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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타고라스 》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의 하나이다. 이 글은 소피스트로서 유명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와의 덕(德)에 관한 대화이다. 덕이란 무엇이며 과연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가 음미된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경건·용기·정의·지혜라고 하는 여러 가지 덕이, 그것들이 정말로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공통된 덕의 본질을 문답 형식으로 탐구해 나간다. 만약 이러한 여러 덕의 본질이 지식임을 안다면 덕은 가르쳐진다고 해도 좋으며, 덕은 지식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한편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가르쳐지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덕이 지식이라는 점을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프로타고라스는 정의·용기·절제 등 여러 덕이 마치 얼굴 가운데서 코나 눈이나 입처럼 각각 다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경건한 태도를 갖지만 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든지,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사려가 깊다고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덕이 황금의 일부분처럼 동일하다고 한다면 용기·절제·경건 등등으로 구별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결론으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은 지식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암시가 전체를 통하여 풍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여, 정의(定義)에 마음을 쏟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 그 보편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지식이라 해도 좋다. 그가 말하는 지식이란 머리에서 생각만 하는 이론적인 지식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면 악을 저지를 수 없는 체득적(體得的) 지식이라 하겠다. 그러한 지식을 얻는 것이 덕이며 사람들의 행복으로 연결되어 간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지(知)는 덕(德)"이며 "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윤리가 이 대화편에 암시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 무명친구 프로타고라스 · 프로디코스 · 히피아스 · 히포크라테스 · 알키비아데스 · 칼리아스 · 크리티아스 대화시기 기원전 약 433년 대화장소 칼리아스의 집 아테네를 방문하여 칼리아스의 집에 묵고 있는 프로타고라스를 소크라테스가 찾아가 그곳에 모여 있는 여러 사람들을 청중으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자신 사이에 있은 대화를 무명친구에게 이야기해 주는 이른바 틀대화이다. 덕을 가르칠 수 있는가?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라케스/ 메논 - 원제 Platonis Opera 3》, 박종현(옮김), 서광사, 2010. 《프로타고라스 - 원제 Protagoras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2》, 강성훈(옮김), 이제이북스, 2012. 《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원제 Gorgias Protagoras》, 천병희(옮김), 도서출판 숲, 2014. 분류:소크라테스의 대화법 분류:플라톤의 대화편 분류:사고 실험 분류:철학에 관한 사고 실험 |
마이클 하틀리 프리드먼 ( , 1951년 4월 21일 -)은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수학자이다. 1986년 20세기 수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에 대한 연구로 필즈상을 수상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으며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를 중퇴한 후 1968년 프린스턴 대학교에 들어가 1973년에 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졸업 후 1975년까지 UC 버클리 수학과의 강사로 재직했다. 1975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일원이 되었으며, 1976년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수학과 부교수가 된다. 1980년과 1981년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보내고, UC 샌디에이고로 돌아가 1982년에는 정교수로 승진한다. 1985년에는 UC 샌디에이고 수학과 학장을 지낸다. 수많은 수상경력이 있다. 분류:1951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수학자 분류:프린스턴 대학교 동문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21세기 수학자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 교수 분류:로스앤젤레스 출신 분류:루마니아계 미국인 분류:필즈상 수상자 |
고급과학연구소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는 사설 연구소이다. 순수 학문 분야의 유명 과학자들이 강의나 연구 자금 등에 구애받지 않고 첨단 학문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에 이주해 온 후 이곳에서 연구를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연구소는 역사, 수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최근 새로 개설된 이론 생물학 스쿨로 구성되어 있다. 각 스쿨마다 소규모의 영구 교수진이 있으며, 매년 선발된 방문 연구자들이 연구할 자격을 얻는다. 고등연구소에는 학위 코스나 실험실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학자들은 연구비를 얻기 위해 어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비록 프린스턴 대학교와 인접해 있어 연구소와 대학의 교류와 협력이 있기는 하지만, 고등연구소는 교육이 목적이 아니며 대학과는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기관이다. 연구에는 어떠한 계약이나 지시 없이 학자들의 완전한 자율에 맡겨진다. 연구소는 1930년 당시의 뉴아크 백화점 주 루이 뱀버거와 그의 남매 캐롤린 뱀버거 풀드의 자금으로 설립되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대공황 직전에 주식을 팔아 연구소를 건립할 수 있었다. 원래 그들의 계획은 백화점의 성공에 대해 뉴저지 주민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이자 초대 소장 플렉스너가 그들을 설득해 순수과학 연구소가 세워졌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피에르 들리뉴 마이클 아티야 장 부르갱 이휘소 엔리코 봄비에리 양첸닝 야우싱퉁 프리먼 다이슨 쿠르트 괴델 필립 오거스터스 그리피스 리정다오 존 밀노어 로버트 오펜하이머 카를 루트비히 지겔 블라디미르 보에보드스키 폰 노이만 헤르만 바일 에드워드 위튼 후안 말다세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홈페이지 분류:1930년 설립 분류:수학 연구소 분류:물리학 연구소 분류:미국의 연구소 분류:프린스턴 대학교 |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며,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재로도 알려져 있다. 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이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 탐구》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과 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고 분석 철학자로서는 예외로 예술가들에게 전파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종종 천재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이 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 데 집중된 반면, 후기 사상은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데 중심이 놓여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주어진 언어-놀이 안에서 그 단어들이 사용될 때 가장 잘 이해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뛰어난 갑부였다. 1890년 촬영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에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어머니는 레오폴디네 비트겐슈타인이다. 루트비히는 8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헤르만 크리스티안과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대인이었으나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1850년대에 작센에서 빈으로 이주하였다. 할머니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요제프 요하임의 사촌이다.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제철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1880년대 후반 무렵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독점하는 제철 사업가이자 세계에서 뛰어난 부자가 되었다. 카를 비트겐슈타인의 자산은 부동산, 주식, 귀금속, 외화 형태로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북미 등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재산이 분산되어 있었기에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뒤에도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어머니인 레오폴디네 칼무스는 유대인 아버지와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노벨상을 받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이모이기도 하다. 이런 가족력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개신교와 가톨릭(천주교)에서 세례받았는데 다른 형제들은 침례교를 신봉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은 할머니의 신앙을 좇아 가톨릭(천주교)에서 세례받았다. 비트겐슈타인(오른쪽 아래), 형 파울과 누나들, 1890년대 후반 Klimt 055.jpg|섬네일|220px|왼쪽|비트겐슈타인의 누나 "그레틀", 1905년 혼인을 기념하여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작품 예술가와 지식인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음악 같은 예술을 사랑하였다. 제철 사업가로서뿐만 아니라 예술 애호자로서도 유명했던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귀스트 로댕,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였고 빈 분리파 전시관을 설립하려는 재정을 책임졌다. 비트겐슈타인 저택에 있는 음악실 가운데 한 곳 비트겐슈타인의 집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같은 예술가가 늘 초대되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비트겐슈타인보다 두 살 위의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요하네스 브람스의 주요한 작품 가운데 몇몇을 비트겐슈타인 집의 음악실에서 초연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후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파울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오른팔을 잃고 러시아에서 포로수용소에 갇혀서도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습하여 명성을 유지하였다. 비트겐슈타인도 절대음감이 있었고, 음악을 향한 열정은 비트겐슈타인의 생활과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 저작에서도 음악에 빗댄 예를 자주 사용하였고 클라리넷을 능숙하게 연주하여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하였다.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교향곡 전체를 외워 휘파람으로 불렀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우울증에 따른 자살 경향을 보였다. 장남인 한스는 네 살 때 작곡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나 1902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자살했다. 뒤를 이어 삼남 루돌프가 1904년 베를린에서 자살하였고 차남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군의 총 퇴각이 결정되자 자신이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하였다. 루트비히도 청년 시절 줄곧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러셀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은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1903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후 린츠에 있는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비트겐슈타인보다 6개월 생일이 빠른 아돌프 히틀러가 1년간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서로 알던 사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양측 모두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회고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리라 추정된다. 학교 생활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높은 톤의 어투에 약간 말더듬이가 있었고 우아한 옷을 입은 민감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심중으로만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동급생 거의 대부분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선생", "헤어 루트비히"()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비트겐슈타인은 1905년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한 영웅과 천재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선집 을 읽고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으나 볼츠만은 1906년 생을 자살로 마감하였다. 1906년 베를린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우스토 베란치오 같은 사람들이 남긴 르네상스 시기 작업에 흥미를 느꼈다. 1908년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항공과 관련한 논문으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공학 연구소의 연구생으로 등록되어 대기권 상층에 연을 띄우는 연구하였고 작은 제트 엔진에 사용될 프로펠러를 제작하였다. 맨체스터에서 연구 생활하는 동안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 원리》,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수의 근본 법칙》를 읽고 수학기초론에 흥미를 느꼈다. 1911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를 방문한 후부터 연락을 자주 교환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로 하였다. 버트런트 러셀1916년 촬영 비트겐슈타인은 1911년 8월부터 버트런드 러셀의 강의실에 출석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러셀과 웃음꽃을 피우면서 철학을 주제로 토론하는 사이가 되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알게 되어 수리 논리학의 원리를 대상으로 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러셀은 수학 기초론과 철학을 확장하고자 연구하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자주 거침없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천재다운 능력을 이용해 논리학상 난제를 해결하는 것에 매료되었고 영국 철학계에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 의해 자신이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로만 비추어지는 것을 못마땅해 하였다. 이 시기 동안,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고전음악과 여행이었다. 1912년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비트겐슈타인은 여로에 종종 동성 애인이었던 데이비드 핀센트와 동행하였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무어가 이끌던 비밀 모임인 케임브리지 어포슬스에 가입하였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가 죽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유산을 상속받아 유럽에서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상속받은 유산의 상당량을 오스트리아의 예술가와 작가들을 도우려고 기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원한 예술가 가운데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게오르크 트라클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트라클을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트라클이 자살로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볼츠만에 이어 트라클까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자살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자신이 일하기에 이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겐 대학연구자들이 심오한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자신들이 영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의 끝에 있는 숄덴 인근의 오지에서 독거에 들어갔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의 한 집 이층을 빌려 겨우내 지내면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가장 정열 있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흔히 "논고"라고 불리는 《논리 철학 논고》로 정리되었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전시된 1914년의 노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1년째 은둔 생활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크게 충격받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에 자원하였다. 입대 초기에는 함선에서 근무하였으나 얼마 후 포병대로 전근하였다. 1916년 3월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7군에 자원하여 브루실로프 공세를 방어하는 최전방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영국군과의 전투 후에 비트겐슈타인은 "용감한 행동과 침착하고 냉정한 영웅다운 활약"으로 말미암아 수훈했다. 1917년 1월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전선의 곡사포 연대로 전근되었고 여기서 다시 용감한 행동으로 은장무공훈장을 비롯해 훈장 여러 개를 받았다. 1918년 비트겐슈타인은 대위로 승진하였고 오늘날 트렌티노로 불리는 이탈리아 티롤 남부 전역에서 산악 포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18년 6월 오스트리아의 공세에서 전훈을 세운 비트겐슈타인은 최고 훈장인 금장무공훈장에 추천되었고 그 아래 단계인 검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1918년 11월 트렌토 근교에서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전쟁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의 눈으로 목격한 천박을 대상으로 한 경멸을 노트에 기록하였다. 종전 뒤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철학과 종교를 대상으로 한 단상을 적어나갔다. 노트에 적힌 단상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종교를 향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대상으로 해 불가지론다운 태도를 견지했는데 전쟁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레프 톨스토이의 《믿음 안의 찬송》을 갈리치아 루마니아 왕국에 있던 한 서점에서 구입한 후 어디나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므로 후일 비트겐슈타인의 지휘에 있던 부대원들은 “찬송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얻었으며,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저작에서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다. 1920년 가족 저택에서 촬영한 사진. 비트겐슈타인은 누나인 헬레네와 스웨덴 친구인 아르비드 시요그렌 사이에 앉아 있다. 윤리, 종교에 딸린 기호를 가지고 "논리"에 부합한 연구를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관심했던 논리 분석을 윤리 개념에 접합하면서 전쟁 기간에 발전하게 한 소위 "그림 이론"을 적용하였다. 여기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과 노르웨이에서 은둔 생활한 시기에 한 작업이 "논고"의 바탕이 되었다. 1918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다를 무렵 비트겐슈타인이 이탈리아 북부의 포병 연대에서 중위로 복무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거기에는 데이비드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의 삼촌 폴에게 찾아가 완성된 논고를 핀센트에게 헌정하였다. 논고는 출판사에 보내졌으나 출판되지 않았다. 1918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 중부의 카치노에 수감된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키네스 같은 영국 친구의 도움으로 책의 반입이 허락되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여러 원고가 영국으로 보내졌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고가 철학상 뛰어난 성과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1919년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프랭크 램지와 찰스 케이 오그던이 비트겐슈타인의 원고를 영역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이 영역물을 검토하였다. 책의 제목 《논리 철학 논고》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정치학 논고》를 기려 조지 에드워드 무어가 지은 것이다. 서문은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논리 철학 논고》는 중요한 철학 서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포로로서 수감된 가운데 버트런드 러셀의 서문을 받아 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기본 사항을 러셀이 오해한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작업 출판을 대상으로 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출판사는 서문을 쓴 러셀만을 부각하게 할 뿐이었다. 논고는 1921년 빌헬름 오스트발트가 운영하던 독일의 출판사인 《자연철학 분석()》에서 독일어로서 마침내 출간되었다. 러셀의 서문과 램지와 오그던이 영역한 판본은 1922년에 출간되었다. 세계의 모든 현대다운 시각의 바탕이 되는 착각인 소위 자연법칙은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한 설명이라서 사람들은 자연법칙이 고대의 신이나 운명처럼 거스를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즉시 멈춰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논고, 6.371–6.372 1920년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끔찍한 전투를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견고해진 비트겐슈타인의 지성과 감성은 "논고"로 집약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작업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답을 구했다고 생각했기에 철학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형제들에게 나눠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하스바흐, 오테르탈, 트라텐바흐와 같은 곳의 산골 초등학교를 돌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보수적인 농촌 학부모들 및 동료 교사들과 불화를 일으켜 교사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논고를 번역한 프랭크 램지가 1923년 가을 비트겐슈타인의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좁다란 텅 빈 방에 침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작은 테이블과 난로가 고작이었다. 프랭크 램지는 저녁 식사로 질긴 빵 하나와 버터와 코코아 한 잔을 건네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침 여덟 시에서 정오나 오후 한 시까지 수업하였고 오후 시간은 자유롭게 보냈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직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이롭게 하려고 42쪽으로 된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을 만들었다. 《어린이를 위한 사전》()은 《논고》를 제외하면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유일한 책이다. 이 사전은 1926년 빈에서 출판되었고 횔더 피흘러 템프스키의 간단한 서문이 들어 있다. 이 사전의 초판은 2005년 2월 경매에서 75,000 £에 판매되었다. 교직 생활하면서 체벌 문제에 휩싸인 비트겐슈타인은 1926년 4월 11살 소년을 심하게 때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였고 결국 교직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교직을 그만 둔 후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잠시 머문 후 휘텔도르프 자비의 형제 수도회에서 정원사로서 일하였다. haus.jpg|섬네일|220px|왼쪽|비트겐슈타인이 설계한 스턴버러 하우스 나는 수직으로 선 건물에 끌리지 않지만, …… 이것은 건축의 모든 가능성을 대상으로 한 기반을 내 스스로 보이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1926년 비트겐슈타인은 누나인 그레틀을 위해 새 집을 구상하였다. 건축은 전쟁 중에 친구가 된 파울 엥겔만이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과 파울 엥겔만은 참호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파울 엥겔만은 새 집이 아돌프 루스 이후 현대 건축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랐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을 짓는 일에 온통 매달렸고 창틀, 문, 난방기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다. 문 손잡이와 난방기는 직접 설계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요구로 모든 창문에 150Kg에 이르는 금속 차양막을 달았다. 《비트겐슈타인의 건축》을 쓴 버나드 라이트너는 이 건축물이 건축사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것이라 평가하면서 "이 집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로 매우 정교하게 지어졌다. 모든 철제는 바닥에 숨겨져 있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집이 거의 완공되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정의 높이를 30mm 더 높이라고 하였고, 그가 원한대로 천정을 높이고서야 마침내 완공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누나 헤르미네는 이 집을 두고 "나는 언제나 내가 그 집 안에서 살아도 되는 걸까 자문하곤 하였다. 그 집은 신의 거처처럼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집을 좋게 말하면 너무 소박하게 지었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이 건축의 기본이 되는 생활이나 건강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고 여겼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집은 러시아 군인들의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1950년대 그레틀의 아들이 개발업자에게 집을 팔아 없어질 위기에 놓였으나 빈 랜드마크 협회가 1971년 이 집을 구매해 보존한다. 이 집은 현재 불가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건축 작업을 마치고 모리츠 슐리크와 만났다. 슐리크는 빈 학파를 이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슐리크 자신은 빈 학파의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한 적이 없으나 프리드리히 바이스만과 같은 빈 학파의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에 기초한 주제를 화제로 하여 자주 대화했다. 슐리크와 빈 학파의 회원들이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자주 좌절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에 딸린 생활과 신비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논리실증주의는 이러한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비하한다고 간주했다. 한 모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를 돌아가면서 낭송하는 사이 자신의 책 언급을 거부하여 좌중을 짜증 나게 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철학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모임이 이어지는 동안 프랭크 램지가 《논고》와 관련해 토론하려고 빈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토론을 통해 프랭크 램지가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프랭크 램지와 다른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복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한 기차역에는 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이런 환대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위를 받지 못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집필하여 이미 철학 박사의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기록하였고 무어와 함께 박사학위 심사를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심사관이 된 두 오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얻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논고를) 절대로 이해 못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에 부임한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의 집에서 만나게 된 마르게리테 레스핑거와 혼인을 고려하였으나 1931년 파혼한 후 독신으로 지냈다.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 성향이 있었고 빈의 프라테르 공원에서 젊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윌리엄 워렌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쓰면서 1973년 발견된 비트겐슈타인의 노트에는 프라테르에서의 만남을 "친구의 격려"와 같이 표기하였다고 밝혔다. 뒷날 바틀리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의심받았으나 비트겐슈타인이 데이비드 핀센트, 프랜시스 스키너, 벤 리처드와 같은 사람들과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풍문은 거의 정설이 되었다. 음악을 거론하지 않고는 나를 표현할 수 없다. 어쨌거나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 비트겐슈타인, 1949 일각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치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자신이 "심장에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고 많은 방면에서 노동자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도덕적 성찰이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방법을 혐오하였으며, 음악취향은 보수적이었고, 핵무기의 사용에 반대하였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를 존경한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이론을 복사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오토 바이닝거처럼 비트겐슈타인도 민족성과 성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었다. 1930년대 초반 기록된 MS 154와 같은 노트에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자책하는 여러 문구가 적혀 있다. 후일 비트겐슈타인은 "내 생각은 100% 헤브라이즘답다"라고 스스로 비판하였다. 1934년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인 케인스가 쓴 《러시아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 서술된 소비에트 생활에 매료되어 스키너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이민을 고려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어를 배웠고 1935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안전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여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당국에 교사 자리가 있는지 문의하였으나 이에 대답은 3주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1936년부터 37년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스키너와 함께 노르웨이에 다시 머물렀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에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이것을 철학적 “조사”라고 불렀다. 1936년과 37년 사이의 겨울에 가까운 친구에게 보내는 “고백”을 썼다. 이 글들은 대부분 선의의 거짓말과 같은 것을 밝히는 소소한 내용이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자 하였다. 1938년 비트겐슈타인은 모리스 드루어리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를 여행하였다. 드루어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정신 의학을 소개한 제자이자 의사였다. 드루어리를 만난 자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마침 드루어리를 찾아온 아일랜드 대통령 이몬 데 발레라를 만났다. 자신도 수학 교사 출신이었던 발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이 수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독일 국적을 갖게 되었고 나치의 인종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고 케인스와 같은 친구들의 힘을 빌어 영국이나 아일랜드 국적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에는 곧바로 오스트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왼손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던 파울은 공연과 교습을 금지당하자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탈출하였고, 여자 형제들은 위조 여권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재판을 받았다. 유일한 희망은 나치 독일의 혼혈법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이 유대인 조상이 있는 혼혈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조부인 헤르만이 독일 귀족 자인-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사생아였다는 증언을 모아 제출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해외 자산에 눈독을 들인 나치 당국과 재산의 상당 부분을 헌납하는 힘겨운 협상 끝에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은 혼혈로 인정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긴박한 협상 과정은 알렉산더 워의 《비트겐슈타인 가문》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재산을 지키려는 파울과 목숨을 지키려는 누이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이후로 파울은 죽을 때까지 형제자매들과 다시는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폴란드 침공 하루 전날 비트겐슈타인 가문을 혼혈로 승인하는 문서에 직접 사인을 한 아돌프 히틀러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혼혈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2,100건의 신청 가운데 인정된 건 수는 12건에 불과할 만큼 이러한 조치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1939년 무어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직을 사임하자 비트겐슈타인이 후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교수직을 갖게 된 얼마 후 영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39년 7월 비트겐슈타인은 빈을 방문하여 그레틀과 다른 누나들을 만났고, 하루는 라이히스방크의 직원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들렀다. 이후, 그는 가족이 처한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던 형 파울을 설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1939년 8월 가족에 대한 해방 요청이 접수되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1주일 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승인으로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재산 금 1.7톤이 나치에게 인도되었다. 이는 2009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억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해에 모스크바를 두 번째로 방문하여 철학자인 소피야 야노프스카야를 만났다.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비트겐슈타인은 영화관 제일 앞자리에서 영화를 보는가 하면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편안히 서방세계를 관망하였다. 노먼 맬콤은 비트겐슈타인이 강의를 마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다고 회고하였다.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수학기초론에 대한 자신의 기존 견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에서 논리는 단단한 기호였으며, 그는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개론》에 대해서도 이러한 사고를 기초로 비평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에 이르러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글과 강의를 통해서 과거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였다. 몽크의 전기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도 철학 강의나 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하였다고 한다. 1941년 9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형제였던 존 라일 교수에게 요청하여 런던에 있는 가이스 병원에서 봉사하겠노라고 요청하였다. 존 라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학 교수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가이스 병원에서 약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병원의 직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간혹 비트겐슈타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부탁하였고, 자신을 비트겐슈타인 교수님이라 부르지 말고 여느 의사들과 같이 박사님이라 불러 주기를 바랐다.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몹시 외로웠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란시스 스키너의 연구 수업에 참여한 십대였던 케이스 커크와 우정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관계는 스키너가 죽은 1941년까지 지속되었다. 스키너는 비트겐슈타인과 커크의 관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문 연구에 비트겐슈타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최소화된 점을 고마워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커크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일기에 종종 커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적곤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편지를 쓸 무렵 커크는 혼인하였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죽음은 삶에서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들어선다면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이다. 제한 없이 펼쳐진 이 길에서 우리의 삶에 끝은 없다. — 비트겐슈타인, 논고, 6.4311 케임브리지 인근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묘 1947년 비트겐슈타인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교수직은 친구인 게오르크 헨리크 폰 브리흐트가 물려받았다. 1947년에서 48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더블린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로즈 호텔에서 머물렀다. 1949년 비트겐슈타인의 학생이었던 노먼 맬콤이 더블린으로 찾아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병들어 있었다. 맬콤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하여 비트겐슈타인을 미국으로 데려갔으나 그의 증세는 악화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맬콤에게 "난 미국에서 죽고 싶지 않아. 난 유럽인이라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라고 요청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런던으로 돌아왔으며 암이 골수에까지 옮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1950년 2월 11일 빈을 방문하여 죽음이 임박한 누나 헤르미네를 만났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을 간신히 알아보는 처지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와 우리 모두에게 크나 큰 손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심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누나의 임종을 지켜본 뒤 비트겐슈타인은 1950년 4월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를 한 번 더 가보고 싶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51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였다. 그는 노먼 맬콤에게 "내 마음은 이미 죽었어. 더이상은 고통일 뿐이지. 내 알기로 삶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그 다음엔 정신적인 삶만이 남게 되는 거야"라고 말하였다. 62번째 생일이던 1951년 4월 26일 의사가 생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좋군요,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4월 29일 사망하였고 로마 가톨릭 식 장례의식을 거쳐 묻혔다. 《논리-철학 논고》의 초판 표지 《논리-철학 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이다. 초판의 서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본문을 썼으며 일정량이 모이면 러셀과 무어에게 보냈고 1918년 완성하였다. 초판의 출간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2년에 이루어졌다. 흔히 《논고》로 줄여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기존의 철학에서 적용하는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논고》를 집필하던 시점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기존의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 이론 (picture theory)을 제시한다. 그림 이론을 구상하게 된 까닭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재판에서 모형들이 사용된 것을 본 것 때문이었다. 그림 이론이란 언어는 세계를, 명제는 사실을, 이름은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실제 대응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일기장에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연습 삼아 조립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그림 이론은 기존의 철학, 특히 형이상학이나 도덕학에서 신이나 자아, 도덕과 같은 것들은 실제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없어서 뜻(Sinn)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같은 것은 실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라고 끝맺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 명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증명할 수 없어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구태여 증명하려 하여 무가치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함께 재직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자신의 그림 이론에 대해 토론을 하던 가운데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론에 스라파가 반론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목부분을 밀어 올렸다. 스라파의 행동은 이탈리아에서 의문이나 조소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제스처였다.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주장했던 언어의 논리학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언어의 의미는 결코 한 가지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바탕으로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였으나 출판하지는 않았다. 《철학적 탐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후에 남겨진 초고를 합하여 출판되었다. 《철학적 탐구》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된다. 초기의 그림 이론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포함한 기존에 있었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있기 전에 생활 양식이 있다. 또한, 언어는 그 뜻 이 아니라 사용 에 본질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쓰임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것을 가족 유사성 (family resemblances) 이라고 불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놀이에 비유했는데, 줄넘기 놀이, 술래잡기, 가위바위보 등의 놀이 에서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대니얼 솔로브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접근을 현대형 프라이버시 개념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이상적인 상태의 언어를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러한 철학은 옥스퍼드학파라고도 불리는 일상언어학파가 잇게 된다. 1889-1921 《논리 철학 논고》(, Annalen der Naturphilosophie, 14 ,1921년), 《쪽지》 1922-1933 〈철학에 대한 견해〉(), 러쉬 리즈(Rush Rhees) 편집,1964년) 1933-1935 《청색 책, 갈색 책》(, 1958년), 케임브리지 재학시절인 1933년 - 1935년 사이에 영어로 쓰인 노트를 사후에 정리 1936-1949 《철학적 탐구》(, 1953년) 1949-1951 〈확실성에 관하여〉() - 행동이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단상들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 G.H. von Wright, R. Rhees, and G.E.M. Anscombe 등이 사후에 편집, 1956년) - 1937년 - 1944년 사이의 논리와 수학에 대한 철학 작업 모음 〈심리학의 철학에 대한 견해〉(, G.E.M. Anscombe and G.H. von Wright 등이 사후에 편집, 1980년) 〈색상에 대한 견해〉(, G.E.M. Anscombe 이 사후에 편집,1977년) 〈문화와 가치〉(, 음악, 종교 등 다양한 문화적 사안에 대한 개인적 견해 모음집 《비트겐슈타인 선집(7권)》, 이영철 역, 책세상, 2006년, * 제1권 논리-철학 논고 / 제2권 소품집 / 제3권 청색 책ㆍ갈색 책 / 제4권 철학적 탐구 / 제5권 쪽지 / 제6권 확실성에 관하여 / 제7권 문화와 가치 《철학적 탐구》, 이승종 옮김, 아카넷, 2016년, 데이비드 에드먼즈, 김태환 역, 비트겐슈타인은 왜, 웅진닷컴, 2001년, 남경희, 비트겐슈타인과 현대 철학의 언어적 전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년, 윤용아,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 VS 의미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숨비소리, 2007년, 레이 몽크, 김병화 역,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레이 몽크, 남기창 역, 비트겐슈타인 평전 천재의 의무, 필로소픽, 2012년, 윌리엄 워런 바틀리 3세, 이윤 역, 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필로소픽, 2014년, 쇼펜하우어 프레게 버트런드 러셀 칼 포퍼 브람스 슈트라우스 구스타브 말러 케임브리지 비트겐슈타인 자료 연구소 오스트리아 비트겐슈타인 학회 분류:1889년 태어남 분류:1951년 죽음 분류: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분류:오스트리아의 논리학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형이상학자 분류:양성애자 작가 분류: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빈 출신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동문 분류:베를린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유대계 오스트리아인 분류:슬로베니아계 오스트리아인 분류:오스트리아계 영국인 분류:유대계 영국인 분류:버트런드 러셀 분류:일상 언어 철학 분류: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영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슬로베니아계 영국인 분류:영국에 거주한 오스트리아인 분류:기분장애 환자 분류:독일계 영국인 분류:체코계 영국인 분류:체코계 오스트리아인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 |
Michel Corneille the Elder, "그리스도의 부활" jonah.jpg|섬네일|왼쪽|미켈란젤로,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이탈리아, 로마 프레스코 ()는 a fresco (방금 회(灰)를 칠한 위에)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낱말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를 일컫는다. 석회·석고 등으로 만든 석회벽의 건조가 채 되지 않은 덜 마른 벽면에 수용성 그림물감으로 채화(彩畵)하는 기법이다. 프레스코란 벽이 깨끗하게 도식(塗飾)되어 있어서 신선하다는 뜻으로, 영어의 프레시(fresh)도 그에 유래한다. 그림물감의 종류는 토질(土質)·광물질의 것으로 색수는 적다. 그림물감은 벽에 흡수되어, 벽이 마를 때 표면에 고착하므로 빛깔은 변색되지 않고 내구력이 있다. 다만 말라감에 따라 광택을 잃고 발색이 둔화되는데 거기에 프레스코 특유의 차분한 색조(色調)를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벽면이나 천장화에 많이 쓰인다. 15세기-16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발달하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나 벽화, 라파엘로의 바티칸궁의 벽화 등이 프레스코 기법에 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프레스코는 인류 회화사에서 아마 가장 오래된 그림의 기술 혹은 형태로 여겨진다. 기원전 약 3000년에 미노스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의 벽화는 프레스코의 기술로 그려졌으며, 기원전 5세기 이래 중국, 한국, 일본에서 그려진 불교벽화의 대부분은 프레스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삼한시대 고분벽화 역시 프레스코의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분류:미술 분류:회화 기법 |
유재하 (柳在夏,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멀티플레이어다. 1962년 태어난 유재하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재학하면서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발탁되었다. 대학 졸업 이후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 1986년 김현식 3집의 〈가리워진 길〉이란 곡을 작곡하여 김현식의 초기 명반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다. 이듬해 1987년에는 자신의 1집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고, 역시 같은 해 11월 1일 25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도 유재하의 음악은 당대는 물론 유재하가요제가 말해주듯 지금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았다. 현재는 그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 장학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재정적 문제로 열리지 못했던 2005년을 제외하고 1989년부터 매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에서 사업가였던 부친 류일청과 모친 황영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유복했던 집안덕택에 그는 소위 빽판과 전축으로 음악적 향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전기 기타로 자신의 싹트는 창작열을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 친형은 "내 바로 위에 형과 14살 차이가 나 둘이 친했다"며 "동생은 순진하고 어수룩한 구석이 있어서 몸이 아픈 내게도 잘 의지하는 귀염둥이였다. 사랑스럽고 늘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 1969년 은석초등학교를 입학한 그는 이때 아코디언과 첼로를 연주했고, 5학년 때부터는 기타를 붙잡고 노래를 했다. 또래 친구들은 딱지치기와 담을 타고 놀 때 유재하는 어니언스(이수영, 임창제)의 노래를 부르며 혼자 그렇게 놀았다. 특히 영화 배우 이소룡을 좋아했던 유재하는 헤어스타일과 패션까지 이소룡을 따라 했고 매일 이소룡 흉내를 내며 다녔다고 한다. 1975년 삼선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친형은 당시의 기타 솜씨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 치더라"고 회상했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쌓아가던 그는 프레시(Fresh)라는 그룹을 구상하기도 하였고, 끝내는 클래식으로 진로를 잡게 된다. 음대를 가기로 작정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대일고 재학 시절에도 클래식보다는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유재하는 당시 레슨을 해주던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어도 숙제는 안 하고 혼자 곡 쓰고 노래만 하곤 했다. 1981년 고교 졸업 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하였다. 진학 후 정원영, 전태관, 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등과 교류하며 매일 모여 함께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 편곡 그리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그는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대학 재학 시절 4학년 때인 1982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를 만난 송홍섭은 "당시 대학생이었던 유재하는 내게는 굉장히 얌전한 학생이었고 성품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팝 음악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재하는 앞으로 팝 음악에 있어서 자기 깃발을 확실히 꽂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이 2개월의 짧은 여정은 학교에서 대중음반 분야의 아르바이트는 허가할 수 없다는 사유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86년에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서 객원 멤버로 활동하였다. 대학 선배 한봉근은 "콘서트때나 녹음 때 한두번 세션으로 도와줬을 뿐이지 정식 멤버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 그룹에서는 6개월쯤 활동하였으며 대구, 부산 등지에서 신촌 블루스 팀과 함께 지방 공연을 갖기도 했다. 김현식에게는 자신의 1집에 수록될 전곡을 주었다. 하지만 밴드 멤버와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고, 후배 뮤지션을 편애하지 않고 챙겨주려 곡 하나만 가져간 김현식의 뜻을 오해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에 6개월의 밴드 활동을 접었다. 이후에는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 위해 언더 음악의 산실 동아기획을 찾아가 한양대 음대 선배로 기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던 포크 가수 이원재와 함께 데모 테이프를 제출, 김영 사장은 고민 끝에 상업적 성공이 불안했던 유재하의 음악을 탈락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영은 이를 부인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잘못된 소문이다. 이원재는 이원재대로 따로 음반을 냈다. 원래 유재하는 김현식의 3집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세션 멤버로 내가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이 유복한 탓에 김현식 3집 녹음과는 별도로 자비를 털어 자신의 독집을 녹음한 것이다. ... 당연히 앨범 제작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조원익이라는 베이스 치는 친구가 음반 제작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며 유재하의 앨범을 넘겨달라 했다. 유재하도 좀 도와주면 어떻겠냐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유재하는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고, 1987년 8월 자신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 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한다. 음반이 나온 후 조원익은 유재하로부터 매니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매니저로서의 자질이 없었다고 여겼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여 얼마 동안은 함께 일을 보러 다녔다. 이렇게 잠깐 매니저를 맡은 조원익은 그의 사후 처리 문제까지 맡았으며 결국에는 추모공연까지 기획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은 당초 음정이 불안하다 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었으며, 발매 초기에도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터득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 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음악 관계자들조차도 노래가 이상하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MBC 방송 심의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시작되는데 PD들은 이를 듣고 그를 박자도 못맞추는 가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KBS의 《젊음의 행진》에서 한 번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게 유재하의 유일한 TV 출연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앨범의 수록곡 〈지난날〉은 예선에서 탈락, 그를 한층 더 낙담으로 몰아갔다. 크게 상심한 유재하는 국내 음악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조 섞인 상실감과 자괴감을 드러냈다. "제 노래 들어보셨어요? 우습죠?" 이 무명의 시간은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부담 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불운의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은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 유재하의 음반을 발매한 서울음반의 이재석은 유재하를 순한 바람 이라고 회고하였다. "레코드가 나온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자신의 작품에 대해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그는 벌써 다음 앨범을 계획하며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더군요." 1987년 10월 31일 오후 5시 30분경 어둑해질 즈음이었다.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 평소에도 다정다감했던 동생은 수술을 받고서 칩거하던 형의 볼에 뽀뽀하고 문밖을 나섰다. 이날 동창회에서 1집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던 그는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은 친구 성낙헌의 차에 올랐다. 1987년 11월 1일 새벽 3시 27분경, 유재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부근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한도콜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로 인해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주검은 경기도 용인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에 묻혔다. 유재하 무덤 앞에는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의 악보 조각상이 있는데, 그 악보 중 2개 음표가 틀렸다. 친형은 그의 미발표곡은 남아있지 않으며, "동생이 대략 5년간 11곡을 썼다"고 밝혔다. 사망 후 일반인들과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 유재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과 동시에 유재하의 음악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3년 후 같은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연예계에는 "먼저 간 유재하가 술친구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는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여기에 더해 유독 11월에 연예계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면서 11월 괴담설 로까지 부풀려졌다. 유재하의 가족은 운전자 성낙헌의 아버지 선순용과 한도콜택시 등을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 2004년 7월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 영화 제작사는 인터넷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은 연예인 이라는 설문 조사를 벌였고 유재하는 5위에 올랐다. 유재하의 영향을 받은 유희열은 유재하 가요제를 계속하기 위해 기금 마련 공연을 열었다. 사후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은 아들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음반수익과 성금을 기탁하여 유재하 음악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장학회 주관으로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1회 대회 수상자인 조규찬을 필두로 유희열, 고찬용, 김연우, 나원주, 정지찬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발라드의 황제로 불린 신승훈은 자신의 데뷔 20주년 앨범을 유재하의 기일인 11월 1일 발매했다.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은 한국 발라드가 음악적으로 10년은 후퇴했음을 의미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유희열은 "유재하씨가 음대 작곡과 출신이란 걸 알고는 음대에 진학했어요. 거기 가면 그 정도 실력이 될까 하고요. 대학에 진학한 뒤 유재하 가요제에도 출전했죠."라고 고백하는 등 유재하는 후배 창작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작곡가 김형석이 음악에 발을 디딘 것도 그의 노래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후배 음악가들을 두고 사람들은 유재하사단이라고 일컫는다. 유재하 음악의 가치는 영화와 각종 TV 프로그램, 언론 기사에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다. 1985년 조용필을 필두로 이문세, 한영애,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FT아일랜드, 박진영, DJ DOC, 조규찬, 왁스, 이기찬, 정수라, 나얼, 백지영, 김조한, 박정현 등 수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에픽하이는 2집 앨범에서 〈11월 1일〉이란 곡으로 김현식과 유재하를 추모했다. 1996년 저명한 클래식 연주자 리처드 스톨츠만은 자신의 음반 《Spirits》에 〈사랑하기 때문에〉를 수록했다. 한국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부제로 찍혀 있다. 1997년에는 후배 음악가들이 헌정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를 발표하였다. 앨범 발표 당시 크게 히트하지 않았던 〈우울한 편지〉는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범행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로 영화에 삽입되어 다시 히트하기도 하였다. 유재하의 유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7년 1월 4일에는 그의 1집 제목을 딴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가 개봉했다. 차태현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 영화는 느낌이 괜찮았는데 저는 좀 걸렸"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 건 유재하 노래로 채워진다는 게 좋아서였다"고 밝혔다. 주지홍 감독은 "나는 시나리오 각색에 참여하다 연출까지 하게 됐다. 평소 유재하의 노래를 좋아한다. 유재하 노래의 가사를 영화를 통해 소개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유재하의 노래를 통해, 우리 영화를 같은 느낌으로 끌어가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생전에 절친했던 유재하의 친구로는 김광민, 전태관, 김종진, 장기호, 박성식, 석훈 등이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은 유치원 시절부터 함께 놀던 사이였다. 그는 "유치원 때부터 같이 놀았던 친구 재하는 어릴 적 부터 노래를 하고 싶어했다. ... 나는 딱지치기하고 담타고 놀 때 재하는 혼자 그렇게 놀았다. 음악뿐 아니어도 당시 또래들과는 뭔가 달랐다. ... 잠시 서로 연이 끊어지고 대학교 때 원영이형(정원영)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재하가 건반 연주자라며 나타난 것이다. 무척 반가웠고 다시 우리는 음악하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인 서도호는 어린 시절 그와 친구 사이였다. 전태관은 그를 두고 "유별"나다고 표현하였으며 "타이거마스크를 그려달라고 하면 너무나 완벽하게 똑같이 그려주었다."고 회고했다. 나중에 서도호는 유재하 솔로 앨범의 자켓 그림을 그려줬다. 유재하는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 가입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당시 촉망받는 젊은 연주자들인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박성식, 그리고 유재하로 구성됐었다. 유재하는 정원영을 통해 김종진, 장기호 등을 만나게 됐다. 김현식은 건반,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유재하를 팀에 꼭 필요한 존재라며 만족해했다고 한다. 김현식은 유재하를 매우 아꼈다.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다 같이 술을 마실 때 다른 이들이 다 나가떨어져도 둘은 밤새 마셨다고 한다. 한영애는 2집 작업에 들어가며 여기저기 음악 동료들에게 노래를 받고 있던 중에 유재하한테도 한 곡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는 "누나! 누나가 부를 거면 나는 언제든지 콜이지!"라며 흔쾌히 대답해줬고, 이후 직접 피아노를 치며 부른, 2집에 수록된 〈비애〉의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왔다. 그는 그녀에게 "누나! 이 노래 누나가 꼭 히트 시켜줘야해! 아니면 내가 다시 불러서 꼭 히트시킬 거야!"라고 말했지만, 이 노래가 실린 앨범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발매되었다. 유재하는 자신이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에도 기쁜 마음에 전화를 걸어 "누나! 나 드디어 TV에 나가! 난 대중음악가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 김광민은 2014년 MBC 《라디오스타》에서 "미국에 있을 때 유재하 씨의 사고 소식을 듣고 되게 많이 울었다"며 "제가 재하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외국에 있으니까 전화밖에 방법이 없었다. 지인들에게 화환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며 답답한 마음에 피아노 앞에 앉았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김광민은 동생 유재하를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냐는 질문에 " 그 동안 정말 보고 싶었다. 잘 있었니. 네가 있었으면 좋은 음악도 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튼 너무나 반갑다 고 말 할 것 같다. 한동안 부둥켜안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진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김광민은 1987년 11월 2일 유재하를 위해 〈지구에서 온 편지〉를 썼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가 당시 사랑했던 한 여인과의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했다. 유재하의 생전 절친이었던 피아니스트 김광민은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서 "유재하의 노래에 등장하는 여인은 단 한명이다. 대단하지 않은가"라고 말문을 열어 그녀가 "유재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으며, "초등학교 졸업 후 못 만나다가 커서 재회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유재하의 1집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한양대 작곡과에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유재하는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첼로 등의 악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유재하와 함께 활약하고 그의 추모 공연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한 박성식은 유재하의 연주를 이렇게 평가했다. "연주자로서의 유재하는 자신만의 독득한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감정이 잘 살아 있어 듣는 사람에게 크게 어필한다는 게 특징이었죠. 임진모는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마스터했으며 작사 작곡 솜씨도 뛰어났다. 악기에 능통한 덕분이었지만 편곡까지 도맡았다는 점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음악웹진 이즘 필자 조이슬은 "그가 드럼, 기타, 건반을 모두 소화해낸 멀티 플레이어라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바로, 악기 하나하나의 음색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곡 전체를 조율하고, 곡의 질감을 결정하는 비범한 편곡 능력이었다. 우리가 지금에서도 고급가요 라고 부르는 정통 발라드의 얼개를 사실상 이 때 형성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있는 신승훈은 "작사, 작곡, 편곡이 모두 유재하로 표기되어있는 것을 보고 일대 충격을 받았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김수철은 당시 유재하의 앨범을 듣고 "노랫말이 너무 빼어났다"는 느낌이 앞섰다고 술회한다. 작곡과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에 한 번씩 직접 작곡한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대학 2학년 쯤 되었을 때의 유재하가 작곡한 악보를 본 교수는 그것을 집어던지며 자네가 아무리 바빠도 모차르트를 배껴오면 어떡하는가 라고 그를 질책했다. 그것은 유재하의 작곡이 화성이나 악절진행에서 모차르트와 비슷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훌륭한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삼선 중학교 시절 그는 브레드, 퀸, 비틀즈, 피터 프램프톤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김종진은 그가 "라이오넬 리치, 필 콜린스, 엘튼 존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종종 다른 가수들에게 줬던 본인의 노래들도 부르며 놀곤 했다."고 말했다. 유재하는 애주가였다. 바로 위의 친형은 "선친이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집안 내력인지 제가 동생에게 술을 366일 먹느냐 고 잔소리를 하곤 했죠. 재하는 싸고 독한 40도짜리 쥬니버 드라이진을 좋아했어요. 전 한잔도 못 하겠던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1시간 반이면 700ml짜리 한 병을 다 비웠죠. 그것도 스트레이트 로요."라고 회고하였다. 김광민 또한 "유재하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술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더 마실 정도였다"고 말했다. 장기호는 "아버님이 탄광을 하신 것으로 안다. 재하의 외모는 중산층 아래쪽 이미지인데 집을 가보면 굉장히 부유했다"며 "약간 빈티지다. 재하 집에 있던 모든 집기는 외제품이였다."라고 당시 부유했던 유재하의 집안을 회상했다. 동아기획의 대표 김영은 유재하가 "요즘말로 하면 개그맨"이었으며 "또 미남은 아니었지만 바람둥이였다."고 말했다. 김종진은 "재하는 무대 위에서 꺅 오빠 소리 듣는 걸 좋아했던 친구였다"고 기억했다. 1987년 8월 - 유재하 1집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유재하 음악장학회 분류:1962년 태어남 분류:1987년 죽음 분류:조용필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 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 분류: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 분류: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 분류:은석초등학교 (서울) 동문 분류:삼선중학교 동문 분류:대일고등학교 동문 분류:한양대학교 동문 분류:안동시 출신 분류: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 분류:풍산 류씨 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김기덕 (金基德, 1960년 12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제작자, 배우이다. 김기덕은 1960년 12월 20일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1968년에 경기도 고양으로 이주하였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기술을 배우라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전수 학교와 전자 공장을 다니며 20세까지 성장한 김기덕은 해병대에 부사관으로 임관하여 5년 간 복무했다. 제대한 후 1986년부터 화가로도 활동하였고 남산의 장애인 보호 시설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동시에 신학교를 다니며 30세까지 서울에서 지냈다. 평소 그림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던 김기덕은 백남준과 관련된 기사가 동기가 되어 31세가 되던 1990년에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 프랑스와 유럽 각지를 다니며 스스로 회화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들른 영화관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 《양들의 침묵》 (1990), 《퐁네프의 연인들》 등을 보고 영화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1992년에 귀국한 뒤 《화가와 사형수》로 1993년 영상작가교육원 창작 대상, 《무단 횡단》으로 1995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대상을 받는 등 각본가로 활동하다가 1996년작인 《악어》를 통해 자신이 직접 감독하여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잔인하고 어두운 영상과 내용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2004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사마리아》로,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빈 집》으로 연이어 감독상을 수상했다. 2018년 미투 운동으로 인해 그가 여성 배우와 직원들에게 강간, 성추행, 성폭력과 폭행, 폭언 등을 일삼았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1996년 - 《악어》 (미술, 연출, 각본) 1997년 - 《야생동물 보호구역》 (연출, 각본) 1998년 - 《파란 대문》 (연출, 각본) 1999년 - 《섬》 (미술, 연출, 각본) 2000년 - 《실제상황》 (연출. 각본) 2001년 - 《수취인불명》 (미술, 연출, 각본) 2002년 - 《나쁜 남자》 (연출, 각본) 2002년 - 《해안선》 (연출) 2003년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주연, 편집, 연출, 각본) 2004년 - 《사마리아》 (편집, 제작, 연출, 각본) 2004년 - 《빈 집》 (편집, 제작, 연출, 각본) 2005년 - 《활》 (편집, 제작, 연출, 각본) 2006년 - 《시간》 (편집, 제작, 연출, 각본) 2007년 - 《숨》 (조연, 연출, 각본, 제작투자, 제작) 2007년 - 《아름답다》 (제작, 원작) 2008년 - 《비몽》 (각본, 편집, 제작, 연출) 2008년 - 《영화는 영화다》 (제작투자, 제작, 각본) 2011년 - 《풍산개》 (투자, 제작, 각본) 2011년 - 《아리랑》 (주연, 제작, 연출, 각본) 2011년 - 《아멘》 (제작, 연출, 각본) 2012년 - 《피에타》 (편집, 제작투자, 연출, 각본) 2012년 - 《배우는 배우다》 (제작, 각본) 2013년 - 《뫼비우스》 (제작, 연출, 각본) 2014년 - 《일대일》 (제작, 연출, 각본, 촬영, 편집) 2015년 - 《메이드 인 차이나》 (제작, 각본) 2016년 - 《그물》 (연출, 각본) 2017년 - 《포크레인》 (제작, 각본) 2018년 - 《인간의 시간》 (연출) 배우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 대문 실제상황 섬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 해안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 집 활 시간 숨 비몽 권혁호 김구택 김영민 김정영 박정기 박지아 방은진 서원 서지석 소재익 손민석 신택기 양승병 이인옥 이종길 이각주 장동직 장항선 조석현 조재현(강간 공범) 지대한 최민 하정우 한여름 2018년 3월 6일, MBC PD수첩 "거장의 민낯"을 통해 여성 배우 세 명을 성추행 및 성폭행한 의혹이 불거졌다. 상기 프로그램이 방송된 후의 중앙일보의 후속 보도는 아래와 같다. 6일 방송된 MBC PD수첩 에는 김기덕 감독과 그 주변 인물들의 성폭력 실태를 고발했다. 피해 배우, 현장 영화 스태프, 전 소속사 직원 등 다양한 영화계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서였다. 이날 방송에서 배우 A씨는 "김기덕 감독은 굉장히 모욕적인 말을 한다"며 " XX는 권력이다, XX들이 XX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는 이야기를 한다"고 증언했다. 이어 김 감독과 배우 조재현, 여성 영화관계자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김 감독이 자기 방으로 자신을 이끌었고, 조재현이 자신에게 함께 올라가줘라 고 권했다고 주장했다. 또 김 감독이 "(여성 영화관계자와) 셋이 같이 자자고 요구했다. 너무 끔찍했다. 심장이 너무 뛰었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고 울먹였다. 이 같은 A씨의 주장에 대해 김기덕 감독은 "술자리가 늦게 끝났고, A씨가 나와 여자 관계자를 한꺼번에 방에 넣고 갔다. 무슨 일인지 몰라 관계자와 이야기를 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A씨는 "김기덕 감독은 해병대 출신이다. 말이 되냐"며 기막혀했다. 이어 김 감독이 자신과 아는 언니가 함께 있을 때 찾아와 바지를 벗은 적이 있다는 말도 이어졌다. 영화 관계자들은 "김기덕 감독은 학교에서 강의 중에도 남학생들에게 내 것이 크냐, 네 것이 크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여배우들, 여자 스태프들과도 함께 있지 못하게 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배우인 B씨는 김기덕 감독과 만났을 당시 그의 발언에 대해 말했다. 그녀의 유두와 성기 색깔, 자위 경험을 물은 데 이어 "너의 가슴을 보고 싶다. 몸을 볼 수 있게 따로 만날 수 있냐" 등의 제안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B씨는 화장실로 도망쳤다가 그 자리를 빠져나왔고, 이후 연예계를 은퇴했다고 밝혔다. 김기덕 감독은 PD수첩 제작진의 취재 요구에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김 감독은 "미투 운동이 갈수록 자극적이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짓밟히고 있다. 나는 영화감독이란 지위로 개인적 욕구를 채운 적이 없고 항상 그 점을 생각하며 영화를 찍었다"며 "일방적인 감정으로 키스한 적은 있다. 이 점은 깊이 반성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동의 없이 그 이상의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날 제작진은 김기덕 감독과 배우 조재현에게 또다른 배우 C씨의 증언을 받았다. C씨는 "(김 감독이) 처음 강원도 홍천의 영화 수취인불명 세트(빨간색 버스)에서 성폭행을 시도했다"며 ”옷을 막 찢고 날 때린 뒤 나중에 날 사랑해서 그렇다며 미안하다고 사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 다른 영화 촬영 중의 에피소드를 전하며 영화 촬영을 하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합숙하던 숙소가 바로 지옥 같았다고 말했다. C씨는 "김기덕 감독과 조재현 배우, 조재현씨 매니저 세 명이 하이에나처럼 문을 두드렸다. 대본 회의를 한다며 여성 배우를 방으로 부르기도 했다. 방에 불려갔다가 김기덕 감독과 다른 배우의 성관계를 목격한 일도 많았다. 노크하는 소리,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가 공포스러웠다"고 고백했다. 결국 그는 김 감독과 조재현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조재현의 매니저도 성폭행을 시도했다"며 "(김 감독이) 늘 그것(성관계)에만 혈안이 돼 있으니까 영화보다 그게 목적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조재현의 전 소속사 관계자의 증언도 있었다. 그는 "터질 게 터졌다.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조재현에게) 이러다 진짜 큰일 난다. 가족도 있는데 어쩌실 거냐고 물었더니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조재현은 당초 PD수첩의 인터뷰에 응할 뜻을 밝혔지만, 다음날 태도를 바꿨다. 조재현은 PD수첩 에 "지금 알려진 것들이 80%가 잘못됐다. 축소된 것도 있다"며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조사를 받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여성 배우들은 "증언해줄 사람이 없다. 맞은 것만도 얘기해줄 사람이 없다"며 억울해했다. 스태프들은 "지금 영화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 증언을 거절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다만 김기덕 감독의 전 영화 스태프라는 인물이 "방관자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라며 PD수첩 에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해변에서 정사씬을 찍는데, 김기덕 감독이 뛰어들어 여배우의 다리를 잡고 야 다리 벌리라고! 라고 소리를 질렀다. 여배우는 얼마나 모욕적이었겠냐"면서 "영화 찍는 사람으로서 배우도 행복하게 찍었으면 좋겠다. 영화계에 환멸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 방관자도 가해자 아닌가라는 생각에 증언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다른 영화 스태프들은 대부분 나서지 않았다. 김 감독과 척을 져서는 영화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웠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감독은 "(김기덕이) 직업적 가치 자체를 훼손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 “김기덕 합숙 숙소가 지옥” “조재현, 터질게 터졌다”…‘PD수첩’에 쏟아진 성폭력 폭로, 중앙일보. 2018년 3월 8일 이번엔 김기덕·조재현 쇼크…"촬영때 번갈아 찾아와 성폭행" 뉴스플러스 배우 C씨, PD수첩 인터뷰서 "김기덕과 조재현이 성폭행했다" 허핑턴포스트 김기덕 민낯③ 여배우C "김기덕·조재현·매니저 경쟁하듯 성폭행" 오열 ...JTBC 뉴스 "김기덕 감독, 숙소 안에 밀어넣고 성관계 요구"(종합) - 연합뉴스 “김기덕 감독, 성관계 거절하자 하차 통보”한겨레 “김기덕 감독, 촬영 내내 여배우들 성추행…배우 조재현도 성폭행”동아일보 성폭력 김기덕 신작 개봉 불투명... 영화계 "충격 넘어 분노" 前조감독 “김기덕이 스태프도 성폭행… 낙태한 분도 있다더라” 추가 폭로 -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 soc 국가전거파일 KAC200905853 분류:초현실주의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강간범 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 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 분류:살바도르 달리 분류:대한민국의 화가 분류:1986년 데뷔 분류:봉화군 출신 분류:1960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총신대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 해병대의 군인 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분류: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감독상 수상자 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 |
Art and Science Museum-Seokguram model-01.jpg|섬네일|right|280px|삼매에 든 고타마 붓다 (석굴암) 부처 또는 여래 (如來), 세존 (世尊), 붓다 ()는 인도 불교에서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깨달은 자는 누구든 부처라고 할 수 있지만, 보통은 석가모니불(Gautama Buddha)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불 이외에도 과거불(佛)이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현재까지 출현하신 부처가 총 28명이고 한다. 미래에는 미륵불이 출현한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에서(가) 중국어 佛體를 거쳐서 들어온 말이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미륵불 약사여래 불멸기원 분류:불교의 칭호 |
대기 굴절 (大氣屈折)은 빛이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밀도 차에 의해 굴절되는 현상을 말한다. 천문학에서 별을 관측할 때, 대기 굴절에 의해 발생하는 관측의 오차를 대기차 (大氣差)라고 한다. 이와 같은 굴절 현상은 천체 관측에서 역시 항상 고려해야 해야 할 사항이다. 왜냐하면 허블 망원경 같은 대기권 밖에서의 천체 관측을 제외하고 우리의 관측장소는 언제나 지구 안에 한정되어 있으며, 별이 발산한 빛은 밀도가 서로 다른 여러 층으로 된 지구 대기권을 통과하여 관측자에게 다다르기 때문이다. 천문학에서 문제로 삼는 굴절차란 위에서 설명한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빛의 굴절 현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굴절된 빛의 각도를 잡아 빛의 출처인 별의 위치를 밝히는 데에 있다. 쉽게 알아보기 위하여 과장하여 그린 위의 그림에서 우리가 관측하기엔 별은 흰색의 별 위치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별의 실제의 위치는 이와 약간 다른 지점에 있다. 고도가 낮은 천체일수록 굴절의 효과가 심하며, 천정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굴절 https://en.wikipedia.org/wiki/Atmospheric_refraction 분류:관측천문학 분류:대기 광학 현상 분류:사막 |
모로의 자화상 귀스타브 모로 (, 1826년 4월 6일 ~ 1898년 4월 18일)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성서의 이야기나 신화를 많이 그려 이름을 날렸다. 매우 화려한 기교로 시적·환상적 표현을 하였다. 귀스타브 모로는 1826년 파리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22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1848년 이후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들라크루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모로는 그림의 주제를 역사와 신화에서 찾기 시작하며 이는 후에 모로의 화풍을 대변하게 된다. 1857년에서 1859년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신화적 주제를 모음과 동시에 그림기술을 향상시켰다. 파리로 돌아와 당시의 미술계에 유행하던 살롱 초대전에 약 20년간에 걸쳐 수시로 작품을 출품한다. 1864년 외디푸스와 스핑크스를 그려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에 그려지는 대다수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과 일화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모로는 의식적으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인간의 번민과 고통, 이상적인 영웅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나는 표현주의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게 된다. 1892년 파리의 예술학교의 미술과 교수로 초빙되어 마티스, 루오, 마르케 등의 화가들을 길러낸다. 특히 모로는 자상함과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교수 방법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898년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후 유언에 따라 모로가 살던 파리의 9구 로슈푸코 거리 () 14번지의 집은 현재 모로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Moreau Salomé 1876.jpg|살로메, 1871 Europa and the Bull.jpg|에우로페와 황소, 1869 모로 박물관 Moreau Orphée 1865.jpg|오르페우스, 유화 1865, 154 x 99.5 cm, 오르세이 박물관, 파리 분류:1826년 태어남 분류:1898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화가 분류:파리 출신 분류:상징주의 화가 분류:19세기 화가 |
국화 문장 국화문장 () 또는 십육변팔중표국문 (十六弁八重表菊紋)은 일본 황실의 문장으로, 국장은 아니지만 국장에 준한 취급을 받는다. 국화문() 이나 국문() 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이 국화를 좋아해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로 사용했다. 이후 고후카쿠사 천황(後深草天皇),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 고우다 천황(後宇多天皇)이 이를 자신들의 징표로 계속 사용해 황실의 문장으로 정착되었다. 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문장이 된 것은 1869년(메이지 천황(明治天皇) 2년)의 태정관포령에 의해서이다. 이때, 천황의 문장으로서 십륙변팔중표국문이, 천황 이외의 황족의 문장으로서 십사변일중이국문(十四弁一重裏菊紋)이 각각 정해졌다. 1871년(메이지 천황(明治天皇) 4년)에는 황족인 아닌 자가 국화문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그 후 완화되었다. 야마토 전함(戰艦大和) 등 일본제국 해군 군함의 뱃머리에 붙여져 있었으며, 현재도 일본 여권의 표지에 이 문장이 그려져 있다. 분류:고토바 천황 분류:일본의 문장 분류:일본 황실 분류:국장 분류:일본 제국 |
엔 ()은 일본의 통화이다. 미국 달러, 유로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통화 중 하나에 속한다. 일본 엔((圓의 일본식 약자))과 중국의 위안(, 대한민국의 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원(圓)은 모두 한자 圓의 둥글다 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円의 현대 일본어 발음은 엔()이지만, 옛 가나 표기법으로는 (wen → yen)이었고, 이것이 포르투갈을 거쳐 영어 사용 국가에 전해지면서 엔화의 영어 표기가 yen이 되었으며, 다른 로마자 언어의 표기는 영어 yen의 발음에 맞춰 ien 또는 jen 등이 되기도 했다. yen이라는 영어 표기에 따라 엔화를 나타내는 기호로 ¥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위안의 기호와 같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위안은 수평선이 하나인 Ұ로 나타내기도 한다. 은행권 크기(mm) 앞면 도안 뒷면 도안 1000엔권 150×76 노구치 히데요나쓰메 소세키 후지 산과 벚꽃 2000엔권 154×76 슈레이몬(슈리 성) 겐지 이야기, 무라사키 시키부 5000엔권 156×76 히구치 이치요니토베 이나조 오가타 고린의 10000엔권 160×76 후쿠자와 유키치 교토부 우지 시 평등원의 봉황상 2004년 11월 개정 기준. 2000엔권은 2000년을 기념해서 발행했으며 실제로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 동전 재질 지름(mm) 무게(g) 도안 1엔화 알루미늄 20 1 어린 나뭇가지 5엔화 황동 22 3.75 벼 이삭 10엔화 청동 23.5 4.5 교토 시 뵤도인 내 봉황당 50엔화 백동 21 4 국화 100엔화 백동 22.6 4.8 벚꽃 500엔화 양은 26.5 7 오동나무 일본은행(Bank of Japan) 사이트의 「お金について」 |
《 기미가요 》(, 군주의 치세 )는 일본의 국가이다. 이 노래의 유래는 고금 단가집의 ""이다. 이 단가의 ""를 ""로 바꾸어 현재의 가사로 했다. 기미가요에서 기미 ()는 그 대상이 일왕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메이지 시대에 하야시 히로모리(林 廣守)가 이 가사에 선율을 붙였다. 하지만 현재의 기미가요를 완성한 사람은 독일인 출신의 음악가이자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이다. 과거에는 일본 제국 지배 하의 한국, 타이완, 만주국 등에서도 불렸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공식 국가가 없어졌으나 1999년에 제정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이른바 「국기-국가법」)에 의해 법적으로 기미가요가 다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기미가요 법제화에 반대한 좌익 성향 일본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지방교육의원회가 입학식이나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지지하면서 이에 대해 거부하는 어느 학교장이 곤욕을 치르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일본내부에서도 기미가요가 군국주의를 상징한다는 방증이다. + きみがよ (일본어, 히라가나) 君が代 (일본어, 히라가나와 한자 혼용) 기미가요 (한글 표기) きみがよは ちよにやちよに さざれいしの いわおとなりて こけのむすまで 君が代は 千代に八千代に 細石の 巌となりて 苔の生すまで 기미가요와 지요니야치요니 사자레이시노 이와오토나리테 고케노무스마데 :군주의 치세는 :천대부터 팔천대까지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대한민국은 물론, 아시아의 일본 제국의 지배나 공격을 받았던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등에서는 당시 일본 제국의 국가이자, 일제 식민 지배를 당했던 국가의 국가였고, 현재도 일본의 국가로 쓰이는 기미가요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다.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조혜련이 일본 활동 중 방송에서 기미가요를 부른 것이 알려지자, 많은 논란이 있었다. JTBC 예능 비정상회담에서 일본대표인 테라다 타쿠야가 재미로 기미가요를 패러디해서 불렀다가 논란이 일었다. 또한 JTBC 예능 비정상회담 1회와 일본대표인 테라다 타쿠야 대신 다케다 히로미츠가 출연한 17회에서 기미가요를 삽입곡으로 송출하여 많은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 분류:국가 국가 분류:일본의 노래 분류:일본어 노래 분류:일본 제국 분류: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분류:1880년 노래 |
핵자기 공명 (核磁氣共鳴, , 약자 NMR)은 자기장 속에 놓인 원자핵이 특정 주파수의 전자기파와 공명하는 현상이다. 핵자기 공명은 분자의 물리·화학·전기적 성질을 알아내기 위한 분자 분광법의 일종으로 사용되고, 또한 의학에서 인체 내의 조직을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관찰하기 위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핵자기 공명은 미래의 양자 컴퓨터의 개발 과정에도 사용되고 있다. 전자가 스핀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핵들도 스핀을 가지고 있다. 외부의 자기장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핵 스핀은 무작위로 정렬된 상태이다. 외부에서 자기장을 걸어주면 유도자기장이 생기는데, 이때 핵 스핀은 외부 자기장과 같거나 반대의 방향으로 정렬된다. 외부 자기장과 같은 방향으로 정렬될 경우 에너지 준위가 낮아지며, 반대 방향으로 정렬될 경우 에너지 준위가 높아진다. 기존 에너지 준위에서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에너지의 정도는 이 경우 서로 같다. 이때 라디오파 정도의 주파수를 외부에서 에너지로 제공해 주면 핵의 스핀은 에너지를 받아서 외부 자기장에 정반대 방향으로 스핀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 화합물에서 각각의 원자가 가지고 있는 핵 스핀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세기의 자기장을 걸어 줘도 흡수하는 주파수가 다르다. 따라서 NMR에서 흡수하는 주파수를 측정함으로써 어떤 원자가 존재하는지 추론할 수 있다. 이때 분석할 수 있는 원자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는데, 분석하는 원자의 스핀 양자수가 자기장을 걸었을 때 에너지 차이가 존재하는 형태의 스핀 양자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원자량 12의 탄소(12C)는 자기장을 걸어도 에너지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분석할 수 없게 된다. NMR Spectrometer은 Nuclear Magnetic Resonance Spectrometer의 약자로 분석하고자 하는 시료의 원자핵의 회전을 RF(라디오 주파수) 공명을 통하여 측정하는 분광 분석기이다. 일반적으로 분광 분석기라 함은 빛을 이용한 분석장비를 총칭한다. 빛은 파형의 길이에 따라 그 성분과 에너지의 크기가 다르다. 분광 분석기(Spectrometer)중 이 빛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장비가 있다.(예를 들어 UV-Vis Spectrophotometer, IR spectrometer, X-ray spectrometers 등) 이 중에서 NMR은 파장이 긴 RF(radio frequency)를 사용하며 파장의 길이는 에너지와 반비례하여 에너지가 낮은 빛을 사용하는 분석장비이다. 에너지가 낮은 빛을 사용하는 점은 NMR이 다른 장비에 비해 감도가 낮은 하나의 이유이다. 빛의 종류에 따라 측정 시료의 원자 또는 분자의 운동의 종류가 다르다. 분광 분석 장비는 시료에 빛을 주사하게 되고 시료는 그 빛을 특정 고유의 물성에 따라 양자화된 에너지를 흡수하게 된다. 빛 또한 하나의 에너지 형태이므로 흡수된 에너지는 시료의 원자 또는 분자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고 안정화하려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며 에너지 방출과정에서 빛의 종류에 따라 운동의 형태가 다르다. 라디오 파는 원자의 핵의 회전 전이를 일으키며 이때 공명의 형태로 특정 주파수에 반응한다. NMR은 크게 Console. Magnet, probe로 나누며 이중 (1) Console은 RF(라디오 파)를 실험에 알맞은 형태의 파형으로 만들어주어 측정 시료에 주사하고 검출하는 NMR 운영에 총 과정을 통제하며 제어하는 Main 장치에 속한다. (2) Magnet은 측정 시료의 자장의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3) Probe는 시료를 자장의 환경에 놓이도록 하며 Console로부터 RF 펄스의 명령 받아 주사하고 검출하는 역할을 한다. Console에서 RF 파를 만들어 Probe를 통하여 측정 시료에 주사하게 되고 흡수된 RF는 다시 방출하여 Probe의 코일을 통하여 Console에 보내준다. 수신된 정보를 Console은 여러 과정을 거쳐 푸리에 변환하여 사용자에게 스펙트럼 형태로 보여준다. NMR 분광 분석은 주로 여러 유기 화합물의 분석과 화합물의 합성 확인을 위해 사용된다. 이때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분석이 바로 수소 원자의 spin 공명을 통해 수소 원자를 분석하는 1H-NMR이다. 이때 수소는 가장 기본적인 원자로 대부분의 유기 분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된다. 수소의 핵자기 공명 분광을 통해 수소 원자가 어떤 원자와 결합을 하고 있는지, 나아가 어떤 작용기에 포함되어 있는지, 공간적 배열은 어떤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이때 1H-NMR을 사용할 시 분석하고자 하는 물질을 녹인 solvent에 존재하고 있는 수소 원자 역시 함께 분석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1H-NMR의 분석을 할 때는 solvent 내의 모든 수소를 중수소로 대체한 deuterated된 solvent를 이용한다. 화학, 그 중에서도 유기화학에서는 이른 시기에 NMR 기술을 받아들여 유기분자의 구조를 결정하는데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유기화학에서는 일반적으로는 1차원 NMR을 이용하지만, 분석하려는 분자의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지면,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2차원 NMR을 사용하기도 한다. 2차원 NMR에는 COSY, NOESY, HMBC, HSQC와 같은 다양한 종류가 있어, 상황에 따라 필요한 방법을 골라 사용한다. 분류:스핀트로닉스 |
