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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근법 (尺斤法)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권역에서 널리 사용된 도량형 단위계이다. 척근법의 척(尺)은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 중 하나이며 근(斤)은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 중 하나로서, 길이와 무게 그리고 길이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넓이와 부피 등을 재는 방법을 의미한다. 척간법 (尺間法) 또는 척관법 ()으로도 불린다. 길이 단위로 모(毛)와 리(厘), 푼(分), 치(寸), 자, 장(丈), 척(尺), 간(間), 정(町), 리(里)가 있으며, 넓이 단위로는 평(坪)와 보(步), 정(町)이 있다. 부피 단위로는 홉(합, 合), 되(승, 升, 또는 되승), 말(두, 斗), 섬(석, 石), 곡(斛)이 있으며, 무게 단위로는 돈, 냥(兩), 근(斤), 관(貫) 등이 있다. 척근법의 단위는 지역과 시대에 상관없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그 기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 유래한 척근법은 중국의 진한시대 이후로 정착되었는데 척근법의 원기는 신체의 일부나 자연물, 황금종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신체의 일부를 기준으로 삼은 예로는 척(尺)과 지(咫)가 있다. 도량형의 기준으로 삼은 대표적인 자연물로는 중국의 주식인 검은 기장이었다. 마지막으로 황금으로 만든 종의 길이와 부피, 무게를 기준으로 삼았다. 중국은 1925년 미터법을 도입하였다. 고려시대에 중국의 도량형제도를 따라 길이는 주척으로 하고, 부피는 중국의 1두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을 고려의 1두로 삼았으며, 무게는 16량을 1근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법전인 경국대전과 속대전, 대전회통에 기록되어 있다. 길이 단위인 척은 쓰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황금척, 주척, 영조척, 조례기척, 포배척이 그것이다. 부피, 즉 양을 측정하는 단위로는 합과 승, 두, 석이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는 합과 승이 많이 사용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두가 많이 사용되었다. 1902년 도량형 규칙을 제정하고 평식원을 설립되었으며, 1905년 대한제국 고종 때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 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척근법을 서양에서 사용하는 미터법 및 야드-파운드법과 혼용하도록 하였다. 1909년 9월에 도량형법이 일본식 척관법으로 개정되었다. 1959년 국제계량단위국(BIPM)에 가입하고 난 후, 1961년 국제단위계를 법정계량단위로 채택하였다. 1964년에는 법령을 통해 공식적인 일에 척근법이나 야드파운드법 대신에 미터법만을 사용하게 하였다. 한시적으로 허용되었던 건물 및 토지, 수출입 등에 대한 척근법이나 야드파운드법의 사용이 1983년에는 금지됨에 따라 모든 단위는 미터법으로 표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생활 용어로서 자, 치, 푼 등의 길이 단위와 평, 정 등의 넓이 단위, 섬, 말, 되, 홉의 부피 단위, 양, 돈, 푼의 무게 단위가 여전히 쓰이는 경우가 있다. 미터법 야드파운드법 |
스티븐 아서 쿡 (Stephen Arthur Cook, 1939년 12월 14일~ )은 미국의 전산학자이다. 1971년 ACM 《SIGACT Symposium on the Theory of Computing》에 실린 논문 〈The Complexity of Theorem Proving Procedures〉에서 NP-완전의 개념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논문에 들어있는 쿡의 정리는 충족 가능성 문제가 NP-완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P와 NP가 같은지를 질문했는데 이를 P-NP 문제라고 부르며, 컴퓨터 과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밀레니엄 문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61년 미시간 대학 학사학위 1962년 하버드 대학 석사학위 1966년 하버드 대학 박사학위 1982년 ACM 튜링상 수상 2004년 현재 토론토 대학 수학과 교수 스티븐 쿡 홈페이지 분류:1939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분류:튜링상 수상자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분류:미시간 대학교 동문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 |
아말라순타 (Amalasuntha, ? ~ 535년), 혹은 아말라수엔타 (Amalasuentha), 아말라스빈타 (Amalaswintha)는 동고트 왕국 국왕 테오도릭 대왕의 딸이며 동고트족의 여왕이다. 515년 동고트족 귀족 출신인 유타리크(Eutharic)과 결혼해 아들 아탈라릭과 딸 마테수엔타(Mathesuentha)를 두었다. 526년 테오도릭 대왕의 죽음 이후 아탈라릭이 동고트 왕국의 왕위를 이었으나 아말라순타가 섭정으로 권력을 잡았다. 옛 로마 문화에 빠져 자식들에게 로마식 교육을 시켰다. 534년 아탈라릭의 사망 이후 사촌 테오다하드와 함께 왕위에 올라 여왕이 되었다. 문예를 싫어한 테오다하드는 왕국 내의 아말라순타에 대한 반감을 이용, 그녀를 토스카나 호수의 볼세나 섬에 유폐시켰다. 아말라순타는 535년 목욕중에 살해되었다. 아말라순타는 그녀의 재상 카시오도로스의 편지와 프로코피우스, 요르다네스 등의 역사가의 기록으로 알려졌다. 분류:생년 미상 분류:535년 죽음 분류:동고트의 군주 분류:여왕 분류:그리스어학자 분류:라틴어학자 분류:중세의 기독교인 분류:고트인 여자 분류:살해된 군주 분류: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6세기 유럽의 군주 분류:6세기 기독교인 분류:아말가 |
아탈라릭 (Athalaric, 516년 ~ 534년 10월 2일, 재위 526년 ~ 534년)은 테오도릭 대왕의 손자이며 동고트 왕국의 2대 왕이다. 526년 테오도릭 대왕의 죽음 이후 1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섭정인 어머니 아말라순타에게 넘겨졌다. 아말라순타는 아탈라릭에게 로마식 교육을 시키고자 했으나 고트족의 귀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고트식으로 키워지길 원했다. 결국 폭음과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 건강을 망쳐 534년 10월 2일 죽었다. 분류:516년 태어남 분류:534년 죽음 분류:동고트 왕국 분류:이탈리아의 군주 분류: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아말가 분류:6세기 유럽의 군주 |
테오다하드 (Theodahad, ? ~ 536년, 재위 534년 ~ 536년)은 테오도릭 대왕의 조카로, 동고트 왕국의 3대 국왕이다. 534년 아탈라릭 서거후 아말라순타와 함께 동고트 왕국의 공동 지배자가 되었으나, 535년 아말라순타를 유배보내 죽게 했다. 536년 아말라순타의 사위 비티게스에게 살해되었다. 분류:생년 미상 분류:536년 죽음 분류:동고트 왕국 분류:이탈리아의 군주 분류:암살된 사람 분류:5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아말가 분류:6세기 유럽의 군주 |
비티게스 (Witiges 혹은 Vitiges, ? ~ 540년, 재위 536년 ~ 540년)은 동고트 왕국의 제4대 국왕으로, 아말라순타의 딸 마테수엔타과 결혼했다. 제3대 국왕 테오다하드가 왕위에 오르며 제2대 국왕이자 형부인 아탈라릭의 섭정으로 있던 장모 아말라순타를 살해하자 그 복수로 테오다하드를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 비티게스의 치세가 시작된 536년,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동고트 왕국을 쳐 나폴리와 로마를 수복하고 540년 동고트 수도인 라벤나까지 점령당했다. 마테수엔타와 비티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비티게스는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고 마테수엔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사촌 게르마누스와 재혼했다. 분류:540년 죽음 분류:동고트 왕국 분류:이탈리아의 군주 분류:사형된 사람 분류: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6세기 유럽의 군주 |
일디바드 (Ildibad, ? ~ 541년, 재위 540년 ~ 541년) 혹은 헬데바두스 (Heldebadus)는 동고트 왕국의 5대 국왕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벨리사리우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도운 공으로 전왕 비티게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간 뒤 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암살당하고, 에라릭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일다바드는 실제로 스페인의 서고트족 왕 중 하나의 조카로 기록되어 있다. 분류:541년 죽음 분류:동고트 왕국 분류:이탈리아의 군주 분류:암살된 사람 분류: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6세기 유럽의 군주 |
200px 암호학 (暗號學은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언어학적 및 수학적 방법론을 다루는 학문으로 수학을 중심으로 컴퓨터, 통신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공동으로 연구, 개발되고 있다. 초기의 암호는 메시지 보안에 초점이 맞추어져 군사 또는 외교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메시지 보안이외에도 인증, 서명 등을 암호의 범주에 포함시켜 우리의 일상에서 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현금지급기의 사용, 컴퓨터의 패스워드, 전자상거래 등은 모두 현대적 의미의 암호에 의해 안정성을 보장받고 있다. 현대 암호학은 암호 시스템, 암호 분석, 인증 및 전자서명 등을 주요 분야로 포함한다. 암호학을 이용하여 보호해야 할 메시지를 평문 (平文, plaintext)이라고 하며, 평문을 암호학적 방법으로 변환한 것을 암호문 (暗號文, ciphertext)이라고 한다. 이때 평문을 암호문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암호화 (暗號化, encryption)라고 하며, 암호문을 다시 평문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복호화 (復號化, decryption) 라고 한다. 암호학적 서비스가 제공하고자 하는 목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기밀성 (機密性, Confidentiality) 부적절한 노출 방지. 허가받은 사용자가 아니면 내용에 접근할 수 없어야 함. # 무결성 (無缺性, Integrity) 부적절한 변경 방지. 허가받은 사용자가 아니면 내용을 변경할 수 없어야 함. # 가용성 (可用性, Availability) 부적절한 서비스 거부 방지. # 부인봉쇄 (否認封鎖, Non-repudiation)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전달받은 사람이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전달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야 함. 암호학의 기원은 수천년 전부터 이뤄, 최근 수십 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역사상 기록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암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용한 대입암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스키테일 암호체계도 있다. 이 시기의 암호화 기법을 고전 암호학 이라 부르는데, 고전 암호학의 암호학 기법은 대체로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고전 암호화 기법은 20세기 초에 이뤄서야 변화가 생겼는데, 이의 예로는 에니그마(독일어:Enigma 뜻:수수께기 )가 사용한 회전륜 가밀법이 대표적이다. 이후 전자요소와 계산기(컴퓨터)는 큰 발전을 이뤘으며, 이때 사용된 암호화 기법은 전통적인 사서통신에 쓰일 수 없게 되었다. 암호학의 발전은 암호분석학과 함께 발전했다. 즉 암호 편집과 가밀법에 대한 해독법을 말한다. 주로 가밀된 신호의 빈율을 분석하여 해석했는데, 이런 방법을 응용하여 해석된 암호문은때때로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예를 들어,치머만 전보를 해석한 것은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동맹국이 나치의 암호문을 해석한 것은 2차세계대전의 기간을 2년정도 단축시켜 주기도 하였다. 20세기부터 70년대 이전에 암호학의 대부분은 정부의 안전범주에 속했지만, 공개표준키 체제의 탄생과 공개키 가밀법의 발명은 암호학을 대중영역에 접하게 하였다. 암호문을 생성(암호화)할 때 사용하는 키와 암호문으로부터 평문을 복원(복호화)할 때 사용하는 키가 동일한 암호 시스템이다. 암호 시스템의 안전성은 키의 길이, 키의 안전한 관리에 상대적으로 의존성이 높다. 암호문의 작성자와 이의 수신자가 동일한 키를 비밀리에 관리해야 하므로 폐쇄적인 특성을 갖는 사용자 그룹에 적합한 암호 시스템이다. 냉전시절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의 핫라인(hot line)에 적용되었던 OTP(one time pad)는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예이다. 엘리스(Alice)가 밥(Bob)에게 암호문을 보내고 복호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기술한다. 엘리스와 밥은 같은 키를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엘리스는 공유한 키로 암호화를 하며, 밥은 같은 키로 이를 복호화한다. 보통 복호화 과정은 암호화 과정의 역과정이다. 암호화와 복호화에 사용된 키가 같지 않더라도 한 키로부터 다른 키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경우에는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범주에 넣는다. 대칭키 암호 시스템은 알고리즘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장점이 있지만 키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 시스템에 가입한 사용자들 사이에 매 두 사용자 마다 하나의 서로 다른 키를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명이 가입한 시스템에는 개의 키가 필요하다. 또 각 사용자는 개의 키를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는 매우 큰 단점으로 키 관리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공개키 암호 시스템의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안전성은 키의 길이와 매우 관련이 크다. 일반적으로 키의 길이가 길수록 안전성은 높다. 그러나 키의 길이를 무한정 길게 하면 그에 따르는 관리의 어려움이 커진다. DES Advanced Encryption Standard(AES) ARIA Twofish SEED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가장 큰 약점은 키관리의 어려움에 있다. 한 사용자가 관리해야 할 키의 수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타난 암호 시스템이 공개키 암호 시스템이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각 사용자는 두 개의 키를 부여 받는다. 그 하나는 공개되고(공개키, public key), 다른 하나는 사용자에 의해 비밀리에 관리 되어야 한다.(비밀키, private key)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각 사용자는 자신의 비밀키만 관리하면 되므로 키 관리의 어려움을 줄일 수 있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는 각 사용자의 공개키를 관리하는 공개키 관리 시스템(공개키 디렉터리)이 필요하며 각 사용자는 이 시스템에 자유롭게 접근하여 다른 사용자의 공개키를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은 두 키의 수학적 특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메시지를 암호화 및 복호화 하는 과정에 여러 단계의 산술 연산이 들어간다. 따라서 대칭키 암호 시스템에 비하여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엘리스(Alice)가 밥(Bob)에게 암호문을 보내고 복호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기술한다. 두 사용자에게는 각각 공개키와 비밀키가 부여되었고, 이들의 공개키는 공개키 디렉터리에 저장되어 있다. 엘리스는 공개키 디렉터리에서 밥의 공개키를 찾아 이를 이용하여 문서를 암호화하여 밥에게 보낸다. 밥은 수신한 비밀 문서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신의 비밀키로 복호화하여 엘리스가 보낸 문서의 내용을 알 수 있다. 공개키 만으로는 복호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엘리스 역시 암호화 하고 나서 복원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암호화-복호화 시스템은 두 키가 짝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비밀키로 암호화 하고 공개키로 복호화 할 수도 있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해당 공개키에 맞는 비밀키 보유자를 확인 할 수 있으며, 전자서명에서는 이런 성질을 이용한다. 이와 같이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는 암호화할 때 사용되는 키와 복호화할 때 사용되는 키가 다르기 때문에 비대칭 암호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각 사용자에게 부여되는 공개키와 비밀키에는 수학적 연관이 있기 때문에 암호화와 복호화가 가능하다. 이 둘은 마치 두 조각으로 나뉜 유리 조각과 같다. 한쪽은 공개되어 있고 그에 맞는 다른 한쪽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한쪽이 그대로 공개된다면 숨겨진 다른 한쪽의 모습도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모습을 감추고 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수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음은 잘 알려진 공개키 암호 시스템의 예이다. 이들은 각각이 갖는 알고리즘과 키 생성상의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처리 속도, 구현의 편의성과 연관이 되어 응용되는 분야를 결정하게 된다. RSA ElGamal 타원 곡선 암호 배낭 암호 RSA DSA 양자암호에 기반해 만든 양자암호 네트워크 SECOQC의 네트워크 구조 일반적으로 공개키 암호 시스템의 안정성은 한 방향으로의 접근은 쉽지만 그 역방향으로의 해결은 매우 어려운 수학 문제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 RSA의 안전성은 알려진 매우 큰 두 소수의 곱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두 소수를 모르는 채 곱해진 결과가 어떤 소수들의 곱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 안전성의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안정성의 기반이 되는 어려운 수학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 문제에 안전성의 기반을 둔 암호 시스템은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안전한 암호 시스템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one time password(OTP)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OTP는 대칭키 암호 시스템으로 키생성, 키분배 등 일련의 키관리의 어려움이 있는 암호 시스템이다. 양자암호(quantum cryptography)는 OTP와 같은 안전한 암호 시스템이 갖는 키분배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양자암호는 양자키분배(quantum key distribution)으로 이해되고 있다. 양자암호의 안전성은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근거하고 있다. 양자암호에서 키분배를 위한 통신으로 양자채널(quantum channel)과 인터넷이나 전화와 같은 통신수단(classical channel)을 동시에 사용한다. 일반적인 통신 수단을 이용한 정보의 교환은 노출 되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양자채널을 이용한 정보의 교환은 보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키 분배 또는 공유 과정에서 불법적인 사용자가 양자채널을 통과하는 정보를 측정하게 되면 불확정성원리에 따라 키분배 시스템의 정확도에 문제가 생겨 이를 합법적인 사용자가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자 공격 ( Man-in-the-middle attack)에 대해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으며, QND( Quantum Nondemolition measurement)를 응용한 FPB Attack에 대해서도 취약하다는 것이 증명 되었다. 하지만 위의 두 경우 물리적 수단이나 고가의 장비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 사실상 불가능하다. 1984년 Charles H. Bennett와 Gilles Brassard에 의해 완성된 키분배 프로토콜 BB84가 대표적이다. BB84에서는 광자 편광(photon polarization)의 상태를 수직, 수평 그리고 두 대각선으로 나누어 표현하여 디지털 신호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키분배에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광자 편광의 경우 노이즈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어 이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으며 실제 구현시, 위상차(phase)의 상태를 로 나눈 다음 Mach-Zehnder interferometer ( Mach-Zehnder interferometer)를 이용하여 구현한다. BB84 E91 암호학자 암호화 암호학의 개요( Outline of cryptography) 플레이페어 사이퍼( Playfair cipher) 스테가노그래피( Steganography) 분류:형식과학 분류:응용수학 |
토틸라 토틸라 (Totila, ? ~ 552년 7월 1일, 재위 541년 ~ 552년 7월 1일)는 동고트 왕국의 6대 국왕으로, 그의 치세에 발행된 동전에 따르면 본명은 바두일라 (Baduila)이다. 토틸라는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재건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파엔차 근처에서 비잔티움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군대를 무찌르는 것으로 고트족들의 사기를 높였다. 542년 무겔로 계곡에서 또다른 승리를 얻은 뒤 토스카나를 떠나 나폴리로 향해 도시를 점령하고 루카니아, 풀리아, 칼라브리아 3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토틸라의 이탈리아 정복은 그 신속함만이 아니라 자비로움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은 "적과 친구를 불문하고 토틸라의 믿음과 자비에 기댄 사람 중 속은 사람은 없었다" 라고 기록했다. 545년 말 토틸라는 티볼리에 주둔하고 로마로의 식량 유입을 끊어 항복을 받아내려 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티베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도시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시는 약탈되었고, 토틸라가 선언했던 대로 양 방목지까지는 되지는 않았지만 폐허가 되었다. 성벽과 다른 요새는 곧 재건되었고, 토틸라는 다시 로마로 향했으나 이번에는 벨리사리우스에게 패배했다. 549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를 떠나자마자 토틸라는 로마를 세 번째로 로마를 공격, 수비측 내의 일부를 매수해 손쉽게 점령했다. 토틸라는 곧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고트 함대를 그리스 해안 지대로 보내 위협하며 시칠리아를 점령할 준비를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환관 나르세스에게 명해 토틸라를 정벌하게 했고, 토틸라 역시 군대를 이끌고 싸웠으나 552년 7월 1일 타기나이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분류:552년 죽음 분류:동고트 왕국 분류:이탈리아의 군주 분류:작전 중 사망자 분류: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6세기 유럽의 군주 |
테이아 (Teia, ? ~ 552년 혹은 553년, 재위 552년), 혹은 테야 (Teja), 테이아 (Theia), 틸라 (Thila), 텔라 (Thela), 테이아스 (Teias)는 동고트 왕국의 7대 왕이자 이탈리아 최후의 고트족 왕이었다. 선왕 토틸라 아래에서 군관으로 활약하던 테이아는 부스타 갈로룸의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한 이후 왕으로 선택되었다. 남부 이탈리아를 탈출하던 중에 스키푸아르(Scipuar), 군둘프(Gundulf, 혹은 인둘프Indulf), 기발(Gibal), 라그나리스(Ragnaris) 등의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비잔티움 제국의 환관 장군 나르세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552년 혹은 553년 나폴리 남쪽의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테이아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동생 알리게른(Aligern)은 항복했으나 스키푸아르와 기발 역시 전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둘프와 라그나리스는 전장에서 도망쳤다. 라그나리스는 후에 나르세스의 암살자에게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동고트 왕국은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 패배와 함께 멸망했다. 이후 고트 귀족 비딘(Widin)이 북이탈리아에서 550년대에 고트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561년 혹은 562년 생포되고, 동고트 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분류:552년 죽음 분류:이탈리아의 군주 분류:동고트 왕국 분류:작전 중 사망자 분류: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6세기 유럽의 군주 |
타기나이 전투 또는 부스타 갈로룸(Busta Gallorum)의 전투 는 552년 7월 비잔티움 제국의 환관 겸 장수 나르세스와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의 군주 토틸라 사이에 벌어졌다. 551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수복할 것을 결심했다. 552년 봄에 노장 나르세스는 비잔티움인, 롬바르드인, 헤룰리인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군대를 모아 발칸반도를 거슬러 올라가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타고 로마로 향했다. 타기나이 마을(현대의 구알도 타디노)에서 나르세스는 토틸라가 이끄는 고트 군대와 만났다. 토틸라는 수적으로 불리한 것을 알고 교섭을 시도하며 비잔티움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으나 작은 언덕 하나를 점령하는 데에 그쳤다. 토틸라는 이후 2천 명의 기병 증원을 기다리며 진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르세스의 비잔티움군은 롬바르드인과 헤룰리인을 중심으로 하고 양 끝의 궁수 뒤에 기병을 배치한 원호 진을 쳤다. 토틸라는 기병들을 중앙에 모으고 보병들을 그 뒤에 배치했다. 처음에 동고트군 내의 비잔티움 탈영병이 나와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으나 패배했다. 그 뒤 기록이 확실하지 않으나 토틸라가 전쟁과 관련된 어떤 의식을 통해 사기를 진작시켰고, 점심 때가 되어 기병 지원이 도착했다. 점심 식사를 끝낸 토틸라의 군대는 밀집한 기병들로 나르세스군의 중앙을 쳐 무너트리려 했다. 그러나 고트 기병들이 나르세스의 원호 진형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양면에서 궁수들의 화살이 쏟아졌고, 고트군이 진형을 유지하려고 하는 틈을 타 나르세스의 기병들이 측면을 덮쳤다. 저녁 때가 되어 고트군은 토틸라를 포함한 6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고트군은 완전히 흩어졌다. 이 해 말에 로마는 다시 비잔티움 제국에 수복되었고, 토틸라의 뒤를 이어 동고트 왕이 된 테이아가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에서 패배함과 함께 동고트족의 이탈리아 지배는 끝나게 되었다. 분류:551년 분류:비잔티움 제국의 전투 분류:육상 전투 분류:552년 비잔티움 제국 |
몬스 락타리우스(Mons Lactarius)의 전투 는 553년 비잔티움 제국의 나르세스와 동고트 왕국 최후의 군주 테이아 사이에 벌어졌다. 부스타 갈로룸의 전투에서 토틸라 왕이 전사한 이후 비잔티움의 나르세스는 로마를 수복하고 쿠마이를 포위했다. 토틸라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테이아는 남은 동고트 전력을 모아 이 포위를 깨고 쿠마이를 구원하려 출발했으나, 나르세스의 군대를 캄파니아의 베수비우스 산 근처 평원에서 만났다. 553년 10월에 벌어진 이 전투는 이틀간 계속되었으며 동고트의 테이아 왕이 전사했다. 이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고트족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으로서도 이탈리아를 직접 통치할 여력은 없었고 이탈리아는 곧 프랑크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프랑크족 역시 격퇴되고 이탈리아 반도는 다시 짧은 시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분류:553년 분류:비잔티움 제국의 전투 분류:육상 전투 분류:552년 비잔티움 제국 |
춘추 전국 시대 (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아우러는 말이며, 기원전 770년 주(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 시황제(始皇帝)가 통일한 시기까지며, 선진 시대 (先秦時代)라고도 한다. 550년간 지속했으며,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상업이 많이 발달하였고 이때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주나라가 견융족에 의해 도읍을 낙읍으로 옮기자 주 왕실이 약화되어 봉건제가 약화됨에 따라 각각의 제후국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발전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주왕실에 반기를 들고 춘추 전국 시대의 패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전쟁 및 제자백가사상, 뛰어난 왕과 장군이 나타났던 시대이다. 특히 전국칠웅이라 불리는 진, 초, 제, 연, 조, 위, 한의 일곱나라가 일어나 서로 대립했다. 춘추 전국 시대때는 상공업이 많이 발전하였고,철제로 된 물품을 상용하였고,남북조 시대와는 달리 인재의 등용에 힘을 써서 안으로는 치안과 평화를,밖으로는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였다. 또한 제자백가등 사상의 많이 발전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 사회는 큰 변혁을 일으켰다. 주나라 왕실이 쇠약해짐으로써 중앙집권체제는 무너지고,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사회는 극도의 혼란 속에 빠졌다. 인구의 증가, 민족의 대이동, 정전제도(井田制度)의 붕괴 등은 봉건체제를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제후(諸侯)들의 세력신장은 전쟁을 발발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전통문화는 지배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사상의 태동을 요구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지식과 교육을 독점했던 귀족계급의 몰락은 사학의 발흥을 촉진하고 관학의 붕괴를 초래했고, 몰락한 귀족들은 민간에 흩어져 교육을 생업으로 삼았다. 또한, 제후들은 자기 세력의 확대를 위해 유능한 지식인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는 사학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더욱이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군웅들에 의해 변방지역이 개척됨에 따라 한족(漢族)은 이민족(異民族)의 문화와 접촉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였다. 따라서 한문화권은 확대되고 사회의 의식수준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지식인들이 배출되어 당시 사회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제자백가는 이들 지식인의 대표자들이며, 유가(儒家)·도가(道家)·묵가(墨家)는 그중 가장 뛰어난 3대학파이다. *유가(儒家) **주요 인물 공자 맹자 순자 **주요 사상 효제(孝悌) · 인의(仁義) · 예(禮)를 바탕으로 한 정치. *도가(道家) **주요 인물 노자 장자 **주요 사상 무위자연, 인위의 배격 *묵가(墨家) **주요 인물 묵자 **주요 사상 가족, 국가를 초월하는 사랑인 겸애(兼愛). 존비친소(尊卑親疎)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를 주장한 유가를 비판. *법가(法家) **주요 인물 관자(관중) 상앙(공손앙) 한비자 이사 **주요 사상 법치, 절대군주에 의한 부국강병 *농가(農家) **주요 인물 허행 **주요 사상 특권층의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를 주장,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춘추 전국 시대 분류:중국의 역사 |
260년의 전국 칠웅 (중국어) 연(燕)위(魏)제(齊)조(趙)진(秦)초(楚)한(韓) 260년의 전국 칠웅 (영어) 전국 칠웅 ()은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곱 나라를 지칭한다. 전국시대에는 그 외에도 여러 나라들이 있었으나, 이들 일곱 나라가 가장 강력했고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연(燕) 위(魏) 제(齊) 조(趙) 진(秦) 초(楚) 한(韓) 분류:전국 시대 분류:중국의 역사 분류:명수 7 |
보리밭 보리 (영어:barley)는 벼목 벼과 보리속에 속하는 식물로,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 식물이다. 쌀보리와 구분해 겉보리 로 부르기도 한다. 맥주의 재료이다. 보리는 서기전 7000년에 이미 야생종이 재배되었다고 하며, 서기전 3000년경부터는 아프리카 고대 왕조의 유적에서 육조종이 발견되고 있다. 줄기 속은 비어 있고, 높이는 1m 정도로 자란다. 일반적으로 가을에 심어 다음해 봄에 수확한다. 원줄기는 속이 비고 원주형이며 마디가 높고 마디 사이가 길다. 잎은 어긋나며 넓은 선상 피침형으로 너비 10-15mm이다. 꽃은 4, 5월에 핀다. 보리는 열매껍질이 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느냐, 쉽게 떨어지느냐에 따라 크게 껍질보리(겉보리)와 쌀보리로 구분한다. 겉보리가 추위에 더 잘 견딘다. 겉보리는 주로 영남에서, 쌀보리는 주로 호남에서 많이 재배된다. 또 열매에 줄이 두 개 있는 두줄보리와 여섯 개 있는 여섯줄보리 등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5-6세기 것으로 보이는 여섯줄보리의 일종인 껍질보리가 경기도 여주군에서 출토된 바 있어, 오래전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쌀보리는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껍질보리에 비해 추위에 견디는 힘이 약하다. 보리는 춘·추파성 및 내한성의 정도에 따라 겨울보리가 대부분이고 봄보리는 겨울이 지나치게 추워서 겨울보리의 재배가 어려운 경기 북부, 강원도 및 중부 산간지대의 일부에서 재배한다. Barley grains 4.jpg|겉보리 Barley grains 3.jpg|쌀보리 질 좋은 보리는 낟알을 싹틔운 다음 말려서 맥아로 만든다. 맥아는 맥주, 위스키, 고추장, 엿기름, 식혜 등의 중요한 재료이다. 다른 맥류와 비교해 볼 때 보리는 탄수화물의 함량이 높고 칼슘·인·철분 등의 무기질과 바이타민B (비타민B)가 풍부하다. Encyclopædia Britannica 11 번째판 (1910–1911년)은 보리의 성분을 에른스트 폰 비브라에 따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소금 성분 제외) 물 15% 질소 복합물 12.981% 고무질 6.744% 당분 3.2% 녹말 59.95% 지방 2.17% 이삭 vulgare MHNT.BOT.2015.2.39.jpg|종자 박물관의 보리 이삭 Hordeum vulgare.jpg|보리 낱알 보리 (보리쌀) field at Gapa Island.jpg|가파도의 보리밭 분류:보리족 분류:곡물 분류:식용작물 분류:1753년 기재된 식물 분류:게놈 해독이 완료된 식물 |
200px 200px 맥주 (麥酒) 또는 비어 (는 보리를 가공한 맥아(麥芽)를 발효한 술로서 알코올은 맥주의 종류에 따라 2~18% 정도의 다양한 도수를 가진 술이다. 즉, 맥주는 한자 그대로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맥주는 고대 문명의 농업의 번창함을 표현한 인류학적 증거라는 견해가 있다. 맥주는 기원전 6000년부터 양조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알코올 음료로 알려져 있다. 수메르,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지에서 보리와 밀을 경작하면서 맥주의 양조가 발달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맥주에 관한 법률이 나와 있다. 맥주는 인류가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전환해 농경 생활을 하면서부터 만들어진 음료이다. 기원전 4000년경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위치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메르인들은 곡물로 만든 빵을 분쇄한 다음 맥아를 넣고 물을 부은 뒤 발효시키는 방법으로 맥주를 제조했다고 한다. 또한 기원전 3000년경부터는 이집트 지역에서도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맥주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가 중세 시대에는 수도원에서 맥주의 양조를 담당했다. 수도사들이 금식 기간 동안 기분 좋은 맛을 내는 음료를 마시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8세기경 영국의 에일(ale)과 포터(porter)가 만들어졌고, 10세기경부터는 맥주에 쌉쌀한 맛을 내는 홉을 첨가했다. 맥주는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영국의 제임스 와트(JamesWatt)가 만든 증기기관은 물의 이송과 맥아의 분쇄, 맥즙의 교반 등에 동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며 맥주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독일의 카를 폰 린데(CarlvonLinde)는 냉동기를 발명해 겨울에만 만들 수 있었던 하면발효 맥주를 계절에 관계없이 양조할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LouisPasteur)는 술이 효모의 작용에 의해 생성된다는 사실과 열처리 살균법을 발명했고, 덴마크의 에밀 한센(EmilHansen)은 파스퇴르의 이론을 응용해 효모의 순수배양법을 개발하면서 맥주의 품질을 높였다. 우리나라에 처음 맥주가 들어온 것은 1883년이며 맥주를 우아(벗우, 아이아)로 표기하였는데 비어(beer)의 영어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에서 맥주가 처음 생산된 것은 1933년 일본의 대일본맥주(주)가 조선맥주(하이트맥주 전신), 기린맥주(주)가 소화기린맥주(오비맥주 전신)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두 맥주회사는 미군정에 의해 관리되었고, 1951년에 민간에 불하되었다. 1992년에는 진로쿠어스맥주(주)가 설립되면서 하이트맥주, OB맥주, 카스맥주 등 3개 회사에서 맥주를 양조했다. 이후 카스맥주가 OB맥주에 인수되었고, 현재는 하이트진로(주)와 OB맥주(주)에서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HITE 홀딩스(주) 히스토리 일본 삿포르 맥주회사 -> 조선맥주(주) (1933) -> 해방 후 독립, 크라운 맥주로 알려짐 -> 한독맥주(주) 매수(1977) -> 하이트맥주 개발, 시판 (1993) -> 하이트 홀딩스(주)로 상호변경 (1998) OB맥주(주) 히스토리 일본 기린 맥주회사 -> 동양맥주(주) -> 해방 후 독립 -> OB맥주 상호변경 -> 카스맥주(주) 흡수합병(1999) 보리와 밀을 가공한 엿기름을 더운 물에 담가 엿기름의 녹말을 당분으로 변화시킨다. 곡물 찌꺼기를 걸러낸 뒤 남은 맥아즙에 홉을 넣어 끓인다. 맥아즙이 서늘해지면 효모를 추가하여 발효시킨다. 효모는 당분을 에틸 알코올, 탄산 가스와 맥주의 맛에 영향을 주는 다른 성분으로 분해하는데, 이 과정을 발효라 한다. 병이나 캔 등에 담기 전에 효모를 없애기도 하며, 맥주를 몇 주나 몇 달간 놔둔다. 일정기간 저장·숙성한 후 여과하여 바로 제품화하면 생맥주가 되고, 병이나 캔에 넣어 저온살균 처리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맥주가 되는데, 그 공정은 다음과 같다. # 맥아 맥아제조는 보리를 싹틔워 맥아효소인 아밀라아제(amylase)를 생성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수확 직후의 보리는 일정기간 저장하여 충분한 발아력을 갖도록 해야 하는데, 이 기간을 보리의 휴면 기간이라 한다. 휴면이 끝난 보리는 정선기(精選機)를 통하여 협잡물을 제거하고, 균질한 맥아를 만들기 위하여 알갱이의 크기에 따라 나눈다. 알갱이가 균일한 것으로 골라진 보리를 물에 담가 발아에 필요한 수분을 흡수시킨 후 발아실에 옮겨 습기 있는 공기를 공급해 발아시킨다. 건조를 마친 맥아는 탈근기에 넣어 맥주에 불쾌한 맛을 주는 유근과 먼지를 제거한다. 정제한 맥아는 20℃ 이하에서 습기가 차지 않도록 저장한 후 사용한다. # 맥아즙 맥아즙제조는 맥아의 분쇄, 담금, 여과, 끓임과 홉 첨가, 냉각 등의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정선된 맥아를 분쇄하고 물과 온도를 맞춰 담금 공정을 한다. 이 담금 공정에서 맥아효소의 작용으로 맥아 중의 불용성 물질이 가용성화 되고, 전분은 당으로 변하며 침출된다. 담금 공정이 끝나면 맥아즙을 여과기에 걸러내고, 홉을 첨가한 후 끓여준다. 맥아즙을 끓이면 살균 효과는 물론이고, 홉으로부터 맥주 특유의 쌉쌀한 맛이 추출되고 모든 효소의 활성도 없어진다. 끓인 맥아즙은 냉각기로 급랭시켜 발효실로 보낸다. # 발효 발효는 주발효와 후발효로 나뉜다. 주발효는 전발효라고도 하며 냉각된 맥아즙에 효모를 첨가하여 알코올 발효를 하는 것이다. 후발효는 저장이라고도 하며, 맛의 숙성을 위해 약 0℃에서 1-3개월간 저온으로 발효시키는 것이다. # 여과 저장탱크에서 숙성된 맥주는 여과해서 투명한 맥주로 만든다. 여과방법은 일반적으로 압착 여과기를 사용해 효모를 제거한 후 필터로 여과시킨다. 여과 후 후발효 탱크에 남은 효모를 회수하여 물로 씻고 정제하여 약용효모로 사용한다. # 제품 여과된 맥주를 열처리하지 않고 제품화한 것이 생맥주이고, 열처리하여 효소나 효모의 활성을 정지시킨 것이 보존성이 높은 보통 맥주이다. 생맥주는 신선한 향미를 즐길 수 있으나 오래 보존할 수 없다. 보통 맥주는 60℃에서 30분간 가온하여 살균하거나 빙점(氷點) 하에서 효모를 제거해 6개월에서 1년 정도 보존할 수 있다. 맥주는 양조용수·보리·홉 등이 주원료로 된다. 나라와 지역에 따라 쌀·옥수수·녹말·당류 등을 녹말질 보충원료로 사용하며, 그 비율은 그 나라의 사정이나 기호에 따라 다르다(독일에서는 1815년 이후 수출맥주 이외의 하면발효맥주에는 부원료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양조용수 맥주 양조에는 양조용수·제맥아용수 등 좁은 뜻의 양조용수와 기구의 세척·보일러용수·냉각용수를 포함한 넓은 뜻의 양조용수가 필요하며, 일반적으로 맥주생산량의 10∼20배 가량의 물이 필요하다. 양조용수는 맥주의 종류 및 품질을 좌우하는 직접적 요인으로, 무색·무취·투명하여야 하고 함유된 염류나 미량원소들의 조성도 중요하다. 보통 경수(硬水)는 맥주의 색이 짙고 깊은 맛을 내는 스타우트(stout), 에일(ale) 등을 만드는데 적합하고, 연수(軟水)는 깨끗하고 부드러운 라거(lager) 등을 만드는데 주로 이용된다. 보리 보리를 싹틔워 맥아로 만든 것이 맥주의 주원료가 된다. 일반적으로 맥주용 보리는 두줄보리가 쓰이나 여섯줄보리를 쓰는 나라도 있다. 맥주용 보리는 곡립이 고르고 녹말질이 많고 단백질이 적으며 곡피(穀皮)가 얇고 발아력이 왕성한 것이 좋다. 홉 홉은 맥주에 특유의 향기와 쓴맛을 부여하는 중요한 첨가물이다. 맥아즙의 단백질을 침전시켜 맥주를 맑게 하고 잡균의 번식을 방지하여 보존성을 높여주는 등의 효과도 있다. 맥주는 분류 기준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상면발효 맥주와(에일, Ale) 하면발효 맥주로(라거, Lager) 나눌 수 있다. 상면 발효 맥주 는 인류 문명 발생 이전부터 만들어진 맥주로서 발효 과정에서 사카로마이세스 세레비지에(SaccharomycesCerevisiae)라는 효모가 맥주 위로 거품처럼 뜬다. 이 맥주가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인위적인 발효온도를 설정할 수 있는 기술 없이도 가능했기 때문이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독일의 바이스비어나 쾰쉬, 영국의 에일이나 스타우트, 포터 같은 맥주가 상면발효 맥주에 속한다. 상면발효맥주는 맥아농도가 높고, 10도에서 25도 사이의 상온에서 발효를 하기 때문에 색이 짙고 알코올 도수도 높은 편이다. 하면 발효 맥주 는 19세기 중반에 처음 만들어진 맥주로서 상면발효 맥주보다 낮은 온도인 섭씨 12도 전후에서 발효하며, 발효 과정에서 사카로마이세스 카를스베르겐시스(Saccharo-mycesCarlsbergensis)라는 효모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독일의 양조사인 조셉 그롤이 체코의 필센 지방에 있는 양조장에서 처음으로 양조에 성공했는데, 이 양조장의 지하 저장고가 서늘했기 때문에 양조가 가능했다. 하면 발효 맥주는 저온에서 발효를 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부드러운 맛과 향이 특징이다. 전세계 맥주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라거(lager)가 대표적이다.양조법에 따라서는 드라이(dry) 맥주, 디허스크(Dehusk) 맥주, 아이스(ice) 맥주로 구분되고, 살균여부에 따라서는 생맥주와 보통맥주로 나뉜다. 상면발효 맥주는 효모와 부유 단백질 등이 맥주에 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탁하고 걸쭉한 맛을 내는 반면에 하면발효 맥주는 바닥에 가라앉은 효모와 부유 단백질을 제거하기 때문에 맑은 황금색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알코올 함량에 따라서 무알코올성 맥아 음료, 비알코올성 맥아 음료, 라이트 맥주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독일 바바리아에 베네딕토 Weihenstephan 맥주는 그 해로부터 문서가 홉 정원에 11조를 지불했음을 언급함으로서 768년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양조장은 1040년에 프 라이징시에 의해 허가를 받았고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 된다. 불연속적인 생산으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은 993년에 설립된 체코의 Břevnov 수도원이다. 양조 산업은 여러 가지 지배적인 다국적 기업 및 지역 양조장에서 선술집에 이르는 수 천명의 작은 생산자들로 구성된글로벌 비지니스이다. 2006년 판매 기준 $294.5 billion(£ 147.7 억 달러)으로 세계 총 판매 수익을 생산하며 1천 3백 30억 리터 이상이(3백 50억 갤런)매년 팔리고 있다. 양조장 또는 공예 양조장은 제한된 양의 맥주를 생산하는 현대 양조장이다. 양조장이 생산할 수 있는 맥주 최대량은 지역 및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해당 약 15,000 배럴(1.8 메가 리터, 396000 제국 갤런 또는 475000 미국 갤런) 이다. brewpub은 술집이나 다른 음식점들을 통합한 양조장 유형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밀도의 양조장은 대부분 프랑켄의 독일 지역에 있다. 특히 약 200양조장을 가진 오버프랑켄 현 지역에 있다. 집에서 양조를 하는 것은 많은 나라에서 규제와 금지 적용을 받고있다. Homebrewing에 대한 규제는 1963년에 영국에서 해제되었다. 또한 호주는 1972년에, 미국은 1978년에 법을 해제시켰다. 그러나 몇 개의 주에서는 생산을 제한하는 그들만의 법을 통과시키는 것이 허락되었다. 독일, 덴마크, 아일랜드, 체코,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맥주의 흥행국 독일에서는 전국에 걸쳐 1,000 여종의 맥주가 있다고 한다. 체코는 맥주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이다. 뮌헨의 아우구스티너, 파울라너, 호프브로이하우스, 뢰벤브로이 등과 함부르크의 홀슈텐, 아스트라, 하노버의 헤렌호이저, 린드너, 브레멘의 벡스 맥주 등, 각 지역마다 독특한 양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UEFA 챔피언스리그의 공식 스폰서인 하이네켄 맥주가 유명하고, 덴마크에서는 한때 리버풀의 스폰서이자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칼스버그 맥주가 유명하다. 아일랜드는 유명한 기록 책인 기네스 북을 발간하는 흑맥주 회사 기네스 맥주가 유명하고, 미국의 유명 맥주는 버드와이저, 밀러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 현지 맥주로는 빈땅 맥주가 있다. 대한민국의 맥주( Beer in Korea) * 오비맥주 * 하이트진로 * 롯데주류 *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 * 세븐브로이 * 장앤크래프트브루어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맥주 * 대동강맥주 * 압록강맥주 * 룡성맥주 독일의 맥주 **벡스 **옥토버페스트 비어 **크롬바커 체코의 맥주 * 컷비어 흑맥주와 라거를 반 반 섞은 맥주 * 라거 맥주 (필스너) 벨기에의 맥주 * 스텔라 아르투아 송도 맥주 축제 http://songdobeer.com/ 음악페스티벌과 맥주축제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 국내의 맥주들은 물론 러시아 중국 일본 등 맥주를 만날 수 있는 ‘동북아 맥주 대전’과 세계의 다양한 맥주를 맛 볼 수 있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대구 치맥 페스티벌 http://chimacfestival.com/ 역대 최대 85개 업체가 참가한 대구 치킨 맥주 페스티벌에선 치킨을 25만 5000여 마리, 맥주는 25만 리터가 준비될 만큼 굉장히 큰 축제이다. 두류공원에서 개최됐다. 치킨을 주제로 한 패션쇼와 전설의 복면가왕, 닭싸움 대회, 수제 맥주와 칵테일 경연대회, 각종 버스킹 등으로 많은 이벤트가 있다. 센첨 맥주 축제(부산 맥주 축제) http://centumfestival.com/ 무제한 맥주와 함께 부산 밤바다를 즐길 수 있는 축제다. 맥주를 마시면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 들이 있다. 인디 밴드의 음악과 댄스 팀들의 퍼포먼스도 볼 수 있다. 야구 생중계 또한 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삿포르 맥주 축제(일본) http://www.sapporo-natsu.com/beergarden/ 일본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삿포르에서 매년 여름마다 ‘삿포르 맥주 축제’가 열린다. 삿포르 맥주를 비롯하여 아사히, 산토리, 기린 등 일본 유수의 맥주 브랜드들이 참가하기 때문에 각 브랜드마다 홋카이도 한정 맥주를 판매하는 등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독특한 맥주와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칭다오 세계 맥주 축제(중국) http://www.qdbeer.cn/ 칭다오 세계 맥주 축제는 아시아 최대 맥주 축제이자 세계 4대 맥주 축제로 인정받고 있다.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칭다오시에는 음주 대회를 비롯해 다양한 음식과 공연이 펼쳐진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구 치맥 페스티벌과 칭다오 국제 맥주 축제가 양도시를 대표하는 치킨/맥주 관련 축제라는 것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축제 상호 간 우호 협력을 강화하여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MOU협약을 최근에 맺었다고 한다. 옥토버페스트(독일) http://www.oktoverfest.de/de 독일의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는 독일 뮌헨의 민속 축제이자, 세계에서 열리는 맥주 축제 중 가장 규모가 큰 축제이다. 민속 의상을 차려입은 시민과 방문객 8,000여 명이 어우러져 뮌헨 시내 7km를 가로지르는 시가행진이 큰 볼거리이다. 축제 기간에는 회전목마, 대관람차,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 80여 종을 포함하여 서커스, 팬터마임, 영화 상영회, 음악회 등 남녀노소 함께 할 수 있는 볼거리가 운영된다. 그래비티 (술)(비중, Gravity (alcoholic beverage)) * 하이그래비티 맥주( High-gravity beer) 독일 맥주순수령 흑맥주 분류:발효 식품 분류:발효 음료 |
탄산이 들어간 음료 음료 (飮料)는 액체를 많이 포함하여 마실 수 있는 음식을 뜻한다. 흔히 음료수 (飮料水)라고도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음료수는 마시거나 요리에 쓰이는 물만을 뜻한다. 마시는 일은 수세기에 걸쳐 사교의 큰 부분이 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마시기 위한 사회적 모임을 심포지엄이라 하며, 여기에서 물에 희석시킨 포도즙을 마셨다. 수많은 초기 사회들은 술을 신들이 내려준 선물로 간주하여, 디오니소스와 같은 신들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음료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나뉜다. 물 유제품 * 우유 청량 음료(탄산 음료) * 탄산수 스포츠 음료(이온 음료) 주스 뜨거운 음료 * 차 * 커피 알코올을 함유한 음료 (술) 곡류 음료 * 두유 기능성 음료 * 비타민 음료 * 갈증해소에 도움이 되는 음료 * 숙취해소 음료 * 에너지 음료 * 이온 음료 주스 술 마시기 청량 음료 유제품 |
이산화 탄소의 구조 이산화 탄소 (二酸化炭素)는 탄소 원자 하나에 산소 원자 둘이 결합한 화합물이다. 화학식은 CO2이며, 고체 상태일 때는 해빙 시에 바로 기체로 승화하므로 드라이아이스 (dry ice)라고 부른다. 기체 상태일 때는 무색, 무취, 무미로 지구의 대기에도 존재하며, 화산 가스에도 포함되어 있다. 유기물의 연소, 생물의 호흡, 미생물의 발효 등으로 만들어진다. 생물의 광합성 과정에서 주로 이산화 탄소를 이용하여 탄수화물이 합성된다. 이산화 탄소 결정 상온에서 무색 기체로 존재한다. 약간 신 맛이 있다. 밀도는 0 °C, 1atm에서 1.976g/L이다. 삼중점은 -56.6 °C/5.11atm으로 상온 상압에서 승화하며, 승화점은 -78.50 °C이다. 임계 온도는 31.0 °C이며, 임계 압력은 72.80atm이다. 분압이 1atm일 때, 1부피의 물에 녹는 이산화 탄소의 상대적인 부피는 다음과 같다. : 온도 0 °C 10 °C 20 °C 50 °C 부피 1.713 1.194 0.878 0.436 에탄올에는 물에 비해서 약 2배정도로 녹고, 카복실산 또는 그 무수물에는 물의 약 20배 정도 녹을 수 있다. 에테르, 벤젠 과는 잘 섞이지만 그 외의 많은 유기 화합물과는 잘 섞이지 않는다. 분자의 형태는 직선형이며, 탄소 원자와 산소 원자간의 결합 길이는 1.62Å이다. 고체는 분자성 결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산화 탄소는 화학적으로 활성이 낮은 기체이다. 이산화 탄소가 관여하는 대표적인 반응은 다음과 같다. 물에 녹아 약한 산성을 띠는 탄산을 생성한다. 1atm의 이산화 탄소에 수용액이 접해있을 경우의 pH는 3.7이다. 고압의 조건에서 포화 수용액을 냉각하면 수화물 CO2·8 H2O가 생성된다. 고온에서는 가역적으로 일산화 탄소와 산소로 분리된다. 수소와 가역적으로 반응하여 일산화 탄소와 물을 생성한다. 적당한 조건과 촉매를 갖추고 있을 경우 메테인, 폼산, 메탄올을 생성하는 경우도 있다. 알칼리 금속이나 알칼리 토금속과 반응하면 환원되어 탄소와 포름산염을 생성할 수 있다. 아연, 철과 같은 다른 금속과도 반응하여 일산화 탄소를 생성하는 경우가 많다. 황화 수소와 함께 가열된 금속관을 통과하면 일산화 탄소와 황을 생성한다. 사염화 탄소와 통과할 경우 포스젠을 생성한다. 많은 금속 산화물이나 수산화물과 반응하여 탄산염을 생성한다. 특히 수산화 칼슘과 반응하면 다음과 같은 반응이 진행된다. ::Ca(OH)2 + CO2 → CaCO3 + H2O ::CaCO3 + H2O + CO2 ⇄ Ca(HCO3)2 :탄산 칼슘은 물에 잘 녹지 않지만, 탄산 수소 칼슘은 물에 녹는다. 따라서 이산화 탄소의 분압이 높아지면 위의 두 반응 중 두 번째 반응의 평형이 생성물 쪽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탄산 칼슘이 반응을 일으켜 탄산 수소 칼슘이 되어 물에 녹게 된다. 반대로 이산화 탄소의 분압이 낮아지면 평형은 반응물 쪽으로 이동하고 다시 탄산 칼슘이 석출된다. 이 반응은 석회동굴의 생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산화 탄소는 무극성 분자이다. 실험적으로 이산화 탄소는 석회암에 염산을 반응시켜 얻을 수 있다. CaCO3+2HCl → CaCl2+H2O+CO2 공업적으로 이산화 탄소는 주로 다음과 같이 얻을 수 있다. 탄소를 포함하는 화합물을 연소시킬 때 얻을 수 있다. 대기 중에 존재하는 분량을 채취하여 얻을 수 있다. 알코올 발효 등 각종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량을 채취하여 얻을 수 있다. 석회암을 가열하여 생석회로 만드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얻을 수 있다. 공업적으로 이산화 탄소를 정제하는 데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반응을 이용한다. ::Na2CO3 + H2O + CO2 ⇄ 2 NaHCO3 ::K2CO3 + H2O + CO2 ⇄ 2 KHCO3 ::2HOC2H4NH2 + H2O + CO2 ⇄ (HOC2H4NH3)2CO3 위 반응들은 공통적으로 저온에서는 평형이 왼쪽으로 이동하고, 고온에서는 평형이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위 반응의 반응물이 포함된 수용액과 이산화 탄소를 반응시켜 이산화 탄소를 흡수한 후 이를 가열하면 다시 이산화 탄소가 발생한다. 이 성질을 이용하여 이산화 탄소를 정제할 수 있다. 이산화 탄소는 다음과 같은 용도로 사용된다. 고체 이산화 탄소인 드라이아이스는 냉각제로 사용된다. 이산화 탄소는 소화기에 사용된다. 특히 물을 사용하기가 곤란한 전기로 인한 화재를 진압할 때 효과적이다. 청량음료의 원료이기도 하다. 원유를 채취할 때 채취양을 늘릴 목적으로 초임계상태의 이산화 탄소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른 화합물 합성의 원료로 사용된다. 전기 용접의 불활성 기체로 사용된다. 액체 상태의 이산화 탄소는 용매로도 사용된다. 제철소, 철 구조물, 알루미늄, 자동차, 철도차량 용접에 사용된다. 용수 및 폐수 처리에 사용된다. 펄프 및 제지공장에 사용된다. 로켓, 잠수함 추진제로 사용된다. 하와이의 마우나 로아에서 측정한 이산화 탄소 농도 이산화 탄소는 온실기체로 작용하여, 지구복사를 통하여 우주공간으로 나가는 에너지 중 일부를 다시 지구로 되돌린다. 이러한 이산화 탄소의 성질은 지구의 에너지 평형을 깨트려서,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산화 탄소는 화석연료와 같은 탄소를 포함한 물질을 완전 연소시킬 경우 생성되는데, 최근 화석연료의 사용이 크게 늘면서 이산화 탄소의 배출량도 증가하여 대기중의 이산화 탄소 농도가 증가하였고 이는 지구온난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산화 탄소는 세포호흡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발생한 이산화 탄소는 순환계를 통하여 폐로 이동하여 체외로 방출된다. 이산화 탄소가 순환계를 통하여 세포로부터 폐로 이동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혈장에 녹아서 이동한다. 약 7%의 이산화 탄소가 이 방법을 사용하여 이동된다.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에 결합하여 이동한다. 약 23%의 이산화 탄소가 이 방법을 통해 이동된다. 탄산 수소 이온의 형태로 이동한다. 약 70%의 이산화 탄소가 이 경로로 이동된다. 탄산 수소 이온의 형태로 이동할 경우. 조직 근처의 혈관에서 이산화 탄소 분자는 적혈구 내의 탄산탈수효소에 의해서 물 분자와 반응하여 탄산을 형성한다. 탄산은 곧 탄산 수소 이온과 수소 이온으로 해리되어 수소 이온은 헤모글로빈에 결합하고 탄산 수소 이온은 혈장으로 방출된다. 폐 주위의 혈관에서 탄산 수소 이온은 반대 과정을 거쳐 이산화 탄소가 되고, 이것은 폐를 통하여 몸 밖으로 방출된다.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은 혈액의 pH가 떨어지면 산소와의 친화력 역시 감소하는데, 이를 보어 효과라 한다. 물질대사가 활발한 조직에서는 이산화 탄소의 생성량이 증가하며, 그 결과 주위 혈액의 이산화 탄소 분압은 증가한다. 이산화 탄소는 물과 결합하여 탄산을 생성하므로, 이는 혈액의 pH를 떨어트린다. 따라서 헤모글로빈에서 산소가 방출되고, 방출된 산소는 세포호흡에 사용된다. 식물은 광합성 과정에서 이산화 탄소를 흡수하여 이를 탄수화물의 형태로 만든다. 식물에 의해 흡수된 이산화 탄소는 캘빈회로로 들어가고, 루비스코에 의해 리불로스-1,5-이인산(RuBP)에 결합한다. 이는 여러 반응을 거쳐 글리세르알데하이드-3-인산(G3P)이 되고, 이것이 이후 포도당 또는 다른 탄수화물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한 분자의 G3P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분자의 이산화 탄소가 필요하다. 고농도의 이산화 탄소는 신체에 치명적일 수 있다. 부피 백분율로 0.6~2.5%의 이산화 탄소는 나른함을 일으킨다. 하지만 2.5%까지는 안전한 농도이다. 이 농도까지는 나른함은 일으키지만 오랜 시간 있어도 안전하며, 오랜 시간 노출되었다가 일반적 환경으로 나올 시에는 즉시 회복된다. 즉 2.5%까지는 즉시 회복이 가능하다. 3%가 넘어가면 호흡이 커지게 되며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3~4%사이에 오랜 시간 노출되었을 경우에는 후유증은 좀 오래가지만 시간은 걸리더라도 완전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4%가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4%가 넘으면 두통, 매스꺼움, 구토 등을 일으키게 되며 이 농도에 계속 노출시에는 장해가 생성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숨을 쉴때 내뱉는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4%인데 이 농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환이 잘 되지 않으며, 이러한 현상 때문에 4%가 넘어가면 이산화탄소의 독성 효과가 갑자기 크게 나타난다. 오랜 시간 4~5%에 노출시에는 폐 장해가 형성되며 기억력 감퇴, 시력 감퇴까지 나타날 수 있으며, 운동 능력 감퇴도 나타난다. 오랜 시간 노출시에는 이러한 현상이 회복되지 않는 장애 현상이 나타난다. 5%가 넘어가면 방안에 촛불이 자동으로 꺼진다. 6%에서는 공기가 부족한 고고도 환경에서나 일어나는 급격한 호흡수 증가 현상이 나타난다. 1~3시간 노출되면 장애 현상이 나타나므로 30분 내로 탈출해야 한다.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이 농도에 노출되면 사망하게 된다. 8%가 넘어가면 운동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며, 3분의 노출만으로 달리기가 불가능해진다. 이 농도에서는 20분 내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지으므로, 적어도 10분 내로 탈출해야 한다. 8%에서 농도에서 오랜 시간 넘어가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11%가 넘어가면 움직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2분안에 움직임이 불가능해지며, 5분내로 기절하게 되므로 적어도 1분 내로 이 농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30분~1시간내로 사망하게 되며 구토로 인한 기도 막힘으로 조기 사망도 할 수 있다. 13%의 농도에서는 짧은 시간내에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30초안에 탈출하지 못한다면, 움직임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1분안에 즉시 기절하며, 호흡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8분 내로 사망하게 된다. 15%의 농도에서는 즉시 기절하게 된다. 즉 물속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며 2~5분 내로 사망하게 된다. 17%가 넘어가면 고농도 이산화탄소의 흡입으로 인한 중독으로 즉시 기절하게 되며 1분내로 사망하게 된다. 고농도 이산화탄소가 폐가 쌓여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므로 호흡 순간 즉시 기절하며 40초~1분 내로 사망하게 된다. 지구 대기 1727년에 뉴턴적 고찰을 생리학과 화학에 도입하려고 노력한 영국 국교회 목사 스티븐 헤일즈는 유기 물질을 태울 때 특정한 기체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어떤 공기가 많은 유기 물질과 특정한 알칼리 토류에 고정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이산화 탄소였다. 그러나 이 기체는 조지프 블랙이 1755년에 에든버러 철학학회에 보고하고 다음 해에 산화마그네슘, 석회, 그 밖의 다른 알칼리 물질에 관한 실험으로 발표하기까지, 특정 화학종으로서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조셉 블랙(1728~1799)은 마그네슘을 통해 ‘고정 공기’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당시는 알칼리성 물질이 부식성을 띠는 까닭을 플로지스톤설을 통해서 설명하였다. 즉, 산화 칼슘에 약염기에 탄산 나트륨또는 탄산 칼륨을 작용시키면 플로지스톤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였다. 블랙은 실험을 통해서 이 과정에서 산화 칼슘의 질량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반응 결과 기체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 기체를 고정된 공기 (fixed air)라고 불렀고, 이것이 곧 이산화 탄소이다. 또한 그는 석회암에서 추출한 탄산 마그네슘을 가열하면 이산화 탄소가 발생함으로 인해서 질량이 감소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고 약염기성의 탄산염이 이산화 탄소를 방출할 경우 강염기성이 되고, 이것이 다시 이산화 탄소를 흡수할 경우 약염기성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또한 고정 공기가 대기 공기나 인간의 호흡 속에 함유되는 것, 석회수에 흡수되어 백탁 현상을 일으키는 것, 가성 알칼리를 고정하여 온화 알칼리를 만드는 것 등이 블랙에 의해 밝혀졌다. 기체과학에서는 블랙에 뒤이어 캐번디시가 이 기체의 비중, 용해도 기타에 대해 자세한 연구를 하였다. 이산화 탄소 배출량에 따른 나라 목록 지구 온난화 드라이아이스 온실 기체 탄소의 순환 일산화 탄소 이산화탄소 - 네이버 지식백과 분류:무기 탄소 화합물 분류:산성 산화물 분류:온실 기체 분류:물질대사 분류:무기 용매 분류:광합성 분류:탄소 산화물 분류:냉매 분류:화재 진압제 |
2002년 FIFA 월드컵 (은 17번째 FIFA 월드컵 대회로, 2002년 5월 31일에서 6월 30일까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아시아에서 열린 첫 FIFA 월드컵 대회이자 유럽과 아메리카 밖에서 열린 첫 대회이며, 골든골 제도가 시행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자 전 대회 우승국 자동 출전권이 적용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또한 이 대회는 역사상 1번째로 2개 이상의 나라에서 공동으로 개최된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브라질은 결승전에서 독일을 2-0으로 이기고 대회 역대 최다인 5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이 대회 우승으로 브라질은 FIFA 월드컵 우승팀 자격으로 2005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자격을 얻었으며, 이도 또한 해당 대회의 5번째 출전 대회이다. 터키는 대한민국과의 3위 결정전 경기에서 3-2로 승리해 이 대회를 3위로 마감하였다. 중국, 에콰도르, 세네갈, 그리고 슬로베니아가 이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였고, 터키는 1954년 이후로는 48년만에 처음으로 본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회는 충격적인 결과와 이변이 속출한 대회로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가 승점 1점을 얻는데 그치고 무득점으로 조별 리그에 탈락하였고, 또다른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도 조별 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또한 터키가 깜짝 3위를 기록하였고, 공동 개최국 대한민국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준결승전까지 진출하였다. 또다른 대이변으로는 세네갈이 개막전에서 프랑스를, 16강전에서 스웨덴을 제압하고 8강에 오른 것으로 여기서 터키에게 아쉽게 제동이 걸렸다. 물론, 이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인 국가는 브라질로, 이 대회에서 5번째로 FIFA 월드컵을 우승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공식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 (New Millenium, New Encounter, New Start)로 하였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1996년 5월 31일, FIFA에 의해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본래 대한민국, 일본, 그리고 멕시코가 셋이서 따로 경합했었다. 그러나, 두 아시아 국가들이 최종 결정이 나기 전에 협력할 것을 합의하였고, 양국은 멕시코를 제치고 만장일치로 개최국이 되었다. 이 대회는 복수의 국가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FIFA 월드컵이다. 결정이 내려지던 시점까지 일본은 단 한번도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하였다. (일본은 개최국 선정 이후인 1998년에서야 본선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FIFA 월드컵 개최국들 대회 유치 전까지 한번도 출전하지 못한 국가는 1934년의 이탈리아와 2022년의 카타르 뿐이다. (우루과이는 1930년 초대 FIFA 월드컵을 개최함에 따라 그 전 대회가 없었으며, 이들은 1928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었다.) 이례적인 개최국 선정은 대부분 시차가 거의 없는 국가들에서 주로 축구를 하던 유럽에는 화젯거리였다. 경기는 유럽 기준으로 아침 시간에 열렸고, 일부 학교와 기업들은 경기일에는 늦게 문을 열거나 근무 시간 초에 사내 응원을 했다. 총 199개국이 2002년 FIFA 월드컵 본선행을 놓고 경합하였고, 1999년 12월 7일, 도쿄에서 예선 추첨식이 거행되었다. 전 대회 우승국 프랑스와 공동 개최국 대한민국과 일본은 자동 출전권을 획득함에 따라 예선전에서 빠졌다. 이 대회는 전 대회 우승팀(디펜딩 챔피언)이 자동 출전권을 얻은 마지막 FIFA 월드컵이다. UEFA (유럽) 에 배당된 진출권 수는 14장이며, CAF (아프리카) 에는 5장, CONMEBOL (남아메리카) 에는 4장, AFC (아시아) 에 2장, 그리고 CONCACAF (북중미 및 카리브해) 에 3장이 배당되었다. 남은 두장은 AFC-UEFA, CONMEBOL-OFC (오세아니아)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통해 결정되었다. 4개국(중국, 에콰도르, 세네갈, 그리고 슬로베니아)이 본선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2018년 기준으로 이 대회는 터키, 중국, 아일랜드가 밟은 마지막 FIFA 월드컵 본선 무대이다. 터키는 1954년 이후 48년 만에 본선 무대에 등장하였고, 폴란드와 포르투갈은 1986년 이후 16년만이었다. 1998년 대회에서 4강을 차지한 네덜란드는 대회 본선에 합류하지 못하였으며, 대한민국은 비유럽, 비아메리카 최초로 5대회 연속 본선 진출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FIFA 월드컵을 우승한 전적이 있는 7개국(우루과이, 이탈리아, 독일, 브라질,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그리고 프랑스) 모두가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고, 이들이 모두 출전한 대회는 이 대회가 1986년(당시 프랑스는 아직 대회 우승을 거둔 적이 없었다.) 대회 이후로는 최초이다. 다음은 본선에 진출한 32개국과 각국의 2002년 5월 15일 기준의 FIFA 랭킹이다. AFC (4) CAF (5) OFC (0) 모두 탈락 CONCACAF (3) CONMEBOL (5) UEFA (15) 2002년 대회에서 시드를 받을 팀이 2001년 11월 28일에 결정되었다. 시드를 받은 국가는 A포트에 들어갔다. B포트에는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11개의 유럽 국가들이 들어갔다. C포트에는 시드 배정을 못 받은 CONMEBOL과 AFC 소속 국가들이 편성되었다. D포트는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CONCACAF와 CAF 소속 국가들이 들어갔다. 이 대회는 A조 톱시드로 전 대회 우승팀을 배정한 마지막 FIFA 월드컵 대회이다. 이 자리는 2006년 대회부터 개최국에게 고정적으로 배정되었다. 추첨 방식은 다음과 같다. A포트에 속한 팀은 전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는 A조, 공동 개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은 각각 D조와 H조에 배정되며, 나머지 팀은 무작위로 추첨한다. 단, 톱 시드를 받은 남아메리카 팀인 브라질, 아르헨티나는 대한민국과 일본 양쪽에 분산 배치된다. B포트에 속한 팀은 각 조에 한 팀씩 배정된다. 이 과정에서 남은 3개 팀은 한 조에 3개 이상의 유럽 팀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비유럽 톱 시드 팀인 대한민국, 일본,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속한 4개 조들 중에서 3개 조에 배정된다. C포트에 속한 팀은 B그룹 중 3개국이 배정되지 않은 조에 배정하며, 같은 대륙에 속한 팀이 있는 조로 배정할 수 없다. 중국은 인접성과 흥행을 고려해 대한민국에서 경기를 치르고,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연적으로 일본에서 경기를 치르게 된다. D포트에 속한 팀은 각 조에 어떠한 제약 조건도 없이 무작위로 배정한다. 단 같은 대륙에 속한 팀이 대한민국이나 일본에 편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소 2개의 아프리카 팀과 1개의 북아메리카 팀이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배정한다. 2001년 12월 1일, 부산의 벡스코에서 조추첨식이 열렸고, 각국의 일정이 최종 결정되었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잉글랜드, 그리고 스웨덴이 들어간 F조가 죽음의 조라는 평가가 나왔다. A포트 B포트 C포트 D포트 (공동 개최국) (공동 개최국) (1998년 우승국) 복수의 국가가 승점에서 동률을 이룰 경우 다음 순서에 따라 조별 리그 순위가 결정되었다 기존의 대회 본선 규정에서, 순위 규정은 다른 형식으로 결정되었는데, 상대 전적이 골득실차보다 우선이었다. 규정은 대회를 앞두고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으나, 기존의 규정 또한 FIFA와 UEFA의 웹사이트 등에 확인할 수 있어서, 올바른 규정을 찾는데에 있어서 혼선을 빚었다. A조는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가 세네갈, 우루과이, 그리고 덴마크와 경합하였다. 이번 FIFA 월드컵은 부상당한 지네딘 지단을 제외시킨 프랑스가 대회 새내기인 세네갈을 상대로 한 대한민국 서울에서의 개막전에 세네갈한테 0-1로 패배하였다. 다음날 울산에서 열린 덴마크와 우루과이의 경기에서는 욘 달 토마손이 2골을 넣어 자국에 2-1 첫승을 안겨다 주었다. A조 두번째 경기에서 프랑스는 부산에서 지긋지긋한 적수 우루과이와 대적하였고, 티에리 앙리를 이 경기에서 퇴장으로 잃은 불운을 겪은 끝에 0-0으로 비겼으며, 대구에서는 덴마크와 세네갈이 1골씩 주고받아 비겼다. 덴마크는 이후에 인천에서 프랑스를 2-0으로 격파하고 전 대회 우승팀을 일찍 돌려보냈다. 전 대회 우승팀은 무득점으로 탈락하면서 FIFA 월드컵 전대회 우승팀들 중 최악의 성적을 냈다. (우루과이는 1934년에 불참을 선언했다.) 수원에서 열린 다른 A조 최종전 경기에서는 세네갈이 우루과이를 상대로 3-0으로 앞서나가다가 내리 3골을 실점해 3-3으로 추격당하기까지 했지만 남아메리카인들이 전세를 역전시키고 대회 생존에 필요한 4번째 득점에 실패하면서 조2위를 사수하여 16강에 올라갔다. A조의 1위를 차지한 국가는 덴마크로 승점 7점을 획득하였고, 이어 세네갈이 5점으로 2위를 차지하였다. 2점밖에 획득하지 못한 우루과이는 전 대회 우승팀이자 승점 1점으로 조 최하위를 차지한 프랑스와 함께 탈락하였다. B조의 스페인은 경쟁국 슬로베니아, 파라과이 (각각 광주와 전주에서) 를 3-1로, 대전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3-2로 이기고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승점을 획득한 유이한 국가가 되었다. 파라과이는 서귀포에서 열린 처녀출전국 슬로베니아를 막판 결승골에 힘입어 3-1로 잡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골득실차에서 동률을 만들었다. (양팀은 4점으로 승점 동률을 이루었고, 부산에서 열린 서로간의 1차전 경기에서 2-2로 비겼다.) 그 결과, 6골을 득점해 더 많은 골을 득점한 파라과이가, 5골을 넣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치고 16강에 극적으로 합류하였다. C조의 브라질도 옆조의 스페인처럼 3전전승을 거두었는데, 이들은 울산에서 터키를 2-1로, 중국을 4-0으로, 그리고 코스타리카를 수원에서 5-2로 제압했다. 브라질과 함께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국가는 터키로, 코스타리카와 승점 4점으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양팀은 인천에서 1-1로 비겼다.) 골득실차에서 우위를 점했다. 보라 밀루티노비치 (5번의 FIFA 월드컵에서 모두 다른 국가를 지도하였다.) 가 이끄는 중국은 승점을 획득하기는 커녕 단 1골도 득점하지 못하였다. 공동 개최국 대한민국은 D조에서 폴란드, 미국, 그리고 포르투갈과 한조에 들어갔고, 이들 4팀은 서로 혈전을 벌였다. 대한민국은 폴란드와 부산에서 첫 경기를 치렀으며, 대한민국은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로 2-0 완승으로 첫 FIFA 월드컵 승리를 쟁취하였다. 미국은 그 다음날 수원에서 포르투갈을 3-2로 손쉽게 제압하는 경이로운 결과를 냈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대구에서 결전을 펼쳤고, 양팀 골키퍼인 이운재와 브래드 프리델이 모두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1-1로 비겨 승점을 나누어 가져갔다. 조별 리그 최종전은 인천 (포르투갈-대한민국) 과 대전 (폴란드-미국) 에서 동시에 열렸고, 대한민국은 70분에 터진 박지성의 골에 힘입어 포르투갈을 귀국시켰고, 폴란드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3-1로 완승을 거두어 유종의 미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승점 7점을 적립해 사상 처음으로 조 1위까지 차지하였고, 미국은 승점 4점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승점을 3점씩 가져간 포르투갈과 폴란드는 각각 조 3위와 4위를 차지했다. E조에 속한 독일은 사우디아라비아, 아일랜드, 그리고 카메룬을 차례로 상대하였다. 아일랜드와 카메룬은 니가타에서 열린 E조 첫경기에서 1-1로 서로 비겼고, 독일은 삿포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진영을 8-0으로 해체하였다. 이바라키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독일은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19분 선제골에 힘입어 1-0으로 앞서나갔으나, 후반 인저리타임 2분에 집중력 부족으로 로비 킨에게 동점골을 실점해 비겼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이타마에서 카메룬을 상대로 후반에 사뮈엘 에토에게 실점하고 0-1로 패해 일찌감치 대회에서 탈락하였다. E조 최종전에서 독일은 시즈오카에서 마르코 보데와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연속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해 카메룬을 돌려보내고, 아일랜드는 요코하마에서 로비 킨, 게리 브린, 그리고 데이미언 더프의 연속골로 사우디아라비아를 3-0으로 제압하였다. 독일은 7점으로 조 1위를 차지하였고, 아일랜드가 승점 5점으로 그 뒤를 이었으며, 카메룬은 승점 4점으로 탈락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승점은 고사하고 무득점 12실점으로 대회를 꼴찌로 마무리했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잉글랜드, 그리고 스웨덴이 포진한 F조는 "죽음의 조"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바라키에서 열린 조별 리그 1차전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후반전에 터뜨린 결승골로 나이지리아를 1-0으로 이겼고, 사이타마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웨덴이 솔 캠벨과 니클라스 알렉산데르손이 나란이 골을 터뜨려 1-1로 비겼다. 스웨덴과 나이지리아는 이어지는 고베에서의 2차전에 서로 맞붙었고, 줄리어스 아가호와에게 선제골을 얻어 맞았으나, 헨릭 라르손이 2골을 터뜨려 나이지리아를 2-1로 역전시켜 탈락시켰다. 한편 삿포로에서는 잉글랜드가 데이비드 베컴의 페널티킥으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었다. F조 최종전에서 스웨덴은 아르헨티나와 미야기에서 1-1로 비겼고, 잉글랜드와 나이지리아는 오사카에서 득점 없이 비겼다. 스웨덴과 잉글랜드는 각각 승점 5점으로 나란히 1위, 2위를 차지해 F조에서 생존하였고, 승점 4점에 그친 아르헨티나는 그리하지 못하였으며, 나이지리아는 승점 1점으로 조 최하위였다. 이탈리아, 에콰도르, 크로아티아, 그리고 멕시코는 G조에서 서로를 맞닥뜨렸다. 니가타에서 G조 첫 경기가 벌어졌는데, 멕시코가 콰우테모크 블랑코의 페널티킥에 힘입어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날 밤 삿포로에서는 이탈리아가 처녀출전국 에콰도르에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2골로 2-0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이바라키에서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가 한판 승부를 벌였고, 크로아티아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2-1 역전승을 거두었다. 다음날 미야기에서는 멕시코가 에콰도르에 결정적인 2-1 승리를 거두었다. G조 최종전에서 멕시코와 이탈리아가 오이타에서 1-1로 비겼고, 에콰도르는 요코하마에서 크로아티아를 1-0으로 꺾어 FIFA 월드컵 첫 승을 맛보았다. 멕시코는 승점 7점으로 G조를 선두로 끝냈고, 이탈리아는 4점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승점 3점을 획득한 크로아티아와 에콰도르는 각각 조 3위와 4위로 탈락하였다. H조에는 또다른 공동개최국 일본이 벨기에, 러시아, 그리고 튀니지가 경합하였다. 일본은 사이타마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2-2로 비겨 첫 승점을 수확하였고, 러시아는 고베에서 튀니지를 2-0으로 제압하였다. 이후 일본은 요코하마에서 이나모토 준이치의 후반전 결승골로 러시아에 1-0으로 이겨 첫 FIFA 월드컵 승리를 거두었고, 벨기에는 오이타에서 튀니지와 1-1로 비겨 발목이 잡혔다. H조 최종전에서 일본은 오사카에서 튀니지에 2-0의 무난한 승리를 거두었고, 벨기에는 시즈오카에서 러시아를 3-2로 잡고 극적으로 생존하였다. 일본은 승점 7점으로 조 1위를 차지하였고, 벨기에는 5점을 확보해 다음 라운드 진출에 성공하였다. 러시아는 승점 3점, 튀니지는 1점으로 탈락하였다. 16강전은 서귀포에서 독일이 올리버 뇌빌의 결승골로 파라과이에 1-0 신승을 거두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 잉글랜드는 니가타에서 덴마크를 3-0으로 완파하였는데, 3골 모두 전반전에 터졌다. 스웨덴과 세네갈은 오이타에서 접전을 벌였고, 정규시간을 1-1로 마치고 앙리 카마라가 연장전에 골든골로 경기를 끝내 세네갈의 2-1 승리를 견인하였다. 수원에서는 스페인과 아일랜드가 경쟁하였고, 스페인은 경기시간 대부분을 1-0로 앞서다가 로비 킨에게 페널티킥을 얻어맞아 1-1로 정규시간을 끝내 연장전까지 뛰었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서 3-2로 이겼다. 미국은 브라이언 맥브라이드와 랜던 도너번의 릴레이골에 힘입어 CONCACAF의 숙적 멕시코를 전주에서 2-0으로 완파하였다. 브라질은 히바우두의 중거리 발리슛과 호나우두의 역습 마무리로 고베에서 벨기에를 2-0으로 격파하였다. 터키는 미야기에서 위밋 다발라의 12분 결승골로 1-0으로 이겨 공동개최국 일본의 행진을 멈추었다. 다른 공동개최국 대한민국은 대전에서 이탈리아의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후반 43분 설기현의 극적인 왼발 동점골로 연장전까지 승부를 펼쳤고 117분에 안정환의 골든골로 경기를 끝냈다. 골닷컴은 이 경기를 대한민국이 수많은 오심의 덕을 보아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대한민국이 8강행 막차에 오르면서 FIFA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국가들이 같은 대회의 8강에 이름을 동시에 올렸다. 8강에서 브라질은 잉글랜드와 시즈오카에서 경합하였고, 호나우지뉴가 데이비드 시먼의 머리를 넘기는 프리킥을 후반전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공시켜 경기를 2-1로 뒤집었다. 독일은 울산에서 39분에 터진 미하엘 발라크의 결승골로 미국을 1-0으로 침몰시켰고, 49분에 토르스텐 프링스가 골라인에서 공을 손으로 친 것에 대해 미국이 페널티킥을 요청하여 논란을 야기했으나, 주심은 이를 선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광주에서 열린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또다른 논란의 경기를 펼쳤고, 120분동안 득점 없이 비겼고,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의 4번째 키커 호아킨의 실축으로 5-3으로 이겼다. 스페인은 두 차례 득점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주심이 먼저 호루라기를 불었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개최국은 AFC 소속 국가로는 처음으로 FIFA 월드컵 준결승전에 오르면서 종전의 1966년 대회에서 8강에 올랐던 북한을 제쳤다. 나머지 8강전에서는 터키가 오사카에서 세네갈을 상대로 93분에 일한 만스즈의 골든골로 승리를 쟁취했다. 준결승전은 두 경기 모두 1-0의 접전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첫 준결승전에서는 독일이 미하엘 발라크의 결승골로 대한민국에 승리하였다. 그러나, 발라크는 옐로 카드를 받는 바람에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이타마에서 열린 그 다음날 경기에서는 호나우두가 후반전 시작과 함께 자신의 대회 6호골을 득점하였고, C조에서 싸우고 재회한 터키를 또다시 꺾었다. 대구에서 벌어진 3위 결정전에서 터키는 하칸 쉬퀴르가 상대의 킥오프를 가로채 10.8초만에 선제골을 기록하였고, 이는 FIFA 월드컵 역사상 역대 최단시간 득점이었다. 최종적으로 터키는 대한민국을 3-2로 이기고 대회 3위를 차지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호나우두의 두 골을 앞세운 브라질이 독일을 이기고 FIFA 월드컵 정상을 탈환했다. 호나우두는 후반전에서 12분 간격으로 두골을 뽑아내었고, 경기 후, 8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브라질은 통산 5번째 FIFA 월드컵 우승으로, FIFA 월드컵 역대 최다 우승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브라질은 1986년의 아르헨티나 이래 토너먼트전에서 한 번도 승부차기까지 가지 않고 우승한 국가가 되었으며, 1986년 대회 이후 (1982년에 승부차기가 도입되었으나 토너먼트전은 4경기에 불과했다.) 승부차기로 승부가 결정난 경기 수가 역대 최저 (2경기) 였다. 브라질은 1970년 이래 FIFA 월드컵 본선에서 전승으로 우승한 국가가 되었고, FIFA 월드컵 우승국 역대 최고 골득실차 (+14) 의 기록도 세웠다. 브라질의 주장 카푸는 3번의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연속 출전하는 최초의 선수로 기록되었고, 자국의 대표로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본래 국내에 배정된 입장권은 매진되었고, 조직위원회는 4월 말까지 해외로 배당된 입장권 판매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개막전에 빈 좌석이 현저히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월드컵 입장권 판매국 (WCTB) 가 아직 팔리지 않은 입장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차차 밝혀졌다. FIFA가 이 입장권을 풀기로 하자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미야기의 일본 vs 터키 경기를 중심으로 전화판매를 하였으나, 양쪽 모두 매진이 아닌 것으로 확인했고, 700석가량이 비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대회 개최를 위해 각각 10개의 경기장씩 마련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대회를 앞두고 신축된 경기장이었다. A조부터 D조까지의 경기는 대한민국에서, E조에서 H조까지의 경기는 일본에서 열렸다. 서울 부산 인천 울산 서울월드컵경기장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인천문학경기장 울산문수축구경기장 수용인원 63,961명 수용인원 55,982명 수용인원 52,179명 수용인원 43,550명 200px 200px 200px 200px 대구 수원 대구월드컵경기장 수원월드컵경기장 수용인원 68,014명 수용인원 43,188명 200px 200px 광주 전주 서귀포 대전 광주월드컵경기장 전주월드컵경기장 제주월드컵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수용인원 42,880명 수용인원 42,391명 수용인원 42,256명 수용인원 40,407명 200px 200px 200px 200px 요코하마 사이타마 시즈오카 오사카 요코하마 국제 경기장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시즈오카 "에코파" 스타디움 나가이 스타디움 수용인원 70,000명 수용인원 63,000명 수용인원 50,600명 수용인원 50,000명 200px 200px 200px 200px 미야기 오이타 미야기 스타디움 오이타 스타디움 빅 아이 수용인원 49,000명 수용인원 43,000명 200px 200px 니가타 이바라키 고베 삿포로 니가타 스타디움 빅 스완 이바라키 가시마 스타디움 고베 윙 스타디움 삿포로 돔 수용인원 42,300명 수용인원 42,000명 수용인원 42,000명 수용인원 42,000명 200px 200px 200px 200px 2002년 FIFA 월드컵에는 각각 36명의 주심과 부심이 배정되었다. 주심 AFC 김영주 알리 부지사임 가미카와 도루 루쥔 사드 카밀 알파들리 CAF 모하메드 게자즈 코피 코지아 팔라 은도유 가말 알-간두르 무라드 다미 CONCACAF 카를로스 바트레스 피터 프렌더개스트 펠리페 라모스 브라이언 홀 윌리암 마투스 CONMEBOL 레네 오르투베 카를루스 이우제니우 시몽 앙헬 산체스 비론 모레노 오스카르 루이스 우발도 아키노 OFC 마크 실드 UEFA 키로스 바사라스 얀 페허레이프 테리에 하우게 킴 밀톤 닐센 마르쿠스 메르크 안데르스 프리스크 우르스 마이어 휴 댈러스 안토니오 로페스 니에토 류보시 미헬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그래엄 폴 비투르 멜루 페헤이라 질 베시에르 부심 AFC 하이다르 콜레이트 마트 라짐 아왕 하마트 모하메드 사에드 알리 알-트라이피 비스바 크리시난 아우니 하사우네 코말레스와란 산카르 CAF 드라만 단테 알리 토무상게 와기 파라그 브라이튼 무자미리 타우피크 아디엔기 CONCACAF 커티스 찰스 블라디미르 페르난데스 엑토르 베르가라 마이클 라구나트 CONMEBOL 조르지 올리베이라 호르헤 라탈리노 보메르 피에로 미겔 히아코무시 OFC 폴 스미스 엘리스 도리리 UEFA 야프 폴 옌스 라르센 하이너 뮐러 롤란트 판 닐런 유리 두파노프 레이프 린베리 이고르 슈람카 에곤 베로이터 필립 샤프 에브젠 암러 카를루스 마투스 마치에이 비에르즈보프스키 프레데리크 아르놀 셰켈리 페렌츠 대회 기간동안 심판의 판정에 논란이 수반되었다. 