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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픽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픽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픽스 확장자 .spx 개발 Xiph.Org 재단, Jean-Marc Valin 파일 포맷 종류 오디오 포맷 표준 RFC 5574 웹사이트 www.speex.org libspeex 개발자 Xiph.Org 재단, Jean-Marc Valin[1] 발표일 1.0 / 2003년 3월 최근 버전 1.1.12[2] / 2006년 2월 19일 (13년 전)(2006-02-19) 미리보기 버전 1.2rc1 / 2008년 7월 23일 (10년 전)(2008-07-23) 운영 체제 크로스 플랫폼 종류 오디오 코덱, 참조 구현 라이선스 BSD 스타일 라이선스[3][4] 웹사이트 Xiph.org 다운로드 스픽스(Speex)는 음성을 위해 개발된 무특허 오디오 압축 포맷이며 VoIP 소프트웨어 및 팟캐스트에 사용되는 프리웨어 음성 코덱이다.[5]CELP 음성 코딩 알고리즘에 기초하고 있다.[6] 스픽스는 모든 특허 제한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개정된 (3절) BSD 라이선스 하에 허가를 받았다. Ogg 컨테이너 포맷과 함께 사용되거나 UDP/RTP를 통해 전송되기도 한다. 스픽스 개발자들은 이 프로젝트를 Vorbis 범용 오디오 압축 프로젝트와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본다. 스픽스는 파일 크기를 줄이기위해 영구적으로 품질을 떨어뜨리는 손실 압축 포맷이다. 스픽스 프로젝트는 2002년 2월 13일에 시작되었다.[7] 스픽스의 첫 개발 버전은 LGPL 라이선스 하에 공개되었으나, 1.0 베타 버전과 마찬가지로 스픽스는 Xiph 재단의 개정 BSD 라이선스 하에 공개되었다.[8] 스픽스 1.0은 2003년 3월 24일에 공지되었다. 스픽스의 최종 버전 인코더와 디코더는 1.1.12이다.[2] Xiph.Org 재단은 스픽스를 이전 버전으로 보고 있으며, 오푸스가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목차 1 설명 1.1 기능 2 같이 보기 3 참조 4 외부 링크 설명[편집] 스픽스는 VoIP와 파일 기반 압축에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개발 목표는 높은 품질의 음성과 낮은 비트레이트에 최적화된 코덱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픽스는 다중 비트레이트를 사용하며, 초광대역(32 kHz 샘플링 레이트), 광대역(16 kHz 샘플링 레이트), 협대역(전화 품질, 8 kHz 샘플링 레이트)을 지원한다. 스픽스는 휴대폰용이 아닌 VoIP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스픽스는 손실된 패킷에 강해야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CELP가 스픽스를 위해 사용할 인코딩 기술로 채택되었다.[6]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CELP가 낮은 비트레이트와 높은 비트레이트에서 작업을 잘 수행하고 크기를 잘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오랫동안 증명됐다는 것이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프리웨어/오픈 소스, 무특허, 무로열티 동일한 비트스트림에서 협대역과 광대역의 통합 광범위한 사용가능 비트레이트(2 kbit/s에서 44kbit/s) 동적 비트레이트 전환과 가변 비트레이트(VBR) 음성 활동 감지(Voice Activity Detection, VBR과 통합)(1.2 버전에서는 지원하지 않음) 가변 복잡성 32 kHz에서 초광대역 모드(48 kHz까지) 인텐시티 스테레오 인코딩 옵션 기능[편집] 샘플링 레이트 스픽스는 주로 3 가지 샘플링 레이트로 개발되었다. 8 kHz(전화용 샘플링 레이트와 같다), 16 kHz, 32 kHz. 이것들은 각각 협대역, 광대역, 초광대역을 가리킨다. 품질 스픽스 인코딩은 0부터 10까지 범위의 품질 매개변수에 대부분의 시간을 통제받는다. 고정 비트레이트(CBR) 작동에서는 품질 매개변수가 정수이며, 가변 비트레이트(VBR) 작동에서는 품질 매개변수가 실수(부동 소수점)이다. 복잡도(가변) 스픽스로, 인코더에 허용된 복잡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gzip 압축의 -1에서 -9까지의 옵션과 비슷하게 1에서 10까지의 범위의 정수로 수행되는 검색 방식으로 조작된다. 일반적인 용도에서는 복잡도 1의 노이즈 레벨이 복잡도 10보다 1에서 2 dB 정도 높지만 복잡도 10의 CPU 요구조건은 복잡도 1보다 5배 높다. 실제적으로 최적의 균형은 2와 4 사이이다.[9] 가변 비트레이트(VBR) 가변 비트레이트(VBR)는 오디오를 인코딩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조절하기 위해 비트레이트를 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스픽스의 예를 살펴보면 모음 혹은 '높은 진폭과 짧은 지속시간을 갖는 음(high-energy transient)'은 좋은 품질을 가지기 위해 높은 비트레이트가 필요하지만, 마찰음은 더 낮은 비트레이트로도 충분하다. 이 때문에 VBR은 동일한 품질을 더 낮은 비트레이트에서 얻거나 어떤 비트레이트에서는 더 좋은 품질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VBR은 세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로 품질을 정해놓기 때문에 최종 평균 비트레이트에 대한 보장이 없다. 둘째로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VoIP) 같은 몇몇 실시간 소프트웨어에서는 통신 채널의 특성상 최대 비트레이트가 낮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셋째로 VBR로 인코딩한 음성을 암호화하는 것은 완전한 보안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평균 비트레이트(ABR) 평균 비트레이트는 특정 목표 비트레이트에 맞추기 위해 품질을 동적으로 조절하는 VBR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품질과 비트레이트의 비율이 실시간으로 조절되기 때문에 전체 품질이, 정확한 품질 설정을 한 VBR로 인코딩한 것보다 약간 낮다. 음성 활동 감지(VAD) 음성 활동 감지가 동작하면 오디오가 음성을 인코딩하고 있는지 혹은 무음이나 배경음을 인코딩하고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VAD는 VBR로 인코딩할 경우에 무조건적으로 활성화되므로 비VBR 작업에서만 작동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이 기능이 활성화 됐을 경우 스픽스는 비음성 부분을 감지하고 배경음을 재구성하기 위해 충분한 비트로 그것들을 인코딩한다. 이것을 '안정 소음 발생'(CNG)라고 한다. VAD를 지원했던 마지막 버전은 1.1.12이며, v 1.2부터 Any Activity Detection으로 대체되었다. 불연속 전송(DTX) 불연속 전송은 VAD 및 VBR에 추가된 기능이다. 배경음이 정지 상태일 때 전송을 완전히 멈출 수 있게 한다. 한 파일에서 5비트는 사라진 각 프레임에 이용된다.(250 bit/s와 일치) 인식 강화(Perceptual enhancement) 인식 강화는 코딩/디코딩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을 감소시키는 디코더의 한 부분이다. 많은 경우에 인식강화는 객관적으로 원음과의 차이를 발생시키지만 최종적으로는 여전히 괜찮은 소리이다. 알고리즘적 지연 모든 코덱은 전송할 때 지연이 발생한다. 스픽스는 이러한 지연이 프레임 크기와 같다. 협대역(8kHz)에서 지연 시간은 30ms, 광대역(16kHz)에서는 34ms이다. 이 값들은 프레임들을 인코딩하거나 디코딩하는데 걸리는 CPU시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같이 보기[편집] CELT 오푸스 참조[편집] ↑ Jean-Marc Valin (2009). “people.xiph.org - personal webspace of the xiphs - Jean-Marc Valin”. Xiph.Org. 2009년 9월 11일에 확인함. ↑ 가 나 “Speex News”. Xiph.Org Foundation. 2009년 9월 1일에 확인함. ↑ “The Speex Codec Manual - Speex License”. Xiph.Org Foundation. 2009년 9월 1일에 확인함. ↑ “Sample Xiph.Org Variant of the BSD License”. Xiph.Org Foundation. 2009년 8월 29일에 확인함. ↑ Xiph.Org Speex: A Free Codec For Free Speech, 2009-09-01에 확인 ↑ 가 나 Xiph.Org Introduction to CELP Coding, 2009년 09월 01일에 확인 ↑ Xiph.org Speex releases - pre-1.0 - NEWS and ChangeLog in speex-0.0.1.tar.gz, 2009년 09월 1일에 확인 ↑ Xiph.Org (2003-03-24) Speex reaches 1.0; Xiph.Org now a 501(c)(3) Non-Profit Organization, 2009년 09월 1일에 확인 ↑ Codec Description 외부 링크[편집] 공식 홈페이지 vdehXiph.Org 재단Ogg 프로젝트 Vorbis Theora FLAC Opus CELT Speex Tremor OggUVS OggPCM Ogg Writ 기타 프로젝트 XSPF Annodex Xiph 퀵타임 컴포넌츠 cdparanoia Icecast 기타 주제 크리스 몽고메리 CMML Ogg 페이지 Ogg 스퀴시 HTML5에서의 Ogg 포맷 사용 Vorbis 코멘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픽스&oldid=24182974" 분류: Xiph.Org 프로젝트오디오 코덱오픈 포맷숨은 분류: RFC 매직 링크를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RomânăРусскийSvenskaYorùbá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2:3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카플란 인터내셔널 컬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플란 인터내셔널 컬리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Kaplan International English, KIE)는 1967년 설립되어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교육기관인 카플란 주식회사의 부서이다. KIE는 전 세계 42곳에서 영어강좌, 대학교 및 시험 준비과정과 대학예비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강좌는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영어 학교와 대학캠퍼스 그리고 온라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KIE는 the Washington Post Company의 전액 출자 자회사이다.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Kaplan International English) 산업 분야 교육, 유학 창립 1967년 국가 런던 웹사이트 http://www.kaplaninternational.com/kor 목차 1 역사 2 어학원 3 영어과정 3.1 어학연수 3.2 장기어학연수과정 3.3 해외자격증과정 3.4 시험준비과정 3.5 대학 진로 프로그램 3.6 인턴쉽 3.7 주니어과정 4 그 외 언어 5 숙소 6 승인서 7 각주 8 외부 링크 역사[편집] 2007년 카플란 주식회사는 1967년 설립된 영국 회사인 어스팩 교육을 인수했다.어스팩은 영어시험준비와 대학예비과정을 제공하였다. 어스팩은 카플란의 기존 영어교육 부서와 결합하여 2007년 9월 카플란 어스팩이 출범하였다. 2010년, 카플란 어스팩과 영국대학 진학을 위해 국제학생들을 준비시키는 것을 전문으로 하던 카플란의 부서인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는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라는 이름으로 결합되었다. 어학원[편집]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는 8개국에서 42개의 EFL(외국어로서의 영어)와 EAP(학문을 위한 영어교수법) 영어 학교를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지역에 위치해있다. 호주: 브리즈번, 케언즈, 맨리, 퍼스, 시드니 캐나다: 토론토, 벤쿠버 영국: 바스 본머스, 캠브리지, 런던 코벤트 가든 과 레스터 스퀘어, 맨체스터, 옥스퍼드, 솔즈버리, 토키 뉴질랜드: 오클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아일랜드: 더블린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미국: 버클리, 보스톤, 보스톤 하버드 스퀘어 과 노스이스턴 대학, 시카고 와 시카고 일리노이 공대 캠퍼스, 로스앤젤레스 웨스트우드, 위티어 잉글리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마이애미, 맨하튼 미드타운, 맨하튼 이스트 빌리지, 뉴욕엠파이어 스테이트, 필라델피아, 오리건, 포틀랜드, 샌디에고, 샌프란시스코, 샌타바버라, 시애틀, 시애틀 하이라인 컬리지 와 워싱턴 DC 영어과정[편집]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는 다양한 기간과 강도의 광범위한 영어과정을 제공한다. KIC는TOEFL, IELTS, FCE, CPE, CAE, GMAT, GRE와 같은 영어시험준비과정 또한 제공한다. 학생들은 해외(유급)인턴쉽과 영어과정을 병합하여 진행할 수도 있다. 어학연수[편집] 어학연수과정은 2주부터 자유로운 기간을 선택할 수 있으며 , 영어레슨 외 보충수업과 다양한 Activity등이 포함되어 있다. 단기 어학연수 과정, 집중 영어 과정, 비즈니스 영어 과정, 방학영어 과정, 혼합영어 과정, 온라인 영어 과정 을 제공한다. 장기어학연수과정[편집] 장기어학연수 프로그램은 20주에서 32주까지 기간에 따라 Academic Year 와 Academic Semester 과정으로, 또한 일반과정과 집중과정으로 나뉘는데, 일반과정은 장기 어학연수에 초첨이 맞추어져 있으며, 집중과정은 영어연수와 더불어 비지니스, 토플 혹은 아이엘츠와 같은 프로그램 등을 추가로 선택하실 수 있다. 장기 어학연수 일반 Academic Semester 과정, 장기 어학연수 집중 Academic Semester 과정, 장기 어학연수 일반 Academic Year과정, 장기 어학연수 집중 Academic Year과정 을 제공한다. 해외자격증과정[편집] 비즈니스 과정은 마케팅, 광고, 인적자원, 경영학, 금융,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등의 핵심 분야에 대한 교육과정이다. Association of Chartered Certified Accountants (ACCA)가 인증하는회계, 금융, 매니지먼트 등의 분야의 전문 자격증과정과 ACCA 코스를 준비하는 국제 학생을 위한 프리세션(Pre-session) 과정을 제공한다. 비즈니스 자격증 과정으로는 비즈니스 4급 자격증 과정, 비즈니스 디플로마 과정, 고급 비즈니스 디플로마 과정, 패키지 과정 1: 비즈니스 4급 자격증, 비즈니스 디플로마, 패키지 과정 2: 비즈니스 4급 자격증, 비즈니스 디플로마, 고급 비즈니스 디플로마를, 영어교사 자격증 과정으로는 CELTA 와 캠브리지 TKT 과정을 제공한다. 시험준비과정[편집] 독자적으로 개발한 교과서와 모의시험과 함께 다양한 영어시험에 대비시키는 과정이다. TOEFL 및 대학 진학 영어 과정, IELTS 집중 과정, IELTS 보충과정, 캠브리지 집중 12주 과정(FCE, CAE, CPE), 국제 학생을 위한 GMAT과정, 국제 학생을 위한 GRE 과정 을 제공한다. 대학 진로 프로그램[편집]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는 학생들이 영국 대학과정에 진학하기 위한 프로그램 또한 제공하고 있다. 필수 수준에 도달하기만 한다면 다음과 같은 제휴 대학교에서 1000개 가 넘는 학위 과정에 진학하는 것을 보장한다. 본머스 대학 런던시티대학 크랜필드 대학 노팅엄 트렌트 대학 브라이튼 대학 글래스고 대학 리버풀 대학 셰필드 대학 웨스트민스터 대학 인턴쉽[편집] 4주간의 영어 어학연수 과정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의 전문 해외 인턴쉽 과정을 제공한다. 이력서와 인터뷰 준비 및 비지니스 영어 프로그램 또한 제공한다. 풀타임 인턴쉽 프로그램은 호주, 뉴질랜드, 영국,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에서 가능하며, 파트타임 인턴쉽 프로그램은 미국에서 할 수 있다. 주니어과정[편집] 이 영어 과정은 6세에서 18세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며, 숙소와 식사 및 여가활동 프로그램도 이루어진다. 유학중인 자녀와 함께 지내는 학부모를 위해 Kaplan 영어학교 근처의 시설에 성인 영어 학습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숙소 또한 제공하고 있다. 일반 및 집중 주니어 영어과정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지역에서 현재 주니어 영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주니어 영어학교 아딩리 칼리지(10-14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본머스(14-17세) 바스(12-17세) 런던 부쉬(14-17세) 런던 킹스턴(14-17세) 솔즈베리(6-17세) 토키(14-17세) 미국 주니어 영어학교 하이라인 커뮤니티 칼리지(12-18세) 로스앤젤레스-위티어 칼리지(12-18세) 노스이스턴 대학교(14-18세) 새크라멘토(14-18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샌디에고(14-18세) 호주 및 뉴질랜드 주니어 영어학교 케언즈(8-15세) 호주 및 뉴질랜드 스터디 투어(10-18세) 그 외 언어[편집] KIC는 중국, 도미니카 공화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몰타, 멕시코, 러시아, 스페인에서 제휴 학교를 통해 단기,중기, 단기의 해외거주 언어과정을 제공한다. 숙소[편집]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는 학생들에게 홈스테이, 아파트, 그리고 기숙사를 제공한다. 승인서[편집]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는 전 세계에서 영어교육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호주: NEAS[1] 캐나다: CAPLS[2] 아일랜드: ACELS[3] 뉴질랜드: NZQA[4] 영국: British Council[5] BAC accreditation for foundation, pre-masters and diploma programs 미국: ACCET[6] 각주[편집] ↑ “NEAS”. 2011년 6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23일에 확인함. ↑ “CAPLS”. 2011년 5월 23일에 확인함. ↑ “ACELS”. 2011년 5월 23일에 확인함. ↑ “NZQA”. 2011년 5월 23일에 확인함. ↑ “British Council”. 2011년 5월 23일에 확인함. ↑ “ACCET”. 2011년 5월 2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한국) 웹사이트 카플란 인터내셔널 잉글리쉬 웹사이트 카플란 네이버 블로그 카플란한국공식트위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카플란_인터내셔널_컬리지&oldid=22911891" 분류: 교육 기업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EnglishFrançais日本語PolskiTürkçe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2일 (금) 16: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대한민국 헌법위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헌법위원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헌법위원회憲法委員會 설립일 1972년 12월 27일 전신 탄핵심판위원회 대법원 해산일 1988년 8월 후신 헌법재판소 ' 설립일 1945년 6월 5일[1] 전신 제헌 헌법 제정 전 국회에 의해 수립 해산일 1961년 5월 2일 후신 헌법재판소 헌법위원회(憲法委員會, Constitutional Council of Korea)는 대한민국의 위헌법률심사, 위헌정당해산심판, 탄핵심판 등 헌법에 관한 분쟁을 담당하는 헌법기관이었다. 역사상 1945년 7월 17일에서 1961년 4월, 그리고, 1972년 12월 27일부터 1988년 8월까지 두번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다. 첫 번째 설치 시에는 탄핵심판 권한이 없었고, 탄핵재판소가 그 업무를 담당하였다. 목차 1 제헌헌법상 헌법위원회 2 3차 개헌과 헌법재판소 3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의 위헌, 탄핵 심사 3.1 법원조직법, 국가배상법 판결 논란 4 유신헌법 이후의 헌법위원회 5 제9차 개정헌법으로 헌법재판소 설치 및 헌법위원회 폐지 6 역대 헌법위원회 위원장 7 결정 8 같이 읽기 9 각주 제헌헌법상 헌법위원회[편집] 대한민국의 제헌국회(制憲國會)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제도에서 미국식을 따르느냐, 또는 유럽식을 따르느냐로 크게 문제가 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심의의 모안(母案)으로 채택하였던 유진오(兪鎭午)안은 유럽식의 헌법재판소제도를 규정하고 있었고, 참고안으로 채택하였던 권승렬(權承烈)안은 미국식 제도를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은 양자의 타협으로서 채택된 것이 1948년 7월에 제헌 국회를 통과한 제헌헌법상의 헌법위원회제도이다. 제헌헌법상의 헌법위원회는 보통법원(普通法院)이 아닌 헌법재판소의 일종이고, 그 구성은 부통령이 위원장이 되고 국회가 선출하는 국회의원 5인의 의원(양원제 국회가 채택된 후에는 민의원 의원 3인과 참의원 의원 2인의 위원)과 대법원장이 추천한 대법관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었고, 이 점에서 유럽식을 따랐지만, 그 심사절차는 미국식을 따랐다. 즉 헌법위원회는 법률의 위헌(違憲) 여부의 심사권을 가지지만, 독자적으로는 심사를 하지 못하고, 반드시 법원의 제청에 의해서만 심사를 하고, 또 법원은 법률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때에 한하여 당해 사건의 담당판사 또는 소송당사자의 신청에 의하여 판사 3인으로서 구성되는 합의부(合議部)의 결정에 의하여 헌법위원회에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를 제청할 수 있었다. 헌법위원회의 위헌결정은 현재의 헌법재판소 결정과 같이 '장래에 향하여 효력을 발생하되 형벌 조항은 소급하여 그 효력을 상실'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유럽 대륙식으로 미국식과 달랐다. 제1공화국 당시 헌법위원회의 위헌심사 건수는 총 10건도 되지 않았고, 위헌결정은 1952년 9월 9일의 2건에 불과했다.[2] 1952년 7월의 제1차 개헌으로 국회의 양원제가 채택되었지만,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붕괴될 때까지 참의원(상원) 선거의 실시 요구를 묵살하였다. 심지어 자유당 정권은 참의원이 구성되지 않았음을 빙자해 헌법위원회의 구성에 협조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헌법위원회의 기능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정지되었다. 한편, 탄핵(彈劾)재판의 결정을 위해 탄핵재판소를 설치하였다. 탄핵재판소의 심판관은 대법관 5인과 국회의원 5인이었으며, 부통령이 탄핵재판장이 되었다. 다만, 대통령과 부통령 탄핵의 경우에는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었다. 3차 개헌과 헌법재판소[편집] 1960년 6월에 실시된 제3차 개헌으로 헌법위원회 제도가 폐지되고 제2공화국 헌법에 따른 상설 헌법기관으로서, 대통령·참의원·대법원이 각각 3인씩 임명하는 심판관으로 구성되는 헌법재판소를 설치하여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뿐만 아니라, 정당의 해산, 탄핵재판 등과 같은 여러 정치재판권(政治裁判權)까지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해당 헌법재판소는 구성되기 전에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다.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의 위헌, 탄핵 심사[편집] 1962년 실시된 제5차 개헌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폐지되고 완전히 미국식을 채용하여 위헌심사권을 보통법원(普通法院)에 부여하고 심사절차에 있어서 구체적 규범통제만을 채택하였다. 한편 탄핵재판을 위해서 탄핵심판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때 1971년 6월 22일 대법원에서는 법원조직법 제59조제1항 단서(1970년 8월 7일 개정)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1967년 3월 3일 개정) 등 2개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 이 위헌 결정에 따라 국가가 배상하도록 판결한 이범렬 당시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고, 여기에 반발한 법원의 영장 기각, 검찰의 2차 청구, 판사들의 집단 사표 등 소위 사법 파동이 일어났다. 법원조직법, 국가배상법 판결 논란[편집] 법원의 합의는 헌법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과반수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정당해산을 명하는 판결은 대법원 법관 정수의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제103조)는 규정이 있었으나, 법률의 위헌 결정에 관하여는 특별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대법원은 '대법원 판사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판사 과반수의 찬성'으로 위헌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1970년 8월 7일 국회에서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하여 대법원이 위헌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대법원 판사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판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것으로 법원조직법에 단서 규정을 신설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집권당인 공화당에서는 이 법의 개정 취지를 "위헌 심사를 신중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실은 징발보상금배상법 등의 입법에 대한 법원의 위헌 결정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6월 22일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1967년 3월 3일 개정)와 법원조직법 제59조제1항 단서(1970년 8월 7일 개정)에 대하여 위헌 결정을 내렸다. 법원조직법의 경우, 16명의 판사 중 대법원장을 비롯한 5명을 제외한 11명이 찬성함으로써 위헌 판결을 얻을 수 있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또 다른 조항인 국가배상법 2조의 경우, 군인이나 군속 등이 타인의 과실로 인해 전사, 순직 등을 한 경우 일시금이나 유족연금 이외에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으나, 이 결정으로 인해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 이후에 이 위헌 결정에 따라 국가가 배상하도록 판결한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고, 여기에 반발한 법원의 영장 기각, 검찰의 2차 영장 청구, 판사들의 집단 사표 등 이른바 '사법 파동'이 일어났다. 이는 1년 뒤 설치된 헌법위원회의 유명무실한 운영과 2년 뒤의 대법원 판사 재임용탈락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신헌법 이후의 헌법위원회[편집] 1972년 12월 27일 공포된 유신헌법에 의해 대법원의 위헌심판권과 탄핵심판위원회가 폐지되고, 헌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특히, 법률의 위헌심판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기 위해 대법원에 합헌결정권을 부여해 '하급법원(고등법원이나 지방법원)의 위헌여부 제청에 대하여 대법원 합의부에서 불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위헌법률심판을 제기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또, 1971년 6월 22일 위헌 판결을 낳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의 위헌 시비를 막기 위해 아예 헌법 조문에 군인과 경찰 등에 대한 배상 제한 규정(현행 헌법 제29조제2항과 같은 규정)을 신설했다. 유신헌법에 따라 전국 법관들의 인사권을 틀어쥔 대통령 박정희는 1973년 3월 24일에 1971년 당시 위헌 판결을 내렸던 판사 9명(방순원, 손동욱, 김치걸, 사광욱, 양회경, 나향윤, 홍남표, 한봉세, 유재방)을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에 위축된 대법원은 이후 위헌심판을 단 한건도 제기하지 않았다. 1980년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설치된 헌법위원회도 1973년의 헌법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대법원에 합헌결정권을 부여해, 결과적으로 1987년 헌법 개정이 되기 전까지 존재한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의 헌법위원회는 유명무실한 휴면기관에 불과했다. 제9차 개정헌법으로 헌법재판소 설치 및 헌법위원회 폐지[편집] 헌법위원회는 제9차 개정헌법으로 폐지되고, 헌법재판소가 새로 설치되었다. 헌법재판소는 ① 법원의 제청에 의한 법률의 위헌여부심판, ② 탄핵의 심판, ③ 정당의 해산심판, ④ 국가기관의 상호간,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간 및 지방자치단체 상호간의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⑤ 법률이 정하는 헌법소원(訴願)에 관한 심판 등의 사항을 관장한다. 특히 헌법에 의거 대법원과 동위의 사법기관으로 그 위상이 강화됨은 물론, 위헌여부심판 또한 일반 개인이 법원을 거치거나, 아니면 헌법소원 형식으로 제청할 수 있어, 한건도 위헌심판을 하지 못한 1972년 이후의 헌법위원회와 비교해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역대 헌법위원회 위원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출신지 출신학교 비고 1대 서상일(徐相日) 1948년 6월 5일[3] ~ 1948년 7월 23일 2대 이시영(李始榮) 1948년 7월 24일[4] ~ 1952년 7월 6일 경기 경성(현 서울) 권한대행 허정(許政) 1951년 5월 10일 ~ 1951년 5월 16일 경남 동래 보성전문(현. 고려대) 3대 김성수 1951년 5월 17일 ~ 1952년 5월 29일 전북 부안 와세다대학 권한대행 장택상 1952년 7월 7일 ~ 1952년 8월 14일 경북 칠곡 에딘버러 대학 수도경찰청장&경기도경찰청장&외무부 장관&3대 총리&부통령 대행 4대 함태영(咸台永)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심계원장&부통령 5대 장면(張勉)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5일 경기 경성(현 서울특별시) 경성농고 주한미국대사&2대 총리&부통령&6대 총리 6대 정헌주(鄭憲柱) 1960년 4월 26일 ~ 1961년 5월 20일 대수 이름 임기 출신지 출신학교 비고 1대 김현철(金顯哲) 1973년 3월 19일[5] ~ 1979년 3월 25일[6] 2대 이호(李澔) 1979년 3월 26일[7] ~ 1981년 4월 21일 3대 주재황(朱宰璜) 1981년 4월 22일[8][9] ~ 1987년 5월 15일 4대 주재황(朱宰璜) 1987년 5월 16일[10] ~ 1988년 8월 31일 결정[편집] 헌법에 의거 법률의 위헌결정, 탄핵의 결정, 정당해산의 결정 또는 헌법소원에 관한 인용결정을 할 때에는 위원회 위원 총원 9명 중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현재 헌법재판소의 결정 정족수와 동일하다. 같이 읽기[편집] 헌법재판소 탄핵재판소 탄핵심판위원회 대법원 대한민국의 부통령 참의원 (대한민국) 각주[편집] ↑ [1] ↑ 인권옹호에 서광! 동아일보, 1952.9.11. 1952년 9월 9일 당시 헌법위원회는 재판의 심급을 제한한 아래 규정들을 위헌결정하였다.: 농지개혁법 제18조제2항 및 제24조 본문 후단,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 제9조 ↑ [2] ↑ [3] ↑ [4] ↑ [5] ↑ [6] ↑ [7] ↑ [8] ↑ [9] vdeh 대한민국의 폐지된 중앙행정기관원 경제기획원 국무원 국토통일원 심계원 재정경제원 통일원 부 건설교통부 건설부 공보부 과학기술부 교육과학기술부 교육인적자원부 교통부 국가안전기획부 국토해양부 내무부 노동부 농림부 농림수산부 농림수산식품부 농수산부 동력자원부 문교부 문화공보부 문화관광부 문화부 문화체육부 미래창조과학부 보건복지가족부 보건부 보건사회부 부흥부 사회부 산업자원부 상공부 상공자원부 안전행정부 여성부 외교통상부 외무부 재무부 재정경제부 정보통신부 중앙정보부 지식경제부 체신부 체육부 체육청소년부 통상산업부 행정자치부 실 공보실 국무총리실 기획조정실 내각수반비서실 대통령경호실 대통령실 무임소장관실 정무장관(제3)실 정무장관(제2)실 정무장관(제1)실 제2무임소장관실 제1무임소장관실 특임장관실 행정조정실 위원회 감찰위원회 경제위원회 고시위원회 공안위원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국가비상기획위원회 국가청렴위원회 국가청소년위원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개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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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위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헌법위원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헌법위원회憲法委員會 설립일 1972년 12월 27일 전신 탄핵심판위원회 대법원 해산일 1988년 8월 후신 헌법재판소 ' 설립일 1945년 6월 5일[1] 전신 제헌 헌법 제정 전 국회에 의해 수립 해산일 1961년 5월 2일 후신 헌법재판소 헌법위원회(憲法委員會, Constitutional Council of Korea)는 대한민국의 위헌법률심사, 위헌정당해산심판, 탄핵심판 등 헌법에 관한 분쟁을 담당하는 헌법기관이었다. 역사상 1945년 7월 17일에서 1961년 4월, 그리고, 1972년 12월 27일부터 1988년 8월까지 두번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다. 첫 번째 설치 시에는 탄핵심판 권한이 없었고, 탄핵재판소가 그 업무를 담당하였다. 목차 1 제헌헌법상 헌법위원회 2 3차 개헌과 헌법재판소 3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의 위헌, 탄핵 심사 3.1 법원조직법, 국가배상법 판결 논란 4 유신헌법 이후의 헌법위원회 5 제9차 개정헌법으로 헌법재판소 설치 및 헌법위원회 폐지 6 역대 헌법위원회 위원장 7 결정 8 같이 읽기 9 각주 제헌헌법상 헌법위원회[편집] 대한민국의 제헌국회(制憲國會)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제도에서 미국식을 따르느냐, 또는 유럽식을 따르느냐로 크게 문제가 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심의의 모안(母案)으로 채택하였던 유진오(兪鎭午)안은 유럽식의 헌법재판소제도를 규정하고 있었고, 참고안으로 채택하였던 권승렬(權承烈)안은 미국식 제도를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은 양자의 타협으로서 채택된 것이 1948년 7월에 제헌 국회를 통과한 제헌헌법상의 헌법위원회제도이다. 제헌헌법상의 헌법위원회는 보통법원(普通法院)이 아닌 헌법재판소의 일종이고, 그 구성은 부통령이 위원장이 되고 국회가 선출하는 국회의원 5인의 의원(양원제 국회가 채택된 후에는 민의원 의원 3인과 참의원 의원 2인의 위원)과 대법원장이 추천한 대법관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었고, 이 점에서 유럽식을 따랐지만, 그 심사절차는 미국식을 따랐다. 즉 헌법위원회는 법률의 위헌(違憲) 여부의 심사권을 가지지만, 독자적으로는 심사를 하지 못하고, 반드시 법원의 제청에 의해서만 심사를 하고, 또 법원은 법률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때에 한하여 당해 사건의 담당판사 또는 소송당사자의 신청에 의하여 판사 3인으로서 구성되는 합의부(合議部)의 결정에 의하여 헌법위원회에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를 제청할 수 있었다. 헌법위원회의 위헌결정은 현재의 헌법재판소 결정과 같이 '장래에 향하여 효력을 발생하되 형벌 조항은 소급하여 그 효력을 상실'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유럽 대륙식으로 미국식과 달랐다. 제1공화국 당시 헌법위원회의 위헌심사 건수는 총 10건도 되지 않았고, 위헌결정은 1952년 9월 9일의 2건에 불과했다.[2] 1952년 7월의 제1차 개헌으로 국회의 양원제가 채택되었지만,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붕괴될 때까지 참의원(상원) 선거의 실시 요구를 묵살하였다. 심지어 자유당 정권은 참의원이 구성되지 않았음을 빙자해 헌법위원회의 구성에 협조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헌법위원회의 기능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정지되었다. 한편, 탄핵(彈劾)재판의 결정을 위해 탄핵재판소를 설치하였다. 탄핵재판소의 심판관은 대법관 5인과 국회의원 5인이었으며, 부통령이 탄핵재판장이 되었다. 다만, 대통령과 부통령 탄핵의 경우에는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었다. 3차 개헌과 헌법재판소[편집] 1960년 6월에 실시된 제3차 개헌으로 헌법위원회 제도가 폐지되고 제2공화국 헌법에 따른 상설 헌법기관으로서, 대통령·참의원·대법원이 각각 3인씩 임명하는 심판관으로 구성되는 헌법재판소를 설치하여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뿐만 아니라, 정당의 해산, 탄핵재판 등과 같은 여러 정치재판권(政治裁判權)까지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해당 헌법재판소는 구성되기 전에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다.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의 위헌, 탄핵 심사[편집] 1962년 실시된 제5차 개헌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폐지되고 완전히 미국식을 채용하여 위헌심사권을 보통법원(普通法院)에 부여하고 심사절차에 있어서 구체적 규범통제만을 채택하였다. 한편 탄핵재판을 위해서 탄핵심판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때 1971년 6월 22일 대법원에서는 법원조직법 제59조제1항 단서(1970년 8월 7일 개정)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1967년 3월 3일 개정) 등 2개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 이 위헌 결정에 따라 국가가 배상하도록 판결한 이범렬 당시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고, 여기에 반발한 법원의 영장 기각, 검찰의 2차 청구, 판사들의 집단 사표 등 소위 사법 파동이 일어났다. 법원조직법, 국가배상법 판결 논란[편집] 법원의 합의는 헌법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과반수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정당해산을 명하는 판결은 대법원 법관 정수의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제103조)는 규정이 있었으나, 법률의 위헌 결정에 관하여는 특별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대법원은 '대법원 판사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판사 과반수의 찬성'으로 위헌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1970년 8월 7일 국회에서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하여 대법원이 위헌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대법원 판사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판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것으로 법원조직법에 단서 규정을 신설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집권당인 공화당에서는 이 법의 개정 취지를 "위헌 심사를 신중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실은 징발보상금배상법 등의 입법에 대한 법원의 위헌 결정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6월 22일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1967년 3월 3일 개정)와 법원조직법 제59조제1항 단서(1970년 8월 7일 개정)에 대하여 위헌 결정을 내렸다. 법원조직법의 경우, 16명의 판사 중 대법원장을 비롯한 5명을 제외한 11명이 찬성함으로써 위헌 판결을 얻을 수 있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또 다른 조항인 국가배상법 2조의 경우, 군인이나 군속 등이 타인의 과실로 인해 전사, 순직 등을 한 경우 일시금이나 유족연금 이외에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으나, 이 결정으로 인해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 이후에 이 위헌 결정에 따라 국가가 배상하도록 판결한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고, 여기에 반발한 법원의 영장 기각, 검찰의 2차 영장 청구, 판사들의 집단 사표 등 이른바 '사법 파동'이 일어났다. 이는 1년 뒤 설치된 헌법위원회의 유명무실한 운영과 2년 뒤의 대법원 판사 재임용탈락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신헌법 이후의 헌법위원회[편집] 1972년 12월 27일 공포된 유신헌법에 의해 대법원의 위헌심판권과 탄핵심판위원회가 폐지되고, 헌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특히, 법률의 위헌심판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기 위해 대법원에 합헌결정권을 부여해 '하급법원(고등법원이나 지방법원)의 위헌여부 제청에 대하여 대법원 합의부에서 불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위헌법률심판을 제기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또, 1971년 6월 22일 위헌 판결을 낳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의 위헌 시비를 막기 위해 아예 헌법 조문에 군인과 경찰 등에 대한 배상 제한 규정(현행 헌법 제29조제2항과 같은 규정)을 신설했다. 유신헌법에 따라 전국 법관들의 인사권을 틀어쥔 대통령 박정희는 1973년 3월 24일에 1971년 당시 위헌 판결을 내렸던 판사 9명(방순원, 손동욱, 김치걸, 사광욱, 양회경, 나향윤, 홍남표, 한봉세, 유재방)을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에 위축된 대법원은 이후 위헌심판을 단 한건도 제기하지 않았다. 1980년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설치된 헌법위원회도 1973년의 헌법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대법원에 합헌결정권을 부여해, 결과적으로 1987년 헌법 개정이 되기 전까지 존재한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의 헌법위원회는 유명무실한 휴면기관에 불과했다. 제9차 개정헌법으로 헌법재판소 설치 및 헌법위원회 폐지[편집] 헌법위원회는 제9차 개정헌법으로 폐지되고, 헌법재판소가 새로 설치되었다. 헌법재판소는 ① 법원의 제청에 의한 법률의 위헌여부심판, ② 탄핵의 심판, ③ 정당의 해산심판, ④ 국가기관의 상호간,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간 및 지방자치단체 상호간의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⑤ 법률이 정하는 헌법소원(訴願)에 관한 심판 등의 사항을 관장한다. 특히 헌법에 의거 대법원과 동위의 사법기관으로 그 위상이 강화됨은 물론, 위헌여부심판 또한 일반 개인이 법원을 거치거나, 아니면 헌법소원 형식으로 제청할 수 있어, 한건도 위헌심판을 하지 못한 1972년 이후의 헌법위원회와 비교해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역대 헌법위원회 위원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출신지 출신학교 비고 1대 서상일(徐相日) 1948년 6월 5일[3] ~ 1948년 7월 23일 2대 이시영(李始榮) 1948년 7월 24일[4] ~ 1952년 7월 6일 경기 경성(현 서울) 권한대행 허정(許政) 1951년 5월 10일 ~ 1951년 5월 16일 경남 동래 보성전문(현. 고려대) 3대 김성수 1951년 5월 17일 ~ 1952년 5월 29일 전북 부안 와세다대학 권한대행 장택상 1952년 7월 7일 ~ 1952년 8월 14일 경북 칠곡 에딘버러 대학 수도경찰청장&경기도경찰청장&외무부 장관&3대 총리&부통령 대행 4대 함태영(咸台永)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심계원장&부통령 5대 장면(張勉)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5일 경기 경성(현 서울특별시) 경성농고 주한미국대사&2대 총리&부통령&6대 총리 6대 정헌주(鄭憲柱) 1960년 4월 26일 ~ 1961년 5월 20일 대수 이름 임기 출신지 출신학교 비고 1대 김현철(金顯哲) 1973년 3월 19일[5] ~ 1979년 3월 25일[6] 2대 이호(李澔) 1979년 3월 26일[7] ~ 1981년 4월 21일 3대 주재황(朱宰璜) 1981년 4월 22일[8][9] ~ 1987년 5월 15일 4대 주재황(朱宰璜) 1987년 5월 16일[10] ~ 1988년 8월 31일 결정[편집] 헌법에 의거 법률의 위헌결정, 탄핵의 결정, 정당해산의 결정 또는 헌법소원에 관한 인용결정을 할 때에는 위원회 위원 총원 9명 중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현재 헌법재판소의 결정 정족수와 동일하다. 같이 읽기[편집] 헌법재판소 탄핵재판소 탄핵심판위원회 대법원 대한민국의 부통령 참의원 (대한민국) 각주[편집] ↑ [1] ↑ 인권옹호에 서광! 동아일보, 1952.9.11. 1952년 9월 9일 당시 헌법위원회는 재판의 심급을 제한한 아래 규정들을 위헌결정하였다.: 농지개혁법 제18조제2항 및 제24조 본문 후단,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 제9조 ↑ [2] ↑ [3] ↑ [4] ↑ [5] ↑ [6] ↑ [7] ↑ [8] ↑ [9] vdeh 대한민국의 폐지된 중앙행정기관원 경제기획원 국무원 국토통일원 심계원 재정경제원 통일원 부 건설교통부 건설부 공보부 과학기술부 교육과학기술부 교육인적자원부 교통부 국가안전기획부 국토해양부 내무부 노동부 농림부 농림수산부 농림수산식품부 농수산부 동력자원부 문교부 문화공보부 문화관광부 문화부 문화체육부 미래창조과학부 보건복지가족부 보건부 보건사회부 부흥부 사회부 산업자원부 상공부 상공자원부 안전행정부 여성부 외교통상부 외무부 재무부 재정경제부 정보통신부 중앙정보부 지식경제부 체신부 체육부 체육청소년부 통상산업부 행정자치부 실 공보실 국무총리실 기획조정실 내각수반비서실 대통령경호실 대통령실 무임소장관실 정무장관(제3)실 정무장관(제2)실 정무장관(제1)실 제2무임소장관실 제1무임소장관실 특임장관실 행정조정실 위원회 감찰위원회 경제위원회 고시위원회 공안위원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국가비상기획위원회 국가청렴위원회 국가청소년위원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개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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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위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헌법위원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헌법위원회憲法委員會 설립일 1972년 12월 27일 전신 탄핵심판위원회 대법원 해산일 1988년 8월 후신 헌법재판소 ' 설립일 1945년 6월 5일[1] 전신 제헌 헌법 제정 전 국회에 의해 수립 해산일 1961년 5월 2일 후신 헌법재판소 헌법위원회(憲法委員會, Constitutional Council of Korea)는 대한민국의 위헌법률심사, 위헌정당해산심판, 탄핵심판 등 헌법에 관한 분쟁을 담당하는 헌법기관이었다. 역사상 1945년 7월 17일에서 1961년 4월, 그리고, 1972년 12월 27일부터 1988년 8월까지 두번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다. 첫 번째 설치 시에는 탄핵심판 권한이 없었고, 탄핵재판소가 그 업무를 담당하였다. 목차 1 제헌헌법상 헌법위원회 2 3차 개헌과 헌법재판소 3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의 위헌, 탄핵 심사 3.1 법원조직법, 국가배상법 판결 논란 4 유신헌법 이후의 헌법위원회 5 제9차 개정헌법으로 헌법재판소 설치 및 헌법위원회 폐지 6 역대 헌법위원회 위원장 7 결정 8 같이 읽기 9 각주 제헌헌법상 헌법위원회[편집] 대한민국의 제헌국회(制憲國會)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제도에서 미국식을 따르느냐, 또는 유럽식을 따르느냐로 크게 문제가 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심의의 모안(母案)으로 채택하였던 유진오(兪鎭午)안은 유럽식의 헌법재판소제도를 규정하고 있었고, 참고안으로 채택하였던 권승렬(權承烈)안은 미국식 제도를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은 양자의 타협으로서 채택된 것이 1948년 7월에 제헌 국회를 통과한 제헌헌법상의 헌법위원회제도이다. 제헌헌법상의 헌법위원회는 보통법원(普通法院)이 아닌 헌법재판소의 일종이고, 그 구성은 부통령이 위원장이 되고 국회가 선출하는 국회의원 5인의 의원(양원제 국회가 채택된 후에는 민의원 의원 3인과 참의원 의원 2인의 위원)과 대법원장이 추천한 대법관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었고, 이 점에서 유럽식을 따랐지만, 그 심사절차는 미국식을 따랐다. 즉 헌법위원회는 법률의 위헌(違憲) 여부의 심사권을 가지지만, 독자적으로는 심사를 하지 못하고, 반드시 법원의 제청에 의해서만 심사를 하고, 또 법원은 법률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때에 한하여 당해 사건의 담당판사 또는 소송당사자의 신청에 의하여 판사 3인으로서 구성되는 합의부(合議部)의 결정에 의하여 헌법위원회에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를 제청할 수 있었다. 헌법위원회의 위헌결정은 현재의 헌법재판소 결정과 같이 '장래에 향하여 효력을 발생하되 형벌 조항은 소급하여 그 효력을 상실'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유럽 대륙식으로 미국식과 달랐다. 제1공화국 당시 헌법위원회의 위헌심사 건수는 총 10건도 되지 않았고, 위헌결정은 1952년 9월 9일의 2건에 불과했다.[2] 1952년 7월의 제1차 개헌으로 국회의 양원제가 채택되었지만,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붕괴될 때까지 참의원(상원) 선거의 실시 요구를 묵살하였다. 심지어 자유당 정권은 참의원이 구성되지 않았음을 빙자해 헌법위원회의 구성에 협조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헌법위원회의 기능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정지되었다. 한편, 탄핵(彈劾)재판의 결정을 위해 탄핵재판소를 설치하였다. 탄핵재판소의 심판관은 대법관 5인과 국회의원 5인이었으며, 부통령이 탄핵재판장이 되었다. 다만, 대통령과 부통령 탄핵의 경우에는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었다. 3차 개헌과 헌법재판소[편집] 1960년 6월에 실시된 제3차 개헌으로 헌법위원회 제도가 폐지되고 제2공화국 헌법에 따른 상설 헌법기관으로서, 대통령·참의원·대법원이 각각 3인씩 임명하는 심판관으로 구성되는 헌법재판소를 설치하여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뿐만 아니라, 정당의 해산, 탄핵재판 등과 같은 여러 정치재판권(政治裁判權)까지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해당 헌법재판소는 구성되기 전에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다.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의 위헌, 탄핵 심사[편집] 1962년 실시된 제5차 개헌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폐지되고 완전히 미국식을 채용하여 위헌심사권을 보통법원(普通法院)에 부여하고 심사절차에 있어서 구체적 규범통제만을 채택하였다. 한편 탄핵재판을 위해서 탄핵심판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때 1971년 6월 22일 대법원에서는 법원조직법 제59조제1항 단서(1970년 8월 7일 개정)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1967년 3월 3일 개정) 등 2개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 이 위헌 결정에 따라 국가가 배상하도록 판결한 이범렬 당시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고, 여기에 반발한 법원의 영장 기각, 검찰의 2차 청구, 판사들의 집단 사표 등 소위 사법 파동이 일어났다. 법원조직법, 국가배상법 판결 논란[편집] 법원의 합의는 헌법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과반수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정당해산을 명하는 판결은 대법원 법관 정수의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제103조)는 규정이 있었으나, 법률의 위헌 결정에 관하여는 특별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대법원은 '대법원 판사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판사 과반수의 찬성'으로 위헌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1970년 8월 7일 국회에서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하여 대법원이 위헌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대법원 판사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판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것으로 법원조직법에 단서 규정을 신설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집권당인 공화당에서는 이 법의 개정 취지를 "위헌 심사를 신중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실은 징발보상금배상법 등의 입법에 대한 법원의 위헌 결정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6월 22일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1967년 3월 3일 개정)와 법원조직법 제59조제1항 단서(1970년 8월 7일 개정)에 대하여 위헌 결정을 내렸다. 법원조직법의 경우, 16명의 판사 중 대법원장을 비롯한 5명을 제외한 11명이 찬성함으로써 위헌 판결을 얻을 수 있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또 다른 조항인 국가배상법 2조의 경우, 군인이나 군속 등이 타인의 과실로 인해 전사, 순직 등을 한 경우 일시금이나 유족연금 이외에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으나, 이 결정으로 인해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 이후에 이 위헌 결정에 따라 국가가 배상하도록 판결한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고, 여기에 반발한 법원의 영장 기각, 검찰의 2차 영장 청구, 판사들의 집단 사표 등 이른바 '사법 파동'이 일어났다. 이는 1년 뒤 설치된 헌법위원회의 유명무실한 운영과 2년 뒤의 대법원 판사 재임용탈락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신헌법 이후의 헌법위원회[편집] 1972년 12월 27일 공포된 유신헌법에 의해 대법원의 위헌심판권과 탄핵심판위원회가 폐지되고, 헌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특히, 법률의 위헌심판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기 위해 대법원에 합헌결정권을 부여해 '하급법원(고등법원이나 지방법원)의 위헌여부 제청에 대하여 대법원 합의부에서 불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위헌법률심판을 제기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또, 1971년 6월 22일 위헌 판결을 낳은 국가배상법 제2조제1항 단서의 위헌 시비를 막기 위해 아예 헌법 조문에 군인과 경찰 등에 대한 배상 제한 규정(현행 헌법 제29조제2항과 같은 규정)을 신설했다. 유신헌법에 따라 전국 법관들의 인사권을 틀어쥔 대통령 박정희는 1973년 3월 24일에 1971년 당시 위헌 판결을 내렸던 판사 9명(방순원, 손동욱, 김치걸, 사광욱, 양회경, 나향윤, 홍남표, 한봉세, 유재방)을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에 위축된 대법원은 이후 위헌심판을 단 한건도 제기하지 않았다. 1980년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설치된 헌법위원회도 1973년의 헌법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대법원에 합헌결정권을 부여해, 결과적으로 1987년 헌법 개정이 되기 전까지 존재한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의 헌법위원회는 유명무실한 휴면기관에 불과했다. 제9차 개정헌법으로 헌법재판소 설치 및 헌법위원회 폐지[편집] 헌법위원회는 제9차 개정헌법으로 폐지되고, 헌법재판소가 새로 설치되었다. 헌법재판소는 ① 법원의 제청에 의한 법률의 위헌여부심판, ② 탄핵의 심판, ③ 정당의 해산심판, ④ 국가기관의 상호간,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간 및 지방자치단체 상호간의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⑤ 법률이 정하는 헌법소원(訴願)에 관한 심판 등의 사항을 관장한다. 특히 헌법에 의거 대법원과 동위의 사법기관으로 그 위상이 강화됨은 물론, 위헌여부심판 또한 일반 개인이 법원을 거치거나, 아니면 헌법소원 형식으로 제청할 수 있어, 한건도 위헌심판을 하지 못한 1972년 이후의 헌법위원회와 비교해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역대 헌법위원회 위원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출신지 출신학교 비고 1대 서상일(徐相日) 1948년 6월 5일[3] ~ 1948년 7월 23일 2대 이시영(李始榮) 1948년 7월 24일[4] ~ 1952년 7월 6일 경기 경성(현 서울) 권한대행 허정(許政) 1951년 5월 10일 ~ 1951년 5월 16일 경남 동래 보성전문(현. 고려대) 3대 김성수 1951년 5월 17일 ~ 1952년 5월 29일 전북 부안 와세다대학 권한대행 장택상 1952년 7월 7일 ~ 1952년 8월 14일 경북 칠곡 에딘버러 대학 수도경찰청장&경기도경찰청장&외무부 장관&3대 총리&부통령 대행 4대 함태영(咸台永)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심계원장&부통령 5대 장면(張勉)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5일 경기 경성(현 서울특별시) 경성농고 주한미국대사&2대 총리&부통령&6대 총리 6대 정헌주(鄭憲柱) 1960년 4월 26일 ~ 1961년 5월 20일 대수 이름 임기 출신지 출신학교 비고 1대 김현철(金顯哲) 1973년 3월 19일[5] ~ 1979년 3월 25일[6] 2대 이호(李澔) 1979년 3월 26일[7] ~ 1981년 4월 21일 3대 주재황(朱宰璜) 1981년 4월 22일[8][9] ~ 1987년 5월 15일 4대 주재황(朱宰璜) 1987년 5월 16일[10] ~ 1988년 8월 31일 결정[편집] 헌법에 의거 법률의 위헌결정, 탄핵의 결정, 정당해산의 결정 또는 헌법소원에 관한 인용결정을 할 때에는 위원회 위원 총원 9명 중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현재 헌법재판소의 결정 정족수와 동일하다. 같이 읽기[편집] 헌법재판소 탄핵재판소 탄핵심판위원회 대법원 대한민국의 부통령 참의원 (대한민국) 각주[편집] ↑ [1] ↑ 인권옹호에 서광! 동아일보, 1952.9.11. 1952년 9월 9일 당시 헌법위원회는 재판의 심급을 제한한 아래 규정들을 위헌결정하였다.: 농지개혁법 제18조제2항 및 제24조 본문 후단,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 제9조 ↑ [2] ↑ [3] ↑ [4] ↑ [5] ↑ [6] ↑ [7] ↑ [8] ↑ [9] vdeh 대한민국의 폐지된 중앙행정기관원 경제기획원 국무원 국토통일원 심계원 재정경제원 통일원 부 건설교통부 건설부 공보부 과학기술부 교육과학기술부 교육인적자원부 교통부 국가안전기획부 국토해양부 내무부 노동부 농림부 농림수산부 농림수산식품부 농수산부 동력자원부 문교부 문화공보부 문화관광부 문화부 문화체육부 미래창조과학부 보건복지가족부 보건부 보건사회부 부흥부 사회부 산업자원부 상공부 상공자원부 안전행정부 여성부 외교통상부 외무부 재무부 재정경제부 정보통신부 중앙정보부 지식경제부 체신부 체육부 체육청소년부 통상산업부 행정자치부 실 공보실 국무총리실 기획조정실 내각수반비서실 대통령경호실 대통령실 무임소장관실 정무장관(제3)실 정무장관(제2)실 정무장관(제1)실 제2무임소장관실 제1무임소장관실 특임장관실 행정조정실 위원회 감찰위원회 경제위원회 고시위원회 공안위원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국가비상기획위원회 국가청렴위원회 국가청소년위원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개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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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 (1889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형 (1889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형(張炯, 1889년 1월 18일 ~ 1964년 12월 30일)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다. 본관은 결성(結城)이며,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다. 호는 범은(梵隱) 또는 범정(梵亭)이고 항일독립운동 시에는 장세담(張世淡)으로 활동하였다. [주 1] 목차 1 생애 1.1 출생 1.2 독립투쟁 1.3 종교활동 1.4 광복 후 1.5 최후 2 신익희와 토지 5만평 3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 4 단국대학 설립 5 가족 6 같이 보기 7 주해 8 각주 생애[편집] 출생[편집] 장형은 1889년(고종 26) 평안북도 용천[주 2]에서 태어났다. 부친 장창익(張昌翼)은 진사시를 거친 유학자였으나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조선이 패망하자 한의사로 전업을 하였다. 장형은 1905년 사서삼경을 마치고 그해 고향의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를 입학, 190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민족의식이 강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1]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2년제 전문부)에 재학하던 중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피탈되자 1911년 학업을 중단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독립투쟁[편집] 처음 맡은 임무는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민족 자본가들과 접촉, 모금활동을 펼치는 일이었고 그때 민족주의적 항일 인사들을 비롯하여 뜻있는 많은 유지들과 교분을 쌓았다. 1914년 구국제민을 기치로 생겨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이듬해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에 이르렀다. 본관은 결성(結城)으로 같은 집안의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리며 광복후 교육자와 역사학자로 활동하였던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 1888~1963)과는 할아버지가 다른 6촌 형제간이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에 속하여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힘써 이극·안창하·이진산·전덕명 등에게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범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도 관여했다. 대표적으로 임시정부는 1921년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문제를 상정하고자 다양하게 노력했다. 이 때 태평양회의에 한국 문제 상정을 촉구하기 위해 국내의 단체 대표 101명이 서명해 ‘한국인민치 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 太平洋會議書)’를 제출했고 범정도 이에 참여했다.[주 3] 2009년 12월 30일 항일투쟁에 헌신한 범정 장형 선생의 어록비가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가로 3.15m, 세로 3.1m 크기의 장형 선생 어록비에는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3] 종교활동[편집] 만주에서 도산 안창호 등을 만나게 되었다. 입학동기생으로 알게된 김두봉(金枓奉), 장도빈(張道斌)과 함께 당시 보성전문 2대 교주였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가 세운 천도교에 적극 가담하기도 하였지만 민족의식이 강하였던 장형은 1914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이듬해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에 이르렀다.[4] 민족종교운동으로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교단의 중흥을 선포한 단군교는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1914년 5월 백두산 북쪽 산밑에 있는 청파호(靑坡湖) 근방으로 총본사를 이전하여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 30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는데 그중에 장형이 있었다. 광복 후[편집] 광복이후 1946년 국민동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임하고,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교육계에 투신하여 임시정부 주도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참여,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및 이사장 활동, 단국대학교 설립 등 교육계 전반에 열정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5][4] 1947년 11월 1일 정부로부터 학교인가를 받아 같은해 11월 3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58년 백남학원(白南學院,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전신)을 인수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6][7](참고문헌, 獨立有功者功勳錄 4(國家報勳處, 1987) 최후[편집] 1963년 3.1절에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964년 74세로 별세하였다. 장지는 한남동 서울캠퍼스내에 마련되었지만 2007년 단국대학교 이전시 경기도 용인시 단국대학교내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고은의 장편시 만인보에 등장인물로 수록되어 있다.[1][5].[주 4] 신익희와 토지 5만평[편집] 현재 한국에는 2백개가 넘는 4년제 대학들이 있다. 각 대학들마다 설립자가 다르고, 설립한 정신이나 취지도 다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대학들이 자신의 대학이 어떠한 대학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단국대학은 어떠한 대학인지를 살펴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단국대학은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속에서 설립되었다. 우선 설립자인 범정 장형은 독립운동가였다. 장형은 일제식민지시기에 서간도와 국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독립군과 연계되어 활동한 인물이다. 단국대학을 설립한 것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의 독립정신과 관련이 있다. 장형은 해방 후 환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와 함께 이사장으로 국민대학을 운영하였다. 이후 1947년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나자 국민대학과 결별하였다. 신익희의 행동을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의 설립을 추진, 1947년 11월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단국대학은 설립주체나 과정으로 보면, 그 설립정신은 독립정신이었다. 설립자가 독립운동가였고, 또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국대학은 다른 대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국대학만이 갖고 있는 정체성이 있다. 첫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한 대학이라는 점이다. 설립자 장형은 독립운동가였고,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김구가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 이사장을 맡는 등 김구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후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난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단국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둘째는 독립운동가가 세운 대학으로, 독립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대학이라는 점이다.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국민대학·국학대학·신흥대학 등이 설립되었지만, 이들 대학은 모두 없어지거나 재단이 바뀌었다. 독립운동가에 의해 설립되고 독립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대학은 단국대학이 유일하다. 셋째는 민족통일을 대비하는 대학이라는 점이다. 장형은 대학을 설립하면서 남북통일과 통일정부 수립에 기여하기를 염원하였고, 학교의 이름에 그 뜻을 담고자 하였다.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라는 생각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 ‘단국’이란 교명은 남북통일과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8]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단국대학 설립취지서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이라고 하여 1922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관립 경성제국대학 설립에 대응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교육과 민족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민립대학을 설립하려고 한 운동도 있었지만 광복 후 대학을 설립한 주체의 하나는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환국 후, 국내에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1922년 11월 이상재, 현상윤, 한용운, 이승훈, 허헌, 송진우, 장덕수, 이갑성, 남궁훈, 홍덕유 등 각계 인사들은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하고,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0여 명의 대표가 한 민족의 지식욕을 충족시킬 만한 대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므로 민립대학을 설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취지에 따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사업계획을 통과시켰다. 이후 안동, 논산 등에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광복이 되기까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광복후 임시정부는 환국 직후 내무부 산하에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행정연구회에 대학설립을 맡겼다. 신익희가 내무부장으로 그 책임을 맡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하여 '국민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취지아래 대학 설립기성회를 조직, 기성회는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을 고문, 외무부장 조소앙을 명예회장으로 하고, 회장은 신익희가 맡았다. 또한 국내의 교육, 법조, 행정, 언론 등 각계 인사 40명으로 이사진을 구성하였다. 구성한 이사 중 한 사람이 장형이었다. 장형은 독립운동계 인사로 참여하였다. 기성회가 중심이 되어 대학설립을 추진하였다. 기성회에서 실무를 주도한 것은 회장 신익희와 이사 장형이었다. 장형은 군자금을 모집하며 서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로 귀국하여 기성회에 참여하였다. 기성회는 5천만원의 대학설립 기금을 모집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때 장형이 독립운동시절 동지였던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로부터 5만평의 토지를 기증받았고 이를 기본 재산으로 하여 1946년 9월 1일 임시 기성회가 발족(發足)할 수가 있었다. 전후 사정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학의 기성회 측에서는 이후 조희재가 제공하려 했던 토지 5만평에 대한 문제와 장형의 재단 설립에 기여된 활동 및 경위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않아 이때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로써 차후에 발생한 일로 받았던 충격과 서로간에 느꼈던 감정의 차이가 상당히 컸음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장형이 '단국대학'을 설립한 계기와 의도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장형은 임시정부에서 추진한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신익희와 함께 대학을 설립하였으나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고, 이제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 '단국대학'을 설립하게 된 연유이다. 끝내 장형은 맡고 있는 재단의 이사장을 사임하였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을 별도로 설립키로 했다. 범정 장형과 뜻을 함께 한 인물은 범정 선생을 통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경기도 화성의 자산가, 박기홍 선생의 부인인 혜당 조희재 여사였다. 조희재 여사는 광복 후 부군이었던 고 박기홍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장형의 대학 설립에 적극 찬성하며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264만m2(약 80만평 )의 토지를 내놓았다.[9] 장형은 이를 기반으로 대학설립을 추진, 1947년 9월 15일 재단법인 단국대학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재단법인의 설립을 정식 신청하여 1947년 11월 1일 정부의 정식 인가와 승인으로 광복후 최초 정규 4년제 대학의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사실 단국대학 설립은 김구와 관계가 깊다. 장형은 '국내에 들어가 김구를 도우라'는 김홍일의 조언을 듣고, 귀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장형은 김구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고,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후 김구가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사장으로 재정적 지원을 하며, 소장 김구의 뜻에 정성으로 도왔다. 장형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인연으로 김정실과 엄항섭, 양주동과 함께 인재교육에 뜻을 두었다. '단국'이란 교명도 임시정부와 김구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국가수립을 지지한 데서 나왔다. 장형은 대학설립을 추진할 때 뜻을 함께하는 여러 인사들에게 교명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서, '지금 임시정부와 김구가 나서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학교 이름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장도빈, 안호상, 안재홍 등이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한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 남북을 막론하고 단군의 건국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단군의 건국정신을 고취한다는 뜻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 이렇듯이 '단국'이란 교명은 단군에 뿌리를 두자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북통일, 통일국가수립을 열망한 데서 나온 것이다. 즉, '단군'의 건국정신과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의 '단군'과 '애국'이라는 글자를 합하여 단국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지어지게 되었다.[10]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편집] 건국실천원양성소 1기 수업식 기념사진서울 용산구 원효로 원효사(1947년 3월 9일)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당시 교육계에 투신하고 있었던 장형은 김구과 각별한 관계로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던 차에 김구가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사장으로 재정적 지원을 하며, 소장 김구와 함께 운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한편 1946년 초 신익희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것을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6월 23일, 신익희는 한국독립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다. 1947년 7월 이후에는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이탈,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갔다. 그리고 1947년 7월 신익희는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가 되었다. 즉,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연합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던 장형은 신익희와는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함께 이을 수 있는 동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주 5] 당시 장형은 국민대학의 이사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사장 직함을 내던지고 신익희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결국 장형은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을 별도로 설립키로 했다. 당시 박기홍(朴基鴻, 장훈보통학교(長薰普通學校) 전 이사장)의 미망인였던 조희재 여사가 이에 적극 찬동하고, 80만평의 토지를 기증하였다. 장형은 이를 기반으로 대학설립을 추진, 1947년 11월 1일 정식 설립인가를 받고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에 참여한 장형은 경험 등이 광복후 최초 정규4년제 대학으로 기록된 단국대학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이러던 차에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여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 원효사는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11][12][13]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대해서는 건국실천원양성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단국대학 설립[편집] 단국대학 설립 시 모습. 앞줄 김구(흰옷)와 설립자 장형, 뒷줄 장도빈(右)과 설립자 조희재의 장녀 박정숙 (개교일 : 1947.11.3)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후 1946년 8월 서북인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동지회(國民同志會)의 회장에 피선이 되고, 1947년 11월 1일 정부에 정식 인가를 받아 1947년 11월 3일 단국대학(檀國大學)을 설립,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1941년 5월 25일 조선공업기술학원으로 개교하여 1947년 2월 8일 백남중학교 6년제로 변경되고 1950년 6월 1일 백남중학교와 백남공업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운영되던 학교법인 백남학원(白南學院)이 경영난에 봉착한 것을 알고 1958년 10월 20일 경영권을 인수하여 같은해 11월 12일 전격 병합하고 이사장이 되었다.[14][15](단국대학교 홈페이지 참조) 장형은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민족 자본가들과 접촉, 모금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는데 단국대학교 설립자인 혜당(惠堂) 조희재(趙喜在, 1892.2.12 - 1947.11.3) 여사의 부군인 박기홍(朴基鴻)과의 오랜 친구로 친분관계를 떠나 지사적(志士的) 신의를 바탕으로 육영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조희재 여사의 뜻이 합하여 여사의 사재와 뜻있는 독지가들의 자산을 기부 받아 대학 설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단국대학교의 창학정신은 설립자 장형의 민족애와 조국애를 근본으로 한다.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범정 장형 선생이나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박기홍 선생의 유지를 성심껏 받든 혜당 조희재 여사는 대학을 세우면서 그 기본 정신을 민족애와 조국애에 두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정통성의 한 가운데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범정도 일찍이 대종교(大倧敎)의 정신을 지키는데 힘썼는데 이는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민족의 얼을 지키겠다는 신념에서였다. 광복은 되었으나 열강에 의하여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지켜본 장형은 젊은이에게 민족의 동질성을 끝까지 지켜가도록 교육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신념에서 교명을 "단군(檀君)과 애국(愛國)"에서 글자를 가져와 "단국(檀國)"으로 하고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대학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정신으로 구국, 자주, 자립(救國, 自主, 自立)을 내세웠다. 어떠한 경우라도 민족정통성에 의한 나라를 세우고 지켜가겠다는 신념을 가지며, 스스로가 투철한 주인정신을 가지고 행동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굳건히 서는 인물을 육성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단국대학교 홈페이지 설립자 소개 참조) 따라서 단국대학교의 창학 정신은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구국, 자주, 자립이다. 구국은 국가관을, 자주는 민족관을, 자립은 세계관을 표상하고 있다. 장형은 단국대학교의 설립일을 1947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였다. 가족[편집] 아들 : 장충식(張忠植) 중국 천진(天津)에서 출생, 호 중재(中齊), 단국대학교 학장, 총장, 이사장 역임) 손자 : 장호성, 단국대학교 총장 같이 보기[편집] 조희재 박기홍 장충식 주해[편집] ↑ 독립운동가 장형(張炯)은 평북 용천 사람이다. 1909년부터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가서 이극(李極)·안창하(安昌夏)·이진산(李震山)·전덕명(全德明) 등에게도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이극을 통하여 전덕원(全德元)·오동진(吳東振)·오광선(吳光鮮) 등에게도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수차 투옥되었다. 그후에도 현금과 패물 등을 모집하여 송병조(宋秉祚)목사를 통해 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2면, 출처 : 국가보훈처) ↑ 용천은 신의주와 이웃하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지역으로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이 강했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일제강점기동안에 끊이지 않고 항일운동이 이어졌다. ↑ 박성순 단국대 교양기초교육원 교수는 “독립운동 시기 범정은 ‘바람의 독립군’이었다”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간난(艱難, 괴롭고 고생스러움)을 무릅쓰고 만주와 국내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범정의 애국심은 이제 우리가 제대로 선양(宣揚,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함)해야 할 위대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2] ↑ 건국훈장(建國勳章)은 전체 5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조국의 독립과 건국에 공로가 있는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통령령 제82호에 의하여 1949년 4월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 공포되면서 상훈제도가 실시되었다. 1963년 12월 법률 제1519호로 지금까지 개별규정으로 시행되어온 각종 훈·포장령(勳·褒章令)을 통폐합한 「상훈법」을 제정하였으며, 1967년 2월에는 대통령령 제2929호로 「상훈법시행령」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 「상훈법시행령」에서는 기존 건국공로훈장의 등급별 명칭을 개정하였는데, 건국공로훈장중장(建國功勞勳章重章)을 건국훈장대한민국장(建國勳章大韓民國章)으로, 건국공로훈장복장(建國功勞勳章複章)을 건국훈장대통령장(建國勳章大統領章)으로, 건국공로훈장단장(建國功勞勳章單章)을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으로 칭하게 되었다.그 뒤 「상훈법」은 1971년 1월 법률 제2282호로 또다시 개정된 바 있으며, 현행법은 1973년 1월 법률 제2447호로 전문이 개정되었다가 1990년 1월 13일 상훈법을 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내용은 건국훈장대한민국장·건국훈장대통령장·건국훈장독립장·건국훈장애국장·건국훈장애족장 등 5등급으로 되어 있다. 범은 장형선생이 받은 '건국훈장국민장'은 1963년에 받을 당시에는 '건국훈장국민장'이었지만 현재는 '건국훈장독립장'으로 되어 있다.(네이버 지식사전 참조) ↑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으로 이뤄진 단체지만 완전한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조직의 달인' 신익희가 김구 쪽에서 이승만 쪽으로 줄을 바꾼 것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신익희가 이승만과 결별하며 유림측에 합작을 청했을 때 유림측에서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호통을 들은 일이나(1946년 8월 4일 일기) 신익희가 자유신문 사장이 되어 김구를 고문으로 내세운 것을 김구가 정면 반박한 일이(1946년 11월 23일 일기) 모두 이 '변절'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해방일기, 김기협, 너머북스 439p 참조) 각주[편집] ↑ 가 나 “단국대, 개교 65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대학신문. 2012년 10월 30일. 2013년 8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독립운동가가 세운 국내 유일의 민족사학 자부심 대학저널(2012-12-03) 기사참조 ↑ 독립기념관에 장형 선생 어록비 Archived 2014년 2월 19일 - 웨이백 머신 이준호기자, 한국일보(2009/12/29) 기사내용 참조 ↑ 가 나 “중앙일보 칼럼-도올 고함(孤喊), 미션 임파서블 《한한대사전》”. 중앙일보. 2008년 12월 24일. 2010년 6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가 나 “백범과 나의 아버지”. 경제풍월. 2013년 7월 30일. 2013년 8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장형(張炯)”.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2005년 11월 30일. 2011년 5월 15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결성장씨(結城張氏) 카페 장형에 관한 내용참조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단국대학교(한시준 학술논문 동양학 제47집 2010년 pp.303-32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참조 ↑ 1953년 화폐개혁 당시의 가치로 1억환이며, 넓이 단위로는 264만 제곱미터로 79.86만 평, 약 80만 평을 의미함(네이버 단위변환) ↑ ““독립정신 계승한 단국대, 명문사학의 길을 걸어오다””. 대학저널. 2012년 12월 3일. 2013년 8월 5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建實(건실)」解散(해산), 1949.08.25, 경향신문2면 사회 기사(뉴스), 建國實踐員(건국실천원) 養成所解散(양성소해산), 1949.08.25, 동아일보2면 사회 기사(뉴스) 참조 ↑ 建國實踐員養成所(건국실천원양성소) 弘益大財團(홍익대재단)서 經營(경영), 1949.09.25, 경향신문2면 사회 기사(뉴스) 참조 ↑ 서울대 법대 학장 지낸 민법학자 진승록 대한변협신문 기사(2015.02.09) 참조 ↑ 백남(白南)은 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박사(1914~2008)의 아호이다. ↑ 한양대, 백남 김연준 탄생 100주년 기념전 개최 아시아투데이(2014.10.20.) 기사참조 vdeh학교법인 단국대학학교 단국대학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기관 단국대학교병원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부속치과병원 석주선기념박물관 이사장 1~4,6대 장형 5,7~13대 박정숙 14대 이용우 15대 장병규 16~17, 23~24대 김학준 18~20, 25대 장충식 21대 박석무 22대 박유철 총/학장단과대학기(학장) 1 장도빈 2 김정실 3 이선근 (학장서리 이종흡) 4 이훈구 5 윤택중 6 고병국 7 김기석 8 김용진 9 장충식 종합대학기(총장) 1~7 장충식 8 윤홍로 9 조장환 10 김도수 11 김승국 12 이용우 13 김승국 14 권기홍 15 장호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형_(1889년)&oldid=24249653" 분류: 단국대학교1889년 태어남1964년 죽음한국의 독립운동가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북로군정서대한민국의 교육인대한민국의 대종교인대학 설립자결성 장씨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0일 (월) 13: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장형 (1889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형 (1889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형(張炯, 1889년 1월 18일 ~ 1964년 12월 30일)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다. 본관은 결성(結城)이며,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다. 호는 범은(梵隱) 또는 범정(梵亭)이고 항일독립운동 시에는 장세담(張世淡)으로 활동하였다. [주 1] 목차 1 생애 1.1 출생 1.2 독립투쟁 1.3 종교활동 1.4 광복 후 1.5 최후 2 신익희와 토지 5만평 3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 4 단국대학 설립 5 가족 6 같이 보기 7 주해 8 각주 생애[편집] 출생[편집] 장형은 1889년(고종 26) 평안북도 용천[주 2]에서 태어났다. 부친 장창익(張昌翼)은 진사시를 거친 유학자였으나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조선이 패망하자 한의사로 전업을 하였다. 장형은 1905년 사서삼경을 마치고 그해 고향의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를 입학, 190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민족의식이 강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1]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2년제 전문부)에 재학하던 중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피탈되자 1911년 학업을 중단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독립투쟁[편집] 처음 맡은 임무는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민족 자본가들과 접촉, 모금활동을 펼치는 일이었고 그때 민족주의적 항일 인사들을 비롯하여 뜻있는 많은 유지들과 교분을 쌓았다. 1914년 구국제민을 기치로 생겨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이듬해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에 이르렀다. 본관은 결성(結城)으로 같은 집안의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리며 광복후 교육자와 역사학자로 활동하였던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 1888~1963)과는 할아버지가 다른 6촌 형제간이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에 속하여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힘써 이극·안창하·이진산·전덕명 등에게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범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도 관여했다. 대표적으로 임시정부는 1921년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문제를 상정하고자 다양하게 노력했다. 이 때 태평양회의에 한국 문제 상정을 촉구하기 위해 국내의 단체 대표 101명이 서명해 ‘한국인민치 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 太平洋會議書)’를 제출했고 범정도 이에 참여했다.[주 3] 2009년 12월 30일 항일투쟁에 헌신한 범정 장형 선생의 어록비가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가로 3.15m, 세로 3.1m 크기의 장형 선생 어록비에는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3] 종교활동[편집] 만주에서 도산 안창호 등을 만나게 되었다. 입학동기생으로 알게된 김두봉(金枓奉), 장도빈(張道斌)과 함께 당시 보성전문 2대 교주였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가 세운 천도교에 적극 가담하기도 하였지만 민족의식이 강하였던 장형은 1914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이듬해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에 이르렀다.[4] 민족종교운동으로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교단의 중흥을 선포한 단군교는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1914년 5월 백두산 북쪽 산밑에 있는 청파호(靑坡湖) 근방으로 총본사를 이전하여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 30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는데 그중에 장형이 있었다. 광복 후[편집] 광복이후 1946년 국민동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임하고,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교육계에 투신하여 임시정부 주도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참여,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및 이사장 활동, 단국대학교 설립 등 교육계 전반에 열정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5][4] 1947년 11월 1일 정부로부터 학교인가를 받아 같은해 11월 3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58년 백남학원(白南學院,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전신)을 인수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6][7](참고문헌, 獨立有功者功勳錄 4(國家報勳處, 1987) 최후[편집] 1963년 3.1절에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964년 74세로 별세하였다. 장지는 한남동 서울캠퍼스내에 마련되었지만 2007년 단국대학교 이전시 경기도 용인시 단국대학교내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고은의 장편시 만인보에 등장인물로 수록되어 있다.[1][5].[주 4] 신익희와 토지 5만평[편집] 현재 한국에는 2백개가 넘는 4년제 대학들이 있다. 각 대학들마다 설립자가 다르고, 설립한 정신이나 취지도 다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대학들이 자신의 대학이 어떠한 대학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단국대학은 어떠한 대학인지를 살펴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단국대학은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속에서 설립되었다. 우선 설립자인 범정 장형은 독립운동가였다. 장형은 일제식민지시기에 서간도와 국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독립군과 연계되어 활동한 인물이다. 단국대학을 설립한 것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의 독립정신과 관련이 있다. 장형은 해방 후 환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와 함께 이사장으로 국민대학을 운영하였다. 이후 1947년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나자 국민대학과 결별하였다. 신익희의 행동을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의 설립을 추진, 1947년 11월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단국대학은 설립주체나 과정으로 보면, 그 설립정신은 독립정신이었다. 설립자가 독립운동가였고, 또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국대학은 다른 대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국대학만이 갖고 있는 정체성이 있다. 첫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한 대학이라는 점이다. 설립자 장형은 독립운동가였고,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김구가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 이사장을 맡는 등 김구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후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난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단국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둘째는 독립운동가가 세운 대학으로, 독립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대학이라는 점이다.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국민대학·국학대학·신흥대학 등이 설립되었지만, 이들 대학은 모두 없어지거나 재단이 바뀌었다. 독립운동가에 의해 설립되고 독립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대학은 단국대학이 유일하다. 셋째는 민족통일을 대비하는 대학이라는 점이다. 장형은 대학을 설립하면서 남북통일과 통일정부 수립에 기여하기를 염원하였고, 학교의 이름에 그 뜻을 담고자 하였다.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라는 생각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 ‘단국’이란 교명은 남북통일과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8]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단국대학 설립취지서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이라고 하여 1922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관립 경성제국대학 설립에 대응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교육과 민족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민립대학을 설립하려고 한 운동도 있었지만 광복 후 대학을 설립한 주체의 하나는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환국 후, 국내에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1922년 11월 이상재, 현상윤, 한용운, 이승훈, 허헌, 송진우, 장덕수, 이갑성, 남궁훈, 홍덕유 등 각계 인사들은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하고,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0여 명의 대표가 한 민족의 지식욕을 충족시킬 만한 대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므로 민립대학을 설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취지에 따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사업계획을 통과시켰다. 이후 안동, 논산 등에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광복이 되기까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광복후 임시정부는 환국 직후 내무부 산하에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행정연구회에 대학설립을 맡겼다. 신익희가 내무부장으로 그 책임을 맡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하여 '국민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취지아래 대학 설립기성회를 조직, 기성회는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을 고문, 외무부장 조소앙을 명예회장으로 하고, 회장은 신익희가 맡았다. 또한 국내의 교육, 법조, 행정, 언론 등 각계 인사 40명으로 이사진을 구성하였다. 구성한 이사 중 한 사람이 장형이었다. 장형은 독립운동계 인사로 참여하였다. 기성회가 중심이 되어 대학설립을 추진하였다. 기성회에서 실무를 주도한 것은 회장 신익희와 이사 장형이었다. 장형은 군자금을 모집하며 서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로 귀국하여 기성회에 참여하였다. 기성회는 5천만원의 대학설립 기금을 모집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때 장형이 독립운동시절 동지였던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로부터 5만평의 토지를 기증받았고 이를 기본 재산으로 하여 1946년 9월 1일 임시 기성회가 발족(發足)할 수가 있었다. 전후 사정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학의 기성회 측에서는 이후 조희재가 제공하려 했던 토지 5만평에 대한 문제와 장형의 재단 설립에 기여된 활동 및 경위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않아 이때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로써 차후에 발생한 일로 받았던 충격과 서로간에 느꼈던 감정의 차이가 상당히 컸음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장형이 '단국대학'을 설립한 계기와 의도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장형은 임시정부에서 추진한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신익희와 함께 대학을 설립하였으나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고, 이제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 '단국대학'을 설립하게 된 연유이다. 끝내 장형은 맡고 있는 재단의 이사장을 사임하였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을 별도로 설립키로 했다. 범정 장형과 뜻을 함께 한 인물은 범정 선생을 통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경기도 화성의 자산가, 박기홍 선생의 부인인 혜당 조희재 여사였다. 조희재 여사는 광복 후 부군이었던 고 박기홍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장형의 대학 설립에 적극 찬성하며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264만m2(약 80만평 )의 토지를 내놓았다.[9] 장형은 이를 기반으로 대학설립을 추진, 1947년 9월 15일 재단법인 단국대학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재단법인의 설립을 정식 신청하여 1947년 11월 1일 정부의 정식 인가와 승인으로 광복후 최초 정규 4년제 대학의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사실 단국대학 설립은 김구와 관계가 깊다. 장형은 '국내에 들어가 김구를 도우라'는 김홍일의 조언을 듣고, 귀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장형은 김구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고,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후 김구가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사장으로 재정적 지원을 하며, 소장 김구의 뜻에 정성으로 도왔다. 장형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인연으로 김정실과 엄항섭, 양주동과 함께 인재교육에 뜻을 두었다. '단국'이란 교명도 임시정부와 김구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국가수립을 지지한 데서 나왔다. 장형은 대학설립을 추진할 때 뜻을 함께하는 여러 인사들에게 교명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서, '지금 임시정부와 김구가 나서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학교 이름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장도빈, 안호상, 안재홍 등이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한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 남북을 막론하고 단군의 건국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단군의 건국정신을 고취한다는 뜻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 이렇듯이 '단국'이란 교명은 단군에 뿌리를 두자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북통일, 통일국가수립을 열망한 데서 나온 것이다. 즉, '단군'의 건국정신과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의 '단군'과 '애국'이라는 글자를 합하여 단국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지어지게 되었다.[10]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편집] 건국실천원양성소 1기 수업식 기념사진서울 용산구 원효로 원효사(1947년 3월 9일)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당시 교육계에 투신하고 있었던 장형은 김구과 각별한 관계로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던 차에 김구가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사장으로 재정적 지원을 하며, 소장 김구와 함께 운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한편 1946년 초 신익희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것을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6월 23일, 신익희는 한국독립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다. 1947년 7월 이후에는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이탈,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갔다. 그리고 1947년 7월 신익희는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가 되었다. 즉,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연합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던 장형은 신익희와는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함께 이을 수 있는 동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주 5] 당시 장형은 국민대학의 이사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사장 직함을 내던지고 신익희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결국 장형은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을 별도로 설립키로 했다. 당시 박기홍(朴基鴻, 장훈보통학교(長薰普通學校) 전 이사장)의 미망인였던 조희재 여사가 이에 적극 찬동하고, 80만평의 토지를 기증하였다. 장형은 이를 기반으로 대학설립을 추진, 1947년 11월 1일 정식 설립인가를 받고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에 참여한 장형은 경험 등이 광복후 최초 정규4년제 대학으로 기록된 단국대학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이러던 차에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여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 원효사는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11][12][13]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대해서는 건국실천원양성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단국대학 설립[편집] 단국대학 설립 시 모습. 앞줄 김구(흰옷)와 설립자 장형, 뒷줄 장도빈(右)과 설립자 조희재의 장녀 박정숙 (개교일 : 1947.11.3)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후 1946년 8월 서북인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동지회(國民同志會)의 회장에 피선이 되고, 1947년 11월 1일 정부에 정식 인가를 받아 1947년 11월 3일 단국대학(檀國大學)을 설립,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1941년 5월 25일 조선공업기술학원으로 개교하여 1947년 2월 8일 백남중학교 6년제로 변경되고 1950년 6월 1일 백남중학교와 백남공업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운영되던 학교법인 백남학원(白南學院)이 경영난에 봉착한 것을 알고 1958년 10월 20일 경영권을 인수하여 같은해 11월 12일 전격 병합하고 이사장이 되었다.[14][15](단국대학교 홈페이지 참조) 장형은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민족 자본가들과 접촉, 모금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는데 단국대학교 설립자인 혜당(惠堂) 조희재(趙喜在, 1892.2.12 - 1947.11.3) 여사의 부군인 박기홍(朴基鴻)과의 오랜 친구로 친분관계를 떠나 지사적(志士的) 신의를 바탕으로 육영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조희재 여사의 뜻이 합하여 여사의 사재와 뜻있는 독지가들의 자산을 기부 받아 대학 설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단국대학교의 창학정신은 설립자 장형의 민족애와 조국애를 근본으로 한다.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범정 장형 선생이나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박기홍 선생의 유지를 성심껏 받든 혜당 조희재 여사는 대학을 세우면서 그 기본 정신을 민족애와 조국애에 두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정통성의 한 가운데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범정도 일찍이 대종교(大倧敎)의 정신을 지키는데 힘썼는데 이는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민족의 얼을 지키겠다는 신념에서였다. 광복은 되었으나 열강에 의하여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지켜본 장형은 젊은이에게 민족의 동질성을 끝까지 지켜가도록 교육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신념에서 교명을 "단군(檀君)과 애국(愛國)"에서 글자를 가져와 "단국(檀國)"으로 하고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대학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정신으로 구국, 자주, 자립(救國, 自主, 自立)을 내세웠다. 어떠한 경우라도 민족정통성에 의한 나라를 세우고 지켜가겠다는 신념을 가지며, 스스로가 투철한 주인정신을 가지고 행동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굳건히 서는 인물을 육성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단국대학교 홈페이지 설립자 소개 참조) 따라서 단국대학교의 창학 정신은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구국, 자주, 자립이다. 구국은 국가관을, 자주는 민족관을, 자립은 세계관을 표상하고 있다. 장형은 단국대학교의 설립일을 1947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였다. 가족[편집] 아들 : 장충식(張忠植) 중국 천진(天津)에서 출생, 호 중재(中齊), 단국대학교 학장, 총장, 이사장 역임) 손자 : 장호성, 단국대학교 총장 같이 보기[편집] 조희재 박기홍 장충식 주해[편집] ↑ 독립운동가 장형(張炯)은 평북 용천 사람이다. 1909년부터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가서 이극(李極)·안창하(安昌夏)·이진산(李震山)·전덕명(全德明) 등에게도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이극을 통하여 전덕원(全德元)·오동진(吳東振)·오광선(吳光鮮) 등에게도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수차 투옥되었다. 그후에도 현금과 패물 등을 모집하여 송병조(宋秉祚)목사를 통해 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2면, 출처 : 국가보훈처) ↑ 용천은 신의주와 이웃하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지역으로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이 강했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일제강점기동안에 끊이지 않고 항일운동이 이어졌다. ↑ 박성순 단국대 교양기초교육원 교수는 “독립운동 시기 범정은 ‘바람의 독립군’이었다”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간난(艱難, 괴롭고 고생스러움)을 무릅쓰고 만주와 국내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범정의 애국심은 이제 우리가 제대로 선양(宣揚,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함)해야 할 위대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2] ↑ 건국훈장(建國勳章)은 전체 5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조국의 독립과 건국에 공로가 있는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통령령 제82호에 의하여 1949년 4월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 공포되면서 상훈제도가 실시되었다. 1963년 12월 법률 제1519호로 지금까지 개별규정으로 시행되어온 각종 훈·포장령(勳·褒章令)을 통폐합한 「상훈법」을 제정하였으며, 1967년 2월에는 대통령령 제2929호로 「상훈법시행령」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 「상훈법시행령」에서는 기존 건국공로훈장의 등급별 명칭을 개정하였는데, 건국공로훈장중장(建國功勞勳章重章)을 건국훈장대한민국장(建國勳章大韓民國章)으로, 건국공로훈장복장(建國功勞勳章複章)을 건국훈장대통령장(建國勳章大統領章)으로, 건국공로훈장단장(建國功勞勳章單章)을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으로 칭하게 되었다.그 뒤 「상훈법」은 1971년 1월 법률 제2282호로 또다시 개정된 바 있으며, 현행법은 1973년 1월 법률 제2447호로 전문이 개정되었다가 1990년 1월 13일 상훈법을 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내용은 건국훈장대한민국장·건국훈장대통령장·건국훈장독립장·건국훈장애국장·건국훈장애족장 등 5등급으로 되어 있다. 범은 장형선생이 받은 '건국훈장국민장'은 1963년에 받을 당시에는 '건국훈장국민장'이었지만 현재는 '건국훈장독립장'으로 되어 있다.(네이버 지식사전 참조) ↑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으로 이뤄진 단체지만 완전한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조직의 달인' 신익희가 김구 쪽에서 이승만 쪽으로 줄을 바꾼 것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신익희가 이승만과 결별하며 유림측에 합작을 청했을 때 유림측에서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호통을 들은 일이나(1946년 8월 4일 일기) 신익희가 자유신문 사장이 되어 김구를 고문으로 내세운 것을 김구가 정면 반박한 일이(1946년 11월 23일 일기) 모두 이 '변절'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해방일기, 김기협, 너머북스 439p 참조) 각주[편집] ↑ 가 나 “단국대, 개교 65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대학신문. 2012년 10월 30일. 2013년 8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독립운동가가 세운 국내 유일의 민족사학 자부심 대학저널(2012-12-03) 기사참조 ↑ 독립기념관에 장형 선생 어록비 Archived 2014년 2월 19일 - 웨이백 머신 이준호기자, 한국일보(2009/12/29) 기사내용 참조 ↑ 가 나 “중앙일보 칼럼-도올 고함(孤喊), 미션 임파서블 《한한대사전》”. 중앙일보. 2008년 12월 24일. 2010년 6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가 나 “백범과 나의 아버지”. 경제풍월. 2013년 7월 30일. 2013년 8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장형(張炯)”.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2005년 11월 30일. 2011년 5월 15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결성장씨(結城張氏) 카페 장형에 관한 내용참조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단국대학교(한시준 학술논문 동양학 제47집 2010년 pp.303-32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참조 ↑ 1953년 화폐개혁 당시의 가치로 1억환이며, 넓이 단위로는 264만 제곱미터로 79.86만 평, 약 80만 평을 의미함(네이버 단위변환) ↑ ““독립정신 계승한 단국대, 명문사학의 길을 걸어오다””. 대학저널. 2012년 12월 3일. 2013년 8월 5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建實(건실)」解散(해산), 1949.08.25, 경향신문2면 사회 기사(뉴스), 建國實踐員(건국실천원) 養成所解散(양성소해산), 1949.08.25, 동아일보2면 사회 기사(뉴스) 참조 ↑ 建國實踐員養成所(건국실천원양성소) 弘益大財團(홍익대재단)서 經營(경영), 1949.09.25, 경향신문2면 사회 기사(뉴스) 참조 ↑ 서울대 법대 학장 지낸 민법학자 진승록 대한변협신문 기사(2015.02.09) 참조 ↑ 백남(白南)은 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박사(1914~2008)의 아호이다. ↑ 한양대, 백남 김연준 탄생 100주년 기념전 개최 아시아투데이(2014.10.20.) 기사참조 vdeh학교법인 단국대학학교 단국대학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기관 단국대학교병원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부속치과병원 석주선기념박물관 이사장 1~4,6대 장형 5,7~13대 박정숙 14대 이용우 15대 장병규 16~17, 23~24대 김학준 18~20, 25대 장충식 21대 박석무 22대 박유철 총/학장단과대학기(학장) 1 장도빈 2 김정실 3 이선근 (학장서리 이종흡) 4 이훈구 5 윤택중 6 고병국 7 김기석 8 김용진 9 장충식 종합대학기(총장) 1~7 장충식 8 윤홍로 9 조장환 10 김도수 11 김승국 12 이용우 13 김승국 14 권기홍 15 장호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형_(1889년)&oldid=24249653" 분류: 단국대학교1889년 태어남1964년 죽음한국의 독립운동가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북로군정서대한민국의 교육인대한민국의 대종교인대학 설립자결성 장씨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0일 (월) 13: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장형 (1889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형 (1889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형(張炯, 1889년 1월 18일 ~ 1964년 12월 30일)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다. 본관은 결성(結城)이며,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다. 호는 범은(梵隱) 또는 범정(梵亭)이고 항일독립운동 시에는 장세담(張世淡)으로 활동하였다. [주 1] 목차 1 생애 1.1 출생 1.2 독립투쟁 1.3 종교활동 1.4 광복 후 1.5 최후 2 신익희와 토지 5만평 3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 4 단국대학 설립 5 가족 6 같이 보기 7 주해 8 각주 생애[편집] 출생[편집] 장형은 1889년(고종 26) 평안북도 용천[주 2]에서 태어났다. 부친 장창익(張昌翼)은 진사시를 거친 유학자였으나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조선이 패망하자 한의사로 전업을 하였다. 장형은 1905년 사서삼경을 마치고 그해 고향의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를 입학, 190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민족의식이 강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1]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2년제 전문부)에 재학하던 중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피탈되자 1911년 학업을 중단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독립투쟁[편집] 처음 맡은 임무는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민족 자본가들과 접촉, 모금활동을 펼치는 일이었고 그때 민족주의적 항일 인사들을 비롯하여 뜻있는 많은 유지들과 교분을 쌓았다. 1914년 구국제민을 기치로 생겨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이듬해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에 이르렀다. 본관은 결성(結城)으로 같은 집안의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리며 광복후 교육자와 역사학자로 활동하였던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 1888~1963)과는 할아버지가 다른 6촌 형제간이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에 속하여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힘써 이극·안창하·이진산·전덕명 등에게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범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도 관여했다. 대표적으로 임시정부는 1921년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문제를 상정하고자 다양하게 노력했다. 이 때 태평양회의에 한국 문제 상정을 촉구하기 위해 국내의 단체 대표 101명이 서명해 ‘한국인민치 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 太平洋會議書)’를 제출했고 범정도 이에 참여했다.[주 3] 2009년 12월 30일 항일투쟁에 헌신한 범정 장형 선생의 어록비가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가로 3.15m, 세로 3.1m 크기의 장형 선생 어록비에는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3] 종교활동[편집] 만주에서 도산 안창호 등을 만나게 되었다. 입학동기생으로 알게된 김두봉(金枓奉), 장도빈(張道斌)과 함께 당시 보성전문 2대 교주였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가 세운 천도교에 적극 가담하기도 하였지만 민족의식이 강하였던 장형은 1914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이듬해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에 이르렀다.[4] 민족종교운동으로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교단의 중흥을 선포한 단군교는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1914년 5월 백두산 북쪽 산밑에 있는 청파호(靑坡湖) 근방으로 총본사를 이전하여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 30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는데 그중에 장형이 있었다. 광복 후[편집] 광복이후 1946년 국민동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임하고,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교육계에 투신하여 임시정부 주도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참여,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및 이사장 활동, 단국대학교 설립 등 교육계 전반에 열정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5][4] 1947년 11월 1일 정부로부터 학교인가를 받아 같은해 11월 3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58년 백남학원(白南學院,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전신)을 인수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6][7](참고문헌, 獨立有功者功勳錄 4(國家報勳處, 1987) 최후[편집] 1963년 3.1절에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964년 74세로 별세하였다. 장지는 한남동 서울캠퍼스내에 마련되었지만 2007년 단국대학교 이전시 경기도 용인시 단국대학교내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고은의 장편시 만인보에 등장인물로 수록되어 있다.[1][5].[주 4] 신익희와 토지 5만평[편집] 현재 한국에는 2백개가 넘는 4년제 대학들이 있다. 각 대학들마다 설립자가 다르고, 설립한 정신이나 취지도 다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대학들이 자신의 대학이 어떠한 대학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단국대학은 어떠한 대학인지를 살펴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단국대학은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속에서 설립되었다. 우선 설립자인 범정 장형은 독립운동가였다. 장형은 일제식민지시기에 서간도와 국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독립군과 연계되어 활동한 인물이다. 단국대학을 설립한 것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의 독립정신과 관련이 있다. 장형은 해방 후 환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와 함께 이사장으로 국민대학을 운영하였다. 이후 1947년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나자 국민대학과 결별하였다. 신익희의 행동을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의 설립을 추진, 1947년 11월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단국대학은 설립주체나 과정으로 보면, 그 설립정신은 독립정신이었다. 설립자가 독립운동가였고, 또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국대학은 다른 대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국대학만이 갖고 있는 정체성이 있다. 첫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한 대학이라는 점이다. 설립자 장형은 독립운동가였고,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김구가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 이사장을 맡는 등 김구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후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난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단국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둘째는 독립운동가가 세운 대학으로, 독립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대학이라는 점이다.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국민대학·국학대학·신흥대학 등이 설립되었지만, 이들 대학은 모두 없어지거나 재단이 바뀌었다. 독립운동가에 의해 설립되고 독립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대학은 단국대학이 유일하다. 셋째는 민족통일을 대비하는 대학이라는 점이다. 장형은 대학을 설립하면서 남북통일과 통일정부 수립에 기여하기를 염원하였고, 학교의 이름에 그 뜻을 담고자 하였다.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라는 생각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 ‘단국’이란 교명은 남북통일과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8]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단국대학 설립취지서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이라고 하여 1922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관립 경성제국대학 설립에 대응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교육과 민족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민립대학을 설립하려고 한 운동도 있었지만 광복 후 대학을 설립한 주체의 하나는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환국 후, 국내에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1922년 11월 이상재, 현상윤, 한용운, 이승훈, 허헌, 송진우, 장덕수, 이갑성, 남궁훈, 홍덕유 등 각계 인사들은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하고,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0여 명의 대표가 한 민족의 지식욕을 충족시킬 만한 대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므로 민립대학을 설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취지에 따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사업계획을 통과시켰다. 이후 안동, 논산 등에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광복이 되기까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광복후 임시정부는 환국 직후 내무부 산하에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행정연구회에 대학설립을 맡겼다. 신익희가 내무부장으로 그 책임을 맡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하여 '국민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취지아래 대학 설립기성회를 조직, 기성회는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을 고문, 외무부장 조소앙을 명예회장으로 하고, 회장은 신익희가 맡았다. 또한 국내의 교육, 법조, 행정, 언론 등 각계 인사 40명으로 이사진을 구성하였다. 구성한 이사 중 한 사람이 장형이었다. 장형은 독립운동계 인사로 참여하였다. 기성회가 중심이 되어 대학설립을 추진하였다. 기성회에서 실무를 주도한 것은 회장 신익희와 이사 장형이었다. 장형은 군자금을 모집하며 서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로 귀국하여 기성회에 참여하였다. 기성회는 5천만원의 대학설립 기금을 모집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때 장형이 독립운동시절 동지였던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로부터 5만평의 토지를 기증받았고 이를 기본 재산으로 하여 1946년 9월 1일 임시 기성회가 발족(發足)할 수가 있었다. 전후 사정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학의 기성회 측에서는 이후 조희재가 제공하려 했던 토지 5만평에 대한 문제와 장형의 재단 설립에 기여된 활동 및 경위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않아 이때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로써 차후에 발생한 일로 받았던 충격과 서로간에 느꼈던 감정의 차이가 상당히 컸음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장형이 '단국대학'을 설립한 계기와 의도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장형은 임시정부에서 추진한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신익희와 함께 대학을 설립하였으나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고, 이제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 '단국대학'을 설립하게 된 연유이다. 끝내 장형은 맡고 있는 재단의 이사장을 사임하였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을 별도로 설립키로 했다. 범정 장형과 뜻을 함께 한 인물은 범정 선생을 통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경기도 화성의 자산가, 박기홍 선생의 부인인 혜당 조희재 여사였다. 조희재 여사는 광복 후 부군이었던 고 박기홍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장형의 대학 설립에 적극 찬성하며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264만m2(약 80만평 )의 토지를 내놓았다.[9] 장형은 이를 기반으로 대학설립을 추진, 1947년 9월 15일 재단법인 단국대학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재단법인의 설립을 정식 신청하여 1947년 11월 1일 정부의 정식 인가와 승인으로 광복후 최초 정규 4년제 대학의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사실 단국대학 설립은 김구와 관계가 깊다. 장형은 '국내에 들어가 김구를 도우라'는 김홍일의 조언을 듣고, 귀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장형은 김구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고,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후 김구가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사장으로 재정적 지원을 하며, 소장 김구의 뜻에 정성으로 도왔다. 장형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인연으로 김정실과 엄항섭, 양주동과 함께 인재교육에 뜻을 두었다. '단국'이란 교명도 임시정부와 김구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국가수립을 지지한 데서 나왔다. 장형은 대학설립을 추진할 때 뜻을 함께하는 여러 인사들에게 교명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서, '지금 임시정부와 김구가 나서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학교 이름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장도빈, 안호상, 안재홍 등이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한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 남북을 막론하고 단군의 건국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단군의 건국정신을 고취한다는 뜻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 이렇듯이 '단국'이란 교명은 단군에 뿌리를 두자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북통일, 통일국가수립을 열망한 데서 나온 것이다. 즉, '단군'의 건국정신과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의 '단군'과 '애국'이라는 글자를 합하여 단국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지어지게 되었다.[10]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편집] 건국실천원양성소 1기 수업식 기념사진서울 용산구 원효로 원효사(1947년 3월 9일)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당시 교육계에 투신하고 있었던 장형은 김구과 각별한 관계로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던 차에 김구가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사장으로 재정적 지원을 하며, 소장 김구와 함께 운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한편 1946년 초 신익희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것을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6월 23일, 신익희는 한국독립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다. 1947년 7월 이후에는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이탈,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갔다. 그리고 1947년 7월 신익희는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가 되었다. 즉,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연합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던 장형은 신익희와는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함께 이을 수 있는 동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주 5] 당시 장형은 국민대학의 이사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사장 직함을 내던지고 신익희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결국 장형은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을 별도로 설립키로 했다. 당시 박기홍(朴基鴻, 장훈보통학교(長薰普通學校) 전 이사장)의 미망인였던 조희재 여사가 이에 적극 찬동하고, 80만평의 토지를 기증하였다. 장형은 이를 기반으로 대학설립을 추진, 1947년 11월 1일 정식 설립인가를 받고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에 참여한 장형은 경험 등이 광복후 최초 정규4년제 대학으로 기록된 단국대학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이러던 차에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여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 원효사는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11][12][13]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대해서는 건국실천원양성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단국대학 설립[편집] 단국대학 설립 시 모습. 앞줄 김구(흰옷)와 설립자 장형, 뒷줄 장도빈(右)과 설립자 조희재의 장녀 박정숙 (개교일 : 1947.11.3)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후 1946년 8월 서북인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동지회(國民同志會)의 회장에 피선이 되고, 1947년 11월 1일 정부에 정식 인가를 받아 1947년 11월 3일 단국대학(檀國大學)을 설립,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1941년 5월 25일 조선공업기술학원으로 개교하여 1947년 2월 8일 백남중학교 6년제로 변경되고 1950년 6월 1일 백남중학교와 백남공업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운영되던 학교법인 백남학원(白南學院)이 경영난에 봉착한 것을 알고 1958년 10월 20일 경영권을 인수하여 같은해 11월 12일 전격 병합하고 이사장이 되었다.[14][15](단국대학교 홈페이지 참조) 장형은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민족 자본가들과 접촉, 모금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는데 단국대학교 설립자인 혜당(惠堂) 조희재(趙喜在, 1892.2.12 - 1947.11.3) 여사의 부군인 박기홍(朴基鴻)과의 오랜 친구로 친분관계를 떠나 지사적(志士的) 신의를 바탕으로 육영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조희재 여사의 뜻이 합하여 여사의 사재와 뜻있는 독지가들의 자산을 기부 받아 대학 설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단국대학교의 창학정신은 설립자 장형의 민족애와 조국애를 근본으로 한다.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범정 장형 선생이나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박기홍 선생의 유지를 성심껏 받든 혜당 조희재 여사는 대학을 세우면서 그 기본 정신을 민족애와 조국애에 두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정통성의 한 가운데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범정도 일찍이 대종교(大倧敎)의 정신을 지키는데 힘썼는데 이는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민족의 얼을 지키겠다는 신념에서였다. 광복은 되었으나 열강에 의하여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지켜본 장형은 젊은이에게 민족의 동질성을 끝까지 지켜가도록 교육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신념에서 교명을 "단군(檀君)과 애국(愛國)"에서 글자를 가져와 "단국(檀國)"으로 하고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대학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정신으로 구국, 자주, 자립(救國, 自主, 自立)을 내세웠다. 어떠한 경우라도 민족정통성에 의한 나라를 세우고 지켜가겠다는 신념을 가지며, 스스로가 투철한 주인정신을 가지고 행동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굳건히 서는 인물을 육성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단국대학교 홈페이지 설립자 소개 참조) 따라서 단국대학교의 창학 정신은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구국, 자주, 자립이다. 구국은 국가관을, 자주는 민족관을, 자립은 세계관을 표상하고 있다. 장형은 단국대학교의 설립일을 1947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였다. 가족[편집] 아들 : 장충식(張忠植) 중국 천진(天津)에서 출생, 호 중재(中齊), 단국대학교 학장, 총장, 이사장 역임) 손자 : 장호성, 단국대학교 총장 같이 보기[편집] 조희재 박기홍 장충식 주해[편집] ↑ 독립운동가 장형(張炯)은 평북 용천 사람이다. 1909년부터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가서 이극(李極)·안창하(安昌夏)·이진산(李震山)·전덕명(全德明) 등에게도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이극을 통하여 전덕원(全德元)·오동진(吳東振)·오광선(吳光鮮) 등에게도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수차 투옥되었다. 그후에도 현금과 패물 등을 모집하여 송병조(宋秉祚)목사를 통해 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2면, 출처 : 국가보훈처) ↑ 용천은 신의주와 이웃하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지역으로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이 강했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일제강점기동안에 끊이지 않고 항일운동이 이어졌다. ↑ 박성순 단국대 교양기초교육원 교수는 “독립운동 시기 범정은 ‘바람의 독립군’이었다”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간난(艱難, 괴롭고 고생스러움)을 무릅쓰고 만주와 국내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범정의 애국심은 이제 우리가 제대로 선양(宣揚,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함)해야 할 위대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2] ↑ 건국훈장(建國勳章)은 전체 5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조국의 독립과 건국에 공로가 있는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통령령 제82호에 의하여 1949년 4월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 공포되면서 상훈제도가 실시되었다. 1963년 12월 법률 제1519호로 지금까지 개별규정으로 시행되어온 각종 훈·포장령(勳·褒章令)을 통폐합한 「상훈법」을 제정하였으며, 1967년 2월에는 대통령령 제2929호로 「상훈법시행령」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 「상훈법시행령」에서는 기존 건국공로훈장의 등급별 명칭을 개정하였는데, 건국공로훈장중장(建國功勞勳章重章)을 건국훈장대한민국장(建國勳章大韓民國章)으로, 건국공로훈장복장(建國功勞勳章複章)을 건국훈장대통령장(建國勳章大統領章)으로, 건국공로훈장단장(建國功勞勳章單章)을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으로 칭하게 되었다.그 뒤 「상훈법」은 1971년 1월 법률 제2282호로 또다시 개정된 바 있으며, 현행법은 1973년 1월 법률 제2447호로 전문이 개정되었다가 1990년 1월 13일 상훈법을 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내용은 건국훈장대한민국장·건국훈장대통령장·건국훈장독립장·건국훈장애국장·건국훈장애족장 등 5등급으로 되어 있다. 범은 장형선생이 받은 '건국훈장국민장'은 1963년에 받을 당시에는 '건국훈장국민장'이었지만 현재는 '건국훈장독립장'으로 되어 있다.(네이버 지식사전 참조) ↑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으로 이뤄진 단체지만 완전한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조직의 달인' 신익희가 김구 쪽에서 이승만 쪽으로 줄을 바꾼 것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신익희가 이승만과 결별하며 유림측에 합작을 청했을 때 유림측에서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호통을 들은 일이나(1946년 8월 4일 일기) 신익희가 자유신문 사장이 되어 김구를 고문으로 내세운 것을 김구가 정면 반박한 일이(1946년 11월 23일 일기) 모두 이 '변절'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해방일기, 김기협, 너머북스 439p 참조) 각주[편집] ↑ 가 나 “단국대, 개교 65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대학신문. 2012년 10월 30일. 2013년 8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독립운동가가 세운 국내 유일의 민족사학 자부심 대학저널(2012-12-03) 기사참조 ↑ 독립기념관에 장형 선생 어록비 Archived 2014년 2월 19일 - 웨이백 머신 이준호기자, 한국일보(2009/12/29) 기사내용 참조 ↑ 가 나 “중앙일보 칼럼-도올 고함(孤喊), 미션 임파서블 《한한대사전》”. 중앙일보. 2008년 12월 24일. 2010년 6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가 나 “백범과 나의 아버지”. 경제풍월. 2013년 7월 30일. 2013년 8월 1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장형(張炯)”.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2005년 11월 30일. 2011년 5월 15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결성장씨(結城張氏) 카페 장형에 관한 내용참조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단국대학교(한시준 학술논문 동양학 제47집 2010년 pp.303-32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참조 ↑ 1953년 화폐개혁 당시의 가치로 1억환이며, 넓이 단위로는 264만 제곱미터로 79.86만 평, 약 80만 평을 의미함(네이버 단위변환) ↑ ““독립정신 계승한 단국대, 명문사학의 길을 걸어오다””. 대학저널. 2012년 12월 3일. 2013년 8월 5일에 확인함.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성명= (도움말) ↑ 「建實(건실)」解散(해산), 1949.08.25, 경향신문2면 사회 기사(뉴스), 建國實踐員(건국실천원) 養成所解散(양성소해산), 1949.08.25, 동아일보2면 사회 기사(뉴스) 참조 ↑ 建國實踐員養成所(건국실천원양성소) 弘益大財團(홍익대재단)서 經營(경영), 1949.09.25, 경향신문2면 사회 기사(뉴스) 참조 ↑ 서울대 법대 학장 지낸 민법학자 진승록 대한변협신문 기사(2015.02.09) 참조 ↑ 백남(白南)은 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박사(1914~2008)의 아호이다. ↑ 한양대, 백남 김연준 탄생 100주년 기념전 개최 아시아투데이(2014.10.20.) 기사참조 vdeh학교법인 단국대학학교 단국대학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기관 단국대학교병원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부속치과병원 석주선기념박물관 이사장 1~4,6대 장형 5,7~13대 박정숙 14대 이용우 15대 장병규 16~17, 23~24대 김학준 18~20, 25대 장충식 21대 박석무 22대 박유철 총/학장단과대학기(학장) 1 장도빈 2 김정실 3 이선근 (학장서리 이종흡) 4 이훈구 5 윤택중 6 고병국 7 김기석 8 김용진 9 장충식 종합대학기(총장) 1~7 장충식 8 윤홍로 9 조장환 10 김도수 11 김승국 12 이용우 13 김승국 14 권기홍 15 장호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형_(1889년)&oldid=24249653" 분류: 단국대학교1889년 태어남1964년 죽음한국의 독립운동가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북로군정서대한민국의 교육인대한민국의 대종교인대학 설립자결성 장씨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0일 (월) 13: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F-35 라이트닝 II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F-35 라이트닝 II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F-35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F-35 라이트닝 II 수직이착륙기인 F-35B 라이트닝 II가 2006년 12월 15일에 비행을 위해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이륙 중이다종류 다목적 전투기, 스텔스 전투기설계자 스컹크 웍스첫 비행 2006년 12월 15일도입 시기 F-35B: 2015년 7월 31일 미 해병대에 도입F-35A: 2016년 8월 2일 미 공군에 도입F-35C: 2018년 미 해군에 도입 예정현황 운용 중 (in service)생산 시기 2003년 ~ 생산 대수 133+(3080대)개발 원형 록히드 마틴 X-35 F-35의 조종석 F-35 라이트닝 II(영어: Lockheed Martin F-35 Lightning II)는 3군 통합 전투기(JSF: Joint Strike Fighter)로 불렸던 미국과 영국이 설계한 스텔스 전투기이다. 이 전투기는 현재 세대의 전폭기들과 미국의 High-Low 전술에 의한 F-22의 로우급을 위한, 특히 해리어 수직이착륙기를 교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F-35는 멀티롤 전폭기(공대공 전투 또한 가능하면서도, 근접항공지원(Close Air Support, CAS)와 전술 폭격 기능이 특히 강조된 비행기로 계획되었다. 현재 록히드 마틴에서 생산중이며, 파트너로서 노스럽 그러먼과 BAE 시스템즈가 참여하고 있다. 스텔스기를 탐지한다는 베라 레이다에는 500 km 거리에서 포착된다고 알려져 있다. 2016년 7월 11일 록히드마틴에 따르면 F-35 적정 생산가를 위한 청사진은 2019년까지 기체 가격을 대당 8,500만 달러 (당해년도 달러 기준)로 낮추는 목표를 갖고 생산비 절감 구상안들을 장려함으로써 대당 순환 가격을 낮추기 위한 정부와 업계의 공동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공군이 FMS(대외군사판매)형태로 도입되는 F-35의 대당 가격도 1,000억 원 대 미만으로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1] 목차 1 설계 1.1 스텔스 1.2 소음 1.3 조종석 1.4 전자전 1.5 정비 2 교체기종 3 파생형 3.1 F-35A 3.2 F-35B 3.3 F-35C 4 국제적 참여 4.1 영국의 F-35B 관련 4.2 고급 무기 4.3 비용/중량의 논쟁들 4.4 호주의 참여 5 대한민국 6 트럼프 행정부 7 F-35 핵전폭기 8 한계 8.1 L 밴드 레이다 8.2 IRST 8.3 모의공중전 9 제원 10 같이 보기 11 참고 11.1 각주 11.2 문헌 12 외부 링크 설계[원본 편집] 스텔스[원본 편집] 스텔스 성능이 발휘되도록 설계된 동체와 레이다 흡수 재료를 통해, F-35 전투기의 레이다 반사면적은 매우 작은 수준이다. F-35 전투기는 스텔스 성능은 레이다에 대한, 저 탐지성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F-35 전투기는 독특한 설계를 통해 적외선 탐지율을 낮추었다. 또한 F-35 전투기에 장착되는 AN/APG-81 레이다는 저피탐성 전파를 발산해, 적의 전자정찰에도 잘 잡히지 않는다. 다양한 스텔스 기술이 접목된 F-35 전투기는, ‘먼저 보고 먼저 쏘는’ 스텔스 전투기의 기능에 충실한 전투기로 알려져 있다. F-35 전투기는 개전 초기에는 적의 레이다에 탐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장과 연료를 동체 내부에 탑재하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타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표준 무장으로는 AIM-120C 암람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과 제이담(JDAM) 폭탄을, 각각 2발씩 동체 내부 폭탄창에 탑재한다. 다른 구성으로 4발의 AIM-120C 또는 8발의 소구경 폭탄 (Small Diameter Bomb)을 내부에 장착할 수도 있다. F-14, F-15, F-16, F/A-18 등 기존의 미국 전투기들은 대형 외부연료탱크를 장착해야만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대형 외부연료탱크는 레이다 반사면적을 크게 높인다. 반면에 F-35는 내부연료탱크만으로 대부분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설계했다. 따라서 최대이륙중량이 31.8톤으로 매우 덩치가 커졌지만, 레이다 반사면적을 대폭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미국 공군 마이클 호스티지 대장에 따르면, F-22와 비슷한 수준의 스텔스 성능을 보여준다. 물론 L 밴드 등 낮은 주파수의 레이다에는 F-22와 마찬가지로 F-35도 스텔스 성능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들 낮은 주파수 대역 레이다들은, 매우 부정확하며, 교란이 쉽다. 무엇보다도 전투기를 락온하여 요격하는데는 높은 주파수의 X 밴드 레이다가 사용되는데, F-22, F-35의 스텔스 페인트는 이 X 밴드를 주로 교란시킨다. 따라서, L 밴드 레이다에 쉽게 탐지가 되더라도, 원거리에서 요격을 할 수가 없다. 반드시 근거리로 접근해야지만 적외선 유도 단거리 미사일 등으로 요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시에 전혀 뜻하지 않은 위치에 나타난 F-35 전투기를 요격하기 위해, 스크램블로 출격해서, 고속으로 접근해, 근거리에서 적외선 유도 공대공 미사일을 쏘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요격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L 밴드 등 낮은 주파수 레이다는 전자전 장비로 교란이 쉽다. F-35는 매우 강력한 전자전 장비를 탑재해, 저주파 레이다들을 교란한다. 소음[원본 편집] 2008년, F-35의 이륙소음이 F-15 보다 2배이며, 착륙소음은 4배라는 미국 공군의 정보가 일반에 알려졌다. 2009년 테스트에서는, F-35의 소음은 프랫 앤 휘트니 F100-PW-200 엔진을 장착한 F-16 정도였다. F-22나 F/A-18E/F 슈퍼호넷 보다는 조용했다. 록히드 마틴의 연구로는, F-35의 소음이 F-22, F/A-18E/F 슈퍼호넷과 비슷하다고 한다. 미국 공군의 환경영향평가에서는, F-16 전투기를 F-35로 교체하자, 공항 주변의 시민들에게 21배 높은 소음의 피해가 있었다.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용 F-35의 152 데시벨 천둥소리급 소음 문제로, 비행갑판의 요원들의 헤드폰을 새로 개발했다. 조종석[원본 편집] F-35 전투기는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멀티-롤 스텔스 전투기로 개발 되었다. F-35 전투기는 공대공, 공대지, 그리고 정찰 임무까지 수행한다. 이러한 임무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F-35 전투기는 전투기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조종석에 대변화를 주었다. 전투기 조종석에 설치된 기계식 계기판과 다기능 디스플레이(MFD)를 없애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위해 최초로 파노라믹 디스플레이(Panoramic Display) 방식을 채용했다. 즉 하나의 대형 디스플레이가 기계식 계기판과 다기능 디스플레이를 대체한 것이다. 또한 터치 스크린 방식이 적용되어, 다양한 기능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투기 조종석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전방 시현 장비(HUD)도 없어졌고, 이들 기능은 통합 헬멧 시현기로 옮겨 졌다. 전자전[원본 편집] 스티브 오버 록히드마틴 국제사업개발 담당이사는 2014년 9월 말 F-35를 제작하는 미국 텍사스주 포스워스 공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F-35의 EMP탄 방호 능력을 묻는 질문에 “기밀사항”이라고 전제한 뒤 “하지만 EMP탄 방호 능력은 낙뢰시험과 유사한데 F-35는 낙뢰시험을 통과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군사전문가들은 “F-35가 EMP탄에 대비한 최소한의 방호 능력을 갖추고 있거나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2] 정비[원본 편집] 플로리다주 올랜도, 2017년 5월 2일 – 록히드마틴 F-35 프로그램의 차기 자율군수정보 시스템 (Autonomic Logistics Information System, 이하 ALIS)이 미 공군 및 해군의 F-35 시설에 설치되도록 승인되었다. 특히 이번 업데이트 버전은 수 차례 개량 작업을 통해 체계 기준치가 향상 되었고 전진 작전 및 지속성 관리를 위한 중요 능력을 제공한다. 록히드마틴 F-35 군수시스템 담당 리브스 발렌타인(Reeves Valentine) 부사장은 “F-35 운용자들은 이번 ALIS 업그레이드를 통해 시스템 내부에서 ‘만약의’ 시나리오를 예측할 수 있으며 오늘날 수동으로 수행되는 대부분의 작업을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며, “ALIS 2.0.2를 사용해 예측 및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전투기 수명주기 동안 최상의 전투기, 지원 장비, 예비 부품, 정비 인력을 배정 및 관리를 할 수 있으며, 축적된 데이터는 궁극적으로 전투기 효용성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고 전했다.[3] 교체기종[원본 편집] F-35로 교체될 기종은 다음과 같다. AV-8B 해리어 II (미국) 해리어 GR7/9 (영국) 시 해리어 (영국) A-10 선더볼트 II F/A-18 F-16 파생형[원본 편집] USS 아메리카 (LHA-6)에 F-35B 10대, 공격헬기 1대, 수송헬기 2대, 오스프리 2대가 보인다. 일본이 이즈모형 호위함 2척에 F-35B를 배치할 계획이다. F-35 라이트닝Ⅱ(F-35 LightningⅡ)는 미국 군수 업체인 록히드마틴이 중심이 되어 개발해온 전투기다. 이 기종에는 다양한 특징이 있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기체 하나로 3가지 파생형 모델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4] F-35A[원본 편집] F-35 시리즈 중 기본형이다. 2016년 8월 2일 IOC를 획득했다. 정상적으로 활주로로 이착륙하는 유형인 CTOL(conventional take-off and landing). 이 기체는 미 공군이 운용할 예정이다. 파생 기종 중 기체 중량은 가장 가볍지만 무장이나 연료를 가득 채우면 무게는 35톤에 이른다. 제트엔진 1개만으로 비행 가능한 단발기로는 상당한 무게다. F-35B[원본 편집] 기본형인 F-35A를 기반으로 엔진 추력을 더하고 조준 장치를 더한 단거리 이륙 수직 착륙기. STOVL(short take off and vertical landing) 모델이다. 이 모델은 미국 해병대가 사용한다. 짧은 활주로만 있으면 이착륙이 가능하지만 복잡한 노즐기구, 기체 정면에 추가한 이착륙용 리프트팬, 이를 구동하는 샤프트 등으로 중량이 늘어나 운동 성능이나 항속거리 심지어 무장 탑재량도 20% 가량 줄어든다. F-35B는 2015년 7월 IOC를 획득한 바 있다. 수직이착륙 버전은 내부무장창에 2천파운드 폭탄 2발을 장착할 수 없다. 천파운드 2발만 장착할 수 있다. 그래도 사실상 유일한 미국 전투기용 핵폭탄인 700파운드 B61 핵폭탄은 장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F-35C[원본 편집] 미 해군 운용을 위해 개발 중인 모델이다.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하는 함재기(CATOBAR)에 요구되는 성능을 위해 주 날개와 수직 꼬리 날개, 수평 꼬리 날개를 대형화하고 양력장치를 강화하는 한편 기체 구조와 착륙 장치(어레스팅 후크), 착함용 와이어 스팅후크, 날개 접는 기구 등을 추가해 F-35B와 비슷한 무게를 지녔다. 날개를 대형화하고 장비를 단순화해 연료 용량을 늘렸기 때문에 표준형인 F-35A보다 항속거리가 길다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F-35C는 미국 해군이 사용할 것이다. 호넷을 교체하기 위해 480대를 계획하고 있다. F-35C는 슈퍼호넷과 함께 항모에 배치될 것이며, 스텔스가 필요한 때에 사용될 것이다.[5] 2010년 10월, 영국은 수직이착륙기 F-35B의 계약을 전면 취소하고, 대신 F-35C를 도입하기로 하였다. 록히드 마틴의 신기술인 리프트 팬의 개발 지연으로 인한 문제 때문이다. F-35C는 영국 공군과 영국 해군이 병행하여 사용할 것이다.[6] 처음 계획한 150대 보다 적게 도입할 것이다. 영국 신형 항모인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은 만재배수량 65,000톤으로서, 보통 12대의 F-35C를 탑재하며, 최대 36대까지 탑재할 수 있다.[6][7] 2011년 7월 27일, F-35C의 시제기 CF-3는 래이크허스트 지상시험설비에서 처음으로 캐터펄트 이륙을 하였다.[8] 2011년 8월 13일, F-35C는 래이크허스트 시설에서 제트화염반사판(JBD) 테스트를 완료했다. 2013년 최초로 항공모함에서 캐터펄트 이륙시험을 할 계획이다(2013년 7월 테스트 완료). [9] 국제적 참여[원본 편집] F-35 리프트팬(lift fan); VTOL 추진 시스템은 영국 롤스로이스가 설계하고 제작하였다 F-35의 내부도 주된 고객은 미군(USAF, USN, USMC)과 영국군(RAF, RN)이다. 8개국을 위한 세가지 레벨의 국제적 참여가 존재한다. 영국은 유일한 레벨 I 파트너이다. 2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레벨 II 파트너는 대략 10억 달러를 투자한 이탈리아와 8억 달러 정도를 투자한 네덜란드다. 레벨 III 파트너는 다음과 같다: 터키 : 1억 9500만 달러 오스트레일리아 : 1억 4천400만 달러 노르웨이 : 1억 2천2백만 달러 덴마크 : 1억 1천만 달러 캐나다 : 1억 6000만 달러 영국의 F-35B 관련[원본 편집] 영국은 유일한 레벨 I 파트너이다. 25억 달러fmf 투자했다. 영국 해군은 해리어 GR7/9, 시 해리어를 퇴역시켰다. 향후에 STOVL 방식의 수직이착륙기 F-35B 138대를 구매해, 미국 다음으로 수직이착륙기를 많이 구매하려고 했으나, F-35B의 리프트 팬 개발 지연이 알려진 이후, 전량 구매계획을 취소하고, CATOBAR 방식인 F-35C를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에 사용하기로 했다. F-35의 개발지연은 수직이착륙기 F-35B의 리프트 팬 개발 지연 때문이라고 보도되었다. 이로써 영국 해군은 1977년 건조된 인빈시블급 항공모함이래 40여년간의 수직이착륙기 시대를 마치고 다시 CATOBAR 방식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영국은 곧있으면 현재 자국이 유일하게 보유중인 인빈시블급 항공모함이 퇴역예정이라 근 10년여간 항공모함 없이 해군을 이끌어야 하는 실정에 처해있다. 2012년 원안으로 회귀했다. 이미 갑판의 공사가 어느정도 이루어진데다 SVTOL에 맞춰서 설계했기 때문에 캐터펄트와 어레스팅 와이어를 설치하기 힘든 구조이다. 거기에다 캐터펄트 설치에 추가비용이 들고 결정적으로 1978년 어데셔스급 항공모함 아크 로열이 퇴역한 이래 영국은 CATOBAR 항공모함을 운용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조종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결국 F-35B형을 들여오는 것이 여러모로 C형을 들여와서 여러 부분을 보완하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해 STOVL로 돌아왔다. 고급 무기[원본 편집] 단거리 이륙과 수직착륙용의 리프트 팬을 설치하지 않으면 대략 100 ft3의 공간이 남게 된다.[10] 또한 27,000 hp 이상의 출력이 여유있게 되어, 20 MW의 전기출력을 생산할 수 있다.[11] 즉, F-35에 directed-energy weapon를 장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무기로서, 고출력 레이저(solid state laser)와 고출력 마이크로웨이브 빔(high-power microwave beam)이 구상되고 있으며, 현재 실전배치가 가능한 상태까지 개발되었다.[12] 비용/중량의 논쟁들[원본 편집] 2004년을 지나면서 JSF의 총 프로젝트 비용은 23% 증가하여 2,440억 달러가 되었다. 주요 기술적 문제는 2200파운드(목표치의 8%) 초과했다고 알려진 F-35B 기종의 무게 문제였다. 이것은 STOVL 비행기가 요구된 성능을 만족시키지 못할 정도이다. 록히드 마틴은 엔진 추력을 증가시키고 비행기 표면을 얇게 하였으며, F-35B 무기 베이가 축소되었고, 수직꼬리날개가 작아지도록 하는 등 1톤 이상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으로 무게 문제를 점차적으로 풀어나갔다.[13] 보다 작아진 무기 베이는 F-35B가 2 x 1000 lb (450 kg) 무기들만을 내부에 장착할 수 있게 할 것이다.(이것은 최초설계 내용이며, 후에 2 x 2000 lb 요구사항이 추가되었다.) 이것은 적 방공망이 제압된 후에 주어지는 CAS 임무를 수행하기에도 부적당한 용량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F-35B는 A형 C형에 비해 문제가 많으며, 가격 급상승의 요인이 되고 있다. F-35 1호기는 당초 2005년 10월에서 연기되어, 2006년 8월에 첫 비행을 할 것으로 보이며, 단거리 이륙 및 수직착륙 버전인 F-35B는 2007년 초에 첫 비행을 할 예정이다. F-35B의 경우 1,300 kg(3,000 lb)가량의 감량이 필요하고 F-35A과 F-35C의 경우는 600 kg 이상의 감량이 필요하다.[14] 호주의 참여[원본 편집] 2005년 5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당초 2006년에 결정하기로 했던 JSF 사업 참여결정을 2008년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현재 임기가 지난 후에 결정을 하겠다고 한다. 호주의 로비단체, 정치인들, 언론들 사이에서는 F-35가 호주 공군의 F-111과 F/A-18 전투기들을 적시에 교체할 수 있도록 생산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들은 비용대 효과의 문제, 도그 파이팅 능력, 항속거리의 짧음, 그리고 슈퍼크루즈 기능의 부재에 대한 것들이다. 호주정부는 또한, 완성된 F-22를 구입하는 비용이 JSF 사업에 투자하는 비용보다 별로 많이 안든다고 이의제기를 한다.[15] 2005년자 Jane’s Defence weekly는 F-22의 가격을 1억5천1백만 달러(약 1천5백10억원)로 본다. 이는 현재의 F-22 공중전 전용기에 JSF와 같은 공대지 타겟팅 성능을 위한 업그레이드를 할 경우에 대당 2억 달러(약 2천억원)정도일 것이라고 한다. 호주정부는 이러한 정보를 고려하여 그러한 이의제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F-35 도입 프로그램은 F-22 도입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호주 국방장관은 F-35 프로그램이 계속지연되자 슈퍼호넷을 도입을 이르렀다. 기종은 내년에 결정되고 슈퍼호넷을 선택하면 F-35 프로그램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원본 편집] 대한민국 방위사업청은 3차 FX 사업으로 준 스텔스 성능을 가진 4.5세대 전투기인 F-15SE를 선정하였으나, 이후 일부 공군 장성출신들의 반대와 정부 내 록히드 마틴 옹호세력에 의해 F-35A를 FMS(수의계약)으로 40대를 7조 4천억원에 도입하기로 했다. 대당 1850억원 정도이다. 최초 록히드마틴은 대한민국 예산안에서 60대와 절충교역의 내용으로 제시했지만, F-35의 가격상승으로 계약은 40대로 하게 되었다. 2018년 3월에 대한민국 공군 소속 F-35 1호기가 공장에서 출고되었다.[16] 변동이 없다면 17 전투비행단에 퇴역이 임박한 F-4E를 교체하면서 총 40대가 우선 인도되고 높은 확률로 20대가 추가 도입될 계획이다.[17] 별도의 사업으로 대한민국은 한국항공우주산업을 중심으로 록히드 마틴, 인도네시아와 함께 KFX를 개발중이다. KFX는 F-35 라이트닝 II와 길이, 무게, 외양이 모두 비슷한데, 엔진만 2개를 탑재했다. 물론 KFX 쌍발엔진의 출력은 F-35 단발엔진 출력과 비슷하다. 2018년 3월 29일, F-35A 1호기가 미국에서 출고되었다. 북한의 반발을 고려해 국방부 장관과 차관이 출고식에 불참했다. 공군참모총장 대신 참모차장이 참석하고 방위사업청장도 불참했다. 2019년 3월 29일, 오후 2시 30분에 F-35A 2대가 청주공군기지에 도착했다. 22일 F-35A 5호기와 6호기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루크 공군기지에서 출발해 하와이에 중간 기착했으며, KC-135의 공중급유를 받으며 총거리 13,800 km를 비행했다. 5호기와 6호기는 5월에 실전배치될 계획이다. 매달 2대씩 청주공군기지의 제17전투비행단 (대한민국)에 배치되어, 2019년에 모두 10대가 배치될 계획이다. 1~4호기는 미국에서 성능 검사 및 조종사 전환 교육에 투입되고 있다. 2021년까지 F-35A 40대가 배치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3번째, 세계 8번째 스텔스 전투기 보유국이 되었다. F-35A는 스텔스 기능이 강점으로 꼽힌다. 레이더에 포착되는 크기가 F-15K의 100분의 1 수준이다. 즉 스텔스 성능이 100배 높다. 레이더에 얼마나 잘 포착되는지를 나타내는 기준 척도가 RCS라는 개념인데 북한이 운용하는 미그 29가 5㎡, 한국 공군의 주력기종 F-16이 1㎡인 반면 F-35A는 0.0001㎡에 불과하다. 유사시 백두산 까지 F-35A로 핵시설이나 미사일 기지를 야간 정찰하면, 북한이 영공을 침입했는지 여부 조차 알 수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중국이 F-35는 물론 F-22도 포착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신형 레이더 JY-27이 시리아에 배치되었는데, 최근 이스라엘 공군의 F-35A에 공습당해 파괴되었다. 스텔스 기능으로 적의 지대공 레이더와 적기의 레이더에 탑지되지 않으면서, AN/APG-81 레이더는 가동하더라도 적에게 잘 탐지되지 않는 전파를 발산해 적 전자정찰 장비에 쉽게 포착되지 않는데, 150 km 전방에 있는 23개 공중 표적 중에서 3초 안에 19개를 찾았낸다. 2017년 9월 23일, 10월 10일 2차례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1B 전략폭격기 2대가 야간에 북한에 매우 근접해 위협비행을 했는데, 북한은 2번 모두 야간에 지대공 레이더를 켜지 않았다. 아무런 레이더 신호도 없었고, 미그 전투기의 스크램블 (전투기) 비상출격도 없었다. B-1B 전략폭격기에 비하면 F-35A 스텔스 성능은 수십만배 높다. 트럼프 행정부[원본 편집] 2016년 12월 1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트위터에서 "F-35 구매계획과 비용은 통제 불능이다. 수십억 달러가 절약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국방부는 록히드 마틴으로부터 1조 4000억달러(1642조원)를 들여 F-35 스텔스 전투기 2443대를 도입할 계획이었다. 전투기 구매비용은 전투기 본체 구매비용에 부수비용을 포함한다. 부수비용은 전체 사업비의 30%를 차지한다. 군수지원, 예비 부품, 수리보수, 훈련프로그램, 시뮬레이션 센터, 운용 부대 창설과 기지 구축비용 등을 말한다.[18] 2016년 12월 2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트위터에 "록히드 마틴 F-35의 엄청난 비용으로 경비가 초과하는 점에 근거해 보잉에 F-18 슈퍼 호넷의 가격 견적을 요청했다"고 적었다. 2010년 보잉은 미국에 대당 4990만 달러(한화 약 531억 원)에 F-18 슈퍼 호넷을 판매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2000년의 6800만 달러보다(약 722억 원)는 크게 낮은 것이다.[19] 대당 4990만 달러에 2457대면 1226억 달러(144조원)이다. 2017년 1월 27일,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F-35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구매계획에 대한 재검토를 공식 지시했다.[20] F-35 핵전폭기[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B61 핵폭탄입니다. B61 핵폭탄의 최신버전인 B61-12가 10조원의 비용으로 개발되어, F-35의 내부무장창에 탑재될 계획이다. F-35는 현재의 F-16 핵전폭기의 임무를 대체하게 된다. 기존의 B-61-3/4/710 버전이 100 m의 CEP를 갖는데 비해, B61-12는 30 m의 CEP로 향상될 것이다. 현재 네덜란드, 벨기에, 터키의 F-16, 독일, 이탈리아의 파나비어 토네이도에 미국 공군의 B61 핵폭탄이 장착되어 있다. 네덜란드 JSM 미사일은 F-35 내부무장창에 탑재가능한 장거리 공대지 순항미사일이다. 사거리 560 km, 탄두중량 230 kg이다.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탄두중량 200 kg 300 kt 수소폭탄을 공대지 순항미사일에 장착한다. JSM에 프랑스와 이스라엘 처럼 300 kt 수소폭탄을 장착하면, F-35 전투기가 장거리 핵미사일을 갖게 된다. 일본이 JSM 도입을 추진중이다. 한계[원본 편집] L 밴드 레이다[원본 편집] F-22, F-35에 사용된 스텔스 도료는 X 밴드 레이다에 대한 저탐지 도료이다. X 밴드는 7.0-11.2 기가헤르츠 주파수 대역을 말한다. 따라서, 파장이 긴 S 밴드(2-4 기가헤르츠) 레이다에는 저탐지성이 제한적이다. 보다 파장이 긴 L 밴드(1-2 기가헤르츠) 레이다에서는 더욱 탐지되기 쉽다.동시에 rwr같은 경보장치에 l밴드 레이다가 기존 x밴드레이다 보다 더 취약하고 탐지시 정밀도가 떨어져 고속으로 이동하는 전투기를 상대로는 오차가 크게나 교전시 미사일 유도용으로 쓸수가 없기에 활용도는 제한적이다[21] 따라서, 러시아 스텔스기인 수호이 T-50 PAK FA은 적 스텔스기 요격을 위해 L 밴드 AESA 레이다를 장착했다. 독도함에서도 L 밴드 AESA 레이다인 SMART-L 레이다를 사용한다. 모스크바 에어쇼 2009에서, 러시아 회사는 Tikhomirov NIIP L-band AESA 레이다를 전시했다. Su-27에 장착할 수 있다. IRST[원본 편집] IRST는 적외선 열탐지 장치를 말한다. F-35에는 노드롭이 개발한 EO-DAS와 록히드가 개발한 EOTS, 두 종류의 IRST가 탑재되며 EO-DAS는 근거리 탐지용 360도 구형으로 전방향 감시가 가능하고 EOTS는 장거리 탐지 및 지상공격용으로 사용된다. 러시아 스텔스기인 수호이 T-50 PAK FA에 탑재된, 360도 전방향 탐지가 가능한 OLS-50 IRST 시스템의 경우, 전술기를 70 km 거리에서 포착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스텔스기는 추진 기관에 바이패스 냉각 같은 적외선 감소처리를 하기에 그보다는 훨씬 줄어든다. 모의공중전[원본 편집] 레드 플래그 – 알래스카 2012에서 F-22는 IRST를 장착한 독일 공군의 유로파이터에게 근접전에서 격추되었다. EADS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전투에서는 조기경보기의 도움을 받은 4대의 유로파이터가 8대의 F-35에 승리했다.[22] 2015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 에드워드 공군기지 1만~3만 피트 상공에서 31톤 5세대 F-35와 20톤 4세대 F-16D 블록 40 전투기가 17회의 근접전(Dogfight)을 벌였다. 실제 무장은 하지 않고 시뮬레이션 공격만 했다. F-35의 기동성이 훨씬 나빠서, 대패했다. 2인승인 F-16D는 보조연료탱크를 두 개나 단 무거운 상태였다. F-35의 시제기 AF-2 2호기는 임무체계 소프트웨어가 탑재되지 않아 적기가 F-35를 발견하기 전에 F-35가 먼저 적을 탐지할 수 있는 센서를 이용할 수 없었다. 또한 스텔스 특수코팅이 적용되지 않았고, 조종사가 항공기의 방향을 움직이지 않고도 헬멧으로 무장을 조준, 발사하도록 하는 무장이나 소프트웨어가 탑재돼 있지 않았다. 순수한 기관총 근접전(Dogfight)의 기동성능 테스트였다. 완전한 버전의 F-35A 4대와 F-16D 블록 40 4대의 편대간 공중전에서는 F-35가 완승했다.[23] F-35 전투기가 원래의 기능과 성능을 갖춘 상태에서 공중전을 펼친다면, F-16D는 격추될 때까지 F-35의 존재도 파악할 수 없다.[24] F-35는 선회 중 기체의 속도를 낮추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독파이팅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엄청난 자동화가 이루어진 F-35를 이전 기체들처럼 움직이려다 보니 되려 조종을 할 후 없는 상태에 빠지고들 한다. 많은 부분이 자동화 제어가 되어있는 바람에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못한 까딱이다. 엔지니어들은 자동 제어 이상의 기동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두 손을 묶고 싸우는 것 같다는 조종사들의 의견을 수렴해 기체의 시스템을 수정하였고, 이젠 근접전마저 F-35가 재패하게 되었다. 2015 모의전 이후부터 좋은 성적을 쌓으며, 2015 레드 플래그 훈련에서는 20 대 1이라는 격추비를 보여주었다. [25] 제원[원본 편집] AN/APG-81. F-35 전투기의 레이다다. 일반 특성 조종사 : 1 길이 : 51.4 ft (15.67 m) 폭 : 35 ft (10.67m) 높이 : 14.2 ft (4.57 m) 날개면적 : 460 ft(42.74 m^2) 공 중량 : 29,300 lb (13,170kg) 무장시 중량 : 49,540 lb (22,470 kg) 최대이륙중량 : 70,000 lb (31,800 kg) 레이다 : AN/APG-81 엔진 : 1× 프랫 앤 휘트니 F135 후기연소기가 장착된 터보팬엔진, 추력 : 43,000 lbf (178kN) Secondary (High Performance), 현재 예산안에는 중단된[26]: 1x General Electric/Rolls-Royce F136 afterburning turbofan 178 kN thrust Lift fan (STOVL): 1x Rolls-Royce Lift System in conjunction with either F135 or F136 power plant 18,000 lbf (80 kN) thrust) 성능 최대속도 : Mach 1.6 (~1,200 mph, 1930 km/h) 순항속도 : Mach (mph, km/h) 전투행동반경 (내부연료)[27] F-35A: 1,093km F-35B: 833km F-35C: 1,100km 항속거리반경 (내부연료) F-35A: 2,222km F-35B: 1,667km F-35C: 2,593km (F-35A보다 길다.) 운용고도 : 48,000 ft (15,000 m) 상승률 : 40,000 ft/min[13] (200 m/s) Wing loading : 91.4 lb/ft² (446 kg/m²) 추력대중량비 : 100% 연료:0.968, 50% 연료 : 1.22 무장 1x GAU-12/U 25 mm 기관포. F-35A에 탑재 공대공 미사일 : AIM-120 AMRAAM, AIM-9 사이드와인더 폭탄 : JDAM, JSOW, SDB 공대지 미사일: HARM, AGM-158 JASSM, 스톰 섀도 기타 F-35A . F-35B . F-35C. 가격: F-35A: 1.53억 달러(약 1700억원) 최초 비행 - X-35 시제기기: 2000년 F-35A 최초 비행 예정일 - 2006년 8월 실전배치: 2016년에서 2018년 사이. The reason for this is that the A will be brought into service first followed by the B. 함재기 버전은 2017년에 실전배치될 것이다. 생산자 록히드 마틴 항공(Lockheed Martin Aeronautics): 주사업자 최종 조립 전체적인 시스템 인티그레이션 Mission system 전방 동체(Forward fuselage) 날개 노스럽 그루만 AESA(Active Electronically Scanned Array) 레이다 가운데 동체(Center fuselage) Weapons bay Arrestor gear BAE Systems 측면 동체(Aft fuselage), empennages 수직, 수평 꼬리날개 조종석 전자전 시스템 F-35는 최신 기체답게 전자전에도 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북한의 방공망을 무력화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더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미 안보 전문매체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TNI)에 따르면 미 해군은 러시아와 중국의 최신예 지대공 미사일 망에 탐지되지 않고 상대 레이다망에 방해전파를 발사해 무력화하는 차세대 전자전체계(NGJ)를 오는 2021년까지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미 해군은 또 통상의 레이다 경보 수신기가 방어만 가능한 것을 보완하려고 F-35 스텔스기나 F/A-18 슈퍼 호넷 등 주력 전투기에도 NGJ를 장착할 수 있도록 해 전자전 공격 능력을 향상한다는 계획이다. 미 해군은 EA-18G기용 NGJ 135세트를 도입한 후 다시 이를 다른 기종에도 확대하기로 했다. 레이시온 고위 관계자는 "NGJ가 전자전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미 해군이 러시아와 중국의 대공망을 무력화해 전력 우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28] 연료 시스템 무장 제어 소프트웨어(FCS1: Flight Control Software) 같이 보기[원본 편집] 스텔스 5세대 전투기 미쓰비시 ATD-X 대한민국 차세대전투기 사업(KFX) 관련 개발 록히드 마틴 X-35 F-22 랩터 유사 항공기 수호이 PAK FA 관련 목록 전투기 목록 헬멧 마운티드 디스플레이(en:Helmet mounted display) 참고[원본 편집] 각주[원본 편집] ↑ 韓공군 F-35 가격 낮아질 듯‥LM, 원가절감시행, 뉴데일리, 2016. 7. 15 ↑ F-35A, EMP탄 방호 능력도 갖춘 듯, 문화일보, 2014. 10. 10 ↑ 록히드마틴, F-35 전투기의 군수 시스템 신규 능력 지원, 유용원의 군사세계, 2017. 5. 4 ↑ 스텔스 전투기 F-35…15년 고난의 개발사, 테크홀릭, 2016. 8. 8 ↑ "F-35C Carrier Variant Joint Strike Fighter (JSF)." GlobalSecurity.org. Retrieved: 16 June 2010. ↑ 가 나 "Securing Britain in an Age of Uncertainty: The Strategic Defence and Security Review." Archived [날짜 없음], - 영국 정부 웹 아카이브 HM Government, 19 October 2010. Retrieved: 19 October 2010. ↑ "CDS on the SDSR." Ministry of Defence (United Kingdom), 24 November 2010. ↑ "Catapult launches F-35C for the first time." Naval Air Systems Command, 27 July 2011. Retrieved: 29 July 2009}} ↑ “F-35C completes jet blast deflector testing” (보도 자료). NAVAIR. 2011년 8월 22일. 2011년 8월 23일에 확인함. ↑ Morris, Jefferson (26 September 2002). Keeping Cool A Big Challenge For JSF Laser, Lockheed Martin Says. Aerospace Daily Retrieved Feb. 08, 2006. ↑ Fulghum, David A. (July 8 2002). Lasers Being Developed for F-35 and AC-130. Aviation Week and Space Technology Retrieved Feb. 08, 2006. ↑ Fulghum, David A. (July 22 2002). Lasers, HPM Weapons Near Operational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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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35 라이트닝 II Official JSF web site Official Team JSF industry web site [깨진 링크([http://web.archive.org/web/*/http://www.jsf.org.uk/ 과거 내용 찾기)] JSF UK Team][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F-35 - Royal Air Force US Navy Research, Development & Acquisition, F-35 page F-35 - Global Security F-35 profile and F-35 weapons carriage on Aerospaceweb.org F-35 Lightning II News on f-35jsf.net F-35B Roll out pictures F-35 Article - Armed Forces F-35 photo gallery Data on the F-35 Joint Strike Fighter (JSF) by the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Global Security on the F-35 JSF Program [1] vdeh록히드 마틴제품 이지스 AN/SPY-1 ASROC ATACMS 아틀라스 미사일 C-5 C-130 우주왕복선 외부연료탱크 밀스타 M270 MLRS F-16 F-22 랩터 F-35 F-117 JASSM 재블린 JCM 헬파이어 P-3 프레데터 SBIRS THAAD T-50 트라이던트 미사일 트라이던트 II VH-71/US101 U-2 AN/FPS-117 KH-11 KH-12 KH-13 MEADS 회사 정보 웹사이트 연간 매출액: $35.5 billion USD (FY2004) 종업원수: 135,000명 종목명칭: NYSE: LMT vdeh사용 중인 미국의 군용기전투기 AV-8B 해리어 II F-15 F-15E F-16 F/A-18 호넷 F/A-18E/F 슈퍼 호넷 F-22 랩터 F-35 라이트닝 II 폭격기 B-52 스트래토포트리스 B-1 랜서 B-2 스피릿 정찰기 GNAT-750 MQ-1 프레데터 RQ-2 파이오니어 RQ-4 글로벌 호크 RQ-7 섀도 MQ-9 리퍼 록히드 U-2 MQ-1C 워리어 수송기 C-2 그레이하운드 C-5 갤럭시 C-9 스카이트레인II C-17 글로브마스터III C-20 걸프스트림III C-21 리어젯 보잉 C-22 보잉 C-32 C-37 걸프스트림V C-40 클리퍼 C-130 허큘리스 C-130J 슈퍼 허큘리스 C-135 스트래토리프터 조기경보기 E-2 호크아이 E-3 센트리 E-8 조인트스타스 훈련기 T-1 제이호크 T-37 트윗 T-38 탤론 보잉 T-43 T-6 텍산 II T-34 멘터 T-39 사브렐라이너 T-2 버크아이 T-44 페가수스 T-45 고스호크 헬기 SH-3 시킹 SH-60B/F 시호크 AH-1 코브라 AH-6J 리틀버드 AH-64 아파치 CH-46 시나이트 CH-47D/F 치누크 CH-53E 슈퍼스탤리온 MH-6J/M 리틀버드 MH-47G 스페셜 오퍼레이션 치누크 MH-53J/M 페이브로우 III/IV MH-60K/L/M 블랙호크 MH-60S 시호크 OH-58A/C/D HH-60G 페이브호크 HH-60H 시호크 MH-68A 스팅레이 VH-3A/D 시킹/마린원 VH-53D 시스탤리온/마린원 VH-60L 블랙호크 VH-60N 나이트호크/마린원 UH-1 이로쿼이 UH-3H 시킹 UH-60A/L 블랙호크 V-22 오스프리 공격기 A-10 썬더볼트 II A-37 드래곤플라이 공중급유기 KC-135 스트래토탱커 보잉 KC-767 KC-45 KC-10 익스텐더 KCS-3 바이킹 기타 S-3 바이킹 보잉 VC-25A 에어포스원 EP-3E 에어리즈II 보잉 E-4B 나이트워치 E-6 머큐리 EA-6B 프라울러 TH-57A 시레인저 TH-67A 크리크 P-3 오라이온 보잉 YAL-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F-35_라이트닝_II&oldid=24435974" 분류: 미국의 전투기공격기함재기스텔스기수직 이착륙 항공기록히드 마틴 항공기2006년 첫 비행한 항공기단발 제트기숨은 분류: 웹아카이브 틀 경고웹아카이브 틀 기타 아카이브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Latviešu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پنجابی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ייִדיש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6일 (일) 12: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F-35 라이트닝 II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F-35 라이트닝 II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F-35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F-35 라이트닝 II 수직이착륙기인 F-35B 라이트닝 II가 2006년 12월 15일에 비행을 위해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이륙 중이다종류 다목적 전투기, 스텔스 전투기설계자 스컹크 웍스첫 비행 2006년 12월 15일도입 시기 F-35B: 2015년 7월 31일 미 해병대에 도입F-35A: 2016년 8월 2일 미 공군에 도입F-35C: 2018년 미 해군에 도입 예정현황 운용 중 (in service)생산 시기 2003년 ~ 생산 대수 133+(3080대)개발 원형 록히드 마틴 X-35 F-35의 조종석 F-35 라이트닝 II(영어: Lockheed Martin F-35 Lightning II)는 3군 통합 전투기(JSF: Joint Strike Fighter)로 불렸던 미국과 영국이 설계한 스텔스 전투기이다. 이 전투기는 현재 세대의 전폭기들과 미국의 High-Low 전술에 의한 F-22의 로우급을 위한, 특히 해리어 수직이착륙기를 교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F-35는 멀티롤 전폭기(공대공 전투 또한 가능하면서도, 근접항공지원(Close Air Support, CAS)와 전술 폭격 기능이 특히 강조된 비행기로 계획되었다. 현재 록히드 마틴에서 생산중이며, 파트너로서 노스럽 그러먼과 BAE 시스템즈가 참여하고 있다. 스텔스기를 탐지한다는 베라 레이다에는 500 km 거리에서 포착된다고 알려져 있다. 2016년 7월 11일 록히드마틴에 따르면 F-35 적정 생산가를 위한 청사진은 2019년까지 기체 가격을 대당 8,500만 달러 (당해년도 달러 기준)로 낮추는 목표를 갖고 생산비 절감 구상안들을 장려함으로써 대당 순환 가격을 낮추기 위한 정부와 업계의 공동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공군이 FMS(대외군사판매)형태로 도입되는 F-35의 대당 가격도 1,000억 원 대 미만으로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1] 목차 1 설계 1.1 스텔스 1.2 소음 1.3 조종석 1.4 전자전 1.5 정비 2 교체기종 3 파생형 3.1 F-35A 3.2 F-35B 3.3 F-35C 4 국제적 참여 4.1 영국의 F-35B 관련 4.2 고급 무기 4.3 비용/중량의 논쟁들 4.4 호주의 참여 5 대한민국 6 트럼프 행정부 7 F-35 핵전폭기 8 한계 8.1 L 밴드 레이다 8.2 IRST 8.3 모의공중전 9 제원 10 같이 보기 11 참고 11.1 각주 11.2 문헌 12 외부 링크 설계[원본 편집] 스텔스[원본 편집] 스텔스 성능이 발휘되도록 설계된 동체와 레이다 흡수 재료를 통해, F-35 전투기의 레이다 반사면적은 매우 작은 수준이다. F-35 전투기는 스텔스 성능은 레이다에 대한, 저 탐지성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F-35 전투기는 독특한 설계를 통해 적외선 탐지율을 낮추었다. 또한 F-35 전투기에 장착되는 AN/APG-81 레이다는 저피탐성 전파를 발산해, 적의 전자정찰에도 잘 잡히지 않는다. 다양한 스텔스 기술이 접목된 F-35 전투기는, ‘먼저 보고 먼저 쏘는’ 스텔스 전투기의 기능에 충실한 전투기로 알려져 있다. F-35 전투기는 개전 초기에는 적의 레이다에 탐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장과 연료를 동체 내부에 탑재하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타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표준 무장으로는 AIM-120C 암람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과 제이담(JDAM) 폭탄을, 각각 2발씩 동체 내부 폭탄창에 탑재한다. 다른 구성으로 4발의 AIM-120C 또는 8발의 소구경 폭탄 (Small Diameter Bomb)을 내부에 장착할 수도 있다. F-14, F-15, F-16, F/A-18 등 기존의 미국 전투기들은 대형 외부연료탱크를 장착해야만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대형 외부연료탱크는 레이다 반사면적을 크게 높인다. 반면에 F-35는 내부연료탱크만으로 대부분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설계했다. 따라서 최대이륙중량이 31.8톤으로 매우 덩치가 커졌지만, 레이다 반사면적을 대폭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미국 공군 마이클 호스티지 대장에 따르면, F-22와 비슷한 수준의 스텔스 성능을 보여준다. 물론 L 밴드 등 낮은 주파수의 레이다에는 F-22와 마찬가지로 F-35도 스텔스 성능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들 낮은 주파수 대역 레이다들은, 매우 부정확하며, 교란이 쉽다. 무엇보다도 전투기를 락온하여 요격하는데는 높은 주파수의 X 밴드 레이다가 사용되는데, F-22, F-35의 스텔스 페인트는 이 X 밴드를 주로 교란시킨다. 따라서, L 밴드 레이다에 쉽게 탐지가 되더라도, 원거리에서 요격을 할 수가 없다. 반드시 근거리로 접근해야지만 적외선 유도 단거리 미사일 등으로 요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시에 전혀 뜻하지 않은 위치에 나타난 F-35 전투기를 요격하기 위해, 스크램블로 출격해서, 고속으로 접근해, 근거리에서 적외선 유도 공대공 미사일을 쏘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요격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L 밴드 등 낮은 주파수 레이다는 전자전 장비로 교란이 쉽다. F-35는 매우 강력한 전자전 장비를 탑재해, 저주파 레이다들을 교란한다. 소음[원본 편집] 2008년, F-35의 이륙소음이 F-15 보다 2배이며, 착륙소음은 4배라는 미국 공군의 정보가 일반에 알려졌다. 2009년 테스트에서는, F-35의 소음은 프랫 앤 휘트니 F100-PW-200 엔진을 장착한 F-16 정도였다. F-22나 F/A-18E/F 슈퍼호넷 보다는 조용했다. 록히드 마틴의 연구로는, F-35의 소음이 F-22, F/A-18E/F 슈퍼호넷과 비슷하다고 한다. 미국 공군의 환경영향평가에서는, F-16 전투기를 F-35로 교체하자, 공항 주변의 시민들에게 21배 높은 소음의 피해가 있었다.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용 F-35의 152 데시벨 천둥소리급 소음 문제로, 비행갑판의 요원들의 헤드폰을 새로 개발했다. 조종석[원본 편집] F-35 전투기는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멀티-롤 스텔스 전투기로 개발 되었다. F-35 전투기는 공대공, 공대지, 그리고 정찰 임무까지 수행한다. 이러한 임무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F-35 전투기는 전투기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조종석에 대변화를 주었다. 전투기 조종석에 설치된 기계식 계기판과 다기능 디스플레이(MFD)를 없애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위해 최초로 파노라믹 디스플레이(Panoramic Display) 방식을 채용했다. 즉 하나의 대형 디스플레이가 기계식 계기판과 다기능 디스플레이를 대체한 것이다. 또한 터치 스크린 방식이 적용되어, 다양한 기능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투기 조종석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전방 시현 장비(HUD)도 없어졌고, 이들 기능은 통합 헬멧 시현기로 옮겨 졌다. 전자전[원본 편집] 스티브 오버 록히드마틴 국제사업개발 담당이사는 2014년 9월 말 F-35를 제작하는 미국 텍사스주 포스워스 공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F-35의 EMP탄 방호 능력을 묻는 질문에 “기밀사항”이라고 전제한 뒤 “하지만 EMP탄 방호 능력은 낙뢰시험과 유사한데 F-35는 낙뢰시험을 통과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군사전문가들은 “F-35가 EMP탄에 대비한 최소한의 방호 능력을 갖추고 있거나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2] 정비[원본 편집] 플로리다주 올랜도, 2017년 5월 2일 – 록히드마틴 F-35 프로그램의 차기 자율군수정보 시스템 (Autonomic Logistics Information System, 이하 ALIS)이 미 공군 및 해군의 F-35 시설에 설치되도록 승인되었다. 특히 이번 업데이트 버전은 수 차례 개량 작업을 통해 체계 기준치가 향상 되었고 전진 작전 및 지속성 관리를 위한 중요 능력을 제공한다. 록히드마틴 F-35 군수시스템 담당 리브스 발렌타인(Reeves Valentine) 부사장은 “F-35 운용자들은 이번 ALIS 업그레이드를 통해 시스템 내부에서 ‘만약의’ 시나리오를 예측할 수 있으며 오늘날 수동으로 수행되는 대부분의 작업을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며, “ALIS 2.0.2를 사용해 예측 및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전투기 수명주기 동안 최상의 전투기, 지원 장비, 예비 부품, 정비 인력을 배정 및 관리를 할 수 있으며, 축적된 데이터는 궁극적으로 전투기 효용성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고 전했다.[3] 교체기종[원본 편집] F-35로 교체될 기종은 다음과 같다. AV-8B 해리어 II (미국) 해리어 GR7/9 (영국) 시 해리어 (영국) A-10 선더볼트 II F/A-18 F-16 파생형[원본 편집] USS 아메리카 (LHA-6)에 F-35B 10대, 공격헬기 1대, 수송헬기 2대, 오스프리 2대가 보인다. 일본이 이즈모형 호위함 2척에 F-35B를 배치할 계획이다. F-35 라이트닝Ⅱ(F-35 LightningⅡ)는 미국 군수 업체인 록히드마틴이 중심이 되어 개발해온 전투기다. 이 기종에는 다양한 특징이 있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기체 하나로 3가지 파생형 모델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4] F-35A[원본 편집] F-35 시리즈 중 기본형이다. 2016년 8월 2일 IOC를 획득했다. 정상적으로 활주로로 이착륙하는 유형인 CTOL(conventional take-off and landing). 이 기체는 미 공군이 운용할 예정이다. 파생 기종 중 기체 중량은 가장 가볍지만 무장이나 연료를 가득 채우면 무게는 35톤에 이른다. 제트엔진 1개만으로 비행 가능한 단발기로는 상당한 무게다. F-35B[원본 편집] 기본형인 F-35A를 기반으로 엔진 추력을 더하고 조준 장치를 더한 단거리 이륙 수직 착륙기. STOVL(short take off and vertical landing) 모델이다. 이 모델은 미국 해병대가 사용한다. 짧은 활주로만 있으면 이착륙이 가능하지만 복잡한 노즐기구, 기체 정면에 추가한 이착륙용 리프트팬, 이를 구동하는 샤프트 등으로 중량이 늘어나 운동 성능이나 항속거리 심지어 무장 탑재량도 20% 가량 줄어든다. F-35B는 2015년 7월 IOC를 획득한 바 있다. 수직이착륙 버전은 내부무장창에 2천파운드 폭탄 2발을 장착할 수 없다. 천파운드 2발만 장착할 수 있다. 그래도 사실상 유일한 미국 전투기용 핵폭탄인 700파운드 B61 핵폭탄은 장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F-35C[원본 편집] 미 해군 운용을 위해 개발 중인 모델이다.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하는 함재기(CATOBAR)에 요구되는 성능을 위해 주 날개와 수직 꼬리 날개, 수평 꼬리 날개를 대형화하고 양력장치를 강화하는 한편 기체 구조와 착륙 장치(어레스팅 후크), 착함용 와이어 스팅후크, 날개 접는 기구 등을 추가해 F-35B와 비슷한 무게를 지녔다. 날개를 대형화하고 장비를 단순화해 연료 용량을 늘렸기 때문에 표준형인 F-35A보다 항속거리가 길다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F-35C는 미국 해군이 사용할 것이다. 호넷을 교체하기 위해 480대를 계획하고 있다. F-35C는 슈퍼호넷과 함께 항모에 배치될 것이며, 스텔스가 필요한 때에 사용될 것이다.[5] 2010년 10월, 영국은 수직이착륙기 F-35B의 계약을 전면 취소하고, 대신 F-35C를 도입하기로 하였다. 록히드 마틴의 신기술인 리프트 팬의 개발 지연으로 인한 문제 때문이다. F-35C는 영국 공군과 영국 해군이 병행하여 사용할 것이다.[6] 처음 계획한 150대 보다 적게 도입할 것이다. 영국 신형 항모인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은 만재배수량 65,000톤으로서, 보통 12대의 F-35C를 탑재하며, 최대 36대까지 탑재할 수 있다.[6][7] 2011년 7월 27일, F-35C의 시제기 CF-3는 래이크허스트 지상시험설비에서 처음으로 캐터펄트 이륙을 하였다.[8] 2011년 8월 13일, F-35C는 래이크허스트 시설에서 제트화염반사판(JBD) 테스트를 완료했다. 2013년 최초로 항공모함에서 캐터펄트 이륙시험을 할 계획이다(2013년 7월 테스트 완료). [9] 국제적 참여[원본 편집] F-35 리프트팬(lift fan); VTOL 추진 시스템은 영국 롤스로이스가 설계하고 제작하였다 F-35의 내부도 주된 고객은 미군(USAF, USN, USMC)과 영국군(RAF, RN)이다. 8개국을 위한 세가지 레벨의 국제적 참여가 존재한다. 영국은 유일한 레벨 I 파트너이다. 2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레벨 II 파트너는 대략 10억 달러를 투자한 이탈리아와 8억 달러 정도를 투자한 네덜란드다. 레벨 III 파트너는 다음과 같다: 터키 : 1억 9500만 달러 오스트레일리아 : 1억 4천400만 달러 노르웨이 : 1억 2천2백만 달러 덴마크 : 1억 1천만 달러 캐나다 : 1억 6000만 달러 영국의 F-35B 관련[원본 편집] 영국은 유일한 레벨 I 파트너이다. 25억 달러fmf 투자했다. 영국 해군은 해리어 GR7/9, 시 해리어를 퇴역시켰다. 향후에 STOVL 방식의 수직이착륙기 F-35B 138대를 구매해, 미국 다음으로 수직이착륙기를 많이 구매하려고 했으나, F-35B의 리프트 팬 개발 지연이 알려진 이후, 전량 구매계획을 취소하고, CATOBAR 방식인 F-35C를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에 사용하기로 했다. F-35의 개발지연은 수직이착륙기 F-35B의 리프트 팬 개발 지연 때문이라고 보도되었다. 이로써 영국 해군은 1977년 건조된 인빈시블급 항공모함이래 40여년간의 수직이착륙기 시대를 마치고 다시 CATOBAR 방식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영국은 곧있으면 현재 자국이 유일하게 보유중인 인빈시블급 항공모함이 퇴역예정이라 근 10년여간 항공모함 없이 해군을 이끌어야 하는 실정에 처해있다. 2012년 원안으로 회귀했다. 이미 갑판의 공사가 어느정도 이루어진데다 SVTOL에 맞춰서 설계했기 때문에 캐터펄트와 어레스팅 와이어를 설치하기 힘든 구조이다. 거기에다 캐터펄트 설치에 추가비용이 들고 결정적으로 1978년 어데셔스급 항공모함 아크 로열이 퇴역한 이래 영국은 CATOBAR 항공모함을 운용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조종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결국 F-35B형을 들여오는 것이 여러모로 C형을 들여와서 여러 부분을 보완하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해 STOVL로 돌아왔다. 고급 무기[원본 편집] 단거리 이륙과 수직착륙용의 리프트 팬을 설치하지 않으면 대략 100 ft3의 공간이 남게 된다.[10] 또한 27,000 hp 이상의 출력이 여유있게 되어, 20 MW의 전기출력을 생산할 수 있다.[11] 즉, F-35에 directed-energy weapon를 장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무기로서, 고출력 레이저(solid state laser)와 고출력 마이크로웨이브 빔(high-power microwave beam)이 구상되고 있으며, 현재 실전배치가 가능한 상태까지 개발되었다.[12] 비용/중량의 논쟁들[원본 편집] 2004년을 지나면서 JSF의 총 프로젝트 비용은 23% 증가하여 2,440억 달러가 되었다. 주요 기술적 문제는 2200파운드(목표치의 8%) 초과했다고 알려진 F-35B 기종의 무게 문제였다. 이것은 STOVL 비행기가 요구된 성능을 만족시키지 못할 정도이다. 록히드 마틴은 엔진 추력을 증가시키고 비행기 표면을 얇게 하였으며, F-35B 무기 베이가 축소되었고, 수직꼬리날개가 작아지도록 하는 등 1톤 이상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으로 무게 문제를 점차적으로 풀어나갔다.[13] 보다 작아진 무기 베이는 F-35B가 2 x 1000 lb (450 kg) 무기들만을 내부에 장착할 수 있게 할 것이다.(이것은 최초설계 내용이며, 후에 2 x 2000 lb 요구사항이 추가되었다.) 이것은 적 방공망이 제압된 후에 주어지는 CAS 임무를 수행하기에도 부적당한 용량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F-35B는 A형 C형에 비해 문제가 많으며, 가격 급상승의 요인이 되고 있다. F-35 1호기는 당초 2005년 10월에서 연기되어, 2006년 8월에 첫 비행을 할 것으로 보이며, 단거리 이륙 및 수직착륙 버전인 F-35B는 2007년 초에 첫 비행을 할 예정이다. F-35B의 경우 1,300 kg(3,000 lb)가량의 감량이 필요하고 F-35A과 F-35C의 경우는 600 kg 이상의 감량이 필요하다.[14] 호주의 참여[원본 편집] 2005년 5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당초 2006년에 결정하기로 했던 JSF 사업 참여결정을 2008년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현재 임기가 지난 후에 결정을 하겠다고 한다. 호주의 로비단체, 정치인들, 언론들 사이에서는 F-35가 호주 공군의 F-111과 F/A-18 전투기들을 적시에 교체할 수 있도록 생산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들은 비용대 효과의 문제, 도그 파이팅 능력, 항속거리의 짧음, 그리고 슈퍼크루즈 기능의 부재에 대한 것들이다. 호주정부는 또한, 완성된 F-22를 구입하는 비용이 JSF 사업에 투자하는 비용보다 별로 많이 안든다고 이의제기를 한다.[15] 2005년자 Jane’s Defence weekly는 F-22의 가격을 1억5천1백만 달러(약 1천5백10억원)로 본다. 이는 현재의 F-22 공중전 전용기에 JSF와 같은 공대지 타겟팅 성능을 위한 업그레이드를 할 경우에 대당 2억 달러(약 2천억원)정도일 것이라고 한다. 호주정부는 이러한 정보를 고려하여 그러한 이의제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F-35 도입 프로그램은 F-22 도입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호주 국방장관은 F-35 프로그램이 계속지연되자 슈퍼호넷을 도입을 이르렀다. 기종은 내년에 결정되고 슈퍼호넷을 선택하면 F-35 프로그램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원본 편집] 대한민국 방위사업청은 3차 FX 사업으로 준 스텔스 성능을 가진 4.5세대 전투기인 F-15SE를 선정하였으나, 이후 일부 공군 장성출신들의 반대와 정부 내 록히드 마틴 옹호세력에 의해 F-35A를 FMS(수의계약)으로 40대를 7조 4천억원에 도입하기로 했다. 대당 1850억원 정도이다. 최초 록히드마틴은 대한민국 예산안에서 60대와 절충교역의 내용으로 제시했지만, F-35의 가격상승으로 계약은 40대로 하게 되었다. 2018년 3월에 대한민국 공군 소속 F-35 1호기가 공장에서 출고되었다.[16] 변동이 없다면 17 전투비행단에 퇴역이 임박한 F-4E를 교체하면서 총 40대가 우선 인도되고 높은 확률로 20대가 추가 도입될 계획이다.[17] 별도의 사업으로 대한민국은 한국항공우주산업을 중심으로 록히드 마틴, 인도네시아와 함께 KFX를 개발중이다. KFX는 F-35 라이트닝 II와 길이, 무게, 외양이 모두 비슷한데, 엔진만 2개를 탑재했다. 물론 KFX 쌍발엔진의 출력은 F-35 단발엔진 출력과 비슷하다. 2018년 3월 29일, F-35A 1호기가 미국에서 출고되었다. 북한의 반발을 고려해 국방부 장관과 차관이 출고식에 불참했다. 공군참모총장 대신 참모차장이 참석하고 방위사업청장도 불참했다. 2019년 3월 29일, 오후 2시 30분에 F-35A 2대가 청주공군기지에 도착했다. 22일 F-35A 5호기와 6호기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루크 공군기지에서 출발해 하와이에 중간 기착했으며, KC-135의 공중급유를 받으며 총거리 13,800 km를 비행했다. 5호기와 6호기는 5월에 실전배치될 계획이다. 매달 2대씩 청주공군기지의 제17전투비행단 (대한민국)에 배치되어, 2019년에 모두 10대가 배치될 계획이다. 1~4호기는 미국에서 성능 검사 및 조종사 전환 교육에 투입되고 있다. 2021년까지 F-35A 40대가 배치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3번째, 세계 8번째 스텔스 전투기 보유국이 되었다. F-35A는 스텔스 기능이 강점으로 꼽힌다. 레이더에 포착되는 크기가 F-15K의 100분의 1 수준이다. 즉 스텔스 성능이 100배 높다. 레이더에 얼마나 잘 포착되는지를 나타내는 기준 척도가 RCS라는 개념인데 북한이 운용하는 미그 29가 5㎡, 한국 공군의 주력기종 F-16이 1㎡인 반면 F-35A는 0.0001㎡에 불과하다. 유사시 백두산 까지 F-35A로 핵시설이나 미사일 기지를 야간 정찰하면, 북한이 영공을 침입했는지 여부 조차 알 수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중국이 F-35는 물론 F-22도 포착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신형 레이더 JY-27이 시리아에 배치되었는데, 최근 이스라엘 공군의 F-35A에 공습당해 파괴되었다. 스텔스 기능으로 적의 지대공 레이더와 적기의 레이더에 탑지되지 않으면서, AN/APG-81 레이더는 가동하더라도 적에게 잘 탐지되지 않는 전파를 발산해 적 전자정찰 장비에 쉽게 포착되지 않는데, 150 km 전방에 있는 23개 공중 표적 중에서 3초 안에 19개를 찾았낸다. 2017년 9월 23일, 10월 10일 2차례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1B 전략폭격기 2대가 야간에 북한에 매우 근접해 위협비행을 했는데, 북한은 2번 모두 야간에 지대공 레이더를 켜지 않았다. 아무런 레이더 신호도 없었고, 미그 전투기의 스크램블 (전투기) 비상출격도 없었다. B-1B 전략폭격기에 비하면 F-35A 스텔스 성능은 수십만배 높다. 트럼프 행정부[원본 편집] 2016년 12월 1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트위터에서 "F-35 구매계획과 비용은 통제 불능이다. 수십억 달러가 절약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국방부는 록히드 마틴으로부터 1조 4000억달러(1642조원)를 들여 F-35 스텔스 전투기 2443대를 도입할 계획이었다. 전투기 구매비용은 전투기 본체 구매비용에 부수비용을 포함한다. 부수비용은 전체 사업비의 30%를 차지한다. 군수지원, 예비 부품, 수리보수, 훈련프로그램, 시뮬레이션 센터, 운용 부대 창설과 기지 구축비용 등을 말한다.[18] 2016년 12월 2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트위터에 "록히드 마틴 F-35의 엄청난 비용으로 경비가 초과하는 점에 근거해 보잉에 F-18 슈퍼 호넷의 가격 견적을 요청했다"고 적었다. 2010년 보잉은 미국에 대당 4990만 달러(한화 약 531억 원)에 F-18 슈퍼 호넷을 판매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2000년의 6800만 달러보다(약 722억 원)는 크게 낮은 것이다.[19] 대당 4990만 달러에 2457대면 1226억 달러(144조원)이다. 2017년 1월 27일,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F-35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구매계획에 대한 재검토를 공식 지시했다.[20] F-35 핵전폭기[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B61 핵폭탄입니다. B61 핵폭탄의 최신버전인 B61-12가 10조원의 비용으로 개발되어, F-35의 내부무장창에 탑재될 계획이다. F-35는 현재의 F-16 핵전폭기의 임무를 대체하게 된다. 기존의 B-61-3/4/710 버전이 100 m의 CEP를 갖는데 비해, B61-12는 30 m의 CEP로 향상될 것이다. 현재 네덜란드, 벨기에, 터키의 F-16, 독일, 이탈리아의 파나비어 토네이도에 미국 공군의 B61 핵폭탄이 장착되어 있다. 네덜란드 JSM 미사일은 F-35 내부무장창에 탑재가능한 장거리 공대지 순항미사일이다. 사거리 560 km, 탄두중량 230 kg이다.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탄두중량 200 kg 300 kt 수소폭탄을 공대지 순항미사일에 장착한다. JSM에 프랑스와 이스라엘 처럼 300 kt 수소폭탄을 장착하면, F-35 전투기가 장거리 핵미사일을 갖게 된다. 일본이 JSM 도입을 추진중이다. 한계[원본 편집] L 밴드 레이다[원본 편집] F-22, F-35에 사용된 스텔스 도료는 X 밴드 레이다에 대한 저탐지 도료이다. X 밴드는 7.0-11.2 기가헤르츠 주파수 대역을 말한다. 따라서, 파장이 긴 S 밴드(2-4 기가헤르츠) 레이다에는 저탐지성이 제한적이다. 보다 파장이 긴 L 밴드(1-2 기가헤르츠) 레이다에서는 더욱 탐지되기 쉽다.동시에 rwr같은 경보장치에 l밴드 레이다가 기존 x밴드레이다 보다 더 취약하고 탐지시 정밀도가 떨어져 고속으로 이동하는 전투기를 상대로는 오차가 크게나 교전시 미사일 유도용으로 쓸수가 없기에 활용도는 제한적이다[21] 따라서, 러시아 스텔스기인 수호이 T-50 PAK FA은 적 스텔스기 요격을 위해 L 밴드 AESA 레이다를 장착했다. 독도함에서도 L 밴드 AESA 레이다인 SMART-L 레이다를 사용한다. 모스크바 에어쇼 2009에서, 러시아 회사는 Tikhomirov NIIP L-band AESA 레이다를 전시했다. Su-27에 장착할 수 있다. IRST[원본 편집] IRST는 적외선 열탐지 장치를 말한다. F-35에는 노드롭이 개발한 EO-DAS와 록히드가 개발한 EOTS, 두 종류의 IRST가 탑재되며 EO-DAS는 근거리 탐지용 360도 구형으로 전방향 감시가 가능하고 EOTS는 장거리 탐지 및 지상공격용으로 사용된다. 러시아 스텔스기인 수호이 T-50 PAK FA에 탑재된, 360도 전방향 탐지가 가능한 OLS-50 IRST 시스템의 경우, 전술기를 70 km 거리에서 포착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스텔스기는 추진 기관에 바이패스 냉각 같은 적외선 감소처리를 하기에 그보다는 훨씬 줄어든다. 모의공중전[원본 편집] 레드 플래그 – 알래스카 2012에서 F-22는 IRST를 장착한 독일 공군의 유로파이터에게 근접전에서 격추되었다. EADS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전투에서는 조기경보기의 도움을 받은 4대의 유로파이터가 8대의 F-35에 승리했다.[22] 2015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 에드워드 공군기지 1만~3만 피트 상공에서 31톤 5세대 F-35와 20톤 4세대 F-16D 블록 40 전투기가 17회의 근접전(Dogfight)을 벌였다. 실제 무장은 하지 않고 시뮬레이션 공격만 했다. F-35의 기동성이 훨씬 나빠서, 대패했다. 2인승인 F-16D는 보조연료탱크를 두 개나 단 무거운 상태였다. F-35의 시제기 AF-2 2호기는 임무체계 소프트웨어가 탑재되지 않아 적기가 F-35를 발견하기 전에 F-35가 먼저 적을 탐지할 수 있는 센서를 이용할 수 없었다. 또한 스텔스 특수코팅이 적용되지 않았고, 조종사가 항공기의 방향을 움직이지 않고도 헬멧으로 무장을 조준, 발사하도록 하는 무장이나 소프트웨어가 탑재돼 있지 않았다. 순수한 기관총 근접전(Dogfight)의 기동성능 테스트였다. 완전한 버전의 F-35A 4대와 F-16D 블록 40 4대의 편대간 공중전에서는 F-35가 완승했다.[23] F-35 전투기가 원래의 기능과 성능을 갖춘 상태에서 공중전을 펼친다면, F-16D는 격추될 때까지 F-35의 존재도 파악할 수 없다.[24] F-35는 선회 중 기체의 속도를 낮추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독파이팅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엄청난 자동화가 이루어진 F-35를 이전 기체들처럼 움직이려다 보니 되려 조종을 할 후 없는 상태에 빠지고들 한다. 많은 부분이 자동화 제어가 되어있는 바람에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못한 까딱이다. 엔지니어들은 자동 제어 이상의 기동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두 손을 묶고 싸우는 것 같다는 조종사들의 의견을 수렴해 기체의 시스템을 수정하였고, 이젠 근접전마저 F-35가 재패하게 되었다. 2015 모의전 이후부터 좋은 성적을 쌓으며, 2015 레드 플래그 훈련에서는 20 대 1이라는 격추비를 보여주었다. [25] 제원[원본 편집] AN/APG-81. F-35 전투기의 레이다다. 일반 특성 조종사 : 1 길이 : 51.4 ft (15.67 m) 폭 : 35 ft (10.67m) 높이 : 14.2 ft (4.57 m) 날개면적 : 460 ft(42.74 m^2) 공 중량 : 29,300 lb (13,170kg) 무장시 중량 : 49,540 lb (22,470 kg) 최대이륙중량 : 70,000 lb (31,800 kg) 레이다 : AN/APG-81 엔진 : 1× 프랫 앤 휘트니 F135 후기연소기가 장착된 터보팬엔진, 추력 : 43,000 lbf (178kN) Secondary (High Performance), 현재 예산안에는 중단된[26]: 1x General Electric/Rolls-Royce F136 afterburning turbofan 178 kN thrust Lift fan (STOVL): 1x Rolls-Royce Lift System in conjunction with either F135 or F136 power plant 18,000 lbf (80 kN) thrust) 성능 최대속도 : Mach 1.6 (~1,200 mph, 1930 km/h) 순항속도 : Mach (mph, km/h) 전투행동반경 (내부연료)[27] F-35A: 1,093km F-35B: 833km F-35C: 1,100km 항속거리반경 (내부연료) F-35A: 2,222km F-35B: 1,667km F-35C: 2,593km (F-35A보다 길다.) 운용고도 : 48,000 ft (15,000 m) 상승률 : 40,000 ft/min[13] (200 m/s) Wing loading : 91.4 lb/ft² (446 kg/m²) 추력대중량비 : 100% 연료:0.968, 50% 연료 : 1.22 무장 1x GAU-12/U 25 mm 기관포. F-35A에 탑재 공대공 미사일 : AIM-120 AMRAAM, AIM-9 사이드와인더 폭탄 : JDAM, JSOW, SDB 공대지 미사일: HARM, AGM-158 JASSM, 스톰 섀도 기타 F-35A . F-35B . F-35C. 가격: F-35A: 1.53억 달러(약 1700억원) 최초 비행 - X-35 시제기기: 2000년 F-35A 최초 비행 예정일 - 2006년 8월 실전배치: 2016년에서 2018년 사이. The reason for this is that the A will be brought into service first followed by the B. 함재기 버전은 2017년에 실전배치될 것이다. 생산자 록히드 마틴 항공(Lockheed Martin Aeronautics): 주사업자 최종 조립 전체적인 시스템 인티그레이션 Mission system 전방 동체(Forward fuselage) 날개 노스럽 그루만 AESA(Active Electronically Scanned Array) 레이다 가운데 동체(Center fuselage) Weapons bay Arrestor gear BAE Systems 측면 동체(Aft fuselage), empennages 수직, 수평 꼬리날개 조종석 전자전 시스템 F-35는 최신 기체답게 전자전에도 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북한의 방공망을 무력화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더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미 안보 전문매체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TNI)에 따르면 미 해군은 러시아와 중국의 최신예 지대공 미사일 망에 탐지되지 않고 상대 레이다망에 방해전파를 발사해 무력화하는 차세대 전자전체계(NGJ)를 오는 2021년까지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미 해군은 또 통상의 레이다 경보 수신기가 방어만 가능한 것을 보완하려고 F-35 스텔스기나 F/A-18 슈퍼 호넷 등 주력 전투기에도 NGJ를 장착할 수 있도록 해 전자전 공격 능력을 향상한다는 계획이다. 미 해군은 EA-18G기용 NGJ 135세트를 도입한 후 다시 이를 다른 기종에도 확대하기로 했다. 레이시온 고위 관계자는 "NGJ가 전자전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미 해군이 러시아와 중국의 대공망을 무력화해 전력 우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28] 연료 시스템 무장 제어 소프트웨어(FCS1: Flight Control Software) 같이 보기[원본 편집] 스텔스 5세대 전투기 미쓰비시 ATD-X 대한민국 차세대전투기 사업(KFX) 관련 개발 록히드 마틴 X-35 F-22 랩터 유사 항공기 수호이 PAK FA 관련 목록 전투기 목록 헬멧 마운티드 디스플레이(en:Helmet mounted display) 참고[원본 편집] 각주[원본 편집] ↑ 韓공군 F-35 가격 낮아질 듯‥LM, 원가절감시행, 뉴데일리, 2016. 7. 15 ↑ F-35A, EMP탄 방호 능력도 갖춘 듯, 문화일보, 2014. 10. 10 ↑ 록히드마틴, F-35 전투기의 군수 시스템 신규 능력 지원, 유용원의 군사세계, 2017. 5. 4 ↑ 스텔스 전투기 F-35…15년 고난의 개발사, 테크홀릭, 2016. 8. 8 ↑ "F-35C Carrier Variant Joint Strike Fighter (J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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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h rejects Blair’s pleas to save F-35 contract for Rolls-Royce[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Business Online, UK Retrieved Feb. 08, 2006. ↑ 하늘의 포르쉐 911 GT3 RS, `록히드마틴 F-35 라이트닝 II 조인트 스트라이크 파이터`, 매일경제, 2015. 12. 11 ↑ 美, 러'ㆍ中 방공망 뚫는 차세대 전자전체계 배치 서둘러, 연합뉴스, 2016. 10. 6 문헌[원본 편집] Borgu, Aldo. A Big Deal: Australia's Future Air Combat Capability. Canberra: Australian Strategic Policy Institute, 2004. ISBN 1-920722-25-4. Gunston, Bill. Yakovlev Aircraft since 1924. London: Putnam Aeronautical Books, 1997. ISBN 1-55750-978-6. Keijsper, Gerald. Lockheed F-35 Joint Strike Fighter. London: Pen & Sword Aviation, 2007. ISBN 978-1-84415-631-3. Kopp, Carlo and Peter Goon. "Joint Strike Fighter." Air Power Australia. Retrieved: 15 July 2007. Spick, Mike. The Illustrated Directory of Fighters. London: Salamander, 2002. ISBN 1-84065-384-1. Winchester, Jim. "Lockheed Martin X-35/F-35 JSF." Concept Aircraft: Prototypes, X-Planes and Experimental Aircraft. Thunder Bay Press, 2005. ISBN 1-59223-480-1. Spick, Mike (2002), The Illustrated Directory of Fighters. Salamander ISBN 1-84065-384-1 Kopp, Carlo; Goon, Peter, Australian Aviation, JSF related articles. 외부 링크[원본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F-35 라이트닝 II Official JSF web site Official Team JSF industry web site [깨진 링크([http://web.archive.org/web/*/http://www.jsf.org.uk/ 과거 내용 찾기)] JSF UK Team][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F-35 - Royal Air Force US Navy Research, Development & Acquisition, F-35 page F-35 - Global Security F-35 profile and F-35 weapons carriage on Aerospaceweb.org F-35 Lightning II News on f-35jsf.net F-35B Roll out pictures F-35 Article - Armed Forces F-35 photo gallery Data on the F-35 Joint Strike Fighter (JSF) by the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Global Security on the F-35 JSF Program [1] vdeh록히드 마틴제품 이지스 AN/SPY-1 ASROC ATACMS 아틀라스 미사일 C-5 C-130 우주왕복선 외부연료탱크 밀스타 M270 MLRS F-16 F-22 랩터 F-35 F-117 JASSM 재블린 JCM 헬파이어 P-3 프레데터 SBIRS THAAD T-50 트라이던트 미사일 트라이던트 II VH-71/US101 U-2 AN/FPS-117 KH-11 KH-12 KH-13 MEADS 회사 정보 웹사이트 연간 매출액: $35.5 billion USD (FY2004) 종업원수: 135,000명 종목명칭: NYSE: LMT vdeh사용 중인 미국의 군용기전투기 AV-8B 해리어 II F-15 F-15E F-16 F/A-18 호넷 F/A-18E/F 슈퍼 호넷 F-22 랩터 F-35 라이트닝 II 폭격기 B-52 스트래토포트리스 B-1 랜서 B-2 스피릿 정찰기 GNAT-750 MQ-1 프레데터 RQ-2 파이오니어 RQ-4 글로벌 호크 RQ-7 섀도 MQ-9 리퍼 록히드 U-2 MQ-1C 워리어 수송기 C-2 그레이하운드 C-5 갤럭시 C-9 스카이트레인II C-17 글로브마스터III C-20 걸프스트림III C-21 리어젯 보잉 C-22 보잉 C-32 C-37 걸프스트림V C-40 클리퍼 C-130 허큘리스 C-130J 슈퍼 허큘리스 C-135 스트래토리프터 조기경보기 E-2 호크아이 E-3 센트리 E-8 조인트스타스 훈련기 T-1 제이호크 T-37 트윗 T-38 탤론 보잉 T-43 T-6 텍산 II T-34 멘터 T-39 사브렐라이너 T-2 버크아이 T-44 페가수스 T-45 고스호크 헬기 SH-3 시킹 SH-60B/F 시호크 AH-1 코브라 AH-6J 리틀버드 AH-64 아파치 CH-46 시나이트 CH-47D/F 치누크 CH-53E 슈퍼스탤리온 MH-6J/M 리틀버드 MH-47G 스페셜 오퍼레이션 치누크 MH-53J/M 페이브로우 III/IV MH-60K/L/M 블랙호크 MH-60S 시호크 OH-58A/C/D HH-60G 페이브호크 HH-60H 시호크 MH-68A 스팅레이 VH-3A/D 시킹/마린원 VH-53D 시스탤리온/마린원 VH-60L 블랙호크 VH-60N 나이트호크/마린원 UH-1 이로쿼이 UH-3H 시킹 UH-60A/L 블랙호크 V-22 오스프리 공격기 A-10 썬더볼트 II A-37 드래곤플라이 공중급유기 KC-135 스트래토탱커 보잉 KC-767 KC-45 KC-10 익스텐더 KCS-3 바이킹 기타 S-3 바이킹 보잉 VC-25A 에어포스원 EP-3E 에어리즈II 보잉 E-4B 나이트워치 E-6 머큐리 EA-6B 프라울러 TH-57A 시레인저 TH-67A 크리크 P-3 오라이온 보잉 YAL-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F-35_라이트닝_II&oldid=24435974" 분류: 미국의 전투기공격기함재기스텔스기수직 이착륙 항공기록히드 마틴 항공기2006년 첫 비행한 항공기단발 제트기숨은 분류: 웹아카이브 틀 경고웹아카이브 틀 기타 아카이브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کوردی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Latviešu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پنجابی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ייִדיש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6일 (일) 12: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근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근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근세(近世, early modern period)는 서양의 중세와 근대 사이의 시기이다. 이를 다시 근세와 근대로 나누기도 하며, 근대는 대개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20세기 초엽(주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를 가리키며, 근세는 그 이전을 일컫는다. 목차 1 개요 2 유럽의 근세 2.1 프랑스와 영국의 왕권 강화 2.2 르네상스 2.3 종교 개혁 2.4 지리상의 발견 2.5 신대륙 식민 3 한국의 근세 4 같이 보기 5 참고 문헌 개요[편집] 서구의 중세 봉건사회는 로마 교회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정신적 공동체로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수차에 걸쳐서 감행된 십자군 원정 이래 로마 교회의 권위와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십자군 운동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상업의 발달은 화폐의 통용을 가져왔고 화폐경제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농업을 주로 하는 봉건사회 내부에 변화를 일으켰다. 즉 봉건 지대(地代)의 금납화(金納化) 과정이 도처에서 실시됨으로써 장원제를 서서히 해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정치적인 측면에서 15 16세기 유럽을 개관해 보면 소위 근대적 국민국가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하는 동안 싹이 튼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의지를 하나로 묶을 수가 있었으며, 봉건제후(封建諸侯) 사이에 벌어졌던 장미 전쟁을 계기로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튜더 왕조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15-16세기는 정치·경제면만의 변혁기가 아니었고,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혁명을 일으킨 시기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문화의 모체가 된 문예 부흥 운동은 인간의 정신활동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었지만 그 중심 사상은 특히 미술과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근본정신은 현세를 존중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는 십자군 운동 이래 동방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부의 축적과 병행하여 외부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어느 국가보다 먼저 받았으며, 14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발흥하였고, 16세기 중엽까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16세기 초엽 독일에서는 인문주의자와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세 로마 교회의 미신적 교리와 교권에 항거하고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후스, 영국의 위클리프를 거쳐 마침내 루터에 이르러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네바의 칼뱅과 스위스의 츠빙글리 등은 각각 타당한 명분을 내걸고 로마 교회와 대결하여 개혁운동을 촉진시켰다. 이 개혁 운동은 단순히 로마 교회에 대한 항거라는 차원에서 끝나 버린 것이 아니고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의 개혁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서아시아에서는 티무르(Timur)가 나타나 차가타이 한국·일 한국과 오스만 투르크를 정복한 다음 강대한 국가를 수립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티무르는 죽고 말았다. 그의 제국도 분열되고 티무르 제국에서 벗어난 오스만 투르크는 소아시아 방면에서 강력한 신흥국가로 등장하여 소아시아 지역을 휩쓸었다. 1453년 모하메드 2세 때에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였다. 1000여 년간 지속되어 오던 비잔틴 제국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오스만 투르크는 세력을 계속 신장시켜 16세기 초에는 발칸반도 전역을 복속시켰다. 그래서 1517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Sultan, 황제)이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로 군림하던 무렵에는 그 막강한 세력으로 서유럽을 위협함으로써 새로운 위기를 조성시켰다. 이 무렵 인도에서는 티무르 제국이 성립한 후 토후국(土侯國)으로 분열상태를 계속해 오다가 티무르의 후계인 바벨(Babel)이 델리 정권을 타도한 다음 무굴 제국을 건설하였다. 14세기 중엽부터 원조(元朝)의 정치세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오랫동안 그 압제하에서 신음하던 한족(漢族)은 반란을 일으켜 몽골족을 다시 사막으로 추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명(明)은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자 즉시 한민족(漢民族)의 중흥과 한문화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영락제(永樂帝)는 북원(北元)의 잔존세력을 소탕하고 남방에는 정화(鄭和)를 파견, 명의 국위를 널리 선양하였다. 그러나 명조(明朝)도 중기에 이르자 대외적으로는 소위 북로남왜(北虜南倭)로 곤경에 빠지게 되고 대내적으로 환관(宦官)의 횡포와 당파싸움에 국세는 차츰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유럽의 근세[편집] 프랑스와 영국의 왕권 강화[편집] 백년전쟁은 그것이 단순히 왕위 계승이나 플랑드르 쟁탈을 에워싼 100년 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 출신 영국 왕실이 프랑스 국내에 갖고 있는 봉토에 대한 지배권(知行權)을 둘러싸고 되풀이된 영국·프랑스 사이의 고질적인 분쟁의 계속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국이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국가의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때에 해당하며 영국·프랑스의 봉건적 제세력을 많이 동원함으로써,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국내 봉건 제후 내부의 투쟁이기도 하였으며, 제후의 몰락과 왕권의 신장, 국민 의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 루이 11세, 샤를 8세에 의한 전후 재건을 통해서 왕권이 정비되었다. 영국에서 전후 또다시 제후, 기사들을 휘말아버린 30년에 걸친 내전인 장미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등장하는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에 의해 영국 절대주의가 등장하였다. 르네상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르네상스입니다. 영국, 프랑스에 왕권이 신장되고 있던 시대에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고 남부에서 나폴리 왕국, 중부에서 로마 교황령, 북부에서는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이익을 거둔 도시가 주변 농촌까지도 지배하에 두고 도시 국가로 번영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을 무대로 부유한 상인층을 기수로 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전개되었다. 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의 옛 영토로서 유적과 유물에 접하는 기회가 풍부하였다. 유럽 중세의 신에 대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이 대치되어 피안적(彼岸的)이 아니고 차안적(此岸的)·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의 약동에 찬 문화가 시민 계급에 의해 이 곳에서 창조되기에 이르렀다. 단테는 《신곡》을 써 르네상스의 선구가 되었고,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가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르네상스 예술은 조토 디 본도네에서 시작해 보티첼리를 거쳐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출현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즈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써서 분열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호소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북방 서구 여러 나라에 파급되고, 제각기 나라별로 독자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의 단순한 모방 따위는 아니다. 네덜란드나 남독일과 같이 도시를 기반으로 하면서 때로는 프랑스·에스파냐·영국처럼 왕권에 의한 국가 통일을 배경으로 르네상스는 싹터 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와 같이 벌써 15세기 초에 반 에이크 형제에 의한 사실적인 풍경화·초상화가 뒤의 플랑드르파의 기초를 만들고 있었으며, 반대로 형제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유화법은 베네치아의 화가를 통하여 이탈리아로 전해졌다. 영국에서는 위클리프의 성서 영역,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통해서 영국 국민 문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더욱이 서구 여러 나라의 르네상스는 깊은 종교성 속에서 전개되었고, 특히 그 휴머니즘은 그리스어, 헤브라이어 원전(原典)에 의한 성서 연구를 통해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남북 유럽을 연결시키는 상업의 중심지이며 모직물 공업이 왕성한 네덜란드에서는 농민의 생활을 밝게 묘사한 브뤼헐이나 시민의 세계를 묘사한 루벤스, 렘브란트 등이 활동하였다. 16세기 최대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린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연구하고 《치우신 예찬》에서 교회의 부패를 풍자했다. 독일에서 르네상스는 종교성으로 짙게 채색된다. 로이힐린, 멜란히톤의 인문주의적인 성서 연구, 뒤러의 회화가 그렇다. 프랑스에서는 궁정의 보호 아래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이야기》나 몽테뉴의 《수상록》 등 예리한 풍자 정신으로 일관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국가 통일과 해외의 발전을 추진하고 있었던 에스파냐에서는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에서 몰락해 가는 기사계급을 풍자하며 인간을 추구한다. 절대주의 체제하의 영국에서는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썼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이 경험론 철학의 기초를 만들어 놓았으며, 셰익스피어가 많은 걸작을 남겼다. 종교 개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종교 개혁입니다. 독일에서는 13,14세기 이래 영방국가 체제가 더욱 진전되고 성속(聖俗)의 제후나 도시는 자립했으며 국내의 분열은 점점 심해져 갔다. 쇠퇴해 가고 있던 교황권은 국가적 통일의 약한 부분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 레오 10세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가 독일을 목표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의한다. 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한 루터의 95개 조항의 논제 발표(1517)와 함께 종교개혁(Reformation)이 시작되었다. 봉건사회의 해체가 늦어진 독일에서도 농민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15세기 이래 농민 폭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였으며, 루터의 개혁에서 그들의 사회적 해방을 기대하였다. 1524년과 1525년 뮌처의 민중적인 설교를 신봉한 서남 독일의 농민들은 격렬한 농민전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루터에게 격려되어 태세를 정비한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더욱이 이들은 종교개혁을 정치 대립에 이용했다. 1529년의 슈바이엘 국회에서 황제에게 항의한 루터파의 제후들은 이듬해 동맹을 맺어 황제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고 슈말칼덴 전쟁을 벌였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나 도시에게 루터파 신앙을 인정함으로써 영방 지배 체제를 종교면에서 확인한 것에 불과하였으며, 독일은 결국 영방국가 체제의 강화, 따라서 국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리상의 발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항해 시대입니다. 12,13세기에 봉건사회의 완성과 더불어 유럽 세계는 밖으로 향해서 팽창·확대를 시작했다. 동남방으로 향해서 십자군이, 서남방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국토 회복이, 동방에는 동독일 식민이 있었다. 이 유럽의 팽창·확대의 전개로서, 15세기 말의 지리상의 발견을 볼 수 있다. 동방에 대한 동경에 곁들여 십자군 이래 이슬람 상인을 매개체로 한 동방 무역의 유리함에 눈뜬 유럽 여러 나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발전으로 무역이 방해를 받았으므로 인도에 이르는 항로의 개발을 기도하였다. 14,15세기에 동방 무역으로 번영한 북이탈리아 도시가 아니라 이슬람과의 국토 회복 전쟁을 통해서 강력한 왕권하에 통일국가를 형성해 가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그 선두에 섰다. 헨리 항해왕 밑에서 착실하게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을 해 나가던 포르투갈에서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하였으며(1488), 그 후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마침내 인도에 도달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1492년 콜럼버스가 단번에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신대륙 식민[편집] 신대륙의 식민 활동은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유럽의 여러 민족이 건너가, 원주민 인디언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유럽 문명과 사회를 이식(移植)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 에스파냐는 16세기 말까지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했다. 에스파냐가 식민지를 경영한 목적은 금·은의 채굴이었으며, 국왕의 직할 지배 아래 영위(營爲)되었다. 네덜란드는 서인도제도, 기아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시 맨해턴섬과 허드슨 강변에 뉴네덜란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1621년에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활동을 했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캐나다에 진출하여 루이 14세 시대에 미시시피강 일대에 광대한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식민 활동은 모피 무역과 가톨릭의 포교(布敎)를 주로 한 것으로, 인구도 적은데다, 국왕의 직접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1497년 존 카보트의 북아메리카 동안(東岸), 체사피크만(灣) 부근의 탐험으로 시작되었는데, 실제의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였다. 1606년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회사(런던 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에 특허장을 주어 식민과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1707년에 제임스 하구(河口)에 건설되어 태평양으로 나가는 방향이 탐색되었다. 제임스 1세의 국교 강제를 피하여, 청교도들이 종교나 정치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건설이나 가톨릭 교도의 메릴랜드나 찰스 2세의 특허장에 의한 영주 식민지(領主植民地)인 캐롤라이나 식민지 등 1732년까지 13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영국 식민지는 견실한 농업 식민이 주이며, 인구도 많고 건전한 발달을 했다. 한국의 근세[편집] 한국사의 시대 구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국의 경우 조선의 건국인 1392년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 1863년까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고대 고대 후기 중세 근대 현대 참고 문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전 고전후 시대 다 음 근대 vdeh시대 구분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근세&oldid=23824757" 분류: 근세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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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근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근세(近世, early modern period)는 서양의 중세와 근대 사이의 시기이다. 이를 다시 근세와 근대로 나누기도 하며, 근대는 대개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20세기 초엽(주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를 가리키며, 근세는 그 이전을 일컫는다. 목차 1 개요 2 유럽의 근세 2.1 프랑스와 영국의 왕권 강화 2.2 르네상스 2.3 종교 개혁 2.4 지리상의 발견 2.5 신대륙 식민 3 한국의 근세 4 같이 보기 5 참고 문헌 개요[편집] 서구의 중세 봉건사회는 로마 교회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정신적 공동체로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수차에 걸쳐서 감행된 십자군 원정 이래 로마 교회의 권위와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십자군 운동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상업의 발달은 화폐의 통용을 가져왔고 화폐경제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농업을 주로 하는 봉건사회 내부에 변화를 일으켰다. 즉 봉건 지대(地代)의 금납화(金納化) 과정이 도처에서 실시됨으로써 장원제를 서서히 해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정치적인 측면에서 15 16세기 유럽을 개관해 보면 소위 근대적 국민국가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하는 동안 싹이 튼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의지를 하나로 묶을 수가 있었으며, 봉건제후(封建諸侯) 사이에 벌어졌던 장미 전쟁을 계기로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튜더 왕조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15-16세기는 정치·경제면만의 변혁기가 아니었고,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혁명을 일으킨 시기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문화의 모체가 된 문예 부흥 운동은 인간의 정신활동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었지만 그 중심 사상은 특히 미술과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근본정신은 현세를 존중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는 십자군 운동 이래 동방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부의 축적과 병행하여 외부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어느 국가보다 먼저 받았으며, 14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발흥하였고, 16세기 중엽까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16세기 초엽 독일에서는 인문주의자와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세 로마 교회의 미신적 교리와 교권에 항거하고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후스, 영국의 위클리프를 거쳐 마침내 루터에 이르러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네바의 칼뱅과 스위스의 츠빙글리 등은 각각 타당한 명분을 내걸고 로마 교회와 대결하여 개혁운동을 촉진시켰다. 이 개혁 운동은 단순히 로마 교회에 대한 항거라는 차원에서 끝나 버린 것이 아니고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의 개혁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서아시아에서는 티무르(Timur)가 나타나 차가타이 한국·일 한국과 오스만 투르크를 정복한 다음 강대한 국가를 수립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티무르는 죽고 말았다. 그의 제국도 분열되고 티무르 제국에서 벗어난 오스만 투르크는 소아시아 방면에서 강력한 신흥국가로 등장하여 소아시아 지역을 휩쓸었다. 1453년 모하메드 2세 때에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였다. 1000여 년간 지속되어 오던 비잔틴 제국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오스만 투르크는 세력을 계속 신장시켜 16세기 초에는 발칸반도 전역을 복속시켰다. 그래서 1517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Sultan, 황제)이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로 군림하던 무렵에는 그 막강한 세력으로 서유럽을 위협함으로써 새로운 위기를 조성시켰다. 이 무렵 인도에서는 티무르 제국이 성립한 후 토후국(土侯國)으로 분열상태를 계속해 오다가 티무르의 후계인 바벨(Babel)이 델리 정권을 타도한 다음 무굴 제국을 건설하였다. 14세기 중엽부터 원조(元朝)의 정치세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오랫동안 그 압제하에서 신음하던 한족(漢族)은 반란을 일으켜 몽골족을 다시 사막으로 추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명(明)은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자 즉시 한민족(漢民族)의 중흥과 한문화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영락제(永樂帝)는 북원(北元)의 잔존세력을 소탕하고 남방에는 정화(鄭和)를 파견, 명의 국위를 널리 선양하였다. 그러나 명조(明朝)도 중기에 이르자 대외적으로는 소위 북로남왜(北虜南倭)로 곤경에 빠지게 되고 대내적으로 환관(宦官)의 횡포와 당파싸움에 국세는 차츰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유럽의 근세[편집] 프랑스와 영국의 왕권 강화[편집] 백년전쟁은 그것이 단순히 왕위 계승이나 플랑드르 쟁탈을 에워싼 100년 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 출신 영국 왕실이 프랑스 국내에 갖고 있는 봉토에 대한 지배권(知行權)을 둘러싸고 되풀이된 영국·프랑스 사이의 고질적인 분쟁의 계속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국이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국가의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때에 해당하며 영국·프랑스의 봉건적 제세력을 많이 동원함으로써,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국내 봉건 제후 내부의 투쟁이기도 하였으며, 제후의 몰락과 왕권의 신장, 국민 의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 루이 11세, 샤를 8세에 의한 전후 재건을 통해서 왕권이 정비되었다. 영국에서 전후 또다시 제후, 기사들을 휘말아버린 30년에 걸친 내전인 장미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등장하는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에 의해 영국 절대주의가 등장하였다. 르네상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르네상스입니다. 영국, 프랑스에 왕권이 신장되고 있던 시대에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고 남부에서 나폴리 왕국, 중부에서 로마 교황령, 북부에서는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이익을 거둔 도시가 주변 농촌까지도 지배하에 두고 도시 국가로 번영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을 무대로 부유한 상인층을 기수로 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전개되었다. 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의 옛 영토로서 유적과 유물에 접하는 기회가 풍부하였다. 유럽 중세의 신에 대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이 대치되어 피안적(彼岸的)이 아니고 차안적(此岸的)·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의 약동에 찬 문화가 시민 계급에 의해 이 곳에서 창조되기에 이르렀다. 단테는 《신곡》을 써 르네상스의 선구가 되었고,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가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르네상스 예술은 조토 디 본도네에서 시작해 보티첼리를 거쳐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출현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즈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써서 분열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호소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북방 서구 여러 나라에 파급되고, 제각기 나라별로 독자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의 단순한 모방 따위는 아니다. 네덜란드나 남독일과 같이 도시를 기반으로 하면서 때로는 프랑스·에스파냐·영국처럼 왕권에 의한 국가 통일을 배경으로 르네상스는 싹터 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와 같이 벌써 15세기 초에 반 에이크 형제에 의한 사실적인 풍경화·초상화가 뒤의 플랑드르파의 기초를 만들고 있었으며, 반대로 형제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유화법은 베네치아의 화가를 통하여 이탈리아로 전해졌다. 영국에서는 위클리프의 성서 영역,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통해서 영국 국민 문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더욱이 서구 여러 나라의 르네상스는 깊은 종교성 속에서 전개되었고, 특히 그 휴머니즘은 그리스어, 헤브라이어 원전(原典)에 의한 성서 연구를 통해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남북 유럽을 연결시키는 상업의 중심지이며 모직물 공업이 왕성한 네덜란드에서는 농민의 생활을 밝게 묘사한 브뤼헐이나 시민의 세계를 묘사한 루벤스, 렘브란트 등이 활동하였다. 16세기 최대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린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연구하고 《치우신 예찬》에서 교회의 부패를 풍자했다. 독일에서 르네상스는 종교성으로 짙게 채색된다. 로이힐린, 멜란히톤의 인문주의적인 성서 연구, 뒤러의 회화가 그렇다. 프랑스에서는 궁정의 보호 아래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이야기》나 몽테뉴의 《수상록》 등 예리한 풍자 정신으로 일관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국가 통일과 해외의 발전을 추진하고 있었던 에스파냐에서는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에서 몰락해 가는 기사계급을 풍자하며 인간을 추구한다. 절대주의 체제하의 영국에서는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썼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이 경험론 철학의 기초를 만들어 놓았으며, 셰익스피어가 많은 걸작을 남겼다. 종교 개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종교 개혁입니다. 독일에서는 13,14세기 이래 영방국가 체제가 더욱 진전되고 성속(聖俗)의 제후나 도시는 자립했으며 국내의 분열은 점점 심해져 갔다. 쇠퇴해 가고 있던 교황권은 국가적 통일의 약한 부분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 레오 10세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가 독일을 목표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의한다. 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한 루터의 95개 조항의 논제 발표(1517)와 함께 종교개혁(Reformation)이 시작되었다. 봉건사회의 해체가 늦어진 독일에서도 농민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15세기 이래 농민 폭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였으며, 루터의 개혁에서 그들의 사회적 해방을 기대하였다. 1524년과 1525년 뮌처의 민중적인 설교를 신봉한 서남 독일의 농민들은 격렬한 농민전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루터에게 격려되어 태세를 정비한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더욱이 이들은 종교개혁을 정치 대립에 이용했다. 1529년의 슈바이엘 국회에서 황제에게 항의한 루터파의 제후들은 이듬해 동맹을 맺어 황제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고 슈말칼덴 전쟁을 벌였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나 도시에게 루터파 신앙을 인정함으로써 영방 지배 체제를 종교면에서 확인한 것에 불과하였으며, 독일은 결국 영방국가 체제의 강화, 따라서 국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리상의 발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항해 시대입니다. 12,13세기에 봉건사회의 완성과 더불어 유럽 세계는 밖으로 향해서 팽창·확대를 시작했다. 동남방으로 향해서 십자군이, 서남방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국토 회복이, 동방에는 동독일 식민이 있었다. 이 유럽의 팽창·확대의 전개로서, 15세기 말의 지리상의 발견을 볼 수 있다. 동방에 대한 동경에 곁들여 십자군 이래 이슬람 상인을 매개체로 한 동방 무역의 유리함에 눈뜬 유럽 여러 나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발전으로 무역이 방해를 받았으므로 인도에 이르는 항로의 개발을 기도하였다. 14,15세기에 동방 무역으로 번영한 북이탈리아 도시가 아니라 이슬람과의 국토 회복 전쟁을 통해서 강력한 왕권하에 통일국가를 형성해 가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그 선두에 섰다. 