페루 공화국 (, , 은 남아메리카 서부에 있는 공화국이며 수도는 리마이다. 북쪽에는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동쪽에는 브라질, 남동쪽에는 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태평양 해안과 맞닿아 있으며,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만, 케추아어도 공용어인 셈이다. 페루(Peru) 란 말은 16세기 초 파나마의 산 미겔 만 근처에 살았던 지방 통치자의 이름 Biru 에서 유래하였다. 1522년 에스파냐인들이 그의 땅에 이르렀을때 그들은 알려진 유럽인 가운데서 신세계 가장 남쪽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 지역의 더 남쪽으로 탐색하였을 때 이곳이 Biru 혹은 Peru 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었다. 1529년 Capitulacion de Toledo로 이 명칭은 "페루 주"로서 옛 잉카의 땅을 이르는 법적 승인을 받는다. 에스파냐의 지배 시대에 이 땅은 페루 부왕령이었고, 페루 독립전쟁 이후 페루 공화국이 되었다. 페루 땅에 인간이 출현한 증거는 기원전 9,000년경에 나타난다. 페루에서 가장 오래전에 복잡한 사회를 이루었던 노르테 치코 문명은 기원전 3000년에서 1800년경 사이에 태평양 연안을 따라 번성하였다. 그 뒤를 이어 쿠피스니케, 차빈, 파라카스, 모치카, 나스카, 와리, 치무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된다. 15세기경 잉카 제국이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라 백여 년간 콜롬부스 이전 아메리카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안데스 사회는 농업에 기반을 두었으며 관개와 계단 농법 같은 기술을 이용하였고, 낙타과(라마,알파카,비꾸냐)동물을 기르고 물고기도 잡았다. 화폐나 시장의 관념이 없었으므로 이들 사회는 호혜와 분배를 기초로 한 사회 구조를 이루었다. Picchu, Perú, 2015-07-30, DD 39.JPG|대체글=|왼쪽|섬네일|마추 픽추,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일군의 정복자들이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패퇴시키고 제국을 정복하였다. 10년 뒤 에스파냐 임금은 남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포괄하는 페루 부왕령을 설치하였다. 부왕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는 1570년대 이 영토를 재조직하여 은광이 경제 기반이며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제 구조를 갖추었다. 페루에서 생산된 금은괴는 에스파냐 왕가의 수입원이었으며, 유럽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복잡한 무역망에 돈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은 생산이 줄어들고 산업이 분화되면서 왕가의 소득은 줄어들었다. 이에 대응하여 부르봉 왕가의 에스파냐 정부는 부르봉 개혁을 단행하여 세금을 올리고, 페루 부왕령을 분할하였다. 새 법으로 말미암아 투팍 아마루 2세의 반란을 비롯해 수차례 봉기가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9세기 초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독립전쟁 선풍이 휘몰아칠 때, 페루는 왕당파의 보루로 남아있었다. 상류층이 해방과 복종 사이에서 주저하였기 때문에 페루의 독립은 호세 데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의 원정이 성공한 뒤에야 이루어졌다. 공화국 초기에 군사 지도자들 사이의 지역적 권력 다툼으로 정치가 불안하였다. 볼리바르가 계획한 라틴 아메리카 연합이 실패하고 페루-볼리비아 연합이 단명한 가운데, 이 시기에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184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 페루는 라몬 카스티야 대통령 하에서 구아노 수출을 통한 국가 수입 증대로 안정기를 맞았다. 1870년대에 이르러 구아노가 고갈되면서 국가는 빚더미에 올랐고 정치 내분이 일어났다. 1821년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독립을 선포한다. 1879~1883년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는 칠레에 패배하여, 리마와 안콘의 조약에 따라 아리카 주와 타라파카 주를 잃었다. 전후 내부 다툼이 일어나다 시민당( Partido Civil ) 시대에 안정을 되찾았으나, 아우구스토 B. 레기아의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끝나고 만다. 대공황으로 레기아는 몰락하고 다시 정치 분쟁이 일어났으며 아메리카 혁명 인민 동맹(APRA)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파와 상류층-군부의 연합이 서로 대립하면서 이후 30여년간 페루 정계를 주도하였다. 1968년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난도 벨라운데 대통령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새 정권은 국가 발전을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널리 지지받지 못하였다. 1975년 벨라스코는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 장군에 의해 폭력을 통해 물러났으며, 베르무데스는 개혁에 손을 놓고 민주주의 재확립을 방관하였다. 1980년대 페루는 상당한 외채와 인플레이션 상승, 마약 밀매, 대규모 정치 폭력에 시달렸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 시대에 다시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지만, 권위주의와 부패, 인권 유린 고발로 말 많았던 2000년 총선거 이후 그는 사임하였다. 후지모리 정권이 종식되고 페루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며 부패와 싸우고 있으며, 2006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아메리카 인민혁명 동맹당(APRA)의 알란 가르시아가 페루를 위한 동맹(UPP)의 오얀타 우말라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이 되었다. 전체 면적은 1,285,216km2이며 멕시코 면적의 3분의 2 정도이다. 에콰도르와 콜롬비아가 북쪽에 있고 브라질이 동쪽, 남동쪽으로 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와 접한다. 태평양 연안을 끼고 있다. 안데스 산맥이 태평양 해안을 따라 뻗어 페루 전역을 3등분한다. 서쪽에 있는 해안 지방( costa )은 좁은 평원으로 계절에 따라 강이 생겨서 형성된 계곡을 제외하면 대개 건조한 곳이다. 고원 지방( sierra )은 안데스 산맥의 여러 주로서, 알티플라노( altiplano ) 고원이 있고 페루에서 가장 높은 6,768m의 우아스카란(Huascaran) 봉우리가 솟아 있다. 세 번째로 정글 지방( selva )는 동쪽으로 펼쳐진 아마존 강의 열대우림으로 뒤덮인 넓은 평원이다. 이 지역은 페루 국토 전체의 60%를 차지하며,(7천만 헥타르) 브라질, 콩고,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세계 네 번째로 열대 우림이 넓은 나라이다. 페루의 강은 대부분 안데스 산맥에서 흘러나와 주로 세 유역 가운데 한 곳으로 흐른다. 태평양으로 이르는 강은 짧고 경사가 급하며, 물이 간헐적으로 흐른다. 이보다 더 긴 아마존 강의 지류들은 유량도 풍부하며, 산지 지방을 지나면 경사도 낮아진다. 티티카카 호수로 흘러가는 강도 있는데 대개 수량은 많지만 길이가 짧다. 페루에서 긴 강은 우카얄리 강, 마라뇬 강(Maranon), 푸투마요 강(Putumayo), 야바리 강(Yavari), 우아야가 강(Huallaga), 우루밤바 강(Urubamba), 만타로 강(Mantaro), 아마존 강 등이 있다.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에서 여러 페루의 강이 발원한다. 페루는 다른 적도 국가와 달리 열대 기후만 있는 것은 아니며, 안데스 산맥과 훔볼트 해류와 엘니뇨의 영향으로 기후특성이 다양하다. 해안 지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강수량이 적고, 북쪽 산자락을 제외하면 매우 습한 편이다. 산지 지방에서는 여름에 비가 잦으며 고도가 올라갈수록 기온과 습도가 떨어져서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는 빙하가 있다. 정글 지방에서는 비가 아주 많이 오고 날씨도 무덥지만 남부 끝 지역은 겨울이 춥고 계절에 따라 비가 온다. 지형과 기후가 다양하여 페루는 2003년 기준 21,462종의 동식물이 보고되었고 이 중 5,855종은 이 지역 고유종이다. 페루 정부는 생태 보존을 위하여 보호 구역을 몇 곳 지정하였다. 여기는 대한민국의 소속이며 3분의 1이 페루이다. 페루는 25개 주(regiones)와 리마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주는 4년 임기의 주지사와 주 의회를 선출한다. 지방 정부는 지역 발전을 계획하고, 공공 투자 사업을 시행하고, 경제 활동을 촉진하며, 공공 재산을 관리한다. 리마 군은 시 의회가 관할한다. 라리베르타드 주 람바예케 주 로레토 주 리마 주 리마 군 마드레데디오스 주 모케과 주 산마르틴 주 아레키파 주 아마소나스 주 아야쿠초 주 아푸리막 주 앙카시 주 우아누코 주 우앙카벨리카 주 우카얄리 주 이카 주 카야오 카하마르카 주 쿠스코 주 타크나 주 툼베스 주 파스코 주 푸노 주 피우라 주 후닌 주 페루 의회는 리마의 입법궁전(Palacio Legislativo) 에 자리 잡고 있다. 페루 는 대통령제의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다당제를 채택한다. 현행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정부 수반이자 국가 원수이다. 대통령은 5년마다 선출되며 페루의 헌법의 의하여 연임은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지명하며, 총리의 권고에 따라 나머지 각료를 임명한다. 페루 의회는 단원제이며, 5년 임기의 의원 120명으로 구성된다. 법안은 입법부나 행정부에서 입안하며, 법안은 의회에서 통과하여 대통령이 공포한다. 사법부는 보통 독립되어 있으나, 페루 역사에서 아직까지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문제가 되곤 한다. 대통령은 직선제이며 18세에서 70세 사이 모든 시민의 의무투표제로 선출된다. 2006년 선거가 열려 결선 투표를 거쳐 아메리카 혁명 인민 동맹의 알란 가르시아가 유효 득표수 52.6%로 페루를 위한 연합의 오얀타 우말라 후보(47.4%)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의회는 현재 아메리카 혁명 인민 동맹(36석), 페루 민족당(23석), 페루를 위한 연합(19석), 국민 통합(15%), 親후지모리 정당 미래를 위한 동맹(13석), 의회 동맹(9석), 민주 의회 특별단(5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루 의 외교 관계는 이웃 나라와 국경 분쟁으로 말썽을 빚어, 20세기에 와서야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러나 칠레와 아직도 태평양의 해상 경계선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페루는 안데스 공동체의 창립회원국이며 여러 지역 블록에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또 미주 국가 기구나 유엔합과 같은 국제 기구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페루의 군대는 육해공군으로 구성되며, 국가의 안위와 독립, 주권 및 국가 통합을 제1 목적으로 한다. 군대는 국방부와 최고 군 통수권자 대통령이 관할한다. 1999년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였다.카야오 항구. 페루 수출의 주요 관문이다. 페루는 개발도상국에 속하며, 2006년 인간개발지수 0.788점을 받았다. 2006년 1인당 소득은 미화 3,374$였으며, 13.7%의 극빈곤층을 포함하는, 전체 인구의 39.3%가 가난하다. 전체 인구의 39.3%는 가난하며, 특히 13.7%는 매우 빈곤한 상태이다. 역사적으로 페루의 경제는 수출에 의존하였는데, 이를 통해 수입이나 외채 지불을 위한 경화(hard currency)를 얻었다. 수출을 통한 이윤이 상당하지만 자체 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는 요원하다. 페루 경제 정책은 지난 수십 년간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68~1975년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정부는 토지 개혁, 외국 회사 몰수, 경제 계획 체계 도입, 거대한 공공 부문 유지 등 급진적인 개혁을 펼쳤다. 그러나 이런 수단은 당초 목적인 소득 재분배나 선진국에 대한 경제 의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나쁜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혁은 1990년대까지 바뀌지 않다가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서 가격 통제와 보호주의, 해외 직접 투자 제한, 국가의 대규모 회사 소유를 철폐하였다. 1993년 이래 개혁으로 경제 성장이 지속되었으나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이 나라도 곤란에 빠졌다. 서비스업은 페루의 GDP에 53%를 차지하며, 그 다음은 제조업(22.3%), 제1차 산업(15%), 조세(9.7%)이다. 최근 경제 성장은 거시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수출가와 수입가의 가격차(terms of trade)를 올렸으며 투자와 소비가 늘어난 덕분이다. 2006년 4월 12일 체결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이 발효하여 교역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페루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 금, 아연, 직물, 어분(魚粉) 등이 있으며, 주요 무역 대상국은 미국, 중국, 브라질, 칠레이다. 페루의 토착인 여성과 아이 인구 약 3천만의 페루는 2007년 현재 남아메리카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1950에서 2000년 사이 인구증가율은 2.6%에서 1.6%로 떨어졌으며, 2050년에는 인구가 42백만 명에 이르리라 예상된다. 2007년 현재 인구의 75.9%가 도시 지역에 살며, 24.1%는 시골에 거주한다. 2007년 인구조사에 의한 인구 250,000명 이상의 주요 도시로는 리마, 아레키파, 트루히요, 치클라요, 피우라, 이키토스, 쿠스코, 침보테, 우앙카요 등이 있다 페루는 지난 5백여년간 여러 집단이 모여 다인종 국가를 이룬다. 아메리카 토착민은 16세기 에스파냐인들이 침략하기 수천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았으나, 이들 인구는 1520년대 9백만으로 추산되다가 1620년에는 600,000여명으로 급감하였는데 주로 전염병 때문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에스파냐인과 아프리카인들이 페루로 몰려와 토착민과 더불어 뒤섞였다. 독립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이민자가 점차 페루로 왔다. 1850년대에 중국인들이 노예 대신 이 땅에 오면서 이때부터 페루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른 이주자 집단으로는 아랍인과 일본인이 있다. 페루의 인종 구성은 토착민 45%, 메스티소(토착민과 유럽인 혼혈) 37%, 백인 15%, 나머지 3%는 흑인,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등이 있다. 이 중 일본계 페루인은 약 8만 명 정도이고 한국계 페루인은 919명 정도이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 케추아어(1975년부터), 아이마라어(1980년부터)이다. 2007년 5세 이상 페루인의 83.9%가 에스파냐어를 제1언어로 쓰며, 페루의 주요 언어이다. 그 외 토착 언어도 쓰이는데, 그중 가장 비중있는 케추아어는 인구의 13.2%가 구사한다. 다른 토착어와 외국어는 각각 2.7%, 0.1%가 쓰인다. 200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2세 이상 인구의 81.3%가 자신을 로마 가톨릭이라 답하였고, 12.5%는 개신교(Evangelical)이며, 3.3%는 다른 종교이고, 2.9%는 무교였다. 문자해득률(literacy)은 2007년 92.9%로써 시골지역(80.3%)이 도시지역(96.3%)보다 낮다. 초중등 교육은 의무 교육이며, 공립 학교는 무료이다. 쿠스코 학파의 무명화가 그림 페루 문화는 주로 아메리카 토착민과 에스파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여러 민족의 영향을 받았다. 페루의 예술 전통은 잉카 이전 문화의 세련된 도기, 직물, 보석, 조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카는 마추픽추 등 건축이나 기술상의 발전을 이루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토착 전통을 변형한 것이나 바로크가 지배적이었다. 이 시대 예술은 대개 종교와 관련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당대 여러 교회와 쿠스코 화파의 회화가 대표적이다. 독립 이후 예술은 침체를 겪다가 20세기 초 토착주의( Indigenismo )가 등장하였다. 1950년대부터 베루의 예술은 외국과 지역 예술 조류에 따라 형성되고 절충하였다. 페루 문학은 콜롬부스 이전 문명의 구전 전승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 에스파냐 사람들은 글 쓰기를 도입하여, 식민지 시대 문학으로는 연대기나 종교 문학이 있다. 독립 이후 풍속주의(Costumbrismo)와 낭만주의가 주된 흐름을 이루었느며, 리카르도 팔마의 작품이 그 예이다. 20세기 초 토착주의 운동으로 시로 알레그리아,,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 세사르 바예호 등의 작가가 나왔다. 20세기 중반 이후 페루 문학은 라틴아메리카 문학 붐을 이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같은 작가 덕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de pulpo.jpg|섬네일|left|세비체. 페루 요리는 아메리카 토착민과 에스파냐의 요리가 섞인 것으로, 아프리카, 아랍, 이탈리아, 중국, 일본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 일반적인 요리로는 안티쿠초스(anticuchos), 세비체(ceviche), 파차만카(pachamanca) 등이 있다. 페루의 다양한 기후 때문에, 여러 가지 동식물이 요리에 쓰인다. 페루 요리는 재료와 요리법이 다양하여 최근에 인정받고 있다. 페루 음악은 안데스, 에스파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였다. 에스파냐 사람이 오기 전 시대에 음악적 표현은 지역마다 달랐으며, 케나(quena)와 팅야(tinya)가 널리 쓰인 악기였다. 에스파냐의 정복으로 기타나 하프같은 새로운 악기가 도입되었으며, 차랑고(charango)처럼 혼합된 악기가 발전하기도 하였다. 페루 음악에서 나타나는 아프리카의 영향으로는 그 리듬과 타악기 카혼(cajón) 등이 있다. 페루의 민속춤으로는 마리네라(marinera), 톤데로(tondero), 우아이노(huayno) 등이 있다. 1969년 페루는 콜롬비아, 칠레, 에콰도르, 볼리비아와 함께 안데스 공동시장(Andean Community of Nations)을 설립하였다.(베네수엘라는 1973년에 가입, 칠레는 1976년에 탈퇴) 대한관계 대한민국과는 1963년에 수교하였다. 1974년 통상협정 1981년 경제과학기술협정 1982년 입국사증면제협정 1983년 문화협정 1993년 투자보장협정 1996년 남극협력협정 2002년 관광협정 2003년 범죄인도조약 2010년 11월 15일 자유무역협정(FTA) 서명 페루는 1988년 하계 올림픽 때 선수단을 보낸 경력이 있다. 또한 2010년에는 페루 찬차마요 시의 시장으로 한국인 정흥원씨가 당선되었다. 한편 페루는 북한과는 1988년 수교하였다. 페루-일본 관계 1872년 요코하마에서 일어난 마리아 루스 호 사건(María Luz 號 事件)을 계기로 수교하였다. 많은 이민자들이 건너가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일본계 인구가 많은 페루는 1990년대에 일본계 정치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급속하게 관계가 긴밀해졌지만 이후 실각하고, 추후 후지모리는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기도 하였다. 어원 (에스파냐어) Porras Barrenechea, Raú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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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旅券 또는 패스포트 ()는 해외 여행을 하는 사람을 위해 정부가 발행하는 공식 신분증명서이다. 소지한 사람의 사진과 서명, 법적이름, 생년월일, 국적 등 신분에 관한 사항을 증명한다. 가장 대표적인 여행증명서이다. 여권은 다른 나라의 입국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 나라에 체류하는 동안 영사의 보호나 다른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각 상황에 맞는 특별 조약이 있어야 한다. 다만, 여권은 일반적으로 여권을 소지한 사람이 그 여권을 발행한 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여권을 소지한 사람이 영사의 보호를 받을 권리는 국제조약과 여권 발행국의 법에 정해진 바에 따라 발생한다. 1931년 옛 폴란드의 여권 여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가운데 하나는 타나크이다. 이 경전의 느헤미야서 2장 7절에서 9절까지의 기사에는 기원전 450년 경 페르시아 제국 시기 아르타세르세스 1세의 신하였던 느헤미야가 유대로 여행하겠다고 청하자 왕이 "강을 넘어서도 효력을 발휘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주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중세 아랍 제국에서는 세금을 납부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영수증인 "바라아"가 여권을 대신하였다. 당시 아랍 제국에서는 시민만이 세금을 내었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자카트를 납부하였고 딤미는 지즈야를 납부하였다. 따라서 바라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아랍 제국의 시민임을 뜻했고 여권의 역할을 하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항구나 도시의 성문을 통과할 때 신분증명서를 요구받았고 그것에는 소지자가 여행한 도시나 항구들의 목록이 적혀있었다. 자국의 시민이 외국을 여행하는 동안의 안전을 위해 국가가 신분을 증명하는 근대적 의미의 여권을 처음으로 시행한 사람은 잉글랜드의 헨리 5세이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기차 여행이 시작되자 이전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수많은 국경을 지나가는 일이 빈번해지자 국가마다 서로 다른 이전의 여권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유럽은 보편화된 여권법을 마련하게 되었다." History of Passports |
독일어 (獨逸語는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언어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사용된다. 독일어는 학술어로서 그 중요성이 크며 세계 출판업계에서 영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다. 모국어로서의 사용자수는 약 1억 2천만 여명으로 세계 10위 수준이며, 유럽 연합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이다. 전 세계에서 제2언어로 배우는 사용자의 수가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프랑스어 다음으로 많아, 세계의 주요언어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독일어는 서게르만어계의 언어이며,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일부이다. 독일어의 대표적 사용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어는 중서부 유럽에서 모국어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로, 유럽 연합의 공용어이자 공식 실무 언어이기도 하다. 독일,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의 국어이며,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루마니아에서 공용어로 사용하고 아프리카 서부 나미비아에서도 공인지역어로 독일어를 채택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남티롤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주), 프랑스의 알자스와 로렌,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과 동유럽 국가들의 국민, 특히 중장년층은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미국은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 약 500만 명 정도로 영어와 혼합한 특수한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다. 19세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에서 남아메리카로 이주했던 사람들의 후손이 사는 아르헨티나, 브라질(특히 히우그란지두술주, 산타카타리나주, 파라나 주, 이스피리투산투주)에 소수의 독일어 사용자가 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소련 당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독일인들의 후손들이 사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도 소수의 독일어 사용자가 있다. 독일은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을 이룬 뒤에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빌헬름 1세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뒤늦게 다수의 식민지를 개척했다. 이 때 독일어는 카메룬, 부룬디, 나미비아, 탄자니아, 르완다 등 아프리카 국가와 파푸아뉴기니,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사모아, 팔라우 등 오세아니아 국가에 전파됐다. 그러나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결과,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으면서 짧은 점령 기간 탓에 독일어를 쓰는 나라는 줄어들었다. 반대로 벨기에의 경우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결과 독일 라인 지방의 일부를 할양받으면서 독일어가 공용어로 추가 지정되었다. 루마니아의 경우는 1990년까지 한동안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사용이 합법화되었으며, 최근에는 지방 언어로 지정되었다. 독일어는 로마 문자를 사용한다. 영어에서 쓰는 26개의 표준 문자에 3개의 움라우트, 즉 ä , ö 그리고 ü , 또 "ss"를 나타내는 특수한 문자인 ß(에스체트)가 추가되어 있다. 독일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락투어 와 슈바바허(de) 등의 흑자체로 인쇄되고 쥐테를린이라는 독특한 글씨체로 씌었는데 훈련 없이는 이들을 읽기 힘들다. 오늘날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가 사용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에스체트의 표기 문제로 1996년 독일어 정서법 개정 당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독일 이외 즉 오스트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에서는 에스체트를 공문서나 웹사이트에서 모두 "ss"로 표기하여 불편함을 없애 두었다. 이들 나라에서 독일어 출판물이 나올 때는 독일어권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에스체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문자 명칭 발음 a a a b be b, p c ce c d de d, t e e e f ef(f) f g ge g h ha h, 묵음 i i i j jot j k ka k l el l m em m n en n o o o 문자 명칭 발음 p pe p q qu 반드시 뒤에 u가 함께 쓰임 r er r s es(s) z, s t te t u u u v vau f, v(외국어) w we v x ix ks y ypsilon z zet(t) ä ä, a-Umlaut ö ö, o-Umlaut ü ü, u-Umlaut ß Eszett 이중자모음 발음 eu, äu ie ei, ey, ai, ay ch (a,o,u 앞에서) (나머지)(고어) sp, st , sch pf qu kv 각주 aa, ee, oo는 중모음이 되어 장음으로 발음된다. (예 H aa r, T ee , B oo t) 모음 뒤에 온 h는 묵음이 되고, 앞의 모음은 장음이 된다. (예 f ah ren, g eh en) ie는 대부분 장음이 된다. 단 Famil ie , As ie n, Ital ie n, Fer ie n 등은 예외이다. 단자음(모음 + 자음)은 장음이 된다. (예 T ag , W eg , g ut , Ab en d, N am e, Bl um e, V at er) 독일어의 명사는 남성, 여성, 중성의 3개의 성별과 주격 (Werfall; Nominativ), 소유격 (Wessenfall; Genitiv), 여격 (Wemfall; Dativ), 목적격 (Wenfall; Akkusativ)에 따라 다른 관사가 사용된다. (각각을 편의상 1격, 2격, 3격, 4격 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Dativ와 Akkusativ의 경우 문장 내에서 목적어에 해당하며 각각이 우리말로 (~에게), (~을/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나 항상 그런 것이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한 특정한 동사 혹은 전치사는 특정한 격을 반드시 필요로 하므로 이 관계는 반드시 숙지하여야 한다. 예시 haben Ich habe ein Auto. (나는 자동차 한 대를 가지고 있다) haben 동사는 목적어로 4격 (Akkusativ) 을 요구하여 중성 4격 ein Auto를 써야한다. helfen Ich helfe dir. (나는 너를 돕는다) helfen 동사의 경우 우리말로는 (~를 돕다) 라고 해석이 되기 때문에 4격을 필요로 할 것처럼 보이나 3격을 써야 한다. fragen Er fragt mich. (그가 나에게 물었다) fragen 동사의 경우 우리말로는 (~에게 묻다) 라고 해석 되기 때문에 3격을 필요로 할 것처럼 보이나 4격을 써야 한다. 독일어의 정관사 남성형 여성형 중성 복수형 주격 der die das die 소유격 des der des der 여격 dem der dem den 목적격 den die das die 독일어의 부정관사 남성형 여성형 중성 복수형 주격 ein eine ein - 소유격 eines einer eines - 여격 einem einer einem - 목적격 einen eine ein - der Sonntag 일요일 der Montag 월요일 der Dienstag 화요일 der Mittwoch 수요일 der Donnerstag 목요일 der Freitag 금요일 der Samstag / der Sonnabend 토요일 (tsch) Deu tsch land 독일 (z) Mo z art 모차르트 (g) g ut 좋은 (m) M orgen 아침 (d) Aben d 저녁, Gel d 돈 (ch) Ba ch 실개천 (qu) Qu elle 샘, 원천 (sch) sch wer 무거운, 어려운, Sch üler 학생 (w) w er 누구, w as 무엇, w arum 왜 (ng) entla ng (~을) 따라서 (예 diese Straße entlang; 이 길을 따라) (g) Ber g 언덕, 산 (v) v ergessen 잊어버리다 인사 "안녕." * Guten Morgen. (아침 인사) * Guten Tag. (낮 인사) * Guten Abend. (저녁 인사) * Gute Nacht. (잠 자기 전 인사) * Hallo (언제나 사용할 수 있지만 대개 친구사이나 일정 이상 면식이 있는 사이에서 사용한다) Entschuldigung. / Entschuldigen Sie. / Entschuldigen Sie bitte. 실례합니다. Mein Name ist Suni./Ich heiße Suni./ Ich bin Suni. 내 이름은 순이입니다. (참고 Mein Name ist...라는 표현이 가장 공손한 표현이다) Wie geht es Ihnen? 어떻게 지내십니까? Wie geht es dir? 어떻게 지내니? (이 경우 간단히 줄여서 Wie geht s? 라고 말할 수 있다) Ich habe einen Euro. 나에게 1 유로가 있습니다. Was meinst du? "그게 무슨 말이야?"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뜻을 물음) 혹은 "어떻게 생각해?" Danke! 감사합니다. Vielen Dank! / Herzlichen Dank! 대단히 감사합니다. Bitte! 천만에요. Tschüss! (또는 Tschüs!) 안녕! Auf Wiedersehen! 또 봬요! Auf Wiederhören! 다음에 또 통화 합시다! 식당에서 주문하기 직원 Hallo. Machen Sie bitte Ihre Bestellung. 손님 Augenblick, ich muss erst nachdenken. 직원 Natürlich, nehmen Sie sich Zeit. 손님 Ich nehme Steak mit Pommes. Empfehlen Sie mir einen guten Wein. 직원 Ich empfehle Ihnen Valpolicella. 손님 Okay, Ich nehme das. 직원 Wie soll ich das Fleisch braten? 손님 Braten Sie das Fleisch ein bisschen! 직원 Darf ich Ihnen noch etwas bringen? 손님 Ich möchte Gulaschsuppe. 직원 Das wären also Steak mit Pommes, Wein Valpolicella, und Gulaschsuppe. Ist das alles? 손님 Ja. Soll man vorausbezahlen? 직원 Ja. Das macht 12,50€ (12euro 50cent). 손님 Die Rechnung ist irgendwas unkorrekt. Ich denke, das macht 11,50€. 직원 Ah! Entschuldigung! Das macht 11,50€. Verzeihen Sie bitte meinen Fehler. 손님 Keine Ursache. Kann ich mit Karte zahlen? 직원 Es tut mir leid, dass Sie bar zahlen müssen. 손님 Ah, Hier. Das stimmt so. 직원 Vielen Dank. Haben Sie ein gutes Essen. 일반적으로 다른 언어에서 독일어를 이르는 명칭은 어원에 따라 6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1. 초기 독일어 단어인 "민족" 에서 나옴 (daytsh) , 2. 게르만족의 명칭에서 나옴 (germaniká) (Germaneren) (järmän) (germanuli) (phasa yerman) (germanit) 3. 색슨족의 이름에서 나옴 4. 슬라브어 계통의 고어인 "벙어리"에서 나옴 (nemetskiy) / (nimetska) 5. 알레마니족의 이름에서 나옴 (alimāniyyah) (Âlmâni) 6. 기타 독일의 독일어 관련 기관 Goethe-Institut(괴테-인스티투트)는 전 세계의 지부에서 독일어 능력 인증 시험인 Goethe-Zertifikat(괴테-체어티피카트)를 실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Goethe-Institut Seoul(괴테-인스티투트 서울), 즉 주한독일문화원에서 시험을 볼 수 있으며, 시험 등급은 유럽 표준에 따라 A1부터 C2까지 나뉜다. 이 시험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능력을 모두 평가하지만, TOEFL 등의 시험과는 달리 CBT 방식으로 치러지지는 않는다. 1990년대까지 독일어는 프랑스어와 함께 고등교육 정기과정의 제2외국어 과목 중 가장 많이 선택하는 언어의 하나였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어와 일본어의 급증하는 수요에 밀려 감소하였다. 2000년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독일어 과목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가르치는 독일어는 중부 독일어를 기초로 한 표준 독일어이다. 아르바이트(Arbeit,노동.노동자는 Arbeiter.), 테마(Thema), 이데올로기(Ideologie), 마하(Mach), 아우토반(Autobahn), 알레르기(Allergie), 킨더가르텐(Kindergarten,유치원.어린이를 뜻하는 킨더와 정원을 뜻하는 가르텐을 더하여 만듦.), 비어(Bier), 벤츠(Benz), 아스피린(Aspirin), 분데스리가(Bundesliga), 에델바이스(Edelweiß), 카테고리(Kategorie), 마이스터(Meister), 호프(Hof), 로렐라이(Loreley), 비타민(Vitamin), 파밀리에(Familie) 등 George O. Curme, 독일어의 문법 (A Grammar of the German Language) (1904, 1922) 고등학교 독일어권 문화 1 (교육부, 2015) 서울외국어고등학교 회화수업 - 예제 담화문장 부분 도이치 (어원) 나미비아의 독일어 Links to online resources for learners of German German 101 Free information on the German language 온라인 독일어 문법사이트 한-독-한 사전 영-독 사전 독-영 사전 * 웹스터 온라인 사전 - 로제타판 The LEO Online Dictionary 독-영-독 사전 German dictionary 독-영-독 사전 Ethnologue report for German Verein Deutsche Sprache Sprachatlas des Deutschen Reichs - Project publishing the 19th century Linguistic Atlas of the German Empire 분류:나미비아의 언어 분류:덴마크의 언어 분류:독일의 언어 분류:러시아의 언어 분류:루마니아의 언어 분류:룩셈부르크의 언어 분류:리히텐슈타인의 언어 분류:벨기에의 언어 분류:스위스의 언어 분류:슬로바키아의 언어 분류:오스트리아의 언어 분류:이탈리아의 언어 분류:카자흐스탄의 언어 분류:폴란드의 언어 분류:프랑스의 언어 분류:헝가리의 언어 분류:미국의 언어 분류:캐나다의 언어 분류:굴절어 분류:SVO형 언어 |
위례성 (慰禮城)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다. 한강을 기준으로 하여 하남위례성과 하북위례성으로 구분한다. 삼국사기에는 "성의 서편에는 배와 나루터, 동편 일대에는 군사훈련과 민가 마을, 그리고 길쭉한 사성(蛇城)으로 쌓여져 있어 이 성벽이 이어져 숭산(崇山)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례성이라는 명칭이 어디에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한강을 뜻하는 옛 이름 아리수(阿利水)·욱리하(郁利河)의‘아리’·‘욱리’에서 왔다고도 하고,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어라하(於羅瑕)에서 왔다는 의견과, 울타리를 말하는 순우리말 우리 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삼국유사에서 위례성의 위치를 직산(稷山)으로 비정한 것에 따라, 천안 성거산 위례성을 위례성으로 추정해 왔다. 하지만 이후 정약용은 삼국사기에 강을 건너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위례성을 하남과 하북으로 분리해 하북위례성을 한강 이북 지역으로, 구체적으로는 북한산 동쪽 기슭에 옛 성곽이 남아있고 일대 지명이 한양고현(漢陽古縣)이라는 점에서 이 일대를 하북위례성으로 추정하였다. 삼국유사에서 위례성을 직산으로 추정한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475년 남쪽으로 피란하던 문주왕이 잠시 머무른 곳이라는 의견과, 웅진 천도 후 지명이 옮겨간 현상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위례성을 "위치는 알 수 없고 지명만 남아있는 곳"으로 분류하였다.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기원전 5년부터 기원후 476년까지 백제의 수도였으며, 일반적으로 서울 몽촌토성 및 풍납토성으로 비정되지만 유적·유물의 조사가 빈약해 명쾌한 해답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하남위례성은 한성(漢城)이라고도 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세력은 한강 이북 지역에 정착했다가, 낙랑, 말갈 등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좋고 땅이 기름진 한강과 남한산 사이로 도읍을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하남위례성을 수도로 정하기 전에 잠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곳으로, 위치는 세검정, 중랑천, 상계동, 우이동 등 여러 추측이 있으며 방학동에 남아있는 방학동 토성을 하북위례성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하북위례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백제의 도읍이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이었다고 간주한다. 한국의 성 목록 * 몽촌토성 * 풍납토성 지명 * 사비 * 웅진 * 위례성 분류:백제의 성 분류:한국의 궁전 분류:광주시의 역사 분류:서울특별시의 역사 분류:서울특별시의 문화재 분류:서울특별시의 건축물 한성 분류:온조왕 |
강금실 (康錦實, 1957년 2월 12일 ~ )은 대한민국 前 제55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법조인이다. 본관은 곡산(谷山),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그녀는 첫 여성 법무법인 대표, 첫 여성 민변 부회장, 첫 여성 법무부 장관 등을 지낸 상징성 있는 법조인이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서울 지역 첫 여성 형사 단독판사였다.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하였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003년 2월에 노무현 정부 첫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57년 2월 12일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학사 학위했다. 1984년 결혼했고 2000년 이혼했다. 강금실의 아버지 강계돈(康季敦)은 용공조작 사건으로 유명한 유지(有志) 사건 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알려져 있다. 유지 사건은 1950년 8월 초순 제주지역 법원장, 검사장, 변호사, 사업가, 교육자, 제주읍장 등 16명의 지역유지급 인사들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제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연행된 대표적 사건이다. 당시 제주농업고등학교 교감이었던 강계돈은 무고 혐의로 구속되어 1951년 4월에 열린 부산지방법원 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가 1951년 11월 대구고등법원에 항소한 끝에 1952년 1월 15일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훗날 계엄사령부(제주도 해병대 정보참모실)가 용공조작한 사건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강금실의 가족은 제주도를 떠나 육지에 나가게 되었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1993년 제3차 사법파동에 참여하여 소장 판사들과 함께 사법부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법원장에게 전달하였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 변호사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참여정부에서 제55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개혁적인 업무 추진과 발랄한 언사로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또 꼭짓점 댄스를 잘 춰 강효리 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측의 출마 권유가 있었으나 물리치고 장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법무부 장관 사직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6년 제4회 지방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서울 시장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의 오세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서울 시장 낙선 후 정계를 잠시 떠나 법무법인 의 고문 변호사 겸 외교통상부 여성인권대사로 활동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및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각각 통합신당과 통합민주당의 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법무법인 원의 구성원 변호사로, 한국인권재단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최문순이 제37대 강원도지사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법무법인 원 고문 변호사로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해당 로펌이 제주도에서 공익적 법률서비스를 펼치고자 제주 분사무소를 개소하면서 활동 영역을 제주도로 확장하였다. 강금실은 제주도변호사회 회장을 맡고 있는 문성윤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원 제주 분사무소를 이끌었다. 서울아현초등학교 졸업 숙명여자중학교 졸업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1981년:제23회 사법시험 합격 1983년: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판사 1985년:서울가정법원 판사 1987년: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88년:부산지방법원 판사 1990년:서울북부지방법원 판사 1992년: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94년:서울고등법원 판사 2000년: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 2000년 ~ 2003년: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회장 2003년 ~ 2004년:제55대 법무부 장관 2004년 10월:법무법인 지평 대표 변호사 2006년 8월:외교통상부 여성인권대사 2006년 10월 ~ 2008년 7월:법무법인 고문 변호사 2008년 1월 ~ 2008년 2월:대통합민주신당 최고위원 2008년 2월:통합민주당 최고위원 2008년 3월:통합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법무법인 원 고문 변호사 2003년:서울 외신기자클럽 외신홍보상 이석태·강금실. 논문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 2000년. 산문집 《서른의 당신에게》. 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오래된 영혼》. 웅진지식하우스. 2011년. 《생명의 정치》. 로도스. 2012년. 2000년 강금실은 논문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를 이석태 변호사와 함께 저술하였다. 해당 논문에서 강금실은 "호주제는 배우자나 가족 사이의 주종관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헌법의 평등권 보장 취지와 인권 이념에 반한다. 호주제가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 봉건적 유교이데올로기와 일본 천황제 파시즘이 결합해 남한 사회에 정착한 이후 권위주의 정권이 이를 적극적으로 정권 유지에 부합하는 제도로 유지·고착시켰기 때문이다. 호주제는 단순히 남성 중심의 문화적 의식구조에 의해 유지된 것이 아니라 구한말 봉건제적 세계관의 한계를 지닌 복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림세력이 조직적으로 호주제 폐지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호주제는 우리 사회에 너무 오래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국회의 입법을 통한 방법만으로는 부족하다.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과 헌법소원심판청구를 통해 위헌 결정을 받아내는 소송 전략을 제시하는 바이다. 최종적으로 유엔 인권 이사회에 제소하는 방법도 있다. 호주제 폐지 후의 대안으로 가족별 호적의 편제방법, 주민등록제도와의 일원화 등을 검토할 수 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대에 설치된 주민등록제도와 관련한 호적제도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고 지적했다. 2003년 3월, 법무부 장관 강금실은 "법무부는 법의 집행뿐 아니라 ‘소수자 집단’의 인권 향상에도 적극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남녀불평등을 야기하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 호주제 의 폐지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라고 말하며 호주제 폐지를 공언하였다.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고, 2005년 3월에 민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3년 후인 2008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이 시행되었다. 호주제폐지시민모임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4회 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33대 (민선 4기) 열린우리당 27.3% 1,077,890표 2위 낙선 공식 홈페이지 트위터 미니홈피 강금실을 사랑하는 사람들 분류:1957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곡산 강씨 분류:제주시 출신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경기여자고등학교 동문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서울아현초등학교 동문 분류:숙명여자중학교 동문 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판사 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 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 분류:김대중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법조인 분류:광운대학교 교수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각료 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 분류:열린우리당 당원 분류:친노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7년) 당원 분류:중도참여개혁통합민주신정계파 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 분류:시민통합당 당원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4년) 당원 분류:친문 분류:옛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 분류:참여연대 분류:대한민국의 여성주의자 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 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 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 분류:대한민국의 법률학 평론가 분류:한양대학교 교수 분류:성공회대학교 교수 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 분류:동국대학교 교수 분류:서강대학교 교수 분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분류: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분류: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 분류:홍익대학교 교수 분류:숭실대학교 교수 분류:국민대학교 교수 분류:연세대학교 교수 분류:단국대학교 교수 분류:개신교도 이탈자 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메테인 분자 구조 가장 단순한 탄화수소 화합물 유기화학 (有機化學, Organic chemistry)은 유기 화합물의 구조나 특성, 제법 및 응용등을 연구하는 화학의 한 분야이다. 원래는 살아있는 생명체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유기물)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었으나, 1828년 프리드리히 뵐러가 무기물인 사이안산암모늄으로부터 요소를 만들어내어, 유기물질이 생명체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실험실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음이 알려진 이후로는 탄소를 포함하는 화합물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재정의되었다. 유기화학에서의 유기화합물은 일반적으로 탄소와 수소를 포함하고 있는 분자를 지칭한다. 주어진 화합물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유기화학에서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여러가지 분석기법이 동원되는데, 기본적으로 NMR, IR, Mass Spectrometry Data등이 필요하며 기타 특성으로 고체화합물의 경우 녹는점을 측정하며 UV-vis data를 통해 분자내 발색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광학활성인 화합물의 경우 비선광도(specific rotation)나 CD spectrum등의 자료가 필요하다. 추가적인 구조분석자료로 고체시료의 경우 X-ray crystallography data가 이용된다. 하나의 유기 화합물의 이름과 표현 유기 화합물의 이름은 규칙을 논리적으로 따라 조직적인 이름으로 이루어지거나, 다양한 전통을 따라 비조직적인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조직적인 이름은 IUPAC의 권고로 규정되어 이루어진다. 조직적인 명명법은 분자 안의 부모 구조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이때 이러한 부모 이름은 접두사, 접미사, 숫자로 수정된다. 수백만의 유기 화합물이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이름을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IUPAC 권고는 복잡한 분자들이 아닌 단순한 화합물에 따라가려고 한다. 조직적인 명명을 이용하려면 부모 구조의 이름과 그 구조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부모 구조에는 탄화 수소, 복소환식화합물, 또 그에 따른 단작용하는 파생물을 포함한다. 조직적이지 않은 명명은 적어도 유기 화학자들에게 더 단순하고 애매함이 없다. 비조직적인 이름은 화합물의 구조를 가리키지 않는다. 비조직적인 이름은 대부분의 천연 상품을 포함하는 복잡한 분자들에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비공식적으로 이름이 붙은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라는 이름은 조직적으로 이름을 붙이면 (6aR,9R)-N,N-diethyl-7-methyl-4,6,6a,7,8,9-hexahydroindolo-4,3-fg quinoline-9-carboxamide가 된다. 유기 화합물 유기 반응 Organic-Chemistry.org, Organic Chemistry Portal - Recent Abstracts and (Name)Reactions |
남량(南梁) 보통(普通) 8년 / 대통(大通) 원년 북위(北魏) 효창(孝昌) 3년 남량(南梁) 무제(武帝) 26년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 12년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4년 고구려(高句麗) 안장왕(安臧王) 9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5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즉위 9월 15일(음력 8월 5일) -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이 불교 공인 +여기서 이차돈은 죽으면서 목에서 흰 피가 났으며, 꽃 비가 내렸다고 한다. 금관가야의 후손이자 신라의 명장 김무력 백제 28대 국왕 혜왕 8월 1일 -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누스 1세 사망 |
남량(南梁) 중대통(中大通) 4년 북위(北魏) 보태(普泰) 2년 / 중흥(中興) 2년 / 태창(太昌) 원년 / 영흥(永興) 원년 / 영희(永熙) 원년 남량(南梁) 무제(武帝) 31년 북위(北魏) 절민제(節閔帝) 2년 / 폐제(廢帝) 2년 / 효무제(孝武帝) 원년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9년 고구려(高句麗) 안원왕(安原王) 2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10년 신라, 금관가야를 병합하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항하여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다. |
남량(南梁) 대동(大同) 2년 동위(東魏) 천평(天平) 3년 서위(西魏) 대통(大統) 2년 신라(新羅) 건원(建元) 원년 남량(南梁) 무제(武帝) 35년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3년 서위(西魏) 경문제(景文帝) 2년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3년 고구려(高句麗) 안원왕(安原王) 6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14년 신라가 최초로 연호를 칭하다. 비티게스가 동고트왕국의 제4대 국왕이 되다. 12월 9일 -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하다. 4월 22일 - 교황 아가피토 1세, 57대 로마 교황. 테오다하드, 동고트왕국 3대 국왕. |
남량(南梁) 대동(大同) 4년 동위(東魏) 원상(元象) 원년 서위(西魏) 대통(大統) 4년 신라(新羅) 건원(建元) 3년 남량(南梁) 무제(武帝) 37년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5년 서위(西魏) 경문제(景文帝) 4년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5년 고구려(高句麗) 안원왕(安原王) 8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16년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다. 백제가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다. 일본에 불교 전함 3월 - 동로마 제국, 로마 근교 밀비우스 다리에서 동고트군을 격파하다. |
남량(南梁) 대동(大同) 6년 동위(東魏) 흥화(興和) 2년 서위(西魏) 대통(大統) 6년 신라(新羅) 건원(建元) 5년 남량(南梁) 무제(武帝) 39년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7년 서위(西魏) 경문제(景文帝) 6년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7년 / 진흥왕(眞興王) 원년 고구려(高句麗) 안원왕(安原王) 10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18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가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점령되고, 국왕 비티게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다. 동고트 왕국의 일디바드가 비티게스의 뒤를 이어 5대 국왕이 되다. 6월 -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왕, 호스로우 1세가 동로마 제국의 안티옥을 점령하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 64대 로마 교황. 교황 보니파시오 3세, 66대 로마 교황. 신라(新羅) 23대 왕 법흥왕(法興王) |
남량(南梁) 대동(大同) 11년 동위(東魏) 무정(武定) 3년 서위(西魏) 대통(大統) 11년 신라(新羅) 건원(建元) 10년 베트남 전 리 왕조(前李朝) 천덕(天德) 2년 남량(南梁) 무제(武帝) 44년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12년 서위(西魏) 경문제(景文帝) 11년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6년 고구려(高句麗) 안원왕(安原王) 15년 / 양원왕(陽原王) 원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23년 토틸라의 동고트족 군대가 로마를 점령, 약탈하다. 신라 거칠부가 《국사》(國史)를 편찬하고 파진찬으로 임명되다. 고구려(高句麗) 23대 국왕 안원왕(安原王) |
남량(南梁) 태청(太淸) 2년 동위(東魏) 무정(武定) 6년 서위(西魏) 대통(大統) 14년 신라(新羅) 건원(建元) 13년 베트남 전 리 왕조(前李朝) 천덕(天德) 5년 남량(南梁) 무제(武帝) 47년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15년 서위(西魏) 경문제(景文帝) 14년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9년 고구려(高句麗) 양원왕(陽原王) 4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26년 중국 난징에서 후경의 난 일어남 8월 31일(윤 7월 12일) - 백제 사신 약엽례(掠葉禮)가 백제로 귀환함. 6월 28일 - 비잔티움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부인 테오도라 |
금속 공학, 야금학(metallurgy)는 재료 공학의 한 분야이지만 특히 금속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대한 평가나 새로운 금속의 연구 개발을 실시하는 학문이다.본래는 광석에서 유용한 금속을 채취 정제·가공하여 여러가지 목적에 따른 실용 가능한 금속 재료·합금을 제조하는 이른바 야금을 범위로 하는 학문이며, 야금학의 이름도 여기에서 딴 것이다. 역사적으로 금속공학은 인류가 구리를 제련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금속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많다. 금속공학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분야로 파생되고 또 물리학이나 화학 등과 같은 다른 학문 분야와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개념들을 사용하게 되어 엄밀히 따지면 재료공학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반대로 재료공학에서 사용하는 상당수의 논리 체계는 전통적인 금속공학에서 차용한 것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흔히 금속·재료공학이라고 많이 표현한다. 재료를 구분하는 방법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지만, 크게 무기 재료(금속/세라믹)와 유기 재료(플라스틱 등의 고분자 재료)로 구분할 수 있다. |
천명제 (天命帝, 1559년 2월 21일 ~ 1626년 9월 30일) 즉 누르가치는 건주여진의 출신으로 건주여진을 통합한 뒤 1616년에 자신을 여진의 한으로 선언하고, 1618년에는 자신의 국가명을 금이라고 발표했으며, 1621년까지 명나라의 요동 지역 대부분을 석권했다. 누르가치는 분명 황제가 아니었지만 그의 사후에 개정된 기록에서는 항상 황제라고 언급됐다. 청 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누르가치는 성스러운 황제 ()이자, 황실의 종교적 의식에서 숭배를 받는 청 제국의 설립자였다. 휘는 아이신 교로 누르가치 (,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연호는 천명 (天命, 이라고 부른다. 첫번째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무황제 (太祖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武皇帝)으로, 줄여서 타이주 호롱오 한 (太祖武皇帝, 네번째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으로, 줄여서 고황제 (太祖高皇帝이다. 별호로는 태조한조종 (太祖汗祖宗이 있다. 생전 도장에 새겨진 칭호는 압카이 푸링가 아이신 구룬 한 ()이다. 누르가치(奴兒哈赤의 이름은 지금까지 누루하치 · 누루카치 와 누하치 등의 독법이 있지만, 누르가치가 올바른 명칭이다. 또한 그의 이름 누르가치는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을 가진 누허치(奴可齊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누르가치는 1559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 탁시에게는 최소한 세 명의 처첩이 있었다. 사료로 고증할 수 있는 본처는 아구(阿古 도독의 딸이다. 성은 히타라(喜塔腊, 이름은 어머치(額穆齊인 그녀는 탁시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첫째가 누르가치, 셋째 아들이 슈르가치, 넷째 아들이 야르가치(雅爾哈齊다. 딸은 정확한 이름이 남아있지 않다. 누르가치의 집안은 건주여진의 숙수후부(蘇克素滸部에 속했었다. 누르가치는 요동에서 개원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해서여진인들을 통합하여 하다국을 설립하고, 여진과 몽골의 지도자들은 물론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과도 밀접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었던 완 한()의 족녀 하다나라 컨저(哈達那拉 懇哲의 학대를 받아 18세의 나이에 퉁갸씨와의 결혼과 동시에 동생 슈르가치 등과 함께 분가했다. 탁시는 분가하는 누르가치에게 노비 남성 6명, 여성 5명, 마 2기, 소 4마리를 지급했다. 누르가치는 처가인 퉁갸 가문으로 가서 직접 인삼을 채취하여 명나라 상인들에 파는 등 빈곤하게 살아간다. 6년 뒤, 조부 교창아와 부 탁시가 구러산성 공방전에서 명군의 오인으로 살해되자 본성 허투아라로 귀환했다. 16세기 말기, 누르가치가 통일하기 직전의 여진족은 현재 중국의 동북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에서, 초기적 형태의 국가들을 이루거나 부족 혹은 씨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의 지역에 일종의 행정구획인 위소(衛所)를 200여개 설치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장을 그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했다. 이때 명이 설치한 여진위소는 종족, 인구수 등 모든 면에서 명나라 내지의 위소와는 전혀 다른 전통적 여진부락에 불과하며 여진족의 부락에 위소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였다. 당시 명은 이들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의 세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세 집단의 하부에는 아이만(部이나 구룬(國으로 불린 여러 정치적 독립집단이 존재했고, 때로는 이 하부 집단도 통일되지 못한 채 내부적으로 여러 씨족과 부족이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건주여진은 압록강의 북쪽으로 혼하(渾河) 상류부터 동가강(佟家江)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蘇克素滸·후너허(渾河·왕야·동오· 저천(哲陳의 5개 아이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외에 백두산 일대의 너옌(訥殷·주셔리(朱舍里·야루 걍(鴨綠江의 3개 아이만도 때로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었다. 건주여진에 속한 여러 부는 정치적 독립체였고, 수장 가문 사이의 혈연적 친연관계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건주여진은 씨족을 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여러 씨족이 하나의 마을에 거주하거나 하나의 씨족이 분화하여 여러 마을에서 분산 거주하는 지연적 형태의 거주로 발전해 있었다. 또한 생산의 면에서 수렵이나 목축, 그리고 채집경제가 여전히 중요했지만 농업과 교역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농업과 교역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계층의 분화가 촉진되어 갔고, 각 부 사이에 명나라와의 교역권을 둘러싸고 갈등과 마찰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후룬 4부라고도 불렸는데, 우라·하다(哈達·예허·호이파(輝發의 4개의 구룬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송화강 하류지역에서 거주했으며, 사회와 생산의 발전 수준은 건주여진과 유사했지만 세력은 건주여진보다 더 강력했다. 건주여진의 여러 부의 수장 가문 사이에 공통의 혈연적 기원이 보이지 않는 반면, 해서여진 4개 부의 수장 가문은 ‘나라 하라 를 공유했다. 그러나 성을 공유했다고 해서 이들이 하나의 씨족에서 파생된 것은 아니었다. 기원의 측면에서 해서여진의 종주격인 우라는 본래 명칭이 ‘후룬’이었고, 수장 일족의 성은 ‘나라’였다. 하다부는 우라부의 수장 일족의 일원이 독립하여 설립한 부였다. 호이파부의 시조인 앙구리()·싱구리()는 본래 흑룡강 유역에서 거주하던 니마차부()의 일원으로 익더리()라는 성을 사용했으나, 송화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로 성을 바꾸고 부를 설립했다. 예허부는 해서여진 4개 부 가운데 특히 이질적이었다. 예허는 몽골인인 싱건 다르한(이 예허 강변으로 이주하여 성을 ‘나라’로 바꾼 후 세운 부였고, 이 때문에 종족과 언어면에서 몽골과 여진이 섞인 독특함을 띠고 있었다. 후룬 구룬의 수장 가문들은 ‘나라’ 성을 공유했고 상호 연맹을 형성했지만, 각 부는 정치적으로 독립체였다. 야인여진은 무단강 일대와 그 동쪽의 오늘날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서 거주했다. 명나라가 야인여진이라고 부른 집단을 훗날 청대에 만주족은 동해지역(東海이라고 불렀다. 야인여진은 후르하(虎爾哈·워지(窩集·와르카(瓦爾喀 등의 부로 나뉘어 있었고, 이 외에 허저(赫哲·퍄카(費雅喀·오로촌·캬카라(哈克拉 등의 부족까지 포함되었다. 건주와 해서가 어느정도 기원의 단일성이나 지리적 근린성을 고려한 구분이었음에 반해, 야인여진은 건주와 해서여진을 제외하고 명나라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한 다양한 집단을 통괄하여 하나의 범주에 넣은 무원칙한 구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인여진의 공통적인 사회상을 찾아보면, 이들은 주로 수렵과 어로를 영위했고, 건주나 해서와 달리 씨족이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야인여진에 포괄된 여러 부는 정치적 단일체라기보다 씨족들의 연맹체적 성격이 강했다. 누르가치의 조부와 부친이 명군에게 오인 살해 당한 뒤 이성량은 그를 위무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우선 그 에게 칙서를 수여하고 말을 하사했다. 그에게 지휘 직위를 주도록 명나라 조정에 건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성량과는 달리 요동 관원들은 니칸 와이란에게 더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런 행동은 누르가치의 불만을 샀다. 당시 건주여진에는 여러 막강한 세력이 있었다. 숙수후부, 후너허부, 왕야부, 동오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부족은 명나라 조정에서 니칸 와이란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누르가치를 멀리했다. 심지어 같은 일가인 교창아의 여러 형제들 세력조차 니칸 와이란에게 귀순해 의지했다. 누르가치 역시 명 조정에 드러내놓고 강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그는 도리 없이 몰래 니칸 와이란에게 불만이 있거나 원한이 있는 건주의 작은 부족의 수령들과 긴밀한 연계를 취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갸무후성주 가하샨(噶哈善, , 사르후성주 구와라(卦喇와 그 형제 노미나(諾密納 등이었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힘을 모아 니칸 와이란을 타도하는 대열이 동참하기로 하늘에 맹세했다. 다른 한편, 누르가치는 명나라 조정에 "내 조부와 부친의 죽음은 사실 니칸 와이란의 사주에 의한 것아다. 그를 사로잡아 나에게 넘겨줘야 비로소 마음이 편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명 조정에서는 당연히 그에게 회답하지 않았고, 누르가치는 이를 복수를 위한 군대를 일으키는 빌미로 삼아 얼마 후 니칸 와이란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누르가치의 세력은 크지 않았는데 건주의 각 부족에서 그를 지지한 사람은 100명에 불과했다. 그의 부친도 그이기 고작 갑옷 13벌의 미미한 유산만 물려줬다. 그러나 누르가치는 이런 열악한 상황이고 불구하고 1583년 5월에 니칸 와이란이 성주인 투런(圖倫성으로 진공을 개시했다. 출병 당시에 노미나가 니칸 와이란과 내통해 출정 시기를 누설했다. 이로 인해 니칸 와이란은 누르가치의 예봉을 피해 피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런성은 누르가치에게 점령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25세의 누르가치가 감히 명나라 군다에 지원하는 건주의 주인 니칸 외이란을 패퇴시킨 것은 대사건이었다. 그의 지위는 급작스럽게 부상하게 됐다. 누르가치는 꾀를 부려 노미나의 세력을 제거한 다음 노미나가 공격할 것을 제의한 바르다이(巴爾達성까지 함락했다. 누르가치가 투런성과 사르후성을 얻은 뒤로 숙수후부의 사람은 대부분 누르가치의 부족으로 편입됐다. 그는 시로 복속시킨 이들을 아주 잘 대해주었으며 그들이 편안하게 살면서 평소에는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게 했다. 그러나 누르가치의 일족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그의 1대조, 2대조, 3대조, 6대조의 자손들이 종묘사직에서 맹세한 다음 누르가치를 모살하려고 했다. 누르가치의 시위와 매부 가하샨이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는 가하샨의 복수를 위해 마르둔(玛尔墩 성채에서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이듬해 동오부를 겸병하는 데 성공했다. 1585년 2월, 누르가치는 또다시 건주의 작은 부족인 저천부의 자이퍈(界凡성을 목표로 출병에 나섰다가 철군하는 과정에서 태란강에 이르렀을 때 자이퍈과 바르다이 등의 성주가 규합한 400여 명의 병력을 격파하여 자이퍈성주 너신(內申과 또 다른 수령 바무니(把木尼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누르가치는 돌아와서 병마를 정돈하고 군비의 확충이 적극 나선 뒤 4월 저천부를 재정벌한다. 저천부는 이에 누르가치를 습격하기로 했다. 토모호(托木河, 장갸(張佳, 바르다이, 철아호(撤兒湖), 자이퍈의 성주가 800여 명의 병사를 규합해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누르가치는 어린 동생 무르가치와 부하를 이끌고 그들을 패퇴시켰다. 1년 후 토모호성을 함락했고, 1587년에는 용맹한 장수 어이두로 하여금 바르다이성을 공격해 저천부를 소멸시켰다. 숙수후부와 동오부를 겸병하고 저천부를 소멸한 누르가치는 1586년 7월, 니칸 와이란이 은거한 오르혼(俄尔浑성을 공격했다. 이때 니칸 와이란은 도주하고 니칸 와이란의 향병 40인이 누르가치에게 30여 군데 창상을 입히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누르가치는 40기를 보내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로 도주하던 니칸 와이란을 추격하도록 했고, 니칸 와이란은 명나라의 변경수비대의 수수방관으로 자이사에게 참수당한 채로 누르가치에게 받쳐졌다. 누르가치는 이로써 자신의 미래 사업을 위한 공고한 기초를 닦았다. 명나라 군대가 누르가치로 하여금 니칸 와이란을 죽이도록 방치한건 누르가치라는 존재를 인정한 까닭이었다. 이에 건주여진의 대부분의 부족이 앞을 다퉈 그에게 귀순하기 시작했다. 수완(蘇完 부족장 솔고(索爾果, 동오 부족장의 손자 호호리(何和禮, 야르구(雅爾古 촌장 후르한(扈爾漢 등이 모두 1588년에 무리를 이끌고 귀순한 인물이다. 같은 해 9월 누르가치는 군대를 이끌고 숙수후강과 동오부 사이의 파저강 상류의 작은 부락인 완안성을 공격하여 왕야부를 통합했다. 건주여진에 대한 누르가치의 통일 사업은 이로써 완전히 끝나게 됐다. 1593년(만력 21년) 누르가치의 건주여진은 몽골의 코르친과 해서여진을 중심으로 한 아홉 부족 연합군과 격돌하여 완승을 거뒀다. 이 전투는 구러 전투 라 불린다. 이때부터 여진의 여러 부족이 건주여진에 내부하게 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엄호장군이라는 관직을 하사했다. 또한 이성량은 2년 전에 부패로 인해 탄핵되어 경질당했다. 이 시기는 명나라가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에 군사력을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관심을 덜 끌 수 있었다. 1599년 어르더니(額爾德尼, Erdeni) 박시와 까까이(噶盖, G ag ai) 자르구치에게 명하여 몽골 문자를 개량한 여진 문자(無圏點点字)를 창제하게 했고, 같은 해 9월 7일에는, 자신을 배신한 해서여진의 하다(哈達, Hada)부를 복속했다. 또한 12월에는 몽골 칼카 바요트부의 엉거더르 타이지와 그가 인솔한 5위의 사신이 누르가치를 쿤두런 한(에 추대하였다. 1607년 9월에 호이파(輝發, Hoifa)부를, 1613년에는 우라부를 복속했다. 1616년 2월 17일, 누르가치는 허투아라에서 팔기 버이러와 여덟 암반()의 추대를 받아 단순히 건주의 지도자인 총명한 존경받는 한(聰睿恭敬汗 에서 가난하여 고통받을 여진 열국들을 돌보라는 천명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겅옌 한(英明汗으로 즉위했다. 그 사이에 삼대정은 거의 해결되었고, 명나라는 누르가치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해서여진의 강력한 예허부를 지지함으로써 누르가치의 대항마로 삼으려 했다. 1618년(만력 46년) 4월, 여진국()의 겅옌 한(英明汗 누르가치는 "일곱가지 큰 원한"(七大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문서에는 명나라가 예허에 가담하여 여진국을 공격한 것, 조부 교창아와 아버지 탁시가 명군에게 사살당한 것 등이 적혀 있다. 이 무렵, 누르가치는 본거지인 허투아라에서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천명(天命, 이라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1619년 3월 명나라는 예허부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여 47만에 이르는 여진 토벌군을 결성하고 이듬해 무순에서 가까운 사르훠(薩爾滸, Sarhū)에서 10만여 명이라 칭하는 만주의 군대과 격돌했다. 수적으로 불리한 여진이었지만, 공을 탐한 명나라 장군 두송이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공격을 했기 때문에 각개 격파할 수 있었다( 사르후 전투 ).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도 부차 전투 에서 포위되어 김응하가 전사하고, 곧 항복하게 된다. 사르훠에서 명군에 큰 타격을 준 누르하치는 후원자를 잃은 예허부를 습격하여, 복속함으로써 흑룡강 일대의 야인여진들을 제외한 여진족을 통일했다. 1621년(천명 4년), 기세가 오른 누르가치는 심양, 요양을 잇따라 함락시켰고, 요양 옆의 심양으로 천도했다. 이 때 금의 세력권은 요동 전역에 미쳤다. 1626년(천명 9년), 연전연승하던 누르가치는 명나라의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을 함락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영원성 에서 장군 원숭환이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홍이포를 대량으로 거취하고 금군을 맞이했다. 홍이포의 위력에 금군은 패배하고, 퇴각했다. 영원성 전투 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영원성 전투 이후 누르가치는 몽골의 칼카 부족을 정벌했다. 또 코르친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그렇기에 근대의 역사학자들도 누르가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주장을 하나같이 믿지 못할 견해로 본다. 그가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 부족으로 확실치 않다. 원숭환은 "누르가치가 영원의 패전을 수치로 여겨 이로 인한 화로 종기가 생겼다"고 말한 바 있다. 팽손이 또한 《산중문견록》에 "건주국한의 등에 종기가 생겼다"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누르가치의 사망은 종기가 돋는 피부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청하에서 온천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기가 돋은 원인이 영원성 전투에서의 포격에 의해 다친 옛 상처가 재발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누르가치는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국가를 통치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누르가치의 8남 홍 타이지는 자신과 함께 후금의 최고 권력자였던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의 양해를 받아 한의 지위를 계승했다. 누르가치는 복릉(福陵에 안장됐다. 요동 정벌은 청 제국의 건설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그것을 탄생 이 암시하는 무한한 에너지, 희망, 야망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누르가치에게는 그런 것들이 다소 다르게 보였음이 틀리없다. 1621년에 요동 대부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을 때 누르가치는 거의 62세였다. 그는 다년을 제외한 인생 3분의 2가량을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보냈고, 때로는 자신의 가족구성원들과도 전투를 벌였다. 자신의 통치를 소규모 촌락 집단에서 명조의 변경인 광활한 요동 지역을 포함한, 만주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그의 군사작전의 형태가 의미하는 것이든, 그가 선포한 전쟁의 이유에 나타난 요지이든, 그의 종족이 몇 세대에 걸쳐 키워온 부의 경제족 기초를 보호히고 향상하게 하려는 한결같은 목적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누르가치의 국가는 독점적인 경제권의 집행과 그 때문에 생겨나는 부의 통제를 기반으로 설립된 지역 정권이었다. 이러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르가치는 요동을 방악하고,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자신의 지역적 패권에 대한 인정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했지만, 더 많은 일을 하려고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봉호 시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별칭 비고 정실 적복진 (嫡福晉) 효원고황후 (孝元高皇后) 동가 합합납찰청 (佟佳 哈哈納扎靑) 1560년 ~ 1592년 원비(元妃) 천명제의 첫 정실부인으로 천명제가 나라를 세우는 데 보좌를 하여 공이 큼 계복진 (繼福晉) 효선고황후 (孝宣高皇后) 부찰 곤대 (富察 袞代) ? ~ 1620년 계비(繼妃) 천명 5년(1620년) 죄로 사형됨. 황후 계복진 (繼福晋) 효열무황후(孝烈武皇后) 오랍나랍 아파해(烏喇那拉 阿巴亥) 1590년 ~ 1626년 대비(大妃) 예충친왕 도르곤의 생모이나 천명제 사후 순장을 강요당하여 순장됨. 측복진 (側福晋)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엽혁나랍 맹고저저 (葉赫那拉 孟固姐姐) 1575년 ~ 1603년 숭덕제의 생모, 사후 추존됨 후궁 측복진 (側福晋) 수강태비(壽康太妃) 박이제길특씨 (博尔濟吉特氏) ? ~ 1655년 강희제에 의해 추존. 측비(側妃) 합달납라 아민저저 (哈達納喇 阿敏姐姐) 이이근각라씨 (伊爾根覺羅氏) 아민격격(阿敏格格) 엽혁나랍씨 (葉赫納喇氏) 효자고황후의 동생. 박이제길특씨 (博爾濟吉特氏) ? ~ 1643년 서복진 (庶福晋) 서비(庶妃) 조가씨 (兆佳氏) 뉴호록씨 (紐祜祿氏) 1566년~? 가목호각라 진가 (嘉穆瑚覺羅 眞哥) 서림각라씨 (西林覺羅氏) ?~1646년 이이근각라씨 (伊爾根覺羅氏) 아제근 (阿濟根) ? ~ 1626년 천명제 사후 순장됨. 낙비(樂妃) 이혜하 (李惠霞) 회족 출신 소복진(小福晋) 덕인택 (德因泽) ? ~ 1626년 천명제 사후 순장됨. - 봉호(시호) 별칭 이름 생몰년도 생모 비고 1 광략패륵(廣略貝勒) 화석패륵(和碩貝勒) 저영(褚英) 1580년 ~ 1615년 원비 동가 씨 초봉은 태자이고, 후에 패륵으로 강등. 2 예열친왕(禮烈親王)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1583년 ~ 1648년 3 진국근민공(鎭國勤敏公) 진국공(鎭國公) 아배(阿拜) 1585년 ~ 1648년 서비 조가씨 4 진국극결장군(鎭國克潔將軍) 탕고대(湯古代) 1585년 ~ 1640년 서비 뉴호록씨 역모 죄를 지어 종실에 축출당함 5 다라패륵(多羅貝勒) 다라패륵(多羅貝勒) 망고이태(莽古爾泰) 1587년 ~ 1633년 계비 부찰씨 후에 봉호 추탈. 6 보국각후공(輔國愨厚公) 보국공(輔國公) 탑배(塔拜) 1589년 ~ 1639년 서비 뉴호록씨 7 요여민군왕(饒餘敏郡王) 다라요여군왕(多羅饒餘郡王) 아파태(阿巴泰) 1589년 ~ 1646년 측비 이이근각라씨 8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 홍타이지 1592년 ~ 1643년 효자고황후 엽혁나랍씨 9 진국각희공(鎭國恪僖公) 진국공(鎭國公) 파포태(巴布泰) 1592년 ~ 1655년 서비 가목호각라씨 10 이혁패륵(已革貝勒) 다라패륵(多羅貝勒) 덕격류(德格類) 1592년 ~ 1635년 계비 부찰씨 후의 봉호 추탈. 11 이혁진국장군(已革鎭國將軍) 진국장군(鎭國將軍) 파포해(巴布海) 1596년 ~ 1643년 서비 가목호각라 씨 12 이혁영친왕(已革英親王) 화석영친왕(和碩英親王) 아제격(阿濟格) 1605년 ~ 1651년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13 보국개직공(輔國介直公) 보국공(輔國公) 뇌모포(賴慕布) 1611년 ~ 1646년 서비 서림각라씨 14 예충친왕(睿忠親王) 화석예친왕(和碩睿親王) 도르곤(多尔衮) 1612년 ~ 1650년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순치제의 섭정왕 15 예통친왕(豫通親王) 화석덕예친왕(和碩德豫親王) 도도(多鐸) 1614년 ~ 1649년 16 비양과(費揚果) 1620년 ~ 1640년 계비 부찰씨 - 봉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별칭 비고 1 고륜단장공주(固倫端莊公主) 눈저(嫩姐) / 눈철(嫩哲) 1578년 ~ 1652년 원비 동가씨 동아공주(東果公主)동아격격(東果格格) 2 화석첨하공주(和碩沾河公主) 눈저(嫩姐) / 눈철(嫩哲) / 안철(顔哲) / 언철(鄢哲) 1587년 ~ 1646년 측비 이이근각라씨 눈철격격(嫩哲格格)첨하공주(沾河公主) 3 화석합달공주(和碩哈達公主) 망고제(莽古濟) 1590년 ~ 1635년 계비 부찰씨 합달공주(哈達公主)합달격격(哈達格格) 4 화석공주(和碩公主) 목고십(穆庫什) 1595년 ~ ? 서비 가목호각라씨 화석격격(和碩格格) 5 ( 5황녀 ) 1597년 ~ 1613년 6 공주(公主) ( 6황녀 ) 1600년 ~ 1646년 7 고륜공주(固倫公主) 1604년 ~ 1685년 서비 이이근각라씨 향군품급(鄕君品級) 8 화석공주(和碩公主) 총고도(聰古圖) 1612년 ~ 1646년 측비 엽혁나랍씨 총고륜격격(聰古倫格格) 9 1590년 ~ 1649년 4복진 과이가씨(瓜爾佳氏) 파약특격격(巴約特格格) 손대격격(蓀岱格格) 화석장친왕 서이합제(천명제의 동생)의 딸 10 1612년 ~ 1648년 순철격격(肫哲格格) 화석장친왕 서이합제의 4남의 딸이자 천명제의 조카 ※수강태비를 제외한 비(妃)는 실제로 봉작된 위호가 아닌 사칭(史稱)으로, 후금(後金)의 명부(命夫) 위호인 복진(계복진·측복진·서복진)을 청(淸) 개국 후 정비된 후비(后妃) 제도에 맞춘 것이다. 원비는 원배(元配·初配)임을 강조하기 위한 사칭(史稱)으로, 숭덕제의 원배 뉴호록 씨 역시 마찬가지다. 《회천문》 (MBC, 1986년~1986년, 배우:백인철) 《왕의 얼굴》 (KBS2 수목드라마, 2014년~2015년, 배우:송영규)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누르하치 분류:1559년 태어남 분류:1626년 죽음 분류:후금의 칸 분류:청나라의 황제 분류:헤이룽장성 출신 분류:작전 중 사망한 군주 분류:문자 발명가 분류:건주여진 분류:창업군주 분류:17세기 중국 사람 분류:여진 통치자 분류:팔기군 분류:17세기 중국의 군주 |
한산 이씨 (韓山 李氏)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가 서로 다른 두 계통이 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의 5대조인 이윤경 (본래 광주 이씨 후손)을 시조로 하는 혈족이 호장공계(戶長公系) 한산 이씨이다. 문정공파 문열공파 문혜공파 순절공파 *양경공파 *이의공파 *직강공파 효령대군 (태종의 둘째 아들) 사위 이훈 인흥군 (선조의 서자) 사위 이수문 정순공주 (태종의 장녀) 사위 문혜공 이계린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口재(在) 승(承) 口직(稙) 口규(珪) 口구(求) 口복(馥) 口원(遠) 口준(濬)口수(洙)口식(湜) 口석(䄷)口화(禾)口선(秈) 口균(均)口배(培)口응(膺)민(珉) 口순(淳)口호(灝)口양(洋)口현(泫) 口래(來)口수(穗)口영(穎)口기(禾+己) 口용(瑢)口락(珞) 口홍(洪)口문(汶) 균(囷)口소(穌) 계(桂)보(珤) 광(洸)왕(汪) 口태(泰)승(乘) 口영(瑩)口천(玔) 口황(滉)口철(澈) 口수(垂)口교(矯) 口숙(琡)口수(垂)민(玟) 호장공 기준으로 보고 싶다면, 이한의 5대조로 이윤우 (본래 광주 이씨 후손)를 시조로 하는 혈족이 권지공계(權知公系) 한산 이씨이다. *한평군파 좌랑공파 통례공파 총제공파 *판중추공파 한산 이씨 뿌리 정보 분류:이씨 분류:서천군 분류:광주 이씨 분류:충청남도 소재 성씨 |
고사기 ()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그 서문에 따르면 와도(和銅) 5년(712년)에 겐메이 천황의 부름을 받아 오호노아소미 야스마로(太朝臣安麻呂)가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고지키라는 제목은 음독이며, 훈독으로는 후루코토후미 ()라고도 읽지만 일반적으로 음독으로 불린다.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필사본 형태로 몇 가지 사본이 전하고 있다(성립 연대는 이 사본의 서문에 기록된 날짜에 따른 것이다). 내용은 일본에서 신대(神代)라 불리는 신화 시대의 아메쓰치(天地)의 창조에서 시작해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시대에 이르는 여러 가지 사건(신화나 전설 등을 포함)과 함께, 고대 일본의 수많은 노래들을 수록하고 있다. 덧붙여 「다카마노하라(高天原)」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점도 《고사기》의 특징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와 전설을 기록한 역사서로 알려져 《일본서기》와 함께 고전으로 중시되나,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더 후대를 기술한 책인 일본서기로 간주된다. 《일본서기》처럼 율령국가의 정사(正史)로서 황명으로 편찬된 책은 아니지만, 서문에 "제기(帝紀)를 찬록하여 구사(舊辭)를 토핵하고, 거짓을 깎아내고 사실을 가려 후세에 전해주려 한다(撰錄帝紀 討覈舊辭 削僞定實 欲流後葉)"는 덴무 천황(天武天皇)의 발언이 실려있는 것에서 미루어 《일본서기》와 같은 황명으로 편찬된 사서로 간주하기도 한다. 당시 천황(天皇)을 제신(祭神)과 연결시켜 천황이 가진 권력의 정당성 과 정통성 을 주장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성립 경위를 기록한 서문에서는 덴무 천황의 명으로 히다노 아레(稗田阿礼)가 「송습(誦習)」하고 있던 「제황일계(帝皇日継)」(천황 계보)과 「선대구사」(先代舊辞)(오래된 전승)을 오오노 야스마로가 글로 적어서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송습」은 「암송」으로 해석되지만, 오기와라 아사오(荻原浅男)는 쇼가쿠칸에서 펴낸 『일본고전문학전집(日本古典文學全集)』 제1 《고사기》에서 「옛 기록을 보면서 고어로 구절을 떼어 반복해서 낭독하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책 제목인 《고사기(古事記)》는 원래는 단순히 오래된 책 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로 정식 이름은 아니며, 그 제목을 야스마로가 붙였는지 후대에 누군가가 붙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사기》는 상, 중, 하의 세 권으로 나뉘는데, 천황가의 계보와 신화·전설 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은 신들의 이야기, 중 · 하권은 각 대(代)의 계보와 천황 · 황자들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중권은 초대부터 15대 천황까지, 하권은 16대부터 33대 천황까지). 내용은 크게 「제기」(천황 기록) 부분과 「구사」(전승)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제기」는 초대 천황에서 제33대 스이코 천황까지의 이름, 황후 · 황자 · 황녀의 이름 및 그 자손의 씨족과 이밖에 황궁의 이름 · 치세 햇수 · 붕어한 해의 간지 · 수명 · 능묘의 소재지 및 그 치세의 주된 사건 등을 적었는데, 이것은 당시 야마토 조정의 가타리베() 등이 암송했다가 천황의 모가리(), 즉, 빈소에서의 제의 등에서 구술하던 관습을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구사」는 궁정 내의 이야기, 황실이나 국가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집계한 것으로 「제기」와 같은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 「제기」나 「구사」는 6세기 전반 내지 중엽 무렵까지의 시기에 야마토 조정의 오키미(大王) 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이나 호족이 창작한 구비전승으로서 천황 (오키미)이라는 존재가 야마토(일본)을 지배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임신의 난을 넘기고 신성화된 왕권의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천황의 지배하인 국가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일본 민족의 진정한 역사적 전승은 아니다. 한편, 널리 민중들에게도 수용하게 할 필요도 있었던 점에서, 민중을 의식한 상권 부분이 본래의 《고사기》가 아니냐고 보는 설도 있다. 오노 야스마로는 히다노 아레가 송습 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자의 훈독과 음독 표기를 섞고 알기 어려운 말에는 주(註)를 달았다. 본문은 변체 한문을 주로 하고 일본의 고어나 고유 명사처럼 한문으로 대용하기 어려운 것은 한 자 한 음 표기로 하고 있으며, 가요는 모두 한 자 한 음 표기로 본문의 한 자 한 음 표기 부분을 포함해 고대 일본의 특수한 가나 사용법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또 한 자 한 음 표기 가운데는 일부 신(神)의 이름 등의 오른쪽에 상(上), 거(去)처럼, 중국의 문서에서 볼 수 있는 한어의 성조인 사성 중 상성이나 거성 같은 문자를 배치하고 있다. 《고사기》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면서도 많은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데, 상당수는 민요나 속요로서 이야기에 맞추어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명한 것은 스사노오노 미코토(須佐之男命)가 구시나다 히메(櫛名田比売)와 결혼했을 때 지어 불렀다는, 와카의 시초로 여겨지는 등이 있다. 사료상으로 서문에 기록된 성립 과정이나 당시 황실의 관여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거나(서문에서 밝힌 천황의 지시로 완성했다는 《고사기》 성립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전혀 없다) 혹은 실제 사실과 모순되는 점이 많다는 견해가 있고,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같은 다른 공식 사서의 기록에도 《고사기》의 언급이 없는 등, 《고사기》라는 사서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증명해주는 물증도 없다는 점에서 《고사기》를 위서로 간주하는 설도 주창되고 있다(후술). 《고사기》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남북조 시대의 것으로 그 이전의 모습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른바 개찬설 도 있으나, 여기에는 고고학적인 반론이 있다. 《고사기》는 국가 통치의 기본을 확립할 의도에서 작성된 것으로 사서로서의 일면도 있으나, 또한 신화 · 전설 · 가요 등 문학성이 풍부한 내용을 가진 일본 문학사의 최초를 장식한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으며, 일본 신토의 경전 의 하나로서(《고사기》에 수록된 신들은, 현재 일본의 많은 신사에서 제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신도를 비롯한 일본의 종교 문화 · 정신 문화에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상권에 나와있는 신화 부분은 한국의 신화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한국의 신화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현존하는 《고사기》 사본은 주로 오나카토미노 사다요(大中臣定世)에 의해 필사된 것을 조본(祖本)으로 하는 「이세본(伊勢本)」 계통과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우라베 가네나가(卜部兼永)가 필사한 것을 조본으로 하는 「우라베본(卜部本)」 계통으로 나뉘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이세본」 계통으로 겐토쿠 2년/오안(應安) 4년(1371년)부터 이듬해 분추 원년/오안 5년(1372년)에 걸쳐 신후쿠지(真福寺)의 승려였던 겐유(賢瑜)가 필사한 신후쿠지본(真福寺本) 《고사기》 3첩이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것이 「이세본」의 조본이며, 발문에는 상 ・ 하권만 사다요가 필사하고, 중권은 후지와라노 미치마사(藤原通雅)가 필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밖에 고카 원년/에이토쿠 원년(1381년)에 필사된 도과본(道果本) 상권 전반부, 오에이 31년(1424년)에 필사된 도상본(道祥本) 상권, 오에이 33년(1426년)에 필사된 춘유본(春瑜本)이 있는데, 이 세 필사본은 모두 신후쿠지본과 가까워서 똑같이 「이세본」 계통으로 분류된다. 이밖의 사본은 모두 「우라베본」 계통이다. 고사기가 근세기 국학자들이 만든 역사서라는 위서설도 있다. 크게 고사기의 서문만 위서라는 설과 본문도 위서라는 설이 있다. 고대 일본어의 한자 표기법과 언어학적 측면에서 위서설은 부정되고 있다.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 다카미무스히노카미 가미무스히노카미 우마시아시카비히코지노카미 아메노토코타치노카미 풍토기 (風土記) 일본서기 상궁기 (上宮記) 고사기전 (古事記傳) 일본의 상대문학사 천황 와카 (和歌) 분류:일본의 역사책 분류:8세기 책 분류:신토 문학 분류:일본 신화 분류:나라 시대의 역사 책 분류:8세기 역사책 |
350px 일본서기 ()는 일본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일본의 육국사(六國史)의 첫 번째에 해당한다. 《고사기》까지 포함하면 현존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일본 역사서이다. 덴무 천황의 명으로 도네리 친왕이 중심이 되어 편찬, 680년경에 시작하여 720년에 완성했다. 일본의 신화 시대부터 지토 천황의 시대까지를 취급한다.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순한문의 편년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 30권과 계도(系圖) 1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계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편찬의 자료로는 제기(帝紀), 구사(舊辭), 제가(諸家)의 전승기록(傳承記錄), 정부의 공식기록, 개인의 수기(手記), 사원(寺院)의 내력 등을 기초로 하고, 특히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 한국의 사료와 《위서》 《진서》 등 중국의 사서를 병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서술된 한국과의 관계는 왜의 진구 황후가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였다는 황당무계한 대목이 있고 연대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사실이 드러나 한국 학자 중에는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평하는 사학자도 있다. 《고사기》와 달리, 일본서기에는 편찬한 경위가 쓰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편찬한 《속일본기》의 기록에 의해서 편찬 경위를 알 수 있다. 속일본기 720년 5월에 기록된 경위에는 "이전부터, 일품 도네리 친왕이 천황의 명을 받아 《일본기》(日本紀)를 편찬하였고, 기30권과 계도 한 권을 완성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중국의 사서인 《진서》 안제기(安帝紀)에는 266년에 왜국(倭國) 관련기사가 등장하는데, 그 다음으로는 5세기 초인 동진(東晋) 의희(義熙) 9년(413년)에 왜국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이전에 대해서는 중국의 사서에 왜국의 기술이 없고, 고고학적인 문자 기록도 없는 점에서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부른다(4세기 후반 이전의 야마토 왕권 성립 과정에 대해서는 야마토 왕권 항목 참조). 《송서》에 실린 왜왕 무(武)의 상표문이나 스다 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에 소장된 명문이 새겨진 구리거울, 지바현 이나리다이(稲荷台) 1호 고분에서 출토된 명문이 새겨진 철검(鐵劍),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稲荷山古墳)에서 발굴된 철검 명문 등으로 미루어 5세기대 일본에서 문자 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야마토 조정 내에서 상시적인 문자 기록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수서(隋書)》 권81의 열전(列傳)제46 동이(東夷)에는 왜국의 사정에 대해 "문자가 없고 단지 나무에 새기고 줄을 엮을 뿐인데, 백제에서 불법을 얻고 나서는 처음으로 문자가 생겨났다(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고 기록되어 있다. 1968년에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발견된 금착명철검(金錯銘鐵劍)에는 5세기 중순의 일본의 지방 호족이 작성한 오오히코(意富比垝) 에서 우와케노오미(乎獲居臣) 에 이르는 8세대에 걸치는 계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철검에 새겨진 오오히코 를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제8대 고겐 천황(孝元天皇)의 제1황자 「오히코노 미코토(大彦命)」(4도 장군의 한 명)로 비정하는 설이 제기되었고, 가와구치 가쓰야스(川口勝康)는 명문에 나오는 「우와케(乎獲居)」를 「오오히코」의 손자 「데요카리와케(弖已加利獲居)」로 보고, 도요카리와케노 미코토(豐韓別命)는 다케누나카와와케(武渟川別)의 아들로 비정하고 있지만, 철검 명문에서 데요카리와케는 다카리소니(多加利足尼)의 아들로 되어 있다.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의 발견으로 5세기 중순의 유랴쿠 천황의 실재를 인정한 다음, 그 전후, 특히 닌토쿠 천황 이후의 일본내 전승에 일정한 진실성을 부여하려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한편에서는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고사기》나 《일본서기》, 《조구키(上宮記)》의 기술은 신용할 수 없고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오키미의 이름이나 계도 등은 신뢰성이 부족하며,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의 명문에 대해서도 한자 읽기 방식을 딱 잘라서 짚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조구키》, 《제기》, 《구사》, 《고쿠기》, 《천황기》 와의 관련 쇼토쿠 태자에 의해 일본 최초의 국사 가 성립되기 전에도 각종 계도(系図)가 존재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게이타이 천황 즉 오도노 오키미(オホド王)의 계도를 기록한 《조구키(上宮記, 또는 가미쓰미야노후미)》나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가 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만약 스이코 천황 때인 600년경 《조구키(上宮記)》가 성립되었다면, 게이타이 천황이 사망한 531년과는 70년의 차이가 있다). 덧붙여 《고사기》, 《일본서기》 편찬의 기본사료가 된 《제기(帝紀)》, 《구사(舊辞)》는 7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스이코 천황 20년(620년)에 "이 해에 황태자는 시마노 오오오미와 함께 의논하여, 천황기(天皇記) 및 고쿠기(國記), 오미(臣) · 무라치(連) · 도모노 미야쓰코(伴造) · 구니노 미야쓰코(國造) 180부와 공민(公民) 등의 본기(本記)를 기술하였다(是歲 皇太子、島大臣共議之 錄天皇記及國記 臣 連 伴造 國造 百八十部并公民等本記)"는 기록을 전하고 있지만, 이러한 야마토 왕권의 사서 편찬에 이바지한 정확하고 충분한 문자 기록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할 뿐더러, 그것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 대부분은 구비전승에 의지해야 했다고 추정된다. 이때 쇼토쿠 태자가 만들었던 역사서 《고쿠기》나 《천황기》는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 이루카(入鹿) 부자가 멸망할 때 대부분 소실되고 화재를 면한 일부가 덴지 천황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현대에는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기술(특히 편년)은 정확함을 보증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시기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세 가지 이설이 전해지는 등 기술이 중첩되는 점, 또한 《일본서기》 편찬자가, 한반도 계통의 사서로 추정되는 《백제본기(百濟本記)》에 근거해, 531년설을 본문에 채용한 것을 통해서도 추측할 수 있다. 《백제본기》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과 함께 백제삼서(百濟三書) 라 불리며, 풍부한 기록성으로 3서 가운데서도 《일본서기》 편찬에 가장 많이 인용되었던 사서이다(《삼국사기》 백제본기와는 다르다). 종래의 일본 학자들은 6세기 후반 위덕왕의 시대에 백제가 왜왕에게 제출하고자 편찬한 것을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참조했으며 이 백제삼서 와 《일본서기》 기사를 대조해 나가면 고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여기에는 백제가 일본의 전통적인 속국이었다는 인식이 수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내용을 《백제본기》에 기초한 《일본서기》 게이타이기(繼體紀), 긴메이키(欽明紀)의 기술에는 일본 천황이 한반도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 보지 않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이 많이 있는데,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술(《백제본기》에 이르기를 "임나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고 일본부를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진구기(神功紀) ・ 오진기(應神紀)의 주석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신라가 귀국(貴國)을 받들지 않아 귀국은 사치히코(沙至比跪)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등 왜국을 귀국(貴國) 이라 부른 기술이 있는데,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는 이 단어를 종래의 일본 사학에서는 2인칭 대명사로 당신의 나라 라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일본서기》 본문에는 제3자의 상호간 대화에서도 왜국을 귀국 이라고 부르고 있는 부분이 있는 점을 들어 귀국 이란 가시코키 스메라미코토(可畏天皇) , 히지리노 오키미(聖王) 가 군림하는 귀한 나라 , 신의 나라 라는 의미라고 해석하였는데, 이처럼 일본을 아라히토카미(現人神) 가 지배하는 신국(神國)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 백제삼서에 기재된 일본 , 천황 등 호칭의 출현과 같은 덴무 천황의 시대의 일이며, 《백제본기》가 다룬 6세기 후반의 시대는 물론 일본 최초의 역사가 편찬되었던 스이코 천황 때에도 이러한 신국 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백제삼서 의 기사의 원형은 백제 왕조의 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한반도에서 백제가 멸망하고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걸쳐 왜국으로 망명한 옛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이 가지고 온 본국의 사서를 재편집하여 천황의 관부에 바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야마오 유키히사는 《일본서기》의 편찬자는 이것을 대폭으로 개변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율령국가체제 성립 과정에서의 국가적 대사업으로 이루어졌던 《일본서기》 편찬, 편찬 주체로 설정된 천황 의 신하라는 입장(정치적 지위 보전 등) 등의 문맥을 무시하고서는 백제삼서 와의 대음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일본서기》와 《백제본기》와의 대응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책의 원래 이름은 일본기(日本紀) 였다는 설과, 처음부터 일본서기 였다는 설이 있다. 일본기 로 보는 설은 《속일본기(續日本紀)》의 요로(養老) 4년 5월 계유조 기사에 서(書) 라는 글자가 없고 일본기라고만 적혀있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서》, 《후한서》의 경우처럼 기전체 사서를 서 라고 부르고, 제왕의 치세를 편년체로 기록한 것은 기(紀) 라고 불렀는데, 이 용법을 모방했다면 《일본서기》는 기 에 해당하므로 일본기(日本紀) 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이어 편찬된 《속일본기》나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모두 이름에 서 자가 없는 것도 이 설을 지지하는 근거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경우 서 자는 후대에 삽입된 것이 된다. 반대로 일본서기 로 보는 설은, 오래된 사본과 나라・ 헤이안 시대 초기의 성립 시기가 비교적 이른(아울러 편찬 시점과도 가까운) 시대의 사료에서도 일본서기 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고닌사기(弘仁私記)》 서문, 《석일본기(釋日本紀)》에 인용된 「엔기강기(延喜講記)」 등에서 일본서기 라고 되어 있으며,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영집해(令集解)》에서 인용한 《고기(古記)》(738년 성립)로 여겨진다. 또한 참고로 삼았던 중국의 사서는 《한서》 ・ 《후한서》처럼 전체를 서 라고 부르고 그 일부에 기 를 가진 체재를 따랐다. 이 점을 들어 현존하는 《일본서기》는 중국의 사서에 적용시키면 일본서(日本書) 의 기(紀) 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일본서기》라 불리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니혼쇼키(にほんしょき) 인지 닛폰쇼키(にっぽんしょき) 인지 정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야마토(やまと) 라는 훈독으로도 불렸던 일본(日本) 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음독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며, 나라 · 헤이안 시대의 문헌에 日ほん 이라는 기술이 나오기는 하지만, 탁음도 반탁음도 없던 당시의 가나(仮名) 사용법을 가지고는 추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의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弥太)는 자신의 저서 『일본의 국호(日本の国号)』(깃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에서 닛폰쇼키 로 주장하였지만,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현재는 니혼쇼키 로 통용되고 있다. 덧붙여 《일본기》와 《일본서기》는 서로 다른 책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만요슈》에는 두 이름이 모두 병용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자료는 기사 내용의 전거가 된 사료와, 수사의 전거가 된 《삼국지》, 《한서》, 《후한서》, 《회남자》 등의 한문 서적이 주를 이루며, 다음의 사료들이 포함된다고 여겨진다. 제기(帝紀) 구사(旧辞) 고사기(古事記) 여러 우지(氏)에 전해진 선조의 기록인 묘기(墓記) 지방에 전해진 전승인 후토기(風土記) 정부 기록물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의 책(伊吉連博徳書)》, 《나니와노키시 오토히토의 책(難波吉士男人書)》, 《고려사문도현일본세기(高麗沙門道顯日本世記)》와 같은 개인의 수기(《석일본기》에 거론된 《安斗宿禰智徳日記》, 《調連淡海日記》) 사찰연기담 외국, 특히 한반도(백제)의 기록인 백제삼서 등이다. 또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스이코 천황 28년(620년)에 쇼토쿠 태자나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서 편찬되었다는 《천황기》, 《국기》 등의 오래된 사서가 존재했으나, 고교쿠 천황 4년(645년)의 을미의 변(다이카 개신) 때에 소실했다. 《일본서기》는 본문에 부기된 주석의 형태로 많은 이전(異傳) , 이설(異說) 을 써두고 있는데, 드문드문 보이는 「일서에 이르기를(一書云)」, 「일본에 이르기를(一本云)」, 「별본에 이르기를(別本云)」, 「구본에 이르기를(舊本云)」, 「혹본에 이르기를(或本云)」 등의 기술은 그러한 이전, 이설을 적은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책이 《일본서기》 편찬에 이용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인용된 서적 대부분은 일부분의 경우만 책 제목을 밝히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일본구기》 - 유랴쿠 천황 21년(477년?) 3월조 인용 《고려사문도현일본세기》 -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 6년(660년) 5월, 7년(661년) 4월, 11월조, 덴지 천황 9년(669년) 10월조 인용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의 책》 -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 7월, 7년(661년) 5월조 인용 《나니와노키시 오토히토의 책》 -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 7월조 인용 《백제기》 - 진구 황후 섭정 47년(247년?) 4월, 섭정 62년(250년?) 2월조, 오진 천황 8년(277년?) 3월, 25년(294년?)조, 유랴쿠 천황 20년(476년?)조 인용 《백제신찬》 - 유랴쿠 천황 2년(458년?) 7월, 5년(461년?) 7월조, 부레쓰 천황 4년(502년?)조 인용. 《백제본기》 - 게이타이 천황 3년(509년) 2월, 7년(513년) 6월, 9년(515년) 2월, 25년(531년) 12월조, 긴메이 천황 5년(544년) 3월조 인용 《보제(譜第)》 - 겐조 천황 즉위전기 인용 《진기거주(晋起居注)》 - 진구 황후(神功皇后) 섭정 66년(267년?)조 인용 당시 《일본서기》 편찬은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천황가(天皇家)나 씨족(氏族)의 역사상에서의 위치 설정을 하기 위한 것이어서 지극히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다. 편집 방침의 결정이나 원사료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우위자가 주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서기》의 문체 · 용어 등 문장상의 다양한 특징을 분류한 연구 ·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30권 가운데 각권1 · 권2의 신대기(神代紀)와 권28 · 29 · 30의 덴무 · 지토기(持統紀)의 실록적인 부분을 제외한 후의 25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각권3의 진무기(神武紀)에서 각권 13의 윤공(允恭) · 안코기(安康紀)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권14의 유랴쿠기에서 권21의 요메이(用明) · 스슌기(崇峻紀)까지이다. 남는 각권 22·23의 스이코 · 조메이기(舒明紀)는 전자, 권24의 고교쿠기에서 권27의 덴지기(天智紀)까지는 후자에 속하는데, 권13에서 14의 사이 즉 유랴쿠기를 전후한 부분에 고대사의 획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본서기》는 순한문체로 여겨져 왔지만, 교토산업대학 교수 모리 히로미치(森博達)의 연구에서는 《일본서기》의 어휘나 어법에서 일본어적 발상에 근거한 오용이나 기용, 소위 왜습(倭習) 이 많이 확인되며, 나아가 《일본서기》에 실린 만요가나의 음운의 차이 등의 연구를 토대로 α군(각권14~21, 각권 24~27)과 β군(각권13, 각권22~23, 각권28~29)로 분류하였는데, 왜습이 없는 정식 한문이 가득한 α군을 중국인(당에서 도래하여 일본에서 다이가쿠의 음박사가 된 속수언續守言과 살홍각薩弘恪)이, 왜습으로 가득한 한문이 쓰인 β군을 일본인(특히 신라에 유학했던 유학승 야마다노후비토 고우보山田史御方)이 쓴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α군에도 일부 왜습 이 보이긴 하지만 이것은 원자료에서 직접 문장을 인용했거나 혹은 나중에 일본인에 의한 추가 · 수정이 이루어진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각권24, 각권25는 α군으로 분류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을미의 변 · 다이카 개신에 관한 부분에서 왜습 이 빈번히 출몰하고 있는데, 소가씨를 역신으로서 주멸한 쿠데타였던 을미의 변 에 관한 기록이 겐메이 천황(덴지 천황의 아들)이나 후지와라노 후히토(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의 의향으로 대폭 가필된 것이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백제로부터의 불교 전래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긴메이 13년(552년) 10월에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석가불상과 경론을 바쳤다고 했으나,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이나 《겐코지연기(元興寺緣起)》는 긴메이 천황 무오년 10월 12일(다만 긴메이 천황의 치세에는 무오년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긴메이 천황이 아닌 센카 천황 3년, 서기 53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에 불교가 백제로부터 전해졌다는 설을 전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이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이같이 《일본서기》에는 개변된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상식이 되고 있다. 조정 지배의 정당성을 역사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했던 당시의 경향을 담고 있어, 달력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까지 편년체를 통해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윤색된 부분이 많다. 따라서 연대가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료로서의 신뢰성이 적다. 예를 들어 진구 황후가 가야를 정복했다거나 백제가 일본한테 신칭했다는 기록 등 한반도 삼국과의 관계를 지극히 왜곡해 기술했으며, 진구황후와 히미코를 동일화하기 위해 기술 연도를 2갑자 뒤로 돌린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이 있다. 백제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 《백제기》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사서가 그대로 보존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본서기의 연대표기에 관하여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설이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이 일본의 역사년대를 끌어 올리기 위하여, 역사 기록을 120년(2갑자) 앞당겼다는 가설이다. 일본서기는 칠지도와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기 30권과 계도 1권이 있지만 계도 1권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권 제1(卷第一) - 신대 상(神代上) 권 제2(卷第二) - 신대 하(神代下) 권 제3(卷第三) - 진무 천황(神武天皇) 권 제4(卷第四) - 스이제이 천황(綏靖天皇) ~ 가이카 천황(開化天皇) 권 제5(卷第五) - 스진 천황(崇神天皇) 권 제6(卷第六) - 스이닌 천황(垂仁天皇) 권 제7(卷第七) - 게이코 천황(景行天皇), 세이무 천황(成務天皇) 권 제8(卷第八) - 주아이 천황(仲哀天皇) 권 제9(卷第九) - 진구 황후(神功皇后) 권 제10(卷第十) - 오진 천황(応神天皇) 권 제11(卷第十一) - 닌토쿠 천황(仁徳天皇) 권 제12(卷第十二) - 리추 천황(履中天皇), 한제이 천황(反正天皇) 권 제13(卷第十三) - 인교 천황(允恭天皇), 안코 천황(安康天皇) 권 제14(巻第十四) - 유랴쿠 천황(雄略天皇) 권 제15(巻第十五) - 세이네이 천황(清寧天皇), 겐조 천황(顕宗天皇), 닌켄 천황(仁賢天皇) 권 제16(巻第十六) - 부레쓰 천황(武烈天皇) 권 제17(巻第十七) - 게이타이 천황(継体天皇) 권 제18(巻第十八) - 안칸 천황(安閑天皇), 센카 천황 (宣化天皇) 권 제19(巻第十九) -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권 제20(巻第二十) - 비다쓰 천황(敏達天皇) 권 제21(巻第二十一) - 요메이 천황(用明天皇), 스슌 천황(崇峻天皇) 권 제22(巻第二十二) -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권 제23(巻第二十三) - 조메이 천황(舒明天皇) 권 제24(巻第二十四) - 고교쿠 천황(皇極天皇) 권 제25(巻第二十五) - 고토쿠 천황(孝徳天皇) 권 제26(巻第二十六) - 사이메이 천황(斉明天皇) 권 제27(巻第二十七) - 덴지 천황(天智天皇) 권 제28(巻第二十八) - 덴무 천황(天武天皇) 권 제29(巻第二十九) - 상동 권 제30(巻第三十) - 지토 천황(持統天皇) 고사기 일본 신화 정한론 - 일본서기가 기본바탕을 이루고 있다 일본의 우익 단체 * 겐요샤(현양사) * 흑룡회 * 일본회의 * 일본재단 이주갑인상 일본서기 분류:나라 시대의 역사 책 분류:일본 신화 분류:신토 문학 분류:편년체 분류:8세기 역사책 분류:720년 일본 |