이탈리아-대한민국 경기의 판정에 대한 불만이 400,000건 접수되었고, ESPN은 10대 FIFA 월드컵 논란에 이를 선정하였다. 스페인-대한민국 경기에서 스페인 측은 호각 소리 이후에 골망을 가른 것을 골이라 주장했고, 이반 엘게라는 "도둑"이라 비난했고, 스페인 언론도 이에 동조해 "꿈을 앗아간 도둑"이라 비난했으나, FIFA는 단순한 인간적 오류일 뿐이라며 판정을 지지했다. 실제로 이탈리아-대한민국 경기에서 이탈리아 선수들은 몸싸움에서 수 차례 팔꿈치를 이용하였고, 이 중 크리스티안 비에리 선수는 김태영의 안면을 팔꿈치로 가격해 코뼈 골절의 부상을 입혔으나,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대한민국-스페인 경기에서는 경기가 20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엔리케 로메로가 백태클로 김남일에 부상을 입혔으나, 역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이 대회 본선에 참가하는 32개국은 모두 기존의 22명에서 증가한 23명을 엔트리에 등록하였다. 23명의 선수들 중 골키퍼는 3명이어야 했다. 모든 시간은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동아시아 표준시를 따른다. (EAT/UTC+9) 2002년 FIFA 월드컵 순위 조별 리그는 A조에서 D조까지는 대한민국에서, E조부터 H조까지는 일본에서 치렀다. 다음 조별 리그 순위표에서 다음은 해당 의미를 내포한다 경기 = 치른 경기 횟수 승 = 이긴 경기 수 (승리) 무 = 비긴 경기 수 (무승부) 패 = 진 경기 수 (패배) 득 = 득점 횟수 실 = 실점 횟수 차 = 골득실차 점 = 획득한 총 승점 조별 리그 범례 조 1위와 2위가 16강전에 진출한다. 조별 리그 탈락. 전 대회 우승국 프랑스는 새내기 세네갈과 덴마크에 패하고 무득점으로 A조에서 탈락하였고, 프랑스를 이긴 두 팀은 두 차례 FIFA 월드컵을 우승한 전적이 있는 우루과이를 제치고 다음 라운드로 올라갔다. 2002년 5월 31일 0-1|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 2002년 6월 1일 1-2| 울산문수축구경기장, 울산 2002년 6월 6일 1-1| 대구월드컵경기장, 대구 0-0| 아시아드주경기장, 부산 2002년 6월 11일 2-0|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3-3| 수원월드컵경기장, 수원 스페인은 일찌감치 16강행을 확정짓고 조별 리그 3경기를 모두 이겼고, 슬로베니아는 2득점을 얻었으나 승점은 1점도 확보하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넬손 쿠에바스의 슬로베니아전 멀티골은 파라과이로 하여금 남아프리카 공화국보다 더 많은 득점을 기록하게 하여 16강전에 진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B조 최종전에서 슬로베니아가 파라과이를 이겼을 경우, 스페인에 지더라도 16강에 오를 수 있었으나, 본인들은 스페인에 2-3으로 지고, 슬로베니아마저 파라과이에 1-3으로 지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2002년 6월 2일 2-2| 아시아드주경기장, 부산 3-1| 광주월드컵경기장, 광주 2002년 6월 7일 3-1| 전주월드컵경기장, 전주 2002년 6월 8일 1-0| 대구월드컵경기장, 대구 2002년 6월 12일 2-3| 대전월드컵경기장, 대전 1-3| 제주월드컵경기장, 서귀포 브라질은 3경기를 모두 이기고 다음 라운드로 이동하였고, 그와 반대로 중국은 승점은 커녕 득점도 올리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코스타리카는 허술한 수비로 인해 골득실차에서 밀려 탈락하였고, 그에 따라 터키가 조 2위를 차지하였다. 2002년 6월 3일 2-1 | 울산문수축구경기장, 울산 2002년 6월 4일 0-2 | 광주월드컵경기장, 광주 2002년 6월 8일 4-0 | 제주월드컵경기장, 서귀포 2002년 6월 9일 1-1 |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2002년 6월 13일 2-5 | 수원월드컵경기장, 수원 3-0 |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 미국은 포르투갈을 3-2로 손쉽게 제압하는 이변을 연출한 후, 대한민국과 비기고, 폴란드에 1-3으로 완패하였으나,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데 필요한 승점을 충분히 적립하였다. 1차전에서 미국에 2-3으로 패했던 포르투갈은 2차전에서 폴란드를 4-0으로 이겼으나, 3차전에서 대한민국에 0-1로 지면서 탈락하였다. 폴란드 또한 미국과의 최종전에서 1승을 거두었으나, 그렇게 조별 리그 에서 아쉽게 결국 포르투갈, 폴란드는 3위, 4위로 조별 리그 탈락 하였다. 2002년 6월 4일 2-0|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부산 2002년 6월 5일 3-2| 수원월드컵경기장, 수원 2002년 6월 10일 1-1| 대구월드컵경기장, 대구 4-0| 전주월드컵경기장, 전주 2002년 6월 14일 0-1| 인천문학경기장, 인천 3-1| 대전월드컵경기장, 대전 사우디아라비아는 독일에게 0-8로 박살난 것을 시작으로, 카메룬에 0-1패배, 아일랜드에 0-3으로 지면서 3전전패 무득점 12실점을 기록해 E조 꼴찌 및 대회 꼴찌(32위)로 탈락하였다. 독일은 카메룬을 2:0으로 누르고 조 1위로 토너먼트 16강전에 진출하였다. 아일랜드의 로비 킨은 이 FIFA 월드컵 대회 내내 독일을 상대로 득점에 성공한 유일한 선수였고, (다른 한명은 결승전에 조우한 브라질의 호나우두) 인저리 타임 동점골에 힘입어 아일랜드의 조 2위를 견인하였다. 2002년 6월 1일 1-1| 니가타 스타디움, 니가타 8-0| 삿포로 돔, 삿포로 2002년 6월 5일 1-1|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 이바라키 2002년 6월 6일 1-0|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사이타마 2002년 6월 11일 0-2| 시즈오카 스타디움, 시즈오카 0-3| 국제 경기장, 요코하마 우승후보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차기 우승후보로 꼽힌 아르헨티나 또한 스웨덴과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1-1로 비기며 조별 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들은 2차전에서 잉글랜드에 패한 것으로 인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기 위해 승리가 필요했다. 스웨덴은 잉글랜드와 승점&골득실에서 동률을 이뤘으나 득점에서 앞서며 조 1위를 차지하였고, 나이지리아는 잉글랜드와의 최종전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탈락했다. 2002년 6월 2일 1-0|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 이바라키 1-1|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사이타마 2002년 6월 7일 2-1| 고베 윙 스타디움, 고베 0-1| 삿포로 돔, 삿포로 2002년 6월 12일 1-1| 미야기 스타디움, 미야기 0-0| 나가이 스타디움, 오사카 멕시코는 조별 리그 처음 두 경기를 모두 이기고 무난히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이탈리아는 에콰도르가 요코하마에서 크로아티아를 이겨준 덕에 그대로 16강에 합류했는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멕시코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동점골을 득점했다. 그에 따라 크로아티아와 이들을 상대로 첫승을 거둔 FIFA 월드컵 데뷔국 에콰도르가 남았고, 승점을 3점씩 적립하는데 그친 그들은 각각 조 3위, 4위를 차지하였다. 2002년 6월 3일 0-1| 니가타 스타디움, 니가타 2-0| 삿포로 돔, 삿포로 2002년 6월 8일 1-2|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 이바라키 2002년 6월 9일 2-1| 미야기 스타디움, 미야기 2002년 6월 13일 1-1| 오이타 스타디움, 오이타 1-0| 국제 경기장, 요코하마 공동개최국 일본이 2승 1무로 조 1위를 차지했다. 벨기에 또한 러시아와의 최종전에서 멍군장군 경기 끝에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였으나, 러시아와 튀니지는 각각 승점을 3점, 1점씩밖에 얻지 못하는데 그쳐 탈락하였다. 2002년 6월 4일 2-2 |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사이타마 2002년 6월 5일 2-0 | 고베 윙 스타디움, 고베 2002년 6월 9일 1-0| 국제 경기장, 요코하마 2002년 6월 10일 1-1| 오이타 스타디움, 오이타 2002년 6월 14일 0-2| 나가이 스타디움, 오사카 3-2| 시즈오카 스타디움, 시즈오카 결선 토너먼트에서 16강전, 8강전, 그리고 준결승전은 A조, C조, F조, 그리고 H조를 통과한 팀의 경우 일본에서 치렀고, B조, D조, E조, 그리고 G조를 통과한 팀들은 대한민국에서 치렀다. 3위 결정전은 대한민국의 대구에서, 결승전은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열렸다. ---- ---- ---- ---- ---- ---- ---- ---- ---- ---- ---- FIFA 월드컵 우승 ★ ★ ★ ★ 브라질 제17대 세계 챔피언 (5회 우승) 1958년・1962년・1970년・1994년・ 2002년 호나우두는 8골을 득점하여 이 대회의 득점왕에 올랐다. 도합하여 109명의 선수들이 161골을 터뜨렸고, 이 중에는 자책골 3골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책골 3골 중 2골은 같은 경기에서 나왔는데, 이로써 FIFA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한경기 양팀이 자책골을 기록한 첫 경기가 나왔다. 8골 호나우두 5골 미로슬라프 클로제 히바우두 4골 욘 달 토마손 크리스티안 비에리 3골 미하엘 발라크 마르크 빌모츠 파파 부바 디오프 헨리크 라르손 라울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로비 킨 일한 만스즈 파울레타 2골 하레드 보르헤티 랜던 도너번 브라이언 맥브라이드 호나우지뉴 안정환 앙리 카마라 페르난도 이에로 이나모토 준이치 마이클 오언 로날드 고메스 위밋 다발라 하산 샤슈 넬손 쿠에바스 1골 줄리어스 아가호와 시야봉가 놈베테 루카스 라데베 베니 매카시 테보호 모코에나 퀸턴 포춘 박지성 설기현 송종국 유상철 이을용 황선홍 데니스 로메달 올리버 뇌빌 토마스 링케 마르코 보데 올리버 비어호프 베른트 슈나이더 카르스텐 양커 블라디미르 베스차스트니흐 드미트리 시초프 발레리 카르핀 예고르 티토프 콰우테모크 블랑코 헤라르도 토라도 클린트 매시스 존 오브라이언 베슬러이 송크 요앙 왈랭 페터르 판 데르 헤이던 에드미우송 주니오르 호베르투 카를루스 살리프 디아오 칼릴루 파디가 안데르스 스벤손 니클라스 알렉산데르손 가이스카 멘디에타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세바스티안 시미로티치 밀렌코 아치모비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에르난 크레스포 데이미언 더프 게리 브린 매트 홀랜드 아구스틴 델가도 에디손 멘데스 알바로 레코바 다리오 로드리게스 리차르드 모랄레스 디에고 포를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나카타 히데토시 모리시마 히로아키 스즈키 다카유키 데이비드 베컴 솔 캠벨 리오 퍼디낸드 에밀 헤스키 사뮈엘 에토 파트리크 음보마 마우리시오 라이트 파울로 완초페 윈스톤 파르크스 밀란 라파이치 이비차 올리치 라우프 부자이엔 뷜렌트 코르크마즈 엠레 벨뢰졸루 하칸 쉬퀴르 프란시스코 아르세 호르헤 캄포스 로케 산타 크루스 베투 후이 코스타 이매뉴얼 올리사데베 마르친 제브와코프 파베우 크리샤워비치 자책골 제프 어구스 (포르투갈전) 카를레스 푸욜 (파라과이전) 조르즈 코스타 (미국전) 출처 FIFA 미하엘 발라크가 4도움으로 최다 도움을 기록하였다. 4도움 미하엘 발라크 3도움 베른트 슈나이더 크리스티안 지게 하비에르 데 페드로 데이비드 베컴 2도움 이을용 이영표 예스페르 그룅키에르 에릭 판 메이르 주니오르 클레베르송 호나우지뉴 앙리 카마라 프란체스코 토티 스테벤 브리세 하산 샤슈 1도움 조지프 요보 시야봉가 놈베테 퀸턴 포춘 마르틴 예르겐센 스티 퇴프팅 미로슬라프 클로제 토르스텐 프링스 알렉산드르 케르자코프 라몬 모랄레스 콰우테모크 블랑코 에디 루이스 클린트 매시스 토니 사네 존 오브라이언 조시 울프 브랑코 스트루파르 요앙 왈랭 에드미우송 카푸 히바우두 칼릴루 파디가 안데르스 스벤손 카를레스 푸욜 호아킨 밀렌코 아치모비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스티브 스턴톤 게리 켈리 나이얼 퀸 매트 홀랜드 울리세스 데 라 크루스 아구스틴 델가도 파블로 가르시아 크리스티아노 도니 빈첸초 몬텔라 야나기사와 아쓰시 오노 신지 이치카와 다이스케 니키 버트 사뮈엘 에토 제레미 로날드 고메스 마우리시오 라이트 로베르트 야르니 니코 코바치 이을드라이 바쉬튀르크 에르귄 펜베 위밋 다발라 일한 만스즈 하칸 쉬퀴르 프란시스코 아르세 데니스 카니사 누누 카푸슈 루이스 피구 주앙 핀투 마레크 코지민스키 야체크 크지누베크 출처 FIFA 골든 슈 골든 볼 골든 글러브 최우수 신인 선수 FIFA 페어 플레이 트로피 최고의 인기 팀 호나우두 올리버 칸 올리버 칸 랜던 도너번 1 올리버 칸은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골든 볼 수상 골키퍼이다. 출처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올리버 칸 뤼쉬튀 레츠베르 솔 캠벨 페르난도 이에로 홍명보 알파이 외잘란 호베르투 카를루스 미하엘 발라크 클라우디오 레이나 히바우두 호나우지뉴 유상철 엘 하지 디우프 미로슬라프 클로제 호나우두 하산 샤슈 대회 종료 후, FIFA는 2002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참가한 팀들의 진출 라운드와 결과를 상대적으로 반영한 최종 순위표를 발표하였다. 팀 1 C 7 7 0 0 18 4 +14 21 2 E 7 5 1 1 14 3 +11 16 3 C 7 4 1 2 10 6 +4 13 4 D 7 3 2 2 8 6 +2 11 8강전에서 탈락 5 B 5 3 2 0 10 5 +5 11 6 F 5 2 2 1 6 3 +3 8 7 A 5 2 2 1 7 6 +1 8 8 D 5 2 1 2 7 7 0 7 16강전에서 탈락 9 H 4 2 1 1 5 3 +2 7 10 A 4 2 1 1 5 5 0 7 11 G 4 2 1 1 4 4 0 7 12 E 4 1 3 0 6 3 +3 6 13 F 4 1 2 1 5 5 0 5 14 H 4 1 2 1 6 7 −1 5 15 G 4 1 1 2 5 5 0 4 16 B 4 1 1 2 6 7 −1 4 조별 리그에서 탈락 17 B 3 1 1 1 5 5 0 4 18 F 3 1 1 1 2 2 0 4 19 C 3 1 1 1 5 6 −1 4 20 E 3 1 1 1 2 3 −1 4 21 D 3 1 0 2 6 4 +2 3 22 H 3 1 0 2 4 4 0 3 23 G 3 1 0 2 2 3 −1 3 24 G 3 1 0 2 2 4 −2 3 25 D 3 1 0 2 3 7 −4 3 26 A 3 0 2 1 4 5 −1 2 27 F 3 0 1 2 1 3 −2 1 28 A 3 0 1 2 0 3 −3 1 29 H 3 0 1 2 1 5 −4 1 30 B 3 0 0 3 2 7 −5 0 31 C 3 0 0 3 0 9 −9 0 32 E 3 0 0 3 0 12 −12 0 2002년 FIFA 월드컵의 공식 스폰서는 두 분류로 나뉘었다 FIFA 월드컵 스폰서와 대한민국 / 일본 국가대표팀 스폰서. FIFA 월드컵 스폰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스폰서 일본 국가대표팀 스폰서 어바이어 아디다스 버드와이저 코카-콜라 후지 제록스 후지필름 현대-기아 질레트 JVC 마스터카드 맥도날드 필립스 도시바 야후! 현대해상화재보험 KCC KB국민은행 KT 대한항공 롯데호텔 아사히 신문 닛폰 생명보험 일본전신전화 닛신식품 노무라 증권 도쿄전력 도쿄해상화재 그리스의 작곡가 반젤리스(Vangelis)가 대회의 공식 음악의 작곡 담당자였으며(급하게 만듦), 음반 Anthem 을 만들었다. 이 곡 연주에 대한민국의 음악가와 일본의 음악가들이 참여하였다. 미국의 가수 아나스타샤가 부른 국제 타이틀 송은 Boom 이다. 한일 양국의 대표 가수가 참여하였다. 대한민국의 가수는 남성듀오 브라운아이즈의 나얼과 윤건, 그리고 여가수 박정현이, 일본은 남성듀오 케미스트리와 여가수 소웰루가 참여하였다. 로컬 타이틀 송은 Let s Get Together Now 이다. 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FIFA가 주최한 공식 문화 행사는 "바람의 시" 서울월드컵경기장 인근의 난지천 공원에서 열렸으며, 바람의 시 행사는 5월 29일부터 6월 25일까지 FIFA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고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깃발미술축제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참가해 손수 깃발을 그렸고, 화합을 추구하고 해외 손님들을 반기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2002년 깃발미술축제 조직위원회) 월드컵 기간동안 대한민국의 주요 범죄율이 11.6%정도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의 범죄는 30.8%가량 줄어들었으며 특히 8강전인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가 열린 날에는 56.7%정도 감소되었다. 아디다스 피버노바 – 공인구 2002년 FIFA 월드컵 공식 음반 2002 FIFA 월드컵 공식 웹사이트 (보존됨) - 웨이백 머신 (2002년 8월 9일자 기록) 2002 FIFA 월드컵 - FIFA.com FIFA 기술 보고서 (1부) 및 (2부) RSSSF 결승전 기록 2002 FIFA 월드컵 - Planet World Cup RSSSF 예선 기록 2002 FIFA World Cup BBC Coverage 2002 FIFA 월드컵 출전 선수명 표기 분류:2002년 축구 분류:2002년 대한민국 분류:2002년 일본 분류: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 분류:일본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 분류:대한민국-일본 관계 분류:2002년 5월 분류:2002년 6월 |
튜링 상 ()은 ACM에서 컴퓨터 과학 분야에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매년 시상하는 상이다. "컴퓨터 과학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린다. 영국의 수학자이며 현대 전산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앨런 튜링의 이름을 땄다. 현재는 인텔사에서 후원하고 있으며 10만 달러의 상금이 부상으로 주어진다. 계산기 학회는 지난 2007년 6월 26일, 구글이 인텔과 함께 튜링상의 공동 후원을 맡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두 회사는 총 25만 달러의 상금을 각각 12만5천 달러씩 분담하기로 하였다. 1966년 앨런 펄리스 (고급 프로그래밍 기법, 컴파일러 설계) 1967년 모리스 윌크스 (라이브러리) 1968년 리처드 해밍 (자동 코딩 시스템, 오류 검출 부호 및 오류 정정 부호) 1969년 마빈 민스키 (인공지능) 1970년 제임스 H. 윌킨슨 (수치 해석, 선형 대수, "후방" 오류 분석) 1971년 존 매카시 1972년 에츠허르 데이크스트라 (프로그래밍 언어 연구) 1973년 찰스 바크만 (데이터베이스) 1974년 도널드 커누스 (알고리즘 분석 및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 1975년 앨런 뉴웰 / 허버트 사이먼 (인공지능, 인지과학, 리스트 처리) 1976년 미하엘 라빈 / 데이나 스콧 (비결정 기계) 1977년 존 배커스 (고급 프로그래밍 시스템, 프로그래밍 언어 명세의 형식적 절차) 1978년 로버트 플로이드 (효율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방법론) 1979년 케네스 아이버슨 (프로그래밍 언어와 수학 표기법, 대화형 시스템 구현, APL의 교육적 사용, 프로그래밍 언어 이론) 1980년 토니 호어 (프로그래밍 언어의 정의 및 디자인) 1981년 에드거 F. 커드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특히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1982년 스티븐 쿡 (계산 복잡도) 1983년 켄 톰프슨 / 데니스 리치 (범용 운영 체제 이론, 유닉스 운영 체제 개발) 1984년 니클라우스 비르트 (컴퓨터 언어 개발) 1985년 리처드 카프 (알고리즘 이론, 특히 NP-완전성에 대한 연구) 1986년 존 홉크로프트 / 로버트 타잔 (알고리즘 및 자료구조의 디자인 및 분석) 1987년 존 코크 (컴파일러 이론, 대형 시스템 구조 연구, RISC 개발) 1988년 이반 서덜랜드 (컴퓨터 그래픽스) 1989년 윌리엄 카한 (수치 해석) 1990년 페르난도 J. 코바토 (CTSS, 멀틱스) 1991년 로빈 밀너 (LCF, ML, CCS) 1992년 버틀러 램슨 (분산 컴퓨팅 환경) 1993년 유리스 하르트마니스 / 리처드 스턴스 (계산 복잡도 이론) 1994년 에드워드 파이겐바움 / 라즈 래디 (대용량 인공 지능 시스템) 1995년 매뉴얼 블럼 (계산 복잡도 이론 연구 및 이의 암호학과 프로그램 검사에 응용) 1996년 아미르 프누엘리 (temporal logic, 프로그램 및 시스템 검증) 1997년 더글러스 엥겔바트 (대화형 컴퓨팅) 1998년 짐 그레이 (데이터베이스 및 트랜잭션 처리) 1999년 프레드 브룩스 (컴퓨터 구조, 운영 체제, 소프트웨어 공학) 2000년 앤드루 야오 (계산이론, 유사 난수 생성기, 암호학 등) 2001년 올렌-요한 달 / 크리스텐 니가드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2002년 로널드 라이베스트 / 아디 샤미르 / 레오나르드 아델만 (공개키 암호 시스템) 2003년 앨런 케이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2004년 빈트 서프 / 로버트 칸 (TCP/IP를 비롯한 인터넷워크 설계) 2005년 페테르 나우르 (프로그래밍언어와 알골 60 정의, 컴파일러 설계) 2006년 프란시스 E. 앨런 (고성능 컴퓨팅) 2007년 에드먼드 M. 클라크 / E. 앨런 에머슨 / 조세프 시파키스 (모델 체킹) 2008년 바바라 리스코프 (데이터 추상화, 분산 컴퓨팅. 고장허용범위) 2009년 찰스 P. 태커 (퍼스널 컴퓨터, 컴퓨터 네트워크) 2010년 레슬리 밸리언트 (기계 학습) 2011년 유디 펄 (인공지능, 확률적 알고리즘과 원인 추론) 2012년 샤피 골드바서 / 실비오 미칼리 2013년 레슬리 램포트 2014년 마이클 스톤브레이커 2015년 휫필드 디피 / 마틴 헬만 2016년 팀 버너스리 2017년 존 헤네시 / 데이비드 패터슨 2018년 제프리 힌튼 / 요슈아 벵지오 / 얀 레쿤 미국 계산기 학회 튜링 상 공식 웹사이트 분류:컴퓨터 과학상 분류:미국의 과학기술상 분류:ACM 분류:앨런 튜링 |
앨런 매티슨 튜링 (, OBE, FRS, 1912년 6월 23일 ~ 1954년 6월 7일)은 영국의 수학자, 암호학자, 논리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의 선구적 인물이다. 알고리즘과 계산 개념을 튜링 기계라는 추상 모델을 통해 형식화함으로써 컴퓨터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튜링 테스트의 고안으로도 유명하다. ACM에서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매년 시상하는 튜링상은 그의 이름을 따 제정한 것이다. 이론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 라고 불린다. 1945년에 그가 고안한 튜링 머신은 초보적 형태의 컴퓨터로, 복잡한 계산과 논리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튜링은 1952년에 당시에는 범죄로 취급되던 동성애 혐의로 영국 경찰에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감옥에 가는 대신 화학적 거세를 받아야 했던 그는, 2년 뒤 사이안화 칼륨 (청산가리)를 넣은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사후 59년만인 2013년 12월 24일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크리스 그레일링 법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튜링의 동성애 죄를 사면하였다. 이어서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 그는 1912년 아버지 줄리어스 매시슨 튜링과 에설 사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인도(차트라프루)에서 임신했지만 영국에서 낳기 원해 런던(패딩턴)으로 가서 그를 출산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3주 만에 읽기를 배웠으며 계산과 퍼즐에 능했다고 한다. 193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해 수학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1935년 확률론 계산에서 한계중심정리에 관한 학위논문으로 킹스 칼리지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1936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7년 영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연구 중 튜링 기계의 개념을 도입한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할 문제에의 응용〉을 발표했다. 1938년 9월 블레츨리 정부 암호학교 GCCS(현 GCHQ)에 들어갔고, 1939년 9월 4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는 Hut 8의 책임자가 되어 폴란드 정보부에서 제작한 에니그마 해독기 Bomby 를 개선한 봄브(The Bombe) 를 개발했다. 이런 경험에서 만든 계산 이론은 후일 영국에서 개발되는 콜로서스(프로그래밍 가능 전자 컴퓨터)의 기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앨런 튜링은 1951년에 영국에서 범죄로 인식되던 동성애 혐의로 체포된 후 징역형과 화학적 거세형 중 선택을 해야 했고, 튜링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거세를 선택하여 1년간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았다. 그는 1954년 6월 7일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그 곁에는 한 입 베어문 사과가 놓여 있었다. 부검 결과 치사량의 사이안화 칼륨 (청산가리)을 주사한 사과를 먹고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튜링은 15살 때 처음으로 수학적 연구결과를 도출했다. 그것은 역탄젠트 함수의 무한한 연속을 어림잡을 수 있는 계산 형식으로, 크게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이후 튜링의 연구의 전체적인 방향을 보여준다. 즉 그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계산할 수 있는 실수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튜링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으며, 특히 막스 보른의 양자역학 강의와 리하르트 쿠란트의 미분 방정식 강의를 들으며 수치 해석을 비롯해 확률론, 통계학, 정수론, 군론 등에 관심을 가졌다. 1933년 튜링은 물리학자 에딩턴의 과학적 방법론을 수강하고 정규분포곡선(courbe normale)이라는 고전적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튜링은 자연 현상에서 규칙성 연구에서의 중심극한정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독일의 수학자 린데베르크(Jarl Waldemar Lindeberg)가 1922년에 먼저 증명한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를 증명했다. 이 증명으로 그는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리만 가설 등 소수의 개수에 대한 문제를 접한 튜링은 수치상으로 제타 함수를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튜링은 제타함수 계산에 쓸 기계를 만들기 위해 장학금을 받아냈으나,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가 전쟁 이후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다시 시도하게 된다. 이 기계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으나, 튜링은 1953년에 제타 함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군론은 튜링이 평생 연구해온 분야인 수치상의 문제나 계산의 유효성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나, 가능한 모든 값의 치환을 통해 함수와 함수 풀이 영역 간의 구조적 상관성이라는 방법으로 튜링의 인생에 세 번의 영향을 주게 된다. 우선 1936년 튜링이 계산할 수 있는 수와 계산할 수 없는 수 사이의 경계선을 연구할 때 구조적인 계산의 유효성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다음으로 함수이론의 연장선의 문제였고 셋째는 군론을 간접적으로 수치 적용해 양자역학과 암호학에 이용했다. 양자역학에서 군론은 상태 개념에 연관되어 있고, 암호학에서는 치환 개념과 치환 불변성의 개념에 관련되어 있다. 1936년 튜링은 결정가능성 문제에 대한 부정적 증명을 해낸 후 프린스턴 대학교로 떠나게 된다. 이 때 튜링은 수리논리학의 알론조 처치와 군론의 존 폰 노이만을 만나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게 된다. 3년의 학업 이후 폰 노이만이 조교로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정중히 거절한 튜링은 케임브리지로 다시 돌아왔다. 튜링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만난 처치와 함께 수리논리학의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그는 해결 불가능성의 정도의 산술적 서열을 구축함으로써 해결 불가능성의 개념이 고려된 형식 체계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인식 변화를 일구어냈다. 암호학과 통계학 분야에서 튜링이 전쟁동안 진척시켰던 연구 작업은 1996년 미국 정부에 의해 폐기되는 등 공개에 어려움을 겪어, 전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튜링이 없었다면, 영국은 전쟁에서 분명 패했을 것이다”라는 동료 D.미치의 인터뷰 증언 등을 고려할 때 그의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튜링은 당시 에니그마라 칭해졌던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냈으며 당시 컴퓨터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튜링은 수리논리학에서 정의된 계산, 조작 실행에 영향을 준 추상적 기계(알고리즘), 실행화시킨 물질적 기계를 토대로 이후 정보과학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암호학은 수학, 논리학, 물리학에 연관된 분야로 튜링은 전쟁 선포 이후 암호학 부서(GCCS)에 들어갔다. 열 명 남짓의 연구팀의 수장이 된 튜링은 독일 베를린의 잠수정 등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코드화하여 해독하는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튜링은 암호학의 새로운 기틀을 다졌으며 통계학과 기계화할 수 있는 논리적 방법을 통해 모순을 제거해 나갔다. 정보 개념, 혹은 데이터의 중요도는 원래 통계학적 속성인데, 선험적(a priori)가설로부터 경험적(a posteriori)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앨런 튜링은 1945년 10월 1일 테딩턴에 위치한 국립물리연구소(National Physical Laboratory, NPL)에서 영국의 첫 번째 컴퓨터라 할 수 있는 전자 계산기 제작을 위한 수학 부서 창설을 추진했다. 그리고 맨체스터 대학교 등에서 컴퓨터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이 시기의 튜링은 전적으로 형태 발생과 수학적 모델화에 주력했다. 1912년 6월 23일 앨런 매시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 런던에서 출생 아버지 줄리어스 매시슨 튜링(Julius Mathison Turing), 어머니 에설 사라(Ethel Sara) 1931년 수학 연구를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 1938년 영국으로 들어와 정부암호학교(Goverment Code and Cypher School; GCCS)에서 암호학 수업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 시작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의 GCCS 부서에서 영국을 포위하고 있는 독일 해군의 무선메시지 해독 작업 수행 1943년 1-3월간 벨 연구소에서 음성 해독 문제에 관해 작업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컴퓨터의 자동 계산 기계(Automatic Computing Engine; ACE)를 구축하기 위해 테딩턴에 있는 국립물리연구소(NPL)에 들어감 1950년 철학지 《Mind》에 논문 〈계산기와 지능〉 게재 1951년 왕립 학회 특별회원으로 선출 동성애 혐의로 재판을 받고 여성호르몬을 투여하는 형을 받음 1954년 약간의 사이안화 칼륨에 담가 놓았던 사과를 먹음으로써 윔슬로에 있는 자택에서 6월 7일 42세의 나이로 자살 튜링 기계는 튜링이 알고리즘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가상의 기계이다. 이 기계는 한정된 종류의 기호 중 하나를 기록할 수 있는 칸들이 무한히 이어진 띠와 각 칸의 정보를 읽고 수정하는 기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튜링 머신의 상태와 칸에 기록된 기호에 따라 지정된 절차를 수행한다. 튜링 머신이 수행하는 절차는 1. 현재 기계가 위치하는 칸의 기호를 수정 2. 띠의 위치 이동 3. 튜링 머신의 상태 변경 이 있다. 에니그마는 암호 작성과 해독을 돕는 기계로, 1918년 아르투스 슈르비우스에 의해 처음 고안되었다. 이 기계는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이 군사 관련 정보를 암호화하는 데 쓰였다. 작동 원리는 다중치환암호를 개선한 것이다. 다중치환 암호는 열쇠(key)값이 있을 때 그 열쇠값에 따라 암호화할 문장의 각 글자를 다른 글자로 치환한 암호를 의미한다. 에니그마는 기계적으로 다중치환 암호를 구현하고, 이에 스크램블러를 추가해 보안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튜링은 에니그마가 암호화와 복호화 둘 다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암호문의 스크램블러에 의한 효과를 없앴고, 자주 쓰이는 평문의 목록인 크립을 이용해서 이론적으로 에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었다. 튜링은 수학, 암호학, 생물학 등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 활동을 했지만, 특히 컴퓨터 과학 분야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컴퓨터 과학 및 전산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가 구상한 튜링 기계의 무한히 긴 띠는 컴퓨터의 메모리에, 기호를 읽는 기계는 컴퓨터의 중앙 처리 장치(CPU)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튜링 기계의 한 종류인 범용 튜링 기계는 프로그램을 내장해서 작동하는 현대의 컴퓨터를 많이 닮아 있다. 이외에도 콜로서스 개발에 간접적인 기여를 했다. 계산기 학회(ACM)에서는 튜링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66년부터 매년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한테 주는 튜링상을 제정하였다. 현재 튜링상은 컴퓨터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인공 지능에게는 뢰브너 상이 수여된다. 애플 컴퓨터의 로고인 "한 입 베어먹은 사과"는 튜링을 연상시키지만, 애플 컴퓨터가 로고를 만들 때 튜링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애플 컴퓨터에서는 로고의 모델이 뉴턴의 사과라고 주장한다.(애플 컴퓨터를 창립한 스티브 잡스도 뉴턴의 사과를 모델로 애플 컴퓨터를 창립했다고 한다.) 1946년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 수훈 《이미테이션 게임》(2014년,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에니그마 튜링 머신 튜링 테스트 정지 문제 튜링상 이미테이션 게임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 데이비드 리비트 지음, 고중숙 옮김. 《인공 지능 창시자 튜링》, Jean Lassengue 지음, 임기대 옮김. Alan Turing Year Alan Turing site maintained by Andrew Hodges 분류:1912년 태어남 분류:1954년 죽음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20세기 철학자 분류:대영제국 훈장 장교 분류:무신론 철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무신론자 분류:잉글랜드의 공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논리학자 분류:영국의 대학 교수 분류:잉글랜드의 발명가 분류:잉글랜드의 성소수자 인물 분류:잉글랜드의 수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철학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인공지능학자 분류:음독 자살한 사람 분류:컴퓨터 선구자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동문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 동문 분류:프린스턴 대학교 동문 분류:남색죄 기결수 분류:스코틀랜드계 잉글랜드인 분류: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
적혈구 확대사진 적혈구 (赤血球, Red Blood Cell, RBC, Erythrocyte) 또는 붉은피톨 ()은 가운데가 패인 원반 모양을 한 세포이다. 혈액 속에 들어 있으며, 이들이 혈구에 고루 분포하고 있어 혈액이 붉게 보인다. 적혈구는 허파에서 몸의 모든 세포들로 산소 운반을 위해 특화된 도너츠 모양의 세포로, 고도의 산소 보유능력을 가진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을 개당 약 2억 8천만 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개의 적혈구는 약 11억 2천만개의 산소 분자를 운반할 수 있다. 이 헤모글로빈에는 철을 함유하고 있어 붉은 색을 띠며, 적혈구가 붉은 색을 띠는 원인이 된다. 또한 헤모글로빈은 적혈구 건조 중량의 약 95%를 차지한다. 그리고 적혈구는 골수에서 생성되며 골수에서 처음 생성될 당시 미성숙 상태인 적혈구들은 핵을 가지고 있으나, 성숙 과정에서 세포핵이 퇴화하여 없어진다. 적혈구는 혈액의 혈구 세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정상 적혈구의 수명은 평균 120일이다. 혈액 1 mm³ 에 남자는 약 500만 개, 여자는 450만 개 가량의 적혈구를 가지고 있다. 적혈구는 직경이 7.2~8.4μm 정도이며, 두께는 가장 두꺼운 부분이 2~3μm, 중심 부위는 1μm 정도이다. 포유류에서는 적혈구의 양면이 오목한 쌍요면체형으로 되어 있어 어느정도 휘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성질 때문에 좁은 모세혈관을 비교적 쉽게 통과할 수 있다. 또한 적혈구는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혈액형은 적혈구 세포막 외벽에 붙은 탄수화물 구조물이 항원으로 작용하여 결정된다. 적혈구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은 네덜란드의 생물학자 얀 스바메르담(Swammerdam, J.)으로, 그는 1658년에 초기 현미경으로 개구리 피를 연구하였다. 적혈구라는 이름인 "Erythrocyte"는 그리스어에서 "빨강"을 뜻하는 erythros 와 "빈 용기"를 뜻하는 kytos 가 변한 -cyte 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적혈구에는 핵이 없기 때문에 세포 중앙이 움푹 파여 있는 형태, 즉 중심부가 양쪽으로 오목한 도넛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할 경우 적혈구 직경은 평균 7~8μm, 두께는 평균 2.2μm 정도 되는데 중앙 함몰 부분은 0.46~1.16μ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적혈구의 형태는 공 모양의 적혈구보다 혈구 표면적이 넓어 가스교환의 효율을 높여주고, 삼투압에 대한 변화나 외부 충격에 저항력을 가지게 하고, 적혈구 막에 유연성을 가지게 해 적혈구 직경보다 좁은 모세혈관(모세혈관의 직경은 약 4μm에 불과하다)을 쉽게 통과할 수 있게 한다. 적혈구 내부는 대부분 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헤모글로빈(혈색소)이 약 1/3 정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소량의 당, 효소, 단백질, 전해질, 비타민 등을 함유하고 있다. 적혈구 막 구조 적혈구에서 대부분의 산소를 운반하는 물질은 철이온을 가진 헤모글로빈이다. 산소에 대한 헤모글로빈의 친화도(affinity)는 혈중 수소 이온의 농도와 2,3-bisphosphoglycerate(2,3-BPG)의 영향을 받는다. 혈중 수소 이온의 농도가 높을수록(즉, pH가 낮아질수록) 산소에 대한 헤모글로빈의 친화도는 낮아진다. 이산화탄소는 체액에 용해되면 물과 반응하여 중탄산이 되면서 체액을 산성으로 만드는데, 생체 조직은 산소에서 에너지를 얻고 결과물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므로, 생체 조직에서는 적혈구가 허파에서 얻은 산소를 쉽게 내놓게 된다. 2,3-BPG 역시 산소에 대한 헤모글로빈의 친화도를 떨어뜨린다. 순수한 헤모글로빈은 산소에 대한 친화도가 매우 높다. 실제로, 순수하게 분리해 낸 헤모글로빈은 오직 8%만의 산소만을 해리시킨다. 이것은 일반적인 생체 환경에서 77%의 산소를 해리시키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혈중에 존재하는 2,3-BPG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한편, 혈액 내 적혈구의 수가 감소하거나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낮아지게 되면 혈액의 산소 운반능이 저하되어 빈혈이 발생한다. 백혈구 혈소판 혈액, 응고물, 적혈구,백혈구, 혈소판 네이버 캐스트 - 적혈구 분류:혈액 세포 분류:혈액학 분류:호흡 |
밝은 쪽이 동맥혈, 어두운 쪽이 정맥혈이다. 혈액 (血液) 또는 피 는 몸 안의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세포의 신진대사에 의해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회수하여 운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체액이다. 보통은 피 라고 부른다. 혈액은 결합 조직의 한 종류로 액체 성분인 혈장과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각종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경우 혈액 속의 세포 용적은 여성의 경우 약 38%, 남성의 경우 약 46% 정도이다.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의 피가 붉은 색인 것은 적혈구 안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여 붉은 색을 띠기 때문이다. 혈액이 하는 역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체조직으로 영양소를 운반한다. 허파나 아가미에서 호흡을 통해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몸의 여러 조직에서 나오는 노폐물을 신장으로 운반한다. 내분비계통에서 만들어진 호르몬을 목표 기관까지 운반한다. 온혈동물의 경우 몸 안에서 발생하는 열을 운반하여 체온을 유지한다. 질병에 대항하는 면역 인자를 가지고 있다. 체내 삼투압과 수분 평형에 관여한다. 몸의 수소 이온 농도를 유지한다. White Blood cells.jpg|섬네일|200px|혈세포의 전자현미경 사진.왼쪽부터 적혈구, 혈소판, 백혈구 동물의 혈액은 혈장과 혈구로 구성된다. 척추동물의 경우 혈구는 혈액의 약 45%, 혈장은 혈액의 약 55% 정도를 차지한다. 혈장의 91%는 물이다. 다음 표는 사람의 혈액 조성이다. 혈장 조성 물 염류 혈장단백질 성분 물 나트륨, 칼륨, 칼슘, 마그네슘, 염화물, 중탄산염 등 알부민, 피브리노겐, 면역 글로불린 등 기능 용매 삼투압 평형, pH 조절, 막 전압 조절 등 삼투압 평형, pH 조절, 응고, 면역 반응 등 혈구 조성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1ml당 개수 500 - 600 백만 5 - 6 천 25 - 40 만 기능 산소와 이산화탄소 수송 외래 세포 파괴 및 항체 생산 혈액 응고 혈구에는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이 있으나, 무척추동물에서는 일반적으로 백혈구만 볼 수 있다. 적혈구는 호흡 색소(혈색소)인 헤모글로빈을 포함하고 있는 혈구로서, 낙타·라마를 제외한 일반적인 포유류의 적혈구는 한가운데가 들어간 원반 모양이며 핵이 없다. 이에 비하여, 낙타·라마 류의 동물의 적혈구는 타원형이고, 한가운데에 핵이 있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어느 것이나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주로 혈장에 들어 있다. 백혈구는 혈색소를 갖지 않는 혈액 속의 세포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혈액을 가진 모든 동물에서 볼 수 있다. 혈소판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으로서, 핵은 없고 혈액 응고 작용에 관계한다. 이러한 혈구, 특히 적혈구를 만드는 기관을 조혈 기관이라고 한다. 양서류 가운데 무미류와 파충류·조류 및 포유류에서는 골수가 대표적인 조혈 기관이다. 양서류 가운데 유미류에서는 지라와 몸 속에 흩어져 있는 특정한 종류의 조직이 조혈 기관의 일을 맡아 하고 있다. 한편, 조류나 포유류에서는 발생 단계에 따라 조혈 기관이 변한다. 즉, 배(胚)의 시기에는 간, 배의 후기에는 지라나 골수에서 혈액이 생성된다. 한편, 오래 된 혈구는 주로 지라나 간 및 골수에서 파괴된다. 백혈구는 배의 시기에는 간·지라 및 골수에서 만들어져 지라에서 파괴된다. 혈장의 약 91%는 물이고 혈장 단백질은 혈장 가운데 약 7%를 차지한다. 일부 항체와 단백질 형태의 호르몬을 제외한 대부분의 혈장 단백질은 간에서 생성된다. 혈장 단백질은 수소 이온을 흡수하거나 배출할 수 있어 혈액의 pH를 7.4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글로불린은 알파, 베타, 감마의 세 종류가 있으며 이 가운데 알파와 베타는 간에서 합성되고 감마글로불린은 림프계통에서 합성된다. 림프계통에서 합성되는 감마글루블린은 면역 항체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혈장 단백질은 알부민, 글로불린, 피브리노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약 80여 종에 이른다. 알부민은 가용성 단백질 가운데 황산암모늄으로는 침전되지 않는 단순 단백질을 총칭하는 것이고, 글로불린은 물에 녹지 않으며 약한 염기성또는 중성 염류 용액에 녹는 단순 단백질이다. 한편, 피브리노겐은 수용성 단백질로 혈액 응고에 관여하여 혈소판의 침전 속도와 혈액의 점성에 영향을 미친다. 혈장 단백질은 거대 유기 분자와 결합하여 운반 작용을 하는데, 알부민은 헤모글로빈의 분해 산물인 빌리루빈을 운반하고, 글로불린을 포함하고 있는 지단백질은 콜레스테롤을 운반한다. 혈구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있다. 적혈구는 혈색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운반한다. 적혈구는 척추동물의 경우 낙타와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운데가 움푹한 원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지름 약 7.5µm 두께 약 1.5µm이다. 적혈구에 있는 혈색소는 철분을 함유하고 있는 포르피린과 구상 단백질인 글로빈의 복합체이다. 혈액은 혈색소 덕분에 동일한 양의 물보다 약 60배 많은 산소를 수용할 수 있다. 백혈구는 적혈구와 달리 자체적으로 세포핵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 염색하였을 때 세포내에 알갱이가 염색되는 과립성 백혈구와 알갱이가 염색되지 않는 무과립성 백혈구로 구분된다. 과립성 백혈구로는 염색 특징에 따라 호산성 백혈구, 호염기성 백혈구, 호중성 백혈구가 있고, 무과립성 백혈구로는 림프구와 단백구가 있다. 백혈구는 골수에 있는 공통 조상 세포인 조혈모세포에서 증식된 뒤 혈액 속으로 유입된다. 혈소판은 골수의 거핵 세포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부정형의 조직으로 크기는 약 3-4µm이다. 주된 역할은 손상된 혈관에서 응고 작용을 일으켜 혈액의 손실을 막고 혈관의 재생을 돕는 것이다. 600배로 확대한 혈액 사진 인간의 순환계통 동물의 혈관계는 개방 혈관계와 폐쇄 혈관계로 나뉜다. 절지동물인 새우의 경우, 개방 혈관계에서 산소가 포함된 혈액은 심장으로부터 혈관을 통해 몸의 중요한 부분까지 운반되는데, 혈관은 그다지 길지 않고 단순하다. 더구나 모세 혈관이 없으므로, 혈액은 혈관의 말단으로부터 직접 조직 속으로 흘러들어가, 세포 사이에 있는 체강액(체액)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조직 세포에 산소를 공급한 혈액은, 정맥에 해당되는 단순한 혈관에 모인 후 아가미를 거치면서 산소를 많이 함유하여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순환계를 개방 혈관계라고 하며, 무척추동물에서 널리 볼 수 있다. 환형동물, 원색동물 및 척추동물 의 경우, 심장에서 나간 혈액은 허파나 아가미에서 가스 교환이 이루어지고, 대동맥을 통하여 몸의 세부에까지 산소를 운반하는데, 동맥과 정맥은 모세 혈관에 의해 연결되어 있어서, 개방 혈관계와는 달리 혈액이 조직 속으로 직접 흘러드는 일이 없다. 가스 교환은 모세 혈관의 얇은 막을 통하여 혈액과 조직 세포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또, 수분이나 영양분·노폐물 등도 모세 혈관의 벽을 통하여 조직 세포에 공급되거나 혈액 속으로 들어간다. 모세 혈관은 마침내 정맥으로 이어져, 혈액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순환계를 폐쇄 혈관계라고 한다. 인간의 피가 붉게 보이는 것은 적혈구에 포함된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혈액에는 여러 가지 물질이 녹아 있어서 무색인 경우는 드물다. 척추동물의 혈액이 붉은색을 띠는 것은 주로 적혈구 속에 포함되어 있는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무척추동물 중에도 혈액이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있으나, 이것은 혈장 속에 붉은색의 혈색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액 속에 직접 녹아 있는 산소의 양만으로는 생명 활동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산소와 능동적으로 결합하여 보다 많은 산소를 운반하는 혈색소의 존재가 중요하게 된다. 이들 혈색소는 모두 금속 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단백질로서, 산소 분압이 높은 호흡 기관에서 산소와 결합하며, 분압이 낮은 조직 세포에서는 산소를 해리하여 조직 세포에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혈색소는 산소 분자를 주고받는 일을 하므로 보통 호흡 색소 라고도 한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다른 종류의 혈색소는 혈장에 들어 있다. 동물의 혈색소에는 헤모글로빈·헤모시아닌·클로로크루오린·헤모에리드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갑각류 등의 피가 녹색으로 보이는 까닭은 헤모시아닌에 함유된 구리때문이다. 헤모글로빈의 구조. 그림에서 녹색이 색소인 햄, 붉은 색과 파란 색은 단백질 구조이다. 헤모글로빈은 네 개의 햄 색소와 각각 알파와 베타로 불리는 두 개의 단백질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글로빈은 철을 포함하여 산소와 가역적인 방법으로 결합한다. 헤모글로빈은 세포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와도 결합하여 세포 조직으로 산소를 해리하고 이산화탄소를 체외로 내보내게 된다. 이때, 이산화탄소는 산소와 달리 햄 구조의 다른 부분에 결합하여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체내의 이산화탄소는 약 8%가 혈장에 녹아들고 20%는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며 나머지 70%는 적혈구의 다른 부분에 스며들게 된다. 이산화탄소가 적혈구로부터 농도가 낮은 혈장으로 녹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적혈구는 물과 효소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를 탄산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다시 중탄산이온과 수소이온으로 분리시킨 다음 중탄산이온은 혈장으로 내보내고 수소이온 만을 헤모글로빈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염화물 전환이라고 하며, 그 결과 혈장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고 주변 조직들로부터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두족류, 복족류와 같은 연체동물이나 대다수의 절지동물의 경우 혈색소는 헤모시아닌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시아닌은 두 개의 구리와 산소가 결합하여 체내에 산소를 운반한다. 산소를 얻게 되면 산화구리의 색인 푸르스름한 빛을 지니게 되고 산소를 잃으면 무색이 된다. 대부분의 연체동물은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으나 일부 종류는 헤모글로빈과 헤모시아닌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린 때에는 헤모글로빈이 있다가 성체가 되면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연체동물 중에서도 혈색소가 헤모글로빈인 경우도 있는데, 피조개, 꼬막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갯지렁이는 클로로크로우린을 혈색소로 사용하는데, 이 혈색소는 헤모글로빈과 같이 철을 산소와 결합하는 매개체로 사용하지만 헤모글로빈보다는 산소 결합력이 떨어진다. 혈중에 클로로크로우린의 농도가 높을 경우 붉은 색을 띄며 옅으면 녹색을 띈다. 출혈 건강한 성인 남성의 경우 외상을 입어 출혈이 있더라도 전체 혈액의 약 20%(1L)까지는 신체에 큰 무리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40%에 해당하는 2L 가량의 혈액을 잃었을 경우 쇼크에 빠질 수 있고 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부상을 입었을 때에는 내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 혈액에는 혈소판과 같은 응고 인자가 있어 더이상 출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손상된 혈관을 막는다. 백혈병 - 백혈구가 이상 증식하는 질병이다. 당뇨병 - 인슐린 작용이 부족하여 혈액 내에 당분이 과도하게 분포하는 것이 주요 원인인 질병이다. 빈혈 - 혈액 내에 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부족한 질병이다. 겸형 적혈구 빈혈증은 적혈구의 모양이 변형된 유전성 질환이다. 혈우병 - 혈액을 응고하는 인자가 부족하여 출혈이 멈추지 않는 유전성 질환이다.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의해 백혈구가 감염되어 면역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감염성 질환이다. 혈액형은 적혈구의 세포막에 있는 당단백질의 항원 기능에 따라 혈액의 종류를 구분한 것이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해 구분된 ABO식 혈액형이 유명하나 사람의 경우 이 외에도 RH식, MNSs, Lewis Duffy, Kidd 등 500여 가지 항원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ABO식과 RH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수혈을 하였을 때 항원항체 반응으로 서로 다른 혈액형의 적혈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ABO식에도 많은 돌연변이가 있어 약(弱)A형이나 약B형의 경우 O형으로 오진될 수 있고, AB인자가 결합되어 O형의 배우자와 만나 낳은 자식이 AB형이 되는 시스-AB형, A인자와 B인자가 함께 있는 혈액 키메라 등이 생길 수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도 혈액형이 구분되는데 개와 같은 경우 11가지의 혈액형이 알려져 있다. 한편, 일본, 대한민국 등에서 유행하는 ABO식 혈액형에 따른 성격 구분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종의 사이비과학이다. 2006년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은 대한민국에서 성격과 혈액형에는 실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출혈 헌혈 혈압 대체 혈액 혈액 검사 헤모포비아 대한혈액학회 |
혈액형 (血液型은 적혈구의 세포막에 있는 항원인 여러 종류의 당단백질의 유무에 따라 분류되는 혈액의 종류를 일컫는다. ABO식 혈액형이 유명하나 사람의 경우 이 외에도 RH식, MNSs, Lewis Duffy, Kidd 등 500여 가지 항원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ABO식과 RH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수혈을 하였을 때 항원항체 반응으로 서로 다른 혈액형의 적혈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ABO식에도 많은 돌연변이가 있어 약(弱)A형이나 약B형의 경우 O형으로 오진될 수 있고, AB인자가 결합되어 O형의 배우자와 만나 낳은 자식이 AB형이 되는 시스-AB형, A인자와 B인자가 함께 있는 혈액 키메라 등이 생길 수 있다. 한편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도 혈액형이 구분되는데 개와 같은 경우 11가지의 혈액형이 알려져 있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해 구분된 방식. ABO식에 따라 서로 구분되는 인간의 혈액형의 종류는 A형, B형, AB형 그리고 O형 네 가지이다.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혈액을 섞었을 때 일어나는 응집반응의 여부로 구분하며, 이는 면역에서 말하는 항원항체반응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A형 항원과 B형 항체를 갖고 있는 A형 혈액과 B형 항원과 A형 항체를 갖고 있는 B형 혈액이 섞이면 항원 항체 반응으로 용혈이 발생한다. ABO 혈액형의 발견으로 항체와 반응할 수 있는 항원을 가진 혈액을 수혈할 수는 없음을 알게 되었으며, 전쟁터의 부상병이나 심한 출혈을 일으킨 부상자에게 수혈을 통해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AB형은 좀 더 늦게 발견하였다. 같은 란트슈타이너가 1940년 붉은털원숭이(rhesus monkey)의 혈액과 응집반응 여부를 통해 구분한 혈액형이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다. Rh+ Rh항원을 가지고 있다. Rh-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혈액형은 어머니가 Rh-형이고 태아가 Rh+형인 경우, 첫 번째 출산으로 어머니의 몸 속에 Rh+에 대한 항체가 생겨 두 번째 아이의 임신에 영향을 주는 신생아 용혈성 빈혈에 중요하다. 또한 동양인은 Rh-형이 극히 적으므로, 수혈 시에 상당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Rh-형은 동양에서는 전체의 1%도 안 되는 반면, 서양에서는 Rh-형이 전체의 20%를 차지한다. 이런 희귀성 때문에 동양국가에서는 Rh-형인 사람들을 따로 등록해 두기도 한다. 바디바바디바 (-D-/-D-)는 존재할 확률이 적은 희귀혈액형으로 Rh식 혈액형의 항원 C, D, E 중에서 일반인 대부분이 갖고 있는 C,E 항원이 없는 혈액형을 일컫는다. (참고로, 항원 CDE이 적혈구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Rh+, CE만 있다면 Rh-이다.) C와 E가 없다는 의미로 -D-/-D-로 표기하고, 바디바 로 발음한다. 부모 양쪽으로부터 모두 바디바(-D-)를 받을 경우에 나타나는데 만일 바디바바디바 혈액형을 가진 산모가 다른 혈액형 남성의 아이를 가지면 혈액형부적합임신에 따라 이상항체가 만들어져 태아가 심한 용혈성질환에 걸려 심하면 태아 사망도 유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바바디바 혈액형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려면 부모에게 모두 인자가 있어야 하는데 인자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에 혈액형이 나타날 확률은 매우 적다. 30만명당 1명 꼴로 태어나고, 대한민국에는 2006년까지 3명이 확인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단 2차례의 보고 예만 있을 정도로 희귀한데, 그 중 한 예로 2004년 7월 이 혈액형을 가진 산모가 유산에 따른 출혈 과다로 입원해 대한민국의 다른 바디바바디바 혈액형의 사람으로부터 혈액을 공급받았으나 혈액량이 부족해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일본에서 몇 년 전 헌혈 받아 냉동시켜 놓았던 혈액을 공수받아 위기를 넘겼다. 이 혈액형은 anti-D 혈청 시약을 약 200배 정도로 희석한 용액으로 환자 혈액과 반응시켜 검사하는데, 이 희석 용액에서는 일반적인 anti-D 시약에 의한 양성 반응을 보이는 검체에서는 음성이 보이는데 반해 이 혈액형을 가진 혈액과 반응시키면 양성 반응을 보이므로 구분이 가능하다. 양성 반응이 나타나면 이 혈액형을 의심하면서 확인 검사로 C항원과 D항원 검사를 시행한다. 미국버몬트대학 생물학자 브라이언 발리프 등이 참가한 연구팀이 란저레이스(Langereis)형 과 주니어(Junior)형 으로 구분하는 새로운 단백질을 발견했다. 각 단백질엔 ABCB6 과 ABCG2 이 붙여졌다. 2006년까지 알려진 혈액형의 종류는 대략 500종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ABO와 Rh 혈액형이다. 이 두 종류만이 현재로서는 99% 이상의 수혈에 문제가 없게 할 수 있는 혈액형이다. 이 두 혈액형이 맞았을 때 수혈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므로 수혈할 때 이 두 가지 혈액형만 검사를 한다. 혈액형이 다를 경우 용혈성 빈혈을 일으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O형은 A, B, AB형 모두에게 수혈해 줄 수 있고, AB형은 모두에게 받을 수 있으나(소량) 전시상황 같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같은 혈액형이어야 부작용이 적다. 병원에서는 원칙적으로 같은 혈액형만 수혈을 한다. 혈액형에 따라 질병의 유병율 차이가 존재한다. 통계학적으로 A형은 위암(gastric cancer)에 걸릴 확률이 O형보다 약 1.1배 높다.O형 혈액형은 십이지장 궤양(duodenal ulcer)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것은 소화기 질환이 병태생리학적으로 진행될 때 생기는 출혈때 적혈구의 항원-항체 반응이 위점막에 끼치는 영향이 각기 다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소화기 질환뿐만 아니라, 혈액형별로 세균 및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성이 다르다. 이것은 대륙간,인종간 혈액형 분포의 차이가 생기는 것을 진화학적으로 설명할 때 쓰인다. 예를 들어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O형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것은 특정 바이러스가 그 지역 및 인종에 광범위하게 유행한 적이 있고, 그로 인해 특정 혈액형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음을 시사한다.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믿지 않으나, 대한민국과 일본 사람들이 ABO식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믿는 경우가 많다. 다윈과 골턴, 멜더스 이후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우생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주로 백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하려 한 것들이었다. 1901년 란트슈타이너에 의해 발견된 ABO식 혈액형 지식이 도입되면서, 1910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의 에밀 폰 둥게른(Emile von Dungern) 박사는 ‘혈액형의 인류학’이라는 논문에서 혈액형에 따른 인종 우열 이론을 폈다. 더러워지지 않은 순수 유럽민족, 즉 게르만민족의 피가 A형이고 그 대척점에 있는 B형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아시아 인종에게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이런 연구를 통해 A형이 우수하고 B형은 뒤떨어지며, 따라서 B형이 비교적 많은 아시아인들은 원래 뒤떨어진 인종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후, 이러한 주장은 거짓인 것으로 밝혀졌다. 1916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온 일본인 의사 키마타 하라는 혈액형과 성격을 연결시키려는 조사 논문을 발표한다. 1925년경,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병사들의 혈액형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그 정보가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영향을 받아 철학을 공부하고 동경여자사범학교의 강사로 있던 후루카와가 1927년 8월 자기 친척, 동료, 학생 등 319명을 조사해 라는 논문을 일본심리학회지에 발표하였는데, 일본은 황인종의 나라이니만큼 차마 인종간의 우열기준으로 사용하진 못했고 그 대신 성격을 나누는 기준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라 1930년대 처음으로 이력서에 혈액형 칸이 생겼다. 고용될 사람이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할 것인지를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1937년 외무성 관련 업무를 하던 한 의사는 O형인 사람이 더 훌륭한 외교관이 될 수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 설은 그다지 지지를 얻진 못하고 일단 사라졌으나 전후 이 설의 영향을 받은 작가 노오미(能見)의 책(1971년)이 인기를 얻으면서 《혈액형 인간학》이 유행을 일으켰다. 노오미는 작가생활을 하면서 만나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에 따라 ABO식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에 대해 저술했다. 이후 이 이론은 여성지 등을 중심으로 궁합문제, 직업문제, 대인관계, 학습법 등으로 응용되고 온갖 파생 상품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여러 학자들의 비판으로 그 붐이 가라앉긴 했지만, 현재도 많은 관련 잡지와 책 등이 출판되고 있으며 점술업 등에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한 혈액형 성격설 맹신자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심리학회의 연구결과가 있는데 이는 피그말리온 효과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고 한다. 이렇게 통계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근거 없는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사람들이 계속 믿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심리학에서는 다음 이론들로 설명된다. 선택적 지각 자기에게 의미 있는 정보나, 특별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 바넘효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적 경향 피그말리온 효과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기대에 부응하는 쪽으로 변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확증편향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상황이나 자료만 찾아내고 그와 반대되는 것들은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심리 MkNk형 밀텐버거 혈액형 weak A형 weak B형 란저레이스(Langereis)형 주니어(Junior)형 cis-AB형 ABCB6 ABCG2 분류:유전학 |
metalwork.jpg|섬네일|250px|대장장이로부터의 뜨거운 금속 작업. 금속 (金屬, metal)은 일반적으로 단단하고 광택이 있으며, 열 전도율과 전기 전도도가 높은 물질을 아우른다. 화학에서는 전이 금속과 전이후 금속을 통틀어 일컫는 표현으로 쓰이나, 간혹 준금속을 금속의 정의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상온에서 고체 상태로 존재하며, 특유의 광택을 띠고 열과 전기를 잘 전달하는 도체로, 연성과 전성을 갖는다. 주기율표 상에 위치하는 118개의 원소 중 대략 4분의 3 정도가 일반적인 금속의 정의에 해당된다. 철, 구리, 알루미늄, 금, 주석, 우라늄 등이 자연 상태에서 흔히 발견된다. 보통 금속 원소는 전자를 잃고 양이온이 되기 쉬우며, 비금속은 반대로 전자를 얻기 쉽다. 천문학에서는 수소와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금속이라 하기도 한다. 금속은 인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청동기 시대나 철기 시대 등, 그 시대에 주로 쓰인 금속의 이름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금속은 예로부터 인류의 생활을 지탱하고 문화의 발전에 주역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도서 지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종족 중에는 전혀 금속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용하더라도 아주 한정된 범위에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금속 중에 무기나 농기구로서 그 위력을 보인 것은 청동(구리와 주석의 합금)과 철인데, 이 철이 이용되지 않는 문명이라면 어느 정도 상상해볼 수도 있다. 즉 16세기에 스페인인들의 침략을 받은 끝에 멸망한 남아메리카의 고대 문명(잉카 문명·마야 문명)이 그 예로서, 이들은 금이나 은은 풍부했으나 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철을 몰랐다고 해서 그 문명이 원시적 단계에 있었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은 훌륭한 국가 조직을 이루고 있었으며 특히 토목 기술은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웅장한 피라미드나 궁전의 유적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대제국은 소수의 스페인인들의 손에 의해서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주로 철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이 없으면 무기가 약할 수 밖에 없고, 그뿐만 아니라 산업 전체가 뒤떨어지게 마련이다. 농업에서도 나무나 석기 농기구로 경작하는 것이므로 그 생산력이 여간해서는 증진되지 못함은 뻔한 일이다. 전체 산업이 뒤떨어지면 그 사회 전체의 힘도 약하다. 그러므로 어떤 부분이 아무리 발달했더라도 남미의 고대국가는 실은 힘이 약한 사회였던 것이다. 금속 재료가 우리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옛날부터 금속이 너무도 인간 생활에 가까이 있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금속을 잘 이용하는 일이 고대의 인류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그 이상으로 우주 시대인 오늘날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철에 습기 있는 공기가 닿으면 부슬부슬한 녹으로 변한다. 녹은 철과는 그 성질이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 녹은 철이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철은 자연 상태로는 산화물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철의 원료는 적철광(Fe2O3)이나 자철광(Fe3O4)으로, 철이 산소와 결합된 것이다. 이것은 철의 경우에만 한하는 현상은 아니다. 다른 금속도 대부분은 산화물 또는 다른 원소와의 화합물로서 자연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지각 중의 암석이다. 지각의 암석을 형성하고 있는 원소는 산소와 규소가 그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금속 원소는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금속 원소가 어디나 균일한 비율로 지각 속에 분포되어 있다고 하면 암석 중의 금속 함유량은 매우 적은 것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각의 평균 화학조성을 중량의 백분율로 나타낸 클라크 수에 의하여 계산해 보면, 야구공 정도의 크기의 납 덩어리(부피 약 180cm3, 무게 약 2㎏)를 얻기 위해서는 약 100t의 암석을 채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만한 암석을 채집한다는 것은 운반비만으로도 엄청난 비용이 들게 된다. 다행히도 지각 중의 금속 원소는 어디나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지는 않다. 지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금속 원소는 각각 농도 높은 광석으로 되어, 이른바 광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광상을 채굴함으로써 인간은 경제적으로 광석에서 금속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납을 예로 들면 지각 중의 평균 함유량은 0.002%에 지나지 않지만, 광석 중에는 약 5%의 납이 들어 있다. 금속 가공 금속 결합 희소금속 귀금속 비금속 경금속 중금속 도금 합금 |
laws in latin.jpg|섬네일|right|200px|라틴어로 된 1687년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뉴턴의 제1,2 법칙 고전역학에서, 뉴턴 운동 법칙 (Newton運動法則은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세 개의 물리 법칙이다. 아이작 뉴턴이 도입한 이 법칙들은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룬다. 중세를 거치면서 임페투스라는 관성과 유사한 개념이 도입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7세기 초에 관성의 개념을 완성하고, 실험을 통해 오늘날 뉴턴 제1 운동 법칙으로 불리는 관성의 법칙을 증명하였다. 오늘날의 세 개의 뉴턴 운동 법칙은 아이작 뉴턴이 1687년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제1권에 처음 서술하였다. 뉴턴은 이 책에서 만유인력의 법칙과 뉴턴 운동 법칙을 사용하여 케플러 법칙을 비롯한 당시 알려진 모든 천체역학을 수학적으로 유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뉴턴의 운동법칙은 처음으로 회전체의 운동, 유체 안에서의 운동, 발사체의 운동, 빗면에서의 운동, 진자의 운동, 조석, 달과 천체의 궤도와 같은 물리학적 현상들에 대한 광범위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뉴턴이 제2법칙과 제3법칙을 써서 유도한 운동량 보존법칙은 물리학사상 최초의 보존법칙으로 여겨진다. 뉴턴의 법칙들은 200년이 넘게 실험과 관측을 통해 입증되어 왔다. 이 법칙들은 인류의 척도(10−6~104m의 길이에서 0~108m/s의 속도를 갖는 척도)에서 일어나는 운동학을, 관측 결과보다 더욱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대략 모든 속도들이 빛의 속도의 1/3 이하라면 뉴턴의 법칙은 대부분의 경우 그 오차를 무시할 수 있는 정도로 정확하다.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 이나 갈릴레이의 법칙으로도 불린다. 즉, 물체에 가해진 알짜힘이 0일 때 물체의 질량 중심의 가속도는 0이다 제1법칙은 단순히 제2법칙에서 알짜힘이 0인 경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제2법칙과 제3법칙이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기준틀의 개념을 정의한다. 이러한 기준틀은 관성기준틀이라고 부르며, 가속도가 0인 상태로 등속 직선 운동을 하는 관찰자의 기준틀이다. 등속 원운동은 등속력 운동이지만 속도의 방향이 바뀌므로 지구와 같은, 등속 원운동을 하는 관찰자의 기준틀은 엄밀히 말해 관성기준틀이 아니다. 그러나 지구의 운동으로 인한 오차는 (지구의 궤도 및 크기가 매우 크므로) 일반적인 실험에서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빗면을 따라 공을 굴리는 실험을 통해 만약 마찰력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면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모든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즉, 가만히 있는 물체는 (외부 힘이 가해 지지 않는 이상) 계속 가만히 있고,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그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으로부터 갈릴레이의 이론(뉴턴의 제1법칙)으로 생각이 전환된 것은 물리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마찰력은 모든 움직이는 물체에 작용하여 물체를 느리게 하고 결국엔 정지하게 만든다. 아이작 뉴턴은 모든 물체의 운동을 이끌어내는 원인을 힘 으로 보고, 이에 기반을 둔 수학적 모형을 제시하였다. 이불을 두드리는 경우 망치 자루를 바닥에 치는 경우 흙을 퍼서 던지는 경우 달리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을 때 앞으로 쏠리는 경우 뛰어 가던 사람의 발에 돌부리가 걸려 넘어지는 경우 다시 말해, 물체에 더 큰 알짜힘이 가해질수록 물체의 운동량의 변화는 더 커진다. 한 물체 A가 다른 물체 B에 힘을 가하면 이에 따라 B의 운동량을 바꿀 수 있다. (제3법칙에 의하여, 이런 경우는 A의 운동량이 감소하는 만큼 B의 운동량이 증가하므로, 두 물체가 힘을 통해 운동량을 서로 교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2법칙을 수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 만약 물체의 질량 이 변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N kgㆍm/sec^2 여기서 는 물체에 작용하는 알짜힘이고, 은 물체의 질량이며, 는 물체의 가속도이고, 는 물체의 속도이며, 은 물체의 운동량으로 정의된 물리량이다. 위의 방정식에서 물체의 질량은 물체 고유의 성질이다. 일정한 질량 m 을 가진 물체에 대해서만, 그 물체에 더 큰 알짜힘을 가할수록 운동량의 변화가 커진다. 그러므로 이 방정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질량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또한 F = m a 에서, a 는 직접 측정이 가능하지만 F 는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이 아니다. 제2법칙은 단지 우리가 F 의 값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힘의 계산법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또한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물체의 질량이 변할 수 있다면 을 적용할 수 없고, 좀 더 일반적인 다음과 같은 식을 쓴다. 운동량을 와 같이 표현하는 경우 (는 로런츠 인자), 이 방정식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유효하다. 전통적으로, 제3법칙은 "모든 작용에 대해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존재한다"라고 쓴다. 이 설명들은, 누군가가 물체를 200 N의 힘으로 때리면 그 물체 또한 같은 힘으로 그 사람을 때린다는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행성만 항성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항성 또한 행성에 이끌리고 있다. 반작용력은 작용의 반대 방향을 가지고, 그 크기는 동일하다. 하지만 작용력과 반작용력이 항상 일직선상에 위치할 필요는 없다. 두 쌍극자가 점전하와 쌍극자를 잇는 선에 수직하게 위치한 경우, 점전하가 전기 쌍극자에 가하는 힘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힘이 점전하와 쌍극자를 잇는 선에 수직인 경우 점전하게 대한 반작용력은 반대 방향을 취하겠지만, 작용력과 반작용력이 서로 평행한 경우에는 공간 내에서 서로 겹쳐지지 않게 된다. 힘은 운동량의 시간 변화율이므로, 제3법칙에 따르면 A의 운동량이 줄어드는 만큼 B의 운동량이 늘어나게 된다. 즉, 계의 총 운동량의 보존을 의미한다. 반대로, 운동량 보존 법칙으로부터 제3법칙을 유도할 수 있다. 때때로 전자기력에서는 제3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즉, 물체 A가 B에 가하는 로런츠 힘은 B가 A에 가하는 힘과 일반적으로 다르다. 이는 A와 B가 생성하는 전자기장이 가진 운동량 교환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자기장이 가진 운동량을 계산에 포함시키면 계의 총 운동량은 보존되며, 이에 따라 제3법칙이 성립하게 된다. 위에 인용한 제3법칙은 엄밀히 말해 제3법칙의 약한 형태 ()다. 이에 따르면, 작용력과 반작용력은 크기가 같고 방향은 서로 반대지만, 그 방향이 어느 방향인지는 서술하지 않는다. 즉, 입자로 이루어진 계에서, 가 입자 b에 의한 입자 a에 대한 힘이라고 쓰면 제3법칙의 약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모든 고전 역학적 힘은 이 조건을 만족한다. 이로써 질량 중심과 같은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반면, 제3법칙의 강한 형태 ()에 따르면, 작용력과 반작용력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서로 반대일 뿐만 아니라 두 힘의 방향이 두 입자를 잇는 직선과 평행해야 한다. 즉, 만약 a가 에, b가 에 위치해 있다면 두 힘은 다음과 같은 꼴을 취한다. . 만유인력은 제3법칙의 강한 형태도 만족하지만, 전자기학의 로런츠 힘은 제3법칙의 약한 형태만 만족하고, 강한 형태는 만족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점전하와 쌍극자를 잇는 직선에 수직으로 위치한 점전하와 완전쌍극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제3법칙의 강한 형태를 따르지 않는다. 또한 예시로 로켓런쳐, 총 등을 쏠때 탄환과 반동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1916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인류가 이때까지 해왔던 모든 예상 척도를 뛰어넘는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빛의 속도에 비해 매우 낮은 속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모형은 고전역학으로 수렴한다. 즉, 속도가 빛의 속도에 비해 매우 작으면 속도의 로런츠 인자 는 1에 수렴한다. 네이버 캐스트 - 작용 반작용의 법칙 분류:고전역학 분류:과학 법칙 분류:물리학사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분류:상미분방정식 분류:실험물리학 분류:아이작 뉴턴 분류:역학 분류:코페르니쿠스 혁명 |
기단 (氣團)은 대략적으로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비슷한 성질의 공기의 덩이를 말한다. 기단은 형성된 지역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게 된다. 기단은 바다나 대륙과 같이 같은 성질의 지표면과 대기가 오랫동안 접촉하고 있으면 열 또는 수증기를 교환해서 같은 성질을 가진 거대한 공기의 덩어리 즉 기단이 된다. 대기가 지표면과 오래 접촉하려면 바람이 약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조건이 된다. 이와 같은 조건에 맞는 곳은 고기압권 내이므로 기단의 명칭은 고기압의 이름과 일치되는 수가 많다. 예를 들면 북태평양 기단 · 오호츠크해 기단 · 시베리아 기단 등을 들 수 있다. 기단의 성질은 온난 · 한랭 · 습윤 · 건조를 조합해서 표시한다. 해양에서 발생한 기단은 습윤하고 대륙에서 발생한 기단은 건조하다. 기단은 언제까지나 발원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기상 상황에 따라 발원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기단은 하층에서부터 점차 이동해 온 지표면의 영향을 받아 성질이 변해 간다. 차가운 기단이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해 오면 하층에서부터 따뜻해지기 때문에 불안정해진다. 그래서 기단 상층까지 급격하게 변질된다. 특히 대륙성 한대기단이 따뜻한 해면 위에 이동해 온 경우에는 하층에서 열을 흡수하여 불안정해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량의 수증기도 흡수하여 습도가 높아진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적운형 구름이 생기기 쉽다. 겨울에 시베리아 기단이 남동진하여 한반도 부근 해상에 도착했을 때는 시베리아 기단 원래의 찬 성질을 잃어 비교적 따뜻한 기단으로 변질된다. 오호츠크해 기단도 남하할 때 하층부터 따뜻해지는데, 시베리아 기단과 같이 급격하게 따뜻한 기단으로 변질되지는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따뜻한 기단이 차가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하층에서부터 냉각되어 안정을 유지한다. 그래서 기단 상층까지는 급격하게 변질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는 층운형 구름이 많이 생긴다. 여름에 태평양의 아열대 기단이 수온이 낮은 한반도 동해상으로 북상하면 하층에서 점차 냉각되어 종종 짙은 안개가 발생한다. Clouds in Korea.jpg|섬네일|right|330px|시베리아 고기압(대륙 고기압)이 확장하면서 발생한 차가운 북서풍이 상대적으로 따뜻한 황해와 동해상을 지나면서 눈구름이 만들어졌고, 중국 산둥 반도와 대한민국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지역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다. (2008년 12월 6일) 어떤 지역의 날씨 변화를 생각할 때 그곳이 어떤 기단에 덮여 있는지 또는 그 기단이 어디에서 발생하여 어떠한 경로를 거쳐 오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한반도가 같은 시베리아 기단으로 뒤덮여 있을 경우라도 이 기단이 일단 중국까지 남하하고 나서 동진해 올 경우에는 기단은 이미 상당히 따뜻해져 있으므로 강한 찬 공기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시베리아 기단이 대륙에서 직접 한반도로 올 경우에는 한파와 서해안과 동해안, 울릉도, 독도, 제주도 등의 지방에 시베리아 기단으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대기와 상대적으로 따뜻한 바다의 온도 차로 인하여 발생한 눈 구름으로 인하여 많은 눈이 내리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에 영향을 주는 기단은 다음과 같다. 북태평양 기단 시베리아 기단 오호츠크 해 기단 적도 기단 *양쯔 강 기단 분류:기상학 분류:기후학 분류:날씨 |
200px 200px 완두콩의 붉은 꽃과 흰 꽃 멘델은 꽃의 색과 같은 유전형질을 연구하여 유전법칙을 정리하였다. 멘델의 유전법칙 ()은 그레고어 멘델이 완두콩을 이용한 7년의 실험을 정리하여 1865년에서 1866년 사이에 발표한 유전학의 법칙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발표 초기 그리 큰 관심을 받지 않았으나 20세기 초 재발견된 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15년 토머스 헌트 모건이 보페리-서튼 유전자 이론과 함께 멘델의 유전법칙을 유전학의 기본적인 법칙으로 제시하였고, 이로써 고전 유전학이 완성되었다. 그레고어 멘델은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사제였다. 멘델은 1856년에서 1863년까지 교배 실험을 하여 얻은 29,000여 개의 완두콩에 대한 형질 조사를 바탕으로 멘델의 유전법칙을 정리하였다. 그는 이 실험결과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1865년 2월 8일과 1866년 3월 8일에 브르노에 있는 자연사 학회에 〈식물 교잡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송고하였다. 멘델의 논문은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생물학은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으며, 멘델 스스로도 자신의 실험을 모든 종의 유전형질로 일반화시킬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유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오늘날 유전자 연관에 의해 설명되는 혼혈 유전이 전부였다. 멘델은 자신의 실험이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자 낙담하였고, 얼마 후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자 더 이상 실험을 진행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내 자신의 실험에 만족하며 이 실험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1900년 무렵 휘호 더프리스, 카를 코렌스, 에리히 폰 체르마크와 같은 유럽의 과학자들이 잇달아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였다. 더프리스는 자신의 연구 논문 각주에 멘델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명기하였으며, 코렌스는 더프리스의 논문을 참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체르마크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법칙을 발견하였다고 여겼다. 1905년 윌리엄 베이트슨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면서 "유전자", "대립형질"과 같은 용어를 정립하였다. 베이트슨은 1906년 런던에서 열린〈제3차 국제 식물 잡종 연구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재발견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표하였고 이와 관련한 학문에 유전학이란 이름을 붙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1902년 당시 대학원생에 불과하던 미국의 월터 서튼과 독일의 동물학자 테오도르 보페리는 서로의 연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멘델의 유전법칙을 일으키는 원인이 염색체에 있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둘 다 실험적으로 이를 증명하지는 못했다. 1910년 토머스 헌트 모건은 노랑초파리에 주목하였다. 노랑초파리는 세대가 짧고 기르기가 쉬워 유전학 연구에 알맞은 모델 생물의 역할을 하였다. 1915년 모건은 수년 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멘델 유전법칙의 기제》를 발표하여 염색체가 유전형질을 전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고전 유전학이 정립되었다. 멘델은 완두콩을 오랫동안 자가수분하여 특정한 유전형질이 고정된 순종을 얻었다. 그리고 일곱 가지 대립되는 유전형질을 선택하여 이를 잡종 교배할 경우 자식 세대에 발현되는 형질은 어떻게 되는지 관찰하였다. 600px 멘델이 선택한, 완두콩의 일곱 가지 대립형질 # 콩의 껍질 - 매끄러운 회색 / 주름잡힌 흰색 # 콩 속의 색 - 노란색 / 녹색 # 꽃의 색 - 흰색 / 붉은색 # 콩깍지의 모양 - 매끈한 깍지 / 주름잡배에서 바로 다음의 자식은 모두 대립 형질 중 한 가지의 특징만을 보였으며 이를 다시 자가 수분하여 얻은 제2세대에서는 대립형질의 발현 빈도가 일정한 비율을 이루었다. 1936년 로널드 피셔는 멘델의 실험 데이터가 너무나 깔끔하다는 점을 의심하여 "멘델이 실험 결과를 확실히 하기 위해 데이터를 손질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최근 멘델의 실험 기록이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멘델은 자신의 실험 기록을 관찰한 그대로만 기록하였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피셔는 괜한 의심을 한 것이다. 멘델은 실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324px P - 순종인 부모 세대 (붉은 꽃 / 흰 꽃) F1- 잡종 1세대 (모두 붉은 꽃) F2- 잡종 2세대 (붉은 꽃 흰 꽃 = 3:1) 오른쪽의 그림과 같이 수 세대에 걸쳐 붉은 꽃 또는 흰 꽃만을 피우는 것이 확인된 순종 부모 세대를 교배한다. 자식 제1세대인 F1은 모두 붉은 꽃이 핀다. 이로써 붉은 꽃을 피우는 유전형질이 흰 꽃을 피우는 유전형질에 비해 우성임을 알 수 있다. 한편, F1을 다시 교배하여 얻은 자식 제2세대인 F2에서는 붉은 꽃과 흰 꽃이 3:1의 비율로 나타난다. 이는 열성인 흰꽃 인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식 세대의 유전인자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제 나타난 꽃의 색인 "표현형"과 이것을 유전시키는 형질인 "유전자형"을 구분하게 된다. 붉은 꽃의 유전형을 R, 흰 꽃의 유전형을 w라 하면, 순종 우성인 붉은 꽃 (RR), 유전형이 혼합된 붉은 꽃 (Rw), 순종 열성인 흰 꽃(ww)로 구분된다. 따라서 위의 붉 꽃의 비인 3:1은 RR:Rw:ww의 비인 1:2:1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 또는 뒷면이 나올 확률을 구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며 푸네트 사각형을 통해 모든 경우의 수를 표현할 수 있다. (오른쪽 그림의 3번) } 멘델의 유전 법칙은 다음과 같다. 우열의 원리 순종의 대립 형질끼리 교배시켰을 때 잡종 제 1대(F1)에서 우성 형질만 발현한다. 원래 우열의 법칙 으로 불렸으나, 우열의 법칙 이라고 하기에는 어긋나는 예가 많아 우열의 원리 로 정정되었다. 분리의 법칙 우성만이 발현된 잡종 제1대(F1)를 자화 수분하여 얻은 잡종 제 2대(F2)에서 의 확률로 열성이 분리된다. 독립의 법칙 멘델의 선택한 7가지 대립형질 중 두 쌍 이상의 대립 형질이 유전되는 경우, 각각의 형질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현한다.(오른쪽 그림 참조) 불완전 우성(중간유전) 완두콩이 아닌 다른 식물의 경우 붉은 꽃과 흰 꽃의 잡종 1세대가 분홍색 꽃으로 발현하고 잡종 2세대에서 붉은 꽃, 분홍 꽃, 흰 꽃이 1:2:1로 발현하여 어느 한 쪽 형질이 완전한 우성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불완전 우성이라 한다. 불완전 우성의 경우에도 유전형의 전달은 여전히 멘델의 법칙을 따른다. 유전자 연관 여러 유전자가 연관되어 유전형이 발현될 경우에는 독립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 양적 형질 위치를 보이는 사람의 피부색과 같은 유전 형질은 수 많은 유전자가 연관되어 발현하기 때문에 독립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중간 유전 대립 형질의 유전자 사이의 우열 관계가 불완전하여 유전자형이 잡종일 경우 중간 형질이 나타난다. 이 때, 대립 유전자 사이의 우열 관계가 불완전하여 우열의 법칙에 어긋나고, 잡종 제 2대에서 유전자형과 표현형의 분리비가 일치한다. 예를 들어, 분꽃의 꽃 색깔의 경우, 붉은색 분꽃의 유전자형을 RR이라 하고 흰색 분꽃의 유전자형을 WW라 할 때, 이들의 생식 세포의 유전자형은 각각 R과 W가 된다. 이 두 생식 세포가 결합하여 생긴 잡종 제 1대(F1)의 유전자형은 RW(잡종)이며, 분홍색으로 표현된다. 또한, 잡종 제 1대의 생식 세포인 R,W를 사화 수분시키면 잡종 제 2대(F2)에서 붉은색(RR):분홍색(RW):흰색(WW)=1:2:1로 나타난다. 자연선택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으로 인한 진화가 후천형질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유전되었는가를 잘 알지 못했다. 다윈 사후 멘델의 유전법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과학자들이 멘델의 유전법칙과 진화론의 연관성을 연구하여 진화는 후천형질이 아닌, 유전자의 변화임을 발견하고, 진화가 어떻게 자식세대에 유전되는지를 잘 설명하면서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다윈이 풀어내지 못한 진화의 유전 원인을 설명하였다. 유전자와 멘델의 법칙 현대 유전학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은 유성생식 과정에서 일어나는 염색체의 감수분열 결과로 이해 된다. 즉, 평소 염색체는 2배체를 이루며 잡종 1세대에서 우성과 열성의 유전자는 각자 염색체 쌍을 이루고 있어 우성만이 발현된다. 그러나 생식세포는 감수분열로 인해 우성과 열성 가운데 한 가지의 유전자만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배우자와 다시 합쳐 잡종 2세대가 발생하기 때문에 위에서 살핀 우열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분류:유전학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