헨리 항해왕 밑에서 착실하게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을 해 나가던 포르투갈에서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하였으며(1488), 그 후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마침내 인도에 도달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1492년 콜럼버스가 단번에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신대륙 식민[편집] 신대륙의 식민 활동은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유럽의 여러 민족이 건너가, 원주민 인디언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유럽 문명과 사회를 이식(移植)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 에스파냐는 16세기 말까지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했다. 에스파냐가 식민지를 경영한 목적은 금·은의 채굴이었으며, 국왕의 직할 지배 아래 영위(營爲)되었다. 네덜란드는 서인도제도, 기아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시 맨해턴섬과 허드슨 강변에 뉴네덜란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1621년에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활동을 했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캐나다에 진출하여 루이 14세 시대에 미시시피강 일대에 광대한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식민 활동은 모피 무역과 가톨릭의 포교(布敎)를 주로 한 것으로, 인구도 적은데다, 국왕의 직접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1497년 존 카보트의 북아메리카 동안(東岸), 체사피크만(灣) 부근의 탐험으로 시작되었는데, 실제의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였다. 1606년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회사(런던 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에 특허장을 주어 식민과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1707년에 제임스 하구(河口)에 건설되어 태평양으로 나가는 방향이 탐색되었다. 제임스 1세의 국교 강제를 피하여, 청교도들이 종교나 정치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건설이나 가톨릭 교도의 메릴랜드나 찰스 2세의 특허장에 의한 영주 식민지(領主植民地)인 캐롤라이나 식민지 등 1732년까지 13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영국 식민지는 견실한 농업 식민이 주이며, 인구도 많고 건전한 발달을 했다. 한국의 근세[편집] 한국사의 시대 구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국의 경우 조선의 건국인 1392년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 1863년까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고대 고대 후기 중세 근대 현대 참고 문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전 고전후 시대 다 음 근대 vdeh시대 구분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근세&oldid=23824757" 분류: 근세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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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근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근세(近世, early modern period)는 서양의 중세와 근대 사이의 시기이다. 이를 다시 근세와 근대로 나누기도 하며, 근대는 대개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20세기 초엽(주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를 가리키며, 근세는 그 이전을 일컫는다. 목차 1 개요 2 유럽의 근세 2.1 프랑스와 영국의 왕권 강화 2.2 르네상스 2.3 종교 개혁 2.4 지리상의 발견 2.5 신대륙 식민 3 한국의 근세 4 같이 보기 5 참고 문헌 개요[편집] 서구의 중세 봉건사회는 로마 교회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정신적 공동체로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수차에 걸쳐서 감행된 십자군 원정 이래 로마 교회의 권위와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십자군 운동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상업의 발달은 화폐의 통용을 가져왔고 화폐경제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농업을 주로 하는 봉건사회 내부에 변화를 일으켰다. 즉 봉건 지대(地代)의 금납화(金納化) 과정이 도처에서 실시됨으로써 장원제를 서서히 해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정치적인 측면에서 15 16세기 유럽을 개관해 보면 소위 근대적 국민국가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하는 동안 싹이 튼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의지를 하나로 묶을 수가 있었으며, 봉건제후(封建諸侯) 사이에 벌어졌던 장미 전쟁을 계기로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튜더 왕조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15-16세기는 정치·경제면만의 변혁기가 아니었고,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혁명을 일으킨 시기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문화의 모체가 된 문예 부흥 운동은 인간의 정신활동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었지만 그 중심 사상은 특히 미술과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근본정신은 현세를 존중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는 십자군 운동 이래 동방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부의 축적과 병행하여 외부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어느 국가보다 먼저 받았으며, 14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발흥하였고, 16세기 중엽까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16세기 초엽 독일에서는 인문주의자와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세 로마 교회의 미신적 교리와 교권에 항거하고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후스, 영국의 위클리프를 거쳐 마침내 루터에 이르러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네바의 칼뱅과 스위스의 츠빙글리 등은 각각 타당한 명분을 내걸고 로마 교회와 대결하여 개혁운동을 촉진시켰다. 이 개혁 운동은 단순히 로마 교회에 대한 항거라는 차원에서 끝나 버린 것이 아니고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의 개혁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서아시아에서는 티무르(Timur)가 나타나 차가타이 한국·일 한국과 오스만 투르크를 정복한 다음 강대한 국가를 수립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티무르는 죽고 말았다. 그의 제국도 분열되고 티무르 제국에서 벗어난 오스만 투르크는 소아시아 방면에서 강력한 신흥국가로 등장하여 소아시아 지역을 휩쓸었다. 1453년 모하메드 2세 때에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였다. 1000여 년간 지속되어 오던 비잔틴 제국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오스만 투르크는 세력을 계속 신장시켜 16세기 초에는 발칸반도 전역을 복속시켰다. 그래서 1517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Sultan, 황제)이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로 군림하던 무렵에는 그 막강한 세력으로 서유럽을 위협함으로써 새로운 위기를 조성시켰다. 이 무렵 인도에서는 티무르 제국이 성립한 후 토후국(土侯國)으로 분열상태를 계속해 오다가 티무르의 후계인 바벨(Babel)이 델리 정권을 타도한 다음 무굴 제국을 건설하였다. 14세기 중엽부터 원조(元朝)의 정치세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오랫동안 그 압제하에서 신음하던 한족(漢族)은 반란을 일으켜 몽골족을 다시 사막으로 추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명(明)은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자 즉시 한민족(漢民族)의 중흥과 한문화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영락제(永樂帝)는 북원(北元)의 잔존세력을 소탕하고 남방에는 정화(鄭和)를 파견, 명의 국위를 널리 선양하였다. 그러나 명조(明朝)도 중기에 이르자 대외적으로는 소위 북로남왜(北虜南倭)로 곤경에 빠지게 되고 대내적으로 환관(宦官)의 횡포와 당파싸움에 국세는 차츰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유럽의 근세[편집] 프랑스와 영국의 왕권 강화[편집] 백년전쟁은 그것이 단순히 왕위 계승이나 플랑드르 쟁탈을 에워싼 100년 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 출신 영국 왕실이 프랑스 국내에 갖고 있는 봉토에 대한 지배권(知行權)을 둘러싸고 되풀이된 영국·프랑스 사이의 고질적인 분쟁의 계속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국이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국가의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때에 해당하며 영국·프랑스의 봉건적 제세력을 많이 동원함으로써,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국내 봉건 제후 내부의 투쟁이기도 하였으며, 제후의 몰락과 왕권의 신장, 국민 의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 루이 11세, 샤를 8세에 의한 전후 재건을 통해서 왕권이 정비되었다. 영국에서 전후 또다시 제후, 기사들을 휘말아버린 30년에 걸친 내전인 장미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등장하는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에 의해 영국 절대주의가 등장하였다. 르네상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르네상스입니다. 영국, 프랑스에 왕권이 신장되고 있던 시대에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고 남부에서 나폴리 왕국, 중부에서 로마 교황령, 북부에서는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이익을 거둔 도시가 주변 농촌까지도 지배하에 두고 도시 국가로 번영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을 무대로 부유한 상인층을 기수로 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전개되었다. 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의 옛 영토로서 유적과 유물에 접하는 기회가 풍부하였다. 유럽 중세의 신에 대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이 대치되어 피안적(彼岸的)이 아니고 차안적(此岸的)·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의 약동에 찬 문화가 시민 계급에 의해 이 곳에서 창조되기에 이르렀다. 단테는 《신곡》을 써 르네상스의 선구가 되었고,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가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르네상스 예술은 조토 디 본도네에서 시작해 보티첼리를 거쳐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출현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즈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써서 분열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호소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북방 서구 여러 나라에 파급되고, 제각기 나라별로 독자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의 단순한 모방 따위는 아니다. 네덜란드나 남독일과 같이 도시를 기반으로 하면서 때로는 프랑스·에스파냐·영국처럼 왕권에 의한 국가 통일을 배경으로 르네상스는 싹터 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와 같이 벌써 15세기 초에 반 에이크 형제에 의한 사실적인 풍경화·초상화가 뒤의 플랑드르파의 기초를 만들고 있었으며, 반대로 형제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유화법은 베네치아의 화가를 통하여 이탈리아로 전해졌다. 영국에서는 위클리프의 성서 영역,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통해서 영국 국민 문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더욱이 서구 여러 나라의 르네상스는 깊은 종교성 속에서 전개되었고, 특히 그 휴머니즘은 그리스어, 헤브라이어 원전(原典)에 의한 성서 연구를 통해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남북 유럽을 연결시키는 상업의 중심지이며 모직물 공업이 왕성한 네덜란드에서는 농민의 생활을 밝게 묘사한 브뤼헐이나 시민의 세계를 묘사한 루벤스, 렘브란트 등이 활동하였다. 16세기 최대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린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연구하고 《치우신 예찬》에서 교회의 부패를 풍자했다. 독일에서 르네상스는 종교성으로 짙게 채색된다. 로이힐린, 멜란히톤의 인문주의적인 성서 연구, 뒤러의 회화가 그렇다. 프랑스에서는 궁정의 보호 아래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이야기》나 몽테뉴의 《수상록》 등 예리한 풍자 정신으로 일관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국가 통일과 해외의 발전을 추진하고 있었던 에스파냐에서는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에서 몰락해 가는 기사계급을 풍자하며 인간을 추구한다. 절대주의 체제하의 영국에서는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썼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이 경험론 철학의 기초를 만들어 놓았으며, 셰익스피어가 많은 걸작을 남겼다. 종교 개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종교 개혁입니다. 독일에서는 13,14세기 이래 영방국가 체제가 더욱 진전되고 성속(聖俗)의 제후나 도시는 자립했으며 국내의 분열은 점점 심해져 갔다. 쇠퇴해 가고 있던 교황권은 국가적 통일의 약한 부분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 레오 10세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가 독일을 목표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의한다. 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한 루터의 95개 조항의 논제 발표(1517)와 함께 종교개혁(Reformation)이 시작되었다. 봉건사회의 해체가 늦어진 독일에서도 농민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15세기 이래 농민 폭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였으며, 루터의 개혁에서 그들의 사회적 해방을 기대하였다. 1524년과 1525년 뮌처의 민중적인 설교를 신봉한 서남 독일의 농민들은 격렬한 농민전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루터에게 격려되어 태세를 정비한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더욱이 이들은 종교개혁을 정치 대립에 이용했다. 1529년의 슈바이엘 국회에서 황제에게 항의한 루터파의 제후들은 이듬해 동맹을 맺어 황제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고 슈말칼덴 전쟁을 벌였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나 도시에게 루터파 신앙을 인정함으로써 영방 지배 체제를 종교면에서 확인한 것에 불과하였으며, 독일은 결국 영방국가 체제의 강화, 따라서 국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리상의 발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항해 시대입니다. 12,13세기에 봉건사회의 완성과 더불어 유럽 세계는 밖으로 향해서 팽창·확대를 시작했다. 동남방으로 향해서 십자군이, 서남방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국토 회복이, 동방에는 동독일 식민이 있었다. 이 유럽의 팽창·확대의 전개로서, 15세기 말의 지리상의 발견을 볼 수 있다. 동방에 대한 동경에 곁들여 십자군 이래 이슬람 상인을 매개체로 한 동방 무역의 유리함에 눈뜬 유럽 여러 나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발전으로 무역이 방해를 받았으므로 인도에 이르는 항로의 개발을 기도하였다. 14,15세기에 동방 무역으로 번영한 북이탈리아 도시가 아니라 이슬람과의 국토 회복 전쟁을 통해서 강력한 왕권하에 통일국가를 형성해 가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그 선두에 섰다. 헨리 항해왕 밑에서 착실하게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을 해 나가던 포르투갈에서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하였으며(1488), 그 후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마침내 인도에 도달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1492년 콜럼버스가 단번에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신대륙 식민[편집] 신대륙의 식민 활동은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유럽의 여러 민족이 건너가, 원주민 인디언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유럽 문명과 사회를 이식(移植)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 에스파냐는 16세기 말까지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했다. 에스파냐가 식민지를 경영한 목적은 금·은의 채굴이었으며, 국왕의 직할 지배 아래 영위(營爲)되었다. 네덜란드는 서인도제도, 기아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시 맨해턴섬과 허드슨 강변에 뉴네덜란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1621년에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활동을 했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캐나다에 진출하여 루이 14세 시대에 미시시피강 일대에 광대한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식민 활동은 모피 무역과 가톨릭의 포교(布敎)를 주로 한 것으로, 인구도 적은데다, 국왕의 직접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1497년 존 카보트의 북아메리카 동안(東岸), 체사피크만(灣) 부근의 탐험으로 시작되었는데, 실제의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였다. 1606년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회사(런던 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에 특허장을 주어 식민과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1707년에 제임스 하구(河口)에 건설되어 태평양으로 나가는 방향이 탐색되었다. 제임스 1세의 국교 강제를 피하여, 청교도들이 종교나 정치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건설이나 가톨릭 교도의 메릴랜드나 찰스 2세의 특허장에 의한 영주 식민지(領主植民地)인 캐롤라이나 식민지 등 1732년까지 13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영국 식민지는 견실한 농업 식민이 주이며, 인구도 많고 건전한 발달을 했다. 한국의 근세[편집] 한국사의 시대 구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국의 경우 조선의 건국인 1392년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 1863년까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고대 고대 후기 중세 근대 현대 참고 문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전 고전후 시대 다 음 근대 vdeh시대 구분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근세&oldid=23824757" 분류: 근세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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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분투 스튜디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분투 스튜디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우분투 스튜디오 Ubuntu Studio Ubuntu Studio 15.04 Vivid Vervet회사 / 개발자 캐노니컬우분투 재단OS 계열 리눅스상태 개발중소스 형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최초 버전 출시일 2007년 4월 19일(2007-04-19)마지막 버전 17.10 Artful Aardvark / 2017년 10월 19일 (19달 전)(2017-10-19) 업데이트 방식 어드밴스트 패키징 툴(APT)패키지관리자 dpkg지원되는 플랫폼 x86-64, ARM커널형태 모노리딕 커널기본 UI 그놈라이선스 여러가지웹사이트 http://ubuntustudio.org 우분투 스튜디오 (Ubuntu Studio)는 리눅스 배포판 가운데 하나로 우분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운영체제는 그래픽 및 멀티미디어에 대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적화되었다. 목차 1 구성 1.1 그래픽 1.2 멀티 미디어 1.3 커널 1.4 테마 2 릴리스 3 한국어 지원에 대한 문제 구성[편집] 라이브 기능이 없는 설치 디스크 ISO 파일(약 1.2GB, 1장짜리) 형태로 배포되며 기본 GUI는 GNOME이고 설치 소프트웨어는 ubuntu Alternative판 디스크와 같다. 설치시 사용자가 필요한 부분을 선택할 수 있으며, 설치되는 주요 소프트웨어는 다음과 같다. 그래픽[편집] Agave Blender FontForge F-Spot 김프 Hugin 잉크스케이프 Scribus Specimen Stopmotion Synfig XSane 멀티 미디어[편집] Aconnectgui Aeolus Ardour Audacity BEAST Bitscope Creox c Echomixer Envy24 contral Freebirth Freqtweak Genpo Gtick HDSPConf HDSPMixer Hexter Hydrogen JACK Control JACK Rack Jack Timemachine JAMin JackEQ Jackbeat Meterbridge Mixxx MusE MuseScore Patchage PureData QAMix QSynth Rmedigicontrol Seq24 SooperLooper Virtual MIDI Keybord ZynAddSubFX Software Synthesizer terminatorX 녹음기(gnome-recorder) Audacious PulseAudio Device Chooser Swami Kino Open Movie Editor Stopmotion Totem 커널[편집] 우분투 스튜디오용 리얼타임 커널 테마[편집] 우분투 스튜디오용 아이콘 테마 및 gdm테마 , usplash 테마 설치하기 위해서는 대략 4GB를 비워 두어야 하며 우분투와 달리 OpenOffice.org, Evolution 등 그림, 소리, 동영상과 관계없는 일부 소프트웨어들은 빠져 있다 릴리스[편집] 버전 번호 코드명 배포일 지원 기간 커널 버전 7.04 Feisty Fawn 2007년 04월 19일 2008년 10월 19일 2.6.20 7.10 Gutsy Gibbon 2007년 10월 18일 2009년 04월 18일 2.6.22 8.04 LTS Hardy Heron 2008년 04월 24일 2011년 05월 12일 2.6.24 8.10 Intrepid Ibex 2008년 10월 30일 2010년 04월 30일 2.6.27 9.04 Jaunty Jackalope 2009년 04월 23일 2010년 10월 23일 2.6.28 9.10 Karmic Koala 2009년 10월 29일 2011년 04월 30일 2.6.31 10.04 LTS Lucid Lynx 2010년 04월 29일 2013년 05월 09일 2.6.32 10.10 Maverick Meerkat 2010년 10월 10일 2012년 04월 10일 2.6.35 11.04 Natty Narwhal 2011년 04월 28일 2012년 10월 28일 2.6.38 11.10 Oneiric Ocelot 2011년 10월 13일 2013년 05월 09일 3.0.0 12.04 LTS Precise Pangolin 2012년 04월 26일 2017년 04월 26일 3.2.0 12.10 Quantal Quetzal 2012월 10월 18일 2014년 05월 16일 3.5.0 13.04 Raring Ringtail 2013년 04월 25일 2014년 01월 27일 3.8.0 13.10 Saucy Salamander 2013년 10월 17일 2014년 07월 17일 3.11.0 14.04 LTS Trusty Tahr 2014년 04월 17일 2019년 04월 3.13.0 14.10 Utopic Unicorn 2014년 10월 23일 2015년 07월 23일 3.16.0 15.04 Vivid Vervet 2015년 04월 23일 2016년 02월 04일 3.19.3 15.10 Wily Werewolf 2015년 10월 22일 2016년 7월 4.2.0 16.04 LTS Xenial Xerus 2016년 4월 21일 2021년 4월 4.4.0 지원 상황: 지원 종료 지원 중 최신 버전 출시 예정 한국어 지원에 대한 문제[편집] 부팅 화면이나 설치 소프트웨어에서 한국어를 선택할 수 있으나 이 부분의 한글화가 완전히 되어 있지 않아 대부분 영어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한국어 출력은 문제가 없으며, 한국어 입력의 경우 운영체제를 설치할때 SCIM이 함께 설치되지만 한국어 플러그인(scim-hangul)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추가로 scim-hangul 패키지를 설치해야 한다. vdeh우분투일반 캐노니컬 우분투 버전 역사 우분투 (사상) 우분투 재단 관련 인물 조노 베이컨 벤 콜린스 벤자민 마코 힐 이안 잭슨 마크 셔틀워스 스콧 제임스 렘넌트 공식 배포판 우분투 쿠분투 주분투 루분투 우분투 그놈 우분투 마테 에듀분투 미스분투 우분투 기린 우분투 스튜디오 우분투 모바일 우분투 터치 우분투 서버 안드로이드용 우분투 비공식 배포판 코분투 이지피지 플럭스분투 gOS 그뉴센스 리눅스 민트 넥센타 OS 슈퍼 OS 소프트웨어 및 지원 Ask 우분투 Bazaar GetDeb GDebi 런치패드 메디분투 노틸러스 오픈CD PPA 우분투 소프트웨어 센터 유비퀴티 우분투 원 유니티 업데이트 매니저 업스타트 우비 엑스플래시 관련 소프트웨어 데비안 deb dpkg Advanced Packaging Tool 앱티튜드 vdeh리눅스 배포판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IA 안드로이드-x86 리니지OS 사이애노젠모드 리믹스 OS 아치 Antergos 아치뱅 아치레비 차크라 만자로 리눅스 파라볼 GNU/리눅스 리브레 데비안 안티X 아스타 리눅스 바라트 운영 체제 솔루션 엘이브 데번 그뉴센스 핸디 리눅스 칼리 리눅스 크노픽스 펠롯 시큐어리 OS 스파이크리눅스 스팀OS 테일스 우분투 에듀분투 쿠분투 루분투 우분투 버디 우분투 그놈 우분투 기린 우분투 마테 우분투 스튜디오 주분투 아스투릭스 보디 리눅스 엘리멘트리 OS 리눅스 민트 피구 OS 트리스퀠 페도라 BLAG 리눅스 앤드 GNU 코로라 레드햇 CentOS 클라OS 린퍼스 리눅스 오라클 리눅스 큐브 OS 록스 클러스터 데블루션 사이언티픽 리눅스 SME 서버 붉은별 젠투 칼라투 리눅스 크로미엄 OS 크롬 OS 펀투 리눅스 사바욘 리눅스 맨드리바 ALT 리눅스 마제야 오픈맨드리바 Lx PCLinuxOS ROSA 리눅스 슬랙웨어 아스트리늄 리눅스 델리 리눅스 DNA리눅스 콩고니 님블X 플레이퓨스 포르투스 삭스 OS SLAX 토핑글리눅스 벡터리눅스 젠워크 리눅스 기타 알파인 리눅스 CRUX 프루갈웨어 리눅스 고보리눅스 직스SD 칼OS 루나 리눅스 닉스OS 오픈수세 수세 리눅스 엔터프라이즈 서버 퍼피 리눅스 소스 메이지 솔루 보디 리눅스 우루크 GNU/Linux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우분투_스튜디오&oldid=21706623" 분류: 데비안 기반 배포판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7월 8일 (일) 15: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존 히컨루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존 히컨루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존 히컨루퍼John Hickenlooper 콜로라도주의 42대 주지사 임기 2011년 1월 11일~2019년 1월 8일 전임 빌 리터 신상정보 출생일 1952년 2월 7일(1952-02-07) (67세)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나베스 학력 웨슬리언 대학교 정당 민주당 배우자 헬렌 소프 (2010-2012, 이혼)로빈 프링글 (2016-) 자녀 1명 종교 퀘이커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 존 라이트 히컨루퍼 주니어 (영어: John Wright Hickenlooper, Jr., 1952년 2월 7일~)는 미국의 정치가로 2011년부터 콜로라도주의 주지사를 역임하고 있다. 2010년에 헌법당 소속 후보와 경쟁 속에서 당선됐으며, 2014년에는 공화당 소속 후보와 접전 끝에 당선되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목차 1 생애 2 정책 3 사생활 4 각주 5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52년 2월 7일에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근교의 나베스에서 노동자였던 아버지 존 라이트 히컨루퍼와 어머니 앤 히컨루퍼 사이에서 태어났다.[1][2] 유년 시절 아버지가 일찍 사망함으로써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1974년 웨슬리언 대학교를 입학하여 1980년에 지리학과를 졸업하였다. 1980년대 동안 콜로라도주에서 지리학자로 근무했으며 1988년에 콜로라도 주에서 호프집 경영을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3][4] 사업 성공을 바탕으로 2003년에 덴버 시장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시장 재직 시절에 시 채무 상환과 조직 개혁, 예술 산업 지지와 교통 문제 해결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며[4], 2005년에 《타임》은 그를 5대 주요 시장으로 꼽았으며[5], 2007년에는 88%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콜로라도 주를 지역구로 하는 상원의원이 내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후임 상원의원에 지명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빌 리터 주지사가 마이클 베넷을 선출하면서 상원의원이 되지는 못하였다.[6] 2006년 선거에서 출마 후보로 공공연히 거론되던 그는 2010년에 콜로라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였다. 선거 초반 공화당 후보 댄 매스와 경합을 벌였지만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보수주의 성향의 헌법당에서 전 연방 하원의원이던 톰 텐크레도를 공천하면서 지지층이 분열, 쉬운 선거전을 진행하였다. 선거 결과 51%를 얻어 36%를 텐크레도와 11%를 얻은 매스를 제치고 당선되었다.[7] 2011년 1월 11일에 취임한 히컨루퍼는 2014년 선거에서는 전 연방 하원의원이었던 밥 뷰프레즈를 49%대 46%로 접전[8] 끝에 승리, 재선하게 되었다. 정책[편집] 히컨루퍼는 총기 규제에 적극 찬성하고 있다. 2015년 11월 27일에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자 즉시 기자회견을 열고 연달아 일어나는 총기 사건에 대비한 총기규제법에 서명하였다.[9] 2014년 재선 선거에서 전미 총기 협회는 낙선 운동을 전개하였고 히컨루퍼는 상대 후보와 접전 끝에 승리하였다.[10] 한편 히컨루퍼는 시리아 난민을 지속적으로 수용하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11] 사생활[편집] 히컨루퍼의 아내 헬렌 소프는 작가로 더 뉴요커 등 여러 잡지에 기고하였다. 히컨루퍼와 소프는 2000년에 결혼해 2002년에 아들을 낳았다. 2012년 7월 31일에 히컨루퍼는 기자회견에서 아내와 결혼한 후 10년 만에 별거하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둘의 이혼 이후로 히컨루퍼는 가족과 같이 살던 덴버의 주택에서 콜로라도 주지사 공관으로 이주하였다.[12] 한편 히컨루퍼는 2010년에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퀘이커 모임에서 소프와 만나게 되었다고 밝혔다.[13] 각주[편집] ↑ “The Happy Shrewdness of John W. Hickenlooper”. 2016년 4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1월 7일에 확인함. ↑ “Mrs. Anne Kennedy Engaged”. 《뉴욕 타임스》. 1948년 5월 9일.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폴리티코 (2011년). “Arena Profile: Gov. John Hickenlooper”. 《politico.com》. 2015년 11월 28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가 나 이하린 (2010년 1월 14일). “잔 히컨루퍼 덴버 시장 콜로라도 주지사 출마 선언”. 《주간포커스》. 2015년 12월 12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Gibbs, Nancy (2005년 4월 17일). “The 5 Best Big City Mayors”. 《타임》. 2015년 11월 28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Parnes, Amie (2009년 1월 3일). “Bennet pick shocks some in Colorado”. 《덴버포스트》. 2015년 11월 28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2010 선거, 뉴욕 타임스, 2010년 11월. ↑ 한미희 (2014년 11월 4일). “<미국 중간선거 격전지 콜로라도주를 가다>”. 《연합뉴스》. 2016년 1월 25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김종우 (2015년 11월 30일). “美 콜로라도, 또 총기난사 악몽…총기규제 여론 부상”. 《연합뉴스》. 2016년 2월 11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송철복 (2015년 12월 9일). “미국 총기난사 빈발해도 규제법률 못 만드는 이유”. 《포커스뉴스》. 2015년 12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2월 11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김세진 (2015년 11월 18일). “<파리 테러> 미 콜로라도주 "우리는 난민 수용하겠다"”. 《연합뉴스》. 2016년 2월 11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Bartels, Lynn (2012년 7월 31일). “Colorado governor and wife to separate, political future still looks bright”. 《덴버 포스트》. 2012년 8월 5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 Timpane, John (2010년 10월 27일). “On campaign trail with John Hickenlooper, Pennsylvania native running for Colorado governor”. 《Inquirer》. 2011년 8월 10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date= (도움말)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존 히컨루퍼 주지사 공식 홈페이지 (영어) 존 히컨루퍼 - Curlie (DMOZ 기반) 공직 이전 빌 리터 제42대 콜로라도 주의 주지사2011년 1월 11일~ 이후현직 이전 웰링턴 웹 제43대 덴버의 시장2003년 7월 21일~2011년 1월 11일 이후빌 비달 vdeh미국의 현직 주지사주 샌도벌 (NV) 리키츠 (NE) 버검 (ND) 마르티네스 (NM) 쿠오모 (NY) 크리스티 (NJ) 서누누 (NH) 카니| (DE) 레이몬도 (RI) 에드워즈 (LA) 베이커 (MA) 호건 (MD) 러페이지 (ME) 불럭 (MT) 데이턴 (MN) 위트머 (MI) 브라이언트 (MS) 닉슨 (MO) P. 스콧 (VT) 매콜리프 (VA) 두가드 (SD) 맥마스터 (SC) 오터 (ID) 테리 브랜스태드 (IA) 허친슨 (AR) B. 워커 (AK) 듀시 (AZ) 벤틀리 (AL) K. 브라운 (OR) 폴린 (OK) 케이식 (OH) 미드 (WY) 인즐리 (WA) 저스티스 (WV) S. 워커 (WI) 허버트 (UT) 홀컴 (IN) 라우너 (IL) 딜 (GA) 브라운백 (KS) 뉴섬 (CA) 베빈 (KY) 멀로이 (CT) 히컨루퍼 (CO) 해즐럼 (TN) 애벗 (TX) 울프 (PA) 드샌티스 (FL) 이게 (HI)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70799609 LCCN: no2011073271 ISNI: 0000 0001 1981 7457 GND: 117730837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존_히컨루퍼&oldid=24340364" 분류: 1952년 태어남미국의 기업인미국의 시장 (행정가)미국의 지질학자민주당 (미국)의 정치인살아있는 사람식당 경영자웨슬리언 대학교 동문콜로라도주지사펜실베이니아주 출신 정치인네덜란드계 미국인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BosanskiCatalà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ItalianoLatinaमराठी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0일 (목) 20: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규슈 자동차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규슈 자동차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고속자동차국도(유료) 규슈 자동차도 노선도 총연장 346.3km 개통년 1971년 ~ 1995년 기점 모지 나들목 (후쿠오카 현 기타큐슈 시 모지 구) 주요경유국가 일본 주요경유지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시, 구루메 시 사가 현 도스 시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시, 야쓰시로 시 미야자키 현 에비노 시 가고시마 현 기리시마 시 종점 가고시마 나들목 (가고시마 현 가고시마 시) 주요교차도로 간몬 자동차도 (간몬 교) 기타큐슈 고속도로 4호선 기타큐슈 고속도로 1호선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후쿠오카 고속도로 4호 가스야 선 후쿠오카 고속도로 2호 다자이후 선 나가사키 자동차도 오이타 자동차도 규슈 추오 자동차도 미나미큐슈 서쪽 우회 자동차도 미야자키 자동차도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하야토 도로) 규슈 자동차도(일본어: 九州自動車道)는 일본 후쿠오카 현 기타큐슈 시 모지 구의 모지 나들목부터 사가 현, 다시 후쿠오카 현에 들어와, 구마모토 현, 미야자키 현을 경유해서 가고시마 현 가고시마 시에 이르는, 총 연장 346.3km에 달하는 일본의 고속도로이다. 국토 개발 간선 자동차로서의 예정 노선명 및 고속 자동차 국도법에 준하는 법정 노선명은 규슈 종관 자동차도 가고시마 선이다. 전 노선에 걸쳐서, 고속도로 번호에 의한 노선 번호로서 「E3」가 부여받았고, 모지 나들목 - 후쿠오카 나들목 구간은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목차 1 개요 2 통과하는 지자체 3 주요 접속 도로 4 나들목 · 분기점 5 같이 보기 개요[편집] 고속 자동차 국도 법정 노선명인 「규슈 종관 자동차도 가고시마 선」의 전 구간에 해당해, 영업 노선명으로서 「규슈 자동차도」의 도로명으로 공용되고 있는 고속도로이다. 미야자키 현 에비노 시 이북에서는 법정 노선명 「규슈 종관 자동차도 미야자키 선」과의 중복구간으로도 있어, 가지키 분기점 이남에서는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과의 중복구간으로도 있다. 규슈의 중앙부보다 약간 서쪽을, 남쪽으로 대부분 직선으로 관통하는 형태로 건설되어 있어, 대부분 국도 제3호선이나 규슈 여객철도 가고시마 본선등과 병행한다. 다만, 구마모토 현 야쓰시로 시의 야쓰시로 나들목 이남은 야쓰시로 해 연안을 통과하는 국도 제3호선이나, 규슈 신칸센과는 떨어져(미나미 큐슈 서쪽 우회 자동차도가 병행), 규슈 자동차도는 규슈 산지, 야타케 고원, 기리시마 연산 구리노 봉 아래를 장대 터널로 관통하는 단연 경로로 되어있다. 규슈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고속교통망으로서 기능하고 있어, 더해서 나가사키 자동차도, 오이타 자동차도, 미야자키 자동차도와 접속하는 것으로 규슈 본토의 각 주요 도시를 상호로 연결하는 고속교통망으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또한, 기타큐슈·후쿠오카 대도시권의 기간도로로 되어 있는 고쿠라미나미 나들목 - 기쿠스이 나들목 간은 전 구간에서 교통량이 4만대 이상으로, 장소에 의해서는 10만대를 넘는다. 규슈 자동차도를 보완하는 목적으로 규슈의 동부 연안으로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야쓰시로 해 연안으로 미나미큐슈 자동차도, 규슈 산지의 중앙부를 규슈 추오 자동차도의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통과하는 지자체[편집] 후쿠오카현 기타큐슈 시 (모지 구 - 고쿠라미나미 구 - 야하타히가시 구 - 야하타니시 구) - 노가타 시 - 구라테 군 구라테 정 - 미야와카 시 - 고가 시 - 가스야 군 (신구 정 - 히사야마 정) - 후쿠오카 시 (히가시 구) - 가스야 군 (가스야 정 - 스에 정 - 우미 정) - 오노조 시 - 다자이후 시 - 지쿠시노 시 사가현 미야키 군 기야마 정 - 도스 시 후쿠오카현 오고리 시 - 구루메 시 - 야메 군 히로카와 정 - 야메 시 - 지쿠고 시 - 미야마 시 - 오무타 시 구마모토현 다마나 군 (난칸 정 - 나고미 정) - 야마가 시 - 구마모토 시 (기타 구) - 고시 시 - 기쿠치 군 기쿠요 정 - 구마모토 시 (기타 구 - 히가시 구) - 가미마시키 군 (마시키 정 - 가시마 정 - 미후네 정 - 고사 정) - 구마모토 시 (미나미 구) - 우키 시 - 야쓰시로 군 히카와 정 - 야쓰시로 시 - 구마 군 야마에 촌 - 히토요시 시 미야자키현 에비노 시 가고시마현 아이라 군 유스이 정 - 기리시마 시 - 아이라 시 - 가고시마 시 주요 접속 도로[편집] 간몬 자동차도 (간몬교) (모지 나들목)에서 직결) 기타큐슈 고속도로 4호선 (모지 나들목에서 접속) 기타큐슈 고속도로 1호선 (고쿠라히가시 나들목에서 접속)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기타큐슈 분기점에서 접속) 기타큐슈 고속도로 4호선 (야하타 나들목에서 접속) 후쿠오카 고속도로 4호 가스야 선 (후쿠오카 나들목에서 접속) 후쿠오카 고속도로 2호 다자이후 선 (다자이후 나들목에서 접속) 나가사키 자동차도 (도스 분기점에서 접속) 오이타 자동차도 (도스 분기점에서 접속) 규슈 추오 자동차도 (가시마 분기점에서 접속) 미나미큐슈 서쪽 우회 자동차도 (야쓰시로 분기점에서 접속) 미야자키 자동차도 (에비노 분기점에서 접속)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하야토 도로) (가지키 분기점에서 접속) 미나미큐슈 서쪽 우회 자동차도 (가고시마 나들목에서 접속) 나들목 · 분기점[편집] 나들목번호 시설 이름 일본어 이름 거리(km) BS 접속 노선 소재지 간몬 교 (간몬 자동차도) 시모노세키 · 주고쿠 자동차도 야마구치 · 히로시마 · 오사카 방면 1 모지 나들목 門司 0.0 기타큐슈 고속도로 4호선 후쿠오카 현도 72호 구로카와시라노에히가시혼마치 선 후쿠오카현 기타큐슈 시 모지 구 - 하타 BS 畑 4.1 ◆ 1-1 신모지 나들목 新門司 4.4 후쿠오카 현도 71호 신모지코다이리 선 - 기시 PA 吉志 6.2 - 구즈하라 BS 葛原 11.2 ◆ 고쿠라미나미 구 2 고쿠라히가시 나들목 小倉東 13.4 기타큐슈 고속도로 1호선 국도 제10호선 (소네 바이패스) 2-1 기타큐슈 분기점 北九州 16.5 -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3 고쿠라미나미 나들목 20.2 ○ 국도 제322호선 4 야하타 나들목 八幡 31.4 ○ 기타큐슈 고속도로 4호선 국도 제200호선 (노가타 바이패스) 야하타니시 구 - 노가타 PA 直方 34.9 ○ 노가타 시 4-1 구라테 나들목 鞍手 36.1 후쿠오카 현도 472호 노가타쿠라테 선 구라테 군 구라테 정 - 구라테 PA 鞍手 36.3 4-2 미야타 스마트 나들목 宮田 42.1 후쿠오카 현도 9호 무로키시모아루키와카미야 선 (시도 경유) 미야와카 시 5 와카미야 나들목 若宮 45.2 ○ 후쿠오카 현도 9호 무로키시모아루키와카미야 선 - 고가 SA 古賀 54.5 고가 시 6 고가 나들목 古賀 57.7 국도 제3호선 (가시 바이패스) 후쿠오카 현도 35호 지쿠시노코가 선 - 아오야기 BS 青柳 58.7 ○ - 다치바나야마 BS 立花山 62.9 ○ 가스야 군 신구 정 히사야마 정 7 후쿠오카 나들목 福岡 68.3 ◆ 후쿠오카 고속도로 4호 가스야 선 국도 제201호선 후쿠오카 시 히가시 구 가스야 군 가스야 정 7-1 스에 PA / SIC 須恵 73.4 ◆ 후쿠오카 현도 91호 시메스에 선 스에 정 - 우미 BS 宇美 75.4 ○ 우미 정 8 다자이후 나들목 太宰府 80.1 ◆ 국도 제3호선 (후쿠오카미나미 바이패스) 후쿠오카 고속도로 2호 다자이후 선 다자이후 시 - 지쿠시노 BS 筑紫野 84.9 ○ 지쿠시노 시 8-1 지쿠시노 나들목 筑紫野 86.9 후쿠오카 현도 7호 지쿠시노인터 선 - 기야마 PA 基山 90.8 ○ 사가현 미야키 군 기야마 정 9 도스 분기점 鳥栖 96.1 - 나가사키 자동차도 오이타 자동차도 도스 시 - 아지사카 SIC 味坂 - 미야노진 BS 宮の陣 102.5 ○ 후쿠오카현 구루메 시 10 구루메 나들목 久留米 105.4 ○ 후쿠오카 현도 3호 도스 쿠루메도로 국도 제322호선 10-1 히로카와 나들목 広川 113.2 ○ 후쿠오카 현도 84호 미즈마조요 선 (바이패스) 야메 군 히로카와 정 - 히로카와 SA 広川 113.6 ○ 11 야메 나들목 八女 118.4 ○ 국도 제442호선 (야메치쿠고 바이패스) 야메 시 지쿠고 시 - 세타카 BS 瀬高 122.4 ○ 미야마 시 11-1 미야마야나가와 나들목 みやま柳川 125.6 후쿠오카 현도 775호 모토요시오가와 선 - 야마카와 PA 山川 128.0 ○ 12 난칸 나들목 南関 135.0 구마모토 현도 5호 오무타난칸 선 구마모토 현도 10호 난칸오무타키타 선 구마모토현 다마나 군 난칸 정 - 고바루 BS 小原 138.8 ○ - 다마나 PA 玉名 142.7 13 기쿠스이 나들목 菊水 146.6 ○ 구마모토 현도 16호 다마나야마가 선 나고미 정 - 가오 BS 鹿央 153.6 ○ 야마가 시 14 우에키 나들목 植木 157.3 ○ 국도 제3호선 구마모토 시 기타 구 - 기타쿠마모토 스마트 나들목 北熊本 구마모토 현도 30호 오즈우에키 선 - 기타쿠마모토 SA 北熊本 162.2 - 니시고시 BS 西合志 165.7 ○ 고시 시 - 무사시가오카 BS 武蔵ヶ丘 169.0 ○ 구마모토 시 기타 구 15 구마모토 나들목 熊本 171.2 국도 제57호선 (구마모토히가시 바이패스) 히가시 구 - 다쿠마 PA 託麻 174.3 15-1 마시키쿠마모토쿠코 나들목 益城熊本空港 176.4 구마모토 현도 36호 구마모토마시키오즈 선 가미마시키 군 마시키 정 - 마시키 BS 益城 177.5 ○ 15-2 가시마 분기점 嘉島 180.7 - 규슈 추오 자동차도 가시마 정 16 미후네 나들목 御船 183.1 ◆ 국도 제445호선 미후네 정 - 미도리카와 PA 緑川 186.7 구마모토 시 미나미 구 가미마시키 군 고사 정 16-1 조난 BS / SIC 城南 189.0 ○ 구마모토 현도 38호 우토코사 선 구마모토 시 미나미 구 17 마쓰바세 나들목 松橋 195.1 ◆ 국도 제218호선 우키 시 17-1 우키히카와 스마트 나들목 히카와타카쓰카 BS 宇城氷川 氷川高塚 204.0 ○ 국도 제3호선 (정도 경유) 야쓰시로 군 히카와 정 - 미야하라 SA 宮原 208.8 ○ 18 야쓰시로 나들목 八代 213.5 ○ 국도 제3호선 야쓰시로 시 18-1 야쓰시로 분기점 八代 214.6 - 미나미큐슈 자동차도 - 사카모토 PA 坂本 222.1 ◆ - 아유가에리 BS 鮎帰 230.2 ◆ - 히고 터널 肥後 - 구마 군 야마에 촌 - 오즈루 BS 小鶴 242.4 ◆ - 야마에 SA 山江 248.0 ◆ 19 히토요시 나들목 人吉 252.0 ○ 구마모토 현도 54호 히토요시인터 선 - 히토요시 본선 요금소 人吉 252.1 - 히토요시 시 - 히토요시쿠마 스마트 나들목 人吉球磨 국도 제219호선 - 히토요시 가출입구 人吉仮出入口 256.2 국도 제219호선 - 히토요시미나미 BS 人吉南 256.4 ◆ - 가쿠토 터널 加久藤 - - - 미야자키현 에비노 시 - 에비노 PA えびの 271.9 20 에비노 나들목 えびの 274.3 ○ 국도 제268호선 21 에비노 분기점 えびの 276.4 - 미야자키 자동차도 - 요시마쓰 PA 吉松 281.6 ○ 가고시마현 아이라 군 유스이 정 22 구리노 나들목 栗野 290.0 가고시마 현도 55호 구리노카지키 선 23 요코가와 나들목 横川 296.0 가고시마 현도 55호 구리노카지키 선 기리시마 시 - 미조베 PA 溝辺 302.7 - 가고시마쿠코미나미 BS 鹿児島空港南 308.6 ○ 24 미조베카고시마쿠코 나들목 溝辺鹿児島空港 309.8 국도 제504호선 호쿠사쓰 횡단 도로 25 가지키 분기점 가지키 나들목 加治木 317.5 -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하야토 도로) 국도 제10호선 (가지키 바이패스) 가고시마 현도 55호 구리토카지키 선 아이라 시 - 조사 BS 帖佐 322.2 ○ - 사쿠라지마 SA / SIC 桜島 323.6 26 아이라 나들목 姶良 326.2 가고시마 현도 57호 후모토시게토미테이류조 선 - 혼조 BS 本城 330.6 ◆ 가고시마 시 27 사쓰마요시다 나들목 薩摩吉田 334.8 가고시마 현도 16호 가고시마요시다 선 - 가고시마 본선 요금소 鹿児島 336.7 - 28 가고시마키타 나들목 鹿児島北 341.9 국도 제3호선 가고시마 현도 18호 가고시마키타인터 선 - 이시키 BS 伊敷 342.0 ○ 29 가고시마 나들목 鹿児島 346.2 미나미 큐슈 서쪽 우회 자동차도 국도 제3호선 (가고시마 바이패스, 가고시마 동서 간선 도로) 이부스키 스카이 라인 (가고시마 현도 17호 이부스키카고시마인터 선) 같이 보기[편집] (일본어) 서일본 고속도로 vdeh일본의 고속도로 동일본 고속도로 가마이시 자동차도 간에쓰 자동차도 기타칸토 자동차도 나가노 자동차도 니혼카이 도호쿠 자동차도 다테야마 자동차도 도오 자동차도 도쿄 가이칸 자동차도 도토 자동차도 도호쿠 자동차도 도호쿠 주오 자동차도 반에쓰 자동차도 삿손 자동차도 신공항 자동차도 아오모리 자동차도 아키타 자동차도 야마가타 자동차도 조반 자동차도 조신에쓰 자동차도 하치노에 자동차도 히가시칸토 자동차도 호쿠리쿠 자동차도 중일본 고속도로 기세이 자동차도 나가노 자동차도 나고야 제2환상 자동차도 도메이 고속도로 신토메이 고속도로 도카이 호쿠리쿠 자동차도 메이신 고속도로 신메이신 고속도로 이세 자동차도 이세 완간 자동차도 주부 횡단 자동차도 주오 자동차도 히가시메이한 자동차도 서일본 고속도로 간몬 교 간사이 공항 자동차도 고치 자동차도 규슈 자동차도 긴키 자동차도 나가사키 자동차도 니시메이한 자동차도 다카마쓰 자동차도 도쿠시마 자동차도 마쓰야마 자동차도 마쓰에 자동차도 마이즈루 와카사 자동차도 메이신 고속도로 미야자키 자동차도 산요 자동차도 산인 자동차도 신메이신 고속도로 오이타 자동차도 오카야마 자동차도 오키나와 자동차도 요나고 자동차도 주고쿠 자동차도 하마다 자동차도 한와 자동차도 히가시큐슈 자동차도 히로시마 자동차도 혼슈 시코쿠 연락 고속도로 고베 아와지 나루토 자동차도 니시세토 자동차도 세토 주오 자동차도 도시고속도로 기타큐슈 고속도로 나고야 고속도로 도쿄 고속도로 수도고속도로 한신 고속도로 히로시마 고속도로 후쿠오카 고속도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규슈_자동차도&oldid=21472006" 분류: 일본의 고속도로서일본 고속도로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규슈 지방의 교통후쿠오카현의 교통사가현의 교통구마모토현의 교통미야자키현의 교통가고시마현의 교통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5월 29일 (화) 15: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소닉 매니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닉 매니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자연스럽지 않게 번역되었으며, 기계 번역에 의해 작성되었을 수도 있습니다.자연스럽지 않은 문장을 한국어 어법에 맞게 고쳐 주세요. (2018년 4월) 소닉 매니아Sonic Mania 소닉 매니아의 로고개발사 소닉 팀, 해드 캐넌, 파고다 웨스트 게임즈발행사 세가프로그래머 크리스천 화이트헤드, 사이먼 톰리아티스트 톰 프라이 플랫폼 PC, 엑스박스 원, 플레이스테이션 4, 닌텐도 스위치출시일 2017년 8월 15일콜렉터즈 한정 2017년 8월 31일장르 플랫포머 소닉 매니아(Sonic Mania)는 2017년 8월, 세가에서 발매한 2D 플랫폼 게임이다. 플레이스테이션 4와 XBOX ONE, 닌텐도 스위치, PC(Windows) 용으로 발매되었다. 2016년에 이이즈카 타카시에 의해 존재가 알려진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의 프로젝트이다.[1] 7월 23일 오후 1시경에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파티에서 첫 트레일러 영상이 공개되었고, 게임 제작은 소닉 컬러즈와 소닉 제너레이션즈를 만든 소닉 팀과 소닉 1과 소닉 2의 리마스터링 게임을 만든 크리스천 화이트헤드, 헤드캐넌, 파고다웨스트 게임스가 담당하고 플레이스테이션 4와 PC, XBOX ONE으로 2017년 5월 21일에는 콜렉터즈가 북미 한정으로 나올 계획이었는데 8월말로 연기되었다. 유럽에서는 판매되지 않음을 밝혔다. 일본에서는 도쿄 게임 쇼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개되어 일본 발매일은 봄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지만 똑같은 사정으로 8월말로 연기되었다. 또한 1월 12일에는 세가측은 닌텐도 스위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추가로 발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애니메이션 형태의 새로운 트레일러 영상이 공개되어 새로운 존과 발매일이 8월 15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PC(스팀) 버전은 30일로 연기되었다. 목차 1 캐릭터 2 그래픽 2.1 아이템 목록 3 스테이지 3.1 그린 힐 존 3.2 미라지 살롱 존 3.3 스튜디오폴리스 존 3.4 플라잉 배터리 존 3.5 스타더스트 스피드웨이 존 3.6 케미컬 플랜트 존 3.7 스페셜 스테이지 3.8 보너스 스테이지 4 여담 4.1 컬렉터즈 에디션 5 소닉 매니아 플러스 6 소닉 매니아 어드벤처스 7 각주 8 외부 링크 8.1 플레이 영상들 8.2 팬 게임 데모 버전 캐릭터[편집] 캐릭터로는 소닉 더 헤지호그, 마일즈 "테일즈" 프라우어, 너클즈 디 에키드나로 플레이가 가능하다. 효과음은 소닉 더 헤지호그 (1991년 비디오 게임)을, 일부 BGM은 소닉 더 헤지호그 3을 사용하였다. 깨져나간 유리조각들과 많은 링이 빠져 나가는 연출은 너클즈 카오틱스와 동일하며, 가시가 가득 찬 크랙이나 갭에 빠졌을 경우 이전작과는 다르게 링이 다시 되돌아온다. 버튼을 눌러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드롭 대시'가 추가되었다. 각 액트를 달성하였을 때의 승리 포즈가 다르게 설정되었다. 그래픽[편집] 여러 채널에 의해 '스튜디오폴리스 존'과 '그린 힐 존'이 나온 상태이고 10월 26일에는 다른 채널에서는 '미러지 살롱 존'이 추가된 사실이 공개되었다. 1년 후, 2017년 3월 16일에는 소닉&너클즈에 등장한 클래식 스테이지인 '플라잉 배터리 존'이 추가되었고 5월 30일에는 소닉 CD에서 등장한 클래식 스테이지인 '스타더스트 스피드웨이 존'이 추가되었고, 6월 8일에는 소닉 2에서 등장한 클래식 스테이지인 '케미컬 플랜트 존'까지 추가되었다. 소닉의 스프라이트가 초기 프로토타입과 동일한 하늘색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경사로를 진행할 때의 표현 방식이 어드밴스 형식으로 변했으며, 대미지를 입었을 때 링이 흩어지는 모습이 다소 입체적으로 바뀌었는데 이 입체적 연출은 너클즈 카오틱스에 사용된 것이다. 또한 소닉 더 헤지호그 시리즈의 게임기어 버전과 같이 링 여러개가 10개의 링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 튀어나오는 연출이 생겼다. 액트 클리어 후 결과 화면에서의 연출은 소닉 3과 프로토타입 소닉 1을[2] 계승했으며 패널을 계속 띄울 수 있고 일정 조건을 만족할 시 배리어가 나온다. 그 외에 소닉 1과 소닉 3에서 입수할 수 있는 4종의 배리어가 전부 등장하는데, 이 점은 소닉 1과 소닉 2의 스마트폰 이식판과 동일하다. 모든 액트마다 보스전이 출현한다. 또한 위로 드러나는 섬은 소닉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오프닝은 샌디에이고의 25주년 기념 파티 참가자들의 합창을 녹음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닌텐도 DS 와 3DS용 게임 개발자 레네게이드 키드가 7월 22일날 올라온 소닉 매니아 공개 트윗에, 닌텐도 3DS에 이식 할 의향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고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이템 목록[편집] 아래의 목록은 게임 내 등장이 확인된 아이템 박스의 목록이다. 슈퍼 링 링 카운트가 10 증가한다. 콤바인 링 파란색 링 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미지를 입고 난 뒤 큰 링을 다시 입수할 경우 링 카운트가 13 증가한다. 너클즈 카오틱스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스피드 부스트 제한시간동안 스피드가 증가한다. 소닉 1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또한 전용 BGM까지 흐르는데 그것은 소닉 CD와 동일하다. 배리어 방어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아무 점프 효과는 없다. 이 배리어는 소닉 1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플레임 배리어 점프 중에 불덩이 대시를 사용할 수 있다. 가시나무길을 불태울 수 있으나 수중 내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썬더 배리어 점프 중에 2단 점프를 사용할 수 있으며 주위의 링을 끌어모을 수 있다. 아쿠아 배리어 점프 중에 연속 바운드를 사용할 수 있다. 3개의 배리어는 소닉 3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무적 박스 모니터를 격파하면 20초 동안 무적이 된다.[3] 에그맨 박스 모니터를 격파하면 대미지를 입으며 이는 소닉 3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스테이지[편집] 그린 힐 존[편집] 소닉 3과 같이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을 나타낸 것이 기존의 소닉 1의 것과는 다르다. 지형이 부분적으로 바뀌었으며 아랫 부분에서는 원경이 바뀐다. 또한 움직이는 발판 위에 스프링이 설치된 곳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외에 소닉 제너레이션즈의 그린 힐과 마찬가지로, 소닉 2에서 볼 수 있었던 코르크스크류 형태의 길도 생겼다. 공개된 액트 1의 보스는 두 대의 둥근 로봇이 체인으로 연결된 형태로, 둘 다 격파하고 나면 액트를 마치는 골 플레이트가 나타난다. 두 대가 모두 남아있을 때는 두 가지 공격 패턴을 번갈아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원작의 보스처럼 한 대가 다른 한 대의 아래에 매달려서 흔들린다. 이 때 두 메카 중 하나는 주황색으로 변하고 가시를 꺼내는데, 이럴 경우 무적 상태일 때만 안전하게 타격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두 메카가 화면의 중앙으로 이동하고, 체인의 중앙을 축으로 삼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두 메카 중 하나를 격파하면 나머지 하나가 플레이어 캐릭터를 향해 돌격하지만 쉽게 피할 수 있다. 2017년 3월 11일에는 소닉 더 헤지혹 공식 유튜브 계정에서 액트2가 공개되었다. 이 액트에서는 플레임 배리어를 사용하여 가시통나무길을 불태울 수 있으며, 소닉 3의 앤젤 아일랜드 존과 유사하게끔 집라인과 토템폴을 설치해 두었다. 첫 번째 다리를 태워서 밑으로 내려가면 원작 액트 3와 동일하게 아이템 박스 5개를 통해 링 50개와 1UP을 얻을 수 있다. 6월 8일에는 SNS에서 공개되었던 액트 2 게임플레이 일부에 보스 사진이 공개되었다. 보스 캐릭터로는 소닉 2에 등장한 마지막 스테이지인 데스 에그 존에 등장한것이다. 그것과는 달리 새롭게 구성되었고, 위치는 오른쪽이 아닌 왼쪽이다. 공격하려면 전작과 동일하지만 긴 드릴팔이 그를 향해 올리는 사이 위로 올라서 스핀대시(드롭 대시)를 해야 한다. 허나 멀리 있는 경우 에그 폭탄을 투화한다. 미라지 살롱 존[편집] 10월 26일에 유튜브 계정인 "Kinda Funny Games"에서 공개된 두번째로 추가된 스테이지이다. 소닉 2에 삭제되었던 스테이지인 "더스트 힐 존"과 소닉 CD에서 삭제되었던 스테이지인 "데저트 데즐 존"을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를 모티브로 새롭게 제작한것이다. 스테이지 중간에 현상수배 전단지 내용들 중에 소닉 파이터즈의 캐릭터 팡 더 스나이퍼, 빈 더 다이너마이트, 바크 더 폴라베어가 카메오로 출연한다. 또한 소닉 CD의 컬리전 카오스 존의 핀볼 구조와 와키 워크벤치 존에서 등장한 360도 회전하는 원통형 발판과 동일한 회전 의자로 구조물이 나타나고 게다가 소닉 1의 스프링 야드 존에서 등장한 배드닉인 롤러가 다시 등장하였고, 피아노 건반 스프링이 보이는데 그것은 소닉 어드밴스 2의 뮤직 플랜트의 구조와 유사하다. 또, 소닉&너클즈에 등장했던 에그 로보의 액자가 보이는데 캐릭터가 이동하면 눈동자도 따라 움직이게 나타나며, 에그로보가 쓴 건총을 거대화 구조로 바뀐다. 또한 모래로 된 회전구 구조물이 보이는데 회전해서 통과하거나, 멈추거나, 위에 올라서 대기하면 모래로 사라지게 된다. 그 구조물은 샌드폴리스 존의 모래벽과 동일하다. 그리고, 전구까지 보이는데 소닉 CD에 나온 구조물과 동일하다. 또한 풍선까지 보이는데 소닉 3의 카니발 나이트 존에 등장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별모양이다. 스튜디오폴리스 존[편집] 스테이지 중간중간에 페이지 모양 영사기에서 닥터 에그맨이 앉았다 섰다하는 모습이 보인다. 스테이지 내에서는 세가소닉 팝콘 숍이 들어서 있으며 베어 너클 1의 상점인 'Pink Pot'이 'Pine Bot'으로 개칭되어 일부 배경으로 나오고 데이토나 USA의 홀넷, 과거 광고에 나온 세가의 반대어 AGES와 클럽 세가의 패러디인 CLUB SPIN으로 알려졌다. 또, 소닉 1의 스프링 야드 존에서 나온 COPE와 CPU가 인근의 고속 철도로 나온다. 런치 베이스와 데스에그 존에서의 유사한 구조의 루프를 찾아볼 수 있다. 스튜디오폴리스 존은 과거 2010년대의 소닉 게임들의 성우들이 녹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슬레이트의 아래를 보면 세가 게임즈의 로고가 붙어있고 CW(Christian Whitehead), HC(HeadCannon), 그리고 PWG(PagodaWest Games)가 적혀 있다. 또한 LED 전광판에는 BY THE MANIA라는 내용이 쓰여져있다. 이 존은 소닉 2의 메트로폴리스와 소닉&너클즈의 샌드폴리스와 같이 이름이 한 단어인 것을 유의하자. 이 존의 미니 보스는 2017년 3월 10일에 공식 SNS에서 발표된 '헤비 거너'라는 새로운 보스다. 이 보스는 헬기에 탄 채로 로켓 런처를 발사하므로, 이 보스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날아오는 포탄을 받아쳐야 한다. 액트 2에서는 방송 스튜디오와 유사한 구조물과 로또 구조물이 추가되었다. 구조물로 들어가면 숫자와 곱하기, 에그맨이 나오는데 에그맨이 나오지 않거나 같은 숫자와 나오면 링들을 얻을수 있다. 그리고 주변에 카드를 지나가면 글자가 보이는데 이것은 미국의 인기 TV게임쇼인 휠 오브 포츈을 오마주 했었다. 그리고 LOCK ON은 소닉 & 너클즈에 나오는 기술장치이고, EGGMAN PIRATE TV은 영국의 세가 캠페인 광고였던 SEGA PIRATE TV를 패러디로 쓰인것이다. GENESIS DONE은 미국의 세가 제네시스 CM광고에 쓰인것이다. 액트 2 보스에서는 TV화면의 3가지 날씨 상황으로 변환하는 형태이다. 쓸어뜨리면 화면에서 정지화면이 나오고 오류음이 들리는데 우연하게도 1년전 미국에서 열린 소닉 25주년 기념 파티 인터넷 방송에서 나온 출력오류음과 동일하여 그대로 쓴것이다. 플라잉 배터리 존[편집] 3월 16일 소닉 더 헤지혹 공식 유튜브 계정과 미국 텍사스 주에서 열린 SXSW에서 공개된 27초의 짧은 시간으로 네번째 신규 스테이지이자 기존 클래식 스테이지를 수록된건 두번째이다. 소닉 2의 "윙 포트리스 존" 에서 보였던 팬 과 배드닉, 골 플레이트, 모니터 등이 대량으로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가 추가되었다. 스타더스트 스피드웨이 존[편집] 5월 30일에 트레일러 영상에서 공개되었던 다섯번째 신규 스테이지이자 클래식 기존 스테이지를 수록된건 세번째다. 기존 스테이지와 달리 아래쪽 달리는 구간에 회전하며 달리는 모습은 소닉 3의 "마블 가든 존"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유사한 구조물을 포함한 신규 구조물도 추가된것으로 확인되었다. 액트 1 미니보스는 소닉 CD에 등장한 반딧불이봇을 거대화로 등장하는데 가끔 조금 일반적으로 등장하지만 어느때는 둘과 같이 등장할때는 떨어진 상태에서 전기를 흐르게 한다. 케미컬 플랜트 존[편집] 6월 8일에 일부 유튜브 채널에서 등장한 여섯번째 신규 스테이지이자 클래식 스테이지로는 네번째다. 스테이지와 달리 케미컬 점프대의 효과음과 점프대 구조는 소닉&너클즈의 머쉬룸 힐 존에 등장한 머쉬룸 점프대와 소닉 CD의 와키 워크벤치 바닥으로 사용되었는데 더 높이 점프하려면 왼쪽에 있는 갈색 주사대를 올려만 한다. 또한 튜브가 돌아가는 구간과 갈라지는 구간 구조물은 소닉 CD의 와키 워크벤치와 메탈릭 매드니스에 사용된것이다. 그리고 신규 구조물로는 액체로 벽을 타거나 붙기도 한다. 액트 2 보스는 시간제한이 없지만 놀랍게도 미니게임 형식인 뿌요뿌요로 되어 있다. 관계적으로 소닉 시리즈의 외전작인 닥터 로보트닉의 민 빈 머신이 있었다. 만일 쌓여지게 되면 밑으로 떨어지게 되니 조심해야한다. 스페셜 스테이지[편집] 기존 작품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 카오스 에메랄드의 유무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소닉 더 헤지혹 SNS 팀에 의하면 스페셜 스테이지는 존재하며, 지금까지 공개된 액트들은 거대한 선으로 이루어진 링이 숨겨져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7월 24일에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코믹스콘 2017에서 스페셜 스테이지의 실태와 음원이 공개되었다. 이번 스페셜 스테이지는 3D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 방식은 세가 새턴버전의 소닉 3D 블래스트와 소닉 CD, 소닉 3, 너클즈 카오틱스로 되어있다. 카오스 에메랄드를 얻으려면 날아오는 UFO를 쫓아가 쳐야하는데 제한시간이 있다. 시간을 추가하려면 링을 얻어야하고, 속도를 높이려면 주변 스피어들이 있어야 한다. 기존은 파랑색으로 되어 있다가 기어가 올라갈수록 노랑색으로 바뀔수 있다. 보너스 스테이지[편집] 공식 유튜브 계정에서 공개된 보너스 스테이지 모습이 공개되었다. 보너스 스테이지를 진입하려면 50개 이상의 링을 얻은후 체크 포인트로 가면 번쩍거리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방식은 소닉 2, 소닉 3와 유사하다. 이번 스테이지는 소닉 3에서 등장한 블루 스피어다. 방식은 똑같지만 모든 블루 스피어만 없애면 은색 소닉 코인과 링까지 모두 얻어 퍼펙트를 받으면 황금색 소닉 코인을 받게 된다. 소닉 코인은 소닉 R에서 채용되어 있다. 코인들을 모으면 엑스트라에서 특정 모드를 해제할수 있다. 여담[편집] 5월 27일 한국시간 약 새벽 1시에 유럽용 스팀 발매 날짜가 8월 15일에 발매된다는 것이 스팀사이트에 의해 유출되었다.[4] 컬렉터즈 에디션[편집] 2016년 9월 한 달 동안 두 종류의 '소닉 매니아 리미티드 에디션 티셔츠'가 판매되었으며 컬렉터즈 에디션을 사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3월에 개최되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에서 관련 정보가 생중계로 공개되었으며 본래 2017년 5월 31일에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게임 제작의 지연으로 인해 8월 31일로 연기되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세가측은 아시아지역의 한국과 일본까지 포함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에디션에는 메가드라이브 스타일 컬렉터즈 박스가 증정되며 아래의 내용물을 넣어두었다. 게임을 내려받을 수 있는 금속형 컬렉터즈 카드, 클래식 소닉 12인치 피규어 + 메가드라이브 받침(받침의 스위치를 켜면 음성이 재생된다.), 금속제 링이 하나 들어있는 카트리지 형태의 틀(진짜 금속 제질은 아니다.). 평가통합 점수통합사점수메타크리틱PS4: 86/100[5]NS: 86/100[6]PC: 84/100[7]XONE: 83/100[8]평론 점수평론사점수디스트럭토이드8/10[9]EGM9/10[10]유로게이머Essential[11]게임 인포머8.5/10[12]게임 레볼루션[13]게임스팟9/10[14]IGN8.7/10[15]닌텐도 라이프9/10[16]닌텐도 월드 리포트9/10[17]PC 게이머 (영국)82/100[18]폴리곤7/10[19]VideoGamer.com7/10[20] 소닉 매니아 플러스[편집] 2018년 3월 17일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에서 소닉 매니아의 확장팩 소닉 매니아 플러스가 공개되었다. 미국 기준 가격은 $29.99이며, 다수 국가에서는 예정이다. 또한 판매방식은 패키지와 DL로 동시에 판매되어 2018년 7월 17일 발매 예정이다. 또한 기존 소닉 매니아 보유자는 좀 더 저렴한 가격의 유료 DLC 방식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변경점은 아케이드 게임 세가소닉 더 헤지호그에 등장했던 케릭터 마이티 디 아르마딜로와 레이 더 플라잉 스쿼럴이 플레이어블로 추가된다. 또한 앙코르 모드를 신규로 추가되었고, 경쟁 모드가 2P을 4P로 플레이를 지원한다. 한정판으로 발매될 패키지 구성은 아래와 같다. 홀로그램 슬립 커버(미국과 유럽 한정)와 세가 제네시스/메가 드라이브 양면 표지, OST(일본과 한국 한정), 32페이지 분량으로 수록된 아트북이 동봉된다. 소닉 매니아 어드벤처스[편집] 2018년 3월 17일 SXSW에서 소닉 매니아 플러스 공개와 동시에 유튜브에서만 볼수 있는 세가의 공식 애니메이션 소닉 매니아 어드벤처스가 공개되었다. 본 애니메이션은 에피소드 형태로 연재되는 방식이다. 스토리는 소닉 포시즈에서 에그맨 군단으로 부터 승리하고 클래식 소닉은 팬텀루비 에너지로 레지스탕스와 헤어져 엔젤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곳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에그맨이 납치된 동물친구들이 구조물에 갇힌채로 들고 달아났다. 그것을 본 소닉은 다시 한번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이다. 각주[편집] ↑ Destructoid사의 보도:https://www.destructoid.com/sonic-the-hedgehog-is-heading-back-to-his-retro-roots-in-sonic-mania-376578.phtml?utm_source=dlvr.it&utm_medium=twitter ↑ 소닉이 손을 들고 뛰어다니는 것. ↑ https://www.youtube.com/watch?v=fEfKC4sxTG8의 6:42에서 7:02까지 지속되는 것이 보인다. ↑ https://www.gamespot.com/articles/sonic-mania-release-date-potentially-revealed-by-s/1100-6450366/ ↑ “Sonic Mania for PlayStation 4 Reviews”. Metacritic. October 25, 2017에 보존된 문서. October 25, 2017에 확인함. ↑ “Sonic Mania for Nintendo Switch Reviews”. Metacritic. October 25, 2017에 보존된 문서. October 25, 2017에 확인함. ↑ “Sonic Mania for PC Reviews”. Metacritic. October 25, 2017에 보존된 문서. October 25, 2017에 확인함. ↑ “Sonic Mania for Xbox One Reviews”. Metacritic. October 25, 2017에 보존된 문서. October 25, 2017에 확인함. ↑ Carter, Chris (August 14, 2017). “Review: Sonic Mania”. Destructoid. August 21,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L Patterson, Mollie (August 15, 2017). “Sonic Mania review”. 《EGMNow》. August 16,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5, 2017에 확인함. ↑ Evans-Thirlwell, Edwin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 Eurogamer.net”. 《Eurogamer》. August 23,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23, 2017에 확인함. ↑ Shea, Brian (August 14, 2017). “A Joyous Leap Back In Time - Sonic Mania - Xbox One”. Game Informer. August 14,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Utley, Matthew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 A Faster, Masterful Remaster”. Game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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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4, 2017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플레이 영상들[편집] 게임스팟 사의 게임 플레이 GameXplain의 게임플레이 폴리곤의 게임플레이 Kinda Funny Games의 게임플레이 공식 계정에 올려진 액트 2의 게임플레이 팬 게임 데모 버전[편집] 다운로드 링크 vdeh소닉 더 헤지호그메인 게임콘솔용 소닉 더 헤지호그 (1991) 소닉 2 소닉 CD 소닉 3 소닉 & 너클즈 3D 블래스트 어드벤처 어드벤처 2 히어로즈 소닉 더 헤지호그 (2006) 언리쉬드 소닉 4: 에피소드 1 컬러즈 제너레이션즈 소닉 4: 에피소드 2 로스트 월드 포시즈 매니아 휴대용 소닉 1 소닉 2 카오스 트리플 트러블 블래스트 포켓 어드벤처 어드밴스 어드밴스 2 어드밴스 3 러시 라이벌즈 러시 어드벤처 라이벌즈 2 컬러즈 제너레이션즈 로스트 월드 외전플랫포머소닉 붐 라이즈 오브 리릭 새터드 크리스털 파이어 & 아이스 기타 너클즈 카오틱스 래버린스 테일즈 스카이패트롤 테일즈 어드벤처 섀도 더 헤지호그 비밀의 링 암흑의 기사 레이싱 드리프트 드리프트 2 소닉 R 라이더즈 라이더즈: 제로 그래비티 세가 올스타즈 레이싱 프리 라이더즈 올스타즈 레이싱 트랜스폼드 모바일 점프 (피버) 대시 러너즈 대시 2 아케이드 코스모 파이터즈 소닉 패트롤 카 세가소닉 더 헤지호그 팝콘 숍 파이터즈 애틸릭스 대시 익스트림 마리오와소닉 베이징 올림픽 밴쿠버 동계올림픽 런던 올림픽 소치 동계올림픽 리우 올림픽 기타 이레이저 스핀볼 민 빈 머신 창조적 스튜디오 게임월드 테일즈 앤 뮤직 메이커 스쿨하우스 셔플 핀볼 파티 배틀 크로니클즈 합본 소닉 잼 소닉 컬렉션 소닉 앤 너클즈 컬렉션 메가 컬렉션 젬즈 컬렉션 얼티밋 제네시스 컬렉션 취소된 게임 크래커스 엑스트림 익스트림 등장인물 소닉 더 헤지호그 마일즈 "테일즈" 파우어 너클즈 디 에키드나 에이미 로즈 닥터 에그맨 섀도우 더 헤지호그 애니메이션 바람돌이 소닉 고슴도치 소닉 OVA 언더그라운드 소닉 X 소닉 툰 영화 관련 게임 플리키 리스타 기타 세가 소닉 팀 그린 힐 존 인물 나카 유지 오오시마 나오토 나카무라 마사토 마이크 폴록 세가타 산시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닉_매니아&oldid=23349511" 분류: 세가의 게임2017년 비디오 게임소닉 시리즈닌텐도 스위치 게임플레이스테이션 4 게임윈도우 게임엑스박스 원 게임플랫폼 게임숨은 분류: 기계 번역 의심 문서/2018년 4월모든 기계 번역 의심 문서기계 번역 의심 문서 - 전체단일 플랫폼 모드로 비디오 게임 평점 틀을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LietuviųNederlandsNorsk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venska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26일 (수) 15: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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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소닉 매니아Sonic Mania 소닉 매니아의 로고개발사 소닉 팀, 해드 캐넌, 파고다 웨스트 게임즈발행사 세가프로그래머 크리스천 화이트헤드, 사이먼 톰리아티스트 톰 프라이 플랫폼 PC, 엑스박스 원, 플레이스테이션 4, 닌텐도 스위치출시일 2017년 8월 15일콜렉터즈 한정 2017년 8월 31일장르 플랫포머 소닉 매니아(Sonic Mania)는 2017년 8월, 세가에서 발매한 2D 플랫폼 게임이다. 플레이스테이션 4와 XBOX ONE, 닌텐도 스위치, PC(Windows) 용으로 발매되었다. 2016년에 이이즈카 타카시에 의해 존재가 알려진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의 프로젝트이다.[1] 7월 23일 오후 1시경에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파티에서 첫 트레일러 영상이 공개되었고, 게임 제작은 소닉 컬러즈와 소닉 제너레이션즈를 만든 소닉 팀과 소닉 1과 소닉 2의 리마스터링 게임을 만든 크리스천 화이트헤드, 헤드캐넌, 파고다웨스트 게임스가 담당하고 플레이스테이션 4와 PC, XBOX ONE으로 2017년 5월 21일에는 콜렉터즈가 북미 한정으로 나올 계획이었는데 8월말로 연기되었다. 유럽에서는 판매되지 않음을 밝혔다. 일본에서는 도쿄 게임 쇼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개되어 일본 발매일은 봄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지만 똑같은 사정으로 8월말로 연기되었다. 또한 1월 12일에는 세가측은 닌텐도 스위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추가로 발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애니메이션 형태의 새로운 트레일러 영상이 공개되어 새로운 존과 발매일이 8월 15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PC(스팀) 버전은 30일로 연기되었다. 목차 1 캐릭터 2 그래픽 2.1 아이템 목록 3 스테이지 3.1 그린 힐 존 3.2 미라지 살롱 존 3.3 스튜디오폴리스 존 3.4 플라잉 배터리 존 3.5 스타더스트 스피드웨이 존 3.6 케미컬 플랜트 존 3.7 스페셜 스테이지 3.8 보너스 스테이지 4 여담 4.1 컬렉터즈 에디션 5 소닉 매니아 플러스 6 소닉 매니아 어드벤처스 7 각주 8 외부 링크 8.1 플레이 영상들 8.2 팬 게임 데모 버전 캐릭터[편집] 캐릭터로는 소닉 더 헤지호그, 마일즈 "테일즈" 프라우어, 너클즈 디 에키드나로 플레이가 가능하다. 효과음은 소닉 더 헤지호그 (1991년 비디오 게임)을, 일부 BGM은 소닉 더 헤지호그 3을 사용하였다. 깨져나간 유리조각들과 많은 링이 빠져 나가는 연출은 너클즈 카오틱스와 동일하며, 가시가 가득 찬 크랙이나 갭에 빠졌을 경우 이전작과는 다르게 링이 다시 되돌아온다. 버튼을 눌러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드롭 대시'가 추가되었다. 각 액트를 달성하였을 때의 승리 포즈가 다르게 설정되었다. 그래픽[편집] 여러 채널에 의해 '스튜디오폴리스 존'과 '그린 힐 존'이 나온 상태이고 10월 26일에는 다른 채널에서는 '미러지 살롱 존'이 추가된 사실이 공개되었다. 1년 후, 2017년 3월 16일에는 소닉&너클즈에 등장한 클래식 스테이지인 '플라잉 배터리 존'이 추가되었고 5월 30일에는 소닉 CD에서 등장한 클래식 스테이지인 '스타더스트 스피드웨이 존'이 추가되었고, 6월 8일에는 소닉 2에서 등장한 클래식 스테이지인 '케미컬 플랜트 존'까지 추가되었다. 소닉의 스프라이트가 초기 프로토타입과 동일한 하늘색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경사로를 진행할 때의 표현 방식이 어드밴스 형식으로 변했으며, 대미지를 입었을 때 링이 흩어지는 모습이 다소 입체적으로 바뀌었는데 이 입체적 연출은 너클즈 카오틱스에 사용된 것이다. 또한 소닉 더 헤지호그 시리즈의 게임기어 버전과 같이 링 여러개가 10개의 링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 튀어나오는 연출이 생겼다. 액트 클리어 후 결과 화면에서의 연출은 소닉 3과 프로토타입 소닉 1을[2] 계승했으며 패널을 계속 띄울 수 있고 일정 조건을 만족할 시 배리어가 나온다. 그 외에 소닉 1과 소닉 3에서 입수할 수 있는 4종의 배리어가 전부 등장하는데, 이 점은 소닉 1과 소닉 2의 스마트폰 이식판과 동일하다. 모든 액트마다 보스전이 출현한다. 또한 위로 드러나는 섬은 소닉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오프닝은 샌디에이고의 25주년 기념 파티 참가자들의 합창을 녹음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닌텐도 DS 와 3DS용 게임 개발자 레네게이드 키드가 7월 22일날 올라온 소닉 매니아 공개 트윗에, 닌텐도 3DS에 이식 할 의향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고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이템 목록[편집] 아래의 목록은 게임 내 등장이 확인된 아이템 박스의 목록이다. 슈퍼 링 링 카운트가 10 증가한다. 콤바인 링 파란색 링 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미지를 입고 난 뒤 큰 링을 다시 입수할 경우 링 카운트가 13 증가한다. 너클즈 카오틱스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스피드 부스트 제한시간동안 스피드가 증가한다. 소닉 1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또한 전용 BGM까지 흐르는데 그것은 소닉 CD와 동일하다. 배리어 방어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아무 점프 효과는 없다. 이 배리어는 소닉 1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플레임 배리어 점프 중에 불덩이 대시를 사용할 수 있다. 가시나무길을 불태울 수 있으나 수중 내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썬더 배리어 점프 중에 2단 점프를 사용할 수 있으며 주위의 링을 끌어모을 수 있다. 아쿠아 배리어 점프 중에 연속 바운드를 사용할 수 있다. 3개의 배리어는 소닉 3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무적 박스 모니터를 격파하면 20초 동안 무적이 된다.[3] 에그맨 박스 모니터를 격파하면 대미지를 입으며 이는 소닉 3에서 처음 차용되었다. 스테이지[편집] 그린 힐 존[편집] 소닉 3과 같이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을 나타낸 것이 기존의 소닉 1의 것과는 다르다. 지형이 부분적으로 바뀌었으며 아랫 부분에서는 원경이 바뀐다. 또한 움직이는 발판 위에 스프링이 설치된 곳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외에 소닉 제너레이션즈의 그린 힐과 마찬가지로, 소닉 2에서 볼 수 있었던 코르크스크류 형태의 길도 생겼다. 공개된 액트 1의 보스는 두 대의 둥근 로봇이 체인으로 연결된 형태로, 둘 다 격파하고 나면 액트를 마치는 골 플레이트가 나타난다. 두 대가 모두 남아있을 때는 두 가지 공격 패턴을 번갈아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원작의 보스처럼 한 대가 다른 한 대의 아래에 매달려서 흔들린다. 이 때 두 메카 중 하나는 주황색으로 변하고 가시를 꺼내는데, 이럴 경우 무적 상태일 때만 안전하게 타격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두 메카가 화면의 중앙으로 이동하고, 체인의 중앙을 축으로 삼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두 메카 중 하나를 격파하면 나머지 하나가 플레이어 캐릭터를 향해 돌격하지만 쉽게 피할 수 있다. 2017년 3월 11일에는 소닉 더 헤지혹 공식 유튜브 계정에서 액트2가 공개되었다. 이 액트에서는 플레임 배리어를 사용하여 가시통나무길을 불태울 수 있으며, 소닉 3의 앤젤 아일랜드 존과 유사하게끔 집라인과 토템폴을 설치해 두었다. 첫 번째 다리를 태워서 밑으로 내려가면 원작 액트 3와 동일하게 아이템 박스 5개를 통해 링 50개와 1UP을 얻을 수 있다. 6월 8일에는 SNS에서 공개되었던 액트 2 게임플레이 일부에 보스 사진이 공개되었다. 보스 캐릭터로는 소닉 2에 등장한 마지막 스테이지인 데스 에그 존에 등장한것이다. 그것과는 달리 새롭게 구성되었고, 위치는 오른쪽이 아닌 왼쪽이다. 공격하려면 전작과 동일하지만 긴 드릴팔이 그를 향해 올리는 사이 위로 올라서 스핀대시(드롭 대시)를 해야 한다. 허나 멀리 있는 경우 에그 폭탄을 투화한다. 미라지 살롱 존[편집] 10월 26일에 유튜브 계정인 "Kinda Funny Games"에서 공개된 두번째로 추가된 스테이지이다. 소닉 2에 삭제되었던 스테이지인 "더스트 힐 존"과 소닉 CD에서 삭제되었던 스테이지인 "데저트 데즐 존"을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를 모티브로 새롭게 제작한것이다. 스테이지 중간에 현상수배 전단지 내용들 중에 소닉 파이터즈의 캐릭터 팡 더 스나이퍼, 빈 더 다이너마이트, 바크 더 폴라베어가 카메오로 출연한다. 또한 소닉 CD의 컬리전 카오스 존의 핀볼 구조와 와키 워크벤치 존에서 등장한 360도 회전하는 원통형 발판과 동일한 회전 의자로 구조물이 나타나고 게다가 소닉 1의 스프링 야드 존에서 등장한 배드닉인 롤러가 다시 등장하였고, 피아노 건반 스프링이 보이는데 그것은 소닉 어드밴스 2의 뮤직 플랜트의 구조와 유사하다. 또, 소닉&너클즈에 등장했던 에그 로보의 액자가 보이는데 캐릭터가 이동하면 눈동자도 따라 움직이게 나타나며, 에그로보가 쓴 건총을 거대화 구조로 바뀐다. 또한 모래로 된 회전구 구조물이 보이는데 회전해서 통과하거나, 멈추거나, 위에 올라서 대기하면 모래로 사라지게 된다. 그 구조물은 샌드폴리스 존의 모래벽과 동일하다. 그리고, 전구까지 보이는데 소닉 CD에 나온 구조물과 동일하다. 또한 풍선까지 보이는데 소닉 3의 카니발 나이트 존에 등장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별모양이다. 스튜디오폴리스 존[편집] 스테이지 중간중간에 페이지 모양 영사기에서 닥터 에그맨이 앉았다 섰다하는 모습이 보인다. 스테이지 내에서는 세가소닉 팝콘 숍이 들어서 있으며 베어 너클 1의 상점인 'Pink Pot'이 'Pine Bot'으로 개칭되어 일부 배경으로 나오고 데이토나 USA의 홀넷, 과거 광고에 나온 세가의 반대어 AGES와 클럽 세가의 패러디인 CLUB SPIN으로 알려졌다. 또, 소닉 1의 스프링 야드 존에서 나온 COPE와 CPU가 인근의 고속 철도로 나온다. 런치 베이스와 데스에그 존에서의 유사한 구조의 루프를 찾아볼 수 있다. 스튜디오폴리스 존은 과거 2010년대의 소닉 게임들의 성우들이 녹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슬레이트의 아래를 보면 세가 게임즈의 로고가 붙어있고 CW(Christian Whitehead), HC(HeadCannon), 그리고 PWG(PagodaWest Games)가 적혀 있다. 또한 LED 전광판에는 BY THE MANIA라는 내용이 쓰여져있다. 이 존은 소닉 2의 메트로폴리스와 소닉&너클즈의 샌드폴리스와 같이 이름이 한 단어인 것을 유의하자. 이 존의 미니 보스는 2017년 3월 10일에 공식 SNS에서 발표된 '헤비 거너'라는 새로운 보스다. 이 보스는 헬기에 탄 채로 로켓 런처를 발사하므로, 이 보스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날아오는 포탄을 받아쳐야 한다. 액트 2에서는 방송 스튜디오와 유사한 구조물과 로또 구조물이 추가되었다. 구조물로 들어가면 숫자와 곱하기, 에그맨이 나오는데 에그맨이 나오지 않거나 같은 숫자와 나오면 링들을 얻을수 있다. 그리고 주변에 카드를 지나가면 글자가 보이는데 이것은 미국의 인기 TV게임쇼인 휠 오브 포츈을 오마주 했었다. 그리고 LOCK ON은 소닉 & 너클즈에 나오는 기술장치이고, EGGMAN PIRATE TV은 영국의 세가 캠페인 광고였던 SEGA PIRATE TV를 패러디로 쓰인것이다. GENESIS DONE은 미국의 세가 제네시스 CM광고에 쓰인것이다. 액트 2 보스에서는 TV화면의 3가지 날씨 상황으로 변환하는 형태이다. 쓸어뜨리면 화면에서 정지화면이 나오고 오류음이 들리는데 우연하게도 1년전 미국에서 열린 소닉 25주년 기념 파티 인터넷 방송에서 나온 출력오류음과 동일하여 그대로 쓴것이다. 플라잉 배터리 존[편집] 3월 16일 소닉 더 헤지혹 공식 유튜브 계정과 미국 텍사스 주에서 열린 SXSW에서 공개된 27초의 짧은 시간으로 네번째 신규 스테이지이자 기존 클래식 스테이지를 수록된건 두번째이다. 소닉 2의 "윙 포트리스 존" 에서 보였던 팬 과 배드닉, 골 플레이트, 모니터 등이 대량으로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가 추가되었다. 스타더스트 스피드웨이 존[편집] 5월 30일에 트레일러 영상에서 공개되었던 다섯번째 신규 스테이지이자 클래식 기존 스테이지를 수록된건 세번째다. 기존 스테이지와 달리 아래쪽 달리는 구간에 회전하며 달리는 모습은 소닉 3의 "마블 가든 존"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유사한 구조물을 포함한 신규 구조물도 추가된것으로 확인되었다. 액트 1 미니보스는 소닉 CD에 등장한 반딧불이봇을 거대화로 등장하는데 가끔 조금 일반적으로 등장하지만 어느때는 둘과 같이 등장할때는 떨어진 상태에서 전기를 흐르게 한다. 케미컬 플랜트 존[편집] 6월 8일에 일부 유튜브 채널에서 등장한 여섯번째 신규 스테이지이자 클래식 스테이지로는 네번째다. 스테이지와 달리 케미컬 점프대의 효과음과 점프대 구조는 소닉&너클즈의 머쉬룸 힐 존에 등장한 머쉬룸 점프대와 소닉 CD의 와키 워크벤치 바닥으로 사용되었는데 더 높이 점프하려면 왼쪽에 있는 갈색 주사대를 올려만 한다. 또한 튜브가 돌아가는 구간과 갈라지는 구간 구조물은 소닉 CD의 와키 워크벤치와 메탈릭 매드니스에 사용된것이다. 그리고 신규 구조물로는 액체로 벽을 타거나 붙기도 한다. 액트 2 보스는 시간제한이 없지만 놀랍게도 미니게임 형식인 뿌요뿌요로 되어 있다. 관계적으로 소닉 시리즈의 외전작인 닥터 로보트닉의 민 빈 머신이 있었다. 만일 쌓여지게 되면 밑으로 떨어지게 되니 조심해야한다. 스페셜 스테이지[편집] 기존 작품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 카오스 에메랄드의 유무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소닉 더 헤지혹 SNS 팀에 의하면 스페셜 스테이지는 존재하며, 지금까지 공개된 액트들은 거대한 선으로 이루어진 링이 숨겨져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7월 24일에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코믹스콘 2017에서 스페셜 스테이지의 실태와 음원이 공개되었다. 이번 스페셜 스테이지는 3D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 방식은 세가 새턴버전의 소닉 3D 블래스트와 소닉 CD, 소닉 3, 너클즈 카오틱스로 되어있다. 카오스 에메랄드를 얻으려면 날아오는 UFO를 쫓아가 쳐야하는데 제한시간이 있다. 시간을 추가하려면 링을 얻어야하고, 속도를 높이려면 주변 스피어들이 있어야 한다. 기존은 파랑색으로 되어 있다가 기어가 올라갈수록 노랑색으로 바뀔수 있다. 보너스 스테이지[편집] 공식 유튜브 계정에서 공개된 보너스 스테이지 모습이 공개되었다. 보너스 스테이지를 진입하려면 50개 이상의 링을 얻은후 체크 포인트로 가면 번쩍거리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방식은 소닉 2, 소닉 3와 유사하다. 이번 스테이지는 소닉 3에서 등장한 블루 스피어다. 방식은 똑같지만 모든 블루 스피어만 없애면 은색 소닉 코인과 링까지 모두 얻어 퍼펙트를 받으면 황금색 소닉 코인을 받게 된다. 소닉 코인은 소닉 R에서 채용되어 있다. 코인들을 모으면 엑스트라에서 특정 모드를 해제할수 있다. 여담[편집] 5월 27일 한국시간 약 새벽 1시에 유럽용 스팀 발매 날짜가 8월 15일에 발매된다는 것이 스팀사이트에 의해 유출되었다.[4] 컬렉터즈 에디션[편집] 2016년 9월 한 달 동안 두 종류의 '소닉 매니아 리미티드 에디션 티셔츠'가 판매되었으며 컬렉터즈 에디션을 사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3월에 개최되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에서 관련 정보가 생중계로 공개되었으며 본래 2017년 5월 31일에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게임 제작의 지연으로 인해 8월 31일로 연기되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세가측은 아시아지역의 한국과 일본까지 포함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에디션에는 메가드라이브 스타일 컬렉터즈 박스가 증정되며 아래의 내용물을 넣어두었다. 게임을 내려받을 수 있는 금속형 컬렉터즈 카드, 클래식 소닉 12인치 피규어 + 메가드라이브 받침(받침의 스위치를 켜면 음성이 재생된다.), 금속제 링이 하나 들어있는 카트리지 형태의 틀(진짜 금속 제질은 아니다.). 평가통합 점수통합사점수메타크리틱PS4: 86/100[5]NS: 86/100[6]PC: 84/100[7]XONE: 83/100[8]평론 점수평론사점수디스트럭토이드8/10[9]EGM9/10[10]유로게이머Essential[11]게임 인포머8.5/10[12]게임 레볼루션[13]게임스팟9/10[14]IGN8.7/10[15]닌텐도 라이프9/10[16]닌텐도 월드 리포트9/10[17]PC 게이머 (영국)82/100[18]폴리곤7/10[19]VideoGamer.com7/10[20] 소닉 매니아 플러스[편집] 2018년 3월 17일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에서 소닉 매니아의 확장팩 소닉 매니아 플러스가 공개되었다. 미국 기준 가격은 $29.99이며, 다수 국가에서는 예정이다. 또한 판매방식은 패키지와 DL로 동시에 판매되어 2018년 7월 17일 발매 예정이다. 또한 기존 소닉 매니아 보유자는 좀 더 저렴한 가격의 유료 DLC 방식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변경점은 아케이드 게임 세가소닉 더 헤지호그에 등장했던 케릭터 마이티 디 아르마딜로와 레이 더 플라잉 스쿼럴이 플레이어블로 추가된다. 또한 앙코르 모드를 신규로 추가되었고, 경쟁 모드가 2P을 4P로 플레이를 지원한다. 한정판으로 발매될 패키지 구성은 아래와 같다. 홀로그램 슬립 커버(미국과 유럽 한정)와 세가 제네시스/메가 드라이브 양면 표지, OST(일본과 한국 한정), 32페이지 분량으로 수록된 아트북이 동봉된다. 소닉 매니아 어드벤처스[편집] 2018년 3월 17일 SXSW에서 소닉 매니아 플러스 공개와 동시에 유튜브에서만 볼수 있는 세가의 공식 애니메이션 소닉 매니아 어드벤처스가 공개되었다. 본 애니메이션은 에피소드 형태로 연재되는 방식이다. 스토리는 소닉 포시즈에서 에그맨 군단으로 부터 승리하고 클래식 소닉은 팬텀루비 에너지로 레지스탕스와 헤어져 엔젤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곳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에그맨이 납치된 동물친구들이 구조물에 갇힌채로 들고 달아났다. 그것을 본 소닉은 다시 한번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이다. 각주[편집] ↑ Destructoid사의 보도:https://www.destructoid.com/sonic-the-hedgehog-is-heading-back-to-his-retro-roots-in-sonic-mania-376578.phtml?utm_source=dlvr.it&utm_medium=twitter ↑ 소닉이 손을 들고 뛰어다니는 것. ↑ https://www.youtube.com/watch?v=fEfKC4sxTG8의 6:42에서 7:02까지 지속되는 것이 보인다. ↑ https://www.gamespot.com/articles/sonic-mania-release-date-potentially-revealed-by-s/1100-6450366/ ↑ “Sonic Mania for PlayStation 4 Reviews”. Metacritic. October 25, 2017에 보존된 문서. October 25, 2017에 확인함. ↑ “Sonic Mania for Nintendo Switch Reviews”. Metacritic. October 25, 2017에 보존된 문서. October 25, 2017에 확인함. ↑ “Sonic Mania for PC Reviews”. Metacritic. October 25, 2017에 보존된 문서. October 25, 2017에 확인함. ↑ “Sonic Mania for Xbox One Reviews”. Metacritic. October 25, 2017에 보존된 문서. October 25, 2017에 확인함. ↑ Carter, Chris (August 14, 2017). “Review: Sonic Mania”. Destructoid. August 21,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L Patterson, Mollie (August 15, 2017). “Sonic Mania review”. 《EGMNow》. August 16,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5, 2017에 확인함. ↑ Evans-Thirlwell, Edwin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 Eurogamer.net”. 《Eurogamer》. August 23,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23, 2017에 확인함. ↑ Shea, Brian (August 14, 2017). “A Joyous Leap Back In Time - Sonic Mania - Xbox One”. Game Informer. August 14,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Utley, Matthew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 A Faster, Masterful Remaster”. Game Revolution. August 15,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Espineli, Matt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GameSpot. August 14,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Kemps, Heidi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IGN. August 15,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Whitehead, Thomas (August 16, 2017). “Sonic Mania Review - Switch eShop”. Nintendo Life. August 18,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6, 2017에 확인함. ↑ Rosenberg, Jared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Nintendo World Report. August 16,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Kelly, Andy (2017년 9월 1일). “Sonic Mania Review”. 《PC Gamer》. 2017년 9월 2일에 확인함. ↑ Gies, Arthur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Polygon. August 15,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 Ahern, Colm (August 14, 2017). “Sonic Mania review”. VideoGamer.com. August 15, 2017에 보존된 문서. August 14, 2017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플레이 영상들[편집] 게임스팟 사의 게임 플레이 GameXplain의 게임플레이 폴리곤의 게임플레이 Kinda Funny Games의 게임플레이 공식 계정에 올려진 액트 2의 게임플레이 팬 게임 데모 버전[편집] 다운로드 링크 vdeh소닉 더 헤지호그메인 게임콘솔용 소닉 더 헤지호그 (1991) 소닉 2 소닉 CD 소닉 3 소닉 & 너클즈 3D 블래스트 어드벤처 어드벤처 2 히어로즈 소닉 더 헤지호그 (2006) 언리쉬드 소닉 4: 에피소드 1 컬러즈 제너레이션즈 소닉 4: 에피소드 2 로스트 월드 포시즈 매니아 휴대용 소닉 1 소닉 2 카오스 트리플 트러블 블래스트 포켓 어드벤처 어드밴스 어드밴스 2 어드밴스 3 러시 라이벌즈 러시 어드벤처 라이벌즈 2 컬러즈 제너레이션즈 로스트 월드 외전플랫포머소닉 붐 라이즈 오브 리릭 새터드 크리스털 파이어 & 아이스 기타 너클즈 카오틱스 래버린스 테일즈 스카이패트롤 테일즈 어드벤처 섀도 더 헤지호그 비밀의 링 암흑의 기사 레이싱 드리프트 드리프트 2 소닉 R 라이더즈 라이더즈: 제로 그래비티 세가 올스타즈 레이싱 프리 라이더즈 올스타즈 레이싱 트랜스폼드 모바일 점프 (피버) 대시 러너즈 대시 2 아케이드 코스모 파이터즈 소닉 패트롤 카 세가소닉 더 헤지호그 팝콘 숍 파이터즈 애틸릭스 대시 익스트림 마리오와소닉 베이징 올림픽 밴쿠버 동계올림픽 런던 올림픽 소치 동계올림픽 리우 올림픽 기타 이레이저 스핀볼 민 빈 머신 창조적 스튜디오 게임월드 테일즈 앤 뮤직 메이커 스쿨하우스 셔플 핀볼 파티 배틀 크로니클즈 합본 소닉 잼 소닉 컬렉션 소닉 앤 너클즈 컬렉션 메가 컬렉션 젬즈 컬렉션 얼티밋 제네시스 컬렉션 취소된 게임 크래커스 엑스트림 익스트림 등장인물 소닉 더 헤지호그 마일즈 "테일즈" 파우어 너클즈 디 에키드나 에이미 로즈 닥터 에그맨 섀도우 더 헤지호그 애니메이션 바람돌이 소닉 고슴도치 소닉 OVA 언더그라운드 소닉 X 소닉 툰 영화 관련 게임 플리키 리스타 기타 세가 소닉 팀 그린 힐 존 인물 나카 유지 오오시마 나오토 나카무라 마사토 마이크 폴록 세가타 산시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닉_매니아&oldid=23349511" 분류: 세가의 게임2017년 비디오 게임소닉 시리즈닌텐도 스위치 게임플레이스테이션 4 게임윈도우 게임엑스박스 원 게임플랫폼 게임숨은 분류: 기계 번역 의심 문서/2018년 4월모든 기계 번역 의심 문서기계 번역 의심 문서 - 전체단일 플랫폼 모드로 비디오 게임 평점 틀을 사용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LietuviųNederlandsNorsk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venska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26일 (수) 15: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인천고등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인천고등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33′ 36″ 동경 126° 40′ 33″ / 북위 37.5600753° 동경 126.6759283° / 37.5600753; 126.6759283 서인천고등학교西仁川高等學校Seoincheon High School 교훈 정직, 성실 개교 1985년 설립형태 사립 교장 우경옥 교감 우종민 국가 대한민국 위치 인천광역시 서구 서곶로 475 (검암동) 학생 수 1,314명 (2018년 5월 1일 기준) 교직원 수 90명 (2018년 5월 1일 기준) 상징 교목: 소나무 / 교화: 장미 학교법인 정파학원 관할관청 인천광역시교육청 웹사이트 서인천고등학교 홈페이지 서인천고등학교(西仁川高等學校)는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목차 1 학교 연혁 2 학교 동문 3 참고 자료 4 외부 링크 학교 연혁[편집] 1958년 7월 3일 : 수원 고려중학교 인수 1967년 9월 29일 : 정관 변경 인가, 인광학원 인광중학교 1984년 2월 25일 : 이사장 홍범식 선생 취임 1984년 11월 30일 : 학교법인 정파학원으로 정관 변경 인가 1984년 12월 1일 : 신축 교사 30교실 준공 1985년 3월 1일 : 초대 교장 이형기 선생 취임 1985년 3월 4일 : 신입생 407명 입학 (남:174명, 여:233명) 1985년 8월 5일 : 별관 250평 준공(도서실) 1985년 9월 30일 : 별관 150평 준공(특별실) 1986년 12월 1일 : 본관 증축 500평 (지하 3교실, 지상 12교실) 1987년 2월 13일 : 인광중학교 제30회 졸업, 폐교(총 3,018명) 1987년 8월 31일 : 초대교장 이형기 선생 정년 퇴임 1987년 9월 1일 : 2대 교장 홍성한 선생 취임 1987년 11월 10일 : 생활관 준공(200평) 1988년 2월 15일 : 제1회 384명 졸업 1988년 10월 18일 : 초대 이사장 홍범식 선생 서거 1988년 11월 10일 : 2대 이사장 이초금 선생 취임 1990년 10월 10일 : 학생 식당 시설 확장(300석) 2000년 10월 15일 : 교내 학내망 Network 시설 준공 2001년 2월 22일 : 학생급식소 774.62m2, 본관 5층 27.00m2 증축 2002년 9월 23일 : 서일관 준공(지상3층 3,722.85m2) 2003년 9월 6일 : 디지털도서관 '서한재' 개관 서일관 1층 259m2, 장서 6,500권 2005년 3월 15일 : 다목적실 준공(서일관 4층 증축:대강당 915.75m2, 체육장 499.5m2) 2010년 11월 24일 : 2대 교장 홍성한 선생 서거 2011년 3월 1일 : 제3대 교장 장용현 선생 취임 2015년 2월 12일 : 제28회 548명 졸업(졸업생 누계 16,310명) 2015년 3월 1일 : 제4대 교장 우경옥 선생 취임 2016년 2월 4일 : 제29회 561명 졸업 (총 16,871명 졸업) 2017년 2월 10일 : 제30회 552명 졸업 (총 17,423명 졸업) 이 목록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이 편집하여 채워 주세요. 학교 동문[편집] 분류:서인천고등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참고 자료[편집] 서인천고등학교 - 한국교육학술정보원 학교알리미 외부 링크[편집] 서인천고등학교 - 공식 웹사이트 vdeh 인천광역시의 고등학교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강화군 강남영상미디어고 강화고 강화여고 교동고 덕신고 산마을고 삼량고 서도고 계양구 계산고 계산공고 계산여고 계양고 서운고 안남고 인천세원고 인천예일고 인천효성고 작전고 작전여고 남동구 도림고 동인천고 문일여고 미추홀외고 석정여고 숭덕여고 신명여고 인제고 인천고잔고 인천금융고 인천남고 인천남동고 인천논현고 인천만수고 인천송천고 인천예고 동구 동산고 영화관광경영고 재능고 미추홀구 도화기계공고 문학정보고 선인고 인명여고 인천고 인천기계공고 인천비즈니스고 인천전자마이스터고 인천하이텍고 인하사대부고 인항고 인화여고 정석항공과학고 학익고 학익여고 부평구 명신여고 부개고 부개여고 부광고 부광여고 부평고 부평공고 부평여고 삼산고 세일고 인천미래생활고 인천부흥고 인천산곡고 인천상정고 인천영선고 인천외고 인천진산과고 인평자동차고 제일고 서구 가림고 가정고 가좌고 검단고 대인고 백석고 서인천고 인천디자인고 인천마전고 인천보건고 인천세무고 인천신현고 인천원당고 인천청라고 인천체고 인천초은고 인천해원고 한국주얼리고 연수구 박문여고 송도고 신송고 연수고 연수여고 옥련여고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 인천대건고 인천뷰티예술고 인천생활과학고 인천여고 인천연송고 인천포스코고 인천해송고 인천해양과학고 청학공고 옹진군 대청고 덕적고 백령고 연평고 인천영흥고 중구 광성고 영종국제물류고 인성여고 인일여고 인천공항고 인천과고 인천국제고 인천여상 인천영종고 인천정보산업고 인천중앙여상 인천하늘고 인천해사고 제물포고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서인천고등학교&oldid=23686233" 분류: 인천 서구의 고등학교인천광역시의 사립 고등학교남녀공학 고등학교일반계 고등학교1985년 개교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2월 12일 (화) 06: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8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8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8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04년 ← 1808년 → 1812년 후보 제임스 매디슨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 정당 민주공화당 연방당 선거인단 122 47 승리한 주 12 5 득표수 124,732 62,431 득표율 64.7% 32.4% 주별 우세지역 선거전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민주공화당 대통령 당선자 제임스 매디슨 민주공화당 18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1808년 미국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로, 민주공화당 제임스 매디슨이 당선되었다 목차 1 후보선출 1.1 민주공화당 1.2 연방당 2 선거 결과 후보선출[편집] 민주공화당[편집]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011 제임스 매디슨 83 93.3% 대통령 후보 1022 제임스 먼로 3 3.4% 1033 조지 클린턴 3 3.4% 총투표수 89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011 조지 클린턴 79 89.8% 부통령 후보 1022 존 랭던 5 5.7% 1033 헨리 디어본 3 3.4% 1044 존 퀸시 애덤스 1 1.1% 총투표수 88 민주공화당은 당원대회를 통해 제임스 매디슨 국무장관을 대통령후보로, 조지 클린턴 부통령을 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연방당[편집] 연방당은 당원대회를 통해 프랑스 대사 찰스 핑크니를 다시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선거 결과[편집] 대통령 후보 정당 근거지 전체유권자 선거인단 득표 러닝메이트 러닝메이트 근거지 득표수 지지율 제임스 매디슨 민주공화당 버지니아 124,732 64.7% 122 조지 클린턴 뉴욕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 연방당 사우스캐롤라이나 62,431 32.4% 47 루퍼스 킹 뉴욕 조지 클린턴 민주공화당 뉴욕 - - 6 제임스 매디슨 버지니아 제임스 먼로 민주공화당 버지니아 4,848 2.5% 0 계 192,691 100.00 % 175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인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제임스 매디슨 후보가 당선되었다 vdeh 미국의 선거대통령 선거 1789 1792 1796 1800 1804 1808 1812 1816 1820 1824 1828 1832 1836 1840 1844 1848 1852 1856 1860 1864 1868 1872 1876 1880 1884 1888 1892 1896 1900 1904 1908 1912 1916 1920 1924 1928 1932 1936 1940 1944 1948 1952 1956 1960 1964 1968 1972 1976 1980 1984 1988 1992 1996 2000 2004 2008 2012 2016 2020 2024 상원의원 선거 1788 1790 1792 1794 1796 1798 1800 1802 1804 1806 1808 1810 1812 1814 1816 1818 1820 1822 1824 1826 1828 1830 1832 1834 1836 1838 1840 1842 1844 1846 1848 1850 1852 1854 1856 1858 1860 1862 1864 1866 1868 1870 1872 1874 1876 1878 1880 1882 1884 1886 1888 1890 1892 1894 1896 1898 1900 1902 1904 1906 1908 1910 1912 1914 1916 1918 1920 1922 1924 1926 1928 1930 1932 1934 1936 1938 1940 1942 1944 1946 1948 1950 1952 1954 1956 1958 1960 1962 1964 1966 1968 1970 1972 1974 1976 1978 1980 1982 1984 1986 1988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2012 2014 2016 2018 2020 하원의원 선거 1789 1792 1794 1796 1798 1800 1802 1804 1806 1808 1810 1812 1814 1816 1818 1820 1822 1824 1826 1828 1830 1832 1834 1836 1838 1840 1842 1844 1846 1848 1850 1852 1854 1856 1858 1860 1862 1864 1866 1868 1870 1872 1874 1876 1878 1880 1882 1884 1886 1888 1890 1892 1894 1896 1898 1900 1902 1904 1906 1908 1910 1912 1914 1916 1918 1920 1922 1924 1926 1928 1930 1932 1934 1936 1938 1940 1942 1944 1946 1948 1950 1952 1954 1956 1958 1960 1962 1964 1966 1968 1970 1972 1974 1976 1978 1980 1982 1984 1986 1988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2012 2014 2016 2018 202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808년_미국_대통령_선거&oldid=24102171" 분류: 18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미국의 대통령 선거1808년 미국1808년 선거제임스 매디슨 행정부숨은 분류: 오래된 그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5일 (목) 23: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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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중공업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현대제철 주식회사Hyundai Steel Company 형태 주식회사 창립 1952년 (강원탄광)1953년 6월 10일 (대한중공업공사)1962년 11월 10일 (인천중공업)1964년 9월 1일 (인천제철)1966년 (강원산업)2001년 7월 23일 (INI스틸)2006년 3월 10일 (현대제철) 해체 1962년 11월 9일 (대한중공업공사)1966년 (강원탄광)1970년 4월 1일 (인천중공업 합병)2000년 3월 15일 (강원산업 합병)2001년 7월 22일 (인천제철)2006년 3월 9일 (INI스틸)2015년 7월 1일 (현대하이스코 합병) 시장 정보 한국: 004020 상장일 1987년 5월 23일 국가 대한민국 본사 소재지 대한민국인천광역시 동구 중봉대로 63 (송현동) 핵심 인물 안동일 (대표이사) 사업 내용 제철업철강 압연, 압출, 연신제품 제조업기타 제철 및 제강업열간 압연 및 압출 제품 제조업냉간 압연 및 압출 제품 제조업철강선 제조업강관제조업 제품 형강, 봉강, 철근, 주단강, 롤, 스테인리스, 원형강 자본금 667,228,925,000원 (2018.12) 매출액 20,780,381,550,301원 (2018) 영업이익 1,026,089,374,644원 (2018) 순이익 407,959,435,202원 (2018) 자산총액 33,304,917,422,605원 (2018.12) 주요 주주 기아자동차주식회사 외 특수관계인: 35.99%국민연금: 8.39% 모기업 현대자동차그룹 자회사 현대종합특수강주식회사현대비앤지스틸주식회사HSMC 종업원 11,563명 (2018.12) 웹사이트 현대제철 현대제철은 대한민국의 철강 기업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이다. 목차 1 역사 2 사건, 사고 및 논란 2.1 산업재해 문제 2.2 용광로 추락 사망 사건 3 사업장 현황 4 각주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53년 6월 현대제철의 전신인 대한중공업공사가 설립. 1970년 4월 대한중공업공사(인천중공업으로 상호 변경)흡수 합병 1972년 5월 철근공장 조업 시작. 1973년 7월 전기제강공장 조업 시작. 1975년 5월 소형공장의 조업 시작. 1978년 6월 현대그룹에 편입. 1979년 한국 최초 24인치 외경 강관공장 연산 100만톤 울산공장 준공 1982년 H형강공장(연산 30만 톤 규모 최초로 H형강 국산화 현재 연산 200만톤 세계계1위) 준공. 1985년 인천합금철을 흡수 합병. 1987년 5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 2000년 3월 강원산업 주식회사를 인수 연산 180만톤 포항 전기로제강소와 레일공장 편입. 2000년 12월 특수강 스텐레스 냉연강판 업체인 창원 삼미특수강 스테인리스 냉연강판공장을 인수. 2001년 4월 현대자동차그룹에 편입. 2001년 7월 INI스틸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 2004년 한보철강 전기로 제강소와 당진 철근 공장을 인수 합병. 2006년 3월 현대제철 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2010년 연산 400만톤 급 고로 2기를 완공 2013년 제3기 고로를 완공 2014년 1월 현대하이스코 주식회사의 냉연강판 제조 및 판매부문 분할합병. 2015년 7월 현대하이스코 주식회사 합병. 사건, 사고 및 논란[편집] 산업재해 문제[편집] 2012년 9월부터 2014년 1월까지 1년여의 기간 동안 모두 13명의 근로자가 현대제철에서 사고로 사망하여 현대제철의 안전 의식과 대책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2013년 5월, 전로제강공장에서 보수작업을 하던 하청업체 직원 5명이 아르곤가스에 질식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직후 고용노동부는 당진제철소를 특별 점검했는데, 이때 현대제철 898건, 협력업체 156건, 건설업체 69건 등 총 1천123건의 산업안전법 위반 사항이 적발되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에도 제철소 내 그린파워발전소에서 가스가 누출돼 1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는데, 이들 사고 당시 근로자들은 산소마스크와 가스누출 경보기 등 기본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채 공장시설에 들어갔던 것으로 드러나서 안전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잇따른 사고로 여론의 질타를 받은 현대제철은 2013년 12월 5일 안전 확보를 위해 1200억 원을 투자하고 전담 인력을 50명 늘린다는 내용의 종합 대책을 발표했으며, 일련의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임원 3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하지만 그 이후인 2014년 1월 19일에 또 다시 협력업체 직원이 고온의 냉각수 웅덩이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해 다시 비판을 받았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유감 표명과 함께 특단의 대책과 그에 대한 실천을 촉구했으며, 금속노조는 현실성 없는 안전계획이 노동자들만 잡아먹은 '죽음의 공장'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4년에 다시 발생한 사고로 인해 현대제철의 수장인 박승하 부회장과 그룹 회장인 정몽구에 대한 책임론도 제기되었다. 박승하 부회장은 2013년 6월 철의 날 기념행사와 12월 5일 대국민 사과 등 안전사고 예방을 두 번씩이나 약속했지만 모두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1][2][3][4][5][6] 용광로 추락 사망 사건[편집] 2015년 4월 3일, 현대제철 인천공장에서 근로자가 용광로에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1500도가 넘는 고온의 쇳물에 빠져 죽은 탓에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시 사고 직후 현장을 촬영한 사진에 의하면 현장에는 난간조차 없었으며 바닥에는 미끄러운 쇳가루가 쌓여 있었고, 조명도 어두웠다고 한다. 당국은 이를 안전규정 위반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7][8][9] 사업장 현황[편집] 본점: 인천광역시 동구 중봉대로 63 (송현동) 인천 제철소 전기로 롱프로덕트 생산공장 한국 최대 H-형강공장 소재지 당진 제철소 연산400만톤 고로3기 한국 최초 4,000㎡급 초대형고로 제철소 당진 제강소는 전기로 철근및 형강공장 보유 구 현대하이스코 냉연,아연도 강판공장 순천 연산120만톤 냉연공장 울산 연산 100만톤 24인치 외경 강관공장 포항 제강소: 구 강원산업 연산 200여만톤 전기로,철근및 형강,레일공장 후판공장은 당진제철소내 보유 서울지점: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길 50 (중학동, 더케이트윈타워) 제주지점: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원님로399번길 319 각주[편집] ↑ “방하남 "현대제철 사망사고 유감"… 23일 사망자 또 발생”. 국민일보. 2014년 1월 27일. ↑ “안전대책 무색, 또 사망사고…현대제철 왜 이러나”. 연합뉴스. 2014년 1월 27일. ↑ “'또 사망사고' 현대제철 왜 이러나”. MBN. 2014년 1월 28일. ↑ “안전대책 무색, 또 사망사고…'현대제철 왜 이러나'”. SBS. 2014년 1월 27일. ↑ “'또 사망 사고' 현대제철, 1년새 10명 'CEO 박승하' 책임론 확산”. 스포츠서울. 2014년 1월 27일. 2014년 2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3월 2일에 확인함. ↑ “당진 현대제철 또 死亡사고… 1년5개월 사이에 13명 숨져”. 조선일보,. 2014년 1월 27일. ↑ 현대제철 용광로서 추락사고…직원 1명 사망 머니위크, 2015년 4월 5일 ↑ 현대제철 인천공장, 직원 쇳물에 추락해 사망 아시아투데이, 2015년 4월 4일 ↑ 1500도 끊는 쇳물에 빠진 근로자…안타까운 사고 SBS 8시 뉴스, 2015년 4월 14일 외부 링크[편집] 현대제철 - 공식 웹사이트 vdeh KRX 100 지수 구성 종목 코스피 지수 코스닥 지수 유가증권 BNK금융지주 CJ CJ CGV CJ대한통운 CJ제일제당 GKL GS GS리테일 KB금융 KB손해보험 KCC KT KT&G LG LG디스플레이 LG생활건강 LG유플러스 LG전자 LG화학 NAVER POSCO SK SK머티리얼즈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하이닉스 S-Oil 강원랜드 고려아연 금호석유 기아차 기업은행 녹십자 농심 대한유화 DB손해보험 롯데쇼핑 롯데제과 롯데칠성 롯데케미칼 미래에셋대우 미래에셋증권 삼성SDI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에스디에스 삼성전기 삼성전자 삼성증권 삼성카드 삼성화재 신세계 신한지주 아모레G 아모레퍼시픽 아이에스동서 에스에프에이 에스원 엔씨소프트 영원무역 오뚜기 오리온 오리온홀딩스 우리금융지주 유한양행 이마트 제일기획 코스맥스 코웨이 포스코대우 하나금융지주 하나투어 한국가스공사 한국금융지주 한국전력 한국콜마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한국토지신탁 한국항공우주 한미사이언스 한미약품 한샘 한세실업 한온시스템 한전KPS 현대건설 현대글로비스 현대모비스 현대백화점 현대위아 현대제철 현대중공업 현대차 현대해상 호텔신라 효성 코스닥 CJ ENM 메디톡스 셀트리온 오스템임플란트 이오테크닉스 카카오 컴투스 vdeh 코스피200 지수 구성 종목 (가나다 순) 코스피 지수 한국거래소 건설 대림산업 대우건설 동양 삼성엔지니어링 쌍용양회 아이에스동서 한일홀딩스 한전기술 현대건설 GS건설 HDC HDC현대산업개발 KCC LG하우시스 금융 기업은행 메리츠종금증권 미래에셋대우 삼성생명 삼성증권 삼성카드 삼성화재 신한지주 우리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한국금융지주 한화생명 현대해상 BNK금융지주 DB손해보험 KB금융 NH투자증권 경기소비재 강원랜드 금호타이어 기아차 넥센타이어 대교 롯데쇼핑 롯데하이마트 만도 삼성물산 세방전지 신세계 쌍용차 에스엘 영원무역 코웨이 쿠쿠홀딩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한라홀딩스 한샘 한섬 한세실업 한온시스템 현대리바트 현대모비스 현대백화점 현대위아 현대차 현대홈쇼핑 호텔신라 GKL LF S&T모티브 SK네트웍스 산업재 대한항공 두산 에스원 팬오션 포스코대우 한국단자 한국항공우주 한전KPS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글로비스 CJ대한통운 LG상사 LIG넥스원 LS LS산전 생활소비재 남양유업 농심 대상 동서 동원F&B 락앤락 롯데지주 롯데칠성 롯데푸드 무학 빙그레 삼양사 삼양홀딩스 아모레G 아모레퍼시픽 오뚜기 오리온 오리온홀딩스 이마트 코스맥스 팜스코 하이트진로 한국가스공사 한국전력 한국콜마 현대그린푸드 BGF BGF리테일 CJ CJ제일제당 GS리테일 KT&G LG생활건강 SPC삼립 에너지/화학 금호석유 남해화학 대한유화 롯데케미칼 롯데정밀화학 유니드 코오롱인더 태광산업 한국쉘석유 한솔케미칼 한화 한화케미칼 효성 효성중공업 후성 휴켐스 AK홀딩스 GS LG화학 OCI S-Oil SK SKC SK디스커버리 SK이노베이션 SK케미칼 정보기술 대덕전자 삼성SDI 삼성SDS 삼성전기 삼성전자 일진머티리얼즈 DB하이텍 LG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SK하이닉스 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두산인프라코어 두산밥캣 두산중공업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 현대로템 현대미포조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중공업 현대중공업지주 철강/소재 고려아연 고려제강 동국제강 동원시스템즈 세아베스틸 영풍 풍산 현대제철 POSCO 커뮤니케이션서비스 넷마블 엔씨소프트 이노션 제일기획 카카오 CJ CGV KT LG유플러스 NAVER SBS SK텔레콤 헬스케어 녹십자 녹십자홀딩스 대웅제약 동아쏘시오홀딩스 동아에스티 보령제약 부광약품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영진약품 유한양행 일양약품 종근당 한미사이언스 한미약품 한올바이오파마 JW중외제약 JW홀딩스 vdeh현대그룹관광 현대아산 에이블현대호텔앤리조트 현대종합연수원 제조업 현대엘리베이터 연구원· 자원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인재개발원 현대투자네트워크 이전 계열사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자원개발 현대상선 인천제철 현대미포조선 현대엔지니어링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종합상사 현대정공 현투증권 현대투자신탁운용 현대캐피탈 현대오토넷 현대정유 금강 금강개발산업 기아자동차 동서산업 고려산업개발 하이닉스반도체 한국프랜지 한라건설 이미지퀘스트 문화일보 현대방송 현대로지스틱스 현대코스코로지스틱스 현대증권 현대저축은행 현대자산운용 동해해운 해영선박 현대부산신항만 대한알루미늄공업 현대시멘트 현대양행 방계기업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HDC그룹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KCC그룹 한라그룹 서한그룹 기타 현대고등학교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현대차 컨벤션 호텔 관련 항목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왕자의난 vdeh현대자동차그룹완성차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철강 현대제철 (현대비앤지스틸) 현대글로비스 현대종합특수강 건설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스틸산업 현대종합설계 현대도시개발 희망세움 미래세움제2차 울산하버브릿지 화성도시고속도로 서부광역철도 진주청천 울산청천 서산청천 울주청천 IT 이노션 월드와이드 현대오토에버 모젠 부품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트랜시스 현대케피코 현대오트론 현대엠엔소프트 현대엠시트 현대IHL 현대파텍스 위아마그나파워트레인 금융 현대캐피탈 현대카드(다이너스 클럽코리아) 현대커머셜 현대차증권 관광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해비치컨트리클럽) 에너지 HL그린파워 현대에너지 부산정관에너지 기타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현대NGV 현대로템 현대서산농장 현대머티리얼 서림환경기술 서림개발 현대건설인재개발원 경인운하 하떠ER&C삼우 메인트란스 그린에어 부산파이낸스센터AMC 스포츠 전북 현대 모터스 KIA 타이거즈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수원 현대건설 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현대제철 남자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양궁단 이전 계열사 현대엠코 현대파워텍 서울시메트로9호선 현대C&I 제2영동고속도로 종로학평 현대위스코 푸본현대생명보험 현대메티아 현대하이스코 삼표제작소 아이아 관련항목 현대그룹 현대중공업그룹 왕자의난 웹사이트: hyundai.co.kr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현대제철&oldid=24550660" 분류: 한국거래소 상장 기업대한민국의 철강생산업체1953년 설립된 기업현대그룹의 이전 자회사현대자동차그룹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تۆرکجهDeutschEnglishفارسیFrançais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9일 (화) 23: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오윤 (화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윤 (화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오윤(吳潤)출생 1946년 4월 13일(1946-04-13) 대한민국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읍 낙민리 (現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사망 1986년 7월 5일 (40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국적 대한민국분야 판화 (목판화), 부조학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직업 화가소속 현실과 발언 사조 민중 미술 (사회비판적 표현주의)대표작 칼노래수상 2005년 옥관문화훈장영향받음 김윤수, 김지하, 최민배우자 박명자(이혼)부모 오영수(부), 김정선(모) 오윤(吳潤, 1946년 4월 13일 ~ 1986년 7월 5일)은 대한민국 화가다. 1980년대 신군부 정권과 자본주의 체제가 드러낸 모순이 격화된 대한민국 사회에 등장한 민중 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였다. 목차 1 생애 2 작품 3 수상 4 저서 5 각주 생애[원본 편집] 1946년 부산 동래구 낙민동에서 소설가인 오영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경남여고 미술과 교사를 지내던 아버지를 따라 바다가 보이는 동구 수정동 경남여자고등학교 관사에서 살았다. 전후 혼란기인 1952년 수정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피난민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로 1953년 흙바닥에 책걸상을 놓고 수업하던 수성국민학교로 분교한다. 국민학교 4학년을 마친 1955년 서울 돈암동 신흥사 입구 배밭골로 이사와서, 돈암국민학교로 전학왔다. 내성적인 조용한 성격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중 누나 오숙희와 친분이 있던 김지하와 알게된다.[1]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1968년 휴학하면서 한국 무전여행을 했다. 1969년 대학 복학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선후배 사이던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현실 동인을 결성하여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하고,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제1 선언문”을 발표했다. 1970년 8월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1년 군대에 입대했으나,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고 1972년 의병제대 했다. 제대 후 경주에서 윤광주, 오경환과 같이 전돌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라시대에서 부터 내려오는 전통 흙을 다루는 기술을 공부한다. 이후에는 일산에서 임진택이 운영하는 전돌공장에서 조건영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1976년 한윤수가 운영하는 청년사가 설립되어 삽화도 제작하고, 지리산, 한탄강 등 현장 답사를 다니기도 했다. 1977년 박명자와 결혼하고 수유리에 방을 얻어, 1977년 3월 선화예술고등학교 미술과 교사가 되었다. 1979년 5월에 부친 오영수가 작고하고, 그해 11월 19일 젊은 작가들이 모인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동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1] 김지하의 시집 《오적(五賊)》과 이원수의 전래 동화집 《땅속나라 도둑귀신》의 판화 삽화와 표지화를 비롯하여 정치적 민주화 운동 및 투쟁을 지원한 포스터와 대형 걸개그림 제작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계속 참여하면서, 1982년 석형산, 김호득 등과 함께 서대문 미술학원을 설립하여 조소를 지도한다. 이후 잦은 음주와 흡연,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로 부인과 불화하고 건강이 악화된다. 1983년 7월 간경화로 고려병원에 입원했다가, 8월에 퇴원하여 민간요법으로 치유를 했으나, 1984년 10월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진도로 요양을 떠난다. 1985년 3월 서울로와서 1986년 5월 3일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했다. 1986년 5월 22일 별거상태였던 아내와 합의이혼했다. 판화집 칼노래를 출간하고, 화실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생활하다가 갑자기 1986년 7월 5일 마흔한 살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1] 현대 판화 선구자로 평가받았으며,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민화, 무속화, 불화, 탈춤, 굿 등 한국 전통의 민중 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민족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해학과 민중적 신명, 한이 날카로운 칼맛을 통한 표현적인 선을 통해 형식과 내용의 탁월한 통일을 보여준다. 한국 민화나 풍속화 같은 전통 미술의 형식을 빌러 강렬한 선과 형태로 민중의 삶과 애환, 분노를 표현을 표했던 오윤의 목판화는 민중 판화의 전형이 되었다.[2] 작품[원본 편집] 판화를 비롯하여 수채화, 유화, 삽화, 조각, 탈 등으로 된 작품을 만들었으며, 걸개그림이나 책 등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조각 작품으로 1974년 제작한 상업은행 구의동 지점에 내외벽 벽화와 동대문 지점에 외벽 장식 테라코타가 있다.[3] <세상사람들>, 아이를 지키는 어머니를 그린 <대지>연작, 노동자의 헛헛한 뒷모습을 새긴 <노동의 새벽>, 노동자와 서민들의 곤한 삶을 컬컬한 흑백 선묘의 얼굴과 땅땅한 인체구도로 포착한 <칼노래> <북춤> <앵적가>등의 전통춤 몸놀림의 신명과 배경 칼선의 오밀조밀한 리듬감으로 표현하는 등 1983년까지 대부분 흑백 목판화를 만들었다. 1984년부터는 간결한 장식적 색상을 도입한 작품으로 새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마케팅>연작은 감로탱 불화, 콜라주, 키치 모자이크 등이 뒤얽힌 파격적 작업으로 서구의 모더니즘, 팝아트와 맛닿아 있다. 해골 병사와 사지 잘린 군상이 우리 현대사를 상징하는 <원귀도>, 머리 위로 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도깨비> <칼노래> 등 신명과 주술이 지배하는 영역까지 표현했다.[4] 마지막 시기의 대형 유화로 《통일대원도》가 있다. 수상[원본 편집] 2005년 옥관문화훈장 저서[원본 편집] 오윤 (2010). 《오윤: 칼을 쥔 도깨비》. 현실 문화 연구. ISBN 9788992214919. 오윤 (2010). 《오윤: 3115, 날 것 그대로 의 오 윤》. 현실 문화 연구. ISBN 9788992214926. 김문주, 오윤 (2007). 《오윤: 한(恨)을 생명의 춤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ISBN 9788991057326. 오윤 (2006). 《오윤: 낮도깨비 신명마당》. 컬처북스. ISBN 9788992074155. 성완경, 허진무 (2005). 《오윤: 희망을새긴판화가 (어린이 미술관)》. 나무숲. ISBN 898900425X. (사후기념) 편집부 (1996). 《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 학고재. ISBN 9788985846172. (오윤 10주기 추모 판화전각집) 오윤 (1986). 《칼 노래: 吳潤 版畵集》. 그림마당·민. 각주[원본 편집] ↑ 가 나 다 허진무 (1991). “吳潤에 關한 批評的 硏究”. 《東國大學校 敎育大學院 : 美術敎育專攻》 (학위논문(석사))|format=은 |url=을 필요로 함 (도움말). |확인날짜=는 |url=을 필요로 함 (도움말) ↑ “'민중미술가' 오윤 회고전 18일까지 열려”. 민중의소리. 2002년 12월 14일. 2011년 5월 4일에 확인함. ↑ “오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확인날짜=는 |url=을 필요로 함 (도움말) ↑ 노형석기자 (2006년 9월 26일). “‘오윤’ 찢어진 눈 불같은 기운 생생”. 2011년 5월 4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오윤_(화가)&oldid=24425323" 분류: 1946년 태어남1986년 죽음대한민국의 화가대한민국의 판화가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부산광역시 출신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문간 질환으로 죽은 사람해주 오씨20세기 화가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운동가숨은 분류: 인용 오류 - URL 없이 형식을 사용함인용 오류 - URL 없이 확인날짜를 사용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10: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궐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궐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개비 필터 담배 궐련(卷煙, 문화어: 마라초; 프랑스어: cigarette [sigaʀεt][*])은 담배 잎을 썰어서 종이로 말아 만든 작은 담배이다. 궐련 한쪽 끝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원통 모양을 타고 올라가 다른 쪽 끝으로 나와 입으로 흡입된다. 궐련 물부리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파이프 담배 등과 달리 별도의 도구는 필요로 하지 않으며, 라이터나 성냥 등의 점화 도구만 있으면 피울 수 있도록 가공되어 있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담배라 함은 궐련 담배를 지칭한다. 목차 1 구조와 재질 2 각주 2.1 내용주 2.2 참조주 구조와 재질[편집] 형태는 잘게 썬 담뱃잎을 종이에 싸 원통 모양으로 만 것으로 굵기는 7밀리미터[A] 정도에 길이는 85밀리미터에서 100밀리미터가 일반적이나[2], 굵기가 5.4밀리미터 정도인 담배나[2] 9밀리미터에 가까운 담배도 있고[1] 길이도 짧은 것은 65밀리미터 정도인 담배도 있다.[2] 궐련을 마는데 쓰는 궐련 용지는 시가렛 페이퍼 혹은 라이스 페이퍼라고 불리는데[2], 라이스 페이퍼라고 해도 원료는 벼가 아니며, 주 재료는 일반적으로 삼[1]과 펄프이다.[2] 담배가 탈때 나는 악취를 막고 담뱃잎이 타는 속도와 맞추기 위해 시가렛 페이퍼에는 탄산 칼슘이 첨가되어 있고, 또한 국가에 따라서는 암모늄, 인산, 염화 마그네슘, 타르타르산 칼륨, 타르타르산 나트륨 등이 첨가되는 경우도 있다.[1] 담뱃잎에는 향을 좋게 하기 위해 향료가 첨가되는 경우가 많으며 주로 사용되는 향료로는 당류(糖類), 코코아, 감초, 멘톨, 럼, 바닐라 등이 있다.[2]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궐련 담배의 굵기는 직경이 아닌 원둘레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 참조주[편집] ↑ 가 나 다 라 《たばこの話あれこれ》. 日本専売公社. 1976. 100쪽. ↑ 가 나 다 라 마 바 “たばこができるまで”. たばこワールド. 2013년 12월 21일에 확인함.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궐련 전거 통제 LCCN: sh85025966 GND: 4190811-9 BNF: cb12066152n (데이터) 이 글은 생활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궐련&oldid=22415114" 분류: 궐련숨은 분류: 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생활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cèhAfrikaan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Boarisch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भोजपुरीবাংলাབོད་ཡིག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کوردی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ArpetanGaeilgeGalegoگیلکیGaelg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ಕನ್ನಡKurdîLatinaLëtzebuergeschLimburgsLumbaartLietuviųLatviešuBaso Minangkaba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Bahasa Melayuမြန်မာဘာသာनेपाली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una SimiRomânăArmãneashti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oomaaliga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KiswahiliŚlůnskiతెలుగు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West-VlamsWinarayייִדיש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6일 (일) 02:3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백승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승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백승환출생 1998년 4월 17일(1998-04-17) (21세)국적 대한민국직업 배우소속사 HB엔터테인먼트 웹사이트 HB엔터테인먼트 백승환백승환 - 인스타그램 백승환(白承煥;1998년 4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목차 1 학력 2 연기 활동 2.1 드라마 2.2 영화 2.3 뮤직비디오 3 수상 및 후보 학력[편집] 은행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연기 활동[편집] 드라마[편집] 2008년 평화방송 창립 20주년 기념 특별기획 드라마 《땀의 순교자 탁덕 최양업》 ... 개똥이 아들 역 2011년 SBS 미니시리즈 《뿌리깊은 나무》 ... 어린 윤평 역(이수혁 아역) 2011년 MBC 미니시리즈 《나도, 꽃》 ... 어린 서재희 역(윤시윤 아역) 2011년 JTBC 대하드라마 《인수대비》 ... 송이의 오빠, 어린 윤구 역(반상윤 아역) 2012년 tvN 미니시리즈 《아이 러브 이태리》 ... 어린 금은동 역(김기범 아역) 2013년 SBS 미니시리즈 《장옥정, 사랑에 살다》 ... 어린 현치수 역(재희 아역) 2015년 KBS1 대하드라마 《징비록》 ... 어린 선조 역(김태우 아역) 2015년 KBS2 미니시리즈 《블러드》 ... 어린 박지상 (안재현 아역) 2015년 SBS 미니시리즈 《육룡이 나르샤》 ... 어린 무휼 역(윤균상 아역) 2016년 KBS2 미니시리즈 《뷰티풀 마인드》 ... 어린 이영오 역(장혁 아역) 2017년 KBS2 미니시리즈 《7일의 왕비》 ... 어린 이역 역 (연우진 아역) 2018년 OCN 수목드라마 《신의 퀴즈: 리부트》 ... 임도윤 역 2019년 MBC 주말특별기획 《이몽》 ... 마자르 역 영화[편집] 2007년 《리턴》 ... 나상우 역 2009년 《애자》 ... 어린 민석 역 2011년 《도가니》 ... 전민수 역 2013년 《남쪽으로 튀어》 ... 최나라 역 2014년 《좋은 친구들》 ... 어린 임현태 역 뮤직비디오[편집] 2012년 하이니 - 전설같은 이야기 수상 및 후보[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16 KBS 연기대상 남자 청소년연기상 뷰티풀 마인드 후보 2017 KBS 연기대상 남자 청소년연기상 7일의 왕비 후보 이 글은 한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백승환&oldid=24406310" 분류: 199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은행고등학교 동문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어린이 배우숨은 분류: 한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0일 (월) 16: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상기 (법조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상기 (법조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상기金相基 대한민국의 서울행정법원장 임기 2003년 2월 12일 ~ 2004년 2월 10일 전임 이근웅 후임 김인수 대한민국의 제40대 청주지방법원장 임기 2002년 2월 8일 ~ 2003년 2월 11일 전임 황인행 후임 김재진 신상정보 출생일 1945년 (73–74세) 출생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담양군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경력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제주지방법원장 부모 민경숙 배우자 3녀 김상기(金相基, 1945년 ~)는 청주지방법원과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목차 1 생애 2 경력 3 주요 판결 4 각주 생애[편집] 1945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난 김상기는 1963년 2월 광주제일고등학교, 1967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서 합격하여 1972년 사법연수원과 군 법무관을 마치고 1973년 광주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었다. '양도담보에 관한 문제점'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으며 초임 법관 시절부터 테니스를 즐겼다. 서울행정법원 법원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9월 22일에 있었던 국정감사에서 홍준표 의원이 "국가정보원 직원의 증인출석 제한이 헌법 불합치로 결정됐는데도 재판부가 피고인측이 주장한 전직 국가정보원장 등을 증인으로 소환하지도 않고 서둘러 재판을 끝냈다"며 "이는 사건의 유·무죄를 떠나 절차적으로 중대한 하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대통령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번 판결이 내려진 것은 대통령의 신당 창당을 도와주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작용한 것 아니었느냐"고 묻자 "판결의 실체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절차적인 부분에 대해 잘못이 있었다는 점은 법원장 개인으로서 충분히 공감한다"고 답변했다.[1] 이에 대해 논란이 있자 "증인도 받아주고 사실조회도 받아줘야 한다"며 "재판내용은 모른 채 홍준표 의원 말씀이 사실이라면 나같으면 그렇게 재판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재판의 실체적인 부분과 정치적 재판을 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절차적 문제에서 잘못됐다고 한다면 충분히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의원들의 흥분도 이해한다"고 말했다.[2] 경력[편집] 1973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1974년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판사 1977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1979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판사 1981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1982년 광주고등법원 판사 1985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86년 마산지방법원 부장판사 1989년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지원장 1991년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1991년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 1992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부장판사 1996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1999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장(직무대리) 2000년 제주지방법원 법원장 겸 광주고등법원 제주부 부장판사 2002년 청주지방법원 법원장 2003년 서울행정법원 법원장 2004년 변호사 개업 주요 판결[편집] 서울고등법원 민사8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6년 2월 27일에 김현철이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판결에서의 정정보도를 가집행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 한겨레신문이 제기한 강제집행 정지 신청에 대해 "이유있다"며 "항소심 판결까지 이를 정지한다"고 했다.[3]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4월 11일에 경전투 헬기사업 관련하여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 구속된 전 국방부 장관 이양호에게 원심대로 징역4년과 1억5천만원 몰수형을 선고했다.[4] 12월 26일에 아랍계 교수 무하마드 깐수로 위장해 12년동안 국내에서 간첩활동을 하여 구속되어 1,2심에서 징역15년이 선고받은 정수일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국가기밀 탐지, 수집, 전달 혐의는 무죄라고 판단하면서 징역12년을 선고했다.[5] 서울고등법원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9월에 폐암으로 숨진 광산노동자에게 폐암을 진폐증의 합병증으로 보아 업무상재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처음으로 선고했다.[6] 각주[편집] ↑ [1] ↑ [2] ↑ 한겨레 1996년 2월 28일자 ↑ 경향신문 1997년 4월 12일 ↑ 한겨레 경향신문 1997년 12월 27일자 ↑ [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상기_(법조인)&oldid=21061813" 분류: 1945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담양군광주제일고등학교 동문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대한민국의 판사대한민국의 지방법원장대한민국의 변호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4월 7일 (토) 10: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상기 (법조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상기 (법조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상기金相基 대한민국의 서울행정법원장 임기 2003년 2월 12일 ~ 2004년 2월 10일 전임 이근웅 후임 김인수 대한민국의 제40대 청주지방법원장 임기 2002년 2월 8일 ~ 2003년 2월 11일 전임 황인행 후임 김재진 신상정보 출생일 1945년 (73–74세) 출생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담양군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경력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제주지방법원장 부모 민경숙 배우자 3녀 김상기(金相基, 1945년 ~)는 청주지방법원과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목차 1 생애 2 경력 3 주요 판결 4 각주 생애[편집] 1945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난 김상기는 1963년 2월 광주제일고등학교, 1967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서 합격하여 1972년 사법연수원과 군 법무관을 마치고 1973년 광주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었다. '양도담보에 관한 문제점'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으며 초임 법관 시절부터 테니스를 즐겼다. 서울행정법원 법원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9월 22일에 있었던 국정감사에서 홍준표 의원이 "국가정보원 직원의 증인출석 제한이 헌법 불합치로 결정됐는데도 재판부가 피고인측이 주장한 전직 국가정보원장 등을 증인으로 소환하지도 않고 서둘러 재판을 끝냈다"며 "이는 사건의 유·무죄를 떠나 절차적으로 중대한 하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대통령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번 판결이 내려진 것은 대통령의 신당 창당을 도와주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작용한 것 아니었느냐"고 묻자 "판결의 실체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절차적인 부분에 대해 잘못이 있었다는 점은 법원장 개인으로서 충분히 공감한다"고 답변했다.[1] 이에 대해 논란이 있자 "증인도 받아주고 사실조회도 받아줘야 한다"며 "재판내용은 모른 채 홍준표 의원 말씀이 사실이라면 나같으면 그렇게 재판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재판의 실체적인 부분과 정치적 재판을 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절차적 문제에서 잘못됐다고 한다면 충분히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의원들의 흥분도 이해한다"고 말했다.[2] 경력[편집] 1973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1974년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판사 1977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1979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판사 1981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1982년 광주고등법원 판사 1985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86년 마산지방법원 부장판사 1989년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지원장 1991년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1991년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 1992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부장판사 1996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1999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장(직무대리) 2000년 제주지방법원 법원장 겸 광주고등법원 제주부 부장판사 2002년 청주지방법원 법원장 2003년 서울행정법원 법원장 2004년 변호사 개업 주요 판결[편집] 서울고등법원 민사8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6년 2월 27일에 김현철이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판결에서의 정정보도를 가집행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 한겨레신문이 제기한 강제집행 정지 신청에 대해 "이유있다"며 "항소심 판결까지 이를 정지한다"고 했다.[3]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4월 11일에 경전투 헬기사업 관련하여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 구속된 전 국방부 장관 이양호에게 원심대로 징역4년과 1억5천만원 몰수형을 선고했다.[4] 12월 26일에 아랍계 교수 무하마드 깐수로 위장해 12년동안 국내에서 간첩활동을 하여 구속되어 1,2심에서 징역15년이 선고받은 정수일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국가기밀 탐지, 수집, 전달 혐의는 무죄라고 판단하면서 징역12년을 선고했다.[5] 서울고등법원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9월에 폐암으로 숨진 광산노동자에게 폐암을 진폐증의 합병증으로 보아 업무상재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처음으로 선고했다.[6] 각주[편집] ↑ [1] ↑ [2] ↑ 한겨레 1996년 2월 28일자 ↑ 경향신문 1997년 4월 12일 ↑ 한겨레 경향신문 1997년 12월 27일자 ↑ [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상기_(법조인)&oldid=21061813" 분류: 1945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담양군광주제일고등학교 동문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대한민국의 판사대한민국의 지방법원장대한민국의 변호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4월 7일 (토) 10: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초과이익공유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초과이익공유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익공유제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초과이익공유제(超過利益共有制, 영어: profit sharing, PS)는 대기업이 해마다 설정한 목표 이익치를 초과하는 이익이 발생했을 때 협력 중소기업에게 초과이윤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제도이다.[1] 목차 1 발단 2 논란 2.1 찬성 측 입장 2.2 반대 측 입장 3 현재 상황 4 출처 5 각주 6 같이 보기 발단[편집]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정운찬은 2011년 2월 24일 "초과 이익이 나는 것은 대기업의 노력도 있겠지만 중소기업의 노력도 있다"면서 "대기업 이익을 주주-임직원뿐 아니라 협력기업까지도 공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공유의 범위는) 대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면서도 "(공유 노력의) 결과를 동반성장지수 평가에 반영해 세제 혜택이나 공공기관 발주 우선권 등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2] 취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 동반 성장이다. 논란[편집] 정운찬 위원장의 발언 이후 정부에서도 찬반이 갈리고 정치인은 물론 재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쏟아졌다. 찬성 측 입장[편집] 정 위원장은 "이익분을 모든 기업들이 다 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서 "기술협력 기금이나 고용안정 기금 마련 등을 통해 중소기업을 더욱 경쟁력 있게 만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여도 산정 방식에 대해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협력업체와 성과를 나눌 기준이 있을 것이다. 종업원을 평가하는 방식처럼 협력업체를 평가하는 방식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는 대기업의 불공정 관행을 지적하면서 "초과이익을 어떻게 정의하고 공유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가 있지만, 취지는 살리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3] 김동선 중소기업청장도 "이념적인 문제를 떠나 기본적 취지에 공감한다"면서 "대기업들이 성과 발표를 하면 협력업체들은 '중소기업의 수익이 너무 떨어진다'는 불만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익의 혜택은 대기업과 협력업체 등 참여한 모든 주체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4] 외국의 사례를 들며 이익공유제가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롤스로이스와 협력사들은 ‘위험 및 판매수입 공유 파트너 계약’(이하 판매수입공유제·Revenue Sharing)을 맺었다. 항공기 엔진 개발에 공동 투자해서 성공하면 투자 비율에 비례해 판매 수입을 나누기로 해 큰 이익을 거두었다. 비디오 대여체인사업자인 블록버스터는 이익공유제를 유통서비스업에 확대 적용했다. 블록버스터는 비디오 대여점에 판매하는 가격을 8분의 1 수준인 8달러로 대폭 낮추었다. 이에 따라 블록버스터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는 대여 횟수가 22회에서 6회로 줄었다. 블록버스터는 비디오 출시 초기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해 소비자에게 대여할 수 있게 되자 수입이 급증했다. 미국 영화산업 태동기인 1920년대 할리우드는 영화배우와 제작사, 배급사 간 협력을 촉진하고자 이익공유제를 도입했다.[5] 반대 측 입장[편집] 한편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홍 최고위원은 "총리를 지내신 분이 대기업 이익을 서민에 할당하자는 급진 좌파 주장을 한다."고 말했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너무 파격적인 내용이라서 사회적 합의와 신중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신중론을 폈다.[6]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사회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며 "경제학에서 배우지도 못한,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꼬집었다.[7]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연초에) 이익 추정치를 공개하라고 하면 기업 대부분이 달성이 어려운 목표치를 내놓을 것"이라며 "반강제적으로 이익을 빼앗기는 상황에서 적정 이익을 발표할 기업은 없다"고 꼬집었고 서승환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마디로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먼 포퓰리즘적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중소기업간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무너진다는 반론도 있다. 이미 대기업에 납품하던 중소기업이 보호막을 얻으면서 새로 납품권을 얻으려는 타 기업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것이다.[8]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애초에 틀린 개념"이라며 반대를 표시했다. 그는 "연초에 대기업을 다 모아서 올해 얼마 이익이 예상되냐고 물어본 후 연말에 그 이익을 넘어가면 그 초과이익이라는 것들을 협력업체에 나눠줘야 한다. 그러면 기업 경영활동에 국가가 일일이 개입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마치 계획경제 같이 된다."고 비판했다.[9] 현재 상황[편집] 한편 2011년 5월 17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선진화포럼 월례토론회에서 동반성장위원회 정운찬 총재는 "위원회 내 실무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이익공유제 또는 협력업체 이익공유 플랜에 대해 연구를 맡겼으며 이번 주 안에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초과이익공유제를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10] 2011년 9월 15일 발표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설문조사 결과, 국내 기업들은 초과이익공유제보다 성과공유제를 선호한다고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가 대기업(62개)과 협력중소업체(79개)에게 물은 결과, 이들은 이익공유제보다는 기존의 성과공유제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 기업들은 대부분 초과이익공유제가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했다.[11] 또한 대기업들 절반 가까이(42.8%)가 현금보상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성과공유제의 애로사항으로 꼽혔다. 상당수 협력사들이 현금보상보다는 물량확대나 신규사업 기회제공 등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적인 거래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12] 출처[편집] ↑ 초과이익공유제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조선일보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24/2011022400212.html ↑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958893 ↑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4959594 ↑ 시사인 2011년 6월 이건희 회장이 경제학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 ↑ 아이뉴스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553300&g_menu=050220&rrf=nv ↑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3/all/20110311/35479365/1 ↑ 한국경제신문 생글생글 ↑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3/all/20110412/36368694/1 ↑ 한국경제신문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51706761 ↑ 전자신문 http://www.etnews.com/201109150243 ↑ 이데일리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C21&newsid=02233686596380448&DCD=&OutLnkChk=Y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공유가치창출(CSV)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경제민주주의(경제민주화) 민주자본주의 사회 양극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초과이익공유제&oldid=24202944" 분류: 경제학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Lietuvių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1: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초과이익공유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초과이익공유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익공유제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초과이익공유제(超過利益共有制, 영어: profit sharing, PS)는 대기업이 해마다 설정한 목표 이익치를 초과하는 이익이 발생했을 때 협력 중소기업에게 초과이윤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제도이다.[1] 목차 1 발단 2 논란 2.1 찬성 측 입장 2.2 반대 측 입장 3 현재 상황 4 출처 5 각주 6 같이 보기 발단[편집]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정운찬은 2011년 2월 24일 "초과 이익이 나는 것은 대기업의 노력도 있겠지만 중소기업의 노력도 있다"면서 "대기업 이익을 주주-임직원뿐 아니라 협력기업까지도 공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공유의 범위는) 대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면서도 "(공유 노력의) 결과를 동반성장지수 평가에 반영해 세제 혜택이나 공공기관 발주 우선권 등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2] 취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 동반 성장이다. 논란[편집] 정운찬 위원장의 발언 이후 정부에서도 찬반이 갈리고 정치인은 물론 재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쏟아졌다. 찬성 측 입장[편집] 정 위원장은 "이익분을 모든 기업들이 다 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서 "기술협력 기금이나 고용안정 기금 마련 등을 통해 중소기업을 더욱 경쟁력 있게 만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여도 산정 방식에 대해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협력업체와 성과를 나눌 기준이 있을 것이다. 종업원을 평가하는 방식처럼 협력업체를 평가하는 방식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는 대기업의 불공정 관행을 지적하면서 "초과이익을 어떻게 정의하고 공유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가 있지만, 취지는 살리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3] 김동선 중소기업청장도 "이념적인 문제를 떠나 기본적 취지에 공감한다"면서 "대기업들이 성과 발표를 하면 협력업체들은 '중소기업의 수익이 너무 떨어진다'는 불만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익의 혜택은 대기업과 협력업체 등 참여한 모든 주체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4] 외국의 사례를 들며 이익공유제가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롤스로이스와 협력사들은 ‘위험 및 판매수입 공유 파트너 계약’(이하 판매수입공유제·Revenue Sharing)을 맺었다. 항공기 엔진 개발에 공동 투자해서 성공하면 투자 비율에 비례해 판매 수입을 나누기로 해 큰 이익을 거두었다. 비디오 대여체인사업자인 블록버스터는 이익공유제를 유통서비스업에 확대 적용했다. 블록버스터는 비디오 대여점에 판매하는 가격을 8분의 1 수준인 8달러로 대폭 낮추었다. 이에 따라 블록버스터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는 대여 횟수가 22회에서 6회로 줄었다. 블록버스터는 비디오 출시 초기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해 소비자에게 대여할 수 있게 되자 수입이 급증했다. 미국 영화산업 태동기인 1920년대 할리우드는 영화배우와 제작사, 배급사 간 협력을 촉진하고자 이익공유제를 도입했다.[5] 반대 측 입장[편집] 한편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홍 최고위원은 "총리를 지내신 분이 대기업 이익을 서민에 할당하자는 급진 좌파 주장을 한다."고 말했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너무 파격적인 내용이라서 사회적 합의와 신중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신중론을 폈다.[6]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사회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며 "경제학에서 배우지도 못한,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꼬집었다.[7]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연초에) 이익 추정치를 공개하라고 하면 기업 대부분이 달성이 어려운 목표치를 내놓을 것"이라며 "반강제적으로 이익을 빼앗기는 상황에서 적정 이익을 발표할 기업은 없다"고 꼬집었고 서승환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마디로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먼 포퓰리즘적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중소기업간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무너진다는 반론도 있다. 이미 대기업에 납품하던 중소기업이 보호막을 얻으면서 새로 납품권을 얻으려는 타 기업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것이다.[8]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애초에 틀린 개념"이라며 반대를 표시했다. 그는 "연초에 대기업을 다 모아서 올해 얼마 이익이 예상되냐고 물어본 후 연말에 그 이익을 넘어가면 그 초과이익이라는 것들을 협력업체에 나눠줘야 한다. 그러면 기업 경영활동에 국가가 일일이 개입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마치 계획경제 같이 된다."고 비판했다.[9] 현재 상황[편집] 한편 2011년 5월 17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선진화포럼 월례토론회에서 동반성장위원회 정운찬 총재는 "위원회 내 실무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이익공유제 또는 협력업체 이익공유 플랜에 대해 연구를 맡겼으며 이번 주 안에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초과이익공유제를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10] 2011년 9월 15일 발표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설문조사 결과, 국내 기업들은 초과이익공유제보다 성과공유제를 선호한다고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가 대기업(62개)과 협력중소업체(79개)에게 물은 결과, 이들은 이익공유제보다는 기존의 성과공유제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 기업들은 대부분 초과이익공유제가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했다.[11] 또한 대기업들 절반 가까이(42.8%)가 현금보상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성과공유제의 애로사항으로 꼽혔다. 상당수 협력사들이 현금보상보다는 물량확대나 신규사업 기회제공 등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적인 거래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12] 출처[편집] ↑ 초과이익공유제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조선일보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24/2011022400212.html ↑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958893 ↑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4959594 ↑ 시사인 2011년 6월 이건희 회장이 경제학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 ↑ 아이뉴스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553300&g_menu=050220&rrf=nv ↑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3/all/20110311/35479365/1 ↑ 한국경제신문 생글생글 ↑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3/all/20110412/36368694/1 ↑ 한국경제신문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51706761 ↑ 전자신문 http://www.etnews.com/201109150243 ↑ 이데일리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C21&newsid=02233686596380448&DCD=&OutLnkChk=Y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공유가치창출(CSV)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경제민주주의(경제민주화) 민주자본주의 사회 양극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초과이익공유제&oldid=24202944" 분류: 경제학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Lietuvių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1: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초과이익공유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초과이익공유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익공유제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초과이익공유제(超過利益共有制, 영어: profit sharing, PS)는 대기업이 해마다 설정한 목표 이익치를 초과하는 이익이 발생했을 때 협력 중소기업에게 초과이윤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제도이다.[1] 목차 1 발단 2 논란 2.1 찬성 측 입장 2.2 반대 측 입장 3 현재 상황 4 출처 5 각주 6 같이 보기 발단[편집]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정운찬은 2011년 2월 24일 "초과 이익이 나는 것은 대기업의 노력도 있겠지만 중소기업의 노력도 있다"면서 "대기업 이익을 주주-임직원뿐 아니라 협력기업까지도 공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공유의 범위는) 대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면서도 "(공유 노력의) 결과를 동반성장지수 평가에 반영해 세제 혜택이나 공공기관 발주 우선권 등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2] 취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 동반 성장이다. 논란[편집] 정운찬 위원장의 발언 이후 정부에서도 찬반이 갈리고 정치인은 물론 재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쏟아졌다. 찬성 측 입장[편집] 정 위원장은 "이익분을 모든 기업들이 다 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서 "기술협력 기금이나 고용안정 기금 마련 등을 통해 중소기업을 더욱 경쟁력 있게 만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여도 산정 방식에 대해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협력업체와 성과를 나눌 기준이 있을 것이다. 종업원을 평가하는 방식처럼 협력업체를 평가하는 방식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는 대기업의 불공정 관행을 지적하면서 "초과이익을 어떻게 정의하고 공유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가 있지만, 취지는 살리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3] 김동선 중소기업청장도 "이념적인 문제를 떠나 기본적 취지에 공감한다"면서 "대기업들이 성과 발표를 하면 협력업체들은 '중소기업의 수익이 너무 떨어진다'는 불만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익의 혜택은 대기업과 협력업체 등 참여한 모든 주체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4] 외국의 사례를 들며 이익공유제가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롤스로이스와 협력사들은 ‘위험 및 판매수입 공유 파트너 계약’(이하 판매수입공유제·Revenue Sharing)을 맺었다. 항공기 엔진 개발에 공동 투자해서 성공하면 투자 비율에 비례해 판매 수입을 나누기로 해 큰 이익을 거두었다. 비디오 대여체인사업자인 블록버스터는 이익공유제를 유통서비스업에 확대 적용했다. 블록버스터는 비디오 대여점에 판매하는 가격을 8분의 1 수준인 8달러로 대폭 낮추었다. 이에 따라 블록버스터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는 대여 횟수가 22회에서 6회로 줄었다. 블록버스터는 비디오 출시 초기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해 소비자에게 대여할 수 있게 되자 수입이 급증했다. 미국 영화산업 태동기인 1920년대 할리우드는 영화배우와 제작사, 배급사 간 협력을 촉진하고자 이익공유제를 도입했다.[5] 반대 측 입장[편집] 한편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홍 최고위원은 "총리를 지내신 분이 대기업 이익을 서민에 할당하자는 급진 좌파 주장을 한다."고 말했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너무 파격적인 내용이라서 사회적 합의와 신중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신중론을 폈다.[6]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사회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며 "경제학에서 배우지도 못한,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꼬집었다.[7]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연초에) 이익 추정치를 공개하라고 하면 기업 대부분이 달성이 어려운 목표치를 내놓을 것"이라며 "반강제적으로 이익을 빼앗기는 상황에서 적정 이익을 발표할 기업은 없다"고 꼬집었고 서승환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마디로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먼 포퓰리즘적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중소기업간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무너진다는 반론도 있다. 이미 대기업에 납품하던 중소기업이 보호막을 얻으면서 새로 납품권을 얻으려는 타 기업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것이다.[8]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애초에 틀린 개념"이라며 반대를 표시했다. 그는 "연초에 대기업을 다 모아서 올해 얼마 이익이 예상되냐고 물어본 후 연말에 그 이익을 넘어가면 그 초과이익이라는 것들을 협력업체에 나눠줘야 한다. 그러면 기업 경영활동에 국가가 일일이 개입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마치 계획경제 같이 된다."고 비판했다.[9] 현재 상황[편집] 한편 2011년 5월 17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선진화포럼 월례토론회에서 동반성장위원회 정운찬 총재는 "위원회 내 실무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이익공유제 또는 협력업체 이익공유 플랜에 대해 연구를 맡겼으며 이번 주 안에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초과이익공유제를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10] 2011년 9월 15일 발표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설문조사 결과, 국내 기업들은 초과이익공유제보다 성과공유제를 선호한다고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가 대기업(62개)과 협력중소업체(79개)에게 물은 결과, 이들은 이익공유제보다는 기존의 성과공유제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 기업들은 대부분 초과이익공유제가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했다.[11] 또한 대기업들 절반 가까이(42.8%)가 현금보상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성과공유제의 애로사항으로 꼽혔다. 상당수 협력사들이 현금보상보다는 물량확대나 신규사업 기회제공 등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적인 거래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12] 출처[편집] ↑ 초과이익공유제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조선일보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24/2011022400212.html ↑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958893 ↑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4959594 ↑ 시사인 2011년 6월 이건희 회장이 경제학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 ↑ 아이뉴스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553300&g_menu=050220&rrf=nv ↑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3/all/20110311/35479365/1 ↑ 한국경제신문 생글생글 ↑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3/all/20110412/36368694/1 ↑ 한국경제신문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51706761 ↑ 전자신문 http://www.etnews.com/201109150243 ↑ 이데일리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C21&newsid=02233686596380448&DCD=&OutLnkChk=Y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공유가치창출(CSV)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경제민주주의(경제민주화) 민주자본주의 사회 양극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초과이익공유제&oldid=24202944" 분류: 경제학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Lietuvių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1: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필터 (사진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필터 (사진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62 mm 자외선, 편광, 형광 필터. 필터(filter, 속칭 렌즈 필터)는 사진술 분야에서 사진기의 광학적 경로(path)에 삽입되는 필터 액세서리를 말한다. 사진기 필터는 홀더 액세서리에 끼울 수 있는 네모 모양인 것도 있으나 보통은 금속이나 플라스틱 재질의 둘레 틀 안쪽에 끼운 유리나 플라스틱 원반 모양이다. 보통 렌즈 앞에서 나사로 조여 조립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필터를 사용해서 찍히는 이미지를 부가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때때로 찍히는 이미지에 아주 약간의 변화를 주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특별한 경우에는 사진기 필터 없이는 사진을 아예 찍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필터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단점으로는 지저분하거나 긁힌 자국이 있는 필터에 의한 이미지 품질과 해상도 손실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광량을 충분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노출이 많이 필요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단점은 필터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유지보수함로써 예방할 수 있다. 두 번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테크닉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필터를 잘 사용하였으면 문제가 안 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필터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대부분의 필터는 래튼 수에 의해 식별된다. 목차 1 사진술 분야에서의 필터의 사용 2 클리어 필터 3 자외선 필터 4 편광 필터 5 같이 보기 6 각주 사진술 분야에서의 필터의 사용[편집] 사진술 분야에서 필터는 그 용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클리어 필터 자외선 필터 색상 보정 - 컬러 커렉션 필터, 컬러 컨퍼젼 필터, 화이트 밸런스 필터라고도 불린다. 색상 분리, 색상 서브트랙션 대비 향상 자외선 뉴트럴 덴시티 - 그라듀에이티드 ND 필터 및 솔라 필터 포함. 편광 다양한 종류의 특수 효과 필터 -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 그라듀에이티드 컬러, 컬러 그래드 크로스 스크린 및 스타 디플랙터 디퓨전 및 콘트라스트 감소 세피아 톤 스팟 클로즈-업, 다른 말로 매크로 디옵터즈(diopters) 및 스플릿 디옵터즈(split diopters), 다른 말로 스플릿 포커스(split focus) 클리어 필터[편집] 클리어 필터, 다른 말로 윈도 글래스 필터(window glass), 옵티컬 플랫츠(optical flats)라고도 하는 것은, 완전히 투명한 필터이다. 들어오는 빛을 (이상적으로는) 전혀 필터링 하지 않는다. 다만 단지 렌즈의 앞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외선 필터[편집] 자외선 필터는, 다른 말로 UV 필터, 자외선 차단 필터라고도 하는데, 자외선 광에 의해 발생되는 흐릿함을 없애기 위해 사용한다. UV 필터는 보통 가시 광선에 대해서는 높은 정도로 투과시켜 주므로, 대부분의 사진 촬영 시 그냥 끼워 두고 써도 무방하다. 이 필터는 값도 싸므로, 클리어 필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사진 찍을 때 렌즈 보호용으로 쓰기도 한다.[1] Haze-2A나 UV17과 같은 강한 UV 필터는 광 스펙트럼 상에서 보라색쪽 부분을 조금 깎아먹기도 한다. 사진은 약간 노란색 기운이 돌게 된다. 이러한 강한 UV 필터는 흐릿함(haziness)를 줄이는 데 더 효과적이다.[2][3] 또한 디지털 카메라의 퍼플 프링잉(purple fringing)을 줄이는 데 쓰인다.[4] 강한 종류의 UV 필터는 때때로 해가 뜬 날(daylight-type) 응달에서 찍은 사진에 따뜻한 색조를 더하기 위해서도 쓰이기도 한다. 편광 필터[편집] 편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광 필터는 컬러 사진 및 흑백 사진 모두에 쓰인다. 지나치게 밝은 하늘을 어둡게 하거나 하는데 쓰인다. 보통 구름의 색상은 이 필터를 써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사진에서는 하늘과 구름과의 대비(contrast)가 증가하게 된다. 아지랑이(atmospheric haze)나 반사된 햇빛(reflected sunlight) 또한 줄어든다. 또한 컬러 사진에서는 전체적인 색상 채도(color saturation)가 증가한다. 편광 필터는 반사(reflection)과 관련 있는 상황을 적절히 처리하기 위해 자주 쓰인다. 예를 들면, 물의 반사, 유리의 반사에 적절히 대응하거나 유리창을 통해 사진을 찍을 때 사용된다. (유리창을 통해 사진을 찍을 때는, 브루스터 각이라는 현상을 이용한다.) 컬러 사진에 대한 편광 필터의 효과. 오른쪽은 편광 필터를 적용한 것이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필터의 효과(effect)를 최소화하도록 편광 필터가 회전되어 있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효과를 최대화하도록 편광 필터가 90°회전되어 있다. 이로써 반사된 햇빛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편광 필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선형 편광 필터(linear polarizer filter, 다른 말로 직선 편광 필터)는 선형적으로 편광된 광원(직선편광)의 한 편광 성분만을 투과시킨다. 원형 편광 필터(circular polarizer, 원평광 필터, 흔히 CPL 필터라고 함.)은 한 개의 편광 성분만을 투과시키지만, 그것을 원편광(circularly polarized)된 광으로 바꾸어준다. 선형 편광 필터에다가 복굴절 층(보통 파장판)을 더해줌으로써 처리된다. 일부 사진기들의 자동 초점 센서 및 계측 센서, 대부분의 일안 반사식 카메라들은 선형 편광 필터를 가지고는 제대로 쓸 수 없다. 초점 작용과 계측 작용에 쓰이는 반사 거울과 빔-스플릿터들 때문이다. 반면, 원형 편광 필터는 모든 종류의 사진기에 쓰일 수 있다. 같이 보기[편집] 필터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필터 ↑ “필터”. 2007년 11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2일에 확인함. ↑ Joseph Meehan (1998). 《The Photographer's Guide to Using Filters》. Watson-Guptill. ISBN 0817454527. ↑ Tiffen Inc. “Protection & UV Absorbing Filters”. ↑ Gary Nugent. “Photoshop Technique: Remove Purple Fringing”. 《great-landscape-photography.com》. vdeh사진술개념 · 원리 화각 조리개 색온도 피사계 심도(DOF) 초점 심도 노출 F 값 필름 포맷 필름 감도 초점 거리 다중 노출 왜곡 사진 인화 현상 적목 현상 사진술과 과학 셔터 속도 존 시스템 종류 항공 상업 사진 운경 다큐멘터리 에로 사진 패션 예술 사진 법의학 사진 글래머 사진 자연 사진 누드 사진 파노라마 포토저널리즘 포르노그래피 포트레이트 기념 촬영 정물 사진 스톡 사진 거리 사진 수중 촬영 웨딩 촬영 야생 사진 장비 카메라 일안 반사식 카메라 이안 반사식 카메라 거리계연동카메라 토이 카메라 일회용 카메라 뷰 카메라 뷰파인더 카메라 암실 (사진 확대기 암등) 사진 필름 필터 플래시 카메라 렌즈 (줌 렌즈 광각 렌즈 망원 렌즈) 영사기 삼각대 디지털 디지털 카메라 (DSLR 미러리스 카메라 디지털백) 고체 촬상 소자 (3CCD 포베온 X3) 화소 필름 스캔 필르마이징 DOF 어댑터 사진가 작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필터_(사진술)&oldid=24497925" 분류: 사진술사진 장비광학 필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සිංහලSimple EnglishSvenska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9일 (토) 09: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필터 (사진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필터 (사진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62 mm 자외선, 편광, 형광 필터. 필터(filter, 속칭 렌즈 필터)는 사진술 분야에서 사진기의 광학적 경로(path)에 삽입되는 필터 액세서리를 말한다. 사진기 필터는 홀더 액세서리에 끼울 수 있는 네모 모양인 것도 있으나 보통은 금속이나 플라스틱 재질의 둘레 틀 안쪽에 끼운 유리나 플라스틱 원반 모양이다. 보통 렌즈 앞에서 나사로 조여 조립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필터를 사용해서 찍히는 이미지를 부가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때때로 찍히는 이미지에 아주 약간의 변화를 주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특별한 경우에는 사진기 필터 없이는 사진을 아예 찍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필터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단점으로는 지저분하거나 긁힌 자국이 있는 필터에 의한 이미지 품질과 해상도 손실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광량을 충분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노출이 많이 필요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단점은 필터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유지보수함로써 예방할 수 있다. 두 번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테크닉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필터를 잘 사용하였으면 문제가 안 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필터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대부분의 필터는 래튼 수에 의해 식별된다. 목차 1 사진술 분야에서의 필터의 사용 2 클리어 필터 3 자외선 필터 4 편광 필터 5 같이 보기 6 각주 사진술 분야에서의 필터의 사용[편집] 사진술 분야에서 필터는 그 용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클리어 필터 자외선 필터 색상 보정 - 컬러 커렉션 필터, 컬러 컨퍼젼 필터, 화이트 밸런스 필터라고도 불린다. 색상 분리, 색상 서브트랙션 대비 향상 자외선 뉴트럴 덴시티 - 그라듀에이티드 ND 필터 및 솔라 필터 포함. 편광 다양한 종류의 특수 효과 필터 -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 그라듀에이티드 컬러, 컬러 그래드 크로스 스크린 및 스타 디플랙터 디퓨전 및 콘트라스트 감소 세피아 톤 스팟 클로즈-업, 다른 말로 매크로 디옵터즈(diopters) 및 스플릿 디옵터즈(split diopters), 다른 말로 스플릿 포커스(split focus) 클리어 필터[편집] 클리어 필터, 다른 말로 윈도 글래스 필터(window glass), 옵티컬 플랫츠(optical flats)라고도 하는 것은, 완전히 투명한 필터이다. 들어오는 빛을 (이상적으로는) 전혀 필터링 하지 않는다. 다만 단지 렌즈의 앞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외선 필터[편집] 자외선 필터는, 다른 말로 UV 필터, 자외선 차단 필터라고도 하는데, 자외선 광에 의해 발생되는 흐릿함을 없애기 위해 사용한다. UV 필터는 보통 가시 광선에 대해서는 높은 정도로 투과시켜 주므로, 대부분의 사진 촬영 시 그냥 끼워 두고 써도 무방하다. 이 필터는 값도 싸므로, 클리어 필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사진 찍을 때 렌즈 보호용으로 쓰기도 한다.[1] Haze-2A나 UV17과 같은 강한 UV 필터는 광 스펙트럼 상에서 보라색쪽 부분을 조금 깎아먹기도 한다. 사진은 약간 노란색 기운이 돌게 된다. 이러한 강한 UV 필터는 흐릿함(haziness)를 줄이는 데 더 효과적이다.[2][3] 또한 디지털 카메라의 퍼플 프링잉(purple fringing)을 줄이는 데 쓰인다.[4] 강한 종류의 UV 필터는 때때로 해가 뜬 날(daylight-type) 응달에서 찍은 사진에 따뜻한 색조를 더하기 위해서도 쓰이기도 한다. 편광 필터[편집] 편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광 필터는 컬러 사진 및 흑백 사진 모두에 쓰인다. 지나치게 밝은 하늘을 어둡게 하거나 하는데 쓰인다. 보통 구름의 색상은 이 필터를 써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사진에서는 하늘과 구름과의 대비(contrast)가 증가하게 된다. 아지랑이(atmospheric haze)나 반사된 햇빛(reflected sunlight) 또한 줄어든다. 또한 컬러 사진에서는 전체적인 색상 채도(color saturation)가 증가한다. 편광 필터는 반사(reflection)과 관련 있는 상황을 적절히 처리하기 위해 자주 쓰인다. 예를 들면, 물의 반사, 유리의 반사에 적절히 대응하거나 유리창을 통해 사진을 찍을 때 사용된다. (유리창을 통해 사진을 찍을 때는, 브루스터 각이라는 현상을 이용한다.) 컬러 사진에 대한 편광 필터의 효과. 오른쪽은 편광 필터를 적용한 것이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필터의 효과(effect)를 최소화하도록 편광 필터가 회전되어 있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효과를 최대화하도록 편광 필터가 90°회전되어 있다. 이로써 반사된 햇빛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편광 필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선형 편광 필터(linear polarizer filter, 다른 말로 직선 편광 필터)는 선형적으로 편광된 광원(직선편광)의 한 편광 성분만을 투과시킨다. 원형 편광 필터(circular polarizer, 원평광 필터, 흔히 CPL 필터라고 함.)은 한 개의 편광 성분만을 투과시키지만, 그것을 원편광(circularly polarized)된 광으로 바꾸어준다. 선형 편광 필터에다가 복굴절 층(보통 파장판)을 더해줌으로써 처리된다. 일부 사진기들의 자동 초점 센서 및 계측 센서, 대부분의 일안 반사식 카메라들은 선형 편광 필터를 가지고는 제대로 쓸 수 없다. 초점 작용과 계측 작용에 쓰이는 반사 거울과 빔-스플릿터들 때문이다. 반면, 원형 편광 필터는 모든 종류의 사진기에 쓰일 수 있다. 같이 보기[편집] 필터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필터 ↑ “필터”. 2007년 11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2일에 확인함. ↑ Joseph Meehan (1998). 《The Photographer's Guide to Using Filters》. Watson-Guptill. ISBN 0817454527. ↑ Tiffen Inc. “Protection & UV Absorbing Filters”. ↑ Gary Nugent. “Photoshop Technique: Remove Purple Fringing”. 《great-landscape-photography.com》. vdeh사진술개념 · 원리 화각 조리개 색온도 피사계 심도(DOF) 초점 심도 노출 F 값 필름 포맷 필름 감도 초점 거리 다중 노출 왜곡 사진 인화 현상 적목 현상 사진술과 과학 셔터 속도 존 시스템 종류 항공 상업 사진 운경 다큐멘터리 에로 사진 패션 예술 사진 법의학 사진 글래머 사진 자연 사진 누드 사진 파노라마 포토저널리즘 포르노그래피 포트레이트 기념 촬영 정물 사진 스톡 사진 거리 사진 수중 촬영 웨딩 촬영 야생 사진 장비 카메라 일안 반사식 카메라 이안 반사식 카메라 거리계연동카메라 토이 카메라 일회용 카메라 뷰 카메라 뷰파인더 카메라 암실 (사진 확대기 암등) 사진 필름 필터 플래시 카메라 렌즈 (줌 렌즈 광각 렌즈 망원 렌즈) 영사기 삼각대 디지털 디지털 카메라 (DSLR 미러리스 카메라 디지털백) 고체 촬상 소자 (3CCD 포베온 X3) 화소 필름 스캔 필르마이징 DOF 어댑터 사진가 작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필터_(사진술)&oldid=24497925" 분류: 사진술사진 장비광학 필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සිංහලSimple EnglishSvenska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9일 (토) 09: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필터 (사진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필터 (사진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62 mm 자외선, 편광, 형광 필터. 필터(filter, 속칭 렌즈 필터)는 사진술 분야에서 사진기의 광학적 경로(path)에 삽입되는 필터 액세서리를 말한다. 사진기 필터는 홀더 액세서리에 끼울 수 있는 네모 모양인 것도 있으나 보통은 금속이나 플라스틱 재질의 둘레 틀 안쪽에 끼운 유리나 플라스틱 원반 모양이다. 보통 렌즈 앞에서 나사로 조여 조립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필터를 사용해서 찍히는 이미지를 부가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때때로 찍히는 이미지에 아주 약간의 변화를 주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특별한 경우에는 사진기 필터 없이는 사진을 아예 찍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필터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단점으로는 지저분하거나 긁힌 자국이 있는 필터에 의한 이미지 품질과 해상도 손실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광량을 충분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노출이 많이 필요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단점은 필터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유지보수함로써 예방할 수 있다. 두 번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테크닉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필터를 잘 사용하였으면 문제가 안 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필터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대부분의 필터는 래튼 수에 의해 식별된다. 목차 1 사진술 분야에서의 필터의 사용 2 클리어 필터 3 자외선 필터 4 편광 필터 5 같이 보기 6 각주 사진술 분야에서의 필터의 사용[편집] 사진술 분야에서 필터는 그 용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클리어 필터 자외선 필터 색상 보정 - 컬러 커렉션 필터, 컬러 컨퍼젼 필터, 화이트 밸런스 필터라고도 불린다. 색상 분리, 색상 서브트랙션 대비 향상 자외선 뉴트럴 덴시티 - 그라듀에이티드 ND 필터 및 솔라 필터 포함. 편광 다양한 종류의 특수 효과 필터 -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 그라듀에이티드 컬러, 컬러 그래드 크로스 스크린 및 스타 디플랙터 디퓨전 및 콘트라스트 감소 세피아 톤 스팟 클로즈-업, 다른 말로 매크로 디옵터즈(diopters) 및 스플릿 디옵터즈(split diopters), 다른 말로 스플릿 포커스(split focus) 클리어 필터[편집] 클리어 필터, 다른 말로 윈도 글래스 필터(window glass), 옵티컬 플랫츠(optical flats)라고도 하는 것은, 완전히 투명한 필터이다. 들어오는 빛을 (이상적으로는) 전혀 필터링 하지 않는다. 다만 단지 렌즈의 앞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외선 필터[편집] 자외선 필터는, 다른 말로 UV 필터, 자외선 차단 필터라고도 하는데, 자외선 광에 의해 발생되는 흐릿함을 없애기 위해 사용한다. UV 필터는 보통 가시 광선에 대해서는 높은 정도로 투과시켜 주므로, 대부분의 사진 촬영 시 그냥 끼워 두고 써도 무방하다. 이 필터는 값도 싸므로, 클리어 필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사진 찍을 때 렌즈 보호용으로 쓰기도 한다.[1] Haze-2A나 UV17과 같은 강한 UV 필터는 광 스펙트럼 상에서 보라색쪽 부분을 조금 깎아먹기도 한다. 사진은 약간 노란색 기운이 돌게 된다. 이러한 강한 UV 필터는 흐릿함(haziness)를 줄이는 데 더 효과적이다.[2][3] 또한 디지털 카메라의 퍼플 프링잉(purple fringing)을 줄이는 데 쓰인다.[4] 강한 종류의 UV 필터는 때때로 해가 뜬 날(daylight-type) 응달에서 찍은 사진에 따뜻한 색조를 더하기 위해서도 쓰이기도 한다. 편광 필터[편집] 편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광 필터는 컬러 사진 및 흑백 사진 모두에 쓰인다. 지나치게 밝은 하늘을 어둡게 하거나 하는데 쓰인다. 보통 구름의 색상은 이 필터를 써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사진에서는 하늘과 구름과의 대비(contrast)가 증가하게 된다. 아지랑이(atmospheric haze)나 반사된 햇빛(reflected sunlight) 또한 줄어든다. 또한 컬러 사진에서는 전체적인 색상 채도(color saturation)가 증가한다. 편광 필터는 반사(reflection)과 관련 있는 상황을 적절히 처리하기 위해 자주 쓰인다. 예를 들면, 물의 반사, 유리의 반사에 적절히 대응하거나 유리창을 통해 사진을 찍을 때 사용된다. (유리창을 통해 사진을 찍을 때는, 브루스터 각이라는 현상을 이용한다.) 컬러 사진에 대한 편광 필터의 효과. 오른쪽은 편광 필터를 적용한 것이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필터의 효과(effect)를 최소화하도록 편광 필터가 회전되어 있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효과를 최대화하도록 편광 필터가 90°회전되어 있다. 이로써 반사된 햇빛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편광 필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선형 편광 필터(linear polarizer filter, 다른 말로 직선 편광 필터)는 선형적으로 편광된 광원(직선편광)의 한 편광 성분만을 투과시킨다. 원형 편광 필터(circular polarizer, 원평광 필터, 흔히 CPL 필터라고 함.)은 한 개의 편광 성분만을 투과시키지만, 그것을 원편광(circularly polarized)된 광으로 바꾸어준다. 선형 편광 필터에다가 복굴절 층(보통 파장판)을 더해줌으로써 처리된다. 일부 사진기들의 자동 초점 센서 및 계측 센서, 대부분의 일안 반사식 카메라들은 선형 편광 필터를 가지고는 제대로 쓸 수 없다. 초점 작용과 계측 작용에 쓰이는 반사 거울과 빔-스플릿터들 때문이다. 반면, 원형 편광 필터는 모든 종류의 사진기에 쓰일 수 있다. 같이 보기[편집] 필터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필터 ↑ “필터”. 2007년 11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2일에 확인함. ↑ Joseph Meehan (1998). 《The Photographer's Guide to Using Filters》. Watson-Guptill. ISBN 0817454527. ↑ Tiffen Inc. “Protection & UV Absorbing Filters”. ↑ Gary Nugent. “Photoshop Technique: Remove Purple Fringing”. 《great-landscape-photography.com》. vdeh사진술개념 · 원리 화각 조리개 색온도 피사계 심도(DOF) 초점 심도 노출 F 값 필름 포맷 필름 감도 초점 거리 다중 노출 왜곡 사진 인화 현상 적목 현상 사진술과 과학 셔터 속도 존 시스템 종류 항공 상업 사진 운경 다큐멘터리 에로 사진 패션 예술 사진 법의학 사진 글래머 사진 자연 사진 누드 사진 파노라마 포토저널리즘 포르노그래피 포트레이트 기념 촬영 정물 사진 스톡 사진 거리 사진 수중 촬영 웨딩 촬영 야생 사진 장비 카메라 일안 반사식 카메라 이안 반사식 카메라 거리계연동카메라 토이 카메라 일회용 카메라 뷰 카메라 뷰파인더 카메라 암실 (사진 확대기 암등) 사진 필름 필터 플래시 카메라 렌즈 (줌 렌즈 광각 렌즈 망원 렌즈) 영사기 삼각대 디지털 디지털 카메라 (DSLR 미러리스 카메라 디지털백) 고체 촬상 소자 (3CCD 포베온 X3) 화소 필름 스캔 필르마이징 DOF 어댑터 사진가 작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필터_(사진술)&oldid=24497925" 분류: 사진술사진 장비광학 필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සිංහලSimple EnglishSvenska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9일 (토) 09: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박진 (1560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진 (1560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박진(朴晉) 박진 장군 묘비출생 1560년 8월 25일조선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현 밀양시 내일동)사망 1596년 3월조선 한성부사인 폭행치사(구타 후유증)거주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국적 조선 별칭 자는 명보(明甫),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 작위는 응천군(凝川君)학력 한학 수학직업 무신, 군인종교 유교(성리학)부모 박인수(부) / 강릉김씨(모)배우자 파평윤씨, 안동김씨친척 할아버지 박언, 외조부 김자달 박진 (朴晉, 朴晋) 생애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 출생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별명 자는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 복무 조선 육군 복무 기간 ? ~ 1597년 3월 최종 계급 경상우도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독포사, 병조참판(종2품) 지휘 경상우도, 황해도 전라도병영 주요 참전 동래성 전투, 밀양성 전투, 작원관 전투,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기타 이력 1583년 과거 급제. 증 병조판서 응천군, 가증 좌찬성 박진(朴晉[1],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은 무신, 군인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 벼슬을 지냈다. 초기의 밀양성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영천성에서 의병 주도로 벌어진 영천성 전투를 지원하여 승전을 거두었고 이후 왜적 111명의 수급을 베어 왕에게 올렸으며, 제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159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순천부사,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596년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냈다. 일본군 장수 사야가는 그를 만나 조선으로 귀순하였다. 사후 증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으며, 후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밀양, 자는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정유길(鄭惟吉)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1.2 과거 급제와 군인 1.2 임진왜란 1.2.1 전란 초기 1.2.2 밀양성 전투 패전 1.2.3 작원관 전투 1.2.4 영천성 전투 1.2.5 항왜 사야가 귀순 1.2.6 제1차, 제2차 경주성 전투 1.3 생애 후반 1.3.1 한성부 상경과 재출정 1.3.2 구타 치사 사건 1.4 사후 2 평가와 비판 3 기타 4 관련 항목 5 각주 6 참고 문헌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박진은 1560년(명종 15년) 8월 25일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에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密興府院君)에 추봉된 박인수(朴麟壽)와 김자달(金自達)의 딸 증 정경부인 강릉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인수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호군(行義興衛副護軍)과 병마절도사를 지냈은아 후일 그의 공적으로 여러번 추증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규정공 박현의 후손으로, 충정공 청재 박심문의 5대손이다. 증조부 박백령은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할아버지 박언은 세자익위사부솔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후일 정승을 지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 급제와 군인[편집] 자는 여회(汝晦[2]),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였다. 일찍이 윤화달의 딸 파평윤씨와 결혼했으나 상처하고 계배인 김시회의 딸 안동김씨와 재혼하였다. 무관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음직으로 군관이 되었다. 여절교위(厲節校尉)로 재직 중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였다.[3] 이후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무인을 불차채용할 때 심수경(沈守慶)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임진왜란[편집] 전란 초기[편집] 동래성 전투장면을 그린 동래부순절도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우병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진주(晉州)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부사 박진은 군(郡) 내 병사 3백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4] 당시 성을 빠져 나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4] 밀양성 전투 패전[편집] 밀양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군이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동래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선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되돌아갔다.[4] 4월 16일 밀양성으로 복귀한 박진은 남은 병력의 수습도 여의치 않았다. 박진이 병사를 모병하는 동안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하였다는 첩보를 접했다.[4] 이후 경상좌병사 이각 등과 함께 소산을 지키다 패배하고 왜군이 성안으로 몰려오자 성안에서 싸우다 포위되었으며, 탈출하여 밀양부를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 이때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5])은“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6] 작원관 전투[편집] 작원관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진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려면 꼭 통과해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4] 일본의 제1군 고니시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양산 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여 방어 병력이 전무한 양산으로 곧장 진격한 일본 제1군의 선발대는 17일 양산에 무혈 입성했다. 4월 18일 동래성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다시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급파시켰다. 여러 곳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하늘처럼 높아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을 따라 밀양성으로 달렸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군사도 없는 무인지경에 빠져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낙동강을 따라 북진하였다.[4] 고니시가 주력군의 선두에 서고 소오 요시토시 등 여섯 장수가 일본군 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밀양성의 병력을 만났는데, 조선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 지형으로 우회시켰다.[4] 이때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양산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좁은 길과 강의 벼랑 사이에 적은 군사들로 길목을 지켰다.[4] 작원관 전투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이 조선군들은 박진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이들을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4] 박진은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에는 절벽이요, 뒤와 옆은 적이었다. 그들은 죽느냐 죽이느냐하는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과 바위를 굴러 항전하다 조총에 총격을 당해도 일본군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일본 주력군도 앞면과 옆면으로부터 공격해 왔고, 최후의 일각까지 밀양 관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대병력을 이기지 못했다.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 3백여 군사가 거의 전멸당하고, 부사 박진과 부하 몇 명만 후퇴했다.[4]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도주했다.[4] 영천성 전투[편집] 영천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후 동년 5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남은 병사를 수습해 소규모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동년 8월 영천성 전투 당시 영천성(永川城)은 함락되었으나 영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정세아, 조희익 등을 중심으로 의병을 결성하고 영천성을 근거지로 하여 안동 주둔 왜군과 상응하고 있었던 왜적을 격파하려 하자 이 소식을 접하고 별장 권응수(權應銖)에게 군사를 딸려 파견, 의병을 돕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했다. 권응수의 지휘로 조선군은 대승을 거두고 말 200 여필, 총통과 창검 900 여개를 노획하였고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간 조선 백성 1천 9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때 박진은 경주 안강에 본진을 두고 영천성 전투를 배후에서 지원하였는데, 사실은 의병을 자신의 휘하에 두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기 전 부관인 별장 권응수를 보내 이들을 지원하게 했고, 전투가 본격적인 시작되기 전에는 군관 변응규를 보내 치사(致辭)를 하고 군기(軍器)와 화약류 등을 보내주고 지원, 격려하는 등 장수로서 넓은 도량을 보였다. 항왜 사야가 귀순[편집] 항왜, 김충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인 사야가(김충선으로 개명)가 그에게 귀순하였다. 사야카는 선조에게 김해 김씨[7]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8]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사야가는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다.[8] “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하여 본의 아니게 선봉이 되어 삼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 인의의 나라를 도저히 공격할 수 없어 저는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8]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을 길 없던 사야카는 항왜의 길에 들어서 조선장수가 되어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8] 제1차, 제2차 경주성 전투[편집] 임진왜란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 이어서 안강(安康)에서 장군 회의를 열어 16읍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성(慶州城)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여 권응수(權應銖),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등을 선봉으로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경주를 공격, 제1차 경주 전투를 치렀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500명의 군사만 잃고 후퇴했다. 그러나 흉흉해진 군사들의 사기를 돋운 뒤 한달 후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제2차 경주 전투를 치렀다. 이때 신예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을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영남 지역의 왜군들을 해안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상주나 서생포로 퇴각하여 영남 지역 중심부 수십개의 읍의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9월 선조로부터 양가죽 옷을 특별히 하사받았다. 1592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했다.[9] 1593년(선조 26년) 2월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2월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일본군 수급 1백 11개를 베어 왕이 있는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10] 대소신려들이 그가 보내온 수급 1백 11개를 보았으며, 이는 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4월 12일 왕명으로 한 자급 특진[11]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생애 후반[편집] 한성부 상경과 재출정[편집] 그해 4월 별장(別將)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소환되었다.[12] 이때 그는 오랫동안 습증(濕證)을 앓아 활을 당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처럼 칼날을 무릅쓰고 싸울수는 없었으나 위엄과 명성이 이미 드러나 있어 아군들도 그를 신뢰하였다.[12] 4월 20일 왕명으로 명나라의 유총병을 만나 군사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 명나라 이 제독의 파병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피난중 행재소(行在所)의 호위문제를 고민하던 선조는 박진의 전과와 명성을 감안하여 그를 불러올려 부원수로 임명해서 여러 장수들을 독전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신들은 그가 각 도와 읍에서 활동하며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고, 영남 지역을 회복한 것도 그의 공이므로 민심을 고려해야 된다며 반대하였다. 1593년 독포사(督捕使)로 내려가 밀양과 울산 등지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해 7월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을 치고 욕을 보여 왕이 분개하였다.[13]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출정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1월 동지중추부사[14], 1594년 2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10월 순천 부사(順天府使),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1596년 11월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구타 치사 사건[편집] 1597년 1월 원균이 이순신의 군관을 내쫓은 것을 보고하였다.[15] 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였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여 군사 훈련 등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16]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 중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17]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참고 있다가 사망에 이르렀다.[17] 그러나 그를 구타한 명나라 장수는 처벌받지도 않았고, 기록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죽은 뒤에 그의 시신을 윤경립이 보자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17] 한준겸 역시 뼈가 부러진 것을 목격하였다.[17] 사후[편집] 박진장군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진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110호) 경기도 적성군 두일리(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149-2 홍의로(洪義老)의 묘소 위편에 안장되었으며[18], 그의 사후 모친은 그의 묘소 근처에서 살았다.[17] 사후 윤성립과 한준겸[19]의 건의로 조정에서 유족을 구휼하였다. 그의 구타 사망 사실은 바로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에서 언급함으로써 알려졌다. 1597년 5월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장에서 그가 중국인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으며, 그의 노모를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17] 바로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증직되었다가 후일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고,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한때 민간인출입통제구역 내에 위치해있었으나 후에 공개되었다. 묘소의 오른쪽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는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1736년(영조 12년) 12월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 평가와 비판[편집] 임진 왜란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쳐 숨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박진은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혼자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대적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의기는 여러 장수들에 비하여 탁월한 것이었다.[17] 또한 지략이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다. 강적이 저돌적으로 쳐들어오자 여러 고을은 달아나기에 바빠서 바람에 쓸리듯이 성을 비우고 진지를 버렸다. 그런데 박진은 외롭고 약한 군졸을 데리고 강적 사이에 홀로 서서 죽기를 작정하고 항거하여 여러번 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비록 남로(南路)를 차단하여 적의 기세를 저지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담력과 지략은 훌륭한 점이 있었다.[20] 기타[편집] 임진왜란 당시 박진은 색깔이 있는 말을 탔었는데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으로 발라 말의 색깔을 없앴으나 여러번 승전하여 명성이 적들에게까지 났기 때문에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했다[21]한다. 관련 항목[편집] 임진왜란 정발 송상현 정문부 김덕령 김천일 최경회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이복남 정기원 정기룡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연천 박진장군 묘역 홍달손 홍의로 서원 염씨 각주[편집] ↑ 晋으로도 쓰인다. ↑ 박진 ↑ 박진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작원관에서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군사 오마이뉴스 2004.09.17일자 ↑ 실학자이자 지봉유설의 저자이다. ↑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 김수로계 김해 김씨와 구별하여 우록 김씨로도 부른다. ↑ 가 나 다 라 항왜(降倭) 김충선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05.04.29일자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1일(정사) 9번째기사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16일(신축) 12번째기사 "영남좌도 절도사 박진이 왜적을 베어 행재소에 보내오다"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8번째기사 "박진과 승장 유정을 가자하라고 분부하다" ↑ 가 나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2번째기사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8일(경오) 3번째기사 "박진 등에게 곤장을 친 관 유격의 일로 경략에게 게첩을 보내라 전교하다" ↑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1월 5일(을묘) 1번째기사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하다" ↑ 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7일(무오) 3번째기사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5일(병술) 1번째기사 "대신들이 황정욱의 일과 무과 출신자를 선발하는 것 등을 건의하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5월 29일(기미) 1번째기사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 ↑ 그의 묘소 바로 아래 17m 지점에 홍의로의 묘가 있고, 홍의로 묘에서 12m 아래는 홍의로의 부인 서원염씨 묘소가 있다. ↑ 인조비 인열왕후 한씨의 친정아버지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2번째기사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 선조실록 30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14일(신미) 2번째기사 "전사한 훈련 봉사 김호를 추증하고 대신을 인견하여 심유경의 강화회담 등을 논하다" 참고 문헌[편집]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대동야승 《촉영도선생안》(矗營道先生案) 《비변사선생안》(備邊司先生案) 외부 링크[편집] 작원관에서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군사 오마이뉴스 2004.09.17일자 항왜(降倭) 김충선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05.04.29일자 박진의 작원관 전투 '임진왜란과 밀양의 의병 항쟁 학술회의' 밀양문화원 주최:군관민 합세 대항 전국의 의병 창의 계기 밀양시민신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진_(1560년)&oldid=23879912" 분류: 1560년 태어남1597년 죽음임진왜란음서과거 급제자조선의 무신조선의 군인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성리학자조선의 철학자조선의 공신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맞아 죽은 사람밀양시 출신밀양 박씨16세기 한국 사람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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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1560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진 (1560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박진(朴晉) 박진 장군 묘비출생 1560년 8월 25일조선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현 밀양시 내일동)사망 1596년 3월조선 한성부사인 폭행치사(구타 후유증)거주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국적 조선 별칭 자는 명보(明甫),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 작위는 응천군(凝川君)학력 한학 수학직업 무신, 군인종교 유교(성리학)부모 박인수(부) / 강릉김씨(모)배우자 파평윤씨, 안동김씨친척 할아버지 박언, 외조부 김자달 박진 (朴晉, 朴晋) 생애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 출생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별명 자는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 복무 조선 육군 복무 기간 ? ~ 1597년 3월 최종 계급 경상우도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독포사, 병조참판(종2품) 지휘 경상우도, 황해도 전라도병영 주요 참전 동래성 전투, 밀양성 전투, 작원관 전투,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기타 이력 1583년 과거 급제. 증 병조판서 응천군, 가증 좌찬성 박진(朴晉[1],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은 무신, 군인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 벼슬을 지냈다. 초기의 밀양성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영천성에서 의병 주도로 벌어진 영천성 전투를 지원하여 승전을 거두었고 이후 왜적 111명의 수급을 베어 왕에게 올렸으며, 제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159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순천부사,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596년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냈다. 일본군 장수 사야가는 그를 만나 조선으로 귀순하였다. 사후 증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으며, 후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밀양, 자는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정유길(鄭惟吉)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1.2 과거 급제와 군인 1.2 임진왜란 1.2.1 전란 초기 1.2.2 밀양성 전투 패전 1.2.3 작원관 전투 1.2.4 영천성 전투 1.2.5 항왜 사야가 귀순 1.2.6 제1차, 제2차 경주성 전투 1.3 생애 후반 1.3.1 한성부 상경과 재출정 1.3.2 구타 치사 사건 1.4 사후 2 평가와 비판 3 기타 4 관련 항목 5 각주 6 참고 문헌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박진은 1560년(명종 15년) 8월 25일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에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密興府院君)에 추봉된 박인수(朴麟壽)와 김자달(金自達)의 딸 증 정경부인 강릉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인수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호군(行義興衛副護軍)과 병마절도사를 지냈은아 후일 그의 공적으로 여러번 추증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규정공 박현의 후손으로, 충정공 청재 박심문의 5대손이다. 증조부 박백령은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할아버지 박언은 세자익위사부솔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후일 정승을 지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 급제와 군인[편집] 자는 여회(汝晦[2]),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였다. 일찍이 윤화달의 딸 파평윤씨와 결혼했으나 상처하고 계배인 김시회의 딸 안동김씨와 재혼하였다. 무관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음직으로 군관이 되었다. 여절교위(厲節校尉)로 재직 중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였다.[3] 이후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무인을 불차채용할 때 심수경(沈守慶)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임진왜란[편집] 전란 초기[편집] 동래성 전투장면을 그린 동래부순절도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우병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진주(晉州)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부사 박진은 군(郡) 내 병사 3백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4] 당시 성을 빠져 나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4] 밀양성 전투 패전[편집] 밀양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군이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동래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선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되돌아갔다.[4] 4월 16일 밀양성으로 복귀한 박진은 남은 병력의 수습도 여의치 않았다. 박진이 병사를 모병하는 동안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하였다는 첩보를 접했다.[4] 이후 경상좌병사 이각 등과 함께 소산을 지키다 패배하고 왜군이 성안으로 몰려오자 성안에서 싸우다 포위되었으며, 탈출하여 밀양부를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 이때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5])은“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6] 작원관 전투[편집] 작원관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진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려면 꼭 통과해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4] 일본의 제1군 고니시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양산 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여 방어 병력이 전무한 양산으로 곧장 진격한 일본 제1군의 선발대는 17일 양산에 무혈 입성했다. 4월 18일 동래성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다시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급파시켰다. 여러 곳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하늘처럼 높아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을 따라 밀양성으로 달렸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군사도 없는 무인지경에 빠져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낙동강을 따라 북진하였다.[4] 고니시가 주력군의 선두에 서고 소오 요시토시 등 여섯 장수가 일본군 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밀양성의 병력을 만났는데, 조선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 지형으로 우회시켰다.[4] 이때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양산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좁은 길과 강의 벼랑 사이에 적은 군사들로 길목을 지켰다.[4] 작원관 전투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이 조선군들은 박진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이들을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4] 박진은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에는 절벽이요, 뒤와 옆은 적이었다. 그들은 죽느냐 죽이느냐하는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과 바위를 굴러 항전하다 조총에 총격을 당해도 일본군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일본 주력군도 앞면과 옆면으로부터 공격해 왔고, 최후의 일각까지 밀양 관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대병력을 이기지 못했다.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 3백여 군사가 거의 전멸당하고, 부사 박진과 부하 몇 명만 후퇴했다.[4]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도주했다.[4] 영천성 전투[편집] 영천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후 동년 5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남은 병사를 수습해 소규모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동년 8월 영천성 전투 당시 영천성(永川城)은 함락되었으나 영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정세아, 조희익 등을 중심으로 의병을 결성하고 영천성을 근거지로 하여 안동 주둔 왜군과 상응하고 있었던 왜적을 격파하려 하자 이 소식을 접하고 별장 권응수(權應銖)에게 군사를 딸려 파견, 의병을 돕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했다. 권응수의 지휘로 조선군은 대승을 거두고 말 200 여필, 총통과 창검 900 여개를 노획하였고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간 조선 백성 1천 9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때 박진은 경주 안강에 본진을 두고 영천성 전투를 배후에서 지원하였는데, 사실은 의병을 자신의 휘하에 두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기 전 부관인 별장 권응수를 보내 이들을 지원하게 했고, 전투가 본격적인 시작되기 전에는 군관 변응규를 보내 치사(致辭)를 하고 군기(軍器)와 화약류 등을 보내주고 지원, 격려하는 등 장수로서 넓은 도량을 보였다. 항왜 사야가 귀순[편집] 항왜, 김충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인 사야가(김충선으로 개명)가 그에게 귀순하였다. 사야카는 선조에게 김해 김씨[7]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8]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사야가는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다.[8] “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하여 본의 아니게 선봉이 되어 삼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 인의의 나라를 도저히 공격할 수 없어 저는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8]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을 길 없던 사야카는 항왜의 길에 들어서 조선장수가 되어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8] 제1차, 제2차 경주성 전투[편집] 임진왜란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 이어서 안강(安康)에서 장군 회의를 열어 16읍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성(慶州城)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여 권응수(權應銖),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등을 선봉으로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경주를 공격, 제1차 경주 전투를 치렀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500명의 군사만 잃고 후퇴했다. 그러나 흉흉해진 군사들의 사기를 돋운 뒤 한달 후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제2차 경주 전투를 치렀다. 이때 신예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을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영남 지역의 왜군들을 해안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상주나 서생포로 퇴각하여 영남 지역 중심부 수십개의 읍의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9월 선조로부터 양가죽 옷을 특별히 하사받았다. 1592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했다.[9] 1593년(선조 26년) 2월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2월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일본군 수급 1백 11개를 베어 왕이 있는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10] 대소신려들이 그가 보내온 수급 1백 11개를 보았으며, 이는 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4월 12일 왕명으로 한 자급 특진[11]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생애 후반[편집] 한성부 상경과 재출정[편집] 그해 4월 별장(別將)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소환되었다.[12] 이때 그는 오랫동안 습증(濕證)을 앓아 활을 당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처럼 칼날을 무릅쓰고 싸울수는 없었으나 위엄과 명성이 이미 드러나 있어 아군들도 그를 신뢰하였다.[12] 4월 20일 왕명으로 명나라의 유총병을 만나 군사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 명나라 이 제독의 파병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피난중 행재소(行在所)의 호위문제를 고민하던 선조는 박진의 전과와 명성을 감안하여 그를 불러올려 부원수로 임명해서 여러 장수들을 독전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신들은 그가 각 도와 읍에서 활동하며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고, 영남 지역을 회복한 것도 그의 공이므로 민심을 고려해야 된다며 반대하였다. 1593년 독포사(督捕使)로 내려가 밀양과 울산 등지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해 7월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을 치고 욕을 보여 왕이 분개하였다.[13]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출정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1월 동지중추부사[14], 1594년 2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10월 순천 부사(順天府使),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1596년 11월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구타 치사 사건[편집] 1597년 1월 원균이 이순신의 군관을 내쫓은 것을 보고하였다.[15] 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였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여 군사 훈련 등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16]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 중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17]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참고 있다가 사망에 이르렀다.[17] 그러나 그를 구타한 명나라 장수는 처벌받지도 않았고, 기록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죽은 뒤에 그의 시신을 윤경립이 보자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17] 한준겸 역시 뼈가 부러진 것을 목격하였다.[17] 사후[편집] 박진장군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진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110호) 경기도 적성군 두일리(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149-2 홍의로(洪義老)의 묘소 위편에 안장되었으며[18], 그의 사후 모친은 그의 묘소 근처에서 살았다.[17] 사후 윤성립과 한준겸[19]의 건의로 조정에서 유족을 구휼하였다. 그의 구타 사망 사실은 바로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에서 언급함으로써 알려졌다. 1597년 5월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장에서 그가 중국인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으며, 그의 노모를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17] 바로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증직되었다가 후일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고,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한때 민간인출입통제구역 내에 위치해있었으나 후에 공개되었다. 묘소의 오른쪽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는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1736년(영조 12년) 12월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 평가와 비판[편집] 임진 왜란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쳐 숨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박진은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혼자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대적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의기는 여러 장수들에 비하여 탁월한 것이었다.[17] 또한 지략이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다. 강적이 저돌적으로 쳐들어오자 여러 고을은 달아나기에 바빠서 바람에 쓸리듯이 성을 비우고 진지를 버렸다. 그런데 박진은 외롭고 약한 군졸을 데리고 강적 사이에 홀로 서서 죽기를 작정하고 항거하여 여러번 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비록 남로(南路)를 차단하여 적의 기세를 저지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담력과 지략은 훌륭한 점이 있었다.[20] 기타[편집] 임진왜란 당시 박진은 색깔이 있는 말을 탔었는데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으로 발라 말의 색깔을 없앴으나 여러번 승전하여 명성이 적들에게까지 났기 때문에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했다[21]한다. 관련 항목[편집] 임진왜란 정발 송상현 정문부 김덕령 김천일 최경회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이복남 정기원 정기룡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연천 박진장군 묘역 홍달손 홍의로 서원 염씨 각주[편집] ↑ 晋으로도 쓰인다. ↑ 박진 ↑ 박진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작원관에서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군사 오마이뉴스 2004.09.17일자 ↑ 실학자이자 지봉유설의 저자이다. ↑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 김수로계 김해 김씨와 구별하여 우록 김씨로도 부른다. ↑ 가 나 다 라 항왜(降倭) 김충선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05.04.29일자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1일(정사) 9번째기사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16일(신축) 12번째기사 "영남좌도 절도사 박진이 왜적을 베어 행재소에 보내오다"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8번째기사 "박진과 승장 유정을 가자하라고 분부하다" ↑ 가 나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2번째기사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8일(경오) 3번째기사 "박진 등에게 곤장을 친 관 유격의 일로 경략에게 게첩을 보내라 전교하다" ↑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1월 5일(을묘) 1번째기사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하다" ↑ 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7일(무오) 3번째기사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5일(병술) 1번째기사 "대신들이 황정욱의 일과 무과 출신자를 선발하는 것 등을 건의하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5월 29일(기미) 1번째기사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 ↑ 그의 묘소 바로 아래 17m 지점에 홍의로의 묘가 있고, 홍의로 묘에서 12m 아래는 홍의로의 부인 서원염씨 묘소가 있다. ↑ 인조비 인열왕후 한씨의 친정아버지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2번째기사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 선조실록 30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14일(신미) 2번째기사 "전사한 훈련 봉사 김호를 추증하고 대신을 인견하여 심유경의 강화회담 등을 논하다" 참고 문헌[편집]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대동야승 《촉영도선생안》(矗營道先生案) 《비변사선생안》(備邊司先生案) 외부 링크[편집] 작원관에서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군사 오마이뉴스 2004.09.17일자 항왜(降倭) 김충선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05.04.29일자 박진의 작원관 전투 '임진왜란과 밀양의 의병 항쟁 학술회의' 밀양문화원 주최:군관민 합세 대항 전국의 의병 창의 계기 밀양시민신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진_(1560년)&oldid=23879912" 분류: 1560년 태어남1597년 죽음임진왜란음서과거 급제자조선의 무신조선의 군인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성리학자조선의 철학자조선의 공신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맞아 죽은 사람밀양시 출신밀양 박씨16세기 한국 사람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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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1560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진 (1560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박진(朴晉) 박진 장군 묘비출생 1560년 8월 25일조선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현 밀양시 내일동)사망 1596년 3월조선 한성부사인 폭행치사(구타 후유증)거주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국적 조선 별칭 자는 명보(明甫),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 작위는 응천군(凝川君)학력 한학 수학직업 무신, 군인종교 유교(성리학)부모 박인수(부) / 강릉김씨(모)배우자 파평윤씨, 안동김씨친척 할아버지 박언, 외조부 김자달 박진 (朴晉, 朴晋) 생애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 출생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별명 자는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 복무 조선 육군 복무 기간 ? ~ 1597년 3월 최종 계급 경상우도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독포사, 병조참판(종2품) 지휘 경상우도, 황해도 전라도병영 주요 참전 동래성 전투, 밀양성 전투, 작원관 전투,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기타 이력 1583년 과거 급제. 증 병조판서 응천군, 가증 좌찬성 박진(朴晉[1],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은 무신, 군인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 벼슬을 지냈다. 초기의 밀양성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영천성에서 의병 주도로 벌어진 영천성 전투를 지원하여 승전을 거두었고 이후 왜적 111명의 수급을 베어 왕에게 올렸으며, 제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159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순천부사,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596년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냈다. 일본군 장수 사야가는 그를 만나 조선으로 귀순하였다. 사후 증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으며, 후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밀양, 자는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정유길(鄭惟吉)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1.2 과거 급제와 군인 1.2 임진왜란 1.2.1 전란 초기 1.2.2 밀양성 전투 패전 1.2.3 작원관 전투 1.2.4 영천성 전투 1.2.5 항왜 사야가 귀순 1.2.6 제1차, 제2차 경주성 전투 1.3 생애 후반 1.3.1 한성부 상경과 재출정 1.3.2 구타 치사 사건 1.4 사후 2 평가와 비판 3 기타 4 관련 항목 5 각주 6 참고 문헌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박진은 1560년(명종 15년) 8월 25일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에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密興府院君)에 추봉된 박인수(朴麟壽)와 김자달(金自達)의 딸 증 정경부인 강릉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인수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호군(行義興衛副護軍)과 병마절도사를 지냈은아 후일 그의 공적으로 여러번 추증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규정공 박현의 후손으로, 충정공 청재 박심문의 5대손이다. 증조부 박백령은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할아버지 박언은 세자익위사부솔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후일 정승을 지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 급제와 군인[편집] 자는 여회(汝晦[2]),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였다. 일찍이 윤화달의 딸 파평윤씨와 결혼했으나 상처하고 계배인 김시회의 딸 안동김씨와 재혼하였다. 무관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음직으로 군관이 되었다. 여절교위(厲節校尉)로 재직 중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였다.[3] 이후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무인을 불차채용할 때 심수경(沈守慶)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임진왜란[편집] 전란 초기[편집] 동래성 전투장면을 그린 동래부순절도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우병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진주(晉州)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부사 박진은 군(郡) 내 병사 3백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4] 당시 성을 빠져 나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4] 밀양성 전투 패전[편집] 밀양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군이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동래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선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되돌아갔다.[4] 4월 16일 밀양성으로 복귀한 박진은 남은 병력의 수습도 여의치 않았다. 박진이 병사를 모병하는 동안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하였다는 첩보를 접했다.[4] 이후 경상좌병사 이각 등과 함께 소산을 지키다 패배하고 왜군이 성안으로 몰려오자 성안에서 싸우다 포위되었으며, 탈출하여 밀양부를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 이때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5])은“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6] 작원관 전투[편집] 작원관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진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려면 꼭 통과해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4] 일본의 제1군 고니시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양산 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여 방어 병력이 전무한 양산으로 곧장 진격한 일본 제1군의 선발대는 17일 양산에 무혈 입성했다. 4월 18일 동래성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다시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급파시켰다. 