17세기에 조각된 메르쿠리우스상 메르쿠리우스 ( 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과 이익 추구, 교역의 신이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의 메르크스(merx; 상품) 또는 메르카토르(mercator; 장사꾼)에서 유래한 듯하다.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에트루리아 신화의 투름스(Turms)와 매우 유사하다. 영어 이름 머큐리 라도 부른다. 로마의 아벤티누스와 팔라티누스 두 언덕의 사이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경기장에 위치한 메르쿠리우스의 신전은 기원전 495년 지어졌다. 경기장인 동시에 상업의 중심지였으니 상업의 신을 숭배하는 신전의 자리로 알맞은 곳이었다. 평민들의 거점인 아벤티누스 언덕과 귀족들의 중심지인 팔라티누스 언덕 사이에 있는 것은 메르쿠리우스가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신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매년 5월 15일에는 메르쿠리우스를 기리는 축제인 메르쿠랄리아(Mercuralia)가 열렸다. 상인들은 로마 근교의 포르타 카페나(Porta Capena) 근처에 있는 메르쿠리우스의 신성한 우물의 물을 머리에 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메르쿠리우스는 로마 제국이 정복한 여러 민족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켈트 인들은 메르쿠리우스를 그들의 주신 루구스(Lugus)와 동일시하였고 게르만 인들은 오딘과 동일시하였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을 신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메르쿠리우스의 다른 이름은 "날개 달린 발을 가진"이란 뜻의 알리페스 (Alipes)이다. 유럽의 많은 언어에서 그의 이름은 수성의 이름에 쓰이고 있다. 분류:로마 신화의 신 분류:상업의 신 분류:전령의 신 분류:무술의 신 분류:수호의 신 분류:올림포스 12신 분류:수성의 신 분류:죽음의 신 분류:헤르메스 |
주피터 (Jupiter)는 다음과 같다 유피테르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남신. 목성 - 태양계에서 다섯번째이자 가장 큰 행성. 키노 마코토 -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의 등장인물인 세일러 주피터. 주피터-C - 미국의 관측 로켓. PGM-19 주피터 - 미국 최초의 중거리 탄도 미사일. 주피터 엔진/주피터 EX - 미국의 컴퓨터·비디오 게임 회사 리스테크에서 개발한 게임 엔진. |
조영관 (造營官) 또는 안찰관 (按察官 )은 고대 로마의 관직이다. 조영관은 원래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는 케레스 신전의 관리인들이었는데, 케레스 신전은 장터이자 무역 전초지였을 뿐 아니라, 초기에 평민들의 정치 유세 중심지였다. 이들의 기능은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이들은 평민들의 기금과 문서보관소의 관리인들이었고, 리비우스(책 3:55)에 따르면 기원전 449년부터는 원로원의 결의들을 관리했다. 훗날에는 경찰로서 활동했고, 시장터, 계량, 공공 사업, 음식과 물 공급, 공공 오락을 관장했다. 평민 조영관 (Aediles plebi) 인원 2명으로서 오직 서민층 (플레비)를 대표한다. 서민 신분을 가진 출마자는 언제나 서민층에 의해 선출된다 귀족 조영관 (Aediles curulus) 인원 2명으로서 귀족까지도 초함한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 귀족 (Noblies)도 출마가 가능하며, 출마자는 구역 총회 (comitia tributa)에서 선출된다. 키케로의 저서에 따르면 De legibus 3.3.7 suntoque aediles curatores urbis, amronae, ludorumque sollemnium, ollisque ad honoris amplioris gradum is primus ascensus esto. 모든 조영관은 선출된 뒤 1년 동안 다음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활동한다. * 시의 일반 행정 도로, 공중 목욕탕, 음료수 관리 * 식량 공급 로마 시민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지방에서 수입하고 곡식의 가격을 경매을 통해 정한다. 제정 시대에 접어들어 이 중요한 일은 황제 직속 관리가 맡아서 하게 된다. * 축제와 각종 경기 행사의 조직과 운영. 귀족 조영관은 경우에 따라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 쿠르수스 호노룸 분류:고대 로마의 관직과 칭호 |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 기원전 497년 - 기원전 406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비극 시인이다. 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으로 꼽힌다. 소포클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그의 전기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497년 아테네의 행정 구역 콜로노스에서 부유한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다. 16살 되던 해에 살라미스 해전을 기리는 연회에서 선창 소년으로 뽑혀 노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468년 29세에 디오니소스제의 비극 경연에서 선배인 아이스킬로스를 물리쳐 명성을 떨쳤다. 펠로포네스전쟁을 전후로 하여 소포클레스는 정치 생활에 들어가 요직을 여러 번 지냈다. 페리클레스의 정치 노선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43년 델로스 동맹의 10명으로 구성된 통솔자에 선출되었으며, 펠로포네스전쟁 초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해군 제독으로 활약한 바도 있어, 그의 뛰어난 재질과 미모로써 아테네의 우상이 되고 시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사망 후에는 아테네 시민은 그에게 덱시온이라는 영웅 칭호를 주었다. 그는 특히 비극예술의 완성자로서 유명하다. 비극 경연에서의 1등 우승은 24회나 되었다고 한다. 극·송가·비가·잠언 등 123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7편 뿐이다. 그 밖에 다수의 단편(斷片)이 있다. 그는 극에 있어서 3부극을 폐지하고 합창 대원을 늘리는 등 극의 단순성을 극복하였으며, 치밀한 구성, 완벽한 기교 등으로 비극을 완성시켰다. 그가 연극에서 추구한 것은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무한무궁의 확대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에 깃들인 무한한 깊이였다. 그는 세 배우를 등용시켜 동시에 대화를 갖게 함으로써 극을 진행시키는 기법을 비롯해서 소도구의 연구나 배경화 등을 채용했다고도 전한다. 당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극장 개축(改築)이나 관람요금의 지급 등 문화진흥정책으로 아테네의 연극 활동은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의 특색은 장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고 치밀한 대화를 통하여 모든 인물을 대조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인간을 단순한 입장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설사 입장을 같이하는 몇 사람의 인간 사이에도 개개의 인간 안에는 제거할 수도 없고 서로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중핵적인 힘이 깃들어 있음을 객관적인 대화의 기법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드라마는(해야 할 행위에의 결의로 시작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한 영웅적 책임감으로 결정(結晶)되는 과정을 드라마라고 부른다면) 그 중핵적인 힘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나타냈던 것이다. 나 과 같은 극작이 운명극이나 성격극으로도 해석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처럼 일단은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혔던 인간이 자기의 의욕적인 성격을 일관시킴으로써 암흑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광명을 획득하는 것도 드라마의 근원을 성격 안에서 발견하고 대화의 묘로써 사건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라 하겠다. 《트라키스 여인들》 《아이아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또는 오이디푸스 튀라노스) 《엘렉트라》 《필록테테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또는 오이디푸스 콜로노스) 원전 Sophoclis Fabulae, H. Lloyd-Jones et N. G. Wilson (편집), 1990 Oxford. Sophocles, 3권, H. Lloyd-Jones (고대 그리스어-영어 대역), 1994-1996 Cambridge(Mass.) 번역본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천병희 역, 단국대학교 출판부, 서울, 2005,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서울, 2008,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천병희 역, 양운덕 해설, 도서출판 숲, 서울, 2017, * 위의 2008년 번역본 중에서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재번역하여 출판한 것이다. 분류:기원전 5세기 태어남 분류:기원전 5세기 죽음 분류:고대 아테네의 극작가 분류:고대 아테네의 시인 분류: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5세기 작가 분류:기원전 5세기 시인 |
아이아스 또는 아약스 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아이아스 (Αἴας)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름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에 두 명의 아이아스가 나온다. 로마 신화의 아약스 (Ajax)에 해당한다. 큰 아이아스 - 텔라몬의 아들 작은 아이아스 - 오일레우스의 아들 큰 아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그리스의 용사이며 오디세우스와의 투표에서 지자 그 날 밤에 미치광이가 되어 소를 죽이게되고 날이 밝은 후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고 자살한다. 아이아스 는 아이아스를 주제로 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다. AFC 아약스 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이다. 아약스 케이프타운 FC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이다. Ajax (Asynchronous JavaScript and XML)는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 기법이다. 아이아스 (이탈리아) |
엘렉트라 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엘렉트라 -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가멤논의 딸이다. 엘렉트라 는 황소자리 방향에 있는, 지구에서 440광년 떨어진 청백색 거성이다. 엘렉트라 - 엘렉트라를 주제로 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다. 엘렉트라 - 엘렉트라를 주제로 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다. 엘렉트라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이다. 엘렉트라 -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여성 암살자이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는 엘렉트라가 아버지 외디푸스를 사랑한 데에서 나온 심리학 용어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칭적이다. |
무기화학 (無機化學은 화학에서 유기화학의 여집합의 개념으로 출발한 학문이다. 유기화학이 주로 탄소-수소 결합이 포함되어 있는 화합물의 화학을 다룬다고 한다면 무기화학은 전이 금속, 희토류 금속과 이의 유기 화합물과의 반응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 학문이다. 이 분야는 유기 화학 물질을 포함하는 무수한 유기 화합물(대개 C-H결합 화합물)을 제외한 모든 화학 화합물을 포괄한다. 유기화학의 하위 학문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두 학문사이의 절대적인 구별은 되지 않는다. 촉매, 재료 과학, 색소, 계면활성제, 코팅, 의약품, 연료 및 농업을 포함하는 화학 산업의 모든 측면에서 응용된다. 산화 포타슘(K2O)의 이온 결합 모형 대부분의 무기 화합물은 양이온과 음이온이 이온 결합에 의해 결합하고 있는 염의 형태로 발견된다. 양이온의 예로는 Na+나 Mg2+ 등이 있고, 음이온의 예로는 Cl나 O2 등이 있다. 염은 전기적으로 중성을 띠기 때문에 이러한 이온들은 Na2O나 MgCl2와 같은 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온들은 산화수를 가지며, 이온들이 화합물을 형성할 것인가는 양이온의 경우 이온 퍼텐셜, 음이온의 경우 전자 친화도로 추론할 수 있다. 무기 화합물은 크게 산화물, 탄산염, 황산염, 할로겐 화합물로 분류될 수 있다. 대다수의 무기 화합물은 높은 녹는점을 가지며, 대부분 고체 상태에서 전기적 부도체이다. 물에 대한 용해도와 결정화도 또한 무기 화합물의 중요한 특징이다. 어떠한 무기 화합물(예를 들어 NaCl)은 물에 매우 잘 용해되는 반면에, 다른 무기 화합물(예를 들어 SiO2)은 그렇지 않다. 가장 간단한 무기 반응은 복분해로, 이는 두 염을 혼합할 때 이온들이 산화수 변화 없이 치환되는 반응이다. 또다른 반응인 산화·환원 반응에서는 산화제의 산화수가 감소하고, 환원제의 산화수는 증가한다. 이러한 산화수 변화의 본질은 전자의 이동이며, 이는 전지의 반응에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자의 이동은 전자 화학에서 자세히 다룬다. 반응물에 수소 이온이 있을 경우 반응은 산-염기 반응 이론에 의해 양성자를 주고 받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일반적 정의에 의하면, 전자쌍을 받으려는 경향을 가진 물질을 루이스 산이라고 하고, 반대로 전자쌍을 주려는 경향을 가진 물질을 루이스 염기라고 한다. 발전된 산-염기 반응 이론인 HSAB 이론은 이온의 극성과 크기까지 고려한다. 자연에서 무기 화합물은 광물의 형태로 발견된다. 흙에는 황철광의 형태로 황화 철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고, 석고의 형태로 황산 칼슘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무기 화합물은 또한 생체 내에서도 발견되는데, 전해질로 사용되는 염화 나트륨이나 에너지 저장에 사용되는 ATP, DNA의 골격을 이루는 폴리인산 등이 그 예이다. 인공적으로 합성된 최초의 중요한 무기 화합물은 비료로 이용하기 위해 하버법을 통해 합성된 질산 암모늄이다. 무기 화합물은 촉매로 사용되기 위해 합성되기도 하는데, 산화 바나듐이나 염화 티타늄(Ⅲ) 등이 그 예이다. 유기 반응의 반응물로 사용할 목적으로 수소화 알루미늄 리튬을 합성하기도 한다. 무기화학의 하위 학문으로는 유기금속화학, 클러스터화학, 생물무기화학 등이 있다. 이러한 분야는 초전도체나 새로운 촉매, 의약품 개발을 목표로 하여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무기화학은 화학에서 굉장히 실용성이 높은 분야이다. 전통적으로, 한 나라의 경제 수준이 황산의 생산량으로 가늠되기도 한다. 캐나다, 중국, 유럽, 일본, 미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20개의 무기 화합물은 황산 알루미늄, 암모니아, 질산 암모늄, 황산 암모늄, 카본 블랙, 염소, 염산, 수소, 과산화 수소, 질산, 질소, 산소, 인산, 탄산 나트륨, 염소산 나트륨, 수산화 나트륨, 규산 나트륨, 황산 나트륨, 황산, 이산화 티타늄이다.(2005년 기준) 연금술의 성과가 서적으로서 중세 유럽에 전해져, 그 박물학적 지식의 집합이 근대 화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무기 화합물에 관한 지식이었고, 화학 자체가 그 연구 대상에 의해 분류하고 구별할 만큼 넓은 영역을 다루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이전의 화학은 무기화학과 같은 의미였다.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발견된 유기 화합물의 종류가 증가함에 따라, 기원에 의한 물질의 분류와 연구대상에 의한 연구 영역의 구분이 시도되게 되었다. 1806년 경 스웨덴의 옌스 베르셀리우스는 유기체를 의미하는 "organ"에서 유기화학(organic chemistry)이나 유기 화합물(organic compound)이라고 하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것이 학술 용어나 학문 영역으로서 정착함에 따라, 유기화학 및 유기 화합물에 대응하는 학문 영역으로서 무기화학과 무기 화합물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났다. 근대 무기화학은 주기율을 시작으로 하는 조성론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가 되었다. 무기화학의 경우 그 구조론의 기원이 되는 것은 1883년에 독일의 알프레드 베르너가 제창한 배위자 이론(배위설)이다. 그 후 무기화학은 금속 착화합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착화합물에 대한 연구에 이어서는 무기구조화학이 확립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전자현미경이나 X선 구조분석 등 서브 마이크로 사이즈의 물리 계측이 가능해지면서 구조론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오늘날의 무기화학에 있어서는 고온 초전도 물질의 페로브스카이트상과 같은 구조론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류가 되고 있다. 원소 물질 * 홑원소 물질 * 화합물 ** 염 - 탄산염, 황산염, ... * 광물 ** 금속 *** 합금, 야금 *** 금속 착화합물 *** 비결정질 금속 ** 유리 ** 세라믹 - 제올라이트 * 방사성 물질 대기 물 |
비휘발성 반도체 기억장치. 이 패키지는 안쪽의 다이를 보여주는 투명한 창이 있다. 이 창이 칩을 자외선에 노출시켜 메모리를 지울 수 있게 한다.DIP패키지형이다. Microchip SuperMacro.jpg|오른쪽|섬네일|220px|EPROM 메모리 집적회로, 메모리 블럭으로 구성 및 집적되어 있다. 외부회로와 연결하기 위해 silver wires 본딩으로 리드선과 연결되어 패키지화되어 있다. 다이옵시스 740 시스템의 집적 회로는 주변 기기 주위에 있는 메모리 블록, 논리 및 입출력 패드를 보여 준다. 집적 회로 (集積回路 또는 모놀리식 집적회로, 칩, 마이크로칩, IC는 반도체에 만든 전자회로의 집합을 말한다. 집적회로는 여러 독립된 요소를 집적해서 하나의 칩으로 만든 것인데, 각각의 트랜지스터 칩을 이용해서 회로로 만들 때 보다 훨씬 작게 만들 수 있다. 집적회로는 손톱수준의 크기에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나 다른 전자부품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조밀하게 만들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회로선폭은 점점 더 세밀해진다. 2008년에는 100나노미터 미만으로 떨어졌고, 지금은 수십 나노미터이다. 반도체 소자가 진공관처럼 증폭기 및 스위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 지고, 반도체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집적회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매우 많은 수의 작은 트랜지스터를 작은 칩에 합치는 것은 전자 부품을 이용하여 손으로 회로를 조립하는 것을 넘어서는 굉장한 발전이었다. 집적회로의 대량생산 능력, 신뢰성, 회로 설계에 대한 빌딩블록 방식 접근은 이산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던 산업이 빠르게 집적회로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집적회로는 이산회로에 비교해서, 비용과 성능이라는 두 가지 주요한 장점이 있다. 한 번에 하나의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는 방식과는 달리 사진석판술을 이용하여 모든 부품을 한꺼번에 찍어내기 때문에 비용이 낮아 진다. 또한, 크기가 작고 부품들이 조밀하게 설계되어, 동작 속도가 빨라지고, 전력 소모는 줄어들게 된다. 2012년, 전형적인 집적회로의 크기는 수 제곱 밀리미터에서 약 450제곱 밀리미터였고, 제곱 밀리미터당 약 9백만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었다. 집적회로는 전자공학에 혁명을 일으켰고 오늘날 거의 모든 전자장비에 사용된다.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컴퓨터, 휴대폰 그리고 다른 모든 가전기기들은 싼 가격의 집적회로 덕분에 가능한 것들이다. 집적회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모든 또는 일부의 회로 소자들이 상업용 따위의 목적으로 불가분하게 배선돼있는 것. 이 정의를 만족하는 회로들은 박막 트랜지스터, 박막기술, 하이브리드 집적회로 등이 있다. 초기 집적회로의 개발은 독일의 공학자인 베르나 야콥이 집적회로와 비슷한 반도체 증폭 기기에 대한<!-- |
남량(南梁) 승성(承聖) 원년 북제(北齊) 천보(天保) 3년 신라(新羅) 개국(開國) 2년 남량(南梁) 원제(元帝) 원년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3년 서위(西魏) 효민제(孝閔帝) 원년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3년 고구려(高句麗) 양원왕(陽原王) 8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30년 7월 - 타기나이 혹은 부스타 갈로룸의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나르세스에게 대패하고 국왕 토틸라가 전사함으로써 테이아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중앙 아시아에 돌궐 제국 성립 동로마 제국의 장군 리베리우스,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침략하다. 10월 - 동고트 왕국이 동로마 제국에 완전히 복속되다. 7월 토틸라, 동고트 왕국 6대 국왕 |
남량(南梁) 천성(天成) 원년 / 소태(紹泰) 원년 북제(北齊) 천보(天保) 6년 신라(新羅) 개국(開國) 5년 남량(南梁) 민제(閔帝) 원년 / 경제(敬帝) 원년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6년 서위(西魏) 공제(恭帝) 원년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6년 고구려(高句麗) 양원왕(陽原王) 11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2년 신라, 비자화군(比自火郡)에 하주(下州)를 두었다. 6월 7일 - 교황 비질리오, 59대 로마 교황. 김부식 (1145), 《삼국사기》 〈잡지제삼 지리일(雜志第三 地理一)〉 |
알렉상드르 쿠아레 (Alexandre Koyré, 1882년/1892년 - 1964년)는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과학사학자, 철학자이다. 근대 과학 혁명기에 대한 탁월한 연구로 유명하다. 젊어서는 독일 철학의 세례를 받았고, 후에 프랑스로 이주해 활동을 했지만 뒤에는 미국을 중요한 지적 배경으로 선택했다. 르네상스 신비주의에서 낭만주의 철학 시기까지, 혹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서 뉴튼의 종합까지, 그의 가장 주요한 업적은 근대 우주론을 "정신적" 혁명의 기원이자 결과로 해석한 르네상스 및 근대 과학사 연구였다. 그는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과 랄랑드, 브렁슈빅 등의 신칸트주의자 밑에서 배웠으며, 독일에서는 훗설과 힐베르트 아래 있었다. 그의 최초의 연구는 제논의 역설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때 다루어진 운동 개념의 문제는 훗날 과학사학자로서의 그의 연구의 주요한 주제로 계속 남아있었다. 1919년 파리로 이주한 그는 계속 철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경향은 러시아 신비주의, 스피노자 철학, 그리고 현상학적으로 해석된 헤겔 철학이었고,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프랑스에서 현상학과 실존주의가 결합된 데는 그의 현상학 연구와 소개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현상학을 하이데거와 같이 형이상학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일종의 본질 탐구를 위한 방법론으로 받아들였다. 일찍이 자콥 뵈메와 러시아 낭만주의 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르네상스 영성이나 러시아 민족주의와 같은 문화적 맥락을 "개념적 분석"을 통해 형이상학적 직관과 결합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르네상스 시기와 근대 초를 배경으로 한 과학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과학적 신조들이 마치 신학적인 신조와 마찬가지로, 그가 딜타이의 "세계관"이나 호프딩의 "세계의 개념"이라고 부른 "사유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에 존재한 "서로 다른 사유 구조"를 찾아내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쿠자의 니콜라스, 파라켈수스, 코페르니쿠스 등을 연구하며 그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사유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가장 어렵고 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레비 브륄의 "망딸리떼" 개념을 받아들여 과학사 연구에 적용시켰다. 쿠아레의 대표적인 저작물은 프랑스어로 쓴 "갈릴레오 연구(Études galiliéennes, 1939)와 영어로 쓴 "닫힌 세계에서 열린 우주로(From the Closed World to the Infinite Universe, 1957)"와 같은 르네상스-근세 시기의 물리학과 우주론에 대한 과학사 연구이다. 하나의 과학 이론을 당시의 문화적 맥락과 형이상학적 직관을 결합시켜 해석한 그의 과학사 연구는 (비록 그와 때때로 견해를 달리 하지만, 그 영향 하에 있다는 점에서 후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이나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을 가능케 해준 토양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사유는 진공 속에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는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질 관념의 틀, 기본적인 원칙,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공리들 속에서 발생한다." 과학을 다른 종류의 집합적 표상에 연결시키고, 과거의 언어를 재구성함으로써 쿠아레는 과학사 연구를 인류학적 연구의 기초 위에 세워놓았고 과학을 분석하는 새로운 역사적 방법론을 개발해내었다. 위 설명은 노스모크에서 저작자가 발췌함. 분류:1882년 태어남 분류:1962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철학자 분류:러시아계 프랑스인 분류:과학사학자 분류:과학 혁명 분류:유대계 러시아인 분류:유대계 프랑스인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
노회찬 (魯會燦, 1956년 8월 31일 ~ 2018년 7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82년 용접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3년 수감되었다. 이후로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독수독과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당했다가 2016년 20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 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던 중 7월 23일 오전 9시 38분 신당동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1969년 초량초등학교 졸업 1972년 부산중학교 졸업 1976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83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어머니 원태순의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이며, 교사를 하던 중 전쟁이 터져 1.4 후퇴 때 거제도로 피난한 후 함경남도가 고향인 아버지 노인모를 만났다. 노회찬은 1956년 부산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생 시절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고교시절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축제에 초청을 받고 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한 해 개봉영화를 모두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중학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으나, 구기종목은 전혀 하지 못하는 소년이었다. 또 고등학교 2학년때 무술을 잘한다고 학내에 소문이 퍼져 노지심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시험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여 1973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삶을 보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3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씨알의 소리》, 《다리》와 같은 잡지를 읽게 되었고, 함석헌, 백기완, 선우휘 등 저항적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을 했던 동기들이 정광필, 이종걸 등이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입시에 떨어졌다. 노회찬은 재수를 하지 않고 바로 군대를 지원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 한 뒤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노회찬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 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한다. 이때부터 노회찬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 했다. 그 뒤 서울, 부천,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하게 된다. 첫 직장은 기아자동차였으나, 대학생 신분인 것이 탄로나 해고 당한다. 그 뒤 여러 공장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노동자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은 정치적인 서클로 발전하게 된다. 대학생 노회찬은 이렇게 노동운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회찬은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었다. 긴 수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터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억눌려왔던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시민권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출범했다. 인민노련은 80년대 운동의 유행이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즉, 정치적 신념을 현실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이 맹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인천 부평에서 창립을 선포했다. 결성 직후 내부 논쟁을 통해 NL진영이 이탈하면서,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의 운동 방향과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민노련은 민중 민주(PD)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즉, 진보정당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대선후보로 추대했으나, 백기완이 야권단일화를 위해 후보를 사퇴하게 된다. 이후 인민노련은 , , 등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거듭났다. 인민노련은 당시 존재했던 진보적인 사회운동 조직 중 현장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가장 큰 전위조직이었다. 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격주간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하던 중 198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체포된다. 노회찬은 법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고 1992년 만기 출소한다. 옥중에서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원고를 구상하기도 했다. 체포 1년 전인 1988년 12월,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김지선(현 여성의 전화 연합 조직위원장, 사단법인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 소장, 가정폭력상담소 소장)과 결혼했다.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송영길 민주당 국회의원, 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국회의원 등이 있다. 노회찬의 복역 도중 인민노련은 1991년 7월 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창준위 대표 주대환은 훗날 신노선이라 불리는 이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합법정당으로 조직을 전환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신노선은 논란 끝에 통과되고 한사노당 창준위는 기존의 지하정당 노선을 탈피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1992년에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민중당과 통합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민중당은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하고 해산당한다. 민중당 당권파였던 김문수, 이재오 등은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김영삼의 영입을 받아들여 민주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1992년 4월 15일 (약칭 진정추)를 결성한다. 진정추는 진보정당을 당장 건설하기에 역량이 부족하다는 내부 평가를 내린 뒤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대응하기로 한다. 1992년 초 감옥에서 만기 출소한 노회찬은 진정추의 결정에 따라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백기완은 23만표, 1%정도의 지지를 얻고 패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실망하고 다른 길을 갔지만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을 계속하기로 한다. 노회찬은 진정추 1기(1992년 4월 ~ 1993년 3월) 사무총장을 거쳐 2~4기 대표를 역임(1995년 9월)한다. 노회찬은 진정추를 "창당에 이르는 안정된 중간단계로서 준정당적 조직"으로 위상을 규정하고 민중정치연합과의 통합을 추진한다. 1995년 9월 25일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으로 거듭났다. 노회찬은 진보정치연합(이하 진정련)의 창립이후 진정련이 국민승리 21에 통합되기까지 대표를 역임했다. 진정추 활동을 하던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을 역임했다.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 발행으로 부채를 많이 지게 되었다. IMF 외환위기때는 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 노회찬 진정련 대표는 1996년 보수야당 소수파였던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추진한다. 1992년 민중당과 백기완 선거운동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섣부르게 창당했다가 조직적으로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개혁신당은 총선을 앞두고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되었다. 노회찬은 이때 진보정당 추진세력의 대표 자격으로 통합민주당의 당무위원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적인 보수야당과의 제휴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96-97 총파업 이후 민주노총은 보수 야당에 의존적인 기존의 노동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 역시 독자적 진보정당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진정련은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논의 끝에 1997년 대선 기구로서 국민승리21이 출범하게 된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우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306,026표(득표율, 1.19%)를 득표하였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이 받았던 238,648표(득표율, 1.0%) 보다는 높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민주노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승리21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전국연합은 공식적으로 국민승리21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1987년, 1992년과 달리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을 건설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국민승리21은 1998년 6월 4일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에서 23명의 당선자를 내어 기사회생하게 된다. 국민승리21은 충분히 준비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대응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이후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조직이다. 국민승리21은 1999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창당준비위원회는 권영길, 양연수, 이갑용을 공동대표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창당 작업을 시작했다. 노회찬은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월 30일 창당했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초대 부대표를 맡았다. 노회찬은 2000년 16대 총선, 2002년 지방선거, 2004년 17대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민주노동당의 대부분의 선거를 지휘했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18%의 저조한 득표를 기록했지만, 울산 등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 2, 광역의원 11명 (비례 9명 포함) 당선, 정당득표에서 8.13% 득표를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노회찬은 2002년 3월 민주노동당 정기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까지 당의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회찬은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비례대표 순위를 뽑는 당내 선거에서 노회찬은 일반명부 4위를 기록해 8번째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 노회찬은 비례대표로 출마한 제17대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이 지역구에서 4석에 그치고 정당득표율이 3%에 미달해 비례대표를 배정받지 못하면서 10선에 도전한 김종필을 물리치고 국회의원이 되어 3김시대의 막을 내렸다. 노회찬은 2004년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선대본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로 유명세를 얻었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졌다. 《힘내라 진달래》는 2004년 11월 3일 제 13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회찬은 17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배치되었다. 노회찬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에 선정되었다. 2007년 12월 9일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에서 신사적인 의원 베스트 10에 뽑혔다. 이외에도 2005년 여성이 뽑은 여성친화적인 남성의원 1위, 2006년 카드포인트 정치후원금 1위,2006년 진보지식인 대상 설문조사 대권후보 2위, 2005년 시민운동가가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2005년 PD들이 뽑은 베스트 의원 1위에 뽑혔다. 여성단체 호주제폐지 감사패, 한글을 빛낸 큰 별, 무지개 인권상, 장애인 차별금지법 감사패, 동남아 쓰나미 국회의원 우수외교상,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으로 불교계 감사패 등을 수상했다. 노회찬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아온 검사 7인을 공개한 이른바 "삼성 X파일"을 폭로했다. 또한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운동,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 학교급식 직영화, 일반병원까지 6세미만 어린이의 예방접종 무료, 아토피걱정 제로 프로젝트, 지역복지재정 확충을 위한 법 개정 추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추진,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 전월세 세입자 보호법 추진등을 했다. 제 17대 국회 (2004-2008) 4년 임기동안 총 467건의 의안을 발의하였다. 이중 1인발의한 의안은 총 0건이며 본회의에서 가결된 의안은 총 31건이다. MBC 이상호 기자가 2005년 7월 22일 방송을 통해 삼성 X파일을 공개했다. X파일은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당시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테잎과 이를 분석한 안기부의 보고서를 말한다. X파일에는 1997년 4월 부터 10월까지 시시각각 변해가는 당시 정국을 반영한 삼성측의 전방위 로비실태가 담겨있던 것으로 전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X파일에는 삼성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엄청난 뇌물을 건냈으며, 최고위급 검찰 간부들에게 명절때마다 1천만원에서 5백만원의 떡값을 뿌리며 검찰 인맥을 관리했다는 내용등이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나 방송에서 뇌물을 받은 검찰들의 실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노회찬은 안기부 X파일을 입수 한 뒤, 2005년 8월 18일 국회 법사위 회의에 앞서 배포한 안기부 X파일 관련 보도자료를 통해 옛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에서 삼성그룹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그러나 검찰은 불법으로 금품을 수수한 고위 검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노회찬의원과 MBC 이상호 기자를 명예훼손 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노회찬은 1심에서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2009년 12월 4일 열린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8부(부장판사 이민영) 2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난 느낌"이라며 "사필귀정"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오늘 판결은 삼성 X파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며 "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삼성 관계자, 중앙일보 관계자, 전 현직 검찰, 검경언권 모든 주체들이 삼성 X파일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의 나머지 300여개 녹취 테잎이 아직 서울중앙지검에 남아 있다"면서 "이 문제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섬네일 노회찬은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 출마를 결정하고 대선 레이스에 참가했다. 노회찬은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주제로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다. 노회찬은 대선 후보 지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다른 두 후보(권영길, 심상정)보다 높은 인지도와 지지율을 보였지만, 자주파가 다수인 당내에서 조직력은 높지 않았다. 결국 노회찬은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다. 노회찬은 경선 패배후 심상정 후보를 지지했다. 대선 전부터 민주노동당이 가지고 있었던 정파간의 갈등은 대선후보 경선을 거치며 더욱 첨예하게 드러났다. 결국 권영길 후보가 2002년 대선(3.9%) 보다 낮은 3.0%의 지지를 얻고 대선을 참패했디. 대선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이 시작되었다. 당 지도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심상정 비대위를 출범 시켰다. 그러나 2008년 2월 3일 열린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가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동거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을 준비했다.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 이덕우, 박김영희, 김석준과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국회의원 총선거에 노원 병 국회의원에 출마한 노회찬 후보가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 옆에는 이금희다. 노회찬은 진보신당 창당 직후인 2008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노원 병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노회찬은 여론조사에서 줄곧 한나라당의 홍정욱 후보에게 앞서, 지역구 당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김성환 (1965년) 후보가 13,036표(득표율 16.26%)를 들고 가는 바람에 결국 3.05%(2,343표) 차이로 석패한다. 하지만 노회찬의 선전은 진보 정당의 후보로서 서울에서 상당한 득표를 했다는 점에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의석이 없는 다른 소규모 정당과는 달리 정당 지지율 2%를 넘겼기에 정당등록취소를 면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정당보조금도 일부분 받을 수 있었다. 2위 대 1위 출마지역 득표율 득표수(명) 노회찬 대 홍정욱(한나라당)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 40.05% 43.10% 32,111 vs 34,454 18대 총선 이후 노회찬의 패배를 아쉬워 하는, 이른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줄임말) 당원의 증가가 크게 이어졌다. 노회찬은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더 많은 지지자와 당세를 확보하게 되었다. 총선 이후 진보신당은 내부적으로는 총선용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재창당하여 본격적인 틀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앙당 측은 당 홈페이지를 통해 재창당에 대한 일반당원들의 의견을 물었으며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8년 5월 16일에는 재창당에 대한 평당원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해 광장에 나간 시민들을 당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재창당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노회찬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활발하게 참여했다. 진보신당 칼라TV 에 리포터로 자주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촛불시위 초기 시위 배후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이 이어지자 "촛불시위의 배후가 있다면 이명박 정부"라며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협상 때문에 건강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순수하게 모여서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신당은 촛불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진보신당 칼라TV 방송 이외에도 연행자 면회 및 경찰서 항의 방문, 연행 과정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에 대한 법률적 자문, 중간에 참여하고자 하는 시민들을 위한 중앙당 상황실 개설 등의 활동을 했다. 진보신당의 촛불시위는 총선 이후 지못미 효과와 이어져 당원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촛불시위가 사그라들며 당 내부에서는 미뤄둔 제2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자는 의견이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2008년 9월부터 당내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지역별 순회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토론회에서는 현재 진보신당이 내걸고 있는 4대 가치 인 평등, 생태, 평화, 연대로는 이념지향을 드러내기 힘들며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통합, 생태주의, 여성주의의 복수(複數)의 이념 등을 가치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9년 3월 1일에 용산 구민회관에서 열린 첫 정기당대회 1차 대회에서는 현행 공동대표 체제를 임기 2년의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하는 조직개편과 당명변경, 당 강령 개정, 재보궐선거 예비후보 선출 등이 결의되었다. 정기당대회 1차 대회의 결의에 따라 3월 23일부터 3월 27일까지 닷새간 당원투표를 실시했고, 그 결과가 3월 29일에 송파 구민회관에서 열린 정기당대회 2차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심상정과 당 대표 경선이 예상됐지만 심상정의 불출마로 단독 출마해서 29일 열린 2차 당대회에서 전 당원을 대상으로 한 직접투표에서 투표율 58.7%에 97.9%의 찬성을 받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진보신당 대표로 취임하여 "서민복지동맹"을 제안하고, 진보신당의 정책 상품을 개발하여 정책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2009년 4월 29일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에서 울산 북구의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면서 진보신당은 원외정당에서 원내정당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노회찬은 2009년 11월 29일 진보신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고. 2010년 1월 31일 2010년 지방선거 출마후보를 결정하는 서울시당 후보선출 대회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서울"을 모토로 콘크리트 서울이 아닌, 보편적 복지정책을 펼치는 도시를 만들것을 주장했다. 선거가 끝난 후 3.3%를 득표하는 데 그쳐 서울시장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회찬이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하였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제18회 국회의원 선거 시절 노회찬은 홍정욱과 벌였던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갈린 표 때문에 졌어도 민주당 후보를 탓한 적이 없었다. 6월 3일부터 6월 5일까지 선거 과정에서 국민참여당-민주노동당 연합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엉뚱하게 노회찬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려지기도 했다. 선거가 끝나고 화살을 맞을대로 다 맞은 한참 후에 노회찬은 나꼼수 팟캐스트에서 한명숙쪽에서 단일화에 대한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고 밝혔다. 노회찬 전 대표는 2010년 진보신당 대의원 회의의 결정으로 진행된 새로운 당 대표단 선거에서 조승수 의원이 3대 대표로 선출되면서 진보신당 대표에서 물러났다.당시 노회찬 전 대표는 모든 당원들에게 문자메시지 를 보내어 진보신당 대표로서의 마지막 감사인사를 하였다. 2011년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른바 종북주의 문제로 인하여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논의가 결렬이 되었다. 또한 진보신당 대의원 대회에서 통합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에 노회찬은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당을 탈당해 새진보정치연대 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새진보연대와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이 3당 합당을 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노회찬은 당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노원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57%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3년 2월 14일 대법원은 이른바 안기부 X파일 을 입수해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노회찬 공동대표에 대해 상고를 기각, 징역 4월(집행유예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형을 확정했다. 노회찬 전 의원은 2005년 8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 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검사 7인의 이름이 담긴 이른바 삼성 X파일 을 인터넷에 올렸다. 대법원의 유죄 선고 논리는, X파일 에 실린 검사들의 이름을 보도자료를 통해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면책 특권에 해당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 알게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규정하는 통신비밀보호법에 근거하여 판결했다. 불법 도청·감청 행위와 이를 공개한 행위를 동일하게 처벌하도록 한 통신비밀법 위반의 경우 벌금형 없이 무조건 실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는데 현역 의원의 경우 통비법 위반 유죄가 인정되면 무조건 의원직을 박탈당하므로 지나치게 과도한 처벌이란 비판이다. 2013년 2월 4일 여야 의원 159명이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는 통비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대법원에 선고연기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과반수의 국회의원들이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입법 통과가 분명한데 판결을 강행한 것은 오히려 법이 바뀔까봐 한사람을 표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서둘러 재판했다는 의혹이 있다. 또한, 도청된 대화 내용에는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노회찬은 "유죄판결 받은 통신비밀보호법은 불법 도청된 내용을 공개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은 도청된 내용에 안 나와 있다"며 "다른 언론에서 공개한 이니셜로 추론한 것인데 사실이 아니라면 그 점을 처벌해야지 도청된 내용 공개로 처벌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판사 출신인 서기호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의 취지는 국민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것이지 재벌이 검사들에게 떡값을 주는 범죄까지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고 비난했고,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도 "대법원 판결을 접하고 참으로 답답하다. 국회의원이 권력형 비리를 고발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권력형 부패를 어떻게 청산할까"라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민변은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것은 삼성이라는 거대 재벌이 검찰을 돈으로 관리하려고 모의하는 대화내용이었으며, 그 대화에 거론된 검사들의 명단이었다. 공개한 내용에 보호돼야 할 사생활은 전혀 없으며, 오로지 재벌이 돈으로 검찰을 관리하려는 내용뿐이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공적 영역에서조차 표현의 자유, 국민의 알 권리가 아닌 권력집단의 손을 들어 주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며 규탄했다. . 2013년 2월 13일,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의 특별수사팀의 지휘를 맡았던 황교안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됐다. 두 사람은 경기고 72회 동기(1976년 졸업)다. 황교안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대해서 그는 "과거 안기부 X파일 사건을 덮는 걸 주도한 사람이 지금 검찰 개혁을 지휘해야 할 법무부 수장으로 지명이 됐다. 같은 시각, 검찰 개혁을 촉구하면서 검찰을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한 나는 국회를 떠나게 됐다"며 부당한 현실을 꼬집었다. 2005년 당시 황교안 중앙지검2차장이 진두지휘한 X 파일 사건 수사팀은 삼성·떡값 검사 전원 무죄(불기소), 이상호 기자와 김연광 편집장과 노회찬의원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 결정 내린 바 있다. 아직도 서울중앙지검에는 당시에 압수되었던 280여 개의 안기부 X파일이 비공개로 남아 있다. 2013년 3월 4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2013. 4·24 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노원병에 출마하기로 한 데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2013년 3월 3일 안철수 전 교수와의 통화에 대해 "판결에 관해 위로의 얘기를 했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은 짧은 통화였다. 어디에 누가 출마하든가는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일 수 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기자회견을 잡아놓고 1시간 반 전에 저한테 전화해서 그냥 간단한 통화한 뒤에 마치 양해를 구한 것처럼 이렇게 뭐 각본을 짜 맞추듯이 이렇게 하는 것은 새 정치가 아니지 않느냐, 저희들로선 하고 싶지 않은 구태정치다" 라고 비판했다. 진보정의당은 "안 전 교수가 국민의 뜻을 수렴하고자 정치복귀를 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그 첫 번째 무대가 노원 병이라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대선 후보를 지낸 소위 거물급 정치인이 진보정치인에 대한 탄압의 결과물인 재보궐 지역에 출마를 한다는 것이 삼성이 동네빵집을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논평했다. 노회찬은 2014년 7월 30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선거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와 단일화하여 사실상 야권단일후보로 선거에 나섰다. 출마한 선거구는 서울시 동작구 을이였다. 하지만 48.69%의 득표율을 올렸으나 2위에 그쳐 패배하였다. 1위는 나경원이었고, 노회찬과 표차이는 928표였다. 2016년에 있었던 제20대 총선에서는 서울 노원구 병과 경남 창원 성산 중 어느 지역구에 출마할지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노원병은 자신의 옛 지역구이자 안철수 의원의 지역구이며, 경남 창원 성산은 제조업이 발달해 있고 노조 조직률이 높은 지역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창원 성산 출마를 권유하였고, 노 후보는 성산 출마를 결정했다. 여론조사에서 노회찬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를 이기고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었다. 노 후보는 당선되어 3선에 성공하였다. 2016년부터 계속 원내대표를 하였다. 2018년 6월 재선출되어 3연임을 하게 되었다. 20대 국회에서 노 의원은 특수활동비 폐지를 주장했다. "내년 예산 편성 때 국회 특수활동비를 제외해야 하고, 올해 예산에서 남은 특수활동비는 각 정당이 매달 사용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고 발언하였고,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기조에 따라 정의당은 현재까지도 계속 특활비 폐지를 추진하고 있으며, 노 전 원내대표 몫으로 지급된 2018년 7월 특활비는 사용하지 않았다. 2018년 7월부터는 JTBC 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2018년 서울에서 정당장으로 치뤄진 노회찬의 장례식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의혹을 받았고, 2018년 7월 23일 노 의원은 동생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8분쯤 서울 중구 신당동 N아파트 1층 현관 앞에서 노 원내대표가 쓰러져 있는 것을 아파트 경비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투신장소로 보이는 아파트 17~18층 사이 계단에는 노 원내대표의 외투, 신분증이 포함된 지갑, 정의당 명함, 유서 3통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유서에는 "드루킹 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있다. 하지만 청탁과는 관련이 없다" 및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유서 3통 중 가족에게 보낸 2통은 유가족 의사에 따라 공개하지 않았으며, 정의당에 보낸 1통(상단 인용문)만 공개되었다. 같은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늘 노동현장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의 애환과 고충을 대변하고자 했던 진정성이 어떻게 비통한 죽음으로 고하는지 말문을 잇지 못하겠다"고 애도를 표했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노회찬 의원이 지향했던 진보와 민주주의 가치들은 후배 정치인들이 그 뜻을 이어받을 것"이라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예정된 SNS 생방송을 취소했다. 빈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여야 정치인들과 노 의원이 출연했던 출연자들, 일반 시민들이 조문을 하였다. 반면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잘못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또다른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논란이 되었다. 정의당은 노 원내대표의 유가족과 상의하여, 장례 형식은 정의당장(葬)으로 5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장례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이정미 대표가 맡기로 했다. 이후 문희상 국회의장의 제안으로 7월 23~25일 3일간은 정의당장으로 치루고, 26~27일 이틀간은 국회장으로 승격해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7월 27일에 국회에서 영결식이 치러지었고, 오후 1시 서울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장지인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한국갤럽 8월 1주차 여론조사에 의하면, 노 의원의 사망 이후 정의당의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올라가 15%로 최고치를 기록하였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을 넘어선 적이 있다. 9월 9일 정의당은 노회찬재단 설립이 제안되었다고 밝혔다. 제안자는 권영길 · 심상정 · 이정미 등 전현직 진보정당 대표들, 이종걸 ·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유시민 작가 등 18명이다. 이후 2019년 4월 3일 그의 지역구인 창원 성산구에서 보궐선거가 치뤄졌고,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작은 표차로 당선되었다. 선거 다음날 여영국 당선인은 당선증을 가지고 노회찬 의원의 묘소를 찾았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와 김진태 의원 등이 노회찬 의원실의 전직 비서의 법무부 취업에 특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노 의원은 "1%라도 채용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 의원직을 내놓겠다"며 "강원랜드 부정채용 의혹 등 자유한국당 전·현직 의원들이 연관된 채용 부정청탁에 대한 물타기"라고 대응했다. 노 의원의 전 비서 역시 "노 원내대표 본인 또는 의원실 관계자 그 누구도 제가 법무부에 원서를 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적어도 채용비리 의혹을 받을 만큼 불성실한 경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대응했다.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을 수사 중인 허익범 특별검사팀은 드루킹 일당이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측에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한 정황을 포착하였다.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은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그는 유서에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며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는 내용을 남겼다. 201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국가보안법위반(기타)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3년 - 1990년 6월 23일 선고, 1991년 5월 25일 특별감형, 1998년 8월 15일 특별복권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 벌금 100만원 - 2001년 4월 6일 선고 통신비밀보호법위반, 명예훼손 징역4월 집행유예1년, 자격정지1년 - 2011년 10월 28일 선고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년) 《나를 기소하라》, (정보와사람, 2008년) 《법은 만명한테만 평등하다》, (정보와사람, 2007년)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년)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 실록》, (일빛, 2004년)-누리집에서 읽을 수 있음.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년) 《지역감정과 정치발전》, (고려대 심포지움,1995년) 《산업별 노동조합과 한국노동조합운동》,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1994년)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 (거름, 1990년) 《87,88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거름, 1989년) 《노동자와 노동절》, (석탑, 1983년) 《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 (해피스토리, 2009년)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 (리더스북, 2009년) 《10살에 꼭 만나야 할 100명의 직업인》, (조선북스, 2008년) 《열정바이러스》, (바른지식, 2008년) 《어머니》, (매일경제신문사, 2006년) 《신영복 함께 읽기》, (돌배게, 2006년) 《대한민국 50대의 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년) 《나의 고전 읽기》, (북섬, 2006년) 《벌거벗은 이력서》, (휘즈프레스, 2007년) 《7인 7색, 일곱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곱 개의 세상》, (북라인, 2005년)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 93통》, (랜덤하우스중앙, 2005년) 《우리가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시와 사회, 2004년)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년.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생각해봤어?》.웅진지식하우스. 2015년. 아버지 노인모 어머니 원태순 아내 김지선 진보정당 민중당 국민승리 21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심상정 권영길 단병호 유시민 진중권 독수독과이론 《노회찬의 의정보고서》2004, 2005, 2006, 2007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노회찬 공식 홈페이지 분류:1956년 태어남 분류:2018년 죽음 분류:강화 노씨 분류:부산광역시 출신 분류:초량초등학교 동문 분류:부산중학교 동문 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 분류:고려대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사회민주주의자 분류:대한민국의 노동 운동가 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분류:건설국민승리21 분류:민주노동당 (대한민국) 당원 분류:진보신당 당원 분류:정의당 (대한민국) 당원 분류: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분류:팟캐스터 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사람 분류:투신자살한 사람 분류:노회찬 분류:민중민주파 분류:자살한 정치인 분류: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 분류:대한민국의 여성주의자 |
진구 황후 (, 170년? ~ 269년? 6월 3일(음력 4월 17일))은 이름은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토(気長足姫尊, 息長足姬尊), 오시타라노미코토(大帯比売命)로 전한다. 아버지는 가이카 천황의 현손 오키나가노스쿠네노미코로, 어머니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의 후손 가즈라키노다카누카히메이며, 오진 천황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고, 201년부터 269년까지 섭정을 하였다고 전한다. 연대에 대하여는 백제왕력을 기준으로 셈하여 120년을 더하면 321년부터 389년까지 섭정하였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진구 황후의 섭정 시기는, 중국의 삼국지에 기록된 히미코의 시대와 비슷하며, 일본서기 9권에 진구 황후 섭정 66년 진 무제 태초 2년 진의 사신을 맞으러 가고 태초 2년 10월 왜 여왕이 먼곳에서 와서 공물을 바쳤다고, 중국에서 기록된 왜여왕에 대한 기술이 인용되었다. 이 때문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면서 야마토조정()과 히미코를 관련지으려는 의도로 전승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여기는 설이 있어, 에도 시대까지는 히미코가 진구 황후이다고 여겨졌다. 또한 이 시대는 장기간에 걸쳐 일본의 천황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일본 천황이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이 해는 266년에 히미코는 벌써 사망하고, 이 때의 여왕은 이요가 다스린 시대였다. 또 이것과는 별도로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郎)는 사이메이 천황과 지토 천황이 모델은 아닌가 하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진구 황후를 히미코, 이요와 같은 무녀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비슷한 시기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조에 히미코가 172년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기록과 위지 왜인전의 기록된 시기와 진구 황후의 통치기간이 비슷하여 진구 황후와 동일 인물 설이 있고, 또 《일본서기》 저자들이 실제 야마토 왕국을 건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오진 천황과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로 추정되는 히미코의 재위 기간을 연결하기 위해 일부러 기록을 2갑자로 돌린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을 이용해 사실의 조작인 견해가 있다. 스미요시산진(住吉三神)와 함께 스미요시 대신의 한 기둥으로서 또 오진 천황과 함께 야와타노카미(八幡神)의 한 기둥으로서 신앙되게 된다. 오이타현의 우사 신궁, 오사카부 오사카 시의 스미요시 대사를 시작하여 후쿠오카현 후쿠쓰 시의 미야지다케 신사, 후쿠오카 현 오카와 시의 풍랑궁 등, 몇몇 신사의 제신이 되었다. 연고가 있는 후쿠오카 시의 카시이궁이나 하코자키궁, 후쿠오카현 우미마치의 우미하치만신을 모신 신사, 이키시의 성모궁에서도 모셔지고 있다. 아버지 가이카 천황의 현손 오키나가노스쿠네노미코 어머니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의 후손 가즈라키노다카누카히메 * 남편 제14대 천황 주아이 천황. ** 황자:호무다 황자, 제15대 천황 오진 천황. ** 황자:호무야와케노미코 황자 황후의 삼한 정벌설을 묘사한 그림으로 요시토시의 1880년 작품 《일본 서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을 임신한 채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00년). 신라왕은 일본군이 도착하자 스스로 결박하고 항복하였고 말과 마구를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배에 돌을 대어 아이의 출산을 늦추었고, 일본에 돌아가 치쿠시에서 오진 천황을 출산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삼한 정벌설은 왜곡된 것이라는 논란이 많다. 메이지 시대에 그려진 삼한정벌도 속 신라왕은 파사 이사금인데, 진구 황후와 파사 이사금은 살던 시대를 비교했을 때 서로 만날 수 없는 인물이었단 점을 보아도 삼한 정벌설은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삼한 정벌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때 이유로 삼았던 설이다. 《근초고왕》(KBS, 2010년~2011년, 배우:홍인영) 제국주의 시대(1868년~1945년)에는 일본은행권에 진구의 초상이 있었다. 일본 천황 * 역대 일본 천황 * 여성천황 (女性天皇) * 주아이 천황 (仲哀天皇, 진구 황후(神功皇后)의 아버지) * 오진 천황 (應神天皇, 진구 황후의 아들) 스미요시다이샤 (住吉大社, 주길대사) 여성 군주 * 여왕 * 여제 임조칭제 (臨朝稱制) 이사금과 이사나기 분류:야요이 시대 사람 분류:여자 섭정 분류:일본의 섭정 분류:일본의 황후 분류:일본 신화의 인물 분류:일본의 추존왕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오미국 사람 분류:일본의 인물신 (기기) 분류:고훈 시대 이전의 황족 분류:3세기 일본의 군주 분류:일본인 여전사 |
진무 천황 (, 기원전 711년 2월 13일 (음력 1월 1일) ~ 기원전 585년 4월 9일 (음력 3월 11일))은 일본의 초대 천황이다. 이름은 가무야마토 이와레히코노 미코토 (《고사기》 , 《일본서기》 )이다.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히코나기사타케 우가야후기아에즈노 미코토와 다마요리히메노 미코토의 사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 따르면 진무 천황은 기원전 711년? 아마쓰히코 히코나기사타케 우가야후키아에즈노 미코토(天津日高日子波限建鵜草葺不合命)의 4남으로 태어나 기원전 585년(진무 천황 76년)에 127세로 죽은 것으로 전한다. 실재성에 대해서는 역사학적으로 부정적인 견해가 강한데, 지금의 진무 천황이라는 시호는 나라시대(奈良時代)의 762년경에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가 찬진한 시호이다. 그는 45세 때 규슈 휴가 국(현 미야자키현)를 떠나 4년 후 가와치 국(현 오사카부)에 입성한 이후 야마토 국을 거점으로 삼던 나가스네히코와 충돌했다. 잠시 퇴각해 쿠마노 등을 경유한 후 다시 야마토국에 들어가 나가스네히코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야마토 국을 정복, 기원전 660년 가시하라노미야(橿原宮)에서 천황으로 즉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2월 11일이 일본의 건국일로 간주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의 건국 기념일로 정해졌다. 1889년에는 우네비 가시하라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현 가시하라 시 우네비야마 근교에 진무 천황을 제신으로 섬기는 가시하라 신궁이 건립되었다. 증조부 아메니기시 쿠니니기시 아마츠히코 히코호노 니니기노 미코토(天邇岐志国邇岐志天津日高日子番能邇邇芸命) 증조모 고노하나사쿠야히메(木花之開耶) * 조부 호오리노 미코토(火遠理命) * 조모 도요타마히메(豊玉姫神) ** 아버지 히코나기사타케 우가야후키아에즈노 미코토(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尊) ** 어머니 다마요리히메노 미코토(玉依姫命) *** 형 이쓰세노미코토(五瀬命) *** 형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 *** 형 미케누노미코토(御毛沼命) 비 아히라쓰히메(吾平津姬) * 장남 다기시미미노 미코토(手研耳命, ? ~ 기원전 582년 11월) - 아버지 진무천황이 죽은 뒤, 황후인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를 아내로 삼고, 세명의 이복 동생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전에 가무야이미미노미코토와 스이제이 천황에게 살해됨. * 차남 기스미미노 미코토(岐須美美命) - 《고사기》에서만 등장. 황후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媛蹈鞴五十鈴媛命) * 삼남 히코야이노미코토(日子八井命) * 사남 가무야이미미노 미코토(神八井耳命, ? ~ 기원전 578년 4월) - 다기시미미의 반역 사건 때 동생 스이제이 천황과 함께 타기시미미노미코토를 죽임. * 오남 가무누나가와미미 미코토(神渟名川耳尊, 기원전 632년 ~ 기원전 549년 6월 28일(음력 5월 10일), 일본 제2대 천황 스이제이 천황 (綏靖天皇) 서복 에조 조몬 시대 진무 동정 진무 경기 (神武景気) - 일본에서 1955년경의 호경기를 일컫는 말 진무 천황 즉위기원 진무천황제 (神武天皇祭) - 진무 천황에게 제사를 하는 행사 가시하라 신궁 (橿原神宮) 미야자키 신궁 (宮崎神宮) 사반왕과 신무천황 분류:일본 천황 분류:일본 신화의 인물 분류:창업군주 분류:기원전 7세기 일본의 군주 분류:기원전 6세기 일본의 군주 분류:장수 신화 |
일본의 국기 는 일장기 (를 의미하며, 히노마루 ()라고 부른다. 일본의 국기 규격과 색상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국기 규격 색상 하양 빨강 RGB 255–255–255(#FFFFFF) 188–0–45(#BC002D) 일장기가 국기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1870년 2월 27일(메이지 3년 음력 1월 27일)로, 메이지 유신에 따른 일본 제국의 성립으로부터 2년 후이다. 일장기를 처음으로 제창한 곳은 일본 제국을 수립하였던 사쓰마 번이며, 일본 제국의 성립 8년 전인 1860년에 미일 수호 통상 조약 비준으로 미국에 건너 간 한 사절단이 "일장기"를 이용했다는 기록이있다. 당시는 도쿠가와 왕조가 잇따르는 불평등 조약(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을 통해 명성을 잃고 있어, 미토 번의 무사들이 사쿠라다 문밖의 변을 일으킨 이후로, 사쓰마 번, 조슈 번, 히코네 번 등의 도쿠가와 왕조를 쓰러뜨리고 일본 제국을 세우려고하는 정치 세력이 도쿠가와 왕조의 접시꽃 을 부정하기 위하여, 일장기 를 새로운 체제 운동의 목표로 사용한 것이다.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사절단에 참가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제국의 성립 후에 "제실론"(帝室論)을 저술하여 천황에 의한 지배를 찬양하고 있다. 일장기는 일본 제국의 77년간(1868년 ~ 1945년)의 공식 국기 역할을 했으며, 1931년 2월, 일본 제국의회에 일장기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는 〈대일본 제국 국기 법안〉이 상정됐다가 천황기가 등장함에 따라 폐기되었으며, 이는 그 후로 일본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주권을 박탈당한 일본 제국은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통해 새로운 국가인 일본국(日本國)이 법적으로 성립되었으며, 1999년에 시행된 〈국기와 국가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일장기와 기미가요에 법적 근거가 부여되었다.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로 인한 착취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인해, 동북아시아권에서는 반일 감정으로 인한 욱일기에 대한 증오의 감정도 강하다. 기 사용 기간 쓰임 120px 1331년 - 1338년 겐무 신정의 시절의 기 120px 1603년 - 1868년 에도 막부 시절의 기 120px 1863년 - 1869년 신선조의 기 120px 1870년 - 1945년 일본 제국 시절의 국기 (비율 7:10) 120px 1919년 - 1947년 남양 군도의 국기 120px 1945년 - 1952년 군정기 당시에 사용한 기 120px 1952년 - 1999년 제2차 세계 대전 패망 이후에 사용된 일본의 국기 (비율 7:10) 일본의 기 목록 욱일기 도도부현기 시정촌기 일장기 말소 사건 분류:국기 분류:일본의 기 국기 |
독일 민주공화국 ( 또는 동독 (은 독일의 재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의 분단국가인 공화국이었다. 동독은 1949년 10월 7일부터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 편입되기 전 1990년 10월 3일까지 존속했다. 1955년 소련은 동독이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포츠담 회담에 의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서독과 서베를린 지구에 진주할 동안 동독 영토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었다. 이에 의해 서베를린은 완전히 동독 영토에 둘러싸였다.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일원이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동맹국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해체에 이어서, 자유 선거가 1990년 3월 18일에 치러지고, 여당 독일 통일사회당은 동독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상실하였다. 그해 8월 23일, 동독 의회는 동독의 행정 구역을 전쟁 전의 5개 주로 복귀하기로 결정하였고, 1990년 10월 3일 독일 연방 공화국에 합병하여 통일이 되었다. 서독(통일 이전의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동독을 중앙 독일(Mitteldeutschland) 또는 SBZ(소비에트 연방 점령 구역)로 불렀다. 한편,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 1인당 GNP가 가장 높고 정치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 허용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모범국으로 불렸으며, 비록 소련의 지도하에 있었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한 국가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독일의 동서 분할 서독 Bild 183-W0910-305, Berlin, SED-SPD-Vereinigungsparteitag.jpg|섬네일|왼쪽|통일사회당 창립에서 빌헬름 피크와 오토 그로테볼. 맞은 편은 발터 울브리히트 Bild 183-1982-0610-101, Berlin, Besuch Regierungsdelegation Grenada, Bootsfahrt.jpg|섬네일|왼쪽|동독을 방문한 모리스 비숍 그레나다 총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에 포츠담 조약에 따라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 미국과 소련은 독일을 4개로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독일의 비옥한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독일 영토 대부분은 소비에트가 지배하는 폴란드령으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 군대 장군들이 분할된 독일의 소련 통치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강탈과 성폭력(성폭력의 희생자 수는 만 명에서 2백만 명에 이른다. )을 일삼자 곧 정치적 반대가 일어났다. 1945년 6월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이 점령한 독일 지역의 독일인 공산주의 지도자에게 자신은 영국 점령지에서 영국의 위치를 점차 잠식하고, 미국이 1, 2년 내에 철수하며, 독일 전체가 소비에트권의 공산주의자 통치로 들어올 수 있도록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1946년 초 스탈린과 다른 지도자들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이 소비에트자 공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공장, 장비, 기술자, 경영자, 능력있는 요인들이 강제로 소련으로 이전되었다. 소비에트의 간섭을 받는 여타 중앙유럽과 마찬가지로 동독에서의 집권 공산당의 주요 임무는 소련의 명령을 행정 기관에 하달하고, 블록의 다른 세력에게는 이를 자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위장하는 일이었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소비에트 당국은 강제로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합병하였는데, 이 때 이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아니고, 소비에트 지향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1946년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 선거에서 — 소비에트 당국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여러 경쟁 정당들이 농촌 지역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 겨우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였다. 재산과 산업은 정부 소유로 되었다. 정해진 선을 넘어서는 발언이나 행동을 한 사람은 견책을 당하고, 여러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심문, 고문 심지어 처형 등 처벌이 따랐다. 학교 교육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 학교 교육 과정에서 강제 사항이 되어 교수들과 학생들이 서방으로 탈주하였다. 정부나 사법 기관 혹은 학교에 임직하려는 지원자는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하였다. 소비에트의 스메르시 비밀 경찰 등 정교한 정치 경찰 조직이 면밀하게 인민을 감시하였다. 엄격한 검열 제도 때문에 출판과 방송을 접하는 데도 제한이 따랐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반대 세력으로 남은 사람들에게도 첩자가 잠입하여 소비에트의 통합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들과 서방 점령 지역 내 "부르주아" 세력의 관계를 이용하였는데, 그러면서도 한편 사회주의통일당의 배후에서 과거 나치 세력과 전문 군 장교를 규합하기 위하여 독일 국가민주당(NDPD)이 창설되었다. 1948년 초 티토-스탈린 결별 당시 사회주의통일당은 소련을 추종하는 어용 독재 정당으로 변화하였다. 중요한 결정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기관이나 혹은 심지어 스탈린 한 사람의 지시를 거쳐야 하였다. 1949년 초 이제 사실상 내부에서 자신들이 스스로 선출하는 소수 집단인 소련식 정치국이 사회주의통일당을 지배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 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되었으며, 이때 소련 외무부에서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하였으나, 자치권은 주지 않았으며 점령 정권에 소련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행사되며, 행정부, 군부, 비밀 경찰 조직에 소비에트 세력을 심어놓았다. 서독이 미국의 영향을 받아 나토에 가입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되었다면, 동독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공식적인 사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고,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했다. 제2차대전이 끝난 뒤에 동서로 분할된 독일이 재통일하는 것은 사실상 곤란하게 여겨졌다. 동독의 공산당은 1946년 사회민주당과 합병해서 사회주의통일당을 결성하고, 이의 지도에 의하여 기독교민주동맹 등 4개 정당이 국민통일전선으로 결집했다. 소련군 점령 밑에 있었던 동독은 1949년 10월에 독일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동독 초대 공산당 서기장은 스탈린주의자 발터 울브리히트였으며, 동독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공화국"으로 규정했다. 울브리히트는 농업집단화, 시장과 이윤제(利潤制)의 개념도입 등의 신경제정책을 채용했다. 그의 사망 후 슈토프에 이어 호네커가 권력을 계승하였다. 마셜플랜의 결과로 서독 경제가 라인강의 기적 을 이루게 되자, 동독도 이의 영향을 받아 1953년 6월 17일, 모든 생산량을 10%로 늘리라는 명령에 항의,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이 시위는 전국을 휩쓸었다. 다음날, 소련군은 보병과 포병을 이끌고 시위를 무력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가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동독의 동독시민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가중됨에 따라, 많은 숫자의 동독 시민들이 동독을 벗어나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로 인해 동독의 경제건설이 곤란을 받게 되자 동독 정부는 하여금 국경을 철조망, 포탑, 개들과 1961년 건설된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거대한 벽으로 폐쇄하였다. 비밀경찰이었던 슈타지는 시민들 사이에 첩보원을 심어 동독 탈출 계획 등을 밀고하게 하였다. 슈타지는 도청과 감시로 악명높았으며, 통일 직전까지 약 10만 명의 슈타지 요원들이 활동하였다. 통일 직전에는 슈타지 요원이 동독 시민들에게 거리에서 맞는 일도 있었으며, 슈타지 본부가 시민들에게 점령당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당시 슈타지에서는 독일통일이 임박하자, 문서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시민들에게 문서자루를 뺏겼다. 독일 정부는 과거사 조사목적으로 슈타지가 옛 동독 시민들에게 뺏긴 옛 슈타지 문서들을 컴퓨터로 복원할 계획이다. 1989년 8월,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하자 많은 동독 시민들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 다른 나라들보다 통행의 자유가 있던 헝가리와 중립국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다. 다른 많은 시민들은 집권당이었던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에 대해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라이프치히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시작으로 마침내 이 시위는 독일민주공화국정권수립 4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면서 동독 공산주의 체제의 건재함을 선보이던 에리히 호네커 를 사임하게 만들었고, 10월에는 동독의 서기장이 에곤 크렌츠로 바뀌었다. 1989년 11월 9일,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12월 22일에는 브란덴부르크 문이 다시 개방되었고, 동독의 공산주의 체제는 무너졌다. 2+4 회담을 통해, 양 독일과 2차대전 승전국들은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1990년 10월 3일에는 동독 정부가 공식 해체되었고, 동독은 재통일된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서 유럽 연합에 가입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통일 이후 동독의 영토는 5개의 주로 다시 나뉘었다. 주민은 독일인으로, 독일어를 사용하였다. 동독지역에서도 러시아인, 폴란드인 등 여러 민족들이 섞였고 1989년까지 소련군이 동독에 주둔해 있었다. 동독의 경찰들 Bild 183-M0925-406, New York, Fahnen vor dem UNO-Gebäude.jpg|섬네일|오른쪽|1973년 동서독의 유엔 가입 후, 유엔 본부 앞에 계양된 동독의 국기 교대 행렬 동독의 제1집권당은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SED)이었다. 1946년에 독일 공산당(KPD)와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통합된 형태이다. 통일 이후에도 SED는 민주사회당(PDS)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는 좌파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다른 정당 들은 SED에 의해 통제되는 국가 전선 연합에 소속되어 있었고, 동독 국회 선거를 위해 세워졌다. # Christlich-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기독교 민주연합, CDU), 통일 후 서독의 CDU와 통합 # Liber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독일 자유민주당, LDPD), 통일 후 서독의 FDP와 통합 # Nation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독일 국가민주당, NDPD) # Demokratische Bauernpartei Deutschlands (독일 민주 농업인당, DBD) 에리히 호네커, 제 3대 서기장. 동독의 최장집권자. 발터 울브리히트, 초대 공산당 서기장. 베를린 장벽 건설의 주도 에리히 밀케, 동독 국가보안부 장관 빌헬름 피크, 동독 건국 주도, 초대 대통령 오토 그로테볼, 동독 초대 총리 빌리 슈토프 로베르트 하베만 에곤 크렌츠, 동독의 마지막 서기장 귄터 샤보브스키, 독일사회주의통일당 대변인 한스 모드로프, 마지막 공산주의자 정부 수뇌 로타어 드 메지에르, 최초의 비공산주의자 정부 수뇌 그레고어 기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마지막 당대표이자 현 민주사회당(독일사회주의통일당 후신) 당대표 1949년부터 1952년까지는 5개 주(브란덴부르크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작센주, 작센안할트주, 튀링겐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2년 7월 25일에 실시된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5개 주가 폐지되었으며 14개 구()가 신설되었다. 이 때에 신설된 14개 구는 게라 구, 노이브란덴부르크 구, 드레스덴 구, 라이프치히 구, 로스토크 구, 마그데부르크 구, 슈베린 구, 에르푸르트 구, 줄 구, 카를마르크스슈타트 구, 콧부스 구, 포츠담 구, 프랑크푸르트 구, 할레 구였다. 이들 구는 하위 행정 구역인 군()과 시()로 나뉘었으며 구의 이름은 각 구의 구청 소재지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수도 동베를린은 1961년에 구와 동등한 행정 구역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7월 22일 인민의회가 채택한 법률에 따라 14개 구가 폐지되었으며 5개 주(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브란덴부르크 주, 작센 주, 작센안할트 주, 튀링겐 주)가 신설되었다. 이 법률은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재통일과 함께 시행되었으며 1990년 10월 14일을 기해 주 정부가 신설되었다. Bild 183-22039-0007, Landwirtschaftliche Produktionsgenossenschaft "Florian Geyer" in Ascherleben.jpg|섬네일|왼쪽|돼지를 사육하고 있는 동독의 한 농가 동독의 광부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동독의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으로 잃었고, 산업과 교통이 파괴되어 많은 피난민이 발생했다. 동독이 소련에 대한 배상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되자, 소련이 동독의 경제정책을 장악하게 되었다. 소련의 적군은 기존의 산업기반을 해체하고 소련으로부터 산업기반시설과 산업설비를 들여와 동독의 산업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동독의 경제는 소련 경제에 예속되게 되었다. 1950년대 초반에 소련에 대한 배상금이 각종 곡물과 소비재 공업생산품으로 지급되었다. 또,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이 영유하고 있었던 남부 슐레지엔과 슈테틴에 걸쳐있는 탄전지대와 부동항이 스탈린의 결정에 의해 폴란드로 귀속되게 되었다. 동독의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형태는 소련의 형태와 유사했다. 동독은 1950년에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다. 1985년의 동독의 경제 통계에 의하면 사회협동기업의 수입이 국가 전체 수입의 96.7%를 차지하였다. 동독 경제당국은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 안정화를 보장하기 위하여 예산 지출의 80%를 사용하였다. 1976년의 동독의 GDP성장률은 5%대였다.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 편에 의하면 동독의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로 나오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동독의 주요 수출품은 프락티카(Praktica)브랜드의 사진기 및 IFA에서 제조한 트라반트(Trabant) 브랜드의 소형 승용차, 바르트부르크(Wartburg) 브랜드의 중대형 승용차와 사냥용 소총, 육분의, 손목시계 등 이었다. 1960년대 까지, 동독은 설탕이나 커피와 같은 식료공업품의 부족을 경험하였다. 동독 경제당국은 서독과의 교역과 서방세계의 외환을 획득하기 위해, 동독 인민들이 동독 국립은행(Staatsbank)을 통해 서독의 은행에 외환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고, 특별 외환상점(Intershop)에서 외환을 주고 서방세계의 물품이나 동독에서 제조된 수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독주민들은 우편제도를 이용하여 외국에서 다양한 소비재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야우어푸드(Jauerfood)사를 통해 동독 화폐로 외국의 식료품을 구입할 수도 있었다. 동독 정부는 통화와 시장가격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였다. 동독 정부는 정규 급여 이외에 여러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여러 보조급여를 지급했으며, 이는 "제2의 급여"라고 불렸다. 이러한 동독의 정책은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고, 서독과 동독의 경제 차이를 발생시켰다. 인위적인 가격 조절은 비효율적인 생산을 불러왔고, 물물교환이나 사재기 등의 비경제적인 경제활동이 나타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은 동독 화폐의 가치를 신뢰하지 못했으며, 동독 화폐를 서방세계의 화폐로 교환하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동독의 경제는 서독에서 제공하는 서방세계의 화폐 대부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동독 인민들은 서독 마르크에 비해 동독 마르크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게 되었다. Bild 183-1990-0702-001, Vietnamesische Näherinnen in der DDR.jpg|섬네일|오른쪽|로스토크의 베트남인 노동자들 1950년대 동독과 서독의 정부 지출 중 상당 비율이 체제 경쟁을 위한 것이었으며, 때문에 독일의 통일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동독과 서독은 스스로 독일의 정체성(Germanness)을 갖고 있다는 것을 치적하기 위해 소모적인 경쟁을 하고 있었다. 서독에게는 전쟁 이전의 소비체계의 회복이 정상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였다. 이러한 것은 "배고픈 세월"을 해결하고, 여성이 더 이상 직장에서 노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동독에서는 압제적 정권에 대한 여러 비난이 쏟아졌다. 동독 존속기간 여러 산업의 기준이 공산주의에 입각해서 정해졌다. 동독 경제 분야에서 가장 현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전기 산업에서조차, 산업 종사자의 채용 기준에서 그 사람의 기술 전문성보다 정치적 성향이 더 우선시 되었다. 정치적 회색분자는 대학과 직장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정책이 있기도 하였다. 동독에서의 낮은 출산률과 높은 이탈률은 동독의 노동력 상실을 가져왔다. 동독에서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서 많은 미숙련공을 유치하였다. 1963년 초반 공산주의 국가의 비밀조약에 따라 폴란드, 헝가리, 쿠바, 알바니아, 모잠비크, 앙골라, 베트남의 노동자들이 동독에 취업하게 되었으며, 그 수는 1989년까지 100만명에 이르렀다. 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근무 여건은 매우 열악했으며, 무권리 상태에서 산업의 하위부에서 종사하였다. 동독의 양심적 반대자들 동독의 교육제도 동독의 여행 국가인민군 인민경찰 독일의 재통일 서독 Auferstanden aus Ruinen 분류:독일의 냉전사 분류:공산주의 국가 분류:유럽의 옛 나라 분류:1949년 설립 분류:1990년 폐지 분류:분단된 지역 분류:유엔의 옛 회원국 분류:소련의 위성국 분류:무신론 국가 분류:냉전기의 정체 |
남진(南陳) 태건(太建) 11년 북주(北周) 대성(大成) 원년 / 대상(大象) 원년 신라(新羅) 홍제(鴻濟) 8년 남진(南陳) 선제(宣帝) 11년 북주(北周) 선제(宣帝) 원년 / 정제(靜帝) 원년 신라(新羅) 진지왕(眞智王) 4년 / 진평왕(眞平王) 원년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 21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26년 *로마 원로원 해체 7월 30일 - 교황 베네딕토 1세, 62대 로마 교황. 8월 24일(음력 7월 17일) - 신라(新羅) 25대 왕 진지왕(眞智王) 가락국의 문신 김무력(金武力) |
