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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Children ()은 사쿠라이 가즈토시, 다하라 겐이치, 나카가와 게이스케, 스즈키 히데야로 구성된 일본의 록 밴드이다. 흔히 줄여서 미스치루라고 불리기도 한다. 1989년에 결성된 Mr.Children은 5천4백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가장 성공한 일본 록 그룹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1990년대 중반엔 발매한 음반들이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등 ‘미스치루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Mr.Children은 싱글 29장 연속 1위 기록을 갖고 있으며, 1994년엔 〈Innocent World〉, 2004년엔 〈Sign〉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2012년 11월까지 Mr.Children은 정규 음반 14장과 싱글 33장, 컴필레이션 음반 5장, 라이브 음반 1장, 영상 음반 15장을 발매했다. 스즈키가 작곡한 〈Asia〉 (《Atomic Heart》)와 〈#2601〉 (《Discovery》) 를 제외한 밴드의 노래 대부분은 리드 싱어인 사쿠라이가 작곡하는데, 때로는 프로듀서인 고바야시 다케시와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아티스트 토탈세일즈 (CD 총 판매량) 약 5750만장 돌파. (2012년 7월 기준, B z에 이은 역대 2위) 싱글 1위 획득 수, 연속 1위 획득 수, 연속 첫 주 1위 획득 수 29작품 (5th싱글 〈innocent world〉로부터 33rd싱글 〈HANABI〉까지. B z에 이어 역대 2위) 진행 중. 싱글 첫 주 판매량 120.8만장 (10th싱글 〈名もなき詩〉로 기록. 역대 1위) 연간 싱글차트 1위 획득수 2작품 (1994년의 〈innocent world〉, 1996년의 〈名もなき詩〉. 미야 시로와 반카라트리오, 핑크 레이디와 함께 역대 1위 타이) 연간 싱글차트 TOP10 획득 수 14작품 (〈奇跡の地球〉를 포함. 역대 1위) 연간 싱글차트 TOP10 연속 획득 수 6년 연속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역대 1위) 밀리언 셀러 획득수 싱글 10작품, 앨범 11작품 (둘 다 B z에 이어 역대 2위) 싱글 더블 밀리언 셀러 획득수 2작품 (차게 앤 아스카와 함께 역대 1위 타이) 싱글 복귀 1위 획득수 3작품 (5th싱글 〈innocent world〉, 6th싱글 〈Tomorrow never knows〉, 29th싱글 〈しるし〉.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사잔 오루 스타즈와 함께 역대 1위 타이). 사쿠라이 가즈토시 (, 1970년 3월 8일 ~ ) 보컬, 기타 다하라 겐이치 (, 1969년 9월 24일 ~ ) 기타 나카가와 게이스케 (, 1969년 8월 26일 ~ ) 베이스 기타 스즈키 히데야 (, 1969년 11월 14일 ~ ) 드럼, 코러스 2008년 봄에는 그들의 노래 〈쇼넨〉이 NHK 야구 드라마 《배터리》의 주제가로 사용됐다. 여름, 그들은 3개월간 3작품 연속 발매를 발표했다. 첫 번째는 《2008년 하계 올림픽》 NHK 방송 테마송인 싱글 《GIFT》, 두 번째는 작년에 개최한 전국 투어에서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을 담은 DVD 《Mr.Childre "HOME" TOUR 2007 ~in the field》, 세 번째는 드라마 《코드블루》 주제가인 싱글 《HANABI》이다. 〈Habani〉는 야마시타 도모히사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코드 블루》의 주제가로 사용됐다. 11월에는 첫 디지털 싱글인 〈하나노 니오이〉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11월 22일 개봉한 나카이 마사히로가 주연한 영화 《나는 조개가 되고싶다》 주제가로 쓰였다. 12월 10일엔 정규 음반 《Supermarket Fantasy》를 발매했는데, 발매 첫 주에 약 70만 장이 팔리며 오리콘 주간 음반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12월 1일, Mr.Children은 음반의 유일한 싱글이자 디지털 싱글로 발매한 〈fanfare〉가 수록된 그들의 16번째 음반 《SENSE》를 발매했다. 발매 직전인 11월 29일까지 발매일을 제외한 수록곡, 곡수, 음반 제목, 커버 등 상세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2011년 4월 4일, Mr.Children은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기부금을 모으기 위한 디지털 싱글 〈카조에 우타〉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발매 첫 주에 AKB48의 자선 싱글 〈다레카노 타메니 (What Can I Do for Someone?)〉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2011년 일본의 아이튠즈 연간 다운로드 순위에서 일본의 음악가로는 가장 높은 순위인 4위를 차지했다. 2012년 4월 18일, Mr.Children은 3년 7개월만에 3A 싱글 〈이노리 나미다노 기도/End of the Day/Pieces〉를 발매했다. 수록곡 가운데 두 곡 은 영화 우리들이 있었다 주제가로 사용됐다. 2012년 5월 10일에는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베스트 음반 《Mr.Children 2001-2005<micro>》와 《Mr.Children 2005-2010<macro>》 두 장을 함께 발매했다. CROSS ROAD 1993년 발매. 125만 장 판매. 드라마 (동창회) 주제가. : 작사 사쿠라이 카즈토시 : 작곡 사쿠라이 카즈토시 : 편곡 코바야시 타케시 앤 Mr.Children innocent world 1994년 발매. 193만 장 판매. 그해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 (AQUARIUS) 광고 음악. : 작사 사쿠라이 카즈토시 : 작곡 사쿠라이 카즈토시 : 편곡 코바야시 타케시 앤 Mr.Children Tomorrow never knows 1994년 발매. 276만 장 판매. 이들의 최대 히트작. 드라마 (젊은이의 모두) 주제가. : 작사 사쿠라이 카즈토시 : 작곡 사쿠라이 카즈토시 : 편곡 코바야시 타케시 앤 Mr.Children Seesaw Game ~Yukanna Koi no Uta~ (시소 게임 ~용감한 사랑의 노래~) 1995년 발매. 181만 장. 오리콘 3주 연속 1위. "논타이업 싱글로는 역대 2위"를 기록. (역대 1위는 우타다 히카루의 "Automatic") 고베 대지진 돕기 노래. : 작사 사쿠라이 카즈토시 : 작곡 사쿠라이 카즈토시 : 편곡 코바야시 타케시 앤 Mr.Children Na mo naki Uta (이름도 없는 노래) 1996년 발매. 230만 장. 오리콘 초기 판매 역대 1위. 드라마 (퓨어) 주제가. : 작사 사쿠라이 카즈토시 : 작곡 사쿠라이 카즈토시 : 편곡 코바야시 타케시 앤 Mr.Children Sign 2004년 발매. 77만 장 판매. 드라마 (오렌지 데이즈) 주제가. : 작사 사쿠라이 카즈토시 : 작곡 사쿠라이 카즈토시 : 편곡 코바야시 타케시 앤 Mr.Children Shirushi (증표) 2006년 발매. 74만 장 판매. 오리콘 1위 복귀 싱글(2006년 11월 20일 오리콘 위클리 차트 이후 2007년 1월 15일 오리콘 위클리 차트 1위). 드라마 (14세의 어머니) 주제가. : 작사 사쿠라이 카즈토시 : 작곡 사쿠라이 카즈토시 : 편곡 코바야시 타케시 앤 Mr.Children *1992년 《Everything》 *1992년 《Kind of Love》 *1993년 《Versus》 *1994년 《Atomic Heart》 *1996년 《신카이》 *1997년 《BOLERO》 *1999년 《DISCOVERY》 *1999년 《1/42》* *2000년 《Q》 *2001년 《Mr.Children 1992-1995》 *2001년 《Mr.Children 1996-2000》 *2002년 《It s a Wonderful World》 *2004년 《시후쿠노오토》 *2005년 《I ♥ U》 *2007년 《Home》 *2007년 《B-Side》 *2008년 《Supermarket Fantasy》 *2010년 《SENSE》 *2012년 《Mr.Children 2001-2005 》 *2012년 《Mr.Children 2005-2010 》 *2012년 《[(an imitation) blood orange]|(an imitation) blood orange》 *2015년 《(REFLECTION {Naked}》 컴필레이션 음반* 라이브 음반 FM802 (토이즈 팩토리) 분류:1988년 결성된 음악 그룹 분류:1992년 데뷔 분류:일본의 록 밴드 분류:일본의 팝 록 밴드 분류:1980년대 음악 그룹 분류:1990년대 음악 그룹 분류:2000년대 음악 그룹 분류:2010년대 음악 그룹 분류: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 음악가 |
80486DX2 bottom.jpg|섬네일|세라믹 PGA의 인텔 80486DX2 마이크로프로세서 중앙 처리 장치 (中央處理裝置) 또는 CPU ()는 컴퓨터 시스템을 통제하고 프로그램의 연산을 실행하는 가장 핵심적인 컴퓨터의 제어 장치, 혹은 그 기능을 내장한 칩을 말한다. 컴퓨터 안의 중앙 처리 장치(CPU)는 외부에서 정보를 입력 받고, 기억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해석하여 연산하고, 외부로 출력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중앙 처리 장치(CPU)는 컴퓨터 부품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컴퓨터 시스템 전체를 제어하는 장치로, 모든 컴퓨터의 작동과정이 중앙 처리 장치(CPU)의 제어를 받기 때문에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의 CPU 칩엔 실행 부분뿐만 아니라 캐시 등의 부가 장치가 통합된 경우가 많다. CPU에는 MCU(Micro Control Unit)와 주변 장치(외부 확장 장체에 관한 IC)가 다 들어있는 Soc(System On Chip)가 있다. 주변 IC가 따로 달려 있을 경우, 그것은 MCU라고 할 수 있다. CPU는 기계어로 쓰인 컴퓨터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해석하여 실행한다. CPU는 프로그램에 따라 외부에서 정보를 입력받아,이를 기억하고, 연산하며, 결과를 외부로 출력한다. CPU는 컴퓨터 부품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컴퓨터 전체의 동작을 제어한다. 기본 구성으로는 CPU에서 처리할 명령어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 레지스터, 비교, 판단, 연산을 담당하는 산술논리연산장치(ALU), 명령어의 해석과 올바른 실행을 위하여 CPU를 내부적으로 제어하는 제어부(control unit)와 내부 버스 등이 있다. 각종 전자 부품과 반도체 칩을 하나의 작은 칩에 내장한 전자 부품을 마이크로프로세서라고 한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전기 밥통에 쓰이는 낮은 성능의 제품부터 컴퓨터에 쓰이는 높은 성능의 제품까지 매우 다양하다. 마이크로프로세서들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성능이 높은 제품은 컴퓨터의 연산 장치로 쓰인다. 이것을 중앙 처리 장치라고 한다. 고정된-프로그램 컴퓨터 라고 불리는 ENIAC같은 컴퓨터는 다른 종류의 작업을 하기 위해 전선을 재배열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CPU" 라는 용어가 소프트웨어의 실행을 위한 장치로 불리게 된 이래로, CPU라고 불릴 수 있는 장치의 출현은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출현 덕분이었다.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는 J.Presper Eckrt와 John Willian Mauchly s의 ENIAC 설계에도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하지만 ENIAC을 빨리 제작하기 위해서 생략되었다. ENIAC이 만들어지기 전인 1945년 6월 30일 수학자 폰 노이만은 EDVAC 초안에 대한 보고 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개요로써 1949년에 완전히 정립되었다. EDVAC은 일정한 수의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확실한 것은, EDVAC 프로그램은 물리적 선의 연결이 아니라 빠른 속도의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ENIAC의 한계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폰 노이만의 디자인은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을 단순히 메모리에 있는 내용을 바꾸는 것 만으로 손쉽게 실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EDVAC은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방식 컴퓨터는 아니었다. 맨체스터 대학교의 SSEM(Small-Scale Experimental Machine)과 마크 1이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초기 버전이다. 트랜지스터 CPU는 당연히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이후 생긴다. 페드리코 페긴이 1970년대에 발명한 것은 CPU의 설계와 구현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70년에 등장한 최초의 상업용 마이크로프로세서(Intel 4004)와 1974년의 최초의 범용 마이크로프로세서(Intel 8080) 이후로 생겼다. 모든 CPU에서 메모리에 저장된 명령어들을 순서대로 불러와서 실행한다는 사실은 물리적형태와는 관계없이 동일하다. 그리고 CPU가 이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꺼내고, 해독하고, 실행하는 5단계가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에서 명령어를 실행하고난 이후에는 다시 이 다섯 단계의 명령 주기가 반복되며, 프로그램 카운터의 변화된 위치에서 실행될 명령어를 불러오게 된다. 첫 번째 단계인 인출(Fetch)은 프로그램의 메모리에서 명령어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프로그램 내부의 명령어의 위치(주소) 두 번째 단계인 해독(Decode)은 인출 단계에서 가져온 명령어를 해독하여 명령어 내의 데이터 정보와 연산 정보를 추출한 뒤, 중앙처리 장치 내의 각 장치에 적절한 제어신호를 보내 연산, 처리에 대한 준비를 하는 단계이다. 실행(Execute)은 명령어에서 추출한 두 데이터와 연산 정보를 이용해 실제로 연산을 하는 단계를 말한다. 연산이 끝난 결과는 곧바로 다음 명령어에서 사용될지, 그렇지 않을지에 따라 메모리 단계로 갈지, 라이트백 단계로 갈지 결정된다. 네 번째 단계인 메모리(Memory)는 연산결과가 다음 명령어에 바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결과를 메모리에 저장하는 것을 말한다. 연산의 마지막 단계인 라이트백(Write-Back)은 이전 명령어의 연산 결과가 다음 명령어의 입력 데이터로 사용될 경우, 계산 결과를 레지스터에 다시 쓰는 것을 말한다. CPU의 내장회로는 CPU가 수행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연산들의 집합인 명령어 집합 으로 이루어져있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숫자에 대한 가감연산 혹은 비교연산 같은것이 있다. 각각의 기본 연산은 옵코드라고 불리는 특정한 비트의 조합으로 나타내진다. 모든 명령어의 실제 수학적인 연산은 CPU 내부의 산술논리장치(ALU, arithmetic logic unit)이라는 조합논리회로에서 담당한다. CPU는 대부분 산술논리장치가 연산을 수행하기 위한 명령어를 메모리로부터 불러오고, 연산의 결과값을 저장하는 일을 한다. 메모리로부터 데이터를 불러오는 연산의 명령어 집합의 종류와 동작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싱글 코어(Single Core)는 하나의 코어로 이루어진 CPU이다. 일반적으로 멀티 코어에 비해 경비가 싸고 프로그래밍도 간단하지만 보수 작업이나 고장의 경우에는 시스템이 완전히 멈추고 멀티 코어에 비해 처리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최근에 나오는 중앙 처리 장치의 성능은 크게 클럭(Clock) 속도와 코어 수로 결정된다. CPU에서 클럭이라고 하는 수치는 중앙 처리 장치 내부에서 일정한 주파수를 가지는 신호로 이 신호에 동기화되어서 중앙 처리 장치의 모든 명령어가 동작되게 된다. 예를 들어, 클럭 수가 3.0GHz이면 초당 30억 번의 명령어 처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클럭 주파수가 빠를수록 제한된 시간에 더 많은 명령을 처리할 수 있기에 더 좋은 성능의 중앙 처리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또, 중앙 처리 장치안의 코어의 수로도 성능의 차이가 난다. 코어는 중앙 처리 장치의 역할을 하는 블록으로 예전에는 한 개의 칩 안에는 한 개의 코어의 구조를 가졌으나, 최근에는 한 개의 칩 안에 여러 개의 코어를 가지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이렇게 한 개의 칩 안에 여러 개의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 장치를 병렬적으로 연결한 멀티 코어 시스템을 통하여 더 좋은 성능의 중앙 처리 장치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싱글 코어 및 다중 코어를 칭하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코어의 개수 명칭 1 싱글 코어 2 듀얼 코어 3 트리플 코어 4 쿼드 코어 6 헥사 코어 8 옥타 코어 10 데카 코어 12 도데카 코어 16 헥사 데시멀 코어 현재는 코어의 속도를 높이기 힘든 한계에 왔기 때문에, 병렬성을 높여 CPU 안에 코어를 72개 넣은 인텔 제온 파이 CPU도 있다. 대중적인 운영 체제하의 CPU 설계 또는 제작사 인텔 AMD ARM *MIPS 마이크로프로세서 마이크로아키텍처 RISC CISC 분류:반도체 분류:마이크로프로세서 분류:컴퓨터 용어 |
수학에서, 어떤 사상의 핵 (核은 0의 원상의 포함 사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한 단사 사상이다. 범주론을 통해 추상적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적절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구체적 범주에서는 특정 원소의 원상의 포함 함수가 된다. 영 사상을 갖는 범주 속의 사상 의 핵 은 다음과 같은 영 사상과의 동등자이다. 영 대상을 갖는 범주 속의 사상 에 대하여, 인 가 존재한다면 를 정규 단사 사상 (正規單射寫像이라고 한다. "정규"라는 용어는 군론의 정규 부분군에서 유래하였다. 임의의 영 대상을 갖는 범주에서, 정규 단사 사상은 (동등자이므로) 단사 사상이다. 모든 단사 사상이 정규 단사 사상인 영 사상을 갖는 범주를 정규 범주 (正規範疇라고 한다. 준가법 범주 (아벨 군의 모노이드 범주 위의 풍성한 범주)에서, 두 사상의 동등자는 그 차의 핵과 같다. 아벨 범주에서 모든 사상은 핵을 가지며, 모든 단사 사상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구체적으로, 아벨 범주에서 모든 단사 사상은 그 여핵의 핵과 같으며, 모든 전사 사상은 그 핵의 여핵과 같다. 환 위의 왼쪽 가군의 범주 는 영 사상을 갖는 범주이며, 이 범주에서 모든 사상(가군 준동형)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의 핵 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에서 모든 단사 사상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이는 (군이나 유사환의 경우와 달리) 임의의 부분 가군에 대한 몫가군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형대수학에서 가 체일 경우, 체 위의 가군들은 벡터 공간이며,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는 핵이 존재한다. 특히, 행렬은 유한 차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을 정의하며, 행렬의 핵은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핵이다. 선형대수학에서 핵은 영공간 (零空間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에서, 영 사상은 1(군 연산의 항등원)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에서 모든 사상(군 준동형)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의 핵 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이 경우, 는 의 정규 부분군을 이룬다. 군의 범주에서, 임의의 군 준동형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는 정규 단사 사상이다. 는 단사 함수이며, 그 상 는 의 정규 부분군이다. 아벨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에서, 영 사상과 핵은 에서와 같다. 즉, 영 사상은 0(군 연산의 항등원)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며, 핵은 0의 원상으로 가는 포함 함수이다. 에서 단사 함수인 모든 군 준동형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이는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이 정규 부분군이기 때문이다. 유사환과 유사환 준동형의 범주 에서, 영 사상은 0 (덧셈 항등원)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에서 모든 사상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의 핵 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이 경우, 는 의 아이디얼을 이룬다. 유사환의 범주에서, 임의의 유사환 준동형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는 정규 단사 사상이다. 는 단사 함수이며, 그 상 는 의 아이디얼이다. (곱셈 단위원을 갖는) 환과 환 준동형의 범주 에서 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디얼은 1을 포함하지 않을 수 있어 부분환을 이루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을 가진 공간의 범주 에서, 영 사상은 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이 범주에서 모든 사상 은 핵 을 가지며, 이는 의 원상에 대한 포함 함수이다. 여핵 영 대상 아벨 범주 분류:대수학 분류:선형대수학 분류:범주론 |
정당 (政黨) 또는 당 (黨)은 공공 이익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을 일컫는다. 정당은 정치의 기구·조직 가운데서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편에 속한다. 사회가 근대화됨에 따라 정치가 다원화하는 것을 반영하는 데 있어서 의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게 되어 여기서 생기는 투입과정의 차질을 보완하기 위하여 점차로 정당이 형성되기 시작되었다. 서구의 정치사에서는 근대정당의 성립과 발전을 대체로 19세기 초부터 잡고 있으며 의회정치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에는 나라에 따라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정당정치의 전통이 확립되는 경우도 있다. 근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정당이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치에 참여하는 인구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귀족이나 지식을 가진 계층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질 때 정치를 좌우하는 것은 합리성이며 또한 그 바탕은 동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단일의 정치적 주체에 대하여 처음에는 부르주아지가, 그리고 뒤이어서는 노동계급이 도전하게 되어 정치는 복잡한 투쟁관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투쟁의 첫단계에서는 주로 폭력이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름했으나 어느 쪽의 종국적인 승리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는 타협과 선의의 경쟁이 룰(rule)이 되었고 이에 정당이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당의 기본적인 개념을 정치사회적으로 보아 다원적 경쟁사회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여길 때 현대의 전체주의적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단일정당은 정당이라고 하기보다는 특수 기능을 장악한 정부의 한 조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정당이란 어휘 자체가 원래 부분적인 모임 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현대의 신생 제국에서 대개의 경우 정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긴 하나 서구적인 기준에서 보면 정당이라고 하기보다는 지배자의 손발과 같은 사조직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때가 많다. 정당의 특징을 몇 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그것은 집단적 조직이라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법률로써 최저 몇 명 이상의 구성원이 있어야 정식으로 정당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어느 정도 이상의 사람이 모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정당은 수만에서부터 수백만의 당원을 가지는 규모로서 영국의 보수당은 8백만 명 이상이며 대한민국의 민주자유당은 4백만 명 이상이다. 코커스적 조직을 기반으로 하거나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정당은 몇만 명도 채 안 되는 제한된 당원을 가지고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 정당은 독특한 조직을 갖는다. 정당에만 고유한 어떤 조직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에 존재하는 조직의 모든 종류 가운데 정당 목적에 합당한 것이면 곧 이용된다. 가부장제적 조직, 군대식 조직, 세포와 같은 비밀조직, 또는 민주적 조직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마이헬스(R. Michels)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중정당의 조직에서 과두적 경향을 적발해 내었던 사실은 유명하다. # 정당은 사회단체와는 달리 정치 권력의 획득을 수단으로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양당정치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정당이 교대하여 정권을 담당할 때 일컫는 말이며 다당제에서의 군소정당은 정권을 획득하는 데 목표를 두기보다는 정권에 참여하거나 또는 영향을 미침으로써 만족한다. 정당은 정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교회나 노동조합, 그리고 기타 사회단체 및 압력집단과 구별된다. # 정당은 공익성을 그 요건으로 한다. 18세기의 영국에서 정당과 의회의 공익성을 주창했던 버크(E. Burke)의 말을 빌려보자. "정당이란 여러 사람이 한데 뭉쳐 공동의 노력으로 국가적 이익의 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집단인데 이때 각당은 자체의 합의에 입각한 독특한 주장을 내세운다" 이 기준에 의하여 우리는 정당과 파벌(faction)을 구별할 수 있다. 현대는 정당의 대부분이 국민 정당으로 되어 있으나 지난날에는 한때 계급정당이 발달하여 배타적으로 싸웠고 또한 사당이 존재하여 국가 이익 같은 것은 돌보지 않았었다. # 정당은 선거와 병존한다. 정당이 민주정치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선거를 치르는 데 있어서 후보자를 내고 선거의 쟁점을 내어놓으며,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도록 권하며, 당선 뒤에 책임정치를 하게 하는 일을 모두 정당이 맡아 보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정당의 일반적인 공통점을 말할 수는 있으나 정당은 각국의 정치문화 및 정치기구의 특징에 따라 그 면모는 각양 각색이 된다. 그러나 대체로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중심제 및 후진국의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의원중심제 정부형태의 모델로는 영국이 가장 적절하다. 그 나라에서는 정당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의회가 발달하였으므로 의회정치를 중심으로 하여 정당이 생겨났다. 따라서 원내 정당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한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면 그 당의 수상으로 되며 반대당이 되었을 때에도 응분의 책임을 지기 때문에 수상과 같은 보수를 받으며, 항상 집권 태세를 갖추어 이른바 섀도 캐비닛 을 구성하고 있다. 이 체제에서는 강력한 정당조직이 필요한 동시에 선거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정당활동을 전개하여 언제나 선거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이에 대하여 미국을 예로 들 수 있는 대통령제에서는 정당은 선거를 위한 기구(the election machine) 에 불과하며 상설된 조직을 갖지 않고 당수도 없으며, 당을 바꾸어도 변절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느슨한 정당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권력의 분립과 견제의 작용이 효력을 발생한다. 대통령은 같은 당이 의회에서 다수를 확보하고 있을 경우일지라도 정당을 통하여 의회를 조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고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구의 정치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정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서구의 사회, 경제, 정치적인 여러 여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처지에서 정당정치는 흔히 비뚤어져 갔다. 선거에 의하여 정권이 교체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1과 ½의 정당제가 되고 말며 또한 정당은 정치과정에서 국민과 연결되지 못하고 지배자의 친위당이 되고 말아 책임정치를 수행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인간이 도당 또는 당파를 조직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역사는 오래된다. 이것을 인간의 투쟁본능의 표현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어떻든 단결이 힘의 결집수단으로서 효과적이라는 단순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정당도 이러한 당파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단순한 도당과 정당 사이에서는 유사점보다도 상위점 쪽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당은 근대적 의회제도 아래서 정치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지만, 도당은 역사적으로 그 이전의 현상이며, 정치권력이 개인 내지 폐쇄적인 집단에 독점되었던 시대에 거기에 대항하는 집단으로서의 도당은 직접 폭력수단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암살이나 협박, 반란 같은 수단에 의존했는데, 권력측도 이에 대항해서 투옥, 사형 등의 위력수단으로 준열한 탄압을 가했다. 그 결과 반정부세력은 종종 비밀결사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당파의 목적·구성원·조직·활동은 일체 비밀에 붙여지고, 이 비밀의 유지를 위해서는 엄격한 규율이 준수되었다. 한편 정당은 근대적 의회정치와 더불어 발전해 온 조직이다. 근대적 의회정치는 # 유권자의 범위에 넓고 좁은 차이는 있어도 어떻든 일반국민이 선거에 의해 국민 가운데서 전체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을 선출하고, # 의회가 입법, 예산 및 정부감독의 권한을 가지며, # 의회의 의사가 공개된장소에서 토론과 설득의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되는 제도를 말한다. ‘전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의 개념은 고정적 이해의 대립을 초월한 공적인 국가의 성립을 전제로 하며, 이해관계나 의견의 대립을 무력이 아니라 토론과 다수결로 해결한다는 것은 다수와 소수를 초월한 전체라는 개념이 인정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근대적 의회정치가 시민사회를 기초로 하는 근대국가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의회 내부에서 동지로서 의원을 모아 다수파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 벌어지고, 의원의 원내조직으로서 정당이 생기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의회의 세력이 한층 더 강화되어 정부가 의회의 다수파를 기초로 해서 설립되게 되자 정당도 정권의 획득·유지를 위해 그 결속을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고, 또 유권자의 범위가 한층 더 확대됨에 따라 정당 자체가 선거활동의 영역에까지 그 활동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이렇게 정당의 활동은 의회정치의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당이라는 조직의 목적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해서는 특정의 주의 및 정책의 실현이라고 하는 설과 정권의 획득·유지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후자의 설이 타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버크(1729년-1797년)는 정당이란 그 성원 전원의 지지를 받는 특정원리에 입각해서 공동의 노력으로 국가적 이익을 추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단의 사람들의 결합체 라고 하는 유명한 정의를 내렸으나 실제로는 정책단체라고 볼 수 없는 정당이 적지 않다. 가령 미국의 양대 정당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의 여름에 각기 당대회를 열어 당의 강령을 발표하나, 양당 사이에 정책상의 차이는 별로 없고, 또 어느 당이건 선거강령과 집권 후의 정책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의회에서 의안이 채결될 때에는 같은 당 소속의 의원이 찬반 양진영으로 갈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정당을 정책을 중심으로 결집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오히려 정권의 획득과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단체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2개 이상의 정당이 다같이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해서 활동한다는 것은 이들 정당이 서로 대립관계에 서서 정권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선거에서부터 시작되어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영역에서 인사 및 정책에 관해 격렬히 전개된다. 그러나 정당이 투쟁조직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당 상호간의 관계가 전부 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할 때는 선거나 내각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몇 개의 정당이 잠정적·부분적인 협력관계를 맺는 예가 적지 않다. 또한 연립내각도 이러한 잠정적·부분적 협력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어디까지나 일시적·부분적이며, 결국은 투쟁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지속적·전면적인 협력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이미 정당의 병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투쟁조직으로서의 정당의 당면 과제는 투표자·지지자·당원 및 소속의원의 수를 늘리는 당세확장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당원의 질을 높이고 그 사기를 고무해서 당의 결속을 강화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무원칙·무방침의 팽창정책이 당내에 많은 이질분자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아, 분파의 대립을 격화시켜 통제를 마비케 하고 결국은 당의 투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말하면 정당은 대립정당이 완전히 약체·무력하게 되는 것을 바라기보다는 강력하기를 바란다. 강력한 경쟁대상이 있어야 당내의 결속이 공고해지는 것이며, 상대방이 무시해도 될 만큼 무력할 때는 당의 결속이 이완되어 내분이 생기는 예가 많다. 정당은 의회정치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엔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공적 조직이며, 정당이 없는 민주정치는 생각할 수도 없다. 미국의 대통령선거나 비례대표제의 의원선거는 정당의 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의회의 의사운영도 정당이 없다면 극도의 혼란을 빚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여당이 결정한 정책은 정부에 의해 실제로 시행될 수 있다. 이렇게 정당이 국가적 의의가 있는 중요한 공공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정당에 국가기관적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당은 국가와는 다른 의미에서 사회에 기초를 두는 정치세력이며 본질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의 결사와 동일하게 사적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서 정당은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결사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정치결사로 특정의 정치적 목적을 공통으로 갖는 사람들의 자발적 결집체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특정 정당의 활동자금을 보조하거나 세법상 특혜를 준다면 이는 민주국가의 헌법에 위배되는 처사가 된다. 정당은 집권을 목적으로 하는 투쟁단체이고 정책단체는 아니나, 정당과 정책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적 의회제도 자체가 편견이나 폭력이 아니라 토론과 이성에 호소하여 문제를 처리하는 제도이므로 이 제도하에서 활동하는 정당이 일정한 원리에 입각하여 주의, 주장, 정책을 놓고 투쟁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거는 본래 ‘인물’의 선택을 의미했으나, 정당이 선거 때에 정책을 발표하게 되면서부터 ‘정책’의 선택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유권자의 수가 격증하고 사회적으로 많은 계층적 이질요소가 형성되어 종전처럼 입후보자나 그 지지자인 명망가들의 지명도나 권위에만 의존해서는 표를 모으기가 곤란해진 데서 온 결과이며, 또한 정부의 시책에 의해서 적절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문제의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에 유권자가 정책을 주목하는 경향이 생긴 데서 오는 결과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는 1891년에 뉴캐슬에서 열렸던 전국자유당연맹대회에서, 미국에서는 1832년의 공화당전국대회에서 각각 최초의 당 강령이 발표되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선거는 종전처럼 후보자 개인의 인물의 선택과 그에 대한 백지위임이 아니라 당의 정책의 검토와 선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따라서 후보자 개인의 투쟁이 아니라 당과 당 사이의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 선거 후에도 의원은 종전처럼 유권자의 백지위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당의 공약으로 그 행동이 규제되며, 또 유권자의 감시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의원이 당원으로서 당의 강령에 구속되는 것은 당연한데, 의회 안에서의 당원의 행동통일을 기하기 위해 당의 규율도 점차 엄격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종래와 같이 유권자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양심과 판단에 기해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의원은 없어지고, 의사당은 극언해서 거수기에 불과한 의원들을 조종하는 정당의 투쟁장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이 선거에 임해서 내세우는 정책은 될수록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유권자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대자본가, 중소기업자, 농민노동자, 연금생활자, 실업자, 인텔리층 기타 사회적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여러 계층의 정치적 요구를 광범하게 당의 강령 속에 반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당이 표방하는 정책은 내용이 포괄적이고 막연한 것이 되기 쉽고, 특히 중요한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명확한 주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정당은 광범한 사회적 이익을 고려함으로써 많은 사회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지만 그 정당에게 ‘이끌리는 사회적 이익’과 그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과는 다르다. 가령 영국의 보수당이 조직이 없는 극빈층의 표를 상당히 획득하고 있다고 해서 보수당이 극빈층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의원이나 당운영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는 간부의 출신계층이나 당자금의 공급원을 살펴보면 보수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은 영국의 전통적인 지배계급, 즉 재계와 자본가계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당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정책’은 그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의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각국의 정치사가 예증하고 있다. 보통 ‘수행하는 정책’과 ‘표방하는 정책’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사정의 변경 기타의 변명으로 일시적으로 미봉하게 되는 정도에 이르면, 공약 불이행의 비판을 초래할 것이고 유권자의 신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정당은 사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활동은 의회정치에서 불가결한 공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선거는 의원, 대통령 및 기타 공직자의 지명절차이며, 각 정당은 입후보자를 내세우고 강령을 발표하며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선거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정당이 정치지도자 선출의 파이프로서 당에서 양성하고 선정한 자를 국민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정당이 중요한 정치문제를 쟁점으로서 국민에게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당의 정책을 밝혀 국민의 선택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유권자는 본래가 아무런 조직도 없는 개개인의 단순한 집합체에 불과하여, 공통의 이해나 명확한 정치적 의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주권자라고는 해도 실은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유권자 자신들이 정치지도자를 내세우거나 정치적 요구의 통일을 기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입후보자와 정당이 선택의 자료를 유권자에게 제공하고 유권자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지지 정당을 선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권자는 정당의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효과적으로 그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당이 유권자의 개별적 의사와 이해를 통합, 집약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정당에 의해 비로소 정치적 발언이 유효하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그 발언이 매우 한계가 좁았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유권자에게 제시된 것은 한정된 정당의 후보자와 정책에 불과하며, 정치참가를 단념하지 않는 한 유권자는 제시된 선택의 자료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권자 앞에 제시되는 정책이 전부 내용이 막연하여 구별의 기준이 생기지 않을 때는 유권자의 선택이 무의미해져 버린다. 선거란 정당이 유권자를 위로부터 조종하여 민의를 유도하고, 체제를 택하는 소란스러운 형식적 절차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당이 정치적 쟁점을 명시하여 정치문제에 있어서의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의 형성을 지도함으로써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높이는 정치교육을 행하는 것과, 혹은 선거 이외의 기회에 야당이 여론형성을 지도하여 이 여론을 배경으로 해서 정부를 비판하고, 여당이 정부의 정책을 수정시키는 것 등 국정과 여론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는 것이 정당의 부차적 기능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선거 결과 양당제의 국가에서는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집권하고, 다수정당제의 경우에는 정당 사이의 절충으로 성립된 연립내각이 정권을 담당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과반수의 선거위원을 차지한 정당의 입후보자가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담당한다. 이렇게 정권을 담당하는 당이 여당이고, 그 밖의 정당이 야당이다. 다수정당제의 국가에는 준여당과 준야당도 있을 수 있으나, 정당은 본래가 투쟁단체인만큼 엄밀한 의미에서의 중립은 있을 수 없고, 각 정당은 정권지지와 반대의 양진영으로 갈라진다. 정당의 국정기능은 주로 정권을 둘러싸고 이 양진영이 하는 역할을 중심으로 한다. 먼저 여당은 당내에서 선정한 정치지도자를 정부에 보낸다. 정부의 수반은 여당 당수인데 그 밑에 여당간부가 각료로 취임한다. 적재적소라는 말은 구호에 그치고 있으며, 당내 분파의 영수들에게 약간의 포스트를 배정하는 일이 많으며 분파의 밸런스를 중요시하고 있으나, 이 관직분배로 오히려 분파의 불만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내각개편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예가 종종 있다. 다음에 여당은 다수의 유권자의 지지를 얻는 원인이 된 표방하는 정책 을 의회와 정부를 통해서 실천할 책임이 있다. 다수정당제하의 연립내각은 정권에 참여한 각 정당 사이에서 성립된 정책협정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선거 때에 각 정당이 내세운 정책이 그대로 실시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양당제의 경우에도 표방하는 정책 과 수행하는 정책 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공약의 해석 을 대체로 왜곡되게 하고 정세의 변화 라는 둔사(遁辭)에 의해 사문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의 이끌리는 사회적 이익 과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 이 다르다는 점에 근본적 원인이 있으며, 표방하는 정책 이 득표의 편의라는 견지에서 정해진다는 사실에 근본원인이 있다. 여당은 의회에서는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 주된 임무이며, 마치 변호사의 형사재판(刑事裁判)에서의 역할이 피고인의 변호인 것과 동일하다. 의원내각제의 경우에는 정부를 조직하는 정당이 동시에 의회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정부와 의회는 여당을 통해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부와 의회의 쌍방을 통제하는 강력한 힘이 여당에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미국과 같은 권력분립제의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속하는 여당이 반드시 의회의 다수파가 아니므로 정당을 통해서 정부와 의회가 연결되지 않는다면 국정은 마비될지도 모른다. 최후로 정부는 여당을 기초로 하지만 여당 그 자체는 아니며, 정부와 여당 사이에는 그 입장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가령 여당이 그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의 여러 가지 정치적 요구를 당의 입장에서 정부에 제시하는 경우에도 정부는 여당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의회 전체에 대해, 그리고 의회를 통해 전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당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야당의 임무는 주로 정부와 여당을 비판·공격하는 데에 있다. 19세기에 있어서는 의회에서의 토론이 다수세력 형성의 원동력의 하나가 될 수 있었으나, 현재는 의사당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정당이며, 웅변에 감동을 받아 개개의 의원이 그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의회에서의 토론은 매스컴을 통해서 유권자에게 호소하여 정부와 여당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을 그 주된 목적으로 한다. 야당의 주된 투쟁장소는 의회이지만 유세활동 및 선거구에서의 일상활동을 통해서 직접 유권자와 접촉하여 호소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다. 야당은 이렇게 정부와 여당을 비판 공격하는 한편으로 정권인수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행정책임을 맡을 능력이 있는 인재의 양성과 즉각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 정책의 연구와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야당은 공직을 지배할 수 없고 또 운영자금도 부족한 형편이지만 야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야당으로서는 최대의 이점으로 모든 실정의 책임을 여당에게 물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또 일체의 반정부세력이 야당 주변에 집결하게 되면 그만큼 정부타도의 전망은 밝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당·야당을 통해서 정당은 의회운영에 불가결한 기능을 맡고 있다. 의회의 운영에 관해서는 헌법·의회법·의원 규칙 및 의사선례 등이 있으나, 그 해석이 반드시 획일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개개의 구체적인 사항은 정당 간의 협의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수백 명의 의원을 거느리고, 방대한 업무를 처리해야 할 의회에 만약 정당이 없다면 의회의 질서 있고 효과적인 운영은 도저히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하나는 정당을 다양한 사회적 이익의 정치적 요구를 조직화시켜 이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민주정치의 도구로서 보는 설이며, 또 하나는 소수 지배층이 선거를 통해서 유권자를 조종하여 민의를 조작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지배층의 득표조직에 불과하다고 보는 설이다. 전자의 설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이익이 복잡한 상호관계를 가지면서 잡다한 정치적 요구를 내세우는데, 이러한 요구는 그 자체로서는 사회 전체 중 소수자의 의사를 반영하며, 직접 정치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잡다한 요구를 집약해서 정치적 표현으로 발전시키는 작용이 정당의 존재로 인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정당은 그 입후보자와 정책을 통해서 사회적 모든 이해의 소리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임무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를 대표해서 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제1의 학설이다. 여기에 대해 제2의 학설에 의하면 다양한 사회적 이해는 저마다의 정치적 요구를 갖고 있으나 입후보자와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이해가 아니라 정당이며, 사회적 이해는 정당이 결정한 것을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사회적 이익과 정당의 관계를 보더라도 정당의 우위가 확실하다. 물론 정당으로서도 다수의 지지를 얻어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각종 사회적 이해와 연결을 가지고, 그들의 요구를 입후보자나 정책에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적 이해의 측에서도 정치적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정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이해는 무수히 있는 데 반해 정당은 고작 몇몇 개가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으므로 그 관계는 정당을 정치적 지지의 결정적 매수시장으로 했으며 정당의 우위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정당이란 일반 유권자가 자유로이 참가하여 당원대중의 민주적 의사로써 운영하는 조직이 아니라, 소수의 직업정치가의 집단이 당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입후보자와 정책을 결정하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정당을 현실적 입장에서 보는 한 유권자를 위로부터 조종해서 민의의 향방을 결정짓는 득표공작 기구라는 설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영국이나 미국 같은 양당제를 전제로 하며, 스칸디나비아 3국과 같은 다수정당제하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각 정당과 사회적 이익이 명확한 형태로 결부되어 있으므로 정당의 사회대표적 성격은 부인할 수 없다. 막스 베버는 정당조직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여 명망가 정당과 근대적 정당의 두 가지 형으로 정당을 구분했다. 명망가 정당은 근대적 의회정치의 초기단계, 즉 제한선거 시대의 정당형으로 의회내에서의 막연한 인적 결합을 의미했으며, 당규율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이합집산이 빈번한 유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한 당비 제도나 정기적 집회가 따르는 지속적인 조직으로서의 지방선거구 조직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선거시에만 지방 명망가의 정치집회가 임시적으로 열렸는데, 그 의장도 유력자가 임시로 맡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집회에서 입후보자가 선정되고 정책이 토의되었다. 그러나 정책은 입후보자나 의회의 정당에 일임되는 예도 많았다. 요컨대 지방선거구에서는 명망가가, 중앙에서는 개개의 의원이 정치의 주역이었다. 한편 근대적 정당은 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근대적 정당제도하에서 당비납부제와 정기적 집회 및 각 단계 당기관의 상호관계를 수반하는 지방선거구 및 전국의 당조직이 확립되고, 후보자 및 정강의 결정에 병행하여 당조직이 선거비용의 조달과 지출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선을 희망하는 의원은 당조직의 지도를 받는 한편 원내의 행동에 관해서는 원내총무의 지시를 받게 되어 의원의 독립성은 점차 상실되어 갔다. 그러나 당운영의 실권을 누가 장악하는가는 나라에 따라 다르며, 미국에서는 원외의 직업적 보스, 독일에서는 원내정당의 간부가 잡고 있다. 이러한 근대적 정당이 성립된 것은 미국에서는 1840년경, 영국에서는 1867년 이후였다. 뒤베르제는 정당을 간부정당과 대중정당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보수정당이나 우익정당을 전자로, 사회주의당이나 노동당을 후자로 생각하고 있다. 간부정당은 선거를 그 목표의 중심에 두고 다수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일에 집중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에서는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수의 명사(名士)가 중심적인 존재가 된다. 명망이나 권세가 있어 표를 모으는 데 유리한 영향력이 있는 명사라든가, 유권자의 취급과 선거운동에 유능한 전문가나, 선거비용을 댈 수 있는 재계의 유력자 등이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같이 간부정당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당소속의 인원수보다 당소속 인원이 선거전에서 얼마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반유권자를 권유해서 당원으로 만들 필요는 그리 없다. 또 조직면에서 볼 때 간부정당은 각 선거구의 당조직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인정하는데, 전국조직은 이러한 지방조직의 이완된 연합체로, 말하자면 지방분권적인 구조이며 중앙집권적이며 긴밀한 결속을 특색으로 하는 지부조직의 정당과는 다르다. 대중정당은 본질적으로는 선거를 위한 조직이 아니고 특정의 사회적 이익을 위한 정치운동이므로, 이 운동에 참가하는 당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조직은 강대해진다. 그 위에 당은 당원에 대해서 정치교육을 실시하며 정치지도자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당의 활동자금을 소수의 자본가의 기부에 의하지 않고 당비로 충당하므로 이 모든 의미에서 당원수가 많을 필요가 있다. 조직면에서는 대중정당은 긴밀하게 결속된 지부조직의 정당이며 중앙집권적인 전국조직이 그 구조적 특색이다. 간부정당과 대중정당의 구별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반대중에게 선거권이 없고 따라서 정치적 영향력이 전혀 없던 시대에는 대중을 당원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이었다. 우선 당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한선거가 보통선거로 발전함으로써 생긴 개념이었다. 그러나 보통선거가 실현되면서 곧 대중정당이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간부정당은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대중을 득표조직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당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자세를 취하기는 했으나 대중의 정치참여는 한정된 범위내에서 인정한 데 불과했고, 당운영의 실권은 여전히 소수간부의 손에 머물러 있다. 대중정당의 출현은 사회당이나 노동당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민정당과 계급정당의 구분기준은 주로 정치투쟁의 무기로서 이용되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이며 학술적인 것은 아니다. 즉 보수정당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성립된다. 정당은 공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전 국민적·전 국가적인 이익의 추진을 목적으로 광범한 일반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국민정당의 본분이며, 특정의 계급적 입장에서 계급적 이익의 증진을 도모하고, 주로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정당, 즉 계급적 정당은 특정계급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에 우선시키므로 의회민주주의 이념에 배치된다. 한편 노동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주장은 이러하다. "사회에는 현실에 있어 서로 대립하는 계급이 존재하는데,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국가의 사회적·경제적 간섭이 적극화된 시대에는 계급적 이익을 초월한 전 국민적 내지는 전 국가적인 이익이란 것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국민정당을 주장하는 보수정당의 논리가 이해관계의 계급적 대립을 부정하는 것 그 자체가 지배계급의 이익과 일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정당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결코 그들의 말하는 바와 같이 계급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배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배계급에 속하는 유권자는 극히 소수이지만 피지배계급의 유권자는 압도적 다수를 이룬다. 따라서 전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은 전자의 계급적 이익을 강조하고, 전자의 지지만으로는 정권의 장악이 불가능해지므로 공익관념이나 세계관이나 종교 등 초(超)계급적인 호소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후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은 후자의 계급적 자각을 높여, 그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계급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보수정당은 보수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며 혁신정당은 혁신주의에 입각한 정당이다. 문제는 보수주의와 혁신주의를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가에 있다. 이 구별을 매콜리(1800년-1859년)는 인간의 기질의 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보수와 혁신을 초역사적인 인간본래의 기질에 둔다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존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질서에 대한 어떤 기본자세의 문제로서 포착되어야 할 것이다. 즉 현존의 질서를 방위 내지 옹호하려는 입장이 보수주의이며, 진보의 관념에 입각해서 현존질서에 비판적 내지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혁신주의이다. 그러므로 현존 질서하에서 지배적 계층에 있는 사람은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은 혁신주의를 지지하기 쉬운 것이다. 보수와 혁신의 의미를 현존질서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할 때는 그 중간적 입장은 이론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소위 중간정당은 실은 보수정당의 온건파와 혁신정당의 온건파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현존 질서의 기초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질 때 중간정당이 항상 분열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원내정당 (院內政黨)은 국회에 소속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다. 정치력이 막강한 정당들이며 국회의원의 수가 많을수록 정치력이 강하다. 따라서 원내정당이 국회의원을 보유한 상태에서 차기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면 또 다시 원내정당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내정당은 국회의원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여당이 있어서 정권을 잡고 있는 정당이 있다. 원외정당 (院外政黨)은 국회에 소속된 국회의원을 보유하지 못한 정당이다. 