여러 곳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하늘처럼 높아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을 따라 밀양성으로 달렸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군사도 없는 무인지경에 빠져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낙동강을 따라 북진하였다.[4] 고니시가 주력군의 선두에 서고 소오 요시토시 등 여섯 장수가 일본군 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밀양성의 병력을 만났는데, 조선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 지형으로 우회시켰다.[4] 이때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양산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좁은 길과 강의 벼랑 사이에 적은 군사들로 길목을 지켰다.[4] 작원관 전투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이 조선군들은 박진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이들을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4] 박진은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에는 절벽이요, 뒤와 옆은 적이었다. 그들은 죽느냐 죽이느냐하는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과 바위를 굴러 항전하다 조총에 총격을 당해도 일본군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일본 주력군도 앞면과 옆면으로부터 공격해 왔고, 최후의 일각까지 밀양 관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대병력을 이기지 못했다.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 3백여 군사가 거의 전멸당하고, 부사 박진과 부하 몇 명만 후퇴했다.[4]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도주했다.[4] 영천성 전투[편집] 영천성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후 동년 5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남은 병사를 수습해 소규모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동년 8월 영천성 전투 당시 영천성(永川城)은 함락되었으나 영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정세아, 조희익 등을 중심으로 의병을 결성하고 영천성을 근거지로 하여 안동 주둔 왜군과 상응하고 있었던 왜적을 격파하려 하자 이 소식을 접하고 별장 권응수(權應銖)에게 군사를 딸려 파견, 의병을 돕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했다. 권응수의 지휘로 조선군은 대승을 거두고 말 200 여필, 총통과 창검 900 여개를 노획하였고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간 조선 백성 1천 9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때 박진은 경주 안강에 본진을 두고 영천성 전투를 배후에서 지원하였는데, 사실은 의병을 자신의 휘하에 두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기 전 부관인 별장 권응수를 보내 이들을 지원하게 했고, 전투가 본격적인 시작되기 전에는 군관 변응규를 보내 치사(致辭)를 하고 군기(軍器)와 화약류 등을 보내주고 지원, 격려하는 등 장수로서 넓은 도량을 보였다. 항왜 사야가 귀순[편집] 항왜, 김충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인 사야가(김충선으로 개명)가 그에게 귀순하였다. 사야카는 선조에게 김해 김씨[7]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8]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사야가는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다.[8] “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하여 본의 아니게 선봉이 되어 삼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 인의의 나라를 도저히 공격할 수 없어 저는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8]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을 길 없던 사야카는 항왜의 길에 들어서 조선장수가 되어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8] 제1차, 제2차 경주성 전투[편집] 임진왜란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 이어서 안강(安康)에서 장군 회의를 열어 16읍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성(慶州城)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여 권응수(權應銖),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등을 선봉으로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경주를 공격, 제1차 경주 전투를 치렀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500명의 군사만 잃고 후퇴했다. 그러나 흉흉해진 군사들의 사기를 돋운 뒤 한달 후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제2차 경주 전투를 치렀다. 이때 신예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을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영남 지역의 왜군들을 해안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상주나 서생포로 퇴각하여 영남 지역 중심부 수십개의 읍의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9월 선조로부터 양가죽 옷을 특별히 하사받았다. 1592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했다.[9] 1593년(선조 26년) 2월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2월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일본군 수급 1백 11개를 베어 왕이 있는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10] 대소신려들이 그가 보내온 수급 1백 11개를 보았으며, 이는 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4월 12일 왕명으로 한 자급 특진[11]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생애 후반[편집] 한성부 상경과 재출정[편집] 그해 4월 별장(別將)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소환되었다.[12] 이때 그는 오랫동안 습증(濕證)을 앓아 활을 당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처럼 칼날을 무릅쓰고 싸울수는 없었으나 위엄과 명성이 이미 드러나 있어 아군들도 그를 신뢰하였다.[12] 4월 20일 왕명으로 명나라의 유총병을 만나 군사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 명나라 이 제독의 파병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피난중 행재소(行在所)의 호위문제를 고민하던 선조는 박진의 전과와 명성을 감안하여 그를 불러올려 부원수로 임명해서 여러 장수들을 독전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신들은 그가 각 도와 읍에서 활동하며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고, 영남 지역을 회복한 것도 그의 공이므로 민심을 고려해야 된다며 반대하였다. 1593년 독포사(督捕使)로 내려가 밀양과 울산 등지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해 7월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을 치고 욕을 보여 왕이 분개하였다.[13]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출정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1월 동지중추부사[14], 1594년 2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10월 순천 부사(順天府使),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1596년 11월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구타 치사 사건[편집] 1597년 1월 원균이 이순신의 군관을 내쫓은 것을 보고하였다.[15] 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였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여 군사 훈련 등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16]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 중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17]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참고 있다가 사망에 이르렀다.[17] 그러나 그를 구타한 명나라 장수는 처벌받지도 않았고, 기록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죽은 뒤에 그의 시신을 윤경립이 보자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17] 한준겸 역시 뼈가 부러진 것을 목격하였다.[17] 사후[편집] 박진장군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진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110호) 경기도 적성군 두일리(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149-2 홍의로(洪義老)의 묘소 위편에 안장되었으며[18], 그의 사후 모친은 그의 묘소 근처에서 살았다.[17] 사후 윤성립과 한준겸[19]의 건의로 조정에서 유족을 구휼하였다. 그의 구타 사망 사실은 바로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에서 언급함으로써 알려졌다. 1597년 5월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장에서 그가 중국인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으며, 그의 노모를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17] 바로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증직되었다가 후일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고,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한때 민간인출입통제구역 내에 위치해있었으나 후에 공개되었다. 묘소의 오른쪽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는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1736년(영조 12년) 12월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 평가와 비판[편집] 임진 왜란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쳐 숨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박진은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혼자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대적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의기는 여러 장수들에 비하여 탁월한 것이었다.[17] 또한 지략이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다. 강적이 저돌적으로 쳐들어오자 여러 고을은 달아나기에 바빠서 바람에 쓸리듯이 성을 비우고 진지를 버렸다. 그런데 박진은 외롭고 약한 군졸을 데리고 강적 사이에 홀로 서서 죽기를 작정하고 항거하여 여러번 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비록 남로(南路)를 차단하여 적의 기세를 저지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담력과 지략은 훌륭한 점이 있었다.[20] 기타[편집] 임진왜란 당시 박진은 색깔이 있는 말을 탔었는데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으로 발라 말의 색깔을 없앴으나 여러번 승전하여 명성이 적들에게까지 났기 때문에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했다[21]한다. 관련 항목[편집] 임진왜란 정발 송상현 정문부 김덕령 김천일 최경회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이복남 정기원 정기룡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연천 박진장군 묘역 홍달손 홍의로 서원 염씨 각주[편집] ↑ 晋으로도 쓰인다. ↑ 박진 ↑ 박진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작원관에서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군사 오마이뉴스 2004.09.17일자 ↑ 실학자이자 지봉유설의 저자이다. ↑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 김수로계 김해 김씨와 구별하여 우록 김씨로도 부른다. ↑ 가 나 다 라 항왜(降倭) 김충선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05.04.29일자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1일(정사) 9번째기사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16일(신축) 12번째기사 "영남좌도 절도사 박진이 왜적을 베어 행재소에 보내오다"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8번째기사 "박진과 승장 유정을 가자하라고 분부하다" ↑ 가 나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2번째기사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8일(경오) 3번째기사 "박진 등에게 곤장을 친 관 유격의 일로 경략에게 게첩을 보내라 전교하다" ↑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1월 5일(을묘) 1번째기사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하다" ↑ 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7일(무오) 3번째기사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5일(병술) 1번째기사 "대신들이 황정욱의 일과 무과 출신자를 선발하는 것 등을 건의하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5월 29일(기미) 1번째기사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 ↑ 그의 묘소 바로 아래 17m 지점에 홍의로의 묘가 있고, 홍의로 묘에서 12m 아래는 홍의로의 부인 서원염씨 묘소가 있다. ↑ 인조비 인열왕후 한씨의 친정아버지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2일(병신) 2번째기사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 선조실록 30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14일(신미) 2번째기사 "전사한 훈련 봉사 김호를 추증하고 대신을 인견하여 심유경의 강화회담 등을 논하다" 참고 문헌[편집]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대동야승 《촉영도선생안》(矗營道先生案) 《비변사선생안》(備邊司先生案) 외부 링크[편집] 작원관에서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군사 오마이뉴스 2004.09.17일자 항왜(降倭) 김충선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05.04.29일자 박진의 작원관 전투 '임진왜란과 밀양의 의병 항쟁 학술회의' 밀양문화원 주최:군관민 합세 대항 전국의 의병 창의 계기 밀양시민신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진_(1560년)&oldid=23879912" 분류: 1560년 태어남1597년 죽음임진왜란음서과거 급제자조선의 무신조선의 군인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성리학자조선의 철학자조선의 공신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맞아 죽은 사람밀양시 출신밀양 박씨16세기 한국 사람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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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케이블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통영 케이블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통영 케이블카 통영 케이블카(Tongyeong Ropeway)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통영관광개발공사가 해발 461m 미륵산에서 운영하는 관광용 케이블카이다.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긴 1,975m의 케이블카로 정식 명칭은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이다. 목차 1 개요 2 케이블카 3 운영 3.1 주요 시설 3.2 요금 및 시간 4 교통 5 사고 일지 6 관련 항목 7 화보 8 각주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미륵산에 설치된 케이블카 미륵산 (경상남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는 해발 461m 미륵산(한국 100대 명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영관광개발공사》가 운영하는 케이블카이다. 통영시와 통영관광개발공사가 남해안 관광벨트사업의 일환으로 사업비 173억 원을 들여 추진한 것이다.[1] 1996년 이 사업은 지난 최초 시설 결정 이후, 2000년 4월 통영도시계획시설 조성계획 결정 등을 거치고, 2002년 12월 주민투표를 통해 12월 30일 착공하였다. 시공사는 (주)효성이며, 케이블카 장비는 스위스 가라반타사(Garaventa Lift Manufacturer of Swiss)의 제품을 사용하였다.[2] 2008년 1월 시험운행을 거쳐, 3월 1일 상업 운행을 시작 하였고, 4월 18일 케이블카 준공식과 개통행사를 진행하였다. 2009년 통영관광개발공사가 케이블카로만 벌어들인 매출은 90억원, 당기순이익 25억원을 거두었다. 2010년 2월 26일 오전 11시에 <향수>의 작가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설치돼 제막식을 열었다. 시인 정지용은 8·15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이 청마 유치환 선생의 안내로 통영을 방문하여, 미륵산에 올라 '나는 통영포구와 한산도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 문필로는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요지의 기행문을 썼다.[3] 2010년 3월 14일 200만명의 탑승객을 기록했다. 2011년 6월 9일에는 하루 입장객수 10,209명을 최초로 돌파했다.[4] 2011년 8월 20일에는 3년 4개월만에 탑승객 400만명을 돌파하였다.[5] 애초에는 수익성 저조와 환경파괴에 대한 지적이 있었지만, 2010년 12월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로 개통 이후에는 탑승객이 30% 증가했다. 2010년을 기준으로 약 1천200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구 14만여명의 통영시가 시민들로부터 1년간 거둬들이는 세수 1천100억원과 맞먹는 수준이다.[6] 케이블카[편집] 통영 케이블카 상부 역사 케이블카 장비는 스위스 가라반타사(Garaventa Lift Manufacturer of Swiss)의 제품을 사용하였다. 케이블 형식은 자동순환 2선식 곤돌라이며, 선로거리는 1,975m로 국내에서 가장 길다. 최대 속도는 초속 6m로 약 10분이 소요된다. 곤돌라는 총 48대를 운행하며, 순환식 8인승으로 시간당 최대 1,000명의 관광객이 이용할 수 있다.[7] 운영[편집] 주요 시설[편집] 역사 맞은 편의 거북선 모형 하부역사 : 매표소, 케이블카 승·하차장, 식당, 매점, 주차장, 상부역사 : 케이블카 승·하차장, 스넥바, 전망대, 산책용 데크 주차장 : 전 주차장 무료 이용 요금 및 시간[편집] 2017년 9월 현재 요금은 개인 대인을 기준으로 왕복 11,000원이며, 소인은 7,000원이다. 단체(25인)나 65세 이상 경로우대자, 통영 시민은 할인이 가능하며, 국가유공자나 장애인도 할인을 받을 수 있다. 할인 시에는 반드시 증을 제시해야 한다. 자세한 요금은 통영케이블카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매월 2주, 4주차 월요일 또는 공휴일 다음날 쉬며, 하절기(4~8월)을 기준으로 9:30 ~19:00까지 운행하지만, 하부 역사에서는 마감 한 시간 전인 18:00까지 탑승을 완료해야 한다. 자세한 운행시간은 통영케이블카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2011년 2월 7일을 기준으로 1일 50명 한정이던 인터넷 예매은 중단되었으며, 현장 발권만 가능하다.[8] 교통[편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남동행 버스(100번대)를 이용하면 근방에 하차가 가능하며, 141번 버스를 이용할 경우 케이블카주차장이나 케이블카하부역사 정류장에서 하차가 가능하다. 사고 일지[편집] 2007년 6월 25일 하부역사내 공사현장에서 케이블에 와이어로프를 걸어 팽팽하게 당기던 작업을 하던 중 와이어로프가 갑자기 끊어져서 1명이 숨지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9] 2008년 4월 19일 개통 하루만에 원인불명으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탑승객 150여명과 정상 정류장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던 관광객 300여명 등이 30여분간 공중에 정지된 상태에서 공포에 떨었다.[10] 2008년 5월 4일 컴퓨터 제어시스템 장애로 30여분간 운행 중단되었다. 2008년 5월 9일 세 번째 정지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상업운전을 중단한 채 정밀점검과 설비보완을 벌여 6월 17일 재개통했다.[11] 2008년 7월 6일 오후 3시 운행 도중 멈춰서 100여 명이 공중에서 2시간여 동안 발이 묶였다.[11] 이후로 2016년까지 뚜렷한 사고는 없다. 매월 2주, 4주 월요일을 '정비의 날'을 정해 각종 장비를 철저히 점검했고 고장 가능성이 있는 부품은 내구연한이 남았어도 교체하는 쪽으로 안전과 운영 노하우를 강화하였고, 상반기 하반기 대정비를 실시 시설관리에 힘을 쓰고 있다. [12] 관련 항목[편집] 미륵산 화보[편집] 미륵산 한산대첩 전망대 미륵산 신선대 전망대 당포해전 전망대 통영 미륵산 등반로 미륵산 정상 각주[편집] ↑ 박현철 기자 (2008년 8월 1일). “총 1975m 국내 최장으로 한려수도 한눈에”. 국제신문.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김진택 기자 (2008년 3월 27일). “통영 한려수도 케이블카 4월 18일 개통”. 통영인터넷뉴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최현식 기자 (2010년 2월 19일). “통영케이블카 전망대에 작가 정지용 시비 설치”. 경남도민일보. ↑ http://v.daum.net/link/17479947[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미륵산케이블카 탑승객 400만명 돌파, 한남일보, 최현식 기자, 8월 22일자 ↑ 통영케이블카 개통 3년..효자상품으로 우뚝, 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2011년 4월 17일 ↑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인터넷 예매 중단 안내 Archived 2010년 12월 28일 - 웨이백 머신, 확인일자 2011년 6월 14일 ↑ 이정훈 기자 (2007년 6월 25일). “통영 케이블카 와이어 끊어져 5명 사상”. 한겨레신문. ↑ 뉴시스 (2008년 4월 19일). “통영케이블카 상업운행 첫날 '사고'”. 경남도민일보. ↑ 가 나 YTN (2008년 7월 6일). “통영 케이블카 또 운행 중 멈춰”. YTN. ↑ 연합뉴스 (2008년 8월 7일). “애물단지 통영 케이블카 환골탈태”. 동아일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통영관광개발공사 케이블카 UCC[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통영 케이블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통영_케이블카&oldid=24121439" 분류: 통영시의 교통대한민국의 삭도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위키데이터에 링크가 없는 위키공용분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29일 (월) 20: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통영 케이블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통영 케이블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통영 케이블카 통영 케이블카(Tongyeong Ropeway)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통영관광개발공사가 해발 461m 미륵산에서 운영하는 관광용 케이블카이다.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긴 1,975m의 케이블카로 정식 명칭은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이다. 목차 1 개요 2 케이블카 3 운영 3.1 주요 시설 3.2 요금 및 시간 4 교통 5 사고 일지 6 관련 항목 7 화보 8 각주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미륵산에 설치된 케이블카 미륵산 (경상남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는 해발 461m 미륵산(한국 100대 명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영관광개발공사》가 운영하는 케이블카이다. 통영시와 통영관광개발공사가 남해안 관광벨트사업의 일환으로 사업비 173억 원을 들여 추진한 것이다.[1] 1996년 이 사업은 지난 최초 시설 결정 이후, 2000년 4월 통영도시계획시설 조성계획 결정 등을 거치고, 2002년 12월 주민투표를 통해 12월 30일 착공하였다. 시공사는 (주)효성이며, 케이블카 장비는 스위스 가라반타사(Garaventa Lift Manufacturer of Swiss)의 제품을 사용하였다.[2] 2008년 1월 시험운행을 거쳐, 3월 1일 상업 운행을 시작 하였고, 4월 18일 케이블카 준공식과 개통행사를 진행하였다. 2009년 통영관광개발공사가 케이블카로만 벌어들인 매출은 90억원, 당기순이익 25억원을 거두었다. 2010년 2월 26일 오전 11시에 <향수>의 작가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설치돼 제막식을 열었다. 시인 정지용은 8·15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이 청마 유치환 선생의 안내로 통영을 방문하여, 미륵산에 올라 '나는 통영포구와 한산도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 문필로는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요지의 기행문을 썼다.[3] 2010년 3월 14일 200만명의 탑승객을 기록했다. 2011년 6월 9일에는 하루 입장객수 10,209명을 최초로 돌파했다.[4] 2011년 8월 20일에는 3년 4개월만에 탑승객 400만명을 돌파하였다.[5] 애초에는 수익성 저조와 환경파괴에 대한 지적이 있었지만, 2010년 12월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로 개통 이후에는 탑승객이 30% 증가했다. 2010년을 기준으로 약 1천200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구 14만여명의 통영시가 시민들로부터 1년간 거둬들이는 세수 1천100억원과 맞먹는 수준이다.[6] 케이블카[편집] 통영 케이블카 상부 역사 케이블카 장비는 스위스 가라반타사(Garaventa Lift Manufacturer of Swiss)의 제품을 사용하였다. 케이블 형식은 자동순환 2선식 곤돌라이며, 선로거리는 1,975m로 국내에서 가장 길다. 최대 속도는 초속 6m로 약 10분이 소요된다. 곤돌라는 총 48대를 운행하며, 순환식 8인승으로 시간당 최대 1,000명의 관광객이 이용할 수 있다.[7] 운영[편집] 주요 시설[편집] 역사 맞은 편의 거북선 모형 하부역사 : 매표소, 케이블카 승·하차장, 식당, 매점, 주차장, 상부역사 : 케이블카 승·하차장, 스넥바, 전망대, 산책용 데크 주차장 : 전 주차장 무료 이용 요금 및 시간[편집] 2017년 9월 현재 요금은 개인 대인을 기준으로 왕복 11,000원이며, 소인은 7,000원이다. 단체(25인)나 65세 이상 경로우대자, 통영 시민은 할인이 가능하며, 국가유공자나 장애인도 할인을 받을 수 있다. 할인 시에는 반드시 증을 제시해야 한다. 자세한 요금은 통영케이블카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매월 2주, 4주차 월요일 또는 공휴일 다음날 쉬며, 하절기(4~8월)을 기준으로 9:30 ~19:00까지 운행하지만, 하부 역사에서는 마감 한 시간 전인 18:00까지 탑승을 완료해야 한다. 자세한 운행시간은 통영케이블카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2011년 2월 7일을 기준으로 1일 50명 한정이던 인터넷 예매은 중단되었으며, 현장 발권만 가능하다.[8] 교통[편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남동행 버스(100번대)를 이용하면 근방에 하차가 가능하며, 141번 버스를 이용할 경우 케이블카주차장이나 케이블카하부역사 정류장에서 하차가 가능하다. 사고 일지[편집] 2007년 6월 25일 하부역사내 공사현장에서 케이블에 와이어로프를 걸어 팽팽하게 당기던 작업을 하던 중 와이어로프가 갑자기 끊어져서 1명이 숨지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9] 2008년 4월 19일 개통 하루만에 원인불명으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탑승객 150여명과 정상 정류장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던 관광객 300여명 등이 30여분간 공중에 정지된 상태에서 공포에 떨었다.[10] 2008년 5월 4일 컴퓨터 제어시스템 장애로 30여분간 운행 중단되었다. 2008년 5월 9일 세 번째 정지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상업운전을 중단한 채 정밀점검과 설비보완을 벌여 6월 17일 재개통했다.[11] 2008년 7월 6일 오후 3시 운행 도중 멈춰서 100여 명이 공중에서 2시간여 동안 발이 묶였다.[11] 이후로 2016년까지 뚜렷한 사고는 없다. 매월 2주, 4주 월요일을 '정비의 날'을 정해 각종 장비를 철저히 점검했고 고장 가능성이 있는 부품은 내구연한이 남았어도 교체하는 쪽으로 안전과 운영 노하우를 강화하였고, 상반기 하반기 대정비를 실시 시설관리에 힘을 쓰고 있다. [12] 관련 항목[편집] 미륵산 화보[편집] 미륵산 한산대첩 전망대 미륵산 신선대 전망대 당포해전 전망대 통영 미륵산 등반로 미륵산 정상 각주[편집] ↑ 박현철 기자 (2008년 8월 1일). “총 1975m 국내 최장으로 한려수도 한눈에”. 국제신문.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김진택 기자 (2008년 3월 27일). “통영 한려수도 케이블카 4월 18일 개통”. 통영인터넷뉴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최현식 기자 (2010년 2월 19일). “통영케이블카 전망대에 작가 정지용 시비 설치”. 경남도민일보. ↑ http://v.daum.net/link/17479947[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미륵산케이블카 탑승객 400만명 돌파, 한남일보, 최현식 기자, 8월 22일자 ↑ 통영케이블카 개통 3년..효자상품으로 우뚝, 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2011년 4월 17일 ↑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인터넷 예매 중단 안내 Archived 2010년 12월 28일 - 웨이백 머신, 확인일자 2011년 6월 14일 ↑ 이정훈 기자 (2007년 6월 25일). “통영 케이블카 와이어 끊어져 5명 사상”. 한겨레신문. ↑ 뉴시스 (2008년 4월 19일). “통영케이블카 상업운행 첫날 '사고'”. 경남도민일보. ↑ 가 나 YTN (2008년 7월 6일). “통영 케이블카 또 운행 중 멈춰”. YTN. ↑ 연합뉴스 (2008년 8월 7일). “애물단지 통영 케이블카 환골탈태”. 동아일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통영관광개발공사 케이블카 UCC[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통영 케이블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통영_케이블카&oldid=24121439" 분류: 통영시의 교통대한민국의 삭도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위키데이터에 링크가 없는 위키공용분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29일 (월) 20: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삼성전기 배드민턴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성전기 배드민턴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삼성스포츠 축구 야구 배구 남자 농구 여자 농구 럭비 탁구 테니스 배드민턴 육상 태권도 레슬링 승마 E스포츠 삼성스포츠 삼성전기 배드민턴단은 대한민국의 배드민턴단이다. 목차 1 연혁 2 주요 성적 3 선수단 3.1 선수 3.2 코칭 스탭 4 시설 5 지원 현황 6 같이 보기 7 외부 링크 연혁[편집] 1996년 4월 삼성전기 배드민턴단 창단 1998년 3월 12일 중국 광둥 성 삼성 배드민턴팀 창단 2006년 3월 삼성전기 전국 장애인 배드민턴 대회 신설 2009년 2월 중국 광둥 성 삼성 배드민턴단 해체 2009년 4월 유소년팀(남녀 초등부) 창단 2009년 9월 유소년팀(남 중등부) 창단 2011년 6월 유소년팀(여 중등부) 창단 2013년 5월 유소년팀(남 고등부) 창단 주요 성적[편집] 1996년 7월 애틀란타올림픽 혼합복식 金(길영아), 여자복식 銀(길영아) 2000년 8월 시드니올림픽 남자복식 銀(이동수, 유용성), 남자복식 銅(김동문, 하태권) 2004년 8월 아테네올림픽 남자복식 金(하태권, 김동문), 남자복식 銀(유용성, 이동수), 여자복식 銅(이경원)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혼합복식 金(이용대, 이효정), 여자복식 銀(이경원, 이효정) 2012년 8월 런던올림픽 남자복식 銀(정재성, 이용대) 2016년 8월 리우올림픽 여자복식 銅(신승찬) 선수단[편집] 선수[편집] 남자팀 황종수 김기정 허광희 하영웅 전봉찬 노예욱 정재욱 강민혁 김원호 여자팀 김하나 신승찬 채유정 이선민 김나영 김가은 성나영 코칭 스탭[편집] 감독 : 길영아 코치 : 정훈민 물리치료사 : 고혜민 역대 선수단 현황 지도자 남자 여자 최일현, 한성귀, 권승택, 김문수, 하태권, 정재성, 황혜연 진영근, 석근오, 곽창용, 박용제, 유용성, 이동수, 최지태, 황선호, 김동문, 이덕준, 고재희, 임방언, 박태상, 권순형, 강우겸, 박계양, 김준수, 조건우, 한상훈, 이용대, 황정운, 김동민, 안세성, 최현호, 김사랑 박애란, 이영숙, 강복승, 곽경희, 정은화, 김지현, 박수연, 정재희, 임경진, 박소연, 이경원, 이효정, 최영은, 이종분, 정연경, 황은진, 서윤희, 박희정, 홍수정, 박소리, 고현정, 강해원, 김민서, 임호현, 장수영, 이임정, 류영서, 기보현, 장나라 시설[편집] 삼성전기 수원사업장 내에 있는 배드민턴 전용 체육관인 한울림 체육관을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원 현황[편집] 삼성전기배 전국 장애인 배드민턴 대회 같이 보기[편집] 삼성전기 삼성스포츠단 외부 링크[편집] 삼성전기 배드민턴단 소개 vdeh삼성 창립: 1938년 창립자: 이병철 계열사전자 삼성전자 삼성전자판매 삼성전자서비스 삼성전자로지텍 삼성메디슨 세메스 스테코 하만 인터내셔널 레드벤드소프트웨어코리아 삼성전기 스템코 (30%) 삼성SDI STM (100%) SD플렉스 삼성SDS 크레듀 미라콤아이앤씨 에스코어 오픈핸즈 시큐아이 삼성디스플레이 SU머티리얼스 삼성코닝어드밴스드글라스 글로벌텍 중공업·건설 삼성물산 건설부문 씨브이네트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삼성중공업 대정해상풍력발전 정암풍력발전 삼성엔지니어링 금융 삼성생명 삼성생명서비스손해사정 삼성SRA자산운용 생보부동산신탁 삼성자산운용 삼성액티브자산운용 삼성헤지자산운용 생보제일호위탁관리부동산투자회사 삼성화재 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 삼성카드 삼성카드고객서비스 삼성증권 삼성선물 삼성벤처투자 서비스 삼성물산 상사부문 삼성물산 패션부문 제일패션리테일 빈폴 에잇세컨즈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에버랜드 에버랜드 리조트 캐리비안 베이 서울레이크사이드 삼성웰스토리 호텔신라 신라면세점 HDC신라면세점 신라스테이 SBTM 제일기획 하쿠호도제일 삼성스포츠 에스원 에스원CRM 휴먼TSS 삼성경제연구소 삼성의료원 삼성서울병원 강북삼성병원 성균관대학교 삼성창원병원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에피스 멀티캠퍼스 기타 삼성타운 삼성SDS타워 향군타워 삼성디지털시티 삼성인력개발원 삼성종합기술원 삼성 시너지 타워 이전 계열사 구 삼성물산 동양화재해상보험 넥스소프트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동남증권 삼성토탈 삼성테크윈 삼성항공/삼성톰슨CSF/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삼성SGL탄소소재) 삼성토탈 삼성건설 삼성물산 유통부문/삼성테스코 삼성시계 삼성상용차 삼성디지털이미징 삼성캐피탈 삼성영상사업단 캐치원 삼성네트웍스 삼성LED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S-LCD 삼성광주전자 신공항하이웨이 SB리모티브 올앳 아이마켓코리아 웨스틴 조선호텔 제일제당 제일제당건설 제일C&C 제일냉동식품 제일선물 제일합섬 신세계백화점 전주제지 중앙일보 보광 동양방송 삼성HTH택배 삼성코닝정밀소재 도시바삼성스토리지테크놀러지(TSST) 구 제일모직 아이비클럽 삼성석유화학 삼성SNS 대도제약 365홈케어 오픈타이드차이나 에스엠피 제일보젤 월드사이버게임즈 에스에스엘엠 케어캠프 가치네트 방계기업 CJ그룹 신세계그룹 한솔그룹 새한그룹 효성그룹 중앙미디어네트워크 BGF그룹 르노삼성자동차 스포츠 수원 삼성 블루윙즈 삼성 라이온즈 서울 삼성 썬더스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삼성 갤럭시 삼성전기 배드민턴단 삼성증권 테니스단 삼성생명 탁구단 삼성생명 레슬링단 삼성중공업 럭비단 삼성에스원 태권도단 삼성전자 육상단 삼성전자 승마단 삼성 트레이닝 센터 사회공헌 삼성복지재단 삼성언론재단 삼성생명공익재단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삼성사회봉사단 삼성법률봉사단 삼성안전환경연구소 마이독 & 삼성 삼성화재안내견학교 삼성생명탐지견센터 문화예술 삼성문화재단 호암재단 호암미술관 호암상 호암아트홀 리움 플라토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 삼성어린이박물관 교육·장학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삼성창원병원 충남삼성학원 충남삼성고등학교 삼성장학회 중동학원 중동중학교 중동고등학교 관련 항목인물 이병철 박두을 이건희 홍라희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 이수빈 이윤형 이인희 이맹희 이창희 이명희 김재열 임우재 손복남 이미경 이재현 손경식 홍진기 홍석현 홍석조 홍석준 홍석규 홍라영 조홍제 조운해 조동길 정상희 정재은 정용진 정유경 장경작 이병각 박정희 정일권 신현확 윤종용 이학수 차인혁 안지홍 강석진 양향자 진기주 윤준원 사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사건 삼성 비자금 관련 폭로 삼성 비자금 의혹 관련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 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등에 대한 재판 삼성 경영 쇄신안 삼성 X파일 사건 영훈국제중학교 부정 입학 비리 사건 국회 오물투척사건 사카린 밀수 사건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 용산4구역 남일당 화재 사건 1980년 언론 통폐합 삼성 갤럭시 노트 7 리콜 사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 글은 배드민턴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삼성전기_배드민턴단&oldid=23104549" 분류: 1996년 설립대한민국의 배드민턴단삼성스포츠삼성전기숨은 분류: 배드민턴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1월 27일 (화) 11: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엄지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엄지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엄지원 2010 메트로시티 패션쇼 & 파티에서의 엄지원출생 1977년 12월 25일(1977-12-25) (41세)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주 1]직업 배우활동 기간 1998년 ~ 현재종교 개신교[1][2]소속사 씨제스엔터테인먼트 부모 엄이웅(부)형제자매 언니 1명배우자 오영욱웹사이트 엄지원 - 인스타그램엄지원 - 트위터엄지원 미니홈피 - 싸이월드 엄지원(嚴志媛[3], 1977년 1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98년 텔레비전 출연을 시작했고, 2000년에는 영화 무대에도 데뷔했다. 2002년 MBC 아침드라마 《황금마차》에 출연하였고, 2003년 영화 《똥개》에 출연하였다. 2006년 영화 《가을로》로 춘사대상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2013년 영화 《소원》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목차 1 학력 2 생애와 경력 2.1 데뷔전 삶과 초기 활동 2.2 2002–2009년 2.3 2010년–현재 3 개인 생활 4 연기 활동 4.1 텔레비전 4.2 영화 4.3 뮤지컬 4.4 뮤직 비디오 5 그 밖의 활동 5.1 방송진행 5.2 홍보대사 6 수상 및 후보 7 각주 7.1 내용주 7.2 참조주 8 외부 링크 학력[편집] 경화여자중학교 졸업 효성여자고등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지리학과 생애와 경력[편집] 데뷔전 삶과 초기 활동[편집] 엄지원은 1977년 12월 25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4][5] 그녀의 아버지 엄이웅(嚴二雄)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공군 소령 출신의 공직자로, 2003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끝으로 퇴임하였다.[6][7][주 2] 엄지원은 효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에서 지리학을 전공하였다.[8] 엄지원은 대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언니에게 놀러갔다가 압구정동에서 찍힌 사진이 패션 잡지에 실리면서 잡지 모델로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8년에는 대구방송(TBC) 리포터로 뽑히기도 했으나 활동하지는 않았다.[9] 엄지원은 1998년 5월부터 KBS 시트콤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말부터 방송된 MBC 시트콤 《아니 벌써》에서 처음으로 고정배역을 맡았다.[10] 그녀는 1999년 KBS 《지구용사 벡터맨》(2기), 2000년 MBC 시트콤 《세 친구》에도 출연했다.[9] 엄지원은 1999년 10월부터 MBC 《사랑의 스튜디오》의 〈러브러브 쉐이크〉 코너 진행자를 시작으로, 이후 예능 프로그램인 KBS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의 〈서바이벌 정글미팅〉, SBS 《좋은 친구들》의 〈모여라 2000〉에서 코너 진행자로도 활동하였다.[11] 엄지원은 코너 진행자로 활동하던 2000년 첫 영화인 《찍히면 죽는다》에 이영호(성욱 역)의 누나 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8][11][주 3] 이후 엄지원은 KBS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SBS 《토요 스토리랜드》, iTV 《연예세상》 등에 출연하며 방송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연기학원에 등록해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12] 2002–2009년[편집] 2009년 2월 영화 《그림자 살인》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엄지원. 2002년 엄지원은 5월 개봉한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에 작은 역할인 장진영(강연희 역)의 직장 동료 김은송 역으로 출연한 후, 같은 해 7월부터 방송된 MBC 아침드라마 《황금마차》에 임지은과 함께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이복 언니인 임지은(황유정 역)이 낳은 아들(황두리)을 키우는 마음씨 착한 동생 황순정을 연기하며 처음으로 주요 배역을 맡게 되었다.[13] 《황금마차》는 최고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배우 엄지원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14] 이후 엄지원은 곽경택 감독이 신작 《똥개》에 정우성(차철민 역)의 상대역으로 출연할 신인 여배우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응모해 3차까지 오디션을 거쳐서 해당 배역에 선발되었다.[15] 그녀가 맡은 역할은 소매치기 출신의 ‘날라리’ 아가씨 김정애 역이었다.[16] 2003년 7월 개봉한 《똥개》는 전국 관객 139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쳐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17][18] 이 작품에서 엄지원의 연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그녀는 그해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다.[19][20][21] 엄지원은 《똥개》를 통해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는데, 이후 인터뷰에서 그녀도 《똥개》를 “내 인생에서 진짜 데뷔작이자 중요한 작품”,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22][23] 한편 엄지원은 《똥개》 개봉을 앞두고 있던 시기 한 매니저에게 “내가 ... 너를 지켜봤는데 ... 너무 방치돼 있었”다, “너를 심은하로 내가 만들어 주겠”다, “회사(소속사)가 해 준 게 뭐 있냐”는 말을 듣고 혹했다가 전속계약 해지 문제로 소속사(싸이클론)와 분쟁을 겪게 되었다.[19][24][주 4] 이듬해인 2004년 엄지원은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매직》에 출연했고,[25][26] 10월 개봉한 영화 《주홍글씨》에 한석규, 이은주, 성현아와 같이 캐스팅되어 한석규(이기훈 역)의 아내인 첼리스트 한수현을 연기했다.[27] 엄지원은 《주홍글씨》로 같은 해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28] 2005년에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극장전》에 김상경(김동수 역), 이기우(전상원 역)의 상대역인 최영실로 출연하였는데, 이 작품은 제58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29][30] 2006년 유지태, 김지수와 함께 출연한 멜로 영화 《가을로》에서는 여행 중인 유지태(최현우 역)와 마주치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생존자 윤세진을 연기해서 그해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춘사대상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31][32][33] 《가을로》는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34] 개봉 후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전국 관객 약 70만 명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17][35] 2007년에는 《스카우트》에 출연하여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러 광주에 온 대학시절 연인 임창정(이호창 역)과 재회하는 시민운동가 김세영을 연기했는데, 이 작품도 31만5천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17][36] 한편 엄지원은 《야수》(2006년)에 권상우(장도영 역)의 연인인 강주희 역으로 우정출연했고,[37] 《기담》(2007년)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년)에도 특별출연 형식으로 얼굴을 내비쳤다.[38][39] 또한 엄지원은 2008년 9월부터 SBS의 연예정보 프로그램 《한밤의 TV연예》의 MC로 서경석과 함께 이후 2010년 4월까지 진행을 맡았다.[40] 2009년 엄지원은 4월 개봉한 영화 《그림자 살인》에 황정민, 류덕환과 함께 캐스팅되어 사대부가의 여인이자 발명가 순덕 역으로 출연했다.[41][42] 5월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 역으로 출연했다.[43] 엄지원은 같은 해인 2009년 배창호 감독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원작으로 한 동명 뮤지컬 《기쁜 우리 젊은 날》에 출연하며 뮤지컬 무대에 데뷔하였고,[44][45] 단편 영화인 백현진 감독의 《THE END》와 유지태 감독의 《초대》에도 출연하였다.[46][47] 2010년–현재[편집] 2013년 11월 청룡영화상 시상식장에 입장하는 엄지원. 엄지원은 2010년 1월부터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박진희, 왕빛나와 함께 캐스팅되어 한영 동시통역사 정다정 역을 맡으며 2004년 《매직》 이후 5년여 만에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였다.[48][주 5] 그러나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같은 시간대에 방송된 KBS의 《추노》, SBS의 《산부인과》에 밀려 방송내내 한자리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하였다.[49] 엄지원은 같은 해 두 편의 코미디 영화에도 출연했다. 《스카우트》 이후 다시 임창정과 같이 캐스팅되어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불량남녀》에는 카드사 채권팀 직원 김무령으로 출연했고,[50] 성을 소재로 한 코미디 《페스티발》에는 신하균, 심혜진, 성동일, 류승범, 백진희, 오달수와 같이 캐스팅되어 신하균(곽장배 역)의 애인인 영어학원 강사 지수 역으로 출연했다.[51] 두 작품은 각각 49만 명과 20만 명의 관객을 기록했다.[17] 2011년 1월부터 3월까지는 SBS 수목드라마 《싸인》에 출연했다. 박신양, 김아중, 전광렬 등이 출연한 이 작품에서 엄지원은 여검사 정우진 역을 맡았다. 《싸인》은 극 초기 MBC의 《마이 프린세스》에 시청률이 밀리기도 했으나 이내 ‘명품 드라마’로 호평을 받으며 수목극 시청률 1위에 올랐다.[52][53] 엄지원의 연기는 무리한 설정과 목소리로 극 초반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이후 극이 진행되면서 호평을 받았다.[54][55] 2012년에는 종합편성채널 MBN의 드라마 《사랑도 돈이 되나요》에 연정훈(마인탁 역)의 상대역으로 돈 때문에 재력가와 결혼을 꿈꾸는 ‘된장녀’ 윤다란 역으로 출연했고,[56] 종합편성채널인 JTBC의 주말연속극으로 극작가 김수현이 극본을 쓴 가족극 《무자식 상팔자》에는 지방법원 판사를 그만두고 미혼모가 되는 집안의 큰손녀 안소영 역으로 출연했다.[57] 2013년 1월 개봉한 《박수건달》에는 박신양, 김정태, 정혜영 등과 같이 출연해 무당 명보살을 연기했다.[58] 이 작품은 전국 관객 약 39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였다.[59] 10월 개봉한 아동성폭력을 다룬 영화 《소원》에서는 딸이 성폭력을 당하는 어머니 미희를 연기했다.[60] 《소원》은 2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17] 엄지원은 이 작품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데뷔 후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61]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와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및 대종상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62][63][64] 다음 출연작으로 2013년 11월부터 방송된 김수현 극본의 SBS 주말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는 애견용품 디자이너인 첫째 딸 오현수 역으로 출연했다.[65] 개인 생활[편집] 엄지원은 2012년 말 지인의 소개로 건축가이자 에세이 작가 오영욱을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필명인 ‘오기사’로도 알려진 오영욱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무소 ‘오기사 디자인’을 운영하고 있다. 둘은 2014년 5월 27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66] 연기 활동[편집] 텔레비전[편집] 연도* 제목 역할 방송사 비고 1998 공포의 눈동자 단역(학생) SBS 납량특집드라마[67] 아니 벌써 엄지원 MBC 1999 지구용사 벡터맨 2기 라디아 공주[주 6] KBS2 2000 세 친구 엄지원[주 7] MBC 2002 황금마차 황순정 MBC 2004 폭풍 속으로 오정희 SBS 매직 하연진 SBS 2008 온에어 엄지원 SBS 5회에 카메오 출연[68] 2010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정다정 MBC 2011 싸인 정우진 SBS 2012 사랑도 돈이 되나요 윤다란 MBN 무자식 상팔자 안소영 JTBC 2013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오현수 SBS 2017 조작 권소라 SBS 2019 봄이 오나 봄 이봄 MBC *다년간 방송된 프로그램의 경우, 엄지원이 출연한 연도 또는 출연하기 시작한 연도를 가리킨다. 영화[편집] 연도* 제목 역할 비고 2000 찍히면 죽는다 누나 2002 오버 더 레인보우 김은송 2003 똥개 김정애 2004 주홍글씨 한수현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69] 2005 극장전 최영실 2006 야수 강주희 우정출연 가을로 윤세진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2007 기담 박 교수의 딸 특별출연 스카우트 김세영 2008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나연 특별출연 2009 THE END 단편영화 그림자 살인 순덕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현희 초대 여자 단편영화 2010 불량남녀 김무령 페스티발 지수 2013 박수건달 명보살 소원 미희 2015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교장 더 폰 조연수 2016 미씽: 사라진 여자 지선 마스터 신젬마 2019 기묘한 가족 남주 *개봉일(공개일) 순. 뮤지컬[편집] 2009년 《기쁜 우리 젊은 날》 - 혜린 뮤직 비디오[편집] 2007년 《안녕》 KCM 그 밖의 활동[편집] 방송진행[편집] 2008년~2010년 《한밤의 TV연예》 (SBS) 2012년 《오페라스타 2012》 (tvN)[70] 2017년 《이집 사람들》 (O tvN) 홍보대사[편집] 2008년 제16회 춘사대상영화제 홍보대사(하정우와 함께)[71] 2011년 열린의사회 홍보대사[72] 수상 및 후보[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출처 2003 제24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똥개 후보 [1] 2004 제25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주홍글씨 후보 [2] 2006 제27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가을로 후보 [3] 2007 제15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조연상 가을로 수상 [4] 2008 제5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여자조연배우상 스카우트 수상 [5] 2010 제18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영화배우부문 우수상 불량남녀 수상 [6] 2011 제3회 아시아 주얼리 어워드 배우부문 사파이어상 빈칸 수상 [7] SBS 연기대상 드라마스페셜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싸인 후보 [8] 2013 제2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박수건달 후보 [9] 제50회 대종상 여우조연상 박수건달 후보 [10] 제34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소원 후보 [11]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소원 수상 [12] 한국영화배우협회 스타의 밤 시상식 스타상 소원 수상 [13] 2014 제5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소원 후보 [14] 제51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소원 후보 [15] SBS 연기대상 장편드라마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세 번 결혼하는 여자 후보 [16] 2016 제21회 춘사영화상 여우조연상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수상 [17] 제36회 황금촬영상 최우수 주연여우상 더 폰 수상 [18]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조연상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후보 [19] 2017 제18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 미씽: 사라진 여자 수상 SBS 연기대상 월화드라마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조작 후보 2018 제8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마리끌레르상 미씽: 사라진 여자 수상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현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 엄이웅은 이후 경상북도 개발공사 사장(제4대), 한도엔지니어링 회장을 지냈다. (출처). ↑ 이후 엄지원은 《찍히면 죽는다》를 “배우로서 생각이 정립되기 전이었고, 제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요. 어리석은 시기였기 때문에 제 필모그래피의 스타트에서 지우고 싶습니다.”라고 밝히며 출연을 후회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12] ↑ 결국 엄지원은 계약 기간이 끝난 후 계약시 받은 계약금 500만원의 6배인 3000만원을 소속사에 물어주어야 했다. (출처). ↑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2004년 방송된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후속편이다. (출처). ↑ 언론에서 라디아, 리디아, 레디아, 레디어 등 표기가 분분하나, 《지구용사 벡터맨 2기》에서 엄지원이 맡은 역할은 ‘레디아 공주’의 동생인 ‘라디아 공주’이다. ↑ 윤다훈이 매니저(실장)로 있는 헬스클럽의 직원(코치)이다. 참조주[편집] ↑ 정미희 (2009-5.6). “치열하게 한 사람을 살아내다”. 《오늘》 (51). ISSN 2005-7350. 2015년 1월 28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기독교 문화 잡지 ‘오늘’ 5·6월호… 가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 배우 인터뷰”. 국민일보. 2009년 5월 10일.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엄지원. “严志媛的微博_微博”. 《웨이보》. 시나. 2016년 2월 4일에 확인함. ↑ 네이버. “네이버 인물정보 (엄지원)”.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김소연 (2004년 10월 28일). “청순가련 깜찍발랄 엄지원”. 서울신문. 23면.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새의자]경북도 정무부지사 엄이웅씨”. 동아일보. 2002년 7월 23일.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정근재 (2003년 9월 2일). “[동정] 엄이웅 정무부지사 퇴임식”. 영남일보.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씨네21. “씨네21 DB - 엄지원 (Uhm Ji-won)”.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가 나 박주연 (2004년 5월 27일). “‘폭풍속으로‘ 엄지원”. 《뉴스메이커(현 주간경향)》 (575).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김호영 (1999년 1월 20일). “[엄지원] "이룰수 없는 반쪽사랑이지만…"”. 《스포츠조선》. 2005년 2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5월 16일에 확인함. ↑ 가 나 맹경환 (2000년 8월 3일). “[인터뷰] 코너 MC서 영화주연까지…엄지원”. 국민일보.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김지수, 손우창 (2007년 12월). “도도한 순수”. 《보그》. 2014년 5월 10일에 확인함. ↑ 정명진 (2002년 7월 9일). “[인터뷰] MBC ‘황금마차’ 주인공 엄지원”. 파이낸셜뉴스. 2013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정명진 (2003년 2월 18일). “SBS 새 아침드라마 ‘당신 곁으로’”. 파이낸셜뉴스. 2014년 5월 10일에 확인함. ↑ 《힐링캠프》 (텔레비전 프로그램). 서울, 대한민국: SBS. 2011년 8월 8일. 2014년 5월 22일에 확인함. ↑ 문화부 (2003년 7월 30일). “영화 “똥개”서 야무진 비행소녀 엄지원”. 세계일보.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영화진흥위원회. “KOFIC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김미영 (2007년 9월 20일). “곽경택 감독 “‘친구’ 이후 줄줄이 흥행 실패, 후회 없지만 섭섭””. 뉴스엔. 2014년 5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5월 6일에 확인함. ↑ 가 나 정명화 (2006년 10월 12일). “엄지원, "'똥개' 이후 인생이 달라졌다!"”. 조이뉴스24.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김병규 (2003년 7월 8일). “<새 영화> '똥개'”. 연합뉴스.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전상희, 정현석 (2003년 11월 27일).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감독상등 사상 최고 치열한 경합”. 스포츠조선. 2014년 3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고규대 (2007년 7월 20일). “엄지원, 와인같은 연기 꿈꾼다”. 스포츠한국. 2014년 5월 6일에 확인함. ↑ 송주연 (2006년 1월 17일). “토크2.1 엄지원의 배우 수업”. 《필름2.0》. ↑ 《힐링캠프》 (텔레비전 프로그램). 서울, 대한민국: SBS. 2011년 8월 8일.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임정식 (2004년 5월 2일). “엄지원, SBS '폭풍 속으로'서 김민준과 가혹한 사랑”.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7일에 확인함. ↑ 임정식 (2004년 7월 23일). “엄지원, '파리의 연인' 후속작 '매직'에 캐스팅”.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7일에 확인함. ↑ 최윤정 (2004년 7월 22일). “섹시·신비·우아…‘주홍글씨’ 삼색미녀”. 스포츠투데이. 2014년 4월 7일에 확인함. ↑ 전상희 (2004년 11월 11일). “[제25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 스포츠조선. 2014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김관명 (2005년 5월 12일). “'극장전', 중독성 강한 홍상수식 유머”. 스타뉴스. 2014년 4월 12일에 확인함. ↑ 김은형 (2005년 5월 4일). “홍상수감독 ‘극장전’ 칸영화제 막차 합류”. 한겨레. 2014년 4월 12일에 확인함. ↑ 김성원, 김인구 (2006년 10월 24일). “['가을로' 주연배우 3색 인터뷰] 유지태-김지수-엄지원”.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김성원 (2006년 12월 13일). “[제27회 청룡영화상] 청룡상 판세 분석”. 스포츠조선. 2014년 3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홍기원 (2007년 9월 14일). “[★포토]엄지원, 여우조연상 받았어요”. 스타뉴스.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이다혜 (2006년 9월 14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가을로>”. 《씨네21》.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권재현 (2007년 1월 27일). “[Life Style]눈물 흘리는 ‘멜로’… 잇단 흥행참패”. 동아일보.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안길수 (2007년 11월 11일). “[영화 스카우트] 선동렬 영입 미션 받고 광주로 간 대학 체육부 직원”. 서울경제. 2014년 4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이은식 (2005년 7월 11일). “엄지원, '야수' 권상우와 애틋한 사랑”. 경제투데이. 2014년 9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이희진 (2007년 7월 14일). “엄지원, 특별출연 '기담'에서 비밀 인도”.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이경호 (2008년 7월 23일). “‘칸’에서 살아난 여인, 엄지원”. 동아일보. 201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김건우 (2010년 4월 21일). “엄지원, '한밤' MC 하차..후임 송지효 발탁”. 스타뉴스.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모신정 (2009년 4월 2일). “'그림자 살인' 캐릭터 신선하지만 짜임새가 왠지…”. 한국일보. 2014년 4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최재욱 (2009년 5월 14일). “‘마더’ ‘해운대’ ‘국가대표’, 한국 영화 흥행 이어갈까”. 스포츠경향. 2014년 7월 3일에 확인함. ‘그림자 살인’은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전국 괸객 192만명을 기록했다. ↑ 온라인뉴스팀 (2009년 5월 11일). “[영화세상]‘잘 알지도 못하면서‘ 엄지원 짱!”. 스포츠경향.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김희선 (2009년 4월 9일).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뮤지컬로”. 연합뉴스.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두경아 (2009년 6월). “영화로 이미지 변신하고 뮤지컬 무대에 도전장 낸 엄지원”. 《레이디경향》.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김희연 (2009년 3월 9일). “퍼포먼스·무용·영화… 경계 허물고 뒤섞여 하나로”. 경향신문.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박세연 (2009년 4월 3일). “엄지원, 유지태 신작단편 ‘초대’ 출연”. 뉴스엔.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정유진 (2010년 1월 14일). “[포토엔]서른넷 세 여자 엄지원-박진희-왕빛나 ‘셋이 합해 102살’”. 뉴스엔.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장서윤 (2010년 3월 12일). “'아결여' 한자리수대 시청률로 아쉬운 종영”. 이데일리.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김구철 (2010년 10월 6일). “[AM7] 백수건달서 경찰로 신분상승 “근데 왜 불쌍해 보이냐고요””. 문화일보. 2014년 5월 1일에 확인함. ↑ 김지영 (2010년 11월 15일). “[영화] 페스티발…야하지만 야하지 않은 블랙 코미디”. 매일경제. 2014년 5월 1일에 확인함. ↑ 서은혜 (2011년 3월 10일). “[굿바이 싸인] 수목극 1위 '질주'…성공요인과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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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엄지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엄지원 2010 메트로시티 패션쇼 & 파티에서의 엄지원출생 1977년 12월 25일(1977-12-25) (41세)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주 1]직업 배우활동 기간 1998년 ~ 현재종교 개신교[1][2]소속사 씨제스엔터테인먼트 부모 엄이웅(부)형제자매 언니 1명배우자 오영욱웹사이트 엄지원 - 인스타그램엄지원 - 트위터엄지원 미니홈피 - 싸이월드 엄지원(嚴志媛[3], 1977년 1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98년 텔레비전 출연을 시작했고, 2000년에는 영화 무대에도 데뷔했다. 2002년 MBC 아침드라마 《황금마차》에 출연하였고, 2003년 영화 《똥개》에 출연하였다. 2006년 영화 《가을로》로 춘사대상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2013년 영화 《소원》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목차 1 학력 2 생애와 경력 2.1 데뷔전 삶과 초기 활동 2.2 2002–2009년 2.3 2010년–현재 3 개인 생활 4 연기 활동 4.1 텔레비전 4.2 영화 4.3 뮤지컬 4.4 뮤직 비디오 5 그 밖의 활동 5.1 방송진행 5.2 홍보대사 6 수상 및 후보 7 각주 7.1 내용주 7.2 참조주 8 외부 링크 학력[편집] 경화여자중학교 졸업 효성여자고등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지리학과 생애와 경력[편집] 데뷔전 삶과 초기 활동[편집] 엄지원은 1977년 12월 25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4][5] 그녀의 아버지 엄이웅(嚴二雄)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공군 소령 출신의 공직자로, 2003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끝으로 퇴임하였다.[6][7][주 2] 엄지원은 효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에서 지리학을 전공하였다.[8] 엄지원은 대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언니에게 놀러갔다가 압구정동에서 찍힌 사진이 패션 잡지에 실리면서 잡지 모델로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8년에는 대구방송(TBC) 리포터로 뽑히기도 했으나 활동하지는 않았다.[9] 엄지원은 1998년 5월부터 KBS 시트콤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말부터 방송된 MBC 시트콤 《아니 벌써》에서 처음으로 고정배역을 맡았다.[10] 그녀는 1999년 KBS 《지구용사 벡터맨》(2기), 2000년 MBC 시트콤 《세 친구》에도 출연했다.[9] 엄지원은 1999년 10월부터 MBC 《사랑의 스튜디오》의 〈러브러브 쉐이크〉 코너 진행자를 시작으로, 이후 예능 프로그램인 KBS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의 〈서바이벌 정글미팅〉, SBS 《좋은 친구들》의 〈모여라 2000〉에서 코너 진행자로도 활동하였다.[11] 엄지원은 코너 진행자로 활동하던 2000년 첫 영화인 《찍히면 죽는다》에 이영호(성욱 역)의 누나 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8][11][주 3] 이후 엄지원은 KBS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SBS 《토요 스토리랜드》, iTV 《연예세상》 등에 출연하며 방송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연기학원에 등록해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12] 2002–2009년[편집] 2009년 2월 영화 《그림자 살인》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엄지원. 2002년 엄지원은 5월 개봉한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에 작은 역할인 장진영(강연희 역)의 직장 동료 김은송 역으로 출연한 후, 같은 해 7월부터 방송된 MBC 아침드라마 《황금마차》에 임지은과 함께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이복 언니인 임지은(황유정 역)이 낳은 아들(황두리)을 키우는 마음씨 착한 동생 황순정을 연기하며 처음으로 주요 배역을 맡게 되었다.[13] 《황금마차》는 최고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배우 엄지원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14] 이후 엄지원은 곽경택 감독이 신작 《똥개》에 정우성(차철민 역)의 상대역으로 출연할 신인 여배우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응모해 3차까지 오디션을 거쳐서 해당 배역에 선발되었다.[15] 그녀가 맡은 역할은 소매치기 출신의 ‘날라리’ 아가씨 김정애 역이었다.[16] 2003년 7월 개봉한 《똥개》는 전국 관객 139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쳐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17][18] 이 작품에서 엄지원의 연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그녀는 그해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다.[19][20][21] 엄지원은 《똥개》를 통해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는데, 이후 인터뷰에서 그녀도 《똥개》를 “내 인생에서 진짜 데뷔작이자 중요한 작품”,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22][23] 한편 엄지원은 《똥개》 개봉을 앞두고 있던 시기 한 매니저에게 “내가 ... 너를 지켜봤는데 ... 너무 방치돼 있었”다, “너를 심은하로 내가 만들어 주겠”다, “회사(소속사)가 해 준 게 뭐 있냐”는 말을 듣고 혹했다가 전속계약 해지 문제로 소속사(싸이클론)와 분쟁을 겪게 되었다.[19][24][주 4] 이듬해인 2004년 엄지원은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매직》에 출연했고,[25][26] 10월 개봉한 영화 《주홍글씨》에 한석규, 이은주, 성현아와 같이 캐스팅되어 한석규(이기훈 역)의 아내인 첼리스트 한수현을 연기했다.[27] 엄지원은 《주홍글씨》로 같은 해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28] 2005년에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극장전》에 김상경(김동수 역), 이기우(전상원 역)의 상대역인 최영실로 출연하였는데, 이 작품은 제58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29][30] 2006년 유지태, 김지수와 함께 출연한 멜로 영화 《가을로》에서는 여행 중인 유지태(최현우 역)와 마주치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생존자 윤세진을 연기해서 그해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춘사대상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31][32][33] 《가을로》는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34] 개봉 후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전국 관객 약 70만 명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17][35] 2007년에는 《스카우트》에 출연하여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러 광주에 온 대학시절 연인 임창정(이호창 역)과 재회하는 시민운동가 김세영을 연기했는데, 이 작품도 31만5천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17][36] 한편 엄지원은 《야수》(2006년)에 권상우(장도영 역)의 연인인 강주희 역으로 우정출연했고,[37] 《기담》(2007년)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년)에도 특별출연 형식으로 얼굴을 내비쳤다.[38][39] 또한 엄지원은 2008년 9월부터 SBS의 연예정보 프로그램 《한밤의 TV연예》의 MC로 서경석과 함께 이후 2010년 4월까지 진행을 맡았다.[40] 2009년 엄지원은 4월 개봉한 영화 《그림자 살인》에 황정민, 류덕환과 함께 캐스팅되어 사대부가의 여인이자 발명가 순덕 역으로 출연했다.[41][42] 5월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 역으로 출연했다.[43] 엄지원은 같은 해인 2009년 배창호 감독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원작으로 한 동명 뮤지컬 《기쁜 우리 젊은 날》에 출연하며 뮤지컬 무대에 데뷔하였고,[44][45] 단편 영화인 백현진 감독의 《THE END》와 유지태 감독의 《초대》에도 출연하였다.[46][47] 2010년–현재[편집] 2013년 11월 청룡영화상 시상식장에 입장하는 엄지원. 엄지원은 2010년 1월부터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박진희, 왕빛나와 함께 캐스팅되어 한영 동시통역사 정다정 역을 맡으며 2004년 《매직》 이후 5년여 만에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였다.[48][주 5] 그러나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같은 시간대에 방송된 KBS의 《추노》, SBS의 《산부인과》에 밀려 방송내내 한자리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하였다.[49] 엄지원은 같은 해 두 편의 코미디 영화에도 출연했다. 《스카우트》 이후 다시 임창정과 같이 캐스팅되어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불량남녀》에는 카드사 채권팀 직원 김무령으로 출연했고,[50] 성을 소재로 한 코미디 《페스티발》에는 신하균, 심혜진, 성동일, 류승범, 백진희, 오달수와 같이 캐스팅되어 신하균(곽장배 역)의 애인인 영어학원 강사 지수 역으로 출연했다.[51] 두 작품은 각각 49만 명과 20만 명의 관객을 기록했다.[17] 2011년 1월부터 3월까지는 SBS 수목드라마 《싸인》에 출연했다. 박신양, 김아중, 전광렬 등이 출연한 이 작품에서 엄지원은 여검사 정우진 역을 맡았다. 《싸인》은 극 초기 MBC의 《마이 프린세스》에 시청률이 밀리기도 했으나 이내 ‘명품 드라마’로 호평을 받으며 수목극 시청률 1위에 올랐다.[52][53] 엄지원의 연기는 무리한 설정과 목소리로 극 초반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이후 극이 진행되면서 호평을 받았다.[54][55] 2012년에는 종합편성채널 MBN의 드라마 《사랑도 돈이 되나요》에 연정훈(마인탁 역)의 상대역으로 돈 때문에 재력가와 결혼을 꿈꾸는 ‘된장녀’ 윤다란 역으로 출연했고,[56] 종합편성채널인 JTBC의 주말연속극으로 극작가 김수현이 극본을 쓴 가족극 《무자식 상팔자》에는 지방법원 판사를 그만두고 미혼모가 되는 집안의 큰손녀 안소영 역으로 출연했다.[57] 2013년 1월 개봉한 《박수건달》에는 박신양, 김정태, 정혜영 등과 같이 출연해 무당 명보살을 연기했다.[58] 이 작품은 전국 관객 약 39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였다.[59] 10월 개봉한 아동성폭력을 다룬 영화 《소원》에서는 딸이 성폭력을 당하는 어머니 미희를 연기했다.[60] 《소원》은 2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17] 엄지원은 이 작품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데뷔 후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61]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와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및 대종상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62][63][64] 다음 출연작으로 2013년 11월부터 방송된 김수현 극본의 SBS 주말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는 애견용품 디자이너인 첫째 딸 오현수 역으로 출연했다.[65] 개인 생활[편집] 엄지원은 2012년 말 지인의 소개로 건축가이자 에세이 작가 오영욱을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필명인 ‘오기사’로도 알려진 오영욱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무소 ‘오기사 디자인’을 운영하고 있다. 둘은 2014년 5월 27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66] 연기 활동[편집] 텔레비전[편집] 연도* 제목 역할 방송사 비고 1998 공포의 눈동자 단역(학생) SBS 납량특집드라마[67] 아니 벌써 엄지원 MBC 1999 지구용사 벡터맨 2기 라디아 공주[주 6] KBS2 2000 세 친구 엄지원[주 7] MBC 2002 황금마차 황순정 MBC 2004 폭풍 속으로 오정희 SBS 매직 하연진 SBS 2008 온에어 엄지원 SBS 5회에 카메오 출연[68] 2010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정다정 MBC 2011 싸인 정우진 SBS 2012 사랑도 돈이 되나요 윤다란 MBN 무자식 상팔자 안소영 JTBC 2013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오현수 SBS 2017 조작 권소라 SBS 2019 봄이 오나 봄 이봄 MBC *다년간 방송된 프로그램의 경우, 엄지원이 출연한 연도 또는 출연하기 시작한 연도를 가리킨다. 영화[편집] 연도* 제목 역할 비고 2000 찍히면 죽는다 누나 2002 오버 더 레인보우 김은송 2003 똥개 김정애 2004 주홍글씨 한수현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69] 2005 극장전 최영실 2006 야수 강주희 우정출연 가을로 윤세진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2007 기담 박 교수의 딸 특별출연 스카우트 김세영 2008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나연 특별출연 2009 THE END 단편영화 그림자 살인 순덕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현희 초대 여자 단편영화 2010 불량남녀 김무령 페스티발 지수 2013 박수건달 명보살 소원 미희 2015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교장 더 폰 조연수 2016 미씽: 사라진 여자 지선 마스터 신젬마 2019 기묘한 가족 남주 *개봉일(공개일) 순. 뮤지컬[편집] 2009년 《기쁜 우리 젊은 날》 - 혜린 뮤직 비디오[편집] 2007년 《안녕》 KCM 그 밖의 활동[편집] 방송진행[편집] 2008년~2010년 《한밤의 TV연예》 (SBS) 2012년 《오페라스타 2012》 (tvN)[70] 2017년 《이집 사람들》 (O tvN) 홍보대사[편집] 2008년 제16회 춘사대상영화제 홍보대사(하정우와 함께)[71] 2011년 열린의사회 홍보대사[72] 수상 및 후보[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출처 2003 제24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똥개 후보 [1] 2004 제25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주홍글씨 후보 [2] 2006 제27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가을로 후보 [3] 2007 제15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조연상 가을로 수상 [4] 2008 제5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여자조연배우상 스카우트 수상 [5] 2010 제18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영화배우부문 우수상 불량남녀 수상 [6] 2011 제3회 아시아 주얼리 어워드 배우부문 사파이어상 빈칸 수상 [7] SBS 연기대상 드라마스페셜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싸인 후보 [8] 2013 제2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박수건달 후보 [9] 제50회 대종상 여우조연상 박수건달 후보 [10] 제34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소원 후보 [11]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소원 수상 [12] 한국영화배우협회 스타의 밤 시상식 스타상 소원 수상 [13] 2014 제5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소원 후보 [14] 제51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소원 후보 [15] SBS 연기대상 장편드라마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세 번 결혼하는 여자 후보 [16] 2016 제21회 춘사영화상 여우조연상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수상 [17] 제36회 황금촬영상 최우수 주연여우상 더 폰 수상 [18]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조연상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후보 [19] 2017 제18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 미씽: 사라진 여자 수상 SBS 연기대상 월화드라마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조작 후보 2018 제8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마리끌레르상 미씽: 사라진 여자 수상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현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 엄이웅은 이후 경상북도 개발공사 사장(제4대), 한도엔지니어링 회장을 지냈다. (출처). ↑ 이후 엄지원은 《찍히면 죽는다》를 “배우로서 생각이 정립되기 전이었고, 제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요. 어리석은 시기였기 때문에 제 필모그래피의 스타트에서 지우고 싶습니다.”라고 밝히며 출연을 후회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12] ↑ 결국 엄지원은 계약 기간이 끝난 후 계약시 받은 계약금 500만원의 6배인 3000만원을 소속사에 물어주어야 했다. (출처). ↑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2004년 방송된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후속편이다. (출처). ↑ 언론에서 라디아, 리디아, 레디아, 레디어 등 표기가 분분하나, 《지구용사 벡터맨 2기》에서 엄지원이 맡은 역할은 ‘레디아 공주’의 동생인 ‘라디아 공주’이다. ↑ 윤다훈이 매니저(실장)로 있는 헬스클럽의 직원(코치)이다. 참조주[편집] ↑ 정미희 (2009-5.6). “치열하게 한 사람을 살아내다”. 《오늘》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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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엄지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엄지원 2010 메트로시티 패션쇼 & 파티에서의 엄지원출생 1977년 12월 25일(1977-12-25) (41세)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주 1]직업 배우활동 기간 1998년 ~ 현재종교 개신교[1][2]소속사 씨제스엔터테인먼트 부모 엄이웅(부)형제자매 언니 1명배우자 오영욱웹사이트 엄지원 - 인스타그램엄지원 - 트위터엄지원 미니홈피 - 싸이월드 엄지원(嚴志媛[3], 1977년 1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98년 텔레비전 출연을 시작했고, 2000년에는 영화 무대에도 데뷔했다. 2002년 MBC 아침드라마 《황금마차》에 출연하였고, 2003년 영화 《똥개》에 출연하였다. 2006년 영화 《가을로》로 춘사대상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2013년 영화 《소원》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목차 1 학력 2 생애와 경력 2.1 데뷔전 삶과 초기 활동 2.2 2002–2009년 2.3 2010년–현재 3 개인 생활 4 연기 활동 4.1 텔레비전 4.2 영화 4.3 뮤지컬 4.4 뮤직 비디오 5 그 밖의 활동 5.1 방송진행 5.2 홍보대사 6 수상 및 후보 7 각주 7.1 내용주 7.2 참조주 8 외부 링크 학력[편집] 경화여자중학교 졸업 효성여자고등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지리학과 생애와 경력[편집] 데뷔전 삶과 초기 활동[편집] 엄지원은 1977년 12월 25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4][5] 그녀의 아버지 엄이웅(嚴二雄)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공군 소령 출신의 공직자로, 2003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끝으로 퇴임하였다.[6][7][주 2] 엄지원은 효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에서 지리학을 전공하였다.[8] 엄지원은 대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언니에게 놀러갔다가 압구정동에서 찍힌 사진이 패션 잡지에 실리면서 잡지 모델로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8년에는 대구방송(TBC) 리포터로 뽑히기도 했으나 활동하지는 않았다.[9] 엄지원은 1998년 5월부터 KBS 시트콤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말부터 방송된 MBC 시트콤 《아니 벌써》에서 처음으로 고정배역을 맡았다.[10] 그녀는 1999년 KBS 《지구용사 벡터맨》(2기), 2000년 MBC 시트콤 《세 친구》에도 출연했다.[9] 엄지원은 1999년 10월부터 MBC 《사랑의 스튜디오》의 〈러브러브 쉐이크〉 코너 진행자를 시작으로, 이후 예능 프로그램인 KBS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의 〈서바이벌 정글미팅〉, SBS 《좋은 친구들》의 〈모여라 2000〉에서 코너 진행자로도 활동하였다.[11] 엄지원은 코너 진행자로 활동하던 2000년 첫 영화인 《찍히면 죽는다》에 이영호(성욱 역)의 누나 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8][11][주 3] 이후 엄지원은 KBS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SBS 《토요 스토리랜드》, iTV 《연예세상》 등에 출연하며 방송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연기학원에 등록해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12] 2002–2009년[편집] 2009년 2월 영화 《그림자 살인》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엄지원. 2002년 엄지원은 5월 개봉한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에 작은 역할인 장진영(강연희 역)의 직장 동료 김은송 역으로 출연한 후, 같은 해 7월부터 방송된 MBC 아침드라마 《황금마차》에 임지은과 함께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이복 언니인 임지은(황유정 역)이 낳은 아들(황두리)을 키우는 마음씨 착한 동생 황순정을 연기하며 처음으로 주요 배역을 맡게 되었다.[13] 《황금마차》는 최고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배우 엄지원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14] 이후 엄지원은 곽경택 감독이 신작 《똥개》에 정우성(차철민 역)의 상대역으로 출연할 신인 여배우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응모해 3차까지 오디션을 거쳐서 해당 배역에 선발되었다.[15] 그녀가 맡은 역할은 소매치기 출신의 ‘날라리’ 아가씨 김정애 역이었다.[16] 2003년 7월 개봉한 《똥개》는 전국 관객 139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쳐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17][18] 이 작품에서 엄지원의 연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그녀는 그해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다.[19][20][21] 엄지원은 《똥개》를 통해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는데, 이후 인터뷰에서 그녀도 《똥개》를 “내 인생에서 진짜 데뷔작이자 중요한 작품”,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22][23] 한편 엄지원은 《똥개》 개봉을 앞두고 있던 시기 한 매니저에게 “내가 ... 너를 지켜봤는데 ... 너무 방치돼 있었”다, “너를 심은하로 내가 만들어 주겠”다, “회사(소속사)가 해 준 게 뭐 있냐”는 말을 듣고 혹했다가 전속계약 해지 문제로 소속사(싸이클론)와 분쟁을 겪게 되었다.[19][24][주 4] 이듬해인 2004년 엄지원은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매직》에 출연했고,[25][26] 10월 개봉한 영화 《주홍글씨》에 한석규, 이은주, 성현아와 같이 캐스팅되어 한석규(이기훈 역)의 아내인 첼리스트 한수현을 연기했다.[27] 엄지원은 《주홍글씨》로 같은 해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28] 2005년에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극장전》에 김상경(김동수 역), 이기우(전상원 역)의 상대역인 최영실로 출연하였는데, 이 작품은 제58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29][30] 2006년 유지태, 김지수와 함께 출연한 멜로 영화 《가을로》에서는 여행 중인 유지태(최현우 역)와 마주치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생존자 윤세진을 연기해서 그해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춘사대상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31][32][33] 《가을로》는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34] 개봉 후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전국 관객 약 70만 명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17][35] 2007년에는 《스카우트》에 출연하여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러 광주에 온 대학시절 연인 임창정(이호창 역)과 재회하는 시민운동가 김세영을 연기했는데, 이 작품도 31만5천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17][36] 한편 엄지원은 《야수》(2006년)에 권상우(장도영 역)의 연인인 강주희 역으로 우정출연했고,[37] 《기담》(2007년)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년)에도 특별출연 형식으로 얼굴을 내비쳤다.[38][39] 또한 엄지원은 2008년 9월부터 SBS의 연예정보 프로그램 《한밤의 TV연예》의 MC로 서경석과 함께 이후 2010년 4월까지 진행을 맡았다.[40] 2009년 엄지원은 4월 개봉한 영화 《그림자 살인》에 황정민, 류덕환과 함께 캐스팅되어 사대부가의 여인이자 발명가 순덕 역으로 출연했다.[41][42] 5월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 역으로 출연했다.[43] 엄지원은 같은 해인 2009년 배창호 감독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원작으로 한 동명 뮤지컬 《기쁜 우리 젊은 날》에 출연하며 뮤지컬 무대에 데뷔하였고,[44][45] 단편 영화인 백현진 감독의 《THE END》와 유지태 감독의 《초대》에도 출연하였다.[46][47] 2010년–현재[편집] 2013년 11월 청룡영화상 시상식장에 입장하는 엄지원. 엄지원은 2010년 1월부터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박진희, 왕빛나와 함께 캐스팅되어 한영 동시통역사 정다정 역을 맡으며 2004년 《매직》 이후 5년여 만에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였다.[48][주 5] 그러나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같은 시간대에 방송된 KBS의 《추노》, SBS의 《산부인과》에 밀려 방송내내 한자리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하였다.[49] 엄지원은 같은 해 두 편의 코미디 영화에도 출연했다. 《스카우트》 이후 다시 임창정과 같이 캐스팅되어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불량남녀》에는 카드사 채권팀 직원 김무령으로 출연했고,[50] 성을 소재로 한 코미디 《페스티발》에는 신하균, 심혜진, 성동일, 류승범, 백진희, 오달수와 같이 캐스팅되어 신하균(곽장배 역)의 애인인 영어학원 강사 지수 역으로 출연했다.[51] 두 작품은 각각 49만 명과 20만 명의 관객을 기록했다.[17] 2011년 1월부터 3월까지는 SBS 수목드라마 《싸인》에 출연했다. 박신양, 김아중, 전광렬 등이 출연한 이 작품에서 엄지원은 여검사 정우진 역을 맡았다. 《싸인》은 극 초기 MBC의 《마이 프린세스》에 시청률이 밀리기도 했으나 이내 ‘명품 드라마’로 호평을 받으며 수목극 시청률 1위에 올랐다.[52][53] 엄지원의 연기는 무리한 설정과 목소리로 극 초반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이후 극이 진행되면서 호평을 받았다.[54][55] 2012년에는 종합편성채널 MBN의 드라마 《사랑도 돈이 되나요》에 연정훈(마인탁 역)의 상대역으로 돈 때문에 재력가와 결혼을 꿈꾸는 ‘된장녀’ 윤다란 역으로 출연했고,[56] 종합편성채널인 JTBC의 주말연속극으로 극작가 김수현이 극본을 쓴 가족극 《무자식 상팔자》에는 지방법원 판사를 그만두고 미혼모가 되는 집안의 큰손녀 안소영 역으로 출연했다.[57] 2013년 1월 개봉한 《박수건달》에는 박신양, 김정태, 정혜영 등과 같이 출연해 무당 명보살을 연기했다.[58] 이 작품은 전국 관객 약 39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였다.[59] 10월 개봉한 아동성폭력을 다룬 영화 《소원》에서는 딸이 성폭력을 당하는 어머니 미희를 연기했다.[60] 《소원》은 2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17] 엄지원은 이 작품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데뷔 후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61]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와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후보 및 대종상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62][63][64] 다음 출연작으로 2013년 11월부터 방송된 김수현 극본의 SBS 주말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는 애견용품 디자이너인 첫째 딸 오현수 역으로 출연했다.[65] 개인 생활[편집] 엄지원은 2012년 말 지인의 소개로 건축가이자 에세이 작가 오영욱을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필명인 ‘오기사’로도 알려진 오영욱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무소 ‘오기사 디자인’을 운영하고 있다. 둘은 2014년 5월 27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66] 연기 활동[편집] 텔레비전[편집] 연도* 제목 역할 방송사 비고 1998 공포의 눈동자 단역(학생) SBS 납량특집드라마[67] 아니 벌써 엄지원 MBC 1999 지구용사 벡터맨 2기 라디아 공주[주 6] KBS2 2000 세 친구 엄지원[주 7] MBC 2002 황금마차 황순정 MBC 2004 폭풍 속으로 오정희 SBS 매직 하연진 SBS 2008 온에어 엄지원 SBS 5회에 카메오 출연[68] 2010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정다정 MBC 2011 싸인 정우진 SBS 2012 사랑도 돈이 되나요 윤다란 MBN 무자식 상팔자 안소영 JTBC 2013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오현수 SBS 2017 조작 권소라 SBS 2019 봄이 오나 봄 이봄 MBC *다년간 방송된 프로그램의 경우, 엄지원이 출연한 연도 또는 출연하기 시작한 연도를 가리킨다. 영화[편집] 연도* 제목 역할 비고 2000 찍히면 죽는다 누나 2002 오버 더 레인보우 김은송 2003 똥개 김정애 2004 주홍글씨 한수현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69] 2005 극장전 최영실 2006 야수 강주희 우정출연 가을로 윤세진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2007 기담 박 교수의 딸 특별출연 스카우트 김세영 2008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나연 특별출연 2009 THE END 단편영화 그림자 살인 순덕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현희 초대 여자 단편영화 2010 불량남녀 김무령 페스티발 지수 2013 박수건달 명보살 소원 미희 2015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교장 더 폰 조연수 2016 미씽: 사라진 여자 지선 마스터 신젬마 2019 기묘한 가족 남주 *개봉일(공개일) 순. 뮤지컬[편집] 2009년 《기쁜 우리 젊은 날》 - 혜린 뮤직 비디오[편집] 2007년 《안녕》 KCM 그 밖의 활동[편집] 방송진행[편집] 2008년~2010년 《한밤의 TV연예》 (SBS) 2012년 《오페라스타 2012》 (tvN)[70] 2017년 《이집 사람들》 (O tvN) 홍보대사[편집] 2008년 제16회 춘사대상영화제 홍보대사(하정우와 함께)[71] 2011년 열린의사회 홍보대사[72] 수상 및 후보[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출처 2003 제24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똥개 후보 [1] 2004 제25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주홍글씨 후보 [2] 2006 제27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가을로 후보 [3] 2007 제15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조연상 가을로 수상 [4] 2008 제5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여자조연배우상 스카우트 수상 [5] 2010 제18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영화배우부문 우수상 불량남녀 수상 [6] 2011 제3회 아시아 주얼리 어워드 배우부문 사파이어상 빈칸 수상 [7] SBS 연기대상 드라마스페셜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싸인 후보 [8] 2013 제2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박수건달 후보 [9] 제50회 대종상 여우조연상 박수건달 후보 [10] 제34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소원 후보 [11]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소원 수상 [12] 한국영화배우협회 스타의 밤 시상식 스타상 소원 수상 [13] 2014 제5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소원 후보 [14] 제51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소원 후보 [15] SBS 연기대상 장편드라마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세 번 결혼하는 여자 후보 [16] 2016 제21회 춘사영화상 여우조연상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수상 [17] 제36회 황금촬영상 최우수 주연여우상 더 폰 수상 [18]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조연상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후보 [19] 2017 제18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 미씽: 사라진 여자 수상 SBS 연기대상 월화드라마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조작 후보 2018 제8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마리끌레르상 미씽: 사라진 여자 수상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현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 엄이웅은 이후 경상북도 개발공사 사장(제4대), 한도엔지니어링 회장을 지냈다. (출처). ↑ 이후 엄지원은 《찍히면 죽는다》를 “배우로서 생각이 정립되기 전이었고, 제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요. 어리석은 시기였기 때문에 제 필모그래피의 스타트에서 지우고 싶습니다.”라고 밝히며 출연을 후회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12] ↑ 결국 엄지원은 계약 기간이 끝난 후 계약시 받은 계약금 500만원의 6배인 3000만원을 소속사에 물어주어야 했다. (출처). ↑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2004년 방송된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후속편이다. (출처). ↑ 언론에서 라디아, 리디아, 레디아, 레디어 등 표기가 분분하나, 《지구용사 벡터맨 2기》에서 엄지원이 맡은 역할은 ‘레디아 공주’의 동생인 ‘라디아 공주’이다. ↑ 윤다훈이 매니저(실장)로 있는 헬스클럽의 직원(코치)이다. 참조주[편집] ↑ 정미희 (2009-5.6). “치열하게 한 사람을 살아내다”. 《오늘》 (51). ISSN 2005-7350. 2015년 1월 28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기독교 문화 잡지 ‘오늘’ 5·6월호… 가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 배우 인터뷰”. 국민일보. 2009년 5월 10일.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엄지원. “严志媛的微博_微博”. 《웨이보》. 시나. 2016년 2월 4일에 확인함. ↑ 네이버. “네이버 인물정보 (엄지원)”.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김소연 (2004년 10월 28일). “청순가련 깜찍발랄 엄지원”. 서울신문. 23면.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새의자]경북도 정무부지사 엄이웅씨”. 동아일보. 2002년 7월 23일.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정근재 (2003년 9월 2일). “[동정] 엄이웅 정무부지사 퇴임식”. 영남일보.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씨네21. “씨네21 DB - 엄지원 (Uhm Ji-won)”.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가 나 박주연 (2004년 5월 27일). “‘폭풍속으로‘ 엄지원”. 《뉴스메이커(현 주간경향)》 (575).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김호영 (1999년 1월 20일). “[엄지원] "이룰수 없는 반쪽사랑이지만…"”. 《스포츠조선》. 2005년 2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5월 16일에 확인함. ↑ 가 나 맹경환 (2000년 8월 3일). “[인터뷰] 코너 MC서 영화주연까지…엄지원”. 국민일보. 2013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가 나 김지수, 손우창 (2007년 12월). “도도한 순수”. 《보그》. 2014년 5월 10일에 확인함. ↑ 정명진 (2002년 7월 9일). “[인터뷰] MBC ‘황금마차’ 주인공 엄지원”. 파이낸셜뉴스. 2013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정명진 (2003년 2월 18일). “SBS 새 아침드라마 ‘당신 곁으로’”. 파이낸셜뉴스. 2014년 5월 10일에 확인함. ↑ 《힐링캠프》 (텔레비전 프로그램). 서울, 대한민국: SBS. 2011년 8월 8일. 2014년 5월 22일에 확인함. ↑ 문화부 (2003년 7월 30일). “영화 “똥개”서 야무진 비행소녀 엄지원”. 세계일보.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마 영화진흥위원회. “KOFIC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김미영 (2007년 9월 20일). “곽경택 감독 “‘친구’ 이후 줄줄이 흥행 실패, 후회 없지만 섭섭””. 뉴스엔. 2014년 5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5월 6일에 확인함. ↑ 가 나 정명화 (2006년 10월 12일). “엄지원, "'똥개' 이후 인생이 달라졌다!"”. 조이뉴스24.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김병규 (2003년 7월 8일). “<새 영화> '똥개'”. 연합뉴스.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전상희, 정현석 (2003년 11월 27일).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감독상등 사상 최고 치열한 경합”. 스포츠조선. 2014년 3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고규대 (2007년 7월 20일). “엄지원, 와인같은 연기 꿈꾼다”. 스포츠한국. 2014년 5월 6일에 확인함. ↑ 송주연 (2006년 1월 17일). “토크2.1 엄지원의 배우 수업”. 《필름2.0》. ↑ 《힐링캠프》 (텔레비전 프로그램). 서울, 대한민국: SBS. 2011년 8월 8일.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임정식 (2004년 5월 2일). “엄지원, SBS '폭풍 속으로'서 김민준과 가혹한 사랑”.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7일에 확인함. ↑ 임정식 (2004년 7월 23일). “엄지원, '파리의 연인' 후속작 '매직'에 캐스팅”.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7일에 확인함. ↑ 최윤정 (2004년 7월 22일). “섹시·신비·우아…‘주홍글씨’ 삼색미녀”. 스포츠투데이. 2014년 4월 7일에 확인함. ↑ 전상희 (2004년 11월 11일). “[제25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 스포츠조선. 2014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 김관명 (2005년 5월 12일). “'극장전', 중독성 강한 홍상수식 유머”. 스타뉴스. 2014년 4월 12일에 확인함. ↑ 김은형 (2005년 5월 4일). “홍상수감독 ‘극장전’ 칸영화제 막차 합류”. 한겨레. 2014년 4월 12일에 확인함. ↑ 김성원, 김인구 (2006년 10월 24일). “['가을로' 주연배우 3색 인터뷰] 유지태-김지수-엄지원”.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김성원 (2006년 12월 13일). “[제27회 청룡영화상] 청룡상 판세 분석”. 스포츠조선. 2014년 3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홍기원 (2007년 9월 14일). “[★포토]엄지원, 여우조연상 받았어요”. 스타뉴스.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이다혜 (2006년 9월 14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가을로>”. 《씨네21》.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권재현 (2007년 1월 27일). “[Life Style]눈물 흘리는 ‘멜로’… 잇단 흥행참패”. 동아일보.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안길수 (2007년 11월 11일). “[영화 스카우트] 선동렬 영입 미션 받고 광주로 간 대학 체육부 직원”. 서울경제. 2014년 4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이은식 (2005년 7월 11일). “엄지원, '야수' 권상우와 애틋한 사랑”. 경제투데이. 2014년 9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이희진 (2007년 7월 14일). “엄지원, 특별출연 '기담'에서 비밀 인도”. 스포츠조선. 2014년 4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이경호 (2008년 7월 23일). “‘칸’에서 살아난 여인, 엄지원”. 동아일보. 2014년 4월 28일에 확인함. ↑ 김건우 (2010년 4월 21일). “엄지원, '한밤' MC 하차..후임 송지효 발탁”. 스타뉴스.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모신정 (2009년 4월 2일). “'그림자 살인' 캐릭터 신선하지만 짜임새가 왠지…”. 한국일보. 2014년 4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최재욱 (2009년 5월 14일). “‘마더’ ‘해운대’ ‘국가대표’, 한국 영화 흥행 이어갈까”. 스포츠경향. 2014년 7월 3일에 확인함. ‘그림자 살인’은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전국 괸객 192만명을 기록했다. ↑ 온라인뉴스팀 (2009년 5월 11일). “[영화세상]‘잘 알지도 못하면서‘ 엄지원 짱!”. 스포츠경향.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김희선 (2009년 4월 9일).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뮤지컬로”. 연합뉴스.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두경아 (2009년 6월). “영화로 이미지 변신하고 뮤지컬 무대에 도전장 낸 엄지원”. 《레이디경향》.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김희연 (2009년 3월 9일). “퍼포먼스·무용·영화… 경계 허물고 뒤섞여 하나로”. 경향신문.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박세연 (2009년 4월 3일). “엄지원, 유지태 신작단편 ‘초대’ 출연”. 뉴스엔.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정유진 (2010년 1월 14일). “[포토엔]서른넷 세 여자 엄지원-박진희-왕빛나 ‘셋이 합해 102살’”. 뉴스엔.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장서윤 (2010년 3월 12일). “'아결여' 한자리수대 시청률로 아쉬운 종영”. 이데일리. 2014년 4월 30일에 확인함. ↑ 김구철 (2010년 10월 6일). “[AM7] 백수건달서 경찰로 신분상승 “근데 왜 불쌍해 보이냐고요””. 문화일보. 2014년 5월 1일에 확인함. ↑ 김지영 (2010년 11월 15일). “[영화] 페스티발…야하지만 야하지 않은 블랙 코미디”. 매일경제. 2014년 5월 1일에 확인함. ↑ 서은혜 (2011년 3월 10일). “[굿바이 싸인] 수목극 1위 '질주'…성공요인과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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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의 문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국 시대의 문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국 문학 상고시대의 문학 삼국 시대의 문학 남북국시대의 문학 고려 시대의 문학 조선 전기의 문학 조선 후기의 문학 현대 전기 문학 현대 후기 문학 향가 시조 가사 세계의 문학 문학상 삼국 시대의 문학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성립된 시기와 후삼국 시대까지 대개 서기 1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형성되었다. 목차 1 특징 2 삼국 시대 문학의 전개 3 삼국 시대의 한문 문학 4 문학 분야별 분류 4.1 시가 문학 4.2 설화 문학 4.2.1 설화 문학의 특징 4.2.2 온달 설화 4.2.3 도미전 5 화랑 문학 6 중국과의 교류 7 함께 보기 8 외부 링크 특징[편집] 삼국 시대 이전의 원시 문학을 집단 가무 시대라 한다면 삼국 문학은 개성 자각의 문학 시대라고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어떠한 부족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웅일지라도 개인으로서의 영웅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평범한 필부나 촌녀의 기쁨이나 슬픔을 노래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집단적·객관적·영웅적인 것에서 개인적·주관적·서정적인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 문학은 전대(前代)보다 발전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가요와 설화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가요의 유래에 대한 설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서야 겨우 그 생명을 유지한 사실로 보아 아직도 전대 문학의 잔영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고구려는 서사 문학이 특히 발달하여 많은 설화 문학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 한반도의 동남과 서남쪽에 위치한 신라와 백제는 서정적인 가요 문학이 발달했다. 이 시대의 주요 문학인으로는 〈신집〉을 집필한 이문진, 일본에 학문을 전한 왕인, 백제의 역사서를 편찬한 고흥, 신라의 역사서를 편찬한 거칠부 등이 있다. 삼국 시대 문학의 전개[편집] 삼국 시대에 있어 문화 교류의 중요한 기틀이 된 학자는 유교 문화뿐 아니라 불교 문화의 큰 힘을 입게 되었는데, 불교의 전래는 그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는 제19대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최초의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년)에 동진으로부터 들어온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하였고,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민간에 전래하고, 법흥왕 때 이차돈의 죽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불교는 거의 천 년간 한민족의 신앙을 지배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했고, 이때부터 한문과 같이 들어온 유교와 고구려 말에 들어온 도교(道敎)의 사상과 더불어 한국의 정신적·사회적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삼국 시대의 한문 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문 § 한국의 한문 문학입니다. 한민족은 전래된 한자의 사용으로 이제까지 구송된 역사·문학을 정착시켰다. 유·불·선의 교리에 영향을 받은 문학이 성행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솟구치는 시정을 서술하는 데 한문학은 한문자와 아울러 삼국의 귀족을 매료시키고 여기에서 문학으로서의 한문학이 꽃피게 되었다. 문학 분야별 분류[편집] 시가 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삼국시대 시가입니다. 삼국은 각기 부족 연맹으로부터 세력을 키워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체의 문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이 초창기에는 아직 문화적으로 제의와 밀접히 관련된 원시의 치졸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집단적·제의적 성격을 탈피하여 개인적인 문학예술이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향가는 세련된 개인 창작시로서 남북국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신라 유리왕 연대에 지어진 〈도솔가〉, 〈회소곡〉 등은 농업 국가를 형성한 신라 민족의 제신적인 성격에서 벗어난 비종교적인 시가이다. 향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가 양식이다. 이것은 특히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화랑·승려 등 신라의 중앙 귀족층에 의해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의적·민요적인 것과는 달리 개인 창작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귀족 문학인 것이다. 이 향가의 완성형은 10구체이며, 그 과도기적인 형태로서 4구체와 8구체가 있다. 내용 면에서 보면, 주로 생사(生死) 등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높은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우아한 언어로 표현한 고상한 서정시이다. 현재 전통적인 신라 향가 14수와 균여의 불교찬가로 지어진 11수가 전하고 있다. 신라 말기에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해 향가집 〈삼대목〉이 편찬되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설화 문학[편집] 삼국 시대의 설화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에 성립된 역사서에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전부를 삼국 시대의 문학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은 삼국 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것을 채록했다고 보아 삼국 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삼국 시대의 문학으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동명왕 건국 설화나 혁거세 건국 신화, 탈해 전승 등은 부족 연맹 간의 투쟁을 통해서 승리를 획득하여 고대 국가를 건설한 영웅의 위업을 그린 민족적인 서사 문학이다. 그리고 이민족과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동북아시아에 강대한 고대 제국을 건설한 광개토왕의 비문은 그의 민족적인 위대한 업적과 고구려 민족의 긍지를 표현한 것으로 역시 한 편의 민족 서사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김유신 설화 역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한 인물의 영웅적인 인간상과 활동을 형상화한 것이다. 궁예와 견훤의 설화의 경우는 신라 말기 사회에 있어서 중앙 귀족의 지배 체제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지방 호족 세력의 투쟁을 나타낸 것으로 주목된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 수록된 〈온달 설화〉, 〈호동왕자〉, 《삼국유사》에 수록된 〈호원〉, 〈노힐부득〉, 〈달달박박〉 등 우수한 설화 문학 작품이 많이 있다. 설화 문학의 특징[편집] 고구려의 시가는 〈황조가〉 외에 〈내원성가〉, 〈연양가〉, 〈명주가〉 등이 문헌 가운데 전하고 있으나, 그 가사는 전하지 않고 줄거리만이 《고려사》 삼국속악조에 적혀 있을 뿐이다. 또한 그 외에도 질투를 하다 가죽주머니에 담겨 죽은 〈관나부인 설화〉, 나랏돼지를 잡으러 갔다가 도읍지를 발견하고 주통촌녀를 발견하고 혈통을 이을 왕자를 낳았다는 〈교축일 설화〉, 낙랑왕 최리의 딸과 결혼하여 그 나라의 수호적인 자명고를 파괴케 하고 마침내 싸움에 이긴 〈왕자호동 설화〉, 활을 잘 쏘며 주춧돌 밑에 감추었던 단검을 발견하고 부왕을 찾아보았다는 〈유리태자 설화〉 등은 모두 고구려의 설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대표적 설화로는 〈도미전〉이 전해 오고 있다. 온달 설화[편집] 온달 설화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설화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며 뒤에 민간설화로 전승되었다. 이 설화에는 유교의 삼강의리가 가미된 색채를 발견할 수 있고, 유교적인 열과 효와 충을 보게 된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평강왕 때 얼굴이 못생기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바보 온달이라 불리는 마음씨 좋은 사나이가 있었다. 왕이 울기만 잘하는 그의 딸, 평강공주에게 울려거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 후 공주는 커서 가난하고 어리석은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청하니 이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게 되었다. 공주는 온달과 부부가 되어 왕궁에서 가지고 나온 금붙이로 살림을 장만하고 온달로 하여금 용맹과 지혜를 갖도록 내조를 한 끝에 온달은 용맹한 장군이 되었고, 드디어 후주 무제의 군사를 맞아 예산에서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임금의 칭찬을 받아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뒤에 신라 군사와 싸우다가 공을 세운 후 전사하였다. 도미전[편집] 도미전(都彌傳)은 백제의 대표적 설화로서,《삼국사기》 및 〈오륜 행실도〉 권3 열녀조에 실려 전한다. 주제는 정절로 백제 여인의 결백한 생활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제8 도미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실려 전한다. 도미는 백제 사람인데 그 아내가 매우 아름답고 정절이 있었다. 개루왕이 그 소문을 듣고 시험해 보고자 신하에게 거짓왕의 차림을 시켜 도미의 처에게 보내니 도미의 처가 꾀를 써서 속였다. 뒤에 속은 줄 알고 도미를 잡아 눈을 뺀 후 배에 실어 강에 흘려버리고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니, 처가 다시 지금 월경(月經)이 있는 중이라 속이고 도망쳐서 강에 이르러 통곡했다. 그러자 갑자기 배가 이르기에 그것을 타고 천성도(泉城道)에 이르러 우연히 아직 살아 있는 남편을 만나 함께 고구려로 도망하여 거기서 한평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다. 화랑 문학[편집] 처음 신라는 경주 지역의 6부를 근거로 일어났으며, 진한·마한·가락·가야 등을 통합하여 부족국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아 오다가 뒤에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 비로소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특히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까지에는 화랑제도와 화백과 같은 제도적 운영의 효과가 큰 힘을 발휘했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그때 들어온 불교를 정치와 문화 방면에 이용하여 유·불·도 3교의 결정체인 원화(源花)와 화랑을 신봉하게 되었다. “ 37년 비로소 원화를 받들어 선랑을 삼았다. 처음에 군신이 사람을 알 도리가 없어 모여 함께 놀게 하고 그 행위를 보아 들어 쓰고자 하여 드디어 미녀 두 사람을 골랐으니 하나는 남무요, 하나는 준정이다. 3백여 인을 모았더니 그 두 여자가 서로 시새워하여 준정이 남무를 유인,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에 강물에 던져 죽였다. 그 무리들은 싸우고 흩어지매 그 후로는 남자를 뽑아 단장을 시켜 받들어 화랑을 삼았다. 이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혹은 도의로써 서로 닦고, 혹은 가악으로써 서로 기꺼워하고, 산수에 놀아 멀어도 아니 미치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고 그 옳은 이를 뽑아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현좌 충신이 이로 좇아 뛰어나고, 양장 맹졸이 이로 말미암아 생겼다 하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르되 풍류라, 실은 3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하였으니, 말하자면 들어서는 집에 효하고, 나서는 나라에 충함은 노사구의 뜻이요, 하염없는 일에 처하여 말이 없는 교를 행함은 주주사의 종이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태자의 화라 하고, 또 영호징의 〈신라국기〉에는 귀인의 아름다운 이를 골라 단장을 시켜 받들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나라 사람이 다 높이 섬겼으니 이는 대개 왕화의 방편이라 했다. 원랑으로부터 나말까지 무릇 3백여 인인데 그중 사선이 가장 어질고 또한 세기중과 같다. ” — 각훈(覺訓),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법운조(法雲條) 또한 《삼국사기》 진흥왕조와 사다함조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화랑제도는 진흥왕 때부터 비롯하여 신라 통일 때 그 무리가 큰 활약을 했고, 통일 후에는 한 풍류적 존재로 변모한 듯하다. 그들은 도의와 가락과 자연을 통하여 단결을 도모하였고, 이들 화랑의 생활은 풍류의 도를 이룩하고 이것은 곧 신라 향가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중국과의 교류[편집] 삼국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문화적인 접촉이 있었으며, 한문을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진 고구려는 국가 교육 기관에서 한자 및 중국 고전을 교육했다. 일찍이 자기의 역사를 기록한 유기(留記)가 있었는데, 이를 뒤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신집〉으로 개찬하였다. 그리고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는 한시로서 한국 최초의 것이다. 백제 역시 육조의 문물에 빈번히 접하였으며,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니 고흥이 지은 〈서기〉라는 역사서가 있었으며, 한문을 일본에 전한 것도 백제였다. 신라는 강수, 설총 등의 한문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최고 귀족층인 성골·진골에 대하여 육두품 출신 귀족으로 신라 사회에서 새로운 지식 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신라 말기에 접어들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신진 지식 계급층의 최치원, 최광유, 박인범, 최승우 등의 활약으로 한문학이 크게 일어났다. 육두품 이하 출신인 그들은 정치적으로 신라적인 골품제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더러는 현실을 도피해 신선사상에 귀의하고 더러는 왕건에 협력하여 뒤에 고려의 문신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문학은 외교 문서의 작성, 비문, 역사 서술, 불교적인 저술 등 실제적인 데 필요했으며, 자연히 형식에 치중한 변려문이 발달하였다. 이들 견당 유학생에 의해서 한시도 본격적으로 발달되는데, 당시 한시는 최고 귀족층의 향가 문학에 대립하여 선진 지식층의 문학으로 성장했으며, 당시의 영향을 받아 율어, 절구 등 금체시가 위주였다. 변려문과 한시로 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한문학가는 최치원이었다. 함께 보기[편집] 한국의 고대 시가 삼국 시대의 문화 외부 링크[편집]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삼국시대의 문학〔개설〕〉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삼국시대 문학의 특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삼국_시대의_문학&oldid=21906114" 분류: 삼국 시대한국 문학삼국 시대의 문화온달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7월 30일 (월) 21: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삼국 시대의 문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국 시대의 문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국 문학 상고시대의 문학 삼국 시대의 문학 남북국시대의 문학 고려 시대의 문학 조선 전기의 문학 조선 후기의 문학 현대 전기 문학 현대 후기 문학 향가 시조 가사 세계의 문학 문학상 삼국 시대의 문학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성립된 시기와 후삼국 시대까지 대개 서기 1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형성되었다. 목차 1 특징 2 삼국 시대 문학의 전개 3 삼국 시대의 한문 문학 4 문학 분야별 분류 4.1 시가 문학 4.2 설화 문학 4.2.1 설화 문학의 특징 4.2.2 온달 설화 4.2.3 도미전 5 화랑 문학 6 중국과의 교류 7 함께 보기 8 외부 링크 특징[편집] 삼국 시대 이전의 원시 문학을 집단 가무 시대라 한다면 삼국 문학은 개성 자각의 문학 시대라고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어떠한 부족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웅일지라도 개인으로서의 영웅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평범한 필부나 촌녀의 기쁨이나 슬픔을 노래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집단적·객관적·영웅적인 것에서 개인적·주관적·서정적인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 문학은 전대(前代)보다 발전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가요와 설화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가요의 유래에 대한 설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서야 겨우 그 생명을 유지한 사실로 보아 아직도 전대 문학의 잔영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고구려는 서사 문학이 특히 발달하여 많은 설화 문학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 한반도의 동남과 서남쪽에 위치한 신라와 백제는 서정적인 가요 문학이 발달했다. 이 시대의 주요 문학인으로는 〈신집〉을 집필한 이문진, 일본에 학문을 전한 왕인, 백제의 역사서를 편찬한 고흥, 신라의 역사서를 편찬한 거칠부 등이 있다. 삼국 시대 문학의 전개[편집] 삼국 시대에 있어 문화 교류의 중요한 기틀이 된 학자는 유교 문화뿐 아니라 불교 문화의 큰 힘을 입게 되었는데, 불교의 전래는 그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는 제19대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최초의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년)에 동진으로부터 들어온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하였고,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민간에 전래하고, 법흥왕 때 이차돈의 죽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불교는 거의 천 년간 한민족의 신앙을 지배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했고, 이때부터 한문과 같이 들어온 유교와 고구려 말에 들어온 도교(道敎)의 사상과 더불어 한국의 정신적·사회적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삼국 시대의 한문 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문 § 한국의 한문 문학입니다. 한민족은 전래된 한자의 사용으로 이제까지 구송된 역사·문학을 정착시켰다. 유·불·선의 교리에 영향을 받은 문학이 성행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솟구치는 시정을 서술하는 데 한문학은 한문자와 아울러 삼국의 귀족을 매료시키고 여기에서 문학으로서의 한문학이 꽃피게 되었다. 문학 분야별 분류[편집] 시가 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삼국시대 시가입니다. 삼국은 각기 부족 연맹으로부터 세력을 키워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체의 문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이 초창기에는 아직 문화적으로 제의와 밀접히 관련된 원시의 치졸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집단적·제의적 성격을 탈피하여 개인적인 문학예술이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향가는 세련된 개인 창작시로서 남북국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신라 유리왕 연대에 지어진 〈도솔가〉, 〈회소곡〉 등은 농업 국가를 형성한 신라 민족의 제신적인 성격에서 벗어난 비종교적인 시가이다. 향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가 양식이다. 이것은 특히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화랑·승려 등 신라의 중앙 귀족층에 의해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의적·민요적인 것과는 달리 개인 창작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귀족 문학인 것이다. 이 향가의 완성형은 10구체이며, 그 과도기적인 형태로서 4구체와 8구체가 있다. 내용 면에서 보면, 주로 생사(生死) 등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높은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우아한 언어로 표현한 고상한 서정시이다. 현재 전통적인 신라 향가 14수와 균여의 불교찬가로 지어진 11수가 전하고 있다. 신라 말기에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해 향가집 〈삼대목〉이 편찬되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설화 문학[편집] 삼국 시대의 설화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에 성립된 역사서에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전부를 삼국 시대의 문학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은 삼국 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것을 채록했다고 보아 삼국 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삼국 시대의 문학으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동명왕 건국 설화나 혁거세 건국 신화, 탈해 전승 등은 부족 연맹 간의 투쟁을 통해서 승리를 획득하여 고대 국가를 건설한 영웅의 위업을 그린 민족적인 서사 문학이다. 그리고 이민족과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동북아시아에 강대한 고대 제국을 건설한 광개토왕의 비문은 그의 민족적인 위대한 업적과 고구려 민족의 긍지를 표현한 것으로 역시 한 편의 민족 서사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김유신 설화 역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한 인물의 영웅적인 인간상과 활동을 형상화한 것이다. 궁예와 견훤의 설화의 경우는 신라 말기 사회에 있어서 중앙 귀족의 지배 체제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지방 호족 세력의 투쟁을 나타낸 것으로 주목된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 수록된 〈온달 설화〉, 〈호동왕자〉, 《삼국유사》에 수록된 〈호원〉, 〈노힐부득〉, 〈달달박박〉 등 우수한 설화 문학 작품이 많이 있다. 설화 문학의 특징[편집] 고구려의 시가는 〈황조가〉 외에 〈내원성가〉, 〈연양가〉, 〈명주가〉 등이 문헌 가운데 전하고 있으나, 그 가사는 전하지 않고 줄거리만이 《고려사》 삼국속악조에 적혀 있을 뿐이다. 또한 그 외에도 질투를 하다 가죽주머니에 담겨 죽은 〈관나부인 설화〉, 나랏돼지를 잡으러 갔다가 도읍지를 발견하고 주통촌녀를 발견하고 혈통을 이을 왕자를 낳았다는 〈교축일 설화〉, 낙랑왕 최리의 딸과 결혼하여 그 나라의 수호적인 자명고를 파괴케 하고 마침내 싸움에 이긴 〈왕자호동 설화〉, 활을 잘 쏘며 주춧돌 밑에 감추었던 단검을 발견하고 부왕을 찾아보았다는 〈유리태자 설화〉 등은 모두 고구려의 설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대표적 설화로는 〈도미전〉이 전해 오고 있다. 온달 설화[편집] 온달 설화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설화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며 뒤에 민간설화로 전승되었다. 이 설화에는 유교의 삼강의리가 가미된 색채를 발견할 수 있고, 유교적인 열과 효와 충을 보게 된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평강왕 때 얼굴이 못생기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바보 온달이라 불리는 마음씨 좋은 사나이가 있었다. 왕이 울기만 잘하는 그의 딸, 평강공주에게 울려거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 후 공주는 커서 가난하고 어리석은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청하니 이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게 되었다. 공주는 온달과 부부가 되어 왕궁에서 가지고 나온 금붙이로 살림을 장만하고 온달로 하여금 용맹과 지혜를 갖도록 내조를 한 끝에 온달은 용맹한 장군이 되었고, 드디어 후주 무제의 군사를 맞아 예산에서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임금의 칭찬을 받아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뒤에 신라 군사와 싸우다가 공을 세운 후 전사하였다. 도미전[편집] 도미전(都彌傳)은 백제의 대표적 설화로서,《삼국사기》 및 〈오륜 행실도〉 권3 열녀조에 실려 전한다. 주제는 정절로 백제 여인의 결백한 생활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제8 도미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실려 전한다. 도미는 백제 사람인데 그 아내가 매우 아름답고 정절이 있었다. 개루왕이 그 소문을 듣고 시험해 보고자 신하에게 거짓왕의 차림을 시켜 도미의 처에게 보내니 도미의 처가 꾀를 써서 속였다. 뒤에 속은 줄 알고 도미를 잡아 눈을 뺀 후 배에 실어 강에 흘려버리고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니, 처가 다시 지금 월경(月經)이 있는 중이라 속이고 도망쳐서 강에 이르러 통곡했다. 그러자 갑자기 배가 이르기에 그것을 타고 천성도(泉城道)에 이르러 우연히 아직 살아 있는 남편을 만나 함께 고구려로 도망하여 거기서 한평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다. 화랑 문학[편집] 처음 신라는 경주 지역의 6부를 근거로 일어났으며, 진한·마한·가락·가야 등을 통합하여 부족국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아 오다가 뒤에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 비로소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특히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까지에는 화랑제도와 화백과 같은 제도적 운영의 효과가 큰 힘을 발휘했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그때 들어온 불교를 정치와 문화 방면에 이용하여 유·불·도 3교의 결정체인 원화(源花)와 화랑을 신봉하게 되었다. “ 37년 비로소 원화를 받들어 선랑을 삼았다. 처음에 군신이 사람을 알 도리가 없어 모여 함께 놀게 하고 그 행위를 보아 들어 쓰고자 하여 드디어 미녀 두 사람을 골랐으니 하나는 남무요, 하나는 준정이다. 3백여 인을 모았더니 그 두 여자가 서로 시새워하여 준정이 남무를 유인,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에 강물에 던져 죽였다. 그 무리들은 싸우고 흩어지매 그 후로는 남자를 뽑아 단장을 시켜 받들어 화랑을 삼았다. 이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혹은 도의로써 서로 닦고, 혹은 가악으로써 서로 기꺼워하고, 산수에 놀아 멀어도 아니 미치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고 그 옳은 이를 뽑아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현좌 충신이 이로 좇아 뛰어나고, 양장 맹졸이 이로 말미암아 생겼다 하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르되 풍류라, 실은 3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하였으니, 말하자면 들어서는 집에 효하고, 나서는 나라에 충함은 노사구의 뜻이요, 하염없는 일에 처하여 말이 없는 교를 행함은 주주사의 종이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태자의 화라 하고, 또 영호징의 〈신라국기〉에는 귀인의 아름다운 이를 골라 단장을 시켜 받들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나라 사람이 다 높이 섬겼으니 이는 대개 왕화의 방편이라 했다. 원랑으로부터 나말까지 무릇 3백여 인인데 그중 사선이 가장 어질고 또한 세기중과 같다. ” — 각훈(覺訓),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법운조(法雲條) 또한 《삼국사기》 진흥왕조와 사다함조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화랑제도는 진흥왕 때부터 비롯하여 신라 통일 때 그 무리가 큰 활약을 했고, 통일 후에는 한 풍류적 존재로 변모한 듯하다. 그들은 도의와 가락과 자연을 통하여 단결을 도모하였고, 이들 화랑의 생활은 풍류의 도를 이룩하고 이것은 곧 신라 향가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중국과의 교류[편집] 삼국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문화적인 접촉이 있었으며, 한문을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진 고구려는 국가 교육 기관에서 한자 및 중국 고전을 교육했다. 일찍이 자기의 역사를 기록한 유기(留記)가 있었는데, 이를 뒤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신집〉으로 개찬하였다. 그리고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는 한시로서 한국 최초의 것이다. 백제 역시 육조의 문물에 빈번히 접하였으며,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니 고흥이 지은 〈서기〉라는 역사서가 있었으며, 한문을 일본에 전한 것도 백제였다. 신라는 강수, 설총 등의 한문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최고 귀족층인 성골·진골에 대하여 육두품 출신 귀족으로 신라 사회에서 새로운 지식 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신라 말기에 접어들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신진 지식 계급층의 최치원, 최광유, 박인범, 최승우 등의 활약으로 한문학이 크게 일어났다. 육두품 이하 출신인 그들은 정치적으로 신라적인 골품제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더러는 현실을 도피해 신선사상에 귀의하고 더러는 왕건에 협력하여 뒤에 고려의 문신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문학은 외교 문서의 작성, 비문, 역사 서술, 불교적인 저술 등 실제적인 데 필요했으며, 자연히 형식에 치중한 변려문이 발달하였다. 이들 견당 유학생에 의해서 한시도 본격적으로 발달되는데, 당시 한시는 최고 귀족층의 향가 문학에 대립하여 선진 지식층의 문학으로 성장했으며, 당시의 영향을 받아 율어, 절구 등 금체시가 위주였다. 변려문과 한시로 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한문학가는 최치원이었다. 함께 보기[편집] 한국의 고대 시가 삼국 시대의 문화 외부 링크[편집]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삼국시대의 문학〔개설〕〉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삼국시대 문학의 특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삼국_시대의_문학&oldid=21906114" 분류: 삼국 시대한국 문학삼국 시대의 문화온달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7월 30일 (월) 21: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삼국 시대의 문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국 시대의 문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국 문학 상고시대의 문학 삼국 시대의 문학 남북국시대의 문학 고려 시대의 문학 조선 전기의 문학 조선 후기의 문학 현대 전기 문학 현대 후기 문학 향가 시조 가사 세계의 문학 문학상 삼국 시대의 문학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성립된 시기와 후삼국 시대까지 대개 서기 1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형성되었다. 목차 1 특징 2 삼국 시대 문학의 전개 3 삼국 시대의 한문 문학 4 문학 분야별 분류 4.1 시가 문학 4.2 설화 문학 4.2.1 설화 문학의 특징 4.2.2 온달 설화 4.2.3 도미전 5 화랑 문학 6 중국과의 교류 7 함께 보기 8 외부 링크 특징[편집] 삼국 시대 이전의 원시 문학을 집단 가무 시대라 한다면 삼국 문학은 개성 자각의 문학 시대라고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어떠한 부족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웅일지라도 개인으로서의 영웅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평범한 필부나 촌녀의 기쁨이나 슬픔을 노래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집단적·객관적·영웅적인 것에서 개인적·주관적·서정적인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 문학은 전대(前代)보다 발전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가요와 설화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가요의 유래에 대한 설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서야 겨우 그 생명을 유지한 사실로 보아 아직도 전대 문학의 잔영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고구려는 서사 문학이 특히 발달하여 많은 설화 문학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 한반도의 동남과 서남쪽에 위치한 신라와 백제는 서정적인 가요 문학이 발달했다. 이 시대의 주요 문학인으로는 〈신집〉을 집필한 이문진, 일본에 학문을 전한 왕인, 백제의 역사서를 편찬한 고흥, 신라의 역사서를 편찬한 거칠부 등이 있다. 삼국 시대 문학의 전개[편집] 삼국 시대에 있어 문화 교류의 중요한 기틀이 된 학자는 유교 문화뿐 아니라 불교 문화의 큰 힘을 입게 되었는데, 불교의 전래는 그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는 제19대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최초의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년)에 동진으로부터 들어온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하였고,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민간에 전래하고, 법흥왕 때 이차돈의 죽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불교는 거의 천 년간 한민족의 신앙을 지배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했고, 이때부터 한문과 같이 들어온 유교와 고구려 말에 들어온 도교(道敎)의 사상과 더불어 한국의 정신적·사회적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삼국 시대의 한문 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문 § 한국의 한문 문학입니다. 한민족은 전래된 한자의 사용으로 이제까지 구송된 역사·문학을 정착시켰다. 유·불·선의 교리에 영향을 받은 문학이 성행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솟구치는 시정을 서술하는 데 한문학은 한문자와 아울러 삼국의 귀족을 매료시키고 여기에서 문학으로서의 한문학이 꽃피게 되었다. 문학 분야별 분류[편집] 시가 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삼국시대 시가입니다. 삼국은 각기 부족 연맹으로부터 세력을 키워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체의 문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이 초창기에는 아직 문화적으로 제의와 밀접히 관련된 원시의 치졸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집단적·제의적 성격을 탈피하여 개인적인 문학예술이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향가는 세련된 개인 창작시로서 남북국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신라 유리왕 연대에 지어진 〈도솔가〉, 〈회소곡〉 등은 농업 국가를 형성한 신라 민족의 제신적인 성격에서 벗어난 비종교적인 시가이다. 향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가 양식이다. 이것은 특히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화랑·승려 등 신라의 중앙 귀족층에 의해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의적·민요적인 것과는 달리 개인 창작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귀족 문학인 것이다. 이 향가의 완성형은 10구체이며, 그 과도기적인 형태로서 4구체와 8구체가 있다. 내용 면에서 보면, 주로 생사(生死) 등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높은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우아한 언어로 표현한 고상한 서정시이다. 현재 전통적인 신라 향가 14수와 균여의 불교찬가로 지어진 11수가 전하고 있다. 신라 말기에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해 향가집 〈삼대목〉이 편찬되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설화 문학[편집] 삼국 시대의 설화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에 성립된 역사서에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전부를 삼국 시대의 문학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은 삼국 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것을 채록했다고 보아 삼국 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삼국 시대의 문학으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동명왕 건국 설화나 혁거세 건국 신화, 탈해 전승 등은 부족 연맹 간의 투쟁을 통해서 승리를 획득하여 고대 국가를 건설한 영웅의 위업을 그린 민족적인 서사 문학이다. 그리고 이민족과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동북아시아에 강대한 고대 제국을 건설한 광개토왕의 비문은 그의 민족적인 위대한 업적과 고구려 민족의 긍지를 표현한 것으로 역시 한 편의 민족 서사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김유신 설화 역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한 인물의 영웅적인 인간상과 활동을 형상화한 것이다. 궁예와 견훤의 설화의 경우는 신라 말기 사회에 있어서 중앙 귀족의 지배 체제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지방 호족 세력의 투쟁을 나타낸 것으로 주목된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 수록된 〈온달 설화〉, 〈호동왕자〉, 《삼국유사》에 수록된 〈호원〉, 〈노힐부득〉, 〈달달박박〉 등 우수한 설화 문학 작품이 많이 있다. 설화 문학의 특징[편집] 고구려의 시가는 〈황조가〉 외에 〈내원성가〉, 〈연양가〉, 〈명주가〉 등이 문헌 가운데 전하고 있으나, 그 가사는 전하지 않고 줄거리만이 《고려사》 삼국속악조에 적혀 있을 뿐이다. 또한 그 외에도 질투를 하다 가죽주머니에 담겨 죽은 〈관나부인 설화〉, 나랏돼지를 잡으러 갔다가 도읍지를 발견하고 주통촌녀를 발견하고 혈통을 이을 왕자를 낳았다는 〈교축일 설화〉, 낙랑왕 최리의 딸과 결혼하여 그 나라의 수호적인 자명고를 파괴케 하고 마침내 싸움에 이긴 〈왕자호동 설화〉, 활을 잘 쏘며 주춧돌 밑에 감추었던 단검을 발견하고 부왕을 찾아보았다는 〈유리태자 설화〉 등은 모두 고구려의 설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대표적 설화로는 〈도미전〉이 전해 오고 있다. 온달 설화[편집] 온달 설화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설화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며 뒤에 민간설화로 전승되었다. 이 설화에는 유교의 삼강의리가 가미된 색채를 발견할 수 있고, 유교적인 열과 효와 충을 보게 된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평강왕 때 얼굴이 못생기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바보 온달이라 불리는 마음씨 좋은 사나이가 있었다. 왕이 울기만 잘하는 그의 딸, 평강공주에게 울려거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 후 공주는 커서 가난하고 어리석은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청하니 이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게 되었다. 공주는 온달과 부부가 되어 왕궁에서 가지고 나온 금붙이로 살림을 장만하고 온달로 하여금 용맹과 지혜를 갖도록 내조를 한 끝에 온달은 용맹한 장군이 되었고, 드디어 후주 무제의 군사를 맞아 예산에서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임금의 칭찬을 받아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뒤에 신라 군사와 싸우다가 공을 세운 후 전사하였다. 도미전[편집] 도미전(都彌傳)은 백제의 대표적 설화로서,《삼국사기》 및 〈오륜 행실도〉 권3 열녀조에 실려 전한다. 주제는 정절로 백제 여인의 결백한 생활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제8 도미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실려 전한다. 도미는 백제 사람인데 그 아내가 매우 아름답고 정절이 있었다. 개루왕이 그 소문을 듣고 시험해 보고자 신하에게 거짓왕의 차림을 시켜 도미의 처에게 보내니 도미의 처가 꾀를 써서 속였다. 뒤에 속은 줄 알고 도미를 잡아 눈을 뺀 후 배에 실어 강에 흘려버리고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니, 처가 다시 지금 월경(月經)이 있는 중이라 속이고 도망쳐서 강에 이르러 통곡했다. 그러자 갑자기 배가 이르기에 그것을 타고 천성도(泉城道)에 이르러 우연히 아직 살아 있는 남편을 만나 함께 고구려로 도망하여 거기서 한평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다. 화랑 문학[편집] 처음 신라는 경주 지역의 6부를 근거로 일어났으며, 진한·마한·가락·가야 등을 통합하여 부족국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아 오다가 뒤에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 비로소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특히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까지에는 화랑제도와 화백과 같은 제도적 운영의 효과가 큰 힘을 발휘했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그때 들어온 불교를 정치와 문화 방면에 이용하여 유·불·도 3교의 결정체인 원화(源花)와 화랑을 신봉하게 되었다. “ 37년 비로소 원화를 받들어 선랑을 삼았다. 처음에 군신이 사람을 알 도리가 없어 모여 함께 놀게 하고 그 행위를 보아 들어 쓰고자 하여 드디어 미녀 두 사람을 골랐으니 하나는 남무요, 하나는 준정이다. 3백여 인을 모았더니 그 두 여자가 서로 시새워하여 준정이 남무를 유인,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에 강물에 던져 죽였다. 그 무리들은 싸우고 흩어지매 그 후로는 남자를 뽑아 단장을 시켜 받들어 화랑을 삼았다. 이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혹은 도의로써 서로 닦고, 혹은 가악으로써 서로 기꺼워하고, 산수에 놀아 멀어도 아니 미치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고 그 옳은 이를 뽑아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현좌 충신이 이로 좇아 뛰어나고, 양장 맹졸이 이로 말미암아 생겼다 하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르되 풍류라, 실은 3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하였으니, 말하자면 들어서는 집에 효하고, 나서는 나라에 충함은 노사구의 뜻이요, 하염없는 일에 처하여 말이 없는 교를 행함은 주주사의 종이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태자의 화라 하고, 또 영호징의 〈신라국기〉에는 귀인의 아름다운 이를 골라 단장을 시켜 받들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나라 사람이 다 높이 섬겼으니 이는 대개 왕화의 방편이라 했다. 원랑으로부터 나말까지 무릇 3백여 인인데 그중 사선이 가장 어질고 또한 세기중과 같다. ” — 각훈(覺訓),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법운조(法雲條) 또한 《삼국사기》 진흥왕조와 사다함조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화랑제도는 진흥왕 때부터 비롯하여 신라 통일 때 그 무리가 큰 활약을 했고, 통일 후에는 한 풍류적 존재로 변모한 듯하다. 그들은 도의와 가락과 자연을 통하여 단결을 도모하였고, 이들 화랑의 생활은 풍류의 도를 이룩하고 이것은 곧 신라 향가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중국과의 교류[편집] 삼국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문화적인 접촉이 있었으며, 한문을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진 고구려는 국가 교육 기관에서 한자 및 중국 고전을 교육했다. 일찍이 자기의 역사를 기록한 유기(留記)가 있었는데, 이를 뒤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신집〉으로 개찬하였다. 그리고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는 한시로서 한국 최초의 것이다. 백제 역시 육조의 문물에 빈번히 접하였으며,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니 고흥이 지은 〈서기〉라는 역사서가 있었으며, 한문을 일본에 전한 것도 백제였다. 신라는 강수, 설총 등의 한문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최고 귀족층인 성골·진골에 대하여 육두품 출신 귀족으로 신라 사회에서 새로운 지식 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신라 말기에 접어들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신진 지식 계급층의 최치원, 최광유, 박인범, 최승우 등의 활약으로 한문학이 크게 일어났다. 육두품 이하 출신인 그들은 정치적으로 신라적인 골품제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더러는 현실을 도피해 신선사상에 귀의하고 더러는 왕건에 협력하여 뒤에 고려의 문신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문학은 외교 문서의 작성, 비문, 역사 서술, 불교적인 저술 등 실제적인 데 필요했으며, 자연히 형식에 치중한 변려문이 발달하였다. 이들 견당 유학생에 의해서 한시도 본격적으로 발달되는데, 당시 한시는 최고 귀족층의 향가 문학에 대립하여 선진 지식층의 문학으로 성장했으며, 당시의 영향을 받아 율어, 절구 등 금체시가 위주였다. 변려문과 한시로 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한문학가는 최치원이었다. 함께 보기[편집] 한국의 고대 시가 삼국 시대의 문화 외부 링크[편집]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삼국시대의 문학〔개설〕〉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삼국시대 문학의 특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삼국_시대의_문학&oldid=21906114" 분류: 삼국 시대한국 문학삼국 시대의 문화온달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7월 30일 (월) 21: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파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파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가톨릭 용어에 관한 것입니다. 같은 이름의 작품에 대해서는 파문 (드라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 탄생 죽음 부활 승천 역사적 예수 기초 교회 신약성경 사도 천국 복음 연표 베드로 바울로 경전 구약성경 신약성경 성경 목록 정경 외경 다양한 기독교의 정경 기독교 신학 구원 세례 성찬·성체성사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가톨릭주의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변증론 종말론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 초대교회 콘스탄티누스 공의회 사도신경 성전 전도 동서 교회의 분열 십자군 종교 개혁 반종교 개혁 교파 가톨릭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가톨릭교회 정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개신교 성공회 루터교 침례교 칼뱅주의 감리교 오순절운동 복음주의 재림주의 신사도운동 성경복귀운동 재세례파 후스파 플리머스 형제단 퀘이커 회복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여호와의 증인 단일오순절교 유니테리언주의 기독교 관련 설화 창조주의 노아의 방주 기타 일반 강론·설교 기도 전례 교회력 성화상 음악 미술 에큐메니즘 유신진화론 타종교 관계 비판 기독교 포털 v • d • e • h 파문(破門, 영어: excommunication)은 기독교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리나 윤리상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기독교인을 공동체로부터 축출하는 조처를 뜻한다.[1] 보통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바깥을 뜻하는 Ex와 모든 성인의 통공(사도신경 참조)를 뜻하는 Communion이 더해진 말이다. 개신교에서의 권징과 비슷하다. 파문을 당한 사람은 공동체에서 쫓겨나, 하느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성사에 참석할 권리를 빼앗기지만, 세례의 효력이 없어지는 일은 없으므로 기독교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몇 가지 방식은 모든 기독교 교회·교단, 그리고 더나아가 모든 신앙공동체의 권징 대상에 속한다. 목차 1 파문의 조건 2 역사적 사례 3 기독교 공동체에 따른 치리 3.1 로마 가톨릭 3.1.1 자동 파문 3.2 개신교 3.2.1 성공회 3.2.2 개혁교회(Reformed) 3.2.3 루터교회 3.2.4 그외 설명 4 각주 파문의 조건[편집] 세례를 받았고 파문에 해당하는 교회법의 조항(1321조)을 형식적,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큼 위반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반항한 신자여야 한다. 역사적 사례[편집] 카노사의 굴욕 마르틴 루터의 파문. 1521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된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에 따라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한다. 장홍빈 알로이시오 前 신부 파문. 2008년 1월 21일 마리아의 구원방주 사건과 관련하여 이단을 추종한 사유로 파문됨. 기독교 공동체에 따른 치리[편집] 로마 가톨릭[편집] 로마 가톨릭교회는 파문을 2가지로 구분했다. 그중 하나는 '톨레라투스'(관용을 베푸는 것), 다른 하나는 '비탄두스'(상대하지 못할 사람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2번째에 해당하는 가혹한 파문을 내리려면 이런 파문을 내리게 되는 특정 범죄를 제외하고는 먼저 범죄자를 대중 앞에서 '비탄두스'라는 이름으로 공포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교황청이 직접 이러한 파문을 내렸다. 이 파문은 대단히 큰 범죄에 한정되었다. 두 종류의 파문 모두 교회의 성사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교회법전에는 파문받을 행위가 상세히 나열되어 있다. 1983년 1월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목록을 개정하여 낙태, 고해의 비밀약속을 깨는 일, 사제의 도움을 받아 죄를 지은 사람을 그 사제가 사면하는 일, 영성체 집행자로 축성된 사람을 모독하는 일, 바티칸의 승인 없이 주교를 임명하는 일, 교황에게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 이단, '신앙을 버리는 일' 등을 포함시켰다. 만일 파문을 당한 사람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 해당하는 고행을 하면 사면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사제가 파문을 사면해주기도 하지만,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경우'(in periculo mortis)를 제외하고는 사면은 통상 주교 또는 교황만의 권한이다. 파문은 정직제재(停職制裁) 및 금지제재라는 2개의 관련징계 방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정직제재는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며, 그들의 권리 일부나 전부를 박탈한다. 금지제재는 신자를 신앙공동체에서 축출하지는 않지만 특정 성사, 성무, 때로는 성사나 성무 전체를 금지한다. 자동 파문[편집]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서 특정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경우 굳이 교황청에 알리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파문 조치되는 경우가 있다. 이 자동파문은 '비탄두스'에 해당되는 파문으로 질이 엄청나게 좋지 않기 때문에 승인 없이 파문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사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이단 종파를 추종하거나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면 그렇게 된다. 현재 공식적으로 자동파문 사유가 되는 것에는 다음과 같다. 마리아의 구원방주와 접촉하면 자동 파문된다. 개신교[편집] 개신교에서는 파문대신 권징 곧 교회에서 죄를 지적하고 처벌하는 일이라고 한다. 성공회[편집] 성공회에서는 교구를 지도하는 주교가 성직자에 대한 면직(성직자의 권리를 박탈함)등으로 처벌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교회를 지도하는 사제도 교인이 신자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했거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킨 경우 처벌할 권리가 있다. 개혁교회(Reformed)[편집] 파문이라는 말보다는 교회 징계라는 말을 쓴다.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잘못된 일이 생겨서 징계를 행하고 필요할 경우에 출교를 선언할 권위를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협의체에 부여한다. 1646년에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0항은 징계의 공정한 단계를 '잘못을 지적하는 훈계, 일정 기간의 성만찬 참여금지 즉,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모시지 못하게 하는 처벌,교회에서 추방하는 출교'로 규정한다. 한국 장로교회에서도 예장 통합의 경우 양심수를 제외하고 실정법에 의해 처벌된 자, 이단적 교설을 주장한 자, 도덕적으로 죄를 지은 자등에 대해 처벌할 수 있다. 루터교회[편집] 루터교 전통은 마르틴 루터의 교리문답을 따른다. 그 교리문답은 '열쇠의 권위'에 대해서 말하며, 징계를 공공연하고 완고한 죄인의 성찬 참여를 거부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성직자와 회중이 모두 그러한 징계를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 그외 설명[편집] 참고로 교회와 정치간의 소모적 대립을 막기 위해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민주주의 전통에 따라 자유교회 전통을 지닌 미국의 개신교 교회에서는 죄인에게 '교회가 책임을 묻는다. 회중적인 정책과 '신자의 세례' 원칙을 갖고 있는 교파에서는 징계가 매우 엄격할 때가 종종 있다. '(churching)라는 말이 출교를 가리킨다. 각주[편집] ↑ 가톨릭 대사전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GND: 4153322-7 HDS: 9625 NDL: 0057664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파문&oldid=23648578" 분류: 파문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Brezhoneg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Interlingua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LëtzebuergeschLimburgsLumbaart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РусиньскыйSicilianu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VènetoTiếng ViệtWalon吴语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6일 (수) 22:0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프 마이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프 마이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프 마이어 개인 정보전체 이름 Josef Dieter "Sepp" Maier출생일 1944년 2월 28일(1944-02-28) (75세)출생지 서독 메텐키 183cm포지션 은퇴 (과거 골키퍼)청소년 클럽 기록1959-1962 바이에른 뮌헨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62-1979 바이에른 뮌헨 5360(0)국가대표팀 기록1961-1962 1963 1966-1979 서독 청소년 서독 아마추어 서독 110(0) 40(0) 950(0)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요제프 디터 "제프" 마이어 (독일어: Josef Dieter "Sepp" Maier, 1944년 2월 28일, 바이에른주 메텐 ~ )는 독일의 전직 축구 선수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1] 그의 별명인 "안칭의 고양이"(Die Katze von Anzing)는 그의 빠른 반사신경에서 유래하였다. 목차 1 선수 경력 1.1 FC 바이에른 뮌헨 1.2 국가대표팀 2 은퇴 이후 3 사생활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팀 4.3 개인 5 각주 선수 경력[편집] FC 바이에른 뮌헨[편집] 바이에른주 메텐 출신으로, 그는 프로선수 시절 FC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활약하였다. 1958년에 그는 바이에른 청소년팀에 합류하였다.[2] 1970년대, 그는 프란츠 베켄바워,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 울리 회네스, 게르트 뮐러와 더불어 바이에른 전성기때의 일원으로 독일팀으로는 현재까지 유일하게 유러피언컵 3연패를 거두었다. 1966년과 1979년 사이, 그는 분데스리가 경기에 442번 연속 출장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독일 최다연속 출장기록이다. 국가대표팀[편집] 마이어는 4차례 FIFA 월드컵의 서독 국가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잉글랜드에서 열린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한스 틸코프스키에 밀려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였다. 멕시코에서 열린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그는 논란이 없는 주전으로, 우루과이와의 3위 결정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 출장하였다.[3] (3-4로 패한 이탈리아와의 준결승 희대의 명승부를 포함하여) 홈 안방에서 열린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그는 능력의 정점을 보였고, 프란츠 베켄바워, 베르티 포크츠, 게르트 뮐러, 파울 브라이트너와 더불어 전설적인 서독 국가대표팀의 수비 중추를 담당하였고 서독을 결승전까지 이끌어냈다. 마이어에게 제2의 고향으로 여겨진 뮌헨에서 열린 요한 크라위프가 이끄는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에서, 서독은 2-1 승리를 거두고, 홈 안방에서 월드컵 우승을 거두었다. 4년 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그는 기량이 하락하였으나, 여전히 노쇠하지 않았음을 보였다. 그러나 서독은 이 대회에서 2라운드에 탈락하였다. 그 전에, 마이어는 UEFA 유로 1972를 우승하였고, UEFA 유로 1976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결승전에 상대하였으나, 승부차기에서 패하였다. 그는 서독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95경기를 출전하였다. 은퇴 이후[편집] 마이어는 클럽과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역임하였고, 올리버 칸의 멘토로도 활약하였다. 2004년 10월, 그는 독일 대표팀 주전 골키퍼 자리로는 아스널 소속으로 뛰고 있던 옌스 레만보다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뛰고 있던 올리버 칸을 중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과 언쟁을 벌인 뒤, 골키퍼 코치직에서 해임당하였다.[4] 그는 이후에 바이에른 뮌헨에서 골키퍼 코치로 활동하다 2008년에 은퇴하였다.[5] 사생활[편집] 그는 골키핑에서의 기량 외에도, 기다란 반바지와 비대한 장갑, 그리고 유머 감각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에서의 경기에서 상대팀이 그의 골대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지루함을 느꼈다. 그때, 오리가 피치에 난입하였고 마이어는 그 오리를 잡으려고 했었다.[6] 2009년 6월, 그는 바이에른주 정부로부터 인생 달성상을 받았다.[7] 클럽 경력 리그 컵 합계 시즌 클럽 리그 출장 골 출장 골 출장 골 독일 리그 DFB-포칼 합계 1962–63 FC 바이에른 뮌헨 레기오날리가 4 0 1963–64 23 0 1964–65 36 0 1965-66 푸스볼-분데스리가 31 0 1966-67 34 0 1967-68 34 0 1968-69 34 0 1969-70 34 0 1970-71 34 0 1971-72 34 0 1972-73 34 0 1973-74 34 0 1974-75 34 0 1975-76 34 0 1976-77 34 0 1977-78 34 0 1978-79 34 0 1979-80 0 0 합계 독일 536 0 경력 합계 536 0 수상[편집] 클럽[편집] 분데스리가: 1968-69, 1971-72, 1972-73, 1973-74 DFB-포칼: 1965-66, 1966-67, 1968-69, 1970-71 유러피언컵: 1973-74, 1974-75, 1975-76 UEFA 컵위너스컵: 1966-67 인터콘티넨털컵: 1976 국가대표팀[편집] FIFA 월드컵: 우승: 1974 준우승: 1966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972 준우승: 1976 개인[편집]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75, 1977, 1978 각주[편집] ↑ fussballdaten.de. “Sepp Maier” (독일어). 2010년 2월 6일에 확인함. ↑ fcbayern.de. “Bayern Hall of Fame: Sepp Maier”. ↑ 제프 마이어 FIFA 주관 대회 기록 - 국제축구연맹 (영어) ↑ Süddeutsche Zeitung (2004년 10월 7일). “Letzte Warnung für Sepp Maier” (독일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fcbayern.de (2008년 5월 17일). “Bayern board honours Hitzfield, Kahn and co.”. ↑ FIFA (2010년 1월 29일). “Bring in the clowns”. ↑ Süddeutsche Zeitung (2009년 6월 29일). “Höchstleistung auf dem Rasen” (독일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vdeh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1966년 FIFA 월드컵 준우승 1 틸코프스키 2 회트게스 3 슈넬링거 4 베켄바워 5 슐츠 6 베버 7 브륄스 8 할러 9 젤러 (주장) 10 헬트 11 에메리히 12 오베라트 13 호르니크 14 루츠 15 파츠케 16 로렌츠 17 파울 18 질로프 19 크레머 20 그라보프스키 21 베르나르트 22 마이어 감독: 쇤 vdeh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1970년 FIFA 월드컵 3위 1 마이어 2 회트게스 3 슈넬링거 4 베켄바워 5 슐츠 6 베버 7 포크츠 8 할러 9 젤러 (주장) 10 헬트 11 피히텔 12 오베라트 13 뮐러 14 리부다 15 파츠케 16 로렌츠 17 뢰어 18 질로프 19 디트리히 20 그라보프스키 21 만글리츠 22 볼터 감독: 쇤 vdeh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1972 우승 (1회) 1 마이어 2 회트게스 3 브라이트너 4 슈바르첸베크 5 베켄바워 (주장) 6 비머 7 그라보브스키 8 회네스 9 하인케스 10 네처 11 크레머스 12 클레프 13 뮐러 14 포크츠 15 본호프 16 벨라 17 뢰어 18 쾨펠 감독: 쇤 vdeh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1974년 FIFA 월드컵 우승 (2회) 1 마이어 2 포크츠 3 브라이트너 4 슈바르첸베크 5 베켄바워 (주장) 6 회트게스 7 비머 8 쿨만 9 그라보프스키 10 네처 11 하인케스 12 오베라트 13 뮐러 14 회네스 15 플로헤 16 본호프 17 횔첸바인 18 헤어초크 19 카펠만 20 H. 크레머스 21 니크부어 22 클레프 감독: 쇤 vdeh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1976 준우승 1 마이어 2 포크츠 3 디츠 4 슈바르첸베크 5 베켄바워 (주장) 6 비머 7 본호프 8 회네스 9 뮐러 10 베어 11 횔첸바인 12 보름 13 다너 14 봉가르츠 15 플로헤 16 노클리 17 칼츠 18 카르구스 감독: 쇤 vdeh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1978년 FIFA 월드컵 1 마이어 2 포크츠 (주장) 3 디츠 4 뤼스만 5 칼츠 6 본호프 7 아브람치크 8 치머만 9 피셔 10 플로헤 11 루메니게 12 슈바르첸베크 13 크노프카 14 D. 뮐러 15 베어 16 쿨만 17 횔첸바인 18 체베 19 보름 20 H. 뮐러 21 카르구스 22 부르덴스키 감독: 쇤 vdeh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60: 젤러 1961: 모어로크 1962: 슈넬링어 1963: 셰퍼 1964: 젤러 1965: 틸코브스키 1966: 베켄바워 1967: 뮐러 1968: 베켄바워 1969: 뮐러 1970: 젤러 1971: 포크츠 1972: 네처 1973: 네처 1974: 베켄바워 1975: 마이어 1976: 베켄바워 1977: 마이어 1978: 마이어 1979: 포크츠 1980: 루메니게 1981: 브라이트너 1982: 푀어슈터 1983: 푈러 1984: 슈마허 1985: 브리겔 1986: 슈마허 1987: 란 1988: 클린스만 1989: 헤슬러 1990: 마테우스 1991: 쿤츠 1992: 헤슬러 1993: 쾨프케 1994: 클린스만 1995: 자머 1996: 자머 1997: 콜러 1998: 비어호프 1999: 마테우스 2000: 칸 2001: 칸 2002: 발라크 2003: 발라크 2004: 아이우통 2005: 발라크 2006: 클로제 2007: 고메스 2008: 리베리 2009: 그라피치 2010: 로번 2011: 노이어 2012: 로이스 2013: 슈바인슈타이거 2014: 노이어 2015: 더 브라위너 2016: 보아텡 2017: 람 vdehFIFA 100UEFA 네드베트 네스타 네이스컨스 다비츠 다사예프 달글리시 데샹 델 피에로 드사이 라울 레네 판 더 케르크호프 레이카르트 레츠베르 렌센브링크 로시 루메니게 루이스 엔리케 리네커 리베라 마소푸스트 마이어 마테우스 말디니 뮐러 미카엘 라우드루프 바레시 바조 발라크 뱅크스 베르고미 베르흐캄프 베스트 베컴 베켄바워 보니에크 보니페르티 부트라게뇨 부폰 브라이트너 브리안 라우드루프 비에라 비에리 빌리 판 더 케르크호프 세이도르프 솁첸코 슈마이켈 슈케르 스토이치코프 시어러 앙리 에우제비우 엠레 오언 젤러 지단 찰턴 초프 칸 캉토나 코파 쾰레만스 크라위프 클라위버르트 클린스만 키건 킨 토티 튀람 트레소르 트레제게 파케티 파팽 파프 판 니스텔로이 판 데르 엘스트 판 바스턴 퐁텐 푸슈카시 플라티니 피구 피레스 하지 후이 코스타 휠릿 CONMEBOL 니우통 산투스 디 스테파노 로메리토 마라도나 바티스투타 발데라마 베론 사네티 사모라노 사비올라 소크라치스 시보리 자우마 산투스 주니오르 지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카푸 켐페스 쿠비야스 크레스포 파사레야 파우캉 펠레 프란체스콜리 피게로아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호마리우 호베르투 카를로스 히바우두 히벨리누 CAF 디우프 밀라 아베디 펠레 오코차 웨아 CONCACAF 산체스 에이커스 햄 AFC 나카타 홍명보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19215182 LCCN: n86860794 ISNI: 0000 0001 1007 8133 GND: 118576429 뮤직브레인즈: 7320db7b-6f56-4531-97ee-a49aafcb8721 NKC: xx001120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프_마이어&oldid=23526302" 분류: 1944년 태어남독일의 축구 선수FC 바이에른 뮌헨의 축구 선수196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7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7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197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FIFA 월드컵 우승팀 선수FIFA 100살아있는 사람축구 골키퍼UEFA 유로 1972 참가 선수UEFA 유로 1976 참가 선수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독일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연방공로십자소수장 수훈자분데스리가의 축구 선수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자숨은 분류: CS1 - 독일어 인용 (de)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Boarisch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atviešuMalagasy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4일 (목) 10: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한량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량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량무 서울특별시의 무형문화재종목 무형문화재 제45호 (2014년 5월 15일 지정)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한량춤(한량무, 김무철) 전라북도의 무형문화재종목 무형문화재 제44호 (2011년 9월 30일 지정)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한량무(閑良舞) 경상남도의 무형문화재종목 무형문화재 제3호 (1979년 5월 2일 지정)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 산171-1, 진주전통예술회관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한량무(閑良舞)는 관아의 행사 때 여흥으로 추어진 것으로 일종의 풍자 춤극이다. 한량(閑良)이란 벼슬 못한 호반(虎班)의 이름으로, 풍류를 알고 호협한 사나이의 별명이다. 춤의 내용은 한량과 별감(別監)이 기생(妓生)을 데리고 즐겁게 노는 자리에 승려가 나타나 이를 보고 기생에게 혹하여 멋진 춤으로 기생의 환심을 사니, 기생은 마침내 한량과 별감을 배반하고 승려에게로 가는 남녀의 관계를 그린 춤이다. 그 뒤 한량무는 광무대(光武臺)·연흥사(延興社)와 가설무대에서 연출하여 성행했었다.[1] 목차 1 개요 1.1 유래 1.2 내용 1.3 장단 2 전승 3 같이 보기 4 각주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개요[편집] 유래[편집] 원래는 남사당패에서 행해지던 놀이춤으로, 사당패가 그 기원을 조선 후기로 발생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로 추측한다. 원래의 4~5인이 추던 남사당패의 한량무는 사라지고, 진주의 교방에서 전해오는 7인의 한량무만 남아 있다. 진주의 한량무는 고종 때 진주목사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한량무에 있는 승무가 기록되어 있고, 교방에서 유행하던 춤극으로 보인다. 내용[편집] 한량이란 양반이면서 벼슬도 못하고 놀고 있는 사람으로, 보통 학문은 뒷전이고 주색잡기에 빠져서 놀고먹는 사람을 말한다. 한량무에는 이런 한량과, 탐관오리 별감, 여자를 밝히는 타락한 승려, 지조없이 파계승과 함부로 놀아나는 색시가 등장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관찰하며, 비꼬는 상좌와 마당쇠 그리고 주모가 양념을 더 하듯 맛을 낸다. 한량과 색시가 무대에 등장하여 어우러져 춤을 추면 상좌가 중을 모시고 무대에 등장한다. 상좌가 엎드려 있는 승려에게 즐겁게 춤추고 있는 색시를 유혹하라고 유도하여 한량이 색시에게 꽃신을 사주려고 퇴장하자 중이 색시를 유혹하여 둘이 함께 춤춘다. 이때 한량이 다시 등장하여 꽃신을 색시에게 신기고 중은 퇴장한다. 중이 다시 등장하여 꽃신을 벗기고 자기가 사온 꽃신을 신기는데, 색시의 태도에 화가 난 한량이 어쩔 줄 모른다. 상좌가 이를 보고 술상을 마련하여 한량에게 대접하고 사과하지만 상좌를 때리려고 하여 상좌가 도망 다닌다. 중과 상좌가 술을 마시다가 한량에게 다가가 사과한다. 그 틈에 한 구석에서 색시가 서성거리고 있음을 알아챈 중이 일어나 색시를 업고 도망가려고 하지만 색시가 이를 뿌리치고 한량에게 달려가 품에 안긴다. 한량은 이를 뿌리치고 발길로 걷어차 색시가 엎드려 운다. 이 광경을 본 한량은 다가가서 색시를 안아 일으키고 춤추기 시작하여 상좌와 중도 어울려 춤으로 마무리한다.[2] 그 춤사위와 몸짓을 보면, 한량은 우아함과 기품이 있고, 바람난 색시는 현란하면서도 절제된 교태가 있다. 별감은 우직스러우면서도 부드러움을 갈무리했고 승려는 일탈(逸脫)하면서도 고요함이 숨어 있다. 주모는 경망스러움과 해학(諧謔)을 춤추고, 상좌는 혼돈 속에서도 믿음을 나타내고, 마당쇠는 순종 속에서도 자기주장을 웃음으로 표출하는 재치를 보인다. 이 일곱 사람의 어울림으로 생기는 묘한 불협화음 속에서 조화를 찾아내는 반시간 정도의 몸 사위는 참으로 절묘하다. 기원은 남사당패에서 남자들이 추던 무용이지만 교방계의 무용으로 옮겨오면서도 남성적인 춤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역동성과 다양성을 잃지않고 있다. 장단[편집] 장단은 북, 장구, 피리, 대금, 아쟁 등을 사용해서 맞춘다. 전승[편집] 경남 진주시 판문동 산171-1번지 전통예술문화회관 진주 한량무보존회에 소재지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진주논개제 진주삼천포농악 각주[편집]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 디지털진주문화대전, 이수덕. “진주한량무”.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년 12월 20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한량무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량춤(한량무, 김무철) (金武喆)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량무 (閑良舞)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진주논개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의암별제) vdeh한국 무용궁중무용 가인전목단 검무 곡파무 공막무 근천정무 경풍도무 도솔가무 동동무 무고 무애무 문덕곡무 몽금척무 봉래의무 수명명무 수보록무 수연장무 선유락 성택무 아박무 오양선 연백복지무 연화대무 육화대무 장생보연지무 진주검무 진주포구락무 처용무 첨수무 첩승무 춘앵전 초무 최화무 포구락 하성명무 하황은무 학무 항장무 헌선도무 향발무 민속무용 강강술래 남무 농악무 무무 무동춤 살풀이춤 소고춤 승무 입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의식무용 나비춤 바라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량무&oldid=22981596" 분류: 서울특별시의 무형문화재전라북도의 무형문화재경상남도의 무형문화재서울 성북구의 문화재전주시의 문화재진주시의 문화재조선의 무용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Bahasa Indonesi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1일 (일) 19: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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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다몬 산성의 항공사진, 1985년 촬영〈일본국토교통성〉 다몬 산성(일본어: 多聞山城 다몬야마조[*])은 나라현 나라 시 호렌 정에 있던 평산성이다. 다몬 성(多聞城)이라고도 한다. 목차 1 개요 2 역사 2.1 센고쿠 시대 2.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2.3 현재 3 성곽 3.1 현재의 성곽 터 3.2 발굴조사 4 각주 5 같이 보기 개요[편집] 도다이지의 다문천왕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미켄지 산에 축성했다. 산의 높이 115m 비고 30m의 나지막한 산이다. 성에서 사천왕중 하나인 다문천왕의 제를 지냈기 때문에 미켄지 산은 다몬 산이라고 불렸다. 현재에도 성터가 있는 산을 다몬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의 동쪽에는 나라의 입구라는 나라사카가 있고, 남동쪽에는 도다이지(東大寺), 남쪽에는 고후쿠지(興福寺)가 있으며, 이를 두루 볼 수 있는 곳에 성이 위치하고 있어 야마토 국의 지배 거점이 되었다. 성안에는 어전 등 건물이 들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4층 천수 혹은 4층 망루가 지어져 근세성곽에 있어서의 천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모습은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에 의해 유럽에도 전해졌다. 에도 시대에 기록된《화훈간》에서는 천수의 시작은 아즈치 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일설에서는 다문 산성의 것을 거론하기도 한다. 벽은 흰색이며,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으며, 석벽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벽위에는 건물이 길게 늘어선 나가야 형태의 망루를 세웠고, 이것이 다몬 망루의 시초였다. 이후, 전국의 성에서 이 다몬 망루를 채택해 짓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선도적 역할을 한 다몬 산성인 까닭에 중세 성곽의 형태를 벗어나 근세 성곽으로의 이행 과정의 과도기적 성으로 볼 수 있으며 성곽발달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성이다. 안타깝게도 다몬 산성은 1576년 야마토 국 슈고로 부임한 쓰쓰이 준케이가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성을 파각하였고, 성의 부재는 쓰쓰이 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 중 몇몇은 고리야마 산성에 사용되었다. 현재 성터에는 나라 시립 와카쿠사 중학교가 지어져있다. 주변에는 다몬 산성의 석벽으로 추정되는 돌로 만들어진 석불이 몇 기 남아있다. 역사[편집] 센고쿠 시대[편집] 마쓰나가 히사히데 센고쿠 시대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미요시 나가요시의 가신으로 나가요시가 기나이의 대세력으로 성장했을 때 야마토 국을 다스렸다. 1559년 음력 8월 당시 실질적 야마토 국의 지배자였던 쓰쓰이 준케이를 포함 야마토의 호족들을 내쫓고 시기 산성에 입성하여 성을 대폭 수리하였다. 이후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야마토 국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560년 다몬 산성이 축성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불분명하다. 다몬 산성이 축성되기 전에는 묘지였음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다. 다몬 산성을 축성하는 도중인 1561년 성은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다몬 산성의 역할은 시기 산성과 양분되어 야마토 국의 정청 및 교토로의 출병시 요새로써 사용되었다. 1564년 음력 7월 이모리 산성에서 미요시 나가요시가 병사하자, 미요시 가문내에서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1565년 음력 8월 에이로쿠의 변에서 미요시 3인방과 함께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동년 음력 11월 미요시 3인방과의 사이가 벌어졌고, 미요시 3인방은 쓰쓰이 준케이와 연합해 히사히데를 공격하였다. 1566년 음력 6월 쓰쓰이 성을 탈환하여 야마토 국에서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내몰았다. 1567년 음력 4월에는 난토를 대부분 제압하여 히사히데를 궁지에 몰았다. 하지만, 동년 음력 10월 10일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도다이지로 진격해 온 쓰쓰이 준케이, 미요시 3인방의 연합군을 기습해 승리했다. 그 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1568년 음력 6월 시기 산성 전투에서 시기 산성이 함락되어 재차 위기에 바지게 된다. 그러던 중 간논지 성 전투에서 승리한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에 봉하기 위해 음력 9월 상경하였고, 궁지에 몰린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아쿠타가와 산성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 도움을 청하였다. 이로써 얻은 원군 2만으로 시기 산성을 공략하여 4개월 만에 성을 재탈환하였고,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쓰쓰이, 미요시 연합군을 야마토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1571년 음력 8월 다쓰이치 성 전투에서 쓰쓰이 군이 승리하자, 오다 노부나가는 쓰쓰이 준케이를 무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케치 미쓰히데를 파견해 쓰쓰이 준케이를 복속시켰다. 쓰쓰이 준케이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오다 가문내에서 동격인 지위에 올랐고, 점차 히사히데의 세력은 쇠퇴해 갔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편집]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서는, 1572년 다케다 신겐이 상경군을 이끌고 출진하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미요시 요시쓰구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지만, 1573년 음력 4월 신겐이 병사하고, 동년 음력 11월 와카에 성 전투에서 미요시 요시쓰구도 죽자,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다몬 산성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넘어가, 아케치 미쓰히데, 시바타 가쓰이에가 성주로 부임하였다. 1574년 음력 11월 오다 노부나가는 도다이지의 쇼소인에서 명향《란사대》를 잘라 오는 길에 다몬 산성을 들렀고, 이때 노부나가는 다몬 산성의 4층 천수를 눈에 두었다. 이 다몬 산성의 천수는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축조할 때의 그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575년 야모토 국의 슈고로 반 나오마사가 부임해 다몬 산성의 성주가 되었지만, 1576년 음력 5월 3일 이시야마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야마토 국의 슈고에 임명된 것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앙숙 쓰쓰이 준케이였고, 쓰쓰이 준케이는 다몬 산성에 입성하지 않고 동년 음력 7월 무라이 사다카쓰를 감독으로 해 성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1577년 음력 6월경 4층의 천수도 해체되었고, 이는 중세 성곽과 근세 성곽의 지표인 다몬 산성이 16년만 존재한 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동년 8월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재차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었고, 시기 산성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무렵 다몬 산성의 해체는 거의 완료되었고, 성의 부재는 쓰쓰이 성과 고리야마 성의 부재로 활용되었다. 와카쿠사 중학교의 정문 에도 시대에는 다몬 산성터에 관청건물이 들어섰고, 에도 시대 말기에는 연병장으로 활용되었다. 현재[편집] 1948년(쇼와 23년) 성터에 와카쿠사 중학교가 건립되었고, 1978년(쇼와 53년) 교사 신축공사를 위해 북쪽에 남아있던 성루 터가 파괴되었다. 성곽[편집] 다몬 산성의 입지,1985년 촬영〈일본국토교통성〉 다몬 산성의 주요부는 와카쿠사 중학교에 있고, 서쪽으로는 닌쇼 황태후릉과 쇼무 천황릉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호 강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빈 해자를 사이에 두고 젠쇼지 산(현 와카쿠사 중학교 운동장)이, 그 동쪽의 길은 차후 나라 가도(奈良街道)가 되는 교통의 요지에 다몬 산성이 입지해 있다. 원래 다몬 산성이 있는 산은 미켄지 산이지만,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다몬 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미켄지 산에 있는 성의 이름이 다몬 산성, 또는 다몬 성으로 불렸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기독교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일설에는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다문천왕의 제를 지냈기 때문에 다몬 산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흥복사일기(興福寺旧記)》와《형록천문지기(享禄天文之記)》에 따르면 1562년 음력 8월 12일 오전 8시경 다몬 산성의 4층 망루의 상량식이 있었고, 이 행사에 나라의 주민을 초대하였다고 한다.《다몬 성과 마쓰나가 히사히데(多聞城と松永久秀)》에서는 이 일이 야마토 국 지배에 반하는 세력에 보이는 일종의 무력시위이며 지배를 상징하는 천수의 상량식은 지키는 성이 아닌 보여주는 성으로의 의미도 있어 이런한 인식에서 기존의 중세성곽을 탈피해 근세성곽으로 진일보했다고 해설하고 있다.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의 1565년 음력 10월 25일자 서간이 루이스 프로이스의《일본사》에 부분적으로 인용되어 기재되어있다. 이 서간은 루이스 데 알메이다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가신의 초대에 응해 견학한 후, 기록한 것이다. 루이스 데 알메이다의 서간 벽은 기독교국에서 본 적이 없는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벽이 그와 같이 흰 것은 석회와 모래를 섞지 않고 특수한 백색 종이를 섞은 것이기 때문이다. 집과 탑은 본 것 중 가장 좋은 기와로 올렸고, 각각의 형태 또, 2 손가락 두께로 된 새카만 기와로 덮었다. 이 같은 기와는 한번 씌우면 4,5백 년은 거뜬하다. 나는 6,7백 년 된 사찰 다수를 본 적이 있다. 이 별장지에 들어서 도로를 걷노라면, 그 청량한 백색으로 된 것이 마치 오늘 완성된 것과 같고, 천국을 거닌 것 같다. 밖으로부터 성을 보노라면 기분이 심히 상쾌하고, 세계 대부분에 그와 같이 미려한 것이 어디있으랴. 성에 들러 궁전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만든 것처럼 생각되지 않고, 이를 부기에 적을려면 종이 2장이 있어야 한다. 궁전은 모두 삼나무로 만들어져 그 향은 안에 있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또, 폭 1프라자(plaza)의 녹색은 모두 1장의 판자로 되어 있다. 벽은 모두 옛 역사를 그리고 있으며 그림이 그려있지 않는 곳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다. 기둥 상하 약 1파레모를 놋쇠로 감고 있으며 모두 금칠과 조각을 해 금같이 보인다. 기둥 중앙에는 미려한 큰 장미가 있고, 방 내부는 1장의 판자와 같이 되어 있어 접근하더라도 방 둘을 연결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 땅을 매우 기묘하게 사용하여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들 궁전의 내부는 다른 곳과 비교해서 더더욱 정교한 방을 가지고 있다. 안쪽 통로 및 폭 4프라자(plaza) 반은 황금색 목재를 사용하였고, 모두 미려한 파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목재는 흡사 가공이 잘된 맑은 거울과 같다고는 하나 이는 목재의 광택이 아니라 일종의 옻칠로 보인다. 정원 및 궁전의 수목은 모두 미려한 것으로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교토에서 이와 같이 미려한 것을 많이 보아왔지만, 대부분 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세계 중 이 성과 같이 선하고 또한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이런 까닭에 일본 전국에서 이를 보러 오는 자가 많구나. 야마토 국 다몬 성 제국고성지도아사노 문고 소장 이 서간에 있어〈탑〉이란 천수 혹은 망루를 뜻하고,〈궁전〉이라는 것은 혼마루에 있었던 어전을 가리키지 않나 추측해 본다. 또,"일본에 있어서 가장 미려한 것 중 하나","세계 안에 이 성과 같이 선하고 또한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궁전 내부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물을 제재로 한 장벽화이고, 기둥은 조각과 금제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큰 장미로 꽃꽂이 되어 내부를 꾸미고 있거나, 천정은 겹천정으로 장식되어 있고, 정원은 정갈히 해두는 등, 전쟁을 대비하여 지어진 성에서는 볼 수 없는 어전이 있었다고 사료된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몇 번인가 성을 축조하거나 개수하였지만,〈근세식 성곽 건축의 시조〉라고 불리면 전해져 오는 것은 주로 다몬 산성을 두고 하는 말임을 이 서간을 토대로 알 수 있다. 이 루이스 데 알메이다의 서간은 과장됨과 외국인의 시각으로 본 찬사, 무엇을 잘못 보아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겸우향기(兼右卿記)》에도 "화려함에 눈을 빼앗겼다"라는 기술이 있고, 사쓰마 국 시마즈 이에히사의 일기《가구군상경일기(家久君上京日記)》에도 "다몬 성안에서 야마토가 한눈에 보인다" 등, 다른 견문과 평가 등으로 추측해볼 때, 당대 기재된 자료로서 신빙성이 높다. 또, 이 서간의 말미에 "일본 전국에서 이를 보러 오는 자가 많구나"라는 문장이 있어, 기밀사항인 성의 배치를 타인이 볼 우려가 있음에도 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보여주는 성으로서, 즉 권위의 상징으로서 일반에 적극적으로 공개한 것 같다. 후에 축성되는 아즈치 성도 인접 주민에게 공개된 점을 볼 때, 다몬 산성은 근세성곽으로의 진일보한 일면을 갖추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이와 같은 장려한 성의 축성이 가능했는 가에 대해서는 마쓰나가 히사히데 자신이 축성에 관해 지대한 관심이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일본의 성(日本の城)》에 따르면, 이외에도 나라의 대사원건축 노하우가 이 같은 성을 축성하게 한 요소라고 해설하고 있다. 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다도인이라는 명성대로 야마토 국과 사카이, 교토의 호상과 저명인을 두루 초대하였고, 다몬 산성에는 몇 번의 다도회가 열린 일이《다회기(茶会記)》에 기재되어 있다. 이 다회기에 따르면, 다몬 산성은 6첩(283.5cm×382cm)과 4첩반(283.5cm×283.5cm)의 두개의 다실(茶室) 혹은 다정(茶亭)이 있었다고 한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에 헌상되는 다호(茶壺)인 쓰쿠모 나스(九十九髪茄子)와 시기 산성이 함락될 때 행방불명이 된 찻솥(茶釜) 히라구모(平蜘蛛窯)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다몬 산성에는 성하 마을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몬 산부터 사호 강까지 무가저택이 조성되었고, 사호 강부터 그 남쪽으로 성하 마을이 널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택지개발에 의해 어디라 단언할 수 없지만,《일본성곽대계(日本城郭大系)》에서는 이치조 대로(一条通)부터 호렌 대로(法連通)까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유추하건데 다몬 산성은 외성을 갖춘 평산성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당대기(当代記)》에 따르면, 이해, 다몬 산성의 저택을 망가뜨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 니조 성 축조에 쓰였다. 로 적혀있어 폐성 후, 많은 자재가 니조 성 축조에 사용된 것 같다. 또,《센고쿠의 성(戦国の城)》에 따르면, 이 기술을 토대로"아마 4층 망루도 니조 성으로 이축되지 않았나"라고 해설하고 있다. 현재의 성곽 터[편집] 현재 다몬 산성 터에는 장려한 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고, 혼마루 부분에는 와카쿠사 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혼마루의 길이는 140m, 최대폭 110m이고, 발굴조사 결과 다몬 산은 평단하여 대규모 삭평공사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주변으로부터 석재를 채굴한 곳도 찾았으며 혼마루 사면을 석벽으로 쌓아 고정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이들 석벽은 쓰쓰이 성의 부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 교사와 와카쿠사 중학교 운동장 사이에는 해자의 일종인 큰 호리키리(堀切)[1]가 나 있어 다몬 산과 젠쇼지 산을 가르고 있다. 와카쿠사 중학교 서쪽에는 학교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눈으로 알 수 있는 구루와 면이 남아있다. 이 북서쪽에서 서쪽에 걸쳐 높이 1.5m의 성루가 있으며, 모퉁이는 높이 3m, 폭은 2m 인 단상의 형태를 띠로 있다. 아마 여기에 천수 혹은 망루가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닌쇼 황태후릉은 다몬 산의 남쪽에 돌출되어 있고, 현재 쇼무 천황릉과 함께 능묘로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일본성곽대계(日本城郭大系)》에서는〈조정지형도〉를 통해 닌쇼 황태후릉 남서쪽 구석에 성루 또는 망루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그 서쪽에 호리키리[1]를 조성하여 혼마루와 분단시켰다. 더욱이 서쪽에는 쇼무 천황릉이 있어 다랑논 형태인 단상의 오비쿠루와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별성인 데쿠루와의 역할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쪽 능묘는 다몬 산성의 일부에 속했다고 사료된다. 발굴조사[편집] 다몬 산성은 2회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이는 와카쿠사 중학교 건설공사 겸 보수공사에 따른 것이다. 발굴조사 발굴조사기간 보고서 제1차 발굴조사 1947년 11월 ~ 1950년 10월 나라 현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조사 초보 제10집 제2차 발굴조사 1978년 7월 ~ 8월 다몬 산성터 발굴조사 개요보고 각주[편집] ↑ 가 나 산이나 언덕을 절단하여 낸 수로 같이 보기[편집] 미요시 정권 오다 정권 노부나가 포위망 좌표: 북위 34° 41′ 39.98″ 동경 135° 49′ 53.191″ / 북위 34.6944389° 동경 135.83144194° / 34.6944389; 135.8314419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다몬_산성&oldid=22148322" 분류: 나라현의 성나라시의 건축물마쓰나가씨시바타씨야마토국일본의 폐성나라시의 역사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فارسی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8월 30일 (목) 11: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다몬 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몬 산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몬산성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7월) 다몬 산성의 항공사진, 1985년 촬영〈일본국토교통성〉 다몬 산성(일본어: 多聞山城 다몬야마조[*])은 나라현 나라 시 호렌 정에 있던 평산성이다. 다몬 성(多聞城)이라고도 한다. 목차 1 개요 2 역사 2.1 센고쿠 시대 2.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2.3 현재 3 성곽 3.1 현재의 성곽 터 3.2 발굴조사 4 각주 5 같이 보기 개요[편집] 도다이지의 다문천왕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미켄지 산에 축성했다. 산의 높이 115m 비고 30m의 나지막한 산이다. 성에서 사천왕중 하나인 다문천왕의 제를 지냈기 때문에 미켄지 산은 다몬 산이라고 불렸다. 현재에도 성터가 있는 산을 다몬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의 동쪽에는 나라의 입구라는 나라사카가 있고, 남동쪽에는 도다이지(東大寺), 남쪽에는 고후쿠지(興福寺)가 있으며, 이를 두루 볼 수 있는 곳에 성이 위치하고 있어 야마토 국의 지배 거점이 되었다. 성안에는 어전 등 건물이 들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4층 천수 혹은 4층 망루가 지어져 근세성곽에 있어서의 천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모습은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에 의해 유럽에도 전해졌다. 에도 시대에 기록된《화훈간》에서는 천수의 시작은 아즈치 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일설에서는 다문 산성의 것을 거론하기도 한다. 벽은 흰색이며,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으며, 석벽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벽위에는 건물이 길게 늘어선 나가야 형태의 망루를 세웠고, 이것이 다몬 망루의 시초였다. 이후, 전국의 성에서 이 다몬 망루를 채택해 짓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선도적 역할을 한 다몬 산성인 까닭에 중세 성곽의 형태를 벗어나 근세 성곽으로의 이행 과정의 과도기적 성으로 볼 수 있으며 성곽발달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성이다. 안타깝게도 다몬 산성은 1576년 야마토 국 슈고로 부임한 쓰쓰이 준케이가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성을 파각하였고, 성의 부재는 쓰쓰이 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 중 몇몇은 고리야마 산성에 사용되었다. 현재 성터에는 나라 시립 와카쿠사 중학교가 지어져있다. 주변에는 다몬 산성의 석벽으로 추정되는 돌로 만들어진 석불이 몇 기 남아있다. 역사[편집] 센고쿠 시대[편집] 마쓰나가 히사히데 센고쿠 시대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미요시 나가요시의 가신으로 나가요시가 기나이의 대세력으로 성장했을 때 야마토 국을 다스렸다. 1559년 음력 8월 당시 실질적 야마토 국의 지배자였던 쓰쓰이 준케이를 포함 야마토의 호족들을 내쫓고 시기 산성에 입성하여 성을 대폭 수리하였다. 이후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야마토 국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560년 다몬 산성이 축성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불분명하다. 다몬 산성이 축성되기 전에는 묘지였음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다. 다몬 산성을 축성하는 도중인 1561년 성은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다몬 산성의 역할은 시기 산성과 양분되어 야마토 국의 정청 및 교토로의 출병시 요새로써 사용되었다. 1564년 음력 7월 이모리 산성에서 미요시 나가요시가 병사하자, 미요시 가문내에서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1565년 음력 8월 에이로쿠의 변에서 미요시 3인방과 함께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동년 음력 11월 미요시 3인방과의 사이가 벌어졌고, 미요시 3인방은 쓰쓰이 준케이와 연합해 히사히데를 공격하였다. 1566년 음력 6월 쓰쓰이 성을 탈환하여 야마토 국에서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내몰았다. 1567년 음력 4월에는 난토를 대부분 제압하여 히사히데를 궁지에 몰았다. 하지만, 동년 음력 10월 10일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도다이지로 진격해 온 쓰쓰이 준케이, 미요시 3인방의 연합군을 기습해 승리했다. 그 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1568년 음력 6월 시기 산성 전투에서 시기 산성이 함락되어 재차 위기에 바지게 된다. 그러던 중 간논지 성 전투에서 승리한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에 봉하기 위해 음력 9월 상경하였고, 궁지에 몰린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아쿠타가와 산성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 도움을 청하였다. 이로써 얻은 원군 2만으로 시기 산성을 공략하여 4개월 만에 성을 재탈환하였고,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쓰쓰이, 미요시 연합군을 야마토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1571년 음력 8월 다쓰이치 성 전투에서 쓰쓰이 군이 승리하자, 오다 노부나가는 쓰쓰이 준케이를 무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케치 미쓰히데를 파견해 쓰쓰이 준케이를 복속시켰다. 쓰쓰이 준케이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오다 가문내에서 동격인 지위에 올랐고, 점차 히사히데의 세력은 쇠퇴해 갔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편집]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서는, 1572년 다케다 신겐이 상경군을 이끌고 출진하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미요시 요시쓰구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지만, 1573년 음력 4월 신겐이 병사하고, 동년 음력 11월 와카에 성 전투에서 미요시 요시쓰구도 죽자,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다몬 산성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넘어가, 아케치 미쓰히데, 시바타 가쓰이에가 성주로 부임하였다. 1574년 음력 11월 오다 노부나가는 도다이지의 쇼소인에서 명향《란사대》를 잘라 오는 길에 다몬 산성을 들렀고, 이때 노부나가는 다몬 산성의 4층 천수를 눈에 두었다. 이 다몬 산성의 천수는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축조할 때의 그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575년 야모토 국의 슈고로 반 나오마사가 부임해 다몬 산성의 성주가 되었지만, 1576년 음력 5월 3일 이시야마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야마토 국의 슈고에 임명된 것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앙숙 쓰쓰이 준케이였고, 쓰쓰이 준케이는 다몬 산성에 입성하지 않고 동년 음력 7월 무라이 사다카쓰를 감독으로 해 성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1577년 음력 6월경 4층의 천수도 해체되었고, 이는 중세 성곽과 근세 성곽의 지표인 다몬 산성이 16년만 존재한 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동년 8월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재차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었고, 시기 산성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무렵 다몬 산성의 해체는 거의 완료되었고, 성의 부재는 쓰쓰이 성과 고리야마 성의 부재로 활용되었다. 와카쿠사 중학교의 정문 에도 시대에는 다몬 산성터에 관청건물이 들어섰고, 에도 시대 말기에는 연병장으로 활용되었다. 현재[편집] 1948년(쇼와 23년) 성터에 와카쿠사 중학교가 건립되었고, 1978년(쇼와 53년) 교사 신축공사를 위해 북쪽에 남아있던 성루 터가 파괴되었다. 성곽[편집] 다몬 산성의 입지,1985년 촬영〈일본국토교통성〉 다몬 산성의 주요부는 와카쿠사 중학교에 있고, 서쪽으로는 닌쇼 황태후릉과 쇼무 천황릉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호 강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빈 해자를 사이에 두고 젠쇼지 산(현 와카쿠사 중학교 운동장)이, 그 동쪽의 길은 차후 나라 가도(奈良街道)가 되는 교통의 요지에 다몬 산성이 입지해 있다. 원래 다몬 산성이 있는 산은 미켄지 산이지만,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다몬 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미켄지 산에 있는 성의 이름이 다몬 산성, 또는 다몬 성으로 불렸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기독교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일설에는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다문천왕의 제를 지냈기 때문에 다몬 산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흥복사일기(興福寺旧記)》와《형록천문지기(享禄天文之記)》에 따르면 1562년 음력 8월 12일 오전 8시경 다몬 산성의 4층 망루의 상량식이 있었고, 이 행사에 나라의 주민을 초대하였다고 한다.《다몬 성과 마쓰나가 히사히데(多聞城と松永久秀)》에서는 이 일이 야마토 국 지배에 반하는 세력에 보이는 일종의 무력시위이며 지배를 상징하는 천수의 상량식은 지키는 성이 아닌 보여주는 성으로의 의미도 있어 이런한 인식에서 기존의 중세성곽을 탈피해 근세성곽으로 진일보했다고 해설하고 있다.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의 1565년 음력 10월 25일자 서간이 루이스 프로이스의《일본사》에 부분적으로 인용되어 기재되어있다. 이 서간은 루이스 데 알메이다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가신의 초대에 응해 견학한 후, 기록한 것이다. 루이스 데 알메이다의 서간 벽은 기독교국에서 본 적이 없는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벽이 그와 같이 흰 것은 석회와 모래를 섞지 않고 특수한 백색 종이를 섞은 것이기 때문이다. 집과 탑은 본 것 중 가장 좋은 기와로 올렸고, 각각의 형태 또, 2 손가락 두께로 된 새카만 기와로 덮었다. 이 같은 기와는 한번 씌우면 4,5백 년은 거뜬하다. 나는 6,7백 년 된 사찰 다수를 본 적이 있다. 이 별장지에 들어서 도로를 걷노라면, 그 청량한 백색으로 된 것이 마치 오늘 완성된 것과 같고, 천국을 거닌 것 같다. 밖으로부터 성을 보노라면 기분이 심히 상쾌하고, 세계 대부분에 그와 같이 미려한 것이 어디있으랴. 성에 들러 궁전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만든 것처럼 생각되지 않고, 이를 부기에 적을려면 종이 2장이 있어야 한다. 궁전은 모두 삼나무로 만들어져 그 향은 안에 있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또, 폭 1프라자(plaza)의 녹색은 모두 1장의 판자로 되어 있다. 벽은 모두 옛 역사를 그리고 있으며 그림이 그려있지 않는 곳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다. 기둥 상하 약 1파레모를 놋쇠로 감고 있으며 모두 금칠과 조각을 해 금같이 보인다. 기둥 중앙에는 미려한 큰 장미가 있고, 방 내부는 1장의 판자와 같이 되어 있어 접근하더라도 방 둘을 연결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 땅을 매우 기묘하게 사용하여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들 궁전의 내부는 다른 곳과 비교해서 더더욱 정교한 방을 가지고 있다. 안쪽 통로 및 폭 4프라자(plaza) 반은 황금색 목재를 사용하였고, 모두 미려한 파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목재는 흡사 가공이 잘된 맑은 거울과 같다고는 하나 이는 목재의 광택이 아니라 일종의 옻칠로 보인다. 정원 및 궁전의 수목은 모두 미려한 것으로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교토에서 이와 같이 미려한 것을 많이 보아왔지만, 대부분 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세계 중 이 성과 같이 선하고 또한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이런 까닭에 일본 전국에서 이를 보러 오는 자가 많구나. 야마토 국 다몬 성 제국고성지도아사노 문고 소장 이 서간에 있어〈탑〉이란 천수 혹은 망루를 뜻하고,〈궁전〉이라는 것은 혼마루에 있었던 어전을 가리키지 않나 추측해 본다. 또,"일본에 있어서 가장 미려한 것 중 하나","세계 안에 이 성과 같이 선하고 또한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궁전 내부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물을 제재로 한 장벽화이고, 기둥은 조각과 금제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큰 장미로 꽃꽂이 되어 내부를 꾸미고 있거나, 천정은 겹천정으로 장식되어 있고, 정원은 정갈히 해두는 등, 전쟁을 대비하여 지어진 성에서는 볼 수 없는 어전이 있었다고 사료된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몇 번인가 성을 축조하거나 개수하였지만,〈근세식 성곽 건축의 시조〉라고 불리면 전해져 오는 것은 주로 다몬 산성을 두고 하는 말임을 이 서간을 토대로 알 수 있다. 이 루이스 데 알메이다의 서간은 과장됨과 외국인의 시각으로 본 찬사, 무엇을 잘못 보아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겸우향기(兼右卿記)》에도 "화려함에 눈을 빼앗겼다"라는 기술이 있고, 사쓰마 국 시마즈 이에히사의 일기《가구군상경일기(家久君上京日記)》에도 "다몬 성안에서 야마토가 한눈에 보인다" 등, 다른 견문과 평가 등으로 추측해볼 때, 당대 기재된 자료로서 신빙성이 높다. 또, 이 서간의 말미에 "일본 전국에서 이를 보러 오는 자가 많구나"라는 문장이 있어, 기밀사항인 성의 배치를 타인이 볼 우려가 있음에도 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보여주는 성으로서, 즉 권위의 상징으로서 일반에 적극적으로 공개한 것 같다. 후에 축성되는 아즈치 성도 인접 주민에게 공개된 점을 볼 때, 다몬 산성은 근세성곽으로의 진일보한 일면을 갖추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이와 같은 장려한 성의 축성이 가능했는 가에 대해서는 마쓰나가 히사히데 자신이 축성에 관해 지대한 관심이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일본의 성(日本の城)》에 따르면, 이외에도 나라의 대사원건축 노하우가 이 같은 성을 축성하게 한 요소라고 해설하고 있다. 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다도인이라는 명성대로 야마토 국과 사카이, 교토의 호상과 저명인을 두루 초대하였고, 다몬 산성에는 몇 번의 다도회가 열린 일이《다회기(茶会記)》에 기재되어 있다. 이 다회기에 따르면, 다몬 산성은 6첩(283.5cm×382cm)과 4첩반(283.5cm×283.5cm)의 두개의 다실(茶室) 혹은 다정(茶亭)이 있었다고 한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에 헌상되는 다호(茶壺)인 쓰쿠모 나스(九十九髪茄子)와 시기 산성이 함락될 때 행방불명이 된 찻솥(茶釜) 히라구모(平蜘蛛窯)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다몬 산성에는 성하 마을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몬 산부터 사호 강까지 무가저택이 조성되었고, 사호 강부터 그 남쪽으로 성하 마을이 널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택지개발에 의해 어디라 단언할 수 없지만,《일본성곽대계(日本城郭大系)》에서는 이치조 대로(一条通)부터 호렌 대로(法連通)까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유추하건데 다몬 산성은 외성을 갖춘 평산성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당대기(当代記)》에 따르면, 이해, 다몬 산성의 저택을 망가뜨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 니조 성 축조에 쓰였다. 로 적혀있어 폐성 후, 많은 자재가 니조 성 축조에 사용된 것 같다. 또,《센고쿠의 성(戦国の城)》에 따르면, 이 기술을 토대로"아마 4층 망루도 니조 성으로 이축되지 않았나"라고 해설하고 있다. 현재의 성곽 터[편집] 현재 다몬 산성 터에는 장려한 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고, 혼마루 부분에는 와카쿠사 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혼마루의 길이는 140m, 최대폭 110m이고, 발굴조사 결과 다몬 산은 평단하여 대규모 삭평공사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주변으로부터 석재를 채굴한 곳도 찾았으며 혼마루 사면을 석벽으로 쌓아 고정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이들 석벽은 쓰쓰이 성의 부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 교사와 와카쿠사 중학교 운동장 사이에는 해자의 일종인 큰 호리키리(堀切)[1]가 나 있어 다몬 산과 젠쇼지 산을 가르고 있다. 와카쿠사 중학교 서쪽에는 학교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눈으로 알 수 있는 구루와 면이 남아있다. 이 북서쪽에서 서쪽에 걸쳐 높이 1.5m의 성루가 있으며, 모퉁이는 높이 3m, 폭은 2m 인 단상의 형태를 띠로 있다. 아마 여기에 천수 혹은 망루가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닌쇼 황태후릉은 다몬 산의 남쪽에 돌출되어 있고, 현재 쇼무 천황릉과 함께 능묘로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일본성곽대계(日本城郭大系)》에서는〈조정지형도〉를 통해 닌쇼 황태후릉 남서쪽 구석에 성루 또는 망루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그 서쪽에 호리키리[1]를 조성하여 혼마루와 분단시켰다. 더욱이 서쪽에는 쇼무 천황릉이 있어 다랑논 형태인 단상의 오비쿠루와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별성인 데쿠루와의 역할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쪽 능묘는 다몬 산성의 일부에 속했다고 사료된다. 발굴조사[편집] 다몬 산성은 2회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이는 와카쿠사 중학교 건설공사 겸 보수공사에 따른 것이다. 발굴조사 발굴조사기간 보고서 제1차 발굴조사 1947년 11월 ~ 1950년 10월 나라 현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조사 초보 제10집 제2차 발굴조사 1978년 7월 ~ 8월 다몬 산성터 발굴조사 개요보고 각주[편집] ↑ 가 나 산이나 언덕을 절단하여 낸 수로 같이 보기[편집] 미요시 정권 오다 정권 노부나가 포위망 좌표: 북위 34° 41′ 39.98″ 동경 135° 49′ 53.191″ / 북위 34.6944389° 동경 135.83144194° / 34.6944389; 135.8314419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다몬_산성&oldid=22148322" 분류: 나라현의 성나라시의 건축물마쓰나가씨시바타씨야마토국일본의 폐성나라시의 역사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فارسی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8월 30일 (목) 11: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산개성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산개성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쌍둥이 성단 산개성단(散開星團, open cluster, 문화어: 널린별떼)[1]은 같은 분자구름에서 태어났으며 나이가 거의 같은 수천개의 항성이 모인 집단이다. 우리 은하에만 1,100개가 넘는 산개 성단이 발견되었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산개 성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2] 성단의 별들은 서로 중력적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으며 은하 중심을 돌면서 다른 성단이나 가스 구름과 만나면 해당 천체의 중력 때문에 종전의 궤도가 망가지거나 성단에 있던 일부 항성이 이탈하기도 한다.[3] 산개성단이 형태를 유지하는 기간은 보통 몇억 년 정도이다. 대조적으로, 구상 성단은 훨씬 강하게 중력적으로 묶여 있어 수십억 년은 유지된다. 산개성단은 나선은하와 불규칙 은하에서만 발견되는데, 둘 다 활발하게 항성이 태어나는 곳이다.[4] 젊은 산개성단들은 자신이 형성된 분자 구름 속에 포함 되어 있는데, 이것이 H II 영역을 형성하는 것으로 밝혀졌다.[5]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단에서 방출되는 방사압이 분자 구름을 흩어놓는다. 방사압이 구름을 흩어 놓기 전에 약 10%의 가스 구름만이 항성의 일부로 합쳐지게 된다. 산개성단은 항성 진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항성들은 매우 유사한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비슷한 화학적 조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항성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보다 여러가지 미묘한 특징적인 차이점들을 관측할 수 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이나 히아데스 성단, 페르세우스자리 알파 성단 등 많은 수의 성단들은 육안으로도 관측할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쌍둥이 성단 같은 것들은 기구 없이는 거의 관측할 수 없으며, 쌍안경이나 망원경을 이용해야 볼 수 있다.[6] 목차 1 역사적 관측들 2 산개성단의 형성 3 형태적 분류 4 산개성단의 수와 분포 5 천문학적 구성 6 최후의 운명 7 항성 진화 연구 8 산개성단과 천문학적 거리 스케일 9 함께 보기 10 참고 11 참고 도서 역사적 관측들[편집] 가장 유명한 산개성단 중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고대부터 항성들의 집단이라고 알려져 왔다. 망원경이 발명되어 항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엔 플레이아데스를 제외한 다른 성단들은 희미하게 빛나는 하늘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을 통해 두 종류의 특징적인 성단을 밝혀내었다. 하나는 은하수의 중심을 향하는 방향에서 발견되는 수천 개의 항성이 모인 구형의 집단이고, 하나는 전 하늘에서 발견되는 불규칙한 모양을 띤 듬성듬성한 항성들의 집단이었다. 천문학자들은 전자를 구상 성단으로, 후자를 산개성단이라고 칭하였다. 산개성단들은 아래에 언급되듯이 대부분 은하수 면에 있어서 은하 성단이라고도 불린다.[7] 산개성단 내의 항성들은 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일찍이 밝혀졌다. Reverend John Michell은 1767년 플레이아데스 같은 한개의 항성 집단이 지구에서 관측될 수 있는 우연한 위치에 있게 된 일이 단지 1/496000의 확률이라는 사실을 계산했다.[8] 천문학이 더 발전하여 정확해지면서 스펙트럼 분석을 통하여 성단의 항성들은 우주공간에서 비슷한 운동을 하고 공통의 방사상의 속도를 가지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성단의 항성들이 같은 시기에 탄생하고 집단 속에 있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2] 산개성단과 구상성단이 꽤 다른 두 집단이긴 하지만, 항성들이 듬성듬성 존재하는 구상성단과 항성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산개성단사이의 모양 차는 거의 없다. 몇몇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성단이 유사한 기본 방식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구상성단의 경우 우리 은하에서 더 이상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수천 수백 개의 항성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상태라는 것이 차이점이다.[9] 산개성단의 형성[편집] 적외선은 오리온자리의 중심부에 형성된 빽빽한 산개성단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항성들은 보통 다중계에서 형성된다.[10] 가스 구름은 자체 중력으로 붕괴될 수 있을 정도로 태양의 몇 배가 되는 질량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무거운 구름은 하나의 항성으로는 붕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11] 거대 분자 구름(태양의 수천 배의 질량의 가스를 가지고 있는 차갑고 빽빽한 구름)의 붕괴로 산개성단의 군락이 생성되었다. 많은 요인들이 거대 분자 구름(혹은 그의 일부)의 붕괴를 촉진 하고, 또한 항성 집단의 폭발이 산개성단 탄생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근처의 초신성과 중력 섭동에 의해서 발생한 충격파 또한 이에 영향을 미친다. 일단 거대 분자 구름이 붕괴되면, 구름의 부분들이 점차 점차 작은 무리가 되면서 몇 천개의 항성이 모인 군락이 형성된다. 우리 은하의 경우 몇천년에 한번 정도의 비율로 산개성단이 형성된다.[12] 일단 항성의 형성이 시작되면, 가장 뜨겁고 큰 질량을 가진 항성들이 방대한 양의 자외선을 방출할 것이다. 이 방사성은 재빨리 거대 분자 구름의 가스를 이온화하여 H II 영역을 형성하고, 거대한 항성들과 방사압이 만들어낸 형성된 항성풍이 가스를 흩어지게 한다. 몇 백 만년 후에 성단은 역시 가스를 방출하는 첫 번째 초신성의 단계가 된다. 수천만년 후에 성단을 둘러싼 가스는 없어지고, 항성의 형성 또한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 성단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10% 이하의 가스는 사라지기 전에 항성을 형성한다.[12] 성단의 형성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분자 구름 핵이 빠른 속도로 수축하고, 일단 큰 질량을 가진 항성들이 빛나기 시작하면 그들은 뜨겁게 이온화된 잔여 가스를 바른 속도로 배출한다. 구름핵 수축이 시작되면서 가스 분출이 일어나는 순간은 백에서 삼백만년을 넘지 않는다. 구름핵에 있는 오직 30-40 퍼센트의 가스만이 항성들을 형성하며, 남은 가스 분출과정은 성운이 대부분의 혹은 모든 항성을 유실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친다.[13] 모든 성단은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부분이 붕괴될 정도의 큰 손실을 겪는다. 성단에서 방출된 젊은 항성들은 우주 공간의 일부가 된다. 모든 항성들이 성단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단들은 은하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토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탄생시의 많은 성단들을 구성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 격렬한 가스 분출은 또한 은하의 구조에 형태학적, 운동학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개 혹은 그 이상의 흩어져 있는 산개성단들이 같은 분자 구름에서 형성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거대 마젤란 구름에서 Hodge 301과 R136은 둘 다 독거미 성운에서 형성되었다. 또한 우리 은하에서 잘 알려진 두 성단인 히아데스와 프레세페 성단의 움직임을 추적해 보면 둘 모두 6억 년 전에 동일한 구름에서 생성된 것을 알 수 있다.[14] 때때로 동시에 형성된 두 성단은 쌍둥이 성단을 이루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 은하수에 있는 쌍둥이 성단인 NGC 869와 NGC 884가 존재하며 적어도 10개 이상의 쌍둥이 성단이 더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15] 많은 것들은 대마젤란, 소마젤란 은하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성단들은 외부 관측이 우리 은하 내에서의 관측보다 쉬운데 그 이유는 은하수 내에 있을 경우 관측 과정에서 무관한 성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형태적 분류[편집] 산개성단은 구성하는 항성의 수가 적고 흩어진 형태의 성단에서부터 수천 개의 항성으로 구성된 매우 거대한 항성의 집합체 형태의 성단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그들은 보통 꽤나 다른 밀집된 핵을 가지고 있는데, 이 성단은 구성하는 항성으로부터 방출된 ‘코로나’에 의해 둘러싸여져 있다. 핵은 보통 3-4광년 정도의 크기이며 코로나는 성단의 중심으로부터 무려 20광년 정도씩이나 펼쳐져 있다. 성단의 중심부에 있는 항성들의 밀집도는 1 cubic 광년에 1.5개 정도씩 분포되어 있는 정도이다. (태양 근처 항성의 밀집도는 1 세제곱 광년에 0.003개 정도이다.)[16] 산개성단들은 1930년 로버트 트럼플러(Robert Trumpler)에 의해 개발된 방법에 의해서 분류된다. 트럼플러 방법은 성단을 세 부분으로 분류하였고, I-IV까지의 로마 숫자로 강하게 연관된 것부터 약하게 연관된 것까지 주위 항성들과의 밀집도와 분산정도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아라비아 숫자 1~3을 성단 구성원인 항성들의 밝기를 표시하는 척도로 사용했다. 그리고 p, m, r은 성단을 구성하는 항성이 적은지, 보통인지 혹은 많은지를 표시했다. 덧붙여 ‘n’은 성단이 성운에 있는지 아닌지를 나타내었다.[17] 트럼플러 방법에 의해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I3rn(성운 내에 위치하며 강하게 밀집되어 있고 항성의 수가 많음)으로 분류되고, 히아데스 성단은 II3m(약간 분산되어 있고 항성들의 수가 썩 많지는 않은 편)으로 분류된다. 산개성단의 수와 분포[편집] NGC 346은 소마젤란 은하에 있는 산개성단이다. 우리 은하에는 1000개 이상의 산개성단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모든 산개성단의 수를 계산한다면 사실 10000개보다 많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18] 나선 은하에서, 산개성단들은 주로 가스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어 항성들이 가장 많이 생성되는 나선팔에서 주로 발견된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성단들은 나선팔을 벗어나기 전에 분산되어 버린다. 산개성단은 은하면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우리 은하의 스케일 높이는 180광년 정도이고 은하의 반지름은 대략 100,000광년 정도이다)[19] 불규칙 은하의 경우 산개성단은 은하 전체에서 발견되며, 그 중에서도 가스는 농도가 가장 높은 곳에 많이 밀집되어 있다.[20] 산개성단은 타원은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데, 타원은하의 경우에는 항성의 생성이 몇 백만 년 전에 이미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존재해 있던 산개성단은 이미 오래전에 흩어져버렸을 것이다.[21] 우리 은하의 경우 성단의 분포는 성단의 연령에 영향을 받는데 늙은 성단의 경우 주로 은하핵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많이 발견된다. 기조력의 경우 은하 중심 주변부에서 더 강력하기 때문에 성단들을 흩어 놓는다. 그리고 성단들을 흩어 놓는 거대 분자 구름이 은하 중심부로 몰리기 때문에 은하 중심 지역에 있는 은하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깥쪽으로 분산되게 된다.[22] 천문학적 구성[편집] 대마젤란 은하에 있는 독거미 성운 산개성단들은 항성들이 죽기 전 대부분 흩어지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방출 되는 빛은 젊고 뜨거운 푸른 항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이런 항성들은 보통 무겁고 수만 수백만 년 정도의 짧은 일생을 가진다. 늙은 산개성단들의 경우 노란 빛을 띠는 항성들이 더 포함되어 있다.[출처 필요] 어떤 산개성단들은 나머지 성단에 있는 어떤 것 보다 유달리 젊은 뜨거운 파란 항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청색 낙오성들은 또한 아주 밀집되어 있는 구상 성단의 핵에서도 관측되는데, 이는 항성들이 충돌하면서 더욱 더 뜨겁고 무거워지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산개성단은 구상 성단에 비해 훨씬 더 밀집도가 낮은데다가 천문학적 충돌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는 많은 수의 청색 낙오성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의 경우 다른 항성들 사이의 역학적 상호작용에 의해서 연성계를 형성하여 하나의 항성으로 합쳐지면서 청색 낙오성이 생성되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23] 질량이 크지 않은 항성들은 일단 핵융합에 의해 수소를 방출하면, 그들의 바깥 쪽 층으로 행성상 성운을 만들어 백색왜성으로 진화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성단들은 구성성분인 항성들이 대부분 백색왜성의 단계가 되기 전에 흩어진다. 그래서 구상성단의 백색왜성의 수는 추측되는 것보다 훨씬 적으며 이를 통해 성단의 연령과 항성들의 초기 질량 분포를 알 수 있다. 적색 거성이 행성상 성운이 되기 위해 바깥층을 방출할 때, 물질의 비대칭적으로 손실되고 이때문에 항성들이 성단으로 배출되기에 충분할 만큼 초당 몇 km씩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백색왜성의 수가 적은 것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설명이다.[24] 최후의 운명[편집] 삼각형자리 은하에 있는 NGC 604는 H II 영역 에 둘러싸인 질량이 아주 큰 산개성단이다. 산개성단 내의 항성들은 충분히 질량이 작아서 탈출 속도가 일반적으로 구성하는 항성들의 속도의 평균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에 많은 산개성단들은 선천적으로 불안정하다. 이러한 성단들은 몇 백만 년 안에 빠르게 흩어질 것이다. 많은 경우, 젊고 뜨거운 젊은 항성들이 내는 방사압때문에 형성된 성단들에 의해 형성된 가스가 없어지는 현상은 성단이 빠르게 흩어질 수 있을 정도로 질량을 감소시킨다.[25] 충분한 질량을 가지고 있어서 주위 성운이 발산할 때도 중력적 결합을 할 수 있는 성단들은 수십 수백만년 동안 유지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부적, 외부적 과정이 또한 그들을 흩어놓는다. 내부적으로 성단의 항성들이 서로 가까이 위치하게 되면서 성단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속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단 구성원들 사이의 점진적 발산이 일어나게 된다.[26] 또한 대략 5억년 정도마다 한번 씩 산개성단은 분자 구름 근처를 지나가거나 통과하면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흩어지게 된다. 이처럼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면서 생성되게 되는 중력적인 기조력은 성단을 흩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성단은 성류(천구 상에서 항성이 일정한 방향을 향하는 현상)로 변하여 성단처럼 가깝지는 않지만 비슷한 속도로 유사한 방향으로 운동할 정도로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단이 흩어지는 시간의 척도는 초기의 천문학적 항성의 밀집도에 따라 달려있다. 더 단단하게 결속된 성단들은 좀 더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다. 성단이 일생의 반 정도를 살았다고 가정 한다면 처음의 밀집도에 따라 남은 반 동안 15억에서 80억 광년의 범위에 걸쳐 구성 항성들이 사라질 것이다.[26] 성단이 중력적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더라도 많은 구성 항성들은 유사한 궤적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이것이 성협 혹은 운동성단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큰 곰자리에 있는 북두칠성 중 가장 밝은 항성들 몇 개는 과거 산개성단의 구성 요소였으며 현재 큰 곰 자리의 운동 성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27] 결과적으로 그들의 상대적으로 미세한 속력차가 그것들을 은하의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한다. 만약 우리가 비슷한 속도와 연령을 가졌지만 연관되지 않은 항성들을 발견한다면 거대 성단은 성류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28][29] 항성 진화 연구[편집] 두 산개성단을 나타낸 H-R 다이어그램. 산개성단을 위한 도표인 H-R다이어그램(헤르츠스프룽-러셀 다이어그램, Hertzsprung-Russell diagram)이 만들어졌을 때, 대부분의 항성들은 주계열에 포함되어 있었다.[30] 가장 질량이 무거운 항성들은 주계열에서부터 진화하기 시작하여 적색거성이 된다. 주계열에서 갈라지는 분기점을 통해 성단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산개성단내의 항성들은 모두 지구에서부터 대략적으로 비슷한 거리에 있다. 또한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구성 항성들 사이의 차이점인 눈에 띄는 밝기는 질량에 의해 기인한 것이다.[30] 항성들을 서로서로 비교해보면 다양한 매개변수들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산개성단은 항성진화를 연구하기에 매우 유용하다. 산개성단 내에서 리튬과 베릴륨의 양을 연구하는 것은 항성들의 진화와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천만K의 온도에 도달하기 전까지, 수소핵이 헬륨으로 융합되지 못할 때 리튬과 베릴륨은 각각 250만K, 350만K의 온도에서 파괴된다. 이것은 그들의 풍부한 정도가 항성 내부에서 얼마의 양의 혼합이 일어났느냐에 따라 크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개성단 내 항성들 속의 리튬, 베릴륨의 양을 연구하면 연령이나 화학조성 등 다양한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된다.[31] 연구를 통해 이러한 빛 구성 물질들이 항성 진화에서 예상되었던 것 보다 훨씬 적은 양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결핍의 이유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나의 가설은 항성 내부의 대류가 방사선이 에너지 수송과정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으로 벗어나게 만든다는 것이다.[31] 산개성단과 천문학적 거리 스케일[편집] M11, Wild Duck 성단은 은하수 중심을 향하고 있는 매우 빽빽한 성단이다. 천체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그들은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안이지만 대부분의 물체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적으로 거리를 측정하기가 어렵다. 천문학적인 거리 스케일을 측정하는 연구는 간접적으로, 때때로는 연관되어 있는 가장 가까운 물체(좀 더 먼 물체들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거리가 직접적으로 측정된)를 측정하는 부정확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32] 가장 가까운 산개성단은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거리가 직접적으로 측정되었다. 첫째로 가까운 산개성단 내에 있는 항성들 사이의 시차는 다른 독립적인 항성들처럼 측정될 수 있다. 500광년 이하의 거리에 있는 플레이아데스나 히아데스 혹은 다른 성단의 경우는 가깝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으며 히파르코스(Hipparcos, 위치 측정 위성)의 측정 결과로부터 몇몇 성단들의 정확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33][34] 다른 직접적인 방법은 운동성단방법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성단 내에 있는 항성들은 우주에서 비슷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성단 구성원들의 움직임을 측정하고 우주를 가로지르는 그들의 운동을 나타내면 소실점으로 모여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단 내의 항성들의 각속도는 이들의 스펙트럼으로부터 도플러 이동을 측정하면 구할 수 있고 성단으로부터 소실점까지의 고유운동과 각거리 간단한 삼각법으로 성단까지의 거리를 알 수 있다. 히아데스 성단은 이 방법을 응용하여 계산된 가장 잘 알려진 예이다.(거리는 46.3 파섹이다)[35] 일단 근처 성단들까지의 거리가 측정되면, 응용된 기술을 이용하여 먼 거리에 있는 성단들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다. 거리가 이미 알려져 있는 성단을 H-R 다이어그램을 통해 더 먼 거리의 성단과 비교해 보면 더 먼 거리에 있는 성단까지의 거리가 측정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산개성단은 히아데스이다. 반면에 북두칠성에 있는 항성들을 포함한 성협까지의 거리는 히아데스까지의 절반정도이지만 성협의 항성들은 산개성단내의 항성처럼 중력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다. 우리 은하에서 가장 먼 산개성단으로 알려진 것은 Berkeley 29이고, 약 15,000파섹 떨어져있다.[36] 산개성단은 또한 국부 은하군에 있는 은하들에서도 쉽게 관측된다. 산개성단의 거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은 표준촉광으로 사용되는 세페이드나 거문고자리 RR 항성같은 다양한 항성들에 의해 보이는 주기광도관계를 측정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런 선명한 항성들은 아주 먼 거리에 있어도 측정될 수 있고 또한 국부 은하군 근처의 먼 은하까지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37] 함께 보기[편집] 성협 천체 운동학 성단 참고[편집] ↑ 한국천문학회 편, 《천문학용어집》 254쪽 좌단 34째줄 ↑ 가 나 Frommert, Hartmut; Kronberg, Christine (2007년 8월 27일). “Open Star Clusters”. 《S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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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0-03-006228-4. vdeh항성계구속 은하 왜소은하 성단(구상성단 산개성단 초성단) 쌍성 다중성계 비구속 성류 성협 운동성군 다중성 성군 폭주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산개성단&oldid=23539010" 분류: 성단산개성단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CS1 - 이탈리아어 인용 (it)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0년 11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5일 (금) 21: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산개성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산개성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쌍둥이 성단 산개성단(散開星團, open cluster, 문화어: 널린별떼)[1]은 같은 분자구름에서 태어났으며 나이가 거의 같은 수천개의 항성이 모인 집단이다. 우리 은하에만 1,100개가 넘는 산개 성단이 발견되었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산개 성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2] 성단의 별들은 서로 중력적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으며 은하 중심을 돌면서 다른 성단이나 가스 구름과 만나면 해당 천체의 중력 때문에 종전의 궤도가 망가지거나 성단에 있던 일부 항성이 이탈하기도 한다.[3] 산개성단이 형태를 유지하는 기간은 보통 몇억 년 정도이다. 대조적으로, 구상 성단은 훨씬 강하게 중력적으로 묶여 있어 수십억 년은 유지된다. 산개성단은 나선은하와 불규칙 은하에서만 발견되는데, 둘 다 활발하게 항성이 태어나는 곳이다.[4] 젊은 산개성단들은 자신이 형성된 분자 구름 속에 포함 되어 있는데, 이것이 H II 영역을 형성하는 것으로 밝혀졌다.[5]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단에서 방출되는 방사압이 분자 구름을 흩어놓는다. 방사압이 구름을 흩어 놓기 전에 약 10%의 가스 구름만이 항성의 일부로 합쳐지게 된다. 산개성단은 항성 진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항성들은 매우 유사한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비슷한 화학적 조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항성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보다 여러가지 미묘한 특징적인 차이점들을 관측할 수 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이나 히아데스 성단, 페르세우스자리 알파 성단 등 많은 수의 성단들은 육안으로도 관측할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쌍둥이 성단 같은 것들은 기구 없이는 거의 관측할 수 없으며, 쌍안경이나 망원경을 이용해야 볼 수 있다.[6] 목차 1 역사적 관측들 2 산개성단의 형성 3 형태적 분류 4 산개성단의 수와 분포 5 천문학적 구성 6 최후의 운명 7 항성 진화 연구 8 산개성단과 천문학적 거리 스케일 9 함께 보기 10 참고 11 참고 도서 역사적 관측들[편집] 가장 유명한 산개성단 중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고대부터 항성들의 집단이라고 알려져 왔다. 망원경이 발명되어 항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엔 플레이아데스를 제외한 다른 성단들은 희미하게 빛나는 하늘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을 통해 두 종류의 특징적인 성단을 밝혀내었다. 하나는 은하수의 중심을 향하는 방향에서 발견되는 수천 개의 항성이 모인 구형의 집단이고, 하나는 전 하늘에서 발견되는 불규칙한 모양을 띤 듬성듬성한 항성들의 집단이었다. 천문학자들은 전자를 구상 성단으로, 후자를 산개성단이라고 칭하였다. 산개성단들은 아래에 언급되듯이 대부분 은하수 면에 있어서 은하 성단이라고도 불린다.[7] 산개성단 내의 항성들은 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일찍이 밝혀졌다. Reverend John Michell은 1767년 플레이아데스 같은 한개의 항성 집단이 지구에서 관측될 수 있는 우연한 위치에 있게 된 일이 단지 1/496000의 확률이라는 사실을 계산했다.[8] 천문학이 더 발전하여 정확해지면서 스펙트럼 분석을 통하여 성단의 항성들은 우주공간에서 비슷한 운동을 하고 공통의 방사상의 속도를 가지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성단의 항성들이 같은 시기에 탄생하고 집단 속에 있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2] 산개성단과 구상성단이 꽤 다른 두 집단이긴 하지만, 항성들이 듬성듬성 존재하는 구상성단과 항성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산개성단사이의 모양 차는 거의 없다. 몇몇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성단이 유사한 기본 방식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구상성단의 경우 우리 은하에서 더 이상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수천 수백 개의 항성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상태라는 것이 차이점이다.[9] 산개성단의 형성[편집] 적외선은 오리온자리의 중심부에 형성된 빽빽한 산개성단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항성들은 보통 다중계에서 형성된다.[10] 가스 구름은 자체 중력으로 붕괴될 수 있을 정도로 태양의 몇 배가 되는 질량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무거운 구름은 하나의 항성으로는 붕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11] 거대 분자 구름(태양의 수천 배의 질량의 가스를 가지고 있는 차갑고 빽빽한 구름)의 붕괴로 산개성단의 군락이 생성되었다. 많은 요인들이 거대 분자 구름(혹은 그의 일부)의 붕괴를 촉진 하고, 또한 항성 집단의 폭발이 산개성단 탄생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근처의 초신성과 중력 섭동에 의해서 발생한 충격파 또한 이에 영향을 미친다. 일단 거대 분자 구름이 붕괴되면, 구름의 부분들이 점차 점차 작은 무리가 되면서 몇 천개의 항성이 모인 군락이 형성된다. 우리 은하의 경우 몇천년에 한번 정도의 비율로 산개성단이 형성된다.[12] 일단 항성의 형성이 시작되면, 가장 뜨겁고 큰 질량을 가진 항성들이 방대한 양의 자외선을 방출할 것이다. 이 방사성은 재빨리 거대 분자 구름의 가스를 이온화하여 H II 영역을 형성하고, 거대한 항성들과 방사압이 만들어낸 형성된 항성풍이 가스를 흩어지게 한다. 몇 백 만년 후에 성단은 역시 가스를 방출하는 첫 번째 초신성의 단계가 된다. 수천만년 후에 성단을 둘러싼 가스는 없어지고, 항성의 형성 또한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 성단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10% 이하의 가스는 사라지기 전에 항성을 형성한다.[12] 성단의 형성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분자 구름 핵이 빠른 속도로 수축하고, 일단 큰 질량을 가진 항성들이 빛나기 시작하면 그들은 뜨겁게 이온화된 잔여 가스를 바른 속도로 배출한다. 구름핵 수축이 시작되면서 가스 분출이 일어나는 순간은 백에서 삼백만년을 넘지 않는다. 구름핵에 있는 오직 30-40 퍼센트의 가스만이 항성들을 형성하며, 남은 가스 분출과정은 성운이 대부분의 혹은 모든 항성을 유실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친다.[13] 모든 성단은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부분이 붕괴될 정도의 큰 손실을 겪는다. 성단에서 방출된 젊은 항성들은 우주 공간의 일부가 된다. 모든 항성들이 성단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단들은 은하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토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탄생시의 많은 성단들을 구성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 격렬한 가스 분출은 또한 은하의 구조에 형태학적, 운동학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개 혹은 그 이상의 흩어져 있는 산개성단들이 같은 분자 구름에서 형성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거대 마젤란 구름에서 Hodge 301과 R136은 둘 다 독거미 성운에서 형성되었다. 또한 우리 은하에서 잘 알려진 두 성단인 히아데스와 프레세페 성단의 움직임을 추적해 보면 둘 모두 6억 년 전에 동일한 구름에서 생성된 것을 알 수 있다.