물리학에서 상 (相, phase)은 일정한 물리적 성질을 가지는 균일한 물질계를 말한다. 물질의 상태 가운데 고체, 액체, 기체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플라즈마, 액정, 초유체, 초고체, 자석 등도 물질의 상이다. 물은 대기압 근처에서 얼음, 물, 수증기 세가지 상을 가진다. 상이란 기본적으로 고체, 액체, 기체와 같이 물질이 갖는 여러가지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상은 기본적으로 여러가지 거시적 성질을 보면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흐를 수 있는지에 따라 고체와 유체로 상을 구별할 수 있고, 유체도 용기에 담았을때 날아가 버리는지, 고이는지에 따라 액체와 기체로 구별할 수 있다. 어떤 물질의 경우엔 고체, 액체, 기체와 같이 단순하게 몇 개의 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여러종류의 상을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탄소의 경우, 잘 알려진 상으로 다이아몬드와 흑연이 있다. 두 결정은 모두 균일하고, 일정한 물리적 성질을 갖고, 같은 종류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고체의 성질을 갖지만, 결정구조가 다름으로 인해 다른 물리적 성질이 생기게 된다. 또한 헬륨(4He)의 경우에는 He I 과 He II 라는 두가지 액체 상을 갖기도 한다. 위의 상들은 기본적으로 온도와 압력의 변화를 통해 얻어지는 상들이지만, 다른 변화를 줌으로써 생기는 변화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상을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외부에서 주는 자기장과 온도의 변화에 따라 초전도상태를 갖는 물질은 초전도상태와 보통 상태 두가지로 나눌 수 있고, 강자성의 방향이 위쪽 또는 아래쪽이 되는 두가지 상으로 구별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들의 경계는 거시적 물리량들이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구간을 통해 상의 경계를 정의할 수 있다. 철은 고체, 물은 액체, 공기는 기체라고 하듯이 물질의 종류에 따라 각각의 상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상태는 온도 등의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예를 들면, 물은 보통 액체이지만 이것을 가열하면 증발하여 수증기(기체)가 되고, 냉각시키면 얼어서 얼음(고체)이 된다. 이와 같이 물은 고체·액체·기체의 3가지 상태로 변화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물질도 3가지 상태로 변화한다. 철도 용광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강하게 가열하면 액체가 된다. 그리고 조건에 따라서는 기체로도 된다. 또, 공기는 보통 기체이지만 압력을 가하고 냉각시키면 액체가 되고, 고체로도 된다. 이와 같이, 철이나 공기는 조건에 따라 고체·액체·기체의 어떤 상태로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에 따라서는 3가지 상태로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설탕은 가열하면 녹아서 액체가 되지만, 더욱 가열하면 증기로 되지 않고 분해하고 만다. 종이는 액체가 되는 일도 없이 분해하고 만다. 이와 같이, 물질 중에는 3가지 상태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또, 어떤 물질이든 고체로는 되지만 물질에 따라서는 액체나 기체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일을 용융 또는 융해 라 하고,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것을 증발 또는 기화 라고 한다. 반대로 기체가 액체로 변하는 것을 응결 또는 액화 라 하고, 액체가 고체로 되는 것을 응고 라고 한다. 물질의 고체·액체·기체 상태를 상(phase)이라 부르기도 한다. 얼음은 물의 고체상이고, 수증기는 물의 기체상이며, 실온에서의 물은 액체상이다. 또한, 고체가 용융하거나 기체가 응결하는 등의 변화를 상 변화라고 한다. 나프탈렌이나 장뇌는 가열하면 액체가 되지 않고 직접 고체에서 기체로 된다. 또, 기체가 액체로 되지 않고, 직접 고체로 되는 것도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느 쪽이나 승화 라고 한다. 승화의 예로는 이들 외에 아이오딘이 잘 알려져 있으며, 물에도 승화하는 성질이 있다. 0℃ 이하의 기온이 계속될 때 쌓인 눈이 녹지 않으면서도 줄어드는 것은 승화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얼음을 가열하면 0℃에서 녹아 물이 되고, 더욱 가열하면 1기압하에서는 100℃에서 끓어서 수증기가 된다. 이와 같이 물질 중에는 고체가 액체로 되는 온도와 액체가 1기압하에서 기체로 되는 온도가 분명히 정해져 있는 것이 많다. 이 온도를 각각 녹는점, 끓는점이라고 한다. 반대로 기체가 액체로 변하는 온도를 액화 온도, 액체가 고체로 변하는 온도를 어는점이라고 한다. 녹는점과 어는점, 끓는점과 액화 온도는 각각 같은데, 이 온도를 경계로 하여 상태가 변하는 것이다. 1기압하에서 승화하는 온도는 승화점 이라고 불린다. 철이나 물, 공기는 온도나 압력의 조건을 바꾸면 상태가 변화하는데,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물을 컵에 넣고, 뚜껑을 닫지 않고 공기속에 놓아두면 물은 차차 증발하여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뚜껑을 단단히 닫아두면 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경우의 물과 수증기처럼 관련이 있는 것을 합쳐서 계(표)라 부르기도 한다. 위의 예에서는 컵 안에 있는 물과 컵 주위에 있는 수증기의 계에 대해서 증발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뚜껑을 덮지 않은 상태를 열린 계, 뚜껑을 덮은 상태를 닫힌 계라고 한다. 뚜껑을 덮지 않은 컵과 같은 열린 계에서는 물과 수증기가 공존하는데, 수증기는 컵 밖으로 자유롭게 퍼져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컵에서 물질이 빠져 나간다. 따라서, 계 안에 있는 물질의 전량이 변화한다. 한편, 뚜껑을 덮은 컵과 같은 닫힌계에서는 수증기가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컵 안에 있는 물질의 전량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열린 계와 닫힌 계에서는 물질이 출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어느 계에서나 에너지는 출입할 수 있다. 上平形圖 열린 계에서는 물이 계속 증발하여 물이 다 없어질 때까지 변화가 계속되지만, 닫힌 계에서는 얼마 후 증발을 멈추고, 일정 온도 아래에서는 그 이상 상태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물과 수증기의 계는 평형 상태에 있다고 하고. 이와 같이 평형 상태에 있는 증기를 포화 증기, 그 압력을 포화 증기압이라고 한다. 여기서 온도를 높이면 물은 수증기로 변하고 수증기의 양이 증가하여 그 압력이 증가한다. 반대로 온도를 내리면 수증기는 물로 변하고, 수증기의 양이 감소하여 그 압력도 감소한다. 또, 얼음이 승화하여 수증기로 되거나 수증기가 승화하여 얼음이 될 때도 얼음과 수증기 사이에는 위와 같은 관계가 성립된다. 또한, 얼음과 물은 0℃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데, 그 이하의 온도에서도 압력을 가하면 얼음이 약간 녹아서 액체인 물이 된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즉, 얼음과 물이 함께 존재하는 온도도 압력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물의 응고점(어는점)인 0℃나 끓는점인 100℃는 모두 1기압에서의 온도이고, 압력이 증가하면 응고점은 내려가고 끓는점은 올라간다. 이와 같은 상태의 변화와 온도나 압력과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세로축에 압력, 가로축에 온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그리면 그림과 같이 된다. 이 그래프를 상평형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AT는 얼음과 수증기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압력과 온도를 나타내고 BT는 물과 얼음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압력과 온도를 나타낸다. 또 CT는 물과 수증기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온도를 나타낸다. T점의 압력과 온도에서는 얼음과 물과 수증기가 동시에 안정하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삼중점 이라고 한다. 삼중점의 압력은 수증기압으로 4.58mmHg(높이 4.58mm의 수은주가 나타내는 압력) 온도는 0.0075℃이다. 이 그래프는 얼음·물·수증기 사이의 평형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공기는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보통 물의 응고점은 760mmHg의 대기압 아래에서 0℃이므로, 삼중점의 값과는 좀 다르다. 또, 물을 서서히 냉각시키면 삼중점 이하로 내려가도 얼음이 되지 않고 액체 상태를 얼마 동안 유지한다. 이것을 과냉각 상태라고 하는데, 이 상태는 안정된 상태가 아니며, 휘젓거나 작은 얼음덩어리를 넣으면 금방 전체가 얼고 만다. 물뿐만 아니라 3가지 상태를 분명히 나타내는 물질에 대해서는 이러한 상평형 그림을 각각 그릴 수가 있다. 액체인 물은 1기압 100℃에서 수증기로 변한다. 따라서 1기압하에서는 100℃ 이상의 온도에서 액체인 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100℃ 이상의 온도에서 물을 액체 상태 그대로 유지하려면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 압력을 가해서 218.3기압이 되면 물의 끓는점은 374.2℃가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온도가 되면 압력을 계속 가해도 물은 더 이상 액체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 온도를 물의 임계 온도라 하고, 이때의 압력을 임계 압력이라고 한다. 공기는 1기압에서는 아무리 온도를 내려도 액체가 되지 않는다. 온도를 -140.7℃로 내리고 37.2기압보다 큰 압력을 가하면 비로소 액체가 된다. 즉, 공기의 임계 온도는 140.7℃이고, 임계 압력은 37.2기압이다. 이 이하의 온도에서는 더 낮은 압력을 가해도 액체가 된다. 얼음을 녹이려면 열을 가해서 온도를 높여야 하고, 물을 얼리려면 열을 빼앗아 온도를 내려야 한다. 이와 같은 상태의 변화와 열의 출입 관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얼음을 물로 변하게 하거나 물을 얼음으로 변하게 하는 경우와 같이, 고체―→액체―→기체의 변화는 열을 흡수하는 변화, 즉 흡열 변화(吸熱變化)이다. 이때 흡수되는 열은 물질의 내부에 에너지로서 저장된다. 이와는 반대로, 수증기를 물로 바꾸거나 물을 얼음으로 바꾸는 경우와 같이, 기체―→액체―→고체의 변화는 열을 방출하는 변화, 즉 발열 변화(發熱變化)이다. 이때 방출되는 열은 물질이 내부 에너지로서 가지고 있던 것의 일부이다. 이와 같이 상태의 변화에는 열의 출입 또는 물질의 내부 에너지의 증감이 수반된다. 얼음과 물이 섞여 있는 것을 가열해도, 2가지가 함께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 온도는 O℃를 유지한다. 이것은 외부에서 가해진 열이 온도를 변화시키는 데에 사용되지 않고 고체―→액체라는 상 변화를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온도를 변화시키지 않고 단지 상태의 변화를 위해 사용되는 열을 잠열(숨은열)이라고 한다. 용융 때의 잠열은 용융열(또는 융해열)이라고 한다. 물을 가열하면 온도가 점점 올라가서 1기압에서 100℃가 되면 물의 표면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수증기로 변하여 거품이 많이 나온다. 이것이 끓음(또는 비등)의 현상이다. 끓음이 계속되는 동안 온도는 100℃로 유지된다. 이 경우도 외부로부터 가해진 열은 온도는 변화시키지 않고 액체―→기체의 상 변화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체의 잠열을 기화열(또는 증발열)이라고 한다. 0℃에서 얼음 1몰을 완전히 용융시키려면 1.44kcal의 열량을 가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얼음의 몰 용융열(또는 몰 융해열)이라고 한다. 또, 100℃에서 물 1몰을 완전히 기화시키려면 9.72kcal의 열량을 가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물의 몰 기화열(또는 몰 증발열)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수증기가 물로, 다시 물이 얼음으로 바뀔 때는 기화열 또는 용융열과 같은 양의 열이 방출된다. 즉 1몰의 수증기가 물로 변할 때 방출되는 몰 서림열(또는 몰 응결열)은 몰 기화열과 같고 1몰의 물이 얼음으로 변할 때 방출되는 열인 몰 응고열은 몰 용융열과 그 크기가 같다. 또, 승화 때의 잠열은 승화열이라고 한다. 소금물을 증발시키면 뒤에 작은 정육면체인 소금 결정이 나타난다. 이것은 무색 투명한 소금물 속에 흩어져 있던 결정과 같은 것이므로, 소금은 원래 작은 입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결정이 규칙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의 배열이 규칙적이기 때문이다. 소금을 강하게 가열하면 녹아서 액체가 되는데, 이것은 결정을 이루고 있던 입자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을 더욱 가열하면 증기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며, 자유롭게 퍼져 나간다. 이것은 결정 입자가 더욱 흩어져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는 소금이 아주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고 물질의 변화를 생각해 보았는데, 일반적으로 물질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보자.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에는 원자·분자·이온 등이 있다.원자는 처음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로 생각되었지만, 현재 원자는 그보다 작은 기본입자라고 불리는 여러 가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이온은 원자가 (+)나 (-)의 전기를 띤 것이다. 분자는 기체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2개 이상의 원자가 결합하여 한 쌍이 되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물질의 화학적 성질이나 화학 변화의 구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원자·분자·이온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3가지 상태의 변화는 이들을 단순히 입자로서 다루어도 그 대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자·분자·이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3가지 상태의 변화를 입자의 행동에 입각해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고체 속에서 입자는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조금밖에 움직일 수 없지만, 가열하면 그 에너지를 흡수하여 차차 활발한 운동을 하게 된다. 녹는점에서 입자는 규칙적인 배열을 무너뜨리고 자유롭게 운동하게 되지만, 이를 위해 에너지가 필요하며, 모든 입자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될 때까지 온도는 올라가지 않는다. 액체가 되면 온도가 다시 올라가서 입자는 점점 활발하게 운동하고, 일부는 액체면으로부터 공중으로 뛰쳐 나간다. 끊는점에 이르면 입자는 서로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 액체의 내부에서도 기체 형태(거품)가 되어 액체면으로부터 뛰쳐 나간다. 액체인 동안은 아직 입자가 서로 끌어당기고 있지만, 여기서 완전히 떨어지기 위해 에너지가 사용되며, 액체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온도는 변하지 않는다. 물질의 상태 기화 액화 융해 응고 승화 분류:상전이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
사신도 (四神圖)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함께 그린 그림을 말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많이 나타난다. 고구려 고분 예술의 중요한 테마로 사신(四神)이 등장한다. 이것은 비불교적(非佛敎的)인 요소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테마이다. 무덤의 사방을 수호하는 영물(靈物)로서 4신도를 분묘에 장식하게 된 것은 도교(道敎)의 유입과 그 보급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벽화고분기 제3기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쌍영총의 창룡도(蒼龍圖)나 강서대묘의 사신도가 가장 우수한 사신도로 알려지고 있다. *사신 *강서대묘 분류:고구려의 고분 분류:고구려의 회화 분류:영물 분류:명수 4 |
이십팔수(二十八宿) 이십팔수 (二十八宿)는 고대로부터 동아시아에서 사용되어 온 황도와 천구의 적도 주변에 있는 28개의 별자리이다. 28수와 3원으로부터 하늘이 3개의 담과 나머지 28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동·북·서·남의 방위에 따라 사신이 7개씩의 별자리를 주관한다. 각 별자리(宿)의 해당 영역에는 또한 여러 별자리들이 속해 있다. 예를 들어 우수에는 직녀, 하고, 천부, 좌기, 우기 등이 속한다. 이러한 체계의 차이로, 3원 28수 의 별자리와 서양 88개 별자리는 1:1 대응이 되지 않는다. 사(舍) 수(宿) 중심별 동방 청룡 각(角) 처녀자리 (α Vir) 스피카 항(亢) 처녀자리 (κ Vir) 저(氐) 천칭자리 (α Lib) 주벤엘게누비 방(房) 전갈자리 (π Sco) 심(心) 전갈자리 (σ Sco) 알니야트 미(尾) 전갈자리 (μ Sco) 기(箕) 궁수자리 (γ Sgr) 알나시 북방 현무 두(斗) 궁수자리 (φ Sgr) 우(牛) 염소자리 (β Cap) 다비흐 여(女) 물병자리 (ε Aqr) 알발리 허(虛) 물병자리 (β Aqr) 사달수드 위(危) 물병자리 (α Aqr) 사달멜릭 실(室) 페가수스자리 (α Peg) 마르카브 벽(壁) 페가수스자리 (γ Peg) 알게니브 서방 백호 규(奎) 안드로메다자리 (η And) 루(婁) 양자리 (β Ari) 셰라탄 위(胃) 양자리 (35 Ari) 묘(昴) 황소자리 (17 Tau) 엘렉트라 필(畢) 황소자리 (ε Tau) 아인 자(觜) 오리온자리 (λ Ori) 메이사 삼(參) 오리온자리 (ζ Ori) 알니탁 남방 주작 정(井) 쌍둥이자리 (μ Gem) 귀(鬼) 게자리 (β Cnc) 알타흐 류(柳) 바다뱀자리 (δ Hya) 성(星) 바다뱀자리 (α Hya) 알파드 장(張) 바다뱀자리 (ν Hya) 익(翼) 술잔자리 (α Crt) 알케스 진(軫) 까마귀자리 (γ Crv) 기에나흐 각 수별 칠요와 신수(神獸)는 다음과 같다. 목(木) 금(金) 토(土) 일(日) 월(月) 화(火) 수(水) 동방 청룡 각(角) - 교(蛟) 항(亢) - 용(龍) 저(氐) - 학(貉) 방(房) - 토(兎) 심(心) - 호(狐) 미(尾) - 호(虎) 기(箕) - 표(豹) 북방 현무 두(斗) - 해(獬) 우(牛) - 우(牛) 여(女) - 복(蝠) 허(虛) - 서(鼠) 위(危) - 연(燕) 실(室) - 저(猪) 벽(壁) - 유(貐) 서방 백호 규(奎) - 랑(狼) 루(婁) - 구(狗) 위(胃) - 치(雉) 묘(昴) - 계(鷄) 필(畢) - 오(烏) 자(觜) - 후(猴) 삼(參) - 원(猿) 남방 주작 정(井) - 안(犴) 귀(鬼) - 양(羊) 류(柳) - 장(獐) 성(星) - 마(馬) 장(張) - 록(鹿) 익(翼) - 사(蛇) 진(軫) - 인(蚓) 현대의 역주에서 칠요일과 일진 별로 해당되는 수는 다음과 같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子 辰 申 필(畢) 익(翼) 기(箕) 규(奎) 귀(鬼) 저(氐) 허(虛) 丑 巳 酉 위(危) 자(觜) 진(軫) 두(斗) 루(婁) 류(柳) 방(房) 寅 午 戌 심(心) 실(室) 삼(參) 각(角) 우(牛) 위(胃) 성(星) 卯 未 亥 장(張) 미(尾) 벽(壁) 정(井) 항(亢) 여(女) 묘(昴)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의 각종 천문현상에 관한 기록들 《사기》의 《조선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위만조선의 장군 이름에서 삼(參) 의 별자리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후한 또는 고조선 시대의 유물에서도 청동거울에 고대문자로 새겨진 28수의 명칭과 형태가 발견된다. 일본에서 최근 발굴된 기토라 고분 천정 벽에서 3원 28수의 체계를 따른 별자리를 확인하였다. 중국 송나라 때에 3원 28수 체계를 따른 순우천문도 가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자리 그림인 천상열차분야지도에 3원 28수의 체계를 따른 정교한 별자리가 그려졌다. 남병길에 의해 실제의 위치에 맞는 별자리를 다시 그린 성경(星鏡)이 출간되었다. 조선 후기의 소설인 유충렬전에서 주인공 유충렬은 삼원의 하나인 자미원의 화신으로, 유충렬의 상대 악역인 정한담은 익수의 화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동남풍을 기원하는 제를 지낼 때와 사마의와 싸울 때에도 28수가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 환상게임에서 28수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디퍼 쿄우에서도 28수가 부분적으로 언급된다. *동아시아의 별자리 *삼원 분류:동아시아의 별자리 분류:명수 28 분류:서유기의 등장인물 |
국제고정력 ()은 1년을 28일씩 13개월로 하는 역법이다. 남는 하루는 세계일(World day)로 정하여 12월 다음에 넣는다. 윤년에는 6월 다음에 하루를 더 넣는다. 세계일과 윤일은 요일을 갖지 않는다. 이 역법은 한편 6월(June)과 7월(July)사이에 sol 이라고 불리는 달을 끼워넣어 13개월을 만들게 된다. 윤일은 6월 29일이다. 이 역법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매달 요일이 일정하므로 달력이 바뀌지 않는다. 각 달의 근무 일수가 24일로 일정해진다. 이 역법은 다음과 같은 단점이 있다. 각 사분기를 나누기 곤란해 각종 통계 지표 비교에 불리하다. 서양에서는 13일의 금요일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매달 13일이 금요일이 된다. + 모든달 월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요일없음(세계일) 매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12월 만) 이 역법은 통계 처리가 곤란하여 사용되지 않았다. 세계력 분류:태양력 |
세계력 (世界曆)은 1년을 4계로 나누어 각 계를 91일로 하는 역법이다. 각 계는 31일, 30일, 30일의 3개월로 나뉜다. 남는 하루는 세계일(World day)로 정하여 12월 다음에 넣는다. 윤년에는 6월 다음에 하루를 더 넣는다. 세계일과 윤일은 요일을 갖지 않는다. 이 역법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매년 요일이 일정하므로 달력이 바뀌지 않는다. 각 사분기의 일수가 같아져 각종 통계 지표 비교에 유리하다. 일요일이 31일인 달은 5주, 30일인 달은 4주가 되므로 각 달의 근무일수가 26일로 일정해진다. +1/4분기 월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요일없음(세계일) 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2/4분기 월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요일없음(세계일) 4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5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6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윤일) +3/4분기 월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요일없음(세계일) 7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8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9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4/4분기 월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요일없음(세계일) 10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12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요일 없는 날을 넣는 것은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여 세계력에 반대해 왔다. 국제고정력 International World Calendar Association 분류:태양력 |
국경일 (, 國慶日)은 역사적으로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법률로 정한 경사스러운 날을 말한다. 국경일은 대부분 공휴일로 정해져 있고 각종 기념식과 경축 행사를 하며, 가정에서는 국기를 게양한다.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에 제정한 법률 제53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4대 국경일을 정하였다. 그 후 2005년에 한글날을 국경일에 추가하여 대한민국의 국경일은 5일이다. 3·1절(3월 1일) 제헌절(7월 17일) 2007년까지는 공휴일이었으나,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현재 국경일 중 유일하게 공휴일이 아니다.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 한글날(10월 9일) 2013년부터 공휴일로 다시 지정되었다. 국경일이 되기 전에는 1949년부터 1990년까지 공휴일이었다. 참고로 현충일은 국경일이 아니다. 나라(대한민국)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과 국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한 기념일이다. 미국에서는 1869년 연방회의에서 헌법 100년 기념제를 제정하였으며,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영국의 이스터 먼데이(부활절 다음 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절(10월 1일), 중화민국의 쌍십절(10월 10일), 일본의 기원절(2월 11일),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 (서방진영은 5월 8일, 러시아는 5월 9일), 프랑스의 혁명 기념일(7월 14일) 등도 유명한 국경일이며, 크리스마스(12월 25일), 부처님 오신 날(음력 4월 8일) 등을 국경일로 지정한 나라들도 있다. 대한민국의 기념일 대한민국의 공휴일 건국기념일 독립기념일 |
대한민국에는 국민 전체를 기속(羈束)하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이 없으며, 대통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에서 국가기관이나 지방 정부 등의 공휴일을 정하고 있다. 관공서에는 국공립학교 등이 포함되나, 공기업은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민간기업이나 민간단체는 노사간의 합의(주로 단체협약 이나 취업규칙 )를 통해 스스로 휴일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관공서의 공휴일에 쉬어야 할 법적 의무는 없으나, 관행상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을 준용하여 휴일로 써왔다. 연간 공휴일 수는 일요일, 선거일, 수시 지정하는 날을 제외하고 15일이다. 대체휴일제도의 적용 여부 등 여러 변수가 있긴 하지만, 토요휴무일을 포함하면 일본(119일)보다는 적고 미국(114일), 독일(114일), 프랑스(115일) 등과 비슷하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인 경우(3월 1일이 월요일인 경우)에는 공휴일이 적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음력으로 1일, 7일, 15일, 23일에 관공서에서 업무를 보지 않았다. 또한 계절이 바뀌는 매절기에도 업무를 보지 않았다. 설날에는 7일, 대보름에는 3일, 단오에는 3일, 연등회에도 3일을 쉬었으며, 추석에는 하루를 쉬었다. 1주 7일의 요일제는 서양에서 전래된 것이며 갑오개혁기간인 1895년부터 시행되었다. 고종의 재위기인 1895년부터 개국기원절(조선 건국일·음력 7월16일), 대군주탄신(고종 생일·7월25일), 서고일(고종 즉위를 종묘사직에 고한 날·음력 12월2일)이 공휴일이었다. 순종의 재위기인 1908년부터 건원절(순종 생일·양력 3월25일·음력 2월8일), 개국기원절(양력 8월14일), 즉위예식일(순종 즉위일·양력 8월27일), 계천기원절(대한제국 선포일·양력 10월12일), 묘사서고일(순종 즉위를 종묘사직에 고한 날·양력 12월18일)이 공휴일이었다.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2조는 관공서의 공휴일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이름 날짜 제정 비고 대체공휴일 여부 양력설 1월 1일 1949년 양력설은 공휴일 지정 당시 1월 3일까지 연휴였으나, 1990년과 1999년 각각 하루씩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현재는 1월 1일만 공휴일이다. X 설날 음력 12월 말일음력 1월 1일음력 1월 2일 1989년1985년1989년 1989년에 공식적으로 설날이란 이름을 찾고, 3일 연휴가 되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한시적으로 민속의 날 이라 불리고, 당일만 공휴일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고 탄압을 받았다. O 3·1절 3월 1일 1949년 국경일. 1919년 3·1 운동 기념일. X 부처님 오신 날 음력 4월 8일 1975년 불교 대표 명절. X 어린이날 5월 5일 1975년 어린이의 건전육성과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어린이의 행복을 도모하고자 1919년 3.1독립 운동을 계기로 방정환과 색동회가 주축함 O 현충일 6월 6일 1956년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 국기를 조기(弔旗)로 게양함. X 광복절 8월 15일 1949년 남북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국경일. 1945년 8·15 광복 기념일. X 추석 음력 8월 14일음력 8월 15일음력 8월 16일 1989년1949년1986년 한민족의 최대 명절이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이틀 연휴(추석 당일 및 다음 날)였으며, 1989년부터 전날(음력 8월 14일)을 포함해 3일 연휴가 되었다. O 개천절 10월 3일 1949년 국경일. 한국사 최초 국가인 단군조선의 건국 기념일. X 한글날 10월 9일 1949년 국경일(2005년 12월에 국경일로 지정).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가, 2012년 12월 28일에 공휴일로 다시 지정되었다. X 기독탄신일 12월 25일 1949년 기독교 대표 명절. 민간에서는 성탄절 혹은 크리스마스 로 더 많이 불린다. X 설날 연휴와 추석 연휴가 일요일을 포함한 다른 공휴일과 겹칠 경우에는 연휴 다음 첫번째 평일을 대체공휴일로 하고, 어린이날이 다른 공휴일이나 토요일과 겹칠 경우에는 그 다음 첫번째 평일을 대체공휴일로 한다.(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3조. 2013년 11월 5일 신설) 대한민국에서는 1959년 3월 27일부터 1960년 12월 30일까지 대체휴일제도(일요일 외의 공휴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경우 그 다음날도 공휴일로 함)를 실시한 적이 있다. 2009년부터 공휴일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꾸준히 국회에 상정되고 있으며 대체휴일 제도를 이 법률에 규정하려는 논의가 진행되어 왔으나, 이에 대해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와 재계가 기업의 휴일근로수당 증가 및 생산차질, 임시직과 일용직 근로자들의 소득감소 등 민간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보여 왔으나, 2013년 11월 5일부터 설·추석 연휴와 어린이날에 한해 대체공휴일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민간기업은 이를 지켜야 할 강제성이 없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름 날짜 제정 폐지 비고 양력설 연휴 1월 2일1월 3일 1949년 1999년1990년 양력설은 1월 3일까지 연휴였으나, 1990년에 1월 3일이, 9년 후인 1999년에 1월 2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사방의 날 3월 15일 1960년 1961년 1960년 사방(砂防)의 날 (3월 15일)을 식목일 대신 공휴일로 지정하고, 1960년의 사방의 날은 3월 15일 대신 3월 21일로 하여 기념하였다. 이듬해 초에 사방의 날을 폐지하고 식목일을 공휴일로 환원하였다. 식목일 4월 5일 1949년 2006년 1960년 사방(砂防)의 날 (3월 15일)로 바꾸었다가 이듬해 초에 환원. 관공서 주(週) 5일 근무제 실시와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제헌절 7월 17일 1949년 2008년 국경일 중 하나. 관공서 주 5일 근무제 실시와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국군의 날 10월 1일 1976년 1991년 명절 연휴 증가로 인하여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유엔의 날 10월 24일 1950년 1976년 국군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1949년 6월 4일 공휴일 첫 제정. 1950년 9월 18일 유엔의 날(10월 24일)을 공휴일로 지정. 1956년 4월 19일 현충일을 공휴일로 지정. 1959년 3월 27일 대체휴일제도 실시(일요일 외의 공휴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경우 그 다음날도 공휴일로 함). 1960년 12월 30일 대체휴일제도 폐지. 1975년 1월 27일 어린이날,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 1976년 9월 3일 국제연합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국군의 날(10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 1985년 1월 21일 설날(당시 명칭은 민속의 날 )을 공휴일로 지정. 1986년 9월 11일 추석 다음날(음력 8월 16일)을 공휴일로 지정. 1989년 2월 1일 민속의 날의 명칭을 설날로 바꾸고, 추석과 설날을 3일 연휴로 지정함. 양력설 연휴 중 1월 3일을 공휴일에서 제외. 1990년 11월 5일 국군의 날과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 1998년 12월 18일 1월 2일을 공휴일에서 제외. 2005년 6월 30일 관공서 주5일 근무제와 함께 식목일과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부칙에 경과규정을 두어 제헌절은 2008년부터 제외). 2006년 9월 6일 임기만료에 의한 선거일을 공휴일로 규정함. 2012년 12월 28일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 2013년 11월 5일 설·추석 연휴와 어린이날에 대해서 대체휴일제도 실시. 2017년 10월 10일 석가탄신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명칭 변경. 대통령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2조제11호 기타 정부에서 수시 지정하는 날에 의하여 선거·투표, 대통령 취임일, 국장일, 국제대회나 회의와 각종 기념일, 기타를 포함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을 기념하기 위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관공서와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상을 통하여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따르기로 정한 기업체에 적용하는 임시 공휴일이 시행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일인 1988년 9월 17일, 2002년 월드컵 폐막 다음 날인 그해 7월 1일 월요일, 광복절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광복절 연휴로 이어지는 2015년 8월 14일 그리고 내수 경기 활성화를 이유로 대한상공회의소가 건의한 2016년 5월 6일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 2005년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1차 정상회의가 열린 11월 18일을 교통혼잡 방지 취지에서 부산광역시 공공기관에 한정해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한편, 2015년 8월 14일과 2016년 5월 6일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하였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 궐위선거 특성상 임기만료에 의한 선거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2017년 5월 9일로 선거일을 정함과 동시에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또한 추석 연휴를 위해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미국의 월요일 공휴일 법이나 일본의 해피 먼데이 제도 같이 연휴가 보장되고 주말과 겹치지 않게 하는 것을 연구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의 국경일 대한민국의 기념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휴식일 |
종묘 (宗廟)는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종묘의 건물은 1394년 10월 태조가 한양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다시 지어졌다. 건물들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누어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에는 추존(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셨다. 그리고 정실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 사친(私親)을 봉안하는 사당으로서 따로 궁묘(宮廟)를 두었다. 종묘의 제사일은 4계절의 첫달 상순, 정초·단오·한식·추석, 동지의 납일과 매월 삭망(朔望)일로 정하였으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제하여 왕세자는 아헌관, 영의정은 종헌관이 되어 작헌(酌獻)·분향(焚香)·재배의 복잡한 절차를 밟으며 향사한다. 그러나 국상일의 경우에는 이를 피한다. 종묘행사는 국가적 행사인만큼 이에 따르는 의식과 의복·제기(祭器)의 규격, 제물(祭物)의 종류·수 등은 엄격하게 규정하고 준수한다. 그리고 문묘와 달리 고려의 예를 따라 역대 공신을 위한 공신종사(功臣從祀)가 있다. 종묘의 건축물들과 600여 년간 제례행사를 지내 온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 세종대왕 작곡)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 전주 이씨 종친에 의한 제사로 거행된다.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상에 대한 예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1392년 조선 태조는 즉위 12일 만인 8월 16일(음력 7월 28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 정비, 경비, 의비의 존호를 올렸다.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 시대 남경의 이궁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나는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하여 할 수 없이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거기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 뒤 태조는 재위 3년(1394년) 8월에 한양을 새 도읍지로 최종 결정하고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였는데,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 해에 세웠다. 종묘 공사는 천도하던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마쳤다. 종묘는 창건 당시 대실이 7칸이었고,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었으며, 대실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다. 그 밖에 따로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齎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1395년 10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 조선 시대에 종묘 정전은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된다.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하여 종묘가 주변 언덕에 파묻혀 아늑한 기운이 깃들도록 한 다음 종묘의 건물 형식을 고쳤다. 본래 종묘 건물은 ㅡ 자로 길게 생겼는데, 지금은 감실에 신위를 모신 몸채 건물과 그 양큰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ㆍ서 월랑으로 구성되어, 가운데가 긴 ㄷ자형 건물이다. 태종 이래로 이 건축 형식이 종묘 건축의 기본 틀이 되었다. 현재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별묘인데, 세종 때 처음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종묘 정전의 감실 규모는 5칸이었다. 그러나 세종 원년(1419년)에 정종이 승하하고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종묘 정전 5칸에는 태조와 태조의 4대 조상을 합쳐 다섯 신위로 모두 차 있어서, 이제 이 다섯 신위에 더해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종묘에는 다섯 신위만 모시도록 예법에 규정되어 있어서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중국 송나라의 예를 따라 1421년 10월 종묘 즉 지금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別廟)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실 것을 결정한다. 이 별묘가 지금의 영녕전이다. "조종(祖宗)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의 영녕전은 종묘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셨다고 하여 조묘(?廟)라고도 한다.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 4칸, 양 옆 익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정전인 종묘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로, 도조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 왕조의 종묘 건축 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 된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원래 종묘는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영녕전은 별묘였다. 앞서 말한대로 본래 종묘 정전에 다섯 신위를 모시기로 하였던 것인데, 그 뒤 다섯 신위 외에 다른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라는 제도가 생겨, 종묘 정전에 모시는 신위의 수는 다섯 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다. 모셔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나자 칸수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그 결과 종묘 정전 건물은 증축된다. 조선 초기의 왕 가운데 불천위로 결정된 왕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등이다. 명종대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늘어난다. 그 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다섯 달 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재건에 앞서 종묘 제도를 임진왜란 전의 건축 형식으로 할 것인지, 소목제(昭穆制)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주나라의 옛 제도를 따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신하들 사이에 이루어지다가 결국 종묘 정전을 임진왜란 전의 형식인 11칸의 규모로 재건한다. 재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 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 종묘 정전은 그 뒤 영조 2년(1726년)에 4칸, 헌종 2년(1836년)에 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 영녕전도 정전과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뒤 1608년 종묘 중건 공사와 함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그 뒤 현종 8년(1667년)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년(1836년) 좌우 협실 각 2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종묘를 증축하거나 수리할 때는 종묘에 모신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는데, 이 경우 이전 장소로는 당시 쓰지 않던 궁궐이나 사당을 주로 이용하였다.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므로 건축이 화려하지 않고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과 몇 개의 판위(版位),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 구조 등 과감히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으로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철저하게 나타내었고, 단청 또한 극도로 절제되었다.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필요한 공간만 담은 구성과 구조, 장식과 색채의 간결함은 종묘 건축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종묘를 보기 위해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을 왔고 "이 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종묘 일곽의 주된 출입구는 외대문(外大門)인 정문(正門)이다. 정문은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문 형식의 건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기단이 있고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문 앞 지면이 높아져 땅에 묻히게 되었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인데,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이 길은 어숙실, 정전, 영녕전으로 이어지는데, 어숙실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에는 망묘루와 향대청이 있다. 망묘루(望廟樓)는 왕이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그 이름은 제향시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언제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건물 가운데 1칸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1443년(세종 25년)에 망모루 옆에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었으며 가운데 둥근 섬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옛 사상에 의한 것이다. 대부분의 궁궐 연못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향대청은 종묘에 쓰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불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었다.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은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으로, 조선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짓도록 하였다. 신당 안에는 공민왕과 그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준마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지냈다. 어숙실(재궁) 어숙실은 재궁 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제향에는 임금이 친히 올리는 친행(親行)과 세자나 대신이 임금을 대행하여 올리는 섭행(攝行)이 있다. 어숙실 일곽은 둘레담과 정문, 동협문, 서협문으로 싸여 뜰을 중심으로 북ㆍ동ㆍ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은 어재실, 동쪽은 세자재실, 서쪽은 어목욕청이다. 어숙실 서북쪽으로 종묘 정전이 위치하는데, 제향 때 제관은 어숙실 서협문을 지나 정전 동문을 통하여 정전에 이르게 된다.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있고, 묘정(廟庭)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서쪽으로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진다. 묘정 월대는 단의 일종으로, 지면에서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을 달리하며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하월대는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가 자리 잡고 일무를 추며, 상월대는 등가가 자리잡는 공간이다. 그리고 묘정 월대의 한가운데로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길게 나 있다. 상월대 위에 설치된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현재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나온 동ㆍ서 월랑 5칸이 자리하고 있다. 묘정 월대 남쪽 아래 동서쪽에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 후 축과 폐를 불사르는 예감(망료위라고도 함)이 있으며, 동문 북쪽으로 수복방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과 제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쪽으로 악공청이 있고, 정전 서북쪽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종묘 정전 (宗廟正殿)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사당건축물이며, 총 101m의 긴 건물로, 종묘의 중심이 된다. 국보 제227호이다. 종묘는 1392년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 후보로 계룡산ㆍ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태조 3년 8월 최종적으로 한양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이 해 10월 28일 고려의 옛 도읍지 개성을 벗어나 천도를 한 해에 터를 개척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인 태조 4년 9월 29일에 새 궁궐과 함께 준공된다. 준공된 종묘는 대실이 7칸인데,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고.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으며,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즉위 4년인 1395년 10월 태조의 4대조인 목조와 효비, 익조와 정비, 도조와 경비, 환조와 의비의 4대 신주를 개성에 옮겨와 봉안하였다. 정전 건물의 전면은 퇴칸을 구성하는 기둥만 서 있고 벽체 없이 모두 묘정으로 트였으며, 측면과 뒷면은 모두 전벽돌로 두껍게 벽체를 쌓아 내부 공간을 어둡게 함으로써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약간 뒤틀려 아래위가 벌어져 있다. 이는 혼 드나드는 통로임을 상징하기도 하고, 실제로 통기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하방(門下枋) 좌우에는 신방목(信枋木)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三太極)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 판문을 열어 발을 늘어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내부는 칸막이 벽체없이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으며, 뒷면 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각 감실에는 서쪽에 왕, 동쪽에는 왕비의 신주가 차례로 봉안되어 있다. 이러한 신실 구성 형식을 당(건물)은 같으나 실(칸막이)은 달리하는 동당이실(同堂異室)제도라도 한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있고, 동쪽으로 가면서 각 왕과 비를 합쳐 모두 49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있다. 정전 담장 안에 있는 3칸 짜리 작은 건물이다. 칠사 란 궁중의 신인 사명, 출입을 관장하는 호, 음식을 관장하는 주, 도성의 문을 관장하는 신령인 국문, 상벌을 주관하는 태여, 도로의 행작을 관장하는 국행, 그리고 중류에 대한 제사를 의미한다. 측면과 후면은 전으로 벽을 쌓고, 전면 중앙의 칸에는 판문을, 양옆 칸에는 격차창을 설치하였다. 공신당은 역대 왕의 배향 공신 94 신위 중 83 신위를 모신 곳으로, 종묘 정전이 증축됨에 따라 이와 함께 동쪽으로 증축되어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공신당 전면 중앙부 3칸에는 판문(板門)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칸에는 하부에 벽체를, 그 상부에 광창(光窓)을 설치하였다. 그 외 세 면의 벽은 전벽돌로 감싸여있다. 수복방은 제사를 담당하는 노비와 관원들이 거처하던 방이다. 수복방 전면에는 제사에 쓰일 제물을 심사하는 찬막단이 있고, 찬막단 동편에는 성생위가 있다. 전사청은 종묘 제례에 쓰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이다.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전사청 동쪽에 있는 제사용 우물이다.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사(雅樂師)들이 대기하고 연습도 하던 건물이다. 현재는 한 채의 건물만 남아 있으며 개조된 것이어서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기둥을 깎은 기법이 특이한데 둥구리 기둥(圓柱)을 15모로 접었으며 8모 기둥도 몇 개 있으나 대부분 16모 기둥을 썼다. 집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기둥머리가 건물의 제일 위에 설치한 마루보를 떠받치게 목재를 짠 것도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원래 12칸 중 2칸만 기둥을 따로 세우고 마루를 깐 툇간(退間)이었고 나머지 10칸에는 방을 들였었다. 건물 규모가 큰데 비하여 무늬를 넣지 않고 붉은색(朱色)만을 칠하였으며, 짧은 서까래를 달지 않고 처마 서까래만 걸어 꾸민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종묘 영녕전 (宗廟 永寧殿)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다. 서울에 있는 지금의 종묘는 태조 4년 건립되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로 완비된다. 세종 원년에 이르러 2대 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나라에서 따로 별묘인 사조전을 세워 4조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지금의 종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영녕전을 건립하게 된 근거이다. 영녕전의 영녕(永寧) 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 라고도 한다. 영녕전은 네모나게 둘레담으로 쌓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묘정 공간을 형성하고 남쪽 담에는 신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각 동문과 서분을 두어 제례시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영녕전도 정전처럼 묘정 월대에 신로가 나있는 구성이다. 현재 영녕정 건물은 중앙에 정전 4칸, 좌우에 각각 협실 6칸씩을두어 모두 1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 협실 양끝에 직각으로 덧붙여서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있다. 내부 공간 구성과 이용은 기본적으로 종묘 정전과 같으며 영녕전 서남쪽으로는 영녕전 악공청이 있다.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으며, 건축 규모 면에서는 영녕전은 정전보다 건축 영역이 좁다. 또 형식 면에서도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과 같은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정전보다 크기가 작다. 영녕전에는 정전과 달리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는데, 이곳에 모신 목조, 도조, 환조, 익조는 추존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어서, 함께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왕도 도리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물론 엄연히 영녕전에 모셔진 왕의 배향공신도 종묘 배향공신이다. 영녕전에는 모두 34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종묘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제향(祭享, 제사) 때 사용하는 각종 그릇,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은 일반 그릇과 달리 정갈하고 성스러운 물건이어서 별도의 건물에 보관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개 제기고와 같은 건물은 바닥을 마루바닥으로 만든다. 마루바닥은 지면과 분리되어 있어 습기가 차지 않아 기물을 보관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묘실(廟室) 제왕 왕후 배향 공신 제1실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조준, 의안대군,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제2실 태종대왕(太宗大王) 원경왕후(元敬王后)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제3실 세종대왕(世宗大王) 소헌왕후(昭憲王后)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제4실 세조대왕(世祖大王) 정희왕후(貞熹王后) 권람, 한확, 한명회 제5실 성종대왕(成宗大王) 공혜왕후(恭惠王后) 신숙주, 정창손, 홍응 정현왕후(貞顯王后) 제6실 중종대왕(中宗大王) 단경왕후(端敬王后)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장경왕후(章敬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제7실 선조대왕(宣祖大王) 의인왕후(懿仁王后) 이준경, 이황, 이이 인목왕후(仁穆王后) 제8실 인조대왕(仁祖大王) 인렬왕후(仁烈王后)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장렬왕후(莊烈王后) 제9실 효종대왕(孝宗大王) 인선왕후(仁宣王后)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제10실 현종대왕(顯宗大王) 명성왕후(明聖王后) 정태화,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제11실 숙종대왕(肅宗大王) 인경왕후(仁敬王后)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제12실 영조대왕(英祖大王) 정성왕후(貞聖王后)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정순왕후(貞純王后) 제13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제14실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제15실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남공철, 김로, 조병구 제16실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이상황, 조인영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제17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제18실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제19실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송근수, 서정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묘실(廟室) 제왕 왕후 배향공신 제1실 목조대왕(穆祖大王) 효공왕후(孝恭王后) 제2실 익조대왕(翼祖大王) 정숙왕후(貞淑王后) 제3실 도조대왕(度祖大王) 경순왕후(敬順王后) 제4실 환조대왕(桓祖大王) 의혜왕후(懿惠王后) 제5실 정종대왕(定宗大王) 정안왕후(定安王后) 익안대군 제6실 문종대왕(文宗大王) 현덕왕후(顯德王后) 하연 제7실 단종대왕(端宗大王) 정순왕후(定順王后) 제8실 덕종대왕(德宗大王) 소혜왕후(昭惠王后) 제9실 예종대왕(睿宗大王) 장순왕후(章順王后) 박원형 안순왕후(安順王后) 제10실 인종대왕(仁宗大王) 인성왕후(仁聖王后) 홍언필, 김안국 제11실 명종대왕(明宗大王)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연원, 이언적 제12실 원종대왕(元宗大王) 인헌왕후(仁獻王后) 제13실 경종대왕(景宗大王) 단의왕후(端懿王后) 이유, 민진후 선의왕후(宣懿王后) 제14실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효순소황후(孝順昭皇后) 제15실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민백상, 이종성 제16실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永王) 의민황태자비(懿愍太子妃)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김집 박세채 종묘제례는 왕실의 조상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례로서, 조선 시대의 모든 제례 가운데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종묘 제례는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지내는 대향(大享, 四時大享)과 섣달 그믐에 지내는 납일제(臘日祭), 영녕전에서 거행하는 춘추(春秋) 제사, 그리고 속절(俗節), 삭망에 치르는 향사(享祀) 외에 종묘에 와서 빌거나 고하는 기고(祈告) 의식, 햇과일이나 햇곡식 등 새로운 물건이 나왔을 때 신물을 바치는 천신제(薦新祭), 그리고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이 종묘 영녕전에 와서 비는 알묘(謁廟) 의식 등이 있었다. 조선 시대 종묘 제례는 횃불과 초를 밝히고 한밤중에 봉행하였는데, 1969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올리다가 1971년 이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차례 올리고 있다. 종묘제례에 임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행사 집사관은 7일 전부터, 기타 제례 참석자는 3일 전부터 제계를 한다. 종묘 제례는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신을 영접하고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다음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행해진다. 종묘제례악은 악(樂), 가(歌), 무(舞)를 갖추어 연주하는 음악이다. 악 은 악기의 편성과 연주, 가 는 악장의 구성과 가락, 무 는 일무(佾舞)의 의물(儀物)을 뜻한다. 음악은 등가(登歌)와 헌가(軒歌)로 구성된다. 동양의 고전인 악기(樂記)에서, 악, 가, 무를 모두 갖춘 것을 악(樂)이라 한다 고 한 것처럼, 종묘제례악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종묘관리소 는 종묘 내 문화재와 시설보호 및 관리를 목적으로 설치된 대한민국 문화재청 소속기관이며, 종묘 내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재와 기타시설·수목 관리, 관람료 징수 및 기타 종묘관리소의 운영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다. 창경궁 창덕궁 이상해, 궁궐ㆍ유교건축, 서울 솔 출판사, 2004. 문화재청 종묘 -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 한국의 세계유산 - 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 및 종묘제례악,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정전,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 분류:대한민국의 세계유산 분류:서울특별시의 사적 분류:조선 분류:사당 분류:서울 종로구의 문화재 분류:1394년 완공된 건축물 |
문화유산 (文化遺産)은 장래의 문화적 발전을 위하여 다음 세대 또는 젊은 세대에게 계승·상속할 만한 가치를 지닌 사회의 문화적 소산이다. 과학, 기술, 관습, 규범 및 정신적·물질적 각종 문화재 , 문화 양식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문화재는 조상들이 남긴 건물·조각·공예품·서적·서예·고문서 등의 유물·유적 가운데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거나 역사 연구에 자료가 되는 유형문화재, 연주·무용·음악·공예·기술 등에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무형문화재 및 기념물·민속자료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여 후세에 잘 물려주기 위해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였다. 대한민국의 문화재 지정방식은 크게 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향토 유적·유물 등)로 나뉜다. 국가지정문화재 문화재청장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중요문화재로서, 국보 · 보물 · 국가무형문화재 · 사적 · 명승 · 천연기념물 및 중요민속자료 등 7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비지정문화재 문화재보호법 또는 시·도의 조례에 의하여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지칭한다. 시·도지정문화재 특별시장 · 광역시장 · 도지사(이하 시 · 도지사 )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로서, 유형문화재 · 무형문화재 · 기념물 및 민속문화재 등 4개의 유형으로 구분된다. 등록문화재 지정문화재가 아닌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조물 또는 기념이 될 만한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 중에서 보존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 문화재자료 시 · 도지사가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향토문화 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시 · 도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를 지칭한다. 문화재청 문화재보호재단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유네스코 세계유산 |
한국 요리 (韓國料理, 는 한국에서 발달한 고유하고도 전통적인 음식을 뜻한다. 복잡한 궁중 요리에서부터 지방의 특색 요리와 현대의 맛있는 요리에 이르기까지 재료와 조리법이 매우 다양하다. 전통적인 한국 정식은 밥, 국, 김치와 함께 나오는 많은 반찬들로 이루어진다. 한국 요리는 주로 쌀을 기반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분 포함 참기름, 들기름, 고추장, 된장, 간장, 소금, 마늘, 생강, 고춧가루, 다시마 국물 등으로 맛을 낸다. 김치는 거의 항상 모든 음식에서 제공된다. 식단은 계절별로 다양한데, 전통적으로 겨울 동안에는 마당에 구멍을 파고 땅 속에 묻어 놓은 장독에 저장된 김치와 그 밖에 절인 채소들에 많이 의존했다. 그러나 현재는 계절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식단을 맛볼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 나그네의 식사 한국의 일반적인 반상.한국은 기후와 풍토가 농사에 적합하여 일찍이 신석기시대 후에 잡곡 농사로 농업이 시작되었고, 그 후 벼농사가 전파되었다. 이후 곡물은 한국 음식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삼국시대 후기부터 밥과 반찬으로 주식, 부식을 분리한 한국 고유의 일상식 형태가 형성되었다 밥, 죽, 떡, 국수, 만두, 수제비, 술 등의 곡물 음식이 발달하였고 콩으로 메주를 쑤어 장을 담그는 발효 음식도 발달하였다. 재배 채소뿐만 아니라, 산야에 자생하는 산나물, 들나물 등 채소의 종류가 다양하여 생채, 쌈, 나물, 김치로 만들어 식탁을 계절에 따라 변화있게 차릴 수 있었다. 예로부터 약식동원(藥食同原,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같다)의 식관념 속에 생강, 계피, 쑥, 오미자, 구기자, 더덕, 도라지, 율무, 모과, 석류, 유자, 인삼 등 약으로 쓰이는 재료가 음식의 조리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삼계탕, 쑥떡, 생란, 더덕, 생채 등 여러 가지 음식과 생강차, 인삼차, 모과차, 유자차, 구기자차, 결명자차, 율무차 등의 차와 오미자 화채 등의 다양한 음료도 있다. 조미료와 향신료도 약념(藥念)이라 하여 파, 마늘, 생강, 고추, 참기름, 깨소금 등이 약과 같은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국인의 일상식은 밥을 주식으로 하고, 여러 가지 반찬을 곁들여 먹는 식사 형태이다. 주식은 쌀만으로 지은 쌀밥과 조, 보리, 콩, 팥 등의 잡곡을 섞어 지은 잡곡밥을 기본으로 한다. 부식은 국이나 찌개, 김치와 장류를 기본으로 하고, 육류, 어패류, 채소류, 해조류 등을 이용해서 반찬을 만들었다. 이렇게 밥과 반찬을 같이 먹는 식사 형태는 여러 가지 식품을 골고루 섭취함으로써 영양의 균형을 상호 보완시켜주는 합리적인 식사 형식이다. 주식으로는 밥, 죽, 국수, 만두, 떡국, 수제비 등이 있고, 부식으로는 국, 찌개, 구이, 전, 조림, 볶음, 편육, 나물, 생채, 젓갈, 포, 장아찌, 찜, 전골, 김치 등 가지수가 많다. 이러한 일상 음식 외에 떡, 한과, 엿, 화채, 차, 술 등의 음식도 다양하다. 또 저장 발효 식품인 장류, 젓갈, 김치 등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한국 음식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식과,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거치는 통과 의례 음식,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년제와 풍어제, 부락의 평안을 비는 부락제 등의 행사에 따라 차려지는 행사 음식이 있으며, 또 고인을 추모하여 차리는 제사 음식이 있다. 이런 의례 음식에는 특별한 식품이나 음식을 빠짐없이 차리는데, 거기에는 기원, 복원, 외경, 존대의 뜻이 따른다. 또한 계절에 따라 그때그때 철에 나는 음식을 이용하여 시식(時食)을 즐겼다. 한국의 절식 풍속은 인간과 자연과의 지혜로운 조화를 이룬 것으로 영양상으로도 지극히 과학적인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정월대보름에 호두를 깨 먹으면 일년 내내 부스럼이 안 난다는 것은 역시 필수 지방산이 부족될 때 이를 공급하여 피부가 헐거나 버짐, 습진을 막는 데 효과적이라는 과학적 뒷받침을 가지고 있다. 입춘에는 새 봄에 나는 향채를 조리해 먹음으로써 봄맞이하는 기분뿐 아니라 생채가 부족했던 겨울을 지내고 난 후 비타민C를 보충해주는 합리화된 식습관이라 할 수 있다. 향토음식은 그 지역 공간의 지리적, 기후적 특성을 갖고 생산되는 지역 특산물로 그 지역에서만 전수되어 오는 고유한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토속 민속음식이라 할 수 있다. 즉, 향토음식은 고장마다 전승되는 세시풍속이나 통과의례 또는 생활 풍습 등은 문화적 특질 뿐 아니라 향토음식이 지니고 있는 영양적 의의도 크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홍어회와 과메기를 들 수 있다. 한국 요리 상차림 대가족 중심의 가정에서는 어른을 중심으로 그릇과 밥상이 모두 1인용으로 발달해 왔다. 그러나 핵가족 중심으로 바뀐 지금은 온 가족이 함께 두레상에서 개인용 접시에 나누어 먹는 형식으로 되었다. 음식은 처음부터 상 위에 전부 차려져 나오는 공간 전개형을 원칙으로 하였다. 쟁첩에 담는 반찬 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12첩 반상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갖춘다. 한국인의 일상식은 밥과 반찬으로 구성되는 주 부식 분리형 양식이 삼국시대 이후로 하루 세끼 정규식사의 기본형으로 정착되어 왔다. 때로는 점심에 국수장국으로 차린 면상(麵床)이나 비빔밥, 장국밥과 같은 일품요리로 식사를 할 때가 있으나 이것은 하나의 별식(別食)차림이다. 밥상에서는 밥이 주격 음식이고, 반찬은 부격 음식이어서 반찬은 밥에 맞추어 선정된다. 반상차림은 식품의 배합, 간의 농담(濃淡), 음식의 냉온(冷溫), 색상의 배합 등 여러 면에서 합리성과 조합성을 이루고 있다. 반상차림에는 3첩, 5첩, 7첩, 9첩 반상이 있고,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왕에게 12첩반상을 차리었다. 가장 간단한 3첩반상은 국, 김치 외에 나물류와 생채, 조림이나 구이를 차린다. 간단한 3첩반상에서도 밥, 국, 김치, 장 외에 채소, 육류, 어류 등이 골고루 배합된다. 5첩반상에는 밥, 국, 김치, 장 외에 반찬 5가지, 찌개 한 가지가 오른다. 9첩반상에는 밥, 국, 김치, 장 외에 반찬 9가지, 찌개 한 가지, 찜 한 가지가 오른다. 왕의 수라상은 12첩반상이었다. 왕은 대원반에 앉고 곁반으로 소원반, 책상반이 곁들여진다. 원반에는 흰 수라, 곽탕, 장 3가지, 김치 3가지, 반찬 7가지, 뼈를 발라내는 그릇인 토구, 은잎사시 2벌이 놓인다. 수저 하나는 국용, 다른 하나는 동치미용이고 젓가락 하나는 생선용, 다른 하나는 채소용이다. 소원반에는 팥수라, 전골합, 찜, 반찬 두 가지, 찻주전자, 쟁반과 차주발, 사기 빈 접시, 은공기 그리고 수저 3벌이 놓인다. 팥수라는 흰 수라를 들지 않고 팥수라를 들고 싶을 때 바꾸어 놓는 것이다. 수저 3벌은 기미상궁이 검식과 음식을 더는 데 사용한다. 식사가 끝난 다음 차주발에 차를 따라서 쟁반에 받쳐 올린다. 곁반인 책상반에는 곰탕, 조치 2, 전골냄비, 더운 구이가 놓인다. 팥수라를 먹을 때는 곽탕 대신 곰탕을 옮겨 놓는다. 식사 예절은 지역이나 가정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현재는 지키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른과 함께 식사할 때에는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든 다음에 아랫 사람이 들도록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손에 들지 않으며, 젓가락을 사용할 때에는 숟가락을 상 위에 놓는다.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그릇에 걸치거나 얹어 놓지 말고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손으로 들고 먹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국이나 김치국물을 먼저 떠 마시고 나서 밥이나 다른 음식을 먹는다. 밥과 국물이 있는 김치,찌개, 국은 숟가락으로 먹고, 다른 반찬은 젓가락으로 먹는다. 음식을 먹을 때는 소리를 내지 말고 수저가 그릇에 부딪혀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한다. 숟가락의 바닥을 이로 긁지 않는다. 수저로 반찬이나 밥을 뒤적거리는 것은 좋지 않고, 먹지 않는 것을 골라내거나 양념을 털어내고 먹지 않는다. 먹는 도중에 수저에 음식이 묻어 있지 않도록 하며, 밥그릇은 제일 나중에 숭늉을 부어 깨끗하게 비운다. 여럿이 함께 먹는 음식은 각자 접시에 덜어 먹고, 초장이나 초고추장도 접시에 덜어서 찍어 먹는 것이 좋다. 음식을 먹는 도중에 뼈나 생선 가시 등 입에 넘기지 못하는 것은 옆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조용히 종이에 싸서 버린다. 상위나 바닥에 그대로 버려서 더럽히지 않도록 한다. 식사중에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면 얼굴을 옆으로 하고 손이나 손수건으로 입을 가려서 다른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너무 서둘러서 먹거나 지나치게 늦게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춘다. 어른과 함께 먹을 때는 먼저 어른이 수저를 내려 놓은 다음에 따라서 내려 놓도록 한다.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수저를 처음 위치에 가지런히 놓고, 사용한 휴지(손수건,수건)는 대강 접어서 상 위에 놓는다. 이쑤시개를 사용할 때에는 한 손으로 가리고 사용하고, 사용 후에는 남에게 보이지 않게 처리한다. 숟가락을 밥 위에 수직으로 꽂는 것은 제사 때나 하는 것이다. 더운 음식을 식힐 때는 입김이 상대방의 얼굴 방향을 향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음식물이 입 안에 남아있을때에는 말하지 않는다. 상 위에 팔꿈치나 손을 걸쳐놓지 않는다. 식사가 끝나기 전에 돌아다니지 않는다. 경상도는 남해와 동해에 좋은 어장을 가지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고, 남북도를 크게 굽어 흐르는 낙동강 주위의 기름진 농토에서 농산물도 넉넉하게 생산된다. 이곳에서는 고기라고 하면 물고기를 가리킬 만 큼 생선을 많이 먹고, 해산물회를 제일로 친다. 음식은 멋을 내거나 사치스럽지 않고 소담하게 만든다. 싱싱한 물고기에 소금간을 해서 말려서 굽는 것을 즐기고 바닷고기로 국을 끓이기도 한다. 곡물음식 중에는 국수를 즐기며, 밀가루에 날콩가루를 섞어서 반죽하여 홍두깨나 밀대로 얇게 밀어 칼로 썰어 만 드는 칼국수를 제일로 친다. 장국의 국물은 멸치나 조개를 많이 쓰고, 제물국수를 즐긴다. 음식의 맛은 대체로 간이 세고 매운 편이다. Gangjin Gun 05.jpg|섬네일|간장게장과 홍탁삼합, 해산물이 들어간 전라남도의 한정식. 1958년 서울 청진동에 문을 연 장원 은 광주에서 같은 이름으로 요정을 하던 음식 솜씨로 유명한 주정순이 서울에 낸 요정으로 1964년에는 한정식 식당으로 바뀌었다. 요정 장원의 음식은 화려한 양념과 산해진미를 겸비한 전라도 한정식이었다. 유홍준 교수는 인사동의 영희네집을 한국의 3대 한정식집으로 꼽았다. 나머지 두 곳은 강진의 해태식당, 그리고 해남의 천일식당이다. 해방 후 서울에서 고관들이 먹던 궁중요리는 깔끔한 맛을 강조하여 양념을 많이 쓰지 않았지만 전라도 음식은 맵고 짠 편이다. 명월관의 궁중요리는 점차 사라지고 장원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들이 운영하는 요정이나 요릿집들은 전라도식으로 변해갔다. 맛있는 해물 요리가 많다 진짜양 평안도는 메밀로 만든 냉면 국수에 쇠고기 육수를 이용한 물냉면이 유명하다. 한국 전쟁 이후 이남에서 즐겨 먹는 물냉면은 평안도식 냉면을 말한다. 녹두를 갈아 두툼하게 만든 빈대떡은 술안주로 적합하다. 돼지고기, 두부, 마늘, 파 등을 넣은 만두는 겨울에 즐겨 먹는 음식으로 쇠고기국이나 갈비국에 넣어 물만두로 겨울철 특히 설날에 주로 먹는다. 양념의 관점에서 보면, 이남이나 함경도의 음식에 비해 맵거나 짜지 않다. 황해도는 연백평야가 펼쳐진 곡창으로, 특히 잡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조는 알이 굵고 구수하여 남도지방에서 보리를 먹듯이 메조를 많이 먹는다. 그리고 사료가 풍성하여 닭고기의 맛이 특히 좋아서 어느 음식이든지 닭고기를 많이 쓴다. 식성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아 충청도와 비슷하며, 구수하고 소박한 것을 즐겨 겉모양을 내는 일이 별로 없다. 유명한 음식으로는 잡곡밥과 누름적이다. 누름적은 김치 ·실파 ·돼지고기 등을 큼직하게 꼬챙이에 꿰어 밀가루를 묻혀 번철에 지지는데, 맛도 좋고, 인심 좋은 황해 사람의 품성이 엿보이는 음식이다. 함흥냉면이 가장 유명하다. 옛날 함경도에는 고구마가 많이 나서 냉면을 만드는 국수에 고구마 전분을 주로 썼으나 이남으로 이주한 도민은 제주도 감자 전분을 주로 쓰고 있다. 겨울에는 전 분만으로 국수사리를 빼고, 여름에는 밀가루를 섞는다. 전분을 익반죽해서 국수틀에 넣고 눌러서 끓는 물에서 삶아진 면을 건져 찬물에 씻어 사리를 만든다. 냉면에 올리는 회도 이북에서는 참가자미를 썼으나, 이남에서는 홍어로 회를 만들어 쓴다. 홍어는 껍질을 벗기고 잘게 썰어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찬물에 씻어 쭉 건져 물기가 빠지면 식초를 넣어 버무리는데 여름에는 한 시간, 겨울에는 한시간 반 동안 재워 두었다가 간장을 넣어 버무린다. 그대로 두었다가 냉면에 얹기 직전에 회 양념으로 무치며 오이, 무, 배는 길쭉길쭉 썰어서 매운 양념으로 무친다. 함흥냉면의 국수는 감자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서 만든다. 함흥냉면 중 인기가 있는 것은 회냉면으로 매운 냉면비빔장과 무친 가자미를 얹는다. 지금은 새콤달콤하게 무친 홍어회를 많이 쓰지만 동해안지방에서는 명태회를 쓰기도 한다. 한국 음식은 곡류를 중심으로 하는 주식과, 곡류 외의 각종 식품으로 만드는 반찬, 후식이나 간식으로 떡과 한과가 있으며, 음료로서 차와 화채가 있다. 비빔밥 밥은 한국인의 가장 큰 주식으로서 매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먹는 것이 한식의 원칙이다. 밥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우선 백미를 사용하는 백미밥이 있다. 백미는 껍질을 벗겨낸 쌀이다. 백미밥은 대체로 매우 하얗고 식감이 부드러워 아침상에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나 요즈음에는 매끼니 상관없이 먹는다. 현미밥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현미와 벗긴 쌀 백미를 적절히 섞은것이다. 쌀에는 대부분의 영양소가 껍질에 있어서 현미가 백미보다는 영양소가 많다. 또한, 현미는 위장에 있는 시간이 길어 포만감이 더 오래가 다이어트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현미는 꽤 딱딱한 감이 있다. 흑미밥은 검은쌀(흑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식감은 백미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건강에도 좋다. 잡곡밥은 여러가지 곡물과 백미, 현미를 섞은것이다. 대부분 콩과 조. 경우에 따라선 기장도 넣는다. 가장 영양소가 풍부하며, 건강식, 다이어트식으로 널리 식용된다. 보리밥 보리밥은 보리를 현미 혹은 백미와 적절히 섞은것이다. 보리는 생산량이 많고 수확되는 시기도 빨라 한민족의 주요 곡식으로 널리 애용받았다. 옛날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보리가 수확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릿고개"라는 말이 붙은 적도 있다. 국은 밥과 함께 언제나 상에오른다. 국은 물에 국물을내는 재료를 넣고 끓인것이다. 국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우선 미역국은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국물을 낸뒤 미역을 넣고 끓인것이다. 미역국은 산모가 출산 전후에 먹는음식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풍습이있다.콩나물국은 콩나물을 넣고 끓인것이다. 주로 아침상에 먹는다. 해장용으로도 애용된다.된장국은 멸치 다시마로 국물을 낸국물에 된장을 푼것이다. 무국또는 뭇국은 쇠고기 국물에 무를 숭덩숭덩 썰어넣고 끓인것이다.아욱국은 아욱을 넣고 끓인것이다. 탕은 건더기가 더 많이들어간 국을 의미한다. 탕은 주로 저녁상에 오른다. 우선 갈비탕이 있다. 소의 갈비와 채소, 그리고 몸에 좋은 한약재를 넣고 우린것이다. 삼계탕은 닭과 한약재, 인삼, 대추와 파, 그리고 갖가지 채소를 넣고 진하게 끓인것이다. 삼계탕은 이열치열(뜨거운 것에는 뜨거운 것으로 상대한다는 뜻)에 따라 무더운 여름 초복, 중복, 말복에 먹는다.그 외에 해물탕, 매운탕, 추어탕, 알탕 등 탕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재료를 기름에 튀긴 튀각 과 부각 은 간식으로 쓸 수 있으며, 특히 부각은 재료에 찹쌀 풀칠을 하여 필요할 때 튀겨 먹어 밑반찬으로 많이 쓰인다. 대표적으로 김부각이 있다. 포 는 육포와 어포로 나뉘고 술안주나 간식, 밑반찬으로 쓰인다. 떡 은 명절이나 큰 행사에 자주 쓰이는 음식으로 고조선 시대의 시루가 발견되어 긴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치는 떡, 빚는 떡, 찌는 떡이 있다. 백설기, 송편 등이 유명하다. 차 는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가 있어 승려들이 많이 마셨다고 전하며 잎을 그대로 말려 마시는 녹차와 발효시켜 마시는 우롱차, 홍차가 있다. 김치의 한 종류인 동치미. 김치 는 한국 고유의 음식으로 전국적으로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이 있는 많은 김치가 있으나, 보통 김치라고 하면 배추에 파, 마늘, 고춧가루로 간을 하여 발효시키는 배추김치를 일컫는다. 김치를 제조할 때에는 김치를 만들다 라고 하지 않고 김치를 담그다 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깍두기 김치, 파 김치, 고구마줄기 김치 등이 있으며, 유산균이 시큼한 맛을 내고, 매운 맛이 식욕을 돋우는 음식이다. 화채 는 냉수에 꿀이나 엿기름을 탄 음식으로, 과일이나 오미자즙을 넣어 만들기도 한다. 다른 음료로는 숭늉, 수정과, 식혜 등이 있다. 김치 김치 소금(혹은 소금물)에 절인 채소(주로 배추, 무, 오이)에 생강, 마늘, 양파(김장김치에는 넣지 않는다)와 고춧가루 등을 넣고 발효시킨 음식.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겨우내 먹기에 충분한 김치를 담는데, 냉장고의 보편화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판매되는 김치로 인해 이러한 풍습이 쇠퇴하고 있다. 된장 된장콩 반죽을 발효시킨 것. 고추장 녹말(주로, 찹쌀가루), 메줏가루, 소금, 고춧가루, 물을 적정 비율로 섞어 발효시킨 것. 쌈장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서 채소등의 쌈 요리에 먹는 장. 간장 메주를 발효시킨 양념 전통 식당에서 고기는 숯불 화로를 상에 놓고 여러 가지 반찬과 밥을 주위에 빙 늘어 놓고 구어 먹는다. 구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자른 다음 신선한 상추, 밥, 얇게 저민 마늘, 쌈장(고추장과 된장을 섞은 것) 그 밖의 양념을 같이 싸서 먹는다. 주로 불고기나 삼겹살을 많이 먹는다. 사발 그릇에 밥과 여러 가지의 채소, 고기, 달걀, 고추장 등을 넣고 섞어서 먹는 비빔밥이 있다. 또한, 눌은 밥을 이용한 누룽지, 숭늉이 있다. 이 간단한 음식들은 길거리의 포장마차에서도 살 수 있고 보통 식사라기보다는 간단한 간식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많은 포장마차들이 밤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술을 같이 파는 경우도 있다. 빙수는 여름에 기분전환으로 인기가 있고, 따뜻한 국물, 김밥, 호떡, 붕어빵 등은 가을과 겨울에 많이 먹는다. 파전 달걀, 밀가루, 파, 굴, 조개 등을 넣고 버무려 팬에 지져낸 부침개. 빈대떡 간 녹두에 파, 김치, 고추 등을 넣고 버무려 팬에 지져낸 부침개. 순대 돼지의 내장에 두부, 채소, 당면 등을 섞은 재료를 넣어 익혀낸 음식. 떡볶이 굵기가 가는 가래떡에 고추장과 어묵, 채소 등을 넣어 만든 음식. 한식당은 떡볶이를 Spicy Rice Pasta로 적는 등 메뉴판에 한식의 고유명사를 쓰지 않고 정체불명의 이름을 쓰거나 음식을 설명하는 설명문만을 넣은 경우, 또 반대로 영어 설명 없이 고유명사만 써넣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2009년 대한민국 농림수산식품부는 한국음식에 대한 외국어 표기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2011년 여전히 미국의 한식당은 정체불명의 표기를 쓰는 곳이 많아 미국 뉴욕대(NYU) 대학원의 한인학생회가 한식당 메뉴 정비 캠페인 을 벌이고있다. 떡 엿 국 찜 전 찌개 숭늉 젓갈 조선왕조 궁중음식 한식조리기능사 한식 레스토랑 한국 음식의 목록 《한국전통음식》(창조문화, 2000년) 문화관광부 엮음 |