정치력이 미약한 정당들이며, 국회의원을 보유하지 못하여 원내에서의 발언권이 없어서 정당보다 시민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원외정당들은 원내진출을 하기 위해 국회의원 총선거에 주로 비례대표로 출마하는 일이 많으나, 정치력이 미약하고, 출마하는 후보 및 선거구의 수가 적어 원내진출하는 일이 흔치 않다. 정당이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대립정당과의 효과적인 투쟁을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영속적인 결사(結社)로서 그 조직을 확립하고, 그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구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각 기관을 설립하여 거기에 임무와 권한을 배분하고, 이들이 서로 결합되어 전체로의 통일을 유지하며, 목적의 달성을 위해 합리적으로 또 능률적으로 상호협력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 의결기관과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의 유기적 결합을 실현시킨다는 것. # 당원 대중의 민주적 발언권을 확보하며 당원의 모럴과 에너지를 고양시켜 당운영에 참여케 하는 동시에, 당원 중의 적극분자를 지도부의 후계자로서 양성한다는 것. 명망가 정당의 단계에서는 거의 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지도적 정치가 개개인의 주변에 막연하고 유동적인 집단이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오늘날과 같이 치밀하고도 방대한 정당조직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보통선거제가 실현되어 많은 새로운 유권자가 등장하고 사회주의정당 기타의 대중정당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뒤베르제는 유권자를 정당과의 관계에서 투표자·지지자·당원·활동가의 4종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성격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투표자는 선거에 있어서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자를 말하나, 반드시 그 정당의 당원은 아니다. 지지자·당원·활동가는 반드시 안정된 투표자이며, 유권자의 당에의 관계의 강도는 투표자에서 활동가의 순서로 강하다. 투표자수에 대한 당원수의 비율을 당원율이라고 말하는데, 간부정당은 당원율이 대중정당에 비해 훨씬 낮다. 그리고 투표자와 당원 사이에는 당내의 위기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응이나 그 수의 증감의 속도 등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양자가 상대적으로 독립한 두 개의 요소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원이 투표자 중의 자각분자라 해서 당원을 투표자를 대표하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라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원과 기타 선거에 의한 공직은 투표자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지만, 당원으로서 당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즉 극단적으로 말해서 의원은 투표자의 의사를 따를 것인가, 당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결정해야 할 입장에 놓일 수도 있다. 투표자와 당원의 정치의식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에 차질이 생기게 되므로, 정당은 그 일상적 활동 기타를 통해서 유권자나 투표자에 대한 교육 선전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다음에 지지자라는 것은 선거시에 당의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의 기관지를 구독하고 당이 주최하는 집회에 출석하고, 혹은 당의 기금을 기부하는 등 당에의 관여도가 투표자보다 높은 자를 말한다. 지지자가 선거에서 당의 후보자에 대한 안정된 투표자인 것은 물론이다. 간부 정당에는 진정한 의미의 당원은 처음부터 존재치 않으며, 일반적으로 간부정당의 당원 이라 함은 실은 이 지지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대중정당의 경우는 지지자와 당원이 명확히 구별된다. 즉 당원은 당의 정규구성원으로 그 신분이 당원명부에 등록되어 당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당비납부·집회출석·선거운동·일상활동 등)를 가지나, 지지자에게는 이러한 요건이 없다. 활동가는 당원 중의 적극분자로 모든 단계의 당조직에서 활동의 중심이 되는 소수자이다. 따라서 일반당원보다 당과의 유대가 훨씬 긴밀하다. 당비를 규칙적으로 납부함은 물론 당집회에 규칙적으로 출석하여 적극 발언하고, 선거에서는 무보수로 선거운동의 선두에 나서는 등 실제 당활동의 기획과 수행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들은 당의 의사결정을 지도하는 자라기보다는 당무의 충실한 집행자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간부정당에는 원래 당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조직 내부에서 일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말하는 소수의 활동가이다. 대중정당에 있어서 비로소 당원의 일부로서의 활동가의 관념이 성립되는 것이지만, 당원 중에서 활동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보통 20% 이하이며, 만약 이것이 30%를 넘는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은 특히 활기에 넘치는 정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활동가의 존재는 당의 운영에 있어 빠질 수 없으며, 그들 없이는 당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활동가라는 핵심집단이 형성되면 일반당원이 모든 적극적인 당활동을 일체 활동가의 수중에 일임해 버리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므로, 일반당원이 점점 더 수동적이 되어 당활동에서 멀어질 위험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적이어야 할 당운영이 소수의 활동가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체제로 전환되게 된다. 그 하나는 당원조직에 대해서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둘째로 원내정당과 당원조직의 관계, 셋째로 당내 민주주의의와 과두 지배체제의 문제가 있다. 모든 조직은 각기 권한과 책임을 달리하는 여러 기관이 상하의 계층질서를 형성하고 횡적으로 상호연결된 기구인데, 그 구성기관 중에는 하부의 의사를 집약하고 상부의 명령을 자체의 책임으로 이행하는 중추적 존재가 있다. 이것이 당원조직에 있어서는 이러한 지위를 가진 것이 선거구의 당조직인데, 그 하부의 조직은 선거구조직에 의해 통괄되며, 전국조직과의 관계로는 의원 후보자의 선정과 같은 업무처리에 있어서 어떤 범위까지의 자율권이 선거구조직에 인정된다. 이렇게 선거구조직이 정당의 기본적 단위로서 그 중추적 역할을 인정받는 것은 정당이 선거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 따라서 전국조직에 권한을 집중시키는가(중앙집권), 혹은 선거구조직에 상당한 범위의 자율권을 인정하는가(지방분권) 하는 문제는 그 정당이 선거에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과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별개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 문제는 정당성립의 역사적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간부정당은 원래 독립된 각 지방의 선거위원회의 이완된 연락조직으로서 성립된 것이어서, 말하자면 지방분권적 성격을 체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중정당은 중앙에서의 정치운동으로 출발해서, 의회에 그 대표를 파견할 필요 때문에 지방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중앙집권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전국 조직이건 선거구 조직이건 요컨대 당원의 당조직인데, 당이 선출하는 의원들은 의회 안에서 협동하여 행동할 필요가 있으므로 특별한 원내조직, 즉 원내정당을 만들게 된다. 즉 의원은 당원조직의 일원인 동시에 원내정당의 일원이기도 하므로 이 양자의 관계, 특히 후자의 당원조직으로부터의 독립성이 문제가 된다. 당 성립의 역사적 배경으로 볼 것 같으면 간부정당의 경우에는 먼저 형성된 것이 원내정당으로, 그 구성원의 재선을 확보하고, 다시 새로운 다수의 의원들을 선출하여 원내정당의 세력을 확대시킬 목적으로 당원조직이 만들어졌으므로 당원조직은 원래 원내정당 때문에 있으며, 봉사하는 수단이며, 당원조직이 원내정당을 구속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는 견해가 나오게 된다. 영국의 자유당을 예로 든다면 1876년에 전국자유당연합이 조직되어, 한편으로 선거구조직을 민주적인 것으로 재편성하는 동시에, 또 한편 이와 같은 선거구조직으로 형성된 전국연합에 의하여 당출신 의원의 원내행동을 지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이 기도는 실패로 끝나고 원내정당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대중정당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노동당이나 사회주의정당의 경우 먼저 형성된 것은 노동조합이나 사회주의운동과 같은 원외의 대중조직·대중운동이며, 당원조직은 원내활동의 필요 때문에 그 후에 형성되어 선거운동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의원들이 원내에서 조직한 원내정당은 당원조직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네의 정치적 요구나 정책을 의회를 통해서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당원조직이 원내정당에 요구와 지시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대중정당이 원내정당의 당원조직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것이 근대적 의회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존재로서 정권교체 체제 안에 묶여 버렸을 때에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원내정당의 독립성을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당내민주주의는 당원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당의 운영에 참여하여 그 의사에 따라 정당이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당의 의사결정의 최고기관인 당대회에 일반당원이 대의원을 통해서 참가하며, 당대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당의 임원은 일정한 임기 중 그 직무를 수행하고, 당대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조직형태이다. 그러나 문제는 형식적인 조직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당원의 의사로 당운영의 내용이 좌우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 간부정당은 권위주의적·전통적 성격이 농후하여 당수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 당간부의 독재적 지배가 일반적인 사실이 되고 있다. 당수·당간부·원내정당·당원조직의 순서로 일관된 권위주의적 지도체제가 확립되어 있어 일반당원으로부터 상향하는 통제기능의 선은 매우 약하다. 이에 반해 대중정당은 당내민주주의의 원리를 당체제로서 내세우고 있으므로, 당원대중의 의사가 당지도부에 미치는 영향은 조직면에서 상당히 강하다. 즉 원리적으로는 당대회·집행부·원내정당·당수의 순서로 당원대중의 상향적 의사에 의해 민주적인 당운영이 보장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당내민주주의는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사실이란 정당이 투쟁단체적 성격 때문에 신속한 의사결정의 능력과 군대적 규율을 가진 계층적·통일적 조직이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과 방대한 수의 당원과 막대한 당재정과 정치의 복잡화 및 전문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당사무국 관료의 발언권이 증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당관료를 구사하는 실력을 가진 소수 간부의 수중에 당의 실권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반당원은 무력함과 무관심 속에 빠지는데, 이것이 또 소수자의 독재를 필요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이 악순환이 로베르트 미헬스(1876년-1936년)가 과두지배의 철칙 이라고 부른 병리현상이다. 정당은 본래 근대적 의회정치하에서 등장하고 발전한 것이지만, 의회정치의 원리와 정당제도간에는 조화되지 않는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의회정치의 입각점이 되는 국민대표권의 개념은 의원의 독립성을 요구하지만, 정당조직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의원을 당 의사의 구속하에 둔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국가가 정당을 오히려 적대시했다. 그러나 정당이 의회정치의 현실의 운영에 불가결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선거법이나 의회법으로 이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또 나아가서는 국민의 정치적 통합이라는 정당의 중요 기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동시에 정당운영에 따르는 각종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당관계의 입법 노력도 추진되고 있다. 정당을 대상으로 하는 입법은 예전에는 원내위원회의 구성, 선거운동,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확보, 정치자금의 공개 등 개개의 사항에 관해 필요한 범위내에서 규제하는 내용에 그쳤으나, 근래에는 서독·이탈리아 및 한국처럼 헌법 중 정당에 관한 원칙규정을 두고, 또 정당에 관한 독립입법을 하는 경우(아르헨티나·서독·한국 등)도 생기게 되었다. 독립적인 정당입법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정당이 국민의 정치적 통합에 대해 현실적으로 맡고 있는 중요한 역할에 비추어 보아 이것을 공인함과 동시에, 그 공적 역할에 알맞은 민주적이며 공정한 당운영을 보장하고, # 포말정당의 난립이나 군소정당의 군립을 방지하며(결과적으로 기성정당 옹호의 의미도 있다), # 반체제정당을 탄압하려는 데에 있다. 반체제 정당의 목적은 파시즘 정당이 헌법상의 자유를 십분 이용하여 헌법체제 자체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쓰라린 경험에서 온 것이나, 서독에서는 1956년에 공산당이 반체제정당의 낙인을 찍혀 해산되었다. 정당을 대상으로 하는 독일의 법적 규제를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독일연방공화국헌법 21조는 # 국민의 정치적 의사의 형성에 협력 하는 의의와 기능이 있는 존재로서 정당을 공인하고, 기타 일반 결사의 자유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를 주고, # 정당설립의 자유를 인정하고, 정치적 권력의 개입을 용납치 않는 자유로운 사회적 결사로서의 정당의 본질을 보장하면서, # 정당의 공적 성격으로 보아 그 내부조직과 자금의 운영은 법적 규제를 받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즉 내부질서는 민주적 원칙에 부합 되는 것이어야 한다 해서 소수간부의 독재를 배제하고, 자금출처를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 고 해서 자금면에서의 정당의 부패를 막고, 그 공명성을 보장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 위헌정당의 배제를 위해 그 목적 또는 소속 당원의 행위 가 자유로운 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 또는 제거하고, 또한 독일연방공화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것을 목표로 하는 정당을 위헌적이라고 보는데, 그 인정은 연방헌법재판소에서 내린다. # 이상의 헌법상 규정의 보다 구체적인 사항의 규제는 연방법에 위임하고 있다. 이러한 위임법률의 하나로서 1967년에 정당법이 제정·시행되었다. 정당은 그 소유재산의 귀속관계에 있어서는 법인격 없는 사단으로 파악된다. 정당은 정치단체로서 고도의 자율권 내지 내부자치권이 보장되어야 하므로 공직선거 후보자 추천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정당내부절차로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당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선거제도의 민주화와 국민주권을 실질적으로 현실화하고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구현에 기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정치의 독점이나 무소속후보자의 진출을 봉쇄하는 정당의 특권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공직선거의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의 자발적 조직으로(정당법 제2조), 그 법적 성격은 일반적으로 사적, 정치적 결사 내지는 법인격 없는 사단으로 파악되고 있고, 이러한 정당의 법률관계에 대하여는 정당법의 관계 조문 이외에 일반 사법규정이 적용되므로, 정당은 공권력 행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헌법 제8조 제1항은 국민 누구나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정당을 설립할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바, 입법자는 정당설립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입법하여야 하고, 헌법재판소가 정당설립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의 합헌성을 심사할 때에는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엄격한 비례심사를 하여야 한다 정당이 비례대표국회의원의 후보자명부를 확정하는데 있어 투표에 의한 당내경선의 방법을 채택한 경우에는 선거권을 가진 당원들의 직접, 평등, 비밀투표 등 일반적인 선거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국회의원선거에 참여하여 의석을 얻지 못하고 유효투표총수의 100분의 2 이상을 득표하지 못한 정당에 대해 그 등록을 취소하도록 한 구 정당법 조항은 군소정당 난립으로 인한 정치질서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서 정당설립의 자유를 침해한다 정당해산심판절차에 민사소송에 관한 법령을 준용할 수 있도록 한 헌법재판소법 제40조 제1항 전문은 정당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 및 정당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 헌법 제8조 제1항 전단은 단지 정당설립의 자유만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정당의 설립만이 보장될 뿐 설립된 정당이 언제든지 해산될 수 있거나 정당의 활동이 임의로 제한될 수 있다면 정당설립의 자유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므로, 정당설립의 자유는 당연히 정당존속의 자유와 정당활동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한편, 정당의 명칭은 그 정당의 정책과 정치적 신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지에 해당하므로, 정당설립의 자유는 자신들이 원하는 명칭을 사용하여 정당을 설립하거나 정당활동을 할 자유도 포함한다. 대한민국의 정당 베트남의 정당 미국의 정당 일본의 정당 독일의 정당 태국의 정당 프랑스의 정당 이탈리아의 정당 중국의 정당 뉴질랜드의 정당 호주의 정당 몰타의 정당 몽골의 정당 대만의 정당 영국의 정당 러시아의 정당 캐나다의 정당 스웨덴의 정당 스페인의 정당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당 브라질의 정당 인도의 정당 태국의 정당 우루과이의 정당 페루의 정당 터키의 정당 몰타의 정당 미얀마의 정당 아이슬란드의 정당 인도네시아의 정당 흔히 쓰이는 정당 이름 옛 정당 목록 |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민주노동당 (民主勞動黨)은 2000년 1월 30일 창당하여 2011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진보주의 정당이다. 국민승리21이 이 당의 전신이며, 2004년 17대 총선거에서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1%)을 획득하여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진출을 달성하였다. 2008년 당의 한 축이었던 평등파 당원들이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결성하면서 분당되었고, 2011년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과 합당을 선언하여 통합진보당이 출범되면서 소멸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전신은 1997년 10월에 결성한 국민승리21이다. 국민승리21의 주요 세력은 진보정당 추진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민중정치연합 (대표:노회찬)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던 민주노총, 민족 민주운동을 대표하는 전국연합이었는데, 1997년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전국연합은 이탈하고, 남은 두 세력을 중심으로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대표:권영길, 부대표:노회찬) 1997년 - 2000년 민주노동당의 전신 국민승리21으로 활동 1997년 대통령 선거에 권영길 후보가 출마하여 1.19% 득표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 권영길 후보를 대표로 선출 2000년 16대 총선 출마, 출마지역 평균 13.1% 득표 2002년 3월 권영길 대표, 노회찬 사무총장을 선출 2002년 지방선거에서 기초단체장 2, 광역의원 11명 (비례 9명 포함) 당선, 정당득표에서 8.13% 득표 2002년 대통령선거에 권영길 후보가 출마하여 3.98% 득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면서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하였다. 지역구 당선자(2명)는 권영길(경남 창원을) 의원과 조승수(울산 북구) 의원이었고, 특히 정당 투표에서 13.03% 득표하여 8명의 비례대표를 당선시켜 44년 만의 진보 정당 원내 진출 이라고 묘사되는 큰 성과를 얻었다. 국회의원 총선거 직후에 시행된 제2기 지도부 선거에서 김혜경 후보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7대 총선거 당시 울산 북구의 음식물 자원화 시설 관련 간담회에서 있었던 조승수 의원(당시 국회의원 후보)의 발언이 빌미가 되어 2005년 9월에 조승수 의원이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10월 26일에 시행된 재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정갑득 후보가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게 패함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전체 의석 수는 총 9석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민주노동당 측은 조승수 의원이 뇌물수수 등의 범죄사실이 없으며, 조승수 의원의 의원직 박탈은 정부의 민주노동당 탄압의 일환이라고 비판하였다. 2005년 8월 24일 김혜경 대표가 방북 기간 중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참배한 자리에서 방명록에 "당신들의 ‘애국의 마음’을 길이길이 새기겠다"는 내용의 서명을 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2005년 2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계덕이 대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공당사상 18세 정당인 이력을 가지기도 했다. 2005년 10월 울산 북구 국회의원 재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혜경 대표를 비롯한 전 지도부가 총사퇴하였고 그동안 민주노동당은 비상대책위원회(임시대표 권영길) 체제로 운영 되었다. 2006년 1월 20일부터 24일까지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는 당직선거가 치루어졌고, 대표 후보로 주대환, 문성현, 조승수 세 후보가 도전하였다. 이후 문성현 후보와 조승수 후보와의 2차 투표 끝에 2006년 2월 10일 자주파의 지지에 힘입어 문성현 후보가 새 대표로 당선되었다. 2006년 제4회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 15명 (비례 10명 포함), 기초의원 66명이 당선되었으며, 정당득표에서 12.1% 득표하였다. 심상정, 권영길, 노회찬 대선 후보 경선 2007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의원이 심상정, 노회찬 두 후보를 누르고, 민주노동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0%의 득표율(712,121 표)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4년 제17대 총선의 13.03%의 득표율은 물론, 2002년 대통령 선거의 3.9%보다 낮아진 것이다. 각 시도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은 곳은 울산광역시(8.4%)이다. 민주노동당은 여러가지 문제로 진보신당과 분당하게 된다. 첫 번째 문제는 2007년 대선의 저조한 득표결과로 인한 지도부 책임론이다. 대선 이후 자주파의 지지를 받던 문성현 대표가 퇴진하고, 평등파에 속하는 심상정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심상정 위원장은 혁신안을 통해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진보정당으로서의 혁신을 위하여 노력했는데, 이것은 여러가지 당내 논쟁을 촉발시켰다. 혁신안의 핵심 내용은 당시 일심회 사건에 연루되어 당내 정보를 북한에 넘겨왔던 두 명의 당원을 제명하고 자주파 간부들을 당내 2선으로 물러나게 하며, 제3세력 중 일부에서 주장하였던 정파등록제를 도입하여 당내 여러 계파들을 공식적으로 등록하는 것 등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왔던 당직선거에 대한 문제였다. 그동안 당직선거는 인터넷 투표를 악용한 대리투표(예를 들어 당직자가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당원들에게 자신의 정파 후보를 투표하게 하는 방식)와 오프라인 투표에서의 "몰표"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는데 대선 이후 부산의 한 지역위원회 위원장 투표에서 평등파 후보가 단일 후보로 나오자 다수파인 자주파에서 일부러 낙선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부산에서 상당한 탈당이 이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북핵 사건으로 인한 종북주의 문제다. 2005년 북한의 핵보유 선언에 이은 2006년 북한 핵실험에 대한 입장 차이(평등파는 북한 핵실험을 규탄할것을 주장했고, 자주파는 북핵은 미국에 맞서기 위한 자위적인 측면이 있으므로 일방적으로 규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로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에서 상당한 감정싸움이 진행되었고 심지어는 조승수 전 의원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신당 창당의 목적을 자주파의 종북주의 문제로 규정할 정도로 상당한 논란이 지속되었다. 결국 이러한 파행들로 인하여 당내 혁신에 한계를 절감한 당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의 모색이 본격화 되었고, 2008년 1월 11일 부산 해운대 평당원 52명의 탈당을 시작으로 분당과정을 겪게 된다. 탈당을 선언한 당원들과 평등파 일부가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을 선언하며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 을 발족했고 이들은 2월 3일에 있었던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일명 분당대회) 이후에 진보신당을 창당하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심상정 위원장은 혁신안이 부결될 경우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반면 자주파 대의원들은 민주노동당이 국가보안법 피의자들을 이중처벌 한다는 점 등을 들어 혁신안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자주파와 평등파에 속하지 않는 제3세력들 중에는 자주파의 패권주의적 당 운영을 비판하는 동시에 평등파가 사실상 자주파를 대체하여 당내 권력을 쥐려 한다는 점과 함께 정파등록제를 통해 자신과 노선이 다른 계파들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점을 비판하는 세력도 있었다. 결국 2008년 2월 8일, 센트럴시티 9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에서 자주파 대의원들의 반대로 혁신안의 핵심 내용은 부결되었으며 자주파의 수정안대로 통과되었다. 혁신안이 부결되자 심상정 위원장 등 비대위원 전원이 사퇴하였고, 민주노동당 제1기와 제2기 지도부를 구성하였던 인물들 가운데 김혜경, 주대환, 김종철, 심재옥, 홍승하, 김기수 등이 탈당하였으며,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단병호도 탈당하였다. 임시당대회 이후 2008년 4월까지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사람은 16,904명에 이르렀고, 2008년 1월 당시 11만여 명에 이르던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는 9만 4천여 명으로 줄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사람들 중 일부는 2008년 2월 21일 진보신당연대회의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2008년 3월 진보신당 창당이 공식 선언되었고, 민주노동당은 분당되었다. 2008년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창원시 을 선거구에서 권영길 후보, 사천시 선거구에서 강기갑 후보가 각각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비례대표는 곽정숙, 홍희덕, 이정희 세 명의 후보가 당선되어 지난 2004년보다 5석 줄어든 5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권영길 의원은 진보정당 국회의원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하였고, 강기갑 의원은 여론 조사 결과를 뒤엎고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적인 측근인 이방호보다 182표를 더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2004년 총선의 13.1%에 못미치는 5.7%를 기록했으며, 진보신당의 2.9%를 합쳐도 9%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얻은 3.0%의 득표율보다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총선이 끝난 5월 초부터 한미 쇠고기 협상 논란이 불거져 나오자, 민주노동당은 강기갑 의원을 중심으로 졸속협상 비판,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한 투쟁에 돌입했다. 당 지도부가 일주일 동안 단식농성을 치렀으며, 이후에는 협상 내용을 비판하는 촛불 집회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5월 말에는 정당 지지율이 10.3%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에는 강기갑이 당 대표에 선출되고, 이정희가 정책위의장이 되는 등, 국회의원단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구조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2009년 들어 벌어진 재보궐선거에서는 민주당의 텃밭으로 알려진 호남 지역에서 1명의 광역의원, 1명의 기초의원을 당선시켰다. 한편, 울산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는 김창현 후보가 출마하였다가 진보신당의 조승수와의 여론조사 단일화를 이루며 사퇴하였고, 조승수가 울산 북구에 당선되었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에서는 "진보진영 단일후보 조승수 후보의 승리에 박수를 보낸다."는 논평을 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과 함께 야권 후보 단일화에 합의해 인천에서 기초단체장 2명을 배출했고, 36명의 광역의원을 당선시켰다. 그리고 201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역시 야권 후보 단일화로 전남 순천에서 최초로 호남 출신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2010년에는 경향신문과 민주노동당 간의 마찰이 있었는데 경향신문은 삼대세습을 비판 하는 것이 진보정당이 할 일 이라며 민주노동당을 비판했고,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이것은 색깔론과 같은 것이라며, 경향신문을 비판하며 일부에서는 절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 민주노동당이 왜 비판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민주노동당은 6.15남북 공동선언을 기초하여 이들 여론에 대해서 입장을 밝혔다. 다음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의 일부이다. 그 외에도 민주노동당은 부유세의 신설을 통한 빈부의 격차 해소와 국가보안법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2002년 대선과 2007년 대선에서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정책이 큰 관심을 모았으며 이중 무상 급식은 민주노동당이 가장 먼저 내놓은 정책으로 2010년 ~ 2011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정국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외에도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이자제한법,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같은 서민 정책도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내놓은 정책들이었다. 처음 민주노동당이 주장한 부유세도 참여정부에서 종합부동산세로 빛을 봤다. 일반적으로 다른 정당이나 언론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남북통일 문제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북한과 관련된 정책만을 주되게 추진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민주노동당이 대한민국 제17대 국회 기간 동안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 섬네일 비정규직 법안 반대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한미 FTA 졸속추진 반대 무상교육, 무상의료 주장 및 복지예산 삭감 반대 대학 자율화 반대 부유세 신설 주장 남북교류 증진 요구 대수 역대 대표 직함 임기 비고 1 권영길 대표 2000년 1월 30일 ~ 2002년 3월 16일 2 권영길 대표 2002년 3월 16일 ~ 2004년 6월 6일 3 김혜경 대표최고위원 2004년 6월 6일 ~ 2005년 10월 31일 10.26 재보선 패배로 사퇴 (임시) 천영세 대표직무대행 2005년 11월 1일 ~ 2006년 2월 10일 지도부 총사퇴로 직무대행 (임시) 권영길 비상대책위원장 2005년 12월 5일 ~ 2006년 2월 10일 10.26 재보선 패배로 비대위 구성 4 문성현 대표최고위원 2006년 2월 10일 ~ 2007년 12월 29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패배로 사퇴 (임시) 심상정 비상대책위원장 2008년 1월 12일 ~ 2008년 2월 4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패배로 비대위 구성, 혁신안 부결되자 사퇴 (임시) 천영세 대표직무대행 2007년 12월 30일 ~ 2008년 2월 19일 비대위 총사퇴로 직무대행 (임시) 천영세 혁신비상대책위원장 2008년 12월 19일 ~ 2008년 7월 25일 진보신당 창당으로 분당되자 혁신비대위 구성 5 강기갑 대표최고위원 2008년 7월 25일 ~ 2010년 7월 16일 6 이정희 대표최고위원 2010년 7월 16일 ~ 2011년 12월 5일 통합진보당으로 신설합당 실시년도 선거 국회의원 당선자 현황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 기초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 광역자치의회의원 당선자 현황 기초자치의회의원 당선자 현황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2000년 6·8 재보선 0 /7 0% 0 /32 0% 0 /57 0% 10·28 재보선 0 /2 0% 0 /9 0% 0 /37 0% 2001년 4·26 재보선 0 /7 0% 0 /6 0% 0 /14 0% 10·28 재보선 0 /3 0% 2002년 8·8 재보선 0 /13 0% 12·19 재보선 0 /1 0% 0 /1 0% 0 /3 0% 0 /4 0% 2003년 4·24 재보선 0 /3 0% 0 /2 0% 0 /4 0% 0 /23 0% 10·30 재보선 0 /4 0% 0 /9 0% 0 /66 0% 2004년 6·5 재보선 0 /4 0% 0 /19 0% 0 /38 0% 0 /53 0% 10·30 재보선 0 /5 0% 0 /7 0% 0 /35 0% 2005년 4·30 재보선 0 /6 0% 0 /7 0% 0 /10 0% 0 /21 0% 10·26 재보선 0 /4 0% 2006년 7·26 재보선 0 /4 0% 10·25 재보선 0 /2 0% 0 /4 0% 0 /1 0% 0 /2 0% 2007년 4·25 재보선 0 /3 0% 0 /6 0% 0 /9 0% 0 /38 0% 12·19 재보선 0 /13 0% 0 /12 0% 0 /25 0% 2008년 6·4 재보선 0 /9 0% 1 /29 0.34% 0 /14 0% 10·29 재보선 0 /2 0% 0 /3 0% 1 /9 11.1% 2009년 4·29 재보선 0 /5 0% 0 /1 0% 1 /3 33.3% 1 /5 20.0% 10·28 재보선 0 /5 0% 2010년 7·28 재보선 0 /8 0% 10·27 재보선 0 /2 0% 0 /1 0% 0 /3 0% 2011년 4·27 재보선 1 /3 33.3% 0 /1 0% 1 /6 16.6% 1 /5 20.0% 1 /23 4.3% 10·26 재보선 0 /1 0% 0 /11 0% 0 /11 0% 1 /19 5.2% 2000년 1월 30일, 민노당 창당대회는 강령과 정강정책을 채택한 뒤, 권영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2000년 4월 14일, 대한민국 제16대 총선 득표수 미달로 해산된 민노당은 5월 24일 재등록한 뒤 6월 11일 당 대회에서 16대 총선 공식 평가안을 의결하고 김혜경 전 서울 관악구 의원과 최순영 전 경기 부천시 의원을 여성 부대표로 선출했다. 2001년 2월 24일, 민노당 대회는 2001년 사업계획과 진보세력 연대를 통한 재창당 방안, 2002년 양대선거 기본 방침등을 논의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권영길 294 69.2% 대표 2 정윤광 131 30.8% 총투표수 425 2002년 3월 16일, 민노당 당 대회는 경선을 통해 권영길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했다. 2002년 9월 8일, 민노당 대회는 진성당원 총투표를 통해 90.8%의 찬성을 받은 권영길 대표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했다. 2003년 3월 1일, 민노당대회는 비례대표 공천과 당원소환권을 골자로 당헌을 개정하고, 부대표 보궐선거를 치러 김형탁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부대표로 선출했다. 2003년 11월 1일, 민노당 대회는 농민위원회 신설과 농민에 대한 부문할당 등 전국농민회총연맹과의 합의를 인준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김혜경 10,702 64.4% 대표최고위원 2 정윤광 4,116 24.8% 3 김용환 1,469 8.8% 총투표수 16,287 2004년 6월 6일, 민노당 당 대회는 전자투표를 도입한 진성당원 총투표를 통해 당직자 선거를 치른 결과, 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원내진입 이후 대거 유입된 자주파의 지원을 받은 김혜경 부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005년 2월 27일, 민노당 대회는 혼재된 지역조직을 시군구 단위 지역위원회로 편제하는 것을 골자로 당헌을 개정하고, 주한미군을 감군 및 후방배치 한다는 강령을 철수 로 개정하였다. 2005년 10월 31일, 김혜경 최고위가 10.26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자 12월 5일, 민노당 중앙집행위는 당 국회의원-시도당위원장 연석회의가 추천한 권영길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인준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문성현 15,596 47.6% 결선투표 진출 2 조승수 14,682 44.8% 결선투표 진출 3 주대환 2,499 7.6% 총투표수 32,777 결선투표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문성현 16,547 53.6% 대표최고위원 2 조승수 14,315 46.4% 총투표수 31,150 2006년 2월 26일, 민노당 대회는 진성당원 총투표를 통해 문성현 경남도당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 뒤, 중앙위 명의로 발의된 결선투표 부정선거 의혹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최고위와 예비당원제 관련 당헌을 개정했다. 2006년 7월 24일, 민노당 대회는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10%, 모든 선출직, 임명직 5%를 장애인에 할당하는 장애인할당제를 의결하고, 최고위원이 기타 당직을 의무로 맡게 하고 확대간부회의를 월 1회로 정례화, 시도당위원장에게 소집권을 부여하도록 당헌을 개정하였다. 2007년 3월 11일, 민노당 대회는 대의원 정족수 미달(2/3에 38표 부족)로 국민참여경선을 도입하는 당헌개정안을 부결시키고, 예결산 심의,의결권을 중앙위로 이관하는 안과 최고위원 숫자를 줄이고 정책위 의장과 사무총장을 대표최고위원이 임면하는 안 역시 부결시켰으나, 정기 당 대회 간격을 2년으로 연장하는 안은 통과시켰다. 심상정 노회찬 권영길 합 계 제주 196 197 234 광주전남 508 655 1749 대구경북 990 957 1035 대전충남 752 736 925 해외 9 3 8 전북 422 660 1429 경남 911 677 2686 부산 532 592 1076 울산 599 347 1407 충북 497 323 332 강원 392 414 498 수도권 4256 3917 7674 총합 10064 9478 19053 결선투표 결과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권영길 19,109 52.7% 대통령 후보 2 심상정 17,122 47.3% 총투표수 36,231 2007년, 민노당은 7월 20일부터 9월 9일까지 전국순회경선을 실시해 권영길 전 대표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보다 득표가 감소하면서 일심회 사건을 비롯한 자주파의 종북 문제와 당직선거 부정 문제 등이 붉어지자 2007년 12월 29일, 문성현 최고위는 심상정 전 원내수석부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천한 뒤 총사퇴했다. 이후 2008년 1월 12일, 중앙위원회는 심상정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인준했다. 2008년 2월 3일, 민노당 대회는 민주노총에 의존 하고 친북 논란에 적극적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고 표현하는 대선패배평가와 종북논란을 일으킨 일심회 사건 관련 당원들을 제명안 등 비대위가 제안한 혁신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이에 따라 심상정 비상대책위원장을 포함한 비대위원들과 평등파 당원들이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2008년 2월 19일, 민노당 중앙위는 총사퇴 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 혁신위를 대신해 천영세 대표대행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인준했다. 순위 기호 이름 온라인 오프라인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강기갑 7,134 73 7,207 최고위원 41.7 39.9 41.7 2 5 이수호 3,261 37 3,298 최고위원 19.1 20.2 19.1 3 4 오병윤 1,844 2 1,846 최고위원 10.8 1.1 10.7 4 5 박승흡 1,532 26 1,558 최고위원 9 14.2 9 5 1 유덕상 1,078 7 1,085 6.3 3.8 6.3 6 9 최순영 753 6 759 여성 몫 최고위원 4.4 3.3 4.4 7 7 이영순 678 25 703 여성 몫 최고위원 4 13.7 4.1 8 6 이상현 654 6 660 3.8 3.3 3.8 9 8 우위영 168 1 169 여성 몫 최고위원 1 0.5 1 합계 - 2008년 7월 17일, 민노당 대회는 최고위원 경선을 통해 강기갑 전농 전 부의장,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오병윤 전 광주시당 위원장, 박승흡 대변인, 최순영 전 부대표, 이영순 전 의원, 우위영 전 문예위원장과 민주노총 몫의 이영희 민주노총 정치위원장과 전농 몫의 최형권 전농 정치위원장을 각각 최고위원으로 선출했으나, 과반 득표자가 없어 대표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1,2위간 결선투표에 들어갔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강기갑 12,691 68.3% 대표최고위원 2 이수호 5,889 31.7% 최고위원 총투표수 36,231 7월 23일부터 7월 24일까지 진행된 온오프라인 결선투표 결과, 강기갑 전 부의장이 이수호 전 위원장을 꺾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6월 21일, 민노당 대회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 국민참여당 들과 연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2010년 3월 1일, 민노당 대회는 불법후원 논란으로 당원 전자투표가 불가능하게 되자,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에 한해 후보를 지역위 운영위, 당 대회에서 추천해 중앙위에서 인준하기로 결정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이정희 5,082 37.3% 최고위원 2 장원섭 2,600 19.1% 최고위원 3 김성진 2,083 15.3% 최고위원 4 정성희 1,812 13.3% 최고위원 5 김승교 1,508 2.1% 6 김혜영 530 2.1% 총투표수 13,615 2010년 민노당은 7월 3일부터 7월 7일까지 진성당원 총투표로 치러진 당직자선거를 통해 이정희 의원, 장원섭 전 광주시당 위원장, 김성진 전 최고위원, 정성희 전 사무부총장을 일반명부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대표최고위원은 최고위원 선거 1,2위를 차지한 이정희 최고위원과 장원섭 최고위원 간의 결선투표를 통해 선출될 예정이었으나, 장원섭 후보의 사퇴로 이정희 후보가 찬반투표를 통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1년 6월 19일, 민노당 대회는 진보신당과의 합당을 통한 통합진보정당 건설과 당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문구 삭제를 의결했다. 2011년 8월 28일, 민노당 대회는 진보신당과의 통합 합의문을 통과시키고, 국민참여당과의 합당 안을 부결시켰다. 2011년 9월 25일, 민노당 대회는 참여당과의 통합 안을 상정, 64.6%의 찬성을 받아 합당에 필요한 의결 정족수 66.7%를 채우지 못해 부결되었다. 2011년 11월 27일, 민노당 대회는 당권파 지도부의 지속적인 압력 끝에 참여당과의 합당을 의결함으로써,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는 통합진보당으로 출범하였다. 2010년 2월 6일, 경찰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혐의 규명을 위해 영장을 발부 받아 확보하려던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서버 하드디스크를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빼내고 제출하지 않았다. 전교조와 전공노의 불법 정치 행위를 수사하던 경찰은 이들의 당원 가입, 당비 납부, 투표 기록 등을 확인하기 위해 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KT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서버관리실에 있는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및 투표사이트 서버를 압수수색하였지만 관련 기록이 저장되어 있던 하드디스크 2개가 사라져서 압수수색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사라진 하드디스크 2개는 서버관리업체인 스마일서브 직원이 민주노동당의 요구로 하드디스크를 빼내서 전달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압수수색이 종료된 것으로 알고 당의 사유재산을 따로 보관한 것으로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민주노동당 측 주장은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며 이는 영장집행중에 행한 증거인멸죄에 해당한다고 반박했다. 또한 압수수색과정에서 선관위에 등록되지 않은 민주노동당 계좌에서 10억원이 강기갑 대표 등 당직자의 계좌에 유입된 사실이 드러났다. 그동안 당의 공식 계좌로 입금되었다거나 노조조합비라고 밝혔던 돈이 소속 국회의원에게 넘어간 것에 대한 비판받고 있다. 정계와 인터넷에서 민주노동당의 행보가 친북, 종북 성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2011년 5월 30일 진보진영에서 논의중인 통합정당 정책 합의 과정중 진보신당이 통합진보정당의 정책으로 “북한의 3대 세습 반대 입장을 채택하자”고 요구한 데 대해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분단의 이분법”이라며 비판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이러한 가운데 2011년 8월 26일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에서 민주노동당 해산 청원에 나선 사실도 있다. 이들은 법무부에 해산청원서 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민주노동당은 목적 및 활동이 모두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므로, 헌법재판소에 위 정당에 대한 해산심판청구를 할 것을 청원한다. (후략) 이에 대해 헌법학자인 김철수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2011년 8월 12일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민주노동당은 헌법적으로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대한민국의 역대 정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분류:2000년 설립된 정당 분류:2011년 폐지 분류: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노회찬 분류:심상정 분류:진중권 분류:백기완 분류: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사회주의 계열 정당 분류:대한민국의 진보정당 분류:사회주의 인터내셔널 |
군론에서, 아벨 군 (Abel群 또는 가환군 (可換群은 교환 법칙이 성립하는 군이다.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벨 군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아벨 군 은 모든 에 대하여 인 군 이다. 아벨 군 은 정수환 위의 가군 이다.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교환 법칙을 만족시키는 군 이 주어졌다면, 여기에 와 같이 정수환의 작용을 정의할 수 있다. 반대로, 정수환 위의 가군 이 주어졌다면, 정수환의 작용을 잊으면 는 가환 법칙을 만족시키는 군을 이룬다. 아벨 군 의 생성 집합 (生成集合 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이다. 임의의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가 존재한다. * 은 유한 집합이다. * 이다. 의 최소 생성 집합 (最小生成集合은 생성 집합 가운데, 집합의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이다. 최소 생성 집합이 유한 집합인 아벨 군을 유한 생성 아벨 군 (有限生成Abel群이라고 한다. 아벨 군 의 일차 독립 부분 집합 (一次獨立部分集合 는 그 합이 0인 선형 결합이 자명한 선형 결합밖에 없는 부분 집합이다. 즉, 가 유한개의 성분들만 0이 아닌 개 음이 아닌 정수들의 순서쌍이라고 하면, 일 필요충분조건은 인 경우다. 아벨 군 의 계수 (階數 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는 기수이다. 는 의 일차 독립 부분집합들의 집합의 크기들의 최댓값이다. 이다. 여기서 는 아벨 군의 텐서곱이다. 따라서,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의 경우, 아벨 군으로서의 계수는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과 같다. 아벨 군 의 원소 및 소수 가 주어졌을 때, 의 -높이 () 는 다음과 같다. 아벨 군들의 집합 이 주어졌다면, 직접곱 를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군의 직접곱의 특수한 경우이며, 아벨 군들의 직접곱은 항상 아벨 군을 이룬다. 아벨 군들의 집합 이 주어졌다면, 직합 를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가군의 직합의 특수한 경우이다. 직합은 직접곱의 부분군이다. 만약 가 유한 집합이라면 직합은 직접곱과 같으나, 무한 집합이라면 직합은 직접곱의 진부분 집합이다. 임의의 크기의 집합 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우변은 기수의 합이다. 아벨 군들의 집합 이 주어졌다면, 텐서곱 을 취할 수 있다. 이는 가군의 텐서곱의 특수한 경우다. 다음과 같은 포함 관계가 성립한다. :순환군 ⊊ 아벨 유한군 ⊊ 유한 생성 아벨 군 ⊊ 아벨 군 ⊊ 데데킨트 군 ⊊ 멱영군 ⊊ 가해군 ⊊ 군 특히, 모든 아벨 군은 데데킨트 군이므로,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은 정규 부분군이다. 아벨 군들의 직접곱은 아벨 군이다. 아벨 군의 부분군은 아벨 군이다. 그러나 아벨 군의 자유곱은 아벨 군이 아니다. 유한 생성 아벨 군의 유한 개의 직합은 유한 생성 아벨 군을 이룬다. 모든 아벨 유한군은 유한 생성 아벨 군이며, 계수가 0이다. 모든 아벨 군 에 대하여, 의 계수는 의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보다 같거나 작고, 의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는 의 크기보다 같거나 작다. 아벨 군 가운데 단순군인 것은 소수 크기의 순환군 밖에 없다. 아벨 군은 정수환 위의 가군이므로, 가군론을 적용할 수 있다. 가군론적 각종 성질은 아벨 군의 성질에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가군의 성질 아벨 군의 성질 자유 가군 자유 아벨 군 (정수환이 주 아이디얼 정역이기 때문) 사영 가군 평탄 가군 꼬임 없는 아벨 군 (정수환이 데데킨트 정역이기 때문) 꼬임 없는 가군 단사 가군 나눗셈군 유한 생성 가군 유한 생성 아벨 군 단순 가군 아벨 단순군 = 소수 크기의 순환군 아벨 군 의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서의) 크룰 차원은 다음과 같다. 라고 하자. 그렇다면 의 크룰 차원은 의 크룰 차원과 같다. 즉, 일 경우 의 크룰 차원은 1이며, 인 경우 의 크룰 차원은 이며, 0 또는 1이 아닌 경우 의 크룰 차원은 0이다. 아벨 군 의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서의) 길이는 그 합성열()의 최대 길이와 같다. 예를 들어, 아벨 유한군 의 길이는 의 소인수 분해가 일 때 이다. 무한 순환군 의 길이는 무한대이다. 정역 위의 가군의 계수는 이다. 여기서 는 의 분수체를 뜻하며, 는 분수체 위의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이다. 이 경우, 아벨 군의 가군론적 계수는 아벨 군으로서의 계수와 같다. 아벨 군은 정수환 위의 가군이다. 대수기하학적으로, 정수환의 스펙트럼은 다음과 같이, 소수 주 아이디얼을 닫힌 점으로 하는 1차원 스킴이다. :정수환의 그림. 닫힌 점들은 소수로 생성되는 주 아이디얼이며, 이 밖에 일반점 (0)이 있다. 가환환 위의 가군은 가환환의 스펙트럼 위의 가군층을 이룬다. 즉, 아벨 군은 정수환의 스펙트럼 위의 층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유한 생성 아벨 군 의 지지 집합은 이다. 가군층의 직합 및 텐서곱은 아벨 군의 직합 및 텐서곱과 같다. 아벨 군 의, 닫힌 점 위에서의 가군층의 올은 유한체 위의 벡터 공간 이며, 일반점 위에서의 가군층의 올은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 이다. 즉, 일반점 위에서의 가군층의 차원은 아벨 군의 계수와 같다. 예를 들어, 순환군 의 지지 집합은 의 소인수들이다. 만약 및 이 주어졌을 때, 두 아벨 군의 텐서곱은 이 된다. 특히, 과 이 서로소라면 이는 자명군이 된다. 기하학적으로, 이는 의 지지 집합은 의 지지 집합과 의 지지 집합의 교집합이 되기 때문이다. 두 지지 집합이 겹치지 않는다면, 텐서곱이 항상 0이 된다. 아벨 군을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 간주하였을 때, 사영 가군은 자유 아벨 군이며, 단사 가군은 나눗셈군이다. 임의의 아벨 군 는 자유 아벨 군 의 몫군 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자유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은 자유 아벨 군이므로, 이는 길이가 1인 사영 분해를 이룬다. 따라서, 아벨 군 의 사영 차원은 다음과 같다. 가 자유 아벨 군일 경우, 가 자유 아벨 군이 아닐 경우, 마찬가지로, 임의의 아벨 군 은 어떤 나눗셈군 의 부분군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나눗셈군의 몫군은 역시 나눗셈군이므로, 이는 길이가 1인 단사 분해를 이룬다. 따라서, 아벨 군 의 단사 차원은 다음과 같다. 가 나눗셈군일 경우, 가 나눗셈군이 아닐 경우, 아벨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는 대수 구조 다양체의 범주이므로, 완비 범주이자 쌍대 완비 범주이다. 이 경우, 각종 극한과 쌍대극한은 다음과 같다. 범주론의 개념 아벨 군론의 개념 영 대상 자명군 곱 군의 직접곱 쌍대곱 아벨 군의 직합 동등자 집합과 함수의 범주에서의 동등자 쌍대동등자 의 쌍대동등자는 으로부터 생성되는 부분군에 대한 몫군 단사 사상 단사 함수인 군 준동형 전사 사상 전사 함수인 군 준동형 군 대상 아벨 군 단사 대상 나눗셈군 사영 대상 자유 아벨 군 다시 말해, 정수환 위의 단사 가군은 나눗셈군이며, 정수환 위의 사영 가군은 자유 아벨 군이다. 아벨 군의 아벨 범주이며, 따라서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두 아벨 군 사이의 군 준동형들의 집합은 자연스럽게 아벨 군의 구조를 갖는다. 구체적으로, 가 주어졌다면 와 같이 정의한다. 모든 유한 곱과 유한 쌍대곱이 존재하며, 서로 같다. 이는 직접곱(=아벨 군의 직합)이다. 분할 보조정리가 성립한다. 망각 함자 의 왼쪽 수반 함자가 존재하며, 이는 집합을 그 집합으로부터 생성되는 자유 아벨 군에 대응시킨다. 마찬가지로, 포함 함자 의 왼쪽 수반 함자가 존재하며, 이는 군을 그 아벨화에 대응시킨다. 또한, 아벨 군의 범주에서 유사환의 범주로 가는 충실충만한 함자 가 존재한다. 이는 아벨 군 를 모든 곱이 0인 유사환 , 으로 대응시킨다. 폰트랴긴 쌍대성에 의하여, 아벨 군의 범주의 반대 범주는 콤팩트 하우스도르프 아벨 위상군과 연속 군 준동형의 범주와 동치이다. 또한, 아벨 유한군의 범주의 반대 범주는 스스로와 동치이다. 아벨 군의 모임은 하나의 2항 연산(+)과 하나의 1항 연산(−), 하나의 0항 연산(0)을 갖는 대수 구조 다양체이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와 마찬가지로, 아벨 군의 합동 관계는 임의의 부분군에 의하여 정의된다 (아벨 군의 경우 모든 부분군이 정규부분군이다). 아벨 군들은 일차적으로 계수 에 의하여 분류된다. 이는 기수이다. 일반적인 아벨 군은 분류하기 힘들다. 다만, 다음과 같은 부분적인 분류가 존재한다. 유한 생성 아벨 군은 완전히 분류되었다. 즉, 모든 유한 생성 아벨 군은 그 계수 및 꼬임 부분군에 의하여 완전히 분류된다. 꼬임 부분군이 없는 계수 1의 아벨 군 역시 완전히 분류되었다. 나눗셈군 역시 완전히 분류되었다. 모든 아벨 유한군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준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유일하다. 이를 소분해 (素分解라고 한다. 여기서 는 소수이다. 마찬가지로 아벨 유한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으며, 이를 불변 인자 분해 (不變因子分解라고 한다. 여기서 이다 (는 가 의 약수임을 뜻한다). 이 두 분해는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를 사용하여 서로 동치임을 보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와 같다. 여기서, 만약 라면 으로 정의한다. 아벨 유한군은 항상 계수가 0이며,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는 이다. 즉, 불변 인자 분해에서 항의 수와 같다. 아벨 유한군의 자기 동형군 역시 완전히 알려져 있다. 소분해가 주어진 아벨 -유한군의 자기 동형군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항상 이며, 이다. 임의의 아벨 유한군 의 자기 동형군은 이다. 모든 유한 생성 아벨 군 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준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유일하다. 여기서 는 아벨 유한군이며, 의 꼬임 부분군 이라고 한다. 자연수 은 의 계수와 같다. 꼬임 부분군이 자명군이며, 계수가 1인 아벨 군들은 다음과 같이 완전히 분류된다. 계수가 1인 아벨 군 가 주어졌다고 하자. 임의의 ()에 대하여, 모든 소수 에 대한 -높이들의 수열 을 정의할 수 있다. 임의의 두 원소 ()에 대하여, 계수가 1이므로 항상 인 이 존재한다 (). 따라서, 만악 가 또는 의 소인수가 아니라면, 가 된다. 즉, 와 는 유한 개의 성분을 제외하고는 서로 일치한다. 이러한 두 에 대하여 와 같이 동치 관계를 정의하면, 동치류 는 에 상관없이 유일하게 정의된다. 이를 의 형 () 라고 하자. 그렇다면, 꼬임 부분군이 없는 계수 1의 두 아벨 군 ,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와 는 서로 동형이다. 두 군은 같은 형을 갖는다. 즉, 이다. 계수가 2 이상인 아벨 군의 분류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계수가 2 이상인, 꼬임 부분군이 자명한 아벨 군의 분류는 계수 1인 경우와 비교할 때 (어떤 집합론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훨씬 더 어렵다. 흔히 볼 수 있는 아벨 군의 예로는 다음이 있다. 기호 설명 계수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 집합의 크기 순환군 0 1 클라인 4원군 0 2 4 무한 순환군 1 1 유리수의 덧셈군 1 유클리드 공간의 유리점 양의 유리수의 곱셈군(=가산 개의 생성원의 자유 아벨 군) 2차 순환군의 가산 무한 직합 0 실수의 덧셈군 유클리드 공간 역사적으로, 군론은 고차 방정식의 해법 가능성 여부에 대한 갈루아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를 연구하던 닐스 헨리크 아벨은 어떤 다항식의 분해체의 갈루아 군이 아벨 군일 경우, 다항식의 해를 거듭제곱근만으로 나타낼 수 있음을 보였다. (이후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사실 갈루아 군이 가해군임이 족함을 보였다. 아벨 군은 가해군의 특수한 경우이다.) 아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카미유 조르당이 이 개념을 "아벨 군"이라고 명명하였다. *리 군 아벨 범주 가해군 가군 유체론 자유 아벨 군 분류:닐스 헨리크 아벨 |
군 에는 다음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있다. 군 (郡)은 행정 구역의 하나이며 국가마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 * 군 (郡)은 미국의 행정 구역 중 하나이다. 군 (軍)은 군대의 준말이다. 군 (軍)은 육군의 부대 편성 단위 가운데 하나이다. 군 (君)은 조선 시대에 서자 출신의 왕자들이나 공신에게 내려진 작위이다. 군 (群)은 수학에서 대수 구조의 일종이다. 군 (君)은 한국의 성씨이다. 군 (群)은 ‘무리’를 뜻하는 한자이다. 군 (群)은 축구나 야구 등에서 상부리그, 하부리그를 뜻하는 1군 (一群), 2군 (二群)을 뜻하는 것이다. 군 (본명 김일군, 1987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제임스 E. 건 (James Edward Gunn)은 미국의 천문학자이다. 군 은 남자아이의 맨 뒤에 붙이는 애칭이다. 카운티 |
