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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급 프로그래밍 언어 또는 로우 레벨 프로그래밍 언어 ()란 컴퓨터가 이해하기 쉽게 작성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일반적으로 기계어와 어셈블리어를 일컫는다. 실행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배우기가 어려우며 유지보수가 힘든 것이 단점이다. 현재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되지 않는다. 저급언어와 반대되는 것으로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다. 기계어는 특별한 변환 과정 없이 컴퓨터가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현재 프로그래머들은 대개 기계어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지는 않는데 그 까닭은 고급 언어가 자동으로 다루는 수많은 세부 사항들을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명령마다 수많은 코드를 기억하고 찾아야 하고, 수정하기 또한 매우 어렵다. 아래는 n번째 피보나치 수를 계산하는 32비트 x86 기계어를 표현한 16진 기능의 예이다 8B542408 83FA0077 06B80000 0000C383 FA027706 B8010000 00C353BB 01000000 C9010000 008D0419 83FA0376 078BD98B B84AEBF1 5BC3 2세대 언어는 기계어 최상단에 추상적인 수준을 제공한다. TX-0, PDP-1과 같은 컴퓨터들을 이용하여 코딩하던 과거에는 MIT 해커들이 했던 최초의 일은 어셈블러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어셈블러는 매크로를 제공하므로 공통이 되는 일련의 명령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래는 상단의 피보나치 수 계산기와 동일하지만, MASM 문법을 이용하여 x86 어셈블리어로 표현한 것이다 fib mov edx, esp+8 cmp edx, 0 ja @f mov eax, 0 ret @@ cmp edx, 2 ja @f mov eax, 1 ret @@ push ebx mov ebx, 1 mov ecx, 1 @@ lea eax, ebx+ecx cmp edx, 3 jbe @f mov ebx, ecx mov ecx, eax dec edx jmp @b @@ pop ebx ret 동일 기능을 C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unsigned int fib(unsigned int n) { if (n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프로그래밍 언어 분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또는 하이 레벨 프로그래밍 언어 ()란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작성된 프로그래밍 언어로서, 저급 프로그래밍 언어보다 가독성이 높고 다루기 간단하다는 장점이 있다. 컴파일러나 인터프리터에 의해 저급 프로그래밍 언어로 번역되어 실행된다. C 언어, 자바, 베이직 등 대부분의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고급언어에 속한다. 추상화의 정도는 얼마나 프로그래밍 언어가 높은 수준인지를 정의한다. 1960년대에 컴파일러를 이용한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보통 오토코드라 불렀다. 오토코드의 예는 코볼과 포트란이 있다. 현대의 고급 언어를 실행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3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가 쓰인다 해석(인터프리트) 인터프리트 언어로 작성된 코드가 있을 때 컴파일 과정 없이 문법을 읽고 직접 실행한다. 인터프리터라는 프로그램은 각 프로그램 문을 읽고 프로그램 흐름을 추적하여 무엇을 할지 결정하고 이를 수행한다. 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가 결합된 형태의 경우 프로그래밍 문을 기계어로 컴파일하고 그것을 실행한 뒤, 기계어는 버리고 줄을 다시 실행할 때 해석을 새로 다시 한다. 아래에 나열된 다른 두 종류에 비해 인터프리터는 가장 단순한 언어의 동작 구현체이다. 컴파일 컴파일 언어로 작성된 코드가 있을 때 문법은 실행 가능한 형태로 변환된 다음 실행한다. 컴파일에는 두 종류가 있다 :; 기계어 생성 일부 컴파일러들은 소스 코드를 기계어로 직접 컴파일한다. 컴파일을 위한 원초적인 방식이며, 기계어로 직접적으로 완전하게 변환된 언어들은 순수하게 컴파일된 언어(truly compiled language)라 부른다. (어셈블리어 참고.) :; 중간 표현 특정 언어로 작성된 코드가 중간 표현으로 컴파일되면, 이 표현은 소스 코드를 다시 읽어들이지 않고도 나중에 실행할 것을 염두에 두고 최적화하거나 저장해 둘 수 있다. 중간 표현이 저장될 때 이는 바이트 코드와 같은 형태일 수 있다. 그 다음 중간 표현은 실행을 위해 해석되거나 추가적인 컴파일 과정을 거친다. 소스 대 소스 번역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로의 번역) 특정 언어로 작성된 코드는 저급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형태로 변환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네이티브 코드 컴파일러들이 널리 이용된다. 자바스크립트와 C 프로그래밍 언어는 이러한 번역기들을 위한 주요 대상이다. (예로서 커피스크립트, 치킨 스킴, 에펠 참고.) 추상화 (컴퓨터 과학) 저급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프로그래밍 언어
주식회사 한글과컴퓨터 는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이다. 2010년 472억 원 매출, 108억 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하며 총 8년간 흑자 경영 체제를 이어가고 있으며, 2011년에는 연간으로는 566억 원대의 매출 목표를 삼아 ‘한컴오피스’ 신제품 출시와 씽크프리 모바일등 오피스 중심으로 사업계획을 재편 중이다. 대한민국 ‘정보자주독립’의 가치를 내걸고 1989년 자국어 워드 프로세서인 한글 1.0 발표, 1990년 10월 9일 설립되었으며, 2003년 프라임 그룹에 인수되었으며 2009년 삼보 컨소시엄으로 주인이 바뀌었으나 대표이사의 횡령이라는 악재 끝에 1년만에 다시 매물로 나왔고 결국 2010년 10월 소프트포럼에 의해 인수되었다. 2011년 들어 PC용 오피스인 한컴오피스 에 더해 신사업 분야인 모바일과 클라우드 기반의 오피스 ‘씽크프리’, 전자책(eBook) 분야 등에서 글로벌 성장에 집중하여 사상 최대의 실적을 거두는 꾸준한 경영실적을 보이고 있다. 주요 매출구조로 30%정도의 매출을 공공기관에서 하고 있다.아래아한글(HWP)을 포함한 한컴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독점할 수 있는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소프트웨어로 살아 남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수입을 대체하는 대안오피스로 발전하고 있다. HWP 문서포맷은 2009년 공개되었으며, MS-Word를 비롯하여, 네이버오피스등 기타 오피스솔루션들에서 HWP파일 포맷을 지원하고 있다. HWP 문서포맷은 HWP2002부터 HWP2014까지 같은 포맷을 사용하고 있다. 한컴오피스 - 사무용 프로그램 꾸러미 한컴오피스 한/글 -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한컴오피스 한셀 -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한컴오피스 한쇼 -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 한컴 개인정보탐색기 - 개인정보 탐색 프로그램 한컴 타자연습 - 한글 타자 연습 프로그램 한글과컴퓨터 아시아눅스 - 개인용 및 기업용 리눅스 운영체제 한/글 iOS 에디션 - iPad용 한/글 워크데스크 - 그룹웨어, 모바일그룹웨어 씽크프리 온라인 - 온라인 오피스 서비스 씽크프리 - 모바일 - 모바일에 최적화된 오피스로서 MID, Netbook, Android 에디션 등이 있다. 씽크프리 - Write - Java기반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 씽크프리 - Calc - Java기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씽크프리 - Show - Java기반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 씽크프리 - Server - 기업맞춤형 오피스 솔루션으로서 Standard, Integrate, Enterprise 에디션 등이 있다. 이지포토 - 이지포토 한컴전자책 - 한컴리드온, 한컴앱북, 한컴DRM, 디지털교과서 넷 한/글 - 인터넷 워드프로세서 서비스 한/글 PDF 컨버터 - 한/글 문서용 PDF 변환도구 한/맥 - 도스용 한글 입출력 프로그램 한/아름 - 사무용 프로그램 꾸러미 한/그림 - 벡터 드로잉 프로그램 심마니 (검색엔진) - 한글 자연어 인터넷 검색엔진 {데이콤에 인수(데이콤은 LG로 인수)} 한컴 홈마우스 한/틀마름이 - 양식 작성 프로그램 한/글 프린트마당 - 인쇄물 작성 프로그램 한/텍 - TeX 프로그램 e지샘 - 전자 교육용 저작도구 한컴 CSD 컨버터 - CSD 문서 제작도구 한컴 CSD 라이터 - CSD 문서 제작도구 위툴즈 - 광고용 콘텐츠 관리 솔루션 한CM - 인터넷 계약 체결 및 관리 서비스 크레팟 - 스타일록 서비스 유비튜브 - 무료문자 및 모바일 문서 전송서비스 한글과 컴퓨터는 이찬진 사장이 경영하던 시절인 1990년대 소프트웨어 개발외에도 출판사업도 하였다. 당시 한글과 컴퓨터는 월간《한글과 컴퓨터》를 발간하였는데, 아래아한글 중·고급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아래아한글활용방법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실제로 1994년 《한글과 컴퓨터》잡지에는 피아노학원 원장이 아래아한글 2.1(일반용)로 악보만드는 법을 소개한 바 있다. 한글과 컴퓨터에서는 한컴프레스라는 출판사도 운영했는데, 한컴프레스출판사에서는 따라해보세요 시리즈의 실용서를 출간하였다. 2010년 6월 29일에 한/글 2002 이후의 제품에서 사용되는 한/글 문서 파일 형식 5.0 및 한/글 97 문서 파일 형식 그리고 XML기반의 HWPML에 대한 문서 파일 형식내의 주요한 자료 형식 및 파일 구조, 레코드 구조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였다. 한컴은 최근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 이용조건 문구를 `한컴은 한컴오피스 한글문서파일(.hwp) 공개 문서에 따라 얻은 결과물을 기초로 또 다른 독점적, 배타적 권리를 취득하고 이를 한글과컴퓨터를 상대로 행사하고자 하는 자를 상대로는 적극적으로 권리행사를 할 수도 있다 고 수정했다. HWP의 개방형 문서형식으로 XML기반의 문서포맷인 OWPML(Open WordProcessor Markup Language)이 KS에 등록되었다. 카이스트(KAIST)와 한글과컴퓨터가 소프트 인력 양성과 해외 진출 경쟁력 강화에 함께 나섰다. KAIST와 한글과컴퓨터는 2014년 4월 8일 대전 유성 KAIST 교내에서 강성모 총장과 김상철 한컴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을 위한 산학협약을 체결하고 공동 태스크포스(TFT)를 발족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소프트웨어 인재 육성, 응용소프트웨어 분야, 한국 글로벌 소프트웨어 시장 확대를 위한 사업모델 발굴에 협력하기로 했다. 한글과컴퓨터는 이날 KAIST에 약 10억원을 소프트웨어 발전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아시아눅스 구름 플랫폼 분류:대한민국의 기업 분류:1990년 설립된 기업 분류:1990년 설립된 기업
김선일 (金鮮一, 1970년 10월 12일 - 2004년 6월 22일)은 주 이라크 미군과 거래하는 업체인 주식회사 가나무역 소속으로 이라크 현지에서 근무하는 통역사였다. 그는 아랍어를 전공하여 2003년 2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가나무역에 취직하여 2003년 6월 15일에 이라크로 갔다. 2004년 5월 30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팔루자 부근에서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끄는 이슬람교 계열 무장 단체인 유일신과 성전(현재의 이슬람 국가)의 인질로 납치되었다. 이 단체는 자이툰 부대 파병국인 대한민국 정부에게 이라크로의 추가 파병 중단 및 현재 주둔하는 한국군을 즉각 철수시키라고 협박하였고, 노무현 정부가 파병을 강행하자 6월 22일에 그를 참수하였다. 뒤에 버려진 시신은 미국군에게 발견되어 미군 수송기로 쿠웨이트로 이송되었고, 이후 한국으로 김 씨의 시신이 송환되었다. 김선일의 아버지와 누나 등 유가족 측근 4명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김선일의 피살 과정에서 국가의 과실 또는 불법 행위는 없었다는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아버지 김종규 어머니 신명자 누나 김향림 2007년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 분류:1970년 태어남 분류:2004년 죽음 분류:2004년 대한민국 분류:2004년 이라크 분류:통역사 분류:대한민국의 범죄 피해자 분류:참수된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기독교 선교사 분류:화기에 죽은 사람 분류:테러 피해자 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사건 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분류:2004년 6월 분류:21세기 기독교 순교자 분류:대한민국의 테러 피해자 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
위(魏) 황초(黃初) 3년 촉(蜀) 장무(章武) 2년 동오(東吳) 황무(黃武) 원년 위(魏) 문제(文帝) 3년 촉(蜀) 소열제(昭烈帝) 2년 동오(東吳) 손권(孫權) 원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27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26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9년 음력 4월, 신라에서 우박이 콩과 보리를 해쳤다. 남신현(南新縣) 사람이 죽었다가, 한달을 지내고 부활하였다. 6월, 촉한(蜀漢)의 선주(先主)유비(劉備), 오(吳)나라와의 효정전투에서 육손(陸遜)에게 패함. - 백제성(영안)으로 퇴각. *음력 10월, 백제 병사가 신라의 우두성(牛頭州)에 들어오니, 이벌찬 충훤이 병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으나, 웅곡(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여, 홀로 말을 타고 돌아오니, 그의 벼슬을 낮추어 진주(鎭主)로 삼았다. 연진(連珍)을 이벌찬으로 삼고 지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중국 서진 명장 두예 로마 제국 23대 황제 엘라가발루스 중국 후한말 삼국시대의 문인이자 촉나라의 문인 마량. 중국 촉나라 오호대장군 황충 중국 위나라 명장 장료 중국 촉나라 오호 대장군, 표기 장군 마초 중국 오나라 용장 감녕 중국 이민족장 사마가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위(魏) 황초(黃初) 5년 촉(蜀) 건흥(建興) 2년 동오(東吳) 황무(黃武) 3년 위(魏) 문제(文帝) 5년 촉(蜀) 후주(後主) 2년 동오(東吳) 손권(孫權) 3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29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28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11년 음력 7월, 신라의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봉산(烽山) 아래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리고, 일천여급(級)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음력 8월, 신라, 봉산성을 쌓았다. 고구려(高句麗) 12대 국왕 중천왕(中川王)
위(魏) 황초(黃初) 7년 촉(蜀) 건흥(建興) 4년 동오(東吳) 황무(黃武) 5년 위(魏) 문제(文帝) 7년 촉(蜀) 후주(後主) 4년 동오(東吳) 손권(孫權) 5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31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30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13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파르티아를 멸망시킴. 신라, 봄에 비가 많이 와 가을 7월까지 계속 비가 왔다. 백성이 굶주리니 창고의 구호미를 베풀어 구휼해 주었다. 겨울 10월, 중앙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가벼운 죄는 용서하여 주었다. 사간(士幹) 사섭(士燮) 사송(士頌) 사지(士祗) 사휘(士徽) 환린(桓隣)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위(魏) 태화(太和) 원년 촉(蜀) 건흥(建興) 5년 동오(東吳) 황무(黃武) 6년 위(魏) 명제(明帝) 원년 촉(蜀) 후주(後主) 5년 동오(東吳) 손권(孫權) 6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32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31년 / 동천왕(東川王) 원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14년 음력 2월, 신라, 서남(西南)의 군읍을 순수(巡狩)하였다. 음력 3월, 신라, 내해 이사금, 순수에서 돌아와 벼슬을 내려 파진찬 강훤(康萱)을 이찬으로 삼았다. 고구려(高句麗) 10대 국왕 산상왕(山上王) 중국 위나라 양평후 장군 서황 공명, 병사.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위(魏) 태화(太和) 3년 촉(蜀) 건흥(建興) 7년 오(吳) 황무(黃武) 8년 / 황룡(黃龍) 원년 위(魏) 명제(明帝) 3년 촉(蜀) 후주(後主) 7년 오(吳) 대제(大帝) 8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34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3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16년 *음력 4월, 신라,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을 울었다. *음력 9월, 신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음력 10월, 신라, 눈이 많이 와서 깊이가 오척에 달했다. 중국 촉한(蜀漢)의 무관 조운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위(魏) 태화(太和) 4년 촉(蜀) 건흥(建興) 8년 오(吳) 황룡(黃龍) 2년 위(魏) 명제(明帝) 4년 촉(蜀) 후주(後主) 8년 오(吳) 대제(大帝) 9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35년 /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원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4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17년 신라, 조분 이사금이 즉위하였고, 연충(連忠)을 이찬(伊飡)으로 삼고 군사와 국사를 맡겼다.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중국 위나라의 명군 종요 중국 촉나라 장비의 아들 장포
위(魏) 태화(太和) 7년 / 청룡(靑龍) 원년 촉(蜀) 건흥(建興) 11년 오(吳) 가화(嘉禾) 2년 위(魏) 명제(明帝) 7년 촉(蜀) 후주(後主) 11년 오(吳) 대제(大帝) 12년 신라(新羅)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4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7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20년 음력 5월 왜가 신라의 동쪽을 노략하니 음력 7월에 이찬 석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왜인과 싸우는데, 화공으로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위(魏) 청룡(靑龍) 2년 촉(蜀) 건흥(建興) 12년 오(吳) 가화(嘉禾) 3년 위(魏) 명제(明帝) 8년 촉(蜀) 후주(後主) 12년 오(吳) 대제(大帝) 13년 신라(新羅)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5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8년 백제(百濟) 사반왕(沙伴王) 원년 / 고이왕(古爾王) 원년 촉나라 장군 이엄 촉나라 승상 제갈량 촉나라 승상 제갈량의 부인 황부인 백제(百濟) 6대 국왕 구수왕 (재위 214년 - 234년) 후한 제14대 황제 헌제 유협 중국 삼국시대 격검의 달인이자 명군 서서
위(魏) 청룡(靑龍) 4년 촉(蜀) 건흥(建興) 14년 오(吳) 가화(嘉禾) 5년 위(魏) 명제(明帝) 10년 촉(蜀) 후주(後主) 14년 오(吳) 대제(大帝) 15년 신라(新羅)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7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10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3년 *음력 2월, 골벌국(骨伐國)의 아음부(阿音夫) 왕이 무리를 이끌고 와 신라에 항복하였다. 저택과 사유 경작지를 하사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 주고, 그 땅은 군(郡)으로 삼았다. 진나라 초대 황제 사마염(司馬炎)
위(魏) 경초(景初) 2년 촉(蜀) 연희(延熙) 원년 오(吳) 가화(嘉禾) 7년 / 적오(赤烏) 원년 위(魏) 명제(明帝) 12년 촉(蜀) 후주(後主) 16년 오(吳) 대제(大帝) 17년 신라(新羅)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9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12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5년 동천왕,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킴. 황제 막시미누스를 로마 원로원이 국가의 공적으로 선포하고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추대함.
고구려 (高句麗)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백제 및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한 주요 국가이다. 그 영토는 만주·한반도 북부, 그리고 러시아의 연해주와 몽골 동부까지 걸친 나라로 약 700년 동안 존재하였다.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 (高麗)로 바꾸었으나, 왕건이 건국한 같은 이름의 왕조(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고구려는 그 전성기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요동반도를 포함하는 현 중국의 동북 지역 및 연해주 일대, 만주 지역까지 영토로 두었다. 또한 요동·유주(현 베이징)·요수의 한족들과·거란·돌궐·말갈(여진족)·선비·지두우(몽골족) 등을 정복하고 통치한 나라이다. 또한 갈석산(제스 산)과 싱안링산맥(흥안련산맥), 아무르강과 쑹화강, 연해주를 모두 포함한 대제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광개토태왕비(好太王碑)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주몽)가 "천자(天帝)의 아들"(天帝之子, 天帝:하늘의 황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구려는 천손국가(天孫國家)였고 중원 고구려비에서 볼수 있듯이 "태왕"(太王)이라는 독자적인 칭호와 연호(年號)를 사용했고 "동맹"이라고 부르는 하늘에 제사(天祭)를 지내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국가들의 경우 주변 국가는 모두 천자의 신하라고 부르고 기록하며 "천자"라는 단어의 사용을 사용하면 항의를 하였고 제후국의 제후들은 부모인 종묘와 땅과 농사의 신인 사직(社稷)에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심하게 항의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천손국가(天孫國家)를 주장한 것은 오직 고구려만이 제후국들을 거느리는 "천제(天帝)의 국가"라는 뜻이다. 이민족의 북조와 중국인들의 남조는 대략 1~2세기면 멸망한 것이 많지만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와 복속된 여러 민족들을 성공적으로 지배하고 7세기 동안 하늘에 제사를(天祭) 이어가며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 졸본부여에서 세력을 키운 추모(성씨는 해 또는 고)가 건국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며 국호를 고구려 스스로 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미 기원전 107년 기록에 . 그 후 국내외 사료에 남은 기록대로 편의에 의하여 고려 등을 혼용하였으며 고구려 후기의 주요 사료의 기록에는 고려(高麗) 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어 장수왕 무렵에 고려로 공식 국호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 후기를 기록한 사료가 전기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유일 수도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 고구려로 이름을 통일하여 부른다. 중국 측의 사료에는 예(濊)/맥/고리/구려/평양((平凉)/요동(遼東) 등으로도 고구려를 호칭하기도 했다. 훗날 대조영의 대진국(발해)의 경우도 국서에는 고려국이라고 자칭한 유물 있으며 왕건이 개국한 고려와도 구별하기 위해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高句麗)로 통용하며(조선의 경우와 같음) 국호의 경우, 사료와 연구 부족으로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고구려는 동부여의 금와왕의 양자라 전해지는 추모고주몽를 중심으로하는 삼국사기의 건국설과 졸본부여 시절의 동명성왕의 건국설이 있다. 주로 한나라와 부여, 고대 군소 국가들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초기의 중심지인 산간지대를 수도로 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전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흡수하는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였고 북쪽은 북부여가 있고 동쪽은 동부여가 있어 주로 단군조선고조선 고토 회복 운동 대의명분으로 요동, 요서 방향을 공략하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초기 유리명왕 시절의 신나라를 공격했다. ref>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후한서 고구려전 하고 있으며, 고구려본기의 내용 또한 중국사서의 기초를 두고 있어 유사하나 고구려후 추가 아닌 장수 연비(延丕)가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고구려는 6대 태조태왕 이후 절대 왕족인 중앙의 고씨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초기 왕족인 해씨 소노부(消奴部) 왕비 배출 부족인 북부의 절노부(絶奴部) 동부의 순노부(順奴部) 남부의 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고구려와 위(魏)나라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위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을 정복하는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낙랑을 함락시키고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함으로서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한족들을 정복하고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된적이 있으나 고구려는 전연을 공격하여 유주 지역(베이징과 톈진지역)을 정복했다.고구려의 덕흥리 무덤에 성씨가 복성인 고구려인의 제후왕에 유주시자라는 표문이 있어 북한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고국원왕때부터 요동과 유주 지역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광개토대왕릉 비문 탁본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를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의 종발성까지 가야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대왕은 402년부터 중국의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에 고구려군과 고구려에 정복된 거란족을 이용하여 중국 후연을 공격하고 중국 후연의 성들을 정복하여 후연은 고구려우 매서운 공격에 점점 쇠약해진다. 중국 후연은 고구려의 유민을 천왕(天王:중국 북조의 황제의 호칭)으로 세우고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고구려는 요동을 정복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위서의 고구려전에는 高麗 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黠虜, 實得征之이라고 쓰여 있으며 고구려가 해외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오랑캐들인 구이(九夷)들을 모두 정벌하여 왔다고 나타나 있다. 남제서 고구려전에서는 북위가 고구려의 사신과 남제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하여 고구려와 남제를 동급의 국력으로 취급하여 남제의 사신이 북위의 사신에게 항의하였으나 북위의 사신이 답하길 "그 자리도 높은 자리이니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리하여 남제서에서는 "고구려가 북위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하여 남제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435년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은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장수왕은 갈로와 맹광 장군을 보내어 북연의 수도인 용성(조양)에서 북위의 군대와 대치하였다.북위의 장군 고필은 고구려군의 위세에 놀라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가였다.그리하여 갈로와 맹광 장군의 고구려군은 북연의 수도인 용성을 함락시키고 북연의 왕과 백성들을 고구려로 끌고 갔다. 북연의 왕, 한족 풍홍은 고구려가 풍홍을 매우 낮게 대하자 송나라에게 사람을 보내 구출을 요청한다.장수왕을 그리하여 손수,고구 등을 보내어 중국 한족 풍홍의 모후와 처자만 남겨두고 풍홍을 죽인다. 송나라는 왕백구와 7천명의 군사를 보내어 손수와 고구를 몰래 공격하여 죽인다. 장수왕은 왕백구등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사로잡고 송나라로 압송하였다. 송나라는 고구려의 뜻대로 왕백구를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놓아주었다. 435년 북위의 조양에서는 당시 전쟁에 만회를 하기 위해 고구려의 정벌을 논의한다.그러자 북위의 낙평왕 비(丕)의 주청으로 중지하고 말았다. 대신 고구려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이오를 고구려에 파견한다.이오는 고구려가 조씨가 세운 위나라때보다 인구가 3배는 된다고 보고하여 고구려의 강성함을 알렸다. 북위 헌문종(465-471)의 부인 문명태후는 고구려에 청혼을 요청하고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李敷)등을 고구려의 국경까지 보내어 폐물을 보내는 등 예의를 다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수왕은 거절하였다. 헌문종 다음의 효문종에게 고구려 장수왕은 혼인을 강하게 요구하여 효문종은 고구려인인 문소태후와 결혼하고 선무종(499-515)를 낳았다.문소태후의 형제인 고조(高肇)일당이 선무종의 집권시기에 크게 세력을 키워 북위의 정권을 잡는다. 장수왕 이후의 고구려의 문자명왕때는 고구려는 북위를 위해 사당을 짓거나 애도를 표하지 않았으나 북위는 고구려 위세에 눌려 스스로 애도와 예의를 표했다. 위서에는 북위의 권력을 잡은 선비족 영태후가 동쪽 사당에 장수왕의 애도를 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508년에 북위의 선무종가 청주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짓기도 하였다. 520년 고구려는 북위를 공격하였다.대릉하 유역의 중심 도시인 조양에 발견된 한기의 묘지명에 평주사마 자의참군직에 있는 한상이 고구려군이 북위를 공격하였을 때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왔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유연과 함께 지두우족(현 몽골족)을 분할 점령하려고 한다.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북조를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고구려 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북위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북조의 사서에 적혀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 는 만주를 정복하고 멀리 내몽고의 대흥안령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국가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 tomb mural.jpg|섬네일|왼쪽|무용총 수렵도.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북위에서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는 무천진 선비족들은 2세기부터 중국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선비족과 경쟁하며 요동과 만주, 북연 등 중국인들을 정복하였는데 고구려보다 더 많은 남쪽의 중국인 한족들을 정복하여 예속시킨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고구려에 친조를 요구하였다.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고구려인 강이식이 "칼로 대답하자" 하여 고구려와 수나라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전쟁이 있었다. 598년 고구려는 요서에 군대를 향하게 하여 요서를 선제 공격하여 정복하자 이를 계기로 수나라의 수 문종은 수나라군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수나라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612년 수 양종은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종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수나라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요동성은 수나라군을 물리친다. 결국 수 양종은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하고 죽었다(살수대첩). 결국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수나라의 국력을 소진시켜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신라·당 연합군에게 패하였고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당나라군을 패망시키고 고구려는 승리하였다.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고 무천진 선비족이 한족들을 예속시켜 세운 당나라는 국력이 쎄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고구려의 마지막 보장왕의 아들 안승(고안승)이 신라에 귀순하여 김씨성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인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며, 그것이 더욱 정비된 것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고구려의 중심 세력은 본래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왕은 부족 연맹장이 되었다. 왕은 선출에서 세습제로 변하였는데 초기는 소노부에서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 초기에는 국왕 밑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주부(主簿)·우대(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 등을 두었는데, 이 관계(官階)는 그 후 발전 과정을 통하여 427년 평양천도 이후에 재정비되었다. 관료의 등급은 대체로 12등급으로 분화·발달되었는데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대사자(大使者)·소형(小兄)·제형(諸兄)·선인(仙人) 등으로 나뉘었다. ‘형’은 연장자로, 가부장적(家夫長的) 족장의 뜻을 나타내며 부족 연맹에서 고대 국가로 전환하면서 여러 족장 세력을 이러한 관등에 흡수한 것 같다. ‘사자’가 붙은 것은 씨족원으로부터 등용된 것으로 공부(貢賦) 징수의 직역(職役)을 뜻하는 것 같다. 대대로와 막리지(莫離支)는 수상격인 고구려 최고의 관직으로 대대로가 평시 행정 담당의 수상이다. 막리지 밑에는 고추대가(古雛大加)·중외대부(中畏大夫)·대주부(大主簿)등을 두었는데 각각 내정(內政)·외정(外政)·재정(財政)을 맡아보았다. 지방은 동·서·남·북·중의 5부(部)로 나누고, 5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부왕(副王)급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 내부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하여야 했다. 원래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을 여러 성(170)은 고구려 왕국의 사적·행정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었고 또 부세(賦稅) 등 지방민에 대한 통치가 행해지기 마련이었다. 고구려에는 귀족 회의의 하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라 하였다.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각 부 내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했다. 그 밑에 각 이원(吏員)이 있어 사무를 분장하였다. 문무의 구별이 체계화되지 못하였던 고구려는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던 여러 성을 행정적·군사적 단위로 편성하였던 것 같다. 5부를 중심으로 하여 기내(畿內)의 뜻인 듯한 내평(內評)과 기외(畿外)의 지방을 의미하는 외평(外評) 제도가 있었다. 또한 평양 천도 후에는 평양 이외에 국내성(國內城, 통구)과 한성(漢城, 재령)의 별경(別京)이 있어 삼경제(三京制)가 성립되었다.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서 국왕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조직도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국내성·평양·한성(漢城 재령)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고,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맡았다. 주요 발사 무기로는 고구려에서 국궁과 각궁을 사용했다. 또한 석궁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성을 방어할때는 투석병이 있었다. 도끼창(미늘창)을병이했다. 고구려의 보병은 창과 칼 두 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첫 번째는 짧은 양날 변형으로 생긴 창으로 대부분 던지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단일 양날 검으로 한나라의 영향력을 받은 칼자루 안에 있었다. 투구는 중앙 아시아 민족이 사용하는 날개 달린 가죽 및 말꼬리 장식과 유사했다. 갑옷은 미늘갑옷이라 군인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신발은 밑에 뾰족하게 된 송곳이 박혀있어 적을 밟을 때 사용했다.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은 12배를 물게 하였다. 1책12법이라고도 하며 부여와의 공통점이다. 고구려에서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남의 가축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는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가 모여서 논의하는 제가 회의를 통하여 처벌하였다. 이렇게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 고구려의 사회 계급은 귀족·평민(호민, 하호)·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또한 각기 넓은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조의·선인·대사자·상가·고추가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일반 백성인 평민은 읍락의 지배계층인 호민(豪民)과 피지배계층인 하호(下戶)로 구분되며, 이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고, 토지 경작과 함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며, 토목공사에도 동원되었다. 고구려의 천민인 노비는 포로·죄인·채무자·귀화인 또는 몰락한 평민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신분 계급에 따라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다. 주로 생산 활동에 종사한 피지배층 하호는 고구려 본족(本族) 중의 범죄자·낙오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피정복민이었으며 전쟁 때 포로가 된 한족도 있었다. 이들 하호는 신분적으로 노예와 구별되었으나 사회 경제적 위치는 노예에 준(準)하는 예속민으로서 대부분 정복당한 원주지에 살면서 농경을 포함한 생산 활동을 거의 전담하였고, 일부는 고구려에 이주되어 토지의 개척과 농경 등에 사역(使役)되었다. 또 전시에는 지배자의 사병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영역 내의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라는 의미에서 토지 국유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 원칙에 입각하여 토지는 분배되었다. 왕실 직속령(直屬領)이었던 것은 물론 전쟁시의 뛰어난 훈공에 의해서 국왕으로부터의 상사(賞賜) 형식으로 수여되는 사전(賜田)이나 식읍(食邑)은 귀족의 대토지 소유의 원천이 되었다. 사전(賜田)은 세습적인 상속이 인정되었고, 식읍은 자손에게 상속될 수 없었으며, 이들 토지 수급자(受給者)는 국가에 조세(租稅)를 납부하였다. 귀족에 의한 토지의 사적지배(사유화 과정)는 족장(귀족)·사원(寺院)을 중심으로 장원(莊園)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귀족은 토지뿐 아니라 경작하는 예민(隸民)까지 마음대로 지배하였다. 고구려의 산업은 농업을 위주로 했으며, 국가에서는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농사를 담당한 것은 피지배계급인 일반 농민이었다. 고구려의 세제(稅制)는 세(稅)와 조(組)가 있었는데, 인두세(人頭稅)에 해당하는 세로 포목 5필에 곡식 5섬을 받았고, 조는 민호(民戶)를 3등급으로 나누어 상호가 1섬·중호가 7말·하호는 5말을 내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 졸본에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사람은 절할 때에도 한쪽 다리를 꿇고 다른 쪽은 펴서 몸을 일으키기 쉬운 자세를 취하였고, 걸을 때도 뛰는 듯이 행동을 빨리 하였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는데, 3세기 들어 사라졌다. 형사취수제는 부여와의 공통점이다. 초기에는 남자가 처가 옆에 마련한 서옥(사위집)에 들어갈 때에 돈과 옷감 등을 예물로 처가에 주었으나, 그 이후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결혼했는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만약 신부 집에서 재물을 받은 경우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 《삼국지》〈위서〉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동맹 때에는 “나라 동쪽에 큰 수혈(隧穴)이 있어,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수신(隧神)을 제사지내며,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모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신은 주몽의 어머니로 민족적인 신앙의 대상이며, 목수는 나무로 만든 곡신(穀神)을 의미한다. 전 부족적인 제례(祭禮)였던 이 의식에서는 부족원이 무리를 지어 연일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사람이 모여 사냥을 하고,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69만호라고 되어 있고, 구당서에는 69만 7천호라고 되어있다. 5-6세기 고구려 지붕 기와의 와당 고구려의 문화는 고구려인의 강건한 기질을 잘 나타낸다. 지배층의 복식은 한나라(漢)·흉노에서 수입한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되었고, 전사(戰士)는 머리에 쓴 적관(冠)에다 깃털을 꽂는 이른바 절풍(折風)을 썼는데 많이 꽂혀있을수록 높은신분을 나타낸다 고구려인은 또한 거대한 분묘와 석총(石塚)을 만들었고, 많은 물건을 시체와 함께 부장하였다. 한자와 한문학은 삼국 중에서 가장 이르게 들여왔으며, 372년(소수림왕 2년)에는 이미 국가에서 유학(儒學)의 교육 기관으로 "태학"(太學)을 세웠고,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의 자제에게 독서(讀書)·궁술(弓術)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인 사이에는 유교의 경전(經典)이나, 사기(史記)·한서(漢書) 등의 사서(史書)가 읽혀졌다. 옥편(玉篇)·자통(字統)과 같은 사전류(辭典類)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文選)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한자의 사용에 따라서 국가적인 사서(史書)의 편찬도 일찍부터 행하여졌다. 그리하여 일찍이《유기(留記)》105권이 편찬되었으며, 이것을 600년(영양왕 11년)에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간략히 하여 《신집(新集)》5권을 편찬케 하였다. 한자 사용의 근거는 통구의 모두루 묘지(牟頭婁墓誌 414년)의 비문(碑文)과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약 1,800자(字)의 비문으로 능히 알 수 있고, 특히 광개토왕의 비문은 중요한 사료(史料)가 되고 그 고굴(告掘)한 예서(隸書)의 자체(字體)는 서예(書藝)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의 시가로는 유리왕(瑠璃王)이 지은 〈황조가(黃鳥歌)〉와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주는 시)〉등이 한시(漢詩)로서 전하고, 그 밖에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등이 그 이름만 《고려사》〈악지〉(樂志)에 전한다. 고구려의 종교는 원시 신앙과 불교·도교로 대별할 수 있는데 원시 신앙으로는 자연물 숭배, 천신(天神)·지신(地神)·조상신(祖上神)의 3신(三神) 숭배와 샤머니즘(shamanism)적 신앙이 있었고, 특히 나라에서는 부여신(河伯女)과 고등신(高登神 주몽)을 시조신(始祖神)으로 해마다 4회 제사를 지냈다. 불교의 전래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에서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佛像)과 불경을 전래한 것이 그 시초이며, 그 2년 뒤에는 다시 동진(晋)에서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여 위의 두 불승(佛僧)을 거주케 함으로써 국가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를 왕실에서 이와 같이 환영하였던 까닭은 불교가 때마침 국민에 대한 사상 통일의 요구에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녔던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왕실에 크게 영합되었기 때문이다. 곧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한편, 도교(道敎)는 고구려 말기인 624년(영류왕 7년)에 당 고조(唐高組)가 양국 간의 친선정책으로 도사(道士)를 보내와 전한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고구려 사신도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 도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건축·미술에서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는데, 대부분의 유적이 통구와 평양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궁실(宮室)이나 사찰(寺刹) 등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분의 구조를 통하여 당시의 귀족 계급의 호화로운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으로는 석총(石塚)과 토총(土塚)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석재(石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將軍塚)은 통구 지방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석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관(棺)을 안치한 큰 석실(石室)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덮은 토총 형식의 대표적인 것은 평양 부근의 쌍영총(雙楹塚)이다. 이와 같은 석실(石室)의 구조와 벽화(壁畵)에 의해서 고구려인의 건축술과 미술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곧 쌍영총의 현실(玄室)과 전실(前室) 사이에 세워진 각(角)의 두 석주(石柱)와 투팔천정(鬪八天井), 또 그림으로 나타낸 천정의 장식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엿보게 한다. 강서대묘 사신도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인의 신앙·사상이나 풍속·복식(服飾) 등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삼국시대 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쌍영총의 섬세·화려한 필치로 그려진 인물화나 무용총(舞踊塚)의 무인(舞人)·가인(歌人)의 그림은 고구려인의 풍속·복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청룡(靑龍)·백호(白虎) 등이 그려진 강서대묘(大墓)의 사신도(四神圖)는 강건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잘 나타낸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 수렵총(狩獵塚)·각저총(角抵塚)·수산리 고분·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가 건축·미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칠년」이 새겨진 금동불입상 02.jpg|섬네일|왼쪽|200px|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국보 119호) 고구려의 불교 미술은 중국의 북위(北魏)풍의 영향으로 불상이나 불화(佛畵) 또는 탑파(塔婆) 등의 미술품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족이나 유물은 극히 드물다. 1940년에 평양 근처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118호)이나 어느 왕의 연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연가(延嘉)7년이라는 고구려 연호가 새겨진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 이 국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은 장수왕(長壽王 재위 422~491),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491~519) 또는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65년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에서 발견되었다. 이 외에 중국 요령성 의현에서 출토된 고구려 금동불상도 있다. 이 불상은 을유년에 제작되었다고 새겨져 있으며, 대고구려국 이라는 국명이 적혀 있는데, 을유년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크게 논의된 바는 없다. 이 불상 자체가 극히 최근에야 국내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구려 문화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구려의 화공(畵工)·학승(學僧)이 일본으로 가서 불교문화를 전하는 데 공현하였다. 특히 승려이자 화가인 담징(曇徵)이 그린 벽화는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 고구려인은 가무(歌舞)를 즐겼으나 더 이상의 문헌적 고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양원왕때의 국상인 왕산악(王山岳)이 진(晋)의 칠현금(七鉉琴)을 개량(改良)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 하고 100여 곡(曲)의 악곡(樂曲)을 지었다고 전한다. 송나라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한반도에 깃발 문화는 소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깃발은 그 종류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 단순하고 무늬도 없었다. Flag of Goguryeo.svg|4세기 경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에 그려진 붉은 깃발. Flag of Goguryeo.svg (Tonggu No. 12).svg|5세기 중엽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에 있는 통구12호분 (또는 마조총) 벽화에 그려진 깃발. Flag of Goguryeo (Ssangyeongchong).svg|5세기 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에 있는 쌍영총 연도동벽화에 그려진 깃발. 중국의 북조 및 북방 초원의 여러 민족과 교섭, 바다를 통해 남조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불교를 전파했으며, 고구려의 승려인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파하고, 호류 사 벽화를 남겨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 고구려 등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바 있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도 고구려의 역사의 계승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하였으나, 2006년에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 역사재단에 통합되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주몽·연개소문 등 고구려를 주제로 한 여러 역사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의 화살은 고구려에서 빗겨난 발해사에 집중되었다. 고구려(高句麗)의 한국어 독음이 고구려가 아니라 ‘ 고구리 ’라는 의견이 있다. 이는 麗의 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발음된다는 음운 법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라 나타나고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한편 장수왕 3년(414년), 69년(481년)에 각각 설치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고려태왕(高麗太王) , 호태왕(好太王) 이라는 명칭을 근거로 고구려에선 왕을 태왕 이라고 칭했다는 의견이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삼국유사》 고구려의 역대 국왕 고구려의 관직 삼국시대 주몽 가우리 고구리 소고구려 발해 후고구려 고려 1책 12법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 동북아역사재단 분류:668년 폐지 분류:기원전 37년 설립
《 교향곡 5번 다 단조 》(Op. 67)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806년에 착상하여 1808년에 완성한 교향곡이다. 1808년 12월 22일 빈에서 초연되었다. 동양에서는 보통 운명 교향곡 으로 알려져 쓰이고 있다. 단 서양에서는 다단조 교향곡으로만 통하고 있으나 운명 부제가 자주 쓰이기 시작하는 추세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Wien) 시내의 빈 강 곁에 있는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극장에서의 1808년 12월 22일 저녁 아카데미(Akademie. 당시에는 연주회를 Akademie라 했음)에서 베토벤이 자신의 세계 음악사상 불후의 작곡인 몇 가지 새 작품들을 모두 자신의 지휘로 선 보일 때에 이 작품도 함께 초연됐다. 음악 연주회 역사상으로도 손꼽을 유명한 이 "아카데미"는, 현대에는 상상할 수 없을 길다란 기록적인 연주시간(4 시간 이상)을 잡아 먹었다 # 교향곡 6번 바 장조 "전원" Op. 68 # 콘서트 아리아 아, 페르피도(Ah, perfido), Op. 65 # 장엄미사곡 다장조, Op. 123 중 Gloria 악장 Sanctus 악장과 Benedictus 악장 # 피아노 협주곡 4번 사장조 Op. 58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겸 지휘) # 휴식 (Intermission) # 교향곡 5번 다단조 Op 67 # 독주 피아노 즉흥곡 (베토벤이 직접 연주한다.) # 합창환상곡 다단조 Op. 80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겸 지휘) 악장구성은 다음과 같다. # 알레그로 콘 브리오 # 안단테 콘 모토 # 알레그로 # 알레그로-프레스토 독일 음악사학자 Paul Bekker는 각 악장마다 몸부림(Struggle) , 희망(Hope) , 의심(Doubt) , 승리(Victory) 라는 별칭을 달았다. 운명 교향곡 이라는 별칭은 일본에서 붙여진 것으로, 동양에서도 널리 쓰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곡 자체가 운명 교향곡 으로 불리는 일은 적다. 하지만 운명 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다음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베토벤이 죽고 나서 몇 년 뒤 그의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가 다음과 같이 쓴 것이다. 쉰들러가 쓴 베토벤의 삶에 대한 모든 기록은 전문가들에게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여지지 않으며, 대부분 쉰들러가 낭만적으로 비화시킨 관점으로 작곡가를 바라보았다는 의견이 많다 (예를 들면 그가 쓴 베토벤의 대화록은 전부 날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위 기록이 쉰들러가 꾸며낸 얘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가능성은 크다.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있다. 엘리자베스 슈웜 글레스너(Elizabeth Schwarm Glesner)는 베토벤이 "성가시게 묻는 사람들에게 별 도움이 될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점으로 위 이야기에 대해 논박했다. 운명 교향곡 의 첫 시작 부분()은 매우 유명하다. 분류: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분류:다단조 작품
알카에다 ( )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살라프파 무슬림에 의한 국제 무장 세력망이다. 소위 이슬람 원리주의 계통에 속해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1990년대 이래 주로 미국을 표적으로 테러했다고 일컬어지며, 많은 사건을 대상으로 하여 스스로 그 실행을 인정하는 이 과격파 국제 테러 조직은 2001년 미국 동시다발 테러를 단행하여 미국과 친하거나 미국을 동경하는 세계를 크게 충격했는데 대테러전으로 수행된 같은 해의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의거해 그때까지 비호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타도되어 크게 타격당했다. 이러한 알카에다의 과격 테러로 인해 주변 중동국가들마저도 알카에다에 매우 적대적인 입장이다. 알카에다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항한 이슬람 의용군(무자헤딘)이 연대한 조직이 기원이다 그 후에 걸프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군대를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이슬람교 제2대 성지 메카와 메디나에 상주하게 한 만행이 계기가 됐다. 이런 만행으로 말미암아 미국에 심정상 반발하던 무자헤딘들의 의식이 결합되었고 반미국 투쟁으로서 진화했다. 1990년대에 시작된 투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과격해져서 2001년에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 국방부 건물 테러 사건, 같은 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소재한, 미국 군대 기지 폭파 사건,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 대사관 폭파 사건, 예멘 근해에 체류한, 미국 군함인 콜을 습격한 사건에 관여했다고 간주되며 2000년에는 미국 뉴욕에 소재한 세계무역센터 생물 학무기 테러 사건을 단행하면서 마침내 2001년 미국을 동시다발 테러한 외에서 동남아시아 각국의 반정부 이슬람 과격파 조직과도 연락하였다고 의심받는다. 2003년 말 이후는 미국과 영국이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서 점령해 통치하는 이라크에 알카에다계 활동 인원이 다수 잠입하였으며, 2004년의 미국인 닉버그 몇 명과 김선일 처형에 간접으로 연관됐다고 간주된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이슬람 근본주의 탈레반 오사마 빈 라덴 사담 후세인 무아마르 알 카다피 분류:이슬람교 관련 논쟁 분류:범이슬람주의 분류:이슬람 테러 조직 분류:민족 해방 운동 분류:1988년 설립 분류:살라프파
위(魏) 정시(正始) 5년 촉(蜀) 연희(延熙) 7년 오(吳) 적오(赤烏) 7년 위(魏) 소제(少帝) 5년 촉(蜀) 후주(後主) 22년 오(吳) 대제(大帝) 23년 신라(新羅)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15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18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11년 *위나라의 조상이 한중을 침공했으나 왕평, 비의에게 격퇴됨.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 고구려 침입 음력 1월, 신라는 이찬 석우로에게 벼슬을 내려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지병마사(知兵馬事)를 겸하게 하였다.
위(魏) 정시(正始) 6년 촉(蜀) 연희(延熙) 8년 오(吳) 적오(赤烏) 8년 위(魏) 소제(少帝) 6년 촉(蜀) 후주(後主) 23년 오(吳) 대제(大帝) 24년 신라(新羅)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16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19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12년 음력 10월에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라의 석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고구려군에 패하고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중국 오나라의 참모 육손. 누명으로 억울한 죄를 문책당하고 화병으로 분사.
위(魏) 정시(正始) 9년 촉(蜀) 연희(延熙) 11년 오(吳) 적오(赤烏) 11년 위(魏) 소제(少帝) 9년 촉(蜀) 후주(後主) 26년 오(吳) 대제(大帝) 27년 신라(新羅) 첨해 이사금(沾解泥師今) 2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22년 / 중천왕(中川王) 원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15년 음력 1월, 신라, 이찬 장훤(長萱)을 서불한으로 삼아 이로써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음력 2월, 신라,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강화(講和)를 맺었다. 고구려(高句麗) 11대 국왕 동천왕(東川王) 왜(倭)의 야마타이코쿠 히미코(卑弥呼)
위(魏) 가평(嘉平) 5년 촉(蜀) 연희(延熙) 16년 오(吳) 건흥(建興) 2년 위(魏) 소제(少帝) 14년 촉(蜀) 후주(後主) 31년 오(吳) 폐제(廢帝) 2년 신라(新羅) 첨해 이사금(沾解泥師今) 7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6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20년 음력 4월, 용이 신라 궁궐 동쪽 못에 나타났다. 금성 남쪽의 넘어진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 음력 5월부터 7월까지 신라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시조묘와 명산(名山)에 빌고 제사지내니, 비로소 비가 내렸다. 음력 9월 17일 - 금관가야에서 마품왕이 제3대 왕으로 즉위. 신라, 굶주린 해여서, 도적이 많았다. 1월 - 촉나라의 문신 비의 6월 - 교황 고르넬리오, 21대 로마 교황. 음력 9월 17일 - 가락국의 제2대 국왕 거등왕.
위(魏) 정원(正元) 2년 촉(蜀) 연희(延熙) 18년 오(吳) 오봉(五鳳) 2년 위(魏) 폐제(廢帝) 2년 촉(蜀) 후주(後主) 33년 오(吳) 폐제(廢帝) 4년 신라(新羅) 첨해 이사금(沾解泥師今) 9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8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22년 음력 9월, 백제가 신라를 침략해 오니, 신라는 일벌찬 익종(翊宗)이 귀곡(槐谷) 서쪽에서 맞서 싸웠으나, 백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음력 10월,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는 항복하지 않았다.
위(魏) 정원(正元) 3년 / 감로(甘露) 원년 촉(蜀) 연희(延熙) 19년 오(吳) 오봉(五鳳) 3년 / 태평(太平) 원년 위(魏) 폐제(廢帝) 3년 촉(蜀) 후주(後主) 34년 오(吳) 폐제(廢帝) 5년 신라(新羅) 첨해 이사금(沾解泥師今) 10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9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23년 음력 3월, 신라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는데, 길이가 세 길이고, 높이가 한 길 두 자였다. 음력 10월 그뭄에 일식이 있었다. 삼국지 조위 초기 점술가 관로(管輅)
위(魏) 감로(甘露) 5년 / 경원(景元) 원년 촉(蜀) 경요(景耀) 3년 오(吳) 영안(永安) 3년 위(魏) 폐제(廢帝) 7년 / 원제(元帝) 원년 촉(蜀) 후주(後主) 38년 오(吳) 경제(景帝) 3년 신라(新羅) 첨해 이사금(沾解泥師今) 14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13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27년 고이왕이 백제의 관직을 정비하다. 여름, 큰 비가 와서 신라의 산이 사십여 군데 무너졌다. 음력 7월, 살별이 동쪽에 이십오일을 머물다가 사라졌다.
위(魏) 경원(景元) 2년 촉(蜀) 경요(景耀) 4년 오(吳) 영안(永安) 4년 위(魏) 원제(元帝) 2년 촉(蜀) 후주(後主) 39년 오(吳) 경제(景帝) 4년 신라(新羅) 첨해 이사금(沾解泥師今) 15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14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28년 음력 2월, 신라,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나마 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 음력 3월,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음력 3월, 촉한의 황제 유선이 죽은 조운의 관직을대장군으로 시호를 순평후로 추증한다 음력 12월 28일, 신라(新羅) 첨해이사금(沾解泥師今)
위(魏) 경원(景元) 4년 촉(蜀) 경요(景耀) 6년 / 염흥(炎興) 원년 오(吳) 영안(永安) 6년 위(魏) 원제(元帝) 4년 촉(蜀) 후주(後主) 41년 오(吳) 경제(景帝) 6년 신라(新羅)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 2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16년 백제(百濟) 고아성(古爾王) 30년 촉이 세운지 43년 만에 유선이 위나라 등애에게 항복함 촉 멸망함. 음력 1월, 신라, 이찬 양부(良夫)에게 벼슬을 내려 서불한으로 삼고, 지내외병마사(知内外兵馬事)를 겸하게 했다. 음력 2월, 신라, 왕이 친히 국조묘(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구도(仇道)를 추봉(追封)하여 갈문왕으로 삼았다.
위(魏) 경원(景元) 5년 / 함희(咸熙) 원년 오(吳) 영안(永安) 7년 / 원흥(元興) 원년 위(魏) 원제(元帝) 5년 오(吳) 경제(景帝) 7년 / 말제(末帝) 원년 신라(新羅)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 3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17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31년 오의 제3대 황제 손휴가 요절한다. 강유와 종회가 등애를 잡아 사마소에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강유와 종회가 사살당한다. 등애가 낙양에 돌아오던 도중 아들 등충과 함께 살해당한다. 음력 2월, 신라, 왕이 동쪽으로 순행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음력 3월, 신라, 왕이 황산(黄山)으로 거둥하여, 고령자와 가난하여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자를 방문하고, 이들을 진휼하였다. 중국 촉한의 장군 강유 중국 조위의 장군 종회 중국 조위의 장군 등애 중국 오나라의 황제 손휴
위(魏) 함희(咸熙) 2년 서진(西晉) 태시(泰始) 원년 오(吳) 원흥(元興) 2년 / 감로(甘露) 원년 위(魏) 원제(元帝) 6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원년 오(吳) 말제(末帝) 2년 신라(新羅)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 4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18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32년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염에게 나라를 양위해 5대 46년만에 위나라가 멸망하고 서진이 세워지다. 위나라 책사이자 진나라 태조 문황제인 사마소
서진(西晉) 태시(泰始) 2년 오(吳) 감로(甘露) 2년 / 보정(寶鼎) 원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2년 오(吳) 말제(末帝) 3년 신라(新羅)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 5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19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33년 서진이 낙랑군을 지배. 음력 8월,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침략해 오자, 성주 직선(直宣)이 장사(壯士) 2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이들을 치니, 백제군이 패하여 달아났다. 신라 왕이 이를 듣고, 직선에게 벼슬을 내려 일길찬으로 삼고, 사졸(士卒)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
서진(西晉) 태시(泰始) 4년 오(吳) 보정(寶鼎) 3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4년 오(吳) 말제(末帝) 5년 신라(新羅)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 7년 고구려(高句麗) 중천왕(中川王) 21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35년 신라,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아,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 친히 정치와 형벌의 성공과 실패를 묻고, 또한, 관리 다섯 명을 보내 둘러보게 하여, 백성의 괴로움과 근심을 물었다. 12월 26일 - 교황 디오니시오, 25대 로마 교황.
위 (魏, 220년 ~ 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 하나로 삼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조위 (曹魏)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부적인 전략과 재능을 가진 조조는 삼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당대의 숙적 원소와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원 일대를 평정하여 최강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중국 대륙이 삼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가 국력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위나라는 220년(황초 원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266년(진시 원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5년간에 걸친 왕조로, 실제 건국은 조조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다 189년(중평 6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이 그를 따른다. 191년(초평 2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靑州兵)’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求賢令)’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통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許)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낙양, 허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 216년에 위왕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220년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조비는 낙양으로 천도하고, 허를 허창(許昌)으로 고쳐 불렀다. 낙양은 중국 삼국 시대 중 규모·인구 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조비는 유가를 부흥하여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고, 구품관인법을 실시하여 인재를 선발하였다. 하지만 조비 스스로 예를 따르지 않고, 오 정벌의 실패로 인하여 위신이 실추되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한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5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서력 사건 155년 조조 태어남. 189년 조조, 향리에서 동탁 토벌을 위한 의병을 모집함. 192년 연주목으로 영입되어 정예군 청주병을 조직함. 196년 헌제를 봉대하고 허창으로 천도함. 둔전제 시행. 200년 백마, 관도에서 원소군을 무찌름. 207년 오환을 정복하여 평정. 210년 구현령과 술지령 공포. 213년 조조, 위공이 됨. 215년 조조의 딸, 헌제의 황후로 세워짐. 한중을 평정. 216년 조조, 위왕이 됨. 219년 조조, 한중을 잃음. 손권과 연합, 관우를 격파함. 220년 조조 서거. 조비, 문제에 오름. 후한 황조 멸망. 낙양으로 천도함. 226년 조비 승하. 조예 즉위. 234년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제갈량과 대치. 237년 요동의 공손연이 반기를 듦. 238년 사마의, 공손연의 난을 진압. 239년 조예 승하. 조방 즉위. 249년 사마의,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당을 처형함. 251년 왕릉의 사마의 타도 계획 실패.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뒤를 이음. 254년 사마사 주살 계획 실패. 조방이 폐위되고 조모가 옹립됨. 255년 사마사가 죽고 동생 사마소가 뒤를 이음. 257년 제갈탄이 오나라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나 다음해 진압됨. 260년 조모가 사마소를 토벌하려다가 살해됨. 조환 즉위. 263년 촉한 정복. 264년 사마소, 상국지공이 됨. 265년 사마소, 진왕이 됨. 사마소, 죽음. 사마염이 뒤를 이음. 위 황조가 멸망하고 진 황조 성립.