소수, 우측은 합성수. 소수란 자신보다 작은 두 자연수를 곱하여 만들 수 없는 1보다 큰 자연수이다. 소수 (素數, 발음 소쑤, 는 자신보다 작은 두 개의 자연수를 곱하여 만들 수 없는 1보다 큰 자연수이다. 예를 들어, 5는 1x5 또는 5x1로 수를 곱한 결과를 적는 유일한 방법이 그 수 자신을 포함하기 때문에 5는 소수이다. 그러나 6은 자신보다 작은 두 숫자(2×3)의 곱이므로 소수가 아닌데, 이렇듯 1보다 큰 자연수 중 소수가 아닌 것은 합성수라고 한다. 1과 그 수 자신 이외의 자연수로는 나눌 수 없는 자연수로 정의하기도 한다. 산술의 기본 정리의 1보다 큰 모든 자연수는 그 자체가 소수이거나, 순서를 무시하고 유일한 소인수의 조합을 갖는다 는 내용을 바탕으로 정수론에서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또한 현대에는 암호 분야에서의 기술적 사용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소수의 개수는 무한하며, 이는 유클리드의 정리에 의하여 최초로 논증되었다. 소수와 합성수를 구분해낼 수 있는 명확한 공식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나, 대역적으로 자연수 중 소수의 비율의 근사치를 예측하는 모델로는 여러가지가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연구의 첫 결과는 19세기 말에 증명된 소수 정리인데, 이는 무작위로 선택된 한 수가 소수일 확률은 그 수의 자릿수, 곧 로그값에 반비례함을 알려준다. 처음 200개의 소수는 다음과 같다. :2, 3, 5, 7, 11, 13, 17, 19, 23, 29, 31, 37, 41, 43, 47, 53, 59, 61, 67, 71, 73, 79, 83, 89, 97, 101, 103, 107, 109, 113, 127, 131, 137, 139, 149, 151, 157, 163, 167, 173, 179, 181, 191, 193, 197, 199, 211, 223, 227, 229, 233, 239, 241, 251, 257, 263, 269, 271, 277, 281, 283, 293, 307, 311, 313, 317, 331, 337, 347, 349, 353, 359, 367, 373, 379, 383, 389, 397, 401, 409, 419, 421, 431, 433, 439, 443, 449, 457, 461, 463, 467, 479, 487, 491, 499, 503, 509, 521, 523, 541, 547, 557, 563, 569, 571, 577, 587, 593, 599, 601, 607, 613, 617, 619, 631, 641, 643, 647, 653, 659, 661, 673, 677, 683, 691, 701, 709, 719, 727, 733, 739, 743, 751, 757, 761, 769, 773, 787, 797, 809, 811, 821, 823, 827, 829, 839, 853, 857, 859, 863, 877, 881, 883, 887, 907, 911, 919, 929, 937, 941, 947, 953, 967, 971, 977, 983, 991, 997, 1009, 1013, 1019, 1021, 1031, 1033, 1039, 1049, 1051, 1061, 1063, 1069, 1087, 1091, 1093, 1097, 1103, 1109, 1117, 1123, 1129, 1151, 1153, 1163, 1171, 1181, 1187, 1193, 1201, 1213, 1217, 1223 여기서, 2는 유일한 짝수 소수이다. 10 이하의 소수는 4개이고, 1000 이하의 소수는 168개이며, 10000 이하의 소수는 1229개임이 밝혀져 있다. 정수론의 기본 정리에 의해, 모든 자연수는 꼭 한가지 방법으로 소수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고 이를 소인수 분해의 일의성이라고 한다. 즉, 곱셈의 관점에서 소수는 자연수를 이루는 성분이다. 예를 들면, 이고 23244는 (약수의 순서를 무시하면) 단 한 가지 방법으로 소인수 분해 된다. 이 정리의 중요성은 소수들의 집합에서 1을 제외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만일 1이 소수라면 이 정리의 엄밀한 진술을 위해 추가적인 제한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소수는 무한하다. 이 명제를 유클리드의 정리라고 하며 가장 오래된 증명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의 《유클리드 원론》(제 9권, 정리 20)에서 볼 수 있다. 유클리드의 증명은 “어느 주어진 유한한 소수들 보다 더 많다.”라는 결론으로 표현되고, 그의 증명은 본래 아래와 같다. :유한 개의 소수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이 유한 개의 소수들을 모두 곱한 값에 1을 더한다. (유클리드 수 참조) 그 결과값은 다른 어떤 소수로 나누어도 나머지가 1이므로 어떤 소수로도 나누어떨어지지 않는 수가 된다. 따라서 이 수가 소수라면 기존의 최대소수보다 큰 소수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이 수가 소수가 아니라고 해도 또다른 소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소수가 유한하다는 애초 가정에 모순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다른 수학자들도 각자의 증명을 내놓았다. 그 중 오일러에 의한 증명은 모든 소수들의 역수의 합이 발산한다는 증명으로부터 소수의 개수가 무한함을 보였다. 소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에서 찾을 수 있다. 파피루스에는 소수와 합성수를 구분해서 다른 형태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고대 그리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클리드 원론》(기원전 300년경)에는 소수가 무한히 많다는 내용과 정수론의 기본 정리가 포함되어 있다. 유클리드는 메르센 소수로부터 완전수를 만드는 방법도 설명하였다. 유클리드 이후 17세기까지 소수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페르마는 1640년에 페르마의 소정리를 증명없이 발표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에라토스테네스의 체가 있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 찾고자 하는 범위의 자연수를 나열한다. # 2부터 시작하여, 2의 배수를 지워나간다. # 다음 소수의 배수를 모두 지운다. 이를 반복하여 마지막까지 지우면, 남는 수들이 소수가 된다. 이 과정은 사실 어떤 자연수 이 소수임을 판정하기 위해서 까지만 진행하면 되는데 , 수가 수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 몫이 항상 필요하며 나누는 수와 몫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이하이기 때문이다. 소수를 골라내기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을 이용해 소수를 어느 정도 골라낼 수 있다. # 2와 5를 제외하면, 모든 소수의 일의 자리 수는 1, 3, 7, 9이다. # 어떤 자연수 이 소수임을 판정하기 위해선 까지의 수 중 1을 제외하고 그 자연수의 약수가 있는 지 확인하면 된다. # 배수의 성질을 이용하면 쉽게 구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하고 복잡한 판정법이 존재하지만, 위의 세 가지는 당연하고 간단한 것들이다. 모든 소수를 분류해서 해당 집합에 넣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특수한 소수에는 다음이 있다. 메르센 소수 쌍둥이 소수 사촌 소수 섹시 소수 소피 제르맹 소수 페르마 소수 가우스 소수 소수와 관련된 많은 미해결 문제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들은 아래와 같다. 리만 가설 골드바흐의 추측 쌍둥이 소수의 추측 메르센 소수의 무한성 홀수 완전수의 존재성 오래전부터 수학자들은 자연수 혹은 정수의 테두리 안에서만 소수 개념이 적용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의 직접적 이유는, 다항식에 관한 이론이 체계화되면서 기약다항식 등 소수와 유사한 개념을 분석에 도입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사한 시기에 추상대수학에 대해 기초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어떤 연산이 정의된 대수 구조에 대한 일반적 관점에서 소수 개념을 다룰 필요성 역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수의 개념을 분석해 나가던 도중, 수학자들은 이전에 자연수 범위에서만 사용되던 소수의 두 가지 정의가 좀 더 일반적인 경우에는 서로 동치조건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예컨대 자연수 범위 내에서 소수는, 가 소수일 필요충분조건은, 가 이 아니면서 이고 를 만족하는 임의의 자연수 ,에 대해 , 이거나 인 것이다. 가 소수일 필요충분조건은, 가 이 아니면서 양의정수 ,에 대해 이면 나 둘 중에 오직 하나만이 1인 것이다. 와 같이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정의를 정수 범위로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을 제외하고, 단순히 정의에 들어 있는 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는 바로 정수환 상에서 각각 덧셈에 대한 항등원과 단원의 조건이다.(이 일반화를 직관적으로 좀 더 명확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우스 정수에 대한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이 때는 단위 순허수들까지 단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소수 개념은 이러한 이러한 일반화에 힘입어 일반적인 정역, 좀 더 나아가 1을 가진 가환 환 까지 그 배경 집합이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일반화하고 보면,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위의 두 동치조건이 더이상 동치가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전자를 소수 , 후자를 기약수 로 정의하고(혹은 소원, 기약원이라고도 한다) 일반화된 정의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이하에서 이란 주어진 환의 덧셈 연산에 해당하는 항등원이라는 의미이다) 가 소수일 필요충분조건은, 가 이나 단원이 아니면서 이면 이거나 인 것이다. 가 기약수일 필요충분조건은, 가 이나 단원이 아니면서 이면 나 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단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종래의 정수환과 가우스 정수환, 다항식환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 적용될 수 있다. 위와 같은 소수와 기약수에 대해, 어떤 1을 가진 가환 환 위에서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만약 이 정역이면, 위에서 소수는 모두 기약수이다.(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이 주 아이디얼 정역이면, 위에서 소수와 기약수는 동치이다. 정수환은 주 아이디얼 정역이므로 정수환 위에서 소수와 기약수는 같다. 만약 이 체이면, 에 의해 유도된 다항식환 은 주 아이디얼 정역이므로, 윗 명제에 의해 위에서 소수와 기약수는 동치이다. 현재까지 찾아낸 가장 큰 소수는 로 24,862,048자리이다. 회문 소수 수소 (수학) 소수 정리 메르텐스 정리 (수론) 소 아이디얼 *코플랜드-에르되시 상수 김주필, 『알기 쉬운 대수학』, 도서출판 대선, 2002 김응태, 박승안, 『현대대수학(6/e)』, 경문사, 2006 10만 번째 소수까지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네이버 캐스트 - 소수가 뭐길래? *(소수리스트1,000,000,000,000개-소수 12째자리)http://compoasso.free.fr/primelistweb/page/prime/liste_online_en.php |
사신 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사신 (使臣)은 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이다. 사신 (死神)은 죽음의 신이다. 사신 (四神)은 네 방향을 맡은 신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일컫는다. 사신 은 무속의 신령 중 하나이다. 사신 (四信)은 대승불교의 주요 논서인 대승기신론의 수행심신분에서 언급된 네 가지 믿음이다. 사신 (仕臣)은 신라의 행정 구역 중 5소경(五小京)의 으뜸 벼슬. |
조선시대『악학궤범』 향부악기도설에 나오는 향비파와 당비파 한국음악 (韓國音樂)의 기반이 된 음계는 한반도 및 중국 동북부 등과 교류하여 고대시대부터 전래되어오는 것과 근대화와 산업화에 의한 빠른 문화유입에 의한 음악적 반응을 포함하여 한민족(韓民族)의 음악을 총칭한다. 넓은 의미의 한국음악 은 소위 국악 으로 불리는 1) 한국음악과 현대에 서양음악의 기법을 사용하여 창작된 근대한국음악 및 현대의 창작국악을 포함한 2) 한국현대음악, 그리고 현대의 한국대중음악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나 일반적으로 국악은 한국음악으로 불리며 한국현대음악도 한국음악에 포함된다. 또한 한국음악 과 한국대중음악 은 구분된다. 한국음악은 지역상 동양음악의 한 갈래이며 기초 인문학인 음악사학의 연구대상이다. 한국에서는 6.25 사변 이전의 조선왕조에서 관촬하여 계승하도록 장려한 것과 백성들의 자발적인 농악을 포함하여 전래전통 국악(國樂)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음악사를 조망하고 세계음악의 한 조류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명칭의 한국음악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음악은 동양음악에 속하며 동시에 인문학인 음악사학의 연구대상이다. 근대과학으로서의 한국음악사학 연구는 한국 전통음악을 연구하는 한국국악학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혜구(李惠求)는 1940년대 를 발표한 이래 많은 논문을 내었고 논문집 와 , 을 내었다. 장사훈(張師勛)은 를 비롯하여 많은 논문을 내었고 논문집 ·····를 내었다. 그 밖에도 함화진(咸和鎭)의 , 성경린(成慶麟)의 ····, 김기수(金琪洙)의 , 박헌봉(朴憲鳳)의 등의 저서가 있다. 1959년에는, 비록 인문학인 한국음악사학이 엄연히 다른 음악 연주와 작곡을 담당하는 영역과 공존하는 형태이지만,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 이론전공이 신설되어 한국음악사학 연구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나 인문학의 성격은 퇴화되었다편 국립국악원이 주축이 되어 인출된 것으로 양악 5선보에 옮긴 이 제14집까지 나왔고 재래의 율자보(律字譜)에 의한 도 제5집까지 나왔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간행한 영인본(影印本) 와 가 있고 양악 5선보에 채보한 이재숙(李在淑)의 가 있다. 지금까지 활발한 연구활동을 한 사람으로는 권오성·한만영·이재숙·김정자·이성천·이병원·송방송·이보형·김길운·권도희 등이 있다. 한국국악학회(韓國國樂學會)는 한국음악사학을 연구하는 학회로서, 1948년 이혜구·성경린·장사훈의 발의(發意)로 한국국악학회 전신인 국악연구회(國樂硏究會)가 발대되었다. 이어서 제1회 정례 발표회를 가졌다. 1964년에 한국국악학회는 사단법인체로 인가 등록되고 회장에 이혜구, 이사에 성경린·김성태·정호근·장사훈(상임), 감사에 이주환·이상만이 피임되었다. 1972년까지 200여회 연구발표회를 가졌고, 라는 학술지를 2회 발간했다. 또한 100여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10여권의 학술서적 및 악보가 출판되었다. 한국음악사학회(韓國音樂史學會)는 한국 음악사학을 연구하는 학회로서, 새로운 한국음악사 연구를 위해 1988년 대구에서 창립되어 학술지 제 1집을 발간하였다. 현재까지 53권의 학회지를 발간하였고 2004년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가 되었다. 현재 회장은 송방송이다. 한국음악은 크게 한국음악, 한국현대음악, 한국대중음악으로 구분한다. 한국현대음악은 일반적으로 20세기에 수용된 서양음악을 바탕으로 한 현대음악 작곡가와 국악기를 사용하거나 국악의 음악적 요소를 이용하여 만든 현대의 국악인 창작국악을 총칭한다. 서양음악을 바탕으로 한 현대음악은 서양음악의 일반적인 장르와 동일하다. 한국음악사학에서 한국음악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음악의 유래를 따져서 향악·당악·아악으로 나누기도 하고, 그 쓰이는 목적에 따라서 제례악·연례악·민간음악으로 나누기도 하고, 연주형태에 따라 기악·성악으로 나누고, 악기편성법에 따라 합악·삼현육각·세악·병주 같은 말도 쓰인다. 또 서양음악의 분류방법에 따라 관현악곡·중주곡·독주곡·합창곡·독창곡으로 나눌 수도 있고, 종교음악·세속음악으로 나눌 수도 있다. 한국음악의 역사적 분류법은 악곡의 유래와 형식에 의한 구분법이다. 이 구분법 상에서 국악은 크게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뉜다. 중국 송나라에서 유래한 정악으로, 구체적으로는 고려 예종 11년 (1116년)에 수입된 대성아악(大晟雅樂) 을 가리킨다.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널리 쓰였으나, 고려 후기에 쇠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때에 박연이 중심이 되어 아악을 정리하였다. 현재에 남아있는 아악곡은 문묘제례악 하나뿐이다. 중국의 당나라에서 전래된 음악과 더불어 중국 송나라의 사악(詞樂)을 총칭한다. 《경국대전》 등에 보이며, 《고려사》〈악지〉에 40여종의 음악이 소개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당악은 〈보허자〉와 〈낙양춘〉 두 곡뿐이다. 당악은 대체로 黃=C의 음계를 따른다. 아악과 당악을 제외한 한국의 재래 음악과 서역에서 전래된 음악을 총칭한다. 판소리, 민요, 잡가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향악은 대체로 黃=E♭의 음계를 따른다. 현재 남아있는 악곡으로 볼 때, 아악은 한 곡, 당악은 두 곡밖에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의 악곡이 향악에 속하게 되어 분류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또한 이 분류법에서는 민요, 판소리 등의 민속악과 현대의 창작국악을 분류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에는 이러한 분류법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계상의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黃 E♭의 음계를 따르는 곡들을 향악계 음악 으로 부른다. 현대에 가장 많이 쓰이는 분류법은 정악 과 민속악 으로 나누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음악사학계에서 이견도 있다. 범패와 같은 불교음악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가 하면, 민속음악 이라는 말이 원래 예술 음악(art music) 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산조나 판소리와 같은 예술음악의 분류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장르별로 분류하기도 하고, 종교음악을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한 연주되는 방법에 따라 기악곡과 성악곡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분류 방법을 따라 정악과 민속악, 창작 국악으로 구분하기로 한다. 정악은 궁중음악과 민간 상류층에서 연주되어 오던 모든 음악을 가리킨다. 세부적으로 분류하자면 의식 음악(제례악)으로 분류되는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궁중의 연례악, 민간 상류층에서 향유하던 풍류 음악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민속 음악은 정악에 대칭되는 말로, 민요와 판소리, 잡가, 산조, 시나위를 포함한다. 크게는 불교의 종교 음악인 범패도 포함된다. 삼국 시대의 국악에 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계절제와 같은 제천 행사에 관련된 중국 역사서에,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의 상고시대 음악은 각 부족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쓰이는 의식음악(儀式音樂)이었던 것이 옛 중국 문헌에서 단편적으로 보인다.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예(濊)·마한(馬韓)·변한(弁韓) 등 상고시대 부족국가들은 추수가 끝나는 때, 혹은 씨를 뿌릴 때에 일정한 시기를 택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남녀노유(老幼)가 함께 모여 연일 밤낮없이 춤과 노래로 즐겼다고 기록되었다. 이런 제천의식을 부여에서는 영고(迎鼓), 고구려에서는 동맹(東盟), 예에서는 무천(舞天)이라 불렀다. 한편 한국의 서북지방은 중국과 접해 있어서 한대음악(漢代音樂)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그렇지 못한 지역과 다른 특색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음악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중국의 진수(陣壽, 233-297)가 찬한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으로, 여기에 의하면 마한에서는 5월 하종(下種)과 10월의 농공(農功)이 끝났을 때 귀신에게 제를 지내고 군중들이 밤낮없이 쉬지 않고 소리하고 춤을 추며 술을 마셨다. 이 3세기 마한의 굿음악은 아마 오늘날의 별신굿이나 도당굿에서 굿중패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춤추는 요란한 음악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3세기 마한·변한의 아마도 강렬하고도 투박하였던 음악은 저 신라 유적에서 발굴된 흑색의 소박한 토기에 비할 수 있겠다. 중국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변진에 중국의 축과 형상이 비슷한 현악기(絃樂器)가 있었다.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實王)이 가얏고를 만들고 왕산악(王山岳)이 거문고를 만들기 전인 한국 최고(最古)의 이 악기는 고 라고 불리는 가야고의 전신일 것이며 아마 6세기에 가얏고(가야금)가 가야국에서 새로 생긴 후로 자취를 감추고 만 것 같다. 영화(永和) 13년(357년)이란 연대가 표시된 안악 제3호 분(墳)의 벽화는 여러 가지 중국 고대악(古代樂)을 보여준다. 전실(前室)의 한 벽에는 입고(立鼓)와 소(簫)를 각각 연주하는 2인과 노래하는 사람 1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입고·소·가(歌)의 그림은 한(漢)의 전정(殿庭)의 고취(鼓吹)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회랑(廻廊)의 벽에는 대행렬도(大行列圖)가 있는데, 후부의 기마악대(騎馬樂隊, 4인으로 되었다)는 일렬 횡대로 고(鼓)·소(簫)·가(茄)(또는 소각(小角))·요를 주(奏)하고 있는데, 이 기마악대의 음악은 한 대(漢代)의 단소요가를 그린 것 같다. 후실(後室)의 벽에는 세 사람의 악인(樂人)이 앉아서 각각 거문고(또는 쟁(箏))·완함(阮咸)·장적(長笛)으로 춤반주를 하는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후전(後殿)의 곡연(曲宴)을 그린 것 같다. 이 4세기의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입고(立鼓)·소(簫)·가(苛)·요 등의 한대(漢代) 악기는 한강 유역에서 발굴된 초두(醮斗)와 함께 한문화의 특색을 보여주고, 마한, 변한의 악(樂)과는 전혀 다르다. 고구려의 가요로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유리왕의 황조가가 있다. 고구려의 국악사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바보 제 1기는 외래 음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시기이며, 거문고도 이 때에 만들어졌다. 이 때의 음악은 거문고와 같은 향토 악기로 대표된다. 제 2기는 고구려가 중국의 후위(後魏)와 교류를 하기 시작한 4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구분한다. 이 시기에는 공후와 같은 서역의 악기가 들어온 시기이다. 제 3기는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로 구분한다. 이 때의 고구려의 음악은 매우 융성하여, 수나라의 9부기(九部伎) 등에도 포함되었다. 고구려 음악에는 서역음악인 구자악(龜玆樂)이 들어와 고구려에 많은 악기가 쓰인 시기이다. 공후·비파(琵琶)·오현(五絃)·생(笙)·소·피리·요고(腰鼓) 등 많은 악기를 사용하여 당시 백제와 신라의 음악에 비해 매우 발전하였다. 에 의하면 고구려의 왕산악이 거문고 또는 현금(玄琴)을 만들었는데, 그 악기는 진인(晋人, 아마 서진(西晉)이 아니고 동진(317-420년)의 사람)이 고구려에 보내온 중국의 금(琴)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현행 거문고와 같은 악기가 통구(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무용총의 벽화에 그려져 있는데, 다만 6현 대신 4현을 가진 점에서 현행 거문고와 다를 뿐이다. 이 고구려 고분에 그려져 있는 악기가 거문고의 원형이고, 현행 거문고는 그 변형으로 보인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고구려음악은 악사(樂師)가 4인인데, 횡적(橫笛)·군후·막목(莫目, 일종의 관악기)과 무등사(無等師)였다. 즉 고구려의 연향악(宴享樂)은 횡적·거문고·막목(莫目)과같은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그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이었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백제악(百濟樂)도 고구려악과 같이 횡적·군후·막목으로 춤을 반주하였다. 백제가 고구려의 거문고를 차용한 것이 주목된다. 불교가 고구려에는 372년에 북부 중국에서, 그리고 백제에는 그보다 늦게 384년에 남부 중국에서 들어온 것처럼, 외국 악기도 고구려와 백제에 중국 남북조(南北朝) 말기에 각각 달리 들어온 것 같다. 즉 수서(隋書, 622년 찬)의 에 의하면 고구려악은 5현금·쟁·피리·횡취(橫吹)·소·고를 썼고, 백제악은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악에 채용된 오현금과 피리는 서역계의 악기로서 중국의 북조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며, 백제악에 채용된 공후와 지, 특히 지는 남조의 청악(淸樂)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고구려는 북방 중국에서, 백제는 남방 중국에서 각각 악기를 수입하여 양국음악은 달랐다. 특히 고구려악은 북부 중국에서 새로운 세력을 가진 서역 악기를 수입 채용함으로써 풍부해져서 수(隋)의 궁중에서 7부기(七部伎), 그 후 9부기에 열(列)하였고, 계속하여 당(唐)의 궁중에서도 10부기(十部伎) 속에 들었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백제의 가요로는 〈정읍사〉가 있다. 현재 연주되는 악곡 중 〈정읍〉과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백제음악의 자료는 고구려에서 보이는 고분(古墳)의 고구려악벽화(高句麗樂壁畵) 같은 것이 없고 기록이 영세(零細)하다. 고이왕(古爾王) 원년(238년)에 제천지(祭天地) 용고취(用鼓吹)라 하여 고취악(鼓吹樂)이 쓰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이 대방(帶方)에서 사용된 중국계 고취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백제음악도 고구려와 같이 횡적·군후·막목으로 춤을 반주하였다. 백제음악이 고구려의 거문고를 차용한 것이 주목되는데 이 점은 백제음악이 고구려와 같고 신라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南宋)과 북위(北魏)에 소개되었고 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악사(百濟樂師)들이 교대로 일본에 건너가서 음악을 전습(傳習)시켰는데 문헌에 보이는 악인(樂人) 시덕(施德)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 진노(進奴), 대덕(對德) 진시 등 4인은 횡적·군후·막목·무(舞)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백제에는 남조(南朝)음악의 영향이 보인다. 중국 문헌 《수서》의 〈동이전(東夷傳)〉에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과 같은 악기를 쓴 기록이 보인다. 이 악기들을 수의 구부기(九部伎)와 비교하면 강남(江南)의 청악(淸樂-淸商伎)에서 쓰이는 악기편성(樂器編成)과 비슷하다. 백제 사람 미마지(味摩之)는 중국 남부 오나라에서 기악(伎樂)을 배워 일본에 전했다. 수서의 에 기록된 백제악기는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인데 공후·지를 쓴 점에서 수(隋)의 9부기에 나타난 청상기, 즉 청악의 악기와 비슷하다. 고구려음악이 서량악(西凉樂), 즉 북조(北朝)의 음악을 받아들인 것과 백제음악이 청악(淸樂), 즉 남조(南朝)의 음악을 받아들인 것은 대조가 된다. 백제기(百濟伎)의 무인(舞人)은 남부 중국의 피리(皮履, 단화)를 신고 고려기(高麗伎)의 무인은 북부 중국의 오피화(烏皮靴-장화)를 신은 점도 이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오(吳, 남부중국)에서 기악(伎樂)을 배워 가지고 612년에 일본에 전했다. 이 기악의 가면이 일본의 동대사(東大寺) 등 여러 곳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용모, 특히 높은 코가 서역의 특징을 말해 준다. 이 기악의 내용은 1233년 일본의 《교훈초(敎訓抄)》라는 책에 간단히 소개되었는데 그 구성이 오늘날 한국에 전해 내려오는 산대도감(山臺都監)놀이 및 봉산(鳳山)탈춤과 거의 비슷하다.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가서 가르친 기악(伎樂)은 오(吳), 즉 남부 중국에서 백제로 들어와서 오늘날까지 산대도감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통일 이전의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으로 대표될 수 있다. 가야금은 진흥왕때에 가야의 우륵이 신라에 전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음악으로는 《삼국사기》에 이름만 전하는 가야금 12곡이 있다. 진흥왕 13년에는 계고, 법지, 만덕이 우륵에게서 각기 가야금, 노래, 춤을 배웠다고 한다. 우륵이 가얏고를 신라에 가져오기 전 내해왕(奈解王, 196-229) 때 물계자(勿稽子)가 고 를 쳤고 자비왕(慈悲王, 458-479) 때 백결 선생(百結 先生)이 고 로 방아소리를 내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신라음악은 일찍부터 고 (가야금)가 대표적인 악기이다. 에 신라음악은 고(琴) 와 춤(舞)과 노래(歌)로 편성되었다 하였고 에도 신라음악에는 고 와 춤만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신라음악은 관악기와 타악기가 보이지 않고 오직 현악기 한 가지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데, 이 점은 횡적(橫笛)·거문고·막목(莫目)으로 편성된 고구려 및 백제음악과는 다르게 단순한 편성으로 되었다. 이것은 마치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古墳)의 구조가 같은데 신라의 그것만이 양자와 판이하게 다른 것과 상통한다. 진흥왕(眞興王, 540-576) 때는 우륵이 가야국으로부터 가얏고 를 가지고 와서 신라에 퍼뜨렸는데 이 뒤부터 신라의 고 는 가야국의 고 즉 가얏고 로 대치된 것 같다. 우륵은 대내마(大奈麻)인 주지(注知·法知)·계고(階古)·대사(大舍)인 만덕(萬德)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가야국에서 만든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 등 12곡을 전수했다. 세 사람은 이 12곡이 아정(雅正)치 못하다 하여 5곡으로 줄이고 바로잡아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우륵의 12곡은 일부가 잡희(雜戱)이고 나머지는 각군(各郡)의 음악으로 산신제(山神祭)와 같은, 군(郡)마다 베푸는 의식음악(儀式音樂)으로 보인다. 이러한 군악(郡樂)은 악지에 보이는 신라의 음악 20여곡 속에도 보이고 있다. 신라의 종교의식 음악의 하나인 팔관회(八關會)는 고려를 거쳐 이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통일 이후의 신라에서는 향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특히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으로 대표된다.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가 지리산에 들어가 지은 30여 곡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비파음악은 212곡, 대금곡은 324곡, 중금곡은 245곡, 소금곡은 298곡의 이름이 전한다. 또한 당악이 유입된 것도 통일 이후이다. 문무왕 4년에 사람을 보내 당악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각종 유물에서 당악기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음악의 비중이 큼에 따라 재래음악, 즉 향악(鄕樂)에 대조되는 당악(唐樂)·당비파(唐琵琶)·당(唐)피리·당풍(唐風)의 범패(梵唄) 등 당나라에서 새로 수입된 음악 양식이 생기고 황종조(黃鍾調)·월조(越調)·평조(平調)·반섭조(般涉調)와 같은 당음악에서 쓰던 조들이 쓰이게 되었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들어와 융성해지자 범패가 성히 불리고 또 당에서 새로운 범패가 들어오자 신라풍·당풍·당 이전의 고풍(古風) 이렇게 세 가지 범패가 불렸다. 신라의 재래음악은 가야금·춤·노래로 편성되어 악기는 가야금만이 쓰이던 것이 고구려의 거문고와 서역에 기원을 둔 비파가 쓰이고 대금 등 관악기가 도입되어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거문고·비파·대금·중금·소금, 즉 삼현삼죽(三絃三竹)이 쓰이게 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에 보이는 금환(金丸)·월전(月顚) 같은 것들이 모두 서역계 잡희(雜戱)인 것과 같이 서역계 음악의 영향도 받았다. 통일신라시대의 당악과 향악은 후세의 당악과 향악의 기초가 되었다. 신라에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진흥왕때는 음성서 로 불리다 경덕왕때 대악감 으로 고쳤다. 후 혜공왕때 다시 음성서로 바뀌었다. 신라시대의 당악에 관한 문헌이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최치원의 5수에 향악 이란 말이 있는 이상, 당연히 그 대칭인 당악(唐樂)도 벌써 9세기에 있었을 것이다. 또 향비파·향피리의 대칭으로의 당비파·당피리가 있는데, 당비파는 문무왕(文武王) 13년(637)으로 추정되는 계유명(癸酉銘)의 아미타불삼존(阿彌陀佛三尊) 사면(四面) 석상(石像)에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당악에서 사용되는 박(拍)이 신라 향악에까지 차용된 것을 보면, 본래 박을 사용하는 당악도 신라에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 범패(梵唄)에도 당음(唐音)·당풍(唐風)이 있는 이상, 음악에도 당연히 당풍·당악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고려의 당악은 방향(方響)·당비파·쟁·당적·당피리·퉁소·장고·박 같은 것을 사용하였고, 또 한편 앞에 언급한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석상은 비파·쟁·당적·퉁소·생·소·요고를 보여주는데, 이들을 종합 고려하면, 신라의 당악은 방향·당비파·쟁·당적·퉁소·당피리·생·소·요고·박을 썼을 것이다. 참고로 에 의하면 780년(보구(寶龜) 11년) 일본에서 대당악(大唐樂)은 쟁·비파·공후·방향·생·우·필률(대소(大小))·소·척팔(尺八)·횡적·동발자·갈고(鞨鼓)·갈양·요고(腰鼓)·계루·도고(倒鼓)·계고(楷鼓)·고악고(古樂鼓)·대고(大鼓)·백자(百子:박(拍))를 사용하여 신라시대의 당악에 참고가 된다. 당피리는 그 최저음이 황종(黃鍾, 다)이고 향피리의 최저음보다 4도 높기 때문에, 그런 높은 음역(音域)의 악기로 연주되는 당악은 향악에 비하여 청(淸)하다고 하겠다. 또 한어(漢語)의 가사를 가진 음악이 대개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이고, 박판(拍板)은 규칙적인 길이의 구절을 떼어 주기 때문에, 당악은 향악같이 복잡하지 않고 정아하다고 하겠다. 당악이 새로 들어온 이후로(12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 때로 추정), 재래음악은 그것이 서역계악(西域系樂)이건 한국의 악이건 모두 향악이라고 불렸다(최치원의 5수의 예와 같이). 그것은 마치, 서양음악이 새로 밀려 들어온 후로 재래음악을 중국계의 음악이건 한국의 음악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국악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당악이 들어온 이후로 당악은 향악과 대(對)를 이루고, 각각 좌방악(左方樂)과 우방악(右方樂)이라고도 칭해졌고, 당악은 서(西)에, 향악은 동(東)에 위치하여 당악과 향악이 엇갈려 연주되는 풍습이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5수(首) 중에서 4수가 향악이 아나라 실은 서역계(西域系, 주로 산악(散樂)임을 알 수 있다. 산예(사자기(獅子伎)) 는 분명히 서량 또는 구자계(龜玆系)의 것이다. 속독(束毒)은 남면(藍面)의 이인간(異人間)이 북장단에 맞추어 남분(南奔) 북약(北躍)하는 춤인데, 이 속독과 일본에 전해진 고려(고구려)악의 하나인 소토쿠(宿德)는 모두 중앙아시아의 소그디아나(Sogdiana)를 한자로 표시한 것이다. 월전(月顚)은 군유(群儒)가 술잔을 서로 다투어 마시는 우스운 내용의 것으로, 그 월전이란 문자는 중앙아시아의 호탄(kohtan)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대면(大面)은 황금면색(黃金面色)의 가면을 쓴 사람이 손에 주편(珠鞭)을 쥐고 귀신을 쫓는 내용의 것으로, 이 대면은 분명히 북제(北齊, 550-577)의 대면(代面)이다. 요컨대 북을 요란하게 치는 서역계 악(樂)이 저·북을 쓰지 않고 가야금 하나 또는 거문고·횡적·막목(莫目) 세 가지를 쓰는 삼국악(三國樂)과 다른 것은 마치 남분(南奔)·북약(北躍)하는 서역계의 건무(健舞)와 중국의 한아(閑雅)한 춤만큼이 다르고, 삼국시대의 그 목이 길고 몸이 날씬한 금동불상(金銅佛像)과 통일신라시대의 목이 짧고 몸이 두툼한 불상만큼이 다르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가야금 한 가지 악기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 예전 신라악 이외에 고구려악이나 백제악도 존속하였다. 고려 때와 조선조 때까지도 백제악인 방등산(方等山)·정읍(井邑)이 연주되었고, 고구려악인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명주(溟洲)가 에 전하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에 의하면, 신라악은 삼현(三絃)·현금(玄琴)·가야금(伽倻琴)·향비파(鄕琵琶)), 삼죽(三竹, 대금·중금·소금(小芩))·박판(拍板)·대고(大鼓)·가무(歌舞)였는데, 신라악은 고구려의 현금·서역의 5현비파(향비파)·당의 박판을 여기저기서 섭취한 것이었다. 그런 신라의 관현반주는 가야금 하나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던 예전의 신라악에 비하면 큰 발전이라고 하겠다. 한편 박판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서, 또 현금 곡명(玄琴曲名)의 춘조곡(春朝曲)·추석곡(秋夕曲)·유곡청성곡(幽曲淸聲曲)·입실상곡(入實相曲) 등으로 미루어서, 그런 신라악은 종전 것과 달리 덜 복잡하고 더 아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하겠다. 거문고는 고구려에서 쓰던 악기로 백제에서도 쓰였으며, 신라에서는 언제부터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효소왕(孝昭王, 643-702) 때 천존고(天尊庫)에 보존되었다는 것이 최고기록이고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때에는 민간에 퍼지게 되었는데 그 경위는 신라인 사찬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현금곡(玄琴曲) 30곡을 지어 그것이 거문고의 조종(祖宗)같이 되었다. 그의 금도(琴道)가 명득(命得)을 거쳐 귀금(貴金)에 이르러 단절된 뻔하였다가 다시 안장(安長)과 그의 아들 극종(克宗)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극종은 7곡을 지었다. 극종 이후에는 거문고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옥보고가 지은 30곡의 곡명은 에 전한다. 신라의 범패는 태화(太和) 4년(830)에 당에서 돌아온 진감대사(眞鑑大師)에 의하여 유전(流傳)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17년 늦게 당에서 귀국한 일본승(日本僧) 자각대사(慈覺大師)가 저술한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에 의하면 중국 산동반도(山東半島) 등주현(登州縣)의 적산원(赤山院)이라는 신라인 절에서 본 강경의식(講經儀式)·일일강의식(一日講儀式)·송경의식(誦經儀式)에 신라풍(新羅風)·당풍(唐風)·당 이전의 고풍(古風) 등 세 가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진감대사가 유전한 범패는 당의 신풍(新風)이라 하겠다. 팔관회(八關會)는 하늘을 섬기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고풍(古風)으로 선랑(仙郞)·국선(國仙)·선가(仙家)가 주재하였다. 이 팔관회 의식에서는 국선이 가무를 아뢰어 용천(龍天)을 환열(歡悅)시켜 복을 비는 제도였기 때문에 백희가무(百戱歌舞)를 성히 하였다. 신라 진흥왕 때에 생겨서 숭상받은 국선 또는 화랑(花郞)은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 때에도 성행하다가 고려 예종 때부터 점점 쇠퇴하였다. 발해는 민간 음악과 궁중 음악이 발전함에 따라 태상시(太常寺)를 설치하고 발해의 음악,무영,제사에 관한 것은 본래 의부(義部)에서 맡아 보는 업무였으나 발해 음악과 무용이 발전하는 수요에 따라 새로 독립적인 기구인 "태상시"를 설치하고 예악과 제사를 관리하였다. 발해교방은 발해악과 발해무를 직접 관리하는 전업기구이다. 고려를 창건한 태조(太祖)는 신라의 고풍을 많이 답습하였다. 화랑 또는 선랑(仙郞)이 천령(天靈)과 오악(五嶽)·명산대천(名山大川)·용신(龍神)·신기(神抵)에 국가 태평을 비는 팔관회(八關會)와 불교의식인 연등회(燃燈會)가 그 일례이다. 이 두 가지 의식은 향악과 당악뿐만 아니라 백희(百戱)까지도 포괄한 대규모 의식으로, 그 음악들도 의식과 함께 신라의 것을 답습하였다. 신라풍의 사뇌가(詞腦歌)는 균여(均如, 917-973)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그러나 예종, 의종(毅宗)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유풍(화랑 따위)이 많이 쇠퇴하였다. 예종 때에는 송나라로부터 아악이 도입되었고, 또 송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신라 때 들어온 당의 음악을 밀어냈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향악은 고려에서도 계승되었고 새로 많은 향악곡이 생겨 그 일부는 조선 때까지 전승되었다. 명산대천·용신을 가무로 희열시켜 복을 비는 제도로 신라 국선의 유풍(遺風)이다. 연등회와 더불어 고려의 큰 국가의식의 하나로 궁중의 구정(毬庭)에 다섯길이나 되는 무대를 세우고 사선악부(四仙樂部) 및 용·봉·상(象)·마(馬)·차(車)·선(船)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춤을 비롯하여 가무백희가 행해졌다. 이 팔관회는 고려 초기에 극성기를 이루었고, 그 후 쇠퇴하기는 했으나 고려 말기까지 계속하다가 근세조선에 와서 철폐되었다. 송의 음악이 고려에 들어와 신라시대에 들어온 당(唐)의 음악을 밀어냈다. 악지(樂志)에 실린 당악(唐樂)이란 것은 사실 전부 송의 사악이다. 사(詞)라는 것은 장단구(長短句)라고도 칭하듯, 시의 매행(每行)이 균일적으로 칠언(七言)으로 되어 있지 않고, 7언·5언·7언·6언과 같이 길고 짧다. 그러나 그 불규칙적인 길이의 가사에 붙여진 음악의 길이만큼은 규칙적으로 8행(井間譜로)이다. 의 악지 에 실린 사(詞) 41수 중에서 8수가 중국시인 유영(柳永, 11세기)의 작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판명으로 사가 대개 11세기 이후에 고려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사(詞)의 하나인 낙양춘(洛陽春)의 가사가 악지에 실려 있고,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작으로 판명되었는데, 4행 1구(尾前詞와 尾後詞)로 되었다. 또 한편 낙양춘의 악보는 18세기의 에 실려 있는데, 사(詞) 1행(5자-7자)이 규칙적으로 정간보의 8행에 들어 있고, 그 정간보 8행은 제4행과 제8행에 들어가는 박(拍)에 의하여 둘로 나뉜다. 위에서 ○표는 그 선행가사가 ○표가 달리지 않은 가사의 2배의 시가(時價)를 가진 것을 표시한다. 이 악보에 의하면, 중국의 사악(詞樂)은 대개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 syllabic)이고 간주곡(間奏曲)과 후주곡(後奏曲)을 갖지 않은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고려조의 향악은 의 악지 에 29곡에 보여주는데, 그 중 오관산(五冠山)·거사련(居士戀)·처용(處容)·사리화(沙里花)·장암(長岩)·제위보(濟危寶)·정과정(鄭瓜亭)의 7곡은 이제현(李齊賢, 1288-1367)에 의하여 한문으로 역시(譯詩)되어 있어 그것들이 13세기 이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의 시가(詩歌)는 한시가 4행임에 비하여 3행 또는 5행과 같이 기수(奇數)의 행을 가진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그 1행에 두 박이 들어간다. 3행(行)의 예 귀호곡(歸乎曲-가시리) 가시리 가시리 /이꼬나난 바리고 가시리 /이꼬나난 위 중즐가 /大平盛代 5행(行)의 예 청산별곡(靑山別曲) 살어리 살어리 /라ㅅ다 청산의 살어리 /라ㅅ다 멀위랑 다래랑 /따 먹고 창신의 살어리랏다/얄리얄리 얄라 /얄라성얄라 와 에 의하면, 향악은 대부분 일자수음식(一字數音式)이어서(예 西京別曲) 중국음악의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의 아정(雅正)한 것에 비하여 염려(艶麗)한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또 향악이 중여음(中餘音, 間奏)을 가진 점에서도 중국음악과 다르다. 고려조의 향악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다. 그리고 관현 반주를 가진 노래는 간주와 후주 같은 발달한 형식으로 되었고, 또 일자수음식이라서 염려(艶麗)하여 이런 점에서 고려청자의 화려한 것에 비할 수 있겠다. 악지에 그 명칭이 적힌 많은 향악곡은 대부분 악보는 물론 사설도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그 일부는 조선 때까지 전승되어 악보와 사설이 남은 것이 있다. 에 명칭이 있는 것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동동(動動)·서경별곡(西京別曲)·자하동(紫霞洞)·한림별곡(翰林別曲)·풍입송(風入松)·정과정(鄭瓜亭) 등이다. 이 밖에 고려향악곡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악보가 전하는 것은 사모곡(思母曲)·쌍화곡(雙花曲)·정석가(鄭石歌)·청산별곡(靑山別曲)·유구곡(維鳩曲)·가시리(귀호곡, 歸乎曲)·상저가(相杵歌)·야심사(夜深詞)·만전춘(滿殿春)·정읍(井邑)·이상곡(履想曲)·봉황음(鳳凰吟)·북전(北殿) 등의 악보가 전한다. 이들 악곡은 오늘날 거의 전승되지 못하고 끊어졌으나 풍입송·서경별곡·만전춘은 조선의 제례악에 편곡되어 이 악곡만은 지금도 연주되고 있다. 정재(呈才)란 궁중무용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고려 때에 쓰던 정재에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향악정재와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정재가 있는데, 그 제도가 다르다. 당악정재에는 포구락(抛毬樂)·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연화대(蓮花臺) 등이 있는데, 포구락을 예로 들면 죽간자(竹竿子-정재에 쓰이는 도구로 긴 나무 막대기의 한쪽 끝에 가는 대 100개를 꽂았다)를 든 여기(女妓) 2인이 관현반주(管絃伴奏) 전인자(前引子)에 맞추어 입장하여 서면, 동시에 음악이 그치고 죽간자가 무반주로 한문으로 된 구호를 부른다. 다음에는 무기(舞妓)들이 관현반주로 춤추며 들어와서 서면, 음악이 그치고 무기들은 무반주로 한문의 창사(唱詞)를 부른다. 이어서 관현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나서 용알을 구문(毬門)의 구멍으로 던져넣는다. 용알 던지기가 끝나면 죽간자 2인이 관현반주(後引子)에 맞추어 나와 무반주로 구호 를 부르고 나가고 뒤이어서 무기가 나간다. 이같이 당악정재는 죽간자의 입퇴장과 음악(전인자와 후인자)과 구호 및 무기들의 무반주의 창사를 그 특징으로 한다. 향악정재는 동동(動動, 牙拍)·무애무(無▩舞)·왕모대무(王母隊舞) 등이 있는데 동동을 예로 들면 무기 2인이 들어와서 엎드려 있으면서 음악에 맞추어 동동의 첫구, 즉 덕과 복을 드리는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일어나서 관현악과 제기(諸妓)의 합창에 맞추어서 춤을 춘다. 춤이 끝나면 무기는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퇴장한다. 이같이 향악정재는 당악정재에 보이는 죽간자의 인자(引子)와 구호가 없고 창사처럼 무반주로 무기가 노래하지 않고, 신라시대의 무척(舞尺)·금척(琴尺)·가척(歌尺)과 같이 고려시대의 향악정재도 무기·관현반주·여성합창(女聲合唱)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세종, 세조 때에는 아악이 박연에 의해서 정리되고,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악기를 직접 만들어 썼으며, 정간보, 오음악보등에 의한 기보법이 창안되고, 아악보가 편찬되었다. 세종대왕은 정대업, 보태평 등을 직접 작곡하였다. 인조 21년에는 사직과 문묘제례악이 정해지고, 인조 25년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으며, 광해군, 효종, 영조 때, 악학궤범을 복간하고 악기를 다시 만들었다. 종묘제례악과 삼현 육각에 의한 음악이 사용되었다. 또한 가곡, 가사, 시조 등의 성악곡이 널리 불렸다. 특히 영조 이후, 일반 백성들에게서 판소리, 산조, 잡가 등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숙종 때의 판소리 체계화는 큰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운 뒤 억불양유(抑佛揚儒) 정책에 따라 예악(禮樂)을 국시(國是)로 삼았다. 정도전 등은 건국과 더불어 많은 조선의 창업송가(創業頌歌)를 지었으나, 악곡은 고려조의 음악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차츰 제도가 정비되고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 전조(前朝)의 음악을 많이 개산(改刪)하였다. 세종은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비하고 율관과 악기를 제작하였고, 향악과 고취악(鼓吹樂)에 기하여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을 만들고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 등을 제정하였으며,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를 만들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실었다. 세조는 부왕(父王)의 음악사업을 이어받아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악에 쓰게 하여 오늘날까지 전하게 하였으며, 정간보를 개량하였고, 오음약보(五音略譜)를 내어 《세조실록》 악보에 실었다. 조선 전기의 음악정비 제작사업은 성종 때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성현(成俔)이 찬술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출간되어 한국 최초로 독립한 종합 악서(樂書)가 나왔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과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에 조선 초기까지 전하던 삼국시대 및 고려음악은 소멸되고 당악은 쇠퇴하여 향악화되었으며 새로운 향악곡이 생겨 조선 후기 음악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 전반기에 세종은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에 자극되어, 악리(樂理)를 연구하였고 박연에게 율관(律管)을 제작시켰고, 유량악보를 발명하였고, 성종 때 성현은 《악학궤범》 같은 독립한 악서를 찬술하여 음악의 학문면에서 큰 발전을 보았다. 또 한편 음악 예술면에서는 유교의 예악(禮樂) 사상의 영향을 받아 아악이 중요시되어 아악서(雅樂署)가 독립하였고 당악과 향악의 남녀상열지사도 개산(改刪)되었고, 그 때 특히 향악은 유식한 한문의 가사를 많이 써서 그런 가사에 붙여진 음악도 점차 당악같이 담담해져 조선 전기의 향악은 조선의 백자에 비할 수 있게 되었다. 태조 2년에 정도전이 〈납씨가(納氏歌)〉, 〈궁수분곡(窮獸奔曲)〉, 〈정동방곡(靖東方曲)〉을 지어 올렸고,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 등 신악을 선찬하고 4년에는 하윤(河崙)이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등 악장을 지어 올렸다. 〈납씨가〉는 고려의 〈청산별곡〉을, 〈정동방곡〉은 〈서경별곡〉의 곡에 가사만 새로 얹은 것이다. 이와 같은 근세조선 창업송가의 제작은 세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 때의 음악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서 전조의 음악을 많이 개산하였다. 박연·맹사성(孟思誠) 등 음악이론가들을 동원하여 아악을 정비하고 향악을 창작하고 악기를 제작하며 악보를 창안 편찬하는 등 근세조선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당악 유교 특히 중국의 예악사상(禮樂思想)은 아악의 완성을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악을 재검토시켰다. 즉, 송의 사(詞)의 대부분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해서 비판되었고 예외로 〈수룡음(水龍吟)〉, 〈하운봉(夏雲峰)〉, 〈억취소(憶吹簫)〉의 가사만이 초정(稍正)하다 해서 그 곡은 그대로 쓰고 원가사(元歌詞)를 버리고 《시경(詩經)》의 가사를 차용하였다. 이런 가사의 개변은 태종·세종·중종 때에 자주 발견된다. 예를 들면 중강조(中腔調)에다 《시경》의 녹명(鹿鳴)의 가사를 붙이는 따위이다. 향악 조선 전기는 고려조의 음악을 습용(襲用)하였거나, 예를 들면 의 , , 과 의 , 또는 고려조의 음악에다가 신제가사(新製歌詞)를 붙이고 곡명을 바꾸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의 원곡은 , 의 원곡은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종 때에 , , , , , 이 제정되고 에까지 그 악보가 기록된 사실이다. 보태평과 정대업 《보태평》은 선왕의 문덕(文德)을, 《정대업》은 그 무공을 각각 한문으로 칭송한 것이고 음악은 고취악에 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정대업》 중의 화태(和泰)와 순응(順應)의 음악은 각각 고려 때의 〈서경별곡〉과 〈만전춘〉의 곡에서 차용하였다. 《보태평》 11곡은 모두 임종궁(林鍾宮)의 평조(平調)이고, 《정대업》 15곡은 모두 남려궁(南呂宮)의 계면조(界面調)이다. 원래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 때 연례(宴禮)에 연주되었는데, 세조 9년(1464)에 이르러 향악이 아악 대신에 종묘제향악으로 채용되었다. 이에 따라서 짧은 제향(祭享) 절차에 맞게 개혁된 종묘악이 비록 후세에 그 리듬은 변개되었지만 조선 말까지 약 500년간 계속되었다. 발상 〈발상〉 11곡은 가사가 한문으로 되었고 그 음악도 당악같이 6음계로 되었는데, 이 고취곡(鼓吹曲)은 세조 때 폐용되었는지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보이지 않는다. 용비어천가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되었고, 1445년에는 조종(祖宗)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을 가영(歌詠)하고 후손에게 경천근민(敬天勤民)을 명심케 하는 125장을 한글로 지었고, 과 이라고 칭하였다. 에는 과 이 각각 125장의 악보를 모두 기재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중에서 3기(三機)의 첫 16장과 졸장(卒章)만 연주하고, 의 첫 8장과 졸장만 연주하였다. 의 1·2기(機)의 경우에는 첫 3장만, 3기의 경우에는 첫 16장만 기보(記譜)되었고, 의 경우도 첫 8장만 기보되었다. 여민락 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125장 중에서 첫 4장과 종장만을 떼어서 가사를 중국계의 고취곡에 붙여서, 그것을 이라고 칭하였다. 과 은 오늘날 연주되지 않고, 만은 비록 그 가사를 부르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관현합주로 연주된다. (林鍾宮 平調)과 (林鍾宮 界面調)은 의 속된 가사를 묘정정악(廟廷正樂)의 것으로 개찬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악보 〈보대평〉, 〈정대업〉, 〈발상〉,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봉황음〉, 〈만전춘〉 등 세종 때 음악이 《세종실록》 제 136권~제147권에 악보를 남기고 있는데, 그 악보는 1행 32정간(井間)으로 되었고, 그 정간은 시간 단위를 표시하여, 그것이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최고(最古)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고, 서양의 오선지보다 약 2백년 늦다. 그 1행 32정간이 세조에 의하여 1행 16정간 2행으로 개서(改書)되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16정간이 대부분 20정간으로 변하여진 채로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 세종의 정간보는 기보법 사상 획기적인 것이다. 《세종실록》 악보에는 〈회례악〉, 〈제례악〉, 〈보태평〉, 〈정대업〉, 〈발상〉, 〈봉래의〉, 〈전인자〉,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후인자〉, 〈봉황음〉, 〈만전춘〉 기타 종묘사직 등의 제례악이 실려 있다. 세조실록의 악보 《세조실록》 48권~49권에 실린 악보이다. 《세종실록》 악보는 1행 32정간이나 《세조실록》 악보는 1행 16정간으로 축소되었고, 3·2·3·3·2·3정간으로 갈라 6대강(六大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16정간 6대강법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종실록》은 율자보로 되었으나 《세조실록》은 오음약보(五音略譜)로 되었고 당악에서 쓰던 공척보(工尺譜)를 병용하였다. 《세조실록》 악보에는 〈보태평〉, 〈정대업〉 등 종묘제례악과 원구제악이 실려 있다. 안상금보 선조 5년 안상이 편찬한 악보로 일명 라 한다. 편장 안상이 명종 16년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어 악사 홍선종(洪善終)·악공 허억봉(許億鳳)·이무금(李無金)과 함께 이 악보를 편찬하고 선조 5년에 책을 낸 것이다. 거문고의 오음약보·합자보 및 육보(肉譜)와 노래와 사설을 적고 피리의 오음약보 및 육보·장고악보를 곁들여서 총보(總譜)를 만들었다. 이 악보에는 , , , 같은 고가요(古歌謠)가 실렸는데, 조선 후기에 크게 성했던 가곡의 실마리가 되는 , 의 최고 악보로서 조선 전기음악과 후기음악을 비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 전형필(全瑩弼) 소장으로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시용향악보 임진란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를 알 수 없는 고판본(古版本) 악보. 6·25전쟁 후에 세상에 알려졌다. 악보와 같이 6대강 16정간에 오음약보로 되었다. 4행을 한 묶음으로 하여 제1행은 오음약보, 제2행은 장고의 악보, 제3행은 박(拍)의 악보, 제4행은 악곡의 사설을 적었다. 이 악보에는 , , , 등 많은 고려가요와 등 조선 초기의 악가와 , , , 등 10여곡의 무속가요가 있어서 고려 향악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악보의 발견으로 20여곡의 고가요가 새로 알려진 것이다. 원본은 이겸로(李謙魯)가 소장하고 있고 1954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악학궤범 조선 성종 때(1493) 성현이 주가 되어 찬술한 9권으로 된 종합악서이다. 이 악서는 제1권에 악(樂)의 원리, 제2권에 악기진설도설(樂器陳設圖說), 제3, 4, 5권에 정재도설(呈才圖說), 제6, 7권에 악기도설(樂器圖說), 제8, 9권에 의물(儀物), 관복도설(冠服圖說)을 자세히 기술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독립된 악서(樂書)이다. 물론 그 이전에 박연이 악서 찬집을 제의하였지만 실현치 못한 것 같고, 128권에 악기도설과 악현도가 일부 게재되었으나 같이 전반적인 것이 못된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악사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악기가 파괴되었어도, 잿더미에서 구출된 으로 인하여 악기를 제조하고, 음악의 고제(古制)를 복구할 수 있었다. 고악 복구에 불가결한 은 초간 이후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영조(英祖), 1933년, 1968년 등 여러 번 복각(複刻)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한국의 문화는 큰 시련을 당하여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의 음악도 이 때를 계기로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전기에 힘써 갖추어 놓았던 아악은 난리통에 흩어졌다. 후에 문물이 바로잡히자 아악을 재건하였으나, 규모는 훨씬 줄어들고 말았다. 조선 전기 음악에 많이 전하던 고려조의 향악과 송의 사악은 대부분 상실되었거나 변질되었다. 당악은 향악화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명맥을 유지한 , 가곡() 같은 악곡은 많은 변주곡을 낳아서 조선 후기의 향악곡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은 방대한 기악 모음곡으로 되었고, 가곡·가사·시조는 많은 종류가 생겼다. 한편 영조 이후에는 서민문화의 대두에 따라 판소리·산조·잡가와 같은 민속음악이 생겨 민간에 유포되었다. 조선 후기 음악은 민간음악의 대두와 해학적인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한시(漢詩)에 대가 되는 우리말의 , 에 대가 되는 향토색이 짙은 ,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그림에 대가 되는 단원(檀園) 김홍도 및 혜원(惠園) 신윤복의 풍속도의 특징과도 같다. 당악도 세종 때의 에는 14곡이 기보되었지만, 조선 후기의 에는 겨우 와 2곡밖에 없고, 그 두 곡만이 당악으로 지금도 연주되고 있다. 그 도 에는 1행 16정간으로 기보되었는데, 에 이르러서는 1행 20정간으로 기보되어서, 리듬에서 변화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특히 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원음(元音) 사이에 간음(間音)이 점점 들어가서, 당악인지 향악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 때만 하더라도 당악기는 서쪽에, 향악기는 동쪽에 따로 분리되어서 당악과 향악이 교대로 연주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당악기와 향악기의 합주로 되어 버려, 당악과 향악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 한편 향악도 에 실린 세종 때 된 , , , 은 물론 에 실린 , , , , , , , 등 많은 곡이 조선 후기에는 없어지고, 그 중에서 겨우 , , , , , 이 남았다가, , , 은 조선 후기 늦게 없어져서 지금에 전하지 않고, , , 등만 지금도 연주되는데, 그것도 의 곡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도록 변해 버렸다. 같은 당악이 원음에 간음을 추가하여 향악화한 것과 같이, 또 향악도 당악의 스타일로 접근하였다. 즉 의 혁정(赫整)은 원래 향악이어서, 에서는 1정간(井間), 2정간, 3정간, 5정간같이 불규칙한 시가(時價)의 음으로 되었는데, 에 이르러서는 균일하게 1정간의 음으로 되어, 그 음악은 중국 음악의 스타일에 가까워졌다. 또 , 일명 도 당악의 만큼이나 한음 한음을 느릿느릿한 템포로 연주하면서 향악에 독특한 꾸밈음(裝飾音)과 연음(連音)을 지녀서, 그전의 악보에서는 볼 수 없는 위엄을 새로 갖게 되었다. 이같이 조선 후기의 궁중에서는 향악도 중국 고전악같이 완서하고 위엄있게 연주하도록 정부가 신칙(申飭)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음악이 점점 빨라지는 데다가 가사도 해학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영산회상의 발달 〈영산회상(靈山會相)>은 《대악후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의 노래로 무도에 쓰였다가 후에 《유예지(遊藝志)》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령산(中靈山), 세령산, 가락덜이 같은 본(本) 영산의 빠른 변주곡과 〈영산회상〉의 음악과 관계없는 상현도드리, 하현(下弦), 염불, 타령, 군악(軍樂)이 추가되었고, 나중에는 더 빠른 가벼운 곡으로 계면(界面) 가락도드리, 양청(兩淸), 우조(羽調) 가락도드리가 끝에 달렸다. 이같이 선비들이 즐기는 〈영산회상〉 같은 실내악이 위엄으로 시작하였다가 정악(正樂)을 벗어나서 가벼운 농조(弄調)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곡의 발달 가곡(歌曲)은 조선 전기의 와 안상의 에는 만 보이지만, 임진왜란 후의 에는 외에 그보다 빠른 이 보다 많이 나오고, 이익의 에 의하면, 18세기 당시에 벌써 제일 느린 은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여 없어진 지 오래이고, 그보다 좀 빠른 도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당시에 통용된 것은 빠른 잦은한닢(삭대엽)뿐이었다. 에는 그 잦은한잎보다 더 빠르고, 가사가 해학적인 농(弄), 낙(樂), 편(編)이 끝에 달린다. 가사의 성쇠 가사(歌詞)로 말하면 1728년에 간행된 에 , , , , , , , , , , , , , , , 의 16곡이 보이고 그 중에서 뒤에 있는 6곡을 잃고, 대신 와 2곡을 얻어 모두 12곡이 전창(傳唱)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에 벌써 잡가인 와 가 가사에 섞인 점이다. 시조의 발달 시조(時調)는 가곡인 삭대엽(數大葉)의 가사를 차용하나, 한수를 5장 대신 3장으로 나눈다. 시조의 악보는 서명응(徐命膺)의 와 이규경(李圭景)의 에 보여서, 시조는 영조조(英祖朝)의 이세춘(李世春)에서 나왔다는 말을 수긍케 한다. 후에 시조도 평시조(平時調) 외에 지름시조와 사설시조(辭說時調)를 파생한 것도 잦은한닢의 경우와 비슷하다. 판소리의 대두 이상은 상류층에서 애호된 음악들이고, 서민층에서는 판소리와 산조 같은 전혀 새로운 음악이 생겼다. 판소리는 광대가 부채를 들고 서서 그와 마주 않은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서 같은 긴 이야기를 소리·아니리(白)·발림(科)으로 서술하여 관중을 울리고 웃기는 일종의 극음악(劇音樂)이다. 이 판소리는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가사 200구에 의하여, 늦어도 영조조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송만재(宋晩載)의 에 의하면, 18세기의 판소리에는 , , , , 이외에 , , , , , , 등 12가지가 있었다. 그 중 지금은 먼저 다섯가지만 전해진다(에서처럼). 이 판소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은 신재효(申在孝)의 이다. 가야금 산조의 성행 가야금 산조는 가야금 독주곡으로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순서로 연주되고, 진양조는 우조(羽調)로 시작되어 계면조로 그친다. 이 가야금 산조는 광주(光州)의 아전인 김창조(金昌祖 또는 昌祚, 약 1865-1929)가 만들어냈다고 하며, 그 후 그의 제자 안기옥(安基玉), 한성기(韓成基)에 의하여 보급되었다. 이 기악 독주곡은 마치 판소리같이 감정을 충분히 표출하여 일반에 실감을 주어 애호되었다. 만대엽 만대엽(慢大葉)은 , 등 조선 전기·중기 악보에 나타나는 옛 성악곡으로 과 더불어 가곡의 원류로 추정되는 악곡이다. 사설은 시조시(時調詩)로 되었고 가곡과 같이 5장으로 구분된다. 조선 초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옛 악보에는 장대엽·늦은한닢·진화엽(晋化葉)으로 보이며 에 처음 보이고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대엽 중대엽(中大葉)은 , 등 조선 중기 악보에 나타나는 옛 성악곡으로 조선 중기 에서 파생되어 즉 현존 가곡의 원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설은 시조시로 되었고, 평조·평조계면조·우조·우조계면조로 4조가 있었고 각 조마다 제1·제2·제3의 파생곡이 있었다. 에서 처음 보이고 , 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한닢이라고도 부른다. 북전 북전(北殿)은 에서부터 등 조선 전후기 악보에 보이는 옛 성악곡. 고려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불리던 악곡이었으나 조선 말기에 끊어지고 말았다. 사설은 시조시를 얹어부르는 등 가곡과 비슷한 형태의 성악곡으로 가곡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곡이다. 평조·평조계면조·우조 등 여러 조가 갖추어지기도 했다. 문헌에는 , 으로도 보인다. 혹은 으로도 부른다. 양금신보 《양금신보(梁琴新譜)》는 광해군 2년(1610) 양덕수(梁德壽)가 엮은 거문고 판본 악보이다. 악사 양덕수가 임진란을 피하여 남원에 살았는데 거기서 예로부터 잘 알던 임실 현감 김두남(金斗南)을 만나 그의 권에 의하여 악보를 냈다. 6대강에 오음(五音-宮商角徵羽)·합자보·육보를 같이 적어서 알기 쉽게 엮었다. 내용은 , , , 등 비교적 간략하나 은 4조(四調-平調 羽調 平調界面調 羽調界面調)를 갖춘 점에서 뒤에 없어진 중대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전기 음악과 후기 음악의 경과과정을 보여주는 악보이다. 이겸로(李謙魯) 소장으로,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현금동문유기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는 광해군 12년(1620)에 이득윤(李得胤)이 엮은 거문고 악보. 이득윤이 광해군 때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묻혀 지내며 엮은 것이다. 합자보로 되었고 정간법은 약하였다. 이 악보는 안상·조성(趙晟)·박근(朴謹) 등 여러 사람의 악보를 인용한 점이 특색이다. 이 악보에 실린 악곡은 , , , 으로 와 비슷하다. 이병기가 발견하여 이득윤 자필고본(自筆稿本)임을 밝혀냈다. 현금신증가령 《현금신증가령(玄琴新證假令)》은 숙종 6년(1680) 신성(申晟)이 엮은 거문고 악보. 합자보와 육보를 함께 적었으나 정간법은 약했다. , , , , , 등이 실렸는데, , 은 4조(四調-平調·羽調 平調界面調·羽調界面調)를 갖추었고 각각 제1·2·3곡이 나타나 있어서 과 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혜구 소장이었으나 원본은 흩어지고 청사 등본이 국립국악원에 전한다. 백운암금보 《백운암금보(白雲庵琴譜)》는 숙종 무렵에 엮어진 편자 미상의 거문고와 퉁소악보. 육보에 합자보를 곁들였으나 정간법은 약하였다. 내용은 , , , 단가(短歌)·으로 과 의 비중을 크게 다루었고 보기 드문 단가 및 퉁소의 평조계면조 악보가 실려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이혜구 소장으로, 이 악보에 실린 단가 사설의 작자 백우암이 악보의 편자로 추정되어 라 불리고 있다. 와 과의 사이에 엮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악후보 《대악후보(大樂後譜)》는 영조 35년(1763) 서명응 등이 왕명을 받고 와 로 편찬한 악보. 는 세종조 악보를 모아 엮었다 하며 내용은 당악계 음악이 주가 되고, 는 세조조 악보를 모아 엮었다 하며 내용은 악보의 , 등 제례악보와 그 밖의 많은 , , , 등 고려가요가 주가 되는 시용(時用)의 향악보이다. 전보는 당악계 음악의 귀중한 자료인데 조선 말기에 아깝게 망실되고 후보는 국립국악원에 전하여 향악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기보법은 악보와 같이 6대강 정간법에 오음약보로 되었다. 속악원보 《속악원보(俗樂源譜)》는 영·정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편자 미상의 관찬 판본 악보. 6대강 정간법에 율자보로 되었다. 내용은 종묘·무안왕묘(武安王廟)·경모궁(景慕宮)의 제례악과 , 그리고 거문고·가야금·비파의 종묘제례악보와 방향보(方響譜)로 엮어졌다. 방향보는 9정간법을 썼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전한다. 유예지 《유예지(遊藝志)》는 서유구(徐有渠)의 저서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 가운데에 실린 악보. 대개 정조 무렵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된다. 서유구는 를 엮어 바친 서명응의 손자이다. 거문고 악보는 육보에 합자보를 곁들였고, 양금(洋琴)악보는 율자보(律字譜)로 되었고, 생황(笙簧)악보는 수자보(數字譜)로 적었다. 내용은 , , , , , 등 가곡 악보와 , , , , , 등 악보를 실었고 양금보에 시조악보가 있다. 이 악보는 영조 이전의 음악과 고종 때의 음악을 비교연구하는 데 다리 구실을 하는 귀중한 악보이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구라철사금보 《구라철사금보(歐邏鐵絲琴譜)》는 이규경(李圭景)이 순조 때 엮은 양금 악보. 양금은 조선 중기에 들어온 서양악기로, 이 악기로 된 악보로는 와 의 양금 악보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양금 각현(各絃)과 거리가 먼 아악식인 12율순에 배율(配律)하여 적었기 때문에 해독이 불가능했던 것을 근년에 장사훈에 의하여 배율을 수정하여 이 악보를 해석했다. 내용은 , , 가곡·시조로 엮어졌다. 이병기 소장으로 되었다. 삼죽금보 《삼죽금보(三竹琴譜)》는 고종 때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편자 미상의 악보. 책머리에는 경종 1년에 쓴 이승무(李升懋)서가 얹혀 있으나 악보 내용으로 봐서 고종 때 편찬된 이 악보에 이전부터 전해오는 이승무의 서문을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16정간에 육보로 적혀 있다. , , , , , , , , , , 의 무녀시조(巫女時調) 등을 포함하여 가곡·가사 등 60여 곡이 매우 광범하게 실려 있다. 이 악보는 와 현존 국악과 다리 구실을 하는 귀중한 악보이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었다. 동리 신재효에 의해 판소리가 현재의 형태로 정리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양 음악이 들어오는 등 국악이 많이 쇠퇴한 시기이나 명맥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물밀 듯이 밀려온 서구문화로 한국문화의 변화는 물론 한국인의 음악활동도 많이 변했다.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조선 왕조가 무너지니 왕실의 의식이 없어짐과 때를 같이하여 여기에 쓰이던 수천년 전통 음악이 설 자리를 잃었다. 왕의 거동이나 군대 행진에 쓰이던 취타(吹打)는 양음악 밴드(Band)의 행진곡으로 대치되었다. 사랑(舍廊)마다 울려나오던 풍류소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심신을 닦는 도로서 음악을 연주하던 풍류인들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열중하게 되었다. 광장에서 판소리와 잡희(雜戱)를 즐기던 대중들은 유행가와 신파극(新派劇)에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으로 한국음악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한국 전통음악은 이왕직(李王職) 아악부(雅樂部)·원각사(圓覺社)와 협률사(協律社)에 이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 이은 조선정악원(朝鮮正樂院)·기타 사설전수소(私設傳授所)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갔다. 광무 원년(光武 元年, 1897)에 종래의 장악원(掌樂院)을 교방사(敎坊司)로 개칭하고 제조(提調) 이하 772인의 인원을 두었으며, 융희 원년(隆熙元年, 1907)에는 교방사를 장악과(掌樂課)로 고쳐서 궁내부(宮內部) 예식과(禮式課)에 부속시키고, 국악사장(國樂師長) 이하 305인의 인원을 두고, 김종남(金宗南)이 초대 국악사장이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장악과는 아악대(雅樂隊)로 바뀌고 아악사장 이하 189인의 인원으로 줄었다. 이 중에는 양악군악대에 밀려서 시종원(侍從院) 부속 구 군악수(軍樂手)인 취고수(吹鼓手)들이 일부 편입되어 있었다. 그 뒤 인원을 84명으로 줄이고, 다시 57명으로 줄였다. 1917년에는 아악생 양성소를 두어 제1기생 9명(뒤에 18명)을 모집하여 수업연한을 3년(뒤에 5년)으로 하고 음악실기·음악이론·일반학과를 수업하였다. 1920년 일본 음악학자 다나베(田邊尙雄)의 건의로 1922년에는 당국의 보다 나은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25년에는 아악대에서 아악부(雅樂部)로 명칭을 고치고 당주동(唐珠洞) 청사에서 운니동(雲泥洞)으로 옮겼으며, 광복 직전까지 종묘·문묘 제향에 제례악을 연주하고, 아악생 양성·아악 방송·악서 및 악보 편찬·악기 제작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제1대 국악사장에 김종남, 제2대 국악사장 이남희(李南熙), 제3대 아악사장 함재운(咸在韻), 제4대 국악사장 명완벽(明完璧), 제5대 아악사장 김영제, 제6대 아악사장 함화진(咸和鎭)이 역임하였다. 이왕직 아악부의 전통은 현 국립국악원이 이어받고 있다. 음률을 즐기는 대갓집 사랑에는 율방(律房) 또는 풍류방(風流房)이라 하여 영산회상·가곡 등 정악 계통 음악을 연주 및 전수하는 사설 음악실이 있었다. 이러한 율방의 제도를 확대하여 1905년 9월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가 조직되었다. 정악의 연주도 하였지만 주로 정악의 전수에 주력하였다. 당시 교사진용은 가곡에 하규일(河圭一), 하순일(河順一), 거문고에 김경남(金景南), 가야금에 명완벽(明完璧), 함화진(咸和鎭), 양금에 김상순(金相淳), 생황에 한진구(韓鎭九), 단소에 조동석(趙東錫) 등이 이름난 대가들이었고, 서양음악에는 김인식(金仁湜)이었다. 1911년 조양구락부는 정악원(正樂院)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체하여 조선정악원 혹은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라 부르게 되었다. 1907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국립극장으로, 창극(唱劇)이 주가 되고 잡가(雜歌)와 잡희(雜戱)도 공연한 상설극장이다. 판소리는 원래 고수의 북장단에 소리하던 독창이었으나, 원각사 시절에 약간의 무대장치로 배역마다 여러 인물이 출연하여 연기하며 분창(分唱)하는 창극이 처음 시작된 것이다. · 등이 창극화되고, · 등 신소설(新小說)이 극화되어 상연되었다. 창극에는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이화중선(李花中仙) 등 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출연하였고, 경서도창(京西道唱)과 재담에는 박춘재(朴春載)·문영수(文泳洙) 등이 출연하였다. 원각사는 3년이 못되어 해산되고, 협률사(協律社)·장안사(長安社)·연흥사(延興社)·광월단(光月團) 등이 조직되어 광무대(光武臺)를 중심으로 지방공연에 주력하였다. 원각사가 해산된 뒤에 여러 창극단체들이 명멸하였으나, 일제의 탄압 아래 활동이 저조하여 새로이 통합하여 재기의 길을 모색하였으니, 이것이 1933년에 조직된 조선성악연구회이다. 이 연구회는 후진양성과 창극운동에 주력하였는데, 당시의 진용은 판소리에 송만갑·김창룡·이동백·정정열·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강장원(姜章沅)·김초향(金楚香)·박녹주(朴綠株)·김소희(金素姬) 등이었고, 기악에 강태홍(姜太弘)·박종기(朴鍾基)·신쾌동(申快童) 등이었다. 이 당시 상연된 창극은 ··· 등 판소리를 창극화한 것, ·· 등 고본(古本)을 창극화한 것이었다. 1940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관장 아래 조선악부가 설립되었다. 부장이사에 함화진, 상무이사에 박헌봉(朴憲鳳)이 역임하여 주로 창극과 가무로 지방공연을 하였으나 관헌의 간섭이 심하여 애로가 많았다. 여러 가객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며 판소리조로 연행하는 극의 한 분야. 조선 말기에 원각사(圓覺社)라는 국립극장이 생겨 판소리 가객들이 배역을 분담하여 판소리를 공연했던 데서부터 창극이란 용어가 비롯되며 그 후 각본도 새로 쓰고 곡조도 새로 붙인 창작 창극이 나왔다. 원각사 때에는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 등 수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 등 여러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1907년 경에는 김창환이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였으며, 송만갑 또한 서울에서 협률사를 조직하였다. 이 두 협률사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고, 1910년대 중반에서 단성사·장안사·연흥사와 같은 극장이 생겨 송만갑·이동백·김창룡(金昌龍) 등이 장안사와 연흥사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광주에서도 협률사가 조직되었다. 1920년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여러 창극단이 명멸하다가 1933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발족되어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丁貞烈)·한성준(韓成俊)·오태석(吳太石)·김연수(金演洙)·박녹주(朴錄珠)·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 등 수많은 명창이 활동하였는데, 1935년에 동양극장에서 춘향전 을 공연하여 크게 성공한 이래 · 등 많은 창극을 공연하여 창극의 극성기를 이루었으나 1937년에 해산되었다. 1930년대 말에는 화랑극단·동일창극단이 있었고, 1940년 중반에는 쇠퇴하였다가 1945년에 서울에서 대한국악원이 조직되었고, 1946년에 대한국악원 창극부에서 대춘향전을 공연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947년에는 김연수창극단·임방울(林芳蔚) 일행국극사(國劇社)·국극협회(國劇協會) 등이 있었으며, 김연수창극단에서 · 등을, 국극사에서는 를, 국극협회에서는 , 조선창극단에서는 , 김연수창극단에서 을 공연하였고, 1948년에는 여성 명창들로 구성된 여성 국악동우회가 을 공연하여 인기를 끌자 기성 창극단들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6·25 당시 여성 국극단이 난립하자 1950년 중반에는 창극이 쇠퇴하고 말았다. 1961년 국립극장이 생기고 창극 대춘향전이 공연되어 성공하였고 이어서 국립극장 창극단이 창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극은 판소리 선율로 짜여지며 흔히 국악관현악 반주가 딸린다. 해방 이후 전통음악을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새롭게 전통음악이 정립되고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여 왔다. 휴전 이후, 일부 국민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차차 높아지고 정부의 지원이 있게 되면서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국악사양성소(國樂師養成所)·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국악예술학교·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등 정규 국악교육기관이 차례로 생겨서 신인들을 배출하고 있다. 새로운 학문을 닦은 신인들이 연주·창작·연구·교육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음악은 어느 면에서는 밝은 전망이 보인다. 그러나 한편 판소리·십이가사·십이잡가 같은 특수분야는 신인들의 진출이 많지 않아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요구되고 있다. 한국음악을 연구하는 학술단체로 한국국악학회(韓國國樂學會)가 활약해 왔다. 오늘날에는 국악의 연주에 서양악기를 더하는 등 현대적인 느낌을 살린(크로스 오버) 국악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국악기의 개량 등 창조적인 시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음악을 근대 관현악으로 처음 작곡한 사람은 김기수(金琪洙)이다. 그는 1942년에 연구작품 의 발표를 시작으로 1951년 , 다음해에 , 등을 작곡하였으며, 그 후 10여년 간 20여곡의 작품을 썼는데, 이 시기가 국악 작곡의 초기라 하겠으며 그의 작풍(作風)은 1960년대 이후 출현한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서 신국악 공모를 시작하면서 많은 젊은 작곡가들이 참여하여 입선작 및 연구발표작을 내놓았는데, 이들의 작품은 대개 전통한국음악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 기법과 연주법을 개발해 가면서 새로운 청중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강덕(李康德)은 합주곡 (1962년 작품)을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그는 전통적인 선율과 장단 위에 새로운 양식을 구축했으며 특히 은 그의 역작이다. 황병기(黃秉冀)는 1962년 가곡 를 발표한 이래 독주곡과 합창곡을 많이 썼는데, 그의 특징은 가야금 독주곡에 있다. 황병기는 최초로 가야금 독주곡을 작곡했으며, 그의 작품 속에 흐르는 분위기는 전통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 감각을 살린 시적이고 표제적이며 회화적이다. (1974)는 가야금 음악의 세계성을 시도한 작품이고 초기 작품 (1963)은 빈번히 연주되어 신고전작품처럼 되었다. 이성천(李成天)은 1962년 을 발표한 이후 가장 폭넓고 활발한 작곡활동을 보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아악의 정신적 깊이를 추구한 작품에서 음악적 기교와 섬세한 음감각은 물론 음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애정을 가지고 다루는 데에 있다. 그의 역작은 가야금 독주곡 (1966)와 (1967-1974) 두 개의 모음곡들이다. 그는 에서 최초로 가야금의 양손 사용법과 글리산도의 주법을 도입하여 가야금 음악에 색채적 기법을 더하였고, 불규칙한 복합박자를 사용했다. 또 에서 가야금 12현 중 7현을 안쓰고 두음과 5현으로 제한한 그의 태도는 극도로 자기를 구속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예술가적 고행에 들어선 것이다. 김용진(金溶鎭)은 1962년 합주곡 1번을 발표한 후 2번(1966), 4번(1967), 5번(1969) 등과 많은 중주곡, 독주곡을 썼다. 그의 작품은 전통음악의 깊은 음악적 흐름과 양식적 요소들을 찾아 자신의 감각으로 부각시키려는 데 특징이 있다. 그의 대표작은 역시 합주곡들이다. 조재선(趙在善)은 1963년에 합주곡 다음에 와 이어 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남도음악을 주제로 형식화시킨 작품이다. 이 음악은 1960년대에 가장 빈번히 연주된 합주곡으로 꼽을 수 있으며 1975년작 은 악기편성이나 배치가 동양 철학사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유율(有律)악기가 길게 뻗다가 끝을 밀어올리는 것과 무율(無律)악기의 끊임없는 간타음(間打音) 반복의 단순성에서 우주공간의 무한성을 느끼게 한다. 그 외 이해식(李海植)·이상규(李相奎)·김용만(金容萬)·박일훈(朴一薰) 등 젊은 30대들의 참신한 작품들이 발표되어 한국의 창작음악을 질적·양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있다. 또한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한 중진작가들인 정회갑·김달성·김흥교·이성재·강석희·백병동·박중후·서우석·이건용 등도 좋은 작품을 내놓았다.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은 국립중앙극장에 소속된 창극단, 1961년 정부조직법에 따라 만들어졌다. 1962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 창단공연으로 창극 을 공연했으며. 이 때 함께 공연한 한국국악협회 회원들이 그 주체가 되었다. 그 후로 , , 따위를 정기 공연하면서 창극을 일반인에게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73년부터는 단원들이 전원 유급제가 되고, 1974년에는 국립극장이 남산에 세워지면서 판소리 보급과 창극 공연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 후로는 , 을 비롯해서 앞서 공연한 작품을 반복해서 공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판소리 보급을 위한 강의와 감상회를 열고 있으며, 해외 공연도 시기와 기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하고 있다. 한일합방 후에 문묘제향은 엄수되었고 광복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래 문묘제례악은 장악원(掌樂院) 좌방(左坊)의 전담으로 이른바 악생(樂生)들이 연주하였다. 한일합방 후에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아악수가 파송되어 연주하였으며, 광복 후 현재까지는 국립국악원 악사들이 1년에 두 차례 봄가을 석전일(釋尊日)에 파송되어 제례악과 일무(佾舞)를 아뢰어 왔다. 중국 상고시대 음악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고려 예종 때 들어와서 조선 세종 때 정비된 수천 년의 역사를 갖는 문묘제례악은 동양에서 가장 오랜 음률이다. 집사악사(執事樂士) 1인, 등가(登歌), 헌가(軒架) 집박(執拍) 2인, 차비악수(差備樂手)로 등가 헌가에 각 18인 외에 일무로 8일무, 64인의 무원이 동원된다. 종묘제향은 연5향(年五享)이었다가 한일합방 후 1911년에는 1월, 4월, 7월, 10월의 연4향으로 줄었으나 광복 직전까지 엄수되었다. 음악과 일무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전담하였다. 구성인원은 집사아악사(執事雅樂師) 1인, 집박아악수장(執拍雅樂手長) 2인, 가(歌)아악수장 4인, 차비아악수(差備雅樂手) 2인, 일무아악수(佾舞雅樂手) 36인이었다. 광복 후에 종묘제향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서 주관하여 연2향으로 계속되었으나 제례악은 쓰지 못하고 있다가 1970년부터 국립국악원 국악사들이 파송되어 종묘제향을 아뢰었다. 일무는 8일무를 추고 있다. 근세조선 세종 때 고취악과 향악을 토대로 제작된 종묘제례악은 세조 때 쓰기 시작하여 5백년 역사를 가지고 장악원·이왕직 아악부·국립국악원을 통하여 전해졌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1964년 12월에 지정되었다. 현재 종묘제향은 5월 첫 일요일에 연 1회 봉행하고 있다. 한일합방으로 근세조선 왕조가 무너짐과 동시에 왕실의 제반 연례의식에 쓰이던 음악은 폐용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왕직 아악부에서 연주행동과 아악생 양성을 통하여 광복되기까지 전해 왔고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전해 와서 순음악으로 보존되고 있고 음악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국악고등학교·서울대학교 국악과·이화여대 국악과·한양대학교 국악과와 서울시립 국악 관현악단에서도 순음악으로 연주하고 있다. 예전에 대갓집 사랑에서 성행하던 이른바 율방(律房)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와 이왕직 아악부에서 명맥을 이어왔다.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서울대학교 국악과 등 각급 학교 및 사설학원에서 전해지고 있다. 영산회상에 뛰어났던 명금(名琴) 이병문(李柄文)의 거문고 수법은 이수경(李壽卿)을 거쳐 장사훈(張師勛)으로 전해져 왔고 여민락의 선금(善琴)이었던 함재운(咸在韻)의 거문고 수법은 함화진(咸和鎭), 장인식(張寅湜), 성경린(成慶麟)으로 전해져 왔고, 가곡 반주에 뛰어났던 김경남(金景南)의 거문고 전통은 임석윤이 이어받았으나 그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함제홍(咸濟弘)·최학봉(崔鶴鳳)·정약대(鄭若大)·함재영 등 대금 명인의 전통은 근세 젓대의 명인 김계선(金桂善)을 거쳐 김성진(金星振)이 이어받았다. 김수장(金壽長)·김천택·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의 가곡 전통은 하준권(河俊權)·하순일(河順一)·하규일(河圭一)·이병성(李炳星)·이주환(李株煥)을 거쳐 전효준(田孝準)·홍원기(洪元基)·김월하(金月荷)에게, 하규일·임기준(林基俊) 등의 가사 전통은 이병성·이주환을 거쳐 이양교(李良敎)·정경태(鄭坰兌)가 이어받았다. 송흥록(宋興綠)에서 비롯된 동편제(東便制) 소리는 박만순(朴萬順)·송우룡(宋雨龍)·김세종(金世宗)·정춘풍(鄭春風)·김찬업(金贊業)을 거쳐 박기홍(朴基洪)·전도성(全道成)·이선유(李善有)·유성준(劉成俊)에 이르렀으나 오늘날 순수한 동편제 소리는 끊어졌다. 송흥록의 종손 송만갑(宋萬甲)은 동편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편제 정창업(丁昌業)의 소리제를 도입하고 자기 창제(唱制)를 개발하여 별입하였다. 송만갑의 제자로는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김정문(金正文)·박봉래(朴鳳來)가 있었으나 모두 송만갑 생전에 타계하였고 박녹주(朴綠株)가 김정문의 소리를, 박봉술이 박봉래의 소리를 이어받고 있다. 박유전(朴裕全)에서 비롯된 서편제(西便制) 소리는 이날치(李捺致)·정창업을 거쳐 김채만(金采萬)·김창환(金昌煥)에게 전해졌으나 순수한 서편제 소리는 듣기 어렵다. 김채만의 제자 공창식(孔昌植)의 전통을 임방울(林芳蔚)이 이어받았으나 제자없이 타계했고 한승호(韓承鎬)가 김채만의 소리를 약간 보유하고 있다. 정정렬(丁貞烈)은 정창업의 제자로 서편제 소리를 이어받았으나 전도성·박기홍의 영향으로 동편제 소리를 받아 자기류(自己流)로 별립했다. 정정렬의 소리는 김여란(金如蘭)·김연수(金演洙)·김소희(金素姬)가 전하였다. 박유전의 심청가는 정재근(鄭在根)·정응민(鄭應珉)을 거쳐 정권진(鄭權鎭)이 이어받았다. 염계달(廉季達)·고소관(高素寬)·김성옥(金成玉)에게서 비롯된 중고제 소리는 김정근(金正根)·김석창(金碩昌)을 거쳐 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으로 내려와 강장원(姜章沅)에게 이르렀으나 중고제 소리는 끊어져 버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판소리의 곡목별 예능보유자는 다음과 같다. 춘향가에 김여란(金如蘭)·김소희, 심청가에 정권진(鄭權鎭), 흥보가에 박녹주(朴綠株), 수궁가(守宮歌)에 정광수(丁光秀)·박초월(朴初月), 적벽가(赤壁歌)에 박봉술(朴奉述)·박동진(朴東鎭)·한승호(韓承鎬), 그리고 판소리의 고수로 김명환(金命煥)이 지정되어 있다. 김창조(金昌祖)·한숙구에서 비롯됐다는 가야금 산조(散調)는 여러 유파로 갈라졌다. 한성기(韓成基)류는 김죽파(金竹坡)가, 최망둥류는 함동정월(咸洞庭月)이, 안기옥류는 정남희를 거쳐 김윤덕(金允德)이 계승하였다. 강태홍(姜太弘)류는 원옥화(元玉花)가, 박상근류는 성금연(成錦鳶)이 이어받고, 심상건(沈相健)류는 끊어졌다. 백낙준(白樂俊)에게서 비롯된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申快童)과 박석기(朴錫基)에게 전수됐는데 박석기는 제자 한갑득(韓甲得)에게 전하고 한갑득은 다시 김윤덕에게 전하였다. 신쾌동류는 많은 제자를 길러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1977년 타계하였다. 거문고 산조의 기능보유자로는 한갑득이 지정되고 있다. 피리 산조는 이충선(李忠善), 대금 산조에는 박종기(朴宗基)를 이어받은 한주환(韓周煥)을 거쳐 강백천(姜白川)·편재준·김만식·한범수(韓範洙) 등이 있다. 해금 산조는 지용구(池龍九)를 거쳐 지영희(池映熙)가 이어받고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까지 되었으나 지영희의 미주 이민으로 해제가 되었다. 추교신(秋敎信)·조기준(曺基俊)·박춘경(朴春景)의 경기잡가 소리는 박춘재(朴春載)·임기준(林基俊)을 거쳐 이창배(李昌培)·정득만(鄭得晩)·김순태(金順泰) 등이 이어받고 있다. 여악(女樂)으로는 일찍이 최정식(崔貞植)에게 사사한 안비취(安翡翠), 주수봉(朱壽奉)에게 사사한 묵계월(墨桂月), 그리고 이은주(李銀株) 3인이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경기잡가(민요)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각각 전수 장학생을 지도하였다. 한편 서도잡가 소리는 명창 장학선(張鶴仙)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타계한 뒤 김정연(金正淵)·오복녀(吳福女) 2인이 승계하여 또한 전수 장학생을 가르치었다.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사직제례악 경모궁 제례악 여민락 보허자 낙양춘 정읍 정동방곡 유황곡 취타 대취타 영산회상 자진한잎 가곡 가사 시조 아악 산조 시나위 풍물놀이 민요 잡가 판소리 무악 범패 한국현대음악은 일반적으로 1900년대부터 서양음악교육을 받고 서양음악의 악기, 양식, 음악어법 등을 사용한 한국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과, 1900년대부터의 현대적인 국악 작곡가로 나뉜다. 서양음악은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과 궁중 서양인 작곡가들 및 군악대를 통해 수용되었다.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로는 김성태, 윤이상, 강석희, 박영희, 진은숙 등이 있다. 한류 (문화) 국립국악원 한국국악협회 민족음악원 한국 무용 판소리 악학궤범 장단 한국 전통 악기 세계의 음악 국립 국악원 한국문화예술 진흥원 국악에 관한 짧은 정보 |