수학에서 결합법칙 (結合 法則, associated law)은 이항연산이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않는 성질이다. 한 식에서 연산이 두 번 이상 연속될 때, 앞쪽의 연산을 먼저 계산한 값과 뒤쪽의 연산을 먼저 계산한 결과가 항상 같을 경우 그 연산은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고 한다. 실수의 덧셈과 곱셈은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예를 들어 다음 식은 참이다. :(2 + 3) + 5 = 2 + (3 + 5)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가장 쉬운 예는 실수의 뺄셈일 것이다. 다음 식에서, :(8 - 7) - 3 ≠ 8 - (7 - 3) 좌변과 우변의 결과값은 각각 -2와 4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실수는 뺄셈에 대하여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실수의 나눗셈도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다음 식에서, :(8 ÷ 7) ÷ 3 ≠ 8 ÷ (7 ÷ 3) 좌변과 우변의 결과값은 각각 0.38095...와 3.42857...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실수는 나눗셈에 대하여도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집합 S 에 대해 정의된 이항 연산 이 결합법칙을 만족하면 다음 식이 성립한다. 이 때 좌변과 우변의 값은 연산을 수행하는 순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법칙은 연산이 세 번 이상 나타날 때에도 확장해서 적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가 결합법칙을 만족하면 연산 순서를 따로 지정하지 않아도 모호함 없이 수식의 값이 결정된다. 따라서 보통 위의 수식을 괄호 없이 다음과 같이 쓴다. 자연수, 정수, 유리수, 실수, 복소수, 사원수의 덧셈과 곱셈은 결합법칙이 성립한다. 팔원수의 덧셈도 결합법칙이 성립하지만 곱셈은 성립하지 않는다.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 함수는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행렬 곱셈은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선형 변환이 행렬의 곱셈으로 표현되므로 선형 변환 역시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집합의 교집합과 합집합 연산은 각각 결합법칙이 성립한다. 진릿값의 논리곱, 논리합, 배타적 논리합 등 논리 연산은 각각 결합법칙이 성립한다. 각 함수의 정의역과 치역이 올바르게 정의된 합성함수도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즉 인 세 함수가 있을 때, * *교환법칙 *분배법칙 분류:추상대수학 분류:이항연산 분류:초등대수학 분류:함수해석학 |
수학에서, 교환법칙 (은 두 대상의 이항연산의 값이 두 원소의 순서에 관계없다는 성질이다. 수학에서, 집합 S 에 이항연산 이 정의되어 있을 때, S 의 임의의 두 원소 a , b 에 대해 a b = b a 가 성립하면, 이 연산은 교환법칙 (交換法則, commutative law)을 만족한다고 한다. 이때 연산은 가환 (可換, commutative)이라고도 한다.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 연산은 비가환 (非可換, non-commutativ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자연수 집합에서 덧셈과 곱셈은 교환법칙을 만족한다. 4 + 5 = 5 + 4 2 × 3 = 3 × 2 그러나 뺄셈과 나눗셈은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다. 4 − 5 ≠ 5 − 4 6 ÷ 3 ≠ 3 ÷ 6 교환법칙을 만족하는 연산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자연수, 정수, 유리수, 실수, 복소수에서 덧셈과 곱셈. 행렬, 벡터의 덧셈 집합의 교집합, 합집합 연산 역행렬의 곱셈 진릿값의 논리합, 논리곱, 배타적 논리합 등 논리 연산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 예는 다음과 같다. 행렬의 곱셈. 3차원 벡터의 벡터곱 합성함수 사상의 합성 사원수의 곱셈 결합법칙 분배법칙 아벨 군 대수 구조 교환자 분류:추상대수학 분류:초등대수학 분류:이항연산 분류:관계 (수학) 분류:대칭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함수해석학 분류:논리학 |
대통령 (大統領, president)은 공화제 국가의 국가원수로서 나라에 따라 임기가 다르고, 선출하는 방식도 국민의 직접 투표 혹은 의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미국은 시민권자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인단을 선출해 그들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투표 방식을 택하고 있으므로, 총득표자수는 많아도 선거인단의 수에서 뒤져 낙선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또한 나라에 따라 중임(重任)에 제한을 두기도 한다. 흔히 경칭으로는 각하(閣下)로도 알려져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정부 수립 이후 사용되다가 제4대 윤보선 정부 때인 1960년 8월 12일 폐지되었으며, 1963년 12월 19일 제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부활했다가 제13대 노태우 정부 때인 1987년 12월 31일까지 쓰였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은 국가주석이고, 중화민국에서는 총통 (總統, president)이란 명칭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영문으로 번역할 때는 똑같이 President로 번역된다. 어원으로서는 대(가장 큰 사람), 통(통치하는), 령(그 나라의 국토)으로 이루어진 말로, 어떤 영토안에서 통치하는 자 중에서 가장 큰 인물을 뜻하는 말임. 동양에서 대통령 이라는 용어는 통령(統領) 으로부터 비롯된 말이다. 청나라 후기에 통령 은 오늘날 여단장급의 무관 벼슬 명칭인 근위영 장관(近衛營 長官)을 이르는 말이었다. 또 고대 한나라 시대에 북방 흉노 군대의 장군을 통령 으로 지칭하는 등 소수 민족 군대의 장군을 비공식적인 표현으로 통령 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에 조운선 10척을 거느리는 벼슬을 통령 이라 불렀다. 일본에서는 통령 이라는 말이 고대부터 쓰였는데, 사무라이를 통솔하는 우두머리 라는 군사적 용어였으며, 군사적 수장이나 씨족의 족장을 의미하는 용어로 매우 흔하게 쓰였다. 근대 일본에서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수, 프랑스 제1공화국의 집정관 등 다른 나라의 직위를 설명하는 번역어로 통령 을 이용하였다. 일본은 president 를 번역하면서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통령 이라는 용어에 "큰 대(大)" 자를 덧붙여서 대통령 이라는 말을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최소한 186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는 이미 대통령 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기 시작하고 있다.『일본국어대사전』에는 1852년에 출간된『막부 외국관계 문서지일(文書之一)』에서 대통령 이란 낱말이 처음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president 의 번역어로 1817년 두인(頭人) 이라는 비칭(卑稱)의 성격을 띤 호칭을 사용한 이래, 총리(總理) , 국주(國主) , 추(酋) , 수사(首事), 추장(酋長) , 방장(邦長) , 백리새천덕 등의 용어를 쓴 바 있다. 통령 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1838년에 이미 나타나고 있고, 대통령 이라는 용어도 1875년 경 출현하기는 하지만 두 가지 용어 모두 이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1870년에 이르러 총통 이라는 용어를 이미 널리 쓰게 되었으며, 총리와 대통령을 구분하여 인식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화민국에서는 president 를 총통(總統) 으로 번역하고, 국부천대 후에도 자국 국가 원수의 직함으로 총통(總統) 을 계속 쓰고 있다. 한국의 기록에서 대통령 이라는 용어는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헌영이 1881년 펴낸「일사집략(日槎集略)」이라는 수신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글에서 일본 신문이 "미국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 뒤 1884년『승정원일기』에서도 고종이 미국의 국가 원수를 대통령 이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에서 대통령 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바로 상해 임시정부가 최고 통수권자로서 대통령 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차용되었던 이 용어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는 5년이나 재선이 불가하고, 미국 대통령 임기는 4년이나 재선이 가능하다. 서양의 경우, 미국의 헌법의 모태가 된 1787년의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의 구성원들이 영국 헌정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정부 형태 자유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 사상을 충실히 수용하여 탄생하였다. 19세기가 되면, 1819년 대 콜롬비아의 성립을 시작으로 남미 국가에서 대통령제가 시행된다. 그리고 20세기가 되면, 1911년 ~ 1912년 신해혁명을 시작으로 공화제 국가가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 소비에트 연방 등 일당제 국가까지 다양했다. 공약이란, 사회 공중에 대한 약속을 함 또는 그 약속 즉,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국민을 향한 약속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는 부정부패 척결,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해소, 정부운영 패러다임의 변화,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뢰받는 정치로의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국민연금, 공무원 연금 등의 실질적인 복지의 확대, 저출산 문제 해결,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같은 인재 혹은 지진, 홍수, 산사태 등과 같은 자연 재해 , 그리고 아동과 여성에 대한 강력 범죄 로부터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사회로의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농어촌 활력화, 중소중견기업 육성, 차별 없는 고용시장 확대, 일자리 창출, 창조경제를 통한 성장동력 확보, 공정성을 높이는 경제민주화 등을 들 수 있다. 교육적으로는 입시제도의 변화, 대학 등록금 인하, 학생들의 꿈과 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 행복한 교육 실현 등을 들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대한민국에 여행을 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 대한 대우 개선, 대한민국 문화의 글로벌 브랜드화 및 전 세계로의 진출 등을 들 수 있다. 외교란 자기 나라의 대외 정책을 실현하고 나라 사이에 생기는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는 일을 뜻한다. 물리적 외교란 자원 을 수출입하거나, 여러 재원 들을 외국에 파견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외국간의 관계를 견고히 맺는 외교를 뜻한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공적개발원조 ODA도 물리적 외교의 일종이다. 개발도상국이나 상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국가들에 대하여 무상지원 혹은 유상지원 등을 행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는 ODA는 외교에 있어 많은 역할들을 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자원외교, 수출입 무역을 통한 외교, 인재 파견 등 물리적 성질을 가진 것들을 외국과의 관계를 통하여 다양한 분야에서의 소통 및 교류를 할 수 있다. 정신적 외교란 자원이나 재원이 아닌 상대 국가의 문화 혹은 트렌드 를 통해 해당 국가간의 관계를 맺는 외교를 뜻한다. 최근 K-POP의 외교적 영향력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외국인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을 늘릴 수 있으며 국가적 브랜드를 세계화하는데 큰 일조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외국인들이 대한민국을 찾아 우리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전 세계에 우리 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정부는 K-POP뿐만 아니라 미술, 영화, 등 다양한 예술적 측면 혹은 우리나라의 문화나 트렌드를 통해 어떻게 하면 국가적 브랜드를 향상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21C에 출현한 새로운 양상의 외교이자, 정보화 시대인만큼 이러한 양상의 외교는 그 중요성이 높아질 것이며 그에 따라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의 헌법상의 지위는 나라마다의 집행권의 구조에 따라 다르다. 집행권의 구조는 일원적 구조에 입각하고 있는 미국형 대통령제에서와 같이 입법부와 사법부와 함께 동령에 위치한다. 이원권 구조에 입각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행정부의 수반을 의미하는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지위에 있다. # 1년 - 스위스 # 4년 - 라트비아, 미국, 마셜 제도, 칠레, 볼리비아, 브라질, 아이슬란드, 에콰도르, 온두라스, 이란, 이집트,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팔라우 등 # 5년 - 그리스, 가이아나, 기니, 나미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한민국, 독일, 라오스, 마다가스카르, 모잠비크, 몰디브, 몰타, 방글라데시, 불가리아, 수리남, 시에라리온, 아프가니스탄, 알바니아, 알제리, 앙골라, 엘살바도르, 오스트리아, 우루과이, 인도네시아, 잠비아, 탄자니아, 튀니지, 터키, 카메룬, 코모로, 코트디부아르, 키프로스,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포르투갈, 프랑스 등 # 6년 - 니카라과, 러시아, 레바논, 멕시코, 아르헨티나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지부티, 짐바브웨, 칠레, 필리핀 등 # 7년 - 아일랜드, 이탈리아, 세네갈, 시리아 등 프랑스는 2000년ㅡ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서 2/3이상의 찬성으로 대통령 임기를 기존 7년에서 5년으로 단축시켰다. 반대로 2008년 러시아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개정을 단행하여 과반수의 표를 얻어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렸다. 각 국가의 헌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의무는 헌법 준수의 의무, 영업 활동의 금지, 겸직 금지의 의무, 청렴의 의무 등을 들 수 있다. 대통령이라는 직위 자체의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은 여러 공약들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대통령은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직권들과 공약들을 통해서 다양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제적인 영향력 또한 상당한데, 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국가에 대한 홍보 및 이미지 메이킹의 선도주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그 자체로서 엄청난 국제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 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받는 느낌을 의미한다. 대통령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미지가 존재하는데, 아무래도 공인이고 국가를 대표하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시선을 많이 느낄 것이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이미지를 달리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정부, 즉 정치인, 국회, 청와대가 추구하는 대통령의 이미지와 국민이 바라보고 있는 대통령의 이미지, 그리고 국민이 진심으로 바라는 대통령의 이미지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정부는 대통령을 한마디로 완전무결한 신적인 존재로 유지하려고 한다. 대통령에 대한 흠이 생기지 않아야 정부 운영에 있어서 장애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의 총 책임자가 작은 흠이 생기게 되면 정부 운영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을 언제나 두려워하는 정부는 대통령의 이러한 이미지를 매사 추구하고자 한다. 국민이 바라보는 대통령의 이미지는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비겁한 겁쟁이와 같이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여러 부정부패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면서 정치에 대한 불신이 늘어난 결과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정치인들의 대표격이 되는 대통령의 이미지 또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이게 되므로 대통령은 이 현상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무엇보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정부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민들은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 그리고 자신의 책임을 소신있게 다하는 모습을 지닌 리더의 이미지를 가진 대통령을 바라고 있다. 국민들에게 명령하는 보스, 독재자가 아닌 먼저 앞장서서 국민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가진 대통령을 원하고 있다. 대통령중심제 이원집정부제 부통령 대한민국의 대통령 |
아래는 질병의 목록이다. *구강 및 식도 :*식도역류증 :*삼킴곤란(연하곤란) :*식도염 *위장 : 위염 : 위암 :*소화성 궤양 *장 :*만성궤양성 대장염(chronic ulcerative colitis) :*크론병(Crohn s diseases) :*과민성 대장 증후군 :*변비 :*게실염 :*실리악 스푸루 *간 :*간염 :*간경변 *담낭 및 췌장 :*담석증 :*담낭염 :*췌장염 감기 폐렴 천식 만성폐쇄성폐질환 폐암 기관지염 *심장 질환 : 부정맥 : 심부전 :*심근경색증 :*심근병증 *혈관 질환 :*뇌졸중 ::*뇌경색 ::*뇌출혈 :*고지혈증 :*동맥경화 :*고혈압 *신증후군 *사구체 신염 *신부전 *신결석 *요도감염 *당뇨병 *갑상선 기능 항진증 *갑상선 기능 저하증 *갑상선 결절 *갑상선 암 *빈혈 *백혈병 *골다공증 *골연화증 *구루병 # 체외 기생충에 의한 전염병 # 세균성 전염병 # 바이러스성 전염병 # 리케치아에 의한 전염병 # 프리온 병 # 회충 # 요충 # 편충 # 흡충 # 폐 흡충 콜레라 장티푸스 학질 = 말라리아 이질 강변실명증 감기 폐렴 결핵 AIDS 흑사병 프리온 병 광우병의 정식 명칭은 프리온 병이다. 가을철 전염병 한탄바이러스, 쯔쯔가무시, 렙토스피라증 여행자 설사 비교적 흔한 유전병(영어 위키백과) 골연골이형성증 (Achondroplasia) 백색증 (Albinism) 디조지 증후군 (DiGeorge syndrome; 22q11.2 deletion syndrome) 안젤만 증후군 (Angelman syndrome) 카나반 병 (Canavan disease) 셀리악병 (celiac disease; Coeliac disease) 샤르코마리투스 병 (CMT; Charcot–Marie–Tooth disease) 색맹 (Color blindness) 묘성증후군 (Cri du chat syndrome) 낭포성 섬유종 (Cystic fibrosis) 다운증후군 (Down Syndrome) 골격 기형병 뒤센형 근위축증 (Duchenne muscular dystrophy) 혈색소 침착증 (Haemochromatosis) 혈우병 (Haemophilia) 클라인펠터 증후군 (Klinefelter s syndrome) 신경섬유종증 (Neurofibromatosis) 다낭성 신종 (PKD; Polycystic kidney disease) 프래더윌리 증후군 (Prader–Willi syndrome) 겸상 적혈구 빈혈증 (Sickle-cell disease) 테이-삭스 병 (Tay–Sachs disease) 터너증후군 (Turner Syndrome) 성장 부진병 *페닐케톤뇨증(Phenylketonuria) *단풍당뇨증 *호모시스틴뇨증 *갈락토스 혈증 *유당 불내증 *통풍 *윌슨씨병 매독 (Syphilis) 임질 (Gonorrhea) 성기 헤르페스 (Herpes) 성기 허피스 클라미디아감염증 (Chlamydia infection) 에이즈 에이즈도 성행위로 감염되는 병이므로 성병이기는 하나, 성병외의 행위로도 감염된다. 비임균성 요도염 임질이 아니면서 임질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사면발이 체외 기생충에 의한 병 옴 매우 가렵다. 감염된 사람과 침구를 같이 해도 걸릴수 있다.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 급성 골수성 백혈병 AIDS 관련 암 방광암 유방암 선종 (종양) 암종 원발성 중추신경계 림프종 교종 (의학) 자궁경부암 만성 림프모구 백혈병 만성 골수성 백혈병 대장암 식도암 망막모세포종 쓸개암 위암 심장암 간세포암 호지킨 림프종 후두암 백혈병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 폐암 림프종 흑색종 중피종 구강암 골수이형성증후군 난소암 췌장암 음경암 크롬친화세포종 뇌하수체 샘종 전립선암 피부암 고환암 갑상선암 요도암 자궁암 뇌암 직장암 간암 원발성 간암 신경증 사고는 정상인 정신 질환, * 신체화 장애 과환기 증후군 * 전환장애 정신증 사고(생각)의 왜곡이 있는 정신 질환, * 조현증 * 조울증 일반 중독 농약 중독 자연독 중독 이를테면 식물성 청산 중독, 독버섯에 의한 중독 뇌출혈 골절 좌상 탈골 (소아마비) B형 간염 ( Hepatitis B ) 황달 동맥경화 심장질환 탈장 ( Hernia ) 치질 천연두 빈혈 낫세포 빈혈증 소아마비 알레르기 천식 당뇨병 동맥경화 신장병 중풍 기억상실증 알츠하이머병 꾀병 비만증 공주병 왕자병 상사병 어플루엔자 중2병 연예인병 가난병 관심병 가정 폭력 학대 노인학대, 아동학대, 동물학대 |
동화 (童話)란 어린이를 독자층으로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아동 문학의 한 장르이다. 판타지나 우화, 프로파간다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의 이솝우화, 이탈리아의 피노키오, 독일의 헨젤과 그레텔 등 동화로 알려진 문학이 있다. 한국에서는 흔히 어린이를 위한 옛날 이야기를 동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문학 유형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간접적으로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 의미에서 동화는 한 지방이나 국가에서 세대를 거치면서 자기 나라말로 구전된 것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적 동화는 종류가 대단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서 동화의 창작은 간과할 수 없는 문학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본격적인 창작동화는 1923년 마해송(馬海松)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이 발표되고, 이어서 《어린이》·《아이생활》·《별나라》 등 여러 잡지와 구연회(口演會)를 통하여 방정환·고한승(高漢承)·진장섭(秦長燮)·정인섭·이정호(李定鎬) 등 색동회 동인들과 기타 이주홍(李周洪) 등의 작가들이 창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비로소 기반을 쌓게 되었다. 현재도 보리출판사, 사계절출판사, 예영커뮤니케이션 등 다수의 출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창작동화들을 출판하고 있다. 분류:설득법 |
복원 뒤 모습(2005년) 안네 프랑크와 언니 마르고트의 상징적 무덤 아넬리스 "아네" 마리 프랑크 (, , 1929년 6월 12일 ~ 1945년 3월 12일)는 독일의 유대인 소녀로 나치가 네덜란드를 지배한 시기에 쓴 일기로 유명하다. 그 일기는 한국어로는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Holländer Frank)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디트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여서-현대 유대교는 토라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는 정통주의 유대교, 토라의 느슨한 준수를 주장하는 개혁파 유대교로 구분된다. 큰 딸 마르고트와 작은 딸 안네도 어려서부터 시나고그에서의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여 유대교 신앙을 배웠다. 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교육, 교통, 거주지 등에서의 인종차별이 실시되고, 1938년 17세 소년 헤어쉘 그린츠판이 거주의 자유 박탈에 항의하다 파리주재 독일대사관 3등서기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테러를 가한 범죄인 수정의 밤 사건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홀로코스트)이 일어나자,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정책을 강제 추방에서 강제수용소 수용 및 학살로 바꿀만큼 유대인들의 망명을 좋아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재정후원이 있는 경우에만 어린이의 망명을 허락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홀로코스트를 묵인한 공범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몬테소리 학교에서 개별 자유 수업을 받았으며, 중학교는 유대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유는 1938년 이후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에서 소외시키려는 나치의 인종차별 실시로, 학교 진학에서도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살 생일에 (후에《안네의 일기》라고 불리게 된) 붉은 체크 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게 키티(Kitty)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은 서부 유럽으로 확대되어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중립국가임에도 점령하였고, 곧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가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에 대해 그리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7년 1월 26일자 《타임》에서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오토 프랑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사건이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만큼 위험한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되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선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에 있는 펙틴(과일잼에 들어가는 식재료)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고(오른쪽 그림의 화살표) 1942년 7월 5일에 자신의 가족을 그곳으로 피신시킬 준비를 하였다. 은신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안네가 일기장에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적었을 정도였으며,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이웃들도 안네 자매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끌려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만큼 보안도 완벽했다.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안네 일가는 새벽에 일어나 옷가지같은 생필품만 챙긴 채 은신처에 갔다. 도망가는 것을들킬까 봐 트렁크는 쓸수 없었다.차별 때문에 안네는 자동 전차를 타지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고 적었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 은신처에서 산 이들은 안네의 가족과 그의 이웃 유대인들(오토 프랑크의 사업을 돕던 판 단과 그의 가족, 치과 의사 뒤셀) 들을 포함한 총 8명이며, 약 2년 동안 생존을 위해 투쟁하였다. 식료품(주로 감자)와 생활용품)은 당시 오토의 공장에 종사했던 3명의 사무직원이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프 기스(Miep Gies)라는 처녀가 심부름을 해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안네의 표현을 빌면 쉴 틈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은신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 주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수과정으로부터 안네의 일기와 그가 습작한 글들을 몰래 빼돌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은신처에서 안네 일가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부친의 먹거리 장사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리던 은신생활 이전의 삶과는 달리 먹을 것, 속옷 등의 생활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부족했고, 같이 살기 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결점이 눈에 띄면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불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일기에는 자그마한 행복들도 보인다. 지하경제로 산 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만들어서 사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발효한 음식)와 같이 먹은 이야기, 불어, 영어,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한 이야기, 독후감, 딸기를 사서 먹은 이야기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행복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제복 경찰(Grüne Polizei)은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유대인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 화요일로 끝나 있다. 범우사에서 번역한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Bergen-Belsen)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해방되기 2달 전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언니 마르고트도 장티푸스로 죽었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안네가 상심이 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외 은신처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병이나 가스실에서의 학살로 죽었는데, 판단 씨 가족의 경우 부인은 안네와 마르고트와 같은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독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죽었고, 판단 씨는 가스실에서 학살되었으며, 안네의 남자친구였던 페터는 독일군의 수용자 강제이주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도 하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편집(안네의 성(性)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59년에는 조지 스티븐스(George Stevens) 감독이 안네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세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 6월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박물관(원래 명칭은 안네 프랑크 하우스 )은 그동안 전쟁문서연구원에 보존돼 온 안네의 자필 문서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영구 전시될 것이라고 하였다. 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자필 문서들은 안네가 1942년 7월 은거에 들어가기 한 달 전인 같은 해 6월 처음 쓰기 시작한 일기장, 역시 일기장으로 사용했던 2권의 학교 학습공책, 퇴고한 360매 분량의 원고이다. 안네의 취미는 영화감상이었다. 안네의 일기를 보면 명견 린 틴 틴이 나오는 영화를 생일날 친구들과 같이 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페트르 긴츠 홀로코스트 마르고트 프랑크 암스테르담 안네 기념관 한겨레 2007년 1월 27일자 국제란 기사-안네 프랑크의 아버지 편지 뉴욕서 발견, 가족 구하려는 필사노력 담겨져 있어... 안네의 생전모습을 담은 유일한 동영상. 영화 안네의 일기 분류:1929년 태어남 분류:1945년 죽음 분류:네덜란드의 일기 작가 분류:네덜란드의 어린이 분류:독일의 일기 작가 분류:독일의 어린이 분류:유대인 작가 분류:어린이 작가 분류:무국적자 분류:프랑크푸르트 출신 분류:독일계 네덜란드인 분류:유대계 네덜란드인 분류:유대계 독일인 분류:바이마르 공화국 사람 분류:네덜란드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제2차 세계 대전의 여자 분류: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수감자 분류: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 희생자 분류:티푸스로 죽은 사람 분류:20세기 네덜란드 사람 분류:20세기 독일 사람 분류:20세기 작가 |
안네의 일기 초판본 복사본 《 안네의 일기 》()는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국외 탈출에 실패한 아버지의 결단으로 2년간 은신 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이며, 일기장을 키티 라고 부르며 친구에게 말하듯이 써내려간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일부내용은 은신 생활에 들어가기전의 내용(독일과 네덜란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지만, 대다수 내용은 은신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썼고, 네덜란드어 판은 1947년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일부 원고 편집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1995년 한국어판으로 무삭제 원고를 완역되어, 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되었다. 1944년 8월 4일 독일 비밀경찰이 안네 일행이 살던 곳을 알아내 그 일행은 모두 붙잡혔고 그 뒤 안네는 다음해 3월 수용소에서 16살의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안네는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적은 일기도 퇴고해서 새로 적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기에는 오리지널 일기와 자신이 정서한 개정판 원고의 두 가지가 있다. 이 원고들은 어느쪽이건 완전한 책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사후에 출간된 책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양쪽을 상호 보완하는 형태로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이 편집의 도중에 안네가 기술한 내용 중, 사춘기 소녀다운 성적 호기심이나 지루한 에피소드, 어머니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제 3자들에 대한 비판은 일부 삭제나 정정이 있었다. 그런데 안네 프랑크가 유명해지면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안네의 일기가 허구이며 안네는 실존하지 않았거나 일기의 내용이 부친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58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안네가 실존했다면 안네를 체포한 인간을 찾아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나치 헌터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은 게슈타포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SD 상사였던 카를 질베바우어를 1963년에 찾아내어 안네가 실존했음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인터뷰에서 실베바우어는 그가 전시중에 SD에서 일했음을 시인했고 안네 프랑크의 사진을 보고 그가 체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인정했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에게서 압수한 물건을 담는 가방에서 안네의 일기장을 빼내는 것을 보았다고 한 그의 진술은 오토 프랑크의 진술과 합치했다.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끈질기게 안네의 일기가 허구라는 주장을 계속했으며 1970년대에 영국의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윙은 일기가 가짜라고 주장했고 1976년에 일기가 허위라는 팜플렛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배포하던 네오나치주의자 에른스트 뢰머와 에드거 가이스가 체포되었을때 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재판중에 오토 프랑크의 의뢰를 받은 역사가 팀이 원본을 정밀 조사하여 일기가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1978년 뢰머와 가이스가 상소하면서 독일 내무성 소속 범죄조사국(Bundes kriminalamt BKA)은 원본의 종이와 잉크에 대한 과학 분석을 실시해서 "일기를 적을 때 사용한 잉크는 전시중의 것이지만 나중에 기입된 정정사항들은 흑, 녹, 청 볼펜으로 기록된 것이다"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BKA는 이에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일기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볼펜은 1950년대에나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일기가 허위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받아들였다. 1986년 일기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전시자료 연구소는 보다 상세한 과학적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BKA에게 볼펜으로 기술된 부분을 지적할 것을 요구했으나 BKA는 그 부분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추후의 조사를 통해서 볼펜으로 기입된 종이 두 장을 발견했으며 1987년 함부르크의 심리학자로 필적 감정 전문가인 한스 오클먼은 그의 어머니인 도로시 오클먼이 미나 베커와 공동으로 일기를 조사했을 때 그 볼펜의 텍스트를 기입했음을 밝혀내어 일기의 진위에 대한 의문점은 해결되었다. 2003년에 출간된 수정판 일기에서는 논란이 된 두 장의 종이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소설가 가람 이병주는 역사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권위주의와 폭력을 비판하는 소재로 《안네의 일기》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인용했다. 분류:1947년 책 분류:일기 분류:네덜란드의 책 분류:유대 문학 분류:홀로코스트 문학 분류:세계기록유산 분류:안네 프랑크 |
둥젠화(2011년) 둥젠화 (동건화, , 상하이어 퉁치화 , 1937년 7월 7일 ~ )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반환 이후 초대 행정장관을 지냈다. 1996년에 위임하여 1997년 7월 1일 홍콩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으로 취임했다. 2002년 재선되었으나 5년 임기를 채우기 전인 2005년 3월 12일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사임했다. 현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역임하고 있다. 분류:1937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중국의 기업인 분류:홍콩의 정치인 분류:홍콩의 억만장자 분류:홍콩의 불교 신자 분류:리버풀 대학교 동문 분류: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구성원 |
음높이 또는 피치 (pitch)는 음의 높낮이를 가리키는 음악용어다. 보통 A4, B3과 같은 표기법을 사용하거나 Hz로 표기한다. 악보에서는 음높이를 줄과 칸으로 표현한다. 음의 진동수가 클수록 음높이는 높아지며, 진동수가 2배가 되면 한 옥타브 높은 음이 된다. 지역별 시대별로 여러 표준 음고가 있었지만 현재는 보통 1939년 런던 국제회의에서 정한 A4 = 440 Hz(듣기)를 사용한다. 진동수 분류:소리 분류:음악 이론 |
리히텐슈타인 후국 ()은 중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다.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1866년 군대를 폐지한 이후로, 국방은 스위스에 의지하고 있다. 또한 1919년 협약에 의해, 따로 정하지 않은 경우에, 제3국에서 스위스 대사가 리히텐슈타인을 대표하여 외교행위를 할 수 있다. 주요 언어는 독일어이고, 국민 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이다. 1699년 리히텐슈타인 후작인 한스아담 1세, 셸렌베르크를 구입. 1712년 파두츠 백작령을 구입. 1719년 1월 23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의 명에 의하여 통일되어 리히텐슈타인 후국 을 형성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 직속이 된다. 1806년 라인 동맹에 가맹. 1815년 독일 연방에 가맹. 1852년 오스트리아와 관세 동맹을 맺다. 1866년 독립. 1867년 영세 중립국이 됨. 1990년 유엔에 가입. 면적은 남북으로 25km, 동서로 6km 정도 뻗어 있으며 세계에서 6번째로 작은 나라이다.(또한 유럽에서는 4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인구는 약 3만 명 정도이다. 독일의 슈베비슈 알프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다. 서쪽은 스위스, 동쪽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다. 국경의 길이는 77.9km이다.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세계에서 둘 밖에 없는 이중 내륙국 가운데 하나이다. 평야지대는 기후가 다소 온화하여 1월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2도~0도, 7월 평균기온은 15도~18도이며, 푄 현상의 피해를 자주 입는다. 연강수량은 평야부에서 800mm, 산릉부에서는 2,600mm에 이른다. 원수 한스아담 2세 헌법 1921년 10월 제정 의회 단원제, 정원 25명, 임기 4년 주요 정당 진보시민당( FBP ) 여성참정권은 1984년 국민 투표로 인정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의 행정 구역은 11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 파두츠 ( ) 샨 ( ) 발처스 ( ) 트리젠 ( ) 에셴 ( ) 마우렌 ( ) 트리젠베르크 ( ) 루겔 ( ) 감프린 ( ) 셸렌베르크 ( ) 플랑켄 ( ) 리히텐슈타인의 산업구조는 2006년 기준 1차산업 2%, 2차산업 45%, 3차산업 53%이며 협소한 국토, 빈약한 부존자원 및 소규모 인구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는 스위스와의 관세동맹, EFTA 가입 및 EEA협약 서명 등 적극적인 대외개방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이같은 대외개방정책과 함께 국내정치 안정, 유리한 세제 및 편리한 교통 등의 조건이 약 1,600여 개의 기업 활동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주고 있다. 국내 노동력이 부족하여 2만 9천여 명의 노동자 중 1만 3천여 명이 스위스, 오스트리아 및 독일에서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2001년). 농업 부문은 밀을 약간 수입하는 것 이외는 국내에서 자급자족하고 있다. 포도와 포도주, 그 밖에 과실 등이 많이 산출되며, 목초지가 잘 정비되어 축산이 활발하다. 공업에 대한 의존도도 크며, 지금까지의 방직·피혁 이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근대화정책으로 금속가공업, 직물, 화학, 현미경·고주파기·광학기기 등의 정밀기계, 난방기기, 화학제품, 소시지가공, 전지, 제지업, 건축자재 접착기술(Hilti AG), 보일러(Hoval AG), 치과의료기(Ivoclar AG), 금속표면보호(Balzers) 등의 업종이 발달하였다. 또 아름답기로 소문난 우표의 매상이 많아 국고수입의 1/3을 차지할 정도이며,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항상 파두츠의 우체국에 몰린다. 1999년 3월 말에 스위스의 스위스콤이 민영화함에 따라 1921년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이 맺은 우편·전화협정은 효력이 없어졌으며, 리히텐슈타인은 1999년 4월 우편공사를 설립하였다. 세금 부담이 매우 가볍기 때문에 외국자본이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있으며, 수도인 파두츠에는 2,000개 이상의 회사들이 등록을 해놓고 있다. 최근 전반적으로 경제가 호조를 보이고 있으며 실업률이 1999년 2.0%에서 2002년 1.3%로 감소하였다. 1996년 수출은 24억 7000만 달러, 수입은 9억 173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전자계측기, 정밀기계, 치과용기기, 우표, 하드웨어, 도자기 등이며 , 수출상대국은 EU 62.6% (독일 24.3%, 오스트리아 9.5%, 프랑스 8.9%, 이탈리아 6.6%, 영국 4.6%), 미국 18.9%, 스위스15.7% (2004)이다. 수입품은 기계, 금속 등이고 주요 무역 상대국은 EU(61%)와 EFTA(유럽자유무역연합)국가들이며 특히 스위스(16%)와의 거래가 많다. 음악분야에서는 프란츠 리스트의 친구이자 저명한 작곡가 험퍼딩크(Humperdinck)의 스승이기도 한 작곡가 조셉 가브리엘 라인베르거(Joseph Gabriel Rheinberger:1839~1901)가 유명하다. 리히텐슈타인에는 유명한 음악가뿐 아니라 많은 음악협회나 합창단들이 있는데 그 수가 400개 이상에 이른다. 또한 리히텐슈타인 음악학교는 국립재단으로 열성적으로 음악사업을 육성하며 국제적 마스터 코스 로 잘 알려져 있다. 미술분야에서는 플라스틱 아트로 유명한 게오르크 말린(Dr. Georg Malin)이나 브루노 카우프만(Bruno Kaufmann)등이 유명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도 활발하여 정부에서는 Art on Buildings 법률로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은행이나 기업들도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부활절 전에 푼켄존탁(Funkensonntag;Spark Sunday)이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일종의 마녀 화형식에서 유래하였으며 공공축제이면서 마을 간 대항전이기도 하다. 리히텐슈타인인의 90%가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기 때문에 많은 전통이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8월 15일 등 로마 가톨릭교회에 따른 기념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전체 종교인의 87%를 차지한다. 그외 개신교는 7.2%, 이슬람은 5.4%이다. 국가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프로 축구 리그가 없는 나라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축구 클럽은 스위스의 축구 리그에 참여한다. 리히텐슈타인의 외교는 스위스가 대신한다. 리히텐슈타인은 대한민국과 1993년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주스위스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국제 사회상에서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때는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IOC 정회원국으로서 선수 및 임원단을 서울에 파견하기도 했다. 리히텐슈타인 정부 공식 사이트 분류:독일어권 분류:내륙국 분류:입헌군주국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유럽 평의회 회원국 분류:후국 분류:독일 연방 가맹국 분류:신성 로마 제국의 후국 분류:라인 동맹 가맹국 |
칼 폰 린네의 초상화 칼 폰 린네의 서명 칼 폰 린네 ( , 1707년 5월 23일 ~ 1778년 1월 10일) 또는 카롤루스 린나이우스 ()는 스웨덴의 식물학자로서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현대 ‘식물학의 시조’로 불린다. 귀족이 되기 전 이름은 ‘카를 린나이우스(Carl Linnæus)’이고, 스스로는 라틴어 이름인 ‘카롤루스 린나이우스(Carolus Linnæus)’를 썼다. 웁살라 근교, 로스폴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룬트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신학교수이자 식물학자인 셀시우스의 소개로 웁살라 대학교의 식물학자인 루드베크의 조수가 되었다. 1735년, 네덜란드의 하르더르베이크 대학교에서 의학 학위를 땄다. 이 곳에서 식물의 관찰, 분류학상의 문제에 대한 연구에 종사하다가 1738년 귀국, 《자연의 체계》, 《식물의 종(種)》을 저술하고, 약 4,000종의 동물, 5,000종의 식물을 다루었다. 속명 다음에 종명 형용사를 붙여서 두 말로 된 학명을 만드는 이명법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변종에 대한 개념도 제시했다. 투르느폴 밑에서 일하던 바이언의 저작에서, 수술의 중요성을 알고, 수술의 수로 강을 나누고 암술의 수로 목을 나누는 암수술 체계를 만들었다. 《자연 분류법 단편》을 초하여 식물 분류에 통일성 있는 원리를 만들려 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이것은 베르나르드 주쉬와 그의 조카인 앙트와느에 의해 계승되어 완성되었다. 칼 폰 린네는 1707년 5월 23일에 스웨덴의 스텐브로훌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닐스 린네우스와 크리스티나 브로델소니아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혈통에서 처음으로 정립된 성씨를 사용한 사람이었다. 닐스 린네우스가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룬드 대학교에 입학하던 청년 시절, 그에게는 하나의 성이 필요했고, 닐스 린네우스는 자신의 스웨덴 농가에서 자라나던 라임 나무의 라틴어인 Linnaeus을 성으로 삼았다. 이후 린네가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은 아버지의 성을 써서 칼 린네우스라고 지어졌다. 린네의 이 라틴어 이름 Linnaeus는 ae 합자로 쓰였는데, 인쇄물이나 손 글씨로도 항상 자신의 이름을 ae 합자로 서명했다. 린네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는 아마추어 식물학자였고, 루터교의 성직자였으며 마을의 부목사였다. 린네의 어머니 크리스티나 브로델소니아는 스텐브로훌트의 교구 목사 사무엘 브로델소니우스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이후 세 명의 딸과 아들 한 명을 더 낳았다. 아들은 사무엘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텐브로훌트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는 양봉에 대한 저서 또한 썼다. 칼 린네가 태어난 다음 해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사무엘 브로델소니우스가 죽고, 그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가 그곳의 교구목사가 되었다. 칼 린네는 어릴 때부터 식물, 특히 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닐스 린네우스는 자신의 아들인 린네와 함께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꽃을 좋아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꽃을 자주 보여주며 꽃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린네는 식물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칼 린네의 아버지는 린네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라틴어, 종교, 지질학 등을 가르쳤다. 칼 린네가 7살이었을 때, 닐스 린네우스는 선생 한 명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칼 린네의 부모는 그 지역의 자작농의 아들이었던 요한 텔란더에게 린네의 교육을 맡기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칼 린네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훗날 린네의 자서전에는 요한 텔란더가 ‘아이의 재능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 텔란더는 린네를 2년 정도 가르쳤는데, 이후 그는 벡셰에 있는 초급 그래머 스쿨(Lower Grammer School) (1717)에 보내졌다. 당시 린네는 공부보다는 식물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기보다는 주로 시골로 식물을 보러 다니는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했다. 15세에 최고학년이 된 린네는 교장 선생님이었던 다니엘 란네루스에게 지도받았다. 식물학에 관심이 있었던 교장 다니엘 란네루스는 린네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을 알아차리고 린네에게 그의 정원을 관리하게 했다. 또, 그는 린네에게 스몰란드의 주 의사이자 벡셰 김나지움에서 선생님을 하는 요한 로스만을 소개해주었다. 칼 린네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은 식물학자였던 요한 로스만에 의해 크게 키워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성 생식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또 린네가 약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1724년에 벡셰 김나지움에 입학한 린네는 그리스어, 히브리어, 신학, 그리고 수학을 본격적으로 배워나갔다. 이 커리큘럼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자 하는 아이들을 위해 체계화 된 것이었다. 김나지움에서의 마지막 해에, 칼 린네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는 그의 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선생님들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다. 당황스럽게도 닐스 린네우스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에게서 칼 린네가 절대 장학생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요한 로스만은 다른 선생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칼 린네에게 약학에 큰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요한 로스만은 닐스 린네우스에게 린네를 로스만의 가족과 함께 살게 하면서 생리학과 식물학을 배우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닐스 린네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룬드 대학교 본관 요한 로스만은 린네에게 식물학이 진지한 학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 먼저 그는 린네에게 투르네포르의 시스템에 의해 식물을 분류하는 법을 가르쳤고, 이후에는 린네가 세바스챤 바일란트로부터 식물의 성(性)에 대해 배웠다. 1727년에 21세의 청년이 된 칼 린네는 스코네에 있는 룬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 버전인 Carolus Linnaeus 로 등록하였고, 이 이름은 훗날 린네의 저서의 라틴어 출판본에 쓰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만난 교수 킬리안 스토바에우스는 자연 과학자이자 의사이고, 역사학자였던 그는 린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린네에게 교습과 숙박을 제공했고, 식물학에 대한 많은 책이 있는 그의 도서관을 사용하는 것 또한 허락해 주었다. 또 그는 린네에게 강의의 무료입장권도 주었는데, 이러한 많은 도움 아래에서 대학 생활을 한 칼 린네는 같은 취미를 가진 학생들과 함께 스코네의 식물군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나갔다. 웁살라 대학교 본관 1728년 8월, 린네는 그가 약학과 식물학을 모두 공부하는 것을 제안했던 요한 로스만의 조언에 따라 웁살라 대학교에 진학했다. 웁살라 대학에는 식물원이 있었는데, 린네는 곧 거기에 매료되었다. 웁살라 대학의 식물학, 동물학, 약리학과 해부학 강의는 그리 좋은 수준이 아니었지만, 린네는 그곳에서 올로프 셀시우스라는 새로운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올로프 셀시우스는 신학 교수이자 아마추어 식물학자였다. 그는 린네를 그의 집에 받아들여주었고, 덕분에 린네는 당시 스웨덴에서 제일가는 식물학 도서관이었던 올로프 셀시우스의 도서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729년에 칼 린네는 Praeludia Sponsaliorum Plantarum 이라는 식물의 성(性)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교수 루드베크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2학년 밖에 안 된 칼 린네에게 대학의 강의를 맡겼다. 칼 린네의 강의는 인기가 있어 30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곤 했다. 같은 해 6월에 린네는 루드베크의 24명의 아이들 중 3명의 교사를 맡기 위해 올로프 셀시우스의 집에서 루드베크의 집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올로프 셀시우스와 린네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고, 서로의 식물학적 탐구를 계속해서 지지했다. 그 해 겨울, 투르네포르의 분류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한 린네는, 자신의 새로운 분류 체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술과 암술의 숫자를 기준으로 식물들을 분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꽃의 해부학을 담은 Adonis Uplandicus 라는 식물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1731년 3월, 루드베크의 전 조수인 닐스 로젠이 약학 학위를 가지고 대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해부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고 린네의 식물학 강의를 빼앗으려 했지만, 루드베크가 이를 막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린네는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그의 부모님과 만났다. 린네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지만, 그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격려했다. 린네는 부모님의 집을 방문했을 때, 라플란드로 여행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린네보다 앞서 루드베크가 1695년에 같은 여행을 했었는데, 그 당시 탐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불에 타 없어져버린 상태였다. 린네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식물, 동물, 그리고 가능하다면 값비싼 광물을 찾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원주민인 사미인의 관습에 대해 궁금해 했다. 사미인은 스칸디나비아의 넓은 툰드라를 방황하는 순록을 목축하는 유목민들이다. 1732년 4월, 린네는 웁살라의 왕립 과학회에서 그의 여행을 승인받았다. 린네는 5월에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그의 저널을 가지고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가끔씩 그는 길에서 꽃이나 돌을 관찰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이끼와 지의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지의류는 라플란드에 서식하는 순록의 주요 식단이다. 린네는 보트니아 만의 해안을 시계방향으로 여행하며 우메오, 룰레오, 토르니오에서 주요한 내륙 관찰을 했다. 그는 10월에 2000 km 정도 되었던 원정에서 돌아왔다. 그는 많은 식물, 조류와 돌 등을 모으고 관찰했다. 라플란드는 비교적 제한적인 종을 가진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린네는 그 곳에서 약 100여 종의 알려지지 않은 식물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의 책 《라포니카 식물상》( Flora Lapponica )의 기초가 되었다. 식물학계에서는 그의 저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린네가 포유류의 분류에 대해 통찰력을 얻은 것도 이 여행 도중이었다. 여행 중 길에 서 있던 말의 아래 턱 뼈를 살피던 중 린네는 “내가 모든 동물이 치아의 종류와 개수, 유두의 개수와 위치를 알면 나는 아마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네 발 짐승의 분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1733년에는 웁살라 대학에서 광물학 강의를 했다. 1734년, 린네는 몇 명의 학생들과 함께 광산지역인 달라나 원정을 갔다. 이 원정은 달라나 정부에 의해 후원받았고, 기존의 자연물을 분류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로로스의 노르웨이 광산업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린네가 웁살라에 돌아갔을 때, 그와 닐스 로젠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팔룬에서 자신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자는 클래스 쇼흘버그이라는 학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광산 검열관이었던 쇼흘버그의 아버지는 린네가 팔룬 근처의 광산을 방문할 수 있게 해주었다. 클래스 쇼흘버그의 아버지는 린네에게 쇼흘버그를 네덜란드로 데려가 그를 가르칠 것을 제안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자연사를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장소 중 하나였으며 스웨덴 인들이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주로 가는 곳이었다. 린네는 평소에 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쇼흘버그 아버지의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735년 4월, 린네와 쇼흘버그는 네덜란드를 향해 출발했다. 린네는 하르더르웨이크 대학교에서 약학 박사 과정을 밟기로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로 가던 길에 그들은 함부르크에 들러 시장을 만났는데, 시장은 그들에게 머리가 7개인 히드라의 유해의 박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린네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 박제에는 족제비의 발톱이 달린 발, 그리고 뱀의 피부가 붙어있었다. 린네는 자신의 관찰 결과를 공표했고, 그 히드라를 비싼 가격으로 팔려던 시장의 계획은 망쳐졌다. 