 연고지인 피레아스 시를 연고로 하며, 아테네의 일부 지역도 포함한다. 클럽의 인기는 1950년대에 여러번 연거푸 우승하며 다수의 기록을 깨면서 인기가 치솟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축구 클럽으로 떠오르게 했다. 전통적으로, 올림피아코스는 본래 노동층을 대표했으나, 클럽은 모든 사회 계층으로부터 팬을 불러 모았으며, 현재 팬층은 특정 사회 계층을 기반으로 두지 않는다.[48][49] UEFA에 따르면 올림피아코스는 가장 인기있는 그리스 클럽이며,[12] 다수의 설문조사와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50][51] 몇몇 신문과 잡지에서 주최한 설문 조사에서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최고의 인기 클럽이라는 결과를 냈고, 백분율로 전체 팬들의 29%에서 37%를 오고가며, 전체 인구의 20.3%에서 29.3%를 오고 가는데, 이 자료를 토대로 올림피아코스의 그리스 국내 팬들 수는 약 250만명으로 추산된다.[14][52] 이 클럽은 피레아스에서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으며, 시 인구의 절반이 올림피아코스를 지지하며,[53] 한편 아테네 전체에서도 지지하는 팬의 비율이 45.1%에 육박하는데, 그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수도권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이다.[54] 올림피아코스는 노동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이기도 하며, 모든 연령대를 통틀어 37%가 지지하고,[53]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 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55] 대부분의 팬들이 중도좌파이거나 중도우파의 정치성향을 나타낸다.[53] 아테네 수도권 외에서도, 올림피아코스는 중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테살리아, 에게 해 제도, 그리고 이오니아 제도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다.[56] 더 나아가서,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에서 역대 최다 평균 관중수 기록을 지니고 있는데,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역대 시즌들 중 대부분 올림피아코스가 이 부문에서 최고를 찍었다.[57] 2006년, 올림피아코스는 전세계에 최다 유료 회원수를 보유한 상위 10개 클럽들 중에 하나로 이름을 올렸고, 이 부문에서 9위로, 레알 마드리드보다 한 순위 높았다.[58] 2006년 4월 기준, 클럽의 등록된 유료 회원 수는 83,000명이었다.[59] 올림피아코스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팬들은 깊은 친선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서로를 정교회 형제라고 부른다. 대개, 몇몇의 올림피아코스 팬클럽의 팬들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경기를 참관하기도 하는데, 특히 파르티잔과의 경기를 참관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정교회 형제들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팬들을 동맹으로 합류시키려 한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팀에 대해 열정적이고 강렬한 지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홈 경기의 분위기는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UEFA컵 2004-05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할 때, 영국 방송 채널 5에서 중계할때, 객원 해설가이자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토니 코티는 지속적으로 분위기가 어떤지에 대해 언급했다. 경기에서 그는 이 경기장이 가장 분위기가 있는 경기장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양한 곳에 대해 들어보고 그곳의 분위기는 실제로 가보면 실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곳은 진짜 [분위기를 느끼는 것 이상을 체감하는] 그곳입니다."[60] 경험많은 체코 국가대표 윙어인 야로슬라프 플라실은 보르도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원정을 앞두었을때 올림피아코스 팬들이 홈경기 팬들이 조성하는 적대적인 분위기에 대해 한번 더 증명했는데, 모나코 시절의 경기를 짚으며 다음과 같의 표의했다: "이곳에서 저는 경기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상을 주는 분위기를 경험했고, 이곳은 우리에게 지옥과 같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들의 응원은 홈팀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61] 파리 생제르맹의 간판 스트라이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2013년 9월 17일자 올림피아코스-파리 생제르맹 경기 후, 올림피아코스 팬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환상적인 관중들 앞에서 활약합니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놀라웠습니다. 제 동료 올로프 멜베리가 여기서 활약했었고, 그는 서포터에 대해 이야기한적 있습니다. 저는 실감하지 못했으나, 이제 이해합니다. 놀랍습니다. 이는 올림피아코스에게 홈경기에서 크게 유리한 점입니다.[62][63] 파리 생제르맹의 억만장자 구단주 나세르 알-켈라이피는 다음과 같이 표의했다: 저는 이곳 팬들에게 큰 존경심을 표합니다. 저는 올림피아코스 팬들과 같은 팬들을 인생에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64] 연계 구단[편집]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65][66]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응원가[편집] 올림피아코스의 공식 응원가는 "경기장의 전설" (그리스어: Θρύλε των γηπέδων) 이라고도 불리며, 피레아스 연고의 종합 스포츠 클럽 올림피아코스 CFP의 많은 부서에서 불린다.[67] 작사는 그리스 작곡가인 코스타스 킬리만초스가 했고, 작곡은 스피로스 발사마키스가 했다.[68] 이 응원가를 처음 부른 사람은 흐리스타키스 볼리오티스이다. 역사적으로, 올림피아코스의 첫 응원가는 1931년 미미스 바실리아디스가 작사하고 얀고스 라우타리스가 작곡했다. 이 곡은 행진곡 형식이며 축구 경기 형식에 더 가깝개 유래되었다. 원문[편집] Θρύλε των γηπέδων Ολυμπιακέ δαφνοστεφανωμένε μεγάλε και τρανέ έχεις δύναμή σου Ολυμπιακέ τον πύρινό σου κόσμο που δε λυγά ποτέ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Δόξα στα παιδιά σου Ολυμπιακέ χιλιοτραγουδισμένε, στον κόσμο ξακουστέ. Τρέμουν στ' άκουσμά σου Ολυμπιακέ κι ακόμα σε θυμούνται η Σάντος κι ο Πελέ.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발음[편집] Thýle ton gipédon Olympiaké dafnostefanoméne megále kai trané écheis dýnamí sou Olympiaké ton pýrinó sou kósmo pou de lygá poté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Dóxa sta paidiá sou Olympiaké chiliotragoudisméne, ston kósmo xakousté. Trémoun st' ákousmá sou Olympiaké ki akóma se thymoúntai i Sántos ki o Pelé.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해석[편집] 경기장의 전설 올림피아코스 월계관을 쓰고, 영광스럽고 위대하며, 당신의 힘은 당신의 열광적인 팬들 한치 양보없는, 항복하지 않는.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당신의 자식들에게 영광을, 올림피아코스 당신에게 천곡을 불렀네, 당신은 전세계에서 유명하네. 모두가 당신의 이름에 벌벌 떠네 펠레와 산투스도 당신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라이벌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영원한 적들의 더비 및 올림피아코스-PAOK 경쟁입니다. 라이벌 파나티나이코스와의 경기에서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내의 올림피아코스 팬들 전통적으로, 올림피아코스의 주 라이벌은 파나티나이코스이며, 이들을 상대하는 경기는 영원한 적들의 더비로 불리며, 아테네 수도권 지역과 그리스 축구의 대표적인 고전 라이벌전이다.[69] 두 팀은 그리스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들이자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들로, 이 라이벌전은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지역적 차이의 지표이다. 현재 두 클럽들간의 차이가 옅어지고 팬층이 비슷하게 되었으나, 올림피아코스는 전통적으로 항구 도시인 피레아스의 노동층을 대표하는 반면, 파나티나이코스는 아테네의 상류층 사회를 대표했다.[48][49] 두 팀은 그리스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들로 도합하여 61번의 우승을 거두었으며, 그에 따라 이들간의 라이벌전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70] 두 팀간의 증오가 매우 강렬해서, 아테네 수도권 지역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곤 했는데, 특히 더비전 전후로 경향이 두드러졌다. 2007년 3월 29일, 22세의 파나티나이코스의 팬이 올림피아코스와 파나티나이코스간의 여자 배구 경기가 당일 예정되었던 아테네 인근의 마을인 파이아니아에서 두 훌리건 단체간의 경기전에 계획된 패싸움으로 인해 찔려 숨진채 발견되었다. 이 사태는 그리스 전국의 분노를 샀고, 대규모 서포터 현장에서 대대적인 경찰 수사를 착수하게 했으며, 그리스의 모든 스포츠 활동이 2주간 중단되었다.[71][72][73] 2012년 더비전은 휘발 폭탄, 홍염, 그리고 미사일이 스피로스 루이스의 팬들과 경찰에게 투척되어 일부가 불에 붙어 경기를 중단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올림피아코스의 주요 라이벌로는 AEK도 있는데, 근접성과 그라운드에서의 팽팽한 경쟁으로부터 유발되었다.[74] 올림피아코스와 PAOK간의 경쟁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올림피아코스가 PAOK의 상징적인 선수인 요르고스 쿠다스를 영입하려는 데에서 야기되었다. 두 클럽간의 라이벌 관계는 그리스의 가장 큰 두 개의 도시 권역인 아테네 수도권과 테살로니키권 간의 경쟁에서도 유발되었다.[75] 올림피아코스의 라이벌로는 피레아스의 제 2구단으로 불리는 에트니코스 피레아스가 있으나, 에트니코스 피레아스가 그리스 축구 1부리그에서 강등당한 이래 둘 간의 맞대결이 열리지 않았다. 통계[편집] 유럽대항전 기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유럽의 올림피아코스 FC입니다.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첼시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 16강 2차전을 앞두고 도열한 올림피아코스 선수들. 올림피아코스는 UEFA 주관 대회에 오랫동안 출전한 기록이 있으며, 1959년 9월 13일, 밀란과의 유러피언컵 1959-60 경기에서 데뷔했다. 그러나, 올림피아코스는 유러피언컵 1958-59의 예선 라운드에서 베식타시를 상대할 예정이었으나, 기권했다.[76] 2010년 2월 23일, 보르도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16강 1차전 경기에서 200번째 유럽대항전 경기를 자축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유럽대항전 2라운드에 진출한 최초의 그리스 클럽으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3-64에서 폴란드의 자그웽비에 소스노비에크를 제압했다. 클럽의 유럽대항전 최고 성적은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의 8강으로, 유벤투스에 패해 탈락했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에서도 8강에 진출했으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패하였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홈경기에서 강한 경향을 보인다. 이는 최다경기 무패 행진에서 증명되는데, 특히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격파해 올림피아코스는 홈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잡은 첫 그리스 클럽이 되었고, 같은 대회에서 현재 형식 도입후로는 5연속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 기록도 세웠다. 더 나아가서, 올림피아코스는 홈에서의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 2002-03에서 전 시즌 준우승팀 레버쿠젠을 상대로 6-2의 충격적인 대승을 거두었으며, UEFA컵 2008-09에서는 노르셸란전 5-0 승리, 벤피카전 5-1 승리, 그리고 헤르타 BSC전 4-0 승리로 3연속 4점차 이상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최고 성적[편집] 시즌 업적 비고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 8강 유벤투스에 패해 탈락, 토리노에서 1-2, 아테네에서 1-1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 8강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패해 탈락, 피레아스에서 1-1, 마드리드에서 1-3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1989–90 16강 오세르에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 피레아스에서 1-1, 오세르에서 0-0 2004–05 16강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패해 탈락, 피레아스에서 1-3, 뉴캐슬에서 0-4 2011–12 16강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에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 하르키우에서 1-0, 피레아스에서 1-2 최다 점수차 승리[편집] 시즌 경기 점수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2002–03 올림피아코스 – 레버쿠젠 6–2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8–69 올림피아코스 – 던펌린 애슬레틱 3–0 1986–87 올림피아코스 – 우니온 룩셈부르크 3–0 1986–87 우니온 룩셈부르크 – 올림피아코스 0–3 1992–93 초르노모레츠 오데사 – 올림피아코스 0–3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2008–09 올림피아코스 – 노르셸란 5–0 2010–11 베사 카바여 – 올림피아코스 0–5 2010–11 올림피아코스 – 베사 카바여 6–1 리그 기록[편집] 부문 기록 최다 점수차 승리 11–0 (포스티라스전, 1973–74 시즌) 한 시즌 최다승 30승 (1999–2000 시즌) 한 시즌 최다골 102골 (1973–74 시즌) 한 시즌 최소실점 13실점 (1972–73 시즌) 최다 연승 기록 16연승 (2005–06 시즌 8라운드 – 2005–06 시즌 23라운드) 최다 경기 무패 기록 58경기 (1972–73 시즌 3라운드 – 1973–74 시즌 27라운드) 역대 성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올림피아코스 FC의 수상 실적입니다. 국내 대회[편집] 범그리스 리그 / 알파 에트니키 / 수페르리가 엘라다 우승 44회 (기록) 우승: 1930-31, 1932-33, 1933-34, 1935-36, 1936-37, 1937-38, 1946-47, 1947-48, 1950-51, 1953-54, 1954-55, 1955-56, 1956-57, 1957-58, 1958-59, 1965-66, 1966-67, 1972-73, 1973-74, 1974-75, 1979-80, 1980-81, 1981-82, 1982-83, 1986-87, 1996-97, 1997-98, 1998-99, 1999-2000, 2000-01, 2001-02, 2002-03,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8-09, 2010-11, 2011-12, 2012-13, 2013-14, [[2014- 15]], [[2015-16]], [[2016-17]] 그리스 컵 우승 27회 (기록) 우승: 1946-47, 1950-51, 1951-52, 1952-53, 1953-54, 1956-57, 1957-58, 1958-59, 1959-60, 1960-61, 1962-63, 1964-65, 1967-68, 1970-71, 1972-73, 1974-75, 1980-81, 1989-90, 1991-92, 1998-99, 2004-05, 2005-06, 2007-08, 2008-09, 2011-12, 2012-13, [[2014-15]] 더블 달성 17회 (비공식 기록) 1946-47, 1950-51, 1953-54, 1956-57, 1957-58, 1958-59, 1972-73, 1974-75, 1980-81, 1998-99, 2004-05, 2005-06, 2007-08, 2008-09, 2011-12, 2012-13, 2014-15 그리스 슈퍼컵 우승 4회 (기록) 우승: [[1980]], 1987, 1992, 2007 대그리스 컵 3회 우승 (기록) 우승: 1969, 1972, 1976 유럽대항전[편집] 발칸컵 1회 우승 우승: 1963 선수[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2015년 1월 28일 기준[77] 번호 포지션 이름 2 MF 이오아니스 마니아티스 (주장) 3 DF 알베르토 보티아 5 MF 루카 밀리보예비치 (안데를레흐트에서 임대) 6 MF 이브라힘 아펠라이 (바르셀로나에서 임대) 8 MF 델빈 은딩가 (모나코에서 임대) 9 MF 지미 두르마즈 10 MF 알레한드로 도밍게스 11 MF 파이팀 카사미 12 FW 프랑코 하라 14 DF 오마르 엘랍델라위 16 GK 로베르토 (삼주장) 17 FW 디미트리스 디아만타코스 18 MF 안드레아스 부할라키스 19 MF 다비드 푸스테르 (부주장) 20 DF 코스타스 얀눌리스 22 GK 안드레아스 얀뇨티스 23 DF 디미트리스 시오바스 번호 포지션 이름 24 DF 타소스 아블로니티스 25 MF 코스타스 포르투니스 26 DF 아르튀르 마쉬아퀴 27 FW 호르헤 베니테스 28 FW 니코스 베르고스 29 DF 프락시텔리스 부로스 30 DF 레안드루 살리누 33 GK 엘레프테리오스 후테시오티스 34 MF 마놀리스 살리아카스 42 GK 메제리 벌라주 45 DF 펠리피 산타나 (샬케 04에서 임대) 60 MF 압디살람 이브라힘 67 DF 안토니스 바투시아디스 72 GK 게오르요스 스트레조스 77 MF 마티외 도세비 MF 야야 투레 임대 선수 명단[편집] 2015년 1월 8일 기준[78] 번호 포지션 이름 DF 바실리오스 카라구니스 (→ 레지나) DF 마놀리스 차나카키스 (→ 에르고텔리스) DF 하랄람보스 리코얀니스 (→ 에르고텔리스) DF 콘스탄티노스 블라호스 (→ 포스티라스) DF 레안드루 (→ 라미아) MF 상부 야타바레 (→ 갱강) MF 알렉산다르 카타이 (→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MF 사샤 즈뎰라 (→ OFK) MF 마르코 얀코비치 (→ OFK) MF 펠레 (→ 레바디아코스) MF 니코스 카타리오스 (→ 파니오니오스) 번호 포지션 이름 MF 디미트리스 콜로보스 (→ 파니오니오스) MF 콘스탄티노스 플레가스 (→ 파나하이키) MF 디미트리스 시오피스 (→ 포스티라스) MF 네일로스-아겔로스 시호요스 (→ 함부르크 II) MF 파나요티스 블라호디모스 (→ 님 올랭피크) FW 아나스타시오스 카라마노스 (→ 아트로미토스) FW 니콜라오스 이오안니디스 (→ 도르트문트 II) FW 마이클 올라이탄 (→ 에르고텔리스) FW 다비트 헤넌 (→ 에버턴 B) FW 마르코 슈체포비치 (→ 마요르카) U-20팀 선수 명단[편집] 올림피아코스 U-20은 올림피아코스의 유소년팀이다. 이 팀은 U-20 수페르리가에 소속되어 있으며[79] UEFA 유스리그 참가 자격을 가지고 있다. U-20팀의 홈구장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렌티 훈련장으로, 피레아스의 렌티에 위치해 있다.[80] 번호 포지션 이름 GK 아리스 블라호스 GK 미할리스 일리아디스 GK 요르고스 스트레조스 DF 아나스타시스 부요우코스 DF 디미트리스 쿠치오스 DF 요르고스 마크로스테르요스 DF 얀니스 소티라코스 DF 아르기리스 투파스 DF 안토니스 바투시아디스 DF 프락시텔리스 부로스 DF 파나요티스 볼로나키스 MF 요르고스 리라스 MF 이오안니스 파이다키스 번호 포지션 이름 MF 디미트리오스 부치오티스 MF 요르고스 카나베타스 MF 얀니 라지 MF 보반 라지치 MF 알렉산드로스 마르가리티스 MF 아힐레아스 나시아코풀로스 MF 안토니스 파파사바스 MF 흐리스토포로스 파살리디스 MF 하랄람보스 렌치스 MF 마놀리스 살리아카스 FW 코스타스 가레팔라키스 FW 일리아스 이그나티디스 FW 니코스 베르고스 과거 선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분류:올림피아코스 FC의 축구 선수입니다. 스태프[편집] 보드진[편집] 올림피아코스의 전 중원사령관이자 현 전술 조언가인 크리스티앙 카랑뵈 지위 성명 회장[81]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총 책임자 얀니스 브렌초스 대표 이사 디미트리스 아그라피오티스 제1 부회장 사바스 테오도리디스 제2 부회장 소크라티스 S. 코칼리스 제3 부회장 게오르게 루바리스 제4 부회장 얀니스 모랄리스 기술 컨설팅 후안 호세 로렌소 전술 조언가 크리스티앙 카랑뵈 스포르팅 디렉터 피에르 이사 팀 매니저 키리아코스 두레카스 코칭스태프 및 의료진[편집] 코칭스태프[82] 감독[83] 비토르 페레이라 수석 코치 필리프 알메이다 루이스 다 실바 안토니오스 니코폴리디스 분석가 요르고스 마르타코스 안토니스 레모나키스 페드루 히베이루 골키퍼 코치 알레코스 란토스 체력 코치 흐리스토스 무리키스 마노스 슴포코스 유소년팀 감독 바실리스 부자스 유소년팀 골키퍼 코치 바실리스 알렉수디스 스카우터[84] 수석 스카우터 후안 호세 로렌소 스카우터 니코스 밤바쿨라스 게오르요스 아마나티디스 디미트리오스 바르발리아스 요르고스 코콜라키스 지우바니 루시아노 가예티 의료진[85] 수석 의료진 흐리스토스 테오스 의료진 니코스 리쿠레시스 알렉시스 카페타나키스 니콜라오스 쿨로풀로스 영양사 마리아 리코미트루 역대 감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올림피아코스 FC 감독 목록입니다. 올림피아코스 역대 회장[편집]   성명 국적 연도 미할리스 마누스코스 1925–1928, 1937–1939, 1945–1950 타나시스 메르미가스 1929–1931, 1953–1954 타키스 자카스 1931, 1936 얀니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32, 1933–1935 얀니스 바르바레소스 1946 요르고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54–1967 코스타스 부자키스 1967–1969 타소스 오이코노무 1969–1970 에우틱시오스 구마스 1970–1971 아리스티데스 스킬리치스 1971 디미트리스 바다니스 1971–1972   성명 국적 연도 니코스 굴란드리스 1972–1975 코스타스 타노풀로스 1975, 1976–1978 페리클리스 라나라스 1975 이라클리스 치찰리스 1978–1979 스타우로스 다이파스 1979–1985, 1986, 1992–1994 니코스 에우티미우 1986 게오르게 코스코타스 1987–1988 아르기리스 살리아렐리스 1988–1992 요르고스 바나사키스 1992–1993 소크라티스 코칼리스 1993–2011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2011– 창립자이자 올림피아코스의 초대 회장, 미할리스 마누스코스 올림피아코스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초기 일원 겸 전 회장 (1954-1967) 이었던 요르고스 안드리아노풀로스 각주[편집] ↑ http://www.uefa.com/MultimediaFiles/Download/StatDoc/competitions/UCL/01/67/63/79/1676379_DOWNLOAD.pdf ↑ “Their full name is Olympiacos Club of Fans of Piraeus. For the sake of sanity, however, you can just call them Olympiacos. Or "Thrylos" once you get to know them. Presentation of Olympiacos F.C. in International Champions Cup's official website: "Olympiacos: The most successful club in Greek football history"”. gazzetta.gr from internationalchampionscup.com. 2014년 2월 22일에 확인함.  ↑ “Olympiacos clinch 40th Greek title”.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Final win completes double for Olympiacos”. UEFA.com. 2013년 8월 24일에 확인함.  ↑ “Final win completes double for Olympiacos”.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Ελληνικό Πρωτάθλημα, Οι Πρωταθλητές Ελλάδας από το 1928 μέχρι σήμερα (그리스 리그 우승팀 목록 1928–2013)” (그리스어). 그리스 축구 협회, epo.gr. 2013년 8월 29일에 확인함.  ↑ “Olympiacos trophies”. Olympiacos.org. 2013년 10월 5일에 확인함.  ↑ “1998–99 Champions League quarter-finals”. UEFA.com. 2013년 8월 27일에 확인함.  ↑ “Olympiacos FC”.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New era in European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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Σε πρόσφατη έρευνα σχετικά με τους περισσότερους οπαδούς, ο ΟΣΦΠ είναι 1ος, 30/06/2009 SPORT24, 15ετής έρευνα του Παντελή Κυπριανού (in Greek) ↑ [1] Archived 2013년 7월 27일 - 웨이백 머신, το 36% (2.016.000) δηλώνουν Ολυμπιακοί, το 30% (1.680.000) Παναθηναϊκοί, Έρευνα της Focus, Οκτώβριος 2005 –Φεβρουάριος 2006, SPORT24, επίσημο blog του sport24 και του αθλητικού συντάκτη Στέλιου Μαρκάκη (그리스어) ↑ H πιο πρόσφατη... «απογραφή»: 36% Oλυμπιακοί (1,677 εκατομμύρια), 30,2% Παναθηναϊκοί Archived 2014년 11월 29일 - 웨이백 머신, Sentragoal, Βαγγέλης Μπραουδάκης (그리스어) ↑ "Red and White" Olympiacos moments in New York, Greek Reporter USA (usa.greekreporter.com), 2011년 6월 4일 ↑ Greek diaspora supports Olympiacos CFP Archived 2013년 10월 29일 - 웨이백 머신, redplanet.gr (그리스어) ↑ Greek side Olympiakos looking forward to playing Melbourne Victory at Etihad Stadium in May. There are thousands of Olympiakos fans in Australia waiting to see our team in action., foxsports.com, 2012년 3월 21일 ↑ "Our Greek fans in Brazil were amazing". Olympiacos won the Intercontinental Cup in Brazil with Spanoulis, Printezis and Mantzaris praising Olympiacos fans from the Greek community in Brazil and thanking them for their support, gazzetta.gr, 2013년 10월 8일 (그리스어) ↑ Olympiacos supporters of the Greek community in Sao Paulo, provided passionate support to Olympiacos basketball team, as they won the Intercontinental Cup, onsports.gr, 2013년 10월 5일 (그리스어) ↑ Olympiacos Club of New York and Greek diaspora honours Olympiacos President Evangelos Marinakis, The National Herald (thenationalherald.com) (그리스어) ↑ Αυτοί είναι οι οπαδοί στην Ελλάδα – Ο Ολυμπιακός έχει τους περισσότερους φιλάθλους στην Ελλάδα, 2012년 6월 26일 Gazzetta (그리스어) ↑ “History of Olympiacos”. 2014년 10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11월 21일에 확인함.  ↑ “Η Ιστορία του Ολυμπιακού” (그리스어). olympiacos.org. 2012년 9월 3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Olympiacos FC History”. olympiacos.org. 2013년 4월 30일에 확인함.  ↑ “Peiraias Regional Championship”. 2009년 3월에 확인함.  ↑ “Olympiakos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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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코스 FC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올림피아코스 FC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본 클럽의 모태 종합클럽에 대해서는 올림피아코스 CFP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올림피아코스 전체 이름 ΠΑΕ ΟΛΥΜΠΙΑΚΟ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παιώς 별칭 Θπύλος (전설) Επυθπόλευκοι (적백) Δαφνοστεφανωμένος (월계관을 씌운) 리그 수페르리가 엘라다 창단 연도 1925년 [3월 10일 구단주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회장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감독 페드루 마르팅스 경기장 그리스 피레아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수용 인원 32,115[1] 웹사이트 http://www.olympiacos.org/ 2018-19 2위 홈 어웨이 서드 최근 시즌 PAE 올림피아코스 (그리스어: ΠΑΕ Ολυμπιακός) 는 흔히 줄여서 올림피아코스, (Ολυμπιακός) 올림피아코스 피레아스 (Ολυμπιακός Πειραιάς) 로 알려져 있으며, 공식명칭이 올림피아코스 신데스모스 필라틀로스 피레아스 (그리스어: Oλυμπιακό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 인 그리스의 프로 축구 클럽이자, 아테네 도시권인 피레아스를 연고로 하는 종합 스포츠 클럽 올림피아코스 CFP의 축구부이다.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으로,[2] 그리스 리그를 41번,[3] 그리스 컵을 26번[4] 우승해 더블을 16번 달성했고,[5] 그리스 슈퍼컵도 4번 우승해 국내대회에서 총 71회의 우승을 거두었고, 모든 부문에서 최다 기록을 내고 있다. 올림피아코스의 압도적인 성공은 다른 그리스 클럽들의 리그 우승 횟수를 합치면 총 37회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6]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리그 최다 연속 우승 기록을 지니고 있는데, 리그 7연패 (알파 에트니키 1996-97 시즌부터 2002-03 시즌) 로 종전의 6연패 (1953-54 시즌부터 1958-59 시즌) 기록을 경신했다.[7] 더 나아가서 파나티나이코스, PAOK와 더불어 그리스 축구 1부리그에서 강등 경험이 없는 세 구단들 중 하나이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8] 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9] 에서 8강에 진출했었다. 또한, 올림피아코스는 유럽 클럽 협회의 창립 멤버이다.[10] 올림피아코스의 홈구장은 피레아스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이다.[11]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으로,[12][13][14][15][16] 국내에 250만명이, 전세계 그리스계 해외 거주민들 중 100만명이 지지하고 있다.[17][18][19][20][21][22] 올림피아코스는 2006년에 4월 기준으로 83,000명의 유료 회원이 등록 되어 유료 회원 수에 따른 클럽 목록에서 9위에 랭크되었다.[23] 2014년, 유료 회원수는 98,000명으로 증가되었다.[24] 올림피아코스는 파나티나이코스와 오랜 기간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두 클럽간의 경기는 영원한 적들의 더비로 불린다. 목차 1 역사 1.1 초창기와 국내 무대에서의 성공 1.2 간간한 성공과 굴란드리스 시대 1.3 성공기 1.4 2010년대 2 문양과 유니폼 3 스폰서와 유니폼 제작사 4 홈구장 5 7번 출입구 참사 6 서포터 6.1 연계 구단 7 응원가 7.1 원문 7.2 발음 7.3 해석 8 라이벌전 9 통계 9.1 유럽대항전 기록 9.1.1 최고 성적 9.1.2 최다 점수차 승리 9.2 리그 기록 10 역대 성적 10.1 국내 대회 10.2 유럽대항전 11 선수 11.1 현재 선수 명단 11.2 임대 선수 명단 11.3 U-20팀 선수 명단 11.4 과거 선수 12 스태프 12.1 보드진 12.2 코칭스태프 및 의료진 13 역대 감독 14 올림피아코스 역대 회장 15 각주 16 외부 링크 역사[편집] 초창기와 국내 무대에서의 성공[편집] 1925년 초창기 팀 노티스 캄페로스는 클럽의 명칭과 문양에 영감을 주었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3월 10일, 피레아스 항에서 창단되었는데,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 (Πειραιάκός Ποδοσφαιρικός Όμιλος) 의 회원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회원들의 병합 결정에 의해 일어났고,[25] 통합된 새 클럽은 고대 올림픽 우승자를 나타내는 문양을 도입했다. 노티스 캄페로스가 올림피아코스 (Ολυμπιακός) 라는 명칭을 제안했고, 미할리스 마누스코스가 현재의 명칭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 (Oλυμπιακό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클럽의 명성을 쌓게 해 주고, 현재의 영광으로 이끈건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로,[26] 상류층 가문의 일원이었던 그들은 그리스 전국에 올림피아코스라는 이름을 알렸다.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 중 얀니스, 디노스, 요르고스, 그리고 바실리스가 초창기에 이 클럽에서 활동했다. 5형제들 중 막내였던 레오니다스는 나중에 합류하여 클럽에서 장기간 활동했다. (1927-1935) 클럽의 초창기 공격진은 5형제로 이루어졌고, 이후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올림피아코스는 즉시 지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팀의 팬은 홈구장인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 인근의 노동층을 기반으로 되어 있었고, 이 곳은 현재 홈구장인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으로 옮기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1926년, 1927년에 피레아스 지역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27] 안드레아스 무라티스는 올림피아코스의 상징적인 주장으로 1945년과 1955년 사이 295번의 경기에 출전했다 1926년, 그리스 축구 협회가 창립되었고, 1927-28 시즌에 범그리스 리그가 출범했다. 이 리그가 국내 최초의 전국 리그로, EPSA 리그, (아테네) EPSP 리그, (피레아스) 그리고 EPSM 리그 (테살로니키) 의 지역 우승팀들이 플레이오프에서 국가 리그 타이틀을 걸고 경쟁하였고, 아리스가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범그리스 리그는 이 형식으로 1958-59 시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시즌인 1928-29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협회와의 불화로 인해 불참을 결정했고, 파나티나이코스와 AEK도 올림피아코스의 결정을 따랐다. 같은 시즌, 이 클럽들간 친선전을 치렀고, 중부 그리스 축구 구단 (Ποδοσφαιρικές Ομάδες Κέντρου, Π. Ο. Κ.) 을 조직했다. 범그리스 리그의 4번째 시즌이 1930-31 시즌에 열렸고, 올림피아코스는 이 시즌에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이 우승을 계기로 올림피아코스는 성공기의 개막을 알렸다. 1940년대에 들어, 올림피아코스는 11시즌동안 무려 6번 우승을 거두었고,[26] 1960년대에 들어서는 23시즌 안에 15번의 리그는 물론 그리스 컵도 9번 거미쥐었다. 1950년대 전설적인 올림피아코스 팀은 안드레아스 무라티스, 일리아스 로시디스, 코스타스 폴리흐로니우, 타나시스 베비스, 일리아스 이판티스, 바비스 코트리디스, 요르고스 다리바스, 바비스 드로소스, 그리고 사바스 테오도리디스로 구성되었고, 1953-54 시즌과 1958-59 시즌까지 리그 6연패를 달성한 것은 물론, 1956-57 시즌, 1957-58 시즌, 그리고 1958-59 시즌에는 컵도 들어올려 그리스 축구에 전례 없는 업적을 달성했다. 올림피아코스가 수많은 우승을 거둔 1950년대를 기점으로, 클럽은 "전설" (Θρύλος, 트릴로스로 발음) 이라는 별칭을 획득했다.[26][28] 간간한 성공과 굴란드리스 시대[편집] 전설적인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 (왼쪽부터) 얀니스, 디노스, 요르고스, 바실리스, 그리고 레오니다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28년 올림피아코스 선수단 국내 1부 리그인 알파 에트니키 (Α΄ Εθνική) 가 출범했고, 1959-60 시즌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나, 60년대와 70년대는 올림피아코스가 그리 많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시대로, 리그를 2회, 컵을 6회 우승하는데 그쳤다. 1972년, 니코스 굴란드리스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다. 그는 라키스 페트로풀로스를 감독으로 내정하고, 게오르요스 델리카리스, 이브 트리안타필로스, 훌리오 로사다, 밀톤 비에라, 미할리스 크리티코풀로스, 로맹 알지루대, 마이크 갈라코스, 라키스 글레조스, 코스타스 다불리스, 이오아니스 키라스타스, 그리고 페터 페르시디스와 같은 톱클래스 선수들을 영입했다. 굴란드리스 회장의 임기에, 올림피아코스는 1972-73 시즌부터 1974-75 시즌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같은 시기에 컵도 3연패를 달성했다.[26] 이 시기에 최고의 해는 1973-74 시즌으로 손꼽히는데, 올림피아코스는 이 시즌에 최다 승점 (59점) 과 최다 득점 (102골) 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1975년, 굴란드리스가 회장직에서 사임한 후, 팀은 1970년대말에 상대적으로 많은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초, 리그가 프로 리그로 전향되자, 올림피아코스는 또다시 그리스 축구에서 압도적인 존재로 부상했는데, 리그 4연패 (1979-80 시즌, 1980-81 시즌, 1981-82 시즌, 1982-83 시즌) 를 거두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공격수 니코스 아나스토풀로스, 미드필더 타소스 미트로풀로스, 그리고 니코스 사르가니스 수문장이 있었다. 그리스 국가대표팀과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알케타스 파나굴리아스는 팀을 1981년과 1983년 사이와 1986-87 시즌에 지휘하여 1981-82 시즌, 1982-83 시즌, 그리고 1986-87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26] 올림피아코스는 1980년대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암흑기를 보냈다. 80년대 중반,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사업가 게오르게 코스코타스가 휘어잡았으나, 나중에 횡령 혐의로 고발되고 유죄 선고가 내려졌으며, 올림피아코스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라운드에서, 팀은, 세심한 경영 없이 1987-88 시즌부터 1995-96 시즌까지 9시즌을 리그 무관으로 보냈다. 이 시기는 올림피아코스의 암흑기로 불리며,[29] 이중 1987-88 시즌은 올림피아코스 최악의 시즌으로, 팀은 리그를 8위로 마감했다. 성공기[편집] 올림피아코스의 성공기는 국제 무대의 거물 선수들인 즐라트코 자호비치, 지우바니, 그리고 FIFA 월드컵 챔피언 히바우두와 크리스티앙 카랑뵈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리그 7연패를 달성하며, 종전에 선배들이 달성한 6연패의 기록을 넘었으며, 1998-99 시즌에는 두샨 바예비치 감독의 지도 하에 더블을 달성하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유럽대항전 최고 성적인 8강 진출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바예비치가 1999년에 경질 당했고, 이어지는 시기 (1999년에서 2004년) 동안, 올림피아코스는 무려 8명의 감독을 교체했다. 이들 중에는 이오아니스 마추라키스, 타키스 레모니스, 트론 솔리에, 올레흐 프로타소우, 그리고 시니샤 고기치가 있었다. 잦은 감독 교체와 수뇌부의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올림피아코스는 감독을 세번 교체해 준우승을 거두었던 2003-04 시즌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우승을 거두었다. 2004년, 올림피아코스는 두샨 바예비치를 다시 감독으로 재선임하였고, 1999년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히바우두를 영입했다. 시즌 종료 후,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더블을 거두었으나, 바예비치는 사임했다. 그의 자리는 노르웨이의 트론 솔리에가 재선임되면서 대체되었다.[30] 클럽은 라이벌 구단 파나티나이코스에서 키프로스 스트라이커 미할리스 콘스탄티누를 영입했다. 2005-06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1972-73 시즌 이래 처음으로 주 라이벌인 파나티나이코스와 AEK와의 주요 라이벌 경기에서 모두 이겼다. 올림피아코스는 이 4번의 경기에서 11득점 3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그리스 컵 결승전에서는 AEK를 3-0으로 꺾으면서 2시즌 연속 더블을 달성했고, 리그 16연승 기록을 세워, 클럽 선배들이 세웠던 종전 기록을 경신했다. 기록을 경신한 시즌 후, 2006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트론 솔리에는 7명의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러나, 솔리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2006-07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2006년 말에 타키스 레모니스에게 지휘봉을 내 주었다. 레모니스는 영건 바실리스 토로시디스를 클럽으로 데려 왔고, 비록 레모니스가 올림피아코스의 리그 3연패를 달성하게 했으나, 그리스 컵에서 PAS 얀니나에게 충격패를 당해 탈락하면서 컵대회 우승에 실패했다. 프레드라그 조르제비치는 올림피아코스에서 12차례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는 기록을 세웠고, 344경기에 출전해 126골을 득점해 클럽의 외국인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히바우두 2007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다르코 코바체비치와 루시아노 가예티를 고액에 영입하였고, 스트라이커 겸 미드필더인 네리 카스티요를 우크라이나 클럽 샤흐타르 도네츠크에 €20M에 매각해 그리스 축구 역사상 최고액 이적료 기록을 세웠다.[31] 카스티요의 계약 조항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15M을 받았고, 나머지 €5M은 선수에게 즉시 주어졌다.[32] 더 나아가, 올림피아코스 성공에 히바우두가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크게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피아코스가 선수와의 재계약을 원치 않으나, 히바우두와 클럽 사이에 논란이 불거졌다. 일리야 이비치 클럽의 전 선수가 팀의 축구 디렉터로 취임했다. 팀은 그리스 리그에서 실망적인 시작을 했으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에서 조 1위를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와 승점에서 11점으로 동률을 이르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33] 그러나, 팀은 리그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는데,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첼시에게 패한 것과 엮여서 소크라티스 코칼리스 구단주가 타키스 레모니스 감독을 경질하게 이르었고, 팀의 수석코치였던 호세 세구라가 시즌 잔여 기간동안 감독직을 대행했다. 비록 올림피아코스가 리그와 컵 더블을 달성했으나, 세구라는 본래 지위인 수석 코치직으로 복귀했다. 2008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지오구 루이스 산투, 아브람 파파도풀로스, 그리고 두두 세아렌세를 영입하고, 에르네스토 발베르데와 €6M짜리 3년 계약을 체결하고 새 감독으로 내정했다.[34] 2008-09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부진하게 시즌을 시작했는데, 초반의 공식경기 몇경기를 패하였는데, 아노르토시스 파마구스타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전에서 패해 UEFA컵 1라운드로 내려앉았는데, 여기서 올림피아코스는 노르셸란을 꺾고 조별 리그에 진출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수페르리가 엘라다 2008-09에서의 우수한 활약을 바탕으로 홈경기에서 매번 승리했으나, 원정 경기에서 고전했다. 홈경기에서 UEFA컵 경기를 훌륭히 치른 후, 팀은 32강에 진출해 프랑스의 생테티엔을 상대했다. 2009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유벤투스의 올로프 멜베리를 €2.5M에,[35] 잉글랜드 스트라이커 맷 더비셔를 블랙번 로버스에서, 미드필더 자우아드 자이리를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에서, 그리고 엔초 마레스카를 세비야에서 영입했다. 많은 선수들이 임대에서 복귀했는데, 예를 들어 게오르요스 카치코얀니스, 전 레알 마드리드 수비수 라울 브라보, 그리고 아르헨티나 미드필더 크리스티안 라울 레데스마가 있었다. 올림피아코스는 브라질 전설 지쿠를 감독으로 내정해 2009-10 시즌을 성공적으로 시작했으며, 다수의 1군 선수들을 부상으로 잃고 임했으나, H조에서 조 선두 아스널에 승점 3점을 밀려 2위로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행에 성공했다.[36] 팀은 16강에서 보르도를 상대해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0-1로 패했다. 2차전에서, 보르도가 초반에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올림피아코스는 동점골을 넣었고, 추가골 찬스를 번번히 놓치나가, 막판 실점으로 패했다. (1-2) 국내 무대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라이벌 구단 파나티나이코스와의 더비전에서 콘스탄티노스 미트로글루의 2골에 힘입어 2-0으로 이겼다.[37] 2010년대[편집] 미첼은 2013-14 시즌에 리그 역대 최단기간 우승을 달성했다. 케빈 미라야스 2010년, 운송업의 거물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가 소크라티스 코칼리스로부터 팀을 인수했다. 마리나키스는 회장 임기 원년에 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에르네스토 발베르데를 감독으로 재선임했고, (발베르데는 1기에서처럼 2기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선수들인 알베르트 리에라, 아리엘 이바가사, 케빈 미라야스, 마르코 판텔리치, 그리고 프랑수아 모데스토를 영입했다. 그 결과 올림피아코스는 2위 파나티나이코스를 무려 13점차로 제치고 수페르리가 통산 38회 우승을 거두었다. 2011-12 시즌, 장 마쿤, 파블로 오르바이스, 이반 마르카노, 라피크 제부르, 그리고 자멜 압둔 등의 선수로 선수단을 강화했고, 에르네스토 발베르데가 2년 사령탑을 맡으면서,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수페르리가와 그리스 컵을 모두 우승하면서 통산 15번째 국내 더블을 달성했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아스널, 마르세유, 그리고 도르트문트로 구성된 F조에 편성되어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아스널과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홈에서 승리 (각각 3-1의 점수로 승리) 를 거두어 F조에서 9점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세유가 도르트문트 적지에서 펼친 6라운드 경기에서 0-2로 밀렸다가 막판 5분에 2골로 논란의 2-3 역전승을 거두면서 16강 진출이 안타깝게 좌절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UEFA 유로파리그에 계속 출전하여 루빈 카잔을 상대했다. 그리스 챔피언은 러시아 클럽을 상대로 2연승 (카잔과 피레아스에서 모두 1-0으로 승리) 을 거두고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와 16강에서 붙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1차전에서 다비드 푸스테르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이겼으나, 2차전에서 초반 선제골을 넣고도 수 차례 골찬스를 날리면서 (전반전에 골대를 두번 맞추었다) 막판 9분에 2골을 실점하고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올로프 멜베리 시즌 종료 후, 에르네스토 발베르데는 스페인 복귀 결정을 내려, 올림피아코스에서의 성공적인 2시즌을 마무리했다. 클럽은 포르투갈의 리우나르두 자르딩을 신임 감독으로 앉혔다. 팀은 그리스 리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B조에서 아스널전 (2-1 홈) 및 몽펠리에전 (2-1 원정) 승리로 9점을 모으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리우나르두 자르딩은 스페인 국적의 감독이자 레알 마드리드 전설 미첼에게 지휘봉을 내주어야 했다. 팀은 2위 PAOK를 15점 차로 제치고 40번째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고,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와의 결승전에서 승리로 26번째 그리스 컵 우승을 거두면서 16번째 더블을 이룩했다. 올림피아코스는 40번째 그리스 리그 우승으로 클럽, 특히 팬들의 목표였던 4번째 별을 클럽 문양 위에 달게 되었다. 조엘 캠벨, 로베르토, 알레한드로 도밍게스, 블라디미르 베이스, 델빈 은딩가, 레안드루 살리누,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하비에르 사비올라를 영입하면서 2013-14 시즌의 기대치는 매우 높았다.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벤피카, 파리 생제르맹, 안데를레흐트와 함께 UEFA 챔피언스리그 2013-14에서 C조에 편성되었다. 조별 리그가 끝난 후, 올림피아코스는 승점 10점을 적립해 벤피카 (피레아스에서 1-0 승리, 리스본에서 1-1 무승부) 와 안데를레흐트 (브뤼셀에서 3-0 승리, 피레아스에서 3-1 승리) 를 너머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격돌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인상적인 활약으로 1차전에서 2-0으로 편안한 승리 (도밍게스 38분, 캠벨 55분) 를 거두었는데, 같은 경기에서 분위기를 지배하고 골찬스를 놓치고도 두골차 리드를 가졌다. 이 2골의 이점을 지키지 못하고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 0-3으로 패했고, 40분에 골찬스를 또 놓치면서 1999년 이래 사상 최초의 8강행을 앞두고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그리스 챔피언은 막판 10분에 원정골을 기록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별 무효과였다. 비록 8강 진출권을 손앞에서 놓쳤으나, 올림피아코스는 시즌 내내 우수한 활약을 펼치며 6년 안에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전 (16강) 진출을 3번 (2007-08 시즌, 2009-10 시즌, 2013-14 시즌) 달성해, 유럽 무대에서 성공했다. 국내 무대에서, 올림피아코스는 2위 PAOK를 17점차로 제치고 역사적인 41번째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문양과 유니폼[편집] 2008-09 시즌의 올림피아코스 유니폼 1925년, 피레아스의 두 클럽인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이 합병되었을 때,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도덕성, 경쟁심, 그리고 광채로부터 영감을 받아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으로 명명되었다. 그 결과 ,클럽은 월계관을 쓴 청소년을 문양으로 도입했고, 이는 올림픽 우승자를 상징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의 작은 변화를 거쳤다. 적색과 백색은 문양의 색상으로 사용된다. 적색은 열정을, 백색은 도덕성을 상징한다.[38][39] 팀의 유니폼은 흔히 적색과 백색의 세로 줄무늬로 되어 있으며, 적색 하의와 백색 양말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유니폼은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했는데, 주로 유니폼의 줄무늬 두께에 변화가 있었다. 그 다음 흔하게 사용된 유니폼은 올 적색이나 올 백색의 유니폼이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세월을 거쳐 원정 유니폼과 써드킷에 다른 색상들을 사용해 왔고, 가장 인상적으로 꼽히는 유니폼은 흑색이나 은색 유니폼이다. 가장 흔했던 올림피아코스의 당시 유니폼은 아래와 같다. (하단의 연도는 해당 유니폼이 사용된 연도를 의미한다) 1950 1978 1979 1985 2000–01 2008–09 2009–10 2010–11 2013–14 스폰서와 유니폼 제작사[편집] 그리스에서 축구가 프로화된 1979년을 기점으로, 올림피아코스는 1982년 이래 특정 유니폼 제작사와 계약을 시작했고, 다음과 같은 유니폼 제작사를 두었다. 다음 차트는 유니폼 제작사와 스폰서의 역대 변천사를 나타낸다: 유니폼 제작사 연도 제작사 1979 엄브로 1980 푸마 1980–1984 아식스 타이거 1984–1992 푸마 1992–1993 엄브로 1993–1994 로토 1994–1995 아디다스 1995–2000 푸마 2000–2005 엄브로 2005–2015 푸마 2015– 아디다스 스폰서 연도 스폰서 1982–1983 피아트 1984 트래블 플랜 1984–1988 시티즌 홀딩스 1988 도요타 1989 크레타 은행 1989–1990 아테네 '96 1990–1994 디아나 1994–1997 에트노카르타 마스터카드 1997–2000 아스피스 프로노이아 2000–2005 지멘스 모바일 2005–2006 지멘스 2006–2009 보다폰 2009–2010 씨티 은행 2010–2013 파메 스토익시마 2013– 유니세프 홈구장[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입니다. 올림피아코스와 아스널간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경기 (1-0) 를 앞둔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그리스어: Γήπεδο Γεώργιος Καραϊσκάκης) 은, 그리스 피레아스의 팔리로 구에 위치해 있으며, 올림피아코스의 전통적인 홈구장이자 현재 홈구장이다. 그리스 독립 전쟁 영웅인 게오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의 이름을 땄으며, 올림피아코스의 대부분 홈경기를 유치했다.[40] 1895년, 이 경기장은 아테네에서 열린 1896년 하계 올림픽의 사이클 경기를 열기 위한 경륜장으로 개장되었다. 공식 경기장 명칭은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 (그리스어: Ποδηλατοδρόμιο Νέου Φαλήρου) 으로, 피치가 자전거 경륜트랙으로 둘러쌓였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창립할때를 기점으로 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64년, 경기장이 리모델링 된 후,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2003년까지 그라운드 주변에 육상 / 경륜 트랙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41]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장으로, 1969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와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1971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 경기를 주최했다.[42] 올림피아코스는 1984년에 잠시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을 떠나, 홈경기를 새로 지어진 스피로스 루이스에서 치르기도 했다. 5년동안 그리스 최대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른 클럽은 전통적인 홈구장으로 복귀해 1997년까지 사용했다. 그 후, 올림피아코스는 스피로스 루이스로 다시 돌아가 또다시 그곳에 5년을 머물렀다. 2002년, 스피로스 루이스가 2004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리모델링을 목적으로 폐장됨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아폴론 스미르니의 홈구장인 아테네 리주폴리 구의 게오르요스 카마라스 경기장으로 이전해 2년을 머물렀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은 황폐해진채 2003년 4월에 올림피아코스에 넘겨졌다. 클럽은 그 자리에 축구 전용 구장을 지을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 구장은 2004년 하계 올림픽의 축구 경기를 주최했다.[43]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올림피아코스는 2052년까지 경기장의 전적인 사용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보수비를 모두 충당하며 주 정부에 수익의 15%를 지불하게 되었다. 구 홈구장은 2003년 봄에 철거되었고, 새 구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14개월이라는 기록적인 기간이 소요되었다. 경기장은 €60M의 가격을 들여 2004년 6월 30일에 완공되었다.[44] 현재,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구장들 중 하나로, 올림피아코스 박물관[45] 과 여러 시설을 운영한다. 7번 출입구 참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참사입니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과 올림피아코스는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참사로 그리스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경험했다. 1981년 2월 8일, 올림피아코스는 AEK와의 리그 홈경기를 치러, 전례 없는 피레아스 연고 홈팀의 6-0 대승으로 끝냈다. 경기 막판, 7번 출입구 인근의 올림피아코스 팬들 수천명이 경기장 정문으로 가 선수들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출입구를 향해 썰물같이 빠져나갔는데, 문은 거의 폐쇄된 구조의 회전문이 놓여 출구로 나가기 어려운 형태였다.[46]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스탠드에서 계속 내려오는 와중에, 위에서는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결국 7번 출입구는 죽음의 함정이 되었다. 아래쪽의 사람들이 눌리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중상을 당했으며, 21명의 젊은이들이 사망했는데, 이들의 사망 주 원인은 질식이었다.[47] 서포터[편집] 7번 출입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홈경기는 물론이고 원정 경기에서도 극도의 열정을 불어넣는다. 이 사진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홈에서 첼시를 상대한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의 토너먼트전 당시 촬영되었다. 베오그라드 스타디온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촬영된 벽화로, 올림피아코스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간의 형제같은 우애를 상징한다. 올림피아코스의 전통적인 팬층은 클럽의 연고지인 피레아스 시를 연고로 하며, 아테네의 일부 지역도 포함한다. 클럽의 인기는 1950년대에 여러번 연거푸 우승하며 다수의 기록을 깨면서 인기가 치솟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축구 클럽으로 떠오르게 했다. 전통적으로, 올림피아코스는 본래 노동층을 대표했으나, 클럽은 모든 사회 계층으로부터 팬을 불러 모았으며, 현재 팬층은 특정 사회 계층을 기반으로 두지 않는다.[48][49] UEFA에 따르면 올림피아코스는 가장 인기있는 그리스 클럽이며,[12] 다수의 설문조사와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50][51] 몇몇 신문과 잡지에서 주최한 설문 조사에서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최고의 인기 클럽이라는 결과를 냈고, 백분율로 전체 팬들의 29%에서 37%를 오고가며, 전체 인구의 20.3%에서 29.3%를 오고 가는데, 이 자료를 토대로 올림피아코스의 그리스 국내 팬들 수는 약 250만명으로 추산된다.[14][52] 이 클럽은 피레아스에서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으며, 시 인구의 절반이 올림피아코스를 지지하며,[53] 한편 아테네 전체에서도 지지하는 팬의 비율이 45.1%에 육박하는데, 그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수도권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이다.[54] 올림피아코스는 노동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이기도 하며, 모든 연령대를 통틀어 37%가 지지하고,[53]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 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55] 대부분의 팬들이 중도좌파이거나 중도우파의 정치성향을 나타낸다.[53] 아테네 수도권 외에서도, 올림피아코스는 중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테살리아, 에게 해 제도, 그리고 이오니아 제도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다.[56] 더 나아가서,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에서 역대 최다 평균 관중수 기록을 지니고 있는데,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역대 시즌들 중 대부분 올림피아코스가 이 부문에서 최고를 찍었다.[57] 2006년, 올림피아코스는 전세계에 최다 유료 회원수를 보유한 상위 10개 클럽들 중에 하나로 이름을 올렸고, 이 부문에서 9위로, 레알 마드리드보다 한 순위 높았다.[58] 2006년 4월 기준, 클럽의 등록된 유료 회원 수는 83,000명이었다.[59] 올림피아코스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팬들은 깊은 친선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서로를 정교회 형제라고 부른다. 대개, 몇몇의 올림피아코스 팬클럽의 팬들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경기를 참관하기도 하는데, 특히 파르티잔과의 경기를 참관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정교회 형제들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팬들을 동맹으로 합류시키려 한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팀에 대해 열정적이고 강렬한 지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홈 경기의 분위기는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UEFA컵 2004-05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할 때, 영국 방송 채널 5에서 중계할때, 객원 해설가이자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토니 코티는 지속적으로 분위기가 어떤지에 대해 언급했다. 경기에서 그는 이 경기장이 가장 분위기가 있는 경기장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양한 곳에 대해 들어보고 그곳의 분위기는 실제로 가보면 실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곳은 진짜 [분위기를 느끼는 것 이상을 체감하는] 그곳입니다."[60] 경험많은 체코 국가대표 윙어인 야로슬라프 플라실은 보르도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원정을 앞두었을때 올림피아코스 팬들이 홈경기 팬들이 조성하는 적대적인 분위기에 대해 한번 더 증명했는데, 모나코 시절의 경기를 짚으며 다음과 같의 표의했다: "이곳에서 저는 경기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상을 주는 분위기를 경험했고, 이곳은 우리에게 지옥과 같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들의 응원은 홈팀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61] 파리 생제르맹의 간판 스트라이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2013년 9월 17일자 올림피아코스-파리 생제르맹 경기 후, 올림피아코스 팬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환상적인 관중들 앞에서 활약합니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놀라웠습니다. 