1948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한민국(大韓民國) 30년 1월 7일 - UN,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방한. 1월 12일 - 야오원위안, 17세 나이로 중국공산당 입당. 1월 30일 - 1948년 동계 올림픽 개막. 2월 4일 - 스리랑카, 독립 선언. 2월 7일 - 2·7 사건 발생. 2월 8일 - 조선인민군 창설 2월 26일 - UN, UN의 감시가 가능한 38線 이남 지역에서만의 선거 결의. 3월 27일 - 북조선로동당 제2차당대회 4월 3일 - 제주 4·3 사건 발발. 4월 14일 - 한신교육투쟁 발발. 4월 19일 - 남북 연석회의가 시작하다. 4월 19일 - 미얀마 UN 가입 5월 10일 - 남한에서, 제헌 국회 구성을 위한 첫 총선거가 실시되다. 5월 14일 - 이스라엘 건국. 7월 17일 - 남한에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는 대한민국 제헌 헌법(大韓民國制憲憲法)이 공포됨. 존 하지, 미군정 폐지 공식 선언. 7월 24일 -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 7월 29일 - 1948년 하계 올림픽 개막 8월 4일 - 제헌국회, 의장과 부의장에 각각 신익희(申翼熙)와 김약수(金若水)선출 8월 5일 - 대한민국 국회,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인준 8월 7일 - 대한민국 초대 정부 기구를 11부 4처 66국으로 결정 8월 15일 -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수립. 8월 16일 -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 이양 8월 25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총선거 실시. 9월 3일 - 미군정, 경찰권 대한민국에 이양 9월 5일 -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개편으로 대한민국 육군과 대한민국 해군 발족 9월 7일 - 대한민국 국회, 반민족행위처벌법 통과 9월 9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김책, 홍명희) 9월 12일 - 대한민국 국회, 연호를 단기(단군기원)로 변경 공포 9월 22일 - 대한민국 국회, 친일파 단죄를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9월 28일 - 대한민국 정부, 남북교역중지 선언 9월 30일 - 대한민국 국회, 한글전용법안 가결 10월 19일 - 여수·순천 사건. 11월 26일 - 반민법개정안 국회통과 11월 26일 - 유고슬라비아 티토 수상, 공산주의 독자 노선 선언 12월 12일 - 제3차 유엔 총회,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UN 위원단의 감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선거가 치러진 지역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결의. 1월 1일 - 아르헨티나의 기업인 호르헤 아모르 아메알. 1월 7일 - 일본의 가수, 성우 미즈키 이치로. 1월 14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잔 피에로 벤투라. 1월 16일 - 일본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감독 호리우치 쓰네오. 2월 2일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故 노무현의 영부인 권양숙. 2월 15일 - 미국의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 2월 5일 - 스웨덴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스벤예란 에릭손. 2월 24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루이스 갈반. 3월 4일 - 미국의 작가 제임스 엘로이. 3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한대수. 3월 15일 - 브라질의 외교관 세르지우 비에이라 데 멜루. 3월 17일 - 캐나다의 작가 윌리엄 깁슨. 3월 26일 - 대한민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3월 28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재섭. 4월 1일 - 대한민국의 의학자 문신용. 4월 10일 - 대한민국의 성악가 강병운 4월 12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마르첼로 리피. 5월 5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기자, 문학평론가 김훈. 5월 19일 - 홍콩 출신의 영화 배우 진상림. 5월 25일 -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 서준식. 6월 14일 - 대한민국의 동양철학자 김용옥. 6월 24일 - 대한민국의 문학인 이문열. 6월 28일 - 미국의 배우 캐시 베이츠. 7월 2일 - 대한민국의 성우 노민. 7월 11일 - 헝가리의 언어학자 히다시 유디트. 7월 15일 - 대한민국의 대중 가수 김세환. 7월 30일 - 스페인 출신 프랑스 배우, 장 르노. 8월 1일 -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알린 코민스키크럼. 8월 8일 - 대한민국의 승려, 정치인 김길수. 8월 13일 -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캐슬린 배틀. 9월 4일 - 홍콩 가수 출신의 영화 배우 허관걸 9월 14일 - 대한민국의 사업가 정몽헌. 9월 19일 - 영국의 영화 배우 제러미 아이언스. 9월 28일 -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전태일. 10월 9일 - 폴란드의 정치가, 한나 수호츠카.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조폭 김태촌.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주호성. 11월 6일 - 미국의 가수 글렌 프레이. 11월 9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 11월 9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아리 한. 11월 14일 - 찰스 왕세자, 영국 왕세자. 차기 왕위 계승 서열 1위. 11월 20일 -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바바라 헨드릭스. 11월 20일 - 미국의 정치가 존 볼턴. 12월 3일 - 영국의 가수 오지 오즈번(블랙 사바스). 12월 6일 - 일본의 정치인 스가 요시히데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노영국.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산악인 고상돈.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 영국의 기업인 앨러스테어 존스턴. 1월 30일 *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 * 미국의 비행기 발명가 오빌 라이트. 7월 15일 - 미국의 군인 존 요셉 퍼싱. 8월 16일 -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 9월 3일 -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에드바르트 베네시. 9월 11일 -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 무하마드 알리 지나. 12월 23일 - 일본의 군인, 정치인 도조 히데키. 이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대 2월 10일 을축 2월 을묘 소 3월 11일 을미 3월 병진 대 4월 9일 갑자 4월 정사 소 5월 9일 갑오 5월 무오 대 6월 7일 계해 6월 기미 소 7월 7일 계사 7월 경신 소 8월 5일 임술 8월 신유 대 9월 3일 신묘 9월 임술 소 10월 3일 신유 10월 계해 대 11월 1일 경인 11월 갑자 소 12월 1일 경신 12월 을축 대 12월 30일 기축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흉상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 Lucius Cornelius Sulla Felix , 기원전 138년 - 기원전 78년)는 로마 시대의 정치가, 장군이었다. 뛰어난 술수와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두 번이나 진격하였고 독재관이 되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술라는 로마 공화정의 영향력 높은 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몰락하여 정치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로마의 하층민들과 보냈으며 메트로비우스라는 당대의 배우를 만나 평생 함께했다고 한다. 술라는 파트리키이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주택(insula)에 거주했고 재산 수준은 같은 공동주택에 살던 해방노예와 별반 다를바 없었다고 한다. 비록 젊은 시절을 방탕하고 가난하게 보내긴 했지만 술라는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07년 당시의 집정관이던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의 군사 재무관으로 누미디아왕 유구르타(Iugurtha)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보쿠스와 유구르타를 격파하였다. 그 후 그는 마우레타니아왕 보쿠스(Bocchus)를 설득해 계략을 꾸며서 로마를 괴롭히던 유구르타를 생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마리우스의 사절로 만리우스와 함께 마우레타니아에 파견된 그는 보쿠스왕에게 로마에 투항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보쿠스는 유구르타와의 관계를 들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보쿠스는 사절단을 술라에게 보냈고, 술라는 이를 마리우스에게 알렸다. 술라에게 융숭한 접대를 받은 사절들은 보쿠스에게 돌아가 술라가 너그럽고 자비로운 인물이라고 보고했다. 사절단의 일부는 마리우스를 통해 로마에 갔고, 로마 원로원은 정식으로 보쿠스가 로마의 동맹자임을 선언했다. 보쿠스는 아들 볼룩스(Volux)를 보내 술라를 모셔오게 했다. 볼룩스는 유구르타가 아군과 가까이 있음을 알리자 술라는 유구르타의 진영을 급습한 뒤 그들을 따돌렸다. 보쿠스는 이후 술라와 비밀회담을 열었다. 술라는 보쿠스에게 로마의 강한 힘을 설명하고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것이 양국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보쿠스는 속임수를 써 유구르타를 술라에게 보냈고 술라는 누미디아왕을 데리고 키르타로 돌아왔다. 이때의 공으로 술라는 대중에게 처음 알려졌으며 마리우스는 그에 대한 질투를 조금씩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리우스와 사이가 나쁜 메텔루스(Metellus) 가의 사람들은 유구르타 전쟁은 오로지 술라의 공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기원전 104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침입하자 술라는 역시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참전하였고 나중에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Quintus Lutatius Catulus)의 휘하에서 싸웠는데 이때 그의 군사적 재능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기원전 97년 술라는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법무관(praetor)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킬리키아(Cilicia, 현재의 터키 남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로마의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르티아(Parthia)왕국의 대사를 만나 외교협상을 벌였고 훌륭한 외교력으로 로마의 이익을 가져왔다. 동방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귀족파(Optimates)에 가담하여 마리우스의 반대편에 섰다.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자 술라는 남부전선에서 속전속결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특히 당시 로마 군단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풀잎관(corona graminea, corona obsidionalis)"을 받을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마리우스와 함께 마르시(Marsi)족을 격파하고 폼페야니(Pompeiani)족의 클루엔티우스(Lucius Cluentius)를 공격했다. 클루엔티우스의 군대는 전투에서 술라에게 패한 뒤, 놀라(Nola)로 달아났으나 술라에게 추격당해 그를 포함한 20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섬멸되었다. 이후 술라는 히르피니족(Hirpini)의 아이쿨라눔(Aeculanum)을 점령하고, 삼니테스(Samnites)족의 가이우스 파피우스(Gaius Papius Mutilus)를 격파했다. 동맹시 전쟁이 종결되자 기원전 88년 술라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Quintus Pompeius Rufus)와 로마 공화정의 최고의 직위인 집정관에 선출된다. 이와 함께 술라는 세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하여 당시 유력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문의 후원을 얻었다. 집정관으로서 술라는 때마침 벌어진 폰투스(Pontus)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지휘권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인 술피키우스 루푸스(Publius Sulpicius Rufus)는 마리우스와 협력하여 민회를 소집하여 술라가 부여받은 미트라데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으로 집정관 폼페이우스 루푸스의 아들이 죽고 루푸스도 도망쳤다. 술라는 잠시 피신했다가 놀라(Nola)에 주둔한 군사를 규합하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술라가 쿠데타를 일으킬지 꿈에도 몰랐으며, 술라가 로마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저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로마에서 탈출했다. 술라는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술피키우스-마리우스 일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주했고 술피키우스는 참수되어 술라에게 보내졌다. 로마가 안정을 되찾자 술라는 집정관인 옥타비우스(Gnaeus Octavius)와 킨나(Lucius Cornelius Cinna)에게 로마를 맡기고는 미트라다테스 정복전쟁에 나섰다. 기원전 87년 술라는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하고 아테네를 공격했다. 당시 아테네는 피레우스에서 주둔한 아르켈라오스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아테네의 농성군과 로마군은 투석전을 벌이며 매우 치열하게 싸웠다. 술라가 아르켈라오스가 판 땅굴에 황과 역청을 집어넣고 불태우자 많은 아테네군이 죽었다. 술라의 공격에 질린 아테네에서 강화사절을 술라에게 보냈고, 그 사절은 술라에게 아테네인들의 위대한 조상들의 업적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술라는 "그런 시시한 역사강의는 그대의 동포들에게나 들려주시구려. 나는 그대들의 강의를 들으러온 학생이 아니라 아테네를 함락시키라고 보내진 장군이오" 라고 답변했다. 곧 포위공격을 받아 식량이 떨어진 아테네는 술라에게 항복했다. 이어 술라는 보이오티아로 달아난 폰투스-그리스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86년 카이로네이아(Chaeronea) 전투에서 술라의 15000명의 보병과 1500명의 기병은 아르켈라오스의 12만명의 대군과 싸웠다. 술라가 폰투스군에 접근하자 아르켈라오스는 기병을 출동시켜 로마군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어 80대의 낫을 단 폰투스 전차가 출격했으나 로마군은 전차를 피하듯 대열을 벌렸다. 전차가 통과하자 로마군은 측면에서 전차를 격퇴했다. 15000명의 폰투스 밀집보병 역시 격파되었다. 공격이 여러번 실패하자 아르켈라오스는 보병을 총출동시키면서 정예기병으로 술라군의 중앙을 돌파해 로마군 좌우익을 포위하였다. 술라는 그때 우익에 있었는데 로마군 좌익이 불리해지는듯 하자 좌익으로 갔다. 술라의 지원으로도 로마군 좌익은 여전히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술라가 로마군 우익으로 돌아오자 힘을 얻은 로마군 우익은 폰투스군 좌익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좌익에서도 적을 궤멸시켰다. 결국 아르켈라오스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고 결국 술라의 압승으로 카이네로이아 전투는 막을 내렸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폰투스군은 10만이나 죽은 반면 술라군의 손실은 12명에 머물렀다고 한다. 같은 해, 오르코메누스(Orchomenus)에서 아르켈라오스의 공격을 받은 로마군이 달아나려 하자 이를 말리다 뜻대로 되지않아 격분한 술라는 병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시민들이여 훗날 누군가가 그대들에게 총사령관을 버린 곳이 어디였냐고 물으면 오르코메누스였다고 답하라!" 이 말을 들은 로마군은 다시 전투의지를 다지고 다수의 적을 척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85년 술라와 미트라다테스 6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강화를 체결했는데 이 때도 술라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미트라다테스를 굴복시켰다. 술라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대한 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한편 술라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을 때 로마는 다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민중파가 집권하여 술라를 반역자로 만들었다. 마리우스는 곧 죽었으나 뒤를 이은 킨나는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Lucius Valerius Flaccus)를 기원전 86년 술라에 맞서는 정규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플라쿠스는 곧이어 일어난 군대의 폭동으로 살해당하고 부사령관 핌브리아(Gaius Flavius Fimbria)가 그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핌브리아는 미트라다테스를 격파하고 술라의 부하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를 자기편으로 포섭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술라는 그의 병력을 적군 가까이에 포진시켰다. 술라군과 핌브리아군은 가까운 곳에서 지내다 보니 친밀감이 생겼고 곧이어 적병들은 모두 진영을 탈주했다. 결국 핌브리아의 병력은 고스란히 술라에게 흡수되었다. 이후 핌브리아는 병사들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하여 자살했다. 술라는 킨나를 격동시키는 글을 써 킨나에게 보냈고, 이탈리아를 술라로 부터 방위하려던 킨나는 그리스에 있는 술라를 정벌하려고 군대를 편성하다가 군단 폭동으로 죽고 말았다. 기원전 83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술라는 귀족파를 규합하였다. 메텔루스 피우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Pius)와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등이 술라를 지지했다. 당시 집정관은 노르바누스(Gaius Norbanus)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Publius Cornelius Scipio Asiaticus)였다. 노르바누스와 소 마리우스가 술라를 급습했으나 오히려 술라에게 대패하며 6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술라와 교섭을 하던 중에 병사들이 그를 버리고 술라에게 항복했다. 스키피오는 술라에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기원전 82년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와 소 마리우스(Gaius Marius)가 집정관이 되었는데 카르보는 기원전 85년과 84년에 킨나와 집정관을 지낸적이 있는 2선 집정관이었다. (기원전 82년 당시는 3선 집정관이다.) 프라이네스테(Praeneste)에서 소 마리우스는 술라의 병사들이 오랜원정에 지쳐있음을 알고 그들을 급습했지만 800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패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르보는 메텔루스 공격을 멈추고 철수했으나 폼페이우스의 기습공격으로 큰 손실을 봤다. 술라의 적인 카리나스는 여러차례 술라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그때마다 도망쳐 살아남았다. 이후 술라는 카르보가 출동시킨 군대를 모조리 무찔렀고 , 메텔루스 역시 파벤티아(Faventia)에서 카르보의 공격을 막아내고 10000명을 척살하였다. 폼페이우스는 클루시움(Clusium)에서 카르보군을 2만명이나 죽였다. 한편, 삼니테스족의 폰티우스 텔레시누스(Pontius Telesinus)는 로마로 진격하였고 술라는 소 마리우스에 대한 포위를 멈추고 콜리네(Coline) 성문에서 텔레시누스와 크게 싸웠다. 기원전 82년 11월 1일 콜리네 문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술라의 우익은 크게 적군을 격파하였으나 술라 자신이 이끄는 좌익은 적군의 우익과 두 군대가 괴멸되기 전 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이 전투 도중에 술라는 적진에서 날아오는 창을 고개를 숙여 피해 전장에서의 죽음을 면했다. 결국 적의 좌익을 섬멸한 술라가 승리하였고, 로마에는 다시 술라의 정권이 세워졌다. 전투 후 소 마리우스와 텔레시누스는 동반 자살했고, 다른 집정관 카르보는 시칠리아로 달아나다 후에 폼페이우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콜리네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로마로 입성한 술라는 대대적이고 철저한 반대파 학살에 착수했다. 우선 삼니테스족 패잔병 8000명을 원로원에서 회의하는 도중에 병사들을 시켜 학살했다. 술라는 1만명의 노예를 해방시켜 자신의 씨족명 코르넬리우스 를 하사하여 정적소탕의 행동대로 삼았다. 또한 살생부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적을 숙청했다. 그 살생부에 오른 인물은 모두 4천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숙적 마리우스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그 시신은 부관참시되었고, 전년도 집정관이자 소 마리우스와 함께 술라를 공격한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도 제거되었다.(스키피오는 술라를 피해 도망가다 병사했다.) 이때의 살생부에는 18세의 킨나의 사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도 있었으나 카이사르는 학살을 면하고 도망쳤다. 한편 술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고 그의 안에는 수백명의 마리우스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한편 마리우스군 잔당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Gnaeus Domitius Ahenobarbus)는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에게 격파되었으며 오직 히스파니아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만이 남아 술라에 대항했다. 기원전 81년 로마는 집정관이 모두 공석이었다. 술라는 10만의 병력을 배경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에 취임했다. 원래 로마 공화정에서 독재관은 임기가 6개월이었지만 술라는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Lucius Valerius Flaccus)의 제안으로 민회는 이를 승인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후 그는 대대적인 국정 개혁에 나섰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원로원 개혁 원로원 수를 600명으로 늘이고 권한을 강화했다. 복지문제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작한 곡물법을 폐지하여 무산계급의 이익을 떨어뜨리고 식민도시에 퇴역병을 이주시켰다. 사법 개혁 그라쿠스 형제 이후 기사계급으로 구성되던 배심원을 다시 원로원 의원으로만 구성하였다. 군사개혁 로마 직할령(루비콘 강 이남)에는 군단을 이끌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군단을 가지는 전직 집정관, 법무관은 반드시 원로원이 결정하게 함 호민관 개혁 호민관직에 있는 사람은 다른 관직에 취임할 수 없게 하고 연임은 10년의 휴지기가 있게함 독재관으로 이러한 개혁을 2년동안 정력적으로 실시한 술라는 기원전 80년 말, 돌연 사임을 발표하고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였고 나폴리 근처의 바닷가의 소박한 별장에서 은둔하였다. 술라는 1년여 한가한 은퇴생활을 한 후 기원전 78년 시골에서 세상을 떠났다. 술라의 장례식은 그의 부하들이 참가한 가운데 로마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유해는 나중에 반대파에게 시신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유언과는 다르게 화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비문이 쓰였다고 전한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기원전 138년 경 – 로마에서 태어남 기원전 107년 –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관이됨 기원전 106년 – 유구르타와의 전쟁 종결 기원전 104년/기원전 103년 – 마리우스의 부하로 갈리아 정벌 참가 기원전 103년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부하로 갈리아 정벌 참가 기원전 101년 – 킴부리 부족을 대패시킴 기원전 94년 – 법무관 다선 기원전 93년 – 킬리키아의 총독 기원전 91년/기원전 88년 – 동맹시 전쟁의 장군으로 참가 기원전 88년 – *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집정관 취임 * 로마로 진격하여 마리우스파 축출 기원전 87년 – 미트라다테스 6세의 정벌에 사령관으로 임명 기원전 86년 – 아테네 공격 기원전 84년 – 소아시아 서부에서 미트라다테스군 격파, 아시아 속주 재조정 기원전 83년 – 이탈리아로 귀환하여 두 번째 로마 진격 기원전 82년 – 독재관에 임명됨 기원전 80년 – 독재관 사퇴후 메텔루스 피우스와 집정관 취임 기원전 79년 –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 기원전 78년 – 사망, 로마에서 장례식 거행 딸 폼페이아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2세 딸 코르넬리아 아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딸 코르넬리아 파우스타 딸 코르넬리아 포스투마 분류:킬리키아 분류:기원전 138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78년 죽음 분류:고대 로마의 군인 분류:고대 로마의 정치인 분류:독재관 분류:로마 공화정의 집정관 분류:친위 쿠데타를 한 지도자 분류:육군 군인 분류:해군 군인 분류:로마 출신 분류:옵티마테스 분류:대량 살인자 분류:기원전 1세기 통치자
ROM.jpg|섬네일|200px|토론토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에 있는 투키디데스 흉상. 투키디데스 (, 기원전 465년경 ~ 기원전 400년경)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역사가이며,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기원전 411년까지 싸운 전쟁을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 는 말을 남겼다. 아테네 명문출신이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자신도 장군으로 선발되어 트라케에 파견되었으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죄로 추방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중대성을 예견하고 자료를 수집했던 그로서는 불행했던 추방도 적의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직접 체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주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또 투키디데스는 정의보다는 패권에 기반하여 국가간의 관계를 보는 정치적 현실주의 학파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투키디데스의 생애에 관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간혹 언급된 개인적인 기록이 거의 전부이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의 북부 지방 트라케 출신인 올로로스의 아들로서 기원전 465년을 전후로 하여 아테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20대 중반에 페리클레스 정책에 동조하여 기원전 425년 또는 기원전 424년 군사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22년에 그가 지휘하는 아테네군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이 시기에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투키디데스 분류:기원전 5세기 태어남 분류:기원전 4세기 죽음 분류:고대 아테네의 역사가 분류:고대 아테네의 장군 분류:그리스의 상인 분류:그리스의 불가지론자 분류:고대의 상인 분류:펠로폰네소스 전쟁 관련자 분류:도편에 의해 추방된 고대 아테네 사람 분류: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4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필라이오스 가
앙리 마티스 앙리 에밀브누아 마티스 (Henri Émile-Benoit Matisse, 1869년 12월 31일 - 1954년 11월 3일)는 20세기 야수파 프랑스 화가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 로 꼽힌다.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1893년 파리 국립 미술 학교에 들어가 구스타프 모로에게서 배웠다. 1904년 무렵에 전부터 친분이 있는 피카소·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타히티 섬에서는 재혼을 하여 약 7년 동안 거주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 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시작하면서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조각·동판화에도 뛰어났고, 직물의 디자인, 삽화 등 새로운 분야도 만들었다. 그리고 대표작으로 이 있다. 인상파 연구 1892년에는 양친을 설득하여 다시 파리에 나와 아카데미 줄리앙의 부그로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이어서 미술학교의 모로에게 배웠다. 동문인 마르케와 루오와의 교우는 이 때에 시작하였다. 루브르에서 고인(古人)을 배웠고 인상파·신인상파를 한 발짝씩 연구해 갔다. 화상(畵商) 볼라르의 점포에서 세잔, 고흐, 고갱의 데생을 구입하였고, 런던으로 여행, 터너를 보았으며, 더욱이 인상파의 유산을 계승하여 우키요에에 열중한 것도 초기 마티스에 있어서는 필요한 영양이 되었다. 포비즘 1896 ~ 1897년경부터는 원색의 대비에 의하여 선명한 표현을 시도하였고, 앙데팡당 미술전의 출품을 통하여 젊은 드랭과 블라맹크와 깊이 사귀게 되어 색채는 더욱 선명해졌다. 이렇게 그는 젊은 화가들의 선두에 서서 포비슴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다. 마티스에 의하면 포비슴의 운동은 무엇보다 먼저 표현수단의 순수함을 재발견하는 용기를 고취하고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회화에서 구한 또 하나는 표현 이다. 그가 말하는 표현이란 얼굴을 찡그린다든지 강렬한 동작을 과시한다든지 하는 격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화가가 주체적으로 화면에 만들어 내는 색과 모양의 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긴밀한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질서 있는 조형을 탐구하였는데, 예를 들면, 실내화(室內畵)와 정물화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의장, 장신구, 가구 꽃, 꽃병, 융단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인물이 의장보다 중요하다든가 융단의 색채가 다른 형태보다 뛰어난다든가 하는 관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면은 모든 구성 요소의 균등한 비중에서 또 그 비중의 하모니에서 성립되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단일한 것, 질서·조화의 창조가 그의 과제였다. 그는 동비중(同比重)·순일(純一)·절도(節度) 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했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최상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길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포브 시대의 마티스 그림에 〈호사(豪奢)·정밀(靜謐)·쾌락을 위한 에튀드〉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얻은 이 세 낱말은 마티스의 예술적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항상 색채를 호사하게 탕진하는 일에 대하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쾌락이란 그에 있어서 방종을 규제하는 질서 속에서 절도 있는 사치에 속한 것이었다. 만년에 80세의 고령인 마티스가 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반의 〈마티스 예배당〉은 그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으로 평가된다. 앙리 마티스의 온라인 전시회 분류:1869년 태어남 분류:1954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화가 분류:프랑스의 무신론자 분류:19세기 화가 분류:20세기 화가 분류:19세기 조각가 분류:20세기 조각가 분류:프랑스의 판화가
서진(西晉) 태시(泰始) 8년 오(吳) 봉황(鳳凰) 원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8년 오(吳) 말제(末帝) 9년 신라(新羅)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 11년 고구려(高句麗) 서천왕(西川王) 3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39년 음력 2월, 신라, 왕이 명령을 내려, 무릇 농사에 해를 주는 것이 있으면, 일체 이를 없애라고 하였다. 음력 7월, 신라,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음력 11월,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2월 27일 - 콘스탄티누스 1세,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년 - 337년)
폴 세잔(1861년) 오른쪽 폴 세잔 (, 1839년 1월 19일 ~ 1906년 10월 22일)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가는 서부 Piedmont에 있는 Cesana라는 마을에 살았다. 그들의 성 세잔은 본래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남프랑스에 있는 Aix-en-Province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약 한달 뒤인 1839년 2월 22일에는 그의 할머니를 대모로, 삼촌인 Louis를 대부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루이스 아우구스테 세잔(Louis-Auguste Cézanne - 28 July 1798 – 23 October 1886)은 한 은행의 공동창업자였는데, 이 은행은 폴 세잔이 살아있는 동안 번영하여 폴의 경쟁자들에겐 불가능했던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폴은 큰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어머니였던Anne Elisabeth Honorine Aubert (24 September 1814 – 25 October 1897) 는 로맨틱하고 명량했지만 범죄를 저지르는데 빨랐다. 폴이 그의 인생에 대한 방향과 비전을 잡는데 그의 어머니로 영감을 얻었다. 그에겐 매일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매리(Marie)와 로즈(Rose), 두 여동생이 있었다.폴이 열살이 되던 해에 그는 Aix에 있는 성 요셉 학교에 입학했다. 1852년, 그보다 낮은 학년에 있던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Baptistin Baille를 만났던 Collège bourbon(지금은Collège Mignet)에 입학했다. 이후 세 친구는"les trois inséparables" (the three inseparables – 분리될 수 없는 세 사람) 로 알려졌다. 마지막 2년은 통학을 했지만, 그는 이 학교에서 6년간 지냈다. 1857년, 그가 스페인 신부인 Joseph Gibert로부터 미술을 공부했던 Free Municipal School of Drawing in Aix에 다니기 시작했다. 1858년과 1861년 사이에는 미술 수업을 병행하며 그의 아버지의 바램에 따라 University of Aix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61년, 폴 세잔은 그의 미술적 발전을 위하여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법학을 버리고 아약스를 떠나 파리로 떠났다. 그의 결정에 있어서 이미 파리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세잔은 인상파 화가였던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게 된다. 처음 1860년대 중반 세잔과 피사로의 친분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는데, 이로 인해 피사로는 세잔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Louveciennes와 Pontoise에서 10년이 넘게 함께 풍경화를 그리면서 둘의 관계는 합작하는 평등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풍경화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특히 상상으로 그려진 중후하고 큰 풍경화도 있었다. 나중 그의 작품들은 직관적인 관찰과 빛을 이용한 화풍을 띠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숙된 작품들에서는 거의 건축에 가까운 굳어진 스타일을 추구하였다. 그는 한평생 동안 그가 실제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을 찾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구조적으로 간단한 형태와 간단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그는 “나는 무언가 단단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impressionism)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한 것과, 그가 Poussin의 “After Nature”를 재구성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구성과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통합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강조했다. 1852년 세잔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가난하고 병약한 소년을 구해주었는데 그가 곧 훗날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이후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30여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예술을 논했다. 죽마고우였던 에밀 졸라와의 관계는 그가 대표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열 네 번째 소설 〈작품〉(L oeuvre) 속에 등장시킨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재능 없는 화가 클로드의 모델이 세잔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파국을 맞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상황이 세잔 본인과 비슷했고 다른 등장인물들 또한 졸라를 비롯한 실제 인물들과 유사했기에 세잔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졸라가 보내준 소설을 읽은 세잔은 1886년 4월 그에게 "이렇게 훌륭히 추억을 담아주어 감사하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30여년의 우정에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잔은 졸라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두 사람의 우정과 갈등은 훗날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ezanne et moi , Cezanne and I, 2015)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 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그리고 원뿔로 다루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통나무는 원기둥으로, 사과와 오렌지는 구로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지각의 진실을 포착하고 싶어하는 세잔의 욕망은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생생하게, 혹은 살짝 다르게 해석하여 관객이 이전의 이상적인 관점과는 다른 심미적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세잔의 혁신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의 다양한 설명들을 병든 망막, 맑은 시각, 그리고 증기 기관차의 영향이라고 평가하게 만들기도 했다. 세잔의 작품들은 1863년Salon des Refusés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지만 전시된 작품들은 공식적인 Paris Salon의 배심원단에게 수용되지는 않았다. Salon은 세잔의 작품들을 1864년 부터 1869년까지 매년 거부했다.그는 Salon에 1882년까지 작품을 제출했다. 그 해에, 동료 화가인 Antoine Guillemet의 도움으로 Salon이 수용한 유일한 작품인 Portrait of Louis-Auguste Cézanne, Father of the Artist, reading l Evénement , 1866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을 전시했다. 1895년 이전 세잔은 인상파 작가들과 함께 2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는 1874년이었고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는 1877년이었다.) 1895년 세잔에게 Ambroise Vollard가 개인전시회를 열어줄 때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개인작들이 전시되었다. 그에게 대중적 인기와 재정적인 성공이 있었지만 세잔은 예술적 고립속에서 작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주로 파리에서 먼 남프랑스 지방에서 머무르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몇가지 주제에 집중하였는데,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를 비롯해 목욕하는 사람을 연구하는데 균등한 시간을 할애했다. 결국에는 세잔은 누드 모델이 부족하여 상상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의 풍경화들처럼 인물화도 아내, 아들 그리고 주변 이웃들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과 미술 경매장 딜러까지 주인공으로 사용했다. 그의 정물화는 디자인이 화려했고 두껍고 납작한 작업대에 그려졌으며Gustave Courbet의 작품들을 연상시켰다. 그가 현대 Aix 외곽에 위치한 그의 스튜디오(atelier)에 남긴 작업대는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세잔의 후기 작품들에 종교적인 색채는 자주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는 로마 가톨릭의 신자였고 “내가 작품을 평가할 때, 나무나 꽃같이 하느님이 만드신 물체 곁에 두고 평가한다. 만약 작품과 물체가 대립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잔의 작품들은 Aix의bourgeoisie에 잘 수용되지 않았다. Henri Rochefort는 졸라가 소유한 그림들이 경매에 올라온 경매장에 갔다가 1903년 3월 9일, L Intransigeant 에 “추함을 위한 사랑”(Love for the Ugly)라는 제목으로 비평을 실었다. Rochefort는 “세잔이라는 이름을 가진 울트라-인상파”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얼마나 우스웠는지를 자세하게 묘사했다. 사실 세잔이 그린 그림은 “졸라에게 전하는 예술적 안부”(The Art Dear To Zola)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나Rochefort는 당시 독일에게 국방기밀을 넘겨준 프랑스의 관료와 그림을 연결지었다. Aix 사회는 충격을 먹었고, L Intransigeant의 복사본들이 세잔의 집 문 앞 발판에 나타나 “당신은 우리의 불명예”(He was Dishonoring) 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가 떠나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어느날, 세잔은 밭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폭풍에 갇히고 말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2시간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세잔은 지나가던 마차에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늙은 집사가 팔과 다리를 주물러 원래 혈색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러 나갔으나 얼마 후에 다시 쓰러졌다. 그와 함께 일하던 모델이 도움을 요청하여 침대로 돌아왔지만 세잔은 이후로 일어나지 못했다. 몇일 뒤, 1906년 10월 22일 그는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폐렴이었으며, 그는 그의 고향 Aix-en-Province에 있는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는Salon des Refusés라는 법령을 만들어Académie des Beaux-Artswere에 전시되어야 하는 작품들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작품 전시가 거부된 작가들 중에는 당시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던 어린 인상파 화가들도 있었다. 세잔은 그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사회적인 관계는 좋지 않았다. (세잔은 불손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들은 어두운 색깔의 사용과 검은색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1859년 Aix-en-Provence 에 있는 École Spéciale de dessin에서 그리던 수채화들과 스케치들과는 크게 대조된다. 표현의 격렬함 또한 그의 전 작품들과 크게 대비되었다. 1866~1867년에, Courbet 의 예시에서 영감을 얻은 세잔은palette knife를 이용하여 작품 몇개를 그렸다. 세잔은 대부분이 인물화인 이 작품들을 두고une couillarde("비싼 에너지를 나타내기 위한 거친 단어")라고 불렀다. Lawrence Gowing은 세잔의 palette knife 작품들을 두고 “이것은 현대 표현주의의 발명이기도 했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예술의 첫 등장이기도 하다.”라고 평가했다. Couillarde 작품들 중에서는 세잔의 삼촌이었던 Dominique의 인물화를 통해 “단편적인 인상으로 정의 될 수 있는” 스타일을 발견하였다. 어둠의 시기 후기의 작품들 중에는Women Dressing (c.1867), The Rape (c.1867), 그리고 The Murder (c.1867–68) 폭력적이거나 에로틱한 작품들도 있다. 1870년 7월 보불전쟁이 발발하고 세잔과 그의 부인이던Marie-Hortense Fiquet는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 근처에 있는 L’Estague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잔의 작품 테마는 대부분이 풍경화로 변하였다. 1871년 1월에 세잔은 병역 기피자로 낙인 찍혔지만 그 다음달인 2월에 전쟁이 끝나면서 세잔과 그의 부인은 1871년 여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1872년 1월, 그들의 아들인 Paul이 출생하였고 그들은 파리 근처에 있는Auversin Val-d Oise로 이사를 갔다. 세잔의 어머니는 가정사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만 세잔은 아버지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세잔은 아버지로부터 100프랑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카미유 피사로는 당시 Pontoise에 살고 있었다. Auvers와 Pontoise에서 세잔과 그는 함께 풍경화를 그렸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세잔은 피사로의 제자로 소개했으며, 그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는 모두 피사로의 가지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사로의 영향 아래 세잔은 어두운 색을 탈피하여 그의 캔버스는 한층 더 밝아졌다. 마르세유 지방에 Hortense를 벗어나 세잔은 파리와 프로방스 사이로 이사하여 그의 첫 전시회(1874)와 인상파 전시회(1877)을 열었다. 1875년, 그는 Victor Chocquet의 관심을 끌어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세잔이 전시한 그림들은 우스웠고, 잔인했으며, 빈정거림이 있었다. 비평가 Louis Leroy는 세잔이 그린 Chocquet의 초상화를 보고 “이 이상한 머리와 오래된 부츠를 보고 임신한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황달에 걸릴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878년 3월, 세잔의 아버지는 Hortense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세잔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그 해 9월에 세잔의 가족을 위해서 400프랑을 주었다. 1880년대 초반에 세잔을 위해 Louis-Auguste가 스튜디오(Jas de Bouffan)를 지어주기 전까지 파리와 프로방스 지방을 계속 돌아다녔다. 이 스튜디오는 윗층에 있었는데 매우 큰 창문이 있어서 처마 사이로 불빛이 들어왔다. 이 형태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잔은 L’Estaque에 정착하였다. 1882년 그는 르누아르와 함께 작업을 하였고 1883년에는 르누아르와 모네를 방문하였다. 1880년대 초반 세잔의 가족이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한 후 얼마 동안 체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았다. 이 이동은 파리 중심적이던 인상파들이 세잔의 고향이 있는 남쪽으로 중심을 옮기는 역할을 하였다. Hortense의 형제 중에 Estaque에Montagne Sainte-Victoire가 보이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1880~1883년 사이에 산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1885~1888년 Gardanne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종종 ‘건설기’(The Constructive Period)라고 불리기도 한다. 1886년에는 세잔의 가족들에게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였다. 세잔은 Hortense와 결혼하였다. 이 해에, 또한 세잔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잔에게 1859년에 산 사유지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 47세였다. 1888년에 가족은 편리를 제공하는 넓은 땅이 있는 대저택 Jas de Bouffan으로 옮겼다. 이 저택은 현재 땅이 줄어들었지만 시 소유로 공공을 위해서 개방되어 있다. 또한 이 해에 세잔의 친구이던 에밀 졸라와의 친분도 깨어졌다. Jas de Bouffan에서의 이상적인 시기는 일시적이었다. 1890년부터 그의 죽음까지 성가시게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거의 미루어두었고 거의 은둔자처럼 지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이제 유명해겨 젊은 화가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1890년 그가 당뇨병에 걸리면서 인격이 불안정해지면서 그의 인간관계가 꼬이기 시작하면서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과의 관계 회복을 기대하면서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올 때 그는 혼자 포로방스로 돌아왔고 아내와 아들은 파리로 돌아왔다. 결국 금전적인 문제로 아내가 프로방스로 돌아왔지만 함께 살지는 않았다. 세잔은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이사했다. 1891년에는 가톨릭신앙으로 돌아왔다. 세잔은 예전에 하던대로 Jas de Bouffan과 파리를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1895년에는Bibémus Quarries를 방문하였고Montagne Sainte-Victoire에 올랐다. 환상적인 풍경에 매료된 그는 1897에 그곳에 작은 방을 얻어 풍경화를 그렸다. 형상들은 초기 “Cubist” 스타일에 영감을 주었으리라 믿어지고 있다. 그 해에는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픈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의 아내와 다시 재결합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Jas de Bouffan의 집을 팔고 스튜디오를 지은 Rue Boulegon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의 인간관계는 폭풍 속이었다. 그는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1901년에는, Aix 지방 높은 곳에 있는 Chermin des Lauves 근교에 땅을 사서 스튜디오를 지었다. (현재는 공공을 위해 개방되어 있다.) 세잔은 1903년에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1902년에는 그의 모든 유산을 아내가 아닌 아들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했다. 다시금 그의 부부관계는 파탄이 났고, 아내는 세잔 어머니의 유품을 불태워 없애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1903년부터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몰두하였고 1904년에는 그의 집에 손님으로 있던Émile Bernard와 함께 작업을 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 Atelier Paul Cézanne, 혹은 les Lauves라 불리는 기념물이 되었다. ==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쓴 에세이 세잔의 의심 ==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인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스타일적인 접근법과 화법을 분석하여 에세이로 남겼다. 1945년 “세잔의 의심”( Cézanne s Doubt)의 제목이 붙은 그의 에세이에서 눈에 비친 상을 그대로 캡처하여 살아있는 지각을 얻기 위해 전통적인 미술의 기법(상의 정렬, 색을 구분하는 바깥 테두리, 단일 관점 등)들을 어떻게 포기했는지 서술했다.그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보고 느끼고 싶어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이 되는 경지를 추구했다. 그는 붓으로 한획을 긋고 몇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왜냐하면 한 획, 한 획마다 “공기와, 빛과, 물체와, 구성과, 테두리, 그리고 스타일”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세잔은 100여개의 작품을 한꺼번에 작업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이미 지나가버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잡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환경은 그림을 그리는 현실의 일부분이 되었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개인적인 통각이며,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림에 구성하여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1906년 세잔이 죽은 이후, 1907년 9월에, 파리에서 그의 작품들을 모아 큰 박물관 같은 회고전이 열렸다. 1907년Salon d Automne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은 파리에 있는 avant-garde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위치를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격상되었고, 입체파의 아버지로 평가받았다. 세잔의 기하학적인 명료화와 광학 현상에 대한 탐구는 Picasso, Braque, Metzinger, Gleizes, Gris에게 큰 영향을 미쳐 같은 물체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형상을 재구성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세잔은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미술 영역에 큰 영감을 주어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뜻을 기려 Aix en Provence시에서는 프랑스에서 미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 세잔 메달(Cézanne medal)을 수여한다. 세잔의 작품인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The Boy in the Red Vest )는 2008년 스위스 박물관에서 도난당하였으나 2012년 세르비아 경찰에 의해 복원되었다.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 《목욕하는 여인》, 《아버지의 초상》, 《여자와 커피포트》, 《프로방스의 산》, 《에스타크의 바위》, 《생트 빅트와르의 산》 Cézanne 133.jpg| Portrait of Uncle Dominique, 1865-186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Cézanne 130.jpg| Portrait of the Artist s Father Louis-Auguste Cézanne, Reading, (아버지의 초상) 1866,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Cézanne 052.jpg| The Black Marble Clock, 1869-1871 Cezanne, A Modern Olympia, c. 1873-1874.jpg| A Modern Olympia, 1873-1874, 오르세 미술관 Cézanne 115.jpg| Montagne Sainte-Victoire, 1882-188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Cézanne 090.jpg| L Estaque, 1883-1885 Cézanne 107.jpg| Mont Sainte-Victoire, 1885-1887 Cézanne 083.jpg| Jas de Bouffan, 1885-1887, Minneapolis Institute of Art Cézanne 014.jpg| Bather, 1885-1887, Museum of Modern Art Cézanne 060.jpg| Fastnacht (Mardi Gras), 1888 Garçon au gilet rouge, par Paul Cézanne.jpg|붉은 조끼를 입은 진느 가르송, 1888년 - 1889년 Cézanne 088.jpg| Boy in a Red Vest,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1888-1890,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Cézanne 125.jpg| Madame Cezanne in the Greenhouse, 1891-189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Cézanne 033.jpg| The House with Burst Walls, 1892-1894 Cézanne 210.jpg| Road Before the Mountains, Sainte-Victoire, 1898-1902,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Cézanne 026.jpg| Château Noir, 1900-1904,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Cézanne 010.jpg| Bathers, 1898-1905, Philadelphia Museum of Art 폴 세잔 의 온라인 전시회 분류:1839년 태어남 분류:1906년 죽음 분류:이탈리아계 프랑스인 분류:프랑스의 화가 분류:인상주의 화가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엑상프로방스 출신 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분류: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19세기 화가 분류:20세기 화가
이탈리아 남부 베노사(Venosa)에 있는 호라티우스의 동상.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Quintus Horatius Flaccus, 기원전 65년 12월 8일 - 기원전 8년 11월 27일)는 고대 로마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인이다. 호라티우스의 출신 가문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신분(libertinus)으로서 로마 자유시민권을 가진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호라티우스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세심한 교육을 받았으며, 기원전 45년에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인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유학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다. 이 시기에 그는 역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친교를 맺게되어 그를 따라 소아시아 지방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한다. 기원전 약 40년을 전후로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젊은 문학자와 사귀면서,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주선으로 당시의 로마의 문학 애호가이자 부호인 가이우스 마에케나스(Gaius Maecenas)에게 소개된다. 이 만남은 호라티우스가 사망할 때까지 깊은 우정관계로 발전한다. 특히 마이케나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기원전 32년 사비나 농장을 선물함으로써,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시 창작에 열중하게 된다. 가이우스 루킬리우스 원전 Q. Horatii Flacci Opera, 편집 D. R. Shackleton Bailey, 1995 Stuttgart. 해설서 Eduard Fraenkel, Horace, 1957 Oxford. 번역본 호라티우스 저, 김남우 역, 카르페 디엠(제1권)/소박함의 지혜(제2권), 민음사, 2016 -라틴어 원전 번역 분류:기원전 65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8년 죽음 분류:고대 로마의 시인 분류:고대 로마의 철학자 분류:고대 로마의 병사 분류:문학 평론가 분류:풍자가 분류:에피쿠로스 철학자 분류:바실리카타주 출신 분류:1세기 시인 분류:1세기 철학자
표현주의 (表現主義)는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의 한 양식이다.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표현주의는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표현주의에서는 표현적 측면이 미학적, 객관적인 측면에 비해서 압도적인 무게를 지닌다. 이것은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관람자를 위해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표현주의는 조형예술에서 생겨난 양식이며, 미술운동으로 20세기 초(1901-1925년)에 특히 독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던 양식경향이다. 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데 주력한 표현주의는 사물의 외면을 묘사하는 인상주의와는 대립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의 특징인 빛과 색채의 유희를 벗어나려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들인 세잔, 고갱, 반 고흐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특징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화가들은 이미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 시키고 색채를 사용하는 데 몇몇 매우 간결하고 원색에 국한하고자 노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표현주의의 화가들은 위에 언급한 화가들의 특징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자연 대상을 단순히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상이 지닌 혹은 관찰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형태와 내면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주제를 강조하며, 기술적인 측면에서 색채와 구도, 형태와 대상의 조화를 과장하거나 생략하고 있는 그것이 표현주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과 그것이 표현주의자에게 끼친 영향 하에서 표현주의는 새로운 양식 경향들과 부분적으로 중첩되거나 부분적으로 대체되었다. 색채, 역동성, 감정과 같은 요소들은 거의 모든 표현주의 미술작품에서 발견된다. 표현주의 화법을 통해서 나타난 색채, 형태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은 혼합되지 않은 색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 목판화와 같은 형태, 소재를 본질적인 것으로 축소한 것, 전통적인 원근법의 해체에서 아주 또렷하게 드러났다.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인상을 현실에 충실하게 재현하거나 아름다운 형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상주의 화가와는 대조적으로 표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내적 흥분을 표현했고, 직접적이고 자발적으로 통렬하게 느끼 고 해석된 소재를 전달했다. 에른스트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 로트루프, 오토 뮐러, 막스 페히슈타인이 주축이 되어서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예술가 집단 다리파 (1905-1913년)와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가브리엘 뮌터, 파울 클레가 속해있던 뭔헨에서 결성된 청기사파(1911-1914년)가 대표적인 표현주의 집단이었다. 표현주의는 당시에 존재했던 기존 질서와 시민 계층에 대한 항의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표현주의의 생성은 당시에 일어났던 삶의 개혁 운동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고찰되어야만 한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프리드리히 니체를 자신들의 생각을 선취한 사람으로 삼았다.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이 발행한 잡지 〈슈투름Sturm〉과 새롭게 창간된 예술 문학 잡지들이 주요 예술가들에게 토론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낡은 미술적 형식들이 포기되었다. 결과적으로 표현주의는 자연주의와 대립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키르히너가 목판으로 제작한 다리파의 강령 표현주의의 강령은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인상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양식적 특성으로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미술이 강령에서부터 생겨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표현주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정신적 태도였다. 1906년 키르히너는 다리라는 제목을 지닌 목판화에서 다리파의 강령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창작하는 새로운 세대가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우리 젊은이들은 함께 외친다. 그리고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인 우리들은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늙은 세력에 대해서 팔과 삶의 자유를 스스로 마련하고자 한다. 창조를 하도록 충동하는 것을 직접적이고 거짓 없이 재현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표현주의의 중요한 대표 화가들은 자신들이 표현주의자라고 지칭되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예를 들면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오토 뮐러는 이런 표현이 자신들의 양식과 독창성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표현주의자라는 명칭을 거부했다. 청기사파 의 몇몇 회원들이 함께 했고, 예술적으로 아주 생산적이었던 튀니지와 북아프리카로의 여행은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오늘날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많은 작품들이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너시에 있는 노튼 시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1차대전 직전의 불안한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뮌헨에서 일어나, 1920년대 중반 무렵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그칠 무렵까지 계속된 건축운동이다. 이 동안의 활동은 별로 통일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아르 누보에서 국가적인 로망주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것을 내포하면서 전개되어 갔다. 그것들은 유기적인 형태나 불안정한 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많았다. 이들 운동 중에 들어가는 작품으로서 멘델존의 아인슈타인탑(塔), 헨가의 칠리관(館), 페르치히의 급수탑(給水塔), 자르츠브르크 축전극장(祝典劇場) 계획안, 시타이너의 괴테관(館) 등이 있다. 베를린의 AEG 공장에 의하여 표현주의에로 이행한 페터 베렌스는 그 뒤 국가적인 로망주의로 이행한다. 그리고 표현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항의로서도 사용되었다. 20세기 표현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선구자들로는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를 들 수 있으며, 그뤼네발트와 엘 그레코와도 흥미로운 연관 관계가 설정될 수 있다. 요제프 아흐만 마르크 샤갈 오토 딕스 콘라트 펠릭스뮐러 에리히 헤켈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 바실리 칸딘스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파울 클레 오스카 코코슈카 엘프리데 로제 베히틀러 아우구스트 마케 프란츠 마르크 오토 뮐러 에드바르트 뭉크 가브리엘 뮌터 에밀 놀데 막스 페히슈타인 카를 슈미트 로트루프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 얼마 후에 제작된 파블로 피카소나 조르즈 브라크의 입체주의적 작품과 마찬가지로 표현주의자들의 작품, 특히 다리파 미술가들의 작품은 남태평양과 아프리카 미술품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 유럽의 민속박물관은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의 섬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가득 찼다. 가면과 인물 조각상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표현의 형태가 새롭고 원초적인 자연 을 바라는 유럽 미술가들의 갈망을 채워주었다. 조형예술에서의 표현주의와 유사하게 문학에서의 표현주의도 우선적으로 전쟁, 대도시, 몰락, 두려움, 자아 상실, 세계 몰락과 같은 주제에 몰두했다.