이 때문에 시장의 분노를 살 위기에 놓인 린네와 쇼흘버그는 함부르크를 재빨리 떠나야만 했다. 린네가 하르더르웨이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로 학위를 따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하르더르웨이크는 1주만에도 ‘인스턴트 학위를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일 먼저 그는 스웨덴어로 작성한 말라리아의 원인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고, 대중 토론에서 자신의 논문 내용에 오류가 없음을 보였다. 다음 단계는 구두 심사를 받고 환자를 진찰하는 것이었다. 2주도 되지 않아 린네는 학위를 받았고, 28세의 나이에 의사가 되었다. 같은 해 여름에 린네는 웁살라에서 사귄 친구인 피터 아테디를 만났는데, 웁살라를 떠나기 전 그들은 한 명이 먼저 죽는다면 다른 한 명이 죽은 사람의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10주 후에 아테디는 암스테르담의 운하 중 하나에서 익사했고, 어류의 분류에 대한 그의 미완성 원고는 린네에게 남겨졌다. 린네는 헤르만 부르하베라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저명한 물리의사이자 식물학자를 만나게 되었다. 부르하베는 린네에게 남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여행할 기회를 주었지만 린네는 자신이 그곳의 더위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부르하베는 린네에게 그가 요하네스 버만이라는 식물학자를 만나야 할 것을 제안했는데, 린네를 만나고 그의 지식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버만은 겨울 동안 린네와 함께 지내며 서로의 연구를 도왔다. 요하네스 버만과 함께 지내던 동안, 린네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이사이자 하테캠프에 있는 큰 식물 정원의 주인인 조지 클리포드 3세를 만났다. 클리포드는 린네의 식물 분류 능력에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를 자신의 의사이자 정원의 관리자로 초청했다. 린네는 버만와 겨울 동안 함께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클리포드는 버만에게 한스 슬론 경의 《Natural History of Jamaica》라는 귀한 책을 주면서 린네를 보내줄 것을 설득했고, 결국 요하네스 버만은 린네가 조지 클리포드에게 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1735년 9월 24일, 린네는 하테캠프의 식물 관리자이자 주치의가 되었고, 그가 원하는 어떤 책이나 식물도 살 수 있게 되었다. 1736년 7월, 린네는 조지 클리포드의 자금으로 영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는 첼시 피직 가든과 그 관리자인 필립 밀러를 보기 위해 런던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린네는 밀러에게 《Systema Naturae》에 있는 자신의 새로운 식물 세부분류법을 가르쳤다. 필립 밀러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 때부터 린네의 시스템에 따라서 자신의 정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린네는 식물학자인 요한 제이콥 딜레니우스를 만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에도 갔다. 하지만 린네는 딜레니우스에게 자신의 시스템을 공용으로써 받아들이게 하는데 실패했다. 영국 여행을 끝마친 린네는 많은 희귀 식물종들을 가지고 하테캠프로 돌아왔다. 다음 해, 그는 《Genara Plantarum》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935 속의 식물을 묘사했고, 얼마 되지 않아 《Corollarium Generum Plantarum》이라는 책으로 60가지 추가 속을 보충했다. 린네가 하테캠프에서 이룬 업적은 그곳의 식물들의 분류를 담은 새로운 책인 《Hortus Cliffortianus》를 출판하도록 했다. 그는 이 책을 9개월 만인 1737년 7월에 완성했지만, 1738년까지 출판되지는 않았다. 이 책은 낭상엽 식물의 속인 네펜데스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쓴 책이다. Nepenthes bellii 린네는 1737년 10월 18일까지 하테캠프에서 클리포드와 함께 있었는데, 이후에 그는 그 곳을 떠나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병과 네덜란드 친구들의 친절은 그를 네덜란드에 몇 달 더 머물게 했지만, 1738년 5월에 그는 다시금 스웨덴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1달 정도 파리에 머물렀고, 안토니 쥐시외 등의 식물학자를 만났다. 그는 돌아온 뒤 다시는 스웨덴을 떠나지 않았다. 린네가 1738년 6월 28일 스웨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팔룬으로 가서 사라 엘리자베스 모라에아와 약혼했다. 린네는 그의 후원자가 되어준 카를 구스타프 테신 백작과 만났는데, 백작은 해군 본부에서 린네가 의사직을 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에 그치지 않고 스톡홀름에 있는 동안 린네는 스웨덴 왕립 과학 한림원을 창설하도록 도왔고, 제비뽑기를 통해 첫 번째 대표가 되었다. 그의 경제 사정이 한 가정을 지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약혼녀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린네의 결혼은 1739년 6월 26일에 이루어졌다. 7년 후에 사라 모라에아는 첫 아들인 칼을 낳았고, 그로부터 2년 후에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나라는 딸을, 그 다음 해에는 사라 마그달레나라는 딸을 낳았다. 안타깝게도 사라 마그달레나는 생후 15일 만에 죽었다. 린네는 이후 로비사, 사라 크리스티나, 요하네스와 소피아라는 네 명의 아이를 더 갖게 된다. 1741년 5월, 린네는 웁살라 대학의 약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약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곧 다른 약학교수와 자리를 바꿔 식물학과 자연사, 식물학 정원을 대신 맡게 되었다. 그는 정원을 철저하게 재건하고 확장했다. 이렇게 웁살라에서 자리를 잡게 된 린네는, 같은 해 10월에 그의 아내와 9살 된 아들과 함께 웁살라에서 살게 되었다. 린네는 교수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을 찾기 위해 욀란드와 고틀란드에 갔다. 먼저 욀란드로 가서 6월 21일까지 머물렀고, 이후 고틀란드에 1달 쯤 머물다가 웁살라로 돌아왔다. 이 원정을 통해 린네와 그의 학생들은 약 100여종의 기록되지 않은 식물을 찾았다. 이 원정에서 관찰된 것은 훗날 Olandskaoch Gothlandska Resa 에 출판되었다. 라포니카 식물상과 같이, 이 책은 동물학적, 식물학적 관찰을 모두 담고 있었고, 욀란드와 고틀란드의 문화에 대한 관찰도 담고 있었다. 1745년 여름, 린네는 《Flora Suecica》와 《Fauna Suecica》라는 두 책을 더 집필했다. 《Flora Suecica》는 식물학 책이었고, 《Fauna Suecica》는 동물학에 관한 책이었다. 안데르스 셀시우스는 1742년에 그의 이름을 딴 온도 스케일을 만들었다. 초기 셀시우스의 스케일은 현대와 반대로, 끓는점을 0도로, 어는점을 100도로 설정하였다. 1745년, 린네는 이 스케일을 돌려서 지금 쓰는 표준 스케일로 만들었다. 1746년 여름, 린네는 정부에 의해 스웨덴의 바스터고틀랜드로 다시 원정을 나가게 되었다. 그는 6월 12일에 웁살라를 떠나 8월 11일에 돌아왔다. 린네는 이전 원정에서 함께 했던 에릭 구스타프 리드벡이라는 학생과 함께 스웨덴에 갔다. 다음 해 그는 이 원정에서 발견한 새로운 것들을 담아 Wastgota-Resa 라는 책을 출판했다. 린네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정부는 린네에게 최남단인 스카니아로 다시 원정을 떠날 것을 제안했지만, 그가 너무 바빴기 때문에 이 일정은 연기되었다. 1747년, 린네는 스웨덴의 왕 아돌프 프레드릭으로부터 최고 의사를 나타내는 “Archiater”라는 작위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그는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49년 봄, 린네는 드디어 스카니아로 원정을 갔다. 그는 올로프 소더버그라는 학생과 원정을 함께 했고, 스카니아로 가는 길에 스텐브로훌트에 있는 남매들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이 원정은 이전의 원정과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추가로 호두나무와 스웨덴산 마가목류를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이 나무들은 군대에서 라이플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린네의 관찰 결과는 다음해에 출판되었다. 1750년, 린네는 웁살라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아마 그가 웁살라에 있는 시간 동안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린네의 많은 학생들은 세계의 다양한 곳으로 원정을 다니며 식물 샘플들을 수집했다. 린네는 이 학생들 중 우수한 학생들을 그의 Apostle, 즉 사도라고 불렀다. 그의 강의는 대부분의 경우에 크게 인기가 있었고, 식물 정원에서 진행되었다. 린네는 학생들에게 자기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과 다른 사람을 신봉하지 말라는 것을 많이 가르쳤다. 린네의 강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은 여름 매주 토요일 이루어지는 식물학 교외활동이었다. 린네와 그의 학생들은 식물과 동물을 웁살라 근교에서 관찰했다. 린네가 웁살라 대학교의 교수이자 총장으로 있었을 당시, 그를 따르던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들 중 특별한 17명을 뽑아 "Apostles"라고 칭했다. 그들은 가장 유망하고 열성적인 학생들이었는데, 그들 모두는 린네의 도움을 받아 세계 곳곳으로 식물학 탐사를 다녔다. 그는 자신의 총장으로서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제자들의 원정에 장학금과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제자들에게 그는 여정에서 무엇을 찾아보아야 할지 설명을 제시했다. 제자들은 린네의 분류체계에 따라 새로운 식물, 동물 그리고 광물들을, 곳곳에서 모으고 정리했다. 원정이 끝나면 그들은 수집물들을 린네에게 제공하였다. 린네가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들의 원정 덕분에 범세계적인 린네의 분류법을 만들 수가 있었다. 영국인 식물학자 윌리엄 스턴은, 제자들의 공로가 없었다면 린네의 새로운 분류 체계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제자들은 원정을 하는 과정 중에 생을 마감했다. 첫 번째 제자 크리스토퍼 탄스트롬은 아내와 자식들을 둔 43세의 사제로서 1746년에 그의 원정을 시작했다. 탄스트롬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같은 해에 열대 지방의 풍토병에 걸려 콘손 섬에서 사망하였다. 탄스트롬의 부인은 린네에게 자신의 남편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는데, 이는 훗날 린네로 하여금 젊고, 미혼인 제자들을 식물학 원정에 보내기를 선호하게 했다. 훗날 피터 포스칼와 페르 로플링을 포함하여 6명의 제자가 추가로 원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탄스트롬이 원정을 다녀오고 2년이 지난 뒤, 핀란드 출신의 페르 캄이 두 번째로 북미에 원정을 가게 되었다. 그는 북미에서 2년 6개월을 지내면서 그곳의 식물과 동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린네는 캄이 많은 꽃과 씨앗들을 가지고 돌아와 아주 기뻐했다. Species Plantarum 에 소개되어 있는 700여종 중 90종은 캄이 원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니엘 솔란더와 요셉 뱅크스는 제임스 쿡과 함께 호주 원정을 떠났다. 다니엘 솔란더는 자신이 웁살라의 학생으로 있었을 때 린네의 집에서 살았었다. 린네는 그에게 자신의 장녀와의 결혼을 약속할 만큼 그에게 애정이 있었다. 또 린네의 추천으로 솔란더는 1760년에 영국으로 원정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는 영국인 식물학자 요셉 뱅크스를 만났다. 이후 뱅크스와 솔란더는 제임스 쿡의 원정에 합류하여 1768-71년에 오세아니아에 다녀왔다. 솔란더 이외에도 제임스 쿡과 함께 원정을 다녀온 제자는 이후에도 더 있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었던 제자는 1770년부터 9년간의 원정을 다녀온 카를 피터 툰베리일 것이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3년간 지낸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내의 모든 외국인들은 데지마 섬에서 지내야만 했는데, 이 때문에 툰베리는 식물군에 대한 연구를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통역가들을 설득함으로써 다양한 식물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자신도 델리마의 정원에서 식물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린네가 죽은 다음 해인 1779년에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린네 정원 린네는 웁살라가 너무 시끄러우며 건강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느껴, 1738년에 두 농장을 샀다. 그 농장의 이름은 함마르비와 사브자이다. 다음 해인 1739년, 그는 옆에 있는 에데비 농장도 샀다. 그는 함마르비에서 가족과 여름을 보냈다. 처음 그곳에는 작은 1층집 밖에 없었지만, 몇 년 뒤인 1762년에는 새롭고 큰 집을 추가하였다. 함마르비에서 린네는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정원을 만들었다. 또 1766년에 그는 함마르비 뒤에 있는 언덕에 박물관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곳으로 그의 도서관과 식물 컬렉션을 옮겼다. 이는 웁살라의 3분의 1 정도를 파괴하고 그의 주택을 위협한 불 때문이었다. 1735년 《Systema Naturae》가 처음 출간된 후 이 책은 몇 번이나 확장되고 재판되어, 10판이 1758년에 나왔다. 이 판은 동물학적 명명법의 시발점이 되었다. 1757년, 스웨덴의 왕 아돌프 프레드릭은 린네를 귀족으로 인정했고, 1761년에 작위를 받았다. 작위를 받으며 그는 칼 폰 린네(Carl von Linne)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린네는 Linnaeus를 줄이고 프랑스화한 것이다. 독일 타이틀 von은 그의 작위를 상징한다. 작위를 받은 후에도 린네는 가르치는 일과 집필을 계속했다. 그의 명성은 전 세계에 퍼졌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캐서린 2세는 그녀의 나라인 러시아에서 얻을 수 있는 씨앗을 보내주었다. 그는 지오바니 안토니오 스코폴리와도 교류했다. 그는 의사이자 식물학자였다. 스코폴리는 그의 모든 연구, 발견과 해석을 서로 나누었다. 린네는 그를 매우 존중했고, 그의 업적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린네와 스코폴리는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린네는 1763년에 스웨덴 왕립 과학 한림원에 대한 의무를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과 같이 10년 이상을 그곳에서 일했다. 이후 린네는 건강상의 이유로 웁살라 대학에서 1772년 12월에 사퇴했다. 린네는 그의 말년에 건강상의 문제에 시달렸다. 그가 1764년에 걸린 심각한 병은 로젠의 치료 덕분에 이겨 낼 수 있었다. 1773년에는 좌골 신경통을 앓았고, 그 다음해에는 발작을 일으킨 후에 몸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는 1776년 두 번째 발작을 일으켰고, 오른쪽 몸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며, 기억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감탄했지만, 그 글이 자신이 쓴 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1777년 12월에, 그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몸이 매우 약해졌다. 결국 1778년 1월 10일에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린네는 함마르비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1월 22일 웁살라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도서관과 수집품은 그의 아내 사라와 아이들에게 남겨졌다. 조셉 뱅크스라는 영국인 식물학자는 그의 수집품을 사고자 했지만, 린네의 아들 칼이 거절하고 수집품을 웁살라로 옮겼다. 하지만, 1783년 칼이 죽고 사라가 수집품을 물려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조셉 뱅크스에게 팔고자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뱅크스가 그것들에 흥미를 잃은 이후였다. 대신 그의 지인이 수집품을 사기로 했다. 그는 24세의 의학과 학생인 제임스 에드워드 스미스로, 모든 수집품을 구입했다. 수집품은 총 14000여개의 식물, 3198개의 곤충, 1564개의 갑각류, 3000개의 편지와 1600권의 책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5년 후, 스미스는 영국 린네 협회(Linnean Society of London)를 창설했다. 폰 린네라는 이름은 그의 아들 칼이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세대에서 사라졌다. 다른 아들인 요하네스는 3살에 죽었다. 린네의 딸 중 2명은 현재 200명 이상의 린네의 후손을 남겼다. 생명의 분류라는 제도는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물질, 또는 생겨난 물질을 형이상학적 방법으로써 첫 번째로 분류하여 발표한 사람이다. 분류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물질, 종, 속과 같이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단어를 제공하였다는 점과, 그의 제도가 린네에 의해 개조되어 보다 일반적인 모습으로 계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에 린네가 식물에 대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의 생식 방법에에 대한 관찰 등을 포함하여 동물들과 그 분류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대한 분류는 현대에 와서 주로 쓸모없는 추가적 정보로 취급되거나, 잊혀지게 되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분류는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제일실체는 철수, 영희와 같은 존재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제이실체는 사람인 철수와 영희 와 같이 제일실체의 일부분에 대한 서술로, 그에 대한 성질이나 특성 같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피터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사람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이실체라 말할 수 있는 특성은 한낱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종이란 각각의 생명체에 대한 가장 참된 제이실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동물이지만 모든 동물이 인간인 것은 아니다. 또한 속이 종을 포함한다는 것은 자명한 관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을 포함하는 무한히 많은 개수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속이 발견될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린네의 분류체계 처럼 종을 문이나 강 등의 더 상위 구조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제이실체는 같은 속 안에서 특정한 차이점(종차)을 이용하여 하나의 종을 다른 종 과 구분 짓는다. 따라서 사람은 여러 일반적인 항목에서 나타나는 종차들의 합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종차의 합을 통해 종을 정의 내릴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사람은 살아 있고, 감각이 있고, 이성적인 실체이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정의는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와 같이 종과 그에 따르는 가장 일반적인 속을 포함하고 있다.그러나 종은 같아도 하나의 개체는 서로 다른 점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기에, 이러한 종의 정의는 통일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서로 다른 여러 속의 집합을 보았을 때, 가장 윗부분은 하나의 실체와, 반드시 실체 안에 존재해야 하는 일반적인 비본질적 성질 아홉 개를 포함한 열 개의 범주로 나뉘어 진다.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지만, 양이나 질과 같은 비본질적 성질은 반드시 실체 안에만 존재한다. 고대의 분류에서는 속보다 상위 범주인 being 은 그에 따르는 문제로 인해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사람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면 이성이라는 것은 동물의 특성이 아니라는 것고 마찬가지로 종차란 그 종이 포함되어 있는 속에서는 존재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발생된 문제는 중세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해결하기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속의 상위단계에 대해 고려할 수 없었다. 상위단계 being 에 대해 고려하게 되면 그 안에 속해 있는 실체가 being의 일부가 될 수 없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being 의 문제점은 스콜라철학자들에서부터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해답은, 존재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존재의 유사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존재론은 공공적으로 더 나은 부분을 받아들였고, 철학과 실험과학에 선을 그었으며, 그 휴 실험과학은 실용적인 기술의 르네상스에 도달하였다. 고전 학자였던 린네는 다시 이 두 분야의 구분선을 접합하여 계몽주의 시대를 도입하였다. 스위스의 교수인 콘라드 폰 제스너는 당시까지 알려졌던 분류들을 편찬함으로써 중요한 진전을 이끌어내었다. 그 후 유럽인들의 신대륙 발견은 새로운 식물과 동물이 발견됨에 따라 분류하고 조사해야 할 생물의 증가를 이끌어내었다. 기존의 분류 체제는 가끔 같은 식물과 동물 채집품을 보고서도 서로 다른 명명을 하게 될 정도로 새로 발견된 종들을 연구하고 분류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분류된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분류의 결과를 찾기 쉽고, 여러 종을 함께 묶어 분류할 수 있는 새로운 분류 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형태학을 기초로 하여 비슷한 외모를 가진 생물체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이명법이 개발되었고,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 사이에는 동물에 대한 조심스러운 연구가 개시되었다. 또한 다양한 해부학적 지식이 발견되오 파브리시어스(Fabricius,1537–1619), 페트러스 세브리너스(Petrus Severinus, 1580–1656),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그리고 에드워드 타이손(Edward Tyson, 1649–1708)와 같은 해부의학자들은 이러한 지식을 이용해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 연구하고 자료를 모아 분류함으로써 분류학에 있어 많은 진전을 일으켰다. 또한 마셀로 말피기 (Marcello Malpighi, 1628–1694), 얀 스웨머담(Jan Swammerdam, 1637–1680), 그리고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2), 로드 몬보도(Lord Monboddo, 1714–1799)와 같은 곤충학자들과 최초의 미생물학자들 역시 분류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들의 작업은 종간 관계를 진화의 이론과 연관지어 생각한 초기의 시도였다. 계통학이란 생물 간의 유연관계를 조사하여 계통적인 체계에 따라 생물을 분류하는 학문이다. 계통학자라는 이름은 칼 린네가 그의 저서 《Bibliotheca Botanica》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생물의 수집과 관찰뿐만이 아닌, 그것들을 분류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대표적인 계통학자들에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안드레아 캐살피노, 영국의 자연학자 존 레이, 독일의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아우구스투스 퀴리너스 리비너스, 프랑스의 의사, 식물학자이자 여행가인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가 있다. 안드레아 캐살피노는 그의 저서 《De plantis libri XVI》에서 식물의 첫 계통학적 분류를 제시했다. 그는 식물의 줄기와 과실의 구조에 따라 식물을 15가지의 “높은 속”으로 분류했다. 존 레이(1627~1705) 존 레이는 식물, 동물, 자연 신학에 대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영국의 자연학자였다. 그는 그의 저서 《Historia Plantarum》에서 현대 분류학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딛었다. 레이는 2분법적인 과거의 분류 시스템을 버리고 관찰에 의해 발견된 식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식물을 분류했다. 캐살피노와 레이는 분류학적인 위치를 나타내지 않는 기존의 식물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사과와 복숭아는 존 레이의 분류에서 서로 다른 속에 속했지만, 이름은 Malus 와 Malus Persica 로 그들의 분류학적인 차이를 나타내지 못했다.) 리비너스와 피톤 드 투르네포트는 이에 한 발 더 나가 속을 분류학적 계층에서 특징적인 계층으로 만들어 식물의 속에 따라 이름을 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 퀴리너스 리비너스는 식물의 꽃에 따라 식물을 분류하며 목이라는 항목을 만들었다. (존 레이와 안드레아 캐살피노의 “높은” 속에 해당) 그는 처음으로 풀과 나무로 식물을 나누는 이전의 방법을 버리고 식물의 과실을 이용해 식물을 분리하고자 했다. 그의 명명법은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의 그것과 비슷했다. 같은 속에 있는 식물의 이름은 같은 단어로 시작하고(속명), 한 가지 이상의 종이 속해있는 속에서 첫 번째 종은 속명만으로 명명되었고, 그 이후의 종들은 종을 구분할 수 있도록 속명 뒤에 추가 단어를 붙여 명명했다. (예시 벼의 학명 Oryza sativa Linne)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는 강, 아속, 속, 종으로 이루어진 더욱 복잡한 체계를 사용했다. 그는 처음으로 속명과 추가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종명을 일관성 있게 사용했다. 리비너스와 그의 다른 점은 두 가지 이상의 종이 속해있는 속에서 첫 번째 종만이 아닌 모든 종에 추가적인 단어를 붙여 그들을 명명했다는 것이다. 동물계( Regnum Animale )에 대한 표, 출처 《Systema Nature》 1판 (1735) 18세기는 자연학에 대한 지식이 팽창하던 시대로 많은 새로운 분야의 과학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는데, 린네 역시 ‘linnaean taxonomy’라 불리는 새로운 범위의 학문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이는 생물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과학적 분류에 대한 학문이다. 린네 이전에도 동식물 분류를 시도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린네는 이전의 연구들을 뛰어넘는 본인과 제자들이 수집한 방대한 양의 수집 자료로써 당시에 알려져 있던 대부분의 동식물을 분류체계에 포함시켰다. 이는 당시 식물학자들에게 유용한 검색표를 제공했고, 분류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린네는 이전의 분류 체계를 더 세분화 시켜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 의 세 가지 계와 그에 속한 강, 목, 속, 종, 변종 등의 계급을 새로 도입했다. 린네의 방식은 자연을 3개의 계로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여 서로 포함관계를 갖는 집단들로써 구분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계는 서로 다른 강으로, 강은 목으로, 목은 속으로, 속은 종으로 분리되었으며, 린네는 가끔 종에서 더 낮은 단위로의 분류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 분류학에서 이는 식물학에서의 품종, 또는 동물학에서의 아종을 의미한다. 현대 분류학에는 린네의 원래 시스템에는 존재하지 않던 ‘과’라는 등급이 목과 속 사이에 새로이 추가되어 있다. 동물계 린네는 분류에 필요한 조직적인 범주를 설정해 약 4000종의 동물을 분류하고 명명했다. 동물계에는 다음과 같은 6가지의 강이 속해 있다.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어류 곤충류 연충류 식물계 린네는 최초로 생식 기관을 식물의 분류 기준으로 사용했다. 식물은 꽃의 암술과 수술의 개수와 배치에 따라 24개의 강으로 분류되었다. 각각은 다음과 같다. Monoandria 1개의 수술을 가짐 Diandria 2개의 수술을 가짐 Triandria 3개의 수술을 가짐 Tetrandria 4개의 수술을 가짐 Pentandria 5개의 수술을 가짐 Hexandria 6개의 수술을 가짐 Heptandria 7개의 수술을 가짐 Octandria 8개의 수술을 가짐 Enneandria 9개의 수술을 가짐 Decandria 10개의 수술을 가짐 Dodecandria 12개의 수술을 가짐 Icosandria 20개 이상의 수술을 가짐 Polyandria 많은 수술이 꽃턱에 위치함 Didynamia 2개의 짧은 수술과 2개의 긴 수술을 가짐 Tetradynamia 2개의 짧은 수술과 4개의 긴 수술을 가짐 Monadelphia 수술의 꽃밥이 나뉘어 있지만 수술대가 끝에서 합쳐짐 Diadelphia 꽃의 수술이 두 개의 묶음으로 나뉘어 있음 Polyadelphia 꽃의 수술이 몇 개의 묶음으로 나뉘어 있음 Syngenesia 꽃밥이 가장자리에서 연결된 5개의 수술을 가짐 Gynandria 수술과 암술이 합쳐져 있음 Monoecia 자웅동체인 식물 Dioecia 자웅이체인 식물 Polygamia 암꽃과 수꽃이 나누어진 식물 Cryptogamia 꽃이 없는 식물 광물계 현대 분류학에서 광물은 생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린네는 광물도 하나의 계로 보고 분류했다. Petræ Mineræ Fossilia Vitamentra 린네의 가장 큰 분류학적 업적은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명명법인 이명법을 확립시켰다는 것이다. 린네 이전의 계통학자들 중에서도 속명과 종명을 이용해 종을 명명한 사람이 있었지만, 린네는 최초로 저작에서 일관되게 이명법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 이명법이란 라틴어로 속명과 종명을 조합하여 나타내는 명명 방식으로, 속명은 고유 명사, 종명은 보통 명사 또는 형용사를 쓴다. 그 뒤에 명명자의 이름을 붙이고 필요시에 학명이 창시된 연도를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속명과 종명은 이탤릭체로 기울여 쓰고, 저자의 이름과 연도는 정자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린네는 본인의 분류 체계를 스스로 인위적인 것이라고 표현했다. 생물간의 모든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려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설정한 기준에 의한 분류이기 때문이다. 린네의 생물 집단 조직은 간단한 차이점들 또는 공통된 물리적 특성들에 대한 관찰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생겨난 여러 등급과 집단 중 동물의 상위 단계의 분류집단은 여전히 사용되지만, 몇몇 집단은 그 집단을 정의하고 기반하는 이론과 원칙에 따라 크게는 그 개념 자체의 변경이 있기도 했다. 실제로 식물의 생식기관에 의한 분류는 많은 오류를 낳았고, 이후 크게 수정되었다. 하지만 린네의 분류는 생물들을 지정된 범주 안에 넣기에 쉽고 유용한 체계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린네 분류학이 현대 분류학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비록 린네가 관찰한 특성들 중 많은 것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지식 또는 DNA sequencing과 같은 새로운 실험 방법의 등장과 함께 변화되고 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분류학에서 린네가 사용한 기본적인 이론적 원리가 여저히 남아있는 것은 그가 관찰된 특성을 기반으로 분류학의 계층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립하였으며 자연의 연관성을 그 아이디어에 반영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독일의 생물학자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에 의하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 사람은 린네라고 한다. 린네는 사람을 분류학의 범주에 넣은 최초의 사람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다른 식물이나 동물과 같이 묘사함으로써 미래의 자연학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린네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동물의 일부에 속한다고 믿었으며, 그의 분류 체제에서 사람을 동물에 포함시켰다. Anthropomorpha.png|섬네일|왼쪽|Hoppius의 (1763)에 묘사된 Anthropomorpha 1. Troglodyta Bontii2. Lucifer Aldrovandi3. Satyrus Tulpii4. Pygmaeus Edwardi 《Systema Naturae》 (1748) 6판에 보면 린네는 안드로포모르파를 호모( homo )와 시미아( simia )의 두 가지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다. 린네는 사람을 《Systema Naturae》의 초판에서부터 영장류로 구분하고 있다. 하테캠프(Hartekamp)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몇몇 원숭이들을 관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어 사람과 그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기록할 수 있었는데, 그를 통해 그는 두 종이 말하는 기관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기본적인 해부학적 특징을 동일하게 갖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다른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는 사람과 원숭이 모두를 사람과 유사하다는 의미를 가진 안드로포모르파라는 같은 범주 안에 들어있도록 배치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요한 고스찰 웰러리우스(Johan Gottschalk Wallerius), 야곱 테오드르 클레인(Jacob Theodor Klein), 요한 조지 멜린(Johann Georg Gmelin) 등과 같은 생물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신학에서 등장한 문제는 더 심각했다. 첫째로, 사람을 원숭이나 고릴라와 같은 수준에 넣는 것은 존재의 대사슬에서 영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며, 둘째로 성경이 말하기를 사람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일 원숭이나 고릴라와 사람의 디자인이 크게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말씀을 따랐을 때, 원숭이와 고릴라들 역시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많은 측면에서 받아들여 질 수 없었다. 사람을 동물의 한 종류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과학적 이론과 종교 사이의 충돌은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의해 창조와 진화 사이의 논쟁이 시작됨으로써 몇 세기가 지난 현재도 뜨거운 냄비 속 물과 같이 진행 중이다. 이러한 비판 이후 린네는 더욱 명확한 설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Systema Naturae》의 10판에서는 포유류(mammalia)와 영장류(primates)라는 새로운 단어를 포함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사람을 이명법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명명하게 하였고 안드로포모르파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였다. 새 분류법의 도입으로 린네의 이론 대한 비판은 줄었지만, 사람이 자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많은 자연학자들은 여전히 그가 인간을 이전 위치에서 강등 분류하였다고 생각했다. 린네는 1658년에 출간한 《Systema Naturae》에서 호모 속에 호모 트로글로다이트(homo troglodytes), 1771년의 3판에서 호모 라(homo lar)라는 새로운 종을 추가하였다. 스웨덴 역사가인 구나 브로버그(gunnar broberg)는 린네가 묘사한 새로운 인류는 사실 신대륙에서 발견된 원주민이나 정착민들로, 외부인을 위협하기 위해 발랐던 진흙 등에서 비롯된 착오라고 말한다. 《Systema Naturae》의 초반 본에는 많이 알려진 전설 속 생물들인 불사조, 용, 맨티 코어 같은 것들이 포함된 포괄적 범주인 파라독사(paradoxa)가 존재한다. 린네는 히드라와 같은 생물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시도했다. 용에 대하여 린네는 그것들이 도마뱀 또는 광선을 보고 창조된 것이 계속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호모 트로글로다이트에 대하여 린네는 스웨덴의 동인도회사에 그것의 존재를 확인해달라는 의뢰를 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그 존재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호모 라의 경우 후에 긴팔원숭이(hylobates lar)로써 재분류되었다. 《자연의 체계》 초판에서 린네는 사람의 종을 국적과 피부색에 따라 Europæus albus" (white European), "Americanus rubescens" (red American), "Asiaticus fuscus" (brown Asian) and "Africanus niger" (black African)라는 4개의 세부 종으로 세분시켰다. 10판에서 그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4개의 기본적인 성질에 따라 각각의 전형적인 특성들을 더욱 자세히 구분하였으며, 사람의 피부색을 노란색으로 바꾸었다. 추가적으로 린네는 야생에 존재한다는 인간이나 몬스터 등 알려지지 않은 그룹들에 대한 분류항목인 몬스트로서스(monstrosus)를 창조하였다. 《자연의 체계》 《자연의 체계》 초판은 1735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758에 10판이 되었는데, 4400여종의 동물과 7700여종의 식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Physalis annua ramosissima, ramis angulosis glabris, foliis dentato-serratis 와 같은 굉장히 길고 어려운 학명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학명들이 간결한 이명법을 따른 학명으로 대체되었다. 이명법을 따른 학명은 속명(specific name)과 종명(specific name)의 병렬식으로 나열한 것이다. 이 이명법들은 종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Species Plantarum 《식물의 종 ( Species Plantarum, exhibentes plantas rite cognitas, ad genera relatas, cum differentiis specificis, nominibus trivialibus, synonymis selectis, locis natalibus, secundum systema sexuale digestas )》은 총 2권으로 1753년에 초판 인쇄가 되었다. 이 책은 국제적으로 현대 식물학 명명법의 시발점으로 받아들여진다. 1권은 5월 24일에 나왔고, 같은 해 8월 16일에 2권이 나왔다. 이 책은 총 2권 1200페이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7300여 가지가 넘는 종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에는 왕이 그에게 북극성 훈장을 수여했다. 1754년에 린네는 식물계를 25개의 강으로 분류하였다. Genera Plantarum 《식물의 속》은 1737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책은 식물의 분류법 중 속에 해당하는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10 판의 출판은 린네 혼자 모든 것을 한 것이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1754년의 5판이다. Philosophia Botanica 《식물 철학》(1751)은 식물 분류와 명명법에 대한 린네의 생각의 요약이었고 그가 이전에 출판했던 책들을 더 잘 갖추어 낸 책이었다. 이 책은 그가 이전에 사용하던 분류 시스템의 전체 개론을 담고 있었다. 또, 이 책에는 식물 정원을 관리하는 법과 여행에서 저널을 쓰는 것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었다. 린네 분류학은 확실히 현대 분류학의 시발점이었지만, 이 분류 체계는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다. 먼저, 린네 분류 체계에서 식물계의 Monoecia 강에 속한 Monadelphia 목은 자웅동체이면서(Monoecia) 수술이 수술대에서 합쳐지는(Monadelphia) 식물로 분류되었는데, 침엽수 등과 함께 참꽃을 가진 식물이 포함되는 오류가 있었다. 또, 뚜렷한 생식 기관이 없는 식물인 Cryptogamia 강에는 양치식물, 선태식물, 이끼류를 비롯해 해면동물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물계의 6가지 강인 포유류, 조류, 양서류, 어류, 곤충류, 연충류 중 4가지는 분류가 확실했지만, 곤충류와 연충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7가지 분류체계를 통합한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보다 부정확한 것이었다. 린네는 고래를 어류로 분류해 이후 수정되기도 했다. 린네는 종이 창조되었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물의 외형적인 특징에만 의존해 종을 분류하였다. 따라서 린네의 분류는 종간의 계통이나 유연관계가 고려되지 않은 분류였다. 특히 식물의 생식 기관을 기준으로 한 분류에서는 정밀하지 못한 분류가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에는 생물의 발생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태를 기준에 따라 생물을 분류한 존 레이의 분류 체계를 따르게 되었다. 비록 린네가 구분하기 쉬운 분류를 했다고 하지만, 린네적 분류의 아이디어는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종의 기원》이 발간될 시기에 동물계와 식물계를 기반으로 하는 계통수로 바뀌게 되었다. 이래즈머스 다윈이 1796년에 《주노미아》를 출판하고,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동물철학》>이 1809년에 출간되면서 종의 변화라는 아이디어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로버트 챔버의 책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분류는 공통조상 의 존재라는 다윈의 이론을 반영하여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화석이 발견되고 연구됨에 따라 진화의 나무가 과학적인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조상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어 현대적인 집단으로 구성된 첫 번째 예시는 새이다. 새롭게 발견된 화석을 이용하여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새가 리처드 오웬에 의해 1842년에 명명된 집단인 공룡에서 진화되어 나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진화학적 분류를 이끌어내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화석이 발견됨에 따라 많은 고생물학자들이 동믈의 역사를 알려진 집단끼리 연결시켜가며 이해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했다. 1940년대의 현대종합설은 주요 집단의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진화학적 분류는 린네 분류학의 기본적 원리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계통발생에 따른 명명법이 분기학적 방법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단원적 분기군과 의사단원적인 분기군, 다원적 분기군의 정의가 이루어졌고, phylocode라 불리는 계통학적 명명법이 공식적으로 정리되었다. 린네가 동물계, 식물계로 나누었던 2계 체제 역시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과정을 거쳐 바뀌게 되었다. 아래의 표는 그 변화 과정을 나타낸다. 생태학의 발전에서 린네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린네는 신과 자연, 물질과 영혼에 대해 신이 자연을 개개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그 사이의 관계를 조절했으며 이러한 질서와 목적은 식물, 동물과 같은 모든 자연의 기능과 모양을 뒷받침하는 자연의 경제성 을 나타낸다는 관점을 가졌다. 이러한 관점은 신과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서는 기독교, 플라톤, 스통다철학의 전통을 띠는 색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린네의 철학에서 가장 눈에 띠는 부분 중 하나인 물질신학은 교회를 그 뿌리에 두고 있다. 그것은 지연학에 다양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은 근본적으로 그의 종교적 관념과 관련되었다. 그의 자연철학과 물질신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유용한 개념과 자연의 연구에 중요한 점을 모두 제공하였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적 연구는 경험적 관찰과 자연 철학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여 동물과 식물이 모든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자연의 경제성이라는 개념은 17세기에 처음 사용된 것이며 신의 창조를 통한 자연의 지배 방법임을 반영한 것이었다. 린네는 이 개념에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여 자연철학의 중요한 개념 개발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물질신학을 통해 창조를 통한 신의 정의라는 생각을 조직화시켰다.린네가 주장한 자연의 경제성 개념은 자연이 자가 갱신 과 자가 정화 라는 개념을 포함하여, 그 자연이 죽은 생물과 같은 폐기물이 과다한 경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갱신하며 자연적으로 순환하는 과정과 지구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고 하였다. 1747년 그는 여행에서 동물이 죽을 때 그들이 뿌리를 덮어 흡수되어 식물이 발생하고, 그것이 동물에 의해 흡수되어 다시 동물의 일부가 되는 자연의 사이클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린네는 다른 동식물에 의한 일부 동물의 피해 역시 개별 종이 아닌 전체적인 생명에 대해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너무 빠른 번식에 의한 특정 종의 기초적인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린네의 개념과 생각 중 일부는 19세기에 세속적인 방향으로 기발되었으며,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서는 현대적 생태 용어의 개념을 포함하는 전구체적 언어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생태학은 자연의 연결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강조와 선택에 의해 쉽게 좌우됨에 반해 린네적 유추 방법은 주로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증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린네의 자연철학은 주로 추측에 근거한 . 더 이상 쓸모 없는 , 환상에 입각한 과 같은 단어로 특징지어지곤 한다. 린네는 한 명의 물질 신학자로써 그는 전통을 심화시켜 물질신학이 더 복잡하게, 환경적 요인을 수용할 수 있도록 발전하도록 하였다. 그 후 린네는 자연에서의 신의 작업이라는 관점을 유지하였으며, 환경의 영향은 단지 자연에서의 신의 존재성에 대한 더 넒은 예시이며, 창조를 위한 신성한 계획에 대한 증거라 생각하였다. 또한 린네는 유추를 이용하여 자연의 연결을 설명하였는데, 자연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든 레벨에 대하여 상호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현대 생물학의 생태와 진화에 연결될 수 있다. 19세기 초반에 생물에 대한 연구를 나타내기 위한 용어인 생물 이 라마르크오 힐레어에 의해 제안되었다. 생물은 시스템 및 종 설명에 초점이 맞추어진 자연학과 대조적으로 자연의 일반적인 법칙과 생명체의 기본 원리를 찾기를 시도하였다.에른스트 헤켈은 생태학 라는 용어를 제안하여 생태학을 통해 우리는 동물의 경제성과 절약성을 이해할 수 있다 고 정의하였으며, 이는 생태학이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그 주변 환경,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물들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 즉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접촉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다양한 관계를 포함함을 의미했다. 이는 생태 라는 것이 자연의 경제성 또는 다윈이 주장한 존재를 위한 투쟁 과 같은 것을 의미함을 말하며, 다윈과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 대한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다윈의 주장은 크게 자연선택과 상속이라는 두 가지 이론의 조합으로 요약된다. 자연선택은 더 많은 생물이 특정지역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이 태어났을 때 발생하는 프로세스로,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연결됨을 의미하며, 모든 생물이 달라질 수 있어 이러한 변화 중 일부가 더 나은 적응의 형태로 상속된다는 것이다. 다윈에 의하면 이러한 이론 역시 진화에 필요한 조건이지만 새로운 종의 생성이 선택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선택과 진화와 관련된 모든 자연적 배경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으며, 이는 다윈으로 하여금 생태학적, 자연철학적 측면에 관심갖게 하였다. 따라서 다윈은 다양한 출처를 통해 초기 생태학적 자료와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새와 곤충이 자연에서 사는 방법에 대한 초기 관찰은 길버트 화이트의 책에서 영향을 받았다. 린네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화이트는 린네의 제자이자 그 당시 유명한 동물학자인 다니엘 솔랜더, 토마스 페넌트와 함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라이엘은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 대한 아이디어와 가치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해한 사람으로써 그의 개인적 업적에서 자연의 경제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대로 사용하였다고 평가받았다. 다윈은 1840년대에 린네의 책을 읽으며 린네의 아이디어와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그 시기 그의 출간물과 편지에서는 자연의 절약 또는 자연의 정치 와 같은 표현을 점점 더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다윈의 생각 중 다양한 생물종이 적절한 장소를 갖고 있다는 생각 역시 린네의 생각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다윈이 존재를 위한 투쟁 과 같은 그의 아이디어를 경제학자 멜서스의 인구 압력 에 대한 이론에서부터 얻어왔다고 주장하였으나, 멜서스 이전에 이미 비슷한 아이디어가 라이엘 또는 윌리엄 패일리의 물질신학적 출간물에서 모두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 과 같은 표현이 발현된다는 것으로 보아 린네의 저서와 아이디어가 그들과 다윈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영감을 제공했을 수 있다. 린네가 제안한 자연의 경제성이라는 개념은 스웨덴에서 린네의 제자들에 의해 매우 제한된 범위로 전달되었다. 린네의 아이디어는 종의 우성성, 시스템, 그리고 스웨덴의 동식물에 대한 포괄적 연관성 지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린네는 다양한 규칙을 마련하고 그 규칙에 입각하여 자연이 어떻게 시스템화 되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였다. 린네 학문을 따르는 자들의 1세대와 2세대 모두 동식물을 차트로 정리하고 생물 간의 보다 일반적 연관성을 찾아 자연의 법칙을 찾으려 하였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적 아이디어는 잉글랜드에서 정교히 발전했지만 린네의 제자인 칼과 오드먼에 의해 스웨덴에서도 연구의 수행이 이루어졌다. 칼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영향에 관한 여러가지 초기생태학적 관찰을 진행하여, 인디언의 생활과 개척자의 등장에 의한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고 관찰하였다. 오드만은 열도의 새 전문가로서 초기 조류 생태 연구에 대한 예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린네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연의 상황을 묘사하였으나, 이론 수준에서는 새롭게 기여하지 않았다. 매년 린네의 생일이 기념되며, 특히 100년마다 린네의 생일은 크게 축하된다. 린네는 수많은 종류의 스웨덴 우표와 지폐에 등장하였으며, 전 세계 국가에 린네의 조각상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런던에서 열리는 린네 학회는 식물학이나 동물학에서 나온 좋은 결과에 대해 1888년부터 린네 메달을 수여한다. Växjö 대학과 칼 마르 대학은 스웨덴의 의회의 승인을 받아 2010년 1월 1일에 병합 후. Linnaeus 대학이 되었다. 린네의 이름을 딴 다른 것들에는 twinflower 속 Linnaea, 지구 달에 분화구 중 하나인 Linné 및 코발트 황화물의 미네랄 Linnaeite을 포함된다. University of California Museum of Paleontology (UCMP) 웹사이트. http://www.ucmp.berkeley.edu/history/linnaeus.html 국가자연사연구종합정보시스템, 동물 분류. http://www.naris.go.kr/v2/worddic/dic_detail.jsp?dis_id=130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한국어), 분류학의 역사적 배경.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0b1523b001 Linne on line. http://www.linnaeus.uu.se/online/index-en.html 스웨덴의 생물학자 아르네 안데르베리(Arne A. Anderberg)가 쓴 린네의 간추린 생애(영어). 분류:1707년 태어남 분류:1778년 죽음 분류:스웨덴의 귀족 분류:스웨덴의 생물학자 분류:스웨덴의 식물학자 분류:스웨덴의 루터교도 분류:용어 전문가 분류:웁살라 대학교 동문 분류: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스웨덴의 곤충학자 분류:스웨덴의 조류학자 분류:스웨덴의 균학자 분류:스웨덴의 분류학자 분류:스웨덴의 자서전 작가 |