제 동료 올로프 멜베리가 여기서 활약했었고, 그는 서포터에 대해 이야기한적 있습니다. 저는 실감하지 못했으나, 이제 이해합니다. 놀랍습니다. 이는 올림피아코스에게 홈경기에서 크게 유리한 점입니다.[62][63] 파리 생제르맹의 억만장자 구단주 나세르 알-켈라이피는 다음과 같이 표의했다: 저는 이곳 팬들에게 큰 존경심을 표합니다. 저는 올림피아코스 팬들과 같은 팬들을 인생에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64] 연계 구단[편집]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65][66]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응원가[편집] 올림피아코스의 공식 응원가는 "경기장의 전설" (그리스어: Θρύλε των γηπέδων) 이라고도 불리며, 피레아스 연고의 종합 스포츠 클럽 올림피아코스 CFP의 많은 부서에서 불린다.[67] 작사는 그리스 작곡가인 코스타스 킬리만초스가 했고, 작곡은 스피로스 발사마키스가 했다.[68] 이 응원가를 처음 부른 사람은 흐리스타키스 볼리오티스이다. 역사적으로, 올림피아코스의 첫 응원가는 1931년 미미스 바실리아디스가 작사하고 얀고스 라우타리스가 작곡했다. 이 곡은 행진곡 형식이며 축구 경기 형식에 더 가깝개 유래되었다. 원문[편집] Θρύλε των γηπέδων Ολυμπιακέ δαφνοστεφανωμένε μεγάλε και τρανέ έχεις δύναμή σου Ολυμπιακέ τον πύρινό σου κόσμο που δε λυγά ποτέ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Δόξα στα παιδιά σου Ολυμπιακέ χιλιοτραγουδισμένε, στον κόσμο ξακουστέ. Τρέμουν στ' άκουσμά σου Ολυμπιακέ κι ακόμα σε θυμούνται η Σάντος κι ο Πελέ.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발음[편집] Thýle ton gipédon Olympiaké dafnostefanoméne megále kai trané écheis dýnamí sou Olympiaké ton pýrinó sou kósmo pou de lygá poté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Dóxa sta paidiá sou Olympiaké chiliotragoudisméne, ston kósmo xakousté. Trémoun st' ákousmá sou Olympiaké ki akóma se thymoúntai i Sántos ki o Pelé.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해석[편집] 경기장의 전설 올림피아코스 월계관을 쓰고, 영광스럽고 위대하며, 당신의 힘은 당신의 열광적인 팬들 한치 양보없는, 항복하지 않는.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당신의 자식들에게 영광을, 올림피아코스 당신에게 천곡을 불렀네, 당신은 전세계에서 유명하네. 모두가 당신의 이름에 벌벌 떠네 펠레와 산투스도 당신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라이벌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영원한 적들의 더비 및 올림피아코스-PAOK 경쟁입니다. 라이벌 파나티나이코스와의 경기에서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내의 올림피아코스 팬들 전통적으로, 올림피아코스의 주 라이벌은 파나티나이코스이며, 이들을 상대하는 경기는 영원한 적들의 더비로 불리며, 아테네 수도권 지역과 그리스 축구의 대표적인 고전 라이벌전이다.[69] 두 팀은 그리스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들이자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들로, 이 라이벌전은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지역적 차이의 지표이다. 현재 두 클럽들간의 차이가 옅어지고 팬층이 비슷하게 되었으나, 올림피아코스는 전통적으로 항구 도시인 피레아스의 노동층을 대표하는 반면, 파나티나이코스는 아테네의 상류층 사회를 대표했다.[48][49] 두 팀은 그리스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들로 도합하여 61번의 우승을 거두었으며, 그에 따라 이들간의 라이벌전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70] 두 팀간의 증오가 매우 강렬해서, 아테네 수도권 지역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곤 했는데, 특히 더비전 전후로 경향이 두드러졌다. 2007년 3월 29일, 22세의 파나티나이코스의 팬이 올림피아코스와 파나티나이코스간의 여자 배구 경기가 당일 예정되었던 아테네 인근의 마을인 파이아니아에서 두 훌리건 단체간의 경기전에 계획된 패싸움으로 인해 찔려 숨진채 발견되었다. 이 사태는 그리스 전국의 분노를 샀고, 대규모 서포터 현장에서 대대적인 경찰 수사를 착수하게 했으며, 그리스의 모든 스포츠 활동이 2주간 중단되었다.[71][72][73] 2012년 더비전은 휘발 폭탄, 홍염, 그리고 미사일이 스피로스 루이스의 팬들과 경찰에게 투척되어 일부가 불에 붙어 경기를 중단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올림피아코스의 주요 라이벌로는 AEK도 있는데, 근접성과 그라운드에서의 팽팽한 경쟁으로부터 유발되었다.[74] 올림피아코스와 PAOK간의 경쟁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올림피아코스가 PAOK의 상징적인 선수인 요르고스 쿠다스를 영입하려는 데에서 야기되었다. 두 클럽간의 라이벌 관계는 그리스의 가장 큰 두 개의 도시 권역인 아테네 수도권과 테살로니키권 간의 경쟁에서도 유발되었다.[75] 올림피아코스의 라이벌로는 피레아스의 제 2구단으로 불리는 에트니코스 피레아스가 있으나, 에트니코스 피레아스가 그리스 축구 1부리그에서 강등당한 이래 둘 간의 맞대결이 열리지 않았다. 통계[편집] 유럽대항전 기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유럽의 올림피아코스 FC입니다.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첼시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 16강 2차전을 앞두고 도열한 올림피아코스 선수들. 올림피아코스는 UEFA 주관 대회에 오랫동안 출전한 기록이 있으며, 1959년 9월 13일, 밀란과의 유러피언컵 1959-60 경기에서 데뷔했다. 그러나, 올림피아코스는 유러피언컵 1958-59의 예선 라운드에서 베식타시를 상대할 예정이었으나, 기권했다.[76] 2010년 2월 23일, 보르도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16강 1차전 경기에서 200번째 유럽대항전 경기를 자축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유럽대항전 2라운드에 진출한 최초의 그리스 클럽으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3-64에서 폴란드의 자그웽비에 소스노비에크를 제압했다. 클럽의 유럽대항전 최고 성적은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의 8강으로, 유벤투스에 패해 탈락했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에서도 8강에 진출했으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패하였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홈경기에서 강한 경향을 보인다. 이는 최다경기 무패 행진에서 증명되는데, 특히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격파해 올림피아코스는 홈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잡은 첫 그리스 클럽이 되었고, 같은 대회에서 현재 형식 도입후로는 5연속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 기록도 세웠다. 더 나아가서, 올림피아코스는 홈에서의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 2002-03에서 전 시즌 준우승팀 레버쿠젠을 상대로 6-2의 충격적인 대승을 거두었으며, UEFA컵 2008-09에서는 노르셸란전 5-0 승리, 벤피카전 5-1 승리, 그리고 헤르타 BSC전 4-0 승리로 3연속 4점차 이상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최고 성적[편집] 시즌 업적 비고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 8강 유벤투스에 패해 탈락, 토리노에서 1-2, 아테네에서 1-1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 8강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패해 탈락, 피레아스에서 1-1, 마드리드에서 1-3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1989–90 16강 오세르에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 피레아스에서 1-1, 오세르에서 0-0 2004–05 16강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패해 탈락, 피레아스에서 1-3, 뉴캐슬에서 0-4 2011–12 16강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에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 하르키우에서 1-0, 피레아스에서 1-2 최다 점수차 승리[편집] 시즌 경기 점수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2002–03 올림피아코스 – 레버쿠젠 6–2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8–69 올림피아코스 – 던펌린 애슬레틱 3–0 1986–87 올림피아코스 – 우니온 룩셈부르크 3–0 1986–87 우니온 룩셈부르크 – 올림피아코스 0–3 1992–93 초르노모레츠 오데사 – 올림피아코스 0–3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2008–09 올림피아코스 – 노르셸란 5–0 2010–11 베사 카바여 – 올림피아코스 0–5 2010–11 올림피아코스 – 베사 카바여 6–1 리그 기록[편집] 부문 기록 최다 점수차 승리 11–0 (포스티라스전, 1973–74 시즌) 한 시즌 최다승 30승 (1999–2000 시즌) 한 시즌 최다골 102골 (1973–74 시즌) 한 시즌 최소실점 13실점 (1972–73 시즌) 최다 연승 기록 16연승 (2005–06 시즌 8라운드 – 2005–06 시즌 23라운드) 최다 경기 무패 기록 58경기 (1972–73 시즌 3라운드 – 1973–74 시즌 27라운드) 역대 성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올림피아코스 FC의 수상 실적입니다. 국내 대회[편집] 범그리스 리그 / 알파 에트니키 / 수페르리가 엘라다 우승 44회 (기록) 우승: 1930-31, 1932-33, 1933-34, 1935-36, 1936-37, 1937-38, 1946-47, 1947-48, 1950-51, 1953-54, 1954-55, 1955-56, 1956-57, 1957-58, 1958-59, 1965-66, 1966-67, 1972-73, 1973-74, 1974-75, 1979-80, 1980-81, 1981-82, 1982-83, 1986-87, 1996-97, 1997-98, 1998-99, 1999-2000, 2000-01, 2001-02, 2002-03,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8-09, 2010-11, 2011-12, 2012-13, 2013-14, [[2014- 15]], [[2015-16]], [[2016-17]] 그리스 컵 우승 27회 (기록) 우승: 1946-47, 1950-51, 1951-52, 1952-53, 1953-54, 1956-57, 1957-58, 1958-59, 1959-60, 1960-61, 1962-63, 1964-65, 1967-68, 1970-71, 1972-73, 1974-75, 1980-81, 1989-90, 1991-92, 1998-99, 2004-05, 2005-06, 2007-08, 2008-09, 2011-12, 2012-13, [[2014-15]] 더블 달성 17회 (비공식 기록) 1946-47, 1950-51, 1953-54, 1956-57, 1957-58, 1958-59, 1972-73, 1974-75, 1980-81, 1998-99, 2004-05, 2005-06, 2007-08, 2008-09, 2011-12, 2012-13, 2014-15 그리스 슈퍼컵 우승 4회 (기록) 우승: [[1980]], 1987, 1992, 2007 대그리스 컵 3회 우승 (기록) 우승: 1969, 1972, 1976 유럽대항전[편집] 발칸컵 1회 우승 우승: 1963 선수[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2015년 1월 28일 기준[77] 번호 포지션 이름 2 MF 이오아니스 마니아티스 (주장) 3 DF 알베르토 보티아 5 MF 루카 밀리보예비치 (안데를레흐트에서 임대) 6 MF 이브라힘 아펠라이 (바르셀로나에서 임대) 8 MF 델빈 은딩가 (모나코에서 임대) 9 MF 지미 두르마즈 10 MF 알레한드로 도밍게스 11 MF 파이팀 카사미 12 FW 프랑코 하라 14 DF 오마르 엘랍델라위 16 GK 로베르토 (삼주장) 17 FW 디미트리스 디아만타코스 18 MF 안드레아스 부할라키스 19 MF 다비드 푸스테르 (부주장) 20 DF 코스타스 얀눌리스 22 GK 안드레아스 얀뇨티스 23 DF 디미트리스 시오바스 번호 포지션 이름 24 DF 타소스 아블로니티스 25 MF 코스타스 포르투니스 26 DF 아르튀르 마쉬아퀴 27 FW 호르헤 베니테스 28 FW 니코스 베르고스 29 DF 프락시텔리스 부로스 30 DF 레안드루 살리누 33 GK 엘레프테리오스 후테시오티스 34 MF 마놀리스 살리아카스 42 GK 메제리 벌라주 45 DF 펠리피 산타나 (샬케 04에서 임대) 60 MF 압디살람 이브라힘 67 DF 안토니스 바투시아디스 72 GK 게오르요스 스트레조스 77 MF 마티외 도세비 MF 야야 투레 임대 선수 명단[편집] 2015년 1월 8일 기준[78] 번호 포지션 이름 DF 바실리오스 카라구니스 (→ 레지나) DF 마놀리스 차나카키스 (→ 에르고텔리스) DF 하랄람보스 리코얀니스 (→ 에르고텔리스) DF 콘스탄티노스 블라호스 (→ 포스티라스) DF 레안드루 (→ 라미아) MF 상부 야타바레 (→ 갱강) MF 알렉산다르 카타이 (→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MF 사샤 즈뎰라 (→ OFK) MF 마르코 얀코비치 (→ OFK) MF 펠레 (→ 레바디아코스) MF 니코스 카타리오스 (→ 파니오니오스) 번호 포지션 이름 MF 디미트리스 콜로보스 (→ 파니오니오스) MF 콘스탄티노스 플레가스 (→ 파나하이키) MF 디미트리스 시오피스 (→ 포스티라스) MF 네일로스-아겔로스 시호요스 (→ 함부르크 II) MF 파나요티스 블라호디모스 (→ 님 올랭피크) FW 아나스타시오스 카라마노스 (→ 아트로미토스) FW 니콜라오스 이오안니디스 (→ 도르트문트 II) FW 마이클 올라이탄 (→ 에르고텔리스) FW 다비트 헤넌 (→ 에버턴 B) FW 마르코 슈체포비치 (→ 마요르카) U-20팀 선수 명단[편집] 올림피아코스 U-20은 올림피아코스의 유소년팀이다. 이 팀은 U-20 수페르리가에 소속되어 있으며[79] UEFA 유스리그 참가 자격을 가지고 있다. U-20팀의 홈구장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렌티 훈련장으로, 피레아스의 렌티에 위치해 있다.[80] 번호 포지션 이름 GK 아리스 블라호스 GK 미할리스 일리아디스 GK 요르고스 스트레조스 DF 아나스타시스 부요우코스 DF 디미트리스 쿠치오스 DF 요르고스 마크로스테르요스 DF 얀니스 소티라코스 DF 아르기리스 투파스 DF 안토니스 바투시아디스 DF 프락시텔리스 부로스 DF 파나요티스 볼로나키스 MF 요르고스 리라스 MF 이오안니스 파이다키스 번호 포지션 이름 MF 디미트리오스 부치오티스 MF 요르고스 카나베타스 MF 얀니 라지 MF 보반 라지치 MF 알렉산드로스 마르가리티스 MF 아힐레아스 나시아코풀로스 MF 안토니스 파파사바스 MF 흐리스토포로스 파살리디스 MF 하랄람보스 렌치스 MF 마놀리스 살리아카스 FW 코스타스 가레팔라키스 FW 일리아스 이그나티디스 FW 니코스 베르고스 과거 선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분류:올림피아코스 FC의 축구 선수입니다. 스태프[편집] 보드진[편집] 올림피아코스의 전 중원사령관이자 현 전술 조언가인 크리스티앙 카랑뵈 지위 성명 회장[81]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총 책임자 얀니스 브렌초스 대표 이사 디미트리스 아그라피오티스 제1 부회장 사바스 테오도리디스 제2 부회장 소크라티스 S. 코칼리스 제3 부회장 게오르게 루바리스 제4 부회장 얀니스 모랄리스 기술 컨설팅 후안 호세 로렌소 전술 조언가 크리스티앙 카랑뵈 스포르팅 디렉터 피에르 이사 팀 매니저 키리아코스 두레카스 코칭스태프 및 의료진[편집] 코칭스태프[82] 감독[83] 비토르 페레이라 수석 코치 필리프 알메이다 루이스 다 실바 안토니오스 니코폴리디스 분석가 요르고스 마르타코스 안토니스 레모나키스 페드루 히베이루 골키퍼 코치 알레코스 란토스 체력 코치 흐리스토스 무리키스 마노스 슴포코스 유소년팀 감독 바실리스 부자스 유소년팀 골키퍼 코치 바실리스 알렉수디스 스카우터[84] 수석 스카우터 후안 호세 로렌소 스카우터 니코스 밤바쿨라스 게오르요스 아마나티디스 디미트리오스 바르발리아스 요르고스 코콜라키스 지우바니 루시아노 가예티 의료진[85] 수석 의료진 흐리스토스 테오스 의료진 니코스 리쿠레시스 알렉시스 카페타나키스 니콜라오스 쿨로풀로스 영양사 마리아 리코미트루 역대 감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올림피아코스 FC 감독 목록입니다. 올림피아코스 역대 회장[편집]   성명 국적 연도 미할리스 마누스코스 1925–1928, 1937–1939, 1945–1950 타나시스 메르미가스 1929–1931, 1953–1954 타키스 자카스 1931, 1936 얀니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32, 1933–1935 얀니스 바르바레소스 1946 요르고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54–1967 코스타스 부자키스 1967–1969 타소스 오이코노무 1969–1970 에우틱시오스 구마스 1970–1971 아리스티데스 스킬리치스 1971 디미트리스 바다니스 1971–1972   성명 국적 연도 니코스 굴란드리스 1972–1975 코스타스 타노풀로스 1975, 1976–1978 페리클리스 라나라스 1975 이라클리스 치찰리스 1978–1979 스타우로스 다이파스 1979–1985, 1986, 1992–1994 니코스 에우티미우 1986 게오르게 코스코타스 1987–1988 아르기리스 살리아렐리스 1988–1992 요르고스 바나사키스 1992–1993 소크라티스 코칼리스 1993–2011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2011– 창립자이자 올림피아코스의 초대 회장, 미할리스 마누스코스 올림피아코스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초기 일원 겸 전 회장 (1954-1967) 이었던 요르고스 안드리아노풀로스 각주[편집] ↑ http://www.uefa.com/MultimediaFiles/Download/StatDoc/competitions/UCL/01/67/63/79/1676379_DOWNLOAD.pdf ↑ “Their full name is Olympiacos Club of Fans of Piraeus. For the sake of sanity, however, you can just call them Olympiacos. Or "Thrylos" once you get to know them. Presentation of Olympiacos F.C. in International Champions Cup's official website: "Olympiacos: The most successful club in Greek football history"”. gazzetta.gr from internationalchampionscup.com. 2014년 2월 22일에 확인함.  ↑ “Olympiacos clinch 40th Greek title”.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Final win completes double for Olympiacos”. UEFA.com. 2013년 8월 24일에 확인함.  ↑ “Final win completes double for Olympiacos”.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Ελληνικό Πρωτάθλημα, Οι Πρωταθλητές Ελλάδας από το 1928 μέχρι σήμερα (그리스 리그 우승팀 목록 1928–2013)” (그리스어). 그리스 축구 협회, epo.gr. 2013년 8월 29일에 확인함.  ↑ “Olympiacos trophies”. Olympiacos.org. 2013년 10월 5일에 확인함.  ↑ “1998–99 Champions League quarter-finals”. UEFA.com. 2013년 8월 27일에 확인함.  ↑ “Olympiacos FC”.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New era in European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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Σε πρόσφατη έρευνα σχετικά με τους περισσότερους οπαδούς, ο ΟΣΦΠ είναι 1ος, 30/06/2009 SPORT24, 15ετής έρευνα του Παντελή Κυπριανού (in Greek) ↑ [1] Archived 2013년 7월 27일 - 웨이백 머신, το 36% (2.016.000) δηλώνουν Ολυμπιακοί, το 30% (1.680.000) Παναθηναϊκοί, Έρευνα της Focus, Οκτώβριος 2005 –Φεβρουάριος 2006, SPORT24, επίσημο blog του sport24 και του αθλητικού συντάκτη Στέλιου Μαρκάκη (그리스어) ↑ H πιο πρόσφατη... «απογραφή»: 36% Oλυμπιακοί (1,677 εκατομμύρια), 30,2% Παναθηναϊκοί Archived 2014년 11월 29일 - 웨이백 머신, Sentragoal, Βαγγέλης Μπραουδάκης (그리스어) ↑ "Red and White" Olympiacos moments in New York, Greek Reporter USA (usa.greekreporter.com), 2011년 6월 4일 ↑ Greek diaspora supports Olympiacos CFP Archived 2013년 10월 29일 - 웨이백 머신, redplanet.gr (그리스어) ↑ Greek side Olympiakos looking forward to playing Melbourne Victory at Etihad Stadium in May. There are thousands of Olympiakos fans in Australia waiting to see our team in action., foxsports.com, 2012년 3월 21일 ↑ "Our Greek fans in Brazil were amazing". Olympiacos won the Intercontinental Cup in Brazil with Spanoulis, Printezis and Mantzaris praising Olympiacos fans from the Greek community in Brazil and thanking them for their support, gazzetta.gr, 2013년 10월 8일 (그리스어) ↑ Olympiacos supporters of the Greek community in Sao Paulo, provided passionate support to Olympiacos basketball team, as they won the Intercontinental Cup, onsports.gr, 2013년 10월 5일 (그리스어) ↑ Olympiacos Club of New York and Greek diaspora honours Olympiacos President Evangelos Marinakis, The National Herald (thenationalherald.com) (그리스어) ↑ Αυτοί είναι οι οπαδοί στην Ελλάδα – Ο Ολυμπιακός έχει τους περισσότερους φιλάθλους στην Ελλάδα, 2012년 6월 26일 Gazzetta (그리스어) ↑ “History of Olympiacos”. 2014년 10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11월 21일에 확인함.  ↑ “Η Ιστορία του Ολυμπιακού” (그리스어). olympiacos.org. 2012년 9월 3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Olympiacos FC History”. olympiacos.org. 2013년 4월 30일에 확인함.  ↑ “Peiraias Regional Championship”. 2009년 3월에 확인함.  ↑ “Olympiakos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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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코스 FC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올림피아코스 FC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본 클럽의 모태 종합클럽에 대해서는 올림피아코스 CFP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올림피아코스 전체 이름 ΠΑΕ ΟΛΥΜΠΙΑΚΟ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παιώς 별칭 Θπύλος (전설) Επυθπόλευκοι (적백) Δαφνοστεφανωμένος (월계관을 씌운) 리그 수페르리가 엘라다 창단 연도 1925년 [3월 10일 구단주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회장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감독 페드루 마르팅스 경기장 그리스 피레아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수용 인원 32,115[1] 웹사이트 http://www.olympiacos.org/ 2018-19 2위 홈 어웨이 서드 최근 시즌 PAE 올림피아코스 (그리스어: ΠΑΕ Ολυμπιακός) 는 흔히 줄여서 올림피아코스, (Ολυμπιακός) 올림피아코스 피레아스 (Ολυμπιακός Πειραιάς) 로 알려져 있으며, 공식명칭이 올림피아코스 신데스모스 필라틀로스 피레아스 (그리스어: Oλυμπιακό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 인 그리스의 프로 축구 클럽이자, 아테네 도시권인 피레아스를 연고로 하는 종합 스포츠 클럽 올림피아코스 CFP의 축구부이다.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으로,[2] 그리스 리그를 41번,[3] 그리스 컵을 26번[4] 우승해 더블을 16번 달성했고,[5] 그리스 슈퍼컵도 4번 우승해 국내대회에서 총 71회의 우승을 거두었고, 모든 부문에서 최다 기록을 내고 있다. 올림피아코스의 압도적인 성공은 다른 그리스 클럽들의 리그 우승 횟수를 합치면 총 37회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6]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리그 최다 연속 우승 기록을 지니고 있는데, 리그 7연패 (알파 에트니키 1996-97 시즌부터 2002-03 시즌) 로 종전의 6연패 (1953-54 시즌부터 1958-59 시즌) 기록을 경신했다.[7] 더 나아가서 파나티나이코스, PAOK와 더불어 그리스 축구 1부리그에서 강등 경험이 없는 세 구단들 중 하나이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8] 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9] 에서 8강에 진출했었다. 또한, 올림피아코스는 유럽 클럽 협회의 창립 멤버이다.[10] 올림피아코스의 홈구장은 피레아스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이다.[11]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으로,[12][13][14][15][16] 국내에 250만명이, 전세계 그리스계 해외 거주민들 중 100만명이 지지하고 있다.[17][18][19][20][21][22] 올림피아코스는 2006년에 4월 기준으로 83,000명의 유료 회원이 등록 되어 유료 회원 수에 따른 클럽 목록에서 9위에 랭크되었다.[23] 2014년, 유료 회원수는 98,000명으로 증가되었다.[24] 올림피아코스는 파나티나이코스와 오랜 기간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두 클럽간의 경기는 영원한 적들의 더비로 불린다. 목차 1 역사 1.1 초창기와 국내 무대에서의 성공 1.2 간간한 성공과 굴란드리스 시대 1.3 성공기 1.4 2010년대 2 문양과 유니폼 3 스폰서와 유니폼 제작사 4 홈구장 5 7번 출입구 참사 6 서포터 6.1 연계 구단 7 응원가 7.1 원문 7.2 발음 7.3 해석 8 라이벌전 9 통계 9.1 유럽대항전 기록 9.1.1 최고 성적 9.1.2 최다 점수차 승리 9.2 리그 기록 10 역대 성적 10.1 국내 대회 10.2 유럽대항전 11 선수 11.1 현재 선수 명단 11.2 임대 선수 명단 11.3 U-20팀 선수 명단 11.4 과거 선수 12 스태프 12.1 보드진 12.2 코칭스태프 및 의료진 13 역대 감독 14 올림피아코스 역대 회장 15 각주 16 외부 링크 역사[편집] 초창기와 국내 무대에서의 성공[편집] 1925년 초창기 팀 노티스 캄페로스는 클럽의 명칭과 문양에 영감을 주었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3월 10일, 피레아스 항에서 창단되었는데,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 (Πειραιάκός Ποδοσφαιρικός Όμιλος) 의 회원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회원들의 병합 결정에 의해 일어났고,[25] 통합된 새 클럽은 고대 올림픽 우승자를 나타내는 문양을 도입했다. 노티스 캄페로스가 올림피아코스 (Ολυμπιακός) 라는 명칭을 제안했고, 미할리스 마누스코스가 현재의 명칭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 (Oλυμπιακός Σύνδεσμος Φιλάθλων Πειραιώς) 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클럽의 명성을 쌓게 해 주고, 현재의 영광으로 이끈건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로,[26] 상류층 가문의 일원이었던 그들은 그리스 전국에 올림피아코스라는 이름을 알렸다.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 중 얀니스, 디노스, 요르고스, 그리고 바실리스가 초창기에 이 클럽에서 활동했다. 5형제들 중 막내였던 레오니다스는 나중에 합류하여 클럽에서 장기간 활동했다. (1927-1935) 클럽의 초창기 공격진은 5형제로 이루어졌고, 이후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올림피아코스는 즉시 지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팀의 팬은 홈구장인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 인근의 노동층을 기반으로 되어 있었고, 이 곳은 현재 홈구장인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으로 옮기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1926년, 1927년에 피레아스 지역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27] 안드레아스 무라티스는 올림피아코스의 상징적인 주장으로 1945년과 1955년 사이 295번의 경기에 출전했다 1926년, 그리스 축구 협회가 창립되었고, 1927-28 시즌에 범그리스 리그가 출범했다. 이 리그가 국내 최초의 전국 리그로, EPSA 리그, (아테네) EPSP 리그, (피레아스) 그리고 EPSM 리그 (테살로니키) 의 지역 우승팀들이 플레이오프에서 국가 리그 타이틀을 걸고 경쟁하였고, 아리스가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범그리스 리그는 이 형식으로 1958-59 시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시즌인 1928-29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협회와의 불화로 인해 불참을 결정했고, 파나티나이코스와 AEK도 올림피아코스의 결정을 따랐다. 같은 시즌, 이 클럽들간 친선전을 치렀고, 중부 그리스 축구 구단 (Ποδοσφαιρικές Ομάδες Κέντρου, Π. Ο. Κ.) 을 조직했다. 범그리스 리그의 4번째 시즌이 1930-31 시즌에 열렸고, 올림피아코스는 이 시즌에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이 우승을 계기로 올림피아코스는 성공기의 개막을 알렸다. 1940년대에 들어, 올림피아코스는 11시즌동안 무려 6번 우승을 거두었고,[26] 1960년대에 들어서는 23시즌 안에 15번의 리그는 물론 그리스 컵도 9번 거미쥐었다. 1950년대 전설적인 올림피아코스 팀은 안드레아스 무라티스, 일리아스 로시디스, 코스타스 폴리흐로니우, 타나시스 베비스, 일리아스 이판티스, 바비스 코트리디스, 요르고스 다리바스, 바비스 드로소스, 그리고 사바스 테오도리디스로 구성되었고, 1953-54 시즌과 1958-59 시즌까지 리그 6연패를 달성한 것은 물론, 1956-57 시즌, 1957-58 시즌, 그리고 1958-59 시즌에는 컵도 들어올려 그리스 축구에 전례 없는 업적을 달성했다. 올림피아코스가 수많은 우승을 거둔 1950년대를 기점으로, 클럽은 "전설" (Θρύλος, 트릴로스로 발음) 이라는 별칭을 획득했다.[26][28] 간간한 성공과 굴란드리스 시대[편집] 전설적인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 (왼쪽부터) 얀니스, 디노스, 요르고스, 바실리스, 그리고 레오니다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28년 올림피아코스 선수단 국내 1부 리그인 알파 에트니키 (Α΄ Εθνική) 가 출범했고, 1959-60 시즌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나, 60년대와 70년대는 올림피아코스가 그리 많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시대로, 리그를 2회, 컵을 6회 우승하는데 그쳤다. 1972년, 니코스 굴란드리스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다. 그는 라키스 페트로풀로스를 감독으로 내정하고, 게오르요스 델리카리스, 이브 트리안타필로스, 훌리오 로사다, 밀톤 비에라, 미할리스 크리티코풀로스, 로맹 알지루대, 마이크 갈라코스, 라키스 글레조스, 코스타스 다불리스, 이오아니스 키라스타스, 그리고 페터 페르시디스와 같은 톱클래스 선수들을 영입했다. 굴란드리스 회장의 임기에, 올림피아코스는 1972-73 시즌부터 1974-75 시즌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같은 시기에 컵도 3연패를 달성했다.[26] 이 시기에 최고의 해는 1973-74 시즌으로 손꼽히는데, 올림피아코스는 이 시즌에 최다 승점 (59점) 과 최다 득점 (102골) 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1975년, 굴란드리스가 회장직에서 사임한 후, 팀은 1970년대말에 상대적으로 많은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초, 리그가 프로 리그로 전향되자, 올림피아코스는 또다시 그리스 축구에서 압도적인 존재로 부상했는데, 리그 4연패 (1979-80 시즌, 1980-81 시즌, 1981-82 시즌, 1982-83 시즌) 를 거두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공격수 니코스 아나스토풀로스, 미드필더 타소스 미트로풀로스, 그리고 니코스 사르가니스 수문장이 있었다. 그리스 국가대표팀과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알케타스 파나굴리아스는 팀을 1981년과 1983년 사이와 1986-87 시즌에 지휘하여 1981-82 시즌, 1982-83 시즌, 그리고 1986-87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26] 올림피아코스는 1980년대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암흑기를 보냈다. 80년대 중반,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사업가 게오르게 코스코타스가 휘어잡았으나, 나중에 횡령 혐의로 고발되고 유죄 선고가 내려졌으며, 올림피아코스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라운드에서, 팀은, 세심한 경영 없이 1987-88 시즌부터 1995-96 시즌까지 9시즌을 리그 무관으로 보냈다. 이 시기는 올림피아코스의 암흑기로 불리며,[29] 이중 1987-88 시즌은 올림피아코스 최악의 시즌으로, 팀은 리그를 8위로 마감했다. 성공기[편집] 올림피아코스의 성공기는 국제 무대의 거물 선수들인 즐라트코 자호비치, 지우바니, 그리고 FIFA 월드컵 챔피언 히바우두와 크리스티앙 카랑뵈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리그 7연패를 달성하며, 종전에 선배들이 달성한 6연패의 기록을 넘었으며, 1998-99 시즌에는 두샨 바예비치 감독의 지도 하에 더블을 달성하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유럽대항전 최고 성적인 8강 진출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바예비치가 1999년에 경질 당했고, 이어지는 시기 (1999년에서 2004년) 동안, 올림피아코스는 무려 8명의 감독을 교체했다. 이들 중에는 이오아니스 마추라키스, 타키스 레모니스, 트론 솔리에, 올레흐 프로타소우, 그리고 시니샤 고기치가 있었다. 잦은 감독 교체와 수뇌부의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올림피아코스는 감독을 세번 교체해 준우승을 거두었던 2003-04 시즌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우승을 거두었다. 2004년, 올림피아코스는 두샨 바예비치를 다시 감독으로 재선임하였고, 1999년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히바우두를 영입했다. 시즌 종료 후,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더블을 거두었으나, 바예비치는 사임했다. 그의 자리는 노르웨이의 트론 솔리에가 재선임되면서 대체되었다.[30] 클럽은 라이벌 구단 파나티나이코스에서 키프로스 스트라이커 미할리스 콘스탄티누를 영입했다. 2005-06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1972-73 시즌 이래 처음으로 주 라이벌인 파나티나이코스와 AEK와의 주요 라이벌 경기에서 모두 이겼다. 올림피아코스는 이 4번의 경기에서 11득점 3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그리스 컵 결승전에서는 AEK를 3-0으로 꺾으면서 2시즌 연속 더블을 달성했고, 리그 16연승 기록을 세워, 클럽 선배들이 세웠던 종전 기록을 경신했다. 기록을 경신한 시즌 후, 2006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트론 솔리에는 7명의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러나, 솔리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2006-07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2006년 말에 타키스 레모니스에게 지휘봉을 내 주었다. 레모니스는 영건 바실리스 토로시디스를 클럽으로 데려 왔고, 비록 레모니스가 올림피아코스의 리그 3연패를 달성하게 했으나, 그리스 컵에서 PAS 얀니나에게 충격패를 당해 탈락하면서 컵대회 우승에 실패했다. 프레드라그 조르제비치는 올림피아코스에서 12차례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는 기록을 세웠고, 344경기에 출전해 126골을 득점해 클럽의 외국인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히바우두 2007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다르코 코바체비치와 루시아노 가예티를 고액에 영입하였고, 스트라이커 겸 미드필더인 네리 카스티요를 우크라이나 클럽 샤흐타르 도네츠크에 €20M에 매각해 그리스 축구 역사상 최고액 이적료 기록을 세웠다.[31] 카스티요의 계약 조항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15M을 받았고, 나머지 €5M은 선수에게 즉시 주어졌다.[32] 더 나아가, 올림피아코스 성공에 히바우두가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크게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피아코스가 선수와의 재계약을 원치 않으나, 히바우두와 클럽 사이에 논란이 불거졌다. 일리야 이비치 클럽의 전 선수가 팀의 축구 디렉터로 취임했다. 팀은 그리스 리그에서 실망적인 시작을 했으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에서 조 1위를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와 승점에서 11점으로 동률을 이르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33] 그러나, 팀은 리그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는데,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첼시에게 패한 것과 엮여서 소크라티스 코칼리스 구단주가 타키스 레모니스 감독을 경질하게 이르었고, 팀의 수석코치였던 호세 세구라가 시즌 잔여 기간동안 감독직을 대행했다. 비록 올림피아코스가 리그와 컵 더블을 달성했으나, 세구라는 본래 지위인 수석 코치직으로 복귀했다. 2008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지오구 루이스 산투, 아브람 파파도풀로스, 그리고 두두 세아렌세를 영입하고, 에르네스토 발베르데와 €6M짜리 3년 계약을 체결하고 새 감독으로 내정했다.[34] 2008-09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부진하게 시즌을 시작했는데, 초반의 공식경기 몇경기를 패하였는데, 아노르토시스 파마구스타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전에서 패해 UEFA컵 1라운드로 내려앉았는데, 여기서 올림피아코스는 노르셸란을 꺾고 조별 리그에 진출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수페르리가 엘라다 2008-09에서의 우수한 활약을 바탕으로 홈경기에서 매번 승리했으나, 원정 경기에서 고전했다. 홈경기에서 UEFA컵 경기를 훌륭히 치른 후, 팀은 32강에 진출해 프랑스의 생테티엔을 상대했다. 2009년 여름, 올림피아코스는 유벤투스의 올로프 멜베리를 €2.5M에,[35] 잉글랜드 스트라이커 맷 더비셔를 블랙번 로버스에서, 미드필더 자우아드 자이리를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에서, 그리고 엔초 마레스카를 세비야에서 영입했다. 많은 선수들이 임대에서 복귀했는데, 예를 들어 게오르요스 카치코얀니스, 전 레알 마드리드 수비수 라울 브라보, 그리고 아르헨티나 미드필더 크리스티안 라울 레데스마가 있었다. 올림피아코스는 브라질 전설 지쿠를 감독으로 내정해 2009-10 시즌을 성공적으로 시작했으며, 다수의 1군 선수들을 부상으로 잃고 임했으나, H조에서 조 선두 아스널에 승점 3점을 밀려 2위로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행에 성공했다.[36] 팀은 16강에서 보르도를 상대해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0-1로 패했다. 2차전에서, 보르도가 초반에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올림피아코스는 동점골을 넣었고, 추가골 찬스를 번번히 놓치나가, 막판 실점으로 패했다. (1-2) 국내 무대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라이벌 구단 파나티나이코스와의 더비전에서 콘스탄티노스 미트로글루의 2골에 힘입어 2-0으로 이겼다.[37] 2010년대[편집] 미첼은 2013-14 시즌에 리그 역대 최단기간 우승을 달성했다. 케빈 미라야스 2010년, 운송업의 거물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가 소크라티스 코칼리스로부터 팀을 인수했다. 마리나키스는 회장 임기 원년에 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에르네스토 발베르데를 감독으로 재선임했고, (발베르데는 1기에서처럼 2기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선수들인 알베르트 리에라, 아리엘 이바가사, 케빈 미라야스, 마르코 판텔리치, 그리고 프랑수아 모데스토를 영입했다. 그 결과 올림피아코스는 2위 파나티나이코스를 무려 13점차로 제치고 수페르리가 통산 38회 우승을 거두었다. 2011-12 시즌, 장 마쿤, 파블로 오르바이스, 이반 마르카노, 라피크 제부르, 그리고 자멜 압둔 등의 선수로 선수단을 강화했고, 에르네스토 발베르데가 2년 사령탑을 맡으면서,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수페르리가와 그리스 컵을 모두 우승하면서 통산 15번째 국내 더블을 달성했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아스널, 마르세유, 그리고 도르트문트로 구성된 F조에 편성되어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아스널과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홈에서 승리 (각각 3-1의 점수로 승리) 를 거두어 F조에서 9점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세유가 도르트문트 적지에서 펼친 6라운드 경기에서 0-2로 밀렸다가 막판 5분에 2골로 논란의 2-3 역전승을 거두면서 16강 진출이 안타깝게 좌절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UEFA 유로파리그에 계속 출전하여 루빈 카잔을 상대했다. 그리스 챔피언은 러시아 클럽을 상대로 2연승 (카잔과 피레아스에서 모두 1-0으로 승리) 을 거두고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와 16강에서 붙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1차전에서 다비드 푸스테르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이겼으나, 2차전에서 초반 선제골을 넣고도 수 차례 골찬스를 날리면서 (전반전에 골대를 두번 맞추었다) 막판 9분에 2골을 실점하고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올로프 멜베리 시즌 종료 후, 에르네스토 발베르데는 스페인 복귀 결정을 내려, 올림피아코스에서의 성공적인 2시즌을 마무리했다. 클럽은 포르투갈의 리우나르두 자르딩을 신임 감독으로 앉혔다. 팀은 그리스 리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B조에서 아스널전 (2-1 홈) 및 몽펠리에전 (2-1 원정) 승리로 9점을 모으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리우나르두 자르딩은 스페인 국적의 감독이자 레알 마드리드 전설 미첼에게 지휘봉을 내주어야 했다. 팀은 2위 PAOK를 15점 차로 제치고 40번째 그리스 리그 우승을 거두고,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와의 결승전에서 승리로 26번째 그리스 컵 우승을 거두면서 16번째 더블을 이룩했다. 올림피아코스는 40번째 그리스 리그 우승으로 클럽, 특히 팬들의 목표였던 4번째 별을 클럽 문양 위에 달게 되었다. 조엘 캠벨, 로베르토, 알레한드로 도밍게스, 블라디미르 베이스, 델빈 은딩가, 레안드루 살리누,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하비에르 사비올라를 영입하면서 2013-14 시즌의 기대치는 매우 높았다. 올림피아코스는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벤피카, 파리 생제르맹, 안데를레흐트와 함께 UEFA 챔피언스리그 2013-14에서 C조에 편성되었다. 조별 리그가 끝난 후, 올림피아코스는 승점 10점을 적립해 벤피카 (피레아스에서 1-0 승리, 리스본에서 1-1 무승부) 와 안데를레흐트 (브뤼셀에서 3-0 승리, 피레아스에서 3-1 승리) 를 너머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 올림피아코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격돌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인상적인 활약으로 1차전에서 2-0으로 편안한 승리 (도밍게스 38분, 캠벨 55분) 를 거두었는데, 같은 경기에서 분위기를 지배하고 골찬스를 놓치고도 두골차 리드를 가졌다. 이 2골의 이점을 지키지 못하고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 0-3으로 패했고, 40분에 골찬스를 또 놓치면서 1999년 이래 사상 최초의 8강행을 앞두고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그리스 챔피언은 막판 10분에 원정골을 기록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별 무효과였다. 비록 8강 진출권을 손앞에서 놓쳤으나, 올림피아코스는 시즌 내내 우수한 활약을 펼치며 6년 안에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전 (16강) 진출을 3번 (2007-08 시즌, 2009-10 시즌, 2013-14 시즌) 달성해, 유럽 무대에서 성공했다. 국내 무대에서, 올림피아코스는 2위 PAOK를 17점차로 제치고 역사적인 41번째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문양과 유니폼[편집] 2008-09 시즌의 올림피아코스 유니폼 1925년, 피레아스의 두 클럽인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이 합병되었을 때,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도덕성, 경쟁심, 그리고 광채로부터 영감을 받아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으로 명명되었다. 그 결과 ,클럽은 월계관을 쓴 청소년을 문양으로 도입했고, 이는 올림픽 우승자를 상징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의 작은 변화를 거쳤다. 적색과 백색은 문양의 색상으로 사용된다. 적색은 열정을, 백색은 도덕성을 상징한다.[38][39] 팀의 유니폼은 흔히 적색과 백색의 세로 줄무늬로 되어 있으며, 적색 하의와 백색 양말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유니폼은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했는데, 주로 유니폼의 줄무늬 두께에 변화가 있었다. 그 다음 흔하게 사용된 유니폼은 올 적색이나 올 백색의 유니폼이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세월을 거쳐 원정 유니폼과 써드킷에 다른 색상들을 사용해 왔고, 가장 인상적으로 꼽히는 유니폼은 흑색이나 은색 유니폼이다. 가장 흔했던 올림피아코스의 당시 유니폼은 아래와 같다. (하단의 연도는 해당 유니폼이 사용된 연도를 의미한다) 1950 1978 1979 1985 2000–01 2008–09 2009–10 2010–11 2013–14 스폰서와 유니폼 제작사[편집] 그리스에서 축구가 프로화된 1979년을 기점으로, 올림피아코스는 1982년 이래 특정 유니폼 제작사와 계약을 시작했고, 다음과 같은 유니폼 제작사를 두었다. 다음 차트는 유니폼 제작사와 스폰서의 역대 변천사를 나타낸다: 유니폼 제작사 연도 제작사 1979 엄브로 1980 푸마 1980–1984 아식스 타이거 1984–1992 푸마 1992–1993 엄브로 1993–1994 로토 1994–1995 아디다스 1995–2000 푸마 2000–2005 엄브로 2005–2015 푸마 2015– 아디다스 스폰서 연도 스폰서 1982–1983 피아트 1984 트래블 플랜 1984–1988 시티즌 홀딩스 1988 도요타 1989 크레타 은행 1989–1990 아테네 '96 1990–1994 디아나 1994–1997 에트노카르타 마스터카드 1997–2000 아스피스 프로노이아 2000–2005 지멘스 모바일 2005–2006 지멘스 2006–2009 보다폰 2009–2010 씨티 은행 2010–2013 파메 스토익시마 2013– 유니세프 홈구장[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입니다. 올림피아코스와 아스널간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경기 (1-0) 를 앞둔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그리스어: Γήπεδο Γεώργιος Καραϊσκάκης) 은, 그리스 피레아스의 팔리로 구에 위치해 있으며, 올림피아코스의 전통적인 홈구장이자 현재 홈구장이다. 그리스 독립 전쟁 영웅인 게오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의 이름을 땄으며, 올림피아코스의 대부분 홈경기를 유치했다.[40] 1895년, 이 경기장은 아테네에서 열린 1896년 하계 올림픽의 사이클 경기를 열기 위한 경륜장으로 개장되었다. 공식 경기장 명칭은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 (그리스어: Ποδηλατοδρόμιο Νέου Φαλήρου) 으로, 피치가 자전거 경륜트랙으로 둘러쌓였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창립할때를 기점으로 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64년, 경기장이 리모델링 된 후,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2003년까지 그라운드 주변에 육상 / 경륜 트랙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41]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장으로, 1969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와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1971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 경기를 주최했다.[42] 올림피아코스는 1984년에 잠시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을 떠나, 홈경기를 새로 지어진 스피로스 루이스에서 치르기도 했다. 5년동안 그리스 최대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른 클럽은 전통적인 홈구장으로 복귀해 1997년까지 사용했다. 그 후, 올림피아코스는 스피로스 루이스로 다시 돌아가 또다시 그곳에 5년을 머물렀다. 2002년, 스피로스 루이스가 2004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리모델링을 목적으로 폐장됨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아폴론 스미르니의 홈구장인 아테네 리주폴리 구의 게오르요스 카마라스 경기장으로 이전해 2년을 머물렀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은 황폐해진채 2003년 4월에 올림피아코스에 넘겨졌다. 클럽은 그 자리에 축구 전용 구장을 지을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 구장은 2004년 하계 올림픽의 축구 경기를 주최했다.[43]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올림피아코스는 2052년까지 경기장의 전적인 사용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보수비를 모두 충당하며 주 정부에 수익의 15%를 지불하게 되었다. 구 홈구장은 2003년 봄에 철거되었고, 새 구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14개월이라는 기록적인 기간이 소요되었다. 경기장은 €60M의 가격을 들여 2004년 6월 30일에 완공되었다.[44] 현재,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구장들 중 하나로, 올림피아코스 박물관[45] 과 여러 시설을 운영한다. 7번 출입구 참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참사입니다.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과 올림피아코스는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참사로 그리스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경험했다. 1981년 2월 8일, 올림피아코스는 AEK와의 리그 홈경기를 치러, 전례 없는 피레아스 연고 홈팀의 6-0 대승으로 끝냈다. 경기 막판, 7번 출입구 인근의 올림피아코스 팬들 수천명이 경기장 정문으로 가 선수들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출입구를 향해 썰물같이 빠져나갔는데, 문은 거의 폐쇄된 구조의 회전문이 놓여 출구로 나가기 어려운 형태였다.[46]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스탠드에서 계속 내려오는 와중에, 위에서는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결국 7번 출입구는 죽음의 함정이 되었다. 아래쪽의 사람들이 눌리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중상을 당했으며, 21명의 젊은이들이 사망했는데, 이들의 사망 주 원인은 질식이었다.[47] 서포터[편집] 7번 출입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홈경기는 물론이고 원정 경기에서도 극도의 열정을 불어넣는다. 이 사진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홈에서 첼시를 상대한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의 토너먼트전 당시 촬영되었다. 베오그라드 스타디온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촬영된 벽화로, 올림피아코스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간의 형제같은 우애를 상징한다. 올림피아코스의 전통적인 팬층은 클럽의 연고지인 피레아스 시를 연고로 하며, 아테네의 일부 지역도 포함한다. 클럽의 인기는 1950년대에 여러번 연거푸 우승하며 다수의 기록을 깨면서 인기가 치솟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축구 클럽으로 떠오르게 했다. 전통적으로, 올림피아코스는 본래 노동층을 대표했으나, 클럽은 모든 사회 계층으로부터 팬을 불러 모았으며, 현재 팬층은 특정 사회 계층을 기반으로 두지 않는다.[48][49] UEFA에 따르면 올림피아코스는 가장 인기있는 그리스 클럽이며,[12] 다수의 설문조사와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50][51] 몇몇 신문과 잡지에서 주최한 설문 조사에서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최고의 인기 클럽이라는 결과를 냈고, 백분율로 전체 팬들의 29%에서 37%를 오고가며, 전체 인구의 20.3%에서 29.3%를 오고 가는데, 이 자료를 토대로 올림피아코스의 그리스 국내 팬들 수는 약 250만명으로 추산된다.[14][52] 이 클럽은 피레아스에서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으며, 시 인구의 절반이 올림피아코스를 지지하며,[53] 한편 아테네 전체에서도 지지하는 팬의 비율이 45.1%에 육박하는데, 그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수도권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이다.[54] 올림피아코스는 노동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이기도 하며, 모든 연령대를 통틀어 37%가 지지하고,[53]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 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55] 대부분의 팬들이 중도좌파이거나 중도우파의 정치성향을 나타낸다.[53] 아테네 수도권 외에서도, 올림피아코스는 중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테살리아, 에게 해 제도, 그리고 이오니아 제도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다.[56] 더 나아가서,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에서 역대 최다 평균 관중수 기록을 지니고 있는데,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역대 시즌들 중 대부분 올림피아코스가 이 부문에서 최고를 찍었다.[57] 2006년, 올림피아코스는 전세계에 최다 유료 회원수를 보유한 상위 10개 클럽들 중에 하나로 이름을 올렸고, 이 부문에서 9위로, 레알 마드리드보다 한 순위 높았다.[58] 2006년 4월 기준, 클럽의 등록된 유료 회원 수는 83,000명이었다.[59] 올림피아코스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팬들은 깊은 친선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서로를 정교회 형제라고 부른다. 대개, 몇몇의 올림피아코스 팬클럽의 팬들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경기를 참관하기도 하는데, 특히 파르티잔과의 경기를 참관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정교회 형제들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팬들을 동맹으로 합류시키려 한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팀에 대해 열정적이고 강렬한 지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홈 경기의 분위기는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UEFA컵 2004-05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할 때, 영국 방송 채널 5에서 중계할때, 객원 해설가이자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토니 코티는 지속적으로 분위기가 어떤지에 대해 언급했다. 경기에서 그는 이 경기장이 가장 분위기가 있는 경기장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양한 곳에 대해 들어보고 그곳의 분위기는 실제로 가보면 실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곳은 진짜 [분위기를 느끼는 것 이상을 체감하는] 그곳입니다."[60] 경험많은 체코 국가대표 윙어인 야로슬라프 플라실은 보르도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원정을 앞두었을때 올림피아코스 팬들이 홈경기 팬들이 조성하는 적대적인 분위기에 대해 한번 더 증명했는데, 모나코 시절의 경기를 짚으며 다음과 같의 표의했다: "이곳에서 저는 경기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상을 주는 분위기를 경험했고, 이곳은 우리에게 지옥과 같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들의 응원은 홈팀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61] 파리 생제르맹의 간판 스트라이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2013년 9월 17일자 올림피아코스-파리 생제르맹 경기 후, 올림피아코스 팬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환상적인 관중들 앞에서 활약합니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놀라웠습니다. 제 동료 올로프 멜베리가 여기서 활약했었고, 그는 서포터에 대해 이야기한적 있습니다. 저는 실감하지 못했으나, 이제 이해합니다. 놀랍습니다. 이는 올림피아코스에게 홈경기에서 크게 유리한 점입니다.[62][63] 파리 생제르맹의 억만장자 구단주 나세르 알-켈라이피는 다음과 같이 표의했다: 저는 이곳 팬들에게 큰 존경심을 표합니다. 저는 올림피아코스 팬들과 같은 팬들을 인생에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64] 연계 구단[편집]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65][66]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응원가[편집] 올림피아코스의 공식 응원가는 "경기장의 전설" (그리스어: Θρύλε των γηπέδων) 이라고도 불리며, 피레아스 연고의 종합 스포츠 클럽 올림피아코스 CFP의 많은 부서에서 불린다.[67] 작사는 그리스 작곡가인 코스타스 킬리만초스가 했고, 작곡은 스피로스 발사마키스가 했다.[68] 이 응원가를 처음 부른 사람은 흐리스타키스 볼리오티스이다. 역사적으로, 올림피아코스의 첫 응원가는 1931년 미미스 바실리아디스가 작사하고 얀고스 라우타리스가 작곡했다. 이 곡은 행진곡 형식이며 축구 경기 형식에 더 가깝개 유래되었다. 원문[편집] Θρύλε των γηπέδων Ολυμπιακέ δαφνοστεφανωμένε μεγάλε και τρανέ έχεις δύναμή σου Ολυμπιακέ τον πύρινό σου κόσμο που δε λυγά ποτέ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Δόξα στα παιδιά σου Ολυμπιακέ χιλιοτραγουδισμένε, στον κόσμο ξακουστέ. Τρέμουν στ' άκουσμά σου Ολυμπιακέ κι ακόμα σε θυμούνται η Σάντος κι ο Πελέ.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Ολυμπί- Ολυμπί- Ολυμπιακέ ομάδα ομαδάρα μου, μεγάλη μου αγάπη, Ολυμπιακάρα μου. 발음[편집] Thýle ton gipédon Olympiaké dafnostefanoméne megále kai trané écheis dýnamí sou Olympiaké ton pýrinó sou kósmo pou de lygá poté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Dóxa sta paidiá sou Olympiaké chiliotragoudisméne, ston kósmo xakousté. Trémoun st' ákousmá sou Olympiaké ki akóma se thymoúntai i Sántos ki o Pelé.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Olympí- Olympí- Olympiaké omáda omadára mou, megáli mou agápi, Olympiakára mou. 해석[편집] 경기장의 전설 올림피아코스 월계관을 쓰고, 영광스럽고 위대하며, 당신의 힘은 당신의 열광적인 팬들 한치 양보없는, 항복하지 않는.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당신의 자식들에게 영광을, 올림피아코스 당신에게 천곡을 불렀네, 당신은 전세계에서 유명하네. 모두가 당신의 이름에 벌벌 떠네 펠레와 산투스도 당신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올림피- 올림피- 올림피아코스 나의 최고이자 가장 큰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나의 위대한 올림피아코스. 라이벌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영원한 적들의 더비 및 올림피아코스-PAOK 경쟁입니다. 라이벌 파나티나이코스와의 경기에서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내의 올림피아코스 팬들 전통적으로, 올림피아코스의 주 라이벌은 파나티나이코스이며, 이들을 상대하는 경기는 영원한 적들의 더비로 불리며, 아테네 수도권 지역과 그리스 축구의 대표적인 고전 라이벌전이다.[69] 두 팀은 그리스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들이자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들로, 이 라이벌전은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지역적 차이의 지표이다. 현재 두 클럽들간의 차이가 옅어지고 팬층이 비슷하게 되었으나, 올림피아코스는 전통적으로 항구 도시인 피레아스의 노동층을 대표하는 반면, 파나티나이코스는 아테네의 상류층 사회를 대표했다.