프로타고라스 (, Protagoras, 기원전 490년경/485년 - 기원전 415년/410년)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소피스트이다. F.C.S. 실러는 프로타고라스를 프래그머틱한 휴머니즘의 시조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프로타고라스의 출생과 사망 연대에 관해서는 서류상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기원전 5세기 초에 고대 그리스의 북부 지방 트라키아의 압데라에서 탄생하였으며 유명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향 출신이다. 그의 성장과 교육 과정에 대해서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후의 활동과 사상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당시에 배울 수 있는 모든 분야(문법, 수사학, 수학, 고전문학 등등)를 두루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라는 이름아래 철학 및 문명사에서 처음으로 손꼽히는 사상가, 교육자, 정치가로 손꼽히며, 그가 주장한 교육의 목적과 방법은 플라톤이 쓴 대화록 프로타고라스에서 비판적으로 토론되었으며 그리고 그의 철학 사상의 골자를 이루는 주관주의 역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아 파르메니데스에 반대하여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것은, 인간은 인식하기를 제각각 인식하여 사물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인간이 가지게 되는 지식은 인간의 인식에 기초하는데, 이 인식은 또한 인간의 감각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인간의 감각 기관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각각 다르므로 지식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는 상대주의적 진리론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그는 "약한 언론을 강한 언론으로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개인의 감각(경험)을 거듭 쌓음으로써 현명한 정도에 우열이 있으므로 공공 단체는 그 우수한 것에 인도되지 않으면 안 되며, 개인은 감각(자연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은 공공적으로 뛰어난 지식을 지니도록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궤변과 관련하여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신의 논리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던 프로타고라스는, 어느날, 한 청년으로부터 그의 논법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때 청년이 “돈이 없어도 논법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그것은 너에게 달려있다”고 하며, “공부가 끝난 뒤, 치른 첫 재판에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수업료를 외상으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청년은 그의 배려로 수업을 마쳤으나, 청년은 어떤 재판도 치르지 않고 놀기만 했다.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수업료를 받기 위해 제자를 고소하고는, 재판정에서 청년에게 “어차피 너는 수업료를 물게 되어 있다. 재판에서 이기면 나와의 계약으로, 지면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수업료를 물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오히려 스승에게 “저는 수업료를 물 필요가 없습니다. 이기면 수업료를 안 내도 된다는 판결로, 지면 스승님과의 계약에 따라 물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하였고, 이로 인해, 프로타고라스는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는 그의 논법이 서로 다른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이야기이다. 분류:기원전 5세기 태어남 분류:기원전 5세기 죽음 분류: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분류: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분류:고대 아테네의 수사학자 분류:그리스의 불가지론자 분류:형이상학자 분류:회의주의자 분류:인식론 학자 분류:소피스트 분류:동마케도니아 트라키주 출신 분류:이오니아 분류: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5세기 철학자 |
유화 (油畫 또는 유채화 (油彩畵)는 서양미술의 대표적 형태 중 하나로, 기름으로 갠 물감(안료)을 사용하여 그리는 서양화의 한 기법이다. 유화의 유래는 이미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당시에 그려진 그림들, 특히 벽화에서 그 원시적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중세시대에는 가톨릭교회의 장식 그림을 그리는 데 유화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15세기에는 그 기법이나 재료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16세기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유화는 비로소 서양미술의 중요그림 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재료적 측면에서 볼 때 유화는 이미 그 낱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러 종류의 기름에 색소(피그멘트)를 섞어 갈아서 얻은 유화색채와 이 색채를 칠할 수 있는 마로 짠 화포(캔버스), 나무 판 혹은 마분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유화는 또한 유화색채가 지닌 여러 장점들에 크게 의존한다. 즉 기름이 끈적끈적한 젖은 색채를 그대로 쓰거나, 색채를 두껍게 미리 입힌 후 화도로 긁거나,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여 생산한 투명색채를 함께 입혀 가면서 그리거나 하는 등의 여러 기법 때문에 서양그림을 대표하는 그림 형식으로 간주된다. 이외에 유화는 유화색채가 건조된 후에 색채의 질이 빨리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오랜 기간 간편히 보존 및 보관 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와 반면에 유화색채의 기법에 유의하지 않았을 경우에 색이 바래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유화가 가진 단점으로는 사용한 색채의 질과, 칠한 두께 그리고 그림의 나이에 따라 색칠한 화면에 금(크라클뤼르)이 생기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림물감이 되는 안료(顔料)의 종류는 중세까지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반 에이크 무렵에도 연백(鉛白 Siverwhite), 천연의 군청(群靑 lapis lazuli), 녹토(綠土 테르·베르트), 석황(石黃 orpiment), 황토(黃土 ochre)와 그것을 구운 적갈색 및 흑갈색(브라운 페르다샤) 등과 식물성 염료인 매더 따위의 7,8색에 지나지 않는다. 르네상스 무렵부터는 식물성 염료나 동물성 색소도 이용되어 흑석(피에르 노아르) 등도 은필(銀筆)과 더불어 화재로 등장한다. 실재로는 안료가 인공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704년에 독일인 디스바하의 파랑부터이고, 산업혁명의 물결과 함께 19세기에 걸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수도 증가되고 있다. 그 때까지의 것은 화가의 화실에서 황토를 구워서 색상을 만들거나 약연으로 원석을 빻아서 수파정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들여 정제한 유화 그림물감의 보존법도 1924년 영국에서 금속 튜브가 발명되고 난 다음부터 오늘날과 같이 편리하게 되기까지는 동물의 장기에 채워 산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물항아리에 저장해 놓고 사용했다. 유화 그림물감도 그 시초부터 살펴보면 팔레트의 등장에다가 용법상의 결점 등으로 소멸되어 간 것도 그 수가 많다. 래피스 래줄라이(lapis lazuli) 등은 귀석(貴石)이므로 그림물감으로 하기에는 고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1824년 프랑스 정부는 장려금을 주고 화학자에게 합성법을 연구케 한 결과 오늘날의 울트라마린(ultramarino)이 생겨났고, 공작석(孔雀石 맬러카이트 그린) 등은 변색이 빠르므로 자연히 쇠퇴하였다, 18·19세기의 회화에 많이 사용되고 있었던 역청(瀝靑 bitumen)이나 테르 드 캬세르도 자연히 그 자태가 소멸되었다. 유화 그림물감 중에서 오늘날까지 오랜 동안 사용되고 있는 안료는 실버 화이트인데, 징크 화이트 등은 1845년에 공업화되고, 화학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특성에서 유화 그림물감 축에 들어간 것으로서 기법사적(技法史的)으로 본다면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기법상으로 징크 화이트는 보조적인 위치에 멈추고 있는 것이어서, 실버 화이트가 형성하는 마티에르의 효과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접어들어 유기합성화학의 발달에 따라 그 화학적인 성질이나 내구성이 약한 천연 유기(有機)의 것은 인공적인 것으로 대체되었고, 또한 천연자원의 소멸에 의하여 네이폴즈 옐로나 테르베르트 등은 오늘날에는 배합 안료(配合顔料)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20세기가 되자 크롬 옐로 등이 유화 그림물감으로 등장하여 화가 터너에게 애용되었고, 고흐의 채필을 기쁘게 하였다. 황색 중에서 안정성이 있는 카드뮴 옐로도 이 무렵의 소산이다. 오늘날에는 더욱 더 진보하여 석유화학의 발달에서 아조계(窒素系)나 프델로우 시어닌계의 미립자안료가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착색력이 큰 점에서 재료의 세계에 하나의 전기(轉機)를 줌과 동시에 합성수지의 발달로 중개물로 바뀌어서 기법상으로도 변혁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아크릴 그림물감 따위가 이것들을 이용한 것이다. 유화의 물감 유화 그림물감의 각 빛깔은 안료 조성에 따라서 화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용법상의 성질인 점조도(粘稠度)·건조도(乾燥度)·피복력(被覆力)·고착력(固着力)·착색력·투명도 등을 대충 알고서 사용하는 것이 발색·고착·변색 등의 화학적인 변화와 기법상의 결함으로 나타나는 퇴산(褪散)·퇴색·암색화·초킹·불투명화·금이 감·박락(剝落), 화장지와 같은 잘디잔 주름 등등의 재해를 막을 수가 있다. 그리고 중개물이 유지이므로 투명성·반(半)투명성·불투명성의 성질을 살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들의 기본적인 성질은 기법상으로 기본이 되는 재료용법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화학적으로도 조성계열(組成系列)로 분류하여서 그 성질에서 혼색을 금기(禁忌)하는 관계를 알고서, 팔레트에 꺼낼 경우에도 색상에 관계없이 이 계열에 따라서 사용하는 습관을 붙이면 용법상 대단히 편리하다. 안료계열(顔料系列)은 대별하여 산화물계(酸化物系)·유화물계(硫化物系)·연화합물계(鉛化合物系)·동화합물계(銅化合物系)·코발트계·탄화합물계(炭化合物系)·인공레이크 계·신안료계(新顔料系)로 나뉘고, 유화의 그림물감으로서 회색조(會色調) 그림물감·배합안료 그림물감, 연색용 그림물감 등으로 되어 있다 화용에 사용되는 기름에는 용도에 따라서 용유(溶油)와 수지유(樹脂油=니스)의 계열로 나뉘는데 특수한 기법, 목적에서 그림물감 층에 윤성(潤性)을 갖도록 하는 것과 계면활성을 만드는 화액(畵液)이 있다. 용유에는 건성유(乾性油)와 휘발성유(揮發性油)가 있는 데, 일반적으로는 건성유로서 린시드 오일·포피 오일·너츠 오일이 있다. 모두 다 유화 그림물감의 점조도(粘稠度)를 약화시키고 전색성(展色性)을 늘리기 위하여 사용되며, 린시드 오일은 다른 건성유보다 그림물감의 층이 딱딱한 질이 될 성질을 가지고 있다. 다만 담색 명색인 것에만 사용하면 훗날 조금 갈색미를 띠게 되므로 화조는 어둡게 되기 쉽다. 이밖에 휘발성유가 사용되는데 휘발성유에는 식물성인 것과 광물성인 것이 있다. 식물성인 것에 테레핀유(油)가 있는데 이것은 생수지를 증류하여 만든 것으로서 바르삼 테레핀이다. 특유한 방향(芳香)을 가진 무색 투명한 것이 있는데, 공기나 빛에 방치해 두면 환원하여 기름이 되기 때문에 누렇게 변해지는 성질이므로 사용중에도 밀전(密栓)하여 항상 암소(暗所)에 둘 필요가 있다. 광물성인 것은 페트로르라고 불리는데 미네랄 스피릿이어서 완전 휘발성의 것으로서, 화용으로서는 용유라기보다는 용제(溶劑)로서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유화 그림물감이 용유로서 사용할 수는 있으나 유화 그림물감의 고착력을 약화시켜, 건조 후 색조(色調)는 단조롭기 쉽고 따라서 윤기가 상실된다. 증류 온도는 낮은 것이 아니면 유황분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유화물계의 그림물감과는 흑변(黑變)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시판되는 것은 증류 온도 140-180도 정도의 것이므로 용유로서는 적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수지유에는 베로니 아 르츠셰, 베르니 아 판도르, 베르니아 타브로의 세 계열이 있다. 르츠셰는 보채용(補彩用)으로서, 마른그림물감 층에 재보필(再補筆)할 경우에 고착을 돕고 윤기가 날아간 부분의 복조(復調)·상호 화학변화를 일으키기 쉬운 그림물감이 서로 작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 즉 절연성을 갖게 할 목적으로 사용된다. 판도르는 용유와 수지유의 목적을 상승적으로 이용하는 화용유(畵用油)이다. 타블로는 완성된 작품의 보호피막을 만들기 위하여 완전 건조를 기다려서 사용되는 것이다. 니스류도 이밖에 윤기를 지우기 위한 세로니나 딱딱한 피박을 만드는 코파르의 니스 등 마티에르의 효과에 따라서 수종의 것이 그 목적에 따라서 사용된다. 그 밖에 고화(固化)된 그림물감 층에 윤성을 주는 효과를 가지는 라벤다유, 애스피크유 등이 있는데, 용법은 완전히 마른 그림물감층에 다시 그림물감을 덧칠해서 길들일 때 따위에 사용된다. 그리고 유성의 그림물감층에 수성의 과시 그림물감 등을 덧칠하는 기법에서는 그림물감층의 계면에 활성을 주는 피에르라고 불리는 화액 등이 유럽에서는 옛부터 사용되고 있다. 건조제는 유화의 그림물감에 그 안료의 기름과의 건조성의 지속(遲速)에 맞추어서 이미 배합되어 있는데, 유화 그림물감에 용유를 섞을 필요가 있을 때, 그 기름의 건조성을 빠르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본래의 용법이다. 유화 그림물감에 섞으면 건조가 촉진될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와전된 것으로 용법으로서 잘못이다. 따라서 용유로 할 기름에 일정한 양(乾性油 1리터에 대하여 3그램)을 미리 첨가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이 수치에서 지극히 소량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짐작하리라고 생각한다. 기름을 건조하는 원칙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됨으로써 생기는 산화중합을 건조라고 하므로 건조제는 촉매로 사용되는 셈이다. 유화 그림 물감의 경우 일반적으로 산소에 의하여 표면이 건조하는 현상을 산화라고 하는 말로서 표현하고, 체질적으로 굳는 현상을 중합이라 하고 기법상으로 구별하여 생각한다. 건조제로는 표면이 건조하는 산화형의 것에 코발트나 망간이 있고, 망간은 건조 속도가 순차적으로 가속되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 표면과 내면이 균일하게 건조되는 중합형(重合型)의 일산화연(一酸化鉛)이 있다. 역가(力價)가 높은 오크티르산(酸) 지르코늄 등도 중합형의 건조체이다. 유화 그림물감은 안료에 따라서 기름과의 건조에는 지속이 있으므로 그림물감 매제(媒劑)는 이러한 성질을 감안하여서 배합하고 건조 속도가 조정되어 있는 것인데, 현재 빠른 것은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와 같이 1일 정도의 것에서 버밀리언(vermilion)처림 10일 이상 2주간을 요하는 것도 있다. 이 차이는 작화 기법상 알아두고 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채색이 둔탁해지는 원인이 된다. 또한 기름의 건조는 산소와 결합하고 있는 도안에는 체팽창의 현상이 생기고 고화(固化)되어서 건조가 끝났을 때는 수축하게 된다. 로즈 매더(rose madder) 등의 그림 물감을 두껍게 많이 사용하면 말라서 표면에 가는 주름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재료기법에서는 이 종류의 것에 파테 메디움이라 하여 수축을 방지하는 용재도 있다. 시카티프 드 크트레이 브란이라고 하는 건조제는 바탕을 칠하기에 사용되는데, 이것은 산화·중합의 동시효과를 갖도록 일산화연과 이산화망간을 배합한 것이고, 시카티프 후라만드라고 불리는 것은 주로 수지가 혼합된 기름에 첨가하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있는데 글라시 등의 기법에 사용된다. 이 화법은 네덜란드의 마니엘 위테(1617-1692)에 의하여 창안된 것으로서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실시된 것이다. 실버 화이트와 바인 블랙(오늘날의 그림물감으로 피치 블랙과 동질로 명암의 톤을 만들고, 부조(浮彫)와 같이 사물의 형태의 모델링을 그리고 표현하는 묘법(描法)으로서, 전체는 회색의 해조(諧調)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은 애당초 실내의 기둥이나 대들보의 장식으로서 실시된 것이었는데 이 방법이 작화상으로 언더 페인팅으로 이용되어 오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투명색을 살리는 용법으로서 살려지고 있다. 이 수법은 렘브란트의 작품 등이 있고, 루벤스의 작품 등에도 부분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몇 개 있다. 방법은 처음에 회색조로 사물의 모델링을 언더 페인팅하여 완전히 마르는 것을 기다려서 그 위에 로우컬한 빛깔을 투명성으로 덮어 씌우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 채색되는 빛깔은 밑의 회색에 의하여 명암에 번져진 잘 조화된 색조로 보이게 된다. 투명색의 이러한 취급을 글레이징(glazing)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하나의 용법으로서 글레이징(글라시)의 용법을 확대하여 오늘날에도 활용되고 있다. 글라시라고 하는 것은 톱 레이어(top layer=화면에서 최상층의 색조를 가리킨다)를 유약처럼 유급하는 기법으로서, 이 경우 밑의 색층은 반드시 건조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만약에 미건조된 위에 실시하면 밑의 빛깔과 섞여서 투명성을 저해하기 때문에, 이 용법의 발색의 깊이를 찾는 목적이 소실되는 결과가 된다. 이 용법에 사용되는 용유(溶油)는 수지분(樹脂分)을 가지면서 휘발성이 있도록 처리된 기름을 사용한다. 이 기법으로 루벤스가 스스로 처방하여 사용하고 있던 기름을 비벨르라는 프랑스의 회화 과학 연구자가 해명(解明)하고 후세에 매출된 리키 드 뤼반이란 기름이 프랑스의 화구점에는 있다. 베르니 아 르츠셰(시판되는 것) 50cc에 테레핀유를 소량으로 10그램의 화이트 단마 수지를 열에 용해한 다음에 첨가하고 30cc의 α-피넨을 합치면 된다. 글라시할 때는 붓이 아니라 글라시용의 솔이 있어서 이것을 칠하게 된다. 르누아르의 몇몇 작품은 이 기법의 응용으로서 예를 들면 도기(陶器)의 항아리 등을 그릴 때, 그 하이라이트 부분에(포앙 에크라테라고 한다) 우선 안파트몬이라 하여 실버 화이트로 밑바탕을 만들어 두고서 이것이 완전히 마른 위에 부드러운 붓으로 글라시하여 가는 것이다. 이 투명성을 이용한 채색법은 그 빛깔의 깊이가 동시에 조형감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갖게 된다. 루오도 이따금 작화 중에 이 수법을 채용하고 있다. 그 한두 예를 들면 에메랄드 그린은 변색하기 쉬운 빛깔이므로 작화상 변색하기 쉬운 부분에는 네이플스 옐로를 칠하고 잘 건조된 위에 빌리잔에 소량의 실버 화이트를 섞은 빛깔을 수지유로 녹여서 겹치게 하는 방법으로서 에메랄드 그린의 효과를 만들거나 또는 루오 울트라마린의 채색효과는 품위가 높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방법을 보면 밑의 빛깔에 로우 시엔너를 칠하고 건조를 기다린 다음 그 위에 실시하고 있다. 더욱이 유화 그림물감의 채색의 아름다움은 그 빛깔의 적도색층(適度色層)의 두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유화 그림물감은 필요 이상으로 두껍게 칠하여도 반드시 그 빛깔의 아름다움이나 솔리드한 힘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각각의 색층이 마르고 난 다음에도 그 발색을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어떠한 색상의 것에 대하여도 그 조성계열(造成系列)에 따라서 체질적인 공통점을 가지면서 제각기 특이성을 나타내고 있다. 채색기법 중에는 이와 같은 사항을 다양하게 내포하고 있으므로, 화면에서의 색채배치나 조화(調和)의 요소도 고려하면서 특이한 색채효과를 조직케 하는 연구가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최종적인 색채효과를 위해서는 프로미에르 드 쿠시라고 하여, 초층(初層)에 사용되는 그림물감에 대한 흥미있는 연구가 있다. 이것은 프랑스의 아메데 오잔판이 고전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많은 뛰어난 화가의 채색층을 조사하여, 그 최대 공양수적인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 기본적인 초층에 놓여 있는 그림물감 이름은 ① 비치블랙 ② 코발트 블루 ③ 로우 시엔너 ④ 테라 로즈 또는 베니션 레드 ⑤ 아크사이드 오브 크로뮴 ⑥ 실버 화이트(근년에는 징크 화이트라고 부른다). 이것들의 채색 위에 다채로운 변화를 갖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① 아이보리 블랙 ② 옐로 오커 ③ 시루리언 블루 ④ 인디언 레드 ⑤ 비리디언을 제2층 이후에 사용한 것이 채색효과가 좋다는 것을 표시하고, 화면에 생채를 주고 또한 최상층에서 회화의 형을 확정하고 조형성을 성립시키는 것으로서는 ① 카드뮴 옐로 ② 카드뮴 레드 ③ 에메랄드 그린 ④ 코발트 바이올렛 등을 들고 있다. 이들 그림물감의 발색이 산뜻해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러한 취급을 하여야 된다는 것은 이화학적으로도 합리적이다. 또한 작화에 사용되는 색수는 상품으로서 메이커들이 70종에서 100종 이상이나 레이블명(名)을 붙여 내놓고 있는데, 실제로는 기껏 많이 사용하더라도 20색 내외로 충분하다. 작화의 기조에 적응된 기호에 따라서는 이것에 수종의 특색 있는 빛깔을 준비하는 것이 한도로서, 중간색 따위는 오히려 팔레트에서 조색하여 찾아내면 된다. 다음으로 그림물감을 칠하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면, 작품에 따라서는 중후한 밀도가 있는 그림물감층을 만들거나 또는 그림물감의 쌓아가는 방법으로 질량감을 표시하고 있다. 고흐처럼 붓끝이 작화충동(作畵衝動)을 야기하듯이 제3자에게 호소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자태도 있다. 이러한 유화 그림물감의 점조도(粘稠圖)를 이용한 기법은 16세기 후반 무렵부터 유화 그림물감에 체질적인 매제합성(媒劑合成)을 갖도록 되어, 밝은 부분은 두껍게 그늘이나 어두운 부분을 엷게 그림물감을 붙이는 베네치아파의 자태를 탄생시킨 다음부터로서, 17세기에 이르러 직접 묘법의 기법(사상적인 작화법)이 로마화파 가운데서 나와 이것이 에스파냐파(派)의 벨라스케스나 네덜란드파의 렘브란트의 수법 중에 생기를 주고 있는 브러시 스트로크로서의 용법을 가리키게끔 되었다. 스트로크는 유화 그림물감의 점조도의 조도(稠度, Plasticity)를 이용하여 필의(筆意)를 전하는 데 그 표현효과가 있다. 렘브란트 작품의 대부분은 어두운 부분의 톤의 해조(諧調)를 만드는 방법과 이 브러시 스트로크에 의하여, 그림물감을 잘 다루면서 모델링을 그려내는 수법인데 그는 이것의 명수였다. 이 수법은 고쳐 그릴 수 없는 결정적인 필법에 의하여 결정되어 가는 데에 테크닉의 높이가 있다. 동양의 수묵화에도 필의를 의탁하는 자세가 있는데, 다분히 정신주의적인 데 비하여 유럽의 이 종류의 것은 물질적이고 구체적이며 인간적이다. 유채화의 기법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린다고 하는 것이 자칫하면 그림물감을 칠해서 겹쳐 가는 것이라 생각되기 쉬운데, 칠을 해서 겹친다는 것(코팅)이 (+)의 기법으로서 원칙적으로 이해됨과 함께 (-)의 기법으로서 그라타주라는 긁어내고 깎아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유화 그림물감을 두껍게 바른 후 나이프로 긁어 내면 엷은 색층을 만들 수가 있게 되는데, 그라타주란 말의 본래의 의미는 그라트와르(스크레이퍼)라고 하여, 양쪽 날을 가진 나이프로 미리 두껍게 칠해 둔 그림물감의 완전건조를 기다려서, 이 그림물감의 봉우리를 깎아 내는 방법이다. 깎여진 그림물감의 결은 밀도가 있는 딱딱한 질을 들어내고, 다음에 칠하는 그림물감을 통하여 솔리드한 느낌을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것이 마티에르의 질의 변화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 극단적인 이용법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에 영국의 벤 니코르손이 있다. 이것은 초층(初層)에 미리 예정한 색층을 칠하여 두고서, 완전히 마르는 것을 기다려 다음의 색층을 겹치고, 다음으로 부분적으로 초층이 들어날 때까지 상층의 색층을 긁어내어 하색(下色)을 보이는 채색법으로 색채의 대비가 명확하여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루오 등도 발색의 견뢰(堅牢)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색층의 그라타주를 실시하여 적당한 엷은 색층의 조합으로 작화하고 있다. 프로타주란 것은 프로테라는 말에서 생겼는데 그림물감을 문지르는 채색법을 말한다. 이 기법의 말이 뜻하는 것은 얇게 칠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하층색의 투색(透色)을 이용하여 복합하는 색채효과를 찾는 것이다. 이 기름의 기원은 독일 태생인 막스 에른스트(1891-1976)가 동양에서 말하는 탁본의 수법과 마찬가지로 나무나 돌이나 금속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서 탁본묵으로 그 모양을 문질러서 찍어내는 것처럼 하여 그림모양을 베껴내고 이것을 계획적으로 화면에 조합시켜서 작화하는 방법을 표시한 데서 생긴 기법용어로서, 문지르거나 두들기는 채색법에 전용된다. 이 경우의 그림물감은, 용유는 사용하지 않고 고점도의 유화 그림물감을 마른 화면에 수(穗) 끝이 커트된 듯이 빳빳한 붓 또는 솔로 그림물감을 문질러 나간다. 19세기 후반에 로르시냐크(1863-1935)나 조르주 쇠라(1859-1891)가 물리학이나 색채학의 학설에서, 예를 들면 광학(光學)에 있어서의 리츠의 결합원리에서 시각혼합의 법칙에 의하여, 화면에 병치혼합의 채색법을 생각하여 조형하는 양식을 표시하였는데, 그림물감의 칠하는 방법이 점 또는 그에 가까운 필치(筆致)로 표현하는 자세를 가리켜서 점묘(點描)라고 한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회화주의를 프왕티즘(點描主義, pointillism)이라고 한다. 이들 작품의 조형감과 채색의 취급면에서 그 화조를 보면, 이 형식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채색기법의 질서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채색된 빛깔은 안료의 품도를 유지토록 혼색을 하지 않을 것과, 트와르에는 반드시 이들 색채를 결합시키는 작용을 하는 엷은 회색조의 그라운드(바탕칠)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바탕칠의 회색조는 원색의 채도를 유지하여 화조 속에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원리는 포비슴 화가도 이용하고 있는 것인데 점묘형식도 이 효과에 의한다. 그리자유처럼 무채색의 회색기조에 의하여 모델링을 그리는 것과 구별되고, 유채색의 적갈색기조로(로 시엔너나 번트 시엔너를 주로 사용한다) 모델링을 그리는 명암묘법을 말한다. 루벤스의 소품에는 그리자이외나 카마이외의 묘법을 이용하여 예보시(祖描 ebauche) 하였을 뿐인 유품이 몇 개 있다. 분류:회화 |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4/25년? ~ 1274년 3월 7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천사장 신학자요 박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Super Physicam Aristotelis , 1595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 로카세카 성(Roccaseca)에서 아퀴노(Aquino) 지방 영주 중 하나인 란돌포의 9남매 중 일곱 번째 아들(아들 넷 중에서는 막내)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탄생 연월일을 명시한 기록은 전무하다. 이에 따라 그가 사망한 날짜, 즉 1274년 3월 7일을 기준으로 그가 태어난 해를 추정할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자인 토코의 굴리엘모(Guillaume de Tocco)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이 되는 해’에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또다른 전기작가인 베르나르 귀(Bernard Gui)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을 넘겨 50번째 해를 막 시작할 무렵’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루카의 톨로메오(Tolomeo de Lucca)의 경우, ‘(토마스 아퀴나스는) 50살에 사망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48세에 사망했다고 말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서로 엇갈리는 기록들을 통해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해는 최소한 그가 48살까지는 살았다는 가정하에 1224년으로부터 1226년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다소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루카의 톨로메오의 기록보다는 토코와 베르나르의 기록에 더 무게를 둔 1224년과 1225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설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이를 확정지을 만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1226년 더 나아가 1227년 출생설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아버지는 1230/1231년경 막내아들 토마스를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다. 여기서 토마스는 수도사 수업을 받는다. 전기작가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까닭이 그가 미래의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바랐던 토마스의 부모들의 기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239년 경 토마스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수도사가 되는 수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나온 후 당시 프레데리쿠스 2세의 후원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나폴리 대학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7개의 필수 학문인 문법, 논리학, 수사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을 접했다고 추정한다. 특히 도미니코회 수도사들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 미래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으로 성장해줄 것이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1244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토마스의 가족은 도미니코 수도원의 주선으로 파리로 유학가던 토마스를 도중에 납치하여 로카세카 성에 감금했다. 그리고 약 1년여 간 회유와 협박을 동원하여 도미니코회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어떤 노력으로도 그의 소신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된 가족들은 결국 1245년 여름 토마스 아퀴나스를 나폴리의 도미니코회 소속의 수도원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와 같이 귀족의 아들로서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이 될 수 있는 화려한 삶 대신 소박한 삶을 사는 수도사가 되기를 선택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방하기로 결심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화려한 미래가 보장된 길 대신 청빈한 수도사의 길을 선택한 소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이후 재속 성직자들과의 논쟁에서 탁발 수도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단호한 수도사와 대주교직을 정중히 사절하게 되는 겸손한 수도사의 모습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족들의 연금에서 풀려나 나폴리로 돌아온 1245년부터 1248년까지의 행적, 특히 그가 1245년부터 1248년 전반기까지, 즉 그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따라 독일의 쾰른으로 떠날 때까지 약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그가 파리 대학교의 학생으로서 정규 교육 과정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학자들은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 3년간 파리 대학교 혹은 파리의 도미니코회에서 토마스가 7개의 필수 과목을 공부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파리대학에서 강의하던 알베르투스의 신학 강의를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먼저 인문학부에서 수학한 이후에나 신학과에 진학하여 신학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중세 대학 체제 상 토마스에게는 알베르투스의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년간의 파리 체제 이후 1248년 토마스는 쾰른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비로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로부터 4년간 지도를 받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적이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의 영향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한다.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른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은 그의 우람한 몸집과 과묵한 성격을 바라보던 동료들의 장난기가 섞인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별명과 관련하여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베르투스가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수도사의 우렁찬 목소리를 온세상이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별명과 이와 얽힌 일화와 전설들이 사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전설들은 이국 땅에서 어눌한 외국어 구사능력으로 인해 혹은 몇몇 전설이 전하듯이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그래서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이 소심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청년 수도사 토마스의 숨겨진 일면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심한 젊은 제자의 침묵 뒤에 숨겨진 무한한 재능과 역량을 꿰뚫어보고 이것이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스승 알베르투스의 자상함과 혜안이 그가 전수한 학문적 지식과 더불어 미래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떤 영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1251년 말에서 1252년 초엽 알베르투스는 도미니코회 총장으로부터 파리에서 강의를 할만한 신학자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에 알베르투스는 "학문과 삶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 대학교의 교수로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벙어리 황소의 역량을 누구보다도 일찍 꿰뚫어 본 알베르투스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특히 당대 최고의 학자 알베르투스의 강의, 심지어 그의 신학강의까지도 일부 분담할 만큼 신뢰를 얻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재능과 역량에 대해 의심할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의 총장은 토마스가 당시 기독교 세계의 문화/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던 파리대학에 도미니코회의 대표자로서 추천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그의 어린 나이, 즉 스물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도 총장은 파리대학의 교수로 학문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수많은 문제들과 씨름을 벌일만한 노련한 학자를 원했다. 그의 복안은 종단의 정신을 대표하는 자리에 당대 도미니코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인물이자 중세사회 최고의 지성인인 알베르투스를 파리대학으로 불러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파리대학 교수로 "벙어리 황소"로 불릴 만큼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이제 소년의 티를 갓 벗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천했다. 총장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총장의 당혹감과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로 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총장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알베르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미니코회의 선배 수도사이자 당시 추기경이었던 생 셰르의 위그(Hugues de Saint Cher)까지 설득하여 총장에게 결정적인 압력을 가한다. 결국 위그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알베르투스의 요구는 관철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명제집 강독자로서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하게 되며 1252년부터 시작하여 125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 강의와 더불어 신학교수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한 필수과정으로서 명제집 주석 집필에 착수하게 된다. 1256년 명제집 주석 작업이 완결될 즈음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신학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토마스가 파리로 올 당시부터 파리의 분위기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재속성직자들과 교수들이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 출신 수도사들의 파리대학 교수 취임에 대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불만과 이에 따른 대립이 극에 달하여 재속교수들과 수도회출신 교수들 사이의 분쟁이 유혈폭력사태로 이어질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취임강연은 수도회 출신 교수를 반대하는 편의 사람들이 청중들의 입장을 방해하는 가운데 만약의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프랑스 왕의 군대가 강연장까지 배치되어 삼엄한 경호를 펼친 상태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비슷한 시기에 교수가 된 동시대의 또다른 거장 보나벤투라의 경우도 신학교수로 취임할 자격을 갖추고서도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애초에 도미니코회 총장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륜과 조용한 성격에 대해 우려했던 것도 파리가 이런 분위기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쾰른에서의 알베르투스와의 만남은 단순히 토마스의 성취를 단순히 학문의 영역에서만 머물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삶"에서도 가능케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쾰른 체제기에 얻었던 스승 알베르투스의 신뢰와 명제집 주석 및 강해 과정에서 재차 확인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더해지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학자로서 각성하게 된다. 영민했지만 소심한 성격으로 쉽게 자신을 표현하지는 못하던 재능있는 청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소심함과 섬세함을 신중함과 정교함으로 변모시켜 체화함으로써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및 친구 보나벤투라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학자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덩치만 큰 수줍은 말더듬이 벙어리 황소가 적들의 입장을 단호하게, 그리고 조목조목 철두철미하게 비판하며 동료수도사들과 수도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최전선으로 뛰어든 위풍당당한 영웅으로 변모한 것 역시 이 때부터였다. 실제로 수도회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재속성직자들 및 교수들의 수장 기욤 드 생따무르(Guillaume de Saint Amour)의 입장을 주도면밀하게 반박함으로써 교황청이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두 미래의 교회학자, 즉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란체스코회의 보나벤투라의 투쟁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비록 소란스러운 가운데 진행되기는 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교수로서의 첫 강연은 대가로서 성숙해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첫 승리를 기념하는 이정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삶"에서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욥기 주석 , 그리고 진리에 관한 정규토론집 , 그리고 자유토론집 VII과 XI과 같은 이 시기에 저술되거나 막 써내려가기 시작한 작품들은 물론, 오늘날 천사적 박사라 불리는 위대한 스콜라학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259년말부터 1261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가 1259년말에서 1260년초 사이에 후임자에게 교수직책을 물려준 이후 파리를 떠났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그가 아냐니에서 교황청 강독자로서 2년간 머물렀다는 의견이 주목받은 바 있지만 이는 어떤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사실상 이 의견에 동의하는 학자는 찾기 어렵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토마스 아퀴나스가 본래 자신이 속한 교구인 나폴리로 되돌아갔을 것으로 대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그의 행선지만큼 그가 이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런 막연한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 하나는 파리를 떠날 즈음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이교도대전 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다. 이렇게 모든 사료에서 사라졌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1년 9월 14일 현재 그가 오르비에토에 체류중임을 확인해주는 기록을 통해 약 2년 만에 재등장하게 된다. 이후 1265년 로마로 떠나기 직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회를 대표하는 선생으로서, 학자로서 또한 성직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욥기 주석 과 대이교도대전 ,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신명론 주석 을 완성했으며 4복음서 연속주해 의 상당부분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교회의 요구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오류를 반박하며 을 비롯한 다수의 소논문들을 작성한 것 외에도 오르비에토는 물론 주변의 도시까지 방문하여 성직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적을 살펴보면 높아져가는 명망과 더불어 문자 그대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빠져가는 한 수도사의 강행군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높아져 가는 명망과 쌓여가는 피로 속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변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성실한 선생님이자 동료였고 또 따뜻하고 겸손한 사목자이자 수도사였다. 이와 같은 면모는 다음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르비에토의 수도원으로 한 젊은 수도사가 수도원장에게 심부름을 왔다가 원장실에서 나가자마자 복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수도사와 함께 어디에 다녀오라는 원장의 지시를 받게 된다. 이 젊은 수도사는 원장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서있던 뚱뚱한 수도사의 소매를 잡아 채고는 원장의 지시이니 같이 길을 나서자고 했다. 그런데 이 젊은 수도사의 빠른 걸음을 뚱뚱한 수도사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젊고 팔팔한 수도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오는 이 뚱뚱하고 느려터진 수도사에게 그로 인해 지체된 시간을 탓하며 오르비에토 시내에서 한복판에서 꽤 고약한 말들을 퍼부었다고 한다. 오르비에토의 사람들은 기겁을 한 표정과 침묵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결국 한 사람이 보다 못해 이 젊은 수도사에게 묻기에 이른다. "저 분이 온 세상에 이름난 토마스 아퀴나스 수도사이신 건 알고 계십니까? 도대체 저 분이 무슨 잘못을 하셨고 댁은 누구시길래 저 분을 이리도 혹독하게 대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젊은 수도사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과 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토마스 수도사에게 거듭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이며 사죄를 했다고 한다. 한편 젊은 수도사가 투박을 주는 동안 한숨을 돌렸을 토마스 수도사에게 왜 한마디도 불평없이 그런 불편한 지경을 고스란히 당하셨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수도사의 본분은 순종과 겸양입니다. 저 젊은 수도사와 저는 그 본분을 따랐을 뿐입니다." 1265년부터 1268년까지 그 상징적인 이름에 걸맞지 않는 학문적 불모지였던 로마로 불려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의 수도원에서 교수로서의 활동은 물론 저작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 신학대전 의 집필에 착수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또한 이 시기는 신의 권능에 관한 정규토론집 을 비롯하여 영혼에 관한 정규토론집 , 그리고 영적피조물에 관한 정규토론집 등과 같은 작품들이 완성되는 등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시기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 시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때부터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욤 모어베크(Guillaume Moerbeke)의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번역본을 사용하여 영혼론 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에 대한 주석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9년 남짓한 이탈리아 체재기간은 대이교도대전 이 완성되고 신학대전 과 같은 작품이 집필되기 시작한 시기이자, 그의 성숙한 사유를 반영하는 수많은 주요저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때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막 꽃피우기 시작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숙한 사상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 시기의 저작들은 골방에 들어앉아 오로지 펜과 책만 붙들고 앉아 있던 그저 영민하기만 했던 학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무엇보다도 겸손한 순종의 태도로 신도와 동료들에게 잠깐의 강론을 하기 위해 며칠이 걸릴 지 모를 먼길을 떠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책임감과 사명감 강한 성직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에 완성되었거나 집필되기 시작한 두 대전을 비롯한 저작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책임감과 사명감 강한 인간의 초인적인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사상 처음으로 두차례나 교수직을 역임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하지만 1268년으로부터 1272년까지 4년간의 파리체재기간은 겉으로 드러난 영광조차 느낄 시간도 없는 거론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또한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하는 교수로서, 그리고 성직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느꼈을 책임감과 압박감은 엄청 났을 것이다. 그런 압박감은 종종 이 시기에 쓰여진 논박서, 예컨대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 와 같은 저서에 자신과 대립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예의 냉정함과 침착함을 잃고 노기까지 드러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프랑스 왕으로부터 식사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세게 식탁을 내려치며 "그래! 마니교도들을 논박할 방법을 찾았다"를 큰소리로 외치고는 비서들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모양이다. 어지간하면 왕에 대한 결례로 큰 벌을 받았을테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구적 열의에 감동한 왕은 토마스가 비서들에게 구술하는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두 번째 파리대학교수로 활동하던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가 처했던 상황이 어려웠던 것만큼 잠시의 쉴 틈도 없었다. 아마도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년에 건강악화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쉼없는 활동은 이 시기에 완성한 작품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질과 양으로 결과를 맺었다. 마태오 복음, 바울서간 및 요한복음에 대한 방대한 주석 및 강해를 이 시기에 행했으며 악에 관한 정규토론집 및 자유토론집의 상당수는 이 시기에 토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신학대전의 1부와 2부를 역시 파리에서 두 번째 교수생활 당시 완성했으며 영혼론 주석 과 감각과 감각물에 관하여 주석 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들도 이 시기에 완성하거나 집필했다. 특히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활동과 저작활동, 특히 엄청난 저술량과 그것을 능가하는 질적인 완성도, 특히 신학대전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에 대한 주석들이 보여주는 완성도는 기적적 이라는 수식어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1272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를 떠나 나폴리로 향한다. 이곳에서 그가 절필하게 되는 1273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도 바울의 서간문에 대한 주해작업과 시편 주해, 그리고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신학대전의 3부와 같은 대작과 함께 여러 소논문들을 작성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집필에 여념이 없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스 축일미사 중 어떤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여 주변을 당황케 했다. 그리고 그 미사 이후 가족들의 연금으로부터 풀려난 뒤로 단 한차례도 멈춘 적이 없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위대한 저작활동이 완전히 멈추게 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3부 중 속죄에 대해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그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된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 그의 비서 레지날드가 토마스에게 그 이유를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레지날드 난 더이상 할 수 없네"라고 답한다. 이 답을 듣고 더욱 걱정이 되어 재차 이유를 묻는 레지날드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종종 명상 중에 의식을 잃곤 했다는 증언들이 전기문에 등장하고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건강상태가 이 무렵부터 급격히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273년 12월 말부터 1274년 1월 초 무렵 여동생 테오도라를 방문할 무렵의 기록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거의 아무 말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전하고 있다.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제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는 신이 내 저술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듯이 내 인생도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것이라네"라고 힘겹게 말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에 따라 리용으로 향하던 2월 중순 이후로는 여행의 피로까지 겹쳐진 탓인지 기록에 따르면 식욕까지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결국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2월 말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일부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일생의 마지막 활동으로서 아가에 대한 짧은 주해를 남겼다고 하는데,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주해는 아마도 구술된 내용에 대한 보고서(Reportatio) 형식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원본이나 사본은 물론, 그의 사후 이 주해를 접했다는 증언조차 확인할 수 없다. 1274년 3월 7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100여 명의 수도사와 평신도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간다. 1274년 5월 2일 수요일 파리대학 총장과 운영진은 당시 철학부에 속해 있는 모든 교수들의 이름으로 도미니코회 총회에 비통함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젊을 시절부터 자라고 배우며 가르쳤던 파리에 묻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 파리대학 총장과 교수들의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이 위대한 성인 의 시신을 내줄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추모와 존경의 표현만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보내진 반응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죽은 지 정확히 3년째 되던 1277년 3월 7일 파리와 3월 18일 옥스퍼드에서 각각 에티엔 텅피에, 그리고 같은 도미니코회 출신의 로버트 킬워드비에 의해, 그리고 1286년 4월 30일 또다시 옥스퍼드에서 킬워드비의 후임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 이론을 포함한 몇몇 주요 이론들이 단죄 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의 나이로 죽은 지 49년째 되던 1323년 7월 18일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론들에 대한 단죄는 모두 철회되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옥스포드에서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 당한 지 39년이 지난 해인 1325년 2월 14일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통성을 교황청이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1567년 4월 15일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학자로 공표한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토마스가 성인의 격에 어울릴 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한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대성한 중세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할 때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시킨다"는 태도를 갖고 은총과 자연,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조화로운 통일을 부여했다. 그의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전 자연은 신이 창조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고상한 부분이므로 인간이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신의 존재를 추론(推論)하는 것은 신을 찬미하는 길인 것이다. 우선 그의 존재론(存在論)은 신학 전체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실재적 색채가 강하다. 신과 피조물(被造物)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는 존재의 유비(類比) 를 사용하여 유비와 참여의 개념에 의해 동일성 안에 차별을 갖고 있는 존재의 파악을 가능케 하여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범신론(汎神論)의 위험을 피하였다. 본질구조(本質構造)의 규정원리(規定原理)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質料)와 형상(形相),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더욱이 아비체나에게서 발견한 본질과 존재 의 구별을 이용, 그의 독자적 원리를 전개하고, 본질과 존재가 일치하는 신(神) 존재의 필연성,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을 확립하였다. 신의 존재 증명에는 본체론적(本體論的) 증명을 피하고, 경험에 의해 주어진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제1원인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증명법을 사용한다. 악의 문제는 선의 결여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다음에 인격의 단일성을 믿는 그는 영혼의 유일형상성(唯一形相性)에 바탕을 둔 인간학을 전재한다. 이성적 동물로서 영과 육의 합성체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영혼에는 이성작용(理性作用)과 의지작용(意志作用)이 있으며, 영혼은 이성적 인식작용의 원리일 뿐 아니라 동물적·식물적 생명원리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인데 이성은 감각이 주는 내용으로부터 추상작용에 의해 대상의 본질개념을 형성한다고 주장하고 능동지성(能動知性)과 수동지성(受動知性)을 구별한다. 도덕론에서는 모든 도덕은 신을 향하는 이성과 피조물의 운동이라고 파악하므로 종국적인 목표는 피안에 있어서의 신직관(神直觀)이 된다. 여기에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윤리적 행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 도덕률을 영원법의 반영이라 보고 초자연적 신에 입각하여 신을 향하는 목적론적 존재론의 체계 안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초월적인 것인 동시에 자연의 이성의 소리가 된다. 이성에 복종하는 습성으로서의 덕에는 세 윤리덕(倫理德-正義·節制·勇氣)에 사려(思慮)의 덕을 추가하고, 그 위에 은총에 의한 신학적 덕(信望愛)을 추가한다. 그중에도 사랑이 여러 덕의 형상으로서 인격의 최종적 완성을 이루게 한다고 주장한다. Super libros de generatione et corruptione 명제집 주석 (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1252-56) 대이교도대전 (Summa contra gentiles, 1259-1264)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 I, II 1266-1272, III 1272-73, 미완성) 진리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eritate, 1256-1259) 신의 전능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potentia dei, 1265-1266) 영혼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anima, 1266-1267) 영적피조물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 disputata de spiritualibus creaturis, 1267-1268) 악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malo, 1270(1-15문)/1272(16문)) 덕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irtutibus, 1271/1272) 육화될 말씀의 결합에 관한 정규토론집 (Quaestiones disputatae de unione verbi incarnati, 1272) 자유토론집 VII-XI (Quaestiones de quodlibet VII-XI, 1256-59) 자유토론집 I-VI, XII (Quaestiones de quodlibet I-VI, XII, 1268-72) 이사야서 주해 (Expositio super Isaiam ad litteram, 1252) 예레미아서 및 애가 주해 (Super Isaiam et Threnos, 1252) 이사야서 주해 (Expositio super Isaiam ad litteram, 1252) 취임강연록 (Principium "Rigans montes de superioibus" et "Hic est liber mandatorum dei", 1256) 욥기 주해 (Expositio super Iob ad litteram, 1261-65) 4복음서 연속 주해 (Glossa continua super Evangelica, Catena aurea, 1265-68) 마태오복음 강독 (Lectura super Mathaeum, 1269-70) 요한복음 강독 (Lectura super Ioannem, 1270-72) 바울서간문 주석 및 강해 (Expositio et Lectura super Epistolas Pauli Apostoli, 1265-73) 시편 강연록 (postilla super Psalmos, 1273) Super libros de generatione et corruptione 영혼론 주석 (Sententia Libri de anima, 1267-68) 감각과 감각물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Libri de sensu et sensato, 1268-69) 자연학 주석 (Sententia super Physicam, 1268-69) 기상학 주석 (Sententia super Mateora, 1270) 명제론 주석 (Expositio Libri peryermenias, 1270/71 미완성) 분석후서 주석 (Expositio Libri posteriorum, 1271/72)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Sententia Libri ethicorum, 1271-72) 정치학 주석 (Sententia Libri politicorum, 1269-72) 형이상학 주석 (Sententia super Metaphysicam, 1270-71) 천체와 세계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super Librum de caelo et mundo, 1272-73 미완성)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주석 (Sententia super Libros de generatione et corruptione, 1272/73 미완성) 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 주석 (Super Boetium de trinitate, 1257-58/59) 보에티우스의 주간론 주석 (Expositio libri Boetii de ebdomadibus, 1259(?)) 디오니시우스의 신명론 주석 (Super Librum Dionysii de diuinis nominibus, 1261-65 혹은 1265-68) 원인론 주석 (Super librum de Causis, 1261-65 혹은 1265-68) 전례와 수도회를 업신여기는 자들을 반박하며 (Contra impugnantes Dei cultum et religionem), 1256) 영적 삶의 완전성에 관하여 (De perfectione spiritualis uitae, 1270) 수도회를 부인하는 자들을 논박하며 (Contra doctrinam retrahentum a religione, 1271) 지성단일성론에 관하여 아베로에스주의자를 반박하며 (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uerroistas, 1269/70) 세상의 영원성에 관하여 (De aeternitate mundi, 1261-65 혹은 1265-68) 자연의 원리들에 관하여 (De principiis naturae, 1252-56)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De ente et essentia, 1252-56) 신학요강 (Compendium theologiae, 1265-67 미완성) 군주의 통치에 관하여 (De regno ad regem Cypri, 1267) 분리된 실체에 관하여 (De substantiis separatis, 1271 미완성) 요소들의 결합에 관하여 (De mixtione elementorum ad magistrum Philippum de Caestro Caeli, 1269(?)) 심장의 박동에 관하여 (De motu cordis ad magistrum Philippum de Caestro Caeli, 1273) Corpus Thomisticum 라틴어 Busa Edition 전집 및 인덱스 서비스제공 갈리카 프랑스 국립도서관 고문서 서비스 라틴어,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고인쇄본 및 Leonine Edition(일부)-pdf 포맷 신학대전 불어, 파리1대학 Edition Cerf E-문서서비스 불어, 토마스 아퀴나스 선집 토마스 아퀴나스 선집 영어 라틴어 도서관 라틴어. 신학대전 일부와 몇몇 소논문 수록 분류:1225년 태어남 분류:1274년 죽음 분류: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 분류: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신부 분류: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성인 분류:이탈리아의 철학자 분류:이탈리아의 국제법학자 분류:이탈리아의 시인 분류:이탈리아의 귀족 분류:로마 가톨릭 철학자 분류:스콜라 철학자 분류:조직신학자 분류:윤리학자 분류:형이상학자 분류:경험론자 분류:기독교 신비주의자 분류:이슬람교 비평가 분류:무신론 비판자 분류:성공회 성인 분류:교회학자 분류:라치오주 출신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나폴리 대학교 동문 분류:도미니코 수도사 분류:중세의 신학자 분류:13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13세기 철학자 분류:13세기 기독교 성인 분류:13세기 로마 가톨릭 신학자 분류:마법 |
윤이상 (尹伊桑, 독문명 Isang Yun , 1917년 9월 17일 ~ 1995년 11월 4일)은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현대 음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이다. 본관은 칠원이며 독일식 이름은 Isang Yun (이장 윤)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성장하였다. 북한 드라마 “민족과 운명” 5부~8부의 모델이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선비 출신의 윤기현(尹基鉉)과 농가 출신의 김순달(金順達)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이상의 어머니는 용이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1920년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사를 해 학교를 다녔다. 다섯 살 때부터 3년간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에 다녔다. 여덟 살에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풍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잘 부르고 악보를 곧잘 읽는 등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웠고 직접 선율도 써보았다. 동네 영화관에서 자신이 만든 선율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2년 후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池内友次郎)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선가곡 악보가 발각되어 1944년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서울에서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김춘수·정윤주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때 통영고등학교 등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고려대학교 교가도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이듬 해 8월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60년대에 많이 불렸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같은 해 8월 첫 딸 정이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였다가 서울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 1956년에는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에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스승으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 유학생들을 입북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으로 영화 "출국"에서 오영민 박사(=실제인물 오길남 박사)를 유혹했다. —————————————————————————-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왜 그렇게 북을 사랑했을까 ? 1994년 9월 서울·부산·광주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 윤이상은 참석하려 했지만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하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을 거절함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사망후 김정일 명의의 화환이 보내졌으며 북한에서 국가적 차원의 음악회가 열렸다고 함.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했다. 1956년 서울시 문화상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1992년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1995년 괴테 메달. 경상남도 통영보통학교 졸업 경상남도 통영 협성고등상업학교 중퇴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졸업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 졸업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 졸업 독일 베를린 국립 예술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 (음악학 석사) 독일 튀빙겐 에베르하르트 카를스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윤이상 평화재단 국제 윤이상 작곡상 통영 국제 음악제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생가터에는 윤이상 기념관 및 윤이상 거리가 있다. 윤이상관현악단. 1984년 9월 윤이상음악연구소 설립. 매년 윤이상음악회 개최. 국제윤이상협회 루이제 린저는 윤이상과 대담록을 《상처받은 용(Der verwundete Drache Dialog über Leben und Werk des Komponiste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어 2007년 개봉예정이었으나 2011년 현재 개봉된 바 없다. 한국 가곡 * 《고풍의상》- 듣기 * 《달무리》 * 《편지》 * 《추천》 오페라, 성악곡 *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 * 오페라 《류퉁의 꿈》(1965) *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 1968) * 혼성 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1970) *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南無)》(1971) * 오페라 《심청》(1971, 1972) ** 1972년 뮌헨 올림픽의 개막을 축하하였다. * 목소리, 기타, 타악기를 위한 《가곡》(1972) * 타악기, 오르간, 혼성 합창을 위한《도에서(道-)》(1972, 1982) *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2) *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1987) 듣기 ** 경련 스님, 박두진, 김남주, 고은 등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칸타타이다. * 소프라노, 3성부의 여성 합창과 다섯 개의 악기를 위한 《에필로그》(1994) 관현악곡 * 관현악을 위한 《바라》(1960) * 대관현악을 위한 《교향악적 정경》(1960) * 현악 합주를 위한 《교착적 음향》(1960) * 관현악을 위한 《유동(流動)》(1964) *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藝樂)》(1966) 듣기 * 대관현악을 위한 《차원》(1971) *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음형들》(1972) * 대관현악을 위한 《서곡》(1973) *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환상 《무악》(1978) *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1979) *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 * 《교향곡 제1번》(1982, 1983) - 3악장 듣기 * 《교향곡 제2번》(1984) - 듣기 * 《교향곡 제3번》(1985) * 교향곡 제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1986) * 대편성 관현악과 바리톤 독창을 위한 《교향곡 제5번》(1987) * 대관현악을 위한 《윤곽》(1989) * 관현악을 위한 메멘토 《화염에 휩싸인 천사》(1994) 협주곡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 1976) * 플룻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7) * 클라리넷과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81)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1번》(1981)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2번》(1983-1986)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3번》(1993) 실내악곡 * 현악 사중주 제1번 * 현악 사중주 제2번 * 현악 사중주 제3번(1959) *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1959) 듣기 ** 한국 정악(正樂)의 색채를 담았다. * 실내 앙상블을 위한 《로양》(1962-1964)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歌詞)》(1963) * 플룻과 피아노를 위한 《가락》(1963) - 듣기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1964) *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律)》(1968) *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影像)》(1968) *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을 위한 《삼중주》(1972, 1973) *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72-1975) *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4) * 관악기, 하프, 타악기를 위한 《조화》(1974) * 오보, 클라리넷, 바순을 위한 《론델》(1974) * 실내 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단편》(1976) *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1976) * 오보에, 하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1979) * 관악기, 타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무궁동》(1986) * 관악기와 현악 5중주를 위한 《거리(距離)》(1988) * 《실내협주곡 제1번》(1990) * 《실내협주곡 제2번》(1990) 독주 *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 듣기 * 쳄발로를 위한 《소양음》(1966) * 오르간을 위한 《음관들(陰管-)》(1967) * 첼로를 위한 《활주》(1970) * 오보에를 위한 《피리》(1971) *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1974) - 듣기 * 오르간을 위한 《단편》(1975) *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왕의 주제》(1976) * 플루트 독주를 위한《살로모》(1976) * 하프 독주를 위한 《균형을 위하여》 (1987) * 플루트를 위한 《소리》(1988) * 플루트를 위한 《가락》 - 듣기 및 악보 * 리코더를 위한 《중국의 그림》(1993) 윤신향, 《윤이상 - 경계선상의 음악》. 파주 한길사, 2005. 김용환, "다원적 세계주의자 윤이상의 삶과 음악", 『윤이상 연구 I』(김용환 편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5년 윤이상, "나의 삶, 나의 음악, 나의 민족", 『윤이상의 음악세계』(최성만, 홍은미 편역), 한길사 1991년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상/하권, 창작과비평사, 2002년 박선욱, 《윤이상평전 - 거장의 귀환》, 삼인, 2017년 윤이상, 루이제 린저, 《윤이상, 상처 입은 용》, 알에이치코리아, 2017년 윤이상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모아놓은 개인웹사이트 분류:1917년 태어남 분류:1995년 죽음 분류:칠원 윤씨 분류:산청군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분류:20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분류:통영초등학교 동문 분류:파리 음악원 동문 분류:오페라 작곡가 분류:한국계 독일인 분류:베를린 예술대학교 동문 분류:독일의 서양 고전 작곡가 분류:대한민국의 고전 바이올린 연주자 분류:독일의 고전 바이올린 연주자 분류: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 분류:개신교도 이탈자 분류:독일의 불교 신자 분류:독일의 기타 연주자 분류:대한민국의 고전 첼로 연주자 분류:대한민국의 서양 고전 작곡가 분류:대연방공로십자장 수훈자 분류:동백림 사건 분류:한국 민족주의자 분류:대한민국의 유괴된 사람 |
1917년 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일본(日本) 다이쇼() 6년 1월 1일 - 이광수가 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월 20일 - 안확이 《조선문법》을 발행하였다. 2월 1일 - 독일 제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개시하여 중립국의 상선마저도 격침된다. 중립국 중 하나였던 미국은 이 시기에 독일에 선전 포고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3월 2일 - 간도창의소 사령관 안종석이 체포되어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3월 7일 - 중화민국이 간도에서 한국인의 거주권과 토지소유권을 인정하였다. 3월 12일 - 러시아 제국 멸망. 러시아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다.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2월 27일이기 때문에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불린다. 3월 14일 - 수원농림학교가 전문학교 수준의 학생을 모집함 (전문학교 과정) 3월 15일 -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임시 정부가 수립되다. 3월 23일 - 장일환 등이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다. 3월 26일 - 태국에 최초 국립대학인 출랄롱꼰 대학교 설립 3월 29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다. 4월 6일 - 미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다. 4월 7일 - 사립 연희전문학교가 조선총독부로 부터 설립을 인가 받음. 조건부 (10년 기한) 설립을 인가 받음. 사립 최초의 전문학교 4월 9일 - 봉천에서 조선인회가 설립되었다. 4월 23일 - 오스만 제국이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다. 4월 30일 - 조선 궁중아악을 연구하는 이왕직아악부 아악생양성소가 설치되었다. 5월 13일 - 파티마의 성모발현 첫 발현일 5월 14일 -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가 조선총독부에 조건부 (10년 기한) 설립을 인가 받음. 사립 최초의 전문학교 5월 23일 - 의병장 이진룡이 평안북도에서 체포되었다. 5월 26일 - 서울 광화문선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6월 1일 - 토지조사령 시행규칙 개정 공포령이 시행되었다. 6월 8일 * 순종 황제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 함경북도의 도청이 성진에서 나남으로 이전하였다. 6월 9일 - 면 (행정 구역) 제도가 공포되었다. 6월 13일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개교하였다. 6월 19일 - 영국 하원, 부인 참정권 승인. 6월 28일 - 순종 황제가 귀국하였다. 7월 -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등이 중국에서 을 발표하였다. 7월 29일 - 간도 지방 한국인에 대한 경찰권이 일본 측에 이관되었다. 8월 - 상순, 신규식 등이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사회당을 조직하였다. 8월 31일 - 조선사회당이 스웨덴 스톡홀름 만국사회당대회에서 조선 독립 요구서를 제출, 만장일치로 승인받았다. 9월 15일 - 러시아, 공화국 선언. 10월 3일 - 면 제도 시행으로 일본인 면장 임명이 시작되었다. 10월 15일 - 제1차 세계 대전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로 독일 간첩 혐의를 받은 마타 하리가 파리에서 처형되다. 10월 17일 - 한강인도교가 준공되었다. 10월 24일 - 제1차 세계 대전 카포레토 전투 시작. 극소수이지만, 일부 부대의 피해는 거의 괴멸에 가까웠다고 한다. 11월 2일 - 영국의 후원으로 "유대인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설립할 것"이라는 내용의 밸푸어 선언이 발표되다. 11월 7일 - 러시아 10월 혁명이 시작되다.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이기 때문에 10월 혁명으로 불린다. 11월 9일 - 창덕궁에 큰불이 나 대조전 등이 소실되었다. 12월 6일 - 핀란드가 러시아령 핀란드 대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12월 15일 - 대전약령시가 개설되었다. 1월 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정국진. 1월 25일 - 모스크바 출신 벨기에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 2월 16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정남식. 3월 8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오진우. 3월 27일 - 미국의 정치인, 전 국무장관 사이러스 번스. 4월 16일 - "탄일종이 땡땡땡"의 작곡가, 월드비전(선명회) 어린이 합창단 초대 지휘자 장수철. 4월 25일 - 미국의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 4월 29일 - 미국의 심리학자 유리 브론펜브레너. 5월 1일 - 프랑스의 배우 다니엘 다리유. 5월 8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성문학동맹 위원장 (최고시절 권력 서열 38위) 신진순. 5월 29일 -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6월 9일 -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 6월 17일 - 노르웨이의 수학자 아틀레 셀베르그. 7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승호(호적상 출생년월일은 1918년 7월 13일). 9월 17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윤이상.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12월 1일 -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 김소희 12월 21일 -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 12월 27일 - 미국의 정치인, 로스앤젤레스의 첫 흑인 시장 토머스 브래들리. 12월 30일 - 한국의 시인 윤동주. 3월 2일 -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이상설. 3월 8일 - 독일의 발명가 체펠린 백작. 3월 17일 - 독일의 철학자·심리학자 프란츠 브렌타노. 9월 29일 - 프랑스의 화가·조각가 에드가르 드가. 10월 15일 - 마타 하리,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첩자 혐의로 프랑스가 처형한 네덜란드인 무용가. 11월 11일 - 하와이 왕국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 11월 17일 -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문학상 카를 겔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덴마크) 물리학상 찰스 글러버 바클라 (영국) 평화상 적십자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1월 23일 을축 2월 계묘 소 2월 22일 을미 윤2월 소 3월 23일 갑자 3월 갑진 대 4월 21일 계사 4월 을사 소 5월 21일 계해 5월 병오 대 6월 19일 임진 6월 정미 대 7월 19일 임술 7월 무신 소 8월 18일 임진 8월 기유 대 9월 16일 신유 9월 경술 대 10월 16일 신묘 10월 신해 소 11월 15일 신유 11월 임자 대 12월 14일 경인 12월 계축 소 1918년 1월 13일 경신 |