임마누엘 칸트 (,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는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고 독일 관념철학의 기반을 확립한 프로이센의 철학자이다. 칸트는 21세기의 철학에 까지 영향을 준 새롭고도 폭 넓은 철학적 관점을 창조했다. 그는 또한 인식론을 다룬 중요한 저서를 출간했고, 종교와 법, 역사에 관해서도 중요한 책을 썼다. 그의 탁월한 저서 중 하나인 《순수이성 비판》은 이성 그 자체가 지닌 구조와 한계를 연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칸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공격하고 있으며, 칸트 자신이 그 분야에 공헌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가 만년에 출간한 다른 주요 저서에는 윤리학을 집중적으로 다룬 《실천이성 비판》과 미학, 목적론 등을 연구한 《판단력 비판》이 있다. 그는 종래의 경험론 및 독단론을 극복하도록 비판철학을 수립하였다. 인식 및 실천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 형식에서 찾고, 사유가 존재를, 방법이 대상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에서 찾고, 완전히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그는 도덕적 인격을 목표로 하면서도 자의적인 ‘한 사람의 의욕과 다른 사람의 의욕이 자유의 보편원칙에 따라 합치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법이라 생각하였다. 칸트에게 내적 자유의 실현 수단인 법은 외적 자유를 제한하는 강제를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도덕과 엄격히 구별되었다. 칸트는 국가에 대해서 계약론의 입장을 취했는데, 그는 국가계약을 역사적 사실처럼 생각한 계몽기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이것을 국민주권을 위한 이론적 요청으로 생각하였다. 또 칸트는 국가 간의 전쟁을 하지 않는, 영구 평화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저술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생긴 문제점을 전쟁이 끝난 뒤에 조정하여 해소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제도의 내용은 국제법의 개념에 근거한 국제 연맹이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1724년 프로이센의 상업도시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수공업자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와 어머니 안나 레기나(Anna Regin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의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11명의 자녀 중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5명뿐이었다). 에마누엘 (Emanuel)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마누엘"(Immanuel: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바꾸었다. 그는 삶을 통틀어서 쾨니히스베르크로부터 100마일 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한 적이 결코 없다. 그의 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 (1682–1746)는,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인 메멜로부터 이주한 독일인 마구(馬具) 제작자이었다. 그의 어머니인 느 레기나 도로시아 류터(née Regina Dorothea Reuter) (1697–1737)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칸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이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의 성을 스코틀랜드식("Cant")으로 적곤 했다. 어렸을 때 칸트는 돋보이지는 않았으나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경건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기독교의 경건주의는 종교적인 헌신과 겸손함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로 칸트가 받은 교육은, 수학과 과학보다는 라틴어와 종교 훈련을 우선시 하였고, 엄격하고 가혹하며 훈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옛 대학 건물 칸트의 부모는 청교도적 생활을 하였으며, 이는 유년시절의 칸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진다. 칸트는 1732년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신학자 슐츠가 지도하던 사학교 프리드릭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174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에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에게 논리학과 수학을 지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고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되었다. 후대의 전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칸트는 1746년 《활력의 진정한 측정에 관한 사상》( Gedanken von der wahren Schätzung der lebendigen Kräfte )이라는 졸업논문과 함께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버지가 사망함에 따라 학자금과 생계 유지를 위해 수 년에 걸쳐 지방 귀족가문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홀로 철학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곧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1755년 6월 12일,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Princip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후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등 여러 분야의 주제로 강의했다. 1756년 크누첸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1764년 프로이센의 교육부에서 제공한 문학 교수자리를 거절할 정도로 철학교수직을 갈망했다. 18세기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의 영역에 속했다. 1766년에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왕립도서관의 사서로 취직하여 1772년까지 근무하기도 했다. 그사이 칸트는 원하던대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직을 얻게되는데, 이때 발표한 교수취임논문(1770년)은 칸트 비판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10여 년간의 철학적 침묵기를 거친 후 칸트는 1780년대에 일련의 중요한 저서, 즉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 1784),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 1785),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 1786)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점점 명성이 올라갔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초판:1781년, 재판:1787년), 《실천이성비판》(1788), 그리고 《판단력비판》(1790)에서 그의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칸트는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으며, 알려진 것처럼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 다만 1792년에 논문출판과 검열을 두고 학부 관리처와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의 논문은 《인간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악에 관하여》( Vom radikalen Bösen in der menschlichen Natur )란 제목으로서 당시의 계몽주의사상과 종교에 관한 칸트의 솔직한 견해가 대학 관리처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커피와 담배를 즐겼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새벽 4시, 80세를 향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겼다. 칸트는 18세기 철학에 있어 가장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실제로 칸트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은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칸트가 초감각적인 세계를 논하는 기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른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 의 체계를 세우려고 했으며, 그러한 체계의 근거가 되는 인식론을 연구하여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두 사상의 한계에서 벗어난 철학을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 은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이성이 이성 자신을 비판하는 철학이다. 칸트의 철학이 비판철학이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세 가지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책의 제목 끝에 붙인 비판 이라는 개념은 칸트가 과거의 철학을 비판적 연구 분석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칸트는 이러한 측면에서 스스로의 철학을 비판철학 이라고 불렀다. 칸트가 이러한 비판 철학을 펼치게 된 데에는, 뉴턴의 자연과학과 루소의 철학, 그리고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흄의 회의를 받아들인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권의 저서 내용을 요약한 질문과 각 책이 다룬 영역은 다음과 같다. 《순수이성비판》(1781년) 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인식론 《실천이성비판》(1788년)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윤리학 《판단력비판》(1790년)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나?-미학 이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의 선험적 도식 17~18세기 철학의 인식론은 크게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나뉘었다. 여기서 합리주의는 인간이 본래부터 지닌 선험적 이성을 중시하였고, 경험주의는 인간이 경험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귀납법을 중시하였다. 합리주의의 방식은 "백마는 희다"와 같이 술어가 주어의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분석판단 을 하므로, 지식을 확장해 나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경험주의의 방식은 귀납적인 방법을 강조하며 종합판단을 한 나머지 진리의 필연성을 찾는 데 한계를 드러내었다. 여기서 칸트는 이 두 사상을 통합한 선험주의를 주장하였다. 즉, 지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인식을 확장하는 선험적(선천적:a priori) 종합판단 을 긍정하였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이성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면서 인간 인식에 선험적 형식을 도입하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Kopernikanische Wendung)을 시도하였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란 인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대상의 관념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대상이 있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그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진리는 주체의 판단형식에서 찾아야 하는 무엇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감성을 통해 얻은 감각을 범주를 사용하여 지성(Verstand:오성)으로 인식하고, 초경험적인 것은 이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감성은 어떤 물자체를 지각하는 능력이며, 범주는 이러한 감각을 인식하게 하는 하나의 틀이다. 따라서 감성과 지성은 인간이 지각 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요건인 셈이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데 시간과 공간 값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체적인 연장과 존재하는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인식을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과 같은 것은 공간 값은 없지만 시간 값만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칸트는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초경험적인 것을 이성으로 알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가령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존재론적 증명 등을 비판하여 여러 형이상학적인 사상들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이 말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 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인간의 지성(Verstand)이 사물의 현상을 분류,정리할 수 있으나, 그 현상 너머에 숨은 본질에는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이나 신에 해당하는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기존의 형이상학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초감각적이고 초경험적인 것을 인식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이 그런 오류에서 벗어나 이성의 인식체계에 대한 학문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는 형이상학적인 신, 영혼들의 존재를 도덕을 다루는 과정에서 다시 요청하게 된다. 칸트는 윤리학을 연구하면서, 주관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나는’ 도덕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을 추구하였다. 모두가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을 도덕법칙이라고 부르는데, 칸트는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선을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은 마음 속에서 충동과 도덕이 투쟁한다고 보았다. 즉, 옳고 그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충동과 도덕심이 투쟁을 하며, 도덕이 이기면 선한 행동을 하고 충동이 이기면 그른 일을 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그렇다고 도덕이 충동을 없애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칸트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어떤 결과를 얻거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명령 그 자체가 목적인‘무조건적인 명령’을 도덕법칙으로 제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적인 가언(假言) 명령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의무로서의 명령인 정언(定言) 명령을 내세운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든 따라야만 하는 정언 명령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명령은, “네 의지의 준칙(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해 누구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스스로 생각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명령은,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이다. 칸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반대하였다. 인간이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본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부정하면서,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강조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도덕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에 합당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세운 이마누엘 칸트의 동상 서양 사상에 대한 칸트의 폭넓은 영향은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특정한 사상가에게 준 구체적인 영향을 넘어서, 칸트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철학연구가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철학의 틀 구조를 바꾸었다. 달리 말하면, 그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이루었다. 이러한 전환은 공리주의에서 후기 칸트학파의 사상에 이르는 혁신과 밀접하게 연관된 채로 철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분야 모두에서 유지되었다. 칸트의 생각은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이후에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친 학파들에게서 드러나고 있다. 독일 관념론, 실증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비판 이론, 언어 철학,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가 그러한 예이다. 칸트의 영향은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에서도 나타나는 데, 막스 베버의 사회학과 장 피아제의 심리학, 그리고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칸트가 패러다임을 철저하게 바꾸었기 때문에, 특별히 칸트의 저서나 칸트의 용어를 언급하지 않는 학자들까지도 칸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생애 동안에, 그의 사상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1780년대에서 1790년대 까지 라인홀드, 피히테, 셸링, 헤겔, 노발리스에게 영향을 끼쳤다. 칸트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글쓰기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철학 운동은 독일 관념론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독일 관념론자인 피히테와 쉘링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에 포함되었던 "절대적인 것", "신", "존재"와 같은 개념을 칸트 비판 철학의 영역으로 옮기려고 시도하였다. 칸트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있었다. 칸트는 이성의 능력과 종교를 모두 비판했고, 이러한 비판은 당시에 이성을 신뢰하던 철학자나 종교를 믿던 종교인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 이었다. 칸트의 제자 요한 헤르더는 그의 스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일반 자연사와 천체론》 (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 1755년)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 ( Beobachtungen über das Gefühl des Schönen und Erhabenen , 1764년) :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05년, 《감각 가상계의 형식과 원리》 ( De mundi sensibilis atque intelligibilis forma et principiis , 1770년) : 《감성계와 지성계의 형식과 원리들》, 최소인 옮김, 이제이북스, 2007년, 《순수이성비판》 ( Kritik der reinen Vernunft , 1판, 1781년 2판, 1787) : 최재희 옮김, 박영사, 2009년(개정판), : 백종현 옮김(전2권), 아카넷, 2006년, 《학으로서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장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 , 1783년) : 《형이상학 서설》,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12년,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 1784년)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 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ürgerlicher Absicht , 1784년) :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이석윤 옮김,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 (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 1785년) : 《윤리형이상학 정초》,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5년, :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이원봉 옮김, 책세상, 2002년,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 1786년) 《실천이성비판》 (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 1788년) :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2년, : 최재희 옮김, 박영사, 2011년, 《판단력비판》 ( Kritik der Urteilskraft , 1790년) : 이석윤 옮김, 박영사, 2005년, :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년, 《순수이성의 한계 내의 종교》 (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 1793년) :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11년,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 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 , 1795년) : 이한구 옮김, 서광사, 1992년, 《윤리 형이상학》 ( Die Metaphysik der Sitten , 1797년) 독일 왕립학술원에서 간행한 전집 (Kant gesammelte Schriften, 편집 Königliche-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10ff., Berlin). 흔히 "학술원판"으로 불리는 이 전집은 칸트저술 인용의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간행한 봐이셰델 편집 (Kants Werke, W. Weischedel (Hrsg.), Suhrkampff) 독일 관념론 신칸트파 내용주 참조주 논문 김석수, 칸트에 있어서 법과 도덕, 서강대학교 윤종한, 칸트의 이성 신앙과 그 역사적 실현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단행본 김석수, 순수이성 비판 서문, 책세상, 2002, 백종현, 존재와 진리, 철학과현실사, 2000, 하영석, 대한철학회 편, 칸트 철학과 현대사상, 형설출판사, 1984 프리드리히 카울바하, 백종현 옮김, 칸트-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 서광사, 1992 오트프리트 회페(Höffe, Otfried) (2004)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뮌헨(München) * 한국어 번역본 이마누엘 칸트, 이상헌 옮김, 문예출판사, 1997, 백과사전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칸트와 독일 관념주의 마인츠 대학의 칸트 연구소 칸트에 관계된 웹사이트 모음집 The University of Adelaide Library 칸트 철학 요약-파깨비 서울대 철학과 강의 요약 분류:1724년 태어남 분류:1804년 죽음 분류:독일의 철학자 분류:독일의 법철학자 분류:독일의 논리학자 분류:독일의 인류학자 분류:독일의 작가 분류:독일의 불가지론자 분류:독일의 루터교도 분류:독일의 고전 자유주의자 분류:독일 국민주의자 분류:계몽주의 철학자 분류:정치 이론가 분류:인식론 학자 분류:대륙철학자 분류:자연철학자 분류:과학철학자 분류:심리철학자 분류:예술철학자 분류:형이상학자 분류:윤리학자 분류:합리주의자 분류:관념론자 분류:쾨니히스베르크 출신 분류: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동문 분류:프로이센 출신 분류: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18세기 독일 사람 분류:18세기 철학자 |
후천면역결핍증후군 (後天免疫缺乏症候群, )는, HIV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병하면 나타나는 전염병이다. HIV는 바이러스의 이름이며, 에이즈는 HIV에 감염된 환자가 발병하면 나타나는 증상들을 일컫는다. 질병관리본부의 문답으로 알아보는 에이즈 상식 자료에 따르면 HIV와 에이즈(AIDS)는 다른 말이다. HIV는 바이러스를 말하며 에이즈는 면역이 결핍돼 나타나는 상태를 뜻한다. HIV에 걸린 사람을 에이즈 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HIV 감염인이란 HIV에 걸린 모든 사람을 말하며 이 중에서 질병이 나타난 사람을 에이즈 환자라고 부른다.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아도 면역결핍으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10~12년 정도 걸린다. 올바른 관리를 한다면 30년 이상 살 수 있다. 현재 에이즈는 만성질환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발견된 HIV 감염자는 현재 5000일째 살아있다. 에이즈는 신체의 면역, 저항력이 저하되는 질병으로 보통 에이즈 질환으로 인한 사망과 그외에도 면역력이 약화되어 기타 다른 질병에 함께 감염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에이즈는 병리학적으론 최초로 1981년 미국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언제 HIV 바이러스가 번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으며, 의학계에서는 침팬지에서 발견되는 SIV에서 HIV가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출현 시기를 1930년대로 보고 있다. 즉 중앙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SIV를 보유하고 있는 침팬지와 접촉함으로 인해 인간의 면역체계를 약화시키는 변종 바이러스 HIV가 생겨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간접적 증거로는 현재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 및 사망률을 보이고 있는 지역이 바로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때는 아프리카 개발이 집중적으로 시작된 시기로 인간들의 무분별한 야생동물 사냥과 원시림을 파괴하며 얻은 SIV를 포함한 침팬치의 고기 및 다른 고기를 유통, 공급하면서 접촉하여 생긴 환경파괴 질병으로 보기도 한다. 공식적으로 에이즈가 인식된 것은 1981년 6월 5일 미국 질병관리예방센터에서 다섯명의 치명적인 폐렴 환자를 보고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 초반 의학계에 에이즈가 불치의 전염병으로 처음 보고되었을 때, 대중들은 이 질병은 성병의 일종이라고 오해하였다. 최초의 발표 사례들이 대부분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확인된 첫 번째 에이즈 환자는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1975년부터 1981년 사이 발견된 면역저하 환자들은 모두 이성애 여성이었다. 사회 전반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동성애혐오적인 의미를 내포한 병명이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미국 질병관리예방센터는 에이즈 환자들의 다수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혈우병 환자, 아이티계 이민자, 마약 중독자들이 전체 환자 중 과반이 넘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1982년이 되어서야 해당 병을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즉 AIDS(에이즈)라 공식적으로 명명한다. 현재까지 에이즈는 약 2800만 명의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및 서부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에는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며, 특히 짐바브웨와 보츠와나는 25%에 달하는 충격적인 HIV 감염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추세는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인도,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 그리고 특히 중국에서도 HIV의 감염자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에이즈 예방이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에이즈는 HIV의 감염으로 생기는 궁극적인 결과이다. 에이즈 바이러스인 HIV는 레트로바이러스이다. 레트로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에 침입하여 자신의 RNA를 DNA로 역전사한 후 숙주 세포의 DNA에 끼여 들어가 증식한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기관들인 CD4+ T 세포와 대식세포 그리고 수지상세포들에 우선적으로 감염된다. 특히 HIV는 직간접적으로 CD4+ T 세포들을 파괴한다. 특히 역전사 과정을 일으키는 역전사 효소는 일반적인 DNA 복제 효소와는 달리 오류정정 기능이 없기 때문에 많은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되어 HIV는 매우 쉽게 변이된다. 임상연구에서는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가 여러가지 변종의 HIV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자주 보고되고 있다. HIV 감염자의 50~70%는 감염 후 3~6주 뒤 독감과 유사한 급성 임상 증후군을 앓게 된다. 그러나, HIV 감염자는 그 이후 짧으면 3년에서 길면 12년까지 무증상 상태를 보이므로 곧바로 HIV 감염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며, 에이즈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미 신체의 면역 체계가 상당 부분 약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HIV가 CD4+T세포들을 죽이기 시작하여, 혈액 1µL당 200개 안팎의 T세포 밖에 남지 않게 되면 세포성 면역을 잃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급성 HIV 감염은 곧 임상적 후기 HIV 감염으로 진행하게 되고 결국 에이즈에 이르게 된다. 혈액 내에 남아있는 CD4+ T세포의 수를 측정하여 위와 같은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HIV 감염의 진단은 ELISA를 통한 선별검사와 웨스턴 블롯을 통한 확진의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대개 감염 후 2주 정도면 혈액 속에 HIV 항체를 판별할 수 있으므로, 이때부터 진단이 가능하다. 에이즈는 체액 교환을 통해 감염되며, 현대 사회의 주된 에이즈 전염 경로는 성병 예방 조치를 하지 않은 성행위와 HIV 보균자의 출생을 통한 수직 감염, 불특정 다수가 돌아가며 사용하는 비위생적인 주사기 및 시술 도구 사용 등 이다. 또한 드물지 않게 수혈 등을 통해서도 에이즈에 감염되기도 한다. 그러나 에이즈는 단순 신체 접촉이나 공기 중으로 감염되지는 않는다. HIV 보균자와 악수하거나 포옹을 한다고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는다. 에이즈는 다양한 성행위를 하면서 접촉하게 되는 체액들에 의해 감염될 수 있다. 콘돔 등 아무런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갖게 되는 성행위를 통해서는, 삽입자 보다는 그 반대편이 위험도가 높다. 구강 성교 또한 예외는 아니다. 구강 성교를 통해서 행위에 참여한 모두가 감염될 수 있다. 성폭력의 경우에는 감염 확률이 매우 높다. 강간 가해자는 콘돔의 사용 확률도 적으며, 피해자의 생식기나 직장에 외상을 입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약 복용도 HIV 감염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2008년 연구자들은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한 사람들이 성병 예방 조치 없이 성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결과 메스암페타민 복용자들은 당연히 타 집단에 비해 HIV감염 확률이 높았다. 다른 성 매개 감염(STI)들에 감염되면 생식기에 궤양을 일으킨다. 이렇게 상피 세포들이 손상되는 것뿐만 아니라, 정자나 질 분비물에 HIV 감수성이 있는 세포 혹은 HIV에 이미 감염된 세포(대식세포나 림프구)의 축적은 결국 HIV감염의 위험을 높인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북미에서 실시된 역학 조사에 따르면, 매독이나 연성 하감을 통해 발생한 생식기 궤양이 실제적으로 HIV 감염률을 4배나 증가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HIV의 전파도는 초기 감염자의 전파성과 감염되지 않은 파트너의 감수성에 영향을 받는다. 병의 전파성은 개인마다 일정하지 않다. 혈장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정액이나 생식기 분비물에서도 바이러스가 없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혈액 HIV 수치가 10배 증가할 때마다 81%의 경우에서 전파가능성이 증가했다. 여성의 경우가 호르몬 변화나 생식기의 미생물학적 환경 때문에 HIV-1에 더 감수성이 높다. HIV 균주 중 하나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다른 균주에 감염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는 더 병원성이 강한 균주에 의해 재감염 될 수 있다. 항문 성교의 경우 다른 체위에 비해 HIV 감염이 상대적으로 높다. 단 한번의 접촉으로 감염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경우 장기간 다수의 파트너와의 성관계를 통해 감염된다. 이런 패턴이 오히려 많은 파트너에게 재차로 감염 기회를 높인다. 에이즈는 감염된 부모로부터 출생할 시에도 감염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에이즈 감염을 알고도 자녀를 출산한 경우가 1건 있는데, 1990년 4월과 5월 각각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부부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도 1993년 1월 여자 아이를 낳은 사례가 있다. 여자 아이를 출산한 에이즈 감염 부모는 줄곧 여자 아이의 에이즈 검사를 거부하다가 2003년 8월 검사를 하였는데, 만10세가 되는 이 여자 아이는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에이즈 병세의 발전 과정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나뉜다. 제 1단계 (급성 HIV 증후군) HIV 감염 환자의 50~70% 정도는 일차 감염 후 3~6주가 되면 독감과 유사한 급성 임상 증후군을 앓는데, 이는 오른쪽 그림과 같이 혈중 바이러스 농도의 폭발적인 증가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몇 주 정도 지나면 체내의 능동 면역 기전이 동작하면서 혈중 바이러스 농도가 감소하고 급성 임상 증상도 점차 사그라진다. 제 2단계 (무증상기) 급성 임상 증후군을 앓은 뒤 대개 8~10년간은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아도 임상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느리긴 해도 체내의 HIV의 증식은 계속 일어나며, 이에 반해 CD4+ T세포는 꾸준히 감소한다. 일반적으로 혈중 HIV RNA 농도가 높을수록 무증상기는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평균적으로 이 기간에는 CD4+ T 세포가 일 년에 최대 50/µL씩 감소하며, 혈중 CD4+ T 세포가 200/µL 미만이 될 정도로 면역력이 떨어지면 기회 감염과 종양에 매우 취약해지게 된다. 제 3단계 (증상기) CD4+ T 세포가 극히 감소하여 면역력이 거의 상실되면, 환자는 P. jiroveci, 미코박테리아, CMV 등의 면역 결핍 없이는 거의 잘 발생하지 않는 기회성 감염을 앓게 된다. 그러나 복합 항 바이러스 제제에 의한 치료법과 기회감염 처치술의 발달로 이러한 이차 감염을 상당히 조절할 수 있다.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 치료 없이는 HIV감염 후 에이즈로 발달하기 까지 보통 9~10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에이즈로 진행된 후에는 평균적으로 10개월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임상적인 병의 진행 속도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2주도 안 걸리는 데 반해 다른 경우에서는 20년이나 걸리기도 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진행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보통 사람의 일반적인 면역 증강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도 진행을 늦추는데 도움을 준다. 나이가 많아 면역계가 약해진 노인층에서 진행 속도가 특히 빠른 것이 이 때문이다. 평소 건강 관리에 소홀했거나, 결핵과 같은 질병에 걸린 내력도 병의 급속한 진행을 돕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감염자의 유전적인 내력도 영향을 미치는데, 어떤 사람의 경우 몇 가지 HIV 균주에 내성을 띠기도 한다. 일례로, CCR5-Δ32 유전자가 동형접합인 사람들은 특정 HIV균주에 저항성을 나타낸다. HIV 자체가 유전적 변동이 심한 편이며 그 균주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병의 진행 속도는 더욱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에이즈의 원인인 HIV는 대단히 약한 바이러스이다. 심지어 공기 중에 노출되기만 해도 죽는다. 따라서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전염경로를 차단함으로써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다. 혈액 전달을 통한 경로 헌혈 및 수혈 과정에서의 안전성 검사를 통해 대부분 예방 가능하다. 그러나 안전성 검사에 위음성을 보이는 경우도 있어 완전한 예방법은 아니다. 혈액을 통한 HIV 노출은 단 한번으로도 95% 이상이 에이즈에 감염된다. 3~5%의 에이즈 환자는 혈액을 통한 에이즈 감염 환자이다. 출산을 통한 경로 신생아의 HIV 감염은 25.5%에 이른다. 그러나 항바이러스제제인 zidovudine을 출산 전부터 산모에 투여하고, 분만 후 신생아에 투여하는 방법으로 감염률을 8.3%까지 낮출 수 있다. 성접촉을 통한 경로 HIV는 체액, 특히 정액이나 질 분비물, 혈액 또는 타액 등에 섞여서 전염된다. 따라서 HIV 감염 여부가 의심되는 경우 성접촉을 피하고, 가능한 한 성행위시 직접적인 점막끼리의 접촉을 막을 수 있는 콘돔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구체적인 방법은 질성교, 구강성교, 항문성교를 할 때 어떠한 경우이건 콘돔을 착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물지만 키스를 통하여서도 충분히 감염이 가능하며 그러한 사례도 있다. 에이즈의 완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발견되었으나,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1995년에 시작된 일종의 칵테일 요법인 고활성 항바이러스 요법( h ighly a ctive a nti- r etroviral t herapy, 이하 HAART 요법)이 HIV 질환의 진행을 늦추고 생존기간을 연장시키는 데에 획기적인 성과를 나타내면서, 에이즈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당뇨병과 같은 조절 가능한 만성 질환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HAART 요법은 뉴클레오사이드 유사 역전사 효소 억제제(Nucleoside analogu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 이하 NRTI)와 비뉴클레오사이드 역전사 효소 억제제(Nonnucleosid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 이하 NNRTI) 및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제(Protease inhibitor, 이하 PI)와 같은 항바이러스 제제를 병합하는 요법이다. 2가지 NRTI 약물에 1~2가지 PI 약물을 환자에게 함께 투여하거나, 2가지 NRTI 약물에 1가지 NNRTI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이러한 초치료가 실패하면, 약물 전체를 바꾸어 다시 시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항바이러스 제제의 유형별 약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뉴클레오사이드 유사 역전사 효소 억제제(Nucleoside analogu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 NRTI) * Zidovudine, Didanosine, Zalcitabine, Stavudine, Lamivudine, Abacavir 비뉴클레오사이드 역전사 효소 억제제(Nonnucleosid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 NNRTI) * Nevirapine, Delavirdine, Efavirenz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제(Protease inhibitor, PI) * Saquinavir, Ritonavir, Indinavir, Nelfinavir, Amprenavir 200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에이즈 치료제의 주류를 이루었던 역전사 효소 억제제와 단백질 분해 효소 억제제의 치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기능을 갖는 약물의 개발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부터 새로운 형태의 에이즈 치료약이 미국 FDA의 승인을 받고 시장에 출시되기 시작했다. 2007년 7월에 처음 소개된 maraviroc (Pfizer, 상품명 Selzentry)는 최초로 병원체인 바이러스가 아닌, 숙주세포에서 감염에 관여하는 수용체 (receptor)의 작용을 억제시키는 치료제이며, 2007년 12월 FDA의 승인을 받고 시판된 Reltegravir (Merck, 상품명 Insentress)는 HIV 바이러스에서 역전사된 DNA가 숙주 세포의 유전자 안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억제하는 치료제이다. 2010년 12월 드디어 후천면역결핍증 완치 사례가 발표되었다. 해당환자는 2007년에 치료를 받고 현재 완치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 급성 골수형 백혈병의 치료를 위해 골수 이식을 받았다가 이 골수를 제공한 사람이 HIV저항인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인자를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게 된, 우연히 완치된 경우였고, 골수 이식의 위험 부담이 높아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념을 바탕으로, 기존의 에이즈 치료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의 Gene Therapy가 미국에서 연구되어 임상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 시술법은, 개별 환자의 몸에서 T세포를 추출하여 HIV바이러스가 T세포와 융합하는 매개처인 CCR5 수용체를 변형, 삭제하여 다시 몸속으로 주입하여 환자 스스로 바이러스를 퇴치하게 만든다. 이미 실행된 임상실험에서는 75% 의 환자들에게서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5년에 드디어 트루바다라는 약이 에이즈를 예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에이즈 감염균으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 외에도 에이즈 감염으로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다른 질병이 합병증으로 걸려서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2011년 미국의 국립 암연구소 연구 결과 에이즈환자의 사망원인 가운데 비에이즈 관련 암, 특히 폐암, 항문암, 간암, 호지킨림프종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립암연구소(NCI) 감염증 면역역학 미레디스 쉴스(Meredith S. Shiels) 박사는 “에이즈환자에서 발생하는 암의 수와 암 형태는 1991년부터 2005년 15년간 크게 변화하고 있다”고 Journal of the National Cancer Institute에 발표했다. HIV감염자에서는 카포지육종, 비호지킨림프종, 자궁경암 위험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또 HIV감염자에서는 폐암, 항문암, 간암, 호지킨림프종 등의 ‘비에이즈 관련 암’ 위험이 높아진다. 쉴즈 박사의 NCI와 미질병관리본부(CDC) 공동연구팀은 미국 에이즈환자를 대상으로 이들 2개군의 발암 현황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HIV/에이즈 암대비연구와 CDC 데이터를 1991~1995년(전 HAART기), 1996~2000년(HAART초기), 2001~2005년(HAART 후기)의 3개 기간으로 나누어 평가했다. 이러한‘에이즈 관련 암’의 이환율은 1090년대 중반에 고활성 레트로바이러스약물요법(HAARTT)가 등장하면서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에이즈 관련 암 환자수는 예상대로 전HAART기(3만 4587명)에서 HAART 후기(1만 325명)에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에이즈의 정확한 원인과 예방법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8년에는 기존의 에이즈균과는 다른 변종 에이즈균 역시 나타난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에이즈에 대해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이라는 법령을 두어 관리하고 있다. 이 법령 제19조에 따르면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이 혈액이나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 하고 있으며, 제25조에서는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중국은 에이즈 발병율이 독보적 1위이다. 미국 국무부 조사에 따르면 중국 여성 매춘부들의 숫자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이들은 아프리카 유럽등지에 퍼져 있다고 한다. 이 중국 여성들이 귀국과 출국을 반복하면서 중국 남성들의 에이즈 감염율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남성들의 에이즈 발병률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에이즈 발병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90년대에 중국 마을을 대상으로 수혈로 생계 유지를 하는 것을 장려한 캠페인 덕택에 에이즈 비율이 늘어났다. 또한 중국인 여성 연예인들은 스폰서를 구하는데 베이징 Zhou bao 신문에 의하면 중국인 여성 연예인이 기업 스폰서 남성을 에이즈 전염을 이유로 고소한 일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사실상 성매매 합법 국가나 마찬가지인 일본과 싱가폴에서도 에이즈 발병률은 높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유럽에서 성매매 합법 국가인 미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등에서 그리고 북유럽에선 에스토니아, 아이슬란드에서 에이즈 인구가 늘고 있으며 남미에서는 매춘 합법 국가인 멕시코,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에서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등에서 에이즈율이 증가하고 있다. 중국여성의 해외성매매 에이즈 음모론 프레디 머큐리 한국 에이즈 재평가를 위한 모임 (NOAIDS) 유엔 HIV/에이즈 연합(UNAIDS) 한국 에이즈 퇴치연맹 한국시론 에이즈 재평가를 위하여 에이즈 4천명 시대에도 ‘콘돔’은 금칙어? 메디컬뉴스 새로운 변종 에이즈 바이러스 발견 조선일보 1998.07.01 그래도 최하 수십 명은 감염 일요신문 2002.06.12 분류:보건재해 분류:범유행 에이즈 분류:감염병 분류:성병 분류:바이러스학 |
심장 (心臟 또는 염통 은 가슴의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근육질로 둘러싸인 혈액을 들리고 보내는 역할을 하는 인체 순환 기관이다. 심장은 보통 자기의 주먹만한 크기이다. 가슴 한가운데 흉골을 기준으로 왼쪽에 2/3, 오른쪽으로 1/3이 위치한다. 심장은 인체에 퍼져 있는 총 80,000km(성인 기준) 이상 되는 혈관으로, 날마다 쉬지 않고 혈액을 순환시킴으로써 물질대사를 비롯하여 인체가 살아있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심장은 관상 동맥이라는 두 개의 작은 동맥들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내막, 중막, 외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장의 혈액을 내보내는 작용은 역학적으로는 펌프와 거의 같다. 즉, 심방이 확대되어 정맥에서 혈액을 빨아들인다. 심방의 수축과 심실의 확대에 의해 혈액은 심실로 빨려들어가고, 이어서 심실이 수축하여 혈액을 동맥으로 내보내는데, 이때 심방은 확대되어 다시 정맥으로부터 혈액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심장은 태생기에 활동을 개시하고 나서 죽을 때까지 이 운동을 계속한다. 심실에서 내보내진 혈액량을 심박출량이라 한다. 건강한 사람이 안정된 상태에서 1회에 60-80㎖, 1분간 약 5ℓ를 내보낸다. 이 양은 체표 면적에 비례하며, 1m²당 2~3ℓ이다. 심장은 인체에 아주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심장 한 기관이 몸 전체의 기관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혈액은 우리 몸을 돌면서 산소 전달, 이산화탄소 흡수, 여러 영양물질을 공급한다. 그 혈액이 만약 멈추면 이산화탄소 흡수, 여러 영양물질 공급이 중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장이 잘못 되면 몸 전체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심장은 조그마한 충격에도 심전도가 많이 변화하기 때문에 제일 조심해야 하는 부위이기도 하다. 심장의 구조 돼지의 심장 심장 바깥쪽은 두 겹의 막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이를 장막성(漿膜性) 심막이라 한다. 하나는 심장 근육에 밀착해 있어 이것은 심장 윗부분의 혈관이 드나드는 부분(심저)에서 구부러져 다시 심장 전체를 에워싼다. 이 두 겹의 막 사이의 틈을 심막강이라 하며, 내부에는 약간의 활액이 들어 있다. 바깥쪽 심막에는 많은 결합 조직 섬유가 붙어 있는데, 그 때문에 섬유성 심막이라 한다. 그 좌우 양 측면에는 폐의 벽측 흉막과 인접해 있다. 원시적인 심장은 환형동물의 지렁이 등에서 볼 수 있다. 지렁이에는 2개의 큰 혈관이 몸의 정중선(正中線)을 따라 등쪽과 배쪽으로 달리고 있어 각각 등혈관·배혈관이라고 불리며, 또 이것을 잇는 횡행 혈관이 있다. 등혈관은 자동적으로 수축하여 혈액을 몸의 뒤쪽으로부터 앞쪽으로 보내며, 등혈관에는 체절마다 판막이 있어 혈액의 역류를 막는다. 한편, 배혈관에는 자동성이 없고 판막도 없다. 이와 같이, 지렁이의 혈액 순환은 등혈관의 자동적인 수축과 판막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환형동물의 심장이 가장 기본적인 구조라 할 수 있다. 절지동물의 심장은 심문(心門) 이라고 하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며, 등쪽에 관 모양을 하고 있어서 관심장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벽의 양쪽에는 근육 익상근 이 붙어 있어서 심장의 수축 운동을 맡는다. 바퀴벌레·지네 등은 원시적인 심장을 가지고 있는데, 배혈관이 넓어진 것 같은 심장이 배쪽에서부터 가슴 부위까지 이르고 있다. 심문은 심장의 좌우로 뚫려 있는데, 둘레는 판막으로 덮여 있다. 심장이 수축할 때는 판막이 닫히고 혈액은 동맥 속으로 보내지며, 심장이 이완할 때는 심문의 판막이 열려 심장 속으로 혈액이 흘러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바퀴벌레는 심문이 13쌍이나 있고, 지네 무리는 100쌍 이상의 심문이 있다. 절지동물의 혈관계는 동맥의 끝이 열려 있는 개방 혈관계이므로, 심장에서 보내진 혈액은 동맥을 통하여 체내의 조직으로 흘러들어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연체동물의 심장은 심방과 심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심강(圍心腔)으로 싸여 있다. 심실은 1개이지만, 심방의 수는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이를테면 부족류는 2개, 권패(나사조개)는 1개, 오징어·문어는 2개로 되어 있다. 또 혈액의 역류를 막도록 심실과 심방, 심실과 동맥 사이에는 판막이 있다. 심실에서는 2개의 동맥이 나오는데, 하나는 머리로, 또 하나는 내장으로 뻗어 있다. 오징어·문어 등의 두족류는 2심방 1심실의 심장 외에, 좌우 아가미의 뿌리 밑에 아가미 심장이라는 특수한 기관이 1개씩 있어서 아가미로 정맥혈을 보낸다. 척추동물의 경우, 진화의 과정에서 육지 생활에 적응함에 따라 심장의 구성에도 변화를 볼 수 있다. 어류의 심장은 모두 1심방 1심실이지만, 양서류 이상의 동물은 심방이 2개이다. 양서류의 심장은 2심방 1심실로서, 심실이 1개이기 때문에, 2개의 심방에서 온 혈액이 심실에서 섞인다. 한편, 파충류의 심장은 심실 안에 격벽이 생겨서, 정맥혈과 동맥혈이 혼합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2심방 불완전 2심실의 구조를 나타낸다. 조류·포유류의 심장은 2심방 2심실로서, 심방·심실이 각각 좌우로 완전히 나뉘어 있기 때문에 정맥혈과 동맥혈이 섞이는 일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조류·포유류가 일정하게 체온을 유지하여 활발히 활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다. 심장은 2심방 2심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방은 우심방과 우심실로, 온 몸에서 온 혈액은 상하 대정맥에 의해 우심방으로 돌아가며, 심실과의 경계인 방실판(房室瓣)을 통해서 우심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밀려나오면 폐동맥을 통해서 폐로 보내진다. 우심실과 폐동맥의 경계에는 폐동맥판이 있다. 두 번째 방은 좌심방과 좌심실이다. 폐에서 나온 혈액이 4개의 폐정맥에서 좌심방으로 돌아오면 심실과의 경계인 방실판(2첨판)을 통해서 좌심실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밀려나오면 대동맥으로 유출되어 온몸으로 보내진다. 좌심실과 대동맥과의 경계에는 대동맥판이 있다. 이 두 개의 방은 심방과 심방, 심실과 심실이 인접해 있고, 좌우를 구획하는 막을 각각 심방 중격(中隔)·심실 중격이라 한다. 심방 중격은 비교적 엷은 막으로, 태생기에 아래위에서 뻗어나와 중앙부에 구멍이 남는데, 출생후 1년 정도 되면 폐쇄된다. 심실 중격은 근육으로 된 두꺼운 벽으로, 태생기에 심첨(心尖)에서 뻗어나와 위쪽에 근육이 없는 곳에 약간 남을 뿐으로 좌우가 완전히 분리된다. 이 분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좌우 심실 사이에 연락 구멍이 남는 상태가 심실 중격 결손이다. 심방과 심실 벽은 심장에 독특한 근육(심근)으로 되어 있다. 완성된 심장의 심방은 약 절반 정도가 원래의 심방(심근 벽을 가진 심방)이고, 나머지 부분은 원래는 정맥관이었던 것이 심방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벽이 엷다. 심실벽은 모두 심근으로 되어 있는데, 좌심실 벽은 우심실 벽보다 3~4배로 심장 구조 중 가장 두껍다. 이것은 우심실은 혈액이 폐에만 도달할 정도의 힘으로 밀어내면 되지만 좌심실은 온몸에 혈액이 전달되도록 강한 힘으로 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심실 내면에는 심근이 불규칙하게 융기해 있는데, 이를 육주(肉柱)라고 한다. 그중 몇 개는 특히 잘 발달하여 손가락 모양으로 돌출해 있으며, 이를 유두근(乳頭筋)이라 한다. 유두근 끝에는 이첨판이나 삼첨판의 끝부분이 뻗어나온 건삭(腱索)이 붙어 있다. 심방이나 심실 내면은 심내막이라 하며, 한 겹의 엷은 막으로 덮여 있다. 심장 내부에는 혈액이 흐르고 있는데, 이 혈액에서 심근 등이 산소나 영양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혈액이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두꺼운 근육으로 된 내부와의 사이에서 물질 교환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심근의 영양은 관상동맥에 의해 보급된다. 이 동맥은 대동맥 기부에서 대동맥판 바로 근처까지 가지가 갈라지며, 대동맥의 첫 가지이다. 관상동맥은 좌우 2개가 나오는데, 약 60% 정도의 사람이 오른쪽 관상동맥이 약간 굵고 길다. 관상동맥은 심방과 심실 사이의 경계에 있는 홈(관상구)을 따라 달리며, 그 도중에 심방과 심실로 가지를 보낸다. 관상정맥은 동맥과 거의 나란히 달리며, 심장 뒷면에 있는 관상 정맥동에 모여 우심실로 들어간다. 대동맥(Aorta) 심장의 좌심실에서 온몸으로 혈액을 보내는 혈관. 대정맥(Vena Cava) 전신에서 모인 혈액을 심장의 우심방으로 보내주는 혈관. 심방(Atrium) 심장에서 정맥과 연결되어있는 부분. 심실(Ventricle) 심장에서 동맥과 연결되어있는 부분. 반월판(Semilunar valves) 우심실과 폐동맥 및 좌심실과 대동맥 사이에 있다. 삼첨판(Tricuspid) 우심방과 우심실 사이에 있다. 이첨판(bicuspid) 좌심방과 좌심실 사이에 있다. 심근(Myocardium) 심장벽의 중층(심근층)을 이루고 있는 두꺼운 근육. 정맥(Vein) 몸의 각 부분에서 혈액을 모아 심장으로 보내는 혈관. 동맥(artery) 심장 박동에 의해 밀려나온 혈액을 온몸으로 보내는 혈관. 심장막(Pericardium) 심장을 싸고 있는 이중의 낭상막(囊狀膜)으로 심낭(心囊)이라고도 한다. 심장은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속이 비어 있는 장기이며 무게는 약 250~300그램이다. 심장은 양쪽 허파 사이의 공간에 위치하며, 정중선상에서 볼 때 2/3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고 횡격막 위에 얹혀져 있다. 심장의 경계는 위쪽은 제2늑연골, 오른쪽은 흉골의 약간 오른편, 왼쪽은 제3~5늑연골까지 걸쳐 있다. 심장마비(심장마비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므로 병명으로는 잘 쓰지 않으며, 죽음의 원인도 된다.) 심근경색증 관상동맥에 의한 심근으로의 산소의 수요·공급이 불균형하여 산소부족상태가 지속된 결과, 심근세포에 비가역성 변화가 일어나서 심근의 수축기능이 장애를 받는 질환 동맥경화증 동맥벽에 비후나 조직의 변성이 일어나서 경화하는 질환 고혈압 또는 저혈압 심장 또는 혈관계의 기능 부전 등으로 정상혈압 범위를 벗어난 상태 이첨판 폐쇄부전증 부정맥 소, 양, 돼지, 닭 등의 가금류의 심장이 여러 나라에서 식용으로 쓰인다. 심장은 내장으로 분류되지만 근육때문에 맛은 보통 육고기와 같다. 맛과 생김새가 사슴고기와 유사하다.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지는 순대의 염통 부분도 돼지의 심장에 해당된다. 동방결절에서 발생된 느린 반응에 의해서 퍼니 채널(funny channel)의 안정막 전압에 의해서 활동전압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심방 전체로 퍼지게 된다. 이 전압은 방실 결절에서 지연되면서 심실과 심방의 시간차가 나는 박동이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심장 세포는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함께 뛰는 것이 정상이지만 유일하게 심방과 심장 사이에는 섬유질로 인한 차단 효과로 특수근전도계를 통하지 않고는 전도가 되지 않는다. 방실결절에서 지연된 활동전압이 푸르키네섬유를 통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심실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되어서 심실이 수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심근 세포는 빠른 반응을 보이게 되며, 0 단계에서는 Na 채널의 빠른 유입으로 인해서 가파른 곡선으로 탈분극이 되고, 1단계에서는 K 채널의 유출로 인해서 약간 재분극을 했다가 다시 2단계에서 Ca 채널의 유입으로 인해 평탄기를 가지면서 활동전압이 길게 유지되고 3단계에 다시 K 채널의 유출로 재분극이 되고 4 단계에 안정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심근세포의 활동전압은 그 유지시간이 길다. 따라서 절대적 불응기가 길게 되어서 강축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부정맥을 방지하는 하나의 원리가 될 수 있다. 푸르키네섬유나 방실 결절도 스스로 활동전압을 만들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활동전압을 만드는 동방결절에 의해서 억제 되므로 심주기에서는 동방결절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심장학 대사 증후군(메터볼릭 신드롬) 인슐린 저항성(IR) 심장대사(cardio-metabolism) 지질대사( Lipid metabolism) 심장 마비 심근 경색 피트산( Phytic acid, IP6) 디톡스(Detox, 해독) 분류:심장혈관계통 |
파두츠 (는 리히텐슈타인의 수도로 인구는 2005년 기준으로 5019명이다. 리히텐슈타인 공작가(家)는 본래 오스트리아에 거소가 있었는데, 1938년부터 이곳에 거소를 두었다. 스위스 국경 부근의 라인 강 동쪽 비탈면에 위치하며 16세기에 건축된 군주 요제프 2세의 고성(古城)이 시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파두츠는 행정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소를 방목하고 곡물이나 포도가 재배되는 농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섬유·식품·정밀 기계 등의 경공업도 활발하며, 아름다운 환경에 힘입어 관광지로서도 알려져 있다. 시 중앙에 있는 우체국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아름다운 우표를 사려고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 파두츠 공식 홈페이지 분류:리히텐슈타인의 도시 분류:리히텐슈타인의 지방 자치체 분류:유럽에 위치한 수도 |
룩셈부르크 대공국 (, , 약칭 룩셈부르크 (, 는 서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며 대공이 통치하는 대공국이다.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철강 업체 아르셀로미탈의 본사가 룩셈부르크에 위치해 있다. 유럽 연합, 경제협력개발기구, 유엔, 북대서양 조약 기구, 베네룩스 경제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며, 수도 룩셈부르크에는 유럽 연합의 여러 기관이 위치하고 있다. 2013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2014년에 임기를 마쳤다. 2016년 기준 룩셈부르크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 혹은 도착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는 187개국이며, 이는 전세계 15위에 해당한다. 963년 아르덴 백작 지크프리트가 룩셈부르크의 고성을 거점으로 삼아 이 지역의 지배를 시작한다. 1060년경 지크프리트의 증손인 콘라트가 처음으로 룩셈부르크 백작을 칭한다. 콘라트의 증손인 에르메진데의 시절에는 영토는 3배로 팽창해 왈롱 지방도 병합된다. 1308년 에르메진데의 증손인 하인리히 7세가 신성로마 황제로 추대된다. 1354년 하인리히 7세의 손자인 황제 카를 4세가 룩셈부르크를 공국으로 승격시킨다. 1443년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2세가 룩셈부르크를 구매하다. 1477년 샤를 7세의 후계자 마리가 후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는 것으로, 룩셈부르크는 합스부르크가에 넘어간다. 1556년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의 영지가 된다. 1659년 피레네 조약에 의해 남부지역이 프랑스에 할양된다. 1684년 프랑스에 병합된다. 1697년 라이스바이크 조약에 의해 에스파냐에 반환된다. 1714년 라슈타트·바덴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령이 된다. 1794년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1815년 빈 회의에 의해 대공국으로 승격되었으며, 네덜란드 국왕이 대공 작위를 겸했다. 1839년 런던회의에 의해 서쪽 영토 절반을 벨기에에 할양하다. 1842년 프로이센 주도의 관세동맹에 가입하다. 1867년 런던 조약으로 프로이센군이 철수하고 독립과 중립이 보장되다. 1890년 대공을 겸한 네덜란드 국왕 빌렘 3세의 죽음에 의해 나사우-바일부르크가의 아돌프가 대공이 되고 동군연합은 해소된다. 정치 형태 입헌 군주제 대공 앙리 총리 그자비에 베텔 헌법 1868년 10월 제정 의회 단원제, 정원 60명, 임기 5년 주요정당 기독사회인민당(CSV = Chrëschtlech Sozial Vollekspartei), 민주당(DP = Demokratesch Partei), 룩셈부르크 사회주의 노동자당(LSAP = Lëtzebuergesch Sozialistesch Arbechterpartei), 민주주의 및 공평한 연금을 위한 행동위원회(ADR = Aktiounskomitee fir Demokratie a Rentegerechtegkeet), 녹색당(Déi Gréng), 룩셈부르크 공산당(KPL). 독일, 프랑스, 벨기에 사이에 있는 내륙국가로 독일과 프랑스의 완충국으로서의 의미도 지녔다.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3개 구와 12개 주, 116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룩셈부르크의 행정 구역 목록이다. 디키르히 구 * 클레르보 주 (Clervaux) * 디키르히 주 (Diekirch) * 레당주 주 (Redange) * 비앙덴 주 (Vianden) * 빌츠 주 (Wiltz) 그레벤마허 구 * 에히터나흐 주 (Echternach) * 그레벤마허 주 (Grevenmacher) * 레미히 주 (Remich) 룩셈부르크 구 * 카펠렌 주 (Capellen) * 에슈쉬르알제트 주 (Esch-sur-Alzette) * 룩셈부르크 주 (Luxembourg) * 메르슈 주 (Mersch) topo en.jpg|룩셈부르크의 지형도 districts.svg|룩셈부르크의 구 LuxemburgKantons.png|룩셈부르크의 주 섬네일 룩셈부르크의 교회 도시 전경 룩셈부르크 전경 룩셈부르크의 한 은행 Lintgen 소방서 전통적으로 협소한 국토 때문에 이웃 나라와 유대를 굳게 하여 1843년부터 1918년에 독일과 관세 동맹을 맺고, 1921년 이후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동맹,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 등에 가맹함으로써 소국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따라 발달한 철강산업은 룩셈부르크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철강산업은 무역액의 29%, 국내총생산(GDP)의 1.8%, 산업고용의 22%, 노동력의 3.9%를 차지한다. 남부의 구틀란트를 중심으로 농업이 이루어져 감자, 보리, 사탕무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독일 국경을 따라 흐르는 모젤 강 연안의 포도원에서 생산하는 포도주는 특히 유명하다. 이 나라 제1의 산업인 광공업은 남서부의 뒤들랑주, 로딩겐, 에슈쉬르알제트, 디페르당주 등지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을 원료로 하였으나, 철광석층의 대부분이 고갈되어 프랑스의 수입에 의존한다. 이밖에 화학제품·금속제품·시멘트를 생산하며, 맥주, 담배, 낙농제품의 제조도 성하다. 그러나 석유파동 이래 세계적 경제의 혼미는 룩셈부르크의 철강업에도 큰 영향을 끼쳐 정부는 경제적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외국기업유치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국(自國)을 금융시장으로 부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룩셈부르크는 은행·보험업, 철강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서비스산업국이자 공업국으로 실업률은 유럽 연합 국가 중 최저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1998년 이후에도 제조업의 수출증가나 금융업의 호조에 의해 고성장을 유지하였다. 무역면에서는 1998년 수출 208억 달러, 수입 174억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금속, 기계, 전기제품, 플라스틱, 고무, 섬유 등이고 수입품은 기계류, 전기제품, 금속, 수송용 기기, 광산물품(석유 포함) 등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등이다. 게르만족이 바탕이 되고 프랑스인과의 혼혈이 있다. 포르투갈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소수로 살고 있는 데, 이들은 룩셈부르크의 철강 산업의 붐이 일어날 때 노동자로 들어왔다. 헌법상의 명시적 조항은 없고, 룩셈부르크어(이 언어는 독일어의 방언으로 규정한다), 프랑스어, 독일어가 사실상의 공용어이다. 입법활동은 프랑스어가 독점하고, 행정 및 사법분야는 3개 언어를 사용한다. 전국민의 97%가 익숙한 프랑스어이기에,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영어도 관광 장소에서 사용한다. 국교는 없고, 주민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세속화 경향이 심하고, 외국인의 유입이 많아 무신론자나 이웃 종교 신도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개신교, 유대교, 정교회, 성공회, 이슬람교 등의 신자가 있다.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 참전국으로 UN군으로 참전하여 44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해운협정(1987년)과 항공협정(2003년)을 체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2001년 수교하였다. 2016년 현재, 별도의 한국대사관이 존재하지 않고 주 벨기에 대사관에서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룩셈부르크 정부 공식 웹사이트 주벨기에 대사관의 룩셈부르크 설명 분류:독일어권 분류:프랑스어권 분류:내륙국 분류:입헌군주국 분류:분단된 지역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유럽 연합 회원국 분류:유럽 평의회 회원국 분류:프랑코포니 회원국 분류: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분류:경제 협력 개발 기구 회원국 분류:대공국 분류:독일 연방 가맹국 |
전한(前漢) 홍가(鴻嘉) 2년 전한(前漢) 성제(成帝) 14년 신라(新羅)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39년 고구려(高句麗) 동명성왕(東明聖王) 19년 / 유리명왕(瑠璃明王) 원년 마한 왕이 죽자, 신라의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 거서간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석탈해가 진한에서 발견되다. 신라 4대 국왕 탈해 이사금 9월 21일 -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고구려(高句麗)의 초대 태왕(太王) 동명성왕(東明聖王) |