[48][49] 두 팀은 그리스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들로 도합하여 61번의 우승을 거두었으며, 그에 따라 이들간의 라이벌전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70] 두 팀간의 증오가 매우 강렬해서, 아테네 수도권 지역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곤 했는데, 특히 더비전 전후로 경향이 두드러졌다. 2007년 3월 29일, 22세의 파나티나이코스의 팬이 올림피아코스와 파나티나이코스간의 여자 배구 경기가 당일 예정되었던 아테네 인근의 마을인 파이아니아에서 두 훌리건 단체간의 경기전에 계획된 패싸움으로 인해 찔려 숨진채 발견되었다. 이 사태는 그리스 전국의 분노를 샀고, 대규모 서포터 현장에서 대대적인 경찰 수사를 착수하게 했으며, 그리스의 모든 스포츠 활동이 2주간 중단되었다.[71][72][73] 2012년 더비전은 휘발 폭탄, 홍염, 그리고 미사일이 스피로스 루이스의 팬들과 경찰에게 투척되어 일부가 불에 붙어 경기를 중단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올림피아코스의 주요 라이벌로는 AEK도 있는데, 근접성과 그라운드에서의 팽팽한 경쟁으로부터 유발되었다.[74] 올림피아코스와 PAOK간의 경쟁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올림피아코스가 PAOK의 상징적인 선수인 요르고스 쿠다스를 영입하려는 데에서 야기되었다. 두 클럽간의 라이벌 관계는 그리스의 가장 큰 두 개의 도시 권역인 아테네 수도권과 테살로니키권 간의 경쟁에서도 유발되었다.[75] 올림피아코스의 라이벌로는 피레아스의 제 2구단으로 불리는 에트니코스 피레아스가 있으나, 에트니코스 피레아스가 그리스 축구 1부리그에서 강등당한 이래 둘 간의 맞대결이 열리지 않았다. 통계[편집] 유럽대항전 기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유럽의 올림피아코스 FC입니다.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첼시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 16강 2차전을 앞두고 도열한 올림피아코스 선수들. 올림피아코스는 UEFA 주관 대회에 오랫동안 출전한 기록이 있으며, 1959년 9월 13일, 밀란과의 유러피언컵 1959-60 경기에서 데뷔했다. 그러나, 올림피아코스는 유러피언컵 1958-59의 예선 라운드에서 베식타시를 상대할 예정이었으나, 기권했다.[76] 2010년 2월 23일, 보르도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16강 1차전 경기에서 200번째 유럽대항전 경기를 자축했다. 올림피아코스는 유럽대항전 2라운드에 진출한 최초의 그리스 클럽으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3-64에서 폴란드의 자그웽비에 소스노비에크를 제압했다. 클럽의 유럽대항전 최고 성적은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의 8강으로, 유벤투스에 패해 탈락했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에서도 8강에 진출했으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패하였다. 유럽대항전에서, 올림피아코스는 홈경기에서 강한 경향을 보인다. 이는 최다경기 무패 행진에서 증명되는데, 특히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격파해 올림피아코스는 홈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잡은 첫 그리스 클럽이 되었고, 같은 대회에서 현재 형식 도입후로는 5연속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 기록도 세웠다. 더 나아가서, 올림피아코스는 홈에서의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 2002-03에서 전 시즌 준우승팀 레버쿠젠을 상대로 6-2의 충격적인 대승을 거두었으며, UEFA컵 2008-09에서는 노르셸란전 5-0 승리, 벤피카전 5-1 승리, 그리고 헤르타 BSC전 4-0 승리로 3연속 4점차 이상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최고 성적[편집] 시즌 업적 비고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 8강 유벤투스에 패해 탈락, 토리노에서 1-2, 아테네에서 1-1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92–93 8강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패해 탈락, 피레아스에서 1-1, 마드리드에서 1-3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1989–90 16강 오세르에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 피레아스에서 1-1, 오세르에서 0-0 2004–05 16강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패해 탈락, 피레아스에서 1-3, 뉴캐슬에서 0-4 2011–12 16강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에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 하르키우에서 1-0, 피레아스에서 1-2 최다 점수차 승리[편집] 시즌 경기 점수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2002–03 올림피아코스 – 레버쿠젠 6–2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8–69 올림피아코스 – 던펌린 애슬레틱 3–0 1986–87 올림피아코스 – 우니온 룩셈부르크 3–0 1986–87 우니온 룩셈부르크 – 올림피아코스 0–3 1992–93 초르노모레츠 오데사 – 올림피아코스 0–3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2008–09 올림피아코스 – 노르셸란 5–0 2010–11 베사 카바여 – 올림피아코스 0–5 2010–11 올림피아코스 – 베사 카바여 6–1 리그 기록[편집] 부문 기록 최다 점수차 승리 11–0 (포스티라스전, 1973–74 시즌) 한 시즌 최다승 30승 (1999–2000 시즌) 한 시즌 최다골 102골 (1973–74 시즌) 한 시즌 최소실점 13실점 (1972–73 시즌) 최다 연승 기록 16연승 (2005–06 시즌 8라운드 – 2005–06 시즌 23라운드) 최다 경기 무패 기록 58경기 (1972–73 시즌 3라운드 – 1973–74 시즌 27라운드) 역대 성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올림피아코스 FC의 수상 실적입니다. 국내 대회[편집] 범그리스 리그 / 알파 에트니키 / 수페르리가 엘라다 우승 44회 (기록) 우승: 1930-31, 1932-33, 1933-34, 1935-36, 1936-37, 1937-38, 1946-47, 1947-48, 1950-51, 1953-54, 1954-55, 1955-56, 1956-57, 1957-58, 1958-59, 1965-66, 1966-67, 1972-73, 1973-74, 1974-75, 1979-80, 1980-81, 1981-82, 1982-83, 1986-87, 1996-97, 1997-98, 1998-99, 1999-2000, 2000-01, 2001-02, 2002-03,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8-09, 2010-11, 2011-12, 2012-13, 2013-14, [[2014- 15]], [[2015-16]], [[2016-17]] 그리스 컵 우승 27회 (기록) 우승: 1946-47, 1950-51, 1951-52, 1952-53, 1953-54, 1956-57, 1957-58, 1958-59, 1959-60, 1960-61, 1962-63, 1964-65, 1967-68, 1970-71, 1972-73, 1974-75, 1980-81, 1989-90, 1991-92, 1998-99, 2004-05, 2005-06, 2007-08, 2008-09, 2011-12, 2012-13, [[2014-15]] 더블 달성 17회 (비공식 기록) 1946-47, 1950-51, 1953-54, 1956-57, 1957-58, 1958-59, 1972-73, 1974-75, 1980-81, 1998-99, 2004-05, 2005-06, 2007-08, 2008-09, 2011-12, 2012-13, 2014-15 그리스 슈퍼컵 우승 4회 (기록) 우승: [[1980]], 1987, 1992, 2007 대그리스 컵 3회 우승 (기록) 우승: 1969, 1972, 1976 유럽대항전[편집] 발칸컵 1회 우승 우승: 1963 선수[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2015년 1월 28일 기준[77] 번호 포지션 이름 2 MF 이오아니스 마니아티스 (주장) 3 DF 알베르토 보티아 5 MF 루카 밀리보예비치 (안데를레흐트에서 임대) 6 MF 이브라힘 아펠라이 (바르셀로나에서 임대) 8 MF 델빈 은딩가 (모나코에서 임대) 9 MF 지미 두르마즈 10 MF 알레한드로 도밍게스 11 MF 파이팀 카사미 12 FW 프랑코 하라 14 DF 오마르 엘랍델라위 16 GK 로베르토 (삼주장) 17 FW 디미트리스 디아만타코스 18 MF 안드레아스 부할라키스 19 MF 다비드 푸스테르 (부주장) 20 DF 코스타스 얀눌리스 22 GK 안드레아스 얀뇨티스 23 DF 디미트리스 시오바스 번호 포지션 이름 24 DF 타소스 아블로니티스 25 MF 코스타스 포르투니스 26 DF 아르튀르 마쉬아퀴 27 FW 호르헤 베니테스 28 FW 니코스 베르고스 29 DF 프락시텔리스 부로스 30 DF 레안드루 살리누 33 GK 엘레프테리오스 후테시오티스 34 MF 마놀리스 살리아카스 42 GK 메제리 벌라주 45 DF 펠리피 산타나 (샬케 04에서 임대) 60 MF 압디살람 이브라힘 67 DF 안토니스 바투시아디스 72 GK 게오르요스 스트레조스 77 MF 마티외 도세비 MF 야야 투레 임대 선수 명단[편집] 2015년 1월 8일 기준[78] 번호 포지션 이름 DF 바실리오스 카라구니스 (→ 레지나) DF 마놀리스 차나카키스 (→ 에르고텔리스) DF 하랄람보스 리코얀니스 (→ 에르고텔리스) DF 콘스탄티노스 블라호스 (→ 포스티라스) DF 레안드루 (→ 라미아) MF 상부 야타바레 (→ 갱강) MF 알렉산다르 카타이 (→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MF 사샤 즈뎰라 (→ OFK) MF 마르코 얀코비치 (→ OFK) MF 펠레 (→ 레바디아코스) MF 니코스 카타리오스 (→ 파니오니오스) 번호 포지션 이름 MF 디미트리스 콜로보스 (→ 파니오니오스) MF 콘스탄티노스 플레가스 (→ 파나하이키) MF 디미트리스 시오피스 (→ 포스티라스) MF 네일로스-아겔로스 시호요스 (→ 함부르크 II) MF 파나요티스 블라호디모스 (→ 님 올랭피크) FW 아나스타시오스 카라마노스 (→ 아트로미토스) FW 니콜라오스 이오안니디스 (→ 도르트문트 II) FW 마이클 올라이탄 (→ 에르고텔리스) FW 다비트 헤넌 (→ 에버턴 B) FW 마르코 슈체포비치 (→ 마요르카) U-20팀 선수 명단[편집] 올림피아코스 U-20은 올림피아코스의 유소년팀이다. 이 팀은 U-20 수페르리가에 소속되어 있으며[79] UEFA 유스리그 참가 자격을 가지고 있다. U-20팀의 홈구장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렌티 훈련장으로, 피레아스의 렌티에 위치해 있다.[80] 번호 포지션 이름 GK 아리스 블라호스 GK 미할리스 일리아디스 GK 요르고스 스트레조스 DF 아나스타시스 부요우코스 DF 디미트리스 쿠치오스 DF 요르고스 마크로스테르요스 DF 얀니스 소티라코스 DF 아르기리스 투파스 DF 안토니스 바투시아디스 DF 프락시텔리스 부로스 DF 파나요티스 볼로나키스 MF 요르고스 리라스 MF 이오안니스 파이다키스 번호 포지션 이름 MF 디미트리오스 부치오티스 MF 요르고스 카나베타스 MF 얀니 라지 MF 보반 라지치 MF 알렉산드로스 마르가리티스 MF 아힐레아스 나시아코풀로스 MF 안토니스 파파사바스 MF 흐리스토포로스 파살리디스 MF 하랄람보스 렌치스 MF 마놀리스 살리아카스 FW 코스타스 가레팔라키스 FW 일리아스 이그나티디스 FW 니코스 베르고스 과거 선수[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분류:올림피아코스 FC의 축구 선수입니다. 스태프[편집] 보드진[편집] 올림피아코스의 전 중원사령관이자 현 전술 조언가인 크리스티앙 카랑뵈 지위 성명 회장[81]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총 책임자 얀니스 브렌초스 대표 이사 디미트리스 아그라피오티스 제1 부회장 사바스 테오도리디스 제2 부회장 소크라티스 S. 코칼리스 제3 부회장 게오르게 루바리스 제4 부회장 얀니스 모랄리스 기술 컨설팅 후안 호세 로렌소 전술 조언가 크리스티앙 카랑뵈 스포르팅 디렉터 피에르 이사 팀 매니저 키리아코스 두레카스 코칭스태프 및 의료진[편집] 코칭스태프[82] 감독[83] 비토르 페레이라 수석 코치 필리프 알메이다 루이스 다 실바 안토니오스 니코폴리디스 분석가 요르고스 마르타코스 안토니스 레모나키스 페드루 히베이루 골키퍼 코치 알레코스 란토스 체력 코치 흐리스토스 무리키스 마노스 슴포코스 유소년팀 감독 바실리스 부자스 유소년팀 골키퍼 코치 바실리스 알렉수디스 스카우터[84] 수석 스카우터 후안 호세 로렌소 스카우터 니코스 밤바쿨라스 게오르요스 아마나티디스 디미트리오스 바르발리아스 요르고스 코콜라키스 지우바니 루시아노 가예티 의료진[85] 수석 의료진 흐리스토스 테오스 의료진 니코스 리쿠레시스 알렉시스 카페타나키스 니콜라오스 쿨로풀로스 영양사 마리아 리코미트루 역대 감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올림피아코스 FC 감독 목록입니다. 올림피아코스 역대 회장[편집]   성명 국적 연도 미할리스 마누스코스 1925–1928, 1937–1939, 1945–1950 타나시스 메르미가스 1929–1931, 1953–1954 타키스 자카스 1931, 1936 얀니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32, 1933–1935 얀니스 바르바레소스 1946 요르고스 안드리아노풀로스 1954–1967 코스타스 부자키스 1967–1969 타소스 오이코노무 1969–1970 에우틱시오스 구마스 1970–1971 아리스티데스 스킬리치스 1971 디미트리스 바다니스 1971–1972   성명 국적 연도 니코스 굴란드리스 1972–1975 코스타스 타노풀로스 1975, 1976–1978 페리클리스 라나라스 1975 이라클리스 치찰리스 1978–1979 스타우로스 다이파스 1979–1985, 1986, 1992–1994 니코스 에우티미우 1986 게오르게 코스코타스 1987–1988 아르기리스 살리아렐리스 1988–1992 요르고스 바나사키스 1992–1993 소크라티스 코칼리스 1993–2011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2011– 창립자이자 올림피아코스의 초대 회장, 미할리스 마누스코스 올림피아코스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초기 일원 겸 전 회장 (1954-1967) 이었던 요르고스 안드리아노풀로스 각주[편집] ↑ http://www.uefa.com/MultimediaFiles/Download/StatDoc/competitions/UCL/01/67/63/79/1676379_DOWNLOAD.pdf ↑ “Their full name is Olympiacos Club of Fans of Piraeus. For the sake of sanity, however, you can just call them Olympiacos. Or "Thrylos" once you get to know them. Presentation of Olympiacos F.C. in International Champions Cup's official website: "Olympiacos: The most successful club in Greek football history"”. gazzetta.gr from internationalchampionscup.com. 2014년 2월 22일에 확인함.  ↑ “Olympiacos clinch 40th Greek title”.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Final win completes double for Olympiacos”. UEFA.com. 2013년 8월 24일에 확인함.  ↑ “Final win completes double for Olympiacos”.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Ελληνικό Πρωτάθλημα, Οι Πρωταθλητές Ελλάδας από το 1928 μέχρι σήμερα (그리스 리그 우승팀 목록 1928–2013)” (그리스어). 그리스 축구 협회, epo.gr. 2013년 8월 29일에 확인함.  ↑ “Olympiacos trophies”. Olympiacos.org. 2013년 10월 5일에 확인함.  ↑ “1998–99 Champions League quarter-finals”. UEFA.com. 2013년 8월 27일에 확인함.  ↑ “Olympiacos FC”. UEFA.com. 2013년 5월 27일에 확인함.  ↑ “New era in European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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Σε πρόσφατη έρευνα σχετικά με τους περισσότερους οπαδούς, ο ΟΣΦΠ είναι 1ος, 30/06/2009 SPORT24, 15ετής έρευνα του Παντελή Κυπριανού (in Greek) ↑ [1] Archived 2013년 7월 27일 - 웨이백 머신, το 36% (2.016.000) δηλώνουν Ολυμπιακοί, το 30% (1.680.000) Παναθηναϊκοί, Έρευνα της Focus, Οκτώβριος 2005 –Φεβρουάριος 2006, SPORT24, επίσημο blog του sport24 και του αθλητικού συντάκτη Στέλιου Μαρκάκη (그리스어) ↑ H πιο πρόσφατη... «απογραφή»: 36% Oλυμπιακοί (1,677 εκατομμύρια), 30,2% Παναθηναϊκοί Archived 2014년 11월 29일 - 웨이백 머신, Sentragoal, Βαγγέλης Μπραουδάκης (그리스어) ↑ "Red and White" Olympiacos moments in New York, Greek Reporter USA (usa.greekreporter.com), 2011년 6월 4일 ↑ Greek diaspora supports Olympiacos CFP Archived 2013년 10월 29일 - 웨이백 머신, redplanet.gr (그리스어) ↑ Greek side Olympiakos looking forward to playing Melbourne Victory at Etihad Stadium in May. There are thousands of Olympiakos fans in Australia waiting to see our team in action., foxsports.com, 2012년 3월 21일 ↑ "Our Greek fans in Brazil were amazing". Olympiacos won the Intercontinental Cup in Brazil with Spanoulis, Printezis and Mantzaris praising Olympiacos fans from the Greek community in Brazil and thanking them for their support, gazzetta.gr, 2013년 10월 8일 (그리스어) ↑ Olympiacos supporters of the Greek community in Sao Paulo, provided passionate support to Olympiacos basketball team, as they won the Intercontinental Cup, onsports.gr, 2013년 10월 5일 (그리스어) ↑ Olympiacos Club of New York and Greek diaspora honours Olympiacos President Evangelos Marinakis, The National Herald (thenationalherald.com) (그리스어) ↑ Αυτοί είναι οι οπαδοί στην Ελλάδα – Ο Ολυμπιακός έχει τους περισσότερους φιλάθλους στην Ελλάδα, 2012년 6월 26일 Gazzetta (그리스어) ↑ “History of Olympiacos”. 2014년 10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11월 21일에 확인함.  ↑ “Η Ιστορία του Ολυμπιακού” (그리스어). olympiacos.org. 2012년 9월 30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Olympiacos FC History”. olympiacos.org. 2013년 4월 30일에 확인함.  ↑ “Peiraias Regional Championship”. 2009년 3월에 확인함.  ↑ “Olympiakos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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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iacos. 2018년 4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9월 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올림피아코스 FC (그리스어/영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 (러시아어/중국어/아랍어/한국어) 공식 웹사이트 (그리스어) 공식 트위터 페이지 (그리스어) 공식 서포터 웹사이트 RSSSF vdeh올림피아코스 FC 선수 감독 시즌 수상 현재 시즌 역사 유럽의 올림피아코스 FC 7번 출입구 참사 홈구장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훈련장 렌티 훈련장 서포터 7번 출입구 라이벌전 영원한 적들의 더비 AEK 경쟁 PAOK 경쟁 모태 구단: 올림피아코스 CFP vdeh올림피아코스 FC – 현재 명단 2 마니아티스 (주장) 3 보티아 5 밀리보예비치 6 아펠라이 7 미트로글루 8 은딩가 9 두르마즈 10 도밍게스 11 카사미 12 하라 14 엘랍델라위 16 로베르토 17 디아만타코스 18 부할라키스 19 푸스테르 20 얀눌리스 22 얀뇨티스 23 시오바스 24 아블로니티스 25 포르투니스 26 마쉬아퀴 27 베니테스 28 베르고스 29 부로스 30 살리누 33 후테시오티스 34 살리아카스 42 메제리 45 산타나 60 이브라힘 62 바투시아디스 72 스트레조스 77 도세비  투레 감독: 페레이라 vdeh 수페르리가 엘라다2018-19 시즌 AEK 아테네 AEL 아폴론 스미르니 이라클리스 테살로니키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 아트로미토스 라미아 레바디아코스 OFI 올림피아코스 파나티나이코스 파네톨리코스 파니오니오스 PAOK PAS 야니나 스코다 크산티 과거 참가 구단 구디 아테네 독사 드라마 디아고라스 로도스 마케도니코스 메가스 알렉산드로스 비자스 아리스 아스피다 크산티 아크라티토스 아트로미토스 피레아스 아티나이코스 아폴론 칼라마리아 에갈레오 에데사이코스 에트니코스 아스테라스 에트니코스 피레아스 이오니코스 카발라 카스토리아 칼라마타 칼리테아 코린토스 테르마이코스 테살로니키 트라시불로스 트리칼라 포스티라스 프로오데프티키 피에리코스 할키다 니키 볼로스 베리아 에르고텔리스 칼로니 케르키라 PAS 야니나 판트라키코스 플라타니아스 과거 참가 구단 (키프로스) 라르나카 AEL APOEL 오모니아 올림피아코스 니코시아 vdeh유럽 클럽 협회 창립 멤버 아약스 안데를레흐트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비르키르카라 첼시 코펜하겐 디나모 자그레브 유벤투스 올랭피크 리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AC 밀란 올림피아코스 포르투 레인저스 레알 마드리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올림피아코스_FC&oldid=24472370" 분류: 그리스의 축구단올림피아코스 FC강등된 적이 없는 축구단1925년 설립된 축구단숨은 분류: CS1 - 그리스어 인용 (el)CS1 - 스페인어 인용 (es)그리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مصرى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KurdîLietuviųLatviešu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4일 (월) 03: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교향곡 7번 (베토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향곡 7번 (베토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토벤 교향곡 제7번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7번 가장조 Op.92 "대곡"》 은 1811년에 보헤미아의 휴양지 테플리스에서 작곡하기 시작하여 1812년에 완성하였다. 빈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으며,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Moritz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에게 헌정했다. (정식 표제는 대교향곡이다.) 8번과 동시작곡된 7번 교향곡은 경쾌한 장단과 리듬을 앞세운 무곡 스타일 형태를 뛰우고 있는 곡이다. 목차 1 개요 2 초연 3 구성 4 평가 개요[편집] II. Allegretto Both performed by John Michel IV. Allegro con brio Both performed by John Michel 듣기에 문제가 있으면 미디어 도움말을 참조하세요. 베토벤의 7번째 교향곡. '투쟁과 패배' 라는 도식의 5번이나 '자연에 대한 찬미' 가 중심 주제인 6번과 달리, 7번에서는 경괘한 장단과 리듬을 앞에 내세우는 무곡 스타일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당대건 후대던 이 곡을 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춤이나 춤곡, 축제 등의 흥분되고 들뜬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한 바 있다. 후속작인 8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는데, 대략 1811년 말에 착수해서 1812년 4월(혹은 5월)에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빈이 아닌 보헤미아 지방의 테플리츠(현 체코 테플리체)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불멸의 연인도 여기서 마지막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이 곡들과 모종의 연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가들도 있다. 헌정은 베토벤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은행가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에게 행해졌다. 초연[편집] 1813년 12월 8일에 빈에서 열린 자선 음악회에서 처음 연주되었는데, 하나우 전투에서 부상당한 오스트리아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된 공연이었다. 베토벤 자신도 그렇고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도 그렇고 꽤 공을 많이 들였는데, 이 때 관현악단에서 연주한 이들 중에는 후기 현악 4중주 보급에 크게 이바지한 바이올리니스트 이그나츠 슈판치히 등의 명연주가들 외에 당대 혹은 이후의 유명 작곡가들까지 있어서 꽤 흥미롭다. 하지만 청각장애가 한층 심해진 데다가, 당대 악기로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힘과 스피드를 얻기 힘들자 리허설 때 꽤 짜증을 낸 모양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참여했던 루이 슈포어의 증언에 따르면, '약하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아예 보면대 밑으로 기어들어갔고, 강한 부분에서는 펄쩍 뛰어올라 고함을 치기까지 했다' 고 한다. 베토벤이 지휘대에서 지휘한 음악회는 한층 고양된 애국주의 열풍과 승리감도 있어서였는지 크게 성공했다. 특히 2악장은 유별나게 인기를 얻어서 여러 형태로 편곡되었고, 초연 무대에서도 앵콜로 연주되었다. 하지만 이 7번이 유독 인기를 많이 얻어 후속작인 8번을 압도하게 되자, 베토벤은 오히려 짜증을 내며 '8번이 7번보다 더 훌륭한 작품' 이라고 출판사에 편지까지 보내 항의했다. 구성[편집] 1악장(Poco sostenuto-Vivace)은 가장조의 목가풍 서주로 시작한다. 3분 남짓 서주가 연주되고 이어 꾀꼬리 소리를 연상케 하는 경쾌한 리듬의 1악장 제시부가 이어진다. 이 주제에 나타나는 특유의 리듬은 이후 1악장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서주를 제외한 1악장은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이다. 2악장(Allegretto)은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라고 써 있지만 이 교향곡에서 가장 느린 악장이다. 가단조의 멜랑콜리한 주제가 제시되고, 대위법적으로 전개된다. 3악장(Presto)은 바장조의 스케르초이다. 전형적인 겹세도막 형식(A-B-A)을 확장한 A-B-A-B-A 구조로 되어 있다. 4악장(Allegro con brio)은 이 교향곡을 통틀어 가장 빠르고 힘이 넘치는 악장으로, '바커스(술의 신)의 향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약박에 있는 액센트가 특징 평가[편집] 로맹 롤랑이 지은 베토벤 전기에서 이 곡을 일컬어 '리듬의 대향연'이라 하였듯이, 이 곡은 각 악장마다 독특하고 인상적인 리듬과 경쾌한 장단이 악장 전체를 지배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곡은 베토벤 교향곡 중에서 인기가 높은 곡으로 손꼽히며, 연주 시간은 약 40분이다. vdeh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초기 1번 다장조 2번 라장조 중기 3번 내림마장조 〈영웅〉 4번 내림나장조 〈낭만적〉 5번 다단조 〈운명〉 6번 바장조 〈전원〉 7번 가장조 〈대곡〉 8번 바장조 〈소곡〉 후기 9번 라단조 〈합창〉 가상: 10번 내림마장조 〈미완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교향곡_7번_(베토벤)&oldid=24270061" 분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가장조 작품헌정곡숨은 분류: 오디오가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4일 (금) 11: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교향곡 7번 (베토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향곡 7번 (베토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토벤 교향곡 제7번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7번 가장조 Op.92 "대곡"》 은 1811년에 보헤미아의 휴양지 테플리스에서 작곡하기 시작하여 1812년에 완성하였다. 빈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으며,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Moritz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에게 헌정했다. (정식 표제는 대교향곡이다.) 8번과 동시작곡된 7번 교향곡은 경쾌한 장단과 리듬을 앞세운 무곡 스타일 형태를 뛰우고 있는 곡이다. 목차 1 개요 2 초연 3 구성 4 평가 개요[편집] II. Allegretto Both performed by John Michel IV. Allegro con brio Both performed by John Michel 듣기에 문제가 있으면 미디어 도움말을 참조하세요. 베토벤의 7번째 교향곡. '투쟁과 패배' 라는 도식의 5번이나 '자연에 대한 찬미' 가 중심 주제인 6번과 달리, 7번에서는 경괘한 장단과 리듬을 앞에 내세우는 무곡 스타일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당대건 후대던 이 곡을 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춤이나 춤곡, 축제 등의 흥분되고 들뜬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한 바 있다. 후속작인 8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는데, 대략 1811년 말에 착수해서 1812년 4월(혹은 5월)에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빈이 아닌 보헤미아 지방의 테플리츠(현 체코 테플리체)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불멸의 연인도 여기서 마지막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이 곡들과 모종의 연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가들도 있다. 헌정은 베토벤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은행가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에게 행해졌다. 초연[편집] 1813년 12월 8일에 빈에서 열린 자선 음악회에서 처음 연주되었는데, 하나우 전투에서 부상당한 오스트리아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된 공연이었다. 베토벤 자신도 그렇고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도 그렇고 꽤 공을 많이 들였는데, 이 때 관현악단에서 연주한 이들 중에는 후기 현악 4중주 보급에 크게 이바지한 바이올리니스트 이그나츠 슈판치히 등의 명연주가들 외에 당대 혹은 이후의 유명 작곡가들까지 있어서 꽤 흥미롭다. 하지만 청각장애가 한층 심해진 데다가, 당대 악기로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힘과 스피드를 얻기 힘들자 리허설 때 꽤 짜증을 낸 모양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참여했던 루이 슈포어의 증언에 따르면, '약하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아예 보면대 밑으로 기어들어갔고, 강한 부분에서는 펄쩍 뛰어올라 고함을 치기까지 했다' 고 한다. 베토벤이 지휘대에서 지휘한 음악회는 한층 고양된 애국주의 열풍과 승리감도 있어서였는지 크게 성공했다. 특히 2악장은 유별나게 인기를 얻어서 여러 형태로 편곡되었고, 초연 무대에서도 앵콜로 연주되었다. 하지만 이 7번이 유독 인기를 많이 얻어 후속작인 8번을 압도하게 되자, 베토벤은 오히려 짜증을 내며 '8번이 7번보다 더 훌륭한 작품' 이라고 출판사에 편지까지 보내 항의했다. 구성[편집] 1악장(Poco sostenuto-Vivace)은 가장조의 목가풍 서주로 시작한다. 3분 남짓 서주가 연주되고 이어 꾀꼬리 소리를 연상케 하는 경쾌한 리듬의 1악장 제시부가 이어진다. 이 주제에 나타나는 특유의 리듬은 이후 1악장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서주를 제외한 1악장은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이다. 2악장(Allegretto)은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라고 써 있지만 이 교향곡에서 가장 느린 악장이다. 가단조의 멜랑콜리한 주제가 제시되고, 대위법적으로 전개된다. 3악장(Presto)은 바장조의 스케르초이다. 전형적인 겹세도막 형식(A-B-A)을 확장한 A-B-A-B-A 구조로 되어 있다. 4악장(Allegro con brio)은 이 교향곡을 통틀어 가장 빠르고 힘이 넘치는 악장으로, '바커스(술의 신)의 향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약박에 있는 액센트가 특징 평가[편집] 로맹 롤랑이 지은 베토벤 전기에서 이 곡을 일컬어 '리듬의 대향연'이라 하였듯이, 이 곡은 각 악장마다 독특하고 인상적인 리듬과 경쾌한 장단이 악장 전체를 지배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곡은 베토벤 교향곡 중에서 인기가 높은 곡으로 손꼽히며, 연주 시간은 약 40분이다. vdeh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초기 1번 다장조 2번 라장조 중기 3번 내림마장조 〈영웅〉 4번 내림나장조 〈낭만적〉 5번 다단조 〈운명〉 6번 바장조 〈전원〉 7번 가장조 〈대곡〉 8번 바장조 〈소곡〉 후기 9번 라단조 〈합창〉 가상: 10번 내림마장조 〈미완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교향곡_7번_(베토벤)&oldid=24270061" 분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가장조 작품헌정곡숨은 분류: 오디오가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4일 (금) 11: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루르드의 성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루르드의 성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루르드의 성모상 루르드의 성모 대성당 루르드의 성모(프랑스어: Notre Dame de Lourdes)는 18회에 걸쳐 나타났다고 보고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루르드의 성모 발현은 1858년 2월 11일 목요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14살의 가난한 소작농 소녀였던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보고에 따르면, 여동생과 친구와 같이 땔나무를 모으던 중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사비엘 동굴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부인’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사후 성녀로 시성되었으며,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당시 그녀가 성모 마리아를 본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62년 교황 비오 9세는 그 지역 주교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루르드의 성모를 공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목차 1 역사 2 루르드 샘물 3 성모 순례지 4 같이 보기 5 각주 역사[원본 편집] 1858년 2월 11일,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빵과 물물교환을 하려고 투아네트, 잔 아바디 등 또래의 다른 두 소녀와 함께 약간의 땔나무와 수프 재료로 쓰일 살이 조금 붙은 뼈 등을 채집하러 돌아다녔다.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 있는 가브 강을 건넌 두 소녀를 따라 베르나데트도 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었을 때, 폭풍우 같은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강변의 나무와 수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동굴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온 하얀 드레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었으며 팔에는 묵주를 두르고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베르나데트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 기도를 바쳤다. 베르나데트가 묵주 기도를 끝마치자, 여인은 베르나데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르나데트는 이 일을 자기만이 아는 비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귀가하던 도중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여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그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부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부모의 힐문을 받고서 그녀와 그녀의 누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았다. 3일 후, 베르나데트는 다른 두 명의 소녀와 같이 동굴을 다시 찾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르나데트가 탈혼 상태에 빠진 것에 놀라 두 소녀가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베르나데트는 아직도 황홀경이 없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2월 18일, 그녀는 부인에게서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 동굴에 오너라.”라는 말을 들었다. 부인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 하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경찰과 시 당국까지 포함한 지역 전체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부모와 경찰은 베르나데트가 더는 마사비엘레 동굴로 가지 못하도록 조치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계속 동굴을 찾았다. 2월 25일, 부인은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베르나데트에게 가서 마신 다음에 씻으라고 지시했다. 베르나데트는 부인이 지시한 대로 손으로 땅을 깊이 파헤친 후 그 물을 마시고 목욕하였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나왔다.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온갖 종류의 병을 앓는 환자들이 대거 몰려와 이 샘물을 마시거나 몸에 뿌렸다. 그 후, 많은 기적 치료가 보고되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샘물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환자는 사고 후 오른손이 기형으로 변한 여성이었다. 군중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프랑스 정부는 루르드를 점차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는 동굴을 울타리로 막고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다음 누구라도 이곳에 접근하는 자는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루르드는 어느새 프랑스의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동굴은 나폴레옹 3세 황제의 개입으로 1858년 10월 4일에 다시 일반에 개장되었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교회는 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로 하였다. 3월 25일, 밤중에 베르나데트는 어둠을 틈타 동굴에 겨우 도착하였다. 동굴 주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가브 강가에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베르나데트는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부인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네 번째 물음에 그녀는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는 부인의 대답을 들었다. 4월 7일 일요일 부활절 날, 베르나데트를 관찰한 의사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 빠졌을 때, 촛불에 손을 뻗었는데도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7월 16일, 베르나데트는 동굴에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부인의 미소를 보고 감탄한 그녀는 나중에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지금까지 모든 과정 동안,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교회는 전국적인 질문들에 직면하자, 1858년 11월 17일에 루르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1860년 1월 18일, 지역 교구장은 “동정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타나셨다.”라고 발표하였다. 오늘날 루르드는 파티마와 더불어 성모 공경의 근거지로서, 매년 세계 각국에서 4-600만 명의 순례자가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순례지 가운데 한 곳으로 자주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다. 근래의 교황들 역시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요한 23세는 주교 시절에 루르드를 찾아왔으며, 비오 12세는 교황 사절 때 루르드를 찾았다. 비오 12세는 또한 루르드의 성모 발현 100주년을 기념해 회칙 《루르드의 성지 순례》(Le Pelerinage de Lourdes)를 발표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루르드를 총 세 번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9월 15일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찾아 미사를 거행하였다. 루르드 샘물[원본 편집] 2008년 9월 12일 토요일, 프랑스 순방 중 루르드의 성모 순례지를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마사비엘 동굴로 찾아가서 19세기식 옷차림을 한 소녀가 건네준 루르드의 샘물을 한 잔 마셨다. 1858년 2월 25일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이 장소에 루르드의 성모가 나타나 샘물이 솟아났다고 설명하였다. 그날 이후 루르드에는 연간 500만 명이나 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여 루르드의 성모가 베르나데트에게 “샘에 가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라고 한 명령을 따라 행하고 있다. 비록 교회가 공식적으로 장려하고 있지는 않지만, 루르드 샘물은 기적의 샘물로 불리며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고취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발현 이후, 난치병을 앓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자신들의 치유를 갈망하며 그 물을 마시거나 몸을 씻고 있다. 그리고 루르드 당국은 루르드 샘물을 마시거나 목욕하러 찾아오는 사람 모두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매년 순례자들이 마시거나 떠가는 샘물의 양은 1만m3나 된다. 1858년 루르드의 시장 앙셀름의 의뢰에 따라 루르드 샘물에 대한 성분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 일은 툴루즈에 사는 교수가 맡았는데, 조사 결과 샘물을 마셔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산소, 질소, 탄산 석회, 마그네시아, 극소량의 탄산철, 알칼리성 탄산염 또는 규산염, 칼륨과 나트륨의 염화물, 극소량의 칼륨과 소다의 황산염, 극소량의 암모니아, 극소량의 아이오딘 등의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본질상,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특별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성모 발현 이후 루르드에서는 지금까지 7천여 건의 기적 치유 사례가 보고됐다. 그러나 현재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적은 총 67건이다. 루르드 샘물의 기적 치유 심사는 1882년 설립된 루르드 의무국에서 실시한다. 이 의무국은 전 세계 모든 의사들에게 열려있으며, 의사들은 기적으로 병이 나은 사람들을 조사하거나 의무국 내 문서를 살펴볼 수 있다. 루르드 의무국에서는 이전에 불치병 판정을 받은 이들이 치유된 사례를 조사하고 완치 확인서를 발급하지만 결코 기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또 이곳에서는 정신적 원인일 가능성이 있는 질병이 아닌 오직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고 의학적으로 입증된 기질적 질병의 치유 사례만을 제한적으로 조사한다. 기적 치유로 인정받으려면 매우 심각하고 치료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질병으로, 회복단계가 아니며, 효과적인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충족해야 한다. 또 치유는 즉각, 완전하게, 영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1] 성모 순례지[원본 편집] 루르드의 성모 대성당 프랑스의 루르드 마을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성지(동굴) 부근 지역을 일컬어 루르드의 성모 순례지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교회 측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으며, 병을 앓는 순례자들과 그들을 거드는 봉사자들을 위해 마련한 진료실과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등 헌신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성지는 동굴을 포함해서 동굴과 연결한 근처 수도꼭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루르드 샘물을 나누어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루르드 의무국을 포함해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동굴 위에 대성당과 2채의 부속 성당을 세웠다. 루르드의 세 성당은 51헥타르에 달하는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스물두 개의 분리된 전례 공간을 갖고 있다. 순례지에서는 공식적으로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등 총 6개국의 언어로 기도를 바친다. 같이 보기[원본 편집] 루르드 성모 발현 각주[원본 편집] ↑ 주정아 (2008년 1월 6일). “[루르드 성모발현 150주년 희년] ②‘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가톨릭신문. 2008년 12월 1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루르드의_성모&oldid=24427636" 분류: 성모 발현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1858년 프랑스1858년 기독교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FrançaisGaeilgeBahasa Indonesia日本語മലയാളംPolskiShqipதமிழ்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19: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루르드의 성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루르드의 성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루르드의 성모상 루르드의 성모 대성당 루르드의 성모(프랑스어: Notre Dame de Lourdes)는 18회에 걸쳐 나타났다고 보고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루르드의 성모 발현은 1858년 2월 11일 목요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14살의 가난한 소작농 소녀였던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보고에 따르면, 여동생과 친구와 같이 땔나무를 모으던 중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사비엘 동굴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부인’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사후 성녀로 시성되었으며,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당시 그녀가 성모 마리아를 본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62년 교황 비오 9세는 그 지역 주교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루르드의 성모를 공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목차 1 역사 2 루르드 샘물 3 성모 순례지 4 같이 보기 5 각주 역사[원본 편집] 1858년 2월 11일,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빵과 물물교환을 하려고 투아네트, 잔 아바디 등 또래의 다른 두 소녀와 함께 약간의 땔나무와 수프 재료로 쓰일 살이 조금 붙은 뼈 등을 채집하러 돌아다녔다.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 있는 가브 강을 건넌 두 소녀를 따라 베르나데트도 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었을 때, 폭풍우 같은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강변의 나무와 수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동굴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온 하얀 드레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었으며 팔에는 묵주를 두르고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베르나데트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 기도를 바쳤다. 베르나데트가 묵주 기도를 끝마치자, 여인은 베르나데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르나데트는 이 일을 자기만이 아는 비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귀가하던 도중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여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그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부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부모의 힐문을 받고서 그녀와 그녀의 누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았다. 3일 후, 베르나데트는 다른 두 명의 소녀와 같이 동굴을 다시 찾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르나데트가 탈혼 상태에 빠진 것에 놀라 두 소녀가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베르나데트는 아직도 황홀경이 없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2월 18일, 그녀는 부인에게서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 동굴에 오너라.”라는 말을 들었다. 부인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 하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경찰과 시 당국까지 포함한 지역 전체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부모와 경찰은 베르나데트가 더는 마사비엘레 동굴로 가지 못하도록 조치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계속 동굴을 찾았다. 2월 25일, 부인은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베르나데트에게 가서 마신 다음에 씻으라고 지시했다. 베르나데트는 부인이 지시한 대로 손으로 땅을 깊이 파헤친 후 그 물을 마시고 목욕하였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나왔다.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온갖 종류의 병을 앓는 환자들이 대거 몰려와 이 샘물을 마시거나 몸에 뿌렸다. 그 후, 많은 기적 치료가 보고되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샘물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환자는 사고 후 오른손이 기형으로 변한 여성이었다. 군중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프랑스 정부는 루르드를 점차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는 동굴을 울타리로 막고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다음 누구라도 이곳에 접근하는 자는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루르드는 어느새 프랑스의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동굴은 나폴레옹 3세 황제의 개입으로 1858년 10월 4일에 다시 일반에 개장되었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교회는 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로 하였다. 3월 25일, 밤중에 베르나데트는 어둠을 틈타 동굴에 겨우 도착하였다. 동굴 주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가브 강가에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베르나데트는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부인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네 번째 물음에 그녀는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는 부인의 대답을 들었다. 4월 7일 일요일 부활절 날, 베르나데트를 관찰한 의사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 빠졌을 때, 촛불에 손을 뻗었는데도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7월 16일, 베르나데트는 동굴에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부인의 미소를 보고 감탄한 그녀는 나중에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지금까지 모든 과정 동안,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교회는 전국적인 질문들에 직면하자, 1858년 11월 17일에 루르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1860년 1월 18일, 지역 교구장은 “동정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타나셨다.”라고 발표하였다. 오늘날 루르드는 파티마와 더불어 성모 공경의 근거지로서, 매년 세계 각국에서 4-600만 명의 순례자가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순례지 가운데 한 곳으로 자주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다. 근래의 교황들 역시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요한 23세는 주교 시절에 루르드를 찾아왔으며, 비오 12세는 교황 사절 때 루르드를 찾았다. 비오 12세는 또한 루르드의 성모 발현 100주년을 기념해 회칙 《루르드의 성지 순례》(Le Pelerinage de Lourdes)를 발표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루르드를 총 세 번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9월 15일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찾아 미사를 거행하였다. 루르드 샘물[원본 편집] 2008년 9월 12일 토요일, 프랑스 순방 중 루르드의 성모 순례지를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마사비엘 동굴로 찾아가서 19세기식 옷차림을 한 소녀가 건네준 루르드의 샘물을 한 잔 마셨다. 1858년 2월 25일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이 장소에 루르드의 성모가 나타나 샘물이 솟아났다고 설명하였다. 그날 이후 루르드에는 연간 500만 명이나 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여 루르드의 성모가 베르나데트에게 “샘에 가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라고 한 명령을 따라 행하고 있다. 비록 교회가 공식적으로 장려하고 있지는 않지만, 루르드 샘물은 기적의 샘물로 불리며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고취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발현 이후, 난치병을 앓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자신들의 치유를 갈망하며 그 물을 마시거나 몸을 씻고 있다. 그리고 루르드 당국은 루르드 샘물을 마시거나 목욕하러 찾아오는 사람 모두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매년 순례자들이 마시거나 떠가는 샘물의 양은 1만m3나 된다. 1858년 루르드의 시장 앙셀름의 의뢰에 따라 루르드 샘물에 대한 성분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 일은 툴루즈에 사는 교수가 맡았는데, 조사 결과 샘물을 마셔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산소, 질소, 탄산 석회, 마그네시아, 극소량의 탄산철, 알칼리성 탄산염 또는 규산염, 칼륨과 나트륨의 염화물, 극소량의 칼륨과 소다의 황산염, 극소량의 암모니아, 극소량의 아이오딘 등의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본질상,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특별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성모 발현 이후 루르드에서는 지금까지 7천여 건의 기적 치유 사례가 보고됐다. 그러나 현재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적은 총 67건이다. 루르드 샘물의 기적 치유 심사는 1882년 설립된 루르드 의무국에서 실시한다. 이 의무국은 전 세계 모든 의사들에게 열려있으며, 의사들은 기적으로 병이 나은 사람들을 조사하거나 의무국 내 문서를 살펴볼 수 있다. 루르드 의무국에서는 이전에 불치병 판정을 받은 이들이 치유된 사례를 조사하고 완치 확인서를 발급하지만 결코 기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또 이곳에서는 정신적 원인일 가능성이 있는 질병이 아닌 오직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고 의학적으로 입증된 기질적 질병의 치유 사례만을 제한적으로 조사한다. 기적 치유로 인정받으려면 매우 심각하고 치료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질병으로, 회복단계가 아니며, 효과적인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충족해야 한다. 또 치유는 즉각, 완전하게, 영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1] 성모 순례지[원본 편집] 루르드의 성모 대성당 프랑스의 루르드 마을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성지(동굴) 부근 지역을 일컬어 루르드의 성모 순례지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교회 측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으며, 병을 앓는 순례자들과 그들을 거드는 봉사자들을 위해 마련한 진료실과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등 헌신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성지는 동굴을 포함해서 동굴과 연결한 근처 수도꼭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루르드 샘물을 나누어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루르드 의무국을 포함해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동굴 위에 대성당과 2채의 부속 성당을 세웠다. 루르드의 세 성당은 51헥타르에 달하는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스물두 개의 분리된 전례 공간을 갖고 있다. 순례지에서는 공식적으로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등 총 6개국의 언어로 기도를 바친다. 같이 보기[원본 편집] 루르드 성모 발현 각주[원본 편집] ↑ 주정아 (2008년 1월 6일). “[루르드 성모발현 150주년 희년] ②‘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가톨릭신문. 2008년 12월 1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루르드의_성모&oldid=24427636" 분류: 성모 발현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1858년 프랑스1858년 기독교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FrançaisGaeilgeBahasa Indonesia日本語മലയാളംPolskiShqipதமிழ்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19: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람보르기니 쿤타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람보르기니 쿤타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람보르기니 쿤타치 람보르기니 쿤타치 LP500S 차종 스포츠카 제조사 람보르기니 생산년도 1974년 - 1990년2,042대 제작 선행차량 람보르기니 미우라 후속차량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차체형식 2도어 쿠페 구동방식 미드 엔진, 후륜구동 엔진 4.0L V12 엔진5.0L V12 엔진5.2L V12 엔진 변속기 5단 수동 람보르기니 쿤타치(Lamborghini Countach)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업체 람보르기니가 1974년부터 1990년까지 16년 동안 제작한 스포츠카이다. 미드십 엔진을 기반으로 한 후륜구동 자동차이다. 쐐기 모양의 디자인을 개척해 대중화시켰으며, 많은 고성능 스포츠카들이 쿤타치의 날카로운 각도에서 영향을 받았다. 쿤타치는 운전석과 조수석을 앞쪽으로 한참 밀어냄으로써 뒤쪽에 거대한 엔진의 공간을 확보했다. 이런 독특한 생김새를 한 쿤타치 덕분에 앞으로 향한 운전석과 조수석 디자인의 컨셉트(cabin-forward design concept)는 많은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2004년, 미국의 스포츠카 전문 잡지 세계의 스포츠 카(Sports Car International)는 "가장 위대한 1970년대의 스포츠카" 10대 중 3위에 쿤타치를 등재시켰으며, 이어 "가장 위대한 1980년대의 스포츠카" 10대 중 10위에도 쿤타치를 등재시켰다. 목차 1 이름 2 스타일링 3 엔진 4 구조 5 쿤타치의 모델 5.1 쿤타치 프로토타입 LP500 5.2 쿤타치 LP400 5.3 쿤타치 LP400S 5.4 쿤타치 LP500S 5.5 쿤타치 LP5000QV 5.6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쿤타치 5.7 월터 울프의 쿤타치 6 쿤타치 에볼루치오네 7 생산량 8 쿤타치의 복제품(Replicas) 9 각주 10 외부 링크 이름[편집] 쿤타치의 뜻은 피에몬테(이탈리아 북서부의 주(州))에서 깜짝 놀랄 때 사용하는 감탄사이다. 피에몬테 주의 지역 방언인 셈인데,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정말 아름다운 여성을 봤을 때의 감탄사로 자주 사용한다.