[14] 때때로 동시에 형성된 두 성단은 쌍둥이 성단을 이루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 은하수에 있는 쌍둥이 성단인 NGC 869와 NGC 884가 존재하며 적어도 10개 이상의 쌍둥이 성단이 더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15] 많은 것들은 대마젤란, 소마젤란 은하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성단들은 외부 관측이 우리 은하 내에서의 관측보다 쉬운데 그 이유는 은하수 내에 있을 경우 관측 과정에서 무관한 성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형태적 분류[편집] 산개성단은 구성하는 항성의 수가 적고 흩어진 형태의 성단에서부터 수천 개의 항성으로 구성된 매우 거대한 항성의 집합체 형태의 성단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그들은 보통 꽤나 다른 밀집된 핵을 가지고 있는데, 이 성단은 구성하는 항성으로부터 방출된 ‘코로나’에 의해 둘러싸여져 있다. 핵은 보통 3-4광년 정도의 크기이며 코로나는 성단의 중심으로부터 무려 20광년 정도씩이나 펼쳐져 있다. 성단의 중심부에 있는 항성들의 밀집도는 1 cubic 광년에 1.5개 정도씩 분포되어 있는 정도이다. (태양 근처 항성의 밀집도는 1 세제곱 광년에 0.003개 정도이다.)[16] 산개성단들은 1930년 로버트 트럼플러(Robert Trumpler)에 의해 개발된 방법에 의해서 분류된다. 트럼플러 방법은 성단을 세 부분으로 분류하였고, I-IV까지의 로마 숫자로 강하게 연관된 것부터 약하게 연관된 것까지 주위 항성들과의 밀집도와 분산정도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아라비아 숫자 1~3을 성단 구성원인 항성들의 밝기를 표시하는 척도로 사용했다. 그리고 p, m, r은 성단을 구성하는 항성이 적은지, 보통인지 혹은 많은지를 표시했다. 덧붙여 ‘n’은 성단이 성운에 있는지 아닌지를 나타내었다.[17] 트럼플러 방법에 의해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I3rn(성운 내에 위치하며 강하게 밀집되어 있고 항성의 수가 많음)으로 분류되고, 히아데스 성단은 II3m(약간 분산되어 있고 항성들의 수가 썩 많지는 않은 편)으로 분류된다. 산개성단의 수와 분포[편집] NGC 346은 소마젤란 은하에 있는 산개성단이다. 우리 은하에는 1000개 이상의 산개성단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모든 산개성단의 수를 계산한다면 사실 10000개보다 많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18] 나선 은하에서, 산개성단들은 주로 가스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어 항성들이 가장 많이 생성되는 나선팔에서 주로 발견된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성단들은 나선팔을 벗어나기 전에 분산되어 버린다. 산개성단은 은하면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우리 은하의 스케일 높이는 180광년 정도이고 은하의 반지름은 대략 100,000광년 정도이다)[19] 불규칙 은하의 경우 산개성단은 은하 전체에서 발견되며, 그 중에서도 가스는 농도가 가장 높은 곳에 많이 밀집되어 있다.[20] 산개성단은 타원은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데, 타원은하의 경우에는 항성의 생성이 몇 백만 년 전에 이미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존재해 있던 산개성단은 이미 오래전에 흩어져버렸을 것이다.[21] 우리 은하의 경우 성단의 분포는 성단의 연령에 영향을 받는데 늙은 성단의 경우 주로 은하핵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많이 발견된다. 기조력의 경우 은하 중심 주변부에서 더 강력하기 때문에 성단들을 흩어 놓는다. 그리고 성단들을 흩어 놓는 거대 분자 구름이 은하 중심부로 몰리기 때문에 은하 중심 지역에 있는 은하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깥쪽으로 분산되게 된다.[22] 천문학적 구성[편집] 대마젤란 은하에 있는 독거미 성운 산개성단들은 항성들이 죽기 전 대부분 흩어지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방출 되는 빛은 젊고 뜨거운 푸른 항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이런 항성들은 보통 무겁고 수만 수백만 년 정도의 짧은 일생을 가진다. 늙은 산개성단들의 경우 노란 빛을 띠는 항성들이 더 포함되어 있다.[출처 필요] 어떤 산개성단들은 나머지 성단에 있는 어떤 것 보다 유달리 젊은 뜨거운 파란 항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청색 낙오성들은 또한 아주 밀집되어 있는 구상 성단의 핵에서도 관측되는데, 이는 항성들이 충돌하면서 더욱 더 뜨겁고 무거워지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산개성단은 구상 성단에 비해 훨씬 더 밀집도가 낮은데다가 천문학적 충돌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는 많은 수의 청색 낙오성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의 경우 다른 항성들 사이의 역학적 상호작용에 의해서 연성계를 형성하여 하나의 항성으로 합쳐지면서 청색 낙오성이 생성되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23] 질량이 크지 않은 항성들은 일단 핵융합에 의해 수소를 방출하면, 그들의 바깥 쪽 층으로 행성상 성운을 만들어 백색왜성으로 진화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성단들은 구성성분인 항성들이 대부분 백색왜성의 단계가 되기 전에 흩어진다. 그래서 구상성단의 백색왜성의 수는 추측되는 것보다 훨씬 적으며 이를 통해 성단의 연령과 항성들의 초기 질량 분포를 알 수 있다. 적색 거성이 행성상 성운이 되기 위해 바깥층을 방출할 때, 물질의 비대칭적으로 손실되고 이때문에 항성들이 성단으로 배출되기에 충분할 만큼 초당 몇 km씩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백색왜성의 수가 적은 것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설명이다.[24] 최후의 운명[편집] 삼각형자리 은하에 있는 NGC 604는 H II 영역 에 둘러싸인 질량이 아주 큰 산개성단이다. 산개성단 내의 항성들은 충분히 질량이 작아서 탈출 속도가 일반적으로 구성하는 항성들의 속도의 평균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에 많은 산개성단들은 선천적으로 불안정하다. 이러한 성단들은 몇 백만 년 안에 빠르게 흩어질 것이다. 많은 경우, 젊고 뜨거운 젊은 항성들이 내는 방사압때문에 형성된 성단들에 의해 형성된 가스가 없어지는 현상은 성단이 빠르게 흩어질 수 있을 정도로 질량을 감소시킨다.[25] 충분한 질량을 가지고 있어서 주위 성운이 발산할 때도 중력적 결합을 할 수 있는 성단들은 수십 수백만년 동안 유지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부적, 외부적 과정이 또한 그들을 흩어놓는다. 내부적으로 성단의 항성들이 서로 가까이 위치하게 되면서 성단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속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단 구성원들 사이의 점진적 발산이 일어나게 된다.[26] 또한 대략 5억년 정도마다 한번 씩 산개성단은 분자 구름 근처를 지나가거나 통과하면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흩어지게 된다. 이처럼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면서 생성되게 되는 중력적인 기조력은 성단을 흩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성단은 성류(천구 상에서 항성이 일정한 방향을 향하는 현상)로 변하여 성단처럼 가깝지는 않지만 비슷한 속도로 유사한 방향으로 운동할 정도로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단이 흩어지는 시간의 척도는 초기의 천문학적 항성의 밀집도에 따라 달려있다. 더 단단하게 결속된 성단들은 좀 더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다. 성단이 일생의 반 정도를 살았다고 가정 한다면 처음의 밀집도에 따라 남은 반 동안 15억에서 80억 광년의 범위에 걸쳐 구성 항성들이 사라질 것이다.[26] 성단이 중력적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더라도 많은 구성 항성들은 유사한 궤적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이것이 성협 혹은 운동성단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큰 곰자리에 있는 북두칠성 중 가장 밝은 항성들 몇 개는 과거 산개성단의 구성 요소였으며 현재 큰 곰 자리의 운동 성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27] 결과적으로 그들의 상대적으로 미세한 속력차가 그것들을 은하의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한다. 만약 우리가 비슷한 속도와 연령을 가졌지만 연관되지 않은 항성들을 발견한다면 거대 성단은 성류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28][29] 항성 진화 연구[편집] 두 산개성단을 나타낸 H-R 다이어그램. 산개성단을 위한 도표인 H-R다이어그램(헤르츠스프룽-러셀 다이어그램, Hertzsprung-Russell diagram)이 만들어졌을 때, 대부분의 항성들은 주계열에 포함되어 있었다.[30] 가장 질량이 무거운 항성들은 주계열에서부터 진화하기 시작하여 적색거성이 된다. 주계열에서 갈라지는 분기점을 통해 성단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산개성단내의 항성들은 모두 지구에서부터 대략적으로 비슷한 거리에 있다. 또한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구성 항성들 사이의 차이점인 눈에 띄는 밝기는 질량에 의해 기인한 것이다.[30] 항성들을 서로서로 비교해보면 다양한 매개변수들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산개성단은 항성진화를 연구하기에 매우 유용하다. 산개성단 내에서 리튬과 베릴륨의 양을 연구하는 것은 항성들의 진화와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천만K의 온도에 도달하기 전까지, 수소핵이 헬륨으로 융합되지 못할 때 리튬과 베릴륨은 각각 250만K, 350만K의 온도에서 파괴된다. 이것은 그들의 풍부한 정도가 항성 내부에서 얼마의 양의 혼합이 일어났느냐에 따라 크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개성단 내 항성들 속의 리튬, 베릴륨의 양을 연구하면 연령이나 화학조성 등 다양한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된다.[31] 연구를 통해 이러한 빛 구성 물질들이 항성 진화에서 예상되었던 것 보다 훨씬 적은 양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결핍의 이유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나의 가설은 항성 내부의 대류가 방사선이 에너지 수송과정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으로 벗어나게 만든다는 것이다.[31] 산개성단과 천문학적 거리 스케일[편집] M11, Wild Duck 성단은 은하수 중심을 향하고 있는 매우 빽빽한 성단이다. 천체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그들은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안이지만 대부분의 물체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적으로 거리를 측정하기가 어렵다. 천문학적인 거리 스케일을 측정하는 연구는 간접적으로, 때때로는 연관되어 있는 가장 가까운 물체(좀 더 먼 물체들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거리가 직접적으로 측정된)를 측정하는 부정확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32] 가장 가까운 산개성단은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거리가 직접적으로 측정되었다. 첫째로 가까운 산개성단 내에 있는 항성들 사이의 시차는 다른 독립적인 항성들처럼 측정될 수 있다. 500광년 이하의 거리에 있는 플레이아데스나 히아데스 혹은 다른 성단의 경우는 가깝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으며 히파르코스(Hipparcos, 위치 측정 위성)의 측정 결과로부터 몇몇 성단들의 정확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33][34] 다른 직접적인 방법은 운동성단방법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성단 내에 있는 항성들은 우주에서 비슷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성단 구성원들의 움직임을 측정하고 우주를 가로지르는 그들의 운동을 나타내면 소실점으로 모여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단 내의 항성들의 각속도는 이들의 스펙트럼으로부터 도플러 이동을 측정하면 구할 수 있고 성단으로부터 소실점까지의 고유운동과 각거리 간단한 삼각법으로 성단까지의 거리를 알 수 있다. 히아데스 성단은 이 방법을 응용하여 계산된 가장 잘 알려진 예이다.(거리는 46.3 파섹이다)[35] 일단 근처 성단들까지의 거리가 측정되면, 응용된 기술을 이용하여 먼 거리에 있는 성단들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다. 거리가 이미 알려져 있는 성단을 H-R 다이어그램을 통해 더 먼 거리의 성단과 비교해 보면 더 먼 거리에 있는 성단까지의 거리가 측정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산개성단은 히아데스이다. 반면에 북두칠성에 있는 항성들을 포함한 성협까지의 거리는 히아데스까지의 절반정도이지만 성협의 항성들은 산개성단내의 항성처럼 중력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다. 우리 은하에서 가장 먼 산개성단으로 알려진 것은 Berkeley 29이고, 약 15,000파섹 떨어져있다.[36] 산개성단은 또한 국부 은하군에 있는 은하들에서도 쉽게 관측된다. 산개성단의 거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은 표준촉광으로 사용되는 세페이드나 거문고자리 RR 항성같은 다양한 항성들에 의해 보이는 주기광도관계를 측정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런 선명한 항성들은 아주 먼 거리에 있어도 측정될 수 있고 또한 국부 은하군 근처의 먼 은하까지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37] 함께 보기[편집] 성협 천체 운동학 성단 참고[편집] ↑ 한국천문학회 편, 《천문학용어집》 254쪽 좌단 34째줄 ↑ 가 나 Frommert, Hartmut; Kronberg, Christine (2007년 8월 27일). “Open Star Clusters”. 《S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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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개성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산개성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쌍둥이 성단 산개성단(散開星團, open cluster, 문화어: 널린별떼)[1]은 같은 분자구름에서 태어났으며 나이가 거의 같은 수천개의 항성이 모인 집단이다. 우리 은하에만 1,100개가 넘는 산개 성단이 발견되었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산개 성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2] 성단의 별들은 서로 중력적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으며 은하 중심을 돌면서 다른 성단이나 가스 구름과 만나면 해당 천체의 중력 때문에 종전의 궤도가 망가지거나 성단에 있던 일부 항성이 이탈하기도 한다.[3] 산개성단이 형태를 유지하는 기간은 보통 몇억 년 정도이다. 대조적으로, 구상 성단은 훨씬 강하게 중력적으로 묶여 있어 수십억 년은 유지된다. 산개성단은 나선은하와 불규칙 은하에서만 발견되는데, 둘 다 활발하게 항성이 태어나는 곳이다.[4] 젊은 산개성단들은 자신이 형성된 분자 구름 속에 포함 되어 있는데, 이것이 H II 영역을 형성하는 것으로 밝혀졌다.[5]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단에서 방출되는 방사압이 분자 구름을 흩어놓는다. 방사압이 구름을 흩어 놓기 전에 약 10%의 가스 구름만이 항성의 일부로 합쳐지게 된다. 산개성단은 항성 진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항성들은 매우 유사한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비슷한 화학적 조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항성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보다 여러가지 미묘한 특징적인 차이점들을 관측할 수 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이나 히아데스 성단, 페르세우스자리 알파 성단 등 많은 수의 성단들은 육안으로도 관측할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쌍둥이 성단 같은 것들은 기구 없이는 거의 관측할 수 없으며, 쌍안경이나 망원경을 이용해야 볼 수 있다.[6] 목차 1 역사적 관측들 2 산개성단의 형성 3 형태적 분류 4 산개성단의 수와 분포 5 천문학적 구성 6 최후의 운명 7 항성 진화 연구 8 산개성단과 천문학적 거리 스케일 9 함께 보기 10 참고 11 참고 도서 역사적 관측들[편집] 가장 유명한 산개성단 중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고대부터 항성들의 집단이라고 알려져 왔다. 망원경이 발명되어 항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엔 플레이아데스를 제외한 다른 성단들은 희미하게 빛나는 하늘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을 통해 두 종류의 특징적인 성단을 밝혀내었다. 하나는 은하수의 중심을 향하는 방향에서 발견되는 수천 개의 항성이 모인 구형의 집단이고, 하나는 전 하늘에서 발견되는 불규칙한 모양을 띤 듬성듬성한 항성들의 집단이었다. 천문학자들은 전자를 구상 성단으로, 후자를 산개성단이라고 칭하였다. 산개성단들은 아래에 언급되듯이 대부분 은하수 면에 있어서 은하 성단이라고도 불린다.[7] 산개성단 내의 항성들은 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일찍이 밝혀졌다. Reverend John Michell은 1767년 플레이아데스 같은 한개의 항성 집단이 지구에서 관측될 수 있는 우연한 위치에 있게 된 일이 단지 1/496000의 확률이라는 사실을 계산했다.[8] 천문학이 더 발전하여 정확해지면서 스펙트럼 분석을 통하여 성단의 항성들은 우주공간에서 비슷한 운동을 하고 공통의 방사상의 속도를 가지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성단의 항성들이 같은 시기에 탄생하고 집단 속에 있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2] 산개성단과 구상성단이 꽤 다른 두 집단이긴 하지만, 항성들이 듬성듬성 존재하는 구상성단과 항성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산개성단사이의 모양 차는 거의 없다. 몇몇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성단이 유사한 기본 방식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구상성단의 경우 우리 은하에서 더 이상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수천 수백 개의 항성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상태라는 것이 차이점이다.[9] 산개성단의 형성[편집] 적외선은 오리온자리의 중심부에 형성된 빽빽한 산개성단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항성들은 보통 다중계에서 형성된다.[10] 가스 구름은 자체 중력으로 붕괴될 수 있을 정도로 태양의 몇 배가 되는 질량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무거운 구름은 하나의 항성으로는 붕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11] 거대 분자 구름(태양의 수천 배의 질량의 가스를 가지고 있는 차갑고 빽빽한 구름)의 붕괴로 산개성단의 군락이 생성되었다. 많은 요인들이 거대 분자 구름(혹은 그의 일부)의 붕괴를 촉진 하고, 또한 항성 집단의 폭발이 산개성단 탄생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근처의 초신성과 중력 섭동에 의해서 발생한 충격파 또한 이에 영향을 미친다. 일단 거대 분자 구름이 붕괴되면, 구름의 부분들이 점차 점차 작은 무리가 되면서 몇 천개의 항성이 모인 군락이 형성된다. 우리 은하의 경우 몇천년에 한번 정도의 비율로 산개성단이 형성된다.[12] 일단 항성의 형성이 시작되면, 가장 뜨겁고 큰 질량을 가진 항성들이 방대한 양의 자외선을 방출할 것이다. 이 방사성은 재빨리 거대 분자 구름의 가스를 이온화하여 H II 영역을 형성하고, 거대한 항성들과 방사압이 만들어낸 형성된 항성풍이 가스를 흩어지게 한다. 몇 백 만년 후에 성단은 역시 가스를 방출하는 첫 번째 초신성의 단계가 된다. 수천만년 후에 성단을 둘러싼 가스는 없어지고, 항성의 형성 또한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 성단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10% 이하의 가스는 사라지기 전에 항성을 형성한다.[12] 성단의 형성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분자 구름 핵이 빠른 속도로 수축하고, 일단 큰 질량을 가진 항성들이 빛나기 시작하면 그들은 뜨겁게 이온화된 잔여 가스를 바른 속도로 배출한다. 구름핵 수축이 시작되면서 가스 분출이 일어나는 순간은 백에서 삼백만년을 넘지 않는다. 구름핵에 있는 오직 30-40 퍼센트의 가스만이 항성들을 형성하며, 남은 가스 분출과정은 성운이 대부분의 혹은 모든 항성을 유실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친다.[13] 모든 성단은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부분이 붕괴될 정도의 큰 손실을 겪는다. 성단에서 방출된 젊은 항성들은 우주 공간의 일부가 된다. 모든 항성들이 성단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단들은 은하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토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탄생시의 많은 성단들을 구성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 격렬한 가스 분출은 또한 은하의 구조에 형태학적, 운동학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개 혹은 그 이상의 흩어져 있는 산개성단들이 같은 분자 구름에서 형성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거대 마젤란 구름에서 Hodge 301과 R136은 둘 다 독거미 성운에서 형성되었다. 또한 우리 은하에서 잘 알려진 두 성단인 히아데스와 프레세페 성단의 움직임을 추적해 보면 둘 모두 6억 년 전에 동일한 구름에서 생성된 것을 알 수 있다.[14] 때때로 동시에 형성된 두 성단은 쌍둥이 성단을 이루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 은하수에 있는 쌍둥이 성단인 NGC 869와 NGC 884가 존재하며 적어도 10개 이상의 쌍둥이 성단이 더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15] 많은 것들은 대마젤란, 소마젤란 은하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성단들은 외부 관측이 우리 은하 내에서의 관측보다 쉬운데 그 이유는 은하수 내에 있을 경우 관측 과정에서 무관한 성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형태적 분류[편집] 산개성단은 구성하는 항성의 수가 적고 흩어진 형태의 성단에서부터 수천 개의 항성으로 구성된 매우 거대한 항성의 집합체 형태의 성단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그들은 보통 꽤나 다른 밀집된 핵을 가지고 있는데, 이 성단은 구성하는 항성으로부터 방출된 ‘코로나’에 의해 둘러싸여져 있다. 핵은 보통 3-4광년 정도의 크기이며 코로나는 성단의 중심으로부터 무려 20광년 정도씩이나 펼쳐져 있다. 성단의 중심부에 있는 항성들의 밀집도는 1 cubic 광년에 1.5개 정도씩 분포되어 있는 정도이다. (태양 근처 항성의 밀집도는 1 세제곱 광년에 0.003개 정도이다.)[16] 산개성단들은 1930년 로버트 트럼플러(Robert Trumpler)에 의해 개발된 방법에 의해서 분류된다. 트럼플러 방법은 성단을 세 부분으로 분류하였고, I-IV까지의 로마 숫자로 강하게 연관된 것부터 약하게 연관된 것까지 주위 항성들과의 밀집도와 분산정도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아라비아 숫자 1~3을 성단 구성원인 항성들의 밝기를 표시하는 척도로 사용했다. 그리고 p, m, r은 성단을 구성하는 항성이 적은지, 보통인지 혹은 많은지를 표시했다. 덧붙여 ‘n’은 성단이 성운에 있는지 아닌지를 나타내었다.[17] 트럼플러 방법에 의해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I3rn(성운 내에 위치하며 강하게 밀집되어 있고 항성의 수가 많음)으로 분류되고, 히아데스 성단은 II3m(약간 분산되어 있고 항성들의 수가 썩 많지는 않은 편)으로 분류된다. 산개성단의 수와 분포[편집] NGC 346은 소마젤란 은하에 있는 산개성단이다. 우리 은하에는 1000개 이상의 산개성단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모든 산개성단의 수를 계산한다면 사실 10000개보다 많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18] 나선 은하에서, 산개성단들은 주로 가스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어 항성들이 가장 많이 생성되는 나선팔에서 주로 발견된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성단들은 나선팔을 벗어나기 전에 분산되어 버린다. 산개성단은 은하면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우리 은하의 스케일 높이는 180광년 정도이고 은하의 반지름은 대략 100,000광년 정도이다)[19] 불규칙 은하의 경우 산개성단은 은하 전체에서 발견되며, 그 중에서도 가스는 농도가 가장 높은 곳에 많이 밀집되어 있다.[20] 산개성단은 타원은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데, 타원은하의 경우에는 항성의 생성이 몇 백만 년 전에 이미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존재해 있던 산개성단은 이미 오래전에 흩어져버렸을 것이다.[21] 우리 은하의 경우 성단의 분포는 성단의 연령에 영향을 받는데 늙은 성단의 경우 주로 은하핵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많이 발견된다. 기조력의 경우 은하 중심 주변부에서 더 강력하기 때문에 성단들을 흩어 놓는다. 그리고 성단들을 흩어 놓는 거대 분자 구름이 은하 중심부로 몰리기 때문에 은하 중심 지역에 있는 은하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깥쪽으로 분산되게 된다.[22] 천문학적 구성[편집] 대마젤란 은하에 있는 독거미 성운 산개성단들은 항성들이 죽기 전 대부분 흩어지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방출 되는 빛은 젊고 뜨거운 푸른 항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이런 항성들은 보통 무겁고 수만 수백만 년 정도의 짧은 일생을 가진다. 늙은 산개성단들의 경우 노란 빛을 띠는 항성들이 더 포함되어 있다.[출처 필요] 어떤 산개성단들은 나머지 성단에 있는 어떤 것 보다 유달리 젊은 뜨거운 파란 항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청색 낙오성들은 또한 아주 밀집되어 있는 구상 성단의 핵에서도 관측되는데, 이는 항성들이 충돌하면서 더욱 더 뜨겁고 무거워지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산개성단은 구상 성단에 비해 훨씬 더 밀집도가 낮은데다가 천문학적 충돌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는 많은 수의 청색 낙오성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의 경우 다른 항성들 사이의 역학적 상호작용에 의해서 연성계를 형성하여 하나의 항성으로 합쳐지면서 청색 낙오성이 생성되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23] 질량이 크지 않은 항성들은 일단 핵융합에 의해 수소를 방출하면, 그들의 바깥 쪽 층으로 행성상 성운을 만들어 백색왜성으로 진화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성단들은 구성성분인 항성들이 대부분 백색왜성의 단계가 되기 전에 흩어진다. 그래서 구상성단의 백색왜성의 수는 추측되는 것보다 훨씬 적으며 이를 통해 성단의 연령과 항성들의 초기 질량 분포를 알 수 있다. 적색 거성이 행성상 성운이 되기 위해 바깥층을 방출할 때, 물질의 비대칭적으로 손실되고 이때문에 항성들이 성단으로 배출되기에 충분할 만큼 초당 몇 km씩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백색왜성의 수가 적은 것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설명이다.[24] 최후의 운명[편집] 삼각형자리 은하에 있는 NGC 604는 H II 영역 에 둘러싸인 질량이 아주 큰 산개성단이다. 산개성단 내의 항성들은 충분히 질량이 작아서 탈출 속도가 일반적으로 구성하는 항성들의 속도의 평균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에 많은 산개성단들은 선천적으로 불안정하다. 이러한 성단들은 몇 백만 년 안에 빠르게 흩어질 것이다. 많은 경우, 젊고 뜨거운 젊은 항성들이 내는 방사압때문에 형성된 성단들에 의해 형성된 가스가 없어지는 현상은 성단이 빠르게 흩어질 수 있을 정도로 질량을 감소시킨다.[25] 충분한 질량을 가지고 있어서 주위 성운이 발산할 때도 중력적 결합을 할 수 있는 성단들은 수십 수백만년 동안 유지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부적, 외부적 과정이 또한 그들을 흩어놓는다. 내부적으로 성단의 항성들이 서로 가까이 위치하게 되면서 성단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속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단 구성원들 사이의 점진적 발산이 일어나게 된다.[26] 또한 대략 5억년 정도마다 한번 씩 산개성단은 분자 구름 근처를 지나가거나 통과하면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흩어지게 된다. 이처럼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면서 생성되게 되는 중력적인 기조력은 성단을 흩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성단은 성류(천구 상에서 항성이 일정한 방향을 향하는 현상)로 변하여 성단처럼 가깝지는 않지만 비슷한 속도로 유사한 방향으로 운동할 정도로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단이 흩어지는 시간의 척도는 초기의 천문학적 항성의 밀집도에 따라 달려있다. 더 단단하게 결속된 성단들은 좀 더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다. 성단이 일생의 반 정도를 살았다고 가정 한다면 처음의 밀집도에 따라 남은 반 동안 15억에서 80억 광년의 범위에 걸쳐 구성 항성들이 사라질 것이다.[26] 성단이 중력적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더라도 많은 구성 항성들은 유사한 궤적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이것이 성협 혹은 운동성단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큰 곰자리에 있는 북두칠성 중 가장 밝은 항성들 몇 개는 과거 산개성단의 구성 요소였으며 현재 큰 곰 자리의 운동 성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27] 결과적으로 그들의 상대적으로 미세한 속력차가 그것들을 은하의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한다. 만약 우리가 비슷한 속도와 연령을 가졌지만 연관되지 않은 항성들을 발견한다면 거대 성단은 성류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28][29] 항성 진화 연구[편집] 두 산개성단을 나타낸 H-R 다이어그램. 산개성단을 위한 도표인 H-R다이어그램(헤르츠스프룽-러셀 다이어그램, Hertzsprung-Russell diagram)이 만들어졌을 때, 대부분의 항성들은 주계열에 포함되어 있었다.[30] 가장 질량이 무거운 항성들은 주계열에서부터 진화하기 시작하여 적색거성이 된다. 주계열에서 갈라지는 분기점을 통해 성단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산개성단내의 항성들은 모두 지구에서부터 대략적으로 비슷한 거리에 있다. 또한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구성 항성들 사이의 차이점인 눈에 띄는 밝기는 질량에 의해 기인한 것이다.[30] 항성들을 서로서로 비교해보면 다양한 매개변수들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산개성단은 항성진화를 연구하기에 매우 유용하다. 산개성단 내에서 리튬과 베릴륨의 양을 연구하는 것은 항성들의 진화와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천만K의 온도에 도달하기 전까지, 수소핵이 헬륨으로 융합되지 못할 때 리튬과 베릴륨은 각각 250만K, 350만K의 온도에서 파괴된다. 이것은 그들의 풍부한 정도가 항성 내부에서 얼마의 양의 혼합이 일어났느냐에 따라 크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개성단 내 항성들 속의 리튬, 베릴륨의 양을 연구하면 연령이나 화학조성 등 다양한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된다.[31] 연구를 통해 이러한 빛 구성 물질들이 항성 진화에서 예상되었던 것 보다 훨씬 적은 양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결핍의 이유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나의 가설은 항성 내부의 대류가 방사선이 에너지 수송과정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으로 벗어나게 만든다는 것이다.[31] 산개성단과 천문학적 거리 스케일[편집] M11, Wild Duck 성단은 은하수 중심을 향하고 있는 매우 빽빽한 성단이다. 천체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그들은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안이지만 대부분의 물체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적으로 거리를 측정하기가 어렵다. 천문학적인 거리 스케일을 측정하는 연구는 간접적으로, 때때로는 연관되어 있는 가장 가까운 물체(좀 더 먼 물체들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거리가 직접적으로 측정된)를 측정하는 부정확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32] 가장 가까운 산개성단은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거리가 직접적으로 측정되었다. 첫째로 가까운 산개성단 내에 있는 항성들 사이의 시차는 다른 독립적인 항성들처럼 측정될 수 있다. 500광년 이하의 거리에 있는 플레이아데스나 히아데스 혹은 다른 성단의 경우는 가깝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으며 히파르코스(Hipparcos, 위치 측정 위성)의 측정 결과로부터 몇몇 성단들의 정확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33][34] 다른 직접적인 방법은 운동성단방법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성단 내에 있는 항성들은 우주에서 비슷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성단 구성원들의 움직임을 측정하고 우주를 가로지르는 그들의 운동을 나타내면 소실점으로 모여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단 내의 항성들의 각속도는 이들의 스펙트럼으로부터 도플러 이동을 측정하면 구할 수 있고 성단으로부터 소실점까지의 고유운동과 각거리 간단한 삼각법으로 성단까지의 거리를 알 수 있다. 히아데스 성단은 이 방법을 응용하여 계산된 가장 잘 알려진 예이다.(거리는 46.3 파섹이다)[35] 일단 근처 성단들까지의 거리가 측정되면, 응용된 기술을 이용하여 먼 거리에 있는 성단들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다. 거리가 이미 알려져 있는 성단을 H-R 다이어그램을 통해 더 먼 거리의 성단과 비교해 보면 더 먼 거리에 있는 성단까지의 거리가 측정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산개성단은 히아데스이다. 반면에 북두칠성에 있는 항성들을 포함한 성협까지의 거리는 히아데스까지의 절반정도이지만 성협의 항성들은 산개성단내의 항성처럼 중력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다. 우리 은하에서 가장 먼 산개성단으로 알려진 것은 Berkeley 29이고, 약 15,000파섹 떨어져있다.[36] 산개성단은 또한 국부 은하군에 있는 은하들에서도 쉽게 관측된다. 산개성단의 거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은 표준촉광으로 사용되는 세페이드나 거문고자리 RR 항성같은 다양한 항성들에 의해 보이는 주기광도관계를 측정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런 선명한 항성들은 아주 먼 거리에 있어도 측정될 수 있고 또한 국부 은하군 근처의 먼 은하까지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37] 함께 보기[편집] 성협 천체 운동학 성단 참고[편집] ↑ 한국천문학회 편, 《천문학용어집》 254쪽 좌단 34째줄 ↑ 가 나 Frommert, Hartmut; Kronberg, Christine (2007년 8월 27일). “Open Star Clusters”. 《S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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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0-03-006228-4. vdeh항성계구속 은하 왜소은하 성단(구상성단 산개성단 초성단) 쌍성 다중성계 비구속 성류 성협 운동성군 다중성 성군 폭주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산개성단&oldid=23539010" 분류: 성단산개성단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CS1 - 이탈리아어 인용 (it)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0년 11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5일 (금) 21: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엑소시스트 (영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엑소시스트 (영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엑소시스트The Exorcist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 제작 윌리엄 피터 블래티 각본 윌리엄 피터 블래티 원작 윌리엄 피터 블래티의 소설,엑소시스트 출연 앨런 버스틴막스 폰 쉬도브리 J. 콥키티 윈잭 맥고런제이슨 밀러린다 블레어 촬영 오웬 로이즈만 편집 노만 게이 음악 마이크 올드필드 제작사 호야 프로덕션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개봉일 1973년 12월 26일 (1973-12-26) (미국)2000년 9월 22일 (2000-09-22) (재공개) 시간 121분[1]133분(디렉터스 컷) 국가 미국 언어 영어이탈리아어라틴어 제작비 미화 $1,200만[2] 수익 미화 $4억 270만 ~ 4억 4,413만[2][3] 《 엑소시스트 》(원제:The Exorcist)는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린다 블레어 주연의 영화이다. 1973년에 제작되었다.[4]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하였다.[5] 대한민국에는 《무당》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6] 목차 1 줄거리 2 출연 2.1 주연 2.2 조연 3 기타 4 감상 및 평가 5 수상 6 각주 7 외부 링크 8 참고 자료 줄거리[편집] 북부 이라크의 고대 유적을 발굴에 참가한 노신부 메린(맥스 폰 시도우)은 앗시리아의 마신상이 발견되자 악령 부활의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혀 미국으로 돌아온다. 한편, 미국의 대학도시 조지 타운에서는 남편과 별거중인 여배우 크리스 마크닐(엘렌 버스틴)이 외동딸 리건(린다 블레어)을 데리고 아담한 집에 살며 촬영에 분주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리건이 악령에 씌이게 된다. 리건의 침대가 진동하고 리건의 몸은 꺾일듯이 휘어질 뿐만 아니라 입에서 거품이 아니라 퍼런 독즙을 내뿜고 성대도 변하여 음산한 목소리가 된다. 현대 의학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이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가까이에 사는 젊은 신부 칼라스의 도움에 청하지만, 젊은 칼라스 신부는 혼신의 노력도 소용이 없자 예수회의 고위 신부에게 청원, 악마 추방령의 허가를 받은 메린 신부가 찾아온다. 고대의 마신상을 발견하고 공포로 온몸을 떨었던 그 노신부이다. 메린과 칼라스 두 신부가 리건의 악령과 처절한 대결을 꾀하나 순식간에 불가사의한 차가운 기운이 온 방안을 휘감으며 온갖 괴기현상이 잇따른다. 메린 노신부는 기력이 진하여 악령추방의 의식을 진행하던 중에 숨을 거둔다. 마지막 수단으로 젊은 칼라스 신부는 최후의 염력으로 악령을 자신의 몸 안에 불러들여 창에서 몸을 던짐으로써 자신과 함께 악령을 죽인다. 칼라스 신부의 희생으로 겨우 악령의 세계에서 탈출한 리건은 그때까지의 일이 전혀 기억에 없는 채 그 맑고도 청순한 옛 모습의 소녀로 돌아간다.[4] 출연[편집] 주연[편집] 엘렌 버스틴 막스 폰 시도우 린다 블레어 리J.콥 키티 윈 잭 맥고런 제이슨 밀러 조연[편집] 레버런드 윌리엄 오말리 바튼 헤이먼 피터 매스터슨 루돌프 션들러 지나 페트러쉬카 로버트 시먼즈 아서 스토치 레버런드 토머스 버밍햄 바시리키 마리아로스 티토스 반디스 월레스 루니 론 파버 도나 미첼 로이 쿠퍼 로버트 게링거 멀시데스 맥캠브릿지 기타[편집] 원작자: 윌리엄 피터 블래티 협력프로듀서: 데이빗 샐븐 조감독: 테렌스 A. 도넬리 미술: 빌 멀리 세트: 제리 운더리치 특수분장: 딕 스미스 감상 및 평가[편집] 공포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작품과 비교될 만한 공포영화는 몇 나오지 않았다.[5] 수상[편집] 1974년 아카데미 각본·음향상을 수상하였다.[5] 1974년 골든 글러브 최우수작품·최우수감독·최우수각본·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6] 각주[편집] ↑ “THE EXORCIST”. 영국 영화 등급 분류 위원회. 1974년 1월 28일. 2016년 6월 16일에 확인함. ↑ 가 나 “The Exorcist (1973)”. The Numbers. 2016년 6월 16일에 확인함. ↑ “The Exorcist”. Box Office Mojo. 2016년 6월 16일에 확인함. ↑ 가 나 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감상/미국영화의 감상/엑소시스트, 《글로벌 세계 대백과》 ↑ 가 나 다 '엑소시스트'(KBS1 오후11:00), 《경향신문》, 1999.7.17 ↑ 가 나 「무당」네部門賞휩쓸어, 《동아일보》, 1974.1.29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엑소시스트 엑소시스트 - 공식 웹사이트 (영어) The Exorcist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The Exorcist – 올무비 (영어) The Exorcist – 박스 오피스 모조 (영어) The Exorcist – 로튼 토마토 (영어) The Exorcist – 메타크리틱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VIAF: 195060060 GND: 4321704-7 SUDOC: 112607004 BNF: cb13751432s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엑소시스트_(영화)&oldid=24190956" 분류: 1973년 영화영어 영화 작품미국의 영화 작품이탈리아의 영화 작품미국의 공포 영화미국의 스릴러 영화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영화배우를 소재로 한 영화워싱턴 D.C.를 배경으로 한 영화아카데미 음향효과상 수상작아카데미 각색상 수상작심리 스릴러 영화워너브라더스 영화악마를 소재로 한 영화종교 공포 영화구마를 소재로 한 영화이라크에서 촬영한 영화워싱턴 D.C.에서 촬영한 영화뉴욕에서 촬영한 영화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작품상(영화) 수상작미국의 드라마 영화미국 국립영화등기부 등재 영화로마 가톨릭 신부를 소재로 한 영화염력을 소재로 한 영화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miliàn e rumagnòlEnglish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àidhlig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4: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엑소시스트 (영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엑소시스트 (영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엑소시스트The Exorcist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 제작 윌리엄 피터 블래티 각본 윌리엄 피터 블래티 원작 윌리엄 피터 블래티의 소설,엑소시스트 출연 앨런 버스틴막스 폰 쉬도브리 J. 콥키티 윈잭 맥고런제이슨 밀러린다 블레어 촬영 오웬 로이즈만 편집 노만 게이 음악 마이크 올드필드 제작사 호야 프로덕션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개봉일 1973년 12월 26일 (1973-12-26) (미국)2000년 9월 22일 (2000-09-22) (재공개) 시간 121분[1]133분(디렉터스 컷) 국가 미국 언어 영어이탈리아어라틴어 제작비 미화 $1,200만[2] 수익 미화 $4억 270만 ~ 4억 4,413만[2][3] 《 엑소시스트 》(원제:The Exorcist)는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린다 블레어 주연의 영화이다. 1973년에 제작되었다.[4]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하였다.[5] 대한민국에는 《무당》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6] 목차 1 줄거리 2 출연 2.1 주연 2.2 조연 3 기타 4 감상 및 평가 5 수상 6 각주 7 외부 링크 8 참고 자료 줄거리[편집] 북부 이라크의 고대 유적을 발굴에 참가한 노신부 메린(맥스 폰 시도우)은 앗시리아의 마신상이 발견되자 악령 부활의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혀 미국으로 돌아온다. 한편, 미국의 대학도시 조지 타운에서는 남편과 별거중인 여배우 크리스 마크닐(엘렌 버스틴)이 외동딸 리건(린다 블레어)을 데리고 아담한 집에 살며 촬영에 분주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리건이 악령에 씌이게 된다. 리건의 침대가 진동하고 리건의 몸은 꺾일듯이 휘어질 뿐만 아니라 입에서 거품이 아니라 퍼런 독즙을 내뿜고 성대도 변하여 음산한 목소리가 된다. 현대 의학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이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가까이에 사는 젊은 신부 칼라스의 도움에 청하지만, 젊은 칼라스 신부는 혼신의 노력도 소용이 없자 예수회의 고위 신부에게 청원, 악마 추방령의 허가를 받은 메린 신부가 찾아온다. 고대의 마신상을 발견하고 공포로 온몸을 떨었던 그 노신부이다. 메린과 칼라스 두 신부가 리건의 악령과 처절한 대결을 꾀하나 순식간에 불가사의한 차가운 기운이 온 방안을 휘감으며 온갖 괴기현상이 잇따른다. 메린 노신부는 기력이 진하여 악령추방의 의식을 진행하던 중에 숨을 거둔다. 마지막 수단으로 젊은 칼라스 신부는 최후의 염력으로 악령을 자신의 몸 안에 불러들여 창에서 몸을 던짐으로써 자신과 함께 악령을 죽인다. 칼라스 신부의 희생으로 겨우 악령의 세계에서 탈출한 리건은 그때까지의 일이 전혀 기억에 없는 채 그 맑고도 청순한 옛 모습의 소녀로 돌아간다.[4] 출연[편집] 주연[편집] 엘렌 버스틴 막스 폰 시도우 린다 블레어 리J.콥 키티 윈 잭 맥고런 제이슨 밀러 조연[편집] 레버런드 윌리엄 오말리 바튼 헤이먼 피터 매스터슨 루돌프 션들러 지나 페트러쉬카 로버트 시먼즈 아서 스토치 레버런드 토머스 버밍햄 바시리키 마리아로스 티토스 반디스 월레스 루니 론 파버 도나 미첼 로이 쿠퍼 로버트 게링거 멀시데스 맥캠브릿지 기타[편집] 원작자: 윌리엄 피터 블래티 협력프로듀서: 데이빗 샐븐 조감독: 테렌스 A. 도넬리 미술: 빌 멀리 세트: 제리 운더리치 특수분장: 딕 스미스 감상 및 평가[편집] 공포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작품과 비교될 만한 공포영화는 몇 나오지 않았다.[5] 수상[편집] 1974년 아카데미 각본·음향상을 수상하였다.[5] 1974년 골든 글러브 최우수작품·최우수감독·최우수각본·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6] 각주[편집] ↑ “THE EXORCIST”. 영국 영화 등급 분류 위원회. 1974년 1월 28일. 2016년 6월 16일에 확인함. ↑ 가 나 “The Exorcist (1973)”. The Numbers. 2016년 6월 16일에 확인함. ↑ “The Exorcist”. Box Office Mojo. 2016년 6월 16일에 확인함. ↑ 가 나 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감상/미국영화의 감상/엑소시스트, 《글로벌 세계 대백과》 ↑ 가 나 다 '엑소시스트'(KBS1 오후11:00), 《경향신문》, 1999.7.17 ↑ 가 나 「무당」네部門賞휩쓸어, 《동아일보》, 1974.1.29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엑소시스트 엑소시스트 - 공식 웹사이트 (영어) The Exorcist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The Exorcist – 올무비 (영어) The Exorcist – 박스 오피스 모조 (영어) The Exorcist – 로튼 토마토 (영어) The Exorcist – 메타크리틱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거 통제 VIAF: 195060060 GND: 4321704-7 SUDOC: 112607004 BNF: cb13751432s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엑소시스트_(영화)&oldid=24190956" 분류: 1973년 영화영어 영화 작품미국의 영화 작품이탈리아의 영화 작품미국의 공포 영화미국의 스릴러 영화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영화배우를 소재로 한 영화워싱턴 D.C.를 배경으로 한 영화아카데미 음향효과상 수상작아카데미 각색상 수상작심리 스릴러 영화워너브라더스 영화악마를 소재로 한 영화종교 공포 영화구마를 소재로 한 영화이라크에서 촬영한 영화워싱턴 D.C.에서 촬영한 영화뉴욕에서 촬영한 영화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작품상(영화) 수상작미국의 드라마 영화미국 국립영화등기부 등재 영화로마 가톨릭 신부를 소재로 한 영화염력을 소재로 한 영화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miliàn e rumagnòlEnglish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àidhlig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4: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오자와 이치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자와 이치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오자와 이치로 (2001년 7월 18일) 오자와 이치로(일본어: 小沢 一郎, 1942년 5월 24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7선 중의원 의원이다. 제34대 자치대신,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신생당 대표간사, 신진당 당수, 자유당 당수, 민주당 대표, 민주당 간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목차 1 생애 1.1 성장기 1.2 정치 입문 이후 1.3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 1.4 신진당 시대 1.5 자유당 시대 1.6 민주당 시대 1.6.1 민주당 대표 1.7 민주당 탈당 이후 1.8 일본 미래당 탈당 이후 1.8.1 제주도 망언 1.9 국민대학교 강연 2 인물 2.1 평가 3 역대 선거 결과 4 각주 5 같이 보기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성장기[편집] 도쿄 시(현 도쿄도 다이토 구)에서 변호사이자 도쿄 부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 오자와 사에키와 어머니 오자와 미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도립 고이시카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도쿄 대학을 목표로 2년간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급사로 단념하고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니혼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으나 중퇴하였으며, 대한민국의 국민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정치 입문 이후[편집] 아버지가 급서한 후 사법시험 공부를 위해 입학한 니혼 대학 대학원에 재학하던 중인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시 이와테 2구에 자유민주당의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를 지휘하던 사람이 간사장이던 다나카 가쿠에이로, 이후 오자와는 다나카의 파벌에 들어가 그의 지도를 받는다. 총무국장과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을 지내고,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는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지낸다. 그러나 록히드 사건으로 당적을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의 영수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들고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과 함께 연구회 ‘소세이카이’(創政会)를 결성하고 이후 다케시타의 파벌로 독립한다. 다케시타 내각 발족 이후 오자와는 당과 정부의 요직을 지내 다케시타 파의 주요한 인물이 된다.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당 간사장에 취임하고, 자유주의 체제의 유지를 명목으로 경제단체연합회 산하의 기업에서 선거자금으로 3백억 엔을 모으고 제39회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의 실적을 올렸다. 걸프 전쟁 당시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데 대해 국회에서 공명당의 협력을 위해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신인을 공천했지만, 후보가 낙선하는 바람에 그 책임을 지고 간사장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파벌의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가네마루(金丸)와 다케시타(竹下)와 함께 ‘곤치쿠쇼’(金竹小)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에게 파벌의 흐름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면서 다케시타와의 마찰이 깊어지게 되었다. 1991년에는 정치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폐안이 된 것을 두고 가이후 도시키 수상이 중의원 해산의 뜻을 담은 발언을 하였다가 당내의 반발을 초래해 총사직하게 되었다(이른바 가이후 오로시).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를 후임 총리로 취임하도록 설득하고, 여러 의원들도 그를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였지만 당시 49세였던 오자와는 지나치게 젊다는 이유로 이를 고사하였다. 또 6월에는 협심증으로 쓰러지면서 건강불안설도 나왔다. 1992년에 도쿄사가와큐빈 사건을 두고 가네마루가 여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으면서 파벌회장과 의원직을 사임했다. 오자와는 그 후임으로 가네마루와 가까웠던 의원들과 함께 하다 쓰토무를 옹립하면서, 다케시타 직계의 오부치 게이조를 추대하려던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대립하게 된다. 당초 중립이었던 다케시타는 스스로 오부치의 지지를 결정하는 등의 영향으로, 파벌의 후임 회장은 오부치로 내정되었다. 이에 오자와는 일부 의원들과 ‘개혁포럼 21’을 결성해 하다 파로 독립하게 되었다. 미야자와 내각 개조내각에서 하다 파는 경제기획청 장관과 과학기술청 장관의 두 자리만이 배정되었고, 간사장마저 오부치 파의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취임하면서 하네다 파는 비주류로 전락하였다. 이에 대해 오자와는 주류 파벌을 ‘수구파’로, 자신을 ‘개혁파’로 칭하고 지론이었던 정치개혁의 실현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편집] 야당에서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1993년 6월 18일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 39명이 찬성표를 던지고, 16명이 결석하는 이른바 반역이 일어나면서 불신임안이 255 대 220으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야자와 내각이 해산하게 되었다. 6월 21일에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이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으며, 이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들이 탈당을 결단하는 한 요인이자 55년 체제 붕괴의 서장이 되었다. 6월 23일에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가 탈당해 신생당을 결성하고, 오자와는 대표간사로 취임했다. 7월 18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고, 신생당과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가 약진했다. 자민당의 미야자와 총재의 후임으로는 고노 요헤이가 선출되었다. 오자와는 총선거 직후부터 일본신당의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비공식회담을 가지고, 이후 8월 9일에는 8당 연립의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호소카와 정권에서 오자와는 내각과는 별도로 여당의 기관인 ‘연립여당 대표자회의’를 가져 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와 정권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고, 내각관방장관으로 관저 주도의 정치를 구상하던 신당 사키가케의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994년 2월 3일, 호소카와 총리는 부가세를 폐지하고 7퍼센트의 ‘국민복지세’를 창설하려는 구상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호소카와 총리는 국민복지세 구상을 철회했지만, 이후 연립여당간의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4월에 사의를 표명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호소카와 총리의 사직에, 오자와는 자민당의 와타나베 미치오의 탈당을 유도하며 제휴를 시도했지만, 와타나베가 탈당을 거부하면서 구상이 좌절되었고 연립여당은 하다 쓰토무를 후임 수반으로 내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25일에 신생당과 일본신당, 민사당 등이 사회당을 배제한 형태로 통일 회파(교섭단체) ‘가이신’(改新)을 결성하면서 사회당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결국 사회당은 4월 26일에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고, 4월 28일에는 소수여당 내각인 하다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오자와와 하다 간에 미묘한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다 내각은 1994년도 예산을 성립시켰지만, 소수여당의 해소를 노린 연립여당과 사회당 사이의 정책합의가 결렬되고, 자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중의원에 제출하였다. 당초는 중의원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구상되었지만, 결국 총선거를 단념하고 6월 25일에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면서 하다 내각은 총64일간의 단명 정권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가이후 도시키는 이후 하다의 후임을 노렸지만, 1994년 6월 29일의 수반지명선거에서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하면서 가이후는 자민당을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연립여당의 총리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261 대 214로 무라야마 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오자와는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신생당 내에서는 오자와의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구 연립여당을 규합해 새로운 세력의 결성을 위해서는 오자와의 힘을 필요로 했으므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야당 187명의 의원이 모여 중의원 회파 ‘가이카쿠’(改革)를 결성했다. 같은 날 중의원 의원 186명과 참의원 의원 39명, 총 225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신당준비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실행위원장으로 오자와가 선출되었다. 신진당 시대[편집] 오자와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 결성의 움직임은 12월 10일의 신진당의 창당으로 결실을 맺었다. 오자와는 당수로 가이후를 옹립하고, 자신은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신진당은 1995년 7월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개선하는 의석 19석을 크게 넘은 40석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12월의 당수 선거에 스스로 입후보하기로 한 오자와는 오래된 맹우인 하다와 격돌하게 되었으며, 하다를 꺾고 오자와가 후임 당수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후 투표자 명부가 파기되는 등 선거 결과가 불명확해 당내에서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1996년 10월 20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신진당은 부가세율의 유지와 18조 엔의 감세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4석이 감소한 156석을 획득하면서 사실상 패배하였다. 총선거의 패배로 당 내의 반발이 격심해지면서 탈당자가 속출했고, 하다 쓰토무와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은 비주류파를 구성하였다. 1996년 12월 26일에는 하다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탈당해 태양당을 결성했다. 오자와는 당시 자민당의 가메이 시즈카 등과 제휴하여 이른바 ‘보보 연합’(保保連合) 노선을 구상했지만, 신진당 내에서 이러한 노선을 두고 반대파가 나타나게 되어 가노 미치히코는 당 내에서 연구회 ‘개혁회의’(改革会議)를 결성했다. 1997년 12월 18일의 당수 선거에서 가노를 꺾고 오자와가 당선되었지만, 선거 전에 공명당이 차기 참의원 선거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방침을 결정하면서 양 당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오자와는 이후 당내 세력에 해산을 요구하고, 12월 25일에는 신진당의 해산과 신당 결성을 발표했다. 해산이 결정된 신진당은 이후 격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자유당 시대[편집] 1998년 1월 6일에는 자유당을 결성하고, 오자와가 당수에 취임하였다. 당초에는 1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결성이 되자 중의원 의원 42명과 참의원 의원 12명의 총 54명이 참가하는 데 머무르면서 제1야당의 자리를 민주당에 내주게 되었다. 7월 12일의 제18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고전할 것이라고 전망되었던 자유당은, 오자와의 인기를 몰아 비례대표에서 514만 표를 얻는 등 총 6석을 획득해 선전했다는 평을 받았다. 참의원 선거 이후의 임시국회에서는 민주당의 대표 간 나오토를 야당 통일 후보로 정하고, 참의원에서 자민당의 오부치 게이조를 꺾고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다만 중의원 우월의 원칙에 따라 간 나오토 대신 오부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오자와는 참의원에서 야당의 연대를 통해 정부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998년 10월에는 내각관방장관이던 노나카 히로무와 회담을 가지고 연립 교섭을 시작했다. 11월 19일에는 오부치 수상과 양 당간의 연립 정권에 합의하고, 199년 1월 14일 정식으로 연립 정권이 성립하면서 오자와는 5년 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999년 7월, 공명당이 연립 정권에 참여하면서, 자민당과 공명당만으로도 참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자유당의 존재감은 저하되었다. 자민당과 자유당의 선거 협력도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오자와는 자민당의 오부치 총리에게 양 당의 해산과 새로운 보수 정당의 결성을 요구했다. 2000년 4월 1일에는 회담을 가졌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연립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직후 오부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게 된다. 자유당은 오자와를 지지하는 연립 이탈파와, 연립 잔류파로 분열되고 잔류파 국회의원 26명은 보수당을 결성하게 된다. 분리된 보수당은 자유당측에 정당보조금의 분할을 위해 분당 처리를 요구했지만, 자유당이 거부하면서 탈당한 것이 된 보수당은 보조금 없이 총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0년 6월 25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도 고전이 예상되었지만, 비례대표에서 약 660만 표를 얻으면서 총 22석을 획득하게 되었다. 보수당은 7석으로 대패했다는 평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29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높은 인기로 자민당에는 순풍이 불고, 오자와 왕국으로 불리던 참의원 이와테 선거구에서도 근소한 차로 이기는 고전을 겪게 된다. 의석수는 전과 같은 6석이었지만, 비례대표는 420만 표까지 감소했다. 민주당 시대[편집] 2002년, 당시 민주당의 대표였던 하토야마 유키오는 당내의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당의 결집을 필요로 하면서 오자와에게 접근했다. 당시 오자와 또한 자유당의 지지층 약화 등으로 독자 선거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결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토야마는 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병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기로 발표했지만, 당 내에서 조정이 불충분했고 오자와에 대한 거부반응도 있어 협의는 좌절되고 하토야마 또한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임으로 선출된 간 나오토 또한 하토야마의 노선을 이어 양 당의 합병을 추진했고, 당명과 강령·임원을 민주당의 체제 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합당이 결정되었다. 2003년 9월 26일, 자유당이 민주당과 정식으로 합치고 오자와는 당대표 대행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2003년 11월 9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정권교체의 열망을 안고 40석이 증가한 177석을 획득했다. 합병 이후 오자와가 처음으로 손을 잡은 사람은 구 일본사회당 계열의 요코미치 다카히로였다. 두 사람은 안전보장 정책에서 견해가 일치하면서 두 세력의 행동은 가까워졌다. 또한 오자와는 야당 결집을 위해 사민당이 민주당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2004년 5월, 연금미납 문제로 인한 혼란의 책임을 지고 간 나오토가 사임하면서 후임 대표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직후에 오자와 또한 국민연금이 강제 가입 제도가 된 1986년 이전에 미가입이었다는 이유로 취임을 사퇴하면서, 간사장이던 오카다 가쓰야가 대표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11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정부와 여당의 연금 법안이 쟁점이 되고, 이에 반대한 민주당에 순풍이 불어 선거구와 비례대표에서 50석을 획득해 자민당의 획득 의석보다 1석 많은 승리를 얻었다. 오자와는 선거 이후 오카다의 요청에 따라 당 부대표에 취임한다. 2005년 9월 11일, 우정민영화를 쟁점으로 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 이상을 잃는 참패를 당하면서 오카다 대표 또한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당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가 선출되었고, 오자와는 대표 대행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오카다 집행부의 부대표이자 총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이를 고사했다. 민주당 대표[편집] 오자와 이치로 선거 벽보 2006년 3월 31일에 마에하라 대표가 호리에 메일 문제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자 오자와는 기자회견에서 “앞장서서 당을 재생해 정권 교체의 횃불을 밝히는 결의”라며 후임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을 표명했다. 오자와의 선출을 예상한 여러 여론조사의 결과와 마찬가지고, 4월 7일의 대표 선거에서 오자와는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대표로 당선되었다. 오자와는 당 안팎에 당의 결집을 어필하기 위해 선거의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대표 대행으로, 하토야마 유키오를 간사장으로 선임하는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오자와가 대표로 취임한 직후에 치러진 4월 24일의 중의원 지바 7구 보궐선거에서는 메일 문제의 역풍으로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힘들다는 예상이 있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5월 9일에 회견을 가지고 중의원 본회의를 자주 결석하는 데 대해 ‘(의사의 충고를 지켜) 식후에 바로 일을 하는 등의 일은 삼가고 있다’며 자신의 몸 관리를 이유로 든 일로 ‘의회 경시’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건강 상태를 이야기한 것을 두고 여러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9월 25일에는 임시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대표로 재선된 후 협심증 발작 징후를 느끼고 입원해 검사하기도 했다. 10월 5일에 퇴원한 오자와는 동맥경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핵실험 직후 동북아 정세를 두고 일본이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이른바 〈주변사태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트로이카 체제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러나 마에하라 전 대표를 비롯한 당내 일각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고, 또한 민주당의 외교·방위 부문은 ‘오자와 대표의 트로이카 체제의 견해는 민주당의 공식견해가 아니다’라고 발표해 이를 둘러싼 민주당 내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오자와는 “핵무장 논의를 용인하면 ‘(핵무기의 보유, 제조, 수입을 하지 않기로 한) 비핵3원칙을 지킨다’는 말도 국민이나 국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층은 2002년 당시 자유당 당수로 있던 오자와가 일본의 핵보유능력을 두고 “일본은 하루아침에 몇천 발의 핵탄두를 가질 수 있다”고 발언한 것과 비교하여 비판했다. 오자와는 자유당 시대부터 방위청이 ‘성’(省)으로 승격할 것을 주장했으며, 실제로 승격시에도 “국방의 소임을 맡은 기관이 내각부의 한 외국(外局)으로만 있는 상태는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여전히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므로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이를 심의할 때는 결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오자와 대표의 최종 결단에 따라 법안에 찬성으로 선회했다. 11월의 후쿠시마현지사 선거에서는 사민당, 오키나와현지사 선거에서는 공산당 및 사민당과 공동으로 투쟁했다. 후쿠시마 현지사 선거에서는 여당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지만,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는 패배하면서 민주당과 다른 정책과 지지층을 가진 정당과 연합했음에도 진 것을 두고 야당 공동 투쟁의 목적에 대해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이라고 불린 2007년 2월 4일의 아이치현지사 선거와 기타큐슈 시장 선거가 시행되었다. 아이치 현지사 선거에서는 아쉽게 패했지만, 기타큐슈 시장 선거에서는 야당의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야나기사와 하쿠오 후생노동상이 “여성은 애낳는 기계”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오자와 대표가 야나기사와 후생노동상이 사임하기 전에는 법안을 심의할 수 없다는 전술을 주도하고, 사임을 유도하는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를 쟁점화하는데 성공한 것이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4월 8일의 통일지방선거에서는 이와테현지사 선거에서 ‘오자와 칠드런’의 대표로 불리는 닷소 타쿠야가 출마해 2위 후보와 3배 가까운 차이를 벌리며 압승하여 오자와 왕국의 건재를 과시했다.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한 오자와는 7월 8일, 선거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때에는 “야당의 대표를 언제까지 맡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며 대표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참의원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사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향을 비친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비판과 차별화에 성공하면서 민주당의 승리가 강고해졌다. 7월 29일에 시행된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을 획득하면서 참의원 제1당으로 부상하고, 야당 전체는 과반수를 획득했다. 이 선거에서 오자와의 비서 30명 이상이 1인구를 중심으로 격전지에서 선거의 전술을 지도하였고, 오자와의 탁월한 선거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선거가 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자민당은 후임 총재로 후쿠다 야스오를 선출했다. 9월 25일의 내각총리대신 지명선거에서 중의원은 후쿠다를, 참의원은 오자와를 지명하면서 양 원의 지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이후 타협점을 찾지 못해 중의원의 의결이 우월하다고 규정한 헌법에 따라 후쿠다가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양원의 지명이 다른 것은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민주당의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된 이래 9년 만이며, 역대 4번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계열이었던 오자와 이치로와 후쿠다 야스오의 대결은 ‘제2의 가쿠후쿠 전쟁’이라고도 불리지만, 본인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아 오자와 대신 후쿠다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다나카 마키코 쪽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2007년 11월 2일, 오자와 민주당 대표는 자민당의 후쿠다 야스오 총재와 회담하였고, 이때 연립정권에 대한 제안이 있었으므로 당으로 돌아와 임시임원회에 상의했다. 그러나 임원회에서 대연립정권에 대한 강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2시간 후에 연립을 거절하였다. 이때 아사히 신문과 닛케이를 제외한 여러 언론에서 오자와가 후쿠다 총리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오자와는 이에 대해 “일부 언론에 의한 민주당에 대한 이유없는 중상모략 보도로, 여론 조작”이라고 비판하며, “나는 대연립 제안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발언해 이 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1]. 오자와 대표는 2007년 11월 4일에 이 대연립 구상을 둘러싼 당내의 반발의 목소리를 수렴해, 이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하는 의사를 표명했다[2]. 그러나 정계에서 대표직 유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두되면서, 오자와는 11월 6일에 “창피한 일이지만, 여러분의 뜻에 따라 부디 한 번 더 열심히 하고 싶다”며 대표직 속투를 표명하였다. 민주당 탈당 이후[편집] 2012년 7월 12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소비세 증세를 밀어붙여 통과되자 이에 반발해 자신을 포함한 계파 의원 51명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 후 '국민 생활이 제일당'이란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하였으나, 이내 일본 미래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그후 2012년 12월 16일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미래당의 62석의 의석이 9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맞았다. 오자와 자신은 지역구 수성에 성공했으나,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자진 탈당하였다. 일본 미래당 탈당 이후[편집] 민주당 복당이 불허되자, 오자와는 다시 일본 미래당에 복당, 일본 생활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 참석이나, 2014년 9월 4일 자신의 국민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 수여식 등에 참여하며[3], 꾸준히 대한민국에 방문하는 일본 정치인 중 하나이다. 제주도 망언[편집] 2009년 3월 오자와 이치로가 엔화가 강세일때를 이용해서 제주도를 매입해야 한다는 망언을 쏟아내 한국인들의 반발을 샀으며, 이러한 망언 등으로 인해 한일간의 새로운 갈등을 낳았다.[4][5][6] 국민대학교 강연[편집] 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오전 10시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은 서울 국민대학교를 방문, 300여명의 학생들과 학교 관계자 한일양국 보도진을 대상으로,‘새로운 한·일 관계와 그 역할을 담당할 지도자 육성’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일본인정치가가 한국의 대학에서 강연을 한 첫 사례였으며,[7] 2시간에 걸쳐 강연은 진행되었다. 강연내용중, '식민지지배와 관련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천황가와 한국인과의 연관성', '외국인 참정권'에 대한 발언 을 주요내용으로 다루었으며, 역사학 공부를 즐겨했다는 이야기, 어머니의 엄격했던 가정교육,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역사인물 3명 등을 이야기 하는 등 개인적인 이야기도 오고갔다. 또한, 국민대학생들에게 학업에 매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업과 관련없는 일이라도 자신이 나아갈 분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시간을 투자하라는 조언도 하였다. 강연에 앞서 한국어 번역본인 오자와 간사장의 저서가 학생등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이어서 강연이 끝난 후 조훈현 9단과 바둑을 둔 후,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 저녁만찬을 가졌다.[8] 인물[편집] 평가[편집] 다나카 가쿠에이의 장남 - 1942년에 태어난 오자와가 5세로 죽은 다나카의 장남과 동갑이었으므로, 다나카는 오자와를 아들처럼 귀여워했다. 가네마루 신은 오자와와 하타 쓰토무, 가지야마 세이로쿠 세 사람을 두고 “평시의 하다, 난세의 오자와, 대난세의 가지야마”라고 평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나는 그(오자와)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처럼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한 사람은 없다.”고 평했다. 주위에서는 오자와가 도호쿠 지방 출신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 순진하고 말재주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때문에 설명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측근이 떨어져나가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오자와는 이를 두고 “떠나는 이 잡지 않고, 오는 이 막지 않고”라고 말한 바 있다. 당 내외의 오자와 알레르기는 오래된 의원에게서 강하다. ‘독단적이고, 측근정치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자민당의 분열과 이후의 분열 공작, 신진당의 분열과 해산 등이 주 비판 대상이 된다. 자민당 간사장 시절에 숙취로 전국간사장회의에 불참하거나, 선거에서 질 것 같으면 선거 지휘를 포기하고 외유에 나가기도 했으므로 ‘워스트1간사장’이라는 평가도 있다.[9]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총선거 32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1,520표 24.8%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3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60,675표 19.2% 2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4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1,449표 22.0%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5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0,813표 21.7%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6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2,838표 22.3%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7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63,212표 18.9% 4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8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95,208표 26.7%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9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89,449표 24.1%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40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신생당 142,451표 40.8%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41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신진당 125,619표 64.7% 1위 총선거 42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자유당 119,099표 59.7% 1위 총선거 43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28,458표 65.1% 1위 총선거 44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24,578표 59.9% 1위 총선거 45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33,978표 62.6% 1위 총선거 46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일본미래당 78,057표 45.5% 1위 총선거 47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생활의 당 75,293표 47.8% 1위 총선거 48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3구 무소속 130,229표 57.4% 1위 각주[편집] ↑ 오자와 이치로 중상보도에 엄중히 항의하다,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오자와씨 ‘혼란에 매듭’ ‘보도에 분노’라고도 회견 전문,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자. ↑ 오자와 대표가 사직서를 제출, 집행부에 진퇴를 일임 Archived 2007년 11월 6일 - 웨이백 머신,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오자와씨가 대표사임의 의향표명 “정치적 혼란의 매듭”,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 ↑ 국민대, 오자와 이치로 일본 생활당 대표에 명예박사 학위수여 ↑ 오자와 `제주도` 망언에 제주도민들 강력 반발 ↑ 日 오자와 민주당대표 “제주도를 사버리자”망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제주도 사겠다고?..가치를 알아나 봤나”. 2009년 3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3일에 확인함. ↑ 일본민주당 공식사이트 관련기사 중반부 참조 ↑ 국민대학교 관련기사 참조 ↑ 奥島貞雄, 《自民党幹事長室の30年》, 주오코론신샤, 2002년. 같이 보기[편집] 자유당 (일본, 2016년) 국민 생활이 제일 오자와 그룹 이치류 전쟁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 노보루 다나카 가쿠에이 다나카 마키코 가네마루 신 노나카 히로무 오사노 겐지 외부 링크[편집] (일본어) 오자와 이치로 공식 홈페이지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11700520 LCCN: nr91010519 ISNI: 0000 0000 8305 8339 GND: 1015363296 SUDOC: 153445718 NDL: 0021256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오자와_이치로&oldid=24510892" 분류: 194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중의원 의원일본의 각료역임자도쿄도 출신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니혼 대학 동문자유민주당 (일본)의 정치인민주당 (일본, 1998년)의 정치인일본의 자치대신도쿄도 구부 출신일본의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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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자와 이치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오자와 이치로 (2001년 7월 18일) 오자와 이치로(일본어: 小沢 一郎, 1942년 5월 24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7선 중의원 의원이다. 제34대 자치대신,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신생당 대표간사, 신진당 당수, 자유당 당수, 민주당 대표, 민주당 간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목차 1 생애 1.1 성장기 1.2 정치 입문 이후 1.3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 1.4 신진당 시대 1.5 자유당 시대 1.6 민주당 시대 1.6.1 민주당 대표 1.7 민주당 탈당 이후 1.8 일본 미래당 탈당 이후 1.8.1 제주도 망언 1.9 국민대학교 강연 2 인물 2.1 평가 3 역대 선거 결과 4 각주 5 같이 보기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성장기[편집] 도쿄 시(현 도쿄도 다이토 구)에서 변호사이자 도쿄 부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 오자와 사에키와 어머니 오자와 미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도립 고이시카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도쿄 대학을 목표로 2년간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급사로 단념하고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니혼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으나 중퇴하였으며, 대한민국의 국민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정치 입문 이후[편집] 아버지가 급서한 후 사법시험 공부를 위해 입학한 니혼 대학 대학원에 재학하던 중인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시 이와테 2구에 자유민주당의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를 지휘하던 사람이 간사장이던 다나카 가쿠에이로, 이후 오자와는 다나카의 파벌에 들어가 그의 지도를 받는다. 총무국장과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을 지내고,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는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지낸다. 그러나 록히드 사건으로 당적을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의 영수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들고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과 함께 연구회 ‘소세이카이’(創政会)를 결성하고 이후 다케시타의 파벌로 독립한다. 다케시타 내각 발족 이후 오자와는 당과 정부의 요직을 지내 다케시타 파의 주요한 인물이 된다.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당 간사장에 취임하고, 자유주의 체제의 유지를 명목으로 경제단체연합회 산하의 기업에서 선거자금으로 3백억 엔을 모으고 제39회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의 실적을 올렸다. 걸프 전쟁 당시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데 대해 국회에서 공명당의 협력을 위해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신인을 공천했지만, 후보가 낙선하는 바람에 그 책임을 지고 간사장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파벌의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가네마루(金丸)와 다케시타(竹下)와 함께 ‘곤치쿠쇼’(金竹小)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에게 파벌의 흐름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면서 다케시타와의 마찰이 깊어지게 되었다. 1991년에는 정치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폐안이 된 것을 두고 가이후 도시키 수상이 중의원 해산의 뜻을 담은 발언을 하였다가 당내의 반발을 초래해 총사직하게 되었다(이른바 가이후 오로시).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를 후임 총리로 취임하도록 설득하고, 여러 의원들도 그를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였지만 당시 49세였던 오자와는 지나치게 젊다는 이유로 이를 고사하였다. 또 6월에는 협심증으로 쓰러지면서 건강불안설도 나왔다. 1992년에 도쿄사가와큐빈 사건을 두고 가네마루가 여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으면서 파벌회장과 의원직을 사임했다. 오자와는 그 후임으로 가네마루와 가까웠던 의원들과 함께 하다 쓰토무를 옹립하면서, 다케시타 직계의 오부치 게이조를 추대하려던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대립하게 된다. 당초 중립이었던 다케시타는 스스로 오부치의 지지를 결정하는 등의 영향으로, 파벌의 후임 회장은 오부치로 내정되었다. 이에 오자와는 일부 의원들과 ‘개혁포럼 21’을 결성해 하다 파로 독립하게 되었다. 미야자와 내각 개조내각에서 하다 파는 경제기획청 장관과 과학기술청 장관의 두 자리만이 배정되었고, 간사장마저 오부치 파의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취임하면서 하네다 파는 비주류로 전락하였다. 이에 대해 오자와는 주류 파벌을 ‘수구파’로, 자신을 ‘개혁파’로 칭하고 지론이었던 정치개혁의 실현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편집] 야당에서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1993년 6월 18일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 39명이 찬성표를 던지고, 16명이 결석하는 이른바 반역이 일어나면서 불신임안이 255 대 220으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야자와 내각이 해산하게 되었다. 6월 21일에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이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으며, 이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들이 탈당을 결단하는 한 요인이자 55년 체제 붕괴의 서장이 되었다. 6월 23일에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가 탈당해 신생당을 결성하고, 오자와는 대표간사로 취임했다. 7월 18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고, 신생당과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가 약진했다. 자민당의 미야자와 총재의 후임으로는 고노 요헤이가 선출되었다. 오자와는 총선거 직후부터 일본신당의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비공식회담을 가지고, 이후 8월 9일에는 8당 연립의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호소카와 정권에서 오자와는 내각과는 별도로 여당의 기관인 ‘연립여당 대표자회의’를 가져 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와 정권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고, 내각관방장관으로 관저 주도의 정치를 구상하던 신당 사키가케의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994년 2월 3일, 호소카와 총리는 부가세를 폐지하고 7퍼센트의 ‘국민복지세’를 창설하려는 구상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호소카와 총리는 국민복지세 구상을 철회했지만, 이후 연립여당간의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4월에 사의를 표명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호소카와 총리의 사직에, 오자와는 자민당의 와타나베 미치오의 탈당을 유도하며 제휴를 시도했지만, 와타나베가 탈당을 거부하면서 구상이 좌절되었고 연립여당은 하다 쓰토무를 후임 수반으로 내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25일에 신생당과 일본신당, 민사당 등이 사회당을 배제한 형태로 통일 회파(교섭단체) ‘가이신’(改新)을 결성하면서 사회당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결국 사회당은 4월 26일에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고, 4월 28일에는 소수여당 내각인 하다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오자와와 하다 간에 미묘한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다 내각은 1994년도 예산을 성립시켰지만, 소수여당의 해소를 노린 연립여당과 사회당 사이의 정책합의가 결렬되고, 자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중의원에 제출하였다. 당초는 중의원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구상되었지만, 결국 총선거를 단념하고 6월 25일에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면서 하다 내각은 총64일간의 단명 정권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가이후 도시키는 이후 하다의 후임을 노렸지만, 1994년 6월 29일의 수반지명선거에서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하면서 가이후는 자민당을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연립여당의 총리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261 대 214로 무라야마 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오자와는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신생당 내에서는 오자와의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구 연립여당을 규합해 새로운 세력의 결성을 위해서는 오자와의 힘을 필요로 했으므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야당 187명의 의원이 모여 중의원 회파 ‘가이카쿠’(改革)를 결성했다. 같은 날 중의원 의원 186명과 참의원 의원 39명, 총 225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신당준비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실행위원장으로 오자와가 선출되었다. 신진당 시대[편집] 오자와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 결성의 움직임은 12월 10일의 신진당의 창당으로 결실을 맺었다. 오자와는 당수로 가이후를 옹립하고, 자신은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신진당은 1995년 7월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개선하는 의석 19석을 크게 넘은 40석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12월의 당수 선거에 스스로 입후보하기로 한 오자와는 오래된 맹우인 하다와 격돌하게 되었으며, 하다를 꺾고 오자와가 후임 당수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후 투표자 명부가 파기되는 등 선거 결과가 불명확해 당내에서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1996년 10월 20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신진당은 부가세율의 유지와 18조 엔의 감세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4석이 감소한 156석을 획득하면서 사실상 패배하였다. 총선거의 패배로 당 내의 반발이 격심해지면서 탈당자가 속출했고, 하다 쓰토무와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은 비주류파를 구성하였다. 1996년 12월 26일에는 하다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탈당해 태양당을 결성했다. 오자와는 당시 자민당의 가메이 시즈카 등과 제휴하여 이른바 ‘보보 연합’(保保連合) 노선을 구상했지만, 신진당 내에서 이러한 노선을 두고 반대파가 나타나게 되어 가노 미치히코는 당 내에서 연구회 ‘개혁회의’(改革会議)를 결성했다. 1997년 12월 18일의 당수 선거에서 가노를 꺾고 오자와가 당선되었지만, 선거 전에 공명당이 차기 참의원 선거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방침을 결정하면서 양 당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오자와는 이후 당내 세력에 해산을 요구하고, 12월 25일에는 신진당의 해산과 신당 결성을 발표했다. 해산이 결정된 신진당은 이후 격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자유당 시대[편집] 1998년 1월 6일에는 자유당을 결성하고, 오자와가 당수에 취임하였다. 당초에는 1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결성이 되자 중의원 의원 42명과 참의원 의원 12명의 총 54명이 참가하는 데 머무르면서 제1야당의 자리를 민주당에 내주게 되었다. 7월 12일의 제18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고전할 것이라고 전망되었던 자유당은, 오자와의 인기를 몰아 비례대표에서 514만 표를 얻는 등 총 6석을 획득해 선전했다는 평을 받았다. 참의원 선거 이후의 임시국회에서는 민주당의 대표 간 나오토를 야당 통일 후보로 정하고, 참의원에서 자민당의 오부치 게이조를 꺾고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다만 중의원 우월의 원칙에 따라 간 나오토 대신 오부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오자와는 참의원에서 야당의 연대를 통해 정부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998년 10월에는 내각관방장관이던 노나카 히로무와 회담을 가지고 연립 교섭을 시작했다. 11월 19일에는 오부치 수상과 양 당간의 연립 정권에 합의하고, 199년 1월 14일 정식으로 연립 정권이 성립하면서 오자와는 5년 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999년 7월, 공명당이 연립 정권에 참여하면서, 자민당과 공명당만으로도 참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자유당의 존재감은 저하되었다. 자민당과 자유당의 선거 협력도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오자와는 자민당의 오부치 총리에게 양 당의 해산과 새로운 보수 정당의 결성을 요구했다. 2000년 4월 1일에는 회담을 가졌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연립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직후 오부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게 된다. 자유당은 오자와를 지지하는 연립 이탈파와, 연립 잔류파로 분열되고 잔류파 국회의원 26명은 보수당을 결성하게 된다. 분리된 보수당은 자유당측에 정당보조금의 분할을 위해 분당 처리를 요구했지만, 자유당이 거부하면서 탈당한 것이 된 보수당은 보조금 없이 총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0년 6월 25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도 고전이 예상되었지만, 비례대표에서 약 660만 표를 얻으면서 총 22석을 획득하게 되었다. 보수당은 7석으로 대패했다는 평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29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높은 인기로 자민당에는 순풍이 불고, 오자와 왕국으로 불리던 참의원 이와테 선거구에서도 근소한 차로 이기는 고전을 겪게 된다. 의석수는 전과 같은 6석이었지만, 비례대표는 420만 표까지 감소했다. 민주당 시대[편집] 2002년, 당시 민주당의 대표였던 하토야마 유키오는 당내의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당의 결집을 필요로 하면서 오자와에게 접근했다. 당시 오자와 또한 자유당의 지지층 약화 등으로 독자 선거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결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토야마는 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병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기로 발표했지만, 당 내에서 조정이 불충분했고 오자와에 대한 거부반응도 있어 협의는 좌절되고 하토야마 또한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임으로 선출된 간 나오토 또한 하토야마의 노선을 이어 양 당의 합병을 추진했고, 당명과 강령·임원을 민주당의 체제 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합당이 결정되었다. 2003년 9월 26일, 자유당이 민주당과 정식으로 합치고 오자와는 당대표 대행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2003년 11월 9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정권교체의 열망을 안고 40석이 증가한 177석을 획득했다. 합병 이후 오자와가 처음으로 손을 잡은 사람은 구 일본사회당 계열의 요코미치 다카히로였다. 두 사람은 안전보장 정책에서 견해가 일치하면서 두 세력의 행동은 가까워졌다. 또한 오자와는 야당 결집을 위해 사민당이 민주당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2004년 5월, 연금미납 문제로 인한 혼란의 책임을 지고 간 나오토가 사임하면서 후임 대표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직후에 오자와 또한 국민연금이 강제 가입 제도가 된 1986년 이전에 미가입이었다는 이유로 취임을 사퇴하면서, 간사장이던 오카다 가쓰야가 대표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11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정부와 여당의 연금 법안이 쟁점이 되고, 이에 반대한 민주당에 순풍이 불어 선거구와 비례대표에서 50석을 획득해 자민당의 획득 의석보다 1석 많은 승리를 얻었다. 오자와는 선거 이후 오카다의 요청에 따라 당 부대표에 취임한다. 2005년 9월 11일, 우정민영화를 쟁점으로 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 이상을 잃는 참패를 당하면서 오카다 대표 또한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당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가 선출되었고, 오자와는 대표 대행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오카다 집행부의 부대표이자 총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이를 고사했다. 민주당 대표[편집] 오자와 이치로 선거 벽보 2006년 3월 31일에 마에하라 대표가 호리에 메일 문제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자 오자와는 기자회견에서 “앞장서서 당을 재생해 정권 교체의 횃불을 밝히는 결의”라며 후임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을 표명했다. 오자와의 선출을 예상한 여러 여론조사의 결과와 마찬가지고, 4월 7일의 대표 선거에서 오자와는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대표로 당선되었다. 오자와는 당 안팎에 당의 결집을 어필하기 위해 선거의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대표 대행으로, 하토야마 유키오를 간사장으로 선임하는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오자와가 대표로 취임한 직후에 치러진 4월 24일의 중의원 지바 7구 보궐선거에서는 메일 문제의 역풍으로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힘들다는 예상이 있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5월 9일에 회견을 가지고 중의원 본회의를 자주 결석하는 데 대해 ‘(의사의 충고를 지켜) 식후에 바로 일을 하는 등의 일은 삼가고 있다’며 자신의 몸 관리를 이유로 든 일로 ‘의회 경시’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건강 상태를 이야기한 것을 두고 여러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9월 25일에는 임시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대표로 재선된 후 협심증 발작 징후를 느끼고 입원해 검사하기도 했다. 10월 5일에 퇴원한 오자와는 동맥경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핵실험 직후 동북아 정세를 두고 일본이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이른바 〈주변사태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트로이카 체제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러나 마에하라 전 대표를 비롯한 당내 일각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고, 또한 민주당의 외교·방위 부문은 ‘오자와 대표의 트로이카 체제의 견해는 민주당의 공식견해가 아니다’라고 발표해 이를 둘러싼 민주당 내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오자와는 “핵무장 논의를 용인하면 ‘(핵무기의 보유, 제조, 수입을 하지 않기로 한) 비핵3원칙을 지킨다’는 말도 국민이나 국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층은 2002년 당시 자유당 당수로 있던 오자와가 일본의 핵보유능력을 두고 “일본은 하루아침에 몇천 발의 핵탄두를 가질 수 있다”고 발언한 것과 비교하여 비판했다. 오자와는 자유당 시대부터 방위청이 ‘성’(省)으로 승격할 것을 주장했으며, 실제로 승격시에도 “국방의 소임을 맡은 기관이 내각부의 한 외국(外局)으로만 있는 상태는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여전히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므로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이를 심의할 때는 결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오자와 대표의 최종 결단에 따라 법안에 찬성으로 선회했다. 11월의 후쿠시마현지사 선거에서는 사민당, 오키나와현지사 선거에서는 공산당 및 사민당과 공동으로 투쟁했다. 후쿠시마 현지사 선거에서는 여당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지만,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는 패배하면서 민주당과 다른 정책과 지지층을 가진 정당과 연합했음에도 진 것을 두고 야당 공동 투쟁의 목적에 대해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이라고 불린 2007년 2월 4일의 아이치현지사 선거와 기타큐슈 시장 선거가 시행되었다. 아이치 현지사 선거에서는 아쉽게 패했지만, 기타큐슈 시장 선거에서는 야당의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야나기사와 하쿠오 후생노동상이 “여성은 애낳는 기계”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오자와 대표가 야나기사와 후생노동상이 사임하기 전에는 법안을 심의할 수 없다는 전술을 주도하고, 사임을 유도하는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를 쟁점화하는데 성공한 것이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4월 8일의 통일지방선거에서는 이와테현지사 선거에서 ‘오자와 칠드런’의 대표로 불리는 닷소 타쿠야가 출마해 2위 후보와 3배 가까운 차이를 벌리며 압승하여 오자와 왕국의 건재를 과시했다.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한 오자와는 7월 8일, 선거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때에는 “야당의 대표를 언제까지 맡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며 대표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참의원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사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향을 비친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비판과 차별화에 성공하면서 민주당의 승리가 강고해졌다. 7월 29일에 시행된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을 획득하면서 참의원 제1당으로 부상하고, 야당 전체는 과반수를 획득했다. 이 선거에서 오자와의 비서 30명 이상이 1인구를 중심으로 격전지에서 선거의 전술을 지도하였고, 오자와의 탁월한 선거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선거가 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자민당은 후임 총재로 후쿠다 야스오를 선출했다. 9월 25일의 내각총리대신 지명선거에서 중의원은 후쿠다를, 참의원은 오자와를 지명하면서 양 원의 지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이후 타협점을 찾지 못해 중의원의 의결이 우월하다고 규정한 헌법에 따라 후쿠다가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양원의 지명이 다른 것은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민주당의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된 이래 9년 만이며, 역대 4번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계열이었던 오자와 이치로와 후쿠다 야스오의 대결은 ‘제2의 가쿠후쿠 전쟁’이라고도 불리지만, 본인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아 오자와 대신 후쿠다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다나카 마키코 쪽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2007년 11월 2일, 오자와 민주당 대표는 자민당의 후쿠다 야스오 총재와 회담하였고, 이때 연립정권에 대한 제안이 있었으므로 당으로 돌아와 임시임원회에 상의했다. 그러나 임원회에서 대연립정권에 대한 강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2시간 후에 연립을 거절하였다. 이때 아사히 신문과 닛케이를 제외한 여러 언론에서 오자와가 후쿠다 총리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오자와는 이에 대해 “일부 언론에 의한 민주당에 대한 이유없는 중상모략 보도로, 여론 조작”이라고 비판하며, “나는 대연립 제안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발언해 이 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1]. 오자와 대표는 2007년 11월 4일에 이 대연립 구상을 둘러싼 당내의 반발의 목소리를 수렴해, 이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하는 의사를 표명했다[2]. 그러나 정계에서 대표직 유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두되면서, 오자와는 11월 6일에 “창피한 일이지만, 여러분의 뜻에 따라 부디 한 번 더 열심히 하고 싶다”며 대표직 속투를 표명하였다. 민주당 탈당 이후[편집] 2012년 7월 12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소비세 증세를 밀어붙여 통과되자 이에 반발해 자신을 포함한 계파 의원 51명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 후 '국민 생활이 제일당'이란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하였으나, 이내 일본 미래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그후 2012년 12월 16일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미래당의 62석의 의석이 9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맞았다. 오자와 자신은 지역구 수성에 성공했으나,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자진 탈당하였다. 일본 미래당 탈당 이후[편집] 민주당 복당이 불허되자, 오자와는 다시 일본 미래당에 복당, 일본 생활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 참석이나, 2014년 9월 4일 자신의 국민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 수여식 등에 참여하며[3], 꾸준히 대한민국에 방문하는 일본 정치인 중 하나이다. 제주도 망언[편집] 2009년 3월 오자와 이치로가 엔화가 강세일때를 이용해서 제주도를 매입해야 한다는 망언을 쏟아내 한국인들의 반발을 샀으며, 이러한 망언 등으로 인해 한일간의 새로운 갈등을 낳았다.[4][5][6] 국민대학교 강연[편집] 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오전 10시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은 서울 국민대학교를 방문, 300여명의 학생들과 학교 관계자 한일양국 보도진을 대상으로,‘새로운 한·일 관계와 그 역할을 담당할 지도자 육성’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일본인정치가가 한국의 대학에서 강연을 한 첫 사례였으며,[7] 2시간에 걸쳐 강연은 진행되었다. 강연내용중, '식민지지배와 관련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천황가와 한국인과의 연관성', '외국인 참정권'에 대한 발언 을 주요내용으로 다루었으며, 역사학 공부를 즐겨했다는 이야기, 어머니의 엄격했던 가정교육,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역사인물 3명 등을 이야기 하는 등 개인적인 이야기도 오고갔다. 또한, 국민대학생들에게 학업에 매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업과 관련없는 일이라도 자신이 나아갈 분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시간을 투자하라는 조언도 하였다. 강연에 앞서 한국어 번역본인 오자와 간사장의 저서가 학생등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이어서 강연이 끝난 후 조훈현 9단과 바둑을 둔 후,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 저녁만찬을 가졌다.[8] 인물[편집] 평가[편집] 다나카 가쿠에이의 장남 - 1942년에 태어난 오자와가 5세로 죽은 다나카의 장남과 동갑이었으므로, 다나카는 오자와를 아들처럼 귀여워했다. 가네마루 신은 오자와와 하타 쓰토무, 가지야마 세이로쿠 세 사람을 두고 “평시의 하다, 난세의 오자와, 대난세의 가지야마”라고 평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나는 그(오자와)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처럼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한 사람은 없다.”고 평했다. 주위에서는 오자와가 도호쿠 지방 출신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 순진하고 말재주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때문에 설명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측근이 떨어져나가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오자와는 이를 두고 “떠나는 이 잡지 않고, 오는 이 막지 않고”라고 말한 바 있다. 당 내외의 오자와 알레르기는 오래된 의원에게서 강하다. ‘독단적이고, 측근정치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자민당의 분열과 이후의 분열 공작, 신진당의 분열과 해산 등이 주 비판 대상이 된다. 자민당 간사장 시절에 숙취로 전국간사장회의에 불참하거나, 선거에서 질 것 같으면 선거 지휘를 포기하고 외유에 나가기도 했으므로 ‘워스트1간사장’이라는 평가도 있다.[9]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총선거 32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1,520표 24.8%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3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60,675표 19.2% 2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4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1,449표 22.0%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5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0,813표 21.7%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6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2,838표 22.3%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7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63,212표 18.9% 4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8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95,208표 26.7%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9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89,449표 24.1%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40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신생당 142,451표 40.8%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41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신진당 125,619표 64.7% 1위 총선거 42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자유당 119,099표 59.7% 1위 총선거 43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28,458표 65.1% 1위 총선거 44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24,578표 59.9% 1위 총선거 45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33,978표 62.6% 1위 총선거 46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일본미래당 78,057표 45.5% 1위 총선거 47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생활의 당 75,293표 47.8% 1위 총선거 48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3구 무소속 130,229표 57.4% 1위 각주[편집] ↑ 오자와 이치로 중상보도에 엄중히 항의하다,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오자와씨 ‘혼란에 매듭’ ‘보도에 분노’라고도 회견 전문,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자. ↑ 오자와 대표가 사직서를 제출, 집행부에 진퇴를 일임 Archived 2007년 11월 6일 - 웨이백 머신,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오자와씨가 대표사임의 의향표명 “정치적 혼란의 매듭”,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 ↑ 국민대, 오자와 이치로 일본 생활당 대표에 명예박사 학위수여 ↑ 오자와 `제주도` 망언에 제주도민들 강력 반발 ↑ 日 오자와 민주당대표 “제주도를 사버리자”망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제주도 사겠다고?..가치를 알아나 봤나”. 2009년 3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3일에 확인함. ↑ 일본민주당 공식사이트 관련기사 중반부 참조 ↑ 국민대학교 관련기사 참조 ↑ 奥島貞雄, 《自民党幹事長室の30年》, 주오코론신샤, 2002년. 같이 보기[편집] 자유당 (일본, 2016년) 국민 생활이 제일 오자와 그룹 이치류 전쟁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 노보루 다나카 가쿠에이 다나카 마키코 가네마루 신 노나카 히로무 오사노 겐지 외부 링크[편집] (일본어) 오자와 이치로 공식 홈페이지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11700520 LCCN: nr91010519 ISNI: 0000 0000 8305 8339 GND: 1015363296 SUDOC: 153445718 NDL: 0021256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오자와_이치로&oldid=24510892" 분류: 194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중의원 의원일본의 각료역임자도쿄도 출신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니혼 대학 동문자유민주당 (일본)의 정치인민주당 (일본, 1998년)의 정치인일본의 자치대신도쿄도 구부 출신일본의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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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자와 이치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오자와 이치로 (2001년 7월 18일) 오자와 이치로(일본어: 小沢 一郎, 1942년 5월 24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7선 중의원 의원이다. 제34대 자치대신,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신생당 대표간사, 신진당 당수, 자유당 당수, 민주당 대표, 민주당 간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목차 1 생애 1.1 성장기 1.2 정치 입문 이후 1.3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 1.4 신진당 시대 1.5 자유당 시대 1.6 민주당 시대 1.6.1 민주당 대표 1.7 민주당 탈당 이후 1.8 일본 미래당 탈당 이후 1.8.1 제주도 망언 1.9 국민대학교 강연 2 인물 2.1 평가 3 역대 선거 결과 4 각주 5 같이 보기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성장기[편집] 도쿄 시(현 도쿄도 다이토 구)에서 변호사이자 도쿄 부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 오자와 사에키와 어머니 오자와 미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도립 고이시카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도쿄 대학을 목표로 2년간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급사로 단념하고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니혼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으나 중퇴하였으며, 대한민국의 국민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정치 입문 이후[편집] 아버지가 급서한 후 사법시험 공부를 위해 입학한 니혼 대학 대학원에 재학하던 중인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시 이와테 2구에 자유민주당의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를 지휘하던 사람이 간사장이던 다나카 가쿠에이로, 이후 오자와는 다나카의 파벌에 들어가 그의 지도를 받는다. 총무국장과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을 지내고,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는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지낸다. 그러나 록히드 사건으로 당적을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의 영수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들고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과 함께 연구회 ‘소세이카이’(創政会)를 결성하고 이후 다케시타의 파벌로 독립한다. 다케시타 내각 발족 이후 오자와는 당과 정부의 요직을 지내 다케시타 파의 주요한 인물이 된다.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당 간사장에 취임하고, 자유주의 체제의 유지를 명목으로 경제단체연합회 산하의 기업에서 선거자금으로 3백억 엔을 모으고 제39회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의 실적을 올렸다. 걸프 전쟁 당시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데 대해 국회에서 공명당의 협력을 위해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신인을 공천했지만, 후보가 낙선하는 바람에 그 책임을 지고 간사장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파벌의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가네마루(金丸)와 다케시타(竹下)와 함께 ‘곤치쿠쇼’(金竹小)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에게 파벌의 흐름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면서 다케시타와의 마찰이 깊어지게 되었다. 1991년에는 정치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폐안이 된 것을 두고 가이후 도시키 수상이 중의원 해산의 뜻을 담은 발언을 하였다가 당내의 반발을 초래해 총사직하게 되었다(이른바 가이후 오로시).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를 후임 총리로 취임하도록 설득하고, 여러 의원들도 그를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였지만 당시 49세였던 오자와는 지나치게 젊다는 이유로 이를 고사하였다. 또 6월에는 협심증으로 쓰러지면서 건강불안설도 나왔다. 1992년에 도쿄사가와큐빈 사건을 두고 가네마루가 여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으면서 파벌회장과 의원직을 사임했다. 오자와는 그 후임으로 가네마루와 가까웠던 의원들과 함께 하다 쓰토무를 옹립하면서, 다케시타 직계의 오부치 게이조를 추대하려던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대립하게 된다. 당초 중립이었던 다케시타는 스스로 오부치의 지지를 결정하는 등의 영향으로, 파벌의 후임 회장은 오부치로 내정되었다. 이에 오자와는 일부 의원들과 ‘개혁포럼 21’을 결성해 하다 파로 독립하게 되었다. 미야자와 내각 개조내각에서 하다 파는 경제기획청 장관과 과학기술청 장관의 두 자리만이 배정되었고, 간사장마저 오부치 파의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취임하면서 하네다 파는 비주류로 전락하였다. 이에 대해 오자와는 주류 파벌을 ‘수구파’로, 자신을 ‘개혁파’로 칭하고 지론이었던 정치개혁의 실현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편집] 야당에서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1993년 6월 18일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 39명이 찬성표를 던지고, 16명이 결석하는 이른바 반역이 일어나면서 불신임안이 255 대 220으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야자와 내각이 해산하게 되었다. 6월 21일에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이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으며, 이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들이 탈당을 결단하는 한 요인이자 55년 체제 붕괴의 서장이 되었다. 6월 23일에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가 탈당해 신생당을 결성하고, 오자와는 대표간사로 취임했다. 7월 18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고, 신생당과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가 약진했다. 자민당의 미야자와 총재의 후임으로는 고노 요헤이가 선출되었다. 오자와는 총선거 직후부터 일본신당의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비공식회담을 가지고, 이후 8월 9일에는 8당 연립의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호소카와 정권에서 오자와는 내각과는 별도로 여당의 기관인 ‘연립여당 대표자회의’를 가져 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와 정권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고, 내각관방장관으로 관저 주도의 정치를 구상하던 신당 사키가케의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994년 2월 3일, 호소카와 총리는 부가세를 폐지하고 7퍼센트의 ‘국민복지세’를 창설하려는 구상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호소카와 총리는 국민복지세 구상을 철회했지만, 이후 연립여당간의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4월에 사의를 표명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호소카와 총리의 사직에, 오자와는 자민당의 와타나베 미치오의 탈당을 유도하며 제휴를 시도했지만, 와타나베가 탈당을 거부하면서 구상이 좌절되었고 연립여당은 하다 쓰토무를 후임 수반으로 내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25일에 신생당과 일본신당, 민사당 등이 사회당을 배제한 형태로 통일 회파(교섭단체) ‘가이신’(改新)을 결성하면서 사회당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결국 사회당은 4월 26일에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고, 4월 28일에는 소수여당 내각인 하다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오자와와 하다 간에 미묘한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다 내각은 1994년도 예산을 성립시켰지만, 소수여당의 해소를 노린 연립여당과 사회당 사이의 정책합의가 결렬되고, 자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중의원에 제출하였다. 당초는 중의원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구상되었지만, 결국 총선거를 단념하고 6월 25일에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면서 하다 내각은 총64일간의 단명 정권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가이후 도시키는 이후 하다의 후임을 노렸지만, 1994년 6월 29일의 수반지명선거에서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하면서 가이후는 자민당을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연립여당의 총리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261 대 214로 무라야마 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오자와는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신생당 내에서는 오자와의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구 연립여당을 규합해 새로운 세력의 결성을 위해서는 오자와의 힘을 필요로 했으므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야당 187명의 의원이 모여 중의원 회파 ‘가이카쿠’(改革)를 결성했다. 같은 날 중의원 의원 186명과 참의원 의원 39명, 총 225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신당준비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실행위원장으로 오자와가 선출되었다. 신진당 시대[편집] 오자와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 결성의 움직임은 12월 10일의 신진당의 창당으로 결실을 맺었다. 오자와는 당수로 가이후를 옹립하고, 자신은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신진당은 1995년 7월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개선하는 의석 19석을 크게 넘은 40석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12월의 당수 선거에 스스로 입후보하기로 한 오자와는 오래된 맹우인 하다와 격돌하게 되었으며, 하다를 꺾고 오자와가 후임 당수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후 투표자 명부가 파기되는 등 선거 결과가 불명확해 당내에서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1996년 10월 20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신진당은 부가세율의 유지와 18조 엔의 감세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4석이 감소한 156석을 획득하면서 사실상 패배하였다. 총선거의 패배로 당 내의 반발이 격심해지면서 탈당자가 속출했고, 하다 쓰토무와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은 비주류파를 구성하였다. 1996년 12월 26일에는 하다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탈당해 태양당을 결성했다. 오자와는 당시 자민당의 가메이 시즈카 등과 제휴하여 이른바 ‘보보 연합’(保保連合) 노선을 구상했지만, 신진당 내에서 이러한 노선을 두고 반대파가 나타나게 되어 가노 미치히코는 당 내에서 연구회 ‘개혁회의’(改革会議)를 결성했다. 1997년 12월 18일의 당수 선거에서 가노를 꺾고 오자와가 당선되었지만, 선거 전에 공명당이 차기 참의원 선거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방침을 결정하면서 양 당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오자와는 이후 당내 세력에 해산을 요구하고, 12월 25일에는 신진당의 해산과 신당 결성을 발표했다. 해산이 결정된 신진당은 이후 격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자유당 시대[편집] 1998년 1월 6일에는 자유당을 결성하고, 오자와가 당수에 취임하였다. 당초에는 1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결성이 되자 중의원 의원 42명과 참의원 의원 12명의 총 54명이 참가하는 데 머무르면서 제1야당의 자리를 민주당에 내주게 되었다. 7월 12일의 제18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고전할 것이라고 전망되었던 자유당은, 오자와의 인기를 몰아 비례대표에서 514만 표를 얻는 등 총 6석을 획득해 선전했다는 평을 받았다. 참의원 선거 이후의 임시국회에서는 민주당의 대표 간 나오토를 야당 통일 후보로 정하고, 참의원에서 자민당의 오부치 게이조를 꺾고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다만 중의원 우월의 원칙에 따라 간 나오토 대신 오부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오자와는 참의원에서 야당의 연대를 통해 정부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998년 10월에는 내각관방장관이던 노나카 히로무와 회담을 가지고 연립 교섭을 시작했다. 11월 19일에는 오부치 수상과 양 당간의 연립 정권에 합의하고, 199년 1월 14일 정식으로 연립 정권이 성립하면서 오자와는 5년 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999년 7월, 공명당이 연립 정권에 참여하면서, 자민당과 공명당만으로도 참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자유당의 존재감은 저하되었다. 자민당과 자유당의 선거 협력도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오자와는 자민당의 오부치 총리에게 양 당의 해산과 새로운 보수 정당의 결성을 요구했다. 2000년 4월 1일에는 회담을 가졌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연립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직후 오부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게 된다. 자유당은 오자와를 지지하는 연립 이탈파와, 연립 잔류파로 분열되고 잔류파 국회의원 26명은 보수당을 결성하게 된다. 분리된 보수당은 자유당측에 정당보조금의 분할을 위해 분당 처리를 요구했지만, 자유당이 거부하면서 탈당한 것이 된 보수당은 보조금 없이 총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0년 6월 25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도 고전이 예상되었지만, 비례대표에서 약 660만 표를 얻으면서 총 22석을 획득하게 되었다. 보수당은 7석으로 대패했다는 평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29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높은 인기로 자민당에는 순풍이 불고, 오자와 왕국으로 불리던 참의원 이와테 선거구에서도 근소한 차로 이기는 고전을 겪게 된다. 의석수는 전과 같은 6석이었지만, 비례대표는 420만 표까지 감소했다. 민주당 시대[편집] 2002년, 당시 민주당의 대표였던 하토야마 유키오는 당내의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당의 결집을 필요로 하면서 오자와에게 접근했다. 당시 오자와 또한 자유당의 지지층 약화 등으로 독자 선거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결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토야마는 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병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기로 발표했지만, 당 내에서 조정이 불충분했고 오자와에 대한 거부반응도 있어 협의는 좌절되고 하토야마 또한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임으로 선출된 간 나오토 또한 하토야마의 노선을 이어 양 당의 합병을 추진했고, 당명과 강령·임원을 민주당의 체제 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합당이 결정되었다. 2003년 9월 26일, 자유당이 민주당과 정식으로 합치고 오자와는 당대표 대행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2003년 11월 9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정권교체의 열망을 안고 40석이 증가한 177석을 획득했다. 합병 이후 오자와가 처음으로 손을 잡은 사람은 구 일본사회당 계열의 요코미치 다카히로였다. 두 사람은 안전보장 정책에서 견해가 일치하면서 두 세력의 행동은 가까워졌다. 또한 오자와는 야당 결집을 위해 사민당이 민주당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2004년 5월, 연금미납 문제로 인한 혼란의 책임을 지고 간 나오토가 사임하면서 후임 대표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직후에 오자와 또한 국민연금이 강제 가입 제도가 된 1986년 이전에 미가입이었다는 이유로 취임을 사퇴하면서, 간사장이던 오카다 가쓰야가 대표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11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정부와 여당의 연금 법안이 쟁점이 되고, 이에 반대한 민주당에 순풍이 불어 선거구와 비례대표에서 50석을 획득해 자민당의 획득 의석보다 1석 많은 승리를 얻었다. 오자와는 선거 이후 오카다의 요청에 따라 당 부대표에 취임한다. 2005년 9월 11일, 우정민영화를 쟁점으로 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 이상을 잃는 참패를 당하면서 오카다 대표 또한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당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가 선출되었고, 오자와는 대표 대행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오카다 집행부의 부대표이자 총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이를 고사했다. 민주당 대표[편집] 오자와 이치로 선거 벽보 2006년 3월 31일에 마에하라 대표가 호리에 메일 문제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자 오자와는 기자회견에서 “앞장서서 당을 재생해 정권 교체의 횃불을 밝히는 결의”라며 후임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을 표명했다. 오자와의 선출을 예상한 여러 여론조사의 결과와 마찬가지고, 4월 7일의 대표 선거에서 오자와는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대표로 당선되었다. 오자와는 당 안팎에 당의 결집을 어필하기 위해 선거의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대표 대행으로, 하토야마 유키오를 간사장으로 선임하는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오자와가 대표로 취임한 직후에 치러진 4월 24일의 중의원 지바 7구 보궐선거에서는 메일 문제의 역풍으로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힘들다는 예상이 있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5월 9일에 회견을 가지고 중의원 본회의를 자주 결석하는 데 대해 ‘(의사의 충고를 지켜) 식후에 바로 일을 하는 등의 일은 삼가고 있다’며 자신의 몸 관리를 이유로 든 일로 ‘의회 경시’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건강 상태를 이야기한 것을 두고 여러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9월 25일에는 임시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대표로 재선된 후 협심증 발작 징후를 느끼고 입원해 검사하기도 했다. 10월 5일에 퇴원한 오자와는 동맥경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핵실험 직후 동북아 정세를 두고 일본이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이른바 〈주변사태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트로이카 체제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러나 마에하라 전 대표를 비롯한 당내 일각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고, 또한 민주당의 외교·방위 부문은 ‘오자와 대표의 트로이카 체제의 견해는 민주당의 공식견해가 아니다’라고 발표해 이를 둘러싼 민주당 내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오자와는 “핵무장 논의를 용인하면 ‘(핵무기의 보유, 제조, 수입을 하지 않기로 한) 비핵3원칙을 지킨다’는 말도 국민이나 국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층은 2002년 당시 자유당 당수로 있던 오자와가 일본의 핵보유능력을 두고 “일본은 하루아침에 몇천 발의 핵탄두를 가질 수 있다”고 발언한 것과 비교하여 비판했다. 오자와는 자유당 시대부터 방위청이 ‘성’(省)으로 승격할 것을 주장했으며, 실제로 승격시에도 “국방의 소임을 맡은 기관이 내각부의 한 외국(外局)으로만 있는 상태는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여전히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므로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이를 심의할 때는 결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오자와 대표의 최종 결단에 따라 법안에 찬성으로 선회했다. 11월의 후쿠시마현지사 선거에서는 사민당, 오키나와현지사 선거에서는 공산당 및 사민당과 공동으로 투쟁했다. 후쿠시마 현지사 선거에서는 여당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지만,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는 패배하면서 민주당과 다른 정책과 지지층을 가진 정당과 연합했음에도 진 것을 두고 야당 공동 투쟁의 목적에 대해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이라고 불린 2007년 2월 4일의 아이치현지사 선거와 기타큐슈 시장 선거가 시행되었다. 아이치 현지사 선거에서는 아쉽게 패했지만, 기타큐슈 시장 선거에서는 야당의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야나기사와 하쿠오 후생노동상이 “여성은 애낳는 기계”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오자와 대표가 야나기사와 후생노동상이 사임하기 전에는 법안을 심의할 수 없다는 전술을 주도하고, 사임을 유도하는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를 쟁점화하는데 성공한 것이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4월 8일의 통일지방선거에서는 이와테현지사 선거에서 ‘오자와 칠드런’의 대표로 불리는 닷소 타쿠야가 출마해 2위 후보와 3배 가까운 차이를 벌리며 압승하여 오자와 왕국의 건재를 과시했다.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한 오자와는 7월 8일, 선거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때에는 “야당의 대표를 언제까지 맡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며 대표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참의원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사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향을 비친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비판과 차별화에 성공하면서 민주당의 승리가 강고해졌다. 7월 29일에 시행된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을 획득하면서 참의원 제1당으로 부상하고, 야당 전체는 과반수를 획득했다. 이 선거에서 오자와의 비서 30명 이상이 1인구를 중심으로 격전지에서 선거의 전술을 지도하였고, 오자와의 탁월한 선거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선거가 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자민당은 후임 총재로 후쿠다 야스오를 선출했다. 9월 25일의 내각총리대신 지명선거에서 중의원은 후쿠다를, 참의원은 오자와를 지명하면서 양 원의 지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이후 타협점을 찾지 못해 중의원의 의결이 우월하다고 규정한 헌법에 따라 후쿠다가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양원의 지명이 다른 것은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민주당의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된 이래 9년 만이며, 역대 4번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계열이었던 오자와 이치로와 후쿠다 야스오의 대결은 ‘제2의 가쿠후쿠 전쟁’이라고도 불리지만, 본인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아 오자와 대신 후쿠다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다나카 마키코 쪽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2007년 11월 2일, 오자와 민주당 대표는 자민당의 후쿠다 야스오 총재와 회담하였고, 이때 연립정권에 대한 제안이 있었으므로 당으로 돌아와 임시임원회에 상의했다. 그러나 임원회에서 대연립정권에 대한 강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2시간 후에 연립을 거절하였다. 이때 아사히 신문과 닛케이를 제외한 여러 언론에서 오자와가 후쿠다 총리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오자와는 이에 대해 “일부 언론에 의한 민주당에 대한 이유없는 중상모략 보도로, 여론 조작”이라고 비판하며, “나는 대연립 제안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발언해 이 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1]. 오자와 대표는 2007년 11월 4일에 이 대연립 구상을 둘러싼 당내의 반발의 목소리를 수렴해, 이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하는 의사를 표명했다[2]. 그러나 정계에서 대표직 유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두되면서, 오자와는 11월 6일에 “창피한 일이지만, 여러분의 뜻에 따라 부디 한 번 더 열심히 하고 싶다”며 대표직 속투를 표명하였다. 민주당 탈당 이후[편집] 2012년 7월 12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소비세 증세를 밀어붙여 통과되자 이에 반발해 자신을 포함한 계파 의원 51명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 후 '국민 생활이 제일당'이란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하였으나, 이내 일본 미래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그후 2012년 12월 16일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미래당의 62석의 의석이 9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맞았다. 오자와 자신은 지역구 수성에 성공했으나,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자진 탈당하였다. 일본 미래당 탈당 이후[편집] 민주당 복당이 불허되자, 오자와는 다시 일본 미래당에 복당, 일본 생활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 참석이나, 2014년 9월 4일 자신의 국민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 수여식 등에 참여하며[3], 꾸준히 대한민국에 방문하는 일본 정치인 중 하나이다. 제주도 망언[편집] 2009년 3월 오자와 이치로가 엔화가 강세일때를 이용해서 제주도를 매입해야 한다는 망언을 쏟아내 한국인들의 반발을 샀으며, 이러한 망언 등으로 인해 한일간의 새로운 갈등을 낳았다.[4][5][6] 국민대학교 강연[편집] 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오전 10시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은 서울 국민대학교를 방문, 300여명의 학생들과 학교 관계자 한일양국 보도진을 대상으로,‘새로운 한·일 관계와 그 역할을 담당할 지도자 육성’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일본인정치가가 한국의 대학에서 강연을 한 첫 사례였으며,[7] 2시간에 걸쳐 강연은 진행되었다. 강연내용중, '식민지지배와 관련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천황가와 한국인과의 연관성', '외국인 참정권'에 대한 발언 을 주요내용으로 다루었으며, 역사학 공부를 즐겨했다는 이야기, 어머니의 엄격했던 가정교육,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역사인물 3명 등을 이야기 하는 등 개인적인 이야기도 오고갔다. 또한, 국민대학생들에게 학업에 매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업과 관련없는 일이라도 자신이 나아갈 분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시간을 투자하라는 조언도 하였다. 강연에 앞서 한국어 번역본인 오자와 간사장의 저서가 학생등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이어서 강연이 끝난 후 조훈현 9단과 바둑을 둔 후,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 저녁만찬을 가졌다.[8] 인물[편집] 평가[편집] 다나카 가쿠에이의 장남 - 1942년에 태어난 오자와가 5세로 죽은 다나카의 장남과 동갑이었으므로, 다나카는 오자와를 아들처럼 귀여워했다. 가네마루 신은 오자와와 하타 쓰토무, 가지야마 세이로쿠 세 사람을 두고 “평시의 하다, 난세의 오자와, 대난세의 가지야마”라고 평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나는 그(오자와)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처럼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한 사람은 없다.”고 평했다. 주위에서는 오자와가 도호쿠 지방 출신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 순진하고 말재주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때문에 설명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측근이 떨어져나가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오자와는 이를 두고 “떠나는 이 잡지 않고, 오는 이 막지 않고”라고 말한 바 있다. 당 내외의 오자와 알레르기는 오래된 의원에게서 강하다. ‘독단적이고, 측근정치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자민당의 분열과 이후의 분열 공작, 신진당의 분열과 해산 등이 주 비판 대상이 된다. 자민당 간사장 시절에 숙취로 전국간사장회의에 불참하거나, 선거에서 질 것 같으면 선거 지휘를 포기하고 외유에 나가기도 했으므로 ‘워스트1간사장’이라는 평가도 있다.[9]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총선거 32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1,520표 24.8%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3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60,675표 19.2% 2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4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1,449표 22.0%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5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0,813표 21.7%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6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72,838표 22.3%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7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63,212표 18.9% 4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8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95,208표 26.7%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39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자유민주당 89,449표 24.1%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40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2구 신생당 142,451표 40.8% 1위 중선거구제 총선거 41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신진당 125,619표 64.7% 1위 총선거 42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자유당 119,099표 59.7% 1위 총선거 43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28,458표 65.1% 1위 총선거 44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24,578표 59.9% 1위 총선거 45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민주당 133,978표 62.6% 1위 총선거 46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일본미래당 78,057표 45.5% 1위 총선거 47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4구 생활의 당 75,293표 47.8% 1위 총선거 48회 중의원 의원 이와테현 제3구 무소속 130,229표 57.4% 1위 각주[편집] ↑ 오자와 이치로 중상보도에 엄중히 항의하다,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오자와씨 ‘혼란에 매듭’ ‘보도에 분노’라고도 회견 전문,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자. ↑ 오자와 대표가 사직서를 제출, 집행부에 진퇴를 일임 Archived 2007년 11월 6일 - 웨이백 머신,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오자와씨가 대표사임의 의향표명 “정치적 혼란의 매듭”,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 ↑ 국민대, 오자와 이치로 일본 생활당 대표에 명예박사 학위수여 ↑ 오자와 `제주도` 망언에 제주도민들 강력 반발 ↑ 日 오자와 민주당대표 “제주도를 사버리자”망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제주도 사겠다고?..가치를 알아나 봤나”. 2009년 3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3일에 확인함. ↑ 일본민주당 공식사이트 관련기사 중반부 참조 ↑ 국민대학교 관련기사 참조 ↑ 奥島貞雄, 《自民党幹事長室の30年》, 주오코론신샤, 2002년. 같이 보기[편집] 자유당 (일본, 2016년) 국민 생활이 제일 오자와 그룹 이치류 전쟁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 노보루 다나카 가쿠에이 다나카 마키코 가네마루 신 노나카 히로무 오사노 겐지 외부 링크[편집] (일본어) 오자와 이치로 공식 홈페이지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11700520 LCCN: nr91010519 ISNI: 0000 0000 8305 8339 GND: 1015363296 SUDOC: 153445718 NDL: 0021256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오자와_이치로&oldid=24510892" 분류: 194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중의원 의원일본의 각료역임자도쿄도 출신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니혼 대학 동문자유민주당 (일본)의 정치인민주당 (일본, 1998년)의 정치인일본의 자치대신도쿄도 구부 출신일본의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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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은영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은영선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72년 5월 10일(1972-05-10) (47세)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활동 기간 1995년 ~ (KBS 25기) 1998년 ~ (프리랜서) 소속 한국방송 성우극회 (프리랜서) 은영선(1972년 5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1995년 KBS 25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목차 1 출연 작품 1.1 TV 애니메이션 1.2 극장용 애니메이션 1.3 외화 1.3.1 전담배우 1.3.2 드라마 1.3.3 영화 1.4 게임 1.5 나레이션 1.6 광고 1.7 홍보멘트 1.8 안내방송 1.9 라디오 드라마 1.10 라디오 프로그램(진행) 2 수상 경력 3 외부 링크 출연 작품[편집] 굵은 글씨는 메인 캐릭터이다. TV 애니메이션[편집] AIR (애니맥스) - 카미오 미스즈, 칸나비노 미코토 TV동화 행복한 세상 (KBS) - 여성 및 아이(전기) 고미의 만화 호기심 천국 (SBS) - 엄마 꼬꼬마 꿈동산 (KBS) - 뚜뚜데이지 꼬잉꼬잉 이솝극장 (SBS) - 프리시 다오배찌 붐힐대소동 (KBS) - 마리드, 케피 뚝딱박사 핌 (KBS) 디지몬 어드벤처 (KBS) - 신나리 / 피노키몬 / 피콜몬 파워 디지몬 (KBS) - 신나리 / 꼬마몬-브이몬-엑스브이몬-파일드라몬-황제드라몬 / 매그너몬 로봇용사 다그온 (SBS) - 건키드, 마리아 리틀 아인슈타인 (KBS) - 애니 마스크맨 (KBS) - 왕세리 미키의 클럽하우스 -미니 마우스 베이브 마이 러브 (애니맥스) - 사카시타 유즈유 비스트워 네오 (SBS) - 나비 쁘띠쁘띠 뮤즈(KBS) - 송아리 스콜피언 (KBS) 스트라토스4 (애니맥스) - 혼조 미카제 스페이스 힙합덕 (KBS) - 소행성R, 메가폰 꽃, 미쓰리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쥐르와 아스마르 (KBS) - 샴수사바 공주 알록달록 크레용 (KBS) - 크레용 애플캔디걸 (KBS) - 피피 에일리언9 (애니맥스) - 오오타니 유리 오! 나의 여신님 (애니맥스) - 스쿨드 오! 나의 여신님 : 각자의 날개 (애니맥스) - 스쿨드 요랑아 노래하자(KBS) - 피노키오 요리킹 조리킹 (KBS) - 반디 우리반 짱돌이 (애니원) - 나혜미 원피스 (KBS) - 네펠타리 비비 윙스 프렌즈/윙스 클럽 (SBS, 니켈로디언) - 플로라, 바네사 쥬로링 동물탐정 (KBS) - 키키(미코가미 나기사) 추리게임 -뫼비우스의 띠- (애니원) - 은아리(유이자키 히요노) 탐정학원 Q (투니버스) - 이치노세 카오루 태극천자문 (KBS) - 하크, 자하라 탱구와 울라숑 (KBS) - 엘리 크리스탈 요정 지스쿼드 (SBS) - 혜미 킴 파서블 (KBS) - 킴 파서블 핌블핌블 (KBS) - 뽀나 Piwi짱! 3D애니메이션 시리즈 (EBS) - 리틀 젤라토스 하우스 오브 마우스 (KBS) (미니 마우스) 우당탕탕 두디두디 (MBC 무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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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telecom 011 고객센터 ARS - LG telecom Main 과 고객센터 ARS - 다이너스 카드 ARS - 한국 PSINet 영어교재, 영어만화, 영어 나레이션 다수 녹음 사랑의 소리 방송 사랑의 응접실 진행 주택은행 사내방송 영화음악실 진행 안내방송[편집] 대전도시철도1호선 전철 안내방송 (2006년 ~ 2018년) 서울교통공사 5~8호선 전철 안내방송 (2012년 ~ 2018년) SK텔레콤 고객센터 음성 ARS SK브로드밴드 고객센터 음성 ARS 라디오 드라마[편집] 소설극장 (KBS 3라디오) 2010.08.27 ~ 2010.10.05 F.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해설) 연속낭독 (KBS 3라디오) 2008.07.23 ~ 2008.08.17 이영미 <광화문 연가> (낭독) 라디오 극장 (KBS 한민족 방송) 2010.05.01 ~ 2010.05.31 유재용 <사로잡힌 영혼> (해설) 2010.09.01 ~ 2010.09.30 오현종 <거룩한 속물들> (해설) 2011.04.01 ~ 2011.04.30 류영국 <소울음> (해설) 2013.06.01 ~ 2013.06.30 이도우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해설) 라디오 독서실 (KBS 2라디오) 2006.06.18 추민주 <빨래> (서나영) KBS 무대 (KBS 한민족 방송) 내게도 사랑이 빈가지 위에 눈꽃이 피다 라디오 프로그램(진행)[편집] 홍서범, 은영선의 가로수를 누비며 (KBS 2라디오) 맛있는 라디오 991, 은영선입니다! (국악방송) 은영선의 창호에 드린 햇살 (국악방송) 수상 경력[편집] 2010년 KBS 성우 연기대상 최우수 여자 연기상 외부 링크[편집] 한국방송 성우극회 은영선 소개 페이지 성우 은영선 다음 팬카페 <포에버§은영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은영선&oldid=24087849" 분류: 대한민국의 여자 성우197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1995년 데뷔행주 은씨광주광역시 출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2일 (월) 22:3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공익광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익광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익 광고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공익광고(公益廣告)는 특정 상품의 선전이나 기업의 이미지 등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공의 이득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지는 광고들의 총칭이다. 주로 사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휴머니즘, 범국민성, 비영리성, 비정치성을 지향하고 있어, 직간접적으로 광고주의 이익을 도모하는 '공익성 광고'와 구별된다.[1] 상업광고와는 다르게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서 편성할수 있다. 목차 1 각국의 공익광고 1.1 대한민국 1.2 일본 2 각주 3 외부 링크 각국의 공익광고[편집]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의 공익광고는 1981년 1월 22일 발족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 코바코) 산하 기구인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제작을 담당하고 있으며, 법령[2]에 의거하여 일정 이상의 공익광고가 방송을 통해 편성되고 있다. 1년간 한국 국내에서 방송되는 공익광고의 주제 선정 및 홍보 대책 수립 및 전략의 모색 등의 자문 역할은, 방송광고진흥공사 내에 구성되는 기구인 공익광고협의회가 담당하고 있다. 이 모임은 1981년 8월 18일 구성된 '방송광고향상 자문위원회'에서 유래하며, 1983년 2월 7일 '공익광고향상 자문위원회'를 거쳐, 1988년 7월 1일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대외 광고의 명의로는 '방송광고향상협의회', '공익광고협의회' 등을 사용하여 왔다. 공익광고협의회는 광고학계, 방송계, 광고계, 시민 단체 등에서 지명되는 15명 내외의 인사로 구성되는 기구이다. 2002년 말 현재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제작한 방송공익광고는 총 258편이며, 1981년 8월 18일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방송광고향상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같은 해 12월 5일 '저축으로 풍요로운 내일을'이라는 내용의 광고를 낸 것이 그 시초이다.[1]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민간 기구인 AC 재팬(AC, 일본광고기구라고 부른다)[3]이나 정부 광보, 일본 광고 심사기구(JARO), 방송윤리·프로그램향상기구(BPO) 등에서 나오는 CM 및 신문광고가 있다. 이런 광고들은 기업 광고를 내보내지 않는 NHK에서도 나오는 경우가 있다. AC 재팬에서 캠페인 주제를 선정하는 기준은 일곱 가지 이다. 첫째, 인간 존중의 정신을 제일로 생각한다. 둘째, 모든 시민에 관계된 중요한 공공적 과제여야 한다. 셋째, 실태를 파악할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넷째, 비영리적, 비당파적, 비종교적으로 입법에 직접 영향을 미칠 의도가 없어야 한다. 다섯째, 광고라는 수단이 목적 달성에 유효해야 한다. 여섯째, 시민의 자발적인 운동을 촉진해야 한다. 일곱째, 구체적으로 표현이 가능하고 해결의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 각주[편집] ↑ 가 나 한국방송광고공사 홈페이지의 '공익광고' 부분에서에서 ↑ 방송법 제73조 4항: ④ 방송사업자 및 전광판방송사업자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제작된 비상업적 공익광고를 대통령령이 정하는 비율이상 편성하여야 한다. 방송법 시행령 제59조 2항의 1: ② 방송사업자 및 전광판방송사업자는 법 제73조제4항의 규정에 의하여 비상업적공익광고를 다음 각호에서 정하는 비율이상 편성하여야 한다. 1. 방송사업자 : 매주 전체방송시간의 100분의 1 이내에서 방송위원회가 고시하는 비율 ※ 2003년 방송위원회 고시 비상업적 공익광고의 의무편성비율 : 매주 전체 방송시간의 100분의 0.2이상 ↑ 원래는 '공공광고기구'였으나 '공공광고기구'라는 정부 기관을 연상시키는 이름에서 생겨나는 '공공광고기구는 정부 기관이다'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AC 재팬으로 개칭했다. 2009년, 명칭변경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공공광고기구'는 'AC 재팬'으로 (일본어) 외부 링크[편집] KOBACO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영어) Ad Council (미국) (일본어) AC 재팬 (일본) 전거 통제 LCCN: sh85001190 NDL: 00577258 이 글은 방송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공익광고&oldid=24196122" 분류: 공익광고광고숨은 분류: 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방송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فارسیעברית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PolskiRomână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1: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공익광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익광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익 광고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공익광고(公益廣告)는 특정 상품의 선전이나 기업의 이미지 등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공의 이득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지는 광고들의 총칭이다. 주로 사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휴머니즘, 범국민성, 비영리성, 비정치성을 지향하고 있어, 직간접적으로 광고주의 이익을 도모하는 '공익성 광고'와 구별된다.[1] 상업광고와는 다르게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서 편성할수 있다. 목차 1 각국의 공익광고 1.1 대한민국 1.2 일본 2 각주 3 외부 링크 각국의 공익광고[편집]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의 공익광고는 1981년 1월 22일 발족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 코바코) 산하 기구인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제작을 담당하고 있으며, 법령[2]에 의거하여 일정 이상의 공익광고가 방송을 통해 편성되고 있다. 1년간 한국 국내에서 방송되는 공익광고의 주제 선정 및 홍보 대책 수립 및 전략의 모색 등의 자문 역할은, 방송광고진흥공사 내에 구성되는 기구인 공익광고협의회가 담당하고 있다. 이 모임은 1981년 8월 18일 구성된 '방송광고향상 자문위원회'에서 유래하며, 1983년 2월 7일 '공익광고향상 자문위원회'를 거쳐, 1988년 7월 1일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대외 광고의 명의로는 '방송광고향상협의회', '공익광고협의회' 등을 사용하여 왔다. 공익광고협의회는 광고학계, 방송계, 광고계, 시민 단체 등에서 지명되는 15명 내외의 인사로 구성되는 기구이다. 2002년 말 현재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제작한 방송공익광고는 총 258편이며, 1981년 8월 18일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방송광고향상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같은 해 12월 5일 '저축으로 풍요로운 내일을'이라는 내용의 광고를 낸 것이 그 시초이다.[1]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민간 기구인 AC 재팬(AC, 일본광고기구라고 부른다)[3]이나 정부 광보, 일본 광고 심사기구(JARO), 방송윤리·프로그램향상기구(BPO) 등에서 나오는 CM 및 신문광고가 있다. 이런 광고들은 기업 광고를 내보내지 않는 NHK에서도 나오는 경우가 있다. AC 재팬에서 캠페인 주제를 선정하는 기준은 일곱 가지 이다. 첫째, 인간 존중의 정신을 제일로 생각한다. 둘째, 모든 시민에 관계된 중요한 공공적 과제여야 한다. 셋째, 실태를 파악할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넷째, 비영리적, 비당파적, 비종교적으로 입법에 직접 영향을 미칠 의도가 없어야 한다. 다섯째, 광고라는 수단이 목적 달성에 유효해야 한다. 여섯째, 시민의 자발적인 운동을 촉진해야 한다. 일곱째, 구체적으로 표현이 가능하고 해결의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 각주[편집] ↑ 가 나 한국방송광고공사 홈페이지의 '공익광고' 부분에서에서 ↑ 방송법 제73조 4항: ④ 방송사업자 및 전광판방송사업자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제작된 비상업적 공익광고를 대통령령이 정하는 비율이상 편성하여야 한다. 방송법 시행령 제59조 2항의 1: ② 방송사업자 및 전광판방송사업자는 법 제73조제4항의 규정에 의하여 비상업적공익광고를 다음 각호에서 정하는 비율이상 편성하여야 한다. 1. 방송사업자 : 매주 전체방송시간의 100분의 1 이내에서 방송위원회가 고시하는 비율 ※ 2003년 방송위원회 고시 비상업적 공익광고의 의무편성비율 : 매주 전체 방송시간의 100분의 0.2이상 ↑ 원래는 '공공광고기구'였으나 '공공광고기구'라는 정부 기관을 연상시키는 이름에서 생겨나는 '공공광고기구는 정부 기관이다'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AC 재팬으로 개칭했다. 2009년, 명칭변경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공공광고기구'는 'AC 재팬'으로 (일본어) 외부 링크[편집] KOBACO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영어) Ad Council (미국) (일본어) AC 재팬 (일본) 전거 통제 LCCN: sh85001190 NDL: 00577258 이 글은 방송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공익광고&oldid=24196122" 분류: 공익광고광고숨은 분류: 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방송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فارسیעברית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PolskiRomână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1: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박성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성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박성중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58년 8월 1일(1958-08-01) (60세)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학력 성균관대학교 도시행정학전공 행정학 박사경력 서울특별시 서초구청장 동국대 행정학과 겸임교수 군복무 육군 중위 전역종교 불교소속위원회 행정안전위원회의원 선수 1의원 대수 20정당 자유한국당지역구 서울 서초구 을 박성중(朴成重, 1958년 8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2016년 12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새누리당을 탈당하여[1] 바른정당에 입당했으나, '보수단일화를 통해 정권창출을 하기 위해' 2017년 5월 바른정당을 탈당했다.[2] 5월 12일 동반 탈당한 11명의 바른정당 탈당파 의원들과 함께 복당 절차가 완료되었다. 목차 1 학력 1.1 비학위 수료 2 경력 3 사건과 논란 3.1 사건 3.2 논란 3.2.1 교통경찰관에 대한 갑질 3.2.2 삼성전자 특혜 의혹 4 역대 선거 결과 5 각주 6 외부 링크 학력[편집] 중현초등학교 졸업 남해중학교 졸업 경남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행정학 학사 육군보병학교 수료 육군포병학교 수료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성균관대학교 행정대학원 도시행정학과 박사 비학위 수료[편집]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학연구소 연구원 연구과정 수료 경력[편집] 1979년: 제23회 행정고시 합격 1993년: 대통령 민정수석비서실 행정관 서울특별시 행정과장 대통령 행정비서실 행정관 1999년 ~ 2000년: 서울특별시 공보관 2003년: 서초구 부구청장 2004년: 서울디지털대학교 법무행정학부 겸임교수 2006년 7월 ~ 2010년 6월: 서초구청장 2011년 1월 ~ 2012년 1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열매 사무총장 동국대학교 행정학과 겸임교수 대한민국 육군 학사장교 총동문회 회장 2012년 12월 ~: 미래도시연구소 소장 2016년 5월: 제20대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을/새누리당) 2016년 6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안전행정위원회 위원 2016년 6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16년 7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 위원 2016년 12월: 새누리당 원내부대표 2016년 12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국회운영위원회 위원 2017년 1월: 제20대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간사 2017년 1월 ~ 2017년 5월: 제20대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을/바른정당) 2017년 1월: 바른정당 원내부대표 2017년 5월 ~: 제20대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을/자유한국당) 2017년 7월 ~ 2018년 6월: 자유한국당 홍보본부장 2017년 7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행정안전위원회 위원 2017년 12월 ~ 2018년 2월: 자유한국당 지방선거기획위원회 위원 2018년 2월 ~ 2018년 5월: 자유한국당 지방선거총괄기획단 지방선거기획본부 홍보소위 위원 2018년 7월 ~ : 제20대 국회 후반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 2018년 12월 ~ : 제20대 국회 공공부문 채용비리 의혹과 관련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 2019년 7월 ~ : 자유한국당 미디어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 사건과 논란[편집] 사건[편집] 박성중은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이성규 부장검사)에 의해 2016년 치러진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2016년 1∼2월 새누리당 경선과 관련해 선거구민 5명에게 전화를 걸어 실제로는 여론조사 2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1위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2∼4월 예비후보자 홍보물과 선거공보에 서초구청장 재직 시절 "우면동 연구개발(R&D)센터에 삼성전자 연구소를 유치했다"는 허위사실을 적시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되었다. 박성중이 구청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부터 2010년 기간 동안 연구개발센터는 용적률 240%, 건물높이 4~5층으로 개발이 제한되어 있어서 기업들의 연구소 건립을 유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면서도 삼성전자와 연구소 건립과 관련하여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를 작성하거나 사전 협의 등 구체적 절차를 진행한 사실이 없었고 구청장에서 물러나고 1년이 훨씬 지난 2011년 8월 22일 국토교통부의 지구 실시계획 변경 승인으로 용적률 360% 건물 높이 10층이하로 규제가 완화되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김도형 부장판사)는 선고공판에서 "피고인이 구청장 재직 중 삼성전자의 사장단과 협의를 실제 진행했던 점이 인정된다 구체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하면서 허위의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한 것에 대해서는 "통화한 당원들이 '통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박 의원이 여론조사 순위를 언급한 부분은 기억한다'는 등 모순되는 진술을 했던 점, 이들이 경쟁 상대였던 예비후보를 지지했던 점"을 근거로 하여 "피고인이 1∼2월 새누리당 서초을 후보 경선 과정에서 선거구 내 당원들에게 전화 통화를 했지만, 이 과정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3]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김대웅 부장판사)는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허위의 여론조사 결과 공표에 대해 "관련 증거를 모두 종합해도 피고인이 사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여론조사 결과를 왜곡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면서 삼성전자 연구소 유치에 대해서도 "피고인이 허위 사실을 공표했다거나 허위성이 있었다는 것이 합리적 의심 없이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1심과 같은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도 검사의 상고를 기각해 무죄를 확정했다.[4][5] 논란[편집] 교통경찰관에 대한 갑질[편집] 신호위반을 단속한 경찰관에게 이름을 물어보고는 경찰청 정보관에게 함정단속이라며 반발한 사건으로 인해 논란이 일고 있다.[6][7] 삼성전자 특혜 의혹[편집] 삼성전자 연구소 건립과 관련하여 허위사실공표로 기소되었으나 판결문에 의하면 "서초동 우면동에 삼성전자 연구소를 유치하는데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그 노력에 의해 용적률을 완화하는 것이라면 삼성전자에 대한 특혜 일 수 밖에 없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지방 선거 6대 구청장 서울 서초구 한나라당 121,297 표 74.57% 1위 초선, 민선 4기 총선 20대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 을 새누리당 55,666 표 46.82% 1위 초선 각주[편집]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21/2016122100789.html?Dep0=twitter&d=2016122100789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5020948001 ↑ 서울중앙지방법원2016고합957 ↑ 서울고등법원2016노3828 ↑ 대법원2017도13212 ↑ “불법 우회전 단속하다 '국회' 신분증 본 교통경찰이 한 말”. 《중앙일보》. 2017년 3월 30일. 2017년 3월 31일에 확인함. ↑ '갑질'논란, 바른정당 박성중 의원, 교통신호 위반 단속 경찰관에 (2017년 3월 30일). “바른정당 박성중 의원, 교통신호 위반 단속 경찰관에 '갑질'논란”. 《서울경제》. 2017년 3월 3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박성중 - 대한민국헌정회 전임조남호 제6대 서울특별시 서초구청장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후임진익철 전 임 (서초구 갑)김회선(서초구 을)강석훈 제20대 국회의원(서울 서초구 을) 2016년 5월 30일 ~ 새누리당 → 무소속 → 바른정당 → 무소속 → 자유한국당 (서초구 갑)이혜훈 후 임 (현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성중&oldid=24510445" 분류: 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육군 학사장교 동문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대한민국 육군 중위홍준표동국대학교 교수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바른정당 당원자유한국당 당원195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남해군 출신성균관대학교 동문육군보병학교 동문육군포병학교 동문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성균관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7월 1일 (월) 20: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시안 셴양 국제공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안 셴양 국제공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시안 셴양 국제공항西安咸阳国际机场Xi'an Xianyang International Airport 시안 셴양 국제공항 전경 IATA: XIY – ICAO: ZLXY 개요 지역 시안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시안 거점 항공사 중국동방항공 조이 에어 해발고도 1,895 m / 6,217 ft 좌표 북위 34° 26′ 49″ 동경 108° 45′ 05″ / 북위 34.44694° 동경 108.75139° / 34.44694; 108.75139 웹사이트 http://www.xxia.com.cn/[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지도 XIY 활주로 방향 면적(m*m) ILS 표면 길이 폭 05R/23R 3,000 콘크리트 05L/23L 3,800 콘크리트 통계 (2011) 승객 21,163,130 시안 셴양 국제공항(중국어: 西安咸阳国际机场 Xī'ān Xiányáng Guójì Jīchǎng, IATA: XIY, ICAO: ZLXY)은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시안 시 서북부의 셴양 시에 있는 공항이다. 면적 5km2로 중국 서북 지방에서 가장 큰 공항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서부 대개발로 여객 및 화물 수송이 급속이 증가하고 있다. 2002년에 중국서북항공이 중국동방항공에 합병되기 전까지 중국서북항공의 허브 공항에 속했다. 현재 국내선과 국제선 노선을 통틀어 79개 노선이 운항 중이다. 시안공항은 여객터미널의 경우 2터미널과 3터미널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으며 터미널에 따라 항공사 체크인 카운터가 달리 있으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목차 1 역사 2 운항 노선 2.1 국제선 2.2 국내선 3 각주 4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84년 국무원과 중앙 군사 위원회에서 공군의 함양 비행장 김병지에 대형 민간 공항 건설을 결정한다. 1987년 8월 : 제1기 공사 착공. 1991년 9월 : 하루 제1기 공사 완공, 개항, 동시에 시안 서관 공항은 폐쇄된다. 2000년 8월 : 제2기 공사 착공. 공사 비용의 일부는 엔화 차관으로 조달됐다. 2003년 9월 : 16일 제2기 공사 완성. 2007년 9월 : 12일 3년 가까이 폐쇄한 구 터미널이 제1터미널로 이용 재개. 중국 남방 항공 계열사(중국남방항공, 샤먼 항공, 쓰촨 항공, 충칭 항공)의 카운터는 제1터미널에 이전. 기타 항공사가 운행하는 국내선 및 국제선은 모두 제2터미널에서의 수속이 된다. 계획 단계에서는 연간 이착륙 횟수 10만회 연간 여객량 1000만명, 화물 물동량 13만톤을 전망한다. 2004년 연간 이착륙 횟수 77,655회(중국 국내 제9위)연간 여객량 6,362,409명(중국 국내 제9위), 물동량 73,368.8톤(중국 국내 제15위).(출처 참조) 운항 노선[편집] 국제선[편집] 항공사 도착지 중국동방항공 서울(인천)[1], 도쿄(나리타)[2], 오사카(간사이)[3], 나고야(주부)[4], 오키나와, 홍콩, 타이페이(도원), 방콕(수완나품)[5], 델리[6], 시드니[7], 싱가포르[8], 프랑크푸르트[9], 파리(샤를 드 골)[10], 하이난 항공 타이페이(도원), 로마(피우미치노), 도쿄(나리타), 파리(샤를 드 골), 시애틀[11] 쓰촨 항공 오사카(간사이) 심천항공 방콕(수완나품) 샤먼항공 싱가포르[12] 스프링 항공 오사카(간사이) 오케이 항공 방콕(수완나품) 대한항공 서울(인천) 아시아나항공 서울(인천) 에어부산 부산(김해) 진에어 제주 중화항공 타이페이(도원) 유니 항공 타이페이(도원) 캐세이 드래곤 항공 홍콩 일본항공 도쿄(나리타) 오리엔트 타이 항공 푸껫 타이 에어아시아 방콕(돈므앙) 에어아시아 X 쿠알라룸푸르 비엣제트 항공 냐짱 몰디브 항공 말레[13] 국내선[편집] 항공사 도착지 중국국제항공 베이징(서우두), 청두, 구이린, 항저우, 상하이(푸둥), 우루무치, 인촨 중국동방항공 베이징(서우두), 청두, 충칭, 다용, 구이린, 하이커우, 항저우, 쿤밍, 란저우, 라싸, 난창, 난징, 칭다오, 싼야, 상하이(푸둥), 선전, 우루무치, 우한, 우시, 인촨, 위린 중국남방항공 창사, 청두, 다롄, 광저우, 충칭, 항저우, 하얼빈, 지난, 칭다오, 싼야, 상하이(푸둥), 선양, 선전, 타이위안, 우루무치, 우한, 시닝, 인촨, 우이 쓰촨 항공 청두 샤먼 항공 창사, 충칭, 푸저우, 항저우, 난창, 톈진, 우한, 우이산, 인촨 하이난 항공 베이징(서우두), 창사, 청두, 충칭, 푸저우, 광저우, 구이양, 하이커우, 항저우, 쿤밍, 란저우, 난징, 칭다오, 싼야, 상하이(푸둥), 선전, 우루무치, 우한, 샤먼, 인촨 베이징 캐피탈 항공 싼야 군요 항공 상하이(훙차오) 럭키 항공 쿤밍, 우루무치 산둥 항공 지난 상하이 항공 자위관, 란저우, 상하이(푸둥), 시닝 선전 항공 광저우, 란저우, 난징, 선전, 시닝, 인촨 스프링 항공 상하이(푸둥), 선양 조이 에어 베이징(서우두), 광저우, 상하이(푸둥) 쿤팡 항공 창춘, 둔황, 푸저우, 하이라얼, 하이페이, 후허하오터, 황염, 자위관, 란저우, 린이, 만저우리, 난징, 난닝, 친황다오, 스좌장, 타이위안, 톈진, 우한, 우저우, 샹판, 옌타이, 인촨, 위린 각주[편집] ↑ 칭다오 류팅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칭다오 류팅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 경유 ↑ 항저우 샤오산 국제공항경유 ↑ 돈므앙 국제공항경유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시안 셴양 국제공항 (중국어/영어) 공식 홈페이지 (영어) 시안 셴양 국제공항 기상 정보 - NOAA / NWS (영어) XIY / ZLXY 사고 역사 - 에비에이션 세이프티 네트워크 vdeh 중화인민공화국의 공항북부 지방 베이징 난위안 베이징 수도 스자좡 정딩 타이위안 우수 톈진 빈하이 후허하오터 바이타 북동 지방 다롄 저우수이쯔 무단장 하이랑 선양 타오셴 옌지 차오양촨 지시 싱카이 창춘 룽자 하얼빈 타이핑 동부 지방 난징 루커우 난창 창베이 닝보 리서 상하이 푸둥 상하이 훙차오 샤먼 가오치 수난 수우팡 양저우 타이저우 옌청 옌타이 펑라이 우이산 원저우 영창 웨이하이 다슈이보 이우 지난 야오창 창저우 번뉴 취안저우 진장 칭다오 류팅 푸저우 창러 항저우 샤오산 허페이 신차오 남부 중앙 지방 광저우 바이윈 구이린 량장 난닝 우수 마카오 선전 바오안 싼야 펑황 우한 톈허 이창 산시야 장자제 허화 정저우 신정 주하이 진완 지에양 창순 창사 황화 포산 사디 하이커우 메이란 헝양 난웨 홍콩 츠례자오 후이저우 핑탄 남서 지방 구이양 룽둥바오 라싸 공가 리장 싼야 시솽반나타 가사 아리 구사 주자이 황룡 청두 솽류 충칭 장베이 쿤밍 창수이 북서 지방 란자우 자오좡 시닝 차오자바오 시안 셴양 우루무치 디워푸 인촨 히동 카슈가르 계획공항 간난 샤허 나취 다그링 다롄 싱타이 다오청 야딩 더링허 런화이 마오타이 루구호 루이양 린펀 치얼리 베이징 다싱 사오관 구이투우 상라오 싼칭산 선눙자린 시옌 무당산 신양 밍간 싼밍 싼시안 오대산 우한 씬팡그 이춘 밍양시안 자거다치 자싱 장자커우 쭌이 신저우 청더 츠저우 주화산 친황다오 베이다이허 카이리 황핑 퉁화 싼야푼 푸윈 한중 청구 허츠 비제 헝양 난유 홍위안 후타구우 폐쇄된 공항 광저우 바이윈 파얀 시안 시구안 옌타이 라이산 창춘 다팡선 쿤밍 우자바 허페이 뤄강 홍콩 치더 중화민국의 공항은 제외., 굵은 글씨로 표기된 것은 국제공항이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시안_셴양_국제공항&oldid=24030291" 분류: 산시성 (섬서성)의 공항시안시의 건축물셴양시의 건축물시안시의 교통셴양시의 교통1991년 개항한 공항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ebuano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Bahasa Indonesia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SvenskaไทยTürkçe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4일 (일) 16: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시안 셴양 국제공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안 셴양 국제공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시안 셴양 국제공항西安咸阳国际机场Xi'an Xianyang International Airport 시안 셴양 국제공항 전경 IATA: XIY – ICAO: ZLXY 개요 지역 시안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시안 거점 항공사 중국동방항공 조이 에어 해발고도 1,895 m / 6,217 ft 좌표 북위 34° 26′ 49″ 동경 108° 45′ 05″ / 북위 34.44694° 동경 108.75139° / 34.44694; 108.75139 웹사이트 http://www.xxia.com.cn/[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지도 XIY 활주로 방향 면적(m*m) ILS 표면 길이 폭 05R/23R 3,000 콘크리트 05L/23L 3,800 콘크리트 통계 (2011) 승객 21,163,130 시안 셴양 국제공항(중국어: 西安咸阳国际机场 Xī'ān Xiányáng Guójì Jīchǎng, IATA: XIY, ICAO: ZLXY)은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시안 시 서북부의 셴양 시에 있는 공항이다. 면적 5km2로 중국 서북 지방에서 가장 큰 공항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서부 대개발로 여객 및 화물 수송이 급속이 증가하고 있다. 2002년에 중국서북항공이 중국동방항공에 합병되기 전까지 중국서북항공의 허브 공항에 속했다. 현재 국내선과 국제선 노선을 통틀어 79개 노선이 운항 중이다. 시안공항은 여객터미널의 경우 2터미널과 3터미널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으며 터미널에 따라 항공사 체크인 카운터가 달리 있으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목차 1 역사 2 운항 노선 2.1 국제선 2.2 국내선 3 각주 4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84년 국무원과 중앙 군사 위원회에서 공군의 함양 비행장 김병지에 대형 민간 공항 건설을 결정한다. 1987년 8월 : 제1기 공사 착공. 1991년 9월 : 하루 제1기 공사 완공, 개항, 동시에 시안 서관 공항은 폐쇄된다. 2000년 8월 : 제2기 공사 착공. 공사 비용의 일부는 엔화 차관으로 조달됐다. 2003년 9월 : 16일 제2기 공사 완성. 2007년 9월 : 12일 3년 가까이 폐쇄한 구 터미널이 제1터미널로 이용 재개. 중국 남방 항공 계열사(중국남방항공, 샤먼 항공, 쓰촨 항공, 충칭 항공)의 카운터는 제1터미널에 이전. 기타 항공사가 운행하는 국내선 및 국제선은 모두 제2터미널에서의 수속이 된다. 계획 단계에서는 연간 이착륙 횟수 10만회 연간 여객량 1000만명, 화물 물동량 13만톤을 전망한다. 2004년 연간 이착륙 횟수 77,655회(중국 국내 제9위)연간 여객량 6,362,409명(중국 국내 제9위), 물동량 73,368.8톤(중국 국내 제15위).(출처 참조) 운항 노선[편집] 국제선[편집] 항공사 도착지 중국동방항공 서울(인천)[1], 도쿄(나리타)[2], 오사카(간사이)[3], 나고야(주부)[4], 오키나와, 홍콩, 타이페이(도원), 방콕(수완나품)[5], 델리[6], 시드니[7], 싱가포르[8], 프랑크푸르트[9], 파리(샤를 드 골)[10], 하이난 항공 타이페이(도원), 로마(피우미치노), 도쿄(나리타), 파리(샤를 드 골), 시애틀[11] 쓰촨 항공 오사카(간사이) 심천항공 방콕(수완나품) 샤먼항공 싱가포르[12] 스프링 항공 오사카(간사이) 오케이 항공 방콕(수완나품) 대한항공 서울(인천) 아시아나항공 서울(인천) 에어부산 부산(김해) 진에어 제주 중화항공 타이페이(도원) 유니 항공 타이페이(도원) 캐세이 드래곤 항공 홍콩 일본항공 도쿄(나리타) 오리엔트 타이 항공 푸껫 타이 에어아시아 방콕(돈므앙) 에어아시아 X 쿠알라룸푸르 비엣제트 항공 냐짱 몰디브 항공 말레[13] 국내선[편집] 항공사 도착지 중국국제항공 베이징(서우두), 청두, 구이린, 항저우, 상하이(푸둥), 우루무치, 인촨 중국동방항공 베이징(서우두), 청두, 충칭, 다용, 구이린, 하이커우, 항저우, 쿤밍, 란저우, 라싸, 난창, 난징, 칭다오, 싼야, 상하이(푸둥), 선전, 우루무치, 우한, 우시, 인촨, 위린 중국남방항공 창사, 청두, 다롄, 광저우, 충칭, 항저우, 하얼빈, 지난, 칭다오, 싼야, 상하이(푸둥), 선양, 선전, 타이위안, 우루무치, 우한, 시닝, 인촨, 우이 쓰촨 항공 청두 샤먼 항공 창사, 충칭, 푸저우, 항저우, 난창, 톈진, 우한, 우이산, 인촨 하이난 항공 베이징(서우두), 창사, 청두, 충칭, 푸저우, 광저우, 구이양, 하이커우, 항저우, 쿤밍, 란저우, 난징, 칭다오, 싼야, 상하이(푸둥), 선전, 우루무치, 우한, 샤먼, 인촨 베이징 캐피탈 항공 싼야 군요 항공 상하이(훙차오) 럭키 항공 쿤밍, 우루무치 산둥 항공 지난 상하이 항공 자위관, 란저우, 상하이(푸둥), 시닝 선전 항공 광저우, 란저우, 난징, 선전, 시닝, 인촨 스프링 항공 상하이(푸둥), 선양 조이 에어 베이징(서우두), 광저우, 상하이(푸둥) 쿤팡 항공 창춘, 둔황, 푸저우, 하이라얼, 하이페이, 후허하오터, 황염, 자위관, 란저우, 린이, 만저우리, 난징, 난닝, 친황다오, 스좌장, 타이위안, 톈진, 우한, 우저우, 샹판, 옌타이, 인촨, 위린 각주[편집] ↑ 칭다오 류팅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칭다오 류팅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경유 ↑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 경유 ↑ 항저우 샤오산 국제공항경유 ↑ 돈므앙 국제공항경유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시안 셴양 국제공항 (중국어/영어) 공식 홈페이지 (영어) 시안 셴양 국제공항 기상 정보 - NOAA / NWS (영어) XIY / ZLXY 사고 역사 - 에비에이션 세이프티 네트워크 vdeh 중화인민공화국의 공항북부 지방 베이징 난위안 베이징 수도 스자좡 정딩 타이위안 우수 톈진 빈하이 후허하오터 바이타 북동 지방 다롄 저우수이쯔 무단장 하이랑 선양 타오셴 옌지 차오양촨 지시 싱카이 창춘 룽자 하얼빈 타이핑 동부 지방 난징 루커우 난창 창베이 닝보 리서 상하이 푸둥 상하이 훙차오 샤먼 가오치 수난 수우팡 양저우 타이저우 옌청 옌타이 펑라이 우이산 원저우 영창 웨이하이 다슈이보 이우 지난 야오창 창저우 번뉴 취안저우 진장 칭다오 류팅 푸저우 창러 항저우 샤오산 허페이 신차오 남부 중앙 지방 광저우 바이윈 구이린 량장 난닝 우수 마카오 선전 바오안 싼야 펑황 우한 톈허 이창 산시야 장자제 허화 정저우 신정 주하이 진완 지에양 창순 창사 황화 포산 사디 하이커우 메이란 헝양 난웨 홍콩 츠례자오 후이저우 핑탄 남서 지방 구이양 룽둥바오 라싸 공가 리장 싼야 시솽반나타 가사 아리 구사 주자이 황룡 청두 솽류 충칭 장베이 쿤밍 창수이 북서 지방 란자우 자오좡 시닝 차오자바오 시안 셴양 우루무치 디워푸 인촨 히동 카슈가르 계획공항 간난 샤허 나취 다그링 다롄 싱타이 다오청 야딩 더링허 런화이 마오타이 루구호 루이양 린펀 치얼리 베이징 다싱 사오관 구이투우 상라오 싼칭산 선눙자린 시옌 무당산 신양 밍간 싼밍 싼시안 오대산 우한 씬팡그 이춘 밍양시안 자거다치 자싱 장자커우 쭌이 신저우 청더 츠저우 주화산 친황다오 베이다이허 카이리 황핑 퉁화 싼야푼 푸윈 한중 청구 허츠 비제 헝양 난유 홍위안 후타구우 폐쇄된 공항 광저우 바이윈 파얀 시안 시구안 옌타이 라이산 창춘 다팡선 쿤밍 우자바 허페이 뤄강 홍콩 치더 중화민국의 공항은 제외., 굵은 글씨로 표기된 것은 국제공항이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시안_셴양_국제공항&oldid=24030291" 분류: 산시성 (섬서성)의 공항시안시의 건축물셴양시의 건축물시안시의 교통셴양시의 교통1991년 개항한 공항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ebuano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Bahasa Indonesia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SvenskaไทยTürkçe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4일 (일) 16: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호구의 사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구의 사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호구의 사랑hogoo of love 장르 코미디, 로맨스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tvN 방송 기간 2015년 2월 9일 ~ 2015년 3월 31일 방송 시간 월요일, 화요일 밤 11시 방송 횟수 16부작 원작 유현숙의 웹툰 《호구의 사랑》 기획 tvN 감독 표민수 제작자 엠아이㈜, 이정희 연출 표민수, 박찬율 극본 윤난중 출연자 유이, 최우식, 임슬옹, 이수경 외 음악 2채널 스테레오 사운드 언어 한국어 자막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외부 링크 호구의 사랑 공식 홈페이지 《호구의 사랑》은 2015년 2월 9일부터 2015년 3월 31일까지 tvN에서 방송된 코믹 로맨스 청춘 드라마이다.[1] 목차 1 줄거리 2 등장 인물 2.1 주요 인물 2.2 도도희의 주변인물 2.3 강호구의 주변인물 2.4 변강철의 주변인물 2.5 그외 인물들 2.6 특별출연 3 시청률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줄거리[편집] 밀리고 당하는 대한민국 대표 호구 '강호구', 걸쭉한 입담의 국가대표 수영 여신 '도도희', 무패 신화의 에이스 잘난 놈 '변강철', 남자인 듯 여자 같은 밀당고수 '강호경'. 이들 4명의 호구남녀가 펼치는 갑을 로맨스 드라마. 등장 인물[편집] 주요 인물[편집] 최우식 : 강호구 역 유이 : 도도희 역 임슬옹 : 변강철 역 이수경 : 강호경 역 도도희의 주변인물[편집] 최덕문 : 소시민 역 강호구의 주변인물[편집] 정원중 : 강용무 역 박순천 : 김옥령 역 최재환 : 김태희 역 이시언 : 신청재 역 변강철의 주변인물[편집] 오영실 : 목경진 역 박지일 : 변강세 역 송지인 : 인공미 역 그외 인물들[편집] 김현준 : 노경우 역 하지영 : 리포터 역 한근섭 오희중 백민현 : 강호경에게 차이는 남자 역 이진권 : 만화책들고 도망가는 학생 역 강준 : 불량고교생 커플 남 역 원웅재 안수호 신영일 : 아나운서 역 노민상 : 감독 역 권병길 이윤상 장태민 김혜화 한여울 문제영 : 양이사 역 이주우 : 민지 역 이도연 : 한성실 역 홍승범 정강희 박지연 하다영 특별출연[편집] 이성민 : 오상식 역 장영남 : 아기엄마 역 도희 : 불량고교생 커플 여 역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년 회차 방송일자 AGB 닐슨 시청률[2] 시청률 순위 종 합 드라마 제1회 2월 9일 1.076% 20 8 제2회 2월 10일 1.262% 9 5 제3회 2월 16일 0.780% 46 12 제4회 2월 17일 1.270% 7 4 제5회 2월 23일 0.772% 41 14 제6회 2월 24일 1.326% 8 5 제7회 3월 2일 0.889% 21 7 제8회 3월 3일 1.179% 15 제9회 3월 9일 1.029% 12 4 제10회 3월 10일 1.336% 11 7 제11회 3월 16일 0.840% 20 10 제12회 3월 17일 1.175% 10 6 제13회 3월 23일 0.914% 24 13 제14회 3월 24일 1.418% 4 3 제15회 3월 30일 0.858% 23 11 제16회 3월 31일 1.405% 6 3 평균 시청률 1.096% - - 같이 보기[편집] 웹툰을 원작으로 삼은 드라마 목록 각주[편집] ↑ 유이·최우식·박정민·이수경, '호구의 사랑' 확정..웹툰열풍 잇나 ↑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와 포털사이트 다음 외부 링크[편집] 호구의 사랑 - 공식 웹사이트 tvN 월화드라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일리있는 사랑(2014년 12월 1일 ~ 2015년 2월 3일) 호구의 사랑(2015년 2월 9일 ~ 2015년 3월 31일) 식샤를 합시다 2(2015년 4월 6일 ~ 2015년 6월 2일) vdeh 월화드라마2010년대 전반2011년 《로맨스가 필요해》 《버디버디》 《꽃미남 라면가게》 2012년 《닥치고 꽃미남 밴드》 《결혼의 꼼수》 《아이 러브 이태리》 《응답하라 1997》 2013년 《이웃집 꽃미남》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연애조작단; 시라노》 《후아유》 《빠스껫 볼》 2014년 《스무살》 《로맨스가 필요해 3》 《마녀의 연애》 《고교처세왕》 《마이 시크릿 호텔》 《라이어 게임》 《일리있는 사랑》 2010년대 후반2015년 《호구의 사랑》 《식샤를 합시다 2》 《신분을 숨겨라》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4》 《풍선껌》 2016년 《치즈인더트랩》 《피리부는 사나이》 《또! 오해영》 《싸우자귀신아》 《혼술남녀》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5》 2017년 《내성적인 보스》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사랑해》 《써클: 이어진 두 세계》 《하백의 신부 2017》 《아르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6》 2018년 《크로스》 《시를 잊은 그대에게》 《멈추고 싶은 순간 : 어바웃 타임》 《식샤를 합시다 3》 《백일의 낭군님》 《계룡선녀전》 2019년 《왕이 된 남자》 《사이코메트리 그녀석》 《어비스》 《60일, 지정생존자》 《유령을 잡아라!》 아침 | 월화 | 수목 | 금토 | 토일 | 불금불토 vdeh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현재와 예정)스케치 코미디 및인포테인먼트 《코미디빅리그》 《프리한 19》 리얼리티 쇼 《강식당2》 《고교급식왕》 《놀라운 토요일》 《서울메이트3》 《슈퍼히어러》 《신서유기7》 《씬의 퀴즈》 《유 퀴즈 온 더 블럭》 《짠내투어》 《플레이어》 《현지에서 먹힐까? - 미국 편》 토크 쇼 《곽승준의 쿨까당》 《문제적 남자》 《쇼! 오디오자키》 《수미네 반찬》 《어쩌다 어른》 드라마 월화 《60일, 지정생존자》 수목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불금 《쌉니다 천리마마트》 토일 《아스달 연대기》 《드라마 스테이지》 다큐멘터리 《tvN 스페셜》 《리틀빅 히어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호구의_사랑&oldid=23678502" 분류: TvN 월화드라마2015년 드라마대한민국의 웹 만화의 텔레비전 드라마화 작품201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윤난중 시나리오 작품TvN의 심야 드라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Bahasa IndonesiaItalianoBahasa Melayu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0일 (일) 19: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성선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선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닌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성선임기본 정보본명 成膳任예명 ソニン출생 1983년 3월 10일(1983-03-10) (36세) 일본 고치현국적 대한민국직업 가수, 배우장르 J-Pop 웹사이트 선임 공식 웹사이트 성선임(成膳任, 일본어: ソニン 소닌[*],Sonim, 1983년 3월 10일~ )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가수이자 배우이다. 일본 고치현 출신으로, 재일 한국인 3세이며 국적은 대한민국, 본적은 경상남도 거창이다.[1] 2000년 일본에서 연예계에 데뷔한 이후 현재까지 가수,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버라이어티, 방송사회자등의 광범위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2006년부터는 한국 드라마 천국의 나무에 출연하고, 같은해 9월, 디지털싱글 후애(後愛)로 한국에 가수로 데뷔하였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뮤지컬 미스 사이공, 뮤지컬 렌트 등의 캐스팅으로 무대배우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부모님이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뜻으로 그녀에게 '선임'(膳任)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예명 '소닌'(ソニン)은 '선임'이란 이름의 가타카나 표기이며, 일본 연예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한국이름 그대로 데뷔했다. 사진찍기와 과자만들기가 취미이며, 환경문제나 성소수자, 3세계 빈곤아동 문제에 관심이 많아 관련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목차 1 출신학교 2 약력 2.1 EE JUMP 2.2 SONIM 3 음악 3.1 싱글 (EE JUMP) 3.2 싱글 (SONIM) 3.3 앨범 3.4 그외 음반 3.5 DVD 4 출연작품 4.1 연속극 드라마 4.2 단편 드라마 4.3 영화 4.4 연극/뮤지컬 4.5 TV(고정출연) 4.6 CF 5 수상,기록 6 각주 7 외부 링크 출신학교[편집] 시코쿠 조선초중급학교(四國朝鮮初中級學校) 고베 조선초중급학교(神戸朝鮮初中級学校) 고베 조선고급학교(神戸朝鮮高級学校) 도쿄 도립 신주쿠 야마부키 고등학교(東京都立新宿山吹高等学校) 편입 약력[편집] EE JUMP[편집] 1999년 업프론트사에 오디션을 받아 합격하지 못했지만,당시 심사위원이자 모닝구무스메의 매니저였던 와다 카오루(和田薫)가 그녀를 발탁, 와다 카오루가 업프론트에서 독립, 새로 만든 회사 Harmony Promotion에 소속되어 가수 트레이닝을 받았다. 2000년 10월18일 고토 마키(모닝구무스메 멤버)의 남동생 유우키와 함께 EE JUMP로 데뷔, 타이틀 곡은 「Love is Energy!」 2001년 3번째 싱글 「おっととっと夏だぜ!」는 오리콘 순위 5위를 기록, 다음 전개가 기대되었지만, 그 다음 싱글 발매 시기에 유우키가 무단실종 사건을 일으킨 뒤 근신하게 되고, EE JUMP의 활동도 잠시 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잠시 「EE JUMP feauturing Sonim」 으로 솔로 활동을 했다. 2002년 2월 유우키가 복귀한 뒤, EE JUMP로서 활동을 재개, 싱글을 발표하며 EE JUMP의 첫 번째 앨범이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4월, 유우키가 캬바쿠라(성인클럽)에 출입하는 것이 잡지에 발각되며, 이로 인해 유키는 탈퇴하며 EE JUMP의 첫 앨범은 발매 중지되고, 듀엣은 해체되었다. SONIM[편집] 2002년 8월 「카레라이스의 여자」로 솔로로 활동을 재개, 이듬해 2월, 제40회 골든애로우상 음악 신인상을 수상한다. 그 시기, TBS 「우타방」의 기획으로 솔로 1,2 싱글 출시와 맞물려「코우치~한국마라톤」「5만6천 개의 도미노 혼자 쌓기」등의 힘든 도전을 수행. 2003년 1월 TBS 드라마 「고교교사」를 통해 배우로서도 활동을 개시, 연기자로도 주목을 받기 시작. 6월6일~7월13일 선임 퍼스트 콘서트 투어「華」(전국 8개소 공연),같은 시기, 드라마 「元カレ」출연 2004년 1월 6,10,18일 선임 콘서트 투어 2004「ALIVE」(토쿄,아이치,오사카). 같은 시기, 메이저 음반사 토이즈팩토리와의 계약이 끝난 선임은 인디즈 레이블로 CD 발매를 위해 전국 100개소 게릴라 라이브를 같이 감행,「우타방」에서 해당 투어를 방송. 2월 인디즈레이블 첫 싱글,「ほんとはね。」발표. 같은 소속사 요리코의 커버곡. 이 싱글을 기점으로 EEJUMP 시절부터 함께해왔던 프로듀서 층쿠와도 결별을 하게 됨. 6~7월 선임 콘서트 투어 2004「うた」,같은시기, 드라마 TBS「동경만경」에서 재일교포 「이기향(노리카)」역으로 출연 7월「한일음악페스티벌」에서 한국에서 첫 공연. 데뷔할 때부터 한국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꿈을 처음으로 실현. 9월 솔로 6번째 싱글,「직소퍼즐」에서 한국어로 포지션의 I LOVE YOU(원곡:오자키유타카)를 커버. 선임의 첫 번째 정식 한국어 곡 11월「8인의 여자들」로 연극 무대에 첫 데뷔. 2005년 1월 솔로7번째 싱글「あすなろ銀河」 발표, 5월 라이브에서 자신의 첫 작사작곡 노래를 발표. 7월 Tv Tokyo 드라마 「가장 어두운 것은 동 트기 전」에 주연으로 출연. 드라마 엔딩에 자신의 곡「小さな夜旅」사용 일본 웹사이트 JOCOSO 에 미니홈피를 개설하여 매일 사진과 함께 일기를 작성해오고 있음.(현재는 ameblo 블로그로 이전.) 당시, 소식을 듣고 많은 한국팬들이 방문하자 선임은 서툰 한국어로 한국팬들에게 인사글을 작성하기도 했다 영어교육방송 「GoGoEigo」에 레귤러 출연. 학생시절 전일본 학생 영어 스피치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을 살림. 드라마 「여자의 일생」,「電車男 Special」출연 예능방송의 기획으로 일본 예능인 치어댄스부 주장으로 발탁. 2006년 1월 한국 드라마 SBS「천국의 나무」에 「미카」역으로 박신혜, 이완과 함께 출연, 일본 올로케로 나가노, 도쿄 등지에서 촬영했으며 드라마 공식 페이지의 메이킹필름에서 한국어로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함. 크랭크 업 파티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함. 3월 DVD영상집 「digi+KISHIN 선임」발매. 한복을 입고 동경시내를 달리는 장면이 화제가 됨. 6월 2003년 일본에서 발매되었던 만화책「소닌이야기」의 번역판이 한국에서 정식 출간. 9월 영화「백댄서즈!」가 공개, 4명의 주연 중 한 명으로 미혼모 댄서역할을 하며 연기력에서 호평. 9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가수 데뷔. 타이틀 곡은 「후애(後愛)」-「카레라이스의 여자」 한국어 버전, 디지털 싱글로 발매. m.net mcountdown 무대로 라이브를 불렀고, 짧은 기간 한국에 방문해 잡지와 케이블방송등의 매체로 홍보활동을 함. 예능방송의 기획으로 일본 예능인 치어댄스부 주장 재임. 칸사이권 치어리더 대회 3위 입상. NHK 복지방송 「하트를 잇자」의 사회자로 출연 시작. 관련 방송에서 한글과 한문이 섞인 "人類다같해(다같아)"라는 문장을 붓글씨로 써서 보여줌. 2007년 1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위니 토드」뮤지컬 첫 출연, 죠안나 역 5월 연극 「피의혼례」주연 , 「스위니 토드」와 「피의혼례」를 통해 매스컴에 무대 연기자로서 확실한 인정을 받기 시작. 9월 한국에서 HowL과의 듀엣곡 「사랑이야기」디지털 싱글 발표, 「사랑이야기」는 Glen Medeilos & Elsa의「Friends you give me a reason」을 커버한 곡. 11월 오사와 아카네(大沢あかね)와 스페셜유닛 「Tomboy」결성, 한국그룹 쥬얼리의 「SuperStar」를 커버한 싱글 발표 2008년 1월~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Dirty Rotten Scoundrels에 크리스틴 역으로 출연 7월~8월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 「미스 사이공」에 주인공 킴 역으로 출연. 2009년 4월 Miss Sigon 종연 후, 기존 소속사 Harmony Promotion에서 NASA ENTERTAINMENT 로 이적. 10월~11월 연극「헨리-6세」에 잔다르크 역으로 출연. 3부작. 2010년 1월 영화「골든슬럼버」출연. 3월 5년만의 LIVE 콘서트「SONIM Cafe Vol.1」 4월 Japanese musical「戯伝写楽」출연. 6월 연극「away in the live」출연. 같은시기, 자신의 고향 코치현의 요사코이 마츠리에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한 팀으로 참가. 10월~12월 뮤지컬「RENT」출연 2011년 9월 24일 BS후지 드라마「P&G 판텐드라마스페셜2011・포르티시모 다시 만나는 날을 위하여」에서 오오니시 사츠키역으로 출연 5월~7월 연극「스위니 토드」출연 2012년 5월11일~13일「브로드 웨이 뮤지컬 라이브2012」출연 5월22일~7월10일 NHK 드라마10「첫사랑」에서 아오야마 치카역으로 출연중 가을 영화 「綱引いちゃった!」출연예정 10월~12월 뮤지컬「RENT」출연예정 음악[편집] 싱글 (EE JUMP)[편집] [LOVE IS ENERGY] (2000/10/18) - 오리콘 18위 2000년, EE JUMP라는 그룹의 일원으로 성선임은 첫 가수 데뷔를 하게 된다. [LOVE IS ENERGY]는 EE JUMP의 데뷔곡.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재일코리안임을 일본매스컴에 숨기지 않고 데뷔했다는 데 의의가 있는 싱글. 데뷔 초기에는 같은 그룹의 멤버 "고토유우키"가 "모닝구무스메"의 인기 아이돌 "고토마키"의 동생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Hello!新しい私 / Hello!새로운 나] (2001/1/24) - 오리콘 17위 EE JUMP는 고토유우키로 화제가 되긴 했으나, CD자켓에 사진 비율로 그녀가 EE JUMP의 리더임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싱글. 실질적으로 노래의 80%는 선임이 부르고 있으며, 유우키는 랩파트를 맡고 있었다. [おっととっと夏だぜ! / 아차차차 여름이다!] (2001/5/16) - 오리콘 5위 그녀가 EE JUMP로 낸 싱글 중 최고의 힛트곡, 발라드, 랩, 댄스, 엔카, 오페라의 장르를 불문하는 특이한 곡에, 코믹한 안무, 그리고 아크로바틱한 선임의 백점프(일본의 여자 가수 중 최초) 등이 화제가 되어 상위권에 랭크한다. JPOP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Southern all stars의 리더, 쿠와타 케이스케가 자신의 CF에서 응원해 준 곡이기도 하다. [イキナリズム / 이키나리즘] (2001/8/29) - 오리콘 14위 전작의 분위기와 인기를 이어서, 랩만 하던 유우키도 노래를 같이 하면서 특이한 안무와 분위기로 승부하려던 곡이었다. 유우키가 이벤트 전 무단 이탈로 유우키는 휴업을 하게 되고, 선임은 홀로 활동하게 되며 곡은 전작의 인기를 이어가지 못한 비운의 곡. 이키나리즘의 PV에는 선임이 한국 축구 대표 유니폼을 입고 출연하는 장면이 나온다. [WINTER~寒い季節の物語~ / WINTER~추운 계절의 이야기~](2001/11/28) - 오리콘 10위 EE JUMP유우키의 휴업 중 EE JUMP Featuring Sonim이라는 이름으로 낸 첫 솔로곡. PV는 -20도의 냉동고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青春のSUNRISE / 청춘의 SUNRISE] (2001/3/6) - 오리콘 12위 EE JUMP의 마지막 싱글, 유우키가 복귀하고 나서 의욕적으로 다시 낸 싱글이었지만, 싱글 발표 직후 얼마 후 유우키가 캬바쿠라를 출입하는 것이 파파라치 잡지, 프라이데이에 실려서 유우키는 스스로 탈퇴하고 EE JUMP는 공중분해 된다. 이 시기, EE JUMP의 첫 앨범,[EE JUMP COLLECTION 1]을 출시 준비 중이었으나 그것도 출시하지 못하게 되고 그 이전의 EE JUMP 싱글들도 모두 폐반이 되고 만다. 싱글 (SONIM)[편집] [カレーライスの女 / 카레라이스의 여자](2002/8/21) - 오리콘 8위 EE JUMP 해산 후의 첫 싱글, 이 싱글을 발표하기 전, 동료 멤버 유우키의 오명으로 TV 출연이 희미해지고, 음반을 준비하면서도 낼 수 있을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의 기획사는 두 가지 초강수를 두게 된다. 첫 번째는 가수를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여 달라는 우타방의 기획 아래 자신의 고향 코우치에서 할아버지의 고향 한국 거창까지 570 킬로미터를 달리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시 화제가 되었던 알몸에 에이프런 쟈켓과 프로모션 비디오. 보통의 여자 가수라면 손을 내저었을 두 가지 상황을 그녀는 다시 노래하기 위해 모두 하게 된다. c/w에는 미발매 앨범 [EE JUMP COLLECTION 1]에 수록될 곡이었던 선임의 솔로 악곡 “愛はもっとそうじゃなくて / 사랑은 좀 더 그렇지 않아서”가 수록되고 있다. [津輕海峽の女 / 츠가루 해협의 여자] (2002/11/20) - 오리콘 9위 c/w에는 미발매 앨범 「EE JUMP COLLECTION 1」에 수록될 곡이었던 「MISSING YOU」가 선임 Version으로 수록되고 있다. MISSING YOU의 랩은 츤쿠♂가, 코러스는 요리코(당시 같은 사무소였음)가 참가하고 있다. [東京ミッドナイトロンリネス / 동경 미드나잇 론리네스] (2003/4/16) - 오리콘 7위 마이크 스탠드 퍼포먼스로 화제가 된 곡. 프로모션 비디오로 타케후지의 유명한 CM(레오타드 모습의 여성 댄서가 춤춘다)을 패러디. c.w에는 [夏が來ない / 여름이 오지 않아] 수록 [合コン後のファミレスにて / 미팅후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2003/10/8) - 오리콘 9위 토이즈 팩토리에서의 마지막 곡이자 포크송에 처음 도전한 곡, 아이돌에서 아티스트로 변화하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c/w에는 미발매 앨범 「EE JUMP COLLECTION 1」에 수록될 곡이었던 [ADA BOY & DA GIRL]이 선임 Version으로 수록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미발매 앨범 「EE JUMP COLLECTION 1」수록곡은 유우키의 솔로 악곡 [下町育ちの僕だから / 변두리 태생의 나이니까] 이 밖에는 모두 발표한 것이 된다. [ほんとはね。/ 사실은요] (2004/2/11) - 오리콘 12위 토이즈 팩토리에서 EE JUMP의 미발표곡 모두를 싱글로 낸 이후, 계약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임은 이 곡을 인디즈로 내놓게 된다. 우타방 기획의 일본 전국 100개소 라이브를 통해 곡을 홍보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ほんとはね。의 DVD를 수록. [ジグソ-パズル(직소퍼즐) / I LOVE YOU] (2004/9/15) - 오리콘 9위 싱글로서는 최초로 자켓에 c/w 곡의 제목을 동시에 표기해 발표한 음반 (I LOVE YOU 한국어 버전은 인디즈 데뷔 전부터 라이브에서 선을 보인 것이 팬들의 많은 요청에 의해 음반화 되었다고 한다.) 같은 사무소의 그룹, THETA가 만들고 선임 자신의 연주로는 처음으로 음반 기타 믹싱에 참여한 [직소퍼즐]과 오자키유타카가 만들고 포지션이 그것을 한국어로 리메이크한 [I LOVE YOU]를 Two top으로 발표. 특히 초저예산으로 장소의 변화 없이 기타 하나만 들고 찍은 I LOVE YOU의 PV는 그녀의 조국, 한국에서 커다란 가치로 받아들여졌다. 이 음반으로 아티스트적으로도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팬들은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글로벌한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명반 중의 하나로 평가한다. [あすなろ銀河 / 아스나로 은하] (2005/1/13) - 오리콘 18위 스키마스잇치가 작사 작곡한 슬로우 발라드 곡, 아스나로 은하의 "아스나로"의 뜻은 "明日にはなろうだろー아스니와 나로우다로"의 줄임말로 "내일에는 이루어진다"라는 의미. 애니메이션 "피치걸"의 엔딩 테마로 쓰였다. 이 곡의 믹싱에서 그녀는 기타와 드럼을 직접 연주했다. 아스나로 은하의 프로모션 비디오는 총 러닝타임이 9분에 달하는 한국의 영화식 뮤비스타일을 채용. c/w 곡은 古内東子의 [誰より好きなのに / 누구보다 좋아하는데]를 커버. [小さな夜旅 / 작은 밤의 여행] (2005/9/14) 선임이 주역 중 하나로 출연한 Tv Tokyo의 심야 드라마, [가장 어두운 것은 새벽전]의 엔딩 테마로 쓰인 곡, 다운로드 한정 판매 형식의 디지털 싱글로 발매되었다. 작사 작곡은 스키마스잇치. [後愛 / 후애] (2006/9/25) 성선임의 한국 가수 데뷔 싱글, 일본에서 발표한 '카레라이스의 여자'를 한국어로 개사한 곡, CJmusic에서 다운로드 판매 형식의 디지털 싱글로 발매되었다. 이전에 한국 매스컴에서는 카타카나 표기 ソニン을 그대로 읽은 '소닌'으로 불리고 있었으나 데뷔 후 인터뷰에서 그녀는 기자의 '소닌씨' 라는 호칭에 "선임, 선임이에요." 라고 하며 자신의 정확한 이름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단 하나의 곡과, M.net의 Mcountdown의 단 한 번의 데뷔 무대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곡의 "날 잊지마"라는 가사는 언젠가 그녀가 또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는 듯한 느낌과 오버랩이 되고 있었다. 이 곡으로 그녀는 Jpop아티스트만이 아닌 Kpop아티스트의 범위까지 들어서게 된다. 앨범[편집] [華/하나] (2003/5/14) 츤쿠♂프로듀스에 의한 첫 앨범. EE JUMP 시대의 노래도 두 곡 포함. "팔리지 않으면 곤란합니다"라고 하는 충격적인 TV-CM도 화제가 되었다. 타이틀 「華」는 일본어로 "華"의 훈독이 '하나'이고 한국어로 "1"을 의미하는 "하나"와 음이 같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미팅 후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전까지의 히트곡을 모은 Best격의 앨범. 앨범만의 수록곡으로는 好きな人だから, 國領, 奮起せよ!, 平凡的女子な条件, SEE YOU ! 그외 음반[편집] [Tribute to Avril Lavigne](2006/10/25) 일본의 가수들이 모여 만든 에이브릴 라빈의 트리뷰트 앨범 선임은「Anything but ordinary」를 노래했다. [HowL / 우리가 사랑했다면] (2007/9/19) HowL과 듀엣곡「사랑이야기」가 커플링곡으로 수록 녹음은 일본에서 진행되었다. 디지털 싱글로 발매. [tomboy / Superstar] (2007/11/14) 2007년 가을 오오사와 아카네와 스페셜유닛 tomboy를 결성, 한국의 쥬얼리가 부른 Superstar를 일본에서 리메이크하였다. 오오사와 아카네와 선임은 연예인 치어리더부에서 만난 뒤, 나중에 아카네로부터 "선임이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이기에, 같이 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들어, tomboy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tomboy라고 이름 짓게 된 것은 두 사람 다 성격이 "말괄량이" 같은 면이 있어 그것을 영어로 tomboy라고 짓게 되었다고. 노래에서 주목되는 것은 쥬얼리와는 다른 섹시한 분위기의 노래와 안무, 그리고 중간에 한국어로 선임이 나레이션을 하는 부분이 있다. DVD[편집] [ソニンコレクション / Sonim Collection] (2004/3/17) 토이즈팩토리 시절(EE JUMP 포함)의 프로모션 비디오 모음집 [digi+Kishin ソニン / digi+Kishin Sonim] (2006/3/1) 유명 사진 작가 "시노야마 키신"이 담아낸 선임의 2006년 영상화보집 "오로지 달린다"라는 것을 주제로 DVD 전체에 흐르는 내용은 은유적으로 그녀가 지내온 날들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동경시내를 달리는 장면이 유명. DVD에는 CD 등에서는 발표하지 않았던 선임의 곡이 두곡 수록되어 있다. 수록곡 [FRIENDS(한국어)], [あなたがくれた日び / 당신이 준 날들] 출연작품[편집] *표시는 DVD 발매 완료 연속극 드라마[편집] 고교교사*(高校敎師)(2003년, TBS) 옛 남자친구*(2003년,TBS) 동경만경*(2004년, 후지TV) 가장 어두운 것은 동트기 전*(2005년, 테레비 도쿄) 천국의 나무*(2006년, sbs) 사랑은 친가에서 싹틀 수 없어* (2006년, NETCINEMA 웹 드라마) Judge ~섬 재판관의 분투기~ (2007년, NHK) 4화 (게스트 출연) 고대소녀 도그짱 (2009년, MBS) 첫사랑 (2012년, NHK) 단편 드라마[편집] 천국에의 응원가 치어즈~치어리딩에 건 청춘~]*(2004년, 니혼테레비) 별에 소원을(2004년, NHK) 전차남 ~ 또 하나의 최종회 스페셜~* (2005년, 후지테레비) 3일 연속드라마・마지막편 악녀의 일생~연기와 결혼한 악녀 杉村春子의 생애~(2005년, 후지테레비) 전차남 디럭스 ~최후의 성전~ (2006년, 후지테레비) P&G 판텐드라마스페셜2011・포르티시모 다시 만나는 날을 위하여(2006년, BS후지) 영화 [편집] 아아!단독주택 프로레슬링*(2004년, 유바리국제 환타스틱 영화제 초대작품) 공중정원*(2005년 10월, 키네마순보 선정 올해의 영화 베스트10) 백댄서즈!*(2006년 9월, 개봉 첫주 일본 박스오피스 7위) 염신전대고온쟈(2008년 8월) 뱀에게 피어싱(2008년 9월) 골든슬럼버 (2010년 1월) 綱引いちゃった!(2012년 가을공개) 연극/뮤지컬[편집] 8인의 여자들(2004년) 스위니 토드(2007년) 피의 혼례(2007년) 나쁜녀석들(2008년) 미스사이공(2008년~2009년) 헨리 6세 (2009년) 戯伝写楽 (2010년) away in the live (2010년) RENT (2010년) 스위니 토드(2011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이브2012(2012년) RENT (2012년 겨울예정) TV(고정출연)[편집] 笑う犬の冒険 -SILLY GO LUCKY!-(후지테레비) (2000년~2001년) GO!GO!EIGO!(BS후지) (2005년) 타케야마선생(테레비토쿄) (2006년~2007년) 하트를 잇자(NHK 교육 텔레비전) 사회자 (2006년~) 드림프레스사(TBS) (2006년~) こうたろ(요미우리 TV 방송) (2007년) Shibuya Deep A(NHK 위성 제2텔레비전) (2007년~2008년 3월) CF[편집] 코나미의 플레이스테이션2용 게임 '캐슬베니아' 일본롯데 서플리먼트 껌 'TE-A-TE' ECC 쥬니어 / 외국어 학원 에리에르 UFU 티슈 수상,기록[편집] 제13회 전국 고교생 영어 스피치 콘테스트 우승 제40회 골든애로우상 음악신인상 제36회 일본 TV 드라마 아카데미 신인배우상 1인도미노 일본신기록달성 칸사이권 단체치어리더 대회 3위 입상 각주[편집] ↑ “고국서 본격 활동 나선 재일교포 3세 가수 소닌”. 2014년 8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8월 2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일본어) SONIM 공식 웹사이트 (일본어) Ameblo 선임 블로그(2007.11.1 JOCOSO홈피에서 이전) (일본어) 선임 공식 트위터 한국 팬 카페 - 네이버 '선임이야기' 전거 통제 뮤직브레인즈: 6ca634bb-0f35-4dd8-b34b-e6f0500184c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성선임&oldid=23029289" 분류: 일본의 여자 가수일본의 여자 배우재일 한국인고치현 출신조선학교 출신198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창녕 성씨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Italiano日本語Tagalog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5일 (목) 23:5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쿠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쿠푸 지위 제2대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 재위 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 전임자 스네프루 후임자 제데프레 신상정보 배우자 헤누첸, 메리타테스 쿠푸(Khufu, 재위: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는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건설자이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유물을 남긴 쿠푸 자신의 유물로는 7.6cm의 작은 상 하나만 전해져 내려온다. 이름의 뜻은 "크눔으로부터 보호받다"이며, 그리스어로는 Χέωψ, 케오프스라고도 한다. 마네토의 연대기에는 수피스 1세로 되어있다. 목차 1 치세 2 대피라미드 2.1 대피라미드에 얽힌 전설 2.2 대피라미드 근처의 유적들 3 기타 유적 4 가족관계 5 참고문헌 6 외부 링크 치세[편집] 쿠푸는 선왕인 스네프루와 마찬가지로 시나이 반도 원정에 나섰다. 와디 마가라의 유적에는 쿠푸의 군대가 주둔하였다고 한다. 또한 남쪽 아스완에 있는 엘레판티네 섬에도 쿠푸 왕의 흔적을 보여주는 비석이 남아 있다. 대피라미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쿠푸의 대피라미드입니다. 기자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대피라미드가 서 있다. 이것은 바로 쿠푸의 작품이라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높이가 137.5m에 달해(건설 당시에는 146.6m) 지금까지 4천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건조물이었다. 쿠푸의 피라미드는 기자에 처음으로 위치한 피라미드이다. 그 이전의 파라오들은 다슈르와 사카라 등지에 피라미드를 조성했다. 쿠푸 이후 기자에 거대한 피라미드 단지가 조성된다. 대피라미드 대피라미드의 공사를 담당한 것은 건축가이자 쿠푸의 사촌인 헤몬이었다. 헤몬의 무덤도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건설기간은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현대 기술로도 이 대피라미드의 건축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경사로를 이용해 지었다는 가설이 있으나 현실성이 떨어지며, 헤로도토스가 설명한 것처럼 특별한 장치를 이용하여 네 면에서 동시에 블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 그나마 제일 신빙성이 있다. 쿠푸 파라오의 석관은 거대한 회랑을 따라 올라가면 피라미드의 핵심에 있는 방에 있다. 이 석관은 거대한 한 개의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이다. 이미 선왕 스네프루의 시절에 한꺼번에 세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 정도로 갖춰진 왕국의 강력한 경제력, 이집트 제 3왕조부터 이어진 평화, 이집트 북부와 남부에 걸친 쿠푸 왕의 활동, 수십만 이집트인들의 노력이 이러한 거대한 유적을 완성해 내었다. 이러한 이유로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성립된 시기를 이집트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라고도 한다. 대피라미드에 얽힌 전설[편집] 발굴 된 나무 배 대피라미드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기에 이에 관한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대피라미드의 공사가 계속되자 쿠푸는 더 많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딸 한명(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음)을 성매매를 하도록 하여 그 돈을 피라미드 공사비에 보탰다고 한다. 이때 이 공주는 화대 이외에 손님들에게 돌 한토막씩을 더 낼 것을 요구했고, 이것을 모아 자기 자신의 피라미드도 만들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 근처의 유적들[편집] 피라미드 근처에는 여러가지 추가적인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동쪽 통로 근처에는 쿠푸의 어머니인 헤테프-헤레스 1세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외에 왕비들의 피라미드 세 기가 발견되었다. 1954년에는 남쪽 면 근처에서 수천년 세월을 견딘 나무로 된 온전한 배 한척이 발견되었다. 기타 유적[편집] 대피라미드의 남쪽 면에서 발견된 배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가 43m에 달했다. 30.8m의 구멍 안에 들어있던 것이 발굴되었는데, 옆에서도 유사한 배가 한 척 더(두 번째 배는 온전하지는 못하다) 발견되었다. 수천년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배는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오랜 복원작업 끝에 1982년부터는 발견장소 바로 위에 세운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수천년 세월동안 나무로 만들어진 배가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이후에는 어떻게 보관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까지 명확한 해답은 없다. 가족관계[편집] 쿠푸의 이름이 찍혀진 장식품 부모 : 스네프루, 헤테프-헤레스 1세 생모를 알 수 없는 왕자들 왕자 제데프레 (제3대 파라오) 왕자 바네프레 공주 카메레르네브티 1세 왕비 헤누첸 왕자 카프레 (제4대 파라오) 왕자 쿠푸카에프 왕비 메리타테스 왕자 카와브 왕자 제데프호르 공주 메레산크 2세 공주 헤테프-헤레스 2세 해가 질 때의 피라미드 쿠푸의 또 다른 석상 쿠푸의 상형문자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쿠푸 참고문헌[편집] 피터 클레이턴(Peter Clayton) 저, 정영목 역, 《파라오의 역사》, 까치, 2004 외부 링크[편집]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쿠푸 전임스네프루 제2대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 후임제데프레 vdeh역대 고대 이집트의 군주이집트 원왕조 군주 티우 트헤쉬 흐세큐 와즈너 전갈왕 1세 이리-호르 세켐-카 전갈왕 2세 초기왕조 시대 군주 나르메르(메네스) 호르-아하 제르 카세켐위 고왕국 시대 군주 조세르 스네프루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사후레 페피 2세 중왕국 시대 군주 멘투호테프 2세 아메넴하트 1세 세누스레트 1세 세누스레트 3세 아메넴하트 3세 소벡네페루 신왕국 시대 군주 아흐모세 1세 하트솁수트 투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3세 아크나톤 스멘크카레 네페르티티 투탕카멘 아이 호렘헤브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 람세스 3세 기타 군주 카모세 셰숑크 1세 샤바카 프삼메티코스 1세 아흐모세 2세 넥타네보 1세 클레오파트라 7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왕비 테티세리 아르모세 네페르타리 아흐모세 여왕 티예 네페르티티 안케세나멘 네페르타리 궁의 사무관 임호텝 웨니 에바나의 아흐모세 이네니 세네무트 레크미레 유야 마야 유니 마네토 포티누스 전거 통제 WorldCat VIAF: 79976596 LCCN: n80020531 ISNI: 0000 0004 4888 1660 GND: 118746227 NKC: ola200210066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쿠푸&oldid=24375677" 분류: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기원전 26세기 파라오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مصرى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ಕನ್ನಡКыргызчаLatina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Тоҷикӣ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Yorùbá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4일 (화) 11: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비명을 찾아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명을 찾아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명을 찾아서. 경성, 쇼우와 62년 상권 표지작가 복거일원제 碑銘을 찾아서. 京城, 쇼우와 62년국가 대한민국언어 한국어장르 대체 역사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세이코 서점 출판일 1987년 3월 1일 1987년 10월미디어 유형 도서 《비명을 찾아서 : 경성, 쇼우와 62년(碑銘을 찾아서 : 京城, 쇼우와 62년)》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복거일이 1987년에 발표한 장편 대체 역사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일본 제국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저격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해,[1] 대체 역사 속 1980년대의 일본 제국을 배경으로 한다. 각 장의 앞에는 여러 매채들을 발췌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문단이 있는데, 주제를 강화해 주는 격언들과 세계관을 설명해 주는 가상의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본문과 가상의 글들을 통해 배경을 천천히 서술해 나간다. 또한 이 소설에는 국한문 병용과 작가 고유의 외국어 표기가 적용되어 있다. 목차 1 줄거리 2 등장 인물 2.1 언급된 인물 2.2 언급된 실존 인물 3 배경 3.1 대체 역사 3.2 조선 3.3 일본 3.4 세계 4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의 설정 논란 5 각주 6 같이 보기 줄거리[편집]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는 노구찌(野口) 그룹 산하 한도우(半島) 경금속 주식회사 과장이자 시집도 낸 적이 있는 무명 시인이다. 히데요는 부장 승진에서 내지인에게 밀려 탈락된 이후, 조선인이 내지인에 비해 차별받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게 된다. 히데요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과 그로 인한 조선의 독립을 가정한 대체 역사 소설 <도우꾜우, 쇼우와 61년의 겨울>을 접하며 일본에 대한 반감을 떠올리고, 일본의 금서 <독사수필>을 읽고 공식 역사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마침 세이슈우의 큰아버지 댁을 방문하다 우연히 큰아버지로부터 죽산 박씨 족보를 보게 되고, 조선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듣게 되면서 조선인은 스사노오 노미꼬도의 자손이며 수천 년 전 일본의 징꼬우 황후가 조선을 정복했다는 공식 역사는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히데요는 집으로 오던 길에 세이슈우의 고서점에서 <조선 고시가선(朝鮮 古詩歌選)>을 구입하게 되고, 그 책에 실린 사이찌엥과 조우지조우의 시들을 읽고 조선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더 알아보기 시작한다. 조우다이(城大)의 도서관에서 <한불(韓佛) 사전>을 복사하고 197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조선의 역사를 찾게 된다. 모또야마에 살던 장모가 사망하여 장례를 위해 안삥의 샤꾸오우지를 찾은 히데요는 절의 주지 소우고우(소공, 小空) 스님을 만나고 조선어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던 소공 스님은 히데요에게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조선어로 낭독한다. 소공 스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반하지만, 히데요는 한용운의 의발을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회사에서 내지로 출장을 가게 된 히데요는 교토제국대학 도서관에서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의 조선의 옛 역사책들을 찾아내 복사하고 조선으로 돌아오나 그사이 일본에서 일어난 정변 이후 강화된 보안검색 때문에 가네우라 공항에서 입국 도중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된다. 고문과 심문을 번갈아 받던 그는 '전선사상보국연맹'의 하꾸야마에게 교육을 받고 연맹에 참가하게 된다. 그에게서 변절한 가야마 미쯔로우 선생의 이야기를 들은 히데요는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히데요는 석방 이후 조선 독립의 필연적 이유를 깨닫고, 언젠가 올 독립의 그 날을 위해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자신의 석방을 위해 아오끼 소좌에게 몸을 허락한 것을 알게 된다. 히데요는 아내의 생일에 그가 집으로 초대한 아오끼가 술에 취해 히데요의 중학생 딸 게이꼬를 성희롱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를 낚싯줄로 교살한다. 결국 히데요는 집을 나와 명맥만 유지되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떠난다. 등장 인물[편집]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박영세, 朴英世). 1987년 기준 39세. 게이조우 데이고꾸 대학 상학과 출신으로 만주에서 소좌로 전역한 후 노구찌 그룹 산하 한도우 경금속 주식회사의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고향은 세이슈우이다. 부인 세쯔꼬와는 선을 통해 결혼했으며, 이 때문에 소설 내에서는 세쯔꼬보다 부하직원 도끼에에게 마음을 둔다. 기노시다 세쯔꼬(木下節子). 히데요의 부인으로, 모또야마의 명가 출신이다. 결혼 전 성은 리노이에(李家)이다. 기노시다 게이꼬(木下惠子). 히데요와 세쯔꼬의 외동딸로, 중학교 3학년이다. 기노시다 헤이따로우(木下平太郞/박원신, 朴元信). 히데요의 큰아버지로, 세이슈우에 거주한다. 세이슈우로 내려온 히데요에게 조선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 시마즈 도끼에(島津時技). 한도우 경금속 직원. 히데요의 직속 부하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직계 후손인 화족이다. 히데요를 짝사랑하나 에릭 앤더슨과 결혼한다. 에릭 앤더슨. 스웨덴계 미국인. 한도우 경금속과의 합작 투자 대상인 미국 기업 '유사라무'의 직원. 도끼에와의 결혼 이후 유럽으로 부임한다. 야마시다 소우따로우(山下曾太郞). 한도우 경금속 과장으로, 히데요의 경쟁자이다. 오사카 대학 출신으로 입사도 늦었으나, 내지인이라는 이점과 군부 요직의 외삼촌 덕분에 히데요 대신 부장으로 진급한다. 아오끼 류우사부로우(靑木龍三郞) 소좌. 보안대 소속의 헌병 소좌. 세쯔꼬의 후배인 아오끼 리에(靑木李技)의 남편으로, 세쯔꼬를 농락하고 게이꼬를 성희롱하다 히데요에게 살해당한다. 소우고우(소공, 小共) 스님. 샤꾸오우지의 주지. 한용운의 의발의 두 번째 계승자로, 한시에 능하며 히데요에게 <님의 침묵>을 조선어로 낭독해 주고 한용운의 의발을 전수한다. 하꾸야마 마사오미(白山正臣). 조선 평론가 협회 간사이자 전선사상보국연맹 회원이자, 히데요의 '갱생교육' 강사이다. 본래 촉망받던 평론가이나, 일본에서 열린 학회에서 가야마 미쯔로우의 소설 원본을 발견하여 처음 조선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독립운동을 시도하고, 고문을 받고 전향한다. 언급된 인물[편집] 사노 히사이찌(佐藤久一). 도쿄제국대학 교수이자 <독사수필>의 저자. 1987년 쿠데타 이후 체포된다. 도우고우 노부오(東郷展男). 해군 출신의 조선 총독. 아베 하루노리(阿部治憲). 소설의 시작 시점의 일본 수상.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전쟁 실패와 민주화 운동 진압 실패의 책임을 물어 사퇴한다. 사또우 게이스께(佐藤圭介). 아베 총리 후임으로 들어선 공군 예비역 대장 출신 수상. 공군이 조각한 내각이나 결국 육군의 쿠데타에 무너진다. 이후 연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라끼 마사야스(荒木昌保) 중장. 사또우 내각을 뒤엎은 쿠데타의 주역인 육군 중장으로 쿠데타 당시 보직은 수도군단장. 처음에는 히또쯔바시 대장을 내세우나 자신이 전면에 나서 수상이 된다. 히또쯔바시 히로모또(一橋廣元) 대장. 육군 참모차장으로서 아라끼의 쿠데타를 묵인하는 대가로 호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나 아라끼에 의해 제거된다. 언급된 실존 인물[편집] 이또우 히로부미. 안중근의 암살 미수 이후 16년을 더 생존하며, 자서전으로 <북정(北政)>을 저술한다. 암살 미수 이후 대륙 진출 이전에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초대 조선 총독으로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을 추진한다. 1925년로 사망. 야마모또 이소로꾸. 회고록 <해풍(海風)>을 저술한다.[2][3] 도우조우 히데끼. 1941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1950년대~1960년대의 '쇼우와 유신'으로 18년간 군부 통치를 행한다. 웬델 윌키. 1940년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1970년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일본 의회에서 연설한다. 미시마 유끼오. 1986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4][5] 가야마 미쯔로우. 조선의 대문호. <흙>,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을 17세기 몽골의 가상의 왕조인 항해왕조 연작으로 개작한다.[6] 오까모또 미노루.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육군 대장 직위에 오르며, 대장 진급 직후 퇴역한다.[7] 빅토르 그리신. 소설 후반 시점의 소련 서기장. 이 목록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이 편집하여 채워 주세요. 배경[편집] 비명을 찾아서에서의 1987년(쇼와 62년)의 아시아 지도 소련 몽골 만주국 (일본 제국의 괴뢰국) 일본 제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의 괴뢰국) 중화민국 (일본 제국의 괴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 필리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태국 인도 제국 네팔 부탄 시간적 배경은 책이 집필된 것과 같은 시기인 1987년(쇼와 62년)이다. 소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고, 그 뒤에도 16년을 더 생존했다는 대체 역사적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정계에 있어 온건파의 구심점이었고, 군국주의 세력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생존은 다이쇼 시대의 일본 정국과 동북아시아의 정세, 전 세계 역사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체 역사[편집] 1910년 한국을 합병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1920년대 초반까지 조선을 대륙 진출의 전진 기지로 만든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는 내각과 군부 사이 협조 속에서 국제 여론을 무마해가면서 만주를 세력권 안에 넣는다. 1940년대 초반에는 미국으로부터 '만주국 문제'에 대한 양해를 얻는 데 성공해 동북아시아에서 지도적 위치를 구축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켜 큰 번영을 누린다.[8] 조선[편집] 조선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통치된다. 조선 총독은 현역 또는 예비역 육군, 해군, 공군 대장만이 될 수 있으며, 일본 내에서 수상 다음의 지위를 차지하여 수상으로 가는 정치적 능력의 시험대로 여겨진다.[9] 총독 관저는 지신다이(慈信臺)라 불린다.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독에 의해 추진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은 역대 총독들에 의해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된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국어 상용 운동'으로 조선어는 1940년대 말까지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조선 역사 왜곡 작업과 '비국어 서적 폐기 정책'에 의해 조선의 역사도 말살된다. 1980년대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충량한 황국 신민이 되고, 압제와 모멸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10] 역사책에서도 징꼬우 황후의 조선 정벌 이후로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조선인의 기원은 스사노오 노미꼬도라고 교육된다. 조선사에 대한 책들은 모두 교토제국대학으로 옮겨지며, 족보의 제작과 소유 또한 출판사업법과 치안유지법에 저촉된다. 조선의 인구는 약 5천만 명이며, 빈부 격차는 대단히 크다. 조선총독부는 내지의 공해산업을 조선으로 유치하고, '조선 환경 보전 공사'를 통해 헤이안호꾸도우 산지나 가이바 고원 등의 오지에 매립지를 만들며, '신생활 운동'으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도우요우 다꾸쇼꾸(東洋拓殖)가 센스이왕 간척 사업을 주도한다. 조선 최대의 도시 게이조우는 인구 약 3백만 명, 면적은 도쿄의 1/4이며, 1992년 하계 올림픽이 게이조우에서 열릴 예정이다. 후요에는 징고우, 게이조우에는 야스꾸니 진자(靖國神社)가 지어져 있다.[11] 1956년의 제국의원법 개정 이후 조선에서 15인의 칙선 귀족원 의원과 각 도부군협의회에서 3인씩 선출되는 45인의 중의원 의원을 선출하고 있다.[12] 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7년 고종 승하와 '정사년 만세 운동' 이후 설립된다. 하지만 일본과 미국이 '만주국 문제'에 대해 타협점을 찾은 이후 몰락하여 테러리즘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3년 상해 중산 국제공항에서 '일본 제국 항공사' 여객기에 대한 공격으로 수뇌들이 체포되고, 현재는 소속 인원도 중국 태생의 조선인들뿐이다.[13] 현실 비명을 찾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안변 (Anbyŏn) 안삥(安邊) (Anpin) 장진 (Changjin) 나가즈(長津) (Nagazu) 추가령 (Chugaryong) 슈우카레이(楸哥嶺) (Shukarei) 해주 (Haeju) 까이슈(海州) (Kaishu) 함흥 (Hamhŭng) 교우난(興南) (Kyonan) 함경남도 (Hamgyŏngnam-do) 강꾜우난도우(咸鏡南道) (Kankyonan-do) 허천 (Hŏchŏn) 고가와(虚川) (Kogawa) 정주 (Jŏngju) 조우슈우(定州) (Joshu) 개마고원 (Kaema Plateau) 가이바 고원(蓋馬高原) (Kaiba Plateau) 길주 (Kilju) 기쯔슈우(吉州) (Kitsushu) 고원 (Kowŏn) 다카하라(高原) (Takahara) 금야 (Kŭmya) 에이교우(英興) (Eigyo) 온성 (Onsŏng) 낭요우(南陽) (Nanyo) 백두산 (Paektu-san) 하쿠도우상(白頭山) (Hakudo-san) 평양 (Pyongyang) 헤이조우(平壌) (Heijo) 평안북도 (P'yŏng'anbuk-do) 헤이안호꾸도우(平安北道) (Heianhoku-do) 낭림산맥 (Rangrim Mountains) 로우링 산맥 狼林山脈) (Rorin Mountains) 삼방협 (Sambang-yong) 산보우교우(三防峽) (Sanbokyo) 신의주 (Sinŭiju) 신기슈우(新義州) (Shingishu) 석왕사 (Sogwangsa) 샤꾸오우지(釋王寺) (Shakuohji) 원산 (Wŏnsan) 모토야마(元山) (Motoyama) 대한민국 안동 (Andong) 안도우(安東) (Ando) 봉황산 (Bonghwang-san) 호우오우상(鳳凰山) (Houou-san) 북악산 (Bugak-san) 게이호쿠상(京北山) (Keihoku-san) 부산 (Busan) 가마야마(釜山) (Kamayama) 부여 (Buyeo) 후요(扶餘) (Fuyo) 청주 (Cheongju) 세이슈우(清州) (Seishu) 천수만 (Cheonsuman) 센스이왕(淺水灣) (Sensuiwan) 충청북도 (Chungcheongbuk-do) 쭈우쇼우호쿠도우(忠清北道) (Choshohoku-do) 충청남도 (Chungcheongnam-do) 쭈우쇼우난도우(忠清南道) (Chushonan-do) 충주 (Chungju) 쭈우슈우(忠州) (Chu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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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부활으로 육군대신, 해군대신, 공군대신 자리에는 현역 중장 또는 대장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으며, 이를 이용해 군부가 내각을 붕괴시킬 수 있다.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 1973년에는 '8·15 사건', 1987년에는 '7·31 궐기'가 발생하며, 부패가 심해 해군이나 공군의 수뇌들이 뇌물을 받기도 한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젊은이들은 육군사관학교나 해군병학교로 가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퇴역 군인들에게 고위 경찰직이나 기업 요직을 알선해 주고 있다. 1932년 만주 사변이 발생하고 1933년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일본은 중국과 분쟁을 겪고 있다. 62사단 120만 병력을 보유한 관동군은 만주 일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몽골인민공화국, 소련과 대치하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유격전에 고전하고 있다. 일본은 1938년에 중화민국과의 전투, 1939년에 노몬한 전투, 1960년대에 소련과의 '흑하 사건'과 '기건 사건', 1985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찰합이성 전투에 처한다. 전시 체제가 유지되고 있어 연간 120시간의 예비군 훈련, 달마다 방공 훈련이 이루어진다. 국민정신총력연맹, 신생활운동본부, 국민의용대, 청년특별연성대, 애국반상회, 그리고 위안부로서의 데이신다이가 운영되고 있다. 만주국은 선통제 이후 제2대 후강희제가 왕조를 계승하고 있으며, 일본, 독일, 교황청, 이탈리아, 미국 등 53개국으로부터 승인받는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중국 해방 통일 전선' 등의 지하 조직들이 뻗어나가 경찰서와 일본 영사관에 테러 공격이 발생하고 있으며, 만주국의 대학생들에게서는 신경대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좌익 계열의 중국 통일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편집] 세계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체제이나, 일본,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 제국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국제 연맹이 유지되고 있으며, 일본은 1940년에 미국과 함께 국제 연맹에 재가입하고, 소련도 재가입하게 된다. 상임이사국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일본이 올라 있다. 미일 관계는 항상 우호적이며, 도우조우 히데끼가 미국 의회에서, 존 F. 케네디가 일본 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한다. 미국은 일본 - 만주국 - 중화민국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연결하여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전략을 위해 중화민국과 일본의 화해를 종용하며 미국, 일본, 중화민국의 연합을 추진하고 있다.[15] 이에 따라 중화민국은 만주국을 승인하게 된다. 소련은 식민 제국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연합하고, 현재는 빅토르 그리신이 소련 서기장에 올라 있다. 국제 연맹의 확대로 인해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스페인 내전 종결은 1940년으로 늦춰지게 되며,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웬델 윌키가 당선된다.[16] 독일은 1942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나 1947년 미국의 드레스덴, 브레멘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패전한 후 점령국 미국의 도움으로 전후 복구에 성공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한 폴란드와 수도 바르샤바는 동서로 분단된다.[17] 스페인은 군사 독재가 유지되고 있다. 식민 제국들의 식민 지배가 계속되면서 일부 식민지들은 종주국에 너무 동화되거나 경제적, 문화적으로 종속되어, 식민지 주민들이 자신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식민지들로는 영국의 로디지아와 나이지리아, 프랑스의 코친차이나와 세네갈, 벨기에의 콩고, 포르투갈의 동아프리카, 소련의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일본의 조선 등이 있다.[18]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서는 베트민과 프랑스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며, 국제 연맹의 중재로 프랑스와 베트민이 제네바에서 휴전 협상을 진행한다. 중국에서는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로 1936년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핵심 간부진이 연안에서 전사해 공산당은 와해되나, 1940년 유소기가 다시 공산당을 재건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50년 11월 신강성을 거점으로 '신강 소비에트'를 수립하여 화북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1952년에는 신강성의 태반과 감숙성 북부를 차지하게 되고, 1953년 4월 내란을 선언한 국민당 정부는 장개석의 실정으로 인해 몰락한다. 공산당의 '토지 개혁 선언'으로 전세는 반전되어 1956년 2월 공산당이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3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지만, 황하 남쪽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일본군이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일본의 '도우조우 선언'이 발표되자, 1956년 7월 정주에서 이종인과 팽덕회가 양국 대표로서 휴전 협정을 맺어 황하를 경계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치하게 된다.