A.D 1년 당시의 세계 게르만 종족의 이동(1년) 전한(前漢) 원시(元始) 원년.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년 신라(新羅)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58년 고구려(高句麗) 유리명왕(瑠璃明王) 20년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19년 고구려(高句麗) - 유리명왕(瑠璃明王)의 태자 도절(都切)이 죽다. 백제(百濟) - 말갈이 쳐들어왔지만 추장이 생포되다. 주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우스, 로마 총독 큉틸리우스 바루스 팔라스 - 그리스의 자유민 및 정치가 가이우스 맹 고구려의 태자 도절 *1년이란 태양이 천구상의 황도(黃道)를 일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이것은 지구의 태양에 대한 공전주기를 반영한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1년이 생길 수 있다. 아래는 뉴컴에 의하여 만들어진 수식이다. *항성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완전히 1회전하는 주기로서 지구의 진공전주기(眞公轉週期)인 동시에 황도상에서 태양의 진선회주기(眞旋回週期)이다. 항성년 = 365.25636042일 + 0.11×10(t - 1900) = 365일 6시 9분 9.5초 + 0.0001초(t - 1900) (황도상의 고정점을 기준) *근점년 지구가 근일점에 도달한 순간부터 다음해 근일점에 오기까지의 시간.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의 복귀주기이다. 이것은 다른 행성의 섭동에 의하여 매년 11″씩 서에서 동으로 옮겨간다. 근점년 = 363.25964134일 + 3.04일 × 10(t - 1900) = 363일 6시 13분 53.0초 + 0.0026초(t - 1900) (근일점기준) *태양년 태양이 춘분점에서 다음의 춘분점에 도달하기까지의 주기.세차운동에 의하여 춘분점이 황도상을 매년 50.03″, 즉 0.013972°씩 동에서 서로 옮겨가므로 항성년보다 20분 24초 짧다. 태양년 = 365.24219879일 - 6.14일 × 10(t - 1900) = 365일 05시 48분 46.0초 - 0.00530초(t - 1900) (춘분점기준) *식년 달의 승교점인 백도와 황도와의 교점에 대한 태양의 1주천 주기 식년 = 346일 14시 52분 50.7초 *우리가 보통 1년이라 하는 것은 1 태양년을 의미하며 윤달의 계산도 태양년을 기준으로 한다. |
전한(前漢) 원시(元始) 4년 전한(前漢) 평제(平帝) 4년 신라(新羅)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61년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원년 고구려(高句麗) 유리명왕(瑠璃明王) 23년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2년 음력 3월 - 혁거세 거서간이 죽었다. 사릉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음력 7월 - 낙랑의 군사가 신라에 와서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남해 차차웅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그릇되이 왕위에 있어, 두려움이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賊)이 우리가 국상(國喪)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8월 - 백제, 말갈을 부근현(父斤峴)에서 고구려(高句麗)의 3대 태왕(太王) 대무신왕(大武神王) 예수 그리스도 신라(新羅)의 초대 국왕(國王)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승하 신라(新羅)의 왕비 알영부인(閼英夫人) 4년 마다 올림픽, 월드컵 등이 개최된다. |
신(新) 시건국(始建國) 원년 신(新) 왕망(王莽) 2년 신라(新羅)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6년 고구려(高句麗) 유리명왕(瑠璃明王) 28년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7년 음력 2월 - 마한의 원산, 금현 2성, 백제에 항복, 마한 멸망 음력 7월 - 백제, 대두산성(大豆山城) 축성 음력 8월 - 부여 대소왕, 고구려에 사대를 권고 9월 -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바루스의 로마군이 아르미니우스(독일명 헤르만)의 게르만족에게 전멸 고구려의 태자 해명(解明) |
이벤 모글렌 (Eben Moglen)은 컬럼비아 로스쿨의 교수이다. 또한 그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포함한 수많은 프로 보노 고객들을 변호하는 소프트웨어 자유 법률센터(Software Freedom Law Center)의 설립자 겸 회장이다. 리처드 스톨만과 함께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GPL을 포함한 GNU 라이선스를 작성했다.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코드가 법이 되지 않는 경우 공중(公衆)의 사업 GNU GPL은 법적 강제성을 갖고 있는가? 엘드레드 대 애쉬크로프트 사건에 대한 FSF의 소견서 분류:1959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법학자 분류:저작권법학자 분류:저작권 활동가 분류:예일 대학교 동문 분류:스와스모어 대학교 동문 분류: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분류:버지니아 대학교 교수 분류:미국의 블로거 분류:GNU 관계자 분류:미국의 변호사 |
신(新) 지황(地皇) 3년 신(新) 왕망(王莽) 15년 신라(新羅)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19년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5년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40년 갈사부여(曷思夫餘) 갈사왕(曷思王) 1년 2월 고구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공격해 대소왕을 죽임 4월 동부여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이 갈사부여를 건국함 7월 동부여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무리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함 동부여(東夫餘)의 2대 국왕(國王) 대소왕(帶素王)이 죽음 고구려(高句麗)의 무신(武臣) 괴유(怪由) |
귀스타브 쿠르베 장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 (, 1819년 6월 10일 - 1877년 12월 31일)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Collège)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Besançon)의 왕립 고등학교 (Lycée)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mit schwarzem Hund.jpg|〈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자화상), 1842년. Selfportrait.jpg|〈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자화상), 1848-49년. Hängematte.jpg|〈해먹〉(원제 처녀의 꿈), 1844년. Courbet - Zélie Courbet.jpg|〈줄리엣 쿠르베의 초상〉, 1847년. Courbet 033.jpg|〈샤를 보들레르의 초상〉, 1848-1849년. Courbet 018.jpg|〈돌 깨는 사람들〉, 1849년. 캔버스에 유채, 165 × 257 cm, 베를린 국립회화관 Courbet 031.jpg|〈오르낭의 식사 후 휴식〉, 1849년. 캔버스에 유채, 195 × 275 cm. Courbet 002.jpg| Farmers of Flagey on the Return From the Market, 1850 bruyas.jpg| Portrait of Alfred Bruyas, 1854 Courbet 010.jpg|〈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1854년. 캔버스에 유채, 129 × 149 cm, 몽펠리에 파브르 박물관 Guéymard as Robert le Diable by Gustave Courbet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436015 (cropped).jpg| Louis Guéymard(1822–1880) as Robert le Diable, 1857, Metropolitan Museum of Art Gustave - Woman with White Stockings - c. 1861.jpg| Les Bas Blancs, (Woman with White Stockings) , ca 1861 (Barnes Foundation) Courbet, Femme nue couchée, 1862.jpg| Femme nue couchée, 1862 Trellis Gustave Courbet 1862.jpeg| The Trellis , 1862, Toledo Museum of Art, Toledo, Ohio Portrait of Countess Karoly 1865 그의 아이들〉, 1865년. Courbet 030.jpg| Sea Coast in Normandy, 1867 Courbet 009.jpg|〈파도와 여인〉, 1868년. 캔버스에 유채, 65 × 54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Courbet - La Source - Musée d Orsay.jpg|〈샘〉, 1868년. 캔버스에 유채, 128 × 97 cm, 오르세 미술관 Courbet 020.jpg|〈파도〉, 1870년. Falaise d Étretat après l orage - Gustave Courbet.jpg|〈폭풍이 지나간 후의 에트르타 절벽〉, 1870년 - Stream in the Jura Mountains (The Torrent), oil on canves, 1872-3.jpg| Stream in the Jura Mountains ( The Torrent ), 1872-3, Honolulu Academy of Arts Courbet 042.jpg| Mountain landscape with fruit trees in Ornans , 1873 Courbet 007.jpg| The Lake Neuchâtel , 1875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귀스타브 쿠르베 Gallery of paintings by Gustave Courbet Berman, Avis "Larger than Life" Smithsonian magazine, April 2008 Courbet images and biography at CGFA Humanities Web on Courbet Art Renewal Center; biography and images Union List of Artist Names, Getty Vocabularies. ULAN Full Record Display for Gustave Courbet. Getty Vocabulary Program, Getty Research Institute. Los Angeles, California. 쿠르베, 귀스타브 쿠르베, 귀스타브 쿠르베, 귀스타브 분류:프랑스의 아나키스트 분류:프랑스의 망명자 분류:파리 코뮌 관련자 분류: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분류:19세기 화가 분류:두주 출신 |
로코코 (Rococo)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 (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왔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또한 로코코에서는 중국 양식이 많이 유행하였다. 로코코란 낱말이 서양 예술사에서 전문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40년대로 보인다 (1842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 낱말의 사용 인정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로코코란 루이 15세 시대 (1730년 - 1750년)에 유행하던 프랑스 특유의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조개무늬를 장식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style de rocaille 라고 부른다). 후에 이 국한된 의미를 벗어나 예술사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 양식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이 있다. 코스마 다미앙 요한 밥티스트 지머만 하일리겐 교회 더비경 주택 상수시 궁전 앙투안 바토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장에티엔 리오타르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브룅 프랑수아 부셰 서양 미술사 분류:유럽의 근세사 |
르네 데카르트 (, , 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 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주(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한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1626년부터 2년 동안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하며 미완성 논문 을 썼다. 1628년 말,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저술 활동에 몰두해 《세계론》(Traite du monde)을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1637년에는 《방법서설》에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가지 부분을 덧붙여 익명을 출판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완성한다. 1644년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를 계승,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 원리》를 출판한다. 그 후 그는 여러 사람과 편지로 자기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기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1649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책, 《정념론》(Les passions de l ame)이 된다. 1650년 2월 11일, 그는 폐렴에 걸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Principia philosophiae , 1685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투렌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La Haye, 현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데카르트 시로 개명함)의 법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 지역 렌(Renne)시의 시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14달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몸이 무척 허약했다고 한다. 1606년 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주(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하게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다. 5년간 라틴어, 수사학, 고전 작가 수업을 받았고 3년간 변증론에서 비롯하여 자연철학,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을 포괄하는 철학 수업을 받았다. 그가 이 시기에 받은 교육은 후에 그의 저서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특히 《방법서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라 플레쉬를 졸업한 후 푸아티에(Poitiers) 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수학·자연 과학·법률학·스콜라 철학 등을 배우고, 수학만이 명증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하였다. 1616년에 리상스(Licence)를 취득한다. 이후 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으로부터 실질적인 지식을 얻고자 학교 밖으로 나갔고,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졸업 후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네덜란드에 갔으며,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에 출정하였다. 1619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첫 작품인 짧은 《음악 개론》(Compendium Musicae)을 썼다. 같은 해에 독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여행하던 중 11월 10일 울름의 한 병영에서 자기 삶의 길을 밝혀 주는 꿈을 꾸게 된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삶의 목표를 학문에 두기로 하였다. 1620년 제대하고 프랑스에 귀환, 1626년부터 파리에서 수학·자연 과학, 특히 광학을 연구하였다. 1627년에 다시 종군한 후, 1628년 단편 을 집필, 자신의 방법론 체계를 세우려 하였다. 같은 해 겨울 연구와 사색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건너가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은 네덜란드에 약 20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1628년 겨울에 데카르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 밑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하아렘, 에그몬드 등의 도시로 여러 차례 주거지를 옮기면서 더러는 개인 교사로 혹은 은둔 학자로 생활을 했다. 이 시기 (1630년 - 1633년)에 자연과학에 관한 책 《세계론》(Le Monde)을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책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진술했다. 1637년부터 데카르트는 존재론과 인식론 문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해에 《방법서설》을 출판했다.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는 1641년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후에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1649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에 부임하여 여왕에게 철학을 강의하고, 아카데미 창립에도 관여하였으나, 1650년 초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확실한 것으로 철학도 수학과 같이 분명하고 명확히 드러나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의심하였는데, 그렇지만 최후의 의심할 수 없는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도달, 이것이 철학의 근본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그 기계적 우주관은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며, 수학에 있어서는 해석 기하학을 창시하여 근대 수학의 길을 열어놓았다.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철학자로의 삶도 살았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저서 《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감각도 배제 했는데, 이는 감각도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달한 결론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다.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방법서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능한 악마가 인간을 속이려 한다고 해도, 악마가 속이려면 생각하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이는 《제일철학을 위한 성찰》에도 나와있다.)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명제이며,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 명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 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데카르트는 본유관념과 인위관념, 외래관념을 분리하였다. 여기서 외래관념은 밖에서 오는 관념을 말하고 인위관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며, 본유관념은 태어나면서 부터 존재하는 관념을 말한다. 본유관념은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개이다. , 정육면체의 면은 여섯개 이다. ,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와 같은 것으로,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덧붙여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 도 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존재론적 증명을 통하여 신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증명은 나중에 칸트의 비판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려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바로 연장과 사유이다. 연장은 구체적인 부피와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를 말하고, 사유는 연장과 달리 부피와 같은 것이 없는 실체를 말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연장과 사유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사유는 몸을 제어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몸과 사유를 이어주는 부분을 송과선으로 보았는데,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이 송과선을 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데카르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그는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고 의사마저도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다행히도 마음씨 고운 한 간호사의 보살핌 덕분에 그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때의 일로 인해 그의 이름을 소생(蘇生) 이란 뜻의 르네 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어려서부터 조용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철학가 기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꼬마 철학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부자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그는 스스로 형제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형제들과도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자주 집을 떠나 혼자 여행을 다녔고 친구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에서 사팔뜨기 인형을 제일 좋아했던 그는 커서도 유독 장애인들에게 호감을 보였다. 8세 때 데카르트는 라 플레슈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여 고전문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데카르트의 선생님은 그를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내성적이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학교의 구시대적 교육방식에 불만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배운 교과서를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1613년에 파리로 가서 법률을 배웠고 1616년 푸아티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식견을 높이기 위해 1617년 그를 다시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도시 생활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수학과 관련된 도박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617년의 어느 날 한가로이 길을 걷던 데카르트는 벽에 붙은 광고지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광고지가 붙은 곳으로 다가갔다. 광고는 네덜란드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행인을 발견한 데카르트는 광고에 적힌 내용을 물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네덜란드 대학교 교장이었고 데카르트에게 광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광고는 어려운 기하학 문제가 적혀 있었고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사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데카르트는 단지 몇 시간 만에 문제를 풀었고 자신에게 수학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온과 휴식뿐이다."라고 말한 수학의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 수학자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해 눈뜨기 힘든 아침 시간,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같은 또래의 보통 소년들과는 달리 자기가 좋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였다. 중년이 된 데카르트는 학교생활을 되돌아보고 나서 이 길고 조용한 아침의 명상이 자신의 철학과 수학의 참다운 원천이었다고 얘기한다. 그 예에 해당하는 일화가 있다. 그가 처음으로 도입한 좌표 개념의 발견과 관련된 일화인데, 30년 전쟁 당시 용병으로 참여하였을 당시 몸이 약해 병영의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어있는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좌표 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데카르트는 문득 자신에게 이상한 성향이 있음을 자각한다. 사시(斜視 사팔뜨기)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만 보면 왠지 더 친근감을 느끼고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푼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던 데카르트는 결국 어린 시절에 한 소녀를 사랑한 적이 있었고, 그녀의 눈이 사시였음을 기억해 낸다. 사랑에 빠진 데카르트에게 소녀의 신체적 결함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사랑의 감정이 그녀의 신체적 결점을 압도하여, 사시라는 결점은 훗날 무의식적으로 좋은 감정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경험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어떤 선택의 순간에 부닥쳤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받은 감정적 충격이나 상처 때문에 종종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철학의 왕자’로 군림했던 데카르트는 이 사소한 일화를 통해, 감정이 어떻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하는지 깨닫는다. 르네 데카르트는 30년전쟁 때 울름가 주변의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그곳은 겨울에 너무나 추웠다. 그가 술회한 바에 의하면, 그는 어느 벽난로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그 난로 속에서 잠이 들었다가 세 가지 꿈을 꾸었다. 첫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심한 바람이 불고 있는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가 약하여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는데 그 근처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한 사람이 있어 데카르트 자신이 그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는데, 두 번째 꿈에서 그는 미신으로 흐려지지 않는 과학의 눈으로 무서운 폭풍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폭풍은 일단 그 정체가 폭로되고 난 후에는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세 번째로 꿈을 꿀 때는, 테이블 위에 사전과 그 옆에 다른 책이 놓여 있는데 ‘나는 어떠한 생활을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오며 낯선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Quiet Non’(그는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학문의 ‘참과 거짓’이라 해석함)으로 시작하는 시를 보여주었다. 그는 세 번째 꿈에서 깨어난 후에 이미 꾼 꿈들의 의미를 생각하였는데 첫 번째 꿈은 과거의 오류에 대한 경고이며, 두 번째 꿈은 그를 사로잡은 진실의 정신이 내습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꿈은 모든 과학의 가치와 참된 지기에의 길을 열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사건은 데카르트가 참된 지식으로의 접근법에 대하여 스스로가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미 이 꿈들을 꾸기 8개월 전 베크만에게 보낸 보고에 ‘앞으로는 기하학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계획을 공언하였다. 기하학과 대수학의 결합으로 두 개의 학문 영역을 하나의 학문으로 파악하는 데 성공한 데카르트는 더 나아가 모든 학문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통합하려 하였다. 모든 문제는 동일하고 보편적인 ‘수학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방법을 그는 보편수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철학의 진술은 수학의 진술처럼 아주 기초적이고, 논리적이고, 엄격해야만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했다. 철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했다. 그럼으로써 모든 근본 중의 근본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근대철학의 토대를 발견했으며, 이 토대 위에 하나의 새로운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1649년 2월,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는 데카르트를 스웨덴 황궁으로 초대했다. “크리스티나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위대한 학자의 시간을 뺏을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그녀에게 사랑에 관한 글을 써서 바쳤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그가 무시해왔던 제목이었다.” 여왕은 일주일에 세 번 그에게서 철학 강의를 들었는데 반드시 새벽 5시에 강의하도록 명했다. 데카르트는 그동안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왕의 명에 따라 일주일에 3일은 한밤중에 일어나서 스웨덴의 찬 공기를 가르며 자신의 숙소에서 여왕의 서재로 찾아가야 했다. 1650년 2월 1일, 새벽 찬 바람을 맞은 데카르트는 감기에 걸렸고, 곧바로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데카르트는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1667년에 파리에 돌아왔고 주느비에브 뒤몽 성당에 안치되었다. 1799년 프랑스 정부는 그의 유해를 프랑스 역사관으로 옮겨 프랑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과 함께 모셨다. 1819년 이후 그의 유골은 다시 생 제르맹 데프레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데카르트, 유럽 르네상스 이후 인류를 위해 처음으로 이성의 권리를 쟁취하고 확보한 사람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근세사상의 기본 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이원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과학적 자연관과 정신의 형이상학을 연결지어 세상을 몰가치적이고 합리적으로 보는 태도와 정신의 내면성을 강조하였다. 대륙철학의 합리주의의 근본이 된 그의 회의론은 다양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함으로써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는 것이었다. 그는 수학을 이러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본 신념으로 여겨 철학을 포함한 모든 진리를 수학적인 원리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철학 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적인 업적도 이룩하였다. 1625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며 광학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1637년 《방법서설》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을 출간하였다. 수학자로서의 그는 데카르트 좌표계(직교 좌표계)를 만들어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며 방정식의 미지수에 최초로 를 사용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거듭제곱을 표현하기 위한 지수의 사용 등을 발명했다. 르네 데카르트는 다양한 여러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수학을 만든 혁명적인 수학자이며 동시에 고대 그리스 과학을 모두 집대성한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의 보편적인 수학은 본인이 예견했듯이 광학, 천문학, 기상학, 음향학, 화학, 건축학, 물리학, 공학, 회계 등에 다양하게 응용되었으며 본인이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분야인 전기학, 인공두뇌학, 미생물학, 유전학, 경제학 등에도 응용되고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며 이 절대적인 진리를 이용해 구성요소의 진리값을 이용한 다른 진술을 증명하는 법을 개발했다. 그는 과학을 대하는 데에 있어 크기, 모양, 운동 등의 경험적인 양에 집중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이론에 따라 진공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세 가지 물질의 연장이 곧 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르네 데카르트의 글과 방법론을 곁들인 데카르트적 회의 는 서양철학의 특징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관한 부분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해석기하학의 창시이다. 특히 그가 고안한 직교좌표계는 이전까지 독립적으로 다루어졌던 대수론과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융합시켜 자신 이후의 뉴턴역학을 비롯한 근대 수학과 과학의 발전에 바탕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직교좌표계는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공간을 대체하였고, 이는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공간 개념을 도입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방법서설》( Discourse on Method) 에 포함된 소논문 《 La Géométrie 》(1637)은 수학의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논문에서 그는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해, 모든 원추곡선을 단 한 종류의 2차 방정식으로 표시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를 제시함으로써 과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숫자(밑) 위에 작은 숫자(지수)를 씀으로써 거듭제곱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그의 수학적 업적은 라이프니츠가 제안하고 뉴턴이 발전시킨 미적분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실계수의 n차방정식의 양의 실근의 개수는 다항식 의 실수의 열사이에서 일어나는 부호변화의 수와 같거나 그 수보다 짝수 개만큼 적다."는 데카르트의 부호법칙은 다항식의 근의 개수를 구하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방정식의 미지수에 처음으로 를 사용한 것도 르네 데카르트의 업적이다. 1618년 르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나 이삭 베크만을 조우했으며, 그에게 많은 문제에 수학을 적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는 수학이 어떻게 류트의 음정을 맞추는 데에 정확하게 응용될 수 있는지와 무거운 물체가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수면의 높이 변화를 나타내는 대수적인 공식을 제안했다. 또한 진공 상태에서 물체가 낙하할 때 임의의 시간에서 그 물체가 가속하는 속도를 예측하는 방법과 어떻게 회전하는 팽이가 똑바로 서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공중에 뜰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베크만의 일기를 통해 1618년 말까지 데카르트가 이미 기하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수 방정식의 적용을 여러 방면에 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네 데카르트는 수학을 "불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기하학을 "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보았으나 그 둘 간의 장벽은 해석기하학이 창시됨에 따라 허물어졌다. 그는 산술과 대수학은 그저 숫자의 과학이 아니라 무리수의 사용을 정의하고 새로운 수학의 가능성을 연 명제의 과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법서설(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을 통해 그는 수학과 모든 과학은 상호관계적이며 둘을 따로 생각하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쉽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로서의 르네 데카르트는 물리학 분야에 큰 공헌을 했다. 10살 때, 라 플레슈(La Fleche)의 학교에 입학해 논리학, 윤리학, 물리학과 형이상학, 유클리드 기하학과 새로운 대수학 및 갈릴레이의 망원경에 의한 최신 업적에 이르기까지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과학자로서의 초석을 다졌다. 1618년 르네는 군에 자원 입대하여 장교로서 복무하였는데, 이 때 그의 과학적 흥미는 탄도학, 음향학, 투시법, 군사기술, 항해술 등까지 발전시켰다. 그 해 겨울 아마추어 과학자이자 당시 수학의 지도자였던 이삭 베크만을 처음 만나 다시 이론적인 문제와 물리학에 흥미를 가진 이후 몇 년간 물리학분야에 있어 빛의 원리, 공학, 자유낙하 등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특히 그가 빛의 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빛을 중요시하던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점도 있다(사실 이는 당대 수학자나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이론적 전개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가장 작은 수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모든 사실을 설명하고, 더구나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까지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스넬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굴절의 법칙이 이 때 발견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저서 《굴절광학》에서 독자적으로 증명한 "굴절의 법칙"을 언급하는 한편, 시력에 관한 다양한 연구 내용을 설명했다. 여기서 그는 굴절의 법칙에 대해 서술할때 자신이 고안한 직교좌표계를 활용하여 법칙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는 《천체론(Le monde)》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후일 뉴턴에 의해 거부된 그의 와류이론에 의하면 에테르의 미소한 입자들이 혹성이나 태양 주위에 거대한 회전흐름, 즉 소용돌이 속에 떠 있는 어린이의 보트와 같이, 이 태양의 소용돌이 속으로 운반되고, 달도 마찬가지로 지구의 주위로 운반된다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Clifford Truesdell 로부터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현대적 의미의 시초이다." (Truesdell 1984,6) 라는 평을 들었다. 데카르트는 사물의 본질을 외연(extension)으로 보았다. 사물에 체계적 의심을 적용해 그것의 감각적 특징들을 지워 나간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간의 일부를 채우고 있는 무색, 무미, 무취의 어떠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공간은 물질로 꽉 차있는 플레넘(plenum)으로, 불의 원소, 공기의 원소, 흙의 원소의 세 종류의 물질로 채워져 있다. 다른 어떠한 감각적 속성이 없이도 크기, 모양, 운동 등으로만 물질을 정의해 차가움, 뜨거움, 습함 등의 질적인 개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데카르트는 플래넘을 구성하는 작은 원소들의 충돌이 자연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또한 데카르트는 그의 책에서 눈에 대한 해부학적 구조를 설명하며 빛이나 외부 이미지가 동공과 내부 유리체를 거쳐 굴절되고 상이 뒤집혀 망막에 맺히고 시신경을 통해 자극이 전달되는 과정 뿐 아니라 눈이 얼마나 상을 최대화하고 또렷하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현미경과 망원경의 개념에까지 확대시켰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렌즈 깎는 법을 설명하며 망원경과 현미경의 유용성을 언급했다. 또한 생물학 분야에서의 르네 데카르트는 윌리암, 하베이와 나란히 근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전생리학의 기초가 되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했다. 다양한 동물의 머리를 해부해보며 상상력과 기억이 위치하는 곳을 찾기 위한 연구를 했으며, 네덜란드에 머무른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 인체를 해부했다. 데카르트는 가설적 모델 방법을 통해 육체 전체를 일종의 기계로 간주해 눈의 깜빡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 현상과 보행과 같은 복합 동작에 있어 많은 관찰과 다양한 기계론적 설명을 내세웠다. 이러한 모든 동작과 운동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그의 방식은 근대적 생리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는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켜 중세적 자연관을 밀어내고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함으로써 자연계의 만물을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르네 데카르트의 글과 방법론이 곁들여진 방법론적 회의이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자신이 믿는 바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의심하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철학의 특징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 의심의 방법은 절대적인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믿음을 의심한 르네 데카르트에 의해 서양 철학에 대중화 되었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방법론적이다. 데카르트적 회의의 목적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으로서 의심을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특히나 경험적 정보의 오류 가능성은 데카르트적 회의의 대상이 된다. 데카르트 회의론의 목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 중 가장 저명한 것은 토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데카르트의 회의론은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하는 것으로서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기본 신념으로부터 데카르트는 다음 지식을 파생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지식을 상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를 토대로 쌓아갔다. 이는 대륙철학의 합리주의를 축약시켜 보여주는 원형적이고 중요한 예시이다. 데카르트적 회의는(4개의 과학적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실이라고 아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둘째, 이 사실들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는 것. 셋째, 간단한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는 것. 넷째, 더 확장된 문제들의 완전한 목록을 만드는 것. ) 의심을 과대하게 하는 것이므로 의심의 경향성을 가진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기준으로의 지식은 단순히 합리적인 것 아닌 가능한 모든 의심을 넘어선 것을 말한다. ) 그의 성찰(1641)에서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로만 이루어진 믿음체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믿음의 진실 여부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적 회의의 원조인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신념, 아이디어, 생각, 중요성을 의심에 두었다. 그는 어떠한 지식에 대한 그의 근거나 추리 또한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식의 초기 상태인 감각적 경험은 잘못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의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보는 것은 환각일 수도 있다. 그가 보는 것이 환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만약, 어떠한 신념이 논박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이의 진실 여부에 대한 근거가 불충분한 것이다. 이 것으로부터 데카르트는 꿈과 악마라는 두 가지 주장을 제안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자신이 깨어있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우리가 꿈을 꿀 때 믿기 어려운 와중에 현실 같을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깨어있을 때의 경험과 꿈을 꿀 때의 경험을 구별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꿈이라는 생각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에 산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성찰(1641)의 끝에 가서는 적어도 회상을 할 때에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악의적 천재에 의해 조정 당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천재는 똑똑하고 강하며 남을 잘 속인다. 데카르트는 그가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허울적인 세상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찰(1641)에서 데카르트는 한 사람이 미쳤었다면, 그 광기가 그 사람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정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부터 막는 어떤 강력하고 교활한 악마가 존재할 수 도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그의 모든 감각들이 거짓말을 할 때, 한 사람의 감각이 그 사람을 쉽게 속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자신에게 거짓말 할 이유가 없는 강력한 존재가 심어두었으며 그의 강력한 존재에 대한 생각은 사실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존재조차도 의심의 방법을 적용하여 의심하는 것이 ”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란 말을 탄생시켰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려고 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식론에서 합리주의란 사실의 기준이 감각이 아닌 지적이고 연역적인 것이다. 이 방법을 강조하는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의 합리주의자들이 있다. 추리력이 지식을 얻는 다른 방법들보다 우선적이라는 온건한 위치부터 추리가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극단적인 위치까지 존재한다. 근대 이전의 합리주의는 철학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계몽운동 이후로, 합리론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에서와 같이 수학적인 방법을 철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합리주의는 영국에서 경험주의가 우세했던 것과는 달리 유럽의 대륙 쪽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대륙 합리주의라고도 불린다. 합리주의는 경험주의와 자주 대조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합리주의를 믿으며 동시에 경험주의를 믿을 수 있다는 점만을 봐도 아주 넓게 보았을 때 이 두 관점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인 경험주의자는 모든 생각이 외적인 감각이던 내적인 감정이던 경험을 통해 얻는다는 관점을 갖는다. 따라서 지식은 본질적으로 경험으로부터 유추되거나 경험을 통해 직접 얻는다는 입장이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에 있어서 논점이 되는 것은 인간의 지식의 근본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증명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합리주의의 몇 부류의 지지자들은 기하학의 자명된 이치와 같은 근복적이고 기초적인 원칙들로부터 나머지 모든 지식들을 연역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가졌던 철학자들로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들 수 있다. 이 둘은 데카르트에 의해 제기 되었던 인식론 상의 근본 원리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합리주의의 근본적인 접근의 발전을 가져왔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둘 다 원칙적으로는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이 추론만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수학을 제외한 영역에서는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관찰했다. 합리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의 구별은 나중에 일어난 일로 그 시기의 철학자들은 알지 못했다. 그 구별 또한 애매하여 대표적인 세 합리주의자들은 경험주의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평가된다. 또한, 많은 경험주의자들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가까웠다. 데카르트는 불변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들만 추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지식들은 과학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경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꿈이 감각적 경험과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꿈들은 사람에게 지식을 제공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한, 자각하고 있는 감각적 경험은 환각이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감각적 경험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그 결과로 데카르트는 사실을 찾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든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얻어내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방법서설, 제1 철학에 관한 성찰과 철학원리에 실었다. 데카르트는 지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지식으로 분류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사실을 찾아내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얻어낸 사실들은 데카르트에 의하면 어떠한 감각적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추론을 통해 얻어낸 사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작은 요소들로 나뉘어 연역적인 방법을 통해 현실에 대한 명백한 사실들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의 결과로 추론은 지식을 결정짓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 방법은 감각의 도움 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은 어떠한 경험의 간섭도 받지 않은 결론이다. 이는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서 다른 모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명제는 그의 형이상학의 제일원리인 동시에, 견실한 과학에 도달하기 위한 제일 원리였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사상에 반동적이었으며 과학에서 발견된 사실을 철학적인 세계관에 옮기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갈릴레오의 기하학적 물리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데카르트가 보기에 그것은 엄밀성이 부족했다. 감각에 기초한 물질 세계의 개념과 좀더 엄격한 수학적인 물질세계의 개념을 구별하는 가운데, 데카르트는 후자가 더 객관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 세계를 지각하는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이며 자주 착각을 일으키고 외부세계와 동일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목표는 주관을 넘어서 객관적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취하는 입장은 감각적 경험이 아닌 이성관념으로, 이는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험적 관념에 따라, 실체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했다. 왜냐하면 정신과 육체는 명확하고 명료한 속성들의 전적으로 구별되는 두 조합을 통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실체의 본성은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이며 물질적인 실체의 본성은 연장된 것(res extensa) 였다. 먼저 정신은 연장적인 특징이 없고 불가분적이므로, 연장을 지니고 있는 물질과는 판명하게 구분된다. 데카르트는 육체 없이도 존재하는 나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신을 물질과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실체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좁은 의미에서는 순수한 지성(수학, 철학을 탐구하는)을 뜻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상상 작용, 감각 작용이 속한다. 감각 작용 신체에서 온 감각인 내부 감각과 외부사물로부터 비롯된 외부 감각으로 나뉜다. 내부감각은 다시 어디에서 오는지 위치를 알 수 있는 고통, 배고픔, 목마름과 같은 관념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분노, 슬픔과 같은 정념으로 나뉜다. 이 신체들의 내부감각은 정신을 속여 가짜의지를 생성해서 신체를 움직이게 한다. 그에게 있어 정신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이며, 제한 되어있지만 신과 동일한 유형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신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신이었으며, 이런 배경으로 인해 순수하게 지적인 능력인 상상력이나 감각 지각과 같이 육체를 전제로 하는 능력과 구분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물질(육체)은 연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하학적 공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섞여있거나 겹치지 않는다. 또한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무한 분할이 가능하며 이러한 모든 물체의 위치와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에서 좌표화 가능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공간 개념에 있어서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물질에 의해 점유되어 있는 것으로서 운동은 연쇄적으로 각 물질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관념들 자체는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것으로 각 관념들은 물체를 특수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또한 정신과 육체는 섞여있는 것이다. 과거 플라톤의 정신과 신체는 선원과 배의 관계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것이었으나, 데카르트는 이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송과선이라는 솔방울 모양의 샘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육체가 신경선으로 동물정기라는 기체화된 혈액을 자극하면 인과적으로 감각적 내용이 송과선을 통해 정신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설명에 대해 기계적인 방식으로 ‘자연에 의해 확립되었다’라는 주장을 한다. 과학혁명 이전의 자연관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자석들은 왜 서로 잡아당기거나 밀어낼까? 상처에 약을 바르면 왜 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르네상스 자연주의에서는 자연을 살아있는 신비한 생명체로 파악하며,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잡아당기는 이유는 서로가 공감을 하기 때문이고, N극과 N극이 밀치는 이유는 서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식물이 성장하고, 동물이 스스로 자각해서 움직이는 모든 운동의 원리를 영혼으로 보았다. 이렇게 자연을 마치 생명과 감정이 있는 인간처럼 여기는 르네상스 자연주의는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추구할 동기로 부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근대 과학은 자연에서 신비로움을 제거해 버렸다. 자연은 객관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고,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으며,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근대 과학의 출발점이 된 것이 바로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이다. 데카르트는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을 제시하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 기계적 철학은 자연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 현상이란 이런 물질들의 운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전제하고, 각종 자연 현상들을 미세한 물질들의 직선 운동과의 충돌로 설명했다. 앞에서 르네상스 자연주의자들이 자석을 공감, 반감을 이용해서 설명했던 것에 비해서,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는 입자와 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석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구멍들이 있고, 자석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나사들이 배열되어 있어서 자석의 구멍을 통해서 작은 나사들이 통과하는데, 나사들의 운동 방향에 따라서 자석은 서로 끌리기도 하고, 서로 밀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자연주의에서 자석은 외부에서 특별히 힘이 작용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매우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지만, 기계적 철학의 눈으로 본 자석은 신비로움을 잃었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자연을 합리적이고 명쾌하게 이해가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다. 기계적 철학에서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조차 불필요했다. 데카르트에게 자연은 단지 기계에 불과했으며, 그 자체의 목적이나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켜서, 중세적 자연관을 밀어내고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했다. 이로써 자연은 기계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자연계의 만물은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17세기 과학혁명의 기본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자연은 정확한 수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완전한 기계"라는 그의 생각은 일생동안 하나의 가설로 남아있어야 했다. 