[1] 대한민국에서는 쿤타치 대신 카운타크로 흔히 부르는데, 이것은 Countach의 영국식 발음(영어: Countach 카운탁[*])이 일본어(일본어: カウンタック)를 거쳐 와전된 말로써, 정확한 명칭은 "쿤타치"(kunˈtɑʃ)[1]이다[2]. 람보르기니는 새로운 자동차를 위해 한참 전부터 투우와 관련된 이름을 연구 중에 있었는데, 쿤타치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 다른 가설이 있다. 누치오 베르토네(Nuccio Bertone)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프로젝트 112"를 계획하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최초의 프로토타입은 197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됐다. 스타일링[편집] 쿤타치 LP500을 위에서 봤을 때 볼 수 있는 초현대적인 스타일링 쿤타치는 베르토네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했다. 마르첼로는 미우라를 디자인한 자동차 디자이너이다. 마르첼로 간디니는 젊었을 시절 경험이 부족한 디자이너였다. 실제로 경험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이나 자동차 제조업체의 직원들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유리한 조건이 있어서 조용하지만 굉장히 눈에 띄는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쿤타치의 모양은 넓고 낮았지만 앞뒤로 길지는 않았다. 쐐기의 각도는 42.1 인치였고, 부등변 사각형(사다리꼴) 모양의 판으로 덮혀져 있어 각이 진 쐐기 모양의 몸체가 대체적으로 평평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스포일러(날개) 라인은 코카콜라 병의 곡선처럼 부드럽게 처리되었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쿤타치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시저 도어이다. 입체 뼈대로 만들어진 섀시를 사용했는데, 실제 자동차를 만들 때는 좌우 폭이 너무 넓어진 것과 반대로 차의 몸통 자체가 너무 비좁고 사방이 막힌 형태라 일반적인 문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됐다. 때문에 수평으로 만들어진 경첩을 붙임으로 문을 연결하게 됐다. 그 결과, 문틀은 굉장히 넓어졌고 문이 매우 높이 위로 올라가서 앞으로 젖혀지는 시저 도어를 장착하게 됐다. 시저 도어를 장착한 후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바로 지붕이 너무 낮다는 것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사람의 머리 위에 곧바로 지붕이 위치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으며, 후방 시야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운전자가 후진(또는 후진 주차)를 하려면 운전자가 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야 했으나, 문틀이 너무 넓어 그럴 수도 없다는 황당한 문제점까지 생겼다. 그러나 후진에 대해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문을 연 상태로 운전자가 문틀에 앉아서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뒤를 살피면 후진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문틀이 매우 넓어서 사람이 앉을 공간이 있으며, 문틀에 앉아서 뒤를 보며 운전이 가능하다.[2] 프로토타입의 온전한 스타일은 계속해서 향상되기도 했고, 계속해서 어수선해지기도 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운전자의 시야였다. 물론 자동차의 성능도 계속해서 개선됐는데, 운전자의 조건에 따르긴 했으나 조향 성능 등이 다루기 쉬워졌다. 이후 최초 생산 모델의 경우 엔진을 냉각시키기 위해 충분한 양의 공기 흡입구가 꼭 필요했다. 결국 미국 항공 자문 위원회(NACA)에 조언을 구해 비행기에 사용되는 수많은 공기 흡입구가 자동차의 양 옆과 뒷쪽 펜더, 그리고 문 근처에 생겼다.(후에 많은 스포츠 자동차들이 이런 공기 흡입구를 채용했는데, 대표적으로 페라리 F40이 쿤타치와 비슷한 공기 흡입구를 갖게 됐다.) 이후, 자동차의 마무리 디자인에서 커다란 엔진의 흡입구가 곧장 운전자의 뒤에 위치하게 되어 후방 시야는 더 좁아졌다. 후에 몇 가지가 더 첨가됐는데, 펜더 부분의 조명등과 스포일러, 카뷰레이터의 덮개와 범퍼 등, 계속해서 자동차에 미적인 가치를 높여주는 것들이 추가됐다. 쿤타치의 스타일링과 인상적인 비주얼이 원인이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쿤타치를 가장 우수한 디자인의 표본으로 삼게 됐다. 물론 자동차 엔지니어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당시까지 쿤타치의 우월한 성능은 후에 람보르기니 모델(디아블로나 무르시엘라고 등의 후속세대)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고성능 자동차 운전자들과 엔지니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쿤타치만의 차별점, 특히 쿤타치만이 소유할 수 있는 별난 독창성은 남기지 못했다. 후에 많은 람보르기니 모델이 만들어졌을 때는 앞서 설명한 사람들 사이에서 현대적인 람보르기니 모델들과 쿤타치를 비교하며, 쿤타치에 대해 "고전적이다(다른 표현:"현재의 람보르기니 디자인이 우수하다")"와 "(쿤타치가)람보르기니 사상 가장 위대한 디자인이다"로 심한 의견 충돌을 보여주어 많은 논란을 남겼다. 대체적으로 충돌한 의견의 주장은, "우아하게 보이는 스타일" vs "기술과 엔지니어링의 우월성"이다. 엔진[편집] 쿤타치의 엔진 람보르기니의 전통적인 V12 엔진을 세로로 돌려서 후륜구동 축과 함께 중앙에 배치했다. 무게 중심을 배열하는 것은 좋아졌는데 엔진을 세로로 배치하는 바람에 "퇴보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토크 밸런스를 결정짓는 자동차의 출력 축은 앞쪽으로 쏠렸으며, 엔진의 바로 앞에 기어박스가 설치됐다. 차동장치가 엔진의 바로 뒤에 설치됐으며 맞은편에 구동축이 자리를 잡았다. 최초로 생산된 자동차는 미우라의 4리터 엔진이 장착되어 있었지만 원래 계획은 5리터의 엔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후에 배기량이 5리터로 늘어난 엔진과 5.2리터 4밸브(Quattrovalvole) 엔진이 장착됐다. 5000QV 모델까지만 모든 람보르기니 쿤타치가 6개의 웨버(Weber) 카뷰레이터를 구비한 채 미국에서도 판매됐다. 유럽에서 판매된 모델은 쿤타치로 유명해진 카뷰레이터를 후속세대인 람보르기니 디아블로까지 사용했을 정도였다. 5000QV가 사용한 엔진에는 보쉬(Bosch)가 만든 K-제트로닉 연료 분사장치가 구비되어 있었다. 구조[편집] 쿤타치는 튜브 모양의 입체 뼈대를 사용했다. 입체 뼈대에 사용된 재질은 차체 강성을 높이기 위해 레이싱 자동차나 항공기가 사용하는 알루미늄이었다. 이 알루미늄을 사용하면 차의 내구성이 높아지며, 무게를 거의 1,400 kg까지 줄일 수 있어 차가 가벼워지는 효과도 동반됐지만 생산값이 너무 비싸졌다. 차체의 몸체 아랫쪽에 섬유 유리(피버 글라스)를 사용했다. 쿤타치의 모델[편집] 쿤타치 프로토타입 LP500[편집] 딱 한 대의 쿤타치 LP500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다. 배기량이 5리터로 늘어난 엔진을 사용하겠다는 의미로 500이라는 숫자를 붙인 것이다. LP는 Longitudinale Posteriore의 약자로, 한글로 직역하면 "후방 세로 배치"라는 뜻이다. 엔진을 뒷쪽에 새로로 배치했다는 뜻이며, 가야르도나 무르시엘라고 시리즈의 상위 모델인 LPxxx 모델에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197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노란색 해바라기 색상이 칠해진 LP500이 충격적인 데뷔를 가졌다. 마르첼로만의 역동적인 디자인 컨셉트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나, 실제로 그가 디자인한 LP500의 디자인 그대로 생산을 하려면 포괄적인 수정이 필요했다. 엔진의 냉각을 위해 자동차의 뒷쪽 어깨에 설치된 작은 공기 흡입구 구멍이 너무 부족했고, 커다란 '공기 박스' 통풍구도 있어야 했다. 더 많은 공기를 흡입하려고 NACA의 더 큰 흡입구가 양 옆에 설치됐다. 실험적인 자동차였으나, 실제 생산을 위해선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서 차체나 흡입구 등을 연결시켜주는 벌집 모양을 한 낙차공도 있어야 했다. 현재 이 자동차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동차이다. 유럽의 신차 안전 검사(충돌 테스트)에서 승인을 받기 위해 희생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산된 쿤타치와는 엄청나게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3] 쿤타치 LP400[편집] 앞쪽(3/4 위치)뒷쪽(3/4 위치)쿤타치 LP400 1974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첫 생산된 쿤타치가 인도됐다. 4리터 엔진을 사용한 쿤타치였다. LP500 프로토타입에서 외향적으로 작은 변화가 있었는데, 극히 평범했던 후미등이 초현대적이게 모여있었다. 자동차를 과열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거대한 공기 통풍구와 흡입구가 부착되며 마르첼로의 원래 구상과 다르게 오히려 디자인 자체가 매우 공격적이게 변해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양이 굉장히 날렵한 것은 변함없었다. 원본 쿤타치와 다르게 아주 좁은 타이어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협소하기 짝이 없는 매끄러운 스타일링은 항력 계수를 낮추는 것에 일조하여 쿤타치가 최고 속도를 최대한 높이는 것에도 도움을 줬다. 많은 사람들이 쿤타치의 여러 파생 모델들 중에서도 원본 모델처럼 깔끔하고, 정말로 평범하지만 매끈한 선과 적은 장식들로 이루어진 LP400의 외모에 호감을 표시했다. 차의 뒷쪽에는 "람보르기니"와 "쿤타치"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는 간단한 엠블렘만 있었는데, 엔진 배기량이나 밸브 배열의 표기가 없었다는 것은 현대의 많은 차들도 표방한 것이었다. 쿤타치 LP400S[편집] 1978년, 새로운 쿤타치 LP400S가 만들어졌다. 엔진은 LP400보다 조금 더 강해졌고, 외관은 더 과격하게 변했다. 휠 아치가 커지면서 타이어도 피렐리 P7 초광폭 타이어로 변경된 채 생산됐다. 옵션으로 V 모양의 스포일러가 제공돼서 뒷쪽 덱(Deck)에 부착되었다. 덕분에 고속 주행에서의 안전성이 좋아졌고, 최고 속도도 10 마일 (약 16 km/h)가 늘어났다. 스포일러는 자동차의 주인이 직접 주문해야 달아줬다. LP400S의 핸들링은 타이어가 넓어지며 코너링에서 더 안전해졌다. 미적으로 몇몇 부분이 더 좋아졌는데, 매끄러운 선이 이전 모델보다 훨씬 공격적이게 변했다. 기본 엠블렘("람보르기니"와 "쿤타치" 엠블렘)은 변함이 없었지만 각이 진 "S"가 쿤타치의 오른쪽에 붙었다. LP400S와는 다른 별개의 세 대가 존재한다. 시리즈 1 — 자전거 부품 제조업체 캄파놀로(Campagnolo)가 1978년과 1979년에 만든 "브라보" 휠을 장착한 50대의 LP400S 시리즈1이 한정판으로 제작됐다. 1978년 전에는 LP400의 원래 운전대를 만들던 곳이었다. 시리즈1이라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트레이드마크로 세팅한 더 낮은 서스펜션(차체도 낮아졌다.)과 45 밀리미터의 카뷰레이터, "스몰 스튜어트 워너 계기판"(Small Stewart Warner gauges) 등이 특징이다. 차를 만들던 직원들과 심각한 문제가 생겨 1979년 중반기에 생산이 끝났다. 50대의 차가 있으며 마지막 차의 차대번호는 1121100*이다. 시리즈 2 — 시리즈1의 낮은 차체를 유지하며 움푹 들어간/오목한 모양의 휠이 부착됐다. 시리즈1의 완성 버전이나 다름없다. 총 105대의 차가 만들어졌고, 마지막 차의 차대번호는 1121310*이다. 시리즈 3 — 차대번호 1321312를 바탕으로 개조된 것이며, 실제 존재한다고 한다. 운전석 공간은 3 센티미터 정도 높아졌고, 서스펜션 역시 조금 더 높아졌다. 82대를 만들었으며 마지막 차의 차대번호는 1121468*이다. 쿤타치 LP500S[편집] 쿤타치 500S 1982년에 성능이 개선된 모델이 등장하는데, 비로소 5리터 배기량의 엔진을 장착했다. 차체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가끔 LP5000S(배기량이 5000이라)이라고 부르는데, 파생 모델인 5000QV와 혼동하기 쉽다.(다음 부분에서 5000QV가 나옴) 1985년, 유명한 TV 시리즈 트랜스포머에 등장하는 사이드스와이프가 바로 람보르기니 쿤타치 LP500S이다. 영화에서는 시보레 콜벳 스팅레이/컨티넨탈 컨셉트 카로 등장한다. 쿤타치 LP5000QV[편집] 1985년, 5.2리터 엔진에 4개의 실린더 밸브(이탈리아어:quattrovalvole, 콰트로-발보레)가 장착되어 출력이 더 높아진 LP500S의 파생 모델이 등장했다. 더 나은 흡배기를 위해 엔진 위에 있던 카뷰레이터가 양옆으로 옮겨졌다. 불행하게도 엔진 덱에 혹처럼 튀어나와있던 카뷰레이터가 좌우로 옮겨지며 생김새 자체가 못 생겨졌다.(이 외에도 범퍼와 관련된 외관 문제는 아래에서 더 언급한다.) 차체의 몇몇 판때기를 케블러(Kevlar) 재질로 수정했고, 조금 더 후에 나온 버전은 카뷰레이터가 연료 직분사를 할 수 있도록 수정돼서 엔진에 부착됐다. 처음에 출시된 모델은 미국 버전의 성능과 함께 미국 안전법에 표준화된 범퍼로 바뀌었다. 이 범퍼는 기존 쿤타치의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쿤타치만의 매끈한 선이 폐허가 됐다고 비난했다. 범퍼 때문에 외관이 많이 변했다. 쿤타치들 중 유일하게 보쉬(Bosch)의 K-제트로닉 연료 직분사 장치를 설치됐다. 유럽에서 판매된 모델에는 제트로닉 연료 직분사 장치가 없는 대신 6개의 웨버 카뷰레이터가 장착되어 있다. 1985년식 미국에서 판매된 5000QV의 가격은 무려 99,500달러였다. 딱 두 개의 옵션만 선택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공기 역학 스포일러(5,500달러 짜리)이며, 다른 하나는 음향 장비(7,500달러)였다. 많은 모델들이 풀옵션으로 팔려나갔다.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쿤타치[편집]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쿤타치 후속차량 람보르기니 쿤타치 5000QV 차체형식 2도어 쿠페, 스포츠카 구동방식 미드쉽, 후륜구동 엔진 5.2L (5167 cc) V12 엔진 변속기 5단 수동 변속기 전장 4,140 밀리미터 전폭 2,000 밀리미터 전고 1,070 밀리미터 전비중량 1,490 킬로그램 1988년, 람보르기니 창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명예로운 이름을 사용한 쿤타치가 발매됐다.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쿤타치는 기계적으로 5000QV와 비슷한 종류였으나 스타일링은 훨씬 더 역동적이게 변한 자동차였다. 뒷쪽에 '공기 박스'가 더 큰 크기로 다시 만들어졌고, 운전자가 엔진 과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도록 통풍구 뒷쪽의 앞과 뒤가 바뀌었고(뒤집힌 것이 아닌 부품 교체), 좌우가 검은색으로 칠해졌다. 여기에 공기 저항을 감소시키고 주행 안정성을 높여주는 에어 댐과 사이드 스커트, 공기 흡입구 등의 장비가 갖춰졌다. 후미등은 더 좁고 빽빽하게 바뀌었는데, 후미등의 위와 아래쪽에 차체의 색과 똑같은 색으로 칠해진 금속판이 덮혀서 후미등이 더 좁고 빽빽해졌다.(후미등의 조명 자체는 그대로였고, 단지 위아래로 작은 판이 덮혀졌을 뿐이다.) 전체적인 디자인이 바뀌었지만 너무나 인기가 없었다. 특히 흡입구의 뱃전판(쭉쭉 갈라진 형체)은 마치 페라리 테스타로사를 흉내낸 것 같았다. 하지만 엔진의 냉각 시스템이 더 개선됐으며, 쿤타치의 가장 큰 문제였던 힘겨운 가속력도 개선됐다. 345/35R15 크기를 가진, 더 넓어진 타이어를 가진 채 생산됐다. 25주년 기념 쿤타치는 1990년까지 생산된 후 단종됐으며 후속세대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에게 V12 자리를 물려줬다. 월터 울프의 쿤타치[편집] 쿤타치 LP400을 소유하고 있던 캐나다의 기업인이자 기업 소유주인 월터 울프가 1970년대에 울프 F1 레이싱팀을 창단했다. 그는 쿤타치 LP400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LP400을 마음에 들어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198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의 F1 레이싱팀인 스쿠데리아 이탈리아(Scuderia Italia)를 설립한 람보르기니의 수석 엔지니어인 달라라(Dallara)에게 고성능 버전의 특별한 쿤타치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게 됐고, 실제로 월터 울프만을 위한 차가 만들어졌다. 차대번호는 "1120148"이고, 쿤타치 LP400에 울프가 요청했던 쿤타치의 원래 엔진인 5리터 배기량의 엔진을 장착하였다. 엔진의 출력은 447 마력 @ 7,900 RPM이었고, 최고 속도는 315 km/h (201.1 mph)였다. 피렐리 P7 타이어를 장착했고, 펜더의 큰 조명등과 함께 LP400S의 앞뒤에 있던 스포일러가 부착됐다. 차체는 빨간색으로 칠해졌으며, 펜더의 조명등은 검은색으로 칠해져서 흡사 1980년대의 "LP500S"와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LP500S보다 훨씬 빨리 등장한 자동차였기 때문에, LP500S에게 영향을 끼친 부분이 꽤 많은 특별 주문제작 모델이었다. 월터 울프의 이 차는 현재 일본에 있다. 총 2대의 울프 쿤타치가 만들어졌는데, 차대번호 "1120202"를 부여받은 한 대는 파란색으로 제작되어 현재 독일에 있다. 다른 한 대는 차대번호 "1121210"을 부여받았으며 감청색(Navy blue)이 칠해져 있다. 오랫동안 울프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판매된 적이 없는 모델이다. 월터 울프가 주문제작한 차와, 그가 람보르기니로부터 받은 다른 두 대의 쿤타치의 모습은 [3]에서 볼 수 있다. 쿤타치 에볼루치오네[편집] 람보르기니는 비공식적으로 1984년과 1987년 사이에 쿤타치 5000QV를 기반으로 '에어로디나미코'(이탈리아 표기:Aerodinamico, 영어 표기:aerodynamic)라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쿤타치 에볼루치오네(이탈리아 표기:Evoluzione, 영어 표기:Evolution)라는 이름도 있다. 이 차와 관련된 사진이나 정보가 거의 없는데, 패트릭 밈란이 람보르기니를 소유하자마자 만들다가 중단했기 때문이다. 주로 디자인이 많이 변경되어서 다른 쿤타치들보다 항력 계수가 많이 낮아졌다. 차대번호 0150번의 쿤타치 에볼루치오네는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양옆이 부드럽게 변했고, 앞과 뒤는 기류 저항으로 인해 더 매끈하게 변했다. 결과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디자인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하게 변해버린 문틀과 비대해진 스포일러 등, 처음부터 좋은 것은 모두 다 쿤타치 레플리카에 줘버리고 나쁜 것만 갖게 됐다. 쿤타치의 마지막 생산이 진행되던 5년 동안 (크라이슬러가 인수한 후) 람보르기니 미우라 조타의 후속차량으로 꽤 많은 양이 생산됐으나 제대로 공개된 적도 없고, 판매된 적도 없다.[4][5] 생산량[편집] 쿤타치는 16년 동안 총 2,042대가 제작됐다. 프로토타입은 1대가 제작됐고, LP400은 157대, LP400S는 237대, LP500S와 LP5000QV는 각각 321대, 676대를 제작했고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모델은 650대 한정판으로 제작됐다. 프로토타입 LP400 LP400S LP500S LP5000QV 25 Anniversary 1 157 237 321 676 650 마지막 5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양을 만들었는데, 람보르기니를 인수한 크라이슬러가 일부러 생산량을 늘린 것이었다. 쿤타치의 복제품(Replicas)[편집] 1984년, 로드 라드렛의 라드렛 디자인 스튜디오(Rod Ladret of Ladret Design Studio)가 위치한 캐나다 앨버타 주에서 쿤타치의 복제품(레플리카)이 만들어져 마케팅에 들어갔다. 실제 쿤타치는 아니며, 쿤타치를 본뜬 석고 반죽과 섬유 유리 주조를 통해 만들어진 키트 카(주인이 될 주문자가 부품을 받아 직접 조립을 하는 자동차이다. 영국의 TVR이 유명하다.) 종류이다. 라드렛 디자인 스튜디오가 직접 만든 튜브 프레임 섀시와 미국산 V8 엔진을 제공했으며, 기본적인 키트와 자동차의 틀도 제공해줬다. 라드렛 디자인 스튜디오는 총 141대의 쿤타치 레플리카를 제작했다. 고객의 주문에 따라 산업용 섬유 유리로 만든 쿤타치의 복제품 섀시를 만들어서 팔기도 했는데, 10년 동안 수천 개를 넘게 판매했다. 1993년, 라드렛은 쿤타치 레플리카의 제작을 중단하고 다른 일을 시작했지만, 1984년에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키트를 다시 만들어서 2007년부터 판매하고 있다. 1985년 막바지부터 1990년대까지 그의 회사가 복제한 쿤타치는 가지각색의 차로 만들어져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다. 1985년에는 개리 톰슨(Gary Thompson)과 피터 잭슨(Pete Jackson)이 실제 쿤타치를 빌려서 섬유 유리 주조(라드렛이 사용한 주조 기술)를 통해 실제와 똑같은 쿤타치를 만들었고, 이것을 가정용 면제품 값에 상류층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은 영국 회사를 차리고 같은 공법으로 쿤타치 레플리카를 만들어서 판매하기도 했다. 쿤타치의 레플리카 회사들 중, 정말 극소수의 회사들이 실제 쿤타치와 큰 차이가 없는 놀라운 완성도를 자랑한 쿤타치 레플리카를 선보여 화제를 얻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폴 로렌슨의 프로바 자동차(Paul Lawrenson of Prova Cars), 앨런 부스의 시에나 자동차(Alan Booth of Sienna Cars), 필 캐터햄의 미라지 레플리카(Phil Cheetham of Mirage Replicas, 신기한 복제품 회사), 브라이트휠 레플리카(Brightwheel Replicas) 등이 있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의 레플리카를 만들기도 한 DC 슈퍼카(DC Supercars)는 오래전, 쿤타치의 레플리카를 만들었던 필 캐터햄의 미라지 레플리카이다.[6][7] 쿤타치의 초현대주의적 디자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단순한 복제만 하지 않고 쿤타치의 차체를 유지한 채 길이를 리무진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8] 각주[편집] ↑ Countach LP500 ↑ 쿤타치는 미국식 발음이며, 이탈리아 현지 발음은 '쿤타쉬'에 가깝다. ↑ Lamborghini Countach Prototyp ↑ http://www.countach.ch/History/Evo/index.html | 쿤타치 에볼루치오네의 사진 ↑ http://www.qv500.com/lamborghinicountachp6.php Archived 2010년 7월 31일 - 웨이백 머신 | 쿤타치 에볼루치오네의 자세한 정보 ↑ http://www.dcsupercars.com/ | 실제로 람보르기니 레플리카를 만드는 DC 슈퍼카의 사이트 주소 ↑ tour d horizon des repliques de countach ↑ Lamborghini Countach Limousine Replica - Top Speed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람보르기니 쿤타치 Countach 25th Anniversary vdeh람보르기니스포츠카 350GT 400GT 미우라 에스파다 이슬레로 자라마 우라코 쿤타치 실루엣 잘파 디아블로 무르시엘라고 가야르도 레벤톤 아벤타도르 베네노 세스토 엘레멘토 우라칸 SUV LM002 우루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람보르기니_쿤타치&oldid=23486874" 분류: 람보르기니의 차종슈퍼카쿠페1970년대 자동차1980년대 자동차1990년대 자동차대형 승용차1974년 도입된 자동차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오래된 그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Bosanski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18일 (금) 16: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람보르기니 쿤타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람보르기니 쿤타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람보르기니 쿤타치 람보르기니 쿤타치 LP500S 차종 스포츠카 제조사 람보르기니 생산년도 1974년 - 1990년2,042대 제작 선행차량 람보르기니 미우라 후속차량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차체형식 2도어 쿠페 구동방식 미드 엔진, 후륜구동 엔진 4.0L V12 엔진5.0L V12 엔진5.2L V12 엔진 변속기 5단 수동 람보르기니 쿤타치(Lamborghini Countach)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업체 람보르기니가 1974년부터 1990년까지 16년 동안 제작한 스포츠카이다. 미드십 엔진을 기반으로 한 후륜구동 자동차이다. 쐐기 모양의 디자인을 개척해 대중화시켰으며, 많은 고성능 스포츠카들이 쿤타치의 날카로운 각도에서 영향을 받았다. 쿤타치는 운전석과 조수석을 앞쪽으로 한참 밀어냄으로써 뒤쪽에 거대한 엔진의 공간을 확보했다. 이런 독특한 생김새를 한 쿤타치 덕분에 앞으로 향한 운전석과 조수석 디자인의 컨셉트(cabin-forward design concept)는 많은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2004년, 미국의 스포츠카 전문 잡지 세계의 스포츠 카(Sports Car International)는 "가장 위대한 1970년대의 스포츠카" 10대 중 3위에 쿤타치를 등재시켰으며, 이어 "가장 위대한 1980년대의 스포츠카" 10대 중 10위에도 쿤타치를 등재시켰다. 목차 1 이름 2 스타일링 3 엔진 4 구조 5 쿤타치의 모델 5.1 쿤타치 프로토타입 LP500 5.2 쿤타치 LP400 5.3 쿤타치 LP400S 5.4 쿤타치 LP500S 5.5 쿤타치 LP5000QV 5.6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쿤타치 5.7 월터 울프의 쿤타치 6 쿤타치 에볼루치오네 7 생산량 8 쿤타치의 복제품(Replicas) 9 각주 10 외부 링크 이름[편집] 쿤타치의 뜻은 피에몬테(이탈리아 북서부의 주(州))에서 깜짝 놀랄 때 사용하는 감탄사이다. 피에몬테 주의 지역 방언인 셈인데,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정말 아름다운 여성을 봤을 때의 감탄사로 자주 사용한다.[1] 대한민국에서는 쿤타치 대신 카운타크로 흔히 부르는데, 이것은 Countach의 영국식 발음(영어: Countach 카운탁[*])이 일본어(일본어: カウンタック)를 거쳐 와전된 말로써, 정확한 명칭은 "쿤타치"(kunˈtɑʃ)[1]이다[2]. 람보르기니는 새로운 자동차를 위해 한참 전부터 투우와 관련된 이름을 연구 중에 있었는데, 쿤타치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 다른 가설이 있다. 누치오 베르토네(Nuccio Bertone)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프로젝트 112"를 계획하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최초의 프로토타입은 197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됐다. 스타일링[편집] 쿤타치 LP500을 위에서 봤을 때 볼 수 있는 초현대적인 스타일링 쿤타치는 베르토네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했다. 마르첼로는 미우라를 디자인한 자동차 디자이너이다. 마르첼로 간디니는 젊었을 시절 경험이 부족한 디자이너였다. 실제로 경험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이나 자동차 제조업체의 직원들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유리한 조건이 있어서 조용하지만 굉장히 눈에 띄는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쿤타치의 모양은 넓고 낮았지만 앞뒤로 길지는 않았다. 쐐기의 각도는 42.1 인치였고, 부등변 사각형(사다리꼴) 모양의 판으로 덮혀져 있어 각이 진 쐐기 모양의 몸체가 대체적으로 평평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스포일러(날개) 라인은 코카콜라 병의 곡선처럼 부드럽게 처리되었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쿤타치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시저 도어이다. 입체 뼈대로 만들어진 섀시를 사용했는데, 실제 자동차를 만들 때는 좌우 폭이 너무 넓어진 것과 반대로 차의 몸통 자체가 너무 비좁고 사방이 막힌 형태라 일반적인 문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됐다. 때문에 수평으로 만들어진 경첩을 붙임으로 문을 연결하게 됐다. 그 결과, 문틀은 굉장히 넓어졌고 문이 매우 높이 위로 올라가서 앞으로 젖혀지는 시저 도어를 장착하게 됐다. 시저 도어를 장착한 후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바로 지붕이 너무 낮다는 것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사람의 머리 위에 곧바로 지붕이 위치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으며, 후방 시야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운전자가 후진(또는 후진 주차)를 하려면 운전자가 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야 했으나, 문틀이 너무 넓어 그럴 수도 없다는 황당한 문제점까지 생겼다. 그러나 후진에 대해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문을 연 상태로 운전자가 문틀에 앉아서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뒤를 살피면 후진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문틀이 매우 넓어서 사람이 앉을 공간이 있으며, 문틀에 앉아서 뒤를 보며 운전이 가능하다.[2] 프로토타입의 온전한 스타일은 계속해서 향상되기도 했고, 계속해서 어수선해지기도 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운전자의 시야였다. 물론 자동차의 성능도 계속해서 개선됐는데, 운전자의 조건에 따르긴 했으나 조향 성능 등이 다루기 쉬워졌다. 이후 최초 생산 모델의 경우 엔진을 냉각시키기 위해 충분한 양의 공기 흡입구가 꼭 필요했다. 결국 미국 항공 자문 위원회(NACA)에 조언을 구해 비행기에 사용되는 수많은 공기 흡입구가 자동차의 양 옆과 뒷쪽 펜더, 그리고 문 근처에 생겼다.(후에 많은 스포츠 자동차들이 이런 공기 흡입구를 채용했는데, 대표적으로 페라리 F40이 쿤타치와 비슷한 공기 흡입구를 갖게 됐다.) 이후, 자동차의 마무리 디자인에서 커다란 엔진의 흡입구가 곧장 운전자의 뒤에 위치하게 되어 후방 시야는 더 좁아졌다. 후에 몇 가지가 더 첨가됐는데, 펜더 부분의 조명등과 스포일러, 카뷰레이터의 덮개와 범퍼 등, 계속해서 자동차에 미적인 가치를 높여주는 것들이 추가됐다. 쿤타치의 스타일링과 인상적인 비주얼이 원인이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쿤타치를 가장 우수한 디자인의 표본으로 삼게 됐다. 물론 자동차 엔지니어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당시까지 쿤타치의 우월한 성능은 후에 람보르기니 모델(디아블로나 무르시엘라고 등의 후속세대)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고성능 자동차 운전자들과 엔지니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쿤타치만의 차별점, 특히 쿤타치만이 소유할 수 있는 별난 독창성은 남기지 못했다. 후에 많은 람보르기니 모델이 만들어졌을 때는 앞서 설명한 사람들 사이에서 현대적인 람보르기니 모델들과 쿤타치를 비교하며, 쿤타치에 대해 "고전적이다(다른 표현:"현재의 람보르기니 디자인이 우수하다")"와 "(쿤타치가)람보르기니 사상 가장 위대한 디자인이다"로 심한 의견 충돌을 보여주어 많은 논란을 남겼다. 대체적으로 충돌한 의견의 주장은, "우아하게 보이는 스타일" vs "기술과 엔지니어링의 우월성"이다. 엔진[편집] 쿤타치의 엔진 람보르기니의 전통적인 V12 엔진을 세로로 돌려서 후륜구동 축과 함께 중앙에 배치했다. 무게 중심을 배열하는 것은 좋아졌는데 엔진을 세로로 배치하는 바람에 "퇴보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토크 밸런스를 결정짓는 자동차의 출력 축은 앞쪽으로 쏠렸으며, 엔진의 바로 앞에 기어박스가 설치됐다. 차동장치가 엔진의 바로 뒤에 설치됐으며 맞은편에 구동축이 자리를 잡았다. 최초로 생산된 자동차는 미우라의 4리터 엔진이 장착되어 있었지만 원래 계획은 5리터의 엔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후에 배기량이 5리터로 늘어난 엔진과 5.2리터 4밸브(Quattrovalvole) 엔진이 장착됐다. 5000QV 모델까지만 모든 람보르기니 쿤타치가 6개의 웨버(Weber) 카뷰레이터를 구비한 채 미국에서도 판매됐다. 유럽에서 판매된 모델은 쿤타치로 유명해진 카뷰레이터를 후속세대인 람보르기니 디아블로까지 사용했을 정도였다. 5000QV가 사용한 엔진에는 보쉬(Bosch)가 만든 K-제트로닉 연료 분사장치가 구비되어 있었다. 구조[편집] 쿤타치는 튜브 모양의 입체 뼈대를 사용했다. 입체 뼈대에 사용된 재질은 차체 강성을 높이기 위해 레이싱 자동차나 항공기가 사용하는 알루미늄이었다. 이 알루미늄을 사용하면 차의 내구성이 높아지며, 무게를 거의 1,400 kg까지 줄일 수 있어 차가 가벼워지는 효과도 동반됐지만 생산값이 너무 비싸졌다. 차체의 몸체 아랫쪽에 섬유 유리(피버 글라스)를 사용했다. 쿤타치의 모델[편집] 쿤타치 프로토타입 LP500[편집] 딱 한 대의 쿤타치 LP500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다. 배기량이 5리터로 늘어난 엔진을 사용하겠다는 의미로 500이라는 숫자를 붙인 것이다. LP는 Longitudinale Posteriore의 약자로, 한글로 직역하면 "후방 세로 배치"라는 뜻이다. 엔진을 뒷쪽에 새로로 배치했다는 뜻이며, 가야르도나 무르시엘라고 시리즈의 상위 모델인 LPxxx 모델에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197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노란색 해바라기 색상이 칠해진 LP500이 충격적인 데뷔를 가졌다. 마르첼로만의 역동적인 디자인 컨셉트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나, 실제로 그가 디자인한 LP500의 디자인 그대로 생산을 하려면 포괄적인 수정이 필요했다. 엔진의 냉각을 위해 자동차의 뒷쪽 어깨에 설치된 작은 공기 흡입구 구멍이 너무 부족했고, 커다란 '공기 박스' 통풍구도 있어야 했다. 더 많은 공기를 흡입하려고 NACA의 더 큰 흡입구가 양 옆에 설치됐다. 실험적인 자동차였으나, 실제 생산을 위해선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서 차체나 흡입구 등을 연결시켜주는 벌집 모양을 한 낙차공도 있어야 했다. 현재 이 자동차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동차이다. 유럽의 신차 안전 검사(충돌 테스트)에서 승인을 받기 위해 희생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산된 쿤타치와는 엄청나게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3] 쿤타치 LP400[편집] 앞쪽(3/4 위치)뒷쪽(3/4 위치)쿤타치 LP400 1974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첫 생산된 쿤타치가 인도됐다. 4리터 엔진을 사용한 쿤타치였다. LP500 프로토타입에서 외향적으로 작은 변화가 있었는데, 극히 평범했던 후미등이 초현대적이게 모여있었다. 자동차를 과열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거대한 공기 통풍구와 흡입구가 부착되며 마르첼로의 원래 구상과 다르게 오히려 디자인 자체가 매우 공격적이게 변해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양이 굉장히 날렵한 것은 변함없었다. 원본 쿤타치와 다르게 아주 좁은 타이어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협소하기 짝이 없는 매끄러운 스타일링은 항력 계수를 낮추는 것에 일조하여 쿤타치가 최고 속도를 최대한 높이는 것에도 도움을 줬다. 많은 사람들이 쿤타치의 여러 파생 모델들 중에서도 원본 모델처럼 깔끔하고, 정말로 평범하지만 매끈한 선과 적은 장식들로 이루어진 LP400의 외모에 호감을 표시했다. 차의 뒷쪽에는 "람보르기니"와 "쿤타치"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는 간단한 엠블렘만 있었는데, 엔진 배기량이나 밸브 배열의 표기가 없었다는 것은 현대의 많은 차들도 표방한 것이었다. 쿤타치 LP400S[편집] 1978년, 새로운 쿤타치 LP400S가 만들어졌다. 엔진은 LP400보다 조금 더 강해졌고, 외관은 더 과격하게 변했다. 휠 아치가 커지면서 타이어도 피렐리 P7 초광폭 타이어로 변경된 채 생산됐다. 옵션으로 V 모양의 스포일러가 제공돼서 뒷쪽 덱(Deck)에 부착되었다. 덕분에 고속 주행에서의 안전성이 좋아졌고, 최고 속도도 10 마일 (약 16 km/h)가 늘어났다. 스포일러는 자동차의 주인이 직접 주문해야 달아줬다. LP400S의 핸들링은 타이어가 넓어지며 코너링에서 더 안전해졌다. 미적으로 몇몇 부분이 더 좋아졌는데, 매끄러운 선이 이전 모델보다 훨씬 공격적이게 변했다. 기본 엠블렘("람보르기니"와 "쿤타치" 엠블렘)은 변함이 없었지만 각이 진 "S"가 쿤타치의 오른쪽에 붙었다. LP400S와는 다른 별개의 세 대가 존재한다. 시리즈 1 — 자전거 부품 제조업체 캄파놀로(Campagnolo)가 1978년과 1979년에 만든 "브라보" 휠을 장착한 50대의 LP400S 시리즈1이 한정판으로 제작됐다. 1978년 전에는 LP400의 원래 운전대를 만들던 곳이었다. 시리즈1이라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트레이드마크로 세팅한 더 낮은 서스펜션(차체도 낮아졌다.)과 45 밀리미터의 카뷰레이터, "스몰 스튜어트 워너 계기판"(Small Stewart Warner gauges) 등이 특징이다. 차를 만들던 직원들과 심각한 문제가 생겨 1979년 중반기에 생산이 끝났다. 50대의 차가 있으며 마지막 차의 차대번호는 1121100*이다. 시리즈 2 — 시리즈1의 낮은 차체를 유지하며 움푹 들어간/오목한 모양의 휠이 부착됐다. 시리즈1의 완성 버전이나 다름없다. 총 105대의 차가 만들어졌고, 마지막 차의 차대번호는 1121310*이다. 시리즈 3 — 차대번호 1321312를 바탕으로 개조된 것이며, 실제 존재한다고 한다. 운전석 공간은 3 센티미터 정도 높아졌고, 서스펜션 역시 조금 더 높아졌다. 82대를 만들었으며 마지막 차의 차대번호는 1121468*이다. 쿤타치 LP500S[편집] 쿤타치 500S 1982년에 성능이 개선된 모델이 등장하는데, 비로소 5리터 배기량의 엔진을 장착했다. 차체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가끔 LP5000S(배기량이 5000이라)이라고 부르는데, 파생 모델인 5000QV와 혼동하기 쉽다.(다음 부분에서 5000QV가 나옴) 1985년, 유명한 TV 시리즈 트랜스포머에 등장하는 사이드스와이프가 바로 람보르기니 쿤타치 LP500S이다. 영화에서는 시보레 콜벳 스팅레이/컨티넨탈 컨셉트 카로 등장한다. 쿤타치 LP5000QV[편집] 1985년, 5.2리터 엔진에 4개의 실린더 밸브(이탈리아어:quattrovalvole, 콰트로-발보레)가 장착되어 출력이 더 높아진 LP500S의 파생 모델이 등장했다. 더 나은 흡배기를 위해 엔진 위에 있던 카뷰레이터가 양옆으로 옮겨졌다. 불행하게도 엔진 덱에 혹처럼 튀어나와있던 카뷰레이터가 좌우로 옮겨지며 생김새 자체가 못 생겨졌다.(이 외에도 범퍼와 관련된 외관 문제는 아래에서 더 언급한다.) 차체의 몇몇 판때기를 케블러(Kevlar) 재질로 수정했고, 조금 더 후에 나온 버전은 카뷰레이터가 연료 직분사를 할 수 있도록 수정돼서 엔진에 부착됐다. 처음에 출시된 모델은 미국 버전의 성능과 함께 미국 안전법에 표준화된 범퍼로 바뀌었다. 이 범퍼는 기존 쿤타치의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쿤타치만의 매끈한 선이 폐허가 됐다고 비난했다. 범퍼 때문에 외관이 많이 변했다. 쿤타치들 중 유일하게 보쉬(Bosch)의 K-제트로닉 연료 직분사 장치를 설치됐다. 유럽에서 판매된 모델에는 제트로닉 연료 직분사 장치가 없는 대신 6개의 웨버 카뷰레이터가 장착되어 있다. 1985년식 미국에서 판매된 5000QV의 가격은 무려 99,500달러였다. 딱 두 개의 옵션만 선택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공기 역학 스포일러(5,500달러 짜리)이며, 다른 하나는 음향 장비(7,500달러)였다. 많은 모델들이 풀옵션으로 팔려나갔다.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쿤타치[편집]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쿤타치 후속차량 람보르기니 쿤타치 5000QV 차체형식 2도어 쿠페, 스포츠카 구동방식 미드쉽, 후륜구동 엔진 5.2L (5167 cc) V12 엔진 변속기 5단 수동 변속기 전장 4,140 밀리미터 전폭 2,000 밀리미터 전고 1,070 밀리미터 전비중량 1,490 킬로그램 1988년, 람보르기니 창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명예로운 이름을 사용한 쿤타치가 발매됐다.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쿤타치는 기계적으로 5000QV와 비슷한 종류였으나 스타일링은 훨씬 더 역동적이게 변한 자동차였다. 뒷쪽에 '공기 박스'가 더 큰 크기로 다시 만들어졌고, 운전자가 엔진 과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도록 통풍구 뒷쪽의 앞과 뒤가 바뀌었고(뒤집힌 것이 아닌 부품 교체), 좌우가 검은색으로 칠해졌다. 여기에 공기 저항을 감소시키고 주행 안정성을 높여주는 에어 댐과 사이드 스커트, 공기 흡입구 등의 장비가 갖춰졌다. 후미등은 더 좁고 빽빽하게 바뀌었는데, 후미등의 위와 아래쪽에 차체의 색과 똑같은 색으로 칠해진 금속판이 덮혀서 후미등이 더 좁고 빽빽해졌다.(후미등의 조명 자체는 그대로였고, 단지 위아래로 작은 판이 덮혀졌을 뿐이다.) 전체적인 디자인이 바뀌었지만 너무나 인기가 없었다. 특히 흡입구의 뱃전판(쭉쭉 갈라진 형체)은 마치 페라리 테스타로사를 흉내낸 것 같았다. 하지만 엔진의 냉각 시스템이 더 개선됐으며, 쿤타치의 가장 큰 문제였던 힘겨운 가속력도 개선됐다. 345/35R15 크기를 가진, 더 넓어진 타이어를 가진 채 생산됐다. 25주년 기념 쿤타치는 1990년까지 생산된 후 단종됐으며 후속세대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에게 V12 자리를 물려줬다. 월터 울프의 쿤타치[편집] 쿤타치 LP400을 소유하고 있던 캐나다의 기업인이자 기업 소유주인 월터 울프가 1970년대에 울프 F1 레이싱팀을 창단했다. 그는 쿤타치 LP400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LP400을 마음에 들어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198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의 F1 레이싱팀인 스쿠데리아 이탈리아(Scuderia Italia)를 설립한 람보르기니의 수석 엔지니어인 달라라(Dallara)에게 고성능 버전의 특별한 쿤타치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게 됐고, 실제로 월터 울프만을 위한 차가 만들어졌다. 차대번호는 "1120148"이고, 쿤타치 LP400에 울프가 요청했던 쿤타치의 원래 엔진인 5리터 배기량의 엔진을 장착하였다. 엔진의 출력은 447 마력 @ 7,900 RPM이었고, 최고 속도는 315 km/h (201.1 mph)였다. 피렐리 P7 타이어를 장착했고, 펜더의 큰 조명등과 함께 LP400S의 앞뒤에 있던 스포일러가 부착됐다. 차체는 빨간색으로 칠해졌으며, 펜더의 조명등은 검은색으로 칠해져서 흡사 1980년대의 "LP500S"와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LP500S보다 훨씬 빨리 등장한 자동차였기 때문에, LP500S에게 영향을 끼친 부분이 꽤 많은 특별 주문제작 모델이었다. 월터 울프의 이 차는 현재 일본에 있다. 총 2대의 울프 쿤타치가 만들어졌는데, 차대번호 "1120202"를 부여받은 한 대는 파란색으로 제작되어 현재 독일에 있다. 다른 한 대는 차대번호 "1121210"을 부여받았으며 감청색(Navy blue)이 칠해져 있다. 오랫동안 울프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판매된 적이 없는 모델이다. 월터 울프가 주문제작한 차와, 그가 람보르기니로부터 받은 다른 두 대의 쿤타치의 모습은 [3]에서 볼 수 있다. 쿤타치 에볼루치오네[편집] 람보르기니는 비공식적으로 1984년과 1987년 사이에 쿤타치 5000QV를 기반으로 '에어로디나미코'(이탈리아 표기:Aerodinamico, 영어 표기:aerodynamic)라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쿤타치 에볼루치오네(이탈리아 표기:Evoluzione, 영어 표기:Evolution)라는 이름도 있다. 이 차와 관련된 사진이나 정보가 거의 없는데, 패트릭 밈란이 람보르기니를 소유하자마자 만들다가 중단했기 때문이다. 주로 디자인이 많이 변경되어서 다른 쿤타치들보다 항력 계수가 많이 낮아졌다. 차대번호 0150번의 쿤타치 에볼루치오네는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양옆이 부드럽게 변했고, 앞과 뒤는 기류 저항으로 인해 더 매끈하게 변했다. 결과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디자인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하게 변해버린 문틀과 비대해진 스포일러 등, 처음부터 좋은 것은 모두 다 쿤타치 레플리카에 줘버리고 나쁜 것만 갖게 됐다. 쿤타치의 마지막 생산이 진행되던 5년 동안 (크라이슬러가 인수한 후) 람보르기니 미우라 조타의 후속차량으로 꽤 많은 양이 생산됐으나 제대로 공개된 적도 없고, 판매된 적도 없다.[4][5] 생산량[편집] 쿤타치는 16년 동안 총 2,042대가 제작됐다. 프로토타입은 1대가 제작됐고, LP400은 157대, LP400S는 237대, LP500S와 LP5000QV는 각각 321대, 676대를 제작했고 람보르기니 25주년 기념 모델은 650대 한정판으로 제작됐다. 프로토타입 LP400 LP400S LP500S LP5000QV 25 Anniversary 1 157 237 321 676 650 마지막 5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양을 만들었는데, 람보르기니를 인수한 크라이슬러가 일부러 생산량을 늘린 것이었다. 쿤타치의 복제품(Replicas)[편집] 1984년, 로드 라드렛의 라드렛 디자인 스튜디오(Rod Ladret of Ladret Design Studio)가 위치한 캐나다 앨버타 주에서 쿤타치의 복제품(레플리카)이 만들어져 마케팅에 들어갔다. 실제 쿤타치는 아니며, 쿤타치를 본뜬 석고 반죽과 섬유 유리 주조를 통해 만들어진 키트 카(주인이 될 주문자가 부품을 받아 직접 조립을 하는 자동차이다. 영국의 TVR이 유명하다.) 종류이다. 라드렛 디자인 스튜디오가 직접 만든 튜브 프레임 섀시와 미국산 V8 엔진을 제공했으며, 기본적인 키트와 자동차의 틀도 제공해줬다. 라드렛 디자인 스튜디오는 총 141대의 쿤타치 레플리카를 제작했다. 고객의 주문에 따라 산업용 섬유 유리로 만든 쿤타치의 복제품 섀시를 만들어서 팔기도 했는데, 10년 동안 수천 개를 넘게 판매했다. 1993년, 라드렛은 쿤타치 레플리카의 제작을 중단하고 다른 일을 시작했지만, 1984년에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키트를 다시 만들어서 2007년부터 판매하고 있다. 1985년 막바지부터 1990년대까지 그의 회사가 복제한 쿤타치는 가지각색의 차로 만들어져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다. 1985년에는 개리 톰슨(Gary Thompson)과 피터 잭슨(Pete Jackson)이 실제 쿤타치를 빌려서 섬유 유리 주조(라드렛이 사용한 주조 기술)를 통해 실제와 똑같은 쿤타치를 만들었고, 이것을 가정용 면제품 값에 상류층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은 영국 회사를 차리고 같은 공법으로 쿤타치 레플리카를 만들어서 판매하기도 했다. 쿤타치의 레플리카 회사들 중, 정말 극소수의 회사들이 실제 쿤타치와 큰 차이가 없는 놀라운 완성도를 자랑한 쿤타치 레플리카를 선보여 화제를 얻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폴 로렌슨의 프로바 자동차(Paul Lawrenson of Prova Cars), 앨런 부스의 시에나 자동차(Alan Booth of Sienna Cars), 필 캐터햄의 미라지 레플리카(Phil Cheetham of Mirage Replicas, 신기한 복제품 회사), 브라이트휠 레플리카(Brightwheel Replicas) 등이 있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의 레플리카를 만들기도 한 DC 슈퍼카(DC Supercars)는 오래전, 쿤타치의 레플리카를 만들었던 필 캐터햄의 미라지 레플리카이다.[6][7] 쿤타치의 초현대주의적 디자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단순한 복제만 하지 않고 쿤타치의 차체를 유지한 채 길이를 리무진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8] 각주[편집] ↑ Countach LP500 ↑ 쿤타치는 미국식 발음이며, 이탈리아 현지 발음은 '쿤타쉬'에 가깝다. ↑ Lamborghini Countach Prototyp ↑ http://www.countach.ch/History/Evo/index.html | 쿤타치 에볼루치오네의 사진 ↑ http://www.qv500.com/lamborghinicountachp6.php Archived 2010년 7월 31일 - 웨이백 머신 | 쿤타치 에볼루치오네의 자세한 정보 ↑ http://www.dcsupercars.com/ | 실제로 람보르기니 레플리카를 만드는 DC 슈퍼카의 사이트 주소 ↑ tour d horizon des repliques de countach ↑ Lamborghini Countach Limousine Replica - Top Speed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람보르기니 쿤타치 Countach 25th Anniversary vdeh람보르기니스포츠카 350GT 400GT 미우라 에스파다 이슬레로 자라마 우라코 쿤타치 실루엣 잘파 디아블로 무르시엘라고 가야르도 레벤톤 아벤타도르 베네노 세스토 엘레멘토 우라칸 SUV LM002 우루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람보르기니_쿤타치&oldid=23486874" 분류: 람보르기니의 차종슈퍼카쿠페1970년대 자동차1980년대 자동차1990년대 자동차대형 승용차1974년 도입된 자동차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오래된 그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Bosanski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18일 (금) 16: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전도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도봉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전도봉全道奉 출생일 1942년 10월 10일(1942-10-10) (76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일운면 구조라리 별명 아호(雅號)는 산남(山南)· 해송(海松)· 해봉(海峯) 닉네임은 해병대의 살아있는 전설, 영원한 해병대 사나이 종교 개신교(예장통합)[1] 정당 무소속 배우자 류명자(柳明子) 자녀 슬하 3남 학력 연세대 행정대학원 복무 대한민국 해병대 복무 기간 1966년 ~ 1998년 최종 계급 해병 중장 지휘 해병대 청룡부대 1소대장 해병대 연평부대 21중대장 해병대 2사단 51대대장 해병대 1사단 3연대장 해병대 사령부 참모장 해병대 교육훈련단장 해병대 1사단장 해병대 부사령관 해병대 사령관 주요 참전 베트남 전쟁 서훈 내역 1998년 미국 정부 공로훈장2009년 글로벌녹색경영대상 기타 이력 한전KDN 사장 한국그린피플연맹 총재 자유민주연합 시민행정특임고문 웹사이트 전도봉 전도봉(全道奉, 1942년 10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공기업인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그의 현재 주요 거주지는 대한민국 서울 성북구 보문동이다. 그는 제22대 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과 제9대 한전KDN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그린피플연맹 총재로 재직중이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가족 관계 4 별칭 5 논란 6 상훈 7 각주 8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42년 10월 10일 경상남도 통영군 일운면(현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부산진국민학교, 개성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그는 해병대 간부후보생(해간) 35기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1966년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제적되었다가 이후 사면되어 해간 38기로 재임관하였다.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 소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6년에는 미국 해병대상륙전학교를, 1982년에는 미국 해군상륙전학교를 수료하였다. 1987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였고, 1996년 대한민국 해병대 부사령관을 거쳐 제22대 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해병대 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1998년 해병대 진급·인사청탁 비리와 뇌물 수수 혐의로 강제 예편 및 구속되었으며, 2002년 대법원 최종심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2]. 2008년 10월 한전KDN 제9대 사장으로 취임하여[3] 2011년 10월까지 재임하였다. 한편 그는 1996년 오제도 변호사가 조직하여 이끌어오던 '신문고 환경살리기 운동본부'를 개편, 2000년 11월 한국그린피플연맹을 발족시키고 현재까지 총재로 재임하며 환경운동을 이끌어오고 있다. 학력[편집] 경남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1965년) 해병병과학교 초등군사반 수료 육군보병학교 위탁교육과정 수료 미국 해병대상륙전학교 초등군사반 수료 미국 해군상륙전학교 위탁교육과정 수료 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졸업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24기(1978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1987년) 가족 관계[편집] 부인 류명자(柳明子)와의 사이에 아들 3명을 두고 있으며 세 아들도 모두 해병대로 군복무를 하였다[4][5]. 별칭[편집] 대한민국 해병대에서는 드물게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해병대 사관후보생 출신으로 해병대 사령관에 올라[4] "해병대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며, 또한 해병대에 대한 남다른 애착 때문에 "영원한 해병대 사나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6]. 논란[편집] 자신의 일대기에서 1966년 8월 해병대의 공군기지 습격사건의 사실 조작을 통해 해병대를 미화하는 등 왜곡을 하여 국가중요범죄행위에 대한 옹호를 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출처 필요] 상훈[편집] 화랑무공훈장(1968년) 보국포장(1980년) 보국훈장 삼일장(1987년) 보국훈장 천수장(1995년) 미국 정부 공로훈장(1998년) 각주[편집] ↑ 장로 명단 - 영암교회(서울 성북구 안암동) ↑ 전도봉 前해병사령관 유죄확정 ↑ 한전KDN, 전도봉 신임 사장 취임 ↑ 가 나 全道奉 해병사령관 내정자 ↑ "우리는 전우" 해병 4父子 탄생 ↑ KTV, 현빈 해병대 훈련 모습 최초 공개 Archived 2013년 12월 24일 - 웨이백 머신, 정책브리핑 외부 링크[편집] 전도봉 홈페이지 한국그린피플연맹 홈페이지 전임이상무 제22대 해병대 사령관1996년 6월 29일 ~ 1998년 4월 8일 후임이갑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전도봉&oldid=24359775" 분류: 194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거제시 출신대한민국의 해병대사령관대한민국 해병 중장대한민국의 기업인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자유민주연합 당원대한민국의 장로교도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경남고등학교 동문부산진초등학교 동문부산개성중학교 동문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해병병과학교 동문육군보병학교 동문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동문국방대학교 동문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9년 4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2일 (일) 08: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박한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한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에 대해서는 박한별 (수영 선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박한별 박한별(2019년)출생 1984년 11월 17일(1984-11-17) (3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국적 대한민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2002년 ~ 현재소속사 플라이업엔터테인먼트 학력 건국대학교 영화예술학과 학사 (졸업)부모 박채화 (부)배우자 유인석자녀 유아준 (2018년 4월 30일)웹사이트 플라이업엔터테인먼트 박한별박한별 - 트위터박한별 - 인스타그램박한별 미니홈피 - 싸이월드 박한별(朴韓별, 1984년 11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모델이다. 2002년 패션잡지 "Ceci"의 모델로 시작하여 2003년 영화 《여고괴담 3: 여우계단》에 출연하면서 배우로 데뷔했으며, 같은 해 SBS 드라마 《요조숙녀》로 SBS 연기대상에서 뉴스타상을 수상했다. 이후 《환상의 커플》(2006), 《다 함께 차차차》(2009), 《잘 키운 딸 하나》(2013), 《애인 있어요》(2015)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인터넷 얼짱 출신이며, 2009년부터는 '스탈리'라는 의류브랜드를 런칭해 자신이 디자인한 의류로 직접 운영하고 있다. 목차 1 학력 2 경력 3 필모그래피 3.1 드라마 3.2 영화 4 그 외 활동 4.1 뮤직 비디오 4.2 예능 5 인간관계 6 음반 7 저서 8 수상 및 후보 9 각주 10 외부 링크 학력[편집] 경복초등학교 (졸업) 선화예술중학교 무용과 한국무용 (졸업) 선화예술고등학교 무용과 한국무용 (전학) 안양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 (중퇴) 건국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영화예술학과 (졸업) 경력[편집] 2003년 제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보대사 2005년 건국대학교 홍보대사 2009년 건국대학교 홍보대사 2010년 제13회 보령머드축제 홍보대사 2010년 구강암·얼굴기형 환자를 위한 스마일마라톤대회 홍보대사 2011년 제1회 설악영화제 홍보대사 2011년 평화운동연합 평화 홍보대사 2011년 국제공익광고제 홍보대사 필모그래피[편집] 드라마[편집] 연도* 제목 배역 방송사 비고 2003 요조숙녀 최수연 SBS 2004 한강수타령 미애 MBC 2006 환상의 커플 오유경 MBC 프리즈 김지우 채널CGV 5부작 2007 푸른 물고기 강윤정 SBS 커플 브레이킹 한여경 채널CGV 4부작 2009 다 함께 차차차 한진경 KBS1 2010 오! 마이 레이디 홍유라 SBS 2011 갈수록 기세등등 이한별 MBN 2013 잘 키운 딸 하나 장하나/장은성 SBS 2015 냄새를 보는 소녀 주마리 SBS 특별출연 애인 있어요 강설리 SBS 2016 안투라지 tvN 특별출연 2017 보그맘 보그맘 MBC 2019 슬플 때 사랑한다 윤마리/우하경 MBC *첫 방영일 순이며, 다년간 방영된 작품의 경우 작품이 방영되기 시작한 연도를 가리킨다. 영화[편집] 연도 제목 배역 비고 2008 숙명 정은영 2009 요가학원 연주 2011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윤혜지 2012 두 개의 달 소희 2014 분신사바 2 송치엔 중국 영화 그 외 활동[편집] 뮤직 비디오[편집] 연도 가수 제목 비고 2002 신승훈 널 위한 이별 휘성 안 되나요 2003 1TYM Without You 2007 최정철 사랑은 왜 해 2010 소야앤썬 웃으며 안녕 세븐 I'm Going Crazy 2012 울랄라세션 아름다운 밤 예능[편집] 올리브쇼 박한별의 핑크 프로포즈 SBS 인기가요 MC 시크릿 아시아 박한별 홍콩을 사다 박한별의 키스 더 스노우 SBS 정글의 법칙 in 얍 - 게스트 출연 박한별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인간관계[편집] 가수 세븐과 오랫동안 사귀었으나, 2014년에 결별했다.[1] 배우 황정음과는 중학교 동창이자 리틀엔젤스 예술단에서 함께하여 현재도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 오고 있다.[2] 2017년 11월 MBC TV 드라마 '보그맘' 촬영을 마친 후 "임신 4개월"이라고 밝히면서 '예비 아빠'와 혼인신고도 이미 마쳤다고 직접 발표했으며, 2018년 4월 30일 오후 3시 30분에 제왕절개로 첫 아들을 출산했다.[3] 음반[편집] 2010년 〈Coffee〉 2011년 〈Luv U〉 2011년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OST 〈마.블.미〉 저서[편집] 2011: 《박한별's 팁스토리》 (페이퍼북 ISBN 9788997148042) 수상 및 후보[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03 SBS 연기대상 뉴스타상[4] 요조숙녀 수상 2009 KBS 연기대상 여자 신인연기상 다 함께 차차차 후보 2010 제5회 아시아 모델상 시상식 패셔니스타부문 모델특별상 빈칸 수상 2014 제7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여자 우수연기상 잘 키운 딸 하나 후보 SBS 연기대상 장편드라마부문 여자 우수연기상 잘 키운 딸 하나 후보 2015 SBS 연예대상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정글의 법칙 수상 SBS 연기대상 장편드라마부문 여자 특별연기상 애인 있어요 수상 2017년 MBC 방송연예대상 쇼 시트콤부문 여자 우수상 보그맘 수상 각주[편집] ↑ 박한별, 세븐 결별 소식과 함께 ‘정은우와 열애?’ - 스포츠동아 ↑ 황정음, 중1때 리틀엔젤스에서 활동…"박한별보다 내가 훨씬 예뻤다." 모태미녀 자신감? - 조선비즈 ↑ 박한별 측 "오늘(30일) 제왕절개로 득남...산모와 아이 건강" (공식입장) - TV리포트 ↑ 이병헌, SBS '연기대상 수상'《뉴시스》2004.1.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박한별 박한별 - 인스타그램 박한별 - 트위터 박한별 미니홈피 - 싸이월드 박한별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박한별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박한별 - 한시네마 vdehYG 엔터테인먼트경영진 양현석 (회장·총괄 프로듀서) 황보경 (대표이사·사장) 가수현재 소속 그룹 지누션 지누 션 원타임 테디 오진환 송백경 태빈 빅뱅 G-Dragon T.O.P. 태양 대성 악동뮤지션 이찬혁 이수현 WINNER 강승윤 김진우 이승훈 송민호 iKON 김진환 송윤형 BOBBY 김동혁 구준회 정찬우 젝스키스 은지원 이재진 김재덕 강성훈 장수원 블랙핑크 지수 제니 로제 리사 트레저 13 방예담 최현석 김준규 윤재혁 하루토 박정우 소정환 하윤빈 마시호 김도영 요시노리 박지훈 아사히 현재 소속 솔로 이은주 페리 이하이 원 CL 박산다라 과거 소속 그룹 킵식스 박동호 심영호 이새영 스위티 안내영 성미현 빅마마 이영현 이지영 신연아 박민혜 XO 전승우 강성민 바운스 강진우 김우근 원티드 김재석 전상환 하동균 서재호 비바소울 Jood Samuel D'low 소울스타 이창근 이승우 이규훈 45RPM 이현배 J-Kwondo 에시리 G.R. 스토니 스컹크 스컬 쿠시 YMGA 마스타 우 디지털 마스터 에픽하이 타블로 DJ 투컷 미쓰라 진 과거 소속 솔로 휘성 거미 렉시 세븐 프라임 레드락 JC지은 공민지 박봄 남태현 싸이 승리 B.I 유닛 · 프로젝트 그룹 무가당 GD&TOP GD X TAEYANG 하이 수현 BOM&HI CL&민지 수펄스 MOBB 배우현재 소속 이수혁 임예진 차승원 정혜영 최지우 장현성 유인나 남주혁 손호준 이성경 갈소원 강동원 김희애 김희정 김새론 황승언 과거 소속 구혜선 박한별 임아람 정성일 허이재 강혜정 양경모 양현모 이종석 프로듀서현재 소속 FUTURE BOUNCE (최필강 a.k.a PK·DEE.P) BIGTONE 강규용 a.k.a Q Rovin 함승천 강욱진 Choice37 Lydia Paek 장석준 a.k.a AiRPLAY 조성확 민연재 과거 소속 용감한 형제 강동철 강흑철 DJ Murf 방송인현재 소속 안영미 과거 소속 유병재 오상진 하이그라운드 타블로(대표) 검정치마 조휴일 밀릭 인크레더블 8 코드쿤스트 이디오테잎 디구루 제제 디알 펀치넬로 오프온오프 영채널 콜드 혁오 오혁 임동건 임현제 이인우 더블랙레이블 테디(대표) 쿠시 자이언티 R.Tee DRESS 서원진 전소미 Joe Rhee 24 Peejay 재규어중사 Bryan Cha$e 오케이션 Seoppoem DJ BOID YGX 승리 (대표) 안다 권현빈 Blue.D PSYG 싸이(대표) 연습생 장한나 조미연 문수아 이채영 지니 박 임수아 박서영 최래성 김종섭 YG케이플러스현재 소속여성 모델 허보미 한혜연 이루영 오혜지 강승현 박예운 지호진 김현희 이승미 정지영 이수진 최영지 김예지 신하영 이성경 최소라 황소희 유은비 정한솔 신해남 이송이 이호정 신현지 지이수 김효정 주희정 이정현 이재이 엄유정 박수진 정유정 이하은 송현민 여연희 황현주 김혜아 현지은 홍효 엄예진 배윤영 엘리스 나딘 박선하 이다정 김수빈 김은선 정소현 윤선아 권지야 최하림 신예민 이연주 김예림 박세진 신혜진 박정민 최정인 전민옥 김세인 윤은화 심소영 안예원 박효린 김설희 최세희 고은비 남성 모델 송재희 김영 최창욱 박병민 이현욱 김필수 박형섭 장기용 변우석 남주혁 주우재 정성중 김보헌 임후석 김종훈 이봄찬 조환 서홍석 맹주호 이후림 김태완 김기범 김태우 이석찬 정용수 강희 박기태 서수원 이규호 박보성 신재혁 이현준 김학수 김성욱 신용국 최한빈 데이비드 권현빈 정의성 김정식 김민종 최연규 방주호 김현진 조효인 강성진 이지석 조성훈 휘황 야마토 코타 칸슈지 타모츠 관련 문서 YG 엔터테인먼트의 음반 YG PLUS 하이그라운드의 음반 더블랙레이블의 음반 YGX의 음반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한별&oldid=24226614" 분류: 1984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대한민국의 여자 모델2003년 데뷔YG 엔터테인먼트 소속서울특별시 출신 배우밀양 박씨경복초등학교 동문선화예술중학교 동문안양예술고등학교 동문건국대학교 동문숨은 분류: 중복된 인수를 사용한 틀의 호출을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МонголRomânăРусскийBasa SundaTagalog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5일 (수) 17:0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송지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지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송지영(宋志英, 1916년 12월 13일 평안북도 박천~1989년 4월 24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번역문학가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1] 호는 우인(雨人)이다.