[19] 현재 중국 대륙에는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만주국 세 나라가 들어서 있다. 중화민국과 접한 상해는 국제 연맹의 감독 하에 자유시로 지정되며, 각국의 조계 및 명맥만 유지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치해 있다.[20]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의 설정 논란[편집] 2002년작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설정이 비슷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영화 제작사에서 판권을 사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각주[편집] ↑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상, ISBN 89-320-0979-1, 문학과지성사, 2010, p. 9. ↑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하, ISBN 89-320-0980-5, 문학과지성사, 2010, p. 52. ↑ 현실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을 지휘하다가 미 해군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 《비명을 찾아서》 상, p. 70. ↑ 현실에서는 1970년에 자살하여 원로출판인 와시오 켄야 선생이 청년시절인 1970년대의 큰 사건으로 요요기계와 비요요기계의 학생운동과 함께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을 《편집이란 어떤 일인가》에서 다루기도 했다. ↑ 《비명을 찾아서》 하, p. 226. ↑ 《비명을 찾아서》 하, p. 47. ↑ 《비명을 찾아서》 상, p. 10. ↑ 《비명을 찾아서》 상, p. 43. ↑ 《비명을 찾아서》 상, p. 11. ↑ 《비명을 찾아서》 상, p. 25. ↑ 《비명을 찾아서》 하, p. 41. ↑ 《비명을 찾아서》 상, p. 251. ↑ 《비명을 찾아서》 상, p. 69. ↑ 《비명을 찾아서》 하, p. 139. ↑ 《비명을 찾아서》 상, p. 89. ↑ 《비명을 찾아서》 하, p. 242. ↑ 《비명을 찾아서》 상, p. 248. ↑ 《비명을 찾아서》 상, p. 77. ↑ 《비명을 찾아서》 상, p. 250. 같이 보기[편집] 대체 역사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명을_찾아서&oldid=24543949" 분류: 대체 역사 소설1987년 소설대한민국 소설이토 히로부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8일 (월) 15: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비명을 찾아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명을 찾아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명을 찾아서. 경성, 쇼우와 62년 상권 표지작가 복거일원제 碑銘을 찾아서. 京城, 쇼우와 62년국가 대한민국언어 한국어장르 대체 역사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세이코 서점 출판일 1987년 3월 1일 1987년 10월미디어 유형 도서 《비명을 찾아서 : 경성, 쇼우와 62년(碑銘을 찾아서 : 京城, 쇼우와 62년)》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복거일이 1987년에 발표한 장편 대체 역사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일본 제국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저격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해,[1] 대체 역사 속 1980년대의 일본 제국을 배경으로 한다. 각 장의 앞에는 여러 매채들을 발췌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문단이 있는데, 주제를 강화해 주는 격언들과 세계관을 설명해 주는 가상의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본문과 가상의 글들을 통해 배경을 천천히 서술해 나간다. 또한 이 소설에는 국한문 병용과 작가 고유의 외국어 표기가 적용되어 있다. 목차 1 줄거리 2 등장 인물 2.1 언급된 인물 2.2 언급된 실존 인물 3 배경 3.1 대체 역사 3.2 조선 3.3 일본 3.4 세계 4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의 설정 논란 5 각주 6 같이 보기 줄거리[편집]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는 노구찌(野口) 그룹 산하 한도우(半島) 경금속 주식회사 과장이자 시집도 낸 적이 있는 무명 시인이다. 히데요는 부장 승진에서 내지인에게 밀려 탈락된 이후, 조선인이 내지인에 비해 차별받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게 된다. 히데요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과 그로 인한 조선의 독립을 가정한 대체 역사 소설 <도우꾜우, 쇼우와 61년의 겨울>을 접하며 일본에 대한 반감을 떠올리고, 일본의 금서 <독사수필>을 읽고 공식 역사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마침 세이슈우의 큰아버지 댁을 방문하다 우연히 큰아버지로부터 죽산 박씨 족보를 보게 되고, 조선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듣게 되면서 조선인은 스사노오 노미꼬도의 자손이며 수천 년 전 일본의 징꼬우 황후가 조선을 정복했다는 공식 역사는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히데요는 집으로 오던 길에 세이슈우의 고서점에서 <조선 고시가선(朝鮮 古詩歌選)>을 구입하게 되고, 그 책에 실린 사이찌엥과 조우지조우의 시들을 읽고 조선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더 알아보기 시작한다. 조우다이(城大)의 도서관에서 <한불(韓佛) 사전>을 복사하고 197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조선의 역사를 찾게 된다. 모또야마에 살던 장모가 사망하여 장례를 위해 안삥의 샤꾸오우지를 찾은 히데요는 절의 주지 소우고우(소공, 小空) 스님을 만나고 조선어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던 소공 스님은 히데요에게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조선어로 낭독한다. 소공 스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반하지만, 히데요는 한용운의 의발을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회사에서 내지로 출장을 가게 된 히데요는 교토제국대학 도서관에서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의 조선의 옛 역사책들을 찾아내 복사하고 조선으로 돌아오나 그사이 일본에서 일어난 정변 이후 강화된 보안검색 때문에 가네우라 공항에서 입국 도중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된다. 고문과 심문을 번갈아 받던 그는 '전선사상보국연맹'의 하꾸야마에게 교육을 받고 연맹에 참가하게 된다. 그에게서 변절한 가야마 미쯔로우 선생의 이야기를 들은 히데요는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히데요는 석방 이후 조선 독립의 필연적 이유를 깨닫고, 언젠가 올 독립의 그 날을 위해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자신의 석방을 위해 아오끼 소좌에게 몸을 허락한 것을 알게 된다. 히데요는 아내의 생일에 그가 집으로 초대한 아오끼가 술에 취해 히데요의 중학생 딸 게이꼬를 성희롱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를 낚싯줄로 교살한다. 결국 히데요는 집을 나와 명맥만 유지되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떠난다. 등장 인물[편집]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박영세, 朴英世). 1987년 기준 39세. 게이조우 데이고꾸 대학 상학과 출신으로 만주에서 소좌로 전역한 후 노구찌 그룹 산하 한도우 경금속 주식회사의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고향은 세이슈우이다. 부인 세쯔꼬와는 선을 통해 결혼했으며, 이 때문에 소설 내에서는 세쯔꼬보다 부하직원 도끼에에게 마음을 둔다. 기노시다 세쯔꼬(木下節子). 히데요의 부인으로, 모또야마의 명가 출신이다. 결혼 전 성은 리노이에(李家)이다. 기노시다 게이꼬(木下惠子). 히데요와 세쯔꼬의 외동딸로, 중학교 3학년이다. 기노시다 헤이따로우(木下平太郞/박원신, 朴元信). 히데요의 큰아버지로, 세이슈우에 거주한다. 세이슈우로 내려온 히데요에게 조선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 시마즈 도끼에(島津時技). 한도우 경금속 직원. 히데요의 직속 부하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직계 후손인 화족이다. 히데요를 짝사랑하나 에릭 앤더슨과 결혼한다. 에릭 앤더슨. 스웨덴계 미국인. 한도우 경금속과의 합작 투자 대상인 미국 기업 '유사라무'의 직원. 도끼에와의 결혼 이후 유럽으로 부임한다. 야마시다 소우따로우(山下曾太郞). 한도우 경금속 과장으로, 히데요의 경쟁자이다. 오사카 대학 출신으로 입사도 늦었으나, 내지인이라는 이점과 군부 요직의 외삼촌 덕분에 히데요 대신 부장으로 진급한다. 아오끼 류우사부로우(靑木龍三郞) 소좌. 보안대 소속의 헌병 소좌. 세쯔꼬의 후배인 아오끼 리에(靑木李技)의 남편으로, 세쯔꼬를 농락하고 게이꼬를 성희롱하다 히데요에게 살해당한다. 소우고우(소공, 小共) 스님. 샤꾸오우지의 주지. 한용운의 의발의 두 번째 계승자로, 한시에 능하며 히데요에게 <님의 침묵>을 조선어로 낭독해 주고 한용운의 의발을 전수한다. 하꾸야마 마사오미(白山正臣). 조선 평론가 협회 간사이자 전선사상보국연맹 회원이자, 히데요의 '갱생교육' 강사이다. 본래 촉망받던 평론가이나, 일본에서 열린 학회에서 가야마 미쯔로우의 소설 원본을 발견하여 처음 조선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독립운동을 시도하고, 고문을 받고 전향한다. 언급된 인물[편집] 사노 히사이찌(佐藤久一). 도쿄제국대학 교수이자 <독사수필>의 저자. 1987년 쿠데타 이후 체포된다. 도우고우 노부오(東郷展男). 해군 출신의 조선 총독. 아베 하루노리(阿部治憲). 소설의 시작 시점의 일본 수상.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전쟁 실패와 민주화 운동 진압 실패의 책임을 물어 사퇴한다. 사또우 게이스께(佐藤圭介). 아베 총리 후임으로 들어선 공군 예비역 대장 출신 수상. 공군이 조각한 내각이나 결국 육군의 쿠데타에 무너진다. 이후 연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라끼 마사야스(荒木昌保) 중장. 사또우 내각을 뒤엎은 쿠데타의 주역인 육군 중장으로 쿠데타 당시 보직은 수도군단장. 처음에는 히또쯔바시 대장을 내세우나 자신이 전면에 나서 수상이 된다. 히또쯔바시 히로모또(一橋廣元) 대장. 육군 참모차장으로서 아라끼의 쿠데타를 묵인하는 대가로 호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나 아라끼에 의해 제거된다. 언급된 실존 인물[편집] 이또우 히로부미. 안중근의 암살 미수 이후 16년을 더 생존하며, 자서전으로 <북정(北政)>을 저술한다. 암살 미수 이후 대륙 진출 이전에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초대 조선 총독으로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을 추진한다. 1925년로 사망. 야마모또 이소로꾸. 회고록 <해풍(海風)>을 저술한다.[2][3] 도우조우 히데끼. 1941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1950년대~1960년대의 '쇼우와 유신'으로 18년간 군부 통치를 행한다. 웬델 윌키. 1940년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1970년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일본 의회에서 연설한다. 미시마 유끼오. 1986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4][5] 가야마 미쯔로우. 조선의 대문호. <흙>,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을 17세기 몽골의 가상의 왕조인 항해왕조 연작으로 개작한다.[6] 오까모또 미노루.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육군 대장 직위에 오르며, 대장 진급 직후 퇴역한다.[7] 빅토르 그리신. 소설 후반 시점의 소련 서기장. 이 목록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이 편집하여 채워 주세요. 배경[편집] 비명을 찾아서에서의 1987년(쇼와 62년)의 아시아 지도 소련 몽골 만주국 (일본 제국의 괴뢰국) 일본 제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의 괴뢰국) 중화민국 (일본 제국의 괴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 필리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태국 인도 제국 네팔 부탄 시간적 배경은 책이 집필된 것과 같은 시기인 1987년(쇼와 62년)이다. 소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고, 그 뒤에도 16년을 더 생존했다는 대체 역사적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정계에 있어 온건파의 구심점이었고, 군국주의 세력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생존은 다이쇼 시대의 일본 정국과 동북아시아의 정세, 전 세계 역사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체 역사[편집] 1910년 한국을 합병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1920년대 초반까지 조선을 대륙 진출의 전진 기지로 만든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는 내각과 군부 사이 협조 속에서 국제 여론을 무마해가면서 만주를 세력권 안에 넣는다. 1940년대 초반에는 미국으로부터 '만주국 문제'에 대한 양해를 얻는 데 성공해 동북아시아에서 지도적 위치를 구축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켜 큰 번영을 누린다.[8] 조선[편집] 조선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통치된다. 조선 총독은 현역 또는 예비역 육군, 해군, 공군 대장만이 될 수 있으며, 일본 내에서 수상 다음의 지위를 차지하여 수상으로 가는 정치적 능력의 시험대로 여겨진다.[9] 총독 관저는 지신다이(慈信臺)라 불린다.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독에 의해 추진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은 역대 총독들에 의해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된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국어 상용 운동'으로 조선어는 1940년대 말까지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조선 역사 왜곡 작업과 '비국어 서적 폐기 정책'에 의해 조선의 역사도 말살된다. 1980년대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충량한 황국 신민이 되고, 압제와 모멸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10] 역사책에서도 징꼬우 황후의 조선 정벌 이후로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조선인의 기원은 스사노오 노미꼬도라고 교육된다. 조선사에 대한 책들은 모두 교토제국대학으로 옮겨지며, 족보의 제작과 소유 또한 출판사업법과 치안유지법에 저촉된다. 조선의 인구는 약 5천만 명이며, 빈부 격차는 대단히 크다. 조선총독부는 내지의 공해산업을 조선으로 유치하고, '조선 환경 보전 공사'를 통해 헤이안호꾸도우 산지나 가이바 고원 등의 오지에 매립지를 만들며, '신생활 운동'으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도우요우 다꾸쇼꾸(東洋拓殖)가 센스이왕 간척 사업을 주도한다. 조선 최대의 도시 게이조우는 인구 약 3백만 명, 면적은 도쿄의 1/4이며, 1992년 하계 올림픽이 게이조우에서 열릴 예정이다. 후요에는 징고우, 게이조우에는 야스꾸니 진자(靖國神社)가 지어져 있다.[11] 1956년의 제국의원법 개정 이후 조선에서 15인의 칙선 귀족원 의원과 각 도부군협의회에서 3인씩 선출되는 45인의 중의원 의원을 선출하고 있다.[12] 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7년 고종 승하와 '정사년 만세 운동' 이후 설립된다. 하지만 일본과 미국이 '만주국 문제'에 대해 타협점을 찾은 이후 몰락하여 테러리즘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3년 상해 중산 국제공항에서 '일본 제국 항공사' 여객기에 대한 공격으로 수뇌들이 체포되고, 현재는 소속 인원도 중국 태생의 조선인들뿐이다.[13] 현실 비명을 찾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안변 (Anbyŏn) 안삥(安邊) (Anpin) 장진 (Changjin) 나가즈(長津) (Nagazu) 추가령 (Chugaryong) 슈우카레이(楸哥嶺) (Shukarei) 해주 (Haeju) 까이슈(海州) (Kaishu) 함흥 (Hamhŭng) 교우난(興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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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부활으로 육군대신, 해군대신, 공군대신 자리에는 현역 중장 또는 대장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으며, 이를 이용해 군부가 내각을 붕괴시킬 수 있다.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 1973년에는 '8·15 사건', 1987년에는 '7·31 궐기'가 발생하며, 부패가 심해 해군이나 공군의 수뇌들이 뇌물을 받기도 한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젊은이들은 육군사관학교나 해군병학교로 가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퇴역 군인들에게 고위 경찰직이나 기업 요직을 알선해 주고 있다. 1932년 만주 사변이 발생하고 1933년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일본은 중국과 분쟁을 겪고 있다. 62사단 120만 병력을 보유한 관동군은 만주 일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몽골인민공화국, 소련과 대치하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유격전에 고전하고 있다. 일본은 1938년에 중화민국과의 전투, 1939년에 노몬한 전투, 1960년대에 소련과의 '흑하 사건'과 '기건 사건', 1985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찰합이성 전투에 처한다. 전시 체제가 유지되고 있어 연간 120시간의 예비군 훈련, 달마다 방공 훈련이 이루어진다. 국민정신총력연맹, 신생활운동본부, 국민의용대, 청년특별연성대, 애국반상회, 그리고 위안부로서의 데이신다이가 운영되고 있다. 만주국은 선통제 이후 제2대 후강희제가 왕조를 계승하고 있으며, 일본, 독일, 교황청, 이탈리아, 미국 등 53개국으로부터 승인받는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중국 해방 통일 전선' 등의 지하 조직들이 뻗어나가 경찰서와 일본 영사관에 테러 공격이 발생하고 있으며, 만주국의 대학생들에게서는 신경대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좌익 계열의 중국 통일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편집] 세계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체제이나, 일본,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 제국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국제 연맹이 유지되고 있으며, 일본은 1940년에 미국과 함께 국제 연맹에 재가입하고, 소련도 재가입하게 된다. 상임이사국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일본이 올라 있다. 미일 관계는 항상 우호적이며, 도우조우 히데끼가 미국 의회에서, 존 F. 케네디가 일본 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한다. 미국은 일본 - 만주국 - 중화민국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연결하여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전략을 위해 중화민국과 일본의 화해를 종용하며 미국, 일본, 중화민국의 연합을 추진하고 있다.[15] 이에 따라 중화민국은 만주국을 승인하게 된다. 소련은 식민 제국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연합하고, 현재는 빅토르 그리신이 소련 서기장에 올라 있다. 국제 연맹의 확대로 인해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스페인 내전 종결은 1940년으로 늦춰지게 되며,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웬델 윌키가 당선된다.[16] 독일은 1942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나 1947년 미국의 드레스덴, 브레멘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패전한 후 점령국 미국의 도움으로 전후 복구에 성공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한 폴란드와 수도 바르샤바는 동서로 분단된다.[17] 스페인은 군사 독재가 유지되고 있다. 식민 제국들의 식민 지배가 계속되면서 일부 식민지들은 종주국에 너무 동화되거나 경제적, 문화적으로 종속되어, 식민지 주민들이 자신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식민지들로는 영국의 로디지아와 나이지리아, 프랑스의 코친차이나와 세네갈, 벨기에의 콩고, 포르투갈의 동아프리카, 소련의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일본의 조선 등이 있다.[18]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서는 베트민과 프랑스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며, 국제 연맹의 중재로 프랑스와 베트민이 제네바에서 휴전 협상을 진행한다. 중국에서는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로 1936년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핵심 간부진이 연안에서 전사해 공산당은 와해되나, 1940년 유소기가 다시 공산당을 재건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50년 11월 신강성을 거점으로 '신강 소비에트'를 수립하여 화북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1952년에는 신강성의 태반과 감숙성 북부를 차지하게 되고, 1953년 4월 내란을 선언한 국민당 정부는 장개석의 실정으로 인해 몰락한다. 공산당의 '토지 개혁 선언'으로 전세는 반전되어 1956년 2월 공산당이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3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지만, 황하 남쪽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일본군이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일본의 '도우조우 선언'이 발표되자, 1956년 7월 정주에서 이종인과 팽덕회가 양국 대표로서 휴전 협정을 맺어 황하를 경계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치하게 된다.[19] 현재 중국 대륙에는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만주국 세 나라가 들어서 있다. 중화민국과 접한 상해는 국제 연맹의 감독 하에 자유시로 지정되며, 각국의 조계 및 명맥만 유지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치해 있다.[20]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의 설정 논란[편집] 2002년작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설정이 비슷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영화 제작사에서 판권을 사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각주[편집] ↑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상, ISBN 89-320-0979-1, 문학과지성사, 2010, p. 9. ↑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하, ISBN 89-320-0980-5, 문학과지성사, 2010, p. 52. ↑ 현실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을 지휘하다가 미 해군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 《비명을 찾아서》 상, p. 70. ↑ 현실에서는 1970년에 자살하여 원로출판인 와시오 켄야 선생이 청년시절인 1970년대의 큰 사건으로 요요기계와 비요요기계의 학생운동과 함께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을 《편집이란 어떤 일인가》에서 다루기도 했다. ↑ 《비명을 찾아서》 하, p. 226. ↑ 《비명을 찾아서》 하, p. 47. ↑ 《비명을 찾아서》 상, p. 10. ↑ 《비명을 찾아서》 상, p. 43. ↑ 《비명을 찾아서》 상, p. 11. ↑ 《비명을 찾아서》 상, p. 25. ↑ 《비명을 찾아서》 하, p. 41. ↑ 《비명을 찾아서》 상, p. 251. ↑ 《비명을 찾아서》 상, p. 69. ↑ 《비명을 찾아서》 하, p. 139. ↑ 《비명을 찾아서》 상, p. 89. ↑ 《비명을 찾아서》 하, p. 242. ↑ 《비명을 찾아서》 상, p. 248. ↑ 《비명을 찾아서》 상, p. 77. ↑ 《비명을 찾아서》 상, p. 250. 같이 보기[편집] 대체 역사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명을_찾아서&oldid=24543949" 분류: 대체 역사 소설1987년 소설대한민국 소설이토 히로부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8일 (월) 15: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송백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백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송백헌宋百憲 출생 1935년 9월 1일(1935-09-01) (83세)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필명 호(號)는 초강(草江) 직업 문학평론가 대학 교수 前 시인 前 중등학교 국어교사 언어 한국어 국적 대한민국 소속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학력 단국대 대학원 활동기간 1967년 ~ 현재 장르 문학평론, 시문학 배우자 김용희(前 중등학교 교장, 前 연구원 원장.) 자녀 슬하 3남 종교 유교(성리학) 송백헌(宋百憲, 1935년 9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자 대학 교수(국문학)이다. 목차 1 생애 1.1 관향과 아호, 그리고 어린 시절 1.2 문학 활동 1.3 학력 1.4 경력 2 저서 3 상훈 4 함께 보기 5 외부 링크 생애[편집] 관향과 아호, 그리고 어린 시절[편집] 그의 본관(관향)은 은진(恩津)이고 아호(雅號)는 초강(草江)이며 조선시대 큰선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10대 직계 후손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충청북도 옥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충청남도 대전에서 성장하여 그 후 일평생토록 현재까지 대전에서 살고 있다. 문학 활동[편집] 비단강(금강)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문학적 정서가 싹텄으나 부모님들의 뜻에 따라 중등학교를 실업학교에 진학하면서 시문학에의 꿈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적성에 맞는 학과를 찾아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을 하면서 훌륭하신 교수님들 밑에서 국어학과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철학, 역사와 심리학 등을 두로 섭렵함으로써 문학적 기초를 다져나가면서 학문의 연구방법론을 터득하였다. 대학 졸업 후 충청남도, 대전시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10년 동안 졸업반을 담당함으로써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나, 한 때 문학 관련에서의 길이 점차 멀어지는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였다. 재직 중 다시 용기를 내어 1967년 「현대문학」지에 조연현 교수의 추천으로 평론가로 등단하고 대학교에 진출하여 비평론, 소설론, 수필론 등을 강의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여 백철 교수의 지도로 문학석사, 전광용 교수의 지도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충남대학교에서 대학원 지도는 물론 경향 각지의 대학원에서 80여 명에 이르는 문학박사를 심사 배출하였다. 한편 문단 활동도 활발히 하여 많은 연구논문과 비평문을 발표하여 1980년 제1회 대전직할시(現 대전광역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하고, 이어 한성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간행된 업적으로는 평론집을 비롯한 수필집 등 30권에 이르고 있다. 한국문인총연합회가 창립되면서 초대 회장으로 15년간 재임하면서 회지 「문학시대」를 창간하였다. 2016년 6월 현재 「문학시대」(계간)는 45호에 이른다. 그 동안 길러낸 문인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 중에서 도종환 시인(현 국회의원), 최문자 ․ 손종호 시인, 정효구 ․ 정순진 등의 평론가와 김현종 소설가들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교육부 건인정 교과서 『문학』의 저자(공저)로 활약하였는데 이후 지방사(地方史)와 문중사(門中史)에도 관심을 집중하여 「대전학」의 개척자로 그와 관련된 서적과 문중 관련 서적 20여권을 간행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지역의 원로 문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충남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대전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계약직 가급 공무원)으로 근무 중에 있다. 학력[편집] 1954년 충청남도 대전공업고등학교 졸업 1958년 경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학사 1970년 충북대 대학원 전기공학과 공학석사 수료 1972년 중앙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 1977년 단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경력[편집] 1958. 04. 18 - 1968. 04. 30 강경상고 대전사범, 충남고. 대전고 교사 1868. 05. 01 - 1973. 03, 09 대전공업고등전문학교 부교수 1973. 03. 10 - 1980. 10. 17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조교수 1980. 10. 18 - 2001. 02. 28 충남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2001. 05. 10 - 현재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2008. 02. 09 - 2016. 06. 03 대전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시간제 계약직 가급 공무원) 저서[편집] 진실과 허구 (민음사) 우리문학과 그 현장 (국학자료원) 한국근대역사소설연구 (삼지원) 서포가문행장 (형설출판사) 계용문작품집 (형설출판사) 한국문학사조론 (새문사. 공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옥천군, 공저) 행복은 별자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청동거울) 유니버시티와 멀티버시티 (충남대 출판부) 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 문학 (문교부) 천년고을 회덕이야기 (대덕문화원) 선비고을 유성이야기 (유성문화원) 은진송씨세적사 (은진송씨대종회) 은진송씨우암문정공파세적록 (은진송씨송자각하종친회) 광산김씨 허주공파 세적록 (광산김씨허주공파종종) 교주 해설 한글 송씨가전 (은진송씨송자각하종친회) 등 30여 권 상훈[편집] 1988. 12. 30 서울올림픽 기장(대회장) 제020897호 체육부장관 1989. 09. 17 제1회 대전광역시(직할시) 문화상(문학부문) 제3호 대전직할시장 1991. 05. 25 표창장(10년 근속) 제1684호 충남대학교 총장 1992. 05. 15 표창장(연공상) 제2926호 교육부장관 1992. 05. 15 표창장(연공상) 제43557호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 회장 2000. 05. 31 표창장(대전광역시 행정서비스헌장 제도개선을 위한 공로) 제375호 행정자치부장관 2001. 02. 20 황조근정훈장 제 003510호 대통령 2002. 11. 08 한성기문학상 문학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2011. 12. 30 표창장 대전광역시장 함께 보기[편집] 원종린 김희수 김우종 손기섭 박경석 박헌오 백승탁 외부 링크[편집] 조인스 데이터 - 송백헌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Daum 데이터 사전 - 文學博士 송백헌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문학박사 초강 송백헌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네이버 예전 신문 보도 기사 - 초강 송백헌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네이버 데이터 - 송백헌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이 글은 작가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교육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송백헌&oldid=23897061" 분류: 1935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대한민국의 건축 평론가대한민국의 교통 평론가대한민국의 교사영동군 출신은진 송씨대한민국의 시인유교 신자충남대학교 교수한밭대학교 교수20세기 대한민국 사람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21세기 대한민국 사람건양대학교 교수배재대학교 교수구 대전공업고등학교 동문경북대학교 동문충북대학교 대학원 동문중앙대학교 대학원 동문단국대학교 대학원 동문숨은 분류: 작가에 관한 토막글교육인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3월 22일 (금) 06:5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춘천고속버스터미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춘천고속버스터미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춘천고속버스터미널 춘천고속버스터미널 전경 공식명칭 춘천고속버스터미널 종류 터미널 국가 대한민국 주소 강원도 춘천시 터미널길14번길 15(온의동) 개장 1989년 이전 2007년 7월 10일 운영기관 동부고속 터미널코드 250 행선지표기 춘천 고속버스 운행 운행 시외버스 운행 미운행 시내버스 운행 미운행 춘천고속버스터미널은 강원도 춘천시 터미널길14번길 15(온의동 111-2)에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이다. 동부고속에서 운영하며 고속버스 전산망상의 터미널 번호는 250이다. 인근에 춘천시외버스터미널이 인접되어 있다. 목차 1 이전 과정 2 운행 노선 3 같이 보기 4 각주 5 외부 링크 이전 과정[편집] 춘천고속버스터미널은 1989년에 춘천시 온의동 지금의 시외버스터미널 부지에 임시정류장으로 인가받아 운영되기 시작하였다.[1] 즉, 운영을 시작할 때부터 본래 터미널 건물은 없었다는 말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99년에 온의동에 건립될 춘천시외버스터미널이 2002년에 완공되면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시외버스를 운영하는 업체들이 동대구 노선을 자신들도 운영하게 해야한다는 주장을 하여[2] 결국 2002년 10월 23일에 춘천시외버스터미널이 완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버스터미널은 이전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3] 결국 갈 곳이 없어진 고속버스터미널은 궁여지책으로 2002년 4월에 춘천시의 중재로 퇴계동의 향토공예관[4] 인근 공터에 컨터이너박스를 두고 임시터미널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고속버스터미널은 하루에 평균 380여명, 연간 13만여명이 이용하고 있어 이용객의 불편은 가중되었고 결국 현재 운영하고 있는 임시터미널의 행태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상의 시설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춘천시에서는 뒤늦게 이전개선명령 및 과태료를 부과하였다. 이렇게 납부한 과태료는 무려 1,200만원이 넘었다.[5] 하지만 춘천시에서 추진하던 동내면 고은리 일대에 종합버스터미널 건립 계획이 무산되고[6], 운영업체들도 이렇다 할 계획을 내지 못하자 2006년 11월에는 춘천시에서 터미널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지경까지 이르렀다.[7] 그러다 2007년 4월 17일, 고속버스 운영업체가 춘천시외버스터미널 옆 부지 2000m2 규모에 터미널 건물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8] 그 해 5월에 바로 착공하여 6월에 완공하였다. 터미널 이전은 같은 해 7월 10일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9] 운행 노선[편집] 운행노선 운행업체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간격(분) 시간표 춘천 ↔ 광주 금호고속대원고속 춘천 ↔ 광주 무정차 4회 08:10, 11:10, 14:10, 17:10 춘천 ↔ 대구 대원고속중앙고속한일고속 춘천 ↔ 동대구 서대구 60~90 첫차:07:00(춘천 기준)막차:19:00(춘천 기준) 한때 경기고속 단독으로 춘천고속버스터미널 착발 홍천, 원주 경유 순천행이 있었으나, 2016년 5월 1일에 춘천시외버스터미널로 변경됐다. 같이 보기[편집] 춘천시외버스터미널 각주[편집] ↑ "컨테이너가 고속터미널” , 세계일보, 2007년 3월 14일 작성. ↑ [로컬이슈]춘천, 터미널없는 고속버스운행 10년째, 강원일보, 2006년 8월 31일 작성. ↑ 춘천 새 시외버스터미널 오늘 문열어, 문화일보, 2002년 10월 23일 작성. ↑ 춘천 KBS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 ‘시민 불만’고속버스 터미널, 경향신문, 2004년 2월 23일 작성. ↑ [로컬이슈]춘천 동내면 종합터미널 조성 계획 무산, 강원일보, 2006년 11월 9일 작성. ↑ 춘천고속버스터미널 내년 면허취소 검토, 강원일보, 2006년 11월 10일 작성. ↑ [춘천]고속버스터미널 제모습 갖춘다, 강원일보, 2007년 4월 18일 작성. ↑ 춘천고속버스 컨테이너 정류장서 이사, 뉴시스, 2007년 7월 10일 작성. 외부 링크[편집] 춘천고속버스터미널시간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코버스 홈페이지 vdeh대한민국의 시외·고속버스터미널서울특별시 서울경부 서울호남 동서울 서울서부 서울남부 상봉 가락시장 김포공항 동대문 마장동 수유리 신촌 잠실 장지역 인천광역시 강화 외포리 화도 인천 인천공항 부평역 송도 용현동 경기도 가평 목동 설악 청평 현리 고양 고양화정 광명 철산 광주 곤지암 구리 군포 김포 도농 · 금곡 · 평내 · 마석 동두천 부천 송내역 부천역·소사동·송내사거리 수원 광교중앙역 서수원 수원역 아주대 영통입구 우만동 성남 가천대 시흥 하늘휴게소 안산 상록수역 안성 공도 대림동산 양성 일죽 주은풍림 죽산 중앙대입구 안양역 · 안양 · 범계 · 호계동 · 비산동 양주역 양평 용문 여주 능서 대신 태평 전곡 오산 용인 백암 신갈 양지 유방동 의정부 의왕고천 의왕TG 이천 장호원 문산 금촌 운정 파주적성 평택 평택시외 송탄 안중 서정리·용이동·청북 평택대 해군기지 포천 송우 신북 운천 일동 하남 서신 동탄 조암 향남 강원도 강릉 강릉시외 주문진 간성 거진 대진 동해 동해시외 삼척 삼척시외 도계 임원 호산 속초 속초시외 양구 남면 양양 낙산 영월 상동 원주 원주시외 문막 인제 백담입구 신남 원통 현리 정선 고한사북 북평 임계 동송 신철원 와수 육단 춘천 춘천시외 강촌 태백 평창 대화 장평 진부 횡계 홍천 내면 서석 양덕원 화천 사창리 횡성 둔내 충청북도 괴산 연풍 단양 매포 보은 보은고속 속리산 영동 추풍령 황간 옥천 안내 청산 음성 감곡 대소 무극 삼성 생극 충북혁신도시 제천 제천시외 백운 증평 진천 광혜원 이월 청주 청주시외 청주공항 북청주 남청주 미원 오창 충주 목계 수안보 주덕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충청남도 대전 서대전 유성 유성시외 대전청사 대전도룡 관저·건양대병원 용두동 도마동 부사동 신흥동 북대전 자운대 조치원 세종 세종청사 고대홍대 전의 금암 · 신도안 · 양정 · 엄사 공주 공암 동학사 산성 유구 금산 논산 논산시외 강경 연무 연무시외 당진 기지시 삽교천 신평 합덕 보령 대천해수욕장 부여 홍산 서산 고북 해미 서천 장항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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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휴게소 인삼랜드휴게소 정안알밤휴게소 횡성휴게소 :현재 시외버스 노선이 운행하지 않거나 없어진 터미널 굵은 글씨는 고속버스가 운행하는 터미널 vdeh춘천시의 교통철도노선 경춘선(■ 수도권 전철 경춘선) 역 ● 경춘선 : (경기도 가평군) ← 굴봉산역 백양리역 강촌역 김유정역 남춘천역 춘천역 고속도로노선 중앙 (55) 서울양양 (60) 나들목·분기점 조양 나들목 강촌 나들목 남춘천 나들목 춘천 나들목 춘천 분기점 일반도로국도 5호 46호 56호 국지도 56호 70호 86호 지방도 403호 407호 주요 간선도로자동차전용 순환대로(구.잼버리도로) 간선도로 가락재로 경춘로 공지로 금강로 박사로 사내천로 삭주로 소양강로 서부대성로 세실로 신샘밭로 영서로 옛경춘로 중앙로 지내고탄로 춘양로 춘천로 춘천순환로 춘화로 충열로 퇴계로 후만로 후석로 교량 강촌교 경강교 가평철교 신매대교 신연교 의암교 춘성대교 터널 배후령터널 버스시내 춘천 시내버스 조교마을버스 고속·시외 춘천 춘천시외 강촌 기타시내 마이비 캐시비 티머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춘천고속버스터미널&oldid=23090661" 분류: 1989년 설립2007년 설립강원도의 버스 교통춘천시의 교통대한민국의 버스 터미널춘천시의 건축물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1월 24일 (토) 21: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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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 허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앰버 허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앰버 허드Amber Heard 2018년 샌디에이고 코믹콘 인터내셔널에서 허드본명 앰버 로라 허드Amber Laura Heard출생 1986년 4월 22일(1986-04-22) (33세)미국 텍사스주 오스틴국적 미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2004년 ~ 현재 형제자매 2녀 중 첫째배우자 조니 뎁 (결혼 2015; 이혼 2017)웹사이트 amberheardofficial.com 앰버 로라 허드(영어: Amber Laura Heard, 1986년 4월 22일[1] ~ )는 간단히 앰버 허드(영어: Amber Heard)로 잘 알려진 미국의 배우이다. 허드는 2004년 스포츠 드라마 영화 《프라이데이 나잇 라이츠》로 데뷔했다. 이후 《노스 컨츄리》와 《알파 독》에서 작은 역할을 거친 후, 허드는 《모든 소년들은 맨디 레인을 사랑해》(2006)에서 첫 주연 역할을 맡았으며 The CW의 《히든 팜스》(2007)에 출연했다. 허드는 2008년 《겟 썸》과 《파인애플 익스프레스》의 역할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 할리우드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인포머스》, 《스텝파더》, 《좀비랜드》, 《수상한 가족》와 같은 영화에서의 출연은 그녀를 더욱 주목 시켰다. 그녀는 다음 작품으로 존 카펜터 감독의 《더 워드》,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 역할을 연기한 《드라이브 앵그리 3D》와, 조니 뎁의 상대 역할을 연기한 《럼 다이어리》에 출연하였으며, 할리우드 영화제에서 스포트라이트상을 수상했다. 2014년에는 《쓰리데이즈 투 킬》, 2015년에는 《매직 마이크 XXL》과 《대니쉬 걸》에 출연했다. 그녀는 슈퍼 히어로 영화 《저스티스 리그》(2017)와 《아쿠아맨》(2018)에서 메라 역할을 연기했다. 목차 1 성장 과정 2 경력 2.1 초기 경력 2.2 2009년-현재 3 사생활 4 자선 활동 5 필모그래피 5.1 영화 5.2 텔레비전 6 수상 및 후보 7 각주 8 외부 링크 성장 과정[편집] 허드는 1986년 4월 22일,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패트리샤 페이지(결혼전 성씨는 파슨스)는 국가소속 인터넷 연구원이며, 아버지 데이비드 클린턴 허드는 건축청부업자로 일했다.[1][2] 그녀에게는 휘트니라는 여동생이있다.[1] 허드는 오스틴에 위치한 세인트 마이클 가톨릭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 그만 두고 결국 홈스쿨링을 통해 졸업장을 받았다.[3] 허드가 16세 때,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고, 그 후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남자친구로부터 아인 랜드의 작품을 소개 받았고, 무신론자라고 선언했다.[3] 그녀는 "나는 랜드의 책을 모두 읽었고, 다 읽은 후 랜드의 이상에 사로 잡혔다. 모두 나 스스로를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다."라고 말했다.[3] 경력[편집] 초기 경력[편집] 허드의 초기 연기 작품으로는 케니 체스니의 "There Goes My Life"와 아이슬리의 "I Was Not Prepared"의 두 편의 뮤직 비디오와, The CW의 단편 시리즈인 《잭 & 바비》(2004)와 《더 마운틴》(2004)의 조연 역할과 10대 드라마 시리즈 《The O.C.》(2005)에서 판매원으로 출연하는 게스트 역할이었다. 그녀는 빌리 밥 손튼 주연의 스포츠 드라마 영화 《프라이데이 나잇 라이츠》로 스크린 데뷔를 했으며 상업적으로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4] 다음 2년 동안, 그녀는 《데드 섹시》(2005), 《프리스 투 페이》(2006), 《더 프린스》(2006)과 《알파 독》(2006)과 같은 몇 편의 장편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담당했으며,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주인공인 스펜서 리드의 사랑에 관심을 갖는 역할로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그녀는 독립 공포 영화 《Side FX》(2005)와 니키 카로 감독의 드라마 영화 《노스 컨츄리》(2005)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주인공의 10대 역할로 더욱 주목 받았다.[5] 또한 《모든 소년들은 맨디 레인을 사랑해》(2006)는 그녀의 첫 주연 역할 중 하나였던 슬래셔 영화이다. 감독인 조나단 레빈은 제목에 대해 관객을 선택했다고 말하면서 "어떤 유형의 아름다움과 허드가 가져온 일종의 타고난 정보가 당신이 매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당신은 누군가 그녀의 나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생각한 프로젝트는 꽤 놀랍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6] 이 영화 는 2006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초연 되었으며, 처음에는 와인스틴 컴퍼니가 배급사로 선정되었다.[7][8] 부정적인 테스트 상영회를 거친 후 와인스틴 컴퍼니는 이 영화를 권리를 포기했으며, 2008년 다른 배급 회사와 계약으로 영국에서 개봉 되었다.[9] 2013년까지 미국에서 영화는 공개되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허드가 2013년까지 가장 확실한 성과를 거뒀으며,[10] 〈워싱턴 포스트〉는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성과를 냈다고 밝혔다.[11] 허드는 다음 작품으로 The CW의 십대 드라마 《히든 팜스》에 주인공의 사랑에 관심을 가지는 역할에 캐스팅되었다. 방송사는 10대 시청자를 겨냥한 다른 시리즈의 여름 재방송을 대체하기를 원했다.[3] 이 시리즈는 2007년 5월 30일 미국에서 초연 되어 다소 찬반이 갈리는 평가를 받았다. TV 시청자들에게는 외면를 받으면서 결국 CW는 계획된 12편 중 8편만 방송했다.[12][13] 2007년 허드는 또한 단편 영화 《Day 73 with Sarah》,[14] 평단의 혹평을 받은 독립 드라마 영화 《리멤버 더 데이즈》와, 쇼타임 시리즈 《켈리포니케이션》의 에피소드에 출연했다.[15] 허드는 주드 아패토우가 제작한 스토너 코미디 영화 《파인애플 익스프레스》와[16] 무술 영화 《겟 썸》 에 출연한 2008년에 더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두 작품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그녀는 할리우드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또 다른 2008년 영화는 그녀가 앙상블 캐스트의 일부였던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인포머스》로[17] 2009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초연 되었고,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2009년-현재[편집] 2009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허드 2009년 허드는 공포 영화 《스텝파더》, 세 편의 코미디 영화 《엑스터미네이터스》, 《좀비랜드》, 《수상한 가족》에 출연했다. 후자에 대한 리뷰에서, 〈버라이어티〉는 영화의 가장 유명한 스타인 데미 무어에서 "그녀는 쇼를 훔친다"고 썼다.[18] 비평가 제임스 버라디넬리는 영화에 전반적인 부정적 리뷰를 썼지만 허드의 연기를 호평했다.[19] 2010년 그녀는 로맨틱 드라마 영화 《더 리버 와이》에 출연했으며 존 카펜터 감독의 영화 《더 워드》와 같은 호러 장르에서 그녀의 작업을 계속했다. 카펜터는 허드에 대해 "매우 똑똑하고, 매우 주도하며, 재능이있다"고 묘사했다.[20] 그녀는 또한 독립 스릴러 영화 《다크니스》를 공동 제작하고 주연했다.[21] 2010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허드 2011년, 허드는 헌터 S. 톰슨의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럼 다이어리》에서 상대 역할의 조니 뎁과는 정반대의 여성 리더로 등장했다. 이 영화는 혼합적인 리뷰를 받았으며,[22][23]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24][25] 허드의 다른 2011년 영화는 《드라이브 앵그리 3D》로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 역할로 출연했다.[26]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그녀의 역할, 즉 그녀의 딸을 컬트에서 구하기 위한 언데드 인간의 임무에 얽혀있는 웨이트리스와 "할 수있는 모든 일을 한다"고 썼다.[27] 2011년 2월에는 영국 TV 프로그램 《탑기어》에 출연했다.[28] 허드는 그녀가 스릴러 영화 《파라노이아》, 액션 코미디 영화 《마셰티 킬스》와 풍자 드라마 《시럽》에 출연한 2013년까지 새로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후자는 맥스 배리의 소설을 기반으로 했으며, 허드를 "놀랍다"고 불렀고 그녀가 "그 역할을 전멸했다.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했다.[29] 그녀의 유일한 2014년 영화인 액션 스릴러 《쓰리 데이즈 투 킬》은 흥행에 성공했다. 허드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의 제임스 모트람이 자신의 경력에서 "분수령의 해"라고 부른 2015년에 발표 된 네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30] 그녀는 채닝 테이텀이 연기하는 주인공과 어울리는 사진 작가로서 코미디 드라마 《매직 마이크 XXL》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작인 《매직 마이크》(2012)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큰 흥행 성공작이었다.[31] 〈Digital Spy〉는 "옆집에 설득력 있는 아가씨"라고 썼다.[32] 허드는 톰 후퍼 감독의 드라마 영화 《대니쉬 걸》(2015)에서 발레 댄서로서의 조연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제72회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초연 되어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33][34] 그녀는 또한 제임스 프랭코, 크리스찬 슬레이터, 에드 해리스와 함께 독립 범죄 스릴러 영화 《애더럴 다이어리》에 출연했다. 〈인디와이어〉는 영화에 복합적인 리뷰를 남겼는데, 허드는 "불평" 했지만 "많은 잠재력을 보이고 더 심각하게 받아 들여지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35] 그녀의 네 번째 역할은 2015년 뮤지컬 드라마 영화 《원 모어 타임》에서 크리스토퍼 월켄의 상대 역할이었다. 이 역할을 위해 그녀는 노래 수업을 듣고 피아노와 기타 레슨을 받았다.[36] 〈인터내셔널 비지니스 타임스〉는 허드에 대해 "방어력이 있는 역할로 진심 어린 순간을 나누기에 충분한 재능"이라고 설명했다.[37]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그녀의 연기에 "최고"와 "영화 무대"는 허드가 "존경할만한 직업"을 했다고 말했다.[38][39] 또한, 허드는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런던 필드》에서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당초 이 영화는 2015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초연 예정이었다.[40] 매튜 컬린 감독이 제작자를 상대로 사기 혐의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여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영화를 홍보하려는 소송을 제기한 이후 영화제 명단에서 뽑혔다.[41] 허드를 비롯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토론자의 언론과 산업 상영에 나오는 상영을 반대하면서 제작자에게도 글을 남겼다.[42] 이 영화에서 허드의 연기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43][44][45] 그녀는 "영화는 가장 어려운 영화 중 하나였으며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다...나는 그녀 [역할] 정의를 했다."고 말한다.[30] 허드는 DC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 영화 《저스티스 리그》(2017)에서 아틀란티안 여왕 메라 역할을 연기했다. 그녀는 《아쿠아맨》(2018)에서 이전보다 큰 비중으로 역할을 되풀이했다.[46][47] 사생활[편집] 2009년 허드 허드는 2010년 GLAAD의 25주년 기념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했으며,[48] "나는 남성과 성공적인 연연 관계를 맺었지만 현재는 여성와의 관계에 있다. 커밍아웃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단지 성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고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말했다.[49] 그녀의 결정에 대해 그녀는 "언론에서의 역할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했다. 나는 문제의 일부분인가? 그리고 수 백만명의 열심히 일하는 납세자 미국인들이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평등을 부정했을 때 유행병 문제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라고 말했다.[48] 허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동성의 사진 작가 타샤 반 리와 연인 관계였다.[48][50] 그녀는 2011년 영화 《럼 다이어리》를 촬영하면서 배우 조니 뎁을 만났고 다음 해 함께 동거를 시작했다.[50][51] 그들은 2015년 2월 3일에 로스 앤젤레스에 있는 그들의 저택에서 비밀 예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51][52] 2015년 4월, 허드와 뎁은 그의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촬영으로 퀸즈랜드로 민간 제트기를 타고 함께 이동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세관에 요크셔테리어 두 마리를 신고하지 않아 호주의 애완동물 검역법을 위반했다. 호주 동물 검역법상 동물이 호주에 입국하기 위해선 반드시 신고를 해야하며 약 10일 간 격리돼있어야 하는데 호주 당국은 광견병 예방을 위해 엄격하게 생물 안전 규칙을 적용하고 있다.[53][54] 그녀가 수면 부족으로 인해 실수를 저질렀다고 진술을 한 검역 문서를 위조한 것에 유죄를 인정했다.[55] 그녀는 1,000 달러의 벌금을 냈다.[56][57] 허드와 뎁은 또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사람들에게 생물 보안법을 준수 할 것을 촉구하는 비디오를 공개했다.[56] 〈가디언〉은 이 사건을 호주 역사상 최고의 범죄 검역 사건으로 규정했다.[56] 2016년 5 월 23일 허드는 뎁과의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58][59] 5일 후, 그녀는 자신의 관계에 대해 "구두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학대했다"는 법원의 선언문에서 이혼 신청을 하기 2일 전에 발생한 폭력 사태와 관련하여 임시 금지 명령을 받았다.[60][61][62][63][64][65] 이에 대해 뎁의 변호사들은 그녀가 "학대 혐의로 조기 재정적 해결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60][66] 다음 3개월 동안 허드의 변호사들은 그 관계에서 다른 혐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언론에 제공했으며,[66] 한 사건에서 부상자의 이미지가 〈피플〉에 의해 발표되었다.[60] 합의는 2016년 8월 16일에 이루어졌고,[67] 이혼은 2017년 1월에 최종 완료되었다.[68] 청문회는 이 금지 명령을 기각하고, "관계가 격렬한 열정과 때때로 휘발성이지만 항상 사랑에 묶여있다"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어느 당사자도 금전적 이익을 위해 거짓 비난을 하지 않았다. "육체적 또는 정서적인 해를 끼칠 의도는 전혀 없었다."라고 말했다.[67] 그녀는 뎁으로부터 위자료로 700만 달러를 받았으며, 그녀는 미국 시민 자유 연맹과 로스엔젤레스 아동 병원에 기부 할 계획을 밝혔다.[67][69] 2018년 4월, 로스앤젤레스 아동 병원은 허드가 2017년에 재단에 1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밝혔다.[70] 허드는 2017년 8월까지 미국의 CEO 엘론 머스크와 데이트했다.[71] 자선 활동[편집] 허드는 북미 내에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높여 왔다. 배우 가보리 시디베와 프리다 핀토와 함께 그녀는 2016년 〈글래머〉의 올해의 여성 어워드에서 상을 수상한 성폭력 피해자 에밀리 도를 대신하여 연설을 읽었다.[72] 같은 해 허드는 #GirlGaze Project에 대한 가정 폭력에 대한 공공 서비스 발표했고,[73] 조니 뎁과의 경험에 대한 공개 서한을 포터 매거진의 2016년 12월호에 썼다.[74] 필모그래피[편집] 영화[편집] Key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를 나타낸다. 년도 제목 역할 참고 2004 프라이데이 나잇 라잇츠Friday Night Lights 마리아 2005 Side FX 샤이 2005 데드 섹시Drop Dead Sexy 캔디 2005 노스 컨츄리North Country 어린 조시 에이미스 2006 프리스 투 페이Price to Pay 트리시 2006 더 프린스The Prince 세레나 2006 알파 독Alpha Dog 알마 2006 모든 소년들은 맨디 레인을 사랑해All the Boys Love Mandy Lane 맨디 레인 2007 스핀Spin 앰버 2007 Day 73 with Sarah 마리 단편 영화 2007 리멤버 더 데이즈Remember the Daze 줄리아 포드 2008 겟 썸Never Back Down 바자 밀러 2008 인포머스The Informers 크리스티 2008 파인애플 익스프레스Pineapple Express 앤지 앤더슨 2009 엑스터미네이터스ExTerminators 니키 2009 수상한 가족The Joneses 젠 존스 2009 좀비랜드Zombieland 406 2009 스텝파더The Stepfather 켈리 포터 2010 다크니스And Soon the Darkness 스테파니 또한 공동 프로듀서 2010 더 리버 와이The River Why 에디 2010 더 워드The Ward 크리스틴 2011 드라이브 앵그리 3DDrive Angry 피퍼 2011 럼 다이어리The Rum Diary 체놀트 2013 시럽Syrup 식스 또한 총괄 프로듀서 2013 파라노이아Paranoia 에마 제닝스 2013 마셰티 킬스Machete Kills 미스 샌 안토니오 2014 쓰리 데이즈 투 킬3 Days to Kill 비비 요원 2015 애더럴 다이어리The Adderall Diaries 라나 에드몬드 2015 원 모어 타임One More Time 주드 2015 매직 마이크 XXLMagic Mike XXL 조 2015 대니쉬 걸The Danish Girl 울라 폴슨 2017 아이 두... 언틸 아이 돈트I Do... Until I Don't 패니 2017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 메라 2018 허 스멜Her Smell 젤다 2018 런던 필드London Fields 니콜라 식스 2013년 촬영 2018 아쿠아맨Aquaman 메라 [75] 2019 걸리Gully 조이스 제작 후반 텔레비전[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2004 잭 & 바비Jack & Bobby 리즈 에피소드: "Pilot" 2004 더 마운틴The Mountain 라일리 에피소드: "A Piece of the Rock" 2005 The O.C. 판매원 에피소드: "Mallpisode" 2006 크리미널 마인드Criminal Minds 릴라 아처 에피소드: "Somebody's Watching" 2007 켈리포니케이션Californication 앰버 에피소드: "California Son" 2007 히든 팜스Hidden Palms 그레타 매슈스 시리즈 주연; 8 에피소드 2011 탑기어Top Gear 자신 에피소드: "Episode #16.5" 2011 더 플레이보이 클럽The Playboy Club 버니 모린 시리즈 주연; 7 에피소드 2015 오버홀린Overhaulin' 자신 에피소드: "In Too Depp" 수상 및 후보[편집] 년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08 영 할리우드 어워드 올해의 주목할만한 상 빈칸 수상 2009 디트로이트 영화 비평가 협회 최우수 앙상블상 좀비랜드 후보 2010 스크림 어워드 최우수 앙상블상 수상 댈러스 국제 영화제 댈러스 스타상 빈칸 수상 2011 할리우드 영화제 스포트라이트상 럼 다이어리 수상 2014 Texas Film Hall of Fame Inductee 빈칸 수상 2018 골든 래즈베리상 최악의 여우주연상 런던 필드 미결정 각주[편집] ↑ 가 나 다 “Amber Heard”. 《TV Guide》. 2015년 2월 1일에 확인함. ↑ “Five things you need to know about Amber Heard”. 《NewsComAu》. 2016년 4월 18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Keck, William (2007년 5월 30일). “Amber Heard will be heard”. 《USA Today》 (Mclean, Virginia: Gannett Company). ↑ "FRIDAY NIGHT F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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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유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찬란한 유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찬란한 유산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SBS TV 방송 기간 2009년 4월 25일 ~ 2009년 7월 26일 방송 시간 토, 일 밤 10시 ~ 11시 20분 방송 분량 1시간 20분 방송 횟수 28부작 기획 SBS 드라마본부 책임프로듀서 허웅 편집 조인형 촬영 전현석 제작사 팬 엔터테인먼트 제작자 김종식, 김희열 연출 진혁 극본 소현경 출연자 한효주, 이승기, 문채원, 배수빈 외 음악 전창엽 여는 곡 너 하나만 닫는 곡 위와 같음. 음성 2채널 스테레오 사운드(아날로그)2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외부 링크 찬란한 유산 홈페이지 《찬란한 유산》은 2009년 4월 25일부터 2009년 7월 26일까지 방영된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이다. 줄여서 찬유라고도 부르는데 해당 협찬사가 수행하고 있는 봉사활동 중의 하나인 '사랑의 밥차' 행사를 드라마속 기업활동의 하나로 묘사(노숙자에게 설렁탕 제공)한 데다가 해당 행사의 현수막을 거의 유사한 형태로 일부 노출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았다[1]. 목차 1 줄거리 2 등장 인물 2.1 주요 인물 2.2 은성 & 승미의 가족 2.3 환의 가족 2.4 준세의 가족 2.5 그 외 3 제작진 4 OST 4.1 Part 1 4.2 Part 2 5 시청률 6 연장 7 수상 내역 8 해외 방영 9 참고 사항 10 각주 11 외부 링크 줄거리[편집] 중견 기업을 이끄는 할머니 덕에 재벌 3세로 살아가던 선우환(이승기 분)이 우연히 할머니를 돕다 자신의 유산을 대신 상속받게 된 고은성(한효주 분)과 이리저리 얽히면서 사랑을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다. 여기에 모든 것을 갖춘 남자 박준세(배수빈 분)와 어머니의 재혼으로 고은성과 ‘동갑내기 자매’가 된 유승미(문채원 분)가 이들과 사각 관계를 형성한다.[2] 등장 인물[편집] 주요 인물[편집] 한효주 : 고은성(25세) 역 고평중의 딸. 어린시절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진성식품의 장숙자 회장을 구한 인연으로 장 회장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설렁탕 체인점에서 일하게 됨과 동시에 유산상속자가 되었다. 장 사장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 이승기 : 선우환(27세) 역 설렁탕 체인점인 ‘진성식품’ 장숙자 사장의 손자. 부자 할머니를 두었고 어릴 적 아버지가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시는 장면을 목격하여 너무 곱게 자란 탓에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 안다. 식당에 출근하여 손님들의 시중을 드는 허드렛일에서부터 회사일을 배우고 있다. 고은성과 엮이게 되면서 차가웠던 그의 마음이 따뜻하게 변화해 나간다. 문채원 : 유승미(25세) 역 은성 계모 백성희의 딸. 친구인 선우환과 같이 있기 위해, 진성식품 마케팅부에 취직했다. 은성을 개인적으로 매우 싫어한다. 배수빈 : 박준세(29세) 역 박 변호사의 아들로 퓨전 레스토랑 '나무'를 경영하고 있다. 은성 & 승미의 가족[편집] 전인택 : 고평중 역 은성의 아버지. 건설회사 사장이었지만 회사가 부도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강도를 당하고 난 후 어느날 TV에서 우연히 자신과 나이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가스폭발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가족들이 자신을 죽은 것으로 오해하면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게 되나 결국 아버지가 죽은줄로만 알았던 은성과 재회한다. 김미숙 : 백성희 역 은성 계모, 고평중의 아내, 승미의 엄마. 살기위해, 딸을 위해 간교해져야 한 여인. 연준석 : 고은우 역 은성의 남동생(자폐3급 판정, 서번트 증후군). 피아노에 재능이 있으며 자폐증이 있지만 기억력이 매우 좋은 편이다. 환의 가족[편집] 반효정 : 장숙자 역 환의 조모, 주식회사 ‘진성식품’ 대표이사. 과부인 자신을 가엽게 여긴 국밥집 아주머니에게서 식당일을 배웠으며, 아주머니에게 식당을 물려받아 진성식품으로 키워냈다. 곱게 키운 손자 환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 때문에 천방지축 청년이 되자, 회사를 은성에게 물려주고, 손자는 자신의 힘으로 살도록 한다. 유지인 : 오영란 역 환의 어머니. 과부인 며느리를 가엽게 생각한 시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으로 세상 물정도,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방법도 모른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회사를 은성에게 물려주자 충격을 받는다. 표상철 집사에게 빨래, 다림질 등의 집안 살림을 배우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고 있다. 한예원 : 선우정 역 환의 여동생. 진성식품 직영 2호점 점장이었지만 본업에는 관심이 없으며 쇼핑을 즐긴다. 철부지같은 성격이며 준세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가 은성을 좋아하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준세의 가족[편집] 최정우 : 박태수 역 준세의 아버지이자 변호사. 진성설렁탕 이사도 겸하고 있으나 나중에는 진성식품 경영권을 쥐려는 야욕을 표방한다. 그 외[편집] 이승형 : 표상철 역 집사 겸 요리사. 조직폭력배였으나, 교도소에서 장숙자 사장에 대한 잡지기사를 읽고 마음을 바로잡았다. 손끝이 섬세하며, 그를 아낀 장숙자 사장의 배려로 진성식품의 요리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집사 겸 요리사가 되었다. 과부이고 시어머니의 재산때문에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 줄을 모르는 오영란을 가엽게 생각한다. 김재승 : 이형진 역 은성의 옛 남자친구로 준세의 집에서 얹혀사는 건축사이다. 민영원 : 이혜리 역 은성의 오랜 친구.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클럽에서 일하던 도중 은성의 부암동방을 지키기 위해 준세의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 손여은 : 정인영 역 은성의 친구. 은성과는 대학시절부터 만났다. 정석원 : 진영석 역 - 환의 친구 백승현 : 이준형 역 - 진성설렁탕 본점 점장 → 진성설렁탕 2호점 점장 박상현 : 박수재 역 - 진성설렁탕 본점 직원 → 진성설렁탕 2호점 직원 이상훈 : 진성식품 공장장 역 - 환의 아버지 친구, 환의 메신저 문영미 : 진성설렁탕 본점 주임 역 이종구 : 은우를 잠시 맡았던 보육원 원장 역 최영인 : 은우를 잠시 맡았던 보육원 원장의 부인 역 김유라 : 고급 쥬얼리 쇼장에서 백성희를 험담하는 여자 역 차나연 : 고급 쥬얼리 쇼장에서 백성희를 험담하는 여자 역 이광세 : 김용호 역 - 은행 지점장 박팔영 : 강만호 역 - 사장, 고평중의 친구 설지윤 : 술집 사장 역 민병애 : 고평중에게 돈을 빌려준 여자 역 김광인 : 공인중개사 역 김추월 : 정인영의 어머니 역 신준영 : 찜질방에서 은우를 때리는 남자 역 민준현 : 클럽의 웨이터 역 안수호 : 자기 노점상 자리라며 장숙자에게 비켜달라는 남자 역 공재원 : 의사 역 오아랑 : 진성설렁탕 2호점 점장 역 김성오 : 환의 친구 역 박성균 : 호텔 관계자 역 박규점 : 백성희의 가구매장 이사장 역 공유석 : 백성희가 은우를 찾으라고 시킨 남자 역 김연수 : 은우를 찾으러 온 남자가 만난 보육원 교사 역 유옥주 : 음악학원의 원장 역 김호창 : 영석의 Bar에 온 손님 역 조성희 : 환을 클럽으로 끌어들이는 웨이터 역 단강호 : 환이 접촉사고를 낸 차량의 운전자 역 최인숙 : 환에게 팁을 주는 여자 역 유금 : 환에게 팁을 주는 여자 역 손영순 : 진성설렁탕 30주년 기념행사에 대해 홍보하는걸 듣는 할머니 역 최교식 : 설렁탕 납품하는 공장의 직원 역 한창현 : 설렁탕 납품하는 공장의 사장 역 - 준세의 선배 이정훈 : 금융감독원 직원 역 정병철 : 하늘교회 관리자 역 유순철 : 설렁탕을 한 그릇만 배달시킨 할아버지 역 운기호 : 장숙자를 수술한 의사 역 나재균 : 진성식품 오 이사 역 이정성 : 진성식품 이사 역 오정원 : 백성희에게 꽃집 매출에 대해 물어보는 여자 역 제작진[편집] 제작지원 : 신선설농탕, 삼천리자전거 촬영협조 : SK건설 기획 : SBS 드라마본부 CP : 허웅 제작 : 김종식, 김희연 제작총괄 : 곽훙석 제작프로듀서 : 윤석훈, 정승재 기획팀장 : 서운혜 기획프로듀서 : 윤고운 마케팅프로듀서 : 김미정 제작행정 : 정희영 법률자문 : 박종술 법무법인 : 가인 유지선 조명감독 : 전성근 조명 : 이우균, 김종성, 김옥, 최승민 동시녹음 : 한경환, 임용균, 김명수 크레인 : 문군현, 임대기, 이성서 보조출연 : 태양기획, 이장석, 서기용 세트협력 : 아트원 소품협력 : 아트검 소품 : 프로아트, 안병렬, 박명희 특수효과 : 도광섭 캐스터 : 방대현, 이충선 미술 : 수도, 이인철 음향효과 : 황인수, 김용배, 오호영, 박광희 음악감독 : 전창엽 음향효과 : 한도환 작곡 : 전명룡, 기세인, 김장원, 이건영 편집 : 쿨미디어 조인형 편집보 : 김아룸 홍보 : 홍성진, 김연식 극본 : 홍림, 김상면 구성 : 배수현 진행 : 주재영, 이창주 스크립터 : 이윤아 섭외 : 민광진, 김자욱 PD : 오세현, 김해주 극본 : 소현경 대표작 : SBS《그 여자》, MBC《얼마나 좋길래》외 다수 연출 : 진혁 대표작 : SBS《온에어》, SBS《바람의 화원》 조연출 : 오진석, 김유진 OST[편집] Part 1[편집] 2009년 5월 1일 발매 〈내 가슴에 사는 사람〉 - 이수 〈사랑에 미쳐서〉 - 지선 〈너 하나만〉 - 강하니 Part 2[편집] 2009년 6월 15일 발매 〈사랑은 벌이다〉 - 케이윌 〈Spring Rain〉 - 지혜 〈그리운 누나〉 - V.A 〈환이를 잡아라〉 - V.A 〈우리가 가족이니?〉 - V.A 〈Funny Life〉 - V.A 〈너에게 가는 길〉 - V.A 〈Smile working〉 - V.A 〈마지막 거짓말〉 - V.A 〈티격태격〉 - V.A 〈이별의 기억〉 - V.A 〈Spring Rain (Guitar Ver.)〉 - V.A 〈운명, 그 두 번째 이야기〉 - V.A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09년 회차 방송일 TNmS 시청률[3] AGB 시청률[4]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제1회 4월 25일 16.9% 17.0% 15.9% 15.8% 제2회 4월 26일 19.2% 19.6% 19.6% 19.4% 제3회 5월 2일 15.9% 15.6% 17.9% 18.8% 제4회 5월 3일 21.7% 21.6% 23.2% 23.9% 제5회 5월 9일 21.8% 23.1% 22.8% 23.8% 제6회 5월 10일 26.5% 27.7% 26.9% 27.6% 제7회 5월 16일 24.7% 25.1% 25.1% 25.4% 제8회 5월 17일 28.5% 29.6% 28.1% 29.1% 제9회 5월 23일 26.8% 27.4% 27.2% 27.8% 제10회 5월 24일 29.1% 29.4% 28.8% 30.2% 제11회 5월 30일 28.5% 28.1% 27.2% 28.4% 제12회 5월 31일 33.4% 33.3% 32.0% 34.2% 제13회 6월 6일 28.5% 29.2% 30.0% 30.8% 제14회 6월 7일 33.4% 33.3% 32.4% 33.5% 제15회 6월 13일 30.9% 30.9% 30.6% 31.5% 제16회 6월 14일 34.1% 34.4% 33.4% 33.9% 제17회 6월 20일 32.9% 32.7% 32.8% 33.5% 제18회 6월 21일 35.5% 36.1% 34.6% 34.6% 제19회 6월 27일 33.0% 33.8% 33.3% 33.8% 제20회 6월 28일 39.9% 40.6% 38.4% 38.8% 제21회 7월 4일 35.6% 35.7% 35.7% 35.6% 제22회 7월 5일 39.7% 40.1% 39.0% 38.5% 제23회 7월 11일 38.5% 37.6% 37.2% 37.2% 제24회 7월 12일 41.8% 41.7% 41.3% 41.2% 제25회 7월 18일 40.1% 39.9% 39.3% 39.0% 제26회 7월 19일 43.4% 44.0% 42.2% 42.8% 제27회 7월 25일 44.6% 45.3% 40.5% 39.9% 제28회 7월 26일 47.1% 47.4% 45.2% 46.0% 평균 시청률 31.9% 32.2% 31.5% 32.0% 연장[편집] 2009년 6월 4일 : 찬란한 유산 방영 분량이 26부작에서 2회 연장되어 28부작으로 변경 및 확정되었다. 수상 내역[편집] 2009년 S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 김미숙 2009년 SBS 연기대상 특별기획부문 남자 연기상, 10대 스타상, 베스트커플상 이승기 2009년 SBS 연기대상 특별기획부문 여자 연기상, 10대 스타상, 베스트커플상 한효주 2009년 SBS 연기대상 공로상 반효정 2010년 제5회 서울 드라마 어워즈 한류드라마부문 여자배우상 한효주 2010년 제5회 서울 드라마 어워즈 인기상 이승기 2011년 제17회 상하이 TV페스티벌 아시안 TV시리즈 특별상[5] 2011년 제44회 휴스턴 국제 필름 페스티벌 TV시리즈 장편드라마 부문 대상[6] 해외 방영[편집]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은 SBS와의 판권 계약에 따라 유럽,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의 81개국에 《찬란한 유산》의 무상 방영을 지원하기로 하였다.[7] 2010년 3월 2일부터 일본 후지 TV '한류 알파'라는 프로그램 통해 방영되었으며, 3월 24일에는 9.7% 시청률을 기록하며 일본 TV 동시간대 1위를 기록했다.[8] 참고 사항[편집] 당초 제목은 《인생은 아름다워》였으나, 동명의 영화와 혼동을 피하고 드라마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찬란한 유산》으로 제목을 변경하였다.[9] 한효주가 맡았던 고은성 역은 당초 박보영이 낙점되었으나 스케줄 문제로 고사했다.[10] 자극적인 소재와 개연성 부족한 일명 ‘막장드라마’가 대세인 2009년 상반기 드라마 코드에 반대되는 '착한 드라마' 라는 호평을 들으며,[11] 24회부터는 전국 시청률 40%를 돌파하기도 하였다. 우연성 문제[12] 때문에 2009년 12월 열린 제 22회 한국방송작가상 드라마 부문 최종 후보에서 탈락했다. OST 중 <운명 그 두 번째 이야기> 는 SBS 《어느날 갑자기》의 〈운명〉을 편곡한 곡이다. 각주[편집] ↑ 봉준영 (2009년 6월 25일). “'시티홀', 욕설-간접광고로 방통심의위 '경고' 조치”. 마이데일리. 2019년 4월 8일에 확인함. ↑ 강명석 외 (2009년 4월 22일). “SBS <찬란한 유산>│나의 피 같은 유산 되찾기”. 텐아시아. 2016년 8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TNmS 멀티미디어 홈페이지 참조. ↑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 참조. ↑ 봉준영 기자 (2011년 4월 19일). “'찬란한 유산', 상하이TV페스티벌 특별상”. 노컷뉴스. ↑ 윤고은 기자 (2011년 6월 12일). “이승기·한효주 '찬란한유산', 휴스턴 국제필름페스티벌 대상”. 연합뉴스. ↑ 인터넷뉴스팀 (2010년 1월 28일). “‘찬란한 유산’ 81개국 무상 방영”. 동아닷컴. ↑ 최은영 기자 (2010년 3월 25일). “'찬란한 유산', 일본서도 시청률 대박 '동시간대 1위'”. 이데일리 SPN.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장서윤 기자 (2009년 4월 22일). “TV 드라마, 방송앞두고 잇단 제목변경…왜?”. 이데일리 SPN. ↑ 서병기 (2009년 7월 22일). “‘찬유’ 한효주, 고은성역 박보영과 경쟁?”. 헤럴드POP. 2017년 1월 11일에 확인함. ↑ 이해림 (2009년 7월 16일). “‘찬란한 유산’, 찬란한 국민 드라마!”. 무비위크. 2009년 7월 20일에 확인함. ↑ 김은구 (2009년 12월 17일). “'선덕'·'찬유' 후보 오른 작가상 드라마부문, 수상자 없는이유”. 이데일리. 2016년 7월 1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SBS 드라마 찬란한 유산 홈페이지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가문의 영광(2008년 10월 11일 ~ 2009년 4월 19일) 찬란한 유산(2009년 4월 25일 ~ 2009년 7월 26일) 스타일(2009년 8월 1일 ~ 2009년 9월 20일) vdeh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1990년대 후반1995년 《코리아게이트》(토요일 2회 연속 방영) 1996년 《임꺽정》 1997년 《아름다운 그녀》 1998년 《모래시계》(재방송) 《삼김시대》 2000년대 전반2002년 《유리구두》 《라이벌》 《대망》 2003년 《태양 속으로》 《천년지애》 《스크린》 《첫사랑》 《완전한 사랑》 2004년 《발리에서 생긴 일》 《폭풍 속으로》 《파리의 연인》 《매직》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2000년대 후반2005년 《봄날》 《그린 로즈》 《온리 유》 《해변으로 가요》 《프라하의 연인》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2006년 《사랑과 야망》 《게임의 여왕》 2007년 《사랑에 미치다》 《푸른 물고기》 《불량 커플》 《칼잡이 오수정》 《조강지처 클럽》 2008년 《가문의 영광》 2009년 《찬란한 유산》 《스타일》 《그대, 웃어요》 2010년대 전반2010년 《인생은 아름다워》 《시크릿 가든》 2011년 《신기생뎐》 《여인의 향기》 《폼나게 살거야》 2012년 《바보엄마》 《신사의 품격》 《다섯 손가락》 《청담동 앨리스》 2013년 《돈의 화신》 《출생의 비밀》 《결혼의 여신》 《세 번 결혼하는 여자》 2014년 《엔젤 아이즈》 《끝없는 사랑》 《미녀의 탄생》 2010년대 후반2015년 《내마음 반짝반짝》 《이혼변호사는 연애중》 《너를 사랑한 시간》 《애인 있어요》 2016년 《미세스 캅 2》 《미녀 공심이》 《끝에서 두번째 사랑》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단막극) 2017년 《언니는 살아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2018년 《착한마녀전》 《시크릿 마더》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미스 마 - 복수의 여신》 《운명과 분노》 아침 | 일일 | 월화 | 수목 | 금토 | 주말 (극장 · 특별기획 · 연속극)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찬란한_유산&oldid=24052455" 분류: 2009년 드라마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팬 엔터테인먼트 텔레비전 프로그램소현경 시나리오 작품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PortuguêsไทยTagalog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7일 (수) 23: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석기 (1954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석기 (1954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석기金碩基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54년 8월 6일(1954-08-06) (64세)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거주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학력 동국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경력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소속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의원 선수 1의원 대수 20정당 자유한국당지역구 경북 경주시당내 직책 지방자치위원장 김석기(金碩基, 1954년 8월 6일 ~ )는 대한민국의 외무공무원이자 경찰공무원이었으며, 한국공항공사 사장이었으나 20대 총선 출마를 위하여 임기를 10개월 남겨두고 한국공항공사 사장직을 사퇴하였다.[1]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경주시에 출마, 당선되었다. 목차 1 학력 1.1 비학위 수료 1.2 명예 박사 학위 2 경력 3 훈포상 4 비판 및 행적 4.1 용산 참사 관련 4.2 총선을 위한 임명직 조기사퇴관련 5 역대 선거 결과 6 같이 보기 7 각주 8 참고 문헌 9 외부 링크 학력[편집] 1967년 계림초등학교 졸업 1970년 경주중학교 졸업 1973년 대륜고등학교 졸업 1978년 영남대학교 행정학사 1986년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31기 1994년 일본 게이사쓰 대학교 경찰행정본과대학원 경찰행정학과 행정학 석사 76기 2008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 비학위 수료[편집] 2009년 ~ 2010년 미국 보스턴대학교 객원연구원 명예 박사 학위[편집] 2010년 용인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경력[편집] 1979년: 경찰간부후보생 제 27기, 경위임관 (수석졸업. 박정희대통령상수상) 1992년 ~ 1994년: 일본경찰대학교본과 76기졸업 1994년 ~ 1997년: 주일본국오사카총영사관영사 1997년 ~ 1998년: 인천시 연수경찰서 서장 1998년 ~ 1999년: 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 과장 1998년 ~ 1999년: 서울수서경찰서 서장 2000년 ~ 2003년: 주일본국 한국대사관 외사협력관 2003년 ~ 2004년: 서울지방경찰청 경무부 부장 2004년: 경찰청 경무기획국 국장 2004년 ~ 2006년: 경북지방경찰청장 2006년: 대구지방경찰청장 2006년 ~ 2008년: 경찰종합학교 교장 2008년: 경찰청 차장 2008년 ~ 2009년: 서울지방경찰청 청장 2009년: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 2011년: 주일본국 오사카총영사관 총영사 2012년: 영남대학교행정대학원객원교수 2013년 ~ 2015년: 한국공항공사사장 2013년 ~ : 국제공항협의회(ACI)아시아태평양지역이사회이사 2014년 12월 ~ : 한국항공보안학회(KAFAS)초대회장 2016년 5월 ~ 2020년 5월: 제20대 국회의원 (경북 경주시) 2016년 6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자유한국당 경북도당 수석부위원장 2017년 3월 ~ 2017년 7월: 자유한국당 중앙연수원 원장 자유한국당 경북도당 윤리위원장 2017년 7월 ~ 2019년 3월 : 자유한국당 재외동포위원장 2017년 10월 : 자유한국당 정치보복대책특별위원회 위원 2017년 12월 ~ 2018년 12월: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2017년 12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재난안전대책특별위원회 위원 2018년 3월 ~ 2018년 8월: 자유한국당 경북도당 위원장 자유한국당 이철우 경상북도지사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 2018년 7월 ~ 2019년 3월 : 자유한국당 전략기획부총장 2018년 7월 ~ :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토교통위원회 위원 2018년 10월 ~ 2019년 1월: 자유한국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 위원 2018년 10월 ~ 2019년 6월 : 제20대 국회 후반기 에너지특별위원회 위원 2018년 12월 ~ 2019년 2월 : 자유한국당 당헌당규개정위원회 위원 2018년 12월 ~ : 자유한국당 경북도당 경주시 당협위원장 2019년 1월 ~ 2019년 2월 : 자유한국당 2.27 전대 선관위 부위원장 2019년 3월 ~ : 자유한국당 지자치위원장 훈포상[편집] 1999년 제 54주년 경찰의 날 근정포장 2004년 홍조근정 훈장 비판 및 행적[편집] 용산 참사 관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용산 철거 현장 화재 사고입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4구역 재개발의 보상대책에 반발해 온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 등 30여 명이 적정 보상비를 요구하며 경찰과 대치하였다. 전철연은 주변건물에 화염병을 던져 화재를 발생시켰고 특히 대로와 버스에까지 화염병과 벽돌을 던지며 무고한 시민을 위협하였다. 이에 경찰은 시위자들이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불법 행위를 중단할 것을 계속해서 경고한다.[2] 시위자들은 진압을 위해 투입된 경찰특공대에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지는 등 저항하다가 화재를 발생시켰으며, 경찰특공대원 1명을 포함하여 6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하였다.[3] 그러나 수사발표와는 다른 주장과 증언도 많다. 증인으로 나온 경찰특공대원은 “진압 당시 화염병 던지는 것은 본 적이 없으며,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들린 뒤 불이 올라 화염병으로 생각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다른 경찰특공대원은 “물이 많이 쏟아지고 갑자기 사람이 몰리면서 망루 3층 바닥이 꺼지고 시너통이 넘어졌다”고 증언했다.[4] 그리고 안전 대책이 미비했음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애초 진압 계획에는 유류 화재 진압을 위한 화학 소방차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는데, 용산경찰서에서는 이를 제외하였다.[5] 경찰은 대량의 인화 물질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1차 진입 당시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이것으로 대형 화재의 위험성이 예견되었는데, 안전 조치 없이 2차 진입을 강행하여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는 견해가 있다.[6] 검찰은 용역 업체 직원 7명을 기소하였고, 1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용산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등 7명에게 징역 5~6년을 선고했으며, 2심에서는 사회적 약자이고 화염병 투척이 우발적이었다는 이유로 형량을 1년씩 감경했다. 대법원 2부(주심 양승태 대법관)는 징역 4~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7] 일각에서는 경찰이 사전 경고 없이 진압을 하였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고 25시간 만에 진압을 한 점을 비판을 하고 있다. 검찰과 대법원에서 경찰의 법 집행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시위자와 경찰관 목숨을 잃은데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2009년 사퇴했다.[8] 총선을 위한 임명직 조기사퇴관련[편집] 이후 일본 오사카 주재 총영사를 지내었으나 임기 3년의 총영사직을 수락하고도 8개월만에 19대 총선 출마를 위해 사퇴하고 귀국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9] 이후 한국공항공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이 역시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20대 총선 출마를 위하여 사퇴하였다.[10]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총선 19대 국회의원 경북 경주시 무소속 33,975 표 28.87% 2위 낙선 총선 20대 국회의원 경북 경주시 새누리당 57,276 표 44.97% 1위 같이 보기[편집] 어청수 강희락 용산 철거 현장 화재 사고 각주[편집] ↑ '경영 공백' 공공기관 10여 곳…기관장 인선 큰 장 선다 2016년 2월 14일, 연합뉴스 ↑ 김석기를 위한 변명 <<세계일보>> ↑ 용산참사 수사 발표, 시너 2차례 뿌리고 화염병… 6초만에 망루전체 인화 <<문화일보>> ↑ 진압대원 “불날 당시 화염병 못봤다”…공소사실 ‘흔들 한겨레, 2009년 10월 9일 ↑ “警, 유류 화재용 소방차 "필요없다" 빼”. 한국일보. 2009년 2월 10일. 2011년 1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2월 7일에 확인함. ↑ “용산 참사 '편파수사' 논란”. MBC. 2009년 2월 10일. 2012년 2월 7일에 확인함. ↑ '용산참사' 농성자에 징역 4~5년 확정(종합) <<연합뉴스>> ↑ "도의적 책임지겠다" 김석기 내정자 자진 사퇴<<SBS>> ↑ 김석기 前 오사카 총영사의 경솔한 처신 국민일보, 2011년 11월 8일 ↑ 용산참사 7년, ‘금배지’ 노리는 김석기의 7년 한겨레, 2016년 1월 20일 참고 문헌[편집] 인터넷 대한뉴스 2007. 5. 2. 국민일보 2008.07.29 시사IN 2009.02.05 외부 링크[편집] 싸이월드 미니홈피 전임(초대) 초대 인천연수경찰서장1997년 7월 4일 ~ 1998년 3월 24일 후임윤재복 전임윤종옥 제3대 서울수서경찰서장1998년 7월 18일 ~ 1999년 6월 28일 후임양낙운 전임김상봉 제68대 경북지방경찰청장2004년 11월 12일 ~ 2006년 2월 20일 후임윤시영 전임강희락 제25대 대구지방경찰청장2006년 2월 21일 ~ 2006년 12월 3일 후임윤시영 전임최석민 제69대 경찰종합학교장2006년 12월 4일 ~ 2008년 3월 6일 후임박종환 전임강희락 제20대 경찰청 차장2008년 3월 5일 ~ 2008년 7월 22일 후임임재식 전임한진희 제66대 서울지방경찰청장2008년 7월 24일 ~ 2009년 2월 12일 후임주상용 (경찰) 전임성시철 제10대 한국공항공사 사장2013년 10월 17일 ~ 2015년 12월 22일 후임성일환(권한대행)윤왕로 전 임 정수성 제20대 국회의원(경북 경주시) 2016년 5월 30일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후 임 (현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석기_(1954년)&oldid=24491165" 분류: 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1954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경찰관계림초등학교 동문경주중학교 동문대륜고등학교 동문영남대학교 동문국방대학교 동문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일본 게이사츠 대학교 동문동국대학교 대학원 동문경주시 출신경찰간부후보생자유한국당 당원경주 김씨친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16: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고간 (후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간 (후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고간(高幹, ? ~ 206년 음력 3월)은 후한 말기의 관료이자 군인으로, 자는 원재(元才)이며 진류군 어현(圉縣) 사람이다. 동래태수 고신의 증손이자 사례교위 고사(高賜)의 손자, 촉군태수 고궁(高躬)의 아들이다. 황하 이북에서 할거한 대장군 원소의 외조카로, 일찍이 병주 일대를 장악하여 원가 분열 후 독립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목차 1 생애 2 일화 3 《삼국지연의》 속 고간 4 출전 5 고간의 친족관계 5.1 관련 인물 6 각주 생애[원본 편집] 초평 2년(191년), 순심·신평·곽도·장도와 함께 원소에게서 세객으로 파견되어, 기주를 다스리던 한복을 협박했다. 한복은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기주를 내주었다. 194년에는 7촌 조카[1] 고유를 불러 하북으로 오게 하였고, 이후 원소는 그를 병주자사에 임명하였다. 건안 7년(202년) 원소가 죽고 원상이 뒤를 이은 후 조조가 공격해 왔다. 원상은 자신의 부하 곽원을 보내 하동군을 공격하게 하고, 남흉노의 선우 호주천과 고간으로 하여금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곽원이 종요에게 패해 죽고, 호주천이 조조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병주로 돌아왔다. 건안 9년(204년), 원상이 조조에게 패하자 원상에게서 고간의 감찰역으로 파견을 와 있던 견초는 원상을 도울 것을 권하지만, 고간은 원상의 위기를 틈타 자립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은밀히 견초를 죽이려고 계획한다. 이를 알아챈 견초는 황급히 달아난다. 심배가 지키던 업이 함락당할 때, 고간 역시 독자적으로 업을 공격해 함락시키려고 획책했으나 업성 내부에서의 내응이 탄로나 내응자들이 철저히 주살되었다. 조조와의 정면 대결을 피했던 고간은 그대로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조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예전처럼 병주를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원상과 원희가 오환으로 달아난 후 조조의 시선이 오환에게 쏠리자, 그 틈을 타 이듬해 10월에 반기를 들고 호관(壺關)을 지켰다. 또 하동의 관리 위고(衛固)와 내통하여 하동을 장악하려 하였으며, 조조가 보낸 하동태수 두기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건안 11년(206년) 1월, 조조가 직접 공격해 오자, 고간은 부하에게 호관을 지키게 하며, 직접 흉노로 가 호주천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3월에 호관이 함락당하자 남쪽으로 달아나던 중 상락도위(上洛都尉) 왕염(王琰)에게 붙잡혀 죽었다. 일화[원본 편집] 고간은 본디 명성을 얻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므로 각지의 선비들과 어울려 사귀었고 전란으로 인해 생긴 유사들을 불러 모았는데, 이로 인해 고간에게 수많은 선비들이 귀의하였다. 중장통은 병주를 지날 때 고간을 만나 후한 대접을 받았다. 중장통은 고간이 거대한 포부가 있으되 거대한 재능은 없으며 선비를 경애하면서도 스스로를 높이 여기는 성품 때문에 사람을 가려 쓸 줄 모르는 점에 대해 충고하였으나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고 있던 고간은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 속 고간[원본 편집] 사서에서는 자립을 노리며 원상의 몰락을 방관하며 은밀히 모략을 꾸미는 등 야심가다운 다소 음험한 면모가 보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대체로 평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원소가 창정(倉亭)에서 조조와 싸울 때 병주의 군사 6만 명을 이끌고 합류했다. 패주하는 원소를 호위하다가 화살을 맞았으며, 여양(黎陽)에서도 원담(袁譚)과 원상을 도와 조조군과 싸웠다. 조조에게 항복했던 일은 나와 있지 않으며, 호관을 지키던 중 조조에게 항복한 장수 여광(呂曠)과 여상(呂翔)의 거짓 귀순에 속아 야습을 시도했다가 패하고 관을 빼앗기는 것으로 나온다. 출전[원본 편집] 진수, 《삼국지》 권24 한최고왕손전 배송지주 범엽, 《후한서》 권49 왕충왕부중장통열전 고간의 친족관계[원본 편집] 관련 인물[원본 편집] 고유 각주[원본 편집] ↑ 《삼국지》에서는 고간이 고유의 종형이라고 하였으나, 고간의 조부는 고유의 증조부 고식(高式)의 동생이므로 고간은 고유의 7촌 족숙이다. vdeh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군주한 영제 소제 헌제 위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촉 유비 유선 오 손견 손책 손권 손량 손휴 손호 진 사마염 기타 공손연 공손찬 도겸 동탁 마등 여포 원소 원술 유언 유장 유표 장각 장로 한수 참모 문관한 공융 교현 양표 왕윤 채옹 위 가후 곽가 곽회 동소 사마사 사마소 사마의 순욱 순유 양수 왕랑 왕숙 유엽 정욱 종요 종회 진군 화흠 촉 간옹 동윤 등지 마량 마속 미축 방통 법정 비의 손건 양의 유파 이적 장완 제갈량 진지 오 감택 고옹 노숙 반준 보즐 여범 우번 육손 장굉 장소 장제 제갈각 제갈근 주유 진 가충 순욱 장화 진수 기타 곽도 괴량 괴월 봉기 심배 이유 장송 저수 전풍 진궁 채모 허유 무장한 노식 동승 주준 하진 황보숭 위 가규 등애 방덕 만총 서황 손례 악진 우금 이전 장합 장료 전예 전위 조인 조진 조창 조홍 조휴 하후돈 하후연 학소 허저 촉 강유 관우 관평 마대 마초 엄안 오의 왕평 요화 위연 이엄 장비 장익 조운 주창 진도 하후패 황권 황충 오 감녕 능통 미방 반장 서성 육항 여몽 장흠 전종 정보 정봉 제갈정 주치 주태 주환 진무 태사자 하제 한당 황개 진 두예 문앙 문호 석포 양호 왕준 기타 고순 곽사 기령 맹달 문추 안량 양봉 이각 장임 제갈탄 화웅 여인한 당희 동태후 하태후 초선 헌목황후 위 견황후 곽귀인 양휘유 왕원희 장춘화 하후휘 촉 감부인 미부인 목황후 황월영 오 대교 소교 보연사 손노반 손부인 오부인 진 양염 양지 기타 채부인 채염 축융부인 비한족 가비능(선비) 구력거(오환) 답돈(오환) 동천왕(고구려) 맹획(남만) 어부라(흉노) 히미코(일본) 기타 관로 남화노선 사마휘 예형 우길 좌자 화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간_(후한)&oldid=24063337" 분류: 생년 미상206년 죽음원소와 주변 인물암살된 사람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EnglishFrançais日本語ไทย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9: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일리네어 레코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일리네어 레코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앰비션 뮤직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일리네어 레코즈 1LLIONAIRE RECORDS 형태 비상장, 주식회사, 힙합 레이블, 법인 사업체, 일반법인 산업 분야 음반 창립 2011년 1월 1일 창립자 이준경 (대표이사 사장 (CEO))신동갑 (대표이사 사장 (CEO)) 시장 정보 비상장 상장일 비상장 국가 대한민국 본사 소재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제금융로2길 37, 2404 (여의도동) 사업 지역 대한민국 핵심 인물 이준경신동갑 빈지노 사업 내용 음반 제작 및 기획공연 제작 및 기획 제품 가수음반공연의류 매출액 Dok2 1,232,332,442,220(2013년 기준) 주요 주주 이준경신동갑 웹사이트 www.illionaire.kr 일리네어 레코즈 1LLIONAIRE RECORDS 기본 정보 국가 대한민국 장르 힙합 활동 시기 2011년 ~ 현재 레이블 일리네어 레코즈 웹사이트 www.illionaire.kr 구성원 도끼 더 콰이엇 빈지노 일리네어 레코즈(ILLIONAIRE RECORDS)는 2011년 1월, Dok2와 The Quiett이 설립한 힙합 레이블이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해 있으며, 앞 글자 'I'를 숫자 '1'로 바꿔 "1LLIONAIRE"라 표기하기도 한다. 멤버로는 Dok2, The Quiett을 비롯하여 Beenzino가 속해있다. 산하 레이블로 앰비션 뮤직 (AMBITION MUSIK)을 두고 있다. 목차 1 역사 2 소속 가수 2.1 일리네어 레코즈 2.2 앰비션뮤직 3 디스코그래피 4 각주 역사[편집] 오랜 기간 활동했던 소울 컴퍼니에서 탈퇴를 결심한 The Quiett은 2010년 12월, 고별 콘서트를 갖고 탈퇴를 하였다. 탈퇴에 앞서 독자 레이블 설립을 계획하던 그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뮤지션이자 마찬가지로 맵더소울이 해체돼, 소속 없이 활동하였던 Dok2에게 레이블 설립을 제안하였다. 이후 공동 CEO로서 함께 설립을 준비하여 2011년 1월 1일에 자정, 힙합플레이야를 통해 공식 발표하였다.[1][2] 설립 후, 첫 콘서트 발표 및 "We Here"를 비롯한 무료 곡들을 배포하였다. 이후 2011년 6월 5일, 빈지노를 영입하였고 투어 및 콘서트 활동을 하였다. 2014년 5월 21일에 첫 레이블 앨범 11:11을 발표했다. 2016년 9월 29일 도끼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하위 레이블인 앰비션 뮤직(AMBITION MUSIK)을 설립한다고 밝혔다.[3] 이후 김효은, CHANGMO, Hash Swan을 소속 아티스트로 영입했다고 발표하였다.[4] 소속 가수[편집] 일리네어 레코즈[편집] Dok2 - 대표이사 (CEO) The Quiett - 대표이사 (CEO) Beenzino - 소속 아티스트 (Artist) 앰비션뮤직[편집] 김효은 CHANGMO Hash Swan ASH ISLAND Way Ched 릴러말즈 디스코그래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일리네어 레코즈의 음반입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엠비션뮤직의 음반입니다. 각주[편집] ↑ “더콰이엇(The Quiett) - 'AMBITIQN' 인터뷰”. 《힙합플레이야》. 2013년 3월 15일. ↑ “[인터뷰] 일리네어 (illionaire)”. 《힙합엘이》. 2011년 5월 17일. ↑ “도끼·더콰이엇 새 레이블 설립 `내일부터 아티스트 공개`”. 《stoo.asiae.co.kr》. 2016년 10월 3일에 확인함. ↑ “김효은·창모·해쉬스완, 도끼·더콰이엇 앰비션뮤직行 '확정'(종합)”. 2016년 10월 2일. 2016년 10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0월 3일에 확인함. vdeh더콰이엇정규 음반 Music (2005) Q Train (2006) The Real Me (2007) Quiet Storm: a Night Record (2010) AMBITIQN (2013) 1 Life 2 Live (2015) Q Train 2 (2016) Millionaire Poetry (2017) 믹스테잎 Back On The Beats Vol.1 (2008) Back On The Beats 0.5 (2009) Rapsolute Mixtape Vol.1 (with Dok2) (2010) Back On The Beats Mixtape Vol.2 (2011) EP 음반 Stormy Friday EP (2011) 싱글 음반 "Never Q.U.I.T.T" "Rapsolute Remixes" "We Here" "Get Dough" "Hotter than a Summer" "All About" "Good Luck" "Nothing" 기타 음반 Supremacy (with Paloalto) (2006) 246 (with Makesense) (2009) 관련 문서 전체 음반 일리네어 레코즈 소울 컴퍼니 P&Q vdeh도끼정규 음반 Hustle Real Hard (2011) Multillionaire (2015) LP 음반 Love & Life, The Album (2012) Ruthless, The Album (2013) 믹스테잎 Thunderground Musik Mixtape Vol.1 (2008) Thunderground Mixtape Vol.2 (2010) Rapsolute Mixtape Vol.1 (with The Quiett) (2010) Do It for the Fans (2011) South Korean Rapstar Mixtape (2013) 싱글 음반 "I'mma Shine" "Rapsolute Remixes" "Fantom" "We Here" "That's Me" 〈그쯤에서 해〉 "Leave Me Alone" "Best Time (In Our Life" "RAPSTAR" "We Gotta Know" "My Love (Piano Ver.)" 〈치키차카초코초〉 "Good Luck" "RIATCH" "Multillionaire" 〈골키퍼 (Goal Keeper)〉 "Future Flame" "Bad Vibes Lonely" "1llusion" EP 음반 Thunderground EP (2009) It's We (2010) 기타 음반 Illstrumentalz Vol.1 (2009) Flow 2 Flow (2011) 11:11 (2014) 같이 보기 전체 음반 일리네어 레코즈 무브먼트 맵더소울 올 블랙 vdeh빈지노정규 음반12 (2016)EP 음반 2 4 : 2 6 (2012) Up All Night (2014) 싱글 "I'll be Back" 〈진절머리〉 "Dali, Van, Picasso" 〈어쩌라고 (So What)〉 "Break" "We Are Going To" "Life in Color" 관련 문서 음반 목록 노래 목록 일리네어 레코즈 IAB 스튜디오 핫클립 재지팩트 vdeh일리네어 레코즈 도끼 더 콰이엇 빈지노 정규 음반 11:11 (2014) EP 음반 "연결고리 (Remixes)" (2014) 싱글 "We Here" "Illionaire Way" 〈연결고리〉 "Rockin' with the Best" 〈뭘 알어 (What U Know)〉 "Illionaire Everyday" 기타 곡들 "Profile" "Illionaire Gang" "1llionaire So Ambitious" 〈내가〉 "My Life" 관련 문서 전체 음반 《Show Me The Money 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일리네어_레코즈&oldid=24506723" 분류: 일리네어 레코즈대한민국의 힙합 레이블2011년 설립된 기업대한민국의 기업서울특별시의 기업대한민국의 연예 기획사대한민국의 음반사대한민국의 래퍼3인조 음악 그룹남성 음악 그룹2010년대 음악 그룹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ქართული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1일 (월) 01: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원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원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원근 출생 1991년 6월 27일(1991-06-27) (28세)국적 대한민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2012년 ~ 현재소속사 유본컴퍼니 학력 건국대학교 영화예술학과웹사이트 이원근 - 인스타그램이원근 - 페이스북이원근 - 트위터 이원근(1991년 6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목차 1 학력 2 출연 작품 2.1 드라마 2.2 영화 3 연기 외 활동 3.1 뮤직 비디오 3.2 광고 4 수상 및 후보 5 외부 링크 학력[편집] 신진자동차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영화예술학과 출연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역할 비고 2012 MBC 《해를 품은 달》 어린 김제운 1회 ~ 6회 SBS 《유령》 권도영 20부작 2013 KBS2 《일말의 순정》 최준영 125부작 SBS 《열애》 어린 강무열 1회 ~ 5회 2014 JTBC 《12년만의 재회: 달래 된, 장국》 어린 유준수 1회 ~ 13회 네이버 tvcast 웹드라마 《그리다, 봄》 서건태 MBC 드라마 페스티벌 - 《형영당 일기》 김홍연 단막극 SBS 《비밀의 문》 김문 24부작 2015 SBS 《하이드 지킬, 나》 이은창 20부작 KBS2 《발칙하게 고고》 김열 12부작 2016 tvN 《굿 와이프》 이준호 16부작 소후TV 《두근두근 스파이크 2》 동해성 웹 드라마 2017 KBS2 《추리의 여왕》 홍준오 16부작 JTBC 《알수도 있는 사람》 김진영 웹 드라마 KBS2 《저글러스》 황보 율 16부작 2018 KBS 드라마 스페셜 - 《너무 한낮의 연애》 햄버거집알바 특별출연 영화[편집] 연도 제목 역할 비고 2013 소년병 소년 2015 기억의 단편 2016 그물 오진우 제41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 마스터즈 섹션 부분 초청 2017 여교사 신재하 2018 환절기 용준 괴물들 조재영 명당 헌종 2019 그대 이름은 장미 어린 명환 나를 찾아줘 승현 연기 외 활동[편집] 뮤직 비디오[편집] 2012년 장재인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광고[편집] 2013년 현대자동차그룹 - 기업 광고 2013년 연승어패럴 클라이드.n 2014년 LG전자 포켓포토 2015년 도브 샴푸 - 헤어 영양보습 편 수상 및 후보[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15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연기상 발칙하게 고고 후보 2016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그물 후보 2017 제37회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 남우주연상 수상 제22회 춘사영화상 신인남우상 여교사 후보 제26회 부일영화상 신인 남자 연기상 후보 제1회 더 서울어워즈 영화 부문 남자 신인상 후보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이원근 - 페이스북 (한국어) 이원근 - 트위터 (한국어) 이원근 - 인스타그램 (영어) Lee Won Gun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이원근 - 한시네마 이 글은 한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원근&oldid=24410655" 분류: 신진자동차고등학교 동문건국대학교 동문2012년 데뷔살아있는 사람1991년 태어남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숨은 분류: 한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Bahasa IndonesiaBahasa MelayuTürkçe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1일 (화) 13:1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원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원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원근 출생 1991년 6월 27일(1991-06-27) (28세)국적 대한민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2012년 ~ 현재소속사 유본컴퍼니 학력 건국대학교 영화예술학과웹사이트 이원근 - 인스타그램이원근 - 페이스북이원근 - 트위터 이원근(1991년 6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목차 1 학력 2 출연 작품 2.1 드라마 2.2 영화 3 연기 외 활동 3.1 뮤직 비디오 3.2 광고 4 수상 및 후보 5 외부 링크 학력[편집] 신진자동차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영화예술학과 출연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역할 비고 2012 MBC 《해를 품은 달》 어린 김제운 1회 ~ 6회 SBS 《유령》 권도영 20부작 2013 KBS2 《일말의 순정》 최준영 125부작 SBS 《열애》 어린 강무열 1회 ~ 5회 2014 JTBC 《12년만의 재회: 달래 된, 장국》 어린 유준수 1회 ~ 13회 네이버 tvcast 웹드라마 《그리다, 봄》 서건태 MBC 드라마 페스티벌 - 《형영당 일기》 김홍연 단막극 SBS 《비밀의 문》 김문 24부작 2015 SBS 《하이드 지킬, 나》 이은창 20부작 KBS2 《발칙하게 고고》 김열 12부작 2016 tvN 《굿 와이프》 이준호 16부작 소후TV 《두근두근 스파이크 2》 동해성 웹 드라마 2017 KBS2 《추리의 여왕》 홍준오 16부작 JTBC 《알수도 있는 사람》 김진영 웹 드라마 KBS2 《저글러스》 황보 율 16부작 2018 KBS 드라마 스페셜 - 《너무 한낮의 연애》 햄버거집알바 특별출연 영화[편집] 연도 제목 역할 비고 2013 소년병 소년 2015 기억의 단편 2016 그물 오진우 제41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 마스터즈 섹션 부분 초청 2017 여교사 신재하 2018 환절기 용준 괴물들 조재영 명당 헌종 2019 그대 이름은 장미 어린 명환 나를 찾아줘 승현 연기 외 활동[편집] 뮤직 비디오[편집] 2012년 장재인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광고[편집] 2013년 현대자동차그룹 - 기업 광고 2013년 연승어패럴 클라이드.n 2014년 LG전자 포켓포토 2015년 도브 샴푸 - 헤어 영양보습 편 수상 및 후보[편집]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결과 2015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연기상 발칙하게 고고 후보 2016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그물 후보 2017 제37회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 남우주연상 수상 제22회 춘사영화상 신인남우상 여교사 후보 제26회 부일영화상 신인 남자 연기상 후보 제1회 더 서울어워즈 영화 부문 남자 신인상 후보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이원근 - 페이스북 (한국어) 이원근 - 트위터 (한국어) 이원근 - 인스타그램 (영어) Lee Won Gun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이원근 - 한시네마 이 글은 한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원근&oldid=24410655" 분류: 신진자동차고등학교 동문건국대학교 동문2012년 데뷔살아있는 사람1991년 태어남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숨은 분류: 한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Bahasa IndonesiaBahasa MelayuTürkçe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1일 (화) 13:1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빙그레 이글스 연도별 선수 명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빙그레 이글스 연도별 선수 명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목차 1 포지션별 주전 선수 2 전체 명단 2.1 투수 3 함께 보기 포지션별 주전 선수[편집] 연도 투수 포수 1루수 2루수 3루수 유격수 우익수 중견수 좌익수 지명타자 1986년 이상군 김상국 강정길 이광길 김한근 김성갑 고원부 이강돈 황병일 유승안 1987년 이상군 김상국 강정길 이광길 김성갑 장종훈 고원부 이정훈 이강돈 김상국 1988년 한희민 유승안 강정길 이광길 김성갑 장종훈 고원부 이정훈 이강돈 김한근 1989년 한희민 유승안 강정길 조양근 김성갑 장종훈 고원부 이중화 이강돈 송일섭 1990년 한용덕 김상국 강정길 김성갑 강석천 장종훈 고원부 이정훈 이강돈 유승안 1991년 한용덕 김상국 강정길 전대영 강석천 황대연 이중화 이정훈 이강돈 장종훈 1992년 송진우 김상국 장종훈 전대영 강석천 지화동 이중화 이정훈 이강돈 강정길 1993년 정민철 김상국 장종훈 지화동 강석천 허준 지화선 진상봉 이강돈 강정길 전체 명단[편집] 투수[편집]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강만식(해태에서 이적) 강만식 강만식(삼성으로 이적) 이상군 이상군 이상군 이상군 이상군 장명부 한희민(9승) 한희민(13승) 한희민(16승) 한희민(16승) 한희민(12승) 한희민(8승) 한희민(2승) 함께 보기[편집] 한화 이글스 연도별 선수 명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빙그레_이글스_연도별_선수_명단&oldid=19315245" 분류: 한화 이글스 연도별 선수 명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8월 20일 (일) 12: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응우옌후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응우옌후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완혜 동상 응우옌후에(베트남어: Nguyễn Huệ/ 阮惠, 1753년 ~ 1792년)는 베트남 대월의 장군 겸 혁명가이자, 서산조 부춘 조정의 제1대 황제(재위: 1788년 ~ 1792년)이다. 원래 성명인 응우옌반후에(阮文惠) 또는 사용한 연호인 광중에서 따와 꽝쭝황제(光中帝) 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세인 태국과 청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으로 기록된다. 목차 1 생애 1.1 농민 봉기 1.2 베트남 통일 전쟁 1.3 태국 군 격퇴 1.4 황제 즉위와 최후 1.5 사후 2 평가 3 관련 항목 4 관련 서적 5 각주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농민 봉기[편집] 본래 생부의 성은 원래 호(Hồ)씨였고 응우옌씨(阮氏)이기는 하지만 광남 응우옌씨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본래 그의 가계는 응에안(Nghệ An) 출신이었으나 온 가족과 함께 떠이선(Tây Sơn, 西山)으로 끌려와 떠이선에서 성장하였다. 응우옌 후에(Nguyễn Huệ)는 7남매, 3남 4녀 중 셋째 아들이자 막내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칭찬을 받았고 스승으로 부터 문무를 전수받았다. 18세기의 베트남에는 후 레 왕조의 황제가 명목상의 황제로 전락되어, 북부는 찐씨(鄭氏), 남부는 응우옌 씨(광남 완씨)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우옌씨가 지배하는 지역에 폭정이 심화되면서, 1771년 떠이선 출신의 3형제(완문악, 완문려, 완문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응우옌 일가의 전횡에 맞서, 1771년 두 형과 함께 당시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웬((Nguyễn)씨 일가의 전횡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권문 세도가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토지와 가솔을 잃은 농민들이 그의 군에 가담하면서 그 세력이 날로 강해져 갔다. 그리하여 뀌이년(Qui Nhơn)을 점령하였으며 그들의 의병에 꽝응아이(Quảng Ngãi)까지 세력이 확장되었다. 베트남 통일 전쟁[편집] 타이손 3형제(좌로부터 응우옌후에, 응우옌냑, 응우옌르) 이들 형제는 처음에는 후 레 왕조의 복권을 주창했고, 후 레 왕조는 이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군사를 이끌고 대거 남하하여 광남 완씨의 수도 부춘(현재의 후에)을 공략했다. 1776년 응우옌후에는 군사를 이끌고 빈 투언(Bình Thuận)을 공략하여 점령하고, 형 응우옌르(Lữ)와 함께 자딘(Gia Định)등을 점령하였다. 떠이선의 세력들은 후 레 왕조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전투를 계속하여, 1777년에 쟈딘(현 호치민시)에서 광남 응우옌 왕조를 멸망시켰다. 1778년 형 응우옌냑(Nhạc)이 투언호아(Thuận Hóa)를 본거지로 삼아 중부 지역의 황제에 올랐다. 그 뒤에 형 응우옌냑의 휘하에서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북방을 정벌하는 문제로 형과 갈등하게 된다. 타이손 형제가 쓰던 총과 검 1782년에는 형 응우옌냑과 함께 남쪽으로 군사를 몰아 응우옌아인(Nguyễn Anh, 1802년 응우옌 왕조를 세운 가륭제)을 치자 응우옌아인은 사이공을 포기하고 푸꾸옥(Phú Quốc)섬으로 달아났고, 아인의 가족은 꼰 다오 섬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추격하여 몰살시켰고 광남 응우옌씨 일족 중 응우옌푹아인(완복영)만은 겨우 살아남아 시암으로 도망쳤다. 응우옌아인(Nguyễn Anh)은 태국으로 건너가서 태국에 원병을 요청, 태국 군사를 데리고 왔고, 사 덱(Sa Đéc)을 공격하였다. 전승한 후에 꾸이년으로 되돌아 갔던 응우옌 후에는 군사를 모으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군사를 재배치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전투를 벌여, 소수의 군사로 태국군 2만 여명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거둔다. 태국 군 격퇴[편집] 태국군과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동상 전투에서 겨우 살아 남은 응우옌아인(Nguyễn Anh)과 태국군 패잔병은 다시금 태국으로 패주하였고 응우옌후에는 뀌년으로 귀환 한다. 꾸이년으로 돌아와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찐씨(Trịnh, 鄭氏) 세력을 점차 몰아내 찐씨 세력의 점령지를 차지하고 결국 멸망시켰다. 1786년에는 꽝빈 이남은 물론 북부 지역 전체가 타이손 형제 세력의 수중에 들어 오게 된다. 탕롱(Thăng Long)을 접수하고 당시 유명무실하였던 후 레(Lê)왕조를 구하자 하니, 레 현종(Lê Hiển Tông, 黎顯宗)은 응우옌후에를 원수로 봉하고 공주와 결혼시켰다. 2008년 8월의 꽝쭝 황제 즉위식 재현행사 1786년에 응우옌후에는 후 레 왕조 내부의 불화를 이용해 북벌을 감행하게 했고, 이것으로 후 레 왕조가 붕괴되었다. 동시에 이 일로 형 응우옌냑과 갈등하게 된다. 응우옌후에는 후 레 왕조의 황제를 폐위하지 않고 자신은 섭정자리에 머물러 왕조를 존속시켰지만 불안을 느낀 레 민제(黎愍帝, 소통제)는 청나라로 망명했다. 민종 소통제는 청나라를 끌어들였는데 1789년 응우옌후에는 내정에 개입한 청나라군을 격퇴하고,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꽝쭝 황제는 하노이에서 축제를 거행하여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중국 군대를 안심시킨 후, 그들을 기습하여 자신의 땅에서 몰아냈다. 베트남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적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능숙해졌음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1] 황제 즉위와 최후[편집] 조카 응우옌광히엔과 청나라의 평화 협정 (1789년) 1788년 청나라가 침입해오자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는 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중(꽝쭝)이라 하였다. 그해 11월 25일 후 레 왕조의 복위를 명분으로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해 오는 청나라 군사를 소수의 병력으로 산악지대에서 물리쳤다. 그는 근대 베트남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 영웅이며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용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황제위에 오른지 4년만인 1792년에 3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묘호는 태조(베트남어: Thái Tổ/ 太祖)이며, 시호는 무황제(베트남어: Vũ Hoàng Đế/ 武皇帝)이다. 가족들은 1802년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에 의해 후에(Huế)에서 참살당했다. 사후[편집] 타이손조는 중흥 군주였던 꽝쭝 황제의 죽음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결국 불안정한 사회기반 속에서 점차 흔들리고 1802년 베트남의 마지막 전통왕조인 응우엔조에 의해 물러나게 된다.[2] 그러나 꽝쭝은 소수의 군사로 태국군과 청나라군을 연이어 격퇴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 국난을 극복한 전사로 칭송받고 있다. 평가[편집] 응우옌후에의 동상 그는 베트남 역사상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 영웅이며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용장으로 평가된다. 관련 항목[편집] 타이손 형제 타이손 왕조 베트남-청 전쟁 베트남-타이 전쟁 관련 서적[편집] 정혜영, 《IT S 베트남》 (미다스북스, 2009) 김영애 외 지음,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각주[편집] ↑ 스콧 데일림플, 존 K. 클레멘스 공저「타임 마스터리」(김은정 역, 비전코리아, 2006) 31페이지 ↑ 김영애 외,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319 외부 링크[편집] 타이손 형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Nhà Tây Sơn 24 năm 1778-1802 Những bà vợ của Hoàng đế Quang Trung Bình định:Khánh thành tượng đài Hoàng đế Quang Trung[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전 임(초대) 제1대 대월 떠이선 왕조 푸쑤언 조정의 황제1788년 ~ 1792년 후 임응우옌꽝또안 vdeh떠이선 왕조의 역대 황제꾸이년 조정 응우옌냑 푸쑤언 조정 응우옌후에 응우옌꽝또안 전거 통제 WorldCat VIAF: 35360992 LCCN: n82223796 ISNI: 0000 0000 2669 4419 GND: 123321999 SUDOC: 14081664X BNF: cb12345095h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응우옌후에&oldid=24397611" 분류: 1753년 태어남1792년 죽음베트남의 혁명가베트남의 군주베트남의 군인베트남의 황제베트남의 시인떠이선 왕조의 황제떠이선 왕조의 장군빈딘성 출신숨은 분류: 베트남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CatalàMìng-dĕ̤ng-ngṳ̄Cebuano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TagalogTiếng Việt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15: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응우옌후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응우옌후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완혜 동상 응우옌후에(베트남어: Nguyễn Huệ/ 阮惠, 1753년 ~ 1792년)는 베트남 대월의 장군 겸 혁명가이자, 서산조 부춘 조정의 제1대 황제(재위: 1788년 ~ 1792년)이다. 원래 성명인 응우옌반후에(阮文惠) 또는 사용한 연호인 광중에서 따와 꽝쭝황제(光中帝) 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세인 태국과 청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으로 기록된다. 목차 1 생애 1.1 농민 봉기 1.2 베트남 통일 전쟁 1.3 태국 군 격퇴 1.4 황제 즉위와 최후 1.5 사후 2 평가 3 관련 항목 4 관련 서적 5 각주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농민 봉기[편집] 본래 생부의 성은 원래 호(Hồ)씨였고 응우옌씨(阮氏)이기는 하지만 광남 응우옌씨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본래 그의 가계는 응에안(Nghệ An) 출신이었으나 온 가족과 함께 떠이선(Tây Sơn, 西山)으로 끌려와 떠이선에서 성장하였다. 응우옌 후에(Nguyễn Huệ)는 7남매, 3남 4녀 중 셋째 아들이자 막내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칭찬을 받았고 스승으로 부터 문무를 전수받았다. 18세기의 베트남에는 후 레 왕조의 황제가 명목상의 황제로 전락되어, 북부는 찐씨(鄭氏), 남부는 응우옌 씨(광남 완씨)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우옌씨가 지배하는 지역에 폭정이 심화되면서, 1771년 떠이선 출신의 3형제(완문악, 완문려, 완문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응우옌 일가의 전횡에 맞서, 1771년 두 형과 함께 당시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웬((Nguyễn)씨 일가의 전횡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권문 세도가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토지와 가솔을 잃은 농민들이 그의 군에 가담하면서 그 세력이 날로 강해져 갔다. 그리하여 뀌이년(Qui Nhơn)을 점령하였으며 그들의 의병에 꽝응아이(Quảng Ngãi)까지 세력이 확장되었다. 베트남 통일 전쟁[편집] 타이손 3형제(좌로부터 응우옌후에, 응우옌냑, 응우옌르) 이들 형제는 처음에는 후 레 왕조의 복권을 주창했고, 후 레 왕조는 이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군사를 이끌고 대거 남하하여 광남 완씨의 수도 부춘(현재의 후에)을 공략했다. 1776년 응우옌후에는 군사를 이끌고 빈 투언(Bình Thuận)을 공략하여 점령하고, 형 응우옌르(Lữ)와 함께 자딘(Gia Định)등을 점령하였다. 떠이선의 세력들은 후 레 왕조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전투를 계속하여, 1777년에 쟈딘(현 호치민시)에서 광남 응우옌 왕조를 멸망시켰다. 1778년 형 응우옌냑(Nhạc)이 투언호아(Thuận Hóa)를 본거지로 삼아 중부 지역의 황제에 올랐다. 그 뒤에 형 응우옌냑의 휘하에서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북방을 정벌하는 문제로 형과 갈등하게 된다. 타이손 형제가 쓰던 총과 검 1782년에는 형 응우옌냑과 함께 남쪽으로 군사를 몰아 응우옌아인(Nguyễn Anh, 1802년 응우옌 왕조를 세운 가륭제)을 치자 응우옌아인은 사이공을 포기하고 푸꾸옥(Phú Quốc)섬으로 달아났고, 아인의 가족은 꼰 다오 섬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추격하여 몰살시켰고 광남 응우옌씨 일족 중 응우옌푹아인(완복영)만은 겨우 살아남아 시암으로 도망쳤다. 응우옌아인(Nguyễn Anh)은 태국으로 건너가서 태국에 원병을 요청, 태국 군사를 데리고 왔고, 사 덱(Sa Đéc)을 공격하였다. 전승한 후에 꾸이년으로 되돌아 갔던 응우옌 후에는 군사를 모으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군사를 재배치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전투를 벌여, 소수의 군사로 태국군 2만 여명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거둔다. 태국 군 격퇴[편집] 태국군과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동상 전투에서 겨우 살아 남은 응우옌아인(Nguyễn Anh)과 태국군 패잔병은 다시금 태국으로 패주하였고 응우옌후에는 뀌년으로 귀환 한다. 꾸이년으로 돌아와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찐씨(Trịnh, 鄭氏) 세력을 점차 몰아내 찐씨 세력의 점령지를 차지하고 결국 멸망시켰다. 1786년에는 꽝빈 이남은 물론 북부 지역 전체가 타이손 형제 세력의 수중에 들어 오게 된다. 탕롱(Thăng Long)을 접수하고 당시 유명무실하였던 후 레(Lê)왕조를 구하자 하니, 레 현종(Lê Hiển Tông, 黎顯宗)은 응우옌후에를 원수로 봉하고 공주와 결혼시켰다. 2008년 8월의 꽝쭝 황제 즉위식 재현행사 1786년에 응우옌후에는 후 레 왕조 내부의 불화를 이용해 북벌을 감행하게 했고, 이것으로 후 레 왕조가 붕괴되었다. 동시에 이 일로 형 응우옌냑과 갈등하게 된다. 응우옌후에는 후 레 왕조의 황제를 폐위하지 않고 자신은 섭정자리에 머물러 왕조를 존속시켰지만 불안을 느낀 레 민제(黎愍帝, 소통제)는 청나라로 망명했다. 민종 소통제는 청나라를 끌어들였는데 1789년 응우옌후에는 내정에 개입한 청나라군을 격퇴하고,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꽝쭝 황제는 하노이에서 축제를 거행하여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중국 군대를 안심시킨 후, 그들을 기습하여 자신의 땅에서 몰아냈다. 베트남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적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능숙해졌음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1] 황제 즉위와 최후[편집] 조카 응우옌광히엔과 청나라의 평화 협정 (1789년) 1788년 청나라가 침입해오자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는 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중(꽝쭝)이라 하였다. 그해 11월 25일 후 레 왕조의 복위를 명분으로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해 오는 청나라 군사를 소수의 병력으로 산악지대에서 물리쳤다. 그는 근대 베트남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 영웅이며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용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황제위에 오른지 4년만인 1792년에 3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묘호는 태조(베트남어: Thái Tổ/ 太祖)이며, 시호는 무황제(베트남어: Vũ Hoàng Đế/ 武皇帝)이다. 가족들은 1802년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에 의해 후에(Huế)에서 참살당했다. 사후[편집] 타이손조는 중흥 군주였던 꽝쭝 황제의 죽음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결국 불안정한 사회기반 속에서 점차 흔들리고 1802년 베트남의 마지막 전통왕조인 응우엔조에 의해 물러나게 된다.[2] 그러나 꽝쭝은 소수의 군사로 태국군과 청나라군을 연이어 격퇴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 국난을 극복한 전사로 칭송받고 있다. 평가[편집] 응우옌후에의 동상 그는 베트남 역사상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 영웅이며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용장으로 평가된다. 관련 항목[편집] 타이손 형제 타이손 왕조 베트남-청 전쟁 베트남-타이 전쟁 관련 서적[편집] 정혜영, 《IT S 베트남》 (미다스북스, 2009) 김영애 외 지음,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각주[편집] ↑ 스콧 데일림플, 존 K. 클레멘스 공저「타임 마스터리」(김은정 역, 비전코리아, 2006) 31페이지 ↑ 김영애 외,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319 외부 링크[편집] 타이손 형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Nhà Tây Sơn 24 năm 1778-1802 Những bà vợ của Hoàng đế Quang Trung Bình định:Khánh thành tượng đài Hoàng đế Quang Trung[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전 임(초대) 제1대 대월 떠이선 왕조 푸쑤언 조정의 황제1788년 ~ 1792년 후 임응우옌꽝또안 vdeh떠이선 왕조의 역대 황제꾸이년 조정 응우옌냑 푸쑤언 조정 응우옌후에 응우옌꽝또안 전거 통제 WorldCat VIAF: 35360992 LCCN: n82223796 ISNI: 0000 0000 2669 4419 GND: 123321999 SUDOC: 14081664X BNF: cb12345095h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응우옌후에&oldid=24397611" 분류: 1753년 태어남1792년 죽음베트남의 혁명가베트남의 군주베트남의 군인베트남의 황제베트남의 시인떠이선 왕조의 황제떠이선 왕조의 장군빈딘성 출신숨은 분류: 베트남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CatalàMìng-dĕ̤ng-ngṳ̄Cebuano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TagalogTiếng Việt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15: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응우옌후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응우옌후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완혜 동상 응우옌후에(베트남어: Nguyễn Huệ/ 阮惠, 1753년 ~ 1792년)는 베트남 대월의 장군 겸 혁명가이자, 서산조 부춘 조정의 제1대 황제(재위: 1788년 ~ 1792년)이다. 원래 성명인 응우옌반후에(阮文惠) 또는 사용한 연호인 광중에서 따와 꽝쭝황제(光中帝) 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세인 태국과 청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으로 기록된다. 목차 1 생애 1.1 농민 봉기 1.2 베트남 통일 전쟁 1.3 태국 군 격퇴 1.4 황제 즉위와 최후 1.5 사후 2 평가 3 관련 항목 4 관련 서적 5 각주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농민 봉기[편집] 본래 생부의 성은 원래 호(Hồ)씨였고 응우옌씨(阮氏)이기는 하지만 광남 응우옌씨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본래 그의 가계는 응에안(Nghệ An) 출신이었으나 온 가족과 함께 떠이선(Tây Sơn, 西山)으로 끌려와 떠이선에서 성장하였다. 응우옌 후에(Nguyễn Huệ)는 7남매, 3남 4녀 중 셋째 아들이자 막내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칭찬을 받았고 스승으로 부터 문무를 전수받았다. 18세기의 베트남에는 후 레 왕조의 황제가 명목상의 황제로 전락되어, 북부는 찐씨(鄭氏), 남부는 응우옌 씨(광남 완씨)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우옌씨가 지배하는 지역에 폭정이 심화되면서, 1771년 떠이선 출신의 3형제(완문악, 완문려, 완문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응우옌 일가의 전횡에 맞서, 1771년 두 형과 함께 당시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웬((Nguyễn)씨 일가의 전횡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권문 세도가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토지와 가솔을 잃은 농민들이 그의 군에 가담하면서 그 세력이 날로 강해져 갔다. 그리하여 뀌이년(Qui Nhơn)을 점령하였으며 그들의 의병에 꽝응아이(Quảng Ngãi)까지 세력이 확장되었다. 베트남 통일 전쟁[편집] 타이손 3형제(좌로부터 응우옌후에, 응우옌냑, 응우옌르) 이들 형제는 처음에는 후 레 왕조의 복권을 주창했고, 후 레 왕조는 이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군사를 이끌고 대거 남하하여 광남 완씨의 수도 부춘(현재의 후에)을 공략했다. 1776년 응우옌후에는 군사를 이끌고 빈 투언(Bình Thuận)을 공략하여 점령하고, 형 응우옌르(Lữ)와 함께 자딘(Gia Định)등을 점령하였다. 떠이선의 세력들은 후 레 왕조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전투를 계속하여, 1777년에 쟈딘(현 호치민시)에서 광남 응우옌 왕조를 멸망시켰다. 1778년 형 응우옌냑(Nhạc)이 투언호아(Thuận Hóa)를 본거지로 삼아 중부 지역의 황제에 올랐다. 그 뒤에 형 응우옌냑의 휘하에서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북방을 정벌하는 문제로 형과 갈등하게 된다. 타이손 형제가 쓰던 총과 검 1782년에는 형 응우옌냑과 함께 남쪽으로 군사를 몰아 응우옌아인(Nguyễn Anh, 1802년 응우옌 왕조를 세운 가륭제)을 치자 응우옌아인은 사이공을 포기하고 푸꾸옥(Phú Quốc)섬으로 달아났고, 아인의 가족은 꼰 다오 섬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추격하여 몰살시켰고 광남 응우옌씨 일족 중 응우옌푹아인(완복영)만은 겨우 살아남아 시암으로 도망쳤다. 응우옌아인(Nguyễn Anh)은 태국으로 건너가서 태국에 원병을 요청, 태국 군사를 데리고 왔고, 사 덱(Sa Đéc)을 공격하였다. 전승한 후에 꾸이년으로 되돌아 갔던 응우옌 후에는 군사를 모으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군사를 재배치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전투를 벌여, 소수의 군사로 태국군 2만 여명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거둔다. 태국 군 격퇴[편집] 태국군과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동상 전투에서 겨우 살아 남은 응우옌아인(Nguyễn Anh)과 태국군 패잔병은 다시금 태국으로 패주하였고 응우옌후에는 뀌년으로 귀환 한다. 꾸이년으로 돌아와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찐씨(Trịnh, 鄭氏) 세력을 점차 몰아내 찐씨 세력의 점령지를 차지하고 결국 멸망시켰다. 1786년에는 꽝빈 이남은 물론 북부 지역 전체가 타이손 형제 세력의 수중에 들어 오게 된다. 탕롱(Thăng Long)을 접수하고 당시 유명무실하였던 후 레(Lê)왕조를 구하자 하니, 레 현종(Lê Hiển Tông, 黎顯宗)은 응우옌후에를 원수로 봉하고 공주와 결혼시켰다. 2008년 8월의 꽝쭝 황제 즉위식 재현행사 1786년에 응우옌후에는 후 레 왕조 내부의 불화를 이용해 북벌을 감행하게 했고, 이것으로 후 레 왕조가 붕괴되었다. 동시에 이 일로 형 응우옌냑과 갈등하게 된다. 응우옌후에는 후 레 왕조의 황제를 폐위하지 않고 자신은 섭정자리에 머물러 왕조를 존속시켰지만 불안을 느낀 레 민제(黎愍帝, 소통제)는 청나라로 망명했다. 민종 소통제는 청나라를 끌어들였는데 1789년 응우옌후에는 내정에 개입한 청나라군을 격퇴하고,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꽝쭝 황제는 하노이에서 축제를 거행하여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중국 군대를 안심시킨 후, 그들을 기습하여 자신의 땅에서 몰아냈다. 베트남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적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능숙해졌음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1] 황제 즉위와 최후[편집] 조카 응우옌광히엔과 청나라의 평화 협정 (1789년) 1788년 청나라가 침입해오자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는 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중(꽝쭝)이라 하였다. 그해 11월 25일 후 레 왕조의 복위를 명분으로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해 오는 청나라 군사를 소수의 병력으로 산악지대에서 물리쳤다. 그는 근대 베트남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 영웅이며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용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황제위에 오른지 4년만인 1792년에 3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묘호는 태조(베트남어: Thái Tổ/ 太祖)이며, 시호는 무황제(베트남어: Vũ Hoàng Đế/ 武皇帝)이다. 가족들은 1802년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에 의해 후에(Huế)에서 참살당했다. 사후[편집] 타이손조는 중흥 군주였던 꽝쭝 황제의 죽음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결국 불안정한 사회기반 속에서 점차 흔들리고 1802년 베트남의 마지막 전통왕조인 응우엔조에 의해 물러나게 된다.[2] 그러나 꽝쭝은 소수의 군사로 태국군과 청나라군을 연이어 격퇴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 국난을 극복한 전사로 칭송받고 있다. 평가[편집] 응우옌후에의 동상 그는 베트남 역사상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 영웅이며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용장으로 평가된다. 관련 항목[편집] 타이손 형제 타이손 왕조 베트남-청 전쟁 베트남-타이 전쟁 관련 서적[편집] 정혜영, 《IT S 베트남》 (미다스북스, 2009) 김영애 외 지음,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각주[편집] ↑ 스콧 데일림플, 존 K. 클레멘스 공저「타임 마스터리」(김은정 역, 비전코리아, 2006) 31페이지 ↑ 김영애 외,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319 외부 링크[편집] 타이손 형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Nhà Tây Sơn 24 năm 1778-1802 Những bà vợ của Hoàng đế Quang Trung Bình định:Khánh thành tượng đài Hoàng đế Quang Trung[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전 임(초대) 제1대 대월 떠이선 왕조 푸쑤언 조정의 황제1788년 ~ 1792년 후 임응우옌꽝또안 vdeh떠이선 왕조의 역대 황제꾸이년 조정 응우옌냑 푸쑤언 조정 응우옌후에 응우옌꽝또안 전거 통제 WorldCat VIAF: 35360992 LCCN: n82223796 ISNI: 0000 0000 2669 4419 GND: 123321999 SUDOC: 14081664X BNF: cb12345095h (데이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응우옌후에&oldid=24397611" 분류: 1753년 태어남1792년 죽음베트남의 혁명가베트남의 군주베트남의 군인베트남의 황제베트남의 시인떠이선 왕조의 황제떠이선 왕조의 장군빈딘성 출신숨은 분류: 베트남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CatalàMìng-dĕ̤ng-ngṳ̄Cebuano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TagalogTiếng Việt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15: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기복 (배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기복 (배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기복(1958년 4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목차 1 생애 2 출연작 2.1 연극 2.2 TV 드라마 2.3 라디오 프로그램 3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77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1979년 KBS 한국방송공사 공채 9기 탤런트 정식 데뷔하였다. 2009년부터 사)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출연작[편집] 연극[편집] 1990년 《햄릿》 ... 햄릿 왕자 역(주인공) TV 드라마[편집] 1987년 《이차돈》 이차돈 역 1987년 《사모곡》서인갑 1991년 《사랑이 뭐길래》 1992년 《삼국기》 화랑 관창의 아버지 김품일 역 1994년 《딸부잣집》 1995년 《코리아게이트》 백동림 역 1995년 《찬란한 여명》 1996년 《용의 눈물》 마천목 역 1998년 《왕과 비》 금부도사 역 2000년 《태조 왕건》 김낙 역 2000년 《천둥소리》 서양갑 역 2001년 《명성황후》 유춘만 역 2002년 《제국의 아침》 황보 숭 역 2003년 《장희빈》 도승지 역 2003년 《야인시대》 장권(건국치안대 간부) 역 2003년 《무인시대》 백임지 역 2004년 《애정의 조건》 2004년 《불멸의 이순신》 기효근 역 2004년 《토지》 지삼만 역 2005년 《부활》 황종인 역 2006년 《연개소문》 화랑 반굴의 아버지 김흠순 역 2006년 《대조영》 소정방 역 2011년 《근초고왕》 해녕(해건의 아버지) 역 2012년 《발효가족》 형사 철석 역 2014년 《플루토 비밀결사대》 2018년 《같이 살래요》 한태중 역 라디오 프로그램[편집] 2015년 EBS 《EBS 책 읽는 라디오 낭독 시리즈》 외부 링크[편집] 김기복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기복_(배우)&oldid=24505753" 분류: 195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1977년 데뷔중앙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30일 (일) 21: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로그 나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그 나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로그 나선(Logarithmic spiral), 대수 나선(형), 등각 나선형 또는 성장 나선형은 종종 자연에 나타나는 나선형 곡선을 표현하는데 유용하다. 로그 나선형은 데카르트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으며, 나중에는 야콥 베르누이컹스가 "스피라 미라빌리스(Spira mirabilis)"로 불리는 놀라운 나선형 (the marvelous spiral)현상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1] 목차 1 정의 2 자연에 나타나는 나선형 곡선을 표현하는 로그 나선의 응용 3 스피라 미라빌리스(Spira mirabilis) 와 야콥 베르누이컹스(Jacob Bernoullikeox) 4 로그 나선과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5 같이 보기 6 각주 정의[편집] 극좌표에서 ( r , θ {\displaystyle r,\theta } ) 로그 나선형 곡선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2] r = a e b θ {\displaystyle r=ae^{b\theta }\,} 또는, θ = 1 b ln ( r a ) {\displaystyle \theta ={{1} \over {b}}\ln ^{\left({r \over a}\right)}} 자연 대수의 기초가되는 e {\displaystyle e} 그리고 a {\displaystyle a} 와 b {\displaystyle b} 는 임의의 양의 실수 상수이다. 좌표상의 매개변수 형태에서 곡선은, x ( t ) = r ( t ) cos ( t ) = a e b t cos ( t ) {\displaystyle x(t)=r(t)\cos(t)=ae^{bt}\cos(t)\,} y ( t ) = r ( t ) sin ( t ) = a e b t sin ( t ) {\displaystyle y(t)=r(t)\sin(t)=ae^{bt}\sin(t)\,} a {\displaystyle a} 와 b {\displaystyle b} 는 실수 나선형은 임의의 점에서 접선과 반지름 ( r , θ ) {\displaystyle (r,\theta )} 간의 각도 ϕ {\displaystyle \phi } 가 일정하다. 이 특성은 다음과 같이 미분 기하학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 arccos ⟨ r ( θ ) , r ′ ( θ ) ⟩ ‖ r ( θ ) ‖ ‖ r ′ ( θ ) ‖ = arctan 1 b = ϕ {\displaystyle \arccos {\frac {\langle \mathbf {r} (\theta ),\mathbf {r} '(\theta )\rangle }{\|\mathbf {r} (\theta )\|\|\mathbf {r} '(\theta )\|}}=\arctan {\frac {1}{b}}=\phi } 나선형 r ( θ ) {\displaystyle r(\theta )} 은 매개변수 b {\displaystyle b} 에 비례 한다. 즉, b {\displaystyle b} 가 나선형을 특정한 나선형이게 결정하며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제어하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b = 0 ( ϕ = π 2 ) {\displaystyle b=0\left(\phi ={{\pi } \over {2}}\right)} 이고 a = 1 , ( ϕ = π 2 → π ) {\displaystyle a=1,\left(\phi ={{\pi } \over {2}}\to \pi \right)} 나선형은 반경 1 {\displaystyle 1} 의 원이 된다. a = 1 {\displaystyle a=1} 와 b = 0 {\displaystyle b=0} 에서, 무한히 ϕ → 0 {\displaystyle \phi \to 0} 접근하는 나선형은 직선에 접근하는 성질을 갖게된다. 여기서 보완적인 개념의 ϕ {\displaystyle \phi } 매개변수를 피치(축경사,pitch)라고한다. 자연에 나타나는 나선형 곡선을 표현하는 로그 나선의 응용[편집] 로그 나선 , 축경사10° 노틸러스 껍질의 단면,파란색점선은 성장률 매개 변수 b = 0.1759 {\displaystyle b=0.1759} 를 기반으로한다 스피라 미라빌리스(Spira mirabilis) 와 야콥 베르누이컹스(Jacob Bernoullikeox)[편집] 스피라 미라빌리스, 직역하면 "기적 나선"에 대한 라틴어는 로그 나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곡선은 다른 수학자들에 의해 "등각 나선형"등등으로 명명되었지만 이와 상관없이, 베르누이는 이 독특한 곡선의 특성 이름인 "나선형"의 고유한 수학적 속성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표현으로 "기적"또는 "놀라운"을 수식어로 하는 놀라운 나선형(Spira mirabilis)이라는 명칭을 이 곡선에 부여했다. 이 곡선은 곡선의 연장선상에서 축경사의 크기가 증가하지만 그 모양은 각각의 연속적인 곡선, 즉 자기 유사성 (self-similarity)으로 알려진 속성만큼은 변경되지 않는다. 이 고유 한 특성의 결과로,스피라 미라빌리스는 자연에서 진화하여 노틸러스 껍질 및 해바라기 머리와 같은 고유한 특정 성장 형태로 나타난것을 확인할수있다. 야콥 베르누이(Jacob Bernoulli)는 "Eadem mutata resurgo"라는 문구와 함께 그의 비석에 새겨진 이러한 나선형을 원했지만 ("몇몇 변수에의해 변형될수는 있지만 여전히 자기유사성으로 인해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속성을 갖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놀라운 나선형"), 실수로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이 대신 배치되었다고 한다.[3][4] 로그 나선과 아르키메데스의 나선[편집] 로그 나선은 기하학적 진행에서 나선의 선회 사이의 거리가 증가하는 반면에, 아르키메데스 나선에서는 이러한 거리가 일정하다는 사실에 의해 아르키메데스 나선과 구별 될 수 있다. 로그 나선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같이 보기[편집] 아르키메데스 나선 피보나치 수 각주[편집] ↑ (Spira mirabilis)http://jwilson.coe.uga.edu/EMT668/EMAT6680.F99/Erbas/KURSATgeometrypro/golden[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spiral/logspiral-history.html ↑ Priya Hemenway (2005). 《Divine Proportion: Φ Phi in Art, Nature, and Science》. Sterling Publishing Co. ISBN 1-4027-3522-7. ↑ Livio, Mario (2002). 《The Golden Ratio: The Story of Phi, The World's Most Astonishing Number》. New York: Broadway Books. ISBN 0-7679-0815-5. ↑ Yates, R. C.: A Handbook on Curves and Their Properties, J. W. Edwards (1952), "Evolutes." p. 20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로그_나선&oldid=24206146" 분류: 와선로그곡선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atina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5: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토성의 고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토성의 고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토성의 테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3년 7월 19일, 1,200,000 km 거리의 카시니 탐사선의 위치에서 토성이 태양을 가릴 때 촬영된 토성의 고리의 총집합(밝기가 과장되었다)이다. G 고리와 E 고리 외곽 사이에서 약 4시 방향 위치에서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의 형태로 보인다. 라디오파 엄폐를 통해 색을 입혀 만들어진 사진이다. 0.94, 3.6, 13 cm 파장의 라디오 신호가 카시니로부터 고리를 통해 지구로 전송되었다. 신호의 파장과 비슷하거나 큰 크기의 수많은 입자들이 반사하여 각 신호의 감쇠가 일어난다. 보라색(B 고리와 A 고리 내부)은 5 cm 보다 작은 입자가 얼마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신호의 감쇠와 비슷하다. 초록색과 파란색(C 고리와 A 고리 외곽)은 5 cm에서 1 cm보다 작은 입자가 각각 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B 고리의 하얀 영역은 가장 밀도가 높고 크기 추정 용도의 작은 신호를 매우 잘 반사한다. 또다른 증거는 세 고리 모두 미터 단위를 넘나드는 넓은 범위의 입자 크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이저 2호가 본 고리에 드리운 토성의 그림자. 네 개의 위성과 고리의 테가 보인다. 토성의 고리(영어: Rings of Saturn)는 태양계에서 어떤 행성의 고리보다도 가장 큰 행성 고리계이다. 이 고리는 수 마이크로미터에서 수 미터에 이르는 작은 입자들로 아주 많이 구성되어 있으며, 토성을 공전하고 있다.[1] 고리 입자는 거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량의 구성성분은 암석 물질이다. 토성의 고리의 형성 과정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고리의 일부 특징들은 고리가 비교적 최근에 기원했음을 시사하지만, 이론적인 모형은 태양계의 역사 초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2] 고리는 햇빛을 반사하여 토성의 밝기를 증가시키지만, 지구에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610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토성의 고리를 발견했지만, 그는 망원경의 성능이 좋지 못해고리를 귀나 컵의 손잡이라고 생각했어도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한 사람이 되었다. 1655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그것을 토성을 둘러싸는 고리로써 최초로 묘사한 사람이 되었다.[3] 많은 사람들이 토성의 고리가 아주 작은 고리들로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라플라스 이후의 개념),[3] 실제로는 몇 개의 간극이 존재한다. 동심원 모양으로 밀도와 밝기의 최대와 최소가 존재하는 고리 원반이 고리에 대한 더 정확한 생각이다.[2] 고리 내에서도 덩어리의 규모에 비해 텅빈 공간이 많다. 고리는 입자의 밀도가 급격히 줄어드는 다양한 간극을 가지고 있다. 이중에 둘은 고리 내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토성의 위성에 의해 열려있고, 그 외 토성의 위성의 불안정한 궤도공명을 받는 곳으로 알려진 위치의 많은 것들이 있다. 일부 간극은 아직 설명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반면 안정된 궤도공명은 타이탄 미세고리나 G 고리와 같이 몇몇 고리의 긴 지속시간에 원인이 있다. 주요 고리의 범위 밖에 있는 포에베 고리는 포에베와 같이 다른 고리에 비해 27도 기울어져 있고, 역행 방식으로 토성을 공전한다. 목차 1 역사 1.1 갈릴레오의 관측 1.2 고리 이론과 관측 2 물리적 특징 3 주요 고리의 형성 4 고리 내의 세분 및 구조 4.1 데이터 표 4.1.1 고리의 주요 세분 4.1.2 C 고리 내의 구조 4.1.3 카시니 간극 내의 구조 4.1.4 A 고리 내의 구조 5 D 고리 6 C 고리 6.1 콜롬보 간극과 타이탄 미세고리 6.2 맥스웰 간극과 미세고리 7 B 고리 7.1 테 7.2 소위성 8 카시니 간극 8.1 하위헌스 간극 9 A 고리 9.1 엥케 간극 9.2 킬러 간극 9.3 소위성 10 로슈 간극 11 F 고리 12 외곽 고리 12.1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 12.2 G 고리 12.3 메토네 고리 호 12.4 안테 고리 호 12.5 팔레네 고리 12.6 E 고리 12.7 포에베 고리 13 레아의 고리계 존재 가능성 14 갤러리 15 같이 보기 16 각주 17 외부 링크 역사[편집] 갈릴레오의 관측[편집]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0년에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0년에 자신의 망원경을 이용하여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했지만, 고리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는 토스카나 대공에게 "행성 토성은 혼자가 아니고, 서로 거의 접촉해 있으며 절대 움직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서 변하지도 않는 셋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황도와 평행하게 배열되어 있고, 중간의 것(토성)은 나머지 것들(고리의 가장자리)의 크기의 약 세 배정도 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또한 그는 토성이 "귀"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1612년, 고리면이 지구 쪽으로 향하고 있어 고리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 때가 있었다. 이에 혼란스러워진 갈릴레오는 신화 속의 사투르누스가 그의 아이들이 자신을 신들의 왕좌에서 끌어내릴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집어삼킨 것을 참고하여, "토성이 그의 자식을 집어삼킨 것인가?" 라고 궁금해 하기도 했다.[4] 1613년 고리가 다시 나타났을 때, 갈릴레오는 더욱 혼란스러워 했다.[5] 초기의 천문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 발표를 준비하기 전에 새로운 발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애너그램을 사용했다. 갈릴레오는 토성의 고리의 발견에 관해 Altissimum planetam tergeminum(나는 가장 먼 행성이 세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관측했다)을 smaismrmilmepoetaleumibunenugttauiras으로 표현했다.[6] 고리 이론과 관측[편집] 로버트 훅은 1666년에 그린 토성의 그림에서 구체에 의해 고리에 비치는 그림자(a와 b)에 주목했다. 1655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토성이 고리로 둘러싸여 있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되었다. 하위헌스는 갈릴레오가 사용했던 망원경보다 더 우수했던 손수 제작한 50배율 굴절 망원경을 이용하여 토성을 관측했고 "그것(토성)은 얇고, 평평하고, 어떤 곳과도 접촉해있지 않으며, 황도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고리로 둘러싸여 있다"[5]라고 기록했다.[7] 1675년,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는 간극을 통해 토성의 고리가 작고 다양한 고리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내었다. 이들 간극 중 가장 큰 것은 후에 카시니 간극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간극은 A 고리와 B 고리 사이에 있는 폭 4,800 km의 영역이다.[8] 1787년,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고리가 아주 많고 작은 고체 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3] 1859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고리가 고체로 되어 있거나 불안정하고 분해되어 있지 않음을 밝혀내었다. 그는 고리가, 셀 수 없이 많으며 모두 독립적으로 토성을 공전하고 있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 후에, 소피야 코발렙스카야는 토성의 고리가 고리 모양의 유체가 될 수 없음을 밝혔다.[10] 1895년, 앨러게니 천문대의 제임스 킬러와 풀코보 천문대의 아리스타크 벨로폴스키에 의해 이루어진 고리의 분광학적 연구를 통해서 맥스웰의 이론의 타당함이 입증되었다. 고리는 발견된 순서대로 알파벳 순으로 명명되었다.[11] 주요 고리는 행성에서 바깥쪽으로 C, B, A 순으로, 가장 큰 간극인 카시니 간극은 B 고리와 A 고리 사이에 있다. 몇몇 희미한 고리들은 그보다 더 최근에 발견되었다. D 고리는 매우 희미하고 행성과 가장 가깝다. 좁은 F 고리는 A 고리의 바깥에 있다. 그 이상으로는 아주 희미한 두개의 고리, G 고리와 E 고리가 있다. 전반적인 규모 면에서 고리는 엄청나게 많은 구조를 보여준다. 일부는 토성의 위성들에 의한 섭동과 관계되어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11] 물리적 특징[편집] 허블 우주 망원경의 탐사용 고성능 카메라에 의해 촬영된 사진(2004년 3월 22일)에서 어두운 카시니 간극은 안쪽의 B 고리와 바깥쪽의 A 고리가 넓게 분리되어 있다. 눈에 덜 뜨이는 C 고리는 B 고리의 안쪽에 있다. 밀도가 높은 주요 고리는 토성의 적도 위로 7,000 km에서 80,000 km 까지 뻗어있다.(고리의 주요 세분 참고, 토성의 적도 반지름은 60,300 km) 추정되는 부분적인 두께가 10 미터[12]만큼 작거나 1 킬로미터만큼 큰[13] 고리들은 99.9%가 순수한 물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톨린이나 규산염과 같은 약간의 불순물로 구성되어 있다.[14] 주요 고리는 주로 1 센티미터에서 10 미터 범위의 크기를 가진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15] 보이저의 관측에 근거하면, 고리의 총 질량은 약 3 x 1019 kg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토성의 총 질량의 아주 작은 한 부분(약 50 ppb)이고 토성의 위성 미마스보다도 작다.[16] 더 최근의 관측과 카시니의 관측에 근거한 컴퓨터 모형은 이 측정값이 고리 내의 군집 때문에 너무 작게 측정되었고 실제 질량은 이 값보다 세 배는 클 것임을 보여주었다.[17] 카시니 간극과 엥케 간극과 같이 고리에서 가장 큰 간극들은 지구에서도 관측될 수 있지만, 아주 작은 것들은 관측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보이저 우주선을 통해서야 고리가 수천 개의 좁은 간극과 작은 고리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이저가 발견한 고리의 구조는 토성의 많은 위성들의 중력적 끌어당김과 같이 각각 다른 방법을 통해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간극들은 판과 같은 아주 작은 위성의 통행에 의해 청소되기도 한다.[18] 일부 작은 고리들은 작은 양치기 위성의 중력적 효과에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출처 필요](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에 의해 F 고리가 유지되는 것과 유사하다) 또다른 간극들은 간극에 위치하는 입자의 공전주기와 그보다 훨씬 밖에 있는 아주 무거운 위성의 공전주기 사이의 공명에 의해 발달한다. 미마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카시니 간극을 유지한다.[19] 고리의 많은 구조는 안쪽 위성의 주기적 중력섭동에 의해 발생하여 공명에 약간 지장을 주는 나선파를 포함하고 있다.[출처 필요] 카시니 우주 탐사선이 본 토성의 고리의 어두운 면(2007년 5월 9일). 카시니 우주 탐사선의 데이터는 토성의 고리 무리가 스스로 행성의 독립적인 대기임을 시사한다. 대기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이 고리 내의 얼음과 상호작용할 때 만들어지는 산소 분자(O2) 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얼음 파편의 물분자와 자외선에 의한 화학적인 반응은 여러가지 중에서 O2를 형성하고 방출한다. 이 대기 모형에 따르면, 수소 분자(H2) 또한 존재한다. O2와 H2로 구성된 대기는 굉장히 희박하다. 이것이 어떻게든 고리에 응결된다면, 대기는 원자 하나의 두께가 될 것이다.[20] 고리는 또한 희박한 수산화물(OH) 대기와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O2와 같이, 이 대기는 물분자의 분해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에서의 분해는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에서 방출된 물분자에 퍼부어지는 고에너지 이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희박하더라도, 이 대기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통해 지구에서 관측될 수 있다.[21] 2009년 8월 12일, 분점 다음 날 카시니에 의해 촬영된 토성의 고리의 모자이크 사진. 태양을 향하고 있는 고리의 빛은 얇거나 F 고리와 같이 고리면 바깥에 있는 부분을 제외하면 토성에 의해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다. 토성은 복잡한 패턴의 밝기 변화를 보여준다.[22] 가장 큰 변동은 고리의 면이 향하는 방향의 변화 때문이고,[23][24] 이는 매번 공전할 때마다 2회의 주기로 진행된다. 그러나 상을 중첩시켜(superimose) 보면 이것은 충에 있는 행성이, 남반구에서 보다 북반구에서 더 밝게 보이게 만드는 행성의 공전궤도의 이심률에 기인한 변동이다.[25] 1980년, 보이저 1호는 토성을 근접통과하면서 서로 꼬여 복잡한 구조를 한 것처럼 보이는 세 개의 좁은 고리로 구성된 F 고리를 보여주었다. 이는 현재 안쪽에 어두운 세번째 고리가 위치하여 서로 꼬인 것처럼 착시를 보여주는, 덩어리와 꼬임으로 구성된 바깥의 두 개의 고리로 알려져 있다.[출처 필요] 2007년에 표현된 토성의 고리 일부분을 구성하는 얼음 입자 응집체. 이러한 길게 늘어진 군집들은 계속해서 결집과 해산을 반복한다. 가장 큰 입자는 수 미터에 이른다. 토성의 분점인 2009년 8월 11일, NASA의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새로운 고리 사진은 얼마 되지 않는 고리면 밖으로 몇 군데에서 고리가 상당한 크기로 뻗어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변위는 간극을 형성하는 위성, 다프니스의 궤도가 고리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킬러 간극의 가장자리에서 4 km에 이를만큼 크다.[26] 주요 고리의 형성[편집]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형성 시기를 측정함에 따라 매우 오래되었을 것이다. 토성의 안쪽 고리의 기원에 관한 두가지 주요 이론이 있다. 원래 19세기에 에두아르 로슈에 의해 주장된 한 이론은, 과거에 기조력(로슈한계 참고)에 의해 산산조각 날 만큼 가까워질 때까지 토성을 공전하다가 파괴된 (로마 신화의 여신, 베리타스로 이름 붙여진)토성의 위성이라는 것이다.[27] 변형된 이 이론은 고리가 나중에 거대한 혜성이나 소행성과 충돌하여 위성이 분해된 것이라는 것이다.[28] 두번째 이론은 고리가 위성의 파편이 아닌 대신에, 토성을 형성했던 성운 물질들의 잔재라는 것이다.[출처 필요] 좀 더 고전적인 분쇄된 위성 이론은 고리가 미마스보다 약간 큰, 지름 400~600 km의 위성의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약 40억 년 전, 후기 운석 대충돌기 동안에 위성을 충분히 분쇄할 수 있을만한 거대한 천체와의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29] 최근 R. M. 캐넙에 의해 변형된 이 이론은 고리가 토성이 아직 가스 성운에 둘러싸여 있던 형성기에 행성 쪽으로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다 외부층이 벗겨진, 타이탄 크기로 매우 큰 위성의 얼음 맨틀의 잔해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한다.[30][31] 이는 고리 내의 암석물질의 부족을 설명할 것이다. 고리는 초기에 지금보다 훨씬 무겁고(~1000배) 넓었을 것이다. 고리의 외곽 부분의 물질은 합쳐져 테티스와 같은 토성의 위성이 되었다. 이러한 대부분의 위성들의 구성 요소 또한 암석물질의 부족을 설명할 수 있다.[31] 증가하고 있는 엔셀라두스의 밀도는 현재 1.61 g/cm3 로, 1.15 g/cm3 인 미마스나 0.97 g/cm3 인 테티스와 비교해보면, 이후 엔셀라두스의 충돌적 또는 저온화산활동적(cryovolcanic) 진화가 위성의 까다로운 얼음 손실로부터 야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31] 초기의 무거운 고리에 관한 아이디어는 나중에 레아와 같은 토성의 위성들의 형성에 관한 설명까지 확장된다.[32] 초기의 무거운 고리가 얼음 뿐만 아니라 암석물질 덩어리(>100 km 반경)도 포함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규산염 천체들은 얼음을 더 많이 흡수하여 고리의 중력 상호작용과 토성의 조석 상호작용으로 인해 계속해서 넓은 궤도로 전이하여 고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로슈한계 내의 암석 천체들은 추가적인 물질을 흡수하기 충분할 정도로 밀도가 높지만, 얼음 천체와 같은 것들은 밀도가 낮아 그렇지 못하다. 고리 바깥쪽에 새로 형성된 위성들은 무작위 병합을 통해 진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과정은 레아와 같은 토성의 위성의 규산염 물질의 변화와 토성과 가까울수록 규산염 물질이 적어지는 경향도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레아는 원시 고리에서 형성된 위성 중 가장 늙은 것이 될 것이고, 토성과 가까운 위성일수록 젊을 것이다.[32] 유성체 먼지의 유입으로 시간에 따라 고리가 점점 검은색으로 변색되어야 할 것을 고려하면, 토성의 고리를 구성하는 얼음의 밝기와 순도는 고리의 연령이 약 1억 년 정도로, 토성보다 훨씬 어리다는 증거로 들어왔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는 B 고리가 유입되는 물질을 희석시킬 정도로 충분히 무겁기 때문에 태양계의 연령 이상의 기간 동안 흑색화를 방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리 물질은 고리 내의 군집을 형성하여 후에 충돌로 분해됨으로써 순환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젊게 보이는 고리 내의 일부 물질을 설명할 것이다.[33] 래리 에스포지토가 이끄는 카시니 UVIS 연구팀은 항성엄폐를 이용하여 F 고리 내에서 27 미터에서 10 킬로미터까지 이르는 13 개의 천체를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반투명했는데, 이들이 수 미터에 이르는 얼음 바위의 일시적인 응집물임을 암시한다. 에스포지토는 이것이 토성의 고리의 기본 구조로, 서로 뭉치고 후에 산산조각 나는 입자라고 여겼다.[34][35] 고리 내의 세분 및 구조[편집] 토성의 고리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부분은 카시니 간극(1675년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에 의해 발견됨) 에 의해 분리된 A 고리와 B 고리이다. 마찬가지로 1850년에 발견된 C 고리도 카시니 간극과 특징에 있어서 유사한데, 이러한 영역들은 주요 고리를 구성한다. 주요 고리는 밀도가 높고 미세먼지 고리보다는 큰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세먼지로 구성된 경우는 토성의 최상층 구름 쪽까지 뻗어있는 D 고리와 G 고리, E 고리, 그 외 주요 고리계 뒤에 있는 다른 것들이 있다. 이렇게 희미한 고리들은 구성 입자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거의 먼지로만 구성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의 화학적 조성은 주요 고리와 유사한데, 거의 대부분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A 고리의 가장자리 바로 바깥에 있는 좁은 F 고리는 구성 부분이 매우 밀도가 높지만, 먼지크기 입자 또한 많은 양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류하기가 매우 어렵다. 2007년 5월 5일, 카시니의 협각 카메라로 빛이 비추어지지 않고 있는 토성의 D, C, B, A, F 고리(왼쪽에서 오른쪽으로)를 촬영한 자연색상 모자이크 사진이다. 빛이 비추어지고 있는 토성의 고리 부분으로 세분화된 주요 고리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데이터 표[편집] 주: (1) 거리는 간극, 고리, 1,000 km 보다 좁은 미세고리(ringlet)의 중심까지 잰 것 (2) 비공식적인 명칭 (3) 유명한 이름이 아닌 한 국제천문연맹에서 지명한 이름을 사용함. 넓은 간극은 경계(division)라 일컫고, 좁은 간극은 틈(gap)이라고 일컬음 (4) 데이터는 대부분 행성의 지명 명명법 사전, NASA 정보보고서와 일부 논문에서 가져온 것[36][37][38] 고리의 주요 세분[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D 고리 66,900 – 74,510 7,500 C 고리 74,658 – 92,000 17,500 B 고리 92,000 – 117,580 25,500 카시니 간극 117,580 – 122,170 4,700 조반니 카시니 A 고리 122,170 – 136,775 14,600 로슈 간극 136,775 – 139,380 2,600 에두아르 로슈 F 고리 140,180 (1) 30 – 500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2) 149,000 – 154,000 5,000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 G 고리 166,000 – 175,000 9,000 메토네 고리 호(2) 194,230 ? 메토네 안테 고리 호(2) 197,665 ? 안테 팔레네 고리(2) 211,000 – 213,500 2,500 팔레네 E 고리 180,000 – 480,000 300,000 포에베 고리 ~4,000,000 – >13,000,000 포에베 C 고리 내의 구조[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콜롬보 간극 77,870 (1) 150 주세페 "베피" 콜롬보 타이탄 미세고리 77,870 (1) 25 타이탄, 토성의 위성 맥스웰 간극 87,491 (1) 270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맥스웰 미세고리 87,491 (1) 64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본드 간극 88,700 (1) 30 윌리엄 크랜치 본드와 조지 필립스 본드 1.470RS 미세고리 88,716 (1) 16 토성의 반지름 1.495RS 미세고리 90,171 (1) 62 토성의 반지름 도스 간극 90,210 (1) 20 윌리엄 루터 도스 카시니 간극 내의 구조[편집] 출처:[39]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하위헌스 간극 117,680 (1) 285–400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하위헌스 미세고리 117,848 (1) ~17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허셜 간극 118,234 (1) 102 윌리엄 허셜 러셀 간극 118,614 (1) 33 헨리 노리스 러셀 제프리스 간극 118,950 (1) 38 해럴드 제프리스 카이퍼 간극 119,405 (1) 3 제라드 카이퍼 라플라스 간극 119,967 (1) 238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베셀 간극 120,241 (1) 10 프리드리히 베셀 바너드 간극 120,312 (1) 13 에드워드 에머슨 바너드 A 고리 내의 구조[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엥케 간극 133,589 (1) 325 요한 엥케 킬러 간극 136,505 (1) 35 제임스 킬러 위 사진은 2004년 12월 12일에 카시니의 협각 카메라로 햇빛이 비추어지는 고리 부분을 비스듬하게(4도 정도) 촬영한 자연색상 모자이크 사진이다. 아래사진은 2005년 5월 3일에 행해진 라디오파 엄폐 관측으로 그려진 가상사진이다. 낮은 사진에서의 색은 고리 입자 크기에 대한 정보를 나타내는데 이용된다.(맨 위에서 두번째 사진의 설명 참고) D 고리[편집] 안쪽의 희미한 파문을 보여주도록 처리된 카시니의 토성의 D 고리 사진, 좌측상단에서 매우 밝은 C 고리가 보인다. D 고리(D Ring)는 가장 안쪽의 고리로, 매우 희미하다. 1980년, 보이저 1호가 이 고리 내에서 D73, D72, 그리고 토성과 가장 가까운 별개의 미세고리 D68로 명명된 미세고리 세 개를 발견했다. 약 25년 후, 카시니가 촬영한 사진은 D72가 상당히 폭이 넓고 더 희미하게 된데다, 행성 방향으로 200 km 이동한 것을 보여주었다.[40] D 고리에서 보이는 것은 30 킬로미터 간격의 미세규모 파동 구조이다. C 고리와 D73 사이의 간극에서 처음 본 이 구조는,[40] 2009년 토성의 분점 동안에 D 고리에서 B 고리의 안쪽 끝까지 반경거리 19,000 km까지 뻗은 채로 발견되었다.[41][42] 이 파동은 진동수가 2 m에서 20 m인 수직 파상 주름의 나선 패턴으로,[43] 파동의 주기는 시간에 따라 감소하고 있다.(1995년에는 60 km, 2006년에는 30 km) 이로부터 파동이 1983년 말에 고리 적도면에 대해 기울어진채로 분쇄된 혜성의 잔해 구름(질량이 ~1012 kg)의 충돌로 기원되었을 수도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40][41][44] 이와 유사한 목성의 주요 고리에서의 나선 패턴은 1994년 슈메이커-레비 제9혜성에서 온 물질과의 충돌로 인해 야기된 섭동의 결과로 판단되었다.[41][45][46] C 고리[편집] C 고리 외곽에서의 관점. 사진의 오른편, 가장 어두운 간극이 맥스웰 간극이고, 그 중심에 맥스웰 미세고리가 있다. 본드 간극은 밝은 띠의 위쪽, 우측상단 방향에 있고, 도스 간극은 우측상단 모퉁이 바로 아래의 어두운 띠 안에 있다. C 고리(C Ring)는 폭이 넓지만 희미한 고리이다. B 고리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고리는 1850년 윌리엄 본드와 조지 본드에 의해 발견되었다. 윌리엄 R. 도스와 요한 갈레 또한 그들과 별개로 고리를 관측했다. 윌리엄 라셀은 이 고리를 밝은 A 고리와 B 고리에 비해 어두운 물질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크레이프 고리"(Crepe Ring)라고 이름 붙였다.[47] C 고리의 수직 두께는 5 미터이고, 질량은 1.1×1018 kg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리의 광학적 깊이가 0.05에서 0.12까지 달라진다.[출처 필요] 이는 고리가 가려지면서 5 퍼센트에서 12 퍼센트 사이의 빛만 수평으로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위에서 관측할 때, 고리는 거의 투명하게 된다. D 고리에서 최초로 보인 30 킬로미터 파장의 나선 파상 주름은 2009년 토성의 분점 동안 C 고리까지 뻗은 채로 관측되었다.(위 참고) 콜롬보 간극과 타이탄 미세고리[편집] 콜롬보 간극(Colombo Gap)은 C 고리의 안쪽에 위치해 있는 간극이다. 간극 내에는 토성의 중심부로부터 77,883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중심을 둔 밝고 좁은 콜롬보 미세고리가 위치해있다. 이 미세고리는 위성 타이탄과의 궤도공명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타이탄 미세고리(Titan Ringlet) 로도 불린다.[48] 고리 내의 이 위치에서, 고리 입자의 근일점 세차운동 거리는 타이탄의 궤도운동 거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 특이한 미세고리의 바깥쪽 끝부분은 항상 타이탄 쪽을 향하고 있다.[48] 맥스웰 간극과 미세고리[편집] 맥스웰 간극(Maxwell Gap)은 C 고리의 바깥 부분 내에 위치해 있는 간극이다. 또한 간극은 밀도가 높은 비원형 미세고리인 맥스웰 미세고리(Maxwell Ringlet)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점에서 이 미세고리는 천왕성의 엡실론 고리와 유사하다. 두 고리의 중심에는 파동과 유사한 구조가 있다. 엡실론 고리의 파동이 천왕성의 위성인 코델리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맥스웰 간극의 경우 현재까지 그러한 구조를 야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위성이 발견되지 않았다.[34] B 고리[편집] 분점 직전에 본 B 고리의 바깥쪽 끝 부분으로, 아마 관측되지 않은 소위성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5 km까지의 수직 구조에 의해 드리운 그림자가 있는 위치이다. 맨 위에 카시니 간극이 보인다. B 고리(B Ring)는 고리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밝으며, 가장 무겁다. 고리의 두께는 5 미터에서 15 미터 정도로 추정되고, 질량은 2.8×1019 kg이며, 광학적 깊이는 0.4에서 2.5까지 달라진다. 이는 B 고리의 일부분이 가려지면서 91%의 햇빛이 통과한다는 뜻이다.[출처 필요] B 고리는 밀도와 밝기의 다양한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이는 거의 모두 설명되지 않고 있으며, B 고리가 어떠한 간극을 포함하고 있지 않더라도 원모양의 좁은 미세고리로써 보이게 만든다.[출처 필요] B 고리의 바깥 부분에서는 주요 고리면에서 2.5 킬로미터까지 벗어난 수직 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테[편집] 미디어 재생 카시니가 촬영한 낮은 위상각에 있는 B 고리의 밝은 부분에 나타난 어두운 테 사진. 이는 낮은 비트레이트 영상이다. 최대 크기 영상,GIF 사진 (400×400 픽셀, 파일 용량: 2.21 MB) 1980년 까지, 토성의 고리의 구조는 오로지 중력에 의한 반응에 의해서만 야기된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보이저 우주선에서 온 사진은 테(spoke)로 알려져 있는,[49] B 고리의 반경에 따른 특징을 보여주었다. 테는 고리의 지속성과 회전이 중력 궤도역학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아, 이런 원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50] 또 테는 후방산란광에서 어둡게, 전방산란광에서 밝게 보인다.(갤러리 사진 참고) 이 변화는 약 60˚에 가까운 위상각에서 발생한다. 테의 구성에 관한 기성 이론은, 테가 아주 미세한 먼지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먼지입자들은 토성의 자기권 내에서 거의 동시에 회전함으로써 일어난 정전기적 반발에 의해 주요 고리에서 날아와 정체했다. 전기적 섭동이 토성의 대기나 고리에 미소 유성체가 충돌하면서 일어난 번개에 의해 테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되어 왔지만, 이를 만들어내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51] 테는 카시니 탐사선이 관측할 때까지 약 25년 동안 다시 관측되지 않았다. 2004년 초에 카시니가 토성에 도착했을 때 이 테는 보이지 않았다. 일부 과학자들은 테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 모형에 근거하여, 2007년까지 테가 관측되지 않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시니 영상 팀은 계속해서 고리 사진에서 테가 촬영되길 기대했다. 이들은 다음 해, 2005년 9월 5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52] 테는 토성이 분점에 가까워질 때인 토성의 한겨울에 사라지고, 한여름에 다시 나타나는 계절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테가 29.7년 주기로 토성이 공전함에 따라 달라지는 계절적인 효과라는 주장은 카시니 임무 후년에 이들이 점진적으로 재출현함으로써 뒷받침되었다.[53] 소위성[편집] 2009년, 분점 동안에 B 고리에 박혀있는 소위성이 주변에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발견되었다. 크기는 직경 400 미터(1,300 ft)로 추정된다.[54] 소위성에게는 S/2009 S 1이라는 임시명칭이 주어졌다. 카시니 간극[편집]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카시니 간극. 하위헌스 간극은 카시니 간극의 오른쪽 둘레에 위치해 있고, 라플라스 간극은 사진 중앙에 위치해 있다. 카시니 간극(Cassini Division)은 A 고리와 B 고리 사이에 있는 4,800 km 폭의 영역으로, 1675년 파리 천문대의 2.5인치 대물렌즈에 20 피트 초점길이, 90배율 굴절망원경을 이용한 조반니 카시니에 의해 발견되었다.[55][56] 지구에서 이 간극은 고리의 얇고 검은 공백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이저는 이 간극이 C 고리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고리 물질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34] 상대적으로 낮은 밀도의 물질들이 고리의 두께를 통해 빛을 더 많이 투과시키기 때문에, 고리의 빛이 비춰지지 않는 쪽에서 보면 간극은 밝게 보인다.(갤러리의 두번째 사진 참고)[출처 필요] 카시니 간극의 안쪽 가장자리는 강력한 궤도공명에 의해 통제된다. 이 위치에서의 고리 입자의 궤도는 항상 미마스의 궤도의 두 배이다.[57] 공명은 미마스가 이 위치에서의 고리 입자를 뭉치게 하고, 입자의 궤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서 고리 밀도의 예리한 절단을 초래하도록 끌어당기게 만든다. 그러나, 카시니 간극 내의 미세고리 사이에 있는 다른 많은 간극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출처 필요] 하위헌스 간극[편집] 하위헌스 간극(Huygens Gap)은 카시니 간극의 안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이 간극은 중간에 밀도가 높고, 둥근 하위헌스 미세고리(Huygens Ringlet)를 포함하고 있다. 이 미세고리는 미마스와의 2:1에 가까운 공명과 B 고리의 바깥쪽 원형 가장자리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하학적 폭과 광학적 깊이의 불규칙한 방위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위헌스 미세고리 바로 바깥에는 좁은 미세고리가 하나 더 있다.[34] A 고리[편집] A 고리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글자에 대해서는 Å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A 고리 내의 판의 궤도와 일치하는 엥케 간극의 중심 미세고리, 말발굽 궤도에 있는 미세고리 입자의 진동을 암시하고 있다. A 고리(A Ring)는 가장 바깥쪽에 있는 크고 밝은 고리이다. 고리의 안쪽 경계는 카시니 간극이고, 뚜렷한 바깥쪽 경계는 작은 위성 아틀라스의 궤도와 가깝다. A 고리는 엥케 간극에 의해 바깥쪽 가장자리의 폭의 22%에 해당하는 폭이 끊겨있다. 바깥쪽 가장자리의 폭의 2%에 해당하는 더 좁은 간극은 킬러 간극이라 불린다. A 고리의 두께는 10 미터에서 30 미터로 추정되고, 질량은 6.2×1018 kg(대략 히페리온의 질량)이며, 광학적 깊이는 0.4에서 1.0까지 달라진다.[출처 필요] B 고리와 유사하게,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는 궤도공명에 의해 유지되는데, 이 경우는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의 7:6 공명이다.[출처 필요] 또한 A 고리의 구조 대부분을 설명하는 다른 궤도공명은, 고리 내의 다양한 나선 밀도파(위성에 의한 것보다는 덜한 정도, 다른 고리도 마찬가지)에 의해 유발된다. 이러한 밀도파는 은하의 나선팔을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물리과정에 의해 설명된다. 또 동일한 이론에 의해 기술되는 A 고리의 나선 굴곡 파동은, 압축파이기 보다는 고리의 수직적 파상 주름이다.[출처 필요] 2014년 4월, NASA의 과학자들은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 근처가 새로운 위성의 형성 단계에 있을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58][59] 엥케 간극[편집] 다프니스의 통과에 의해 발생하는 킬러 간극 가장자리의 요동. 토성의 분점에 가까울 때, 다프니스와 A 고리에 그림자를 드리운 요동. 엥케 간극(Encke Gap)은 A 고리 내의 폭 325 킬로미터의 간극이다.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133,590 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두고 있다.[60] 엥케 간극은 간극 내에서 공전하고 있는 작은 위성인 판에 의해 형성되었다.[61]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사진은 간극에 적어도 세개의 얽힌 얇은 미세고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34] 판이 나선을 그리는 물결흔적을 추가적으로 유발하는 동안, 간극의 양쪽에서 보이는 나선 밀도파는 고리 근처 외부에 있는 위성과의 공명에 의해 유발된다.(갤러리 참고)[34] 요한 엥케 그 자신은 이 간극을 관측하지 못했고, 나중에 그의 고리의 관측을 기리기 위해서 이름 붙여졌다. 간극은 1888년에 제임스 에드워드 킬러에 의해 발견되었다.[47] A 고리에서 두번째로 크고, 보이저에 의해 발견된 간극은 킬러를 기리기 위해 킬러 간극으로 이름 붙여졌다.[62] 엥케 간극은 완전히 A 고리 내에 있기 때문에 틈(gap)이다. 2008년 국제천문연맹에서 명확한 정의를 내릴 때까지, 틈(gap)과 경계(division)라는 용어 사이의 몇가지 애매성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간극은 "엥케 경계"(Encke Division)라고 불렸었다.[63] 킬러 간극[편집] 킬러 간극(Keeler Gap)은 A 고리 내의 폭이 42 킬로미터인 간극이다.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대략 25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간극 내에서 공전하면서 간극을 청소하는 작은 위성인 다프니스가 2005년 5월 1일에 발견되었다.[64] 위성은 간극의 가장자리에 요동을 유발한다.[34] 다프니스의 공전은 고리면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유발되는 요동은 고리면에 대해 위쪽으로 1.5 km (0.93 마일) 거리에 이르는 수직 요소를 가지고 있다.[65][66] 킬러 간극은 보이저에 의해 발견되었고, 천문학자 제임스 에드워드 킬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이 간극의 명칭에 붙여졌다. 또 킬러는 엥케 간극을 발견하여 요한 엥케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간극의 명칭으로 붙였다.[47] 소위성[편집] 소위성 블레리오 A 고리에서 처음 발견된 네 개의 소위성의 위치. 2006년, 네 개의 작은 "소위성"(moonlet)이 카시니가 촬영한 A 고리의 사진에서 발견되었다.[67] 소위성은 직경이 고작 약 100 미터 정도로, 직접 관측하기에는 매우 작다. 카시니가 실제로 관측한 것은 소위성이 일으킨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프로펠러 모양의 섭동이다. 이러한 천체들은 A 고리 내에 수백 개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되었다. 2007년, 여덟 개의 소위성이 더 발견되었다. 이들은 주로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약 130,000 km 떨어져 있는, 3000 km 대에 갇혀 있었고,[68] 2008년까지 150개 이상의 프로펠러 소위성이 관측되었다.[69] 몇년 동안 추적해온 것은 블레리오(Bleriot)라고 이름 붙여졌다.[70] 로슈 간극[편집] A 고리와 좁은 F 고리 사이의 로슈 간극(사진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거대한 간극). 아틀라스가 사진에서 보인다. 또 엥케 간극과 킬러 간극도 보인다. A 고리와 F 고리 사이의 간극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에두아르 로슈를 기리기 위해 로슈 간극(Roche Division)으로 붙여졌다.[71] 로슈 간극은 거대한 천체가 (토성과 같은)행성과 매우 가까이 있을 때 행성의 기조력에 의해 산산조각나는 물리학적 개념인 로슈 한계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72] 주요 고리계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로슈 간극은 사실 고리가 위성으로 흡수될 수 없는 이유인 토성의 로슈 한계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73] 카시니 간극과 같이, 로슈 간극은 텅 비어있지 않고 물질 덩어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 물질의 특징은 빈약하고 먼지투성이의 D 고리, E 고리, G 고리와 유사하다.[출처 필요] 로슈 간극 내의 두 위치에서는 다른 위치보다 먼지의 집중이 크다. 이것들은 카시니 탐사선 영상 팀에 의해 발견되었고, 임시 명칭이 주어졌다. R/2004 S 1은 위성 아틀라스의 궤도를 따라 놓여있고, R/2004 S 2는 프로메테우스의 궤도의 안쪽,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138,900 km 떨어진 곳에 중심을 두고 있다.[출처 필요] F 고리[편집] 미디어 재생 F 고리의 양쪽을 공전하는 양치기 위성 판도라(왼쪽)와 프로메테우스(오른쪽). 고리의 안쪽에 새겨진 검은 홈이 프로메테우스를 뒤쫓고 있다. F 고리(F Ring)는 토성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별개의 고리이고 시간 단위의 시간규모로 특징이 변하고 있는, 아마도 태양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고리일 것이다.[74] 고리는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3,000 km 뒤에 위치해 있다.[75] F 고리는 1979년 파이오니어 11호 영상 팀에 의해 발견되었다.[76] 매우 얇고, 폭이 고작 수백 킬로미터로, 안쪽과 바깥에서 공전하고 있는 양치기 위성인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61] 최근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근접 촬영 사진은 F 고리가 한개의 고리 핵과 그 주변의 나선 가닥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77] 또한 프로메테우스가 최원점에서 고리와 근접할 때, 위성의 중력이 F 고리의 안쪽 부분에 어두운 홈(channel)을 두어, 고리의 물질을 '훔쳐감'으로써 고리의 구부러짐과 꼬임을 유발한다.(갤러리에 있는 F 고리 사진의 비디오 링크 참고) F 고리 내의 물질보다 토성을 더 빨리 공전하는 프로메테우스로 인해, 새로운 홈들은 각각 이전의 것보다 약 3.2도 앞쪽에 형성된다.[74] 2008년, F 고리 내에서 공전 중인 미관측된 작은 위성이 프로메테우스의 섭동으로 인해 계속해서 고리의 좁은 핵을 통과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요동 원인이 더 발견되었다. 작은 위성 중 하나는 S/2004 S 6 일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확인되었다.[74] F 고리의 255˚(약 70%)를 보여주는 107장의 사진을 합성하여 만든 모자이크 사진. 반경 폭(꼭대기에서 바닥까지)은 1,500 km이다. 외곽 고리[편집] 태양에 의해 후방에 빛이 비추어짐으로써 보이는 외곽 고리 안테 고리 호. 밝은 점은 안테이다. 후방에 빛이 비추어지는 E 고리. 고리를 배경으로, 엔셀라두스의 실루엣과 그 아래에서 엔셀라두스의 남극에서 방출되는 제트가 밝게 보인다.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편집] 2006년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전방산란광 사진에 드러난 것과 같이,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의 궤도가 위치한 영역 근처에는 희미한 먼지 고리가 있다. 이 고리는 반경 폭이 약 5,000 km이다.[78] 이것의 근원은 위성의 표면과 유성체와의 충돌로 인해 솟아올라, 궤도 경로를 둘러싸는 희미한 고리를 형성한 입자이다.[79] G 고리[편집] G 고리(G Ring)는 F 고리와 E 고리의 시작점 사이의 중간에 있는 매우 얇고, 희미한 고리이다.(갤러리의 마지막 사진 참고) 고리의 안쪽 가장자리는 미마스의 궤도 안쪽으로 약 15,000 km 떨어져 있다. G 고리는 고리의 안쪽 가장자리 근처에 뚜렷하고 밝은 호(해왕성의 고리의 호와 유사하다)를 하나 포함하고 있다. 호는 G 고리의 둘레의 약 6분의 1배만큼 뻗어있고, 미마스와 7:6 궤도공명에 의해 제자리에 유지되는 0.5 km 직경의 소위성 아이가이온에 중심을 두고 있다.[80][81] 호는 직경이 수 미터 까지의 얼음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G 고리의 일부분은 이 호에서 방출된 먼지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9,000 km 폭의 G 고리 전체에 비해, 호의 반경 폭은 약 250 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80] 호는 직경이 약 100 미터의 작은 얼음 소위성에 해당하는 물질을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80] 유성진과의 충돌로 인해 아이가이온과 다른 근원 천체에서 방출된 먼지는, 토성의 자기권(G 고리의 궤도 운동보다 훨씬 빠르게 회전하는, 토성의 자기장과 동시에 회전하는 플라스마)과의 상호작용 때문에 호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작은 입자들은 계속해서 유성진과의 많은 충돌로 인해 침식되고, 플라스마의 인력에 의해 흩어진다. 수천 년 동안 고리는 서서히 질량을 잃게 되지만,[82] 아이가이온과 유성진의 계속되는 충돌로 다시 보충된다. 메토네 고리 호[편집] 2006년 9월에 처음으로 관측된, 세로 방향으로 약 10도 가량 걸쳐 있는 희미한 고리 호는 위성 메토네와 연관되어 있다. 호의 물질은 유성진과의 충돌에 의해 메토네에서 방출된 먼지에 해당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 내의 먼지의 분산은 (G 고리 내의 호의 분산 메커니즘과 유사한)미마스와의 14:15 궤도공명에 기인한 것이다.[83][84] 동일한 궤도공명의 영향을 받아, 메토네는 자신의 궤도에서 경도 5˚의 진폭을 가진 채 전후로 진동을 한다. 안테 고리 호[편집] 2007년 6월에 처음 관측된, 세로 방향으로 약 20도 가량 걸쳐 있는 희미한 고리 호는 위성 안테와 연관되어 있다. 호의 물질은 유성진과의 충돌에 의해 안테에서 방출된 먼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 내의 먼지의 분산은 미마스와의 10:11 공명에 기인한 것이다. 동일한 공명의 영향으로, 안테는 자신의 궤도에서 경도 14도 이상으로 전후로 운동하게 된다.[83][84] 팔레네 고리[편집] 2006년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전방산란광 사진에서, 팔레네의 궤도를 공유하는 희미한 먼지 고리가 드러났다.[78] 이 고리는 반경 폭이 약 2,500 km이다. 고리의 근원은 유성체와의 충돌로 팔레네의 표면에서 방출되어, 자신의 궤도 경로를 둘러싸는 희미한 고리를 형성한 입자이다.[79][84] E 고리[편집] E 고리(E Ring)는 두번째로 가장 바깥에 있는 고리이고, 매우 폭이 넓다. 규산염, 이산화탄소, 암모니아 및 얼음으로 구성된 매우 작은(마이크로미터 이하)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85] E 고리는 미마스와 타이탄의 궤도 사이에 분포해 있다.[86] 다른 고리와는 달리, 눈에 보일 정도의 얼음덩어리 보다는 아주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 E 고리의 물질의 근원은 위성 엔셀라두스의 남극 영역에 있는 "타이거 스트라이프"(tiger stripe)에서 나오는 얼음화산의(cryovolcanic) 분출물[87][88]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주요 고리와는 달리, E 고리는 2,000 km 이상 두껍고, 엔셀라두스와의 거리가 증가할수록 두께가 증가한다.[86] E 고리의 입자는 고리 내에서 공전하는 위성에 뭉치려는 경향이 있다. 테티스의 순행 반구(leading hemisphere, 위성의 공전 방향의 반구)의 적도는 거기서 유입된 물질에 의해 약간 파란색을 띤다.[89] 텔레스토, 칼립소, 헬레네, 폴리데우케스와 같은 트로이 위성들은 특히 고리의 면의 아래 위로 궤도 운동을 함으로써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결과로, 위성들의 표면은 밝은 물질로 뒤덮여 있어 주름 없이 매끄러운 것이 특징이다.[90] 포에베 고리[편집] 주요 고리를 왜소해 보이게 만드는 포에베 고리의 거대한 정도. 삽입된 사진은 고리의 일부를 담은 24 마이크로미터 스피처 사진이다. 2009년 10월, 포에베의 궤도 바로 안에 희미한 물질 원반의 발견이 발표되었다. 발견 당시에, 원반은 모서리가 지구를 향해 있었다. 이 원반은 다른 고리들 처럼 대략적으로 설명된다. 매우 거대하긴(겉보기 크기가 지구에서 보이는 보름달의 두배) 해도, 고리는 사실 보이지 않는다. 고리는 NASA의 스피처 우주 망원경을 이용해서 발견되었고,[91] 관측 전체 범위에서 보였는데, 토성의 반지름의 128~207배 만큼 뻗어있었다.[92] 계산은 59 토성 반지름의 이아페투스의 궤도를 안쪽으로, 바깥쪽으로는 300 토성 반지름까지 뻗어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93] 고리는 나중에 WISE, 허셜우주망원경과 카시니 탐사선을 이용하여 연구되었다.[94] 포에베는 토성으로부터 평균 215 토성 반지름 거리에서 공전한다. 포에베 고리(Phoebe Ring)는 두께가 행성의 직경보다 약 20배만큼 두껍다.[95] 고리의 입자가 포에베와 유성진 이상의 천체와의 충돌에서 기원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들은 안쪽의 위성 이아페투스의 궤도 운동과 반대 방향의 역행 궤도를 공유해야 한다.[93] 포에베 고리는 토성의 궤도면에 위치해 있고, 거의 타원이다. 따라서 토성의 적도면과, 다른 고리에 대해 27도 기울어져 있다. 포에베는 토성의 궤도 측면에 대해 5˚정도 기울어져 있고(포에베의 역행 공전 운동 때문에 종종 175˚로 쓰인다), 고리면 상하의 수직적 이탈은 포에베 고리의 40 토성 반지름에 육박하는 관측된 두께와 일치한다. 포에베 고리의 존재는 1970년대 스티븐 소터에 의해 제기되었다.[93] 발견은 버지니아 대학교의 앤 J. 버비서(Anne J. Verbiscer) 및 마이클 F. 스크루츠키(Michael F. Skrutskie)와 메릴랜드 대학 칼리지 파크 캠퍼스의 더글라스 P. 해밀턴에 의해 이루어졌다.[92][96] 세 명은 대학원생으로써 코넬 대학교에서 함께 연구했다.[97] 고리 물질은 태양 복사의 재방출 때문에 안쪽으로 이동하게 되고,[92] 따라서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와 충돌하게 된다. 이 물질의 유입은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를 약간씩 어둡고 붉게 만들고 있지만(천왕성의 위성인 오베론과 티타니아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위성의 극적인 두가지 색을 곧바로 만들지는 못한다.[98] 유입되는 물질은 따뜻한 영역에서의 얼음 승화로 인한 열적인 자체 분해 과정 뒤에 차가운 영역에서의 수증기의 응결이 뒤따르면서 양의 피드백이 일어난다. 이는 북극 영역과 역행 반구(trailing hemisphere)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밝은 얼음 퇴적물과 대조를 이루는,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의 적도 영역 대부분을 덮고 있는 어두운 잔여물질을 남긴다.[99][100][101] 레아의 고리계 존재 가능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레아의 고리입니다. 토성의 두번째로 큰 위성 레아는 고체 입자로 구성된 원반 내에 세 개의 좁은 띠를 포함하는 매우 작은 고리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가설화 되었다.[102][103] 이러한 가설상의 고리는 발견되지는 못했지만, 2005년 11월 카시니의 관측에서, 레아 근처에서의 토성의 자기권의 고에너지 전자의 부족으로부터 그 존재가 추정되었다. 자기권 영상 기구(Magnetospheric Imaging Instrument, MIMI)는 위성의 양면의 플라스마 흐름에서 세 개의 급격한 감소가 간간이 끼어드는, 거의 대칭적인 패턴을 보이는 부드러운 변화를 관측했다. 플라스마가 아마 수 데시미터에서 약 1미터 직경의 입자로 구성된 고밀도 고리 또는 고리 호를 포함하는 적도의 원반 모양의 고체 물질에 의해 흡수된 것이라면, 이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레아의 고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더 최근의 증거 일부는 위성의 적도 2도 이내의 둘레 근처에 4분의 3 만큼 뻗어 있는, 일사불란하게 분포된 자외선상의 작고 밝은 점들의 집합이다. 이 점들은 궤도에서 벗어난 고리 물질의 충돌 지점으로써 설명된다.[104] 그러나, 카시니의 목표가 된 가설상의 고리 면의 여러 각도에서의 관측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그러한 불가사의한 특징에 대한 또다른 설명이 필요함을 시사한다.[105] 갤러리[편집] 토성의 분점 가까이에서 B 고리(꼭대기)의 빛이 비추어지지 않은 안쪽과 C 고리(바닥)의 바깥쪽을 촬영한 카시니의 모자이크 사진. 미마스의 그림자가 많이 보인다. 그림자는 빽빽한 B 고리에 의해 희미해졌다. 맥스웰 간극이 중심부 아래에 보인다. 해가 비추어지지 않은 B 고리의 일부분을 촬영한 카시니의 사진에서 낮은 위상각의 어두운 테가 보인다. 중심부 왼쪽에, 두 개의 어두운 간극(큰 쪽은 하위헌스 간극)과 왼쪽의 카시니 간극을 구성하는 밝은 미세고리가 있다. 2009년에 카시니에 의해 144˚의 위상각에서 촬영된, 밝은 B 고리의 테와 함께 햇빛이 비춰지는 고리 부분이 담긴 사진. A 고리의 엥케 간극을 통한 판의 운동은 가장자리의 요동과 (스스로 전파되지 않는)그 앞과 안쪽에 나선을 그리는 물결흔적을 유발한다. 다른 더 빽빽한 물결대는 나선 밀도파이다. (오른쪽의 오래된 홈과 함께)F 고리 내의 어두운 홈을 형성하고 있는 궤도 최원점 근처의 프로메테우스. 이 과정에 대한 영상은 카시니 영상 팀 웹사이트[106] 또는 유투브[107]에서 볼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중앙)와 판도라는 F 고리의 양쪽에 있는 양치기 위성이다. 아마 F 고리의 핵을 통과하거나 가까이서 공전하고 있는 작은 소위성의 섭동 효과 때문으로 추정되는 F 고리의 요동 원인. G 고리의 일부를 가린 토성의 그림자. 호의 궤도 운동을 보여주는 영상은 유투브[108] 또는 카시니 영상 팀 웹사이트[109]에서 볼 수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갈릴레오 갈릴레이 - 1610년, 토성의 고리를 최초로 관측한 사람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 1655년, 토성의 고리를 토성을 둘러싼 고리라고 최초로 묘사한 사람 조반니 카시니 - 1675년, A 고리와 B 고리 사이의 간극(카시니 간극)을 발견한 사람 에두아르 로슈 - 토성의 로슈 한계 내에서 위성이 어떻게 파괴되어 고리를 형성하는지 설명한 프랑스의 천문학자 천왕성의 고리 - 태양계의 행성 중 고리가 있는 행성 중 하나인 천왕성의 고리에 대한 설명이다. 각주[편집] ↑ Porco, Carolyn. “Questions about Saturn's rings”. 《CICLOPS web site》. 2012년 10월 5일에 확인함. |work=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가 나 Tiscareno, M. S. (2012년 7월 4일 preprint). 〈Planetary Rings〉. Kalas, P.; French, L. 《Planets, Stars and Stellar Systems》. Springer. 6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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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토성의 고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토성의 테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3년 7월 19일, 1,200,000 km 거리의 카시니 탐사선의 위치에서 토성이 태양을 가릴 때 촬영된 토성의 고리의 총집합(밝기가 과장되었다)이다. G 고리와 E 고리 외곽 사이에서 약 4시 방향 위치에서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의 형태로 보인다. 라디오파 엄폐를 통해 색을 입혀 만들어진 사진이다. 0.94, 3.6, 13 cm 파장의 라디오 신호가 카시니로부터 고리를 통해 지구로 전송되었다. 신호의 파장과 비슷하거나 큰 크기의 수많은 입자들이 반사하여 각 신호의 감쇠가 일어난다. 보라색(B 고리와 A 고리 내부)은 5 cm 보다 작은 입자가 얼마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신호의 감쇠와 비슷하다. 초록색과 파란색(C 고리와 A 고리 외곽)은 5 cm에서 1 cm보다 작은 입자가 각각 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B 고리의 하얀 영역은 가장 밀도가 높고 크기 추정 용도의 작은 신호를 매우 잘 반사한다. 또다른 증거는 세 고리 모두 미터 단위를 넘나드는 넓은 범위의 입자 크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이저 2호가 본 고리에 드리운 토성의 그림자. 네 개의 위성과 고리의 테가 보인다. 토성의 고리(영어: Rings of Saturn)는 태양계에서 어떤 행성의 고리보다도 가장 큰 행성 고리계이다. 이 고리는 수 마이크로미터에서 수 미터에 이르는 작은 입자들로 아주 많이 구성되어 있으며, 토성을 공전하고 있다.[1] 고리 입자는 거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량의 구성성분은 암석 물질이다. 토성의 고리의 형성 과정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고리의 일부 특징들은 고리가 비교적 최근에 기원했음을 시사하지만, 이론적인 모형은 태양계의 역사 초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2] 고리는 햇빛을 반사하여 토성의 밝기를 증가시키지만, 지구에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610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토성의 고리를 발견했지만, 그는 망원경의 성능이 좋지 못해고리를 귀나 컵의 손잡이라고 생각했어도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한 사람이 되었다. 1655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그것을 토성을 둘러싸는 고리로써 최초로 묘사한 사람이 되었다.[3] 많은 사람들이 토성의 고리가 아주 작은 고리들로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라플라스 이후의 개념),[3] 실제로는 몇 개의 간극이 존재한다. 동심원 모양으로 밀도와 밝기의 최대와 최소가 존재하는 고리 원반이 고리에 대한 더 정확한 생각이다.[2] 고리 내에서도 덩어리의 규모에 비해 텅빈 공간이 많다. 고리는 입자의 밀도가 급격히 줄어드는 다양한 간극을 가지고 있다. 이중에 둘은 고리 내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토성의 위성에 의해 열려있고, 그 외 토성의 위성의 불안정한 궤도공명을 받는 곳으로 알려진 위치의 많은 것들이 있다. 일부 간극은 아직 설명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반면 안정된 궤도공명은 타이탄 미세고리나 G 고리와 같이 몇몇 고리의 긴 지속시간에 원인이 있다. 주요 고리의 범위 밖에 있는 포에베 고리는 포에베와 같이 다른 고리에 비해 27도 기울어져 있고, 역행 방식으로 토성을 공전한다. 목차 1 역사 1.1 갈릴레오의 관측 1.2 고리 이론과 관측 2 물리적 특징 3 주요 고리의 형성 4 고리 내의 세분 및 구조 4.1 데이터 표 4.1.1 고리의 주요 세분 4.1.2 C 고리 내의 구조 4.1.3 카시니 간극 내의 구조 4.1.4 A 고리 내의 구조 5 D 고리 6 C 고리 6.1 콜롬보 간극과 타이탄 미세고리 6.2 맥스웰 간극과 미세고리 7 B 고리 7.1 테 7.2 소위성 8 카시니 간극 8.1 하위헌스 간극 9 A 고리 9.1 엥케 간극 9.2 킬러 간극 9.3 소위성 10 로슈 간극 11 F 고리 12 외곽 고리 12.1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 12.2 G 고리 12.3 메토네 고리 호 12.4 안테 고리 호 12.5 팔레네 고리 12.6 E 고리 12.7 포에베 고리 13 레아의 고리계 존재 가능성 14 갤러리 15 같이 보기 16 각주 17 외부 링크 역사[편집] 갈릴레오의 관측[편집]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0년에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0년에 자신의 망원경을 이용하여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했지만, 고리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는 토스카나 대공에게 "행성 토성은 혼자가 아니고, 서로 거의 접촉해 있으며 절대 움직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서 변하지도 않는 셋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황도와 평행하게 배열되어 있고, 중간의 것(토성)은 나머지 것들(고리의 가장자리)의 크기의 약 세 배정도 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또한 그는 토성이 "귀"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1612년, 고리면이 지구 쪽으로 향하고 있어 고리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 때가 있었다. 이에 혼란스러워진 갈릴레오는 신화 속의 사투르누스가 그의 아이들이 자신을 신들의 왕좌에서 끌어내릴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집어삼킨 것을 참고하여, "토성이 그의 자식을 집어삼킨 것인가?" 라고 궁금해 하기도 했다.[4] 1613년 고리가 다시 나타났을 때, 갈릴레오는 더욱 혼란스러워 했다.[5] 초기의 천문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 발표를 준비하기 전에 새로운 발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애너그램을 사용했다. 갈릴레오는 토성의 고리의 발견에 관해 Altissimum planetam tergeminum(나는 가장 먼 행성이 세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관측했다)을 smaismrmilmepoetaleumibunenugttauiras으로 표현했다.[6] 고리 이론과 관측[편집] 로버트 훅은 1666년에 그린 토성의 그림에서 구체에 의해 고리에 비치는 그림자(a와 b)에 주목했다. 1655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토성이 고리로 둘러싸여 있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되었다. 하위헌스는 갈릴레오가 사용했던 망원경보다 더 우수했던 손수 제작한 50배율 굴절 망원경을 이용하여 토성을 관측했고 "그것(토성)은 얇고, 평평하고, 어떤 곳과도 접촉해있지 않으며, 황도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고리로 둘러싸여 있다"[5]라고 기록했다.[7] 1675년,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는 간극을 통해 토성의 고리가 작고 다양한 고리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내었다. 이들 간극 중 가장 큰 것은 후에 카시니 간극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간극은 A 고리와 B 고리 사이에 있는 폭 4,800 km의 영역이다.[8] 1787년,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고리가 아주 많고 작은 고체 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3] 1859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고리가 고체로 되어 있거나 불안정하고 분해되어 있지 않음을 밝혀내었다. 그는 고리가, 셀 수 없이 많으며 모두 독립적으로 토성을 공전하고 있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 후에, 소피야 코발렙스카야는 토성의 고리가 고리 모양의 유체가 될 수 없음을 밝혔다.[10] 1895년, 앨러게니 천문대의 제임스 킬러와 풀코보 천문대의 아리스타크 벨로폴스키에 의해 이루어진 고리의 분광학적 연구를 통해서 맥스웰의 이론의 타당함이 입증되었다. 고리는 발견된 순서대로 알파벳 순으로 명명되었다.[11] 주요 고리는 행성에서 바깥쪽으로 C, B, A 순으로, 가장 큰 간극인 카시니 간극은 B 고리와 A 고리 사이에 있다. 몇몇 희미한 고리들은 그보다 더 최근에 발견되었다. D 고리는 매우 희미하고 행성과 가장 가깝다. 좁은 F 고리는 A 고리의 바깥에 있다. 그 이상으로는 아주 희미한 두개의 고리, G 고리와 E 고리가 있다. 전반적인 규모 면에서 고리는 엄청나게 많은 구조를 보여준다. 일부는 토성의 위성들에 의한 섭동과 관계되어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11] 물리적 특징[편집] 허블 우주 망원경의 탐사용 고성능 카메라에 의해 촬영된 사진(2004년 3월 22일)에서 어두운 카시니 간극은 안쪽의 B 고리와 바깥쪽의 A 고리가 넓게 분리되어 있다. 눈에 덜 뜨이는 C 고리는 B 고리의 안쪽에 있다. 밀도가 높은 주요 고리는 토성의 적도 위로 7,000 km에서 80,000 km 까지 뻗어있다.(고리의 주요 세분 참고, 토성의 적도 반지름은 60,300 km) 추정되는 부분적인 두께가 10 미터[12]만큼 작거나 1 킬로미터만큼 큰[13] 고리들은 99.9%가 순수한 물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톨린이나 규산염과 같은 약간의 불순물로 구성되어 있다.[14] 주요 고리는 주로 1 센티미터에서 10 미터 범위의 크기를 가진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15] 보이저의 관측에 근거하면, 고리의 총 질량은 약 3 x 1019 kg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토성의 총 질량의 아주 작은 한 부분(약 50 ppb)이고 토성의 위성 미마스보다도 작다.[16] 더 최근의 관측과 카시니의 관측에 근거한 컴퓨터 모형은 이 측정값이 고리 내의 군집 때문에 너무 작게 측정되었고 실제 질량은 이 값보다 세 배는 클 것임을 보여주었다.[17] 카시니 간극과 엥케 간극과 같이 고리에서 가장 큰 간극들은 지구에서도 관측될 수 있지만, 아주 작은 것들은 관측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보이저 우주선을 통해서야 고리가 수천 개의 좁은 간극과 작은 고리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이저가 발견한 고리의 구조는 토성의 많은 위성들의 중력적 끌어당김과 같이 각각 다른 방법을 통해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간극들은 판과 같은 아주 작은 위성의 통행에 의해 청소되기도 한다.[18] 일부 작은 고리들은 작은 양치기 위성의 중력적 효과에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출처 필요](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에 의해 F 고리가 유지되는 것과 유사하다) 또다른 간극들은 간극에 위치하는 입자의 공전주기와 그보다 훨씬 밖에 있는 아주 무거운 위성의 공전주기 사이의 공명에 의해 발달한다. 미마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카시니 간극을 유지한다.[19] 고리의 많은 구조는 안쪽 위성의 주기적 중력섭동에 의해 발생하여 공명에 약간 지장을 주는 나선파를 포함하고 있다.[출처 필요] 카시니 우주 탐사선이 본 토성의 고리의 어두운 면(2007년 5월 9일). 카시니 우주 탐사선의 데이터는 토성의 고리 무리가 스스로 행성의 독립적인 대기임을 시사한다. 대기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이 고리 내의 얼음과 상호작용할 때 만들어지는 산소 분자(O2) 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얼음 파편의 물분자와 자외선에 의한 화학적인 반응은 여러가지 중에서 O2를 형성하고 방출한다. 이 대기 모형에 따르면, 수소 분자(H2) 또한 존재한다. O2와 H2로 구성된 대기는 굉장히 희박하다. 이것이 어떻게든 고리에 응결된다면, 대기는 원자 하나의 두께가 될 것이다.[20] 고리는 또한 희박한 수산화물(OH) 대기와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O2와 같이, 이 대기는 물분자의 분해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에서의 분해는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에서 방출된 물분자에 퍼부어지는 고에너지 이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희박하더라도, 이 대기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통해 지구에서 관측될 수 있다.[21] 2009년 8월 12일, 분점 다음 날 카시니에 의해 촬영된 토성의 고리의 모자이크 사진. 태양을 향하고 있는 고리의 빛은 얇거나 F 고리와 같이 고리면 바깥에 있는 부분을 제외하면 토성에 의해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다. 토성은 복잡한 패턴의 밝기 변화를 보여준다.[22] 가장 큰 변동은 고리의 면이 향하는 방향의 변화 때문이고,[23][24] 이는 매번 공전할 때마다 2회의 주기로 진행된다. 그러나 상을 중첩시켜(superimose) 보면 이것은 충에 있는 행성이, 남반구에서 보다 북반구에서 더 밝게 보이게 만드는 행성의 공전궤도의 이심률에 기인한 변동이다.[25] 1980년, 보이저 1호는 토성을 근접통과하면서 서로 꼬여 복잡한 구조를 한 것처럼 보이는 세 개의 좁은 고리로 구성된 F 고리를 보여주었다. 이는 현재 안쪽에 어두운 세번째 고리가 위치하여 서로 꼬인 것처럼 착시를 보여주는, 덩어리와 꼬임으로 구성된 바깥의 두 개의 고리로 알려져 있다.[출처 필요] 2007년에 표현된 토성의 고리 일부분을 구성하는 얼음 입자 응집체. 이러한 길게 늘어진 군집들은 계속해서 결집과 해산을 반복한다. 가장 큰 입자는 수 미터에 이른다. 토성의 분점인 2009년 8월 11일, NASA의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새로운 고리 사진은 얼마 되지 않는 고리면 밖으로 몇 군데에서 고리가 상당한 크기로 뻗어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변위는 간극을 형성하는 위성, 다프니스의 궤도가 고리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킬러 간극의 가장자리에서 4 km에 이를만큼 크다.[26] 주요 고리의 형성[편집]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형성 시기를 측정함에 따라 매우 오래되었을 것이다. 토성의 안쪽 고리의 기원에 관한 두가지 주요 이론이 있다. 원래 19세기에 에두아르 로슈에 의해 주장된 한 이론은, 과거에 기조력(로슈한계 참고)에 의해 산산조각 날 만큼 가까워질 때까지 토성을 공전하다가 파괴된 (로마 신화의 여신, 베리타스로 이름 붙여진)토성의 위성이라는 것이다.[27] 변형된 이 이론은 고리가 나중에 거대한 혜성이나 소행성과 충돌하여 위성이 분해된 것이라는 것이다.[28] 두번째 이론은 고리가 위성의 파편이 아닌 대신에, 토성을 형성했던 성운 물질들의 잔재라는 것이다.[출처 필요] 좀 더 고전적인 분쇄된 위성 이론은 고리가 미마스보다 약간 큰, 지름 400~600 km의 위성의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약 40억 년 전, 후기 운석 대충돌기 동안에 위성을 충분히 분쇄할 수 있을만한 거대한 천체와의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29] 최근 R. M. 캐넙에 의해 변형된 이 이론은 고리가 토성이 아직 가스 성운에 둘러싸여 있던 형성기에 행성 쪽으로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다 외부층이 벗겨진, 타이탄 크기로 매우 큰 위성의 얼음 맨틀의 잔해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한다.[30][31] 이는 고리 내의 암석물질의 부족을 설명할 것이다. 고리는 초기에 지금보다 훨씬 무겁고(~1000배) 넓었을 것이다. 고리의 외곽 부분의 물질은 합쳐져 테티스와 같은 토성의 위성이 되었다. 이러한 대부분의 위성들의 구성 요소 또한 암석물질의 부족을 설명할 수 있다.[31] 증가하고 있는 엔셀라두스의 밀도는 현재 1.61 g/cm3 로, 1.15 g/cm3 인 미마스나 0.97 g/cm3 인 테티스와 비교해보면, 이후 엔셀라두스의 충돌적 또는 저온화산활동적(cryovolcanic) 진화가 위성의 까다로운 얼음 손실로부터 야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31] 초기의 무거운 고리에 관한 아이디어는 나중에 레아와 같은 토성의 위성들의 형성에 관한 설명까지 확장된다.[32] 초기의 무거운 고리가 얼음 뿐만 아니라 암석물질 덩어리(>100 km 반경)도 포함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규산염 천체들은 얼음을 더 많이 흡수하여 고리의 중력 상호작용과 토성의 조석 상호작용으로 인해 계속해서 넓은 궤도로 전이하여 고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로슈한계 내의 암석 천체들은 추가적인 물질을 흡수하기 충분할 정도로 밀도가 높지만, 얼음 천체와 같은 것들은 밀도가 낮아 그렇지 못하다. 고리 바깥쪽에 새로 형성된 위성들은 무작위 병합을 통해 진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과정은 레아와 같은 토성의 위성의 규산염 물질의 변화와 토성과 가까울수록 규산염 물질이 적어지는 경향도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레아는 원시 고리에서 형성된 위성 중 가장 늙은 것이 될 것이고, 토성과 가까운 위성일수록 젊을 것이다.[32] 유성체 먼지의 유입으로 시간에 따라 고리가 점점 검은색으로 변색되어야 할 것을 고려하면, 토성의 고리를 구성하는 얼음의 밝기와 순도는 고리의 연령이 약 1억 년 정도로, 토성보다 훨씬 어리다는 증거로 들어왔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는 B 고리가 유입되는 물질을 희석시킬 정도로 충분히 무겁기 때문에 태양계의 연령 이상의 기간 동안 흑색화를 방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리 물질은 고리 내의 군집을 형성하여 후에 충돌로 분해됨으로써 순환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젊게 보이는 고리 내의 일부 물질을 설명할 것이다.[33] 래리 에스포지토가 이끄는 카시니 UVIS 연구팀은 항성엄폐를 이용하여 F 고리 내에서 27 미터에서 10 킬로미터까지 이르는 13 개의 천체를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반투명했는데, 이들이 수 미터에 이르는 얼음 바위의 일시적인 응집물임을 암시한다. 에스포지토는 이것이 토성의 고리의 기본 구조로, 서로 뭉치고 후에 산산조각 나는 입자라고 여겼다.[34][35] 고리 내의 세분 및 구조[편집] 토성의 고리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부분은 카시니 간극(1675년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에 의해 발견됨) 에 의해 분리된 A 고리와 B 고리이다. 마찬가지로 1850년에 발견된 C 고리도 카시니 간극과 특징에 있어서 유사한데, 이러한 영역들은 주요 고리를 구성한다. 주요 고리는 밀도가 높고 미세먼지 고리보다는 큰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세먼지로 구성된 경우는 토성의 최상층 구름 쪽까지 뻗어있는 D 고리와 G 고리, E 고리, 그 외 주요 고리계 뒤에 있는 다른 것들이 있다. 이렇게 희미한 고리들은 구성 입자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거의 먼지로만 구성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의 화학적 조성은 주요 고리와 유사한데, 거의 대부분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A 고리의 가장자리 바로 바깥에 있는 좁은 F 고리는 구성 부분이 매우 밀도가 높지만, 먼지크기 입자 또한 많은 양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류하기가 매우 어렵다. 2007년 5월 5일, 카시니의 협각 카메라로 빛이 비추어지지 않고 있는 토성의 D, C, B, A, F 고리(왼쪽에서 오른쪽으로)를 촬영한 자연색상 모자이크 사진이다. 빛이 비추어지고 있는 토성의 고리 부분으로 세분화된 주요 고리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데이터 표[편집] 주: (1) 거리는 간극, 고리, 1,000 km 보다 좁은 미세고리(ringlet)의 중심까지 잰 것 (2) 비공식적인 명칭 (3) 유명한 이름이 아닌 한 국제천문연맹에서 지명한 이름을 사용함. 넓은 간극은 경계(division)라 일컫고, 좁은 간극은 틈(gap)이라고 일컬음 (4) 데이터는 대부분 행성의 지명 명명법 사전, NASA 정보보고서와 일부 논문에서 가져온 것[36][37][38] 고리의 주요 세분[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D 고리 66,900 – 74,510 7,500 C 고리 74,658 – 92,000 17,500 B 고리 92,000 – 117,580 25,500 카시니 간극 117,580 – 122,170 4,700 조반니 카시니 A 고리 122,170 – 136,775 14,600 로슈 간극 136,775 – 139,380 2,600 에두아르 로슈 F 고리 140,180 (1) 30 – 500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2) 149,000 – 154,000 5,000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 G 고리 166,000 – 175,000 9,000 메토네 고리 호(2) 194,230 ? 메토네 안테 고리 호(2) 197,665 ? 안테 팔레네 고리(2) 211,000 – 213,500 2,500 팔레네 E 고리 180,000 – 480,000 300,000 포에베 고리 ~4,000,000 – >13,000,000 포에베 C 고리 내의 구조[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콜롬보 간극 77,870 (1) 150 주세페 "베피" 콜롬보 타이탄 미세고리 77,870 (1) 25 타이탄, 토성의 위성 맥스웰 간극 87,491 (1) 270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맥스웰 미세고리 87,491 (1) 64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본드 간극 88,700 (1) 30 윌리엄 크랜치 본드와 조지 필립스 본드 1.470RS 미세고리 88,716 (1) 16 토성의 반지름 1.495RS 미세고리 90,171 (1) 62 토성의 반지름 도스 간극 90,210 (1) 20 윌리엄 루터 도스 카시니 간극 내의 구조[편집] 출처:[39]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하위헌스 간극 117,680 (1) 285–400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하위헌스 미세고리 117,848 (1) ~17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허셜 간극 118,234 (1) 102 윌리엄 허셜 러셀 간극 118,614 (1) 33 헨리 노리스 러셀 제프리스 간극 118,950 (1) 38 해럴드 제프리스 카이퍼 간극 119,405 (1) 3 제라드 카이퍼 라플라스 간극 119,967 (1) 238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베셀 간극 120,241 (1) 10 프리드리히 베셀 바너드 간극 120,312 (1) 13 에드워드 에머슨 바너드 A 고리 내의 구조[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엥케 간극 133,589 (1) 325 요한 엥케 킬러 간극 136,505 (1) 35 제임스 킬러 위 사진은 2004년 12월 12일에 카시니의 협각 카메라로 햇빛이 비추어지는 고리 부분을 비스듬하게(4도 정도) 촬영한 자연색상 모자이크 사진이다. 아래사진은 2005년 5월 3일에 행해진 라디오파 엄폐 관측으로 그려진 가상사진이다. 낮은 사진에서의 색은 고리 입자 크기에 대한 정보를 나타내는데 이용된다.(맨 위에서 두번째 사진의 설명 참고) D 고리[편집] 안쪽의 희미한 파문을 보여주도록 처리된 카시니의 토성의 D 고리 사진, 좌측상단에서 매우 밝은 C 고리가 보인다. D 고리(D Ring)는 가장 안쪽의 고리로, 매우 희미하다. 1980년, 보이저 1호가 이 고리 내에서 D73, D72, 그리고 토성과 가장 가까운 별개의 미세고리 D68로 명명된 미세고리 세 개를 발견했다. 약 25년 후, 카시니가 촬영한 사진은 D72가 상당히 폭이 넓고 더 희미하게 된데다, 행성 방향으로 200 km 이동한 것을 보여주었다.[40] D 고리에서 보이는 것은 30 킬로미터 간격의 미세규모 파동 구조이다. C 고리와 D73 사이의 간극에서 처음 본 이 구조는,[40] 2009년 토성의 분점 동안에 D 고리에서 B 고리의 안쪽 끝까지 반경거리 19,000 km까지 뻗은 채로 발견되었다.[41][42] 이 파동은 진동수가 2 m에서 20 m인 수직 파상 주름의 나선 패턴으로,[43] 파동의 주기는 시간에 따라 감소하고 있다.(1995년에는 60 km, 2006년에는 30 km) 이로부터 파동이 1983년 말에 고리 적도면에 대해 기울어진채로 분쇄된 혜성의 잔해 구름(질량이 ~1012 kg)의 충돌로 기원되었을 수도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40][41][44] 이와 유사한 목성의 주요 고리에서의 나선 패턴은 1994년 슈메이커-레비 제9혜성에서 온 물질과의 충돌로 인해 야기된 섭동의 결과로 판단되었다.[41][45][46] C 고리[편집] C 고리 외곽에서의 관점. 사진의 오른편, 가장 어두운 간극이 맥스웰 간극이고, 그 중심에 맥스웰 미세고리가 있다. 본드 간극은 밝은 띠의 위쪽, 우측상단 방향에 있고, 도스 간극은 우측상단 모퉁이 바로 아래의 어두운 띠 안에 있다. C 고리(C Ring)는 폭이 넓지만 희미한 고리이다. B 고리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고리는 1850년 윌리엄 본드와 조지 본드에 의해 발견되었다. 윌리엄 R. 도스와 요한 갈레 또한 그들과 별개로 고리를 관측했다. 윌리엄 라셀은 이 고리를 밝은 A 고리와 B 고리에 비해 어두운 물질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크레이프 고리"(Crepe Ring)라고 이름 붙였다.[47] C 고리의 수직 두께는 5 미터이고, 질량은 1.1×1018 kg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리의 광학적 깊이가 0.05에서 0.12까지 달라진다.[출처 필요] 이는 고리가 가려지면서 5 퍼센트에서 12 퍼센트 사이의 빛만 수평으로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위에서 관측할 때, 고리는 거의 투명하게 된다. D 고리에서 최초로 보인 30 킬로미터 파장의 나선 파상 주름은 2009년 토성의 분점 동안 C 고리까지 뻗은 채로 관측되었다.(위 참고) 콜롬보 간극과 타이탄 미세고리[편집] 콜롬보 간극(Colombo Gap)은 C 고리의 안쪽에 위치해 있는 간극이다. 간극 내에는 토성의 중심부로부터 77,883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중심을 둔 밝고 좁은 콜롬보 미세고리가 위치해있다. 이 미세고리는 위성 타이탄과의 궤도공명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타이탄 미세고리(Titan Ringlet) 로도 불린다.[48] 고리 내의 이 위치에서, 고리 입자의 근일점 세차운동 거리는 타이탄의 궤도운동 거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 특이한 미세고리의 바깥쪽 끝부분은 항상 타이탄 쪽을 향하고 있다.[48] 맥스웰 간극과 미세고리[편집] 맥스웰 간극(Maxwell Gap)은 C 고리의 바깥 부분 내에 위치해 있는 간극이다. 또한 간극은 밀도가 높은 비원형 미세고리인 맥스웰 미세고리(Maxwell Ringlet)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점에서 이 미세고리는 천왕성의 엡실론 고리와 유사하다. 두 고리의 중심에는 파동과 유사한 구조가 있다. 엡실론 고리의 파동이 천왕성의 위성인 코델리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맥스웰 간극의 경우 현재까지 그러한 구조를 야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위성이 발견되지 않았다.[34] B 고리[편집] 분점 직전에 본 B 고리의 바깥쪽 끝 부분으로, 아마 관측되지 않은 소위성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5 km까지의 수직 구조에 의해 드리운 그림자가 있는 위치이다. 맨 위에 카시니 간극이 보인다. B 고리(B Ring)는 고리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밝으며, 가장 무겁다. 고리의 두께는 5 미터에서 15 미터 정도로 추정되고, 질량은 2.8×1019 kg이며, 광학적 깊이는 0.4에서 2.5까지 달라진다. 이는 B 고리의 일부분이 가려지면서 91%의 햇빛이 통과한다는 뜻이다.[출처 필요] B 고리는 밀도와 밝기의 다양한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이는 거의 모두 설명되지 않고 있으며, B 고리가 어떠한 간극을 포함하고 있지 않더라도 원모양의 좁은 미세고리로써 보이게 만든다.[출처 필요] B 고리의 바깥 부분에서는 주요 고리면에서 2.5 킬로미터까지 벗어난 수직 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테[편집] 미디어 재생 카시니가 촬영한 낮은 위상각에 있는 B 고리의 밝은 부분에 나타난 어두운 테 사진. 이는 낮은 비트레이트 영상이다. 최대 크기 영상,GIF 사진 (400×400 픽셀, 파일 용량: 2.21 MB) 1980년 까지, 토성의 고리의 구조는 오로지 중력에 의한 반응에 의해서만 야기된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보이저 우주선에서 온 사진은 테(spoke)로 알려져 있는,[49] B 고리의 반경에 따른 특징을 보여주었다. 테는 고리의 지속성과 회전이 중력 궤도역학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아, 이런 원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50] 또 테는 후방산란광에서 어둡게, 전방산란광에서 밝게 보인다.(갤러리 사진 참고) 이 변화는 약 60˚에 가까운 위상각에서 발생한다. 테의 구성에 관한 기성 이론은, 테가 아주 미세한 먼지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먼지입자들은 토성의 자기권 내에서 거의 동시에 회전함으로써 일어난 정전기적 반발에 의해 주요 고리에서 날아와 정체했다. 전기적 섭동이 토성의 대기나 고리에 미소 유성체가 충돌하면서 일어난 번개에 의해 테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되어 왔지만, 이를 만들어내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51] 테는 카시니 탐사선이 관측할 때까지 약 25년 동안 다시 관측되지 않았다. 2004년 초에 카시니가 토성에 도착했을 때 이 테는 보이지 않았다. 일부 과학자들은 테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 모형에 근거하여, 2007년까지 테가 관측되지 않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시니 영상 팀은 계속해서 고리 사진에서 테가 촬영되길 기대했다. 이들은 다음 해, 2005년 9월 5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52] 테는 토성이 분점에 가까워질 때인 토성의 한겨울에 사라지고, 한여름에 다시 나타나는 계절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테가 29.7년 주기로 토성이 공전함에 따라 달라지는 계절적인 효과라는 주장은 카시니 임무 후년에 이들이 점진적으로 재출현함으로써 뒷받침되었다.[53] 소위성[편집] 2009년, 분점 동안에 B 고리에 박혀있는 소위성이 주변에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발견되었다. 크기는 직경 400 미터(1,300 ft)로 추정된다.[54] 소위성에게는 S/2009 S 1이라는 임시명칭이 주어졌다. 카시니 간극[편집]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카시니 간극. 하위헌스 간극은 카시니 간극의 오른쪽 둘레에 위치해 있고, 라플라스 간극은 사진 중앙에 위치해 있다. 카시니 간극(Cassini Division)은 A 고리와 B 고리 사이에 있는 4,800 km 폭의 영역으로, 1675년 파리 천문대의 2.5인치 대물렌즈에 20 피트 초점길이, 90배율 굴절망원경을 이용한 조반니 카시니에 의해 발견되었다.[55][56] 지구에서 이 간극은 고리의 얇고 검은 공백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이저는 이 간극이 C 고리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고리 물질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34] 상대적으로 낮은 밀도의 물질들이 고리의 두께를 통해 빛을 더 많이 투과시키기 때문에, 고리의 빛이 비춰지지 않는 쪽에서 보면 간극은 밝게 보인다.(갤러리의 두번째 사진 참고)[출처 필요] 카시니 간극의 안쪽 가장자리는 강력한 궤도공명에 의해 통제된다. 이 위치에서의 고리 입자의 궤도는 항상 미마스의 궤도의 두 배이다.[57] 공명은 미마스가 이 위치에서의 고리 입자를 뭉치게 하고, 입자의 궤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서 고리 밀도의 예리한 절단을 초래하도록 끌어당기게 만든다. 그러나, 카시니 간극 내의 미세고리 사이에 있는 다른 많은 간극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출처 필요] 하위헌스 간극[편집] 하위헌스 간극(Huygens Gap)은 카시니 간극의 안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이 간극은 중간에 밀도가 높고, 둥근 하위헌스 미세고리(Huygens Ringlet)를 포함하고 있다. 이 미세고리는 미마스와의 2:1에 가까운 공명과 B 고리의 바깥쪽 원형 가장자리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하학적 폭과 광학적 깊이의 불규칙한 방위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위헌스 미세고리 바로 바깥에는 좁은 미세고리가 하나 더 있다.[34] A 고리[편집] A 고리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글자에 대해서는 Å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A 고리 내의 판의 궤도와 일치하는 엥케 간극의 중심 미세고리, 말발굽 궤도에 있는 미세고리 입자의 진동을 암시하고 있다. A 고리(A Ring)는 가장 바깥쪽에 있는 크고 밝은 고리이다. 고리의 안쪽 경계는 카시니 간극이고, 뚜렷한 바깥쪽 경계는 작은 위성 아틀라스의 궤도와 가깝다. A 고리는 엥케 간극에 의해 바깥쪽 가장자리의 폭의 22%에 해당하는 폭이 끊겨있다. 바깥쪽 가장자리의 폭의 2%에 해당하는 더 좁은 간극은 킬러 간극이라 불린다. A 고리의 두께는 10 미터에서 30 미터로 추정되고, 질량은 6.2×1018 kg(대략 히페리온의 질량)이며, 광학적 깊이는 0.4에서 1.0까지 달라진다.[출처 필요] B 고리와 유사하게,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는 궤도공명에 의해 유지되는데, 이 경우는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의 7:6 공명이다.[출처 필요] 또한 A 고리의 구조 대부분을 설명하는 다른 궤도공명은, 고리 내의 다양한 나선 밀도파(위성에 의한 것보다는 덜한 정도, 다른 고리도 마찬가지)에 의해 유발된다. 이러한 밀도파는 은하의 나선팔을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물리과정에 의해 설명된다. 또 동일한 이론에 의해 기술되는 A 고리의 나선 굴곡 파동은, 압축파이기 보다는 고리의 수직적 파상 주름이다.[출처 필요] 2014년 4월, NASA의 과학자들은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 근처가 새로운 위성의 형성 단계에 있을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58][59] 엥케 간극[편집] 다프니스의 통과에 의해 발생하는 킬러 간극 가장자리의 요동. 토성의 분점에 가까울 때, 다프니스와 A 고리에 그림자를 드리운 요동. 엥케 간극(Encke Gap)은 A 고리 내의 폭 325 킬로미터의 간극이다.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133,590 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두고 있다.[60] 엥케 간극은 간극 내에서 공전하고 있는 작은 위성인 판에 의해 형성되었다.[61]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사진은 간극에 적어도 세개의 얽힌 얇은 미세고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34] 판이 나선을 그리는 물결흔적을 추가적으로 유발하는 동안, 간극의 양쪽에서 보이는 나선 밀도파는 고리 근처 외부에 있는 위성과의 공명에 의해 유발된다.(갤러리 참고)[34] 요한 엥케 그 자신은 이 간극을 관측하지 못했고, 나중에 그의 고리의 관측을 기리기 위해서 이름 붙여졌다. 간극은 1888년에 제임스 에드워드 킬러에 의해 발견되었다.[47] A 고리에서 두번째로 크고, 보이저에 의해 발견된 간극은 킬러를 기리기 위해 킬러 간극으로 이름 붙여졌다.[62] 엥케 간극은 완전히 A 고리 내에 있기 때문에 틈(gap)이다. 2008년 국제천문연맹에서 명확한 정의를 내릴 때까지, 틈(gap)과 경계(division)라는 용어 사이의 몇가지 애매성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간극은 "엥케 경계"(Encke Division)라고 불렸었다.[63] 킬러 간극[편집] 킬러 간극(Keeler Gap)은 A 고리 내의 폭이 42 킬로미터인 간극이다.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대략 25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간극 내에서 공전하면서 간극을 청소하는 작은 위성인 다프니스가 2005년 5월 1일에 발견되었다.[64] 위성은 간극의 가장자리에 요동을 유발한다.[34] 다프니스의 공전은 고리면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유발되는 요동은 고리면에 대해 위쪽으로 1.5 km (0.93 마일) 거리에 이르는 수직 요소를 가지고 있다.[65][66] 킬러 간극은 보이저에 의해 발견되었고, 천문학자 제임스 에드워드 킬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이 간극의 명칭에 붙여졌다. 또 킬러는 엥케 간극을 발견하여 요한 엥케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간극의 명칭으로 붙였다.[47] 소위성[편집] 소위성 블레리오 A 고리에서 처음 발견된 네 개의 소위성의 위치. 2006년, 네 개의 작은 "소위성"(moonlet)이 카시니가 촬영한 A 고리의 사진에서 발견되었다.[67] 소위성은 직경이 고작 약 100 미터 정도로, 직접 관측하기에는 매우 작다. 카시니가 실제로 관측한 것은 소위성이 일으킨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프로펠러 모양의 섭동이다. 이러한 천체들은 A 고리 내에 수백 개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되었다. 2007년, 여덟 개의 소위성이 더 발견되었다. 이들은 주로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약 130,000 km 떨어져 있는, 3000 km 대에 갇혀 있었고,[68] 2008년까지 150개 이상의 프로펠러 소위성이 관측되었다.[69] 몇년 동안 추적해온 것은 블레리오(Bleriot)라고 이름 붙여졌다.[70] 로슈 간극[편집] A 고리와 좁은 F 고리 사이의 로슈 간극(사진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거대한 간극). 아틀라스가 사진에서 보인다. 또 엥케 간극과 킬러 간극도 보인다. A 고리와 F 고리 사이의 간극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에두아르 로슈를 기리기 위해 로슈 간극(Roche Division)으로 붙여졌다.[71] 로슈 간극은 거대한 천체가 (토성과 같은)행성과 매우 가까이 있을 때 행성의 기조력에 의해 산산조각나는 물리학적 개념인 로슈 한계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72] 주요 고리계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로슈 간극은 사실 고리가 위성으로 흡수될 수 없는 이유인 토성의 로슈 한계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73] 카시니 간극과 같이, 로슈 간극은 텅 비어있지 않고 물질 덩어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 물질의 특징은 빈약하고 먼지투성이의 D 고리, E 고리, G 고리와 유사하다.[출처 필요] 로슈 간극 내의 두 위치에서는 다른 위치보다 먼지의 집중이 크다. 이것들은 카시니 탐사선 영상 팀에 의해 발견되었고, 임시 명칭이 주어졌다. R/2004 S 1은 위성 아틀라스의 궤도를 따라 놓여있고, R/2004 S 2는 프로메테우스의 궤도의 안쪽,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138,900 km 떨어진 곳에 중심을 두고 있다.[출처 필요] F 고리[편집] 미디어 재생 F 고리의 양쪽을 공전하는 양치기 위성 판도라(왼쪽)와 프로메테우스(오른쪽). 고리의 안쪽에 새겨진 검은 홈이 프로메테우스를 뒤쫓고 있다. F 고리(F Ring)는 토성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별개의 고리이고 시간 단위의 시간규모로 특징이 변하고 있는, 아마도 태양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고리일 것이다.[74] 고리는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3,000 km 뒤에 위치해 있다.[75] F 고리는 1979년 파이오니어 11호 영상 팀에 의해 발견되었다.[76] 매우 얇고, 폭이 고작 수백 킬로미터로, 안쪽과 바깥에서 공전하고 있는 양치기 위성인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61] 최근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근접 촬영 사진은 F 고리가 한개의 고리 핵과 그 주변의 나선 가닥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77] 또한 프로메테우스가 최원점에서 고리와 근접할 때, 위성의 중력이 F 고리의 안쪽 부분에 어두운 홈(channel)을 두어, 고리의 물질을 '훔쳐감'으로써 고리의 구부러짐과 꼬임을 유발한다.(갤러리에 있는 F 고리 사진의 비디오 링크 참고) F 고리 내의 물질보다 토성을 더 빨리 공전하는 프로메테우스로 인해, 새로운 홈들은 각각 이전의 것보다 약 3.2도 앞쪽에 형성된다.[74] 2008년, F 고리 내에서 공전 중인 미관측된 작은 위성이 프로메테우스의 섭동으로 인해 계속해서 고리의 좁은 핵을 통과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요동 원인이 더 발견되었다. 작은 위성 중 하나는 S/2004 S 6 일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확인되었다.[74] F 고리의 255˚(약 70%)를 보여주는 107장의 사진을 합성하여 만든 모자이크 사진. 반경 폭(꼭대기에서 바닥까지)은 1,500 km이다. 외곽 고리[편집] 태양에 의해 후방에 빛이 비추어짐으로써 보이는 외곽 고리 안테 고리 호. 밝은 점은 안테이다. 후방에 빛이 비추어지는 E 고리. 고리를 배경으로, 엔셀라두스의 실루엣과 그 아래에서 엔셀라두스의 남극에서 방출되는 제트가 밝게 보인다.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편집] 2006년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전방산란광 사진에 드러난 것과 같이,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의 궤도가 위치한 영역 근처에는 희미한 먼지 고리가 있다. 이 고리는 반경 폭이 약 5,000 km이다.[78] 이것의 근원은 위성의 표면과 유성체와의 충돌로 인해 솟아올라, 궤도 경로를 둘러싸는 희미한 고리를 형성한 입자이다.[79] G 고리[편집] G 고리(G Ring)는 F 고리와 E 고리의 시작점 사이의 중간에 있는 매우 얇고, 희미한 고리이다.(갤러리의 마지막 사진 참고) 고리의 안쪽 가장자리는 미마스의 궤도 안쪽으로 약 15,000 km 떨어져 있다. G 고리는 고리의 안쪽 가장자리 근처에 뚜렷하고 밝은 호(해왕성의 고리의 호와 유사하다)를 하나 포함하고 있다. 호는 G 고리의 둘레의 약 6분의 1배만큼 뻗어있고, 미마스와 7:6 궤도공명에 의해 제자리에 유지되는 0.5 km 직경의 소위성 아이가이온에 중심을 두고 있다.[80][81] 호는 직경이 수 미터 까지의 얼음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G 고리의 일부분은 이 호에서 방출된 먼지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9,000 km 폭의 G 고리 전체에 비해, 호의 반경 폭은 약 250 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80] 호는 직경이 약 100 미터의 작은 얼음 소위성에 해당하는 물질을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80] 유성진과의 충돌로 인해 아이가이온과 다른 근원 천체에서 방출된 먼지는, 토성의 자기권(G 고리의 궤도 운동보다 훨씬 빠르게 회전하는, 토성의 자기장과 동시에 회전하는 플라스마)과의 상호작용 때문에 호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작은 입자들은 계속해서 유성진과의 많은 충돌로 인해 침식되고, 플라스마의 인력에 의해 흩어진다. 수천 년 동안 고리는 서서히 질량을 잃게 되지만,[82] 아이가이온과 유성진의 계속되는 충돌로 다시 보충된다. 메토네 고리 호[편집] 2006년 9월에 처음으로 관측된, 세로 방향으로 약 10도 가량 걸쳐 있는 희미한 고리 호는 위성 메토네와 연관되어 있다. 호의 물질은 유성진과의 충돌에 의해 메토네에서 방출된 먼지에 해당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 내의 먼지의 분산은 (G 고리 내의 호의 분산 메커니즘과 유사한)미마스와의 14:15 궤도공명에 기인한 것이다.[83][84] 동일한 궤도공명의 영향을 받아, 메토네는 자신의 궤도에서 경도 5˚의 진폭을 가진 채 전후로 진동을 한다. 안테 고리 호[편집] 2007년 6월에 처음 관측된, 세로 방향으로 약 20도 가량 걸쳐 있는 희미한 고리 호는 위성 안테와 연관되어 있다. 호의 물질은 유성진과의 충돌에 의해 안테에서 방출된 먼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 내의 먼지의 분산은 미마스와의 10:11 공명에 기인한 것이다. 동일한 공명의 영향으로, 안테는 자신의 궤도에서 경도 14도 이상으로 전후로 운동하게 된다.[83][84] 팔레네 고리[편집] 2006년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전방산란광 사진에서, 팔레네의 궤도를 공유하는 희미한 먼지 고리가 드러났다.[78] 이 고리는 반경 폭이 약 2,500 km이다. 고리의 근원은 유성체와의 충돌로 팔레네의 표면에서 방출되어, 자신의 궤도 경로를 둘러싸는 희미한 고리를 형성한 입자이다.[79][84] E 고리[편집] E 고리(E Ring)는 두번째로 가장 바깥에 있는 고리이고, 매우 폭이 넓다. 규산염, 이산화탄소, 암모니아 및 얼음으로 구성된 매우 작은(마이크로미터 이하)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85] E 고리는 미마스와 타이탄의 궤도 사이에 분포해 있다.[86] 다른 고리와는 달리, 눈에 보일 정도의 얼음덩어리 보다는 아주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 E 고리의 물질의 근원은 위성 엔셀라두스의 남극 영역에 있는 "타이거 스트라이프"(tiger stripe)에서 나오는 얼음화산의(cryovolcanic) 분출물[87][88]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주요 고리와는 달리, E 고리는 2,000 km 이상 두껍고, 엔셀라두스와의 거리가 증가할수록 두께가 증가한다.[86] E 고리의 입자는 고리 내에서 공전하는 위성에 뭉치려는 경향이 있다. 테티스의 순행 반구(leading hemisphere, 위성의 공전 방향의 반구)의 적도는 거기서 유입된 물질에 의해 약간 파란색을 띤다.[89] 텔레스토, 칼립소, 헬레네, 폴리데우케스와 같은 트로이 위성들은 특히 고리의 면의 아래 위로 궤도 운동을 함으로써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결과로, 위성들의 표면은 밝은 물질로 뒤덮여 있어 주름 없이 매끄러운 것이 특징이다.[90] 포에베 고리[편집] 주요 고리를 왜소해 보이게 만드는 포에베 고리의 거대한 정도. 삽입된 사진은 고리의 일부를 담은 24 마이크로미터 스피처 사진이다. 2009년 10월, 포에베의 궤도 바로 안에 희미한 물질 원반의 발견이 발표되었다. 발견 당시에, 원반은 모서리가 지구를 향해 있었다. 이 원반은 다른 고리들 처럼 대략적으로 설명된다. 매우 거대하긴(겉보기 크기가 지구에서 보이는 보름달의 두배) 해도, 고리는 사실 보이지 않는다. 고리는 NASA의 스피처 우주 망원경을 이용해서 발견되었고,[91] 관측 전체 범위에서 보였는데, 토성의 반지름의 128~207배 만큼 뻗어있었다.[92] 계산은 59 토성 반지름의 이아페투스의 궤도를 안쪽으로, 바깥쪽으로는 300 토성 반지름까지 뻗어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93] 고리는 나중에 WISE, 허셜우주망원경과 카시니 탐사선을 이용하여 연구되었다.[94] 포에베는 토성으로부터 평균 215 토성 반지름 거리에서 공전한다. 포에베 고리(Phoebe Ring)는 두께가 행성의 직경보다 약 20배만큼 두껍다.[95] 고리의 입자가 포에베와 유성진 이상의 천체와의 충돌에서 기원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들은 안쪽의 위성 이아페투스의 궤도 운동과 반대 방향의 역행 궤도를 공유해야 한다.[93] 포에베 고리는 토성의 궤도면에 위치해 있고, 거의 타원이다. 따라서 토성의 적도면과, 다른 고리에 대해 27도 기울어져 있다. 포에베는 토성의 궤도 측면에 대해 5˚정도 기울어져 있고(포에베의 역행 공전 운동 때문에 종종 175˚로 쓰인다), 고리면 상하의 수직적 이탈은 포에베 고리의 40 토성 반지름에 육박하는 관측된 두께와 일치한다. 포에베 고리의 존재는 1970년대 스티븐 소터에 의해 제기되었다.[93] 발견은 버지니아 대학교의 앤 J. 버비서(Anne J. Verbiscer) 및 마이클 F. 스크루츠키(Michael F. Skrutskie)와 메릴랜드 대학 칼리지 파크 캠퍼스의 더글라스 P. 해밀턴에 의해 이루어졌다.[92][96] 세 명은 대학원생으로써 코넬 대학교에서 함께 연구했다.[97] 고리 물질은 태양 복사의 재방출 때문에 안쪽으로 이동하게 되고,[92] 따라서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와 충돌하게 된다. 이 물질의 유입은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를 약간씩 어둡고 붉게 만들고 있지만(천왕성의 위성인 오베론과 티타니아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위성의 극적인 두가지 색을 곧바로 만들지는 못한다.[98] 유입되는 물질은 따뜻한 영역에서의 얼음 승화로 인한 열적인 자체 분해 과정 뒤에 차가운 영역에서의 수증기의 응결이 뒤따르면서 양의 피드백이 일어난다. 이는 북극 영역과 역행 반구(trailing hemisphere)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밝은 얼음 퇴적물과 대조를 이루는,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의 적도 영역 대부분을 덮고 있는 어두운 잔여물질을 남긴다.[99][100][101] 레아의 고리계 존재 가능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레아의 고리입니다. 토성의 두번째로 큰 위성 레아는 고체 입자로 구성된 원반 내에 세 개의 좁은 띠를 포함하는 매우 작은 고리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가설화 되었다.[102][103] 이러한 가설상의 고리는 발견되지는 못했지만, 2005년 11월 카시니의 관측에서, 레아 근처에서의 토성의 자기권의 고에너지 전자의 부족으로부터 그 존재가 추정되었다. 자기권 영상 기구(Magnetospheric Imaging Instrument, MIMI)는 위성의 양면의 플라스마 흐름에서 세 개의 급격한 감소가 간간이 끼어드는, 거의 대칭적인 패턴을 보이는 부드러운 변화를 관측했다. 플라스마가 아마 수 데시미터에서 약 1미터 직경의 입자로 구성된 고밀도 고리 또는 고리 호를 포함하는 적도의 원반 모양의 고체 물질에 의해 흡수된 것이라면, 이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레아의 고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더 최근의 증거 일부는 위성의 적도 2도 이내의 둘레 근처에 4분의 3 만큼 뻗어 있는, 일사불란하게 분포된 자외선상의 작고 밝은 점들의 집합이다. 이 점들은 궤도에서 벗어난 고리 물질의 충돌 지점으로써 설명된다.[104] 그러나, 카시니의 목표가 된 가설상의 고리 면의 여러 각도에서의 관측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그러한 불가사의한 특징에 대한 또다른 설명이 필요함을 시사한다.[105] 갤러리[편집] 토성의 분점 가까이에서 B 고리(꼭대기)의 빛이 비추어지지 않은 안쪽과 C 고리(바닥)의 바깥쪽을 촬영한 카시니의 모자이크 사진. 미마스의 그림자가 많이 보인다. 그림자는 빽빽한 B 고리에 의해 희미해졌다. 맥스웰 간극이 중심부 아래에 보인다. 해가 비추어지지 않은 B 고리의 일부분을 촬영한 카시니의 사진에서 낮은 위상각의 어두운 테가 보인다. 중심부 왼쪽에, 두 개의 어두운 간극(큰 쪽은 하위헌스 간극)과 왼쪽의 카시니 간극을 구성하는 밝은 미세고리가 있다. 2009년에 카시니에 의해 144˚의 위상각에서 촬영된, 밝은 B 고리의 테와 함께 햇빛이 비춰지는 고리 부분이 담긴 사진. A 고리의 엥케 간극을 통한 판의 운동은 가장자리의 요동과 (스스로 전파되지 않는)그 앞과 안쪽에 나선을 그리는 물결흔적을 유발한다. 다른 더 빽빽한 물결대는 나선 밀도파이다. (오른쪽의 오래된 홈과 함께)F 고리 내의 어두운 홈을 형성하고 있는 궤도 최원점 근처의 프로메테우스. 이 과정에 대한 영상은 카시니 영상 팀 웹사이트[106] 또는 유투브[107]에서 볼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중앙)와 판도라는 F 고리의 양쪽에 있는 양치기 위성이다. 아마 F 고리의 핵을 통과하거나 가까이서 공전하고 있는 작은 소위성의 섭동 효과 때문으로 추정되는 F 고리의 요동 원인. G 고리의 일부를 가린 토성의 그림자. 호의 궤도 운동을 보여주는 영상은 유투브[108] 또는 카시니 영상 팀 웹사이트[109]에서 볼 수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갈릴레오 갈릴레이 - 1610년, 토성의 고리를 최초로 관측한 사람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 1655년, 토성의 고리를 토성을 둘러싼 고리라고 최초로 묘사한 사람 조반니 카시니 - 1675년, A 고리와 B 고리 사이의 간극(카시니 간극)을 발견한 사람 에두아르 로슈 - 토성의 로슈 한계 내에서 위성이 어떻게 파괴되어 고리를 형성하는지 설명한 프랑스의 천문학자 천왕성의 고리 - 태양계의 행성 중 고리가 있는 행성 중 하나인 천왕성의 고리에 대한 설명이다. 각주[편집] ↑ Porco, Carolyn. “Questions about Saturn's rings”. 《CICLOPS web site》. 2012년 10월 5일에 확인함. |work=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가 나 Tiscareno, M. S. (2012년 7월 4일 preprint). 〈Planetary Rings〉. Kalas, P.; French, L. 《Planets, Stars and Stellar Systems》. Springer. 6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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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Now. 2010년 8월 5일에 확인함. ↑ Ciclops.org ↑ Youtube.com ↑ Youtube.com ↑ Ciclops.org 외부 링크[편집] 행성의 고리 마디: 토성의 고리계 NASA의 태양계 탐사의 토성의 고리 USGS 행성 명명법 페이지에서의 토성의 고리 명명법 NASA 토성의 거대한 고리 발견 – Yahoo 7 news (2009-10-07 검색) vdeh토성지질학적 특징 대기 용의 폭풍 대백반 육각형 자기장 고리 주요 위성 디오네 엔셀라두스 히페리온 이아페투스 미마스 포에베 레아 테티스 타이탄 천문학 팔분의자리 델타 토성 횡단 소행성 탐사 카시니-하위헌스 엔셀라두스 탐사선 파이어니어 11호 보이저 계획 기타 픽션 토성 토성의 위성 vdeh행성의 고리행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외계 행성 기타 레아 커리클로 키론 태양 소행성대 카이퍼 대 관련 내용 기체 토러스 vdeh태양계태양 · 태양권계면행성 위성 고리지구형 행성 수성 금성 지구 (달) 화성 (위성) 목성형 행성 목성 위성 고리 토성 위성 고리 천왕성 위성 고리 해왕성 위성 고리 왜행성 명왕성형 천체 세레스 명왕성 (위성) 하우메아 (위성) 마케마케 에리스 (위성) 소천체소행성 벌컨군 지구 근접 소행성 소행성대 소행성족 목성 트로이군 센타우루스 소행성군 해왕성 트로이군 소행성 위성 유성체 해왕성 바깥 천체 카이퍼 대 명왕성족 고전적 카이퍼 대 천체 산란원반 분리천체 혜성 주기 혜성 비주기 혜성 다모클레스군 힐스 구름 오르트 구름 코르딜레프스키 구름 참고태양계 천체 목록 (반지름순, 질량순, 중력적으로 둥근 천체), 소행성체 목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토성의_고리&oldid=24186055" 분류: 행성 고리토성1655년 발견한 천체1610년 발견한 천체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외부 링크인용 오류 - 날짜CS1 관리 - 수직선 없음CS1 관리 - 날짜와 연도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CS1 관리 - et al.