헤이안 시대 (, 794년~1185년)는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 390년간을 지칭하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교토에 세워진 헤이안쿄가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까지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나라 시대에 율령정치가 시작되어 헤이안 초기에는 천황의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승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후지와라씨 정권에 의한 부패가 횡행했다. 정치에 불만을 가진 하급귀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들이 설치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이들을 제압하려 커진 정치세력이 무사 계급이다. 귀족들을 대신해 무사의 정치가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부터 에도 막부시기까지 700년동안 이어졌다. 일본 역사상 모노노케, 음양사를 비롯한 미신이 크게 성행한 시대이다. 헤이안 전기(前期)는 전 시대(나라 시대)부터의 중앙집권적인 율령정치를 기본적으로는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인 수정을 하였다. 하지만, 율령제와 현실의 괴리가 커지면서 9세기말 ~ 10세기초에 정부는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율령제의 기본이었던 개인별 지배체제를 고쳐, 토지를 대상으로 과세하는 지배체제로 크게 방침을 전환하였다. 이 방침의 전환은 민간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이를 현지에 부임하는 필두 고쿠시(國司:수령(受領))가 총괄하게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왕조국가체제라고 한다. 왕조국가체제기는 보통 고대의 말기에 해당하지만, 분권적 성격을 띠는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므로,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라고 생각되고 있다.(일본문학사 연구에서는 중고 (中古)라는 표현도 쓴다.) 왕조국가 체제하에서는 국가에서 토지경영이나 백성을 지배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유력한 백성(다토(田堵), 묘슈(名主))층의 성장이 나타나며, 그들의 통제하기 위한 이 권력위임과 병행하여, 국가에서 군사경찰권을 위임받은 군사귀족층과 무예전문 하급관리 층도 또한 무사로서 성장하였다. 국가권한의 위임과 이에 의한 중앙집권의 지나친 부담의 경감에 의해 중앙정계에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관직이 특정 가업을 담당하는 가계에 세습되는 현상이 진행되어 귀족의 최상위에서는 셋칸케(摂関家)가 확립되었고, 중류귀족에 고정된 계층은 중앙에서는 가업의 전문기능 에 따라 공무를 담당하는 기능관인으로서 행정 실무를, 지방에서는 수령이 되어 지방행정을 담당했다(헤이안 귀족). 이 시기는 셋칸케에 의한 셋칸 정치가 전개되었고, 특정 권문(権門)이 독점적으로 징세권을 얻는 장원(荘園)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단계적으로 증가하여 수령이 징세권을 담당하는 공령(公領)과 함께 세력이 둘로 나뉘었다. 11세기 후반부터는 태상천황(太上天皇)이 지텐노키미(治天の君)가 되어 정무를 돌보는 인세이(院政)가 시작되었다. 인세이의 시작이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인세이 시기에는 장원의 일원영역적(一円領域的)인 집적과 고쿠가료(国衙領)의 징세 단위화가 진행되어, 장원공령제라고 불리는 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12세기 중반엔 귀족사회 내부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게 되어, 이에 동원된 무사의 지위가 급속히 상승하였다. 이러는 중에 최초의 무가정권(武家政権)인 다이라씨 정권이 등장하지만, 이 시기의 사회적 모순을 혼자 도맡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확대된 내란에 의해 붕괴되고 만다. 다이라씨 정권의 붕괴와 함께 중앙정부인 조정과는 별개로 내란을 수습하여 도호쿠의 지배권을 얻은 가마쿠라 막부가 등장하여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륙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사절과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에 안전한 신라쪽이었다. 마침내 799년 일본은 신라사(新羅使)의 파견을 중단하였다. 당시 일본은 발해와는 계속 왕래해도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803년 7월에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 다음 해 5월에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 했으며, 882년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헌상했다 한다. 그러나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을 정지한 터에 황금을 바쳤다는 것은 신뢰하기 힘들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9세기 이후 정상화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아전인수라는 주장도 있다. 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하지만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926년 발해가 멸망했으며 935년에는 통일신라마저도 멸망하게 되자 귀족 중심의 사회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자 무역을 중단하게 되면서 아시아에서 완전히 고립되기에 이른다. 784년(엔랴쿠 3년) 간무 천황, 나가오카쿄(長岡京) 건설 개시 785년(엔랴쿠 4년) 나가오카쿄의 건설 책임자인 후지와라노 다네쓰구(藤原種継) 암살, 용의자로 지목받은 황태자 사와라(早良) 친왕(親王) 폐위 787년(엔랴쿠 6년) 나가오카쿄로 천도 788년(엔랴쿠 7년)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最澄), 히에이 산 엔랴쿠사(延曆寺)를 창건 794년(엔랴쿠 14년) 나가오카쿄에서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 807년(다이도 2년) 이요(伊予) 친왕의 변(変) 810년(다이도 5년) 구스코(薬子)의 변 840년(조와承和 7년) 조와의 변 858년(덴난 2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신하로서 최초로 셋쇼(攝政)가 됨(셋칸 정치 시작) 866년(조간 8년) 오텐몬의 변(応天門)의 변(고대부터 이어져온 명문 씨족 오오토모大伴 집안의 몰락) 880년(간교 4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経), 간파쿠 취임 887년(닌나 3년) 아형 사건(阿衡事件) 894년(간표 6년) 견당사 폐지 901년(쇼타이昌泰 4년) 쇼타이의 변, 후지와라노 도키히라(藤原時平)의 참소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가 다자이후로 좌천 902년(엔기 2년) 엔기의 장원정리령(莊園整理令) 927년(엔초 5년) 《엔기시키(延喜式)》 성립 939년(덴교天慶 2년) 데와(出羽)에서 부수(俘囚)들의 무장봉기가 일어남(덴교의 난).간토(關東)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가 히타치(常陸)를 비롯한 간토 지역 여러 구니(國)를 차지하고 신황(新皇)을 칭함.같은 시기에 서해에서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가 해적들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다(조헤이·덴교의 난). 940년(덴교 3년) 다이라노 마사카도,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鄕) 등이 이끄는 조정군에 패하여 전사하다. 941년(덴교 4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다치바나노 도오야스(橘遠保)·오노노 요시후루(小野好古) 등에 의해 진압되다. 967년(고호 4년) 《엔기시키》 시행 969년(안나(安和) 2년), 후지와라 가문의 참소로 사다이진(左大臣) 미나모토노 다카아키라(源高明) 실각(안나의 변) 996년(조토쿠(長德) 2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나이란(內覽)의 선지를 얻고, 전임 간파쿠인 형 미치타카(道隆)의 가문을 정계에서 배척(조토쿠의 변) 1016년(조와 5년) 후지와라 미치나가, 셋쇼 취임 1019년(간닌 3년) 여진족 해적들이 일본 해안을 약탈하다(도이의 입구) 1028년(만주 5년) 다이라 다다쓰네(平忠常)의 난이 일어나다. 1031년(조겐 4년) 다이라 다다쓰네,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賴信)에게 항복 1051년(에이쇼 6년) 전(前)9년의 역(役) 시작 1062년(고헤이 5년) 아베노 사다토 패사, 전9년의 역 종결 1068년(지랴쿠 4년) 고산조(後三條) 천황 즉위, 셋칸 정치 시대 폐막 1072년(엔큐 4년) 국가에서 공인된 도량형 규격의 단위를 확정한 《엔큐젠지마스(延久宣旨枡)》를 제정하다. 1083년(에이호 3년) 후(後)3년의 역 시작 1086년(오토쿠 3년) 시라카와(白河) 상황, 태상천황으로서 인세이(院政)를 개시 1087년(간지 원년) 후3년의 역 종결. 1108년(가쇼 3년)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를 토벌하다(미나모토노 요시치카의 난) 1111년(덴에이 2년) 기록장원권계소(記録荘園券契所) 설치 1129년(다이지 4년) 시라카와 법황 사망, 도바(鳥羽) 상황이 상황이 되어 인세이 개시 1156년(호겐 원년) 도바 법황(法皇) 사망, 고시라카와(後白河) 천황과 스토쿠(崇德) 상황 사이의 무력충돌에서 천황측이 승리하다(호겐保元의 난). 1159년(헤이지 원년) 헤이지(平治)의 난 1167년(닌난 2년)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에 취임(헤이케 정권) 1177년(안겐 3년) 법황을 중심으로 한 반(反)헤이케 세력이 시시가타니(鹿ヶ谷) 산장에 모여 헤이케 정권의 전복을 꾀한 일이 사전에 발각되다(시시가타니 음모 사건). 1179년(지쇼 3년) 다이라노 기요모리, 고시라카와 법황을 도바덴(鳥羽殿)에 유폐하다. 1180년(지쇼 4년) 황족 모치히토왕(以仁王)이 전국의 겐지들에게 내린 헤이케 타도의 영지(令旨)에 호응해, 이즈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시나노에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 등이 연이어 거병하다.(겐페이 전쟁의 시작) 1181년(지쇼 5년/요와 원년) 다이라노 기요모리 사망.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 재개, 요와(養和)의 기근 1183년(주에이 2년) 다이라 일문이 교토를 버리고 서국으로 후퇴하고,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교토로 들어오다. 고토바(後鳥羽) 천황 즉위.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도고쿠 지역의 지배권을 조정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받다(주에이 2년 10월 선지). 1184년(주에이 3년/겐랴쿠 원년)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요리토모의 동생 요시쓰네(義經)에게 패하여 전사하다.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에 몬쥬쇼(問注所)·구몬쇼(公文所) 설치 1185년(겐랴쿠 2년/분지(文治) 원년) 단노우라 전투로 헤이케 멸망. 교토 조정과 가마쿠라 사이의 교섭 끝에, 각 지방에 지토(地頭)·슈고(守護)의 설치가 이루어짐(분지의 칙허) 1189년(분지 5년) 오슈합전(奧州合戰)으로 오슈(奧州) 후지와라(藤原) 집안 멸망 1190년(겐큐 원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교토에 들어와, 곤노다이나곤(權大納言)·우곤노에노다이쇼(右近衛大將)에 취임하다. 1192년(겐큐 3년) 고시라카와 법황 사망. 미나모토 요리토모,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다.(가마쿠라 막부 개창) 분류:일본의 역사 분류:일본의 고대사
미생물 (microorganism, 微生物)은 맨눈으로는 관찰 할 수 없는 작은 생물이다. 미생물은 영어로 "Microorganism"이라고 하는데, "Micro"는 그리스어로 "작다"라는 의미이다. 미생물에 대한 관찰과 연구는 1673년 레벤후크가 현미경을 발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진균(Fungi), 원생동물(Protozoa), 세균(Bacteria), 바이러스(Virus), 조류(Algae) 등을 포함한다. 미생물은 세포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원핵세포는 진핵세포에 비해 단순한 구조이며, 형태가 원시적이다. 핵과 세포기관이 없으며, 유전물질이 핵막에 둘러싸여 있지 않고 세포질의 핵양체(nucleiod)에 위치해 있다. 세균과 원핵조류가 여기에 속한다. 진핵세포는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진 진화된 세포이다. 뚜렷한 핵막과 세포기관을 갖고 있다. 모든 동식물의 세포는 진핵세포이며, 조류(원핵조류 제외), 균류(진균), 원생동물등의 고등미생물이 여기에 속한다. 바이러스는 다른 종류의 미생물과 달리, 세포가 아니며, 세포막도 없다. 유전물질(DNA, RNA)과 단백질 껍질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생물은 현미경으로 발견되었다.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미생물을 최초로 발견했을 때 사용한 현미경은 단식 현미경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복식 현미경이 등장하였다. 현재는 이런 광학 현미경뿐만 아니라 전자 현미경이 발명되어 투과형에서 주사형(走査型)으로의 개발이 진행되고 거듭 개량되어 확대율이 향상되고, 높은 해상력(解像力) 및 입체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미생물은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기 때문에 인간의 육안으로는 식별이 곤란한 생물을 말하나, 특허법상의 미생물이란 유전자, 벡터, 재조합벡터, 형질전환체, 융합세포, 재조합단백질, 모노클로날항체, 바이러스, 세균, 효모, 곰팡이, 버섯, 방선균, 단세포조류, 원생동물, 동식물의 세포, 조직배양물 등 특허 절차상 기탁 가능한 생물학적 물질(biological material)을 의미한다(생명공학분야 특허심사기준 1998. 3.). 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을 특허출원하기 위해서는 그 미생물을 특허청장이 정하는 기탁기관 또는 특허절차상 미생물 기탁의 국제적인 승인에 관한 부다페스트 조약에 따른 국제기탁기관에 기탁하고 그 수탁증을 출원서에 첨부하여야 한다. 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에 대하여 특허출원을 하고자 하는 자는 특허청장이 정하는 기탁기관 또는 특허절차상 미생물기탁의 국제적 승인에 관한 부다페스트조약 제7조의 규정에 의하여 국제기탁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취득한 기관(이하 "국제기탁기관"이라 한다)에 그 미생물을 기탁하고 특허출원서에 그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국제기탁기관에 기탁한 경우에는 특허절차상미생물기탁의국제적승인에 관한 부다페스트조약규칙 제7규칙에 의한 수탁증 중 최신의 수탁증사본)를 첨부하여야 한다. 다만, 당해 발명이 속하는 기술분야에서 통상의 지식을 가진 자가 그 미생물을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이를 기탁하지 아니할 수 있다. 특허출원인 또는 특허권자는 제1항의 미생물의 기탁에 대하여 특허출원 후 새로운 수탁번호가 부여된 때에는 지체없이 그 사실을 특허청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 특허법 시행령 제3조 (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의 특허출원명세서 기재) === 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에 대하여 특허출원을 하고자 하는 법 제42조 제2항 의 규정에 의한 명세서를 기재함에 있어서 제2조 제1항 본문의 규정에 의하여 미생물을 기탁한 때에는 그 기탁기관 또는 국제기탁기관의 명칭·수탁번호 및 수탁연월일을, 제2조 제1항 단서의 규정에 의하여 그 미생물을 기탁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미생물의 입수방법을 기재하여야 한다. Ricki Lewis 외,《LIFE》,6th Ed.,Mc Graw Hill(2009) Campbell et al, 《Biology》,8th Ed., Pearson(2008) 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한국미생물보존센터 미생물소재은행 한국미생물학회 한국미생물학회(영어) 미생물관련 사이트들 - 바이오 사이트
죽도 (竹島)는 울릉도에서 약 2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울릉도와 매우 가까워 좋지 않은 기상상황에도 육안으로 확인가능하다. 대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데에서 섬 이름이 유래하였다. 죽도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 위에 수평에 가까운 평지가 펼쳐져 있는 지형이다.죽도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 위에 수평에 가까운 평지가 펼쳐져 있는 지형이다. 면적은 독도 전체 넓이(0.188km2)보다 약간 큰 0.208km2로, 울릉군에서 울릉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행정상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 산 1-1번지다. 2018년 기준으로 인구는 단 2명으로, 1가구가 더덕 농사를 지으며 거주하고 있다. 죽도 또는 대섬 은 예전에는 죽서도 (竹嶼島)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독도(獨島)의 일본 측 주장 명칭인 ‘다케시마()’와 비슷하여 서로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 명칭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죽서로 표기한다. http://www.ulleung.go.kr/tour/ - 관광정보 분류:동해의 섬 분류:경상북도의 섬 분류:울릉군의 섬
서진(西晉) 영가(永興) 7년 / 건흥(建興) 원년 성한(成漢) 옥형(玉衡) 3년 전조(前趙) 가평(嘉平) 3년 서진(西晉) 회제(懷帝) 7년 / 민제(愍帝) 원년 신라(新羅) 흘해 이사금(訖解泥師今) 4년 고구려(高句麗) 미천왕(美川王) 14년 백제(百濟) 비류왕(比流王) 10년 제정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공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고구려 미천왕이 한반도에 남은 최후의 한사군인 낙랑군을 멸망시켜 중국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였다.
마사초 마사초 (Masaccio, 1401년 12월 21일 ~ 1428년)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마사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산조반니발다르노에서 1401년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는 늙은 약방 주인과 재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의 마사초의 성장 과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남아 있는 문서상의 기록으로는 1422년 마사초는 당시 피렌체 화풍을 이끄는 메디치 화가조합(Medici e speziali)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술에 대한 정열이 지나쳐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저분한 톰 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아무튼 1423년에서 1425년 사이에 마사초는 많은 인물화와 프레스코, 그리고 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마사초의 프레스코, 특히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기도소(Cappella Brancacci)에 마솔리노와 함께 구약 및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한 프레스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라고 미술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마사초는 젊은 시절 피렌체에서 조토의 작품을 모사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를 사귀게 되어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된다. 1423년 에는 그들의 격려로 마솔리노와 함께 로마로의 여행을 가서 고대 로마, 그리스 작품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화려한 장식의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게 된다. 003.jpg|《성 삼위일체》(1425~1428) - 산타 마리아 성당, 피렌체 (1425년경) - 산타 마리아 성당, 피렌체 분류:1401년 태어남 분류:1428년 죽음 분류:이탈리아의 화가 분류:르네상스 화가 분류:15세기 화가
에드문트 후설 (독일어 Edmund Husserl, 1859년 4월 8일 - 1938년 4월 27일)은 현대철학의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의 체계를 놓은 철학자이다. 그는 심리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을 통해 실증주의와 결별하였다. 그가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유대인은 인종적 분류가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종교적 분류일 뿐이다.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독일에서 태어나 할레 대학교의 강사, 괴팅겐 대학교의 강사와 교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거쳐 은퇴 후 오히려 더욱 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각오로 연구와 강연에 매진하면서 죽는 날까지,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는 자신의 유언 그대로,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한 말 그대로 ‘철학자’ 자체였다. 후설은 1859년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 제국의 한 지방인 메렌 (Mähren, 현재 체코의 동부 지방)의 작은 도시 프로스니츠 (Proßsnitz)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6년에서 1878년까지 독일의 라이프치히 (Leipzig)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한 후 1878년 베를린으로 가 1881년까지 수학, 물리학, 천문학, 철학을 공부한다. 후설은 다시 빈으로 거처를 옮겨 1882년까지 프란츠 브렌타노 밑에서 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다. 1883년 수학과에서 편차 계산론에 관한 연구 (Beiträge zur Theorie der Variationsrechnung)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886년까지 브렌타노 밑에서 계속 철학연구에 열중한다. 1887년에 수의 개념에 관하여 심리적 분석 (Über den Begriff der Zahl. Psychologische Analyse) 논문으로 후설은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했다. 이 후 할레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전임강사로 취직하면서 같은 해에 말비네 쉬타인쉬나이더와 결혼한다. 후설은 1901년 《논리연구》를 출간하여 현상학을 개척하였다. 이후 프라이부르크에 재직하는 동안 현상학은 그의 주된 연구 대상이었다. 1933년 후설은 나치의 반유대주의로 인해 대학교의 도서관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의 제자였던 마르틴 하이데거가 이러한 반유대주의에 가담하였다는 소문이 있으나 하이데거 본인은 이는 중상모략이라며 부정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나치 치하였던 1941년, 자신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후설에게 헌정한다는 문구를 삭제하였다. 1938년 후설은 사망하였으며 1년 뒤인 1939년 4만여 쪽에 달하는 그의 전집이 출간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급속하게 발전한 과학과 기술은 전통적으로 철학의 영역이라 여겨지고 있었던 분야들을 자신의 범주로 포함시켰다. 특히 심리학의 형성과 발전은 인지, 정신과 같은 철학 본원의 영역으로 인정 받던 분야 역시 과학의 탐구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과학의 거센 도전을 맞은 철학은 영국, 미국의 철학과 같이 보다 과학쪽으로 다가가거나, 리케르트와 같은 신칸트주의에서 처럼 과학과 철학을 별개의 학문으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후설은 앞의 움직임과는 다른 방향에서 과학을 바라보았다. 그는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실증주의를 공격하여 그것이 참된 의미의 객관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이러한 실증주의 비판을 통해 후설이 제창한 철학을 현상학이라 한다. 빌헬름 분트(, 1832년 - 1920년, 독일의 심리학자)의 실험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인 실험의 대상으로 다루었다. 그는 이로 인해 종종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분트에 의해 시작된 실험 심리학은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심리학이 모든 과학의 근원"이라는 믿음인 심리학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후설은 그의 저서 《논리연구》에서 경험주의에 입각한 과학적 방법론이 언제나 반박될 수 있는 귀납적 사례들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심리학주의를 비판하였다. 후설은 철학을 과학보다 엄밀한 학문으로서 자리잡게 하고자 하였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의식과 대상을 실체적으로 분리시켜 사고하는 것이 철학적 오류라 비평하였다. 후설은 우리의 의식은 항상 어떤 무엇(즉 대상)을 향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대상 역시 의식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후설의 이러한 주장을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at)"이라고 한다. 이는 후설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별을 보면서 한 쪽으로는 과학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다루면서 한 쪽으로는 예술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을 인식하는 주체의 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객관성을 절대적으로 부각한 나머지 가치 판단과 같은 인식의 주관성을 부정함하는 것은 오류이라고 지적하였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철학의 목을 잘랐다"고 표현하였다. 후설은 인간의 의식에 드러나는 그대로의 "현상"을 기술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때문에 그의 철학적 방법은 현상학이라 불리게 되었다.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 :후설의 저서는 현재 벨기에의 루벵에 있는 후설자료보관소에서 비판본 전집이 후설리아나 (Husserliana)라는 이름으로 계속 출판되고 있다. I 데카르트적 성찰 (Cartesianische Meditationen und Pariser Vorträge, 1963 Den Haag). II 현상학의 이념 (Die Idee der Phänomenologie. Fünf Vorlesungen, 1958). III,1 순수 현상학의 이념과 현상학적 철학. 제 1권 순수 현상학 입문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Erstes Buch Allgemeine Einführung in die reine Phänomenologie, 1976). III,2 보충자료 (Ergänzende Texte 1912-1929, 1976). IV 순수 현상학의 이념과 현상학적 철학. 제 2권 구성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Zweite Buch Phänomenologische Untersuchungen zur Konstitution, 1952). V 순수 현상학의 이념과 현상학적 철학. 제 3권 현상학과 학문의 토대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Drittes Buch Die Phänomenologie und die Fundamente der Wissenschaft, 1952). VI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 현상학적 철학 입문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 und die transzentale Phänomenologie. Eine einführung in die phänomenologische Philosophie, 1962). 1887. Über den Begriff der Zahl. Psychologische Analysen ( On the Concept of Number habilitation thesis) 1891. Philosophie der Arithmetik. Psychologische und logische Untersuchungen ( Philosophy of Arithmetic ) 1900. Logische Untersuchungen. Erster Teil Prolegomena zur reinen Logik ( Logical Investigations , Vol. 1) 1901. Logische Untersuchungen. Zweiter Teil Untersuchungen zur Phänomenologie und Theorie der Erkenntnis ( Logical Investigations , Vol. 2) 1911. Philosophie als strenge Wissenschaft (included in Phenomenology and the Crisis of Philosophy Philosophy as Rigorous Science and Philosophy and the Crisis of European Man ) 1913.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Erstes Buch Allgemeine Einführung in die reine Phänomenologie ( Ideas General Introduction to Pure Phenomenology ) 1923–24. Erste Philosophie. Zweiter Teil Theorie der phänomenologischen Reduktion ( First Philosophy , Vol. 2 Phenomenological Reductions ) 1925. Erste Philosophie. Erster Teil Kritische Ideengeschichte ( First Philosophy , Vol. 1 Critical History of Ideas ) 1928. Vorlesungen zur Phänomenologie des inneren Zeitbewusstseins ( Lectures on the Phenomenology of the Consciousness of Internal Time ) 1929. Formale und transzendentale Logik. Versuch einer Kritik der logischen Vernunft ( Formal and Transcendental Logic ) 1930. Nachwort zu meinen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 Postscript to my "Ideas" ) 1936.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Eine Einleitung in die phänomenologische Philosophie ( The Crisis of European Sciences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An Introduction to Phenomenological Philosophy ) 1939. Erfahrung und Urteil. Untersuchungen zur Genealogie der Logik. ( Experience and Judgment ) 1950. Cartesianische Meditationen (translation of Méditations cartésiennes ( Cartesian Meditations , 1931)) 1952. Ideen II Phänomenologische Untersuchungen zur Konstitution ( Ideas II Studies in the Phenomenology of Constitution ) 1952. Ideen III Die Phänomenologie und die Fundamente der Wissenschaften ( Ideas III Phenomenology and the Foundations of the Sciences ) Philosophy of Arithmetic , Willard, Dallas, trans., 2003 1891. Dordrecht Kluwer. Logical Investigations , 1973 1900, 2nd revised edition 1913, Findlay, J. N., trans. London Routledge. "Philosophy as Rigorous Science", translated in Quentin Lauer, S.J., editor, 1965 1910 Phenomenology and the Crisis of Philosophy . New York Harper & Row. Ideas Pertaining to a Pure Phenomenology and to a Phenomenological Philosophy – First Book General Introduction to a Pure Phenomenology , 1982 1913. Kersten, F., trans. The Hague Nijhoff. Ideas Pertaining to a Pure Phenomenology and to a Phenomenological Philosophy – Second Book Studies in the Phenomenology of Constitution , 1989. R. Rojcewicz and A. Schuwer, translators. Dordrecht Klu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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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l of Japan.svg|섬네일|국화문장은 공식 국장은 아니지만 일본 천황의 상징이며, 국장처럼 쓰이기도 한다 일본 천황 ( 통칭 일왕 (日王) 은 일본의 군주로 일본 황실의 대표이다.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 일본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외교 관계에서 국가원수 지위에 있다. 지위로서 천황의 기능에 대해서는 일본국 헌법 제1조부터 제7조에 명시되어 있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제1조)으로 규정되어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해, 법률이나 조약의 공포, 국회가 지명한 내각총리대신의 임명, 국회의 소집 등의 국사행위로 제한된 권한(제7조)을 가진다. 일본에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라는 격언이 있는데, 이는 천황의 절대권을 의미한다. 일본 황실의 계보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존속되었다고 주장하는 의미로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말이 있다. 일본 제국 때에는 세계의 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하에 있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이념이 천황제 파시즘과 황국사관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한편 천황이 국가원수의 지위를 갖느냐와 관련하여서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국가 원수라고 보는 견해와 반대하는 견해가 대립된다. 현재는 제126대 천황인 나루히토가 황위에 있다. 천황의 유래는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편찬된 《고지키》, 《니혼쇼키》 등의 역사서에 따르면 김수로왕의 넷째왕자인 초대 진무 천황(神武天皇)이 기원전 660년에 즉위했다고 추정된다. 이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으나, 주로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와 비교하여 천황의 역사를 정당화하고자 후대에 연대를 올려 고쳤거나, 아예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두 설이 유력하다. 고대에는 오오키미(大君)라 불렸다. 1192년 이후는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잃었다. 다만 쇼군 등의 관위는 형식상으로는 천황이 임명하는 것이었다. 근대 이전에는 연호가 국가적인 경조사 또는 재해에 의한 피해가 있을 때마다 바뀌어, 지금의 일세일원(一世一元)과는 달랐다. 제국 시대 (1868년 ~ 1945년) 에는 일본제국 헌법에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1947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부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천황 이라는 칭호가 생기기 이전에 고대 야마토(大和)에서 수장이라는 뜻의 칭호를 국내에서는 「오오키미(大君)」(치천하대왕) 또는 천왕(天王)이라 불렀고, 대외적으로는 왜왕 ( 倭王 ), 왜국왕 ( 倭國王 ), 대왜왕 ( 大倭王 ) 등으로 칭했다. 고대에는 스베라기(須米良伎), 스메라기(須賣良伎), 스메로기(須賣漏岐), 스메라미코토(須明樂美御德), 스메미마노미코토(皇御孫命) 등으로 불렸다. 천황 이라는 칭호가 성립된 것은 7세기 후반의 일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에서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법제화하기 직전인 덴무 천황(天武天皇) 또는 지토 천황(持統天皇)의 시대의 일로 보는 것이 통설인데, 시기상 7세기 후반은 중국 당(唐)의 고종(高宗)이 천황 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후의 일이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이전의 사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시대에 성립되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13세기 이후 「천황」이라는 칭호의 사용은 잠시 폐해지기도 했으나, 19세기 초에 다시 사용되기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본 고대의 한자음 차자표기에서는 「덴와(てんわう)」로 표기된다. 「덴와(てんわう)」는 중세를 지나며 「덴노(てんのう)」로 변화되었다. 「천황」이라는 칭호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 북극성(北極星)을 신격화하여 가리키던 도교(道教)의 용어 「천황대제(天皇大帝)」 또는 「부상대제동황부(扶桑大帝東皇父)」에서 따왔다는 설. 당 고종이 도교적 용어인 「천황」을 칭한 것을 일본에서도 수입해서 썼다는 설. 5세기경에 대외적으로 「가외천왕(可畏天王)」, 「귀국천왕(貴國天王)」 등 단순히 「천왕(天王)」 등으로 불리던 것이 스이코조(또는 덴무조)에 「천황」이 되었다는 설. + 「천황」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말이 있는 오래된 기록들 문서 ・ 금석문 연대 발췌 출전 현대의 평가 견당사(遣隋使)의 국서 607년 日出處 天子 致書日沒處天子無恙 《수서》(隋書)(636년 성립) 호류지 금당 약사여래상 광배명(法隆寺金堂薬師如来像光背銘) 607년 池辺大宮治天下 天皇 실제로는 607년보다는 조금 뒤인 하쿠호 시대(白鳳時代)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쇼토쿠 태자가 수에 보낸 국서 608년 東 天皇 敬白西皇帝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성립) 《일본서기》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호코지 장륙석가상 광배명(法興寺丈六釈迦像光背銘) 609년 多知波奈土與比 天皇 겐코지 가람연기(元興寺伽藍縁起) 및 유기자재장(流記資財帳)(746년 성립) 현재 유물 자체는 남아있지 않다. 천황기(天皇記) 620년 (제목 자체에 「 천황 」이 포함되어 있음) 《일본서기》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서기》 외에는 기록이 없다. 천수국수장(天寿国繍帳) 7세기 斯帰斯麻宮治天下 天皇 悲哀嘆息白畏 天皇 前日啓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徳法王帝説)(성립시기 불명) 천수국수장은 파손된 부분이 많고 발췌된 부분도 「皇前日啓」 등의 부분만 존재.나머지 전문은 《법왕제설》에서 전하는 것이다. 성립연대를 두고 논쟁이 있다. 목간(木簡) 677년 天皇 聚露忽謹 아스카노이케(飛鳥池) 유적 출토 「천황」이라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자 기록 천황 이라는 칭호는 율령(律令)(「의제령儀制令」)에 규정이 있는데, 《양로율령》(養老律令) 천자조(天子条)에 따르면 제제사에서는 ‘천자’(天子), 조서에서는 ‘천황’, 대외적으로는 ‘황제’, 신하가 직접 주달할 때에는 ‘폐하’, 황태자 등 후계자에게 양위한 경우에는 ‘태상천황’(太上天皇), 외출시에는 ‘승여’(乘輿), 행행시에는 ‘거가’(車駕) 등으로 부르는 7개의 호칭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러한 표현은 표기시에만 사용할 뿐, 어떻게 쓰더라도 읽는 것은 당시의 풍속을 따라 ‘스메미마노미코토’()나 ‘스메라미코토’() 등으로 칭한다(특히 제사 지낼 때에는 「天子」라 쓰고 「스메미마노미코토」로 읽었다). 천황의 죽음은 붕어(崩御)라 했고, 재위중인 천황은 금상 천황(今上天皇), 사망한 뒤 추시되는 시호가 정해질 때까지는 대행 천황(大行天皇)이라 불렸다. 배우자는 「황후(皇后)」. 천황 자신이 칭할 때는 「짐(朕)」, 신하들로부터는 「지존(至尊)」이라 불렸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었다. 나라 시대(奈良時代)인 덴표호지(天平宝字) 6년에 진무 천황(神武天皇)부터 지토 천황까지의 41명의 천황 및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 겐쇼 천황(元正天皇)에 대한 한풍(漢風) 시호가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에 의해 일괄적으로 바쳐졌음이 《쇼쿠니혼키》(続日本紀)에 기술되어 있지만, 이것은 당대의 칭호와는 관계없는 시호일 뿐이다. 헤이안 시대부터 도쿠가와 시대까지는 ‘미카도’(御門, 帝)라거나 ‘긴리’(禁裏), ‘다이리’(内裏), ‘긴주’(禁中) 등의 여러 표현으로 칭해졌다. 미카도는 원래 어소(御所, 천황의 거처)에서 천황이 드나드는 문을 가리키며, 긴리·다이리·긴주는 그 어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표현은 천황을 직접 지칭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표현이다. 폐하도 마찬가지다. 또한 ‘주상’(主上, 오카미, 슈조)라는 표현도 이용되었다. ‘천조’(天朝, 덴초)는 일본의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정이나 국가, 또는 천황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스메라미코토’, ‘스메로기’, ‘스베라키’ 등 또한 사용되었다. ‘황후’는 ‘중궁’(中宮)이라고도 불렸으며, 금상천황 또한 ‘당금의 제’(當今の帝, 도긴노미카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상천황은 ‘상황’(上皇), ‘선동’(仙洞), ‘원’(院)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출가한 경우에는 ‘법황’(法皇)이라고도 불렸다. 태상 천황은 고카쿠 천황이 닌코 천황에게 양위한 이후에는 사실상 사라진 표현이며, 제국 시대 이후에는 제도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황실전범이 퇴위에 대한 규정 없이, 천황의 붕어를 통해 황태자가 즉위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처음으로 천황의 호칭이 ‘천황’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외교 문서 등에서는 ‘일본국 황제’가 많이 이용되었으며, 국내의 공문서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표기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는 ‘천자님’(天子様)으로 불리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육해군의 통수권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대원수’라고도 불렸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내의 각종 보도 등에서 천황의 경칭은 황실전범에 규정된 ‘폐하’를 채용하여 ‘천황폐하’로 칭한다. 궁내청 등의 공문서에서는 다른 천황과의 혼동을 막기 위해 ‘금상폐하’로 칭하기도 한다. 3인칭으로 경칭없이 ‘지금 천황’()이나 ‘현재 천황’(), ‘금상 천황’(今上天皇) 등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지만, 근래에는 완곡한 표현을 이용하는 것은 드물다. Emperor ‘황제’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세계의 군주 중에서 유일하게 Emperor로 불리는 군주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는 에도 막부까지 천황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정이대장군은 자신을 ‘일본 국왕’이 아니라 ‘일본국 상국’(日本國相國)으로 칭했으며, 조선 또한 국왕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1407년 이후에는 정이대장군을 일본의 최고 실권자로 인식하고 국왕으로 호칭하였으며, 천황의 계보를 서술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같은 경우에는 쇼군을 국왕으로 호칭하고, 천황은 국정과 무관한 존재로 이름만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였던 학봉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알현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관백’(關白)을 ‘위황(僞皇)의 정승’으로 칭하고, 천황을 일본의 최고 통치자로 인식하였다. 다만 일본의 입장에서 천황을 지칭할 때는 ‘천황’이라고 지칭하여 호칭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종교적·의례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자리만 있을 뿐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쇼군에 대한 호칭도 관백으로 변화하였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천황(天皇)’이 ‘일본에서 그 왕을 이르는 말’로 설명되어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된 《한국사》에는 ‘덴노’로 표기되었다. 대한민국의 신문, 뉴스 등 매체에서는 ‘천황’ 대신 ‘일왕’(日王)이라는 호칭으로 낮추어 부르는 경우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과거 일본 외부에서 부르던 호칭이자, 비하하는 말인 ‘왜왕’(倭王)이라고도 불린다. 일본 측은 일왕(日王) 또는 왜왕(倭王)등의 호칭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 문제에 대해, 국제 관계에서 여러 왕국들을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일본은 원칙적으로 "제국"(Empire)이 아닌 "왕국"(Kingdom)에 해당되므로, 제국의 군주을 부르는 "황"(Emperor)이라는 호칭을 일본의 임금에게 쓰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천황(天皇)을 일본인이 자국의 군주을 부르는 고유명사로서 "일본국의 입헌군주(constitutional monarchy of Japan)"의 기능을 하는 "일본의 국왕"이라는 말을 줄여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대로, 차르와 같이 외국의 군주를 칭하는 고유명사로서 덴노(てんのう) 라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일본은 1947년이후 현재까지도 국제적으로 "일본국"(Japan)으로 활동하며, 정식국호에 자신들의 국가체제를 표현하는 왕국(Kingdom)이나 공화국(Republic) 등을 붙이지 않는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제125대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한 이후에 다른 국가와 일본 황실 사이에 문제가 빚어진 사례는 없다. 다만 쇼와 천황의 경우나 이전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좋지 않은 관계를 보여,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에는 화염병 공격을 받기도 했다. 타이나 부탄 왕실과는 교우가 깊다. place Japan 1979 air.jpg|250px|섬네일|위성에서 바라본 고쿄 부근의 모습(1979년 촬영) 천황의 지위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제국 헌법의 제정으로 일본에서 헌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제국 헌법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서 언급되어 있는 천황의 지위와 권한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전자의 경우에는 천황이 통치권자이자 신성한 존재로 규정되었음에 비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다”고 규정된 것이다. 일본제국 헌법 체제에서 천황의 지위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의사에 기초한 만세일계의 지위이다. 따라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으며, 천황의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는 불경죄로 의율하여 중하게 처벌한다. 또한 천황은 천황대권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모든 통치권을 총람하는 존재였다. 즉 국가의 모든 작용을 통괄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에 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일본국 헌법의 천황의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 것으로, 국민주권의 원리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천황제는 절대적인 것이라거나 불가변의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국민의 총의에 기하여 가변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체적인 내용면에서도 ‘신의 자손’으로 특별히 보는 규정은 없다. 권한의 면에서도 천황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국사에 관한 행위”, 이른바 국사행위만을 행할 수 있다. 일본국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 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해, 천황이 일반적인 ‘국가원수’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천황을 국가원수로 보는 견해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헌법 제1조)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각각 국회와 내각의 지명에 근거하여 행정부(내각)의 수장인 내각총리대신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장관을 임명한다(제6조)는 내용에 근거한다. 또한 “국권의 최고 기관이며,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인 국회를 소집(제7조 2호)·해산(제7조 3호)하는 등, 국정의 중요한 행위를 ‘국사행위’로 수행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조, 다만 국사행위에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함). 또한 “전권위임장 및 대사, 공사의 신임장을 인증”(제7조 5호)하고,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 문서를 인증”(제7조 8호)하며,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제7조 9호)하는 등, 일반적으로 국가원수가 수행하는 외교상의 주요 행위를 천황이 실시하다고 정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천황이 국가원수라고 본다. 일본국 정부의 공식 견해로는, ‘천황은 국가원수’라고 한 1990년 5월 14일 참의원의 내각법제국 장관 답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을 ‘나라의 상징이며, 또 일정 부분의 외교 관계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한정된 의미의 국가원수로 표현했다. 천황 플래카드 사건에서 도쿄 지방재판소는 ‘국가원수인 천황’이라고 표현하여 천황을 국가원수로 표현했다. 천황을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일본국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되어,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위는 황통에 속하는 남계의 남자가 다음 순서에 따라 계승한다. 그러나 역대 일본 천황계보를 살펴보면 여자가 천황이 된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특히 고교쿠 천황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천황에 즉위했다. # 황장자 # 황장손 # 그 밖의 황장자의 자손 # 황차자와 그 자손 # 그 밖의 황자손 # 황형제와 그 자손 # 황백숙부와 그 자손 # 최근친 계통인 황족 다만 황사에게 정신이나 신체상 불치의 중환이 있거나 중대한 사고가 있을 때에는 황실회의의 협의를 거쳐 위의 순서에 따라 황위계승의 순서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역대 일본 천황 계보에 의하면 태어나자마자 즉위하여 8살에 사망하거나 3살에 즉위하여 19살에 선양하고 59살까지 살거나(고토바 천황) 즉위하자마자 제위에서 쫓겨나거나(고분 천황) 천황의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原 씨 성을 부여받고 황족의 신분에서 신하의 신분으로 강등당하거나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후계자에게 선양하거나 이미 선양을 하고 나서 다시 정권을 되찾아 재즉위하거나(한 예로 역대 일본 천황 중에 고교쿠 천황과 사이메이 천황이 동일인물이라는 점.) 하는 등 문제점도 많았다. 현재 일본 황실에는 여자 후손이 많고 남자 후손이 적어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여자 황족도 제위를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인 고종 이치(李治)는 천황(天皇) 또는 천황대제(天皇大帝)로 불렸다. 역대 일본 천황 팔굉일우 남조 (일본) 북조 (일본) 남북조 정윤론(:ja:南北朝正閏論) 군국주의 전체주의 국사행위 고쿄(황거) 일본 제국 일본제국 헌법 천황기관설 일본국 헌법 일본의 전쟁 범죄 국가원수 일본 궁내청 일본의 역사 천황배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 천황제(:ja:天皇制) 천황제 폐지론 천황제 옹호론 상징 천황제(:ja:象徴天皇制) 기쿠 터부(:ja:菊タブー) 오니즈카 히데아키(:ja:鬼塚英昭) 일본의 황위 계승 순위 황위계승문제(:ja:皇位継承問題 (平成)) 함구령( Gag rule)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일본 궁내청 공식 홈페이지
동진(東晉) 영화(永和) 2년 성한(成漢) 태화(太和) 3년 / 가녕(嘉寧) 원년 후조(後趙) 건무(建武) 12년 전량(前凉) 건흥(建興) 34년 대(代) 건국(建國) 9년 동진(東晉) 목제(穆帝) 2년 신라(新羅) 흘해 이사금(訖解泥師今) 37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 16년 백제(百濟) 계왕(契王) 3년 / 근초고왕(近肖古王) 원년 음력 7월 7일 - 금관가야의 5대 왕 이시품왕이 보위에 오르다. 부여가 전연의 침략으로 고구려의 보호국으로 전락함. 백제(百濟)의 12대 어라하(於羅瑕) 계왕(契王) 음력 7월 7일 - 가락국의 제4대 국왕 거질미왕
동진(東晉) 영화(永和) 10년 전량(前凉) 건흥(建興) 42년 / 화평(和平) 원년 전연(前燕) 원새(元璽) 3년 전진(前秦) 황시(皇始) 4년 대(代) 건국(建國) 17년 동진(東晉) 목제(穆帝) 10년 신라(新羅) 흘해 이사금(訖解泥師今) 45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 24년 백제(百濟) 근초고왕(近肖古王) 9년 훈족과 알란족의 전쟁이 끝나다. 352년부터 전쟁하였다.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은호(殷浩)를 탄핵시키고 군권을 장악하였다. 전진을 공격하여 장안 근처까지 진군했으나 군량 부족으로 퇴각했다.
동진(東晉) 융화(隆和) 원년 전량(前凉) 승평(昇平) 6년 전연(前燕) 건희(建熙) 3년 전진(前秦) 감로(甘露) 4년 대(代) 건국(建國) 25년 동진(東晉) 애제(哀帝) 원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7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 32년 백제(百濟) 근초고왕(近肖古王) 17년 2월 4일 - 율리아누스 황제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포고령 발표 6월 16일 - 율리아누스 황제가 학교에 관한 포고령 발표 - 그리스도인 교사의 학생 교습을 금지
동진(東晉) 융화(隆和) 2년 / 흥녕(興寧) 원년 전량(前凉) 승평(昇平) 7년 전연(前燕) 건희(建熙) 4년 전진(前秦) 감로(甘露) 5년 대(代) 건국(建國) 26년 동진(東晉) 애제(哀帝) 2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8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 33년 백제(百濟) 근초고왕(近肖古王) 18년 3월 5일 - 율리아누스 황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한 동방 원정 출발 6월 26일 - 율리아누스 황제 동방 원정 퇴각 행군 중 사산 병력의 공격으로 창에 찔려 사망 유송 고조 무황제 유유(劉宋 高祖 武皇帝 劉裕)
동진(東晉) 영강(寧康) 3년 전량(前凉) 승평(昇平) 19년 전진(前秦) 건원(建元) 11년 대(代) 건국(建國) 38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3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20년 고구려(高句麗) 소수림왕(小獸林王) 5년 백제(百濟) 근초고왕(近肖古王) 30년 / 근구수왕(近仇首王) 원년 발람베르가 이끄는 훈족이 동고트족을 남쪽으로 몰아내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다. 백제(百濟)의 13대 어라하(於羅瑕)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346~375 왕맹 -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의 명재상 11월 17일 -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속주 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죽은 뒤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정 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 내전(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이며, 원래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리트라이라는 마을 출신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의 머리 라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포룸 로마눔과 매우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던 곳이다. 옥타비우스는 아이를 들에 버리라는 점성가의 경고를 받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키우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Gaius Octavius)라고 지었다. 그러나 로마 시내가 북적거려 사람들로 넘쳐나자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이사가 거기서 자랐다. 옥타비아누스는 회고록에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고만 적었다. 그의 친증조부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시칠리아에서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방의 여러 공공기관에 재직하였다 한다. 아버지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마케도니아의 총독 을 지냈으며, 아이의 가명(家名)을 투리누스 로 지었는데, 이 가명은 옥타비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과 싸워 이긴 시칠리아의 투리이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평민이었지만,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로 귀족이었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평민층에 속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59년 옥타비아누스의 나이 네 살 때,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안 돼 어머니 아티아는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하였다. 필리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었고 기원전 56년에는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필리푸스는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소(小) 옥타비아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랐다. 기원전 51년,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이때부터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단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옥타비아누스는 4년 뒤인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 되었고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선출되었다. 다음 해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세운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에서 행해지는 그리스 경기를 관장하였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6년, 아티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오랜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병이 들어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배를 타고 카이사르의 뒤를 쫓았으나 배는 곧 난파되었다. 육상으로부터 숙련된 정비사들이 와서 난파된 배를 수리한 후 원래 자신이 머물던 적의 영토에서 카이사르의 막사까지 배를 타고 횡단하였는데, 이 사건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카이사르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자기 마차에 동승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하였다. 로마로 돌아오고 난 뒤 카이사르는 새 유언장을 사제녀들과 함께 보관하였고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제1 상속자로 낙점하였다. 죽음》, 장레옹 제롬이 1867년에 그린 것으로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주도한 옥타비아누스의 양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을 나타내고 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공부와 군사 훈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군사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장교들의 조언을 거절하고 이탈리아로 가 자신의 잠재적인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 브룬디시움 근처에 있는 루피아이라는 곳에 상륙하고 난 뒤, 카이사르의 유서에 적힌 내용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재산의 2/3를 상속받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치적인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로 하였다. 당시 카이사르에게는 살아 있는 적자녀가 없었기에 그의 이손(離孫, 누이의 친손 및 외손)인 옥타비아누스가 제1 상속자이자 아들로 입양되었다. 카이사르가 죽고 난 뒤 정식 입양된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의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를 쓰게 되었다. 로마 전통에 따라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에 ‘투리누스’ 대신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는 가명을 붙여 자신의 출신 가문을 나타내었다. 아직 옥타비아누스가 당시 이 이름을 썼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이름은 그의 출신을 명백하게 드러내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성적으로 총애했기 때문에 입양한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하였지만, 이는 중상모략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국에 성공적으로 입문하려면 자신의 빈약한 재산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브룬디시움에서 카이사르의 병사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후,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 싸우려고 카이사르가 충당했던 일부 자금을 요구하였다. 이 돈은 브룬디시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무려 7억 세스테르티우스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 돈으로 원로원의 가장 큰 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치려고 쓰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라진 공금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원로원은 이내 수사를 중단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그해에 다시 큰일을 벌였는데, 동방 속주에서 이탈리아로 보낸 조공을 공식적인 허가도 받지 않고 가로챘다.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카이사르가 이끌던 정예병과 파르티아를 치려고 모은 군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특히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며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 그가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로마로 이동할 때, 소문난 인품과 그가 새로 얻은 자금 덕분에 캄파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를 숭상한 옛 노병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기원전 44년 6월까지 그는 3천 명의 충성스러운 노련한 병사들을 얻었고 봉급으로 5백 데나리우스를 주었다. 프리마 포타의 아우구스투스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그림. 기원전 44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그리고 독재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쉽지 않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해 3월 17일에 원로원은 이미 암살자들에게 특사령을 내렸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들 대부분을 로마에서 몰아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 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외친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어 암살자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많은 로마 시민과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가 카이사르의 신격화 운동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카이사르의 재산을 안토니우스에게 양도하겠다고 하였으나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여름 동안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해 9월 귀족파 출신의 웅변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연설에서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의 가장 큰 위험한 인물이라고 역설하며 극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에서 인기가 떨어진 데다가 집정관 임기도 거의 끝나가자 안토니우스는 원래 카이사르의 암살범 가운데 한 명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다스리다가 안토니우스에게 편입된 갈리아 키살피나를 통제할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일임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다. 그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전임 병사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있었고, 11월 28일에는 안토니우스 휘하 두 개의 군단을 돈으로 현혹하여 쉽게 격파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막강한 군사력과 원로원으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로마에 있는 것에 위험을 느낀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떠났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갈리아 키살피나를 포기하기를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그를 완전 포위하였다.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행동을 각하하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는데 원로원에는 그에게 대적할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출신에 관하여 조롱하는 것을 비호해 주기도 하였는데 키케로는 “요즘의 젊은이들 중 가장 전통적인 공경심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하였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대는 그대의 이름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라고 한 말을 들려주었듯이 이것은 안토니우스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의견의 정면 반박이었다. 과거 대표적인 반(反)카이사르파 원로원 의원인 키케로가 조작화한 이 동맹으로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1월 1일을 기해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여 그는 전직 집정관들과 같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추가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의 사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령을 합법적으로 만들었고 곧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히르티우스, 판사와 함께 무티나의 포위를 풀러 출병하였다.기원전 43년 4월, 안토니우스군은 포룸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집정관이 전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의 군대까지 지휘할 수 있는 대군의 단독 사령권을 손에 넣었다.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엄청난 사례금을 준 후, 원로원은 집정관의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주려고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협조하지 않기로 하였다.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포 계곡(Po Valley)에 주둔하면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모든 공격적인 대응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해 7월, 옥타비아누스 휘하 백인대의 사절이 로마로 들어왔고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남긴 집정관의 권한을 자신이 전부 받아야 함을 요구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공공의 적으로 천명한 것을 무효화하는 포고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4만8천 명의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행진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아무런 군사적 반대 세력을 만나지 않았고 기원전 43년 8월 19일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친(親)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동맹을 구축하였다. with Octavian aureus.jpg|섬네일|오른쪽|300px|기원전 41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탄생을 축하하며 발행된 로마의 화폐 아우레우스에 새겨져 있는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오른쪽)가 새겨져 있다. 모두 “III VIR R P C”의 문구, 즉 “공화정의 조정을 위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새겨져 있다. 18년경에 발행된 데나리우스. 앞면에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뒷면에는 신성한 율리우스()라고 새겨져 있다. 기원전 43년 10월, 볼로냐 근처에서 열린 회담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 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 이 5년간의 명백한 월권 행위는 비공식적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 정치와 달리 평민들에게 통과된 법안에 따라 크게 지지받았다.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세 집정관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곧 싸우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에 크게 자극받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 3명의 집정관이 암살자들의 유산과 재산을 몰수하는 동안 암살자들에게 내건 현상금은 로마 시민을 크게 고무시켰다. 세 집정관의 이러한 수단은 암살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숙청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추방 명령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추방 명령을 받은 자신의 새 조력자, 키케로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키케로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커서 결국 키케로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 의원이 죽었고, 3명의 집정관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20세기의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이를 로마 혁명(Roman revolu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이 구세대 원로원 의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여 뒷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2년 1월 1일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고 ‘신성한 율리우스’(Divus Iulius)라 부르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 )임을 강조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의 군단을 해로로 보내어 그리스에 세력을 모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다.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로마군을 승리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뒷날 이 전투들의 성과를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 보이게 하려 하였는데 두 번의 필리피 전투 모두 안토니우스군이 로마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추가로, 두 번의 승리의 전과를 따지는데, 안토니우스는 아그리파에게 직속 지휘권을 넘겨준 옥타비아누스를 겁쟁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필리피 전투 이후,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 사이에서 새로운 영토 협정이 맺어졌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의 이집트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상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옛 정부이자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속주로 가게 되었는데 원래 히스파니아로 가게 되었으나 안토니우스가 방해하고 옥타비아누스를 히스파니아로 가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 원정 이후 곧 제대할 많은 병사를 정착시키기 위해 일단 이탈리아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이 많은 병사는 과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공화파 쪽에서 서서 싸운 병사들로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달래지 않았으면 쉽게 그의 정적들과 연합할 수 있었으나 그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 더 이상 병사들의 정착지를 위해 분배해줄 국유지가 없자 옥타비아누스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로마 시민의 땅을 몰수하여 시민들을 멀리하는 것 또는 로마의 심장부에서 그에게 대적할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수 있는 많은 로마 병사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전자를 택하였다. 새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 18개의 도시가 그 땅으로 사용되었는데 도시에 살고 있던 모든 시민들이나 일부 시민들을 쫓아내 버렸다. Statue.JPG|섬네일|왼쪽|185px|기원전 30년경에 만들어진 옥타비아누스의 상. 옥타비아누스가 추진했던 퇴역병의 정착 계획에 대한 많은 불만으로 인해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당파는 결집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남동생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풀비아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인 클로디아 풀케라와 이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옥타비아누스와 클로디아의 부부 관계는 진전이 없었고 그는 클로디아를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된 장모 풀비아에게 보냈다. 풀비아는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병사들을 길러 옥타비아누스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세 집정관이 로마 병사들의 월급을 마음대로 나눠줄 수 있는 권한이 생기자, 루키우스와 풀비아는 옥타비아누스를 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도박을 걸었다. 