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 중국 난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활동하다가 1944년 체포되었다.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 중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풀려났다. 1961년 민족일보 사건에 연루되어 조용수, 안신수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고, 8년이 넘게 복역한 뒤 결국 감형으로 풀려났다. 1980년 신군부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을 때 입법의원으로 참가해 언론기본법을 제정했고,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송지영은 일제 말기 항일 운동으로 옥살이를 한데다 5·16 군사 정변 주체인 군부의 언론 탄압으로 사형수가 되었던 진보 언론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기에,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에 협조하면서 언론 통제에 가담한 일로 비판적인 평가도 있다.[2] 목차 1 약력 2 참고 자료 3 각주 4 외부 링크 약력[편집] 중국 남경중앙대학(南京中央大學) 수학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번역가협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국토통일원 고문 숙명학원 이사 민족문화추진위 이사 1980년 :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1981년 ~ 1984년 : 제11대 국회 의원 (민주정의당)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참고 자료[편집] 송지영 - 대한민국헌정회 박용규 (2007년 3월 1일). “‘격정시대’를 살다간 풍운의 언론인” (PDF). 신문과방송. 68~73면. 2008년 5월 23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송지영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각주[편집] ↑ 시조 송유익 고려때 공 세우며 기틀 마련… 조선 들어 명문가로, 《세계일보》, 2014년 3월 25일 ↑ 박용규 (2007년 3월 1일). “‘격정시대’를 살다간 풍운의 언론인” (PDF). 신문과방송. 73면. 2007년 11월 27일에 확인함. 항일 운동과 진보언론 활동 관련자로 10년의 옥고를 치른 그가 말년에 보여준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vdeh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총 81명)정계 정래혁 박명근 남재희 정석모 장승태 채문식 한영수 고재청 유한열 오세응 손세일 권중돈 유옥우 김윤환 신상초 이종률 김철 이태구 조종호 진의종 경제계 정수창 유기정 박태준 학계 김상협 정의숙 권이혁 서명원 안세희 박봉식 박승재 김대환 나창주 김만제 한기춘 박일경 윤근식 법조계 정희택 이태청 이진우 윤길중 김사용 이병호 이범렬 임영득 종교계 강신명 이병주 이영복 서경보 조향록 전달출 김봉학 이종흥 여성계 김정례 김행자 안목단 이경숙 노동계 정한주 문화·사회계 이호 송지영 정범석 박인각 김준 권정달 박윤종 이정식 이종찬 언론계 방우영 이원경 이진희 향군대표 이맹기 이형근 국보위 대표 이광노 이기백 심유선 조영길 이우재 김영균 노재원 박종문 정태수 서동렬 vdeh민주정의당 제11대 국회의원 전국구1981년 4월 11일 - 1985년 4월 10일 1번 이재형 7번 정희택² 13번 최상업 19번 이우재² 25번 이건호 31번 박현태 37번 지갑종 43번 최낙철 49번 김종인 55번 김행자¹ 61번 전병우 67번 김지호† 2번 나길조 8번 박동진 14번 황병준 20번 이춘구 26번 신상초 32번 이양우 38번 허청일 44번 김모임 50번 박원탁 56번 이낙훈 62번 정창화† 68번 이성재³ 3번 김종경¹ 9번 정원민 15번 류근환 21번 김현자 27번 오제도 33번 박종관 39번 이상선 45번 이헌기² 51번 이상희 57번 김영구 63번 문용주† 69번 강창희† 4번 이용훈 10번 김정호 16번 김용수 22번 정순덕² 28번 김윤환 34번 고귀남 40번 손춘호 46번 이윤자 52번 이영일 58번 황설 64번 김유상† 70번 이성배† 5번 김기철 11번 윤석순 17번 박태준 23번 배성동 29번 정희채 35번 나웅배² 41번 정시채 47번 이민섭 53번 이경숙 59번 하순봉 65번 장경우† 6번 송지영² 12번 김종호 18번 박경석 24번 김사용 30번 김춘수 36번 김집 42번 안교덕 48번 이영희 54번 조남조 60번 곽정현 66번 류수환† ¹임기 중 사망      ²사퇴      ³승계 전 사퇴      †승계 vdeh혁명재판 주요 기결수교수형 정치깡패사건 이정재 경무대 앞 발포사건 곽영주 홍진기 고대생 습격사건 임화수 유지광 동양극장 앞 학생살해사건 신정식 부정선거사건 최인규 특수밀수사건 한필국 민족일보사건 조용수 사회당 반국가행위사건 최백근 무기징역 부정선거사건 한희석 이강학 박용익 민족일보사건 안신규 송지영 30사단 반혁명사건 이갑영 경남북유족회사건 이원식 마산 발포사건 박종표 대구2대법반대데모사건 김문심 동대문시장 깡패사건 조열승 유기금고 대한반공청년단 고대생 습격사건 신도환 경무대 앞 발포사건 유충렬 이 글은 작가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정치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송지영&oldid=22879848" 분류: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대한민국의 제11대 국회의원혁명재판 기결수1916년 태어남1989년 죽음여산 송씨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대한민국의 언론인대한민국의 번역가박천군 출신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작가에 관한 토막글정치인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0월 30일 (화) 15: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현영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현영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현영민 개인 정보로마자 표기 Hyun Young Min출생일 1979년 12월 25일(1979-12-25) (39세)출생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구례군키 178cm포지션 은퇴 (과거 풀백)청소년 클럽 기록1998-2001 건국대학교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2002-20052006 2007-2009 2010-201320132014-2017 울산 현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울산 현대 FC 서울 성남 FC 전남 드래곤즈 0960(3)0100(0)0710(0) 0690(3)0300(1)1210(1)국가대표팀 기록‡20022001-2004 대한민국 U-23대한민국 030(0)150(0) 메달 기록 대한민국의 선수 남자 축구 아시안 게임 동 2002 부산 단체전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6년 12월 3일 기준이다.‡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11년 8월 15일 기준이다. 현영민(玄泳民, 1979년 1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왼쪽 풀백이다. 목차 1 개요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생활 2.2 국가 대표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4 그 외 5 경력 5.1 선수 경력 5.2 국가 대표 경력 6 수상 6.1 개인 6.2 클럽 6.2.1 울산현대 6.2.2 FC 서울 6.3 국가 대표팀 7 각주 8 외부 링크 개요[편집]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출생으로 서울광희초등학교, 경희중학교, 경희고등학교, 건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외모가 축구 선수 이민성을 닮았다고 하여 '민성이 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민성의 별명을 본따 '하산 2'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축구인 생활[편집] 선수 생활[편집] 2002년 울산 현대에서 데뷔하여, 팀의 K리그 1회 우승 (2005년), K리그 2회 준우승 (2002년, 2003년)에 공헌하였다. 2006년 1월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팀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적하여 활약하였고,[1] 2005-06시즌 UEFA컵 본선 무대에 진출하여 로센보르그 BK와의 32강전 2차전에서 데뷔하였다.[2] 세비야 FC와의 8강전 2차전에서 1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3] 통역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여 교체되기도 하였다.[4] 하지만 자신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냈던 블라스티밀 페트르옐라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뒤 아드보카트 감독이 새로 부임하자 거의 출전하지 못하였고,[5] 2007년 친정 팀 울산 현대로 복귀하였다.[6] 울산 현대로 복귀한 뒤 2007년 하우젠 컵 우승 등에 공헌하였으며 2010년 김치곤을 상대로 FC 서울로 트레이드되었다. 2013년 성남 FC로 이적하였다가, 시즌 후 다시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2017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였고 은퇴 후에는 축구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국가 대표 생활[편집] 2001년 11월 8일 세네갈과의 친선경기에서 데뷔하여, 2002년 FIFA 월드컵, 2004년 AFC 아시안컵 등에 참가하였다. 2002년 FIFA 월드컵에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지만 본선 경기에서 기용되지는 않았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좌우 모두 가능하며 공격 가담시 파괴력 또한 상당하다. 재기 넘치는 발동작과 과감한 돌파, 슈팅 등으로 상대 수비를 무력화시키며, 강하고 정확한 롱스로인으로 팀의 또 하나의 득점 루트를 제공한다. 경운기 드리블과 같은 예능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7] 그 외[편집] 2006년 12월, 미스코리아 출신 안춘영과 결혼하였다. 경력[편집] 선수 경력[편집] 2002년 ~ 2005년 울산 현대 2006년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2007년 ~ 2009년 울산 현대 2010년 ~ 2013년 FC 서울 2013년 성남 일화 천마 2014년 ~ 2017년 전남 드래곤즈 국가 대표 경력[편집] 2002년 FIFA 월드컵 대표 2004년 AFC 아시안컵 대표 수상[편집] 개인[편집] 2002년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수상 2002년 체육훈장 맹호장 클럽[편집] 울산현대[편집] K리그 우승 1회 (2005) 리그컵 우승 1회 (2007) K리그 준우승 3회 (2002, 2003, 2008) 리그컵 준우승 2회 (2002, 2005) FC 서울[편집] K리그 우승 2회 (2010, 2012) 리그컵 우승 1회 (2010) 국가 대표팀[편집] 2002년 FIFA 월드컵 4위 2002년 아시안 게임 동메달 각주[편집] ↑ 현영민, 연봉 100만달러에 러시아행 확정···유럽 무대로 '첫 발' ↑ 현영민, UEFA컵 출장…소속 팀 16강 진출 ↑ 현영민, UEFA컵 득점포…소속 팀은 4강 좌절 ↑ 현영민 “통역 미워할 거야~” ↑ 현영민, 아드보카트 부임 후 줄곧 벤치 신세 - 쿠키뉴스 ↑ 울산, 오장은-현영민 영입 마무리 - OSEN ↑ 현영민의 롱 스로인 ‘EPL 델랍 못지않아’ 외부 링크[편집] 현영민 K리그 기록 - 한국프로축구연맹 현영민 - 대한축구협회 vdehFC 서울 - 2010년 K리그 우승 (4회) & 2010년 포스코컵 우승 (2회)← 이전 2006년 삼성 하우젠컵 우승2012년 K리그 우승 다음 → 1 김용대 2 최효진 3 이규로 4 윤홍창 5 천제훈 6 김진규 (부주장) 7 김치우 8 아디 9 정조국 10 데얀 11 방승환 13 현영민 14 김한윤 15 박용호 (주장) 16 하대성 17 이종민 18 고요한 19 이정열 20 한태유 21 최원권 22 고명진 25 이윤표 26 문기한 27 배해민 28 이승렬 29 이현승 30 정다훤 31 강재욱 32 강정훈 33 최태욱 34 조수혁 35 최현태 36 김동우 37 최현빈 38 최종환 39 김태환 40 한일구 42 최원욱 43 이윤호 44 윤동민 45 박영준 46 이광진 47 정승용 48 송승주 49 전호연 50 정상호 88 제파로프 감독: 넬루 빙가다 수석 코치: 안익수 코치: 최용수, 최진한, 김성재 골키퍼 코치: 카르발류 피지컬 코치: 코스타 스카우트: 최기봉 vdehFC 서울 - 2012년 K리그 우승 (5회)← 이전 2010년 K리그 우승 & 2010년 포스코컵 우승2015년 대한민국 FA컵 우승 다음 → 1 김용대 2 윤시호 3 김동우 4 김주영 5 최현태 6 김진규 (부주장) 7 고요한 8 아디 9 정조국 10 데얀 11 몰리나 13 현영민 14 문기한 15 강정훈 16 하대성 (주장) 17 이종민 18 김치우 19 이재권 20 한태유 21 조수혁 22 고명진 23 한일구 24 유상훈 26 에스쿠데로 27 고광민 29 김태환 30 박희도 31 이승규 32 정승용 33 최태욱 35 김용찬 36 이택기 37 김원식 38 장현우 39 송승주 40 윤성우 41 황인성 42 곽중근 43 조호연 44 주익성 45 조민우 46 이재일 47 정동연 48 유상희 77 최효진 감독: 최용수 수석 코치: 박태하 코치: 김성재, 김성남, 이기형 골키퍼 코치: 레안드로 피지컬 코치: 간노 아쓰시 스카우트: 최기봉, 이원준, 김상문, 정재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2002년 CONCACAF 골드컵 4위 1 김병지 2 최성용 3 현영민 4 김태영 5 김남일 6 이민성 7 송종국 8 김도훈 9 최용수 10 황선홍 11 이천수 12 이운재 13 이을용 14 김도근 15 최진철 16 박지성 17 이영표 18 유상철 19 최태욱 20 차두리 21 안효연 22 이동국 23 김용대 24 김상식 29 권정혁 감독: 히딩크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2002년 FIFA 월드컵 4위 1 이운재 2 현영민 3 최성용 4 최진철 5 김남일 6 유상철 7 김태영 8 최태욱 9 설기현 10 이영표 11 최용수 12 김병지 13 이을용 14 이천수 15 이민성 16 차두리 17 윤정환 18 황선홍 19 안정환 20 홍명보 (주장) 21 박지성 22 송종국 23 최은성 감독: 히딩크 vde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2002년 아시안 게임 동메달 1 이운재 2 조병국 3 현영민 4 박요셉 5 김영철 6 박용호 7 변성환 8 김두현 9 이천수 10 박지성 11 최태욱 12 이영표 13 김동진 14 박규선 15 조성환 16 김용대 17 최성국 18 김은중 19 박동혁 20 이동국 (주장) 감독: 박항서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2004년 AFC 아시안컵 1 이운재 2 박진섭 3 박재홍 4 최진철 5 김남일 7 김태영 9 설기현 10 현영민 12 이영표 13 이을용 14 정경호 15 이민성 16 차두리 17 김정겸 18 김은중 19 안정환 20 이동국 21 박지성 22 김용대 25 박요셉 28 김진규 30 차기석 감독: 본프레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현영민&oldid=24238907" 분류: 197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대한민국 국적의 축구 해설가축구 수비수축구 풀백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축구 선수FC 서울의 축구 선수성남 FC의 축구 선수전남 드래곤즈의 축구 선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K리그1의 축구 선수러시아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대한민국의 러시아 진출 축구 선수러시아의 외국인 축구 선수2002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2002년 CONCACAF 골드컵 참가 선수2004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200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구례군 출신서울광희초등학교 동문경희중학교 동문경희고등학교 동문건국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개신교도러시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تۆرکجهEnglishفارسیFrançais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8일 (토) 11: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달랏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달랏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달랏시Thành phố Đà Lạt 쑤언흐엉 호수 달랏시의 위치 현황 국가 베트남 지방 중부 고원 지방 성 럼동성 설립 1893년 예르생 박사가 럼비엔 고원에 도착1916년 후에 법원이 달랏시 설립을 반포 면적 394.64 km² 총인구 406,105 명 (2018) 인구밀도 637 명/km² 방 12개 사 4개 소재지 쩐푸 거리 36번지 관리코드 99D1 우편번호 66100 전화번호 +84-240 차량번호 51 홈페이지 http://www.dalat.gov.vn/ 달랏시(영어: Da Lat, 베트남어: Thành phố Đà Lạt타인포다랏)는 베트남의 럼동성의 성도로 럼비엔(Lâm Viên) 고원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1,500m 고도에 넓이는 393.29km2, 인구는 2009년 기준 206,895명(1999년을 기준 12만명)이다. 호찌민 시에서 약 3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버스로 6시간 30분에서 8시간 정도 소요된다. 달랏이라는 이름은 라틴어: Dat Aliis Laetitiam Aliis Temperiem→"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을, 어떤 이에게는 신선함을"에서 왔으며, 프랑스 식민지 정부가 달랏(Đà Lạt)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하였다. 베트남에서 달랏은 인기있는 관광 목적지이며, 노보텔 달랏과 소피텔 달랏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소피텔 달랏은 본래 1922년에 지어진 달랏 왕궁이었다. 달랏의 특징적인 광경은 우거진 소나무 숲과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이며, 겨울에는 트리메리골드가 피어난다. 일년 내내 잦은 안개도 이 도시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달랏은 생명공학과 핵물리학 분야의 과학 연구 지역으로도 명성이 높다. 고원 지대답게 서늘한 날씨가 일년 내내 이어지며, 배추류나 화훼류, 고구마, 장미 등이 경작된다. 목차 1 역사 2 행정구역 2.1 방 2.2 사 3 기후 4 관광 5 교통 5.1 항공 5.2 버스 5.3 철도 6 갤러리 7 자매도시 8 각주 9 외부 링크 역사[편집] 1890년대 이 지역을 탐사한 박테리아 학자 알렉산드르 예르산과 프랑스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코친차이나의 영토였던 이곳을 보고, 프랑스 식민정부 총독인 폴 두메르에게 고원에 리조트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는 두메르는 흔쾌히 동의를 했다. 1907년 첫 번째 호텔이 지어지고, 도시계획이 어니스트 에브라(프랑스어: Ernest Hébrard)에 의해 실행되었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이곳에 빌라와 기지 등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행정구역[편집] 달랏 달랏 파노라마 달랏은 다음 12개의 방(坊)과 4개의 사(社)로 구성된다. 방[편집] 1방 (Phường 1) 2방 (Phường 2) 3방 (Phường 3) 4방 (Phường 4) 5방 (Phường 5) 6방 (Phường 6) 7방 (Phường 7) 8방 (Phường 8) 9방 (Phường 9) 10방 (Phường 10) 11방 (Phường 11) 12방 (Phường 12) 사[편집] 따눙사 (Tà Nung /耶農) 짬하인사 (Trạm Hành /站行) 쑤언토사 ( Xuân Thọ / 春壽) 쑤언쯔엉사 (Xuân Trường / 春長) 기후[편집] 열대 지역인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달랏이지만 일년 내내 아주 시원한 도시이다. 가장 더운 4월에도 최고 기온 25 ℃ 전후이며, 아침 저녁이되면 겉옷이 필요한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다. 장마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비가 4월에서 11월 초 정도까지 계속된다. 달랏시 (1964–1998)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30.0 (86) 31.0 (87.8) 31.5 (88.7) 31.2 (88.2) 30.6 (87.1) 30.0 (86) 29.2 (84.6) 29.3 (84.7) 29.7 (85.5) 30.0 (86) 29.2 (84.6) 29.4 (84.9) 31.5 (88.7) 평균최고기온 °C (°F) 22.3 (72.1) 24.0 (75.2) 25.0 (77) 25.2 (77.4) 24.5 (76.1) 23.4 (74.1) 22.8 (73) 22.5 (72.5) 22.8 (73) 22.5 (72.5) 21.7 (71.1) 21.4 (70.5) 23.2 (73.8) 일평균기온 °C (°F) 15.8 (60.4) 16.7 (62.1) 17.8 (64) 18.9 (66) 19.3 (66.7) 19.0 (66.2) 18.6 (65.5) 18.5 (65.3) 18.4 (65.1) 18.1 (64.6) 17.3 (63.1) 16.2 (61.2) 17.9 (64.2) 평균최저기온 °C (°F) 11.3 (52.3) 11.7 (53.1) 12.6 (54.7) 14.4 (57.9) 16.0 (60.8) 16.3 (61.3) 16.0 (60.8) 16.1 (61) 15.8 (60.4) 15.1 (59.2) 14.3 (57.7) 12.8 (55) 14.3 (57.7) 최저기온기록 °C (°F) −0.1 (31.8) −0.6 (30.9) 4.2 (39.6) 4.0 (39.2) 10.0 (50) 10.9 (51.6) 10.4 (50.7) 10.6 (51.1) 10.0 (50) 8.1 (46.6) 4.4 (39.9) 2.6 (36.7) −0.6 (30.9) 평균 강수량 mm (인치) 11 (0.4) 24 (0.9) 62 (2.4) 170 (6.7) 191 (7.5) 213 (8.4) 229 (9) 214 (8.4) 282 (11.1) 239 (9.4) 97 (3.8) 36 (1.4) 1,739 (68.5) 평균강우일수 2 2 5 11 18 20 23 22 23 19 10 5 161 평균 상대 습도 (%) 82 78 77 84 87 88 90 91 90 89 85 84 85 평균 월간 일조시간 255 234 255 202 190 147 157 136 133 140 172 215 2,238 출처 #1: 달랏 지리지 (extremes 1918–1940, and 1964–1998)[1] 출처 #2: 베트남 과학 기술 육성 연구소(sun)[2] 관광[편집] 린선 사원 달랏 중앙 시장 쑤언흐엉 호수 - 시 중앙에 있는 호수 뚜옌럼 호수 (터널 클레이 지역) 항응아 게스트하우스 (크레이지 하우스) 달랏 대성당 몽모 언덕 바오다이 황제의 별장 교통[편집] 항공[편집] 리엔크엉 국제공항이 시내에 있다. 베트남 항공, 비엣제트 항공, 젯스타 항공, 바스코, 타이 베트 제트가 운행하고 있다. 운항 도시는 하노이, 호치민, 다낭, 빈, 후에, 방콕, 우한이다. 버스[편집] 호찌민에서 신카페 , 김카페 등 여행사 버스를 이용하면 약 7시간, 냐짱에서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철도[편집] 달랏역 갤러리[편집] 사진을 찍는 허니무너 항응아 게스트하우스 항응아 게스트하우스 항응아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홀 2005년 달랏 꽃축제 항응아 게스트하우스 달랏의 수국 커피 테라스 허니문 여행지로 인기높은 달랏 자매도시[편집] 캐나다 미시소가 일본 삿포로시 태국 치앙마이 영국 맨체스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각주[편집] ↑ “KHÍ HẬU” (베트남어). 달랏시. 2013년 3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월 26일에 확인함.  ↑ “Vietnam Building Code Natural Physical & Climatic Data for Construction” (PDF) (베트남어). 베트남 과학 기술 육성 연구소. 2018년 7월 22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7월 2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달랏 2005 Vietnam Travel Guide - Đà Lạt Columbia Encyclopedia article about Đà Lạt vdeh럼동성의 행정 구역시 달랏시 바오록시 현 깟띠엔현 다떼현 다후오아이현 담롱현 던즈엉현 득쫑현 락즈엉현 럼하현 바오럼현 지린현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33829822 LCCN: n91076786 GND: 7618636-2 BNF: cb125072414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달랏&oldid=24435415" 분류: 달랏베트남의 도시럼동성베트남의 성도럼동성의 지형숨은 분류: CS1 - 베트남어 인용 (vi)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베트남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cèhAkanالعربيةAymar aruBoarischБеларускаяBislamaBahasa BanjarBamanankanBrezhonegCatalàCebuano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miliàn e rumagnòl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NordfriiskFurlanGàidhligGalego客家語/Hak-kâ-ngîעבריתKreyòl ayisyenMagyar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Italiano日本語TaqbaylitKongoKalaallisutRipoarischKurdîLatinaLëtzebuergeschLimburgsLigureLumbaartLietuviųLatviešuMalagasy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NedersaksiesNederlandsNorskDeitschPolskiPiemontèis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ŚlůnskiไทยTagalogSetswana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吴语Zeêuws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6일 (일) 10: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혈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혈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밝은 쪽이 동맥혈, 어두운 쪽이 정맥혈이다. 혈액(血液) 또는 피는 몸 안의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세포의 신진대사에 의해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회수하여 운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체액이다. 보통은 피라고 부른다. 혈액은 결합 조직의 한 종류로 액체 성분인 혈장과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각종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경우 혈액 속의 세포 용적은 여성의 경우 약 38%, 남성의 경우 약 46% 정도이다[1].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의 피가 붉은 색인 것은 적혈구 안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여 붉은 색을 띠기 때문이다. 목차 1 역할 2 조성 2.1 혈장 단백질 2.2 혈구 3 순환계통 3.1 개방 혈관계 3.2 폐쇄 혈관계 4 혈색소 4.1 헤모글로빈 4.2 헤모시아닌 4.3 기타 5 혈액과 건강 5.1 혈액과 관련이 있는 질병 6 혈액형 7 같이 보기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역할[편집] 혈액이 하는 역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2]. 체조직으로 영양소를 운반한다. 허파나 아가미에서 호흡을 통해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몸의 여러 조직에서 나오는 노폐물을 신장으로 운반한다. 내분비계통에서 만들어진 호르몬을 목표 기관까지 운반한다. 온혈동물의 경우 몸 안에서 발생하는 열을 운반하여 체온을 유지한다. 질병에 대항하는 면역 인자를 가지고 있다. 체내 삼투압과 수분 평형에 관여한다. 몸의 수소 이온 농도를 유지한다. 조성[편집] 혈세포의 전자현미경 사진.왼쪽부터 적혈구, 혈소판, 백혈구 동물의 혈액은 혈장과 혈구로 구성된다. 척추동물의 경우 혈구는 혈액의 약 45%, 혈장은 혈액의 약 55% 정도를 차지한다. 혈장의 91%는 물이다[3]. 다음 표는 사람의 혈액 조성이다.[1] 혈장 조성 물 염류 혈장단백질 성분 물 나트륨, 칼륨, 칼슘, 마그네슘, 염화물, 중탄산염 등 알부민, 피브리노겐, 면역 글로불린 등 기능 용매 삼투압 평형, pH 조절, 막 전압 조절 등 삼투압 평형, pH 조절, 응고, 면역 반응 등 혈구 조성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1ml당 개수 500 - 600 백만 5 - 6 천 25 - 40 만 기능 산소와 이산화탄소 수송 외래 세포 파괴 및 항체 생산[주해 1] 혈액 응고 혈구에는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이 있으나, 무척추동물에서는 일반적으로 백혈구만 볼 수 있다. 적혈구는 호흡 색소(혈색소)인 헤모글로빈을 포함하고 있는 혈구로서, 낙타·라마를 제외한 일반적인 포유류의 적혈구는 한가운데가 들어간 원반 모양이며 핵이 없다. 이에 비하여, 낙타·라마 류의 동물의 적혈구는 타원형이고, 한가운데에 핵이 있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어느 것이나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주로 혈장에 들어 있다. 백혈구는 혈색소를 갖지 않는 혈액 속의 세포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혈액을 가진 모든 동물에서 볼 수 있다. 혈소판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으로서, 핵은 없고 혈액 응고 작용에 관계한다. 이러한 혈구, 특히 적혈구를 만드는 기관을 조혈 기관이라고 한다. 양서류 가운데 무미류와 파충류·조류 및 포유류에서는 골수가 대표적인 조혈 기관이다. 양서류 가운데 유미류에서는 지라와 몸 속에 흩어져 있는 특정한 종류의 조직이 조혈 기관의 일을 맡아 하고 있다. 한편, 조류나 포유류에서는 발생 단계에 따라 조혈 기관이 변한다. 즉, 배(胚)의 시기에는 간, 배의 후기에는 지라나 골수에서 혈액이 생성된다. 한편, 오래 된 혈구는 주로 지라나 간 및 골수에서 파괴된다. 백혈구는 배의 시기에는 간·지라 및 골수에서 만들어져 지라에서 파괴된다[4]. 혈장 단백질[편집] 혈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부분의 본문은 혈장 단백질입니다. 혈장의 약 91%는 물이고 혈장 단백질은 혈장 가운데 약 7%를 차지한다. 일부 항체와 단백질 형태의 호르몬을 제외한 대부분의 혈장 단백질은 간에서 생성된다. 혈장 단백질은 수소 이온을 흡수하거나 배출할 수 있어 혈액의 pH를 7.4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5]. 글로불린은 알파, 베타, 감마의 세 종류가 있으며 이 가운데 알파와 베타는 간에서 합성되고 감마글로불린은 림프계통에서 합성된다. 림프계통에서 합성되는 감마글루블린은 면역 항체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6]. 혈장 단백질은 알부민, 글로불린, 피브리노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약 80여 종에 이른다[7]. 알부민은 가용성 단백질 가운데 황산암모늄으로는 침전되지 않는 단순 단백질을 총칭하는 것이고, 글로불린은 물에 녹지 않으며 약한 염기성또는 중성 염류 용액에 녹는 단순 단백질이다. 한편, 피브리노겐은 수용성 단백질로 혈액 응고에 관여하여 혈소판의 침전 속도와 혈액의 점성에 영향을 미친다[7]. 혈장 단백질은 거대 유기 분자와 결합하여 운반 작용을 하는데, 알부민은 헤모글로빈의 분해 산물인 빌리루빈을 운반하고, 글로불린을 포함하고 있는 지단백질은 콜레스테롤을 운반한다[5]. 혈구[편집] 혈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혈구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있다. 적혈구는 혈색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운반한다. 적혈구는 척추동물의 경우 낙타와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운데가 움푹한 원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지름 약 7.5µm 두께 약 1.5µm이다. 적혈구에 있는 혈색소는 철분을 함유하고 있는 포르피린과 구상 단백질인 글로빈의 복합체이다. 혈액은 혈색소 덕분에 동일한 양의 물보다 약 60배 많은 산소를 수용할 수 있다[8]. 백혈구는 적혈구와 달리 자체적으로 세포핵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 염색하였을 때 세포내에 알갱이가 염색되는 과립성 백혈구와 알갱이가 염색되지 않는 무과립성 백혈구로 구분된다. 과립성 백혈구로는 염색 특징에 따라 호산성 백혈구, 호염기성 백혈구, 호중성 백혈구가 있고, 무과립성 백혈구로는 림프구와 단백구가 있다[1][9]. 백혈구는 골수에 있는 공통 조상 세포인 조혈모세포에서 증식된 뒤 혈액 속으로 유입된다[10]. 혈소판은 골수의 거핵 세포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부정형의 조직으로 크기는 약 3-4µm이다. 주된 역할은 손상된 혈관에서 응고 작용을 일으켜 혈액의 손실을 막고 혈관의 재생을 돕는 것이다[10]. 600배로 확대한 혈액 사진 사람 개구리 어류 순환계통[편집] 인간의 순환계통 이 부분의 본문은 순환계통입니다. 동물의 혈관계는 개방 혈관계와 폐쇄 혈관계로 나뉜다[11]. 개방 혈관계[편집] 절지동물인 새우의 경우, 개방 혈관계에서 산소가 포함된 혈액은 심장으로부터 혈관을 통해 몸의 중요한 부분까지 운반되는데, 혈관은 그다지 길지 않고 단순하다. 더구나 모세 혈관이 없으므로, 혈액은 혈관의 말단으로부터 직접 조직 속으로 흘러들어가, 세포 사이에 있는 체강액(체액)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조직 세포에 산소를 공급한 혈액은, 정맥에 해당되는 단순한 혈관에 모인 후 아가미를 거치면서 산소를 많이 함유하여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순환계를 개방 혈관계라고 하며, 무척추동물에서 널리 볼 수 있다. 폐쇄 혈관계[편집] 환형동물[주해 2], 원색동물[주해 3] 및 척추동물[주해 4] 의 경우, 심장에서 나간 혈액은 허파나 아가미에서 가스 교환이 이루어지고, 대동맥을 통하여 몸의 세부에까지 산소를 운반하는데, 동맥과 정맥은 모세 혈관에 의해 연결되어 있어서, 개방 혈관계와는 달리 혈액이 조직 속으로 직접 흘러드는 일이 없다. 가스 교환은 모세 혈관의 얇은 막을 통하여 혈액과 조직 세포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또, 수분이나 영양분·노폐물 등도 모세 혈관의 벽을 통하여 조직 세포에 공급되거나 혈액 속으로 들어간다. 모세 혈관은 마침내 정맥으로 이어져, 혈액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순환계를 폐쇄 혈관계라고 한다. 혈색소[편집] 인간의 피가 붉게 보이는 것은 적혈구에 포함된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혈액에는 여러 가지 물질이 녹아 있어서 무색인 경우는 드물다. 척추동물의 혈액이 붉은색을 띠는 것은 주로 적혈구 속에 포함되어 있는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무척추동물 중에도 혈액이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있으나, 이것은 혈장 속에 붉은색의 혈색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액 속에 직접 녹아 있는 산소의 양만으로는 생명 활동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산소와 능동적으로 결합하여 보다 많은 산소를 운반하는 혈색소의 존재가 중요하게 된다. 이들 혈색소는 모두 금속 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단백질로서, 산소 분압이 높은 호흡 기관에서 산소와 결합하며, 분압이 낮은 조직 세포에서는 산소를 해리하여 조직 세포에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혈색소는 산소 분자를 주고받는 일을 하므로 보통 '호흡 색소'라고도 한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다른 종류의 혈색소는 혈장에 들어 있다. 동물의 혈색소에는 헤모글로빈·헤모시아닌·클로로크루오린·헤모에리드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갑각류 등의 피가 녹색으로 보이는 까닭은 헤모시아닌에 함유된 구리때문이다.[10] 헤모글로빈[편집] 헤모글로빈의 구조. 그림에서 녹색이 색소인 햄, 붉은 색과 파란 색은 단백질 구조이다. 헤모글로빈은 네 개의 햄 색소와 각각 알파와 베타로 불리는 두 개의 단백질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글로빈은 철을 포함하여 산소와 가역적인 방법으로 결합한다. 헤모글로빈은 세포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와도 결합하여 세포 조직으로 산소를 해리하고 이산화탄소를 체외로 내보내게 된다. 이때, 이산화탄소는 산소와 달리 햄 구조의 다른 부분에 결합하여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체내의 이산화탄소는 약 8%가 혈장에 녹아들고 20%는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며 나머지 70%는 적혈구의 다른 부분에 스며들게 된다. 이산화탄소가 적혈구로부터 농도가 낮은 혈장으로 녹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적혈구는 물과 효소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를 탄산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다시 중탄산이온과 수소이온으로 분리시킨 다음 중탄산이온은 혈장으로 내보내고 수소이온 만을 헤모글로빈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염화물 전환이라고 하며, 그 결과 혈장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고 주변 조직들로부터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12] 헤모시아닌[편집] 두족류, 복족류와 같은 연체동물이나 대다수의 절지동물의 경우 혈색소는 헤모시아닌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시아닌은 두 개의 구리와 산소가 결합하여 체내에 산소를 운반한다. 산소를 얻게 되면 산화구리의 색인 푸르스름한 빛을 지니게 되고 산소를 잃으면 무색이 된다.[13] 대부분의 연체동물은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으나 일부 종류는 헤모글로빈과 헤모시아닌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린 때에는 헤모글로빈이 있다가 성체가 되면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연체동물 중에서도 혈색소가 헤모글로빈인 경우도 있는데, 피조개, 꼬막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14] 기타[편집] 갯지렁이는 클로로크로우린을 혈색소로 사용하는데, 이 혈색소는 헤모글로빈과 같이 철을 산소와 결합하는 매개체로 사용하지만 헤모글로빈보다는 산소 결합력이 떨어진다. 혈중에 클로로크로우린의 농도가 높을 경우 붉은 색을 띄며 옅으면 녹색을 띈다.[14] 혈액과 건강[편집] 출혈: 건강한 성인 남성의 경우 외상을 입어 출혈이 있더라도 전체 혈액의 약 20%(1L)까지는 신체에 큰 무리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40%에 해당하는 2L 가량의 혈액을 잃었을 경우 쇼크에 빠질 수 있고 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부상을 입었을 때에는 내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 혈액에는 혈소판과 같은 응고 인자가 있어 더이상 출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손상된 혈관을 막는다.[15] 혈액과 관련이 있는 질병[편집] 백혈병 - 백혈구가 이상 증식하는 질병이다. 당뇨병 - 인슐린 작용이 부족하여 혈액 내에 당분이 과도하게 분포하는 것이 주요 원인인 질병이다. 빈혈 - 혈액 내에 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부족한 질병이다. 겸형 적혈구 빈혈증은 적혈구의 모양이 변형된 유전성 질환이다. 혈우병 - 혈액을 응고하는 인자가 부족하여 출혈이 멈추지 않는 유전성 질환이다.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의해 백혈구가 감염되어 면역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감염성 질환이다. 혈액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혈액형입니다. 혈액형은 적혈구의 세포막에 있는 당단백질의 항원 기능에 따라 혈액의 종류를 구분한 것이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해 구분된 ABO식 혈액형이 유명하나 사람의 경우 이 외에도 RH식, MNSs, Lewis Duffy, Kidd 등 500여 가지 항원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ABO식과 RH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수혈을 하였을 때 항원항체 반응으로 서로 다른 혈액형의 적혈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ABO식에도 많은 돌연변이가 있어 약(弱)A형이나 약B형의 경우 O형으로 오진될 수 있고, AB인자가 결합되어 O형의 배우자와 만나 낳은 자식이 AB형이 되는 시스-AB형, A인자와 B인자가 함께 있는 혈액 키메라 등이 생길 수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도 혈액형이 구분되는데 개와 같은 경우 11가지의 혈액형이 알려져 있다.[16] 한편, 일본, 대한민국 등에서 유행하는 ABO식 혈액형에 따른 성격 구분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종의 사이비과학이다.[17] 2006년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은 대한민국에서 성격과 혈액형에는 실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18] 같이 보기[편집] 출혈 헌혈 혈압 대체 혈액 혈액 검사 헤모포비아 주해[편집] ↑ 과민반응을 일으킬 경우 알레르기가 생길 수 있다. ↑ 대표적인 환형동물로는 지렁이가 있다 ↑ . 대표적인 원색동물로는 히드라, 해파리 등이 있다 ↑ 척추동물로는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이 있다. 각주[편집] ↑ 가 나 다 Pulves 외, 이광웅 외 역, 생명 생물의 과학, 2006, 교보문고, ISBN 89-7085-516-5, 919쪽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37쪽 ↑ The Franklin Institute Inc.. "Blood – The Human Heart" Archived 2009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Retrieved 19 March 2009.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 가 나 강성구 외, 인체생물학, 아카데미서적, ISBN 89-7616-248-X, 98쪽 ↑ 강정부 외, 수의임상병리, 기전연구사, 2000, ISBN 89-336-0181-3, 273쪽 ↑ 가 나 화학용어사전, 일진사, 2006 ISBN 89-429-0903-5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38쪽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47쪽 ↑ 가 나 다 생명과학사전, 아카데미서적, 2003, ISBN 89-7616-270-6 ↑ 이하 별도의 출처가 없는 것은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 조지 B 존슨, 전병학 역, 생명 과학, 동화기술, 2007, ISBN 89-425-1186-4, 476쪽 ↑ Shuster, Carl N (2004). "Chapter 11: A blue blood: the circulatory system". In Shuster, Carl N, Jr; Barlow, Robert B; Brockmann, H. Jane. The American Horseshoe Crab. Harvard University Press. pp. 276–7. ISBN 0-674-01159-7. ↑ 가 나 권오길, 달과 팽이, 지성사, 2005, ISBN 89-7889-120-9, 223-224쪽 ↑ "Blood - The Human heart" Archived 2009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The Franklin Institute. Retrieved 19 March 2009. ↑ 이성주, 인체의 신비, 살림, 2003, ISBN 89-522-0119-1 , 60쪽 ↑ 혈액형이 성격 결정? 새빨간 거짓말, 한겨레신문, 2008년 5월 26일 ↑ 김범준, 〈복잡계로서의 사회와 사회물리학〉, 《복잡계 워크샵》, 삼성경제연구소, 2006, ISBN 89-7633-310-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혈액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피 대한혈액학회 vdeh순환계통심장겉구조 심장바닥 심장끝 고랑(방실사이, 심방사이, 앞심실사이, 뒤심실사이) 속구조 심방(심방사이막, 빗살근, 분계고랑) 심실(심실사이막, 힘줄끈, 꼭지근) 심장판막 판막첨판 방실사이막심장뼈대정맥사이결절 우심(대정맥, 관상정맥동) → 우심방 → 삼첨판 → 우심실 → 폐동맥판 → (폐동맥)좌심(폐정맥) → 좌심방 → 승모판 → 좌심실 → 대동맥판 → (대동맥)온몸순환(심장, 좌심실) → 대동맥 → 동맥 → 세동맥 → 모세혈관 → 세정맥 → 정맥 → 대정맥 → (심장, 우심방)폐순환(심장, 우심실) → 폐동맥 → (폐) → 폐정맥 → (심장, 좌심방)혈관 혈관내피 혈관속막 혈관중간막 혈관바깥막 동맥 관상동맥 영양동맥 정맥 동반정맥 이끌정맥 정맥얼기 림프계통 림프 림프관 모세림프관 림프절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LCCN: sh85014927 GND: 4007259-9 BNF: cb11934902m (데이터) NDL: 0056567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혈액&oldid=24059694" 분류: 혈액숨은 분류: 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ܐܪܡܝܐمصرىঅসমীয়াAsturianuAtikamekwАвар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བོད་ཡིག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Chavacano de ZamboangaMìng-dĕ̤ng-ngṳ̄CebuanoᏣᎳᎩکوردی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Zazaki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VõroFøroysktFrançaisFurlanFryskGaeilgeGàidhligGalegoAvañe'ẽगोंयची कोंकणी / Gõychi Konknniગુજરાતી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Fiji Hindi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ភាសាខ្មែរಕನ್ನಡKurdî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ЛаккуЛезгиLimburgsLumbaartLingálaLietuviųLatviešuMalagasyОлык марий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altiမြန်မာဘာသာNāhuatlPlattdüütschनेपाली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Oromooଓଡ଼ିଆਪੰਜਾਬੀKapampanganPolskiپنجابیپښتو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संस्कृतम्Саха тылаᱥᱟᱱᱛᱟᱲᱤSicilianuScotsسنڌي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ChiShonaSoomaaligaShqip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Тоҷикӣ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Vepsän kel’Tiếng ViệtWest-VlamsVolapükWinarayWolof吴语IsiXhosa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YorùbáVahcuengh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3: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혈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혈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밝은 쪽이 동맥혈, 어두운 쪽이 정맥혈이다. 혈액(血液) 또는 피는 몸 안의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세포의 신진대사에 의해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회수하여 운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체액이다. 보통은 피라고 부른다. 혈액은 결합 조직의 한 종류로 액체 성분인 혈장과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각종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경우 혈액 속의 세포 용적은 여성의 경우 약 38%, 남성의 경우 약 46% 정도이다[1].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의 피가 붉은 색인 것은 적혈구 안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여 붉은 색을 띠기 때문이다. 목차 1 역할 2 조성 2.1 혈장 단백질 2.2 혈구 3 순환계통 3.1 개방 혈관계 3.2 폐쇄 혈관계 4 혈색소 4.1 헤모글로빈 4.2 헤모시아닌 4.3 기타 5 혈액과 건강 5.1 혈액과 관련이 있는 질병 6 혈액형 7 같이 보기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역할[편집] 혈액이 하는 역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2]. 체조직으로 영양소를 운반한다. 허파나 아가미에서 호흡을 통해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몸의 여러 조직에서 나오는 노폐물을 신장으로 운반한다. 내분비계통에서 만들어진 호르몬을 목표 기관까지 운반한다. 온혈동물의 경우 몸 안에서 발생하는 열을 운반하여 체온을 유지한다. 질병에 대항하는 면역 인자를 가지고 있다. 체내 삼투압과 수분 평형에 관여한다. 몸의 수소 이온 농도를 유지한다. 조성[편집] 혈세포의 전자현미경 사진.왼쪽부터 적혈구, 혈소판, 백혈구 동물의 혈액은 혈장과 혈구로 구성된다. 척추동물의 경우 혈구는 혈액의 약 45%, 혈장은 혈액의 약 55% 정도를 차지한다. 혈장의 91%는 물이다[3]. 다음 표는 사람의 혈액 조성이다.[1] 혈장 조성 물 염류 혈장단백질 성분 물 나트륨, 칼륨, 칼슘, 마그네슘, 염화물, 중탄산염 등 알부민, 피브리노겐, 면역 글로불린 등 기능 용매 삼투압 평형, pH 조절, 막 전압 조절 등 삼투압 평형, pH 조절, 응고, 면역 반응 등 혈구 조성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1ml당 개수 500 - 600 백만 5 - 6 천 25 - 40 만 기능 산소와 이산화탄소 수송 외래 세포 파괴 및 항체 생산[주해 1] 혈액 응고 혈구에는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이 있으나, 무척추동물에서는 일반적으로 백혈구만 볼 수 있다. 적혈구는 호흡 색소(혈색소)인 헤모글로빈을 포함하고 있는 혈구로서, 낙타·라마를 제외한 일반적인 포유류의 적혈구는 한가운데가 들어간 원반 모양이며 핵이 없다. 이에 비하여, 낙타·라마 류의 동물의 적혈구는 타원형이고, 한가운데에 핵이 있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어느 것이나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주로 혈장에 들어 있다. 백혈구는 혈색소를 갖지 않는 혈액 속의 세포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혈액을 가진 모든 동물에서 볼 수 있다. 혈소판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으로서, 핵은 없고 혈액 응고 작용에 관계한다. 이러한 혈구, 특히 적혈구를 만드는 기관을 조혈 기관이라고 한다. 양서류 가운데 무미류와 파충류·조류 및 포유류에서는 골수가 대표적인 조혈 기관이다. 양서류 가운데 유미류에서는 지라와 몸 속에 흩어져 있는 특정한 종류의 조직이 조혈 기관의 일을 맡아 하고 있다. 한편, 조류나 포유류에서는 발생 단계에 따라 조혈 기관이 변한다. 즉, 배(胚)의 시기에는 간, 배의 후기에는 지라나 골수에서 혈액이 생성된다. 한편, 오래 된 혈구는 주로 지라나 간 및 골수에서 파괴된다. 백혈구는 배의 시기에는 간·지라 및 골수에서 만들어져 지라에서 파괴된다[4]. 혈장 단백질[편집] 혈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부분의 본문은 혈장 단백질입니다. 혈장의 약 91%는 물이고 혈장 단백질은 혈장 가운데 약 7%를 차지한다. 일부 항체와 단백질 형태의 호르몬을 제외한 대부분의 혈장 단백질은 간에서 생성된다. 혈장 단백질은 수소 이온을 흡수하거나 배출할 수 있어 혈액의 pH를 7.4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5]. 글로불린은 알파, 베타, 감마의 세 종류가 있으며 이 가운데 알파와 베타는 간에서 합성되고 감마글로불린은 림프계통에서 합성된다. 림프계통에서 합성되는 감마글루블린은 면역 항체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6]. 혈장 단백질은 알부민, 글로불린, 피브리노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약 80여 종에 이른다[7]. 알부민은 가용성 단백질 가운데 황산암모늄으로는 침전되지 않는 단순 단백질을 총칭하는 것이고, 글로불린은 물에 녹지 않으며 약한 염기성또는 중성 염류 용액에 녹는 단순 단백질이다. 한편, 피브리노겐은 수용성 단백질로 혈액 응고에 관여하여 혈소판의 침전 속도와 혈액의 점성에 영향을 미친다[7]. 혈장 단백질은 거대 유기 분자와 결합하여 운반 작용을 하는데, 알부민은 헤모글로빈의 분해 산물인 빌리루빈을 운반하고, 글로불린을 포함하고 있는 지단백질은 콜레스테롤을 운반한다[5]. 혈구[편집] 혈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혈구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있다. 적혈구는 혈색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운반한다. 적혈구는 척추동물의 경우 낙타와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운데가 움푹한 원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지름 약 7.5µm 두께 약 1.5µm이다. 적혈구에 있는 혈색소는 철분을 함유하고 있는 포르피린과 구상 단백질인 글로빈의 복합체이다. 혈액은 혈색소 덕분에 동일한 양의 물보다 약 60배 많은 산소를 수용할 수 있다[8]. 백혈구는 적혈구와 달리 자체적으로 세포핵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 염색하였을 때 세포내에 알갱이가 염색되는 과립성 백혈구와 알갱이가 염색되지 않는 무과립성 백혈구로 구분된다. 과립성 백혈구로는 염색 특징에 따라 호산성 백혈구, 호염기성 백혈구, 호중성 백혈구가 있고, 무과립성 백혈구로는 림프구와 단백구가 있다[1][9]. 백혈구는 골수에 있는 공통 조상 세포인 조혈모세포에서 증식된 뒤 혈액 속으로 유입된다[10]. 혈소판은 골수의 거핵 세포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부정형의 조직으로 크기는 약 3-4µm이다. 주된 역할은 손상된 혈관에서 응고 작용을 일으켜 혈액의 손실을 막고 혈관의 재생을 돕는 것이다[10]. 600배로 확대한 혈액 사진 사람 개구리 어류 순환계통[편집] 인간의 순환계통 이 부분의 본문은 순환계통입니다. 동물의 혈관계는 개방 혈관계와 폐쇄 혈관계로 나뉜다[11]. 개방 혈관계[편집] 절지동물인 새우의 경우, 개방 혈관계에서 산소가 포함된 혈액은 심장으로부터 혈관을 통해 몸의 중요한 부분까지 운반되는데, 혈관은 그다지 길지 않고 단순하다. 더구나 모세 혈관이 없으므로, 혈액은 혈관의 말단으로부터 직접 조직 속으로 흘러들어가, 세포 사이에 있는 체강액(체액)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조직 세포에 산소를 공급한 혈액은, 정맥에 해당되는 단순한 혈관에 모인 후 아가미를 거치면서 산소를 많이 함유하여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순환계를 개방 혈관계라고 하며, 무척추동물에서 널리 볼 수 있다. 폐쇄 혈관계[편집] 환형동물[주해 2], 원색동물[주해 3] 및 척추동물[주해 4] 의 경우, 심장에서 나간 혈액은 허파나 아가미에서 가스 교환이 이루어지고, 대동맥을 통하여 몸의 세부에까지 산소를 운반하는데, 동맥과 정맥은 모세 혈관에 의해 연결되어 있어서, 개방 혈관계와는 달리 혈액이 조직 속으로 직접 흘러드는 일이 없다. 가스 교환은 모세 혈관의 얇은 막을 통하여 혈액과 조직 세포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또, 수분이나 영양분·노폐물 등도 모세 혈관의 벽을 통하여 조직 세포에 공급되거나 혈액 속으로 들어간다. 모세 혈관은 마침내 정맥으로 이어져, 혈액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순환계를 폐쇄 혈관계라고 한다. 혈색소[편집] 인간의 피가 붉게 보이는 것은 적혈구에 포함된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혈액에는 여러 가지 물질이 녹아 있어서 무색인 경우는 드물다. 척추동물의 혈액이 붉은색을 띠는 것은 주로 적혈구 속에 포함되어 있는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무척추동물 중에도 혈액이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있으나, 이것은 혈장 속에 붉은색의 혈색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액 속에 직접 녹아 있는 산소의 양만으로는 생명 활동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산소와 능동적으로 결합하여 보다 많은 산소를 운반하는 혈색소의 존재가 중요하게 된다. 이들 혈색소는 모두 금속 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단백질로서, 산소 분압이 높은 호흡 기관에서 산소와 결합하며, 분압이 낮은 조직 세포에서는 산소를 해리하여 조직 세포에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혈색소는 산소 분자를 주고받는 일을 하므로 보통 '호흡 색소'라고도 한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다른 종류의 혈색소는 혈장에 들어 있다. 동물의 혈색소에는 헤모글로빈·헤모시아닌·클로로크루오린·헤모에리드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갑각류 등의 피가 녹색으로 보이는 까닭은 헤모시아닌에 함유된 구리때문이다.[10] 헤모글로빈[편집] 헤모글로빈의 구조. 그림에서 녹색이 색소인 햄, 붉은 색과 파란 색은 단백질 구조이다. 헤모글로빈은 네 개의 햄 색소와 각각 알파와 베타로 불리는 두 개의 단백질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글로빈은 철을 포함하여 산소와 가역적인 방법으로 결합한다. 헤모글로빈은 세포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와도 결합하여 세포 조직으로 산소를 해리하고 이산화탄소를 체외로 내보내게 된다. 이때, 이산화탄소는 산소와 달리 햄 구조의 다른 부분에 결합하여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체내의 이산화탄소는 약 8%가 혈장에 녹아들고 20%는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며 나머지 70%는 적혈구의 다른 부분에 스며들게 된다. 이산화탄소가 적혈구로부터 농도가 낮은 혈장으로 녹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적혈구는 물과 효소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를 탄산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다시 중탄산이온과 수소이온으로 분리시킨 다음 중탄산이온은 혈장으로 내보내고 수소이온 만을 헤모글로빈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염화물 전환이라고 하며, 그 결과 혈장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고 주변 조직들로부터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12] 헤모시아닌[편집] 두족류, 복족류와 같은 연체동물이나 대다수의 절지동물의 경우 혈색소는 헤모시아닌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시아닌은 두 개의 구리와 산소가 결합하여 체내에 산소를 운반한다. 산소를 얻게 되면 산화구리의 색인 푸르스름한 빛을 지니게 되고 산소를 잃으면 무색이 된다.[13] 대부분의 연체동물은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으나 일부 종류는 헤모글로빈과 헤모시아닌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린 때에는 헤모글로빈이 있다가 성체가 되면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연체동물 중에서도 혈색소가 헤모글로빈인 경우도 있는데, 피조개, 꼬막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14] 기타[편집] 갯지렁이는 클로로크로우린을 혈색소로 사용하는데, 이 혈색소는 헤모글로빈과 같이 철을 산소와 결합하는 매개체로 사용하지만 헤모글로빈보다는 산소 결합력이 떨어진다. 혈중에 클로로크로우린의 농도가 높을 경우 붉은 색을 띄며 옅으면 녹색을 띈다.[14] 혈액과 건강[편집] 출혈: 건강한 성인 남성의 경우 외상을 입어 출혈이 있더라도 전체 혈액의 약 20%(1L)까지는 신체에 큰 무리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40%에 해당하는 2L 가량의 혈액을 잃었을 경우 쇼크에 빠질 수 있고 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부상을 입었을 때에는 내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 혈액에는 혈소판과 같은 응고 인자가 있어 더이상 출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손상된 혈관을 막는다.[15] 혈액과 관련이 있는 질병[편집] 백혈병 - 백혈구가 이상 증식하는 질병이다. 당뇨병 - 인슐린 작용이 부족하여 혈액 내에 당분이 과도하게 분포하는 것이 주요 원인인 질병이다. 빈혈 - 혈액 내에 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부족한 질병이다. 겸형 적혈구 빈혈증은 적혈구의 모양이 변형된 유전성 질환이다. 혈우병 - 혈액을 응고하는 인자가 부족하여 출혈이 멈추지 않는 유전성 질환이다.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의해 백혈구가 감염되어 면역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감염성 질환이다. 혈액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혈액형입니다. 혈액형은 적혈구의 세포막에 있는 당단백질의 항원 기능에 따라 혈액의 종류를 구분한 것이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해 구분된 ABO식 혈액형이 유명하나 사람의 경우 이 외에도 RH식, MNSs, Lewis Duffy, Kidd 등 500여 가지 항원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ABO식과 RH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수혈을 하였을 때 항원항체 반응으로 서로 다른 혈액형의 적혈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ABO식에도 많은 돌연변이가 있어 약(弱)A형이나 약B형의 경우 O형으로 오진될 수 있고, AB인자가 결합되어 O형의 배우자와 만나 낳은 자식이 AB형이 되는 시스-AB형, A인자와 B인자가 함께 있는 혈액 키메라 등이 생길 수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도 혈액형이 구분되는데 개와 같은 경우 11가지의 혈액형이 알려져 있다.[16] 한편, 일본, 대한민국 등에서 유행하는 ABO식 혈액형에 따른 성격 구분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종의 사이비과학이다.[17] 2006년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은 대한민국에서 성격과 혈액형에는 실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18] 같이 보기[편집] 출혈 헌혈 혈압 대체 혈액 혈액 검사 헤모포비아 주해[편집] ↑ 과민반응을 일으킬 경우 알레르기가 생길 수 있다. ↑ 대표적인 환형동물로는 지렁이가 있다 ↑ . 대표적인 원색동물로는 히드라, 해파리 등이 있다 ↑ 척추동물로는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이 있다. 각주[편집] ↑ 가 나 다 Pulves 외, 이광웅 외 역, 생명 생물의 과학, 2006, 교보문고, ISBN 89-7085-516-5, 919쪽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37쪽 ↑ The Franklin Institute Inc.. "Blood – The Human Heart" Archived 2009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Retrieved 19 March 2009.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 가 나 강성구 외, 인체생물학, 아카데미서적, ISBN 89-7616-248-X, 98쪽 ↑ 강정부 외, 수의임상병리, 기전연구사, 2000, ISBN 89-336-0181-3, 273쪽 ↑ 가 나 화학용어사전, 일진사, 2006 ISBN 89-429-0903-5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38쪽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47쪽 ↑ 가 나 다 생명과학사전, 아카데미서적, 2003, ISBN 89-7616-270-6 ↑ 이하 별도의 출처가 없는 것은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 조지 B 존슨, 전병학 역, 생명 과학, 동화기술, 2007, ISBN 89-425-1186-4, 476쪽 ↑ Shuster, Carl N (2004). "Chapter 11: A blue blood: the circulatory system". In Shuster, Carl N, Jr; Barlow, Robert B; Brockmann, H. Jane. The American Horseshoe Crab. Harvard University Press. pp. 276–7. ISBN 0-674-01159-7. ↑ 가 나 권오길, 달과 팽이, 지성사, 2005, ISBN 89-7889-120-9, 223-224쪽 ↑ "Blood - The Human heart" Archived 2009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The Franklin Institute. Retrieved 19 March 2009. ↑ 이성주, 인체의 신비, 살림, 2003, ISBN 89-522-0119-1 , 60쪽 ↑ 혈액형이 성격 결정? 