의 직접적인 사용CS1 관리 - 저자표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8월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9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བོད་ཡིག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Avañe'ẽעבריתहिन्दीHrvatski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4: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토성의 고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토성의 고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토성의 테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3년 7월 19일, 1,200,000 km 거리의 카시니 탐사선의 위치에서 토성이 태양을 가릴 때 촬영된 토성의 고리의 총집합(밝기가 과장되었다)이다. G 고리와 E 고리 외곽 사이에서 약 4시 방향 위치에서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의 형태로 보인다. 라디오파 엄폐를 통해 색을 입혀 만들어진 사진이다. 0.94, 3.6, 13 cm 파장의 라디오 신호가 카시니로부터 고리를 통해 지구로 전송되었다. 신호의 파장과 비슷하거나 큰 크기의 수많은 입자들이 반사하여 각 신호의 감쇠가 일어난다. 보라색(B 고리와 A 고리 내부)은 5 cm 보다 작은 입자가 얼마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신호의 감쇠와 비슷하다. 초록색과 파란색(C 고리와 A 고리 외곽)은 5 cm에서 1 cm보다 작은 입자가 각각 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B 고리의 하얀 영역은 가장 밀도가 높고 크기 추정 용도의 작은 신호를 매우 잘 반사한다. 또다른 증거는 세 고리 모두 미터 단위를 넘나드는 넓은 범위의 입자 크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이저 2호가 본 고리에 드리운 토성의 그림자. 네 개의 위성과 고리의 테가 보인다. 토성의 고리(영어: Rings of Saturn)는 태양계에서 어떤 행성의 고리보다도 가장 큰 행성 고리계이다. 이 고리는 수 마이크로미터에서 수 미터에 이르는 작은 입자들로 아주 많이 구성되어 있으며, 토성을 공전하고 있다.[1] 고리 입자는 거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량의 구성성분은 암석 물질이다. 토성의 고리의 형성 과정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고리의 일부 특징들은 고리가 비교적 최근에 기원했음을 시사하지만, 이론적인 모형은 태양계의 역사 초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2] 고리는 햇빛을 반사하여 토성의 밝기를 증가시키지만, 지구에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610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토성의 고리를 발견했지만, 그는 망원경의 성능이 좋지 못해고리를 귀나 컵의 손잡이라고 생각했어도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한 사람이 되었다. 1655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그것을 토성을 둘러싸는 고리로써 최초로 묘사한 사람이 되었다.[3] 많은 사람들이 토성의 고리가 아주 작은 고리들로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라플라스 이후의 개념),[3] 실제로는 몇 개의 간극이 존재한다. 동심원 모양으로 밀도와 밝기의 최대와 최소가 존재하는 고리 원반이 고리에 대한 더 정확한 생각이다.[2] 고리 내에서도 덩어리의 규모에 비해 텅빈 공간이 많다. 고리는 입자의 밀도가 급격히 줄어드는 다양한 간극을 가지고 있다. 이중에 둘은 고리 내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토성의 위성에 의해 열려있고, 그 외 토성의 위성의 불안정한 궤도공명을 받는 곳으로 알려진 위치의 많은 것들이 있다. 일부 간극은 아직 설명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반면 안정된 궤도공명은 타이탄 미세고리나 G 고리와 같이 몇몇 고리의 긴 지속시간에 원인이 있다. 주요 고리의 범위 밖에 있는 포에베 고리는 포에베와 같이 다른 고리에 비해 27도 기울어져 있고, 역행 방식으로 토성을 공전한다. 목차 1 역사 1.1 갈릴레오의 관측 1.2 고리 이론과 관측 2 물리적 특징 3 주요 고리의 형성 4 고리 내의 세분 및 구조 4.1 데이터 표 4.1.1 고리의 주요 세분 4.1.2 C 고리 내의 구조 4.1.3 카시니 간극 내의 구조 4.1.4 A 고리 내의 구조 5 D 고리 6 C 고리 6.1 콜롬보 간극과 타이탄 미세고리 6.2 맥스웰 간극과 미세고리 7 B 고리 7.1 테 7.2 소위성 8 카시니 간극 8.1 하위헌스 간극 9 A 고리 9.1 엥케 간극 9.2 킬러 간극 9.3 소위성 10 로슈 간극 11 F 고리 12 외곽 고리 12.1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 12.2 G 고리 12.3 메토네 고리 호 12.4 안테 고리 호 12.5 팔레네 고리 12.6 E 고리 12.7 포에베 고리 13 레아의 고리계 존재 가능성 14 갤러리 15 같이 보기 16 각주 17 외부 링크 역사[편집] 갈릴레오의 관측[편집]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0년에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0년에 자신의 망원경을 이용하여 최초로 토성의 고리를 관측했지만, 고리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는 토스카나 대공에게 "행성 토성은 혼자가 아니고, 서로 거의 접촉해 있으며 절대 움직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서 변하지도 않는 셋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황도와 평행하게 배열되어 있고, 중간의 것(토성)은 나머지 것들(고리의 가장자리)의 크기의 약 세 배정도 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또한 그는 토성이 "귀"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1612년, 고리면이 지구 쪽으로 향하고 있어 고리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 때가 있었다. 이에 혼란스러워진 갈릴레오는 신화 속의 사투르누스가 그의 아이들이 자신을 신들의 왕좌에서 끌어내릴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집어삼킨 것을 참고하여, "토성이 그의 자식을 집어삼킨 것인가?" 라고 궁금해 하기도 했다.[4] 1613년 고리가 다시 나타났을 때, 갈릴레오는 더욱 혼란스러워 했다.[5] 초기의 천문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 발표를 준비하기 전에 새로운 발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애너그램을 사용했다. 갈릴레오는 토성의 고리의 발견에 관해 Altissimum planetam tergeminum(나는 가장 먼 행성이 세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관측했다)을 smaismrmilmepoetaleumibunenugttauiras으로 표현했다.[6] 고리 이론과 관측[편집] 로버트 훅은 1666년에 그린 토성의 그림에서 구체에 의해 고리에 비치는 그림자(a와 b)에 주목했다. 1655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토성이 고리로 둘러싸여 있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되었다. 하위헌스는 갈릴레오가 사용했던 망원경보다 더 우수했던 손수 제작한 50배율 굴절 망원경을 이용하여 토성을 관측했고 "그것(토성)은 얇고, 평평하고, 어떤 곳과도 접촉해있지 않으며, 황도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고리로 둘러싸여 있다"[5]라고 기록했다.[7] 1675년,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는 간극을 통해 토성의 고리가 작고 다양한 고리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내었다. 이들 간극 중 가장 큰 것은 후에 카시니 간극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간극은 A 고리와 B 고리 사이에 있는 폭 4,800 km의 영역이다.[8] 1787년,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고리가 아주 많고 작은 고체 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3] 1859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고리가 고체로 되어 있거나 불안정하고 분해되어 있지 않음을 밝혀내었다. 그는 고리가, 셀 수 없이 많으며 모두 독립적으로 토성을 공전하고 있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 후에, 소피야 코발렙스카야는 토성의 고리가 고리 모양의 유체가 될 수 없음을 밝혔다.[10] 1895년, 앨러게니 천문대의 제임스 킬러와 풀코보 천문대의 아리스타크 벨로폴스키에 의해 이루어진 고리의 분광학적 연구를 통해서 맥스웰의 이론의 타당함이 입증되었다. 고리는 발견된 순서대로 알파벳 순으로 명명되었다.[11] 주요 고리는 행성에서 바깥쪽으로 C, B, A 순으로, 가장 큰 간극인 카시니 간극은 B 고리와 A 고리 사이에 있다. 몇몇 희미한 고리들은 그보다 더 최근에 발견되었다. D 고리는 매우 희미하고 행성과 가장 가깝다. 좁은 F 고리는 A 고리의 바깥에 있다. 그 이상으로는 아주 희미한 두개의 고리, G 고리와 E 고리가 있다. 전반적인 규모 면에서 고리는 엄청나게 많은 구조를 보여준다. 일부는 토성의 위성들에 의한 섭동과 관계되어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11] 물리적 특징[편집] 허블 우주 망원경의 탐사용 고성능 카메라에 의해 촬영된 사진(2004년 3월 22일)에서 어두운 카시니 간극은 안쪽의 B 고리와 바깥쪽의 A 고리가 넓게 분리되어 있다. 눈에 덜 뜨이는 C 고리는 B 고리의 안쪽에 있다. 밀도가 높은 주요 고리는 토성의 적도 위로 7,000 km에서 80,000 km 까지 뻗어있다.(고리의 주요 세분 참고, 토성의 적도 반지름은 60,300 km) 추정되는 부분적인 두께가 10 미터[12]만큼 작거나 1 킬로미터만큼 큰[13] 고리들은 99.9%가 순수한 물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톨린이나 규산염과 같은 약간의 불순물로 구성되어 있다.[14] 주요 고리는 주로 1 센티미터에서 10 미터 범위의 크기를 가진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15] 보이저의 관측에 근거하면, 고리의 총 질량은 약 3 x 1019 kg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토성의 총 질량의 아주 작은 한 부분(약 50 ppb)이고 토성의 위성 미마스보다도 작다.[16] 더 최근의 관측과 카시니의 관측에 근거한 컴퓨터 모형은 이 측정값이 고리 내의 군집 때문에 너무 작게 측정되었고 실제 질량은 이 값보다 세 배는 클 것임을 보여주었다.[17] 카시니 간극과 엥케 간극과 같이 고리에서 가장 큰 간극들은 지구에서도 관측될 수 있지만, 아주 작은 것들은 관측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보이저 우주선을 통해서야 고리가 수천 개의 좁은 간극과 작은 고리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이저가 발견한 고리의 구조는 토성의 많은 위성들의 중력적 끌어당김과 같이 각각 다른 방법을 통해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간극들은 판과 같은 아주 작은 위성의 통행에 의해 청소되기도 한다.[18] 일부 작은 고리들은 작은 양치기 위성의 중력적 효과에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출처 필요](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에 의해 F 고리가 유지되는 것과 유사하다) 또다른 간극들은 간극에 위치하는 입자의 공전주기와 그보다 훨씬 밖에 있는 아주 무거운 위성의 공전주기 사이의 공명에 의해 발달한다. 미마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카시니 간극을 유지한다.[19] 고리의 많은 구조는 안쪽 위성의 주기적 중력섭동에 의해 발생하여 공명에 약간 지장을 주는 나선파를 포함하고 있다.[출처 필요] 카시니 우주 탐사선이 본 토성의 고리의 어두운 면(2007년 5월 9일). 카시니 우주 탐사선의 데이터는 토성의 고리 무리가 스스로 행성의 독립적인 대기임을 시사한다. 대기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이 고리 내의 얼음과 상호작용할 때 만들어지는 산소 분자(O2) 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얼음 파편의 물분자와 자외선에 의한 화학적인 반응은 여러가지 중에서 O2를 형성하고 방출한다. 이 대기 모형에 따르면, 수소 분자(H2) 또한 존재한다. O2와 H2로 구성된 대기는 굉장히 희박하다. 이것이 어떻게든 고리에 응결된다면, 대기는 원자 하나의 두께가 될 것이다.[20] 고리는 또한 희박한 수산화물(OH) 대기와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O2와 같이, 이 대기는 물분자의 분해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에서의 분해는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에서 방출된 물분자에 퍼부어지는 고에너지 이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희박하더라도, 이 대기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통해 지구에서 관측될 수 있다.[21] 2009년 8월 12일, 분점 다음 날 카시니에 의해 촬영된 토성의 고리의 모자이크 사진. 태양을 향하고 있는 고리의 빛은 얇거나 F 고리와 같이 고리면 바깥에 있는 부분을 제외하면 토성에 의해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다. 토성은 복잡한 패턴의 밝기 변화를 보여준다.[22] 가장 큰 변동은 고리의 면이 향하는 방향의 변화 때문이고,[23][24] 이는 매번 공전할 때마다 2회의 주기로 진행된다. 그러나 상을 중첩시켜(superimose) 보면 이것은 충에 있는 행성이, 남반구에서 보다 북반구에서 더 밝게 보이게 만드는 행성의 공전궤도의 이심률에 기인한 변동이다.[25] 1980년, 보이저 1호는 토성을 근접통과하면서 서로 꼬여 복잡한 구조를 한 것처럼 보이는 세 개의 좁은 고리로 구성된 F 고리를 보여주었다. 이는 현재 안쪽에 어두운 세번째 고리가 위치하여 서로 꼬인 것처럼 착시를 보여주는, 덩어리와 꼬임으로 구성된 바깥의 두 개의 고리로 알려져 있다.[출처 필요] 2007년에 표현된 토성의 고리 일부분을 구성하는 얼음 입자 응집체. 이러한 길게 늘어진 군집들은 계속해서 결집과 해산을 반복한다. 가장 큰 입자는 수 미터에 이른다. 토성의 분점인 2009년 8월 11일, NASA의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새로운 고리 사진은 얼마 되지 않는 고리면 밖으로 몇 군데에서 고리가 상당한 크기로 뻗어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변위는 간극을 형성하는 위성, 다프니스의 궤도가 고리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킬러 간극의 가장자리에서 4 km에 이를만큼 크다.[26] 주요 고리의 형성[편집]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형성 시기를 측정함에 따라 매우 오래되었을 것이다. 토성의 안쪽 고리의 기원에 관한 두가지 주요 이론이 있다. 원래 19세기에 에두아르 로슈에 의해 주장된 한 이론은, 과거에 기조력(로슈한계 참고)에 의해 산산조각 날 만큼 가까워질 때까지 토성을 공전하다가 파괴된 (로마 신화의 여신, 베리타스로 이름 붙여진)토성의 위성이라는 것이다.[27] 변형된 이 이론은 고리가 나중에 거대한 혜성이나 소행성과 충돌하여 위성이 분해된 것이라는 것이다.[28] 두번째 이론은 고리가 위성의 파편이 아닌 대신에, 토성을 형성했던 성운 물질들의 잔재라는 것이다.[출처 필요] 좀 더 고전적인 분쇄된 위성 이론은 고리가 미마스보다 약간 큰, 지름 400~600 km의 위성의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약 40억 년 전, 후기 운석 대충돌기 동안에 위성을 충분히 분쇄할 수 있을만한 거대한 천체와의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29] 최근 R. M. 캐넙에 의해 변형된 이 이론은 고리가 토성이 아직 가스 성운에 둘러싸여 있던 형성기에 행성 쪽으로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다 외부층이 벗겨진, 타이탄 크기로 매우 큰 위성의 얼음 맨틀의 잔해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한다.[30][31] 이는 고리 내의 암석물질의 부족을 설명할 것이다. 고리는 초기에 지금보다 훨씬 무겁고(~1000배) 넓었을 것이다. 고리의 외곽 부분의 물질은 합쳐져 테티스와 같은 토성의 위성이 되었다. 이러한 대부분의 위성들의 구성 요소 또한 암석물질의 부족을 설명할 수 있다.[31] 증가하고 있는 엔셀라두스의 밀도는 현재 1.61 g/cm3 로, 1.15 g/cm3 인 미마스나 0.97 g/cm3 인 테티스와 비교해보면, 이후 엔셀라두스의 충돌적 또는 저온화산활동적(cryovolcanic) 진화가 위성의 까다로운 얼음 손실로부터 야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31] 초기의 무거운 고리에 관한 아이디어는 나중에 레아와 같은 토성의 위성들의 형성에 관한 설명까지 확장된다.[32] 초기의 무거운 고리가 얼음 뿐만 아니라 암석물질 덩어리(>100 km 반경)도 포함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규산염 천체들은 얼음을 더 많이 흡수하여 고리의 중력 상호작용과 토성의 조석 상호작용으로 인해 계속해서 넓은 궤도로 전이하여 고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로슈한계 내의 암석 천체들은 추가적인 물질을 흡수하기 충분할 정도로 밀도가 높지만, 얼음 천체와 같은 것들은 밀도가 낮아 그렇지 못하다. 고리 바깥쪽에 새로 형성된 위성들은 무작위 병합을 통해 진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과정은 레아와 같은 토성의 위성의 규산염 물질의 변화와 토성과 가까울수록 규산염 물질이 적어지는 경향도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레아는 원시 고리에서 형성된 위성 중 가장 늙은 것이 될 것이고, 토성과 가까운 위성일수록 젊을 것이다.[32] 유성체 먼지의 유입으로 시간에 따라 고리가 점점 검은색으로 변색되어야 할 것을 고려하면, 토성의 고리를 구성하는 얼음의 밝기와 순도는 고리의 연령이 약 1억 년 정도로, 토성보다 훨씬 어리다는 증거로 들어왔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는 B 고리가 유입되는 물질을 희석시킬 정도로 충분히 무겁기 때문에 태양계의 연령 이상의 기간 동안 흑색화를 방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리 물질은 고리 내의 군집을 형성하여 후에 충돌로 분해됨으로써 순환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젊게 보이는 고리 내의 일부 물질을 설명할 것이다.[33] 래리 에스포지토가 이끄는 카시니 UVIS 연구팀은 항성엄폐를 이용하여 F 고리 내에서 27 미터에서 10 킬로미터까지 이르는 13 개의 천체를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반투명했는데, 이들이 수 미터에 이르는 얼음 바위의 일시적인 응집물임을 암시한다. 에스포지토는 이것이 토성의 고리의 기본 구조로, 서로 뭉치고 후에 산산조각 나는 입자라고 여겼다.[34][35] 고리 내의 세분 및 구조[편집] 토성의 고리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부분은 카시니 간극(1675년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에 의해 발견됨) 에 의해 분리된 A 고리와 B 고리이다. 마찬가지로 1850년에 발견된 C 고리도 카시니 간극과 특징에 있어서 유사한데, 이러한 영역들은 주요 고리를 구성한다. 주요 고리는 밀도가 높고 미세먼지 고리보다는 큰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세먼지로 구성된 경우는 토성의 최상층 구름 쪽까지 뻗어있는 D 고리와 G 고리, E 고리, 그 외 주요 고리계 뒤에 있는 다른 것들이 있다. 이렇게 희미한 고리들은 구성 입자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거의 먼지로만 구성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의 화학적 조성은 주요 고리와 유사한데, 거의 대부분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A 고리의 가장자리 바로 바깥에 있는 좁은 F 고리는 구성 부분이 매우 밀도가 높지만, 먼지크기 입자 또한 많은 양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류하기가 매우 어렵다. 2007년 5월 5일, 카시니의 협각 카메라로 빛이 비추어지지 않고 있는 토성의 D, C, B, A, F 고리(왼쪽에서 오른쪽으로)를 촬영한 자연색상 모자이크 사진이다. 빛이 비추어지고 있는 토성의 고리 부분으로 세분화된 주요 고리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데이터 표[편집] 주: (1) 거리는 간극, 고리, 1,000 km 보다 좁은 미세고리(ringlet)의 중심까지 잰 것 (2) 비공식적인 명칭 (3) 유명한 이름이 아닌 한 국제천문연맹에서 지명한 이름을 사용함. 넓은 간극은 경계(division)라 일컫고, 좁은 간극은 틈(gap)이라고 일컬음 (4) 데이터는 대부분 행성의 지명 명명법 사전, NASA 정보보고서와 일부 논문에서 가져온 것[36][37][38] 고리의 주요 세분[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D 고리 66,900 – 74,510 7,500 C 고리 74,658 – 92,000 17,500 B 고리 92,000 – 117,580 25,500 카시니 간극 117,580 – 122,170 4,700 조반니 카시니 A 고리 122,170 – 136,775 14,600 로슈 간극 136,775 – 139,380 2,600 에두아르 로슈 F 고리 140,180 (1) 30 – 500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2) 149,000 – 154,000 5,000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 G 고리 166,000 – 175,000 9,000 메토네 고리 호(2) 194,230 ? 메토네 안테 고리 호(2) 197,665 ? 안테 팔레네 고리(2) 211,000 – 213,500 2,500 팔레네 E 고리 180,000 – 480,000 300,000 포에베 고리 ~4,000,000 – >13,000,000 포에베 C 고리 내의 구조[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콜롬보 간극 77,870 (1) 150 주세페 "베피" 콜롬보 타이탄 미세고리 77,870 (1) 25 타이탄, 토성의 위성 맥스웰 간극 87,491 (1) 270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맥스웰 미세고리 87,491 (1) 64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본드 간극 88,700 (1) 30 윌리엄 크랜치 본드와 조지 필립스 본드 1.470RS 미세고리 88,716 (1) 16 토성의 반지름 1.495RS 미세고리 90,171 (1) 62 토성의 반지름 도스 간극 90,210 (1) 20 윌리엄 루터 도스 카시니 간극 내의 구조[편집] 출처:[39]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하위헌스 간극 117,680 (1) 285–400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하위헌스 미세고리 117,848 (1) ~17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허셜 간극 118,234 (1) 102 윌리엄 허셜 러셀 간극 118,614 (1) 33 헨리 노리스 러셀 제프리스 간극 118,950 (1) 38 해럴드 제프리스 카이퍼 간극 119,405 (1) 3 제라드 카이퍼 라플라스 간극 119,967 (1) 238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베셀 간극 120,241 (1) 10 프리드리히 베셀 바너드 간극 120,312 (1) 13 에드워드 에머슨 바너드 A 고리 내의 구조[편집] 이름(3) 토성으로부터의 거리(km)(4) 폭 (km)(4) 이름 주인 엥케 간극 133,589 (1) 325 요한 엥케 킬러 간극 136,505 (1) 35 제임스 킬러 위 사진은 2004년 12월 12일에 카시니의 협각 카메라로 햇빛이 비추어지는 고리 부분을 비스듬하게(4도 정도) 촬영한 자연색상 모자이크 사진이다. 아래사진은 2005년 5월 3일에 행해진 라디오파 엄폐 관측으로 그려진 가상사진이다. 낮은 사진에서의 색은 고리 입자 크기에 대한 정보를 나타내는데 이용된다.(맨 위에서 두번째 사진의 설명 참고) D 고리[편집] 안쪽의 희미한 파문을 보여주도록 처리된 카시니의 토성의 D 고리 사진, 좌측상단에서 매우 밝은 C 고리가 보인다. D 고리(D Ring)는 가장 안쪽의 고리로, 매우 희미하다. 1980년, 보이저 1호가 이 고리 내에서 D73, D72, 그리고 토성과 가장 가까운 별개의 미세고리 D68로 명명된 미세고리 세 개를 발견했다. 약 25년 후, 카시니가 촬영한 사진은 D72가 상당히 폭이 넓고 더 희미하게 된데다, 행성 방향으로 200 km 이동한 것을 보여주었다.[40] D 고리에서 보이는 것은 30 킬로미터 간격의 미세규모 파동 구조이다. C 고리와 D73 사이의 간극에서 처음 본 이 구조는,[40] 2009년 토성의 분점 동안에 D 고리에서 B 고리의 안쪽 끝까지 반경거리 19,000 km까지 뻗은 채로 발견되었다.[41][42] 이 파동은 진동수가 2 m에서 20 m인 수직 파상 주름의 나선 패턴으로,[43] 파동의 주기는 시간에 따라 감소하고 있다.(1995년에는 60 km, 2006년에는 30 km) 이로부터 파동이 1983년 말에 고리 적도면에 대해 기울어진채로 분쇄된 혜성의 잔해 구름(질량이 ~1012 kg)의 충돌로 기원되었을 수도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40][41][44] 이와 유사한 목성의 주요 고리에서의 나선 패턴은 1994년 슈메이커-레비 제9혜성에서 온 물질과의 충돌로 인해 야기된 섭동의 결과로 판단되었다.[41][45][46] C 고리[편집] C 고리 외곽에서의 관점. 사진의 오른편, 가장 어두운 간극이 맥스웰 간극이고, 그 중심에 맥스웰 미세고리가 있다. 본드 간극은 밝은 띠의 위쪽, 우측상단 방향에 있고, 도스 간극은 우측상단 모퉁이 바로 아래의 어두운 띠 안에 있다. C 고리(C Ring)는 폭이 넓지만 희미한 고리이다. B 고리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고리는 1850년 윌리엄 본드와 조지 본드에 의해 발견되었다. 윌리엄 R. 도스와 요한 갈레 또한 그들과 별개로 고리를 관측했다. 윌리엄 라셀은 이 고리를 밝은 A 고리와 B 고리에 비해 어두운 물질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크레이프 고리"(Crepe Ring)라고 이름 붙였다.[47] C 고리의 수직 두께는 5 미터이고, 질량은 1.1×1018 kg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리의 광학적 깊이가 0.05에서 0.12까지 달라진다.[출처 필요] 이는 고리가 가려지면서 5 퍼센트에서 12 퍼센트 사이의 빛만 수평으로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위에서 관측할 때, 고리는 거의 투명하게 된다. D 고리에서 최초로 보인 30 킬로미터 파장의 나선 파상 주름은 2009년 토성의 분점 동안 C 고리까지 뻗은 채로 관측되었다.(위 참고) 콜롬보 간극과 타이탄 미세고리[편집] 콜롬보 간극(Colombo Gap)은 C 고리의 안쪽에 위치해 있는 간극이다. 간극 내에는 토성의 중심부로부터 77,883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중심을 둔 밝고 좁은 콜롬보 미세고리가 위치해있다. 이 미세고리는 위성 타이탄과의 궤도공명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타이탄 미세고리(Titan Ringlet) 로도 불린다.[48] 고리 내의 이 위치에서, 고리 입자의 근일점 세차운동 거리는 타이탄의 궤도운동 거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 특이한 미세고리의 바깥쪽 끝부분은 항상 타이탄 쪽을 향하고 있다.[48] 맥스웰 간극과 미세고리[편집] 맥스웰 간극(Maxwell Gap)은 C 고리의 바깥 부분 내에 위치해 있는 간극이다. 또한 간극은 밀도가 높은 비원형 미세고리인 맥스웰 미세고리(Maxwell Ringlet)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점에서 이 미세고리는 천왕성의 엡실론 고리와 유사하다. 두 고리의 중심에는 파동과 유사한 구조가 있다. 엡실론 고리의 파동이 천왕성의 위성인 코델리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맥스웰 간극의 경우 현재까지 그러한 구조를 야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위성이 발견되지 않았다.[34] B 고리[편집] 분점 직전에 본 B 고리의 바깥쪽 끝 부분으로, 아마 관측되지 않은 소위성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5 km까지의 수직 구조에 의해 드리운 그림자가 있는 위치이다. 맨 위에 카시니 간극이 보인다. B 고리(B Ring)는 고리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밝으며, 가장 무겁다. 고리의 두께는 5 미터에서 15 미터 정도로 추정되고, 질량은 2.8×1019 kg이며, 광학적 깊이는 0.4에서 2.5까지 달라진다. 이는 B 고리의 일부분이 가려지면서 91%의 햇빛이 통과한다는 뜻이다.[출처 필요] B 고리는 밀도와 밝기의 다양한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이는 거의 모두 설명되지 않고 있으며, B 고리가 어떠한 간극을 포함하고 있지 않더라도 원모양의 좁은 미세고리로써 보이게 만든다.[출처 필요] B 고리의 바깥 부분에서는 주요 고리면에서 2.5 킬로미터까지 벗어난 수직 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테[편집] 미디어 재생 카시니가 촬영한 낮은 위상각에 있는 B 고리의 밝은 부분에 나타난 어두운 테 사진. 이는 낮은 비트레이트 영상이다. 최대 크기 영상,GIF 사진 (400×400 픽셀, 파일 용량: 2.21 MB) 1980년 까지, 토성의 고리의 구조는 오로지 중력에 의한 반응에 의해서만 야기된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보이저 우주선에서 온 사진은 테(spoke)로 알려져 있는,[49] B 고리의 반경에 따른 특징을 보여주었다. 테는 고리의 지속성과 회전이 중력 궤도역학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아, 이런 원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50] 또 테는 후방산란광에서 어둡게, 전방산란광에서 밝게 보인다.(갤러리 사진 참고) 이 변화는 약 60˚에 가까운 위상각에서 발생한다. 테의 구성에 관한 기성 이론은, 테가 아주 미세한 먼지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먼지입자들은 토성의 자기권 내에서 거의 동시에 회전함으로써 일어난 정전기적 반발에 의해 주요 고리에서 날아와 정체했다. 전기적 섭동이 토성의 대기나 고리에 미소 유성체가 충돌하면서 일어난 번개에 의해 테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되어 왔지만, 이를 만들어내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51] 테는 카시니 탐사선이 관측할 때까지 약 25년 동안 다시 관측되지 않았다. 2004년 초에 카시니가 토성에 도착했을 때 이 테는 보이지 않았다. 일부 과학자들은 테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 모형에 근거하여, 2007년까지 테가 관측되지 않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시니 영상 팀은 계속해서 고리 사진에서 테가 촬영되길 기대했다. 이들은 다음 해, 2005년 9월 5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52] 테는 토성이 분점에 가까워질 때인 토성의 한겨울에 사라지고, 한여름에 다시 나타나는 계절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테가 29.7년 주기로 토성이 공전함에 따라 달라지는 계절적인 효과라는 주장은 카시니 임무 후년에 이들이 점진적으로 재출현함으로써 뒷받침되었다.[53] 소위성[편집] 2009년, 분점 동안에 B 고리에 박혀있는 소위성이 주변에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발견되었다. 크기는 직경 400 미터(1,300 ft)로 추정된다.[54] 소위성에게는 S/2009 S 1이라는 임시명칭이 주어졌다. 카시니 간극[편집]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카시니 간극. 하위헌스 간극은 카시니 간극의 오른쪽 둘레에 위치해 있고, 라플라스 간극은 사진 중앙에 위치해 있다. 카시니 간극(Cassini Division)은 A 고리와 B 고리 사이에 있는 4,800 km 폭의 영역으로, 1675년 파리 천문대의 2.5인치 대물렌즈에 20 피트 초점길이, 90배율 굴절망원경을 이용한 조반니 카시니에 의해 발견되었다.[55][56] 지구에서 이 간극은 고리의 얇고 검은 공백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이저는 이 간극이 C 고리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고리 물질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34] 상대적으로 낮은 밀도의 물질들이 고리의 두께를 통해 빛을 더 많이 투과시키기 때문에, 고리의 빛이 비춰지지 않는 쪽에서 보면 간극은 밝게 보인다.(갤러리의 두번째 사진 참고)[출처 필요] 카시니 간극의 안쪽 가장자리는 강력한 궤도공명에 의해 통제된다. 이 위치에서의 고리 입자의 궤도는 항상 미마스의 궤도의 두 배이다.[57] 공명은 미마스가 이 위치에서의 고리 입자를 뭉치게 하고, 입자의 궤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서 고리 밀도의 예리한 절단을 초래하도록 끌어당기게 만든다. 그러나, 카시니 간극 내의 미세고리 사이에 있는 다른 많은 간극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출처 필요] 하위헌스 간극[편집] 하위헌스 간극(Huygens Gap)은 카시니 간극의 안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이 간극은 중간에 밀도가 높고, 둥근 하위헌스 미세고리(Huygens Ringlet)를 포함하고 있다. 이 미세고리는 미마스와의 2:1에 가까운 공명과 B 고리의 바깥쪽 원형 가장자리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하학적 폭과 광학적 깊이의 불규칙한 방위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위헌스 미세고리 바로 바깥에는 좁은 미세고리가 하나 더 있다.[34] A 고리[편집] A 고리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글자에 대해서는 Å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A 고리 내의 판의 궤도와 일치하는 엥케 간극의 중심 미세고리, 말발굽 궤도에 있는 미세고리 입자의 진동을 암시하고 있다. A 고리(A Ring)는 가장 바깥쪽에 있는 크고 밝은 고리이다. 고리의 안쪽 경계는 카시니 간극이고, 뚜렷한 바깥쪽 경계는 작은 위성 아틀라스의 궤도와 가깝다. A 고리는 엥케 간극에 의해 바깥쪽 가장자리의 폭의 22%에 해당하는 폭이 끊겨있다. 바깥쪽 가장자리의 폭의 2%에 해당하는 더 좁은 간극은 킬러 간극이라 불린다. A 고리의 두께는 10 미터에서 30 미터로 추정되고, 질량은 6.2×1018 kg(대략 히페리온의 질량)이며, 광학적 깊이는 0.4에서 1.0까지 달라진다.[출처 필요] B 고리와 유사하게,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는 궤도공명에 의해 유지되는데, 이 경우는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의 7:6 공명이다.[출처 필요] 또한 A 고리의 구조 대부분을 설명하는 다른 궤도공명은, 고리 내의 다양한 나선 밀도파(위성에 의한 것보다는 덜한 정도, 다른 고리도 마찬가지)에 의해 유발된다. 이러한 밀도파는 은하의 나선팔을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물리과정에 의해 설명된다. 또 동일한 이론에 의해 기술되는 A 고리의 나선 굴곡 파동은, 압축파이기 보다는 고리의 수직적 파상 주름이다.[출처 필요] 2014년 4월, NASA의 과학자들은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 근처가 새로운 위성의 형성 단계에 있을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58][59] 엥케 간극[편집] 다프니스의 통과에 의해 발생하는 킬러 간극 가장자리의 요동. 토성의 분점에 가까울 때, 다프니스와 A 고리에 그림자를 드리운 요동. 엥케 간극(Encke Gap)은 A 고리 내의 폭 325 킬로미터의 간극이다.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133,590 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두고 있다.[60] 엥케 간극은 간극 내에서 공전하고 있는 작은 위성인 판에 의해 형성되었다.[61]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사진은 간극에 적어도 세개의 얽힌 얇은 미세고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34] 판이 나선을 그리는 물결흔적을 추가적으로 유발하는 동안, 간극의 양쪽에서 보이는 나선 밀도파는 고리 근처 외부에 있는 위성과의 공명에 의해 유발된다.(갤러리 참고)[34] 요한 엥케 그 자신은 이 간극을 관측하지 못했고, 나중에 그의 고리의 관측을 기리기 위해서 이름 붙여졌다. 간극은 1888년에 제임스 에드워드 킬러에 의해 발견되었다.[47] A 고리에서 두번째로 크고, 보이저에 의해 발견된 간극은 킬러를 기리기 위해 킬러 간극으로 이름 붙여졌다.[62] 엥케 간극은 완전히 A 고리 내에 있기 때문에 틈(gap)이다. 2008년 국제천문연맹에서 명확한 정의를 내릴 때까지, 틈(gap)과 경계(division)라는 용어 사이의 몇가지 애매성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간극은 "엥케 경계"(Encke Division)라고 불렸었다.[63] 킬러 간극[편집] 킬러 간극(Keeler Gap)은 A 고리 내의 폭이 42 킬로미터인 간극이다.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대략 25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간극 내에서 공전하면서 간극을 청소하는 작은 위성인 다프니스가 2005년 5월 1일에 발견되었다.[64] 위성은 간극의 가장자리에 요동을 유발한다.[34] 다프니스의 공전은 고리면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유발되는 요동은 고리면에 대해 위쪽으로 1.5 km (0.93 마일) 거리에 이르는 수직 요소를 가지고 있다.[65][66] 킬러 간극은 보이저에 의해 발견되었고, 천문학자 제임스 에드워드 킬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이 간극의 명칭에 붙여졌다. 또 킬러는 엥케 간극을 발견하여 요한 엥케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간극의 명칭으로 붙였다.[47] 소위성[편집] 소위성 블레리오 A 고리에서 처음 발견된 네 개의 소위성의 위치. 2006년, 네 개의 작은 "소위성"(moonlet)이 카시니가 촬영한 A 고리의 사진에서 발견되었다.[67] 소위성은 직경이 고작 약 100 미터 정도로, 직접 관측하기에는 매우 작다. 카시니가 실제로 관측한 것은 소위성이 일으킨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프로펠러 모양의 섭동이다. 이러한 천체들은 A 고리 내에 수백 개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되었다. 2007년, 여덟 개의 소위성이 더 발견되었다. 이들은 주로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약 130,000 km 떨어져 있는, 3000 km 대에 갇혀 있었고,[68] 2008년까지 150개 이상의 프로펠러 소위성이 관측되었다.[69] 몇년 동안 추적해온 것은 블레리오(Bleriot)라고 이름 붙여졌다.[70] 로슈 간극[편집] A 고리와 좁은 F 고리 사이의 로슈 간극(사진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거대한 간극). 아틀라스가 사진에서 보인다. 또 엥케 간극과 킬러 간극도 보인다. A 고리와 F 고리 사이의 간극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에두아르 로슈를 기리기 위해 로슈 간극(Roche Division)으로 붙여졌다.[71] 로슈 간극은 거대한 천체가 (토성과 같은)행성과 매우 가까이 있을 때 행성의 기조력에 의해 산산조각나는 물리학적 개념인 로슈 한계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72] 주요 고리계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로슈 간극은 사실 고리가 위성으로 흡수될 수 없는 이유인 토성의 로슈 한계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73] 카시니 간극과 같이, 로슈 간극은 텅 비어있지 않고 물질 덩어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 물질의 특징은 빈약하고 먼지투성이의 D 고리, E 고리, G 고리와 유사하다.[출처 필요] 로슈 간극 내의 두 위치에서는 다른 위치보다 먼지의 집중이 크다. 이것들은 카시니 탐사선 영상 팀에 의해 발견되었고, 임시 명칭이 주어졌다. R/2004 S 1은 위성 아틀라스의 궤도를 따라 놓여있고, R/2004 S 2는 프로메테우스의 궤도의 안쪽, 토성의 중심으로부터 138,900 km 떨어진 곳에 중심을 두고 있다.[출처 필요] F 고리[편집] 미디어 재생 F 고리의 양쪽을 공전하는 양치기 위성 판도라(왼쪽)와 프로메테우스(오른쪽). 고리의 안쪽에 새겨진 검은 홈이 프로메테우스를 뒤쫓고 있다. F 고리(F Ring)는 토성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별개의 고리이고 시간 단위의 시간규모로 특징이 변하고 있는, 아마도 태양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고리일 것이다.[74] 고리는 A 고리의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3,000 km 뒤에 위치해 있다.[75] F 고리는 1979년 파이오니어 11호 영상 팀에 의해 발견되었다.[76] 매우 얇고, 폭이 고작 수백 킬로미터로, 안쪽과 바깥에서 공전하고 있는 양치기 위성인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61] 최근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근접 촬영 사진은 F 고리가 한개의 고리 핵과 그 주변의 나선 가닥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77] 또한 프로메테우스가 최원점에서 고리와 근접할 때, 위성의 중력이 F 고리의 안쪽 부분에 어두운 홈(channel)을 두어, 고리의 물질을 '훔쳐감'으로써 고리의 구부러짐과 꼬임을 유발한다.(갤러리에 있는 F 고리 사진의 비디오 링크 참고) F 고리 내의 물질보다 토성을 더 빨리 공전하는 프로메테우스로 인해, 새로운 홈들은 각각 이전의 것보다 약 3.2도 앞쪽에 형성된다.[74] 2008년, F 고리 내에서 공전 중인 미관측된 작은 위성이 프로메테우스의 섭동으로 인해 계속해서 고리의 좁은 핵을 통과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요동 원인이 더 발견되었다. 작은 위성 중 하나는 S/2004 S 6 일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확인되었다.[74] F 고리의 255˚(약 70%)를 보여주는 107장의 사진을 합성하여 만든 모자이크 사진. 반경 폭(꼭대기에서 바닥까지)은 1,500 km이다. 외곽 고리[편집] 태양에 의해 후방에 빛이 비추어짐으로써 보이는 외곽 고리 안테 고리 호. 밝은 점은 안테이다. 후방에 빛이 비추어지는 E 고리. 고리를 배경으로, 엔셀라두스의 실루엣과 그 아래에서 엔셀라두스의 남극에서 방출되는 제트가 밝게 보인다. 야누스/에피메테우스 고리[편집] 2006년 카시니 탐사선이 촬영한 전방산란광 사진에 드러난 것과 같이, 야누스와 에피메테우스의 궤도가 위치한 영역 근처에는 희미한 먼지 고리가 있다. 이 고리는 반경 폭이 약 5,000 km이다.[78] 이것의 근원은 위성의 표면과 유성체와의 충돌로 인해 솟아올라, 궤도 경로를 둘러싸는 희미한 고리를 형성한 입자이다.[79] G 고리[편집] G 고리(G Ring)는 F 고리와 E 고리의 시작점 사이의 중간에 있는 매우 얇고, 희미한 고리이다.(갤러리의 마지막 사진 참고) 고리의 안쪽 가장자리는 미마스의 궤도 안쪽으로 약 15,000 km 떨어져 있다. G 고리는 고리의 안쪽 가장자리 근처에 뚜렷하고 밝은 호(해왕성의 고리의 호와 유사하다)를 하나 포함하고 있다. 호는 G 고리의 둘레의 약 6분의 1배만큼 뻗어있고, 미마스와 7:6 궤도공명에 의해 제자리에 유지되는 0.5 km 직경의 소위성 아이가이온에 중심을 두고 있다.[80][81] 호는 직경이 수 미터 까지의 얼음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G 고리의 일부분은 이 호에서 방출된 먼지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9,000 km 폭의 G 고리 전체에 비해, 호의 반경 폭은 약 250 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80] 호는 직경이 약 100 미터의 작은 얼음 소위성에 해당하는 물질을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80] 유성진과의 충돌로 인해 아이가이온과 다른 근원 천체에서 방출된 먼지는, 토성의 자기권(G 고리의 궤도 운동보다 훨씬 빠르게 회전하는, 토성의 자기장과 동시에 회전하는 플라스마)과의 상호작용 때문에 호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작은 입자들은 계속해서 유성진과의 많은 충돌로 인해 침식되고, 플라스마의 인력에 의해 흩어진다. 수천 년 동안 고리는 서서히 질량을 잃게 되지만,[82] 아이가이온과 유성진의 계속되는 충돌로 다시 보충된다. 메토네 고리 호[편집] 2006년 9월에 처음으로 관측된, 세로 방향으로 약 10도 가량 걸쳐 있는 희미한 고리 호는 위성 메토네와 연관되어 있다. 호의 물질은 유성진과의 충돌에 의해 메토네에서 방출된 먼지에 해당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 내의 먼지의 분산은 (G 고리 내의 호의 분산 메커니즘과 유사한)미마스와의 14:15 궤도공명에 기인한 것이다.[83][84] 동일한 궤도공명의 영향을 받아, 메토네는 자신의 궤도에서 경도 5˚의 진폭을 가진 채 전후로 진동을 한다. 안테 고리 호[편집] 2007년 6월에 처음 관측된, 세로 방향으로 약 20도 가량 걸쳐 있는 희미한 고리 호는 위성 안테와 연관되어 있다. 호의 물질은 유성진과의 충돌에 의해 안테에서 방출된 먼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 내의 먼지의 분산은 미마스와의 10:11 공명에 기인한 것이다. 동일한 공명의 영향으로, 안테는 자신의 궤도에서 경도 14도 이상으로 전후로 운동하게 된다.[83][84] 팔레네 고리[편집] 2006년 카시니 탐사선에 의해 촬영된 전방산란광 사진에서, 팔레네의 궤도를 공유하는 희미한 먼지 고리가 드러났다.[78] 이 고리는 반경 폭이 약 2,500 km이다. 고리의 근원은 유성체와의 충돌로 팔레네의 표면에서 방출되어, 자신의 궤도 경로를 둘러싸는 희미한 고리를 형성한 입자이다.[79][84] E 고리[편집] E 고리(E Ring)는 두번째로 가장 바깥에 있는 고리이고, 매우 폭이 넓다. 규산염, 이산화탄소, 암모니아 및 얼음으로 구성된 매우 작은(마이크로미터 이하)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85] E 고리는 미마스와 타이탄의 궤도 사이에 분포해 있다.[86] 다른 고리와는 달리, 눈에 보일 정도의 얼음덩어리 보다는 아주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 E 고리의 물질의 근원은 위성 엔셀라두스의 남극 영역에 있는 "타이거 스트라이프"(tiger stripe)에서 나오는 얼음화산의(cryovolcanic) 분출물[87][88]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주요 고리와는 달리, E 고리는 2,000 km 이상 두껍고, 엔셀라두스와의 거리가 증가할수록 두께가 증가한다.[86] E 고리의 입자는 고리 내에서 공전하는 위성에 뭉치려는 경향이 있다. 테티스의 순행 반구(leading hemisphere, 위성의 공전 방향의 반구)의 적도는 거기서 유입된 물질에 의해 약간 파란색을 띤다.[89] 텔레스토, 칼립소, 헬레네, 폴리데우케스와 같은 트로이 위성들은 특히 고리의 면의 아래 위로 궤도 운동을 함으로써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결과로, 위성들의 표면은 밝은 물질로 뒤덮여 있어 주름 없이 매끄러운 것이 특징이다.[90] 포에베 고리[편집] 주요 고리를 왜소해 보이게 만드는 포에베 고리의 거대한 정도. 삽입된 사진은 고리의 일부를 담은 24 마이크로미터 스피처 사진이다. 2009년 10월, 포에베의 궤도 바로 안에 희미한 물질 원반의 발견이 발표되었다. 발견 당시에, 원반은 모서리가 지구를 향해 있었다. 이 원반은 다른 고리들 처럼 대략적으로 설명된다. 매우 거대하긴(겉보기 크기가 지구에서 보이는 보름달의 두배) 해도, 고리는 사실 보이지 않는다. 고리는 NASA의 스피처 우주 망원경을 이용해서 발견되었고,[91] 관측 전체 범위에서 보였는데, 토성의 반지름의 128~207배 만큼 뻗어있었다.[92] 계산은 59 토성 반지름의 이아페투스의 궤도를 안쪽으로, 바깥쪽으로는 300 토성 반지름까지 뻗어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93] 고리는 나중에 WISE, 허셜우주망원경과 카시니 탐사선을 이용하여 연구되었다.[94] 포에베는 토성으로부터 평균 215 토성 반지름 거리에서 공전한다. 포에베 고리(Phoebe Ring)는 두께가 행성의 직경보다 약 20배만큼 두껍다.[95] 고리의 입자가 포에베와 유성진 이상의 천체와의 충돌에서 기원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들은 안쪽의 위성 이아페투스의 궤도 운동과 반대 방향의 역행 궤도를 공유해야 한다.[93] 포에베 고리는 토성의 궤도면에 위치해 있고, 거의 타원이다. 따라서 토성의 적도면과, 다른 고리에 대해 27도 기울어져 있다. 포에베는 토성의 궤도 측면에 대해 5˚정도 기울어져 있고(포에베의 역행 공전 운동 때문에 종종 175˚로 쓰인다), 고리면 상하의 수직적 이탈은 포에베 고리의 40 토성 반지름에 육박하는 관측된 두께와 일치한다. 포에베 고리의 존재는 1970년대 스티븐 소터에 의해 제기되었다.[93] 발견은 버지니아 대학교의 앤 J. 버비서(Anne J. Verbiscer) 및 마이클 F. 스크루츠키(Michael F. Skrutskie)와 메릴랜드 대학 칼리지 파크 캠퍼스의 더글라스 P. 해밀턴에 의해 이루어졌다.[92][96] 세 명은 대학원생으로써 코넬 대학교에서 함께 연구했다.[97] 고리 물질은 태양 복사의 재방출 때문에 안쪽으로 이동하게 되고,[92] 따라서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와 충돌하게 된다. 이 물질의 유입은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를 약간씩 어둡고 붉게 만들고 있지만(천왕성의 위성인 오베론과 티타니아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위성의 극적인 두가지 색을 곧바로 만들지는 못한다.[98] 유입되는 물질은 따뜻한 영역에서의 얼음 승화로 인한 열적인 자체 분해 과정 뒤에 차가운 영역에서의 수증기의 응결이 뒤따르면서 양의 피드백이 일어난다. 이는 북극 영역과 역행 반구(trailing hemisphere)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밝은 얼음 퇴적물과 대조를 이루는, 이아페투스의 순행 반구의 적도 영역 대부분을 덮고 있는 어두운 잔여물질을 남긴다.[99][100][101] 레아의 고리계 존재 가능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레아의 고리입니다. 토성의 두번째로 큰 위성 레아는 고체 입자로 구성된 원반 내에 세 개의 좁은 띠를 포함하는 매우 작은 고리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가설화 되었다.[102][103] 이러한 가설상의 고리는 발견되지는 못했지만, 2005년 11월 카시니의 관측에서, 레아 근처에서의 토성의 자기권의 고에너지 전자의 부족으로부터 그 존재가 추정되었다. 자기권 영상 기구(Magnetospheric Imaging Instrument, MIMI)는 위성의 양면의 플라스마 흐름에서 세 개의 급격한 감소가 간간이 끼어드는, 거의 대칭적인 패턴을 보이는 부드러운 변화를 관측했다. 플라스마가 아마 수 데시미터에서 약 1미터 직경의 입자로 구성된 고밀도 고리 또는 고리 호를 포함하는 적도의 원반 모양의 고체 물질에 의해 흡수된 것이라면, 이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레아의 고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더 최근의 증거 일부는 위성의 적도 2도 이내의 둘레 근처에 4분의 3 만큼 뻗어 있는, 일사불란하게 분포된 자외선상의 작고 밝은 점들의 집합이다. 이 점들은 궤도에서 벗어난 고리 물질의 충돌 지점으로써 설명된다.[104] 그러나, 카시니의 목표가 된 가설상의 고리 면의 여러 각도에서의 관측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그러한 불가사의한 특징에 대한 또다른 설명이 필요함을 시사한다.[105] 갤러리[편집] 토성의 분점 가까이에서 B 고리(꼭대기)의 빛이 비추어지지 않은 안쪽과 C 고리(바닥)의 바깥쪽을 촬영한 카시니의 모자이크 사진. 미마스의 그림자가 많이 보인다. 그림자는 빽빽한 B 고리에 의해 희미해졌다. 맥스웰 간극이 중심부 아래에 보인다. 해가 비추어지지 않은 B 고리의 일부분을 촬영한 카시니의 사진에서 낮은 위상각의 어두운 테가 보인다. 중심부 왼쪽에, 두 개의 어두운 간극(큰 쪽은 하위헌스 간극)과 왼쪽의 카시니 간극을 구성하는 밝은 미세고리가 있다. 2009년에 카시니에 의해 144˚의 위상각에서 촬영된, 밝은 B 고리의 테와 함께 햇빛이 비춰지는 고리 부분이 담긴 사진. A 고리의 엥케 간극을 통한 판의 운동은 가장자리의 요동과 (스스로 전파되지 않는)그 앞과 안쪽에 나선을 그리는 물결흔적을 유발한다. 다른 더 빽빽한 물결대는 나선 밀도파이다. (오른쪽의 오래된 홈과 함께)F 고리 내의 어두운 홈을 형성하고 있는 궤도 최원점 근처의 프로메테우스. 이 과정에 대한 영상은 카시니 영상 팀 웹사이트[106] 또는 유투브[107]에서 볼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중앙)와 판도라는 F 고리의 양쪽에 있는 양치기 위성이다. 아마 F 고리의 핵을 통과하거나 가까이서 공전하고 있는 작은 소위성의 섭동 효과 때문으로 추정되는 F 고리의 요동 원인. G 고리의 일부를 가린 토성의 그림자. 호의 궤도 운동을 보여주는 영상은 유투브[108] 또는 카시니 영상 팀 웹사이트[109]에서 볼 수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갈릴레오 갈릴레이 - 1610년, 토성의 고리를 최초로 관측한 사람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 1655년, 토성의 고리를 토성을 둘러싼 고리라고 최초로 묘사한 사람 조반니 카시니 - 1675년, A 고리와 B 고리 사이의 간극(카시니 간극)을 발견한 사람 에두아르 로슈 - 토성의 로슈 한계 내에서 위성이 어떻게 파괴되어 고리를 형성하는지 설명한 프랑스의 천문학자 천왕성의 고리 - 태양계의 행성 중 고리가 있는 행성 중 하나인 천왕성의 고리에 대한 설명이다. 각주[편집] ↑ Porco, Carolyn. “Questions about Saturn's rings”. 《CICLOPS web site》. 2012년 10월 5일에 확인함. |work=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가 나 Tiscareno, M. S. (2012년 7월 4일 preprint). 〈Planetary Rings〉. Kalas, P.; French, L. 《Planets, Stars and Stellar Systems》. Springer. 6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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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Now. 2010년 8월 5일에 확인함. ↑ Ciclops.org ↑ Youtube.com ↑ Youtube.com ↑ Ciclops.org 외부 링크[편집] 행성의 고리 마디: 토성의 고리계 NASA의 태양계 탐사의 토성의 고리 USGS 행성 명명법 페이지에서의 토성의 고리 명명법 NASA 토성의 거대한 고리 발견 – Yahoo 7 news (2009-10-07 검색) vdeh토성지질학적 특징 대기 용의 폭풍 대백반 육각형 자기장 고리 주요 위성 디오네 엔셀라두스 히페리온 이아페투스 미마스 포에베 레아 테티스 타이탄 천문학 팔분의자리 델타 토성 횡단 소행성 탐사 카시니-하위헌스 엔셀라두스 탐사선 파이어니어 11호 보이저 계획 기타 픽션 토성 토성의 위성 vdeh행성의 고리행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외계 행성 기타 레아 커리클로 키론 태양 소행성대 카이퍼 대 관련 내용 기체 토러스 vdeh태양계태양 · 태양권계면행성 위성 고리지구형 행성 수성 금성 지구 (달) 화성 (위성) 목성형 행성 목성 위성 고리 토성 위성 고리 천왕성 위성 고리 해왕성 위성 고리 왜행성 명왕성형 천체 세레스 명왕성 (위성) 하우메아 (위성) 마케마케 에리스 (위성) 소천체소행성 벌컨군 지구 근접 소행성 소행성대 소행성족 목성 트로이군 센타우루스 소행성군 해왕성 트로이군 소행성 위성 유성체 해왕성 바깥 천체 카이퍼 대 명왕성족 고전적 카이퍼 대 천체 산란원반 분리천체 혜성 주기 혜성 비주기 혜성 다모클레스군 힐스 구름 오르트 구름 코르딜레프스키 구름 참고태양계 천체 목록 (반지름순, 질량순, 중력적으로 둥근 천체), 소행성체 목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토성의_고리&oldid=24186055" 분류: 행성 고리토성1655년 발견한 천체1610년 발견한 천체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외부 링크인용 오류 - 날짜CS1 관리 - 수직선 없음CS1 관리 - 날짜와 연도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CS1 관리 - et al.의 직접적인 사용CS1 관리 - 저자표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8월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9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བོད་ཡིགBosanskiCatalàکوردی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Avañe'ẽעבריתहिन्दीHrvatski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Bahasa Melayu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4: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대회 개요개최국 적도 기니개최 기간 1월 17일 ~ 2월 8일예선 참가국 47개국참가국 16개국경기장 4 (4개 도시) 최종 순위● 우승국 코트디부아르 (2번째 우승)● 준우승국 가나● 3위 콩고 민주 공화국● 4위 적도 기니통계총 경기수 32경기득점 총합 68골 (경기당 2.13골)최다 득점 선수 아흐메드 아카치 앙드레 아유 하비에르 발보아 티에비 비푸마 디외메르시 음보카니 (3골)최우수 선수 크리스티안 아츠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2013 2017 → v • d • e • h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영어: 2015 Africa Cup of Nations)은 2015년 1월 17일부터 2월 8일까지 적도 기니에서 개최된 대회인 30번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이다.[1] 이 대회는 당초 모로코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2014년 10월 모로코가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에 따른 우려로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 대회 개최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11월 2일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해 한 차례 논의를 거쳤다.[2]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이 대회의 개최를 2016년으로 연기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며 11월 8일까지 모로코 축구 협회에 2015년 개최 의사를 전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로코 축구 협회가 이에 응하지 않아 11월 11일에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모로코 축구 협회에 이 대회의 개최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출전 정지 징계를 내렸음을 통보하는 한편 모로코를 대신하여 이 대회를 개최할 국가를 선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1월 14일, 적도 기니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목차 1 개최를 희망했던 국가 1.1 대체 개최국으로 거론되었던 국가 2 개최 도시 및 경기장 3 예선 3.1 본선 진출 팀 4 시드 배정 4.1 조 추첨 결과 5 선수 명단 6 조별 리그 6.1 A조 6.2 B조 6.3 C조 6.4 D조 7 결선 토너먼트 7.1 8강전 7.2 준결승전 7.3 3·4위전 7.4 결승전 8 우승국 9 수상 9.1 올스타 팀 10 최종 순위 11 득점 선수 12 각주 개최를 희망했던 국가[편집] 보츠와나 카메룬 콩고 민주 공화국 기니 모로코 남아프리카 공화국 잠비아 짐바브웨 여기에서 모로코가 개최 국가로 결정되었으나 모로코가 에볼라 유행을 이유로 개최를 연기하기를 원하자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모로코의 개최권을 박탈하고 다른 국가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대체 개최국으로 거론되었던 국가[편집]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몇 개 회원국을 선정하여 모로코를 대신하여 이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조사하였다. 그 결과 다음 5개국은 개최 불가 의사를 전달하였다. 가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단 알제리 이집트 다음 1개국은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다음 3개국은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서 협상되었던 국가이다. 가봉 앙골라 적도 기니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적도 기니에서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의 개최 도시와 경기장은 다음과 같다. 바타 - 데 바타 경기장 (수용인원: 35,700) 말라보 -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수용인원: 15,250) 몽고모 - 데 몽고모 경기장 (수용인원: 10,000) 에베비인 -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수용인원: 35,700) 예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입니다. 본선 진출 팀[편집] 팀 예선 결과 본선 진출 결정일 과거 본선 기록 적도 기니 개최국 2014년 11월 14일 1011회 (2012) 남아프리카 공화국 A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098회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3) 알제리 B조 1위 2014년 10월 15일 11515회 (1968, 1980, 1982, 1984, 1986, 1988, 1990, 1992, 1996, 1998, 2000, 2002, 2004, 2010, 2013) 가봉 C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055회 (1994, 1996, 2000, 2010, 2012) 카메룬 D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1616회 (1970, 1972, 1982, 1984, 1986, 1988, 1990, 1992,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가나 E조 1위 2014년 11월 19일 11919회 (1963, 1965, 1968, 1970, 1987, 1980, 1982, 1984,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카보베르데 F조 1위 2014년 10월 15일 1011회 (2013) 튀니지 G조 1위 2014년 11월 14일 11616회 (1962, 1963, 1965, 1978, 198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2012, 2013) 콩고 공화국 A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066회 (1968, 1972, 1974, 1978, 1992, 2000) 말리 B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088회 (1972, 1994, 2002, 2004, 2008, 2010, 2012, 2013) 부르키나파소 C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099회 (1978, 1996, 1998, 2000, 2002, 2004, 2010, 2012, 2013) 코트디부아르 D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2020회 (1965, 1968, 1970, 1974, 1980, 1984, 1986, 1988,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기니 E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1010회 (1970, 1974, 1976, 1980, 1994, 1998, 2004, 2006, 2008, 2012) 잠비아 F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1616회 (1974, 1978, 1982, 1986,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세네갈 G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1212회 (1965, 1968, 1986, 1990, 1992, 1994, 2000, 2002, 2004, 2006, 2008, 2012) 콩고 민주 공화국 D조 3위 2014년 11월 19일 11616회 (1965, 1968, 1970, 1972, 1974, 1976, 1988,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13) 굵은 글씨는 우승한 대회를 의미한다. 시드 배정[편집] 이번 시드 배정은 2013년 대회와는 다르게 지난 3개 대회의 전적, 2012년 예선(0.5배의 가중치), 2013년 예선, 2015년 예선(2배의 가중치),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의 점수를 합산하여 시드를 배정했다.[3] 그 결과, 15년 만에 본선에 진출한 콩고 공화국은 최하위 시드를 배정받았다. 이 기준에 근거한 시드 배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시드 1 시드 2 시드 3 시드 4 적도 기니 (개최국, A조 배정) 가나 (48점) 코트디부아르 (44점) 잠비아 (41점) 부르키나파소 (40점) 말리 (38점) 튀니지 (32.5점) 알제리 (28점) 카보베르데 (26.5점) 남아프리카 공화국 (23.5점) 카메룬 (23.5점) 가봉 (22점) 기니 (19점) 세네갈 (19점) 콩고 민주 공화국 (18점) 콩고 공화국 (13점) 조 추첨은 2014년 12월 3일, 적도 기니 말라보에서 열렸다. 조 추첨 결과[편집] 조 1시드 2시드 3시드 4시드 A 적도 기니 부르키나파소 가봉 콩고 공화국 B 잠비아 튀니지 카보베르데 콩고 민주 공화국 C 가나 알제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네갈 D 코트디부아르 말리 카메룬 기니 선수 명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선수 명단입니다. 조별 리그[편집] 모든 경기는 현지 시간(UTC+01)을 따름. A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콩고 공화국 3 2 1 0 4 2 +2 7 적도 기니 3 1 2 0 3 1 +2 5 가봉 3 1 0 2 2 3 -1 3 부르키나파소 3 0 1 2 1 4 -3 1 2015년 1월 17일 17:00 적도 기니 1 : 1 콩고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0,245 심판: 바카리 가사마 은수에 16' 리포트 비푸마 87' 2015년 1월 17일 20:00 부르키나파소 0 : 2 가봉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0,245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리포트 오바메양 19' 에부나 72' 2015년 1월 21일 17:00 적도 기니 0 : 0 부르키나파소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9,867 심판: 네앙 알리움 리포트 2015년 1월 21일 20:00 가봉 0 : 1 콩고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4,782 심판: 빅터 고메스 리포트 오니앤구에 48' 2015년 1월 25일 19:00 가봉 0 : 2 적도 기니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9.230 심판: 누망디에즈 두에 리포트 발보아 55' (페널티골) 이반 86' 2015년 1월 25일 19:00 콩고 공화국 2 : 1 부르키나파소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945 심판: 조지프 램프티 비푸마 51' 온다마 87' 리포트 반체 86' B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튀니지 3 1 2 0 4 3 +1 5 콩고 민주 공화국 3 0 3 0 2 2 0 3 카보베르데 3 0 3 0 1 1 0 3 잠비아 3 0 2 1 2 3 -1 2 2015년 1월 18일 17:00 잠비아 1 : 1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319 심판: 게하드 그리샤 싱굴루마 2' 리포트 볼라시 65' 2015년 1월 18일 20:00 튀니지 1 : 1 카보베르데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479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망세 70' 리포트 헬돈 78' (페널티골) 2015년 1월 22일 17:00 잠비아 1 : 2 튀니지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8,000 심판: 아부바카 방구라 마유카 60' 리포트 아카치 70' 치하우이 89' 2015년 1월 22일 20:00 카보베르데 0 : 0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680 심판: 말랑 디에히오 리포트 2015년 1월 26일 19:00 카보베르데 0 : 0 잠비아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950 심판: 네앙 알리움 리포트 2015년 1월 26일 19:00 콩고 민주 공화국 1 : 1 튀니지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11.463 심판: 바카리 가사마 보킬라 66' 리포트 아카치 31' C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가나 3 2 0 1 4 3 +1 6 알제리 3 2 0 1 5 2 +3 6 세네갈 3 1 1 1 3 4 -1 4 남아프리카 공화국 3 0 1 2 3 6 -3 1 가나와 알제리는 승점이 동률을 이루어 승자승 원칙에 따른 동률 팀간 전적에 따라 가나가 1위, 알제리가 2위가 되었다. (가나 1 : 0 알제리) 2015년 1월 19일 17:00 가나 1 : 2 세네갈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569 심판: 베르나르 카미유 아유 14' (페널티골) 리포트 디우프 58' 소우 90+3' 2015년 1월 19일 20:00 알제리 3 : 1 남아프리카 공화국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2,788 심판: 누망디에즈 두에 훌라짜요 67' (자책골) 굴람 72' 슬리마니 83' 리포트 팔라 50' 2015년 1월 23일 17:00 가나 1 : 0 알제리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2,387 심판: 코만 쿨리발리 잔 90+2' 리포트 2015년 1월 23일 20:00 남아프리카 공화국 1 : 1 세네갈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674 심판: 알리 렘가이프리 마니사 47' 리포트 음보지 60' 2015년 1월 27일 19:00 남아프리카 공화국 1 : 2 가나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670 심판: 하마다 엘 무사 남피안드라자 마상고 17' 리포트 보예 73' 아유 83' 2015년 1월 27일 19:00 세네갈 0 : 2 알제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549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리포트 마레즈 11' 벤탈렙 82' D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코트디부아르 3 1 2 0 3 2 +1 5 기니 3 0 3 0 3 3 0 3 말리 3 0 3 0 3 3 0 3 카메룬 3 0 2 1 2 3 -1 2 기니와 말리는 승점을 비롯하여 상대 전적에 따른 골 득실, 상대 전적에 따른 득점, 전체 골 득실, 전체 득점이 모두 동률을 이루어 추첨으로 8강 진출이 결정된다. 추첨 결과, 기니가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2015년 1월 20일 17:00 코트디부아르 1 : 1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875 심판: 메흐디 아비드-차레프 둠비아 72' 리포트 야타라 36' 2015년 1월 20일 20:00 말리 1 : 1 카메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심판: 재니 시카즈웨 야타바레 71' 리포트 오용고 83' 2015년 1월 24일 17:00 코트디부아르 1 : 1 말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890 심판: 보샤이브 엘 아라치 그라델 85' 리포트 사코 7' 2015년 1월 24일 20:00 카메룬 1 : 1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000 심판: 테세마 밤라크 무칸조 13' 리포트 트라오레 42' 2015년 1월 28일 19:00 카메룬 0 : 1 코트디부아르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230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리포트 그라델 35' 2015년 1월 28일 19:00 기니 1 : 1 말리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470 심판: 메드 코르디 콘스탄트 15' (페널티골) 리포트 마이가 47'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1월 31일 - 바타 콩고 공화국 2 2월 4일 - 바타 콩고 민주 공화국 4 콩고 민주 공화국 1 2월 1일 - 말라보 코트디부아르 3 코트디부아르 3 2월 8일 - 바타 알제리 1 코트디부아르 (PSO) 0(9) 2월 1일 - 말라보 가나 0(8) 가나 3 2월 5일 - 말라보 기니 0 가나 3 3·4위전 1월 31일 - 바타 적도 기니 0 튀니지 1 콩고 민주 공화국 (PSO) 0(4) 적도 기니 (AET) 2 적도 기니 0(2) 2월 7일 - 말라보 8강전[편집] 2015년 1월 31일 17:00 콩고 공화국 2 : 4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1,670 심판: 베르나르 카미유 도레 55' 비푸마 62' 리포트 음보카니 65', 90+1' 보킬라 75' 킴와키 81' 2015년 1월 31일 20:30 튀니지 1 : 2 (연장전) 적도 기니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1,000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아카치 70' 리포트 발보아 90+2' (페널티골), 102' 2015년 2월 1일 17:00 가나 3 : 0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500 심판: 재니 시카즈웨 아츠 4', 61' 아피아 44' 리포트 2015년 2월 1일 20:30 코트디부아르 3 : 1 알제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000 심판: 바카리 가사마 보니 26', 68' 제르비뉴 90+4' 리포트 수다니 51' 준결승전[편집] 2015년 2월 4일 20:00 콩고 민주 공화국 1 : 3 코트디부아르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0,000 심판: 네앙 알리움 음보카니 24' (페널티골) 리포트 투레 21' 제르비뉴 41' 카논 68' 2015년 2월 5일 20:00 가나 3 : 0 적도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250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아유 42' (페널티골) 무바라크 45+1' 아유 75' 리포트 3·4위전[편집] 2015년 2월 7일 17:00 콩고 민주 공화국 0 : 0 (연장전) 적도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심판: 게하드 그리샤 리포트 승부차기 마브와티 마비디 망우루 몽공구 4 : 2 발보아 파비아니 주브날 엘옹 결승전[편집] 2015년 2월 8일 20:00 코트디부아르 0 : 0 (연장전) 가나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8,000 심판: 바카리 가사마 리포트 승부차기 보니 가지 오리에 둠비아 투레 칼루 투레 카논 베일리 디에 바리 9 : 8 무바라크 아유 아콰 아체암퐁 아유 멘사 아제망바두 애풀 라흐만 보예 라작 우승국[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 코트디부아르 2번째 우승 수상[편집] 최고 득점자 최우수 선수 최고의 골 선수 페어플레이 페어플레이 앙드레 아유 크리스티안 아츠 크리스티안 아츠 vs 기니 전 크웨시 아피아 콩고 민주 공화국 올스타 팀[편집]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실뱅 지보우오 로버트 키디아바 세르주 오리에 해리슨 애풀 콜로 투레 앙드레 아유 야야 투레 막스 그라델 야니크 볼라시 제르비뉴 크리스티안 아츠 윌프리드 보니 최종 순위[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순위 우승 준우승 3위 4위 8강 조별 리그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코트디부아르 6 3 3 0 9 4 +5 12 2 가나 6 4 1 1 10 3 +7 13 3 콩고 민주 공화국 6 1 4 1 7 7 0 7 4 적도 기니 6 2 3 1 5 5 0 9 5 콩고 공화국 4 2 1 1 6 6 0 7 6 알제리 4 2 0 2 6 5 +1 6 7 튀니지 4 1 2 1 5 5 0 5 8 기니 4 0 3 1 3 6 -3 3 9 세네갈 3 1 1 1 3 4 +1 4 10 말리 3 0 3 0 3 3 0 3 11 카보베르데 3 0 3 0 1 1 0 3 12 가봉 3 1 0 2 2 3 -1 3 13 카메룬 3 0 2 1 2 3 -1 2 13 잠비아 3 0 2 1 2 3 -1 2 15 남아프리카 공화국 3 0 1 2 3 6 -3 1 16 부르키나파소 3 0 1 2 1 4 -3 1 우승에서 4위까지는 준결승, 3, 4위전 및 결승전 결과로 순위를 가린다. 이전 단계에서 탈락한 팀들의 순위는 조별 리그와 동일하게 승점-골득실차-다득점순으로 가리며 모두 같을 경우 공동 순위로 한다. 8강에서 탈락한 팀은 최고 5위에서 최하 8위까지이다.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팀은 최고 9위에서 최하 16위까지이다. 토너먼트에서 승부차기로 경기가 가려진 경우에는 FIFA의 규정에 따라 무승부로 기재한다. 득점 선수[편집] 3골 티에비 비푸마 디외메르시 음보카니 하비에르 발보아 앙드레 아유 아흐메드 아카치 2골 예레미 보킬라 크리스티안 아츠 윌프리드 보니 제르비뉴 막스 그라델 1골 나빌 벤탈렙 파우지 굴람 리야드 마레즈 이슬람 슬리마니 엘 아르비 힐렐 수다니 아리스티데 반체 벵자맹 무칸조 앙브루아즈 오용고 헬돈 라모스 페레보리 도레 파브리스 온다마 프린스 오니앤구에 야니크 볼라시 조엘 킴와키 에밀리오 은수에 이반 에듀 피에르에메리크 오바메양 말리크 에부나 크웨시 아피아 조르당 아유 존 보예 아사모아 잔 와카소 무바라크 케빈 콘스탄트 이브라히마 트라오레 모하메드 야타라 세이두 둠비아 윌프리드 카논 야야 투레 바카리 사코 모디보 마이가 삼부 야타바레 맘 비람 디우프 카라 음보지 무사 소우 오우파 마니사 만들라 마상고 투소 팔라 야시네 치하우이 모하메드 알리 망세 이매뉴얼 마유카 기븐 싱굴루마 자책골 툴라니 훌라짜요 (알제리 전) 각주[편집] ↑ 정성래 기자 (2014년 11월 14일). “적도기니, 모로코 대신해 아프리카네이션스컵 개최”. 스포탈코리아. 2014년 11월 14일에 확인함. ↑ “CAF Reaction on the Request of Morocco”. Confederation of African Football. 2014년 10월 11일. ↑ “2015 Africa Cup of Nations Draw” (PDF). Confederation of African Football. 2014년 12월 2일.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vdeh아프리카 네이션스컵본선 수단 1957년 아랍 연합 공화국 1959년 에티오피아 1962년 가나 1963년 튀니지 1965년 에티오피아 1968년 수단 1970년 카메룬 1972년 이집트 1974년 에티오피아 1976년 가나 1978년 나이지리아 1980년 리비아 1982년 코트디부아르 1984년 이집트 1986년 모로코 1988년 알제리 1990년 세네갈 1992년 튀니지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6년 부르키나파소 1998년 가나/나이지리아 2000년 말리 2002년 튀니지 2004년 이집트 2006년 가나 2008년 앙골라 2010년 가봉/적도 기니 201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2013년 적도 기니 2015년 가봉 2017년 이집트 2019년 카메룬 2021년 코트디부아르 2023년 기니 2025년 예선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결승전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선수 명단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1957년과 1959년 대회에는 예선이 없었고 1959년과 1976년 대회에는 우승국이 로빈 라운드 형식으로 정해졌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5년_아프리카_네이션스컵&oldid=23951769" 분류: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아프리카 네이션스컵2015년 축구2015년 적도 기니2015년 1월2015년 2월적도 기니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नेपाली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일 (화) 06: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대회 개요개최국 적도 기니개최 기간 1월 17일 ~ 2월 8일예선 참가국 47개국참가국 16개국경기장 4 (4개 도시) 최종 순위● 우승국 코트디부아르 (2번째 우승)● 준우승국 가나● 3위 콩고 민주 공화국● 4위 적도 기니통계총 경기수 32경기득점 총합 68골 (경기당 2.13골)최다 득점 선수 아흐메드 아카치 앙드레 아유 하비에르 발보아 티에비 비푸마 디외메르시 음보카니 (3골)최우수 선수 크리스티안 아츠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2013 2017 → v • d • e • h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영어: 2015 Africa Cup of Nations)은 2015년 1월 17일부터 2월 8일까지 적도 기니에서 개최된 대회인 30번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이다.[1] 이 대회는 당초 모로코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2014년 10월 모로코가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에 따른 우려로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 대회 개최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11월 2일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해 한 차례 논의를 거쳤다.[2]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이 대회의 개최를 2016년으로 연기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며 11월 8일까지 모로코 축구 협회에 2015년 개최 의사를 전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로코 축구 협회가 이에 응하지 않아 11월 11일에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모로코 축구 협회에 이 대회의 개최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출전 정지 징계를 내렸음을 통보하는 한편 모로코를 대신하여 이 대회를 개최할 국가를 선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1월 14일, 적도 기니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목차 1 개최를 희망했던 국가 1.1 대체 개최국으로 거론되었던 국가 2 개최 도시 및 경기장 3 예선 3.1 본선 진출 팀 4 시드 배정 4.1 조 추첨 결과 5 선수 명단 6 조별 리그 6.1 A조 6.2 B조 6.3 C조 6.4 D조 7 결선 토너먼트 7.1 8강전 7.2 준결승전 7.3 3·4위전 7.4 결승전 8 우승국 9 수상 9.1 올스타 팀 10 최종 순위 11 득점 선수 12 각주 개최를 희망했던 국가[편집] 보츠와나 카메룬 콩고 민주 공화국 기니 모로코 남아프리카 공화국 잠비아 짐바브웨 여기에서 모로코가 개최 국가로 결정되었으나 모로코가 에볼라 유행을 이유로 개최를 연기하기를 원하자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모로코의 개최권을 박탈하고 다른 국가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대체 개최국으로 거론되었던 국가[편집]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몇 개 회원국을 선정하여 모로코를 대신하여 이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조사하였다. 그 결과 다음 5개국은 개최 불가 의사를 전달하였다. 가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단 알제리 이집트 다음 1개국은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다음 3개국은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서 협상되었던 국가이다. 가봉 앙골라 적도 기니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적도 기니에서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의 개최 도시와 경기장은 다음과 같다. 바타 - 데 바타 경기장 (수용인원: 35,700) 말라보 -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수용인원: 15,250) 몽고모 - 데 몽고모 경기장 (수용인원: 10,000) 에베비인 -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수용인원: 35,700) 예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입니다. 본선 진출 팀[편집] 팀 예선 결과 본선 진출 결정일 과거 본선 기록 적도 기니 개최국 2014년 11월 14일 1011회 (2012) 남아프리카 공화국 A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098회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3) 알제리 B조 1위 2014년 10월 15일 11515회 (1968, 1980, 1982, 1984, 1986, 1988, 1990, 1992, 1996, 1998, 2000, 2002, 2004, 2010, 2013) 가봉 C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055회 (1994, 1996, 2000, 2010, 2012) 카메룬 D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1616회 (1970, 1972, 1982, 1984, 1986, 1988, 1990, 1992,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가나 E조 1위 2014년 11월 19일 11919회 (1963, 1965, 1968, 1970, 1987, 1980, 1982, 1984,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카보베르데 F조 1위 2014년 10월 15일 1011회 (2013) 튀니지 G조 1위 2014년 11월 14일 11616회 (1962, 1963, 1965, 1978, 198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2012, 2013) 콩고 공화국 A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066회 (1968, 1972, 1974, 1978, 1992, 2000) 말리 B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088회 (1972, 1994, 2002, 2004, 2008, 2010, 2012, 2013) 부르키나파소 C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099회 (1978, 1996, 1998, 2000, 2002, 2004, 2010, 2012, 2013) 코트디부아르 D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2020회 (1965, 1968, 1970, 1974, 1980, 1984, 1986, 1988,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기니 E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1010회 (1970, 1974, 1976, 1980, 1994, 1998, 2004, 2006, 2008, 2012) 잠비아 F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1616회 (1974, 1978, 1982, 1986,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세네갈 G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1212회 (1965, 1968, 1986, 1990, 1992, 1994, 2000, 2002, 2004, 2006, 2008, 2012) 콩고 민주 공화국 D조 3위 2014년 11월 19일 11616회 (1965, 1968, 1970, 1972, 1974, 1976, 1988,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13) 굵은 글씨는 우승한 대회를 의미한다. 시드 배정[편집] 이번 시드 배정은 2013년 대회와는 다르게 지난 3개 대회의 전적, 2012년 예선(0.5배의 가중치), 2013년 예선, 2015년 예선(2배의 가중치),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의 점수를 합산하여 시드를 배정했다.[3] 그 결과, 15년 만에 본선에 진출한 콩고 공화국은 최하위 시드를 배정받았다. 이 기준에 근거한 시드 배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시드 1 시드 2 시드 3 시드 4 적도 기니 (개최국, A조 배정) 가나 (48점) 코트디부아르 (44점) 잠비아 (41점) 부르키나파소 (40점) 말리 (38점) 튀니지 (32.5점) 알제리 (28점) 카보베르데 (26.5점) 남아프리카 공화국 (23.5점) 카메룬 (23.5점) 가봉 (22점) 기니 (19점) 세네갈 (19점) 콩고 민주 공화국 (18점) 콩고 공화국 (13점) 조 추첨은 2014년 12월 3일, 적도 기니 말라보에서 열렸다. 조 추첨 결과[편집] 조 1시드 2시드 3시드 4시드 A 적도 기니 부르키나파소 가봉 콩고 공화국 B 잠비아 튀니지 카보베르데 콩고 민주 공화국 C 가나 알제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네갈 D 코트디부아르 말리 카메룬 기니 선수 명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선수 명단입니다. 조별 리그[편집] 모든 경기는 현지 시간(UTC+01)을 따름. A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콩고 공화국 3 2 1 0 4 2 +2 7 적도 기니 3 1 2 0 3 1 +2 5 가봉 3 1 0 2 2 3 -1 3 부르키나파소 3 0 1 2 1 4 -3 1 2015년 1월 17일 17:00 적도 기니 1 : 1 콩고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0,245 심판: 바카리 가사마 은수에 16' 리포트 비푸마 87' 2015년 1월 17일 20:00 부르키나파소 0 : 2 가봉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0,245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리포트 오바메양 19' 에부나 72' 2015년 1월 21일 17:00 적도 기니 0 : 0 부르키나파소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9,867 심판: 네앙 알리움 리포트 2015년 1월 21일 20:00 가봉 0 : 1 콩고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4,782 심판: 빅터 고메스 리포트 오니앤구에 48' 2015년 1월 25일 19:00 가봉 0 : 2 적도 기니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9.230 심판: 누망디에즈 두에 리포트 발보아 55' (페널티골) 이반 86' 2015년 1월 25일 19:00 콩고 공화국 2 : 1 부르키나파소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945 심판: 조지프 램프티 비푸마 51' 온다마 87' 리포트 반체 86' B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튀니지 3 1 2 0 4 3 +1 5 콩고 민주 공화국 3 0 3 0 2 2 0 3 카보베르데 3 0 3 0 1 1 0 3 잠비아 3 0 2 1 2 3 -1 2 2015년 1월 18일 17:00 잠비아 1 : 1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319 심판: 게하드 그리샤 싱굴루마 2' 리포트 볼라시 65' 2015년 1월 18일 20:00 튀니지 1 : 1 카보베르데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479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망세 70' 리포트 헬돈 78' (페널티골) 2015년 1월 22일 17:00 잠비아 1 : 2 튀니지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8,000 심판: 아부바카 방구라 마유카 60' 리포트 아카치 70' 치하우이 89' 2015년 1월 22일 20:00 카보베르데 0 : 0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680 심판: 말랑 디에히오 리포트 2015년 1월 26일 19:00 카보베르데 0 : 0 잠비아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950 심판: 네앙 알리움 리포트 2015년 1월 26일 19:00 콩고 민주 공화국 1 : 1 튀니지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11.463 심판: 바카리 가사마 보킬라 66' 리포트 아카치 31' C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가나 3 2 0 1 4 3 +1 6 알제리 3 2 0 1 5 2 +3 6 세네갈 3 1 1 1 3 4 -1 4 남아프리카 공화국 3 0 1 2 3 6 -3 1 가나와 알제리는 승점이 동률을 이루어 승자승 원칙에 따른 동률 팀간 전적에 따라 가나가 1위, 알제리가 2위가 되었다. (가나 1 : 0 알제리) 2015년 1월 19일 17:00 가나 1 : 2 세네갈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569 심판: 베르나르 카미유 아유 14' (페널티골) 리포트 디우프 58' 소우 90+3' 2015년 1월 19일 20:00 알제리 3 : 1 남아프리카 공화국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2,788 심판: 누망디에즈 두에 훌라짜요 67' (자책골) 굴람 72' 슬리마니 83' 리포트 팔라 50' 2015년 1월 23일 17:00 가나 1 : 0 알제리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2,387 심판: 코만 쿨리발리 잔 90+2' 리포트 2015년 1월 23일 20:00 남아프리카 공화국 1 : 1 세네갈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674 심판: 알리 렘가이프리 마니사 47' 리포트 음보지 60' 2015년 1월 27일 19:00 남아프리카 공화국 1 : 2 가나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670 심판: 하마다 엘 무사 남피안드라자 마상고 17' 리포트 보예 73' 아유 83' 2015년 1월 27일 19:00 세네갈 0 : 2 알제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549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리포트 마레즈 11' 벤탈렙 82' D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코트디부아르 3 1 2 0 3 2 +1 5 기니 3 0 3 0 3 3 0 3 말리 3 0 3 0 3 3 0 3 카메룬 3 0 2 1 2 3 -1 2 기니와 말리는 승점을 비롯하여 상대 전적에 따른 골 득실, 상대 전적에 따른 득점, 전체 골 득실, 전체 득점이 모두 동률을 이루어 추첨으로 8강 진출이 결정된다. 추첨 결과, 기니가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2015년 1월 20일 17:00 코트디부아르 1 : 1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875 심판: 메흐디 아비드-차레프 둠비아 72' 리포트 야타라 36' 2015년 1월 20일 20:00 말리 1 : 1 카메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심판: 재니 시카즈웨 야타바레 71' 리포트 오용고 83' 2015년 1월 24일 17:00 코트디부아르 1 : 1 말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890 심판: 보샤이브 엘 아라치 그라델 85' 리포트 사코 7' 2015년 1월 24일 20:00 카메룬 1 : 1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000 심판: 테세마 밤라크 무칸조 13' 리포트 트라오레 42' 2015년 1월 28일 19:00 카메룬 0 : 1 코트디부아르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230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리포트 그라델 35' 2015년 1월 28일 19:00 기니 1 : 1 말리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470 심판: 메드 코르디 콘스탄트 15' (페널티골) 리포트 마이가 47'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1월 31일 - 바타 콩고 공화국 2 2월 4일 - 바타 콩고 민주 공화국 4 콩고 민주 공화국 1 2월 1일 - 말라보 코트디부아르 3 코트디부아르 3 2월 8일 - 바타 알제리 1 코트디부아르 (PSO) 0(9) 2월 1일 - 말라보 가나 0(8) 가나 3 2월 5일 - 말라보 기니 0 가나 3 3·4위전 1월 31일 - 바타 적도 기니 0 튀니지 1 콩고 민주 공화국 (PSO) 0(4) 적도 기니 (AET) 2 적도 기니 0(2) 2월 7일 - 말라보 8강전[편집] 2015년 1월 31일 17:00 콩고 공화국 2 : 4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1,670 심판: 베르나르 카미유 도레 55' 비푸마 62' 리포트 음보카니 65', 90+1' 보킬라 75' 킴와키 81' 2015년 1월 31일 20:30 튀니지 1 : 2 (연장전) 적도 기니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1,000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아카치 70' 리포트 발보아 90+2' (페널티골), 102' 2015년 2월 1일 17:00 가나 3 : 0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500 심판: 재니 시카즈웨 아츠 4', 61' 아피아 44' 리포트 2015년 2월 1일 20:30 코트디부아르 3 : 1 알제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000 심판: 바카리 가사마 보니 26', 68' 제르비뉴 90+4' 리포트 수다니 51' 준결승전[편집] 2015년 2월 4일 20:00 콩고 민주 공화국 1 : 3 코트디부아르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0,000 심판: 네앙 알리움 음보카니 24' (페널티골) 리포트 투레 21' 제르비뉴 41' 카논 68' 2015년 2월 5일 20:00 가나 3 : 0 적도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250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아유 42' (페널티골) 무바라크 45+1' 아유 75' 리포트 3·4위전[편집] 2015년 2월 7일 17:00 콩고 민주 공화국 0 : 0 (연장전) 적도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심판: 게하드 그리샤 리포트 승부차기 마브와티 마비디 망우루 몽공구 4 : 2 발보아 파비아니 주브날 엘옹 결승전[편집] 2015년 2월 8일 20:00 코트디부아르 0 : 0 (연장전) 가나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8,000 심판: 바카리 가사마 리포트 승부차기 보니 가지 오리에 둠비아 투레 칼루 투레 카논 베일리 디에 바리 9 : 8 무바라크 아유 아콰 아체암퐁 아유 멘사 아제망바두 애풀 라흐만 보예 라작 우승국[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 코트디부아르 2번째 우승 수상[편집] 최고 득점자 최우수 선수 최고의 골 선수 페어플레이 페어플레이 앙드레 아유 크리스티안 아츠 크리스티안 아츠 vs 기니 전 크웨시 아피아 콩고 민주 공화국 올스타 팀[편집]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실뱅 지보우오 로버트 키디아바 세르주 오리에 해리슨 애풀 콜로 투레 앙드레 아유 야야 투레 막스 그라델 야니크 볼라시 제르비뉴 크리스티안 아츠 윌프리드 보니 최종 순위[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순위 우승 준우승 3위 4위 8강 조별 리그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코트디부아르 6 3 3 0 9 4 +5 12 2 가나 6 4 1 1 10 3 +7 13 3 콩고 민주 공화국 6 1 4 1 7 7 0 7 4 적도 기니 6 2 3 1 5 5 0 9 5 콩고 공화국 4 2 1 1 6 6 0 7 6 알제리 4 2 0 2 6 5 +1 6 7 튀니지 4 1 2 1 5 5 0 5 8 기니 4 0 3 1 3 6 -3 3 9 세네갈 3 1 1 1 3 4 +1 4 10 말리 3 0 3 0 3 3 0 3 11 카보베르데 3 0 3 0 1 1 0 3 12 가봉 3 1 0 2 2 3 -1 3 13 카메룬 3 0 2 1 2 3 -1 2 13 잠비아 3 0 2 1 2 3 -1 2 15 남아프리카 공화국 3 0 1 2 3 6 -3 1 16 부르키나파소 3 0 1 2 1 4 -3 1 우승에서 4위까지는 준결승, 3, 4위전 및 결승전 결과로 순위를 가린다. 이전 단계에서 탈락한 팀들의 순위는 조별 리그와 동일하게 승점-골득실차-다득점순으로 가리며 모두 같을 경우 공동 순위로 한다. 8강에서 탈락한 팀은 최고 5위에서 최하 8위까지이다.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팀은 최고 9위에서 최하 16위까지이다. 토너먼트에서 승부차기로 경기가 가려진 경우에는 FIFA의 규정에 따라 무승부로 기재한다. 득점 선수[편집] 3골 티에비 비푸마 디외메르시 음보카니 하비에르 발보아 앙드레 아유 아흐메드 아카치 2골 예레미 보킬라 크리스티안 아츠 윌프리드 보니 제르비뉴 막스 그라델 1골 나빌 벤탈렙 파우지 굴람 리야드 마레즈 이슬람 슬리마니 엘 아르비 힐렐 수다니 아리스티데 반체 벵자맹 무칸조 앙브루아즈 오용고 헬돈 라모스 페레보리 도레 파브리스 온다마 프린스 오니앤구에 야니크 볼라시 조엘 킴와키 에밀리오 은수에 이반 에듀 피에르에메리크 오바메양 말리크 에부나 크웨시 아피아 조르당 아유 존 보예 아사모아 잔 와카소 무바라크 케빈 콘스탄트 이브라히마 트라오레 모하메드 야타라 세이두 둠비아 윌프리드 카논 야야 투레 바카리 사코 모디보 마이가 삼부 야타바레 맘 비람 디우프 카라 음보지 무사 소우 오우파 마니사 만들라 마상고 투소 팔라 야시네 치하우이 모하메드 알리 망세 이매뉴얼 마유카 기븐 싱굴루마 자책골 툴라니 훌라짜요 (알제리 전) 각주[편집] ↑ 정성래 기자 (2014년 11월 14일). “적도기니, 모로코 대신해 아프리카네이션스컵 개최”. 스포탈코리아. 2014년 11월 14일에 확인함. ↑ “CAF Reaction on the Request of Morocco”. Confederation of African Football. 2014년 10월 11일. ↑ “2015 Africa Cup of Nations Draw” (PDF). Confederation of African Football. 2014년 12월 2일.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vdeh아프리카 네이션스컵본선 수단 1957년 아랍 연합 공화국 1959년 에티오피아 1962년 가나 1963년 튀니지 1965년 에티오피아 1968년 수단 1970년 카메룬 1972년 이집트 1974년 에티오피아 1976년 가나 1978년 나이지리아 1980년 리비아 1982년 코트디부아르 1984년 이집트 1986년 모로코 1988년 알제리 1990년 세네갈 1992년 튀니지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6년 부르키나파소 1998년 가나/나이지리아 2000년 말리 2002년 튀니지 2004년 이집트 2006년 가나 2008년 앙골라 2010년 가봉/적도 기니 201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2013년 적도 기니 2015년 가봉 2017년 이집트 2019년 카메룬 2021년 코트디부아르 2023년 기니 2025년 예선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결승전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선수 명단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1957년과 1959년 대회에는 예선이 없었고 1959년과 1976년 대회에는 우승국이 로빈 라운드 형식으로 정해졌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5년_아프리카_네이션스컵&oldid=23951769" 분류: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아프리카 네이션스컵2015년 축구2015년 적도 기니2015년 1월2015년 2월적도 기니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नेपाली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일 (화) 06: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대회 개요개최국 적도 기니개최 기간 1월 17일 ~ 2월 8일예선 참가국 47개국참가국 16개국경기장 4 (4개 도시) 최종 순위● 우승국 코트디부아르 (2번째 우승)● 준우승국 가나● 3위 콩고 민주 공화국● 4위 적도 기니통계총 경기수 32경기득점 총합 68골 (경기당 2.13골)최다 득점 선수 아흐메드 아카치 앙드레 아유 하비에르 발보아 티에비 비푸마 디외메르시 음보카니 (3골)최우수 선수 크리스티안 아츠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2013 2017 → v • d • e • h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영어: 2015 Africa Cup of Nations)은 2015년 1월 17일부터 2월 8일까지 적도 기니에서 개최된 대회인 30번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이다.[1] 이 대회는 당초 모로코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2014년 10월 모로코가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에 따른 우려로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 대회 개최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11월 2일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해 한 차례 논의를 거쳤다.[2]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이 대회의 개최를 2016년으로 연기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며 11월 8일까지 모로코 축구 협회에 2015년 개최 의사를 전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로코 축구 협회가 이에 응하지 않아 11월 11일에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모로코 축구 협회에 이 대회의 개최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출전 정지 징계를 내렸음을 통보하는 한편 모로코를 대신하여 이 대회를 개최할 국가를 선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1월 14일, 적도 기니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목차 1 개최를 희망했던 국가 1.1 대체 개최국으로 거론되었던 국가 2 개최 도시 및 경기장 3 예선 3.1 본선 진출 팀 4 시드 배정 4.1 조 추첨 결과 5 선수 명단 6 조별 리그 6.1 A조 6.2 B조 6.3 C조 6.4 D조 7 결선 토너먼트 7.1 8강전 7.2 준결승전 7.3 3·4위전 7.4 결승전 8 우승국 9 수상 9.1 올스타 팀 10 최종 순위 11 득점 선수 12 각주 개최를 희망했던 국가[편집] 보츠와나 카메룬 콩고 민주 공화국 기니 모로코 남아프리카 공화국 잠비아 짐바브웨 여기에서 모로코가 개최 국가로 결정되었으나 모로코가 에볼라 유행을 이유로 개최를 연기하기를 원하자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모로코의 개최권을 박탈하고 다른 국가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대체 개최국으로 거론되었던 국가[편집]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몇 개 회원국을 선정하여 모로코를 대신하여 이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조사하였다. 그 결과 다음 5개국은 개최 불가 의사를 전달하였다. 가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단 알제리 이집트 다음 1개국은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다음 3개국은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서 협상되었던 국가이다. 가봉 앙골라 적도 기니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적도 기니에서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의 개최 도시와 경기장은 다음과 같다. 바타 - 데 바타 경기장 (수용인원: 35,700) 말라보 -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수용인원: 15,250) 몽고모 - 데 몽고모 경기장 (수용인원: 10,000) 에베비인 -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수용인원: 35,700) 예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입니다. 본선 진출 팀[편집] 팀 예선 결과 본선 진출 결정일 과거 본선 기록 적도 기니 개최국 2014년 11월 14일 1011회 (2012) 남아프리카 공화국 A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098회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3) 알제리 B조 1위 2014년 10월 15일 11515회 (1968, 1980, 1982, 1984, 1986, 1988, 1990, 1992, 1996, 1998, 2000, 2002, 2004, 2010, 2013) 가봉 C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055회 (1994, 1996, 2000, 2010, 2012) 카메룬 D조 1위 2014년 11월 15일 11616회 (1970, 1972, 1982, 1984, 1986, 1988, 1990, 1992,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가나 E조 1위 2014년 11월 19일 11919회 (1963, 1965, 1968, 1970, 1987, 1980, 1982, 1984,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카보베르데 F조 1위 2014년 10월 15일 1011회 (2013) 튀니지 G조 1위 2014년 11월 14일 11616회 (1962, 1963, 1965, 1978, 198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08, 2010, 2012, 2013) 콩고 공화국 A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066회 (1968, 1972, 1974, 1978, 1992, 2000) 말리 B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088회 (1972, 1994, 2002, 2004, 2008, 2010, 2012, 2013) 부르키나파소 C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099회 (1978, 1996, 1998, 2000, 2002, 2004, 2010, 2012, 2013) 코트디부아르 D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2020회 (1965, 1968, 1970, 1974, 1980, 1984, 1986, 1988,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기니 E조 2위 2014년 11월 19일 11010회 (1970, 1974, 1976, 1980, 1994, 1998, 2004, 2006, 2008, 2012) 잠비아 F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1616회 (1974, 1978, 1982, 1986, 1990,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6, 2008, 2010, 2012, 2013) 세네갈 G조 2위 2014년 11월 15일 11212회 (1965, 1968, 1986, 1990, 1992, 1994, 2000, 2002, 2004, 2006, 2008, 2012) 콩고 민주 공화국 D조 3위 2014년 11월 19일 11616회 (1965, 1968, 1970, 1972, 1974, 1976, 1988, 1992, 1994, 1996, 1998, 2000, 2002, 2004, 2006, 2013) 굵은 글씨는 우승한 대회를 의미한다. 시드 배정[편집] 이번 시드 배정은 2013년 대회와는 다르게 지난 3개 대회의 전적, 2012년 예선(0.5배의 가중치), 2013년 예선, 2015년 예선(2배의 가중치),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의 점수를 합산하여 시드를 배정했다.[3] 그 결과, 15년 만에 본선에 진출한 콩고 공화국은 최하위 시드를 배정받았다. 이 기준에 근거한 시드 배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시드 1 시드 2 시드 3 시드 4 적도 기니 (개최국, A조 배정) 가나 (48점) 코트디부아르 (44점) 잠비아 (41점) 부르키나파소 (40점) 말리 (38점) 튀니지 (32.5점) 알제리 (28점) 카보베르데 (26.5점) 남아프리카 공화국 (23.5점) 카메룬 (23.5점) 가봉 (22점) 기니 (19점) 세네갈 (19점) 콩고 민주 공화국 (18점) 콩고 공화국 (13점) 조 추첨은 2014년 12월 3일, 적도 기니 말라보에서 열렸다. 조 추첨 결과[편집] 조 1시드 2시드 3시드 4시드 A 적도 기니 부르키나파소 가봉 콩고 공화국 B 잠비아 튀니지 카보베르데 콩고 민주 공화국 C 가나 알제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네갈 D 코트디부아르 말리 카메룬 기니 선수 명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선수 명단입니다. 조별 리그[편집] 모든 경기는 현지 시간(UTC+01)을 따름. A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콩고 공화국 3 2 1 0 4 2 +2 7 적도 기니 3 1 2 0 3 1 +2 5 가봉 3 1 0 2 2 3 -1 3 부르키나파소 3 0 1 2 1 4 -3 1 2015년 1월 17일 17:00 적도 기니 1 : 1 콩고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0,245 심판: 바카리 가사마 은수에 16' 리포트 비푸마 87' 2015년 1월 17일 20:00 부르키나파소 0 : 2 가봉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0,245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리포트 오바메양 19' 에부나 72' 2015년 1월 21일 17:00 적도 기니 0 : 0 부르키나파소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9,867 심판: 네앙 알리움 리포트 2015년 1월 21일 20:00 가봉 0 : 1 콩고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4,782 심판: 빅터 고메스 리포트 오니앤구에 48' 2015년 1월 25일 19:00 가봉 0 : 2 적도 기니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9.230 심판: 누망디에즈 두에 리포트 발보아 55' (페널티골) 이반 86' 2015년 1월 25일 19:00 콩고 공화국 2 : 1 부르키나파소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945 심판: 조지프 램프티 비푸마 51' 온다마 87' 리포트 반체 86' B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튀니지 3 1 2 0 4 3 +1 5 콩고 민주 공화국 3 0 3 0 2 2 0 3 카보베르데 3 0 3 0 1 1 0 3 잠비아 3 0 2 1 2 3 -1 2 2015년 1월 18일 17:00 잠비아 1 : 1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319 심판: 게하드 그리샤 싱굴루마 2' 리포트 볼라시 65' 2015년 1월 18일 20:00 튀니지 1 : 1 카보베르데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479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망세 70' 리포트 헬돈 78' (페널티골) 2015년 1월 22일 17:00 잠비아 1 : 2 튀니지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8,000 심판: 아부바카 방구라 마유카 60' 리포트 아카치 70' 치하우이 89' 2015년 1월 22일 20:00 카보베르데 0 : 0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680 심판: 말랑 디에히오 리포트 2015년 1월 26일 19:00 카보베르데 0 : 0 잠비아 데 누에보 에베비인 경기장, 에베비인 관중수: 7.950 심판: 네앙 알리움 리포트 2015년 1월 26일 19:00 콩고 민주 공화국 1 : 1 튀니지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11.463 심판: 바카리 가사마 보킬라 66' 리포트 아카치 31' C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가나 3 2 0 1 4 3 +1 6 알제리 3 2 0 1 5 2 +3 6 세네갈 3 1 1 1 3 4 -1 4 남아프리카 공화국 3 0 1 2 3 6 -3 1 가나와 알제리는 승점이 동률을 이루어 승자승 원칙에 따른 동률 팀간 전적에 따라 가나가 1위, 알제리가 2위가 되었다. (가나 1 : 0 알제리) 2015년 1월 19일 17:00 가나 1 : 2 세네갈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569 심판: 베르나르 카미유 아유 14' (페널티골) 리포트 디우프 58' 소우 90+3' 2015년 1월 19일 20:00 알제리 3 : 1 남아프리카 공화국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2,788 심판: 누망디에즈 두에 훌라짜요 67' (자책골) 굴람 72' 슬리마니 83' 리포트 팔라 50' 2015년 1월 23일 17:00 가나 1 : 0 알제리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2,387 심판: 코만 쿨리발리 잔 90+2' 리포트 2015년 1월 23일 20:00 남아프리카 공화국 1 : 1 세네갈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674 심판: 알리 렘가이프리 마니사 47' 리포트 음보지 60' 2015년 1월 27일 19:00 남아프리카 공화국 1 : 2 가나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670 심판: 하마다 엘 무사 남피안드라자 마상고 17' 리포트 보예 73' 아유 83' 2015년 1월 27일 19:00 세네갈 0 : 2 알제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549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리포트 마레즈 11' 벤탈렙 82' D조[편집]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코트디부아르 3 1 2 0 3 2 +1 5 기니 3 0 3 0 3 3 0 3 말리 3 0 3 0 3 3 0 3 카메룬 3 0 2 1 2 3 -1 2 기니와 말리는 승점을 비롯하여 상대 전적에 따른 골 득실, 상대 전적에 따른 득점, 전체 골 득실, 전체 득점이 모두 동률을 이루어 추첨으로 8강 진출이 결정된다. 추첨 결과, 기니가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2015년 1월 20일 17:00 코트디부아르 1 : 1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875 심판: 메흐디 아비드-차레프 둠비아 72' 리포트 야타라 36' 2015년 1월 20일 20:00 말리 1 : 1 카메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심판: 재니 시카즈웨 야타바레 71' 리포트 오용고 83' 2015년 1월 24일 17:00 코트디부아르 1 : 1 말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890 심판: 보샤이브 엘 아라치 그라델 85' 리포트 사코 7' 2015년 1월 24일 20:00 카메룬 1 : 1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000 심판: 테세마 밤라크 무칸조 13' 리포트 트라오레 42' 2015년 1월 28일 19:00 카메룬 0 : 1 코트디부아르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230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리포트 그라델 35' 2015년 1월 28일 19:00 기니 1 : 1 말리 데 몽고모 경기장, 몽고모 관중수: 13,470 심판: 메드 코르디 콘스탄트 15' (페널티골) 리포트 마이가 47'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1월 31일 - 바타 콩고 공화국 2 2월 4일 - 바타 콩고 민주 공화국 4 콩고 민주 공화국 1 2월 1일 - 말라보 코트디부아르 3 코트디부아르 3 2월 8일 - 바타 알제리 1 코트디부아르 (PSO) 0(9) 2월 1일 - 말라보 가나 0(8) 가나 3 2월 5일 - 말라보 기니 0 가나 3 3·4위전 1월 31일 - 바타 적도 기니 0 튀니지 1 콩고 민주 공화국 (PSO) 0(4) 적도 기니 (AET) 2 적도 기니 0(2) 2월 7일 - 말라보 8강전[편집] 2015년 1월 31일 17:00 콩고 공화국 2 : 4 콩고 민주 공화국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1,670 심판: 베르나르 카미유 도레 55' 비푸마 62' 리포트 음보카니 65', 90+1' 보킬라 75' 킴와키 81' 2015년 1월 31일 20:30 튀니지 1 : 2 (연장전) 적도 기니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41,000 심판: 라진드라파르사드 시추른 아카치 70' 리포트 발보아 90+2' (페널티골), 102' 2015년 2월 1일 17:00 가나 3 : 0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4,500 심판: 재니 시카즈웨 아츠 4', 61' 아피아 44' 리포트 2015년 2월 1일 20:30 코트디부아르 3 : 1 알제리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000 심판: 바카리 가사마 보니 26', 68' 제르비뉴 90+4' 리포트 수다니 51' 준결승전[편집] 2015년 2월 4일 20:00 콩고 민주 공화국 1 : 3 코트디부아르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0,000 심판: 네앙 알리움 음보카니 24' (페널티골) 리포트 투레 21' 제르비뉴 41' 카논 68' 2015년 2월 5일 20:00 가나 3 : 0 적도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관중수: 15,250 심판: 에릭 오투고 카스타네 아유 42' (페널티골) 무바라크 45+1' 아유 75' 리포트 3·4위전[편집] 2015년 2월 7일 17:00 콩고 민주 공화국 0 : 0 (연장전) 적도 기니 데 누에보 말라보 경기장, 말라보 심판: 게하드 그리샤 리포트 승부차기 마브와티 마비디 망우루 몽공구 4 : 2 발보아 파비아니 주브날 엘옹 결승전[편집] 2015년 2월 8일 20:00 코트디부아르 0 : 0 (연장전) 가나 데 바타 경기장, 바타 관중수: 38,000 심판: 바카리 가사마 리포트 승부차기 보니 가지 오리에 둠비아 투레 칼루 투레 카논 베일리 디에 바리 9 : 8 무바라크 아유 아콰 아체암퐁 아유 멘사 아제망바두 애풀 라흐만 보예 라작 우승국[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 코트디부아르 2번째 우승 수상[편집] 최고 득점자 최우수 선수 최고의 골 선수 페어플레이 페어플레이 앙드레 아유 크리스티안 아츠 크리스티안 아츠 vs 기니 전 크웨시 아피아 콩고 민주 공화국 올스타 팀[편집]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실뱅 지보우오 로버트 키디아바 세르주 오리에 해리슨 애풀 콜로 투레 앙드레 아유 야야 투레 막스 그라델 야니크 볼라시 제르비뉴 크리스티안 아츠 윌프리드 보니 최종 순위[편집]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순위 우승 준우승 3위 4위 8강 조별 리그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코트디부아르 6 3 3 0 9 4 +5 12 2 가나 6 4 1 1 10 3 +7 13 3 콩고 민주 공화국 6 1 4 1 7 7 0 7 4 적도 기니 6 2 3 1 5 5 0 9 5 콩고 공화국 4 2 1 1 6 6 0 7 6 알제리 4 2 0 2 6 5 +1 6 7 튀니지 4 1 2 1 5 5 0 5 8 기니 4 0 3 1 3 6 -3 3 9 세네갈 3 1 1 1 3 4 +1 4 10 말리 3 0 3 0 3 3 0 3 11 카보베르데 3 0 3 0 1 1 0 3 12 가봉 3 1 0 2 2 3 -1 3 13 카메룬 3 0 2 1 2 3 -1 2 13 잠비아 3 0 2 1 2 3 -1 2 15 남아프리카 공화국 3 0 1 2 3 6 -3 1 16 부르키나파소 3 0 1 2 1 4 -3 1 우승에서 4위까지는 준결승, 3, 4위전 및 결승전 결과로 순위를 가린다. 이전 단계에서 탈락한 팀들의 순위는 조별 리그와 동일하게 승점-골득실차-다득점순으로 가리며 모두 같을 경우 공동 순위로 한다. 8강에서 탈락한 팀은 최고 5위에서 최하 8위까지이다.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팀은 최고 9위에서 최하 16위까지이다. 토너먼트에서 승부차기로 경기가 가려진 경우에는 FIFA의 규정에 따라 무승부로 기재한다. 득점 선수[편집] 3골 티에비 비푸마 디외메르시 음보카니 하비에르 발보아 앙드레 아유 아흐메드 아카치 2골 예레미 보킬라 크리스티안 아츠 윌프리드 보니 제르비뉴 막스 그라델 1골 나빌 벤탈렙 파우지 굴람 리야드 마레즈 이슬람 슬리마니 엘 아르비 힐렐 수다니 아리스티데 반체 벵자맹 무칸조 앙브루아즈 오용고 헬돈 라모스 페레보리 도레 파브리스 온다마 프린스 오니앤구에 야니크 볼라시 조엘 킴와키 에밀리오 은수에 이반 에듀 피에르에메리크 오바메양 말리크 에부나 크웨시 아피아 조르당 아유 존 보예 아사모아 잔 와카소 무바라크 케빈 콘스탄트 이브라히마 트라오레 모하메드 야타라 세이두 둠비아 윌프리드 카논 야야 투레 바카리 사코 모디보 마이가 삼부 야타바레 맘 비람 디우프 카라 음보지 무사 소우 오우파 마니사 만들라 마상고 투소 팔라 야시네 치하우이 모하메드 알리 망세 이매뉴얼 마유카 기븐 싱굴루마 자책골 툴라니 훌라짜요 (알제리 전) 각주[편집] ↑ 정성래 기자 (2014년 11월 14일). “적도기니, 모로코 대신해 아프리카네이션스컵 개최”. 스포탈코리아. 2014년 11월 14일에 확인함. ↑ “CAF Reaction on the Request of Morocco”. Confederation of African Football. 2014년 10월 11일. ↑ “2015 Africa Cup of Nations Draw” (PDF). Confederation of African Football. 2014년 12월 2일.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vdeh아프리카 네이션스컵본선 수단 1957년 아랍 연합 공화국 1959년 에티오피아 1962년 가나 1963년 튀니지 1965년 에티오피아 1968년 수단 1970년 카메룬 1972년 이집트 1974년 에티오피아 1976년 가나 1978년 나이지리아 1980년 리비아 1982년 코트디부아르 1984년 이집트 1986년 모로코 1988년 알제리 1990년 세네갈 1992년 튀니지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6년 부르키나파소 1998년 가나/나이지리아 2000년 말리 2002년 튀니지 2004년 이집트 2006년 가나 2008년 앙골라 2010년 가봉/적도 기니 201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2013년 적도 기니 2015년 가봉 2017년 이집트 2019년 카메룬 2021년 코트디부아르 2023년 기니 2025년 예선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결승전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선수 명단 1957년 1959년 1962년 1963년 1965년 1968년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3년 2015년 2017년 2019년 1957년과 1959년 대회에는 예선이 없었고 1959년과 1976년 대회에는 우승국이 로빈 라운드 형식으로 정해졌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5년_아프리카_네이션스컵&oldid=23951769" 분류: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아프리카 네이션스컵2015년 축구2015년 적도 기니2015년 1월2015년 2월적도 기니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नेपाली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일 (화) 06: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윤봉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윤봉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배우에 대해서는 윤봉길 (배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윤봉길尹奉吉 왼 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윤봉길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수상 예하 행정특보비서관 직무대리 임기 1931년 12월 6일 ~ 1931년 12월 11일 주석 이동녕 (대한 임정 주석) 총리 김구 (대한 임정 국무총리) 전임 강계대 후임 이봉창 신상정보 출생일 1908년 6월 21일(1908-06-21) 출생지 대한제국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 (現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사망일 1932년 12월 19일 (24세) 사망지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사형(총살형) 집행[1] 본관 파평(坡平) 학력 1991년 충청남도 예산 덕산초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추서 경력 前 한국독립당 초급청년행정위원 前 한국독립당 민족행정특보위원 前 한인애국단 단원 정당 한인애국단 부모 윤황(부), 김원상(모) 형제 윤성의(친아우) 윤영의(친아우) 윤영석(친아우) 배우자 배용순 자녀 윤종(장남), 윤담(차남) 친인척 윤용(조카) 윤주(조카) 윤홍(조카) 윤주경(친손녀) 별명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아호는 매헌(梅軒)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서훈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991년 충청남도 예산 덕산초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추서 앙(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 겸 저술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덕산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2]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2]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2]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목차 1 농촌 계몽 활동 2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3 최후 4 유언 5 사후 5.1 기념사업 5.2 기념관 6 평가 7 논란 7.1 당시 사진의 조작 논란 7.2 조작으로 밝혀짐 8 저서 9 가족 관계 10 유품 11 함께 보기 12 윤봉길을 연기한 배우 12.1 연극 12.2 TV 드라마 13 각주 14 외부 링크 농촌 계몽 활동[편집]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2]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입니다. 김구와 윤봉길 일본 가나자와에 있는 윤봉길 선생 위령비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3], 협의 끝에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4]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결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불발하였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하자 일본 헌병들이 윤봉길을 덮쳐 구타하였다. 윤봉길은 구타를 당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5]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3],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최후[편집] 처형 직전의 윤봉길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6]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 편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2]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2]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되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놓은 것으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복수였다.[1] 유언[편집]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순국 73주기를 맞아 유언 친필 사본을 공개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홍커우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7]"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사후[편집] 효창공원 삼의사의 묘 서울시민의 숲 매헌 기념관에 서있는 그의 동상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가나자와(金沢)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기념사업[편집] 노신 공원에 있는 기념비(2008년 )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되었다.[8] 2012년 그의 일본 순국 기념비에 모욕적인 문구가 담긴 말뚝을 박는 사건이 벌어져 논란이 되었다.[9] 기념관[편집] 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현재 양재시민의숲역의 부역명도 그의 호를 딴 '매헌'이다. 1963년 윤봉길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고,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 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윤봉길이 4세 때부터 망명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 동상이 있다. 생가 지역에는 도중도,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다.[10]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의 장소였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 평가[편집]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 제국에 대해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던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6]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1]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6] 반면, 박헌영과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고,[12][13] 이승만은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14] 논란[편집] 1932년 5월 1일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조작사진 최초 사진[15] 당시 사진의 조작 논란[편집] 1999년, 강효백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현재 널리 알려진 훙커우 의거 이후 체포사진(오른쪽 사진)이 가짜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오른쪽 사진과 표제 사진의 인물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것은 물론, 윤봉길은 중절모를 쓴 적이 없으며, 트렌치 코트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관해 대한민국 정부는 오랫동안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0월 8일,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의 주장에 근거하여 이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확실하다고 답변하였으며, 강효백 교수는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하는 한편, SBS스페셜에서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16] 윤봉길의 유족들 중 6촌 동생인 윤명의는 "윤 의사가 생전에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봉길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과 동생 윤남의는 1976년에 위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이 맞다고 증언한 바 있다.[17] 조작으로 밝혀짐[편집]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 방송에서 윤봉길의 사진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상해 총영사관의 외무성 경찰사에서는 "윤봉길은 두들겨 맞고 기절해 군인과 헌병의 힘에 의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 두 장 또한 컴퓨터 그래픽 판독 결과 각각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18] 저서[편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농민독본》3권 《기사년 일기》(己巳年日記) 가족 관계[편집] 8.15 광복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윤봉길의 가족. 왼쪽부터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백부: 윤경(尹坰) 아버지: 윤황 (尹墴~1950년) 어머니: 김원상 (~1952년) 동생: 윤남의(尹南儀, 1915년 12월 28일 ~ 2003년 1월 15일) 동생: 윤성의(尹成儀) 동생: 윤영의(尹英儀) 동생: 윤준의(尹俊義) 동생: 윤순례(尹順禮) 동생: 윤임의(尹任義) 부인: 배용순(1907년 8월 15일 ~ 1988년 7월 10일) 장남: 윤종(尹淙, 1927년 ~ 1984년) 차남: 윤담(尹淡, 2살때 사망 장녀: 윤안순(尹安順) 1929년 사망 자부: 김옥남(1936~) 손녀: 윤주경(尹柱敬, 1959년 5월 3일 ~ ) 손자: 윤주웅(尹柱雄, 1974~) 유품[편집] 윤봉길 의사 유품 함께 보기[편집] 배용순 김구 이봉창 안중근 백정기 한인애국단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윤봉길의사 기념관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윤봉길을 연기한 배우[편집] 연극[편집] 은희진 - 1986년 (윤봉길 의사) 연극 TV 드라마[편집] 김상중 - 1992년 (님이여) MBC 드라마 각주[편집] ↑ 가 나 재일민단 "윤봉길 의사 순국 골짜기 확인", 연합뉴스, 2010년 12월 19일 ↑ 가 나 다 라 마 바 Untitled Document ↑ 가 나 donga.com[뉴스]-“숭고한 정신, 모두에게 교훈”…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75주년 ↑ 윤의사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물통 폭탄이 저격용, 도시락 폭탄이 자결용이었다고 한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날이 오면》,한길사, 2004년, 190쪽 ↑ 가 나 다 뉴스한국 - 대한독립 신호탄 된 4·29 상해의거 재구성 목숨 걸고 던진 ‘물통폭탄’이 나라 살리다 ↑ 백승찬기자 (1995년 12월 18일). “윤봉길의사 “아들아, 조선의 투사가 돼라””. 경향신문. 2010년 12월 20일에 확인함. ↑ Untitled Document ↑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에 또 말뚝 YTN 2012년 9월 27일 ↑ “예산 충의사”. 2010년 12월 20일에 확인함. ↑ 의열투쟁과 한국독립운동(한국민족운동사학회 | 국학자료원 | 2003.02.03) 40페이지 ↑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칼럼 : 한겨레21 ↑ 1932년 7월에 박헌영은 '상해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고 보았던 것이다. ↑ KBS 한국사傳 이승만 2부 ↑ “ 사건이 터졌을때, 다른 신문사들은 아직 행사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최초의 사진 1장을 찍은 뒤 공원 부근 지국장의 사택으로 가서 전화로 지국에 제1보를 보냈다. 그래서 그 후의 상황은 찍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어떤 사진가로부터 받은 사진을 냈다. - 황천 기자 ” ↑ "정권 바뀌었다고 가짜 사진이 진짜 사진 되나" , 미디어오늘, 2008년 10월 20일 ↑ "끝나지 않은 윤봉길 의사 사진 진위 논란", 오마이뉴스, 2008년 10월 31일 ↑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논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 아츠뉴스 2011년 3월 1일 외부 링크[편집] (사) 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 “매헌의 헌신-염원 되새겨야” 윤봉길 의사 탄생 100주년 (동아일보) 2008-06-23자 윤봉길, 항일투쟁의 결정적 하루 역덕이슈 오늘 vdeh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이승만 이시영 제임스 밴 플리트 장제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응오딘지엠 아드난 멘데레스 허위 김좌진 오동진 조병세 안중근 윤봉길 이준 강우규 김구 안창호 신익희 김창숙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최익현 이강년 민영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S. 트루먼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프랑수아 톰발바예 다비드 다코 수루 미강 아피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레온 음바 아마두 아히조 하마니 디오리 조모 케냐타 무테사 2세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퉁쿠 압둘 라흐만 푸트라 알 하즈 타놈 키티카초른 쑹메이링 천궈푸 쑨원 천치메이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조만식 임병직 서재필 박정희 최규하 시리낏 끼띠야꼰 푸미폰 아둔야뎃 전두환 김규식 조소앙 유관순 vdeh1992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김상옥 2월 편강렬 3월 손병희 4월 윤봉길 5월 이상룡 6월 지청천 7월 이상재 8월 서일 9월 신규식 10월 이봉창 11월 이회영 12월 나석주 vdeh2019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유관순 김마리아 손병희 안창호 김규식·김순애 한용운 이동휘 김구 지청천 안중근 박은식 윤봉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윤봉길&oldid=24470543" 분류: 윤봉길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1908년 태어남1932년 죽음예산군 출신일제 강점기의 교사일제 강점기의 시인한국독립당 (1930년)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람일제 강점기의 저술가파평 윤씨장로교 독립운동가덕산초등학교 (충남) 동문한국의 사형된 사람총살형된 사람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Português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3일 (일) 17: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범 김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백범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백범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구金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10대 국무령 임기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부통령 이인성 전임: 홍진(제8대)후임: 이동녕(제11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18·19·20대 주석 임기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국가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제17대)후임: 이승만(제21대) 신상정보 국적 조선 (1876년 - 1897년)대한제국 (1897년 - 1910년)일제강점기 조선 (1910년 - 1919년)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 1948년)대한민국 (1948년 - 1949년) 출생일 1876년 8월 29일(1876-08-29) 출생지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現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대한민국 기준))(現 태탄군 지촌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준)) 사망일 1949년 6월 26일 (72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2층 거실에서 암살됨. 본관 안동 정당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배우자 최준례 종교 유교(성리학) → 동학 → 불교 → 개신교(감리회)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독립운동가 김구의 필체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1876년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1] 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2][3]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4],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5]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876 ~ 1949) 1.1.2 유년기 (1880 ~ 1888) 1.1.3 청소년기 (1888 ~ 1892) 1.2 청년기 1.2.1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 ~ 1895) 1.2.2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 1.2.3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 1.2.4 치하포 사건과 은신 생활 1.2.4.1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 (1896 ~ 1897) 1.2.4.2 개화와 죄수 교육 (1897 ~1899) 1.2.4.3 승려 활동 (1898 ~ 1899) 1.2.5 애국계몽운동과 수감 생활 1.2.5.1 애국계몽운동 (1900 ~ 1910) 1.2.5.2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 ~ 1919) 1.3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1.3.1 임정 수립 초기 1.3.1.1 임시의정원 의원과 경무국장 (1919) 1.3.1.2 의정원 의원 재선과 내무총장 시절 (1920 ~ 1921) 1.3.2 국무총리 대리 시절 1.3.3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1926~1929) 1.3.4 임정의 재정난 1.3.5 항일의거와 군사단체 조직 노력 1.3.5.1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24~1930) 1.3.5.1.1 친일파 제거와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 1.3.5.2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30~1932) 1.3.5.2.1 이봉창 의거와 이즈모호 폭파 미수 1.3.5.2.2 윤봉길 의거 1.3.5.2.3 조선 총독 암살 미수 1.3.5.2.4 만주철도 폭파미수 1.3.5.3 수배, 피신 생활 (1932~1933) 1.3.5.4 옥관빈 암살(1933) 1.3.5.5 광복군 조직 노력 (1933~1937) 1.3.6 안공근과 결별 1.3.7 중일 전쟁 중의 활동 (1937~1939) 1.3.8 임시정부 주석 재임 시 1.3.8.1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4) 1.3.8.2 주석 재선 (1944~1945) 1.3.9 귀국 직전 1.4 광복 이후 1.4.1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1.4.1.1 귀국 직후 1.4.1.2 정치 자금 조달 1.4.1.3 국내 정치 활동 준비기간 중 1.4.1.4 반탁 결의와 송진우와의 공방전 1.4.1.5 반탁운동 개시와 총파업 1.5 하지의 임정요인 추방 사태 1.5.1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 1.5.2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1.5.3 정치 활동 1.5.3.1 미소공위 반대 운동 (1946) 1.5.3.2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폭탄투척 1.5.3.3 이승만과의 경쟁 1.5.3.3.1 화교 무역 시도와 실패 1.5.3.4 임정법통과 임시정부의 재편성 (1947) 1.5.3.5 반탁, 임정 법통 운동 (1947) 1.5.3.6 우익 진영 단결 노력 1.5.4 이승만, 한민당과의 합작 실패 1.5.4.1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1.6 생애 후반 1.6.1 이승만과의 결별 1.6.2 재판정 출두 1.6.3 남북 협상으로 선회 (1948) 1.6.4 남북협상 참여 1.6.4.1 남북협상의 실패 1.6.5 여순 사건 관련 공방전 1.6.6 칩거 생활 1.7 반민특위 재개와 부활 1.8 암살 1.8.1 암살의 배후 1.8.2 추도사 1.8.3 암살 직후 1.9 사후 2 기타 약력 2.1 1910년대 이전 2.2 임시정부 활동 2.3 광복 이후 3 의혹과 논란 3.1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 3.2 안준생 암살 사주 3.3 안공근 암살 의혹 3.4 김립 암살, 무고 의혹 3.5 장덕수 암살 의혹 3.6 만주 폭격 계획 의혹 3.7 김성수 암살 기도 의혹 3.8 민간인 살해 논란 3.9 이승만과의 결별 과정 3.10 도덕성 논란 3.11 주애보와의 관계 4 평가와 비판 4.1 당대의 여론 4.2 미국의 시각 4.3 평가 4.4 비판 4.4.1 테러리즘 논란 4.4.2 권위주의적인 행동 4.4.3 정치적 실패에 대한 비판 5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6 일화 6.1 백범일지 윤문 7 저서 7.1 《백범일지》(1947, 국사원) 7.1.1 〈나의 소원〉 7.2 그 외 8 사상과 신념 8.1 남북협상 참여 목적 8.2 외교 문제 8.3 애국가에 대한 관점 8.4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8.5 여순 사건에 대한 관점 9 가족 관계 10 김구를 연기한 배우들 10.1 텔레비전 드라마 10.2 라디오 드라마 10.3 연극 영화 11 같이 보기 12 역대 선거 결과 13 각주 14 참고 자료 15 참고 자료 16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 (1876 ~ 1949)[편집]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6][7][8][9] 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10]'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언함(金彦喊)의 부인이 진주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 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 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유년기 (1880 ~ 1888)[편집]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11][12]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13]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14]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15]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15] 청소년기 (1888 ~ 1892)[편집]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그는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11] 이때 목동 노릇도 했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7세에는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14] 소년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는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게 되었다. 과거 시험 당시 매관 매직의 타락상, 즉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14]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리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14] 청년기[편집]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 ~ 1895)[편집] 천도교, 동학 농민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11]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 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14]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 제국의 군부대가 쏘는 총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15]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11]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종선을 묻어주고 안태훈을 찾아가게 되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16]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편집] 스승 후조 고능선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후조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공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은 화서학파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20세에 청나라행을 결심,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참빗장수를 만났다. 연령은 김구보다 8~9세 위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으로 그를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고, 백두산을 관람하고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편집] 신천을 떠나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 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에 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 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에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17] 치하포 사건과 은신 생활[편집]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 (1896 ~ 1897)[편집] 을미사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라면서도 서울말을 쓰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고 발로 차는 등 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18]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자 일본 육군 중위 신분으로써 조선에 밀파된 군사간첩이라고 기술하였으나[18],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9]. 한때 김완섭이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20]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이었다고 주장했다.[21]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 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출처 필요]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쓰시마 섬(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22]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18]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을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종의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다. 1896년 덕수궁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었는데, 이 전화는 주요 관아는 물론 나중에 인천까지 개통되었다. 대궐에 있던 승지 한 명이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라고 적힌 것을 보고 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일단 사형 집행을 중지시키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 때가 전화가 개통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고종의 어명은 인천감리서의 이재정 감리사에게 신속히 전달되었고 사형 집행을 멈출 수 있었다. 훗날 김구는 자서전인 《백범일지》에서 "만약 전화 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전화가 처음 개통된 시기가 1896년인 것은 맞지만, 서울에서 인천까지 장거리 전화가 개통된 시기는 1902년이었으므로, 고종이 직접 인천감옥으로 전화를 건 것이 아니라, 궁궐에서 전화로 하명을 하고 이것을 인천에 전보로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23] 개화와 죄수 교육 (1897 ~1899)[편집] 김구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은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 동료 상인, 객주들과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24] 뒤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김구는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창수가 재소자에게 옥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일부는 김창수에게 밥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글공부에 참여하였다.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재소자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글을 대신 써줌)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민담과 노래를 배웠다. 이때 김구는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간수의 소개로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25] 그러나 중국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였고, 향후에도 영어에 관해서는 문맹이었다 한다.[26] 승려 활동 (1898 ~ 1899)[편집] 공주 마곡사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1898년 가을께에 출가자인 공주 출신 이서방 이라는 남자를 따라 공주 마곡사에 도착했다. 먼저 삭발한 공주의 이서방이 찾아와 마곡사에 식객으로 유숙하던 그를 찾아와 "하은당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境)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후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하은당을 은사로 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출가 초기부터 불경을 외우는 일과 법당의 허드렛일 도중 실수로 스승인 하은당과 다른 선임 승려들에게 질타를 당하였다. 다른 승려들은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고령이라 이 분들이 작고하면 마곡사 법당의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확고한 결심에 의한 출가도 아니며 승려의 길에 뜻이 없었던 백범은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24]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1899년 가을 황해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성실하게 농업에 종사하면 혼처를 마련해주겠노라며[27] 농사일을 권유하였다.[24]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애국계몽운동과 수감 생활[편집] 애국계몽운동 (1900 ~ 1910)[편집]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1년 뇌졸증으로 반신불수가되 투병중이던 아버지 사망.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인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24]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28]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28]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28]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敎員)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 보강학교(保強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13]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 ~ 1919)[편집] 신민회, 안악 사건, 105인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경성의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1910년 12월 그를 방문한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형문을 받았고, 재판에서 징역 15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1911년 일제의 피체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김좌진과 조우하였다.[29] 1912년에는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30]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55호였다.[31] 이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 도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8월에 특별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는데, 출옥후 어머니 곽씨로부터 소식을 접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32]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33]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편집] 임정 수립 초기[편집] 임시의정원 의원과 경무국장 (1919)[편집]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경무국장 시절 카이저 콧수염으로 단장한 김구 (1920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상하이 임시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였다.[34]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30]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였다. 9월에는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자신의 소원을 말하며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자 안창호는 그에게 경무국장(警務局長)을 천거하였다. 자신의 학식이 낮음을 이유로 경무국장직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으나 안창호는 거절하면 젊은 사람들 아래에서 일하기 싫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므로 그는 안창호의 임명을 받아들인다. 9월 통합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김구는 임정 내무부 경무국장(警務局長)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경호부장으로 여순근을 임명하고 한인 청년들을 고용하여 경찰, 정보감찰 업무, 밀정색출 업무를 분담시켰으며 동시에 재판소가 없는 임시정부에서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행사하였다.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35][36] 일본 영사관 경찰은 임정 요인 체포를 위해 경무국장인 그를 사살하려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 선우갑(鮮于甲)·강린우(康麟佑)가 왔으나 자발적으로 그에게 이실직고하자 추방하였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로 독립운동가를 따라 상하이에 나타났던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하였고, 이후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납치, 암살기도에 시달렸다. 황학선(黃鶴善)은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한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약물로 독살하려 했다. 김구는 황학선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의정원 의원 재선과 내무총장 시절 (1920 ~ 1921)[편집] 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가운데 있는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자대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37] 1921년 5월 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38], 후임은 김용원이 임명되었다.[38] 경무국장에서 물러남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만 활동하게 되었다.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첫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앉은 이가 김구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왔고, 그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재당선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선출되었다.[37] 1922년 7월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李始榮), 여운형, 조소앙, 이유필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9월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차남 김신(金信)이 출생하였다. 10월 여운형·조동호·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한국노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37] 국민대표자대회 소집의 주요 인물이기도 한 박은식을 규탄, 성토하였고 그의 아들 박시창이 찾아와 항의하자 구타하기도 했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39] 1922년 2월 소련의 레닌에게서 받은 200만 루블 중 40만불을 지불받은 한형권과 김립에 대한 사살령을 내린다. 노면직, 오종균 등은 상하이에서 김립을 사살하였다. 그는 백범일지에 김립이 광둥 여자를 사서 축첩하고 호화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김립이 호화생활을 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40]"는 것이다. 박노자에 의하면 김립의 암살 원인은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고 분석했다.[40] 국무총리 대리 시절[편집] 임정 요인들(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앞줄)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1923년 4월 9일 내무총장에 재임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였으나 그는 임정 고수파가 된다. 그러나 임정의 해체와 개조를 놓고 국민대표자 대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김구는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또한 임정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상하이 추방령을 선언한다. 23년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자발적인 자율방범대인 교민단 의경대를 설치할 때, 의경대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41] 최준례는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인 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1923년 그는 청년 오면직, 노종균 등을 파견하여 러시아의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추격, 제거하도록 지시하였다. 1922년 2월 11일 오면직, 노종균 등 을 파견해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 등을 사살했다.[39][42]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범일지에는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되었으나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43] 1920년대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23년 이후 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구미의 각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돈이 모였다.[44]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임시정부 재정부장 이시영(李始榮)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44]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44],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44] 미주 동포들이 후원금과 성금을 보내면 그는 친필로 쓴 붓글씨와 백범일지의 사본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1923년 12월 상해 한인교민단에서 치안조직인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하였고,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24년 4월 23일 국무총리 대리에서 면직되었고,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노동국 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1925년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활동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32]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45]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1926~1929)[편집] 1926년 9월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30] 임시정부도 정부인데 한미한 가계에서 태어난 자신이 수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수 있을 것, 이상룡, 안창호, 홍면희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입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렇다할 배경이 없는 자신이 수상이 되면 다른 실력과 배경을 갖춘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호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김구는 국무령직을 수락한다. 임시정부는 1926년 12월 14일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맡았다. 1927년 4월 10일 후계내각 발표로 국무령에서 총사퇴하고, 국무위원회의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되었다.[46]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47] 1930년 1월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47] 임정의 재정난[편집]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1930년대 초의 김구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 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 취직했다. 김구는 임시정부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재중국 한국인 교민단체와 교포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모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중국의 군인·공무원으로 취직한 한인, 시장 상인, 아편장사 등이 내는 돈에 의존했으며, 일부는 3인조 암살단등 비밀조직을 움직여 일본군의 군자금 탈취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48] 자금을 걷을 인력이 부족해 김구 자신과 임정 직원들이 직접 성금과 자금을 걷으러 다녔다. 이재에 밝지 못했고 장사수완이 부족했던 김구는 사업이나 장사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두상'(頭相), '수상'(首相)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한인 교포들은 그에게 '두상','수상'이라 불렀다. 망명정부의 수반이라는 위치 역시 그를 장사나 공업,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변변하지 못한 임정 청사의 월세도 대지 못해 김구는 늘 쩔쩔맸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고 임정의 충복인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다 한다. '그때 임정에는 삥천이라는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충성스러운 하인이 없었다.[49]'는 것이다. 이런 충복에게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몇년 동안 주지 못하였다. 삥천의 부인이 해산할 때 돈이 없어 밀린 월급의 일부만이라도 달라는 호소 조차 들어주지 못할 정도였다.[49]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후, 이승만은 미주지역의 성금을 독식했고 임정으로의 직접 송금도 가로막았다. 김구는 1928년 이후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자신도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절하였으나, 자금의 일부를 임정으로 보내주었다. 1932년 5월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 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임정에 흘러오는 자금에 활기를 띄었다. 1925년,26년 무렵 국내의 임정 연락망인 연통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29년 8월 상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고[47], 1930년 다시 국무령에 선출되었다.[50]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해 나갔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의 창당 작업에 참여하였다. 항일의거와 군사단체 조직 노력[편집]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24~1930)[편집] 대한통의부,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친일파 제거와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편집] 1924년에는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내려, 박희광(朴喜光), 김광추(金光秋), 김병현으로 3인조 암살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친일파인 보민회괴수(保民會魁首) 최창규(崔晶奎)의 가족을 백주(白晝)대낮에 토벌했다. 이 사건은 1924년 7월26일자 독립신문에 크게 게재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鄭甲周),이등박문의 수양녀이자 매국녀인 배정자(裵貞子), 일진회 회장 이용구등을 암살 하라는 지령으로 암살을 시도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일본 주요관계자 및 요인제거를 목적으로 박희광(朴喜光)등이 봉천성 일본영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실패했다.[51] 이들은 같은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당시 일본군 장성이 드나들던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 김병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김구는 이외에도 친일파 척결작업과 부족한 자금조달을 위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활동을 배후에서 비밀리에 지휘 또는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30~1932)[편집] 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최흥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봉창 의거와 이즈모호 폭파 미수[편집] 1930년 8월 4일 국무령에 임명되었고, 1930년 11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財務部長)에 선출되었다.[46] 이때 김구는 1927년 신약헌에 의한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회가 채택된 이후 그간 4년간의 정부 예산 집행의 결산서(決算書)를 무더기로 의정원 의장 앞으로 제출하였다.[52] 1931년에는 일본 정부 및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22년 만주에서 결성한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53] 을 강화해 임시정부 내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54] 김구는 홍보를 통해 청년 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말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같이 지내면서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55] 이봉창이 왜 천황을 죽이지 못하느냐고 힐난하자, 김구는 자극을 받아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히로히토 천황이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한편 2월 12일에는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신형 잠수정 이즈모 호(出雲号)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배 밑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윤봉길 의거[편집] 2월에는 윤봉길이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 요인인 왕백수, 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 상하이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 실패하였다. 4월초,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를 지휘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의 계기가 된 이 의거 직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 비서 엄항섭, 김철과 함께 미국인 장로교회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2018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함)의 집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야 했다.[56][57]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58] 조선 총독 암살 미수[편집] 1932년 4월 윤봉길의 2차 거사를 보내기 직전 김구는 유진식과 이덕주를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조선에 보내 조선총독 우카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의 동경의거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진행하는 한편으로 윤봉길의 의거를 준비하기에 앞서 두 명의 한인애국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였다.[59] 국내로 파견된 대원은 이덕주와 유진식이며, 이들에게 김구가 내린 임무는 조선총독의 처단이었다.[59] 이덕주(李德柱), 유진식(兪鎭植)은 왜총독 암살을 명하여 선파(先派) 입국하고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은 만주에 본장번(本藏番) 등 암살을 명하여 상기 진행코자 할 즈음에 4월 24일 김구는 이덕주와 유진식 두 명의 한인애국단원에게 조선총독 우원일성(宇垣一成)을 처단할 것을 명하고 국내로 파견하였다. “ 한인청년당원은 김구 일미가 계획한 흉폭행위실행의 역할을 감당하고 이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이나 그 간부 중 이미 이덕주라 칭하는 서리균(徐利均)과 유진식이라 칭하는 유진만(兪鎭萬)은 황해도에서, 주천현朱天懸이라 칭하는 유상근과 최흥식은 대련에서, 또 송진표(宋鎭杓)라 칭하는 장현근(張鉉瑾)과 김덕근(金德根)은 당관에 체포당했음으로...홍구공원폭탄사건의 하수인 윤봉길에 수교한 90불, 최흥식에게 지급한 580불전후 3회에 걸쳐, 유상근에 지급한 1,000불전후 2회, 이덕주에 지급한 120원, 유진만에 수교한 60불, 김긍호(金兢鎬)에 지급한 50불 합계 1,900불의 흉폭행위자금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는 직후 알 자료가 없어 명료하지 않으나 본년 3월 20일 불계에서 한인측 김구, 김철, 조소앙 등이 상의하고 중국측 광동파 호용청(胡用淸) 등과 더불어 중한민족항일대동맹(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한 사실에서 추찰하여 아마 우 동맹의 중국측 간부를 통해 혹은 광동파 내지 19로군 간부로부터 지출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60] ” —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고서 4월 24일과 28일 사이에 조선총독을 처단할 임무를 띄고 국내로 파견된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61] 이후 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됨으로써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만주철도 폭파미수[편집] 1932년 5월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軍務部長)에 임명되었다. 5월 일본의 만철(滿鐵)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김구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3월말과 4월 27일 각각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였다. 유상근은 상해를 출발하기 2~3일 전인 4월 25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2개의 폭탄 중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김구에게 돌려주고 수통형 형태의 폭탄 1개를 받아 자신의 거주지인 살파새로 188호 3층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4일 대련에 도착하였다.[62] 유상근보다 한 달 먼저 배편으로 상해를 출발하여 대련에 도착해 있던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대련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 먼저 대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을 사용하여 본장번(本庄繁) 일본 관동군사령관, 내전강재(內田康哉) 남만철도 총재,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 관동청장관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았다.[62] 5월 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ㆍ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58]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63] 수배, 피신 생활 (1932~1933)[편집]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5월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고 상하이에서 탈출했다. 그 뒤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길 때 군무부장에 취임하였으나,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張震球) 또는 '장진'(長震, 張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김구의 친할머니가 장씨(張氏)였기 때문에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이다. 가흥에서 김구는 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가흥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한편 김구는 이때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64]'라고 하였다. 이후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65] 옥관빈 암살(1933)[편집] 옥관빈 한편 1930년대 초부터 임정 창립 초기의 멤버였으나 임정을 이탈, 어느정도 거리를 두던 옥관빈이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비난, 조소하였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김구의 귀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 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66]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67] ”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자랑과 허영을 못마땅하게 봤던 그는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66]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67] 이는 그대로 김구나 임시정부, 의열단, 아나키스트들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임정에서 탈퇴한 뒤로 옥관빈은 흥사단 활동 등 일부를 빼고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를 했다. 더구나 옥관빈의 형 한명은 불조계에서 형사로 취직하기도 했다. 옥관빈은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한 대신 공장을 운영하며 매상을 올려 부자가 되었다. 옥관빈은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 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많은 돈을 써서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하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67] 호화스러운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67]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67]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67]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했다.[67] 이어 옥관빈 암살을 지원하였다. 옥관빈은 그해 8월 1일 불조계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를 만나 몰래 간통하고 나오던 길에 남화한인동맹원 엄형순 등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68] 광복군 조직 노력 (1933~1937)[편집] 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김구 (우측)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 광복군입니다. 1933년 장쑤 성 자싱(가흥)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였다. 이때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그러나 상하이 법대총장 저보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자싱으로 옮겼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을 추진하였는데 중국 측에서는 진과부,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였다.[56] 5월 장개석과 만났으며,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강소성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69] 의거와 피신 이후 한인애국단의 조직이 어렵게 되자 한인애국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한국특무대독립군으로 흡수, 개편된다.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의견의 대립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산론이 나오자 김구는 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7월 조소앙·김두봉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체와 단일신당결성을 주장하여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하였다.[70] 10월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71] 김구는 남경중앙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71]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69] 그리고 김구는 곧 한국국민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한 김구 등은 1936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72]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73] 그 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74][75]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76] 이후 김구는 한국독립당의 당의 무력조직인 한국독립당군의 조직을 준비하여,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보게 된다. 안공근과 결별[편집]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자신의 큰형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77]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77] 당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45][78] 그런데 김구는 안중근의 부인과 가족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분개하였다. 이를 두고 사학자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45] 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며 안공근을 질타하고 꾸중하였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45] “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79][80] ” — 백범일지 중에서 백범일지의 기록과는 달리 안공근은 '자기 식구만 충칭으로 이주하게 한 것'이 아니라 중일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을 자신의 가족들보다 먼저 피신[45]'시켰다.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45] 오영섭에 의하면 '안공근이 김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김구로부터 신망을 잃었으며 그로 인해 김구의 단체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는 위의 기록을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81]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안공근 자신에게 쏟아질 것임을 누구보다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 형의 가족을 함께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의 현지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81]'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해서 안공근의 형수와 조카들을 데려오지 못한 일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81] 중일 전쟁 중의 활동 (1937~1939)[편집] 총탄을 맞고 수술 후 회복한 김구 (1938년) 중일 전쟁 발발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의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표 지청천) 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82]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었다.[82] 1938년 5월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玄益哲)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유동렬, 지청천 등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83] 타고난 체력으로 그는 과다출혈을 하고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총격 직후 백범일지에 의하면 네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시켰다. 병원에 가서 치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의 글씨체는 떨려서 구부러진 글씨를 썼는데 이를 일명 총알체라 한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83] 1938년이후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 개조론, 임정고수론 논쟁 당시 개조파와 창조파에 참가하거나 기울었던 인사들이므로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 소수인사들은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정체이며 민족의 대표기관이므로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84] 한편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임정의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는 청년층의 비난도 받게 되었다. 1939년 4월 모친 곽낙원여사가 인후증(咽喉症)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이 일본군 타살사건으로 체포된 뒤에도 아들을 신뢰하였고, 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도 늘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곽낙원은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뒤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말 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85]'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85] 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9년 김규식, 이상정 등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86] 임시정부 주석 재임 시[편집]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4)[편집] 충칭 임시정부 청사. 한국 광복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主席)에 선출되었다. 그해 승인거부되었던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었고, 그해 9월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한국독립당군(1939.1)을 확대 개편하여 한국광복군(1940.9)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가 주석 장제스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4월 치장(朞江)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통합)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70]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1940년 9월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85]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87]1940년 9월 워싱턴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85] 이후 구미위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88] 1940년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73] 1942년 2월에는 김성숙, 김원봉, 장건상 등 좌파[모호한 표현]들이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였다. 5월에는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당시 임정 내부 좌·우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측이 한독당의 김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89]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주석 재선 (1944~1945)[편집] 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번과 면담한 김구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73]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8월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으로 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이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그는 광복군 통수부의 주석도 겸하여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90]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한국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金仁)이 폐질환으로 중국 쓰촨 성에서 병사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8월 15일 섬서성에서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로부터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귀국 직전[편집]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로 귀환하였다.[91]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30]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11월초 국민당의 송별식에 초대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송별연에도 참석하였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 일행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92] 김구는 11월 3일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 상하이 비행장에서 중국 국민당 인사들의 환송을 받고 출발하였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편집] 귀국 직후[편집] 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김구는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1월 3일 오후 비행기편으로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로 정했고 지주 최창학 자신의 별장인 죽첨장을 그에게 기증했다. 이후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93] 선언하였다. 11월 4일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현시가 20억여 원)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했다.[94] 수십년간 대일항전의 동지로 지내온 김구에 대한 최후의, 가장 파격적인 지원이었다.[94] 장제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김구에게 20만달러라는 거액을 쥐어준 데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향후 일종의 ‘보은’을 다짐받는 의미가 들어있었다.[94] 그러나 김구는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실패했다.[94] 당시 김구·김규식 등은 임정 대표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 해방과 함께 정권을 인수한 미군정이 또다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94]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 박헌영과 인공 내각의 견제를 위해 임시정부가 정부 의 명칭을 쓰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미군정은 김구의 개인경호원과 광복군에게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92] 하였으나 장제스가 준 돈 20만 달러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귀국하자 윤치호(尹致昊)는 그와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친일파의 거두로 지탄받고 있었다. 윤치호의 영향력과 일제 강점기 당시 그로부터 받은 지원금 등 윤치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김구는 거절하는 대신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정치 자금 조달[편집] 1945년 11월 5일 아침 김구 일행이 서울에 입경한 그 다음날, 송진우는 낭산 김준연을 대동하고 백범의 숙소로 마련된 서울 서대문의 경교장(京橋莊)으로 예방해 불굴의 노애국자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고, 같은 날 낮 이번에는 국민대표준비회의 대표 자격으로 장택상을 대동하고 예방해 후원회 기금을 전달했다.[95] 얼마 뒤에 임정 요인들은 그 후원금 가운데 깨끗하지 못한 돈이 들어있다 하여 국민대표준비회 사무실로 들고와 처리 문제를 논란했다.[95] 대화는 자연히 거칠어지면서 주먹과 흥분의 수라장이 벌어졌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고하 송진우는 참다못해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에는 양민의 돈도 들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요. 이런 큰일에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아오”라고 설득함으로써 겨우 수습하기도 했다.[95] 11월 중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20만 달러의 자금을 보내준다고 연락하였다.[94]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김구는 중화민국의 의 정치자금을 수용하였다. 중국과 경쟁하기를 원치 않았던 미군은 중국측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돈과 함께 보내준 3명의 무전사와 무전기에 대해서도 무전사를 추방하고 무전기는 압수했다. 다급해진 김구는 뉴욕의 주미 중국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결국 돈은 중국은행에 보관된다.[94] 11월 한민당 인사들이 찾아왔고, 최창학·방응모 등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이광수가 한동안 그를 방문하지 않자 대노하여 이광수를 찾았다. 김구의 불호령을 듣고 경교장에 불려간 뒤 이광수는 종종 경교장을 찾았으며 1947년 이후 김구의 7촌 조가 김흥두와 함께 백범 일지 한글판 번역작업에 동참한다.[96] 국내 정치 활동 준비기간 중[편집] 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끝에 앉은 이가 김구) 45년 11월 23일 김구는 바쁜 와중에도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97]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97] 11월 24일 내외신 방송과의 기자 회견을 하였다. 여기서 김구는 '내가 이박사보다 더 나은 수단을 갖고 왔다고 생각해서는 잘못이오. 다만 근 30년 동안 해외에 있다가 돌아온 터이므로, 현 정세에 어둡고 정세를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소.[98]'라고 답변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99]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진 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100]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100]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 주관하였다.[101] 순국선열추념대회 총재로 선출되었다.[101] 12월 25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73] 반탁 결의와 송진우와의 공방전[편집] 송진우 피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송진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의문을 입수해 검토한 뒤,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이어 안재홍, 여운형 역시 반탁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히 관철하려 하였다. 12월 29일 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회의에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남로당(조선공산당의 오류로 생각된다.) 사람들까지 다 나왔다. 다들 아주 격해 있었다.[102] 송진우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강원룡에 의하면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102] 한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103]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송진우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다.[102] 송진우는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104] 송진우는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의 통치권 주장을 미 군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105]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106][107]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106][107] 송진우의 이러한 주장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김구의 추종자들은 1945년 12월 30일, 그를 자택에서 저격, 사살했다.[104] 송진우와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 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108]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브루스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108] 조병옥도 김구를 암살 배후로 지목한다. 훗날, 국립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술에 취해 말하기를,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109]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110] 반탁운동 개시와 총파업[편집]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하지에게 보냈다. 12월 30일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111]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위원회는 반탁시위를 주관하였고, 12월 31일 오전 그는 국자(國子)를 발표한다. 그 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46년 1월 1일 김구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 다른 임정요인도 함께 군정청으로 불려갔다. 이때 김구는 하지로부터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었고, 김구는 하지의 융단에 올라 이자리에서 죽겠다고 대들었다 한다. 송남헌은 그가 하지로부터 추방시키겠다고 위협당하였다고 증언했다.[112]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113] 엄항섭 대독을 통해 군정청 한국인 직원의 복귀를 촉구했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전해지자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다시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114] 1946년 1월 2일 갑자기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의 지지로 돌변했다.[115]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선공산당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 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116] 김구는 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부수립이 우선이라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반탁의 입장을 철회한다. 하지의 임정요인 추방 사태[편집] 임정 주최의 반탁 운동이 극치에 달한 1945년 12월 31일 하오 하지 중장은 조병옥에게 연락관을 보내 사령관실에서 요담할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즉시 하지를 만나러 갔다. 하지 중장은 말하기를 군정을 접수하려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즉시 처치해야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임정 요인 처치에 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조병옥에게 원고 전문을 보여주었다.[117] “ 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들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군정 접수운동의 여파로써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오늘밤 0시를 기하여 인천 소재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118] ” — 원고 내용 하지는 김구에 대한 물리적인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조병옥은 즉시 이 원고를 다 읽고 난 뒤 경악하면서 하지중장에게 말하기를 임정 요인들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3.1 운동 이래 자유독립의 혁혁한 경력을 가진 분으로 민족의 자유전치운동의 봉화를 든 민족운동의 투사이므로 이 애국자들의 국외추방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한국인의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미군정은 한국에 있어서 실패로 끝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그런 조치는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118] 하지 중장은 조병옥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방송을 중지하겠다고 하였다. 조병옥은 즉석에서 김구와 하지의 면담을 약속받았다. 조병옥은 하지 중장에게 "나에게 김구 주석과 협상할 전권을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 중장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118] 12월 31일 저녁 조병옥은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숙소를 방문하게 되었다.[118] 조병옥은 김구와 여러 시간 면담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에게 진언하기를 “ 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도 한 푼도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맹약한 이상 현재의 입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 접수 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공산주의 치하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한반도는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 철제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미군정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오니 주석께서는 그 점 신중히 심사숙고하시어 한번 하지 장군과 만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보심이 어떻습니까?[118] ” 조병옥의 말에 김구는 하지 중장을 만나 보겠다고 수락, 그의 진언을 들어주었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편집]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앞줄 가운데가 김구, 앞줄 오른쪽이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왼쪽은 조완구, 프란체스카 도너 순,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1946년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104] 1월 이승만이 미국에 갈 때,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민족 외교'를 위해 '외교사절 후원회'를 조직했다.[119] '이승만 박사 외교사절 후원회'의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고, 김구와 배은희 등은 반탁총동원위원회나 비상국민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거뒀다.[119] 그리고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국내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도미 외교를 지지하였다.[119]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조병옥에 의하면 '한편 미군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익 우익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또 이승만은 완강한 정치인이라고 해서 한국 정치계에서 제가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120] 김구 주석은 극렬한 반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였다.[120]'는 것이다. 이에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반전을 꾀한다.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편집]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구는 김규식, 이승만,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21]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22] 1946년 2월 12일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121]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123]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121]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김구와 이승만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124] 2월 14일부터 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125] 반탁운동을 수단으로 해서 국민의회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수립케 하려는 것이었다.[125]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125][126]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127]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127] 3월 5일과 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125]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128]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128] 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등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129] 정치 활동[편집] 미소공위 반대 운동 (1946)[편집]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미소공동위원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월 20일에 열린 미, 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 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130]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131]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려 하지 않자 그것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131]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31] 46년 3월 22일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이때 김구는 이승만에게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초당적인 국민운동'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132][133]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134]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134] 1946년 5월 25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 서울역에서 (오른쪽 두 번째가 김구)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135]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136] 6월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단독정부론을 말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137]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138]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138] [139] 이승만의 연설에 이어 김구는 이 대회에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138][140][141]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김구는 부총재에 선출됐다.[138] 이승만은 국민운동의 총본부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민총)의 설치를 발표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민총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138]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 이승만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142]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43]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폭탄투척[편집] 1946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염동진의 백의사는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앞에서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백의사 청년단원들은 김일성에 대한 폭탄을 던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의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가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한 것이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144][145][14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삼일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간 열여덟 살 소년 김형집이었다.[144][147][148]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과 김책의 집에도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양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144][147][148]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149] 을 분실했고[144][148][150]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151]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151]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152]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153]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153]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153] 이승만과의 경쟁[편집] 이승만, 해방 직후 정치적으로 경쟁하던 중, 장덕수 암살 사건을 계기로 결별한다. 김구는 평소 이승만에게 우남 형님, 우남장(雩南丈) 이라며 존대했다. 그러나 반공주의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미국의 한인 교포 노동자들과, 청년층 지식인들이 정치자금과 후원금을 송금한 이승만과 비교할 때 그에게는 정치자금이 부족했다.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화교 무역으로 정치자금 마련[94] 을 모색한다. 이승만은 장제스가 김구에게 지원하려던 거금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는 정치자금에 관한 한 일찌감치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미군정의 후원아래 친일 경제인들이 조직한 대한경제보국회가 1946년 초 2천만원의 정치자금을 모았는데 이중 1천만원이 이승만에게 전달될 정도였다. 이즈음 20만달러의 반입을 포기한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 돈을 주기로 약속한다. 임정 시절 이승만과 재미교포 사회에서 받은 지원에 대한 보답 성격이었다.[94] 이때부터 돈을 손에 넣기 위한 이승만의 집요한 노력이 시작된다. 그는 1946년 2월 장제스 총통에게 전보를 보낸다. “20만달러를 미국 안전신탁공사(American Security and Trust Company)에 예치시킨 뒤 워싱턴의 임병직 대령(이승만의 심복)에게 지불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보를 접수한 국민당 우티에청 사무장은 잠시 난감했지만 곧바로 장제스에게 “이 돈은 이승만이 아닌 김구가 수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제출한다.[94] 방응모, 조선일보의 사주였던 방응모는 귀국 이후 그의 정치적, 경제적 후견인이었다. 이승만은 1946년 2월 전보를 시작으로 47년 말까지 4~5차례에 걸쳐 장제스에게 이 자금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한다. 미군정과의 관계악화로 46년 말 도미했던 그는 이듬해 4월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일부러 상하이·난징을 거쳐서 돌아온다. 이때 장제스와 처음 대면한 그는 20만달러 이야기를 꺼내지만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한다.[94] 이때 장제스는 서울의 김구에게 전화했고, 김구는 이승만이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렀음을 접하고 자금 일부를 국내로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그로부터 두달 뒤인 47년 6월 김구는 주한 중국영사관에 부탁해서 10만달러를 임시정부 주화(중)대사관의 운영자금으로 지원토록 한다.[94] 국내정치에서 이승만과 긴장관계가 조성된 만큼 돈을 자기몫으로 챙긴 것이다.[94] 그러나 이승만은 이 돈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해 8월 프란체스카와 함께 주한 중국영사관을 찾아가 나머지 10만달러를 달라고 사정하지만 실패한다. 이 일 직후 10만달러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들여와 경교장 생활비와 ‘백범일지’ 출간비용 등에 충당했다.[94]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김구는 일단 한민당이 보낸 자금과 경방에서 보낸 7백만 달러를 받아들인다. 조선일보의 방응모와도 연대하여 경제적 후견인으로 삼는다. 방응모는 곧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재정부장을 지냈다. 방응모는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101],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1]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154],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 등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46년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 유해봉환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방응모는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에 서자 그와 결별하기 전까지 그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거나 지원하였다. 1945년 말 그는 1천 5백만~2천만 원의 '애국금'을 기부받았다.[155] 정병준에 의하면 '김구가 받은 1천 5백만~2천만 원의 '애국금' 중 상당액이 이승만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155]'고 한다. 정치 자금의 부족은 그의 활동에 제약을 가져왔다. 화교 무역 시도와 실패[편집] 김구는 다른 편으로는 중국 화교무역을 통한 정치자금 조달을 계획한다. 20만 달러의 '해프닝' 이후에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에는 모종의 계획이 추진됐다. 1947년 말 임시정부 주화(주중국)대표단에서 국민당과 김구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민석린은 ‘중한동제실업공사 조직요강 초안’을 작성,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을 통해 장제스에게 올린다.[94] 중국 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각 당의 경제기초 건설을 위해 중한동제실업공사(中韓同濟實業公司)를 조직한다. 업무범위는 무역·운수·어업·부동산·공장·은행·농장 등으로 정한다. 자금은 우선 1백억원을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절반씩 출자하고 장래 업무발전 상황에 맞춰 증자한다. 해방 이후 가장 비중이 컸던 대일무역을 비롯해 대외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유일한 것이 타이완·홍콩·마카오 등지와 이뤄졌던 화교무역이었다. “타이완산 소금이 한국에 수입됐는데 반응이 좋았고 빈 배로 돌아가기 아까워서 인삼을 실어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같은 한·중간 경제활동을 관장함으로써 양당의 정치자금으로 쓰고자 했던 것이다.[94] 민석린과 우티에청 간에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국내에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운 김구나 장기간의 대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자금이 소진된 장제스, 양측의 이해가 맞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임시 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결고리였던 우티에청은 바람직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장제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만다.[94] 1948년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결정적 국면에 다다른 시기였다. 남북한이 각자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김구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이승만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다. 중국 국민당 역시 국공 내전이 심화되면서 베이징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내주는 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94] 결국 중화민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중국 공산당에게 뺏기게 되었고, 이로써 화교무역을 통한 김구의 정치자금 조달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임정법통과 임시정부의 재편성 (1947)[편집] 8.15 광복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윤봉길의 가족. 왼쪽부터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이후 경교장에서 기념사진. 왼쪽부터 손기정, 서윤복, 본인, 남승룡 1947년 1월초 이승만의 도미 외교 목적의 출국시 김포 비행장에 나가 환송하였다. 1947년 1월 이승만이 미국을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156] 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156] 존 하지 중장으로부터도 다시 경고를 받았다. 결국 김구는 학생들에게 과격시위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7년 1월 18일 김성수,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경성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구는 김성수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157]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 등에도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이는 대부분 일회성이었다.[158] 원래 우익진영은 김구의 주도로 1947년 1월 18일 김구의 주도로 우익진영은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 1주년을 기념, 대대적인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이승만의 만류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고로 김구는 반탁시위를 보류하였다.[156]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는 천도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축소되었고,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156]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가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159],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7년 2월 14일~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만약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로 하여 이승만의 도미를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젠 자기 길을 걷겠다고 나선 셈이었다.[125] 김구는 임정 계열과 함께 이승만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3.1절 전후로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의 3.1절을 전후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은 기밀이 누설되어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조차 '아이들 장난'으로 조롱하였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했다.[127] 미군정은 김구와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을 호출하였고, 군정의 호출을 받고 3월 5일 임정 요인들을 데리고 주한미군사령관실을 방문하였다. 군정청은 그들을 잡아넣겠다고 협박했고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정부수립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정해구는 김구의 이같은 시도에는 '이승만 부재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의한 김구의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국민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구의 이같은 시도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대처와 여타 세력의 지원부족으로 제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127] 한편 김구의 반탁노선에 반발한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국민당 세력은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한독당을 이탈하기도 했다.[160]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부주석으로 추대되었다.[161] 김규식.장건상.김붕준(金朋濬) 등 중도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161]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162] 반탁, 임정 법통 운동 (1947)[편집] 김구 (1947년) 4월 21일 이승만이 귀국하는 날, 김포에 마중을 나가 단정론 연설만은 그만두도록 충고하였다.[163] 단정론 연설이 자칫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승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연설을 취소하였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김구는 이승만과 반탁 투쟁을 전개했다.[131]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164][165]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166]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6.23 반탁데모를 격려하였다. 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167][168] 그러나 그러나 김구와 이승만의 격려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169]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170]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171]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도 않았다. 우익 진영 단결 노력[편집] 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함께 (1947년) 반탁운동, 임정 법통 운동과 함께 김구는 우익진영 단결, 통일을 추진했다. 그는 우선 반공, 우익진영 정당 통합을 추진했고, 다수의 우익인사들은 그의 단결 노력에 동조했다. 안재홍은 광복 직후 조선국민당을 창당하고, 권동진은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여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김구의 우익진영 단결운동에 동조하여 한국독립당에 통합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놓고 꾸준히 충돌하다가 국민당계는 탈당하게 된다. 미소공위에 긍정적 의사를 보였던 신한민족당 계열 역시 축출당했다. 김구, 조완구, 조경한 등은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고[172], 김구는 47년 2월 26일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172] 한민당에서도 김구의 우익진영 단결 노력에 반응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173] 이는 장덕수에 대한 김구의 감정이 악화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174]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75] 그러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176] 김구는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성명을 번복하여 발표하였다.[175] 성명서 발표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175][177][178]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179] 김구가 반탁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우익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이승만측과의 계속 갈등, 대립한 이유는 중경임시정부의 현실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172] 이승만, 한민당과의 합작 실패[편집] 장덕수. 재령 보강학교 당시 그의 제자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173]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180]'는 것이다.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180] 미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173][181][182]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173]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182][183]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편집] 단국대학 설립시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앞줄:김구 장형, 뒷줄: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이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張炯)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저격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본부였던 원효사는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은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184][185][186][187]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대해서는 건국실천원양성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생애 후반[편집] 이승만과의 결별[편집]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관련자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모욕감때문에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결별[188] 하였다. 김구는 한살 위인 이승만을 깎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에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189] 강준만에 의하면 '어찌됐건, 피를 나눈 형제 못지 않게 정을 주고받았던 의형제 사이의 애증관계가 아니라면, 김구의 행동은 달리 이해하기가 어렵다.[189]"고 했다. 미군 군사법정에서 증인 자격으로 심문중인 김구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뒷짐 지고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182]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였다.[190]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182]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191]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한민당은 김구와 임정계를 일제 시대 악명 높은 사교 집단인 백백교에 비유하면서 "살인마의 조직과 명령 계통을 근절하라"고 촉구하였다.[191]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91] 사학자 신복룡은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와 이승만이 이끌던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통합이 무산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김구의 배신감이 배가되었다."라고 했다.[191] 1947년 백야 김좌진의 추모회에 참석한 김구는 김좌진의 추도사를 했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192]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재판정 출두[편집] 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3) 1948년 2월 초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명의로 군정청 재판정 소환 출두서와 여비가 경교장에 도착되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193]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194] 3월 13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출두하였다. 김구는 증인 자격으로 재판정에 섰지만 미군정청 군법무관들로부터 추궁당했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청 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내가 지시했다고 하는 것은 나를 모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놈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설산이 죽은 것만도 분한데 왜 나한테 자꾸 이러느냐?[195] 암살범인 박광옥은 김구의 증인 신문 때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195]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196] 그러나 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3월 4일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 피고인들은 진술서가 고문과 강압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 에서는 트루만 미국 대통령 명의로 3월 12일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197] 장덕수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은 3월 한달 동안 21회에 걸쳐 계속 되었다.[197] 남북 협상으로 선회 (1948)[편집] 38선에서 모습 김규식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 조소앙이 찾아와서 그를 만류하였고 이철승 역시 그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현실적인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김구는 한편 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197]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의 한사람이던 김학규도 반대하였다.[198] 그리고 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198],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99]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렘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199]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199] 는 공격을 당했다. 남북협상 참여 당시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200]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가 방북할 뜻을 표현하자 수백 명의 청년들이 경교장 앞에 와서 못가십니다 를 외치며 가로막았다. 김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쳤지만 학생들이 물러나려 하지 않자, 아들 김신, 비서 선우진에게 북행길을 포기한다 하고 발표하고는 담을 넘어서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김구의 출발 소식이 알려지자 북행길을 주저하던 김규식 역시 출발한다. 4월 김구 북행을 결행하려 하자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일행들은 '이승만 박사와 노선이 분열되면 안 된다'며 경교장에 드러누워 김구의 북행을 저지했다[201]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그러나 김구는 자신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도와주지 않고 이제와서 북행길은 반대하느냐며 학생들을 향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 경교장에서 사람이 나와 김구는 북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하자 이철승 등 청년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김구 일행은 이들을 피해 담벼락을 넘어 경교장을 나갔다. 청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일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러 북한으로 갔다. 남북협상 참여[편집]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202]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193]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203]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순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204]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205]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조국분단의 위기를 만구하기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한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며 ...(이하 중략)...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206]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202] 남북협상의 실패[편집]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고 확신했다는 것이다.[207] 1948년 4월 26일 김구는 송태산장을 찾아 도산 안창호의 형인 안치호, 여동생 안신호를 만나고 내려왔다. 5월 10일 3.8선을 넘어 귀환하였다. 남북협상에 다녀와서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뭐니 해서 거기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208] 고 했다. 그러자 김선(1910~) 등 총선거에 출마한 당원들은 '할 수 없이 탈당[208]'하였다. 김선 등은 '그래도 다 같이 애국운동 하던 사람인데(이승만) 이젠 나라 세운다니까 여기서 일하자.' '말이 당수지 나가랄때 나가자 우리가 아쉬울 것이 있냐[208]' 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208]'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208]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208]'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208]'라며 조롱하였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209] 1948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자 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자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210]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210] 여순 사건 관련 공방전[편집]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중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211] 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212]-서울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212]-자유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212]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213]"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213]"라고 밝혔다. 이범석은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213]"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이범석은 포고문을 발표한다. 이범석 총리는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고 언급하며, 이 반란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212] 이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신을 극우파로 지적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그러자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는 10월 27일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211][214] 김구의 반박 보도문은 조선일보와 한성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4]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215] 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그 극우가 대체 누구냐며 윤치영에게 따졌고, 윤치영은 누군지는 알수 없지만 극우 인사인 것은 분명하다며 응대하였다. 칩거 생활[편집] 김구 (1949년) 한편 김구는 분명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닫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216] 비록 정치도덕가는 아닌 김구였지만 그러한 조선 민족의 희생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그는 김규식과 함께 타협하여 민족통일을 이룩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리처드 로빈슨에 의하면 '두 김씨의 입장은 이승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혐오감, 애국심이 복합된 것이었다.[216]' 한다. 1948년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217][218]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217][218]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219]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219]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219] 반민특위 재개와 부활[편집] 김구는 민족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민족의 반역자인 친일파들은 반드시 처단해야한다며 반민특위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그일로 악랄한 친일파였던 장경근, 김창룡, 김종원, 안두희, 등의 모든 친일파들의 입장에선 김구는 신경이 거슬렸던 존재였다. 이일로 인해 암살할 명분이 생기기도 했다. 암살[편집]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193]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220]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193]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221]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21]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221]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222]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222]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222]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암살의 배후[편집] 김구의 묘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223]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224][225][226]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한편 안두희는 초기 진술에서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216] 고 진술하였다. 한편 안두희가 자신의 군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추도사[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국무총리 이범석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전 임정 부주석 김규식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국독립당 대표 엄항섭 추도사 전문 암살 직후[편집]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216] 6월 27일 이승만은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비판했다.[216]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216] 김구의 장례는 국장이 결정되었으나 한독당 측에서는 민족장을 고집했다. 정부에서 이범석과 신성모, 허정 등을 경교장에 파견하자 조완구, 조소앙 등은 너희가 죽여놓고 너희가 국장을 하느냐며 흥분했고 실랑이와 몸싸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측이 보낸 사절단과 한독당 인사 간에 마찰이 빚어졌고, 김규식의 중재로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은 10일간 거행되었다.[227] 김구의 국민장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고,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후[편집]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228]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229][230] 기타 약력[편집] 1910년대 이전[편집] 1880년 백부 김백영 사망 1888년 조부 김만묵 사망 1892년 임진년 경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 그외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고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231] 1901년 부친 김순영 사망 1902년 여옥과 약혼 1903년 약혼녀 여옥 사망[232] 1904년 12월 최준례(崔遵禮)와 결혼, 장련 읍내로 이사. 1905년 11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233] 1907년 2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 사퇴 1907년 신민회에 참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받고 수감 1915년 가석방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 1919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 경무국장 취임 1924년 대한통의부, 참의부 김명봉,박희광등과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암살계획 협력 임시정부 활동[편집] 1926년 12월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됨. 1929년 5월 백범일지 상권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69] 1930년 8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1931년 10월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1932년 1월 일본 쇼와 천황 살해를 노린 사쿠라다몬(桜田門) 폭탄투척 사건 1932년 2월 상하이에 정박중인 이즈모 호 폭파에 윤봉길을 파견했으나 미수.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 쇼와 천황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지휘. 1932년 5월 한인애국단원 이덕주·유진식, 조선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에파견했으나 체포됨.[234] 1932년 5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최흥식 등을 관동군 사령관 본장결을 암살하기 위하여 만주로 파견하였으나 체포됨.[234] 1935년 한국국민당 조직. 1939년 5월 30일 측근이었다가 결별한 안공근이 암살되었다.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을 받았다.[235] 194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重慶)으로 이전.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갖고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광복군 침투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 광복 이후[편집]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236] 그러나 뒤에 김구는 취임을 거절했다. 1945년 11월 김구는 임시정부를 정부의 자격으로 귀국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 좌절.