종속형 시트 또는 캐스케이딩 스타일 시트 (, CSS)는 마크업 언어가 실제 표시되는 방법을 기술하는 언어로, HTML과 XHTML에 주로 쓰이며, XML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W3C의 표준이며, 레이아웃과 스타일을 정의할 때의 자유도가 높다. 마크업 언어가 웹사이트의 몸체를 담당한다면 CSS 는 옷과 액세서리 같은 꾸미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HTML 구조는 그대로 두고 CSS 파일만 변경해도 전혀 다른 웹사이트처럼 꾸밀 수 있다. 현재 개발 중인 CSS3의 경우 그림자 효과, 그라데이션, 변형 등 그래픽 편집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이미지를 대체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또한 다양한 애니메이션 기능이 추가되어 어도비 플래시를 어느 정도 대체하고 있다. CSS는 1994년 10월 10일, 하콤 비움 리(Håkon Wium Lie)가 처음 제안하였다. CSS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버전이 나오고 있다. 1996년에 도입된 CSS 1은 CSS의 바탕이 되었다. CSS의 표준으로는 CSS 2.1이 있으며 이전 버전에 비하여 새로운 기능과 도구가 추가되었다. 대다수의 웹 브라우저는 CSS 2.1를 잘 지원한다.(인터넷 익스플로러의 경우, 버전 7이 되면서 CSS2.1을 지원한다.) 현재 W3C에서는 CSS3을 표준으로 만들고 있다. CSS는 여러 수준과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다. 각 수준의 CSS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능을 담고 있으며 CSS1, CSS2, CSS3, CSS4로 나뉜다. 프로파일들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장치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위해 만들어진 하나 이상 수준의 CSS의 하부 집합이다. 현재 휴대용 장치, 프린터, 텔레비전 수상기를 위한 프로파일들이 있다. 첫 CSS 규격은 공식 W3C 권고안이 되었으며 그 이름은 CSS1이다. 1996년 12월에 발표되었다. CSS2는 W3C가 개발하였으며 1998년 5월에 권고안으로 발표되었다. CSS3는 2005년 12월 5일 이후 개발 중에 있다. W3C CSS3 로드맵은 요약과 도입부를 제공하고 있다. 전체가 모듈화되어 사용자 에이전트가 모듈에 대한 모든 모듈을 지원하지 않거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다른 세로 글쓰기와 HTML 이외의 규격에까지 관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현재 어떤 모듈도 권고안까지 이른 것은 없다. 하나의 통합된 CSS4 사양은 없는데, 이는 여러 개의 모듈로 나뉘어 있는데 기인하다. 그러나 "레벨 4" 모듈들이 존재한다. CSS는 단순한 문법을 가지며, 수많은 영어 키워드를 사용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프로퍼티의 이름을 규정한다. 스타일 시트는 규칙의 목록으로 구성된다. 각 규칙이나 규칙 집합은 하나 이상의 셀렉터와 하나의 선언 블록을 이룬다. CSS에서 셀렉터(selector)는 마크업 자체에 태그와 속성을 일치시킴으로써 어느 부분의 마크업에 스타일을 적용할지 선언한다. 클래스와 ID들은 대소문자를 구분하며 문자로 시작해야 하며 영숫자와 언더바(_)를 포함할 수 있다. 클래스는 어떠한 요소의 어떠한 수의 인스턴스에도 적용할 수 있다. ID는 하나의 요소에만 적용할 수 있다. 선언 블록은 괄호로 이루어진 선언들의 목록으로 이루어진다. 각 선언은 그 자체가 프로퍼티, 콜론( ), 값으로 구성된다. 한 블록 안에 여러 선언이 있으면, 세미콜론 ( )이 개개의 각 선언에 삽입되어야 한다. CSS 정보는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러한 원천으로는 웹 브라우저, 사용자, 제작자가 될 수 있다. 제작자로부터의 정보는 더 나아가 인라인, 미디어 타입, 중요성, 셀렉터 특정, 규칙 순서, 상속, 프로퍼티 정의로 분류될 수 있다. CSS 스타일의 정보는 별도의 문서에 있을 수 있고, HTML 문서에 직접 추가할 수도 있다. 사용되는 출력 장치에 따라 다른 스타일을 적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화면 버전은 인쇄 버전과 매우 다르므로 제작자는 각 매체에 적절한 표현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 CSS 우선 순위 스킴 (높은 순위에서 낮은 순위 순) 우선도 CSS 원천의 종류 설명 1 중요성 ‘’은 이전의 우선 타입들을 덮어쓴다. 2 인라인 HTML style 속성을 통해 HTML 요소에 적용되는 스타일 3 미디어 타입 미디어 특정 CSS가 정의되어 있지 않다면 프로퍼티 정의는 모든 미디어 타입에 적용된다. 4 사용자 정의 대부분의 브라우저가 접근성 기능을 갖추고 있다 사용자 정의 CSS 5 셀렉터 특정성 특정 컨텍스트 셀렉터()는 일반 정의를 덮어쓴다. 6 규칙 순서 마지막 규칙 선언은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가진다. 7 부모 상속 프로퍼티를 지정하지 않으면, 부모 요소에 상속된다. 8 HTML 문서 안에서의 CSS 프로퍼티 정의 CSS 규칙 또는 CSS 인라인 스타일은 기본 브라우저 값을 덮어쓴다. 9 브라우저 기본값 가장 낮은 우선 순위 브라우저 기본값은 W3C 초기값 사양에 정의되어 있다. p{ font-size 110%; font-family garamond, sans-serif; } h2{ color red; background white; } .highlight{ color red; background yellow; font-weight bold; } #test_id { color blue; background white; } Acid3 W3C의 CSS 공식 사이트 KLDP의 한글화된 CSS 유효성 검사 서비스 스탠다드 매거진 CSS3 정보 블로그 CSS Zen Garden CSS 기반 디자인에 대한 예제 백괴사전의 혼돈 문서로 본 미디어위키 CSS활용법(눈이 아플 수 있으니 주의하기 바람) 분류:W3C 표준 |
에르되시 수 (Erdős number)는 공동연구 네트워크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단계를 나타내는 수로 베이컨의 수와 같은 개념으로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 팔과 몇 단계를 거쳐 연결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이다. 붉은 옷의 여자가 에르되시와도 논문을 같이 썼고, 푸른 옷의 남자와도 같이 썼다 하자. 그럼 푸른 옷의 남자는 에르되시와 두 단계 지나 연결되므로, 에르되시 수는 2가 된다. 에르되시 수는 재귀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에르되시 본인의 에르되시 수는 0이다. 에르되시와의 공동 작업자는 에르되시 수가 1이 된다. 임의의 수학자 M 의 에르되시 수는, M 과 함께 논문을 공동 저술한 수학자 가운데 가장 낮은 에르되시 수를 가진 사람보다 하나 많다. 이런 공저자 관계가 없는 사람의 경우 에르되시 수는 정의되지 않거나 무한이 된다. 에르되시는 평생동안 1500여 편에 달하는 논문을 저술했고, 대부분이 공동 저술 논문이다. 그와 함께 논문을 저술한 사람은 509명이며, 이 사람들의 에르되시 수는 정의에 의해 1이다. 에르되시 수가 1인 사람들과 논문을 공동 저술했지만 에르되시 본인과는 공동 저술하지 않은 사람들의 에르되시 수는 2이다. 에르되시 수가 2인 사람들과 공동 저술했지만 에르되시 수 1인 사람들이나 에르되시 본인과 저술하지 않은 사람들은 3을 갖고, 마찬가지로 계속될 수 있다. 에르되시는 엄청난 양의 공동연구를 했기 때문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수학자일수록 에르되시 수가 작은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장난처럼 얼마나 뛰어난 수학자인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2000년경에 활동중인 모든 수학자들의 에르되시 수는 최고 15 정도이지만 평균은 5 이하이며 거의 모든 사람이 8 이하의 에르되시 수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날이 갈수록 서로 다른 학문간에 공동 연구가 많아짐에 따라 현재 활동중인 모든 과학자들이 수학과 크게 관계없는 분야에서조차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는 어떤 통계학자가 임상실험에 관해 어떤 약학자와 공동 논문을 저술했다면 그 약학자 역시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약학계의 많은 사람들이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게 될 것이다. 알렉스 로페스-오르티스에 의하면 1986년부터 1994년까지 필즈상과 네반리나상 수상자들의 에르되시 수는 9를 넘지 않는다. 같은 개념을 영화계에 적용한 것으로 케빈 베이컨의 여섯 단계 라고도 알려진 베이컨 수가 있다. 베이컨 수는 케빈 베이컨과 영화를 같이 찍은 배우들에게 숫자를 매긴다. 2004년 4월 20일 에르되시 수 4인 연구원 빌 토지에는 이베이에 자신과 공동연구를 통해 에르되시 수 5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경매로 내걸었다. 1,031달러에 낙찰받은 낙찰자는 이미 에르되시 수 3을 갖고 있었다. 그는 “논문은 연구를 통해 스스로 쓰는 것이지 경매를 통해 사고 파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옛날 수학자들은 현대에 비해 논문을 적게 썼고, 공동 저술은 더욱이 적었기 때문에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는 사람이 많지 않다.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는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수학자로는 공동 저술의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리하르트 데데킨트(1831년생)와 게오르크 프로베니우스(1849년생)가 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같은 그 이전 수학자들은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에르되시 수 프로젝트 — 에르되시 수가 2 이하인 모든 수학자의 일람을 제공하고 있다. 분류:에르되시 팔 분류:소셜 네트워크 분류:수학 문헌 |
3세기 초 삼한의 형세 삼한 (三韓)은 삼국 시대 이전 한반도 중부 및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연맹왕국인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을 통칭하는 말로,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성립하였던 진국에 기원을 둔 것이다. 이후 마한의 백제국(伯濟國)이 백제로, 변한의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진한의 사로국(斯盧國)이 신라가 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삼한으로 통칭되는 78개의 ‘국’(國)의 성격을 두고는 여러가지 논의가 진행되어 왔는데, 대개 신지(臣智)를 정점으로 읍차(邑借)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로 서열화되어 있는 상당한 정치수준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시대 후기부터 삼한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을 의미하는 단어로 치환되어 이해되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후대로도 계속 이어져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어원이 되었다. 대륙으로부터 전파된 금속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 이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전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의 원시 사회는 부족 사회로 전환되었다. 북부 사회보다는 뒤늦게 그 형식이 변모된 남방식 고인돌이 이 시기에 각처에서 축조되었으며, 또 그러한 사실은 부족 사회의 성립이 그만큼 뒤늦었음과 그 발전 과정이 북부 사회의 그것과 비슷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고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무렵 이 지역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이들은 중국의 군현세력에 저항하면서 점차 부족연맹 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그 결과 삼한(三韓)이라고 통칭하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세 그룹의 부족 사회가 생겨, 기원후 3세기경에는 대방군에 공격을 가하기도 하고 직접 진(晉)과 교섭하기도 했다. 일찍이 삼한의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부족(目支部族)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목지국은 마한 54개 소국 연맹체의 맹주로 그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비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북방 부여와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백제(伯濟)국의 예맥족이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건국 당시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百濟王國)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으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중심으로 한 사로(斯盧, 신라)가 경주평야의 6촌(六村)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금속문화를 수용해서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삼한은 사회 발전이 늦어 씨족사회적인 요소가 오래 계속되었다. 기원전 2부터 기원전 3세기에 이르기까지 삼한 사회에서 부족 간의 권력에 크게 차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세력의 대소에 따라 신지(臣智)·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족장이 있었으나 그들은 아직도 지역적으로 조직화된 권력을 형성하지 못하여 서로 제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정(祭政)은 일찍부터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제사권은 족장 외에 천군(天君)이란 것이 따로 있어, 각기 소도(蘇塗)라고 일컬어지는 특별 구역에서 매년 한두 차례 제사(祭祀)가 행해졌다. 삼한에는 노예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한 전 지역에서 관개시설(灌漑施設)을 갖추고 벼농사가 행해졌다. 또, 이미 견직물과 철(鐵)이 생산되어 생활에 이용되었다. 예속(禮俗)이나 기강은 엄하지 않았고, 남녀노소가 움집 또는 귀틀집에서 살았으며, 복식과 주거 양식에서는 지배층과 씨족원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장사에는 관(棺)만을 사용하였고, 특히 변한에서는 큰 새의 날개를 함께 부장했다. 농업을 주로 한 삼한 사회에서는 5월의 파종(播種)과 10월의 수확 후에 제천의식을 행하고 모든 씨족원이 모여 음주와 가무로 밤을 지새웠다. 고조선 말기에 이르러 한강 유역으로부터 남부 일대에 걸쳐 진국(辰國)이라는 하나의 큰 부족국가 연맹체가 있었는데, 그 중심지는 지금의 직산(稷山 충청남도 천안시 북부)과 금마(金馬 전라북도 익산시 중부)로 추정하는 견해가 병존한다. 당시 북쪽에 위치하였던 위만조선은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 한 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아 붕괴되고(기원전 108년), 그 땅에 한의 군현이 설치됨에 따라 한족(漢族)의 세력과 문화가 크게 흘러 들어왔다. 이와 같은 외래의 정치적 세력과 문화는 한의 군현과 이웃한 고대 한민족(韓民族)의 여러 부족 국가 또는 부락국가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주었는데, 이 무렵에 이르러 남쪽 진국은 지리적 환경에 따라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삼한으로 나뉘었다.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는데,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전라에 퍼져 있었으며, 목지(目支)·백제(伯濟)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삼한 78개의 소국(小國)은 각각 지역에 따라 여러 부락 국가로 된 연맹체였고, 각 부락 국가에는 우두머리인 군장(君長)이 있었는데 그 세력의 대소에 따라 큰 것부터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견지(遣支)·읍차(邑借)가 있었으며, 군장의 통솔 밑에서 부락적 또는 씨족적 자치생활을 하였다. 농업과 양잠·길쌈 등은 삼한을 통하여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 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었던 것 같다.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제천(堤川)의 의림지(義林池) 등은 이때의 저수지이다. 그 외에 목축(牧畜)도 성했으며, 해안 지대에는 어업(漁業)을 행하였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 물품매매에 돈처럼 사용되었고, 낙랑 방면과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집은 대개 평지에 움집, 산지에는 귀틀집이 많았는데, 의복은 삼베·모시·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자는 베로 만든 도포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으며,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으며, 이때부터 지게가 사용되었다. 또, 옥구슬을 재보로 삼고 그것을 치레로 옷에 달기도 하였으며, 귀걸이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풍속이 순후하여 변한·진한에서는 길 가던 사람들은 서로 길을 사양하였다 한다. 혼인과 예절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었으며,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삼한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술 마시기를 즐겼다 한다. 특히 변한·진한에는 비파와 같은 현악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뒷날에 가야금의 근원이 된 듯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제정은 서로 나뉘게 되었다. 마한의 여러 국읍에는 정치를 맡은 군장 이외에 천신을 제사하는 사람을 각각 따로 두어 이를 천군(天君)이라 일렀다. 그리고 마한 여러 나라의 특별한 지역에는 소도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매고 귀신을 제사하던 곳인데, 본래 이것은 단군설화에 보이는 신단수의 유풍을 받은 것으로서 만주 풍속의 신간(神竿)과도 같이 신역을 상징하는 것이며, 방울과 북은 신을 즐겁게 하는 악기였던 것이다. 이 신역에서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아내지 못할 만큼 법률의 힘도 미치지 못하였던 곳인데, 이것 역시 고대 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다. 그리고 천군은 종교적으로 보면 단군의 원류를 받은 것으로, 뒷날 향무(鄕巫 골무당 또는 단골무당)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이 밖에 마한에서는 연중행사로 5월에 씨뿌리기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여럿이 모여 주야로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다. 수십 명이 같이 손발의 장단을 맞추어가며 추었다 하는데, 이것은 지금도 남아있는 전라도 지방의 ‘강강술래’ 및 경상도 지방의 ‘칭칭 나네’와 같은 노래춤 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한에서는 이러한 제삿노래를 10월에도 행하였다 하는데, 이는 상고 농업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널리 행하여진 것으로 5월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이고 10월에는 풍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후하게 지냈다. 마한에서는 장사에 관(棺)을 쓰고 곽(槨) 은 쓰지 않았으며, 소와 말도 모두 장사에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축을 순장(殉葬)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삼한의 풍습은 뒷날 신라·백제·가야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철기 시대 문화이며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였다. 초가지붕의 반움집을 지었다. 주된 경제 활동은 농경으로, 오곡과 벼가 대표적이다. 누에와 뽕을 치기도 하였으며, 가축도 사육하였다. 삼한에는 별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기풍제와 추수감사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한(馬韓)은 고대 한민족의 부족국가 연명체이다. 한강 유역과 한반도 서반부 지역에 위치하였다. 이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 78개의 소국(小國 마한 54국, 변한 12국, 진한 12국)으로 형성된 삼한(三韓) 전체의 왕인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은 마한의 부족 사회에서 추대되었고, 마한인이 대대로 이를 인정·계승하였다. 54개의 고을(邑)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을 모두를 각각의 나라로 불렀으며, 정치적으로 통일된 집단이 아니었다. 그 중 백제국(伯濟國)이 점차 세력을 확대해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에는 백제(百濟) 왕국의 영역이 되었다. 마한에서의 대부족 세력은 만여 호(戶), 소부족 세력은 수천 호를 거느려서 총호수가 10만여 호에 이르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이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중심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마한을 세웠고, 후에 고구려 동명성왕이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추정한다. 변한(弁韓)은 고대 삼한 중의 하나인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삼국지》〈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지역과 종족명으로 마한의 동쪽,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여 12개의 작은 부족 국가로 형성되어 있었다. 인구는 진한의 12나라와 합쳐서 4~5만 호이며, 지금의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동부 일부(여수·순천·광양)와 경상북도 남부 일부(고령·성주)에 이르는 범위에 위치했다. 12국은 미리미동국·접도국·고자미동국·고순시국·반로국·낙노국·미오야마국·감로국·구야국·주조마국·안야국·독로국으로 서쪽은 지리산, 북쪽은 가야산, 동쪽은 낙동정맥을 경계로 하였다. 각국에는 군장이 있어서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 등으로 불리었다. 《삼국유사》에서는 변한을 백제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명칭은 백제 땅에 변산(卞山, 전라북도 부안)이 있었던 것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하였다. 언어·주택·풍속·의복은 진한과 비슷하였으나 제사는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었으며, 농업과 양잠을 주요산업으로 하였다. 뒤에 가야국이 되었다. 진한(辰韓)은 마한·변한(弁韓)과 함께 남한에 위치한 고대 한민족의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그 위치는 현재의 경상북도와 울산광역시에 해당한다. 12개의 소국(小國)을 거느린 진한은, 삼한(三韓) 전체의 왕인 마한의 지배하에 놓인 종속적 관계이기도 하였다. 삼한(三韓) 전체의 왕인 진왕(辰王)은 마한의 부족 사회에서 추대되었고, 마한인이 대대로 이를 인정·계승하였다. 진한에서는 대부족 세력은 4~5천 호, 소부족 세력은 6~7백 호를 거느렸다. 여러 부족 중에서 지금의 경주 지방에 있던 사로 부족(斯盧部族)이 가장 유력하여 큰 세력을 형성해 갔다. 秦韓(진한) 이라고도 하는데, 서로를 도(徒) 라고 불러 마치 진(秦)나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한이 진나라 또는 연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에게 마한의 동쪽 땅을 떼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고조선 영토의 일부가 연나라, 진나라에 복속되었음을 고려하면, 삼한이 고조선의 유민이라는 주장과 부합한다. 후일 사로국에서 발전한 신라에 의해 통합되었다. 삼한이라는 용어는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마한, 진한, 변한이 각기 고구려, 백제, 신라가 되었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일컬어 일통삼한(一通三韓) 이라 부르거나 삼국 전체를 통칭할 때 삼한 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인식은 후삼국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고려는 후삼국의 통일을 일컬어 일통삼한 이라 칭하였으며, 이후에도 한(韓)은 고려나 조선을 가리키는 또 다른 용어로 사용되었다. 대한제국의 한(韓) 이라는 국호는 삼한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때의 삼한은 삼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대한제국의 뒤를 이어 한(韓)을 국호로 사용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삼한의 단편적인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삼국이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고대국가였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어 삼한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 《삼국사기》 본기는 마한이 온조왕 때에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고고학적인 발굴에 따르면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한편, 《삼국사기》〈잡지(雜志)〉 3권에는 최치원의 글이 인용되어 있는데, 최치원은 마한이 고려(고구려), 변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라고 생각하였다. 《삼국유사》는 최치원의 의견을 긍정하여 마한을 백제에 비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권근은 《동국사략》에서 최치원의 의견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한 변한이 고구려라고 주장하였다. 서거정 등은 《동국여지승람》에서 삼한의 영역을 비정하여 황해·경기·충청·강원도 지역을 마한, 전라도를 변한, 경상도를 진한으로 서술하였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최치원이나 권근의 견해를 비판하고 현재의 고증과 같이 영역을 비정하였다. 실학자 안정복, 정약용, 한치윤 등은 다양한 문헌 고증을 통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삼한의 영역을 고증하고 삼한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책을 서술하였다. 한(韓)의 어원으로 한(干)ㆍ한(汗)ㆍ한(翰) 등과 관련이 있으며, 고대의 군장(君長)을 이르던 말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일부 비주류 역사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삼한의 한(韓)에 대하여 민족적·종교적인 어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분류:한국의 옛 나라 분류:명수 3 분류:원삼국 시대 |
한국의 역사 (韓國-歷史) 또는 한국사 는 구석기 시대 부터 주로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바탕으로 발전되어 온 역사이다. 이 문서는 광복 이전의 한국에 대한 역사를 주로 기술한다. 한국 역사의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되는 선사시대와 고조선의 성립 이후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까지의 고대, 고려 시대인 중세, 조선 시대인 근세,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 등으로 구분된다. 강만길, 한국사 연표 1, 한길사, 1995, 강만길, 한국사 연표 2, 한길사, 1995, 한국의 역사는 고찰하고자 하는 영역에 따라 한국의 경제사 , 한국의 생활사, 한국의 정치사 와 같이 분야별 역사로 나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한국사의 특이점 중 하나는 한국의 역사는 한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고조선이 건국된 이래 한민족이 타 민족에 의해 밀려나거나 소멸되어 민족의 교체 혹은 단절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접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선비족이나 여진족과 같은 북방 민족에 의해 민족 주도권이 교체되었고 일본의 경우에는 야요이 시대의 등장으로 인해 이전부터 이어지던 조몬 시대가 단절되었고 이에 민족 단절을 초래하였으며 유럽의 대다수 국가의 경우 여러 민족이 대륙 내를 이동하면서 특정 지역의 민족 주도권이 수시로 교체되었다. 때문에 한국 문화의 영향권에서 발굴되는 유물에서도 한민족 고유의 문화적 특성이 단절되지 않은 채 연속적으로 보여진다. 한국의 역사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은 전곡리 유전, 단양 도담리 금굴, 파주 주월리·가월리 유적, 연천 원당리 유적, 상원 검은모루 유적 등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것이다. 기원전 6000년 이전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청동기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중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 왕국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 고 한다. 그 후,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여 여러 나라로 나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삼국시대를 맞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원삼국 시대의 여러 국가를 정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들 세 국가는 경제와 군사 면에서 서로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력하였고, 특히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하곤 하였다. 신라의 힘은 점진적으로 커져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을 달성하였고, 이에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전직 고구려 장군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뒤를 이어 698년 동모산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신라가 9세기 후반에 국력이 쇠퇴하자,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고, 왕건이 918년에 건국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비슷한 시기였던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 시대에는 고대보다 법률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과거제가 소개되었으며, 불교가 번성하였다. 993년~1019년 동안 고려는 거란과 전쟁을 벌여서 거란을 격퇴하였다. 1238년 몽골이 침입하였고 30년에 가까운 전쟁 끝에 양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공민왕의 자주 개혁이 있기 전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는데, 이 시기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되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 한글이 창제되고 측우기, 앙부일구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수군을 이끈 이순신 장군의 노력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을 비롯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난 덕분에 결국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노론과 남인 위주의 일당전제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민은 점차 경제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생산력도 증가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영조, 정조 시대에 다시 중흥하였다. 이때 실학이 융성하였고, 천주교가 일부 남인에 의해 학문의 일부로서 전래되었다. 그리고 양명학이 전래되었으며 천문학과 의학,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의 기술적 성과가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편으로는 양반층이 증가하고 농민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등 반상제의 신분제가 동요하였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봉기 등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점과 지방 관리의 학정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서민 음악이 유행하였고, 생활 도예가 공예의 중심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조선에는 같은 외세의 접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위기 속에 흥선대원군은 철저한 봉쇄 정책으로 일시적으로 접근을 막았으나, 이후 주위의 열강들과 무력 분쟁을 겪는 등 제국주의와 맞서게 되었다. 1870년대 초반에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청나라와 충돌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조선과 요동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에 의해 잠시 물러섰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암살되었다. 1897년 10월 12일, 조선은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부당한 요구와 간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한국의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910년에는 요적인 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조약 모두 강압에 의한 것이며 법적으로는 무효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제국의 점령에 저항하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에는 곳곳에서 비폭력적인 3.1 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이러한 독립운동을 총괄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에는 서로군정서와 같은 독립군이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쟁을 벌였고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부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는 시기까지를 군정기 또는 해방정국이라 한다. 해방정국에서 남과 북은 극심한 좌우 갈등을 겪었다. 북에서는 조만식과 같은 우익 인사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남에서는 여운형과 같은 중도 좌파 정치인이 암살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소련과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한국에서의 극심한 반대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가 별도로 수립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는 기준이 되었다. 분단 이후 양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수시로 국지적인 교전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침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의 선사시대는 구석기 시대 후기로부터 시작되며, 약 70만 년 전에서 청동기 시대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 및 유적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발굴 성과와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기원전 70만년 전부터 기원전 6000년 경까지 시기에 해당된다. 약 7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충청북도 단양군의 금굴, 평안남도 상원의 검은모루 동굴, 덕천군의 승리산 동굴 최하층 유적,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 등에는 기원전 70만년 경의 뗀석기와 동물 뼈조각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초기의 인골은 약 10만년 전의 평양시 역포구역에서 발견된 역포인과 덕천군 승리산의 중층에서 발견된 덕천인과 단양 상시바위그늘에서 발견된 기원전 3만 9천년 경의 남성 아래턱뼈 상시인 등이 그들로, 이들은 호모 하이델베르켄시스에 해당되는 것으로 비정된다. 기원전 4만 년 경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면서 기원전 3만년 경에 한반도에 도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서서히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자생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 1962년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를 시작으로 공주시 석장리, 제천군 점말동굴, 덕천 승리산 동굴 등에서 구석기 시대의 인골 발굴이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체질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유골이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 연천 전곡리 유적 전곡리 유적은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0여 차례의 발굴 결과 전기 구석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 중요한 유적이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 있는 해발 61m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다섯 군데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적으로는 주먹도끼, 박편도끼, 뾰족찍개 등이 있다. 전곡리 석기는 대부분 석영이나 규암으로 된 자갈을 이용한 것으로 큰 자갈의 박편을 떼어낸 뗀석기나 작은 자갈을 다듬은 원핵석기가 많다. 공주 석장리 유적 단양 금굴 유적 단양 상시리 유적 청원 두루봉 유적 제천 홍수굴 유적 제천 점말 유적 한국의 중석기 시대(또는 고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부근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행하는 과도기에 해당되며,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동아시아 중석기 시대의 구분과 함께 다양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 양양 오산리 유적, 홍천 하화계리 유적, 김해 패총 하층, 제주 빌레못 굴 등에서 발견된 유적들이 중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이들은 구석기인이 중석기시대까지 한반도에 정착한 유형 혹은 초기 신석기인의 유적으로 본다. 덧무늬토기, 부산 동삼동 출토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출토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와 달리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쓰인 시대이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1만 년 전에서 4천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간석기를 비롯하여 빗살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한반도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 발견되며,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이때문에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도 한다. 간석기는 신석기 초기부터 쓰였으나 농기구나 무기에 간석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중기 이후이다. 특히 울산 대곡리반구대암각화 (국보 제 285호)는 신석기시대에 조성된 바위그림으로 선사인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 285호) 대곡리 청동기 일괄.jpg|250px|섬네일|화순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 일괄 상고 시대는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국가성립까지를 가리키는 시대구분이다. 한국의 상고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된다. 상고 시대의 중요한 사건은 국가의 형성이다. 그러나, 한국사 학회에서는 최초의 국가가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에 대해서는 부족집단에서 출발하여 국가를 이루었다는 부족국가설, 추장과 같은 지도자의 권력이 커지면서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군장국가설, 마을 단위로 모여살던 사회가 국가의 기원이 되었다는 성읍국가설 등이 있다. 1940년대 이후 주장되어온 부족국가설은 1960년대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아 오늘날에는 학계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안된 군장국가설과 성읍국가설은 서로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고대사회 경제, 정치 관계에 대한 연구 성과를 근거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1990년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가 출판한 《한국사》 에서는 성읍국가설을 채택하고 있고, 서울대학교출판부의 《한국사특강》은 고조선의 출현을 군장국가설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기원전 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요임금 즉위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나라이름을 조선이라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를 근거로 연도를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 (약 4400년 전) 그러나 이 기록은 단군 신화와 함께 서술된 것으로 그 정확성을 믿기는 힘들다. 한편 단군은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칭호로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단군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이나 재위 연도를 알 수는 없다. 일각에서는 환단고기를 근거로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으나, 환단고기는 많은 면에서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자료로 비판되고 있으며 역사 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조선은 단군조선 시기와 위만조선 시기로 나뉜다. 근대 이전의 옛 역사서에는 기자조선이 등장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평가된다. 고조선이 중국측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에 쓰인 제나라의 《관자》(管子)로 제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공자는 동방예의지국인 구이로 망명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구이는 중국에서 고조선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 강역 문제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이 요동이나 요서에 있는 평양인지 아니면 지금의 평양시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는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인 세형동검이 만주지역에서도 출토되고 문헌에 고조선이 연나라와 싸워 패했다는 기록이 있어 기원전 3세기를 전후로 하여 남쪽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와 사회 제도 고조선 후기인 위만조선 시대에 대한 기록에는 박사, 경, 대부, 상, 대신, 장군 등의 관직명이 남아있어 중앙정치조직이 있었음을 알게해 준다. 그러나 지방 세력은 독자적인 정치 권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상 역계경이 한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왕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휘하 2천호를 거느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해 버리는 일이 있었다. 고조선은 노비와 귀족, 왕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고 8조법과 같은 법률이 있었다.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의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철 기술의 도입으로 만들어진 철제 농기구는 농업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당시 주요 유물로는 철제 농기구, 철제 무기와 함께 막대 모양의 쇳덩이인 덩이쇠가 있는데 이 덩이쇠가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배 계급이 철의 주조능력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철기 문화는 무쇠와 강철이 거의 동 시대에 발전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위만조선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개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강만길은 일본인 2세가 페루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페루의 역사가 일본의 역사에 편입되지 않듯이 위만이 연나라 출신이라하여 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석암리 금제 띠고리.jpg|섬네일|250px|낙랑시대 금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국보 제89호 금제교구)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중국의 망명자를 많이 받아들이고, 예나 진국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섭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9년 섭하를 보내 우거의 무역독점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우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과 고조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의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사군은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증가된 생산력과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는 여러 소국들이 건설되었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되었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고조선 이후 세워진 부여는 철기를 바탕으로한 연맹 왕국이었다. 이후 동예, 옥저,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탐라, 우산국과 같은 연맹체 왕국들이 출현하였다. 이후 이러한 연맹 왕국에서 출발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주변의 왕국들을 병합하여 성장하게 된 삼국시대까지 여러 소국과 대국이 혼재하여 있던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 또는 열국시대라한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예맥(濊貊)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웠던 부족 국가인 부여(夫餘, 扶餘)는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나라이다. 동은 읍루(挹婁), 남은 고구려 및 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었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로 구분된다. 부여 부여는 별도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북부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흘승골성에 도읍하였다는 건국신화가 있고 동부여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이 세웠다고 한다. 부여는 전국을 사출도(四出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같은 제가(諸加)가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그 인구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풍속이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 특히 엄벌하였다. 북부여와 동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고구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이후 주몽이라 불리는 군장을 중심으로 한 부여계 지배층이 이주해 와 고구려의 계루부를 형성하였고 기존의 토착세력인 소노부를 대체하여 고구려 연맹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는 땅이 협소하고 산악지역이 많아 주변에 대한 전쟁을 자주하였다. 주변의 여러 소국을 복속시키며 확장하던 고구려는 부여를 흡수하여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옥저와 동예 동해안에 면한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라 불리는 소국이 있었고, 이들은 예맥족의 한 지족(支族)으로 고구려와 언어·풍속이 비슷하였다.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며, 예맥족의 부족사회였다. 또한 중앙의 왕이 없고 각 지방의 맹주인 현후(縣侯)가 군림하였다. 현후 밑에 삼로(三老)가 하호를 지배하였다. 자원이 풍부하였으며 2만호에 이르는 비교적 큰 나라였으나 왕국을 성립하지는 않았다. 이후 이웃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동예(東濊)는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던 부족사회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가 통치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삼한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 기원전 8세기무렵에 이미 한반도 여러 곳에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는 지배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수 많은 성읍국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과 같은 수 많은 고인돌을 남겼다. 기원전 3세기의 기록인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삼한에 속한 나라들이 무려 70~80여 국에 이르며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는 6~7백호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크고 작은 소국들은 점차 연맹왕국을 이루어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되었다. * 마한 삼한 중 가장 먼저 세력이 커진 것은 마한이었다. 한강 유역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맹 왕국이었던 마한 내의 목지국은 마한을 비롯한 삼한을 지배하여 진국의 왕으로 불렸다. 일찍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국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이리하여 고구려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가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전설상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 기초를 다졌다. * 변한과 진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斯盧國)이 경주평야의 6촌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로 발전해 갔다. 한편 변한에서는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발전하였다. * 삼한의 생활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되었으며,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였다. 농경과 철기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별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기풍제와 추수감사제를 지냈다. 한국의 고대는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900년까지의 시기로, 원삼국시대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으로 합쳐진 삼국시대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발해가 세워진 남북국시대, 그리고 신라 말엽 호족 세력에 의해 형성된 후삼국시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476년 한반도 삼국시대 지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은 각자 고유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들 나라는 이렇듯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시간적 선후를 지니며 각자 독자적으로 성립했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해 나갔다. 일부 사학자들은 실질적으로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 시대가 전개된 것은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이므로 사국 시대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삼국시대의 정치 삼국 시대 초기 국가들의 정치는 국왕과 지방세력인 각 부의 연맹 왕국 형태였다. 고구려에는 5부가 있었으며, 백제역시 고구려-부여계의 이주집단이 부를 형성하였고, 신라에는 6부가 있었다. 이들 부는 독자적인 무력 행위나 외교를 할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독자적인 자치를 누렸다. 고구려에서는 3세기 전반까지도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왕권이 점차 강해져 관등제가 확충되고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왕을 중심으로한 일원적인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 확립의 결과 각 나라에서는 율령이 반포되고 호구를 조사하여 세입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귀족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하였으며 실제 국정의 운영은 이들 귀족들과 왕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정사암 고사, 신라의 화백제도 등은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귀족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의 언어 삼국사기에는 3국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 별다른 통역이 필요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측의 기록에서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와 동예 옥저의 말을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양서》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장과 예절, 언어가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어휘와 이두 표기에서도 이들의 언어는 공통점이 많으며 중세 국어와도 통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각 나라의 언어는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같았다고 볼 수 있다. tomb mural.jpg|섬네일|left|무용총 수렵도.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 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의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과 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백제의 왕관 장식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 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에 진출하고 전라도 지역의 마한 잔존 세력을 병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연이은 압박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맞았다. 침체에 빠진 백제는 무령왕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중흥 노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본인도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新羅)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이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532년 수도인 금관가야 등이 신라에 정벌, 투항하였고, 결국 대가야가 562년 최종적으로 항복함으로써 가야는 멸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가야의 패망 원인으로는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까지의 영토를 확립하고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남북국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로, 남북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통일신라라는 시각이 강했고, 이러한 관점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나,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고를 필두로, 남인 실학파와 노론 북학파 계열 일부로부터 발해역시 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이 시도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근대 이후 결실을 거두어 1980년대 이후 발해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신라의 건축물인 불국사. 나당 전쟁(羅唐戰爭)의 마지막 해인 676년,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以南)을 완전히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侍中, 중시)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祿邑)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 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 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9세기에 들어서 왕위 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고, 중앙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전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고, 골품제의 폐단이 속출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워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칭하며, 조정으로부터 자립하였다. 중하대 신라 시대에는 대동강 이남의 통일로 전쟁이 줄어들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며, 특히 불교 문화는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발해의 석판 발해(渤海)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와 동부,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696년, 영주(營州)에서 거란(契丹)족의 반란이 일어나 이 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세력이 쇠퇴해졌다. 옛 고구려의 장수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그의 아들인 대조영(大祚榮)은 이틈을 노려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한 후 영주에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의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뒤, 698년에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 제2대 무왕(武王)은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정하고,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북부여를 계승한 두막루(豆莫婁)를 병합하고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압박하였다. 또한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의 등주를 공격하여 당에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제3대 문왕(文王)은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하였다. 문왕은 영토 확장보다는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문왕은 발해의 수도를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순으로 옮기며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얻는 데 주력하였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다. 그러나 신라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제10대 선왕(宣王)은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하여 발해 역사상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선왕대에 이르러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릴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제15대 왕인 대인선 (大諲譔) 의 치세에 멸망하였다. 10세기에 들어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15대 220년간의 역사를 남긴 채 사라졌다. 발해는 문화적으로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와 당의 문화를 수용한 문화국가였다. 발해의 귀족이었던 열만화는 발해의 유민들을 모아 압록강 부근에 정안국(定安國)을 건국하였고, 2대 왕이었던 오현명은 거란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986년 거란의 2차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는 892년 ~ 936년의 시기에 해당하며 견훤과 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신라 말기(9세기 말)에 들어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지방의 호족들이 자립하기에 이르렀고, 이 중 군인 세력인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고, 뒤이어 궁예도 901년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고구려를 세웠다.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 고려(高麗)는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의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한 이후,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멸망하기까지 475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왕조이다. 우리나라가 ‘코리아(Korea)’로 불린 것은 약 1000년 전인 이 고려 시대(918~1392)부터다. 고려를 드나들던 서역 상인들이 ‘고려’를 ‘꼬레아’라고 부르던 데서 한국의 영어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만큼 고려는 국제화되고 개방적인 나라였다. 여성의 지위가 조선에 비해 훨씬 높았고, 문화적으로도 역동적인 다원사회였다. 고려는 개국 초, 각 지방호족에게 토성(土姓)을 나누어 주어 자기 지역을 다스리는 본관제를 시행했고, 지방관을 파견한 주현을 통해 다른 속현을 다스리는 독특한 지방 지배체제를 갖췄다. 고려는 전기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양인을 늘렸고, 과거제를 도입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후기 권문세족의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새로운 세력에게 왕조를 내줬다. 한국사에서는 이 고려 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 고려는 신라 말기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개국하여, 송악을 개경(開京 현재의 개성)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았다.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이후 고려의 4대 국왕인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켜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자 하였다. 거란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특히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섬멸하였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고려 사회는 점차 그 사회와 문화가 향상 되어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났으나, 11세기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는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그 예다.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때로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Koreana-01.jpg|섬네일|250px|팔만대장경. 12세기 중반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후로는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또한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전국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한편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이 고려로 침입해 왔는데,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이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나 당시 집권자인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결국 1270년 최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어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의 항쟁은 모두 진압되었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원의 간섭기 동안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또한 새로이 등장한 권문 세족은 불법 행위로 사회 모순을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원이 점차 쇠퇴할 즈음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과 신진 사대부 계층의 성장 기반 마련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는 등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고려 사회는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왜구와 홍건적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의 이성계는 정도전을 위시한 신흥 사대부들과 결합하였고, 신흥 사대부들은 점차 권문 세족을 압박하는 개혁을 확대하여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Taejo Yi 02.jpg|섬네일|140px|right|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조선(朝鮮)시대는 근세에 해당된다.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1388년 고려의 무신으로서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왕·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어 정몽주가 제거되자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1398년, 1400년)이 발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당성이 결여된 집권으로 쇠약해진 왕권을 다시 강화해 나가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육조직계제와 관제 개정 등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양민으로 복귀시키는 등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부왕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서자(庶子) 및 서얼(庶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든다. 이때 구성된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 제도는 성종 때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되어 영조때까지 서얼의 관직 임용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 많은 서얼들의 자유로운 활동의 제한 및 사회적 차별을 유발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유신(遺臣)을 자처하며 새 조정에 협력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중반 이후 서서히 고려 유신 세대는 사라졌고, 그 아들, 손자 세대는 새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북방 지역인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시켰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였던 《경국대전》 의 편찬을 완성하고 국가의 의례서인《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또한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들인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 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고려 말기의 온건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후예이며 학맥상으로는 정몽주의 후예들이었던 사림은 세조 대에 김종직 등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래 꾸준히 세력을 넓혀 나갔다. 김종직은 비록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찬탈을 비난했지만, 이후 성종 대에 훈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파 들을 본격적으로 등용하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한다. 동시에 이들 사림은 향촌에서 향약과 소학 등을 보급함으로써 지역적 기반을 다져놓기도 한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boat.jpg|섬네일|200px|거북선.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는데,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 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반정).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전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건설한 수원 화성.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 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영조의 강력한 탕평정치로 인해 왕권이 강화되고 붕당정치의 힘은 약화되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으며,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 1800년 8월 18일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이와 전후하여 서양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되었고,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東學)이 창시되었으나 모두 박해를 당하였다. Daewongun Portrait.jpg|섬네일|right|180px|흥선대원군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의 어린 둘째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이후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1884년 12월 4일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파병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이에 고종은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10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였던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을미의병). 한편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4년 1월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시기로 분류된다. 대한제국의 국기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존속한 제국이다.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진 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 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구본신참 성격의 점진적인 개혁으로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독립협회도 수구파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더욱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1904년 2월 23일,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게 한반도내에 영토, 시설등 군사적 이용을 협조할것 을 강요하는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고문정치).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는데,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제국이 전략적인 승리를 얻게되어 한반도에 영향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어서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일방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통감정치).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으며, 다시 의병이 조직되어 무장 항전을 벌였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통감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군대를 강제로 해산(軍隊害刪)하였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가담하여 의병 운동의 양상은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60일간의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일제(日帝)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경술국치)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는 일본 제국(이하 일제)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시기로서, 제1기인 무단 통치 시기, 제2기인 민족 분열 통치 시기(소위 문화통치), 제3기인 민족 말살 통치 시기로 나뉜다. 1910년대는 일제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태형에 처하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되었다. 또 산림령, 광업령, 어업령을 공포하여 민족자원약탈을 적극적으로 수탈하였다. 한편 한일병합으로 국내에서 민족 해방 운동이 어렵게 되자 민족 해방 운동가들은 국내에서는 비밀결사형태로 조직되었다. 근대 때부터 존재해왔던 대표적 비밀결사 항일 운동 단체인 신민회는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을 계기로 해체되고 말았다. 해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미주 지역 등에서 민족 해방 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많이 이주하여, 간도 일대에 한인촌, 연해주 일대에 신한촌 등을 형성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큰 도움이 되었다. 3·1운동 기념비 일제의 탄압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919년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인 3·1 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발표는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고, 이는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견하는 것과,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으로 이어진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만으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통치 을 시행했다. 이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 위한 고등경찰제 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때 3.1 운동의 무자비한 진압을 보고 충격을 받은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는 무장 투쟁론과 외교 독립론 외에 실력 양성론이 나타난다. 윤치호, 안창호, 이광수, 신흥우, 김성수, 안재홍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교육과 문화 사업 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한 뒤에 독립이 가능하다 판단하고, 학교 설립, 신앙 활동, 계몽 활동, 언론 활동, 문화 사업 등을 추진해 나간다. 그리고 일제는 무단통치시기에 금지되었던 언론`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이 때에 탄생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후일 한국 사회의 주류 언론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20년대 초 신문에 대한 검열을 통해 삭제, 정간, 폐간을 자행하였다. 또한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단체의 설립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또 조선인의 교육의 기회를 늘리겠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노동력 양성을 위한 산학과 같은 초급 학문이나 기술 교육만을 허용하였고,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한 운동도 탄압하였다. 민립대학 기성회 광고.jpg|섬네일|left|140px|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1923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일제는 조선인을 기만하고 식민통치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의 분열과 이간을 조장하였다.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던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자치론자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을 상대로 조선인의 자치권을 청원하는 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한편 해외에서는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내부의 독립운동 방법론 차이에 따른 분열과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임시정부 주도의 독립 운동은 한동안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국내에는 천마산대, 구월산대 등의 유격활동을 하는 게릴라부대 등이 존재하였다. 특히 천마산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역할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계열과 사회주의자의 연대가 계기가 된 6·10 만세 사건(1926년)과, 해외에서의 불어온 좌우합작의 분위기로 인해 국내에서도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때에 만들어진 것이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민족단체였던 신간회이다. 신간회는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세력과 결별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자 계열이 모여 만든 좌우합작단체인데, 국내의 많은 대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3·1 운동 이후 가장 큰 항일 운동이었던 광주학생운동(1929년)에도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노동운동이 항일운동으로 변화되는 성격을 지닌 원산 총파업도 지원하였다. 특히 신간회는 많은 사회 대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는데, 대표적인 여성 단체였던 근우회를 자매단체로 두기도 하였고, 형평 운동이나 청년 운동 등 많은 대중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국내외에서 일본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는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 투쟁도 활발하였다. 무장투쟁 외에도 자체적인 실력 양성론이 전개되어 김성수 계열과 조만식 계열을 중심으로 일본과 외국계 자본에 대항하는 국내 자본 양성 노력이 시도되었다. 안재홍과 정인보 등은 유적지 발굴과 역사 연구를 진행해 나갔고, 장택상 등은 해외로 반출되는 고미술품을 매입하여 유물의 반출을 차단하였다. Jirō 1931.jpg|섬네일|140px|민족말살정책을 실행한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 192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일제는 그 타개책으로 식민지 확보를 통한 블록경제를 선택하였다. 그에 따라 1930년대 일제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한, 1941년 일제가 미국의 진주만을 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이른바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되었고, 학도 지원병, 징병제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의 명목아래 성노예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침체되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활동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 애국단의 활약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애국단의 일원이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도 끌어내 후에 중일전쟁 이후에 창설된 한국 광복군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 30년대의 독립 운동의 중심점은 김원봉과 김규식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이후 김원봉과 김규식, 그리고 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만주지역에 자유시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사실상 중단된 무장 독립 투쟁 노선도 1930년대 초반부터 한중연합작전을 전개해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만주침략이 본격화 된,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이 힘들어지자, 지청천과 같은 혁신의회 계열의 한국독립군 인사들은 임정의 요청을 받고 중국 관내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여건 속에서도 만주에서는 한중연합작전을 넘어선 한중연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 관내에서는 많은 항일 무장 부대가 편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원봉과 김규식, 지청천, 조소앙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와,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 김두봉 등이 주도한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 인사들이 충칭의 임시정부로 합류하자, 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의 다수의 세력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그 후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독립동맹의 산하 군조직으로 편성되었다. 1910년 이후로 침체되었던 외교독립론은 1933년 이승만이 제네바 회의에 참석한 것을 이후로 여러 국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외교 활동은 1930년까지도 미미하다가 1932년의 윤봉길, 이봉창의거를 계기로 활기를 띄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 독립의 승인을 요청했고, 1941년의 태평양 전쟁 이후 그의 노력이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한국 광복군을 연합군과 연합작전을 시행하였다. 미얀마와 인도 일대에서는 영국군의 지원요청으로 주로 심리전 역할을 담당하였고, 미국의 OSS 전략사무국과 함께 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나, 도중에 일본이 항복하여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종료되었다. reed hodge.jpg|섬네일|right|160픽셀|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으나, 곧이어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해 주둔함으로써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 기간에 좌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결국 1948년에 38선 이남에서 총선거가 실시된 후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면서 남북이 분단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는 한국 전쟁을 거쳐 한반도 이남의 대한민국과 한반도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확실히 나뉘게 되었다.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와 한민족의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한반도내에는 건국준비위원회등이 치안과 행정권을 담당하여 혼란한 해방정국 상황을 일시적으로 수습하였으나, 9월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정책과 포고령으로 불인정 되었고, 곧이어 한반도에는 군정기를 맞게 된다. 군정기 기간동안 좌∙우익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좌우합작운동등 추진되었으나 구심점을 잃게되었다. 트루먼 독트린이 계기가 되어 냉전이 시작되고, 계속되는 좌,우익 세력의 대립으로 인해 남북 각각 단독정부 수립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각자 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된다는 여론이 우세하게 작용했다. 전쟁 시 한복 여성.jpg|left|섬네일|160px|한국 전쟁 당시 입대하는 장정을 마중나온 여성 (대구) 특히, 1950년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였고,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반시설은 대부분 초토화되어 남북한 사이간의 상호 불신이 더욱 깊어 갔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참상과 깊은 후유증속에, 1950년대에는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받는등 삼백산업의 발달로 전쟁의 참혹한 폐허의 상처를 딛고 복구해 나아갔다. 이후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여 자유당의 영구집권 음모로 발생한 3·15 부정 선거의 후유증으로 부정선거 개표와 재선거를 촉구하는 시위가 4·19 혁명으로 번지면서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허정의 과도내각을 거쳐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국 최초의 정권교제인 제2공화국은 그러나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구파, 신파간 갈등으로 1년만에 5·16 군사 정변으로 몰락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정부주도의 경제발전 계획 이래 경공업 및 경제개발계획등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에 육성에 크게 기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등 크게 발전해 나아갔고, 1980년대에는 3저 호황 으로 경제안정기를 맞아 첨단산업 발달하였다. 1997년 11월에 IMF로 경제위기난을 겪기도 하였지만, 2001년 8월 IMF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광복 직후에 대한민국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 또한,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제5공화국까지 이어지던 1987년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주의 정부가 새로 출범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었으며,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져 가고 있다. 광복 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넓어지면서,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는 점이 있다. 오늘날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20세기 말 찾아온 IMF 경제위기로 인해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었으나, 금모으기 운동 등 국민의 뛰어난 단합력을 보여주면서 한강의 기적 이라고 불리는 빠른 경제회복을 맞았다. 대한민국은 천연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나, 높은 교육열과 학생들의 뛰어난 학습력 및 공부에 대한 의지로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가진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배출된 수많은 인재가 대한민국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 역량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바이다. 또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국민들은 단합의 기회를 갖고, 그 이후 시민의식 수준이 더 높아지게 되었다.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의 저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단연 교육의 힘만이 아니다. 현대 대한민국은 문화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은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그 종류도 세분화되었다. 또한, 학습적인 교육에만 국한된 교육이 아닌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융합형 인재는 물론이고 음악, 미술, 체육 등에 능통한 예술 인재 또한 배출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 인재들은 대한민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육이 다른 분야에 영향을 미친 예이다. 대한민국의 노래들은 K-Pop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아이돌 및 가수들은 해외로 나가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계인들은 K-Pop에 열광하며 엄청난 규모의 해외 팬까지 생겼다.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계 각지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소위 문화 강국 이 된 것의 배후에는 또 교육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단연 학습 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교육 이란 광의(廣意)의 교육으로써 모든 분야에서의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아이돌은 어려서부터 특화된 교육-가창력 향상 관리나 춤(안무) 테크닉 교육 등-을 받아 노래, 춤, 작곡 등에 모두 능통한 융합형 인재 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것 역시 교육이다.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은 단순히 많은 융합형 예술인재가 배출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신인 예술인재들은 선배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문화를 이어간다. 즉, 일관성 있게 재창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가수들은 1960~1990년대의 대한민국 선배 가수들의 노래를 리메이크한다. 이것은 예전 세대와 현재 세대의 문화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주며 이렇게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문화를 창출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문화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화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그 예가 정치 관련 홍보를 콘서트 등의 문화 행사로 시행하여 그 효과를 높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의 대한민국은 과학기술, 산업, 인재, 교육, 시민의식과 예술, 문화, 경제 등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는 국가이다. 고조선 최씨낙랑국 부여 옥저 동예 삼한 (마한-진한-변한) 고구려 백제 가야 연맹 탐라국 우산국(우산국-우산도) 발해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후백제) 미군정 한국의 역사학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국사 (교과목)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사의 오류와 진실 한국의 독립운동 대한민국의 정부표준영정 《한국사 - 1.총설》, 국사편찬위원회, 2002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에 관한 정보를 수집, 정리, 편찬하는 국가 연구 기관, 소장 자료, 논문, 저서 검색, 한국사 관련 연구 기관. 소장 자료, 논문, 저서 검색, 한국사 관련 안내 국사 전자 교과서 현직 교사들이 연구.감수하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지원하였다. 2007년 개정된 국사교과서의 내용이 아직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 역사 정보 시스템 한국사 연표, 한국사 기초 사전 및 신문 자료, 문헌 자료, 문집 등을 제공 한국학 중앙 연구원 한국 문화 및 한국학 여러 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연구 기관. 디지털 한국학 개발, 정보 광장, 전자 도서관, 전통 문화 등 수록 역사 문제 연구소 순수 민간 연구 단체, 근현대사 자료실, 간행물 자료, 한국사 학습 자료 등 수록 고구려 연구재단 고구려사를 비롯한 중국의 역사 왜곡에 학술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2004년 설립된 법인.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 관련 자료의 조사, 수집, 정리, 정보화 자료 제공.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 으로 편입되었다. 국가 기록 영상관 대한 뉴스, 문화 기록 영화, 대통령 기록 영상 등 멀티미디어 역사 자료 제공 국가 문화 유산 종합 정보 서비스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 기념물 지정 종목별, 시대별, 지역별, 유형별, 유물 정보, 검색 서비스 제공 국가 지식 정보 통합 검색 시스템 정보 통신부 제공, 과학 기술, 정보 통신, 교육, 학술, 문화, 역사 등의 포괄적이고 연동적인 학술 데이터 검색 국가기록유산 국가적 기록유산의 원본과 원문 열람 서비스 제공 |
vi (브이아이는 Emacs와 함께 유닉스 환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문서 편집기이다. 1976년 빌 조이가 초기 BSD 릴리즈에 포함될 편집기로 만들었다. vi라는 이름은 한 줄씩 편집하는 줄단위 편집기가 아니라 한 화면을 편집하는 비주얼 에디터(visual editor)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기능으로 열광적인 사용자가 많다. 현재는 오리지널 vi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일반적으로 기능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클론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클론 중 많이 쓰이는 것은 기능이 다양한 것을 장점으로 내세우며, 리눅스 배포판에 포함되는 Vim, 그리고, BSD 라이선스로 제공되며 원본 vi의 동작과 호환성으로 정평이 나 있는 nvi, 독자적인 팬층을 확보한 elvis등이 있다. ADM3A 키보드 레이아웃 빌 조이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Lear-Siegler ADM3A 터미널에서 vi를 작성했다. 그런데 이 터미널의 키보드는 키가 오른쪽 현재의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IBM 호환 키보드(IBM PC 키보드) 에서 키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키를 가지고 사용자들이 vi 에디터 모드 변경을 매우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또한 Lear-Siegler ADM3A 터미널에는 화살표 키에 대응할 만한 키가 없었기 때문에 vi는 H, J, K, L 키(keys h , j , k , l )가 지금의 화살표 키를 대신해서 커서를 이동하게 만들어졌다.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일반적으로 명령(normal) 모드로 시작하게 된다. 이때 키보드에서 키를 누르게 되면 편집(insert)모드로 들어가게 된다. 키를 누를 때까지 문서 작성을 할 수 있다. vi에서는 편집모드에서만 내용을 넣거나 수정할 수 있다. vi 편집기는 입력, 명령, 비주얼 등의 모드가 있어 같은 키 입력이라도 현재 모드에 따라 다른 동작을 한다. 입력과 명령모드를 주로 왔다갔다 하면서 편집하게 된다. 입력모드에서는 말 그대로 입력하는 문자가 그대로 문서에 입력된다. 입력상태에서 키를 누르면 명령모드로 바뀌게 된다. 명령어 모드에서는 나 키 등을 사용하지 않고도 키를 두드려서 커서의 움직임이나, 붙여넣기, 지우기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는 커서를 아래로, 는 위로 움직이게 하며, 는 커서 위치의 한 문자를 지우고, 는 입력상태로 들어가게 한다. 명령어 모드에서 키 등을 누르면 비주얼 모드가 되고 영역을 설정할 수 있게 된다. vi 실행 초기의 모드는 명령모드이기 때문에, vi를 처음 사용하는 사용자들은 아무리 키를 눌러도 누른 키가 입력이 되지 않아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Vi는 유닉스에서 발전하였고 조금 더 개량한 vi 복제품들이 나와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이 다양한 컴퓨터에 포팅되어 있다. Vim 은 "Vi IMproved"의 약자로 만든 이름이며 현재 vi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vi보다 더 다양한 기능(구문 강조 기능(또한 이 기능을 작성하는 기능), 마우스 지원, 그래픽 버전, 시각 모드, 수많은 새로운 편집 명령어들을 가지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리눅스 시스템에서는 이 프로그램이 표준 모델로 들어가고 있다. macvim Vim for the Mac 가장 최근에 나온 맥용 Vi emacs 애용자들은 vi를 vicious interface 라고 한다. Snap.com 은 vi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인터넷 검색 엔진을 개발했다. visearch.com 웹페이지 Vi Lovers 홈페이지 한국 Vi 사용자 모임 Vi/vim 단축키 모음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유닉스 문서 편집기 분류:유닉스 SUS2008 유틸리티 분류:BSD 라이선스 소프트웨어 |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다.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 1922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피페의 커크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애덤의 부친은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모친에게로 돌아왔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장난스럽게 애덤 스미스는 별로 쓸 만한 집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첨부한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대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하였다. 1748년에 케임스경의 후원하에 에든버러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했다. 1764년부터 귀족인 타운젠트의 아들을 데리고 가정교사를 하며 유럽여행을 시작한다. 2년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였다. 귀국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1776년 유명한 을 발표하여, 국가가 여러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 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경제학 사상 최초의 체계적 저서로 그 후의 여러 학설의 바탕이 된 고전 중의 고전이다. 1778년 스코틀랜드의 관세 위원이 되고, 1787년 글래스고 대학 학장을 지냈다. 그는 영국 정통파 경제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며, 윤리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시장 경제야말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낳으며, 사회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통한 자유무역과 노동분업이 왕이나 군주보다는 보통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의 중앙계획경제 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데 반해 시장경제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위정자들과 연고 없는 사람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만큼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그의 노동 가치설 이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 일반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가치 분석은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 노동의 결과물을 모두 보수로 받던 것과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가 이윤을 떼어 가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일관성을 잃는 점이 있으나,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앨프리드 마셜 야경국가 카를 마르크스 따뜻한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의 발목을 잡다 분류:1723년 태어남 분류:1790년 죽음 분류:영국의 경제학자 분류:영국의 철학자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 동문 분류:글래스고 대학교 동문 분류:에든버러 대학교 분류:글래스고 대학교 분류:영국의 경영학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에든버러 대학교 동문 분류: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분류:스코틀랜드의 경영학자 |