새빨간 거짓말, 한겨레신문, 2008년 5월 26일 ↑ 김범준, 〈복잡계로서의 사회와 사회물리학〉, 《복잡계 워크샵》, 삼성경제연구소, 2006, ISBN 89-7633-310-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혈액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피 대한혈액학회 vdeh순환계통심장겉구조 심장바닥 심장끝 고랑(방실사이, 심방사이, 앞심실사이, 뒤심실사이) 속구조 심방(심방사이막, 빗살근, 분계고랑) 심실(심실사이막, 힘줄끈, 꼭지근) 심장판막 판막첨판 방실사이막심장뼈대정맥사이결절 우심(대정맥, 관상정맥동) → 우심방 → 삼첨판 → 우심실 → 폐동맥판 → (폐동맥)좌심(폐정맥) → 좌심방 → 승모판 → 좌심실 → 대동맥판 → (대동맥)온몸순환(심장, 좌심실) → 대동맥 → 동맥 → 세동맥 → 모세혈관 → 세정맥 → 정맥 → 대정맥 → (심장, 우심방)폐순환(심장, 우심실) → 폐동맥 → (폐) → 폐정맥 → (심장, 좌심방)혈관 혈관내피 혈관속막 혈관중간막 혈관바깥막 동맥 관상동맥 영양동맥 정맥 동반정맥 이끌정맥 정맥얼기 림프계통 림프 림프관 모세림프관 림프절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LCCN: sh85014927 GND: 4007259-9 BNF: cb11934902m (데이터) NDL: 0056567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혈액&oldid=24059694" 분류: 혈액숨은 분류: 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ܐܪܡܝܐمصرىঅসমীয়াAsturianuAtikamekwАвар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བོད་ཡིག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Chavacano de ZamboangaMìng-dĕ̤ng-ngṳ̄CebuanoᏣᎳᎩکوردی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Zazaki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VõroFøroysktFrançaisFurlanFryskGaeilgeGàidhligGalegoAvañe'ẽगोंयची कोंकणी / Gõychi Konknniગુજરાતી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Fiji Hindi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ភាសាខ្មែរಕನ್ನಡKurdî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ЛаккуЛезгиLimburgsLumbaartLingálaLietuviųLatviešuMalagasyОлык марий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altiမြန်မာဘာသာNāhuatlPlattdüütschनेपाली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Oromooଓଡ଼ିଆਪੰਜਾਬੀKapampanganPolskiپنجابیپښتو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संस्कृतम्Саха тылаᱥᱟᱱᱛᱟᱲᱤSicilianuScotsسنڌي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ChiShonaSoomaaligaShqip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Тоҷикӣ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Vepsän kel’Tiếng ViệtWest-VlamsVolapükWinarayWolof吴语IsiXhosa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YorùbáVahcuengh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3: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혈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혈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밝은 쪽이 동맥혈, 어두운 쪽이 정맥혈이다. 혈액(血液) 또는 피는 몸 안의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세포의 신진대사에 의해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회수하여 운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체액이다. 보통은 피라고 부른다. 혈액은 결합 조직의 한 종류로 액체 성분인 혈장과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각종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경우 혈액 속의 세포 용적은 여성의 경우 약 38%, 남성의 경우 약 46% 정도이다[1].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의 피가 붉은 색인 것은 적혈구 안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여 붉은 색을 띠기 때문이다. 목차 1 역할 2 조성 2.1 혈장 단백질 2.2 혈구 3 순환계통 3.1 개방 혈관계 3.2 폐쇄 혈관계 4 혈색소 4.1 헤모글로빈 4.2 헤모시아닌 4.3 기타 5 혈액과 건강 5.1 혈액과 관련이 있는 질병 6 혈액형 7 같이 보기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역할[편집] 혈액이 하는 역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2]. 체조직으로 영양소를 운반한다. 허파나 아가미에서 호흡을 통해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몸의 여러 조직에서 나오는 노폐물을 신장으로 운반한다. 내분비계통에서 만들어진 호르몬을 목표 기관까지 운반한다. 온혈동물의 경우 몸 안에서 발생하는 열을 운반하여 체온을 유지한다. 질병에 대항하는 면역 인자를 가지고 있다. 체내 삼투압과 수분 평형에 관여한다. 몸의 수소 이온 농도를 유지한다. 조성[편집] 혈세포의 전자현미경 사진.왼쪽부터 적혈구, 혈소판, 백혈구 동물의 혈액은 혈장과 혈구로 구성된다. 척추동물의 경우 혈구는 혈액의 약 45%, 혈장은 혈액의 약 55% 정도를 차지한다. 혈장의 91%는 물이다[3]. 다음 표는 사람의 혈액 조성이다.[1] 혈장 조성 물 염류 혈장단백질 성분 물 나트륨, 칼륨, 칼슘, 마그네슘, 염화물, 중탄산염 등 알부민, 피브리노겐, 면역 글로불린 등 기능 용매 삼투압 평형, pH 조절, 막 전압 조절 등 삼투압 평형, pH 조절, 응고, 면역 반응 등 혈구 조성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1ml당 개수 500 - 600 백만 5 - 6 천 25 - 40 만 기능 산소와 이산화탄소 수송 외래 세포 파괴 및 항체 생산[주해 1] 혈액 응고 혈구에는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이 있으나, 무척추동물에서는 일반적으로 백혈구만 볼 수 있다. 적혈구는 호흡 색소(혈색소)인 헤모글로빈을 포함하고 있는 혈구로서, 낙타·라마를 제외한 일반적인 포유류의 적혈구는 한가운데가 들어간 원반 모양이며 핵이 없다. 이에 비하여, 낙타·라마 류의 동물의 적혈구는 타원형이고, 한가운데에 핵이 있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어느 것이나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주로 혈장에 들어 있다. 백혈구는 혈색소를 갖지 않는 혈액 속의 세포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혈액을 가진 모든 동물에서 볼 수 있다. 혈소판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으로서, 핵은 없고 혈액 응고 작용에 관계한다. 이러한 혈구, 특히 적혈구를 만드는 기관을 조혈 기관이라고 한다. 양서류 가운데 무미류와 파충류·조류 및 포유류에서는 골수가 대표적인 조혈 기관이다. 양서류 가운데 유미류에서는 지라와 몸 속에 흩어져 있는 특정한 종류의 조직이 조혈 기관의 일을 맡아 하고 있다. 한편, 조류나 포유류에서는 발생 단계에 따라 조혈 기관이 변한다. 즉, 배(胚)의 시기에는 간, 배의 후기에는 지라나 골수에서 혈액이 생성된다. 한편, 오래 된 혈구는 주로 지라나 간 및 골수에서 파괴된다. 백혈구는 배의 시기에는 간·지라 및 골수에서 만들어져 지라에서 파괴된다[4]. 혈장 단백질[편집] 혈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부분의 본문은 혈장 단백질입니다. 혈장의 약 91%는 물이고 혈장 단백질은 혈장 가운데 약 7%를 차지한다. 일부 항체와 단백질 형태의 호르몬을 제외한 대부분의 혈장 단백질은 간에서 생성된다. 혈장 단백질은 수소 이온을 흡수하거나 배출할 수 있어 혈액의 pH를 7.4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5]. 글로불린은 알파, 베타, 감마의 세 종류가 있으며 이 가운데 알파와 베타는 간에서 합성되고 감마글로불린은 림프계통에서 합성된다. 림프계통에서 합성되는 감마글루블린은 면역 항체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6]. 혈장 단백질은 알부민, 글로불린, 피브리노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약 80여 종에 이른다[7]. 알부민은 가용성 단백질 가운데 황산암모늄으로는 침전되지 않는 단순 단백질을 총칭하는 것이고, 글로불린은 물에 녹지 않으며 약한 염기성또는 중성 염류 용액에 녹는 단순 단백질이다. 한편, 피브리노겐은 수용성 단백질로 혈액 응고에 관여하여 혈소판의 침전 속도와 혈액의 점성에 영향을 미친다[7]. 혈장 단백질은 거대 유기 분자와 결합하여 운반 작용을 하는데, 알부민은 헤모글로빈의 분해 산물인 빌리루빈을 운반하고, 글로불린을 포함하고 있는 지단백질은 콜레스테롤을 운반한다[5]. 혈구[편집] 혈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혈구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있다. 적혈구는 혈색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운반한다. 적혈구는 척추동물의 경우 낙타와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운데가 움푹한 원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지름 약 7.5µm 두께 약 1.5µm이다. 적혈구에 있는 혈색소는 철분을 함유하고 있는 포르피린과 구상 단백질인 글로빈의 복합체이다. 혈액은 혈색소 덕분에 동일한 양의 물보다 약 60배 많은 산소를 수용할 수 있다[8]. 백혈구는 적혈구와 달리 자체적으로 세포핵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 염색하였을 때 세포내에 알갱이가 염색되는 과립성 백혈구와 알갱이가 염색되지 않는 무과립성 백혈구로 구분된다. 과립성 백혈구로는 염색 특징에 따라 호산성 백혈구, 호염기성 백혈구, 호중성 백혈구가 있고, 무과립성 백혈구로는 림프구와 단백구가 있다[1][9]. 백혈구는 골수에 있는 공통 조상 세포인 조혈모세포에서 증식된 뒤 혈액 속으로 유입된다[10]. 혈소판은 골수의 거핵 세포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부정형의 조직으로 크기는 약 3-4µm이다. 주된 역할은 손상된 혈관에서 응고 작용을 일으켜 혈액의 손실을 막고 혈관의 재생을 돕는 것이다[10]. 600배로 확대한 혈액 사진 사람 개구리 어류 순환계통[편집] 인간의 순환계통 이 부분의 본문은 순환계통입니다. 동물의 혈관계는 개방 혈관계와 폐쇄 혈관계로 나뉜다[11]. 개방 혈관계[편집] 절지동물인 새우의 경우, 개방 혈관계에서 산소가 포함된 혈액은 심장으로부터 혈관을 통해 몸의 중요한 부분까지 운반되는데, 혈관은 그다지 길지 않고 단순하다. 더구나 모세 혈관이 없으므로, 혈액은 혈관의 말단으로부터 직접 조직 속으로 흘러들어가, 세포 사이에 있는 체강액(체액)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조직 세포에 산소를 공급한 혈액은, 정맥에 해당되는 단순한 혈관에 모인 후 아가미를 거치면서 산소를 많이 함유하여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순환계를 개방 혈관계라고 하며, 무척추동물에서 널리 볼 수 있다. 폐쇄 혈관계[편집] 환형동물[주해 2], 원색동물[주해 3] 및 척추동물[주해 4] 의 경우, 심장에서 나간 혈액은 허파나 아가미에서 가스 교환이 이루어지고, 대동맥을 통하여 몸의 세부에까지 산소를 운반하는데, 동맥과 정맥은 모세 혈관에 의해 연결되어 있어서, 개방 혈관계와는 달리 혈액이 조직 속으로 직접 흘러드는 일이 없다. 가스 교환은 모세 혈관의 얇은 막을 통하여 혈액과 조직 세포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또, 수분이나 영양분·노폐물 등도 모세 혈관의 벽을 통하여 조직 세포에 공급되거나 혈액 속으로 들어간다. 모세 혈관은 마침내 정맥으로 이어져, 혈액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순환계를 폐쇄 혈관계라고 한다. 혈색소[편집] 인간의 피가 붉게 보이는 것은 적혈구에 포함된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혈액에는 여러 가지 물질이 녹아 있어서 무색인 경우는 드물다. 척추동물의 혈액이 붉은색을 띠는 것은 주로 적혈구 속에 포함되어 있는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무척추동물 중에도 혈액이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있으나, 이것은 혈장 속에 붉은색의 혈색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액 속에 직접 녹아 있는 산소의 양만으로는 생명 활동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산소와 능동적으로 결합하여 보다 많은 산소를 운반하는 혈색소의 존재가 중요하게 된다. 이들 혈색소는 모두 금속 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단백질로서, 산소 분압이 높은 호흡 기관에서 산소와 결합하며, 분압이 낮은 조직 세포에서는 산소를 해리하여 조직 세포에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혈색소는 산소 분자를 주고받는 일을 하므로 보통 '호흡 색소'라고도 한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다른 종류의 혈색소는 혈장에 들어 있다. 동물의 혈색소에는 헤모글로빈·헤모시아닌·클로로크루오린·헤모에리드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갑각류 등의 피가 녹색으로 보이는 까닭은 헤모시아닌에 함유된 구리때문이다.[10] 헤모글로빈[편집] 헤모글로빈의 구조. 그림에서 녹색이 색소인 햄, 붉은 색과 파란 색은 단백질 구조이다. 헤모글로빈은 네 개의 햄 색소와 각각 알파와 베타로 불리는 두 개의 단백질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글로빈은 철을 포함하여 산소와 가역적인 방법으로 결합한다. 헤모글로빈은 세포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와도 결합하여 세포 조직으로 산소를 해리하고 이산화탄소를 체외로 내보내게 된다. 이때, 이산화탄소는 산소와 달리 햄 구조의 다른 부분에 결합하여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체내의 이산화탄소는 약 8%가 혈장에 녹아들고 20%는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며 나머지 70%는 적혈구의 다른 부분에 스며들게 된다. 이산화탄소가 적혈구로부터 농도가 낮은 혈장으로 녹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적혈구는 물과 효소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를 탄산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다시 중탄산이온과 수소이온으로 분리시킨 다음 중탄산이온은 혈장으로 내보내고 수소이온 만을 헤모글로빈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염화물 전환이라고 하며, 그 결과 혈장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고 주변 조직들로부터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12] 헤모시아닌[편집] 두족류, 복족류와 같은 연체동물이나 대다수의 절지동물의 경우 혈색소는 헤모시아닌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시아닌은 두 개의 구리와 산소가 결합하여 체내에 산소를 운반한다. 산소를 얻게 되면 산화구리의 색인 푸르스름한 빛을 지니게 되고 산소를 잃으면 무색이 된다.[13] 대부분의 연체동물은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으나 일부 종류는 헤모글로빈과 헤모시아닌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린 때에는 헤모글로빈이 있다가 성체가 되면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연체동물 중에서도 혈색소가 헤모글로빈인 경우도 있는데, 피조개, 꼬막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14] 기타[편집] 갯지렁이는 클로로크로우린을 혈색소로 사용하는데, 이 혈색소는 헤모글로빈과 같이 철을 산소와 결합하는 매개체로 사용하지만 헤모글로빈보다는 산소 결합력이 떨어진다. 혈중에 클로로크로우린의 농도가 높을 경우 붉은 색을 띄며 옅으면 녹색을 띈다.[14] 혈액과 건강[편집] 출혈: 건강한 성인 남성의 경우 외상을 입어 출혈이 있더라도 전체 혈액의 약 20%(1L)까지는 신체에 큰 무리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40%에 해당하는 2L 가량의 혈액을 잃었을 경우 쇼크에 빠질 수 있고 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부상을 입었을 때에는 내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 혈액에는 혈소판과 같은 응고 인자가 있어 더이상 출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손상된 혈관을 막는다.[15] 혈액과 관련이 있는 질병[편집] 백혈병 - 백혈구가 이상 증식하는 질병이다. 당뇨병 - 인슐린 작용이 부족하여 혈액 내에 당분이 과도하게 분포하는 것이 주요 원인인 질병이다. 빈혈 - 혈액 내에 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부족한 질병이다. 겸형 적혈구 빈혈증은 적혈구의 모양이 변형된 유전성 질환이다. 혈우병 - 혈액을 응고하는 인자가 부족하여 출혈이 멈추지 않는 유전성 질환이다.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의해 백혈구가 감염되어 면역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감염성 질환이다. 혈액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혈액형입니다. 혈액형은 적혈구의 세포막에 있는 당단백질의 항원 기능에 따라 혈액의 종류를 구분한 것이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해 구분된 ABO식 혈액형이 유명하나 사람의 경우 이 외에도 RH식, MNSs, Lewis Duffy, Kidd 등 500여 가지 항원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ABO식과 RH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수혈을 하였을 때 항원항체 반응으로 서로 다른 혈액형의 적혈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ABO식에도 많은 돌연변이가 있어 약(弱)A형이나 약B형의 경우 O형으로 오진될 수 있고, AB인자가 결합되어 O형의 배우자와 만나 낳은 자식이 AB형이 되는 시스-AB형, A인자와 B인자가 함께 있는 혈액 키메라 등이 생길 수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도 혈액형이 구분되는데 개와 같은 경우 11가지의 혈액형이 알려져 있다.[16] 한편, 일본, 대한민국 등에서 유행하는 ABO식 혈액형에 따른 성격 구분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종의 사이비과학이다.[17] 2006년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은 대한민국에서 성격과 혈액형에는 실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18] 같이 보기[편집] 출혈 헌혈 혈압 대체 혈액 혈액 검사 헤모포비아 주해[편집] ↑ 과민반응을 일으킬 경우 알레르기가 생길 수 있다. ↑ 대표적인 환형동물로는 지렁이가 있다 ↑ . 대표적인 원색동물로는 히드라, 해파리 등이 있다 ↑ 척추동물로는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이 있다. 각주[편집] ↑ 가 나 다 Pulves 외, 이광웅 외 역, 생명 생물의 과학, 2006, 교보문고, ISBN 89-7085-516-5, 919쪽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37쪽 ↑ The Franklin Institute Inc.. "Blood – The Human Heart" Archived 2009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Retrieved 19 March 2009.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 가 나 강성구 외, 인체생물학, 아카데미서적, ISBN 89-7616-248-X, 98쪽 ↑ 강정부 외, 수의임상병리, 기전연구사, 2000, ISBN 89-336-0181-3, 273쪽 ↑ 가 나 화학용어사전, 일진사, 2006 ISBN 89-429-0903-5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38쪽 ↑ 김상균, 동물해부생리학, 유한문화사, 2006, ISBN 89-7722-627-9, 147쪽 ↑ 가 나 다 생명과학사전, 아카데미서적, 2003, ISBN 89-7616-270-6 ↑ 이하 별도의 출처가 없는 것은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 조지 B 존슨, 전병학 역, 생명 과학, 동화기술, 2007, ISBN 89-425-1186-4, 476쪽 ↑ Shuster, Carl N (2004). "Chapter 11: A blue blood: the circulatory system". In Shuster, Carl N, Jr; Barlow, Robert B; Brockmann, H. Jane. The American Horseshoe Crab. Harvard University Press. pp. 276–7. ISBN 0-674-01159-7. ↑ 가 나 권오길, 달과 팽이, 지성사, 2005, ISBN 89-7889-120-9, 223-224쪽 ↑ "Blood - The Human heart" Archived 2009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The Franklin Institute. Retrieved 19 March 2009. ↑ 이성주, 인체의 신비, 살림, 2003, ISBN 89-522-0119-1 , 60쪽 ↑ 혈액형이 성격 결정? 새빨간 거짓말, 한겨레신문, 2008년 5월 26일 ↑ 김범준, 〈복잡계로서의 사회와 사회물리학〉, 《복잡계 워크샵》, 삼성경제연구소, 2006, ISBN 89-7633-310-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혈액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피 대한혈액학회 vdeh순환계통심장겉구조 심장바닥 심장끝 고랑(방실사이, 심방사이, 앞심실사이, 뒤심실사이) 속구조 심방(심방사이막, 빗살근, 분계고랑) 심실(심실사이막, 힘줄끈, 꼭지근) 심장판막 판막첨판 방실사이막심장뼈대정맥사이결절 우심(대정맥, 관상정맥동) → 우심방 → 삼첨판 → 우심실 → 폐동맥판 → (폐동맥)좌심(폐정맥) → 좌심방 → 승모판 → 좌심실 → 대동맥판 → (대동맥)온몸순환(심장, 좌심실) → 대동맥 → 동맥 → 세동맥 → 모세혈관 → 세정맥 → 정맥 → 대정맥 → (심장, 우심방)폐순환(심장, 우심실) → 폐동맥 → (폐) → 폐정맥 → (심장, 좌심방)혈관 혈관내피 혈관속막 혈관중간막 혈관바깥막 동맥 관상동맥 영양동맥 정맥 동반정맥 이끌정맥 정맥얼기 림프계통 림프 림프관 모세림프관 림프절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LCCN: sh85014927 GND: 4007259-9 BNF: cb11934902m (데이터) NDL: 0056567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혈액&oldid=24059694" 분류: 혈액숨은 분류: 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ܐܪܡܝܐمصرىঅসমীয়াAsturianuAtikamekwАвар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བོད་ཡིག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Chavacano de ZamboangaMìng-dĕ̤ng-ngṳ̄CebuanoᏣᎳᎩکوردی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Zazaki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VõroFøroysktFrançaisFurlanFryskGaeilgeGàidhligGalegoAvañe'ẽगोंयची कोंकणी / Gõychi Konknniગુજરાતી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Fiji Hindi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ភាសាខ្មែរಕನ್ನಡKurdî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ЛаккуЛезгиLimburgsLumbaartLingálaLietuviųLatviešuMalagasyОлык марий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altiမြန်မာဘာသာNāhuatlPlattdüütschनेपाली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Oromooଓଡ଼ିଆਪੰਜਾਬੀKapampanganPolskiپنجابیپښتو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संस्कृतम्Саха тылаᱥᱟᱱᱛᱟᱲᱤSicilianuScotsسنڌي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ChiShonaSoomaaligaShqip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Тоҷикӣ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Vepsän kel’Tiếng ViệtWest-VlamsVolapükWinarayWolof吴语IsiXhosa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YorùbáVahcuengh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3: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안동 도산서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 도산서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산서원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도산서원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도산서원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 대한민국의 사적 종목 사적 제170호 (1969년 5월 28일 지정)면적 323,110m2시대 조선 시대위치 안동 도산서원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좌표 북위 36° 43′ 38″ 동경 128° 50′ 16″ / 북위 36.72722° 동경 128.83778°  / 36.72722; 128.83778좌표: 북위 36° 43′ 38″ 동경 128° 50′ 16″ / 북위 36.72722° 동경 128.83778°  / 36.72722; 128.83778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69년 5월 28일 사적 제170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목차 1 개요 2 관련 문화재 3 유네스코 세계유산 4 사진 5 사건 5.1 서자 출입 허락 사건 6 같이 보기 7 각주 8 참고 자료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에 설립되었다. 영남학파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생가이면서 태실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시작하여 1576년 완공하였다. 1570년 퇴계 이황이 작고하자,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1575년에 선조가 명필 한석봉으로 하여금 쓰게한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되어, 1977년 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1] 관련 문화재[편집]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 보물 제210호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기 위한 강당이다. 전교당의 맢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팔작지붕과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 보물 제211호 도산서원 가장 뒷쪽에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강세황필 도산서원도 - 보물 제522호 안동 도산서원 - 사적 제170호 유네스코 세계유산[편집]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이곳 안동 도산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사진[편집] 정선이 그린 도산서원도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전교당 농운정사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시사단(試士壇) 사건[편집] 서자 출입 허락 사건[편집] 도산서원은 교육기관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기관이었지만, 영남 안동과 주변지역 사림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1884년 서얼들이 도산서원 출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원에서는 끝까지 허락할수 없다고 거절했고, 서얼들과 서원 유사(有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서자들의 서원 출입 허락 상소가 계속되자 1884년(고종 21년) 조정에서는 서얼들도 서원 출입을 허용하라는 공문인 관문(關文)을 각 관아와 서원에 하달하였다. 1884년 11월 조정에서 하달한 관문에서 "서원에 서류들의 출입을 허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경주 옥산서원은 곧 서얼의 서원 출입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도산서원은 서자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옥산서원의 사정이지 도산서원은 적용할수 없다며 거절했다. 분개한 서얼들이 단체로 도산서원을 찾아와 드디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서얼들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라고 했다. 서얼들에게 서원의 수노(首奴)들은 몰매를 맞고 "피가 흘러 땅에 가득했고", 유사 등 임원은 서얼들에게 잡혀 "옷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떨어지며 강물에 패댕이쳐지기도" 하는 등 갖은 수모를 입었다. 이를 두고 서원 측에서는 "서원이 창건된 이래 다시없는 극변"이라 했다. 사태가 진정된 후 도산서원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으며, 이를 《도산서원서류사변일기 陶山書院庶類事變日記》라 부른다. 서자들이 출입을 요구하면서 폭력을 행사하자, 결국 관망하던 군청이 개입했다. 1885년 2월 10일 최대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임원 모두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종손에게 욕하고 종택을 파괴하려 한다"며 관아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관아가 개입하자 서얼들 무리 사이에에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남아 있다가 붙잡혀 구금되고 일부는 자기 집안에 끌려가 문벌(門罰)을 받았다. 문벌을 받은 서얼들은 관아의 판결에 불복하고, 이후 안동권 곳곳의 다른 서얼들과 연합하여 대립했다. 결국 서자들과 도산서원의 갈등, 대립은 4년 1개월간 계속되었고, 결국 1888년 12월 서자들의 출입 요구가 관철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서원 이황 이언적 경주 옥산서원 병산서원 임천서원 각주[편집] ↑ “도산서원/사원 소개”. 도산서원. 2008년 11월 26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안동 도산서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 한국서원연합회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 누리집 도산서원(공식) 안동시 vdeh고종 때 서원 철폐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경기도 개성 숭양서원 김포 우저서원 용인 심곡서원 양성 덕봉서원 파주 파산서원 고양 기공사 여주 강한사 과천 사충서원, 노강서원 강화 충렬사 광주 현절사 포천 용연서원 충청도 연산 돈암서원 홍산 창렬사 노성 노강서원 청주 표충사 충주 충렬사 경상도 동래 충렬사 순흥 소수서원 선산 금오서원 현풍 도동서원 상주 옥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안동 병산서원 예안 도산서원 상주 흥암서원 진주 창렬사 경주 서악서원, 옥산서원 고성 충렬사 거창 포충사 전라도 태인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광주 포충사 강원도 김화 충렬서원 영월 창절서원 철원 포충사 황해도 배천 문회서원 장연 봉양서원 평산 태사사 해주 청성묘 평안도 영유 삼충사 안주 충민사 영변 수충사 평양 무열사 정주 표절사 함경도 북청 노덕서원 vdeh 경상북도의 서원공원 | 교통 | 도로 | 도서관 | 동굴 | 박물관 | 산 | 서원 | 섬 | 성 | 온천 | 저수지 | 종합병원 | 축제 | 하천 | 해수욕장경산시 관란서원 구계서원 금호서원 남호서원 동산서원 백곡서원 용계서원 원계서원 임호서원 경주시 경산서원 구강서원 귀산서원 단구서원 동강서원 서악서원 옥산서원 용산서원 운곡서원 인산서원 장산서원 직천서원 고령군 낙산서원 노강서원 도암서원 매림서원 문연서원 반암서원 봉양서원 영연서원 구미시 경락서원 금오서원 낙봉서원 동락서원 문산서원 오산서원 군위군 남계서원 문양서원 봉강서원 북산서원 송호서원 양산서원 양천서원 화계서원 김천시 경양서원 덕림서원 도동서원 섬계서원 원계서원 일신서원 자동서원 춘천서원 하로서원 문경시 근암서원 소양서원 웅연서원 의산서원 한천서원 봉화군 구만서원 구양서원 단계서원 도계서원 봉산서원 봉산서원 삼계서원 송록서원 행계서원 상주시 낙암서원 도남서원 봉강서원 봉산서원 옥동서원 연악서원 옥성서원 임호서원 청암서원 효곡서원 흥암서원 성주군 덕암서원 덕천서원 문곡서원 암포서원 오암서원 옥천서원 운양서원 천곡서원 청천서원 회연서원 안동시 경광서원 고산서원 근성서원 기양서원 노림서원 도계서원 도산서원 동산서원 명호서원 묵계서원 벽계서원 병산서원 봉암서원 분강서원 사빈서원 서산서원 역동서원 용강서원 용계서원 우계서원 유암서원 임천서원 임호서원 창렬서원 청성서원 타양서원 호계서원 화천서원 영덕군 구봉서원 운계서원 운산서원 인산서원 영양군 봉람서원 여남서원 영산서원 운곡서원 영주시 구고서원 구호서원 귀강서원 노계서원 덕산서원 도고서원 방산서원 백산서원 사계서원 산천서원 삼봉서원 소수서원 오계서원 오산서원 용연서원 욱양서원 운곡서원 의산서원 이산서원 장암서원 한천서원 영천시 고천서원 구천서원 덕강서원 도계서원 도잠서원 무원서원 백학서원 성남서원 송곡서원 연계서원 용계서원 임고서원 창대서원 회계서원 횡계서원 예천군 금곡서원 기천서원 노봉서원 도정서원 물계서원 소천서원 신천서원 옥천서원 완담서원 인산서원 울진군 고산서원 노동서원 명계서원 옥계서원 옥동서원 운암서원 월계서원 의성군 금산서원 단구서원 덕양서원 매강서원 명곡서원 빙계서원 속수서원 우곡서원 장대서원 화산서원 청도군 금호서원 선암서원 용강서원 임호서원 자계서원 지산서원 학남서원 황강서원 훈령서원 청송군 병암서원 사양서원 송학서원 칠곡군 곤산서원 사양서원 소암서원 자강서원 포항시 광남서원 금산서원 덕림서원 라곡서원 봉덕서원 삼명서원 서산서원 수성서원 안산서원 오천서원 입암서원 죽림서원 중양서원 학산서원 학삼서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안동_도산서원&oldid=24548964" 분류: 경상북도의 서원경상북도의 사적안동시의 문화재이황한국의 서원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9일 (화) 16: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안동 도산서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 도산서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산서원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도산서원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도산서원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 대한민국의 사적 종목 사적 제170호 (1969년 5월 28일 지정)면적 323,110m2시대 조선 시대위치 안동 도산서원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좌표 북위 36° 43′ 38″ 동경 128° 50′ 16″ / 북위 36.72722° 동경 128.83778°  / 36.72722; 128.83778좌표: 북위 36° 43′ 38″ 동경 128° 50′ 16″ / 북위 36.72722° 동경 128.83778°  / 36.72722; 128.83778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69년 5월 28일 사적 제170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목차 1 개요 2 관련 문화재 3 유네스코 세계유산 4 사진 5 사건 5.1 서자 출입 허락 사건 6 같이 보기 7 각주 8 참고 자료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에 설립되었다. 영남학파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생가이면서 태실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시작하여 1576년 완공하였다. 1570년 퇴계 이황이 작고하자,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1575년에 선조가 명필 한석봉으로 하여금 쓰게한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되어, 1977년 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1] 관련 문화재[편집]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 보물 제210호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기 위한 강당이다. 전교당의 맢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팔작지붕과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 보물 제211호 도산서원 가장 뒷쪽에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강세황필 도산서원도 - 보물 제522호 안동 도산서원 - 사적 제170호 유네스코 세계유산[편집]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이곳 안동 도산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사진[편집] 정선이 그린 도산서원도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전교당 농운정사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도산서원 경내 시사단(試士壇) 사건[편집] 서자 출입 허락 사건[편집] 도산서원은 교육기관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기관이었지만, 영남 안동과 주변지역 사림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1884년 서얼들이 도산서원 출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원에서는 끝까지 허락할수 없다고 거절했고, 서얼들과 서원 유사(有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서자들의 서원 출입 허락 상소가 계속되자 1884년(고종 21년) 조정에서는 서얼들도 서원 출입을 허용하라는 공문인 관문(關文)을 각 관아와 서원에 하달하였다. 1884년 11월 조정에서 하달한 관문에서 "서원에 서류들의 출입을 허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경주 옥산서원은 곧 서얼의 서원 출입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도산서원은 서자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옥산서원의 사정이지 도산서원은 적용할수 없다며 거절했다. 분개한 서얼들이 단체로 도산서원을 찾아와 드디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서얼들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라고 했다. 서얼들에게 서원의 수노(首奴)들은 몰매를 맞고 "피가 흘러 땅에 가득했고", 유사 등 임원은 서얼들에게 잡혀 "옷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떨어지며 강물에 패댕이쳐지기도" 하는 등 갖은 수모를 입었다. 이를 두고 서원 측에서는 "서원이 창건된 이래 다시없는 극변"이라 했다. 사태가 진정된 후 도산서원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으며, 이를 《도산서원서류사변일기 陶山書院庶類事變日記》라 부른다. 서자들이 출입을 요구하면서 폭력을 행사하자, 결국 관망하던 군청이 개입했다. 1885년 2월 10일 최대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임원 모두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종손에게 욕하고 종택을 파괴하려 한다"며 관아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관아가 개입하자 서얼들 무리 사이에에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남아 있다가 붙잡혀 구금되고 일부는 자기 집안에 끌려가 문벌(門罰)을 받았다. 문벌을 받은 서얼들은 관아의 판결에 불복하고, 이후 안동권 곳곳의 다른 서얼들과 연합하여 대립했다. 결국 서자들과 도산서원의 갈등, 대립은 4년 1개월간 계속되었고, 결국 1888년 12월 서자들의 출입 요구가 관철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서원 이황 이언적 경주 옥산서원 병산서원 임천서원 각주[편집] ↑ “도산서원/사원 소개”. 도산서원. 2008년 11월 26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안동 도산서원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 한국서원연합회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 누리집 도산서원(공식) 안동시 vdeh고종 때 서원 철폐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경기도 개성 숭양서원 김포 우저서원 용인 심곡서원 양성 덕봉서원 파주 파산서원 고양 기공사 여주 강한사 과천 사충서원, 노강서원 강화 충렬사 광주 현절사 포천 용연서원 충청도 연산 돈암서원 홍산 창렬사 노성 노강서원 청주 표충사 충주 충렬사 경상도 동래 충렬사 순흥 소수서원 선산 금오서원 현풍 도동서원 상주 옥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안동 병산서원 예안 도산서원 상주 흥암서원 진주 창렬사 경주 서악서원, 옥산서원 고성 충렬사 거창 포충사 전라도 태인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광주 포충사 강원도 김화 충렬서원 영월 창절서원 철원 포충사 황해도 배천 문회서원 장연 봉양서원 평산 태사사 해주 청성묘 평안도 영유 삼충사 안주 충민사 영변 수충사 평양 무열사 정주 표절사 함경도 북청 노덕서원 vdeh 경상북도의 서원공원 | 교통 | 도로 | 도서관 | 동굴 | 박물관 | 산 | 서원 | 섬 | 성 | 온천 | 저수지 | 종합병원 | 축제 | 하천 | 해수욕장경산시 관란서원 구계서원 금호서원 남호서원 동산서원 백곡서원 용계서원 원계서원 임호서원 경주시 경산서원 구강서원 귀산서원 단구서원 동강서원 서악서원 옥산서원 용산서원 운곡서원 인산서원 장산서원 직천서원 고령군 낙산서원 노강서원 도암서원 매림서원 문연서원 반암서원 봉양서원 영연서원 구미시 경락서원 금오서원 낙봉서원 동락서원 문산서원 오산서원 군위군 남계서원 문양서원 봉강서원 북산서원 송호서원 양산서원 양천서원 화계서원 김천시 경양서원 덕림서원 도동서원 섬계서원 원계서원 일신서원 자동서원 춘천서원 하로서원 문경시 근암서원 소양서원 웅연서원 의산서원 한천서원 봉화군 구만서원 구양서원 단계서원 도계서원 봉산서원 봉산서원 삼계서원 송록서원 행계서원 상주시 낙암서원 도남서원 봉강서원 봉산서원 옥동서원 연악서원 옥성서원 임호서원 청암서원 효곡서원 흥암서원 성주군 덕암서원 덕천서원 문곡서원 암포서원 오암서원 옥천서원 운양서원 천곡서원 청천서원 회연서원 안동시 경광서원 고산서원 근성서원 기양서원 노림서원 도계서원 도산서원 동산서원 명호서원 묵계서원 벽계서원 병산서원 봉암서원 분강서원 사빈서원 서산서원 역동서원 용강서원 용계서원 우계서원 유암서원 임천서원 임호서원 창렬서원 청성서원 타양서원 호계서원 화천서원 영덕군 구봉서원 운계서원 운산서원 인산서원 영양군 봉람서원 여남서원 영산서원 운곡서원 영주시 구고서원 구호서원 귀강서원 노계서원 덕산서원 도고서원 방산서원 백산서원 사계서원 산천서원 삼봉서원 소수서원 오계서원 오산서원 용연서원 욱양서원 운곡서원 의산서원 이산서원 장암서원 한천서원 영천시 고천서원 구천서원 덕강서원 도계서원 도잠서원 무원서원 백학서원 성남서원 송곡서원 연계서원 용계서원 임고서원 창대서원 회계서원 횡계서원 예천군 금곡서원 기천서원 노봉서원 도정서원 물계서원 소천서원 신천서원 옥천서원 완담서원 인산서원 울진군 고산서원 노동서원 명계서원 옥계서원 옥동서원 운암서원 월계서원 의성군 금산서원 단구서원 덕양서원 매강서원 명곡서원 빙계서원 속수서원 우곡서원 장대서원 화산서원 청도군 금호서원 선암서원 용강서원 임호서원 자계서원 지산서원 학남서원 황강서원 훈령서원 청송군 병암서원 사양서원 송학서원 칠곡군 곤산서원 사양서원 소암서원 자강서원 포항시 광남서원 금산서원 덕림서원 라곡서원 봉덕서원 삼명서원 서산서원 수성서원 안산서원 오천서원 입암서원 죽림서원 중양서원 학산서원 학삼서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안동_도산서원&oldid=24548964" 분류: 경상북도의 서원경상북도의 사적안동시의 문화재이황한국의 서원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9일 (화) 16: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2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2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2I Spit on Your Grave 2 감독 스티븐 R. 먼로 배급사 앵커 보이 필름스 개봉일 2013년 8월 25일 시간 106분 국가 미국 언어 영어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2》(영어: I Spit on Your Grave 2)는 2013년 공개된 미국의 공포 영화이다. 목차 1 출연 1.1 주연 1.2 조연 2 기타 3 외부 링크 출연[편집] 주연[편집] 젬마 달렌더 조 앱솔롬 알렉산다 알렉시브 야보르 바하로프 조연[편집] 메리 스토클리 피터 실버리프 캐시 반필드 디모 알렉시예프 이반 이바노브-바노 메리 스토클리 마이클 딕슨 발렌틴 펠카 조지 즈라타레브 크라지미르 오타치브 기타[편집] 공동제작: 빌 베리 공동제작: 아담 드리스콜 공동제작: 닐 엘만 공동제작: 다니엘 길보이 조감독: 페트야 이브티모바 조감독: 리사 M. 핸슨 세트: 로즌 스테파노브 분장: 야나 스토야노바 헤어: 페트야 시메오노바 의상: 데실라바 안도노바 섭외: 질리언 하우저 프로덕션매니저: 발렌틴 디미트로브 프로덕션매니저: 리사 M. 핸슨 외부 링크[편집] (영어)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2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vdeh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영화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1978) 리메이크 시리즈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2010)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2》 (2013)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3》 (2015) 캐릭터 제니퍼 힐스 기타 《잔인한 복수》 (비공식적인 속편) 이 글은 공포 영화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네_무덤에_침을_뱉어라_2&oldid=24030779" 분류: 영어 영화 작품2013년 영화미국의 공포 영화미국의 범죄 스릴러 영화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불가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불가리아에서 촬영한 영화뉴욕에서 촬영한 영화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공포 영화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zərbaycanc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ՀայերենItaliano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தமிழ்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4일 (일) 18: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속도 결정 단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속도 결정 단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화학 속도론에서, 종종 전체 반응 속도는 대략적으로 가장 느린 단계인 속도 결정 단계(영어: Rate-determining step,RDS)나 속도 제한 단계(영어: rate-limiting step)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반응 메커니즘에서, 대응하는 반응 속도식 예측(실험적 반응 속도 법칙과 비교하기 위한 것)은 종종 속도 결정 단계로 근사하여 단순화 시킨다. 원칙적으로, 반응물과 생성물 농도의 시간 변화는 메커니즘의 각 반응에 대응하는 반응 속도식들로부터 결정된다. 하지만, 이 미분방정식들의 해석적 해를 구하는 것은 항상 쉽지만은 않고, 어떤 경우는 수치적분이 필요할 수 있다.[1] 속도 결정 단계가 하나만 있다는 가정은 수학적 계산을 크게 단순화시킨다. 가장 간단한 경우는 첫 단계가 가장 느릴때로, 전체 속도는 첫 번째 단계의 속도이다. 또한, 속도 결정 단계가 하나 뿐인 메커니즘의 반응 속도식은 메커니즘과의 관계와 속도 결정 단계가 명백한 단순한 수학적 형태를 가진다. 올바른 속도 결정 단계는 아래의 NO2와 CO의 예시처럼 각 단계를 지정해 반응 속도 법칙을 예측하고 실험적 법칙의 다른 예측과 비교해서 확인할 수 있다. 속도 결정 단계의 개념은 촉매나 연소와 같은 화학 반응의 최적화와 이해에서 매우 중요하다. 목차 1 반응 예: NO2 + CO 1.1 속도 결정 단계는 첫 번째 1.2 사전 평형: 만약 두 번째 단계가 속도 결정 단계라면 2 친핵성 치환 반응 3 전이 상태의 구성 4 반응 좌표 5 연쇄 반응 6 확산 지배 반응 7 같이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반응 예: NO2 + CO[편집] 그 예시로 기체 상태 반응 NO2 + CO → NO + CO2을 다루고자 한다. 만약 이 반응이 한 단계 만에 일어난다면, 그 반응 속도식(r)은 NO2와 CO 분자의 충돌에 비례한다: r = k[NO2][CO]. 여기서 k는 속도상수이고 대괄호는 몰 농도를 나타낸다. 다른 전형적인 예시는 젤도비치 메커니즘이다. 속도 결정 단계는 첫 번째[편집] 하지만, 사실 관측된 반응 속도는 NO2에 대해서는 2차이고 CO에 대해서는 0차로,[2] 반응 속도식은 r = k[NO2]2이다. 이는 반응 속도가 NO2 두 분자가 반응하는 단계에서 결정되고, 그 뒤에 CO 분자가 더 빠르게 결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한 메커니즘은 반응 속도를 설명할 수 있는 기초적인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NO2 + NO2 → NO + NO3 (느린 단계, 속도 결정 단계) NO3 + CO → NO2 + CO2 (빠른 단계) 이 메커니즘에서 반응성 중간체 NO3 가 첫 번째 단계에서 r1의 속도로 생성되고 두 번째 단계에서 r2의 속도로 CO와 반응한다. 하지만 NO3는 첫 번째 반응이 속도 r−1로 역방향 (NO + NO3 → 2 NO2)으로 일어난다면, NO와도 반응할 수 있다. 이 때, 속도에서 마이너스 기호는 역반응의 속도를 나타낸다. [NO3]와 같은 반응성 중간체의 농도는 계속 낮으며 거의 상수에 가깝다. 따라서 생성되는 속도와 소모되는 속도가 같다고 가정하는 정상 상태 근사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예시에서 NO3는 한 단계에서 생성되고 두 단계에서 소모된다: d [ NO 3 ] d t = r 1 − r 2 − r − 1 ≈ 0. {\displaystyle {\frac {d{\ce {[NO3]}}}{dt}}=r_{1}-r_{2}-r_{-1}\approx 0.} 첫번째 단계가 느리다는 말은 실제로는 첫번째 단계의 역방향이 두 번째 단계의 정방향 보다 느리다는 의미로, 거의 모든 NO3가 NO가 아닌 CO와 반응해서 소모된다. 즉, r−1 ≪ r2, 따라서 r1 − r2 ≈ 0이다. 하지만 전체 반응 속도는 최종 생성물(여기서는 CO2)의 생성 속도이므로, r = r2 ≈ r1이다. 즉, 전체 속도는 첫 번째 단계의 속도에 의해 결정되며, 첫 번째 단계에서 반응한 (거의) 모든 분자는 빠른 두 번째 단계로 텀어간다. 사전 평형: 만약 두 번째 단계가 속도 결정 단계라면[편집] 가능한 다른 경우는 두 번째 단계가 느리고 속도 결정 단계인 경우로, 첫 번째 단계의 역방향 보다 느린 것을 의미한다: r2 ≪ r−1. 이 가정에서는, r1 − r−1 ≈ 0, 따라서 첫 번째 단계가 (거의) 평형 상태에 있다. 전체 반응 속도는 첫 번째 단계에서 반응한 분자의 극히 일부만이 더 느린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에 두 번째 단계에 의해 결정된다: r = r2 ≪ r1. 이런 중간체(여기서는 NO3)가 속도 결정 단계 이전에 평형 상태에 이르는 상태를 사전 평형(영어: pre-equilibrium)이라고 부른다[3] NO2와 CO의 반응에서, 이 가정은 실험에서 나온 반응 속도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기각된다. 만약 첫 번째 단계가 평형 상태에 있다면, 그 평형 상수 식을 이용하여 중간체 NO3의 농도를 더 안정한(그리고 더 쉽게 측정되는) 반응물과 생성물 관계로 계산할 수 있다: K 1 = [ NO ] [ NO 3 ] [ NO 2 ] 2 , {\displaystyle K_{1}={\frac {{\ce {[NO][NO3]}}}{{\ce {[NO2]^2}}}},} [ NO 3 ] = K 1 [ NO 2 ] 2 [ NO ] . {\displaystyle [{\ce {NO3}}]=K_{1}{\frac {{\ce {[NO2]^2}}}{{\ce {[NO]}}}}.} 그러면 전체 반응 속도는 다음과 같다: r = r 2 = k 2 [ NO 3 ] [ CO ] = k 2 K 1 [ NO 2 ] 2 [ CO ] [ NO ] , {\displaystyle r=r_{2}=k_{2}{\ce {[NO3][CO]}}=k_{2}K_{1}{\frac {{\ce {[NO2]^2 [CO]}}}{{\ce {[NO]}}}},} 이 결과는 위에서 주어진 실험적 반응 속도 법칙과 맞지 않다. 따아서 두 번째 단계가 속도 결정 단계라는 가정이 반증되었다. 하지만, 일부 다른 반응은 아래에서 나타낸 것 처럼 빠른 사전 평형이 속도 결정 단계 이전에 관여된다고 믿어진다. 친핵성 치환 반응[편집] 다른 예시는 유기화학의 단일분자 친핵성 치환 반응 (SN1)으로, 첫 번째 단계가 1차인 속도 결정 단계이다. 특수한 경우는 수산화 나트륨 수용액에 의한 브로민화 tert-뷰틸 (t-C4H9Br)의 염기성 가수 분해이다. 이 메커니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여기서 R은 tert-뷰틸 라디컬t-C4H9을 나타낸다): 탄소 양이온의 생성 R−Br → R+ + Br-. 물 분자의 친핵체 공격 R+ + OH- → ROH. 이 반응은 일차 반응이다: r = k[R−Br]. 즉, 첫 번째 단계가 느리며 전체 속도를 결정한다. OH−가 나오는 두 번째 단계는 훨씬 빨라서 전체 속도는 OH−의 농도와는 무관하다. 반면에, 브로민화 메틸(CH3Br)의 알칼리 가수 분해는 이분자성 친핵성 치환 반응 (SN2)으로 한 2차 단계로 일어난다. 이 반응 속도 법칙은 이차이다: r = k[R−Br][OH-]. 전이 상태의 구성[편집] 메커니즘의 결정에 있어서 유용한 규칙은 반응 속도 법칙에서 농도 인자는 활성화 착물의 구성과 전하나 전이 상태를 가리킨다.[4] 위의 NO2-CO 반응에서, 반응 속도는 [NO2]2에 의존해서, 활성화 착물은 N2O4의 구성으로, NO2 두 분자가 전이 상태로 가기 전에 반응에 들어가며, 전이 상태 이후 CO가 반응한다. 여러 단계를 갖는 예시는 수용액에서 옥살산와 염소의 반응이다: H2C2O4 + Cl2 → 2 CO2 + 2 H+ + 2 Cl-.[4] 관측된 반응 속도 법칙은 다음과 같다: v = k [ Cl 2 ] [ H 2 C 2 O 4 ] [ H + ] 2 [ Cl − ] , {\displaystyle v=k{\frac {{\ce {[Cl2][H2C2O4]}}}{[{\ce {H+}}]^{2}[{\ce {Cl^-}}]}},} 이 결과는 활성화 착물이 속도 결정 단계 이전에 2H+ + Cl-를 잃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성화 착물의 공식은 Cl2 + H2C2O4 − 2 H+ − Cl- + x  H2O, 또는 C2O4Cl(H2O)x–이다( H2O에 관한 반응 속도의 의존성이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알 수 없는 개수의 물 분자를 추가했다. 그 이유는 데이터를 얻는 곳이 다량으로 존재하며 농도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물 용매 안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메커니즘은 전이 상태 이전의 예비 상태가 빠르게 사전 평형에 도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4] Cl2 +  H2O HOCl + Cl- + H+ H2C2O4 H+ + HC2O4- HOCl + HC2O4- →  H2O + Cl- + 2 CO2 반응 좌표[편집] 다단계 반응에서, 속도 결정 단계는 반응 좌표에서 깁스 자유 에너지가 가장 높을 필요는 없다.[5][3] 만약 초기 반응물보다 에너지가 낮은 반응 중간체가 있다면, 후속 전이 상태를 지나야 하는 활성화 에너지는 저에너지 중간체의 깁스 자유 에너지에 따른다. 그러면 속도 결정 단계는 시작 물질이나 어떤 이전 중간체와의 깁스 자유 에너지 차이가 가장 큰 단계이다.[5][6] 또한 일차 반응이 아닌 단계에서는, 속도 결정 단계를 결정할 때 농도를 고려해야 한다.[5][3] 연쇄 반응[편집] 모든 반응이 속도 결정 단계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연쇄 반응의 속도는 보통 한 단계에서만 결정되지 않는다.[5] 확산 지배 반응[편집] 이전 예시에서 속도 결정 단계는 생성물이 생성되어가는 순차적인 화학 반응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속도 결정 단계는 반응해서 생성물을 생성하기 위한 반응물의 수송이 될 수 있다. 이 경우는 확산 지배 반응이라 일컬으며 일반적으로 반응 중간체에서 생성물의 형성이 매우 빠르게 일어날 때, 반응물의 공급이 속도 결정 단계가 된다. 같이 보기[편집] 생성물 결정 단계 각주[편집] ↑ Steinfeld J. I., Francisco J. S., Hase W. L. Chemical Kinetics and Dynamics (2nd ed., Prentice-Hall 1999) ch. 2. ↑ Whitten K. W., Galley K. D., Davis R. E. General Chemistry (4th edition, Saunders 1992), p. 638–639. ↑ 가 나 다 Peter Atkins and Julio de Paula, Physical Chemistry (8th ed., W. H. Freeman 2006) p. 814–815. ISBN 0-7167-8759-8. ↑ 가 나 다 Espenson, J. H. (2002). 《Chemical Kinetics and Reaction Mechanisms》 2판. McGraw-Hill. 127–132쪽. ISBN 0072883626.  ↑ 가 나 다 라 Keith J. Laidler. Chemical Kinetics (3rd ed., Harper and Row 1987) p. 283–285. ISBN 0-06-043862-2. ↑ Murdoch, Joseph R. (1981). “What is the rate-limiting step of a multistep reaction?”. 《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58 (1): 32–36. Bibcode:1981JChEd..58...32M. doi:10.1021/ed058p32.  Zumdahl, Steven S. (2005). 《Chemical Principles》 5판. Houghton Mifflin. 727–8쪽. ISBN 0618372067.  외부 링크[편집] The Rate-Limiting Enzyme regulation database (RLEdb) vdeh기본 반응 메커니즘친핵성 치환 반응 단일분자 친핵성 치환 반응 (SN1) 이분자성 친핵성 치환 반응 (SN2) 친전자성 방향족 치환 반응 (SNAr) 자유 라디컬 치환 반응 (SNi) 친핵성 아실 치환 반응 제거 반응 단일분자 제거 반응 (E1) E1cB 제거 반응 이분자성 제거 반응 (E2) 첨가 반응 친전자성 첨가 반응 친핵성 첨가 반응 자유 라디칼 첨가 반응 고리화 첨가 반응 관련 분야 단일 단계 반응 분자도 입체화학 촉매 충돌모형 Solvent effects Arrow pushing 반응속도론 반응 속도식 속도 결정 단계 전거 통제 NDL: 0056441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속도_결정_단계&oldid=24064994" 분류: 화학 반응화학반응속도론유기화학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کوردیDansk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RomânăSimple English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11: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880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880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해1877년 1878년 1879년 - 1880년 - 1881년 1882년 1883년 연대1860년대 1870년대 - 1880년대 - 1890년대 1900년대 세기17세기 18세기 - 19세기 - 20세기 21세기 서기 1880년의 다른 기년법 간지 기묘년~경진년 단기 4213년 그레고리력 1880년 MDCCCLXXX 불기 2424년 이슬람력 1297~1298 일본 메이지(明治) 13년 황기 2540년 히브리력 5640~5641 아시리아력 6630년 에티오피아력 1874~1875 포덕(천도교) 21년 1880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목차 1 연호 2 기년 3 사건 4 탄생 5 사망 6 달력 6.1 음양력 대조 일람 연호[편집] 청(淸) 광서(光緖) 6년 일본(日本) 메이지(明治) 13년 기년[편집] 청(淸) 덕종 광서제(德宗 光緖帝) 6년 조선(朝鮮) 고종(高宗) 17년 사건[편집] 10월 15일 - 멕시코 군인들이 아파치 족 군사 전략가 빅토리오를 죽이다. 조선, 제2차 수신사(김홍집)를 일본에 파견. 영국의 축구 클럽 맨체스터 시티 FC 창단. 탄생[편집] 1월 26일 - 더글러스 맥아더 2월 22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 신규식. 2월 28일 - 마리아 올리비아 다 실바, 3번째로 오래 산 사람 3월 22일 -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 총독을 지낸 일본의 군인, 정치인 6월 27일 - 헬렌 켈러, 미국의 작가, 교육자 6월 29일 - 루드비히 베크, 독일의 군인 8월 26일 - 기욤 아폴리네르, 프랑스의 시인 . 