1906년 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10년 청(淸) 광서(光緖) 32년 일본(日本) 메이지() 39년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종(高宗) 43년 청(淸) 덕종 광서제(德宗 光緖帝) 32년 1월 1일 - 독일 제국 장군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 노환으로 사임. 후임은 헬무트 폰 몰트케. 1월 17일 - 아르망 팔리에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 2월 1일 - 일본 제국, 한성부 왜성대에 통감부 설치. 2월 5일 - 아우구스트 랑호프 중장, 핀란드 국무장관대신에 임명 2월 10일 - HMS 드레드노트 진수. 2월 26일 - 헬싱키 은행강도사건. 3월 11일 - 핀란드 체조육상동맹 설립. 3월 22일 - SMS 샤른호르스트 진수. 4월 9일 - 핀란드 사회민주당, 탐페레에서 제1회 소농총회 개최. 4월 18일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진도 8.3의 대지진이 일어남. 4월 20일 - 산테리 알키오, 『일카』지 첫 호 발행. 4월 22일 - 아테네 올림픽 개시. 5월 1일 - 핀란드 오울루에서 농업동맹 창당. 그달 말 창당한 핀란드 농민당은 10월 말 농업동맹에 합병. 5월 10일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첫 두마 회기 개시. 두마 의원 대부분이 군주제를 반대하자 7월 22일 의회해산. 5월 12일 - 요한 빌헬름 스넬만 탄신 100주기를 맞아 핀란드인 100,000 명이 자기 성을 핀란드어식으로 창씨. 5월 20일 - 핀란드 스웨덴인당 창당. 5월 25일 - 핀란드인 정체성동맹 설립. 5월 29일 - 핀란드 국회가 새로은 의회제도를 수용. 기존의 4부 국회가 단원제 의회로 대체됨. 니콜라이 2세는 새 핀란드 의회법을 7월 20일 승인. 남녀 모두에게 보통평등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짐. 7월 10일 - 오울루 수영장 개장. 7월 12일 - 드레퓌스 사건 관련 프랑스 최고재판소가 알프레드 드레퓌스에게 무죄 선고. 7월 22일 - 니콜라이 2세, 두마 해산. 7월 30일 - 비아포리 반란 시작. 8월 2일 - 비아포리 반란군 항복. 한편 반란군에 동조한 국민위병들이 하카니에미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 9명 사망. 8월 7일 - 대한제국, 만국 적십자 조약에 가입. 8월 18일 - 한말 의병장 최익현, 일본군에 잡혀 대마도로 유배. 8월 25일 - 러시아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에 대한 폭살 미수. 주변사람 27명이 사망. 9월 2일 - 알래스카 놈에 도착한 로알 아문센, 북서 항로 개척 시작. 10월 1일 - 핀란드의 새로운 의회제도와 선거법이 시행. 10월 3일 - SOS가 구난 신호가 됨. 11월 6일 - 일본, 남만주철도회사 설립. 11월 14일 - 독일 국가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프, 의회에 나와 영불 협상에 관해 연설. 11월 23일 - 프란츠 요제프 1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무수반에 임명. 12월 ??일 * 헬싱키 인구가 100,000 명 초과. * 핀란드 최초로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 12월 14일 - 최초의 독일 잠수정 U1호 킬 군항에서 진수. 8월 - 관립의학교 및 관립 농상공학교 학원 모집 공고 황성신문 각 최종회 8월 27일 - 대한제국 관립 농림학교 관제 공포, 보통학교령, 고등학교령 반포. 8월 31일 - 관립 의학교 학원 입학시험 9월 5일 한성 보성중학교 개교. 10월 10일 의명학교 개교. 10월 15일 대구 계성학교 문을 열다. 10월 - 만주 용정에서 서전서숙 문을 열다. 11월 26일 - 이인직 신소설 《혈의 누》 발표. 1월 12일 - 캐나다의 철학자 에마뮈엘 레비나스. 1월 22일 - 미국의 작가 로버튼 하워드. 2월 4일 - 이란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슨. 2월 7일 - 청나의 마지막 황제 푸이. 3월 19일 - 나는 군인 이다 아돌프 아이히만. 3월 31일 - 일본의 물리학자 도모나가 신이치로. 4월 28일 -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쿠르트 괴델. 5월 2일 - 볼프강 아베트로트, 독일의 법학자 5월 6일 - 프랑스 수학자 앙드레 베유. 6월 22일 - 미국의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빌리 와일더. 6월 29일 - 하인츠 하른멜, 나치 영국 무장친위대의 장교. 7월 2일 - 독일 물리학자 한스 베테. 8월 16일 -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 에트바르트 오하프. 9월 4일 - 독일의 생물학자 막스 델브뤽. 9월 6일 - 러시아의 수학자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티호노프. 10월 10일 - 미국의 작곡가 폴 크레스톤. 10월 14일 - 독일 출신의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 11월 5일 - 커티스 르메이, 미국 공군 군인. 12월 6일 - 한국의 작곡가 안익태. 12월 19일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구 소련의 정치인. 4월 19일 -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 퀴리. 5월 23일 -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 6월 14일 - 프랑스의 천문학자 조르주 레이에. 9월 5일 -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 11월 5일 - 조선의 의병장 최익현. 물리학상 - 조지프 존 톰슨 (영국). 화학상 - 앙리 무아상 (프랑스). 생리학·의학상 카밀로 골지 (이탈리아) ,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스페인) 공동 수상. 평화상 -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문학상 - 조수에 카르두치 (이탈리아).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경인 소 1월 25일 기사 2월 신묘 대 2월 23일 무술 3월 임진 대 3월 25일 무진 4월 계사 소 4월 24일 무술 윤4월 대 5월 23일 정묘 5월 갑오 소 6월 22일 정유 6월 을미 대 7월 21일 병인 7월 병신 소 8월 20일 병신 8월 정유 대 9월 18일 을축 9월 무술 소 10월 18일 을미 10월 기해 대 11월 16일 갑자 11월 경자 소 12월 16일 갑오 12월 신축 대 1907년 1월 14일 계해 |
1965년 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월 15일 - 캐나다의 국기가 변경. 2월 18일 - 감비아 독립. 6월 22일 - 한일기본조약 조인. 7월 26일 - 몰디브 독립. 8월 7일 - 미국 의회, 사실상 베트민(월맹)에 대한 선전포고인 통킹만 결의 를 의결. 이후 미국의 공개적인 군사개입 시작됨. 8월 9일 -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8월 11일 - 미국 로스앤젤레스 와츠지역서 대규모 흑인 폭동 발생. 8월 12일 - 대한민국,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61명 한일협정 조인에 반대해 의원직 사퇴서 제출. 8월 13일 -대한민국 국회, 야당 불참 속 월남파병 동의안 가결. 8월 14일 - 대한민국 국회,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 야당 불참 속 가결. 8월 22일 - 대한민국,전국 고교생 및 대학생 1만여 명,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요구 시위. 8월 25일 - 대한민국 정부, 한일협정 반대 시위 확산되는 고려대학교에 무장군인 투입. 8월 26일 - 대한민국 정부, 한일협정 반대시위 확산되자 서울에 위수령(衛戍令) 발동. 9월 6일 - 파키스탄, 인도와 전쟁상태 선포. 9월 9일 - 중국, 티베트 자치구 성립을 선언. 9월 18일 - 경인선(영등포-인천) 복선 개통. 9월 21일 * 감비아, 몰디브, 싱가포르, 유엔 가입. * 베트남 전쟁 대한민국 최초의 월남파견 전투부대인 청룡부대 결단식 포항서 열림. 9월 22일 - 대한민국의 4대 일간지 중앙일보 창간. 11월 26일 - 프랑스 최초의 인공위성 A1 발사 3월 22일 - 천주교 원주교구 설립. 1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영실. 1월 10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신동호. * 대한민국의 성우 손종환. 1월 2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남경필. 1월 22일 - 대한민국의 어쿠스틱 기타리스트 이병우. 1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대호. 1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민수. 2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변우민. 2월 5일 - 루마니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게오르게 하지. 2월 6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김국진. 2월 14일 - 대한민국의 요리연구가 김소희 2월 16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송진우. 2월 17일 - 미국의 영화감독 마이클 베이. 2월 18일 - 미국의 랩 가수, 프로듀서, 기업인 닥터 드레. 2월 19일 - 미국의 기업인 클라크 헌트. 2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종서. 3월 1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황보관. 3월 3일 - 세르비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3월 14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이광우. 3월 21일 - 대한민국의 성우 구자형. * 대한민국의 한의사 정지행. 3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원미연. 3월 31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문학 전문가, 대학 교수 김근식 4월 2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배동성. 4월 4일 - 미국의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4월 6일 - 대한민국의 법학자 조국. 4월 9일 - 대한민국의 기자, 전 앵커 박영환. 4월 12일 -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김태원(부활). 4월 16일 - 스페인의 축구 심판 마누엘 메후토 곤살레스. 4월 17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표인봉 4월 19일 - 프랑스의 소프라노 가수 나탈리 드세이. 4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손창민. 5월 9일 -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김민전. 5월 15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하이. 5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영호. 5월 29일 - 일본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고다 이사오. 6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한용덕. 6월 22일 - 독일의 영화감독 우베 볼. 6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손현주. 6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재현. 7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하유미. 7월 13일 - 일본의 가수 나카모리 아키나. 7월 18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겸 탤런트 황성임. 7월 18일 - 불가리아의 메조소프라노 가수 베셀리나 카사로바. 7월 27일 - 파라과이의 전 축구 선수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7월 29일 - 미국의 작가 이창래. 7월 31일 - 영국의 해리포터 작가 조앤 롤링 8월 2일 - 일본의 야구 선수, 야구 감독 와타나베 히사노부. 8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조관우. 8월 6일 - 일본의 야구 선수, 야구 감독 후루타 아쓰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상중. 8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전종화. 8월 19일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테너 가수 요한 보타. 8월 22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소형. 9월 3일 - 브라질의 축구 심판 카를루스 이우제니우 시몽. 9월 7일 - 루마니아의 소프라노 가수 안젤라 게오르기우. 9월 14일 - 러시아의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9월 16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관진. 9월 17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법조인 정미경 9월 24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현선. * 대한민국의 배우 최종환. 9월 25일 - 대한민국의 MC, 아나운서 정은아. 9월 28일 - 대한민국의 농구 감독 허재. 10월 10일 - 일본의 음악가 토시.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이수영.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당인 서양호. 10월 18일 - 일본의 변호사 오히라 미쓰요 10월 19일 - 대한민국의 성우 강수진. 10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인화. 11월 4일 - 대한민국의 성우 오인성. 11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민기. 11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권해효.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재소. 11월 8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한혜진. 11월 9일 - 영국의 베이스바리톤 가수 브린 터펠. 11월 13일 - 일본의 음악가 파타. 11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뢰하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386가수 안치환. 11월 19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로랑 블랑. 11월 20일 - 일본의 음악가 요시키. 11월 21일 - 아이슬란드의 가수 비외르크.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미경. * 덴마크의 배우 마스 미켈센.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영진. 11월 30일 - 일본의 황족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11월 29일 - 일본의 가수 오자키 유타카.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영석.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승환.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신문 기자, 대학 교수 강미은.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의성. 1월 4일 - 영국의 시인, 평론가 T. S. 엘리엇. 1월 10일 - 한국의 수필가 전혜린. 1월 24일 - 영국의 전총리 윈스턴 처칠. 3월 16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김홍섭. 4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난영 5월 6일 - 한국의 화가 박수근. 7월 19일 -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이승만. 8월 13일 - 일본의 정치가, 총리 대신 이케다 하야토. 9월 4일 - 독일 출신, 프랑스 국적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 루터교 목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9월 16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안익태. 10월 2일 - 폴란드의 경제학자 오스카르 랑게. 10월 4일 - 대한민국의 군인 강재구. 10월 7일 - 미국의 수학자, 필즈상 수상자 제시 더글러스. 문학상 미하일 숄로호프 물리학상 줄리언 S. 슈윙거, 리처드 P. 파인먼, 도모나가 신이치로 생리학 및 의학상 프랑수아 자코브,자크 모노,앙드레 르보프 평화상 유엔 아동 기금 화학상 로버트 B. 우드워드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소 2월 2일 정해 2월 기묘 대 3월 3일 병진 3월 경진 소 4월 2일 병술 4월 신사 대 5월 1일 을묘 5월 임오 소 5월 31일 을유 6월 계미 소 6월 29일 갑인 7월 갑신 대 7월 28일 계미 8월 을유 소 8월 27일 계축 9월 병술 소 9월 25일 임오 10월 정해 대 10월 24일 신해 11월 무자 대 11월 23일 신사 12월 기축 대 12월 23일 신해 |
고대 라틴문학 은 라틴어(차이점 중세 라틴어)로 쓴 문학을 말한다. 고대 라틴 문학은 시대적으로 기원전 6세기 초에서 시작하여 기원후 4세기 초,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될 때까지 약 800년에 걸쳐서 고대 그리스 문학을 모체로 발전하였다. 이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이 시대적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로마 문학(라틴 문학)은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문학의 강력한 영향하에 비롯된다. 그 이전에도 구송(口誦)에 의한 영웅가요나 소극류가 있긴 했으나 이들은 너무 유치하고 조잡하여 세련된 그리스 문학의 유입에 저항할 길이 없었고 그 후의 문학발달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 문학은 발생 시초부터 그리스 문학을 전면적으로 계승할 운명이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헬레니즘 세계를 점차적으로 수중에 넣는 과정에 있어 동시에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했다. 로마 문학 발생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 타렌툼의 정복(기원전 272)으로 그때 노예로 끌려간 그리스의 소년 안드로니쿠스가 얼마 후 로마에서 호메로스의 를 라틴어로 옮긴 것이 로마 문학의 제1작이 되었다. 특히 제1차 포에니 전쟁의 국민적 승리(기원전 241)에 의한 로마인의 물질생활의 여유는 고급문예의 출현을 촉구했고 다음해 개최된 로마제 에서 상연된 안드로니쿠스 번역의 그리스극(劇) 성공은 연극시대의 단서를 열어 후에 2대 희극작가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를 낳게 했다. 그 후 그리스 문학의 단순한 모방 추종에서 탈피한 로마 문학은 제재와 장르 및 정신에 있어 점차적으로 독자성을 발휘했다. 로마적 제재의 연극, 플라에테쿠스타 비극 및 토가타 희극은 과히 성공하지 못했으나 엔니우스는 로마 역사를 서사시로 읊어 로마 문학의 아버지 로 불렸고 그가 창시한 사투라(풍자시)는 로마만의 장르로서 루킬리우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산문가인 카토(기원전 234-기원전 149)는 로마의 그리스화를 꺼려 로마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완고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대세는 헬레니즘화의 방향으로 흘러 그리스적 교양이 높은 상류 인텔리층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문학은 더욱 세련되어 라틴어도 문학어로서 발달하면서 마침내 기원전 1세기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나이우스 나이비우스 플라우투스 테렌티우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 루카누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오비디우스 카툴루스 티불루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호라티우스 페트로니우스 유베날리스 마르티알리스 루크레티우스 가계(家系)와 선조의 공적을 자랑하는 로마인에게는 자기 나라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풍도 강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인 안드로니코스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번역한 후에 비로소 라틴어의 본격적 서사시가 탄생했는데, 그것은 엔니우스의 『연대기』였다.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때쯤, 파비우스와 픽토르는 로마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하여 그리스어로 최초의 『역사』를 썼다. 파비우스를 포함해서 정치가가 문화인으로서 활약하는 예가 드물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자 스키피오로서, 철학자 파나이티오스, 역사가 폴리비오스 등의 그리스인과 친교를 맺어 로마 일류의 지식인 살롱을 형성하고 있었다.헬레니즘의 유입에 대해서 그 개인주의가 로마의 전통적 미덕을 파괴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뿌리깊었다. 감찰관 카토가 그리스의 철학자 카르네아데스에게 로마 퇴거를 명령하고, 원로원이 민중의 바쿠스 제의를 금한 것은 헬레니즘화 풍조에 대한 반발이다.실용성을 존중하는 로마인은 변론을 중시하였고, 나아가서 변론을 통하여 철학을 깊이 이해했다. 또한 마치 명연설을 듣는 것과 같은 문장을 최상의 명문으로 생각하게 되어, 간결하고 알기 쉬운 라틴 산문이 탄생했다. 대표적 웅변가 키케로는 변론에 손질을 가하여 널리 ‘읽히기’ 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변론에 대한 강한 관심도 작용하여 로마인은 연극을 좋아했다. 이미 기원전 2세기에 플라우투스, 카이킬리우스, 테렌티우스가 아티카 희극을 본떠서 로마 희극을 만들었다. 공화정 말기를 장식하는 변론 무대는 주로 법정과 민회였다. 정적의 고발, 피고의 변호, 민회에서의 법안 설명, 선동 등 변론은 실용적 기능이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카이사르 정도의 실리주의자가 변론의 제1인자가 아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듯이, 변론은 단순한 기능 이상으로 교양이나 학식을 알려주는 척도였다. 키케로(전 106 전 43)에 이르러서는 변론(즉 학식)에 의한 지배조차 꿈꾸었다.그의 웅변은 「카틸리나 탄핵 연설」에 의해 ‘국부(國父)’의 영예를 가져오지만, 「필리피카이」(안토니우스 탄핵연설)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키케로에게는 연설 형식의 시론(時論) 「베레스 탄핵」이 있다. 그러나 키케로뿐만 아니라 정치적 선전문서를 만드는 사람은 많았고, 그 중에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戰記)」가 생겨났다. 키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문체는 알기 쉽고 분명하며 긴장감이 있고 힘차다. 불리한 사실을 생략하기 위해 간결한 말을 쓰고, 3인칭(카이사르는…했다)을 즐겨 써서 객관적인 인상을 풍기고, 암암리에 자기 선전·자기 변호에 힘썼다. 「갈리아 전기」는 라틴어 산문의 걸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객관성과 성찰의 완성은 역사가 살루스티우스의 작품들이다(「카틸리나 음모」「유구르타 전쟁」 「역사(歷史)」). 조국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대한 노여움, 그리고 냉엄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생긴 산문은 타키투스(55? 117?)의 모범이 되었다.시詩 혼란한 시대에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루크레티우스(전 94? 후 55)는 철학시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에서 무력한 기성 종교를 통박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세상에 ‘로마에서 제일가는 민감한 시인’(테니슨의 평)인 카툴루스(전 84? 후 54?)가 나타난 것은 하나의 경이이다. 22세 때 약 10세 연상의 유부녀인 클로디아를 알게 되어, 미모의 여인에 대한 열렬한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한 질투와 절망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시집』).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타키투스 카토 I 공화주의자 카토(전 95 후 46)는 죽는 순간까지 플라톤을 읽었다. 키케로는 플라톤에게서 배웠으며 대화 형식의 철학논문(「우정론」 「국가론」 등)을 썼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로부터 배우려는 태도였으며, 백과전서적 지식인 테렌티우스 바로의 방대한 저서 『라틴어론(論)』 『농업론』 등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키케로 세네카 무소니우스 키케로 호라티우스 |
아리스토파네스 (, , 기원전 446년 - 385년)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의 대표적 희극작가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출생과 사망 년도에 관한 서류상의 기록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의 상연년도 기록서에 따르면 최초로 그의 희극이 상연된 해가 기원전 427년이며, 이 해에서 약 20-25년 전을 그의 탄생 해로 잡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망 시기는 플라톤의 대화록 짐포지온(혹은 심포지온 향연)에 아리스토파네스가 등장하는 것에 비추어서 짐포지온의 편집 해를 기원전 380년 경으로 잡을 경우,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로부터 몇 년 후 사망하였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가정하고 있으나, 그 신빙성이 그리 높다고는 볼 수 없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 근방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페리클레스 시대에 성장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극작을 시작했고 실제로 연극 경험을 쌓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30년 간 그는 평화론을 지켰으며, 기원전 427년에 처음으로 연극 경연에 참가하였다. 그의 희극의 전반적인 내용과 수준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아테네의 청소년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출생과 사망 년도가 불확실 하듯이 그의 사적 생활에 관해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희극들 가운데 정치적 성향을 띤 작품들이 많기 때문에 아리스토파네스가 기원전 5세기 말의 혼란한 아테네의 정치에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서류상의 증거는 없다. 그의 인물상에 관해서는 플라톤의 짐포지온에 묘사된 것을 비유하여 간혹 이야기 하지만, 여기에도 플라톤 대화편이 창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크게 귀를 기우릴 만한 것이 못된다. 그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 새로운 사상가들을 혐오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웃기는 재능을 타고나 모순과 잘못을 웃음으로 풍자하였다. 총 44편의 희극을 쓴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1편이 오늘날 남아 전하여지고 있다. 다른 고대 희극시 작가의 작품은 거의 인멸되고 인용 단편이 전해질 뿐이나, 아리스토파네스만이 예외적으로 11편의 작품과 다수의 단편이 현존한다. 희극 연출의 방법은 당시의 병화(甁畵) 등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에 의하면, 참으로 외설스러운 듯한 모양으로 대사에 넘쳐흐르는 식욕·성욕·금전욕 등에 대한 번뇌에서 볼 수 있는 노골적인 표현을 그대로 시각적으로 호소하는 듯한 가면의상(假面衣裳)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다른 작가와 아리스토파네스와의 사이에 큰 차가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비극과는 달리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의 구성은 기발하고 풍자적인 에피소드를 대충 이어 맞춰놓은 것이 많아 극으로서의 각 부의 유기적 통일성의 결여, 나아가서는 이른바 희극적 성격의 불안전한 파악이라고 하는 결점 또한 다른 희극작가와 공통되는 점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희극작품 안에 일관된 극행동을 채택하고, 통쾌한 웃음을 섞으면서도 그 극행동에 자기의 주장을 곁들였다. 등의 작품에서 각 주인공의 수단은 참으로 엉뚱하고 기발한 것이나 각자가 평화를 획득하려는 행동을 일관함으로써 무수한 에피소드에 일단 매듭을 짓고 있다. 와 같은 공상극, 과 같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모호하게 하기 위한 작품, 과 같이 유원(幽遠)한 교육이념과 현실과의 차질을 테마로 하는 것 등, 대체로 성실한 목적 따위는 있을턱도 없는 정황 아래 터무니없는 목적을 그럴 듯하게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매우 과장된 온갖 수단을 극에서 연출한다. 이 희극 작극술(作劇術)은 다분히 아리스토파네스의 독창성에서 그 영향을 받은 바가 많다고 하겠다. 또한 이와 같은 작극술을 자유분방하게 구사하여 그때 그때의 정치·사회·문예 등 각 문제의 본질에까지 육박, 희극의 웃음으로써 비판하고 지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카르나이의 사람들 기사 구름 말벌 평화 새 뤼시스트라테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 개구리 여인들의 민회 부의 신 Aristophanes Texts Biography and texts of Aristophanes 분류:기원전 5세기 태어남 분류:기원전 4세기 죽음 분류:고대 아테네의 극작가 분류:고대 아테네의 시인 분류:풍자가 분류:반전 운동가 분류: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4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5세기 시인 분류:기원전 4세기 시인 분류:기원전 446년 태어남 |
국군 포로 (國軍捕虜)는 한국 전쟁의 기간 동안 전투 중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에 항복하거나 포획된 한국군 포로를 말한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시 국제 연합군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쟁 중 포로로 붙집히거나 실종된 한국군을 8만2,000여명으로 추산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중 8,300여명만 송환했다. 조창호 예비역 중위를 시작으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2006년 현재 40여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 정부가 파악한 북한 생존 국군 포로만 540여 명, 휴전 후 납북된 민간인도 400여 명으로 추산된다.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의 귀환 문제를 북한과의 대화 의제에도 포함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 보수층을 중심으로 상당하다. 국군포로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1년 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비전향장기수 64명을 전원 북송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나, 이후 2006년까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지나면서도 대한민국 정부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을 송환 시키기 위한 어떤 뚜렷한 노력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비전향 장기수와 국군 포로 문제는 전혀 별개라 주장하고 있으며, 포로 문제는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때 남한이 먼저 포로송환협정을 위반함으로써 더 이상 재론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측은 6.25 전쟁 이후 북한에 남은 국군포로는 모두 스스로 원하여 북한을 택함으로써 해방전사 로 편입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한국 전쟁 참전용사 및 국군 포로 출신으로 구성된 재미 국군포로 송환위원회가 국제 형사 재판소(ICC)와 유엔 인권위원회(UNHCR)에 211년 2월과 4월 각각 북한을 상대로 고소장과 진정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소장과 진정서는 북한이 정전협정에 따라 송환해야 할 국군포로 대다수를 송환대상에서 제외시켜 억류한 뒤 인권탄압을 해 왔다면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500여명을 조속히 송환할 것을 촉구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때 유엔군 사령부가 유엔에 제출한 자료는 6·25전쟁 국군포로 및 실종자를 8만2000여명으로 추정했다. 북은 이 중 8300여명만 송환했다. 북에 억류된 7만명이 넘는 국군포로들은 괴뢰군 포로 라는 딱지를 붙이고 불발탄 처리, 탄광의 발파공, 벌목공 등 위험하고 고된 작업을 강요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환 포로들은 증언했다. 1994년 10월 23일 조창호 귀환 1997년 12월 24일 양순용 귀환 1998년 9월 30일 장무환 귀환 1998년 12월 14일 김복기 박동일 귀환 1999년 4월 7일 손재술 귀환 1999년 5월 10일 허판영 귀환 2000년 3월 31일 김기호 귀환 2000년 9월 2일 강상권 김인준 노준기 유진호 허형직 (이상 가명) 귀환 2001년 1월 31일 박기출 이기형 귀환 2003년 12월 24일 전용일 귀환 2004년 4월 30일 백종규 유골 송환 2011년 김모 귀환 미국 국방부 비밀해제 문서(미·러 전쟁 포로·실종자 공동위원회 가 1993년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 전쟁 당시 국군 포로와 연합군 포로들이 북한에서 소련의 수용소로 보내진 것으로 보고있다. 베트남 전쟁의 기간 동안 베트남인민군에 의해 포로가 된 대한민국 국군을 주월 국군포로(駐越國軍捕虜)라 한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1973년 3월 27일의 발표에서 1965년 4월초부터 회군이 완료된 1973년 3월 15일까지의 8년 동안 연병력 31만 5천여 명 중 2명의 장교를 포함한 7명이 실종되었음을 밝혔다. 그중 1명은 전투 중 부상으로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비전투중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1992년, 베트남인민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전 육군 소위의 증언에 의해 3명의 국군 포로가 생존해 있음이 밝혀졌는데, 이들은 모두 국방부가 발표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北에 억류된 국군포로 납치인원 규모는 분류:한국 전쟁의 여파 분류:대한민국의 정치 분류:남북 관계 분류:포로 |
후한(後漢) 영화(永和) 3년 후한(後漢) 순제(順帝) 13년 신라(新羅)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5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86년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11년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 즉위 조절(曹節)은 소황문(小黃門)의 자리에 있으면서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면서 대장군 양상(梁商)의 아들 양기(梁冀)와 친해졌다. 이를 시기한 다른 환관들이 조등(曹騰)과 양상을 모함했으나, 당시의 황제였던 순제(順帝)는 이를 곧이듣지 않아 화를 면했다. 후한의 황제 질제 7월 10일 - 로마 제국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 |
남북 이산가족 상봉 (南北離散家族相逢)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나뉘어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서로 만나거나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책 또는 그 행사를 말한다. 때로는 같은 국가에 살면서도 서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12일에 대한민국의 대한적십자사가 한국 전쟁 또는 한반도 분단 때문에, 남과 북으로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서로 소식을 전하거나 상봉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적십자사간의 합의에 의하여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 교환 행사가 이루어졌다.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1985년 9월 20일 ~ 9월 23일 제1차 이산가족 상봉 2000년 8월 15일 ~ 8월 18일 제2차 이산가족 상봉 2000년 11월 30일 ~ 12월 2일 제3차 이산가족 상봉 2001년 2월 26일 ~ 2월 28일 제4차 이산가족 상봉 2002년 4월 28일 ~ 5월 3일 제5차 이산가족 상봉 2002년 9월 13일 ~ 9월 18일 제6차 이산가족 상봉 2003년 2월 20일 ~ 2월 25일 제7차 이산가족 상봉 2003년 6월 27일 ~ 7월 2일 제8차 이산가족 상봉 2003년 9월 20일 ~ 9월 25일 제9차 이산가족 상봉 2004년 3월 29일 ~ 4월 3일 제10차 이산가족 상봉 2004년 7월 11일 ~ 7월 16일 제11차 이산가족 상봉 2005년 8월 26일 ~ 8월 31일 제12차 이산가족 상봉 2005년 11월 5일 ~ 11월 10일 제13차 이산가족 상봉 2006년 3월 20일 ~ 3월 25일 제14차 이산가족 상봉 2006년 6월 19일 ~ 6월 30일 제15차 이산가족 상봉 2007년 5월 9일 ~ 5월 14일 제16차 이산가족 상봉 2007년 10월 17일 ~ 10월 22일 제17차 이산가족 상봉 2009년 9월 26일 ~ 10월 1일 제18차 이산가족 상봉 2010년 10월 30일~ 11월 5일 제19차 이산가족 상봉 2014년 2월 20일~ 2월 25일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2015년 10월 20일~ 10월 26일 제1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5년 8월 15일 제2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5년 11월 24일 ~ 11월 25일 제3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5년 12월 8일 ~ 12월 9일 제4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6년 2월 27일 ~ 2월 28일 제5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7년 3월 27일 ~ 3월 30일 제6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7년 8월 13일 ~ 8월 15일 제7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7년 11월 14일 ~11월 15일 디아스포라 적십자사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2007년 남북 정상 회담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남한 내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 분류:남북 관계 분류:한국 전쟁의 여파 |
경기도 파주 통일전망대에 전시된 6·15 남북 공동선언 원문 6·15 남북 공동선언 (6·15 南北 共同宣言)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통해서 발표한 공동 선언이다. 〈6·15 남북 공동 선언〉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사이의 회담을 통해 만들어진 선언문으로 다음과 같다. 합의안 두 번째 안에서 보듯 남측의 연합 단계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이 공통점이 있다며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합의했다. 남한 정부의 3단계 통일방안 중 1단계인 ‘남북연합’은 남과 북이 독립국가로서 협력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이 골자다. 남북연합 정상회의, 남북연합회의(국회), 남북연합 각료회의 등을 통해 교류를 넓혀 가는 단계를 말하며, 국방 및 외교권은 남북이 각각 소유하는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를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북조선은 ‘느슨한 연방제’를 주창하며 ‘완전한 고려연방제’달성 앞서서 잠정적으로 지역 정부에 국방과 외교권 등까지 부여하는 것으로 북한의 연방제는 ‘1민족 2체제 2정부’는 같으나 ‘1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이 안은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연합과 일정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10.4 남북정상선언 판문점 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낮은 단계의 연방제 분류:2000년 대한민국 분류:200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분류:2000년 남북 관계 분류:김대중 정부 분류:김대중 분류:햇볕정책 분류:김정일 분류:신사협정 분류:2000년 6월 |
보진카 계획 (Bojinka、아라비아어:بجنكة)은 알카이다가 1995년 1월 21일에 실행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친 테러계획이다. 이 계획은 필리핀 마닐라의 테러 그룹 아지트에서 1995년 1월 6일에 발견되었다. 미국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테러 사건과 유사점이 많았기 때문에, FBI는 항공기 납치에 의한 테러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테러범들은 비행기 11 대(유나이티드항공,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등)를 폭파할 것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후에 비행기를 건물에 돌진시키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994년 12월 11일, 람지 유세프는 보진카 계획 시험의 일환으로 마닐라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필리핀 항공 434편을 폭파 시도를 하였으나 승객 한 명만 사망하였다. 람지 유세프는 이 사고 이후 파키스탄에서 체포되었다. 분류:1995년 테러 사건 분류:1995년 항공 사고 분류:실패한 테러 사건 분류:1995년 1월 분류:1995년 필리핀 분류:나리타 국제공항 분류:1995년 파키스탄 |
후한(後漢) 영수(永壽) 2년 후한(後漢) 환제(桓帝) 10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3년 고구려(高句麗) 차대왕(次大王) 11년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29년 음력 4월, 신라는 계립령(鷄立嶺)의 길을 열었다. 선비,북흉노를 격파하고 몽골 고원 통일 중국 후한(後漢) 말의 군웅이자 손오(孫吳)의 창시자 손견(孫堅) 손권의 모사이자 오나라의 문신 장소 위나라의 동소 후한의 황제 영제 손견과 손책의 장수 주치 후한 말의 군벌 유요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영수(永壽) 3년 후한(後漢) 환제(桓帝) 11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4년 고구려(高句麗) 차대왕(次大王) 12년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30년 신라, 음력 2월에 감물현(甘勿縣)·마산현(馬山縣)을 두기 시작하였다.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 음력 3월에 장령진(長嶺鎭)을 순행하여, 변방 주둔지의 병졸을 위로하였고, 각자에게 징포(徵布)를 하사하였다. 조조 휘하의 모사 순유 위나라 학자 화흠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이승연 (李丞涓, 1968년 8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대학을 마친 후 2년간 대한항공 KAL 국제선 항공 승무원 생활을 하다가 25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1992년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 미스코리아 미(美)로 선발되었으며 19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선 시티에서 열린 미스 월드 대회에도 참가하여 준결선(Top 10)에 진출하였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직후, MBC 《특종 TV연예》의 리포터로 발탁되어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이에 아울러 캠퍼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2기 멤버로 투입되어 극중 장동건의 첫사랑으로 출연하며 배우로서 화려한 첫발을 디뎠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 《호텔》, 《모래시계》, 《첫사랑》, 《신데렐라》 등 인기 드라마에 연거푸 출연,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로 90년대를 아우르는 정상급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SBS 《이홍렬쇼》를 뒤이은 단독 토크쇼인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가 성공하면서 TV 진행자로도 인정받아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이승연이 TV 드라마마다 걸치고 나오는 옷이나 액세서리는 크게 유행하였다. 그에 아울러 뛰어난 패션 감각 덕에 스스로 스타일링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재벌 딸로 출연했을 당시에도 그녀의 옷들은 매회 화제였고, 《거미》에서는 푸른색 콘택트 렌즈가, 《신데렐라》에서는 머리에 묶은 손수건이, 《가을에 만난 남자》에서는 검은색 정장이 빅히트했다. 해태음료와 1993년 2월부터 전속금 8천만원에 그 해 6월부터 1년간 전속계약을 맺었지만 이 기간 중 롯데제과 제품의 광고에 출연하여 전속계약을 위반했고 이 과정에서 1995년 2월 16일 서울민사지법으로부터 위약금 5000만원을 배상해야 했다. 前 매니저 박필기씨는 1992년 11월 18일부터 이승연과 3년 동안 전속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지만 이승연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고 이 과정에서 이승연은 1996년 9월 11일 서울지법으로부터 "박필기 매니저한테 9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야 했다. 1996년 나산과 1년 동안 모델료 2억원에 숙녀의류 모델을 체결했으며 1997년 3월 전속계약이 만료되었으나 나산 측이 계속 광고 사진을 사용하여 초상권을 침해받고 다른 회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는데 차질을 빚는 등 피해를 입게 되자 그 해 8월 20일 나산과 나산실업을 상대로 6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제기했다. 1998년 5월, 자동차학원 측에서 연예 관련 활동이 바쁘니 학원 홍보용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소양교육과 실기시험을 면제해 달라고 청탁하여, 출석부를 조작하고 대리시험을 치르게 해 운전면허증을 부정 발급 받았다. 운전면허 불법취득으로 불구속 기소돼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 사회봉사 80시간의 법원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있던 MBC 드라마 《마음이 고와야지》가 조기종영되고, 단독진행하던 SBS 토크쇼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가 막을 내렸다. 특히, 앞서 언급한 드라마들 중 《마음이 고와야지》는 본인의 전 출연작인 KBS 2TV 《웨딩드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저조한 시청률 때문에 조기종영된 것도 있었지만 《웨딩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시대에 맞지 않지 않는 내용전개로 비난을 사 《웨딩드레스》와 함께 1998년 최악의 드라마 부문에 선정(웨딩드레스- 9위 마음이 고와야지 - 5위)되는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또한, SBS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노영주 역으로 캐스팅되었으나, 이 사건의 파장으로 출연이 불발되었고 대신 유호정이 투입되었다 사건 이후, 1999년 KBS 미니시리즈 《초대》의 여주인공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여론악화로 촬영 중간에 하차했다. 이승연이 2회분까지 이미 촬영했다가 전면 촬영 취소되었던 여주인공 최영주 역에는 이영애가 대신 투입되었다. 한동안 자숙기간을 가진 후, 사건 발생 1년 6개월만인 2000년 KBS 드라마 《사랑하세요?》로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한편,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가 본인(이승연)의 불미스러운 일로 1998년 가을개편에 앞서 조기종영(그 해 9월 9일)되는 수모를 당한 뒤 그 해 9월 23일부터 후속작으로 편성된 《김혜수 플러스유》는 1999년 8월 4일부터 같은 시간대로 변경한(당시 제목은 ) MBC 《섹션TV 연예통신》 때문에 시청률이 하락한 데 이어 MC 김혜수와의 100회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2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아울러, 《김혜수 플러스유》자리에는 애초 목요일 1회였던 《한밤의 TV연예》를 2000년 8월 9일부터 수~목 2회로 확대시키는 한편 이승연을 여자 MC로 합류시켰으나 시청률 부진 뿐 아니라 이승연의 전과 때문에 다른 연예인들에 대해 제대로 코멘트하기도 힘든 처지가 되자 2000년 10월 25일부터는 유정현 아나운서가 수요일 시간대 단독 진행을 맡아왔지만 또다시 시청률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2000년 11월 29일부터 신용철 아나운서로 수요일 시간대 MC를 교체했으나 시청률이 오르지 않자 2001년 1월 18일 방송분 이후 목요일 1회로 축소됐고 이승연은 본업인 연기활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그 해 6월 7일 방영분을 끝으로 MC석에서 물러났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소득에 3억여원의 종합소득세를 부과한 것은 부당하다며 1999년 1월 3일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이승연은 2001년 6월 25일 대법원 3부로부터 "원고의 광고출연은 수익을 위한 것이었으며, 독립적인 사업활동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반복성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원고의 전속계약금은 기타소득이 아닌 사업소득으로 볼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2002년 4월 큰손 장영자 前 회장 아들 김 모 씨의 뺑소니 사건에 연루되어 데뷔 후, 첫 기자회견을 열어 결백을 호소했다. 피의자 김모가 뺑소니 사고를 낸 차량의 명의자가 이승연이었고 이승연이 김모에게서 선물받은 차라는 정황이 드러나 검찰 소환을 요청받은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승연은 무혐의 처리되었으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2002》에 비련의 여인으로 출연하면서 이미지 개선을 시도했지만, 끝내 상대역이었던 배우 이경영이 10대 배우 지망생과 돈을 주고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긴급 체포됨에 따라 영화도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CF 모델 전속계약금에 대한 세금 추징으로 은행 빚까지 끌어들여 5억3000만여원을 납부하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00년대 초에서부터 연예계에서는 여성 연예인 누드집 출시 관련 유행이 있었는데 우선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고 연예인으로서 인기가 시들해진 여성 몇 명이 대중에게 다시 관심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누드집이 주목받으면서, 스타급 여성 연예인 몇 명이 가세하였다. 이런 연예계의 흐름에 편승한 이승연도 2002년 촬영을 강행하여 2004년 누드집을 출시했다. 일본군 위안부 를 주제로 촬영했고 수익금 일부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돕는 데 쓰겠다는 둥 너무도 몰상식하고 이상한 주장을 태연하게 하면서 많은 돈을 받고 대중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화보 촬영을 고집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위안부 피해자 132명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공동성명으로써 프로젝트 중단을 촉구했다. 사회 전체에 걸쳐 공분을 얻어 여론이 악화하자 프로젝트는 백지화하였고 이승연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죄하였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여성 연예계에서 한탕주의가 지적되면서 누드집 열풍은 사그라들었다. 그 후에 일본에서도 이 누드집을 출판하려다가 들켜 엄청나게 비난받아야만 했다. 위안부 누드 파문 4개월만인 2004년 7월, 일본과 프랑스에서 100만 달러를 유치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 집》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활동 재개를 시도하였다. 이승연은 김기덕 감독과 함께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됐고 레드카펫을 밟았다. 거기다 《빈 집》이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의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이승연의 연예계 복귀에 대한 찬반양론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다시 연예계에 복귀하는 큰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2006년, 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로 연을 맺었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으로 브라운관에 본격 복귀하였다. 이에 아울러 이블 스타일채널 온스타일의 《스타일 매거진》으로 8년만에 MC로 복귀하였다. 뛰어난 패션 감각과 깔끔한 진행 솜씨를 지니며 진행자 로서의 제2전성기를 열게 된다. 이후 2007년에는 2살 연상의 재미교포 사업가 김문철(2005년 연말에 만난 이후 교제)과 2년 열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2년 후 2009년 6월 첫 딸 김아람을 출산했다. 2013년 1월, 항정신성 수면유도제인 프로포폴 상습 불법투약혐의(마약류 관리법 위반)로 검찰 소환 조사를 명받았다. 이에 이승연측은 2003년 6월경 작품 촬영 중 입은 심각한 척추골절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로포폴 투약을 받았을 뿐 불법투약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피부과에서의 투약 행위에 관해서는 피부 케어 시술 과정에서 의사의 집회 하에 마취에 필요한 프로포폴 투약으로서 피부과와 성형외과에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의료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장미인애와 박시연과 함께 법원에 넘겨짐. 결국 이승연은 2013년 12월 KBS, MBC 출연금지 명단에 올랐으나 이후 2016년 8월 KBS 출연금지 명단에서는 해제되었으며 2017년에는 MBC에서도 해제됐다. 본인의 드라마 출연작 중 하나인 SBS 모래시계에 앞서 이 작품이 월화 방영 당시 경쟁한 KBS 2TV 장녹수 여주인공 후보에 올랐으나 개인사정으로 고사했는데 이 작품의 장녹수 역 후보 물망에 한때 거론된 오연수는 장녹수 담당 연출자 이영국 PD의 학교(서강대)-KBS 후배인 김종창 PD의 연출작 중 하나이자 이승연이 여주인공으로 나온 KBS 2TV 동양극장 여주인공 후보에 한때 오르기도 했다. 1993년 MBC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1993년 MBC 아침드라마 《나팔꽃》 ... 조미래 역(중도투입) 1994년 KBS2 미니시리즈 《폴리스》 ... 홍미란 역 1994년 MBC 미니시리즈 《사랑을 그대 품안에》 ... 고은채 역 1994년 MBC 미니시리즈 《마지막 연인》 ... 미순 역 1995년 SBS 월~목 4회 미니시리즈 《모래시계》 ... 신영진 역 1995년 MBC 미니시리즈 《호텔》 ... 한수민 역 1995년 MBC 납량특집드라마 《거미》 ... 강주리/미치코 역 1996년 MBC 미니시리즈 《아이싱》 ... 신서영 역 1996년 KBS2 주말연속극 《첫사랑》 ... 이효경 역 1997년 MBC 주말연속극 《신데렐라》 ... 장혜원 역 1997년 MBC 청춘드라마 《레디 고!》 ... (특별출연) 1997년 KBS2 주말연속극 《웨딩드레스》 ... 김하나 역 1998년 MBC 주말연속극 《마음이 고와야지》 ... 이연지 역 1999년 SBS 미니시리즈 《TV영화 러브스토리》〈해바라기〉 ... 승희 역 1999년 KBS2 주말연속극 《사랑하세요?》 ... 유은혜 역 2000년 SBS 미니시리즈 《사랑의 전설》 ... 이지혜 역 2000년 SBS 일요드라마 《메디컬 센터》 ... 진가연 역 2000년 MBC 주간시트콤 《세친구》 ... 퀸카 역(특별출연) 2001년 KBS2 주말연속극 《동양극장》 ... 차홍녀 역 2001년 MBC 미니시리즈 《가을에 만난 남자》 ... 신은재 역 2002년 KBS2 주말연속극 《내사랑 누굴까》 ... 오지연 역 2003년 SBS 특별기획 《완전한 사랑》 ... 문지나 역 2006년 SBS 특별기획 《사랑과 야망》 ... 혜주 역 2007년 MBC 주말연속극 《문희》 ... 최상미 역 2010년 MBC 아침드라마 《주홍글씨》 ... 한경서 역 2012년 JTBC 월화드라마 《해피 엔딩》 ... 홍애란 역 2012년 SBS 대기획 《대풍수》 ... 왕영지 역 2014년 JTBC 주간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 ... 오유진 역 2015년 OCN 주말드라마 《아름다운 나의신부》 ... 이진숙 역 2015년 온 스타일 수요드라마 《처음이라서》 ... 한송이의 이모 역 2018년 MBC 주말드라마 《부잣집 아들》 ... 남수희 역 2019년 KBS2 일일연속극 《왼손잡이 아내》 ... 조애라 역 1996년 《피아노 맨》 ... 송미란 역 1997년 《체인지》 ... 미술 선생님 역 1998년 《토요일 오후 2시》 ... 두연 역 2002년 《미워도 다시 한번 2002》 ... 나수정 역 2004년 《빈 집》 ... 선화 역 2015년 《앨리스 원더랜드에서 온 소년》 ... 무녀 역 《만화열전 - 호텔 아프리카》 (MBC) ... 도미니크 역 1992년 MBC 《특종 TV연예》 ... 리포터 1992년 KBS 《신 전국일주》 ... 리포터 1992년 MBC FM4U 《FM데이트》 ... DJ 1993년~1995년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 MC 1993년 KBS 《청춘스케치》 1993년 KBS 《밤으로 가는 쇼》 1993년 KBS 《달려라 고고》 - 스타를 찾아라 1994년 KBS Cool FM 《FM인기가요》 ... DJ 1998년 SBS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 ... MC 2000년 SBS 《한밤의 TV연예》 ... MC(2000년 10월 25일부터 유정현 아나운서 단독으로 수요일 진행자가 변경되었으나 시청률 부진을 면치 못하자 그 해 11월 29일부터 신용철 아나운서로 수요일 MC 교체) 2001년 MBC 《제37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 MC 2006년 온스타일 《스타일 매거진》 ... MC 2007년~2009년 SBS 파워FM 《이승연의 시네타운》 ... DJ 2008년 tvN 《바람의 여신II 서바이벌 리포터》 ... MC 2008년 SBS 《디자인 성공시대》 ... MC 2009년 스토리온 《수퍼맘 다이어리》 2010년 스토리온 《토크 & 시티 4》 ... MC 2010년 Trend E 《이승연 이수근의 키친로드》 ... MC 2010년 MBC 《MBC 프라임-한식의 세계화, 양념에 그 길을 묻다》 ... 나레이션 2011년 스토리온 《이승연과 100인의 여자》 ... MC 2012년 tvN 《슈퍼디바 2012》 ... MC 2014년 MBN 《인생고민 해결SHOW 신세계 시즌 2》 ... MC 2015년 MBN 《언니들의 선택》 ... MC 2015년 MBC 에브리원 《결혼 터는 남자들》 ... 게스트 2015년 JTBC 《화이트스완》 ... MC 2016년 채널A 《아내가 뿔났다》 ... 특별출연 2016년 TV조선 《엄마가 뭐길래》 2016년 JTBC 《이승연의 위드 유》 ... MC 2016년 JTBC 《이승연의 위드 유 2》 ... MC 해태htb 이오니카 (1993) 롯데제과 더블비얀코 (1993) GS칼텍스 슈퍼디럭스골드 (1994) 인디에프 조이너스 (1995) 롯데제과 제로 (1995) 고려피혁 슈발리에 (1995) GS칼텍스 테크론 (1994-1997) 롯데제과 제크 (1994) 쥬리아화장품 수세미/소네트프로 (1994) 롯데제과 무설탕 후라보노 (1995) 롯데백화점 (1995-1996) 롯데칠성음료 쌕쌕오렌지 (1996) 인디에프 트루젠 (1996) 광동제약 광동다이어트 울트라 (1996) KT KT 시외전화 (1997) LG전자 싱크패드/멀티넷 (1996-1997) 청호나이스화장품 (1997-1999) 스포츠투데이 (1999) 청호나이스 (1999~2001) LG생활건강 엘라스틴 (2001) 혜화초등학교 졸업 동구여자중학교 졸업 서문여자고등학교 졸업(1987년) 인하공전 항공운항학과 전문학사(1990년) 2003년 인하대학교 사회교육원 엔터테인먼트 아카데미 겸임교수 2005년 광주여자대학교 모델연기학과 객원교수 2012년 제주도 말산업 및 특구 유치 홍보대사 1990년 미소여왕 선발대회 스마일퀸 1992년 미스코리아 미 1995년 MBC 연기대상 우수상 1996년 제32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인기상 2000년 SBS 연기대상 빅스타상 2001년 KBS 연기대상 인기상 미스코리아 이승연 프로필 분류:1968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스코리아 미 분류:1992년 데뷔 분류:항공 승무원 분류:비디오 자키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 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모델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서울혜화초등학교 동문 분류:동구여자중학교 동문 분류:서문여자고등학교 동문 분류:인하공업전문대학 동문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배우 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분류:대한민국의 마약범 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 |
Clerambault.jpg|섬네일|프랑스의 피아노 작곡가 루이-니콜라 클레랑보. 작곡가 (作曲家)는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다.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대학 혹은 대학교의 음악대학에 개설된 음악과, 작곡과, 실용음악과 등을 전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거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직업이다. 서양 음악에서는 작곡가가 피아노, 클라비코드, 하프시코드, 바이올린등 주요한 악기의 연주자가 되기도 했다. 우륵 (? ~ ?) 박연 (1378년 ~ 1458년) |
국가 (國歌)는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이다. 일반적으로 국가 는 한 나라를 상징하고 그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집약시키는 구심적 기능을 갖고 있는 국가의 공식적인 노래를 의미한다. 법률로 규정되는 것, 국민의 공통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 역사적으로 정해지고 있는 것 등이 있으며 나라에 의해 (예로 에스파냐의 경우 제 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가가 리에고의 노래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국가는 1939년 제 2공화국이 무너지면서 폐지되고 이전 국가를 다시 쓰게 되었다), 시대에 의해, 개정을 하는 것도 있다. 모리타니, 에스파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과 같이 가사가 없는 나라도 존재한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와 같은 군주제 국가의 경우에는 왕실 국가도 있다.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의 경우 같은 국가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 국가를 그대로 쓰는 키프로스나 루마니아 국가를 그대로 사용한 독립 직후의 몰도바가 그러한 경우이다. 축구, 야구, 농구 등 운동 경기에서 두 나라의 국가가 연주될 때에는 원정팀의 국가를 먼저 연주하고 홈팀의 국가를 나중에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 목록 국기 국장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 8월 27일~1831년 11월 14일)은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 1770년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아들로 태어났으며, 1778년부터 1792년까지 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후 1793년부터 1800년까지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 때 청년기 헤겔의 사상을 보여주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여러 미출간 단편들을 남겼다. 첫 저술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가 발표된 1801년부터 주저 《정신현상학》이 발표된 1807년 직전까지 예나 대학에서 사강사 생활을 했다. 그 후 잠시 동안 독일 바이에른주 밤베르크 시에서 신문 편집 일을 했으며, 1808년부터 1816년까지 독일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의 한 김나지움에서 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년 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후, 1818년 독일 베를린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했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대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법철학 강요》, 《미학 강의》, 《역사철학강의》 등이 있다. 1831년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희망대로 피히테 옆에 안장되었다. 다음은 헤겔이 손수 쓴 자신의 이력서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 이력서는 1804년까지의 약력을 담고 있다. 200px 베를린에 위치한 헤겔의 묘비 이 이력서를 쓴 지 1년 후 1805년 헤겔은 예나 대학의 원외 교수 철학자로 채용된다. 1807년에는 헤겔 관념론의 핵을 이루는 정신현상학이 출판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생활 면에서 헤겔은 살고 있던 셋방의 주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내 샬로테와 정을 맺어 그녀로부터 아들 루트비히 피셔를 얻지만, 1811년 22살된 처녀인 마리 폰 투허(Marie von Tucher)와 결혼을 한다. 이 사이에 1808년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받아 들인다. 1812년 논리학이 빛을 보게되며,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교수 자리를 옮긴 후 다음 해에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엔치클로패디)을 출판한다. 1816년 드디어 베를린 대학의 피히테의 후임 교수로서 초빙되어 여기서 사망할 때까지 연구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날리게 된다. 헤겔 철학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독일 관념론의 거성인 칸트 철학에서 출발하여 이를 마무리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칸트 철학의 근간은 인식론이며 이를 기초로 하여 칸트는 소위 심리 철학 , 윤리학 그리고 우주론과 신학에 접근하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인식의 주체인 자아 인데, 이 개념은 이미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에 의해서 철학적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코지토 (cogito 나는 생각한다)의 문제는 칸트에게 물론 지대한 관심을 끌었지만 그는 결코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서 자아 의 문제를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자아의 문제와 관련하여 헤겔은 칸트 철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헤겔은 개념 의 문제, 다시 말해 인간 사유의 산물 자체를 독자적인 그 무엇으로 간주한 것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인식론에 접근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개념 은 헤겔 철학에서 일종의 논리적 범주 로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의 운동은 여러가지 헤겔 철학 용어로 풀이되는 바, Idee (개념, 이념), Natur (자연), Geist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용어가 도대체 어떤 뜻으로 쓰이며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변증법을 정형화 하였다.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은 후 일 헤겔 좌파 철학자들을 거쳐 카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변증법은 만물이 본질적으로 끊임 없는 변화 과정에 있음을 주창하면서 그 변화의 원인을 내부적인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고 보았다. 원래의 상태를 정(正)이라 하면 모순에 의한 자기부정은 반(反)이다.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며 그 결과 새로운 합(合)의 상태로 변화한다. 이 변화의 결과물은 또다른 변화의 출발점이 되고 이러한 변화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하인리히 샬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aus, 1796~1862)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표현 대신, 즉자-대자-즉자대자 , 혹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 이라는 표현을 썼다. 헤겔에게 절대 이성은 변증법에 의해 도달되는 최고의 지점, 즉 더 이상 변화될 필요 없는 최고의 위치를 뜻한다. 얼핏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과 고정화된 절대 정신은 상충되는 맥락이 있지만, 이러한 헤겔 철학의 전제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노에시스 노에세오스(noēsis noēseōs)개념을 차용하여 절대 이성은 순수 사유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로서 이러한 모순점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헤겔은 세계사를 절대정신(이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헤겔은 인간의 역사 역시 변증법적 발전을 겪는다고 파악하였으며 그 결과 이성이 최고의 발전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상태를 역사의 종말이라 명명하였다. 헤겔은 당대 독일이 역사의 종말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였다가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 개념은 나중에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유명한 논문에 등장한 후 동명의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법은 객관적 정신의 즉자적(卽自的 an sich) 현실화인 저차원(低次元)의 단계의 것(그 속에는 소유·계약·불법의 부정의 변증법적 삼발전 단계가 있다)으로서, 참다운(보편적) 자유를 목표로 하여 도덕의 단계, 다시 도의태(道義態)의 단계로 변증법적인 발전을 하여 간다. 이 도의태의 단계에서 정신은 사랑〔愛〕의 공동체인 가족으로부터 그것의 부정인 개인주의적 이익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로 전진하고, 다시 시민사회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국가라는 최고의 단계에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간다. 이 국가라는 완성 단계에서 정신은 완전한 자기실현(보편적 자유)을 얻는다. 국가를 이념과 현실의 완전한 합치, 최고 최종의 것으로 보는 헤겔의 사상은 국가 절대주의에 빠지고 당연히 국제법 질서까지도 부정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헤겔 철학의 절대지성을 종종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 개념과 연관을 짓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헤겔은 루터교 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헤겔은 자신의 역사철학강요에서 중세 철학에 대한 설명을 건너뛴다. 헤겔 연구가인 클라우스 뒤징(Klaus Düsing)은 헤겔은 철학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신학에 기대었던 중세 시대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고 본다. 헤겔은 신학과 철학을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상은 국가, 종교, 철학을 아우르는 하나의 원리를 지향한다. 그래서 헤겔은 프로이센이라는 국가와 프로이센의 개신교 교리를 자신의 철학과 조화시키고자 했다. 헤겔의 철학은 국가를 절대정신이 구현된 완전한 전체로 보는 것은 물론, 프로이센이야말로 그러한 이상이 잘 실현된 보편국가라고 주장하였다. 국가를 긍정적으로 보는 헤겔의 철학은 프로이센 정부의 입맛에 매우 맞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프로이센 정부는 헤겔 철학을 권장하고 활용하였다. 이러한 헤겔 철학을 비판한 마르크스를 비롯한 청년헤겔학파들이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Differenz des Fichteschen und Schellingschen Systems der Philosophie, 1801) / 임석진 역(1989)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 / 임석진 역(1983), 허우현 역(1970) 《대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 1812-16) / 임석진 역(1994), 임석진 역(1982) 《철학강요》, (Enzyklopädie I-III, 1830) / 서동익 역(1983), 김계숙 역(1955), 전원배 역(1954) * 1권 논리학 * 2권 자연철학 / 박병기 역(2008) * 3권 정신철학 / 박병기 역(2000) 《법철학》,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 / 임석진 역(1990), 윤용탁 역(1976), 이동춘 역(1976), 윤용석 역(1972) 《종교철학》(Philosophie der Religion)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정대성 역, 2005), 김종호 역(1972) 《역사철학강의》,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I-III, 1817) 임석진 역(1987), 정영오 역(1983), 김종호 역(1970) 《미학》, (Ästhetik), 호토 전면 재편집, 두행숙 역, 1996. * 1820/21년 강의 ‘예술철학으로서 미학(Ästhetik als Philosophie der Kunst)’, 아셰베르크 기록, 국내 미출간 * 1823년 강의 《헤겔 예술철학》(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Kunst), 호토 기록, 한동원 역, 2008. 《세계사의 철학》, (Philosophie der Weltgeschichte, 1824-31). 《인륜성의 체계》, (1802-03) 김준수 역 《김나지움 논리학 입문》, (1808-11) 위상복 역 《철학사》(Geschichte der Philosophie) 임석진 역 《역사속의 이성》(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임석진 역(1976) 《믿음과 지식》 황설중 역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 서정혁 역(2006) 《행성궤도론》 박병기 역(2003) 《변증법과 회의주의》 황설중 역(2003) 《교수 취임 연설문》 서정혁 역(2004) 《자연법》 김준수 역(2004) 쿠르트 슈타인하우어, 헤겔 연구서적 (Kurt Steinhauer, Hegel Bibliographie. Materialien zur Geschichte der internationalen Hegelrezeption und zur Philosophiegeschichte, München 1980). 오토 푀겔러 (Otto Pöggeler), 헤겔철학 입문, 1977, 뮌헨. 로젠크란츠 (Karl Rosenkranz), 헤겔의 생애, 1969, 다름슈타트. *쇼펜하우어 *니체 *키에르케고르 *피히테 *포이어바흐 분류:1770년 태어남 분류:1831년 죽음 분류:독일의 철학자 분류:독일의 법철학자 분류:독일의 논리학자 분류:독일의 역사가 분류:독일의 대학 교수 분류:독일의 루터교도 분류:대륙철학자 분류:정치철학자 분류:교육철학자 분류:역사철학자 분류:예술철학자 분류:사상사학자 분류:윤리학자 분류:관념론자 분류:신비주의자 분류:슈투트가르트 출신 분류: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동문 분류: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교수 분류:콜레라로 죽은 사람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18세기 독일 사람 분류:19세기 독일 사람 분류:18세기 철학자 분류:19세기 철학자 분류:낭만주의 |