기원전 40년 초, 루키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응징에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지아)에서의 농성을 끝내고 항복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루키우스와 그의 군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편 풀비아는 그리스의 시키온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지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기원전 40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일을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의 인사를 루키우스와 공조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페루시아도 다른 장군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약탈하고 도시에 불을 질렀다. 이 잔인한 사건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인생을 더럽혔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 등은 이를 두고두고 비난하였다. 제1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승리한 이래, 아직 로마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39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과 협정을 맺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가지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가 아닌 공화파 소속의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을 맺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는데 폼페이우스의 부하이자 사위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딸, 즉 폼페이우스의 외손녀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적녀인 율리아를 낳았는데 율리아가 태어난 이 날은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 황후가 되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한 날이기도 하였다.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3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떠났다.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대적할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항, 브룬디시움에 진을 쳤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모두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카이사르파의 중요한 정치적인 지지기반이었던 백인대장들이 싸움을 거부하였고 그들 휘하의 각 병사들은 백인대장을 따라 전투 중지를 원하였다. 한편, 시키온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가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안토니우스가 그녀를 보기 위해 시키온으로 가던 중이었다. 풀비아의 죽음과 백인대장들의 항명은 두 집정관을 잠정적으로 화해시켰다. 기원전 40년 가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룬디시움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맡기로 하였다. 중부의 이탈리아 반도는 신병들에게 맡겨졌는데 사실 이 조약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겐 무용지물이었다. 기원전 40년 말엽,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확고한 동맹을 위해 자신의 친누나인 소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옥타비아는 대 안토니아와 소 안토니아 두 명의 딸을 낳았다. Sextus Pompeius-Scilla.jpg|섬네일|300px|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상대로 이긴 것을 기념하여 주조한 데나리우스. 앞에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이긴 기함 메시나의 파루스가, 뒤에는 괴물 스킬라가 새겨져 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간의 군량 수송 거부로 이탈리아의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하였는데 폼페이우스의 아들이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 이탈리아에 큰 기근의 원인이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제해권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넵툰의 아들’(Neptuni filius)이라 불렀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조약으로 임시 평화 협정이 맺어졌는데 이탈리아의 해상 봉쇄가 풀리자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내주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35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세 명의 집정관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간의 영토 협정은 기원전 38년 1월 17일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와 재혼하자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폼페이우스의 휘하 제독 중 하나가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도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반환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를 공격하려면 안토니우스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던 옥타비아누스는 협정을 맺어 삼두 정치 체제를 연장하여 기원전 37년부터 시작하여 5년 동안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지지를 얻은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와의 원정을 위해 그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그는 기원전 53년의 카르하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고 싶어하였다. 타렌툼(Tarentum)의 협정에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120척의 전함을 주고 옥타비아누스는 2만 명의 군사를 파르티아와 싸우려는 안토니우스에게 보내준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약속했던 병력의 불과 1/10인 2천 명밖에 보내주지 않았고 이러한 도발은 안토니우스가 6년 뒤 서로 전투에서 마주 대할 때까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한다.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해 합동 작전을 개시하였다. 옥타비아누스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기원전 36년 9월 3일 나우로쿠스 전투에서 아그리파의 군대에게 거의 완파되었다. 섹스투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퇴각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항복한 폼페이우스의 병사를 손에 넣었는데 머지않아 레피두스는 자신이 시칠리아를 다스릴 충분한 능력이 된다 자부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나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의 군대는 자신들이 싸우는 데 지치고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돈으로 유혹하자 레피두스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투항하였다.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의 직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삼두 정치 체제에서 쫓겨나고 공직 생활 역시 끝이 나면서 이탈리아의 카페 키르케이에 있는 장원으로 유배되었다. 로마의 통치권은 이제 서방의 옥타비아누스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게로 주어졌고 양분되었다. 공화국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전역한 병사들에게 이탈리아 외곽에 자리를 잡게 해주는 사이, 과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참가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던 3만여 명의 노예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오자 자신과 리비아, 옥타비아의 신변 안전의 보장을 원로원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누이인 옥타비아, 딸인 율리아는 주권면제권을 부여받았다. Alma-Tadema- Anthony and Cleopatra.JPG|섬네일|왼쪽|280px|로렌스 알마타데마가 그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한편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게 돌아갔다. 비록 옥타비아누스가 2천 명의 군사를 보내주었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았고 작전 실패로 인해 지도자로서의 그의 이미지도 추락하였다. 하지만 이미 안토니우스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안토니우스의 군사를 다시 보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안토니우스는 전처인 옥타비아를 로마로 돌려보냈다. 비록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군사를 재건하여 다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려고 계획했더라도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인 배우자를 부정하고 동방의 정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선동을 하였고, 갈수록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추락하였다.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끝났으니 안토니우스가 삼두 정치 체제의 집정관 직을 사퇴하면 자신도 그리할 것이라 하였으나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권모술수로 자신의 독재적인 이미지는 감추면서 안토니우스를 더욱 극악하고 독재적인 이미지로 만들려 하였다.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가 로마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안토니우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로 하여금 아르메니아의 왕 자리에 앉히고 클레오파트라에겐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을 하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건을 인용하면서 원로원에게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야망을 지녔다고 주장하였다. 기원전 33년 1월 1일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자 그는 원로원 회의에서 안토니우스가 가지고 있는 작위와 자식들이나 친척들 그리고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에게 나눠준 영토 문제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망명한 전직 집정관,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선동 에 불신을 품고 안토니우스의 편에 붙었는데 기원전 32년 가을, 변절한 각료와 원로원 의원들은 다시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변절하였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같은 망명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를 비난하기 위해 원로원의 승인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베스타 처녀의 신전에 폭풍이 불자 옥타비아누스는 수석 사제녀에게 안토니우스의 비밀 유서를 내놓으라 강요하였는데 그 유서에는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자신의 아들들을 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묻힐 영묘를 알렉산드리아에 호화롭게 건설하라 쓰여 있었다.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의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고 있는 이집트에 선전 포고하였다. Battle of Actium.jpg|섬네일|오른쪽|230px|1672년에 로렌조 카스트로가 그린 《악티움 해전》. 런던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 기원전 31년 초, 아그리파의 함대가 로마군을 수송하여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횡단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곧 벌어질 큰 전투의 예비 단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본대를 그들의 해상 보급 경로에서 차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푸 섬 맞은편에 위치한 본토에 도착,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바다와 땅 모두에서 막히자, 안토니우스군의 탈영병은 하루가 머다 하고 계속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는데 옥타비아누스군은 전쟁 준비로 휴식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상 차단 해제를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 서쪽 해안의 악티움 만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아그리파와 가이우스 소시우스의 함대가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대보다 수는 많지만 더 작고 조종하기 더 쉬운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였다. 안토니우스와 남은 군사들은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막판에 노력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추격하였고 기원전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였는데 독사가 클레오파트라를 무는 사이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로 몸을 찌르고 클레오파트라의 팔 쪽으로 쓰러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잘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카이사르가 있으나 하나로 족하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훗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비록 그의 수단은 잔인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이자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하였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지지가 약해졌어도 ‘신의 아들(Divi filius)’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전에 적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주었고 로마 시민의 호응이 없는 정책을 계속 고수하였으나 악티움 해전 이후 그는 그의 정적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신뢰를 쌓았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아직 로마는 형식상으로는 공화정이었고 로마 시민은 군주제와 독재라면 진저리를 쳤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원하는 것들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부터 8년간 해마다 집정관의 자리를 맡았다. 그중 기원전 28년과 기원전 27년은 아그리파가 동료 집정관이었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다시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공화정 시절의 정치 체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머리 부분은 기원전 30년~기원전 20년경에 제작되었고, 몸통은 2세기에 제작되었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일인자라는 뜻의 국가 제1시민 (princeps civitati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흔히 프린켑스 라고만 쓰는 이 칭호는 공화정 시대에 지도급 원로원 의원으로 인정받은 집정관 역임자이자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자를 뜻했다. 이 칭호는 실제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폼페이우스에게도 수여된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는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던 현실 속에서 로마의 최고 책임자라는 것을 반영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위임받았던 여러 특권을 원로원에 되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올 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속주와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보호자,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중은 엄청난 양의 부를 아우구스투스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공공건물 건설과 가도 유지·보수에 자발적으로 기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기대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가도 건설에 나섰다. 기원전 16년에 발행된 화폐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막대한 양의 돈을 공공기금에 기부한 후 이루어낸 가도 건설을 선전하였다. 하지만 역사학자인 하워드 스컬러드(Howard Scullard)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의 진정한 권력은 군대와 “최종 결제권”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원로원은 내전을 종결시킨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의 통치를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 요청은 아우구스투스가 초법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원로원이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면서 계속해서 공직을 수행하였으며 10년 기한의 속주 통치 권한을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게 된 속주들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 등 로마에 정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속주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일 때, 자신이 통치하는 속주에 파견할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는다. 반면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지 않는 “원로원령 속주” 의 경우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다. 속주와 군단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압도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다. 고대 로마의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던 아프리카 속주의 경우 원로원에서 파견한 총독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며, 시칠리아 속주 및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등 여러 속주는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였다.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수의 속주만 원로원에서 임명한 전직 집정관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으며, 나머지 지역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기 때문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감히 대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광활하고 지리적으로 먼 황제령 속주에는 대다수 군단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법무관급 레가투스를 임명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Bevilacqua Glyptothek Munich 317.jpg|섬네일|왼쪽|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원로원 의원들은 감격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아우구스투스의 집 출입구의 위쪽에 시민관(corona civica)을 걸고 출입구의 양쪽 기둥을 월계수 묘목 장식으로 뒤덮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황금 방패에 공화정을 복귀시켰다는 사실을 새겨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하였다. 이 칭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였다. 신의 아들(divi filius, 즉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더불어 ‘길조’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함축되어 있었는데, 로물루스가 엄숙한 징조(augusto augurio)를 보고 로마를 창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제2의 창건자로서 또 다른 로물루스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평화로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내전 등 끔찍한 사건을 겪었던 “옥타비아누스의 시대”와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제2의 건국자임을 상징하기 위해서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서 따온 “로물루스”라는 칭호도 고려되었지만 로물루스라는 칭호는 왕정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선택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자기 자신을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Imperator Caesar divi filius)이라 칭했다. 이는 자신이 신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과, 승리를 상징하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받았던 특권인 보라색의 토가를 입을 수 있는 권리, 권위를 상징하는 머리띠와 홀을 쓸 수 있는 권리는 받지 않았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Terentius Varro Murena)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항하려 한다. 그 방식은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무레나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us Piso)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피소는 널리 알려진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동료 집정관과 협력하면서 파벌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과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늦봄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칫하면 죽을 수 있었던 정도로 심하게 병을 앓았고,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친구인 아그리파에게 자신의 인장을 넘기고 사위인 마르켈루스에게 병권을 위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인장과, 관리하고 있던 공금 및 군단 통제권을 동료 집정관인 피소에게 위임했다. 이러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황제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잠시 거둔다. 아우구스투스는 사유 재산만 자신이 지목한 상속자들에게 수여하려 했다. 당시 로마의 시민들은 여전히 군주정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약 권력을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려 했다면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August BM Gem3577.jpg|섬네일|왼쪽|200px|서기 14년 ~ 20년경에 만들어진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 마노 세공으로 되어 있다. 건강을 회복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 직에서 사임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뿐이다. 하지만 군 통수권은 여전히 원로원의 요청으로 지니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에서 사임하여 구 귀족들에게 집정관 자리에 오를 기회를 늘려 주었으며, 전통적인 공화주의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계속 집정관직을 보유하는 것이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행적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공직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전직 집정관으로 속주 통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또 그는 기원전 27년부터 황제령 속주에 전임 집정관의 명령권(proconsulare imperium)을 계속 보유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원로원령 속주의 명령권보다 더 우위에 있는 상급 임페리움(maius imperium)까지 얻게 되어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속주 총독들 위해 군림하고 필요한 경우 모든 군단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죽을 때까지 행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귀족 계급으로서 호민관에 취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호민관 특권을 손에 넣어 거부권 행사, 선거 관리, 모든 모임에서 제일 먼저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호민관 특권을 활용하여 풍기 단속을 담당하고 시민들이 공익을 보존하는지 자세히 감찰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그리고 인구 조사와 원로원의 의원을 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게 되었다. 이 권한까지 손에 넣자 아우구스투스는 포룸에 들어올 때 전통 복장 토가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게 하여 로마 애국주의의 미덕을 지키려 하였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서는 아우구스투스처럼 감찰관에 선출된 적도 없던 사람이 이런 권한을 갖는 것과 한 사람이 호민관 특권과 감찰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전례가 없었다.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비슷한 권한을 가졌지만 인구 조사를 시행하거나 원로원 의원 명단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공화정 시대와 비교해서 호민관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을 여전히 법무관이 되고자 하는 평민 계급이 거쳐야 하는 중요한 단계로의 의미는 살려둔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의 복장을 한 아우구스투스의 상.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군 통수권도 손에 넣는다. 이는 이전에는 집정관이나 권한을 위임 받은 장군들만이 가지고 있던 권리였지만, 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만 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만이 가지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오직 아우구스투스만이 명목상 로마군의 최고 통수권자의 자격으로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장군들이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면 그 영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갔다.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가 유일한 예외였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7년에 게르마니아에서의 공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갖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기원전 13년에 기한 연장 승인을 받았다. 이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머무르면서 퇴역 장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에게 아낌없이 선심을 베푼다. 앞에서 언급한 권한들의 획득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장이었다. 평민 계급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기원전 22년에 홍수와 기근이 겹쳐서 일반 서민들의 생활이 힘들어졌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영구 집정관직 혹은 독재관직을 부여할 것과 그가 직접 감찰관직을 맡아 곡물 담당관직(cura annonae)를 맡아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독재관에 취임하지는 않았지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비를 부담하여 짧은 시간 내에 사태를 해결하였다. 8년에 다시 발생한 기근 때에는 “식량청 장관”() 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로마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게 하였다. 기원전 19년에 원로원은 민중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의 상징을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권리와 두 집정관의 사이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허락했다. 그 결과권력은 공식적으로도 집정관에 취임하지 않더라도 집정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기원전 12년에는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이었던 레피두스가 죽은 후에 그 자리에 취임한다. 최고 제사장은 종신제인 데다가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기원전 2년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로부터 “국부”()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30aC - 6dC 55%CS jpg.JPG|섬네일|오른쪽|230px|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확장된 영토. 노란색 부분은 기원전 31년 당시의 로마의 영토이다. 녹색 부분은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동안 얻은 지역이며, 분홍색은 동맹국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승리와 연결시키기 위해 자신의 칭호에 개선장군을 뜻하는 “임페라토르”를 집어넣어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 하였다. 이후 13년까지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임페라토르”라고 불릴 만한 21회가량의 큰 승리를 거두었고 3회의 정식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제4장에 이러한 군사적 성공으로 치른 개선식, 감사제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도 적지 않았으며, 외교도 적절히 사용하였다. 한 예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당했던 대패(大敗)를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만회하는 대신, 아르메니아 왕국에 친(親)로마 성향의 인물을 왕위에 앉힌 후에 파르티아를 압박하여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NyCarlsberg01.jpg|섬네일|왼쪽|180px|티베리우스의 흉상.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와 노리쿰, 일리리쿰,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또한, 오늘날 스페인의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원전 1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하였으며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편입된다.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풍부한 광물 자원은 이후 군자금의 원천이 된다. 대표적인 곳으로 라스 메둘라스의 풍부한 금광이 있다. 기원전 17년과 16년에 일리리쿰 총독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가 알프스 산악 지역의 노리쿰(오늘날의 티롤, 스티리아, 잘츠부르크)에 정복 사업을 개시하여, 황제의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완수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사이에 군사적 완충 지대가 생겼다. 지금의 모나코 근교에 알프스 전승기념비가 세워졌고 호라티우스는 이 승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 기원전 12년에는 알프스 근방에서 군사 행동을 재개하였고,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가 이끄는 군대가 각각 일리리쿰에서 판노니아 족, 동부 라인란트에서 게르만족을 공격하였다.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기원전 9년에 드루수스가 이끄는 군대는 엘베 강에 도달했다. 하지만 얼마 후 드루수스는 낙마하여 죽었고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였다. de Las Médulas.jpg|섬네일|오른쪽|200px|라스 메둘라스의 금광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동방을 파르티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러 동맹국을 완충 지대로 적극 활용하였다. 동방 방위를 위해 시리아 속주에 군단을 주둔시켰으며, 티베리우스가 파르티아와 교섭을 하였다. 이 협상의 결과로 로마는 기원전 53년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 대패를 당했을 때 빼앗겼던 군단기(軍團旗)를 되찾을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5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도 했다. 파르티아가 언제나 위협적인 상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전쟁은 게르만 족을 상대로 대부분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에서 벌어졌다. 안토니우스와 최종 전투를 벌이기 전에 달마티아의 부족들과 벌였던 전쟁 이후 로마군은 착실히 도나우 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화하는 데 실패하였다. 9년에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당한 참패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게르마니아의 총독인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케루스키 족 출신의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족에게 전멸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티베리우스는 이후 여러 차례 라인란트로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죽은 후에 계승자인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로마군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주 방어선으로 삼아 방위 체계를 구축한다. 기원전 23년의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이라는 화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켰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 아우구스투스 영묘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례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평정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 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Gestae.jpg|섬네일|220px|터키 앙카라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일부 미술관에 있는 프리마 포타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시기에 수립된 정책들은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지속하였다. 양부로부터 이어받은 성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1400여 년간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카이사르는 여러 언어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아우구스투스 동상과 흉상이 제작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 신앙( Divus Augustus )은 391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을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서, 자신이 직접 쓴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Res Gestae Divi Augusti )의 동판을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정면에 걸어 놓기를 원했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사본은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 터키의 앙카라에서 발견된 사본의 경우, 라틴어로 되어 있는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공건물에 부착하였다. 테오도어 몸젠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금석문의 여왕”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작품은 여러 편이 알려졌다. 이 중에는 시칠리아에 대한 시집 《시칠리아》, 〈브루투스의 《카토론》 반박〉, 13권에 걸쳐 기술한 《자서전》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분석하여 작품에 대한 추가 정보를 연구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정책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였던 기간에 계속 사용되었고 “로마에 의한 평화”( Pax Romana )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 Pax Augusta )라 칭송받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셋째 아내인 리비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지혜와 결단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게다가 그의 정책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많은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도인 로마 시에 “경찰청”( Praefectus urbi )과 “소방청”( Praefectula vigilum )을 만들었으며, 지방 자치 단체들에 상주하는 장관들을 파견하였다. 경찰청은 대대별로 500명씩이었으며, 소방청은 대대별로 500에서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7개 대대가 14개 구의 치안과 화재 진압을 담당하였다. 내전이 끝난 후, 아우구스투스는 28개 군단, 총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한다. 이들은 각 속주의 주민들로 구성된 보조병과 함께 국방을 담당하였다. 또한 역참 제도를 창설하여 “관찰장관”( praefectus vehiculorum )이라 불리는 장교들이 감독하도록 하였으며, 자비를 털어서 도로를 유지 및 보수하였다. 동시에 추가로 가도를 더 건설하여, 더욱 더 빠른 통신 체계를 갖추면서 군대가 신속하게 행군할 수 있게 되었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는 현역 및 퇴역 군인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하여 “군인 연금 기금”( aerarium miltare )을 만들었다. 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의 경호를 목적으로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근위대는 훗날 원로원에 압력 넣기, 새 황제 추대, 기존의 황제 제거 등 로마의 역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근위대는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할 때까지 존속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언제나 공화주의자로서의 미덕과 규범을 실천하려 애썼다. 언제나 서민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보았던 그는 관대한 정책들과 과다한 지출 삭감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기원전 29년에는 25만 명의 시민에게 개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씩 지급하였고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12만 명의 퇴역병에게는 1,000세스테리우스씩을 지급하였으며, 약 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들여 자신의 병사들이 땅을 사서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로마의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 82곳을 복구하였다. 기원전 28년에는 검소하고 관대한 모습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은상 80여 개를 녹였다. 신전에 묘사된 이집트풍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긴 통치 기간과, 이 기간에 로마 제국에 남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산들도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14년 당시의 젊은이들은 원수정 외의 정치 체제는 알지 못하였다.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었더라면(예 기원전 23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동안 사실상 군주정이었던 로마에서 옛 공화정 지지자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추종자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경험과 인내심, 치밀한 전략과 정치적 통찰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조율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잘 훈련된 군대가 전선에서 주둔하는 것, 제위 계승에 대한 원칙, 황제의 자비를 털어 수도를 꾸미는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로마 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최고의 업적은 이후 2세기간 이어진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에게 매우 좋게 남았고, 이는 제국 시대의 정치적 풍조 아래 좋은 황제의 패러다임으로 남게 된다. 이후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Caesar Augustus )를 사용하였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점차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칭호로 더 많이 사용된다. 동시대인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의 수호자, 도덕 규율을 바로잡은 자, 제국을 짊어지고 갈 의무를 기꺼이 진 자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통치 기간에 원수정을 확립한 것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동시대의 법학자, 공화정의 추종자인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 ~ 서기 10년 또는 11년)는 공개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체제를 비판하였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의 서문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교활한 방법으로 공화정 로마를 노예처럼 만들었다고 서술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에 티베리우스가 이 자리를 물려받았고, 로마의 사람들은 노예 매매와 같이 계속하여 다음 주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타키투스는 네르바가 “원수정”과 “자유”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생각을 잘 조화시켰다고 믿었다. 3세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친절하고 관대한 통치자라는 점은 인정하였지만, 동시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를 전제군주로 보았다. 시인인 마르쿠스 아나에우스 루카누스(39년 ~ 65년)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소 카토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로마의 전통적 자유가 끝난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역사가인 체스터 G. 스타 2세는 루카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은 이유가 그러기엔 너무나도 신성불가침의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썼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Discourse on the Contests and Dissentions in Athens and Rome 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에 전제군주제를 도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였고 대영제국의 입헌군주정을 기원전 2세기경의 로마 공화정에 비유하였다. 장군이자 역사가였던 토머스 고든(1658년 ~ 1741년)은 아우구스투스를 올리버 크롬웰과 비교하며 비판하였다. 토머스 고든과 몽테스키외는 아우구스투스가 전장에서는 겁쟁이라고 평하였다. 스코틀랜드의 학자인 토머스 블랙웰(Thomas Blackwell, 1701년 ~ 1757년)은 Memoirs of the Court of Augustus 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마키아벨리 성향의 군주라 보았다. 인도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화폐. 대영박물관 소장.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화폐의 모조품(인도, 1세기). 대영박물관 소장.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히먀리트 왕국에서 제작된 모조품 아우구스투스의 세제 개혁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전 시대에는 널리 행해졌던 속주민에 대한 특별 징세를 하지 않았으며, 새로 정복한 지역의 기반을 닦고 고정 세율로 직접세를 징수하였다. 세금을 불시에 임의로 거두어 속주민의 분노를 불러오는 대신에 고정 세제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세입이 증가하였고, 돈의 흐름이 안정되었으며, 해마다 속주가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일정해졌다. 세금 징수를 위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각 속주마다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정해졌다. 속주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권자의 경우 간접세만 납부하였다. 노예 매매 시 가격의 4퍼센트를 세금으로 냈으며, 경매 시에도 1퍼센트를 납부하였으며, 재산 상속 시에도 가까운 친척이 아닌 이로부터 1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상속을 받으면 5퍼센트의 세금을 납부하였다. 또한, 세금도 민간 징수원이 징수하던 기존 방식에서, 세금 담당 공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공화정 시대의 민간 징수원들은 세금을 과다하게 걷어가며 힘을 불려나가, 점점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많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세금을 추가로 더 걷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었다. 이들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세금 납부자들에게서 부당 징수를 일삼았고, 이는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직접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점과 로마 정부 형태의 변화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의 비옥한 땅을 재정원으로 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아닌 아우구스투스의 사유지처럼 간주되었고, 이후에도 이집트는 황제들의 사유지로 취급된다. 이집트는 원로원 계급 출신이 통치하는 대신에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 기사 계급(equestrian)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다. 아우구스투스와 이후의 황제는 이집트의 농경지에서 벌어들인 많은 수입을 복지 정책, 공공 정책과 군사 원정의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로마의 역법에서 “여섯 번째 달”()로 불리었던 달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이후부터 8월(이라는 지금의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8월이 31일이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8월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7월(July)이 똑같은 날짜 수를 가지길 원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13세기의 학자였던 사크로보스코의 요한네스(Johannes de Sacrobosco)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8월은 이름이 아우구스투스 로 바뀌기 전부터 31일이었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 마크로비우스에 따르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 로 바뀐 것은 로마 원로원의 결정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0년 8월에 알렉산드레이아를 함락한 뒤 권좌에 오르자, 이를 기리고자 8월을 아우구스투스 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편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제정했던 율리우스력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역법에 혼란이 왔는데, 이를 바로 잡으면서 8월을 아우구스투스 로 명명하였다고도 한다. 제단에 새겨진 돋을새김. 비엔에 위치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신전.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았고,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줬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 발언이 황제의 권력에 대한 은유라고 분석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전의 시대에도 건물을 지을 때 대리석을 사용했고, 그 후에 대리석의 사용량이 갑자기 증가하지도 않았다. 화재의 위험이 높았던 건물이 많았던 수부라 지역의 건설에 대리석을 많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마르스 광장(Campus Martius) 근방에 평화의 제단()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많이 세웠다. 평화의 제단 앞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놓여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 따르면 평화의 제단에 새겨져 있는 돋을새김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를 이룩한 것을 경축하고, 앞으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 돋을새김에는 집정관, 여사제뿐만 아니라 로마의 시민들도 함께 새겨져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카이사르 신전, 아그리파 목욕탕을 지었으며, 마르스 신전이 딸려 있는 아우구스투스 포룸도 건설하였다. 다른 건설 사업들도 장려하였는데, 대표적인 건물로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 아우구스투스가 건설 자금을 지원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붙인 옥타비아 회랑, 마르켈루스 극장 등이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가족을 위한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건설하였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여 기원전 29년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근방에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이 건립되었고, 기원전 19년에는 이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건설 사업은 제국 전역에서 행해졌는데, 현재까지도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여러 곳에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건설된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이후 로마 제정 시기 동안 그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코린토스 양식의 건물이 주를 이루었다.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에 죽은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개인 재산까지 기부해 가며 책임지던 수도 유지·보수 업무를 정비하여야 했다. 그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 지정한 3명의 원로원 의원이 로마의 수로교의 유지·보수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에는 다섯 명의 원로원 의원이 “공공사업청”(curatores locorum publicorum iudicandorum)이라 불리는 공공건물과 신전의 유지·보수를 맡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도로청”(curatores viarum)을 창설하여 정기적으로 각 지방의 가도 유지·보수를 담당하도록 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로마 황제 연대표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아우구스투스 영묘 제2차 삼두 정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Bourne, 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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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네이버캐스트 - 아우구스투스 The Res Gestae Divi Augusti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The Deeds of Augustus, his own account 라틴어 및 그리스어 원본의 영어 번역본) 《황제전》, 수에토니우스, 라틴어 원본의 영어 번역본 《 로마사》 디오 카시우스, 권 45–56, 영어번역본 Life of Augustus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 영어번역본 The Via Iulia Augusta, 기원전 13년 ~ 기원전 12년 사이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건설된 로마의 도로들. Gallery of the Ancient Art August Humor of Augustus De Imperatoribus Romanis Augustus Caesar and the Pax Romana Octavian / Augustus Augustus and the Roman army—Mutual Loyalty and Rewards Augustus at BBC History Anthony Everitt, The First Emperor Caesar Augustus and the Triumph of Rome (review) *Borgies, Loïc, Le conflit propagandiste entre Octavien et Marc Antoine. De l usage politique de la uituperatio entre 44 et 30 a. C. n. , Brussels Latomus, 2016. . 분류:기원전 63년 태어남 분류:14년 죽음 분류:로마의 황제 분류:로마 출신 분류:로마 제국의 집정관 분류:창업군주
동진(東晉) 태원(太元) 11년 전진(前秦) 태안(太安) 2년 / 태초(太初) 원년 후연(後燕) 연원(燕元) 3년 / 건흥(建興) 원년 서연(西燕) 경시(更始) 2년 / 창평(昌平) 원년 / 건명(建明) 원년 / 건평(建平) 원년 / 건무(建武) 원년 / 중흥(中興) 원년 후진(後秦) 백작(白雀) 3년 / 건초(建初) 원년 서진(西秦) 건의(建義) 2년 북위(北魏) 등국(登國) 원년 후량(後凉) 태안(太安) 원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14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원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31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양왕(故國壤王) 3년 백제(百濟) 진사왕(辰斯王) 2년 가을 7월, 백제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함.
동진(東晉) 태원(太元) 15년 전진(前秦) 태초(太初) 5년 후연(後燕) 건흥(建興) 5년 서연(西燕) 중흥(中興) 5년 후진(後秦) 건초(建初) 5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3년 북위(北魏) 등국(登國) 5년 후량(後凉) 인가(麟嘉) 2년 적위(翟魏) 건광(建光) 3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18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5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35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양왕(故國壤王) 7년 백제(百濟) 진사왕(辰斯王) 6년 데살로니가의 사람들이 테오도시우스황제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1월 25일 - 초기 기독교 교부 철학자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스
동진(東晉) 태원(太元) 16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원년 전진(前秦) 태초(太初) 6년 후연(後燕) 건흥(建興) 6년 서연(西燕) 중흥(中興) 6년 후진(後秦) 건초(建初) 6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4년 북위(北魏) 등국(登國) 6년 후량(後凉) 인가(麟嘉) 3년 적위(翟魏) 건광(建光) 4년 / 정정(定鼎) 원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19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6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36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양왕(故國壤王) 8년 / 광개토왕(廣開土王) 원년 백제(百濟) 진사왕(辰斯王) 7년 고구려(高句麗)의 18대 태왕(太王) 고국양왕(故國壤王)
동진(東晉) 태원(太元) 17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2년 전진(前秦) 태초(太初) 7년 후연(後燕) 건흥(建興) 7년 서연(西燕) 중흥(中興) 7년 후진(後秦) 건초(建初) 7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5년 북위(北魏) 등국(登國) 7년 후량(後凉) 인가(麟嘉) 4년 적위(翟魏) 정정(定鼎) 2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20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7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37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2년 백제(百濟) 진사왕(辰斯王) 8년 / 아신왕(阿莘王) 원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를 쳐서 관미성을 비롯한 11개 성을 함락시켰다. 293회 고대 올림픽이 종결됨. 백제(百濟)의 16대 어라하(於羅瑕) 진사왕(辰斯王)
동진(東晉) 태원(太元) 19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4년 전진(前秦) 태초(太初) 9년 / 연초(延初) 원년 후연(後燕) 건흥(建興) 9년 서연(西燕) 중흥(中興) 9년 후진(後秦) 건초(建初) 9년 / 황초(皇初) 원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7년 북위(北魏) 등국(登國) 9년 후량(後凉) 인가(麟嘉) 6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22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9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39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4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3년 고대 올림픽이 막을 내리다. 고구려(高句麗)의 20대 태왕(太王) 장수왕(長壽王)
동진(東晉) 태원(太元) 20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5년 후연(後燕) 건흥(建興) 10년 후진(後秦) 황초(皇初) 2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8년 북위(北魏) 등국(登國) 10년 후량(後凉) 인가(麟嘉) 7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23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10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40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5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4년 훈족의 서아시아 대원정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 고구려 광개토왕이 거란의 패려부를 쳐서 6부락 700영을 함락시키고 무수히 많은 가축을 얻었다.
동진(東晉) 태원(太元) 21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6년 후연(後燕) 건흥(建興) 11년 / 영강(永康) 원년 후진(後秦) 황초(皇初) 3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9년 북위(北魏) 등국(登國) 11년 / 황시(皇始) 원년 후량(後凉) 인가(麟嘉) 8년 / 용비(龍飛) 원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24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11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41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6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5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벌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58성 700촌을 얻었다.
동진(東晉) 융안(隆安) 2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8년 후연(後燕) 영강(永康) 3년 / 청룡(靑龍) 원년 / 건평(建平) 원년 후진(後秦) 황초(皇初) 5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11년 북위(北魏) 황시(皇始) 3년 / 천흥(天興) 원년 후량(後凉) 용비(龍飛) 3년 남량(南凉) 태초(太初) 2년 북량(北凉) 신새(神璽) 2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2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13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43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8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7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신라를 토벌하여 복속하였다.
동진(東晉) 융안(隆安) 3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9년 후연(後燕) 장락(長樂) 원년 후진(後秦) 황초(皇初) 6년 / 홍시(弘始) 원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12년 북위(北魏) 천흥(天興) 2년 후량(後凉) 용비(龍飛) 4년 / 함녕(咸寧) 원년 남량(南凉) 태초(太初) 3년 북량(北凉) 신새(神璽) 3년 / 천새(天璽) 원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3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14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44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9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8년 백제와 동맹을 맺은 왜가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동진(東晉) 융안(隆安) 4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10년 후연(後燕) 장락(長樂) 2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2년 서진(西秦) 태초(太初) 13년 북위(北魏) 천흥(天興) 3년 후량(後凉) 함녕(咸寧) 2년 남량(南凉) 건화(建和) 원년 북량(北凉) 천새(天璽) 2년 남연(南燕) 건평(建平) 원년 서량(西凉) 경자(庚子) 원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4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15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45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10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9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5만 대군을 보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하였다. 분류:기년
동진(東晉) 융안(隆安) 5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11년 후연(後燕) 장락(長樂) 3년 / 광시(光始) 원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3년 북위(北魏) 천흥(天興) 4년 후량(後凉) 함녕(咸寧) 3년 / 신정(神鼎) 원년 남량(南凉) 건화(建和) 2년 북량(北凉) 천새(天璽) 3년 / 영안(永安) 원년 남연(南燕) 건평(建平) 2년 서량(西凉) 경자(庚子) 2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5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16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46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11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10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이른바,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완성
동진(東晉) 원흥(元興) 원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12년 후연(後燕) 광시(光始) 2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4년 북위(北魏) 천흥(天興) 5년 후량(後凉) 신정(神鼎) 2년 남량(南凉) 건화(建和) 3년 / 홍창(弘昌) 원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2년 남연(南燕) 건평(建平) 3년 서량(西凉) 경자(庚子) 3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6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17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47년 /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원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12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11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후연을 쳐서 평주(랴오닝)를 함락시켰다. 신라(新羅) 17대 왕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동진(東晉) 원흥(元興) 3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14년 후연(後燕) 광시(光始) 4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6년 북위(北魏) 천흥(天興) 7년 / 천사(天賜) 원년 남량(南凉) 홍창(弘昌) 3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4년 남연(南燕) 건평(建平) 5년 서량(西凉) 경자(庚子) 5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8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19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3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14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13년 고구려가 후연을 쳐서 유주(허베이)를 함락시켰다. 이때 왜군이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의 대방(황해도) 지역을 침공하자,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일으켜 평양에서 왜를 무찔렀다. 동진(東晉)의 유유(劉裕)가 거병하여 환현(桓玄)을 격파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환현(桓玄)
동진(東晉) 의희(義熙) 원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15년 후연(後燕) 광시(光始) 5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7년 북위(北魏) 천사(天賜) 2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4년 남연(南燕) 건평(建平) 6년 / 태상(太上) 원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원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9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20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4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15년 백제(百濟) 아신왕(阿莘王) 14년 / 전지왕(腆支王) 원년 백제, 한학 일본에 전함 백제(百濟) 17대 왕 아신왕(阿莘王)
동진(東晉) 의희(義熙) 3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17년 후연(後燕) 건시(建始) 원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 북위(北魏) 천사(天賜) 4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7년 남연(南燕) 태상(太上) 3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3년 북연(北燕) 정시(正始) 원년 하(夏) 용승(龍昇) 원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11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22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6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17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3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를 일으켜 왜를 섬멸하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음력 4월 10일 - 가락국의 제5대 국왕 이시품왕.
동진(東晉) 의희(義熙) 4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18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10년 북위(北魏) 천사(天賜) 5년 남량(南凉) 가평(嘉平) 원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8년 남연(南燕) 태상(太上) 4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4년 북연(北燕) 정시(正始) 2년 하(夏) 용승(龍昇) 2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12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23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7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18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4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
동진(東晉) 의희(義熙) 5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19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11년 북위(北魏) 천사(天賜) 5년 / 영흥(永興) 원년 서진(西秦) 경시(更始) 원년 남량(南凉) 가평(嘉平) 2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9년 남연(南燕) 태상(太上) 5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5년 북연(北燕) 정시(正始) 3년 / 태평(太平) 원년 하(夏) 용승(龍昇) 3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13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24년 / 명원제(明元帝) 원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8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19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5년
동진(東晉) 의희(義熙) 6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20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12년 북위(北魏) 영흥(永興) 2년 서진(西秦) 경시(更始) 2년 남량(南凉) 가평(嘉平) 3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10년 남연(南燕) 태상(太上) 6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6년 북연(北燕) 태평(太平) 2년 하(夏) 용승(龍昇) 4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14년 북위(北魏) 명원제(明元帝) 2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9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20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6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동부여를 쳐서 항복시켰다. 아틸라, 훈족의 왕
동진(東晉) 의희(義熙) 7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21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13년 북위(北魏) 영흥(永興) 3년 서진(西秦) 경시(更始) 3년 남량(南凉) 가평(嘉平) 4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11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7년 북연(北燕) 태평(太平) 3년 하(夏) 용승(龍昇) 5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15년 북위(北魏) 명원제(明元帝) 3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10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21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7년 신라가 고구려의 사주로 일본 열도를 침공하여 야마토(倭) 오진(應神) 왕의 항복을 받았다.