10월 7일 - 파울 하우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군인 11월 1일 - 알프레트 베게너, 독일 지질학자 12월 3일 - 페도르 폰 보크,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군인 12월 8일 - 신채호,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사망[편집] 3월 31일 - 폴란드의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5월 8일 - 프랑스의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 10월 5일 - 프랑스의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 10월 5일 -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라셀 달력[편집] 1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4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5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6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7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8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9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10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11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12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음양력 대조 일람[편집]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2월 10일 기사 2월 기묘 소 3월 11일 기해 3월 경진 대 4월 9일 무진 4월 신사 대 5월 9일 무술 5월 임오 소 6월 8일 무진 6월 계미 대 7월 7일 정유 7월 갑신 대 8월 6일 정묘 8월 을유 소 9월 5일 정유 9월 병술 대 10월 4일 병인 10월 정해 소 11월 3일 병신 11월 무자 소 12월 2일 을축 12월 기축 대 12월 31일 갑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880년&oldid=21282915" 분류: 1880년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Аҧсшәа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Boarisch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বিষ্ণুপ্রিয়া মণিপুরী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НохчийнCebuanoکوردیQırımtatarcaČeštinaKaszëbsczi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ZazakiΕλληνικάEmiliàn e rumagnòl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VõroFøroysktFrançaisArpetanNordfriiskFryskGaeilge贛語GàidhligGalegoAvañe'ẽ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Fiji HindiHrvatskiHornjoserbsce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ಕನ್ನಡКъарачай-малкъарRipoarischКоми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ЛезгиLimburgsLigureLumbaartLietuviųLatviešuमैथिलीBasa BanyumasanМокшеньMalagasyОлык марийMāoriBaso Minangkaba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मराठीКырык марыBahasa Melayuမြန်မာဘာသာЭрзяньNāhuatlNapulitanoPlattdüütschनेपाली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NouormandSesotho sa LeboaOccitanLivvinkarjalaଓଡ଼ିଆИронਪੰਜਾਬੀपालिPolski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संस्कृतम्Саха тылаSarduSicilianuScotsسنڌي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ၽႃႇသႃႇတႆး 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Basa Sunda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TetunТоҷикӣไทยTürkmençe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дмурт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West-VlamsVolapükWalonWinaray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YorùbáZeêuws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5월 17일 (목) 17: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프리슈티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슈티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프리슈티나 Priština 프리슈티나의 모습 프리슈티나북위 42° 40′ 00″ 동경 21° 10′ 00″ / 북위 42.666667° 동경 21.166667°  / 42.666667; 21.166667좌표: 북위 42° 40′ 00″ 동경 21° 10′ 00″ / 북위 42.666667° 동경 21.166667°  / 42.666667; 21.166667 행정 나라 코소보 행정구역 프리슈티나 구 인구 인구 211,129 명 (2013년) 인구밀도 370 명/km2 광역인구 504,165 명 지리 면적 572 km2 기타 시간대 CET (UTC+1) 지역번호 +381 https://kk.rks-gov.net/prishtina/ 프리슈티나의 위치 프리슈티나(알바니아어: Prishtina / Prishtinë, 세르비아어: Приштина, Priština)는 코소보의 수도이다. 근처의 도시로는 약 95km 북동쪽의 니시와 약 80km 남쪽의 스코페(북마케도니아의 수도) 등이 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현재 재건 중에 있으며 국제 연합의 관리를 받고 있다. 목차 1 인구 2 역사 2.1 중세~근대 2.2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 3 기후 4 문화 5 관광 6 각주 7 외부 링크 인구[편집] 2007년 현재 인구는 50만~60만 정도로 추산된다. 주민의 대부분은 알바니아계이다. 그러나 코소보 전쟁 당시에 많은 알바니아계 주민이 살해되었다. 그 외의 민족으로는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루마니아 등이다. 거리의 중심 광장에는 중세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인 스컨데르베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역사[편집] 중세~근대[편집] 중세 시대에는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로서 발칸 반도의 교역 거점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389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함에 따라서 이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이때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를 죽였고, 결국에는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게 됨으로써, 코소보 전투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서 신화가 되었다. 그 결과 근대가 되어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프리슈티나를 포함한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지역이 되어 버렸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서 발칸 반도의 기독교 신앙은 일정한 범위내에서 존중받았다. 그러나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주로 종교적인 이유에서 이 땅의 세르비아인들이 오스트리아령으로 이주하였고, 인구가 희박하게된 이 지역에 이슬람교 계통의 알바니아인들이 이주하였다. 그 때문에 중세 역사에서는 세르비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거주하고 있는 민족구성 면에서는 알바니아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19세기말보다 프리슈티나 등 여러 곳에서 알바니아인들의 민족운동도 고양되었다. 그 때문에 알바니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지역은 민족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이유들은 나중에 코소보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편집] 공산당 시대에 세워진 호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다시 세르비아의 지배로 되돌아갔다. 다만 세르비아 자체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전간기에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고 개칭하였고 프리슈티나도 유고슬라비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이탈리아군 그리고 독일군에 점령되었지만 1944년에 파르티잔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하면서 세르비아 내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코소보의 자치 또는 알바니아와의 통일 등을 내거는 운동이 대두되었다. 이에 대하여 세르비아 정부는 강경책으로 임하였고 무력진압도 불사했다. 알바니아어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의 민족 억압 정책은 구(舊)유고슬라비아 해체 후에 한층 격화되었고, 1999년의 코소보 전쟁에서는 세르비아의 군사 개입에 의해 많은 알바니아인이 학살되었으며, 다수의 공공기관도 파괴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군사제재 조치로서 NATO의 공중 폭격을 당하여 프리슈티나 내의 세르비아 군사시설 등이 공격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국제 연합 코소보 잠정 통치 기구(UNMIK)가 주둔하고 있다. 기후[편집] Pristina (1961–199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15.8 (60.4) 20.2 (68.4) 26.0 (78.8) 29.0 (84.2) 32.3 (90.1) 36.3 (97.3) 39.2 (102.6) 36.8 (98.2) 34.4 (93.9) 29.3 (84.7) 22.0 (71.6) 15.6 (60.1) 39.2 (102.6) 평균최고기온 °C (°F) 2.4 (36.3) 5.5 (41.9) 10.5 (50.9) 15.7 (60.3) 20.7 (69.3) 23.9 (75) 26.4 (79.5) 26.7 (80.1) 23.1 (73.6) 17.1 (62.8) 10.1 (50.2) 4.1 (39.4) 15.5 (59.9) 일평균기온 °C (°F) −1.3 (29.7) 1.1 (34) 5.0 (41) 9.9 (49.8) 14.7 (58.5) 17.8 (64) 19.7 (67.5) 19.5 (67.1) 15.9 (60.6) 10.6 (51.1) 5.1 (41.2) 0.4 (32.7) 9.8 (49.6) 평균최저기온 °C (°F) −4.9 (23.2) −2.8 (27) 0.2 (32.4) 4.2 (39.6) 8.5 (47.3) 11.4 (52.5) 12.5 (54.5) 12.3 (54.1) 9.4 (48.9) 5.0 (41) 0.9 (33.6) −3.1 (26.4) 4.4 (39.9) 최저기온기록 °C (°F) −27.2 (−17) −24.5 (−12.1) −14.2 (6.4) −5.3 (22.5) −1.8 (28.8) 0.5 (32.9) 3.9 (39) 4.4 (39.9) −4.0 (24.8) −8.0 (17.6) −17.6 (0.3) −20.6 (−5.1) −27.2 (−17) 평균 강수량 mm (인치) 38.9 (1.53) 36.1 (1.42) 38.8 (1.53) 48.8 (1.92) 68.2 (2.69) 60.3 (2.37) 51.6 (2.03) 44.0 (1.73) 42.1 (1.66) 45.4 (1.79) 68.2 (2.69) 55.5 (2.19) 597.9 (23.54) 평균강수일수 (≥ 0.1 mm) 13.6 12.3 11.4 12.1 12.8 11.9 8.3 7.9 7.5 8.6 12.3 14.5 133.2 평균강설일수 10.2 8.3 6.2 1.5 0.0 0.0 0.0 0.0 0.0 0.5 3.4 8.1 38.2 평균 상대 습도 (%) 83 77 70 65 67 67 63 62 68 74 80 83 71 평균 월간 일조시간 70.8 96.0 143.0 184.0 227.9 246.3 299.3 289.6 225.8 173.5 96.9 70.2 2,123.3 출처: Republic Hydrometeorological Service of Serbia[1] 문화[편집] 국립 공공 도서관 프리슈티나 대학 관광[편집] 그라차니차 수도원 (14세기 전반기에 건설되었다.) 각주[편집] ↑ “Monthly and annual means, maximum and minimum values of meteorological elements for the period 1961–1990” (Serbian). Republic Hydrometeorological Service of Serbia. 2017년 2월 25일에 확인함.  CS1 관리 - 인식할 수 없는 언어 (링크)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프리슈티나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지워진 역사: 코소보의 민족 말살 프리슈티나의 공식 웹페이지 프리슈티나 대학 프리슈티나 공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리슈티나&oldid=24260500" 분류: 코소보의 도시프리슈티나숨은 분류: CS1 관리 - 인식할 수 없는 언어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알바니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세르비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Žemaitėška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བོད་ཡིག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НохчийнČeštinaCymraegDanskDeutschDolnoserbski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FryskGaeilgeGàidhligGalegoGaelgעבריתHrvatskiHornjoserbsce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TaqbaylitҚазақшаKernowekLëtzebuergeschLimburgsلۊری شومالی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altiNāhuatl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NovialOccitanИронਪੰਜਾਬੀPapiamentuNorfuk / Pitkern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Саха тылаSardu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Gagana SamoaChiSho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Ślůnskiதமிழ்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дмурт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epsän kel’Tiếng ViệtVolapükWinaray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17: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프리슈티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슈티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프리슈티나 Priština 프리슈티나의 모습 프리슈티나북위 42° 40′ 00″ 동경 21° 10′ 00″ / 북위 42.666667° 동경 21.166667°  / 42.666667; 21.166667좌표: 북위 42° 40′ 00″ 동경 21° 10′ 00″ / 북위 42.666667° 동경 21.166667°  / 42.666667; 21.166667 행정 나라 코소보 행정구역 프리슈티나 구 인구 인구 211,129 명 (2013년) 인구밀도 370 명/km2 광역인구 504,165 명 지리 면적 572 km2 기타 시간대 CET (UTC+1) 지역번호 +381 https://kk.rks-gov.net/prishtina/ 프리슈티나의 위치 프리슈티나(알바니아어: Prishtina / Prishtinë, 세르비아어: Приштина, Priština)는 코소보의 수도이다. 근처의 도시로는 약 95km 북동쪽의 니시와 약 80km 남쪽의 스코페(북마케도니아의 수도) 등이 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현재 재건 중에 있으며 국제 연합의 관리를 받고 있다. 목차 1 인구 2 역사 2.1 중세~근대 2.2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 3 기후 4 문화 5 관광 6 각주 7 외부 링크 인구[편집] 2007년 현재 인구는 50만~60만 정도로 추산된다. 주민의 대부분은 알바니아계이다. 그러나 코소보 전쟁 당시에 많은 알바니아계 주민이 살해되었다. 그 외의 민족으로는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루마니아 등이다. 거리의 중심 광장에는 중세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인 스컨데르베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역사[편집] 중세~근대[편집] 중세 시대에는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로서 발칸 반도의 교역 거점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389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함에 따라서 이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이때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를 죽였고, 결국에는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게 됨으로써, 코소보 전투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서 신화가 되었다. 그 결과 근대가 되어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프리슈티나를 포함한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지역이 되어 버렸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서 발칸 반도의 기독교 신앙은 일정한 범위내에서 존중받았다. 그러나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주로 종교적인 이유에서 이 땅의 세르비아인들이 오스트리아령으로 이주하였고, 인구가 희박하게된 이 지역에 이슬람교 계통의 알바니아인들이 이주하였다. 그 때문에 중세 역사에서는 세르비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거주하고 있는 민족구성 면에서는 알바니아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19세기말보다 프리슈티나 등 여러 곳에서 알바니아인들의 민족운동도 고양되었다. 그 때문에 알바니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지역은 민족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이유들은 나중에 코소보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편집] 공산당 시대에 세워진 호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다시 세르비아의 지배로 되돌아갔다. 다만 세르비아 자체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전간기에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고 개칭하였고 프리슈티나도 유고슬라비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이탈리아군 그리고 독일군에 점령되었지만 1944년에 파르티잔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하면서 세르비아 내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코소보의 자치 또는 알바니아와의 통일 등을 내거는 운동이 대두되었다. 이에 대하여 세르비아 정부는 강경책으로 임하였고 무력진압도 불사했다. 알바니아어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의 민족 억압 정책은 구(舊)유고슬라비아 해체 후에 한층 격화되었고, 1999년의 코소보 전쟁에서는 세르비아의 군사 개입에 의해 많은 알바니아인이 학살되었으며, 다수의 공공기관도 파괴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군사제재 조치로서 NATO의 공중 폭격을 당하여 프리슈티나 내의 세르비아 군사시설 등이 공격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국제 연합 코소보 잠정 통치 기구(UNMIK)가 주둔하고 있다. 기후[편집] Pristina (1961–199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15.8 (60.4) 20.2 (68.4) 26.0 (78.8) 29.0 (84.2) 32.3 (90.1) 36.3 (97.3) 39.2 (102.6) 36.8 (98.2) 34.4 (93.9) 29.3 (84.7) 22.0 (71.6) 15.6 (60.1) 39.2 (102.6) 평균최고기온 °C (°F) 2.4 (36.3) 5.5 (41.9) 10.5 (50.9) 15.7 (60.3) 20.7 (69.3) 23.9 (75) 26.4 (79.5) 26.7 (80.1) 23.1 (73.6) 17.1 (62.8) 10.1 (50.2) 4.1 (39.4) 15.5 (59.9) 일평균기온 °C (°F) −1.3 (29.7) 1.1 (34) 5.0 (41) 9.9 (49.8) 14.7 (58.5) 17.8 (64) 19.7 (67.5) 19.5 (67.1) 15.9 (60.6) 10.6 (51.1) 5.1 (41.2) 0.4 (32.7) 9.8 (49.6) 평균최저기온 °C (°F) −4.9 (23.2) −2.8 (27) 0.2 (32.4) 4.2 (39.6) 8.5 (47.3) 11.4 (52.5) 12.5 (54.5) 12.3 (54.1) 9.4 (48.9) 5.0 (41) 0.9 (33.6) −3.1 (26.4) 4.4 (39.9) 최저기온기록 °C (°F) −27.2 (−17) −24.5 (−12.1) −14.2 (6.4) −5.3 (22.5) −1.8 (28.8) 0.5 (32.9) 3.9 (39) 4.4 (39.9) −4.0 (24.8) −8.0 (17.6) −17.6 (0.3) −20.6 (−5.1) −27.2 (−17) 평균 강수량 mm (인치) 38.9 (1.53) 36.1 (1.42) 38.8 (1.53) 48.8 (1.92) 68.2 (2.69) 60.3 (2.37) 51.6 (2.03) 44.0 (1.73) 42.1 (1.66) 45.4 (1.79) 68.2 (2.69) 55.5 (2.19) 597.9 (23.54) 평균강수일수 (≥ 0.1 mm) 13.6 12.3 11.4 12.1 12.8 11.9 8.3 7.9 7.5 8.6 12.3 14.5 133.2 평균강설일수 10.2 8.3 6.2 1.5 0.0 0.0 0.0 0.0 0.0 0.5 3.4 8.1 38.2 평균 상대 습도 (%) 83 77 70 65 67 67 63 62 68 74 80 83 71 평균 월간 일조시간 70.8 96.0 143.0 184.0 227.9 246.3 299.3 289.6 225.8 173.5 96.9 70.2 2,123.3 출처: Republic Hydrometeorological Service of Serbia[1] 문화[편집] 국립 공공 도서관 프리슈티나 대학 관광[편집] 그라차니차 수도원 (14세기 전반기에 건설되었다.) 각주[편집] ↑ “Monthly and annual means, maximum and minimum values of meteorological elements for the period 1961–1990” (Serbian). Republic Hydrometeorological Service of Serbia. 2017년 2월 25일에 확인함.  CS1 관리 - 인식할 수 없는 언어 (링크)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프리슈티나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지워진 역사: 코소보의 민족 말살 프리슈티나의 공식 웹페이지 프리슈티나 대학 프리슈티나 공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리슈티나&oldid=24260500" 분류: 코소보의 도시프리슈티나숨은 분류: CS1 관리 - 인식할 수 없는 언어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알바니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세르비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Žemaitėška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བོད་ཡིག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НохчийнČeštinaCymraegDanskDeutschDolnoserbski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FryskGaeilgeGàidhligGalegoGaelgעבריתHrvatskiHornjoserbsce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TaqbaylitҚазақшаKernowekLëtzebuergeschLimburgsلۊری شومالی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altiNāhuatl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NovialOccitanИронਪੰਜਾਬੀPapiamentuNorfuk / Pitkern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Саха тылаSardu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Gagana SamoaChiSho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Ślůnskiதமிழ்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дмурт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epsän kel’Tiếng ViệtVolapükWinaray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17: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프리슈티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슈티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프리슈티나 Priština 프리슈티나의 모습 프리슈티나북위 42° 40′ 00″ 동경 21° 10′ 00″ / 북위 42.666667° 동경 21.166667°  / 42.666667; 21.166667좌표: 북위 42° 40′ 00″ 동경 21° 10′ 00″ / 북위 42.666667° 동경 21.166667°  / 42.666667; 21.166667 행정 나라 코소보 행정구역 프리슈티나 구 인구 인구 211,129 명 (2013년) 인구밀도 370 명/km2 광역인구 504,165 명 지리 면적 572 km2 기타 시간대 CET (UTC+1) 지역번호 +381 https://kk.rks-gov.net/prishtina/ 프리슈티나의 위치 프리슈티나(알바니아어: Prishtina / Prishtinë, 세르비아어: Приштина, Priština)는 코소보의 수도이다. 근처의 도시로는 약 95km 북동쪽의 니시와 약 80km 남쪽의 스코페(북마케도니아의 수도) 등이 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현재 재건 중에 있으며 국제 연합의 관리를 받고 있다. 목차 1 인구 2 역사 2.1 중세~근대 2.2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 3 기후 4 문화 5 관광 6 각주 7 외부 링크 인구[편집] 2007년 현재 인구는 50만~60만 정도로 추산된다. 주민의 대부분은 알바니아계이다. 그러나 코소보 전쟁 당시에 많은 알바니아계 주민이 살해되었다. 그 외의 민족으로는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루마니아 등이다. 거리의 중심 광장에는 중세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인 스컨데르베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역사[편집] 중세~근대[편집] 중세 시대에는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로서 발칸 반도의 교역 거점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389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함에 따라서 이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이때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를 죽였고, 결국에는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게 됨으로써, 코소보 전투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서 신화가 되었다. 그 결과 근대가 되어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프리슈티나를 포함한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지역이 되어 버렸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서 발칸 반도의 기독교 신앙은 일정한 범위내에서 존중받았다. 그러나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주로 종교적인 이유에서 이 땅의 세르비아인들이 오스트리아령으로 이주하였고, 인구가 희박하게된 이 지역에 이슬람교 계통의 알바니아인들이 이주하였다. 그 때문에 중세 역사에서는 세르비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거주하고 있는 민족구성 면에서는 알바니아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19세기말보다 프리슈티나 등 여러 곳에서 알바니아인들의 민족운동도 고양되었다. 그 때문에 알바니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지역은 민족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이유들은 나중에 코소보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편집] 공산당 시대에 세워진 호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다시 세르비아의 지배로 되돌아갔다. 다만 세르비아 자체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전간기에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고 개칭하였고 프리슈티나도 유고슬라비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이탈리아군 그리고 독일군에 점령되었지만 1944년에 파르티잔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하면서 세르비아 내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코소보의 자치 또는 알바니아와의 통일 등을 내거는 운동이 대두되었다. 이에 대하여 세르비아 정부는 강경책으로 임하였고 무력진압도 불사했다. 알바니아어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의 민족 억압 정책은 구(舊)유고슬라비아 해체 후에 한층 격화되었고, 1999년의 코소보 전쟁에서는 세르비아의 군사 개입에 의해 많은 알바니아인이 학살되었으며, 다수의 공공기관도 파괴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군사제재 조치로서 NATO의 공중 폭격을 당하여 프리슈티나 내의 세르비아 군사시설 등이 공격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국제 연합 코소보 잠정 통치 기구(UNMIK)가 주둔하고 있다. 기후[편집] Pristina (1961–199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15.8 (60.4) 20.2 (68.4) 26.0 (78.8) 29.0 (84.2) 32.3 (90.1) 36.3 (97.3) 39.2 (102.6) 36.8 (98.2) 34.4 (93.9) 29.3 (84.7) 22.0 (71.6) 15.6 (60.1) 39.2 (102.6) 평균최고기온 °C (°F) 2.4 (36.3) 5.5 (41.9) 10.5 (50.9) 15.7 (60.3) 20.7 (69.3) 23.9 (75) 26.4 (79.5) 26.7 (80.1) 23.1 (73.6) 17.1 (62.8) 10.1 (50.2) 4.1 (39.4) 15.5 (59.9) 일평균기온 °C (°F) −1.3 (29.7) 1.1 (34) 5.0 (41) 9.9 (49.8) 14.7 (58.5) 17.8 (64) 19.7 (67.5) 19.5 (67.1) 15.9 (60.6) 10.6 (51.1) 5.1 (41.2) 0.4 (32.7) 9.8 (49.6) 평균최저기온 °C (°F) −4.9 (23.2) −2.8 (27) 0.2 (32.4) 4.2 (39.6) 8.5 (47.3) 11.4 (52.5) 12.5 (54.5) 12.3 (54.1) 9.4 (48.9) 5.0 (41) 0.9 (33.6) −3.1 (26.4) 4.4 (39.9) 최저기온기록 °C (°F) −27.2 (−17) −24.5 (−12.1) −14.2 (6.4) −5.3 (22.5) −1.8 (28.8) 0.5 (32.9) 3.9 (39) 4.4 (39.9) −4.0 (24.8) −8.0 (17.6) −17.6 (0.3) −20.6 (−5.1) −27.2 (−17) 평균 강수량 mm (인치) 38.9 (1.53) 36.1 (1.42) 38.8 (1.53) 48.8 (1.92) 68.2 (2.69) 60.3 (2.37) 51.6 (2.03) 44.0 (1.73) 42.1 (1.66) 45.4 (1.79) 68.2 (2.69) 55.5 (2.19) 597.9 (23.54) 평균강수일수 (≥ 0.1 mm) 13.6 12.3 11.4 12.1 12.8 11.9 8.3 7.9 7.5 8.6 12.3 14.5 133.2 평균강설일수 10.2 8.3 6.2 1.5 0.0 0.0 0.0 0.0 0.0 0.5 3.4 8.1 38.2 평균 상대 습도 (%) 83 77 70 65 67 67 63 62 68 74 80 83 71 평균 월간 일조시간 70.8 96.0 143.0 184.0 227.9 246.3 299.3 289.6 225.8 173.5 96.9 70.2 2,123.3 출처: Republic Hydrometeorological Service of Serbia[1] 문화[편집] 국립 공공 도서관 프리슈티나 대학 관광[편집] 그라차니차 수도원 (14세기 전반기에 건설되었다.) 각주[편집] ↑ “Monthly and annual means, maximum and minimum values of meteorological elements for the period 1961–1990” (Serbian). Republic Hydrometeorological Service of Serbia. 2017년 2월 25일에 확인함.  CS1 관리 - 인식할 수 없는 언어 (링크)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프리슈티나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지워진 역사: 코소보의 민족 말살 프리슈티나의 공식 웹페이지 프리슈티나 대학 프리슈티나 공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리슈티나&oldid=24260500" 분류: 코소보의 도시프리슈티나숨은 분류: CS1 관리 - 인식할 수 없는 언어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알바니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세르비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Žemaitėška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བོད་ཡིག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НохчийнČeštinaCymraegDanskDeutschDolnoserbski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FryskGaeilgeGàidhligGalegoGaelgעבריתHrvatskiHornjoserbsce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TaqbaylitҚазақшаKernowekLëtzebuergeschLimburgsلۊری شومالی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altiNāhuatl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NovialOccitanИронਪੰਜਾਬੀPapiamentuNorfuk / Pitkern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Саха тылаSardu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Gagana SamoaChiSho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Ślůnskiதமிழ்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дмурт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epsän kel’Tiếng ViệtVolapükWinaray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17: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진영시외버스정류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영시외버스정류장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진영시외버스정류장 공식명칭 김해 진영시외버스터미널 종류 시외버스 터미널 국가 대한민국 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로 215 (여래리) 행선지표기 진영 고속버스 운행 미운행 시외버스 운행 운행 시내버스 운행 운행 웹사이트 http://bus.gimhae.go.kr/index2.html 진영시외버스터미널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로 215(여래리 711-1)에 위치한 버스터미널이다. 과거 진영시외버스 정류장 또는 진영시외버스주차장(옛날에는 터미널을 주차장이라 명칭하였음)으로 불리다 진영시외버스터미널로 지명변경하였다. 목차 1 운행 노선 1.1 시외버스 1.2 시내버스 1.2.1 창원시내버스 1.2.2 김해시내버스 2 특이 사항 3 외부 링크 4 각주 운행 노선[편집] 2018년 4월 30일 동서울행 노선이 신설되었다. 시외버스[편집] 운행노선 운행업체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시간표 진영 ↔ 동서울 고려여객천일여객 진영 ↔ 동서울 무정차 2회 08:05, 12:35 진영 ↔ 밀양 밀성여객 김해 ↔ 밀양 가술, 수산 3회 11:25, 18:00, 19:50 진영 ↔ 부곡 밀성여객 진영 ↔ 부곡 가술, 수산, 초동, 인교 1회 07:55 진영 ↔ 부산서부 김해여객 진영 ↔ 부산서부 장유, 진례 30분간격 첫차:06:30(진영 기준)막차:21:00(진영 기준) 진영 ↔ 수산 밀성여객 김해 ↔ 수산 가술 2회 11:45, 16:50 시내버스[편집] 진영시외버스터미널에는 시내버스도 운행한다. 주로 김해시를 운행하는 편이며, 창원, 마산 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 노선도 경유한다. 창원시내버스[편집] 노선 운행업체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35 동양교통,대운교통,창원버스 대방동 ↔ 진영(설창사거리) 창원시청, 창원문성대, 창원공고, 덕산, 자여 5회 첫차:05:50(대방동),07:10(진영)막차:20:00(대방동),21:30(진영) 45 대운교통,마창여객,신양여객,마인버스,제일교통,대중교통 경남대학 ↔ 진영(설창사거리) 어시장, 마산터미널, 창원역, 덕산, 자여 5회 첫차:05:30(경남대),06:50(진영)막차:19:40(경남대),21:00(진영) 김해시내버스[편집] 노선 운행업체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비고 10 김해BUS 진영역 ↔ 봉하마을 한서병원, 진영시외버스터미널, 진영중학교, 중흥S클래스2단지, 주호, 본산 22회 (30~60분) 첫차:06:20(진영역),06:45(봉하)막차:21:30(진영역),21:00(봉하) 11 김해BUS 상룡 ↔ 동산 신용삼거리, 한서병원, 진영역, 진영 시외버스터미널, 삼성아파트, 부곡, 좌곤, 금산초교, 동산, 우동, 하계 9회 첫차:06:40(상룡),07:10(하계)막차:20:50(상룡),21:25(하계) 14-1 가야IBS 외동터미널 ↔ 금산초등학교 구산동, 부영6차, 망천1구, 빙그레, 설창, 진영역, 진영시외버스터미널, 삼성아파트, 부곡, 좌곤 15 첫차:05:00(외동),05:40(금산초)막차:22:20(외동),23:05(금산초) 44 동부교통 외동차고지(신세계백화점) ↔ 진영공설운동장 수로왕릉, 김해세무서, 김해여객터미널, 내덕, 부영13차, 냉정, 신안마을, 진례면사무소, 세일아파트, 한서병원, 진영터미널 30 첫차:05:30(외동),06:00(진영)막차:22:00(외동),21:25(진영) 56 동부교통 풍유동공영차고지 ↔ 진영시외버스터미널 외동터미널, 김해세무서, 김해여고, 부영6차, 망천1구, 한림면사무소, 한림정역, 가동, 가산, 주호 60 첫차:06:20(풍유동),06:30(진영)막차:21:50(풍유동),21:30(진영) 57 김해BUS 진영시외버스터미널 → 진영시외버스터미널 금병초등학교 → 봉하 → 장방 → 한림정역 → (장재[1]) → 외오서 → 내오서 → 금곡 → 정촌 → 모정(회차 지점) → 시전 → 부평 → 한림정역 → 장방 → 봉하 → 금병초등학교 8회 첫차:06:30(모정),07:20(진영)막차:20:40(모정),21:30(진영) 13 김해BUS 진영시외버스터미널 ↔ 진례파출소 진영역, 고모, 담안, 김해테크노밸리산업단지, 진례역, 진례백조아파트 9회 첫차:06:30(진례),07:20(진영)막차:21:15(진례),20:30(진영) 15 김해BUS 진영시외버스터미널 ↔ 진례파출소 진영역, (퇴은[2]), 고모, 담안, 송현, 진례백조아파트 17회 첫차:07:00(진례),08:00(진영)막차:20:40(진례),21:30(진영) 140 태영고속 김해터미널 ↔ 마산터미널 금강병원, 구산백조A, 명동, 진영역, 동읍, 의창동, 창원역 20~25 구. 김해-마산 완행시외버스, 14번 통합 특이 사항[편집] 태영고속에서 운행하는 진영신도시 노선은 이곳에 정차하지 않으며, 그 대신 도보 5분 거리의 "진영농협" 정류장에서 승차할 수 있다. 외부 링크[편집] 진영정류장 시간표 -> 시간표가 맞지 않습니다. 진영터미널 공식 블로그 : https://blog.naver.com/jbbjbb/221550958682 - 블로그에 오셔서 시간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각주[편집] ↑ 모정 방향에 한하여 1일 3회 경유한다. ↑ 1일 2회 경유한다. vdeh대한민국의 시외·고속버스터미널서울특별시 서울경부 서울호남 동서울 서울서부 서울남부 상봉 가락시장 김포공항 동대문 마장동 수유리 신촌 잠실 장지역 인천광역시 강화 외포리 화도 인천 인천공항 부평역 송도 용현동 경기도 가평 목동 설악 청평 현리 고양 고양화정 광명 철산 광주 곤지암 구리 군포 김포 도농 · 금곡 · 평내 · 마석 동두천 부천 송내역 부천역·소사동·송내사거리 수원 광교중앙역 서수원 수원역 아주대 영통입구 우만동 성남 가천대 시흥 하늘휴게소 안산 상록수역 안성 공도 대림동산 양성 일죽 주은풍림 죽산 중앙대입구 안양역 · 안양 · 범계 · 호계동 · 비산동 양주역 양평 용문 여주 능서 대신 태평 전곡 오산 용인 백암 신갈 양지 유방동 의정부 의왕고천 의왕TG 이천 장호원 문산 금촌 운정 파주적성 평택 평택시외 송탄 안중 서정리·용이동·청북 평택대 해군기지 포천 송우 신북 운천 일동 하남 서신 동탄 조암 향남 강원도 강릉 강릉시외 주문진 간성 거진 대진 동해 동해시외 삼척 삼척시외 도계 임원 호산 속초 속초시외 양구 남면 양양 낙산 영월 상동 원주 원주시외 문막 인제 백담입구 신남 원통 현리 정선 고한사북 북평 임계 동송 신철원 와수 육단 춘천 춘천시외 강촌 태백 평창 대화 장평 진부 횡계 홍천 내면 서석 양덕원 화천 사창리 횡성 둔내 충청북도 괴산 연풍 단양 매포 보은 보은고속 속리산 영동 추풍령 황간 옥천 안내 청산 음성 감곡 대소 무극 삼성 생극 충북혁신도시 제천 제천시외 백운 증평 진천 광혜원 이월 청주 청주시외 청주공항 북청주 남청주 미원 오창 충주 목계 수안보 주덕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충청남도 대전 서대전 유성 유성시외 대전청사 대전도룡 관저·건양대병원 용두동 도마동 부사동 신흥동 북대전 자운대 조치원 세종 세종청사 고대홍대 전의 금암 · 신도안 · 양정 · 엄사 공주 공암 동학사 산성 유구 금산 논산 논산시외 강경 연무 연무시외 당진 기지시 삽교천 신평 합덕 보령 대천해수욕장 부여 홍산 서산 고북 해미 서천 장항 아산 아산시외 신창 예산 신례원 천안 병천 성환 쌍용 한기대 청양 정산 태안 만리포 안면도 홍성 광천 내포 전라북도 고창 대산공용 무장 상하 선운사 해리 흥덕 군산 군산시외 대야 김제 만경 원평 남원 남원시외 덕과 반선 인월 무주 구천동 안성 부안 격포 줄포 순창 적성 고산 대둔산 봉동 삼례 운주 익산 익산시외 금마 여산 함열 임실 관촌 강진공용 오수 장수 번암 장계 전주 전주시외 정읍 신태인 태인 진안 백운 안천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주 문화동 소태역 송정역 진월동 강진 마량 성전 고흥 과역 나로도 녹동 곡성 옥과 광양 광영 동광양 태인 구례 나주 영산포 영삼거리 다시 담양 목포 남악 무안 보성 벌교 예당 조성 순천 순북 점암 지도 여수 여천 영광 법성포 홍농 영암 독천 삼호 신북 완도 고금 당목 장성 장성사거리 장흥 노력항 회진 진도 녹진 함평 문장 학교 해남 땅끝 화순 능주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동대구 서대구 대구북부 · 대구서부 · 현풍 용계 경산 영남대 자인 하양 경주 경주시외 건천 산내 아화 안강 입실 고령 구미 구미공단 선산 군위 우보 김천 문경 점촌 가은 봉화 춘양 상주 함창 성주 안동 경북도청 안동역 길안 풍산 영덕 강구 병곡 영해 장사 영양 영주 풍기 풍기IC 꽃동산 영천 임포 예천 용궁 울진 기성 부구 온정 죽변 평해 후포 의성 단촌 도리원 안계 탑리 청도 운문사 청송 월정 주왕산 진보 왜관 약목 포항 포항시외 송라 청하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 부산서부 김해공항 동래 신평 하단 해운대 울산 울산시외 신복 방어진 언양 봉계·공업탑·남창·무거·옥동·웅촌·태화·호계·효문 고현 장승포 거창 고성 배둔 김해 장유 진영 남해 밀양 유천 표충사 사천 곤양 삼천포 산청 생초 원지 양산 통도사 의령 신반 진주 진주시외 개양 반성 창녕 남지 부곡 영산 창원 내서 남산 창원역 마산 마산시외 남마산 진해 통영 하동 진교 화개 함안 함양 백무동 서상 안의 합천 가야 삼가 초계 해인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 · 서귀포 고속도로 환승정류장 낙동강휴게소 선산휴게소 섬진강휴게소 인삼랜드휴게소 정안알밤휴게소 횡성휴게소  :현재 시외버스 노선이 운행하지 않거나 없어진 터미널 굵은 글씨는 고속버스가 운행하는 터미널 vdeh김해시의 교통철도노선 경전선 부산신항선 (화물전용) 부산-김해 경전철 부전-마산선 역 진영역 한림정역 진례역 장유역¹ ¹ : 여객취급을 하지 않는 역 고속도로노선 남해 (10) 중앙 (55) 남해제2지선 (104) 남해제3지선 (105) 중앙지선 (551) 부산외곽순환 (600) 나들목·분기점 광재 김해가야 남진례 대동 대청 동김해 상동 서김해 장유 진례 진영 초정 한림 김해 분기점 냉정 분기점 대감 분기점 대동 분기점 진례 분기점 진영 분기점 일반도로국도 14호 25호 58호 국지도 60호 69호 지방도 1020호 1030호 1042호 주요 간선도로간선도로 금관대로 김해대로 동서대로 공항로 해원로(동읍우회도로) 호계로 교량 삼랑진교 대동화명대교 터널 불모산터널 창원터널 버스시내 김해 시내버스 고속·시외 김해 장유 진영 항공공항 김해국제공항 기타시내 마이비카드 캐시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진영시외버스정류장&oldid=24431034" 분류: 대한민국의 버스 터미널김해시의 교통경상남도의 버스 교통김해시의 건축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15일 (토) 10:5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에스토니아 별칭 Sinisärgid (파란 티셔츠) 연맹 에스토니아 축구 협회 대륙 유럽 축구 연맹 감독 마르틴 레임 주장 라그나르 클라반 최다 출전자 마르틴 레임 (157) 최다 득점자 안드레스 오페르 (38) 홈 구장 A. 레 코크 아레나 FIFA 코드 EST FIFA 랭킹 이 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최고 순위: 47위 (2012년 3월)최저 순위: 137위 (2008년 10월) 첫 국제경기 출전 에스토니아 0 - 6 핀란드 (핀란드 헬싱키; 1920년 10월 17일) 최다 점수차승리 리투아니아 0 - 6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1923년 6월 24일) 에스토니아 6 - 0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탈린; 1928년 7월 26일) 지브롤터 0 - 6 에스토니아 (포르투갈 파루/롤레; 2017년 10월 7일,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최다 점수차패배 핀란드 10 - 2 에스토니아 (핀란드 헬싱키; 1922년 8월 11일) 독일 8 - 0 에스토니아 (독일 마인츠; 2019년 6월 11일, UEFA 유로 2020 예선) 유니폼 홈 원정 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1920년 10월 17일 핀란드와의 A매치 데뷔전에서 0-6으로 대패했다. '파란 티셔츠(Sinisärgid)'라는 별칭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A. 레 코크 아레나를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목차 1 개요 2 FIFA 월드컵 (본선) 3 FIFA 월드컵 (예선) 4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5 하계 올림픽 6 주목할 만한 선수 7 각주 개요[편집] 에스토니아의 국제 대회 출전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1924년 하계 올림픽과 발트 3국이 모여 치르는 친선 대회인 발틱컵이 유이하며 FIFA 월드컵과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 출전 기록은 전무하다. 승점과 득실차를 놓고 봤을 때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국제 대회 예선은 2006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으로 12경기에서 5승 2무 5패를 기록했고 득실차에서도 -1(16득점·17실점)을 기록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국제 대회 예선은 UEFA 유로 2012 예선으로 역시 12경기에서 5승 2무 5패에 득실차 -3(16득점·19실점)을 기록했다. 또한 발틱컵에서는 3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준우승도 6번 차지했다. 그러나 UEFA 네이션스리그 2018-19 리그 C 2조 6경기에서 1승 1무 4패·조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차기 시즌 리그 D로 강등되었다. FIFA 월드컵 (본선)[편집] 년도 결과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불참 1934년 예선 탈락 1938년 1950년 소련에 강제 병합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예선 탈락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합계 FIFA 월드컵 (예선)[편집]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불참 1934년 1 0 0 1 2 6 0 1938년 3 1 0 2 4 11 3 1950년 소련에 강제 병합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10 0 1 9 1 27 1 1998년 10 1 1 8 4 16 4 2002년 10 2 2 6 10 26 8 2006년 12 5 2 5 16 17 17 2010년 10 2 2 6 9 24 8 2014년 10 2 1 7 6 20 7 2018년 10 3 2 5 13 19 11 합계 76 16 11 49 65 166 59 순위 월드컵 예선 승점 순위 : 111위 (유럽 39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편집] 1960년 ~ 1992년 - 소련에 강제 병합 1996년 ~ 2016년 - 예선 탈락 UEFA 유로컵 예선 기록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60년 소련에 강제 병합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없음[1] 1996년 10 0 0 10 3 31 0 2000년 10 3 2 5 15 17 11 2004년 8 2 2 4 4 6 8 2008년 12 2 1 9 5 21 7 2012년 12 5 2 5 16 19 17 2016년 10 3 1 6 4 9 10 합계 62 15 8 39 47 103 53 순위 유로 예선 승점 순위 : 42위 하계 올림픽[편집] 올림픽 축구 기록 년도 결과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20년 없음[2] 1924년 예비라운드 17위 1 0 0 1 0 1 0 1928년 불참 1936년 1992년[3] 없음[2] 1996년[3] 진출 실패 2000년[3] 2004년[3] 2008년[3] 2012년[3] 2016년[3] 합계 1회 진출(1/9[4]) 예비라운드(1회) 1 0 0 1 0 1 0 주목할 만한 선수[편집] 마르트 폼 안드레스 오페르 마르틴 레임 인드레크 젤린스키 마르코 크리스탈 라이오 피로야 콘스탄틴 바실리예브 타르모 킹크 헨리크 오야마 세르게이 파레이코 이고르 모로조프 라그나르 클라반 각주[편집] ↑ 에스토니아 축구협회 창립 이전 ↑ 가 나 에스토니아 축구협회 창립 이전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모든 연령의 선수 참가에서 23세 이하로 변경 ↑ 본선 진출 횟수. 독립 이후로 계산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vdehUEFA 소속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라트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리히텐슈타인 몬테네그로 몰도바 몰타 벨기에 벨라루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북아일랜드 불가리아 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웨덴 스위스 스코틀랜드 스페인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아제르바이잔 안도라 알바니아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웨일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잉글랜드 조지아 지브롤터 체코 카자흐스탄 코소보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터키 페로 제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FIFA 월드컵 예선 참가국vdeh1934년 FIFA 월드컵 예선 참가국남아메리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북아메리카 멕시코 미국 아이티 쿠바 아시아·아프리카 이스라엘 이집트 터키 유럽 그리스 네덜란드 독일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벨기에 불가리아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아일랜드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헝가리 vdeh1938년 FIFA 월드컵 예선 참가국남아메리카 브라질 아르헨티나 북아메리카 네덜란드령 가이아나 멕시코 미국 아이티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쿠바 아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일본 유럽·아프리카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독일 라트비아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벨기에 불가리아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이스라엘 이집트 체코슬로바키아 포르투갈 폴란드 핀란드 헝가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에스토니아_축구_국가대표팀&oldid=24423764" 분류: 에스토니아의 축구축구 국가대표팀유럽의 축구 국가대표팀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मराठीMaltiनेपाली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00: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에스토니아 별칭 Sinisärgid (파란 티셔츠) 연맹 에스토니아 축구 협회 대륙 유럽 축구 연맹 감독 마르틴 레임 주장 라그나르 클라반 최다 출전자 마르틴 레임 (157) 최다 득점자 안드레스 오페르 (38) 홈 구장 A. 레 코크 아레나 FIFA 코드 EST FIFA 랭킹 이 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최고 순위: 47위 (2012년 3월)최저 순위: 137위 (2008년 10월) 첫 국제경기 출전 에스토니아 0 - 6 핀란드 (핀란드 헬싱키; 1920년 10월 17일) 최다 점수차승리 리투아니아 0 - 6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1923년 6월 24일) 에스토니아 6 - 0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탈린; 1928년 7월 26일) 지브롤터 0 - 6 에스토니아 (포르투갈 파루/롤레; 2017년 10월 7일,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최다 점수차패배 핀란드 10 - 2 에스토니아 (핀란드 헬싱키; 1922년 8월 11일) 독일 8 - 0 에스토니아 (독일 마인츠; 2019년 6월 11일, UEFA 유로 2020 예선) 유니폼 홈 원정 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1920년 10월 17일 핀란드와의 A매치 데뷔전에서 0-6으로 대패했다. '파란 티셔츠(Sinisärgid)'라는 별칭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A. 레 코크 아레나를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목차 1 개요 2 FIFA 월드컵 (본선) 3 FIFA 월드컵 (예선) 4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5 하계 올림픽 6 주목할 만한 선수 7 각주 개요[편집] 에스토니아의 국제 대회 출전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1924년 하계 올림픽과 발트 3국이 모여 치르는 친선 대회인 발틱컵이 유이하며 FIFA 월드컵과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 출전 기록은 전무하다. 승점과 득실차를 놓고 봤을 때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국제 대회 예선은 2006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으로 12경기에서 5승 2무 5패를 기록했고 득실차에서도 -1(16득점·17실점)을 기록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국제 대회 예선은 UEFA 유로 2012 예선으로 역시 12경기에서 5승 2무 5패에 득실차 -3(16득점·19실점)을 기록했다. 또한 발틱컵에서는 3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준우승도 6번 차지했다. 그러나 UEFA 네이션스리그 2018-19 리그 C 2조 6경기에서 1승 1무 4패·조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차기 시즌 리그 D로 강등되었다. FIFA 월드컵 (본선)[편집] 년도 결과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불참 1934년 예선 탈락 1938년 1950년 소련에 강제 병합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예선 탈락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합계 FIFA 월드컵 (예선)[편집]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불참 1934년 1 0 0 1 2 6 0 1938년 3 1 0 2 4 11 3 1950년 소련에 강제 병합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10 0 1 9 1 27 1 1998년 10 1 1 8 4 16 4 2002년 10 2 2 6 10 26 8 2006년 12 5 2 5 16 17 17 2010년 10 2 2 6 9 24 8 2014년 10 2 1 7 6 20 7 2018년 10 3 2 5 13 19 11 합계 76 16 11 49 65 166 59 순위 월드컵 예선 승점 순위 : 111위 (유럽 39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편집] 1960년 ~ 1992년 - 소련에 강제 병합 1996년 ~ 2016년 - 예선 탈락 UEFA 유로컵 예선 기록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60년 소련에 강제 병합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없음[1] 1996년 10 0 0 10 3 31 0 2000년 10 3 2 5 15 17 11 2004년 8 2 2 4 4 6 8 2008년 12 2 1 9 5 21 7 2012년 12 5 2 5 16 19 17 2016년 10 3 1 6 4 9 10 합계 62 15 8 39 47 103 53 순위 유로 예선 승점 순위 : 42위 하계 올림픽[편집] 올림픽 축구 기록 년도 결과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20년 없음[2] 1924년 예비라운드 17위 1 0 0 1 0 1 0 1928년 불참 1936년 1992년[3] 없음[2] 1996년[3] 진출 실패 2000년[3] 2004년[3] 2008년[3] 2012년[3] 2016년[3] 합계 1회 진출(1/9[4]) 예비라운드(1회) 1 0 0 1 0 1 0 주목할 만한 선수[편집] 마르트 폼 안드레스 오페르 마르틴 레임 인드레크 젤린스키 마르코 크리스탈 라이오 피로야 콘스탄틴 바실리예브 타르모 킹크 헨리크 오야마 세르게이 파레이코 이고르 모로조프 라그나르 클라반 각주[편집] ↑ 에스토니아 축구협회 창립 이전 ↑ 가 나 에스토니아 축구협회 창립 이전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모든 연령의 선수 참가에서 23세 이하로 변경 ↑ 본선 진출 횟수. 독립 이후로 계산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vdehUEFA 소속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라트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리히텐슈타인 몬테네그로 몰도바 몰타 벨기에 벨라루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북아일랜드 불가리아 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웨덴 스위스 스코틀랜드 스페인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아제르바이잔 안도라 알바니아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웨일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잉글랜드 조지아 지브롤터 체코 카자흐스탄 코소보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터키 페로 제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FIFA 월드컵 예선 참가국vdeh1934년 FIFA 월드컵 예선 참가국남아메리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북아메리카 멕시코 미국 아이티 쿠바 아시아·아프리카 이스라엘 이집트 터키 유럽 그리스 네덜란드 독일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벨기에 불가리아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아일랜드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헝가리 vdeh1938년 FIFA 월드컵 예선 참가국남아메리카 브라질 아르헨티나 북아메리카 네덜란드령 가이아나 멕시코 미국 아이티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쿠바 아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일본 유럽·아프리카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독일 라트비아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벨기에 불가리아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이스라엘 이집트 체코슬로바키아 포르투갈 폴란드 핀란드 헝가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에스토니아_축구_국가대표팀&oldid=24423764" 분류: 에스토니아의 축구축구 국가대표팀유럽의 축구 국가대표팀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मराठीMaltiनेपाली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00: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자의왕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자의왕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 ? ~ 681년[1])는 신라의 제30대 왕인 문무왕의 왕비이다. 아들은 신문왕이며, 아버지는 파진찬 김선품이다. 자눌왕후(慈訥王后)라고도 한다. 진흥왕의 증손녀이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2.1 선대 2.2 형제, 자매 2.3 인척 3 자의왕후가 등장한 작품 4 각주 생애[편집] 자의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이다. 김선품은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아들인 구륜공과 진평왕과 미실의 딸인 보화공주의 소생이다. 자의왕후의 어머니는 이화랑과 숙명공주의 아들인 보리공과 정숙태자와 만호태후의 딸인 만룡낭주의 소생인 보룡궁주이다. 어렸을 때 부친 김선품이 사망하여 어머니인 보룡궁주가 김춘추 집안의 유모가 되었다. 이에 김춘추의 장남인 법민과 인연을 맺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고 김법민이 태자로 책봉 될 때 그녀 또한 태자비로 책봉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자의왕후의 동생인 야명부인도 문무왕의 후궁으로 입궐하여 인명전군을 낳았다. 자의왕후는 문무왕과의 사이에서 소명태자와 훗날 신문왕이 되는 정명태자를 낳았다. 문무왕 말기에 정명태자의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이 정권을 장악하여 대립하였다. 신문왕 원년(681년)에 김흠돌이 야명궁주 소생인 인명전군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김흠돌을 비롯하여 흥원(興元), 진공(眞功 - 제26대 풍월주), 흠돌의 아들인 흠언(金欽言, 제31대 풍월주), 진공의 아들인 신공(信功 - 제32대 풍월주)와 군관공, 인명전군을 처형하였다. 이들이 대부분 화랑도 출신이므로 그녀는 화랑도를 일시 폐지 시키고 이에 소속된 자들을 병부에 소속시키나, 지방까지는 미치지 못하자 다시 부활시켜 풍월주와 국선 이원체제가 아닌 국선 일원체제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김흠돌 세력의 반란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문무왕이 붕어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서거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선대[편집] 조부 : 김구륜 (金仇輪) - 진흥왕(眞興王)과 사도왕후(思道王后)의 아들 조모 : 보화공주 김씨(寶華公主 金氏) - 진평왕(眞平王)과 미실궁주(美室宮主)의 딸 아버지 : 김선품(金善品) - 제 21대 풍월주 어머니 : 보룡궁주 김씨(寶龍宮主 金氏) - 선품공이 사망하자 김춘추의 집안의 유모로 들어갔다. 외조부 : 보리공 (菩利公) - 이화랑(二花郞)과 숙명공주 김씨(叔明公主 金氏)의 아들이자 제 12대 풍월주 외조모 : 만룡낭주 김씨(萬龍娘主 金氏) - 정숙태자(貞肅太子)와 만호태후 김씨(萬呼太后 金氏)의 딸 외숙부 : 예원공(禮元公) - 제 20대 풍월주 형제, 자매[편집] 남매 : 김순원(金順元) - 성덕왕과 효성왕의 장인 여동생 : 김운명(金雲明) - 28대 풍월주 오기공에게 출가 조카 : 김대문(金大門) - 화랑세기 2대 저자 여동생 : 야명궁주 김씨(夜明宮主 金氏) - 문무왕의 후궁 조카 : 인명전군(仁明殿君) 인척[편집] 시아버지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신라 제 29대 왕 시어머니 :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서현의 차녀 남편 : 문무왕 - 신라 제 30대 왕 아들 : 소명태자(昭明太子) - 일찍 사망 아들 : 신문왕 - 신라 제 31대 왕 며느리 : 폐비김씨 며느리 :신목왕후 손자 : 효소왕,성덕왕 시이모 : 영창부인(永昌夫人) - 김서현의 장녀 자의왕후가 등장한 작품[편집] 《대왕의 꿈》 (KBS, 2012년~2013년, 배우: 최규현) 각주[편집] ↑ 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웅진지식하우스 이 글은 한국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자의왕후&oldid=20868690" 분류: 생몰년 미상신라의 왕비경주 김씨숨은 분류: 한국사에 관한 토막글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3월 5일 (월) 18: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해를 품은 달 (드라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해를 품은 달 (드라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해를 품은 달 장르 드라마 [로맨틱]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MBC 방송 기간 2012년 1월 4일 ~ 2012년 3월 15일 방송 시간 수, 목 밤 9시 55분 ~ 밤 11시 15분 방송 분량 1시간 10분 방송 횟수 20부작 + 스페셜 4부작 추가 채널 MBC 드라마넷, MBC 에브리원, MBC 라이프[1], 올'리브, 스토리온, 스카이 드라마, QTV, 드라마큐브(케이블방송) 원작 정은궐 - 해를 품은 달 기획 오경훈 프로듀서 이경식 제작자 팬엔터테인먼트문정수 연출 김도훈, 이성준 조연출 박지현, 현솔잎 극본 진수완 출연자 한가인, 김수현, 정일우, 김민서, 송재희, 송재림, 윤승아, 남보라, 김영애, 전미선 외 닫는 곡 OST Part 1 (달빛이 지고 - 해오라) OST Part 2 (시간을 거슬러 - 린) OST Part 5 (아니기를 - 이기찬) 음성 2채널 스테레오 사운드(아날로그)2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외부 링크  해를 품은 달 홈페이지 《해를 품은 달》은 소설가 정은궐이 집필한 동명의 장편 소설[2] 을 원작으로 한 MBC의 수목 미니시리즈이다. 