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각각 임시정부 송별연을 베풀어 줌.[237] 1945년 11월 2일, 존 하지 중장,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236]"라고 말함. 8.15광복 후 1945년 11월 3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임정요인 환국 제1진으로 귀국. 1945년 11월 24일 존 하지 중장,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삼상회의 결정서를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 1945년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기도 하였다.[238]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주제의 방송담화(엄항섭 대독)에서 강력한 국방군의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239]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명(반탁학련) 데모대가 김구에게 반탁학생대회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가 있는 서대문 서교장으로 향했다. 신문로에 이르렀을 때 좌익성격의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같은 날 천도교 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행사를 축소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156][240]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된 데 이어,[241]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241] 1946년 3월 1일 이승만과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1946년 6월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유골을 찾아,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였다.[193] 한편 방응모등의 재정적 후원을 얻었다.[출처 필요]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수립을 발표하다. 그러나 이때 김구는 탈장증세로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242]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결성식에 참석,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43]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193] 1947년 1월 전국반탁학련 반탁 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하여 46년과 같은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대대적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만류와 존 하지의 경고로 보류하였다.[243] 1947년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인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에서 참석하여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244]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맡음.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하자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다. 이때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245]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193] 1948년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 발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 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여,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1948년 3월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 자격으로 미군정청 재판정에 출두하였다.[246]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8년 8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 장남 김인의 유골을 봉환하고, 9월 이동녕·차이석 선생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 천장식을 하고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다.[193] 1949년 1월 서울특별시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1949년 3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193]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함.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됨. 향년 74세.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등록문화재 439호~442호로 등록 의혹과 논란[편집]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편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가 쿠데타를 계획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쿠데타를 기도하였다는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이범석은 그가 극좌파와 손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주장했다.[211] 그리고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여순 사건 당시 극우 정객이 극좌파와 손을 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하여 그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212] 그러자 김구는 조선일보에 사설을 발표, 여순 사건에 극우 관련운은 이해난(이해하기 어렵다.)이다고 맞받아쳤다.[212] 그러나 이후에도 김구의 쿠데타 준비설은 계속 나타났다. 국군 내에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김구를 추대하려는 세력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 CIC는 김구가 정부 전복 쿠데타를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의 첩보기관 CIC의 보고에 의하면 1949년 그는 염동진과 손잡고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개입한 증거[247]' 가 미군 방첩대에 입수되었다. 한편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225] 한편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 중 제4연대 소속 장교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울 계획을 짜기도 한다. '제4연대 장교들의 참모회의 과정에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보다 군사적 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토로되었으며,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247] 이에 따르면 이 정부는 김구의 파시스트형 정부에 합류할 북한군 내부의모든 친소장교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장교들과 경찰관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요원은 이승만 배후에 미국의 세력, 권력과 위신 때문에 비록 현재는 이승만 정부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유형의 정부는 결코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거나, 한국이 재건하고 군사적 기반을 통하여 국가들 중의 국가가 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247]'는 것이다.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같이 관여[225] 하였다. 염동진과의 쿠데타 기도는 곧 미군 방첩대와 당시 대한민국 총리인 이범석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고, 염동진과 김구의 쿠데타 시도 관련 문건이 미국 방첩대에 전달되면서 그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염동진은 김구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었다. 염동진은 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역할을 해왔다.[247] 그런데 염동진이 국군내 자료를 김구에게 전달하고, 군내 불만세력과 김구의 사이를 연결 목적으로 작성한 서신이 미군정 방첩대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이 군대내 파벌은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었다. 한번은 제출되는 정보들을 보호하기위한 보안장치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해서 내 자신이 점검을 해본 일이 있었다.[247] 한 건의 비밀보고서가 실질적으로 한국경비대(국군) 정보참모부(G-2)에 뿌려졌고 김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247] 이후 이 문서는 미군정 방첩대 수중에 들어간다. 그 후에 문서화된 보고서들이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구두 보고들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이루어졌다.[247] 그러나 한편으로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225],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225]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248] 한편 김구가 암살된 직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구의 암살 배경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어느 고위층이 외국 언론에 김구의 쿠데타 미수 계획을 발설하였다.[216] 이 익명의 고위인사는 외신 기자들에게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밝혔고, 바로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216] 라고 보도한다. 안준생 암살 사주[편집] 1945년 8월 귀국 직전 그는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을 암살하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249]'는 것이다.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249] 고 부탁했고, 부탁의 사유로는 '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부친 의사의 죄를 사하고, 미나미 지로 총독을 애비라 칭하였다.[249]'고 했다. 안중근 사후 생계의 곤란을 겪던 안준생은 조선총독부에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나미를 아버지라 했다는 근거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그의 안준생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안공근 암살 의혹[편집] 안공근 피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에 실종, 암살된 안공근의 살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실제로 해방 뒤에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중에는 김구의 측근이었던 모 독립운동가가 안공근을 납치,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는 의혹이 널리 언급되었다. 1932년 이후 김구는 그의 최측근 중 한사람이었던 안공근과 여러 번 마찰을 빚었는데, 그 뒤 안공근은 1939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실종, 피살되었다. 안공근은 한때 김구의 측근이었으나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형수(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로부터 심히 질책받았고, 임정의 자금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쓴 일과, 도박으로 자금을 탕진한 일이 있었다. 안공근은 김구의 심한 질책을 받고 임정 이동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밖에 안공근은 임정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기도했다. 김구는 안공근에게 부여된 임시정부 및 한인애국단의 대외 연락업무를 박찬익에게 맡겼다. 이후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중 상하이의 한 부두에서 사라졌었다. 안공근은 의문의 실종을 당했고, 이후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후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235] 이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 널리 언급되고 있다.[235] 김립 암살, 무고 의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김립 암살 사건입니다.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 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250] 그는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로,'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251]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251] 그러고서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251]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레닌이 준 자금을 김립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250] 는 반론도 있으며, 그가 중국 여자를 첩으로 삼고 향락을 즐겼는가 여부는 뜬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레닌이 한형권, 김립 등에게 준 자금은 한인사회당 내지는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공작금으로 지급된 자금이었다. 이들은 자금을 실제 활동비와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분배하였고 임정 측에는 내놓지 않았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 박노자에 의하면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다 한다.[250] 그러나 박노자는 한국외대 반병률의 주장을 인용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한국외대 반병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250] 박노자는 이를 두고 '동족 테러'라고 비판했다.[250] 그에 의하면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 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250] 이라는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사치, 향락을 하고 광동인 첩을 사서 즐겼다고 하였으나, 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장덕수 암살 의혹[편집] 1947년 12월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한독당을 용의자로 의심되었고, 그는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 짓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차마 김구 주석에게는 가서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252] 구미위원부에 10년간 근무했던 허정은 한인애국단과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준비하는데 조소앙이 기여한 점을 근거로 조소앙을 찾아갔던 것이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252]"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당시 수도경찰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180]'고 했다.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180]'라고 했다. 결국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임정과 한독당, 민주의원에 모두 간부로 몸담던 김석황, 조상항이 체포되면서 김구까지 법정에 서게 되었다. 만주 폭격 계획 의혹[편집] 해방 직후 그는 만주 폭격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김구와 염동진은 만주 지역의 폭격을 계획한 만주계획을 세웠다 한다.[253] 만주 폭격 계획은 1947년 말 ~ 1948년 초에 여러 차례 김구가 강조한 만주에서의 군사계획이었다. 이때 김구, 이청천, 이범석[253] 등은 북한을 폭격할 계획을 세운다. 김구 등은 '중국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북을 무력공격할 뿐만 아니라 중국 내전에서 장졔스의 중국 군대와 동맹해 한·중의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종국적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격멸한다.[253]'는 것이었다. 즉 남·북·만주가 포함된 이 계획은 한국·중국·미국의 동아시아 삼각 반공 군사 동맹 체제의 수립[253]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 조직원들이 떨어져나가면서 타격을 받았고, 인력과 장비의 부족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이후 김구의 암살로 만주 폭격 계획은 실패, 백지화된다. 김성수 암살 기도 의혹[편집]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 의혹 외에도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254]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55]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255]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민간인 살해 논란[편집]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18],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당시 일본의 기록이나 조선의 기록에서도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내용은 없다. 2003년 11월 말 김완섭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256] 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257] 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256]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256]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257] 고 밝혔다. 그러나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21] 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22] 이승만과의 결별 과정[편집]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날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해 한 시간 정도 요담한 후,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176] 그러나 12월 2일에 일어난 장덕수 암살 사건은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끝장내는 동시에 파국으로 끌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자신이 배후로 의심받자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승만은 “김 주석(김구)가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는 등 딴전을 피웠다.[176] 이승만은 자신을 재판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는 김구의 도움 요청을 회피하고 수수방관하였다. 평소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 했을 만큼[182] 그와 친밀하였다. 그러나 장덕수 사건을 계기로 양자의 관계는 악화되고 파국에 이른다. 이승만은 김구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였다. 분노한 김구는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했다.[176] 김구가 단정론의 철회와 남북협상론을 들고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인간관계의 파탄 직후였다.[176]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과정에는 어느정도 인간적인 감정도 작용하였다. 도덕성 논란[편집] 김구의 정치적 도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리처드 로빈슨은 김구가 정치적 도덕가는 아니라고 평하였다.[216] 미군정 외에도 브루스 커밍스는 김구가 송진우의 암살범이라고 지목했다. 한편 김성수의 암살을 공작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었다. 주애보와의 관계[편집] 김구는 이봉창 의거와 홍구공원 사건을 계기로 피신해 있었다. 이 피신기간 중 중국 국민당 관계자가 소개시킨 미혼의 뱃사공 주아이바오(주애보)와 부부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주아이바오와의 사이에서 자녀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평가와 비판[편집]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258]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258]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258]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한다.[258]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258] 미국의 시각[편집] 미국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259] 로 보고 있었다. 미군정은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260])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도 묘사하였다.[260]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114],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108]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다.[247]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247] 평가[편집]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261]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262] 1946년 초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263][264] 지나치게 고평가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265] 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265]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265]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265]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265]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265]”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266] 비판[편집] 전북대 교수 강준만과 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각각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267][268] 또,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의 반공주의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세력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269]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270]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은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가 건국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271]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272]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273] 한편 5·10 선거를 반대하던 4·3 항쟁에 침묵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274] 는 비판도 있다. 강준만은 '김구가 50대까지 어머니로부터 '사랑의 매'를 맞았다는 건 미담(美談)일 수도 있지만, 그걸 뒤집으면 그만큼 고전적인 인물이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275]'고 보았다. 테러리즘 논란[편집] 2008년 5월 출간된 비한국사 전공자로 구성된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서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물의를 빚었다. 한양대 석좌교수 신용하는 김구 테러리즘 논란에 대해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국내 일부 학자의 시각에 대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265] 신용하에 의하면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1930년대는 ‘완바오산 사건’으로 중국 내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됐고,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각지를 점령하면서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 신 교수는 “임시정부는 열세적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265] 7개월에 불과한 한인애국단 활동 기간 중 백범이 중국 국민당에서 독립군 장교 양성 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도 백범의 치밀한 지략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테러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공작전’으로 봐야 한다[265] 고 평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을 상대로 하여 사망 혹은 중상을 입히거나 인질로 잡는 등의 위해를 가하여 대중 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 혹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어떤 사람, 대중, 정부, 국제 조직 등으로 하여금 특정 행위를 강요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침략기관, 일본의 침략행위에 참여한 군인이나 관료등을 상대로 진행된 항일운동을 테러로 보지 않는다. 윤봉길과 이봉창등은 일본 천황, 일본 고위 군인등을 상대로 한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가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들에 대해 대해 암살을 시도한 백색 테러를 저질렀다는 의혹 또한 존재한다. 김구는 소군정기 북한의 지도자 및 관료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별다른 직위 없이 남한에서 정치 운동을 이끌던 사람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백의사가 북한의 관료였던 강량욱을 암살하고자 할 때 죄없는 아들, 딸, 친구 목사까지 죽게 만들었다.[276] 강량욱은 고위관료여서 민간인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생당한 강량욱의 가족, 친구는 민간인이므로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백색테러라 볼 수 있다. 그 외에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다.[108] 또한 커밍스는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277] 고 평하기도 했다. 38선 이북 조선에서는 1946년 3·1절 기념식 때의 폭탄투척 사건 이후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미군정의 보고서[254]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55] 해왔다 한다. 권위주의적인 행동[편집]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275][278]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 한국독립당, 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방북시에도[275][279]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275][279]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74]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274] 정치적 실패에 대한 비판[편집] 광복군 참모장이자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은 그가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하여 국제정세를 외면하다시피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이 백범 선생이다. 그런 까닭에 이박사는 마침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섰고, 백범 선생은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고 비판했다.[280] 제1대 내무부 장관과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동산 윤치영은 그는 김구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281] “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281] ”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281]'이라고 분석했다. 윤치영은 또 김구 생전에 그가 임정의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윤치영은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205] 16대 대통령 노무현은 그를 '실패한 정치인'이라 비판하였다. 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이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282] 그는 도쿄방송(TBS)이 일본 전역에 방영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 솔직하게 직접 대화'라는 주제의 90분짜리 토론에 참석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일본 여성 방청객의 질문에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고 밝혔다.[282]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편집]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 노선으로 갔다.[283] 훗날 국민당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283] 강준만은 미국의 패권장악과 중화민국의 몰락을 이승만의 승리와 김구의 패배 요인으로 보았다.[283] 이승만에 비교해서 웅변력이 떨어졌던 김구는 대중 선동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284] 이점 역시 김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김구는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한다.[219] 이승만도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219] 한편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219]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182] 그러나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182]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182]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82]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285] 일화[편집]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선생을 모시는 이들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267][286][287] 한미호텔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267][286]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286][288] 백범일지 윤문[편집]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의 교열과 윤문은 이광수가 하였다. 1945년 11월 김구가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출간할 때 이광수가 윤문을 자청했다[289] 한다. 백범일지의 윤문을 허락한 사람이 백범 자신인지, 아니면 백범 비서 등 주변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290] 문제는 춘원이 윤문 과정에서 친필본에 없는 문장을 임의로 첨삭해 원전의 텍스트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290] 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이광수가 백범일지 편찬에 참여한 것을 김구가 알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르면 “(이광수가) 속죄하는 심정으로 맡겠다고 하니 시켜보라고 주위에서 백범께 말했다. 김구는 그의 행실(일제 후반에 변절한 것) 때문에 망설였다”[289] 고 한다. 그러나 곧 이광수에게 백범일지 윤문을 맡긴다. 둘째 아들 김신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건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김신 씨의 대담, <신동아>, 1986년 8월, 347쪽.[289])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저서[편집] 《백범일지》(1947, 국사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백범일지입니다. 〈나의 소원〉[편집]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백범일지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強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하략)...백범[291] 그 외[편집] 《도왜실기》(1932, 엄항섭 정리) 《백범어록》(2008, 도진순 주해) 사상과 신념[편집] 남북협상 참여 목적[편집] 1970년대 이후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는 통일과 조국애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 과정이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다.[274]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274] 시점에서 새로운 정국 반전을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김구는 ‘백의사’ 등을 통해 대북 타격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했다.[274] 백의사 단원들이 소지한 무임승차권이 북한측에 입수되면서 그는 엄청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3.1절 경축식 폭탄 투척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혔[151] 고, 북한은 이후 그의 이름으로 풍자삼아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152] 해방공간 내내 반공, 반소로 일관한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는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조건에서 취해진 정치전술일 가능성이 농후했다.[274] 외교 문제[편집] 외교 문제에 소홀했다는 평가도 있다. 전 서울교육대 총장 이택휘는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 부재나 당시 강대국인 소련에 대해 배타 정책을 쓴 것은 외교적 투박함”이라고 지적했다.[265] 김구의 외교력 미숙에 대해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신용하는 “중국 국민당과 군사 협력 관계에 있었던 상황에서 백범이 공산당과 공식 관계를 모색하기는 어려웠다”며 “당시 장제스(蔣介石)를 설득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백범 외교의 진가”라고 반박하였고[265] 단국대 교수 한시준도 “백범이 광복군의 연합군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며 “이는 백범이 외교에서 상당한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265] 그러나 이승만을 통해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반론도 있다.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그는 이승만과 함께 임정을 미국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애국가에 대한 관점[편집]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292]'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292]'고 반박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편집] 그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274] ...(이하 중략)...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274] 또한“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위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좌파와의 연대는 극히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274] 임시정부의 존재를 좌파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1938년 이후 장졔스가 국공합작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해 김구와 김규식, 김원봉을 소환하여 합작, 협력하라고 하자 좌파의 임정입각을 수용하게 된다. 1922년 초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지원받았으나 임시정부에는 상납하지 않은 김립을 사살한 것도 그였다. 그는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을 보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250] 또한 김립은 레닌으로부터 매각하면 현금으로 바꿀수 있는 귀금속인 금괴를 일부 전달받았는데 이것 역시 임시정부에게 내놓지 않았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며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251] 으며,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251] 이라며 비판을 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외세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도 생각했다. 1919년 임시정부 경무국장 당시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혁명에 동참해달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는 소련 등 외국 세력에 기대는 것이라며 참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여순 사건에 대한 관점[편집]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214]', '반도(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214]'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오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니,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勵動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숙고하여 용감히 悔悟하고 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 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293] 여러분의 기대와 託付와 애국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293] 10월 30일 여순 사건 관련 담화에서 김구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293]'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처지지 않을수 없다[293]"고 발표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김구의 자서전《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또한 군인 출신 정치인 이후락과도 사돈관계이기도 하다. 증조부 : 김영원(金榮元[294], ? ~ ?) 조부 : 김만묵 (金萬默, ? ~ 1888년) 조모 : 장씨(張氏, ? ~ ?) 아버지 : 김순영 (金淳永, 1848년 ~ 1901년 2월) 어머니 : 곽낙원 (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부인: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1일) 장남: 입언 김인(立言 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육군 소령 자부 :안미생(安美生, 1914년 ~ 2007년, 안중근의 조카) 손녀 : 김효자(金孝子, 1941년 ~ ), 장자 김인의 딸 차남 : 서언 김신(瑞言 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대한민국 6대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주중국 대사, 국회의원 역임, 前 백범기념관 관장 자부: 임윤연(林胤嬿,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독립운동가 임학준의 딸, 위암으로 사망 손자 : 김진(金振, 1949년 10월 30일 ~ ) 대한주택공사 사장 역임 손자 :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 주상하이 총영사, 국가보훈처장 역임 손부 : 이정희(1959년 ~ ) 손자 : 김휘(金揮, 1955년 ~, 나라기획 이사 역임)[295] 손녀 : 김미(金美, 한화 그룹 회장인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과 결혼[296] 손녀사위 : 김호연(金昊淵, 기업인) 손자 : 김윤 장녀: 미상(1906년 ~ 1907년)-가마를 타고가다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쐬서 사망했다. 차녀: 김화경(金化慶, 1910년 ~ 1915년) 삼녀: 김은경(金恩慶, 1916년 ~ 1917년 2월) 삼종조카(9촌) : 김흥두(金興斗[297]) 사돈 : 이후락, 정치인 사돈 :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기업인 김구를 연기한 배우들[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이영후 - 1981년 《제1공화국》 MBC 이영후 - 1984년 《거부실록 시리즈 - 백산 안희제》 MBC 안대용 - 1984년 《독립문》 KBS 2 이영후 - 1984년 《조선총독부》 MBC 이영후 - 1984년 《그의 아내》 MBC 이치우 - 1985년 《새벽》 KBS 1 김진태 - 1989년 《백범일지》 MBC 김진태 - 1990년 《반민특위》 MBC 이영후 - 1991년 《여명의 그날》KBS 1 정욱 - 1992년 《님이여》 MBC 김상중 - 1995년 《김구》, 청년 김구 KBS 조상건 - 1995년 《김구》, 장년 김구 KBS 이영후 - 1998년 《삼김시대》 SBS 이영후 - 2003년 《야인시대》 SBS 이영후 - 2006년 《서울 1945》 KBS 이영후 - 2010년 《자유인 이회영》 KBS 유하복 - 2019년 《이몽》 MBC 라디오 드라마[편집] 이치우 - 1966년 《광복 20년》 TBS 다큐멘터리 이치우 - 《이승만과 김구》 이치우 - 1981년 《8·15 특집 그여름의 이틀》 KBS 라디오 연극 영화[편집] 전창근 - 1960년 《아! 백범김구선생》[298] 영화 전창근 - 1967년 《춘원 이광수 (1967년 영화)》, 영화 박암 - 1969년 《춘원 이광수 (1969년 영화)》, 영화 박암 - 1973년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영화 조통달 - 1986년 《윤봉길 의사》, 연극 이영후 - 1998년 《천년의 수인》, 연극 임동진 - 2005년 《청년 장준하》, 뮤지컬 왕기석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청년 김구 역) 왕기철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장년 김구 역) 임진택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노년 김구 역) 김홍파 - 2015년 《암살》, 영화 조진웅 - 2017년 《대장 김창수》, 영화 같이 보기[편집] 한국독립당 한국노병회 백범일지 백범기념관 동학농민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신탁통치반대운동 송진우 피살 사건 제1공화국 김규식 박찬익 이승만 장제스 안창호 안공근 105인 사건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이동녕 이시영 윤치영 김좌진 김두한 광복군 미군정 안공근 피살 사건 민주의원 고능선 김창숙 민필호 송병조 안미생 안재홍 안정근 안중근 양기탁 윤치호 장제스 중화민국 조성환 한국국민당 한인애국단 허정 홍진 하지 미 군정 송진우 경교장 삼청장 반공주의 장덕수 피살 사건 김홍일 안공근 장덕수 김석황 안두희 엄항섭 이유필 조소앙 김학규 안창호 여운형 여운홍 조만식 조완구 차이석 김신 임정 각료 선우진 신익희 이청천 독립촉성중앙회 한국국민당 백의사 염동진 김성수 김인 김준엽 김일성 김철 박헌영 신규식 이범석 이철승 장면 장건상 장택상 장준하 조봉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김구선생 암각문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대선 대통령 1대 한국독립당 6.63% 13표 2위 낙선 제1대 부통령 선거 부통령 1대 한국독립당 31.47% 62표 2위 낙선 각주[편집] ↑ 백범 발자국 따라 걸으면 큰길 되지요 ↑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 김삼웅《백범김구평전》시대의창,132쪽 ↑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p.514 ↑ 대한민국의 이북5도 행정구역 기준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37P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에 해당한다. ↑ 조선향토대백과 오담리 ↑ 김구,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6) 22페이지 ↑ 가 나 다 라 백범김구기념사업회 - 연보 ↑ 계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위인전기 《김구》편에도 김구선생이 어릴적 개구장이여서,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장난의 정도가 지나쳐서 친척 할아버지가 집에 데려가 며칠간 돌보아주면서 위로할 만큼 호되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 가 나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 김구 그는 누구인가”. 주간조선. 2006년 10월 2일. 2011년 11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가 나 다 라 마 백범일지 상권 참조 ↑ 가 나 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 ↑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50~51쪽쪽. ISBN 89-7199-148-8.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8쪽. ↑ 가 나 다 라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90~101쪽쪽. ISBN 89-7199-148-8.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피카츄: 돌베개. 98쪽 각주59쪽. ISBN 89-7199-148-8.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오마이뉴스 2009년 1월 17일 ↑ 가 나 경향신문 1997년 8월 13일자, 19면 ↑ 가 나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_contentA.asp?nNewsNumb=200811100050&ctcd=&cPage=1 ↑ 구자홍 기자, 〈치하포 의거로 발현된 청년 김구의 피 끓는 애국심〉, 《주간동아》, 2019년 3월 4일 ↑ 가 나 다 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0~251쪽 참조. ↑ 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당대총서 15)》 (당대, 2008) 265페이지 ↑ 백범일지 참조 ↑ 가 나 다 김구 - Daum 백과사전 ↑ 백범일지 ↑ 가 나 다 라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267쪽쪽. ISBN 89-7199-148-8.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440쪽쪽. ISBN 89-7199-148-8.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가 나 백범김구기념사업회 ↑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440~441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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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4월 23일 후임이동녕 전임홍진 제9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10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1927년 4월 10일 - 1927년 8월 후임이동녕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1930년 8월 4일 - 1933년 10월 후임양기탁 전임이동녕 제18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0년 3월 13일 - 1940년 10월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19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0년 10월 8일 - 1944년 4월 6일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20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4년 4월 6일 - 1947년 3월 3일 후임이승만 전임김규식 제3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1947년 3월 3일 - 1947년 9월 5일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4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1947년 9월 5일 - 1948년 8월 15일 후임이시영(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경무국장1919년 9월 - 1921년 5월 후임김용원 한국 광복군 통수부 주석(광복군 최고사령관)1944년 10월 - 1946년 1월 15일 후임원용덕(남조선국방경비대 수립) vdeh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대통령 (1919년 ~ 1925년) 이승만 박은식 국무령 (1925년 ~ 1940년) 이상룡 양기탁 이동녕 안창호 이동녕 홍진 김구 주석 (1940년 ~ 1948년) 이동녕 김구 이승만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후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vdeh신민회 창건위원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이회영 윤치호 류동렬 안창호 이경희 김홍량 김구 vdeh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이승만 이시영 제임스 밴 플리트 장제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응오딘지엠 아드난 멘데레스 허위 김좌진 오동진 조병세 안중근 윤봉길 이준 강우규 김구 안창호 신익희 김창숙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최익현 이강년 민영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S. 트루먼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프랑수아 톰발바예 다비드 다코 수루 미강 아피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레온 음바 아마두 아히조 하마니 디오리 조모 케냐타 무테사 2세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퉁쿠 압둘 라흐만 푸트라 알 하즈 타놈 키티카초른 쑹메이링 천궈푸 쑨원 천치메이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조만식 임병직 서재필 박정희 최규하 시리낏 끼띠야꼰 푸미폰 아둔야뎃 전두환 김규식 조소앙 유관순 vdeh1995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김지섭 2월 최팔용 3월 이종일 4월 민필호 5월 이진무 6월 장진홍 7월 전수용 8월 김구 9월 차이석 10월 이강년 11월 이진룡 12월 조병세 vdeh1995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정월터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vdeh2019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유관순 김마리아 손병희 안창호 김규식·김순애 한용운 이동휘 김구 지청천 안중근 박은식 윤봉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64909377 LCCN: n81017839 ISNI: 0000 0000 8389 4118 GND: 123233933 SUDOC: 107977966 BNF: cb170015989 (데이터) BIBSYS: 4063026 NDL: 00622698 NKC: jo201586575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구&oldid=24523797" 분류: 김구1876년 태어남1949년 죽음화기에 죽은 사람한국의 암살된 정치인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반일 감정대한민국의 반일 감정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살인자대한제국의 정치인대한제국의 승려대한제국의 교육인동학농민운동 관련자일제 강점기의 정치인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범죄 피해자테러 피해자한국의 범죄인대한민국의 정치인한국의 통일운동가민족주의자천도교 이탈자불교 이탈자대한민국의 감리교도6성장군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대원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원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대장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경찰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대한민국 제1공화국한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수상자한국의 독립운동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한국의 통일운동김구 가신민회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비상국민회의백색 테러한국노병회한국독립당 (1930년)한국독립당의 당원신한청년당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안동 김씨 (구)태탄군 출신숨은 분류: 참조 오류가 있는 문서인용 오류 - 날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9년 6월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모호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지적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2009년 4월출처가 필요한 글/2010년 6월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인용집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تۆرکجهBosanski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贛語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atina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4일 (목) 16: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범 김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백범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백범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구金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10대 국무령 임기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부통령 이인성 전임: 홍진(제8대)후임: 이동녕(제11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18·19·20대 주석 임기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국가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제17대)후임: 이승만(제21대) 신상정보 국적 조선 (1876년 - 1897년)대한제국 (1897년 - 1910년)일제강점기 조선 (1910년 - 1919년)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 1948년)대한민국 (1948년 - 1949년) 출생일 1876년 8월 29일(1876-08-29) 출생지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現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대한민국 기준))(現 태탄군 지촌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준)) 사망일 1949년 6월 26일 (72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2층 거실에서 암살됨. 본관 안동 정당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배우자 최준례 종교 유교(성리학) → 동학 → 불교 → 개신교(감리회)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독립운동가 김구의 필체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1876년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1] 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2][3]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4],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5]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876 ~ 1949) 1.1.2 유년기 (1880 ~ 1888) 1.1.3 청소년기 (1888 ~ 1892) 1.2 청년기 1.2.1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 ~ 1895) 1.2.2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 1.2.3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 1.2.4 치하포 사건과 은신 생활 1.2.4.1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 (1896 ~ 1897) 1.2.4.2 개화와 죄수 교육 (1897 ~1899) 1.2.4.3 승려 활동 (1898 ~ 1899) 1.2.5 애국계몽운동과 수감 생활 1.2.5.1 애국계몽운동 (1900 ~ 1910) 1.2.5.2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 ~ 1919) 1.3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1.3.1 임정 수립 초기 1.3.1.1 임시의정원 의원과 경무국장 (1919) 1.3.1.2 의정원 의원 재선과 내무총장 시절 (1920 ~ 1921) 1.3.2 국무총리 대리 시절 1.3.3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1926~1929) 1.3.4 임정의 재정난 1.3.5 항일의거와 군사단체 조직 노력 1.3.5.1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24~1930) 1.3.5.1.1 친일파 제거와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 1.3.5.2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30~1932) 1.3.5.2.1 이봉창 의거와 이즈모호 폭파 미수 1.3.5.2.2 윤봉길 의거 1.3.5.2.3 조선 총독 암살 미수 1.3.5.2.4 만주철도 폭파미수 1.3.5.3 수배, 피신 생활 (1932~1933) 1.3.5.4 옥관빈 암살(1933) 1.3.5.5 광복군 조직 노력 (1933~1937) 1.3.6 안공근과 결별 1.3.7 중일 전쟁 중의 활동 (1937~1939) 1.3.8 임시정부 주석 재임 시 1.3.8.1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4) 1.3.8.2 주석 재선 (1944~1945) 1.3.9 귀국 직전 1.4 광복 이후 1.4.1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1.4.1.1 귀국 직후 1.4.1.2 정치 자금 조달 1.4.1.3 국내 정치 활동 준비기간 중 1.4.1.4 반탁 결의와 송진우와의 공방전 1.4.1.5 반탁운동 개시와 총파업 1.5 하지의 임정요인 추방 사태 1.5.1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 1.5.2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1.5.3 정치 활동 1.5.3.1 미소공위 반대 운동 (1946) 1.5.3.2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폭탄투척 1.5.3.3 이승만과의 경쟁 1.5.3.3.1 화교 무역 시도와 실패 1.5.3.4 임정법통과 임시정부의 재편성 (1947) 1.5.3.5 반탁, 임정 법통 운동 (1947) 1.5.3.6 우익 진영 단결 노력 1.5.4 이승만, 한민당과의 합작 실패 1.5.4.1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1.6 생애 후반 1.6.1 이승만과의 결별 1.6.2 재판정 출두 1.6.3 남북 협상으로 선회 (1948) 1.6.4 남북협상 참여 1.6.4.1 남북협상의 실패 1.6.5 여순 사건 관련 공방전 1.6.6 칩거 생활 1.7 반민특위 재개와 부활 1.8 암살 1.8.1 암살의 배후 1.8.2 추도사 1.8.3 암살 직후 1.9 사후 2 기타 약력 2.1 1910년대 이전 2.2 임시정부 활동 2.3 광복 이후 3 의혹과 논란 3.1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 3.2 안준생 암살 사주 3.3 안공근 암살 의혹 3.4 김립 암살, 무고 의혹 3.5 장덕수 암살 의혹 3.6 만주 폭격 계획 의혹 3.7 김성수 암살 기도 의혹 3.8 민간인 살해 논란 3.9 이승만과의 결별 과정 3.10 도덕성 논란 3.11 주애보와의 관계 4 평가와 비판 4.1 당대의 여론 4.2 미국의 시각 4.3 평가 4.4 비판 4.4.1 테러리즘 논란 4.4.2 권위주의적인 행동 4.4.3 정치적 실패에 대한 비판 5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6 일화 6.1 백범일지 윤문 7 저서 7.1 《백범일지》(1947, 국사원) 7.1.1 〈나의 소원〉 7.2 그 외 8 사상과 신념 8.1 남북협상 참여 목적 8.2 외교 문제 8.3 애국가에 대한 관점 8.4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8.5 여순 사건에 대한 관점 9 가족 관계 10 김구를 연기한 배우들 10.1 텔레비전 드라마 10.2 라디오 드라마 10.3 연극 영화 11 같이 보기 12 역대 선거 결과 13 각주 14 참고 자료 15 참고 자료 16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 (1876 ~ 1949)[편집]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6][7][8][9] 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10]'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언함(金彦喊)의 부인이 진주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 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 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유년기 (1880 ~ 1888)[편집]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11][12]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13]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14]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15]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15] 청소년기 (1888 ~ 1892)[편집]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그는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11] 이때 목동 노릇도 했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7세에는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14] 소년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는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게 되었다. 과거 시험 당시 매관 매직의 타락상, 즉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14]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리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14] 청년기[편집]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 ~ 1895)[편집] 천도교, 동학 농민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11]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 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14]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 제국의 군부대가 쏘는 총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15]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11]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종선을 묻어주고 안태훈을 찾아가게 되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16]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편집] 스승 후조 고능선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후조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공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은 화서학파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20세에 청나라행을 결심,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참빗장수를 만났다. 연령은 김구보다 8~9세 위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으로 그를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고, 백두산을 관람하고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편집] 신천을 떠나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 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에 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 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에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17] 치하포 사건과 은신 생활[편집]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 (1896 ~ 1897)[편집] 을미사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라면서도 서울말을 쓰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고 발로 차는 등 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18]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자 일본 육군 중위 신분으로써 조선에 밀파된 군사간첩이라고 기술하였으나[18],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9]. 한때 김완섭이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20]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이었다고 주장했다.[21]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 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출처 필요]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쓰시마 섬(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22]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18]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을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종의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다. 1896년 덕수궁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었는데, 이 전화는 주요 관아는 물론 나중에 인천까지 개통되었다. 대궐에 있던 승지 한 명이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라고 적힌 것을 보고 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일단 사형 집행을 중지시키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 때가 전화가 개통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고종의 어명은 인천감리서의 이재정 감리사에게 신속히 전달되었고 사형 집행을 멈출 수 있었다. 훗날 김구는 자서전인 《백범일지》에서 "만약 전화 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전화가 처음 개통된 시기가 1896년인 것은 맞지만, 서울에서 인천까지 장거리 전화가 개통된 시기는 1902년이었으므로, 고종이 직접 인천감옥으로 전화를 건 것이 아니라, 궁궐에서 전화로 하명을 하고 이것을 인천에 전보로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23] 개화와 죄수 교육 (1897 ~1899)[편집] 김구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은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 동료 상인, 객주들과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24] 뒤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김구는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창수가 재소자에게 옥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일부는 김창수에게 밥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글공부에 참여하였다.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재소자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글을 대신 써줌)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민담과 노래를 배웠다. 이때 김구는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간수의 소개로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25] 그러나 중국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였고, 향후에도 영어에 관해서는 문맹이었다 한다.[26] 승려 활동 (1898 ~ 1899)[편집] 공주 마곡사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1898년 가을께에 출가자인 공주 출신 이서방 이라는 남자를 따라 공주 마곡사에 도착했다. 먼저 삭발한 공주의 이서방이 찾아와 마곡사에 식객으로 유숙하던 그를 찾아와 "하은당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境)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후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하은당을 은사로 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출가 초기부터 불경을 외우는 일과 법당의 허드렛일 도중 실수로 스승인 하은당과 다른 선임 승려들에게 질타를 당하였다. 다른 승려들은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고령이라 이 분들이 작고하면 마곡사 법당의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확고한 결심에 의한 출가도 아니며 승려의 길에 뜻이 없었던 백범은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24]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1899년 가을 황해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성실하게 농업에 종사하면 혼처를 마련해주겠노라며[27] 농사일을 권유하였다.[24]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애국계몽운동과 수감 생활[편집] 애국계몽운동 (1900 ~ 1910)[편집]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1년 뇌졸증으로 반신불수가되 투병중이던 아버지 사망.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인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24]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28]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28]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28]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敎員)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 보강학교(保強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13]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 ~ 1919)[편집] 신민회, 안악 사건, 105인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경성의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1910년 12월 그를 방문한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형문을 받았고, 재판에서 징역 15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1911년 일제의 피체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김좌진과 조우하였다.[29] 1912년에는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30]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55호였다.[31] 이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 도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8월에 특별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는데, 출옥후 어머니 곽씨로부터 소식을 접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32]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33]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편집] 임정 수립 초기[편집] 임시의정원 의원과 경무국장 (1919)[편집]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경무국장 시절 카이저 콧수염으로 단장한 김구 (1920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상하이 임시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였다.[34]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30]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였다. 9월에는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자신의 소원을 말하며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자 안창호는 그에게 경무국장(警務局長)을 천거하였다. 자신의 학식이 낮음을 이유로 경무국장직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으나 안창호는 거절하면 젊은 사람들 아래에서 일하기 싫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므로 그는 안창호의 임명을 받아들인다. 9월 통합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김구는 임정 내무부 경무국장(警務局長)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경호부장으로 여순근을 임명하고 한인 청년들을 고용하여 경찰, 정보감찰 업무, 밀정색출 업무를 분담시켰으며 동시에 재판소가 없는 임시정부에서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행사하였다.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35][36] 일본 영사관 경찰은 임정 요인 체포를 위해 경무국장인 그를 사살하려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 선우갑(鮮于甲)·강린우(康麟佑)가 왔으나 자발적으로 그에게 이실직고하자 추방하였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로 독립운동가를 따라 상하이에 나타났던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하였고, 이후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납치, 암살기도에 시달렸다. 황학선(黃鶴善)은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한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약물로 독살하려 했다. 김구는 황학선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의정원 의원 재선과 내무총장 시절 (1920 ~ 1921)[편집] 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가운데 있는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자대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37] 1921년 5월 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38], 후임은 김용원이 임명되었다.[38] 경무국장에서 물러남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만 활동하게 되었다.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첫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앉은 이가 김구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왔고, 그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재당선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선출되었다.[37] 1922년 7월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李始榮), 여운형, 조소앙, 이유필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9월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차남 김신(金信)이 출생하였다. 10월 여운형·조동호·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한국노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37] 국민대표자대회 소집의 주요 인물이기도 한 박은식을 규탄, 성토하였고 그의 아들 박시창이 찾아와 항의하자 구타하기도 했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39] 1922년 2월 소련의 레닌에게서 받은 200만 루블 중 40만불을 지불받은 한형권과 김립에 대한 사살령을 내린다. 노면직, 오종균 등은 상하이에서 김립을 사살하였다. 그는 백범일지에 김립이 광둥 여자를 사서 축첩하고 호화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김립이 호화생활을 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40]"는 것이다. 박노자에 의하면 김립의 암살 원인은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고 분석했다.[40] 국무총리 대리 시절[편집] 임정 요인들(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앞줄)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1923년 4월 9일 내무총장에 재임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였으나 그는 임정 고수파가 된다. 그러나 임정의 해체와 개조를 놓고 국민대표자 대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김구는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또한 임정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상하이 추방령을 선언한다. 23년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자발적인 자율방범대인 교민단 의경대를 설치할 때, 의경대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41] 최준례는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인 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1923년 그는 청년 오면직, 노종균 등을 파견하여 러시아의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추격, 제거하도록 지시하였다. 1922년 2월 11일 오면직, 노종균 등 을 파견해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 등을 사살했다.[39][42]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범일지에는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되었으나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43] 1920년대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23년 이후 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구미의 각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돈이 모였다.[44]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임시정부 재정부장 이시영(李始榮)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44]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44],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44] 미주 동포들이 후원금과 성금을 보내면 그는 친필로 쓴 붓글씨와 백범일지의 사본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1923년 12월 상해 한인교민단에서 치안조직인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하였고,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24년 4월 23일 국무총리 대리에서 면직되었고,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노동국 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1925년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활동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32]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45]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1926~1929)[편집] 1926년 9월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30] 임시정부도 정부인데 한미한 가계에서 태어난 자신이 수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수 있을 것, 이상룡, 안창호, 홍면희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입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렇다할 배경이 없는 자신이 수상이 되면 다른 실력과 배경을 갖춘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호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김구는 국무령직을 수락한다. 임시정부는 1926년 12월 14일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맡았다. 1927년 4월 10일 후계내각 발표로 국무령에서 총사퇴하고, 국무위원회의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되었다.[46]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47] 1930년 1월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47] 임정의 재정난[편집]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1930년대 초의 김구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 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 취직했다. 김구는 임시정부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재중국 한국인 교민단체와 교포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모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중국의 군인·공무원으로 취직한 한인, 시장 상인, 아편장사 등이 내는 돈에 의존했으며, 일부는 3인조 암살단등 비밀조직을 움직여 일본군의 군자금 탈취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48] 자금을 걷을 인력이 부족해 김구 자신과 임정 직원들이 직접 성금과 자금을 걷으러 다녔다. 이재에 밝지 못했고 장사수완이 부족했던 김구는 사업이나 장사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두상'(頭相), '수상'(首相)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한인 교포들은 그에게 '두상','수상'이라 불렀다. 망명정부의 수반이라는 위치 역시 그를 장사나 공업,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변변하지 못한 임정 청사의 월세도 대지 못해 김구는 늘 쩔쩔맸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고 임정의 충복인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다 한다. '그때 임정에는 삥천이라는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충성스러운 하인이 없었다.[49]'는 것이다. 이런 충복에게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몇년 동안 주지 못하였다. 삥천의 부인이 해산할 때 돈이 없어 밀린 월급의 일부만이라도 달라는 호소 조차 들어주지 못할 정도였다.[49]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후, 이승만은 미주지역의 성금을 독식했고 임정으로의 직접 송금도 가로막았다. 김구는 1928년 이후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자신도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절하였으나, 자금의 일부를 임정으로 보내주었다. 1932년 5월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 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임정에 흘러오는 자금에 활기를 띄었다. 1925년,26년 무렵 국내의 임정 연락망인 연통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29년 8월 상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고[47], 1930년 다시 국무령에 선출되었다.[50]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해 나갔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의 창당 작업에 참여하였다. 항일의거와 군사단체 조직 노력[편집]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24~1930)[편집] 대한통의부,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친일파 제거와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편집] 1924년에는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내려, 박희광(朴喜光), 김광추(金光秋), 김병현으로 3인조 암살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친일파인 보민회괴수(保民會魁首) 최창규(崔晶奎)의 가족을 백주(白晝)대낮에 토벌했다. 이 사건은 1924년 7월26일자 독립신문에 크게 게재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鄭甲周),이등박문의 수양녀이자 매국녀인 배정자(裵貞子), 일진회 회장 이용구등을 암살 하라는 지령으로 암살을 시도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일본 주요관계자 및 요인제거를 목적으로 박희광(朴喜光)등이 봉천성 일본영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실패했다.[51] 이들은 같은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당시 일본군 장성이 드나들던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 김병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김구는 이외에도 친일파 척결작업과 부족한 자금조달을 위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활동을 배후에서 비밀리에 지휘 또는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30~1932)[편집] 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최흥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봉창 의거와 이즈모호 폭파 미수[편집] 1930년 8월 4일 국무령에 임명되었고, 1930년 11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財務部長)에 선출되었다.[46] 이때 김구는 1927년 신약헌에 의한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회가 채택된 이후 그간 4년간의 정부 예산 집행의 결산서(決算書)를 무더기로 의정원 의장 앞으로 제출하였다.[52] 1931년에는 일본 정부 및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22년 만주에서 결성한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53] 을 강화해 임시정부 내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54] 김구는 홍보를 통해 청년 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말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같이 지내면서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55] 이봉창이 왜 천황을 죽이지 못하느냐고 힐난하자, 김구는 자극을 받아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히로히토 천황이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한편 2월 12일에는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신형 잠수정 이즈모 호(出雲号)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배 밑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윤봉길 의거[편집] 2월에는 윤봉길이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 요인인 왕백수, 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 상하이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 실패하였다. 4월초,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를 지휘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의 계기가 된 이 의거 직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 비서 엄항섭, 김철과 함께 미국인 장로교회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2018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함)의 집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야 했다.[56][57]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58] 조선 총독 암살 미수[편집] 1932년 4월 윤봉길의 2차 거사를 보내기 직전 김구는 유진식과 이덕주를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조선에 보내 조선총독 우카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의 동경의거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진행하는 한편으로 윤봉길의 의거를 준비하기에 앞서 두 명의 한인애국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였다.[59] 국내로 파견된 대원은 이덕주와 유진식이며, 이들에게 김구가 내린 임무는 조선총독의 처단이었다.[59] 이덕주(李德柱), 유진식(兪鎭植)은 왜총독 암살을 명하여 선파(先派) 입국하고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은 만주에 본장번(本藏番) 등 암살을 명하여 상기 진행코자 할 즈음에 4월 24일 김구는 이덕주와 유진식 두 명의 한인애국단원에게 조선총독 우원일성(宇垣一成)을 처단할 것을 명하고 국내로 파견하였다. “ 한인청년당원은 김구 일미가 계획한 흉폭행위실행의 역할을 감당하고 이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이나 그 간부 중 이미 이덕주라 칭하는 서리균(徐利均)과 유진식이라 칭하는 유진만(兪鎭萬)은 황해도에서, 주천현朱天懸이라 칭하는 유상근과 최흥식은 대련에서, 또 송진표(宋鎭杓)라 칭하는 장현근(張鉉瑾)과 김덕근(金德根)은 당관에 체포당했음으로...홍구공원폭탄사건의 하수인 윤봉길에 수교한 90불, 최흥식에게 지급한 580불전후 3회에 걸쳐, 유상근에 지급한 1,000불전후 2회, 이덕주에 지급한 120원, 유진만에 수교한 60불, 김긍호(金兢鎬)에 지급한 50불 합계 1,900불의 흉폭행위자금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는 직후 알 자료가 없어 명료하지 않으나 본년 3월 20일 불계에서 한인측 김구, 김철, 조소앙 등이 상의하고 중국측 광동파 호용청(胡用淸) 등과 더불어 중한민족항일대동맹(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한 사실에서 추찰하여 아마 우 동맹의 중국측 간부를 통해 혹은 광동파 내지 19로군 간부로부터 지출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60] ” —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고서 4월 24일과 28일 사이에 조선총독을 처단할 임무를 띄고 국내로 파견된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61] 이후 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됨으로써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만주철도 폭파미수[편집] 1932년 5월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軍務部長)에 임명되었다. 5월 일본의 만철(滿鐵)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김구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3월말과 4월 27일 각각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였다. 유상근은 상해를 출발하기 2~3일 전인 4월 25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2개의 폭탄 중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김구에게 돌려주고 수통형 형태의 폭탄 1개를 받아 자신의 거주지인 살파새로 188호 3층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4일 대련에 도착하였다.[62] 유상근보다 한 달 먼저 배편으로 상해를 출발하여 대련에 도착해 있던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대련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 먼저 대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을 사용하여 본장번(本庄繁) 일본 관동군사령관, 내전강재(內田康哉) 남만철도 총재,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 관동청장관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았다.[62] 5월 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ㆍ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58]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63] 수배, 피신 생활 (1932~1933)[편집]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5월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고 상하이에서 탈출했다. 그 뒤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길 때 군무부장에 취임하였으나,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張震球) 또는 '장진'(長震, 張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김구의 친할머니가 장씨(張氏)였기 때문에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이다. 가흥에서 김구는 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가흥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한편 김구는 이때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64]'라고 하였다. 이후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65] 옥관빈 암살(1933)[편집] 옥관빈 한편 1930년대 초부터 임정 창립 초기의 멤버였으나 임정을 이탈, 어느정도 거리를 두던 옥관빈이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비난, 조소하였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김구의 귀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 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66]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67] ”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자랑과 허영을 못마땅하게 봤던 그는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66]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67] 이는 그대로 김구나 임시정부, 의열단, 아나키스트들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임정에서 탈퇴한 뒤로 옥관빈은 흥사단 활동 등 일부를 빼고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를 했다. 더구나 옥관빈의 형 한명은 불조계에서 형사로 취직하기도 했다. 옥관빈은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한 대신 공장을 운영하며 매상을 올려 부자가 되었다. 옥관빈은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 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많은 돈을 써서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하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67] 호화스러운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67]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67]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67]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했다.[67] 이어 옥관빈 암살을 지원하였다. 옥관빈은 그해 8월 1일 불조계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를 만나 몰래 간통하고 나오던 길에 남화한인동맹원 엄형순 등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68] 광복군 조직 노력 (1933~1937)[편집] 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김구 (우측)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 광복군입니다. 1933년 장쑤 성 자싱(가흥)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였다. 이때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그러나 상하이 법대총장 저보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자싱으로 옮겼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을 추진하였는데 중국 측에서는 진과부,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였다.[56] 5월 장개석과 만났으며,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강소성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69] 의거와 피신 이후 한인애국단의 조직이 어렵게 되자 한인애국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한국특무대독립군으로 흡수, 개편된다.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의견의 대립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산론이 나오자 김구는 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7월 조소앙·김두봉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체와 단일신당결성을 주장하여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하였다.[70] 10월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71] 김구는 남경중앙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71]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69] 그리고 김구는 곧 한국국민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한 김구 등은 1936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72]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73] 그 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74][75]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76] 이후 김구는 한국독립당의 당의 무력조직인 한국독립당군의 조직을 준비하여,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보게 된다. 안공근과 결별[편집]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자신의 큰형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77]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77] 당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45][78] 그런데 김구는 안중근의 부인과 가족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분개하였다. 이를 두고 사학자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45] 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며 안공근을 질타하고 꾸중하였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45] “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79][80] ” — 백범일지 중에서 백범일지의 기록과는 달리 안공근은 '자기 식구만 충칭으로 이주하게 한 것'이 아니라 중일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을 자신의 가족들보다 먼저 피신[45]'시켰다.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45] 오영섭에 의하면 '안공근이 김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김구로부터 신망을 잃었으며 그로 인해 김구의 단체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는 위의 기록을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81]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안공근 자신에게 쏟아질 것임을 누구보다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 형의 가족을 함께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의 현지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81]'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해서 안공근의 형수와 조카들을 데려오지 못한 일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81] 중일 전쟁 중의 활동 (1937~1939)[편집] 총탄을 맞고 수술 후 회복한 김구 (1938년) 중일 전쟁 발발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의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표 지청천) 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82]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었다.[82] 1938년 5월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玄益哲)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유동렬, 지청천 등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83] 타고난 체력으로 그는 과다출혈을 하고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총격 직후 백범일지에 의하면 네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시켰다. 병원에 가서 치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의 글씨체는 떨려서 구부러진 글씨를 썼는데 이를 일명 총알체라 한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83] 1938년이후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 개조론, 임정고수론 논쟁 당시 개조파와 창조파에 참가하거나 기울었던 인사들이므로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 소수인사들은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정체이며 민족의 대표기관이므로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84] 한편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임정의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는 청년층의 비난도 받게 되었다. 1939년 4월 모친 곽낙원여사가 인후증(咽喉症)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이 일본군 타살사건으로 체포된 뒤에도 아들을 신뢰하였고, 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도 늘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곽낙원은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뒤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말 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85]'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85] 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9년 김규식, 이상정 등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86] 임시정부 주석 재임 시[편집]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4)[편집] 충칭 임시정부 청사. 한국 광복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主席)에 선출되었다. 그해 승인거부되었던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었고, 그해 9월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한국독립당군(1939.1)을 확대 개편하여 한국광복군(1940.9)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가 주석 장제스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4월 치장(朞江)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통합)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70]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1940년 9월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85]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87]1940년 9월 워싱턴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85] 이후 구미위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88] 1940년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73] 1942년 2월에는 김성숙, 김원봉, 장건상 등 좌파[모호한 표현]들이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였다. 5월에는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당시 임정 내부 좌·우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측이 한독당의 김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89]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주석 재선 (1944~1945)[편집] 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번과 면담한 김구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73]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8월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으로 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이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그는 광복군 통수부의 주석도 겸하여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90]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한국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金仁)이 폐질환으로 중국 쓰촨 성에서 병사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8월 15일 섬서성에서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로부터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귀국 직전[편집]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로 귀환하였다.[91]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30]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11월초 국민당의 송별식에 초대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송별연에도 참석하였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 일행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92] 김구는 11월 3일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 상하이 비행장에서 중국 국민당 인사들의 환송을 받고 출발하였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편집] 귀국 직후[편집] 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김구는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1월 3일 오후 비행기편으로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로 정했고 지주 최창학 자신의 별장인 죽첨장을 그에게 기증했다. 이후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93] 선언하였다. 11월 4일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현시가 20억여 원)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했다.[94] 수십년간 대일항전의 동지로 지내온 김구에 대한 최후의, 가장 파격적인 지원이었다.[94] 장제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김구에게 20만달러라는 거액을 쥐어준 데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향후 일종의 ‘보은’을 다짐받는 의미가 들어있었다.[94] 그러나 김구는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실패했다.[94] 당시 김구·김규식 등은 임정 대표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 해방과 함께 정권을 인수한 미군정이 또다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94]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 박헌영과 인공 내각의 견제를 위해 임시정부가 정부 의 명칭을 쓰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미군정은 김구의 개인경호원과 광복군에게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92] 하였으나 장제스가 준 돈 20만 달러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귀국하자 윤치호(尹致昊)는 그와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친일파의 거두로 지탄받고 있었다. 윤치호의 영향력과 일제 강점기 당시 그로부터 받은 지원금 등 윤치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김구는 거절하는 대신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정치 자금 조달[편집] 1945년 11월 5일 아침 김구 일행이 서울에 입경한 그 다음날, 송진우는 낭산 김준연을 대동하고 백범의 숙소로 마련된 서울 서대문의 경교장(京橋莊)으로 예방해 불굴의 노애국자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고, 같은 날 낮 이번에는 국민대표준비회의 대표 자격으로 장택상을 대동하고 예방해 후원회 기금을 전달했다.[95] 얼마 뒤에 임정 요인들은 그 후원금 가운데 깨끗하지 못한 돈이 들어있다 하여 국민대표준비회 사무실로 들고와 처리 문제를 논란했다.[95] 대화는 자연히 거칠어지면서 주먹과 흥분의 수라장이 벌어졌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고하 송진우는 참다못해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에는 양민의 돈도 들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요. 이런 큰일에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아오”라고 설득함으로써 겨우 수습하기도 했다.[95] 11월 중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20만 달러의 자금을 보내준다고 연락하였다.[94]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김구는 중화민국의 의 정치자금을 수용하였다. 중국과 경쟁하기를 원치 않았던 미군은 중국측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돈과 함께 보내준 3명의 무전사와 무전기에 대해서도 무전사를 추방하고 무전기는 압수했다. 다급해진 김구는 뉴욕의 주미 중국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결국 돈은 중국은행에 보관된다.[94] 11월 한민당 인사들이 찾아왔고, 최창학·방응모 등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이광수가 한동안 그를 방문하지 않자 대노하여 이광수를 찾았다. 김구의 불호령을 듣고 경교장에 불려간 뒤 이광수는 종종 경교장을 찾았으며 1947년 이후 김구의 7촌 조가 김흥두와 함께 백범 일지 한글판 번역작업에 동참한다.[96] 국내 정치 활동 준비기간 중[편집] 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끝에 앉은 이가 김구) 45년 11월 23일 김구는 바쁜 와중에도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97]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97] 11월 24일 내외신 방송과의 기자 회견을 하였다. 여기서 김구는 '내가 이박사보다 더 나은 수단을 갖고 왔다고 생각해서는 잘못이오. 다만 근 30년 동안 해외에 있다가 돌아온 터이므로, 현 정세에 어둡고 정세를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소.[98]'라고 답변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99]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진 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100]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100]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 주관하였다.[101] 순국선열추념대회 총재로 선출되었다.[101] 12월 25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73] 반탁 결의와 송진우와의 공방전[편집] 송진우 피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송진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의문을 입수해 검토한 뒤,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이어 안재홍, 여운형 역시 반탁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히 관철하려 하였다. 12월 29일 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회의에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남로당(조선공산당의 오류로 생각된다.) 사람들까지 다 나왔다. 다들 아주 격해 있었다.[102] 송진우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강원룡에 의하면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102] 한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103]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송진우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다.[102] 송진우는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104] 송진우는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의 통치권 주장을 미 군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105]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106][107]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106][107] 송진우의 이러한 주장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김구의 추종자들은 1945년 12월 30일, 그를 자택에서 저격, 사살했다.[104] 송진우와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 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108]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브루스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108] 조병옥도 김구를 암살 배후로 지목한다. 훗날, 국립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술에 취해 말하기를,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109]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110] 반탁운동 개시와 총파업[편집]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하지에게 보냈다. 12월 30일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111]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위원회는 반탁시위를 주관하였고, 12월 31일 오전 그는 국자(國子)를 발표한다. 그 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46년 1월 1일 김구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 다른 임정요인도 함께 군정청으로 불려갔다. 이때 김구는 하지로부터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었고, 김구는 하지의 융단에 올라 이자리에서 죽겠다고 대들었다 한다. 송남헌은 그가 하지로부터 추방시키겠다고 위협당하였다고 증언했다.[112]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113] 엄항섭 대독을 통해 군정청 한국인 직원의 복귀를 촉구했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전해지자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다시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114] 1946년 1월 2일 갑자기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의 지지로 돌변했다.[115]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선공산당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 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116] 김구는 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부수립이 우선이라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반탁의 입장을 철회한다. 하지의 임정요인 추방 사태[편집] 임정 주최의 반탁 운동이 극치에 달한 1945년 12월 31일 하오 하지 중장은 조병옥에게 연락관을 보내 사령관실에서 요담할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즉시 하지를 만나러 갔다. 하지 중장은 말하기를 군정을 접수하려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즉시 처치해야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임정 요인 처치에 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조병옥에게 원고 전문을 보여주었다.[117] “ 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들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군정 접수운동의 여파로써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오늘밤 0시를 기하여 인천 소재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118] ” — 원고 내용 하지는 김구에 대한 물리적인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조병옥은 즉시 이 원고를 다 읽고 난 뒤 경악하면서 하지중장에게 말하기를 임정 요인들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3.1 운동 이래 자유독립의 혁혁한 경력을 가진 분으로 민족의 자유전치운동의 봉화를 든 민족운동의 투사이므로 이 애국자들의 국외추방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한국인의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미군정은 한국에 있어서 실패로 끝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그런 조치는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118] 하지 중장은 조병옥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방송을 중지하겠다고 하였다. 조병옥은 즉석에서 김구와 하지의 면담을 약속받았다. 조병옥은 하지 중장에게 "나에게 김구 주석과 협상할 전권을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 중장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118] 12월 31일 저녁 조병옥은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숙소를 방문하게 되었다.[118] 조병옥은 김구와 여러 시간 면담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에게 진언하기를 “ 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도 한 푼도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맹약한 이상 현재의 입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 접수 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공산주의 치하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한반도는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 철제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미군정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오니 주석께서는 그 점 신중히 심사숙고하시어 한번 하지 장군과 만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보심이 어떻습니까?[118] ” 조병옥의 말에 김구는 하지 중장을 만나 보겠다고 수락, 그의 진언을 들어주었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편집]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앞줄 가운데가 김구, 앞줄 오른쪽이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왼쪽은 조완구, 프란체스카 도너 순,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1946년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104] 1월 이승만이 미국에 갈 때,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민족 외교'를 위해 '외교사절 후원회'를 조직했다.[119] '이승만 박사 외교사절 후원회'의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고, 김구와 배은희 등은 반탁총동원위원회나 비상국민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거뒀다.[119] 그리고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국내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도미 외교를 지지하였다.[119]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조병옥에 의하면 '한편 미군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익 우익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또 이승만은 완강한 정치인이라고 해서 한국 정치계에서 제가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120] 김구 주석은 극렬한 반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였다.[120]'는 것이다. 이에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반전을 꾀한다.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편집]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구는 김규식, 이승만,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21]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22] 1946년 2월 12일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121]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123]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121]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김구와 이승만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124] 2월 14일부터 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125] 반탁운동을 수단으로 해서 국민의회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수립케 하려는 것이었다.[125]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125][126]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127]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127] 3월 5일과 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125]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128]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128] 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등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129] 정치 활동[편집] 미소공위 반대 운동 (1946)[편집]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미소공동위원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월 20일에 열린 미, 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 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130]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131]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려 하지 않자 그것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131]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31] 46년 3월 22일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이때 김구는 이승만에게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초당적인 국민운동'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132][133]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134]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134] 1946년 5월 25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 서울역에서 (오른쪽 두 번째가 김구)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135]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136] 6월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단독정부론을 말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137]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138]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138] [139] 이승만의 연설에 이어 김구는 이 대회에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138][140][141]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김구는 부총재에 선출됐다.[138] 이승만은 국민운동의 총본부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민총)의 설치를 발표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민총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138]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 이승만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142]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43]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폭탄투척[편집] 1946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염동진의 백의사는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앞에서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백의사 청년단원들은 김일성에 대한 폭탄을 던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의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가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한 것이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144][145][14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삼일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간 열여덟 살 소년 김형집이었다.[144][147][148]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과 김책의 집에도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양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144][147][148]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149] 을 분실했고[144][148][150]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151]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151]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152]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153]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153]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153] 이승만과의 경쟁[편집] 이승만, 해방 직후 정치적으로 경쟁하던 중, 장덕수 암살 사건을 계기로 결별한다. 김구는 평소 이승만에게 우남 형님, 우남장(雩南丈) 이라며 존대했다. 그러나 반공주의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미국의 한인 교포 노동자들과, 청년층 지식인들이 정치자금과 후원금을 송금한 이승만과 비교할 때 그에게는 정치자금이 부족했다.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화교 무역으로 정치자금 마련[94] 을 모색한다. 이승만은 장제스가 김구에게 지원하려던 거금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는 정치자금에 관한 한 일찌감치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미군정의 후원아래 친일 경제인들이 조직한 대한경제보국회가 1946년 초 2천만원의 정치자금을 모았는데 이중 1천만원이 이승만에게 전달될 정도였다. 이즈음 20만달러의 반입을 포기한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 돈을 주기로 약속한다. 임정 시절 이승만과 재미교포 사회에서 받은 지원에 대한 보답 성격이었다.[94] 이때부터 돈을 손에 넣기 위한 이승만의 집요한 노력이 시작된다. 그는 1946년 2월 장제스 총통에게 전보를 보낸다. “20만달러를 미국 안전신탁공사(American Security and Trust Company)에 예치시킨 뒤 워싱턴의 임병직 대령(이승만의 심복)에게 지불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보를 접수한 국민당 우티에청 사무장은 잠시 난감했지만 곧바로 장제스에게 “이 돈은 이승만이 아닌 김구가 수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제출한다.[94] 방응모, 조선일보의 사주였던 방응모는 귀국 이후 그의 정치적, 경제적 후견인이었다. 이승만은 1946년 2월 전보를 시작으로 47년 말까지 4~5차례에 걸쳐 장제스에게 이 자금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한다. 미군정과의 관계악화로 46년 말 도미했던 그는 이듬해 4월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일부러 상하이·난징을 거쳐서 돌아온다. 이때 장제스와 처음 대면한 그는 20만달러 이야기를 꺼내지만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한다.[94] 이때 장제스는 서울의 김구에게 전화했고, 김구는 이승만이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렀음을 접하고 자금 일부를 국내로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그로부터 두달 뒤인 47년 6월 김구는 주한 중국영사관에 부탁해서 10만달러를 임시정부 주화(중)대사관의 운영자금으로 지원토록 한다.[94] 국내정치에서 이승만과 긴장관계가 조성된 만큼 돈을 자기몫으로 챙긴 것이다.[94] 그러나 이승만은 이 돈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해 8월 프란체스카와 함께 주한 중국영사관을 찾아가 나머지 10만달러를 달라고 사정하지만 실패한다. 이 일 직후 10만달러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들여와 경교장 생활비와 ‘백범일지’ 출간비용 등에 충당했다.[94]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김구는 일단 한민당이 보낸 자금과 경방에서 보낸 7백만 달러를 받아들인다. 조선일보의 방응모와도 연대하여 경제적 후견인으로 삼는다. 방응모는 곧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재정부장을 지냈다. 방응모는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101],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1]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154],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 등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46년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 유해봉환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방응모는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에 서자 그와 결별하기 전까지 그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거나 지원하였다. 1945년 말 그는 1천 5백만~2천만 원의 '애국금'을 기부받았다.[155] 정병준에 의하면 '김구가 받은 1천 5백만~2천만 원의 '애국금' 중 상당액이 이승만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155]'고 한다. 정치 자금의 부족은 그의 활동에 제약을 가져왔다. 화교 무역 시도와 실패[편집] 김구는 다른 편으로는 중국 화교무역을 통한 정치자금 조달을 계획한다. 20만 달러의 '해프닝' 이후에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에는 모종의 계획이 추진됐다. 1947년 말 임시정부 주화(주중국)대표단에서 국민당과 김구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민석린은 ‘중한동제실업공사 조직요강 초안’을 작성,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을 통해 장제스에게 올린다.[94] 중국 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각 당의 경제기초 건설을 위해 중한동제실업공사(中韓同濟實業公司)를 조직한다. 업무범위는 무역·운수·어업·부동산·공장·은행·농장 등으로 정한다. 자금은 우선 1백억원을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절반씩 출자하고 장래 업무발전 상황에 맞춰 증자한다. 해방 이후 가장 비중이 컸던 대일무역을 비롯해 대외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유일한 것이 타이완·홍콩·마카오 등지와 이뤄졌던 화교무역이었다. “타이완산 소금이 한국에 수입됐는데 반응이 좋았고 빈 배로 돌아가기 아까워서 인삼을 실어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같은 한·중간 경제활동을 관장함으로써 양당의 정치자금으로 쓰고자 했던 것이다.[94] 민석린과 우티에청 간에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국내에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운 김구나 장기간의 대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자금이 소진된 장제스, 양측의 이해가 맞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임시 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결고리였던 우티에청은 바람직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장제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만다.[94] 1948년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결정적 국면에 다다른 시기였다. 남북한이 각자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김구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이승만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다. 중국 국민당 역시 국공 내전이 심화되면서 베이징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내주는 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94] 결국 중화민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중국 공산당에게 뺏기게 되었고, 이로써 화교무역을 통한 김구의 정치자금 조달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임정법통과 임시정부의 재편성 (1947)[편집] 8.15 광복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윤봉길의 가족. 왼쪽부터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이후 경교장에서 기념사진. 왼쪽부터 손기정, 서윤복, 본인, 남승룡 1947년 1월초 이승만의 도미 외교 목적의 출국시 김포 비행장에 나가 환송하였다. 1947년 1월 이승만이 미국을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156] 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156] 존 하지 중장으로부터도 다시 경고를 받았다. 결국 김구는 학생들에게 과격시위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7년 1월 18일 김성수,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경성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구는 김성수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157]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 등에도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이는 대부분 일회성이었다.[158] 원래 우익진영은 김구의 주도로 1947년 1월 18일 김구의 주도로 우익진영은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 1주년을 기념, 대대적인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이승만의 만류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고로 김구는 반탁시위를 보류하였다.[156]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는 천도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축소되었고,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156]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가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159],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7년 2월 14일~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만약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로 하여 이승만의 도미를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젠 자기 길을 걷겠다고 나선 셈이었다.[125] 김구는 임정 계열과 함께 이승만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3.1절 전후로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의 3.1절을 전후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은 기밀이 누설되어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조차 '아이들 장난'으로 조롱하였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했다.[127] 미군정은 김구와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을 호출하였고, 군정의 호출을 받고 3월 5일 임정 요인들을 데리고 주한미군사령관실을 방문하였다. 군정청은 그들을 잡아넣겠다고 협박했고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정부수립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정해구는 김구의 이같은 시도에는 '이승만 부재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의한 김구의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국민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구의 이같은 시도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대처와 여타 세력의 지원부족으로 제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127] 한편 김구의 반탁노선에 반발한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국민당 세력은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한독당을 이탈하기도 했다.[160]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부주석으로 추대되었다.[161] 김규식.장건상.김붕준(金朋濬) 등 중도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161]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162] 반탁, 임정 법통 운동 (1947)[편집] 김구 (1947년) 4월 21일 이승만이 귀국하는 날, 김포에 마중을 나가 단정론 연설만은 그만두도록 충고하였다.[163] 단정론 연설이 자칫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승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연설을 취소하였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김구는 이승만과 반탁 투쟁을 전개했다.[131]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164][165]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166]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6.23 반탁데모를 격려하였다. 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167][168] 그러나 그러나 김구와 이승만의 격려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169]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170]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171]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도 않았다. 우익 진영 단결 노력[편집] 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함께 (1947년) 반탁운동, 임정 법통 운동과 함께 김구는 우익진영 단결, 통일을 추진했다. 그는 우선 반공, 우익진영 정당 통합을 추진했고, 다수의 우익인사들은 그의 단결 노력에 동조했다. 안재홍은 광복 직후 조선국민당을 창당하고, 권동진은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여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김구의 우익진영 단결운동에 동조하여 한국독립당에 통합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놓고 꾸준히 충돌하다가 국민당계는 탈당하게 된다. 미소공위에 긍정적 의사를 보였던 신한민족당 계열 역시 축출당했다. 김구, 조완구, 조경한 등은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고[172], 김구는 47년 2월 26일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172] 한민당에서도 김구의 우익진영 단결 노력에 반응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173] 이는 장덕수에 대한 김구의 감정이 악화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174]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75] 그러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176] 김구는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성명을 번복하여 발표하였다.[175] 성명서 발표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175][177][178]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179] 김구가 반탁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우익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이승만측과의 계속 갈등, 대립한 이유는 중경임시정부의 현실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172] 이승만, 한민당과의 합작 실패[편집] 장덕수. 재령 보강학교 당시 그의 제자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173]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180]'는 것이다.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180] 미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173][181][182]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173]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182][183]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편집] 단국대학 설립시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앞줄:김구 장형, 뒷줄: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이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張炯)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저격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본부였던 원효사는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은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184][185][186][187]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대해서는 건국실천원양성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생애 후반[편집] 이승만과의 결별[편집]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관련자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모욕감때문에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결별[188] 하였다. 김구는 한살 위인 이승만을 깎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에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189] 강준만에 의하면 '어찌됐건, 피를 나눈 형제 못지 않게 정을 주고받았던 의형제 사이의 애증관계가 아니라면, 김구의 행동은 달리 이해하기가 어렵다.[189]"고 했다. 미군 군사법정에서 증인 자격으로 심문중인 김구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뒷짐 지고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182]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였다.[190]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182]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191]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한민당은 김구와 임정계를 일제 시대 악명 높은 사교 집단인 백백교에 비유하면서 "살인마의 조직과 명령 계통을 근절하라"고 촉구하였다.[191]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91] 사학자 신복룡은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와 이승만이 이끌던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통합이 무산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김구의 배신감이 배가되었다."라고 했다.[191] 1947년 백야 김좌진의 추모회에 참석한 김구는 김좌진의 추도사를 했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192]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재판정 출두[편집] 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3) 1948년 2월 초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명의로 군정청 재판정 소환 출두서와 여비가 경교장에 도착되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193]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194] 3월 13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출두하였다. 김구는 증인 자격으로 재판정에 섰지만 미군정청 군법무관들로부터 추궁당했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청 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내가 지시했다고 하는 것은 나를 모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놈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설산이 죽은 것만도 분한데 왜 나한테 자꾸 이러느냐?[195] 암살범인 박광옥은 김구의 증인 신문 때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195]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196] 그러나 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3월 4일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 피고인들은 진술서가 고문과 강압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 에서는 트루만 미국 대통령 명의로 3월 12일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197] 장덕수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은 3월 한달 동안 21회에 걸쳐 계속 되었다.[197] 남북 협상으로 선회 (1948)[편집] 38선에서 모습 김규식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 조소앙이 찾아와서 그를 만류하였고 이철승 역시 그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현실적인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김구는 한편 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197]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의 한사람이던 김학규도 반대하였다.[198] 그리고 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198],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99]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렘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199]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199] 는 공격을 당했다. 남북협상 참여 당시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200]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가 방북할 뜻을 표현하자 수백 명의 청년들이 경교장 앞에 와서 못가십니다 를 외치며 가로막았다. 김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쳤지만 학생들이 물러나려 하지 않자, 아들 김신, 비서 선우진에게 북행길을 포기한다 하고 발표하고는 담을 넘어서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김구의 출발 소식이 알려지자 북행길을 주저하던 김규식 역시 출발한다. 4월 김구 북행을 결행하려 하자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일행들은 '이승만 박사와 노선이 분열되면 안 된다'며 경교장에 드러누워 김구의 북행을 저지했다[201]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그러나 김구는 자신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도와주지 않고 이제와서 북행길은 반대하느냐며 학생들을 향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 경교장에서 사람이 나와 김구는 북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하자 이철승 등 청년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김구 일행은 이들을 피해 담벼락을 넘어 경교장을 나갔다. 청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일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러 북한으로 갔다. 남북협상 참여[편집]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202]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193]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203]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순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204]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205]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조국분단의 위기를 만구하기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한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며 ...(이하 중략)...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206]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202] 남북협상의 실패[편집]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고 확신했다는 것이다.[207] 1948년 4월 26일 김구는 송태산장을 찾아 도산 안창호의 형인 안치호, 여동생 안신호를 만나고 내려왔다. 5월 10일 3.8선을 넘어 귀환하였다. 남북협상에 다녀와서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뭐니 해서 거기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208] 고 했다. 그러자 김선(1910~) 등 총선거에 출마한 당원들은 '할 수 없이 탈당[208]'하였다. 김선 등은 '그래도 다 같이 애국운동 하던 사람인데(이승만) 이젠 나라 세운다니까 여기서 일하자.' '말이 당수지 나가랄때 나가자 우리가 아쉬울 것이 있냐[208]' 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208]'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208]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208]'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208]'라며 조롱하였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209] 1948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자 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자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210]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210] 여순 사건 관련 공방전[편집]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중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211] 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212]-서울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212]-자유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212]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213]"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213]"라고 밝혔다. 이범석은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213]"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이범석은 포고문을 발표한다. 이범석 총리는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고 언급하며, 이 반란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212] 이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신을 극우파로 지적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그러자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는 10월 27일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211][214] 김구의 반박 보도문은 조선일보와 한성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4]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215] 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그 극우가 대체 누구냐며 윤치영에게 따졌고, 윤치영은 누군지는 알수 없지만 극우 인사인 것은 분명하다며 응대하였다. 칩거 생활[편집] 김구 (1949년) 한편 김구는 분명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닫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216] 비록 정치도덕가는 아닌 김구였지만 그러한 조선 민족의 희생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그는 김규식과 함께 타협하여 민족통일을 이룩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리처드 로빈슨에 의하면 '두 김씨의 입장은 이승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혐오감, 애국심이 복합된 것이었다.[216]' 한다. 1948년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217][218]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217][218]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219]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219]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219] 반민특위 재개와 부활[편집] 김구는 민족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민족의 반역자인 친일파들은 반드시 처단해야한다며 반민특위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그일로 악랄한 친일파였던 장경근, 김창룡, 김종원, 안두희, 등의 모든 친일파들의 입장에선 김구는 신경이 거슬렸던 존재였다. 이일로 인해 암살할 명분이 생기기도 했다. 암살[편집]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193]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220]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193]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221]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21]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221]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222]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222]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222]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암살의 배후[편집] 김구의 묘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223]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224][225][226]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한편 안두희는 초기 진술에서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216] 고 진술하였다. 한편 안두희가 자신의 군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추도사[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국무총리 이범석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전 임정 부주석 김규식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국독립당 대표 엄항섭 추도사 전문 암살 직후[편집]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216] 6월 27일 이승만은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비판했다.[216]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216] 김구의 장례는 국장이 결정되었으나 한독당 측에서는 민족장을 고집했다. 정부에서 이범석과 신성모, 허정 등을 경교장에 파견하자 조완구, 조소앙 등은 너희가 죽여놓고 너희가 국장을 하느냐며 흥분했고 실랑이와 몸싸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측이 보낸 사절단과 한독당 인사 간에 마찰이 빚어졌고, 김규식의 중재로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은 10일간 거행되었다.[227] 김구의 국민장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고,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후[편집]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228]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229][230] 기타 약력[편집] 1910년대 이전[편집] 1880년 백부 김백영 사망 1888년 조부 김만묵 사망 1892년 임진년 경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 그외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고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231] 1901년 부친 김순영 사망 1902년 여옥과 약혼 1903년 약혼녀 여옥 사망[232] 1904년 12월 최준례(崔遵禮)와 결혼, 장련 읍내로 이사. 1905년 11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233] 1907년 2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 사퇴 1907년 신민회에 참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받고 수감 1915년 가석방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 1919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 경무국장 취임 1924년 대한통의부, 참의부 김명봉,박희광등과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암살계획 협력 임시정부 활동[편집] 1926년 12월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됨. 1929년 5월 백범일지 상권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69] 1930년 8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1931년 10월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1932년 1월 일본 쇼와 천황 살해를 노린 사쿠라다몬(桜田門) 폭탄투척 사건 1932년 2월 상하이에 정박중인 이즈모 호 폭파에 윤봉길을 파견했으나 미수.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 쇼와 천황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지휘. 1932년 5월 한인애국단원 이덕주·유진식, 조선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에파견했으나 체포됨.[234] 1932년 5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최흥식 등을 관동군 사령관 본장결을 암살하기 위하여 만주로 파견하였으나 체포됨.[234] 1935년 한국국민당 조직. 1939년 5월 30일 측근이었다가 결별한 안공근이 암살되었다.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을 받았다.[235] 194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重慶)으로 이전.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갖고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광복군 침투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 광복 이후[편집]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236] 그러나 뒤에 김구는 취임을 거절했다. 1945년 11월 김구는 임시정부를 정부의 자격으로 귀국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 좌절.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각각 임시정부 송별연을 베풀어 줌.[237] 1945년 11월 2일, 존 하지 중장,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236]"라고 말함. 8.15광복 후 1945년 11월 3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임정요인 환국 제1진으로 귀국. 1945년 11월 24일 존 하지 중장,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삼상회의 결정서를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 1945년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기도 하였다.[238]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주제의 방송담화(엄항섭 대독)에서 강력한 국방군의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239]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명(반탁학련) 데모대가 김구에게 반탁학생대회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가 있는 서대문 서교장으로 향했다. 신문로에 이르렀을 때 좌익성격의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같은 날 천도교 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행사를 축소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156][240]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된 데 이어,[241]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241] 1946년 3월 1일 이승만과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1946년 6월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유골을 찾아,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였다.[193] 한편 방응모등의 재정적 후원을 얻었다.[출처 필요]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수립을 발표하다. 그러나 이때 김구는 탈장증세로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242]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결성식에 참석,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43]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193] 1947년 1월 전국반탁학련 반탁 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하여 46년과 같은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대대적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만류와 존 하지의 경고로 보류하였다.[243] 1947년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인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에서 참석하여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244]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맡음.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하자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다. 이때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245]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193] 1948년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 발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 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여,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1948년 3월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 자격으로 미군정청 재판정에 출두하였다.[246]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8년 8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 장남 김인의 유골을 봉환하고, 9월 이동녕·차이석 선생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 천장식을 하고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다.[193] 1949년 1월 서울특별시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1949년 3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193]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함.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됨. 향년 74세.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등록문화재 439호~442호로 등록 의혹과 논란[편집]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편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가 쿠데타를 계획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쿠데타를 기도하였다는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이범석은 그가 극좌파와 손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주장했다.[211] 그리고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여순 사건 당시 극우 정객이 극좌파와 손을 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하여 그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212] 그러자 김구는 조선일보에 사설을 발표, 여순 사건에 극우 관련운은 이해난(이해하기 어렵다.)이다고 맞받아쳤다.[212] 그러나 이후에도 김구의 쿠데타 준비설은 계속 나타났다. 국군 내에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김구를 추대하려는 세력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 CIC는 김구가 정부 전복 쿠데타를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의 첩보기관 CIC의 보고에 의하면 1949년 그는 염동진과 손잡고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개입한 증거[247]' 가 미군 방첩대에 입수되었다. 한편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225] 한편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 중 제4연대 소속 장교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울 계획을 짜기도 한다. '제4연대 장교들의 참모회의 과정에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보다 군사적 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토로되었으며,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247] 이에 따르면 이 정부는 김구의 파시스트형 정부에 합류할 북한군 내부의모든 친소장교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장교들과 경찰관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요원은 이승만 배후에 미국의 세력, 권력과 위신 때문에 비록 현재는 이승만 정부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유형의 정부는 결코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거나, 한국이 재건하고 군사적 기반을 통하여 국가들 중의 국가가 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247]'는 것이다.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같이 관여[225] 하였다. 염동진과의 쿠데타 기도는 곧 미군 방첩대와 당시 대한민국 총리인 이범석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고, 염동진과 김구의 쿠데타 시도 관련 문건이 미국 방첩대에 전달되면서 그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염동진은 김구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었다. 염동진은 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역할을 해왔다.[247] 그런데 염동진이 국군내 자료를 김구에게 전달하고, 군내 불만세력과 김구의 사이를 연결 목적으로 작성한 서신이 미군정 방첩대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이 군대내 파벌은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었다. 한번은 제출되는 정보들을 보호하기위한 보안장치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해서 내 자신이 점검을 해본 일이 있었다.[247] 한 건의 비밀보고서가 실질적으로 한국경비대(국군) 정보참모부(G-2)에 뿌려졌고 김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247] 이후 이 문서는 미군정 방첩대 수중에 들어간다. 그 후에 문서화된 보고서들이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구두 보고들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이루어졌다.[247] 그러나 한편으로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225],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225]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248] 한편 김구가 암살된 직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구의 암살 배경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어느 고위층이 외국 언론에 김구의 쿠데타 미수 계획을 발설하였다.[216] 이 익명의 고위인사는 외신 기자들에게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밝혔고, 바로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216] 라고 보도한다. 안준생 암살 사주[편집] 1945년 8월 귀국 직전 그는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을 암살하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249]'는 것이다.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249] 고 부탁했고, 부탁의 사유로는 '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부친 의사의 죄를 사하고, 미나미 지로 총독을 애비라 칭하였다.[249]'고 했다. 안중근 사후 생계의 곤란을 겪던 안준생은 조선총독부에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나미를 아버지라 했다는 근거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그의 안준생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안공근 암살 의혹[편집] 안공근 피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에 실종, 암살된 안공근의 살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실제로 해방 뒤에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중에는 김구의 측근이었던 모 독립운동가가 안공근을 납치,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는 의혹이 널리 언급되었다. 1932년 이후 김구는 그의 최측근 중 한사람이었던 안공근과 여러 번 마찰을 빚었는데, 그 뒤 안공근은 1939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실종, 피살되었다. 안공근은 한때 김구의 측근이었으나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형수(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로부터 심히 질책받았고, 임정의 자금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쓴 일과, 도박으로 자금을 탕진한 일이 있었다. 안공근은 김구의 심한 질책을 받고 임정 이동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밖에 안공근은 임정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기도했다. 김구는 안공근에게 부여된 임시정부 및 한인애국단의 대외 연락업무를 박찬익에게 맡겼다. 이후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중 상하이의 한 부두에서 사라졌었다. 안공근은 의문의 실종을 당했고, 이후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후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235] 이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 널리 언급되고 있다.[235] 김립 암살, 무고 의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김립 암살 사건입니다.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 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250] 그는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로,'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251]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251] 그러고서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251]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레닌이 준 자금을 김립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250] 는 반론도 있으며, 그가 중국 여자를 첩으로 삼고 향락을 즐겼는가 여부는 뜬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레닌이 한형권, 김립 등에게 준 자금은 한인사회당 내지는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공작금으로 지급된 자금이었다. 이들은 자금을 실제 활동비와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분배하였고 임정 측에는 내놓지 않았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 박노자에 의하면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다 한다.[250] 그러나 박노자는 한국외대 반병률의 주장을 인용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한국외대 반병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250] 박노자는 이를 두고 '동족 테러'라고 비판했다.[250] 그에 의하면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 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250] 이라는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사치, 향락을 하고 광동인 첩을 사서 즐겼다고 하였으나, 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장덕수 암살 의혹[편집] 1947년 12월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한독당을 용의자로 의심되었고, 그는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 짓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차마 김구 주석에게는 가서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252] 구미위원부에 10년간 근무했던 허정은 한인애국단과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준비하는데 조소앙이 기여한 점을 근거로 조소앙을 찾아갔던 것이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252]"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당시 수도경찰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180]'고 했다.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180]'라고 했다. 결국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임정과 한독당, 민주의원에 모두 간부로 몸담던 김석황, 조상항이 체포되면서 김구까지 법정에 서게 되었다. 만주 폭격 계획 의혹[편집] 해방 직후 그는 만주 폭격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김구와 염동진은 만주 지역의 폭격을 계획한 만주계획을 세웠다 한다.[253] 만주 폭격 계획은 1947년 말 ~ 1948년 초에 여러 차례 김구가 강조한 만주에서의 군사계획이었다. 이때 김구, 이청천, 이범석[253] 등은 북한을 폭격할 계획을 세운다. 김구 등은 '중국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북을 무력공격할 뿐만 아니라 중국 내전에서 장졔스의 중국 군대와 동맹해 한·중의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종국적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격멸한다.[253]'는 것이었다. 즉 남·북·만주가 포함된 이 계획은 한국·중국·미국의 동아시아 삼각 반공 군사 동맹 체제의 수립[253]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 조직원들이 떨어져나가면서 타격을 받았고, 인력과 장비의 부족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이후 김구의 암살로 만주 폭격 계획은 실패, 백지화된다. 김성수 암살 기도 의혹[편집]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 의혹 외에도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254]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55]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255]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민간인 살해 논란[편집]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18],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당시 일본의 기록이나 조선의 기록에서도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내용은 없다. 2003년 11월 말 김완섭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256] 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257] 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256]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256]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257] 고 밝혔다. 그러나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21] 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22] 이승만과의 결별 과정[편집]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날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해 한 시간 정도 요담한 후,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176] 그러나 12월 2일에 일어난 장덕수 암살 사건은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끝장내는 동시에 파국으로 끌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자신이 배후로 의심받자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승만은 “김 주석(김구)가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는 등 딴전을 피웠다.[176] 이승만은 자신을 재판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는 김구의 도움 요청을 회피하고 수수방관하였다. 평소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 했을 만큼[182] 그와 친밀하였다. 그러나 장덕수 사건을 계기로 양자의 관계는 악화되고 파국에 이른다. 이승만은 김구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였다. 분노한 김구는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했다.[176] 김구가 단정론의 철회와 남북협상론을 들고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인간관계의 파탄 직후였다.[176]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과정에는 어느정도 인간적인 감정도 작용하였다. 도덕성 논란[편집] 김구의 정치적 도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리처드 로빈슨은 김구가 정치적 도덕가는 아니라고 평하였다.[216] 미군정 외에도 브루스 커밍스는 김구가 송진우의 암살범이라고 지목했다. 한편 김성수의 암살을 공작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었다. 주애보와의 관계[편집] 김구는 이봉창 의거와 홍구공원 사건을 계기로 피신해 있었다. 이 피신기간 중 중국 국민당 관계자가 소개시킨 미혼의 뱃사공 주아이바오(주애보)와 부부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주아이바오와의 사이에서 자녀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평가와 비판[편집]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258]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258]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258]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한다.[258]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258] 미국의 시각[편집] 미국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259] 로 보고 있었다. 미군정은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260])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도 묘사하였다.[260]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114],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108]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다.[247]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247] 평가[편집]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261]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262] 1946년 초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263][264] 지나치게 고평가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265] 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265]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265]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265]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265]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265]”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266] 비판[편집] 전북대 교수 강준만과 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각각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267][268] 또,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의 반공주의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세력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269]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270]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은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가 건국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271]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272]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273] 한편 5·10 선거를 반대하던 4·3 항쟁에 침묵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274] 는 비판도 있다. 강준만은 '김구가 50대까지 어머니로부터 '사랑의 매'를 맞았다는 건 미담(美談)일 수도 있지만, 그걸 뒤집으면 그만큼 고전적인 인물이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275]'고 보았다. 테러리즘 논란[편집] 2008년 5월 출간된 비한국사 전공자로 구성된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서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물의를 빚었다. 한양대 석좌교수 신용하는 김구 테러리즘 논란에 대해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국내 일부 학자의 시각에 대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265] 신용하에 의하면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1930년대는 ‘완바오산 사건’으로 중국 내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됐고,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각지를 점령하면서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 신 교수는 “임시정부는 열세적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265] 7개월에 불과한 한인애국단 활동 기간 중 백범이 중국 국민당에서 독립군 장교 양성 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도 백범의 치밀한 지략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테러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공작전’으로 봐야 한다[265] 고 평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을 상대로 하여 사망 혹은 중상을 입히거나 인질로 잡는 등의 위해를 가하여 대중 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 혹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어떤 사람, 대중, 정부, 국제 조직 등으로 하여금 특정 행위를 강요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침략기관, 일본의 침략행위에 참여한 군인이나 관료등을 상대로 진행된 항일운동을 테러로 보지 않는다. 윤봉길과 이봉창등은 일본 천황, 일본 고위 군인등을 상대로 한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가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들에 대해 대해 암살을 시도한 백색 테러를 저질렀다는 의혹 또한 존재한다. 김구는 소군정기 북한의 지도자 및 관료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별다른 직위 없이 남한에서 정치 운동을 이끌던 사람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백의사가 북한의 관료였던 강량욱을 암살하고자 할 때 죄없는 아들, 딸, 친구 목사까지 죽게 만들었다.[276] 강량욱은 고위관료여서 민간인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생당한 강량욱의 가족, 친구는 민간인이므로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백색테러라 볼 수 있다. 그 외에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다.[108] 또한 커밍스는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277] 고 평하기도 했다. 38선 이북 조선에서는 1946년 3·1절 기념식 때의 폭탄투척 사건 이후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미군정의 보고서[254]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55] 해왔다 한다. 권위주의적인 행동[편집]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275][278]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 한국독립당, 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방북시에도[275][279]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275][279]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74]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274] 정치적 실패에 대한 비판[편집] 광복군 참모장이자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은 그가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하여 국제정세를 외면하다시피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이 백범 선생이다. 그런 까닭에 이박사는 마침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섰고, 백범 선생은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고 비판했다.[280] 제1대 내무부 장관과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동산 윤치영은 그는 김구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281] “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281] ”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281]'이라고 분석했다. 윤치영은 또 김구 생전에 그가 임정의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윤치영은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205] 16대 대통령 노무현은 그를 '실패한 정치인'이라 비판하였다. 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이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282] 그는 도쿄방송(TBS)이 일본 전역에 방영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 솔직하게 직접 대화'라는 주제의 90분짜리 토론에 참석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일본 여성 방청객의 질문에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고 밝혔다.[282]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편집]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 노선으로 갔다.[283] 훗날 국민당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283] 강준만은 미국의 패권장악과 중화민국의 몰락을 이승만의 승리와 김구의 패배 요인으로 보았다.[283] 이승만에 비교해서 웅변력이 떨어졌던 김구는 대중 선동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284] 이점 역시 김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김구는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한다.[219] 이승만도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219] 한편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219]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182] 그러나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182]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182]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82]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285] 일화[편집]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선생을 모시는 이들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267][286][287] 한미호텔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267][286]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286][288] 백범일지 윤문[편집]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의 교열과 윤문은 이광수가 하였다. 1945년 11월 김구가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출간할 때 이광수가 윤문을 자청했다[289] 한다. 백범일지의 윤문을 허락한 사람이 백범 자신인지, 아니면 백범 비서 등 주변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290] 문제는 춘원이 윤문 과정에서 친필본에 없는 문장을 임의로 첨삭해 원전의 텍스트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290] 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이광수가 백범일지 편찬에 참여한 것을 김구가 알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르면 “(이광수가) 속죄하는 심정으로 맡겠다고 하니 시켜보라고 주위에서 백범께 말했다. 김구는 그의 행실(일제 후반에 변절한 것) 때문에 망설였다”[289] 고 한다. 그러나 곧 이광수에게 백범일지 윤문을 맡긴다. 둘째 아들 김신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건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김신 씨의 대담, <신동아>, 1986년 8월, 347쪽.[289])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저서[편집] 《백범일지》(1947, 국사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백범일지입니다. 〈나의 소원〉[편집]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백범일지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強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하략)...백범[291] 그 외[편집] 《도왜실기》(1932, 엄항섭 정리) 《백범어록》(2008, 도진순 주해) 사상과 신념[편집] 남북협상 참여 목적[편집] 1970년대 이후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는 통일과 조국애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 과정이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다.[274]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274] 시점에서 새로운 정국 반전을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김구는 ‘백의사’ 등을 통해 대북 타격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했다.[274] 백의사 단원들이 소지한 무임승차권이 북한측에 입수되면서 그는 엄청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3.1절 경축식 폭탄 투척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혔[151] 고, 북한은 이후 그의 이름으로 풍자삼아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152] 해방공간 내내 반공, 반소로 일관한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는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조건에서 취해진 정치전술일 가능성이 농후했다.[274] 외교 문제[편집] 외교 문제에 소홀했다는 평가도 있다. 전 서울교육대 총장 이택휘는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 부재나 당시 강대국인 소련에 대해 배타 정책을 쓴 것은 외교적 투박함”이라고 지적했다.[265] 김구의 외교력 미숙에 대해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신용하는 “중국 국민당과 군사 협력 관계에 있었던 상황에서 백범이 공산당과 공식 관계를 모색하기는 어려웠다”며 “당시 장제스(蔣介石)를 설득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백범 외교의 진가”라고 반박하였고[265] 단국대 교수 한시준도 “백범이 광복군의 연합군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며 “이는 백범이 외교에서 상당한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265] 그러나 이승만을 통해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반론도 있다.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그는 이승만과 함께 임정을 미국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애국가에 대한 관점[편집]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292]'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292]'고 반박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편집] 그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274] ...(이하 중략)...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274] 또한“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위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좌파와의 연대는 극히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274] 임시정부의 존재를 좌파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1938년 이후 장졔스가 국공합작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해 김구와 김규식, 김원봉을 소환하여 합작, 협력하라고 하자 좌파의 임정입각을 수용하게 된다. 1922년 초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지원받았으나 임시정부에는 상납하지 않은 김립을 사살한 것도 그였다. 그는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을 보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250] 또한 김립은 레닌으로부터 매각하면 현금으로 바꿀수 있는 귀금속인 금괴를 일부 전달받았는데 이것 역시 임시정부에게 내놓지 않았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며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251] 으며,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251] 이라며 비판을 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외세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도 생각했다. 1919년 임시정부 경무국장 당시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혁명에 동참해달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는 소련 등 외국 세력에 기대는 것이라며 참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여순 사건에 대한 관점[편집]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214]', '반도(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214]'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오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니,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勵動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숙고하여 용감히 悔悟하고 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 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293] 여러분의 기대와 託付와 애국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293] 10월 30일 여순 사건 관련 담화에서 김구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293]'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처지지 않을수 없다[293]"고 발표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김구의 자서전《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또한 군인 출신 정치인 이후락과도 사돈관계이기도 하다. 증조부 : 김영원(金榮元[294], ? ~ ?) 조부 : 김만묵 (金萬默, ? ~ 1888년) 조모 : 장씨(張氏, ? ~ ?) 아버지 : 김순영 (金淳永, 1848년 ~ 1901년 2월) 어머니 : 곽낙원 (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부인: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1일) 장남: 입언 김인(立言 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육군 소령 자부 :안미생(安美生, 1914년 ~ 2007년, 안중근의 조카) 손녀 : 김효자(金孝子, 1941년 ~ ), 장자 김인의 딸 차남 : 서언 김신(瑞言 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대한민국 6대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주중국 대사, 국회의원 역임, 前 백범기념관 관장 자부: 임윤연(林胤嬿,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독립운동가 임학준의 딸, 위암으로 사망 손자 : 김진(金振, 1949년 10월 30일 ~ ) 대한주택공사 사장 역임 손자 :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 주상하이 총영사, 국가보훈처장 역임 손부 : 이정희(1959년 ~ ) 손자 : 김휘(金揮, 1955년 ~, 나라기획 이사 역임)[295] 손녀 : 김미(金美, 한화 그룹 회장인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과 결혼[296] 손녀사위 : 김호연(金昊淵, 기업인) 손자 : 김윤 장녀: 미상(1906년 ~ 1907년)-가마를 타고가다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쐬서 사망했다. 차녀: 김화경(金化慶, 1910년 ~ 1915년) 삼녀: 김은경(金恩慶, 1916년 ~ 1917년 2월) 삼종조카(9촌) : 김흥두(金興斗[297]) 사돈 : 이후락, 정치인 사돈 :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기업인 김구를 연기한 배우들[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이영후 - 1981년 《제1공화국》 MBC 이영후 - 1984년 《거부실록 시리즈 - 백산 안희제》 MBC 안대용 - 1984년 《독립문》 KBS 2 이영후 - 1984년 《조선총독부》 MBC 이영후 - 1984년 《그의 아내》 MBC 이치우 - 1985년 《새벽》 KBS 1 김진태 - 1989년 《백범일지》 MBC 김진태 - 1990년 《반민특위》 MBC 이영후 - 1991년 《여명의 그날》KBS 1 정욱 - 1992년 《님이여》 MBC 김상중 - 1995년 《김구》, 청년 김구 KBS 조상건 - 1995년 《김구》, 장년 김구 KBS 이영후 - 1998년 《삼김시대》 SBS 이영후 - 2003년 《야인시대》 SBS 이영후 - 2006년 《서울 1945》 KBS 이영후 - 2010년 《자유인 이회영》 KBS 유하복 - 2019년 《이몽》 MBC 라디오 드라마[편집] 이치우 - 1966년 《광복 20년》 TBS 다큐멘터리 이치우 - 《이승만과 김구》 이치우 - 1981년 《8·15 특집 그여름의 이틀》 KBS 라디오 연극 영화[편집] 전창근 - 1960년 《아! 백범김구선생》[298] 영화 전창근 - 1967년 《춘원 이광수 (1967년 영화)》, 영화 박암 - 1969년 《춘원 이광수 (1969년 영화)》, 영화 박암 - 1973년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영화 조통달 - 1986년 《윤봉길 의사》, 연극 이영후 - 1998년 《천년의 수인》, 연극 임동진 - 2005년 《청년 장준하》, 뮤지컬 왕기석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청년 김구 역) 왕기철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장년 김구 역) 임진택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노년 김구 역) 김홍파 - 2015년 《암살》, 영화 조진웅 - 2017년 《대장 김창수》, 영화 같이 보기[편집] 한국독립당 한국노병회 백범일지 백범기념관 동학농민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신탁통치반대운동 송진우 피살 사건 제1공화국 김규식 박찬익 이승만 장제스 안창호 안공근 105인 사건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이동녕 이시영 윤치영 김좌진 김두한 광복군 미군정 안공근 피살 사건 민주의원 고능선 김창숙 민필호 송병조 안미생 안재홍 안정근 안중근 양기탁 윤치호 장제스 중화민국 조성환 한국국민당 한인애국단 허정 홍진 하지 미 군정 송진우 경교장 삼청장 반공주의 장덕수 피살 사건 김홍일 안공근 장덕수 김석황 안두희 엄항섭 이유필 조소앙 김학규 안창호 여운형 여운홍 조만식 조완구 차이석 김신 임정 각료 선우진 신익희 이청천 독립촉성중앙회 한국국민당 백의사 염동진 김성수 김인 김준엽 김일성 김철 박헌영 신규식 이범석 이철승 장면 장건상 장택상 장준하 조봉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김구선생 암각문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대선 대통령 1대 한국독립당 6.63% 13표 2위 낙선 제1대 부통령 선거 부통령 1대 한국독립당 31.47% 62표 2위 낙선 각주[편집] ↑ 백범 발자국 따라 걸으면 큰길 되지요 ↑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 김삼웅《백범김구평전》시대의창,132쪽 ↑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p.514 ↑ 대한민국의 이북5도 행정구역 기준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37P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에 해당한다. ↑ 조선향토대백과 오담리 ↑ 김구,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6) 22페이지 ↑ 가 나 다 라 백범김구기념사업회 - 연보 ↑ 계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위인전기 《김구》편에도 김구선생이 어릴적 개구장이여서,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장난의 정도가 지나쳐서 친척 할아버지가 집에 데려가 며칠간 돌보아주면서 위로할 만큼 호되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 가 나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 김구 그는 누구인가”. 주간조선. 2006년 10월 2일. 2011년 11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가 나 다 라 마 백범일지 상권 참조 ↑ 가 나 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 ↑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50~51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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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4월 23일 후임이동녕 전임홍진 제9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10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1927년 4월 10일 - 1927년 8월 후임이동녕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1930년 8월 4일 - 1933년 10월 후임양기탁 전임이동녕 제18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0년 3월 13일 - 1940년 10월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19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0년 10월 8일 - 1944년 4월 6일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20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4년 4월 6일 - 1947년 3월 3일 후임이승만 전임김규식 제3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1947년 3월 3일 - 1947년 9월 5일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4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1947년 9월 5일 - 1948년 8월 15일 후임이시영(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경무국장1919년 9월 - 1921년 5월 후임김용원 한국 광복군 통수부 주석(광복군 최고사령관)1944년 10월 - 1946년 1월 15일 후임원용덕(남조선국방경비대 수립) vdeh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대통령 (1919년 ~ 1925년) 이승만 박은식 국무령 (1925년 ~ 1940년) 이상룡 양기탁 이동녕 안창호 이동녕 홍진 김구 주석 (1940년 ~ 1948년) 이동녕 김구 이승만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후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vdeh신민회 창건위원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이회영 윤치호 류동렬 안창호 이경희 김홍량 김구 vdeh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이승만 이시영 제임스 밴 플리트 장제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응오딘지엠 아드난 멘데레스 허위 김좌진 오동진 조병세 안중근 윤봉길 이준 강우규 김구 안창호 신익희 김창숙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최익현 이강년 민영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S. 트루먼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프랑수아 톰발바예 다비드 다코 수루 미강 아피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레온 음바 아마두 아히조 하마니 디오리 조모 케냐타 무테사 2세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퉁쿠 압둘 라흐만 푸트라 알 하즈 타놈 키티카초른 쑹메이링 천궈푸 쑨원 천치메이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조만식 임병직 서재필 박정희 최규하 시리낏 끼띠야꼰 푸미폰 아둔야뎃 전두환 김규식 조소앙 유관순 vdeh1995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김지섭 2월 최팔용 3월 이종일 4월 민필호 5월 이진무 6월 장진홍 7월 전수용 8월 김구 9월 차이석 10월 이강년 11월 이진룡 12월 조병세 vdeh1995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정월터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vdeh2019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유관순 김마리아 손병희 안창호 김규식·김순애 한용운 이동휘 김구 지청천 안중근 박은식 윤봉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64909377 LCCN: n81017839 ISNI: 0000 0000 8389 4118 GND: 123233933 SUDOC: 107977966 BNF: cb170015989 (데이터) BIBSYS: 4063026 NDL: 00622698 NKC: jo201586575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구&oldid=24523797" 분류: 김구1876년 태어남1949년 죽음화기에 죽은 사람한국의 암살된 정치인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반일 감정대한민국의 반일 감정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살인자대한제국의 정치인대한제국의 승려대한제국의 교육인동학농민운동 관련자일제 강점기의 정치인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범죄 피해자테러 피해자한국의 범죄인대한민국의 정치인한국의 통일운동가민족주의자천도교 이탈자불교 이탈자대한민국의 감리교도6성장군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대원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원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대장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경찰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대한민국 제1공화국한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수상자한국의 독립운동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한국의 통일운동김구 가신민회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비상국민회의백색 테러한국노병회한국독립당 (1930년)한국독립당의 당원신한청년당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안동 김씨 (구)태탄군 출신숨은 분류: 참조 오류가 있는 문서인용 오류 - 날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9년 6월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모호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지적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2009년 4월출처가 필요한 글/2010년 6월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인용집위키문헌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تۆرکجهBosanski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贛語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atinaМонгол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4일 (목) 16: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범 김구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백범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백범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구金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10대 국무령 임기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부통령 이인성 전임: 홍진(제8대)후임: 이동녕(제11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18·19·20대 주석 임기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국가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제17대)후임: 이승만(제21대) 신상정보 국적 조선 (1876년 - 1897년)대한제국 (1897년 - 1910년)일제강점기 조선 (1910년 - 1919년)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 1948년)대한민국 (1948년 - 1949년) 출생일 1876년 8월 29일(1876-08-29) 출생지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現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대한민국 기준))(現 태탄군 지촌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준)) 사망일 1949년 6월 26일 (72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2층 거실에서 암살됨. 본관 안동 정당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배우자 최준례 종교 유교(성리학) → 동학 → 불교 → 개신교(감리회)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독립운동가 김구의 필체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1876년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1] 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2][3]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4],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5]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876 ~ 1949) 1.1.2 유년기 (1880 ~ 1888) 1.1.3 청소년기 (1888 ~ 1892) 1.2 청년기 1.2.1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 ~ 1895) 1.2.2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 1.2.3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 1.2.4 치하포 사건과 은신 생활 1.2.4.1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 (1896 ~ 1897) 1.2.4.2 개화와 죄수 교육 (1897 ~1899) 1.2.4.3 승려 활동 (1898 ~ 1899) 1.2.5 애국계몽운동과 수감 생활 1.2.5.1 애국계몽운동 (1900 ~ 1910) 1.2.5.2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 ~ 1919) 1.3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1.3.1 임정 수립 초기 1.3.1.1 임시의정원 의원과 경무국장 (1919) 1.3.1.2 의정원 의원 재선과 내무총장 시절 (1920 ~ 1921) 1.3.2 국무총리 대리 시절 1.3.3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1926~1929) 1.3.4 임정의 재정난 1.3.5 항일의거와 군사단체 조직 노력 1.3.5.1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24~1930) 1.3.5.1.1 친일파 제거와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 1.3.5.2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30~1932) 1.3.5.2.1 이봉창 의거와 이즈모호 폭파 미수 1.3.5.2.2 윤봉길 의거 1.3.5.2.3 조선 총독 암살 미수 1.3.5.2.4 만주철도 폭파미수 1.3.5.3 수배, 피신 생활 (1932~1933) 1.3.5.4 옥관빈 암살(1933) 1.3.5.5 광복군 조직 노력 (1933~1937) 1.3.6 안공근과 결별 1.3.7 중일 전쟁 중의 활동 (1937~1939) 1.3.8 임시정부 주석 재임 시 1.3.8.1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4) 1.3.8.2 주석 재선 (1944~1945) 1.3.9 귀국 직전 1.4 광복 이후 1.4.1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1.4.1.1 귀국 직후 1.4.1.2 정치 자금 조달 1.4.1.3 국내 정치 활동 준비기간 중 1.4.1.4 반탁 결의와 송진우와의 공방전 1.4.1.5 반탁운동 개시와 총파업 1.5 하지의 임정요인 추방 사태 1.5.1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 1.5.2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1.5.3 정치 활동 1.5.3.1 미소공위 반대 운동 (1946) 1.5.3.2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폭탄투척 1.5.3.3 이승만과의 경쟁 1.5.3.3.1 화교 무역 시도와 실패 1.5.3.4 임정법통과 임시정부의 재편성 (1947) 1.5.3.5 반탁, 임정 법통 운동 (1947) 1.5.3.6 우익 진영 단결 노력 1.5.4 이승만, 한민당과의 합작 실패 1.5.4.1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1.6 생애 후반 1.6.1 이승만과의 결별 1.6.2 재판정 출두 1.6.3 남북 협상으로 선회 (1948) 1.6.4 남북협상 참여 1.6.4.1 남북협상의 실패 1.6.5 여순 사건 관련 공방전 1.6.6 칩거 생활 1.7 반민특위 재개와 부활 1.8 암살 1.8.1 암살의 배후 1.8.2 추도사 1.8.3 암살 직후 1.9 사후 2 기타 약력 2.1 1910년대 이전 2.2 임시정부 활동 2.3 광복 이후 3 의혹과 논란 3.1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 3.2 안준생 암살 사주 3.3 안공근 암살 의혹 3.4 김립 암살, 무고 의혹 3.5 장덕수 암살 의혹 3.6 만주 폭격 계획 의혹 3.7 김성수 암살 기도 의혹 3.8 민간인 살해 논란 3.9 이승만과의 결별 과정 3.10 도덕성 논란 3.11 주애보와의 관계 4 평가와 비판 4.1 당대의 여론 4.2 미국의 시각 4.3 평가 4.4 비판 4.4.1 테러리즘 논란 4.4.2 권위주의적인 행동 4.4.3 정치적 실패에 대한 비판 5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6 일화 6.1 백범일지 윤문 7 저서 7.1 《백범일지》(1947, 국사원) 7.1.1 〈나의 소원〉 7.2 그 외 8 사상과 신념 8.1 남북협상 참여 목적 8.2 외교 문제 8.3 애국가에 대한 관점 8.4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8.5 여순 사건에 대한 관점 9 가족 관계 10 김구를 연기한 배우들 10.1 텔레비전 드라마 10.2 라디오 드라마 10.3 연극 영화 11 같이 보기 12 역대 선거 결과 13 각주 14 참고 자료 15 참고 자료 16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 (1876 ~ 1949)[편집]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6][7][8][9] 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10]'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언함(金彦喊)의 부인이 진주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 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 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유년기 (1880 ~ 1888)[편집]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11][12]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13]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14]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15]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15] 청소년기 (1888 ~ 1892)[편집]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그는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11] 이때 목동 노릇도 했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7세에는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14] 소년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는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게 되었다. 과거 시험 당시 매관 매직의 타락상, 즉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14]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리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14] 청년기[편집]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 ~ 1895)[편집] 천도교, 동학 농민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11]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 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14]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 제국의 군부대가 쏘는 총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15]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11]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종선을 묻어주고 안태훈을 찾아가게 되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16]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편집] 스승 후조 고능선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후조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공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은 화서학파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20세에 청나라행을 결심,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참빗장수를 만났다. 연령은 김구보다 8~9세 위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으로 그를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고, 백두산을 관람하고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편집] 신천을 떠나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 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에 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 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에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17] 치하포 사건과 은신 생활[편집]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 (1896 ~ 1897)[편집] 을미사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라면서도 서울말을 쓰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고 발로 차는 등 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18]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자 일본 육군 중위 신분으로써 조선에 밀파된 군사간첩이라고 기술하였으나[18],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9]. 한때 김완섭이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20]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이었다고 주장했다.[21]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 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출처 필요]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쓰시마 섬(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22]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18]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을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종의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다. 1896년 덕수궁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었는데, 이 전화는 주요 관아는 물론 나중에 인천까지 개통되었다. 대궐에 있던 승지 한 명이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라고 적힌 것을 보고 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일단 사형 집행을 중지시키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 때가 전화가 개통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고종의 어명은 인천감리서의 이재정 감리사에게 신속히 전달되었고 사형 집행을 멈출 수 있었다. 훗날 김구는 자서전인 《백범일지》에서 "만약 전화 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전화가 처음 개통된 시기가 1896년인 것은 맞지만, 서울에서 인천까지 장거리 전화가 개통된 시기는 1902년이었으므로, 고종이 직접 인천감옥으로 전화를 건 것이 아니라, 궁궐에서 전화로 하명을 하고 이것을 인천에 전보로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23] 개화와 죄수 교육 (1897 ~1899)[편집] 김구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은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 동료 상인, 객주들과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24] 뒤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김구는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창수가 재소자에게 옥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일부는 김창수에게 밥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글공부에 참여하였다.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재소자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글을 대신 써줌)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민담과 노래를 배웠다. 이때 김구는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간수의 소개로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25] 그러나 중국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였고, 향후에도 영어에 관해서는 문맹이었다 한다.[26] 승려 활동 (1898 ~ 1899)[편집] 공주 마곡사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1898년 가을께에 출가자인 공주 출신 이서방 이라는 남자를 따라 공주 마곡사에 도착했다. 먼저 삭발한 공주의 이서방이 찾아와 마곡사에 식객으로 유숙하던 그를 찾아와 "하은당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境)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후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하은당을 은사로 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출가 초기부터 불경을 외우는 일과 법당의 허드렛일 도중 실수로 스승인 하은당과 다른 선임 승려들에게 질타를 당하였다. 다른 승려들은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고령이라 이 분들이 작고하면 마곡사 법당의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확고한 결심에 의한 출가도 아니며 승려의 길에 뜻이 없었던 백범은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24]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1899년 가을 황해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성실하게 농업에 종사하면 혼처를 마련해주겠노라며[27] 농사일을 권유하였다.[24]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애국계몽운동과 수감 생활[편집] 애국계몽운동 (1900 ~ 1910)[편집]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1년 뇌졸증으로 반신불수가되 투병중이던 아버지 사망.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인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24]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28]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28]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28]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敎員)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 보강학교(保強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13]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 ~ 1919)[편집] 신민회, 안악 사건, 105인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경성의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1910년 12월 그를 방문한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형문을 받았고, 재판에서 징역 15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1911년 일제의 피체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김좌진과 조우하였다.[29] 1912년에는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30]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55호였다.[31] 이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 도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8월에 특별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는데, 출옥후 어머니 곽씨로부터 소식을 접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32]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33]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편집] 임정 수립 초기[편집] 임시의정원 의원과 경무국장 (1919)[편집]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경무국장 시절 카이저 콧수염으로 단장한 김구 (1920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상하이 임시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였다.[34]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30]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였다. 9월에는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자신의 소원을 말하며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자 안창호는 그에게 경무국장(警務局長)을 천거하였다. 자신의 학식이 낮음을 이유로 경무국장직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으나 안창호는 거절하면 젊은 사람들 아래에서 일하기 싫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므로 그는 안창호의 임명을 받아들인다. 9월 통합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김구는 임정 내무부 경무국장(警務局長)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경호부장으로 여순근을 임명하고 한인 청년들을 고용하여 경찰, 정보감찰 업무, 밀정색출 업무를 분담시켰으며 동시에 재판소가 없는 임시정부에서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행사하였다.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35][36] 일본 영사관 경찰은 임정 요인 체포를 위해 경무국장인 그를 사살하려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 선우갑(鮮于甲)·강린우(康麟佑)가 왔으나 자발적으로 그에게 이실직고하자 추방하였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로 독립운동가를 따라 상하이에 나타났던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하였고, 이후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납치, 암살기도에 시달렸다. 황학선(黃鶴善)은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한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약물로 독살하려 했다. 김구는 황학선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의정원 의원 재선과 내무총장 시절 (1920 ~ 1921)[편집] 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가운데 있는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자대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37] 1921년 5월 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38], 후임은 김용원이 임명되었다.[38] 경무국장에서 물러남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만 활동하게 되었다.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첫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앉은 이가 김구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왔고, 그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재당선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선출되었다.[37] 1922년 7월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李始榮), 여운형, 조소앙, 이유필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9월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차남 김신(金信)이 출생하였다. 10월 여운형·조동호·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한국노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37] 국민대표자대회 소집의 주요 인물이기도 한 박은식을 규탄, 성토하였고 그의 아들 박시창이 찾아와 항의하자 구타하기도 했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39] 1922년 2월 소련의 레닌에게서 받은 200만 루블 중 40만불을 지불받은 한형권과 김립에 대한 사살령을 내린다. 노면직, 오종균 등은 상하이에서 김립을 사살하였다. 그는 백범일지에 김립이 광둥 여자를 사서 축첩하고 호화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김립이 호화생활을 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40]"는 것이다. 박노자에 의하면 김립의 암살 원인은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고 분석했다.[40] 국무총리 대리 시절[편집] 임정 요인들(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앞줄)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1923년 4월 9일 내무총장에 재임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였으나 그는 임정 고수파가 된다. 그러나 임정의 해체와 개조를 놓고 국민대표자 대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김구는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또한 임정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상하이 추방령을 선언한다. 23년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자발적인 자율방범대인 교민단 의경대를 설치할 때, 의경대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41] 최준례는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인 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1923년 그는 청년 오면직, 노종균 등을 파견하여 러시아의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추격, 제거하도록 지시하였다. 1922년 2월 11일 오면직, 노종균 등 을 파견해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 등을 사살했다.[39][42]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범일지에는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되었으나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43] 1920년대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23년 이후 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구미의 각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돈이 모였다.