동진(東晉) 의희(義熙) 8년 고구려(高句麗) 영락(永樂) 22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14년 북위(北魏) 영흥(永興) 4년 서진(西秦) 경시(更始) 4년 / 영강(永康) 원년 남량(南凉) 가평(嘉平) 5년 북량(北凉) 영안(永安) 12년 / 현시(玄始) 원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8년 북연(北燕) 태평(太平) 4년 하(夏) 용승(龍昇) 6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16년 북위(北魏) 명원제(明元帝) 4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11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 22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8년 신라(新羅) 내물마립간의 아들인 복호와 미사흔이 각각 고구려, 왜에 인질로 보내진다. 고구려(高句麗)의 19대 태왕(太王) 광개토왕(廣開土王)
동진(東晉) 의희(義熙) 9년 후진(後秦) 홍시(弘始) 15년 북위(北魏) 영흥(永興) 5년 서진(西秦) 영강(永康) 2년 남량(南凉) 가평(嘉平) 6년 북량(北凉) 현시(玄始) 2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9년 북연(北燕) 태평(太平) 5년 하(夏) 용승(龍昇) 7년 / 봉상(鳳翔) 원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17년 북위(北魏) 명원제(明元帝) 5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12년 고구려(高句麗)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23년 / 장수왕(長壽王) 원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9년 고구려(高句麗)의 19대 태왕(太王) 광개토왕(廣開土王)
동진(東晉) 의희(義熙) 13년 후진(後秦) 영화(永和) 2년 북위(北魏) 태상(泰常) 2년 서진(西秦) 영강(永康) 6년 북량(北凉) 현시(玄始) 6년 서량(西凉) 건초(建初) 13년 / 가흥(嘉興) 원년 북연(北燕) 태평(太平) 9년 하(夏) 봉상(鳳翔) 5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21년 북위(北魏) 명원제(明元帝) 9년 신라(新羅)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15년 /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원년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 5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13년 신라(新羅) 18대 왕 실성 마립간(實聖麻立干)
동진(東晉) 원희(元熙) 2년 유송(劉宋) 영초(永初) 원년 북위(北魏) 태상(泰常) 5년 서진(西秦) 건홍(建弘) 원년 북량(北凉) 현시(玄始) 9년 서량(西凉) 가흥(嘉興) 4년 / 영건(永建) 원년 북연(北燕) 태평(太平) 12년 하(夏) 진흥(眞興) 2년 동진(東晉) 공제(恭帝) 2년 유송(劉宋) 무제(武帝) 원년 북위(北魏) 명원제(明元帝) 12년 신라(新羅)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4년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 8년 백제(百濟) 전지왕(腆支王) 16년 /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 *중국, 유송의 설립 백제(百濟) 18대 왕 전지왕(腆支王)
유송(劉宋) 영초(永初) 2년 북위(北魏) 태상(泰常) 6년 서진(西秦) 건홍(建弘) 2년 북량(北凉) 현시(玄始) 10년 서량(西凉) 영건(永建) 2년 북연(北燕) 태평(太平) 13년 하(夏) 진흥(眞興) 3년 유송(劉宋) 무제(武帝) 2년 북위(北魏) 명원제(明元帝) 13년 신라(新羅)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5년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 9년 백제(百濟) 구이신왕(久爾辛王) 2년 2월 8일 - 콘스탄티우스 3세가 호노리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의 공동황제가 되다. 음력 4월 12일 - 가락국의 제6대 국왕 좌지왕. 9월 2일 - 서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Flavius Constantius III) 동진의 마지막 황제 공제 사마덕문
유송(劉宋) 원가(元嘉) 8년 북위(北魏) 신가(神䴥) 4년 서진(西秦) 영홍(永弘) 4년 북량(北凉) 승현(承玄) 4년 / 의화(義和) 원년 북연(北燕) 태흥(太興) 원년 하(夏) 승광(勝光) 4년 유송(劉宋) 문제(文帝) 8년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8년 신라(新羅)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15년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 19년 백제(百濟) 비유왕(毗有王) 5년 동로마 제국의 에페소에서 에페소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5호 16국}의{흉노}계통나라 하나라가 티베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 (, , 대략 기원전 484년경~기원전 425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어느 정도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으며 잘 짜여지면서도 생생한 줄거리에 따라 사료를 배치한 최초의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저작 《역사》를 통해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 (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 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특히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 시기의 이야기 자료를 기록하였으며 그 밖에 자신이 지중해와 흑해 주변의 여러 지역을 널리 여행하면서 접한 여러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긴 여담을 많이 썼다. 그의 말에 의하면 본인의 기록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다고 하며 그는 자신이 여행하면서 들은 것만 기록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한 그의 《역사》에 간간히 언급된 기록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고향은 도리아 인에 의해 건설된 소아시아 지방의 할리카르나소스(현재 터키의 남서쪽 해안 도시인 보드룸)이며 그의 선조는 아마 카리아 지방(현재 터키의 남서쪽 내륙 지방)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할리카르나소스의 지배 가문을 축출하려는 시도에 연루되어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추방되어 사모스 섬으로 이주하였다. 약 30세를 전후로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그리고 스키타이 지역(현재 우크라이나 지방)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 여행을 통해 수집한 많은 자료가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한 그의 《역사》에 들여지게 된다. 특히 제2권에서 보게되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한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이집트학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사망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6.91)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동기와 초기 상황에 관한 암시를 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기원전 420년대에 헤로도토스는 아직 생존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40년경에 쓴 《역사》는 서양 최초의 역사책으로 여겨진다. 전 9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항쟁 유래로부터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저술되어 있는데, 제 9권은 미완성이다.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다. 좁게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을 다루었지만 헤로도토스가 여행한 여러 지역의 문화, 풍습, 역사도 폭넓게 다루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자들의 여러 증언을 토대로 하였는데 확인할 수 없는 증언은 적으면서 사실인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썼다. 그러나 그의 역사 기술이 사실과 다르고 내용에 편향적인 시각이 들어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일례로 2세기의 작가 루키아노스는 풍자적인 요소가 강한 그의 작품 《실화》에서 헤로도토스를 거짓말쟁이로 비난하고 있다. 근대의 학자들 여러 명은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여행한 범위를 과장했고 정보 출처를 지어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고고학적, 문헌학적 발견으로 잘못이라 생각되었던 헤로도토스의 기술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여러 차례 드러나면서 《역사》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는 20세기 중반 이후 더 높아졌다. 이제 헤로도토스는 역사뿐만이 아니라 민족지, 인류학의 아버지로도 평가된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내용에는 나일 강이 매년 범람하는 것이 남쪽 멀리 눈이 녹아서라는 증언이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더운 곳에 눈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또 이집트에서 만난 페니키아 뱃사람들은 아프리카를 돌아 항해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할 때 태양이 오른쪽에 떠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믿지 않은 증언들도 전달하면서 당시 지리학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과거의 위업을 후세의 기억 속에 남긴다는 지극히 서사시적 발상하에 지리, 풍속, 역사, 삽화, 종교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항이 수록되어 있어 이것이 때때로 주제에서 이탈함으로써 보기에 따라 전체의 통일성이 결여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항을 동서간의 항쟁이라는 일관된 역사적 전체 속에 집어넣고 페르시아 전쟁도 그 한 부분으로서 파악한 데에 《역사》의 구성상 통일이 있고 그의 역사적 달관이 담겨 있다. 《역사》의 문체가 지니는 매력은 다양성과 유연성에 있다. 직설적인 묘사와 과학적 산문이라고 할 건조한 문체, 그리고 극적인 긴장감을 주는 표현 등 변화가 풍부하다. 또한 줄거리의 교묘함, 서사시적 웅대함, 줄거움을 주면서 가르치는 수완, 낭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점 등이 헤로도토스가 산문의 호메로스 로 불리는 이유이다. 원전 * Historiae, K. Hude (편집), 2권, 1927 Oxford. * Herodotus, The Persian Wars, A. D. Godley (번역, 그리스어-영어), 4권, LOEB Classical Library, 1920-1924 Cambridge (Mass.). 분류:기원전 5세기 태어남 분류:기원전 5세기 죽음 분류: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분류: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난민 분류:아케메네스 제국의 역사가 분류:고대 할리카르낫소스인 분류: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람
유송(劉宋) 원가(元嘉) 28년 북위(北魏) 태평진군(太平眞君) 12년 / 정평(正平) 원년 유송(劉宋) 문제(文帝) 28년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28년 신라(新羅)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35년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 39년 백제(百濟) 비유왕(毗有王) 25년 6월 20일 - 카탈로니아 평원의 전투. 10월 - 칼케돈 공의회. 동방 정교회 분열의 시작. 음력 2월 3일 - 가락국의 제7대 국왕 취희왕.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1세.
논리학 (論理學, 은 논리 및 그것과 관련된 구성과 원리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올바른 논증, 곧 추론과 증명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일반적으로는 논증의 학문이라고 정의된다. 판단·추리·개념 등과 관련하여 올바른 조리에 관한 과학이라고도 한다. 흔히 철학의 한 분과로 분류되나, 형식적 논리학은 수학기초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논리학은 영어의 Logic , 독일어의 Logik , 프랑스어의 Logique 에 해당되는 말이며, 이들은 모두 그리스어의 Logos에서 유래된 말들이다. Logos는 Legein(센다, 모은다, 배열한다, 말한다)이라는 동사에서 전환된 명사로서, 말, 생각, 사유, 사고, 논리라는 뜻 이외에도 개념, 판단, 정의(定義), 이유, 이성, 진리, 사상, 법칙, 이론, 학문 등의 뜻을 지닌다. 비형식 논리학은 인식논리학이라고도 불리며, 추리 형식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이 진리인 것 같은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의 경로나 그 형태를 연구한다. 예로부터 뛰어난 철학자들은 자기의 철학적 인식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논리학 대신 모두 제각기의 입장에서 특징있는 인식론적 논리학을 설정했다. 베이컨의 귀납적 논리학, 칸트의 선험적 논리학,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리학, 듀이의 실험적 논리학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리에 맞는 합리적인 사고로 그 내용을 올바르게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 하는 사고의 규범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데, 심리학도 사고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나 심리학이 사고를 하는 원인에 초점을 두는 것이고 논리학이 사고 과정 자체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구별된다. 형식 논리학은 개개의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에 상관없이 추리의 형식상 타당성만을 문제로 삼는다. 현대에는 흔히 수리논리학(기호논리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며, 현대 수학의 근간을 이루는 수학기초론의 한 분야이기도 하다. 고전적인 형식논리학의 토대를 세운 것은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로, 그의 오르가논에서는 올바른 추론 및 증명을 논하는 논증 의 토대가 제시되었고, 이는 수천년 간 서양 철학 발전의 근본을 이루게 된다. 이후 중세에는 오컴, 아벨라르, 라이프니츠 등의 학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논리학에 대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근대에는, 고틀로프 프레게가 그의 저술 《개념 표기법》에서 논리학적 기호와 체계화된 술어 논리를 고안하였고, 주세페 페아노는 집합론을 발전시키고 페아노 공리계를 고안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세웠다. 20세기 초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이전을 고전논리학, 그 이후를 현대논리학으로 구분될 정도로 중요한 변혁이 발생한 시기로, 특히 게오르크 칸토어의 집합론적 연구로부터 영감을 받아 버트런드 러셀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동으로 저술한 《수학 원리》(, 1910-1913)가 출간되었는데, 이 저서는 현대 수학기초론이 성립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러셀의 역설이나 칸토어의 역설은 사실로 믿어져온 고전 논리학 및 집합론에 명백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확실한 수학적 공리의 필요성이 호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르트 괴델이 1930년 10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산술적 명제가 존재한다 는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면서 페아노 공리의 완벽성 이 흔들리게 되었고, 논리학도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대에는 체르멜로-프렝켈 공리에 선택공리가 추가된 ZFC 공리계의 9가지 공리가 일반 수학기초론을 이루고 있으며, 많은 공리들이 이와 무모순적(독립적)임이 증명되어 있다. 또한 공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다룸으로써 다양한 대상들을 다룰 수 있도록 하는 직관논리, 양상 논리 등 새로운 수리논리학적 체계들이 등장하였다. 주세페 페아노 고틀로프 프레게 버트런드 러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유제프 마리아 보헨스키 쿠르트 괴델 알프레드 타르스키 윌러드 밴 오먼 콰인 수리논리학 수리철학 다치논리학 양상 논리 프레임 (인식의 방법) 한국논리학회 분류:추상 분류:형식과학 분류:철학의 분과
유피테르 (Iuppiter 또는 Iupiter, 속격 Iovis) 또는 요베 (Jove)는 고대 로마의 종교와 로마 신화에서 하늘과 천둥의 신이자 모든 신들의 왕이다. 유피테르는 공화정과 제정 시기를 거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우세 종교가 될때까지 로마 국교의 최고신이였다. 로마 신화에서 제2대 로마의 왕 누마 폼필리우스와 공물, 제물 같은 로마 종교의 원칙들을 세우는걸 논의했다고 한다. 유피테르는 하늘의 신으로 기원한 것으로 보통 생각된다. 그를 상징하는 것은 벼락이고 그의 가장 신성시 받는 동물은 다른 새들보다 앞서 길조로 우선시되었고 로마군의 가장 평범한 상징 (아퀼라) 중 하나가 된 독수리이다. 이 두 상징물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동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발톱에 천둥을 쥐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으로서 유피테르를 상징하는데 자주 혼합되었다. 하늘의 신으로서 그는 정의와 선치 등 신성시 받는 신뢰, 맹세에 대한 신성한 증인이였다. 그의 행사 대다수는 성채가 위치한 카피톨리노 언덕에 집중되었다. 그는 마르스, 퀴리누스와 함께 초기 카피톨리움 3신의 최고 신이였다. 후기 카피톨리움 3신에서는 유노, 미네르바와 함께 로마의 수호신이였다. 그의 신성시 받는 나무는 참나무였다. 로마인들은 유피테르를 그리스 신 제우스와 동일하게 여겼고, 라틴 문학, 로마 미술, 신화, 도상학에서의 제우스는 유피테르 (Iuppiter)라는 이름으로 각색되었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전승에서는 그는 각각 포세이돈과 하데스에 해당하는 넵투누스, 플루톤 의 형제이다. 그들 각자는 하늘, 바다, 지하세계라는 3개의 왕국에 거주했다. 고대 이탈리아의 신 디에스피테르 (Diespiter)는 햇빛에서 나타나는 하늘의 신이긴 하지만, 항상 유피테르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니였다. 티니아는 그의 에트루리아 신화에서의 대응 모습으로 보통 여겨지고 있다. - Inauguration du Louvre-Lens le 4 décembre 2012, la Galerie du Temps, n° 058.JPG|섬네일|200px|개선문의 장식 조각 황제의 경호원인 친위대 부조에서 벼락을 쥐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로마인들은 유피테르가 그들에게 우월성을 주었다고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이들이 했던거 보다 그를 많이 숭배했다. 유피테르는 "쉬고 있는 신들과 로마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새점의 원천"이였다. 그는 로마의 고위 공직, 내부 조직, 대외 관계등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화신이였다. 공화정과 제정기 시절 유피테르 신전에서의 그의 모습은 로마의 옛 왕들과 고위 집정관, 황제 숭배등과 관련된 리게일리어를 갖고 있었다. of titus - imperial cortege.jpg|섬네일|upright=1.5|티투스 개선문의 4개의 바퀴가 달린 전차에 타고 있는 개선 장군 |alt=Bas-relief of Roman driver in four-horse chariot, facing left. 집정관들은 유피테르의 이름으로 그들의 지위에 대한 서약을 했고, 9월 유피테르 신전에서 열리는 연례 행사에서 그를 숭배했다. 유피테르의 도움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또한 그의 지속적인 지원을 바라며), 집정관들은 금박을 입힌 뿔을 지닌 하얀 소를 그에게 제물로 바쳤다. 이와 비슷한 공물은 유피테르 신전에 있는 유피테르 조각상 발 밑에 승리의 징표들을 두고 간 개선 장군들이 하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개선 장군들이 개선식 행렬에서 유피테르를 상징하거나 흉내낸 것으로도 보고 있다. 유피테르에 대한 군주제, 주권의 연관성은 로마의 정부 체제가 바뀜에 따라 재해석되었다. 본래 로마는 왕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세워지면서, 종교적 특권도 통치 귀족 가문들인 파트리키들에게 이전됐다. 군주제에 대한 향수(鄕愁), affectatio regni)는 반역 행위로 여겨졌다. 군주제에 대한 열망을 품는다는 혐의를 받으면, 어떠한 자리에 있던간에 처벌되었다. 기원전 5세기 개선 장군 카밀루스는 유피테르가 하고 다닌다고 여겨지던 4필의 흰색 말로 이뤄진 전차 (콰드리가)를 몰고 나서 추방을 당하였다. 침공해오는 갈리아인들에 맞서 유피테르 신전에서 방어전을 펼쳐 카피톨리누스 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르쿠스 만리우스가 왕처럼 행세한다는 혐의를 받아, 반역 혐의로 타르페이아의 바위에서 던져지며 쳐형당하였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그의 저택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어떤 귀족도 거기서 살도록 허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칙령이 내려졌다. 카피톨리누스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은 까다로운 위치에 세워졌다 유피테르는 왕정 시기에서부터 지속된 왕가의 힘을 상징했고, 그에게 존경을 표한 정무관들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동시에 그는 당시 금지되고, 혐오받으며, 경멸받던 사상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계층 갈등 시기에 로마의 플레브스들은 정치, 종교 공직 자리를 요구하였다. 그들 최초의 농성 (총파업과 유사) 기간 동안에 그들은 로마에서 물러나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위협을 하였다. 그들이 로마로 돌아오기로 동의할때, 그들은 로마 국가 공동체 (res publica)의 통합에 대한 상징과 보증인으로서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언덕으로 가서 언덕에 대고 맹세하였다. 플레브스들은 마침내 모든 정무관과 대부분의 사제직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직은 파트리키들만의 것으로 남았다. pacis fregio lato ovest 2 B.JPG|섬네일|left|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의 부조, 아펙스를 쓰고 있는 플라멘들을 보여주고 있다|alt=Bas-relief of five Roman priests 유피테르는 로마의 공식 대중 종교에서 각자 특정한 신들을 모셔던 15개 사제들의 콜레기움의 고위 사제들인 플라멘들 중에서 파트리키들로 이뤄진 플라멘 디알리스들이 다루었다. 이 사제들의 아내인 플라미니카 디알리카스 (Flaminica Dialis)는 그들만의 의무를 갖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비슷하게 열리는 "장날"인 눈디나이 에 유피테르에게 숫양을 제물로 바쳤다. 이 부부는 유피테르에게 스펠트밀로 만든 빵을 제물로 바치는 귀족 계층들의 특권적인 의식인 콘파레아티오를 통한 혼인이 요구되었다. 플라멘 디알리스는 일부 독특한 금지된 규정들의 제한을 받았으며, 그 중 몇몇은 신의 절대적 본질을에 비춰지는 것이였다. 예를 들어, 유피테르의 플라멘들은 "천상의 신" 유피테르의 시야 아래에 있는 하늘에 그들의 나체 모습을 피하기 위해서, 지붕 아래에서 그들의 의복과 아펙스 (머리에 쓰는 모자)를 벗었을 것이다. 플라미니카들은 유피테를 달랠때까지 매시간 번개를 보거나 천둥 소리 (유피테르의 독특한 악기)를 들었고, 평범한 일상 생활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피테르의 플라멘들의 일부 특권은 유피테르의 절대적 본질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크러슬 의자에 앉았고, 릭토르보다 의전이 앞선 유일한 사제 (사케르도스)이자 원로원 의원에 자리가 있었다. 다른 규정들은 의식상 순서성과 군사 업무로부터의 분리등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말을 타거나 로마의 신성한 경계 (포메리움) 밖에 있는 로마 군대를 보는 것이 금지되었다. 성스러운 맹세를 상징하는 신을 섬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맹세를 하는 것에 대해 종교적으로 허용되었다 (파스). 시체, 장례식, 장례용 불, 날고기등 어떤 죽은 것이나 죽음과 관련된 것들과 접촉해서도 안됐다. 이 일련의 제한들은 유피테르의 특징인 생명의 충만함과 절대적 자유를 반영한다. 아우구레스 푸블리키 (augures publici), 아우구르들은 모든 창업식 행사에 참여한 사케르도스 무리이며, 아우구리아 (auguria)라고 알려진 의식 행위를 행했다. 이들은 로물루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피테르의 의지를 유일하게 해석하는 자들로 여겨지며, 로마인들이 국가 권위의 원천을 유피테르로 보았기에, 아우구르들은 로마 정부에게 그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였다. 페티알들은 로마의 국제 문제에 대한 종교적 행정을 다루는 20명의 단체이다. 그들의 업무는 외국과 로마와의 관계에서 신들의 보호를 약속받는 복잡한 절차들인 페티알 법률 (ius fetiale)을 지키고 적용하는 것이였다. 유피테르 라피스는 그들의 행위를 보호해주는 신이며, 최고위 페티알 (pater patratus)은 강화 조약을 포함한 의식에 관여하였다. 선전 포고가 일어나면, 페티알들은 페티알 법률에서 잠재적 위반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려 천상과 지상, 지하의 신들인 유피테르와 퀴리누스들을 찾아갔다. 이들은 33일 이내에 선전 포고가 가능했다. 페티알들의 조치는 선의의 전능한 수호자인 유피테르의 권한에 해당했다. 페티알 지위의 일부 상징들은 유피테르가 존재했다. 규석은 페티알 의식에 사용된 돌로, 그들의 성소인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 신전에 위치했다. 가끔식은 버베나로 확인됐던 성스러운 허브 (sagmina)는 그들의 의식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인근 성채 (아르크스)에서 채취됐다. cameo Louvre Bj1820.jpg|섬네일|left|월계수, 담쟁이덩굴로 된 왕관을 쓰고 있는 유피테르. 사도닉스 카메오 (루브르 박물관) 계층 갈등에서 유피테르의 역할은 종교적인 로마인들에게 반영되었다. 파트리키들은 로마의 새점을 보유함으로서 꽤나 자연스럽게 전능한 신의 지지를 주장할 수 있었고, 플레브스들은 유피테르가 정의의 원천이며, 그들의 대의 명분이 정당하기에 그가 자신들의 편이라 논쟁했다. 플레브스들의 첫 철수는 그들에게 짊어진 막대한 빚에 의한 것이였다. 법률 제도 넥숨 때문에 채무자들은 채권자들의 노예가 되었다. 플레브스들은 빚이 귀족들이 원한 전쟁의 비용 때문에 채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논쟁했다. 원로원이 전체 빚을 감행해달라는 독재관이자 아우구르인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재기한 제안에 응하지 않자, 플레브스들은 안니오 강에 있는 노벤툼 다리를 건너 로마에서 북북동쪽 3마일 거리에 위치한 언덕인 성산 (聖山)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며, 보통 창자 점쟁이 점을 치던 장소였다. 결국에는 원로원이 플레브스들과 협상을 할 수 있는 완전한 권력을 지닌 10명으로 이뤄진 대표단을 보냈으며. 이중에는 메네니우스 아그리파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Manius Valerius)가 있었다. 다른 문서 자료들과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만들어져 1688년 아레초에서 출토된 명문에 따르면, 이 산에서 플레브스들을 내려오게 한 이가 발레리우스였다고 하며, 그후 철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올라간 언덕을 유피테르의 땅 (Jupiter Territor)으로 축성을 하고 언덕 꼭대기에 제단을 지었다. 유피테르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은 이 사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성산의 축성은 정상 부분만 언급됐을 것이다. 이 의식에서 아우구르 (마니우스 발레리우스로 추정)와 폰티펙스 (pontifex)의 참여가 요청되었다. 두 번째 철수는 귀족 행정관들과 사케르도스들에 의해 비밀을 유지되던 법률을 기록하기 위해 로마 시민들에게 임명된 데켐비리들의 횡포와 오만한 행위로 인해 발생하였다. 플레브스들의 모든 행정관들과 호민관은 자리에서 사임하였다. 이에 대한 결과로 12표법이 생겼지만, 민간 법률만 다루고 있었다. 플레브스들은 다시 한번 성산으로 올라갔다 이 행위는 첫 번째 철수를 상기시키는 것 외에도 최고의 신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였다. 이 철수는 데벰비리들의 사임과 볼스키인과의 전쟁 중에서 그들의 지휘관을 버리고 알기두스 산 인근 그들의 야영지에서 탈영한 반란 병사들에 대한 사면으로 끝이 났다. 이 사면은 원로원에 의해 부여된 것이고 플레브스들의 새로운 호민관 후보로 여겨지던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인 퀸투스 푸리우스 (Quintus Furius, 리비우스의 버전) 또는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Marcus Papirius)가 보장하였으며, 그는 아벤티노 언덕에서 지지자들을 모았다. 권력 공백기 상황에서 폰티펙스 막시무스 의 역할은 종교적 배경과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tribunicia potestas)적 성격을 바탕으로 엄청난 요소였다. pompei.JPG|섬네일|right|폼페이의 벽화에서 독수리와 지구본과 함께 있는 제우스|alt=Painting of a bearded, seated Jupiter, unclothed from the waist up and holding a staff 학계의 대부분은 초기 시대의 로마가 신화의 양이 부족하거나 토착 신화가 그리스 신화의 영향으로부터 회복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입장이다.. 로마 문화의 그리스화가 이뤄진 후, 라틴 문화와 도상학은 유피테르의 서술과 묘사를 제우스의 신화로 재해석하였다. 로마의 전설적인 역사에서 유피테르는 로마의 왕과 왕권과 자주 연관되었다. 유피테르는 프라이네스테에 있는 조각상 중 하나인 유노의 쌍둥이 형제로 묘사되어, 포르투나 프리미게니아가 이들을 간호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또한 프라이네스테에서 발견된 명문에서는 포르투나 프리미게니아가 유피테르의 첫 번째 자식이라고 한다. 자클린 샹포 (Jacqueline Champeaux)는 이 모순이 연이어 다른 문화와 종교가 합쳐짐에 따른 결과로 보고 있으며, 그리스 세계에서 온 영향의 파도가 포르투나를 유피테르의 딸로 만들었다. 제우스의 어린 시절은 그리스 종교, 미술, 문학에서 중요 요소이지만, 어린 시절 유피테르의 묘사는 드물고 확실치도 않다. 봄 초에 나쁜 날씨로 농작물이 위험에 빠지게 된 시기를 마주친 로마의 왕 누마는 그의 존재를 떠올리며, 신의 조언을 구하는 계획에 의존했다. 그는 술을 먹이게 하여 감금시킨 피쿠스, 파우누스 두 신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했다. 이 두 신들 (사로잡힌)은 유피테르를 불렀고, 그는 아벤티노 산에 있는 지상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이러한 이유로 유피테르 엘리키우스 Iuppiter Elicius)라고 불렸다. 누마가 인신공양에 대한 유피테르의 요구를 능숙하게 피한 후, 유피테르는 번개를 피하는 방법을 알기 원하던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누마에게 언급한 인신공양에 대한 대체품으로 다음을 요청했다 양파의 비늘꼴 줄기, 머리카락, 물고기. 추가적으로 유피테르는 다음 날에 해가 뜰 때 누마와 로마인들에게 지배적인 권리를 줄 것이라 약속하였다. 다음 날, 맑은 하늘을 가로 지르는 3개의 번개를 던진 후, 유피테르는 천상에서 방패를 보냈다. 이 방패에는 각이 지지 않았기 때문에, 누마는 앙킬레 (ancile)라고 불렀고, 이 방패가 로마의 운명을 지녔기에, 그는 진품을 숨기기 위해 많은 복제품들을 만들었다. 누마는 대장장이 마무리우스 베투리우스에게 복제품을 만들어달라 요청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복제품들을 살리이에게 주었다. 그의 일에 대한 보답으로 마무리우스는 그의 이름이 살리이들의 마지막 시에서 노래불러지게 해달라고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이야기에 살짝 다른 버전을 제시했는데, 이 방패의 신비로운 증여의 원인이 질병 때문이였고 로마의 지배권과는 관련이 없다고 썼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통치 기간에 종교에 대해서 경멸적인 자세를 가졌다. 그의 기질은 호전적이였고, 종교적인 의식과 경건함을 무시했다. 호라티우스와 쿠리아티이간의 대결로 알바니족을 정복한 후, 툴루스는 알바 롱가를 파괴하고 그곳의 거주민들을 로마로 추방시켰다. 티투스 리비우스가 전하는 이 이야기에서, 추방된 알바니인들이 유피테르의 성소와 연관된 그들의 옛 의식을 무시하였기에 알바니 산에 돌의 비가 내리는 징조 (프로디기움)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 징조들은 더 일어났는데, 알바니인들이 종교 의식을 수행하라는 요청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전염병이 뒤따랐고 마침내 왕 자신이 아팠다. 이에 대한 결과로, 호전적인 툴루스의 성격이 없어졌고; 그는 종교와 사소하고 미신적인 관행에 의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누마가 기록한 유피테르 엘리키우스 를 불러들이는 종교 의식을 담은 책을 찾아냈다. 그는 의식을 시도했지만, 그는 의식 행위를 잘못 실행하여, 유피테르가 번개를 집어던져 그의 저택을 불태우고 툴루스를 죽였다. 타르퀴니우스가 그의 친종족들인 타르퀴니이인에서 실패한 후, 정치에서 그의 행운을 시험하기 위해 향하고 있었을때, 원을 돌며 소리를 지르며 날던 독수리 한 마리가 급강하 하여 그의 모자를 빼앗아다가, 다시 모자를 두고 날아갔다. 타르퀴니우스의 아내 타나퀼은 독수리가 하늘에서 날아왔고, 유피테르가 독수리를 보낸 것과 그의 모자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머리에 위치한 의류)를 건드린 것을 보고 이 징조를 그가 이 새를 기반으로 하여 왕이 될것이라 해석했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카피톨리움 베투스라는 건물을 지으며, 로마에 카피톨리노 3신을 전파했다. 마크로비우스는 타르퀴니우스가 지닌 사모트라케의 신비로운 믿음에서 이러한 성향이 발생됐다고 썼다.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마니아의 승리를 거둔 후,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신전 앞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다 (2세기 이후). 카피톨리니 미술관|alt relief of family group, with an animal, outside large building with columns 유피테르에게 바쳐진 제물은 (호스티아이)은 소 (거세된 숫소), 양 (이데스, 오비스 이둘리스 때), 거세한 숫양 (1월의 이데스 때)이였다. 이 동물들은 새하얀 것이여만 했다. 양의 성별에 대한 의문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양은 일반적으로는 숫양이였지만, 오래된 축제 개회식에서 플라멘 디알리스들은 제물로 썼다. 이 규칙에는 플라미니카 디알리스들이 눈디나이에서 보여준 것에서는 숫양을 제물로 쓰는등 많은 예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에니 전쟁 위기 당시에는 유피테르에게 그 해에 태어난 짐승들을 매번 제물로 바쳐졌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로마의 캄피돌리오 언덕에 서있었다. 그곳에서 유피테르는 개인 신으로서 숭배받았고, 유노와 미네르바는 카피톨리움 3신으로서 숭배받았다. 이 건물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짓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마지막 로마의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시기에 완료되어 로마 공화정 (기원전 509년 9월 13일) 초기에 개관되었다. 유피테르가 전차 기수로 되어있고 콰드리가 형태로 만들어진 4필의 말 조각상이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거대한 유피테르 조각상이 건물 내에 위치했고; 축제 때에 유피테르 조각상의 얼굴을 붉은 색으로 칠했다. 이 신전내 (또는 인근)에는 맹세한 서약이 이뤄진다는 유피테르 라피스 유피테르의 돌이 있었다. 카피톨리노 유피테르 신전은 아마 속주 지역에 위치한 그의 신전들의 건축 모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 지역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지었을때, 유피테르의 신전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터 위에 세워졌다. 유피테르 스타토르 (Iuppiter Stator)에게 헌정된 신전 두 개가 로마에 있었다; 첫 번째는 제3차 삼니움 전쟁 이후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기원전 294년에 짓고 헌정하였다. 팔라티노 언덕으로 향하는 옛 입구인 무고니아 문 (Porta Mugonia) 아래에 있는 노바 가도 (Via Nova)에 위치했었다. 로물루스에게 바쳐졌다는 전설도 있다. 유피테르 숭배가 비문으로 증명되었기에 유피테르의 초기 신전 (파눔)이 이었을 수 도 있다. 오비디우스는 그 신전의 봉헌식이 6월 27일에 있었다고 하지만, 원래 날짜나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복원된 이후 재봉헌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alt=Narrow stone altar, with inscription 두 번째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전는 기원전 146년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 인근에서 개선식을 한 퀸투스 카이킬루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Quintus Caecilus Metellus Macedonicus)가 짓고 헌정하였다. 주랑 현관 (포르티쿠스 옥타비아이)으로 복원된 유노 레기나 신전과 연결됐었다. 유피테르 빅토르 (Iuppiter Victor)는 기원전 295년 삼니움 전쟁 기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짓고 헌정했다. 위치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비문 Diovei Victore 이 발견된 퀴리날리스 언덕이나 Liber Regionum (regio X, aedes Iovis Victoris)에서의 Notitia에 따른 팔라티노 언덕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4월 13일 또는 6월 13일에 헌정되었던 것 같다 (오비디우스의 달력에 따르면 각각 유피테르 빅토르와 유피테르 인빅투스의 날). 제정 시대의 비문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유피테르 프로푸그나토르 (Iuppiter Propugnator )라는 알려지지 않은 신전이 있었음을 밝혔다. 유피테르 라티아리스 (Iuppiter Latiaris) 숭배 의식은 유피테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숭배 의식이다 알바 롱가의 패권 하에서 라틴 동맹의 최고 수호자로서 유피테르에 대한 숭배는 알바누스 산 꼭대기 인근에서 먼 옛날부터 행해졌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알바 롱가를 파괴한 이후 이 숭배 의식은 잊혀졌다. 유피테르는 엄청난 바위 비를 통해 그의 불만을 나타냈다 로마 원로원이 알아내기 위해 보낸 조사단도 바위 비를 맞딱드렸고 알바누스 산의 정상에 있는 숲에서 알바니인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른 유피테르에 대한 종교적 행위를 행하기를 요청하는 커다란 목소리를 들었다. 이 사건으로 로마인들은 9일 간의 축제를 벌였다 ( 눈디나이 , nundinae). 그렇더라도 질병이 발생하여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병에 걸리고 마침내 유피테르의 벼락을 맞고 사망함으로서 끝이 나게 되었다. 이 축제는 로마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 의해 원시적인 의식 형태로 다시 행해졌다. 페리아이 라티나이 또는 라티아르는 고대 라틴족들과 알바니인들의 축제 (panegyris)이다. 이 라틴족들의 고대 종교 전통에는 로마의 헤게모니를 뿌리체 뽑고 그들의 힘을 되찾으려는 목표를 하였다. 본래 숭배 의식은 바뀐거 없이 계속되었으며, 이는 의식의 일부 옛 특징들로 증명되고 있다 의식에서 포도주를 배제하고 우유와 치즈를 공물로 바치며, 경기중 하나로서 춤 (몸 흔들기)을 추는등. 춤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의식 중 하나이며 매우 널리 퍼져 있다. 라티아르에서 춤은 나무에서 이루어졌고 승자는 당연히 가장 많이 흔들은 자였다. 이 의식은 알바니인들이 카이레의 왕 메젠티우스에 맞선 전투에서 실종된 라티누스를 기념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의식은 지상과 하늘에서 그를 찾는 것을 상징한다. 춤 뿐만 아니라 관례적으로 우유를 마시는 것은 유년기를 기념하고 의식적으로서 유년기로 돌아가는 것으로 고려되고 있다. 의식의 가장 최신 형태에서 로마인들은 로마에서 전래한 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가져왔고 모든 축제의 참가자들은 이 소고기를 분배받았는데, 이 의식은 카르넴 페테레 (carnem petere)로 알려졌다. 참가자들이 있는 자치구에서는 다른 게임들도 열렸었다. 로마에서 열린 전차 경주 경기 (quadrigae)는 유피테르 신전에서 출발됐다 승자는 향쑥으로 만든 증류주를 마셨다. 이 경기는 베다 문화권의 의식인 바자뻬야와 비교된다 그곳 의식에서는 17개의 전차가 경기를 펼치고, 그 경기에서 이겨야만이 왕이 마두 (소마) 한 잔을 마시는 걸 허용한다. 축제는 적어도 4일 동안은 계속되었고, 니부어에 따르면 6일 동안이라는 가능성도 있다고 하며, 하루 당 6개의 라틴인과 알바니인들의 데쿠리아이가 참여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들에서는 47개나 53개의 자치구들이 이 축제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축제에 참여한 곳들의 지명들이 플리니우스의 NH III 69와 할리카르낫소스의 디오니소스의 AR V 61 기록들 사이에 너무 큰 차이가 있다). 라티아르 는 로마의 정치 생활에서 중요한 특징이 되었으며, 이들은 페리아이 콩켑티바이 로 그들의 날짜는 매년 다양했다 로마의 집정관들과 고위 행정관들은 국정이 시작하기 잠시 이 행사에 참여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본래는 3월 15일이였다 페리아이는 일반적으로 4월 초에 열렸다. 로마인들은 페라이아가 끝이 나기전에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만약 페리아이를 도외시하거나 의식을 벌이지 않을 경우, 라티아르를 완전하게 반복적으로 해야만 했다. 제정 시기의 명문에서는 이 축제가 데켐비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하였다. 독일의 고전 문헌학자 비소바는 알바누스 산의 신전이 개선식에 대한 분명한 관계를 지닌 유피테르 신전과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기원전 231년 이래로 일부 개선 장군들은 로마에서 제1의 같은 법적 특성을 지닌 유피테르 신전에서 개선식을 벌였다. 이데스 (한 달의 중간 지점, 만월)는 그 날에 빛이 밤낮으로 빛 났기 때문에 유피테르를 신성하였다. 일부 (또는 모든) 이데스는 유피테르를 신성시 여기는 페리아이 요비스였다. 이데스에는 하얀 양 (ovis idulis)이 로마의 신성한 길을 따라 카피톨리노의 성체로 이끌려 유피테르의 제물로 바쳐졌다. 유피테르의 두 개의 에풀라 요비스 축제가 이데스 때 옵티무스 막시무스, 빅토르, 인빅투스, 스타토르 (가정)등 그의 신전들에서 열렸다. 눈디나이는 매 9일마다 반복되었으며, 달력을 1주일과 비슷한 시장 주기로 나누었다. 장날은 시골 사람들 (파기)에게 도심에서의 판매 기회와 3일마다 공개적으로 게시되는 종교 및 정치 칙령에 대해 통보를 받게 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 행사는 로마의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도입했다고 한다. 유피테르의 고위 성직자 (플라미니카 디알리스)들은 유피테르에게 양을 제물로 바치며 축성을 하였다. 공화정 시대 당시에는 로마 역법에 다른 어떤 신들보다 유피테르에게 헌정된 공휴일들이 있었다. 포도 재배와 포도주 축제는 포도가 악천후에 특히 취약하기 때문에 유피테르에게 바쳐졌다. 뒤메질은 취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힘을 가진 포도주를 베다 신화의 소마와 유사한 "왕의" 음료로 묘사했다. 세 개의 로마의 축제가 포도 재배와 포도주와 연관되었다. 8월 19일 시골에서 열리는 비날리아 알테라 는 수확 전에 포도를 숙성시키기에 좋은 날씨를 달라고 요청했다. 포도가 익었을 때, 양을 유피테르에게 제물로 바쳤고 플라멘 디알리스 들은 수확하는 첫 포도를 꺽었다. 10월 11일에 열리는 메디트리날리아 는 포도 수확의 끝을 알렸다; 새로운 포도주가 압착되어, 맛을 보고, 발효공정을 위해 오래된 포도주와 섞었다. 파스티 아미테르니니 (Fasti Amiternini)라는 축제도 유피테르에게 해당하는 축제였다. 후기 로마의 사료에는 축제의 명칭을 설명하기 위해 여신인 메디트리나 (Meditrina)를 만들어냈다. 4월 23일에 열리는 비날리아 우르바나 에서 새로운 포도주를 유피테르에게 공물로 바쳤다. 다량의 포도주가 카피톨리노 언덕에 위치한 베누스의 신전 인근의 배수로에 부어졌다. 2월 24일에 열린 레기푸기움 ("왕의 도주")은 유피테르에게 신성한 날인 7월 5일에 열리는 포플리푸기아와의 연관성이 자주 논의되었다. 레기푸기움은 2월 23일에 열린 유피테르 테르미누스 (유피테르의 경계) 축제 다음 날에 열렸다. 후기 로마의 골동품 전문가들은 레기푸기움을 로마의 왕을 축출시키는 걸 기념한 것이라고 잘못 해석하였지만, 이 축제에서의 "왕"은 의식으로 새해 (옛 로마 역법에서는 3월 1일)와 관련한 힘의 부활과 약화시키는걸 조절했던 렉스 사크로룸이라고 알려진 사제들이라고 알려져있다. 이 힘의 일시적인 공백 (공위시대로 해석)은 레기푸기움이 열리는 2월 24일과 새해가 다가오는 3월 1일 사이에 발생했고 (달의 주기가 태양의 주기와 일치했다고 여겨지던 때), 겨울의 두 달 동안에 불확실적인 변화는 끝이 났다. 일부 학자들은 이 행사때의 전통적인 정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유피테르에게 신성한 날인 포플리푸기아 ("군대의 길")는 그 해의 후반기를 기념했던 것으로 보이며; 율리우스력으로 대체하기 이전에는 매달들을 숫자들로 퀸틸리스 (다섯 번째 달)에서 데켐베르 (10번째 달)까지 이름 붙였다. 포플리푸기아는 성인 남성이 정결 의식을 가지기 위해 모인 "초기 군사 의식"으로, 그들은 의식으로서 로마의 외부 적들을 몰아냈다. 에풀룸 요비스 (epulum Iovis, "요베의 축제")라 불리는 두 개의 축제가 있었다. 하나는 9월 13일에 열리며, 유피테르의 카피톨리움 신전의 설립을 기념하는 날이였다. 또다른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 축제는 루디 플레베이이의 일부로서, 11월 13일에 열렸다. 기원전 3세기 에풀룸 요비스는 렉티스테르니움가 유사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경기는 9월과 11월의 두 에풀라 요비스가 하루 지난 뒤 (dies ater "어두운 날"로 여겨졌던 이 날은 전통적으로 비록 nefas는 아니었지만 불행한 날으로 간주되었다)에 열렸다. 루디 마그니 (Ludi Magni)라고 이름 붙여진 9월의 경기는 원래라면 매년 열리는 것을 아니였지만, 시간이 흘러 매년 열리는 루디 로마니 (Ludi Romani)가 되어 카피톨리움 언덕에서 행렬을 가진 후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열렸다. 이 경기는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에게 헌정된 것이며, 카피톨리움 언덕의 유피테르 숭배와 관련이 있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개선식과의 유사함으로 이해했고, 뒤메질은 로마인들이 지닌 공통적인 에트루리아적 기원으로 이것을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기를 맡게 된 행정관들은 개선 장군 복장을 했고 폼파 키르켄시스는 개선식 행렬을 닮았다. 비소바와 몸젠은 로마인들이 위의 이유로 이 행사를 개선식의 분리된 일부라고 주장했다 (뒤메질은 이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디 플레베이 (Ludi Plebei)는 11월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에서 열렸다. 몸젠은 루디 플레베이의 에풀룸 (epulum, 성찬)이 루디 로마니의 모델이라 주장하였지만, 비보사는 이 가정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루디 플레베이는 기원전 534년에 실시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행사와 유피테르 숭배 의식의 연관성은 키케로가 증명했다. 12월 23일에 열린 이 축제는 아카 라렌티아 (또는 라렌탈리아)를 기리는 주요 의식에 집중된 날이며, 일부 고위 성직자들 (플라멘 퀴리날리스, 폰티프들도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도 참여하였다. 파스티 프라이네스티니는 마크로비우스가 그러길 요비스의 축제 라고 하였다. 파렌타티오 (parentatio) 의식이 유피테르 축제인지 혹은 같은 날에 열린 다른 축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소바는 유피테르와 그의 플라멘들이 사후 세계 또는 죽음의 신들과 연관이 없었기에 이 행사들의 연관성을 부인하였다. 라틴어 명칭 Iuppiter 는 고 라틴어 호격 *Iou 와 pater ("아버지")에서 기원했으며 고 라틴어 주격 *Ious로 대체되었다. 요베 (Jove)는 고 라틴어 사격의 어간 Iov- 를 기반으로 한 덜 사용되는 영어 형태이다. 언어학 연구 자료들은 *Iou-pater 형태가 인도유럽어 주격 Dyēu-pəter (의미 "아버지 하늘신"; 주격형태 Dyēus-pətēr ).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de la Moncloa (M.A.N. Madrid) 03.jpg|섬네일|left|upright|신 아티카 양식의 유피테르 부조 조각, 유피테르 오른손에 천둥을 들고 있다; 몽클로아 푸테알 (서기 2세기 로마), 마드리드 국립 고고학 박물관|alt=Bas-relief of Jupiter, nude from the waist up and seated on a throne 로마 내 유피테르의 옛 명칭은 Dieus-pater ("하늘의 아버지"), 그 이후에는 Diéspiter (디에스피테르)였다. 19세기 언어학자 게오르크 비소바는 이 명칭들이 Diovis, Diovis Pater에 개념적 - 언어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fulgur Summanum (밤의 천둥)와 플라멘 디알리스 (Dius, dies에 기반)반대되는 Vedius-Veiove와 fulgur Dium라는 유사한 형태를 비교하였다. 베르 사크룸 분류:로마 신화의 남신 분류:천둥신 분류:천공신 분류:정의의 신 분류:신화의 왕 분류:신화의 강간범
《 행성 》(The Planets, Op. 32)은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가 쓴,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이다. 작곡자에게 점성술을 가르쳐 준 클리포드 백스의 제안으로 1914년에 착상하여 1916년에 작곡을 마쳤으며 1920년 10월 10일 버밍엄에서 애플비 매슈스(Appleby Matthews)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도미타 이사오의 신시사이저 편곡이 있다. 이 중 〈화성〉은 넥스트의 《Lazenca - A Space Rock Opera》 앨범에 편곡돼 수록되어 있고,〈목성〉의 도입부는 MBC 뉴스데스크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홀스트가 행성조곡 의 작곡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13년 그의 친구 클리포드 백스가 점성술에 관해 소개하는 데서 출발한다. 1925년 출판된 클리포드 백스의 회고록인 Inland Far 에서 그는 1913년 3월의 어느 날에 그의 형인 아놀드, 밸포어 가디너 그리고 구스타브 홀스트와 가졌던 휴일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클리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홀스트는 나에게 그가 막 점성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알렸으며, 그러한 성향의 화제거리로 오랜 동안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가디너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그를 상하게 할 문제는 없었다." 책의 뒤에서 클리포드는 별도로 언급하기로는 홀스트에게 점성술을 소개한 이는 자신이었다고 적었으며, 홀스트가 점성술로부터 끌어낸 영감을 소진해 버리고 나서 그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홀스트의 딸 이모겐은 행성조곡 의 원고 사본판 서문에서 그녀의 부친이 읽은 책인 1913년 런던에서 출판된 Alan Leo의 천궁도란 무엇인가? 에 대해 적었다. 사실 Alan Leo는 1차 대전 전과 전쟁 중에 점성술을 장려하는 일종의 대중적인 책과 인쇄물의 저자였다. 홀스트는 이 책을 보고(비록 친구들의 점괘를 맞추는 것 뿐이지만) 일생동안 점쟁이 노릇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Leo의 책에는 화성 전쟁의 신 , 토성 수확자 처럼 각 행성의 성격에 대해 간단한 기술이 되어 있었고, 홀스트는 이에 착안하여 자신의 작품에도 각 행성 별로 부제를 붙였는데, 해왕성 에 붙인 신비로운 자 만은 Leo의 기술을 그대로 갖다 붙인 제목이었다. 1908년부터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기간에 영국에서는 드뷔시와 라벨에 의한 새로운 음악이 런던에서 연주(1908년 "바다", 1909년 "야샹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1912년 "어미 거위")되었고, 디아길레프가 그의 발레-뤼스를 이끌고 와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1912),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모두 1913년),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1914)를 더했고, 작곡자의 관현악적 색채는 선명하게 확대되어서 영국의 음악적 조직의 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은 1914-16년 사이에 작곡된 행성 에 홀스트에 의해 내면화 되었다. 행성 의 필사본에는 단순하게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7개의 작품 이라는 제목이 달렸었다. 이미 언급한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와는 별개로, 1914년 8월 이전 런던에서 주목할 만한 관현악 초연은 1912년 9월 12일 헨리 우드 경의 지휘로 초연된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1914년 1월에 쇤베르크 자신의 지휘로 한번 더 연주되었다.)이었다. 최근의 몇몇 주석자들은 홀스트의 작곡의 시작점이 쇤베르크의 혁신적인 악보의 예로 보아도 된다는 의견을 냈다. 홀스트가 첫 연주회에 참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수첩 속의 기술은 그가 두 번째에는 틀림없이 참석했었음을 제시한다. 홀스트 생가 박물관의 관리자인 Lowinger Maddison은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의 문고판 총보는 홀스트가 가장 아끼던 소지품들 중에 하나로, 그가 작곡시에 그것을 곁에 두었음을 지적했다.( 금성 에는 쇤베르크의 악보와 유사한 첼레스타 악구가 나타난다.) 홀스트는 행성 을 2년 혹은 3년 간 다듬었지만, 마지막으로 쓰여진 수성 을 제외하고 그는 그것들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순서대로 썼다는 점은 흥미롭다.(1차대전 전에 명왕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행성 은 실제로 거의 2년의 기간이 넘게 작곡되었다. 홀스트는 "그것은 마치 여인의 뱃속의 아기처럼 ... 2년 동안, 스스로 점차 확실하게 형태를 이루듯이" 그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자랐다고 말했다. 1914년에 먼저, 집요한 운율적 행보의 화성 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발발에 대한 반작용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홀스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6월에 그의 스케치를 끝냈기 때문이다. 이후 전쟁 중의 첫 가을에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이, 그리고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이 나왔다. 1915년의 여름과 가을에 천왕성 과 해왕성 을 끝냈는데, 수성 은 1916년 초까지도 마치지 못했다. 그것은 홀스트가 작곡을 매우 천천히 했고 그의 오른팔의 신경염 때문에 세인트 폴 학교의 전(前) 학생들을 비롯하여 여러 팀의 사보가들의 봉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손으로 작성된 원고는 그의 딸 이모겐이 사본판으로 출판하였다. 홀스트 자신은 행성 을 실제로 들어볼 수 있을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차 대전 종료 1주일 전 무렵에 그가 살로니카에 군대 음악교육계의 음악 간사로 가게 되었고, 그의 후원자이던 밸포어 가디너가 그에게 이별의 선물로 퀸즈 홀에서 퀸즈 홀 오케스트라로 행성 의 연주를 주선하는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던 것이다. 홀스트는 즉각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 29살의 야심있는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마침 그는 작품 준비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 에이드리언, 내가 YMCA룰 위해 곧 살로니카로 가게 되었어. 밸포어 가디너가 은혜롭게 나에게 이별 선물로 퀸즈 홀과 퀸즈 홀 오케스트라 전부를 일요일 아침에 모두 주셨어. 우리는 행성 을 할 예정이고 자네가 지휘를 해 줘야겠어." 볼트는 이미 전 해에 그 작품의 2대의 피아노 편곡판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홀스트의 청을 바로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행성 의 초연은 1918년 9월 29일에 이루어졌는데, 거의 개인적인 연주회였던 터라 초대된 청중들만 온 탓에, 넓은 퀸즈 홀은 절반도 못 채웠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대 성공이었다. 홀스트의 딸 이모겐에 따르면 "회랑에 있던 파출부들 조차도 넋을 잃을 정도" 였다고 하면서, 목성 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그들도 빗자루를 내려 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홀스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에 난처해 하였고, 연주회 후 볼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자네는 영광에 둘러싸였고 중략 자네의 성공은 내가 말과 글로써 형언하기 건방질 만큼이나 확실하다네. 신의 가호가 있기를!" 홀스트는 또한 행성조곡 의 악보를 출판하면서 서문에 자신과 그 작품의 성공은 아드리안 볼트 덕분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볼트는 왕립 음악협회의 2차례 시즌의 두 번째 연주회인 1919년 2월 27일에도 초대되어 행성조곡 의 5개 악장만을 연주하였다(대중에의 전곡 초연은 1920년 11월 알버트 코츠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로도 볼트는 세계에 걸친 객원지휘 뿐만 아니라 버밍엄(1924-30 및 1959-60), BBC 교향악단(1930-50) 그리고 런던 필하모닉(1950-57) 등의 수석 지휘자로서의 경력 중에도 계속 행성조곡 을 지휘하였고 녹음도 5회나 남겼다. 목관악기 플루트 4(3, 4번은 피콜로와 알토 플루트를 겸함.), 오보에 3(3번은 베이스 오보에 겸함),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4, 바순 3, 콘트라바순 금관악기 호른6, 트럼펫4, 트롬본3, 튜바, 유포니움 타악기 팀파니2, 트라이앵글, 작은북, 탬버린, 심벌즈, 큰북, 탐탐,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실로폰 현악기 하프 2, 현악 5부 건반악기 오르간 기타 2부 여성 합창(무대 뒤) 약 50분 《행성》은 태양계의 일곱 행성에 해당하는 로마 신화의 신을 각각 주제로 한 일곱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 천문학이 아닌 점성술 상의 행성 배열로 나누었고, 행성과 그에 해당하는 이미지의 그리스로마 신화 신들을 나타내는 표제가 붙어 있고, 곡에도 물론 반영되어 있다. #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 # 〈수성, 날개달린 파발꾼〉() #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 # 〈토성, 황혼기를 가져오는 자〉() # 〈천왕성, 마술사〉() # 〈해왕성, 신비로운 자〉() 점성술의 이미지 외에 동시대에 작곡된 곡들도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는데, 이교적인 기괴한 스토리와 거대한 관현악 편성, 미칠듯이 변하는 박자와 불협화음의 향연으로 스캔들이 되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 이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 클로드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 와 야상곡 등의 영향이 종종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음악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 드뷔시와 달리 곡 자체를 크게 놓고 보면 그리 혁신적인 것도 아닌데, 오히려 대편성의 관현악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굉장히 다채로운 음색을 뽑아내는 면모 덕에 그런 인상을 받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이 곡은 영국 음악의 전통에 깊게 뿌리박고 있고, 목성 의 중간부 선율은 애국적인 내용의 가사가 붙어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합니다 (I vow to thee, my country) 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 당시에는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악명이 높았고, 초연 때의 연주는 연습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꽤 어설펐다고 한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개량되었던 녹음 기술 덕에 홀스트 자신이 직접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해 두 종류의 음반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것마저 한정된 녹음 시간과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곡의 독특한 색채는 거의 죽어버린 소리가 나왔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음반 포맷이었던 SP는 한 면당 기껏해야 3분~4분 반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다. 그런 탓에 대곡을 녹음할 경우, 판 숫자를 줄이려는 프로듀서나 엔지니어 등 녹음 스탭의 요청 때문에 빨리 내달려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후 독일로부터 압류해온 오픈릴 테이프와 그 레코더의 개량 작업, 그리고 스테레오 녹음의 상업화 등으로 인해 녹음의 질이 부쩍 좋아진 덕에, 스펙터클한 레퍼토리 를 찾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음반 취입곡이 되었다. 다장조 5/4박자. 제시부-발전부-재현부-종결부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 - 특정 패턴의 이른바 "오스티나토" 리듬이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가운데 호른에 의한 제 1주제("da --- da da ---")가 시작된다. 제 1주제는 반복되면서 점차 복잡하게 발전하며 정점에 이른 뒤, 좀더 격렬한 느낌의 오스티나토 리듬을 타고 제 2주제("da - dada - da")가 등장하여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이 제 2주제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후 발전부로 이어진다. 발전부 - 행진곡 풍의 리듬을 타고 테너 튜바에 의해 제 3주제가 나타나고, 이 제 3주제는 확대 변형된 후 저음 현에 의해서 제 2주제가 다시 나타나 질질 끄는 듯한 느낌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금관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전 관현악에 의해 오스티나토 리듬이 나타나면서 재현부가 시작된다. 재현부 - 전 관현악의 총주로 오스티나토 리듬을 필두로 제시부의 제 1주제와 발전부의 제 3주제가 차례로 등장한 후 제 2주제가 등장하여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다 정점에 이르러서 금관과 오르간의 코랄이 포르티시시모로 등장하면서 종결부로 이어진다. 종결부 - 금관과 오르간의 마치 추락하는 듯한 느낌의 코랄이 잦아들면서 잠잠해지다가 다시 현악과 목관의 상승 음형에 의해 반란 이 일어난다. 그러나 변형된 오스티나토 리듬의 팀파니와 금관이 등장하면서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데, 미국의 작곡가 존 윌리엄스는 자신이 작곡한 스타워즈 영화부수음악 의 주제곡에서 이 부분을 차용하기도 했다. 내림마장조, 4/4박자. 호른을 제외한 금관과 타악기가 숨을 죽인 채, 조금 긴 호흡의 호른의 제 1주제가 개시된다. 이어서 목관이 가세하고 하프, 현악 합주로 see-saw음형의 제 2주제가 이어진다. 잠시 종결하는 듯한 후 다시 제 1주제가 나타나면서 고조된다. 이어 나타나는 감미로운 느낌의 첼로의 분산화음이 상승하면서, 호른과 목관의 유영하는 느낌의 반주를 타고 바이올린 독주가 고음역을 한가롭게 노래하는 제3주제가 이어진다. 한차례 클라이막스가 있은 후, 바이올린 독주와 목관, 호른의 반주가 교대 혼합되어 진행한다. 다시 제2주제, 제1주제가 나타나고, 앞에서 나왔던 첼로의 분산 화음이 한 옥타브 높게 등장한 후 제3주제가 다시 나타난다. 하프와 목관의 분산화음이 어우러지며 클라이막스에 이른 후 첼레스타의 속삭이는 듯한 분산화음에 호른이 see-saw음형을 노래하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의 고음으로 이어지고 흩어지듯이 사라진다. 내림나장조, 8/6박자. 비록 홀스트는 그의 계획에 독일 교향곡의 어떠한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없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느린 악장에 이어지는 스케르초이다. 화성 의 집중된 음향의 무게는 다시 멀어졌고, 목관악기와 약음기를 낀 현의 반짝이는 대비는 주목할 만한 발빠른 분위기를 창줄한다.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의 목관의 빠른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면서 하프의 달리는 느낌의 연주에 이어지면서 고조되다가 호른의 코랄로 분위기가 바뀐다. 이 부분이 잠잠해진 후, 날아다니는 느낌의 목관이 다시 나타나고 현악기의 달려가는 듯한 악구가 고조된다. 팀파니의 빠른 패시지를 타고 목관이 연주되다 사라지고 첼레스타와 하프, 목관악기들이 어우러지며 고조된 후 조용히 끝맺는다. 다장조, 2/4박자. 화성 과 마찬가지로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는 바이올린의 분산화음을 타고 호른이 귀에 익숙한 제1주제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된다. 이 주제는 오래 전에 모 방송국에서 저녁 9시 뉴스의 시그널로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목성 은 중간부의 아름다운 선율과 더불어 친근감이 드는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목관의 분산화음이 더해지고 다른 금관들도 합세하여 한차례 더 반복된다. 이어 전 관현악이 분위기를 일신한 후 반복과 변형을 거듭하며 발전한다. 그후 제2주제인 3박자의 리듬이 반복되면서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제1주제 등의 단편들이 나타나면서 제시부는 점차 잦아든다. 이어지는 발전부는 금관에 의해서 3박자의 유려한 선율이 전개되는데, 후에 홀스트는 이 선율에 I Vow to Thee My Country 의 가사를 붙였다. 한껏 고조된 발전부가 끝나고 이어지는 재현부는 제시부의 선율들이 다시 순서대로 등장하여 부풀어 오르면서 종결부로 이어진다. 종결부는 하프와 현악기의 물결치는 듯한 아르페지오를 타고 저음 금관과 저음 목관에 의해 발전부 선율이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금관의 기상곡 풍의 팡파르가 등장하면서 끝맺는다. 다장조, 4/4박자.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곡상을 풀어가는 교향시의 성격이다. 플루트와 하프의 see-saw 음형으로 조용히 시작하면서 마치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듯이 화성 의 제 1주제가 들어간 음형(이하 "A음형"이라 칭함)이 더블베이스에 의해 나타난다. 목관이 이 A음형을 반복하고, 점차 현악기군과 목관이 더해지고 금관이 지속음을 내면서 멎는 듯하다가,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으로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행진곡 풍의 리듬을 피치카토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의욕적인 출발의 느낌을 주는 A음형의 금관의 화음이 상승, 하강을 반복하면서 고조되다가 하프와 현의 잡아채는 듯한 리듬에 목관이 처음에는 순응하다가 점차로 저항하는 듯이 확대되면서 상승한다. 확대된 목관이 점차 고조되어 금관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저항을 이겨낸 듯 see-saw 음형의 행진 리듬으로 바뀐다. see-saw 음형과 A음형이 혼합되어 반복되면서 점차 침잠하는 듯이 잦아들고 마치 고독한 승자의 모습을 묘사하듯 플루트와 하프의 투명한 울림만이 남는다. 오르간의 지속음과 하프와 목관이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금관의 see-saw 음형이 명상적인 느낌을 이끌어 내며 천천히 음색을 변화시켜 간다. 마침내 모든 욕심으로부터 초연해진 듯이, 음악은 서서히 높은 곳을 향해 사라진다. 다장조, 6/4박자. 서주는 트럼펫과 테너 튜바, 베이스 튜바에 의해 "솔-미flat-라-시" 의 네 음으로 시작한다. 알렉산더 깁슨/RNO(Chandos) 음반의 내지 설명에 의하면. 이 네 음은 홀스트의 이름(GuStAv Holst)에서 따 온 것이라는 Malcolm MacDonald의 주장도 있다. 금관에 의해 제시된 네 음은 테너튜바와 베이스튜바가 모방하다가 팀파니에 의해 제지당하면서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이어서 바순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다른 목관들도 차례로 합류하고 더불어 속도도 빨라진다. 점차 고조된 뒤, 바순에 의해 다른 주제가 나타나고, 이 주제를 다른 목관들이 따라 하면서 확대 발전한다. 이어 금관에 의해서 화성 의 제 2주제가 나타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절정에 다다른 후 점차 가라앉는다. 여기까지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노스가 카오스로부터 여러 신과 물질을 창조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베이스 튜바에 의해서 서주에 나왔던 네 음이 다시 등장하고, 새로운 주제의 행진곡이 등장하면서 확대 변형 발전하면서 점차 고조된다. 온갖 타악기들이 난무하는 소란스러운 선율로 한동안 정신없이 연주하는데, 마치 바람기를 억제하지 못한 우라노스의 행각(?)을 보는 듯하다. 전 관현악의 코랄과 함께 오르간이 거칠은 음향으로 등장하면서 모두 침묵하고 눈치를 살피는 듯한 하프의 see-saw 음형이 마치 가이아의 사주를 받은 제우스와 맞선 우라노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마침내 일격을 가하는 제우스의 모습이 오르간과 전 관현악에 의해 연주되고, 비참하게 사라져 가는 우라노스의 모습이 하프의 see-saw 음형으로 표현되면서 조용히 사라진다. 다장조, 5/4박자. 제목에 걸맞게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한다. 하프와 다른 목관들이 선율을 따르며 발전하고, 금관이 부드럽게 지속음으로 받쳐준다. 이어서 일렁이는 느낌의 첼레스타와 하프의 아르페지오를 타고 팀파니, 심벌즈, 사이드 드럼의 부드러운 트레몰로와 목관 금관의 지속음이 신비로운 느낌을 채색하다가 점차 가라앉는다. 저음 현의 지속음이 깔린 채 베이스 오보에와 바순의 느릿한 상승을 다른 목관들이 이어받으며 반복하는 중에, 무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2부 여성합창이 보칼리제로 지속음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호른이 see-saw음형으로 화음을 연주하고,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 고조되었다가 사라지면, 박자를 세는 듯한 느낌의 하프를 타고 여성 합창이 앞서의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연주했던 선율을 재현한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여성합창이 쉬는 사이 목관과 금관의 지속음과 타악기의 부드러운 트레몰로와 하프 및 첼레스타의 아르페지오로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여성합창이 다시 등장하여 see-saw음형을 연주하면서 하프가 간간이 받쳐주다가 여성합창만이 연주된다. 이 부분에서 여성합창이 있는 곳의 문은 서서히 닫히도록 악보에 지시되어 있는데, 마치 보이저 2호가 마지막으로 해왕성 사진을 전송하고는 은하계 바깥으로 사라져 가듯이 여성합창도 점점 멀어진다. 1930년 명왕성이 발견되었는데, 홀스트는 명왕성을 위한 곡을 쓰는 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00년 할레 오케스트라(Hallé Orchestra)의 위촉으로 콜린 매슈스가 〈명왕성, 새롭게 하는 자〉()를 써서 이모겐 홀스트에게 헌정했다. 매슈스는 해왕성의 종결 부분을 명왕성으로 넘어가도록 고쳤다. 명왕성이 포함된 《행성》은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2000년 5월 11일 맨체스터에서 초연했다. 2006년 8월 국제천문연맹이 명왕성의 분류를 행성에서 외행성으로 바꾸면서 《행성》은 다시 지구를 제외한 모든 태양계의 행성을 다루는 곡이 되었다. 연주시간 약 6분 악기편성 플루트 4(3, 4번은 피콜로, G조 베이스 플루트 겸함.), 오보에 3(3번은 베이스 오보에 겸함),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4, 바순 3, 콘트라바순, 호른 6, 트럼펫 4, 트롬본 3, 튜바, 유포니움, 팀파니 2, 트라이앵글, 작은북, 탬버린, 심벌즈, 큰북, 탐탐,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자일러폰, 하프 2, 오르간, 2부 여성 합창(무대 뒤) 분류:관현악곡 분류:모음곡 분류:행성을 소재로 한 노래
LaTeX ( 또는 )은 문서 조판에 사용되는 프로그램이다. 도널드 커누스가 만든 TeX을 쉽게 사용하기 위하여 1984년에 레슬리 램포트가 만든 매크로이다. TeX을 직접 사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LaTeX을 이용하여 문서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변환되는 파일 포맷과 프로그램 LaTeX 소프트웨어는 LaTeX Project Public License(LPPL)로 제공되는 자유 소프트웨어이다. 현재, OS X과 솔라리스 등의 유닉스, 리눅스와 BSD 계열 OS 등의 UNIX 호환 OS,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등 다양한 OS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최신 버전은 1993년 발표된 LaTeX2e이다. 구버전인 LaTeX 2.09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LaTeX2e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좋다. LaTeX2e 공식 로고는 와 같이 표기하고, 이 같은 표기가 불가능한 텍스트 또는 전자 우편의 경우에는 "LaTeX2e" 또는 "LaTeX 2e"로 표기하도록 되어 있다. 아래는 LaTeX 입력의 예이다. 이 입력은 오른쪽 그림처럼 출력된다. \documentclass12pt{article} \usepackage{amsmath} \title{\LaTeX} \date{} \begin{document} \maketitle \LaTeX{} is a document preparation system for the \TeX{} typesetting program. It offers programmable desktop publishing features and extensive facilities for automating most aspects of typesetting and desktop publishing, including numbering and cross-referencing, tables and figures, page layout, bibliographies, and much more. \LaTeX{} was originally written in 1984 by Leslie Lamport and has become the dominant method for using \TeX; few people write in plain \TeX{} anymore. The current version is \LaTeX2e. % This is a comment; it will not be shown in the final output. % The following shows a little of the typesetting power of LaTeX \begin{align} E &= mc^2 \\ m &= \frac{m_0}{\sqrt{1-\frac{v^2}{c^2}}} \end{align} \end{document} 425px \usepackageT1{fontenc} \usepackage{CJKutf8} \usepackageenglish{babel} \begin{document} \begin{CJK}{UTF8}{mj} 안녕하세요? \end{CJK} \end{document} 위의 코드로도 한글을 조판할 수 있으며 이보다 더 다양한 방법들은 KTUG Wiki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닥북(DocBook) BibTeX TeX MikTeX Lyx 수식 편집기 ShareLaTex 한글 TeX 사용자 모임 한글 LaTeX 설치에서 활용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으며, 한글 TeX 환경 개발은 물론, 문답 게시판 및 개발위키를 통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LaTeX 프로젝트 홈페이지 BibTeX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페이지 기술 언어 분류:TeX 분류:1984년 소프트웨어 분류:오픈 포맷