타이완 섬은 대만 ()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면적은 35,980 km²로, 시간대는 UTC+08:00이다. 별칭은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을 가리키는 포르모사 ()이다. 거주 인구는 약 2300만 명이다. 카이로 선언에 따라 일본의 식민 통치가 끝난 1945년부터 중화민국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1949년 국공 내전 이후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나의 중국 논리에 따라 자국으로의 귀속을 주장하여 타이완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일본 류큐 제도와 중국 대륙, 필리핀의 가운데에 위치한 교통 요지이다. 타이완에서 류큐 제도까지의 거리는 약 75 km, 중국 대륙까지는 약 150 km, 필리핀까지는 약 300 km다. 타이완의 지형은 산이 많아, 전체 면적의 64%가 산지이다. 중양 산맥이 섬의 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봉우리들의 평균 고도는 3000m를 넘는다. 섬에서 가장 높은 위 산(玉山, 옥산)은 표고가 3997m에 이른다. 산맥의 동쪽은 평야부가 적고, 태평양 연안에서는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솟는 절벽이 계속된다. 그에 비해 서쪽은 비옥한 평야가 완만하게 타이완 해협을 향해 펼쳐져 있다. 대부분의 강이 타이완 산맥에서 발원하고 있어 모두 짧고 험난하다. 주요 하천은 서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가장 긴 하천은 중부를 흐르는 줘수이강(濁水溪 탁수계, 167km)이다. 타이완의 기후는 온난 습윤 기후로 대변된다. 섬 전체의 연평균 기온은 23 °C로 온난하다. 여름은 5월부터 9월까지로 평균 기온은 28 °C이나, 겨울은 12월부터 2월까지로 짧고 매우 따뜻하여 북부에서도 평균 기온은 10 °C를 넘는다. 높고 험한 타이완 산맥과 계절풍은 타이완의 기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타이완 북동부에 있는 지룽 및 이란의 강우량이 많은 것과 섬 남서부의 건조기후는 이러한 요인에 의한 것이다. 섬 전체의 연간 강수량은 2540 mm로, 평지보다 산지가, 서해안보다 동해안 쪽이 많다. 또 6월부터 10월에는 태풍이 많이 거쳐가 매년 큰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타이완의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따뜻한 기후로 생성된 비옥한 풍토라 할 수 있다. 광물자원으로는 석탄, 대리석, 유황, 석유, 천연가스 등이 산출된다. 타이완에 분포하는 식물은 3800종이 넘는다. 삼림에 덮인 산은, 고도에 따라 삼림 형태가 달라지며 다양한 식생이 분포한다. 해발 0-1980m는 아열대성의 식생이 나타나고, 1980-3050m는 낙엽수림대와 침엽수림대의 혼합 지대, 3050m이상은 침엽수림이다. 근래에는 고산 기후를 이용한 고랭지 채소 재배나 과일 재배가 행해지고 있다. 이곳에 서식하는 동물도 여러 종류가 있다. 포유류는 다람쥐과, 사슴, 멧돼지, 타이완곰 등 63종(1996년 시점)이 확인되었다. 또한 많은 새(445종), 파충류(80종), 양서류(31종), 곤충을 볼 수 있다. 타이완 주변에는 22개의 작은 섬이 있다. 이 중에는 현재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댜오위 섬(釣魚島, 중국어 댜오위 섬, 일본어 센카쿠 열도)를 포함하고 있다. 란위 섬(蘭嶼) 뤼다오 섬(綠島) 샤오류치우(小琉球) 구이산 섬(龜山島) 미엔화 섬(棉花嶼) 펑지아 섬(彭佳嶼) 댜오위 섬(釣魚島, 센카쿠 열도) 타이완의 역사 연표 타이완 해협 타이완이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624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타이완 섬에 진출하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 시기에도 타이완 원주민들이 정주, 생활하여 왔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타이완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들의 섬이었다. 명·청대 들어 점차 한족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타이완의 역사는 크게 16세기 이전 시기(선사 시대 포함), 네덜란드 점령 시기, 정씨왕국 시기, 청나라 시기,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 시기, 중화민국 시기(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타이완)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타이완 섬에 맨 처음 도달한 민족 집단은 말레이 폴리네시아계의 민족(지금의 고산족)이다. 이들은 부족마다 따로 떨어져 생활했기 때문에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고, 문자도 없었기 때문에 역사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중국대륙의 삼국시대에는 타이완을 이주(夷州)라 불렀는데 이릉 대전 이후 오나라는 주민부족에 시달렸다. 이에 손권은 230년 봄에 위온과 제갈직에게 정병 1만명을 준 뒤 이주와 단주 등을 샅샅이 뒤져서 주민들을 징발해오도록 명령했으나 위온과 제갈직은 가는 동안 풍랑을 만나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잃고 그렇게 징발해온 말레이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은 고작 1천명에 불과했다. 이에 손권은 대노하여 위온과 제갈직을 주살했다. 13세기 후반 원나라가 펑후 제도에 행정 기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타이완섬을 통치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한족 등이 세운 명나라가 펑후 제도를 차지 했지만, 역시 타이완섬은 별도로 다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타이완에 관련된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는 때는 유럽인의 상륙 이후이다. 17세기가 되면서 스페인인이 타이완의 북부지역 (타이베이 시, 지룽 시, 신베이 시 일원)을 차지하고,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타이완의 남부지역 (타이난 시 일원)을 차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농사를 짓기 위해 푸젠 성, 광둥 성에서 사는 한족들을 모집해 타이완으로 이주시켜 농업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타이완에 정착하면서 현대정치에서 본성인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서 한족 남성이 유입되면서 원주민 여성과의 결혼 빈도가 늘어나 자연스럽게 타이완만의 독특한 혈통이 형성되었다. 명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여 남명으로 밀려나고 만주족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자 항청복명의 구호를 내건 정성공이 1661년에 타이완에 있던 네덜란드 세력을 침공해 이듬 해인 1662년 네덜란드 세력을 타이완에서 축출하고 타이완을 장악하였다. 1662년 정성공이 죽은 이후에도 아들 정경이 타이완을 통치하였다. 정민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 처음으로 타이완에 사실상의 중국계 국가가 건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씨 일가의 타이완 지배는 청나라의 타이완 정벌에 의해 끝나버렸다. 이로써 타이완은 청나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당초 청나라는 정씨 일가를 응징할 목적으로 타이완을 공격했으므로 타이완을 직접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왜적의 침입을 막아야 되는 등의 군사적인 이유로 타이완을 활용하였다. 청나라는 타이완 섬에 1부(府), 3현(縣)을 설치하고, 푸젠 성의 관할하에 두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통치력은 타이완 전역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현재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유권 주장이나 1945년 중화민국 귀속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타이완 섬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했던 원주민은 푸젠 성, 광둥 성으로부터 생활이 어려운 한족들이 대거 타이완으로 이주 및 정착하였고, 당시에 스스로 한족과 동화되어 가던 청나라는, 관청에서 조직적으로 타이완 원주민에게 성씨나 가계도, 족보 등을 부여하여 한족화를 추진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청나라 조정과 원주민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에 동화되어 갔다.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청나라는 일본 제국이나 구미 열강의 대외 진출에 대한 방어 거점으로 타이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어, 1885년에 타이완을 푸젠 성에서 분리해 타이완 성으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1894년 일어난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일본의 주도하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만주와 펑후 제도를 비롯해 타이완 섬을 일본에게 할양하였고, 곧 타이완 성도 폐지되었다. 타이완 섬에서는 일본의 점령에 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나 타이완 민주국의 건국을 선포하기도 했었지만, 일본의 강력한 진압으로 저항 운동은 사그러들었다. 그 후, 일본 정부는 타이완 총독부를 설립해 1945년 패망할 때까지 타이완을 통치하였다. 일본제국의 패망으로, 1945년 10월 25일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는 50년 만에 중화민국으로 반환되어 현재까지 통치되고 있다. 1949년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화민국에 대한 권리 일체를 주장하고 있다. 타이완을 수복하고 통치하기 위해 파견된 중화민국 정부의 관료와 병사들은 타이완 주민들의 기대와 다른 모습들을 보여 이들에 대한 주민들의 실망은 무척 커졌다. 타이완 주민의 이러한 불만은 1947년 2월 28일의 항거(2·28 사건)를 통해 폭발하게 된다. 봉기로 인해 중화민국 관료들은 주민들을 상대로는 협상을 할 것처럼 시간을 벌면서 뒤로는 장제스에게 본토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3월 8일 본토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타이완에서는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본성인 약 3만여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이 사건은 타이완 본성인과 1945년 이후부터 타이완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외성인 사이에 깊은 앙금으로 남게 되었다.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의 국공 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에 밀려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하였고(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의 실효 통치 지역은 사실상 타이완 지구로 축소되었다. 1996년 3월 23일 국민의 직접선거로 총통을 선출하도록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타이완은 중국 국민당 장기 집권을 마감하고 본격적인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에 선출됨으로써 제헌 이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기도 하였다. 2008년 에는 중국 국민당의 마잉주가 당선되었고 2016년 에는 다시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이 총통에 취임하였다. 타이완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1945년에 연합국을 통해서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이 때는 동중국해의 작은 섬에 불과했으나,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게 밀린 중국 국민당이 1949년 난징 시의 국민정부를 타이베이 시로 전격 이전하면서 타이완은 중화민국의 중심지로 변모하여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1945년의 반환 결정은 곧 자국에게 소급된다며 23번째 성(省)으로 규정하고 타이완에 대한 일체의 영유권을 주장해오고 있다. 하지만, 타이완 특별행정구 로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 군대 불유지 타이완 지구 군대 유지 가능)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역사 타이완의 역사 타이완 성 (대만성, 臺灣省) 분류:중국어권 분류:타이완의 섬 분류:일본의 옛 식민지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분쟁 분류:아시아의 나라별 지리 분류:아시아의 영토 분쟁 분류:영토 분쟁 섬 분류:중화민국의 영토 분쟁 분류:중화민국 |
온도가 감소하면서, 흑체복사 곡선의 정점이 크기는 줄어들고 파장은 길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흑체복사 그래프는 레일리와 진스의 고전적 모델과도 비교할 수 있다. 흑체 (黑體, 란 진동수와 입사각에 관계없이 입사하는 모든 전자기 복사를 흡수하는 이상적인 물체이다. 열평형 상태에 있는(즉, 온도가 일정한) 흑체는 "흑체복사"라는 전자기 복사를 방출한다. 이 복사는 플랑크 법칙에 따라 방출되며, 그것인즉 물체의 모양이나 구성요소가 아닌 온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우측 그림 참조). 열평형 상태의 흑체는 두 가지의 주요한 성질을 나타낸다. # 이상적 방출체이다. 모든 진동수에서 대상은 같은 온도의 그 어떠한 물체만큼, 또는 그 이상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 확산성 방출체이다. 대상의 에너지는 등방적으로, 방향과 관계없이 복사된다. 대략적인 흑체면의 사례로는 단단히 둘러싸인 벽의 구멍을 들 수 있다. 구멍 속으로 들어간 빛은 영원히 반사를 반복하거나 구멍 내부에 흡수되어 다시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구멍은 거의 완벽한 흡수체이다. 이렇게 둘러싸여 사방이 막힌 복사체는 벽의 성질과 구멍을 둘러싼 다른 성분들에 따라 열평형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실제의 물질은 흑체 에너지 수준의 극히 일부(방사율이라 한다)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정의에 따르면, 열평형 상태의 흑체는 방사율이 ε = 1.0 이다. 진동수와 관계없이 방사율이 이것보다 낮은 물질은 보통 회체 (灰體라 한다. 방사율을 최대한 1에 가깝게 하여 흑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재까지도 주요한 관심대상으로 남아 있다. 한편 백체 (白體란 "모든 입사광선을 완벽히, 모든 방향으로 균일하게 반사하는 거친 면"이다. 천문학에서, 항성과 행성의 복사를 유효온도에 관하여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유효온도란 똑같은 양의 전자기 에너지 선속을 방출하는 흑체의 온도이다. 흑체라는 개념은 1862년에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처음 사용했다. "복사파의 분포가 물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 않고, 오직 온도에만 의존한다." 한 물체가 뜨거워지면 열을 내게 되는데, 이를 복사(radiation)라고 부른다. 고체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조사하면 여러 가지 파장 또는 진동수를 가진 빛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물체나 그 표면에 부딪히는 복사열의 일부는 흡수하고 나머지는 반사한다. 특히 표면에 부딪히는 모든 복사를 흡수하는 경우 이런 물체를 흑체(black body)라고 부른다. 물론 흑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 즉 복사열을 방출도 한다. 19세기말에 물리학자들은 흑체에서 어떻게 여러 가지 진동수를 가진 복사가 나오며 이들은 표면의 온도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많이 연구하였고 복사의 연구로부터 양자론이 시작되었다. 이런 흑체에 대한 연구의 시작은 1850년대부터로 생각할 수 있다. 1859년말에서 1860년초에 키르히호프(G. Kirchhoff, 1824-1887)는 흑체복사강도의 분포는 벽의 물질이나 빈구멍(Cavity)의 모양, 크기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온도와 빛의 파장에만 관계된다는 것이다 는 것을 밝혔다. 즉, 같은 온도로 달구어진 물체는 돌이든 쇠든 방출하는 빛의 분포가 똑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실험이나 이론물리학 수준으로는 다양한 온도와 파장에 걸쳐 키르히호프가 정의한 열복사의 강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키르히호프가 복사법칙을 발견하였지만, 열복사 문제를 맥스웰의 전자기학과는 별개로 취급되는 등 당시의 이론물리학 수준으로는 키르히호프의 복사 법칙을 정확하게 기술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1879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요제프 슈테판(, 1835-1893)이 실험적으로 전체 복사 에너지가 절대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884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슈테판의 공식을 맥스웰 방정식을 사용하여 유도하였다. 이 법칙을 오늘날 슈테판-볼츠만 법칙 으로 부른다. 1886년 미국의 천문학자인 랭글리(S. P. Langley, 1834-1906)는 적외선의 강도를 잴 수 있는 볼로미터(bolometer)를 개발해서 흑체구리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태양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정량적인 흑체 복사 법칙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볼로미터를 이용한 랭글리의 실험은 여러면에서 정성적이고 상당히 엉성한 것이었지만, 곧 여러사람들에 의하여, 실험적 차원에서 더욱 정교한 정량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1888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전자기파의 존재를 발견한 뒤에야 많은 사람들은 가시 광선이나 열복사에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을 적용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공동 속의 에너지 밀도 u는 에너지 밀도를 모든 진동수에 대해 적분하여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는 보편적인 상수이다. 총 에너지 밀도는 동공 벽의 절대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어떤 물체가 단위 시간당, 단위 면적당 복사하는 에너지 역시 에 비례한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슈테판-볼츠만 법칙이라고 한다. 빈 변위 법칙은 흑체 복사의 파장 가운데 에너지 밀도가 가장 큰 파장과 흑체의 온도가 반비례한다는 것을 말하는 법칙이다. 1900년 6월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는 위에서 주어진 빈의 미지함수 F가 상수임으로 보였는데, 고전물리학적 개념을 사용한 이 공식의 완전한 유도는 1905년 레일리와 진스(J. Jeans)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흑체복사 스펙트럼을 설명하기 위해, 레일리와 진스는 흑체복사를 온도 T에서 복사가 채워진 공동 (cavity)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전적인 계산을 하였다. 흑체 내부의 밀폐된 빈 공간을 한 변의 길이가 A, B, C인 직육면체로 한다. 그리고 흑체 내부의 빈 공간과 그 벽면은 온도 T의 평형상태에 있다고 가정한다. center 공동의 벽을 완전 반사체로 가정하였기 때문에 복사는 전자기파의 정상파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각 벽 위에서 정상파의 마디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방향이야 어떻든 간에 벽과 벽 사이의 경로가 반 파장의 정수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은 정상파의 x,y,z방향에 대한 가능한 파수들은 각각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총 파수는 다음과 같은 식을 만족한다. 위의 식은 타원체(ellipsoid)의 방정식에 해당된다. 주어진 에 대하여 여러 개의 방식이 존재한다. 방식의 수를 얻기 위하여 먼저, 주어진 보다 작은 값을 갖는 방식의 수를 구하자. 이 값은 n,m,l으로 구성된 공간에서의 타원체의 제 1상한 부분(n,m,l값이 모두 양수인 공간)의 부피에 해당한다. 빛은 두 개의 자유도를 가지므로, 그 부피에 2배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가 주어진면 타원체의 긴반지름과 짧은반지름이 각각 이므로 (총 방식의 수) = 를 얻는다. 한편 직육면체의 부피는 V = ABC 이므로 단위 체적당 진동수가 에서 사이에 있는 방식의 수는 가 된다. :는 각진동수이고 진동수 이므로, 단위 부피 안에서 진동수가 와 사이에 있는 방식의 수는 가 된다. 다음 단계는 각 정상파당의 평균 에너지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양자 물리와 고전물리 사이에 차이가 벌어진다. 이미 언급했던 고전적인 에너지의 등분배 법칙을 따르면 온도 T에서 열적 평형을 이루고 있는 어떤 개체로 이루어진 계에서 각 자유도에 배당되는 평균 에너지는 1/2kT이다. 복사로 가득 찬 공동 내에서의 정상파는 평균 총 에너지로 E=kT를 주는 두 개의 자유도를 가진다. 왜냐하면, 각 파는 공동의 벽안에 있는 한 진동자로부터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동자는 두 개의 자유도를 가지는데, 하나는 진동자의 운동 에너지에, 나머지 하나는 진동자의 위치 에너지에 해당된다. 여러 개의 단진자가 온도 T에서 열적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면 단위 부피 안에 에너지 E를 갖는 진동자의 수는 볼츠만 분포를 따른다고 생각하여 에너지가 E~E+dE사이에 있는 경우 진동자의 수 이다. 따라서 만일 에너지가 연속적으로 변하는 경우 한 진동자가 가지는 평균 에너지는 이다. 여기서 1/kT = 로 두고, 분배 함수 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자. 그렇다면 한 진동자가 가지는 평균 에너지를 분배 함수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 : : 레일리와 진스는 각 모드가 kT의 에너지를 갖기 때문에 구하려는 복사에너지의 밀도는 주어진 모-드의 수에 kT를 곱하여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진동수 사이에 있는 복사에너지 밀도는 의 결과를 얻는다. 이 식은 진동수가 작은 영역에서는 잘 맞으나 진동수가 큰 영역에서는 맞지 않는다. 만약 진동수가 가 되면 에너지 밀도역시 가 된다. 이 경우를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라 부르며 막스 플랑크는 이것의 보완을 고려하였다. 1900년 12월, 플랑크는 흑체 복사의 측정 자료와 일치하는 결과를 얻기 위하여 방출된 빛의 에너지가 특정한 상수(h)와 진동수를 곱한 값의 정수배로만 주어진다고 가정하였다. 여기서 방출된 빛의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어떤 기본 에너지 양자 의 정수배로만 주어진다는 가정은 빛이 파동으로서 그 에너지가 연속적 값을 갖는다는 고전적 개념과 배치되며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플랑크의 양자가설(Quantum hypothesis)이라고 한다. 이 경우 방출된 빛의 평균 에너지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로 치환하고, 분배 함수 Z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 빛의 평균 에너지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 : : : 따라서 진동자 당 평균에너지는 레일리-진스 공식에서 사용하였던 에너지 등분배 평균인 kT 대신에 아래와 같이 된다. 여기에 단위 체적당 방식 밀도를 곱하면 전자파의 에너지 밀도에 대한 플랑크 법칙 을 얻는다. 플랑크가 올바른 공식을 얻기는 하였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의 공식 유도에는 심각한 결함이 내포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공동 벽에 있는 진동자는 그 에너지로 가 아닌 을 가짐을 알고 있다. 영점 에너지 을 포함하여 맥스웰-볼츠만 통계를 적용하면 위의 플랑크 평균 에너지 밀도식이 주어 지지 않는다. 정당한 절차는 공동내의 전자기파를 광자 가스로 생각하고, 광자의 스핀이 1이므로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를 적용한다. 그러므로, 각 에너지 상태 에 있는 평균 광자수는 아래 식의 보스-아인슈타인 분포에 의해 주어진다. :보스-아인슈타인 분포함수 막스 플랑크와 물리학의 혁명 막스플랑크가 자신의 생애에서 보여주었던 양자 불연속성 개념에 대한 태도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작용 양자에 대한 개념을 제창해서 양자물리학의 포문을 열었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이런 변혁이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즉 20세기 초 현대 물리학 분야에서 나타난 혁명적 변화는 정작 창시자였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원하지 않았던 혁명이었다. 플랑크는 아주 보수적인 인물로서 본래 고전물리학을 거부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자신의 업적과 관련이 있었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던 인물이었다. 또한 고전 양자론의 시작을 알렸던 그는 고전양자론의 발전 과정에서 나온 마지막 산물인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비결정론에 대해서도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지난 세기말에 이룩한 플랑크의 혁명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플랑크의 이 혁명은 물리학이 너무 완벽하게 완성되어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상태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만약 플랑크가 뮌헨 대학시절 교수에게 설득되었다면 그는 새로운 혁명적 이론을 제기한 이론 물리학자로 역사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새롭게 할 일이 없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바로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플랑크는 혁명적 이론을 제안한 다른 많은 과학자들과는 달리 그리 천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20세기 초 물리학내의 혁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대기만성형의 평범한 과학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분류:열역학 분류:천체물리학 분류:적외선 분류:전열 분류:전자기파 |
01.jpg|섬네일|270px|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에서 바라본 허블 우주망원경 망원경 (望遠鏡은 렌즈나 거울 등의 광학기기를 이용하여 가시광선·적외선·자외선·엑스선 ·전파 등의 전자기파를 모아 멀리 있는 물체를 관측하는 장치이다. 망원경으로 다루는 전자기파의 파장에 따라서 광학 망원경, 전파 망원경 등으로 분류되는데, 일반적으로 망원경이라고 하면 가시광선을 보는 광학 망원경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망원경은 주로 천문학에서 많이 사용되며, 이 외에도 군용 및 레저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망원경(" telescope ")은 "멀리( tele )"라는 뜻의 그리스어 τῆλε와 "본다( skopein )"는 뜻의 σκοπεῖν에서 유래했으며, 1611년에 그리스 수학자인 Giovanni Demisiani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시연한 관측기기를 일컬으며 처음 사용한 기록이 있다. 최초의 망원경은 1608년에 네덜란드에서 한스 리퍼세이(Hans Lippershey) 등이 발명한 굴절 망원경이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 후에 망원경을 개선하여 천문학 관측에 사용하였다. 빛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대물렌즈()를 거울로 바꾸면서 반사 망원경이 등장했다. 굴절 망원경이 가진 구면수차와 색 수차를 줄일 수 있는 포물면 거울의 장점이 알려지면서 여러가지 디자인의 반사망원경들이 등장하였다. 1668년에는 아이작 뉴턴이 나중에 뉴턴식 망원경으로 알려진 첫 실용적인 반사망원경을 발명하였다. 1733년 이 후에는 일반 렌즈의 색 수차를 줄일 수 있는 색지움 렌즈(achromatic lens)의 발명 덕에 굴절망원경의 성능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반사망원경은 초기에는 거울의 도금물질이 쉽게 산화해버리는 문제가 있었지만, 1857년, 1932년에 각각 망원경 거울을 은이나 알루미늄으로 도금하는 기술이 발명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현재 깎을 수 있는 유리 렌즈의 최대 크기는 약 1미터정도에 불과하므로, 20세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대형 망원경들은 모두 반사망원경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가장 큰 광학 망원경의 크기는 10미터가 넘는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가시광선 뿐 만 아니라, 다른 파장의 빛(전파부터 감마선까지)을 관측할 수 있는 일반적인 전자기파 관측기기로서의 망원경이 개발되었다. 최초의 전파망원경은 1931년에 칼 잰스키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적외선 관측기술은 1960년대에 들어 크게 발전되었다. 이 후 망원경은 파장 대역, 분해능, 집광력등의 면에서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거듭하였다. 망원경은 대물렌즈나 반사거울을 이용하여 물체로부터 나오는 빛을 모아 상을 만들고, 이 상을 접안렌즈로 확대해서 실제보다 크게 보이도록 하는 기구이다. 대물렌즈가 크면 클수록 물체로부터 나오는 빛을 많이 받게 되므로 상의 밝기가 증가한다. 밤하늘의 대상들은 그 거리가 무한대로 볼 수 있으므로 상은 항상 대물렌즈의 초점상에 맺히게 된다. 그러므로 대물렌즈에 의한 상의 크기가 크고 접안렌즈의 초점거리가 짧을수록 물체를 크게 확대시켜 볼 수 있다. 렌즈나 곡면 거울과 같은 광학 도구를 이용하면, 한 점에서 출발한 빛을 다른 한 점으로 초점이 맺게 할 수 있다. 즉 피사체와 동일한 모양의 상을 다른 위치에 만들 수 있다. 이때 렌즈나 곡면 거울의 두께와 곡률 등을 조절하여 피사체보다 더 큰 상을 만들게 되면 우리는 실물보다 더 크게 물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망원경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집광능 과 분해능 이다. 사람의 동공보다 훨씬 더 넓은 면적의 렌즈나 곡면 거울을 이용하여 빛을 모으므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어두운 피사체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집광능이다. 또한 망원경의 광학계-렌즈 또는 거울-의 지름이 클수록 분해능이 높아지므로, 피사체를 더욱 세밀하고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두 요소 덕분에 망원경은 멀리 떨어져서 희미하게 보이는 천체를 우리가 관측할 수 있을 정도로 밝게 빛을 모아주는 동시에, 관측 대상의 상을 더욱 세밀하고 정확하게 맺어 주기 때문에 천문 관측에 아주 적합한 도구이다. 망원경이 처음 발명된 직후부터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해 천문 관측에 이용되었고, 현대에도 지름 수 미터 이상의 대형 망원경들이 다수 제작되어 천문 관측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고전적인 의미의 망원경은 빛, 즉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 영역의 전자기파만을 모으는 역할을 해 왔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가시광선 영역 이외에도 지구에서는 관측하기 어려운 자외선, X선, 감마선, 적외선, 전파 등의 전자기파를 모아 관측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개발되고, 그 목적에 맞는 다양한 망원경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현대의 망원경들을 통해 우리 인류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우주의 모습을 넘어서, 더욱 더 다양한 천체와 우주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망원경의 파장, 위치, 이용 목적등 여러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관측하는 파장에 따라 전자기파를 모으는 방식과 기술이 크게 달라지므로 망원경은 아래의 표와 같이 주로 관측하는 파장에 따라 분류한다. 망원경은 위치에 따라서 지상 망원경, 우주 망원경, 항공 망원경 ( Airborne observatory)으로 나뉜다. 또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문학자들의 연구용 망원경, 그리고 아마추어 천문가의 망원경으로 나눌 수도 있다. 하나 이상의 망원경, 관측기기들로 구성된 운송수단(차량,비행기,기구,위성)이나 캠퍼스를 천문대라고 한다. 파장대역 이름 망원경 천문학 분과 파장 주파수 광자의 에너지 전파() 전파 망원경 전파(레이다) 천문학(레이다 천문학) > 1 mm 300 GHz - 3 Hz 1.24 meV - 12.4 feV 서브밀리미터() 서브밀리미터 망원경 서브밀리미터 천문학 0.1 mm - 1 mm 3THZ-300GHz 1.24 meV - 12.4 meV 적외선() 적외선 망원경 적외선 천문학 750 nm - 1 mm 405 THz - 300 GHz 1.24 meV - 1.7 eV 가시광선() 광학/근적외선 망원경 광학 천문학 390 nm - 750 nm 790 THz - 405 THz 1.7 eV - 3.3 eV 자외선() 자외선 망원경 자외선 천문학 10 nm - 400 nm 30 EHZ - 790 THz 3 eV - 124 eV X-선 X-선 망원경 X-선 천문학 0.01 nm - 10 nm 30 PHz - 30 EHZ 120 eV - 120 keV 감마선() 감마선 망원경 감마선 천문학 10 EHZ 100 keV - 300 GeV 켁(Keck) 반사 망원경 광학 망원경은 가시광선 대역의 빛을 초점으로 모아 확대된 상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망원경을 말한다. 광학망원경은 일반적으로 근적외선까지도 쓰인다. 이 확대된 영상을 눈으로 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또는 컴퓨터로 신호를 보내는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다. 광학 망원경은 주로 천문학에서 많이 쓰이며, 천문학 이외의 용도로는 측량기, 조준경, 쌍안경, 카메라 렌즈 등이 있다. 광학 망원경은 보통 유리로 만들어진 렌즈나 거울을 조합하여 빛을 모으는데, 어떠한 도구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굴절 망원경() - 렌즈를 이용한 망원경 반사 망원경() - 거울을 이용한 망원경 반사-굴절 망원경 - 렌즈와 거울을 이용한 망원경 뉴멕시코 주에 있는 Very Large Array 전파 간섭계 전파 망원경은 지향성 안테나를 이용한 망원경이다. 광학 망원경과는 달리 긴 파장의 전파를 이용하므로, 같은 크기의 광학 망원경에 비해 분해능이 떨어지는 단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전파 망원경은 광학 망원경보다 훨씬 큰 구경의 포물면 형태를 갖는 파라볼라 안테나(그 모양 때문에 흔히 접시 라고 불린다.)를 사용한다. 현재 가장 큰 전파 망원경은 중국의 FAST (Five hundred meter Aperture Spherical Telescope)라는 지름 500m의 전파 망원경이다. 하지만, 건축 구조상 망원경 크기를 늘리는 데에 한계가 있으므로, 더 좋은 분해능을 얻기 위해서 다수의 작은 전파 망원경을 일정한 거리로 배열해서 그 배열 전체의 넓이와 같은 구경의 단일 망원경과 같은 분해능을 얻을 수 있는 간섭계()가 만들어졌다. 가장 유명한 망원경 배열(간섭계)은 미국에 있는 Very Large Array (VLA)이다. X-선 망원경 X-선은 지구 대기에서 흡수되기 때문에 X-선 망원경은 로켓이나 위성을 이용해서 대기 밖에서 관측해야 한다. 또한 X-선은 거의 수직으로 입사할 경우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울조차도 쉽게 통과해버리므로 X-선을 초점에 모으기 위해 볼터 망원경(Wolter telescope)이라는 특별한 디자인이 고안되었다. 이 볼터식 망원경은 거울을 X-선의 입사 방향에 거의 평행하게 배치하여, X-선이 거울에서 반사할 때 마다 단지 몇 도(°)씩만 방향을 바꾸는 방법을 이용하는데, 이러한 거울을 겹겹이 고리 모양으로 배치하여 빛을 초점에 모아 X-선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2012년 현재 작동 중인 X-선 망원경으로는 찬드라 X-선 망원경, XMM-뉴턴 망원경등이 있다. 감마선은 파장이 너무 짧고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가시광이나 X-선처럼 유리 또는 금속 거울을 이용해서 초점으로 빛을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감마선 망원경은 감마선이 특별히 선택된 물질들과 반응(콤프턴 산란)하면서 내는 전하를 띈 입자나 광학 섬광을 검출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지구 대기가 감마선에 대해서도 불투명하므로 감마선 망원경은 기구, 로켓, 위성 등에 의해 실려서 대기 밖에 위치해야 한다. 이러한 감마선 망원경으로는 콤프턴 감마선 천문대 (, 2000년 퇴역), 페르미 감마선 망원경 ()등이 있다. 반면 아주 높은 에너지(>30 GeV)를 가진 감마선들은 지상에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검출한다. 이 감마선은 대기에 들어오면서 공기의 원자/분자들과 연쇄 반응하면서 수많은 우주선들을 만들어내고(air shower라고 한다),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이 상대론적 입자들은 체렌코프 복사를 방출하게 되는데 이를 지상에서 검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종류의 망원경으로는 미국 아리조나 주에 위치한 VERITAS가 있다. 우주선(고에너지 입자) 망원경 중력파 검출기 () 뉴트리노 검출기 () - 뉴트리노는 거의 물질과 반응하지 않으므로, 뉴트리노 망원경은 커다란 용기에 많은 양의 물과 얼음을 채워 놓고 이들이 뉴트리노와 아주 낮은 확률로 반응할 때 나오는 미세한 빛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수의 광전관(photomultiplier)으로 검출한다. 지구 대기는 대부분의 전자기파에 불투명하기 때문에, 지상에서 관측할 수 있는 파장 대역은 가시광선-근적외선과 전파로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 때문에 X-선이나 원적외선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망원경을 대기 바깥의 우주공간에 띄워야 한다. 한편 가시광은 지상에서 관측이 가능하지만, 허블 우주망원경처럼 훨씬 좋은 시상 또는 분해능을 얻기 위해 망원경을 우주 궤도에 올려 보내기도 한다. 파장에 따른 지구 대기의 불투명도()와 각 파장에서 사용되는 망원경들. 서로 다른 파장의 망원경들을 통한 관측에서 얻어지는 상호 보완적인 정보를 모으면 천체에 대해 보다 넓게 이해할 수 있다. 잔해인 게 성운을 여러가지 파장에서 본 모습. 사진의 크기는 가로 세로 약 6분이다. (원본 사진(영어)) 망원경의 가대는 지상 망원경을 지지해주는 기계적인 구조이다. 망원경의 가대들은 망원경의 무게를 지탱해주고 망원경이 별과 같은 천체를 정확하게 가리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망원경의 가대는 역사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현재는 지구의 자전 속도에 맞춰, 별이 움직이는 것을 자동으로 추적할 수 있게 설계된다. 크게 다음과 같은 가대가 있다. 경위대식 망원경 () 적도의식 망원경 () 허블 우주망원경 - 자외선, 가시광선, 근적외선에서 관측. 스피처우주망원경() - NASA의 적외선 우주망원경. 찬드라 X-선 우주망원경 켁 망원경 - 지상에서 가장 큰 광학 망원경. 아레시보 망원경 - 가장 큰 단일접시 전파망원경. 보현산 망원경 - 보현산 천문대에 설치된 1.8미터 반사 망원경. 한국에서 가장 큰 망원경. 광학 망원경에 대한 목록 (영어) 가장 큰 반사 광학 망원경의 목록 (영어) 가장 큰 굴절 광학 망원경의 목록 (영어) 가장 큰 광학 망원경의 연표 (영어) 전파 망원경의 목록 (영어) 태양 망원경의 목록 (영어) 우주 망원경의 목록 (영어) 망원경 부품의 목록 (영어) 망원경 종류 목록 (영어) :분류:망원경 :분류:중력파 망원경 :분류:감마선 망원경 :분류:X-선 망원경 :분류:적외선 망원경 :분류:광학 망원경 :분류:서브밀리미터 망원경 :분류:자외선 망원경 :분류:전파 망원경 전자기파 천문대 쌍안경 아마추어 천체망원경 제작 초대형 망원경, 초거대 망원경 망원경 기술의 연표 ( Timeline of telescope technology) 망원경, 천문대, 관측기술의 연표 ( Timeline of telescopes, observatories, and observing technology) 천체 망원경 -《사용과 관측》, 도서출판 마당, 1986 Louise Bell, 《The Telescope》, Dover, 1981 망원경, 한국천문연구원 Galileo to Gamma Cephei - The History of the Telescope Outside the Optical Other Kinds of Telescopes (미)우주망원경연구소(STScI) 천체망원경의 400년 역사 갈릴레오 프로젝트 - 망원경 최초의 망원경, "과학적 우주론의 역사"의 일부 미국 물리 연구소 망원경 기술의 연표 분류:네덜란드의 발명품 |
laws diagram.svg|섬네일|400px|두 행성의 공전궤도를 통한 케플러의 세가지 법칙들에 대한 설명. (1) 첫 번째 행성의 공전궤도는 f1 과 f2 를 초점으로 갖는 타원궤도이고, 두 번째 행성의 공전궤도는 f1 과 f3 을 초점으로 갖는 타원궤도이다. 태양은 여기서 초점 f1 에 있다. (2) 행성이 같은 시간 동안 휩쓸고 지나가는 음영으로 표시된 두 영역 A1 과 A2 는 같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3) 두 행성의 공전주기의 비는 이다.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 (Kepler-行星運動法則은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표한 행성의 운동에 대한 세 개의 물리학 법칙이다.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기 약 반세기 전,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가 평생 동안 천체를 관측하면서 축적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발표하였다. #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 (타원궤도 법칙) #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다. #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아이작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운동 법칙과 케플러 법칙 등을 기반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도해냈다. 즉, 케플러가 기술한 태양계의 행성의 운동은 뉴턴의 법칙에 따르는 두개의 질점간의 상호작용에 해당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따라서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은 태양과 행성 사이에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성과 그 위성(인공위성을 포함하여), 위성과 위성이 갖는 손자위성 사이에도 성립한다. 케플러의 제1법칙 행성의 궤도를 태양이 중심에 있는 극좌표계 를 이용하면 아래와 같이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간단하게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여러 물리학 법칙을 이용하여 증명할 수 있다. , 이심률 행성의 각운동량 초점에 위치한 별의 질량 행성의 질량 행성의 역학적 에너지 중력 상수 이다. 케플러의 제1법칙은 궤도의 법칙 이라고도 불린다. 행성의 공전 궤도는 타원 모양이다. 태양은 타원의 두 초점 중 하나에 위치한다. 케플러의 제2법칙 케플러의 제2법칙은 케플러 넓이 법칙 ()이라고도 불린다.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다. 면적속도는 수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케플러의 제2법칙은 위 값이 행성 운동의 운동 상수임을 의미한다. 혹은, 행성의 공전 속도를 사용하여 가 일정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위 값은 행성의 각운동량에 비례하므로, 이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관계없이 각운동량 보존 법칙으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 케플러의 제3법칙은 주기의 법칙 이라고도 불린다.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이를 수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공전 주기 공전 궤도의 긴반지름 이다. 좀 더 비례 관계를 명확히 하면, 이다. 여기서 중력 상수 초점에 위치한 별의 질량 행성의 질량 이다. 태양계에서 행성은 태양에 비해 훨씬 더 가벼우므로 (), 다음과 같이 근사할 수 있다. 따라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 안의 모든 행성에 대해선 의 값이 모두 같다. 케플러의 제3법칙은 비리얼 정리의 특수한 경우이다. 행성운동법칙 분류:천체역학 분류:중력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분류:코페르니쿠스 혁명 |
튀코 브라헤 (, 1546년 12월 14일 ~ 1601년 10월 24일)는 덴마크의 천문학자이다. 로스토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1572년,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신성을 발견하여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을 때까지 14개월간 관측을 계속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재능이 인정되어 덴마크왕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 의 지원을 받아 벤 섬에 우라니보르 천문대, 스티에르네보르 천문대를 건설하고 방대하고 정밀한 관측기록을 남긴다. 프레데리크 2세가 죽은 후, 159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 황실부 제국수학관에 초청되어 프라하로 이주한다. 천문학자로서 그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지동설)의 기하학적 장점과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천동설)의 철학적 장점을 결합하여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동시에 다른 행성들이 태양 둘레를 돈다는 독특한 튀코 체계 (수정된 천동설)를 주장하였고, 이 학설의 선취권 문제로 라이마루스 우르소와 추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브라헤가 천동설을 옹호하기 위해 남긴 관측기록은 그가 병으로 죽은 후 제자이며 공동연구자였던 요하네스 케플러가 그의 기록을 분석하여 케플러 법칙을 발견해 내면서 지동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튀코 브라헤는 1577년 나타난 혜성에 대해서도 많은 관측결과를 남겼으며, 혜성 현상이 달보다 먼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그 혜성관측결과와 신성의 발견은 달보다 먼 곳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당시의 천동설을 반증하는 한 증거이기도 했다. Hradčany - Tycho Brahe a Johannes Kepler.jpg|섬네일|프라하에 있는 튀코 브라헤와 그의 제자 케플러의 동상|오른쪽|200px 튀코 브라헤는 1546년에 덴마크 귀족 가문의 자기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튀코의 큰아버지 외르겐 브라헤(Jorgen Brahe)가 자손이 없어 튀코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면 형에게 양자로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튀코의 큰아버지는 기다리고 있다가,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 튀코를 납치해 버렸다. 큰아버지 밑에서 자란 튀코는 13살때 다닐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6살때부터 라틴학교를 다니면서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 큰아버지 외르겐은 그의 정부에 있는 자리를 튀코에게 물려주려고 했으나, 1560년 8월 21일에 일어난 개기일식이 튀코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때부터 튀코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백부가 원하는 데로 13세 때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법학을 전공으로 하였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천문학과 수학공부에 할애했고, 백부는 그런 그를 막기위해 라이프니치 대학교에서 안데르스 베델 이라는 젊은이를 통해 튀코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튀코는 천문학이 매우 체계적이고 정확한 관측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 천문 관측 장비들과 프톨레마이우스의 라틴어 서적들을 샀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만의 천문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별들의 위치를 관측하면서 천문의 별 관측표 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1564년에 직접 직각기 가 부정확한 것을 알고 장비 수정표 를 만들기도 하였고,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그 시대의 누구보다 더 정확한 관측을 할 수 있었다.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사를 간 튀코는 그곳의 아마추어 천문학 동아리에 가입해 직경 12 미터짜리 육분의를 제작했다. 이 장치는 별의 위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백부의 명령에 따라서 1565년 5월에 코펜하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1566년도에 비텐베르크 대학교, 로스토크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하였다. 튀코는 귀족 가문 출신이라 성격이 매우 거만했는데, 누구의 수학 실력이 더 뛰어난가를 두고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결투에서 브라헤는 코가 잘려나갔지만, 그 이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상대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1566년 11월 29일, 당시 로스토크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튀코는 그의 사촌이기도 한 덴마크의 귀족 맨더루프 파스버그와의 결투에서 칼에 맞아 코의 일부가 절단되었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인 11월 10일과 27일에도 그는 어떤 수학 공식의 타당성을 두고 파스버그와 싸움을 벌인 바 있었다. 두 사람 다 상대방이 틀렸다는 주장의 뒷받침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결국 결투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나중에 화해하기는 했지만 이 결투에서 튀코는 콧등 부위를 잃고 말았다. 튀코는 이 사건으로 인해 약학과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죽을때까지 은과 금으로 된 코 보형물을 착용했다고 한다. (보형물의 접착을 위해서는 접착용 반죽과 풀을 사용하였다.) 몇몇 연구가들은 그가 금, 은 보형물 외에도 구리제품 또한 보유하였고 1901년 6월 24일 그의 무덤이 공개되었을 때 두개골에서 발견된 녹색 흔적이 구리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구리제품이 귀금속제품보다 더 가볍고 편안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 시기에 걸쳐서 그가 다양한 종류의 보형물을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010년 그의 묘가 발굴되어 덴마크와 체코의 연구원들이 그의 코 뼈의 일부를 화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2012년 11월 발표하였는데,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가 착용했던 보형물은 놋쇠였다고 한다. Knutstrop castle에서 태어난 튀코에게는 쌍둥이 동생이 있었지만 세례도 받기 전에 죽게 되었고 두 명의 여자 형제 키르스티네(Kirstine), 소피아(Sophia)가 있었다. 튀코의 친아버지 오테 브라헤(Otte Brahe)는 귀족이었으며 추밀 고문관 이었다. 그 후 여러 나라의 대위로 재직했다가 헬싱보리성의 영주로 지냈다. 튀코의 친어머니 Beate Bille는 위대한 신학자와 정치가들을 배출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튀코를 키워준 요에르젠(Jeorgen Brahe)은 튀코의 백부였고 일찍이 튀코 브라헤의 친아버지에게 튀코 브라헤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기로 하였다. 그러나 튀코 브라헤의 친아버지는 이를 어겼으나 튀코 브라헤가 1살이 되던 해에 유괴하여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는 양아들로 인정을 받아 키우게 된다. 그는 1565년 5월에 물에 빠진 왕을 구하려다 물에 빠진 후유증으로 6월 21에 숨을 거두었다. 튀코 브라헤의 외삼촌 스틴은 튀코 브라헤가 천문학을 공부할 때 모두가 반대할 때 가장 격려를 많이 해준 사람이었다. 그는 덴마크에 최초로 유리와 종이 제조의 기술을 도입하였다. 튀코 브라헤의 부인 Christin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지만 1573년 이후부터 계속 같이 살았다. 왼쪽 튀코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인간의 몸 사이의 관계가 있다고 믿었고, 그는 다른 동료들처럼 점성술을 믿고 별점을 쳤다. 1566년 10월에 티코는 위대한 술탄 술라이만 으로 알려진 오스만 투르크 제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 이 별점이 사실로 일어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였고 그는 한번에 점성술로 유명해졌다. 1566년 12월 10일과 27일에 티코는 덴마크 귀족인 만드럽 파스베르크 (Manderup Parsberg)와 수학공식의 합법성에 관하여 다퉜고, 결국에는 두 사람이 결투를 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29일에 튀코는 만드럽과의 결투에서 코를 잘렸고, 그는 남은 일생돌안 은,금으로 만들어진 가짜 코를 만들어서 붙이고 다녔다. 후세 사람들이 튀코의 무덤을 발굴해보니, 그의 코가 동으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고 발견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튀코는 약학과 연금술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568년 5월 14일에 튀코는 프레데리크 2세에게 셸란 섬의 로스킬레 대성당의 수도참사 회원으로 임명해주겠다는 공식 약속을 받았다. 앞길이 밝은 튀코는 1570년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잠시 머물고, 천문 관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여기서 사분의라 불리는 관측장비를 개량하여 엄청난 크기의 기계를 만들었지만, 1574년 12월에 폭풍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그는 그 후 그의 외삼촌 요에르잔 브라헤(Joergen Brahe)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지만, 새로운 초신성을 발견하면서 그는 양아버지와도 같은 삼촌의 죽음의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573년 튀코는 그의 애인 크리스티너와 정식은 아니지만 결혼을 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다음해에 그는 천문관측도 하면서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그리 만족스럽지 못해서 장거리 여행을 갔다가 바젤에 정착을 하였다. 1576년 튀코는 자신이 원하던데로 참사회원 자리도 맡았고, 우라니보르 천문대(Uraniborg)를 설립하여 최첨단 천문장비들로 마음껏 천문관측을 하였다. 하지만, 1597년 왕이 크리스티안 4세로 바뀌면서, 그의 연금이 삭감되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왕실과의 마찰이 생겼고, 국가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는 프라하로 정착지를 옮겼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일생의 나머지를 살았고, 그의 제자 케플러와의 성관계도 맺었다. 섬네일 튀코는 1601년의 어느 날, 로젠버그 남작의 만찬회에서 와인을 과음했다. 하지만 그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튀코는 만찬회가 끝나고 집에 간 후에, 화장실을 너무 오래 참아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케플러가 남긴 자료에 의하면 튀코 브라헤는 죽어가기 직전에 케플러에게 루돌핀 표(Rudolphine Table) 를 완성하라고 하고,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천체 모델보다는 자신의 것을 이용하라고 했다한다. 케플러는 튀코가 "현인처럼 살다가 바보처럼 죽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어떤 이들은 튀코의 시체에서 수은이 검출되었으므로 그가 방광파열이 아닌 누군가에 의하여 독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12년 11월 튀코의 무덤을 발굴해본 결과, 튀코의 시체에서는 수은은 물론이고 다른 어떠한 독극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튀코 브라헤가 살해당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튀코는 "방광이 터져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내렸다. 튀코의 시체는 프라하에 있는 교회 무덤에 보관이 되고 있다. 튀코의 사분의(1569) 튀코 브라헤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은 1560년 8월 21일, 코펜하겐에서 일어난 일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튀코 브라헤는 천문학자들이 달의 궤도를 적은 관측표를 통해 일식같은 현상을 예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이후에 튀코는 관측표들에 관하여 더욱 자세히 알아보았지만, 그가 점점 더 천문학에 빠져들수록 관측표들의 오류가 조금씩 더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튀코는 이러한 점을 못마땅해 하였고 그는 오류들을 고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천문을 관측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라이프니치 대학교에서 아버지의 바램과는 반대로 천문관측에 힘을 쏟았고, 별점에도 관심을 보였다. 라이프니치 대학을 떠난 후 그는 1570년에 덴마크로 돌아와서 헬싱보리 성에서 관측을 계속 하였다. 이후에 그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De Nova Stella 를 출판하였다. 1576년, 유명한 천문학자 튀코를 자신의 나라에 계속 두기 위하여 프레데리크 왕은 코펜하겐과 엘시노어 사이의 해협에 있는 작은 섬 벤(Hven)을 튀코에게 주었다. 그 해 2월 22일 튀코는 화성과 달의 합을 관찰하고, 그 이후 튀코는 자신의 천문관측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1579년 에는 벤 섬에 위치한 자신의 천문대를 우라니보르그(Uraniborg) 라고 지었으며, 현재 이 천문대는 중요한 과학시설이 되었다. 그 섬에서 튀코는 별자리들을 중심으로 태양, 화성, 목성, 토성 등의 궤도를 관측하였지만, 수십년이 지나도 그의 관측에는 별다른 발전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1577년 그가 밝은 혜성을 발견함으로써 천문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1588년 튀코를 매우 아끼던 프레데리크 2세의 죽음이 튀코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였다. 후계자 크리스티안이 국왕이 된 이후, 튀코의 지위는 낮아졌지만 튀코는 자신의 제자인 케플러와의 인연을 맺으면서 이 시대에서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천문학적 관측자료였던 튀코의 관측결과는 후에 케플러에게 모두 넘어갔다. 튀코가 관측한 별과 행성 궤도 등 여러 결과들은 양도 많을 뿐더러 모든 자료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튀코의 별 관측 목록 D에 관하여 Rawlins는 이전의 어떠한 천문학자들보다 튀코는 관측방법, 기구, 계산 등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관측 을 했다고 하였다. 그는 수년간에 걸쳐서 정확한 관측을 계속하면서 정확성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극한까지 이르렀고,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은 관측으로는 가장 정밀하였다고 한다. 그의 정확성을 살펴본다면 그가 작성한 항성목록의 표준성좌표의 오차는 불과 25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오랜시간을 별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바쳐 항성목록을 출판했는데 그 목록에는 777개 항성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했으며 나중에는 1000개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달궤도의 각 지점의 위치를 정기적으로 측정하여 달 운동이론을 발전시키고 달궤도 귀착점의 속도를 측정하였다. 이후 천문학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 튀코 브라헤의 행성관측이었다. 당시의 정밀하지 못한 관측기구를 이용하여 가까운 항성의 이각 을 측정해내었다. 벤 섬에서 연구하던 시절에 그는 항상 자신이 만든 사분의와 혼천의를 사용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에 의해 결국 수치화된 행성이론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케플러에 의해 완성되었다. 우라니보르그 천문대 헤레바드(Herrevad) 대수도원 * 튀코가 연구한 최초의 천문대로써 1574년도에 관측결과를 발표하였다. Hesse-Kassel 천문대 * 1575년, William IV를 뵙기 위하여 잠시 머문 곳이다. 우라니보르 천문대(Uraniborg) * 1575년 튀코가 지었고 덴마크, 벤섬에 위치한 천문대로 프레데리크 왕이 하사한 곳이다. 튀코는 이곳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천문대의 건물 구조가 천문학적인 위치와 방향을 나타낸다고 한다. Stjerneborg 천문대 * 튀코가 1581년에 우라니보그 천문대 설립이후 추가로 지은 천문대이다. Benátky nad Jizerou에 위치한 천문대 * 왕이 바뀌면서, 벤섬에서 나온 튀코가 지은 천문대로써 1년간 연구한 곳이다. 튀코 브라헤가 발견한 SN1572 초신성 1572년 11월 11일, 실험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튀코 브라헤는 밤하늘의 별자리중에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다섯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날 다섯 개의 별보다 더 밝은 별 하나가 더 빛나고 있음을 알아냈다.(현재 그 별은 SN1572라고 불린다.) 그 당시에는 별은 수정구에 고정된 상태로 빛을 내뿜는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이는 큰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튀코는 한 번의 관측으로 이를 별이라 결론내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육분의 를 이용하여 관측을 계속 하였다. 튀코는 새로운 별의 연주시차를 측정하려고 했으나 다른 별과 행성들에 비하여 그 운동이 너무 상대적으로 작아서 그 별이 움직이지 않고, 행성이 아니라고 결론은 내렸다. 그 별은 18개월동안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나 1572년 이후부터 점점 희미해져갔다. 튀코는 이 관측을 토대로 새로운 별 De Nova Stella 를 출판했으며 새로운 용어인 신성 nova 를 얻게 되었고 그 책에서는 밝은 물체를 다른 별들처럼 천구에 속해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튀코 브라헤의 초신성 발견은 꽤 유명한 업적이어서 에드거 앨런 포(Edgar Ellan Poe)의 시인 Al Aaraaf의 영감이 되었다. 또한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햄릿에도 초신성이 인용되어서 나온다. 튀코 브라헤는 초신성이 천구에 속해있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하긴 하였으나, 시대적 상황이 그를 그렇게 생각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교황청의 압박이 두려워서 그는 신성에 관한 책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에서 그의 생각을 최대한 종교의 관점으로 펼쳤다. 따라서 그의 초신성 발견은 그리 크게 과학사에 남지는 못하였지만, 튀코의 사고를 조금 바꾸어 주는 계기가 되었고, 나중에 튀코가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튀코 브라헤가 밤마다 고정된 별들을 기준으로 하여 행성들의 위치를 측정하고 그 결과를 분석한 결과 태양, 행성등의 움직임을 추적하였다. 1577년 튀코 브라헤는 밝은 혜성 을 발견하였다. 그 혜성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분석하였고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기에 성공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혜성은 지구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는 혜성의 출현은 달과 지구 사이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고 먼곳에서부터 날아오는 천체 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즉, 행성들 사이, 행성들의 궤도를 가로질러 여행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내었다. 이것은 1572년 초신성 관측처럼 수정구라는 개념에 문제점이 생기게 되었다. 혜성이 수정구가 존재할 것이라는 위치들을 통과하여 운행되었기 때문이었다. 튀코 브라헤가 다른 혜성들을 관측, 분석한 결과 이러한 결론을 입증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핼리 라는 과학자가 혜성이 태양계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섬네일 튀코 브라헤는 1587년과 1588년에 두 권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천문학 입문 (Astronomiae Instauratae Progymnasmata)를 펴냈다. 이 책에서는 그의 우주모델인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타협을 시도한 절충설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는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이 중심이라는 것을 매우 비판하였다.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을 물리적 어리석음 이라 펌하했다.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면 탑에서 떨어진 공이 예상했던 곳에서 떨어진 곳에 떨어져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당시의 기술로는 하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정확한 과학적 근거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구 자전운동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지구가 자전한다면, 서쪽으로 발사한 포탄이 동쪽으로 발사한 포탄보다 멀리가야 하는데, 이 역시 그 당시의 기술로는 너무 지구의 크기에 비하여 작은 거리 차이기 때문에 튀코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구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절대로 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에는 우주는 에테르와 Quintessence라는 가볍고도 바뀌지 않으면서 항상 원운동을 하고 있는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구는 그와는 정반대로 무겁고 정지되어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의 한계는 코페르니쿠스와 튀코의 생각을 한정지어버렸다. 튀코는 지구가 태양을 주위로 공전을 하면, 그 당시에 관측된 천문학적 사실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튀코는 연주시차가 지구 공전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연주시차는 지구가 태양주위를 공전하면서 생기는 별의 위치를 바뀌어서 생기는 각도여서 그 자체로도 매우 작기 때문에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시대에서는 연주시차라는 현상을 관측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튀코 브라헤는 자신의 우주모델이 맞다고 여긴것이다. 하지만 튀코가 세운 가설 중에 특정 별들이 태양의 3-4배 정도 크면 연주시차 등 문제들이 해결되고, 지동설도 설명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튀코는 그러한 거대한 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튀코는 Deduce these things geometrically if you like, and you will see how many absurdities (not to mention others) accompany this assumption of the motion of the earth by inference .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한다고 하여도, 이 가정을 뒤따르는 많은 모순점들을 발견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이를 고정점으로 하여 태양, 달 , 다른 행성들이 돈다는 이론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도 아니고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 체제도 아닌 타협안을 내세웠다. 180px 튀코가 1570년대 후반에 주장한 절충설은 지구가 우주 중심에 고정되어 있으며, 태양과 달, 고정된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태양 그 자체는 다섯 행성들의 궤도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성과 금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태양의 궤도 안쪽에서 돌고 있고, 화성, 목성, 토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그들의 궤도 안에 태양과 지구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새로운 체계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제시되었던 소원과 이심이 제거되어 보다 쉽게 해석할 수 있었고 태양의 움직임이 다른 행성들의 움직임과 함께 뒤섞인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내행성의 위상이 반달보다 크게 관측된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지만 반면에 티코브라헤의 절충설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하지만 이 우주모델역시 연주시차 의 개념을 정확히 설명해 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절충설은 아쉽게도 지구가 자전하고,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채 세상에 나왔다. 튀코가 제안한 절충설은 Heraclides가 BC 4세기 경에 최초로 제안한 정리이다. 그 이후 Macrobius Ambrosius Theodosius가 이집트인들의 실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에서 이집트 체계라고 칭하였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이 절충설을 알았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튀코의 절충설과 헤라클리데스의 우주체계의 다른 점은 튀코는 모든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돌았지만 헤라클리데스는 수성과 금성만 태양을 돌고있다는 점이다. 또한 튀코의 체계는 지구가 자전을 하지 않지만, 헤라클리데스의 우주체계는 지구가 제자리에서 하루에 한번 자전을 한다. 헤라클리데스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1580년도에도 절충설을 제안한 폴 비티히(Paul Wittich) 와 여러 다른 천문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제안한 체계와 튀코 체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화성과 태양의 궤도가 만났다는 점이다. 이 차이점은 튀코와 그 당시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연주시차 차이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절충설을 주장한 여러 학자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절충설이 가진 문제점에 대하여 깨닫기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그렇게 많이는 걸리지 않았다. 튀코 브라헤는 달의 경도의 변화에 대해서 관측을 하여 달의 이론에 기여를 하였다. 중심차 와 출차 이후의 달의 경도의 불균형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는 또한 달의 면이 공전궤도 면에 대해서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 자전축이 진동하는 현상인 칭동 현상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달의 황위 의 작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튀코 브라헤의 달 이론은 예전에 알았던 것에 비해서 달이 불균형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많이 찾아내었다. 이것은 후에 튀코 브라헤가 죽은 뒤에 케플러에 의해 1602년에 확립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운동이섬원의 중심(X)은 지구의 중심과 다르다. 이심원의 회전은 동시심(●)에서 볼 때 회전속도가 일정하도록 움직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의 체계는 흔히 천동설이라 불린다. 천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공전하는 우주모델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당연하게 땅은 움직이지 않고 하늘이 회전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후 중세 봉건시대에서 우주를 신이 창조했다고 믿었으며 천체는 둥글고, 고귀하기 때문에 지구는 중심을 차지하며, 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등속운동을 하고 있다는 전제를 두었다. 그리고 이곳에 지구 구형설과 지구 중심설이 존재했다. 기원전 4세기 정도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졌다. 그 후 이런것을 토대로 지구 중심설의 모델을 수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페르게의 아폴로니오스는 태양, 달의 부등속을 설명하기 위해 이심원을 채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전원을 도입하여 행성의 역행과 지구접근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하였다. A.D.2년에 이르러서 클라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지구 중심설을 이용하여 우주에 대한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즉, 천동설을 구체화하였다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다음과 같다. 1.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이 나열되어서 공전하고 있고 별들은 고정되어 있다. 2. 각각의 행성은 주전원을 따라 돌고 있고 주전원의 중심은 이심원을 따라 돌며 이심원의 중심 근처에 지구가 위치한다. 3. 역행 운동을 보이는 이유는 작은 원을 그리면서 주전원을 돌기 때문이다. 4. 내행성의 최대이각 현상은 지구와 태양을 잇는 직선위에서 작은원을 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코페르니쿠스가 의심을 가지고 새로운 우주 모델인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까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Kopernik.jpg|섬네일|150px|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6세기에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왼쪽 우주관에 대한 생각은 사실에서부터 왜곡된 상황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고 하늘이 돈다고 생각하였고 그 이후에 아리스타르코스 가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하였지만 히파르코스 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 이후에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천동설이 구체화되어 사람들에게 확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모델인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져왔다. 지구가 중심이라는 전제를 부정하며 태양이 중심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천동설의 복잡한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다음과 같다. 태양을 중심으로 안쪽에서부터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순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공전하고 있다. 행성들의 공전방향은 시계반대방향이며 안쪽에 있는 행성의 공전속도가 더 빠르고 공전주기는 짧다. 달만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원을 그리면서 공전한다. 예전의 수수께끼였던 충 -지구접근-역행 그리고 내행성의 최대이각의 측정 역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 체계는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543)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모델을 바로 발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너무 바빴던 것도 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 역시 오랜 수수께끼를 해결해주지만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델이 오랜 수수께끼들을 모두 해결해주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이 세상에 나온 이후에도 그 당시 사람들의 사상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사상에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관점은 교회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내동댕이 쳐지고 말았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튀코 브라헤, 갈릴레오 갈릴레이, 케플러와 아이작 뉴턴 같은 학자들이 발전된 천문 기술과 관측 기술을 이요한 천체 관측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지동설의 증거를 여러 찾아내었다. 그들을 통해서 지동설이 우주의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이를 통해서 과학적으로 우주 체계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지동설이라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튀코 브라헤에게는 제자인 케플러가 있었다. 튀코 브라헤와 케플러의 관계는 그리 우호적인 관계를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케플러는 완전히 튀코 브리헤에게 의지하지 않는 케플러의 이런 태도에 매우 불만족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튀코 브라헤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고 케플러는 황제를 기리기 위해 만드는 루돌프 표 ( Rudolpine Tables ) 로 불리게 될 행성궤도 표를 편찬하는 일에 티코의 공식 조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티코 브라헤는 죽음 직전의 자신의 평생에 걸친 관측자료와 루돌프 표를 만드는 임무를 케플러에게 모두 다 넘겨주게 되었다.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의 관측자료를 분석해가며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행성운동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케플러 제1,2,3 법칙을 만들게 되었다. 케플러 이외에도 튀코 이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 베셀 등 저명한 천문학자들이 나오면서 천문학은 과학에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 케플러 제1법칙 란 각각의 행성은 태양의 둘레를 타원형의 궤도로 공전하고 있고 태양은 타원의 두 초점 중 하나에 위치하고 있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으로 인해 예전에 존재했던 소원, 이심등의 복잡한 요소들이 마침내 제거되었다. 이 타원궤도의 법칙을 이용하여 케플러 제2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태양과 태양의 둘레를 따라 돌고 있는 행성을 연결하는 가상선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케플러 제2법칙 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긴반지름의 원주각보다 짧은 반지름의 원주각이 더 커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발견과 전체 사상은 1609년 《신천문학》( Astronomia Nova )에 의해 출판되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환호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원이 아닌 타원이라는 개념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련한 수학자들만이 케플러의 모델이 신비적이고 관측된 사실에 튼튼하게 뿌리내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제로 케플러의 법칙들은 아이작 뉴턴과 같은 수학자가 정확하게 증명을 하고나서 부터야 케플러가 매우 훌륭한 천문학자임을 알게 되었다. 케플러의 마지막 위대한 작업들 중 하나가 세계의 조화 ( Harmonice Mundi )으로 알려져 있다. 케플러 제3법칙 은 한 행성이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태양에서 그 행성까지의 거리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행성들의 주기의 제곱은 태양에서 떨어진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160px 200px 갈릴레오는 진자의 등시성 및 관성법칙 발견한 위대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수학자이다. 그는 천문학에서도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타협안을 찾은 튀코 브라헤와는 달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을 굳게 믿었고, 프톨레마이우스의 주장은 강하게 비판하였다. 1597년 그가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와 1610년 그가 공표한 관찰 결과에 따르면 바다의 조수 현상, 태양의 흑점, 달의 표면, 금성의 차고 기움, 목성의 4개 위성 등이 모두 다 천동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의 모든 주장들은 그가 망원경을 통하여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이기에 튀코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천문학계에 큰 기여를 하였다.또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 라는 책을 통하여 그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결국에는 교황청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지동설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천문학에 큰 기여를 하였고, 그의 주장은 약 350년 후 다시 빛을 발한다. 1784년에 태어난 독일의 천문학자로써 최초로 백조자리의 별의 연주시차를 계산한 인물이다. 아직 지동설이 완벽하게 증명이 되지 않았을 때, 베셀(Friedrich Wilhelm Bessel)은 1838년에 지구공전의 증거가 되는 연주시차 를 계산해냈다. 튀코 브라헤는 맨눈으로 자신의 관측사실과 갈릴레이의 금성 위상변화 관측을 통하여 지동설을 믿었지만, 결정적인 증거인 연주시차는 그의 맨눈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우스 체계의 타협안인 절충설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베셀은 초단위로 계산 가능한 연주시차를 계산하였고, 그 결과 지동설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또한, 연주시차를 통하여 후세의 천문학자들은 그 별까지의 거리도 잴 수 있었다. 튀코브라헤의 육분의 튀코 브라헤는 훌륭한 기술자이자 천문학자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였다. 그는 주위의 모든 것을 혁신적이고 아름답게 꾸미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원고를 자신의 방식으로 제본·제작하기 위해 출판사를 차렸다. 뿐만 아니라 가장 정확하고 정교한 천문기기를 만들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기술자를 초청하여 기기를 만들었다. 또 이탈리아와 독일의 예술가와 건축가를 설득하여 자신의 천문대를 설계하고 아름답게 꾸미도록 했다. 위생을 위하여 위생세면시설을 위한 압력장치 역시 고안했다. 우라니보르그는 북유럽의 천문학 연구와 관측의 중심지가 되겠다고 기대한 프레테리크 2세의 만족을 충족시켰다. 그러나 1588년 프레테리크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4세가 왕에 오르자 튀코 브라헤의 영향력이 점점 감소하였다. 튀코 브라헤는 자신에게 오는 돈이 곧 명예라고 생각하면서 크리스티안 4세에게 계속하여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자신은 시민으로써의 의무를 행하는 데에 소홀하게 되었다. 결국 튀코 브라헤는 왕, 귀족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면서 1597년에 벤을 떠나게 되었다. 튀코 브라헤의 천문관 비록 튀코 브라헤의 새로운 모델인 절충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것은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구 중심설을 제안한 동시에 천동설을 부정한 최후의 천문학자이다. 그를 통해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관이 바뀔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관측은 과학혁명 에 큰 기여를 했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가 관측한 자료들을 토대로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기술하는 법칙을 세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체의 운동에 관한 운동을 자세히 기술할 수 있었다. 그가 관측한 천체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튀코 신성, 튀코 분화구 등이 만들어졌고 그의 이름을 딴 Tycho Brahe Planetarium의 천문관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천문학에 엄청난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1900년대까지도 사용되는 약초학을 발전시켜 의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튀코 브라헤가 Uraniborg에서 만든 연구회는 연구센터의 역할과 교육기관으로의 역할 모두 수행해 내었다. 덴마크의 학생들과 이외의 외국학생들에게 약초학과 천문학에 대해 알려주는 대학원이었다. 이렇듯 튀코 브라헤는 분명 천문학자로써 정확하고 객관적인 관측을 하는 명사로 지칭된다. 그리고 천문학 이외에도 의학, 교육학 등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튀코 브라헤는 천문학자이기도 하고 점성술사이기도 했다. 그는 천문관측과 점성술을 이용하여 한 해에 다음과 같이 운이 좋은 날과 좋지 않은 날을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운이 좋지 않은 날 1월 1, 2, 4, 6, 11, 12, 20일 7월 17, 21일 2월 11, 17, 18일 8월 20, 21일 3월 1, 4, 14, 15일 9월 10, 18일 4월 10, 17, 18일 10월 6일 5월 7, 18일 11월 6, 18일 6월 6일 12월 6, 11, 18일 운이 좋은 날 1월 26일 2월 9, 10일 6월 15일 튀코가 이러한 날들에 대해 주장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들은 없다. 후세 사람들이 튀코 브라헤의 업적을 더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1573년 새로운 별(De Nova et Nullius Aevi Memoria Prius Visa Stella) * 튀코 브라헤는 그가 제작한 커다란 육분의를 이용하여 하늘에서 18개월 동안 사라지지 않는 새로운 별을 관측했고, 그것에 관하여 책을 썼다. 1587-88년 새로운 천문학 입문 (Astronomiae Instauratae Progymnasmata) * 튀코의 혜성 연구와 초신성 관측에 관한 대표작으로써, 2년에 걸쳐 두권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최초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했다. 1588년 De Mundi Aetherei Recentioribus Phaenomenis 1598년 Astronomiae Instauratae Mechanica 1602년 Astronomiae Instauratae Progymnasmata Tycho Brahe Homepage Brahe, Tycho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Tycho Brahe pages by Adam Mosley at Starry Messenger An Electronic History of Astronomy, University of Cambridge The Noble Dane Images of Tycho Brahe. The Museum of the History of Science, Oxford, exhibits Eduard Ender s painting and other Tycho material. Astronomiae instauratae mechanica, 1602 edition - Full digital facsimile, Lehigh University. Astronomiae instauratae mechanica, 1602 edition - Full digital facsimile, Smithsonian Institution. Astronomiae instauratae mechanica, 1598 edition - Full digital facsimile, the Danish Royal Library. Includes Danish and English translations. Electronic facsimile editions of the rare book collection at the Vienna Institute of Astronomy Brahe Bio at Skyscript The Galileo Project article on Tycho Brahe The Observations of Tycho Brahe Tycho s 1004-Star Catalog The First Critical Edition, edited and analyzed astronomically and statistically by Dennis Rawlins. Learned Tico Brahae, His Astronomicall Coniectur , 1632 - Full digital facsimile, Linda Hall Library. 분류:1546년 태어남 분류:1601년 죽음 분류:덴마크의 루터교도 분류:덴마크의 천문학자 분류:덴마크의 점성술사 분류:덴마크의 연금술사 분류:초신성 발견자 분류:코펜하겐 출신 분류:코펜하겐 대학교 동문 분류: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분류:로스토크 대학교 동문 분류:독일에 거주한 덴마크인 분류:신부전으로 죽은 사람 분류:브라헤 가 분류:16세기 천문학자 분류:16세기 독일 사람 분류:16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분류:16세기 보헤미아 사람 분류:코페르니쿠스 혁명 |
한사군 (漢四郡, 기원전 108년 ~ 314년) 또는 한군현 (漢郡縣)은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의 4군과 그 속현을 말한다. 근대 이전에는 전통적으로 사군(四郡)이라 불렀고, 현대 한국사학계에서는 한군현, 동방변군 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한사군의 위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의 학계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106년 전한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의 3군을 위만조선 영내에 설치하였으며, 기원전 107년에 다시 예맥(濊貊) 지방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진번·임둔 양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켰으며 기원전 75년(전한 소제 원봉 6년)에는 토착민의 반발로 현도군이 요동 방면(지금의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노성(老城) 지방)으로 옮겨졌다. 이때 현도군에 통합되었던 임둔군의 현들은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南部都尉)와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신나라의 왕망 시기에는 태수의 관직을 태윤(太尹)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이라 찍힌 봉니(捧泥)가 발굴되었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는 반란이 일어나 낙랑사람 왕조(王調)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 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 후한 광무제는 서기 30년에 왕준(王遵)을 보내서 낙랑군을 다시 정복하고 패수 이남을 영토로 확정하였다. 한편 현도군은 후한 초기에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다시 무순(撫順) 지방으로 이치되었다. 연도별 이동 2세기 후반,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요동군(遼東郡)을 중심으로 공손탁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 및 현도까지 지배하였다. 이 시기 낙랑군은 고구려 및 한이 강성하여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수의 민호가 삼한으로 유망하기도 하였다. 공손강은 3세기 초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으며 공손모(公孫摸)·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流民)을 막았다. 위가 건국된 후 명제는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낙랑·대방을 평정하였다. 서진이 건국된 이후 백제 및 고구려의 공격이 가속화되어 낙랑 및 대방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276년에는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신설하고 낙랑·대방을 속하게 하였다. 300년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서진의 수도 낙양이 전조에 함락되자(311년) 낙랑군과 대방군은 더 버틸 힘을 상실하였다. 313년 미천왕은 낙랑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낙랑·대방의 군벌 장통(張統)이 모용씨에게 투항한 뒤, 314년에 대방군까지 축출되면서 소멸되었다. 이후에도 모용씨 및 북위 시기에 낙랑 및 대방군은 요동 및 요서 지역에서 계속 존속되거나 이름만 존재하는 군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사군이 설치되어 실제로 식민정책을 수행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 정도이고 그 중심지는 역시 낙랑군이었다. 한때는 동(東)의 임둔고지와 남(南)의 진번고지를 병합한 적도 있었고, 대방군 역시 1세기밖에 존속하지 못하였고, 현도군도 두 차례나 이동하였기 때문에 한사군의 문화는 대국적으로 보아서 낙랑군 중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낙랑·대방군 외의 주위 여러 토착사회(土着社會)의 문화는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인들은 종래 주위 이민족에 대한 전통 정책에 의하여 만이군장(蠻夷君長)과 거수(渠帥)들에게 봉작(封爵)과 의복·인수(印綬) 등을 수여하고 군현과의 조공(朝貢)·조알(朝謁) 관계를 맺는 동시에 그들의 토산물을 수탈하였다. 일종의 공적 무역과 교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사회와의 교류관계를 살펴보면, 김해 패총(貝塚)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는 다수의 패각(貝殼)·골기각(骨器角)·토기 파편과 약간의 석기도 출토되었지만 철부두(鐵斧頭)·쇳조각·화천(貨泉) 등이 같이 출토되었다. 화천이 이 조개더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 지방이 원래 가야의 본거지요 한·위 시대에 일본에 파송되는 낙랑·대방의 사신이 여기에 중계하였던 터이므로 화폐가 이곳까지 유포된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동으로 경북 영천군 금호면 어은동(永州郡 琴湖面 漁隱洞) 유적지에서 발견된 금속기에서는 소형 고경(小形古鏡)과 기타 청동 식구(飾具,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영천은 본시 골벌국(骨伐國)인데 이곳 발견의 소형 고경(小形古鏡)에는 수개의 칠흑색(漆黑色) 백동경(白銅鏡)과 청동방제경(靑銅倣製鏡)이 있는데, 백동경은 한대의 일광경(日光鏡)으로 이런 종류의 것은 낙랑유적에서는 물론 남만주지방과 서부 일본에서도 발견된 일이 있다. 또 경주 외동면(外東面) 입실리(入室里)와 내동면 구정리(九政里)에서는 겹꼭지 잔줄 거울(多鈕細文鏡) 1개, 구정리에서는 철도(鐵刀)·철부(鐵斧)·철겸(鐵鎌)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중국 한대의 것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소위 북방계통 양식의 것으로 이상 유물은 대개 전한 말경의 것으로 본다. 제주도에서는 1936년 동지 축항공사시 해안에 가까운 용암 밑에서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대천오십(大泉五十)·포화(布貨)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왕망시대(王莽時代)에 주조한 것인데 이곳에서 출토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제주도는 고대의 탐라국(耽羅國)으로 《삼국지》 위지(衛誌)에는 주호(州胡)라 하여 그곳 토착인이 배를 타고 중한(中韓)에 왕래하며 무역을 행하였다고 씌어 있다. 중한은 낙랑·대방에 접근한 진한·마한을 지적한 것이니 위의 유물들은 이러한 지방과의 교역에서 중계 유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낙랑 등 한사군 주변의 토착사회는 동군현과 또 거기를 통해서 중국 역조(歷朝)에 대한 교역 교류관계에서 전파된 한문화 특히 철기문명의 자극을 받아 그것을 모방하는 한편, 차차로 자기반성, 자기 각성을 일으켜 차츰 고대국가(古代國家)가 전후(前後)하여 형성하게 되었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 사군이 폐지되고 이부(二府)로 재편된 것으로 잘못 표기한 이래 《동국통감》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조선 초기까지는 사군-이부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실학자들에 의해 이부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게 되어 사군의 사실만 받아들여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식민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타율성론’, ‘반도사관’ 등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한사군이 사용되었다. 한사군을 중국의 식민지로 받아들이는 한편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모두 식민지 정권으로 규정하고 사대주의에 대해서도 타율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한민족의 역사가 식민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론을 펼쳤다. 초기의 고구려는 한사군과 밀접한 지역에 위치하여 한사군과의 투쟁 속에 성장하였으며, 예(濊)나 맥(貊), 그리고 삼한도 한사군에 대항하였고, 한사군은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국가의 성립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에서는, 한사군은 동북아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20여 년 동안 대부분 중국 본토로 철수하고 낙랑군만이 평안도 일대에 남아 한나라와의 교역을 관리하는 무역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언급 외에는 한사군에 대한 설명이 모두 삭제되었다. 한사군의 명칭에 있어서도 사군이 실제로 존속한 기간이 짧기 때문에 한군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며, 한나라 이후에도 존속한 군현을 설명하기 위해 동방변군 (東方邊郡)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한나라 시기 중국의 군현 정책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면서 중국 본토에 설치된 내군(內郡)과 변경에 설치된 변군(邊郡) 또는 외군(外郡)의 성격을 구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변군에 대한 직접적인 군현 지배를 시도하였으나 점차 변화하여 변군의 실제적인 통치는 한의 법률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지방의 토착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태수는 명목상의 지배자로 조공과 책봉을 통해서 간접적인 통제를 수행하였다. 낙랑군 자체의 성격에 대하여 실질적인 중국의 군현 체제로 존속하였던 것은 전한 및 후한 시기에 불과하였으며 대부분의 시대에는 중국계 유이민 세력의 군벌 세력으로 존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평양 낙랑 토성에서 낙랑예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와당 발견, 한무제 때 쓰던 오수전 동전,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발굴,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대방태수 무덤 발견 등으로 인하여 한국 사학계에서도 최근 인식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서술과 실제 역사를 비교하면 알겠지만 낙랑군은 420년간 지속이 되었으며 그 흔적은 공손연 등을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난다. 낙랑군 위치에 관한 학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과거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임둔군이나 진번군의 경우 설치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철폐되었고, 현도군 역시 랴오닝 성 무순 방면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위치에 대한 논란은 주로 낙랑군을 두고 계속되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로 비정하였다.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이후 평양 일대에서 봉니(封泥)·한식(漢式) 무덤 등 낙랑 관련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낙랑의 위치는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임이 확증되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2005년 출토)을 분석하여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신채호 등의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낙랑이 요동 일대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리지린을 비롯한 북한 학자들과 대한민국의 윤내현 등의 일부 학자들은 낙랑을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고 주장하며, 박영규 등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의 위치를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대한민국 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취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사기》〈조선열전〉에 고조선의 멸망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한사군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군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사군은 사실이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사기》〈남월열전〉,〈서남이열전〉 등에도 설치된 군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한서》〈조선전〉에 《사기》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고 있다. 한사군의 명칭이 명시된 점이 조금 다르다. 한편, 〈지리지〉에는 낙랑군과 현도군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낙랑군은 원봉3년(BC108), 현도군은 원봉4년(BC107)으로 설치된 연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사마상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문서로, 임둔군, 진번군의 위치를 장안으로부터 각각 6138리, 764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상여는 무제가 조선을 평정하기 9년 전에 죽었기에 《무릉서》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후한서》〈군국지〉에 낙랑군과 현도군에 대한 설명이 나타난다. 간략한 건치연혁과 함께 낙양과의 거리를 각각 5000리, 4000리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동이전〉에 낙랑 및 대방군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요동의 군벌 공손강이 낙랑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을 분할하여 대방을 설치했으며, 경초(景初) 연간(237~239)에 사마의가 공손연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진서》〈지리지〉에 낙랑군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276년에 평주(平州)를 신설하고 낙랑군을 소속시켰다고 한다. 《자치통감》〈진기(晉紀)〉에 낙랑군 폐지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313년에 낙랑, 대방 지역의 군벌 장통(張統)이 미천왕의 공격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선비족의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모용외는 자신의 세력권인 요서·요동 지역에 낙랑군의 피난민을 받아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았다. 이와 관련해서 요동이나 요서 일대에 낙랑군을 비정하는 주장에 대해 주류 사학계에서는 이 시기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군을 혼동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재야사학계에서는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교)군에 대한 설명에 아무런 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반고(1세기), 《한서》〈권95 서남이양오조선전(西南夷兩粵朝鮮傳)〉 《한국사》 4권, 초기국가 - 고조선, 부여, 삼한, 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1997. 한사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한나라 분류:고조선 분류:위만조선 분류:한사군 분류:중국의 역사 분류:한국의 역사 분류:명수 4 분류:고조선-한나라 관계 |