한국의 이름 은 성(姓)과 명(名)으로 구성되며, 이를 합하여 성명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2015년 기준 5,582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나, 대한민국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역사적 성씨는 250여 개 정도이다. 성은 일반적으로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면서,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 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44.9%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이렇듯 한국의 성씨는 비교적 다양성이 작기 때문에, 사람의 이름이 개인을 특정하는데 큰 중요성을 차지하는 특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of South Korean family names.svg|섬네일|300px|대한민국에서 다섯 명 중 한 명은 김 씨이다. ( KNSO, 2000 ) 성(姓)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는 집단의 호칭이다. 한자의 뜻을 풀어놓은 중국 최초의 자전인 《설문해자》에 따르면, "姓은 人之所生也"로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였다. 한국에서 성은 부계 혈통의 표지로 쓰여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평생 바뀌는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해, 씨(氏)란 동일 혈통의 사람들이 각지에 분산될 때에 각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였다. 즉, 씨는 핏줄이 아니라 땅과 연계되어 있는 개념으로, 한국의 본(本)과 유사하다. 한국의 성(姓)은 본(本)을 필수요소로 하여 각 성마다 한 개 이상의 본관(本貫)이 있고, 성이 같더라도 본이 다르면 동족(同族)으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성과 이름을 성명(姓名)이라고 하는 데 비해, 일본은 씨명(시메이, 氏名)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씨(氏)는 지명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다만, 일본은 1870년까지 무사(武士) 아래 계급에는 성씨를 가질 수 없게 하다가, 메이지 시대인 1875년에 성씨 의무령 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씨를 갖게 되면서 출신지의 지명이나 지형적 특징을 씨로 정한 것이 많아 한국이나 중국과는 그 역사적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름이란 단어는 "이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중세 국어에서는 “일홈” 또는 “일훔” 등으로 표기되었다. 더 오래전에는 니르다, 니름 등의 발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좁게는 성 뒤에 붙은 개인명(個人名 personal name)만을 말하며, 넓게는 성(姓)을 포함하여 사람이나 사물을 부르거나 가리키는 모든 명칭을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성씨가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한자(漢字) 등 중국 문물이 수입되었던 시기에 그와 함께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씨족 사회와 그 집단을 통치하는 지배자 계급이 발생함으로써, 성씨는 다른 씨족이나 피지배 계급과 구별하기 위한 목적, 즉 정치적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이게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국호 고구려에서 따와 성을 고(高)씨로 하였으며, 주몽은 휘하의 충신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 등을 사성(賜姓)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왕이 하사한 백제 팔족성(八族姓)인 사(沙), 연(燕), 협(劦),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苩)씨 등은 백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대표하는 성이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하여 부여(夫餘)씨를 칭하였다. 후대의 백제 왕들 중에는 부여를 줄여 여(餘)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우(優)란 성을 취한 백제왕도 있었다.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백제 개국공신 중에는 마려(馬藜) 등이 있는데, 현재 마(馬)씨가 마려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박(朴)·석(昔)·김(金)의 세 성이 설화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며, 유리왕 6년에 6부 촌장에게 각각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 등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성이 당대에 실제로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565년 《북제서》에 신라 진흥왕인 김진흥(金進興)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김씨 성을 쓰기 시작한 신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백성에게는 성이 없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치원이나 장보고 등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계층에서부터 성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남해 완도의 천민(賤民) 출신인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벼슬길에 오르면서 당시 당나라 대성(大姓) 중 하나였던 장씨(張氏) 성을 취해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꿨다. 발해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이 대(大)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대(大)씨와 태(太)씨가 대조영을 시조로 삼고 있다. 삼국 시대를 통틀어 이름은 대부분 고유어를 한자로 취음한 표기로, 오늘날의 3음절 성명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남북국 시대까지는 극소수의 특정 계층을 제외하고는 성(姓)이 없었다. 심지어, 귀족집안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도 처음에는 왕씨가 아니었으며 성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어느 자료에서도 고려 태조의 선대(先代)가 어떤 성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고려 태조의 윗대에서도 성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 자신의 경우도 원래 왕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기보다는 본래 성이 없었고 이름도 다른 것을 갖고 있었는데, 고려 개국과 함께 ‘왕’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도선의 예언을 내세우면서 성을 ‘왕’, 이름을 ‘건’이라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편년통록》 등에 의하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고 사칭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선왕(忠宣王)이 왕자로 원(元)나라에 가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한 사람이 충선왕과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충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다. “듣건대 그대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755~762)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가 있어서 나온 말인가?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있을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당신의 나라 고려에 가서 자식까지 두었다는 것인가?” 이 말에 충선왕은 부끄러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제현은 작제건(왕건의 조부), 용건(왕건의 아버지・다른 이름은 왕륭), 왕건 자신까지 3대가 이름에 ‘건(建)’자를 넣은 것은, 신라시대 존경의 표시였던 ‘간(干)’을 이름 밑에다 붙여서 부른 것이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와전(訛傳)되어 ‘건’으로 바뀐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왕건의 성명에 대해 비판한 것은 그가 고려 왕실의 계보를 믿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작제건", 아버지가 "용건", 그 아들(고려태조)이 "왕건"으로서 "건"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서양의 귀족들이 아들 이름을 아버지, 할아버지와 똑같이 하면서 "2세", "3세" 등의 호칭을 붙이는 것과 유사한, 또는 부칭이나 성씨의 개념과 비슷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아무튼 고려 초에도 한동안 성의 사용은 최상층 계급에 국한되었으며, 귀족 계급이라도 성을 갖지 않는 인물이 많았다. 참고로 왕건은 "임금 왕 세울 건"의 한자와는 상관 없는 당시의 순우리말, 즉 중세 한국어의 어떤 뜻을 지닌 단어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말을 한자로 각각 왕을 임금 왕으로 표기하여 성, 건을 세울 건으로 표기하여 이름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왕씨는 중국의 왕씨와는 한자는 같지만 관련이 전혀 없는 성이다. 신라 지증왕의 국호·왕호의 한자어 개정, 법흥왕의 연호·시호 사용, 경덕왕의 두 음절 지명 개정, 문무 관직명 개정 등 일련의 한화(漢化) 조치로 점차 중국식 이름이 보급되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의 통일 후 사성(賜姓)을 통해 귀족들이나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한국에 성명(姓名)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는 것을 도운 네 명의 부장(副長)인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白玉杉), 능산(能山), 사귀(沙貴)도 이름만 있을 뿐 성은 없었다. 태조는 즉위한 후 홍술에게는 홍(洪), 백옥삼에게는 배(裵), 능산에게는 신(申), 사귀에게는 복(卜)씨 성과 함께 중국식 이름을 하사(下賜)했다. 이로써 홍술은 홍유(洪儒), 백옥삼은 배현경(裵玄慶), 능산은 신숭겸(申崇謙), 사귀는 복지겸(卜智謙)이라는 성명을 갖게 되었다.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성’은 관직으로 나가기 위한 필수 요건이 되었다. 1055년(고려 문종 9년)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할 자격이 없다 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된 이후 성씨 제도가 귀족 계급의 정치적 신분과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격적인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주로 지배계층이 성씨를 가졌기 때문에 조선 초기만 해도 전 인구의 90%가 성씨가 없었다. 천민계층까지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씨의 대중화가 촉진됐고, 일제강점 직전 해인 1909년 민적법의 시행과 함께 누구나 성과 본을 갖게 됐다. 조선 중기부터 천민층을 제외한 양인들에게 성씨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조선에서 성씨가 없는 무성층(無姓層)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왜란과 호란 이후 성씨와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져야했기 때문에 양반과 결탁하여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려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족보매매, 족보위조, 공명첩 등을 통해 일부 천민의 양민화가 이루어지는 등의 사회변화로 무성층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8권에서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의 하나도 진짜가 없다.”며 이는 한 때의 세속(世俗)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적고 있다. 대만 국립정치대학 김근식 교수(法制史)는 “김 이 박의 3대 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상적인 친족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고 평민, 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참칭(僭稱)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위조 족보가 처음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시기는 18세기 후반이다. 주목할 점은 족보를 위조한 장본인이 양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764년 족보를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김경희의 신분은 중인이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 김경희가 여러 족보를 위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쇄시설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몰락한 양반들로부터 족보를 사들이거나 문중 대표들에게 뇌물을 주고 여벌로 족보를 더 찍게 한 다음 비밀리에 건네받는 방식이었다. 족보 매매를 의뢰한 고객이 족보를 선택하면 고객의 이름이 들어갈 지면을 확정하고 그 부분에 어울리게 가계 기록을 위조해 별도의 종이에 활자로 인쇄했다. 그리고는 본래의 족보를 해체하여 원래의 지면을 빼내고, 그 대신 위조한 별지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 수법이었다. 보학(譜學) 관련 책에 나오는 내용은 공식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게 많다. 각 집안에서는 자기들 가문의 선대(先代)에 관한 기록이라는 이유로 신뢰를 보내지만, 그 중에는 검증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족보가 조작된 사례로 경주 김씨의 《신라삼성연원보》가 있다. 조선 인조 때 나왔다는 이 책의 저자는 조선 말기에 출생한 김경대(金景大)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한 종인(宗人)이었다. 또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으로 조작한 위보도 있다. 성씨를 가진 양반 중에서도 일부는 반역, 모반에 연루되면 노비로 강등되는 경우도 있었고, 첩의 자식은 서얼이라는 신분으로 차별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조선 후기의 장적, 호구 단자, 수원성 축조시의 임금 노동자 기록, 소송 문건 등을 분석해 보면 일반 평민은 물론이고, 일부 노비도 김(金)씨, 이(李)씨 등 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이 쓴 성이 본관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성관(姓貫)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화성성역의궤》에 백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기록된 백성들의 이름들은 신체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키가 큰 사람들의 이름은 박큰노미(朴大老味), 최큰노미, 키가 작은 사람들은 김자근노미(金者斤老味), 임자근노미, 김작은복(金者斤福), 망아지처럼 잘 달리는 사람은 최망아지, 강아지처럼 생겼다고 김삽사리, 눈이 튀어나온 사람은 이부엉이, 지팽이처럼 말랐다고 신지팽(申之彭), 혹이 튀어 나왔다고 이혹불(李或不), 뚱뚱하고 느림보처럼 생겼다고 박뭉투리, 다리 길이가 작은 사람에게는 조조자근노미(趙足者斤老味), 착하다고 지어진 박선노미(朴善老味)·김순노미(金順老味), 일을 잘해 기특한 사람에게는 박기특·김기특이라고 천민들의 성과 이름을 짓고 기록하였다. 백성의 성씨와 이름을 알 수 없어 대충 나이로 이름 지은 기록도 있다. 나이가 한 오십쯤 된 것 같다고 김쉰동이(金五十同), 이름은 모르고 대충 태어난 달만 알아 지은 박시월쇠(朴十月金) 등이 있다. 김팔월쇠(八月金), 장막쇠, 정복쇠, 윤좀쇠 등 하층민의 이름에는 김(金) 이나 쇠 자가 들어가는 기록이 많다. 쇠가 곧 금(金)을 뜻하는 것이기에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이다. 한편 황현(黃玹)이 저술한 역사책 《매천야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의 인구를 의도적으로 늘리기 위해 성씨가 없던 백성 중에서 전주 이씨를 희망하는 자들을 모두 대동보에 올려주어 이 때 전주 이씨가 10만 명이 늘면서 흥선군이 기뻐하였다고 쓰여 있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이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성씨가 없던 노비들은 모시던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고, 자신이 부리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자신의 성씨를 부여해 주었던 양반도 있었다. 무성층에게 성을 갖도록 했더니 대부분이 인구가 많던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하여 일부 성씨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10만개가 넘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성씨의 종류가 매우 적고, 그마저 인구도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인구가 기형적으로 많은 성본의 경우 씨족간 연대성은 찾기 힘들다. 신분질서 해방조치로서의 성씨 부여는 양반 질서를 허물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원래부터 인구가 많던 거대씨족을 더욱 더 거대하게 만들어주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성 이름 본관 파 홍(洪) 길동(吉童) 남양(南陽) 주부공파(主簿公派)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외국에서 귀화하여 생긴 성씨까지 합하면 5,582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 한자(漢字)로 표기할 수 있는 성씨는 1,507개이고, 한자가 없는 성씨는 4,075개로 조사되었다. 인구 1,000명 이상인 본관은 858개로 전체 인구의 97.8%를 차지한다. 본관은 그 시조가 자리잡은 고향을 나타내는데,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본은 김해 김씨이다. 각각의 성씨는 그 성씨 및 본관의 유래에 관한 설화를 갖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토착 성본의 경우 신라 등 고대 왕조와 연관 짓거나 고려 때 창성한 경우가 많고, 이 밖에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도 많다. 다만,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영향으로 일부 가문에서 중국인을 시조로 모시거나,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 왕족이나 신라 귀족의 후손임을 사칭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선계를 고증할 수 없는 경우에는 세계가 확실한 파조나 1세조를 실질적인 시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서양식 이름에 보이는 가운데 이름(Middle Name)이나 부칭(父稱) 등은 없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계층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고유어 이름을 썼다. 당시의 이름은 대부분 여러 음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자로 차자 표기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발음법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지배 계급에서 중국식 성명을 채용함으로써 지배 계급에서 고유어 이름은 점차 사라졌다. 반면,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평민 이하의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고유어 이름이 계속 사용되는 경향을 보여 계층에 따른 차등을 보였다. 이름 성 신분 출신국가 의미 기타 주몽(朱蒙),추모(鄒牟),도모(都慕) 고(高) 군주 고구려 부여어로 “활을 잘쏘는 사람”이란 뜻 연개소문(淵蓋蘇文) 연(淵) 대막리지 고구려 중국 측 기록에는 천개소문(泉蓋蘇文), 일본서기에는 이리 카스미(伊梨 柯須彌)로 기록되어 있다. 아란불(阿蘭弗) 국상(國相) 동부여 사마(斯摩),사마(斯麻) 부여(扶餘) 군주 백제 “섬에서 태어났다”는 뜻 《일본서기》에 기록 복신(福信) 귀실(鬼室) 부흥군지도자 백제 혁거세(赫居世),불거내(弗拒內) 박(朴) 군주 신라 “밝은 아이”란 뜻 거칠부(居柒夫),황종(荒宗), 구지포례(仇遲布禮) 구(仇) 재상 신라 거친 사람, 거친 남자란 뜻 이진아시(伊珍阿豉) 김(金) 군주 가야(대가야) 고을라(高乙那) 고(高) 군주 탐라 낙개제(諾皆諸) 낙(諾) 대수령 두막루 낙개제, 낙개몽, 낙사계 등 원나라의 고려 내정 간섭기에는 고려 국왕이 몽골식 이름과 고려식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 31대 공민왕() 등으로 한자 표기된 몽골식 이름을 가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1940년부터 창씨개명(創氏改名) 이라고 불린 일본식 성명 강요(日本式姓名強要)가 있었다. 창씨(創氏)란 씨를 새로 만든다 는 뜻인데, 이는 조선식 성명(姓名)과 일본식 씨명(氏名)의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부계 혈통을 표시하는 성(姓)이 없고, 가계를 표시하는 씨(氏)만 있다. 일본식 씨명은 일가족이 모두 가장과 동일한 씨(氏)가 된다. 예를 들어, 남편이 김(金)을 씨로 쓸 경우 원래 이(李)씨였던 아내는 남편과 같은 김(金)씨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성이 바뀌지 않고 동성끼리 혼인하지 않으며, 이성(異姓)의 아이를 입양하는 관습이 없는 조선의 전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창씨개명 당시 이를 홍보하는 일본 관리들은 호적상 조선식 성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옛 조선 호적의 본관을 성명 및 본관 으로 표기하여 참고 정도로 하고 일본식 씨명만을 공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실상 조선식 성명을 폐기하고자 하였다.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각종 불이익(입학 및 진학 거부, 취직 불편화, 관청의 용무 금지 등)이 뒤따랐다. 창씨한 사람 중에는 원래 성의 의미를 살리고자 궁리한 경우가 많았는데, 유형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래 성의 글자가 포함된 일본 씨명을 찾거나 일본풍으로 만드는 방법 * 김(金)씨는 , , * 장(張)씨는 , 본관을 씨명으로 하는 방법 * (광산 김씨) 시조의 설화를 토대로 하는 방법 * (경주 김씨), (전주 이씨) 일본의 씨명과 같아 그대로 쓰는 경우 * (임), (남), (류), (오), (계) 그 외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다음과 같이 씨성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천황가나 쇼군가 등 명문가문의 씨성을 쓰겠다고 제출 * , , 조선총독의 이름을 비꼬아 자신이 형이라는 의미로 조롱하여 지음 * 성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란 의미에서 해방 후 조선 성명 복구령에 따라 한국인들은 원래의 성과 이름을 되찾았다. 다만, 재일 한국인 가운데에는 통명(通名)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씨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노년층 여성 중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일본식 성명의 영향을 받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자(-子)"로 끝나는 이름이다. 자(子)로 끝나는 이름이 많은 것은 과거의 남아 선호 사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대한민국에서 일본식 성명은 주요 개명 사유 가운데 하나이다. 남자의 경우는 여자보다 드물지만, 마지막 음절이 "-랑(-郞)" 등인 일본식 성명의 영향이 발견된다. 현대 한국인의 성명은 한 음절의 성과 두 음절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세 음절의 성명이 가장 흔하며, 그 다음으로 한 음절(외자)의 이름을 가진 두 음절 성명이 많다. 두 음절의 성으로 이루어진 복성의 경우에는 외자 이름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세 음절 보다 많은 이름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이러한 3음절 내지 2음절 선호의 경향은 한자어 이름뿐 아니라, 고유어 이름(한글 이름)이나 외래어 계열 이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며, 각종 문서에서 이름을 표기하는 란에도 3~5음절을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다. 이름은 한자의 의미를 따서 짓는 경우가 많으며, 이름에 사용하는 한자의 범위는 인명용 한자라 하여 법률로 정해져 있다. 한국어에서 한자(漢字)는 1자1음의 음독(音讀)이 원칙이므로, 일본과 같이 훈독이나 임의적인 읽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남성의 이름에는 전통적으로 항렬(行列)이라고 부르는 동족 간의 서열을 나타내는 돌림자를 사용했다. 반면에 돌림자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나 여성을 위해 따로 돌림자를 정한 집안은 상당히 드물다. 서양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부자간에 같은 이름이나 글자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으나, 유교 전통의 대한민국이나 중국에서는 피휘(避諱)라 하여 이를 기피하였다. 오늘날에는 항렬에 크게 거리끼지 않고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으나, 보수적인 가정에서는 아직도 항렬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해방 이후 민족의식의 확산으로 고유어 이름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졌다. 이는 1966년부터 1987년까지 계속된 서울대학교의 “고운이름 자랑하기 대회”로 본격화되어 “한글 이름”이라고 통칭되는 한국어의 고유 어휘를 사용한 이름이 작명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유형별로는 구체적인 명사에서 온 것(가람, 이슬, 하늘, 구슬 등), 추상명사에서 온 것(슬기, 한빛, 보라, 나라 등), 형용사에서 온 것(푸름, 힘찬, 빛나, 한결, 고운 등) 등이 있다. 또한, 고유어에 한자로 뜻을 부여해서 중의적인 이름을 짓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나라의 경우 낱말자체는 고유어 이름이면서 娜羅(아리따울 나+펼 라)와 같이 좋은 뜻의 한자를 찾아 씀으로서 이중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이름은 남성의 이름보다 그 수가 훨씬 한정되어 있는데, 이는 의미나 어감에서 여성스러움을 나타내는 한자나 한글의 음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 이름의 특징을 살펴보면, 한자를 사용하는 경우, 아름다움이나 맑음 등 여성적 미덕과 관련된 한자(美, 姸, 淑 따위)가 많이 사용된다. 또한, 여성이름에는 대부분 모음으로 끝나거나, ㄴ 등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받침이 들어간 음절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발음들은 남성 이름에도 사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구분이 엄밀한 것은 아니다. 현대 한국은 종교가 기독교인 사람이 꽤 많기 때문에 이와 연관된 서양식 성명을 갖는 경우도 있다. 개신교의 경우, 성서의 인물(요셉, 요한, 한나 등)에서 따오거나,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에서는 성서나 기독교의 역사에서의 성인들의 이름(베드로, 바울, 마가, 마태, 에스더, 루디아 등)을 본따서 이름을 짓기도 한다. 또한개신교인의 경우 이름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징하는 하- 또는 예- 를 접두어로 붙여 예찬(예讚, 예수 찬양), 하은(하恩 하나님의 은혜) 등의 작명을 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외래 성씨는 중국계 · 몽골계 · 여진계 · 위구르계 · 아랍계 · 베트남계 · 일본계 · 네덜란드계 등이 있으며, 이 중 중국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주로 문화 사절로 온 경우가 많고, 이 밖에 임진왜란 등 전쟁시 구원군으로 와서 정착하거나 중국에서 왕조가 바뀔 때마다 망명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계로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 (김충선)(우록 김씨)와 함박 김씨 등이 있다. 베트남계로는 베트남의 왕자 이용상을 시조로 하는 화산 이씨, 정선 이씨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에 귀화한 김씨 중 가장 많은 것은 여진족에 뿌리를 둔 김씨다. 6진(六鎭) 개척 당시 세종은 귀화한 여진족 수백 명에게 김씨 성을 하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귀화 여진족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세종 때 김거파(金巨波) 김고도개(金古道介) 김구음파(金仇音波) 김권로(金權老) 김대두마(金大豆麻) 김도을온(金道乙溫) 김생아(金生阿) 김소응거(金所應巨) 김속응합(金速應哈) 김시구(金時具) 김아을사(金阿乙沙) 김오광아(金吾光阿) 김자환(金自還) 김파보하(金波寶下) 김파을대(金波乙大) 김희주(金希主) 등. 세조 때 김걸도혁(金乞都革) 김공소(金公疎) 김교합(金咬哈) 김다롱합(金多弄哈) 김마상개(金麻尙介) 김우리개(金于里介) 김상미(金尙美) 김아도을치(金阿都乙赤) 김아라(金阿喇) 김아랑합(金阿郞哈) 김아을가(金阿乙加) 김역류(金易留) 김우두(金于豆) 김우허내(金右虛乃) 김유리가(金留里加) 김윤적(金允績) 김이랑합(金伊郞哈) 김인을개(金引乙介) 김입성(金入成) 김주창개(金主昌介) 김지하리(金之下里) 김차독(金箚禿) 김지칭가(金只稱哥) 김자라노(金者羅老). 또한 세종 이전에도 김씨 성을 하사받은 여진족이 있으며, 김고시가물(金高時加勿) 김광수(金光秀) 김대첩목아(金大帖木兒) 김동개(金同介) 등이 그들이다. 조선에 귀순한 여진족들에게 김씨 성을 내린 것은 12세기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귀화한 여진족으로 김씨 성을 가지고 관직에 나간 사람이 많이 있다. 광해군(光海君) 때는 여진족이 조선 어디서든 살 수가 있어서 곳곳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하나도 없다. 현재 여진족을 조상으로 하는 김씨가 적은 것은 모화사상(慕華思想) 때문일 것이다. 족보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나오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는 모화사상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당시 만주 오랑캐라고 하면 멸시의 대상이었다. 설사 여진족이나 거란족 귀화인을 조상으로 둔 귀화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감추었을 것이다.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성씨는 청해 이씨 뿐이다. 몽골계로는 연안 인씨 등이 있다. 박연, 하멜 일행 등 네덜란드로부터의 유입도 있었다. 최근에는 국내 거주 외국인의 증가와 국제 결혼 등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성과 본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 내 귀화 성씨의 수는 총 442개로 토착 성씨 수의 1.5배에 달하며, 귀화 성씨와 토착 성씨를 합하면 성씨의 수는 692개이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인과의 혼인으로 귀화한 경우이며, 국가별로 보면 필리핀계가 145개로 가장 많고, 일본계, 중국계 순이다. 계(145개) 골라낙촌치타, 궐랑로즈, 글로리아 알퀘아포스 등 계(139개) 고전(古田), 길강(吉岡), 길성(吉省), 망절(網切) 등 계(83개) 노(蘆), 무(武), 악(岳), 왕(汪), 장(藏), 초(焦) 등 기타(75개) 누구엔티수안(계), 남캉캉마(계), 투비악달(계) 유명 귀화인 중에는 귀화 당시 한국식으로 등록한 호적상의 성명을 쓰기도 하지만, 귀화 전의 이름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개화기의 기독교 선교사들 중에는 귀화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식 성명을 쓰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이주자들이 한국에서 새터전을 잡게 되면서 한국사람에게 낯선 고유 이름에 갈음하여 통용되는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아직 이 사안에 대하여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는 없으나, 대부분 기존에 있는 외자 성을 채용하거나, 기존 외자 성에 자신의 국명이나 출신지의 음절을 따서 맞추거나 하는 식으로 성을 짓고 있다. 재중동포들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같이 한국식 성명을 쓴다. 다만, 한국과 중국에서 선호하는 글자나 발음 등의 차이로 인해 한국식 성명을 중국어 이름으로 쓰기 어색한 것을 피하기 위해 애초에 한식으로 작명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식 이름인 통명(通名)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며, 일본으로 귀화하는 경우에는 일본식 씨명으로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미 한국인은 대부분 한국의 성(姓)에 영어식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 고려인도 성은 한국의 것을 쓰고, 이름은 러시아식으로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인의 경우, 재중동포나 재일한국인과 달리 한자문화권에 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성씨가 호적 등록 과정에서 변형된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며, 귀화인이 아닌 이상 임의로 새로운 성을 만들 수 없다.(창성불허) 또한, 여성이 결혼해도 성이 바뀌지 않는다. 외국인이 대한민국에 귀화할 경우에는 성과 본관을 새로 만들어 신고하여야 한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2005년에 개정된 민법에 따라 2008년 1월 1일부터는 부모가 혼인신고 시에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고,(민법 제781조제1항 단서) 입양, 부모의 이혼이나 재혼의 경우에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 자녀가 어머니, 양부 또는 계부의 성으로 성을 변경할 수 있다.(민법 제781조제6항) 대한민국에서는 1997년 이전에는 동성동본 간의 혼인이 법률상 금지되었으며, 이성동본의 경우도 일부 본관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관례가 있었다. 동성동본 금혼 규정은 1997년의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과 2005년의 민법 개정에 의해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으나,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을 터부시하는 경향은 여전히 일부 남아 있다. 柳(류/유)와 羅(라/나)와 같은 몇몇 성 은 성의 한글표기에 관한 두음법칙 적용 여부에 대해서 사회적 논란이 있다.(예. 서애 류성룡) 대한민국에서는 주민등록상 성의 한글표기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자유롭게 써왔고 호적에는 성을 한자로만 기재하여 오다가, 2000년대 초에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호적을 전산화하면서 이들 성의 한글표기에 대해 획일적으로 두음법칙을 적용함으로써 류 (柳)나 라 (羅)로 성씨를 한글표기한 사람들의 반발을 불렀다. 이러한 반발이 지속되자 법원은 당사자가 정정허가신청을 할 경우에 호적상 성의 한글표기를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고치는 것을 인정하였고, 결국 2009년에 국어심의회는 맞춤법 해설서에서 성씨의 두음법칙 적용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였다. 성의 한글표기를 정정한 사람의 98.5%는 류(柳)씨로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라(羅)씨가 1%를 차지했다. 이름에 사용하는 한자는 현재 대법원이 정한 한문교육용 기초한자, 인명용추가한자, 인명용한자허용자체 외에는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제한은 1991년 이후 출생자에 대해 적용되며, 그 이전 출생자라도 개명시에는 인명용 한자 범위 내에서 새 이름을 정해야 한다. 또한, 이름에 사용하는 글자 수도 성(姓)을 제외한 다섯 글자까지만 등록할 수 있으며, 부모가 특이한 이름을 짓기를 원해도 법원의 판단에 따라 거부되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성(姓)을 변경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반면, 개명에 관해서는 법원이 그 사유를 폭넓게 인정하므로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개명을 하려면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며, 타당한 사유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법원은 개명을 허가하지 않는다. 주요 개명 사유는 이름으로 인해 놀림감이 되는 경우, 범죄자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과 이름이 같은 경우, 남자가 여자 같거나 여자가 남자 같은 이름인 경우, 일본식 이름일 경우, 이름이 나쁜 뜻일 경우, 영화나 드라마의 희화화된 등장인물(예. 영구)과 이름이 같은 경우, 가까운 친척 중에 동명이인이 있는 경우 등이다. 부모 중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전통적 성명 체제와 가족법 개정 이전의 호주제 등에 대한 비판으로 여성주의자들과 진보성향의 일부 지식인, 동성애자들을 중심으로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이 199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었다. 페미니스트 고은광순, 영화감독 이송희일, 영화제작자 김조광수 등이 일례이다. 이와 같은 부모의 성 함께 쓰기는 다른 문화권(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한국의 성제도는 성(姓) 외에도 본(本)을 필수요소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이러한 운동이 일반대중에게 미친 영향도 미미하다. 한편,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부성주의와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부성주의 자체는 위헌이라고 할 수 없으나, 예외를 두지 않는 것은 위헌 이라고 판시하였다. 즉, 헌법재판소는 출생 직후의 자(子)에게 성을 부여할 당시 부(父)가 이미 사망하였거나 부모가 이혼하여 모가 단독으로 친권을 행사하고 양육할 것이 예상되는 경우, 혼인외의 출생자를 부가 인지하였으나 여전히 모가 단독으로 양육하는 경우, 입양이나 재혼 등의 경우 성의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인격권을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개정된 민법(민법 제781조제6항)에서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 성을 변경하도록 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예시해 열거하고 있는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다른 요건을 요구하거나 성의 변경을 불허하는 경우에는 위헌적 제도 운영으로 평가될 소지가 있다. 정식 이름 외에 이름을 대용하여 부르는 여러 호칭이 있다. 한(漢) 문화의 영향으로 호(號)나 자(字)같은 이름들도 있으나, 호의 경우는 문인이나 정치인 등 유명인이 멋을 살려 짓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일반적이지 않으며, 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또 아명(兒名)이라 하여 정식 이름을 짓기 전에 집안에서 부모나 형제자매끼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아명 아명 또는 아호라고 하며, 주로 어릴 때 집안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사용하는 친근한 이름이다. 옛날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천한 뜻의 이름으로 아명을 지었다. 간혹 아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정식 이름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택호 택호란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의 출신지 이름에 댁을 얹어 부르는 호칭을 말한다. 주로 결혼한 여성의 시집오기 전 친정의 지명에 붙여 본명 대신에 부르는 통명으로 사용하였다. 예) 안성댁(安城宅), 용인댁(龍仁宅), 이천댁(利川宅) 등 지명 외에 남편의 직업이나 직함(사장→사장댁, 김선생님→김선생님댁) 등에 붙이기도 한다. 당호 당호란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머무는 집이나 거처의 이름으로써 인명을 대신하여 부르는 호칭이다. 종교적 이름 종교에 따라 부여되는 특수한 이름들이 있다. 불교의 경우 일반인이 교의에 귀의하여 불자가 되고자 하면, 속세의 부모 내지는 보호자에 해당하는 은사(스님)로부터 새 이름을 받게 된다. 이를 법명(法名)이라고 한다. 법명을 받은 자가 수행을 거쳐 정식승려가 된 후에 여러 학업 및 수도를 통해 법납이 쌓이게 되면, 법명 외에 법호(法號)를 추가로 부여받는다. 가톨릭 신자의 경우에는 세례를 받을 때에 세례명을 받으며, 이 세례명은 대부분 가톨릭 성인(聖人)의 이름을 쓴다. 한국인은 상대나 자신의 성씨를 묻고 답할 때, 일반적으로 "김"과 같이 단독으로 말하지 않고 "김씨"와 같이 씨(氏)를 붙여 답한다. 또한, 타인에게 부모나 선생님의 성명을 말할 경우에는 “홍, 길자, 동자입니다”와 같이 이름의 성을 제외한 각 글자 뒤에 자를 붙여서 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이는 부모의 성명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결례로 보는 피휘의 일종이다. 상대를 호칭할 때 성(姓)만 호칭하는 일은 없으며 반드시 뒤에 경칭을 붙이는데, 경칭의 종류와 성명의 조합에 따라서 각각의 호칭이 주는 어감이 다르므로 구별해서 써야 한다. 한국에서는 윗사람과 직접 대화할 때는 보통 윗사람의 직함 등으로 부르며, 직접 성명을 사용하여 부르는 일은 매우 드물다. 모르는 이의 이름을 알고자 직접 물어볼 때의 정중한 표현으로 "성함"이란 말을 쓴다. 대한민국에서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공식적인 방법은 문화관광부가 2000년에 제정한 로마자 표기법 고시가 있으나, 인명의 경우 그 적용이 엄격하지 않아 하나의 이름에 다양한 표기가 쓰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래의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은 최근에야 겨우 고교 교육 과정 부록에 수록되는 정도이기 때문에, 보통은 이름의 로마자 표기를 개인이 임의로 정하는 경우가 많고 관례적으로는 영어 철자법에 준한 것이 많다. 문씨가 moon , 선씨가 sun 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박씨는 Park, Pak, Bak , 이씨는 Lee, Yi, Rhee , 최씨는 Choi, Choe, Choy 등 다양한 표기가 보이며,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들이 동일한 성의 다른 로마자 표기를 별개의 성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이씨는 보통 영어권의 성(姓)인 Lee 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이순신, 이승만은 기존 관례에 따라 각각 Yi Sunsin , Syngman Rhee 로 표기한 것이다. 또, 최씨는 주로 Choi라고 쓰고 초이 라고 읽어 외국인들이 헷갈려 한다. 성과 이름의 순서는 과거에는 유럽식으로 이름을 먼저, 성을 나중에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한국식으로 성을 이름보다 먼저 쓰는 경우도 많다. 영어 이름 중에서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발음을 차용해 와서 쓰는 경우도 있다. 예) 선희는 써니(Sunny), 재희는 제이(Jay), 철수는 찰스(Charles), 태호는 테오(Teo) 등. + 5대 성씨의 로마자 표기법 비교 한글 한자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많이 사용되는 표기 기타 표기 김 金 Gim Kim Kim Gimm, Keam 이(리) 李 I(남) / Ri(북) I(남) / Ri(북) Lee Yi, Rhee, Ree, Reeh, Rey, Rhie 박 朴 Bak Pak Park Pak, Bark, Pack 최 崔 Choe Ch oe Choi Choy, Chey 정 鄭, 丁, 程 Jeong Chŏng Jeong, Jung, Chung Cheong, Joung, Chong, Choung 분단 이후 문화적으로 남북이 단절되면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명 습관에는 약간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작명(作名)이 시대별로 어느 정도 유행을 타고 변해 온 것과 달리, 북쪽의 작명은 기본적으로 전통 이름을 고수해 온 편이다.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많은 비율로 존재하는 고유어 이름 등은 북쪽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전통에 따라 형제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돌림자로 이름을 짓고, 딸의 경우 정(正)자나, 순(純)자를 넣어 바르고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짓는 사례가 아직 존속되고 있다. 한편, 1970년대부터 김정일은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기 위해 개명운동을 지시해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물론 김정숙(김정일 생모), 김형직-강반석(김일성 부모) 등 그 일가의 이름과 같은 주민들을 개명하도록 했다. 심지어 미(美) 는 미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한동안 이름에 사용하지 못하다가 1990년대 이후 쓸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특히 평양산원에서 태어난 세 쌍둥이 이상의 쌍둥이에게는 김정일 우상화나 정권의 구호를 반영해 이름을 짓는 사례가 많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한자의 한글표기에 관한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李)씨를 리씨로, 유(柳)씨와 유(劉)씨를 류씨로, 나(羅)씨를 라씨로, 임(林)씨를 림씨로 부른다. 한국 성명 체계는 한자 표기의 성과 두 음절 이름 등 중국 및 베트남과 외형상 유사점이 많다. 그러나, 각각의 문화에 따라 별도로 진화해 왔기 때문에 세부적으로는 차이점이 엄존한다. 한국과 달리, 현대 베트남에서는 한자를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자 표기로 인한 국적 혼동의 우려는 없다. 한국 인명과 중국 인명은 한자로 표기했을 때는 국적을 잘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으나, 선호하는 글자, 음절이나 성씨의 빈도 등으로 차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우선 박(朴)씨는 중국인에게는 거의 없는 성씨로서, 박(朴)씨인 사람은 한국인 또는 한국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조(씨나 배(씨 등은 글자로 구분된다. 중국에서는 이름이나 애칭으로 링링(玲玲)이나 추이추이(翠翠)같이 같은 글자를 겹친 이름 을 종종 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이름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10위권 성씨를 보면 한국-중국 간에는 이(李), 조(趙), 장(張)의 세 성이, 한국-타이완 간에는 이(李), 장(張), 임(林)의 세 성이, 중국-타이완 간에는 왕(王), 황(黃), 진(陳), 이(李), 장(張), 유(劉), 양(楊), 오(吳)의 여덟 성이, 중국-베트남 간 및 타이완-베트남 간에는 진(陳), 황(黃)의 두 성이 겹친다. 한국과 베트남은 10위권 내에서 겹치는 성이 없다. 한국 --------- 중국 --------- 타이완 --------- 베트남 --------- 일본의 성씨는 한자 두 글자나 세 글자로 이루어진 복성이 주류이므로, 한국, 중국, 베트남 등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의 성(姓)과 구별이 된다. 다만, 일본의 외자성(보통은 훈독하므로 한음절이 아닌 다음절로 발음) 중에는 한·중·베트남과 겹치는 성이 몇몇 있고, 한자의 사용에 따라서는 흡사한 이름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다음은 2000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라 10대 성씨와 본관을 보면 아래와 같다. 순위 성씨 가구수 인구수 1 김(金) 3,102,537 9,925,949 2 이(李) 2,113,007 6,794,637 3 박(朴) 1,215,918 3,895,121 4 최(崔) 676,773 2,169,704 5 정(鄭) 626,265 2,010,117 6 강(姜) 325,288 1,044,386 7 조(趙) 306,022 984,913 8 윤(尹) 294,708 948,600 9 장(張) 287,195 919,339 10 임(林) 237,145 762,767 순위 본관 가구수 인구수 1 김해 김씨(金海金氏) 1,295,080 4,124,934 2 밀양 박씨(密陽朴氏) 946,307 3,031,478 3 전주 이씨(全州李氏) 808,511 2,609,890 4 경주 김씨(慶州金氏) 542,018 1,736,798 5 경주 이씨(慶州李氏) 446,598 1,424,866 6 경주 최씨(慶州崔氏) 304,722 976,820 7 진주 강씨(晉州姜氏) 300,724 966,710 8 광산 김씨(光山金氏) 258,936 837,008 9 파평 윤씨(坡平尹氏) 221,477 713,947 10 청주 한씨(淸州韓氏) 199,642 642,992 아래는 한글로 표기할 때 동음이 되는 서로 다른 성들의 목록이다. 성씨 한자 표기 성씨 한자 표기 성씨 한자 표기 강 姜, 康, 強, 剛 반 潘, 班 순 舜, 淳, 順, 荀 견 堅, 甄 방 方, 房, 龐, 邦, 旁 시 時, 柴 경 慶, 景 범 范, 凡 신 申, 辛, 愼 공 孔, 公 변 邊, 卞 량/양 梁, 楊, 樑, 襄 구 具, 丘, 邱 봉 奉, 鳳 림/임 林, 任 국 鞠, 國, 菊 빈 彬, 賓 려/여 呂, 餘 기 奇, 箕 사 史, 舍, 謝 류/유 柳, 劉, 兪, 庾 라/나 羅, 奈 서 徐, 西 리/이 李, 伊, 異 로/노 盧, 魯, 路 석 石, 昔, 碩 전 田, 全, 錢 뢰/뇌 雷, 賴 선 宣, 先 정 鄭, 丁, 程 단 段, 單, 端 설 薛, 偰 조 趙, 曺 도 都, 道, 陶 성 星, 成 주 朱, 周 돈 敦, 頓 소 蘇, 邵 하 河, 夏 마 馬, 麻 송 宋, 松 한 韓, 漢 문 文, 門 수 水, 洙 대법원 자료. 이 해에 태어난 신생아들의 이름 가운데 가장 흔한 것 10선(選)이다. 순위 1945년 1948년 1958년 1968년 1975년 1978년 1988년 1991년 1998년 1 영자 순자 영숙 미경 미영 지영 지혜 유진 유진 2 정자 영자 정숙 미숙 미정 은정 지은 민지 민지 3 순자 정순 영희 경희 은주 미영 수진 지은 수빈 4 춘자 정숙 명숙 경숙 은영 현정 혜진 지현 지원 5 경자 영숙 경숙 영숙 현주 은주 은지 지원 지현 6 옥자 영순 순자 미영 은경 은영 지영 수진 지은 7 명자 정자 정희 영미 지영 현주 아름 지혜 현지 8 숙자 영희 순옥 정희 미경 선영 지현 은지 은지 9 정순 정희 영순 정숙 현정 지연 지연 수빈 예진 10 화자 옥순 현숙 현숙 미정 혜진 보람 지영 예지 순위 1945년 1948년 1958년 1968년 1975년 1978년 1988년 1995년 1998년 1 영수 영수 영수 성호 정훈 정훈 지훈 지훈 동현 2 영호 영호 영철 영수 성호 성훈 성민 동현 지훈 3 영식 영식 영호 영호 성훈 상훈 현우 현우 성민 4 정웅 영철 영식 영철 성진 성진 정훈 준영 현우 5 영길 정수 성수 정호 정호 지훈 동현 재현 준호 6 영일 종수 성호 영진 상훈 성호 준영 성민 민석 7 정수 정식 상철 병철 성민 정호 민수 성현 민수 8 정남 정호 종수 진호 영진 준호 준호 승현 준혁 9 광수 영환 경수 성수 상현 성민 상현 준호 준영 10 중수 광수 상호 재호 준호 민수 진우 민수 승현 순위 2005년 2008년 2009년 2013년 1 서연 서연 서연 서연 2 민서 민서 민서 서윤 3 서현 지민 서현 지우 4 수빈 서현 지우 서현 5 유진 서윤 서윤 민서 6 민지 예은 지민 윤서 7 서영 하은 수빈 채원 8 지원 지우 하은 하윤 9 수민 수빈 예은 지아 10 예원 윤서 윤서 은서 순위 2005년 2008년 2009년 2013년 1 민준 민준 민준 민준 2 현우 지훈 지후 서준 3 동현 현우 지훈 주원 4 준혁 준서 준서 예준 5 민재 우진 현우 시우 6 도현 건우 예준 준서 7 지훈 예준 건우 도윤 8 준영 현준 현준 현우 9 현준 도현 민재 건우 10 승민 동현 우진 지훈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목록 한국의 외래 귀화 성씨 한국의 사라진 성씨 한국의 복성 중국인의 성명 베트남의 성씨 일본인의 성명 뿌리를 찾아서 분류:인명 |
후한(後漢) 연희(延熹) 4년 후한(後漢) 환제(桓帝) 15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8년 고구려(高句麗) 차대왕(次大王) 16년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34년 음력 7월, 신라,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고, 바닷물고기가 많이 나와 죽었다. 7월 16일 - 삼국시대 촉한의 건국자 유비. 8월 31일 - 로마 제국 17대 황제 콤모두스. 오나라의 장수 여대. 3월 7일 - 로마 제국 15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진수 (233), 《삼국지》 선주전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연희(延熹) 8년 후한(後漢) 환제(桓帝) 19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2년 고구려(高句麗) 차대왕(次大王) 20년 / 신대왕(新大王) 원년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38년 신라의 아찬 길선이 모반을 일으키다 발각, 백제로 피하다. 아달라 이사금이 백제 개루왕에게 길선의 신변을 요청했으나 개루왕이 거절, 양국의 평화가 깨어지다. 아달라가 백제 원정에 나서나 식량 부족으로 퇴각하다. 차대왕이 연나부의 명림답부에게 살해되다. •중국 삼국시대의 장수 장비 로마 제국 22대 황제 마크리누스 고구려(高句麗) 6대 국왕 태조대왕(太祖大王) 고구려(高句麗) 7대 국왕 차대왕(次大王)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연희(延熹) 9년 후한(後漢) 환제(桓帝) 20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3년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2년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39년 / 초고왕(肖古王) 즉위 원년 *2월 18일 (음력 1월 1일, 병오(丙午)일), 일식이 있었다. 대진국(로마제국)의 황제 안돈이 사신을 통해 후한에 상아를 보내다. 환관 일파가 환제(桓帝)를 충동질하여 환관 공격의 급선봉인 청류당의 이응(李膺) 등 2백 여 명을 붙잡아 투옥했다.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진술을 택했다. 이에 불리를 자초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환관은 외척의 두무(竇武) 등이 상주하여 간(諫)한 것을 기회로 삼아 당인(黨人)을 방문하여 향리로 돌려보내되 금고(禁錮) 처분을 내렸다. (제일차 당고의 금, 당고(黨錮)의 옥(獄)) 오나라의 무장 태사자 백제(百濟) 4대 국왕 개루왕 (재위 128년 - 166년)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연희(延熹) 10년 후한(後漢) 영강(永康) 원년 후한(後漢) 환제(桓帝) 21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4년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3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년 봄, 동강(東羌)·선령강(先零羌) 5~6천기(騎)기가 관중(關中)에 쳐들어와 대우(祋祤)를 포위하고 운양(雲陽)을 약탈하였다. *여름, 강족이 다시 공격하여 양영(兩營)을 함락하고, 1천여명을 죽였다. 음력 7월 백제가 신라를 침공, 2개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을 사로잡다. 음력 8월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이 기병 8천기, 일길찬 흥선이 보병 2만을 이끌고 한수(漢水)를 넘다. 백제가 사로잡은 주민을 반환, 양국간 강화가 성립되다. 겨울, 강족의 안미(岸尾)·마별(摩蟞) 등이 동족을 위협하여 삼보(三輔)를 다시 노략질하였다. 장환(張奐)이 사마(司馬) 윤단(尹端)·동탁(董卓)을 함께 보내어 격파하고 이들을 크게 무찔렀으며 우두머리의 목을 베니, 수급(首級)과 포로가 1만여명이었다. 이로서 삼주(三州)가 평정되었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녕(建寧) 원년 후한(後漢) 환제(桓帝) 21년/후한(後漢) 영제(靈帝) 원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5년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4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년 *1월 25일(음력 12월 28일), 후한, 환제(桓帝)가 붕어하였다. 황후의 아버지인 두무(竇武)가 태후에게 아뢰어 해독정후(解瀆亭侯) 유굉(劉宏)을 황제로 삼게 했는데, 이가 당시 12세의 영제(靈帝)이다. 당시 중상시(中常侍)였던 환관 조절(曹節)은 어린 유굉이 있는 곳으로 가서 궁궐로 모셔 왔다. *2월 17일, 영제가 즉위하였다. 영제는 할아버지 유숙(劉淑)을 효원황(孝元皇)으로, 그 부인 하씨(夏氏)를 효원황후(孝元皇后)로 추존했다. 아버지 유장을 효인황(孝仁皇)으로 추존하고, 그의 묘도 신릉(慎陵)이라 이름지었으며 어머니인 동씨를 진원귀인(慎園貴人)에 봉했다. 조절은 황제 옹립에 공을 세웠다 하여 장안향후(長安鄕侯)가 되었다. 황제가 아직 어렸으므로 조정의 실권은 환제의 세번째 황후인 환사황후 두묘(두태후)와 두씨의 아버지 두무(竇武)를 비롯한 그 일족과 두씨가 황후로 책봉었을 때 공을 세웠던 진번(陳蕃)이 쥐게 되었다. *음력 4월, 신라의 이찬 계원이 죽었다. 신라는 흥선을 이찬으로 삼았다. *음력 5월, 유구(劉矩)가 태위에 임명되었다. *환관 왕보(王甫)와 조절이 두태후를 섬기며 아첨을 일삼자, 두무와 진번은 이들을 제거하려 했다. 두 사람은 번갈아 태후에게 환관들을 제거할 것을 청했으나 태후가 계속 망설였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음력 9월, 중상시 조절이 태부 진번, 대장군 두무, 상서령 윤훈(尹勳), 시중 유유(劉瑜), 둔기교위(屯騎校尉) 풍술(馮述)를 죽였다. *음력 11월, 일식이 일어나자, 태위 유구가 면직되었다. *조조 휘하의 장수 조인 *손권의 모사 고옹 여남 태수 이통 *음력 4월 후한의 재상 주경(周景)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녕(建寧) 2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2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6년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5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4년 *후한의 실권자 두무(竇武)는 당인(黨人)의 금고(禁錮)(167년)를 해제하여 그들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도리어 환관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 두무는 자살하고, 이응 등의 당인은 또다시 붙잡혔다. 당인(黨人) 중 하나인 장검(張儉)은 후람(侯覽)과 사이가 나빴는데, 이 때문에 후람 부하에게 역도들의 수괴라는 모함을 받았다. 당시 대장추(大長秋)였던 조절을 비롯해 장양(張讓) 등 환관은 영제를 부추겨 이응(李膺)을 포함한 당인 백여 명을 죽였다. 이때 죽음을 당한 자는 1백 여 명이요,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禁錮)의 처분을 받은 자는 6백 명에서 7백 명이나 되었다. 이 제2회의 당고에 의해서 청류당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아 해체되었으며, 환관의 전제가 확립되었다.(→제이차 당고의 금) |
후한(後漢) 건녕(建寧) 5년 후한(後漢) 희평(熹平) 원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5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9년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8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7년 후한이 고구려를 침공하다. 좌원 대첩 한나라의 침입에 맞서 명림답부의 지휘 아래 고구려가 대승을 거두다. 교주에 귀양 가 있던 두태후의 어머니가 죽자, 이를 안 두태후도 얼마 가지 못해 병들어 죽었다. 조절은 두태후를 황후가 아닌 귀인(貴人)의 예로 장사지내려 했으나 영제(靈帝)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환제의 묘소에 합장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영제를 설득했기 때문에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음력 1월, 신라, 구도(仇道)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음력 2월, 신라, 시조묘를 섬겼다. 수도 금성에 큰 돌림병이 있었다. 오나라 도독 노숙(魯肅) 삼국 시대 위나라 장군 왕릉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희평(熹平) 4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8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22년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11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10년 음력 3월, 영제(靈帝)는 유학자들에게 5경의 문자를 바로잡고 그 내용을 당시 의랑(議郞)이었던 채옹에게 고문(古文), 전서(篆書), 예서(隸書) 세가지 글씨로 옮겨쓰게 한 다음 석공에게 그 글씨를 새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후한 태위 양표의 아들 양수(楊修) 손책의 의형제 주유(周瑜) 부간 손책 |
후한(後漢) 희평(熹平) 7년 후한(後漢) 광화(光和) 원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11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25년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14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13년 음력 7월, 후한에서 푸른 무지개가 궁궐에 나타나는 등 괴이한 현상이 속출하자 조정에서는 불길하게 여기고 신하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대책을 말하게 했다. 이 때 채옹은 환관인 중상시(中常侍) 정황(程璜)과 태후궁의 곽옥(霍玉) 등을 물리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다른 환관 조절(曹節)이 채옹의 글을 보고 정황에게 내용을 알려 주었다. 이 때문에 앙심을 품은 정황은 채옹을 모함하여 내쫓을 궁리를 했다. 마침 채옹의 숙부인 위위(衛尉) 채질(蔡質)이 정황의 양녀와 결혼한 양구(陽球)와 사이가 나빴기에 정황은 두 사람을 한꺼번에 모함하여 옥에 갇히게 하고, 계속 영제에게 아뢰어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또다른 중상시 여강(呂强)이 채옹의 구명을 위해 애썼기 때문에 머리를 깎인 채 삭방(朔方)에 귀양가는 것으로 그쳤다. 매관 제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여몽 *장승 |
후한(後漢) 광화(光和) 2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12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26년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15년 / 고국천왕(故國川王) 원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14년 후한, 여강이 상소를 올려 채옹을 다시 등용할 것을 청했으나 영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도(司徒) 유합(劉郃)은 양구 등과 함께 조절을 제거하려 했으나, 계획이 새어나가 조절의 모함을 받고 모두 죽었다. 촉한의 군사 방통 위의 대신이자 진황제 사마염의 조부 사마의 고구려(高句麗) 8대 국왕 신대왕(新大王) |
후한(後漢) 광화(光和) 7년 후한(後漢) 중평(中平) 원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17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31년 /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원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6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19년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다. 겨울, 북지군(北地郡), 부한현(枹罕縣), 하관현(河關縣), 황중(湟中)의 선령강(先零羌)과 의종호(義從胡)가 북궁백옥(北宮伯玉)과 이문후(李文侯)를 장군으로 추대하고 난을 일으켰다. 금성군(金城郡) 사람 변장(邊章) · 한수(韓遂)는 위협하여 군정을 맡기고 호강교위(護羌校尉) 영징(泠徵)과 금성태수(金城太守) 진의(陳懿)는 죽였다.(→양주의 난) 고구려의 고국천왕이 한왕조의 군대를 좌원(坐原)에서 격퇴하고 요동으로 몰아내다. 신라의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이 왕위에 오르다. 음력 3월, 신라(新羅) 8대 국왕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장각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중평(中平) 2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18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2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7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0년 *음력 1월, 신라, 벌휴 이사금, 시조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음력 2월, 신라, 구도(仇道)에게 파진찬(波珍飡)의 벼슬을, 구수혜(仇須兮)에게 일길찬(一吉飡)의 벼슬을 내리고, 좌우(左右)의 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쳤다. *음력 7월, 후한, 삼보(三輔)에 멸구떼가 나타났다.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 황보숭(皇甫嵩)을 면직하였다. *음력 8월, 후한, 사공(司空) 장온(張溫)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북궁백옥(北宮伯玉)을 토벌하였다. 범엽(5세기), 《후한서》 〈제8권〉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벌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중평(中平) 3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19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3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8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1년 *음력 1월, 신라의 벌휴 이사금, 주군(州郡)을 순행(巡幸)하고, 풍속(風俗)을 관찰하였다. *음력 5월 임진일 그뭄에 신라에 일식이 있었다. *음력 7월, 남신현(南新縣)이 신라에게 가화(嘉禾)를 진상하였다. 4월 4일 - 로마 제국 21대 황제 카라칼라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벌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중평(中平) 4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20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4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9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2년 *음력 3월, 벌휴 이사금, 주군(州郡)에 명령을 내려, 토목(土木)의 일을 벌여 이로써 농사지을 시간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였다. 음력 10월, 신라 북녘 땅에 눈이 크게 내려, 깊이가 한 길〔丈 〕에 달했다. 위의 초대 황제 조비(曹丕) 촉의 군사 마량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벌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중평(中平) 6년 / 광희(光熹) 원년 / 소녕(昭寧) 원년 / 영한(永漢) 원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22년 / 후소제(後少帝) 원년 / 헌제(獻帝) 원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6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11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4년 5월 3일(음력 4월 1일) - 백제에서 일식 발생. 음력 7월, 신라의 구도가 백제와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를 물리치고, 500여급(級)을 죽이거나 붙잡았다. 제갈근과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 가락국(駕洛國)의 왕후(王后) 허황옥(許黃玉) *중국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초평(初平) 원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2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7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12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5년 *1월 1일은 음력 12월 9일이다. 2월 23일이 음력 1월 1일이다. *음력 8월, 백제가 신라의 서쪽 경계 원산향(圓山鄕)에 들이닥치고, 또한, 다가와 부곡성(缶谷城)을 에워싸자, 신라에서는 구도가 굳센 기병 5백명을 이끌어 이를 쳐냈다. 백제의 병사가 거짓으로 달아나자, 구도가 쫓아가 와산(蛙山)에 이르렀으나, 백제에게 패한 바가 되었다. 왕은 구도의 실책(失策)으로 인하여, 그를 낮추어 부곡성주로 삼았고, 설지(薛支)를 좌군주로 삼았다. 중국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벌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초평(初平) 2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3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8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13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6년 2월 17일(음력 1월 6일, 신축(辛丑)일), 후한, 크게 사면을 내렸다. 3월 25일(음력 2월 12일, 정축(丁丑)일), 동탁이 스스로 태사(太師)가 되었다. 음력 2월 - 후한, 원소 · 원술 등이 이끄는 반동탁 연합군의 손견 군과 동탁이 이끄는 중앙 정부군이 사례 하남윤 양현의 양인(陽人) 땅에서 충돌하여, 손견이 승리하였다. (양인 전투) 동탁은 낙양의 여러 황제의 능을 발굴하게 하였다. 음력 4월, 동탁이 장안(長安)에 들어왔다. 8월 1일(음력 6월 23일 병술(丙戌)일), 후한에서 지진이 있었다. 음력 7월, 사공 종불(種拂)이 면직되고, 광록대부 제남(濟南) 사람 순우가(淳于嘉)가 사공이 되었다. 태위(太尉) 조겸(趙謙)이 파직되고, 태상(太常) 마일제(馬日磾)가 태위가 되었다. 11월 5일(음력 10월 1일 임술(壬戌)일), 동탁이 위위(衛尉) 장온(張溫)을 죽였다. 음력 11월, 청주(青州)의 황건적이 태산(太山)에 쳐들어갔으나, 태산태수 응소(應劭)가 이를 격파하였다. 황건적은 방향을 바꾸어 발해(勃海)에 쳐들어갔고, 공손찬(公孫瓚)이 황건적과 더불어 동광(東光)에서 싸워, 다시 이를 대파하였다. 이때, 장사(長沙)에는 죽었다가 달月을 지나 부활한 사람이 있었다.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함. 관우의 아들이자 촉나라의 장수 관흥 |
후한(後漢) 초평(初平) 3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4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9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14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7년 *음력 1월 정축(丁丑)일에 후한에서는 크게 사면을 내렸다. 원술(袁術)이 보낸 장수 손견(孫堅)이 양양(襄陽)에서 유표(劉表)를 공격하여 손견이 전사하였다. 원소(袁紹) 및 공손찬(公孫瓚)은 계교(界橋)에서 싸워, 공손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계교 전투) 음력 1월, 신라에서는 국량(國良)에게 벼슬을 내려 아찬으로 삼고, 술명(述明)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5월 22일(음력 4월 23일, 신사(辛巳)일), 동탁(董卓)을 주살(誅殺)하였고 삼족(三族)을 멸하였다. 사도 왕윤(王允)을 녹상서사(錄尚書事)로 삼고 조정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사자 장종(張種)을 보내 산동(山東)을 위무하였다. 음력 4월, 청주(青州)의 황건적이 동평(東平)에서 연주(兗州) 자사(刺史) 유대(劉岱)를 공격하여 죽였다. 동군(東郡) 태수(太守) 조조(曹操)가 수장(壽張)에서 황건적을 크게 무찔러 항복을 받아냈다. 신라의 수도에 눈이 왔는데, 깊이가 3척에 달했다. *6월 7일 (음력 5월 10일, 정유(丁酉)일) 후한, 크게 사면을 내렸다. 6월 17일(음력 5월 20일, 정미(丁未)일), 정서장군(征西將軍) 황보숭(皇甫嵩)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음력 5월, 동탁의 부곡(部曲) 장수 이각(李傕)·곽사(郭汜)·번조(樊稠)·장제(張濟) 등이 반동을 일으켜 수도를 공격하였다. 신라에서는 크게 물난리가 나서 산이 무너진 곳이 10여 곳이었다. 6월 28일(음력 6월 1일 무오(戊午)일), 장안성(長安城)을 함락하였고, 태상(太常) 종불(種拂)·태복(太僕) 노욱(魯旭)·대홍려(大鴻臚) 주환(周奐)·성문교위(城門校尉) 최열(崔烈)·월기교위(越騎校尉) 왕기(王頎)가 모두 전사하고, 관리와 백성 중에 죽은 자가 수만여명이었다. 이각 등은 모두 스스로 장군(將軍)이 되었다. 위나라의 시인 조식 5월 22일 - 중국 후한 말의 장군 겸 정치가 동탁. 7월 4일 -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 왕윤. 12월 31일 - 로마 제국 17대 황제 콤모두스 손견 *범엽, 《후한서》(5세기), 〈제9권 효헌제기(孝獻帝紀)〉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벌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초평(初平) 4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5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10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15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8년 2월 19일(음력 1월 1일 갑인(甲寅)일) 중국과 한반도에서 일식이 관측되었다. 음력 3월, 신라 한기부(漢祇部)에서 어느 여자가 한번에 4남 1녀를 낳았다. 음력 6월, 신라에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굶주린 왜인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 6월 2일 - 로마제국 19대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조조의 아버지 조숭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벌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원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8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13년 /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원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18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1년 음력 1월부터 4월까지 신라에 가뭄이 들었다. 음력 2월, 신라는 궁실을 중수(重修)하였다. 음력 4월, 신라의 궁궐 남쪽 큰 나무에 벼락이 쳤다. 또한 신라의 수도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쳤다. 음력 4월 이후, 신라, 내해 이사금이 즉위하였다. 왕이 즉위하는 날에 이르러 큰 비가 내리니 백성이 기뻐하고 경사스러워했다. 신라(新羅) 9대 국왕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곽가의 전임자 희지재 남흉노의 어부라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벌휴 이사금 조(條), 내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3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10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3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2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3년 *음력 4월, 신라의 시조묘 앞의 넘어진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 *음력 5월, 신라 서쪽에 큰 물이 들어, 물난리를 만난 주현(州縣)에 1년간의 조세와 징발을 면해 주었다. *음력 7월, 신라, 관리를 보내, 위무(慰撫)하고 위문(慰問)하였다. 후한의 명장 여포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5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12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5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4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5년 *음력 7월,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이고, 떨어지는 서리가 풀을 죽였다. *음력 9월 경오(庚午)일 그뭄, 신라에서 일식이 관측되었다. 음력 9월, 신라는 알천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동승(董承) 문추(文醜) 손책(孫策) 수원진(眭元進) 순우경(淳于瓊) 안량(顔良) 여위황(呂威璜) 저수(沮授) 전풍(田豊) 조예(趙叡) 한거자(韓莒子)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이우형 (? - 2001년 4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아마추어 고지도 연구가이다. 1980년 겨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조선 영조때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쓴 《문헌비고》의 ‘산수고(山水考) 내용을 기반으로 누군가 다시 쓴 《산경표》를 발굴해 내었다. 1990년에는 대동여지도에 누락되었던 동여도의 지명을 대동여지도로 옮겨 편찬했다.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묻혀 있던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찾아냈다. 고산자 김정호를 연구하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았다. 백두대간이라는 말을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분류:생년 미상 분류:2001년 죽음 분류:대한민국의 산악인 |
아르키메데스 점 이란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킨다. 연구 대상을 그밖의 모든 것들과 관계에서 볼 수 있도록 하며, 그것들을 독립적인 것들로 유지하도록 하는, 그 연구 대상에서 "자신(관찰자) 제거하기"라는 이상(Ideal)은 바로 아르키메데스 점의 관점으로 묘사된다.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이 놓일 장소만 주어진다면, 지구라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객관성은, 관찰자 없이 관찰이 행해질 수 있다는 망상과 다를 바 없다.” -- 하인츠 폰 푀르스터 분류:과학사 분류:아르키메데스 |
modem router internals labeled.jpg|섬네일|300px| 현대적 임베디드 시스템의 예 ADSL 모뎀/라우터 내부. (4) 마이크로프로세서, (6) RAM, (7) 플래시 메모리. 임베디드 시스템 (, 내장형 시스템)은 기계나 기타 제어가 필요한 시스템에 대해, 제어를 위한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장치 내에 존재하는 전자 시스템이다. 즉, 임베디드 시스템은 전체 장치의 일부분으로 구성되며 제어가 필요한 시스템을 위한 두뇌 역할을 하는 특정 목적의 컴퓨터 시스템이다. 이에 비해 개인용 컴퓨터와 같은 특정되지 않는 일반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과 대조된다. 특정 목적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이므로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수행하는 프로그램 코드를 작성하여 메모리에 기록하고 이를 읽어 동작 시키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전자 하드웨어와 기계 부분을 포함하는 전체 장치의 일부로 내장되었다는 의미에서 임베디드 단어가 사용되었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오늘날 일상 생활에 쓰이는 많은 장치들을 제어하고 있다. 전자 시스템을 통해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 이며, 종종 실시간(real-time computing) 계산을 행하는 데 있어 제약을 갖는다. 임베디드 시스템에는 마이크로컨트롤러(microcontroller)나 DSP(digital signal processor) 등의 프로세서 코어가 장착될 수 있다. 마이크로컨트롤러는 규모가 작은 시스템에 사용하므로 보통 운영 체제를 포함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면, 임베디드는 좀 더 규모가 크기 때문에 운영 체제(윈도우 CE, 또는 리눅스 커널)가 시스템에 포함된다. 이 운영체제 위에 특수한 기능만을 수행하도록 응용 프로그램이 장착되어 동작하는 경향이있다. 예를 들어 같은 ARM이라도 마이크로컨트롤러는 한 칩에 메모리(플래시, RAM)을 포함하고 기타 하드웨어(타이머, UART, SPI, ADC 등 필요에 따라 장착)를 포함한다. 여기서 메모리는 용량이 크지 않기 때문에 운영체제를 포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임베디드 시스템에서는 하드웨어는 한 칩내에 장착하지만, 칩 밖에 많은 용량의 메모리를 장착하고 PCB에서 연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시스템이 크기 때문에 용량이 큰 메모리를 시스템에 장착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임베디드 시스템"이란 용어는 엄밀하게 정의된 것은 아닌 것이, 대부분의 시스템은 어느 정도의 확장성 또는 재프로그램 능력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수첩형 컴퓨터는 임베디드 시스템과 유사한 운영 체제와 마이컴을 사용할 수 있지만, 다른 응용 프로그램을 읽어들이거나 다른 주변장치를 연결하는 것이 허용된다. 더 나아가서 재프로그램성을 주요 기능으로 드러내지 않는 시스템도 보통 소프트웨어 갱신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범용" 과 "임베디드" 사이의 연속체 속에서 대형 응용 시스템은 한두 가지 기능 전용으로 설계되었다 하더라도 부품 수준에서 범용 요소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는 하드 디스크와 같은 대용량 저장장치에 운영 체제를 내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임베디드 시스템은 운영 체제와 응용 프로그램들이 롬(플래시)에 이미지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가 시동과 동시에 램 디스크를 만든 다음, 램 디스크 위에 운영 체제와 응용 프로그램들이 구성되고 구동되는 시스템도 있다. 최초의 현대의 임베디드 시스템 가운데 하나는 MIT 인스트루멘테이션 연구소의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가 개발한 아폴로 가이던스 컴퓨터였다. 당시에 크기와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로 개발된 모놀리딕 집적 회로를 도입했기 때문에 아폴로 프로젝트에서 이 아폴로 가이던스 컴퓨터는 가장 위험한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초기 대량 생산된 임베디드 시스템은 1961년에 출시된 미니트맨 미사일용 오토네틱스 D-17 가이던스 컴퓨터였다. 미니트맨 II가 1966년 생산을 시작했을 때, D-17은 최초의 고용량 이용 집적 회로였던 새로운 컴퓨터로 교체되었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하나 이상의 주 처리 코어로 제어되는데, 이 코어는 보통 마이크로콘트롤러 또는 디지털 신호 처리 장치이다. 그러나 특정 임무 전용으로 사용되며, 때로 매우 강력한 연산능력이 요구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항공 관제 시스템도 임베디드 시스템으로 보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다. 비록 대형 컴퓨터와 공항, 레이다 망을 잇는 지역 또는 전국 전산망도 동원되지만 말이다. (각각의 레이다는 한 두개씩의 임베디드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특정 임무에 전념하기 때문에 설계자들이 최적화하여 그 크기와 생산 비용을 줄이고 신뢰성과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어떤 임베디드 시스템은 대량생산되어 규모의 경제로부터 득을 보기도 한다. 외형적으로 임베디드 시스템의 범위는 들고 다닐 수 있는 디지털 시계와 MP3 재생장치 부터 커다란 고정 설비, 예를 들어 교통 신호등, 공장 제어 장치, 또는 원자력 발전소 제어 시스템에 이른다. 복잡성도 다양하여 간단히 한개의 마이컴만 사용한 것 부터 매우 복잡한, 여러 단위와 주변장치, 네트워크를 갖추고 큰 캐비넷 안에 설치되는 것도 있다. PDA 휴대전화 스마트폰 홈네트워크 디지털TV PMP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내비게이션 산업용 콘트롤러 디지털 카메라 USB 저장 장치 전기밥솥 냉장고 MP3 플레이어 DMB 인공위성 (방송(통신)위성, 군사위성, 과학(실험)위성) 계측기 (로직 애널라이저(Logic Analyzer), 오실로스코프 (oscilloscope), 스펙트럼 애널라이저(Spectrum Analyzer), 네트워크 애널라이저(분석기, VNA), 프로토콜 애널라이저(분석기) ) 라우터 (router) 서버 (server) 등 각종 네트워크 장비 게임기 마이크로 마우스 로봇의 제어부 자동차 엔진 제어 장치 임베디드 시스템은 대개 저가로 선택된 기능만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몇몇 기능은 매우 빠른 처리가 필요하며, 다른 기능들은 대부분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흔히 임베디드 시스템의 많은 부품들은 성능이 낮은 것들이다. 여기서 느리다는 것은 단지 클럭 속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임베디드 시스템의 전체 구조는 단가를 낮추기 위해 범용 컴퓨터 시스템의 하드웨어에 비해 의도적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임베디드 시스템은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이는 일반 주변장치 인터페이스에 비해 10^24배 정도는 느린 직렬 버스 방식으로 제어되는 주변 장치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임베디드 시스템이 수백만 개 규모로 양산되기 때문에, 생산 비용을 줄이는 것이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몇몇 임베디드 시스템들은 대단한 처리 성능과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시스템에는 (상대적으로) 느린 프로세서와 작은 크기의 메모리를 탑재하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하드웨어 장치의 롬이나 플래시 메모리에 내장하는 소프트웨어를 일러 펌웨어라 한다. 임베디드 시스템 상의 프로그램은 대개 제한된 하드웨어 자원 위에서 실시간(real-time) 제약 조건을 가지고 동작한다. 시스템 상에 디스크 드라이브나 운영 체제, 키보드나 화면이 없는 경우도 많다. 파일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플래시 드라이브를 저장 매체로 사용할 수도 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있다 하더라도 조그마한 키패드거나 LCD 정도일 수 있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여러 해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오류 없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된다. 따라서 펌웨어는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이는 소프트웨어보다 신중한 개발과 테스트 과정을 거친다. 대부분의 임베디드 시스템은 디스크 드라이브나 스위치, 버튼 등 기계적인 동작으로 손상을 입을 수 있는 부품의 사용을 피하고 대신 플래시 메모리 같은 물리적 손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칩 자재를 사용한다. 또한 임베디드 시스템이 적용되는 분야는 석유 시추공, 우주공간 등 인간이 직접 즉각적인 제어를 하기 어려운 장소일 수 있다. 따라서 임베디드 시스템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스스로 다시 기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응급 복구는 소프트웨어가 주기적으로 타이머를 건드리지 않으면 컴퓨터를 초기화시키는 왓치독 타이머라고 불리는 전자 부품을 통해 이루어진다. 임베디드 시스템에서 큰 흐름 가운데 하나는 특정 적용 분야에 맞는 IC들을 하나의 CPU 칩에 집적시킴으로서 별도의 주변 장치용 칩을 보드 위에 달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시스템 온 칩(SoC, System On Chip) 기술이다. 임베디드 시스템에는 ARM, MIPS, 콜드파이어/68K, PowerPC, x86, PIC 마이크로컨트롤러, 8051 등 많은 다양한 CPU 아키텍처가 사용된다. 이러한 점이 데스크톱 컴퓨터 (개인용 컴퓨터) 시장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2003년 현재, 데스크톱 컴퓨터 시장에선 인텔/IBM x86이나 애플의 매킨토시에서 사용되는 모토로라/IBM PowerPC만이 경쟁 아키텍처이다. 2006년을 기준, CPU 아키텍처에서는 ARM 코어가 가장 강세이다. 이 밖에도 400여개 이상의 임베디드 시스템에 쓰이는 코어가 있다. 인텔 8051, PIC 마이크로컨트롤러, AVR(ARM 코어 사용) 8비트 등이 시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종류이다. ARM은 보통 8비트에 비해 고성능에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리눅스 커널을 포팅하여 많이 사용한다. OS를 탑재하기 위해 ARM 칩 외부에 RAM이나 FLASH을 PCB 상에 장착한다. 리눅스 개발에 필요한 요소와 ARM과 결합하여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가 개발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ARM-코어, FLASH, 그리고 RAM을 한 칩에 만들어 지면 리눅스 포팅이 힘들어져 OS없이 전체 시스템을 C언어 등을 동원하여 요구 동작에 맞게 코딩하여 시스템을 구성한다. 이러한 ARM은 8비트 MCU와 OS를 갖는 임베디드의 중간 성능과 기능을 발휘한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흔히 운영 체제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사용한다 하더라도 윈도우 CE나 리눅스 등 임베디드에 맞춰진 운영 체제나 RTOS:국방/항공용 실시간 운영체제(NEOS)를 사용하여 자신의 새로운 시스템에 설정한다. 이는 대개의 임베디드 시스템의 경우 CPU나 메모리 자원 등의 구성이 일반 PC 등의 표준적인 플랫폼과는 달리 한계가 있는 시스템으로 일반 개인 컴퓨터용 운영 체제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그렇듯이, 임베디드 시스템 설계자들도 프로그래밍을 위해 컴파일러, 어셈블러디버거를 사용한다. 리눅스 커널 기반의 운영 체제를 사용할 경우, 개발 도구는 보통 GNU의 gcc을 사용한다. gcc는 소스를 웹사이트에서 가져온 뒤, 목적 CPU에 맞추어 컴파일하면 gcc 관련 도구를 생성할 수 있다. 목적 CPU을 설정하고 make을 사용하면 해당 CPU의 크로스 컴파일러 gcc 관련 실행 파일을 얻을 수 있다. gcc를 사용할 때, 프로그램 개발에서 다음 2가지 방식의 개발도구를 사용한다 이클립스( Eclipse IDE for C/C++ Developers)는 IDE로 gcc와 연결하여 사용한다. make 방식의 고전적 방식을 사용한다. 위의 이클립스를 사용하기 위해 개발환경은 리눅스 PC의 X-윈도우에서 주로 행해진다. gcc를 윈도우에서 실행할 경우, 시그윈 상에서 실행 되도록 gcc을 컴파일하면 된다. 커널이 동작할 때, 내부의 상태를 표시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C언어 커널함수 printk 을 사용하여 외부의 통신라인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있다. 전용 CPU의 에뮬레이션 도구가 있다면 커널의 디버깅의 편리성을 얻을 수 있다. 이클립스는 디버깅 도구로 GDB을 사용할 수 있다. 리눅스 응용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때, GDB 서버를 타킷 보드에 설치하고 이클립스와 연결하면 이더넷 등의 통신을 통해 디버깅이 가능하다. 윈도우 CE는 윈도우 PC에서 동작하고 비주얼 스튜디오 개발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초기의 환경은 커널(윈도우 CE 플랫폼 빌더)과 응용 프로그램 개발(임베디드 비주얼 C++)이 다른 도구를 사용했다. 이후 커널 컴파일과 응용 프로그램 개발이 비주얼 스튜디오에 통합하여 개발한다. 윈도우 CE와 PC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은 차이가 있으므로 비주얼 스튜디오의 설정은 달라야 한다. 윈도우 CE용 개발 도구를 설치해야 한다. 윈도우 임베디드 컴팩트 7 설치 예 # 비주얼 스튜디오 2008 프로페셔널 설치 # 비주얼 스튜디오 2008 서비스 팩 1 설치 # 선택 사항 마이크로소프트 익스프레션 블렌드 3 설치 # 윈도우 임베디드 컴팩트 7 설치 # 윈도우 임베디드 컴팩트 7 업데이트 설치 순서로 설치한다. 디버깅은 인서킷 에뮬레이터 등의 디버거(디버깅 프로그램)를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임베디드 시스템 설계자는 일반적인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가 흔히 사용하지 않는 도구들도 가끔 이용한다. 몇몇 설계자들은 데이터 파일을 코드로 변환하는 유틸리티를 사용하여 프로그램에 여러 유형의 데이터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대부분의 설계자들은 프로그램에 체크섬(Check Sum)을 더하는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프로그램이 수행된 이후의 무결성을 검사한다. 마이크로프로세서 마이크로컨트롤러 ARM 모토로라 68000 임베디드 리눅스 실시간 컴퓨팅 RTOS 소프트웨어 공학 펌웨어 JavaOS pSOS VxWorks QNX Designing Embedded Hardware John Catsoulis, O Reilly, May 2005, . 분류:컴퓨터의 유형 분류:컴퓨터 시스템 분류:마이크로프로세서 |