도널드 어빈 커누스 (Donald Ervin Knuth, , 1938년 1월 10일 위스콘신주 밀워키 출생)는 미국의 저명한 컴퓨터 과학자이며,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의 명예교수이다. 본인의 홈페이지 FAQ에 의하면, 그의 성을 Ka-NOOTH()라고 읽는다. 한글 표기는 크누스 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국제 음성 기호(IPA) 표기에 따라 커누스 로 표기하고 있다. 한자 이름은 고덕납()이며, 이는 "커누스"(→가오)와 "도널드"(→더나)를 중국어 발음으로 음역한 것이다. 커누스는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책인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의 저자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의 1권은 커누스가 28세일 때 지은 것이다. 알고리즘 분석 분야를 실질적으로 창조했으며, 이론 컴퓨터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기초적인 중요한 공헌을 했다. 조판 시스템과 메타폰트 폰트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문학적 프로그래밍 (literate programming)의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그는 수준 높은 프로그래머였으며, geek 유머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그가 쓴 책에서 오타나 실수를 찾아내면 상금으로 2.56 달러를 주는데, 왜냐하면 "256 센트가 16진수로 1 달러이기 때문"이다. (예외도 있는데 3:16 Bible Texts Illuminated 라는 책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는 사람에게 걸린 현상금은 3.16달러이다). 소프트웨어의 버전번호는 3, 3.1, 3.14와 같은 방식로 π로 수렴한다. 메타폰트의 버전 번호는 같은 방식으로 e 에 수렴한다. 학부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1963년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튜링상, 미국 국가 과학 훈장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취미 생활로는 음악을 즐기며 특히 오르간 연주를 즐긴다고 한다. (실제로 커누스의 집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고 한다.) 다만 연주실력이 썩 훌륭하지는 않다고 한다. 커누스는 또한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약 1975년부터 1990년 1월 1일까지만 이메일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그때 사용해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 평생 동안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 우편만 사용한다고 한다. 커누스는 우편물을 "배치 모드(batch mode)"로 처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3개월 동안 받은 우편물을 하루 만에 처리하는 방식을 말한다.) 질 커누스 여사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두 자녀가 있다. 커누스-모리스-프랫 알고리즘 커누스 윗화살표 표기법 커누스-벤딕스 알고리즘 노래의 복잡성 스탠퍼드 대학의 도널드 커누스 홈페이지 도널드 커누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 도널드 커누스 컴퓨터 과학의 오일러 (Softpanorama) 분류:1938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분류:튜링상 수상자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스탠퍼드 대학교 교수 분류:컴퓨터 선구자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조합론자 분류:프로그래밍 언어 설계자 분류:독일계 미국인 분류:21세기 수학자 분류: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 동문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그레이스 머리 호퍼상 수상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로버트 하워드 로버트 어윈 하워드 (Robert E. Howard 1906년 1월 22일 ~ 1936년 6월 11일)는 판타지 작가이다. 1930년대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 라는 잡지에 주로 글을 실었다. 미국 텍사스주 피스터(Peaster)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텍사스주 크로스 플레인스(Cross Plains)에서 자랐다. 15세부터 전문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한 것은 1925년 7월달의 Weird Tales 에 실린 "Spear and Fang" 이었다. 여러 장르의 소설을 썼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야만인 전사(戰士) 코난 시리즈이다. 최초의 코난 시리즈 작품은 1932년 12월에 쓴 "The Phoenix on the Sword"이다. 하워드의 문장은 미묘하거나 문학적이기보다는, 직설적이고 화려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재미있다. 마법사들과 칼을 든 영웅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며, 독자들을 즐겁게 하지만 말초적인 즐거움이 아닌 세련된 면도 갖추고 있다. 하워드는 러브크래프트와 클라크 애쉬턴 스미스같은 당시 통속잡지(pulp magazine) 저자들과도 교류했다. 결핵에 걸린 그의 어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30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로버트 하워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Robert E. Howard United Press Association 하워드, 로버트 하워드, 로버트 하워드, 로버트 하워드, 로버트 분류:아일랜드계 미국인 분류:크툴루 신화 작가 분류:20세기 시인 분류:미국의 판타지 작가 분류:애빌린 (텍사스주) 출신
야만인 코난 은 로버트 하워드가 1930년대 통속잡지인 위어드 테일스(Weird Tales) 에 출판한 판타지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배경은 하이보리아 시대의 지구이다. 하이보리아 시대는 하워드가 지어낸 가상의 시대로,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에 잠긴 이후 고대 문명이 발생하기 전의 사이의 시대이다. 하워드는 러브크래프트와 친구사이였기 때문에 서로의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소설에서 배경을 빌려와서 자기 소설에 끼워 넣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크툴후 신화 시대에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하워드가 30살의 나이로 요절한 이후로 오늘날의 작가들이 코난 시리즈를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날의 작가들은 이런 연관관계를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다. 코난은 북방의 야만족 킴메리아인이며, 대장장이의 아들로 전쟁터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이미 훌륭한 전사(戰士)로 이름이 높았으며 베나리움을 파괴하는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나중에 방랑벽에 사로잡혀 여기저기를 방랑하며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시작했으며, 이 모험을 하워드가 기록한 것이 바로 코난 사가(saga)이다. 코난은 전설속에 나오는 괴물들, 사악한 마법사들을 만나고 감미로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는 세상을 떠돌면서 노예로 잡히기도 하고, 도둑이나 무법자가 되기도 하고, 용병이 되었다가 용병단 두목이 되기도 한다. 부하들을 여럿 거느려서 땅을 다스리려 한 적도 있었으나 자신을 제외한 부하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경우를 종종 당하였다. 마침내 40대가 되어서는 당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던 아퀼로니아의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 신진출판사의 어린이용 전집에서 모험왕 코난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론 하워드가 1935년에 발표한 The Hour of the Dragon 을 번역한 것이며 정복자 코난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최초로 영화화된 것은 1982년에 만들어진 야만인 코난(Conan the Barbarian) 이다. 올리버 스톤과 존 밀리어스가 각본을 썼으며, 존 밀리어스가 감독을 맡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코난 사가의 여러 이야기를 조합했고,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주인공 코난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로 알려지게 된 슈왈츠제네거는 1984년에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에 출연하게 된다.) 1984년에는 속편격인 파괴자 코난(Conan the Destroyer) 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슈왈츠제너가가 마찬가지로 주인공 코난 역을 했다. 슈왈츠제너거는 1985년에 로버트 하워드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레드 소냐(Red Sonja) 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6년 4월에 베가북스에서 야만인 코난 이란 제목으로 1,2권을 내놓은 상태이다. 2010년 5월 20일 피망에서 에이지 오브 코난의 오픈 베타가 시작되었다. 에이지 오브 코난 홈페이지 분류:로버트 E. 하워드
TeX (, 은 도널드 커누스가 만든 조판 프로그램이다. TeX 개발의 두 가지 목적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미려한 문서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컴퓨터 기종과 상관없이 똑같은 결과물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TeX으로 컴파일하여 만든 문서의 확장자는 device independent format을 뜻하는 .dvi이다. 이를 변환하여 PDF, 포스트스크립트 등의 문서화일을 얻는다. (.dvi를 만드는 것이 TeX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으나, 요즘은 사실상 문서 표준으로 자리잡은 PDF를 dvi를 거치지 않고 바로 만드는 방법도 많이 쓰인다.) 수학, 물리학, 컴퓨터 과학, 경제학 등 많은 분야에서 논문, 책자, 발표 슬라이드 등 다양한 문서 작성을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식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강력하다. 현재 나와 있는 명령어 기반 수식 편집이 가능한 워드프로세서 등(한글, 위키백과)의 명령어는 이 TeX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수식에 강점을 갖고 있지만, 목차, 표목차, 그림목차, 각주, 미주, 장절명령등이 자동화되므로, 내용에 집중한 구조적 문서를 만드는 것을 강제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 조판언어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어, 사용자들이 명령어를 익혀야 하는 등 초기 사용에 다소 진입장벽이 있다는 단점도 있다. 텍과 주변 패키지들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조의 밑에서부터 엔진-포맷(또는 포맷의 집합인 패키지)-클래스 순으로 생각하면 쉽다. 우선, 커누스 교수가 개발한 TeX 엔진은 그 자체로 사용하기에는 TeX은 단순한 명령어들을 자주 사용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에 이를 보완하여 레슬리 램포트가 TeX 위에서 구동하는 매크로방식의 포맷(자주 쓰이는 일련의 명령어를 하나의 명령어나 틀로 통합하여 간단하게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체계) LaTeX을 만들었다( 레이텍 으로 읽는다). 이러한 포맷 중 수식편집에 강력한 기능을 가진 것에는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가 수학 논문 조판에 필요한 기능을 담아 만든 AMSTeX이 있다. AMSTeX과 LaTeX 등을 합쳐 같이 배포하는 형태를 "패키지"라고 한다(이 패키지의 이름은 AMS-LaTex으로 부름). 또한, 한글 등 다국어 문서 편집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포맷으로 LuaTeX, ConTeXt, XeTeX가 있다. 이런 포맷을 사용하여 텍 문서를 작성할 경우 각 포맷마다 요구하는 형식이나 조건들을 선언해 주어야 하는데, 이를 간편하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클래스"이다. 이중 한글사용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Memoir 클래스, 그리고 Memoir 위에서 구동하며 이를 더 편하게 쓸 수 있게 해주는 클래스 위의 클래스로서 Oblivoir 클래스가 있다. 또한,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쉽게 만들어 주는 beamer 클래스도 널리 사용된다. 이러한 것들을 이용해 문서를 만들려면 먼저 텍스트 파일 에디터를 이용, 텍스트 문서에다 위에 열거한 포맷과 클래스를 선언하여 이를 쓸 것이라고 지정해 주고, 그의 규칙에 맞게 텍 코드에 따라 문서를 작성해서(HTML을 생각하면 쉽다) 컴파일 하면 pdf 등 최종출력본 문서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런 도구들과 이런 도구의 추가 설치 및 업데이트 한데 묶어서 배포하는 것이 ko.TeX 패키지 들이다.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 2012년까지는 한글 TeX 사용자그룹에 접속하여 ko.TeXlive를 다운받아야 했었는데, 2013년부터는 ko.TeX 관련 패키지가 CTAN에 대거 등재되면서 단순히 TeXlive를 다운받아 사용하더라도 한글 텍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HLaTeX. 일명 한글 LaTeX 개발자 은광희. ko.TeX 이전의 사실상 표준 한글 LaTeX이었다. hLaTeXp, hTeXp, 한글 TeX 개발자 차재춘, HLaTeX과 동시기에 사용된 한글 TeX 시스템이다. 이와 같은 뿌리를 갖는 시스템은 윈도 기반에서 운용되는 hLaTeXn, hTeXn, 한TeX등 한TeX KAIST 고기형 교수와 연구실이 한글과컴퓨터 사의 의뢰로 만들었다. 트루타입 글꼴을 이용하고, 자체 DVI 뷰어를 갖는 등, 현재 기준으로 보아도 뒤떨어지지 않는 사용 편의성을 가지고 있었다. ko.TeX 주 개발자 김도현 교수, 김강수, 은광희. dhucs의 저자들과 HLaTeX의 저자가 힘을 모아 새롭게 조성한 한글 TeX 구현 모음이다. dhucs의 유니코드기반의 한글 TeX 환경을 중심으로 EUC-KR로 인코딩한 한글 문서 중심의 HLaTeX의 코드를 이어 받아, option에 따라 유니코드로 인코딩된 문서와 EUC-KR로 인코딩된 예전 문서에 대한 호환성을 유지하고 있다. 2018년 현재 기준으로 TeX에서 한글을 사용하기 위한 시스템중 가장 안정화되어 있으며, 사실상 TeX에서 한글 구현의 표준이다. 코드 표시 e^{\pi i} + 1 = 0 \frac 3 2 또는 {3 \over 2} LaTeX 한글 TeX 사용자 그룹 (KTUG) hTeXp, hLaTeXp 홈페이지 플레인 TeX 퀵 레퍼런스 (PDF)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페이지 기술 언어 분류:디지털 타이포그래피 분류:1978년 소프트웨어 분류:도널드 커누스
《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 》,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 (TAOCP)은 도널드 커누스가 집필하고 있는 알고리즘에 관한 책이다. 2006년 현재 3권까지 나와 있고, 앞으로 4권이 더 발행될 예정이다. 2006년 9월에 1권이 한국어 번역판으로 발행되었다. Volume 1 Fundamental Algorithms . Third Edition (Reading, Massachusetts Addison-Wesley, 1997), xx+650pp. Volume 2 Seminumerical Algorithms . Third Edition (Reading, Massachusetts Addison-Wesley, 1997), xiv+762pp. Volume 3 Sorting and Searching . Second Edition (Reading, Massachusetts Addison-Wesley, 1998), xiv+780pp.+foldout. Volume 1, Fascicle 1 MMIX -- A RISC Computer for the New Millennium . (Addison-Wesley, 2005년 2월 14일) (volume 1의 4판에 추가될 예정) Volume 4, Fascicle 0 Boolean basics (partial preview available, publication planned in early 2007) Volume 4, Fascicle 2 Generating All Tuples and Permutations , (Addison-Wesley, 2005년 2월 14일) v+127pp, Volume 4, Fascicle 3 Generating All Combinations and Partitions . (Addison-Wesley, 2005년 7월 26일) vi+150pp, Volume 4, Fascicle 4 Generating all Trees -- History of Combinatorial Generation , (Addison-Wesley, 2006년 2월 6일) vi+120pp, Volume 1 , first edition, 1968. 634pp. . Volume 2 , first edition, 1969, xi+624pp, . Volume 3 , first edition, 1973, xi+723pp+centerfold, . Volume 1 , second edition, 1973, xiii+634pp, . Volume 2 , second edition, 1981, xiii+ 688pp. .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 1》 - 기초 알고리즘, 류광 옮김, (한빛미디어, 2006년 9월 18일), 798쪽 .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 2》 - 준수치적 알고리즘, 류광 옮김, (한빛미디어, 2007년 9월 13일), 931쪽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 3》 - 정렬과 검색, 류광 옮김, (한빛미디어, 2008년 1월 28일), 937쪽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 4A》 - 조합적 알고리즘, 류광 옮김, (한빛미디어, 2013년 8월 10일), 1184쪽 분류:컴퓨터 과학 분류:컴퓨터 책 분류:미국의 책 분류:1968년 책 분류:도널드 커누스 분류:1969년 책 분류:1973년 책 분류:1981년 책 분류:2011년 책 분류:컴퓨터 산술 알고리즘
2001년 이전 고속국도 노선(기종점은 2001년 8월 24일 이전을 기준으로 함) 노선 기호와 사용 연도 x50px x50px 1983년 ~ 1997년 1997년 ~ 2001년 노선명 경부고속도로(고속국도 제1호선) 기점 서울특별시 강남구 종점 부산광역시 금정구 버스전용차로 경부고속도로 (京釜高速道路, 고속국도 제1호선, 의 일부)는 부산광역시 금정구를 기점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를 종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이다. 1968년 2월 1일에 기공하여 1970년 7월 7일 완공되었다. 대부분의 구간이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 구간의 일부이다. 본래 경부고속도로였던 양재 나들목 - 한남대교 구간은 2002년 12월에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었으며, 현재는 단순한 자동차 전용도로로 취급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차로 수는 왕복 4차로에서 10차로로 되어 있으며, 거의 모든 구간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대전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등 3개의 광역시를 거친다. 또한 수도권 대도시, 지역 거점 도시들을 거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국토의 대동맥’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속도로의 번호가 개통 당시와 동일하게 1번인 이유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고, 국가의 중요 도로이며, 남북축 도로이지만 일부 구간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 매우 불규칙한 노선이기 때문에 다른 고속도로와 같은 체계로 번호를 매길 경우 혼란이 빚어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 부산과 서울을 통행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잇는 사업으로, 기공 전에는 현실성 등의 이유로 논란이 많았다. 경부고속도로는 429억원이 투입 되어 1968년 2월 1일부터 1970년 7월 7일까지 2년 5개월만에 완공 되었고, 연인원 892만 8천명과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고, 77명이 건설과정에서 사망하였다. 16개의 업체와 3개 건설공병단이 참여하여 건설하였다. 2014년 승용차의 서대전 - 부산간 통행 요금은 13,800원이나 1970년엔 1,000원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 되자 고속버스도 운행을 시작하였다. 1970년 당시 서울 - 부산간 고속버스 요금은 성인 1명 기준 1,600원이었다. 2015년 서울 - 부산간 고속버스 요금은 23,000원이다. 1967년 11월 7일 정부 여당연석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시 1967년 12월 1일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추진위원회 구성 1967년 12월 15일 대통령령 제3300호에 따라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 설치 1967년 12월 19일 청와대에서 제1차국가기간고속도로 추진위원회 개최 1968년 1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의 첫 공중 및 지상노선 답사 1968년 1월 12일 서울 ~ 대전간 노선 확정 1968년 1월 20일 서울 압구정동에서 용인 기흥면까지 (잠원 나들목 ~ 수원 나들목)를 2급국도 제97호선 서울~수원선으로 지정 1968년 1월 29일 건설부령 제48호로 서울 ~ 부산간고속도로공사사무소 설치 1968년 2월 1일 서울 ~ 수원간 고속도로 기공식 1968년 4월 3일 수원 ~ 대전 구간 기공식 1968년 5월 2일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제65회 국회본회의 제13차 회의에서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차관도입 협상시 6개 고속도로 중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후순위에 놓겠다는 세계은행과의 합의를 깨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최우선을 진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고속도로 건설비용 부족분을 유류세 인상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박병배 신민당 의원의 발언이 있었다. 1968년 9월 11일 대구 ~ 부산 구간 기공식 1968년 10월 18일 대전 ~ 대구 구간 노선 확정을 통해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노선 확정 1968년 12월 21일 잠원 나들목(한남대교 남단) ~ 수원 나들목 구간 22.4km 개통 1968년 12월 30일 수원 나들목 ~ 오산 나들목 13.8km 구간 개통 1969년 4월 8일 서울 세종로에서 부산 영도까지를 1급국도 제1-1호선 서울부산선으로 지정, 노선 번호 변경 1969년 9월 2일 오산 나들목 ~ 천안 나들목 38.1km 구간 개통 1969년 12월 10일 천안 나들목 ~ 대전 나들목 67km 구간 개통 건설부공고 제122호, 1969년 12월 6일. 1969년 12월 26일 제3한강교 남단 ~ 부산시 동래구 구서동 428km 구간을 고속교통구역으로 지정 1969년 12월 29일 동대구 나들목 ~ 구서 나들목 123km 구간 개통 1970년 7월 7일 대전 나들목 ~ 동대구 나들목 152km 구간을 개통, 이에 따라 모든 구간이 왕복 4차로 도로로 개통되었다. 1970년 8월 21일 추풍령 휴게소 부근에서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가 발생하였다. 1970년 12월 30일 회덕 분기점 개통 1971년 1월 1일 최초 휴게소인 추풍령휴게소 개설 1971년 3월 7일 최초 추풍령휴게소 안에 주유소 개설 1971년 4월 13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사동 ~ 부산시 동래구 구서동 428km 구간에 도로구역 결정으로 고속도로 부지 확정 1971년 8월 31일 서울 중구 세종로 ~ 부산시 중구 대교동 구간을 고속국도 제1호선 서울 ~ 부산선으로 지정 1971년 11월 15일 판교 나들목 착공 1972년 5월 25일 판교 나들목 개통 1971년 12월 1일 신갈 분기점 개통 1973년 11월 1일 추풍령 나들목 확장 개통 1977년 6월 14일 망향휴게소 확장을 위해 충청남도 천원군 성거면 요방리 일대 도로구역 결정 1978년 6월 22일 기점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으로, 종점을 부산시 중구 대교동 에서 부산시 동래구 구서동 으로 단축함. 1979년 6월 1일 서울 기점 260.1km 위치에 낙동 나들목 개통 1979년 8월 31일 버스정류장 및 주차장 설치를 위해 충청남도 천원군 성거면 요방리 460m 구간을 도로구역으로 결정 1981년 11월 7일 경부고속도로(경부선) 으로 노선명 변경 1983년 5월 24일 신탄진 나들목 건설을 위해 충청남도 대덕군 신탄진읍 덕암리 7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3년 12월 12일 신탄진 나들목 개통 1984년 1월 21일 내남정류소 설치를 위해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이조리 52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4년 2월 7일 낙동휴게소 건설을 위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반계동 ~ 아곡동 1.9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4년 3월 2일 평사휴게소 확장을 위해 경상북도 경산군 진량면 평사리 11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4년 4월 30일 대창정류소 설치를 위해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읍 오계동 ~ 대창면 병암리 42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4년 5월 18일 부산리휴게소 (하행) 건설을 위해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공세리 ~ 고매리 1.1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4년 8월 10일 청원 나들목 건설을 위해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외천리 92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4년 11월 30일 청원 나들목 개통 1985년 1월 14일 경산 나들목 진입도로 개량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경산군 진량면 보인동 ~ 신상동 8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5년 2월 19일 서울 요금소 확장 공사로 인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원지동 1.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5년 4월 15일 옥산정류소 설치를 위해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오산리 ~ 가락리 54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5년 5월 17일 회덕 분기점 ~ 남이 분기점 21.7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 착공 1985년 5월 23일 망향휴게소 확장을 위해 충청남도 천원군 성거면 요방리 35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5년 10월 24일 독립기념관 나들목 건설을 위해 충청남도 천원군 성남면 용원리 ~ 목천면 남화리 9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5년 12월 11일 서울 요금소 이전 계획에 의해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1.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6년 1월 16일 서울 요금소 이전 설치를 위해 경기도 성남시 궁내동 7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6년 12월 19일 달래내고개 완속차선 설치로 인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원동 ~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3.5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7년 3월 24일 천안삼거리휴게소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남도 천안시 구성동 12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7년 10월 5일 서울 요금소를 서울특별시 강남구 원지동에서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으로 이설. 이로 인해 판교 나들목의 판교영업소 폐지 및 경부고속도로 통행요금 기산점을 판교 나들목으로 변경하고 경부고속도로 시점 ~ 판교 나들목 구간을 무료화. 1987년 11월 26일 서울만남의광장휴게소 설치를 위해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1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7년 12월 3일 회덕 분기점 ~ 남이 분기점 21.7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완료 1988년 4월 12일 추풍령휴게소 (상행) 확장을 위해 경상북도 금릉군 봉산면 광천리 4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8년 4월 20일 옥천 나들목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동 1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8년 6월 24일 구 서울 요금소 부지에 서울만남의광장휴게소 신설 개장 1988년 6월 양재 나들목 신설 개통 1988년 7월 23일 옥산휴게소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오산리 25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89년 11월 16일 경주 나들목 차선 확장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172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0년 1월 4일 수원 나들목 ~ 양재 나들목 구간 왕복 6차선 확장공사로 인해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상갈리 15.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0년 5월 12일 천안 나들목 차선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남도 천안시 신부동 646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0년 9월 1일 서대구 나들목 이설 공사로 인해 대구직할시 북구 조야동 ~ 서변동 3.246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1년 1월 3일 죽암휴게소 (하행) 신설 공사로 인해 충청남도 청원군 현도면 선동리 1.0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양산 분기점 건설 공사로 인해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읍 북부리 ~ 동면 내송리 4.33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1년 1월 31일 양재 나들목 ~ 수원 나들목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상갈리 18.53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1년 5월 13일 수원 나들목 ~ 양재 나들목 18.5km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공사 착공 1991년 6월 27일 수원 나들목 ~ 청원 나들목 구간 왕복 6~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보라리 ~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척북리 94.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1년 7월 4일 건천 나들목 건설을 위해 경상북도 경주군 건천읍 천포리 ~ 송선리 9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1년 8월 13일 남이 분기점 ~ 청원 나들목 8.3km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완료 1991년 9월 27일 남이 ~ 현도 구간 확장 및 청주 나들목 이설을 위해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 현도면 5.01~7.11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1년 10월 31일 판교 분기점 개통 1992년 2월 10일 서대구 나들목 이설로 인해 대구직할시 북구 서변동 1.4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2년 2월 13일 건천휴게소 신설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경주군 건천읍 방내리 ~ 조전리 76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2년 3월 13일 안성휴게소 신설 공사로 인해 경기도 평택시 월곡동 ~ 안성군 원곡면 반제리 1.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천안휴게소 신설 공사로 인해 충청남도 천원군 성남면 대화리 ~ 수신면 신풍리 1.4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안성 나들목 요금소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안성군 공도읍 승두리 1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2년 4월 29일 종점을 부산직할시 동래구 구서동 에서 부산직할시 금정구 구서동 으로 변경 1992년 7월 14일 수원 나들목 ~ 양재 나들목 18.5km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완료 1992년 12월 31일 반포 나들목 ~ 양재 나들목 구간 왕복 6~8차선 확장 공사로 인해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 양재동 5.16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3년 7월 7일 청원 나들목 ~ 수원 나들목 100.1km 구간 왕복 6 ~ 8차로 확장 완료 1993년 9월 2일 황간휴게소 신설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848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3년 9월 16일 옥천휴게소 (상행) 신설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매화리 505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3년 12월 27일 건천 나들목 개통 1994년 9월 17일 서초 나들목에서 신탄진 나들목까지 대한민국내 최초로 중앙버스전용차로가 지정되어서, 대중교통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1994년 10월 4일 1995년 6월까지 판교 분기점 ~ 판교 나들목 분리차선 설치로 인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 판교동 2.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4년 10월 21일 1997년 12월까지 청원 나들목 ~ 회덕 분기점 왕복 8차로 확장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죽암리 ~ 대전직할시 대덕구 신대동 14.465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4년 11월 4일 1995년 12월까지 수원 나들목 요금소 확장을 위해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상갈리 ~ 영덕리 528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5년 1월 18일 1996년 6월까지 입장휴게소 건설을 위해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 가산리 1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5년 1월 25일 1995년 12월까지 오산 나들목 요금소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오산시 원동 366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5년 2월 천안 나들목 ~ 서울 구간, 신탄진 나들목 ~ 남이 분기점 구간이 왕복 6차로에서 왕복 8차로로 확장되었다. 1995년 3월 18일 안성 나들목 요금소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승두리 7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5년 7월 11일 경산 나들목 이설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환상리 ~ 진량면 선화리 1.5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5년 9월 7일 양재 나들목 ~ 반포 나들목 5.2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완료 1995년 10월 7일 1999년 12월까지 회덕 ~ 증약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대동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15.6km 구간을 14.7km로 도로구역 변경 1996년 1월 12일 1996년 12월까지 판교 나들목 요금소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8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6년 3월 25일 1998년 12월까지 언양 나들목 이설 공사로 인해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73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6년 5월 16일 천안 나들목 요금소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남도 천안시 신부동 97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6년 7월 1일 종점을 부산직할시 금정구 구서동 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으로 변경 1996년 11월 18일 1998년 12월까지 추풍령 구간 선형개량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 1.75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8년 12월까지 부산 요금소 차선 확장 공사로 인해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 선동 845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7년 4월 24일 1998년 12월까지 수락휴게소 (상행) 설치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사정리 ~ 수락리 6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7년 6월 2일 1998년 12월까지 경주휴게소 (하행) 설치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월산리 1.1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건설교통부고시 제1997-175호, 1997년 6월 2일. 1997년 6월 3일 1998년 12월까지 옥천휴게소 (하행) 설치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매화리 1.09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7년 7월 10일 1998년 12월까지 신탄진휴게소 설치 공사로 인해 대전광역시 대덕구 상서동 1.96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7년 7월 12일 2001년 12월까지 옥천 ~ 영동 구간 선형개량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 영동군 용산면 부상리 12.7km 구간을 11.5km로 도로구역 변경 1997년 9월 4일 1998년 12월까지 김천 나들목 요금소 차선 확장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 32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8년 3월 7일 2002년 12월까지 구미 ~ 금호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42.4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8년 7월 4일 1999년 12월까지 안성 나들목 요금소 차선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승두리 ~ 진사리 360m 구간, 목천 나들목 요금소 차선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운전리 22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건설교통부고시 제1998-215호, 1998년 7월 4일. 1998년 9월 21일 2002년까지 금호 ~ 동대구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동구 신평동 18.205km 구간을 18.32km로 도로구역 변경 1998년 9월 30일 회덕 분기점 ~ 청원 나들목 14.3km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완료 1998년 12월 18일 2001년 12월까지 미호교 개량 및 왕복 6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 ~ 전읍리 1.1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9년 2월 25일 2003년 12월까지 천안 나들목 ~ 천안 분기점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남도 천안시 신부동 ~ 삼룡동 7.4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9년 3월 29일 2003년까지 비룡 ~ 옥천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 옥천읍 문정리 5.8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9년 5월 7일 2002년 12월까지 양재 나들목 개량 공사로 인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양재동 ~ 원지동 1.16km 구간을 1.36km로 도로구역 변경 1999년 6월 30일 대전 나들목 ~ 회덕 분기점 5.8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완료 1999년 9월 6일 비룡 분기점 ~ 회덕 분기점 9.5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완료 2000년 7월 14일 김천 나들목 ~ 추풍령 나들목 구간에서 추풍령 고갯길 참사가 발생하였다. 2000년 9월 5일 서울산 나들목 개통 2000년 9월 26일 2002년까지 외천교 ~ 가달동 구간 선형변경 공사로 인해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 노곡동 1.5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건설교통부고시 제2000-243호, 2000년 9월 26일. 2000년 10월 26일 2004년까지 동대구 ~ 영천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대구광역시 동구 부동 ~ 경상북도 영천시 본촌동 26.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1년 3월 16일 2005년까지 언양 ~ 부산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36.9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1년 3월 23일 2003년 12월까지 청원 나들목 개량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외천리 48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1년 8월 25일 기점과 종점을 각각 서울 → 부산에서 부산 → 서울로 변경. 2001년 9월 28일 2005년까지 김천 ~ 구미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김천시 삼락동 ~ 아포읍 송천리 15.7km 구간, 영동 ~ 김천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 ~ 김천시 삼락동 33.0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김천 분기점 개통 2001년 10월 22일 2003년 12월까지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 영동군 용산면 구간 선형개량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조령리 ~ 영동군 용산면 부상리 3.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1년 12월 6일 2002년 12월까지 안성휴게소 (하행)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평택시 월곡동 2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2년 2월 18일 2004년까지 한남 ~ 반포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한남대교남단 ~ 반포동 반포 나들목 2.4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2년 11월 25일 양재 나들목 ~ 한남대교 남단 구간이 자동차 전용도로로 지정되었다. 2002년 12월 5일 종점을 서울특별시 강남구 에서 서울특별시 서초구 로 단축. 이에 따라 양재 나들목 ~ 한남대교 구간이 고속도로 지정 해제됨. 천안 분기점 ~ 천안 나들목 6.7km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완료 2002년 12월 12일 안성 분기점 개통 2002년 12월 23일 천안 분기점 개통 2003년 3월 3일 2008년까지 경주 나들목 ~ 언양 분기점 구간 왕복 왕복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26.5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3년 4월 2일 2003년 12월까지 기흥 나들목 간이요금소 설치 공사로 인해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고매리 20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3년 4월 11일 2011년까지 영천 나들목 ~ 경주 나들목 구간 왕복 6 ~ 8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영천시 본촌동 ~ 경주시 율동 28.1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3년 8월 19일 2004년 12월까지 대전 나들목 요금소 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1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3년 10월 1일 부산 요금소 차선 확장 공사 기간을 2005년 12월로 연기 2003년 영동1터널 ~ 옥천1터널 구간 직선화 개통 2003년 12월 23일 동대구 나들목 ~ 김천 분기점 71.8km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완료, 청원휴게소 신설 개장 2003년 12월 26일 금강 휴게소 리모델링 완료, 재개장 2003년 12월 29일 부산방향 옥산휴게소가 화물휴게소로 재개장 2004년 1월 8일 2005년까지 노포 나들목 건설을 위해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36.9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4년 5월 22일 2004년 12월까지 동대구 ~ 구미 구간 확장 공사를 위해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 대구광역시 동구 신평동 60.7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4년 12월 7일 도동 분기점 개통 2005년 4월 4일 2006년 12월까지 승두교 전면 개량 공사로 인해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 승두리 1.06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5년 6월 23일 2006년 12월까지 경기도 오산시 구간 선형 개량 공사로 인해 경기도 오산시 원동 ~ 오산동 1km 구간 도로구역 결정 2005년 11월 4일 옥산휴게소 (서울방향) 폐쇄 2005년 11월 14일 구서 나들목 ~ 양산 분기점 14.51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완료, 노포 나들목 개통 2005년 11월 28일 2006년까지 김천휴게소 설치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 ~ 아포읍 봉산리 12.89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5년 12월 6일 2007년까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구간 선형 개량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 석실리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5년 12월 13일 옥천 나들목 ~ 증약 지점 5.82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완료 2005년 12월 14일 경산 나들목 ~ 동대구 나들목 9.39km 구간 왕복 8차로 확장 완료, 양산 분기점 ~ 언양 분기점 22.44km 구간 왕복 6, 8차로 확장 개통 2006년 1월 25일 중앙고속도로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민자구간 개통으로 인해 동대구 나들목이 중앙고속도로로 이설, 기존 동대구 나들목은 동대구 분기점으로 변경 2006년 3월 30일 영동 ~ 김천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 기간을 2006년으로 연기 2006년 6월 22일 2010년까지 기흥 나들목, 수원 나들목, 판교 나들목 3개소 개량 및 서울 요금소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20.9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6년 6월 28일 기흥 나들목 ~ 판교 분기점 28.7km 구간 왕복 8 ~ 10차로 확장 공사 착공 2006년 10월 27일 2008년 12월 31일까지 양재 나들목 개량 공사로 인해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 원지동 1.143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6년 11월 8일 영천 나들목 ~ 경산 나들목 16.42km 구간 왕복 6 ~ 8차로 확장 완료 2006년 12월 13일 김천 분기점 ~ 영동 나들목 47.2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완료 건설교통부공고 제2006-431호, 2006년 12월 1일. 2007년 6월 18일 2009년까지 칠곡물류 나들목 신설을 위해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1.2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7년 11월 28일 청원 분기점 개통 2008년 1월 28일 기흥이설 나들목 개통 2008년 5월 9일 기흥 ~ 판교 구간 왕복 10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영천리 ~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20.9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8년 6월 11일 판교임시 나들목 개통 2008년 7월 1일 오산 나들목에서 한남대교까지 평일 6시부터 22시까지 평일 버스전용차로 제도가 시범 실시되기 시작했다. 주말 버스전용차로는 한남대교에서 신탄진 나들목까지이며 실시시간은 평일과 동일하였다. 2008년 9월 8일 기흥이설 나들목 완전 개통 및 기흥 나들목 부산방향 진입로와 서울방향 진출로 폐쇄 2008년 10월 1일 평일 버스전용차로 제도가 전면 실시되기 시작했다. 평일 전용차로는 오산 나들목에서 한남대교남단까지이며 실시시각은 7시부터 21시까지로 변경 (2시간 감소)되었다. 주말 전용차로의 실시시각은 9시부터 21시까지로 변경되었다. 2008년 12월 8일 2011년까지 북천안 나들목 신설 공사로 인해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417.4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9년 2월 11일 2012년까지 영동 ~ 옥천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 ~ 부상리 7.06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09년 3월 10일 영동 나들목 ~ 청성 7.1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 착공 2009년 10월 29일 동탄 분기점 개통 2009년 12월 29일 칠곡물류 나들목 개통, 2012년 12월까지 동김천 나들목 신설 공사로 인해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초곡리 ~ 농소면 신촌리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0년 4월 13일 청성 ~ 동이 구간 선형개량공사가 준공됨에 따라 기존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 청성면 조천리 12.03km 구간 폐지 2010년 9월 1일 천안 나들목 ~ 양재 나들목 구간 제한속도를 최고 110km/h, 최저 50km/h 로 지정 2010년 12월 28일 도로명주소에 구서 나들목부터 한남대교까지 423.2km 구간을 경부고속도로 로 고시 2011년 1월 1일 신탄진 나들목에서 한남대교까지 주말 버스전용차로 실시시간이 기존 9시부터 21시까지에서 평일과 동일한 7시에서 21시까지로 변경 (2시간 증가)되었다. 또한 설날·추석 연휴 기간 및 그 전날의 경우 실시시간이 7시부터 익일 새벽 1시까지로 연장되었다. 2011년 8월 25일 언양휴게소 (부산방향) 폐쇄, 구 통도사 나들목 부지에 통도사휴게소 신설 개장 2011년 10월 31일 판교 분기점 ~ 양재 나들목 7.5km 구간 왕복 10차로 확장 공사 착공 2011년 12월 27일 통도사 하이패스 나들목 부산방향 진입로 개통 2011년 12월 28일 영천 나들목 ~ 언양 분기점 54.8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 및 봉계 나들목 착공 2012년 1월 4일 안성휴게소 확장 공사를 위해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반제리 17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2년 4월 16일 2016년까지 언양 ~ 영천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 경상북도 영천시 본촌동 55.03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2년 9월 25일 동김천 나들목, 북천안 나들목 개통 2013년 7월 15일 양재대로12길로의 진출로 (일명 신양재 나들목) 개통 2014년 10월 10일 2015년 12월까지 영동 ~ 옥천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 ~ 부상리 7.06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4년 11월 11일 2016년까지 통도사휴게소 확장 및 통도사 하이패스 나들목 설치를 위해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사송리 ~ 하북면 순지리 869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4년 12월 1일 청원 나들목이 남청주 나들목으로, 청원 분기점이 청주 분기점으로 명칭 변경 2015년 1월 1일 수원 나들목이 수원신갈 나들목으로 명칭 변경 2015년 3월 27일 국토교통부고시로 기점을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성동 , 종점을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으로 명시 2015년 7월 성남 분기점 부산 방향 연결 협약 체결 2015년 7월 30일 판교 분기점 ~ 양재 나들목 7.5km 구간 왕복 10차로 조기 확장 완료 2015년 9월 16일 영동 나들목 ~ 청성 7.1km 구간 왕복 6차로 임시 확장 개통 및 기존 영동터널 폐도 2015년 10월 21일 2016년 12월 31일까지 오산 나들목 진입부 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척북리 94.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5년 11월 19일 2016년까지 동천역 EX-허브 설치 공사로 인해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572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5년 12월 영동 나들목 ~ 청성 7.1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완료 2016년 1월 14일 2016년까지 옥산 하이패스 나들목 설치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오산리 ~ 덕촌리 1.6km 구간 도로구역 결정 2016년 3월 성남 분기점 부산 방향 연결로 설치 공사 착공 2016년 4월 성남 분기점 양방향 연결 협약 체결 2016년 6월 8일 영동 ~ 옥천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개통에 따라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 ~ 부상리 7.0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및 기존 4.3km 구간 폐지 2016년 7월 20일 2016년 12월 31일까지 오산 나들목 진출 우회전차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오산시 원동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6년 9월 1일 천안 나들목 ~ 양재 나들목 구간 제한속도를 최고 110km/h, 최저 50km/h 로 지정 2016년 9월 9일 통도사 하이패스 나들목 서울방향 진출로 개통 2016년 10월 19일 남사 나들목 설치 공사로 인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 ~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2.06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6년 11월 성남 분기점 서울 방향 연결로 설치 공사 착공 2016년 12월 26일 옥산 나들목 서울방향 진출입로 개통 2017년 1월 6일 남사 나들목 신설 사업 기간을 2019년 4월로 명시 2017년 2월 9일 2018년 7월까지 성남 분기점 서울 방향 연결로 설치 공사로 인해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1.3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7년 5월 4일 2017년 12월까지 판교 나들목 진출로 건설 공사로 인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438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7년 5월 16일 2021년까지 영동 ~ 옥천 구간 확장 공사로 인해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지양리 ~ 옥천읍 문정리 3.494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7년 5월 22일 2020년 6월까지 동탄2신도시 지역 직선화 공사로 인해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방교리 ~ 영천동 4.7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7년 6월 14일 활천 나들목 개통 2017년 6월 22일 옥산 나들목 부산방향 진출입로 개통 2017년 6월 28일 영천 분기점 개통 2017년 8월 23일 금강휴게소 회차시설 요금소 개통 2017년 10월 10일 2018년 12월 31일까지 오산 나들목 진입로 확장을 위해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척북리 94.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7년 12월 28일 노포 분기점 개통 2018년 1월 13일 옥산 분기점 개통 2018년 7월 12일 금토 분기점 진출로 개통 2018년 12월 12일 영천 나들목 ~ 언양 분기점 55.03km 구간 왕복 6차로 확장 개통 및 서울산 나들목 ~ 영천 나들목 구간 통행료 인상 2018년 12월 27일 금토 분기점 진입로 개통 2019년 1월 3일 2020년 12월까지 기흥 나들목 개량을 위해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2.18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19년 1월 28일 기흥 ~ 판교 구간 확장공사 당시 기흥동탄 나들목의 동탄진입 램프구간이 누락되어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영천리 ~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20.9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2020년 12월 남사 나들목 개통 예정 구간명 연장(km) 개통일 부산~대구 123 1969년 12월 29일 대구~대전 152.0 1970년 7월 7일 대전~천안 67.0 1969년 12월 10일 천안~오산 38.1 1969년 9월 2일 오산~수원 13.8 1968년 12월 30일 수원~서울 22.4 1968년 12월 21일 차로수 구간 차선 양재 나들목 ~ 판교 나들목 왕복 10차로 판교 나들목 ~ 동탄 분기점 왕복 8차로 동탄 분기점 ~ 오산 나들목 왕복 10차로 오산 나들목 ~ 천안 분기점 왕복 8차로 천안 분기점 ~ 남이 분기점 왕복 6차로 남이 분기점 ~ 청주 분기점 왕복 10차로 청주 분기점 ~ 회덕 분기점 왕복 8차로 회덕 분기점 ~ 삼양터널 왕복 6차로 삼양터널 ~ 영동1터널 왕복 4차로 영동1터널 ~ 김천 분기점 왕복 6차로 김천 분기점 ~ 경산 나들목 왕복 8차로 경산 나들목 ~ 영천 나들목 왕복 6차로 영천 나들목 ~ 언양 분기점 왕복 6차로 언양 분기점 ~ 양산 나들목 왕복 6차로 양산 나들목 ~ 양산 분기점 왕복 8차로 양산 분기점 ~ 부산기점 왕복 6차로 총 연장 416.1km 제한속도 구간 속도 양재 나들목 ~ 천안 나들목 최고 110km/h, 최저 50km/h 천안 나들목 ~ 구서 나들목 최고 100km/h, 최저 50km/h 터널 이름 소재지 길이 준공 년도 비고 경주터널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도계리 135m 1969년 서울 방면 152m 부산 방면 황간터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 624m 2006년 서울 방면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계룡리 613m 부산 방면 영동3터널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금곡리 484m 2015년 서울 방면 587m 부산 방면 영동2터널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가곡리 584m 2015년 서울 방면 654m 부산 방면 영동1터널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길현리 578m 2003년 서울 방면 618m 부산 방면 옥천4터널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 873m 2003년 서울 방면 868m 부산 방면 옥천3터널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우산리 1,593m 2003년 서울 방면 1,613m 부산 방면 옥천2터널 212m 2003년 서울 방면 210m 부산 방면 옥천1터널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조령리 690m 2003년 서울 방면 681m 부산 방면 삼양터널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서정리 361m 2005년 서울 방면 336m 부산 방면 증약터널 대전광역시 동구 신상동 755m 1999년 대전터널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812m 1999년 서울 방면 796m 부산 방면 삼평터널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250m 2010년 서울 방면 판교IC터널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281m 2010년 부산 방면 여기서 숫자는 진출입교차점 (IC 및 JC) 번호를 말하고, TG는 요금소 (Tollgate), SA는 휴게소 (Service Area)를 뜻한다. 거리의 단위는 km 이다. 중첩 구간은 번호란의 배경색을 참조. * 연한 파란색(■) 중앙고속도로 중첩 구간 * 연한 초록색(■) 당진영덕고속도로 중첩 구간 * 연한 하늘색(■) 아산청주고속도로 중첩 구간 번호 이름 로마자 이름 구간거리 누적거리 접속 노선 소재지 비고 부산기점 Busan - 0.00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국도 제7호선 (중앙대로)부산광역시도 제61호선 (중앙대로)금정로 부산광역시 금정구 서울방향 기준으로부산시점에서 구서동 만남의 광장 간 구간은자동차 전용도로의 통행제한이 시행되지 않음(금정문화회관, 동래여고에 진입하는 경우) 1 구서 Guseo 0.60 0.60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부산광역시도 제11호선 (번영로) 1-1 영락 Yeongnak 금정도서관로 부산방향 진입과 서울방향 진출만 가능영락공원 외에는 진출입 불가 TG 부산 요금소 Busan TG 본선요금소 2 노포 Nopo 4.48 5.08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국도 제7호선 (중앙대로)부산광역시도 제61호선 (중앙대로)고분로·체육공원로399번길 서울방향 진입과 부산방향 진출만 가능 2-1 노포 분기점 Nopo JC 600호선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부산방향의 경우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김해방향) 진출 불가능서울방향의 경우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부산방향) 진출 불가능 SA 양산휴게소 Yangsan SA 경상남도 양산시 서울방향 3 양산 분기점 Yangsan JC 7.76 12.84 551호선 중앙고속도로지선 4 양산 Yangsan 5.10 17.94 국도 제35호선 (양산대로) 4-1SA 통도사 하이패스통도사휴게소 Tongdosa HipassTongdosa SA 12.76 30.70 국도 제35호선 (양산대로) 부산방향하이패스 전용 나들목부산방향 진입과 서울방향 진출만 가능버스정류장 병행구 통도사 나들목 부지 5 통도사 Tongdosa 1.35 32.05 국도 제35호선 (반구대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6 서울산 W.Ulsan 6.43 38.48 국도 제35호선 (반구대로) 7 언양 분기점 Eonyang JC 1.63 40.11 16호선 울산고속도로(65호선 동해고속도로) 울산방향 진출시 동해고속도로 간접 연결 SA 언양휴게소 Eonyang SA 서울방향 8 활천 Hwalcheon 17.19 57.30 활천내와로(국도 제35호선 (반구대로)) SA 경주휴게소 Gyeongju SA 경상북도 경주시 부산방향 9 경주 Gyeongju 10.96 68.26 국도 제35호선 (반구대로·서라벌대로) SA 건천휴게소 Geoncheon SA 양방향 10 건천 Geoncheon 10.40 78.66 국도 제20호선 (건포산업로·단석로) 10-1 영천 분기점 Yeongcheon JC 301호선 상주영천고속도로 영천시 부산방향의 경우 상주영천고속도로(상주방향) 진출 불가능 11 영천 Yeongcheon 17.73 96.39 영천아이시로(국도 제4호선 (대경로))(국도 제35호선 (대경로)) SA 평사휴게소 Pyeongsa SA 경산시 부산방향 SA 경산휴게소 Gyeongsan SA 서울방향 12 경산 Gyeongsan 16.45 112.84 지방도 제919호선 (대학로)(국가지원지방도 제69호선 (다문로·대학로)) 13 동대구 분기점 E.Daegu JC 9.27 122.11 55호선 중앙고속도로 대구광역시 동구 14 도동 분기점 Dodong JC 4.08 126.19 20호선 새만금포항고속도로 16 북대구 N.Daegu 7.68 133.87 대구광역시도 제12호선 (서변남로) 북구 17 금호 분기점 Geumho JC 5.48 139.35 55호선 중앙고속도로451호선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18 칠곡물류 Chilgok Logistics Term. 10.74 150.09 국도 제4호선 (칠곡대로)금호로 경상북도 칠곡군 19 왜관 Waegwan 3.18 153.27 국도 제4호선 (칠곡대로)국가지원지방도 제79호선 (칠곡대로·호국로) SA 칠곡휴게소 Chilgok SA 양방향 20 남구미 S.Gumi 13.98 167.25 낙동강변로(국도 제33호선 (강변서로)) 구미시 구 낙동 나들목 21 구미 Gumi 5.07 172.32 지방도 제514호선 (구미대로·구미중앙로) 22 김천 분기점 Gimcheon JC 10.86 183.18 45호선 중부내륙고속도로 김천시 22-1 동김천 E.Gimcheon 8.82 192.00 국도 제3호선 (김천순환로)(국도 제59호선 (김선로·환경로)) SA 김천휴게소 Gimcheon SA 양방향 23 김천 Gimcheon 8.27 200.27 지방도 제514호선 (영남대로)(국도 제4호선 (영남대로·송설로)) 24SA 추풍령추풍령휴게소 ChupungnyeongChupungnyeong SA 12.05 212.32 봉산로(국도 제4호선 (영남대로)) 양방향 25 황간 Hwanggan 10.06 222.38 국가지원지방도 제68호선 (영동황간로) 충청북도 영동군 SA 황간휴게소 Hwanggan SA 양방향 26 영동 Yeongdong 9.89 232.27 국도 제19호선 (남부로)지방도 제514호선 (남부로·용산로) 27SA 금강금강휴게소 GeumgangGeumgang SA 16.04 248.31 금강로 옥천군 양방향 SA 옥천휴게소 Okcheon SA 양방향 28 옥천 Okcheon 11.40 259.71 동부로·중앙로 29 비룡 분기점 Biryong JC 8.67 268.38 35호선 통영대전고속도로300호선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대전광역시 동구 30 대전 Daejeon 3.56 271.94 동서대로 대덕구 31 회덕 분기점 Hoedeok JC 5.95 277.89 30호선 당진영덕고속도로251호선 호남고속도로지선 SA 신탄진휴게소 Sintanjin SA 서울방향 32 신탄진 Sintanjin 4.08 281.97 덕암로신탄진로681번길(국도 제17호선 (신탄진로)) SA 죽암휴게소 Jugam SA 충청북도 청주시 양방향 33 남청주 S.Cheongju 11.08 293.05 국가지원지방도 제96호선 (연청로)(국도 제17호선 (청남로)) 구 청원 나들목 34 청주 분기점 Cheongju JC 3.50 296.55 30호선 당진영덕고속도로 구 청원 분기점 35 남이 분기점 Nami JC 3.94 300.49 35호선 중부고속도로 부산방향의 경우 중부고속도로(하남방향) 진출 불가능 36 청주 Cheongju 4.62 305.11 국도 제36호선 (가로수로) SA36-1 옥산휴게소옥산 Oksan SAOksan 3.61 308.72 지방도 제508호선 (오송가락로) 부산방향하이패스 전용 나들목 36-2 옥산 분기점 Oksan JC 32호선 아산청주고속도로 SA 청주휴게소 Cheongju SA 서울방향, 서울시점으로 100 km 지점 SA 천안휴게소 Cheonan SA 충청남도 천안시 부산방향 37 목천 Mokcheon 21.19 329.91 삼방로·충절로 38 천안 분기점 Cheonan JC 3.53 333.44 25호선 논산천안고속도로 SA 천안삼거리휴게소 Cheonan-Samgeori SA 서울방향 39 천안 Cheonan 6.70 340.14 국도 제1호선 (삼성대로·만남로)국도 제23호선 (만남로)국가지원지방도 제23호선 (만남로·망향로) 제한속도 110km/h 시점 SA 망향휴게소 Manghyang SA 부산방향 39-1 북천안 N.Cheonan 8.36 348.50 국도 제34호선 (삼사로) SA 입장휴게소 Ipjang SA 서울방향 40 안성 Anseong 11.61 360.11 국도 제38호선 (서동대로) 경기도 안성시 구 안성평택 나들목 SA 안성휴게소 Anseong SA 부산방향 41 안성 분기점 Anseong JC 4.83 364.94 40호선 평택제천고속도로 SA 안성휴게소 Anseong SA 서울방향 42 오산 Osan 13.27 378.21 동부대로·원동로(국도 제1호선 (경기대로))(지방도 제310호선 (경기대로)) 오산시 42-1 동탄 분기점 Dongtan JC 3.89 382.10 400호선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화성시 43 기흥동탄 Giheung-Dongtan 4.39 386.49 지방도 제318호선 (삼성2로) 기흥 Giheung 0.70 387.19 지방도 제318호선 (삼성2로)(지방도 제317호선 (동탄기흥로)) 용인시 서울방향 진입과 부산방향 진출만 가능 SA 기흥휴게소 Giheung SA 부산방향 44 수원신갈 Suwon-Singal 5.09 392.28 국도 제42호선 (중부대로)국가지원지방도 제98호선 (중부대로)신수로 구 수원 나들목 45 신갈 분기점 Singal JC 2.68 394.96 50호선 영동고속도로 SA 죽전휴게소 Jukjeon SA 서울방향 TG 서울 요금소 Seoul TG 성남시 본선요금소 47 판교 Pangyo 11.98 406.94 국가지원지방도 제23호선 (대왕판교로)국가지원지방도 제57호선 (서현로) 서울방향 진출입시 요금지불서울방향 진입시 판교 분기점과 연계 48 판교 분기점 Pangyo JC 1.10 408.04 100호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부산방향의 경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진출 불가능 대왕판교 Daewang-Pangyo 0.28 408.32 달래내로국가지원지방도 제23호선 (대왕판교로) 서울방향 진입과 부산방향 진출만 가능, 진출입시 요금지불구 판교임시 나들목 48-1 금토 분기점 Geumto JC 0.98 409.30 171호선 용인서울고속도로 서울방향의 경우 용인서울고속도로(용인방향) 진출 불가능 SA 서울만남의광장휴게소 Seoul Underground Rendezvous SA 서울특별시 서초구 부산방향구 서울 요금소 부지 49 양재 Yangjae 6.75 416.05 국도 제47호선 (양재대로)경부간선도로(구 경부고속도로)서울특별시도 제41호선 (강남대로·헌릉로)양재대로12길 경부간선도로(구 경부고속도로) 직결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 선동 - 두구동 - 노포동)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 다방동 - 남부동 - 중부동 - 북부동 - 신기동 - 북정동 - 산막동 - 상북면 - 하북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 삼남면 - 언양읍 - 두동면 - 두서면)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 율동 - 광명동 - 건천읍 - 서면) - 영천시 (북안면 - 본촌동 - 금호읍 - 대창면 - 금호읍 - 대창면) - 경산시 (진량읍 - 하양읍) 대구광역시 동구 (숙천동 - 사복동 - 대림동 - 괴전동 - 동내동 - 괴전동 - 신서동 - 각산동 - 율암동 - 신평동 - 부동 - 방촌동 - 둔산동 - 검사동 - 도동 - 봉무동 - 불로동) - 북구 (검단동 - 산격동 - 서변동 - 조야동 - 노곡동 - 팔달동 - 금호동 - 사수동)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 왜관읍 - 석적읍 - 북삼읍) - 구미시 (오태동 - 임은동 - 사곡동 - 광평동 - 신평동 - 송정동 - 원평동 - 도량동 - 선기동 - 부곡동) - 김천시 (아포읍 - 남면 - 농소면 - 덕곡동 - 지좌동 - 모암동 - 신음동 - 교동 - 삼락동 - 봉산면)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 매곡면 - 황간면 - 용산면) - 옥천군 청성면 - 영동군 용산면 - 옥천군 (청성면 - 동이면 - 옥천읍 - 군북면) 대전광역시 동구 (신상동 - 세천동 - 신상동 - 비룡동) - 대덕구 (비래동 - 송촌동 - 법동 - 읍내동 - 연축동 - 신대동 - 와동 - 산서동 - 덕암동 - 목상동 - 석봉동)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 남이면) - 흥덕구 석곡동 - 서원구 남이면 - 흥덕구 (신전동 - 수의동 - 석소동 - 강내면 - 옥산면) - 청원구 오창읍 - 흥덕구 옥산면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 수신면 - 성남면 - 목천읍 - 삼룡동 - 구성동 - 원성동 - 신부동 - 안서동) - 서북구 (성거읍 - 직산읍 - 입장면)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 공도읍) - 평택시 용이동 - 안성시 원곡면 - 평택시 (월곡동 - 청룡동) - 안성시 원곡면 - 평택시 진위면 - 안성시 원곡면 - 평택시 진위면 -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 평택시 진위면 - 오산시 (고현동 - 원동 - 부산동 - 오산동 - 부산동) - 화성시 (방교동 - 오산동 - 영천동) -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 공세동 - 보라동 - 하갈동 - 보라동 - 상갈동 - 신갈동 - 보정동 - 마북동 - 보정동) - 수지구 (죽전동 - 동천동) -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 동원동 - 금곡동 - 궁내동 - 백현동 - 삼평동) - 수정구 (금토동 - 상적동) 서울특별시 서초구 (신원동 - 원지동 - 양재동) 2009년의 교통량 정보는 다음과 같다. 구간 거리(km) 평균 통행량 (대/일) 12시간 24시간 구서 ~ 언양 40.0 43,934 58,852 언양 ~ 동대구 82.2 30,842 42,905 동대구 ~ 금호 17.3 80,110 118,495 금호 ~ 김천 43.9 55,552 86,345 김천 ~ 회덕 94.8 22,949 36,376 회덕 ~ 남이 22.6 69,491 103,187 남이 ~ 천안 32.9 55,362 79,993 천안 ~ 안성 31.5 91,418 126,835 안성 ~ 신갈 30.0 98,519 138,298 신갈 ~ 양재 21.0 115,567 175,044 최고 통행량 지점은 수원신갈 나들목부터 신갈 분기점까지의 2.5km 구간으로, 24시간에 189,828대 (10개 차로, 차로당으로 환산하면 18,983대/차로)가 통과한다. 차로당 최고 통행량 지점은 신갈 분기점부터 판교 분기점까지 13.0km 구간으로 24시간당 차로당 23,038대 ((판교에서 서울 요금소까지는 서울 방향 5차로, 부산 방향 8차로, 이후 구간은 왕복 10차로), 총 184,310대)가 통과한다.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은 고속도로 중의 하나지만, 대체 도로 등이 계속 개통되면서 2005년부터는 대체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안성 휴게소 ~ 오산 나들목 (서울 방향 6.2km 구간, 2014년 2월 17일부터 시행) 경산 나들목 ~ 동대구 분기점 (양 방향 6km 구간, 2015년 8월 말부터 시행) 신탄진 나들목 ~ 죽암 휴게소 ~ 남청주 나들목 (서울 방향 8.4km 구간, 2016년 1월부터 시행) 금강 나들목 ~ 영동 나들목 (부산 방향 14km 구간) 영천 분기점 ~ 건천 나들목 (부산 방향 8.2km 구간, 제한속도 100km/h) 언양휴게소 ~ 활천 나들목 (서울,대구방향 12.3km 구간, 제한속도 100km/h) Expresway - Seoul TG.jpg|서울 요금소(요금소표지판 개정전) Tunnel.jpg|대전 터널 (서울 방향) out for Daejeon IC (to Seoul).jpg|대전 나들목 진출로 (서울 방향) Junction on Gyeongbu Expressway to Seoul.jpg|비룡 분기점 (서울 방향) out sign for Biryong Junction.jpg|비룡 분기점 안내 표지판 (서울 방향) IC.JPG|부산 시점 과거 양재 나들목 ~ 한남대교 구간은 경부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이었으나, 2002년에 이 구간의 관리권이 한국도로공사에서 서울특별시로 이양되면서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어 일반 자동차 전용도로가 되었다. 때문에 이 구간은 고속국도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현재는 양재 나들목이 고속국도 제1호선 경부고속도로의 종점이다. 그러나 도로명 주소상 정식 도로명은 여전히 경부고속도로이며, 교통방송 등에서는 아직도 경부고속도로 라고 하거나 혹은 “시구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경부고속도로와 이어지는 만큼 이 구간도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 도로는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기 직전인 2002년 11월 25일자로 전 구간이 자동차 전용도로로 지정되었다. 때문에 보행자, 자전거 등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륜자동차(모터사이클 혹은 오토바이)는 긴급자동차(싸이카 및 소방용 모터사이클 등)에 한해 통행이 가능하며, 그 밖의 이륜자동차는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당국에서는 경부고속도로라는 이름과 함께 2006년 1월부터 경부간선도로 로 칭하고 있다. 아래 표에서, 구간 거리는 2002년 도로현황조서를 바탕으로 하였다. 종류 이름 로마자 이름 구간거리 누적거리 접속 노선 소재지 비고 경부고속도로 직결 IC 양재 Yangjae - 0.00 경부고속도로국도 제47호선 (양재대로)양재대로12길서울특별시도 제41호선 (헌릉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IC 서초 Seocho 2.56 2.56 서울특별시도 제92호선 (남부순환로) 한남방향 진입로 폐쇄 IC 반포 Banpo 2.28 4.84 사평대로 양재방향 진입과 한남방향 진출만 가능 IC 잠원 Jamwon 0.74 5.58 신반포로 한남방향 진출입로 없음 JC 한남대교분기점 Hannamdaegyo Br. 1.28 6.86 한남대교서울특별시도 제41호선 (강남대로)서울특별시도 제88호선 (올림픽대로)압구정로·잠원로 강남구 본래는 잠원 나들목의 일부 강남대로 직결 서울특별시 * 서초구 - 강남구 전 구간 최고 80km/h, 최저 50km/h 구 경부고속도로 대전육교 1990년대 대대적으로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대전 ~ 대구 구간의 선형 개량 및 일부 확장 공사로 인해 대전 ~ 영동 구간에는 옛 경부고속도로 구간들이 많이 남아있으며, 대전광역시와 옥천군 구간에 있는 도로들은 일반도로로 활용 중이다. 구 경부고속도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대전육교 - 현재 방치되어 있다. 신상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가양비래공원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 대전터널을 포함한다. 옥천 나들목 진입로 일부 금강로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 옥천군 청성면) - 구 옥천터널을 포함하며, 일부는 한쪽 도로만을 활용 중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의 방치된 4차선 도로 -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옆으로 잠깐 4차선 도로의 흔적이 보인다. 구 영동터널 ~ 영동 나들목 - 최근까지 쓰였던 구간으로 2015년 9월 폐도되었다.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 중앙고속도로 통영대전고속도로 당진영덕고속도로 아산청주고속도로 네이버 캐스트 여행 -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영상보기 분류:대한민국의 고속도로 분류:서울특별시의 도로 분류:경기도의 도로 분류:충청남도의 도로 분류:충청북도의 도로 분류:대전광역시의 도로 분류:경상북도의 도로 분류:대구광역시의 도로 분류:울산광역시의 도로 분류:경상남도의 도로 분류:부산광역시의 도로 분류: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 분류:부산 금정구의 교통 분류:양산시의 교통 분류:울주군의 교통 분류:경주시의 교통 분류:영천시의 교통 분류:경산시의 교통 분류:대구 동구의 교통 분류:대구 북구의 교통 분류:달성군의 교통 분류:칠곡군의 교통 분류:구미시의 교통 분류:김천시의 교통 분류:영동군의 교통 분류:옥천군의 교통 분류:대전 동구의 교통 분류:대전 대덕구의 교통 분류:청주시의 교통 분류:천안시의 교통 분류:안성시의 교통 분류:평택시의 교통 분류:오산시의 교통 분류:화성시의 교통 분류:용인시의 교통 분류:성남시의 교통 분류:서울 서초구의 교통
코난 (Conan)은 켈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코난 1세 코난 2세 코난 3세 코난 4세 아서 코난 도일 은 영국의 추리소설가이다. KONAN 은 일본 아이돌 그룹 SDN48의 멤버이다. 코난 (Konnan)은 프로레슬링 선수였다. 주로 WCW에서 활동했다. 코넌 오브라이언 은 미국의 텔레비전 진행자이다. 코난 (본명 안영민)은 싱어송라이터 그룹 로코베리의 멤버이자, 대한민국의 작곡가이다. 코넌 스티븐스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이자 전직 프로레슬링 선수 코난 은 로버트 하워드가 연재한 시리즈물의 주인공이며, 이 작품을 소재로 해서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으로 촬영된 영화의 제목이다. 코난은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 미래소년 코난 》의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다. 에도가와 코난 은 만화 시리즈 《 명탐정 코난 》의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다. 코난은 TBS에서 방영하는 코미디 토크 쇼 이다.