데카르트의 꿈을 실현시키고, 과학혁명을 완성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 "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어받아, 뉴턴도 자연 현상의 기본을 운동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운동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데카르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입자의 운동에 수학적 성격을 합친 "힘"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운동을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다시 말해서 "힘"을 운동의 원인으로 설정하여, 힘의 수학적인 표현을 찾아내고, 거기서부터 가속도, 속도, 물체의 움직이는 궤적 등을 계산하는 역학의 방법을 정식화했다. 뉴턴은 결국 데카르트를 뛰어넘지만,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데카르트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다. 복잡한 자연을 단순하게 분해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나, 운동에서 자연 현상의 근원을 찾고, 그 운동을 수학적인 언어로 풀어내려고 했던 점 등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영국의 뉴턴 중 누가 옳았는가" 하는 문제가 양국 과학자들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두 사람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이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유하는 것이 더 많았던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을 그렇게 항목별로 비교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와 뉴턴의 가장 큰 공통점은 우리가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는 점에 있다. 20세기 초에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일상 세계는 데카르트와 뉴턴이 확립해 놓은 고전역학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실체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실체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존재함을 뜻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 생각된다는 것"은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 정의를 실체로 적용할 때,의미를 악화시켜서 자신이 내린 정의에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그는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 신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도 정의한다. 이는 실체 개념을 창조물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자신이 내린 실체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는 자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 실체"라는 말은 불합리한 개념이며, 신만이 실체라고 주장한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다"고 한 스피노자의 정리에서 잘 드러난다. 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개입하는지에 대해서도 두 사상가는 커다란 입장 차이를 보인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데카르트의 신은 인격을 소유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 소멸, 심지어는 개입할 수도 있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을 그런 초월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신의 의지에 의한 "기적"같은 것은 신의 작동 방식을 법칙으로 이해하고자 한 스피노자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종교적 믿음은 학계에서 엄밀히 논쟁되어 왔다. 그는 《제1 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의 목적들 중 하나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서 데카르트는 이원론 또는 무신론을 믿은 것으로 비난받았다. 동시대의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철학에서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에게 손가락 움직임 하나만으로 세계를 확립하라고 재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그는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스티븐 고크로져의 데카르트 전기는 그가 죽는 날까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단호하고, 열정적인 열망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에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고 저술한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에서 죽은 후, 크리스티나 여왕은 스웨덴의 법이 신교도 지도자를 요구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기 위해서 왕위에서 물러났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그녀가 장기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개인 지도 교사인 데카르트뿐이었다. 데카르트 전집 Oeuvres de Descartes , 편집 Ch. Adam et P. Tannery, 11판, 1982-1991 Paris. 《음악개론》 Compendium Musicae , 1618년 《정신지도규칙》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Rules for the Direction of the Mind) , 1626-1628년 《인간, 태아발생론》 L Homme(Man) , 1630-1633년, 1662년 출판 《세계론》 Le Monde(The World) , 1630-1633년, 1664년 출판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Discourse on the Method) , 1637년 문예출판사 1997, 《기하학》 La Géométrie(Geometry) , 1637년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 1641년 양진호, 옮김, 책세상출판사 2011,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 1641년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 , 1644년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어떤 비방문에 대한 주석》 Notae in programma(Comments on a Certain Broadsheet) , 1647년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The Description of the Human Body , 1647년 《뷔르만과의 대화》 Responsiones Renati Des Cartes(Conversation with Burman) , 1648년 《정념론》 Les passions de l âme(Passions of the Soul) , 1649년 김선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3 《음악에 관한 소고》 Musicae Compendium(Instruction in Music) , 1656년, 사후 출판 《서한집》 Correspondance , 1657년, 클라우데 클레르슬리에( Claude Clerselier )에 의해 출판 코기토 에르고 숨 이보경,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자연학, 서울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1 이성근,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회의에 대한 연구 『성찰』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7 김현선,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정신" 보편학으로서 철학의 과제와 관련하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95 Domski, Mary, "Descartes Mathematic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Winter 2011 Edition), Edward N. Zalta(ed.),http://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1/entries/descartes-mathematics/ 안광복, 철학, 역사를 만나다, 웅진지식하우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1997, 르네 데카르트, 성찰(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 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1997, 르네 데카르트, 성찰 해제-르네 데카르트를 찾아서 성찰의 시대, 시대의 성찰, 양진호 역, 해제 양진호, 책세상 2011, 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역, 아카넷 2002,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르네 데카르트 분류:1596년 태어남 분류:1650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철학자 분류:프랑스의 물리학자 분류:프랑스의 수학자 분류:프랑스의 논리학자 분류:프랑스의 음악 이론가 분류:프랑스의 용병 분류: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계몽주의 철학자 분류:언어 창작자 분류:과학철학자 분류:자연철학자 분류:심리철학자 분류:로마 가톨릭 철학자 분류:형이상학자 분류:합리주의자 분류:인식론 학자 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분류:앵드르에루아르주 출신 분류:레이던 대학교 동문 분류:네덜란드에 거주한 프랑스인 분류:스웨덴에 거주한 프랑스인 분류:17세기 프랑스 사람 분류:17세기 철학자 분류:17세기 수학자 |
알칼리 금속 (alkali metal, -金屬)은 주기율표의 1족 가운데 수소를 제외한 나머지 화학 원소를 통틀어 일컫는 표현으로 리튬(Li), 나트륨(Na), 칼륨(K), 루비듐(Rb), 세슘(Cs), 프랑슘(Fr)이 이 화학 계열에 속한다. 반응성이 매우 강하여 산소나 물, 할로젠 원소 등과 만나면 빠르게 반응을 일으킨다. 알칼리 금속은 대체로 은백색을 띠며, 매우 무르고 밀도가 낮은 고체이다. 할로젠과 결합하여 염을 생성하며, 물과 반응하여 강한 염기(-OH) 수산화물을 생성한다. 알칼리 금속은 모두 가장 바깥의 전자껍질에 1개의 전자를 가지고 있다. 반응성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공기 중에 방치하면 빠른 속도로 반응이 일어나 표면의 은백색 광택이 사라진다. 그므로 알칼리 금속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빛이 차단되는 갈색의 병에 파라핀 등의 액상의 유기 탄화 수소를 채워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산소, 물 등과의 접촉을 차단하여 서늘한 응달에 보관해야한다. 알칼리 금속 자체의 강력한 반응성으로 인해 피부에 직접 닿지 않도록 취급해야 하고, 적은 양으로도 물과 접촉하면 폭발적으로 반응하게 되므로 항상 주의해야 한다.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성질을 이용하여 폭약을 만들기도 한다. 주기 원소 이름 원소 기호 (번호) 원자 질량 녹는점 (K) 끓는점 (K) 전기음성도 2 리튬 Li (3) 6.941(2) 453.69 1615 0.98 3 나트륨/소듐 Na (11) 22.989770(2) 370.87 1156 0.93 4 칼륨/포타슘 K (19) 39.0983(1) 336.53 1032 0.82 5 루비듐 Rb (37) 85.4678(3) 312.46 961 0.82 6 세슘 Cs (55) 132.90545(2) 301.59 944 0.79 7 프랑슘 Fr (87) 223.0197 300 950 0.7 8 우누넨늄 Uue (119) 315 ? ? ? 분류:원소족 분류:주기율표 |
수소 (水素는 주기율표의 가장 첫 번째(1족 1주기) 화학 원소로, 원소 기호는 H (←)이다. 원자 번호는 1 이다. 수소 원자는 우주에서 가장 흔하며 가볍고 무색의 원자이다. 1족 원소로서는 유일한 비금속 원소이다. 동위원소로는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있다. 수소(水素)라는 이름은 풀면 ‘물의 재료’로, 독일어 Wasserstoff에서 유래하였다. 영어로도 Hydrogen, hydro(물)을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질량 기준으로 우주의 75%를 구성하고, 두 개의 수소 원자가 산소 원자와 결합해 물을 구성하는 원소이다. 두 개의 수소 원자로 수소 기체를 이루게 되면, 급격히 불에 타는 가연성을 가진 연료이며, 양이온의 형태로 존재하면 금속을 부식시키는 등 산성 용액의 특징을 나타내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실험실에서 수소의 존재를 확인하는 간단한 방법으로서, 수소는 성냥불을 대면 “퍽” 소리를 내며 탄다. 16세기 연금술사 파라켈수스는 금속이 산에 녹을 때 어떤 기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그 기체를 수소라고 맨 처음 언급하였다. 그 당시에는 수소가 일산화탄소와 같은 다른 가연성 기체와 혼동되었으나, 1766년 헨리 캐번디시는 수소가 다른 가연성 기체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1776년 월타이어는 수소가 연소할 때 물을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고, 몇 년 후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를 수소라고 명명하였다. 스스로 타는 성질이 있고 폭발하는 성질이 있다. 그 때문에 현재 많은 나라에서 풍선이나 비행선에 수소를 채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수소는 현재 주기율표에서 가장 바깥쪽 껍질에 전자를 하나 가진 리튬 위에 배열한다. 하지만 수소는 금속원자가 아니고 할로겐 원소와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IUPAC에서는 수소를 17족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소는 불이 붙는 온도가 매우 낮으며 작은 스파크에도 폭발을 일으킨다.(가연성)(#안전과 주의사항 문단 참고) Main Engine Test Firing cropped edited and reduced.jpg|섬네일|위오른쪽|왼쪽|우주 왕복선의 주 엔진은 수소와 산소를 이용하여 연소한다. 특히, 추진력이 최대일 때, 거의 보이지 않는 불꽃을 낸다.|alt=A black cup-like object hanging by its bottom with blue glow coming out of its opening. 기체 수소(수소 분자) 는 불에 대하여 매우 잘 반응하고 공기 중 수소의 농도가 4% ~ 75% 일 때는 폭발하게 된다. 수소의 발열량은 286 KJ/mol 이다. 2 H2(g) + O2(g) → 2 H2O(l) + 572 kJ (286 kJ/mol) 기체 수소는 공기 중에서는 4~74%의 농도, 염소 화합물에는 5~95%의 농도일 때 강한 폭발성을 띈다. 혼합물은 자연스레 불꽃, 열 또는 태양광에 의해 폭발한다. 수소의 자연발화 온도는 대략 500 °C 이다. 순수한 수소-산소 불꽃은 자외선과 맨눈으로는 거의 볼 수 없는 빛을 방출한다. 때문에 수소의 누출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불꽃 감지기가 필요하다. 특히, 수소의 누출은 매우 위험하다. 이는 힌덴부르크호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수소는 공기보다 가볍기 때문에, 수소 불꽃은 매우 빠르게 상승하려는 성질이 있다. 힌덴부르크호에 탑승했던 승객의 2/3은 화재에서는 목숨을 건졌지만, 나머지는 비행선에서 추락하거나 연료가 점화되어 사망했다. H2(수소 분자)는 모든 산소화합물과 반응한다. 또한 수소는 상온에서 염소나 플루오린과 반응하여 염화 수소나 플루오린화 수소 등의 물질을 생성한다. 전자의 배치에 따라 오르토 수소나 파라 수소를 형성한다. 전자가 수소 분자의 바깥을 향하면 오르토 수소이다. 비교적 전환 속도가 느리므로 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상온에서는 오르토 수소와 파라 수소가 3:1 정도의 비율로 존재한다. 수소에는 세 개의 자연에서 발견되는 동위원소(1H, 2H, 3H)가 있다. 다른 매우 불안정한 동위원소들은 실험실에서 합성된 적이 있으나(4H,5H,6H,7H),자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H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수소 중 99.98%를 차지하는 가장 흔한 동위원소로 원자핵이 양성자 단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경수소 라는 형식적 이름을 가지나 이 이름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2H는 다른 안정한 동위원소로 중수소 라고 불리며, 원자핵이 양성자 하나와 중성자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중수소는 대폭발 때 생겨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중수소는 방사성을 띠지 않으며 독성 위험도 크지 않다. 중수소와 그 화합물은 화학 실험에서 방사능을 띠지 않는 표지나 1H-NMR 분광법의 용매로 사용되며, 상업적 핵융합의 잠재적 연료이기도 하다. 특히 중수소가 많이 포함된 물을 중수라고 부르며, 중성자 감속재나 원자로 용매로 사용된다. 3H는 삼중수소 라고 불리며, 원자핵이 양성자 하나와 중성자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삼중수소는 방사성을 띠어 12.32년의 반감기를 갖는 베타 붕괴를 통해 3He로 붕괴된다. 적은 양의 삼중수소가 우주선과 대기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나 자연에 존재한다. 삼중수소는 핵무기 실험에서 방출되기도 한다. 삼중수소는 핵융합 반응에 사용되거나 동위원소 지구화학에서 추적자로 사용된다. 수소는 각 동위원소의 다른 이름이 흔히 사용되는 유일한 원소이다. D와 T라는 표기가 2H와 3H 대신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여전히 2H, 3H를 권장하지만 IUPAC도 D와 T를 인정하고 있다 방사능의 초기 연구에서, 많은 방사성 동위원소가 이름 지어졌으나 수소 이외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수소 기체는 파라셀수스가 금속과 강산을 섞어 처음 만들었다. 그는 이 화학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가연성 기체가 새로운 화학 원소임을 알지 못했다. 1671년, 로버트 보일이 수소 기체가 발생하는 반응인 철가루와 묽은 산 간의 반응을 재발견하고 기술하였다. 수소 기체를 개별적인 물질로 처음 인식한 것은 헨리 캐번디시였다. 그는 1766년 금속-산 반응에서 나오는 기체를 “인화성 공기”로 확인했고,1781년에는 그 기체를 연소시키면 물이 생김을 발견했다. 헨리 캐번디시는 보통 수소의 발견자로 인정받는다. 그 뒤 1783년에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와 함께 수소가 연소되면 물이 생긴다는 캐번디시의 발견을 재현한 뒤 원소에 수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소는 제임스 듀어에 의해 재생식 냉각법과 그의 발명품인 진공 보온병을 이용해 1898년 처음 액화되었다. 그는 그 다음 해에 고체 수소도 만들었다. 중수소는 헤롤드 유리가 1931년 12월에 발견했고, 삼중수소는 어니스트 러더퍼드, 마크 올리펀트, 파울 하르텍이 1934년 만들었다. 물 분자에서 보통 수소의 자리가 중수소로 대체된 중수는 1932년 헤롤드 유리의 그룹이 발견하였다. 에드워드 다니엘 클라크는 1819년에 수소 기체 취관을 발명했다. 1823년에는 되베라이너 등과 석회광이 발명되었다. 수소 충전 풍선은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이 1783년에 처음 발명하였다. 앙리 지파르가 수소를 이용해 뜨는 비행선을 1852년에 발명하면서 수소가 항공 교통 수단이 공중에 뜨는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뒤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이 수소를 충전하여 공중에 뜨는 경식 비행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이 비행선은 나중에 체펠린 비행선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900년에 처음 비행했고, 1910년에는 규칙적으로 비행하게 되었다.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체펠린 비행선은 중대한 사고 없이 3만5천 명의 탑승객을 운반했다. 전쟁 도중에 수소로 뜨는 비행선들은 관찰대나 폭격기로 이용되었다. 첫 무착륙 대서양 횡단은 1919년 영국 비행선 R34가 이루었다. 정기적인 여객 서비스가 1920년대에 재개되었고, 미국에서의 헬륨의 발견은 비행선에 더 큰 안전성을 보장했으나, 미국 정부는 비행선에 사용할 목적으로 쓰이는 헬륨을 파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LZ 129 힌덴부르크에는 수소가 사용되었고, 힌덴부르크는 1937년 5월 6일에 비행 도중의 화재로 파괴되었다. 이 사고는 라디오로 생방송되었다. 새어나온 수소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고 여겨졌으나, 수사 결과 알루미늄 섬유의 정전기 때문에 불이 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소의 비행선에의 사용은 이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현재 비행선에는 거의 헬륨을 사용하고 있다. 니켈-수소 전지는 1977년 미 해군의 NTS-2에 처음 사용되었고, 국제 우주 정거장 과 마스 오디세이,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 에도 장착되었다. 수소는 공기보다 가벼워 한때 풍선속 공기로 활용되었지만 위험성이 알려지며 지금은 헬륨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수소가 싸다는 이유로 일부 상인은 불법으로 풍선에 수소를 넣고 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논란과 파문이 되고 있다. spectrum-H.png|500px|섬네일|가시광선 영역에서의 수소 방출 스펙트럼 선을 나타낸 그림이다. 발머 계열에 속하는 네 개의 선을 볼 수 있다. 왼쪽부터 410 nm, 434 nm, 486 nm, 656 nm의 빛이 수소 방출 스펙트럼을 구성하고 있다. 양성자 하나와 전자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비교적 간단한 원자 구조 때문에, 수소 원자와 수소 원자가 내는 스펙트럼은 원자 구조 이론의 발전에 중심이 되어 왔다. 게다가 그에 따르는 수소 분자와 그 양이온 H2+의 간단함은 화학 결합의 본질에 대해 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간단함으로 인해 수소 양이온과 수소 분자 양이온에 대해 슈뢰딩거 방정식의 완전해를 구할 수 있다. 뚜렷하게 관찰된 양자적 효과 중 하나는 양자역학 이론이 완전히 정립되기 반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수소에 대한 맥스웰의 관찰이다. 맥스웰은 수소 분자의 비열용량이 상온에서는 이원자 분자의 비열용량 경향을 따르고 극저온으로 내려가면 단원자 분자의 비열용량 경향과 비슷해지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관찰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 현상은 양자화된 회전 에너지 수준 사이의 차이가 수소의 낮은 질량 때문에 매우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 수준 간의 큰 차이가 낮은 온도에서 같은 양의 열 에너지가 회전 운동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다. 한편 더 무거운 원자로 구성된 이원자 분자에서는 에너지 수준 간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H2는 혐기성 생물이 하는 물질 대사의 결과물로써 수소화효소라고 부르는 철 혹은 니켈이 포함된 효소의 촉매 반응을 하는 미생물이 생성하기도 한다. 이 효소는 H2와 그 구성 물질인 두 개의 양성자와 두 개의 전자 간에 이루어지는 역산화 환원 반응을 촉진시킨다. 기체 수소는 피루브산이 발효 과정에 관여하면서 생성된 같은 양의 물질이 전달 도중에 변형되어 발생한다. 물 분해는 물이 양성자, 전자 그리고 산소로 분해되는 현상으로, 광합성을 하는 모든 생물의 명반응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런 생물들 중에는 엽록체 내의 특별한 수소화효소가 작용하여 양성자와 전자가 기체 수소로 환원되도록 진화한 개체도 있다. 대표적으로 클라미도모나스 레인하드티, 남조류가 있다. 산소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효율적으로 H2를 합성하는 남조류의 수산화효소를 유전자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생물반응기 내의 유전자 조작 조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수소는 공기와 혼합되었을 때 폭발과 함께 화재를 동반할 수 있다. 하지만, 수소는 원자번호 1번, 즉 공기보다 14배 가벼운 기체이기 때문에 공기중에 누출시에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며, 점화 온도(약 500°C)가 높아 자연적 발화 자체가 극히 낮다. 액체 수소 (영하 2352도 이하에서 액체화)는 극저온유체로써 기체수소에 비해 부피기준 1/800 수준이기 때문에 약 10배 이상의 수소효율성이 예상된다. 만약 액체수소를 직접 피부와 접촉하면 동상에 걸릴 수 있으나 일반인이 직접 접촉하기는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수소는 또한 금속재료에 흡수되어 취화(Hydrogen Embrittlement , 水素脆化)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어딘가 수소가 누출되면 수소 취성이 일어나거나, 균열이 가거나, 심하한 경우에는폭발도할일위험성이 있다. 외부 공기와 접촉하게 된 수소 기체는 그 즉시 발화하게 되는데 이 때 일어난 화재의 경우 매우 뜨겁고, 거의 보이지도 않아 우연치 않게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수소에 대한 정보 (이로운 정보도 포함하여) 를 분석하면 수소로 인하여 발생하는 현상의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수소의 다양한 물리적, 화학적 특성은 파라 수소와 오르토 수소의 비율에 달려있다. 임계 폭발 압력, 온도 따위의 수소 폭발에 대한 인자는 컨테이너 구조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전자제품, 반도체 제조공정에 사용된다. :삼중수소는 금속 물질을 안정화시키는 물질로,비정형 실리콘과 비정형의 탄소의 깨진 ("dangling")결합의 안정화와 금속 적합성을 늘리는데 사용된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 경우에서 전자쌍을 주는 물질로서 다양한 산화 금속 (ZnO, SnO2, CdO, MgO, ZrO2, HfO2, La2O3, Y2O3, TiO2, SrTiO3, LaAlO3, SiO2, Al2O3, ZrSiO4, HfSiO4,SrZrO3)에게 전자쌍을 준다. 전기공업, 유리공업에 사용된다. 로켓, 잠수함 추진제에 사용된다. 제철소, 철 구조물, 알루미늄 용접에 사용된다. 태양열에 사용된다. 수소연료자동차로도 사용된다. 광섬유, 조명공업에 사용된다. 중수소 삼중수소 수소 결합 수소 동위 원소 수소폭탄 LZ 129 힌덴부르크 리튬-6 수소 - WebElements.com 분류:비금속 분류:화학 원소 분류:환원제 분류:냉매 |
동위 원소 (同位元素, Isotope)는 원자 번호가 같지만 원자량이 다른 원소를 말한다. 어떤 원소의 동위원소는 그 원소와 같은 수의 양성자와 전자를 가지지만, 다른 수의 중성자를 가진다.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양성자와 전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므로 동위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원래 원소와 같다. 하지만 중성자의 수가 달라서 질량이 다르므로 물리적 방법으로 분리할 수 있다. 즉, 동위 원소는 서로 다른 물리적 성질을 가진다. 즉, 화학적 성질은 비슷하다. 동위 원소는 양성자의 수가 같은 원소이다. 동중성자 원소는 중성자의 수가 같은 원소이다. 동중 원소는 질량수, 즉 양성자와 중성자의 수의 합이 같은 원소이다. 이성질핵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수는 같지만 들뜬 상태에 있는 원자핵이다. 방사성 동위 원소 인공 방사성 동위 원소 동위 원소 표 분류:핵물리학 |
후한(後漢) 건무(建武) 8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8년 신라(新羅) 유리 이사금(儒理泥師今) 9년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 백제(百濟) 다루왕(多婁王) 5년 유리 이사금이 진한 6부를 개편하다.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멸망시키다. 10월 8일(음력 8월 15일) - 신라에서 한가위의 가배(嘉俳)놀이 시작됨. 회소곡(會蘇曲)을 부름. 4월 28일 - 로마 제국 7대 황제 오토 반초, 중국 후한 초의 장수. 가락국(駕洛國)의 왕후(王后) 허황옥(許黃玉) *고구려(高句麗)의 태자(太子) 호동(好童) 낙랑(樂浪)의 공주(公主) 낙랑공주(樂浪公主) |
1세기 는 1년부터 100년까지이다. 4년 - 신라, 남해 차차웅 즉위. 8년 - 왕망, 신나라 건국. 14년 - 로마제국, 티베리우스 즉위. 18년 - 고구려, 대무신왕 즉위. 23년 - 신나라 멸망. 24년 - 신라, 유리이사금 즉위. 25년 - 후한, 광무제 즉위. 28년 - 백제, 다루왕 즉위. 30년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37년 - 로마제국, 칼리굴라 즉위. 41년 - 로마제국, 클라우디우스 즉위. 42년 - 김수로, 가야 건국. 44년 - 신라 일성이사금 출생. 44년 - 고구려, 민중왕 즉위. 48년 - 고구려, 모본왕 즉위. 53년 - 고구려, 태조왕 즉위. 54년 - 로마제국, 네로 즉위. 68년 - 로마제국, 갈바 즉위 69년 - 로마제국, 오토 즉위. 69년 - 로마제국, 비텔리우스 즉위. 70년 - 로마제국,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77년 - 백제, 기루왕 즉위. 79년 - 로마제국, 티투스 즉위. 80년 - 신라, 파사이사금 즉위. 81년 - 로마제국, 도미티아누스 즉위. 96년 - 로마제국, 네르바 즉위. 98년 - 로마제국, 트라야누스 즉위. 4년 - 신라, 남해 차차웅 즉위. 8년 - 왕망, 신나라 건국. 14년 - 로마제국, 티베리우스 즉위. 18년 - 고구려, 대무신왕 즉위. 23년 - 신나라 멸망. 24년 - 신라, 유리이사금 즉위. 25년 - 후한, 광무제 즉위. 28년 - 백제, 다루왕 즉위. 30년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37년 - 로마제국, 칼리굴라 즉위. 41년 - 로마제국, 클라우디우스 즉위. 44년 - 고구려, 민중왕 즉위. 48년 - 고구려, 모본왕 즉위. 53년 - 고구려, 태조왕 즉위. 54년 - 로마제국, 네로 즉위. 68년 - 로마제국, 갈바 즉위. 69년 - 로마제국, 오토 즉위. 69년 - 로마제국, 비텔리우스 즉위. 70년 - 로마제국,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77년 - 백제, 기루왕 즉위. 79년 - 로마제국, 티투스 즉위. 80년 - 신라, 파사이사금 즉위. 81년 - 로마제국, 도미티아누스 즉위. 96년 - 로마제국, 네르바 즉위. 97년 - 로마제국, 트라야누스 즉위. 기원전 0년대 전9 전8 전7 전6 전5 전4 전3 전2 전1 0년대 1 2 3 4 5 6 7 8 9 |
갈리아 아퀴타니아 (Gallia Aquitania)는 아키텐 이라고도 알려진 로마 제국의 속주 중 하나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아퀴타니아가 벨가이 및 나머지 갈리아와 언어, 풍습, 제도가 다르다고 기술했다. 갈리아 전쟁 3년째 (기원전 56년)에 정벌되었으며 전후 갈리아 코마타 속주에 포함되었다가 후에 아퀴타니아 속주로 재편되었다. 로마 속주로서의 아퀴타니아는 황제 속주로서, 수도는 기원전 1세기 편성당시 메디올라눔 산토눔(생트), 48년부터 3세기까지 부르디갈라(보르도)였다. 그 이후의 수도는 불분명하나 레모눔(푸아티에)였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의 지배가 끝나고 몇 차례에 걸친 게르만족 침입이 있은 뒤 서프랑크 왕국에, 그리고 후에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중세를 거치는 동안 아퀴타니아 일대는 오크어로 아키타니오(Aquitània)라 불렸고, 아키타니오 공국이 되었다. 현재 아퀴타니아는 프랑스의 레지옹 아키텐이다. 이 일대는 현재 가스코뉴라고도 불리며 프랑스어와 다른, 오크어의 갈래인 가스코냐어를 사용한다. 분류:갈리아 분류:로마의 속주 분류:아키텐 분류:프랑스의 역사 분류:5세기에 멸망한 나라 |
of Millennium Democratic Party.svg|섬네일|오른쪽|250px|새천년민주당 당시의 로고. 민주당 (民主黨)은 대한민국에 있었던 정당(政黨)이었다. 당 대표는 박상천이었고, 당사(黨舍) 소재지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5-4번지였다. 2000년 1월 20일 기존의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해 새천년민주당 (새千年民主黨)을 창당하였으며, 2005년 5월 6일에 민주당 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2007년 6월 27일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통합을 선언하면서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재출범하였다.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1987년 5월 1일 통일민주당 창당 1987년 11월 12일 통일민주당 탈당파들이 평화민주당 창당하고, 김대중을 총재 및 대통령선거 후보로 추대 1991년 4월 15일 평화민주당이 이우정, 신계륜, 장영달 등의 재야운동가를 영입하여 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 변경 1991년 9월 16일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 탄생 이후, 이에 반대한 통일민주당의 잔류파와인 꼬마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통합민주당)으로 창당 1995년 9월 5일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의 주도로 민주당내의 상당수 인사들이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었고,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집권 여당이 되었다. 2000년 1월 20일 기존의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해 새천년민주당 으로 창당하였다. 2002년 2월,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후보를 뽑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 국민 경선 제도를 도입하여 노무현 후보를 선출하였다. 2002년 5월 6일 각종 게이트 의혹과 아들들의 비리 연루로 김대중 대통령, 새천년민주당 탈당 200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대통령 당선 2003년 9월 29일 노무현 대통령, 새천년민주당 탈당 (새천년민주당이 야당이 됨) 2003년 11월 11일 당내 개혁파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해 당세가 약화되었다. (열린우리당으로 이동)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였다가, 국민의 지지를 잃어 17代 국회의원선거에서 총 9명의 의원만이 당선되어, 원내교섭단체에서 제외되었다. 2005년 5월 6일 민주당 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2007년 2월 6일 김한길 열린우리당 전 원내대표 등 의원 23명이 중도개혁세력과 함께 통합신당을 구성할 것을 밝히면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집단 탈당을 하였다. 2007년 2월 12일 열린우리당 탈당파 24명이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국회에 교섭단체에 대한 등록을 하였다. 2007년 4월 3일 민주당 박상천 전 의원이 장상후보를 누르고 대표에 선출되었다. 2007년 4월 25일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씨의 차남 김홍업씨가 당선되었다. 2007년 4월 30일 국민중심당의 공동대표였던 신국환의원이 국민중심당을 탈당해 중도개혁통합 신당추진 모임에 합류했다. 2007년 5월 7일 중도개혁통합 신당추진 모임이 김한길의원을 대표로 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2007년 5월 17일 이인제 의원이 국민중심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복당했다. 2007년 6월 27일 민주당과 중도개혁통합신당이 합당하여 소속의원 34명의 중도통합민주당 이 창당되었다.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섬네일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경선결과 김중권 노무현 정동영 김근태 이인제 한화갑 유종근 합 계 제주 55 125 110 16 172 175 18 울산 281 298 65 10 222 116 20 광주 148 595 54 사퇴 491 280 사퇴 대전 81 219 894 충남 196 277 1,432 강원 159 630 경남 사퇴 1,713 전북 756 대구 1,137 인천 1,022 경북 1,246 충북 387 전남 1,297 부산 1,328 경기 1,191 서울 3,924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지방 선거에서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시키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실시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 이후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의 지지철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당선되어 새천년민주당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한다.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됨에 따라 정식으로 여당이 되었다. 이 때 단일화 과정에서 한 협상을 통해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공동으로 여당이 된다. 하지만 곧 이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했고, 공동여당의 의석 수는 한나라당에 못 미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자유민주연합은 17석밖에 못 얻어 교섭단체가 될 수 없었다.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의 공동여당 구제방침에 의거해 그 해 12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유성의 국회의원 송석찬이 ‘의원 꿔주기’를 주도했다. 이때 장재식, 송영진, 배기선이 송석찬과 함께 자민련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의원 꿔주기에 대해 당시 여론은 민의 배반과 정당정치 근간 훼손 등의 이유로 숱한 비난을 쏟아내었으며, 자유민주연합 내에서 송석찬 외 3명의 영입을 반대하던 국회의원 강창희가 제명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때 “연어의 심정으로 민주당을 떠납니다”라는 송석찬 의원의 탈당의 변이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두 정당간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당시 자민련의 권력남용 중 통일부 장관 해임 사건이 일어나자 민주당의 제안으로 공조가 파기되고 만다. 2002년 민주당은 노무현의 당선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했으나, 바로 이듬해 노무현이 탈당하면서 민주당은 야당이 되었다. 이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탄핵을 주도하였다가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17대 총선에서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수 역대 대표 직함 임기 비고 1 김대중 총재 2000년 1월 20일 ~ 2001년 11월 13일 10.25재보선 전패로 사퇴 (임시) 한광옥 총재권한대행 2001년 11월 13일 ~ 2001년 2월 3일 총재직 폐지 대수 역대 대표 직함 임기 비고 1 서영훈 대표최고위원 2000년 1월 20일 ~ 2000년 8월 30일 총재가 지명 2 서영훈 대표최고위원 2000년 8월 30일 ~ 2000년 12월 20일 총재가 지명 3 김중권 대표최고위원 2000년 12월 20일 ~ 2001년 9월 9일 총재가 지명 4 한광옥 대표최고위원 2001년 9월 10일 ~ 2002년 4월 27일 총재가 지명 5 한화갑 대표최고위원 2002년 4월 27일 ~ 2003년 2월 23일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사퇴 6 정대철 대표최고위원 2003년 2월 23일 ~ 2003년 9월 21일 한화갑 사퇴로 승계, 열린우리당 합류 위해 사퇴 7 박상천 대표최고위원 2003년 9월 22일 ~ 2003년 11월 28일 정대철 사퇴로 승계 8 조순형 대표최고위원 2003년 11월 28일 ~ 200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로 사퇴 (임시) 한화갑 비상대책위원장 2004년 4월 19일 ~ 2004년 4월 26일 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로 비대위 구성 9 한화갑 대표 2004년 4월 26일 ~ 2005년 2월 3일 대표로 추대 10 한화갑 대표 2005년 2월 3일 ~ 2006년 12월 22일 불법 정치자금 유죄선고로 사퇴 11 장상 대표 2006년 6월 28일 ~ 2007년 4월 3일 공동대표로 취임, 한화갑 사퇴로 단일대표 12 박상천 대표 2007년 4월 3일 ~ 2007년 6월 27일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합당 2000년 1월 20일, 민주당 창당대회는 새정치국민회의와의 합당을 결의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총재로 선출한 뒤, 김대중 총재의 지명에 따라 서영훈 대표최고위원과 이인제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인준하고 대한민국 제16대 총선 대비체제에 들어갔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한화갑 4,933 56.6% 지도위원 2 이인제 3,862 44.3% 최고위원 3 김중권 3,769 43.3% 최고위원 4 박상천 3,373 38.7% 최고위원 5 정동영 3,044 34.9% 최고위원 6 김근태 2,966 34.1% 최고위원 7 정대철 2,590 29.7% 최고위원 8 김기재 1,932 22.2% 9 김민석 1,932 22.2% 10 안동선 1,655 19% 11 추미애 1,627 18.7% 12 이협 906 10.4% 13 조순형 896 10.3% 14 김회선 799 9.2% 15 김태식 762 8.7% 총투표수 8,710 2000년 8월 30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1인4표 방식으로 한화갑 지도위원, 이인제 전 경기지사, 김중권 전 대통령 비서실장, 박상천 전 법무장관, 정동영 전 국민회의 대변인, 김근태 전 민주당 부총재, 정대철 전 국민회의 부총재를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은 서영훈 대표, 권노갑 상임고문, 신낙균 문화관광장관, 장태완 의원, 장을병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지명한 뒤, 서영훈 대표를 다시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 2002년 초, 민주당은 대의원 20%, 일반당원 30%에 일반 유권자를 지역별, 연령별, 성별 인구비례로 1천명당 1명씩 공모한 50%의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다. 공모 경쟁률은 48:1에 달했고, 선거인단으로 선정된 일반 유권자들은 선거법 문제로 민주당에 입당해야했다. 한편으로는 인터넷 투표도 도입, 인터넷 투표 참가자 득표율을 1750표로 환산해 합산하고, 투표 방식으로는 선호투표제를 도입했다. 경선은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도는 순회경선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선에는 노무현 전 민주당 최고위원을 비롯해 김근태 최고위원, 김중권 최고위원, 유종근 전북지사, 이인제 최고위원, 정동영 최고위원, 한화갑 최고위원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지지율이 10%도 채 안 되는 군소 후보였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경선결과 김중권 노무현 정동영 김근태 이인제 한화갑 유종근 합 계 제주 55 125 110 16 172 175 18 울산 281 298 65 10 222 116 20 광주 148 595 54 사퇴 491 280 사퇴 대전 81 219 894 충남 196 277 1,432 강원 159 630 경남 사퇴 1,713 전북 756 대구 1,137 인천 1,022 경북 1,246 충북 387 전남 1,297 부산 1,328 경기 1,191 서울 3,924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 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2001년 11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이 10.25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재직을 사퇴한 뒤,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는 총재직을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한화갑 5,961 55.7% 대표최고위원 2 정대철 5,163 50.3% 최고위원 3 박상천 4,401 42.9% 최고위원 4 한광옥 4,381 42.7% 최고위원 5 이협 3,983 38.8% 최고위원 6 추미애 3,327 32.4% 최고위원 7 신기남 2,648 25.8% 최고위원 8 김태랑 2,063 20.1% 최고위원 9 신계륜 1,992 19.4% 10 김옥두 1,699 16.5% 11 이해찬 1,658 16.1% 12 박상희 1,547 15.1% 13 김경천 1,181 11.5% 14 이규정 1,072 10.4% 총투표수 10,269 2002년 4월 27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1인4표 방식의 최고위원 경선을 통해 한화갑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2002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함으로써, 영남권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재신임을 묻겠다는 노무현 후보의 공언에 따라 6월 18일 민주당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노무현 후보의 재신임을 의결했다. 2003년 9월,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이 분당되고 정대철 대표마저 이에 동참하기 위해 탈당하자, 민주당은 조기 전당대회를 치르게 된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조순형 3,119 62.1% 대표 2 추미애 2,151 42.8% 중앙상임위원 3 김경재 1,199 23.9% 중앙상임위원 4 장재식 1,150 22.9% 중앙상임위원 5 김영환 888 17.7% 중앙상임위원 6 이협 685 13.6% 7 김영진 581 11.6% 8 장성민 277 5.5% 총투표수 5,025 11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조순형 전 민주당 부총재를 대표로 선출했다. 2004년 4월 19일, 조순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와 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민주당은 총선당선자회의를 통해 한화갑 전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이후 4월 26일, 비상대책위원회는 당헌당규에 규정되지 않은 비대위원장직의 권한에 한계가 있음을 들어 한화갑 위원장을 대표로 추대하였다. 순위 이름 대의원 후원당원 총 득표(환산) 비고 비율 비율 비율 1 한화갑 3,662 6,390 83.1 대표 82 87.3 2 김상현 799 929 16.9 18 12.7 2005년 2월 3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의원 현장투표와 후원당원 우편투표를 8:2비율로 적용한 경선을 통해 한화갑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한 뒤, 열린우리당과의 합당 반대를 결의하였다. 2006년 6월 15일, 민주당 중앙위는 공동대표제를 도입하기로 하고, 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를 승리로 이끈 장상 전 총리서리를 공동대표로 선출하였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박상천 2,164 42.3% 대표 2 장상 1,924 37.7% 3 김영환 536 10.3% 4 김경재 376 6.2% 5 심재권 126 2.1% 총투표수 5,118 2007년 4월 3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박상천 전 대표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2007년 6월 27일, 중도개혁통합신당과 민주당 통합수임기구 합동회의는 중도통합민주당으로의 신설합당을 의결했다.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대통합민주신당 분류:2000년 설립된 정당 분류:2007년 폐지 분류: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정당 분류:대한민국 제6공화국 분류:1995년 설립된 정당 |
가곡 (歌曲이란 서양 고전음악에서 유래한 노래이다. 시와 음악의 긴밀한 결합으로 19세기 낭만시대에 나타난 음악의 형태로 지극히 개인적 감정이 담긴 낭만주의 서정시(괴테, 하이네, 뮐러 등)의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피아노의 발전으로 예술가곡에서는 노래와 이중주의 형태를 가진다. 종종 가곡집으로 묶여서 발표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가곡 작곡가로 프란츠 슈베르트와 로베르트 슈만이 있다. 한국의 가곡은 1920년대부터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홍난파 - 〈봉숭아〉, 〈고향의 봄〉 이흥렬 - 〈바우고개〉, 〈코스모스를 노래함〉 김동진 - 〈가고파〉 김성태 - 〈동심초〉 현제명 - 〈그집앞〉, 〈희망의 나라〉 윤용하 - 〈보리밭〉 등이 있다. 분류:성악곡 분류:독일의 음악사 |
전기 (傳記는 특정한 인물의 남다른 경험이나 업적에 대하여 그 인물이 겪은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한 글이다. 전기문은 실제로 살아 있던 인물의 일생이나 일생의 일부를 기록한 글로, 전기문 속의 모든 인물, 장소, 사건 등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 전기문은 중심 인물의 활동과 그 동기, 활동에 참가하거나 관계한 다른 인물 등에 의하여 전개되므로 소설과 같이 일정한 줄거리 를 가진다. 전기 속의 사건들은 작가가 드러내려는 주제와 관련되는 것들로 주로 선택된다. 전기는 실재했던 인물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감동적인 교훈을 준다. 전기 어떤 사람이 다른 인물의 일생을 쓴 글 자서전 자기의 일생을 쓴 일기 회고록 생애 중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만을 다룬 것 평전 비평적 전기. 저자가 사료를 선정하고 해석하여 정리한 전기. 주로 역사적, 사상적, 문학적 평전이 많다. 열전(列傳) 왕조(王朝)의 역사를 기록할 때 유명한 사람들의 일생이나 업적, 또는 일화 등을 간단히 실은 글 사람 분류:장르 분류:논픽션 문학 |
지방자치단체 (地方自治團體)는, 일정한 지역에 대하여 국가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아 지방적 사무를 처리하는 지방자치의 단체를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의 헌법에 따라 지방자치를 보장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조직·운영 등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어 국가와 같은 모습의 통치단체 성격을 가지며 자치행정권은 물론이고 조례(條例)를 제정·개폐하는 자치입법권과 지방세 과징, 사무처리 경비를 수입·지출하는 자치재정권 등을 인정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주민의 편의 및 복리증진을 위하여 노력하고, 조직 및 운영의 합리화와 그 규모의 적정화를 도모하며, 법령이나 상급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위반되지 않아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를 법률로 정하며, 지방자치법 제2조(지방자치단체의 종류)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는 광역지방자치단체 와 기초지방자치단체 가 있다. 특별시 서울특별시 광역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 대전광역시, 울산광역시 특별자치시 세종특별자치시 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 시와 군 및 자치구 (단, 인구 50만 이상의 도소속 시에 설치된 구와 특별자치도 소속의 시는 지방자치법 제3조에 의해 지방자치단체가 아님) 자치사무 지방자치단체가 자기의 책임과 부담하에 자치단체의 존립유지 또는 주민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처리하는 사무 단체위임사무 지방자치단체의 본래의 사무가 아니고 각 개별 법령에 의하여 국가 또는 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위임받아 처리하는 사무 기관위임사무 법령의 규정에 의해 국가 또는 상급자치단체로부터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처리를 위임하는 사무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목록 대한민국 지방 재정 자립도 지자체 분류:헌법 |
광역시 (廣域市)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이다. 특별시, 도와 동급의 행정 구역으로, 원래는 직할시였으나 지방자치법에 의해 1995년에 현재와 같이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5년 광역시 체제 출범 당시에는 기존의 직할시였던 부산, 인천, 광주, 대구, 대전만이 있었으나 1997년에 경상남도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현재는 총 6곳이 되었다. 산하 행정 구역으로 기초자치단체인 자치구나 군을 둘 수 있다. 현재 광주광역시와 대전광역시를 제외한 광역시들 산하에 군이 있다. 지방자치법1. 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 도, 특별자치도2. 시, 군, 구 부산광역시 1963년 1월 1일에 경상남도 동래군 일부와 부산시 일원을 경상남도청에서 정부(내무부) 직할 부산시로 이관하여 최초의 직할시 승격이 이루어졌고, 1981년 4월 4일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 개정으로 법령상의 부산직할시①(시행일) 이 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②(경과조치) 이 법 시행당시의 부산시는 부산직할시로 하며, 다른 법령중 "부산시"는 "부산직할시"로, "부산시장"은 "부산직할시장"으로 본다.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에 부산직할시를 부산광역시로 개편. 대구광역시 1981년 7월 1일에 경상북도 경산군 일부, 칠곡군 일부, 달성군 일부, 대구시 일원을 대구직할시 및 인천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 에 따라 대구직할시로 승격하고 1995년 1월 1일에 대구직할시를 대구광역시로 개편. 인천광역시 1981년 7월 1일에 경기도 인천시 일원을 대구직할시 및 인천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 에 따라 인천직할시로 승격하고 1995년 1월 1일에 인천직할시를 인천광역시로 개편. 광주광역시 1986년 11월 1일에 전라남도 광주시 일원을 광주직할시 및 송정시 설치에 관한 법률 에 따라 광주직할시로 승격하고 1995년 1월 1일에 광주직할시를 광주광역시로 개편. 대전광역시 1989년 1월 1일에 충청남도 대덕군과 대전시 일원을 대전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 에 따라 대전직할시로 승격하고 1995년 1월 1일에 대전직할시를 대전광역시로 개편. 울산광역시 1997년 7월 15일에 경상남도 울산시 일원을 울산광역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에 따라 울산광역시로 승격.(직할시를 거치지 않고 가장 최근에 승격된 광역시) 광역시의 경우 기존의 직할시가 그대로 유지된 채 광역시로 지정되거나 승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광역시로 승격하는 자치시의 면적이 작으면 이웃에 있는 시, 군을 통합하기도 한다. 이는 옛 직할시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부산광역시(1995년) - 부산직할시 + 경상남도 양산시 일부(현 기장군) 대구광역시(1995년) - 대구직할시 + 경상북도 달성군 인천광역시(1995년) - 인천직할시 + 경기도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 광주광역시(1995년) - 광주직할시(1986년 직할시 승격, 1988년 송정시, 광산군 편입) 대전광역시(1995년) - 대전직할시(1989년 직할시 승격 당시 대덕군 편입) 울산광역시(1997년) - 경상남도 울산시 일반적으로 자치시의 인구가 100만명 이상이거나, 인접 시, 군과 통합하는 행정구역 조정으로 기초자치단체 단위의 인구가 100만명이 넘게 되면 광역시로의 승격이 거론된다. 단, 인구 100만 명 이상이 광역시 승격 조건이라는 법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금의 광역시들이 보통 인구 100만을 즈음하여 광역시로 (당시는 직할시) 승격되었기에 그런 거론이 되는 것이다. ===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 통합 및 성남광역시 승격 움직임 === 2001년 10월 10일 오성수 성남시장은 우선적으로 추진할 시책에 대해 "신.구시가지 균형발전을 위한 종합행정타운건설과 현실직제에 맞는 행정기구 개편"이라고 꼽으며 "앞으로 열심히 일하는 행정분위기를 조성, 임기내에 반드시 광역시 승격을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2008년 3월 성남시청 확대간부회의에서 이대엽 성남시장의 지시로 광역시 승격 준비 및 광역시 추진전략을 수립하기로 하였다. 2009년 9월 14일 성남시청이 이대엽 성남시장과 김황식 하남시장이 함께 추진하는 성남시·하남시 통합에 대해 각 구별로 주민설명회를 진행하였다. 2009년 9월 18일 행정안전부 이달곤 장관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수도권 지역은 통합에 관한 한 어떤 컨센서스(합의)도 이루기 어렵다”고 밝혀 성남시·광주시·하남시 통합추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 장관은 “충청북도 청원군이 청주시를 도넛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어 청원군청을 비롯한 청원군 주요 기관들이 대부분 청주시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일 생활권임에도 행정구역이 달라 주민들은 시외버스 요금을 내고 용무를 보러 다니는 등 불편을 겪고 있다”고 통합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 “이와 유사한 경우로 전라북도 전주시와 완주군도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이런 지역은 주민 동의를 얻어 우선적으로 통합시키는 게 좋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달곤 장관은 통합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경기도 지역의 경우 “수도권은 이미 대도시화됐고 큰 도시가 되면 자족성이 커지긴 하지만, 서울과 붙어 있는 지역이 인구 100만 명 이상으로 커져서 대도시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특히, ‘통합시가 100만 이상의 경우 광역시 승격여부’에 대해서는 “지방에는 거점별로 일부 거대도시가 탄생할 필요가 있지만, 이들 지역을 광역시로 승격시켜주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이들에 대해서는 행정구를 나눌 수 있도록 하고 도시계획을 통합적으로 하게 해주고, 원하면 공단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등 인적·재정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밝혔다. 이달곤 장관의 이러한 발언에 앞서 행정안전부 관계자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남시·하남시·광주시 등 통합으로 인구가 100만 명이 넘더라도 광역시로 승격시키지 않을 것”이라며 “100만 명이 넘는 지역은 관계 법률을 개정해 행정상의 혜택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2010년 2월 22일 국회정론관에서 민주당 이재명 부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성남 광주 하남이 자치권을 가지고 예산에 하향평준화가 되지 않는 광역시로의 통합을 주민의견 수렴하에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 경기도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 통합 및 수원광역시 승격 움직임 === 2007년 12월 5일 수원시의회는 본회의에서 ‘대도시 행정 수요에 상응하는 수원광역시 승격 건의안’을 의결하였다. 수원시청도 이미 내부적으로 광역시 승격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 놓은 상태이다. 수원시청에 따르면 1963년 부산이 직할시(광역시의 이전 명칭)로 승격할 당시 인구가 116만명이었고, 인천은 1981년 직할시 승격 당시 108만명, 광주는 1986년 직할시 승격 당시 92만명, 울산은 1997년 광역시 승격 당시 101만명이었다. 수원시청 이광인 자치기획국장은 “인구는 광역시 승격 여건이 되지만 아직 도청 소재지로 머물러 있어 행정이나 주민 생활면에서 많은 불편이 따른다”며 “수원시를 광역시로 승격시켜 도시계획권과 인사권, 예산 및 지방세 권한 등을 독립시켜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경기도청 정흥재 자치행정국장은 “6~7년 전에도 수원시가 광역시 승격을 주장했다가 당시 임창열 경기도지사가 경기도청을 용인시나 과천시로 옮기겠다고 하자 수그러들었다”며 “통합 행정이 중요한데 수원시를 광역시로 독립시키는 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행정적 낭비”라고 일축했으며 화성시청 조성행 자치행정국장도 “대응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 잘라 말했다. 현행법상 광역시 승격 요건은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지만 수원시가 광역시가 되기 위해서는 경기도청의 의견 검토를 거쳐 중앙정부와 국회의 의결 절차를 밟거나 행정자치부가 타당성을 인정해 수원시민들의 투표를 거치는 방법 등이 있다. 두 가지 모두 경기도청과 중앙정부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수원시청이 독자적으로 광역시 승격을 추진하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와 관련하여 행정자치부 강병규 지방행정본부장은 “수원시의 광역시 승격을 위해서는 경기도 전체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부터 검토해야 한다”며 “현재로서는 검토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2008년 11월 4일 민주공무원노동조합 수원시지부는 성명을 내고 "지방자치법상 자치 조직권은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에 있다. 따라서 중앙정부가 지침 형태로 강제할 권한도 없으며, 지방자치단체가 이행할 의무도 없다. 올바른 행정이라면 오히려 정원축소보다 지방자치법 규정대로 광역시를 추진하고, 대시민 행정서비스 강화를 위해 증원을 요구하라"고 밝혔다. 2014년 7월 31일 손학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새누리당 김용남 당선인은 전날 수원병(팔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 후 인터뷰에서 “소속 상임위원회가 결정돼야 구체적인 계획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현안과 관련해 인구가 울산보다 많은 수원시를 특정광역시로 반드시 승격시키는데 힘을 보탤 것이다. 또 수원역 롯데쇼핑몰 개장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전통시장 활성화방 안, 구도심 재개발 등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2014년 9월 17일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수원병)은 수원시를 특정광역시로 승격하기 위한 경기도 수원특정광역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정안 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경기도 수원특정광역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정안 은 경기도 수원시 를 경기도 수원특정광역시 로 변경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김용남 의원은 "개정안이 통과돼 수원시가 특정광역시 라는 법적 지위를 갖게 되면 재정과 사무의 범위가 대폭 확대돼 시민들이 한 차원 높은 행정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 경기도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 과천시 통합 및 안양광역시 추진 움직임 === 2001년 10월 15일 군포·안양·의왕 등 3개 시 통합론이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활발히 재론되고 있는 가운데 군포시청이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기능적 통합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군포시청은 “무조건적인 통합만이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아닐 것”이라고 전제한 뒤 “해당 시간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미묘한 문제인 만큼 시민단체를 비롯해 모든 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 공감대가 형성됐을 때 자연스럽게 통합이 이뤄져야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광역시로의 행정통합 이전에 복잡하고 낭비적인 요인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안양종합운동장과 군포시민회관 등 각종 시설물과 향후 유치할 법원, 검찰 등 공공기관 등을 해당 시민 구분없이 함께 이용하는 기능적 통합이 먼저 이뤄져야 시민공감대 형성은 물론 중복투자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9년 9월 14일 오전 이필운 안양시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4개 시 통합과 관련하여 드리는 말씀 을 통해 안양·군포·의왕·과천 등 안양권 4개 시 통합을 공식제안했다. 