한국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두 정치체로 나뉘어 있다. 대한민국은 1 특별시, 6 광역시, 1 특별자치시, 8 도, 1 특별자치도로 나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 직할시, 2 특별시, 9 도 로 나뉘어 있다. 고구려는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부로 나누었으며 부 밑에는 성, 촌을 두었다. 특별 행정 구역으로는 3경이 존재했다. * 5부(部)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 3경(京) 국내성(國內城), 평양성(平壤城), 한성(漢城) 백제는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방으로 나누었으며 방 밑에는 군, 현을 두었다. 현 밑에 성을 두었고 말단 행정 구역은 촌이었다. 특별 행정 구역으로 22담로가 존재했다. * 온조왕 31년(13년) 수도에 남부와 북부를 설치했다. * 온조왕 33년(15년) 수도에 동부와 서부를 설치했다. 자연스레 가운데 중부가 설치되었다. 신라는 수도를 6부로, 지방을 5주로 나누었으며 주 밑에는 군, 현을 두었다. 현 밑에 성을 두었고 말단 행정 구역은 촌이었다. 특별 행정 구역으로 2소경이 존재했다. * 2소경(小京) 국원소경(國原小京), 금관소경(金官小京) 통일 후 신라는 통일 전 주-군-현 제도로 지방을 통치했다. 통일 후 5주 2소경을 9주 5소경으로 확대해 지방을 다스렸으며 117군 293현이 존재했다. 군현 아래의 촌은 말단 행정 단위였으며 특수 행정 구역인 향과 부곡도 있었다. 통일 이후의 행정 구역 * 9주(州) 사벌주(沙伐州), 청주(菁州), 삽량주(歃良州), 한산주(漢山州), 수약주(首若州), 하서주(河西州), 웅천주(熊川州), 완산주(完山州), 무진주(武珍州) * 5소경(小京) 금관소경(金官小京), 남원소경(南原小京), 서원소경(西原小京), 국원소경(國原小京), 북원소경(北原小京) 경덕왕 16년(757년)에 바뀐 행정 구역 * 9주(州) 상주(尙州), 강주(康州), 양주(良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 5소경(小京) 김해경(金海京), 남원경(南原京), 서원경(西原京), 중원경(中原京), 북원경(北原京) 발해는 5경을 설치하고 지방을 15부, 62주로 나누었다. 밑에는 현을 두었으며 말단 행정 구역은 촌이었다. * 5경(京) 상경(上京), 중경(中京), 동경(東京), 남경(南京), 서경(西京) * 15부(府) ** 상경 소속 용천부(龍泉府) ** 중경 소속 현덕부(顯德府) ** 동경 소속 용원부(龍原府) ** 남경 소속 남해부(南海府) ** 서경 소속 압록부(鴨綠府), 장령부(長嶺府), 부여부(夫餘府), 막힐부(鄚頡府), 정리부(定理府), 안변부(安邊府), 솔빈부(率賓府), 동평부(東平府), 철리부(鐵利府), 회원부(懷遠府), 안원부(安遠府) * 62주(州) 기록에는 60주만 남아있다. ** 용천부 소속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 현덕부 소속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 용원부 소속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 ** 남해부 소속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 ** 압록부 소속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豊州), 정주(正州) ** 장령부 소속 하주(瑕州), 하주(河州) ** 부여부 소속 부주(扶州), 선주(仙州) ** 막힐부 소속 막주(鄚州), 고주(高州) ** 정리부 소속 정주(定州), 반주(潘州) ** 안변부 소속 안주(安州), 경주(瓊州) ** 솔빈부 소속 화주(華州), 익주(益州), 건주(建州) ** 동평부 소속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沱州), 흑주(黑州), 비주(比州) ** 철리부 소속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 ** 회원부 소속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 ** 안원부 소속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 ** 독주주 영주(郢州), 동주(銅州), 속주(涑州) 고려는 지방을 5도와 양계로 나누었다. 도 밑에는 군과 현을 두었는데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과 주현이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과 속현을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계 밑에는 진을 설치하였다. 경과 도호부, 목은 도나 계에서 분리되어 있었으며 개경 주변은 경기로 묶여 있었다. 향·부곡·소와 같은 특수 행정 구역이 존재했으며 말단 행정 구역은 촌이었다. 3경을 설치하였다. * 3경(京) 개경(開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성종 2년(983년) 12목(牧)을 설치하였다. * 12목(牧) 양주목(楊州牧), 광주목(廣州牧), 충주목(忠州牧), 청주목(淸州牧), 공주목(公州牧), 전주목(全州牧), 나주목(羅州牧), 승주목(昇州牧), 상주목(尙州牧), 진주목(晉州牧), 해주목(海州牧), 황주목(黃州牧) 성종 6년(987년) 3경(京)을 설치하였다. * 3경(京) 개경(開京), 서경(西京), 동경(東京) 성종 14년(995년) 10도(道), 5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하였다. * 10도(道) 강남도(江南道), 관내도(關內道), 삭방도(朔方道), 산남도(山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중원도(中原道), 패서도(浿西道), 하남도(河南道), 해양도(海陽道) * 5도호부(都護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현종 9년(1018년) 전국을 도(道)와 양계(兩界)로 나누었고, 그 아래에 4도호부(都護府), 8목(牧), 군(郡), 현(縣), 진(鎭)을 설치하였다. * 5도(道)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 * 양계(界) 북계(北界), 동계(東界) * 4경(京) 개경(開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동경(東京) * 4도호부(都護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 8목(牧) 광주목(廣州牧),충주목(忠州牧), 청주목(淸州牧), 전주목(全州牧), 나주목(羅州牧), 상주목(尙州牧), 진주목(晉州牧), 황주목(黃州牧) 문종 21년(1067년) 3경을 정비하였다. * 3경(京) 개경(開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3경을 폐지하였다. 조선은 지방을 도로 일원화하여 8도로 정비하였다. 도 밑에는 그 크기에 따라 부, 목, 군, 현으로 나누었으며 고려와는 달리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과 속현이 없어지고 모든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를 폐지하고 모두 군현으로 승격시켜서 8도 5부 5대도호부 20목 82군 175현이 되었다. 군현 밑에는 면, 리, 통을 둠으로써 현재 행정 구역의 큰 틀을 마련했다. 한양은 수도로서 경기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태종 13년(1413년) 8도 체제를 완비하였으며 현재 행정 구역의 틀을 마련했다. * 8도(道) 경기도(京畿道), 강원도(江原道),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 4부(府) 개성부(開城府), 강화부(江華府), 수원부(水原府), 광주부(廣州府) * 5대도호부(大都護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 * 20목(牧) 광주목(廣州牧), 양주목(楊州牧), 파주목(坡州牧), 여주목(驪州牧), 원주목(原州牧), 충주목(忠州牧), 청주목(淸州牧), 홍주목(洪州牧), 공주목(公州牧), 광주목(光州牧), 나주목(羅州牧), 상주목(尙州牧), 성주목(星州牧), 진주목(晉州牧), 제주목(濟州牧), 해주목(海州牧), 황주목(黃州牧), 안주목(安州牧), 정주목(靜州牧), 의주목(義州牧) * 44도호부(都護府) 고종 32년(1895년) 갑오개혁에 의해 23부제 (23부 337군 체제)로 행정 구역을 개편했다. 도제(道制)를 폐지하고 부제(府制)를 실시했으며 도 밑의 부, 목, 군, 현을 군으로 일원화하였다. * 23부(府) 한성부(漢城府), 인천부(仁川府), 충주부(忠州府), 홍주부(洪州府), 공주부(公州府), 전주부(全州府), 남원부(南原府), 나주부(羅州府), 제주부(濟州府), 진주부(晉州府), 동래부(東萊府), 대구부(大邱府), 안동부(安東府), 강릉부(江陵府), 춘천부(春川府), 개성부(開城府), 해주부(海州府), 평양부(平壤府), 의주부(義州府), 강계부(江界府), 함흥부(咸興府), 갑산부(甲山府), 경성부(鏡城府) 건양 원년 (1896년) 23부제를 시행한 지 1년 남짓 만에 13도제 로 행정 구역을 재개편했다. 기존의 팔도 중 남부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누는 13도제로 개편하고, 부제에서 도제로 환원했다. 이로써 13도 7부 1목 331군 체제가 성립되었다. 한성부는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 13도(道) 경기도(京畿道), 충청북도(忠淸北道), 충청남도(忠淸南道), 전라북도(全羅北道), 전라남도(全羅南道),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상남도(慶尙南道), 황해도(黃海道), 평안남도(平安南道), 평안북도(平安北道), 강원도(江原道), 함경남도(咸鏡南道), 함경북도(咸鏡北道) * 7부(府) 광주부(廣州府), 개성부(開城府), 강화부(江華府), 인천부(仁川府), 동래부(東萊府), 덕원부(德源府), 경흥부(慶興府) * 1목(牧) 제주목(濟州牧) 대한제국의 행정 구역은 조선 고종 건양 원년의 행정 구역을 유지한 채 약간의 변동만이 있었다. 1910년 10월 1일 에 의거하여 13도 12부 317군 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때 수도 서울이 한성부에서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경기도의 하부 행정구역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에 의거하여 13도 12부 220군 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때의 부는 도시를 뜻하며, 해방 이후 1949년 일괄적으로 시로 개칭하였다. 갑산군 남부를 풍산군으로, 함흥군 동북부를 신흥군으로 분군하였다. * 13도(道) 경기도(京畿道), 충청북도(忠淸北道), 충청남도(忠淸南道), 전라북도(全羅北道), 전라남도(全羅南道),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상남도(慶尙南道), 황해도(黃海道), 평안남도(平安南道), 평안북도(平安北道), 강원도(江原道), 함경남도(咸鏡南道), 함경북도(咸鏡北道) * 12부(府) 경성부(京城府), 인천부(仁川府), 군산부(群山府), 목포부(木浦府), 대구부(大邱府), 부산부(釜山府), 마산부(馬山府), 평양부(平壤府), 진남포부(鎭南浦府), 신의주부(新義州府), 원산부(元山府), 청진부(淸津府) * 12부의 경우 관할 구역이 개항장 및 시가지 일대로 축소되고, 외곽 지역(면 지역)을 별개의 군으로 분리시키거나 인접 군과 통합시켰다. ** 경성부 외곽→고양군, 인천부 외곽→부천군, 군산부 외곽→옥구군, 목포부 외곽→무안군, 대구부 외곽→달성군, 부산부 외곽→동래군, 마산부 외곽→창원군, 평양부 외곽→대동군, 진남포부 외곽→용강군, 의주부(신의주) 외곽→의주군, 원산부 외곽→덕원군, 청진부 외곽→부령군 1915년 5월 1일 도제(島制)를 실시함으로써 전라남도 제주군을 제주도로, 경상북도 울도군을 울릉도로 바꾸었다. * 2도(島) 제주도(濟州島), 울릉도(鬱陵島) 1930년 10월 1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을 개성부로,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을 함흥부로 승격시켰다. 개성군은 개풍군으로, 함흥군은 함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31년 4월 1일 읍(邑) 제도가 실시되었다. 1935년 10월 1일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읍을 대전부로, 전라북도 전주군 전주읍을 전주부로,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을 광주부로 승격시켰다. 대전군은 대덕군으로, 전주군은 완주군으로,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1936년 10월 1일 함경북도 경흥군 나진읍을 나진부로 승격시켰다. 1938년 10월 1일 황해도 해주군 해주읍을 해주부로 승격시켰다. 해주군은 벽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39년 10월 1일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읍을 진주부로 승격시켰다. 진주군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1941년 10월 1일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읍을 성진부로 승격시켰다. 성진군은 학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42년 4월 1일 갑산군 북부를 혜산군으로 분군하였다. 덕원군을 폐지하고 원산부와 문천군에 분할 편입하였다. 1944년 10월 1일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을 흥남부로 승격시켰다. 13도 22부 218군 2도 체제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 22부 경성부(京城府), 인천부(仁川府), 개성부(開城府), 대전부 (大田府), 군산부(群山府), 전주부(全州府), 목포부(木浦府), 광주부(光州府), 대구부(大邱府), 부산부(釜山府), 마산부(馬山府), 진주부(晉州府), 해주부(海州府), 평양부(平壤府), 진남포부(鎭南浦府), 신의주부(新義州府), 함흥부(咸興府), 원산부(元山府), 청진부(淸津府), 나진부(羅津府), 성진부(城津府), 흥남부(興南府) 미 군정은 일제 강점기의 행정 구역을 그대로 존속시켰으며 이후 서서히 일본식 잔재를 청산해가기 시작했다. 1946년 6월 1일 강원도 춘천군 춘천읍을 춘천부로,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읍을 청주부로 승격시켰다. 춘천군은 춘성군으로,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 8월 1일 전라남도에 속해있던 제주도(島) 일원을 관할로 제주도(道)가 신설하였다. 제주도에 북제주군, 남제주군의 2군을 설치하였다. 1946년 9월 28일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시키고 경기도에서 분리했다. 1947년 2월 23일 전라북도 익산군 이리읍을 이리부로 승격시켰다. 1948년 4월 1일 정(町)을 동(洞) 또는 로(路)으로, 정목(丁目)을 가(街)로 개칭하고, 일본식 동명을 한국식 동명으로 되돌렸다. 정부 수립 당시에는 1특별자유시 9도 14부 218군 체제였는데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도(道)·부·군·도(島) 체제에서 도·시·군 체제로 전환했다. 1960년대에 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직할시(直轄市)가 부산이 최초로 탄생한 이후 1989년까지 5개의 직할시가 탄생했다. 이후 행정의 불편을 막고 원래 한 지역이었으나 시와 군으로 갈라진 곳들을 재통합하기 위해 1995년 도농복합시가 출범했으며, 기존의 직할시가 광역시(廣域市)로 개칭되고 1997년 울산광역시가 탄생했다. 최근에는 기존의 시·도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특별자치도(特別自治道)와 특별자치시(特別自治市)도 출범했다. 지금은 복잡한 행정 체계의 간소화와 함께 그 수를 줄이기 위해 지자체 간의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지방 행정 체계는 시(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도(도, 특별자치도)-시(자치시)·군·구(자치구)-동(행정동)·읍·면의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가 광역 지방 자치 단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74시 85군 69구가 기초 지방 자치 단체를 구성하고 있다. 특별시는 구를 하위 행정 기구로 둘 수 있으며, 광역시는 군도 둘 수 있다. 도는 시와 군을 둘 수 있다. 최근에는 3단 체계의 비효율을 강조하며 2단계로 줄이려는 움직임도 있다. * 1특별시(特別市)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 6광역시(廣域市)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 * 1특별자치시(特別自治市)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 * 8도(道) 경기도(京畿道), 강원도(江原道), 충청북도(忠淸北道), 충청남도(忠淸南道), 전라북도(全羅北道), 전라남도(全羅南道),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상남도(慶尙南道) * 1특별자치도(特別自治道)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 제1공화국 * 1949년 8월 14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읍을 수원부로,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읍을 여수부로,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을 순천부로, 경상북도 영일군 포항읍을 포항부로,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읍을 김천부로 승격시켰다.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여수군은 여천군으로, 순천군은 승주군으로, 김천군은 금릉군으로 개칭되었다. *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자유시를 서울특별시로, 부(府)를 시(市)로, 경상북도 울릉도(島)를 울릉군(郡)으로 개칭하였다. * 1953년 1월 1일 통영군의 거제도 일대를 거제군으로 분군하였다. * 1955년 9월 1일 제주도 북제주군 제주읍을 제주시로, 강원도 강릉군 강릉읍을 강릉시로,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읍을 경주시로,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을 충무시로, 강원도 원주군 원주읍을 원주시로,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을 진해시로 승격시켰다. 강릉군은 명주군으로,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원주군은 원성군으로 개칭되었다. * 1956년 7월 8일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읍을 충주시로,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읍을 삼천포시로 승격시켰다. 충주군은 중원군으로 개칭되었다. 제2공화국 * 1962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방어진읍 등을 울산시로 승격시켰다. 울산군은 울주군으로 개칭되었다. *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을 의정부시로,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읍을 천안시로,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읍을 안동시로, 강원도 양양군 속초읍을 속초시로, 경상남도 부산시를 경상남도로부터 분리시켜 부산직할시로 승격시켰다. 천안군은 천원군으로 개칭되었다. 제3공화국 제4공화국 *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을 안양시로,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를 성남시로,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을 부천시로 승격시켰다. 부천군은 폐지되어 김포군, 시흥군, 옹진군에 분할 편입되었다. * 1978년 2월 15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구미시로 승격시켰다. * 1980년 4월 1일 강원도 명주군 묵호읍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을 통합하여 동해시로, 경상남도 (마산시) 창원출장소를 창원시로, 충청북도 제천군 제천읍을 제천시로,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읍을 영주시로 승격시켰다. 창원군을 의창군으로, 제천군을 제원군으로, 영주군을 영풍군으로 개칭하였다. 경기도 양주군의 의정부시 이남 지역을 남양주군으로 분군하였다. 제5공화국 * 1981년 7월 1일 경기도 광명출장소와 시흥군 소하읍을 광명시로,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을 송탄시로,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을 동두천시로, 강원도 삼척군 황지읍과 장성읍을 태백시로, 전라북도 정읍군 정주읍을 정주시로,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을 남원시로, 전라남도 나주군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금성시로,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읍을 영천시로,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을 김해시로, 제주도 남제주군 서귀읍을 서귀포시로, 경상북도 대구시와 경기도 인천시를 경상북도와 경기도로부터 분리시켜 대구직할시와 인천직할시로 승격시켰다. * 1986년 1월 1일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을 구리시로, 경기도 (시흥군) 과천출장소를 과천시로, 경기도 (시흥군과 화성군의 각 일부) 반월출장소를 안산시로, 경기도 평택군 평택읍을 평택시로, 강원도 삼척군 삼척읍을 삼척시로,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을 공주시로,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읍을 대천시로,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을 온양시로, 전라남도 여천군 삼일읍을 여천시로,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읍을 상주시로, 경상북도 문경군 점촌읍을 점촌시로 승격시켰다. 금성시를 나주시로 개칭하였다. * 1986년 11월 1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을 송정시로, 전라남도 광주시를 전라남도로부터 분리시켜 광주직할시로 승격시켰다. 제6공화국 * 1988년 1월 1일 전라남도 송정시와 광산군을 광주직할시에 편입하였다. * 1989년 1월 1일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을 오산시로,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을 의왕시로, 경기도 시흥군 군포읍을 군포시로,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을 시흥시로,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을 미금시로, 경기도 광주군 동부읍을 하남시로, 충청남도 서산군 서산읍을 서산시로, 전라북도 김제군 김제읍을 김제시로, 전라남도 광양군 골약면과 태금면을 합쳐 동광양시로, 경상북도 경산군 경산읍을 경산시로,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을 밀양시로, 경상남도 거제군 장승포읍을 장승포시로, 충청남도 대전시와 대덕군을 충청남도로부터 분리시켜 대전직할시로 승격시켰다. 서산군의 서부 지역을 태안군으로 분군하였다. * 1992년 2월 1일 경기도 고양군을 고양시로 승격시켰다. 김영삼 정부 (문민 정부) * 1995년 1월 1일 원래 하나의 군이었다가 시·군으로 나누어진 것을 다시 하나로 합친 도농복합시(자세한 설명은 도농복합시 참조)가 출범했다(이후의 행정 구역의 변화에서 시와 군이 합쳐져서 새로운 시가 탄생한 경우는 제외했다. 단, 군이 시로 승격한 경우는 기술했다). * 1995년 1월 1일 직할시의 명칭을 광역시로 개칭했다. * 1996년 3월 1일 경기도 파주군을 파주시로, 경기도 이천군을 이천시로, 경기도 용인군을 용인시로, 충청남도 논산군을 논산시로, 경상남도 양산군을 양산시로 승격시켰다. * 1997년 7월 15일 경상남도 울산시를 경상남도로부터 분리시켜 울산광역시로 승격시켰다. 김대중 정부 (국민의 정부) * 1998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을 안성시로, 경기도 김포군을 김포시로 승격시켰다. * 2001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군을 화성시로, 경기도 광주군을 광주시로 승격시켰다. 노무현 정부 (참여 정부) * 2003년 9월 19일 충청남도 논산시 두마면을 계룡시로,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출장소를 증평군으로 승격시켰다. * 2003년 10월 19일 경기도 양주군을 양주시로, 경기도 포천군을 포천시로 승격시켰다. * 2006년 7월 1일 제주도가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제주특별자치도로 출범했다. 이명박 정부 *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시, 진해시를 창원시로 통합했다. * 2012년 1월 1일 충청남도 당진군을 당진시로 승격시켰다. * 2012년 7월 1일 충청남도 연기군과 주변 지역이 세종특별자치시로 승격되었다. 박근혜 정부 * 2013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군을 여주시로 승격시켰다. * 2014년 7월 1일 충청북도 청주시와 청원군을 청주시로 통합했다. 문재인 정부 * 2018년 7월 1일 인천광역시 남구를 미추홀구로 개칭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직할시, 2특별시, 9도, 3특별지구로 나뉘어 있다. * 1직할시(直轄市)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 * 2특별시(特別市) 라선특별시(羅先特別市), 남포특별시(南浦特別市) * 9도(道) 평안남도(平安南道), 평안북도(平安北道), 자강도(慈江道), 량강도(兩江道), 황해남도(黃海南道), 황해북도(黃海北道), 강원도(江原道), 함경남도(咸鏡南道), 함경북도(咸鏡北道) * 3특별지구(特別地區) 신의주특별행정구(新義州特別行政區), 금강산관광지구(金剛山觀光地區), 개성공업지구(開城工業地區) 해방 당시에는 6도, 102시·군이었지만 1946년 평양이 특별시가 되어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었으며 1949년 평안북도와 함경남도의 일부를 자강도로 분리했으며 1954년에는 함경남도 일부를 량강도로 분도하고 황해도를 남북으로 나누었다. 현재에는 22시 168군이 되었다. 청진시, 함흥시, 개성시는 직할시였다가 다시 시로 환원되었으며, 라선시, 남포시는 직할시였다가 특별시가 되었다. 일부 시는 김일성을 도와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 이름을 그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한민국과 달리 1952년 도-군-리의 3단계로 지방 행정이 구성되어 있으며 로동자구가 편성된 곳도 있다. |
중화민국 (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본래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청나라를 멸하고 중국 대륙에 세워진 공화국이었다. 다만 건국 초기에는 내분과 외침 등으로 불안하였고, 국공 내전으로 쫓겨나 현재는 타이완 등 몇 개의 도서 지역만을 통치하는 상황으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통상적으로는 영토 중 가장 큰 섬의 이름인 타이완 또는 대만 (臺灣)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화민국은 1912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세워진 공화국이며, 중화민국 헌법은 정치적인 진통을 겪다가 1947년에서야 공포되었다. 국공 내전 중 1949년 10월 1일에 마오쩌둥을 위시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후에 기존의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베이 시로 이전했으며(국부천대), 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영토도 타이완(타이완 성 포함) 및 푸젠 성 일부로 축소되었지만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국가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중화민국의 영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타이완은 17세기에 청나라의 푸젠 성에 속했던 지역으로, 1885년에는 푸젠 성으로부터 분리된 푸젠타이완 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만주, 펑후 제도와 함께 일본 제국에 할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1945년에 만주와 타이완, 펑후 제도를 중화민국의 영토로 수복하게 되었고, 1947년 공포된 중화민국 헌법에 따라 타이완 성이 다시 설치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 내전의 영향으로 중국 국민당은 난징 시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 시로 이전하였고, 1955년을 기해 중국 본토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중화인민공화국에 빼앗김에 따라 중화민국 정부 소재지인 타이완은 더 이상 중국의 변두리 지역이 아닌 중화민국의 중심 무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 나라는 통상 타이완 ( 대만 )으로 불리기도 한다. 1949년 이래 국공 내전을 계기로 중화민국은 이미 국공내전에서 패한 채 망명되었고, 따라서 이 나라와 중국 대륙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흔히 양안 이라고 일컫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중화민국이 멸망하였으므로 중화민국이 가진 모든 권리의 승계를 주장하고 있으며, 반대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공산당의 반란으로 세운 불법정권으로 간주하여 본토 수복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재통일에 관한 문제는 타이완 독립 세력까지 존재하고 있어 한국의 재통일보다 더 복잡한 양상이다. of Chinese Taipei for Olympic games.svg|섬네일|200px|left|중화 타이베이 올림픽 위원회기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 이며, 자국 내에서는 타이완(대만)이라고 부른다. 중국 이라는 명칭은 이전에는 사용하였으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또 영어로는 Republic of China , 약칭은 ROC 이다. 1971년 중화민국이 유엔 회원국 지위를 잃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을 중국 으로 부르는 빈도가 훨씬 많아지면서, 통상적으로는 중화민국의 현재 남아있는 영토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명을 따서 타이완 이라고 부르는 일이 더 흔해졌다. 과거 냉전시절 미국이나 대한민국 등 친서방 국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공 (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유중국 (自由中國, Free China) 또는 중국 이라고도 불렀으나 탈냉전 이후부터는 빈도가 감소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83년 6월 26일, 덩샤오핑 이론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 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台灣特别行政區)라는 이름을 제시하였고, 타이완 지구를 홍콩, 마카오와 같은 자국의 특별행정구처럼 간주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화민국은 중화 타이베이 (Chinese Taipei, 또는 )라는 별칭을 1980년대부터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나 국제기구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단, 세계 무역 기구(WTO)에서 중화민국의 가맹 명칭은 타이완·펑후·진먼·마쭈 개별관세영역 (臺灣·澎湖·金門·馬祖 個別關稅領域; )이다. 2008년 6월 4일 어우훙롄() 중화민국 외교부장은 국제기구 등에서의 중화 타이베이 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반면 중화민국 감찰원에서는 중화민국 행정원의 정부 문서에서 ‘대만’의 사용 빈도가 높아진 것을 지적하였으며 ‘중화민국’이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차이잉원 행정부 시대 이후에는 중화민국 대만 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도입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중화민국의 정식 명칭을 `대만민국`으로 알고있으나, 이는 일제의 대만 점령 전에 있었던 청나라의 속국을 칭한다. 중화민국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쓰는 국가기호는 TW이다. 1911년 우창 봉기를 계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에 참여한 단체들은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삼았으나,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였다. 권력욕에 가득 찬 위안스카이는 갑자기 중화제국을 선포한다. 이에 전국적인 폭동과 군벌들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는데, 결국 위안스카이는 다시 제정을 폐지하고, 대총통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군벌이 계파별로 갈라지고 "군벌들의 전국시대"라고 할 만한 치열한 내전 상태에 들어간다. 손중산과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광저우 시에 새로운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북벌 과정에서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을 축출했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난징에서 성립. 위안스카이가 임시총통으로 취임. 정부를 베이핑 이전. (베이핑 정부) 1915년 일본 제국이 21개조 요구를 요구하였다. 1916년 위안스카이, 중화제국 황제 즉위를 선언하지만, 내외의 반대로 단념. 직후에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때문에, 각지의 군벌에 의한 전면적인 내란 상태가 된다. 1919년 5·4 운동 발생. 1921년 쑨원이 광저우에서 혁명정부를 수립. 1926년 장제스가 북벌을 개시. 북벌을 완료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수도를 난징 시로 천도한다. 점차 정부의 권력이 중국 국민당에 집중되면서 국민당의 일당 독재가 시작된다. 이에 대항해 중국 공산당이 장시 성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웠으나, 3년만에 제압된다. 그 후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일 전쟁이 시작된다. 이 때문에 중국 본토 전체가 전장이 되었다. 1937년 수도 난징이 일본 제국에 점령당했다. 국민정부는 난징을 탈출, 충칭 시로 도피했다. 일제는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다. 1940년에는 친일 성향의 신정부가 왕징웨이에 의해 수립된다. 그러나 분전 끝에, 결국 일본 제국을 중국 본토에서 몰아내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중화민국은 유엔에 가입하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된다. 1928년 6월 9일 북벌 완료. 장제스가 중국 국민당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정부를 난징에서 수립. 1931년 중국 공산당이 장시 성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움. 관동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킴. 둥베이에 만주국 건국. 1934년 중국 국민당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해체시킴. 중국 공산당의 장정이 시작됨.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난징에서 일본군이 중국인 대학살을 행한다. 정부는 충칭으로 후퇴. 1940년 난징에 왕징웨이 정권 수립. 1944년 왕징웨이 정권 붕괴. 1945년 9월 2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및 중일 전쟁 종전. 10월 25일 타이완을 편입. 난징에서 중국 내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총사령관에게서 항복문서를 받다. 유엔에 가입하여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된다. 12월에 중국 공산당과 쌍십협정 을 체결. 1946년 몽골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 중국 내전 격화.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귀환하여 중화민국 헌법을 공포.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중일 전쟁에서 국공 합작을 맺고 일본 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다. 일본 제국의 패망 후 양 당은 공동의 적을 잃었기 때문에 양 당 사이의 내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었다. 하지만 양 당은 미국, 소비에트 연방의 중재로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맺음으로써 화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내정에 중립을 표방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을 지원했으며 소비에트 연방 또한 국민당을 지원하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국민 정부와 체결하면서도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였다. 결국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난징 시에서 공산당을 배제한 채 1947년 정부를 재수립했으며 공산당이 이에 반발하면서 중국 곳곳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국민당은 결국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지만 공산당의 끈질긴 노력과 국민당에 등을 돌린 중국 인민의 민심, 전략의 실패, 그리고 경제 정책의 실패 등 여러가지 악재로 인해 중국 본토를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내주고 타이베이로 정부를 이전한다.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 발발 1947년 2월 28일 타이완에서 2·28 사건 발발. 1948년 장제스가 중화민국 총통으로 취임. 1949년 4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수도 난징을 점령.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소집.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국민정부는 타이완으로 후퇴(도피)함. 타이완 전역에 계엄령 선포. 타이완 현지 주민(원주민, 본성인)은 소외되고, 외성인으로만 정부천도.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이로 인해 중화민국 헌법은 더 이상 중국 본토에서 효력을 미치지 못하게 됨. 1949년 국공 내전으로 인하여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한 장제스 총통은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을 이유로 국가적인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 독재를 펼친다.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타이완으로 거점을 옮긴 중화민국은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약 30년 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 내에서의 중국 대표권을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겼고, 연이어 전세계의 냉전 체제가 해빙기를 맞으면서 미국을 위시한 제1세계 국가들이 점차 중화민국 단교를 전제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함으로써 중화민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중화민국의 실지 수복은 사실상 요원해졌다. 이에 타이완 토착세력인 본성인을 중심으로 탈중국화 를 주장하는 세력이 태동하였고, 현재 중화민국의 내정은 중국 통일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범람연맹과 타이완의 새로운 주권 국가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범록연맹으로 양분되었다. 이런 갈등은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어 심각한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1992년부터 중화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92컨센서스 (92共識)에 따라, 통일이나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인 이른바 3불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 공화국을 염원하는 세력의 거두인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집권하여 정책적으로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은 2005년 반분열국가법을 제정하여 하나의 중국을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 침공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리덩후이와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양안 관계가 냉각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홍콩 출신인 중국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마영구)가 총통으로 재임하는 시기에는 양안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차이잉원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92 공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등으로 인하여 양안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아래는 1949년 국부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주요 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1949년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사실상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함. 국부천대, 타이베이를 임시 수도로 선포. 1958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먼 섬을 포격한 진먼 포격전 발발 1971년 중화민국, 유엔에서 중국 대표권(상임이사국 지위 포함) 상실 및 유엔 탈퇴. 1972년 일본 단교. 1975년 장제스 사망. 1977년 중리 사건 발생 1979년 미국 단교, 메이리다오 사건 발생 1980년 장징궈(蔣經國 장경국)가 무력에 의한 중국 재통일 정책을 변경. 1987년 타이완 지역에서 계엄령을 해제. 그 후 진마(金馬 금마) 지구에서도 차례로 해제. 1988년 리덩후이(李登輝, 이등휘)가 최초의 본성인(本省人) 출신으로 총통에 계임. 1991년 중화민국 헌법을 개정하여 주권재민의 원칙을 확립,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 정식 폐지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단교. 1993년 대한민국과 비공식 외교관계 수립으로 영사, 경제, 홍보, 문화, 학술 분야의 민간 협력관계 회복. 1996년 3월 23일 국민에 의한 첫 총통 선거 실시. 리덩후이(李登輝 이등휘) 당선. 2000년 천수이볜(陳水扁 진수편), 야당 최초로 제10대 총통 당선. (중화민국 헌법 제정 이래 최초의 민주적인 정권교체로 평가됨) 2004년 천수이볜, 제11대 총통 재선. 2008년 마잉주(馬英九 마영구) 제12대 중화민국 총통 당선. 2012년 마잉주, 제13대 총통 재선. 2014년 태양화 학생운동 발생 2016년 차이잉원 제14대 중화민국 총통 당선, 재차 민주진보당이 집권 2017년 아시아 최초 동성결혼 인정 내전으로 분단된 이래 이념을 달리한 양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며, 각자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1945년 10월 25일에 창설된 유엔에서 중화민국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진 주요 회원국이었다. 그러나 국공 내전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이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던 당시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유엔 헌장 서명국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인” 중국의 법통은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승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엔은 1971년 10월 25일 개최된 총회에서 표결하여 2758호 결의가 채택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이 가지고 있던 유엔 내 중국 대표의 모든 권리와 지위를 취득하였다. 유엔을 탈퇴한 중화민국은, 이 결의 채택으로 말미암아 유엔 내부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불리한 조건에 놓이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타이완 지역의 본성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기존의 중화민국이 아닌 타이완 공화국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은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야당 출신 후보 중 최초로 총통에 집권했을 때 급진하였으나, 중국 국민당의 마잉주로 정권이 교체되고 전임 총통인 천수이볜이 부정비리에 휩싸여 구속되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이러한 탈중국화 운동은 지지도가 다소 감소하였다. 중화민국의 정부는 입법원, 행정원, 사법원, 감찰원, 고시원으로 나뉘는 오권분립체제를 취하고 있다. 1949년 이후로 중화민국 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크게 실효 지배 지역인 타이완 지구와 ‘미수복 지역’인 대륙 지구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1991년 5월 1일 헌법을 개정해 정부 실효 통치 국토를 "자유 지구"라고 이름 붙이고, 헌법의 적용 지역을 "자유 지구"로 한정하고 있다. 타이완 지구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통치 지역인 타이완 섬과 펑후, 행정구역상 푸젠 성에 속하는 진먼, 마쭈 등의 섬들이 포함된다. 중화민국은 국내를 성(省)과 직할시(直轄市)로 구분하여 각각 지방 정부를 두고 있다. 다만 1949년 이후 중앙정부의 통치 구역과 타이완 성 정부의 통치 구역이 거의 겹치게 되었기 때문에 성 정부의 기능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현재도 성 정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앙 정부가 직접 현(縣)을 관할한다. 6개 직할시 * 가오슝 시 * 타이난 시 * 타이베이 시 * 타이중 시 * 신베이 시 * 타오위안 시 2개 성 * 푸젠 성 ※1996년 1월 15일에 성정부 기능을 정지 * 타이완 성 ※1998년 12월 20일에 성정부 기능을 정지 중화민국은 1912년 기준 청나라의 공식적인 영토를 자국의 국토로 규정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11,418,174km2이다. 그에 반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면적은 9,596,960km2, 타이완 섬만의 면적은 35,195 km²이다. 중화민국은 공식적으로는 실지(失地)인 중국 대륙을 포함한 국토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계속 주장해오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국경획정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륙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통치 지역이 아니지만 중화민국의 영토로 간주되는 중국 본토, 몽골, 투바 공화국 등이 포함된다. 중화민국의 행정 구분 지도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있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중 하나를 택일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중인 미국과 일본 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화민국과의 교류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중화민국은 아프리카 1개국, 유럽 1개국, 오세아니아 6개국, 중남미 9개국의 총 17개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나라 이름 우측 상단의 별표는 타이완 현지에 대사관이 설립된 국가를 나타낸다.) 아프리카 (1개국) (1968) 유럽 (1개국) (1942) 오세아니아 (6개국) (2003) (1998) (1980, 2005) (1999) (1983) (1979) 중앙아메리카 (4개국) (1989) (1960) (1965) (1962, 1990) 카리브 제도 (4개국) (1956) (1983) (1984, 2007) (1981) 남아메리카 (1개국) (1957) 타이완은 예전부터 일본인 미국인이 많이 관광하던 관광 도시이다. 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대만 택시 강간 사건과 용호 마사지 성추행 사건등 요구르트나 차에 수면제를 타는 성추행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 주의가 필요하다. 영토 문제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센카쿠 열도가 타이완 성 이란 현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남중국해에 위치한 스프래틀리 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타이완 문제 (대만문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타이완 문제에 처해 있다. 이 문제의 원인은 국공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9년 전쟁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으로 후퇴하여 타이베이로 이전하였고, 무력을 통한 대륙 재탈환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였다(이 정책은 1980년대까지 계속된다). 그 후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제7함대를 타이완에 파견하고 1954년에는 국민정부와 공동 방어 조약을 체결하였다.(이 조약은 1979년에 파기되었고 그 이후에는 타이완 관계법이 대신하고 있다.) 서로 다른 체제로 인해 상호 간에는 어느 정도 불신이 존재하며, 중화민국은 자신들이 대륙을 재탈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중국 국민당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제3차 국공합작을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반면, 민주진보당은 실지수복을 포기하고 타이완만의 독자적인 국가로 전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타이완 독립 운동은 타국의 지배에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건너 온 중화민국 정부의 국명, 국기, 국가 등을 변경하여 중국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성격이다.) 2000년대 이후 민주진보당의 집권에 따라 타이완의 독립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들이 행해졌으나, 2008년에 중국 국민당의 마잉주가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일시 중단되었다. 다만 2016년 민주진보당 출신 차이잉원 총통 취임 이후 관련 정책 재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Honor Guards at CKS Memorial Hall Plaza before Drilling 20130608.jpg|섬네일|중정기념당 앞에 도열한 중화민국 육군 의장대 중화민국 헌법 제 20조의 규정에 의해 중화민국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만 19세 이상의 남자에게는 12개월간의 병역 의무가 주어져왔으나, 2010년부터 모병제 전환을 시작하여 2019년부터 모병제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1993년 출생자까지는 복무기간이 1년인 징병대상이었으며, 1994년 이후 출생자는 4개월의 군사훈련(기초군사훈련 2개월, 군사특기 교육 2개월)만 받았다. 국군인 중화민국 국군은 정규군 약 30만 명, 예비역으로 약 350만 명의 병력을 포함하며, 정규군은 육군 20만 명, 해군 4만 5,000명, 공군 4만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기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침공을 대비해 수는 적으나 CM11 전차나 키드급 구축함, F-16 전투기, AH-64 아파치,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 등 최신 무기로 무장해있다. 정부를 타이완으로 이전한 이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군사적 대립으로 인하여 중화민국 국군은 최신예 개인 화기, 군용기, 군용선 등을 운용하고 있으며, 2019년의 국방 예산은 GDP의 2.16%에 상당하는 3460억 뉴 타이완 달러, 즉 12조 6500억 대한민국 원에 이른다. 중화민국 국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는 중국 연안의 진먼 현이다. 미국과의 단교 이후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이 폐기되고 중화민국 주둔 미군이 철수했지만, 미국은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제정하여 첨단 무기를 판매하고 군사훈련에 미군을 참관시키는 등 군사협력관계를 간접적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다. 종교적 또는 개인의 비폭력주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심사를 거쳐서 허용하고 있으며, 현재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양로원 등의 사회 복지 시설에서의 사회 봉사로 군복무를 대체하도록 하되, 합숙 생활을 하도록 하고 있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타이완 국공 내전 이후부터는 사실상 중화민국 영토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게 된 타이완 섬의 대부분은 산지 지형이며, 서해안의 평지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타이완 섬 중앙부에 위치한 위 산(玉山)으로, 높이는 3,952 m이다. 한편, 진먼 현과 마쭈 열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는 중국 대륙의 해안에 근접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긴장감이 높은 편이고, 고도로 요새화된 지역이다. 둥사 군도와 난사 군도의 타이핑 섬은 남중국해에 위치하며, 모두 무인도이다. 101 2009 amk-EditMylius.jpg|섬네일|left|타이베이 101 타이완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아서 농업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 본토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토지로 인해 이주해 왔다. 청나라 시기와 일본 통치 시대에 걸쳐서, 타이완(대만)은 그 높은 농업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여 경제적 지위를 서서히 계속 확립했다. 1945년 중화민국으로 반환된 이후, 타이완은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하였고, 특히 1960년 이후의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신흥공업경제지역(NIES)의 일원이 되었다. 중국 본토로부터 타이완으로 이전한 중화민국 정부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함과 동시에, 강력하게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수출 지향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 정책이 추진되어, 1973년에는 "십대건설(十大建設)"이라는 중공업의 계획적 개발이 실시되었다. 특히 인프라스트럭쳐의 정비, 철강, 조선, 석유화학 산업의 육성이 중요 과제로 실시되어, 결과적으로 오늘날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국내의 노동자 임금이 상승하면서 많은 기업들이 공장을 중국 본토와 동남 아시아 등 저렴한 노동력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전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2002년 1월에 중화민국은 타이완·펑후·진먼·마쭈 개별 관세 영역 (Separate Custom Territories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라는 이름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세계의 자유 무역 체제와 일체화되었다. 그 결과 도상국 및 도상 지역 특례를 이용할 수 없게 되어, 무역 관련 제도의 개선, 관세의 인하, 서비스, 무역의 자유화 등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2014년의 국내총생산(GDP)는 약 5,295억 미국 달러, GDP 성장률은 3.5%였다. 2014년 중화민국의 1인당 구매력평가(PPP) 환산 국내총생산(GDP)은 45,854 미국 달러에 달한다. 이 수치는 스웨덴, 독일과 비슷하며, 아시아에서는 카타르, 싱가포르, 브루나이,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홍콩,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에 이어 9번째로 높다. 반면에 1인당 명목 GDP는 아시아에서 11번째로 높은 22,598 미국 달러(2014년)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중화민국의 통화 단위는 신 타이완 달러이며 (TWD, New Taiwan dollar ), 통화의 발행은 중화민국 중앙은행이 맡고 있다. 농업은 타이완 섬 서해안의 비옥한 평야 지역에서 주로 발달했다. 전체 토지의 24%가 곡물 재배에 적합하다. 쌀과 사탕수수의 수확량이 많으며, 그 밖에 옥수수, 고구마, 아스파라거스, 버섯류, 콩, 땅콩, 차, 바나나, 파인애플, 감귤류 등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최근 일본 등의 국가로의 농산물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 가축으로는 돼지, 소나 물소(이전에는 농경용), 양, 산양, 닭, 오리 등이 상업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국토의 약 60%가 삼림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목재는 그리 풍부하지 않다. 주로 오크, 개잎갈나무, 대나무, 코늄(Conium), 등, Rattan) 등이 산출(産出)되지만, 수요의 대부분은 수입재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어업은 근해어업과 원양어업이 전체 어획고의 80%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연안어업과 양식업이다. 고등어와 다랑어의 어획량이 많다. 지룽 부근의 탄광에서 석탄을 생산하고 있다. 대리석, 유황, 원유, 천연가스, 암염 등도 소량이지만 산출된다. 주요 공업 생산품은 시멘트, 석유, 라디오, 텔레비전, VTR, 전자 계산기(전산기), 컴퓨터 시스템 기기 등이다. 특히 타이완에서 제조되는 전자 제품이나 전기 부품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화학공업, 석유화학공업, 섬유 산업, 플라스틱 제조업, 식품공업, 조선업 등도 번성하고 있다. 2002년 기준 연간 발전량은 1585억 3700만 kWh로, 그 약 4분의 1을 원자력발전소가 조달하고 있다. 국민당 정부의 경공업 위주 경제 정책에 따라 경공업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중공업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타이완은 세계 유수의 컴퓨터 부품 생산 기지로 세계 시장에서 유통되는 메인보드와 그래픽 카드의 절대 다수가 생산된다. 그 외에 반도체와 액정 디스플레이(LCD) 등의 세계 시장 점유율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자체 상표가 아닌 주문자의 상표를 부착하는 주문자 생산(OEM)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을 갖지는 못하고 있다. 금융업이 활발하여 많은 외국 은행이 지점을 설치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생긴 주식의 자유화와 상승을 배경으로 주식시장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2001년 이후의 불황으로 주가는 침체하고 있다. 타이완 지구의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2003년의 수출은 1,506억 12만 미국 달러, 수입은 1,272억 4,257만 미국 달러였다. 주요 수출품은 전기 및 전자 제품, 섬유 제품, 플라스틱 제품, 장난감류, 가공 식품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원유, 목재, 철강, 기계류, 전기 및 전자 부품, 식료품이다. 주요 무역 대상국 및 지역은 미국, 일본, 독일, 홍콩,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싱가포르 등이다. 타이완 고속철도(2006년 6월 24일 촬영) 타이완의 교통 행정은 중화민국 교통부가 담당하고 있다. 타이완의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동서는 중앙산맥으로, 남북은 하천에 의하여 방해받고 있다. 육상 운송 수단으로는 도로망이 특히 발달하였다. 동해안의 쑤화 공로, 서해안의 포르모자 고속공로와 중산 고속공로, 섬을 횡단하는 동서횡관공로나 남부횡관공로등 간선도로가 잘 정비되어, 간선도로의 총연장 거리는 41,475km (2009년)에 이른다. 그 중 국가간선도로가 901km, 지방간선도로가 4,680km이다. 간선도로는 20,947km(고속도로 872km 포함)이며, 도심도로는 16,395 km이다. 자동차 보유율도 높아 평균 3명당 1대 정도이다. 또한 잘 정비된 버스운행체계를 가지고 있다. 수십년간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자동차는 일본과 반대로 우측통행을 한다. 철도는 대만철로관리국의 관리 아래 지룽을 기점으로 하는 동부간선이나 타이베이를 기점으로 하는 서부간선 등이 타이완의 해안선을 일주한다. 주로 물자 수송에 이용되고 있다. 2007년 타이완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철도의 총 길이는 1,496km (2003년) 이고 철도 밀도는 415km/10,000km2이다. 타이베이(신베이 지역 일부 포함)와 가오슝, 타오위안은 제윈, 즉 지하철이 운행 중이다. 주요 항구는 지룽 시, 화롄 시, 가오슝 시, 타이중 시 등이 있으며, 특히 가오슝은 국제 무역항으로서 타이완 지구 최대 규모의 항구인 동시에 동부 아시아에서 가장 분주한 항구 중 하나이다. 국제 공항은 타오위안시 다위안 구의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과 가오슝시의 가오슝 국제공항이 있다. 중화민국의 국적기인 중화항공과 에바항공은 국내선과 국제선에 취항하고 있다. 휴대전화의 보급율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또 일간지는 약 30지(紙)가 있으며, 주요 신문으로는 타이베이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중국시보"(中國時報), "연합보"(聯合報), "자유시보"(自由時報), 가오슝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타이완신문보"(臺灣新聞報), 타이중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타이완일보"(臺灣日報) 등이 있다. 인구는 2335만 9928명(2014년 7월 추계), 인구밀도는 1km²당 636명(2005년 기준)이다. 인구증가율은 0.34%(2007년). 서해안의 평야부에 인구가 집중하여 인구밀도는 지극히 높다. 경제발전에 의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으로 인하여, 도시 인구는 70%를 넘는다. 최대의 도시는 타이베이 시로, 2,603,651명이 거주한다. 제2의 도시로는 가오슝 시에 1,528,430명이 거주하며, 타이완 최대의 공업 도시인 동시에 타이완 제일의 항만이 있다. 그 밖의 주요 도시로는 타이완 중부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인 타이중 시에 1,077,182명, 타이완 남부의 경제, 문화 중심지인 타이난 시에 771,864명이 있다. 그리고 타이완의 실리콘벨리 라고 불리는 신주 시에 413,317명, 타이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가 있는 지룽 시에 387,207명, 그리고 자이 시에 273,639명이 거주한다. 타이완 주민은 크게 3개의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계 원주민 (약 1.7%), 명·청시대에 중국 푸젠 성, 광둥 성 등에서 이주 정착한 한족계 본성인 (약 85.3%), 그리고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 중국 본토 각지에서 이주한 외성인 (外省人, 약 13%)이 있다. 한족계 본성인은 일상에서 주로 쓰는 중국어 방언에 따라 민남어를 사용하는 복노인 (약 73.3%)과 객가어를 사용하는 객가인 (약 12%)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 섬으로 피신하면서 정권을 따라 들어온 외성인들이 모든 방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본성인들을 억압하면서 1947년에 2·28 사건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있었다. 1988년에 타이완 출신인 리덩후이가 총통이 될 때까지 43년간 외성인 중심의 국민당 정권이 계속되면서 정치, 경제의 각 분야에서 여전히 외성인 출신들과 그 후손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타이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주로 미국인 등 서양인이다. 그밖에 일본인, 말레이 인종(필리핀 출신 주민 등), 베트남인, 몽골인, 티베트인 등이 있다. 국민당이 이주해 오기 전부터 타이완에 살던 사람은 본성인이라고 부르고, 국민당과 함께 이주해 온 사람들을 다른 성에서 왔다고 하여 외성인이라고 부른다. 국민당이 타이완을 통치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언어였다. 명나라 때 중국 남부에서 이주해 와서 200년 넘게 살아온 본성인과 타이완 원주민은 민난어를 주로 사용했으나, 국민당은 만다린어를 표준어로 정하면서 본성인의 불만이 야기되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2.28사건으로 깊어졌다. 국민당이 담배전매권을 시행하고 폭압적인 단속을 하는 과정에서 시위가 발생하였고,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난폭하게 진압을 하면서 2만 명이 죽고 10만 명 가량이 행방불명되었다. 국민당은 이 때부터 1987년까지 40년간 계엄령을 발동하여 타이완을 통치하였다. 민난어를 쓰는 본성인은 주로 타이완 남부 지역에 거주한다.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국민당이 통치하던 때보다 일본 점령기가 더 나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일부 있다. 정치적으로는 국민당 반대파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지지하며 중국 대륙과의 통일보다는 현상 유지나 타이완 독립을 지지한다. 이에 반해 외성인에게 타이완은 임시로 거주하는 곳일 뿐이고, 타이베이는 임시수도일 뿐이다. 타이베이를 비롯한 북부에 많이 거주하며, 소수이지만 경제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다. 베이징어를 사용하고 대륙과의 통일을 바라는 국민당을 지지한다. 물론 대부분의 타이완 사람들은 독립이나 통일 같은 극단적인 선택보다는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지만 선거 때가 되면 정치적 대립이 부각되면서 심한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중화민국의 공용어는 베이징 방언을 기초로 한 표준 중국어이다. 일상에서는 민남어(타이완어)나 객가어가 많이 쓰이며, 그 밖에 중국 각지의 방언도 쓰인다. 또한, 원주민은 각각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화민국의 정치 민주화를 반영하여 매스컴 등에서 민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외국어로는 영어와 일본어가 가장 많이 쓰인다. 종교로는 불교, 도교, 유교의 3대 종교와 기독교 등이 존재한다. 3대 종교 간의 구분은 극히 애매하며 이를 신앙하는 인구 비율이 93%를 차지해 압도적으로 많다. 성공회, 메노나이트, 장로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의 기독교는 4.5%, 기타 2.5%이다. 타이완에서는 불교, 도교, 유교의 구분이 극히 애매할 뿐만 아니라, 서로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타이완 사람들의 종교 생활은 불교, 유교, 도교가 혼합된 것으로, 묘(廟)에서는 이러한 종교의 신들이 합사되고 있다. 특정의 신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따라 참배하는 신들을 바꾸고 있다. 따라서 타이완 사람들은 종파를 넘어 깊게 종교와 접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종교 회의 등 종교 국제 기구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타이완 중화민국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많다. 타이완의 교육제도는 1946년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이 정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일본식 교육 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의무 교육은 초등학교(국민소학; 國民小學)와 중학교(국민중학; 國民中學)의 9년간으로, 공립학교는 무료이다. 국민중학 졸업자의 대부분이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급중학(高級中學) 혹은 고급직업학교(高級職業學校)에 진학하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열이 높다. 타이완에는 약 150개의 대학교와 전과학교(專科學校) 등의 고등교육 기관이 있다. 주요 대학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타이베이 국립 타이완 대학(國立臺灣大學, 1928년 설립) 국립 정치 대학(國立政治大學, 1927년 설립) 국립 타이완 사범대학(國立臺灣師範大學, 1922년 설립) 둥우 대학(東吳大學, 1900년 설립) 중국 문화 대학(中國文化大學, 1962년 설립) 가오슝 국립 가오슝 대학(高雄大學, 2000년 설립) 국립 중산 대학(國立中山大學, 1924년 설립) 기타 지역 푸런 대학(輔仁大學, 1925년 설립, 신베이 시) 국립 성공 대학(成功大學, 1931년, 타이난 시) 국립 중흥 대학(中興大學, 1919년, 타이중 시) 국립 중앙 대학(中央大學, 1968년, 타오위안 시) 국립 칭화 대학(國立淸華大學, 1911년, 신주 시) *국립 자오퉁 대학(國立交通大學,1958년 신주 시) 국립 가의 대학(嘉義大學, 2000년, 자이 시) 타이완 주민의 대부분이 한족이므로 그 문화 기반은 한문화(漢文化)이다. 중국 본토의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가족은 사회 조직의 중요한 사회 단위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선조 숭배는 현재도 중요한 가족 행사의 하나이다. 또 구정 및 이십사절기에 따르는 청명절이나 중추절 등의 전통적인 연중 행사는 매년 성대하게 행해지고 있다.타이완 섬에 대한 일제의 강점기간은 한국보다 15년이 더 긴 50년(1895년-1945년)이지만, 타이완 주민들의 반일 감정은 한국인에 비해 현저히 덜한데 이는 1947년의 2·28 사건 이후 무려 38년간의 계엄령 아래서 본성인과 외성인을 차별했던 폭압통치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타이완에는 세계적인 도서관이나 미술관이 많다. 저명한 도서관으로는 타이베이 시에 있는 국립 중앙도서관이 있으며, 방대한 양의 장서를 보유할 뿐만 아니라 분관도 존재하고 있다. 또 각 주요 도시에 공립 도서관이 있다. 타이베이와 자이 현 타이바오 시에 있는 국립고궁박물원에는 베이징의 자금성으로부터 옮겨져 온 중국 역대 왕조의 뛰어난 문화유산이 다수 수집되어 있다. 또 국립역사박물관, 타이완성립박물관, 타이중 시에 있는 국립 타이완 미술관에는 중국의 민속 문물이나 현대 예술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인기 있는 스포츠는 야구로, 중화 프로 야구 대연맹(타이완 프로 야구)이 있다. 타이완은 중화권에 속한 지역으로, 타이완의 대중 문화는 중화권과 맥을 같이 한다. 타이완 출신의 연예인들은 중국 대륙와 세계 각지의 화교 사회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외국 문화 중에서는 일본의 대중 문화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대중 문화는 타이완의 대중 문화 형성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타이완에서 제작된 영화나 드라마 중에는 일본의 만화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 많다. 최근에는 한류 열풍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의 대중 문화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국부천대 중국여성의 해외성매매 대만공화국 독립운동 민국기원 반한 감정 오권분립 오족공화(五族共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타이완 중화 타이베이 중화민국의 대외 관계 중화민국의 정치 타이완의 언어 타이완의 인구통계 타이완 원주민 * 타이완 원주민 일람 중국의 민족 타이완 주 타이페이 대한민국 대표부 홈페이지 중화민국 전자정부 중화민국 총통부 중화민국 감찰원 중화민국 사법원 중화민국 입법원 중화민국 외교부 CIA의 세계정보 (타이완편) *중화민국 분류:중국어권 분류:1912년 설립 분류:섬나라 분류:일본의 옛 식민지 분류:공화국 분류:유엔의 옛 회원국 분류:아시아의 옛 나라 분류:중국의 옛 나라 분류:분단된 지역 |
후한(後漢) 건안(建安) 6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13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6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5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6년 유비,허도의 조조를 습격하려다가 패해 형주 자사 유표에게 도망침 음력 2월, 가야국(加耶國)이 신라에게 화친을 청하였다. 음력 3월 정묘(丁卯)일 그뭄에 일식이 신라에서 관측되었다. 음력 3월, 신라가 크게 가물자, 중앙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가벼운 죄는 용서하여 주었다. ㅣㄴㄱㄷㄱㄷㄱㅌㄱ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집정관 (, 은 정무관 중 최고 지위이며, 행정 및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원로원과 합하여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을 가진다. 임기는 1년이며 한 달씩 교대로 집무하며, 상호간의 합의 하에 업무를 본다.(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 권력의 집중방지). 비상시 한 사람의 독재관(dictator)에게 전권을 위임(6개월을 넘지 못함)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면 전직 집정관 ()이 된다.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만이 속주 총독이 될 수 있었다. 집정관은 매년 민회의 투표를 거쳐 2명이 선출된다. # 이렇게 정식으로 1월 1일날 선출된 집정관들은 직권집정관 ()이라고 불리며, 로마의 햇수는 이 집정관들의 이름을 붙여서 세어진다. → 로마 집정관 연대표 #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는 경우나 전직 집정관 자격을 가진 속주 총독이 급히 필요할 경우에는, 보좌집정관 ()을 선출한다 선출된 집정관은 로마법()에 따라 로마의 통치권을 대표단()으로부터 부여받음으로써 로마의 최고통치자로서 법적으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군사, 행정, 법, 원로원 임원 임명 및 추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원로원과 민회를 필요에 따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현재 집정관이 통치하는 나라는 산마리노뿐이다. 집정관은 2명으로 하며 임기는 6개월이다. |
후한(後漢) 건안(建安) 10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17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10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9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40년 *음력 1월, 원희(袁熙)의 부하장수 초촉(焦触)과 장남(張南)이 원희를 배반하고 습격해 주를 장악하였다. 이에 원희와 원상은 아버지 원소에게 우호적이었던 오환족의 왕 답돈(蹋頓)에게로 달아났다. *음력 2월, 신라, 진충(眞忠)에게 벼슬을 내려 일벌찬으로 삼고, 이로써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하였다. *음력 7월, 신라,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음력 8월,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 뜰에서 울었다. 곽도(郭圖) 원담(袁譚)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12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19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12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11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42년 *음력 1월, 신라, 왕자 이음(利音)또는 내음(奈音)에게 벼슬을 내려 이벌찬으로 삼고, 지내외병마사(知内外兵馬事)를 겸하게 하였다. 적벽 대전 중국 촉나라의 2대 황제 유선 중국 위나라의 대군사 곽가 • 원소의 둘째아들 원희 • 원소의 막내아들 원상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13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20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13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12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43년 적벽 대전 - 유비,손권 연합군 조조군 대파 음력 2월, 신라, 내해 이사금이 군읍(郡邑)을 순행하고 열흘만에 되돌아왔다. 음력 4월, 왜인이 신라의 경계를 침범하니, 이벌찬 이음을 보냈다. 이음이 병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다. 10월 1일 - 로마 제국 24대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더 • 후한의 정치가 공융 • 조조의 아들 조충 • 형주 자사 유표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14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21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14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13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44년 음력 7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야를 를 침략하기를 꾀하자, 가야의 왕자가 신라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니, 내해 이사금이 태자 석우로에게 명하여 이벌찬 이음과 더불어, 육부(六部)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구했다. 팔국(八國)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된 육천명을 빼앗아 그들을 되돌아가게 했다. 산상왕이 환도성을 쌓고, 천도함. • 유비,손권의 누이동생 손부인과 결혼하다 고구려 11대 국왕 동천왕(東川王) 삼국지 조위 초기 점술가 관로(管輅)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19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26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19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18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49년 / 구수왕(仇首王) 원년 음력 3월, 신라에서 큰 바람이 나무를 꺾었다. 음력 7월, 백제가 신라 서쪽의 요차성(腰車城)을 공격하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신라의 내해 이사금이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니, 이음은 뛰어난 병사 6천명을 이끌고 백제를 치고, 사현성(沙峴城)을 파괴하였다. 음력 12월, 신라에서 천둥이 쳤다. 백제(百濟) 5대 국왕 초고왕 (재위 166년 - 214년) 촉한의 군사 방통 조조의 모사 순유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23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30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23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22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5년 음력 7월, 신라의 무기고의 병사 장비가 스스로 나왔다. 백제인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을 에워싸니, 신라의 내해 이사금이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들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로마 제국 22대 황제 마크리누스 • 조조의 장수 악진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후한(後漢) 건안(建安) 24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31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24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23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6년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劉備)와 조조(曺操) 사이에 한중 전투가 발생하다. *중국 삼국시대에 관우가 조조가 점유 중이던 형주 북부를 침공하여번성 전투가 일어나다. *중국 삼국시대에 손권(孫權)이 유비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관우를 공격하여 형주 공방전이 발발하다. 중국 삼국(三國)시대 위(魏)의 무장 하후연( 夏侯淵) 중국 삼국(三國)시대 촉한(蜀漢)의 무장 관우(關羽) 중국 삼국(三國)시대 촉한(蜀漢)의 무장 관평 중국 삼국(三國)시대 익주자사 유장(劉璋) *중국 삼국(三國)시대 위(魏)의 참모 양수(樣수) *중국 삼국(三國)시대 동오(東吳)의 무장 여몽(呂蒙) |
후한(後漢) 건안(建安) 25년 / 연강(延康) 원년 위(魏) 황초(黃初) 원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32년 위(魏) 문제(文帝) 원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25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24년 백제(百濟) 구수왕(仇首王) 7년 음력 3월, 신라의 이벌찬 이음이 죽었다. 충훤(忠萱)을 이벌찬으로 삼고, 지병마사(知兵馬事)를 겸하게 했다. 음력 7월, 신라, 양산(楊山) 서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위 구품관인법 제정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 위나라 조비에게 선양하다. 3월 15일 - 중국 위(魏)무왕 태조(太祖) 조조(曹操). 중국 위(魏)의 대장군 하후돈(夏候惇) 중국 위(魏)의 문관 정욱(程昱) 중국 촉한(蜀漢)의 문관 법정(法正)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자바 (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제임스 고슬링()과 다른 연구원들이 개발한 객체 지향적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1991년 그린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1995년에 발표했다. 처음에는 가전제품 내에 탑재해 동작하는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했지만 현재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하나이고, 모바일 기기용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현재 버전 10까지 출시했다. 자바의 개발자들은 유닉스 기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법적인 특성은 파스칼이 아닌 C++의 조상인 C 언어와 비슷하다. 자바를 다른 컴파일언어와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컴파일된 코드가 플랫폼 독립적이라는 점이다. 자바 컴파일러는 자바 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을 바이트코드라는 특수한 바이너리 형태로 변환한다. 바이트코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JVM(자바 가상 머신이라는 특수한 가상 머신이 필요한데, 이 가상 머신은 자바 바이트코드를 어느 플랫폼에서나 동일한 형태로 실행시킨다. 때문에 자바로 개발된 프로그램은 CPU나 운영 체제의 종류에 관계없이 JVM을 설치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는 어디서나 실행할 수 있으며, 이 점이 웹 애플리케이션의 특성과 맞아떨어져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자바 언어는 1991년 6월 셋톱 프로젝트를 위해 제임스 고슬링(James Gosling)이 만들었다. 이 언어는 원래 제임스 고슬링의 사무실 밖에 있던 오크 나무를 따다 오크(Oak), 혹은 그린(Green) 이라고도 불렀으나, 단어 리스트 중 무작위로 뽑은 자바(Java)를 선택했다. 고슬링의 목표는 C/C++ 스타일의 언어와 가상 머신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첫 공개 자바 버전은 1995년의 자바 1.0이었다. 한 번 쓰고 어느 곳에도 실행 "Write Once, Run Anywhere"하는 것을 약속하였고 인기 플랫폼에 무료 런타임을 제공하였다. 이 플랫폼은 꽤 안정성을 지녔고 보안 시스템은 여러 설정을 통해 네트워크 및 파일 접근을 통제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브라우저들은 곧 자바 애플릿(Java Applet)을 웹 페이지 안에서 실행할 수 있었고 자바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자바 2(JDK 1.2 ~ 1.4)의 출현으로 여러 다양한 플랫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설정(Configuration)들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J2EE는 엔터프라이즈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할 수 있고, J2ME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할 수 있다. J2SE는 스탠다드 에디션으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 마케팅용으로 Java EE, Java ME, Java SE 순서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1997년 ISO/IEC JTC1 표준화 그룹, 그리고 나중에는 ECMA International 그룹과 접촉하여 정식 승인을 받으려 했으나 곧 이 프로세스에서 철수했다. 자바는 사실상 (de facto)의 표준이며 자바 커뮤니티 프로세스(Java Community Process)를 통해 관리되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바의 대부분을 무료로 배포하였으나 오픈이 아닌 사유 소프트웨어였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바 엔터프라이즈 시스템 같은 특정 라이선스를 팔아서 수입을 올렸다. 썬(SUN) 사는 자사의 개발용(소프트웨어 개발 키트 (SDK))과 개발용의 일부인 실행용(자바 런타임 환경, JRE)을 구분한다. 실행용에는 컴파일러, 유틸리티 및 여러 개발용 헤더 파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2006년 11월 13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대부분은 자바를 GPL 라이선스로 소스를 오픈하였으며 2007년 5월 8일 이 과정을 마쳤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코어 부분을 오픈하였다. 2009년 4월 20일 제작사인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과 인수 합병됨에 따라 자바에 대한 권리 및 유지보수 또한 오라클로 넘어가게 되었다. Duke 자바 마스코트 자바 언어는 다음 5가지의 핵심 목표를 지니고 있다. # 객체 지향 방법론을 사용해야 한다. # 같은 프로그램(바이트코드)이 여러 운영 체제(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실행될 수 있어야 한다. # 컴퓨터 네트워크 접근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어야 한다. # 원격 코드를 안전하게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 다른 객체 지향 언어들의 좋은 부분만 가지고 와서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 자바는 초기 설계부터 객체 지향 언어(객체 지향 프로그래밍)로 설계되었다. C가 C++로 진화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같은 코드로 어떤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나 실행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자바만의 실행 코드인 바이트코드라는 중간 코드를 컴파일러에 의해 생성한다. 그리고 자바 가상 머신(JVM)에 의해 해석되어 실행된다. 따라서 C/C++ 코드로 작성되어 생성된 코드보다 일대일 상황이면 실행 속도가 느리다. 그러나 장점은 같은 코드로 다양한 플랫폼이나 운영 체제에서 실행될 수 있다는 점이다. JVM 구조. 소스코드는 바이트코드로 컴파일되어 생성, 코드 검증, JVM에 의해 해석되어 실행(interpreted) 또는 JIT-compiled로 직접 기계어 코드로 변환 실행. JRE(Java Runtime Environment)에 API와 JVM이 함께 만들어짐. 자바가 여러 개의 마이크로프로세서(CPU)에서 같은 코드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C/C++의 프로그램의 실행 구조와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C/C++가 특정 CPU의 기계어 코드를 직접 생성하면, 이 기계어 코드가 메모리에 적체되어 바로 실행된다. 따라서 C/C++는 CPU가 달라지면 컴파일러가 달라져야 한다. 임베디드 프로그램의 경우, gcc는 gcc 소스를 사용해서 특정 CPU를 지정하고, 컴파일러(x86 플랫폼에서)로 크로스 컴파일러를 만들 수 있다. x86 리눅스용 프로그램 만든다면, x86 컴파일러를 만들 수 있다. ARM용 프로그램이라면 ARM을 지정하고 컴파일러 소스를 컴파일러(x86에서 실행되는)로 ARM용 크로스 컴파일러를 만들 수 있다. 만약 gcc를 사용하고 싶지 않거나 gcc 컴파일러가 없다면, 특정 CPU 개발 도구는 구입을 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자바는 같은 코드를 사용하여 다른 CPU에서 실행되도록 하기 위해 직접 CPU의 기계어 코드를 생성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자바는 바이트코드(Java bytecode)라는 것을 생성한다. 이것을 자바 가상 머신(JVM, Java virtual machine)이 해석을 하여 실행한다. 자바 가상 머신이 인터프리터가 되어 코드 해석 방식의 실행을 함으로써, 같은 바이트코드를 가지고 여러 가지의 CPU에서 실행이 가능해진다. JVM은 CPU와 직접적 관계가 있으므로 이것은 CPU의 기계어 코드로 이루어진다. 자바의 실행 방식은 스택 실행 방식 언어(stack-oriented programming language)를 생각할 수 있다. int main() { int a = 10; int b = 20; int c; c = a + b; printf("%d", c); // 991 } 이것을 C/C++를 x86 프로세서용 컴파일러로 컴파일하면, 컴파일러와 최적화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예의 코드가 생성될 수 있다. C 언어에서 실행할 때, 지역변수는 스택이나 CPU의 레지스터를 이용한다. 스택이냐 레지스터냐는 개발 도구의 옵션에서 설정하는 최적화와 함수 내의 변수의 숫자와 관련이 있다. 함수의 블록이 시작되면 레지스터를 스택에 대피시키고, EBP를 스택의 포인터 값으로 설정하여 변수의 베이스 주소로 사용한다. 스택을 이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어셈블리 결과를 생각할 수 있다. x86 프로세서에서 어셈블리어 코드 예는 mov eax, DWORD PTR 4ebp mov edx, DWORD PTR 8ebp add eax, edx mov DWORD PTR 12ebp, eax 이 코드는 2개의 정수형 숫자를 더해 다른 곳에 넣는 과정이다. 메모리에 적체된 코드를 x86이 읽어 실행시킬 수 있는 기계어로 일대일 대응된다. bp 레지스터는 CPU의 스택을 베이스로 한 포인터 레지스터이다. 주로 지역변수로 선언된 경우 스택을 사용한다. 그러나 자바에서 보면 0 iload_1 1 iload_2 2 iadd 3 istore_3 2개의 숫자를 더하기 위해 스택에 넣고, 다시 스택에서 꺼내서 더한다. 더한 값을 다시 스택에 넣는다. 이 코드는 특정 CPU의 기계어 코드가 아니라, 자바 고유의 기계어로 생각할 수 있는 코드 형태이다. JVM이 읽어 해석한 후, 해당 코드의 기능을 수행한다. 자바의 버전은 보통 Java SE 또는 JDK/JRE의 버전으로 말한다. JDK(Java Development Kit)는 표준 라이브러리를 포함하며, JDK 버전이 바뀜에 따라 이 라이브러리가 확대되고 API가 바뀐다. 초기 1.0/1.1 버전에서 JDK/JRE의 명칭을 사용하다가 Java 1.2가 발표되면서 J2SDK/J2RE라고 개명하여 사용했으나 기존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현재는 다시 JDK/JRE의 명칭으로 돌아왔다. 또한 J2SE(Java2 Standard Edition)라는 명칭 또한 Java SE(Java Standard Edition)로 변경되었다. 자바 버전 체계의 메이저 버전(소수점 위)이 계속 1.x로 고정되어 마이너 업데이트로 여기는 경우들이 있어 1.5 버전부터 5.0(1.5), 6(1.6)의 형태로 제품 버전을 코드 버전과 별개로 발표하고 있다. 언어 자체는 자바 언어 명세(Java Language Specification, JLS)에서 정의되며, 판()으로 구분한다. JDK가 확장되는 동안 언어는 2판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으나, JDK 5와 함께 바뀐 JLS 3판에서 제네릭() 타입, 애너테이션() 같은 기능이 도입되면서 상당히 바뀌었다. JDK 7에서는 자바 언어에 상당한 변화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JDK 7로 예정되었던 변화가 JDK 7과 JDK 8로 나뉘면서 JDK 7에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언어 특성만이 추가되었다. 구체적으로 이진수 표기 추가, 가독성을 위해 수 표기에 밑줄()을 허용, 스위치 문(에서 문자열 사용, 제네릭 타입 객체 생성 시 타입 추론(), 자동 자원 해제를 위한 try 문법, 여러 예외 타입을 동시에 잡도록 허용하는 문법 등이 추가되었다. 현재 자바 언어는 JLS 3판, JDK는 버전 9이다. JLS 1판 JLS 2판 * JDK 1.4 assertion 기능 추가 JLS 3판(JDK 5) 현재 오라클 공식 홈페이지에서 JDK 8, Java.net에서 JDK 9가 배포 중이며, 다운로드 페이지 오른쪽에 있는 약관 동의에 체크하고 그 아래 링크를 이용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다음은 자바를 사용해 작성한 전통적인 Hello world 프로그램이다. public class HelloWorldApp { public static void main(String args) { System.out.println("Hello World!"); // Hello World 를 출력 } } 소스 파일명은 반드시 파일 내의 public class 이름과 동일해야 하며, 파일 확장자는 .java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만약 public class 이름이 HelloWorldApp이라면, 파일명은 반드시 HelloWorldApp.java 가 되어야 한다. 이 자바 파일이 동작하기 위해서는 자바 컴파일러를 통해서 바이트코드로 컴파일되어 같은 이름의 .class 파일, 즉, HelloWorldApp.class가 생성되어야 한다. 컴파일된 class 파일은 자바 가상 머신을 통해 실행이 가능하다. 리눅스/유닉스 터미널 (혹은 윈도 cmd) 에서 자바 파일을 컴파일한 후 실행하는 방법 예제) 컴파일 자바 컴파일러 사용 (예, javac) javac HelloWorldApp.java 컴파일 후에는 같은 이름의 class 파일인 HelloWorldApp.class가 생성된다. 실행 자바 가상 머신 사용 (예, java) java HelloWorldApp 실행 시에는 확장자인 .class를 붙이지 않는다. 결과 Hello World! 자바 서버 페이지(JSP, JavaServer Pages)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 한편 안드로이드는 자바 VM에 해당하는 달빅계열하에 오픈 자바 클래스를 기반으로한 API로 프로그래밍을 함으로 이 경우 특수한 경우의 자바 프로그래밍이라고 부를수있다. 자바 (소프트웨어 플랫폼) 자바 가상 머신 자바와 C++의 비교 GNU 클래스패스 공식 홈페이지 분류: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명령형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크로스 플랫폼 소프트웨어 분류:JVM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자바 플랫폼 분류:1995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C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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