울릉군 (鬱陵郡)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동해상의 군이다. 동해상의 울릉도 본도와 독도, 죽도, 관음도 등 44개 부속섬으로 이루어진다. 울릉도는 해안선 길이 64.43 km의 화산암 지역으로, 섬의 중앙부에는 성인봉(984 m)이 솟아 있고, 칼데라 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나리분지가 있다. 주상절리, 기암괴석, 용출수, 원시림 등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39종의 특산식물과 6종의 식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드문 해양성 기후로 일교차가 작고, 눈이 많이 내린다. 특산물로는 오징어, 호박엿, 산나물, 울릉약소 등이 유명하다. 군청 소재지는 울릉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2면이다.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 또는 철기시대 전기 (기원전 300년~1년)에 울릉도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현포, 남서, 저동리) ~ 512년 우산국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 930년 고려 태조 13년 조공한 우릉도(芋陵島) 주민에게 작위를 하사했다. 1018년 고려 현종 9년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농업을 폐하게 되어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구를 하사하였다. 1032년 고려 덕종 원년 우릉성주가 아들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1157년 고려 의종 11년 우릉도 주민을 이주시킬 계획으로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을 보내 조사케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1379년 고려 우왕 15년 왜구가 무릉도(武陵島) 주민들을 본토로 귀환하도록 하였다. 1417년 조선 태종 17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귀환시켰다. 1614년 조선 광해군 6년 대마도주에게 울릉도(鬱陵島)에 왜인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를 보냈다. 1693년 숙종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사이 외교분쟁 발생. (안용복 1차 도일) 1694년 숙종 20년 삼척첨사 장한상 울릉도 수토 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2차 도일 일본 백기주(伯耆州) 태수와 담판,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일본인의 출어,벌채금지서계 조선에 전달) 1882년 고종 19년 이규원 검찰사 울릉도 검찰, 울릉도 개척령 반포, 전석규 도장에 임명. (수토정책 철훼) 1883년 울릉도 주민 이주 시작(16호 54명) 1895년 고종 32년 삼척영장 겸임 도장제에서 전임도장을 임명하고 도장을 도감으로 개칭. 1900년 대한제국 광무 4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편하면서 강원도에 편입하고 행정구역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누었다. 도감을 군수로 개칭. 1903년 대한제국 광무 7년 군청 소재지가 태하에서 도동리로 이전되었다. 1906년 광무 10년 울도군을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이속하였다. 남면 일부(남양동, 석문동, 통구미동, 남서동, 구암동) 및 북면 일부(태하동, 학포동)에 서면을 신설. (3면) 1914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이속 1915년 경상북도 울릉도로 개편하였다. 1949년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개편하였다. 1950년에는 한국 전쟁 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일시적으로 점령하였다가 다시 대한민국이 수복하였다.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2면) 2000년 울릉읍 도동리 일부를 독도리로 분리하였다. 울릉도는 동해의 해저에서 분출한 마그마가 굳어서 형성된 화산섬이다. 울릉도는 형성된 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화산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화산체의 약 2/3는 바다에 잠겨 있으며 해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은 경사가 급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는 칼데라 분지인 나리 분지가 있으며 나리 분지 내에는 알봉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이중 화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며 해상에서는 특이하고 독특한 울릉도의 지형이 관찰된다. 섬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 지대이다.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 부근 지역의 기후는 난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기후를 띠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약 12℃이며 가장 더운 달인 8월의 기온도 24℃를 넘지 않아서 여름에도 시원한 편이다. 연중 85%가 흐리거나 눈비가 내려 비교적 습한 지역이다. 그리고 가장 추운 달인 1월의 평균기온은 1.0℃로 온난한 편이다. 울릉도 주변 지역은 안개가 많고 연중 흐린 날이 160일 이상이며, 비가 내리는 날은 150일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 정도이다. 겨울철 강수는 대부분 눈이 쌓인 적설의 형태이며, 폭설이 자주 내린다. 울릉도의 바람은 서풍과 남풍계열이 출현빈도가 높으며 연간 평균풍속은 4.3㎧이다. 울릉군의 행정 구역은 1읍, 2면, 1출장소가 설치되어 있고, 면적은 73.33 km²이다. 울릉군 홈페이지는 울릉군의 면적을 72.86 km²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이는 울릉도만의 면적이다. 여기에 독도 등 울릉도의 부속 도서들의 면적을 합한 것이 울릉군의 면적이다.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9,975 명, 5,435 가구이고, 전체 인구의 70.5%가 울릉읍에 거주하고 있다. 남녀의 성비는 1.20:1로 남초 현상이 심한데, 성비 불균형이 인천광역시 옹진군(1.31:1)과 강원도 화천군(1.22:1) 다음으로 심각하다. 울릉군의 인구는 1974년에 2만9810 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후 계속 감소하여 2000년대 이후로는 1만 명 내외에서 정체된 상태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기초지방자치단체이다. 읍·면 한자 면적(km²) 인구 세대 360px 울릉읍 鬱陵邑 21.79 7,036 3,794 서면 西面 27.19 1,474 798 북면 北面 24.34 1,465 843 총계 73.33 9,975 5,435 울릉도 울릉군의 본도(本島)이며, 면적은 72.86 km²이다. 독도 대한민국의 최동단(울릉읍이다. 지하에 가스하이드레이트가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독도리)이며, 면적은 0.187 km²(187,554 m²)이다. 죽도 울릉읍 저동리에 속하며, 면적은 0.208 km²이다. 관음도 북면 천부리에 속하며, 면적은 0.071 km²이다. 울릉군의 연도별 인구 추이 연도 총인구 1960년 17,910명 1966년 22,016명 1970년 23,000명 1975년 29,479명 1980년 18,960명 1985년 17,281명 1990년 15,283명 1995년 11,306명 2000년 10,150명 2005년 8,331명 2010년 7,764명 2015년 82,770명 울릉군의 대표 관광지 독도 독도 독도는 울릉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천연기념물 제 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독섬으로 한자화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전한다. 독도는 해저 약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화산섬으로, 대략 460만 년 전부터 약 250만 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울릉도(약250만 년 전)보다 약 200만 년, 제주도(약120만 년 전)보다는 약 340만 년 앞서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거친 바람과 파도에 꺾이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풍혈 풍혈 (風穴)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냉기가 나오는 곳으로, 봉래폭포를 찾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 중 하나이다. 땅 밑을 흐르는 지하수의 찬공기가 바위틈으로 흘러나와 항상 섭씨 4℃를 유지하기 때문에, 여름철 온도가 24℃ 이상 올라갈 때는 찬공기로 느껴지며, 겨울철 대기 온도가 영하로 내려갈 때는 오히려 따듯한 느낌을 준다. 행남산책로 - 도동부두 왼쪽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이다. 자연동굴과 골짜기를 잇는 교량 사이로 펼쳐지는 해안비경을 볼 수 있다. 여객선은 울릉도를 접근하는 가장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 다음과 같은 곳에서 울릉도 저동항에 여객선을 타고 접근할 수 있다. 묵호여객터미널 * 대아고속여객선 (썬플라워호, 오션플라워호, 씨플라워호) 울진후포항 여객터미널 * 동해해상해운 포항여객터미널 강릉항여객선터미널 차량 및 화물승선은 포항에서만 가능하며, 울릉도는 LPG충전소가 없으므로 LPG 차량은 입항이 되지 않는다. 울릉도 도동항에서 독도를 운항하는 것은 오션플라워호와 씨플라워호 그리고 삼봉호, 씨스타호가 있으며, 정기 운행은 되지 않는다. 울릉군에서 운행하는 농어촌버스 노선은 총 4개이며 운영업체로는 무릉교통이 유일하다. 대부분 중형차량이나 소형차량으로만 운행한다. 울릉도 전체를 일주하는 울릉도 일주도로가 있으며, 울릉도 가두봉 인근의 바다를 매립하여 1800미터급 활주로를 건설한뒤, 공항을 건설하여 향후 제트기가 취항할 수 있도록 하는 가칭 울릉공항 건설 계획이 추진중이지만, 바다가 오염된다는 의견도 있다. 독도는 우리 땅 (2절 가사에 울릉군 이 들어가 있음) 울릉군 보건의료원 http://www.ulleung.go.kr/health/ 진료과목 연락처 비고 내과 054-790-6896 내과2 054-790-6902 피부과 054-790-6904 소아청소년과 054-790-6904 안과 054-790-6902 산부인과 054-790-6908 정형외과 054-790-6910 이비인후과 054-790-6918 치과 054-790-6916 한방과 054-790-6918 보건지소 연락처 주소 서면보건지소 054-790-6851 서면 남양1길 30 북면보건지소 054-790-6861 북면 천부1길 25 한의원 연락처 주소 선린한의원 054-791-1275 울릉읍봉래길63 강남한의원 054-791-7585 울릉읍도동길193 울릉군 보건의료원 http://www.ulleung.go.kr/health/ 울릉군 농업기술센터 http://www.ulleung.go.kr/ula 울릉군 상하수도사업소 독도관리사무소http://ulleung.go.kr/mdokdo/ 독도박물관http://dokdomuseum.ulleung.go.kr/ 시설관리사업소 KT 울릉지사 국민연금공단 울릉상담센터 국민건강보험공단 울릉출장소 LX한국국토정보공사 울릉지사 NH농협은행 울릉군지부 새마을금고 수협 울릉농협 울릉교육지원청 http://www.kbuled.go.kr 학교명 주소 학급수 울릉고등학교 울릉읍 울릉순환로 236 8학급 학교명 주소 학급수 울릉중학교 울릉읍 도동길151-19 3학급 울릉서중학교 서면 남서길 52 3학급 울릉북중학교 북면 천부길 74-7 3학급 우산중학교 울릉읍 저동길 54 3학급 학교명 주소 학급수 울릉초등학교 울릉읍 도동길172 6학급 남양초등학교 서면 남양1길 58 5학급 저동초등학교 울릉읍 봉래길128-3 6학급 천부초등학교 북면 천부길 95-3 4학급 천부초등학교현포분교 북면 현포1길 38 3학급 학교명 주소 학급수 울릉초등학교병설유치원 울릉읍 도동길172 1학급 남양초등학교병설유치원 서면 남양1길 58 1학급 천부초등학교병설유치원 북면 천부길95-3 1학급 현포분교 병설유치원 북면 현포1길 38 1학급 저동초등학교병설유치원 울릉읍 봉래길128-3 1학급 도동유치원(사립) 울릉읍 행남길 9 2학급 울릉군에는 기상 등의 문제로 인해 정시에 시험지가 발부 및 회수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울릉군에서는 자격 시혐 등 국가공인시험 중 필기 부문이 치루어지지 않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험장이 없어 울릉도 학생들은 포항 등 외지로 나가서 수능을 본다. 다만 통신의 발달로 인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수험장이 설치될 가능성도 대두되었으나, 2018년 수험생과 학부모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수시 대비 등의 이유로 80%가 군내의 수능 시험장 설치를 반대했다. 경기도 안양시 경상북도 포항시 부산광역시 수영구 강원도 삼척시 경기도 성남시 경기도 구리시 울릉군청 (공식) 분류:경상북도의 군 분류:1949년 설치 분류:대한민국의 항구 도시 분류:동해
울릉도 (鬱陵島)는 경상북도 울릉군의 본도(本島)로, 대한민국에서 9번째로 넓은 섬이다. 면적은 72.86 km²이고,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약 1만 명이다. 포항항에서 뱃길로 270km, 독도에서 87.4 km 떨어져 있다.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으로 울릉도에서 130.3 km 떨어져 있다. 울릉도는 육지에서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울릉도는 생화산이다. "울릉도" 현포, 남서, 저동리에서는 고인돌, 무문토기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어 당시에도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시대에 우산국이 있었는데, 512년(지증왕 13년) 6월 하슬라주의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 이후 고려 때까지 조공 관계가 계속되다가 11세기 초에 여진으로부터 침구(侵寇)를 받은 우산국 사람들이 본토로 도망오고부터 울릉도는 고려의 직할 구역이 되었다. 1407년(태종 7년) 3월 쓰시마 도주는 사신을 파견해 토산물을 헌납하고 납치해 간 포로를 송환하면서 울릉도에 쓰시마 사람을 이주시키어 살게 해서 쓰시마 도주가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원했으나, 조선 태종은 이를 거절했다. 조선 초기 왜구의 노략과 탈세를 막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1416년(태종 16년) 조정은 섬의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공도 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울릉도(당시 이름 무릉도)의 주민 3명을 이주시킨 후 여러 차례 무릉도 일대의 주민을 조선 본토로 이주시켰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이 들어가본 일이 있으나 역시 왜의 분탕질을 당하여 정착하지 못하였다. 근자에 들으니 왜노가 기죽도를 점거했다 하는데, 기죽도라고 혹 말하는 것은 곧 울릉도이다.” 조선 세종 때에 도망한 사람들을 벌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에 속하며,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으며,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 있고,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불렀다 고 기록되었다. 1614년(광해군 6년) 6월 쓰시마 도주는 서계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울릉도를 둘러봐야 하니 길안내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조정은 이를 거절하고 경상감사와 동래부사에게 울릉도의 일본인 왕래를 금지하도록 지시했다. 1618년 도쿠가와 막부는 오타니 집안과 무라카와 집안에게 울릉도 도해 면허를 내어 줬다. 그 집안 사람은 울릉도와 일본을 왔다 가며 조업했다. 1692년 3월 무라카와 집안이 울릉도로 갔을 때 조선 사람들이 무라카와의 도구로 전복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조선인에게 나가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본 사람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막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막부는 “저쪽이 잘못을 깨닫고 철수할 것이다”라는 답변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후 안용복 문제 등 충돌이 생기고 나서 막부도 1696년 일본인에게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다. 1787년 프랑스의 라페루즈 탐험대는 울릉도를 최초로 실측하여 다줄레(Dagelet) 라는 명칭으로 지도에 포함시켰다. 고종 21년(1884년), 임금의 명에 따라 울릉도를 개척한 후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어 현대에 이른다. 울릉도는 독도와 함께 신생대 제3기에서 제4기 사이에 해저로부터 솟아난 해산(海山)이며, 섬 부분은 산의 봉우리 부근이다. 섬 중앙에는 성인봉이 있다. 섬의 북부에는 유일한 평지인 나리 분지가 있다. 울릉군은 주도인 울릉도 외에도 부속도인 관음도 · 죽도 및 여러 개의 암도를 동반하고 있다. 신생대 제3기와 제4기에 있었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종상화산의 정상부로, 조면암·안산암·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군으로는 너도밤나무·섬잣나무·솔송나무 등 650여 종이, 동물군으로는 흑비둘기 등 50여 종의 조류, 340여 종의 곤충류가 서식하고 있다. 2002년 경상북도는 환경부에 ‘울릉도·독도 해상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백두화산맥이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동해상에 울릉도를 솟게 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동남해상에 독도를 비롯한 많은 화산을 분출시켰다. 울릉도 중앙부에는 주봉인 성인봉(984m)이 솟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미륵산(901m)·초봉(608m)·형제봉(712m)·향목령(297m), 동쪽으로는 관모봉(586m)·망향봉(317m) 등이 잇따라 있어 지붕을 이룬다. 성인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가두봉(194m), 동북으로 두루봉에 이르는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고, 산맥 사이에는 깊은 침식곡이 발달하여 자연적인 행정 경계를 이룬다. 섬의 북서부 사면에 있는 나리분지는 동남부·서남부가 높이 500m 안팎의 단애에 둘러싸이고 북부가 200m 이하의 낮은 산지로 막혀 있는 울릉도의 유일한 평야이다. 이 분지는 성인봉의 칼데라 화구가 삼각형 모양으로 함몰해 형성된 것이다. 그 화구에는 2차로 분출된 화산이 중앙화구인 알봉538m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이중화산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성인봉을 비롯한 동남부와 서남부의 높은 단애들은 이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한다. 울릉군의 근해는 동한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조경수역이므로 회유성 어족이 모여들어 좋은 어장을 이룬다. 그러나 길이 56.5km의 해안선은 대부분 단조롭고 높은 절벽을 이루며, 특히 서남과 동남 해안은 90m 높이의 절벽으로 천연의 양항 발달이 어렵다. 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연 평균 강수량이 1383mm 정도이며, 연 평균 기온은 12.4℃, 8월 평균 기온은 23.6℃, 1월 평균 기온은 1.4℃이다. 연 평균 풍속은 4.0m/s로 동해상에 고기압이 발달하는 늦봄과 장마전선이 형성되는 초여름에 북동풍이 우세하고,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주로 발생한다. 특히 울릉도는 대한민국의 다설지역으로 연 평균 강설 일수가 57.8일이다. 울릉도의 동남쪽에 9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독도는 대한민국의 최동단에 위치한 외딴 섬으로, 독도는 동도와 서도를 중심으로 가재바위·구멍바위·지네바위 등의 34개의 돌섬과 암초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도에는 화산 분화구가 있고 절벽이 솟아 있어 배를 대기가 어렵다. 이 곳에는 독도를 지키는 경비대 외에 상주 주민이 없다. 독도는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나 군사, 해양자원 관리, 해양 운항 등 다방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고인돌 - 남서리, 저동리 고분군 - 현포리 (38기), 천부리 (3기), 남서리 (37기), 남양리 (2기), 태하리 (2기), 사리 (1기) 1938년 울릉도기상대는 울릉도 내륙의 해발고도 220m에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 울릉도 울릉읍 사동항 일원에 2014년부터 향후 5년간 4,932억원을 투입하여 활주로 길이 1.5km, 폭 30m 규모의 활주로 2개와 계류장과 해군항공기지등을 함께 건설하여 운용하게 될 공항이다. 울릉공항이 건설되면 수도권에서 울릉도까지 배로 8시간 걸리던 것이 비행기로 2시간 이내로 단축될 전망이다. 일주 도로는 울릉도 둘레를 도는 도로로 길이는 약 52.4 km이다. 아직 4.4 km 구간이 끊어져 있는 상태이다. 크고 작은 터널이 13개 있다. 구간 내수전 - 저동항 - 울릉터널(길이 340m) 또는 울릉대교(길이 65m) - 가두봉터널(길이 35m) - (통구미터널(길이 150m) - 남통터널(길이 260m) - 남양터널(길이 375m)) - 남양피암터널(길이 35m) - 남서터널(길이 15m) - 구암터널(길이 50m) - 사태감터널(길이 165m) - 곰바위터널(길이 60m) - 수층교(길이 135m) - 수층터널(길이 360m) - 삼막터널(길이 460m) - 태하터널(길이 280m) - 현포령(풍력발전기 1기) - 천부 - 관선터널(길이 65m) - 섬목. 외과의사 봉달희 - 울릉도에서 촬영을 진행한 부분이 있음. 독도는 우리 땅 - 1절 가사에 울릉도 가 들어가 있음. 울릉도 트위스트 - 이시스터즈 노래 가요로는 1966년 발표된 〈울릉도 트위스트〉가 있다. 독도 경상북도 한국의 섬 울릉공항 김부식, 《삼국사기》, 고려 중기. 일연, 《삼국유사》, 고려 말. 《조선왕조실록》 고영구 외, 《잃어버린 30억년을 찾아서》,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3년. 「울릉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울릉도고분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울릉군 홈페이지 신용하, 「명칭으로 본 울릉도와 독도의 주인 」, 《동아닷컴》, 2007.5.11. 분류:울릉군의 섬 분류:한국의 화산 분류:성층 화산 분류:화산섬 분류:칼데라 화산 분류:활화산 분류:지수 6 화산 분류:동해의 섬
Otricoli Pio-Clementino Inv257.jpg|섬네일|upright|오트리콜리에서 발견된 제우스 흉상(바티칸,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 원형 전시관) 그리스 신화 (-神話)는 고대 그리스의 신과 영웅, 우주관, 그리고 그리스 고유의 종교 의례와 의식 행위의 기원 및 의미에 대한 신화와 전설을 말한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신화를 토대로 한 연구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정치 제도를 파악하고, 이러한 요소들이 신화로 만들어지게 된 생성 원리를 탐구한다. 그리스 신화는 여러 이야기 모음집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도기 그림이나 봉헌물과 같은 구상 예술 작품에서도 내재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는 세계의 기원과 신, 여신, 영웅과 같은 다양한 인물의 삶과 모험, 전설의 생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비 전승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오늘날에는 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 문학의 근원은 트로이아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호메로스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었던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쓴 두 서사시 《신통기》, 《노동과 나날》에서 세계의 기원, 신들의 왕과 인간 시대의 변천, 인간이 겪는 불행과 제물 의식의 기원을 설명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서사시권에서 서사시의 일부인 호메로스 찬가, 서정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품, 고전학자의 문서와 헬레니즘 시대의 시, 플루타르코스와 파우사니아스와 같은 로마 제국 시대의 저술가가 쓴 원문으로도 이어져 왔다.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드러난 여러 유물의 장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신과 영웅들은 그리스 신화의 설명에 주요한 출처가 된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경에 만들어진 기하학적 모양의 도자기에는 트로이아권과 헤라클레스의 모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호메로스 시가와 다양한 신화적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 작품을 보충 설명하는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명의 문화, 예술,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서양의 문화 유산과 언어 일부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시인과 예술가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신화의 주제가 동시대에 갖는 의미 및 관련성을 찾기도 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오늘날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900년부터 800년까지에 이르는 기하학 시대의 시각 매체에서 묘사되기도 하였다. 문학적, 고고학적 근원은 때때로 중간 단계에서 서로에게 협력하거나 충돌이 있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자료 집대성의 존재는 그리스 신화 요소들이 사실에 입각한 역사적인 뿌리를 갖게 되는 강력한 지표가 되었다. 신화적 서술로 쓰여진 연극은 대부분의 그리스 문학 장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리스 고대에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총체적인 신화 해설집은 동명의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가 유일하다. 이 신화 해설집은 시인들의 상반된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고대 그리스 신화와 영웅 전설을 간명하고 빠짐없이 요약하였다. 아테네의 아폴로도로스는 신화를 주제로 많은 글을 쓴 기원전 180~120년 경의 인물이다. 《비블리오테케》가 쓰여진 시대는 그가 죽은 지 훨씬 후인 2세기 경이기 때문에, 현재는 동명이인인 저자가 쓴 서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래의 아폴로도로스는 이 신화 해설집의 초안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Moreau Prometheus.jpg|섬네일|upright|《프로메테우스》(1868년 귀스타브 모로 작).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헤시오도스가 문헌에서 처음 알린 것으로,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3부작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풀린 프로메테우스》, 《불을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의 바탕이 되었다. 가장 초기의 문학 근원 중에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서사시권"으로 이루어진 다른 서사시들도 있었으나, 이러한 후기의 소규모 서사시들은 대부분이 모두 소실되었다. 호메로스 찬가라는 이름으로 전승된 시들은,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이 합창 찬가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대 초기에 등장한 것이다. 호메로스와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저서 《신통기》(신의 기원)에서 세계의 창조를 다룬 초기 그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신의 기원인 티탄과 기간테스뿐만 아니라 복잡한 가계도와 민간 설화, 기원 신화까지 자세하고 충실하게 설명하였다. 헤시오도스의 또 다른 저서 《노동과 나날》은 농경 생활에 대한 교훈 서사시로,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신화, 다섯 시대 설화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위험한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신들로 인해 세상이 더 위험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서정시는 신화에서 그 주제를 가져올 때도 있었으나, 표현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서사가 아닌 암시를 많이 썼다. 핀다로스, 바킬리데스, 시모니데스와 같은 서정 시인들과 테오크리토스, 비온과 같은 목가 시인들은 각각의 신화적 사건을 서로 연관지어 표현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화는 고전 아테네 연극의 중심 소재이기도 했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의 줄거리에 트로이아 전쟁과 영웅 시대의 신화를 차용하였다. 여러가지 비극적인 줄거리(아가멤논과 그의 자녀, 오이디푸스, 이아손, 메데이아 등)의 전형적인 형태는 이러한 비극에서 잘 드러나 있다. 희곡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 또한 자신의 작품 《새》, 《개구리》에서 신화를 차용하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 스트라보는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글로써 기록하였는데, 이 이야기들은 수많은 지역 신화와 전설, 그리고 같은 이야기의 많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들은 다양한 구전 신화를 연구하였으며, 그리스와 동방 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역사적이거나 신화적인 근원을 찾았다. 또한, 신화의 기원과 다른 문화적 개념을 혼합하여 융화시키고자 하였다.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 시는 숭배 행위라기보다는 문학적인 목적으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다른 경우였다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중요한 많은 세부 설명들이 포함될 수 있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 스타티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 세르비우스의 논평. # 고대 후기 시대의 그리스 시인 논노스, 안토니노스 리베랄리스, 코인토스 스미르나이오스 #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시인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칼리마코스, 동명의 에라토스테네스, 파르테니오스. 신화를 언급하는 같은 시대의 산문 작가로는 아풀레이우스와 페트로니우스, 롤리아누스, 헬리오도로스 등이 있다. 동명의 히기누스가 로마 작가 양식으로 쓴 《파불라에》(Fabulae)와 《아스트로노미카》(Astronomica)는 신화를 시적인 표현 없이 개요로 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필로스트라투스 3세와 4세의 《이매진》(Imagines), 칼리스트라토스의 《디스크립션》(Descriptions) 또한 작품의 주제에 신화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서술 양식에 대한 유용한 근거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사례는 비잔티움의 그리스 작가로, 상당수가 신화에 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설명을 남겼는데, 지금은 소실된 초기 그리스 작품이 유래가 된 것도 많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화를 보존한 사람은 아르노비우스, 《수이다스》의 저자, 헤시키우스, 요한 트제트제스, 에우스타티오스 등이 있다. 이들은 대개 기독교적 도덕관의 시각에서 신화를 다루었다. 원고 《베르길리우스 로마노스》에 묘사된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 자신의 저작에서 그리스 신화에 대한 많은 설명을 남겼다. 19세기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미케네 문명 발견과 20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경의 크레타 미노아 문명의 발견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해 남아있던 많은 의문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신과 영웅에 대한 많은 신화적 설명의 고고학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미케네와 미노아 지역의 신화 및 의식에 대한 증거는 모두 기념적인 것에 불과하였는데, 예를 들어서 선형문자 B 기록(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 문자)은 신과 영웅에 대한 이름이 애매하게 나타나 있기는 하였지만, 주로 농산물의 수확과 재산, 상품 목록을 작성하는 용도로 쓰였다. 기원전 8세기의 도자기에 새겨진 기하학 디자인은 헤라클레스의 모험뿐만 아니라 트로이아 연대기의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신화의 시각적 묘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많은 그리스 신화가 문학적 근원보다 항아리 묘사에서 일찍 등장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헤라클레스의 12업은 케르베로스를 생포하는 모험만이 동시대의 문헌에서 등장한다. 또한, 시각적인 근원은 때때로 현존하는 문학적 근원에서 등장하지 않는 신화, 또는 신화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어떤 경우에는, 기하학 양식에서 처음 묘사된 신화로 알려진 것이 몇 세기가 지난 후에야 고대 서사시에서 처음 언급되기도 한다. 이후 고대(c. 750–c. 500 BC)와 고전(c. 480–323 BC), 헬레니즘(323–146 BC) 시대에 등장한 호메로스풍을 비롯한 다양한 신화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적 증거를 보충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그녀의 유모로 보이는 하인, 기원전 60-20년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그리스 신화는 시간이 경과할 수록 문화의 발전에 적응하고 변화해왔으며, 이러한 변화에는 전체적인 것과 더불어 무언의 가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그리스 신화의 문학 형태는 대부분이 점진적인 변화를 거친 것으로, 길버트 커스버트슨의 주장처럼 그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던 발칸 반도의 초기 거주자들은 애니미즘 사상을 통해 자연의 모든 것에 영혼을 부여하였고, 사람의 형태로 가정된 이러한 영혼들은 지역 신화에서 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발칸 반도 북부의 부족들이 침범하게 되면서, 정복과 세력, 싸움에서의 용기, 영웅적 자질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새로운 판테온 신들이 기존 발칸 반도의 신화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농경 사회에 존재했던 오래된 신들은 그들의 더욱 강력한 침략자에 융합되었고, 그렇지 못한 신들은 쇠퇴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고대 중반 이후에는 남신과 남성 영웅 간의 관계에 대한 신화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기원전 630년 경에 확산되었다고 여겨지는 교육적 동성애(Eros paidikos, παιδικός ἔρως)의 동시적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기원전 5세기가 끝날 무렵, 시인들은 아레스를 제외한 모든 중요한 신과 많은 전설적 인물에게 적어도 한 명의 에로메노스(성적인 관계의 어린 소년)를 정해두었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처럼 이전에 존재하던 신화 또한 암시적인 동성애 관계가 가미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유행에 맞추어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의 이야기를 각색하였으며, 초기 로마 제국의 문학 신화 수집가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일련의 역사적 이야기를 만들어낸 서사시의 업적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감각의 신화적 연대기로 발전하였고, 그리스 신화는 세계와 인간의 발전 모습 또한 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내용에서 드러나는 자기 모순적 서술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 구성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연대는 파악할 수 있다. 신화에서 설명하는 "세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세 시대, 또는 네 시대로 나눌 수 있다. # 창세 신화 또는 신들의 시대(신통기, "신들의 탄생") 세계와 신, 인간의 기원에 대한 신화 # 신들과 인간의 자유 교류 시대 초기에 신들과 반신반인, 인간이 서로 교류했던 이야기. # 신들의 활동이 제한되었던 영웅의 시대. 마지막이자 가장 거대한 영웅 전설은 트로이아 전쟁과 후일담이다.(어떤 연구자들은 네 번째 시대로 나누기도 한다.) 신들의 시대가 동시대의 신화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온 반면에, 고대와 고전 고대의 그리스 작가들은 영웅의 시대를 더 선호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설명한 후,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업적에 대한 기록과 연대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서, 영웅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신통기》와 호메로스 찬가의 규모와 유행을 위축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영향으로 "영웅 숭배" 문화는 종교 생활의 개혁을 가져왔고, 죽음(영웅)의 세계에서 신들의 세계를, 올림피안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분리하여 표현하였다.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에서 인간(종족)의 시대를 금, 은, 청동, 철의 네 시대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종족, 또는 시대는 신들의 창조를 기준으로 구별하는데, 금의 시대는 크로노스의 지배에 속하며, 이후의 종족은 제우스가 창조한 것이다. 헤시오도스는 청동 시대 다음에 영웅의 시대(종족)를 삽입하였다. 마지막 시대는 철의 시대로, 시인들이 활동하던 시대와 동일하였다. 시인들은 이 시대를 최악의 시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판도라의 신화를 통해서 철의 시대부터 세상에 악(惡)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게 되면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좌절되고 오직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헤시오도스의 네 시대 개념을 가져왔다. Caravaggio 003.jpg|섬네일|upright|사랑의 신 에로스를 묘사한 Amor Vincit Omnia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의 1601–1602년 작품. "근원 신화" 또는 "창조 신화"는 인간의 용어로 우주를 이해하며,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를 말한다. 철학적인 설명으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서술되어 있다. 그는 세상이 지루한 공허인 카오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공허가 끝나자 에우리노메, 가이아(대지)가 나타났고, 에로스(사랑), 무저갱(나락, 타르타로스), 에레보스와 같은 다른 근본 신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가이아는 남자의 도움 없이 우라노스(하늘)를 낳았고 그와 결합하였다. 이 결합으로 거인족 티탄이 처음으로 태어났는데, 이들은 코이오스, 크리오스, 크로노스, 히페리온, 이아페토스, 오케아노스의 여섯 남자, 므네모시네, 포이베, 레아, 테이아, 테미스, 테티스의 여섯 여자로 구성되었다. 이윽고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외눈박이 키클롭스와 100개의 손이 달린 헤카톤케이레스를 낳았다. 크로노스("교활하며, 가장 젊고 무서운 가이아의 자녀" )는 우라노스를 거세시키고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누이 레아를 자신의 배우자로 삼고, 다른 형제 티탄들을 지배층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립 주제는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들 제우스에게 적대를 받으며 되풀이되었다. 아버지를 배반하였던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 또한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레아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빼앗아 삼켜버렸다. 이것을 증오하던 레아는 마지막으로 낳았던 아들 제우스를 숨기고 강보에 싼 바위를 대신 주어 크로노스가 삼키도록 하였다. 성장한 제우스는 크로노스에게 약이 든 음료를 마시게 하여 구토를 하게 만들었고, 크로노스의 위장에 있던 레아의 다른 자녀들과 바위가 모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위를 차지하고자 크로노스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벌였다. 막바지에 이르러 키클롭스(제우스가 타르타로스에서 구출)의 도움으로 제우스와 형제들은 승리하게 되었고, 패배한 크로노스와 티탄들은 내쫓겨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었다. birth Athena Louvre F32.jpg|섬네일|left|아티카식 흑회식 암포라에 그려진 메티스를 삼킨 제우스의 머리에서 "재탄생"하는 아테나,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투이아가 오른쪽에서 돕고 있다. 기원전 550 - 525년 경 작품.(파리 루브르 박물관) 크로노스와 같은 반란을 겪을까봐 걱정하던 제우스는, 첫 번째 아내인 메티스가 "자신보다 위대한" 신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자 아내를 삼켜버렸다. 하지만 메티스는 이미 아테나를 임신하고 있었고,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계속 두통을 앓게 만들다가 무장을 한 채 완전히 성장한 모습으로 그의 머리에서 나오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인들은 시에 대하여 신통기를 원형적인 시 장르—원형적 미토스—로 여겼으며, 내용 대부분에 마법적인 힘이 깃들여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원형 시인 오르페우스 또한 신통기를 읊는 원형적 가수였는데,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카》에서는 바다를 잠재우거나 폭풍을 일으켰으며, 하데스로 하강하여 지하세계 신들의 냉혹한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였다. 〈헤르메스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 헤르메스가 서정시를 고안해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부른 노래도 신들의 탄생에 관한 것이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전해내려오는 신들의 모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무사이에게 영감을 비는 긴 첫머리에서 아르카익 시인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도 충실히 담고 있다. 신통기는 또한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 에피메니데스, 아바리스와 그 밖의 전설적 현자가 지었다고 여겨지며, 내밀한 정화 의식과 밀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소실된 많은 시들을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실제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 신통기의 몇가지 이야기에 정통했다. 그러나 종교 의식과 신앙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되었기 때문에, 종교의 신앙은 유지된 반면,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한 이러한 문화의 종류의 보고는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후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면서, 일부만이 종교 의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문헌에서 이러한 의식에 대한 언급을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양상은 소실된 직접적인 문헌과 달리 글의 방향이 너무 명료하고 의도적인 것에 불과하다. 도기와 종교적 예술품에 묘사된 장면들은 다양한 신화와 전설로 해석되었으며, 잘못 해석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러한 작품의 일부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의 인용과 최근에 발견된 파피루스 조각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파피루스 조각 중의 하나인 데르베니 파피루스는 오르페우스 신앙의 천지 창조 시가 최소 기원전 5세기부터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었다. G. Betegh, The Derveni Papyrus , 147 그리스 세계에서는 최초의 철학적 우주론자들이 반대하거나 성립해온 대중적인 신화적 개념들이 한동안 존재했었다. 이러한 개념들의 일부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시에서는 대지가 오케아노스의 강 위에 떠있는 평평한 원판이며, 태양, 달, 별이 있는 반구형의 하늘에 둘러싸여 있다고 설명하였다. 태양(헬리오스)은 전차를 몰면서 하늘을 가로질렀고, 밤에는 황금 사발을 타고 대지 주위를 항해하였다. 태양, 대지, 하늘, 강, 바람은 발원의 대상이 되거나 입증 선언에서 이름이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자연의 균열은 보통 하데스의 지하 세계이자 그의 전신인 죽음의 세계로 가는 입구로 생각하였다. K. Algra, The Beginnings of Cosmology , 45 다른 문화권의 영향은 언제나 새로운 주제를 창출해내었다. - after Michelangelo Buonarroti.jpg|섬네일|right|백조로 둔갑하여 스파르타 왕비 레다를 유혹하는 제우스. 분실된 미켈란젤로 원작의 16세기 복제본. 고전 시대 신화에서는 티탄들의 패배 이후, 신들의 새로운 판테온이 세워졌다고 설명한다. 주요한 그리스 신들 중에서 올림피안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제우스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신들을 말한다. 이들의 인원이 열두 명으로 제한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개념으로 보인다. 올림피안 이외에도 그리스인들은 염소 신 판, 강의 정령 님프, 샘에 사는 나이아드,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 바다에 사는 네레이드, 강의 신, 사티로스를 비롯한 그 지역의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였다. 여기에는 에리니에스(또는 푸리아이)처럼 혈연 관계에게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뒤쫓는 저승의 암흑 세력도 있었다. 시인들은 그리스 판테온의 영광을 기리고자 호메로스 찬가를 지었다.(33편의 노래). 그레고리 나지는 호메로스 찬가를 "각 노래마다 신에 대한 기원을 노래하는(《신통기》에 비해) 간결한 서가"로 간주하였다. 그리스 신화를 구성하는 방대한 신화와 전설에서 그리스인들이 생각해낸 신들은 본질로 봤을 때는 물질적이지만 이상적인 신체를 가졌다고 묘사된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그리스의 신인 동형론의 특징에 대하여 "그리스 신들은 인간이며,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고대 그리스 신들은 그들의 근원적인 형태와는 별개로 많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들은 질병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매우 특정한 상황에서만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을 불사로 보았고, 영원한 젊음과 더불어 이러한 불사의 능력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섭취하여 혈관에 신성한 피를 돌게 하는 방법으로 보장 받을 수 있었다. 각 신들은 서로 다른 관심사를 추구하며 자신의 계보를 이어가며, 특유의 개성에 의해 좌우되는 전문적인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묘사들은 다른 것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 고대 지역 전승의 다양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시나 기원, 의식에서는 신들을 호명할 때 이름과 수식어를 결합하여 부르며, 다른 명시와는 다른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들을 식별한다.(예를 들어 아폴로 무사게테스는 "무사이의 지도자 아폴로") 수식어만을 사용하여 부르는 것은 신의 특정하고 부분적인 모습만을 식별하는 것으로 보이며,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고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신들은 삶의 특정한 모습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하데스는 죽음의 신, 아테나는 지혜와 용기의 여신이었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같은 일부 신들은 복잡한 특성을 가지며 다양한 영역을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반면 헤스티아("난로")와 헬리오스("태양")처럼 좀 더 전형적인 화신의 성향을 가진 신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주요 신전들은 거대 범그리스 신앙의 중점이 되는 제한된 숫자의 신들만을 헌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개별 종교와 마을에서는 비주류 신들을 숭배하며 의식을 치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많은 도시에서 또한 잘 알려진 신들을 독특한 지역 의식과 함께 찬양하였으며, 다른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화를 그들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또는 반신) 숭배가 부가되기도 하였다. 신들만이 살아갈 때의 시대와 인간의 문제에 신성한 간섭이 제한된 시대를 이어주는 것은 신과 인간이 함께 활동하였던 과도기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세계의 초기 시절로, 신과 인간의 무리들이 나중의 시대와 비교할 때 서로 더 자유롭게 어울렸던 시대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이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려졌으며, 여기서는 주로 사랑 이야기와 징벌 이야기의 두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satyrs Cdm Paris 575.jpg|섬네일|left|디오니소스와 사티로스. 브리고스 화가 카비네 드 미다이어스가 잔 안쪽에 그린 작품. 사랑 이야기는 주로 근친 상간, 또는 남자 신이 인간 여자를 유혹하거나 강간하여 영웅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는 피해야할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데, 상호 합의의 관계에서도 해피 엔딩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는 드물다. 여자 신이 인간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경우도 드물게 있는데,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는 여신이 안키세스와 동침하여 아이네이아스를 낳았다고 이야기한다. 두 번째 유형(징벌 이야기)은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쳤을 때, 탄탈로스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제우스의 식탁에서 훔쳐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신들의 비밀을 누설할 때, 프로메테우스나 리카온이 제물을 날조할 때, 데메테르가 트립톨레모스에게 농업을 전수할 때, 마르시아스가 아울로스를 만들어 아폴론과 음악 경연을 펼칠 때와 같이 어떤 의미 있는 문화적 아티팩트의 전유나 발명을 포함하고 있다. 이안 모리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신들과 인간의 역사 간의 지위"로 간주하였다. 3세기에 기록된 작자 미상의 파피루스 조각에는 디오니소스가 트라키아의 왕 리쿠르고스에게 내린 형벌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는데, 뒤늦게서야 새로운 신을 알아본 리쿠르고스는 내세까지 이어지는 잔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디오니소스가 등장하면서 트라키아에서 그의 숭배가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이스킬로스 삼대 비극의 주제이기도 하다. 또 다른 비극인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 여신도들》에서는 테바이의 왕 펜테우스가 디오니소스를 경시하고 그의 여성 숭배자 마이나스를 몰래 구경하다 신의 형벌을 받게 된다. hydria Antikensammlung Berlin 1984.46 n2.jpg|섬네일|아풀리안 적회식 히드리아에 그려진 데메테르와 메타네이라, 기원전 340년 경 작품.(베를린 구 박물관) 비슷한 주제가 반영된 오래된 설화를 모티브로 한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데메테르가 도소라 불리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의 딸 페르세포네를 찾던 중 아티카 엘레우시스의 왕 켈레오스에게 환대를 받는다. 데메테르는 켈레오스에게 보답하고자 그의 아들 데모폰을 신으로 만들 의식을 치루지만, 도중에 어머니인 메타니라가 불에 휩싸인 아들을 보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자 노여워하며 일을 그르치게 된다. 데메테르는 어리석은 인간이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탄식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영웅들이 살았던 시대를 영웅 시대로 부른다. 서사시와 계보시에서는 특정한 영웅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는 이야기들의 순환을 만들어 내었고, 다른 이야기 속 영웅 간의 가족 관계를 설명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연속적으로 이야기들을 배열하였다. 켄 다우든에 따르면 이것은 연대기 효과로도 볼 수 있으며, 계승되는 세대의 운명을 따라가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영웅 숭배가 등장한 이후, 영웅은 신만이 차지하였던 신성한 영역에 가세하며 맹세와 기원의 대상으로서 그 이름이 신과 함께 언급되었다. 신들의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들의 명단이 수정되지 않은 최종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또한, 위대한 신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영웅들은 언제나 죽음의 무리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영웅이 지역 단위의 무리에게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 또한 신 숭배와 영웅 숭배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영웅 시대의 서막은 헤라클레스의 기념비적인 모험들을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또한, 영웅 시대에는 장대한 군사 사건인 아르고나우타이의 원정, 테바이권과 트로이아 전쟁도 포함된다. H.J. Rose, A Handbook of Greek Mythology , 340 and Telephos Louvre MR219.jpg|upright|섬네일|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들 텔레포스(파리, 루브르 박물관). 일부 철학자들은 헤라클레스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신화가 아르고스 왕국의 종속 국가 지도자와 같은 실존 인물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일부 철학자는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가 태양이 1년동안 황도 12궁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문화권의 초기 신화로 비추어 볼 때, 헤라클레스 이야기는 이미 확립된 영웅 신화의 지역화로서 보여진다는 의견도 있다. 전통적으로,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페르세우스의 손녀 알크메네의 아들이었다. 그의 환상적이고 유일무이한 공적은 그것들이 갖는 설화적 주제와 함께 인기있는 전설의 소재를 제공하였다. 그는 희생자이자 제단의 창립자, 게걸스러운 먹보로 묘사되거나 언급된다. 희극에서 등장하는 그의 이러한 역할은 그의 비참한 죽음이 많은 비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상반적이다. — 탈리아 파파도푸루는 《헤라클레스》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연구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T. Papadopoulou, Heracles and Euripidean Tragedy , 1 예술과 문학에서 헤라클레스는 보통의 인간보다 막대한 힘을 가진 남성으로 등장하며, 활을 무기로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종종 곤봉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꽃병 토기에는 헤라클레스의 묘사가 다른 소재와 비할 수 없는 인기를 구가하였는데, 특히 그가 사자와 싸우는 장면은 수백 개의 토기에서 발견되었다. 헤라클레스는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신화 및 숭배에도 등장하며, 로마인이 쓰던 라틴어 감탄사 "mehercule"은 그리스어인 "Herakleis"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헤라클레스를 상인의 신으로 숭배하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의 특징적인 재능인 행운이나 위험에서의 구조를 염원하기도 하였다. 헤라클레스는 도리스 왕의 시조로 공식 지정되어 높은 사회적 위신을 이루었다. 이것은 도리스인이 펠로폰니소스로 이주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스 부족의 이름이기도 한 영웅 힐로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이자 헤라클레이다이(헤라클레스의 자손, 특히 힐로스의 후예를 말하며, 다른 헤라클레이다이로는 마카리아, 라모스, 만토, 비아노로, 틀레폴레모스, 텔레포스가 있다.)의 한 명이 되었다. 헤라클레이다이는 미케네와 스파르타, 아르고스의 펠로폰니소스 왕국을 정복하였으며, 전설에 입각한 주장에 따르면 조상 대대로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의 지배가 시작된 것을 종종 "도리스인의 침입"이라고도 부른다. 리디아인과 후기 마케도니아 왕들 또한 같은 계급의 지배자로서 헤라클레이다이가 되었다. W. Burkert, Greek Religion , 211 초기 세대의 다른 영웅들은 페르세우스, 데우칼리온, 테세우스, 벨레로폰 등이 있으며, 이들은 헤라클레스와 공통적으로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행적은 헤라클레스처럼 혼자서 해낸, 환상적인 것들로, 동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키마이라와 메두사같은 괴물을 처치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벨레로폰의 모험은 평범한 형태로,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모험과 유사하다. 상상으로 빚어낸 영웅의 최후는 초기 영웅 전설에서 반복되는 주제였으며, 페르세우스와 벨레로폰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서사 시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감독)의 《아르고나우티카》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헬레니즘 서사시로써, 이아손과 아르고나우타이가 황금 양모를 찾기 위해 신화 상의 지역인 콜키스로 항해를 떠나는 신화를 다루고 있다. 《아르고나우티카》에서 한 쪽에만 샌달을 신은 남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네메시스라는 신탁을 받은 펠리아스 왕은 이아손에게 강제로 임무를 부여한다. 이아손은 강에서 샌달을 잃어버린 채로 펠리아스의 궁전에 도착하고, 이때부터 서사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헤라클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차세대 영웅들이 이아손과 함께 아르고 호를 타고 황금 양모를 찾으러가는 모험에 가담하였다. 이 세대에는 크레타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른 테세우스, 여걸 아탈란테, 한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경쟁하던 서사시의 주인공 멜레아그로스도 있었다. 핀다로스, 아폴로니우스, 아폴로도로스는 아르고나우타이의 전체 목록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Apollonius, Argonautica , I, 20ff Pindar, Pythian Odes , Pythian 4. 1 아르고나우타이는 아폴로니우스가 기원전 3세기가 되어서야 쓴 서사시지만, 그 이야기 구성은 《오디세이아》보다 먼저 존재하였으며, 이아손의 공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오디세우스의 방랑은 부분적으로 이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P. Grimmal, The Dictionary of Classical Mythology , 58 고대에는 이 원정을 역사적 사실, 즉 그리스인이 흑해에서 무역과 식민지 사업을 개척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했다. 또한, 매우 인기를 끌어 여러가지 지역 전설이 덧붙여진 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비극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하였다. 아르고 원정과 트로이아 전쟁 사이에는 주로 잔혹한 범죄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세대가 있다. 여기에는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가 아르고스에서 벌인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아트레우스 가문(라브다쿠스 가문과 함께 두 주요 영웅 왕조 중 하나)의 신화 뒤에는 권력 이양과 주권을 계승하는 방법에 얽힌 문제가 드러나있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형제는 미케네의 권력 이양의 비극의 주역으로 출연하며, 그들의 자손들도 이것을 반복한다. 테바이권은 주로 도시의 창설자인 카드모스와 연관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후반에는 테바이에서 일어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사건을 중점으로 다룬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결국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와 에피고노이의 손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며 끝을 맺게 된다.(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의 초기 서사시 등장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이디푸스가 관계되어있는 초기 서사시에는 그가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 드러난 이후에도 테바이를 계속해서 통치했으며,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여 그녀가 자신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비극 작품(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후기 신화에서 보아왔던 이야기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Simonet - El Juicio de Paris - 1904.jpg|섬네일|350px|엔리케 시모네의 1904년 《파리스의 심판》. 파리스가 오른손에 황금 사과를 든 채 계산적인 태도의 세 여신을 판단하고 있다. Rage of Achilles by Giovanni Battista Tiepolo.jpeg|섬네일|upright|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아킬레우스의 분노》(1757년, 프레스코, 300 x 300 cm, 비첸차 빌라 발마라나 소재)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전쟁 포로인 브리세이스를 두고 협박을 일삼는 것에 분노하여 칼을 뽑아 아가멤논을 죽이려고 한다. 이때, 갑자기 여신 아테나가 등장하여 프레스코의 묘사처럼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아 그를 말린다.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트로이아 전쟁, 서사시권 문서를 보십시오.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와 트로이아 간의 트로이아 전쟁과 그 결과에서 절정을 이룬다. 호메로스 작품에서는 주된 줄거리가 이미 충분한 형태와 요지를 갖추었으며, 개별적인 주제의 경우에는 그 후에 그리스 연극과 같은 매체에서 더욱 자세해졌다. 트로이아 전쟁은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로 로마 문화에서 굉장한 관심을 이끌어내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트로이아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아를 떠나 방랑하던 중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가 된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고 전하는데, 베르길리우스가 이후에 《아이네이스》라는 책으로 자세히 다루었다.(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2권에는 매우 잘 알려진 트로이아 부대 이야기가 있음.) 마지막에 와서는 딕티스 크레텐시스, 다레스 프리기누스라는 이름의 저자가 썼다는 허위 연대기 두 권이 라틴어로 쓰여져 전해 내려온다. 서사시 모음인 트로이아권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에리스와 칼리스티의 황금 사과, 파리스의 심판, 헬레네 납치, 아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이피게니아 이야기로 시작한다. 헬레네를 되찾고자 그리스는 메넬라오스의 형제이자 미케네, 또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의 지휘 아래 거대한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트로이아는 헬레네를 돌려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전쟁이 일어난지 10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일리아스》에서는 아가멤논과 그리스의 뛰어난 전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반목,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와 프리아모스의 장남 헥토르의 전투에서 빚어지는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다. 헥토르의 죽음 이후 트로이아 진영에는 동맹 관계인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 에피오티아의 왕이자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이 가세하였다. 아킬레우스가 이 둘을 죽였으나, 그는 파리스의 화살로 죽게 되었다. 그리스는 트로이아를 함락시키기 전에 성채에서 팔라스 아테나의 목조상(팔라디움)을 훔쳤으며, 마지막에 와서는 아테나의 도움으로 트로이아 목마를 완성시켰다.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아인들은 그리스 진영의 탈영병으로 가장한 시논의 설득만을 믿고 그 목마를 아테나에게 바치는 공물로써 트로이아 성 안으로 들였다. 신관 라오콘이 이 목마를 파괴하려 했으나, 갑자기 나타난 바다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 밤이 되어 그리스 함대가 돌아오자, 목마에 숨어있던 그리스인들은 트로이아의 성문을 열었다. 총력을 기울인 약탈이 이루어지면서, 프리아모스와 남아있던 그의 아들들은 살해 당했고, 트로이아의 여자들은 그리스 여러 도시의 노예로 전락했다. 모험적인 그리스 지도자의 귀향 항해(아가멤논을 살해한 아이네이아스와 오디세우스의 방랑 포함)는 두 개의 서사시 《귀향》(소실된 노스토이),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서 다루고 있다. 트로이아권은 트로이아 세대의 자녀들이 겪는 모험도 담고 있다.(오레스테스와 텔레마코스) 트로이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주제를 제공하였으며, 그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예 트로이아 약탈이 묘사된 파르테논의 메토프) 트로이아권에서 유래한 주제가 이같은 예술적 선호를 받은 사실은 이것이 고대 그리스 문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동일한 신화적 연대기 또한 후대 유럽 문학 작품의 일련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서,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트로이아 중세 유럽 작가는 트로이아 전설에서 영웅과 낭만적 이야기의 풍부한 원천과 함께, 이것이 그 시대에 맞게 궁정풍의 기사적인 전형으로 각색하기 쉬운 구조를 갖췄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누아 드 셍트 모르(《로망 드 트로이》, 1154-60년), 엑세터의 조셉(《드 벨로 트로이아노》, 1183년)과 같은 12세기 작가들은 전쟁을 묘사하면서 딕티스와 다레스의 이야기를 각색하였다. 이들은 호라티우스의 조언과 베르길리우스의 전례를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말하는 대신에 트로이아의 시를 다시 쓴 것이다. 트로이아 전쟁에 등장하는 유명한 영웅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아 진영 아에네아스 헥토르 파리스 그리스 진영 아이아스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왕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는 일상의 중심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그들의 역사의 일부로 보았다. 그들은 자연 현상과 문화적 변화, 인습적인 증오와 친교를 설명하는데 신화를 사용하였다. 한 지도자가 신화적 영웅, 또는 신의 후손이라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설명하는 트로이아 전쟁의 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사 역사가, 칼럼니스트, 정치 수필가이자 전 고전학 교수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과 고전학 부교수 존 히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에게 호메로스 서사시의 심오한 지식은 그들의 문화 변용의 기저로 간주되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학문"(Ἑλλάδος παίδευσις)이었고, 그의 시는 한 권의 "책"이었다. 그린 《아테네 학당》 프레스코의 플라톤(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유사). 그는 이상적 《국가론》에서 호메로스와 비극, 관련된 신화적 전통의 연구를 배격한 철학자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철학과 역사, 산문과 합리주의가 등장한 이후, 신화의 미래는 불투명해졌고, 신화적 계보도가 포함되던 역사의 구상에서도 초자연적 요소가 배제되었다.(투키디데스 역사 등) 시인들과 극작가들이 여전히 신화를 개작했던 반면에, 그리스 역사가와 철학자들은 이것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와 같은 일부 급진 철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부터 시인들의 이야기를 신성 모독적인 거짓말로 여겼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려낸 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신들에게 귀속시켰다. 절도, 간통, 서로 기만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표현은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에서도 광범위하게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만의 우의적인 신화를 만들었고(《국가》의 에르의 몽상), 신들의 부도덕한 속임수, 도둑질, 간통을 소재로 하는 구비 설화를 비판하였으며, 문학 작품에서 그들이 중심 역할로 등장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신화를 "늙은 아내의 수다" 로 비유한 플라톤의 비판은 호메로스 신화 전통에 대항하는 최초의 중대한 도전이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에 근접한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적 접근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헤시오도스와 신학 작가들은 그들에게 그럴듯해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우리를 배려하지 않았다 ... 하지만 신화적 문체로 돋보이려는 작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는 없다. 우리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며 나아갈 그들에게 반대 심문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비판에도, 플라톤은 그 자신과 그의 집단을 신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일례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서술은 철학자들이 스승의 정직한 삶을 찬양할 때 사용되는 전통적인 서사시풍의 비극 양식을 바탕으로 하였다. 핸슨과 히스는 호메로스 전통에 대한 플라톤의 거부가 그리스 문명의 대중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는 않았다고 추정한다. 오래된 신화는 지역 종교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러한 신화들은 계속해서 시 문학에 영향을 미쳤고, 회화와 조각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종종 오래된 전통을 비웃는 연극을 제작하였으며, 그가 창조한 배역의 목소리를 빌어 의심의 어조를 담아내었다. 그가 제작한 연극은 언제나 예외없이 신화를 주제로 행해졌다. 이러한 많은 연극들은 과거에 같거나 비슷한 신화를 소재로 쓰인 연극의 회답으로 쓰여졌다. 에우리피데스는 주로 신에 대한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과거 크세노크라테스의 표현과 유사한 반대에 입각한 비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묘사된 신들은 너무 어리석게도 인간과 닮았다." 신화에 관한 개인적 회의론과 신성의 철학적 개념에 중점을 둔 그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기존 체제의 옹호자라고 생각했다. 헬레니즘 시대 동안 신화는 일정 신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일류 엘리트 지식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동시에 고전 시대의 회의적인 성향 또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스 신화 수집가 에우헤메로스는 신화적 존재와 사건이 기초로 하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찾는 관례를 확립하였다. 그의 본래 작품( Sacred Scriptures )은 유실되었지만, 디오도로스와 락탄티우스가 기록한 자료를 통해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신화 해석학의 합리화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물리주의 이론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높은 관심을 받았다. 유헤메로스 학파가 신화를 역사적 형태로 합리화한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신과 영웅에 대한 설명을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더불어 스토아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신화적 전통의 도덕적 의의를 강조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그리스 어원에 바탕을 두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르침을 통해 그를 따르는 시민들의 마음에 사로잡힌 미신의 두려움을 쫓고자 하였다. 리비우스 또한 신화적 전통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전설(파불라에)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 직접 판단을 내리고자 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 로마인들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종교적 전통의 강력하고 변증적인 관념을 동반하였으며, 전통이 종종 미신의 온상이 되는 것을 방어하기도 했다. 고전학자 바로는 종교는 인간의 제도이며, 사회의 선을 보호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고, 종교적 숭배의 기원에 대한 엄밀한 연구에 헌신하였다. 그의 저서인 《신의 역사》( Antiquitates Rerum Divinarum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에서 일반적 접근법을 찾을 수 있다.)에서 바로는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신을 두려워하는 반면, 진실로 경건한 사람은 그들을 부모로서 공경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에 따르면, 로마 사회에서 신은 시인이 연극과 오락을 위해 만들어낸 신화적 가치, 도시와 사람들이 숭배를 위해 이용하는 시민적 가치, 철학자가 만들어낸 자연적 가치의 세 가지 가치로 구분된다. 바로는 시민의 신학이 시적이고 신화적인 가치, 철학자의 가치와 결합된 곳이 최고의 국가라고 덧붙였다. 로만 아카데믹 코타는 신화를 문자 그대로, 또는 우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모두 조롱하였으며, 철학에는 신화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키케로 또한 일반적으로 신화를 경멸하였으나, 바로와 마찬가지로 국교와 국교의 관례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였다. 이 합리주의 확장이 사회적 척도와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키케로는 그 누구도(노파나 소년도) 하데스의 공포나 스킬라, 켄타우로스, 다른 괴물의 존재를 믿을만큼 멍청하지 않다고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미신적이고 잘 속는 속성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키케로의 사상은 저서인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Deorum)에 포괄적인 요약이 드러나 있다. Apollo Louvre left.jpg|섬네일|upright|로마 종교에서 그리스 신 아폴로(초기 로마 제국의 4세기 그리스 작품의 복제품, 루브르 박물관)의 숭배는 솔 인빅투스 숭배와 결합하였다. 태양 숭배는 황제와 제국의 특별한 보호자로써 기독교로 대체되기 전까지 제국의 최고 권위를 가진 종교였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와 다른 외래의 수많은 신들이 융합된 로마 신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로마 신화가 이러한 발생 과정을 갖게된 이유는 로마인들만의 신화가 적었기 때문이며, 주요 로마 신들이 그리스의 대등한 신들의 특징을 답습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의 신화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주신 제우스와 주피터는 이러한 신화적 공통점의 좋은 예이다. 두 신화적 전통의 결합에 더불어 새롭게 유입된 동방 종교는 더욱 심화된 융합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서, 태양 숭배 문화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시리아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 로마에 들어온 것이다. 아시아의 신 미트라(태양이라 칭함)와 바알은 아폴로와 헬리오스에 융합되어 하나의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가 되었고, 집성 의식을 받으며 혼합된 속성을 띄게 되었다. 