1986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28일 - 미국에서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사고가 발생하다. 4월 11일 - 미국 마이애미에서 FBI 총격전이 발생하다. 4월 15일 - 미국, 리비아를 공습하다. 4월 17일 - 네덜란드와 실리 제도가 평화 협정을 맺고 335년 전쟁을 끝내다. 4월 26일 - 소비에트 연방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가 실험 중 사고로 폭발하다. 5월 3일 - 5.3 인천 사태가 발생하다. 5월 10일 - 대한민국의 교사 546명이 교육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다. 7월 3일 -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하다. 8월 13일 - 대한민국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8월 16일 - 신민당서 탈당한 신보수계 인사들이 유한열 의원을 총재로 하는 민중민주당을 창당하다. 8월 27일 - 대한민국에 태풍 베라가 상륙하다. 9월 1일 - 대한민국, 외국산 담배 시판 시작. 9월 5일 - 소비에트 연방 발트 해 연안에서 핵 폭발이 발생하다. 9월 7일 - 대한민국의 전국 승려 2천여 명, 해인사에서 불교 악법 철폐 대회를 개최한 뒤에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9월 9일 - 일본의 후지오 마사유키 문부대신, “한일 병합 조약은 양국의 합의에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장관직에서 파면되었다. 9월 14일 - 1986년 아시안 게임의 개막을 앞두고 김포국제공항에서 폭발물 테러가 발생해 5명이 사망하다. 9월 15일 - 대한민국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첫 번째 사건이 발생하다. 9월 16일 - 대한민국 정부,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 발표. 9월 27일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모태가 된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발족했다. 10월 21일 - 마셜 제도가 미국에서 독립하다. 10월 22일 - 대한민국 대구에서 삼성 라이온즈 팬들이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 선수단을 태운 버스에 방화를 저지른 사건이 일어나다. 11월 1일 - 전라남도 광주시 일원을 관할하는 광주직할시가 설치되다. 11월 26일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금강산 댐 건설에 대응할 ‘평화의 댐’ 건설 발표하다. 12월 - 베트남, 제6차 베트남 공산당 대회에서 도이모이 정책 채택을 결정하다. 서울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폐막 이후 각국 선수단의 통신편의를 위해 공중전화카드를 발행, 공급하기 시작. 교복 자율화가 폐지되고 교복을 다시 입게 되었다. 다만 교복 선택을 학교장 재량에 따르도록 하게 하여 이전과는 다르게 다양한 교복이 생기게 되었다. 미국 정부, 법률상 유연 휘발유의 사용을 금지. 일본 자레코에서 모모코 120% 비디오 게임 출시. 1월 1일 - 시흥군 과천면 일원이 과천시로 승격됨. 1월 1일 - MBC CI로 선포하였다. 3월 1일 - 초신성 플래시맨 방송 시작 3월 8일 - 대한민국 프로야구 빙그레 이글스 창단. 3월 21일 -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에서 베스타 출시.(시판은 같은 달 22일) 5월 - 영국 과 프랑스 를 잇는 채널 터널이 착공되다. 5월 27일 - 비디오 게임 역사상 최초로 개발된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 드래곤 퀘스트가 출시되다. 5월 31일~6월 29일 - 1986년 FIFA 월드컵 개최. 6월 22일 - 제13회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와 의 시합 도중 마라도나가 신의 손 사건을 발생시킴. 6월 27일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르망 출시. 6월 29일 - 제13회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에서 는 을 3대 2로 승리하고 통산 2회째 우승을 차지함. 7월 24일 - 현대자동차에서 그랜저 출시. 8월 21일 -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 옛 중앙청을 개조해 이전 개관. 8월 23일 - 대한민국, 창경궁 문정전 복원 중건. 8월 25일 - 대한민국, 영광 원자력 1호기 준공. 9월 20일~10월 5일 - 서울에서 서울 아시안 게임 개최. 8월 25일 - 대한민국, 국립현대미술관을 과천시로 이전 개관. 9월 2일 - 수도권 전철 1호선 창동~의정부 개통. 9월 11일 - 대한민국, 호남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 준공식. 10월 3일 - 부활의 앨범 Rock will Never Die 발매 10월 5일 - FFG-46 USS 렌츠, DLG-24 USS 리비스, DD-972 USS 올렌도르프가 중국의 칭다오를 방문, 1949년 이래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미국의 해군 군함으로 기록됨. 10월 6일 - 삼성전자, 초소형 4mm VTR 세계최초로 개발. 11월 20일 - 대한민국에서 1987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12월 4일 - 현대자동차에서 그레이스, 포터, 마이티 출시. 1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민 (슈퍼주니어). 1월 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보희 1월 5일 * 일본의 배우, 가수 고이케 뎃페이. * 대한민국의 배우 이도영.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이국주. * 대한민국의 배우 주민하. 1월 7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채하. 1월 8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다비드 실바. 1월 9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박소유. 1월 12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김수화.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루스 회르츠. 1월 14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요안 카바예. 1월 1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황인성. 1월 2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인석 1월 22일 - 대한민국의 모델, 가수 이파니. 1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재중 (JYJ). * 대한민국의 성우 김디도. 1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문유정. 1월 29일 * 일본의 배우 야스다 소타로. * 대한민국의 배우 안세하. 1월 30일 - 일본의 성우 시모다 아사미 2월 1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정주원. 2월 2일 - 미국의 농구 선수 라존 론도 (보스턴 셀틱스). 2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민효린. 2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유노윤호 (동방신기). 2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진혁. 2월 10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홍훤. 2월 11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허민. 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조태관. 2월 1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소정환. 2월 15일 * 불가리아의 축구 선수 발레리 보지노프. * 일본의 성우 코시미즈 아미. 2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우람 2월 19일 * 중화민국의 배우 및 가수 궈차이제.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마르타 비에이라 다 시우바. * 노르웨이의 가수 마리아 메나. * 대한민국의 배우 박공주. * 일본의 축구 선수 반다이 히로키. * 베트남의 축구 선수 부이떤쯔엉. * 스웨덴의 배우 비에른 구스타프손. * 잉글랜드의 배우 오필리아 로비본드. 2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다니엘. 2월 23일 - 일본의 가수, 배우 카메나시 카즈야 (KAT-TUN). 2월 2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전준우. 2월 26일 * 일본에서 활동중인 대한민국계 가수 크리스털 케이.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나초 몬레알. 2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허승민 (삼성 라이온즈). * 대한민국의 가수 윤혁 (디셈버). * 대한민국의 배우 구재이. 3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민영. 3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보은. 3월 11일 - 일본의 가수 시노다 마리코. 3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승빈. 3월 16일 * 일본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다카하시 다이스케.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지연 3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보람 (티아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하나. * 대한민국의 가수 나비. 3월 27일 * 독일의 축구 선수 마누엘 노이어. 3월 28일 * 미국의 가수 레이디 가가.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윤서. 3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前) 가수 소영 (애프터스쿨). 3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안재홍. 4월 2일 - 네덜란드의 음악 프로듀서 리햅. 4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은혁 (슈퍼주니어). 4월 7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전소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세정. 4월 8일 * 일본의 배우 사와지리 에리카. * 대한민국의 성우 윤아영. 4월 10일 * 벨기에의 축구 선수 뱅상 콩파니. * 대한민국의 배우 신현빈.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은우. 4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DK (디셈버). * 대한민국의 가수 미성. 4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은채. * 대한민국의 방송인 오초희. * 대한민국의 개그맨 이진호. 4월 16일 - 일본의 축구 선수 오카자키 신지. 4월 19일 * 중국의 가수 조미 (슈퍼주니어-M). * 대한민국의 배우 이해인. 4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경태. 4월 29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이채영. * 대한민국의 배우 변요한. 5월 1일 - * 대한민국의 가수 이창민 (옴므, 2AM).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백수정. 5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안재민. 5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ZINNI (글램). 5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권혁수. 5월 7일 - 대한민국의 팝페라 가수 임형주. 5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선호. * 일본의 성우 사토 사토미. 5월 12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맹승지. 5월 15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율. 5월 16일 - 미국의 배우 메건 폭스. 5월 17일 - * 웨일스의 배우 에린 리처즈. * 대한민국의 배우 문지인. 5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나지완 (KIA 타이거즈). 5월 21일 * 대한민국의 태권도 선수 황경선. * 대한민국의 가수 SG 워너비의 김진호. * 대한민국의 가수 걸스데이의 소진. * 크로아티아의 축구선수 마리오 만주키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5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백옥담. 5월 25일 - 일본의 배우 우에노 주리. 5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노민우.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오수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양훈. 5월 30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세르히오 라모스 (레알 마드리드). 6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이장우. 6월 3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최효종 6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박유천 (JYJ). 6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김현중 (SS501). 6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소연. 6월 11일 - 미국의 배우 샤이아 러버프. 6월 13일 - 일본의 축구선수 혼다 게이스케. 6월 15일 - 미국의 배우 스토야. 6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하주연 (쥬얼리). 6월 1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유원상. 6월 21일 * 일본의 배우 마츠모토 히로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재원 6월 25일 - 일본의 가수 마쓰우라 아야. 6월 26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조정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정민. 6월 28일 - 일본의 성우 미모리 스즈코. 6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수아. 7월 1일 - 미국의 영화 배우 샤이아 러버프. 7월 2일 - 미국의 가수, 배우 린지 로언. 7월 3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올라 토이보넨. 7월 4일 - 일본의 가수, 배우 마스다 다카히사 (NEWS). 7월 10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병호 (넥센 히어로즈). 7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다나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7월 1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희.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차현주. 7월 20일 - 덴마크의 축구 선수 테레사 닐센. 7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아. 7월 22일 - 일본의 배우 스에나가 하루카. 7월 23일 - 일본의 성우 우치다 아야. 7월 24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윤석민(KIA 타이거즈). 7월 29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조해리. 7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구윤회. 8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서준. 8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주비. 8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베이식. 8월 13일 - 일본의 배우 후루하라 야스히사. 8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황선희.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유진. 8월 17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마르쿠스 베리. 8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권수현. 8월 21일 - 자메이카의 육상 선수 우사인 볼트. 8월 22일 - 일본의 배우 기타가와 게이코. 8월 25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출신 방송인 이겨레 8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필. 8월 28일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전준형 (광주 FC). 8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유. 9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태임. 9월 11일 - 일본의 배우 나카무라 치세. 9월 12일 * 미국의 배우 에미 로섬. * 일본의 축구선수 나가토모 유토. * 대한민국의 배우 백승희. 9월 13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슬기.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좌. 9월 14일 - 일본의 가수 다카하시 아이 (모닝구무스메). 9월 15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조정식. 9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그림 9월 22일 - 일본의 성우 야하기 사유리. 9월 24일 - 일본의 가수 리아 디존. 9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윤영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한동욱. * 대한민국의 배우 류준열. 9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시윤 9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배슬기. 9월 30일 * 일본의 가수, 배우 니시지마 타카히로 (AAA).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올리비에 지루. 10월 4일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신영석(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이연 10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아인. 10월 9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한가은. 10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베이지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전(前) 미스코리아 이진. 10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스윙스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동해 (슈퍼주니어).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성우 안효민. 10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산체스.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오영종. 10월 21일 - 대한민국의 MBC 아나운서 강다솜. 10월 22일 - 일본의 배우 에비사와 겐지. 10월 24일 * 일본의 성우 오카모토 노부히코. * 캐나다의 힙합 가수 드레이크. 10월 28일 - 일본의 성우 토요사키 아키.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오재일. 10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연지 (씨야). 11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허영생 (SS501). 11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엄현경. 11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보아. 11월 7일 - 대한민국의 넥센 히어로즈 야구 선수 금민철.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황진하 11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문채원. * 대한민국의 배우 한민채. 11월 14일 - 미국의 배우 코리 마이클 스미스. 11월 15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아눅 데커르.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제 (초신성). *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나니. 11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은채. 11월 26일 - 일본의 성우 이토 가나에. 11월 27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사비 토레스. 11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은정 (쥬얼리).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박시현 (스피카). 12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하윤. 12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민수. 12월 8일 - * 대한민국의 개그맨 양세찬. * 대한민국의 가수 그레이. 12월 9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정범균.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유다현. 12월 10일 **일본의 성우 닛타 에미. **대한민국의 유튜버 도티. 12월 11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새해.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큐리 (티아라). 12월 13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미카엘 루스티그. 12월 15일 **대한민국의 배우 나현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준수 (JYJ) 12월 18일 - 캐나다의 쇼트트랙 선수 프랑수아 아믈랭.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박성준.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설아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이진희. 12월 24일 - * 일본의 배우 이시하라 사토미. * 대한민국의 배우 최희서.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기성. 12월 26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위고 요리스.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웅.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옥빈. 1월 10일 - 체코의 소설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1월 28일 - 미국의 물리학자 겸 우주비행사 로널드 맥네어 2월 11일 - 미국의 작가 프랭크 허버트 2월 24일 - 캐나다의 정치가 토미 더글러스 2월 28일 - 스웨덴의 총리 올로프 팔메 4월 8일 - 일본의 연예인 오카다 유키코 4월 22일 - 루마니아 출생 작가이자 비교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 5월 27일 - 대한민국의 범죄자 이동식 6월 14일 *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대한민국의 건축가 김수근. 6월 19일 - 프랑스의 배우이자 희극인 콜루슈(Coluche) 6월 30일 - 헝가리의 추기경 레커이 라슬로 8월 1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영신 9월 1일 - 미국의 배우 머리 해밀턴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목일신 11월 1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서영춘 11월 8일 - 구 소련의 정치인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12월 29일 - 영국의 총리 해럴드 맥밀런 보츠와나의 작가 베시 헤드 경제학상 제임스 맥길 뷰캐넌 문학상 월레 소잉카 물리학상 에른스트 루스카,게르트 비니히,하인리히 로러 생리학 및 의학상 스탠리 코언,리타 레비몬탈치니 평화상 엘리 비셀 화학상 더들리 R. 허슈바흐,리위안저,존 C. 폴러니 10월 4일~10월 5일 롯켄 섬 대량살인사건 발생.(괭이갈매기 울적에)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경인 소 2월 9일 갑신 2월 신묘 대 3월 10일 계축 3월 임진 대 4월 9일 계미 4월 계사 소 5월 9일 계축 5월 갑오 대 6월 7일 임오 6월 을미 대 7월 7일 임자 7월 병신 소 8월 6일 임오 8월 정유 대 9월 4일 신해 9월 무술 소 10월 4일 신사 10월 기해 대 11월 2일 경술 11월 경자 소 12월 2일 경진 12월 신축 소 12월 31일 기유 |
1989년 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1일 - 국외여행 전면 자유화. 1월 7일 - 일본 제124대 천황인 히로히토가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다음날 아키히토가 천황 자리에 즉위하고, 새로운 연호를 "헤이세이(平成)"라고 결정. 3월 16일 -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이 파업하다. 당시까지 사상 최악의 지하철 파업이었으며, 2주일 동안 1호선을 제외한 지하철이 마비되었고, 이 파업으로 6명이 해고되었다. 5월 2일 - 동의대학교사건 발생. 5월 10일 - 대한민국, 조선대학교 학생 이철규의 변사체가 광주에서 발견되다. 6월 4일 - 중국 톈안먼 사건이 일어나다. 7월 1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남한에서는 임수경이 참가하였으며, 동시에 월북하였다. 7월 27일 -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발생. 8월 2일 -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 서경원(徐敬元) 의원 밀입북 사건과 관련해 국가안전기획부에 구인. 8월 8일 -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최연소 일본 총리에 취임. 8월 10일 - 콜린 파월 대장, 미국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에 임명. 8월 15일 - 대한민국,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의 변사체가 거문도에서 발견되다. 8월 23일 -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트의 길 시위가 열리다. 8월 25일 -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지나가다. 8월 27일 - 일본 자위대, 태평양 군사훈련에 참가. 8월 28일 - 대한민국 재무부,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소유 강력히 억제하는 정책 발표. 8월 31일 - 대한민국, 동아건설, 53억 달러 상당의 리비아 2차 대수로 공사 수주. 9월 8일 -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 임수경 밀입북 사건 수사결과 발표. 9월 11일 -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 국회 특별 연설에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제시. 9월 15일 - 대한민국 노동부, 최저임금제도 실시를 10인 이상 모든 산업체로 확대하는 시행령 개정안 확정. 10월 7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대한민국을 다시 방문하였다. 11월 9일 -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다. 12월 6일 - 독일 민주 공화국의 지도자 에곤 크렌츠가 물러남으로서 사실상 독일 민주 공화국의 붕괴. 12월 20일 - *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하다. * 티미쇼아라 반정부시위를 시작으로 루마니아 전역에서 독재자 차우셰스쿠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가 번지다. 12월 25일 -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 엘레나가 재판을 거쳐 총살되다. *폴란드 자유노조 총선 승리 1월 1일 - * 시흥군 폐지, 오산읍이 오산시로 군포읍이 군포시로 의왕읍이 의왕시로 변경. 태안군 설치. * 충청남도 대전시 일원과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는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現 계룡시 신도안면)으로 편입되었다.)를 제외한 전역을 관할로 대전직할시가 설치되었다. 1월 2일 - 변진섭 2집 너에게로 또 다시 발매. 대한민국 최초의 밀리언셀러 싱글 음반. 1월 10일 - 아시아나항공이 대한민국내 두 번째 정기 항공사로서의 첫 취항하다. (국내선 1월 10일 / 국제선 12월 23일) 3월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임페리얼 출시. 3월 3일 -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에서 캐피탈 출시. 3월 19일 - 프랑스군 한국전쟁 참전기념비가 건립되다. 4월 21일 - 닌텐도에서 게임보이를 발매하다. 4월 26일 - 드래곤볼 Z의 방송 시작. 5월 1일 - * 안양시에 만안출장소, 동안출장소 설치. * 성남시 분구. (수정구, 중원구) * 전주시 분구. (완산구, 덕진구) 5월 27일 - 성남시에 분당출장소를 설치. 7월 12일 - 롯데월드 어드벤처 개장. 8월 13일 -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 9월 1일 - 일본의 여성 만화가 집단 클램프가 신서관 윙스에서 성전 RG VEDA를 연재, 데뷔. 9월 2일 - 대한민국, 30회 기능 올림픽에서 종합우승으로 대회 8연패 달성. 9월 17일 -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 서울평화상 제정 발표. 10월 5일 -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다. 10월 11일 - 대한민국, 항공우주연구소 발족. 10월 15일 - 이승환 1집 B.C 603 발매. 데뷔. 11월 6일 -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가 착공되다. 11월 25일 - 장필순 첫 솔로앨범을 발매함으로써 솔로 전향. 12월 1일 - 대전극동방송이 개국하였다.(주파수 FM 93.3MHz) (호출부호 및 출력 HLAD 3KW) 12월 10일 - 니혼 팔콤에서 《드래곤 슬레이어 영웅전설》게임이 출시되었다. 12월 15일 - 대한민국에서 1990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1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배그린. * 대한민국의 래퍼 블랙넛. 1월 2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박상우.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용찬. 1월 3일 * 일본의 가수 우메다 아야카 (AKB48)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성현. 1월 4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박요한. 1월 6일 *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앤디 캐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일본의 성우 미카미 시오리. 1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찬호. * 대한민국의 배우 김가은. * 대한민국의 배우 이이경. 1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솔지 (EXID). 1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MC 김정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고종욱. 1월 14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한민영. 1월 16일 - 캐나다의 싱어송라이터 카이자. 1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가현 (HAM). 1월 23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강동윤. 1월 24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방송인 공평희.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기성용 (스완지시티). * 일본의 가수 나카니시 유카(SKE48). 1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백성현. * 대한민국의 배우 강한나. * 대한민국의 가수 건우 (마이네임). 1월 31일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금단비 2월 3일 - 대한민국의 중국가수 지아 (미스에이). 2월 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원제(삼성 라이온즈).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 2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문준영 (제국의 아이들). 2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재신(배우). 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동현 (보이프렌드). * 대한민국의 모델 설초록 2월 15일 * 대한민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모태범. * 일본의 가수 니시와키 아야카. 2월 1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새아. 2월 21일 -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정준영. 2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수연. 2월 25일 * 대한민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이상화. * 일본의 성우 하나자와 카나.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윤완주. 2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은아. 2월 2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구자철 (마인츠 05). 2월 28일 - 중국의 가수 장리인. 3월 1일 - 멕시코의 축구 선수 카를로스 벨라. 3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미소수미 (남녀공학). 3월 6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승렬 (전북 현대 모터스).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앙엘라 크리스트. 3월 9일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태연 (소녀시대). **일본의 배우 치바 유다이 3월 10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박시영 (롯데 자이언츠). * 대한민국이 프로게이머 신희승. 3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수현 (유키스). * 미국의 배우 안톤 옐친. 3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주연. 3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소민. *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선수 시오 월콧(아스날) 3월 17일 - 일본의 축구 선수 가가와 신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3월 1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전민수 (KT 위즈). * 일본의 가수 니시노 카나. * 영국, 미국의 배우 릴리 콜린스. 3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백용환 (KIA 타이거즈).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진명호. 3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신본기. 3월 22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지미 두르마즈. 3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문정. 3월 25일 - 대한민국의 스케이트 선수 조수훈. 3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동인. 3월 27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사라 가마. 3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아름. 3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보형. 4월 6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셰일라 판 덴 뷜크. 4월 10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박보미. 4월 1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진야곱 (두산 베어스). 4월 12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연아. 4월 13일 - 대한민국의 음악PD 자이언티. 4월 14일 - 일본의 가수 ELISA. 4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디자이너 제시카. 4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대성 (빅뱅). * 대한민국의 가수 유성은. 4월 27일 -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 구본길. 4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성규 (인피니트). 4월 2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하준호 (KT 위즈).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도마고이 비다. 4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우영 (2PM). 5월 2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안애경.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상규 (한화 이글스). 5월 3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허영무. 5월 5일 - 미국의 가수 크리스 브라운. 5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레이나 (애프터스쿨). 5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노을. 5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前 가수 우지해.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창희. 5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써니 (소녀시대). 5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권. * 대한민국의 가수 장범준. 5월 17일 * 대한민국의 전(前) 가수 김성희. * 대한민국의 배우 오혜금. 5월 19일 - 일본의 성우 쿠보 유리카. 5월 24일 - 일본의 바둑 기사 이야마 유타 5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은 (원더걸스). 5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효민 (티아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가은. * 대한민국의 가수 에일리. 5월 31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조영철(경남 FC). * 독일의 축구 선수 마르코 로이스(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바스 도스트. 6월 5일 - 영국의 배우 이머전 푸츠. 6월 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형종 (LG 트윈스). 6월 8일 - 일본의 성우 츠다 미나미. 6월 13일 * 대한민국의 프로그래머 김윤환.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김지석. 6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유 (투엑스). 6월 18일 * 대한민국의 래퍼 김태헌 (제국의 아이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윤명준. 6월 19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박지훈. 6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전우엽 (KIA 타이거즈) 6월 22일 *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배우 정용화 (씨앤블루).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여름 (광주 FC). 6월 23일 * 일본의 성우 타케타츠 아야나.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크리스토페르 노르드펠트. 6월 27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강하빈. 6월 30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율리아 스페츠마르크. 7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윤도경 (KT 위즈). 7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두준 (하이라이트).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민석. 7월 5일 - 일본의 야구 선수 가라카와 유키(지바 롯데 마린스). 7월 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오선진 (상무 피닉스). * 대한민국의 배우 김범.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서한빛 7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아 (나인뮤지스). * 대한민국의 배우 서현석. * 대한민국의 배우 신현수. 7월 13일 * 일본의 가수 미치시게 사유미 (모닝구 무스메). * 대한민국의 래퍼 진온 (F.CUZ). 7월 1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범준 (LG 트윈스). 7월 1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노진혁. 7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우빈.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준섭(KIA 타이거즈). * 영국의 축구 선수 가레스 베일. 7월 19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前 아나운서 황보미.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슬기.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노르베르투 무라라 네투. 7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주승. 7월 21일 -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구성훈. * 대한민국의 배우 장미관. 7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창엽. * 대한민국의 배우 박민지. 7월 23일 - 영국의 배우 대니얼 래드클리프. 7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중휘. * 대한민국의 배우 권화운.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알빈 에크달. 7월 29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제이 로드리게스.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코소바레 아슬라니. 8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티파니 (소녀시대). *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 매디슨 범가너. 8월 5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라이언 버트런드. 8월 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동민. 8월 11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베카 8월 12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선예.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홍정호(FC 아우크스부르크). 8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신효. 8월 1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송창현. 8월 2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서건창. 8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희 (엠파이어). 8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조권 (2AM). * 대한민국의 가수 조현아 (어반자카파). 8월 29일 - 대한민국의 성우 공준호. 8월 3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조윤준. 8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혜선. 9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다운.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김아빈. 9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현승. 9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이 (피에스타) 9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소은. 9월 9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최별하. 9월 11일 - 일본의 가수 쿠라모치 아스카 (AKB48) 9월 1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민성기 (NC 다이노스). 9월 13일 - 독일의 축구 선수 토마스 뮐러 (FC 바이에른 뮌헨). 9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종석. 9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성초. 9월 19일 * 일본의 패션 모델 IMALU. * 대한민국의 배우 서하준. 9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효연 (소녀시대).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이아영. 9월 23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최진아. 9월 26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연상은. *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윈. 9월 27일 * 대한민국의 수영선수 박태환. * 일본의 성우 오오쿠보 루미. 9월 28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아망딘 앙리. 9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정민. 10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나성범.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이바 란데카. 10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초희. 10월 6일 -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보경(카디프 시티 FC).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천이슬.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도재욱. 10월 8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웹툰 작가 안가연 10월 9일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서윤아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안나경 10월 11일 - * 한국계 미국인 골프 선수 미셸 위. * 캐나다계 중국인 가수 헨리 (슈퍼주니어-M).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전효성 (시크릿).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장희. 10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제이엔 (New.F.O)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윤호.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김하음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린지 (피에스타) 10월 24일 - 스웨덴의 방송인 퓨디파이 10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용재 11월 3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택용. * 대한민국의 배우 김리원. 11월 6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유준희 (삼성전자 칸). * 대한민국의 배우 인병국. *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마렌 미엘데. 11월 8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모르간 슈네데를랭. 11월 9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진아름. 11월 11일 * 일본의 가수 다나카 레이나 (LoVendoЯ).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희. 11월 14일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이봄이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수임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상문.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모델 문가비.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차명환. * 대한민국의 배우 남보라. 12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우동균. 12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리 (소녀시대). * 대한민국의 가수 김예원 (쥬얼리). * 대한민국의 배우 이규환. 12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유영. 12월 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정희철 (제국의 아이들). 12월 13일 * 미국의 컨트리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 일본의 가수 후루카와 아이리 (SKE48).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MC, 뮤지컬 배우 온유 (샤이니).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성의준.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신애.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선빈 (기아 타이거즈).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용준형 (하이라이트).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봉성.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용 (터치).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방연지.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수지.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로꼬. 12월 26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선수 곽윤기.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출신 배우 민찬기.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김태군 (NC 다이노스). 히로히토 테즈카 오사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월 7일 - 일본 124대 천황 히로히토. 2월 4일 - 대한민국의 사상가 함석헌. 2월 9일 - 일본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3월 7일 - 대한민국의 시인 기형도. 4월 12일 - 미국의 활동가 애비 호프만. 4월 21일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4월 30일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5월 1일 -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 에드바르트 오하프. 6월 3일 - 이란의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6월 23일 - 독일의 법학자 이자 나치 친위대 장교, 베르너 베스트 (Werner Best). 6월 24일 - 일본 가수이자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7월 2일 - 안드레이 그로미코, 구 소련의 외교관. 7월 16일 - 베를린 필하모니커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8월 15일 -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 이내창. 8월 22일 - 흑표당의 창시자 휴이 뉴튼. 12월 16일 - 미국의 배우 리 밴클리프. 12월 25일 - 루마니아의 정치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2월 26일 - 아일랜드의 극작가 샤무엘 베케트 사망. 12월 31일 - 헝가리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런토시 미할리. 경제학상 트리그베 호벨모 문학상 카밀로 호세 세라 물리학상 노만 F. 램지, 한스 G. 데멜트, 한스강 파울 생리학 및 의학상 J. 마이클 비숍, 해럴드 E. 바머스 평화상 제14대 달라이 라마 화학상 시드니 올트먼, 토머스 R. 체크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병인 대 2월 6일 정유 2월 정묘 소 3월 8일 정묘 3월 무진 소 4월 6일 병신 4월 기사 대 5월 5일 을축 5월 경오 소 6월 4일 을미 6월 신미 대 7월 3일 갑자 7월 임신 소 8월 2일 갑오 8월 계유 대 8월 31일 계해 9월 갑술 대 9월 30일 계사 10월 을해 소 10월 30일 계해 11월 병자 대 11월 28일 임진 12월 정축 대 12월 28일 임술 |
1988년 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월 1일 - 소비에트 연방,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주도 아래, 페레스트로이카에 착수 개시. 2월 25일 - 노태우가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4월 26일 -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루어지다. 6월 30일 -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와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가 스위스 에콘에서 교황의 승인 없이 네 명의 주교를 서임하다. 7월 2일 - 대한민국 국회,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부결되다. 7월 7일 - 7·7 선언 발표. 8월 4일 -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도중 도청장치 방송사고 발생. 8월 8일 - 미얀마에서 8888 항쟁 발생. 8월 20일 - 이란-이라크 전쟁, 정전협정 발효. 8월 23일 - 미국, 포괄무역법안(슈퍼301조 포함) 서명. 9월 3일 - 대한민국 정부, 북한 및 공산권 자료 일반 공개방침 발표. 9월 8일 - 소비에트 연방, 서울 올림픽 전후 23일간 KAL기의 자국영공 통과 허용키로 결정. 9월 18일 - 미얀마에서 사웅 마웅 장군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 발생. 9월 24일 -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김용남(일명 용팔이) 검거. 9월 27일 - 서울 올림픽 100m 우승자 벤 존슨 약물복용 사실 판명. 10월 5일 - 대한민국 국회, 16년 만에 국정감사를 다시 시작하다. 10월 7일 - 대한민국 정부, 7개항의 대북경제개방조치 발표. 11월 8일 -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에 승리하였다. 11월 26일 * 노태우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과 5공 비리 조사활동 연내 매듭 호소시국사범 석방 등 야당 주장 수용, 민주화 6개항 발표. * 전국언론노조 창립, 초대위원장 권영길, 41개 언론사 노조 참여. * 대한민국-소비에트 연방 영사관계 수립 합의. 12월 21일 - 뉴욕행 팬암 항공 103편이 스코틀랜드 남부에 위치한 로커비 마을을 지나던 중 폭발하여, 탑승객 259명 전원과 마을 주민 11명 등 270명이 사망했다. (팬암 항공 103편 폭파 사건) 1월 19일 - 한글 맞춤법 개정. 1월 26일 - 오스트레일리아, 이주 200주년. 2월 13일 - 제15회 동계 올림픽이 캐나다의 캘거리에서 개막. (~2월 28일) 2월 17일 - 아시아나항공 창립. 2월 27일 - 초수전대 라이브맨 방송 시작. 3월 13일 - 유영석이 푸른하늘 1집을 발매하면서 데뷔. 일본의 아오모리와 하코다테를 잇는 세계 최장의 해저터널인 세이칸 터널이 개통. 5월 4일 - 서울랜드 개장. 5월 15일 - 신문 한겨레 창간. 5월 27일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2.1이 출시. 7월 4일 - FIFA가 1994년 FIFA 월드컵 개최지를 미국으로 결정. 8월 6일 - 이상은이 담다디로 MBC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데뷔. 8월 10일 - 대한민국, 울진 원전1호기(발전용량 95만kw) 준공. 8월 14일 - 프로 권투 선수 문성길, 세계 권투 협회(WBA) 밴텀급 챔피언 타이틀 획득. 8월 29일 - 제52차 국제펜대회 서울서 개막.(~9월 2일) 9월 3일 - 서울 올림픽 선수촌 개촌. 9월 12일 - 제94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서울서 개최.(~16일) 9월 17일~10월 2일 - 서울에서 제24회 하계 올림픽이 개최하다. 9월 29일 - 대한민국 여자핸드볼, 올림픽 구기사상 첫 금메달. 9월 30일 - 유엔 평화유지군, 88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10월 2일 - 제24회 서울 올림픽 폐막. 대한민국 종합 순위 4위. 10월 15일~10월 24일 - 1988 서울 장애인 올림픽, 65개국 4천361명 참가한 가운데 개최하다. 10월 29일 - 세가에서 16비트 가정용 게임기 메가드라이브 발매. 11월 21일 - 쌍용자동차에서 코란도 훼미리 출시. 11월 22일 - 한국의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과 삼성 라이온즈의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 트레이드가 성사됨 11월 23일 - 박학기가 라는 노래가 우리노래전시회 3집에 실림으로써 데뷔. 12월 16일 - 대한민국에서 1989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12월 24일 - 신해철이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1988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 1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시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상수. * 일본의 성우 아케사카 사토미. * 덴마크의 축구 선수 나디아 나딤. 1월 3일 - 북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조니 에번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월 7일 - 네덜란드의 음악 프로듀서 하드웰. 1월 9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고명진. 1월 1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승준 (SK 와이번스). 1월 1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현수 (두산 베어스). 1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성. 1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Jun. K (2PM). 1월 16일 - 덴마크의 축구 선수 니클라스 벤트네르 (VfL 볼프스부르크). 1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현우. 1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겸 크리에이터 최다은. 1월 27일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조세희 1월 29일 - 한국계미국인의 야구 선수 최현 (휴스턴 애스트로스). 2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규현 (슈퍼주니어). 2월 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강경덕 (볼티모어 오리올스). 2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준 (엠블랙). 2월 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주환 (두산 베어스). * 일본의 모델, 배우 사사키 노조미. 2월 9일 - 대한민국의 성우 권성혁. 2월 11일 - 일본의 가수 쥰쥰 (모닝구 무스메). 2월 12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설초록. 2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허이슬. 2월 14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앙헬 디 마리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월 15일 - 일본의 배우, 모델 구사노 히로노리. 2월 16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윤상. * 대한민국의 배우 김수현. 2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강창민 (동방신기). 2월 20일 *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 기보배. * 바베이도스의 가수 리한나. 2월 22일 - 대한민국의 래퍼 고우리 (레인보우). 2월 23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수 Kevin (제국의 아이들). * 대한민국의 가수 박나래 (스피카). 2월 25일 - 중국의 쌍둥이 대룡, 소룡 (테이스티). 2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이연희. 2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주환. 2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손수현. 3월 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양현종 (KIA 타이거즈).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상화 (롯데 자이언츠). 3월 2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성은. 3월 3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지원. 3월 6일 * 대한민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이승훈.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박희원. 3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인수 (마이네임). 3월 1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윤지웅 * 대한민국의 배우 추수현. 3월 12일 -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 김지연. 3월 13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재은. * 대한민국의 배우 한서진. 3월 14일 * 일본의 가수 데구치 아키 (SKE48). * 미국의 농구 선수 스테픈 커리. * 벨기에의 전 축구 선수 임케 쿠르투아. 3월 17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라스무스 엘름 (CSKA 모스크바). 3월 1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손아섭 (롯데 자이언츠). 3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민우. 3월 23일 * 대한민국의 첼리스트 김소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병곤 3월 26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김가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유병수 (FC 로스토프). 3월 27일 - 일본의 축구 선수 우치다 아쓰토. 3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백다은. 4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해인. 4월 3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팀 크륄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4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양지원 (스피카). 4월 6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김나희. *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 파브리스 무암바. 4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이 (애프터스쿨). 4월 13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안데르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4월 14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신욱 (울산 현대 축구단). 4월 15일 - 일본의 성우 누마쿠라 마나미. 4월 1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주현. 4월 17일 - 일본의 가수, 타카 (ONE OK ROCK) 4월 18일 -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클라우디아 네투. 4월 19일 - 일본의 가수, 배우 코지마 하루나(AKB48). 4월 25일 - 중국의 바둑 기사 퍄오원야오. 4월 28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후안 마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대한민국의 배우 전혜영. * 대한민국의 배우 신지훈. 4월 29일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서진아 5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보결. 5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유애린. 5월 5일 - 영국의 가수 아델. 5월 6일 - 대한민국의 미국인 타일러 라쉬. 5월 9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이윤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백창수. 5월 12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마르셀루 (레알 마드리드). * 독일의 축구 선수 바베트 페터. 5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안보현. 5월 17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마르틴 올손. 5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양 (빅뱅). 5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박규리 (카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김주리. 5월 22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일라리아 마우로. 5월 23일 * 대한민국의 방송연예인 예정화. * 대한민국의 배우 강소연. 5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여의주. 5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수혁. 6월 1일 - 멕시코의 축구 선수 하비에르 에르난데스. 6월 2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세르히오 아구에로 (맨체스터 시티).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승기. 6월 4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윤주하. 6월 7일 - 캐나다의 배우 마이클 세라. 6월 9일 - 대한민국의 요리연구가 정세미. 6월 11일 - 일본의 배우, 가수 아라가키 유이. 6월 15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한나 폴케손. 6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혜진. 6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금미 (크레용팝). 6월 2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동한. *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이사벨 헬로브센. 6월 24일 - 미국의 가수 닉쿤 (2PM). 6월 25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지성. * 대한민국의 컬링 선수 이슬비. 6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양진성. 6월 29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에베르 바네가 (세비야 FC). 7월 1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김지효. 7월 1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김선형. 7월 2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최성훈.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청용 (볼턴 원더러스). 7월 8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임상협. 7월 11일 - 일본의 성우 이구치 유카. 7월 1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윤용태 (웅진 스타즈). 7월 16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세르히오 부스케츠 (FC 바르셀로나). 7월 22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김광현 (SK 와이번스). * 일본의 배우 요시타카 유리코. 7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한승연 (카라). 7월 26일 * 일본의 배우 아키모토 사야카. * 대한민국의 배우 김규선. 7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윤기호 (한화 이글스). 7월 2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알렉산더 (유키스). 7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세영. 8월 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윤용식. 8월 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송병구 (삼성전자 칸). 8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은성. * 대한민국의 배우 수혜. * 대한민국의 배우 장준유. * 요크 공녀 베아트리스 8월 12일 - 한국계미국인 야구 선수 제이크 더닝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8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지미. 8월 14일 * 미국의 인권운동가 케일라 뮬러. *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류보미르 페이사. *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엘리세 토르스네스. 8월 15일 - 덴마크의 축구 선수 사네 트뢸스고르. 8월 16일 - 미국의 영화배우 루머 윌리스. 8월 17일 - 일본의 배우 도다 에리카. 8월 18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배우 G-드래곤 (빅뱅). 8월 19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배우 송인화. 8월 21일 - 폴란드의 축구 선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FC 바이에른 뮌헨) 8월 24일 * 영국의 배우 루퍼트 그린트. * 일본의 축구 선수 요시다 마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연우 8월 25일 -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정민. * 대한민국의 가수 황광희 (제국의 아이들). 9월 2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하비 마르티네스 (FC 바이에른 뮌헨). 9월 3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제롬 보아텡 (FC 바이에른 뮌헨). 9월 5일 * 터키의 축구 선수 누리 샤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에콰도르의 축구 선수 펠리페 카이세도 (RCD 에스파뇰). 9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NS윤지. 9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이용대. 9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윤. 9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오승아 (레인보우).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왕기춘. * 대한민국의 가수 존 박. 9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하린. * 대한민국의 배우 류선영.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한송이 9월 20일 - 일본의 가수 오모토 아야노. 9월 22일 - 대한민국 야구선수 김재환 (두산 베어스). 9월 25일 - 일본의 성우 이세 마리야. 9월 26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김여정. * 대한민국의 배우 서윤아. * 핀란드의 피겨스케이터 키라 코르피. 9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은지. 9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죠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태훈 (두산 베어스). 9월 30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우정호. 10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가령. 10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유빈 (원더걸스). 10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길은혜 10월 6일 * 일본의 배우 호리키타 마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치영. 10월 12일 - 벨기에의 축구 선수 야니서 케망. 10월 14일 - 미국의 배우 맥스 시리엇. 10월 15일 - 독일의 축구 선수 메수트 외질 (아스널 FC).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권미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강. 10월 17일 - 일본의 가수, 배우 오시마 유코(AKB48). 10월 20일 * 일본의 가수 니이가키 리사 (모닝구 무스메). * 중국의 탁구 선수 마룽 10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고은아.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지훈. 10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황승언. 11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혜린. 11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수진. 11월 9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현우.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이성혜. 11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왕지원 11월 17일 - 한국계 미국인 가수 에릭 남. 11월 18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배우 성인규.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대우.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원준 (소년공화국). 11월 2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재곤 (롯데 자이언츠).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 김진엽. 12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 임시완 (제국의 아이들). * 대한민국의 성우 김신우. 12월 3일 - 대한민국의 래퍼 도우 (에이젝스). 12월 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도연. 12월 8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박동민 (점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승우. 12월 10일 -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네벤 수보티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은정 (티아라).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보정. 12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서준. * 독일의 축구 선수 마츠 후멜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조준호.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김하늘.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진선유.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민성 (넥센 히어로즈). * 한국계 미국인 가수 제시. 12월 19일 * 칠레의 축구 선수 알렉시스 산체스 (아스널 FC).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엠마 베릴룬드. 12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현준. 12월 23일 -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김민정. * 일본의 가수 카메이 에리 (모닝구 무스메). * 일본의 가수 가시노 유카. 12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재경 (레인보우). * 대한민국의 가수 윤수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진주.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정윤.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래퍼 택연 (2PM). 1월 14일 - * 소비에트 연방 정치가 게오르기 말렌코프 * 니카라과의 혁명 게릴라, 정치가 노라 아스토르가 4월 19일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권기옥 5월 21일 -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치가 디노 그란디 6월 11일 - 이탈리아의 정치가 주세페 사라가트 8월 1일 - 대한민국의 농촌운동가 김용기. 8월 12일 - 장 미셸 바스키아, 미국의 낙서화가 8월 17일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파키스탄의 군인, 정치가 10월 16일 - 탈주범 지강헌 11월 4일 - 일본의 정치가, 총리 대신 미키 다케오 11월 27일 -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가 리처드 S. 프레이저 11월 12일 - 대한민국의 정치 깡패 유지광 11월 15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윤극영 경제학상 모리스 알레 문학상 나기브 마푸즈 물리학상 리언 레더먼, 멜빈 슈워츠, 잭 스타인버거 생리학 및 의학상 제임스 W. 블랙, 거트루드 B. 앨리언, 조지 H. 히칭스 평화상 유엔 평화유지군 화학상 요한 다이젠호퍼, 로베르트 후버,하르트무트 미헬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소 2월 18일 계묘 2월 을묘 소 3월 18일 임신 3월 병진 대 4월 16일 신축 4월 정사 소 5월 16일 신미 5월 무오 대 6월 14일 경자 6월 기미 소 7월 14일 경오 7월 경신 대 8월 12일 기해 8월 신유 대 9월 11일 기사 9월 임술 소 10월 11일 기해 10월 계해 대 11월 9일 무진 11월 갑자 대 12월 9일 무술 12월 을축 소 1989년 1월 8일 무진 |
자원 기술 프레임워크 (Resource Description Framework, RDF)는 웹상의 자원의 정보를 표현하기 위한 규격이다. 상이한 메타데이터 간의 어의, 구문 및 구조에 대한 공통적인 규칙을 지원한다. 웹상에 존재하는 기계 해독형(machine-understandable)정보를 교환하기 위하여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에서 제안한 것으로, 메타데이터간의 효율적인 교환 및 상호호환을 목적으로 한다. 메타 데이터 교환을 위해서 명확하고 구조화된 의미표현을 제공해 주는 공통의 기술언어로 XML(eXtensible Markup Language)을 사용하기도 한다. RDF는 데이터 모형, 데이터의 상호교환을 위한 구문, 스키마 모형, 기계 해독형 스키마를 위한 구문, 질문과 프로파일 프로토콜과 같은 요소로 구성된다. RDF 데이터 모형(data model)은 메타데이터의 일관적인 인코딩과 교환 및 생성을 지원하기 위한 표현모형으로 여러가지 유형의 메타데이터가 가지고 있는 어의(semantics)를 정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구조적인 상호호환성을 제공한다. RDF 데이터 모형은 정보 자원(Resource), 속성 유형(Property Type), 속성값(Value)으로 구성된다. RDF 데이터 모형에서 기술되는 정보 자원은 그 형태에 관계없이 URI로 식별가능한 모든 객체를 의미하며, 하나의 정보 자원은 여러 개의 속성 유형과 속성 값을 가질 수 있다. 속성 유형은 저자 , 서명 등과 같이 자원의 속성을 적절한 이름으로 표현한 것이다. 속성값은 속성유형에 상응하는 값으로, 문자열이나 숫자 등과 같은 자연어로 상세하게 기술될 수도 있으며, 속성값 자체가 하나의 정보 자원이 되어 고유의 속성(Property)을 가질 수 있다. 속성이란 정보 자원과 속성 유형, 속성값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속성 그 자체가 다른 속성의 값이 되기도 하며, 또는 그 자신이 또 다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동일한 정보 자원을 참조하고 있는 속성들의 집합을 기술(Description)이라고 한다. RDF 데이터 모형은 메타데이터를 정의하고 사용하기 위한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로 메타데이터를 교환하고 작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구문(syntax)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RDF에서는 상호호환성과 확장성, 검증, 인간 및 기계가독성, 웹 상에서의 운용가능성, 그리고 복잡한 문서의 논리적 구조를 표현해 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지는 XML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RDF는 XML 문서유형정의부(DTD)를 정의하지 않는 유연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RDF에서는 동일 어의를 가진 여러 표현간의 불명확성을 고려하기 위해 XML의 Namespace 기법을 사용하여 RDF기술 내에서 사용되는 어휘들에 대한 정의를 제공하는 메타데이터 스키마를 URI로 선언해 줌으로써 새롭게 작성된 메타데이터 어휘를 기계 해독이 가능하도록 처리해 준다. Namespace정의는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선언된다. RDF 구문은 나열형구문(Serialization Syntax)과 축소형구문(Abbreviated Syntax)의 두 가지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축소형 구문은 HTML 문서 내에 RDF 메타데이터를 포함시킬 경우에 사용된다. RDF 스키마(Schema)는 특정 메타데이터에서 정의하고 있는 어휘들을 선언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어휘(Vocaburaries)란 속성집합으로 자원을 기술하기 위해 각 메타데이터 형식들에서 정의하고 있는 메타데이터 요소집합을 말한다. 인간이 읽을 수 있고(human-readable) 기계처리가 가능한(machine-processable) 어휘들을 정형화 하는 것은 상이한 메타데이터 형식들간의 어휘 확장과 재사용, 상호교환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정형화를 위한 것이 바로 RDF 스키마이다. RDF 스키마는 RDF의 데이터 모형과 구문 명세에 의해서 표현된다. 현재 RDF 스키마 명세는 개발단계에 있으며, 더 많은 연구가 필요된다. 기본적인 RDF스키마 유형으로는 property, propertyType, instanceOf, subclassof, allowedPropertyType, Range 가 있다. 더블린 코어 제5차 워크숍에서 다양한 형식의 메타데이터를 지원하기 위한 구조로 RDF를 채택하였으며, 특히 더블린코어 메타데이터를 RDF로 구현하였다. RDF를 이용하여 더블린 코어를 기술하기 위해 우선 더블린코어의 15가지 기술 요소를 더블린 코어 스키마로 정의하고, Namespace기법을 이용하여 더블린 코어를 선언한 후에 실제 정보자원의 기술을 위한 더블린 코어 레코드를 작성한다. 시맨틱 웹 메타데이터 더블린 코어 University) 분류:W3C 표준 분류:XML 분류:XML 기반 표준 분류:메타데이터 분류:시맨틱 웹 |
장폴 사르트르 (, 1905년 6월 21일 ~ 1980년 4월 15일)는 예비역 프랑스 해군 상사 출신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대표적인 실존주의 사상가이며 작가이다. 1964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였다. 1905년 해군 장교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15개월만에 아버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후유증인 열병으로 사망하고, 10살이 될 때까지 외가에서 엄격한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 1844년~1935년)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샤를 슈바이처는 소르본 대학교의 독문학 교수로서 훗날 의료선교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백부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모친과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사촌, 사르트르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오촌 관계가 된다). 후일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와 사시(斜視) 그리고 외가집의 낯설음 등으로 이 시절에 겪은 심리적 부담에 대해 밝히고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의 깊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파리의 부르주아지 지식인 계층에서 자라난 사르트르는 1915년에 파리의 명문 리세(중고등학교) 앙리 4세 리세 ・ 루이 르 그랑에 입학하는데, 이때에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1905년~1940년)을 알게 되었다(덧붙여 2002년의 『제국 이후』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엠마뉴엘 토드는 니장의 손자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7년 어머니가 당시 공장장 조제프 망시와 재혼하게 되면서, 의붓아버지를 따라 1917년에 라 로셸(La Rochelle)학교로 전학하며 이주하게 되는데, 사르트르는 전학한 라 로셸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고(자신은 이때를 좌절의 세월 로 술회한다) 이 시기에 어머니의 돈을 훔쳐 할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일이나, 아름다운 소녀에게 다가갔다가 실패하고 자신의 추함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라 로셸에서의 그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 을 염려한 가족들에 의해 사르트르는 1920년 다시 앙리 4세 리세로 돌아왔고, 폴 니장과도 재회하였다. 1922년부터 2년 동안 리세 · 루이 르 그랑에서 국립 고등사범학교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에르(École Normale Supérieure) 입학을 위한 준비반 과정에서 니장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 해에 간행한 동인지 「무명 잡지」(Revue sans titre)에 단편소설 「병든 사람의 천사」를 발표하였는데, 고등사범학교에는 불합격되었다가 이듬해인 1924년 고등사범학교에 수석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레몽 아롱과 메를로 퐁티 등과 교제하였으며, 1927년에는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했다. 1928년에 아그레가시온(1급 교원 자격) 철학시험에 낙제하였는데, 사르트르의 지인들은 모두 이에 놀랐지만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1929년 수석으로 합격했다(폴 니장도 같은 해에 합격). 같은 시험의 차석은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의 집을 방문한 그녀에게 사르트르는 1929년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된다. 사범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 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간 복무한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도 있었으나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제대 후인 1931년 그는 파리와 파리 근교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이때 그는 20페이지 분량의 「진리의 전설」을 집필하는데, 순전히 사르트르 자신의 지식만으로 저술된 이 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출판은 거부되었다. 1932년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로 있던 레몽 아롱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설의 현상학에 관해 듣고 (1929년 후설이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한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에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생으로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현상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한다. 1935년에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친구였던 의사 라갓슈로부터 메스칼린 주사를 받았는데, 이때 온몸을 게와 낙지가 감싸고 도는 환각을 겪었고 때문에 반년 동안 우울증 증세로 괴로워했다(갑각류에 대한 공포는 이후 평생 지속되었다).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을 완성했고 소설 《구토》를 출판(1938년)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소집되었다가 1940년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1941년에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귀향, 멜퐁티 등과 같이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1943년에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그리 활발하지 않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당시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인 알베르 카뮈를 알게 된다. 그리고 종전 후인 1945년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잡지 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에 대해서 논하면서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제3의 정치 세력을 위해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으나 친미화, 우익화로 내부 분열이 생겨 1949년 11월 해산되고 말았다.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해 지에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나 이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실천하였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올랐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알베르 카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68년 5월의 프랑스 5월 혁명에서 사르트르는 청년들을 향해 정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하였고, 그를 체포할 것을 권하는 참모들에게, 당시 드골 대통령이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며 사르트르의 체포를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한국의 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을 때,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의 번역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이듬해 2월에 김지하는 풀려났다). 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1971년 플로베르 평전 1,2권을 출판하였으나 1973년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다. 1943년에 발표한 희곡 는 독일군 점령하에 파리에서 뒤랭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 후 이 성공을 거둔 이후 과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고 뒤마의 , 에우리피데스의 을 각색한 작품을 남겼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고전적인 극작법의 기술과, 철학자로는 보기드문 무대적인 감각과, 시사적인 소재 등을 고루 갖추어 세계적인 성공을 얻었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후설의 영향 밑에서 그 자신의 현상학적 존재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데카르트적 자아를 넘어서 인간은 하나의 실존의 존재임을 밝히고 실존은 본질에 앞서며, 실존은 바로 주체성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또한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 구조를 밝히고 실존의 결단과 행동과 책임과 연대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라는 조그만 책자에서 그의 실존주의 사상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행동적 지식인인 사르트르는 세계 평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발언과 평론을 하는 동시에,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의 저술들은 이러한 계열에 속한다. 구토 (La nausée) (1938) 벽 (Le mur) (1939) 자유에의 길 (Les Chemins de la liberté) (1949) 파리떼 (Les Mouches) (1943) 닫힌 방(Huis clos) (1944) 무덤 없는 사자 (Morts sans sépulture) (1946) 존경할 만한 창녀 (La Putain respectueuse) (1946) 더러운 손 (Les Mains sales) (1948) 악마와 신 (Le Diable et le Bon Dieu) (1951) 알토나의 유폐자들 (Les Séquestrés d’Altona) (1959) 상황 I-X (Situations I-X) (1947~76) 문학이란 무엇인가 (Qu est-ce que la litterature) (1947) 보들레르 (Baudelaire) (1947) 성자 주네, 배우와 순교자 (Saint Genet, comedien et martyr(1952) 집안의 천치 I-III(L Idiot de la famille I-III) (1971,1972) 상상력 (L Imagination) (1936) 상상계 (L Imaginaire) (1940) 존재와 무 (L Etre et le néant) (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L 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6)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1960)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실존주의 한국 사르트르 연구회 분류:1905년 태어남 분류:1980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작가 분류:파리 대학교 교수 분류:프랑스의 인문주의자 분류:프랑스의 철학자 분류:프랑스의 극작가 분류:프랑스의 소설가 분류:프랑스의 저술가 분류:프랑스의 평론가 분류:프랑스의 언론인 분류:프랑스의 반전 운동가 분류:프랑스의 문학 평론가 분류:프랑스의 무신론자 분류:프랑스의 아나키스트 분류:레지스탕스 관련자 분류:실존주의자 분류:마르크스주의자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동문 분류:프랑스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사상가 분류:파리 출신 분류:시각 장애인 분류:자유 연애 분류:알베르 카뮈 분류:시몬 드 보부아르 분류:형이상학자 분류:전기 작가 분류:프랑스 해군 군인 분류:프랑스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프랑스의 전기 작가 |
핀란드 공화국 (, 약칭 핀란드 (는 북유럽에 있는 나라다. 서남쪽은 발트 해 남쪽은 핀란드 만을 통해 에스토니아와 가깝다. 서쪽은 보트니아 만 등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스웨덴과 노르웨이, 러시아와 국경이 닿아 있다. 동쪽은 러시아의 카렐리야 공화국와 인접해 있다. 본토 서남쪽에 위치한 올란드 제도는 핀란드 통치 아래서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있다. 다수의 국민은 우랄족의 핀란드인에 속한다. 공용어는 핀란드어와 스웨덴어이다. 2014년 기준으로 인구는 약 5백만명 이상이다. 기원전 수천년 무렵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우랄어족 언어를 쓰는 핀족이 서진을 계속하여 기원후 1세기에 지금의 핀란드 남부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중엽, 스웨덴 왕 에리크 9세의 십자군이 핀란드에 쳐들어 옴으로써 스웨덴의 핀란드 지배 윤곽이 잡혔다. 이후 스웨덴의 역대 왕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핀란드에서 스웨덴 영토를 넓혀왔으며, 1397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연합왕으로 즉위할 때 핀란드도 이에 편입되었다. 1523년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을 안정된 독립 왕국으로 만들면서 이에 포함시켰다. 이후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에서도 루터교로 개종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수학한 미카엘 아그리콜라의 공이 컸다. 17세기 초에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핀란드를 동방 전초 기지로 활용하였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에서 문예를 크게 진흥시켜 투르쿠 대학이 이 무렵에 세워졌다. 스웨덴 왕 칼 12세의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시작된 대북방 전쟁(1700~1721년)에서 핀란드의 국토는 러시아의 대대적 침공으로 일대 타격을 입었다. 구스타브 3세가 러시아와 전쟁(1788~1790년)을 하는 틈을 타 핀란드 장교들이 무장봉기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핀란드 영토를 둘러싼 열강의 외교전이 펼쳐진 끝에 1809년 러시아가 핀란드를 점령하였고,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이에 맞서 핀란드인의 국권 회복 운동이 점차 불붙었고 엘리아스 뢴로트는 1835년부터 1849년 사이에 서사시 칼레발라를 썼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7년에 핀란드는 독일 제국의 공국인 헤센-카셀(Hessen-Kassel)가를 핀란드의 왕가로 받아들여 독일제국에서 책봉을 받는 형식상의 제후국이 되었다. 1918년 1월 27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적핀란드(공산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 백군(정부군)이 5월 15일 이를 진압하였다. 한편 그 해 11월 11일 독일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핀란드는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부터 소련의 위협이 다시 커져 국가의 생존을 걸고 소련과 2차례에 걸쳐 전쟁(겨울 전쟁·계속 전쟁)을 벌였다. 명장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장군의 지휘 아래 전 국력을 총동원하여 소련에 맞서 싸웠고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국력의 열세 때문에 끝내 패배로 끝났다. 이전부터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는데, 이 전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국토는 다시 재건되었고 핀란드 정부는 소련과 서유럽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면서 경제발전에 힘을 쏟았다. 소련의 의향에 따라 마셜 플랜을 받지 못했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하지 않았다. 자유 민주 정권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제권에 속하는 경제정책을 쓰고, 외교, 국방 측면에서 공산권과 가까웠지만,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맹하지 않았다. 소련 붕괴 후 서방 진영에 접근하여, 1994년에는 EU 가입에 합의하고, 2000년에는 유로를 도입했다. 에두스쿤타(), 핀란드의 의회 최고 입법기관인 의회(는 단원제로 200명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이며, 15개 선거구로 나누어 개방식 비례 대표제 선거로 뽑힌다. 의회는 헌법을 고치거나 내각을 해임시키거나 대통령이 발동하는 거부권을 무효화할 권한이 있다. 유럽 최초로 보통선거를 실시했다. 1906년 보통 선거권이 실시된 이후 핀란드 국회는 우파인 국민연합당, 농민당과 좌파인 사회민주당, 좌익연합 등의 정당이 지배해왔다.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력이 컸던 냉전 시대에도 민주주의를 지켜왔다. 총리는 부총리와 장관과 함께 내각을 구성한다. 각 각료는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총리는 총선 후 각당 대표의 협상 결과에 따라 대통령이 총리 후보를 지명하고 의회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후, 대통령의 임명을 거쳐 취임한다. 다른 각료는 총리의 임명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내정 면에서는 선진적인 북유럽 형의 복지국가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전후 배상금 등의 지불과 같은 외적인 요소로 노동자의 권리 향상은 우선 순위가 밀렸지만, 급속하게 복지 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북유럽 형의 사회에 근접하였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 부패가 적은 나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2008년 민간 활동 단체인 "국제 투명성 기구"에 의한 정치 부패 인식 지수 조사에서는 2004년까지 1위를 지켰지만, 2009년에는 6위로 떨어졌다. 핀란드의 헌법에서 특이한 점은 헌법재판소가 없고, 대법원에게는 어떤 법률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점이다. 핀란드 이외에 헌법재판소가 없는 나라는 네덜란드와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뿐이다. right 오늘날 핀란드는 6개의 주(래니 lääni, 복수 래닛 läänit)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 남핀란드 주 # 서핀란드 주 # 동핀란드 주 # 오울루 주 # 라피 주 # 올란드 주 올란드 제도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분야에서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있다. 라플란드 남동부의 풍경 북쪽은 노르웨이,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국경을 접하고있다. 서쪽은 보트니아 만, 남쪽은 발트 해, 남쪽은 핀란드 만과 맞닿아 있다. 보스 만 건너편은 스웨덴, 핀란드 만 건너편은 에스토니아다. 동쪽에서 남쪽 걸쳐 러시아와 육로로 국경을 접하고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국토의 대부분은 평탄한 지형으로 빙하에 깎여 형성된 호수가 무수히 흩어져 있다. 식물은 타이가와 이끼가 많다. 또한 숲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군이 서식한다. 핀란드의 지형은 대체로 평평하며 최고봉은 북쪽 사미 주 해발 1,328미터인 할티툰투리 산이다. 핀란드는 호수 이외에도 육지의 68%가 북방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섬들은 대부분 서남쪽에 있다. 핀란드는 호수와 섬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와 섬이 많다. 호수 187,888개와 섬 179,584개가 있다. 사이마 호는 유럽에서 6번째로 크다. 핀란드에 있는 큰 호수는 다음과 같다. 네시 호 빠이엔네 호 사이마 호(Saimaa) 오리 호 삐에리넨 호 오울루 호 로카 호 이나리 호 핀란드 국토의 4분의 1 정도는 북극권에 있어 여름에는 백야 현상이 관찰된다. 핀란드 최북단에서는 여름에는 73일 동안 해가 지지 않고, 겨울에는 51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핀란드 최대 기업 노키아의 본사 핀란드는 이웃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1860년 대기근과 같은 경제적 변동에 취약한 나라였다. 1930년대까지 핀란드의 산업은 농업이 대부분이었고, 1950년대까지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1차산업에 종사했다. 2차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나라들이 국유화를 진행할 때에도, 핀란드는 국유화를 기피했다. 보호무역주의가 실패한 후, 1973년 유럽공동체와의 자유무역을 위해 무역장벽을 완화하고, 산업의 시장경쟁력을 강화했다. 1980년대에 빚에 바탕을 둔 거품경제가 무너짐으로써 1991년에서 1993년까지 심각한 경기 후퇴가 있었다. 인구가 대한민국의 1/10에 불과한 핀란드는 1980년대 이후 농업 및 임업 중심의 경제 체제에서 휴대 전화의 생산량이 세계 1위에 오르는 등 첨단산업을 핵심으로 하는 산업 선진국으로 현저한 변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2008년 기준으로, 종사자별로 농림 4.5%, 공업 18.3%, 건설 7.3%, 상업 16%, 재무·보험 14.5%, 교통·통신 7%, 공공 서비스 32.4%로 구성되어 있다. 서비스 산업이 전체 경제의 65.7%를 차지하고, 공업이 31.4%를 차지한다. 주요 공업 부문으로는 전자 21.6%, 기계·자동차·금속공업 21.1%, 삼림공업 13.3%, 화학공업 10.9% 등이 있다. 150년 전 제지업체로 시작한 노키아(NOKIA)와 리눅스(Linux)로 유명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선두가 되었다.(2002년 2위로 발표되었다가 재평가 후 1위로 수정). 여성의 노동력화는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법률가, 의사는 여성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기업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여성도 늘고 있지만, 남성에 비하면 아직 적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정규직으로 고용되기 어려운 경향이 있고, 젊은 여성에 계약직 일자리가 많다.(20대 여성의 4%가 파견 사원). 타임 뱅크 제도를 적용하여 바쁜 시기에 근무하여 바쁘지 않은 때 여가 시간을 쓸 수 있는 제도도 존재한다. 1994년에 16.6%까지 상승한 실업률은 불경기에서 벗어나 해마다 개선되고 있으며, 2006년에는 7.7%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GDP와 구매력이 증가하면서 러시아와 발트 삼국에서 유입되는 노동자의 증가로 일을 찾지 못해 매춘부 같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증가 추세에 있다. 2016년 현재 기준으로 1인당 명목 gdp는 42,654 달러, 국내 총생산량은 약 2,400억 달러이다. 민족 비율은 핀란드인이 93%, 스웨덴인이 6%, 사미인, 러시아인과 기타 민족은 1%를 차지한다. 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스웨덴어는 과거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으로 인해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비율상으로 핀란드어는 93.4%, 스웨덴어가 5.9%로 2개 모두 공용어이자 1919년에 제정되었다. 모든 도로 표지판, 거리의 이름, 경고문 등이 양쪽 언어로 표기되지만 대부분, 일상생활에서는 핀란드어가 주로 쓰인다. 스웨덴어는 대부분 남서부의 올란드 제도에서 쓰이고 있지만, 이미 핀란드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소수파라고 불리고 있으며, 기업, 산업계에서 영향력을 가지며, 정부에도 주요정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용어 문제는 역사적인 문제였다. 스웨덴어는 일부에서도 고귀한 언어로 인식되어 받아들여졌다. 북부의 사미인은 사미어를 쓰고, 1970년대에 지위가 올라갔다. 1999년의 헌법개정에 의해서 준공용어로 명기되었다. 동시에 집시, 그 외의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도 더해져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에 능통하고 일부는 독일어나 러시아어 역시 구사한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러시아출신의 귀환자는 최근 계속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어는 1세기에 걸쳐서 지배사회의 상층부에서만 영향력을 준 것 뿐이었고, 국민사이에서는 침투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것은 러시아어를 야만 민족의 언어로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수는 에스토니아어를 쓰는 경우도 있다. 종교는 개신교(루터교)가 89%, 동방 정교회가 1%, 무종교 9%, 기타(대부분이 이슬람교). 미카엘 아그리콜라 최초의 핀란드어 책을 쓰고 신약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한 투르쿠의 주교 미카엘 아그리콜라(1510~1557년경)는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19세기에 엘리아스 뢴로트가 집필한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는 핀란드 전통 문화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소설가 프란스 에밀 실란패는 193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가 미카 발타리도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음악가로는 《핀란디아》를 작곡한 장 시벨리우스가 유명하다. 핀란드 전통 음악에는 하프와 비슷한 현악기인 칸텔레가 쓰인다. 또한 나이트위시, 소나타 아티카 등 헤비 메탈 음악도 인기를 얻고 있다. 로르디는 2006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하였다. 핀란드는 또 알바르 알토(Alvar Aalto)를 비롯한 유명한 건축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사우나(sauna)는 핀란드의 전통어이다. “사우나”는 핀란드어 중에서 국제적으로 쓰이는 낱말 중의 하나이다. 사우나는 달궈진 돌에 물을 껴얹어 생기는 수증기를 이용하는데, 섭씨 90도에서 100도까지 상승한다. 생강 쿠키는 크리스마스 전 날에 만들어 크리스마스 시즌 내내 먹는 음식이다. 보통 글뢰기 라고 하는 매콤한 음료와 함께 먹는데 어른들의 경우 보드카에 섞어 먹는다. 100개 이상의 신문사가 있고, 300개의 잡지, 2000개 이상의 전문지, 60개의 라디오 방송국, 5개의 국영 라디오 채널, 5개의 디지털 라디오 채널이 있다. 매년 30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15,000권의 책이 출판되며, 1000만장의 음반이 판매된다. 국영 방송사인 YLE는 5개의 채널과 15개의 라디오 채널을 5개의 언어로 송신한다. 약 85%의 국민들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2009년을 기준으로 180만명이 이상이 광대역 인터넷에 접속한다. 올란드 제도를 제외하고 학교에서는 핀란드어가 필수이며, 스웨덴어도 필수로 지정되어 있고, 영어 및 기타 언어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스웨덴계 국민은 어려서부터 TV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핀란드어를 접하게 되고, 보통 종합학교 7학년부터 학교에서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현재는 스웨덴어보다 영어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종합학교 3학년 정도부터 영어 수업을 시작한다. 또한 종합학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합친 과정으로 9년)에서도 다른 외국어를 선택 과목으로 이수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어 과목 교육 과정 등은 지자체와 학교마다 다를 수 있다. 정부들의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높기 때문에 4 ~ 5개 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핀란드인이 많다. 핀란드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구별이 없으며 학교 제도는 종합학교를 9년간 다니고 고등학교에 3년간 다니는, 일명 9-3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종합학교 9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사이에 진로를 찾기 위한 1년간의 휴학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대학에 가기 전에 13년 동안 공부하는 것이다. 대학은 모두 국립으로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핀란드의 교육 수준은 세계 교육계에서 "핀란드 메쏘드(핀란드(만의) 방식)"로 주목할 만큼 수준이 높다. 학생들은 경쟁에 의한 상대 평가가 아니라 달성도에 의해 평가되는 절대 평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것은 학력의 차이를 무시한 똑같은 교육이 아니며, 고등학교는 종합학교 중등반 성적에 따라 갈 수 있다. 또한, 종합학교의 교육에 주목할만한 것은 성적이 낮은 학생이 특별 학급에 배정되거나, 보충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학력을 차별화하여, 저학력 학생에 대한 개별 교육으로 뒤떨어진 학업성취도를 보충해 줌으로써 학생이 학교의 인형으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가 핀란드 교육의 특징이다. 유네스코의 규정에 따른 고등 교육 기관 (대학 및 기타 고등 교육 기관 과정)의 진학률은 2004년도를 기준으로 세계 두 번째로 87%이다. 2004년도에 열린 OECD의 PISA(학업능력평가)에서는 한국, 일본, 홍콩 등 교육열이 높은 국가가 유럽 선진국을 제치고 학력 세계 제일을 기록하였지만, OECD 조사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PISA는 (1) 독해 (2) 수학 능력 (3) 과학 문맹률이라는 세 분야에 대해서만 57 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핀란드 학교는 주 5일제를 적용하며, 교사는 대학원 졸업이 기본이다.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에 대한 지원이 강력하며, 의무 교육이지만 유급 제도가 있으며,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다수 학교의 학비가 무료이다. 한 교실에 주 교사, 보조교사, 특수아동담당 교사를 포함하여 3명 까지도 들어갈 수 있다. Leopard 2.jpg|섬네일|left|핀란드 독립기념일의 레오파드 2A4 전차 행진 FNS "한코" 하미나급 미사일 고속정 Air Force F-18C RIAT.jpg|섬네일|right|핀란드에서 제조한 F-18 전투기 상비군-30,000명 * 직업 군인-20,000명 최대 동원 가능수-60,000명 * 육군-30,000명 * 해군-11,000명 * 공군-9,000명 군사비- GDP의 2% 3군 이외에 인원 5000명 가량의 국경수비대가 별도로 짜여져 있는데 평상시에는 내무부 지휘 아래에 있지만, 유사시에는 군으로 통합된다. 복무기간은 6개월가량으로, 18살 이상의 남자에 대해 징병제를 실시한다. 여성과 여호와의 증인(Jehovah s witness) 신도들(종교 법인)은 면제 된다. 100명당 소형무기 소유율이 2007년 기준으로 미국, 독일 다음의 세계 3위 수준이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제의 미그 21 전투기와 AK 소총, T-54/55과 T-72 전차와 중립국의 스웨덴제 사브 35 드라켄 전투기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는 미국에서 구매한 F/A-18 호넷 전투공격기, 독일제 레오파드 2 전차 등을 갖추고 있다. 하지(Juhannus)는 핀란드인에게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이다. 사람들은 일년 중 가장 낮이 긴 날을 축하하기 위해 도심을 떠나 여름별장으로 간다. 모닥불을 피우고 호숫가에서 흥겹게 수영하며 뱃놀이를 한다. 엄청나게 술을 마시는 것 또한 하지 축제의 한 특징이다. 7월의 포리째즈축제(Pori Jazz Festival)는 가장 인기 있는 째즈 축제이지만 중세기의 성 올라빈린나 (Olavinnlinna Castle)에서 열리는 사보린나오페라축제(Savonlinna Opera Festival)가 가장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몇 축제는 대부분 먼 지역에서 열린다. 예를 들면 쿠모(Kuhmo)의 실내악축제, 코꼴라(Kokkola) 근처 카우스티넨 (Kaustinen)의 민속음악제 등이다. 하지의 주말에 열리는 록 페스티은큰 연례행사이며 가장 오래된 축제는 7월 투르크에서 열리는 루이스록(Ruisrock)축제이다. 난탈리 (Naantali)와 한코 (Hanko)마을에는, 가장 게으른 사람을 뽑아 바다에 던지는 7월 27일 잠꾸러기의 날(Sleepyhead Day)이 있으며, 가장 생소한 행사로는 해마다 7월 손카예르비(Sonkaj rvi.)에서 열리는 아내를 업고 뛰는 경기(wife-carrying championship)이다. 대한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1973년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남한과는 1973년 8월 24일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핀란드는 한국을 1973년 4월 13일 승인하였다. 핀란드는 서울에 대사관을, 한국은 헬싱키에 대사관을 각각 두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 러시아와는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어서 나쁜 관계도 가지고 있다. 냉전시기에는 소련과의 관계에선 친소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지만, 소련해체 이후에는 서방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EU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러시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핀란드 경제가 최근 어려워지면서 핀란드의 대러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러시아 자본이 핀란드의 기업을 인수하는 등 핀란드에 진출을 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인이 핀란드로 이주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 핀란드는 일본과는 우호협력관계에 서있으며, 국제 사회상에도 일본은 핀란드의 입장을 지지해왔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추축국의 편에서 같이 싸우기도 하였으며, 대립 관계에 있기도 하였다. 지금도 핀란드는 일본과의 관계에 좋은 위치를 하고 있다. 현재 일본과 핀란드는 일본항공과 핀에어 항공편이 운항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 중국과의 관계는 매우 좋다. 그러나 2013년 핀란드 외교부 네트워크의 심각한 정보 유출에 러시아와 중국이 연관된 것으로 의심되어 관계에 악영향이 있기도 했다. 핀란드의 통신 핀란드의 교통 핀란드의 군대 핀란드의 외교관계 핀란드의 공휴일 노키아 핀란드의 대표적인 회사 재핀란드 신한인회 핀란드 정부 홈페이지 핀란드 외무부 핀란드 국가 포털 사이트 Visit Finland 주핀란드 대한민국 대사관 핀란드 해외여행(핀란드편) 핀란드 개요 핀란드에 대하여 재핀란드신한인회/학생회 분류:핀란드어권 분류:스웨덴어권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유럽 연합 회원국 분류:유럽 평의회 회원국 분류:경제 협력 개발 기구 회원국 분류:툰드라 분류:타이가·북방수림 |