[44]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임시정부 재정부장 이시영(李始榮)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44]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44],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44] 미주 동포들이 후원금과 성금을 보내면 그는 친필로 쓴 붓글씨와 백범일지의 사본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1923년 12월 상해 한인교민단에서 치안조직인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하였고,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24년 4월 23일 국무총리 대리에서 면직되었고,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노동국 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1925년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활동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32]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45]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1926~1929)[편집] 1926년 9월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30] 임시정부도 정부인데 한미한 가계에서 태어난 자신이 수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수 있을 것, 이상룡, 안창호, 홍면희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입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렇다할 배경이 없는 자신이 수상이 되면 다른 실력과 배경을 갖춘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호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김구는 국무령직을 수락한다. 임시정부는 1926년 12월 14일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맡았다. 1927년 4월 10일 후계내각 발표로 국무령에서 총사퇴하고, 국무위원회의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되었다.[46]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47] 1930년 1월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47] 임정의 재정난[편집]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1930년대 초의 김구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 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 취직했다. 김구는 임시정부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재중국 한국인 교민단체와 교포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모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중국의 군인·공무원으로 취직한 한인, 시장 상인, 아편장사 등이 내는 돈에 의존했으며, 일부는 3인조 암살단등 비밀조직을 움직여 일본군의 군자금 탈취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48] 자금을 걷을 인력이 부족해 김구 자신과 임정 직원들이 직접 성금과 자금을 걷으러 다녔다. 이재에 밝지 못했고 장사수완이 부족했던 김구는 사업이나 장사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두상'(頭相), '수상'(首相)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한인 교포들은 그에게 '두상','수상'이라 불렀다. 망명정부의 수반이라는 위치 역시 그를 장사나 공업,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변변하지 못한 임정 청사의 월세도 대지 못해 김구는 늘 쩔쩔맸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고 임정의 충복인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다 한다. '그때 임정에는 삥천이라는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충성스러운 하인이 없었다.[49]'는 것이다. 이런 충복에게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몇년 동안 주지 못하였다. 삥천의 부인이 해산할 때 돈이 없어 밀린 월급의 일부만이라도 달라는 호소 조차 들어주지 못할 정도였다.[49]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후, 이승만은 미주지역의 성금을 독식했고 임정으로의 직접 송금도 가로막았다. 김구는 1928년 이후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자신도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절하였으나, 자금의 일부를 임정으로 보내주었다. 1932년 5월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 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임정에 흘러오는 자금에 활기를 띄었다. 1925년,26년 무렵 국내의 임정 연락망인 연통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29년 8월 상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고[47], 1930년 다시 국무령에 선출되었다.[50]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해 나갔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의 창당 작업에 참여하였다. 항일의거와 군사단체 조직 노력[편집]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24~1930)[편집] 대한통의부,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친일파 제거와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편집] 1924년에는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내려, 박희광(朴喜光), 김광추(金光秋), 김병현으로 3인조 암살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친일파인 보민회괴수(保民會魁首) 최창규(崔晶奎)의 가족을 백주(白晝)대낮에 토벌했다. 이 사건은 1924년 7월26일자 독립신문에 크게 게재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鄭甲周),이등박문의 수양녀이자 매국녀인 배정자(裵貞子), 일진회 회장 이용구등을 암살 하라는 지령으로 암살을 시도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일본 주요관계자 및 요인제거를 목적으로 박희광(朴喜光)등이 봉천성 일본영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실패했다.[51] 이들은 같은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당시 일본군 장성이 드나들던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 김병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김구는 이외에도 친일파 척결작업과 부족한 자금조달을 위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활동을 배후에서 비밀리에 지휘 또는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30~1932)[편집] 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최흥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봉창 의거와 이즈모호 폭파 미수[편집] 1930년 8월 4일 국무령에 임명되었고, 1930년 11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財務部長)에 선출되었다.[46] 이때 김구는 1927년 신약헌에 의한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회가 채택된 이후 그간 4년간의 정부 예산 집행의 결산서(決算書)를 무더기로 의정원 의장 앞으로 제출하였다.[52] 1931년에는 일본 정부 및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22년 만주에서 결성한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53] 을 강화해 임시정부 내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54] 김구는 홍보를 통해 청년 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말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같이 지내면서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55] 이봉창이 왜 천황을 죽이지 못하느냐고 힐난하자, 김구는 자극을 받아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히로히토 천황이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한편 2월 12일에는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신형 잠수정 이즈모 호(出雲号)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배 밑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윤봉길 의거[편집] 2월에는 윤봉길이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 요인인 왕백수, 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 상하이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 실패하였다. 4월초,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를 지휘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의 계기가 된 이 의거 직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 비서 엄항섭, 김철과 함께 미국인 장로교회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2018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함)의 집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야 했다.[56][57]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58] 조선 총독 암살 미수[편집] 1932년 4월 윤봉길의 2차 거사를 보내기 직전 김구는 유진식과 이덕주를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조선에 보내 조선총독 우카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의 동경의거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진행하는 한편으로 윤봉길의 의거를 준비하기에 앞서 두 명의 한인애국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였다.[59] 국내로 파견된 대원은 이덕주와 유진식이며, 이들에게 김구가 내린 임무는 조선총독의 처단이었다.[59] 이덕주(李德柱), 유진식(兪鎭植)은 왜총독 암살을 명하여 선파(先派) 입국하고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은 만주에 본장번(本藏番) 등 암살을 명하여 상기 진행코자 할 즈음에 4월 24일 김구는 이덕주와 유진식 두 명의 한인애국단원에게 조선총독 우원일성(宇垣一成)을 처단할 것을 명하고 국내로 파견하였다. “ 한인청년당원은 김구 일미가 계획한 흉폭행위실행의 역할을 감당하고 이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이나 그 간부 중 이미 이덕주라 칭하는 서리균(徐利均)과 유진식이라 칭하는 유진만(兪鎭萬)은 황해도에서, 주천현朱天懸이라 칭하는 유상근과 최흥식은 대련에서, 또 송진표(宋鎭杓)라 칭하는 장현근(張鉉瑾)과 김덕근(金德根)은 당관에 체포당했음으로...홍구공원폭탄사건의 하수인 윤봉길에 수교한 90불, 최흥식에게 지급한 580불전후 3회에 걸쳐, 유상근에 지급한 1,000불전후 2회, 이덕주에 지급한 120원, 유진만에 수교한 60불, 김긍호(金兢鎬)에 지급한 50불 합계 1,900불의 흉폭행위자금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는 직후 알 자료가 없어 명료하지 않으나 본년 3월 20일 불계에서 한인측 김구, 김철, 조소앙 등이 상의하고 중국측 광동파 호용청(胡用淸) 등과 더불어 중한민족항일대동맹(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한 사실에서 추찰하여 아마 우 동맹의 중국측 간부를 통해 혹은 광동파 내지 19로군 간부로부터 지출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60] ” —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고서 4월 24일과 28일 사이에 조선총독을 처단할 임무를 띄고 국내로 파견된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61] 이후 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됨으로써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만주철도 폭파미수[편집] 1932년 5월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軍務部長)에 임명되었다. 5월 일본의 만철(滿鐵)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김구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3월말과 4월 27일 각각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였다. 유상근은 상해를 출발하기 2~3일 전인 4월 25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2개의 폭탄 중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김구에게 돌려주고 수통형 형태의 폭탄 1개를 받아 자신의 거주지인 살파새로 188호 3층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4일 대련에 도착하였다.[62] 유상근보다 한 달 먼저 배편으로 상해를 출발하여 대련에 도착해 있던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대련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 먼저 대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을 사용하여 본장번(本庄繁) 일본 관동군사령관, 내전강재(內田康哉) 남만철도 총재,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 관동청장관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았다.[62] 5월 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ㆍ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58]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63] 수배, 피신 생활 (1932~1933)[편집]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5월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고 상하이에서 탈출했다. 그 뒤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길 때 군무부장에 취임하였으나,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張震球) 또는 '장진'(長震, 張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김구의 친할머니가 장씨(張氏)였기 때문에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이다. 가흥에서 김구는 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가흥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한편 김구는 이때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64]'라고 하였다. 이후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65] 옥관빈 암살(1933)[편집] 옥관빈 한편 1930년대 초부터 임정 창립 초기의 멤버였으나 임정을 이탈, 어느정도 거리를 두던 옥관빈이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비난, 조소하였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김구의 귀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 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66]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67] ”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자랑과 허영을 못마땅하게 봤던 그는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66]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67] 이는 그대로 김구나 임시정부, 의열단, 아나키스트들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임정에서 탈퇴한 뒤로 옥관빈은 흥사단 활동 등 일부를 빼고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를 했다. 더구나 옥관빈의 형 한명은 불조계에서 형사로 취직하기도 했다. 옥관빈은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한 대신 공장을 운영하며 매상을 올려 부자가 되었다. 옥관빈은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 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많은 돈을 써서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하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67] 호화스러운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67]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67]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67]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했다.[67] 이어 옥관빈 암살을 지원하였다. 옥관빈은 그해 8월 1일 불조계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를 만나 몰래 간통하고 나오던 길에 남화한인동맹원 엄형순 등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68] 광복군 조직 노력 (1933~1937)[편집] 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김구 (우측)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 광복군입니다. 1933년 장쑤 성 자싱(가흥)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였다. 이때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그러나 상하이 법대총장 저보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자싱으로 옮겼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을 추진하였는데 중국 측에서는 진과부,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였다.[56] 5월 장개석과 만났으며,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강소성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69] 의거와 피신 이후 한인애국단의 조직이 어렵게 되자 한인애국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한국특무대독립군으로 흡수, 개편된다.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의견의 대립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산론이 나오자 김구는 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7월 조소앙·김두봉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체와 단일신당결성을 주장하여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하였다.[70] 10월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71] 김구는 남경중앙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71]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69] 그리고 김구는 곧 한국국민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한 김구 등은 1936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72]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73] 그 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74][75]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76] 이후 김구는 한국독립당의 당의 무력조직인 한국독립당군의 조직을 준비하여,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보게 된다. 안공근과 결별[편집]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자신의 큰형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77]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77] 당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45][78] 그런데 김구는 안중근의 부인과 가족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분개하였다. 이를 두고 사학자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45] 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며 안공근을 질타하고 꾸중하였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45] “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79][80] ” — 백범일지 중에서 백범일지의 기록과는 달리 안공근은 '자기 식구만 충칭으로 이주하게 한 것'이 아니라 중일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을 자신의 가족들보다 먼저 피신[45]'시켰다.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45] 오영섭에 의하면 '안공근이 김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김구로부터 신망을 잃었으며 그로 인해 김구의 단체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는 위의 기록을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81]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안공근 자신에게 쏟아질 것임을 누구보다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 형의 가족을 함께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의 현지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81]'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해서 안공근의 형수와 조카들을 데려오지 못한 일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81] 중일 전쟁 중의 활동 (1937~1939)[편집] 총탄을 맞고 수술 후 회복한 김구 (1938년) 중일 전쟁 발발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의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표 지청천) 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82]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었다.[82] 1938년 5월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玄益哲)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유동렬, 지청천 등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83] 타고난 체력으로 그는 과다출혈을 하고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총격 직후 백범일지에 의하면 네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시켰다. 병원에 가서 치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의 글씨체는 떨려서 구부러진 글씨를 썼는데 이를 일명 총알체라 한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83] 1938년이후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 개조론, 임정고수론 논쟁 당시 개조파와 창조파에 참가하거나 기울었던 인사들이므로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 소수인사들은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정체이며 민족의 대표기관이므로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84] 한편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임정의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는 청년층의 비난도 받게 되었다. 1939년 4월 모친 곽낙원여사가 인후증(咽喉症)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이 일본군 타살사건으로 체포된 뒤에도 아들을 신뢰하였고, 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도 늘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곽낙원은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뒤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말 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85]'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85] 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9년 김규식, 이상정 등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86] 임시정부 주석 재임 시[편집]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4)[편집] 충칭 임시정부 청사. 한국 광복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主席)에 선출되었다. 그해 승인거부되었던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었고, 그해 9월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한국독립당군(1939.1)을 확대 개편하여 한국광복군(1940.9)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가 주석 장제스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4월 치장(朞江)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통합)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70]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1940년 9월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85]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87]1940년 9월 워싱턴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85] 이후 구미위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88] 1940년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73] 1942년 2월에는 김성숙, 김원봉, 장건상 등 좌파[모호한 표현]들이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였다. 5월에는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당시 임정 내부 좌·우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측이 한독당의 김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89]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주석 재선 (1944~1945)[편집] 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번과 면담한 김구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73]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8월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으로 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이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그는 광복군 통수부의 주석도 겸하여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90]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한국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金仁)이 폐질환으로 중국 쓰촨 성에서 병사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8월 15일 섬서성에서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로부터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귀국 직전[편집]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로 귀환하였다.[91]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30]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11월초 국민당의 송별식에 초대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송별연에도 참석하였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 일행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92] 김구는 11월 3일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 상하이 비행장에서 중국 국민당 인사들의 환송을 받고 출발하였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편집] 귀국 직후[편집] 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김구는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1월 3일 오후 비행기편으로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로 정했고 지주 최창학 자신의 별장인 죽첨장을 그에게 기증했다. 이후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93] 선언하였다. 11월 4일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현시가 20억여 원)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했다.[94] 수십년간 대일항전의 동지로 지내온 김구에 대한 최후의, 가장 파격적인 지원이었다.[94] 장제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김구에게 20만달러라는 거액을 쥐어준 데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향후 일종의 ‘보은’을 다짐받는 의미가 들어있었다.[94] 그러나 김구는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실패했다.[94] 당시 김구·김규식 등은 임정 대표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 해방과 함께 정권을 인수한 미군정이 또다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94]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 박헌영과 인공 내각의 견제를 위해 임시정부가 정부 의 명칭을 쓰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미군정은 김구의 개인경호원과 광복군에게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92] 하였으나 장제스가 준 돈 20만 달러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귀국하자 윤치호(尹致昊)는 그와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친일파의 거두로 지탄받고 있었다. 윤치호의 영향력과 일제 강점기 당시 그로부터 받은 지원금 등 윤치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김구는 거절하는 대신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정치 자금 조달[편집] 1945년 11월 5일 아침 김구 일행이 서울에 입경한 그 다음날, 송진우는 낭산 김준연을 대동하고 백범의 숙소로 마련된 서울 서대문의 경교장(京橋莊)으로 예방해 불굴의 노애국자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고, 같은 날 낮 이번에는 국민대표준비회의 대표 자격으로 장택상을 대동하고 예방해 후원회 기금을 전달했다.[95] 얼마 뒤에 임정 요인들은 그 후원금 가운데 깨끗하지 못한 돈이 들어있다 하여 국민대표준비회 사무실로 들고와 처리 문제를 논란했다.[95] 대화는 자연히 거칠어지면서 주먹과 흥분의 수라장이 벌어졌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고하 송진우는 참다못해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에는 양민의 돈도 들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요. 이런 큰일에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아오”라고 설득함으로써 겨우 수습하기도 했다.[95] 11월 중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20만 달러의 자금을 보내준다고 연락하였다.[94]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김구는 중화민국의 의 정치자금을 수용하였다. 중국과 경쟁하기를 원치 않았던 미군은 중국측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돈과 함께 보내준 3명의 무전사와 무전기에 대해서도 무전사를 추방하고 무전기는 압수했다. 다급해진 김구는 뉴욕의 주미 중국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결국 돈은 중국은행에 보관된다.[94] 11월 한민당 인사들이 찾아왔고, 최창학·방응모 등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이광수가 한동안 그를 방문하지 않자 대노하여 이광수를 찾았다. 김구의 불호령을 듣고 경교장에 불려간 뒤 이광수는 종종 경교장을 찾았으며 1947년 이후 김구의 7촌 조가 김흥두와 함께 백범 일지 한글판 번역작업에 동참한다.[96] 국내 정치 활동 준비기간 중[편집] 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끝에 앉은 이가 김구) 45년 11월 23일 김구는 바쁜 와중에도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97]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97] 11월 24일 내외신 방송과의 기자 회견을 하였다. 여기서 김구는 '내가 이박사보다 더 나은 수단을 갖고 왔다고 생각해서는 잘못이오. 다만 근 30년 동안 해외에 있다가 돌아온 터이므로, 현 정세에 어둡고 정세를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소.[98]'라고 답변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99]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진 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100]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100]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 주관하였다.[101] 순국선열추념대회 총재로 선출되었다.[101] 12월 25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73] 반탁 결의와 송진우와의 공방전[편집] 송진우 피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송진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의문을 입수해 검토한 뒤,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이어 안재홍, 여운형 역시 반탁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히 관철하려 하였다. 12월 29일 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회의에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남로당(조선공산당의 오류로 생각된다.) 사람들까지 다 나왔다. 다들 아주 격해 있었다.[102] 송진우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강원룡에 의하면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102] 한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103]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송진우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다.[102] 송진우는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104] 송진우는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의 통치권 주장을 미 군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105]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106][107]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106][107] 송진우의 이러한 주장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김구의 추종자들은 1945년 12월 30일, 그를 자택에서 저격, 사살했다.[104] 송진우와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 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108]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브루스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108] 조병옥도 김구를 암살 배후로 지목한다. 훗날, 국립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술에 취해 말하기를,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109]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110] 반탁운동 개시와 총파업[편집]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하지에게 보냈다. 12월 30일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111]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위원회는 반탁시위를 주관하였고, 12월 31일 오전 그는 국자(國子)를 발표한다. 그 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46년 1월 1일 김구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 다른 임정요인도 함께 군정청으로 불려갔다. 이때 김구는 하지로부터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었고, 김구는 하지의 융단에 올라 이자리에서 죽겠다고 대들었다 한다. 송남헌은 그가 하지로부터 추방시키겠다고 위협당하였다고 증언했다.[112]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113] 엄항섭 대독을 통해 군정청 한국인 직원의 복귀를 촉구했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전해지자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다시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114] 1946년 1월 2일 갑자기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의 지지로 돌변했다.[115]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선공산당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 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116] 김구는 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부수립이 우선이라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반탁의 입장을 철회한다. 하지의 임정요인 추방 사태[편집] 임정 주최의 반탁 운동이 극치에 달한 1945년 12월 31일 하오 하지 중장은 조병옥에게 연락관을 보내 사령관실에서 요담할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즉시 하지를 만나러 갔다. 하지 중장은 말하기를 군정을 접수하려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즉시 처치해야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임정 요인 처치에 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조병옥에게 원고 전문을 보여주었다.[117] “ 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들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군정 접수운동의 여파로써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오늘밤 0시를 기하여 인천 소재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118] ” — 원고 내용 하지는 김구에 대한 물리적인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조병옥은 즉시 이 원고를 다 읽고 난 뒤 경악하면서 하지중장에게 말하기를 임정 요인들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3.1 운동 이래 자유독립의 혁혁한 경력을 가진 분으로 민족의 자유전치운동의 봉화를 든 민족운동의 투사이므로 이 애국자들의 국외추방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한국인의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미군정은 한국에 있어서 실패로 끝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그런 조치는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118] 하지 중장은 조병옥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방송을 중지하겠다고 하였다. 조병옥은 즉석에서 김구와 하지의 면담을 약속받았다. 조병옥은 하지 중장에게 "나에게 김구 주석과 협상할 전권을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 중장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118] 12월 31일 저녁 조병옥은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숙소를 방문하게 되었다.[118] 조병옥은 김구와 여러 시간 면담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에게 진언하기를 “ 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도 한 푼도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맹약한 이상 현재의 입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 접수 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공산주의 치하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한반도는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 철제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미군정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오니 주석께서는 그 점 신중히 심사숙고하시어 한번 하지 장군과 만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보심이 어떻습니까?[118] ” 조병옥의 말에 김구는 하지 중장을 만나 보겠다고 수락, 그의 진언을 들어주었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편집]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앞줄 가운데가 김구, 앞줄 오른쪽이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왼쪽은 조완구, 프란체스카 도너 순,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1946년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104] 1월 이승만이 미국에 갈 때,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민족 외교'를 위해 '외교사절 후원회'를 조직했다.[119] '이승만 박사 외교사절 후원회'의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고, 김구와 배은희 등은 반탁총동원위원회나 비상국민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거뒀다.[119] 그리고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국내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도미 외교를 지지하였다.[119]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조병옥에 의하면 '한편 미군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익 우익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또 이승만은 완강한 정치인이라고 해서 한국 정치계에서 제가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120] 김구 주석은 극렬한 반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였다.[120]'는 것이다. 이에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반전을 꾀한다.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편집]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구는 김규식, 이승만,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21]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22] 1946년 2월 12일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121]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123]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121]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김구와 이승만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124] 2월 14일부터 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125] 반탁운동을 수단으로 해서 국민의회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수립케 하려는 것이었다.[125]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125][126]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127]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127] 3월 5일과 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125]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128]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128] 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등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129] 정치 활동[편집] 미소공위 반대 운동 (1946)[편집]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미소공동위원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월 20일에 열린 미, 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 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130]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131]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려 하지 않자 그것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131]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31] 46년 3월 22일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이때 김구는 이승만에게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초당적인 국민운동'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132][133]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134]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134] 1946년 5월 25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 서울역에서 (오른쪽 두 번째가 김구)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135]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136] 6월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단독정부론을 말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137]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138]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138] [139] 이승만의 연설에 이어 김구는 이 대회에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138][140][141]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김구는 부총재에 선출됐다.[138] 이승만은 국민운동의 총본부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민총)의 설치를 발표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민총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138]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 이승만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142]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43]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폭탄투척[편집] 1946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염동진의 백의사는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앞에서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백의사 청년단원들은 김일성에 대한 폭탄을 던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의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가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한 것이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144][145][14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삼일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간 열여덟 살 소년 김형집이었다.[144][147][148]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과 김책의 집에도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양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144][147][148]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149] 을 분실했고[144][148][150]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151]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151]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152]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153]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153]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153] 이승만과의 경쟁[편집] 이승만, 해방 직후 정치적으로 경쟁하던 중, 장덕수 암살 사건을 계기로 결별한다. 김구는 평소 이승만에게 우남 형님, 우남장(雩南丈) 이라며 존대했다. 그러나 반공주의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미국의 한인 교포 노동자들과, 청년층 지식인들이 정치자금과 후원금을 송금한 이승만과 비교할 때 그에게는 정치자금이 부족했다.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화교 무역으로 정치자금 마련[94] 을 모색한다. 이승만은 장제스가 김구에게 지원하려던 거금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는 정치자금에 관한 한 일찌감치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미군정의 후원아래 친일 경제인들이 조직한 대한경제보국회가 1946년 초 2천만원의 정치자금을 모았는데 이중 1천만원이 이승만에게 전달될 정도였다. 이즈음 20만달러의 반입을 포기한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 돈을 주기로 약속한다. 임정 시절 이승만과 재미교포 사회에서 받은 지원에 대한 보답 성격이었다.[94] 이때부터 돈을 손에 넣기 위한 이승만의 집요한 노력이 시작된다. 그는 1946년 2월 장제스 총통에게 전보를 보낸다. “20만달러를 미국 안전신탁공사(American Security and Trust Company)에 예치시킨 뒤 워싱턴의 임병직 대령(이승만의 심복)에게 지불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보를 접수한 국민당 우티에청 사무장은 잠시 난감했지만 곧바로 장제스에게 “이 돈은 이승만이 아닌 김구가 수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제출한다.[94] 방응모, 조선일보의 사주였던 방응모는 귀국 이후 그의 정치적, 경제적 후견인이었다. 이승만은 1946년 2월 전보를 시작으로 47년 말까지 4~5차례에 걸쳐 장제스에게 이 자금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한다. 미군정과의 관계악화로 46년 말 도미했던 그는 이듬해 4월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일부러 상하이·난징을 거쳐서 돌아온다. 이때 장제스와 처음 대면한 그는 20만달러 이야기를 꺼내지만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한다.[94] 이때 장제스는 서울의 김구에게 전화했고, 김구는 이승만이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렀음을 접하고 자금 일부를 국내로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그로부터 두달 뒤인 47년 6월 김구는 주한 중국영사관에 부탁해서 10만달러를 임시정부 주화(중)대사관의 운영자금으로 지원토록 한다.[94] 국내정치에서 이승만과 긴장관계가 조성된 만큼 돈을 자기몫으로 챙긴 것이다.[94] 그러나 이승만은 이 돈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해 8월 프란체스카와 함께 주한 중국영사관을 찾아가 나머지 10만달러를 달라고 사정하지만 실패한다. 이 일 직후 10만달러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들여와 경교장 생활비와 ‘백범일지’ 출간비용 등에 충당했다.[94]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김구는 일단 한민당이 보낸 자금과 경방에서 보낸 7백만 달러를 받아들인다. 조선일보의 방응모와도 연대하여 경제적 후견인으로 삼는다. 방응모는 곧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재정부장을 지냈다. 방응모는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101],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1]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154],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 등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46년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 유해봉환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방응모는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에 서자 그와 결별하기 전까지 그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거나 지원하였다. 1945년 말 그는 1천 5백만~2천만 원의 '애국금'을 기부받았다.[155] 정병준에 의하면 '김구가 받은 1천 5백만~2천만 원의 '애국금' 중 상당액이 이승만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155]'고 한다. 정치 자금의 부족은 그의 활동에 제약을 가져왔다. 화교 무역 시도와 실패[편집] 김구는 다른 편으로는 중국 화교무역을 통한 정치자금 조달을 계획한다. 20만 달러의 '해프닝' 이후에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에는 모종의 계획이 추진됐다. 1947년 말 임시정부 주화(주중국)대표단에서 국민당과 김구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민석린은 ‘중한동제실업공사 조직요강 초안’을 작성,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을 통해 장제스에게 올린다.[94] 중국 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각 당의 경제기초 건설을 위해 중한동제실업공사(中韓同濟實業公司)를 조직한다. 업무범위는 무역·운수·어업·부동산·공장·은행·농장 등으로 정한다. 자금은 우선 1백억원을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절반씩 출자하고 장래 업무발전 상황에 맞춰 증자한다. 해방 이후 가장 비중이 컸던 대일무역을 비롯해 대외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유일한 것이 타이완·홍콩·마카오 등지와 이뤄졌던 화교무역이었다. “타이완산 소금이 한국에 수입됐는데 반응이 좋았고 빈 배로 돌아가기 아까워서 인삼을 실어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같은 한·중간 경제활동을 관장함으로써 양당의 정치자금으로 쓰고자 했던 것이다.[94] 민석린과 우티에청 간에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국내에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운 김구나 장기간의 대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자금이 소진된 장제스, 양측의 이해가 맞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임시 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결고리였던 우티에청은 바람직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장제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만다.[94] 1948년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결정적 국면에 다다른 시기였다. 남북한이 각자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김구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이승만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다. 중국 국민당 역시 국공 내전이 심화되면서 베이징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내주는 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94] 결국 중화민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중국 공산당에게 뺏기게 되었고, 이로써 화교무역을 통한 김구의 정치자금 조달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임정법통과 임시정부의 재편성 (1947)[편집] 8.15 광복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윤봉길의 가족. 왼쪽부터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이후 경교장에서 기념사진. 왼쪽부터 손기정, 서윤복, 본인, 남승룡 1947년 1월초 이승만의 도미 외교 목적의 출국시 김포 비행장에 나가 환송하였다. 1947년 1월 이승만이 미국을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156] 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156] 존 하지 중장으로부터도 다시 경고를 받았다. 결국 김구는 학생들에게 과격시위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7년 1월 18일 김성수,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경성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구는 김성수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157]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 등에도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이는 대부분 일회성이었다.[158] 원래 우익진영은 김구의 주도로 1947년 1월 18일 김구의 주도로 우익진영은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 1주년을 기념, 대대적인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이승만의 만류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고로 김구는 반탁시위를 보류하였다.[156]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는 천도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축소되었고,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156]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가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159],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7년 2월 14일~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만약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로 하여 이승만의 도미를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젠 자기 길을 걷겠다고 나선 셈이었다.[125] 김구는 임정 계열과 함께 이승만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3.1절 전후로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의 3.1절을 전후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은 기밀이 누설되어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조차 '아이들 장난'으로 조롱하였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했다.[127] 미군정은 김구와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을 호출하였고, 군정의 호출을 받고 3월 5일 임정 요인들을 데리고 주한미군사령관실을 방문하였다. 군정청은 그들을 잡아넣겠다고 협박했고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정부수립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정해구는 김구의 이같은 시도에는 '이승만 부재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의한 김구의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국민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구의 이같은 시도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대처와 여타 세력의 지원부족으로 제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127] 한편 김구의 반탁노선에 반발한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국민당 세력은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한독당을 이탈하기도 했다.[160]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부주석으로 추대되었다.[161] 김규식.장건상.김붕준(金朋濬) 등 중도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161]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162] 반탁, 임정 법통 운동 (1947)[편집] 김구 (1947년) 4월 21일 이승만이 귀국하는 날, 김포에 마중을 나가 단정론 연설만은 그만두도록 충고하였다.[163] 단정론 연설이 자칫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승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연설을 취소하였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김구는 이승만과 반탁 투쟁을 전개했다.[131]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164][165]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166]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6.23 반탁데모를 격려하였다. 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167][168] 그러나 그러나 김구와 이승만의 격려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169]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170]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171]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도 않았다. 우익 진영 단결 노력[편집] 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함께 (1947년) 반탁운동, 임정 법통 운동과 함께 김구는 우익진영 단결, 통일을 추진했다. 그는 우선 반공, 우익진영 정당 통합을 추진했고, 다수의 우익인사들은 그의 단결 노력에 동조했다. 안재홍은 광복 직후 조선국민당을 창당하고, 권동진은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여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김구의 우익진영 단결운동에 동조하여 한국독립당에 통합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놓고 꾸준히 충돌하다가 국민당계는 탈당하게 된다. 미소공위에 긍정적 의사를 보였던 신한민족당 계열 역시 축출당했다. 김구, 조완구, 조경한 등은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고[172], 김구는 47년 2월 26일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172] 한민당에서도 김구의 우익진영 단결 노력에 반응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173] 이는 장덕수에 대한 김구의 감정이 악화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174]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75] 그러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176] 김구는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성명을 번복하여 발표하였다.[175] 성명서 발표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175][177][178]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179] 김구가 반탁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우익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이승만측과의 계속 갈등, 대립한 이유는 중경임시정부의 현실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172] 이승만, 한민당과의 합작 실패[편집] 장덕수. 재령 보강학교 당시 그의 제자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173]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180]'는 것이다.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180] 미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173][181][182]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173]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182][183]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편집] 단국대학 설립시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앞줄:김구 장형, 뒷줄: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이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張炯)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저격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본부였던 원효사는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은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184][185][186][187]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대해서는 건국실천원양성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생애 후반[편집] 이승만과의 결별[편집]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관련자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모욕감때문에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결별[188] 하였다. 김구는 한살 위인 이승만을 깎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에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189] 강준만에 의하면 '어찌됐건, 피를 나눈 형제 못지 않게 정을 주고받았던 의형제 사이의 애증관계가 아니라면, 김구의 행동은 달리 이해하기가 어렵다.[189]"고 했다. 미군 군사법정에서 증인 자격으로 심문중인 김구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뒷짐 지고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182]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였다.[190]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182]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191]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한민당은 김구와 임정계를 일제 시대 악명 높은 사교 집단인 백백교에 비유하면서 "살인마의 조직과 명령 계통을 근절하라"고 촉구하였다.[191]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91] 사학자 신복룡은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와 이승만이 이끌던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통합이 무산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김구의 배신감이 배가되었다."라고 했다.[191] 1947년 백야 김좌진의 추모회에 참석한 김구는 김좌진의 추도사를 했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192]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재판정 출두[편집] 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3) 1948년 2월 초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명의로 군정청 재판정 소환 출두서와 여비가 경교장에 도착되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193]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194] 3월 13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출두하였다. 김구는 증인 자격으로 재판정에 섰지만 미군정청 군법무관들로부터 추궁당했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청 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내가 지시했다고 하는 것은 나를 모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놈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설산이 죽은 것만도 분한데 왜 나한테 자꾸 이러느냐?[195] 암살범인 박광옥은 김구의 증인 신문 때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195]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196] 그러나 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3월 4일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 피고인들은 진술서가 고문과 강압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 에서는 트루만 미국 대통령 명의로 3월 12일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197] 장덕수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은 3월 한달 동안 21회에 걸쳐 계속 되었다.[197] 남북 협상으로 선회 (1948)[편집] 38선에서 모습 김규식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 조소앙이 찾아와서 그를 만류하였고 이철승 역시 그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현실적인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김구는 한편 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197]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의 한사람이던 김학규도 반대하였다.[198] 그리고 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198],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99]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렘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199]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199] 는 공격을 당했다. 남북협상 참여 당시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200]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가 방북할 뜻을 표현하자 수백 명의 청년들이 경교장 앞에 와서 못가십니다 를 외치며 가로막았다. 김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쳤지만 학생들이 물러나려 하지 않자, 아들 김신, 비서 선우진에게 북행길을 포기한다 하고 발표하고는 담을 넘어서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김구의 출발 소식이 알려지자 북행길을 주저하던 김규식 역시 출발한다. 4월 김구 북행을 결행하려 하자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일행들은 '이승만 박사와 노선이 분열되면 안 된다'며 경교장에 드러누워 김구의 북행을 저지했다[201]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그러나 김구는 자신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도와주지 않고 이제와서 북행길은 반대하느냐며 학생들을 향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 경교장에서 사람이 나와 김구는 북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하자 이철승 등 청년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김구 일행은 이들을 피해 담벼락을 넘어 경교장을 나갔다. 청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일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러 북한으로 갔다. 남북협상 참여[편집]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202]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193]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203]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순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204]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205]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조국분단의 위기를 만구하기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한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며 ...(이하 중략)...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206]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202] 남북협상의 실패[편집]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고 확신했다는 것이다.[207] 1948년 4월 26일 김구는 송태산장을 찾아 도산 안창호의 형인 안치호, 여동생 안신호를 만나고 내려왔다. 5월 10일 3.8선을 넘어 귀환하였다. 남북협상에 다녀와서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뭐니 해서 거기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208] 고 했다. 그러자 김선(1910~) 등 총선거에 출마한 당원들은 '할 수 없이 탈당[208]'하였다. 김선 등은 '그래도 다 같이 애국운동 하던 사람인데(이승만) 이젠 나라 세운다니까 여기서 일하자.' '말이 당수지 나가랄때 나가자 우리가 아쉬울 것이 있냐[208]' 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208]'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208]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208]'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208]'라며 조롱하였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209] 1948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자 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자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210]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210] 여순 사건 관련 공방전[편집]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중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211] 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212]-서울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212]-자유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212]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213]"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213]"라고 밝혔다. 이범석은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213]"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이범석은 포고문을 발표한다. 이범석 총리는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고 언급하며, 이 반란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212] 이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신을 극우파로 지적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그러자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는 10월 27일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211][214] 김구의 반박 보도문은 조선일보와 한성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4]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215] 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그 극우가 대체 누구냐며 윤치영에게 따졌고, 윤치영은 누군지는 알수 없지만 극우 인사인 것은 분명하다며 응대하였다. 칩거 생활[편집] 김구 (1949년) 한편 김구는 분명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닫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216] 비록 정치도덕가는 아닌 김구였지만 그러한 조선 민족의 희생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그는 김규식과 함께 타협하여 민족통일을 이룩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리처드 로빈슨에 의하면 '두 김씨의 입장은 이승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혐오감, 애국심이 복합된 것이었다.[216]' 한다. 1948년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217][218]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217][218]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219]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219]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219] 반민특위 재개와 부활[편집] 김구는 민족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민족의 반역자인 친일파들은 반드시 처단해야한다며 반민특위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그일로 악랄한 친일파였던 장경근, 김창룡, 김종원, 안두희, 등의 모든 친일파들의 입장에선 김구는 신경이 거슬렸던 존재였다. 이일로 인해 암살할 명분이 생기기도 했다. 암살[편집]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193]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220]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193]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221]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21]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221]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222]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222]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222]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암살의 배후[편집] 김구의 묘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223]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224][225][226]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한편 안두희는 초기 진술에서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216] 고 진술하였다. 한편 안두희가 자신의 군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추도사[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국무총리 이범석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전 임정 부주석 김규식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국독립당 대표 엄항섭 추도사 전문 암살 직후[편집]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216] 6월 27일 이승만은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비판했다.[216]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216] 김구의 장례는 국장이 결정되었으나 한독당 측에서는 민족장을 고집했다. 정부에서 이범석과 신성모, 허정 등을 경교장에 파견하자 조완구, 조소앙 등은 너희가 죽여놓고 너희가 국장을 하느냐며 흥분했고 실랑이와 몸싸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측이 보낸 사절단과 한독당 인사 간에 마찰이 빚어졌고, 김규식의 중재로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은 10일간 거행되었다.[227] 김구의 국민장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고,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후[편집]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228]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229][230] 기타 약력[편집] 1910년대 이전[편집] 1880년 백부 김백영 사망 1888년 조부 김만묵 사망 1892년 임진년 경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 그외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고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231] 1901년 부친 김순영 사망 1902년 여옥과 약혼 1903년 약혼녀 여옥 사망[232] 1904년 12월 최준례(崔遵禮)와 결혼, 장련 읍내로 이사. 1905년 11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233] 1907년 2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 사퇴 1907년 신민회에 참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받고 수감 1915년 가석방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 1919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 경무국장 취임 1924년 대한통의부, 참의부 김명봉,박희광등과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암살계획 협력 임시정부 활동[편집] 1926년 12월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됨. 1929년 5월 백범일지 상권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69] 1930년 8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1931년 10월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1932년 1월 일본 쇼와 천황 살해를 노린 사쿠라다몬(桜田門) 폭탄투척 사건 1932년 2월 상하이에 정박중인 이즈모 호 폭파에 윤봉길을 파견했으나 미수.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 쇼와 천황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지휘. 1932년 5월 한인애국단원 이덕주·유진식, 조선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에파견했으나 체포됨.[234] 1932년 5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최흥식 등을 관동군 사령관 본장결을 암살하기 위하여 만주로 파견하였으나 체포됨.[234] 1935년 한국국민당 조직. 1939년 5월 30일 측근이었다가 결별한 안공근이 암살되었다.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을 받았다.[235] 194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重慶)으로 이전.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갖고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광복군 침투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 광복 이후[편집]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236] 그러나 뒤에 김구는 취임을 거절했다. 1945년 11월 김구는 임시정부를 정부의 자격으로 귀국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 좌절.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각각 임시정부 송별연을 베풀어 줌.[237] 1945년 11월 2일, 존 하지 중장,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236]"라고 말함. 8.15광복 후 1945년 11월 3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임정요인 환국 제1진으로 귀국. 1945년 11월 24일 존 하지 중장,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삼상회의 결정서를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 1945년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기도 하였다.[238]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주제의 방송담화(엄항섭 대독)에서 강력한 국방군의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239]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명(반탁학련) 데모대가 김구에게 반탁학생대회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가 있는 서대문 서교장으로 향했다. 신문로에 이르렀을 때 좌익성격의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같은 날 천도교 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행사를 축소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156][240]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된 데 이어,[241]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241] 1946년 3월 1일 이승만과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1946년 6월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유골을 찾아,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였다.[193] 한편 방응모등의 재정적 후원을 얻었다.[출처 필요]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수립을 발표하다. 그러나 이때 김구는 탈장증세로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242]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결성식에 참석,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43]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193] 1947년 1월 전국반탁학련 반탁 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하여 46년과 같은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대대적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만류와 존 하지의 경고로 보류하였다.[243] 1947년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인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에서 참석하여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244]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맡음.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하자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다. 이때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245]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193] 1948년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 발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 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여,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1948년 3월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 자격으로 미군정청 재판정에 출두하였다.[246]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8년 8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 장남 김인의 유골을 봉환하고, 9월 이동녕·차이석 선생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 천장식을 하고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다.[193] 1949년 1월 서울특별시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1949년 3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193]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함.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됨. 향년 74세.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등록문화재 439호~442호로 등록 의혹과 논란[편집]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편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가 쿠데타를 계획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쿠데타를 기도하였다는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이범석은 그가 극좌파와 손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주장했다.[211] 그리고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여순 사건 당시 극우 정객이 극좌파와 손을 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하여 그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212] 그러자 김구는 조선일보에 사설을 발표, 여순 사건에 극우 관련운은 이해난(이해하기 어렵다.)이다고 맞받아쳤다.[212] 그러나 이후에도 김구의 쿠데타 준비설은 계속 나타났다. 국군 내에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김구를 추대하려는 세력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 CIC는 김구가 정부 전복 쿠데타를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의 첩보기관 CIC의 보고에 의하면 1949년 그는 염동진과 손잡고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개입한 증거[247]' 가 미군 방첩대에 입수되었다. 한편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225] 한편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 중 제4연대 소속 장교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울 계획을 짜기도 한다. '제4연대 장교들의 참모회의 과정에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보다 군사적 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토로되었으며,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247] 이에 따르면 이 정부는 김구의 파시스트형 정부에 합류할 북한군 내부의모든 친소장교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장교들과 경찰관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요원은 이승만 배후에 미국의 세력, 권력과 위신 때문에 비록 현재는 이승만 정부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유형의 정부는 결코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거나, 한국이 재건하고 군사적 기반을 통하여 국가들 중의 국가가 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247]'는 것이다.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같이 관여[225] 하였다. 염동진과의 쿠데타 기도는 곧 미군 방첩대와 당시 대한민국 총리인 이범석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고, 염동진과 김구의 쿠데타 시도 관련 문건이 미국 방첩대에 전달되면서 그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염동진은 김구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었다. 염동진은 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역할을 해왔다.[247] 그런데 염동진이 국군내 자료를 김구에게 전달하고, 군내 불만세력과 김구의 사이를 연결 목적으로 작성한 서신이 미군정 방첩대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이 군대내 파벌은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었다. 한번은 제출되는 정보들을 보호하기위한 보안장치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해서 내 자신이 점검을 해본 일이 있었다.[247] 한 건의 비밀보고서가 실질적으로 한국경비대(국군) 정보참모부(G-2)에 뿌려졌고 김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247] 이후 이 문서는 미군정 방첩대 수중에 들어간다. 그 후에 문서화된 보고서들이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구두 보고들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이루어졌다.[247] 그러나 한편으로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225],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225]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248] 한편 김구가 암살된 직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구의 암살 배경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어느 고위층이 외국 언론에 김구의 쿠데타 미수 계획을 발설하였다.[216] 이 익명의 고위인사는 외신 기자들에게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밝혔고, 바로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216] 라고 보도한다. 안준생 암살 사주[편집] 1945년 8월 귀국 직전 그는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을 암살하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249]'는 것이다.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249] 고 부탁했고, 부탁의 사유로는 '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부친 의사의 죄를 사하고, 미나미 지로 총독을 애비라 칭하였다.[249]'고 했다. 안중근 사후 생계의 곤란을 겪던 안준생은 조선총독부에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나미를 아버지라 했다는 근거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그의 안준생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안공근 암살 의혹[편집] 안공근 피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에 실종, 암살된 안공근의 살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실제로 해방 뒤에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중에는 김구의 측근이었던 모 독립운동가가 안공근을 납치,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는 의혹이 널리 언급되었다. 1932년 이후 김구는 그의 최측근 중 한사람이었던 안공근과 여러 번 마찰을 빚었는데, 그 뒤 안공근은 1939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실종, 피살되었다. 안공근은 한때 김구의 측근이었으나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형수(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로부터 심히 질책받았고, 임정의 자금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쓴 일과, 도박으로 자금을 탕진한 일이 있었다. 안공근은 김구의 심한 질책을 받고 임정 이동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밖에 안공근은 임정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기도했다. 김구는 안공근에게 부여된 임시정부 및 한인애국단의 대외 연락업무를 박찬익에게 맡겼다. 이후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중 상하이의 한 부두에서 사라졌었다. 안공근은 의문의 실종을 당했고, 이후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후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235] 이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 널리 언급되고 있다.[235] 김립 암살, 무고 의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김립 암살 사건입니다.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 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250] 그는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로,'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251]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251] 그러고서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251]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레닌이 준 자금을 김립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250] 는 반론도 있으며, 그가 중국 여자를 첩으로 삼고 향락을 즐겼는가 여부는 뜬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레닌이 한형권, 김립 등에게 준 자금은 한인사회당 내지는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공작금으로 지급된 자금이었다. 이들은 자금을 실제 활동비와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분배하였고 임정 측에는 내놓지 않았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 박노자에 의하면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다 한다.[250] 그러나 박노자는 한국외대 반병률의 주장을 인용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한국외대 반병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250] 박노자는 이를 두고 '동족 테러'라고 비판했다.[250] 그에 의하면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 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250] 이라는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사치, 향락을 하고 광동인 첩을 사서 즐겼다고 하였으나, 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장덕수 암살 의혹[편집] 1947년 12월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한독당을 용의자로 의심되었고, 그는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 짓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차마 김구 주석에게는 가서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252] 구미위원부에 10년간 근무했던 허정은 한인애국단과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준비하는데 조소앙이 기여한 점을 근거로 조소앙을 찾아갔던 것이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252]"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당시 수도경찰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180]'고 했다.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180]'라고 했다. 결국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임정과 한독당, 민주의원에 모두 간부로 몸담던 김석황, 조상항이 체포되면서 김구까지 법정에 서게 되었다. 만주 폭격 계획 의혹[편집] 해방 직후 그는 만주 폭격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김구와 염동진은 만주 지역의 폭격을 계획한 만주계획을 세웠다 한다.[253] 만주 폭격 계획은 1947년 말 ~ 1948년 초에 여러 차례 김구가 강조한 만주에서의 군사계획이었다. 이때 김구, 이청천, 이범석[253] 등은 북한을 폭격할 계획을 세운다. 김구 등은 '중국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북을 무력공격할 뿐만 아니라 중국 내전에서 장졔스의 중국 군대와 동맹해 한·중의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종국적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격멸한다.[253]'는 것이었다. 즉 남·북·만주가 포함된 이 계획은 한국·중국·미국의 동아시아 삼각 반공 군사 동맹 체제의 수립[253]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 조직원들이 떨어져나가면서 타격을 받았고, 인력과 장비의 부족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이후 김구의 암살로 만주 폭격 계획은 실패, 백지화된다. 김성수 암살 기도 의혹[편집]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 의혹 외에도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254]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55]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255]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민간인 살해 논란[편집]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18],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당시 일본의 기록이나 조선의 기록에서도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내용은 없다. 2003년 11월 말 김완섭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256] 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257] 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256]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256]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257] 고 밝혔다. 그러나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21] 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22] 이승만과의 결별 과정[편집]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날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해 한 시간 정도 요담한 후,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176] 그러나 12월 2일에 일어난 장덕수 암살 사건은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끝장내는 동시에 파국으로 끌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자신이 배후로 의심받자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승만은 “김 주석(김구)가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는 등 딴전을 피웠다.[176] 이승만은 자신을 재판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는 김구의 도움 요청을 회피하고 수수방관하였다. 평소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 했을 만큼[182] 그와 친밀하였다. 그러나 장덕수 사건을 계기로 양자의 관계는 악화되고 파국에 이른다. 이승만은 김구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였다. 분노한 김구는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했다.[176] 김구가 단정론의 철회와 남북협상론을 들고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인간관계의 파탄 직후였다.[176]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과정에는 어느정도 인간적인 감정도 작용하였다. 도덕성 논란[편집] 김구의 정치적 도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리처드 로빈슨은 김구가 정치적 도덕가는 아니라고 평하였다.[216] 미군정 외에도 브루스 커밍스는 김구가 송진우의 암살범이라고 지목했다. 한편 김성수의 암살을 공작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었다. 주애보와의 관계[편집] 김구는 이봉창 의거와 홍구공원 사건을 계기로 피신해 있었다. 이 피신기간 중 중국 국민당 관계자가 소개시킨 미혼의 뱃사공 주아이바오(주애보)와 부부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주아이바오와의 사이에서 자녀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평가와 비판[편집]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258]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258]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258]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한다.[258]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258] 미국의 시각[편집] 미국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259] 로 보고 있었다. 미군정은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260])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도 묘사하였다.[260]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114],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108]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다.[247]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247] 평가[편집]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261]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262] 1946년 초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263][264] 지나치게 고평가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265] 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265]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265]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265]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265]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265]”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266] 비판[편집] 전북대 교수 강준만과 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각각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267][268] 또,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의 반공주의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세력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269]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270]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은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가 건국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271]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272]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273] 한편 5·10 선거를 반대하던 4·3 항쟁에 침묵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274] 는 비판도 있다. 강준만은 '김구가 50대까지 어머니로부터 '사랑의 매'를 맞았다는 건 미담(美談)일 수도 있지만, 그걸 뒤집으면 그만큼 고전적인 인물이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275]'고 보았다. 테러리즘 논란[편집] 2008년 5월 출간된 비한국사 전공자로 구성된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서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물의를 빚었다. 한양대 석좌교수 신용하는 김구 테러리즘 논란에 대해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국내 일부 학자의 시각에 대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265] 신용하에 의하면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1930년대는 ‘완바오산 사건’으로 중국 내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됐고,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각지를 점령하면서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 신 교수는 “임시정부는 열세적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265] 7개월에 불과한 한인애국단 활동 기간 중 백범이 중국 국민당에서 독립군 장교 양성 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도 백범의 치밀한 지략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테러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공작전’으로 봐야 한다[265] 고 평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을 상대로 하여 사망 혹은 중상을 입히거나 인질로 잡는 등의 위해를 가하여 대중 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 혹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어떤 사람, 대중, 정부, 국제 조직 등으로 하여금 특정 행위를 강요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침략기관, 일본의 침략행위에 참여한 군인이나 관료등을 상대로 진행된 항일운동을 테러로 보지 않는다. 윤봉길과 이봉창등은 일본 천황, 일본 고위 군인등을 상대로 한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가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들에 대해 대해 암살을 시도한 백색 테러를 저질렀다는 의혹 또한 존재한다. 김구는 소군정기 북한의 지도자 및 관료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별다른 직위 없이 남한에서 정치 운동을 이끌던 사람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백의사가 북한의 관료였던 강량욱을 암살하고자 할 때 죄없는 아들, 딸, 친구 목사까지 죽게 만들었다.[276] 강량욱은 고위관료여서 민간인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생당한 강량욱의 가족, 친구는 민간인이므로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백색테러라 볼 수 있다. 그 외에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다.[108] 또한 커밍스는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277] 고 평하기도 했다. 38선 이북 조선에서는 1946년 3·1절 기념식 때의 폭탄투척 사건 이후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미군정의 보고서[254]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55] 해왔다 한다. 권위주의적인 행동[편집]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275][278]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 한국독립당, 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방북시에도[275][279]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275][279]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74]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274] 정치적 실패에 대한 비판[편집] 광복군 참모장이자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은 그가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하여 국제정세를 외면하다시피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이 백범 선생이다. 그런 까닭에 이박사는 마침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섰고, 백범 선생은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고 비판했다.[280] 제1대 내무부 장관과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동산 윤치영은 그는 김구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281] “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281] ”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281]'이라고 분석했다. 윤치영은 또 김구 생전에 그가 임정의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윤치영은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205] 16대 대통령 노무현은 그를 '실패한 정치인'이라 비판하였다. 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이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282] 그는 도쿄방송(TBS)이 일본 전역에 방영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 솔직하게 직접 대화'라는 주제의 90분짜리 토론에 참석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일본 여성 방청객의 질문에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고 밝혔다.[282]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편집]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 노선으로 갔다.[283] 훗날 국민당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283] 강준만은 미국의 패권장악과 중화민국의 몰락을 이승만의 승리와 김구의 패배 요인으로 보았다.[283] 이승만에 비교해서 웅변력이 떨어졌던 김구는 대중 선동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284] 이점 역시 김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김구는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한다.[219] 이승만도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219] 한편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219]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182] 그러나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182]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182]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82]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285] 일화[편집]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선생을 모시는 이들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267][286][287] 한미호텔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267][286]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286][288] 백범일지 윤문[편집]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의 교열과 윤문은 이광수가 하였다. 1945년 11월 김구가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출간할 때 이광수가 윤문을 자청했다[289] 한다. 백범일지의 윤문을 허락한 사람이 백범 자신인지, 아니면 백범 비서 등 주변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290] 문제는 춘원이 윤문 과정에서 친필본에 없는 문장을 임의로 첨삭해 원전의 텍스트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290] 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이광수가 백범일지 편찬에 참여한 것을 김구가 알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르면 “(이광수가) 속죄하는 심정으로 맡겠다고 하니 시켜보라고 주위에서 백범께 말했다. 김구는 그의 행실(일제 후반에 변절한 것) 때문에 망설였다”[289] 고 한다. 그러나 곧 이광수에게 백범일지 윤문을 맡긴다. 둘째 아들 김신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건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김신 씨의 대담, <신동아>, 1986년 8월, 347쪽.[289])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저서[편집] 《백범일지》(1947, 국사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백범일지입니다. 〈나의 소원〉[편집]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백범일지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強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하략)...백범[291] 그 외[편집] 《도왜실기》(1932, 엄항섭 정리) 《백범어록》(2008, 도진순 주해) 사상과 신념[편집] 남북협상 참여 목적[편집] 1970년대 이후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는 통일과 조국애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 과정이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다.[274]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274] 시점에서 새로운 정국 반전을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김구는 ‘백의사’ 등을 통해 대북 타격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했다.[274] 백의사 단원들이 소지한 무임승차권이 북한측에 입수되면서 그는 엄청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3.1절 경축식 폭탄 투척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혔[151] 고, 북한은 이후 그의 이름으로 풍자삼아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152] 해방공간 내내 반공, 반소로 일관한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는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조건에서 취해진 정치전술일 가능성이 농후했다.[274] 외교 문제[편집] 외교 문제에 소홀했다는 평가도 있다. 전 서울교육대 총장 이택휘는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 부재나 당시 강대국인 소련에 대해 배타 정책을 쓴 것은 외교적 투박함”이라고 지적했다.[265] 김구의 외교력 미숙에 대해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신용하는 “중국 국민당과 군사 협력 관계에 있었던 상황에서 백범이 공산당과 공식 관계를 모색하기는 어려웠다”며 “당시 장제스(蔣介石)를 설득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백범 외교의 진가”라고 반박하였고[265] 단국대 교수 한시준도 “백범이 광복군의 연합군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며 “이는 백범이 외교에서 상당한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265] 그러나 이승만을 통해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반론도 있다.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그는 이승만과 함께 임정을 미국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애국가에 대한 관점[편집]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292]'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292]'고 반박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편집] 그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274] ...(이하 중략)...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274] 또한“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위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좌파와의 연대는 극히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274] 임시정부의 존재를 좌파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1938년 이후 장졔스가 국공합작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해 김구와 김규식, 김원봉을 소환하여 합작, 협력하라고 하자 좌파의 임정입각을 수용하게 된다. 1922년 초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지원받았으나 임시정부에는 상납하지 않은 김립을 사살한 것도 그였다. 그는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을 보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250] 또한 김립은 레닌으로부터 매각하면 현금으로 바꿀수 있는 귀금속인 금괴를 일부 전달받았는데 이것 역시 임시정부에게 내놓지 않았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며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251] 으며,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251] 이라며 비판을 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외세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도 생각했다. 1919년 임시정부 경무국장 당시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혁명에 동참해달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는 소련 등 외국 세력에 기대는 것이라며 참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여순 사건에 대한 관점[편집]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214]', '반도(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214]'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오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니,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勵動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숙고하여 용감히 悔悟하고 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 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293] 여러분의 기대와 託付와 애국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293] 10월 30일 여순 사건 관련 담화에서 김구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293]'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처지지 않을수 없다[293]"고 발표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김구의 자서전《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또한 군인 출신 정치인 이후락과도 사돈관계이기도 하다. 증조부 : 김영원(金榮元[294], ? ~ ?) 조부 : 김만묵 (金萬默, ? ~ 1888년) 조모 : 장씨(張氏, ? ~ ?) 아버지 : 김순영 (金淳永, 1848년 ~ 1901년 2월) 어머니 : 곽낙원 (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부인: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1일) 장남: 입언 김인(立言 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육군 소령 자부 :안미생(安美生, 1914년 ~ 2007년, 안중근의 조카) 손녀 : 김효자(金孝子, 1941년 ~ ), 장자 김인의 딸 차남 : 서언 김신(瑞言 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대한민국 6대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주중국 대사, 국회의원 역임, 前 백범기념관 관장 자부: 임윤연(林胤嬿,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독립운동가 임학준의 딸, 위암으로 사망 손자 : 김진(金振, 1949년 10월 30일 ~ ) 대한주택공사 사장 역임 손자 :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 주상하이 총영사, 국가보훈처장 역임 손부 : 이정희(1959년 ~ ) 손자 : 김휘(金揮, 1955년 ~, 나라기획 이사 역임)[295] 손녀 : 김미(金美, 한화 그룹 회장인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과 결혼[296] 손녀사위 : 김호연(金昊淵, 기업인) 손자 : 김윤 장녀: 미상(1906년 ~ 1907년)-가마를 타고가다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쐬서 사망했다. 차녀: 김화경(金化慶, 1910년 ~ 1915년) 삼녀: 김은경(金恩慶, 1916년 ~ 1917년 2월) 삼종조카(9촌) : 김흥두(金興斗[297]) 사돈 : 이후락, 정치인 사돈 :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기업인 김구를 연기한 배우들[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이영후 - 1981년 《제1공화국》 MBC 이영후 - 1984년 《거부실록 시리즈 - 백산 안희제》 MBC 안대용 - 1984년 《독립문》 KBS 2 이영후 - 1984년 《조선총독부》 MBC 이영후 - 1984년 《그의 아내》 MBC 이치우 - 1985년 《새벽》 KBS 1 김진태 - 1989년 《백범일지》 MBC 김진태 - 1990년 《반민특위》 MBC 이영후 - 1991년 《여명의 그날》KBS 1 정욱 - 1992년 《님이여》 MBC 김상중 - 1995년 《김구》, 청년 김구 KBS 조상건 - 1995년 《김구》, 장년 김구 KBS 이영후 - 1998년 《삼김시대》 SBS 이영후 - 2003년 《야인시대》 SBS 이영후 - 2006년 《서울 1945》 KBS 이영후 - 2010년 《자유인 이회영》 KBS 유하복 - 2019년 《이몽》 MBC 라디오 드라마[편집] 이치우 - 1966년 《광복 20년》 TBS 다큐멘터리 이치우 - 《이승만과 김구》 이치우 - 1981년 《8·15 특집 그여름의 이틀》 KBS 라디오 연극 영화[편집] 전창근 - 1960년 《아! 백범김구선생》[298] 영화 전창근 - 1967년 《춘원 이광수 (1967년 영화)》, 영화 박암 - 1969년 《춘원 이광수 (1969년 영화)》, 영화 박암 - 1973년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영화 조통달 - 1986년 《윤봉길 의사》, 연극 이영후 - 1998년 《천년의 수인》, 연극 임동진 - 2005년 《청년 장준하》, 뮤지컬 왕기석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청년 김구 역) 왕기철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장년 김구 역) 임진택 - 2010년 《판소리 백범 김구》 판소리, (노년 김구 역) 김홍파 - 2015년 《암살》, 영화 조진웅 - 2017년 《대장 김창수》, 영화 같이 보기[편집] 한국독립당 한국노병회 백범일지 백범기념관 동학농민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신탁통치반대운동 송진우 피살 사건 제1공화국 김규식 박찬익 이승만 장제스 안창호 안공근 105인 사건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이동녕 이시영 윤치영 김좌진 김두한 광복군 미군정 안공근 피살 사건 민주의원 고능선 김창숙 민필호 송병조 안미생 안재홍 안정근 안중근 양기탁 윤치호 장제스 중화민국 조성환 한국국민당 한인애국단 허정 홍진 하지 미 군정 송진우 경교장 삼청장 반공주의 장덕수 피살 사건 김홍일 안공근 장덕수 김석황 안두희 엄항섭 이유필 조소앙 김학규 안창호 여운형 여운홍 조만식 조완구 차이석 김신 임정 각료 선우진 신익희 이청천 독립촉성중앙회 한국국민당 백의사 염동진 김성수 김인 김준엽 김일성 김철 박헌영 신규식 이범석 이철승 장면 장건상 장택상 장준하 조봉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김구선생 암각문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대선 대통령 1대 한국독립당 6.63% 13표 2위 낙선 제1대 부통령 선거 부통령 1대 한국독립당 31.47% 62표 2위 낙선 각주[편집] ↑ 백범 발자국 따라 걸으면 큰길 되지요 ↑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 김삼웅《백범김구평전》시대의창,132쪽 ↑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p.514 ↑ 대한민국의 이북5도 행정구역 기준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37P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에 해당한다. ↑ 조선향토대백과 오담리 ↑ 김구,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6) 22페이지 ↑ 가 나 다 라 백범김구기념사업회 - 연보 ↑ 계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위인전기 《김구》편에도 김구선생이 어릴적 개구장이여서,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장난의 정도가 지나쳐서 친척 할아버지가 집에 데려가 며칠간 돌보아주면서 위로할 만큼 호되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 가 나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 김구 그는 누구인가”. 주간조선. 2006년 10월 2일. 2011년 11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가 나 다 라 마 백범일지 상권 참조 ↑ 가 나 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 ↑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50~51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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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4월 23일 후임이동녕 전임홍진 제9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10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1927년 4월 10일 - 1927년 8월 후임이동녕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1930년 8월 4일 - 1933년 10월 후임양기탁 전임이동녕 제18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0년 3월 13일 - 1940년 10월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19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0년 10월 8일 - 1944년 4월 6일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20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1944년 4월 6일 - 1947년 3월 3일 후임이승만 전임김규식 제3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1947년 3월 3일 - 1947년 9월 5일 후임김구 전임김구 제4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1947년 9월 5일 - 1948년 8월 15일 후임이시영(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경무국장1919년 9월 - 1921년 5월 후임김용원 한국 광복군 통수부 주석(광복군 최고사령관)1944년 10월 - 1946년 1월 15일 후임원용덕(남조선국방경비대 수립) vdeh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대통령 (1919년 ~ 1925년) 이승만 박은식 국무령 (1925년 ~ 1940년) 이상룡 양기탁 이동녕 안창호 이동녕 홍진 김구 주석 (1940년 ~ 1948년) 이동녕 김구 이승만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후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vdeh신민회 창건위원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이회영 윤치호 류동렬 안창호 이경희 김홍량 김구 vdeh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이승만 이시영 제임스 밴 플리트 장제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응오딘지엠 아드난 멘데레스 허위 김좌진 오동진 조병세 안중근 윤봉길 이준 강우규 김구 안창호 신익희 김창숙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최익현 이강년 민영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S. 트루먼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프랑수아 톰발바예 다비드 다코 수루 미강 아피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레온 음바 아마두 아히조 하마니 디오리 조모 케냐타 무테사 2세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퉁쿠 압둘 라흐만 푸트라 알 하즈 타놈 키티카초른 쑹메이링 천궈푸 쑨원 천치메이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조만식 임병직 서재필 박정희 최규하 시리낏 끼띠야꼰 푸미폰 아둔야뎃 전두환 김규식 조소앙 유관순 vdeh1995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김지섭 2월 최팔용 3월 이종일 4월 민필호 5월 이진무 6월 장진홍 7월 전수용 8월 김구 9월 차이석 10월 이강년 11월 이진룡 12월 조병세 vdeh1995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정월터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vdeh2019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유관순 김마리아 손병희 안창호 김규식·김순애 한용운 이동휘 김구 지청천 안중근 박은식 윤봉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64909377 LCCN: n81017839 ISNI: 0000 0000 8389 4118 GND: 123233933 SUDOC: 107977966 BNF: cb170015989 (데이터) BIBSYS: 4063026 NDL: 00622698 NKC: jo201586575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구&oldid=24523797" 분류: 김구1876년 태어남1949년 죽음화기에 죽은 사람한국의 암살된 정치인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반일 감정대한민국의 반일 감정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살인자대한제국의 정치인대한제국의 승려대한제국의 교육인동학농민운동 관련자일제 강점기의 정치인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범죄 피해자테러 피해자한국의 범죄인대한민국의 정치인한국의 통일운동가민족주의자천도교 이탈자불교 이탈자대한민국의 감리교도6성장군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대원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원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대장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경찰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대한민국 제1공화국한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수상자한국의 독립운동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한국의 통일운동김구 가신민회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비상국민회의백색 테러한국노병회한국독립당 (1930년)한국독립당의 당원신한청년당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안동 김씨 (구)태탄군 출신숨은 분류: 참조 오류가 있는 문서인용 오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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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병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공병우公炳禹 출생 1907년 1월 24일(1907-01-24)대한제국 평안북도 벽동군 사망 1995년 3월 7일 (88세)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 안과 의사 국어국문학자 저술가 수필가 사진가 언어 한국어 국적 대한민국 소속 前 공안과 원장 前 한글학회 이사장 前 한글문화원 원장前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겸임교수前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겸임교수 학력 일본 나고야 제국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활동기간 1938년 ~ 1995년 장르 수필, 저술, 사진 수상내역 대통령상(1958) 외솔문화상(1974) 금관문화훈장(1995) 배우자 이용희 자녀 슬하 3남 6녀 종교 개신교 웹사이트 아래아 한글 탄생과 공병우 박사 공병우 타자기와 관련 있는 세벌식 카페 공병우(公炳禹, 1907년 1월 24일(1906년 음력 12월 30일) ~ 1995년 3월 7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안과 의사이자 국어국문학자이다. 한글 전용과 한글 기계화 및 전산화에 공헌하였다. '공병우 타자기'가 유명하다.[1] 목차 1 생애 2 약력 3 학력 4 디지털 시대의 업적 5 노년 6 출연작 7 지은 책 8 사후 발간 9 수상 10 각주 11 외부 링크 생애[편집] 한글학회 이사장(1959~1977)을 지냈으며 이후 한글문화원을 개설(1988)하여 원장을 지낸 그의 본관은 김포(金浦)이며 평안북도 벽동에 유복한 집안에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1938년 한국인 최초로 안과 전문 의원인 공안과를 개원한 의학박사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강압적인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반발로 스스로 '금일(오늘) 공병우 사망'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부터는 사재를 털어 한글기계화운동에 주력하면서 세벌식 글자판 개발과 보급에 더욱 전념했고 1949년 최초로 개량형 기계식 타자기를 개발했다. 그 이전에는 다섯벌식, 네벌식, 세벌식 글자판 타자기가 나와 있었으나 모두 개량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공병우 타자기가 개량하는데 성공하면서 일반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박정희 정부에서 타자기에 네벌식 글자판이 표준으로 채택되었고 1983년 전두환 정부에서 컴퓨터에 두벌식 자판이 표준으로 채택하면서 글자판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5년 3월 7일, 노환으로 인하여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 후, 후진들의 의학 교육을 위하는 유지에 따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몸소 해부학 실습을 위해 시신을 기증하였다. 약력[편집] 1906년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태어남. 1926년 조선 의사 검정 시험 합격. 1936년 일본 나고야 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 1938년 공안과 의원 개설.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 의원 개설) 1949년 최초로 "실용적인" 한글 타자기 개발. 초성, 중성, 종성의 세벌식 글자판. 1958년 최초로 콘택트렌즈 도입 시술. 1959년 2월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 (1971년 2월까지) 1968년 기계식 한영 겸용 타자기 발명. 1970년대 한글 네벌식 자판 반대 운동. 1971년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 개발. 1980년대 세벌식 글자판 미국 교포 사회에 보급. 1988년 한글문화원 개설. 1995년 사망.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됨. 학력[편집] 평안남도 평양의학강습소 학사 일본 나고야 제국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석사·의학박사 디지털 시대의 업적[편집] 공병우는 90대였던 1990년대에도 한글과학화와 발전을 위한 평생의 꿈을 추구했다. 그가 만든 한글문화원은 80년대 중반부터 매킨토시 컴퓨터를 직접 활용하여 직결식 한글 세벌식 글자꼴을 개발하였다. 그는 세벌식이 가장 빠르고 편리하게 한글을 기계와 컴퓨터에 입력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글문화원에서 훗날 아래아한글의 개발을 함께한 박흥호와 함께 세벌식자판배열을 완성했으며, 세벌식입력기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공병우박사는 그 무렵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재야에서 실력을 떨치던 젊은 프로그래머였던 강태진, 정내권, 이찬진, 안대혁 등과 교류하였고, 이들을 지원했다. 이들은 한글문화원에서의 인연으로 훗날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했으며, 국산워드프로세스인 아래아한글을 개발하였다. 그는 군사정권하에서 세벌식자판과 조합형코드가 IT 표준으로 정착되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 했으며 과학적으로 한글을 모두 표현하지 못하는 완성형 코드를 비판하고 조합형 코드를 지지하였으며 한글의 창제원리에 맞지 않는 네모 글자꼴의 한글 글꼴들의 획일화를 비판하였다. 노년[편집] 1990년대 PC 통신(하이텔)에 세벌식의 우수성에 대해 글을 올리고, 키보드에 붙이는 세벌식 자판을 무료로 보내주는 등 세벌식을 널리 알리는 일을 계속했다.[2] “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 ” — 공병우의 유언 1995년 3월 7일 출연작[편집] 1988년 12월 7일 KBS 《11시에 만납시다》 한글타자기에 바친 의학박사 공병우 지은 책[편집] 공병우 (1989년 9월 1일).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 대원사. ISBN 9788936907501. (자서전) 공병우 (1980). 《공병우사진集》. 삼화인쇄(주)출판부. 공병우 (1939). 《新小眼科學》 (일본어). 京城: 柳韓洋行學術部. 사후 발간[편집] 김은식; (그림)이상규 (2012. 8. 27.). 《공병우(한겨레 인물탐구 9)(》. 한겨레아이들. ISBN 9788984316140.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송현 (2008). 《공병우: 한글기계화의아버지》. 작은씨앗. ISBN 9788990787675. 공병우; (그림)신현영 (2006. 4. 26.). 《공병우(우리 위인 동화 6)》. 기탄동화. ISBN 9788959502103.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수상[편집] 1949년 10월: 국회의장상 (전국 과학 전람회에 한글 타자기 출품) 1958년 10월: 대통령 표창 (한글 타자기 발명 공로) 1962년 8월: 대통령 표창 (건국 공로 식산) 1968년 10월: 문화공보부 장관상 (한글 전용 공로자) 1970년 7월: 평택 군수 감사장 (평택군 관내 안과 환자 1개월 간 무료 진료) 1974년 3월: 외솔 문화상 (한글 문화 개발 공로) 1975년 10월: 은장 박애장 (대한 적십자사 70주년 기념) 1978년 9월: 여군단장 감사패 (여군 창설 제28주년 기념 여군 한글 타자 기술 향상에 기여) 1979년 3월: 서울 적십자사 총재 표창 (모범 납세자) 1979년 10월: 대한 적십자사 총재 표창 (적십자 사업 발전 기여) 1980년 2월: 종로구청장 표창 (새마을 저축 증대 기여) 1980년 5월: 평안북도 첫 문화상 수상 (평안북도 도민의 날) 1981년 4월: 국민훈장 석류장 (장애자의 날) 1983년 7월: 사회복지법인 우성원 및 구화학교 공동명의 감사패 (우성원 및 구화 학교 준공) 1984년 10월: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맹인 선교회에서 공로패 (맹인 개안 및 맹인 재활 사업에 기여) 1987년 1월: 제1회 서재필 상 (서재필 기념재단에서 한글 타자기 발명 및 한글 컴퓨터 개발 등 한글 기계화 공로) 각주[편집] ↑ 박돈규. 정전협정문 작성한 '공병우 타자기' 아시나요. 조선일보. 2018년 7월 21일. ↑ 이민우 (2005년 3월 8일). “공병우 박사 10주기 '세벌식' 불씨 살린다”. 오마이뉴스. 2013년 9월 16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아래아 한글 탄생과 공 병우 박사 공병우 타자기와 관련 있는 세벌식 카페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공병우&oldid=24133115" 분류: 1907년 태어남1995년 죽음일제 강점기의 의사대한민국의 의사대한민국의 저술가대한민국의 수필가대한민국의 사진가벽동군 출신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연세대학교 교수고려대학교 교수대한민국의 개신교도한글김포 공씨나고야 대학 동문대한민국의 자서전 작가대한민국의 발명가숨은 분류: CS1 - 일본어 인용 (ja)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인용 오류 - 날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일 (수) 20: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은성 (아나운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은성 (아나운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은성출생 1971년 12월 8일(1971-12-08) (47세)대한민국 서울특별시거주지 서울특별시국적 대한민국 학력 경희대학교 철학과 학사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대학원 저널리즘 석사,스피치 커뮤니케이션 박사직업 아나운서소속 KBS 아나운서실 김은성 (1971년 12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KBS 아나운서이다. 1997년 공채 24기 아나운서로 입사하였다.KBS광주방송총국 지역근무하여 현재 KBS 아나운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대학원에서 〈저널리즘〉석사, 〈스피치 커뮤니케이션〉박사 학위를 받았다. 목차 1 학력 2 경력 3 진행 3.1 TV 3.2 라디오 4 저서 5 기타 경력 6 참고 7 외부 링크 학력[편집] 경희대학교 철학과 학사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대학원 저널리즘 석사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박사 경력[편집] 1997년 KBS 공채 24기 아나운서(KBS광주방송총국 지역근무) 진행[편집] TV[편집] KBS 광주 1TV《KBS 뉴스 광주 · 전남권 》 KBS 1TV《KBS 뉴스 (1050)》 KBS 1TV《KBS 뉴스 네트워크》(2009년 10월 19일 ~ 2010년 12월 31일) KBS 1TV《KBS 뉴스광장》토요일 (2007년 5월 5일 ~ 2009년 10월 17일) KBS 1TV《KBS 뉴스 12》(2014년 7월 7일 ~ 2016년 4월 22일) KBS 1TV《KBS 오전 5시 뉴스》토요일 (2013년 8월 24일 ~ 2014년 4월 5일) KBS 1TV《KBS 뉴스 5》(2002년 3월 25일 ~ 2007년 4월 27일) KBS 1TV《KBS 뉴스 7》(2018년 2월 12일 ~ 2018년 4월 20일) KBS 2TV《건강 TV, 안녕하십니까》 KBS 2TV《TV클리닉 당신의 건강은》 KBS 1TV 《KBS 뉴스 930》(2018년 9월 10일 ~ 현재) 라디오[편집] KBS 1FM《출발 FM과 함께》 KBS 1라디오 《세상의 모든 지식》 KBS 1라디오《퀴즈가 좋다》[1] 저서[편집] 지저스 코칭파워 프레젠테이션이 남자가 말하는법리더의 7가지 언어예수님께 소통을 배워라인류의 최고의 설득술,프렙(Prep) 기타 경력[편집] 2007년 《미래주간 홍보대사》 《방송진행자의 스피치 구성 요인과 공신력 평가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 논문[2] 《마음을 사로잡는 파워스피치》저술 ISBN 10-8960860107 참고[편집] ↑ 종전 '시사 퀴즈왕'에서 이름과 시간대만 변경 ↑ 김현덕 (2006년 7월 3일). “손석희·유재석 말 잘하는 방송인… KBS 김은성 아나운서 박사 논문”. 쿠키뉴스. 2010년 2월 2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KBS 아나운서 소개 중 김은성 페이지 김은성 - 트위터 이 글은 방송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은성_(아나운서)&oldid=24000509" 분류: 1971년 태어남경희대학교 동문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대한민국의 아나운서살아있는 사람숨은 분류: 방송인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9일 (화) 18: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사첼 페이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첼 페이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사첼 페이지 Satchel Paige 기본 정보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06년 7월 7일 출신지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 사망일 1982년 6월 8일 (75세) 사망지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신장 190 cm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48년 드래프트 순위 우선순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 첫 출장 MLB / 1948년 7월 9일 구장명 대 시카고 화이트삭스전 마지막 경기 1965년 9월 25일 구장명 대 보스턴 레드삭스전 경력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메이저 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8년 ~ 1949년) 메이저 리그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1951년 ~ 1953년) 메이저 리그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1965년) 미국 야구 전당 전당 헌액자 선출년 1971년 선출방법 니그로 리그 협회 르로이 로버트 "사첼" 페이지 (Leroy Robert "Satchel" Paige, 1906년 7월 7일 ~ 1982년 6월 8일)는 전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메이저 리그 선수이다.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멕시칸 리그 등 각종 독립리그에서 활약했으며, 1948년 42살의 나이에 메이저 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투수, 최고령 신인 선수가 되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활약하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現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 활약하여 1953년 은퇴했으며 12년후, 1965년에 58세의 나이에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오늘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선수로 등록되어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3이닝 선발 등판하여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며 메이저 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971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목차 1 생애 2 선수생활 2.1 니그로리그 & 중남미리그등 각종 독립리그 2.2 메이저 리그 시절 3 은퇴 이후 4 통산 성적 4.1 니그로 리그 4.2 노스다코타 4.3 도미니칸 리그 4.4 멕시칸 리그 4.5 쿠바 리그 (윈터 리그) 4.6 캘리포니아 윈터리그 4.7 푸에르토 리그 (윈터 리그) 4.8 메이저 리그 4.9 마이너리그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06년[2] 11명의 형제중 7번째로 태어났다. 사첼 페이지는 본래 이름이 르로이 페이지(LeRoy Paige)였다. 페이지의 출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그가 1906년생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설에는 1900년생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그를 옆에서 직접 본 선수들은 그보다 10살 이상 많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1959년, 페이지 어머니의 증언으로 일단락됐다.[3] 13남매를 뒀던 페이지의 어머니는 성경책에 자녀들의 생일을 모두 기록해 뒀다. 하지만 어느날 집에 들어온 염소가 일부를 뜯어먹었고, 이후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페이지의 출생연도가 1904년에서 1906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편, 어린 시절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페이지가 교도소에 가지 않기 위해 두 살을 속이면서 1906년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정원사 일을 하던 아버지와 가정부로 살림을 꾸려나간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여행용가방(Satchel)에 7살이였던 그를 넣어놓고 기차를 이용한 일이 있어 그 때부터 '르로이'(LeRoy)라는 이름 대신 '사첼'(Satchel)이라고 불렸으며[4],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고향 프로팀의 잔심부름을 시작으로 10살부터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24년 세미프로팀에서 한경기당 1$을 받는 조건으로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하게 된 그는 1926년부터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선수생활[편집] 니그로리그 & 중남미리그등 각종 독립리그[편집] 선수생활하면서 니그로 리그의 전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 이후 1930년대 니그로리그의 여러 팀에서 활약을 하면서 그는 긴 팔다리를 최대한 이용, 엄청난 강속구를 뿌렸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페이지는 20여 년 이상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각종 독립리그를 순회하며 2000경기 이상에 등판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첼 페이지의 기록은 너무나도 놀라워 지금까지도 여러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일설에는 승리만 2000승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도 50타자 연속 삼진, 수비수들을 모두 덕아웃으로 불러 놓고 공 9개로 이닝 종료, 워밍업 때 성냥갑을 홈플레이트 삼아 스트라이크 던지기 등 확인되지 않은 전설이 퍼져나갈 정도로 확실하게 경기를 압도하는 투수였다고 알려질 정도였다.[5] 하지만 문제는 그 누구도 정확한 기록을 알지 못해서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인것인데,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6] 니그로리그 선수들에 대한 근거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많이 부풀려진 면이 있겠지만, 1930년 이벤트로 치러진 메이저 리그와 니그로 리그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는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위력적인 공을 구사했다.[7] 당시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22개의 탈삼진을 잡아냈었다고 알려진 것, 1932년 이벤트로 치러진 메이저 리그와 니그로리그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는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위력적인 공을 구사했었다. 당시 메이저 리그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던 디지 딘을 비롯해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했던 슈퍼스타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조 디마지오는 자신이 페이지에게 4타수 1안타를 친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뒷날 1948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나이 40이 넘어서도 145km이상의 직구를 뿌린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있는 주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기량은 많은 메이저 리그 선수들도 인정하고 있었고, 그가 당시 최고의 투수였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 사첼 페이지는 구단주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선수들에게는 만담꾼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관객들에게는 쇼맨쉽으로 인기가 많았던 선수였다. 그는 상상하기 힘든 강속구를 지녔으며 오버핸드, 언더핸드 등 변칙투구로 타자들을 농락하였다고 한다. 메이저 리그 시절[편집] 그는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메이저 리그 입성은 이루어질수 없었고,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 데뷔를 이룬 이듬해 42살의 나이가 돼서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호출을 받았다. 그러나 사첼 페이지 자신은 나이가 40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처음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40이 넘어서도 145 km 이상 뿌릴 수 있는 강속구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 섣불리 물러날 구단장이 아니었고, 같은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AL리그 첫 번째 흑인선수로 데뷔하자, 사첼 페이지는 결국에 1948년 42살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선수라는 타이틀과 함께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의 최초 흑인투수가 되었으며, 42세 나이에 최고령 신인 기록을 하면서 메이저 리그 데뷔하게 되었다. 전성기가 지나가버린 그였지만,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1948년 시즌 6승 1패 방어율 2.47을 기록한 첫해 그의 첫 3경기 등판 동안 무려 20만명이라는 엄청난 야구팬이 각 구장마다 몰려들었고[8], 그가 불펜에서 몸을 푸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환호를 질렀다고 한다. 1950년 독립리그로 잠시 외도를 하였다가 1951년 다시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현재, 볼티모어 오리올스이다.)로 메이저리거로 복귀하여 45살 나이였던 1952년 12승 10패 방어율 3.07을 기록하였는데, 1952년시즌에 역사상 최고령 완봉, 완투승을 이뤄냈을때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말을 남겼다. “ 내가 100살이 되어도, 그 녀석들(상대 타자들)은 삼진시킬 수 있을거야. ” 그리고 이듬해 1953년 입단 3년 만에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글러브를 벗은 지 12여 년이 지난 1965년, 연금법이 개정되어 페이지가 3이닝이 모자라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캔자스시티 어슬래틱스는 59세의 그를 영입해 보스턴 레드삭스전에 선발 등판시켰고, 페이지는 3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유일했던 1안타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간판타자 칼 야스트렘스키가 뽑아낸 2루타였고, 페이지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며 메이저 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3][9] 은퇴 이후[편집] 그가 기록한 메이저 리그 통산기록은 5시즌 동안, 28승 31패 4세이브 방어율 3.29를 기록했다. 은퇴 이후 밀워키 브레이브스(현재, 아틀란타 브레이브스)의 투수코치로 2년간 활약했고, 1971년, 니그로리그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니그로 리그 협회(Committee on Negro Leagues)를 통해 헌액되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입성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활약했던 백인 선수 테드 윌리엄스는 사첼 페이지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페이지와 깁슨 같은 선수는 니그로리그의 상징으로 언젠가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단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I hope some day Satchel Paige and Josh Gibson will be voted into the Hall of Fame as symbols of the great Negro players who are not here only because they weren't given the chance.) ”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당시 65세였던 페이지는 "현재는 물론이고 10년 뒤에 등판해도 승리할 수 있다."며 끝없는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약 10년 뒤인 198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통산 성적[편집] 니그로 리그를 비롯한 중남미 리그등 그의 성적이 일부 기록되어있으나, 이는 정확하다. 그 이유는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그로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이닝 피안타 볼넷 삼진 RA 방어율 1927 Birmingham NNL (first) 7 1 .875 18 5 89.3 69 26 69 3.32 2.12 1928 Birmingham NNL 12 5 .706 26 11 134.3 109 21 112 2.95 2.01 1929 Birmingham NNL 10 9 .526 30 15 188.3 188 31 176 4.92 3.73 1930 Baltimore Independent 3 1 .750 4 3 31.0 35 6 17 3.48 2.32 1930 Birmingham NNL 7 4 .636 14 9 96.3 74 9 69 3.27 2.62 1931 Cleveland NNL 1 2 .333 6 1 32.7 26 4 18 3.31 2.48 1931 Pittsburgh Independent 0 1 .000 1 1 8.0 5 1 0 3.38 2.25 1932 Pittsburgh Independent 10 4 .714 22 12 132.7 92 35 92 3.19 1.70 1933 Pittsburgh p NNL (second) 5 7 .417 13 8 95.0 54 12 55 3.69 1.89 1934 Pittsburgh NNL 14 2 .875 22 15 154.0 103 26 144 2.16 1.40 1935 Kansas City Independent 0 0 .000 2 1 9.0 5 1 11 0.00 0.00 1936 Pittsburgh p NNL 5 0 1.000 7 5 47.7 41 9 47 3.21 2.08 1937 Trujillo All-Stars Independent 0 1 .000 2 1 11.0 16 1 11 4.09 4.09 1940 Kansas City p NAL 1 0 1.000 2 1 11.0 6 0 8 0.82 0.00 1941 Kansas City p NAL 4 0 1.000 12 2 55.0 42 6 42 3.44 1.64 1941 뉴욕 NNL 1 0 1.000 1 1 9.0 5 0 8 3.00 0.00 1942 Kansas City c NAL 4 5 .444 18 5 95.0 68 11 79 2.84 1.80 1943 Kansas City NAL 6 8 .429 23 3 102.0 90 22 74 4.59 2.65 1943 Memphis NAL 1 0 1.000 1 0 5.0 0 2 7 0.00 0.00 1944 Kansas City NAL 4 5 .444 14 5 82.7 51 13 76 1.96 0.54 1945 Kansas City NAL 2 4 .333 11 2 51.7 48 14 54 5.05 1.05 1946 Kansas City p NAL 5 1 .833 11 2 47.0 40 3 45 2.11 1.15 1947 Kansas City NAL 1 1 .500 3 2 19.0 7 0 17 0.95 0.47 Total 19 seasons 103 61 .628 263 110 1506.7 1174 253 1231 3.31 2.02 p = pennant; c = Negro League World Series championship. 노스다코타[편집] 연도 팀 승리 패전 승률 완투 이닝 볼넷 삼진 RA 1933 Bismarck 6 0 1.000 7 72.0 11 119 1.25 1935 Bismarck 29 2 .935 18 229.7 16 321 1.96 Total 2 seasons 35 2 .946 25 301.7 27 440 1.79 도미니칸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 패 승률 1937 Ciudad Trujillo Dominican League 8 2 .800 멕시칸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이닝 피안타 볼넷 삼진 방어율 1938 Agrario de México Mexican League 1 1 .500 3 0 19.3 28 12 7 5.12 쿠바 리그 (윈터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1929–30 Santa Clara Cuban League 6 5 .545 15 8 캘리포니아 윈터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완투 이닝 볼넷 삼진 1931–32 Philadelphia Giants California Winter 6 0 1.000 6 58 — 70 1932–33 Tom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7 0 1.000 7 63 — 91 1933–34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16 2 .889 18 172 47 244 1934–35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8 0 1.000 7 69 20 104 1935–36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13 0 1.000 6 94 28 113 1943–44 Baltimore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3 1 .750 1 36 10 39 1945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1 1 .500 1 27 12 27 1946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0 2 .000 0 15 7 21 1947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2 1 .667 1 35 14 60 Total 9 seasons 56 7 .889 47 569 — 769 푸에르토 리그 (윈터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이닝 볼넷 삼진 방어율 1939–40* Guayama p Puerto Rico 19† 3 .864 205 54 208† 1.93 1940–41 Guayama Puerto Rico 4 5 .444 — 26 70 3.89 1947–48 Santurce Puerto Rico 0 3 .000 34 13 26 2.91 Total 3 seasons 23 11 .676 — 93 304 — * – league MVP; † – single-season league record; p = pennant. 메이저 리그[편집] 사첼페이지 메이저 리그 통산 성적 참조. 마이너리그[편집] 사첼페이지 마이너리그 통산 성적 참조. 같이 보기[편집] 조시 깁슨 재키 로빈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각주[편집] ↑ 정확히 말하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단장이 입단 제의를 표했고, 사첼 페이지는 이를 받아들여서 입단. ↑ 정확히 몇 년 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가 나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에이스' 새철 페이지 ↑ 이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다. 7세 때 돈벌이를 위해 기차역에서 짐꾼으로 일하는데 그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여행가방나무(Satchel tree)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어렸을 때 남의 가방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그런 별명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 네이버 스포츠 ↑ 일부 기록된 것은 있으나, 이는 불정확하다. ↑ 당시, 이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는 불참했다. 그 이유는 베이브 루스가 '흑인하고는 같이 경기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베이브 루스가 사첼 페이지한테 삼진을 당할까봐 두려워해서 벤치를 지켰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 당시, 클리블랜드 홈구장은 '클리블랜드 뮤니시펄 스타디움'이었다. 관중수요 규모는 75000석. ↑ 페이지는 이후 연금법이 또 개정되면서 또 대상에서 제외되자 다시 공을 던지려 했지만 노령이라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커미셔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후 연금법이 다시 바뀌면서 페이지는 다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공식 웹사이트 (영어) 경력 통계와 선수 정보 -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영어) 사첼 페이지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영어) 사첼 페이지 - 파인드 어 그레이브 '시대를 잘못 만난' 새철 페이지 ML '전설의 특급투수' 사첼 페이지 사첼 페이지 메이저 리그 통산 기록 '전설의 투수' 사첼 페이지, 탄생 100주년 맞아 사첼 페이지 투구 모션 vdeh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1948년 월드 시리즈 우승 3 에디 로빈슨 4 조 고든 5 루 부드로 6 켄 켈트너 7 알 로센 10 짐 헤건 11 레이 분 12 조 팁턴 14 래리 도비 16 에드 클리에먼 18 루스 크리스토퍼 19 밥 펠러 21 밥 레몬 24 밥 케네디 25 밥 먼크리프 27 스티브 그로멕 29 사첼 페이지 30 진 비어든 31 앨리 클라크 34 데일 미첼 35 월리 주드니치 36 할 펙 38 서먼 터커 감독 5 루 부드로 코치 41 빌 맥케시니 42 머디 루엘 43 멜 하더 스키 메릴로 조지 수스 vdeh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의 헌액자투수 갤빈 고메즈 고시지 그라임스 그로브 글래빈 깁슨 뉴하우저 니콜스 니크로 데이 드라이스데일 디히고 딘 라이언 라이온스 래드번 러핑 레몬 로간 로버츠 루시 릭시 마르티네스 마리첼 마쿼드 매덕스 매슈슨 맥기니티 멘데스 반스 버닝 벤더 M. 브라운 R. 브라운 블라일레븐 서턴 수터 스몰츠 스미스 스판 시버 알렉산더 에커슬리 영 워델 월시 웰치 윈 윌리스 윌리엄스 윌헬름 젱킨스 조스 R. 존슨 W. 존슨 체스브로 칼턴 커밍스 코벨레스키 쿠퍼 쿠팩스 클락슨 키프 파머 페리 페이지 페노크 페이버 펠러 포드 B. 포스터 R. 포스터 플랭크 핑거스 허벨 헌터 헤인스 호이트 포수 깁슨 디키 롬바디 매키 베라 벤치 브레스나한 산토프 쇼크 유잉 카터 캄파넬라 코크런 페럴 피스크 피아자 하넷 화이트 1루수 게릭 그린버그 레너드 마이즈 맥코비 머레이 바텀리 베클리 브루서스 서틀스 세페다 시슬러 앤슨 챈스 켈리 코너 킬브루 테리 테일러 페레스 폭스 2루수 게링거 고든 그랜트 도에르 라제리 라조이 로빈슨 매저로스키 모건 맥피 비지오 샌드버그 쇼인딘스트 알로마 에버스 커루 콜린스 폭스 프리슈 허먼 혼즈비 3루수 댄드리지 로빈슨 린드스톰 매슈스 베이커 보그스 브렛 슈미트 윌슨 존슨 켈 콜린스 트레이너 유격수 데이비스 라킨 로이드 리주토 리즈 립켄 매런빌 밴크로프트 뱅크스 본 부드로 슈얼 스미스 아파리시오 애플링 와그너 욘트 워드 월리스 웰스 잭슨 제닝스 크로닌 트래멜 팅커 외야수 고슬린 그리피 그윈 더피 델라한트 도비 도슨 J. 라이스 S. 라이스 레인스 로빈슨 루스 루시 디마지오 마누시 매카시 맨틀 메드윅 메이스 뮤지얼 버켓 벨 브라운 브록 스나이더 스타젤 스턴스 스피커 슬로터 시먼스 애시번 야스트렘스키 어빈 에런 에이버릴 영스 오루케 오트 와그너 워너 윈필드 B. 윌리엄스 T. 윌리엄스 윌슨 잭슨 찰스턴 칼라인 커레이 커일러 J. 켈리 K. 켈리 콤스 콥 크로퍼드 키너 킬러 클라크 클레멘테 클레인 토리엔테 톰프슨 퍼켓 플릭 하피 해밀턴 헤일먼 헨더슨 후퍼 휘트 힐 감독 더로셔 라 루사 라소다 로빈슨 로페스 매카시 맥 맥그로 맥케시니 사우스워스 셀리 스텡걸 올스턴 앤더슨 위버 윌리엄스 콕스 토리 포스터 해리스 허긴스 허조그 핸런 운영 / 공로 그리피스 드레이퍼스 J. 라이트 H. 라이트 랜디스 리키 La. 맥파일 Le. 맥파일 맨리 배로 벌커리 빅 스팰딩 오맬리 요키 웨이스 윌킨슨 자일스 존슨 채드윅 챈들러 카트라이트 코미스키 쿤 포시 폼페스 프릭 해리지 헐버트 화이트 심판 맥가원 발릭 에번스 차일락 코널리 콘런 클렘 하비 허버드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191449 LCCN: n86039039 ISNI: 0000 0003 5385 9831 GND: 133065545 NDL: 0051539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첼_페이지&oldid=23746806" 분류: 1906년 태어남1982년 죽음앨라배마주 출신 야구 선수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볼티모어 오리올스 선수아프리카계 미국인 야구 선수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선수캔자스시티 모나크스 선수아메리칸 리그 올스타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SvenskaTagalog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1일 (목) 16: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사첼 페이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첼 페이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사첼 페이지 Satchel Paige 기본 정보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06년 7월 7일 출신지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 사망일 1982년 6월 8일 (75세) 사망지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신장 190 cm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48년 드래프트 순위 우선순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 첫 출장 MLB / 1948년 7월 9일 구장명 대 시카고 화이트삭스전 마지막 경기 1965년 9월 25일 구장명 대 보스턴 레드삭스전 경력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메이저 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8년 ~ 1949년) 메이저 리그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1951년 ~ 1953년) 메이저 리그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1965년) 미국 야구 전당 전당 헌액자 선출년 1971년 선출방법 니그로 리그 협회 르로이 로버트 "사첼" 페이지 (Leroy Robert "Satchel" Paige, 1906년 7월 7일 ~ 1982년 6월 8일)는 전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메이저 리그 선수이다.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멕시칸 리그 등 각종 독립리그에서 활약했으며, 1948년 42살의 나이에 메이저 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투수, 최고령 신인 선수가 되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활약하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現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 활약하여 1953년 은퇴했으며 12년후, 1965년에 58세의 나이에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오늘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선수로 등록되어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3이닝 선발 등판하여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며 메이저 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971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목차 1 생애 2 선수생활 2.1 니그로리그 & 중남미리그등 각종 독립리그 2.2 메이저 리그 시절 3 은퇴 이후 4 통산 성적 4.1 니그로 리그 4.2 노스다코타 4.3 도미니칸 리그 4.4 멕시칸 리그 4.5 쿠바 리그 (윈터 리그) 4.6 캘리포니아 윈터리그 4.7 푸에르토 리그 (윈터 리그) 4.8 메이저 리그 4.9 마이너리그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06년[2] 11명의 형제중 7번째로 태어났다. 사첼 페이지는 본래 이름이 르로이 페이지(LeRoy Paige)였다. 페이지의 출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그가 1906년생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설에는 1900년생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그를 옆에서 직접 본 선수들은 그보다 10살 이상 많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1959년, 페이지 어머니의 증언으로 일단락됐다.[3] 13남매를 뒀던 페이지의 어머니는 성경책에 자녀들의 생일을 모두 기록해 뒀다. 하지만 어느날 집에 들어온 염소가 일부를 뜯어먹었고, 이후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페이지의 출생연도가 1904년에서 1906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편, 어린 시절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페이지가 교도소에 가지 않기 위해 두 살을 속이면서 1906년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정원사 일을 하던 아버지와 가정부로 살림을 꾸려나간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여행용가방(Satchel)에 7살이였던 그를 넣어놓고 기차를 이용한 일이 있어 그 때부터 '르로이'(LeRoy)라는 이름 대신 '사첼'(Satchel)이라고 불렸으며[4],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고향 프로팀의 잔심부름을 시작으로 10살부터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24년 세미프로팀에서 한경기당 1$을 받는 조건으로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하게 된 그는 1926년부터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선수생활[편집] 니그로리그 & 중남미리그등 각종 독립리그[편집] 선수생활하면서 니그로 리그의 전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 이후 1930년대 니그로리그의 여러 팀에서 활약을 하면서 그는 긴 팔다리를 최대한 이용, 엄청난 강속구를 뿌렸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페이지는 20여 년 이상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각종 독립리그를 순회하며 2000경기 이상에 등판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첼 페이지의 기록은 너무나도 놀라워 지금까지도 여러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일설에는 승리만 2000승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도 50타자 연속 삼진, 수비수들을 모두 덕아웃으로 불러 놓고 공 9개로 이닝 종료, 워밍업 때 성냥갑을 홈플레이트 삼아 스트라이크 던지기 등 확인되지 않은 전설이 퍼져나갈 정도로 확실하게 경기를 압도하는 투수였다고 알려질 정도였다.[5] 하지만 문제는 그 누구도 정확한 기록을 알지 못해서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인것인데,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6] 니그로리그 선수들에 대한 근거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많이 부풀려진 면이 있겠지만, 1930년 이벤트로 치러진 메이저 리그와 니그로 리그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는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위력적인 공을 구사했다.[7] 당시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22개의 탈삼진을 잡아냈었다고 알려진 것, 1932년 이벤트로 치러진 메이저 리그와 니그로리그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는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위력적인 공을 구사했었다. 당시 메이저 리그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던 디지 딘을 비롯해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했던 슈퍼스타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조 디마지오는 자신이 페이지에게 4타수 1안타를 친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뒷날 1948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나이 40이 넘어서도 145km이상의 직구를 뿌린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있는 주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기량은 많은 메이저 리그 선수들도 인정하고 있었고, 그가 당시 최고의 투수였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 사첼 페이지는 구단주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선수들에게는 만담꾼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관객들에게는 쇼맨쉽으로 인기가 많았던 선수였다. 그는 상상하기 힘든 강속구를 지녔으며 오버핸드, 언더핸드 등 변칙투구로 타자들을 농락하였다고 한다. 메이저 리그 시절[편집] 그는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메이저 리그 입성은 이루어질수 없었고,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 데뷔를 이룬 이듬해 42살의 나이가 돼서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호출을 받았다. 그러나 사첼 페이지 자신은 나이가 40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처음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40이 넘어서도 145 km 이상 뿌릴 수 있는 강속구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 섣불리 물러날 구단장이 아니었고, 같은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AL리그 첫 번째 흑인선수로 데뷔하자, 사첼 페이지는 결국에 1948년 42살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선수라는 타이틀과 함께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의 최초 흑인투수가 되었으며, 42세 나이에 최고령 신인 기록을 하면서 메이저 리그 데뷔하게 되었다. 전성기가 지나가버린 그였지만,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1948년 시즌 6승 1패 방어율 2.47을 기록한 첫해 그의 첫 3경기 등판 동안 무려 20만명이라는 엄청난 야구팬이 각 구장마다 몰려들었고[8], 그가 불펜에서 몸을 푸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환호를 질렀다고 한다. 1950년 독립리그로 잠시 외도를 하였다가 1951년 다시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현재, 볼티모어 오리올스이다.)로 메이저리거로 복귀하여 45살 나이였던 1952년 12승 10패 방어율 3.07을 기록하였는데, 1952년시즌에 역사상 최고령 완봉, 완투승을 이뤄냈을때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말을 남겼다. “ 내가 100살이 되어도, 그 녀석들(상대 타자들)은 삼진시킬 수 있을거야. ” 그리고 이듬해 1953년 입단 3년 만에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글러브를 벗은 지 12여 년이 지난 1965년, 연금법이 개정되어 페이지가 3이닝이 모자라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캔자스시티 어슬래틱스는 59세의 그를 영입해 보스턴 레드삭스전에 선발 등판시켰고, 페이지는 3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유일했던 1안타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간판타자 칼 야스트렘스키가 뽑아낸 2루타였고, 페이지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며 메이저 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3][9] 은퇴 이후[편집] 그가 기록한 메이저 리그 통산기록은 5시즌 동안, 28승 31패 4세이브 방어율 3.29를 기록했다. 은퇴 이후 밀워키 브레이브스(현재, 아틀란타 브레이브스)의 투수코치로 2년간 활약했고, 1971년, 니그로리그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니그로 리그 협회(Committee on Negro Leagues)를 통해 헌액되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입성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활약했던 백인 선수 테드 윌리엄스는 사첼 페이지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페이지와 깁슨 같은 선수는 니그로리그의 상징으로 언젠가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단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I hope some day Satchel Paige and Josh Gibson will be voted into the Hall of Fame as symbols of the great Negro players who are not here only because they weren't given the chance.) ”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당시 65세였던 페이지는 "현재는 물론이고 10년 뒤에 등판해도 승리할 수 있다."며 끝없는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약 10년 뒤인 198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통산 성적[편집] 니그로 리그를 비롯한 중남미 리그등 그의 성적이 일부 기록되어있으나, 이는 정확하다. 그 이유는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그로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이닝 피안타 볼넷 삼진 RA 방어율 1927 Birmingham NNL (first) 7 1 .875 18 5 89.3 69 26 69 3.32 2.12 1928 Birmingham NNL 12 5 .706 26 11 134.3 109 21 112 2.95 2.01 1929 Birmingham NNL 10 9 .526 30 15 188.3 188 31 176 4.92 3.73 1930 Baltimore Independent 3 1 .750 4 3 31.0 35 6 17 3.48 2.32 1930 Birmingham NNL 7 4 .636 14 9 96.3 74 9 69 3.27 2.62 1931 Cleveland NNL 1 2 .333 6 1 32.7 26 4 18 3.31 2.48 1931 Pittsburgh Independent 0 1 .000 1 1 8.0 5 1 0 3.38 2.25 1932 Pittsburgh Independent 10 4 .714 22 12 132.7 92 35 92 3.19 1.70 1933 Pittsburgh p NNL (second) 5 7 .417 13 8 95.0 54 12 55 3.69 1.89 1934 Pittsburgh NNL 14 2 .875 22 15 154.0 103 26 144 2.16 1.40 1935 Kansas City Independent 0 0 .000 2 1 9.0 5 1 11 0.00 0.00 1936 Pittsburgh p NNL 5 0 1.000 7 5 47.7 41 9 47 3.21 2.08 1937 Trujillo All-Stars Independent 0 1 .000 2 1 11.0 16 1 11 4.09 4.09 1940 Kansas City p NAL 1 0 1.000 2 1 11.0 6 0 8 0.82 0.00 1941 Kansas City p NAL 4 0 1.000 12 2 55.0 42 6 42 3.44 1.64 1941 뉴욕 NNL 1 0 1.000 1 1 9.0 5 0 8 3.00 0.00 1942 Kansas City c NAL 4 5 .444 18 5 95.0 68 11 79 2.84 1.80 1943 Kansas City NAL 6 8 .429 23 3 102.0 90 22 74 4.59 2.65 1943 Memphis NAL 1 0 1.000 1 0 5.0 0 2 7 0.00 0.00 1944 Kansas City NAL 4 5 .444 14 5 82.7 51 13 76 1.96 0.54 1945 Kansas City NAL 2 4 .333 11 2 51.7 48 14 54 5.05 1.05 1946 Kansas City p NAL 5 1 .833 11 2 47.0 40 3 45 2.11 1.15 1947 Kansas City NAL 1 1 .500 3 2 19.0 7 0 17 0.95 0.47 Total 19 seasons 103 61 .628 263 110 1506.7 1174 253 1231 3.31 2.02 p = pennant; c = Negro League World Series championship. 노스다코타[편집] 연도 팀 승리 패전 승률 완투 이닝 볼넷 삼진 RA 1933 Bismarck 6 0 1.000 7 72.0 11 119 1.25 1935 Bismarck 29 2 .935 18 229.7 16 321 1.96 Total 2 seasons 35 2 .946 25 301.7 27 440 1.79 도미니칸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 패 승률 1937 Ciudad Trujillo Dominican League 8 2 .800 멕시칸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이닝 피안타 볼넷 삼진 방어율 1938 Agrario de México Mexican League 1 1 .500 3 0 19.3 28 12 7 5.12 쿠바 리그 (윈터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1929–30 Santa Clara Cuban League 6 5 .545 15 8 캘리포니아 윈터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완투 이닝 볼넷 삼진 1931–32 Philadelphia Giants California Winter 6 0 1.000 6 58 — 70 1932–33 Tom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7 0 1.000 7 63 — 91 1933–34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16 2 .889 18 172 47 244 1934–35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8 0 1.000 7 69 20 104 1935–36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13 0 1.000 6 94 28 113 1943–44 Baltimore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3 1 .750 1 36 10 39 1945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1 1 .500 1 27 12 27 1946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0 2 .000 0 15 7 21 1947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2 1 .667 1 35 14 60 Total 9 seasons 56 7 .889 47 569 — 769 푸에르토 리그 (윈터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이닝 볼넷 삼진 방어율 1939–40* Guayama p Puerto Rico 19† 3 .864 205 54 208† 1.93 1940–41 Guayama Puerto Rico 4 5 .444 — 26 70 3.89 1947–48 Santurce Puerto Rico 0 3 .000 34 13 26 2.91 Total 3 seasons 23 11 .676 — 93 304 — * – league MVP; † – single-season league record; p = pennant. 메이저 리그[편집] 사첼페이지 메이저 리그 통산 성적 참조. 마이너리그[편집] 사첼페이지 마이너리그 통산 성적 참조. 같이 보기[편집] 조시 깁슨 재키 로빈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각주[편집] ↑ 정확히 말하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단장이 입단 제의를 표했고, 사첼 페이지는 이를 받아들여서 입단. ↑ 정확히 몇 년 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가 나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에이스' 새철 페이지 ↑ 이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다. 7세 때 돈벌이를 위해 기차역에서 짐꾼으로 일하는데 그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여행가방나무(Satchel tree)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어렸을 때 남의 가방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그런 별명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 네이버 스포츠 ↑ 일부 기록된 것은 있으나, 이는 불정확하다. ↑ 당시, 이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는 불참했다. 그 이유는 베이브 루스가 '흑인하고는 같이 경기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베이브 루스가 사첼 페이지한테 삼진을 당할까봐 두려워해서 벤치를 지켰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 당시, 클리블랜드 홈구장은 '클리블랜드 뮤니시펄 스타디움'이었다. 관중수요 규모는 75000석. ↑ 페이지는 이후 연금법이 또 개정되면서 또 대상에서 제외되자 다시 공을 던지려 했지만 노령이라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커미셔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후 연금법이 다시 바뀌면서 페이지는 다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공식 웹사이트 (영어) 경력 통계와 선수 정보 -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영어) 사첼 페이지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영어) 사첼 페이지 - 파인드 어 그레이브 '시대를 잘못 만난' 새철 페이지 ML '전설의 특급투수' 사첼 페이지 사첼 페이지 메이저 리그 통산 기록 '전설의 투수' 사첼 페이지, 탄생 100주년 맞아 사첼 페이지 투구 모션 vdeh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1948년 월드 시리즈 우승 3 에디 로빈슨 4 조 고든 5 루 부드로 6 켄 켈트너 7 알 로센 10 짐 헤건 11 레이 분 12 조 팁턴 14 래리 도비 16 에드 클리에먼 18 루스 크리스토퍼 19 밥 펠러 21 밥 레몬 24 밥 케네디 25 밥 먼크리프 27 스티브 그로멕 29 사첼 페이지 30 진 비어든 31 앨리 클라크 34 데일 미첼 35 월리 주드니치 36 할 펙 38 서먼 터커 감독 5 루 부드로 코치 41 빌 맥케시니 42 머디 루엘 43 멜 하더 스키 메릴로 조지 수스 vdeh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의 헌액자투수 갤빈 고메즈 고시지 그라임스 그로브 글래빈 깁슨 뉴하우저 니콜스 니크로 데이 드라이스데일 디히고 딘 라이언 라이온스 래드번 러핑 레몬 로간 로버츠 루시 릭시 마르티네스 마리첼 마쿼드 매덕스 매슈슨 맥기니티 멘데스 반스 버닝 벤더 M. 브라운 R. 브라운 블라일레븐 서턴 수터 스몰츠 스미스 스판 시버 알렉산더 에커슬리 영 워델 월시 웰치 윈 윌리스 윌리엄스 윌헬름 젱킨스 조스 R. 존슨 W. 존슨 체스브로 칼턴 커밍스 코벨레스키 쿠퍼 쿠팩스 클락슨 키프 파머 페리 페이지 페노크 페이버 펠러 포드 B. 포스터 R. 포스터 플랭크 핑거스 허벨 헌터 헤인스 호이트 포수 깁슨 디키 롬바디 매키 베라 벤치 브레스나한 산토프 쇼크 유잉 카터 캄파넬라 코크런 페럴 피스크 피아자 하넷 화이트 1루수 게릭 그린버그 레너드 마이즈 맥코비 머레이 바텀리 베클리 브루서스 서틀스 세페다 시슬러 앤슨 챈스 켈리 코너 킬브루 테리 테일러 페레스 폭스 2루수 게링거 고든 그랜트 도에르 라제리 라조이 로빈슨 매저로스키 모건 맥피 비지오 샌드버그 쇼인딘스트 알로마 에버스 커루 콜린스 폭스 프리슈 허먼 혼즈비 3루수 댄드리지 로빈슨 린드스톰 매슈스 베이커 보그스 브렛 슈미트 윌슨 존슨 켈 콜린스 트레이너 유격수 데이비스 라킨 로이드 리주토 리즈 립켄 매런빌 밴크로프트 뱅크스 본 부드로 슈얼 스미스 아파리시오 애플링 와그너 욘트 워드 월리스 웰스 잭슨 제닝스 크로닌 트래멜 팅커 외야수 고슬린 그리피 그윈 더피 델라한트 도비 도슨 J. 라이스 S. 라이스 레인스 로빈슨 루스 루시 디마지오 마누시 매카시 맨틀 메드윅 메이스 뮤지얼 버켓 벨 브라운 브록 스나이더 스타젤 스턴스 스피커 슬로터 시먼스 애시번 야스트렘스키 어빈 에런 에이버릴 영스 오루케 오트 와그너 워너 윈필드 B. 윌리엄스 T. 윌리엄스 윌슨 잭슨 찰스턴 칼라인 커레이 커일러 J. 켈리 K. 켈리 콤스 콥 크로퍼드 키너 킬러 클라크 클레멘테 클레인 토리엔테 톰프슨 퍼켓 플릭 하피 해밀턴 헤일먼 헨더슨 후퍼 휘트 힐 감독 더로셔 라 루사 라소다 로빈슨 로페스 매카시 맥 맥그로 맥케시니 사우스워스 셀리 스텡걸 올스턴 앤더슨 위버 윌리엄스 콕스 토리 포스터 해리스 허긴스 허조그 핸런 운영 / 공로 그리피스 드레이퍼스 J. 라이트 H. 라이트 랜디스 리키 La. 맥파일 Le. 맥파일 맨리 배로 벌커리 빅 스팰딩 오맬리 요키 웨이스 윌킨슨 자일스 존슨 채드윅 챈들러 카트라이트 코미스키 쿤 포시 폼페스 프릭 해리지 헐버트 화이트 심판 맥가원 발릭 에번스 차일락 코널리 콘런 클렘 하비 허버드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191449 LCCN: n86039039 ISNI: 0000 0003 5385 9831 GND: 133065545 NDL: 0051539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첼_페이지&oldid=23746806" 분류: 1906년 태어남1982년 죽음앨라배마주 출신 야구 선수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볼티모어 오리올스 선수아프리카계 미국인 야구 선수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선수캔자스시티 모나크스 선수아메리칸 리그 올스타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SvenskaTagalog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1일 (목) 16: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사첼 페이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첼 페이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사첼 페이지 Satchel Paige 기본 정보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06년 7월 7일 출신지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 사망일 1982년 6월 8일 (75세) 사망지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신장 190 cm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48년 드래프트 순위 우선순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 첫 출장 MLB / 1948년 7월 9일 구장명 대 시카고 화이트삭스전 마지막 경기 1965년 9월 25일 구장명 대 보스턴 레드삭스전 경력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메이저 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8년 ~ 1949년) 메이저 리그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1951년 ~ 1953년) 메이저 리그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1965년) 미국 야구 전당 전당 헌액자 선출년 1971년 선출방법 니그로 리그 협회 르로이 로버트 "사첼" 페이지 (Leroy Robert "Satchel" Paige, 1906년 7월 7일 ~ 1982년 6월 8일)는 전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메이저 리그 선수이다.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멕시칸 리그 등 각종 독립리그에서 활약했으며, 1948년 42살의 나이에 메이저 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투수, 최고령 신인 선수가 되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활약하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現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 활약하여 1953년 은퇴했으며 12년후, 1965년에 58세의 나이에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오늘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선수로 등록되어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3이닝 선발 등판하여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며 메이저 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971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목차 1 생애 2 선수생활 2.1 니그로리그 & 중남미리그등 각종 독립리그 2.2 메이저 리그 시절 3 은퇴 이후 4 통산 성적 4.1 니그로 리그 4.2 노스다코타 4.3 도미니칸 리그 4.4 멕시칸 리그 4.5 쿠바 리그 (윈터 리그) 4.6 캘리포니아 윈터리그 4.7 푸에르토 리그 (윈터 리그) 4.8 메이저 리그 4.9 마이너리그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06년[2] 11명의 형제중 7번째로 태어났다. 사첼 페이지는 본래 이름이 르로이 페이지(LeRoy Paige)였다. 페이지의 출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그가 1906년생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설에는 1900년생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그를 옆에서 직접 본 선수들은 그보다 10살 이상 많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1959년, 페이지 어머니의 증언으로 일단락됐다.[3] 13남매를 뒀던 페이지의 어머니는 성경책에 자녀들의 생일을 모두 기록해 뒀다. 하지만 어느날 집에 들어온 염소가 일부를 뜯어먹었고, 이후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페이지의 출생연도가 1904년에서 1906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편, 어린 시절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페이지가 교도소에 가지 않기 위해 두 살을 속이면서 1906년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정원사 일을 하던 아버지와 가정부로 살림을 꾸려나간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여행용가방(Satchel)에 7살이였던 그를 넣어놓고 기차를 이용한 일이 있어 그 때부터 '르로이'(LeRoy)라는 이름 대신 '사첼'(Satchel)이라고 불렸으며[4],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고향 프로팀의 잔심부름을 시작으로 10살부터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24년 세미프로팀에서 한경기당 1$을 받는 조건으로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하게 된 그는 1926년부터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선수생활[편집] 니그로리그 & 중남미리그등 각종 독립리그[편집] 선수생활하면서 니그로 리그의 전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 이후 1930년대 니그로리그의 여러 팀에서 활약을 하면서 그는 긴 팔다리를 최대한 이용, 엄청난 강속구를 뿌렸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페이지는 20여 년 이상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멕시칸 리그, 각종 독립리그를 순회하며 2000경기 이상에 등판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첼 페이지의 기록은 너무나도 놀라워 지금까지도 여러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일설에는 승리만 2000승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도 50타자 연속 삼진, 수비수들을 모두 덕아웃으로 불러 놓고 공 9개로 이닝 종료, 워밍업 때 성냥갑을 홈플레이트 삼아 스트라이크 던지기 등 확인되지 않은 전설이 퍼져나갈 정도로 확실하게 경기를 압도하는 투수였다고 알려질 정도였다.[5] 하지만 문제는 그 누구도 정확한 기록을 알지 못해서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인것인데,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6] 니그로리그 선수들에 대한 근거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많이 부풀려진 면이 있겠지만, 1930년 이벤트로 치러진 메이저 리그와 니그로 리그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는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위력적인 공을 구사했다.[7] 당시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22개의 탈삼진을 잡아냈었다고 알려진 것, 1932년 이벤트로 치러진 메이저 리그와 니그로리그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는 메이저리거들 상대로 위력적인 공을 구사했었다. 당시 메이저 리그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던 디지 딘을 비롯해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했던 슈퍼스타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조 디마지오는 자신이 페이지에게 4타수 1안타를 친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뒷날 1948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나이 40이 넘어서도 145km이상의 직구를 뿌린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있는 주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기량은 많은 메이저 리그 선수들도 인정하고 있었고, 그가 당시 최고의 투수였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 사첼 페이지는 구단주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선수들에게는 만담꾼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관객들에게는 쇼맨쉽으로 인기가 많았던 선수였다. 그는 상상하기 힘든 강속구를 지녔으며 오버핸드, 언더핸드 등 변칙투구로 타자들을 농락하였다고 한다. 메이저 리그 시절[편집] 그는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메이저 리그 입성은 이루어질수 없었고,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 데뷔를 이룬 이듬해 42살의 나이가 돼서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호출을 받았다. 그러나 사첼 페이지 자신은 나이가 40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처음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40이 넘어서도 145 km 이상 뿌릴 수 있는 강속구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 섣불리 물러날 구단장이 아니었고, 같은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AL리그 첫 번째 흑인선수로 데뷔하자, 사첼 페이지는 결국에 1948년 42살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선수라는 타이틀과 함께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의 최초 흑인투수가 되었으며, 42세 나이에 최고령 신인 기록을 하면서 메이저 리그 데뷔하게 되었다. 전성기가 지나가버린 그였지만,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1948년 시즌 6승 1패 방어율 2.47을 기록한 첫해 그의 첫 3경기 등판 동안 무려 20만명이라는 엄청난 야구팬이 각 구장마다 몰려들었고[8], 그가 불펜에서 몸을 푸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환호를 질렀다고 한다. 1950년 독립리그로 잠시 외도를 하였다가 1951년 다시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현재, 볼티모어 오리올스이다.)로 메이저리거로 복귀하여 45살 나이였던 1952년 12승 10패 방어율 3.07을 기록하였는데, 1952년시즌에 역사상 최고령 완봉, 완투승을 이뤄냈을때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말을 남겼다. “ 내가 100살이 되어도, 그 녀석들(상대 타자들)은 삼진시킬 수 있을거야. ” 그리고 이듬해 1953년 입단 3년 만에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글러브를 벗은 지 12여 년이 지난 1965년, 연금법이 개정되어 페이지가 3이닝이 모자라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캔자스시티 어슬래틱스는 59세의 그를 영입해 보스턴 레드삭스전에 선발 등판시켰고, 페이지는 3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유일했던 1안타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간판타자 칼 야스트렘스키가 뽑아낸 2루타였고, 페이지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며 메이저 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3][9] 은퇴 이후[편집] 그가 기록한 메이저 리그 통산기록은 5시즌 동안, 28승 31패 4세이브 방어율 3.29를 기록했다. 은퇴 이후 밀워키 브레이브스(현재, 아틀란타 브레이브스)의 투수코치로 2년간 활약했고, 1971년, 니그로리그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니그로 리그 협회(Committee on Negro Leagues)를 통해 헌액되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입성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활약했던 백인 선수 테드 윌리엄스는 사첼 페이지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페이지와 깁슨 같은 선수는 니그로리그의 상징으로 언젠가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단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I hope some day Satchel Paige and Josh Gibson will be voted into the Hall of Fame as symbols of the great Negro players who are not here only because they weren't given the chance.) ”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당시 65세였던 페이지는 "현재는 물론이고 10년 뒤에 등판해도 승리할 수 있다."며 끝없는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약 10년 뒤인 198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통산 성적[편집] 니그로 리그를 비롯한 중남미 리그등 그의 성적이 일부 기록되어있으나, 이는 정확하다. 그 이유는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그로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이닝 피안타 볼넷 삼진 RA 방어율 1927 Birmingham NNL (first) 7 1 .875 18 5 89.3 69 26 69 3.32 2.12 1928 Birmingham NNL 12 5 .706 26 11 134.3 109 21 112 2.95 2.01 1929 Birmingham NNL 10 9 .526 30 15 188.3 188 31 176 4.92 3.73 1930 Baltimore Independent 3 1 .750 4 3 31.0 35 6 17 3.48 2.32 1930 Birmingham NNL 7 4 .636 14 9 96.3 74 9 69 3.27 2.62 1931 Cleveland NNL 1 2 .333 6 1 32.7 26 4 18 3.31 2.48 1931 Pittsburgh Independent 0 1 .000 1 1 8.0 5 1 0 3.38 2.25 1932 Pittsburgh Independent 10 4 .714 22 12 132.7 92 35 92 3.19 1.70 1933 Pittsburgh p NNL (second) 5 7 .417 13 8 95.0 54 12 55 3.69 1.89 1934 Pittsburgh NNL 14 2 .875 22 15 154.0 103 26 144 2.16 1.40 1935 Kansas City Independent 0 0 .000 2 1 9.0 5 1 11 0.00 0.00 1936 Pittsburgh p NNL 5 0 1.000 7 5 47.7 41 9 47 3.21 2.08 1937 Trujillo All-Stars Independent 0 1 .000 2 1 11.0 16 1 11 4.09 4.09 1940 Kansas City p NAL 1 0 1.000 2 1 11.0 6 0 8 0.82 0.00 1941 Kansas City p NAL 4 0 1.000 12 2 55.0 42 6 42 3.44 1.64 1941 뉴욕 NNL 1 0 1.000 1 1 9.0 5 0 8 3.00 0.00 1942 Kansas City c NAL 4 5 .444 18 5 95.0 68 11 79 2.84 1.80 1943 Kansas City NAL 6 8 .429 23 3 102.0 90 22 74 4.59 2.65 1943 Memphis NAL 1 0 1.000 1 0 5.0 0 2 7 0.00 0.00 1944 Kansas City NAL 4 5 .444 14 5 82.7 51 13 76 1.96 0.54 1945 Kansas City NAL 2 4 .333 11 2 51.7 48 14 54 5.05 1.05 1946 Kansas City p NAL 5 1 .833 11 2 47.0 40 3 45 2.11 1.15 1947 Kansas City NAL 1 1 .500 3 2 19.0 7 0 17 0.95 0.47 Total 19 seasons 103 61 .628 263 110 1506.7 1174 253 1231 3.31 2.02 p = pennant; c = Negro League World Series championship. 노스다코타[편집] 연도 팀 승리 패전 승률 완투 이닝 볼넷 삼진 RA 1933 Bismarck 6 0 1.000 7 72.0 11 119 1.25 1935 Bismarck 29 2 .935 18 229.7 16 321 1.96 Total 2 seasons 35 2 .946 25 301.7 27 440 1.79 도미니칸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 패 승률 1937 Ciudad Trujillo Dominican League 8 2 .800 멕시칸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이닝 피안타 볼넷 삼진 방어율 1938 Agrario de México Mexican League 1 1 .500 3 0 19.3 28 12 7 5.12 쿠바 리그 (윈터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등판 완투 1929–30 Santa Clara Cuban League 6 5 .545 15 8 캘리포니아 윈터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완투 이닝 볼넷 삼진 1931–32 Philadelphia Giants California Winter 6 0 1.000 6 58 — 70 1932–33 Tom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7 0 1.000 7 63 — 91 1933–34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16 2 .889 18 172 47 244 1934–35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8 0 1.000 7 69 20 104 1935–36 Wilson's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13 0 1.000 6 94 28 113 1943–44 Baltimore Elite Giants California Winter 3 1 .750 1 36 10 39 1945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1 1 .500 1 27 12 27 1946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0 2 .000 0 15 7 21 1947 Kansas City Royals California Winter 2 1 .667 1 35 14 60 Total 9 seasons 56 7 .889 47 569 — 769 푸에르토 리그 (윈터 리그)[편집] 연도 팀 리그 승리 패전 승률 이닝 볼넷 삼진 방어율 1939–40* Guayama p Puerto Rico 19† 3 .864 205 54 208† 1.93 1940–41 Guayama Puerto Rico 4 5 .444 — 26 70 3.89 1947–48 Santurce Puerto Rico 0 3 .000 34 13 26 2.91 Total 3 seasons 23 11 .676 — 93 304 — * – league MVP; † – single-season league record; p = pennant. 메이저 리그[편집] 사첼페이지 메이저 리그 통산 성적 참조. 마이너리그[편집] 사첼페이지 마이너리그 통산 성적 참조. 같이 보기[편집] 조시 깁슨 재키 로빈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각주[편집] ↑ 정확히 말하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단장이 입단 제의를 표했고, 사첼 페이지는 이를 받아들여서 입단. ↑ 정확히 몇 년 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가 나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에이스' 새철 페이지 ↑ 이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다. 7세 때 돈벌이를 위해 기차역에서 짐꾼으로 일하는데 그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여행가방나무(Satchel tree)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어렸을 때 남의 가방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그런 별명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 네이버 스포츠 ↑ 일부 기록된 것은 있으나, 이는 불정확하다. ↑ 당시, 이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는 불참했다. 그 이유는 베이브 루스가 '흑인하고는 같이 경기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베이브 루스가 사첼 페이지한테 삼진을 당할까봐 두려워해서 벤치를 지켰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 당시, 클리블랜드 홈구장은 '클리블랜드 뮤니시펄 스타디움'이었다. 관중수요 규모는 75000석. ↑ 페이지는 이후 연금법이 또 개정되면서 또 대상에서 제외되자 다시 공을 던지려 했지만 노령이라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커미셔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후 연금법이 다시 바뀌면서 페이지는 다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공식 웹사이트 (영어) 경력 통계와 선수 정보 -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영어) 사첼 페이지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영어) 사첼 페이지 - 파인드 어 그레이브 '시대를 잘못 만난' 새철 페이지 ML '전설의 특급투수' 사첼 페이지 사첼 페이지 메이저 리그 통산 기록 '전설의 투수' 사첼 페이지, 탄생 100주년 맞아 사첼 페이지 투구 모션 vdeh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1948년 월드 시리즈 우승 3 에디 로빈슨 4 조 고든 5 루 부드로 6 켄 켈트너 7 알 로센 10 짐 헤건 11 레이 분 12 조 팁턴 14 래리 도비 16 에드 클리에먼 18 루스 크리스토퍼 19 밥 펠러 21 밥 레몬 24 밥 케네디 25 밥 먼크리프 27 스티브 그로멕 29 사첼 페이지 30 진 비어든 31 앨리 클라크 34 데일 미첼 35 월리 주드니치 36 할 펙 38 서먼 터커 감독 5 루 부드로 코치 41 빌 맥케시니 42 머디 루엘 43 멜 하더 스키 메릴로 조지 수스 vdeh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의 헌액자투수 갤빈 고메즈 고시지 그라임스 그로브 글래빈 깁슨 뉴하우저 니콜스 니크로 데이 드라이스데일 디히고 딘 라이언 라이온스 래드번 러핑 레몬 로간 로버츠 루시 릭시 마르티네스 마리첼 마쿼드 매덕스 매슈슨 맥기니티 멘데스 반스 버닝 벤더 M. 브라운 R. 브라운 블라일레븐 서턴 수터 스몰츠 스미스 스판 시버 알렉산더 에커슬리 영 워델 월시 웰치 윈 윌리스 윌리엄스 윌헬름 젱킨스 조스 R. 존슨 W. 존슨 체스브로 칼턴 커밍스 코벨레스키 쿠퍼 쿠팩스 클락슨 키프 파머 페리 페이지 페노크 페이버 펠러 포드 B. 포스터 R. 포스터 플랭크 핑거스 허벨 헌터 헤인스 호이트 포수 깁슨 디키 롬바디 매키 베라 벤치 브레스나한 산토프 쇼크 유잉 카터 캄파넬라 코크런 페럴 피스크 피아자 하넷 화이트 1루수 게릭 그린버그 레너드 마이즈 맥코비 머레이 바텀리 베클리 브루서스 서틀스 세페다 시슬러 앤슨 챈스 켈리 코너 킬브루 테리 테일러 페레스 폭스 2루수 게링거 고든 그랜트 도에르 라제리 라조이 로빈슨 매저로스키 모건 맥피 비지오 샌드버그 쇼인딘스트 알로마 에버스 커루 콜린스 폭스 프리슈 허먼 혼즈비 3루수 댄드리지 로빈슨 린드스톰 매슈스 베이커 보그스 브렛 슈미트 윌슨 존슨 켈 콜린스 트레이너 유격수 데이비스 라킨 로이드 리주토 리즈 립켄 매런빌 밴크로프트 뱅크스 본 부드로 슈얼 스미스 아파리시오 애플링 와그너 욘트 워드 월리스 웰스 잭슨 제닝스 크로닌 트래멜 팅커 외야수 고슬린 그리피 그윈 더피 델라한트 도비 도슨 J. 라이스 S. 라이스 레인스 로빈슨 루스 루시 디마지오 마누시 매카시 맨틀 메드윅 메이스 뮤지얼 버켓 벨 브라운 브록 스나이더 스타젤 스턴스 스피커 슬로터 시먼스 애시번 야스트렘스키 어빈 에런 에이버릴 영스 오루케 오트 와그너 워너 윈필드 B. 윌리엄스 T. 윌리엄스 윌슨 잭슨 찰스턴 칼라인 커레이 커일러 J. 켈리 K. 켈리 콤스 콥 크로퍼드 키너 킬러 클라크 클레멘테 클레인 토리엔테 톰프슨 퍼켓 플릭 하피 해밀턴 헤일먼 헨더슨 후퍼 휘트 힐 감독 더로셔 라 루사 라소다 로빈슨 로페스 매카시 맥 맥그로 맥케시니 사우스워스 셀리 스텡걸 올스턴 앤더슨 위버 윌리엄스 콕스 토리 포스터 해리스 허긴스 허조그 핸런 운영 / 공로 그리피스 드레이퍼스 J. 라이트 H. 라이트 랜디스 리키 La. 맥파일 Le. 맥파일 맨리 배로 벌커리 빅 스팰딩 오맬리 요키 웨이스 윌킨슨 자일스 존슨 채드윅 챈들러 카트라이트 코미스키 쿤 포시 폼페스 프릭 해리지 헐버트 화이트 심판 맥가원 발릭 에번스 차일락 코널리 콘런 클렘 하비 허버드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191449 LCCN: n86039039 ISNI: 0000 0003 5385 9831 GND: 133065545 NDL: 0051539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첼_페이지&oldid=23746806" 분류: 1906년 태어남1982년 죽음앨라배마주 출신 야구 선수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볼티모어 오리올스 선수아프리카계 미국인 야구 선수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니그로 리그 베이스볼 선수캔자스시티 모나크스 선수아메리칸 리그 올스타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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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맛 (Red Flavor)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빨간 맛 (Red Flavor)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빨간 맛 (Red Flavor)레드벨벳의 싱글수록 음반 The Red Summer포맷 디지털 다운로드장르 댄스 팝길이 3:11레이블 SM 엔터테인먼트, 지니 뮤직 작사·작곡 켄지, 다니엘 카이저, 루드비히 린델프로듀서 카이저 & 루이레드벨벳 싱글 연표 Would U 빨간 맛 (Red Flavor) 환생 (Rebirth) "빨간 맛 (Red Flavor)"은 대한민국 걸 그룹 레드벨벳의 5번째 EP인 The Red Summer의 타이틀곡이다. SM 엔터테인먼트의 작사가인 켄지가 가사를 맡았고, 대니얼 카이사르와 루드비치 린델이 프로듀싱한 "빨간 맛"은 여름 풍의 바이브가 가미된 댄스 팝 곡이다. 2017년 7월 9일 "The Red Summer"에 수록되어 발매되었으며, 뮤직비디오도 같이 공개되었다. 초기 발매 이후 "빨간 맛"은 훅 부분과 여름 가사에 대한 각인성을 칭찬한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고, 비평가들의 몇몇 연간 목록에 등장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도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 "빨간 맛"은 가온 디지털 차트에서 처음으로 1위에 진입했고, 빌보드의 Kpop 핫 100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으며, 레드벨벳의 음반 중 5번째로 100만 장 이상 팔린 음반이 되었다. 본국뿐만 아니라 빌보드의 세계 디지털 곡에서 4위를 달성하였고, 필리핀과 일본의 빌보드 차트에서도 처음으로 순위권에 진입했다. 목차 1 배경과 발매 2 구성 3 프로모션 4 비평 5 차트 6 각주 배경과 발매[편집] 레드벨벳의 네번째 EP인 Rookie가 2월에 나온 이후, SM 엔터테인먼트는 2017년 6월 23일 레드벨벳이 첫 번째 여름 음반을 발매하고 뮤직비디오 촬영을 최근에 마쳤음을 확인시켰다.[1] 6월 30일, 티저 이미지의 첫 묶음이 레드벨벳의 공식 소셜 미디어 계정에 올라왔다. "빨간 맛" 앨범의 제목과 모든 수록곡도 같은 날 공개되었다.[2] 7월 7일 19초의 "빨간 맛" 티저 비디오가 공식 SMTOWN 채널에 올라왔고, 이틀 후 공식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3] 2017년 7월 9일 EP와 함께 레드벨벳의 공식 디지털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구성[편집] "빨간 맛"은 대니얼 카이사르와 루드비히 린델이 프로듀싱했다. 원래 빨간 맛은 영국 걸그룹 Little Mix에게 "Dance With Nobody"라는 제목으로 이 곡을 만들었음을 인터뷰에서 밝혔다. Kpop 시장에서도 노래가 통할 것이라 결정한 이후 합창 이전 부분의 배경 음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 딤베르크의 목소리와 함께 듀오는 데모를 녹음했다. 노래에 녹음된 "빨간 맛"의 가사를 부르는 왜곡된 목소리는 린델 그 스스로가 녹음했다.[4] SM에서 오랫동안 작사가로 일한 켄지가 가사를 맡았다. 가사는 과일들을 언급하며 여름의 사랑에 빠진 소녀를 주제로 담고 있다. 음악적으로, 빌보드의 타마르 헤르만은 이 곡을 드라마틱한 신시사이저와 타악기 멜로디가 어우러진 일렉트로팝으로 분류하며 레드벨벳의 6번째 "Red" 컨셉의 곡으로 분류했다. "빨간 맛"은 분당 125비트의 템포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조의 키로 작곡되었다.[5][6][7] 추가적으로 The 405의 체이스 맥멀렌은 이 곡이 박수에 맞춘 그루브와 호른 같은 악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여름 바이브를 준다고 언급했다.[8] 초기에 한국어판으로 발매된 이후 이 곡은 일본어판으로 녹음되기도 했다.[9] 프로모션[편집] 2014년부터 레드벨벳의 타이틀곡의 안무를 맡은 카일 하나가미가 안무를 담당했다. 성창원 감독이 촬영을 맡은 과일 특성의 뮤직비디오는 레드벨벳 멤버 전원이 사랑에 대해 노래하며 다채로운 여름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멤버들이 홈파티를 하는 모습과 거대한 과일과 인터뷰하는 모습도 보여준다.[10][11] 레드벨벳 멤버인 조이는 저녁 만찬에서 SM 엔터테인먼트 설립자 이수만과의 회동에 참석해 그에게 제목, 가사, 멜로디, 리듬, 안무에 직접 개입했음을 들었다[12] 디지털 발매 이전까지, "빨간 맛"은 비공식적인 발매로 여겨지는 서울 SMTOWN 콘서트에서 곡을 생방송으로 공연했다.[13] 7월 9일 발매 이후 1시간 뒤 레드벨벳은 인기가요에서 "You Better Know"와 함께 처음으로 공식적인 생방송 공연을 했다.[14] 그들은 더 쇼, 뮤직뱅크, 엠카운트다운, 쇼 챔피언 등에서 지속적으로 공연했고, 2017년 7월 20일 처음으로 "빨간 맛"으로 트로피를 수상했다.[15] 2017년 8월 레드벨벳의 첫 단독 콘서트인 Red Room에서 "빨간 맛"은 전체 곡의 일부로 등장했다. "빨간 맛"은 레드벨벳의 노래 중 처음으로 일본어로 녹음된 곡으로, 2017년 11월 6일 일본에서의 데뷔 공연에서 일본어판 곡을 선보였다.[16] 비평[편집] 초기의 발매 이후 "빨간 맛"은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빌보드의 타마 헤르만은 노래가 "몹시 붐비며 과대하지 않은 프로덕션을 통한 역동적인" 곡이라고 평가했으며, 여름 Kpop의 인상깊은 곡 중 하나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결론내렸다.[5] 퓨즈의 제프 벤자민은 노래를 이해하기 매우 쉬운 팝으로 묘사하며 쾌활하고 단순한 멜로디라는 평가를 주며 레드벨벳의 가장 다가가기 쉬운 음악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11] 체이스 맥멀런은 "수월해보이는 팝글라이드"라고 칭찬했고, IZM의 이기선은 레드벨벳의 통합성이 노래 전반에 나타나있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8][17] 더 스타의 체스터 친은 면전의 여름 잼이라고 이를 붙이며 가차없이 마음을 사로잡는 곡이라고 평가했다.[18] 데이즈드 디지털의 테일러 그래스비는 이 곡이 단순히 변덕스러운 해결책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녀는 합창 부분의 강력한 한 방으로 인해 이 곡이 완벽하게 여름을 이겼다고 주장했다.[19] "빨간 맛"은 IZM의 올해의 싱글 앨범 10에 포함되었으며 2017년 GQ 코리아 11월 호에서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었다.[20][21] 12월, Osen의 선미경 기자는 2017년 기억에 남은 노래의 목록에 "빨간 맛"을 선정하며 노래의 중독성과 차트에 오래 남은 기록을 강조하며, 곡의 훅 부분이 음악 산업계에서 큰 히트를 쳤다고 말했다.[22] 데이즈드 또한 2017년 최고의 K-pop 노래 20에서 이 곡을 2위로 선정했고, YouTube 한국의 2017년 가장 인기있는 뮤직비디오에서 "빨간 맛"은 1위로 선정되었다.[19][23] 빌보드의 2017년 최고의 K-pop 노래 20에서 "빨간 맛"은 4위를 차지했다.[24] 차트[편집] 발매된지 하루 만에 "빨간 맛"은 대한민국 디지털 음원차트 7개와 8개국의 아이튠 디지털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25] 2017년 7월 셋째 주에 가온 디지털 차트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오른 빨간 맛은 레드벨벳의 디지털 음반 히트곡 1순위가 되었다. 가온 디지털 차트에서 291,463회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빨간 맛"은 첫 주에 레드벨벳의 다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26] 2017년 12월, "빨간 맛"은 100만 번 이상 다운로드되었으며, 레드벨벳의 5번째 밀리언셀러 음반이 되었다. 현재 이 곡은 러시안 룰렛 (Russian Roulette)의 뒤를 이어 2번째로 히트를 친 곡이다. 빌보드의 Kpop 핫 100에서는 2위에 달성했는데, 이로 인해 레드벨벳은 처음으로 상위 5위권에 진입했고, 새로 작성된 차트 목록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27] 대한민국 이외의 국가에서, 미국의 빌보드 세계 디지털 곡에서 "빨간 맛"은 데뷔 이후 "행복 (Happiness)"과 "Rookie"에 뒤이어 세번째로 4위를 기록했다.[28] 한국어판의 노래 역시 빌보드 필리핀 핫 100에서 24위를 기록했고 일본 핫 100에서는 25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처음으로 레드벨벳의 노래가 순위권에 오른 사례이다.[29][30] 각주[편집] ↑ “Red Velvet confirm their comeback in July!”. 《naver》.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Jung, Hee-yeon (2017년 6월 30일). “'컴백' 레드벨벳, 타이틀곡 '빨간 맛'…7월 9일 공개”. 《naver》.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Red Velvet Offers a Taste of Summer With 'Red Flavor' Song & Video: Watch”. 《Billboard》.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Korean Flavors: An Interview with Songwriting/Production Duo Caesar & Loui”. 《toneglow》. Tone Glow. 2017년 8월 8일.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Herman, Tamar (2017년 7월 9일). “Red Velvet Offers a Taste of Summer With 'Red Flavor' Song & Video: Watch”. 《Billboard》. 2017년 7월 11일에 확인함. ↑ LLC, Blendist. “BPM for Red Velvet - 빨간 맛 Red Flavor on songbpm”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빨간 맛 Red Flavor - Red Velvet - Spot On Track”. 《www.spotontrack.com》 (영어). 2017년 11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http://thefourohfive.com. “Album Review: Red Velvet - Red Summer”. 《The 405》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Going global! Red Velvet are making waves in Japan”. 《SBS PopAsia》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Yoon, Joon-pil. “美 퓨즈TV, 레드벨벳 집중 조명…'보는 맛'도 잡은 '빨간 맛'”. 10asia.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Red Velvet Capture the Taste of Summer With 'Red Flavor': Watch the Video”. 《Fuse》.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이수만이 적극 추천한 SM 타이틀곡 3”. 《dispatch》. Dispatch. 2017년 10월 25일.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레드벨벳, SM타운 콘서트서 신곡 '빨간 맛' 최초 공개···조이 티저 오픈”.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이효리, '인기가요'로 음방 피날레…레드벨벳 신곡 첫 공개 : 스포츠조선”. 《sports.chosun.com》.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Red Velvet receives their first music trophy for Red Flavor”. ↑ “"열도도 빨간맛"…레드벨벳, 日 첫 쇼케이스로 본격 진출 활동”.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Neo Music Communication IZM”. 《izm.co.kr》.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The Red Summer': K-pop girl group Red Velvet's sizzling affair”. 《star2》. The Star.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Glasby, Taylor (2017년 12월 7일). “The 20 best K-Pop songs of 2017”. 《Dazed》. 2017년 12월 8일에 확인함. ↑ “2017 올해의 가요 싱글”. 《IZM》. IZM. 2017년 12월 4일에 확인함. ↑ “2017 GQ Awards”. 《GQ Korea》 (GQ Korea). November 2017. |확인날짜=는 |url=을 필요로 함 (도움말) ↑ Sun, Mi-kyung (2017년 12월 7일). “[Oh!쎈 초점] "빨간맛→나야 나"..올해의 한 소절”. 《siminsori》. 2017년 12월 8일에 확인함. ↑ Hicap, Jonathan (2017년 12월 8일). “2017's top K-pop music videos on YouTube in Korea revealed”. 《Manila Bulletin》. 2017년 12월 9일에 확인함. ↑ Benjamin, Jeff (2017년 12월 14일). “The Best K-pop Songs of 2017: Critics' Picks”. Billboard. 2017년 12월 16일에 확인함. ↑ “Red Velvet Tops 7 Korean Digital Music Charts With New Title Track "Red Flavor" | Soompi”. 《www.soompi.com》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국내 대표 음악 차트 가온차트!”. 《gaonchart.co.kr》.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Billboard K-pop Hot 100 - July 17-23, 2017”. ↑ “World Digital Song Sales : Jul 29, 2017 | Billboard Chart Archive”. 《Billboard》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Staff, BillboardPH (2017년 7월 31일). “BillboardPH Hot 100 - July 31 - Billboard Philippines”. 《Billboard Philippines》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Japanese Music: Top Japanese Songs Chart”. 《Billboard》. 2017년 12월 4일에 확인함. vdeh레드벨벳 아이린 슬기 웬디 조이 예리 정규 음반 The Red (2015) Perfect Velvet (2017) 리패키지 음반 The Perfect Red Velvet (2018) EP 음반대한민국 Ice Cream Cake (2015) The Velvet (2016) Russian Roulette (2016) Rookie (2017) The Red Summer (2017) Summer Magic (2018) RBB (2018) The ReVe Festival: Day 1 (2019) 일본 #Cookie Jar (2018) Sappy (2019) 싱글 및 노래 행복 (Happiness) Be Natural Ice Cream Cake Dumb Dumb 세가지 소원 (Wish Tree) 7월 7일 러시안 룰렛 (Russian Roulette) Rookie Would U 빨간 맛 (Red Flavor) 환생 (Rebirth) 피카부 (Peek-A-Boo) Bad Boy #Cookie Jar Power Up RBB Zimzalabim 리얼리티 쇼레벨업 프로젝트콘서트 Red Room (2017/2018) REDMARE (2018/2019) 관련 문서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음반 목록 · 음반 외 활동 목록 · 수상 목록 · 콘서트 목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빨간_맛_(Red_Flavor)&oldid=24528322" 분류: 레드벨벳의 노래2017년 노래숨은 분류: CS1 - 영어 인용 (en)인용 오류 - URL 없이 확인날짜를 사용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5일 (금) 15: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빨간 맛 (Red Flavor)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빨간 맛 (Red Flavor)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빨간 맛 (Red Flavor)레드벨벳의 싱글수록 음반 The Red Summer포맷 디지털 다운로드장르 댄스 팝길이 3:11레이블 SM 엔터테인먼트, 지니 뮤직 작사·작곡 켄지, 다니엘 카이저, 루드비히 린델프로듀서 카이저 & 루이레드벨벳 싱글 연표 Would U 빨간 맛 (Red Flavor) 환생 (Rebirth) "빨간 맛 (Red Flavor)"은 대한민국 걸 그룹 레드벨벳의 5번째 EP인 The Red Summer의 타이틀곡이다. SM 엔터테인먼트의 작사가인 켄지가 가사를 맡았고, 대니얼 카이사르와 루드비치 린델이 프로듀싱한 "빨간 맛"은 여름 풍의 바이브가 가미된 댄스 팝 곡이다. 2017년 7월 9일 "The Red Summer"에 수록되어 발매되었으며, 뮤직비디오도 같이 공개되었다. 초기 발매 이후 "빨간 맛"은 훅 부분과 여름 가사에 대한 각인성을 칭찬한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고, 비평가들의 몇몇 연간 목록에 등장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도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 "빨간 맛"은 가온 디지털 차트에서 처음으로 1위에 진입했고, 빌보드의 Kpop 핫 100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으며, 레드벨벳의 음반 중 5번째로 100만 장 이상 팔린 음반이 되었다. 본국뿐만 아니라 빌보드의 세계 디지털 곡에서 4위를 달성하였고, 필리핀과 일본의 빌보드 차트에서도 처음으로 순위권에 진입했다. 목차 1 배경과 발매 2 구성 3 프로모션 4 비평 5 차트 6 각주 배경과 발매[편집] 레드벨벳의 네번째 EP인 Rookie가 2월에 나온 이후, SM 엔터테인먼트는 2017년 6월 23일 레드벨벳이 첫 번째 여름 음반을 발매하고 뮤직비디오 촬영을 최근에 마쳤음을 확인시켰다.[1] 6월 30일, 티저 이미지의 첫 묶음이 레드벨벳의 공식 소셜 미디어 계정에 올라왔다. "빨간 맛" 앨범의 제목과 모든 수록곡도 같은 날 공개되었다.[2] 7월 7일 19초의 "빨간 맛" 티저 비디오가 공식 SMTOWN 채널에 올라왔고, 이틀 후 공식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3] 2017년 7월 9일 EP와 함께 레드벨벳의 공식 디지털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구성[편집] "빨간 맛"은 대니얼 카이사르와 루드비히 린델이 프로듀싱했다. 원래 빨간 맛은 영국 걸그룹 Little Mix에게 "Dance With Nobody"라는 제목으로 이 곡을 만들었음을 인터뷰에서 밝혔다. Kpop 시장에서도 노래가 통할 것이라 결정한 이후 합창 이전 부분의 배경 음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 딤베르크의 목소리와 함께 듀오는 데모를 녹음했다. 노래에 녹음된 "빨간 맛"의 가사를 부르는 왜곡된 목소리는 린델 그 스스로가 녹음했다.[4] SM에서 오랫동안 작사가로 일한 켄지가 가사를 맡았다. 가사는 과일들을 언급하며 여름의 사랑에 빠진 소녀를 주제로 담고 있다. 음악적으로, 빌보드의 타마르 헤르만은 이 곡을 드라마틱한 신시사이저와 타악기 멜로디가 어우러진 일렉트로팝으로 분류하며 레드벨벳의 6번째 "Red" 컨셉의 곡으로 분류했다. "빨간 맛"은 분당 125비트의 템포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조의 키로 작곡되었다.[5][6][7] 추가적으로 The 405의 체이스 맥멀렌은 이 곡이 박수에 맞춘 그루브와 호른 같은 악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여름 바이브를 준다고 언급했다.[8] 초기에 한국어판으로 발매된 이후 이 곡은 일본어판으로 녹음되기도 했다.[9] 프로모션[편집] 2014년부터 레드벨벳의 타이틀곡의 안무를 맡은 카일 하나가미가 안무를 담당했다. 성창원 감독이 촬영을 맡은 과일 특성의 뮤직비디오는 레드벨벳 멤버 전원이 사랑에 대해 노래하며 다채로운 여름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멤버들이 홈파티를 하는 모습과 거대한 과일과 인터뷰하는 모습도 보여준다.[10][11] 레드벨벳 멤버인 조이는 저녁 만찬에서 SM 엔터테인먼트 설립자 이수만과의 회동에 참석해 그에게 제목, 가사, 멜로디, 리듬, 안무에 직접 개입했음을 들었다[12] 디지털 발매 이전까지, "빨간 맛"은 비공식적인 발매로 여겨지는 서울 SMTOWN 콘서트에서 곡을 생방송으로 공연했다.[13] 7월 9일 발매 이후 1시간 뒤 레드벨벳은 인기가요에서 "You Better Know"와 함께 처음으로 공식적인 생방송 공연을 했다.[14] 그들은 더 쇼, 뮤직뱅크, 엠카운트다운, 쇼 챔피언 등에서 지속적으로 공연했고, 2017년 7월 20일 처음으로 "빨간 맛"으로 트로피를 수상했다.[15] 2017년 8월 레드벨벳의 첫 단독 콘서트인 Red Room에서 "빨간 맛"은 전체 곡의 일부로 등장했다. "빨간 맛"은 레드벨벳의 노래 중 처음으로 일본어로 녹음된 곡으로, 2017년 11월 6일 일본에서의 데뷔 공연에서 일본어판 곡을 선보였다.[16] 비평[편집] 초기의 발매 이후 "빨간 맛"은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빌보드의 타마 헤르만은 노래가 "몹시 붐비며 과대하지 않은 프로덕션을 통한 역동적인" 곡이라고 평가했으며, 여름 Kpop의 인상깊은 곡 중 하나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결론내렸다.[5] 퓨즈의 제프 벤자민은 노래를 이해하기 매우 쉬운 팝으로 묘사하며 쾌활하고 단순한 멜로디라는 평가를 주며 레드벨벳의 가장 다가가기 쉬운 음악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11] 체이스 맥멀런은 "수월해보이는 팝글라이드"라고 칭찬했고, IZM의 이기선은 레드벨벳의 통합성이 노래 전반에 나타나있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8][17] 더 스타의 체스터 친은 면전의 여름 잼이라고 이를 붙이며 가차없이 마음을 사로잡는 곡이라고 평가했다.[18] 데이즈드 디지털의 테일러 그래스비는 이 곡이 단순히 변덕스러운 해결책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녀는 합창 부분의 강력한 한 방으로 인해 이 곡이 완벽하게 여름을 이겼다고 주장했다.[19] "빨간 맛"은 IZM의 올해의 싱글 앨범 10에 포함되었으며 2017년 GQ 코리아 11월 호에서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었다.[20][21] 12월, Osen의 선미경 기자는 2017년 기억에 남은 노래의 목록에 "빨간 맛"을 선정하며 노래의 중독성과 차트에 오래 남은 기록을 강조하며, 곡의 훅 부분이 음악 산업계에서 큰 히트를 쳤다고 말했다.[22] 데이즈드 또한 2017년 최고의 K-pop 노래 20에서 이 곡을 2위로 선정했고, YouTube 한국의 2017년 가장 인기있는 뮤직비디오에서 "빨간 맛"은 1위로 선정되었다.[19][23] 빌보드의 2017년 최고의 K-pop 노래 20에서 "빨간 맛"은 4위를 차지했다.[24] 차트[편집] 발매된지 하루 만에 "빨간 맛"은 대한민국 디지털 음원차트 7개와 8개국의 아이튠 디지털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25] 2017년 7월 셋째 주에 가온 디지털 차트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오른 빨간 맛은 레드벨벳의 디지털 음반 히트곡 1순위가 되었다. 가온 디지털 차트에서 291,463회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빨간 맛"은 첫 주에 레드벨벳의 다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26] 2017년 12월, "빨간 맛"은 100만 번 이상 다운로드되었으며, 레드벨벳의 5번째 밀리언셀러 음반이 되었다. 현재 이 곡은 러시안 룰렛 (Russian Roulette)의 뒤를 이어 2번째로 히트를 친 곡이다. 빌보드의 Kpop 핫 100에서는 2위에 달성했는데, 이로 인해 레드벨벳은 처음으로 상위 5위권에 진입했고, 새로 작성된 차트 목록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27] 대한민국 이외의 국가에서, 미국의 빌보드 세계 디지털 곡에서 "빨간 맛"은 데뷔 이후 "행복 (Happiness)"과 "Rookie"에 뒤이어 세번째로 4위를 기록했다.[28] 한국어판의 노래 역시 빌보드 필리핀 핫 100에서 24위를 기록했고 일본 핫 100에서는 25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처음으로 레드벨벳의 노래가 순위권에 오른 사례이다.[29][30] 각주[편집] ↑ “Red Velvet confirm their comeback in July!”. 《naver》.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Jung, Hee-yeon (2017년 6월 30일). “'컴백' 레드벨벳, 타이틀곡 '빨간 맛'…7월 9일 공개”. 《naver》.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Red Velvet Offers a Taste of Summer With 'Red Flavor' Song & Video: Watch”. 《Billboard》.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Korean Flavors: An Interview with Songwriting/Production Duo Caesar & Loui”. 《toneglow》. Tone Glow. 2017년 8월 8일.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Herman, Tamar (2017년 7월 9일). “Red Velvet Offers a Taste of Summer With 'Red Flavor' Song & Video: Watch”. 《Billboard》. 2017년 7월 11일에 확인함. ↑ LLC, Blendist. “BPM for Red Velvet - 빨간 맛 Red Flavor on songbpm”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빨간 맛 Red Flavor - Red Velvet - Spot On Track”. 《www.spotontrack.com》 (영어). 2017년 11월 12일에 확인함. ↑ 가 나 http://thefourohfive.com. “Album Review: Red Velvet - Red Summer”. 《The 405》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Going global! Red Velvet are making waves in Japan”. 《SBS PopAsia》 (영어).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Yoon, Joon-pil. “美 퓨즈TV, 레드벨벳 집중 조명…'보는 맛'도 잡은 '빨간 맛'”. 10asia.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가 나 “Red Velvet Capture the Taste of Summer With 'Red Flavor': Watch the Video”. 《Fuse》. 2017년 11월 10일에 확인함. ↑ “이수만이 적극 추천한 SM 타이틀곡 3”. 《disp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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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7. |확인날짜=는 |url=을 필요로 함 (도움말) ↑ Sun, Mi-kyung (2017년 12월 7일). “[Oh!쎈 초점] "빨간맛→나야 나"..올해의 한 소절”. 《siminsori》. 2017년 12월 8일에 확인함. ↑ Hicap, Jonathan (2017년 12월 8일). “2017's top K-pop music videos on YouTube in Korea revealed”. 《Manila Bulletin》. 2017년 12월 9일에 확인함. ↑ Benjamin, Jeff (2017년 12월 14일). “The Best K-pop Songs of 2017: Critics' Pi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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