아폴로는 종교에서 헬리오스, 또는 심지어 디오니소스와 점점 동일시되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신화를 개작한 문헌에서는 이러한 발달을 반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승 문학 신화는 실제 종교적 관습에서 갈수록 더 분리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작품인 2세기 오르페우스 찬가 모음집과 5세기 마크로비우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의 《사투르날리아》는 융화 경향과 합리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오르페우스 찬가는 고전 이전의 시적인 구성을 취하며, 유명한 신화의 주인공인 오르페우스가 썼다고 전한다. 실제 이 시들은 몇 명의 시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선사 유럽 신화에 대한 줄거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사투르날리아》의 목적은 마크로비우스 자신이 읽은 자료를 통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었으나, 신에 대한 시각은 베르길리우스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 이집트와 북부 아프리카 신화, 신학의 색채를 띄었다. 《사투르날리아》에서는 유헤메로스, 스토아,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적 의견이 다시 등장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이해의 기원을 신화를 "거짓말", 또는 전해져 오는 우화로 재해석하는 "기독교적 악의에 찬 전통적 태도"에 대한 18세기 말의 반발 작용으로 인한 것으로 평가한다. 1795년경, 독일에서는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다. 요한 마티아스 게스너는 괴팅겐에서 그리스 연구를 다시 부활시켰고, 그와 동시에 후임자인 크리스티안 고트로프 하이네는 요한 요아힘 빙켈만과 함께 독일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신화 연구에 대한 기초를 다졌다. Muller.jpg|섬네일|upright|막스 뮐러는 비교 신화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비교 신화학》(1867년)을 통해서 초기 유럽 민족과 "미개" 민족 신화 간의 "복잡한" 유사성을 분석하였다. 19세기 비교 언어학의 발전과 20세기의 민속학적 발견이 더해져, 신화는 신화학이라는 학문 형태로 정립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이래로 신화에 대한 연구는 모두 비교 연구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빌헬름 만하르트, 제임스 프레이저, 스티스 톰프슨은 민담과 신화의 주제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데 비교 연구 접근 방법을 사용하였다. 1871년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그의 저서 Primitive Culture 에서 비교 연구 방법을 적용하여 종교의 기원과 발달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R.A. Segal, Theorizing about Myth , 16 넓게 분리된 문화권들의 물질 문화, 종교와 신화를 한데 모으는 타일러의 절차는 카를 융과 조셉 캠벨에게 영향을 미쳤다. 막스 뮐러는 신화 연구에 비교 신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여 아리아인의 자연 숭배의 왜곡된 잔해를 발견하였다.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는 신화가 공통의 사회적 기능을 이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신화들의 형식적인 관계와 유형을 비교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신화가 인간의 보편적이고 생물학적인 개념, 그리고 억압된 발상의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로이트 신화 해석의 논거는 해몽으로, 프로이트의 개념인 꿈 작업은 꿈 속에서 나타난 어떤 개별 요소든지,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후 관계가 중요함을 인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의견은 프로이트 개념에서 신화에 대한 구조 언어학자와 정신 분석적 접근 간의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카를 융은 자신의 이론 "집단 무의식"과 신화에서 흔히 보이는 부호화된 원형("태고적" 양식의 승계)을 통한 보편적이고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신화를 해석했으며, "신화 형성 구조의 요소는 무의식 정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버트 A. 세갈은 융의 방법론과 조셉 캠벨의 이론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캠벨의 신화 해석은 단순히 원형을 동일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오디세이아》 해석은 오디세우스의 삶이 어떻게 영웅적 양태에 합치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융은 원형의 동일시가 단지 신화 해석의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연구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칼 케레니이는 융의 그리스 신화에 대한 원형 이론을 적용하고자 신화에 대한 자신의 초기 견해를 철회하였다. 현대에는 그리스 신화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성서적 이론에 따르면, 신화적 전설은 실제 사실에서 가장되고 바뀐 부분은 있으나 모두 성서 속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 이론에서는 신화에서 언급되는 모든 인물은 실존 인물이며, 그들과 관련된 전설은 단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본다. 이 이론에서는 아이올로스의 이야기를 아이올로스가 티레니아 해에 위치한 어떤 섬의 지배자였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우의적 이론은 모든 고대 신화가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추정한다. 이와는 다르게 물리적 이론에서는 공기와 불, 물의 원소가 본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주요한 신들이 이러한 자연의 힘을 신격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따르고 있다. 막스 뮐러는 인도유럽 종교의 형태를 "본래" 명시하던 아리아인의 흔적을 찾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이해하고자 했다. 1891년,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완성된 인류 고대사에 관한 최고로 중요한 발견은 ... 다음의 표본 등식이었다. 산스크리트어 디아우스 피트르 고대 노르드어 티르" 서로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 드러나는 특성과 기능은 밀접한 평행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전승이 공유되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우라누스와 산스크리트 바루나 또는 그리스의 모이라와 노르드 신화의 노른의 경우처럼 언어의 유사성을 보이는 증거가 부족하여 확실한 입증은 어렵다. A. Winterbourne, When the Norns Have Spoken , 87 한편, 고고학과 신화학에서는 그리스가 소아시아와 근동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아도니스는 근동의 죽음의 신과 유사성을 띄는데, 신화보다는 숭배 의식에서 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아프로디테의 도해가 셈족 여신에서 파생된 부분이 많은 반면, 키벨레는 아나톨리아 문화를 그 뿌리로 두고 있다. 초창기 신의 세대(카오스와 그의 자손들)와 에누마 엘리시의 티아마트 또한 공통점이 많다. R.A. Segal, A Greek Eternal Child , 64 메이어 라인홀드는 "권력을 원하는 세대의 투쟁, 폭력을 통한 신의 계승을 비롯해서 근동의 신통기적 개념은 ... 그리스 신화 속으로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인도유럽과 근동 기원에 더하여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 신화가 크레타, 미케네, 필로스, 테베, 오르코메누스와 같은 프레헬레닉 문명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로 추측하고 있다. 종교 역사학자들은 크레타와 관련된 수많은 고대의 신화 구성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졌다.(황소의 신, 제우스와 에우로페, 황소와 관계를 맺어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파시파에 등) 마틴 P. 닐슨 교수는 주요한 고전 그리스 신화가 미케네 문명과 선사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부르케르트는 크레타 궁전 시대의 도해로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이론은 확증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Botticelli - La nascita di Venere - Google Art Project - edited.jpg|섬네일|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1486년 경, 캔버스에 유화, 우피치, 플로렌스) — 고대 다신교의 새로운 관점을 목적으로 한 베누스 푸티카의 재현. 현대인을 위한 르네상스 정신의 전형으로도 통한다. 광범위하게 수용된 기독교는 신화의 유행을 억제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고대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오비디우스의 시는 시인과 극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의 창조력과 영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L. Burn, Greek Myths , 75 르네상스 초기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그리스 신화의 이교적인 주제를 전통적인 기독교적 주제와 나란히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라틴 매체와 오비디우스 작품의 유입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와 조반니 보카치오, 단테와 같은 중세 르네상스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Draper - The Lament for Icarus - Google Art Project.jpg|섬네일|left|upright|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1898년 작품 《이카로스를 위한 탄식》 북부 유럽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시각 예술의 주제로 채용하지 않았으나, 문학 분야에서는 그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받은 영국인의 예술적 창조력은 초서와 존 밀턴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셰익스피어와 로버트 브리지스를 통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라신과 독일의 괴테는 고대 신화를 개작하면서 그리스 연극을 부활시켰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동안에 그리스 신화에 대한 저항이 유럽 전역에 퍼졌지만, 신화는 극작가들에게 여전히 천연 그대로의 중요한 소재였으며, 헨델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리브레토로 쓰여지기도 했다. 18세기 말에 와서는 낭만주의가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그리스 문화의 뜨거운 열풍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영국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 작품의 새로운 번역물이 출간되면서 동시대의 시인(알프레드 테니슨, 키츠, 바이런, 셸리 등)과 화가(프레더릭 레이턴, 로렌스 앨머 태디마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토프 글루크, 리차드 스트라우스, 자크 오펜바흐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는 음악에 그리스 신화적 주제를 심어두기도 하였다. 토머스 불핀치와 너대니얼 호손과 같은 19세기 미국 작가들은 영미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고전 신화의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최근에 와서는, 프랑스의 장 아누이, 장 콕토, 장 지로두, 미국의 유진 오닐, 영국의 T. S. 엘리엇과 같은 극작가와 제임스 조이스, 앙드레 지드와 같은 소설가에 의해 고전적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아르고나우티카》 ( Argonautica ), 제1권. Sacred Texts 에서 원문 보기 . 아이스킬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 Prometheus Bound ). Perseus program 에서 원문 보기 . 아이스킬로스, 《페르시아인들》 ( The Persians ). Perseus program 에서 원문 보기 . 아폴로도로스, 《도서관과 요약집》 ( Library and Epitome ). Perseus program 에서 원문 보기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 Metamorphoses ). Latin Library 에서 원문 보기 . 키케로, 《예언에 관하여》 ( De Divinatione ). Latin Library 에서 원문 보기 . 키케로, 《투스쿨룸 논쟁》 ( Tusculanae Disputationes ). Latin Library 에서 원문 보기 . 파우사니아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 Apology ). Perseus program 에서 원문 보기 .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Theaetetus ). Perseus program 에서 원문 보기 . 핀다로스, 《피티아 송가》 ( Pythian Odes ), Pythian 4 For Arcesilas of Cyrene Chariot Race 462 BC. Perseus program 에서 원문 보기 . 헤로도토스, 《역사》 ( The Histories ), 제1권. Sacred Texts 에서 원문 보기 . 헤시오도스, 《노동과 나날》 ( Works and Days ). 휴 G. 이벨린화이트의 영어 번역 . 헤시오도스, 《신통기》 ( Theogony ). 휴 G. 이벨린화이트의 영어 번역 . 호메로스, 《일리아스》 ( Iliad ). Perseus program 에서 원문 보기 . 《데메테르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 ( Homeric Hymn to Demeter ). Perseus project 에서 원문 보기 .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 ( Homeric Hymn to Aphrodite ). 그레고리 너지의 영어 번역 . 《헤르메스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 ( Homeric Hymn to Hermes ). Online Medieval and Classical Library 에서 영어 번역 보기 . 스미스, 윌리엄 (1870),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 Library of Classical Mythology Texts 고전 문헌 작품 번역 LIMC-France 그리스 로마 신화와 그림 해석 전문 데이터베이스 제공 Theoi Project, Guide to Greek Mythology 고전 예술의 이미지와 원전을 인용한 신화 인물 전기 마틴 P. 닐슨, The Mycenaean Origin of Greek Mythology, 구글 북 분류:고대 그리스의 종교 분류:유럽의 신화 분류:고대 그리스 문학 분류:그리스 신화
Vinci Vitruve Luc Viatour.jpg|섬네일|비트루비우스적 인간 ~ 1505/1507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da Vinci (1452-1519) - The Last Supper (1495-1498).jpg|섬네일|〈최후의 만찬〉(1495 ~ 1498,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수도원 식당)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피에로 다 빈치(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르네상스의 만능인으로 어릴 때부터 수학·음악·회화 외에 모든 학문에 있어서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 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성모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 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2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이른바 환상적인 색감을 살리는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대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aerial perspective)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 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 라고 부른다. 1516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1516년 프랑수아 1세가 있는 프랑스의 끌로 뤼세(Clos Lucé)로, 그의 제자인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와 함께 이주한다. 그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간다. 여기서 와 를 완성하였다.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 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 설계하였다. 1519년 4월 23일 유언을 남기고 5월 2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랑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랑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서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도 식물학 등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저서로 그림에 관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의 중요한 문헌인 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 한동일 서강대학교 교수가 쓴 《라틴어수업》(흐름출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과 과학공부 뿐만 아니라 라틴어 공부도 했다. 〈그리스도의 세례〉(1472년~1475년)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베로키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왼쪽의 천사를, 베로키오는 오른쪽의 천사를 그린 것으로 알려짐. 교회의 통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그렸다.) 〈수태고지〉(1475년~1480년)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예수를 잉태한 성모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왔다는 루가 복음서의 탄생 설화를 소재로 함 〈동굴의 성모〉(1483년~1486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예수가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갔다는 루가 복음서의 전승 내용을 소재로 함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1488년~1490년) – 차르토리스키 박물관, 크라코우 (Krakow), 폴란드 모델은 세실리아 가레라니(Cecilia Gallerani)로 뤼도빅 르 모르(Ludociv le More)의 정부(情婦)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의 흰 족제비는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순결함 혹은 순수함 그리고 모로 집안에 대한 상징으로 주로 해석된다. 〈음악가의 초상〉(1490년경) – 암브로시니아 미술관, 밀라노, 43 x 31 cmㅡ 다 빈치의 유일한, 남성을 그린 초상화로 알려졌다. 모델은 프란치노 가퓌리오(Franchino Gaffurio) 〈리타의 성모〉(1490년~1491년) – 에르미타지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최후의 만찬〉(1498년경)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수도원 식당, 밀라노 〈모나리자〉(1503년~1506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암굴의 성모〉(1508년경) – 국립 미술관, 런던 〈성 안나와 성 모자〉 (1510년경) –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로이트가 다 빈치의 동성애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로 본 그림. 성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즉, 예수의 외할머니이다. 〈세례자 요한〉(1514년경) – 루브르 박물관, 파리, 다 빈치의 손으로 완성된 마지막 작품으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모호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소설 《다빈치 코드》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유비소프트사의 어쌔신 크리드 2와 후속작 어쌔신 크리드 2 브라더 후드의 주인공 에지오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코덱스 레스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 저술을 모은 필사본으로 30,802,500달러에 빌 게이츠에게 판매되었다. 최초의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Experience, Experiment, Design (review) Complete text & images of Richter s translation of the Notebooks Vasari Life of Leonardo in 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 . Web Gallery of Leonardo Paintings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의 온라인 전시회 Drawings of Leonardo da Vinci Da Vinci Decoded - 가디언 지의 기사 The true face of Leonardo Da Vinci? Leonardo da Vinci s Ethical Vegetarianism 분류:1452년 태어남 분류:1519년 죽음 분류:이탈리아의 화가 분류:이탈리아의 조각가 분류:이탈리아의 건축가 분류:이탈리아의 공학자 분류: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분류:이탈리아의 생리학자 분류:이탈리아의 발명가 분류:이탈리아의 외교관 분류:이탈리아의 비술사 분류:르네상스 화가 분류:르네상스 조각가 분류:르네상스 건축가 분류: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분류:토목공학자 분류:군사 기술자 분류:탄도학자 분류:풍자 만화가 분류:우화 작가 분류:관상학자 분류:채식주의자 분류:토스카나주 출신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반동성애법 피기소자 분류:15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1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15세기 화가 분류:16세기 화가 분류:15세기 조각가 분류:16세기 조각가
율리우스력 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해 기원전 45년부터 시행한 양력(陽曆) 역법이다. 율리우스력의 1년은 365일 또는 366일(4년에 한번)이다. 기원전 46년 이전까지 고대 로마에서는 태음력을 사용하였으며, 점차 계절의 변화(즉, 태양의 일주)를 고려해 태음력과 태양력을 섞어서 년(年)과 월(月)을 계산하였다. 이에 따라 특히 달을 계산하는 데 적지 않은 혼란과 계산의 착오가 생겼으며, 이러한 착오는 제사장이 임의로 수정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채택한 달력은 태양력을 기준으로 2월을 제외한 달은 모두 30일 또는 31일로 정함으로써 이전에 있던 번거로움을 한꺼번에 해소하였다. 율리우스력은 4년마다 2월 29일을 추가하는 윤년을 두어 율리우스력의 한 해 길이는 365.25일이다. 이는 365.2422일인 태양년보다 0.0078일(11분 14초)이 길어서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났기 때문에, 1582년부터 보다 정확한 그레고리력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현재(1900년 ~ 2099년),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의 차이는 13일이다.(그레고리력 1월 14일은 율리우스력으로 1월 1일이다) 월 라틴어 기원전 46년 이전 기원전 45년 이후 1월 Ianuarius 29 31 2월 Februarius 28 (23/24) 28 (29) 3월 Martius 31 31 4월 Aprilis 29 30 5월 Maius 31 31 6월 Iunius 29 30 7월 Quintilis (Julius) 31 31 8월 Sextilis (Augustus) 29 31 9월 September 29 30 10월 October 31 31 11월 November 29 30 12월 December 29 31 Intercalaris (27) (폐지) 그레고리력을 교회력으로 채택하고 있는 서방 교회(천주교와 개신교)와 달리 동방 교회는 율리우스력을 교회력으로 쓰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성탄절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로, 이는 그레고리력으로 1월 7일이다. 《시간의 지도 달력》 E.G.리처즈 지음, 이민아 옮김, 까치, 2003 중 "제16장, 로마력과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 율리우스일 베르베르력 분류:태양력 분류:율리우스 카이사르 분류:이탈리아의 발명품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 , 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부는 원래 농노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로크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로크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호프은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로크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타간로크에서 받는 장학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그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은 문학잡지 《귀뚜라미( Strekoza )》, 《파편( Oskolski )》, 《자명종( Budilnik )》,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 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그 해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하게 되었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 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1888)이나 (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1899), (1901), (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는 앞서의 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나 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Sočinenija (작품), 10권, 편집 A. f. Marks, 1899-1902, 페터스부르그 (최초의 안톤 체호프 전집). 30권 전집, 편집 Belčikov, D. D. Blagoj, G. A. Bjalyj, A. S. Majsnikov, L. D. Opulskaja, A. I. Revjakin, M. B. Chrapčenko, 1974ff. 모스크바. 단편 〈관리의 죽음〉(1883) 〈우수〉(1885) 〈키스〉 〈사랑에 대하여〉 〈귀여운 여인〉(1898) 〈약혼녀〉(1902) 〈개를 데리고 있는 여인〉(1899) 〈카멜레온〉(1884) 〈초원〉(1888) 〈6호 병실〉 (1892) 〈사할린 섬〉(1890) 〈아리아드나〉 〈결투〉(1892) 극 《이바노프》 《갈매기》(1896) 《세 자매》(1901)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1903) 《곰》 분류:1860년 태어남 분류:1904년 죽음 분류:러시아의 소설가 분류:러시아의 저술가 분류:러시아의 극작가 분류:러시아의 무신론자 분류:단편소설가 분류:실증주의자 분류:로스토프주 출신 분류:모스크바 대학교 동문 분류: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분류:러시아 제국 사람 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
400px 미토콘드리아 (), 고대 그리스어 mitos 끈 + chondros 낱알)는 진핵생물에서 산소 호흡의 과정이 진행되는 세포 속에 있는 중요한 세포소기관으로, 한자 표기로는 사립체 (絲粒體) 또는 활력체(活力體)라고도 한다. 미토콘드리아라는 이름은 아래의 모식도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겉모양이 낱알을 닮고 내부 구조가 마치 끈을 말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본적인 기능이 여러 유기물질에 저장된 에너지를 산화적 인산화 과정을 통하여 생명활동에 필요한 아데노신삼인산(ATP)의 형태로 변환하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발전소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25%의 세포질을 차지하고 있으나 그 크기와 수가 세포의 종류와 역할에 따라 다양하다. 자체적인 DNA(미토콘드리아 DNA)와 RNA를 가지고 있어 세포질 유전에 관여한다. 자체적인 DNA의 존재와 이중막 구조는 미토콘드리아뿐만 아니라 엽록체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오래전 세균에 의한 세포내 공생의 결과로 진핵생물의 탄생이 이루어진 데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미토콘드리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것이 있다는 사실이 전자 현미경의 연구로 알려져 있으나, 광학 현미경에서는 아주 작은 과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세포 내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수는 세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많은 수가 존재한다. 전자 현미경에 의한 관찰에 따르면, 미토콘드리아는 바깥쪽을 둘러싸는 막질 부분과 내부로 이루어져 있다. 막 부분은 외막과 내막의 이중막으로 되어 있는데, 내막의 일부는 안쪽으로 돌출하여 여러 겹으로 접혀 있다. 이렇게 접혀 있는 내막의 구조를 ‘크리스테(cristae)’라고 한다. 미토콘드리아에는 TCA회로나 전자 전달계에 관여하는 모든 효소가 들어 있다. 따라서, 미토콘드리아는 세포내 호흡에 의해 유기물의 화학에너지를 ATP로 바꾸는 중요한 기관이다. (numbers version).svg|섬네일|미토콘드리아의 구조 1. 외막 2. 막 사이 공간 3. Intercristal space 4. Peripheral space 5. 라멜라 구조 6. 기질 7. 크리스타 구조 8. 내막 9. Inner boundary membrane 10. Cristal membrane 11. Mitochondrial DNA 12. Matrix granule 13. 리보솜 14. ATP 합성 효소 15. Porin 미토콘드리아는 세포막과 같은 형태이며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는 인지질 2중층으로 이루어진 내막과 외막을 가지고 있다. 외막과 내막의 기능은 각각 다르다. 미토콘드리아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무게 기준으로 인지질과 단백질이 반반씩 구성하고 있다. 포린(porin)(2~3 nm 정도 크기의 비교적 큰 내재성단백질(integral proteins))이 많이 있는데 이 포린은 5000D(달톤)이하인 분자가 투과할 수 있는 통로(channel)이다.Alberts, 1994 5000D보다 큰 분자들은 능동수송에 의해서만 외막을 통과할 수 있다. 지방산의 탄화수소부분의 합성/신장, 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의 산화, 트립토판의 분해등의 기능에 관련된 다양한 효소들이 이러한 능동수송 과정에 작용한다. 4가지 종류의 기능을 가진 단백질(효소)을 가지고 있다.(Alberts, 1994) # 산화효소 세포호흡 # ATP 생성효소:아데노신삼인산/ATP생성 # 내막 안팎으로의 대사물질운송 # 단백질 수송 내막은 구불구불 접혀져 있기 때문에 막 표면적이 넓어져 ATP생성 능력을 높여준다. 이러한 내막이 늘어난 부분을 크리스테라고 하고, 이런 구조형태를 크리스테 구조 라고 한다. 예를 들어 간의 미토콘드리아는 크리스테를 포함한 내막 표면적이 외막의 5배에 달하며 근육세포와 같이 더 많은 ATP를 요구하는 세포의 경우 간세포의 경우보다 더 많은 크리스테를 가지고 있다 기질은 내막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미토콘드리아, 리보솜, tRNA, DNA, 게놈의 복사본과 수백 가지의 효소가 존재하고 있다. 효소들의 기능은 지방산과 피루브산의 산화, TCA회로를 포함한다.(Alberts, 1994) 미토콘드리아는 자체적인 유전물질을 가지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RNA와 단백질을 만들 수 있다. 핵에서 유래하지 않은 미토콘드리아 DNA는 내막을 구성하는 펩티드(사람에서는 13개의 펩티드)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자체 생성된 펩티드는 숙주세포의 핵에서 유래한 폴리펩티드와 함께 미토콘드리아 막을 구성한다. cell.svg|섬네일|300px|동물세포의 세포소기관 구성. 세포소기관 (1) 인(nucleolus) (2) 세포핵 (3) 리보솜 (4) 소낭(vesicle) (5) 조면 소포체 (RER) (6) 골지체 (7) 세포골격 (8) 활면소포체(SER) (9) 미토콘드리아 (10) 액포(vacuole) (11) 세포질 (12) 리소좀 (13) 중심체 미토콘드리아의 기본적인 기능은 유기물질을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 형태인 ATP로 전환하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의 일부 기능은 특정한 세포에서만 수행된다. 예를 들어 간세포의 미토콘드리아는 단백질 대사의 부산물인 암모니아를 해독하는 효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의 변이는 여러 가지 미토콘드리아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의 주 기능은 ATP의 생산으로 해당과정(미토콘드리아의 바깥쪽 세포질에서 이루어진다)의 주생산물인 피루브산과 NADH 대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ATP의 생성은 세포의 유형이나 산소의 존재유무에 따라 2 가지 방법이 있다. 피루브산 TCA회로(tricarboxylic acid cycle) 해당과정에서 생성된 피루브산 분자는 능동수송에 의해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거쳐 기질로 들어간다. 기질에 들어간 피루브산은 coenzyme A에 결합해 acetyl CoA를 생성하고 생성된 acetyl CoA는 TCA회로(구연산회로 또는 Krebs 회로)로 들어가게 된다. 1개의 피루브산에 의해 3개의 NADH와 1개의 FADH2가 생성되어 전자전달계에 관여하게 된다. 미토콘드리아 내막에 붙어있는 숙신산 탈수소효소(succinate dehydrogenase)를 제외하고 TCA회로에 관여하는 모든 효소는 미토콘드리아 기질에 녹아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에너지 요구에 반응하여 DNA를 복제하고 분열한다. 세포의 에너지요구량이 높아지면 미토콘드리아는 신장하여 분열하며 에너지 요구량이 낮아지면 미토콘드리아는 파괴되거나 불활성화 상태가 된다. 세포가 분열할 경우 세포질의 분배가 다소 불균등하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의 분배 또한 균등하지 않다. 미토콘드리아는 세균과 같이 이분법으로 자신을 복제하지만 세균과는 달리 미토콘드리아끼리 융합하기도 한다. 때로는 단백질과 폴리리보솜이 많은 곳에서 새로운 미토콘드리아가 생기기도 한다.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는 핵의 유전자와 같은 방법으로 유전되지 않는데, 정자에 의한 난자의 수정에서 난자의 핵과 정자의 핵이 동등하게 수정란의 세포핵유전자에 기여하는 반면 미토콘드리아는 난자의 것만 유전된다. 난자에 수정되는 정자는 단 1개뿐이며 정자의 미토콘드리아는 편모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내는 데 사용되다 난자에 들어오게 되면 이내 파괴되게 된다. 반면 난자 자체는 정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미토콘드리아를 가지고 있지만 살아남아서 분열을 계속하여 성체의 세포에 존재하게 된다. 즉 미토콘드리아는 거의 대부분 모계(母系)유전하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DNA의 모계유전(maternal inheritance)은 동물을 포함 대부분의 진핵생물에서 볼 수 있다. 드물게 부계유전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침엽수(소나무와 주목 제외)에서 흔하게 나타나며, 인간의 경우 아주 낮은 확률로 나타난다고 한다. 단일계통 유전은 서로 다른 미토콘드리아 계통 간의 유전자 재조합 가능성이 낮고 미토콘드리아 DNA가 대체로 클론임을 의미한다. 만약 유전자 재조합이 없다면 모든 미토콘드리아 DNA는 일베체형nomuhyun)에 서두 동일하기 때문에 집단의 진화적 역사를 연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미토콘드리아 DNA 재조합 이 일어나기도 한다. 미토콘드리아는 미토콘드리아가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정세균 무리보다 무척 적은 규모의 게놈을 가지고 있다. 일부는 소실된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수가 세포핵으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진화적으로 볼 때 비교적 일반적으로 보인다. 미토콘드리아의 단일계통 유전은 일부 효모종의 미토콘드리아의 Petite 돌연변이(자신의 DNA 일부 또는 모두를 잃어 산화적 인산화를 못하는 비정상적인 미토콘드리아 돌연변이. petite와 정상적인 효모사이의 융합이 일어나게 되면 딸세포의 일정 비율은 petite가 됨.)에서 볼 수 있듯이 유전자 간 분쟁(intragenomic conflict)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포소기관의 분쟁은 남성과 여성의 분화로 해결할 수 있으며 유전자간 분쟁은 성의 분화가 일어난 원인 중 하나로 생각된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유전자 재조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집단 유전학이나 진화 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반수체의 형태, 즉 거의 대부분 모계로부터 유전되기 때문에 다른 개체간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관계는 계통수(系統樹, phylogenetic tree)로 나타낼 수 있으며 미토콘드리아 DNA의 유형분석을 통해 집단의 진화역사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인간 진화 유전학에서 대표적인 예가 아프리카기원설(인류 최초의 여성조상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추적)과 네안데르탈인 연구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토콘드리아는 거의 모계로만 유전되어 재조합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최초의 여성인류를 추적할 수 있다. 모든 인류에게서 미토콘드리아 DNA 유형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경우 해부학적으로 현생인류와 공통점이 없어 현생인류의 조상인지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 현생인류와 연관성이 없음이 밝혀져 네안데르탈인 후예의 존재여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끔 하였다. 그러나 미토콘드리아 DNA는 집단에서의 여자(모계)쪽의 역사만을 반영하기 때문에 전체 군집의 역사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인구의 분산이 주로 남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미토콘드리아 연구로는 알아내지 못한다. Y염색체(포유동물에서 재조합이 없는 영역)를 포함한 핵DNA연구(재조합으로 분석하기가 힘듦)로 보다 넓은 범주의 집단의 진화적 역사를 연구한다. 미토콘드리아는 리보솜과 GOZA를 가지고 있고 스스로 분열할 수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생활을 하던 원핵생물의 세포 내 공생으로 유래했다고 본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원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대체로 원형이고 여러 유전정보를 담고 있어 원시세균 무리 중 특수하게 분화된 것이 원시 미토콘드리아로 되었다는 가설도 있고(Futuyma 2005), 리케차(rickettsia)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지만 세포내 공생에서 유래했다 점에서는 동일하다. 세포 내 공생에 관해서도 기생에 의한 것이라는 이견도 있지만 숙주의 내포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원시 미토콘드리아의 숙주세포 내 공생으로 숙주는 세포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같은 영양을 공급받더라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원시 미토콘드리아는 생존을 보장받고 양질의 양분(당)을 공급받게 되어 상호간의 상승작용이 일어나 생존할 수 있는 영역의 확장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미토콘드리아뿐만 아니라 엽록체 또한 세포내 공생으로 상승작용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적어도 20억 년 전 세포공생이 이루어졌다고 추측되는 미토콘드리아는 아직도 그 기원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첫째, 미토콘드리아는 진핵세포(80S 리보솜)와 달리 원핵생물과 유사한 70S(침강계수, sediment coefficient)리보솜을 가지고 있다. 둘째, DNA가 원핵생물과 유사하다. 반복구간이 없이 코딩DNA비율이 높고 대체로 인트론(intron)이 없으며 원래 원핵생물보다 적은 유전정보를 담고 있지만 직선이 아닌 원형DNA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 미토콘드리아는 인트론이 거의 없고 반복구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형 mRNA를 잘라 다시 접합(polyadenylation)하여 완성된 mRNA를 만드는 다인자 전사(multigenic transcript)를 한다. 일부 진균(microsporidian)이나 원생생물(metamonad, entamoebid, 독립영양 pelobiont)과 같은 진핵생물에서는 미토콘드리아가 없는 경우도 있다. rRNA계통수에서 이들은 매우 원시적인 진핵생물로 여겨지며 미토콘드리아의 세포공생 이전에 출현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미토콘드리아에 의해 유도된 세포소기관 과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으므로 실제로 미토콘드리아가 없는 진핵생물은 없다고 봐야한다. 결론적으로 미토콘드리아의 존재는 진핵생물의 발달에서 중요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물질대사(신진대사) * 동화작용( Anabolism) * 이화작용( Catabolism) 화학삼투설 엽록체 전기화학 퍼텐셜 세포공생설 해당과정 미토콘드리아 질병 미토콘드리아 DNA 미토콘드리아 유전학 미토콘드리아 투과성 변이공(Mitochondrial permeability transition pore, Mt PT pore) 생활습관병 대사 증후군(메터볼릭 신드롬) 만성 피로 증후군(CFS) 당뇨병(DM) 인슐린 민감성(IS) VS 인슐린 저항성(IR) 미토콘드리아 전자 절편구조(영어) 미토콘드리아 노화에 관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동영상(영어) 미토콘드리아에 대한 전반적인 논평(영어) 미토콘드리아 구조가 기능을 말한다.(영어) 세포생물학에서 미토콘드리아(독일어) 미토콘드리아 도감(영어) 여러 가지 관련 문서들(영어) 미토콘드리아와 마음의 발달(한글) 미토콘드리아와 한민족의 기원(한글) 분류:세포소기관 분류:세포 호흡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독일어 Vorsokratiker, 영어 Presocratics)란 문자 그대로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를 한데 묶어서 쓰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처음 독일의 고전 문헌학자 헤르만 딜스가 이들 철학자의 단편들을 한데 모아 엮은 책의 제목에서 비롯된다. 그 뒤,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독일어를 직역하여 그대로 쓰고 있으며, 오늘날 서양 철학사에서 굳어진 낱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흔히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하며, 또는 그들이 태어난 지방의 이름을 따서 이오니아, 엘레아 철학자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에 대한 중요한 분석들은 그레고리 블라스토스, 조너선 번스, 고든 클라크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에 의해 다루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중요한 문헌들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그 문헌들이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후대의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의해 인용되었던 것들과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들뿐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그들 주위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신화적 해석들을 거부했으며, 대신 좀 더 이성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물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만물은 무엇으로부터 창조되었는가?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물들의 다수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자연은 수학적으로 어떻게 기술해야 하는가? 일부는 나중에 수학적, 과학적 그리고 철학적 연구의 기초가 되는 문제들과 역설들을 정의하는 데 집중했다. 물론, 초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우주론은 근대 과학에서 기초된 관점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내놓은 대답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물었던 질문들은 이후 철학자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관계를 표시한 도표, 붉은 선은 서로 상반되는 철학을 표현함. 밀레토스 학파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 :필롤라오스 :알크마이온 :아르퀴타스 :티마이오스 헤라클레이토스 엘레아 학파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엘레아의 제논 :멜리소스 다원주의 학파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원자주의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궤변론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트라시마쿠스 :칼리클레스 :크리티아스 :프로디코스 :히피아스 :안티폰 :리코프론 디오게네스 딜스-크란츠 번호 , 김인곤 외, 아카넷, 2005.
헤라클레이토스 (Heraclitus of Ephesu, , 기원전 6세기 초 - ?)는 고대 그리스의 이른바 전소크라테스 철학자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출생 연대는 매우 불확실하다. 기원후 3세기에 쓰여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전기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기원전 504년 경에 이른바 아크메(Akme, 사람이 가장 많이 활동하는 나이, 40대)에 접어 들었다고 하며, 에페소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밖에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애에 관해 오늘날 전해지는 일화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글을 자주 씀으로써 이미 고대에 어두운 철학자 (Skoteinos)로 이름이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플라톤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하다. 그 어떤 것도 안정되거나 머물러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성, 변화"를 중요시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을 구성하는 변하지 않는 그 무엇(원질)이 불 이라고 주장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 경험세계에 대한 형식적 통일에 대해 우려 감각을 완전히 무시는 안했지만 그것을 신중히 써야한다. 평형은 대립적인 요소가 서로 투쟁하여 균형을 유지 그는 "이 세계는 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인간이 만든 것 또한 아니다. 언제나 살아 있는 불로서 정해진 만큼 연소되고 정해진 만큼 꺼지면서 언제나 있었고 또 있으며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라면서 세계의 원질을 불에 비유하였다. 또한 "만물은 움직이고 있어서 무릇 모든 것이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도 두번 다시 같은 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만물이 유전(流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善)도 악(惡)도 하나인 것이다. 위로 향하는 길이나 아래로 가는 길도 다 같이 하나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생(生)과 사(死), 각성(覺醒)과 수면(睡眠), 젊음과 늙음의 양상도 모두 같은 것이다. 이것이 전화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전화하여 이것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생성의 원리로서 "대립" 또는 "다툼"을 제시하였다. 그는 "여기에 말해 둔 것은 항상 그대로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비로소 그것이 들려와도 들리지 않던 전과 다름이 없다. 만물의 생성이 여기에 말해 둔 대로 행해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런 범례(範例)를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말에도 행동에도 그런 범례는 마땅히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로고스(logos)의 개념을 제시하여 감관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헤겔 이후 재조명 받았고 흔히 존재에서 생성으로 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철학의 전회에 따라 영향권이 확장되고 있다. 니체, 베르그송, 들뢰즈 등 현대의 거장들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현저하다. 또한 운동/생성에 대한 고찰이 유사한, 노장철학과 중국철학과의 연관성으로 동양철학에서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 네이버캐스트 분류:기원전 6세기 태어남 분류:기원전 5세기 죽음 분류: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분류:고대 그리스의 물리학자 분류:자연철학자 분류:형이상학자 분류:고대 에페소스인 분류:부종으로 죽은 사람 분류:기원전 6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6세기 철학자 분류:기원전 5세기 철학자 분류:플라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1865년 6월 13일 ~ 1939년 1월 28일)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19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노벨 위원회는 "고도의 예술적인 양식으로 전체 나라의 영혼을 표현한, 영감을 받은 시"라는 평가를 남겼다. 아일랜드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예이츠는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완성해 낸 몇 안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예술가인 잭 버틀러 예이츠의 형이며 존 버틀러 예이츠의 아들이다. 더블린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유년시절은 슬라이고 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에 시를 공부했고, 어렸을 때부터 아일랜드의 전설과 신비주의 모두에 매료되었다. 두 가지 주제 모두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으며, 이후 세기가 바뀔 때인 1900년 무렵 까지도 그의 작품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 가 처음으로 낸 시집은 1889년에 출간되었고, 그 시집에 담긴 시들은 느리고 서정적이었는데 이러한 표현은 라파엘 전파의 서정시와 마찬가지로 영국 시인 두 사람 곧 에드먼드 스펜서와 퍼시 비시 셸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예이츠 화가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화가를 지망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뒤늦게 시를 쓰기 시작하여, 1889년 처녀 시집 을 발표하여 와일드 등 유명한 시인들에게 절찬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낭만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점차 상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세워지자 원로원 의원으로 정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국민 극장 창설에 앞장섰다. 대표작으로 시집 과 희곡집 등이 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 는, 윌리엄마이트 군의 군사이자 리넨 상인이었다가 1712년 세상을 떠난 저비스 예이츠의 자손이었다. . 저비스 예이츠의 손자 벤저민은 킬데어의 부유한 지주의 딸인 메리 버틀러와 결혼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부친인 존은 결혼할 당시에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곧 런던의 헤더리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법률 공부를 중단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모친인 수전 메리 폴렉스핀은 슬라이고에서 제분업과 운송업으로 성공한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윌리엄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가족은 외갓집과 함께 지내기 위해 슬라이고로 이사하는데 그 곳은 어린 시인의 가슴 속에 어린 시절 속 공간일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집으로 남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라이고는, 사실로써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예이츠에게 “마음속의 고향” 이 된다. 버틀러 예이츠 가족은 무척 예술적인 집안이어서, 그의 남동생 잭은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누이 엘리저베스와 수전 메리(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들을 롤리와 릴리라고 불렀다)는 미술 공예 운동에 가담하였다. 예이츠가 어렸을 때, 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 우위(Protestant Ascendancy)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급격한 시대 변화로 인해 개신교 신자였던 예이츠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에 벌어지는 변화에는 전반적으로 찬성했지만 19세기 민족주의의 부활로 인해 재산에 피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예이츠의 인생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7년, 예이츠의 전기집을 쓴 포스터(R. F. Foster) 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20세였을 당시의 세상을 이해해야한다는 나폴레옹의 말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경우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라고 했다. 개신교 신자가 권력을 잃어가면서 예이츠의 어린 시절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1880년대에는 정치가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이 권력을 얻으면서 홈룰 운동(아일랜드의 토지를 영국계 지주들의 손에서 되찾아내려는 운동)이 널리 유행했고 1890년대에는 민족주의가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세기말에는 가톨릭 신자가 기득권층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예이츠의 시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그의 국가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67년, 예이츠의 부친 존이 영국에서 예술 공부를 계속하기를 원하자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한다. 예이츠의 부모는 처음에 아이들을 집에서 교육하였다. 예이츠의 모친은 아이들에게 아일랜드 전래동화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부친은 예이츠를 슬라우 지역으로 데려가 자연사 탐구를 도우면서, 독특한 지리와 화학 교육을 제공하였다. 1877년 1월 26일, 어린 시인은 고돌핀 학교에 입학해 4년 동안 학교를 다닌다. 예이츠는 학업 면에서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으며, 그의 담임교사는 성적표에 “나쁘지 않은 수준. 다른 과목보다는 라틴말에 능한 듯함. 철자법에 매우 취약함.”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예이츠는 수학과 언어 공부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마 그가 음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물과 동물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80년 말, 예이츠의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더블린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의 가족은 처음에는 도심에서 살다가 후에 호스 시 교외로 이사했다. 1881년 10월, 예이츠는 더블린에 위치한 에라스무스 스미쓰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재개한다. 부친의 화실이 학교 주변에 위치했던 덕분에 예이츠는 많은 시간을 화실에서 보냈고 도시의 유명한 화가들과 작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즈음, 그는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1885년 예이츠의 초기 시들과 라는 제목의 수필집이 더블린 대학 논평지(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1884년에서 1886년까지, 예이츠는 토마스 거리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현 국립 예술 디자인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의 초기작품들은 그가 17살이었을 때 지어졌는데 그중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왕위에 오르는 마법사에 관한 시(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가 있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지은 다른 작품에는 어느 양치기에게 이교도로 고소당한 여인, 주교, 그리고 수사에 관한 연극을 비롯해 사랑과 관련된 시, 그리고 중세시대 독일 기사에 관한 설화시 등이 있다. 그의 초기작들은 지극히 평범했고, 비평가 찰스 존슨(Charles Johnson)의 말에 따르자면 “아주 아일랜드답지 못하고 그에게 속삭이는 꿈이라는 어둠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이 셸리,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그리고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시의 구절들과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에 반해, 예이츠가 이후에 지은 작품들은 아일랜드의 전설과 전래동화,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영향을 받았다. 예이츠는 후에 블레이크를 “인간들에게 위대한 진실을 전달해 준, 위대한 조물주 중 하나”라고 칭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1891년, 예이츠는 과 를 출판했는데 전자는 중편소설이었고, 후자는 짧은 이야기였다. 두 작품은 더블린의 더 릴리풋 프레스(The Lilliput Press)에서 1990년 재출판 되었다. 예이츠의 가족은 1887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1890년에 예이츠는 플릿 스트릿(Fleet Street) 술집에서 정기적으로 시낭송을 하면서 알게 된 런던 시인들 중 한 명인 어니스트 리스(Ernest Rhys)와 라이머클럽(Rhymers Club)을 공동설립하였다. 이 때 발표한 작품들은 훗날 라는 이름으로 1892년 첫 번째, 1894년에 두 번째 작품집이 출판되었다. 그는 에드윈 엘리스(Edwin Ellis)와 함께 처음으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작품집을 완성시키면서, 잊혀진 시 를 재발견하게 된다. 훗날 셸리(Percy Bysshe Shelley)에 대한 에세이에서 예이츠는 “를 다시 읽어보았다. 신성하다고 여겼던 그 어떤 책들보다도 훨씬 확고한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라고 썼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그린 1900년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초상 예이츠는 평생 신비주의나 심령론, 점성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생동안 광범위한 주제의 글들을 읽고 초자연현상 연구단체인 회원이 되었는데, 특히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의 글에 영향을 받았다. 1892년 초에 예이츠는 “내가 신비로운 힘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블레이크집에 단 한 단어도 쓸 수 없었을 것이며, 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비로운 인생이야말로 나의 모든 행동과,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글의 중심이다.”라고 저술했다. 신지학자인 모히니 채터지(Mohini Chatterjee)가 연구했던 힌두교, 그리고 신비주의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이츠의 그러한 관심은 훗날 그의 작품에서 큰 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은 지적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영향력을 무시하고 있다. 특히 위스턴 휴 오든(W.H. Auden)은 이러한 면에 대해 “다 큰 성인이 뻔한 마술과 쓸데없는 인도(India) 의식에 사로잡혀 우스운 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처음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를 시적 모델로 한 판타지 작품 이었다. 이 작품은 더블린 대학 논평지(Dublin University Review)에 실렸으나 그 이후 재출판되지는 않았다. 첫 단독 출판집은 (1886)라는 소논문으로, 예이츠의 부친이 돈을 들여 100부를 인쇄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1889년에는 그가 1880년대 중반에 지었던 시들을 모아 라는 작품집을 발행하였다. 예이츠 전기작가인 포스터(R. F. Foster)는 이 긴 제목의 시집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일(Gael)식 이름, 두드러지는 반복기법, 끊어짐 없는 운율이 세 단락에 걸친 이 시들에 미묘한 변화를 준다.”라고 말했다. 는 아일랜드 신화 중 피니언 편(Fenian Cycle)의 구절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무엘 퍼거슨 경과 라파엘 전파 시인들로부터 받은 영향 또한 드러내고 있다. 완성하기까지 2년이 걸린 이 시는 그가 아직 미성숙했던 시절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훗날 예이츠가 다룬 가장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행동하는 삶을 넘어 명상하는 삶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 이후에 예이츠는 더 이상 장편시를 쓰지 않았다. 사랑 또는 신비롭고 난해한 주제에 대한 명상을 담은 초기 시들로는 , , 이 있다. 1885년에 예이츠는 더블린 연금술회(Dublin Hermetic order) 창립에 합류하게 되었다. 6월 16일에 열린 첫 번째 회의에서 예이츠는 의장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신지학협회 (Theosophical Society) 런던지회에 강의를 하러 온 체터지와 공동으로 더블린 신지학회 지부(Dublin Theosophical lodge)를 열었다. 다음 해에 예이츠는 그의 첫 강신회에 참여하였다. 훗날 신지학협회와 신비학, 특히 황금여명단(Golden Dawn)의 장미 십자회 이념이 접목된 신비학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12년에 열린 강신회에서는 자신을 ‘레오 아프리카누스(Leo Africanus)’라 칭하며 예이츠의 수호신 또는 반(反)자아라고 주장하는 혼령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산문집이 이다. 예이츠는 1890년에 황금여명단에 정식으로 가입되어 Daemon est Deus inversus(‘악마는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뜻) 라는 마법명을 받았다. 이 이시스 우라니아(Isis-Urania) 종단 사원의 열렬한 전도자였던 예이츠는 그의 숙부인 조지 폴렉스펜(George Pollexfen)과 모드 곤(Maud Gonne), 플로렌스 파르(Florence Farr)를 입단시켰다. 그는 비록 개인숭배가 저변에 깔린 추상적이고 독단적인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는 있었지만 황금여명단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매력을 느꼈다. 예이츠는 플로렌스 파르, 맥그리거 매터즈(Macgregor Mathers)와 함께 협회의 권력 투쟁에 가담하였으나, 블리스 로드 사건(Battle of Blythe Road)이 있던 당시 매터즈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를 퇴출시키고 황금여명단의 소유물들을 독점하도록 하는 데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황금여명단이 해체되어 여러 분파로 나뉜 후에 예이츠는 1921년까지 샛별회(Stella Matutina)에서 활동하였다. 1916년, 51세가 되던 해에 예이츠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그는 1916년 여름에 모드 곤(Maud Gonne)에게 마지막으로 청혼을 했다. 곤의 정치 혁명 활동 경력과 클로로포름 중독, 1916년 부활절 봉기사건에 연루되어 훗날 영국군에게 처형당한 존 맥브라이드(John MacBride)와의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 등 그녀에게 있었던 최근 몇 년간의 개인적인 재앙들 때문에 그녀는 부적절한 아내로 여겨졌다. 전기작가인 포스터(R.F. Foster)는 예이츠의 마지막 청혼은 모드 곤과 결혼하려는 진심어린 마음 보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앨빈 랭던 코번(Alvin Langdon Coburn)이 찍은 예이츠 예이츠는 조건을 붙여서 무관심한 태도로 청혼했으며, 내심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랐다. 포스터(R.F. Foster)에 따르면 그가 의례적으로 모드에게 청혼하고 의례적으로 거절당했을 때, 그의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녀의 딸에게로 옮겨갔다.” 이조 곤(Iseult Gonne)은 당시 21세로 모드가 루시앙 밀레보이예(Lucien Millevoye)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이였다. 그녀는 그 때까지 슬픈 삶을 살아왔다. 짧은 생을 살고 간 그녀의 오빠를 환생시키려는 시도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몇 년 동안은 그녀의 엄마의 입양된 조카로 소개되었다. 그녀는 11세에 계부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위해 총기 밀반입자로 일했다. 15세 되던 해, 그녀는 예이츠에게 청혼을 했었다. 그리고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접근한지 몇 개월 후에 이조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해 가을, 예이츠는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소개로 만난 25세의 조지 하이디 리즈(Georgie Hyde-Lees, 1892-1968)에게 청혼했다. “조지, 안돼. 그 사람은 곧 죽을 노인이야.”라는 그녀의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이디 리즈는 청혼을 받아들였고, 그 해 10월 2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나이차이와 예이츠가 신혼여행 도중 품었던 후회와 회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생활은 성공적이었다. 부부는 안느(Anne)와 마이클(Michael) 2명의 자녀를 낳았다. 비록 나중에 예이츠가 다른 여성들과 불륜관계를 맺었을 때라도 조지는 그녀의 남편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이 죽은 후에 사람들은 당신의 불륜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거에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에요. 왜냐하면 난 당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람인지 기억하고 있을테니까요.” 그의 결혼생활 초반에 예이츠와 조지는 사이코그래프법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안에서 조지는 그들이 “선생님”라고 부르는 다양한 영혼, 안내자들과 소통했다. 영혼들은 글자와 역사에 관한 복잡하고 난해한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했고, 부부는 이를 무아지경(최면상태)의 환경과 단계, 원뿔, 나선형에 대한 설명을 통한 실험을 하면서 발전시켰다. 예이츠는 이 내용을 《비전》(1925)으로 출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24년에 그는 자신의 출판인인 워너 로리(T. Werner laurie)에게 “나는 아마 이 책이 내 책 중의 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고 인정하는 글을 썼다.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of William Butler Yeats in Drumcliff 예이츠는 20세기 영시 작가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상징시를 즐겨 지었는데 작품 속에서 사물을 암시적으로 형상화시키거나 상징적 구조를 주로 사용했다. 그는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에서 표면적 의미 이상의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사용한 상징은 대부분 그 자체로서의 의미와 더불어 무형적이고 영원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들이었다. 다른 모더니즘 작가들이 자유시 창작을 시도한 것에 반해 예이츠는 기존 문학 양식의 대가로서 문학 양식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그 또한 모더니즘 사조의 영향을 받아 차츰 종래의 시어법에서 벗어나 소박한 언어와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서술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의 중기 작품인 《일곱 개의 숲에서》(In the Seven Woods), 《책임》(Responsibilities), 《초록 투구》(The Green Helmet) 등에 두드러진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는 보다 개인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가 사망하기 20년 전에 지어진 작품들에서는 그의 아들과 딸에 대한 언급이나 늙음에 대한 사유가 드러난다. 《서커스 동물들의 탈주》(The Circus Animals Desertion) 이라는 시에서 예이츠는 후기 작품 창작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이츠는 1919년 이래로 골웨이 주 고트 인근의 투르 발릴리(Thoor Ballylee) 탑 (위도53°06 11.4", 경도08°46 29.2") 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다가 1929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그 여름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이츠는 1932년 더블린 근교 래스파에서 리버스데일(Riversdale) 휴양지를 임대해 머물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발자취는 주로 아일랜드 외부에 남겨져 있다. 그는 말년에 창작활동에 주력하면서 많은 운문, 연극, 산문시 등을 발표했다. 1938년, 예이츠는 그의 희곡 《연옥》(Purgatory) 의 첫 공연을 감상했다. 같은 해에 그는《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자서전》(Autobiographies of William Butler Yeats) 을 완성했다. 예이츠의 초기 작품 중 대부분이 아일랜드 전설과 민담을 소재로 삼은데 반해 그의 후기 작품은 보다 현실과 관련된 사항을 다루고 있는 만큼 예이츠의 초기 문체와 후기 문체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이츠의 작품은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 작품은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어조와 함께 화려한 수식을 특징으로 삼으며, 인정없는 비평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격식을 갖추고 있다. 예이츠의 초기 시에는 서사시인 《오이진의 방랑기》(The Wanderings of Oisin)이나 《아일랜드의 위상》(The Isle of Statues) 이 있다. 《오이진의 방랑기》는 예이츠가 남긴 유일한 장편시이다. 그의 다른 초기작품에는 사랑이나 몽환적 주제에 관한 서정시가 있다. 중기 작품을 창작할 때 예이츠는 초기 시의 라파엘 전파적 경향을 떨쳐내고 새로운 특징의 시를 짓는다. 그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던 여성적이고 우미하던 스타일은 딱딱하고 건조한 남성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환상적이던 심상은 금속적이라 할 만큼 구체성을 지닌 심상으로 전화한다. 예이츠의 중기 작품을 좋아한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리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모더니즘적이라고 평가한 반면, 그의 작품을 비방한 비평가들은 시적 형상화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들에는 시인이 강신론의 영향을 받아 얻은 창의적인 영감이 잘 드러난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후기 작품들은 초기 작품들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는데 예이츠의 초기 작품인《오이진의 방랑기》에서 다뤄졌던 세속적인 기사와 종교적인 성직자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후기 작품《영혼의 대화》(A Dialogue Between Self and Soul)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 어떤 비평가들은 미술 분야의 파블로 피카소와 비슷하게 시 분야에서는 버틀러 예이츠가 19세기에서 20세기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평가하지만, 예이츠가 정말로 T.S. 엘리엇 (T. S. Eliot) 이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와 더불어 모더니즘 작가로 인정받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더니즘 작가들은 《재림》(The Second Coming) 이 예이츠가 엘리엇의 모더니즘을 모방해 유럽에서 문명이 쇠퇴함에 따라 바치는 장송곡이라고 평가했지만 훗날의 비평가들은 이 시가 예이츠의 종말론 이론에 관한 시이기 때문에 1890년 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내렸다. 예이츠의 작품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그가《초록 투구》(1910) 와《책임》(1914)를 짓기 시작했을 때이다. 시인이 늙어감에 따라 그의 시 속 심상은 강력해져가서《탑》(The Tower) (1928),《나선 계단》(The Winding Stair) (1929), 그리고《새 시들》(New Poems) (1938) 은 20세기 시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심상을 이용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신지학과 주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예이츠의 환상적 경향 은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시를 보고 지적 신뢰도가 낮아졌다고 평가했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 드러나는 형이상학은《환상》(A Vision) (1925) 에 나타난, 소수의 사람들만 공유했던 근본과 연관되어 해석돼야 한다. 예이츠가 1920년 쓴 《재림》은 20세기 창작된 시 가운데 시적 형상화가 무척 두드러지는 시이다. 이 시에서 “선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물질주의의 바람 앞에서 전통 문화를 지키는데 무능력했던 기존의 기득권층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역사는 반복되고 당시 사회는 순환하던 역사가 마무리되고 새롭게 기독교가 성장하는 시대였다는 예이츠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이츠는 19세기 말의 아일랜드 연극운동의 주요한 추천자이기도 했다. 1904년에 설립된 더블린의 애비 극장이 초기의 곤란을 극복하고 존속한 것은 예이츠의 작가로서의 재능과 지도자로서의 통솔력이 크게 기여했었다. 그러나 근대극에서의 예이츠의 참된 공헌은 사실주의로 덮여 있던 연극에 시극(詩劇)을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예이츠의 초기의 시극 (1894), (1899), (1897-1906) 등은 관객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이며, 계속되는 (1903), (1903), (1907)에서는 극적 수법에 진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농민극(農民劇)이나 아일랜드 전설에 의거한 영웅극도 썼다. 만년의 작품에서는 예이츠 시극의 특징인 단순한 표현에 포함되는 사상의 심원(深遠)함이 관객의 지성(知性)과 상상력에 가장 강하게 의존하는 형태로 정점에 이르렀다. (1934), (1938)이 그 대표작이다. 예이츠에 대한 예일대학 강좌 audio, video and full transcripts from Open Yale Courses 예이츠 서머 스쿨, 슬리고 NY 예이츠 학회 The National Library of Ireland s exhibition, Yeats The Life and Works of William Butler Yeats Podcast Paul Muldoon on W.B. Yeats Yeats Leda and the swan an image s coming of age Gallery of Locations of Yeats Poems and his Grave The Yeats theatre, an introduction to his life and work W. B. Yeats and A Vision provides outline and analysis of Yeats s esoteric system The 1911 Census return lists W.B. Yeates (sic) and Lady Gregory boarding in South Frederick Street, Dublin BBC discussion on Radio 4 programme In our time . "Yeats and Irish politics and "Yeats and mysticism". Both 45 minutes. 분류:1855년 태어남 분류:1939년 죽음 분류:아일랜드의 시인 분류:아일랜드의 극작가 분류:아일랜드의 판타지 작가 분류:아일랜드의 성공회교도 분류:아일랜드의 비술사 분류:영국의 시인 분류:영국의 극작가 분류:영국의 판타지 작가 분류:영국의 성공회교도 분류:영국의 비술사 분류:모더니스트 작가 분류:국민주의자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아일랜드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더블린주 출신 분류:프랑스에 거주한 아일랜드인 분류:영국계 아일랜드인 분류:빅토리아 시대 작가 분류:19세기 아일랜드 사람 분류:20세기 아일랜드 사람 분류:19세기 시인 분류:20세기 시인 분류:아일랜드의 반가톨릭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