본 문서는 프랑스의 교육 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스는 유럽 서부의 공화국으로서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하나로 발전하여 왔으며, 문화·교육 면에서도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프랑스인의 특성으로는 합리성·명석·실증주의 정신을 중요시하는 점 등을 들 수 있으며, 교육제도에 있어서도 철저한 실력주의를 특색으로 하여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에서 제외된 난점도 있었다. 그래서 이를 조화시키는 가운데 참다운 교육개혁을 꾀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1789년의 대혁명 이전에는 교육을 나라의 일이 아니라 하여, 교육에 대한 국가정책다운 것이 없었다. 당시의 교육체제란 일부 소수의 지적 선량(知的選良:elite)을 육성하기 위한 것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구제사업으로 행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었다. 한편 일반 민중의 자제를 위한 교육은 후자의 자선학교에서 취급될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아주 최근까지의 프랑스 학교계통의 특색인 복선형의 바탕을 이루어 왔다. 1791년의 헌법은 모든 시민에게 공통적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무상의 공교육(公敎育)을 조직한다. 라고 정하고, 이에 이어지는 19세기 초엽의 나폴레옹 제제(帝制)는 교육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하는 혁명기의 사상을 이어받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교육행정조직을 정비하였다. 그 후에 기조(F.P.G. Guizot)·폴 및 뒤르이 등의 개혁을 거쳐, 1870년대에 비종파·공통·의무 를 3원칙으로 하는 교육을 국비의 부담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민중교육사상이 일반화되고, 1879년의 선거에서 공화파가 승리하고 페리가 공교육장관이 되자, 근대적인 국민교육제도의 기초가 잡히게 되었다. 1880년대에 초등교육의 무상(無償), 6세에서 13세까지의 의무교육, 공교육에 있어서의 교육의 비종파성의 3원칙이 확립되고, 또한 고등교육 체제가 조직화되었다. 그리고 제1차대전 후 사회경제의 발전에 수반하는 교육개혁의 움직임이 높아져 통일학교 의 운동이 추진되었고, 1937년 전후에 쟝 제이(Jean Zay) 교육부장관의 개혁(초등·중등 교육간의 사회계층적인 차별을 제거하고, 연령 발달관계에 의한 구분에 의해서 교육단계를 구분하는 일 등)이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제4공화제는 교육제도를 새로이 재건하였는데, 그 기본원리로서 다른 여러 나라의 교육개혁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 1947년의 랑주방 개혁안이다. 그리고 1958년 드골 대통령에 의한 제5화제의 성립 직후에는 베르트당 개혁(1959년)이 공포·시행되었으며, 본격적인 교육개혁이 실시과정으로 옮겨졌다. 그 후 후기 중등교육을 중심으로 한 1965년의 프셰 개혁이나, 고등교육에 관한 1968년의 폴 개혁이 행해지고 있다. 프랑스 교육제도의 특색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 교육은 국가적 직무로 되어 있어, 중앙집권적인 교육행정제도 밑에서 공립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수업과목의 종류나 교육내용 등은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고, 지방적인 차이는 전혀 없는 것이 제1의 특색이다. # 공립학교에 있어서는 1880년대에 종교교육이 배제되었으나, 한편 사립학교의 자유는 인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주요한 자격이 국가시험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연히 사립학교의 교육도 실질적으로는 공립학교의 교육에 준할 수밖에 없다. 사립학교의 대부분은 기독교 관계의 학교이며, 이 밖에 직업교육을 행하는 학교도 있으나, 특히 고등교육에 있어 사립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낮다. # 학교교육의 계통은 이른바 복선형을 취하여 왔으나, 이를 없애기 위한 교육이 행하여지고 있으며 계층적인 교육, 지적 교육편중 등에 대한 반성에서, 능력에 부응시킬 수 있는, 다양하면서도 외곬이 아닌 교육계통을 만들려고 힘쓰고 있다. # 교육제도의 개혁은 장기적인 실험을 쌓은 바탕 위에서 행하여지고 있으며, 실험학교를 설치하여 장기간 연구를 하거나 새로운 조직과 방법을 조금씩 실시하면서 낡은 것을 제거해 나간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학교교육에 있어서는 단순히 연수가 차면 진급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또는 성적 판정에 의한 과정 수료주의를 취하고 있다. 수업 연한의 기준은 있으나 실제적으로 학년과 연령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생활연령보다 정신이나 능력의 발달정도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시험은 낙방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준을 지키기 위해서 실시하고 있다. 이때문에 똑같은 학급에서 재수하는 일이 흔하다. 초등학교에서도 수료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수험자의 약 8할이다. 그러나 다만 의무교육만은 연령제여서 수료증서의 취득과 관계없이 소정의 연령이 되면 의무교육을 마치게 된다. # 학교교육 이외의 근로청소년이나 성인에 대한 교육적 조직이 있는데, 이것은 프로모션 소셜(promotion social)이나 생애교육으로 정비되어 있다. 교육행정은 교육부→대학구(大學區)→주(州)→초등교육 장학관구라는 계통에 의해 중앙집권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많은 자문·협의기관의 존재와 동등한 위치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 기관에는 현장의 교원도 많이 참가하고 있다. 중앙교육심의회·각국심의회·전문동수협의회(專門同數協議會)나 인사(人事)동수위원회·주(州) 초등교육평의회 등, 교육이나 연구에 관한 전문적 기관으로는 기술연구기관으로서 콜레주 드 프랑스 나 국립과학 연구센터, 교육연구 및 연수기관으로서 국립교육연구소·지방교육 자료센터 그리고 세브르 국제교육연구센터 등이 있다. 의무교육은 만6세 때부터 시작되는데, 그 마지막 단계는 1959년의 개혁에 의해 14세에서 16세로 2년간 연장되었다. 이 연장은 1967년도부터 적용되고 있다. 한편 의무교육은 가정에 있어서의 부모 또는 부모가 선택한 인물이 실시해도 무방하게 되어 있다. 취학 전 교육이 잘 보급되어 있음은 프랑스교육의 특색이다. 만2세부터의 유아에 대해서는 유치원 또는 유치원 부설 유아학급이 설치되어 있으나, 그의 약 9할이 공립이다. 연령별 재적률은 2세 14%, 3세 51%, 4세 79%, 5세 98%이다. 초등교육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행하고 있는데, 전기(前期)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과정에 초등 보습교육(補習敎育)을 행하는 일도 있다. 초등학교는 과거에는 8년제(6-14세)였으나 1959년의 개혁에 의해 11세까지의 5년제가 되었다. 중등교육은 초등학교 5개년을 수료한 다음에 진학하는 7년제의 리세(Lycée) , 4년제의 보통교육 콜레주(Collège) 와 중등교육 콜레주 , 후자를 수료한 자가 진학하는 3년제의 기술 리세 와 4년제의 사범학교, 초등학교 8개년을 수료한 자가 진학하는 3년제의 기술교육 콜레주 에서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등교육의 학교 종류는 많았는데, 1959년의 개혁 및 그 후의 개혁에 의해 초등학교는 5개년이 되어, 그 수료자를 모두 4년제의 전기 중등교육학교(중등교육 콜레주)에 수용하고, 후기 중등교육은 3년제의 리세 와 2년제의 제2기 콜레주 에서 담당하도록 단순화되었다. 초등교육의 경우는 남녀공학이 원칙이나 증등학교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있으며 1986년 자료에 의하면 교육비 지출이 GNP의 3% 수준으로 나타났다.4년 간의 전기 중등교육은 정식으로는 제1기 과정이라고 부르는데, 관찰·지도과정으로 통칭되고 있다. 그러나 몇 개로 코스가 나누어지기도 하고, 또한 과도기에는 추이학급(推移學級)이나 완결과정 및 초등학교 완성급 등이 있다. 한편 의무교육 연한의 연장에 따라 1967년도에는 2년제의 직업교육과가 신설되었다. 코스의 분류는, 전기중등교육의 경우에는 고전과·근대과, 후기 중등교육의 경우에는 A·B·C·D·E과(科) 및 중급 기술자 면허증이나 직업 적임증 등 직업의 자격에는 여러 종류의 코스가 있다. 후기 중등교육의 수료자격은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중급 기술자 면허증 등이다. 고등교육은 국립종합대학·국립전문대학 및 사립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되어 있는데, 양적으로 대표적인 것이 국립종합대학이다. 1968년에 23개교에서 약 60만 명의 학생들을 포용하였고, 국립전문대학(grandes écoles)은 약 160개교, 학생은 3만 명인데, 이것은 사립고등교육기관 40개교의 3만 명에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문(文)·이(理)·법경(法經)·의(醫)·약(藥) 및 신학의 6종류가 되는 학급제 밑에 학사호(學士號)·수사호(修士號)·박사호 등의 자격을 수여하고 있으나, 1968년의 폴 개혁으로 유니테 제도를 중심으로 한 큰 변혁이 가하여지고 있다. 바칼로레아 자격의 소유자만이 입학이 허용되는데, 학사호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은 입학자의 약 3할이라고 한다. 국립전문학교에는 고등사범학교 등 국립종합학교보다 오히려 정도가 높은 것도 있는데, 특별한 입학시험으로 입학자를 엄선하여 뽑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사립고등교육기관은 기독교 계통의 것과 특정한 직업교육을 행하는 것이 있다. 교원양성은 사범학교 및 고등사범학교에서 계획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중등교육의 급속한 확대에 수반하여 중등교원의 대부분은 국립종합대학에서 양성되고 있다. 교원 자격증은 초등교원 자격·아그레가숑 자격, 중등교원 자격, 중등기술교원 자격 등의 여러 자격이 있으나, 실제로 교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 교원자격증이 없어도 일정한 자격요건만 갖추고 있으면 된다. 그 대신 신분·우대에 큰 차이가 있다. 학년은 9월에 시작되어 6월에 끝난다. 주 5일이 원칙이며, 초등·중등교육의 경우에는 목요일이 휴일이다. 주당 수업시간은 교육부령으로 정하여지며, 초등학교는 27시간, 전기 중등교육은 24-30시간, 후기 중등교육의 보통과정은 25-35시간, 기술 리세 는 30-40시간이다. 학급 규모는 보통 40명인데, 추이학급과 완결과정은 30명, 제2기 과정의 최상급은 50명으로 정하여지며, 또한 관찰·지도과정의 경우 수업시간의 약 3분의 1은 24명 이하로 되어 있다. 프랑스의 교육제도는 우측의 도표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right 프랑스의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1학년인 6세부터 의무이다. 하지만 유치원(école maternelle)들이 지방의 초등학교와 연계되어 있어서 많은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를 3세정도부터 보내기 시작한다. 몇몇은 심지어 2세때부터 본질적으로 보육원인 classe pré-maternelle에 보낸다. 학생들이 처음 읽기를 접하는 유치원의 최고 학년(grande section)은 아주 중요한 단계이다. 유치원을 마치고, 어린 학생들은 초등학교로 진학한다. 1학년때 그들은 쓰는 법을 배우고, 읽기를 완성한다. 많은 다른 교육제도처럼, 프랑스 초등학교 학생은 프랑스어, 수학, 자연과학, 역사, 지리학 등 많은 과목을 가르치는 한 명(혹은 두 명)의 교사에게 배운다. 프랑스의 중등교육은 두 개의 학교로 분리된다. 초등학교 마친 직후, 꼴레주(collège)에서 4년. 한국의 중학교에 해당. 리세(lycée)에서 나머지 3년.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 중등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면 학사 학위를 받는다. 중학교 졸업장은 학생이 따는 최초의 공식 학위이다. 지금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필수 사항이다. 학교는 중학교 4학년 전체로 반을, 그 전 해인 3학년을 반으로 하여 지표로 사용한다. 그러나 2007년부터는 4학년만 평가에 사용된다. 나머지 반은 기말고사를 사용한다. 학생들은 프랑스어, 수학, 역사/지리만을 시험본다. 2017년부터는 과학이 추가되어 기술, 물리화학,지구과학 중 2가지 과목을 추가로 본다. 총 700점 만점 중 400점은 내신으로 들어가고 100점은 프랑스어 말하기/발표 시험 나머지 300점은 기말고사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série들은 완전한 전문화가 아니고 모든 bac 교수는 그의 관할구역 안에서 그가 원하는 과목과 부합한다면, 구역 내 어느 대학이라도 통합을 할 권리가 있다. L시리즈를 이수한 학생은 고등학교 교육만으로 과학 대학에서 성공할 만큼의 충분한 과학적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바깔로레아와 대학의 과(분야)가 다른 경우는 매우 적다. 공업 바깔로레아(baccalauréat technologique)와 직업전문 바깔로레아(baccalauréat professionnel)도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프랑스 고등교육의 놀라운 점은 작은 규모와, 다목적의 규율로 다양화된 설립의 다중성이다. 낭시(Nancy)나 그르노블(Grenoble)과 같은 프랑스의 중형 도시는 2~3개(예를 들어 과학, 사회)의 대학을 갖고 있을 수 있고, 다른 많은 공학 및 특성화된 고등교육 기관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파리와 교외에 13개의 대학이 있는데, 그것들은 전혀 전문화되지 않았고, 아주 전문적인 작은 단위의 교육기관들이 있다. 더 많은 과목들을 제공하기 위해 몇 개의 교육기관들이 함께 하나의 학위 과정을 운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파리 국립광업학교, 에콜 센트랄 파리,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같은 공대에서는 오랜 기간 고정강의를 하는 교수들이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한 과목만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시간 강사들이 더 많은 것이 흔한 일이다. 이 시간제 교수들은 주로 이웃의 대학이나, 연구소 혹은 산업현장에서 고용해 온다. 또 다른 프랑스 고등 교육의 창의적인 점은 많은 양의 과학 연구가 대학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CNRS나 INSERM과 같은 연구 기관에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대학(또는 다른 고등교육기관)안에 그들의 연구단위가 마련되어 있으며, 대학과 연구기관이 협력하여 운영된다. 또한 연구원들이 몇 개의 대학원 강의를 하는 것도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연구원들은 대학의 일반 교수진에 속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들이 세계 대학순위에서 사용되는 평가기준이 프랑스 대학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학비가 낮다는 점이다. 고등 교육은 국영이라서 돈을 적게 낸다. 대학과 교육수준에 따라서 150에서 400유로정도이다. 석사 학위를 받는 데(5년 내)750~2,000유로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저소득층 자녀는 장학금을 신청할 수도 있다.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아주 적은 수업료와 교재비를 내고, 다달이 수당도 받는다. 그러나 공학계 학교의 수업료는 1년에 5000유로까지 들 수도 있고, 몇몇 경제학교들은 1년에 8000유로까지 징수한다. 학생들의 건강보험은 25세까지 무료이기 때문에 생활비와 책값만 더하면 된다. 바끄(bac)라고도 불리는 바깔로레아 (Baccalauréat)는 학생들이 대학 진학, 수업준비 혹은 전문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고등학교 졸업장이다. 바깔로레아는 학위와 그 시험 자체를 나타낸다. 이것은 한국의 수능, 영국의 A-Levels, 미국의 SAT, 아일랜드의 Leaving Certificate, 오스트레일리아의 Higher School Certificate, 독일의 Abitur와 비슷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치는 일반 바깔로레아(baccalauréat général)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S(série scientifique)는 자연과학, 물리나 수학에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이과에 해당한다. ES(série économique et sociale)는 경제와 사회과학과 연관이 있다. 이과와 문과의 중간으로 볼 수 있다. L(série littéraire)은 프랑스어, 외국어, 철학과 관련이 있다. 한국의 문과에 해당한다. 프랑스의 국영대학의 이름은 대학 근처의 큰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붙이고, 여러 개가 있으면 숫자를 붙인다. 13개의 대학이 있는 파리에서 대학의 이름은 Paris I부터 Paris XIII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파리시 바깥쪽 교외에 있다. 프랑스 시스템은 지금 유럽 대학의 표준을 만들자는 Bologna process 라는 것을 하고 있다. 학사학위에 3년, 석사에 2년, 박사에 3년을 계획했다. 그랑제콜 (Grandes écoles & classes préparatoires, 줄여서 CPGE)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독특한 고등교육제도이다. 일반대학과 그랑제콜의 차이점은 지원자격, 선발방법, 수업 연한, 교육방법 및 졸업후의 진로 등 여러 가지를 열거할 수 있다. 그랑제콜은 전문교육을 하는 교육기관이다. 교육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교육에 치중함으로 그랑제콜의 졸업생들은 졸업 후 고등·대학의 교사나 교수, 관공서나 각 기업체의 고급간부 및 엔지니어가 된다. 따라서 우수한 학생들은 자연히 일반대학보다 그랑제꼴을 지망하게되며 프랑스의 영재들은 그랑제꼴을 통하여 배출된다. 그랑제콜 준비반(CPGE)에 들어가려면, 바깔로레아에 합격해야 함은 물론 고등학교 최종학년의 성적표와 교사의견서를 제출해야 한다. 준비반은 2년 과정이다. 2년 과정의 교육을 이수한 후 그랑제꼴에 입학하기 위하여 매우 어려운 입학시험을 치루어야 하며 서류전형이 동시에 실시되기도 한다. 그랑제꼴의 수업 연한은 3년 또는 4년이며, 그랑제꼴을 졸업하려면 바깔로레아 이후 보통은 5~6년이 걸리므로 일반대학보다 학업 연한이 길다. 프랑스에서는 학업을 마무리 짓는 과정이 매우 다양하며 이들 졸업 유형 가운데에는 한국의 교육제도에 없는 졸업 유형이 대부분이다. BREVET 중학과정 졸업 BEP (Brevet d études professionelles) 직업고등학교 졸업 CAP (Certificat d aptitude) 중등 직업학교 졸업 BAC (Baccalauréat) 인문고등학교 졸업 * BAC TECH (Baccalauréat Technologique) 인문기술고등학교 졸업 IUT (Institut universitaire de technologie) 전문 고등기술학교 졸업 DUT (Diplôme universitaire de technologie) 전문기술대학 졸업 BTS (Brevet de technicien supérieur) 전문기술고등대학 졸업 DEUG (Diplôme d études universitaire générale) 일반대학 제1과정 졸업 Licence 일반대학 제2과정 졸업(학사) CAPES (Certificat d aptitude de professeur de l enseignement secondaire) 일반대학 제2과정 졸업 Maîtrise 일반대학 제2과정 졸업(석사) Agrégation 일반대학 제2과정 졸업후 고등학교 선생자격 취득 Diplôme 일반대학 이외의 국가특수 대학(그랑제콜 및 기타 에콜) 졸업 DEA (Diplôme d études approfondies) 석사 후 과정 졸업 DESS (Diplôme d études supérieurs spécialisées) 석사 후 과정 졸업 Doctorat 박사과정 졸업 파리 대학교 |
올림픽 (은 전 세계 각 대륙 각국에서 모인 수천 명의 선수가 참가해 가을과 겨울 스포츠 경기를 하는 국제적인 대회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은 2년마다 하계 올림픽과 동계 올림픽이 번갈아 열리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감독하고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5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고대 올림피아 경기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말에 쿠베르탱이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영감을 얻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이를 위해서 쿠베르탱은 1894년에 IOC를 창설했으며, 2년 뒤인 1896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열렸다. 이때부터 IOC는 올림픽 운동의 감독 기구가 되었으며, 조직과 활동은 올림픽 헌장을 따른다. 20세기에 올림픽 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IOC는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변화의 예로는 얼음과 눈을 이용한 경기 종목을 다루는 동계 올림픽, 장애인이 참여하는 패럴림픽·스페셜 올림픽·데플림픽, 10대 선수들이 참여하는 유스 올림픽 등을 들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IOC는 20세기의 변화하는 경제, 정치, 기술 환경에도 적응해야 했다. 그리하여 올림픽은 쿠베르텡이 기대했던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에서 벗어나서, 프로 선수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올림픽은 점차 대중 매체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올림픽의 상업화와 기업 후원을 놓고도 논란이 생겨났다. 또한 올림픽을 치르며 발생한 보이콧, 도핑, 심판 매수, 테러와 같은 수많은 일들은 올림픽이 더욱 굳건히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올림픽은 국제경기연맹(IF), 국가 올림픽 위원회(NOC), 각 올림픽의 위원회(예-벤쿠버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로 구성된다. 의사 결정 기구인 IOC는 올림픽 개최 도시를 선정하며, 각 올림픽 대회마다 열리는 올림픽 종목도 IOC에서 결정한다. 올림픽 경기 개최 도시는 경기 축하 의식이 올림픽 헌장에 부합하도록 조직하고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올림픽 축하 행사로는 여러 의식과 상징을 들 수 있는데 올림픽기나 성화가 그 예이다. 올림픽은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하계 올림픽은 33개의 종목과 약 400개의 세부종목에서 13,000 명이 넘는 선수들이 겨루고 그중 각 종목별 1, 2, 3위는 각각 금/은/동메달을 수여받는다. 전 세계 언론에서 각각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를 중계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선수가 개인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와 더불어 올림픽 경기는 개최지와 개최국에게도 세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된다.. 올림피아에 위치한 경기장 고대의 올림픽 경기(올림피아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의 대표선수들이 모여 벌인 일련의 시합이었으며, 육상 경기가 주 종목이지만 격투기와 전차 경기도 열렸다. 고대 올림픽의 유래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잘 알려진 신화로는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올림픽의 창시자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경기를 최초로 올림픽 이라고 부르고, 4년마다 대회를 개최하는 관례를 만든 사람이 헤라클레스라고 한다. 어떤 전설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이른바 헤라클레스의 12업을 달성한 뒤에 제우스를 기리고자 올림픽 경기장을 지었다고 한다. 경기장이 완성되자 헤라클레스는 일직선으로 200 걸음을 걸었으며, 이 거리를 "스타디온"이라 불렀는데, 후에 이것이 길이 단위인 스타디온 ( → )이 되었다. 또 다른 설로는 올림픽 휴전 ()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관념이 최초의 올림피아 경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올림픽 휴전 이란 어느 도시 국가라도 올림피아 경기 기간 중에 다른 나라를 침범하면 그에 대한 응징을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올림픽 기간에는 전쟁하지 말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가 처음 열린 시점은 보통 기원전 776년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이 연대는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비문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비문의 내용은 달리기 경주 승자 목록이며 기원전 776년부터 4년 이후 올림피아 경기 마다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 고대 올림픽의 종목으로는 육상, 5종 경기(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달리기, 레슬링, 멀리뛰기), 복싱, 레슬링, 승마 경기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엘리스의 코로이보스가 최초로 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이라고 한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중요성을 띄고 있었는데, 스포츠 경기를 할 때는 제우스(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는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이 있음)와 펠롭스를 기리기 위하여 제물 봉헌 의식을 치렀다. 펠롭스는 올림피아의 전설상의 임금이었던 피사티스의 오이노마오스 왕과 전차 경주를 겨룬 영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올림피아 경기의 승자는 시와 조각상으로 칭송받았다. 올림피아 경기는 4년마다 열렸으며, 이 기간을 올림피아드 (Olympiad)라고 했는데, 그리스인들은 이를 시간 단위로 이용하였다. 올림피아 경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범그리스 대회의 순환 대회 가운데 하나였다. 올림피아 경기는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이르렀으나, 그 후 로마가 패권을 잡은 뒤 그리스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고대 올림픽이 공식적으로 끝난 해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부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모든 이단 숭배 및 예배를 금지했던 393년을 고대 올림픽의 마지막이라고 추정한다. 다른 설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의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모든 그리스 신전을 파괴하라고 명령한 426년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올림픽이 사라진 이후로 이보다 한참 뒤인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올림픽 경기가 열리게 된다. Pierre de Coubertin.jpg|섬네일|오른쪽|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 고대 올림피아 경기를 제대로 구현한 최초의 시도는 혁명 시대의 프랑스에서 1796년부터 1798년까지 3년동안 실시했던 프랑스 국내 올림픽인 공화국 올림픽 ( L Olympiade de la République )이었다. 이 대회의 종목 중에는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경기 때 행한 일부 종목도 있었다. 특히 1798년 공화국 올림픽 대회는 미터법을 최초로 스포츠에 도입시킨 대회이기도 하다. 이후 52년뒤인 1850년에는 잉글랜드 슈롭셔주의 웬록에서 올림픽급의 대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 대회는 1859년에 아테네에서 열렸을때 웬록 올림픽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지금도 열리고 있다. 브룩스 박사는 1859년에 아테네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의 내용을 이후 경기에 채택하였다. 1866년 런던의 수정궁에서는 윌리엄 페니 브룩스가 영국의 국가 올림픽 대회를 만들었다. 1821년 그리스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때부터 올림픽 부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시인이자 신문 편집자였던 파나요티스 수초스(Παναγιώτης Σούτσος)는 1833년에 출간한 자신의 시 망자(亡者)의 대화 에서 최초로 올림픽 부활에 대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리스의 부유한 박애주의자였던 에방겔리스 자파스(Ευαγγέλης Ζάππας)는 1859년에 아테네 시 광장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일명 자파스 올림픽)"를 후원하였다. 이 경기에는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출신의 선수들이 참가하였다. 에방겔리스 자파스는 이후에도 올림픽 경기를 개최할 수 있도록 고대의 경기장이었던 파나티네코 경기장을 복원하는 데도 돈을 썼다. 파나티네코 경기장에서 1870년과 1875년에 자파스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현대 올림픽인 2004년 하계 올림픽 때는 양궁 경기장으로도 쓰였다. 역사학자였던 쿠베르탱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면서 군사들이 체계적인 체력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말한 인물이다. 1890년 웬록 올림픽에 참석한 쿠베르탱은 그 이후부터 올림픽을 대규모로 부활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쿠베르탱은 웬록 올림픽과 자파스 올림픽을 토대로 하여 올림픽 경기를 국제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나라별로 올림픽을 번갈아가며 개최하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그는 이 방안을 새로 설립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첫 올림픽 의회 기간 중에 언급했다. 총회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1894년 6월 16일부터 6월 23일까지 7일간 지속되었으며, 총회 마지막날, 2년 후인 1896년에 아테네에서 국제적 규모의 올림픽 대회를 열기로 결정되었다. IOC는 올림픽을 조직하는 데에 모든 책임을 졌으며, 초대 위원장으로는 그리스의 작가였던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Δημήτριος Βικέλας)가 선출되었다. Olympic opening ceremony.jpg|섬네일|그리스 아테네의 파나티네코 경기장에서 열린 1896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 1859년 자파스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의 수는 250 명을 넘지 못했다. 에방겔리스 자파스는 "지난 자파스 올림픽을 포함, 1896년에 개최될 2번째 올림픽을 위해 파나티네코 경기장을 보수 해야한다." 라는 충고를 하지만, 그리스 정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1896년 아테네 올림픽 준비를 위해 파나티네코 경기장은 두 번이나 정비해야 했다. 1회 대회 정식종목으로는 9종목이 있었는데 육상, 사이클, 펜싱, 체조, 사격, 수영, 테니스, 역도, 레슬링이 있었으며, 조정도 정식종목이었으나 매우 나쁜 날씨로 인해 조정 경기는 취소되었다. 펜싱 경기는 역사적 건물인 자피온(에반젤리스 자파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에서 열렸다. 그리스의 관리들과 국민들은 올림픽 경기 개최에 열광적이었다. 많은 선수들이 이에 동감하면서 앞으로도 올림픽 대회를 아테네에서 영구히 개최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근대 올림픽은 순환 개최로 열리는 세계적인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2회 올림픽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기로 결정되었다. 1896년 올림픽 대회의 성공을 이어서 개최된 두 번째 올림픽인 1900년 올림픽에서는 올림픽의 존폐여부를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00년에 파리와 1904년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올림픽은 하필이면 엑스포와 시간과 장소가 겹치는 바람에 빛을 바래게 된다. 1904년 대회를 예로 들면 650 명의 선수단이 참가했지만 그중 580 명은 미국국적을 가진 사람이었다. 1900년과 1904년의 두 올림픽 대회는 역대 올림픽중에 최저점을 기록한다. 올림픽은 1906년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개최되었을 때 다시 일어서게 된다. 또 다른 성공적인 올림픽은 그리스 올림픽 협회가 조직했으며 세 차례나 올림픽을 치른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경기는 비공식 올림픽이긴 했지만 세계적으로 상당한 참가자들을 불러 모았으며 대중들에게 큰 재미를 갖다주었다. 이 때를 시작으로 올림픽의 인기와 번영이 시작되었다. Bild 102-05472, St. Moritz, Winterolympiade.jpg|섬네일|생모리츠에서 열린 1928년 동계 올림픽의 아이스하키 경기장면 동계 올림픽은 눈과 얼음을 이용하는 스포츠들을 모아 이루어졌으며 하계 올림픽 때 실행하기 불가능한 종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피겨스케이팅, 아이스하키는 각각 1908년과 1920년에 하계올림픽 종목으로 들어가 있었다. IOC는 다른 동계 스포츠로 구성된 새로운 대회를 만들고 싶어 했고, 로잔에서 열린 1921년 올림픽 의회에서 겨울판 올림픽을 열기로 합의했다. 1회 동계올림픽은 1924년, 프랑스의 샤모니에서 11일간 진행되었고, 16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IOC는 동계 올림픽이 4년 주기로 하계 올림픽과 같은 년도에 열리도록 했다. 이 전통은 프랑스의 알베르빌에서 열린 1992년 올림픽 때 까지 지속되었으나,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에서 열린 1994년 올림픽부터 동계 올림픽은 하계 올림픽이 끝난지 2년후에 개최하였다. Summer Paralympics Wheelchair tennis - women.jpg|섬네일|왼쪽|베이징에서 열린 2008년 하계 패럴림픽의 휠체어테니스 복식 경기장면 패럴림픽(Paralympic)은 신체·감각 장애가 있는운동 선수가 참가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로, 장애인 올림픽으로 불린다. 1948년에 루드비히 구트만 경(Sir Ludwig Guttman)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일환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과 동시에 몇몇 병원들을 연합해서 여러 경기를 펼쳤다. 구트만의 세계 휠체어, 신체부자유자대회(World Wheelchair and Amputee Games)로 알려진 이 대회는 매년 열리는 스포츠대회가 되었다. 12년이 넘도록 구트만과 다른 사람들은 스포츠를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 중 하나로써 계속 대회 개최에 노력을 기울였다. 로마에서 열린 1960년 하계 올림픽때 구트만은 400 명의 선수들을 "Parallel Olympics"에 참가시켰으며 이것이 곧 1회 패럴림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패럴림픽은 하계 올림픽이 열린 년도에 열리게 되었다. 서울에서 열린 1988년 하계 올림픽부터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는 패럴림픽도 같이 개최하기로 한다. 2010년에 첫대회가 개최되며 14~18세가 참가하는 대회이다. 청소년 올림픽은 IOC위원장인 자크 로게가 2001년에 고안한 것으로써 2007년 제119차 IOC총회때 승인되었다. 제1회 하계 청소년 올림픽은 2010년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으며 제1회 동계 청소년 올림픽은 2년후인 2012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열렸다. 이 올림픽은 성인 올림픽보다 짧은 기간 내에 진행되며 하계 올림픽은 12일, 동계 올림픽은 9일간 열린다. IOC는 하계 유스 올림픽에 3,500 명의 선수단과 875 명의 임직원, 동계 유스 올림픽에는 970 명의 선수단과 580 명의 임직원이 참여한다고 말했다. 경기종목은 성인 올림픽과 동일하나 세부종목에 있어서는 제외되는 종목이 있다. 1896년 대회때는 14개국에서 241 명의 선수단이 참가했지만 2008년 하계 올림픽때는 204개국에서 10,500 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등 세계적인 대회로 변모했다. 동계 올림픽의 규모는 하계 올림픽 규모보다 작다. 예를 들면 2006 토리노 동계 대회때는 80개국에서 2,508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82개 세부종목이 있었고,2008 베이징 하계 대회때는 204개국, 11,508 명의 선수, 302개의 세부종목이 있었다.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선수와 임직원들은 올림픽 선수촌에서 지낸다. 올림픽 선수촌에는 선수들을 위한 개인실이 있으며 카페테리아, 헬스 클리닉, 종교적인 시설 등 최상의 편의를 위한 시설들이 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나라는 UN에 등록된 국가의 수 193개보다 많다. 다른 국제조직이 개최하는 대회들은 정치적 주권국으로 참가를 제한하는 반면, IOC는 그에 상관없이 올림픽에 모든 공동체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연합체나 공동체에서 국가올림픽위원회(NOC)를 만드는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푸에르토리코, 버뮤다, 홍콩과 같은 곳도 올림픽에서 다른 나라와 스포츠 경쟁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다. cio.jpg|섬네일|오른쪽|로잔에 위치한 IOC 본부 올림픽 활동이란 많은 수의 국가, 국제 경기 연맹과 협회 • 미디어 파트너를 맺기 • 선수, 직원, 심판, 모든 사람과 기관이 올림픽 헌장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모든 올림픽 활동을 통솔하는 단체로서, 올림픽 개최 도시 선정, 계획 감독, 종목 변경, 스폰서 및 방송권 계약 체결 등의 권리가 있다. 올림픽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국제경기연맹(IF)은 국제적인 규모의 경기를 관리, 감독하는 기구이다. 예를 들어서 국제 축구 연맹(FIFA)는 축구를 주관하며, 국제 배구 연맹(FIVB)은 배구를 주관하는 기구이다. 올림픽에는 현재 35개의 국제경기연맹이 있고 각 종목을 대표한다. (이 중에는 올림픽 종목은 아니지만 IOC의 승인을 받은 연맹도 있다.) 국가 올림픽 위원회(NOC)는 각국의 올림픽 활동을 감독하는 기구이다. 예를 들어서 대한 올림픽 위원회(KOC)는 대한민국의 국가 올림픽 위원회이다. 현재 IOC에 소속된 국가 올림픽 위원회는 205개이다. 올림픽 조직 위원회(OCOG)는 임시적인 조직으로 올림픽의 총체적인 것(개막식, 페막식 등)을 책임지기 위해 구성된 조직이다. 올림픽 조직 위원회는 올림픽이 끝나면 해산되며 최종보고서를 IOC에 제출한다. 올림픽에서 공식언어는 프랑스어와 영어이다.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그 개최국의 공용어는 영어, 프랑스어와 더불어서 그 대회의 공식언어이다. 모든 선언(예를 들어서 개막식 때 각국 소개를 할 때)들은 세 언어가 모두 나오거나 영어나 프랑스어 중에서 한 언어로만 말하기도 한다. 개최국의 공용어가 영어나 프랑스어가 아닐 때는 당연히 그 나라의 공용어도 함께 나온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이하 IOC로 지칭)는 몇몇 위원들이 한 행위에 대해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예로 IOC 위원장이었던 에이버리 브런디지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브런디지는 20년 넘게 IOC 위원장직을 맡았고 임기 중에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휘말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 보호했다. 그러나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표단에게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된 이슈를 건드리고 반유대정책을 함으로써 비난을 받았다. 사마란치 위원장 시기 때는 족벌 정치와 부패로 비난받았다. 사마란치가 스페인에서 프랑코 정권에 협력했다는 것도 비판의 이유가 되었다. 1998년에 몇몇 IOC위원들이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미국에게 미국을 올림픽 개최지로 뽑아달라는 뇌물청탁을 받았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이에 IOC는 사퇴한 IOC위원 4 명과 강제 퇴출된 6 명에 대한 조사를 했다. 이 스캔들은 이후에 개최지 선정에서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IOC가 개혁에 착수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BBC 다큐멘터리인 파노라마 에서는 매수된 올림픽 이란 주제로 2004년 8월에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이때 이 프로그램에서는 2012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 선정과 관련된 뇌물에 대해서 조사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특정 후보 도시가 IOC 위원들에게 뇌물수수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파리 시장이었던 베르트랑 들라노에(Bertrand Delanoë)는 영국의 총리인 토니 블레어와 런던올림픽유치위원회가 입후보 규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를 목격자로 내세웠지만 시라크 대통령은 이 분쟁에 휘말려드는 것을 주의했으며 인터뷰를 삼갔다. 결국 베르트랑 들라노에의 주장에 대한 조사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2006년 동계 올림픽을 유치했던 토리노도 이 논쟁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번에는 스위스 국적의 IOC위원 마크 호들러(Marc Hodler)가 이 논쟁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 위원은 스위스 시온의 경쟁 도시였던 토리노가 IOC위원들에게 뇌물수수를 했다고 말했고, 이 발언으로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언행이 많은 IOC위원들이 시온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게 되고 토리노가 개최지로 선정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처음에 IOC는 스폰서에게서 자금제공을 받는 것을 거부했었다. 이런 방침은 에이버리 브런디지가 IOC 위원장이었던 1972년까지 유지되어 왔었다. 이 당시 IOC는 텔레비전 같은 미디어들이 갖는 잠재성과 큰 수익을 가져오는 광고시장에 대해 조사했었다. 그 후 1980년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 시절부터 올림픽은 올림픽 관련 상품과 올림픽 브랜드를 연계시키려는 국제적인 스폰서를 맞아들임으로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1950년대까지 IOC는 적은 예산으로 운영되어 왔다. 에이버리 브런디지가 위원장으로 있던 1952년부터 1972년까지,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그 어떤 상업적인 관심도 올림픽과 연계를 꾀하는 것을 거부했다. 협력 스폰서의 관심이 IOC의 결정에 지나치게 간섭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런디지가 이러한 수익창출을 거부했다는 것은 IOC가 스폰서 계약이나 올림픽 상징의 사용에 대한 협상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브런디지가 IOC에 200만 달러를 남기고 은퇴한 후 8년 뒤에 IOC의 잔고는 4500만 달러로 늘어났다. 그 이유는 IOC가 처음으로 텔레비전 중계권을 판매하고 스폰서와 계약함으로써 올림픽의 팽창을 노리는 이데올로기(관념)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에 IOC위원장으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당선되었을 때, 그의 소원이 IOC의 재정적 독립이었을 정도로 상업성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1984년 하계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피터 워버로스(Peter Ueberroth)의 지휘하에 있던 LA 하계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그 당시 2억 2500만 달러라는 전례가 없던 이익을 얻었다. 왜냐하면 조직위원회는 독점스폰서에 대한 권리를 판매하였고 그로 인해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IOC는 이러한 재정적 후원 권리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1년 뒤인 1985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올림픽 브랜드를 만들어내기 위한 올림픽 프로그램(The Olympic Program, TOP) 을 설립했다. TOP의 회원들은 독점 적이고, 비싼 비용 을 IOC에 지불해야만 한다. 4년마다 TOP 회원들은 5000만 달러를 내야 한다. 그 대가로 TOP의 회원은 생산하는 물품에 올림픽 상징인 오륜기를 국제적,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출판물이나 광고에도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베를린에서 열렸던 1936년 하계 올림픽은 전 세계가 아닌 독일 내에서만의 방송이지만 텔레비전으로 방송한 첫 번째 올림픽이었다. 1956년 동계 올림픽은 올림픽을 전 세계적으로 중계 방송한 첫 번째 올림픽이었으며, 1960년 동계 올림픽에서는 중계권을 어느 특정한 방송사에 판매한첫 번째 올림픽이다. 그 후 수십 년간 올림픽은 냉전중인 국가들의 이데올로기 선전의 장이 되었다. 강대국들은 정치 주권을 위해 IOC(국제 올림픽 위원회)를 조종했으며, IOC는 중계권 판매를 통해 이익을 높이고자 하였다. 중계권의 판매는 올림픽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그로 인해 텔레비전의 광고 시간을 사는 광고주들에게 경쟁을 유발하여 IOC는 더욱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는 IOC에게 있는 중계권을 비롯한 수많은 권리들에 지불해야 할 금액들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1998년 동계 올림픽 중계권을 사는 데 CBS는 3억 7500만 달러를 지불했지만 2000~2012년 올림픽의 중계권을 따내는 데 NBC는 35억 달러나 지불해야 했다. 올림픽 시청자들 또한 1960년대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68년 하계 올림픽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사람들은 6억 명으로 추측되었고, 1984년 하계 올림픽을 시청한 사람들은 9억 명으로 늘어났으며, 1992년 하계 올림픽은 약 35억 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NBC의 조사에 의하면 시드니에서 열린 2000년 하계 올림픽은 1968년부터 개최된 올림픽 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시청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시청자 수 감소의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가 지목되는데, 그중 하나는 케이블 채널 간의 경쟁이 심화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시간으로 경기 영상과 결과를 보여주는 인터넷의 대중화이다. 이러한 원인 분석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아직도 지연방송에 의존하고 있다. 시청률 감소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광고 시간을 예전보다 싼 가격에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게 많은 방송 비용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케이블의 치열한 경쟁을 이유로 엄청난 중계권 가격을 조금 낮춰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결국 IOC는 올림픽 프로그램 진행 시간을 상당 부분 변경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하계 올림픽 때 체조종목은 밤 7시에서 9시까지 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갈라쇼는 흥미를 높이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또한 IOC는 수영과 다이빙 종목의 시간은 늘렸는데, 이 종목은 텔레비전 시청자들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종목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방송국들의 로비가 올림픽 종목들의 일정 시간까지도 미국의 텔레비전 황금시간대에 맞춰서 변경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변화는 장점과 단점이 혼재되어 있고, 그 예로 유럽에서 열렸던 2006년 동계 올림픽의 시청률은 미국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열렸던 2002년 동계 올림픽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낮았으며 또한 베이징에서 열렸던 2008년 하계 올림픽의 시청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올림픽 브랜드의 판매는 항상 논란이 되어왔다. 비판 중 하나는 올림픽이 지나치게 상업성과 연계되어 이제 올림픽이 기존의 상업적인 스포츠쇼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1996년과 2000년 하계 올림픽 기간 사이에는 올림픽 관련 상품 시장의 포화 상태가 일어나면서 IOC에게 또 다른 비판이 일었다. 개최도시가 올림픽 관련 물건들을 파려는 상인과 회사들로 넘쳐났던 것이다. IOC는 이에 대해 앞으로 다가올 올림픽에서는 과다 경쟁을 방지하고 이런 불미스라운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처하겠다고 응답했다. 또 다른 비판으로는, 개최국이나 개최도시는 올림픽에 모든 비용을 들이는데 IOC는 손도 까딱 않고 올림픽 상징으로부터 얻는 모든 권리와 수입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IOC는 올림픽 상징으로 인한 수입 뿐 아니라 스폰서와 중계권에서 들어오는 수입의 일정 지분도 가져간다. 개최도시 입장에서는 그들의 투자가 흑자가 될지 확신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올림픽 개최도시로서의 권리를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기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헌장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이상이나 철학을 표현하는 상징을 사용한다. 오륜기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올림픽 기는 5개의 둥근 고리가 얽혀있으며 각 원마다 5대륙을 상징한다.(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는 아메리카로 합쳐 있다.) 파랑, 노랑, 검정, 초록, 빨간 고리에 흰색 바탕은 올림픽 기를 나타낸다. 이 색들이 선택된 이유는 모든 국기에서 적어도 이 5개의 색 중 하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 기가 채택된 것은 1914년이지만 1920년 하계 올림픽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올림픽 기는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 동안 게양한다. 올림픽 표어는 라틴어로 Citius, Altius, Fortius 이며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라는 뜻이다. 쿠베르탱의 이상은 올림픽 선서에 더 잘 나타나 있다. 매 올림픽이 시작되기 몇 개월전에 고대 그리스에서 제사를 지냈던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올림픽 성화가 채화된다. 여자 배우가 마치 여자 사제인 것처럼 연기해서 태양광선을 포물면 거울(오목 거울의 하나)의 안쪽에 집중시켜서 점화한다. 그 후에 여자는 첫 번째 성화 봉송 주자에게 성화를 넘기고 개최도시의 개막식이 열리는 올림픽 경기장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올림픽 성화는 전달된다. 올림픽 상징으로서의 올림픽 성화는 1928년 하계 올림픽 때 이미 있었지만, 성화 봉송은 1936년 하계 올림픽때 독일 정부의 나치즘 선전의 일환으로 처음 시행된 것이 그 유래이다. 개최도시의 문화적 상징물을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내는 올림픽 마스코트는 1968년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1980년 하계 올림픽 때 러시아 아기곰인 미샤가 국제적인 스타의 자리에 오르며, 올림픽의 상징에 있어 마스코트가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가장 최근의 하계 올림픽 마스코트는 2012 런던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웬록으로, 웬록은 영국 중서부 슈롭셔의 작은 마을 이름이며 이곳은 근대 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창안했던 곳이다. 또한 가장 최근의 동계 올림픽 마스코트로는 2010년 동계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미가, 콰치, 수미가 있다. 올림픽에서 이루어지는 주요 행사로는 개막식, 폐막식, 시상식 등이 있다. ceremony of the 1984 Olympics.jpg|섬네일|L.A에서 열린 1984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 중 한 장면 개막식 때는 올림픽 헌장에 따라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개막식의 기본 토대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린 1920년 하계 올림픽 때 만들어졌다. 개막식은 대개 개최국의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울려퍼지며 시작된다. 그 후에 개최국이 준비한 그들의 문화를 대표하는 음악, 춤, 영상 따위가 공연된다. 개막식은 아름답기가 매회가 지날수록 웅대해지고 복잡해지는데, 이는 전 대회보다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함이다. 보도에 의하면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때 든 비용은 1억 달러로 그 대부분이 예술적인 부분에 들었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면 다음에는 각국의 선수단이 입장한다. 올림픽의 발상지라는 영예를 가진 그리스가 전통적으로 맨 처음에 입장한다. 나머지 각국 선수단은 주최국에서 선택한 언어의 사전 순으로 입장하고 나서, 개최국 선수단이 제일 마지막에 입장한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200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그리스 국기가 맨 처음에 입장하고, 그리스 선수단이 맨 마지막에 입장했다. 개막식 마지막에는 올림픽 성화가 들어오고 마지막 성화 봉송자에게 전달할 때까지 돌게 된다. 마지막 성화 봉송자는 대체로 유명하고 올림픽에서 성공한 개최국의 선수가 하며 올림픽 성화를 경기장 내에 점화한다. 그 다음 올림픽조직위원장과 IOC 위원장이 개막 선언을 하는데 공식적으로 개막되었다는 것과 올림픽 성화가 점화되는 것을 선언한다. 그 다음에 올림픽조직위원장과 IOC 위원장이 개회사를 낭독하게 된다. 마자막으로 올림픽기 게양에 이어 올림픽 선서를 끝으로 개막식 과정은 모두 끝나게 된다. 하계 올림픽 폐막식 행사의 일환으로 선수들이 경기장안으로 모여들고 있다. 폐막식은 올림픽 경기가 모두 끝난 후에 열린다. 각국의 기수가 경기장에 들어온 후에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선수들이 함께 들어온다. 3개의 기가 국가가 울려퍼지는 동안 게양되는데, 그 3개의 국기는 그리스의 국기(올림픽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도시의 국기, 다음 하계·동계 올림픽의 개최도시의 국기이다. 그 다음 올림픽조직위원장과 IOC 위원장이 폐막 선언을 하는데 공식적으로 폐막되었다는 것과 올림픽 성화가 꺼지는 것을 선언한다. 일명 안트베르펜 세레모니 라고 하는 것도 진행되는데, 이는 올림픽 개최도시의 수장이 특별한 올림픽 기를 IOC 위원장에게 넘겨주면 그것을 또다시 다음 대회의 개최도시의 수장에게 넘겨주는 것으로서 1920 안트베르펜 올림픽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행사가 끝나면 짧게 다음 대회 개최지에 대한 소개로 홍보 영상이나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의 시상식( 사이클 남자 팀 추적 경기 ) 시상식은 각 종목이 끝날 때마다 열린다. 개인 혹은 팀으로 참가해서 1위를 하거나 2위 혹은 3위를 한 선수(들)은 시상대에 올라서서 존경의 뜻으로 메달을 수여받는다. 올림픽 위원들에게 메달을 받은 후에 1위를 한 선수의 국가가 울려퍼지고 1, 2, 3위를 한 선수들의 국기가 올라간다. 개최도시의 자원봉사자들도 시상식 때 활동하는데 메달을 준비하거나 꽃을 들고 이동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한다. 올림픽 종목마다 시상식은 대체로 그 종목의 결승전(본선)이 끝난 후 거의 하루 뒤에 이루어진다. 남자 마라톤의 경우에는 시작은 올림픽 마지막 날 아침 일찍 하고 시상식은 그 날 저녁에 폐막식 도중에 이루어진다. 올림픽 종목은 총 33개부문 52개 종목에서 약 400개의 경기로 이루어져있다. 예를 들어서 하계 올림픽 부문인 레슬링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의 두 종목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10경기는 남자부, 4경기는 여자부로 열리며 분류기준은 체중이다. 하계 올림픽은 26개, 동계 올림픽은 7개 부문으로 이루어져있다. 하계 올림픽에서는 육상, 수영, 펜싱, 체조가 1회 대회때부터 한번도 빠짐없이 정식종목이었으며, 동계 올림픽에서는 크로스컨트리,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 하키, 노르딕 복합, 스키 점프, 스피드 스케이팅이 1924년 동계 올림픽부터 빠짐없이 정식종목이었다. 배드민턴, 농구, 배구와 같은 정식종목들은 처음에는 시범종목이었으며 그 후에 정식종목으로 승인 되었다. 야구처럼 예전에는 정식종목 이었지만 지금은 정식 종목에서 빠진 종목도 있다. 각 올림픽 종목들은 IOC로부터 승인을 받은 국제경기연맹의 관리를 받는다. 35개의 연맹이 IOC에서 승인을 받았으며, 승인을 받았지만 현재 정식종목이 아닌 종목을 감독하는 연맹도 있다. IOC의 승인을 받았지만 올림픽 종목이 아닌 스포츠들은 올림픽 종목으로 고려되지는 않으나, 올림픽이 끝난 후 처음으로 열리는 IOC총회 때마다 정식종목이 되도록 신청을 할 수는 있다. IOC 총회 때 정식종목 선정은 총회에 참석중인 IOC위원들의 투표를 통해 이루어지며, 재적 위원 수의 과반수 이상 찬성표를 얻어야 정식종목으로 인정을 받는다. IOC의 승인을 받은 스포츠이나 찬성표를 받지 못해 정식종목이 되지 못한 스포츠로는 체스와 서핑과 같은 것이 있다. 2004년 10월과 11월에 IOC는 올림픽 프로그램 위원회 (Olympic Programme Commission)를 설립했다. 여기서는 올림픽 종목과 올림픽 종목이 아닌 스포츠를 모두 재검토하는 일을 한다. 이 위원회의 목표는 올림픽 종목에 더 체계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위원회에서는 우선적으로 올림픽 종목으로 포함되기 위해서는 7개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 7개의 기준은 역사, 전통, 보편성, 인기도와 잠재성, 선수의 건강, 연맹의 스포츠를 관리할만한 능력, 스포츠를 여는 데에 필요한 비용이다. 예를 들면 2012년 하계 올림픽의 정식종목 후보에 7개 조건을 포함한 비(非)올림픽 스포츠가 올랐고 그 내용은, 골프, 가라테, 럭비, 인라인 스케이팅, 스쿼시였다. 이 스포츠들은 IOC 상임이사회에서 재검토되어 2005년 7월에 열린 싱가포르 총회에서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결국 5개 중 2개(가라테와 스쿼시) 가 최종 후보로 올라왔으나 가라테와 스쿼시 둘 다 2/3의 미만의 찬성표로 정식종목이 되지는 못한다. 그 후 2016년 올림픽 정식종목에는 7개의 스포츠가 정식종목 신청을 했는데, 내용은 가라테, 골프, 스쿼시, 야구, 소프트볼, 7인제 럭비, 인라인 스케이팅이었다. 2009년 8월 13일, 신청된 7개의 스포츠 중 단 2개만 최종후보로 선정 되었는데, 이는 7인제 럭비와 골프였다. 같은해인 2009년 10월에 열린 IOC 총회에서 골프와 럭비는 과반수 이상의 득표를 얻어서 2016년 하계 올림픽과 2020년 하계 올림픽의 정식종목으로 채택 되었다. 2002년에 열린 제114차 IOC 총회에서는 하계 올림픽 종목은 최대 28부문 301개 경기에 10,500 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3년 뒤인 제117차 IOC 총회에서는 정식종목이었던 야구와 소프트볼을 정식 종목에서 제외시킨다. 이 결과에 대한 이견이 없었으므로 2012년 올림픽 때는 26개부문에서 경기가 열린다. 2016년과 2020년 올림픽 때는 럭비와 골프가 추가되어 다시 28개부문에서 경기가 열린다. 1998-Russia vs Czech Republic.jpg|오른쪽|섬네일|프로 NHL선수들은 1998년부터 아이스 하키종목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 나가노 올림픽 결승전 러시아 vs 체코 ). 영국 명문 공립 학교의 이념은 쿠베르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영국 공립 학교는 스포츠를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해서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mens sana in corpore sano 를 표어로 삼았다. 이 이념에 의하면 신사들은 특정한 분야에서만 우수해서는 안되고 모든 분야에서 고르게 잘해야 하고, 공정한 결과에는 승복해야 하며, 연습이나 훈련은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전문적으로 스포츠를 연습한 사람은 취미로 연습한 사람에 비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 올림픽에서는 프로 선수의 참가 불허가 많은 분쟁을 가져왔다. 1912년 하계 올림픽의 근대 5종 경기와 10종 경기에서 우승한 짐 소프는 올림픽에 나가기 전에 준프로야구선수로 활동했다는 게 나중에 밝혀져 메달이 박탈되었다. 소프는 후에 동정적 여론의 힘을 업고 1983년에 메달을 돌려받게 된다. 1936년 동계 올림픽 때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스키선수들은 돈을 벌기 위해 스포츠를 했는데 이러한 행동이 아마추어 정신에 위배된다고 결정되어 그들은 스키종목에 참가할 수 없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 계급구조가 붕괴되면서 이른바 귀족적인 신사라는 아마추어 선수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뒤처지는 말이 되게 된다. 일부 국가들은 정식 아마추어 선수 를 키워서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벗어나고 있었고, 자신이 내는 비용으로 연습하는 선수들의 불리함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IOC는 아마추어 정신에 관한 입장을 고수했다. 1970년대 초에는 아마추어 정신이 올림픽헌장에서 폐지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프로선수들의 출전은 국제경기연맹(IF)에서 결정짓도록 되었다. 2008년 기준으로 아마추어 선수만 출전하고 있는 올림픽 종목은 복싱이 유일하며 남자 축구에서는 나이가 23세 이상인 선수를 3 명까지만 선발할 수 있다. 이는 아마추어 정신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올림픽 보이콧 국가들 올림픽에서 첫 번째 보이콧은 1956년 하계 올림픽에서. 시작되었다.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항의해 참가를 거부했다. 캄보디아,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은 제2차 중동 전쟁 때문에 보이콧했다. 1972년과 1976년 올림픽에는 많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에서 일어나는 인종 차별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올림픽 참가를 거부했다. 이 보이콧에는 뉴질랜드도 관계가 되어있는데, 뉴질랜드 럭비 국가 대표팀이 당시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을 쓰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경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의 올림픽 참가가 허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이 두 보이콧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후자의 뉴질랜드의 경우는 럭비가 올림픽 종목이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뉴질랜드의 올림픽 참가 금지 요청을 거부했다. 당시 아프리카에 속해 있던 20개국과 가이아나, 이라크는 경기를 끝낸 선수들이 있었지만 탄자니아가 이끄는 올림픽 보이콧에 가세했다. 대만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했는데, 그 이유는 중국이 몬트리올 올림픽 조직위원회에게 대만을 중화민국 의 이름으로 참가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대만은 이것에 반발해서 중화민국의 국기와 중화민국의 국가를 계속 쓸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은 1984년까지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그 후 참가할 때는 대만 올림픽 위원회기와 특별한 국가를 사용한다. 1980년과 1984년 올림픽 때는 냉전의 당사국들이 각각 반대진영에서 개최된 올림픽에 불참했다. 1980년에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미국을 비롯한 65개국이 불참해서 1956년 이후 가장 적은 국가의 수인 81개국만 참가하는 대회가 되었다. 1984년에 열린 L.A 올림픽때는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소련과 동구권의 14개 국가가 자국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올림픽에 불참했다. 소련의 한 관계자는 그들이 올림픽 보이콧을 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지지했다. 동구권에서 보이콧을 한 국가들은 올림픽을 대신할 대회로 프렌드십 게임을 7월과 8월에 했다. 2008년에는 티베트와 다르푸르에 관한 중국의 인권문제를 두고 그에 대한 항의 표시로 중국산 물품의 불매운동과 2008 올림픽 불참에 대한 요구가 컸으나 보이콧을 한 나라는 없었다. 2008년 8월, 조지아 정부는 러시아가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 참전한 것과 관련하여 러시아의 소치에서 열릴 2014년 동계 올림픽을 보이콧하자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앞으로 개최될 때까지 6년이나 남았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섣불리 이른 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했다. Bild 183-G00630, Sommerolympiade, Siegerehrung Weitsprung.jpg|오른쪽|섬네일|1936년 하계 올림픽 멀리뛰기에서 금메달을 딴 제시 오언스가 시상대에 서있다. 쿠베르탱이 말했던 원래 이념과는 반대로 올림픽이 정치 혹은 체제 선전의 장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1936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할 때 당시의 나치독일은 나치는 자비롭고 평화를 위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했다. 또 이 올림픽에서 아리안족의 우월함을 보여줄 생각이었으나 이는 흑인이었던 제시 오언스가 금메달을 4개나 따내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소련은 헬싱키에서 열린 1952년 하계 올림픽 때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 전에는 소련이 조직한 스파르타키아다라는 대회에 1928년부터 참가했었다.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전쟁 기간 사이에 노동자 올림픽(Socialist Workers Sport International)을 조직했는데, 이는 올림픽을 자본가와 귀족들의 대회로 여기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고안된 대회였다. 그 이후 소련은 1956년 하계 올림픽부터 1988년 하계 올림픽까지 엄청난 스포츠강국의 면모를 보여주며 올림픽에서의 명성을 드높였다. 선수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표현하기도 했다.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 1968년 하계 올림픽의 육상부문 200m 경기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한 미국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시상식 때 블랙 파워 설루트(Black Power salute , 흑인 차별 반대 행위)를 선보였으며 2위를 한 피터 노먼도 상황을 깨닫고 스미스와 카를로스의 행위를 지지한다는 뜻에서 급하게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OPHR) 배지를 달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 IOC 위원장이었던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에 이 두 선수를 미국으로 돌려보내거나 미국 육상팀 전부를 돌려보내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하게 했고, 미국 올림픽 위원회는 두 선수를 미국으로 돌려 보낸다. 현재 이란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어떤 경기 경쟁이든 피하고 있다.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이란의 수영 선수는 이스라엘 수영 선수와 같이 경기한다는 이유로 경기를 포기했으며, 2004년 하계 올림픽에서도 이란의 유도 선수는 이스라엘 선수와 경기한다는 일정이 잡혔을 때 경기를 포기했다. 이 선수는 공식적으로는 시합전에 계체량을 재서 체중이 초과되어 실격 되었으나 이란정부로부터 125,000달러나 되는 돈을 받았다고 한다. Hicks1904.jpg|오른쪽|섬네일|토마스 J. 힉스가 1904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하는 모습 20세기 초반, 많은 운동 선수들은 기록향상을 위해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04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미국 선수 토머스 J. 힉스는 코치에게서 스트리크닌과 브랜디를 받았다. 올림픽에서 약물을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사례도 한 번 있었다. 1960년 로마 대회 때 사이클 개인도로 경기 중에 덴마크 선수인 크누드 에네마르크 옌센이 자전거에서 떨어져서 사망했다. 검시관들의 조사에 의하면 그의 죽음의 원인은 암페타민 과다 복용이라고 했다. 이에 1960년대 중반부터 각 경기 연맹은 약물 복용을 금지하기 시작했으며 1967년에는 IOC도 약물 복용 금지에 동참했다. 올림픽에서 약물 복용 양성 반응이 나와서 메달을 박탈당한 첫 번째 사례로는 1968년 하계 올림픽의 근대 5종 경기에 출전해 동메달을 딴 한스 군나르 리렌바르가 있다. 그는 경기 후 도핑검사 결과 알코올을 복용한 것으로 확인되어 메달을 박탈당했다. 도핑 양성 반응으로 메달을 박탈당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88년 하계 올림픽 육상 1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도핑 검사 결과 스타노졸롤을 복용한 것으로 확인돼 금메달을 박탈당한 캐나다 선수인 벤 존슨이 있다. 이에 따라 금메달은 2위를 했던 칼 루이스가 대신 받았다. 1990년대 후반,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도핑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1999년에 세계반도핑기구(WADA)를 설립한다. 2000년 하계 올림픽과 2002년 동계 올림픽 때는 약물 양성 반응을 보인 선수들이 급격히 증가했고, 역도와 크로스컨트리에서는 몇몇 선수들이 도핑 테스트에 걸려서 실격되기도 했다. 2006년 동계 올림픽 때는 메달리스트 한 명이 양성반응을 보여 메달을 반납해야 했다. IOC가 만든 약물 반응 판정(현재 올림픽 도핑테스트의 기준이 됨)은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다른 경기 연맹에서도 벤치마킹을 할 정도가 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기간중에는 3,667 명의 선수들이 세계반도핑기구의 검사를 받았으며 소변과 혈액 검사로 약물 복용 검사를 했다. 몇몇 선수들은 국가 올림픽 위원회(NOC)에 의해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에 출전금지 조치를 당했고, 올림픽 기간중에는 단 3 명만이 도핑 검사에 걸렸다. 쿠베르탱의 생각과는 달리, 올림픽이 세계에 완벽한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기로 했던 제6회 1916년 하계 올림픽이 취소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 도쿄에서 열리기로 했던 제12회 1940년 하계 올림픽, 삿포로에서 열리기로 했던 1940년 동계 올림픽, 영국 런던에서 열리기로 했던 제13회 1944년 하계 올림픽,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열릴 예정인 1944년 동계 올림픽이 취소되었다. 베이징에서 열린 2008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날 조지아와 러시아간의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이 올림픽을 보러 왔으며 중국 주석인 후진타오가 주최한 오찬에 참석해서 이 현안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조지아 대표인 니노 살루크바체와 러시아 대표인 나탈리아 파데리나가 여자 10m 공기권총 경기에서 각각 동메달과 은메달을 땄을 때 이 일은 베이징 올림픽의 유명한 사건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살루크바체와 파데리나는 시상식이 끝난 뒤 서로 포옹을 하며 국적에 상관없이 기쁨을 나누었다. 테러도 올림픽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뮌헨 참사로 알려진 1972년에 서독 바이에른의 뮌헨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때의 사건은 테러리스트인 검은 9월단이 일으킨 사건으로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인질로 붙잡았다가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미숙한 진압으로 인해 인질 9명(선수 1명과 코치 1명은 인질로 잡기 이전에 살해), 테러범 5명, 독일 경찰관 1명이 사망했으며 이 진압 작전 이전에는 인질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애틀란타에서 열린 1996년 하계 올림픽 때는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Centennial Olympic Park)에서 폭발 사건이 일어나 2명이 죽고 111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 에릭 로버트 루돌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마라톤 역시 전쟁에서 유래한 것이다. 개인 혹은 팀으로 경기에 출전해서 1위, 2위, 3위를 한 선수는 메달을 받는다. 1912년까지는 우승자에게 순금으로 된 금메달을 주었으며 그 후에는 도금된 금메달을 준다. 하지만, 2010 동계 올림픽에서는 전자제품 부속품을 녹여서 넣었다. 이러한 경우처럼 순금 외에 다른 물질을 넣을 경우에는 순금이 반드시 6g 이상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 2위를 한 선수는 은메달을, 3위를 한 선수는 동메달을 받는다.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종목의 경우에는(복싱, 태권도 등) 3위를 구분하지 않고 준결승에서 패해서 3/4위전으로 간 선수들에게 모두 동메달을 수여한다. 189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메달이 2개만 수여됐는데 1위에게 은메달을 주었고 2위에게 동메달을 주었다. 이때 3위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의 메달 수여 방식은 1904년 하계 올림픽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8년부터는 4, 5, 6위를 한 선수에게는 인증서를 수여했다. 1984년 대회부터는 7, 8위를 한 선수에게도 인증서를 수여했다. 아테네에서 열린 2004년 하계 올림픽 때는 1, 2, 3위 선수에게 메달과 함께 올리브 화환도 같이 수여했다. 국가 올림픽 위원회(NOC)와 방송사에서는 자국의 메달 현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에서는 공식적으로 메달집계를 하고 있지 않지만, 비공식적으로 메달집계에 관해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메달집계는 현대 올림픽에서 성공한 올림픽 선수들을 알아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래의 표는 올림픽에서 개인 통산 다관왕을 한 상위 10 명의 선수들에 관한 표이다. 선수 성별 나라 종목 로고 올림픽 참가 기간 medal icon.svg 금 medal icon.svg 은 medal icon.svg 동 합계 남성 수영 100x100픽셀 2000년~2016년 26 3 2 31 여성 체조 100x100픽셀 1956년~1964년 9 5 4 18 남성 육상 100x100픽셀 1920년~1928년 9 3 0 12 남성 수영 100x100픽셀 1968년~1972년 9 1 1 11 남성 육상 100x100픽셀 1984년~1996년 9 1 0 10 남성 크로스 컨트리 100x100픽셀 1998~2014년 8 4 1 13 비르기트 프린츠 여성 카누 100x100픽셀 1980년~2004년 8 4 0 12 남성 체조 100x100픽셀 1968년~1976년 8 3 1 12 여성 수영 100x100픽셀 1992년~2004년 8 3 1 12 남성 수영 100x100픽셀 1984년~1992년 8 2 1 11 하계 올림픽 개최지. 한 번 개최한 국가는 초록색으로 나와있고 두 번이상 개최한 국가는 파란색으로 나와있음. 동계 올림픽 개최지. 한 번 개최한 국가는 초록색으로 나와있고 두 번이상 개최한 국가는 파란색으로 나와있음. } 올림픽 개최지는 해당 올림픽 개최 7년 전에 IOC 위원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개최지 선정에는 약 2년이 걸린다. 유치를 희망하는 도시는 우선 자국의 올림픽 위원회에 신청을 해야 한다. 만약 한 국가에서 두 도시 이상이 유치를 희망한다면, 한 국가당 한 도시만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규칙에 따라 내부적으로 후보 도시를 결정해야 한다. 후보 도시가 결정되면 후보 도시가 소속된 국가의 올림픽 위원회는 IOC에 개최 신청을 하고, 신청 후에는 올림픽 개최에 대한 질의 응답서를 보내야 한다. 이 질의응답서에서 신청한 도시는 올림픽 헌장을 준수하며 IOC 상임이사회에 의한 다른 규정들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이 질의응답서는 전문가들이 검토하여 신청 도시들의 잠재성과 계획을 평가한다. 이 전문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IOC 상임이사회에서는 신청도시 중에서 후보도시를 고른다. 후보도시로 선택되면 그 도시들은 IOC에 보내는 후보도시에 관한 문서에 그들의 계획을 더욱 상세하고 방대한 양으로 적어서 보내야 한다. 평가조사단들이 이 후보도시들을 평가한다. 평가조사단은 후보도시들을 방문해서 지역 관계자들과 회견을 갖고 경기장 시설을 세심하게 조사한 뒤 개최지 투표를 하기 한달전에 조사를 바탕으로 한 공식 보고를 한다. 회견을 하는 동안에도 후보도시들은 자신들이 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충분한 자금이 조달될 수 있는지 등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평가조사단의 업무가 끝나면 후보지의 국가 위원들은 IOC 정기총회에 참석한다. 이 총회에서 IOC 위원들은 올림픽 개최지를 선정하게 되며 후보지의 국가에 소속된 위원들은 자국의 후보지가 탈락하지 않는 이상 투표를 할 수 없다. 투표가 끝난후에 개최지로 선정된 곳의 유치위원회가 IOC와 개최도시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공식적으로 올림픽 개최도시(개최국)으로 인정된다. 2016년까지 올림픽은 23개국 44개 도시에서 열렸으며 유럽과 북아메리카대륙 이외의 대륙에서는 고작 8번 밖에 개최하지 못했다. 1988년 하계 올림픽이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것을 시작으로 그 후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올림픽이 4번이나 열렸으며, 이는 그 이전의 현대 올림픽사와 비교해보면 엄청나게 늘어난 수치였다. 2016년 하계 올림픽이 개최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는 남미에서 열리는 첫 번째 올림픽이다. 아직 아프리카에서는 올림픽이 한 번도 개최되지 않았다.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가장 많은 선수가 참여한 나라는 중국으로 639명이 참가했으며 그 다음은 미국과 러시아로 각각 596명과 455명이 참가했다. 미국은 5번의 하계 올림픽과 4번의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최다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이다. 영국은 2012년에 3번째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스는 하계 올림픽을 2번 개최한 국가이다. 동계 올림픽에서는 프랑스가 3번을 개최했으며 2024년 하계올림픽 개최예정으로 영국에 이번 두 번째로 한 도시에서 3번 올림픽 개최하며 하계올림픽3번 개최하였다. 동계, 하계 올림픽 각 3번씩 총 6번 개최로 미국 9번에 최다개최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이 개최한 국가 프랑스가 된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일본, 이탈리아는 2번씩 개최했다.일본은 하계,동계 각 2번씩 총 4번으로 미국,프랑스 다음 세번째로 많이 개최한 국가이다. 2010년에 밴쿠버에서 열린 2010년 동계 올림픽은 캐나다에서 열리는 두 번째 동계 올림픽이고, 동/하계 올림픽을 합쳐 캐나다에서 3번째로 개최되는 올림픽이다. 하계 올림픽 동계 올림픽 패럴림픽 청소년 올림픽 아시안 게임 월드컵 축구 대회 게이 게임스 국제 올림픽 위원회 공식 웹사이트 분류:국제 스포츠 경기 대회 분류:종합 스포츠 경기 대회 |
리눅스 문서화 프로젝트 ( The Linux Documentation Project , TLDP)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로 리눅스 관련 문서를 만드는 데 목표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엔 리눅스 해커들끼리 각자가 만들어 놓은 문서를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문서의 수준은 직업 시스템 어드민(admin) 등 숙달된 사용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초보자들이 따라할 수 있는 강좌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LDP는 최초 1992년 FTP 사이트로 시작되었고, 1993년에 MetaLab의 웹사이트로 옮겨졌다. 이 사이트는 리눅스에 관한 최초의 웹사이트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LDP는 475개 이상의 문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중 십여개는 일반 책의 분량이고, 이들 대부분은 오라일리 등의 컴퓨터 전문 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어 책으로 구입할 수 있다. LDP는 또한 사용자가 단계적으로 따라해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다수의 HowTo 문서 또한 제공한다. 문서의 목적은 매우 다양해서 특정 모뎀의 설정 같은 매우 구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네트워크 관리와 같은 광대하고 추상적인 것일 수 있다. 보안이나 네트워킹과 같은 넓고 추상적인 주제는 보통 책의 분량이 되는 안내서에서 다루어진다. LDP는 잦은 질문 목록 (FAQ), 메인 페이지 등의 문서들과 두 개의 웹진(리눅스 가제트, 리눅스 포커스)을 발행하고 있다. LDP 에서 제공하는 문서들은 거의가 GNU 자유문서 라이선스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무료로 배포할 수 있는 기타 라이선스를 따르는 문서도 있다. 현재의 라이선스 정책은 GFDL 이나 Open Publication License을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KLDP에선 LDP 문서를 한국어로 옮기고, 자체 리눅스 관련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 http://www.tldp.org -- 리눅스 문서화 프로젝트 TLDP HowTo Generator. 분류:리눅스 |
레비치비타 기호 (Levi-Civita symbol) 또는 치환 텐서 (permutation tensor)는 선형대수학과 텐서 미적분학에서 정의된 텐서로 수의 치환과 관련해 값을 주는 텐서이다. 이 기호는 이탈리아 수학자 툴리오 레비치비타를 따라 이름지어졌다. 레비치비타 기호의 모습 레비치비타 기호 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정의에서 보다시피 레비치비타 기호는 완전 반대칭이다. 레비치비타 기호는 크로네커 델타와 많은 관계가 있다. 3차원에서는 다음과 같은 관계들이 있다. ("축약된 입실론 성질") :(아인슈타인 표기법을 사용하면 ) 레비치비타 기호는 수학과 물리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선형대수학에서 두 3차원 벡터의 벡터곱은 이 기호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혹은, 더 간단히 쓰면 위 표기는 아인슈타인 표기법을 사용하면 훨씬 더 간단해진다 레비치비타 기호는 다음과 같이 고차원으로 일반화 될 수 있다. 크로네커 델타 분류:선형대수학 분류:텐서 분류:순열 |
인상주의 (impressionism, 印象主義) 또는 인상파 (印象派)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는 미술 사조이다. 인상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하였다. 1860년대 파리의 미술가들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클로드 모네의 유화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unrise )에서 비롯되었는데, 비평가 루이 르로이가 《Le Charivari》지에 기고한 비판에서 처음으로 쓰였었다. 인상주의 미술은 인상주의 음악과 인상주의 문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Monet, Impression, soleil levant.jpg|섬네일|250px|left|《인상, 해돋이》( Impression, Sunrise )|대체글=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세잔, 르누아르, 모리조, 기요맹 등은 1874년 4월에, 파리 카프신가(街)의 전 나다르 사진관을 회장(會場)으로 하여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회장에 우연히 모네의 풍경화인 《인상, 해돋이》가 있어, 그것을 들어 잡지 《샤리바리》의 비평가 르로아가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一黨)이라는 데에서, 인상파라고 야유한 연유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인상파의 전시회는 1886년 제8회까지 계속되는데, 최초에는 압도적인 매도(罵倒)로 시작하여 화가의 고투(苦鬪)가 계속되었다. 이윽고 고갱도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했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1874년 4월 25일 미술 비평가 르로이가 파리의 전시회에서 비판적인 뜻으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하며, 오늘날 서양 미술사에서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조로 쓰이고 있다. 인상주의는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하며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없는 사물의 인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포착해내기 위해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색채 표현에 있어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이용한 색채분할법을 사용하였다. 이와같은 인상주의는 회화에서의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더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상주의는 서양 미술사에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애호되는 화풍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상주의가 대중에게 커다란 호감을 주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꼽힌다. 인상주의 미술은 전통적인 그림의 주제와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림의 동기와 대상을 찾았다. 인상주의 미술은 사실주의 미술처럼 도시의 일상뿐만 아니라 프랑스 시골의, 특히 프로방스 지방의 햇살 아래의 수시로 변화 하는 풍경을 현장에서 직접 화폭에 음악으로써 생동감과 친근감을 주게 된다. 인상주의 화가는 빛과 색의 조화, 대상과 면의 구성을 나름대로 실험하였으며, 이는 고갱과 고흐, 세잔 등의 후기 인상주의로 이어져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등 현대 미술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툴루즈 로트렉 베르트 모리조 구스타브 카유보트 프란시스코 고야 장 프레데릭 바지유 분류:예술 사조 분류:프랑스의 미술 |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 (Διόνυσος) (Dionȳsos) (Dionysos, Dionysus) 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포도주와 풍요, 포도나무, 광기, 다산, 황홀경, 연극의 신이며, 죽음과 재생의 신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고 아리아드네의 남편이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 (Bacchus)에 해당한다. 로마 신화에서는 리베르라는 풍요의 신과 동일시 되기도 하였으며,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 프리기아 신화의 사바지오스와 동일시 되기도 하였다. 디오니소스의 초기 숭배 당시 모습은 수염을 기르고 로브를 입은 성인 남성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수염이 없고, 감각적이며, 발가벗고(혹은 반쯤 벌거벗은), 양성적인 모습의 젊은이로 묘사된다.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는 종종 그를 "여자같은" 혹은 "여성스러운 남자"로 묘사한다. 완전히 발달된 형태로, 그의 중심적인 숭배 이미지들은 마치 유명하고 문명화된 국경 너머의 어딘가에서 온 것처럼 그의 의기양양하고 무질서한 도착과 귀환을 보여준다. 그의 행렬은 거친 여성 추종자들(마이나스)과 발기 상태의 턱수염을 기른 사티로스들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원 중 일부는 티르소스로 무장하고 있으며 춤과 혹은 음악을 연주한다. 디오니소스는 전통적인 사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호자이자 도시의 종교로 대표되며, 따라서 그는 인간의 이성을 벗어나고 예측 불가능한 신의 행동에 기인할 수 있는 혼란스럽고 위험하고 예상치 못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 상징 동물은 표범, 사자, 호랑이, 염소, 황소, 여우, 뱀, 돌고래, 노새 등이며, 상징 식물은 포도, 사과, 무화과, 딸기, 아이비 등이다. 끝에 솔방울이 달려있고, 담쟁이 덩쿨로 둘러싼 티르소스라는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다른 한 손에는 술잔, 풍요의 뿔을 쥐고 있기도 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14편 325)에 따르면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시오도스 역시 신통기 940-942에서 세멜레를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로 전하고 있다. 이름의 어원은 디오스 (Διός, 제우스의 소유격) + 뉘소스 (νυσος - 학자에 따라 서는 σνυσος를 뒷뿌리로 잡기도 한다). 그러나 뉘소스가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치가 않다. 디오니소스의 유래 장소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일치된 의견은 없다. 미케네 문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테베에서 숭배된 신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는 에게 해 연안의 고대 그리스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새로운 계절의 활력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숭배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8세기를 전후로 고대 그리스 신화가 틀이 잡히면서 널리 알려지고, 디오니소스를 둘러싼 여러 가지 신화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디오니소스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오늘날 주로 에우뤼피데스의 비극 박카이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의 아들로 나온다. 헤라는 제우스의 내연녀인 세멜레를 무척 미워하였다. 헤라는 세멜레에게 복수하기 위해 유모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접근한다. 헤라는 세멜레로 하여금 자신의 애인이 정말 제우스가 맞는지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헤라의 속임수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본모습을 보여달라고 부탁했고, 스틱스 강에 맹세한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제우스가 신의 모습을 드러내자 세멜레는 공포에 떨며 그 광채에 타 죽어버린다. 세멜레는 제우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제우스는 타 죽어버린 세멜레의 자궁에서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꿰매 넣고 기른다. 달이 차고 허벅지에서 아이가 태어나자 제우스는 아이의 이름을 디오니소스 라 짓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가 따르는 크레타 신화에 의하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지하세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는 갓 태어난 디오니소스를 헤르메스에게 맡긴 뒤, 뉘사 산의 님프들에게 양육을 부탁했다고 한다. 제우스는 님프들에게 디오니소스를 여자처럼 키우라고 부탁하였다. 제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정성껏 돌봐준 뉘사 산의 님프들을 휘아데스 성단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헤르메스(혹은 제우스)가 디오니소스에게 여자 아이의 옷을 입히고 세멜레의 언니인 이노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이노에게 양육을 부탁하며 헤라의 눈을 피하고 디오니소스를 소녀처럼 키우라고 말한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말대로 이노의 집에서 여장을 하고 소녀처럼 길러진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헤라가 이노의 남편인 아타마스에게 광기를 불어 넣는다. 아타마스는 평소에 사냥을 즐겼는데, 집에 큰 사슴이 들어온 것을 보고는 화살을 쏴 죽여 버렸다. 그러나 그가 죽인 것은 아들 레아르코스였다. 광기에 사로잡혀 제 아들을 사슴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광기에 미쳐버린 아타마스는 레아르코스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는 아내인 이노와 아들 멜리케르테스마저 죽이려고 달려 들었다. 이노는 아타마스로부터 도망쳐 멜리케르테스를 안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어버린다. 일설에 의하면 제우스는 아들 디오니소스를 키워준 보답으로 바다에 몸을 던진 이노를 레우코테아 여신으로, 멜리케르테스를 팔라이몬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설에서는 이노도 광기에 미쳐버려 끓는 물이 든 냄비에 멜리케르테스를 넣고 죽인 뒤, 그 시신을 품고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한편 디오니소스는 새끼 염소로 변신하여 정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헤르메스에 의해 구출 되었다는 설도 있고, 자신도 광기에 미쳐 방황하다 여신 레아에 의해 광기가 풀렸다는 설도 있다. 디오니소스와 암펠로스 - 프란시스코 라이거티 (1782년) 리지아의 왕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의 스승이면서 양부인 실레노스를 잘 보살펴준 대가로 디오니소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는다. 디오니소스가 미다스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미다스는 자신의 손이 닿은 것은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디오니소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 요청을 승낙했고 미다스는 그 결과에 너무나 만족해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미다스가 음식을 먹기 위해 손을 대는 순간 음식은 황금으로 변해버렸고, 자신의 부하와 딸 마저 황금으로 변하고 말았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가서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에게 팍톨루스 강에 몸을 씻으면 원상태로 돌아갈 것이라 말하였고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의 말대로 팍톨루스 강에 가서 몸을 씻자 황금으로 변하는 일이 사라졌다. 그 후 미다스는 부와 영화를 싫어하였고 시골에 살면서 들의 신인 판의 숭배자가 되었다. 암펠로스는 실레노스와 님프가 정을 통하여 낳은 젊은 사티로스로, 디오니소스가 짝사랑한 미소년이다. 신화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디오니소스는 암펠로스라는 같은 나이 또래의 미소년 사티로스와 어울렸다. 암펠로스를 너무나도 사랑한 디오니소스는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암펠로스를 자신의 애인이라고 소개시키며 그가 가니메데스보다도 훨씬 아름답다고 비교하기까지 했다. 디오니소스와 암펠로스는 씨름을 하면서 서로의 몸을 스치며 탐하기도 했다. 디오니소스는 그와 씨름을 할 때마다 일부러 져주면서 그의 몸에 깔리는 느낌을 즐겼다. 디오니소스는 언제나 암펠로스와 함께 사냥을 다니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다만 성난 수소를 건드리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울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수소를 발견한 암펠로스는 디오니소스의 당부를 잊고 수소 목에 굴레를 걸고 수소를 타기 시작했다. 이에 질투심을 느낀 셀레네는 등에떼를 내보내 수소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고, 수소는 암펠로스를 언덕 위에 내던져 버렸다. 암펠로스는 결국 바위에 부딪혀 죽고 말았다. 암펠로스의 시체를 발견한 디오니소스는 그를 팍톨루스 강가 주변에 묻어 주었다. 또한 암펠로스의 무덤 위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도나무를 심어 주었다. 디오니소스는 사랑하는 애인이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도 따라 죽고 싶었지만 불멸의 신이어서 그를 따라 하이데스로 갈 수가 없었다. 슬픈 디오니소스는 계절의 여신 호라이의 위로를 받고 기운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음날 무덤에서 자란 포도나무가 익자 디오니소스는 포도를 따 즙을 짰다. 디오니소스는 하룻동안 숙성시킨 포도즙을 여러 사람에게 맛보게 하였고 그렇게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 되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를 암펠로스라고 부르며 온 세상에 포도나무의 종자를 퍼트렸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가 사라진 것을 알고 몹시 슬퍼하였는데 이때 낙소스에 잠시 들른 디오니소스가 나타나 슬퍼하는 아리아드네를 위로하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결혼하였다. 헤시오도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승에서 테세우스가 낙소스 섬에 잠든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떠난 후 디오니소스가 그녀를 발견하여 결혼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몇몇 전승에서는 디오니소스가 테세우스에게 나타나 아리아드네를 낙소스 섬에 두고 떠나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에 대해 싫증이 나서 임신한 그녀를 섬에 버리고 갔다고 한다. 오리온은 키오스 섬의 왕 오이노피온의 딸 메로페와 결혼하려 하지만 왕이 결혼을 승낙 하지 않자 강제로 메로페를 차지하려 한다. 이에 오이노피온은 디오니소스의 도움으로 오리온을 술을 먹여 깊이 잠들게 하고 그의 눈을 멀게 한다. 일설에 의하면 오이노피온은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올림포스의 신이 된 디오니소스는 죽은 어머니(혹은 아내 아리아드네)를 되살리고 싶어했다. 디오니소스는 하이데스를 찾기 위해 아르고스 레그네 부근의 알키오니아 호수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폴림노스라는 양치기 노인을 만났다. 폴림노스는 디오니소스가 지하세계 입구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때 폴림노스는 디오니소스에게 길을 알려준 대신 자신과 성관계를 나눌 것을 요구하였다. 휘기누스의 천문학에 따르면 폴림노스가 디오니소스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폴림노스에게 저승에서 어머니를 구해오는데 성공한다면 소원을 꼭 이루어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후 디오니소스는 지하세계에서 죽은 어머니를 구해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가 돌아왔을 때 폴림노스는 죽어 있었다. 폴림노스의 죽음을 슬퍼한 디오니소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화과나무의 가지를 남근 모양으로 깎아 그의 무덤에 앉은 채 성행위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에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종교가 있었다. 오르페우스교와 깊은 관련을 가진 이것은 주로 부녀자들이 살아있는 산짐승이나 가축, 혹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일종의 광란에 빠진 상태에서 이 제물들을 산채로 뜯어먹고 그 피를 마셨다고 한다. 그리스의 비이성적인면을 보여주는 디오니소스 교는 현대 와서 고대 그리스의 연구가 지속됨에 따라 실체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Ariadne Louvre CA929.jpg|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꽃병 그림, 기원전 400-375년, 루브르 박물관, 테베. Museum Mosaik Dionysos 06.jpg|표범을 타고 있는 날개 달린 디오니소스, 델로스의 디오니소스의 집 (House of Dionysus), 기원전 2세기경 모자이크 Giovanni Domenico (1692-1768), Bacchus cum Ampelo (post 1731-pre 1766).jpg|디오니소스와 암펠로스 - 지오바니 도메니코 (1692-1768년) 오르페우스교 바카날리아 디오니소스 극장 마이나스 -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 오시리스 Theoi Project, 올림포스 신 디오니소스에 대하여 분류:그리스 신화의 남신 분류:풍요의 신 분류:올림포스 12신 분류:술의 신 분류:죽음과 재생의 남신 분류:그리스 지하신 분류:테베 분류:미케네 |
타르수스 (, 는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 이름으로서, 오늘날 터키의 중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지중해로부터 16km 내륙으로 들어와 있다. 한글성서에서는 타르소 (공동번역), 다소 (개역한글판)으로 음역되어 있다. 타르수스는 고대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하나인 헤티트 문명의 영향 하에 건설된 도시로서 고고학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0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는 천연적 항구 도시로서 지중해의 물물 교환과 교통 왕래를 통하여 빨리 발전하였으며, 기원전 7세기를 전후로 고대 그리스인이 소아시아 지역에 활발히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할 무렵 이들의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타르수스는 킬리키아 지방의 행정 수도 역할을 하였으며, 도시의 문화적 수준이 심지어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 갔다고 전해진다 (스트라본, 지리서 14. 673)이 도시는 스토아 학파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디오게네스의 후계자인 아르케데무스(Archedemus), 기원전 3세기 초 스토아 학파의 수장이던 제논(이 제논은 제논의 역설의 그 제논이 아님), 기원전 2세기 경 스토아 철학의 수장이전 안티파터(Antipater)를 비롯하여 Nestor, Athenodorus 등을 배출하였다. 한 때는 역시 스토아 철학자인 키케로가 총독으로 있기도 하였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배로 지중해를 건너 키드누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타르수스는 또한 사도 바울로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실례로 사도행전의 바울로 전승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 자신도 타르수스 출신임을 밝힌 적이 있다. 분류:터키의 지리 분류:터키의 역사 분류:킬리키아 분류:셀레우코스 제국의 식민지 |