이 드라마를 마지막으로 주중 드라마에서 시청률이 40%를 돌파한 작품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MBC의 역대 수목드라마 중 독보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목차 1 등장 인물 1.1 주요 인물 1.2 허영재 (연우, 염의 부친) 일가 1.3 훤 일가 1.4 윤대형 (윤보경의 부친) 일가 1.5 성수청 사람들 1.6 궁궐 사람들 2 시청률 3 OST 3.1 Part.1 3.2 Part.2 3.3 Part.3 3.4 Part.4 3.5 Part.5 3.6 Part.6 3.7 정규앨범 4 수상 5 일화 6 동시간대 드라마 7 각주 8 외부 링크 등장 인물[편집] 주요 인물[편집] 한가인 : 해를 머금은 달 - 허연우(煙雨), 월(月) 役 (아역 김유정) 홍문관 대제학 허영재의 딸, 염의 누이동생, 훤의 첫사랑 과거 : 세자빈 - 현재 : 왕의 액받이 무녀(왕에게 일어날 흉한 일[액 : 厄]을 대신 받는 무녀) 연우(煙雨),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안개비 또는 보슬비라는 뜻. 하지만 그녀의 성격은 오히려 뜨거운 태양 아래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청량하고 신선하고 쾌활하다. 홍문관 대제학의 여식(딸)답게 영리하고 똘똘하기까지 하다. 우연히 입궐, 그 곳에서 훤과 마주친다. 그리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설렘은 마침내 첫사랑이 되었다. 이제 훤의 반쪽이 되어 세자빈으로서 행복한 날들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들어 국혼을 얼마 안 남겨두고 사가(私家)로 돌려 보내진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내 이름은 액받이 무녀, 월(月) 그녀는 8년 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데... 후에 모든 것이 해결되고 중전 윤씨가 자결을 하자, 훤의 정비가 된다. 김수현 : 달을 그리는 해 - 이훤(暄) 역 (아역 여진구) 조선의 왕, 중전 한씨의 소생, 민화공주의 오라버니, 연우의 첫사랑 과거 : 세자 - 현재 : 왕 나는 이나라의 왕세자다.(세자시절) 다소 히스테리컬한 청년국왕이다. 잘생겼다. 영리하다.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 죽여준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위협' 인 양명 앞에서 언제나 티없이 맑게 웃는다. 염을 통해 학문의 즐거움과 군왕의 도리를 배웠다면, 연우를 통해서는 자신이 다스려야 할 궐 너머의 세상과 첫사랑의 설렘을 배웠다. 연우가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첫사랑은 결실을 맺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갑작스럽게 죽고, 외척가문의 보경이 대신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 훤은 더 이상 철없는 왕세자가 아니었다. 과인은 조선의 왕이다.(현재) 차갑다. 시니컬하다. 별로 웃지 않는다. 후궁은커녕 중전도 품지 않는다. 내의원의 권고로 우연히 피병(병을 피하여 거처를 옮김)을 갔다가 음산한 무녀의 집에서 비를 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정일우 : 해에 가려진 슬픈 빛 - 양명군(陽明) 역 (아역 김진성, 이태리) 전왕의 서장자, 희빈 박씨의 소생,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의 왕자 유유자적, 풍류남아. 겉으로는 허허실실, 내면은 오리무중의 자유로운 영혼. 아니, 이 자유를 얻기 위해 그가 얼마나 용을 쓰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왕위 계승 서열 1순위. 그 허울 좋은 명분 때문에 양명의 저택에는 늘 권력에 뒷줄을 대려는 도포자락들로 넘쳐난다. 어린 시절 훤의 그늘에 가려 부왕으로 부터 많은 냉대를 받았으나, 홍문관 대제학의 사가에 드나들며 치유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우를 만나 애타는 그리움과 연모를 배웠지만, 그녀의 세자빈 간택과 연이은 죽음에 그 또한 절망에 빠졌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러나 운명은 그를 또다시 훤과 맞부딪치게 만드는데... 김민서 : 달을 꿈꾸는 거울 - 윤보경(寶鏡) 역 (아역 김소현) 중전, 훤의 정비(正妃), 윤대형의 딸 착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다소곳하고 얌전한 여인. 어질고 온화한 성품으로 궁인들 사이에 떠도는 여론 또한 모두 중전의 편이다. 그러나 그녀는 용종 잉태를 외면하는 훤을 단 한번도 원망하지 않는다. 괜찮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을 뿐. 자, 여기까지가 대외적인 그녀의 모습이다. 어른들의 사랑, 아랫사람들의 흠앙(공경하여 우러러 사모함), 왕친들의 동정, 조정의 여론형성...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어린 시절 평범한 아이였던 보경을 지금의 야심가로 키워낸 건 아버지 윤대형이었다. 세자빈이 되어 훤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연우의 부고로 현실이 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보경의 편이었다. 아니 그런줄로만 알았다. 월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밝혀지고 아버지 윤대형이 반란을 일으키자 괴로워하던 보경은 조용히 목을 맨다. 송재희 : 날개 꺾인 불꽃 - 허염(炎) 역 (아역 임시완) 민화공주의 남편이 되어 의빈(왕의 사위)봉작을 받았다. 유록대부 양천위, 연우의 오라버니, 훤의 스승이며 매제 초(超)절정 미모의 소유자로 성균관 시절 모든 유생들의 우상이었다. 게다가 수재다.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초(超)천재.(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물론 단점도 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없으며 남녀의 감정에 둔한 천하에 없는 유생 그 자체. 그 최대 피해자가 바로 민화공주다. 열일곱에 장원 급제하고 그 해 세자시강원의 문학에 재수되어 겨우 두살 아래인 왕세자 훤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훤과 사제의 정을, 군신의 정을, 그리고 동년배의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연우의 죽음 이후 비극이 시작점이 되어버린 그 시절... 지금도 염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훤과 연우를 연결해준 자신을 책망하고 후회한다. 송재림 : 비를 품은 구름 - 운(雲) 역 (아역 이원근) 본명 김제운, 23세의 젊은 무사, 조선 최고의 운검으로 훤의 최 측근에서 호위 뭘 해도 그림이 된다. 날카로운 눈매에 서늘한 콧날. 육척이 넘는 훤칠한 키와 긴 팔다리로 언제나 훤 뒤에 그림자처럼 묵묵히 서 있다. 한마디로 미친 존재감. 게다가 조선 팔도 최고의 무예실력과 뛰어난 지적수양으로 완벽한 스펙을 갖췄다. 양명군, 허염과 삼총사이다. 서자출신이라 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염을 존대한다. 그리고.. 운을 남자로 만들어준 한 명의 여인. 연우.. 아니, 무녀 월(月)... 그는 주군에 대한 충심(忠心), 사내의 연심(戀心) 사이에서 갈등한다. 허영재 (연우, 염의 부친) 일가[편집] 선우재덕 : 허영재 역 (특별출연) 연우와 염의 부친, 홍문관 대제학. 청렴 결백한 성정과 높은 학문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충직한 성품 덕에 선대왕의 총애를 받지만 바로 그 올곧은 성정 때문에 윤대형을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들인 염과 양명을 운에게 소개해주어 친구의 정을 알게 해주었다. 연우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마음의 병을 얻는다. 양미경 : 정경부인 신씨 역 연우와 염의 모친, 민화공주의 시어머니. ‘대제학 집의 곳간은 도성 사람 모두의 것이요, 그 집 마나님은 여자 일지매다’ 라는 소문이 무성한 따뜻한 성정의 소유자. 그러나 하나 뿐인 딸과 남편의 연이은 죽음으로 시든 꽃처럼 활기를 잃어버렸다. 그런 그녀에게 다시 웃음을 찾아준 것이 바로 민화공주다. 윤승아 : 불꽃을 품은 눈 - 설(雪) 역 (아역 서지희) 과거 허씨 가문의 노비. 본명은 이 년. 현재 이름은 설(雪). 연우를 호위하는 보이시한 느낌의 소녀 검객. 우연한 계기로 도무녀 장씨와 얽히게 되면서 연우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설’ 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 도련님 ‘허염’을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다. 후에 궐내에서 마주친 운과 짝사랑의 아픔에 대한 찐한 동지애를 나눈다. 훤 일가[편집] 김영애 : 대왕대비 윤씨 역 외척세력의 대지주, 성조대왕의 어머니이자 훤의 할머니. 윤대형의 친척이자 정치적 연대관계. 3년 간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현재는 영리한 훤에 의해 결국 철정을 선언, 뒷방으로 물러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친정 가문의 건세를 도모하기 위한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세자빈 죽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안내상 : 성조대왕[3] 역 (특별출연) 훤, 양명, 민화의 아버지. 문무를 겸비한 왕. 과거 아끼던 이복동생 의성군이 역모에 연루돼 윤대형에게 참살된 일을 묵인한 아픈 기억이 있다. 하여 서자인 양명을 마음으로는 아끼나 겉으로는 유독 싸늘하게 대한다. 세자인 훤이 강력한 군주가 되어 바른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지지한다. 김선경 : 대비 한씨 역 훤의 어머니. 온화하고 지고 지순한 조선시대 여인의 전형. 세도가 출신이 아니며 정치색이 없어 윤대형의 견제를 덜 받는다. 내심 연우를 세자빈으로 점 찍어두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훗날 훤의 건강 악화가 죽은 연우의 원혼 때문이라 여겨 위령제를 제안한다. 김명수 : 의성군 역 (특별출연) 성조대왕의 이복동생. 간언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모두 외척을 겨냥한다는 이유로 윤대형에 의해 살해당한다. 남보라 : 불꽃이 되지 못한 꽃 - 민화공주(旼花) 역 (아역 진지희) 훤과 양명의 동생, 염의 최강동안 어린 신부. 귀엽고 천진난만한 한마디로 타고난 공주로, 어렸을 적부터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은 민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런 민화가 처음으로 욕심을 낸 사람이 바로 첫 눈에 반한 염이었다. 연우의 죽음 이후 기적처럼 염과의 혼인에 성공하나, 가끔씩 자신이 염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만 같아 문득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윤대형 (윤보경의 부친) 일가[편집] 김응수 : 윤대형 역 훤의 국구, 보경의 부친, 외척세력의 수장이자 노회한 정치 9단. 국모가 된 딸과 대왕대비 윤씨를 뒷배로, 마침내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그는 아직도 목이 마르다. 권력에의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 냉정하고 탐욕적인 인물. 사위인 훤과 끊임없이 대립하며 결국 그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드는데…. 장희수 : 김씨부인 역 윤대형의 처, 보경의 모친 김승욱 : 윤수찬 역 호조 참판에서 추후 판서, 대비 윤씨와 일문으로 윤대형의 육촌 동생뻘, 든든한 가문 덕에 음서로 조정에 출사한 인물로, 학문의 깊이가 얇고 가방 끈이 짧다는 데에 약간의 열등감이 있다. 훗날 인사권을 장악하고 뇌물과 비리의 온상이 된다. 성수청 사람들[편집] 전미선 : 해와 달을 섬기는 무녀(巫女) - 도무녀 장씨(녹영) 역 성수청 국무(國巫), 조선팔도 최고의 신력을 가진 무당. 세자빈 시해 사건에 대한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으뜸 주술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알만한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요구로 존폐위기에 놓인 성수청을 구하고자, 대비 윤씨의 사주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데… 김익태 : 혜각도사 역 소격서의 도사. 우연한 기회에 대비 윤씨와 도무녀 장씨가 결탁하는 장면을 목격하여 본의 아니게 ‘세자빈 시해사건’ 에 연루된다. 처음에 도무녀 장씨를 오해하나 이내 그녀의 계획을 눈치 채고 목숨을 건 공범자(?)가 되어준다. 배누리 : 잔실 역 (아역 조민아) 무노비(巫奴婢), 도무녀 장씨의 신딸. 약간의 신력이 있으나 워낙 겁이 많아 오히려 자신의 신기에 휘둘리는 스타일. 평소에 어리바리 하지만 문득 그녀가 어딘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으면 긴장해야 한다. 장영남 : 아리 역 (특별출연) 과거 녹영과 절친한 우정을 나눈 뛰어난 신력(神力)의 소유자이다. 윤대형이 의성군을 살해하는 현장을 보게 되면서 쫓기게 된다. 홍경연 : 국무 역 (특별출연) 궁궐 사람들[편집] 정은표 : 형선 역 대전 상선 내관. 세자 시절부터 훤을 보필해오던 인물. 영화 ‘시네마천국’ 에 알프레도와 토토처럼 그렇게 우정을 쌓아왔다. 훤의 첫사랑과 성장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로, 연우의 죽음 이후 냉랭하게 변모한 훤의 모습에 안타까워한다. 윤희석 : 홍규태 역 의금부 도사. 행동도 말투도 외모도 하여튼 여러 면에서 튄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이단아! 의금부 내의 비리를 발고하는 상소를 올려 왕따를 당한다. 후에 훤의 눈에 들어 특별한(?)밀지를 받는다. 변복을 하고 칡뿌리를 씹고 다니며 탐문수사를 벌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조선의 셜록홈즈를 연상시킨다. 김예령 : 희빈 박씨 역 양명군의 어머니. 선대왕의 후궁. 대비 한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야심이 없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늘 역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양명이 안쓰럽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실없는 사람처럼 위장하고 사는 아들의 모습이 가슴 아프다. 이승형 : 한재길 역 한성부 판윤에서 후에 병조 판서. 윤대형, 심산과는 동방으로 윤대형파 인물 중 가장 점잖은 인물. 겉으로는 유학자인척, 군자인척, 고상한 척 하지만, 결국 뼛속까지 속물에 처세술에 능한 야심가일 뿐이다. 서현철 : 심산 역 이조 참의에서 추후 도승지, 윤대형 파의 2인자이자 브레인이다. 윤대형의 오른팔로서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해왔다. 윤대형과는 가장 말이 통하는 인물로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 추귀정 : 조상궁 역 보경이 세자빈으로 입궐할 때 친정에서 데리고 온 본방내인. 입이 무겁고 머리 회전이 빨라 보경의 수족이 되어 움직인다. 보경이 유일하게 자신의 속내를 말하는 인물. 김민경 : 민상궁 역 북촌 염의 사가에서 민화 공주를 모시는 상궁. 매사 철없고 고집불통인 공주 자가를 모시느라 알게 모르게 고생이 많은 인물. 밤마다 어여삐 치장하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민화 공주 덕에 화장술과 미용술이 일취월장한다. 이정훈 : 오혜성 역 관상감의 천문학 교수, 천문 관측이나 측후, 역서(달력) 제작을 담당하는 천문학 분야의 일인자 박길수 : 문지방 역 관상감의 지리학 교수, 풍수학을 토대로 왕궁, 왕릉 등의 명당 터를 잡는 일을 하는 지리학 분야의 일인자 김명국 : 나대길 역 관상감의 명과학 교수, 왕실의 합궁일이나 길일 택일, 길흉화복의 점복을 담당하는 명과학 분야의 일인자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2년 회차 방송일 부제 TNmS 시청률[4] AGB 시청률[5]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제1회 1월 4일 두 개의 태양과 하나의 달 15.0% 16.9% 18.0% 19.7% 제2회 1월 5일 두 개의 달과 하나의 태양 17.3% 20.8% 19.9% 22.2% 제3회 1월 11일 꽃잎처럼, 불꽃처럼 19.4% 22.3% 23.2% 26.1% 제4회 1월 12일 하나의 태양, 하나의 달 20.6% 25.1% 23.4% 26.0% 제5회 1월 18일 달이 지다 22.9% 24.9% 24.9% 28.3% 제6회 1월 19일 숨은 달 25.9% 28.6% 29.3% 32.9% 제7회 1월 25일 무녀 월(月) 25.5% 28.8% 29.7% 33.8% 제8회 1월 26일 액받이 무녀 26.2% 29.4% 31.7% 35.3% 제9회 2월 1일 태양 옆에 숨은 달 28.4% 32.3% 34.5% 38.9% 제10회 2월 2일 사자전서(死者傳書) 30.5% 35.1% 37.1% 40.5% 제11회 2월 8일 밀애(密愛) 34.3% 38.6% 37.1% 41.7% 제12회 2월 9일 눈물길 33.7% 37.8% 37.1% 40.8% 제13회 2월 15일 마녀사냥 34.6% 39.3% 38.4% 42.9% 제14회 2월 16일 나는 왜 죽었는가 37.2% 42.0% 37.6% 42.1% 제15회 2월 22일 다시 두 개의 태양, 두 개의 달 37.7% 42.6% 39.1% 43.1% 제16회 2월 23일 달의 정체 39.8% 45.5% 41.3% 46.1% 제17회 2월 29일 달을 품은 해 33.3% 36.1% 36.0% 39.7% 제18회 3월 1일 핏빛 전조(前兆) 40.7% 47.0% 41.2% 45.8% 제19회 3월 14일 반역(反逆) 38.9% 42.9% 38.7% 41.8% 제20회 3월 15일 해를 품은 달 42.3% 46.5% 42.2% 45.8% 평균 시청률 30.2% 34.1% 33.0% 36.7% 스페셜 제1회 3월 7일 명장면 릴레이 24.7% 26.0% 24.5% 26.9% 제2회 3월 8일 명장면&명대사 19.8% 21.7% 19.2% 20.9% 제3회 3월 10일 명장면&명대사 정리본~★ 5.1% 5.8% 5.4% 6.1% 제4회 명장면&명대사 정리본~★ 5.5% 5.9% 6.0% 6.8% OST[편집] 해를 품은 달 OST Part.1 해오라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1월 11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2 린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1월 17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3 휘성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1월 26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4 먼데이 키즈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2월 9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5 이기찬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2월 23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6 김수현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3월 13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Various Artists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2월 15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Part.1[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달빛이 지고 (해오라)반형문, 한상원반형문, 한상원 03:40 2. 달빛이 지고 (inst.) (해오라) 반형문, 한상원 03:39 Part.2[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시간을 거슬러 (린)김박사김박사, Meng이 03:31 2. 시간을 거슬러 (inst.) (린) 김박사, Meng이 03:31 Part.3[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눈물길 (휘성)휘성문하, 휘성 03:50 2. 눈물길 (inst.) (휘성) 문하, 휘성 03:50 Part.4[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그림자 (먼데이 키즈)반형문, 한상원반형문, 한상원 03:56 2. 그림자 (inst.) (먼데이 키즈) 반형문, 한상원 03:56 Part.5[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아니기를 (이기찬)민연재KingMing, The Name 03:47 Part.6[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그대 한 사람 (김수현)김창락김창락 03:53 2. 그대 한 사람 (inst.) (김수현) 김창락 03:53 정규앨범[편집] # 제목 재생 시간 1. 시간을 거슬러 (린) 03:31 2. 달빛이 지고 (해오라) 03:39 3. 눈물길 (휘성) 03:50 4. 그림자 (먼데이 키즈) 03:56 5. 해를 품은 달   02:05 6. 숨은 달   03:01 7. 꽃잎처럼, 불꽃처럼   04:05 8. 애지애가(愛之哀歌)   02:38 9. 궐   02:28 10. 장명루   02:46 11. 저자거리   01:55 12. 위령제   03:01 13. 두개의 태양과 하나의 달   02:10 14. 은월각   02:20 15. 연우 내리다   03:24 16. 태양의 눈물   02:26 17. 궁의 아침   02:51 18. 달빛의 노래   01:43 19. 흑주술   01:45 20. 나비의 춤   02:14 수상[편집] 2012년 제25회 한국촬영감독협회 그리메상 드라마 부문 최우수작품상 2012년 MBC 연기대상 남자 최우수상, 남자 인기상 - 김수현 2012년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 - 한가인 2012년 MBC 연기대상 여자 아역상 - 김유정 2012년 MBC 연기대상 남자 아역상 - 여진구 2012년 MBC 연기대상 여자 아역상 - 김소현 2012년 MBC 연기대상 여자 황금연기상 - 양미경 2012년 MBC 연기대상 올해의 작가상 - 진수완 2012년 MBC 연기대상 올해의 드라마상 2012년 제4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 김수현 2012년 제4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 일화[편집] 주원 양명군 역에 캐스팅 되었으나, 드라마 《오작교 형제들》의 연장방송으로 하차. 주원 대신 정일우 교체.[6] 한가인이 12월 21일 소속사를 통해 갑작스럽게 불거진 하차설과 관련해 입장을 밝힘, 이날 한가인 측에선 하차설에 대해 하차할 의사가 절대 없다는 식의 글을 게재하며 하차설을 일축했다.[7] 기자회의 취재, 제작거부로 MBC 뉴스 프로그램 제작에 차질이 빚어진 가운데 1월 25일에는 9시 50분 방송, 80분으로 확대 편성되었다.[8] MBC가 1월 25일 방송분을 80분으로 확대편성 한다고 밝혔으나 실제 런닝타임은 63분[9], 전 보다 더 짧은 분량으로 논란이 되었다.[10] KBS 드라마《동안미녀》에서 김민서와 친분을 쌓았던 가수 겸 배우 장나라가 《해를 품은달》제작진에게 150인분의 삼계탕을 보냈다.[11] 수도권 시청률 40% 돌파 기념으로 한가인은 해를 품은 달 제작진에게 갈비 150인분을 대접했다.[12] 2월 2일 김수현은 제작진에게 피자 150인분을 대접했다.[13] 2월 20일 ‘킹투허츠’ 공홈 D-23 예고 ‘해품달’ 연장 없다.[14] 3월 6일]《해를 품은 달》 스페셜 방송으로 대체.[15] 3월 7일 김도훈 PD 《해를 품은 달》현장 다시 복귀.[16] 동시간대 드라마[편집] 부탁해요 캡틴 (SBS) 난폭한 로맨스 (KBS 2TV) 각주[편집] ↑ MBC 라이프는 MBC 퀸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1] 해를 품은 달 상(정은궐 장편소설)]. ↑ 이민지 기자 (2012년 1월 5일). “‘해를품은달’ 성조대왕 누구? 역사왜곡 논란 사전차단 노림수”. newsen.  ↑ TNmS 멀티미디어 홈페이지 참조. ↑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 참조. ↑ 김진아 기자 (2011년 12월 6일). “정일우, 주원 하차로 '해를 품은 달' 양명군으로 캐스팅”. 한강타임즈.  ↑ 전선하 기자 (2011년 12월 21일). “한가인 ‘해품달’ 하차설에 화들짝 “전혀 사실무근””. tvreport.  ↑ 강민정 기자 (2012년 1월 25일). “MBC 기자회 제작거부로 뉴스 차질… '해를 품은 달' 확대 편성”. 스포츠한국.  ↑ 이민지 기자 (2012년 1월 26일). “‘해품달’ 80분 확대편성 맞아? ‘런닝타임 오히려 줄었다’”. newsen.  ↑ 안현희 기자 (2012년 1월 26일). “‘해품달’ 확대편성 논란 “이게 80분 방송? 시청자 우롱””.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최재윤 기자 (2012년 2월 2일). “장나라, 김민서 위해 ‘해품달’ 150인분 삼계탕 선물! '의리녀' 등극”. tvdaily.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강민정 기자 (2012년 2월 6일). “한가인 '시청률 40% 회식' 지켰다”. 스포츠 한국. 2012년 2월 9일에 확인함.  ↑ 이지영 기자 (2012년 2월 7일). “'해품달' 김수현, 촬영장에 피자 150인분 선사 '왕다운 배포'”. OSEN. 2012년 2월 9일에 확인함.  ↑ 이민지 기자 (2012년 2월 20일). “‘킹투허츠’ 공홈 D-23 예고 ‘해품달’ 연장 없다”. 뉴스N. 2012년 2월 20일에 확인함.  ↑ 한여울 기자 (2012년 3월 6일). “<해를 품은 달>, 이번 주 스페셜 방송으로 대체”. 10 아시아. 2012년 3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3월 6일에 확인함.  ↑ 유지윤 기자 (2012년 3월 7일). “김도훈 PD ‘해를 품은 달’ 현장 다시 복귀”. 헤럴드 경제. 2012년 3월 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MBC 해를 품은 달 홈페이지 MBC 해를 품은 달 공식 트위터 MBC 해를 품은 달 네이버 공식 블로그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나도, 꽃! (2011년 11월 9일 ~ 2011년 12월 28일) 해를 품은 달 (2012년 1월 4일 ~ 2012년 3월 15일) 더킹 투하츠 (2012년 3월 21일 ~ 2012년 5월 24일)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 (드라마)》 2011년 2012년해를 품은 달 2013년 시크릿 가든 추적자 THE CHASER vdeh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1970년대드라마 수상작 없음 (1974) 수사반장 (1975) 집념 (1976) KBS 무대 - 한국 단편 문학 순례 시리즈 (1977) 부부 (1978) 6.25 (1979) 1980년대드라마 한국인 (1980) TV문학관 - 을화 (1981) TV문학관 - 등신불 (1982) 풍운 (1983) 베스트셀러극장, 불타는 바다 (1984) 전원일기 (1985) 억새풀 (1986) 생인손 (1987) 사랑과 야망 (1988) 사로잡힌 영혼 (1989) 교양 수상작 없음(1980 ~ 1984) 한국의 나비 (1985) 사람과 사람 (1986) 장애인 도심 정복 훈련 - 이제는 파란불이다 (1987) 천적의 세계 (1988) 한국의 자생 약초 (1989) 1990년대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 (1990) 제2공화국 (1991) 여명의 눈동자 (1992) 억새 바람 (1993) 엄마의 바다 (1994) 모래시계 (1995) 연애의 기초 (199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1997) 달팽이 (1998)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1999) 교양† 평화, 멀지만 가야할 길 (1990) 러시아 동구의 문학과 예술 (1991) 백로와 소년 (1992)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 베트남전쟁 그후 17년, 그것이 알고 싶다 (1993) PD수첩, 독도 365일 (1994) 신인간시대 (1995) 한국의 파충류 (1996) 자연다큐멘터리 게 (1997) 일요스페셜 (1998) 21세기 위원회 (1999) 예능† 가요무대 (1990) 일요일 일요일 밤에 (1991) 토요대행진,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1992)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1993) 열린음악회 (1994) 일요일 일요일 밤에 (1995) 샘이 깊은 물 (1996) 테마게임 (1997) 이홍렬쇼 (1998) 21세기 위원회 (1999) 2000년대드라마 국희 (2000) 아줌마 (2001) 피아노 (2002) 네 멋대로 해라 (2003) 꽃보다 아름다워 (2004) 미안하다, 사랑한다 (2005) 토지 (2006) 서울 1945 (2007) 쩐의 전쟁 (2008) 엄마가 뿔났다 (2009) 교양 역사스페셜 (2000) 영상기록 병원 24시 (2001) MBC 스페셜 - 이슬람 (2002)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 (2003) 환경의 역습 (2004) 지금도 마로니에는 (2005) 나는 가요, 도쿄 제2의 여름학교 (2006) 긴급출동 SOS 24 (2007) 차마고도 (2008) 그것이 알고 싶다 (2009) 예능 개그콘서트 (2000) 진실게임, 코미디 하우스 (2001) 일요일 일요일 밤에 (2002) 느낌표 (2003) 코미디하우스 (2004) 안녕, 프란체스카 (2005) 상상플러스 (2006) 미녀들의 수다 (2007) 무한도전 (2008) 개그콘서트 (2009) 2010년대드라마 아이리스 (2010) 시크릿 가든 (2011) 해를 품은 달 (2012) 추적자 THE CHASER (2013) 굿 닥터 (2014) 풍문으로 들었소 (2015) 시그널 (2016) 디어 마이 프렌즈 (2017) 마더 (2018) 나의 아저씨 (2019) 교양 아마존의 눈물 (2010) 학교란 무엇인가 (2011) 다큐프라임 - 문명과 수학 (2012) 한국인의 밥상 (2013) 그것이 알고싶다 (2014) 요리인류키친 (2015) 다큐프라임 - 시험 (2016) 썰전 (2017) 땐뽀걸즈 (2018) 저널리즘 토크쇼 J (2019) 예능 지붕뚫고 하이킥! (2010) 놀러와 - 쎄시봉 콘서트 (2011) 개그콘서트 (2012) 런닝맨, 정글의 법칙, 일밤 - 아빠! 어디가?(2013) 꽃보다 할배 (2014) 비정상회담 (2015)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2016) 미운 우리 새끼 (2017) 효리네 민박 (2018) 전지적 참견 시점 (2019) †교양과 예능 부문의 작품상은 1999년부터 정식으로 시상함. 대상 | 작품상 | 남자최우수연기 | 여자최우수연기 | 남자조연 | 여자조연 | 남자예능 | 여자예능 | 남자신인연기 | 여자신인연기 vdeh 수목 미니시리즈1980년대 전반 《겨울 해바라기》 《물보라》 1980년대 후반 《엄마의 방》 《억새풀》 《첫사랑》 《겨울꽃》 《도시의 얼굴》 《인현왕후》 《한중록》 《파문》 《당신의 축배》 1990년대 전반 《사랑의 종말》 《그 여자》 《까치 며느리》 《여명의 눈동자》 《일출봉》 《여자의 방》 《폭풍의 계절》 《야망》 《아들의 여자》 1990년대 후반1995년 《숙희》 《제4공화국》 1996년 《이혼하지 않는 이유》 《사과꽃 향기》 《강가에 앉아서 울다》 《미망》 1997년 《내가 사는 이유》 《영웅신화》 1998년 《육남매》 《대왕의 길》 《적과의 동거》 《수줍은 연인》 《해바라기》 1999년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눈물이 보일까봐》 《안녕 내 사랑》 《햇빛속으로》 2000년대 전반2000년 《진실》 《나쁜 친구들》 《이브의 모든 것》 《신 귀공자》 《비밀》 《에어포스》(단막) 《황금시대》 2001년 《맛있는 청혼》 《호텔리어》 《네 자매 이야기》 《반달곰 내 사랑》 《가을에 만난 남자》 《소풍》(단막) 2002년 《그 햇살이 나에게》 《선물》 《난 왜 아빠랑 성이 달라?》(단막) 《로망스》 《네 멋대로 해라》 《링링》(단막) 《리멤버》 《삼총사》 2003년 《눈사람》 《위풍당당 그녀》 《남자의 향기》 《앞집 여자》 《좋은사람》 《나는 달린다》 《사막의 샘》(단막) 《아르곤》(단막) 2004년 《천생연분》 《사랑한다 말해줘》 《결혼하고 싶은 여자》 《황태자의 첫사랑》 《아일랜드》 《12월의 열대야》 2000년대 후반2005년 《슬픈 연가》 《신입사원》 《내 이름은 김삼순》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가을 소나기》 《영재의 전성시대》 2006년 《궁》 《닥터 깽》 《어느 멋진 날》 《오버 더 레인보우》 《여우야 뭐하니》 《90일, 사랑할 시간》 2007년 《궁S》 《고맙습니다》 《메리대구 공방전》 《그라운드 제로》(단막) 《개와 늑대의 시간》 《태왕사신기》 《뉴하트》 2008년 《누구세요?》 《우리들의 해피엔딩》(단막) 《스포트라이트》 《대한민국 변호사》 《베토벤 바이러스》 《종합병원 2》 2009년 《돌아온 일지매》 《신데렐라 맨》 《트리플》 《혼》 《맨땅에 헤딩》 《히어로》 2010년대 전반2010년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개인의 취향》 《나는 별 일 없이 산다》(단막) 《런닝, 구》(단막) 《로드 넘버원》 《장난스런 키스》 《즐거운 나의 집》 2011년 《마이 프린세스》 《로열 패밀리》 《최고의 사랑》 《넌 내게 반했어》 《지고는 못살아》 《나도, 꽃!》 2012년 《해를 품은 달》 《더킹 투하츠》 《아이두 아이두》 《아랑사또전》 《못난이 송편》(단막) 《보고싶다》 2013년 《7급 공무원》 《남자가 사랑할 때》 《여왕의 교실》 《투윅스》 《메디컬 탑팀》 《미스코리아》 2014년 《앙큼한 돌싱녀》 《개과천선》 《운명처럼 널 사랑해》 《내 생애 봄날》 《미스터 백》 2010년대 후반2015년 《킬미힐미》 《앵그리맘》 《맨도롱 또똣》 《밤을 걷는 선비》 《그녀는 예뻤다》 《달콤살벌 패밀리》 2016년 《한 번 더 해피엔딩》 《굿바이 미스터 블랙》 《운빨로맨스》 《W》 《쇼핑왕 루이》 《역도요정 김복주》 2017년 《미씽9》 《자체발광 오피스》 《군주 - 가면의 주인》 《죽어야 사는 남자》 《병원선》 《로봇이 아니야》 2018년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 《이리와 안아줘》 《시간》 《내 뒤에 테리우스》 《붉은 달 푸른 해》 2019년 《봄이 오나 봄》 《더 뱅커》 《봄밤》 《신입사관 구해령》 《어쩌다 발견한 하루》 아침 | 일일 (일일  · 특별기획) | 월화 | 수목 | 금 | 예능 | 주말 (특별기획  · 연속극) | 시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해를_품은_달_(드라마)&oldid=24485735" 분류: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2012년 드라마201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대한민국의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대한민국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왕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팬 엔터테인먼트 텔레비전 프로그램진수완 시나리오 작품정은궐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МонголBahasa MelayuPortuguêsසිංහලதமிழ்ไทยTagalogTiếng Việt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6일 (수) 12: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해를 품은 달 (드라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해를 품은 달 (드라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해를 품은 달 장르 드라마 [로맨틱]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MBC 방송 기간 2012년 1월 4일 ~ 2012년 3월 15일 방송 시간 수, 목 밤 9시 55분 ~ 밤 11시 15분 방송 분량 1시간 10분 방송 횟수 20부작 + 스페셜 4부작 추가 채널 MBC 드라마넷, MBC 에브리원, MBC 라이프[1], 올'리브, 스토리온, 스카이 드라마, QTV, 드라마큐브(케이블방송) 원작 정은궐 - 해를 품은 달 기획 오경훈 프로듀서 이경식 제작자 팬엔터테인먼트문정수 연출 김도훈, 이성준 조연출 박지현, 현솔잎 극본 진수완 출연자 한가인, 김수현, 정일우, 김민서, 송재희, 송재림, 윤승아, 남보라, 김영애, 전미선 외 닫는 곡 OST Part 1 (달빛이 지고 - 해오라) OST Part 2 (시간을 거슬러 - 린) OST Part 5 (아니기를 - 이기찬) 음성 2채널 스테레오 사운드(아날로그)2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외부 링크  해를 품은 달 홈페이지 《해를 품은 달》은 소설가 정은궐이 집필한 동명의 장편 소설[2] 을 원작으로 한 MBC의 수목 미니시리즈이다. 이 드라마를 마지막으로 주중 드라마에서 시청률이 40%를 돌파한 작품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MBC의 역대 수목드라마 중 독보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목차 1 등장 인물 1.1 주요 인물 1.2 허영재 (연우, 염의 부친) 일가 1.3 훤 일가 1.4 윤대형 (윤보경의 부친) 일가 1.5 성수청 사람들 1.6 궁궐 사람들 2 시청률 3 OST 3.1 Part.1 3.2 Part.2 3.3 Part.3 3.4 Part.4 3.5 Part.5 3.6 Part.6 3.7 정규앨범 4 수상 5 일화 6 동시간대 드라마 7 각주 8 외부 링크 등장 인물[편집] 주요 인물[편집] 한가인 : 해를 머금은 달 - 허연우(煙雨), 월(月) 役 (아역 김유정) 홍문관 대제학 허영재의 딸, 염의 누이동생, 훤의 첫사랑 과거 : 세자빈 - 현재 : 왕의 액받이 무녀(왕에게 일어날 흉한 일[액 : 厄]을 대신 받는 무녀) 연우(煙雨),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안개비 또는 보슬비라는 뜻. 하지만 그녀의 성격은 오히려 뜨거운 태양 아래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청량하고 신선하고 쾌활하다. 홍문관 대제학의 여식(딸)답게 영리하고 똘똘하기까지 하다. 우연히 입궐, 그 곳에서 훤과 마주친다. 그리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설렘은 마침내 첫사랑이 되었다. 이제 훤의 반쪽이 되어 세자빈으로서 행복한 날들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들어 국혼을 얼마 안 남겨두고 사가(私家)로 돌려 보내진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내 이름은 액받이 무녀, 월(月) 그녀는 8년 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데... 후에 모든 것이 해결되고 중전 윤씨가 자결을 하자, 훤의 정비가 된다. 김수현 : 달을 그리는 해 - 이훤(暄) 역 (아역 여진구) 조선의 왕, 중전 한씨의 소생, 민화공주의 오라버니, 연우의 첫사랑 과거 : 세자 - 현재 : 왕 나는 이나라의 왕세자다.(세자시절) 다소 히스테리컬한 청년국왕이다. 잘생겼다. 영리하다.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 죽여준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위협' 인 양명 앞에서 언제나 티없이 맑게 웃는다. 염을 통해 학문의 즐거움과 군왕의 도리를 배웠다면, 연우를 통해서는 자신이 다스려야 할 궐 너머의 세상과 첫사랑의 설렘을 배웠다. 연우가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첫사랑은 결실을 맺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갑작스럽게 죽고, 외척가문의 보경이 대신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 훤은 더 이상 철없는 왕세자가 아니었다. 과인은 조선의 왕이다.(현재) 차갑다. 시니컬하다. 별로 웃지 않는다. 후궁은커녕 중전도 품지 않는다. 내의원의 권고로 우연히 피병(병을 피하여 거처를 옮김)을 갔다가 음산한 무녀의 집에서 비를 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정일우 : 해에 가려진 슬픈 빛 - 양명군(陽明) 역 (아역 김진성, 이태리) 전왕의 서장자, 희빈 박씨의 소생,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의 왕자 유유자적, 풍류남아. 겉으로는 허허실실, 내면은 오리무중의 자유로운 영혼. 아니, 이 자유를 얻기 위해 그가 얼마나 용을 쓰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왕위 계승 서열 1순위. 그 허울 좋은 명분 때문에 양명의 저택에는 늘 권력에 뒷줄을 대려는 도포자락들로 넘쳐난다. 어린 시절 훤의 그늘에 가려 부왕으로 부터 많은 냉대를 받았으나, 홍문관 대제학의 사가에 드나들며 치유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우를 만나 애타는 그리움과 연모를 배웠지만, 그녀의 세자빈 간택과 연이은 죽음에 그 또한 절망에 빠졌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러나 운명은 그를 또다시 훤과 맞부딪치게 만드는데... 김민서 : 달을 꿈꾸는 거울 - 윤보경(寶鏡) 역 (아역 김소현) 중전, 훤의 정비(正妃), 윤대형의 딸 착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다소곳하고 얌전한 여인. 어질고 온화한 성품으로 궁인들 사이에 떠도는 여론 또한 모두 중전의 편이다. 그러나 그녀는 용종 잉태를 외면하는 훤을 단 한번도 원망하지 않는다. 괜찮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을 뿐. 자, 여기까지가 대외적인 그녀의 모습이다. 어른들의 사랑, 아랫사람들의 흠앙(공경하여 우러러 사모함), 왕친들의 동정, 조정의 여론형성...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어린 시절 평범한 아이였던 보경을 지금의 야심가로 키워낸 건 아버지 윤대형이었다. 세자빈이 되어 훤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연우의 부고로 현실이 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보경의 편이었다. 아니 그런줄로만 알았다. 월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밝혀지고 아버지 윤대형이 반란을 일으키자 괴로워하던 보경은 조용히 목을 맨다. 송재희 : 날개 꺾인 불꽃 - 허염(炎) 역 (아역 임시완) 민화공주의 남편이 되어 의빈(왕의 사위)봉작을 받았다. 유록대부 양천위, 연우의 오라버니, 훤의 스승이며 매제 초(超)절정 미모의 소유자로 성균관 시절 모든 유생들의 우상이었다. 게다가 수재다.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초(超)천재.(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물론 단점도 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없으며 남녀의 감정에 둔한 천하에 없는 유생 그 자체. 그 최대 피해자가 바로 민화공주다. 열일곱에 장원 급제하고 그 해 세자시강원의 문학에 재수되어 겨우 두살 아래인 왕세자 훤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훤과 사제의 정을, 군신의 정을, 그리고 동년배의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연우의 죽음 이후 비극이 시작점이 되어버린 그 시절... 지금도 염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훤과 연우를 연결해준 자신을 책망하고 후회한다. 송재림 : 비를 품은 구름 - 운(雲) 역 (아역 이원근) 본명 김제운, 23세의 젊은 무사, 조선 최고의 운검으로 훤의 최 측근에서 호위 뭘 해도 그림이 된다. 날카로운 눈매에 서늘한 콧날. 육척이 넘는 훤칠한 키와 긴 팔다리로 언제나 훤 뒤에 그림자처럼 묵묵히 서 있다. 한마디로 미친 존재감. 게다가 조선 팔도 최고의 무예실력과 뛰어난 지적수양으로 완벽한 스펙을 갖췄다. 양명군, 허염과 삼총사이다. 서자출신이라 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염을 존대한다. 그리고.. 운을 남자로 만들어준 한 명의 여인. 연우.. 아니, 무녀 월(月)... 그는 주군에 대한 충심(忠心), 사내의 연심(戀心) 사이에서 갈등한다. 허영재 (연우, 염의 부친) 일가[편집] 선우재덕 : 허영재 역 (특별출연) 연우와 염의 부친, 홍문관 대제학. 청렴 결백한 성정과 높은 학문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충직한 성품 덕에 선대왕의 총애를 받지만 바로 그 올곧은 성정 때문에 윤대형을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들인 염과 양명을 운에게 소개해주어 친구의 정을 알게 해주었다. 연우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마음의 병을 얻는다. 양미경 : 정경부인 신씨 역 연우와 염의 모친, 민화공주의 시어머니. ‘대제학 집의 곳간은 도성 사람 모두의 것이요, 그 집 마나님은 여자 일지매다’ 라는 소문이 무성한 따뜻한 성정의 소유자. 그러나 하나 뿐인 딸과 남편의 연이은 죽음으로 시든 꽃처럼 활기를 잃어버렸다. 그런 그녀에게 다시 웃음을 찾아준 것이 바로 민화공주다. 윤승아 : 불꽃을 품은 눈 - 설(雪) 역 (아역 서지희) 과거 허씨 가문의 노비. 본명은 이 년. 현재 이름은 설(雪). 연우를 호위하는 보이시한 느낌의 소녀 검객. 우연한 계기로 도무녀 장씨와 얽히게 되면서 연우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설’ 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 도련님 ‘허염’을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다. 후에 궐내에서 마주친 운과 짝사랑의 아픔에 대한 찐한 동지애를 나눈다. 훤 일가[편집] 김영애 : 대왕대비 윤씨 역 외척세력의 대지주, 성조대왕의 어머니이자 훤의 할머니. 윤대형의 친척이자 정치적 연대관계. 3년 간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현재는 영리한 훤에 의해 결국 철정을 선언, 뒷방으로 물러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친정 가문의 건세를 도모하기 위한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세자빈 죽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안내상 : 성조대왕[3] 역 (특별출연) 훤, 양명, 민화의 아버지. 문무를 겸비한 왕. 과거 아끼던 이복동생 의성군이 역모에 연루돼 윤대형에게 참살된 일을 묵인한 아픈 기억이 있다. 하여 서자인 양명을 마음으로는 아끼나 겉으로는 유독 싸늘하게 대한다. 세자인 훤이 강력한 군주가 되어 바른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지지한다. 김선경 : 대비 한씨 역 훤의 어머니. 온화하고 지고 지순한 조선시대 여인의 전형. 세도가 출신이 아니며 정치색이 없어 윤대형의 견제를 덜 받는다. 내심 연우를 세자빈으로 점 찍어두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훗날 훤의 건강 악화가 죽은 연우의 원혼 때문이라 여겨 위령제를 제안한다. 김명수 : 의성군 역 (특별출연) 성조대왕의 이복동생. 간언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모두 외척을 겨냥한다는 이유로 윤대형에 의해 살해당한다. 남보라 : 불꽃이 되지 못한 꽃 - 민화공주(旼花) 역 (아역 진지희) 훤과 양명의 동생, 염의 최강동안 어린 신부. 귀엽고 천진난만한 한마디로 타고난 공주로, 어렸을 적부터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은 민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런 민화가 처음으로 욕심을 낸 사람이 바로 첫 눈에 반한 염이었다. 연우의 죽음 이후 기적처럼 염과의 혼인에 성공하나, 가끔씩 자신이 염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만 같아 문득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윤대형 (윤보경의 부친) 일가[편집] 김응수 : 윤대형 역 훤의 국구, 보경의 부친, 외척세력의 수장이자 노회한 정치 9단. 국모가 된 딸과 대왕대비 윤씨를 뒷배로, 마침내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그는 아직도 목이 마르다. 권력에의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 냉정하고 탐욕적인 인물. 사위인 훤과 끊임없이 대립하며 결국 그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드는데…. 장희수 : 김씨부인 역 윤대형의 처, 보경의 모친 김승욱 : 윤수찬 역 호조 참판에서 추후 판서, 대비 윤씨와 일문으로 윤대형의 육촌 동생뻘, 든든한 가문 덕에 음서로 조정에 출사한 인물로, 학문의 깊이가 얇고 가방 끈이 짧다는 데에 약간의 열등감이 있다. 훗날 인사권을 장악하고 뇌물과 비리의 온상이 된다. 성수청 사람들[편집] 전미선 : 해와 달을 섬기는 무녀(巫女) - 도무녀 장씨(녹영) 역 성수청 국무(國巫), 조선팔도 최고의 신력을 가진 무당. 세자빈 시해 사건에 대한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으뜸 주술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알만한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요구로 존폐위기에 놓인 성수청을 구하고자, 대비 윤씨의 사주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데… 김익태 : 혜각도사 역 소격서의 도사. 우연한 기회에 대비 윤씨와 도무녀 장씨가 결탁하는 장면을 목격하여 본의 아니게 ‘세자빈 시해사건’ 에 연루된다. 처음에 도무녀 장씨를 오해하나 이내 그녀의 계획을 눈치 채고 목숨을 건 공범자(?)가 되어준다. 배누리 : 잔실 역 (아역 조민아) 무노비(巫奴婢), 도무녀 장씨의 신딸. 약간의 신력이 있으나 워낙 겁이 많아 오히려 자신의 신기에 휘둘리는 스타일. 평소에 어리바리 하지만 문득 그녀가 어딘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으면 긴장해야 한다. 장영남 : 아리 역 (특별출연) 과거 녹영과 절친한 우정을 나눈 뛰어난 신력(神力)의 소유자이다. 윤대형이 의성군을 살해하는 현장을 보게 되면서 쫓기게 된다. 홍경연 : 국무 역 (특별출연) 궁궐 사람들[편집] 정은표 : 형선 역 대전 상선 내관. 세자 시절부터 훤을 보필해오던 인물. 영화 ‘시네마천국’ 에 알프레도와 토토처럼 그렇게 우정을 쌓아왔다. 훤의 첫사랑과 성장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로, 연우의 죽음 이후 냉랭하게 변모한 훤의 모습에 안타까워한다. 윤희석 : 홍규태 역 의금부 도사. 행동도 말투도 외모도 하여튼 여러 면에서 튄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이단아! 의금부 내의 비리를 발고하는 상소를 올려 왕따를 당한다. 후에 훤의 눈에 들어 특별한(?)밀지를 받는다. 변복을 하고 칡뿌리를 씹고 다니며 탐문수사를 벌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조선의 셜록홈즈를 연상시킨다. 김예령 : 희빈 박씨 역 양명군의 어머니. 선대왕의 후궁. 대비 한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야심이 없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늘 역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양명이 안쓰럽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실없는 사람처럼 위장하고 사는 아들의 모습이 가슴 아프다. 이승형 : 한재길 역 한성부 판윤에서 후에 병조 판서. 윤대형, 심산과는 동방으로 윤대형파 인물 중 가장 점잖은 인물. 겉으로는 유학자인척, 군자인척, 고상한 척 하지만, 결국 뼛속까지 속물에 처세술에 능한 야심가일 뿐이다. 서현철 : 심산 역 이조 참의에서 추후 도승지, 윤대형 파의 2인자이자 브레인이다. 윤대형의 오른팔로서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해왔다. 윤대형과는 가장 말이 통하는 인물로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 추귀정 : 조상궁 역 보경이 세자빈으로 입궐할 때 친정에서 데리고 온 본방내인. 입이 무겁고 머리 회전이 빨라 보경의 수족이 되어 움직인다. 보경이 유일하게 자신의 속내를 말하는 인물. 김민경 : 민상궁 역 북촌 염의 사가에서 민화 공주를 모시는 상궁. 매사 철없고 고집불통인 공주 자가를 모시느라 알게 모르게 고생이 많은 인물. 밤마다 어여삐 치장하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민화 공주 덕에 화장술과 미용술이 일취월장한다. 이정훈 : 오혜성 역 관상감의 천문학 교수, 천문 관측이나 측후, 역서(달력) 제작을 담당하는 천문학 분야의 일인자 박길수 : 문지방 역 관상감의 지리학 교수, 풍수학을 토대로 왕궁, 왕릉 등의 명당 터를 잡는 일을 하는 지리학 분야의 일인자 김명국 : 나대길 역 관상감의 명과학 교수, 왕실의 합궁일이나 길일 택일, 길흉화복의 점복을 담당하는 명과학 분야의 일인자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2년 회차 방송일 부제 TNmS 시청률[4] AGB 시청률[5]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제1회 1월 4일 두 개의 태양과 하나의 달 15.0% 16.9% 18.0% 19.7% 제2회 1월 5일 두 개의 달과 하나의 태양 17.3% 20.8% 19.9% 22.2% 제3회 1월 11일 꽃잎처럼, 불꽃처럼 19.4% 22.3% 23.2% 26.1% 제4회 1월 12일 하나의 태양, 하나의 달 20.6% 25.1% 23.4% 26.0% 제5회 1월 18일 달이 지다 22.9% 24.9% 24.9% 28.3% 제6회 1월 19일 숨은 달 25.9% 28.6% 29.3% 32.9% 제7회 1월 25일 무녀 월(月) 25.5% 28.8% 29.7% 33.8% 제8회 1월 26일 액받이 무녀 26.2% 29.4% 31.7% 35.3% 제9회 2월 1일 태양 옆에 숨은 달 28.4% 32.3% 34.5% 38.9% 제10회 2월 2일 사자전서(死者傳書) 30.5% 35.1% 37.1% 40.5% 제11회 2월 8일 밀애(密愛) 34.3% 38.6% 37.1% 41.7% 제12회 2월 9일 눈물길 33.7% 37.8% 37.1% 40.8% 제13회 2월 15일 마녀사냥 34.6% 39.3% 38.4% 42.9% 제14회 2월 16일 나는 왜 죽었는가 37.2% 42.0% 37.6% 42.1% 제15회 2월 22일 다시 두 개의 태양, 두 개의 달 37.7% 42.6% 39.1% 43.1% 제16회 2월 23일 달의 정체 39.8% 45.5% 41.3% 46.1% 제17회 2월 29일 달을 품은 해 33.3% 36.1% 36.0% 39.7% 제18회 3월 1일 핏빛 전조(前兆) 40.7% 47.0% 41.2% 45.8% 제19회 3월 14일 반역(反逆) 38.9% 42.9% 38.7% 41.8% 제20회 3월 15일 해를 품은 달 42.3% 46.5% 42.2% 45.8% 평균 시청률 30.2% 34.1% 33.0% 36.7% 스페셜 제1회 3월 7일 명장면 릴레이 24.7% 26.0% 24.5% 26.9% 제2회 3월 8일 명장면&명대사 19.8% 21.7% 19.2% 20.9% 제3회 3월 10일 명장면&명대사 정리본~★ 5.1% 5.8% 5.4% 6.1% 제4회 명장면&명대사 정리본~★ 5.5% 5.9% 6.0% 6.8% OST[편집] 해를 품은 달 OST Part.1 해오라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1월 11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2 린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1월 17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3 휘성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1월 26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4 먼데이 키즈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2월 9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5 이기찬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2월 23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Part.6 김수현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3월 13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해를 품은 달 OST Various Artists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2년 2월 15일장르 드라마레이블 한국음원제작자협회 Part.1[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달빛이 지고 (해오라)반형문, 한상원반형문, 한상원 03:40 2. 달빛이 지고 (inst.) (해오라) 반형문, 한상원 03:39 Part.2[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시간을 거슬러 (린)김박사김박사, Meng이 03:31 2. 시간을 거슬러 (inst.) (린) 김박사, Meng이 03:31 Part.3[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눈물길 (휘성)휘성문하, 휘성 03:50 2. 눈물길 (inst.) (휘성) 문하, 휘성 03:50 Part.4[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그림자 (먼데이 키즈)반형문, 한상원반형문, 한상원 03:56 2. 그림자 (inst.) (먼데이 키즈) 반형문, 한상원 03:56 Part.5[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아니기를 (이기찬)민연재KingMing, The Name 03:47 Part.6[편집] # 제목작사작곡 재생 시간 1. 그대 한 사람 (김수현)김창락김창락 03:53 2. 그대 한 사람 (inst.) (김수현) 김창락 03:53 정규앨범[편집] # 제목 재생 시간 1. 시간을 거슬러 (린) 03:31 2. 달빛이 지고 (해오라) 03:39 3. 눈물길 (휘성) 03:50 4. 그림자 (먼데이 키즈) 03:56 5. 해를 품은 달   02:05 6. 숨은 달   03:01 7. 꽃잎처럼, 불꽃처럼   04:05 8. 애지애가(愛之哀歌)   02:38 9. 궐   02:28 10. 장명루   02:46 11. 저자거리   01:55 12. 위령제   03:01 13. 두개의 태양과 하나의 달   02:10 14. 은월각   02:20 15. 연우 내리다   03:24 16. 태양의 눈물   02:26 17. 궁의 아침   02:51 18. 달빛의 노래   01:43 19. 흑주술   01:45 20. 나비의 춤   02:14 수상[편집] 2012년 제25회 한국촬영감독협회 그리메상 드라마 부문 최우수작품상 2012년 MBC 연기대상 남자 최우수상, 남자 인기상 - 김수현 2012년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 - 한가인 2012년 MBC 연기대상 여자 아역상 - 김유정 2012년 MBC 연기대상 남자 아역상 - 여진구 2012년 MBC 연기대상 여자 아역상 - 김소현 2012년 MBC 연기대상 여자 황금연기상 - 양미경 2012년 MBC 연기대상 올해의 작가상 - 진수완 2012년 MBC 연기대상 올해의 드라마상 2012년 제4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 김수현 2012년 제4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 일화[편집] 주원 양명군 역에 캐스팅 되었으나, 드라마 《오작교 형제들》의 연장방송으로 하차. 주원 대신 정일우 교체.[6] 한가인이 12월 21일 소속사를 통해 갑작스럽게 불거진 하차설과 관련해 입장을 밝힘, 이날 한가인 측에선 하차설에 대해 하차할 의사가 절대 없다는 식의 글을 게재하며 하차설을 일축했다.[7] 기자회의 취재, 제작거부로 MBC 뉴스 프로그램 제작에 차질이 빚어진 가운데 1월 25일에는 9시 50분 방송, 80분으로 확대 편성되었다.[8] MBC가 1월 25일 방송분을 80분으로 확대편성 한다고 밝혔으나 실제 런닝타임은 63분[9], 전 보다 더 짧은 분량으로 논란이 되었다.[10] KBS 드라마《동안미녀》에서 김민서와 친분을 쌓았던 가수 겸 배우 장나라가 《해를 품은달》제작진에게 150인분의 삼계탕을 보냈다.[11] 수도권 시청률 40% 돌파 기념으로 한가인은 해를 품은 달 제작진에게 갈비 150인분을 대접했다.[12] 2월 2일 김수현은 제작진에게 피자 150인분을 대접했다.[13] 2월 20일 ‘킹투허츠’ 공홈 D-23 예고 ‘해품달’ 연장 없다.[14] 3월 6일]《해를 품은 달》 스페셜 방송으로 대체.[15] 3월 7일 김도훈 PD 《해를 품은 달》현장 다시 복귀.[16] 동시간대 드라마[편집] 부탁해요 캡틴 (SBS) 난폭한 로맨스 (KBS 2TV) 각주[편집] ↑ MBC 라이프는 MBC 퀸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1] 해를 품은 달 상(정은궐 장편소설)]. ↑ 이민지 기자 (2012년 1월 5일). “‘해를품은달’ 성조대왕 누구? 역사왜곡 논란 사전차단 노림수”. newsen.  ↑ TNmS 멀티미디어 홈페이지 참조. ↑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 참조. ↑ 김진아 기자 (2011년 12월 6일). “정일우, 주원 하차로 '해를 품은 달' 양명군으로 캐스팅”. 한강타임즈.  ↑ 전선하 기자 (2011년 12월 21일). “한가인 ‘해품달’ 하차설에 화들짝 “전혀 사실무근””. tvreport.  ↑ 강민정 기자 (2012년 1월 25일). “MBC 기자회 제작거부로 뉴스 차질… '해를 품은 달' 확대 편성”. 스포츠한국.  ↑ 이민지 기자 (2012년 1월 26일). “‘해품달’ 80분 확대편성 맞아? ‘런닝타임 오히려 줄었다’”. newsen.  ↑ 안현희 기자 (2012년 1월 26일). “‘해품달’ 확대편성 논란 “이게 80분 방송? 시청자 우롱””.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최재윤 기자 (2012년 2월 2일). “장나라, 김민서 위해 ‘해품달’ 150인분 삼계탕 선물! '의리녀' 등극”. tvdaily.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강민정 기자 (2012년 2월 6일). “한가인 '시청률 40% 회식' 지켰다”. 스포츠 한국. 2012년 2월 9일에 확인함.  ↑ 이지영 기자 (2012년 2월 7일). “'해품달' 김수현, 촬영장에 피자 150인분 선사 '왕다운 배포'”. OSEN. 2012년 2월 9일에 확인함.  ↑ 이민지 기자 (2012년 2월 20일). “‘킹투허츠’ 공홈 D-23 예고 ‘해품달’ 연장 없다”. 뉴스N. 2012년 2월 20일에 확인함.  ↑ 한여울 기자 (2012년 3월 6일). “<해를 품은 달>, 이번 주 스페셜 방송으로 대체”. 10 아시아. 2012년 3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3월 6일에 확인함.  ↑ 유지윤 기자 (2012년 3월 7일). “김도훈 PD ‘해를 품은 달’ 현장 다시 복귀”. 헤럴드 경제. 2012년 3월 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MBC 해를 품은 달 홈페이지 MBC 해를 품은 달 공식 트위터 MBC 해를 품은 달 네이버 공식 블로그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나도, 꽃! (2011년 11월 9일 ~ 2011년 12월 28일) 해를 품은 달 (2012년 1월 4일 ~ 2012년 3월 15일) 더킹 투하츠 (2012년 3월 21일 ~ 2012년 5월 24일)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 (드라마)》 2011년 2012년해를 품은 달 2013년 시크릿 가든 추적자 THE CHASER vdeh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1970년대드라마 수상작 없음 (1974) 수사반장 (1975) 집념 (1976) KBS 무대 - 한국 단편 문학 순례 시리즈 (1977) 부부 (1978) 6.25 (1979) 1980년대드라마 한국인 (1980) TV문학관 - 을화 (1981) TV문학관 - 등신불 (1982) 풍운 (1983) 베스트셀러극장, 불타는 바다 (1984) 전원일기 (1985) 억새풀 (1986) 생인손 (1987) 사랑과 야망 (1988) 사로잡힌 영혼 (1989) 교양 수상작 없음(1980 ~ 1984) 한국의 나비 (1985) 사람과 사람 (1986) 장애인 도심 정복 훈련 - 이제는 파란불이다 (1987) 천적의 세계 (1988) 한국의 자생 약초 (1989) 1990년대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 (1990) 제2공화국 (1991) 여명의 눈동자 (1992) 억새 바람 (1993) 엄마의 바다 (1994) 모래시계 (1995) 연애의 기초 (199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1997) 달팽이 (1998)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1999) 교양† 평화, 멀지만 가야할 길 (1990) 러시아 동구의 문학과 예술 (1991) 백로와 소년 (1992)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 베트남전쟁 그후 17년, 그것이 알고 싶다 (1993) PD수첩, 독도 365일 (1994) 신인간시대 (1995) 한국의 파충류 (1996) 자연다큐멘터리 게 (1997) 일요스페셜 (1998) 21세기 위원회 (1999) 예능† 가요무대 (1990) 일요일 일요일 밤에 (1991) 토요대행진,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1992)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1993) 열린음악회 (1994) 일요일 일요일 밤에 (1995) 샘이 깊은 물 (1996) 테마게임 (1997) 이홍렬쇼 (1998) 21세기 위원회 (1999) 2000년대드라마 국희 (2000) 아줌마 (2001) 피아노 (2002) 네 멋대로 해라 (2003) 꽃보다 아름다워 (2004) 미안하다, 사랑한다 (2005) 토지 (2006) 서울 1945 (2007) 쩐의 전쟁 (2008) 엄마가 뿔났다 (2009) 교양 역사스페셜 (2000) 영상기록 병원 24시 (2001) MBC 스페셜 - 이슬람 (2002)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 (2003) 환경의 역습 (2004) 지금도 마로니에는 (2005) 나는 가요, 도쿄 제2의 여름학교 (2006) 긴급출동 SOS 24 (2007) 차마고도 (2008) 그것이 알고 싶다 (2009) 예능 개그콘서트 (2000) 진실게임, 코미디 하우스 (2001) 일요일 일요일 밤에 (2002) 느낌표 (2003) 코미디하우스 (2004) 안녕, 프란체스카 (2005) 상상플러스 (2006) 미녀들의 수다 (2007) 무한도전 (2008) 개그콘서트 (2009) 2010년대드라마 아이리스 (2010) 시크릿 가든 (2011) 해를 품은 달 (2012) 추적자 THE CHASER (2013) 굿 닥터 (2014) 풍문으로 들었소 (2015) 시그널 (2016) 디어 마이 프렌즈 (2017) 마더 (2018) 나의 아저씨 (2019) 교양 아마존의 눈물 (2010) 학교란 무엇인가 (2011) 다큐프라임 - 문명과 수학 (2012) 한국인의 밥상 (2013) 그것이 알고싶다 (2014) 요리인류키친 (2015) 다큐프라임 - 시험 (2016) 썰전 (2017) 땐뽀걸즈 (2018) 저널리즘 토크쇼 J (2019) 예능 지붕뚫고 하이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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