나르세스 (Narses, 478년 ~ 573년)는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의 2명의 명장 중 하나이다. 나르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한 환관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527년 황제가 됨과 함께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52년 벨리사리우스를 동고트 왕국 전선에서 해임하고 당시 74세였던 나르세스를 후임자로 임명했고, 나르세스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타기나이의 전투에서 토틸라를 괴멸시켰다. 이듬해인 553년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에서 테이아 왕의 나머지 동고트 군대를 상대로 싸워 승리했고, 554년 프랑크족과 알라마니족을 알프스 산맥 너머로 몰아냈다. 이후 남은 동고트족은 나르세스에게 항복했고 이탈리아는 제국령으로 돌아왔다. 나르세스는 그대로 이탈리아에 총독으로 눌러 앉았으나, 주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진 못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아올 것을 명령받았으나, 이탈리아를 떠나길 거부하고 나폴리 근처의 작은 마을로 은퇴했다. 말년의 나르세스의 삶에 대해서는 몇 가지 확실치 않은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나르세스가 비밀리에 568년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도록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때 90세의 나르세스는 다시 황제에게 군권을 위탁받아 롬바르드족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겠다고 청원을 내지만 거부당했다. 나르세스가 죽은 573년에 이르러 이탈리아는 절반 이상이 롬바르드족의 손에 이미 넘어가 있었다. 분류:478년 태어남 분류:573년 죽음 분류: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분류:비잔티움 제국의 환관 분류:육군 군인 분류:6세기 아르메니아 사람 |
히로시마 현 ()은 일본 혼슈 섬 서남부의 주고쿠 지방에 있는 현이다. 현청 소재지는 히로시마 시이다. 히로시마 지역은 빈고 국과 아키 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일본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히로시마 시는 주고쿠 지방의 전통적인 중심지이자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까지 모리 씨의 근거지였다. 에도 시대에는 히로시마 번(藩)이라 하여 다이묘(大名) 아사노 씨()가 지배하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4분, 히로시마 시에 미국에 의해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 현은 주고쿠 지방 중앙에 놓여있고 세토 내해 맞은 편으로 시코쿠와 접한다. 현의 대부분은 시마네현을 향해 달리는 산맥으로 이루어져있으나 강과 해안가에 비옥한 평야가 발달해있다. 히로시마 현은 또한 세토 내해의 많은 작은 섬들을 포함한다. 내해 덕분에 히로시마의 기후는 온화하다. 히로시마 현의 지도 히로시마 시() * 나카 구() * 니시 구() * 미나미 구() * 사에키 구() * 아키 구() * 아사키타 구() * 아사미나미 구() * 히가시 구() 구레 시() 미요시 시() 미하라 시() 다케하라 시() 아키타카타 시() 에타지마 시() 오노미치 시() 오타케 시() 쇼바라 시() 하쓰카이치 시() 후쿠야마 시() 후추 시() 히가시히로시마 시() 세라 군() * 세라 정() 아키 군() * 사카 정() - 구마노 정() - 가이타 정() - 후추 정() 야마가타 군() * 아키오타 정() - 기타히로시마 정() 진세키 군() * 진세키코겐 정() 도요타 군() * 오사키카미지마 정() 히로시마 현의 주요 산업은 자동차(마쓰다는 히로시마 현에 본사를 두고 있다)와 조선(구레 시는 일본 해군의 주요 해군 기지 중 하나이다)이다. 히로시마 공항 서일본 여객철도 * 산요 신칸센 * 산요 본선 * 구레 선 * 가베 선 * 게이비 선 * 후쿠엔 선 * 기스키 선 * 산코 선 히로시마 전철 * 본선 * 우지나 선 * 에바 선 * 하쿠시마 선 * 히지야마 선 * 요코가와 선 * 미야지마 선 이바라 철도 * 이바라 선 히로시마 고속 교통 * 히로시마 신교통 1호선 고속도로 * 산요 자동차도 * 주고쿠 자동차도() * * ** ** ** ** * 국도 * 국도 2호선 * 국도 9호선 * 국도 31호선 * * * * * * * * * * * * * * * * 히로시마 현에 연고지를 둔 스포츠 팀은 다음과 같다. 축구 산프레체 히로시마(히로시마 시) 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시) 원폭돔 히로시마 성 이쓰쿠시마 신사 히로시마 현 공식 홈페이지 |
동고트인 ()은 동부 게르만족 중 하나인 고트인―다른 일파는 서고트인이다―의 일파(一派)로서, 로마 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민족이다. 이들은 타키투스 시대에 비스와 강 하류(下流)지방에 단일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3세기까지 동남방으로 이동한 고트인 가운데 흑해 서북안(西北岸)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일파이다. 4세기 후반 헤르만리크 밑에서 전성기를 이루고 370년경 동방으로부터 이동한 훈족의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아틸라의 죽음에 의하여 훈 제국이 와해되자 독립하여 457년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어서 483년 테오도리쿠스 대왕 아래서 다키아, 모에시아로 옮기고, 488년 이탈리아에 들어가 전(全)반도를 정복, 동고트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동고트 왕국은 552년 동로마에 의해 멸망당했다. 분류:고대 게르만족 분류:고트인 |
도쿠가와 이에야스 (, 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센고쿠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향토삼영걸로 불린다. 가계는 미카와의 고쿠진 마쓰다이라 씨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을 지휘하였으며, 승전 이후 에도 막부를 개창하여 첫 쇼군(재임 1603년 ~ 1605년)이 되었다. 1605년 3남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다음에도 오고쇼의 자격으로 슨푸에 머무르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후에는 닛코 동조궁에 묻혔으며, 동조대권현 ()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성 이에야스는 1543년 1월 31일 (와레키() 덴분 11년 12월 26일) 미카와 국 오카자키 성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로, 아버지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이며 어머니는 가리야 성의 성주인 미즈노 다다마사(水野忠政)의 딸 오다이노가타()이다. 이에야스가 태어났을 때에는 각각 열일곱 살과 열다섯 살의 젊은 나이였다. 당시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는 히로타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살해당한 모리야마의 변 사건이 발생한 후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쓰다이라 씨가 지배하던 미카와 국 동부는 이마가와 씨가 지배하고 있었고, 서부는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히데가 계속 노리던 상황이었다. 이에야스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1544년 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가 죽고 뒤를 이은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친(親)오다 정책을 유지하면서 가신의 탄핵으로 히로타다가 오다이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1548년에는 히로타다의 숙부인 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씨와 내통하던 사카이 다다히사 등 중신들과 손잡고 히로타다를 오카자키 성에서 몰아내려는 모반을 일으켰고 오다는 미카와 국을 더욱 빈번하게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히로타다는 이마가와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고 당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당시 여섯 살이던 이에야스를 슨푸(駿府)에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히로타다는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접한 오다 노부히데는 아쓰미 반도에 위치한 다하라 성주이자 이에야스의 의붓 외조부 인 도다 야스미쓰()를 이용하여 오와리 국 아쓰타(熱田)로 납치하였으며, 그 대가로 1,000간몬 을 주었다. 노부히데는 이에야스를 인질로 삼아 히로타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히로타다는 강경하게 거절하였다. 강경한 태도를 들은 이마가와 씨는 마쓰다이라 씨에 지원을 약속하였고, 노부히데도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고 아쓰타 신궁에 있던 이에야스를 나고야(名古屋) 반쇼지()에 가두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오와리 국에서 2년 동안 인질 생활을 했는데, 오다 씨의 대접은 의외로 관대했다고 한다. 한편 미카와 국에서는 히로타다가 1549년 가신에 의해 살해당하고, 마쓰다이라 씨가 오다 씨와 손잡을 것을 우려한 이마가와 씨가 대관을 보내 마쓰다이라 씨와 그 가신들의 영지를 전부 몰수하고, 가신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 스루가로 보내는 일이 발생하였다. 또한 이마가와 씨는 같은 해 참모인 다이겐 셋사이의 헌책에 따라 안쇼 성을 공략하여 성주 오다 노부히로() 와 이에야스를 교환하였지만, 이에야스를 오카자키가 아닌 슨푸로 호송하였다. 이에야스는 슨푸의 다카쇼(鷹匠) 부근에서 8세부터 19세까지 인질로서 생활하였다. 그 동안 그는 오다이의 어머니로 비구니가 된 겐오니()에게 양육되었으며, 셋사이를 스승으로 섬기며 6년 간 학문과 병법을 배웠다. 1556년, 15세가 된 이에야스는 관례를 올림과 동시에 관례의 후견인이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은 마쓰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라 불리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에야스는 법요식(法要式)의 명분으로 미카와 국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미카와 국은 이마가와의 성주 대리와 장병들에 의해 가혹한 수탈을 당하고 있었다. 또한 이에야스의 가신과 장병들은 이마가와 씨의 전투에서 최전방에 강제로 나섬에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등 홀대를 받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의 감시 하에 오카자키 성에서 미카와 무사들과의 대면을 가졌고, 이를 계기로 히로타다의 옛 부하였던 도리이 다다요시는 필요할 때 사용하라며 자택에 숨겨두었던 쌀과 엽전 다발을 이에야스에게 주었다. 16세가 된 이에야스의 결혼 상대는 이마가와 씨의 가신 중 한 명인 세키구치 지카나가의 딸로, 요시모토의 조카이기도 했던 쓰루히메(후의 쓰키야마도노)였다. 이 결혼은 혼인 관계를 통해 이에야스가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기 위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계획이었다. 이에야스의 생애 첫 출전은 결혼한 이듬해였던 1558년 2월 5일에 있었다. 그의 임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측으로 넘어간 스즈키 시게타쓰()가 다스리고 있던 미카와 국 서부의 데라베 성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방화 작전으로 데라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히로세 성·고로모 성·이호 성에서도 같은 방화 전법으로 오다 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오다카 전투에서는 밤을 틈타 군량미를 전달하기 위해 기습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칼을 내리고, 야마나카의 땅을 봉토로 주었다. 또한 승전의 공으로서 이에야스는 개명을 요청하여, 자신의 할아버지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 모토야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1560년, 이에야스의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에 도취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5,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 씨의 본거지인 기요스 성을 포위하였으나, 곧 오케하자마 산으로 옮기는 빈틈을 보였고, 결국 기습을 당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전투 중 모리 요시카쓰에게 죽음을 당했다. 한편 이마가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군 중 가장 뒤늦게 적지를 탈출했지만, 노부나가의 추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카자키에 들어온 후에도 성에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다이주 사(大樹寺)에 머물러있다가, 5월 23일 오카자키 성의 조다이였던 미우라 고즈케노스케가 슨푸로 돌아간 후 오카자키 성으로 입성함으로써 인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몇년 간 이에야스는 독립을 선언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며, 이마가와 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와리 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다 씨의 관심이 소홀했던 미카와 국 서부의 오다 씨 성채들을 자주 공격하였다. 이처럼 이에야스는 혼다 다다카쓰, 이시카와 가즈마사, 고리키 기요나가,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을 앞세워 마쓰다이라 씨의 확장에 몰두하다가, 1561년 이마가와 씨를 배신하였다. 한편 노부나가는 미노 국의 사이토 요시다쓰와의 전쟁을 앞두고 미즈노 노부모토에게 이에야스 측과의 교섭을 의뢰했고, 미즈노의 중재 하에 이에야스는 1562년 기요스 성에서 비밀리에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기요스 동맹은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야스가 오다 씨와 비밀 동맹을 결성한 것을 알아챈 이미가와 씨의 계승자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이에야스를 소환하려 했으나, 이에야스가 병을 핑계로 오려 하지 않자 분노하여 미카와 중신들의 처자를 기둥에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磔刑)이라는 가혹한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는 이마가와 씨의 중요한 일족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자식들은 죽이지 못했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마쓰이 다다쓰구 등에게 명해 니시고리 성을 공격해 이마가와의 측근으로 요시모토의 처남이었던 우도노 나가테루의 두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 우도노를 슨푸에 잡혀 있는 이에야스의 가족과 교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이에야스는 장남의 이름을 노부나가의 이름에서 딴 노부야스라 칭하고,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와 정략 약혼을 했으며, 7월에는 모토야스라는 이름을 이에야스(家康)로 바꾸어 이마가와 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였다. 한편 조구 사, 쇼만 사, 혼쇼 사 등 3대 사찰을 중심으로 미카와의 일향종이 벼의 징수 문제로 잇키를 일으켰다. 이에야스는 사사키(佐崎)에 있는 조구 사에서 사사키 성주 스가누마 사다아키에게 비축을 위한 군량미를 징수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스가누마는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수확이 이루어지던 조구 사에서 억지로 벼를 징수해 갔고, 이에 조구 사에서는 혼쇼 사와 쇼만 사에 격문을 보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야스는 일향종의 잇키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데, 이 때문에 이에야스의 가신 중 사카이 다다나오, 기라 요시아키, 아라카와 요시히로, 하치야 한노조 등, 일향종을 따르는 이들이 대부분 적으로 돌아서 잇키에 가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때 이에야스는 조총탄을 두 발이나 맞았으나 갑옷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잇키는 1563년 2월 이에야스가 주동자 시쓰다 사쿠주로를 죽이고, 주동자를 추방한 다음 가담한 가신들을 용서함으로써 끝났는데, 이후 이에야스는 미카와 국 내의 일향종 사원을 전부 부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내정을 어느 정도 정비한 후 마침내 이마가와 씨의 본거지를 치기로 했다. 이에야스는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명하여, 미카와 국 동부에 있는 이마가와 씨의 최대 거점인 요시다 성을 공략하여 점령하도록 했다. 그 직후에는 혼다 히로타카가 다하라 성을 점령하며 미카와 국 동부에서 이마가와 씨를 완전히 몰아내 미카와 국을 통일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에야스는 이시카와 이에나리와 사카이 다다쓰구를 가로(家老)로 임명함과 동시에 각각 미카와 국의 서부와 동부의 지배를 맡겼다. 또한 혼다 시게쓰구, 고리키 기요나가, 아마노 야스카게를 부교(奉行)로 임명하였다. 통치 체제를 정비한 후 이에야스는 다시 이마가와 씨의 영지인 도토미 국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토미 공략은 오다 노부나가 -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 이마가와 우지자네 간의 복잡한 동맹 관계로 인하여 주춤하였다. 그 동안 이에야스는 1566년 칙허에 따라 성씨를 세이와 겐지 계통의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종5품 미카와노카미 관직을 받았다. 또한 다케다 신겐의 동맹 파기를 이용해, 이에야스는 신겐과 이마가와 씨의 영지를 두고 오이 강을 경계로 분할한다는 이른바 가와기리의 약정을 맺어 동맹을 결성하였다. 다케다 신겐은 협정에 따라 1568년 12월 슨푸 성을 점령하고, 엔슈()를 공격하고 이에야스는 이듬해 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신겐의 배신에 따라 본성을 오카자키에서 히쿠마로 옮겨, 하마마쓰 성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가케가와 성까지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추적하여 그를 처가가 있는 이즈 국으로 낙향시켜 사실상 이마가와 씨를 멸망시키며 도토미와 미카와의 전역을 확보한다. 한편 1568년 이에야스의 동맹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 국에서 가장 인접한 야마토 국을 획득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교토로 입성해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570년 노부나가가 에치젠 국과 오미 국을 공격할 때 이에야스도 참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퇴각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노부나가는 같은 해 6월에 다시 오미와 에치젠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를 틈탄 다케다 신겐의 교토 침공 시도를 막기 위해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다시 진군, 아자이 나가마사·아사쿠라 요시카게와의 아네가와 전투, 신겐과의 미카타가하라와 나가시노 전투를 거치며 입지를 크게 넓혀갔다. 비록 이 과정에서 쓰키야마도노와 아들 노부야스를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 이에야스는 1580년 간토의 호조 씨와 다케다 씨 간의 동맹 관계 파기를 이용하여 도토미 국 동부를 점령하였다.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 국 일대를 점령하자, 1582년 호조 씨를 포섭하여 오다, 도쿠가와, 호조가 동시에 가이 국을 공격하여 4월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이에야스는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등 세 개의 구니를 장악했다. 노부나가 6월, 오다 노부나가와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할복하는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면서 같이 초청받았던 이에야스가 서둘러 미카와 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이가 국 닌자 출신인 핫토리 한조와 교토의 대상인인 자야 시로지로의 도움을 받았다. 자야 시로지로는 이에야스에게 혼노지의 변을 처음으로 알렸고, 핫토리는 고카(甲賀)의 다라오 등 다른 닌자들과 힘을 합쳐 이에야스를 이세 국의 시로코 해변까지 경호하였다. 오다 사후 이에야스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수를 쳐 오사카 부근의 야마자키(山崎)에서 아케치를 죽이자 단념하고 철수하였다. hideyoshi.jpg|200픽셀|섬네일|왼쪽|도요토미 히데요시 한편 히데요시는 아케치를 죽인 후 기요스에서 두살의 오다 가문의 적손인 산포시()를 앞세우며 사실상 오다의 세력을 계승하였다. 산포시의 계승에 불만을 품은 시바타 가쓰이에는 히데요시가 또다른 오다 씨의 계승 경쟁자였던 오다 노부타카를 몰아내자 이에 반기를 들어 히데요시와 시즈가타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시바타 세력이 괴멸되자, 이에야스는 남은 반 히데요시 세력인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와 손잡았다. 전투가 벌어진 고마키 산 (아이치현 고마키 시 소재) 시즈가타케 전투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회유할 목적으로 조정을 통해 그에게 정4품 하계 좌근위권중장(左近衛權中將) 벼슬을 제수했는데, 이는 종5품 하계였던 히데요시보다 더 높은 직위였고, 노부카쓰와는 같은 직위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했고, 히데요시가 종3품인 참의(參議)로 이에야스를 천거하자 오히려 화를 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유능한 세 중신에 대한 모략을 퍼뜨려, 노부카쓰가 중신들을 죽이게 하였으며, 이어서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노부카쓰 진영을 동요하게 하였다. 노부카쓰가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1584년 3월 이에야스는 오다 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에야스는 출전에 앞서, 아키 국의 모리 데루모토,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 엣추 국의 삿사 나리마사 () 등과 동맹을 맺어 히데요시의 배후를 교란하게 하도록 미리 약속을 해두었고, 히데요시도 이에 맞서 시코쿠의 센고쿠 히데히사, 히젠 국의 우키타 히데이에, 가가 국의 마에다 도시이에를 각각 모리, 조소카베, 삿사와 맞서게 하는 등 철저하게 대비하였다. 이에야스는 같은 시기 미노 국 오가키(大垣)의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가 사위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와 더불어 이누야마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마키 산에 진을 친 후 하구로에서 모리 나가요시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마키 산 북쪽의 가쿠덴()에 진을 치고,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카쓰의 연합군과 장기적으로 대치하였다. 같은 해 4월 9일 이에야스의 선제 기습으로 나가쿠테에서 히데요시의 선봉대가 궤멸당하자 다시 전투는 장기 지구전으로 바뀌었고, 11월에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카쓰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이에야스가 계속 싸울 명분이 사라지자 차남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강화 이후의 냉전 과정에서 전부터 히데요시와의 우호 관계를 건의해 오던 중신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의 설득을 받아 히데요시 측으로 출분하면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히메 와의 정략 결혼을 거쳐 1586년 히데요시에게 형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고, 복종을 맹세하였다. 신종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시코쿠와 규슈를 정벌하는 동안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를 하마마쓰에서 슨푸로 옮겼다. 이에 앞서 1585년 이에야스는 슨푸에 성을 쌓는 공사를 시작했었다. 1590년, 시코쿠와 규슈를 완전히 평정한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의 야망을 완수하기 위해, 간핫슈()·오우() 를 공격하기에 앞서 이에야스와 함께 오다와라(小田原)의 고호조(後北條)에게 신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호조는 히데요시에게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고 군비를 증강하며, 히데요시의 가신 사나다 마사유키의 성을 점령하는 등 계속 히데요시를 자극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20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다와라로 출격하였으며, 이에야스는 2만 8,000여명의 선발대를 이끌며 가장 먼저 오다와라로 진격하였다. 호조는 오다와라 성 안에서 계속 농성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주변의 보급로와 연락망을 봉쇄하는 고사작전을 통해 호조를 압박하였다. 또 호조가 히데요시의 군대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던 중에 "아무리 논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토론"을 일컫는 오다와라 평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마침내 7월 5일,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켜 간토를 손에 넣고, 오우의 아이즈()까지 점령해 오우 지역의 다이묘를 복종시켜, 100여년의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 통일을 완수하였다. 고쿄인 에도 성의 이중교와 후시미 망루 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최대한 떨어뜨리기 위해 오다와라 성에서 이에야스에게 선약했던 대로 도카이도의 5개 국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간핫슈 지역과 이즈(伊豆)를 내렸다. 그리하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의 결과를 받아들인 이에야스는, 오다와라나 가마쿠라가 아닌, 간토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던 호조의 일개 출장소 에도()로 명절인 핫사쿠()였던 1590년 8월 1일 입성하였다. 에도로 입성하면서 이에야스는 불안감을 느끼던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겠다며 에도 성에 입성할 때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히토에()를 입게 하였다. 또한 입성 닷새 후 주민 모두에게 쌀을 무상으로 배급하였다. 입성 이후, 이에야스는 녹봉 배치를 제일 먼저 시작하였다. 우선 아직 자신에게 적대적인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최측근인 도쿠가와 사천왕에게 외곽 지역의 10만여석 이상의 땅을 주었고, 그 내부에도 미카와 시절부터 가신으로 일해 온 후다이 다이묘를 배치하여 이중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또한 호조와 다케다의 유신(遺臣), 지역 토호들에게는 무리한 압력을 피하고 일정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주었다. 또한 자신의 직할지 1백여만석에는 호조, 다케다, 이마가와의 유신들에게 다이칸(代官)이란 지방관직을 주어 행정을 관리하도록 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이 다이칸들을 지휘하는 다이칸카시라(代官頭)에는 이나 다다쓰구, 오쿠보 나가야스 등의 기술·행정 전문가들이 등용되었다. 이러한 효율적 제도와 다른 지역과 산으로 격리된 간토의 지리적 특성이 맞물려 간토를 지배하던 이에야스는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를 두고 나중에 "이에야스는 후퇴하여 제국을 건설했다"는 속담이나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에도 건설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다른 지방의 다이묘들 중간에 서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1590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 간의 화해를 주선하여 성공시켰고, 다테와 충돌하던 가모 우지사토()가 다테가 오슈 각지의 토호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이에야스는 다테에게 서신을 보내 토호들을 진압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징계에서도 그들을 변호하여 신망을 얻었다. 1592년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인도 정복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완수하기 앞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며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히젠 국에 새로 축조해 놓은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할 것을 명령하고 나고야 성을 조선 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이에야스도 동원령을 받아 1592년 병력을 이끌고 나고야 성으로 출진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출병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일본에 계속 머무르는 동안 두 차례 출병했던 일본군은 후반으로 갈 수록 고전을 면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섰던 다이묘들은 엄청난 비용과 군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와중에 이에야스는 일본 내부의 세력 판도가 조선을 침략하는 데 앞장선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한 무장 다이묘 출신의 무공파와 일본군의 점령지에서 행정사무를 맡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행정관 출신의 문관파로 나뉘자, 무공파의 편을 들며 인망을 모으고 있었다. 1598년 히데요시는 죽음을 앞두고, 어린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할 다섯 다이로와 다섯 부교를 뽑아 정책을 결정하도록 하였는데, 이에야스는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키타 히데이에와 더불어 다섯 다이로로 뽑혔고, 집행 기관인 다섯 부교에는 문관파인 이시다 미쓰나리, 아사노 나가마사, 마에다 겐이, 나쓰카 마사이에, 마시타 나가모리가 뽑혔다. 또한 이에야스와 도시이에는 각각 후시미에서의 정사 담당과 오사카에서의 히데요리 보좌라는 중대한 임무가 더 맡겨졌다.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다섯 다이로들에게 늦게 얻은 유일한 혈육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다이묘들 간의 혼인 관계 맺기를 금지했던 것을 무시하고 여러 다이묘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며 입지를 넓혀갔다. 그러자 같은 다이로였던 마에다 도시이에를 비롯한 나머지 다이로들과 부교들이 이에야스를 비난하면서 도요토미 가의 가신들은 이에야스를 따르는 무리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따르는 무리로 나뉘게 되었지만 도시이에가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와 화해함으로써 직접적인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99년 이시다 미쓰나리(石田光成)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 오던 도시이에가 세상을 떠나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호소카와 다다오키에 집에 침입하여 호소가와 다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를 죽게 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한 무공파가 미쓰나리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으로 도망쳐 온 미쓰나리를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으로 무사히 보내주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와야마 성에 도착하는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공파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직을 일시적으로 파직시켰다. 한편, 아이즈로 돌아간 우에스기 가케카쓰가 새로운 성을 쌓고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이듬해인 1600년 이에야스는 가케카쓰에게 진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가케카쓰의 가로인 나오에 가네쓰구는 이에 대해 "각 구니의 풍습에 지나지 않는다"며 반박하였고 이에야스는 즉각 각 다이묘들에게 아이즈 정벌을 명했다.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들을 이끌고 긴키를 출발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미쓰나리는 반도쿠가와 파를 결집시키기 위해 사이고쿠 다이묘들에게 격문을 돌려 거병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모리 데루모토()를 총 대장으로 하여 우키타 히데이에, 조소카베 모리치카(),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오타니 요시쓰구 등 10만 4천여명의 병력이 결집하였다. 이렇게 결성된 서군(西軍)은 곧 이에야스의 근거지인 후시미 성을 함락시키고 미노 국으로 진출하여, 8월 11일 오가키 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서군이 오가키를 점령하기 전인 7월 24일 시모쓰케 국 오야마(小山)에서 이미 미쓰나리의 거병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동군(東君)을 결성하고, 9월 14일에 오가키 성 북쪽의 가쓰야마에 본진을 구축하였다. 또한 동군의 본대가 도카이도()를 거치는 동안 이에야스는 자신의 3남인 히데타다에게 3만 8천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카센도를 거쳐 오도록 하였으나 히데타다의 군대는 중간에 시나노 국 우에다(上田)의 사나다 마사유키와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여 정작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전투를 그린 병풍. 한편 동군이 9월 14일에 진을 구축하자, 서군은 오가키 성을 빠져나와 서쪽의 세키가하라로 이동하였다. 이는 동군을 세키가하라의 비좁은 분지로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서군은 세키가하라에서 반월 형태의 진을 치고 동쪽에서 일렬종대로 진격해오는 동군을 일방적으로 포위해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미 이에야스는 서군쪽의 지휘체계가 이에야스 자신의 명령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군과는 달리 통합되지 못하고 서군쪽 지휘관들이 모두 따로 움직인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러한 다이묘들 중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깃카와 히로이에 등 서군의 주요 다이묘들에게 배반 또는 내통을 약속받았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에야스에게 적극 협조하지는 않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에게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군을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인 9월 15일 동군은 배신을 약속한 서군 다이묘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서군을 궤멸시켰으며, 미쓰나리는 이부키야마로 도주하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던 시마즈 군은 동군의 중앙을 정면 돌파해 이세 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 열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툰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와 동군이 압승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서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이에야스에게 저항했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등은 모두 체포되어 10월 1일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참수되었다. 이외 서군에 가담했던 모든 다이묘들은 가차없이 가이에키() 또는 감봉(減封)을 당하였다. 하지만 예외로 시마즈 씨는 이에야스에게 동군을 정면 돌파해 퇴각한 것이 눈에 띄어, 사쓰마 국과 오스미 국의 60여만석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또한 사타케 씨 등 형세를 관망하던 이들도 덴포를 당하였으며, 히데요리도 셋쓰 국, 가와치 국, 이즈미 국 등 세 개 구니 65만석으로 감봉되어 일개 다이묘로 강등되었다. 대신 이에야스는 이들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동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거나 동군에 협조한 서군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들을 도자마 다이묘로 임명하고 1만석 이하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하타모토들도 다이묘 대열에 합류시켰다. 또한 같은 도쿠가와·마쓰다이라 씨의 일족으로 다이묘가 된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와 사후 처리를 통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쇼군 때의 이에야스 1603년 3월 24일,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으며, 후시미 성에서 고요제이 천황의 선지(宣旨) 를 받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에야스는 무로마치 막부 이래 여러 권력자들이 교토에 본거지를 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개창하였다. 그 후 이에야스는 1604년부터 에도 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에도 성의 증축을 위해 이에야스는 도도 다카토라를 등용하여 설계를 맡겼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도자마 다이묘 28개 가문에 공사를 돕도록 명령하였다. 따라서 공사를 돕도록 명령받은 도자마 다이묘들은 1,000석 당 한 사람의 인부를 제공해야만 했다. 또한 간토 평야에는 축성에 알맞은 석재가 없었기 때문에 이즈 반도에서 채석한 석재를 배로 수송해야 했는데, 도자마 다이묘들이 10만석 당 100명이 들 수 있는 석재를 120개 준비하도록 하는 식으로 충당하였다. 이처럼 공사는 도자마 다이묘들의 막대한 비용 지출을 바탕으로 시작되어, 3대 쇼군인 이에미쓰가 집권하던 시기인 1636년까지 2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러한 부역 부담을 통해 이에야스는 다이묘를 손쉽게 통제하였으며, 에도 성은 260년 간 도쿠가와 쇼군의 거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castle tatsumiyagura.jpg|200픽셀|섬네일|왼쪽|슨푸 성 다쓰미 망루 1605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도요토미 씨의 위협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형식적인 지위를 안정적으로 굳히고자 쇼군 직위를 3남 히데타다에게 계승하게 한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을 보내 히데타다가 교토에 상경하였을 때 히데요리도 인사를 하도록 요구하였다. 하지만 히데요리가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자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보내 양해를 구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이에야스는 1607년 슨푸 성으로 들어가 명목 상으로는 은거하였지만 곧 스스로를 오고쇼()라고 지칭하면서 에도의 히데타다와 함께 2중 정치를 이끌었다. 이에야스는 사망할 때까지 슨푸에서 9년 간 각양 각층의 측근들을 만나며 조언을 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통치 기구들을 만들어냈다. 미카와 시절부터 이에야스에게 종사하던 원로들은 한 사람도 예외로 하지 않고 모두 은퇴해야만 했고, 대신 혼다 마사즈미, 나루세 마사나리 등과 같은 젊은 신참 다이묘와 행정 전문가, 곤치인 스덴, 하야시 라잔 같은 승려와 유학자, 자야 시로지로, 이나 다다쓰구 같은 경제 전문가와 거상(巨商), 윌리엄 애덤스 같은 외국인 등이 오고쇼 정치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슨푸 성도 에도 성처럼 대대적인 증축을 개시하고 거리를 정비해 슨푸 성은 칠중오층의 천수각을 가진 거대한 규모의 성으로 재탄생하였고, 조카마치 또한 정치, 경제, 외교의 중심지로서 대성하였다. 한편 이에야스는 비록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탄압 정책을 전개하였다. 기독교를 금지한 명령 곧 금교령은 이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후반에 히데요시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이에야스 대에 이르러서도 예수회를 비롯한 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계속 찾아왔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이들을 지배 체제로 편입해 해외 무역의 확대를 도모코자 전교 활동을 묵인하였지만 일부다처제의 부인이나 할복에 대한 금지, 야훼 이외의 신들에 대한 숭배를 금지한 기독교의 특성에 따른 다신교인 신토와의 대립 등은 막부를 긴장하게 하였으며 , 결국 오카모토 다이하치의 뇌물 사건 이후 도요토미 씨의 잔당 쪽에 기독교도가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선교사와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새 금교령은 1612년 3월 에도, 오사카, 교토에 발표되었고, 이듬해 12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금교령 발표 이후 이에야스는 모든 백성들이 불교의 신도가 되도록 하였으며, 기독교를 믿고 있던 이들에게도 신토나 불교로의 개종을 강요하였는데, 이를 거부한 다카야마 우콘을 비롯한 열네 명의 신자가 마카오와 필리핀 등지로 추방되었다. 이어서 1616년에는 유럽인의 거주·무역 지역을 히라도와 나가사키의 데지마 일대로만 한정하였다. 또, 이에야스의 조정에 대한 압력도 계속되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교토에 쇼시다이()를 설치하여 조정 및 공가의 동향을 감시하였다. 그러다 1607년 이노쿠마 노리토시의 추문 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대한 해결을 조정이 막부에 의뢰한 것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이노쿠마를 참수형에 처한 후 1613년 공가중법도를 제정하여 공가에 대한 간섭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더욱 엄격한 규정인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하여, 조정과 공가의 군사·정치적 권한까지 빼앗았다. 일대와 해군 훈련소 (나가사키 시) 이에야스는 슨푸에 머무르면서 무장 이외에도 여러 가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며,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들을 외교 및 무역의 고문으로서 적극 활용하였다. 1600년 네덜란드의 데 리프데 (De Liefde)호가 규슈의 분고에 표류하였을 때, 이에야스는 데 리프데 호의 선원이었던 얀 요스틴, 윌리엄 애덤스 등을 에도로 초청하여, 외교·무역 고문으로 삼고 네덜란드, 영국과의 무역을 추진하였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은 1609년과 1613년에 차례대로 일본에 내항하여, 이에야스의 허가를 받은 후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스페인과의 교역에도 열의를 보여 1609년 가즈사 국에 표류한 루손의 전 총독 돈 로드리고를 교토의 상인 다나카 쇼스케에게 소개하여 무역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행렬도 (대영 박물관 소장) 한편으로 주변국과의 외교 정책도 중시하여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이래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1607년까지 조선과 포로를 교환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 통신사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1609년에는 기유약조이 체결되어 삼포왜란 이래 폐지되었던 왜관이 동래에 다시 설치되어 무역이 정상화되었다. 명나라와는 정식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히라도와 나가사키에서의 사무역 정도만이 성행하였으며 타이완, 필리핀, 시암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사무역이 종종 이루어졌다. 다만 같은 해, 사쓰마 국의 시마즈 이에히사가 류큐 왕국 (오키나와)을 침략하여 류큐 왕국을 막부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도쿠가와 사천왕 :이이 나오마사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사카이 다다쓰구 오쿠보 나가야스-악사() 출신으로 횡혈식 채굴법과 수은 방류를 통한 제련법 등을 알림. 금은 부교로 음명되어 이와미 은광, 사도 금광, 이즈 금광의 채굴을 맡기도 하였다. 곤치인 스덴-승려. 덴카이 쇼닌-승려. 하야시 라잔-유학자. 자야 시로지로-혼노지의 변 당시 이에야스를 도움. 고토 쇼자부로-대상인. 윌리엄 애덤스()-영국인. 얀 요스텐 반 로덴스타인(-네덜란드인. Toyotomi.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도요토미 히데요리 오고쇼로 있던 이에야스는 여전히 도쿠가와 씨에 위협적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측의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전에 오사카 성에 남겨둔 막대한 도요토미 씨의 재산을 최대한 소모시키려는 계략을 세웠다. 우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도요토미 씨의 부흥을 기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긴키 지역의 신사, 사찰의 수리와 새로운 신사, 사찰의 조영을 건의하였다. 히데요리는 이를 수락하여 긴키 일원의 신사와 사찰의 수리 복구와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그 결과 상당한 자금이 소모되었다. 특히 교토 히가시야마의 호코 사() 대불전의 수리 복구 비용에 가장 많은 돈을 들였다. 1614년 4월 호코지 대불전의 수리가 완성되자 히데요리의 가신인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이에야스에게 완성 소식을 알리고 첫 공양의 거행을 알렸지만, 이에야스는 대불전의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불만을 표시하였다. 법종 명문의 일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에야스는 하야시 라잔과 곤치인 스덴의 말을 바탕으로 이 명문의 내용이 도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며, 이에야스 (家康)의 이름 사이에 안(安)이라는 글자를 넣어 갈라놓은 것이 이에야스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 1614년 10월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출진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자신은 총지휘관이 되어 오사카 성 부근의 덴노지에 진을 치고 히데요리를 포위하였다. 같이 출전한 히데타다는 오사카 성을 총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지구전을 통해 히데요리를 굴복시키려 했던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11월 19일 이에야스 측의 하치스카 요시시게()의 외성 공격으로 첫 공격이 시작되긴 했으나, 11월 26일에 이마후쿠와 시기노에서 크게 충돌한 것 이외에는 작은 충돌이나 기습전만 반복되다가 12월에서야 두 차례의 교섭 끝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대신 이에야스는 혼마루만을 남기고 오사카 성의 바깥 쪽 해자를 매립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공사를 맡은 혼다 마사노부·마사즈미 부자에게 안쪽 해자와 망루도 모두 파괴할 것을 명령하였고, 히데요리의 사신이 항의를 위해 찾아올 때마다 혼다 부자는 여러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면서 해자를 모두 매립하였다. 그 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야마토 국이나 이세 국의 다이묘 자리로 옮겨가도록 명령하여 히데요리를 자극하여, 히데요리 측이 1615년 4월 교토에 방화를 한 것을 빌미로 오사카 성을 공격하였다. 병력과 물자 면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 비해 월등히 유리하였으나, 초반에 사나다 유키무라의 분전으로 고전하였다.사나다 유키무라가 죽기를 각오 하고 이에야스 본진까지 오자 이에야스는 나는 죽었다 할복하겠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가 전사하자 이에야스는 성내의 내관인 다이도코로가시라 등과 내통하고, 손녀인 센히메를 풀어주도록 압박하였다. 결국 5월 8일 오사카 성이 함락되자 히데요리와 생모 요도도노가 자살함으로써 도요토미 씨는 대가 끊기고 말았으며 이에야스는 잠재적인 위협 요소였던 도요토미 씨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of Kunozan Toshogu.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구능산 동조궁 1616년 정월, 슨푸 근교로 매 사냥을 나갔던 이에야스는 측근으로부터 돈까스, 덴푸라를 먹은 후 그날 밤 복통을 일으키며 중태에 빠졌는데, 시의 (侍醫) 가타야마 소테쓰의 재빠른 조치로 회복되었지만, 이후 3개월 간 이에야스의 건강 상태는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며 결국 4월 7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위암, 매독, 각기병 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의 유훈은 《동조궁신군어유훈》()에 쓰여져 닛코 동조궁에 모셔져 있다. 이외에 이에야스는 죽음을 앞두고 혼다 마사즈미, 곤치인 스덴, 덴카이 쇼닌을 불러, 사체를 스루가 국 구노잔(久能山)에서 장사지낸 후 장례는 에도의 조조 사에서 지내고, 위패는 미카와 국의 다이주지에 봉안하고 시모쓰케 국의 닛코(日光)에 작은 사당을 지어 죽은 지 1주일 후 옮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이에야스가 죽은 날 밤 이들은 이에야스의 유해를 비밀리에 구노잔으로 옮겨 장사지낸 후, 이에야스를 신격화하기 위해 불교의 산왕일실신도에 따라 곤겐()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죽은 후 1주기가 되던 날에는 유해를 닛코로 옮겼으며, 천황으로부터 도쇼다이곤겐()이라는 신호가 부여되었다. 유골이 보존되어 있는 닛코 동조궁의 청동탑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 이에야스는 마쓰라의 센류에 제시된 시에서 묘사된 것처럼 "인내의 귀재"로 평가받는다.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에 부를 여의고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며, 계속 복종을 강요당해왔다. 하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며, 임진왜란 도중에도 영지만 지키며 신중히 대처하였다고 평가받는다. 때문에 이에야스의 삶은 일본에서 여러 소설과 책, 드라마, 영화, 연극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나아가 일본 사람들은 그를 늘 ‘일본의 10걸’로 선정하면서 존경하고 있다. 반면 에도 시대 서민들 사이에서는 천하 통일의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며 살쾡이 영감 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여 상반되는 평가를 가지고 있다. 이에야스는 62세에 11남인 도쿠가와 요리후사 (미토 도쿠가와 가의 시조)를 낳았고 70세에 임질에 걸렸을 정도로 많은 자식을 남겼는데 이후 이에야스의 다른 자식들이 고산케를 창가하면서 이에야스의 직계 자손이 끊어진 이후에도 고산케에서 번갈아 쇼군직을 계승하여 대가 끊기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11남 5녀를 슬하에 두었다. 아래는 이에야스의 자식들이다. 정실 쓰키야마도노(築山殿) *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 자결 * 장녀 가메히메(亀姫)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信昌)의 정실 계실 아사히히메(朝日姫)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복여동생 측실 오쓰마노가타(お都摩の方) * 5남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 다케다 노부하루의 대를 이었으나 요절 측실 오만노가타(お万の方) *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 - 고산케 (기슈 도쿠가와 가) 창가 *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 - 고산케 (미토 도쿠가와 가) 창가 측실 오만노가타(お万の方) * 차남 유키 히데야스 - 유키 하루토모의 양자가 됨 측실 오아이노가타(お愛の方) * 3남 제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 4남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측실 오타케노가타(お竹の方) * 3녀 후리히메(振姫) -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 →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의 정실 측실 자아노쓰보네(茶阿局) *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 7남 마쓰다이라 마쓰치요 측실 오나쓰노가타(お夏の方) 측실 오카지노가타(お梶の方) * 4녀 마쓰히메(松姫) * 5녀 이치히메(市姫) 측실 오우메노가타(お梅の方) 측실 오스와노가타(お須和の方) 측실 오무스노가타(お牟須の方) - 난산 도중 모자가 함께 사망 측실 오카메노가타(お?の方) * 8남 히라이와 센치요 - 히라이와 지카요시의 양자가 됨 *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 - 고산케 (오와리 도쿠가와 가) 창가 측실 오센노가타(お仙の方) 측실 오로쿠노가타(お六の方) 측실 니시고리노가타(西郡の方) * 차녀 도쿠히메(督姫) -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 →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의 아내 슬픈 인질 생활 시절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던 하라미이시 몬도는 자신의 저택 정원에서 매로 사냥하는 이에야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미카와의 꼬마 녀석"이라며 모욕을 주었다. 나중에 하라미이시가 다케다 신겐의 수하로 들어가, 다케다 씨의 성병(城兵)으로 복무할 때 이에야스에게 포로로 잡히자 이에야스는 그에게 "그대는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보기 싫을 것이다"라며 할복하도록 하였다. 반면, 슨푸 시절에 이에야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가신 출신의 다른 포로는 풀어주고 큰 상을 내렸다. 이에야스가 이끌던 미카와 국의 무사들은 결집력과 충성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킨 후 각지의 다이묘들을 불러 주연을 열면서 자신의 진귀한 골동품들을 자랑하였을 때 다른 영주들에게 어떤 보물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이에야스는 "미카와의 벽지에서 자라 아무 골동품도 가진 게 없지만,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감한 5백명의 가신들이 저의 보배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시다 시게루 외 4명, 오와다 데쓰오 감수, 이언숙 옮김, 《사건과 에피소드로 보는 도쿠가와 3대》 (2003년), 청어람미디어, 연민수, 《일본역사》 (1998년), 보고사, 고미 후미히코, 한은미 옮김, 《2천년 일본사를 만든 일본인 이야기》 (2003년), 이손, 고운기,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2009년), 현암사, 박석순 외 3명, 《일본사》 (2005년), 대한교과서, 이길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과 리더십》 (2004년), 동아일보사, NHK 대하드라마 《태합기》(1965년, 배우 오노에 키쿠조) 《하늘과 땅과》(1969년, 배우 마츠야마 세이지) 《봄의 언덕길》(1971년, 배우 야마무라 소) 《나라 훔친 이야기》(1973년, 배우 테라오 아키라) 《황금의 나날》(1978년, 배우 코다마 키요시) 《여자 태합기》(1981년, 배우 프랭키 사카이) 《도쿠가와 이에야스》(1983년, 배우 타키타 사카에) 《독안룡 마사무네》(1987년,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 《다케다 신겐》(1988년, 배우 나카무라 하시노스케) 《카스카노 츠보네》(1989년, 배우 단바 테츠로) 《노부나가 KING OF ZIPANGU》(1992년, 배우 고 히로미) 《류큐의 바람》(1993년, 배우 코바야시 아키라) 《히데요시》(1996년, 배우 니시무라 마사히코)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2000년,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 《토시이에와 마츠~카가 백만석 이야기~》(2002년, 배우 타카시마 마사히로) 《무사시 MUSASHI》(2003년, 배우 키타무라 카즈오) 《공명의 갈림길》(2006년, 배우 니시다 토시유키) 《천지인》(2009년, 배우 마츠카타 히로키) 《고우~공주들의 전국~》(2011년, 배우 키타오오지 킨야) 《군사 칸베에》(2014년, 배우 테라오 아키라) 《사나다마루》(2016년, 배우 우치노 세이요) 《여자 성주 나오토라》(2017년, 배우 아베 사다오) 《임진왜란》(MBC, 1985년~1986년, 배우 김현직) 《불멸의 이순신》(KBS1, 2004년~2005년, 배우 전일범) 《임진왜란 1592》(KBS1, 2016년), 배우 이종신) 도쇼구 삼영걸 도쿠가와 사천왕 徳川一族について (도쿠가와 일가에 대하여) 徳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 분류:1543년 태어남 분류:1616년 죽음 분류:안쇼 마쓰다이라 씨 분류:도쿠가와씨 분류:센고쿠 다이묘 분류: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다이묘 분류:에도 막부의 정이대장군 분류:미카와국 사람 분류:스루가국 사람 분류:인쇄사 관련 인물 분류:일본의 인물신 (에도 시대) 분류:삼영걸 분류:16세기 일본 사람 |
롤러코스터 ()는 조원선, 이상순, 최진우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모던 록 밴드이다. 롤러코스터는 솔로로 활동하던 최진우, 객원보컬과 코러스 활동을 하던 조원선 그리고 기타리스트였던 이상순이 모여 결성하였다. 1999년 1집 《Roller Coaster》로 데뷔하였고, 처음 롤러코스터의 음악이 소개 되었을때 음악 전문가들은 이들의 음악장르를 대개 애시드 재즈나 혹은 애시드 팝 이라고 분류해 놓았으나, 일렉트로니카나 펑크스타일의 곡도 발표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다. 1999년 9월 9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컬트홀에서 첫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다. 2000년 8월 정규 2집 앨범인 《일상다반사》를 발매하였다. 2002년 4월 정규 3집 앨범인 《Absolute》를 발매하였다. 1999년 결성해 멤버의 변화없이, 2006년까지 5장의 정규 앨범과 한장의 라이브 앨범을 내놓았다. 멤버 중 보컬인 조원선은 2009년에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다. 이후에 별다른 그룹활동이 없다가, 조원선과 이상순은 각자의 길에 충실할 것을 원함으로써 2015년 해체되었다. 조원선 생. 보컬 담당 이상순 . 기타 담당 김동률과 베란다 프로젝트 그룹 결성. 2010년 5월 18일,《Day Off》 발표. 2011년 11월, 가수 이효리와의 열애를 인정, 2013년 9월 결혼. 최진우 생. 베이스 기타와 프로그래밍 담당. 1990년 동경 One 90 페스티벌 최우수 기타리스트상 수상 1996년 1집 앨범 JinuJoke 발매 좋아하는 아티스트 조용필, 안전지대, 벤 헤일런 토이(Toy)의 유희열과 해군 동기. 김세황과도 친분이 있음. 1999년 《Roller Coaster》 (1집) 2000년 《일상다반사》 (2집) 2002년 《Absolute》 (3집) 2002년 《Live》 (실황음반) 2004년 《Sunsick》 (4집) 2006년 《Triangle》 (5집) 2006년 〈유행가〉 (디지털 싱글) 분류:모던 록 분류:대한민국의 팝 록 밴드 분류:전자 음악 그룹 분류:대한민국의 전자 음악 그룹 분류:일렉트로니카 그룹 분류:혼성 음악 그룹 분류:3인조 음악 그룹 분류:해체한 음악 그룹 분류:한국대중음악상 수상 음악가 |
닛코 시 (는 일본 혼슈 도치기현에 있는 시이다. 도쿄에서 북쪽으로 약 140km, 우쓰노미야 시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능이 있는 닛코 동조궁과 767년에 세워진 후타라산 신사가 있는 일본과 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목적지이다. 이 지역에는 또한 많은 유명한 온천들이 있다. 도시 중앙에 닛코 국립공원이 있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닛코를 보기 전에 훌륭하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미 8세기부터 불교사원이 세워졌다.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나자 동조궁을 건립하고 1617년 그의 유골을 이곳에 안장했다. 이에야스의 손자 쇼군 이에미쓰가 안장된 대유원(大猶院)도 유명하다. 동조궁, 대유원 등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 이에야스의 신호)에 대한 존경 의식이 강하다. 다리 Nikko Tosho-gu Three wise monkeys 5965.jpg|듣지 않는, 말하지 않는, 보지 않는 원숭이들 통합 후의 닛코 시는 도치기 현의 북서쪽의 광대한 농촌 지역을 포함해 면적도 1,449.87km²로 늘어났다. 이것은 일본에서 다카야마 시, 하마마쓰 시에 이어 세 번째로 넓은 것이다. 주젠지 호와 게곤 폭포, 닛코 식물원이 있으며, 도시의 많은 산과 폭포는 수력 발전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 이 지역은 또한 구리, 알루미늄, 콘크리트 등을 채굴한다. 닛코의 날씨는 도쿄와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홋카이도와 비슷하다. 이러한 이유는 닛코 시의 고도 때문이다. 닛코의 연평균 기온은 7 °C 이고 가장 더운 달에도 22 °C까지 밖에 안 오르고 가장 추운 달에는 -8 °C까지 떨어진다. 도치기 현 * 가누마 시 * 나스시오바라 시 * 시오야 군 시오야 정 * 우쓰노미야 시 군마현 * 도네 군 가타시나 촌 * 누마타 시 * 미도리 시 후쿠시마현 * 미나미아이즈 군 ** 미나미아이즈 정 ** 히노에마타 촌 쇼도 쇼닌(勝道上人)은 766년에 린노지를 세웠고 이후 784년에는 주젠지를 세웠다. 닛코 마을은 이러한 절들을 주변으로 발전하였다. 1617년에 닛코 동조궁이 완성되었고 에도 시대에 이 지역에 방문객을 오게하는 주요 시설이 되었다. 많은 새로운 길들이 이 시기에 세워져 주변 지역에서 닛코로 접근하는 것을 편리하게 하였다. 닛코 동조궁, 후타라산 신사, 린노지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메이지 시대에 닛코는 산 속의 휴양지로 개발되었고 특히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장소가 되었다. 1890년에 일본 철도(현재의 닛코 선)이 개업하였고 1929년에는 도부 철도 닛코 선이 개업하였다. 1889년 4월 1일에 가미쓰가 군 닛코 정이 성립하였으며, 1954년에 이웃한 오코로가와 촌을 합병해 시로 승격되었다. 2006년 3월 20일, 주변에 있는 이마이치 시(), 가미쓰가 군 아시오 정(), 시오야 군 후지하라 정(), 구리야마 촌()과 통합하여 새로운 닛코 시가 발족하였다. 시청은 지역의 중심지이자 인구가 가장 많은 옛 이마이치 시에 세워졌고 시 이름은 지명도가 높은 "닛코"가 채택되었다. 닛코 호텔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기누가와 온천 닛코 국립공원 닛코 동조궁(日光東照宮) 닛코 식물원 후타라산 신사 닛코 우쓰노미야 도로 국도 제119호선 국도 제120호선 국도 제121호선 국도 제122호선 국도 제352호선 국도 제400호선 국도 제461호선 도부 철도 * 닛코 선 * 기누가와 선 동일본 여객철도 * 닛코 선 야간 철도 * 아이즈키누가와 선 와타라세 계곡 철도 * 와타라세 계곡선 팜스프링스( 캘리포니아주, 1969년 7월 30일) 하치오지 시( 도쿄도, 1974년 4월 1일) 고라 정( 시가현, 1977년 4월 16일) 도마코마이 시( 홋카이도, 1982년 4월 16일) 래피드시티( 사우스다코타주, 1993년 2월 7일) 오다와라 시( 가나가와현, 2006년 10월 20일) 경주시 ( 경상북도 2009년 11월 11일) 이부카 마사루 공식 웹사이트 닛코 관광 협회 사이트 분류:도치기현의 도시 분류:일본의 세계유산 분류:가미쓰가군 |
인공위성에서 바라본 한반도의 모양 한반도 (韓半島)는 정치지리학적으로 동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북쪽 끝에 있는 반도이다. 삼면이 바다와 맞닿아 있다. 동쪽 바다는 동해, 서쪽 바다는 서해, 남쪽 바다는 남해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국,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등에서는 조선반도 (朝鮮半島)라고 한다. 한반도는 936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시작으로, 1392년 조선 까지 약 1000년간 단일 국가가 통치해왔으나, 1910년 외세의 영향에 의해 쇠퇴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 점령으로 멸망하였고, 1945년에 일제가 멸망해서 종식되었으나, 이미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에 따른 한국의 군정기로 인해 이념을 달리한 두 개의 정부가 1948년 수립되어 분단국가가 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현재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대한민국,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계속해서 군사력 증강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 최초로 나타난 국가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를 다스렸던 국가로 파악되고 있다.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에는 진국이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후에 고조선의 왕이었던 준왕과 다수의 유이민들이 진국에 가서 한(韓)을 세웠고, 후에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되었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였고, 한나라는 옛 고조선의 땅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만주에 위치했던 부여와 더불어 옥저, 동예, 삼한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원삼국 시대라고 한다. 차츰 압록강 유역에서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들이 마한 부족국 연맹체로 유입되어, 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고, 서라벌 지역에서는 신라가 건국되었다. 지금이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옛 변한이 가야가 되어 연맹체제를 이루었는데 후에 대부분의 지역이 신라에 합병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삼국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발전해갔다. 그러다 신라가 당나라와 나당군사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백제 유민들,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물리쳐서 676년에 부분적인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고구려의 멸망으로부터 약 30여년이 지났을 때, 고구려 출신 장수였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 말갈 세력과 함께 한반도 북부-만주-연해주 일대에 발해를 건국했다. 이렇게 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기간을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발해는 지배층의 분열과 거란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멸망했고, 신라는 지배층의 타락과 각 지역의 반란으로 인해 점차 수도를 제외한 지역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견훤은 백제 유민들과 더불어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는 고구려 유민들과 더불어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후 후고구려의 장수였던 왕건이 다른 호족 세력들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였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발해가 멸망한 뒤, 많은 발해 유민들을 수용하였다.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다스렸던 고려는 요나라, 금나라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몽골과 대립하다 결국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공민왕은 지속적인 반원(反元) 운동을 실시하였고,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정권을 잡아 조선을 건국하였다. 후에 세종 때에는 한반도 북부의 여진족들을 물리치고 4군 6진을 개척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였다.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뒤늦게 시도한 변화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한일 병합 조약으로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조선인들은 계속해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게 되어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된 한반도는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남쪽은 미국의 군사통치, 북쪽은 소련의 군사통치로 인해 분단되었다. 이후에 남쪽에서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쪽에서는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기습적으로 침공하여 한국 전쟁(한반도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약 3년 동안 진행되었고,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휴전선 이남은 대한민국, 휴전선 이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치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한반도는 중화인민공화국 둥베이에서 일본을 향해 약 1,000 km 정도 뻗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압록강 및 두만강을 경계로 1,416km를, 러시아와는 두만강 하류를 경계로 19km의 국경을 맞대고 있다. 산악 지형이 면적의 70%이상을 차지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8,460km에 달한다. 한반도에서 육지의 폭이 가장 좁은 구간은 평양에서 약간 북쪽의 평안남도~함경남도 구간이다. 한반도의 면적은 22만 3348 km²인데, 북한이 12만km², 남한이 10만km²정도를 차지하며 한반도는 한국 면적의 97%를 차지한다. 한반도의 지형 한반도는 추가령 구조곡을 경계로 하여 남쪽과 북쪽의 지질 구조가 현격한 차이를 나타난다. 북쪽으로는 요동반도와 평행한 방향으로 뻗은 평남 분지, 두만 분지, 관모봉 분지, 단천 습곡대, 낭림 분지가 펼쳐지며, 남쪽으로는 옥천대(沃川帶)를 사이에 두고 경기 육괴, 영남 육괴와 경상 분지로 이루어진다. 경기육괴와 영남육괴는 주로 선캄브리아 시대의 변성암으로 되어있다. 평남 분지는 한반도 남부의 태백산 분지는 고생대의 해성 퇴적암으로 되어있다. 이 분지들의 퇴적은 단속적이어서 실루리아기와 데본기 동안에는 퇴적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고생대 전기동안의 퇴적층을 조선 누층군(朝鮮累層群)이라고 부르며, 고생대 후기동안의 퇴적층을 평안 누층군이라고 한다. 두 누층군은 평행 부정합으로 접촉한다. 조선 누층군에서는 석회암을, 평안 누층군에서는 석탄을 채굴한다. 경상 분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육성층(陸成層)으로 아직 큰 지질 운동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에 평행한 층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제3기 동안에는 동해의 형성과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는 경동 운동(傾東運動)의 영향으로 동쪽으로 태백산맥과 낭림산맥이 융기해서 남북의 고저 차이와 버금가는 동서 간에 고저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또한 동해안의 지형 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동해안은 융기 지형으로서 가파르게 내려가는 해안 경사가 특징이며, 서해와 남해는 완만한 경사의 해안을 갖고 있다. 제3기 중신세(中新世) 이후에 일어난 단층 및 요곡(撓曲) 운동의 결과 대체적으로 동쪽이 높고 서쪽으로 낮아진 경동지형(傾東地形)을 이룬다. 따라서 한국의 높은 산들은 대부분 동해안 쪽에 치우쳐서 지형의 등줄기를 이룬다. 그 높은 등줄기 산지는 동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면서 동해안에 임박하지만, 서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서서히 고도를 낮추면서 서해안에 이른다. 신생대 동안에는 수차례의 화산 활동이 있었다. 현무암질 마그마의 분출로 백두산과 개마고원이 형성되었다. 독도, 울릉도, 제주도는 모두 화산 활동을 통하여 생긴 섬들이다. 개마고원 말고도 철원에서는 현무암질 마그마가 분출하여 용암대지를 이루고 있다. 한국의 산맥 분포는 우리 국토의 지형 특색을 크게 결정짓는다. 한국의 산맥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태백산맥(太白山脈)과 낭림산맥(狼林山脈) 등 이른바 한국 방향의 산맥이다. 그리고 요동遼東 방향의 산맥과 중국 방향의 산맥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강남산맥(江南山脈)·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묘향산맥(妙香山脈)·언진산맥(彦眞山脈)·멸악산맥(滅惡山脈)·함경산맥(咸鏡山脈) 등은 요동방향 산맥이고,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광주산맥(廣州山脈)·차령산맥(車嶺山脈)·소백산맥(小白山脈)·노령산맥(蘆嶺山脈) 등은 중국 방향 산맥에 속한다. 그들 산맥에는 백두산(白頭山:2,744m)·관모봉(冠帽峰:2,540m)을 비롯한 고봉들이 솟아 있는데, 휴전선 이남에 있는 주요 산은 소백산맥에 속하는 지리산(智異山:1,915m), 태백산맥에 속하는 설악산(雪嶽山:1,708m)·태백산(太白山:1,567m) 등이다. 제주의 한라산(漢拏山:1,950m)은 휴전선 이남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그 성인이 육지부의 산과는 상이하다. 산맥에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는 재峙:고개가 많이 분포해 있고 이 중 고도가 높은 재들은 대부분 휴전선 이북에 있다. 휴전선 이남에서는 대관령(大關嶺:832m)·육십령(六十嶺:734m)·죽령(竹嶺:689m)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의 산지에는 일정한 고도에 평탄면이 있는데, 해발고도에 따라 고위면·중위면·저위면 등으로 나뉜다. 고위면은 해발고도 900m 이상의 고도에 300m 내외의 소기복을 이루면서 나타나고 중위면은 300∼700m에 걸친 고도에 나타난다. 저위면은 원주와 충주를 잇는 선의 서쪽 남한강 하류 등지에 나타나는 평탄면으로, 해발고도 30∼70m의 산록완사면과 70∼80m의 저구릉성 침식지형이 여기에 포함된다. 산정에 평탄면이 생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곳에 산성취락(山城聚落)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압록강(鴨綠江)·대동강(大同江)·한강(漢江)·금강(錦江)·영산강(榮山江)·낙동강(洛東江) 등 대부분의 하천은 지형관계로 황해나 남해로 흐른다. 하천의 유량은 극히 불규칙하여 여름에는 홍수를 일으키는 하천이 많고, 갈수기에는 하상을 거의 노출시키는 하천들이 많다. 따라서 하천의 하황계수(河況係數)는 한강이 1:393, 낙동강이 1:372, 금강이 1:299로 다른 나라의 하천에 비하여 대단히 크다. 그와 같이 유황(流況)이 불안정하므로 홍수 때 많은 침식이 일어나고 토사가 흘러내려서 하류에 넓은 충적지를 이룬다. 하천은 대부분 심하게 곡류하지만, 산중사행성(山中蛇行性) 곡류가 대부분이며 자유사행천(自由蛇行川)은 거의 없다. 하천의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평야 중 대표적인 것은 한강 하류의 김포평야(金浦平野), 안성천 하류의 안성평야(安城平野), 금강 하류의 논산평야(論山平野), 만경강과 동진강 하류의 호남평야(湖南平野), 영산강 하류의 나주평야(羅州平野), 낙동강 하류의 김해평야(金海平野) 등이다. 한국 국토는 반도이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안선이 극히 복잡하여 해안선 총연장은 1만 7,361 km(도서 포함)에 달하고 연안에 3,418개의 도서가 분포한다. 그들 도서 가운데 2,900개가 휴전선 이남, 518개가 휴전선 이북에 있으며, 유인도(有人島)는 전체의 약 1/3을 차지한다. 제주도(濟州島)를 비롯하여 거제도(巨濟島)·강화도(江華島)·진도(珍島)·남해도(南海島) 외, 주요 도서는 대부분 휴전선 이남의 서해안과 남해안에 분포한다. 동해안은 두만강 하구에서 부산 송도에 이르는 직선거리 809 km, 실제거리 1,727km의 해안으로 해안선은 비교적 단순하며, 산지가 해안에 가까이 있어서 넓은 평야는 없다. 해안에 따라서 사구(砂丘)가 발달되어 있고, 경포(鏡浦)와 화진포(花津浦) 등 석호(潟湖)가 여러 곳에 형성되어 있다. 또 단속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반월형의 사빈(砂濱)해안은 해수욕장으로 이용된다. 사빈해안 사이에는 암석해안이 나타나며 암석해안의 단애에는 타포니가 생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타포니는 서해안의 암석해안에서도 발견된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해상에 화산도인 울릉도와 독도가 있다. 남해안은 부산 송도에서 전남 해남에 이르는 해안으로, 해안선이 극도로 복잡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룬다. 조차(潮差)는 서쪽으로 갈수록 점차 커지고 간석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어서 간척된 곳도 많다. 특히 남해안의 서부에는 약 2,000개 이상의 섬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다도해를 이룬다. 지절(肢節)이 다양한 해안부와 도서부 곳곳에 뛰어나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산재하며, 대략 여수반도(麗水半島)를 경계로 동부에 한려해상(閑麗海上), 서부에 다도해해상(多島海海上)의 두 국립공원이 지정되어 있다. 서해안은 압록강 하구에서 전남 해남에 이르는 해안으로, 직선거리는 650km이나, 실제거리는 4,719km에 달한다. 특히 서해안의 남부는 해안선이 복잡하여 리아스식 해안의 발달이 현저하다. 서해안은 일반적으로 조차가 큰데, 특히 아산만 일대에서는 대조(大潮) 때의 평균조차가 8.5m 이상이 된다. 연안의 해저지형이 비교적 평탄하고 조차가 크므로 곳곳에 넓은 간석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간석지는 예로부터 간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금까지 실시된 대규모 간척사업 중 대표적인 것은 전북 군산시(舊옥구군) 일대, 부안군 계화도(界火島) 일대, 전남 진도의 소포리(素浦里) 일대 등지에서 완공된 것들이다. 특히 인천지역은 지난 100여년 동안 전체 육지면적의 33.8%에 이르는 땅이 갯벌 매립으로 조성되었다. 그와 같은 대단위 간척사업들로 해서 서해안은 네덜란드의 해안과 더불어 인공에 의한 해안선의 형태 변화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안으로 유명하다. 간석지 후면에는 사빈해안이 형성되어 있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해안을 따라 넓은 평지가 있고, 배후 산지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해안부에서는 곳에 따라 사구의 발달도 볼 수 있다. 한반도의 특수지형은 카르스트지형, 화산지형이 있다. 석회암의 용식지형인 카르스트 지형은 석회암지대가 분포하는 강원과 충북 일대에 발달하였다. 카르스트 지형의 대표적인 특징인 돌리네는 주로 원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와지(窪地)를 이루며, 여러 개의 돌리네가 합쳐진 복합 돌리네도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카르스트 지역에서는 하계망(河系網)의 밀도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카르스트 지형에서 나타나는 석회암 동굴도 대부분 강원·충북 일대에서 발견되는데, 중요한 것은 삼척의 환선굴(幻仙窟)·초당굴(草堂窟)·대이굴(大耳窟)·신령굴(神靈窟)·용연굴(龍淵窟), 정선의 주암굴(晝岩窟), 평창의 백룡굴(白龍窟), 영월의 고씨굴(高氏窟)·용담굴(龍潭窟), 단양의 고수굴(高藪窟)·노동굴(蘆洞窟)·남굴(南窟)·지하굴(地下窟), 원성의 금대굴(金垈窟), 봉화의 평천굴(坪川窟), 울진의 성류굴(聖留窟) 등이다. 그들 동굴 안에는 종유석과 석순을 비롯한 갖가지 아름다운 동굴지형이 형성되어 있어 대부분의 석회암 동굴이 관광지로 되어 있다. 화산지형은 백두산 일대, 철원∼평강, 신계∼곡산 일대 및 제주도·울릉도 지역에 발달해 있다. 한국의 화산지형은 비교적 적게 분포하는 편이며,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백두산 지역이다. 백두산은 1597년, 1668년, 1702년의 세 차례 폭발 및 용암유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대로 휴화산이다. 백두산의 산정부는 제3기의 화산 폭발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알칼리성 조면암(租面岩)을 주로 하는 종상화산(鐘狀火山)을 이룬다. 그러나 해발고도 2,200m 이하에서는 제4기에 용암이 분출하여 용암평원을 이루었으므로 순상화산(楯狀火山)의 형태를 보여준다. 중앙화구는 함몰되어 칼데라가 되었으며, 여기에 물이 괴어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 백두산 일대에는 백두산 외에도 대연지봉(大脂峰:2,358m)·소연지봉(小脂峰:2,115m)·간백산(間白山:2,162m)·소백산(小白山:2,172m)·북포태산(北胞胎山:2,288m)·두류산(頭流山:2,309m) 등의 화산들이 있다. 특히 제4기 플라이스토세(世)에 백두화산대의 열하(裂)를 따라 분출한 용암류는 개마고원의 일부와 만주를 덮었는데, 그 면적은 동서 240 km, 남북 400km에 이른다. 철원∼평강, 신계∼곡산의 용암대지도 제4기에 현무암의 열하분출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의 열하분출의 중심지는 평강 남서부 약 3.5 km 지점에 있는 압산(鴨山:453m)이라는 작은 화산으로 추측된다. 용암류의 일부는 한강하곡을 따라 흘러내려 전곡(全谷) 일대까지 이르른 것으로 보이며, 당시 용암류가 하상으로 흘러내려 하천력(河川礫)을 덮고 있는 것을 포천군 청산면(靑山面) 백의리(白蟻里)의 한탄강변에서 볼 수 있다. 제주도의 화산은 제3기말에서 제4기초에 걸쳐 분출된 것으로, 화산활동을 시기별로 5기로 나눌 수 있다. 용암은 총 79회 이상 분출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화산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한라산의 정상부는 종상화산을 이루나, 1,800m대 이하는 순상화산을 이룬다. 산정에는 동서 약 600m, 남북 500m의 화구호인 백록담(白鹿潭)이 있다. 또 한라산 산록에는 약 360개의 기생(寄生)화산이 분포하는데 대표적인 것은 천당봉(天堂峰:1,707m)·어후악(御後岳:1,025m)·어승생악(御乘生岳:1,176m)·성판악(城板岳:1,215m) 등이다. 《동국여지승람》 및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002년, 1007년, 1455년, 1570년에 화산폭발이 있었으므로 한라산도 역시 휴화산이다. 제주에는 또 김녕(金寧)의 사굴(蛇窟)과 만장굴(萬丈窟), 한림(翰林)의 협재굴(狹才窟)과 같은 용암동굴도 형성되어 있다. 울릉도는 종상화산으로서 형성시기는 제3기 말로 추정되며, 조면암과 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봉인 성인봉(聖人峰:984m) 북쪽에 화구원(火口原)인 나리(羅里)분지가 있다. 나리분지는 2km2 내외의 면적으로 해발고도 약 250m에 위치하며, 분지 안에 알봉이라는 작은 화산이 있는데, 그 정상부의 소화구에는 또 다른 작은 화산이 있어서 알卵처럼 보인다. 독도는 2개의 화산섬으로 나뉘어 있고, 최소한 2개의 화구가 관찰된다. 그러나 생성연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한반도는 냉대, 온대에 속하여 열대나 한대에 비하여 비교적 살기 좋은 여러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하는 반도이고 철에 따라 여러 기단의 영향을 받고, 지형도 복잡한 관계로 독특한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한반도는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이 뚜렷하다. 봄 시베리아 기단이 약해지면서 여기서 갈라져 나온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과 양쯔강 기단의 이동성 고기압으로, 동진할 때 뒤따르는 이동성 저기압의 영향을 받아 날씨의 변화가 심해진다. 고기압이 통과하게 되면 맑은 날씨에 기온도 상승하여 남쪽에서는 꽃이 피기 시작한다. 때로는 이상 건조나 황사 현상이 일어나며, 겨울 날씨 못지않은 꽃샘 추위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 저기압이 통과하면서 봄비를 가져와 농작물의 파종과 발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름 장마철과 한여름으로 구별된다. 6월이 되면, 무더운 초여름이 시작되면서 여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차고 습한 오호츠크해 기단이 서쪽으로 확대되어 한반도 일대를 덮고, 남쪽의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도 확장되어 한반도로 접근해 온다. 이 두 기단이 서로 만나 이루어진 전선은 동서로 길게 뻗어 이른바 장마 전선을 형성한다.장마철에는 흐린 날이 많고 비가 많이 오며, 때로는 집중호우가 발생하여 홍수를 일으킨다. 계절 중 고온다습한 남서풍이 불어올 때는, 습도가 높아져 불쾌 지수가 높아진다. 장마전선이 만주 지방으로 북상하면, 하루 최고 기온이 30 를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는 한여름이 된다. 이 때는 강수량은 점차 감소하고, 때때로 소나기가 더위를 식혀 주기도 한다. 8월 하순이 되면 북태평양 기단이 약해지고, 만주로 북상했던 장마 전선이 다시 남하하여, 짧은 가을장마가 나타나며 남쪽에서는 태풍이 불어오기도 한다. 가을 가을철에는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데 일사가 강하며 습도가 높지 않아, 연중 가장 쾌적한 계절이 된다.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는 겨울에는 날씨가 한랭건조하고 북서계절풍이 강하게 분다. 겨울 겨울철 한파는 시베리아 기단 및 상층 대기의 대순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상층 제트 기류는 남쪽으로 확대하면서 한파는 더욱 심해진다. 북서계절풍은 건조하여 겨울 강수량이 적으나, 바다를 지날 때 습기를 포함하여 울릉도에서는 많은 눈을 내린다. 예로부터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볼 때 대륙(중국)과 해양(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을 담당해왔다. 따라서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의 물류 중심지가 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2011년 1월 북한의 테러에 대응하고 한반도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일간에 한국군과 자위대의 연합을 강화 하기로 했으며 양국간에 포괄적인 협력을 담은 새로운 공동선언을 올해 봄에 발표할 것으로 전해 졌다. 한일 병합 100년에 맞추어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방문시 이 때 양국 정상의 서명을 통해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북한의 경제적인 상황의 악화와 반정부 분위기로 인한 급변사태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냉전 시대의 한반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의 장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점차 경제, 정치에서 세력을 넓혀가는 중국과 그런 중국으로 부터 태평양지역의 방위를 위한 미국 간의 완충 지대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 한반도기 Lo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 The Official Korea Tourism Guide Site 분류:아시아의 반도 분류:동아시아의 지리 |
수(隋) 대업(大業) 10년 신라(新羅) 건복(建福) 31년 수(隋) 양제(煬帝) 10년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36년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 25년 백제(百濟) 무왕(武王) 15년 신라에서 현재의 구미시를 이루고 있는 사벌주(沙伐州)가 폐지되고 ‘일선주’(一善州)가 설치되자 군주(軍主)를 두면서‘ 일선 ’이라는 이름이 주로 사용되기 시작하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장군 샤흐르바라즈가 동로마 제국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주민을 학살하다. 고구려(高句麗)의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 가락국(駕洛國)의 후손 김무력(金武力(추정) 신라(新羅)의 왕비 사도왕후(思道王后) |
수(隋) 대업(大業) 14년 / 의녕(義寧) 2년 당(唐) 무덕(武德) 원년 신라(新羅) 건복(建福) 35년 수(隋) 양제(煬帝) 14년 / 공제(恭帝) 2년 당(唐) 고조(高祖) 원년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40년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 29년 / 영류왕(榮留王) 원년 백제(百濟) 무왕(武王) 19년 당나라가 고조 이연에 의해 건국됨 11월 8일 - 교황 아데오다토 1세, 68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고구려(高句麗) 26대 태왕(太王) 영양왕(嬰陽王) 중국 수(隋)의 2대 황제 양제(煬帝) 양광 |
당(唐) 무덕(武德) 9년 신라(新羅) 건복(建福) 43년 당(唐) 고조(高祖) 9년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48년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 9년 백제(百濟) 무왕(武王) 27년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발칸 반도의 아바르 족과 연합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실패하고 대군을 잃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30대 왕 일본 38대 천황 덴지 당나라 황태자 이건성 |
당(唐) 정관(貞觀) 2년 신라(新羅) 건복(建福) 45년 당(唐) 태종(太宗) 2년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50년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 11년 백제(百濟) 무왕(武王) 29년 신라에 627년 대상해(大霜害)의 영향으로 대기근이 닥쳐 백성들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점령했던 동로마 제국의 모든 영토가 동로마 제국에 반환되다. *1월 -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황궁을 점령하다. *3월 -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에서 반란이 일어나 호스로우 1세가 폐위되어 처형당하고 셰로에가 황위에 오르다. *4월 3일 - 사산조 페르시아가 동로마 제국에 정식으로 항복하다. *9월 14일 - 동로마 제국의 헤라클리우스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선식을 가지다. 7월 21일 - 중국 당조 제3대 황제 당 고종 ?월 - 신라의 공무원 검군. 사산조 페르시아의 황제 호스로우 1세 |
당(唐) 정관(貞觀) 6년 신라(新羅) 건복(建福) 49년 당(唐) 태종(太宗) 6년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54년 / 선덕여왕(善德女王) 원년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 15년 백제(百濟) 무왕(武王) 33년 신라, 수도 금성에 첨성대를 세우다. 백제, 부여의자(扶餘義慈, 훗날 의자왕)를 태자로 삼았다. 신라의 진평왕 6월 8일 -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신라의 태자 김용수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정관(貞觀) 15년 신라(新羅) 인평(仁平) 8년 당(唐) 태종(太宗) 15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0년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 24년 백제(百濟) 무왕(武王) 42년 / 의자왕(義慈王) 원년 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요한네스 4세가 제72대 로마 교황으로 선출되다. 당 태종, 사부랑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백제로 보내, 의자왕을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음력 8월, 백제 의자왕,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백제(百濟) 30대 왕 무왕(武王) 제71대 교황 세베리노 2월 11일 -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 5월 25일 -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 9월 -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티나(여제) 9월 -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로나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정관(貞觀) 16년 신라(新羅) 인평(仁平) 9년 당(唐) 태종(太宗) 16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1년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 25년 / 보장왕(寶臧王) 원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2년 *음력 1월, 백제,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음력 2월, 백제, 의자왕이 주·군(州郡)을 순행하고 위무하였다. 죄수(罪囚)를 헤아려 보아,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 이외에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음력 7월, 백제, 의자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항복시켰다. *음력 8월, 백제,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성주 김품석(品石)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이들을 모두 죽였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王都)에 이를 전하였다.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병사를 머무르게 하여 그 성을 지켰다. 의자왕은 윤충(允忠)의 공로에 대해서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상으로 주었다. (대야성 전투) 11월 24일 - 교황 테오도로 1세, 73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다. 고구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였다. 10월 12일 - 교황 요한 4세, 72대 로마 교황. 고구려(高句麗) 27대 태왕(太王) 영류왕(榮留王) 백제의 왕비 사택왕후 신라의 공주 김고타소 신라의 명장 김품석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정관(貞觀) 17년 신라(新羅) 인평(仁平) 10년 당(唐) 태종(太宗) 17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2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2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3년 *음력 1월, 백제,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음력 11월, 백제,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이로써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발동하여 공격하니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의자왕이 이를 듣고, 군사를 거두었다. 백제의 태자 여풍(餘豊)이 동양종 꿀벌을 일본국에 전하였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정관(貞觀) 18년 신라(新羅) 인평(仁平) 11년 당(唐) 태종(太宗) 18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3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3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4년 *음력 1월, 백제,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당 태종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보내, 백제와 신라를 타일렀다. 의자왕이 표(表)를 받들고는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백제는 부여융(隆)을 태자로 세우고, 크게 사면하였다. *음력 9월, 신라, 김유신 장군이 병사를 이끌고 백제를 침략하여 일곱 성(城)을 취하였다. 12월, 당 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정관(貞觀) 19년 신라(新羅) 인평(仁平) 12년 일본(日本) 다이카(大化) 원년 당(唐) 태종(太宗) 19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4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5년 6월 -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발발 당나라가 고구려의 요동,백암,비사,개모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안시성으로 향함. 연개소문은 고연수,고혜진에게 15만 병력을 주어 지원하게 하나 이들 군대마저 패배함. 그러나 안시성주의 끈질긴 항전으로 고립상태에서도 당군과 계속 싸워 이김. *음력 5월, 백제 의자왕은 당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서 징병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그 사이를 틈타서 백제가 신라의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더니, 신라는 장군 김유신을 보내 쳐들어 왔다. 7월 12일 - 왜 고토쿠 천황 즉위, 연호를 다이카로 하고 나니와(오사카)로 천도 음력 9월 18일 - 당 태종의 철수로 전쟁 종료. 동로마 제국, 이슬람에게서 알렉산드리아를 탈환하다. 신라의 화랑 관창 발해(渤海)의 초대 태왕(太王) 고왕(高王)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정관(貞觀) 21년 신라(新羅) 인평(仁平) 14년 / 태화(太和) 원년 일본(日本) 다이카() 3년 당(唐) 태종(太宗) 21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6년 / 진덕여왕(眞德女王) 원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6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7년 2월 17일 - 신라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등극하다. 음력 10월,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김유신이 친히 병사를 권면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한 필의 말을 타고 홀로 돌아왔다. 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카르타고 총독 그레고리우스가 이끄는 12만 대군을 격파하다. 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카이사레아(현재의 카이세리)를 점령하다. 2월 17일 - 신라(新羅) 27대 왕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新羅) 문흥대왕(文興大王, 추존) 김용춘(金龍春).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정관(貞觀) 22년 신라(新羅) 태화(太和) 2년 일본(日本) 다이카() 4년 당(唐) 태종(太宗) 22년 신라(新羅)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7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8년 *음력 3월, 백제의 장수 의직은 신라의 서쪽 변방 요거(腰車) 등 십여개의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음력 4월, 백제 군이 옥문곡(玉門谷)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 장군 김유신이 이를 맞이하여, 다시 싸우니 의직이 대패하였다. 당나라 초기 대신, 방현령이 향년 70세로 사망하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정관(貞觀) 23년 신라(新羅) 태화(太和) 3년 일본(日本) 다이카() 5년 당(唐) 태종(太宗) 23년 신라(新羅) 진덕여왕(眞德女王) 3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8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9년 당 태종의 정관의 치 라는 태평성대가 종식되다. 이세민의 황자인 이치(李治, 당 고종)가 황위를 승계한다. 7월 - 교황 마르티노 1세, 74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음력 8월, 백제 의자왕은 좌장 은상(左將 殷相)을 보내, 정예병 7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다. 신라 장군 김유신(庾信)·진춘(陳春)·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이 이를 맞아 치니, 전세가 불리해지고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치고 다시 싸웠으나, 백제군이 패배하였다. 음력 11월, 백제, 천둥이 치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이집트 전역을 점령하다. 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키프로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다. 당나라의 2대 황제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5월 14일 - 교황 테오도로 1세, 73대 로마 교황.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영휘(永徽) 4년 일본(日本) 하쿠치() 4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12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13년 신라(新羅) 진덕여왕(眞德女王) 7년 당(唐) 고종(高宗) 4년 봄, 백제가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다. 음력 8월에 백제 의자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 교황 마르티노 1세를 체포하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영휘(永徽) 6년 당(唐) 고종(高宗) 6년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2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14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15년 *음력 2월, 백제, 태자궁(太子宫)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손질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음력 5월, 백제, 붉은 색의 말〔騂馬〕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서, 울면서 불우(佛宇)를 돌다가 며칠만에 죽었다. *음력 7월, 백제, 마천성(馬川城)을 또다시 고쳤다. 8월 10일 - 교황 에우제니오 1세, 75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음력 8월, 백제 의자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배알하였고, 표(表)를 올려 일컫기를, “백제가 고구려·말갈과 함께 우리 북쪽 경계를 침략하여, 30여 성을 빼앗았습니다.”라 하였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 마스트 전투에서 이슬람에 대패 동국18현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 신라(新羅)의 문신 김삼광(金三光) 9월 16일 - 교황 마르티노 1세, 74대 로마 교황. 신라의 문신 김흠운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현경(顯慶) 원년 당(唐) 고종(高宗) 7년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3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15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16년 *음력 3월, 의자왕이 궁녀와 더불어 음탕하였고, 주색에 빠졌으며, 마음껏 즐기며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에 좌평 성충이 간언하였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임종을 당하여 성충은 왕에게 상소를 올려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육로는 탄현(炭峴)을 막고 수로(水路)는 기벌포(伎伐浦)를 방비하라 말하고 죽었다. 의자왕은 성충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백제 성충이 죽음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현경(顯慶) 2년 당(唐) 고종(高宗) 8년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4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16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17년 *음력 1월, 백제, 의자왕의 서자(庶子) 41명에 벼슬을 내려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다. *음력 4월, 백제, 크게 가물어 적지(赤地)가 되었다. 7월 30일 - 교황 비탈리아노, 76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6월 2일 - 제75대 교황 에우제니오 1세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현경(顯慶) 4년 당(唐) 고종(高宗) 10년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18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19년 *음력 2월, 백제,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 위에 앉았다. *음력 4월, 백제, 태자궁(太子宫)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獨山)·동잠(桐岑) 2개의 성을 침공하였다. *음력 5월, 백제, 왕도(王都) 서남쪽의 사비하(泗沘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장(丈)이었다. *음력 8월, 백제, 어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이었다. *음력 9월, 백제, 궁중의 느티나무가 울었는데 마치 사람이 우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당(唐) 현경(顯慶) 5년 당(唐) 고종(高宗) 11년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19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20년 / 풍왕 (豊王) 원년 *음력 2월부터 음력 6월까지 백제에는 불길한 기운이 여러 번 나타났다. (→ 신라의 백제 정벌) *7월 9일(음력 5월 26일) 신라의 군대가 출진함을 시작으로 신라와 당이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는 8월 29일(음력 7월 9일)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백제 부흥군에 의해 32대 왕 부여풍 즉위 첫 번째 이슬람 칼리파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 시작하다. 백제 최후의 왕 의자왕 백제의 무장 의직 8월 20일 - 백제의 명장 계백 백제의 문신 상영 신라의 화랑 관창 신라의 화랑 반굴 신라의 문신 금강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육(百濟本紀第六) 의자왕(위키문헌 번역본)〉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번역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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