이필운 안양시장은 "국회에서 자율통합에 관한 의원입법이 발의됐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 범정부차원에서 획기적 지원계획을 발표했다"며 "지금이야말로 4개 시가 다시 하나로 뭉치는 좋은 기회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머지 시청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재영 군포시장은 "군포는 얻을 실익이 없으며 찬반 의견 제출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이형구 의왕시장은 "시장이나 일부 공무원이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시민들이 판단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천시청은 "우리는 나머지 3개 시와 생활권이나 정체성이 다르다"고 말했다. 안양권이 통합되면 면적 184.63km2(안양 58.46km2·군포 36.36km2·의왕 54km2·과천 35.81km2)에 인구 111만5000여명(안양 62만7000명·군포 28만2000명·의왕 13만6000명·과천 7만명)의 광역시급 도시가 탄생하게 된다.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성제 의왕시장 후보는 안양·군포·의왕 3개시 간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안양권 통합을 반대했다. 김성제 시장후보는“통합의 명분이나 실익도 없고 결국에는 주민 갈등만 유발시키는 부작용만 우려되는 통합은 의미가 없다”며“3개시가 통합되면 광역시 승격 없이 인구 106만의 거대한 기초단체가 또 하나 탄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2년 4월 27일 통합반대의왕시민대책위원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의왕시는 2012년 2월 현재 인구 15만의 중소도시로 발돋음하고 있으며, 최근 국토연구원 건강도시지표에서 수도권 시·군·구 중 살기좋은 도시로 경기도 2위에 선정돼 살기좋은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3개시 통합은 의왕시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다”며 “여론조사는 통합추진에 따른 시민갈등 및 분열을 조장하는 실익이 없는 처사”라고 규정했다. 이종만 3개시 통합추진 안양시위원회 상임대표는 “조만간 3개시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토론회를 개최해 통합 찬·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해 보자”며 “글로벌 시대를 맞아 안양권도 3개시를 통합해 선진 외국시처럼 경쟁력을 갖는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같은 날 주간현대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김윤주 군포시장은 행정구역개편과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과 이명박 대통령 정권초기 논의대로 광역자치단체를 없애고 전국을 60~70개의 광역시로 재편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윤주 군포시장은 도를 없애는 방향으로 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된다면 군포·안양·의왕의 통합을 찬성한다는 것이 군포시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행 중앙정부 →광역자치단체→기초자치단체를 거치는 행정 단계에서 광역자치단체를 없애 행정의 낭비를 줄이겠다면 통합에 찬성한다는 조건부 찬성이다. 그러나 현재 행정안전부 개편추진위원회가 도 단위 광역자치단체를 존치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어서 김윤주 시장의 행보는 사실상의 통합 반대로 풀이되고 있다. 2012년 5월 21일 오후 오마이뉴스가 안양시의회 회의실에서 지역 언론인 안양뉴스, 뉴스앤뷰와 공동으로 안양·군포·의왕 통합토론회 를 열어 통합과 관련된 의견을 나누었다. 토론회 사회는 이민선 뉴스앤뷰 편집국장이, 토론자로는 김성균(성결대학교 겸임교수) 박사와 방극채 안양시의원, 김동별 군포시의원, 기길운 의왕시의원이 참석했다. 이날 기길운 의왕시의원은 "우리 지역의 역사성이 같다고 하는데, 안양시와 의왕시는 같은 자치단체로 있었던 것은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성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로 일방적으로 시민들을 호도하기 위한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의왕시는 수원과 화성권역이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안양시에서는 인구 100만 이상인 광역시가 되어야 의왕의 택지개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사실과 다르다. 의왕시는 현재 15개 지역에서 재건축·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안양시 힘 안 빌리고도 잘 하고 있다. 안양과 합쳐봐야 실익이 없다. 만일 통합이 되면 이 개발이익금이 다 어디로 가겠나? 통합되면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통합되어 100만이 넘는 도시가 되면 시장이 구청장을 임명하는데 큰 지역 위주로 가기 때문에 의왕시청 공무원들이 인사에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과 유형의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방극채 의원님이 청주와 청원이 통합될 때 비용이 많이 들고 우리는 그 비용이 안 든다고 하셨는데 통합된 걸로 보고 그냥 살면 되지 뭐 하러 통합을 하나."라며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군 통합 및 청주광역시 승격 움직임 === 2012년 6월 27일 충청매일에 따르면 김광민 한국은행 충북본부 과장은 “청주·청원 통합시는 인근 도시와의 경제적 비교우위를 선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아주 바람직한 선택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청주·청원 통합시는 엄청난 지역경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이는 곧 주민들의 삶의질적 측면과도 직결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며 “광역시로의 발돋움도 조심스럽게 점칠 수 있다. 아무튼 청주·청원 통합시는 향후 인근 세종특별자치시 및 대전광역시와 함께 광역도시권을 형성해 국토의 중심에서 행정·산업·R&D·교통 등의 주요기능 연계를 통한 중부권 핵심도시로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2년 9월 10일 열린 314회 충청북도의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산업경제위원회 소속 이수완(민주통합당·진천)의 질의에 대해 이시종 충청북도지사가 청주 청원 통합시 출범이후 충청북도청 이전과 청주시의 광역시 승격은 정부 방침상 인구 100만이 넘더라도 광역시 승격이 어렵고, 충청북도청 입장에서도 광역시 승격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검토 대상도 아니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날 이수완 의원은 대집행부질문을 통해 “청주·청원통합에 따른 향후 광역시 승격이 예상되는데, 다른 시·도와 같이 행정관할 구역분리에 따라 충청북도청도 이전해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통합시가 출범하면 향후 10년 이내에 인구 100만을 넘어서는 광역시로 승격될 전망이고, 이에 따라 인구 증가뿐만 아니라 충청북도의 행정과 경제, 문화 등이 발전되는 현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광역시 출범에 따라 충청남도청이 2012년 말 이전할 계획이고, 전라남도청도 2005년에 이전했으며 경상북도청은 2014년에 이전할 계획이다”면서 “그동안 도청 소재지 도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 당연히 행정관할 구역분리에 따라 도청을 이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2012년 말 준공예정인 진천·음성혁신도시는 교통의 요람지이자, 자족형 미래도시가 될 것”이라며 “지금부터라도 부지확보 문제 등을 선결하고, 충청북도청을 교통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는 혁신도시로 이전하는 것이 북부권과 남부권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답변에 나선 이시종 충청북도지사는 "전라남도청(무안), 충청남도청(홍성), 경상북도청(안동·예천)처럼 도청이전을 추진했거나 추진 중인 지방자치단체가 있는건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기초자치단체가 인구 100만 명을 넘어도 광역시로 승격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방침 때문에 경기도 수원시는 114만 명이고 성남시는 98만 명, 창원시는 109만 명에 달하지만 광역시 승격은 불가능하다"며 "정부 방침에 비춰볼 때 향후 통합 청주시 인구가 100만 명을 넘더라도 광역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통합 청주시의 광역시 승격에 따른 도청 이전 문제는 검토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도청 이전보다는 통합 청주시의 조기정착을 적극 지원하고, 도내 모든 시·군이 고르게 잘 살 수 있도록 균형발전 실현을 위해 도정역량을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2013년 5월 10일 충북균형발전과 충주발전 전략 모색 학술토론회’가 충북행정학회(회장 안형기 건국대학교 교수) 주관으로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에서 열렸다. 이날 최일성 한국교통대학교 명예교수는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돼 인구 100만명 이상으로 광역시 승격이 되면 충청북도와는 행정구역이 별개로 돼 현재 청주에 있는 도청 이전이 불가피한데, 이때 충청북도청 이전은 균형발전과 역사와 전통문화의 산실인 중원문화권(충주)으로 복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3년 11월 27일 최일성 한국교통대학교 명예교수는 충주시청 탄금홀에서 열린 지역경제활성화 시민대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해 “통합청주시 인구가 100만명이 되면 광역시로 승격이 가능하다”며 “이 같은 일이 언제 이뤄진다고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타 지역의 도청 이전 추세로 보아 기정사실로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충청북도청의 충주 이전에 대한 당위성을 이어가기 위해 경상남도청의 사례를 예로 들었다. 창원시는 지난 1983년 광역시로 승격된 부산시로부터 도청을 이전받아 현재 인구 100만여명의 메가시티로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는 설명이다. 도청을 이전하면 산하기관과 유관기관도 이전되기 때문에 인구 40만명 이상의 자족도시 형성은 시간 문제라는 해석이다. 최일성 교수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1986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며 2005년 무안 남악신도시로 전라남도청이 이전된 점, 1989년 대전에 있던 충청남도청이 같은 이유로 2010년 예산 내포신도시로 이전된 점, 대구에 있던 경상북도청이 역시 같은 이유로 2014년 예천군 도청신도시로 이전 계획을 세운 점 등을 들었다. 청주시와 청원군은 2014년 7월 1일 통합되었다. 2014년 8월 24일 통합청주시금고 운영자 선정을 앞두고 경제계의 한 관계자는 "통합청주시가 향후 광역시로 발돋움 하기 위해 온 힘을 집중시켜야 하는데 금고 문제로 이러쿵저러쿵 잡음이 들린다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아 보인다"며 "청주시가 현명한 판단을 내려 하나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전라북도 군산시, 김제시, 부안군 통합 및 새만금광역시 설립 움직임 === 2008년 3월 5일 통합민주당 정원영 예비후보는 ‘군산시를 인구 100만의 ‘새만금광역시’로 만들겠다’는 정책공약을 제안했다. 정 예비후보는 기자간담회를 통해 “군산·새만금을 경쟁력 있는 개방도시, 살기 좋은 복지도시, 지속가능한 녹색도시, 번영하고 상생하는 균형도시로 만들겠다”며 “군산-서천(장항 포함)-김제-부안을 하나로 묶어 개발해 20년 이내에 인구 100만의 도시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으며 이어 “새만금밸트를 통해 해당지역이 하나로 묶이면 20년 이내에는 울산광역시에 버금가는 인구 100만의 전국 7대 도시로 우뚝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10년 2월 25일 민주당 서동석 군산시장 후보는 “2010년 4월 개통을 눈앞에 둔 새만금 방조제의 경계가 불분명해 분쟁의 우려가 높고 이 지역은 공유수면 매립지역이어서 지방자치단체 간 관할지역을 긋지 못하고 있다”며 “군산시와 김제시, 그리고 부안군을 아우르는 ‘새만금광역시’를 준비한다는 구상을 밝혔다”고 말했다. 2011년 5월 12일 국무총리실과 행정안전부, 농림수산식품부, 전라북도청은 부안군을 시작으로 13일 군산시와 김제시에서 각각 주민 300명 안팎씩 초청해 새만금 행정구역 설정에 관한 대토론회를 공동 개최하였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이 주제를 발제하고 각 시·군이 추천한 전문가 토론회를 거쳐 여론을 수렴하였는데, 이 중 한 방안으로 거론되는 새만금광역시는 새만금과 주변 3개 시·군을 통폐합해 준광역시를 설립하자는 안이다. 군산시청이 선호하는 안으로, 이경우 새만금권 인구는 약 80만 명대에 달해 전주를 제치고 도내 거점도시가 될 것이란 기대다. 하지만 군산시청과 달리 주변 시·군청은 이에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이에 대해 전라북도청 관계자는 “새만금광역시를 만드는 것은 새만금의 전략적 발전과 투자 유치, 정부 지원 등을 종합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가장 좋은 방안”이라면서 “하지만 지방자치단체별로 의견이 엇갈리는 데다 장항권에서 통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새로운 통합 로드맵이 나와봐야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 전라북도 전주시, 완주군 통합 및 전주광역시 승격 움직임 ===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 전라북도 전주시를 광역시의 전신인 직할시로 승격시키려는 논의가 있었으며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6월 정부와 민주자유당이 전주를 전북지역발전과 서해안개발의 거점도시로 활용한다는 방침아래 직할 자치단체로 승격, 중앙정부 차원에서 중점 지원한다는 방침 아래 필요한 행정적 조치를 검토한 바 있다. 당시 민주자유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날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전북 개발을 위해서는 중점도시인 전주에 대한 중앙정부차원의 행정및 재정지원이 절실하다"며 "가급적 연내 직할시승격을 위한 당정협의를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전주 인구가 54만명(1991년말 기준)에 불과해 직할시여건이 미비한것은 사실이나 이는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 실제 거주자는 70만명에 달하고 유동인구를 합치면 1백만명에 육박한다"며 "이는 광주와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될 때와 비슷한 여건"이라고 직할시 승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재정재립도나 인구수를 기준으로 할 때 경남 울산과 창원이 우선적인 직할시 승격대상이나 직할시 승격문제는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도 검토해야할 문제"라고 우선 전주시를 승격시킨 뒤 울산 등 다른 도시의 승격문제를 검토할 것임을 시사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도 대선공약이었던 전라북도 전주시와 경상남도 울산시의 직할시 승격 논의를 거쳤으나 경상남도 울산시만 광역시로 승격된 바 있다. 1995년 당시 김영삼 정부는 전주시와 완주군의 경우 인구 65만 7140명으로 ‘시군을 통합할 경우 인구 50만 이상의 과대시가 되어 대도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이유로 통합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2012년 3월 21일 김완주 전라북도지사가 도지사 의전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전주 완주 통합논의를 묻는 질문에 대해 “4·11 총선을 20여일 앞두고 있는 만큼, 총선 이후 본격 논의에 들어갈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전주권이 광역시로 승격하려면 전주 완주 통합이 시급하다는 것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며 “총선 이후 전주시의 통 큰 양보가 있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고 말했다. 김완주 도지사는 전주시의 통큰 양보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주시와 완주군으로부터 통합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제출 받아 검토한 바 있다. 2012년 4월 11일 치러지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호 3번 자유선진당 백병찬 후보가 전주 불치병전문 통합의학특구 등과 함께 전주시의 광역시 승격을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 경상남도 창원시, 함안군 통합 및 창원광역시 승격 움직임 ===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시, 진해시가 통합한 통합창원시가 설립되어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가 되었다. 통합 6개월 후 창원시청이 만19세 이상 시민 2,060명을 대상으로 전문여론조사기관인 경남리서치에 의뢰해 통합평가, 시정만족도 등을 설문조사하였으며, 조사 내용 중 시민들이 원하는 향후 창원시의 행정체계상 희망 도시형태로 광역시를 32.2%가 꼽았고, 특정시 19.3%, 특별자치시 19.0%, 기초시 11.6% 순으로 나타나 응답자의 70.5%가 통합 창원시 규모에 걸맞은 권한 확대를 희망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2010년 8월 23일 김두관 경상남도지사는 경남도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통합창원시의 광역시 승격에 대해 "통합이 우여곡절을 겪고 된 만큼 (창원시는)도시 경쟁력을 키우는 문제, 삶의 질 높이는 문제를 고민하는 중일 겁니다. 그런데 특례조항이 관철되면 그런 고민이 더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책임 있는 분들이 이 어려움을 타개한다는 뜻에서 이 문제(광역시 승격)를 꺼내는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통합 과정에서 후유증이 있었고 소외도 큰데, 이런 문제를 지금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통합이 아직 논의 중인데, 전체 시·군·구에 대한 큰 그림이 나온 다음에 광역시 승격을 하든 해야 합니다."라며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2011년 1월 3일 박완수 창원시장은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으면”이라는 전제조건을 단 상태에서,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광역시 승격을 하려면 함안군을 통합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인구와 경제력 모두 경남 전체의 3분의 1 수준을 차지하는 창원시가 경상남도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경상남도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경상남도민들에게는 아직도 “부산과 울산은 경상남도에서 분가한 자녀”라는 생각이 박혀 있어 창원시민과 비창원시민 간 반목과 갈등도 예상된다. 2012년 11월 24일 창원시의회는 의회 정례회 제1차 본회의에서 차형보 의원이 발의하고 전체 시의원이 동의해 대통령실장, 국회의장, 기획재정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등에 보낸 건의문을 통해 창원시민의 자치권 확립과 생활 자치를 실현하고 자치재정권의 한계 극복 및 주민에 대한 행정서비스 제고를 위해 창원의 광역시 승격을 강력하게 추진해줄 것을 건의했다. 창원시의회는 창원시장에게도 지역단체, 학계, 언론, 상공회의소 등 시민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창원광역시승격추진위원회 를 구성해 창원광역시 승격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줄 것을 촉구했으며 행정안전부장관과 국회의원에게 창원광역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안을 제정해 국회에 제출하고 법안이 국회의 심의. 의결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줄 것과 국회는 창원광역시 승격을 위한 법률안 제정에 적극 나서 줄 것 등을 건의했다. 건의문을 대표 발의한 차형보 의원은 " 창원시의 인구규모는 110만의 광역시급 자치단체인데도 행정체제는 경상남도 산하에 기초자치단체로서 조직, 인사, 재정의 취약점을 안고 있다"면서 " 광역시 승격으로 인해 시민들의 통합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현실적으로 실현시켜 조기에 시민통합을 이루고, 각 분야별로 도출된 문제점과 현안사업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통합시의 장기 발전방향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통합시의 위상에 맞는 제도적 장치가 요구되므로 광역시로의 승격 추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했다. 2013년 2월 27일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이 “앞으로 시·군이 통합할 때 인구가 100만을 넘어가면 광역시로 승격하는 등 지방 활성화 차원의 접근을 하는 것은 어떻냐”고 묻자 “창원은 인구 100만의 도시이지만, 광역시 승격은 인구로만 판단하기 어렵다”며 유보적인 뜻을 나타냈다. 유정복 후보자는 광역시 승격 문제에 대해 “광역시 승격은 인구로만 판단하기 어렵고, 지방자치단체가 가진 주변 상황이나 도시화 정도, 재정 자치 여건과 성숙도, 또 주민의 정서나 동의 여부가 종합적으로 판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도시에 대한 것을 전반적으로 진단하고 검토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2013년 7월 3일 강기윤 국회의원·경남대학교·창원대학교 창원발전연구센터·창원상공회의소 주최로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창원시 자치분권 모델 개발포럼’에서 경상남도 창원시의 자치분권 모델로 광역시 승격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허명환 한국지방세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의 창원시에 대해 “광역시 승격도 어렵고 기초지자체로 그냥 두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정부가 광역시로 승격시키면 경남의 도세(道勢)가 위축되고 다른 시·군의 재정이 악화하는 등 균형발전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허 연구위원은 창원시 등 100만 대도시의 자치분권 모델로 직통시(直通市)와 대특례시(大特例市)를 제시했다. 직통시는 자치구를 두지 않은 광역시 모델, 대특례시는 현재의 기초자치단체는 유지하면서 일부 기능에서는 도의 지휘감독은 배제하는 모델이다. 이민호 한국행정연구원 정부간관계연구실장은 “3개 지방자치단체를 합쳐 탄생한 창원시가 다시 기초자치단체(구)를 설치하고 광역시로 승격하겠다는 것은 행정구역 통합 논리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단기적으로는 인구 50만명 이상 대도시를 대상으로 하는 현행 특례 조항을 따르면서 준광역시(대특례시) 모델로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장기적으로는 일반시와 광역시의 이중적 성격을 갖고 구역 내에서 독점적 자치권한을 행사하는 특별자치시(=직통시) 모델을 제시했다. 2014년 11월 19일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제322회 경상남도의회 정례회 2차 본회의에 참석, 새누리당 박해영 경상남도의원의 통합창원시 정체성 관련 질문에 대해 “창원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 경상남도는 껍데기만 남는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정부-광역 시ㆍ도-기초 시ㆍ군’의 현 3단계 행정구조에서 창원시가 광역시가 되면 경기도와 경상남도는 껍데기만 남는다는게 반대 이유다.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다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소통하는 2단계 행정구조로 바뀌면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2015년 1월 5일 창원시청이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했던 통합창원시 광역시 승격에 대한 시민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여론조사는 창원에 거주하는 19세 이상 시민 1502명을 대상으로 2014년 12월 20~30일 사이 실시되었는데 55.9%가 찬성하고 25.0%가 반대했으며, 19.1%는 잘 모름 이라고 했다. 옛 지역별로 보면, 창원지역은 찬성 58.9%와 반대 24.6%, 마산지역은 찬성 54.0%와 반대 23.2%, 진해지역은 찬성 51.8%와 반대 30.2%로 상대적으로 옛 창원지역이 마산과 진해보다 광역시 승격을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역시 승격을 공약으로 걸고 당선된 안상수 창원시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2015년을 광역시 승격 운동의 원년으로 삼아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15년 1월 7일 홍준표 경상남도지사가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놨다.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같은 조건인 경기도 4개시(수원·고양·성남·용인)도 (광역시 승격을) 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경기도가 도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라고 말했다.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결국은 도를 없애는 행정체계 개편을 해야 하고, 그리 되면 광역시든 무엇이든 의미가 없게 된다, 내가 재임하는 동안에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안상수 창원시장에 대해 "오죽했으면 그런 공약을 내걸었겠느냐? 광역시라는 꿈을 걸어놔야 서로 덜 싸우고, 마산·진해가 빠져나가지 않지 않겠느냐?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광역시 승격은) 어렵다"라고 말했다. 2015년 1월 8일 오전 간부회의에서 안상수 창원시장은 "창원광역시는 가능하고 성사돼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안상수 창원시장은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입장에서 창원광역시 승격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이해가 된다"라면서도 "그러나 울산이 광역시가 될 때도 경상남도청은 반대했다, 창원은 울산처럼 경상남도청에서 반대해도 성공할 수 있다, 창원시장과 시민들의 합치된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또 "광역시는 경기도 1개, 지방 1개로 추진될 것으로 생각하고, 지방은 통합창원시에 통합인센티브로 광역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홍준표 경상남도지사가 경기도 분해를 언급하지만 인구가 1100만 명에서 400만 명이 빠져도 700만 명이 남는다, 경제력도 충분하며 분해될 이유가 없다, 전국 최고의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경기도는 변함이 없다"라고 밝혔다. 같은 날 창원시 공무원노동조합은 안상수 창원시장의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 본격추진과 관련 “승격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힌 것은 환영하나, 108만 시민의 뜻에 따라 추진되어야 하며, 시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내는 범시민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공무원노동조합 창원시지부는 이날 오전 창원시청 브리핑 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그 동안 공약사항으로 취임 이후 줄곧 구호에 그쳤던 광역시 승격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발표한 것은 보다 진일보한 추진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또한 “광역시 승격 추진은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시민의 의견을 반영한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냐가 더 중요한 문제”며 “주민의사 반영 없이 졸속 추진된 행정구역 통합의 잘못된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광역시 승격에 대해 지역 국회의원, 시·도의원 조차 부정적 여론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득해 나갈 것인지, 경상남도청을 비롯한 도내 타 시군에 대해서도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줄이고 창원시청의 입장을 충분히 알려 부정적인 여론에 대한 구체적인 설득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5년 1월 9일 창원시청 미래전략위원회(위원장 박재완)가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창원경제-제2의 도약 주제로 주최한 토론회에서 안상수 창원시장은 광역시 승격 추진, 첨단산업과 관광산업 발전 전략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광역시 승격 추진에 대해서는 "광역시 승격은 대박이다"고 재차 강조했다. 2015년 3월 18일 ‘창원광역시 승격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가 창원컨벤션센터(CECO)에서 시민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창립총회에는 회원 140여 명이 참석해 김철곤 전 창원시의회 의장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부회장에 김형봉 전 진해시의회 의장, 김이수 통합창원시 초대 의장, 전서훈 창원산업단지경영자협의회 회장, 최팔관 창원상공회의소 부회장,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을 각각 선출했다. 또한 운영위원장에는 강인호 전 창원시의회 의장을 각각 선출하는 등 임원진을 구성했다. 2015년 5월 28일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는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창원광역시 승격과 국가 및 경남의 균형발전 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국토연구원장을 지낸 박양호 창원시정연구원장은 창원광역시 승격이 국가와 경남의 균형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고 안상수 창원시장은 창원광역시가 오히려 경상남도 전체의 파이를 키우게 된다고 강조하며 "국경이 없는 도시 간의 경쟁시대에 창원·부산·울산이 강력한 광역 벨트를 이루면 경제수도권이 가능하다"며 "창원이 (경남에서) 떨어져 나가도 새살이 돋듯 진주·김해·거제·양산이 지금의 창원처럼 성장할 것이다"고 예측했다.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은 "창원광역시가 되면 경남 공동화 를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며 "1997년 울산이 광역시가 되어 분리됐지만, 경남은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2015년 6월 2일 CBS 등이 보도를 통해 창원광역시 승격 추진 주민서명이 90만명을 넘었으나 안상수 창원시장이 공무원들에게 서명 을 독려한뒤, 공무원들이 만사 제쳐놓고 묻지마식으로 서명을 받는데 몰두한 결과 주민 공감대가 없는 소위 묻지마 서명 이 늘고 있다는 비판 이후 안상수 창원시장은 서명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서명운동에는 3개월 만에 무려 90만 명이 넘게 서명했지만 22만 명 정도가 중복 서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창원시의회 송순호 의원은 "관이 주도하는 승격추진운동은 5년전 창원시 통합 때와 비슷한 분위기다"고 지적하며 "장미빛 청사진만 제시하며 통합한지 불과 5년만에 광역시로 가야한다고 또 다시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은, 통합 자체가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꼴이다"고 꼬집었다. 이어 "통합시 갈등을 서둘러 덮어두기 위한 안상수 시장의 정치적 미봉책이란 지적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창원시의회 김헌일 의원은 "추진동력이 붙지 않다보니, 광역시가 되면 여러 가지로 불리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5년 6월 8일 진해어민들은 “진해 어민들은 지금도 이래저래 조업하기가 곤란하다. 진해기지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 부근에서는 조업을 못하고, 부산 쪽으로 조금만 나가면 조업구역을 이탈했다고 어업지도선이 단속을 나온다”며 “여기에 광역시 승격으로 인해 경남도에서 창원시만 조업구역이 한정돼 떨어져 나오게 되면 조업 가능한 해역이 줄어들고, 자연히 살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해상은 일반적으로 어업허가권자인 시·도 관할 육상 행정구역 경계에 맞춰 각 지자체 관할 수역을 설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연안어업(무동력 어선과 10t미만의 어선)의 경우 각 광역시장·도지사·특별자치도지사가 관할하는 수역에서 조업이 가능하다. 창원시 연안어업 허가 수는 3215개로, 진해 어민 대다수가 거제 외포와 장승포 칠천포 등지로 조업을 나간다. 진해를 통해 유통되는 장어의 90% 이상은 이곳에서 잡힌다. 이때문에 진해어민들은 “어민 대부분이 소형 선박을 이용해 진해만과 거제 일원에서 조금씩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데, 창원시가 광역시로 승격돼 조업구역이 창원시 관할 구역인 진해만과 마산만 일부로 한정되면 무얼 먹고 사느냐”며 우려를 표했다. 이에 대해 창원시청 수산과 관계자는 “인천이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이와 유사한 일이 불거져 경기도와 인천광역시 해상을 공동조업구역으로 설정해 어민들이 자유롭게 공동으로 조업하고 있다”며 “선례가 있는 만큼 이를 토대로 법제화를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진해어민들은 “1989년 가덕도가 부산직할시로 편입되면서 거제 어민들의 조업 구역이 줄어 생계가 어려워졌고, 이에 공동조업구역 지정을 추진했지만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지 않느냐”며 “광역시 승격의 이점만 부각할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당면할 시민들 삶의 변화를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2015년 6월 30일 안상수 창원시장은 창원시청에서 열린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창원의 미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경쟁력이 뛰어난 도시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광역시로 도약하는 것이다. 창원광역시 승격으로 창원, 부산, 울산을 잇는 광역벨트를 형성해서 수도권 집중에 대응하는 강력한 ‘경제수도권 을 구축해 국가 균형발전에 기여하고,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의 주요 도시와도 경쟁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2015년 7월 2일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는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주민센터에서 상남동 주민 100여 명을 대상으로 순회설명회를 열고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 회원인 최낙범 경남대학교 교수가 강사로 나서 광역시 승격의 필요성과 기대효과 등에 대해 설명했다. 김철곤 협의회 회장은 “메르스 여파로 연기했던 설명회도 본격적으로 개최하고 홍보캠페인도 전개하여 서명운동에 많은 시민들이 보여준 지지에 화답할 수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앞으로도 계속 시민여러분의 관심과 지지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2015년 7월 3일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와 창원시의회 의장단은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한 식당에서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유원석 창원시의회 의장, 김하용 부의장, 정쌍학 기획행정위원장 등 의장단과 범시민추진협의회 김철곤 회장, 김이수 부회장, 강정운 기획분과위원장 등 20여 명이 참석했으며 협의회는 하반기 추진계획 설명과 시의회의 협의회 참여해 광역시 승격 건의안 이 시의회에서 채택돼 국회나 정부에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시의회의 협조를 구했다. 김철곤 회장은 "광역시 추진에 있어 시의회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며 "지금까지 시와 협의회가 주축이 돼 광역시 홍보와 서명운동을 추진했는데 이제는 시의회도 시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광역시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유원석 의장은 "우리 시의회도 협의회와 뜻을 같이하고 아울러 앞으로 시와 시민과 함께 창원광역시 승격 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2015년 7월 28일 경남시장군수협의회 회장인김동진 통영시장을 비롯한 12명은 경상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창원광역시 추진 반대 입장을 냈다. 이날 회견에는 이창희 진주시장, 김동진 통영시장, 김맹곤 김해시장, 박일호 밀양시장, 나동연 양산시장, 오영호 의령군수, 차정섭 함안군수, 김충식 창녕군수, 박영일 남해군수, 허기도 산청군수, 임창호 함양군수, 하창환 합천군수가 참석했다. 시장군수들은 "1983년 경상남도청이 부산시에서 창원시로 이전하고 나서 창원시는 경상남도청의 집중적인 지원과 재정투자로 눈부시게 성장했다"며 "당시 경상남도 내 전 시·군에 고루 분배돼야 할 재원이 창원시에 집중됐다"고 밝혔다. 이어 "경상남도청의 전폭적인 지원과 17개 시·군의 희생과 헌신으로 100만 명품도시 창원시가 탄생한 것이다"며 "그러나 창원시는 경남도정과 보조를 같이해 17개 시·군과 상생발전의 길로 나가야 함에도 최근 광역시 승격이라는 이기적인 형태는 17개 시·군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경상남도 지역총생산(GRDP)의 37.8%를 차지하는 창원시청이 경상남도청로부터 독립해 나간다면 경상남도 도세 위축은 물론, 나머지 17개 시·군의 재정도 붕괴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며 "창원시는 한편으로는 광역시 승격을 꿈꾸고, 다른 한편으로는 야구장 건립비와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개최비용, 로봇랜드 조성 등 17개 시·군은 꿈도 꾸기 어려운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경상남도청에 요구하고 있다"며 "이러한 창원시청의 행동을 17개 시·군 시장·군수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2015년 8월 10일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창원의 광역시 승격은 현 지방행정체계 하에서는 불가능하다"며 "광역시는 지방행정체제 개편 때 검토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추진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원시가 광역시 추진으로 행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면서 "지방행정체제를 3단계에서 2단계로 바꿀 때 광역시가 거론되는 것이지, 3단계 체계를 그대로 두고 창원시만 광역시로 할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2015년 8월 18일 홍준표 경상남도지사가 간부 공무원들과 티 타임을 갖고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 추진과 관련해 “창원시청은 헛된 정치구호로 행정력을 낭비하면서 창원시민들을 현혹시키지 말고, 18개 시·군의 일원으로 돌아와 통합시의 균형발전과 내실을 기하는 것이 최우선 정책이 되어야 한다”며 ”경상남도 수부도시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도리“라고 강조했다. 2015년 9월 17일 허성무 새정치민주연합 창원시 성산구지역위원장이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사진)을 열어 "안상수 창원시장이 그동안 추진해 왔던 광역시 승격 운동은 서명운동을 제외하고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면서 "대책 없는 광역시 승격 논의를 중단하고 100만 대도시 특례 추진협의회 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 영·호남 6개시·군(경상남도 사천시, 하동군, 남해군, 전라남도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통합 및 섬진광역시 추진 움직임 === 2010년 7월 3일 국회에서 포럼을 통해 남해안에 지역구를 둔 여야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된 국회 `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 연구모임 (공동대표 새누리당 정의화·이주영, 민주통합당 김성곤) 소속 의원들이 전남 동부권과 경남 서부권의 기초자치단체들을 통합하여 섬진강시로 개편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순천, 여수, 광양 등 전남권 지역과 하동, 사천, 남해 등 경남권 지역을 통합해 동서 대화합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정의화 국회부의장은 인사말을 통해 "남해안을 발전시키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이 점차 해소되고 균형 있는 국토발전을 이뤄갈 수 있다"며 "섬진강이 동서를 나누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동서가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와 관련 "기존의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특별자치시를 만들자는 ‘섬진광역시’ 계획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단순한 행정적인 통합이 아니라 해양을 매개체로 하여 거대 해양산업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유준상 새누리당 상임고문은 "박근혜 당선인은 이런 점을 감안해 광주전남에선 단순한 지역발전 공약보다는 국민대통합을 실천할 섬진광역시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면서 "황우여 대표에게도 이 안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특별시 특별자치시 특정시 행정시 이탈리아의 광역시 광역군(직할군)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 광역시 출범 분류: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분류:1995년 설치 |
2세기 는 101년부터 200년까지이다. 마한 54개국, 변한 12개국, 진한 12개국에 나뉘인다. 티칼이 세워지다. 117년 - 로마 제국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 134년 - 일성이사금 즉위. 154년 - 아달라이사금 즉위. 184년 - 황건의 난 발생. 이 사건을 계기로 후한은 멸망하기 시작하여 결국 중국은 삼국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채륜(蔡倫, 50년? ~ 121년?) 장각(張角, ?~184년) 히미코(175년경? - 248년경) *후한의 환관인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다. |
3세기 는 201년부터 300년까지이다. 204년 - 대방군 설치된다. 220년 - 후한 왕조가 멸망하고, 위 왕조가 건국되다. 2??년 중국에서 나침반이 만들어지다. 234년 - 사반왕, 고이왕 즉위. 265년 - 서진이 낙랑군을 지배. 280년 - 서진가 오나라의 항복을 받아 중국 재통일. 점전법·과전법, 호조식을 공포. 298년 - 기림이사금 즉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제국의 황제(145~211) 히미코(175경?~248경) - 야마타이코쿠 여왕 제갈량 중국 삼국시대 촉의 정치가(181~234) 사마염 중국 서진(西晉)의 제1대 황제(재위 265∼290). 중국을 통일함. |
5세기 는 401년부터 500년까지이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380년 ~ 415년 찬드라굽타 2세가 굽타 제국의 황금기를 다스렸다. 399년 ~ 412년 중국의 법현 스님이 인도양을 건너 스리랑카와 인도를 다니며 경전을 수집했다. 401년 구마라습이 장안에 도착하였다. 405년 메스로프 마슈토츠가 아르메니아 문자를 새로 만들었다. 406년 수에비, 알라니족, 반달족이 마인츠 부근의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너 골 지역으로 침공해 들어오면서 서로마 제국의 동부 국경지대가 무너졌다. 407년 콘스탄티누스 3세가 브리튼의 로마 군단을 골로 파견하고 아를 (아렐라테)을 점령했다. 이 사건은 로마가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410년 알라리크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잠식했다. 411년 수에비족이 갈라이시아에 최초의 기독교 왕국을 건국했다. 413년 히포의 주교였던 성 아우구스투스가 《신국》 집필을 시작했다. 415년 ~ 455년 쿠마라굽타가 굽타 제국을 다스렸다. 420년 진 왕조가 유송에 의해 멸망하고, 남북조가 시작되었다 (~589년). 426년 키니치 약스 쿠크 모가 코판 왕국을 재건국했다.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겼다. WEST COURT 01.jpg|thumbnail|코판 430년 일로팡고 화산이 폭발하면서 마야 도시 (오늘날의 엘살바도르)가 파괴되었다. 431년 제3차 공의회인 에페소스 공의회가 열려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 로 명명하였다. 439년 반달족이 카르타고를 참공하였다. 440년 앵글로색슨 족이 브리튼 섬에 정착했다. 451년 **제4차 공의회인 칼세돈 공의회가 열려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느님으로 설정했다.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훈 족의 아틸라 왕이 로마에 입성한 한편 서고트족들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대패했다. 452년 **아퀼레이아 시가지가 훈 족의 아틸라 왕이 이끄는 군대로 파괴되었다. **교황 레오 1세가 민초 강에서 아틸라 왕과 만나 로마를 몰살시키지 말아달라고 설득했다. 453년 아틸라 왕 사망. 훈 제국은 아틸라의 자손에 의해 분열되었다. 454년 네다오 전투. 게르만족이 훈족의 군대를 격파하고 훈족의 통치를 무력화시켰다. 455년 * 반달 족이 로마를 약탈했다. * 엑시코에서 치첸이트사 시가 건설되었다. * 굽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스칸다굽타가 즉위했다 (~467년). 469년 훈 제국의 마지막 칸이었던 뎅기지크가 사망했다. 470년 브리튼 족의 리오타무스 왕이 브르타뉴로 군대를 보내 서로마 제국의 서고트 족 방어를 지원했다.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오도아케르 장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를 서로마 제국 멸망의 기준점으로 본다. 477년 혹은 495년 중국 허난의 숭산에 스님들이 소림사를 지었다. 480년 명목상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율리우스 네포스가 달마티아에서 살해당했다. 481년 힐데리히 1세의 죽음으로 클로비스 1세가 서프랑크의 국왕에 즉위했다. 486년 클로비스가 스바그리우스를 물리치고 서로마 제국의 남은 영토를 참공했다. 490년 바돈 산 전투. 전설에 의하면 아서 왕이 이끄는 브리튼 군이 색슨 족의 침략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491년 클로비스 1세가 독일의 튀링겐 왕국을 물리치고 종속시켰다. 493년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오도아케르를 쫓아내고 이탈리아의 군주가 되었다. 494년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골 북부를 통일하였다. 496년 톨비아크 전투. 클로비스 왕이 알레만니를 종속시키고, 랭스의 교주였던 레미기우스로부터 수많은 프랑크족과 함께 가톨릭교에 귀의하였다. 이밖에도 불교가 미얀마와 인도네시아로 전파되었고, 과테말라 티칼 유적지 (마야 문화)와 이탈리아 라벤나에 네온 세례당이 건설되었다. 또한 고구려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정복 활동으로 최대 전성기에 이르렀으며, 아프리카인과 인도네시아인이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하였다. |
6세기 는 501년부터 600년까지이다. 502년 - 남조의 제나라 대신 양 무제가 양나라를 세운다. 504년 -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쿠스 마그누스이 게피드 족을 카르파티아 산맥 주변에서 추방한다. 백제 무령왕 (462년 - 523년) - 백제의 제 25대 국왕 (재위 502년 - 523년)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에서 묘지나 부장품이 발견된다. 백제 성왕 (? - 554년) - 백제의 제26대 국왕 (재위 523년 - 554년) 일본에 불교를 전달,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 |
7세기 는 601년부터 700년까지이다. 618년 - 수나라가 멸망하고 귀족 이연에 의해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622년 - 무함마드가 신도들을 이끌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했다(헤지라). 630년 - 당 태종의 원정군대가 돌궐 제국을 정복. 645년 - 발해의 대조영 이 태어났다. 646년 - 왜에서 다이카 개신을 단행했다. 656년 - 알리와 무아위야 1세 간에 이슬람 내전 발발했다. (~661년) 660년 - 백제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멸망하다. 661년 - 4대 칼리프 알리가 암살당하고 무아위야 1세가 칼리프에 올라 우마이야 왕조를 세움. 668년 - 고구려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멸망당하다. 676년 -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682년 - 일테리시 카간이 돌궐을 재건하고 돌궐 제2제국을 선포했다. 698년 - 발해가 고구려 계승을 표명하며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다. |
8세기 는 701년부터 800년까지이다. 710년 - 겐메이 천황이, 헤이조쿄(현재의 나라)로 천도했다. 711년 - 이슬람 장수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무찌르고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다. 717년 - 이슬람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으나 레오 3세의 비잔틴 제국 군대가 막아냈다. (~718년) 720년 - 일본서기가 완성됐다. 730년 - 비잔틴 제국의 레오 3세의 성상 숭배 금지령이 내려졌다. 732년 - 투르 푸아티에 전투가 벌어졌다. 751년 - 탈라스 전투가 있었다. 754년 - 피핀의 기증,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이 롬바르드 왕국의 영토를 빼앗아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기증했다.(교황령의 기초) 755년 - 안사의 난 (~763년)이 일어났다. 763년 - 토번(티베트)의 군대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787년 - 비잔틴 제국의 섭정인 이레네가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해 성상 숭배를 인정했다. 793년 - 영국, 홀리 아일랜드에 최초의 바이킹 침입이 발생했다. 794년 - 간무 천황, 헤이안쿄(현재의 교토)로 천도했다. 797년 - 속일본기가 완성됐다. |
9세기 는 801년부터 900년까지이다. 9세기 초반에는 800년에 카를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된 후,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유럽 역사가 전개되었다. 카를 대제는 교황에 대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세력을 넓혀,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가 중 로마 제국 이후로는 가장 넓은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이는 비잔틴 세계 및 이슬람 세계와 구별되는 서유럽 세계라는 정치·문화적 공동체의 기반이 되었다. 카를 대제의 통치 기간 중 그 이전 시기의 민족 대이동으로 인해 쇠퇴했던 문화가 부흥하였고, (카롤링거 르네상스), 게르만·로마·기독교 등의 여러 요소가 융합하여 오늘날까지도 내려오는 서유럽 공통의 출발점을 이룩하였다. 지중해 연안을 통한 무역은 이미 8세기부터 발흥한 이슬람교도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쇠퇴하였으며, 이는 서유럽 사회가 교환경제 사회에서 자연경제 사회로 되돌아가게 하여 경제 성장이 저해되었다. 이는 카를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그리고 로타르령의 세 왕국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에는 8세기부터 계속되어 온 바이킹의 내습에 의해, 분열되어 있던 앵글로색슨 계열의 7왕국이 차례로 정복되었으나, 최후로 남은 색슨계 왕국인 웨섹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878년에 이들을 격퇴하고 일부 영토를 수복하여 잉글랜드 왕국의 기원이 되었다. 9세기의 유럽에서는 점차 장원제(莊園制)가 보급됨과 아울러 지배자와의 사이에 주종(主從)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封建制)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장원의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나중에 영주권이 강화되어 왕권과 대립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방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한편, 교회도 이른바 교회령(敎會領)을 가지게 되며, 이 무렵에는 그 권력이 세속의 영주와 다를 바 없게 됨으로써 여기서 중세의 소위 2원적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었다.그러나 이에 대하여 비잔틴 세계는 고전 그리스 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며 아시아 여러 민족의 침입에 대하여 서유럽 세계를 지키는 방파제 구실을 해 주었고, 또 그들의 문화는 문화적 진공상태하에 놓여 있던 동구(東歐) 슬라브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8세기 중엽 안사(安史)의 난을 겪고 나서 당(唐)의 국운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당의 경제적 기초였던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지고 현실적 토지 사유에 바탕을 둔 양세법(兩稅法)이 시행되자, 토지 집중화 현상을 빚어냄과 동시에 농민의 몰락이 가속화하였다. 또한 농촌 사회의 변동은 부병제(府兵制)를 동요시켜 모병제(募兵制)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절도사(節度使)가 용병(傭兵)을 사병화(私兵化)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절도사는 지방의 행정·군사·재정의 실권을 집중하여 사실상 지방정권화하였다. 더구나 양세법 시행 이후에도 당의 재정 곤란은 격심하여 여러 종류의 잡세가 부가되고, 아울러 상업 및 고리대본이 발전함에 따라 농민은 장원에 유입되거나 번진(蕃鎭)의 용병이 되는 일이 속출하였다.번진 세력의 대두와는 반대로 중앙 귀족이 조락하고, 정부 내 환관(宦官)의 전횡과 관료의 당쟁은 당의 붕괴를 재촉하였다. 지방에 할거(割據)한 신흥 지주 호족 세력은 농민과 유민을 흡수하여 빈번하게 반란을 일으켰다. 9세기 후기의 황소(黃巢)의 난은 전후 10여 년에 걸쳐 당의 보고(寶庫)인 강회지방(江淮地方)을 유린함으로써 당 멸망에 결정타를 가했다. 811년 - 고닌의 한구. 840년 - 일본후기 완성. 867년 - 후백제 견훤 출생 869년 - 조간의 한구. 892년 - 후백제가 견훤에 의해 건국되다. 893년-894년 - 간표의 한구. 일본에서 가나문자의 사용이 시작된다. 카롤루스 대제 노르웨이의 하랄 1세 류리크(?879년) - 노브고로드 공국을 건국한 바이킹(노르만인). 케네스 마카르핀(810년 - 858년) - 최초의 스코틀랜드왕, 아르바 왕국을 건설. 바시레이오스 1세(827년 - 886년) - 동 로마 황제(재위 867년 - 886년).마케도니아 왕조의 개조. 황소(黃巢?) - 당나라시대의 반란총수. 컬 대제(742년 - 814년) - 프랭크왕(재위 768년 - 814년).서로마 황제(재위 800년 - 814년). 에그바트(775년? - 839년) - 웨섹스왕(재위 802년 - 839년).잉글랜드를 통일했다. 알프레드 대왕(849년 - 899년) - 잉글랜드왕(재위 871년 - 899년) 하룬 알 라시드(763년 - 809년) - 압바스조 제 5대 칼리프(재위 786년 - 809년) |
10세기 는 901년부터 1000년까지이다.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에서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중국에서는 송이 5대 10국 시기의 정치적 분열을 통일하였다. 원난 지방에서 대리가 세력을 넓혀 갔으며, 북부 베트남 지역에서 중국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다가 몇 차례의 왕조 교체가 이어진 후 대월이 성립되었다. 901년 -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905년 - 고킨와카슈가 성립됐다. 918년 - 태조 왕건이 궁예의 태봉을 무너뜨리고 개경을 도읍삼아 고려를 건국했다. 926년 - 발해가 요나라에게 멸망당했다. 935년 -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게 항복했다. 935년 - 도사 닛키가 씌어졌다. 936년 - 고려가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됐다. 고려의 건국은 한국사에서 중세의 개막을 의미한다. 996년 - 마쿠라노소시가 씌어졌다. 997년 - 죠토쿠의 한구. 1000년 - 헝가리 왕국과 방글라데시를 건국했다. 궁예 후고구려(마진, 태봉)의 창시자 (857년 - 918년) 견훤 후백제의 창시자 (867년 - 936년 재위 900년 - 935년) 주전충(852년 - 912년) - 후량의 초대 황제(재위 907년 - 912년). 왕건(877년 - 943년)- 고려의 초대 왕(재위 918년 - 943년). 야율아보기(872년 - 926년) - 계단(요나라)의 초대 황제(태조)(재위 916년 - 926년). 조광윤(927년 - 976년) - 송왕조의 초대 황제(태조)(재위 960년 - 976년). 오토 1세(대제)(912년 - 973년)- 독일왕.초대 「신성 로마 황제」(재위 962년 - 973년). 위그 카페(941년 - 996년) - 초대 프랑스 국왕.카페왕조의 시조(재위 987년 - 996년). 아브드·앗라후만 3세(889년 - 961년) - 후 말 아니왕조의 칼리프(재위 929년 - 961년). 바실리우스 2세(958년 - 1025년) - 동 로마 제국 최성기의 황제(재위 976년 - 1025년). 시메온 1세(864년 - 927년) - 불가리아왕(재위 893년 - 913년), 불가리아 황제(재위 913년 - 927년). 이슈트바 1세(975년 - 1038년) - 헝가리의 건국자(재위 997년 - 1038년).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1세(956년 - 1015년) - 키예프 대공(재위 980년 - 1015년). 이븐 시나(980년 - 1037년) - 부하라 출신의 철학자·의사·과학자. |
11세기 는 1001년부터 1100년까지이다. 서하가 등장하여 비단길의 요충지역을 차지하였다. 게 성운 을 남긴 천체 SN 1054가 발견되다. 1차 십자군 전쟁 (1096 ~ 1099) 안셀무스, 중세 이탈리아의 신학자, 철학자(1034년 - 1109년)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973년경 - 1014년 및 1025년경) 피르다우시, 「샤 나메」(1009년경 완성)을 저술한 시인(934년 - 1025년) 바실리우스 2세, 동 로마 황제(958년 - 1025년, 재위 976년 - 1025년) 투 그릴 베크, 세르쥬크왕조 초대 술탄(993년 - 1063년, 재위 1038년 - 1063년) 머프 무드, 가즈니왕조의 술탄(재위 998년 - 1030년) 덩컨 1세, 스코틀랜드왕(1001년 - 1040년, 재위 1031년 - 1040년) 마크베스, 스코틀랜드왕(1005년 - 1057년, 재위 1040년 - 1057년) 라젠드라 1세, 쵸라왕조의 왕, (재위 1016년 - 1044년) 아이르란가, 쟈와, 쿠디리왕(재위 1019년 - 1052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로마 교황(1020년 - 1085년, 재위 1073년 - 1085년) 윌리엄 1세, 잉글랜드왕(1027년 - 1087년, 재위 1035년 - 1087년) 왕안석, 중국·북송 왕조의 정치가(1021년 - 1086년) 사마광, 중국·북송 왕조의 정치가·학자(1019년 - 1086년) 우르바누스 2세, 로마 교황(1035년 - 1099년, 재위 1088년 - 1099년) 알렉시우스 1세, 동 로마 황제(1048년 - 1118년, 재위 1081년 - 1118년) |
12세기 는 1101년부터 1200년까지이다. 칭기즈 칸 피에르 아벨라르 오마르 하이얌 데이비드 1세(1080년 - 1153년) - 스코틀랜드왕 진회(1090년 - 1155년) - 남송의 재상 스티븐(1096년 - 1154년) - 잉글랜드왕 악비(1103년 - 1141년)- 남송의 무장 주희(1130년 - 1200년)- 남송의 유학자 살라흐 앗 딘 - 살라딘(1138년 - 1193년)- 아이유브왕조의 시조 윌리엄 1세(1143년 - 1214년) - 스코틀랜드왕 리처드 1세(1157년 - 1199년) - 잉글랜드왕 프랑스의 필리프 2세(1165년 - 1223년) - 프랑스 왕 잉글랜드의 존 (1167년 - 1216년) - 잉글랜드왕 미나모토 요리토모 - 가마쿠라 막부 성립 |
13세기 는 1201년부터 1300년까지이다. 키예프 공국이 몽골 제국에 의하여 붕괴됨. 제 4차 십자군 전쟁 (1202~1204) -> 콘스탄티노플 약탈 칭기스 칸, 몽골 제국의 창시자(1162년 - 1227년) 바투 쿠빌라이, 몽골 제국 제 5대칸, 원 세조(1215년 - 1294년) 바이바르스 에드워드 1세, 잉글랜드왕 (1239년 - 1307년) 아레그잔다 2세, 스코틀랜드왕 (1189년 - 1249년) 가사도, 중국 남송의 재상(1213년 - 1275년)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1224년 - 1282년), 동 로마 황제(재위:1261년 - 1282년) 문천상, 중국 남송의 군인·정치가(1236년 - 1282년) 아레그잔다 3세, 스코틀랜드왕 (1241년 - 1286년) 존 베이랴르, 스코틀랜드왕 (1250년 - 1315년) 마르코 폴로, 여행가(1254년 - 1324년) 마가렛, 스코틀랜드 여왕 (1283년 - 1290년) |
14세기 는 1301년부터 1400년까지이다. 1309년 ~ 1377년 - 아비뇽 유수 1392년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뒤 권력을 잡고 왕으로 등극하다. 1393년 - 이성계가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경하다. 1394년 -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다. 1397년 - 아시카가 요시미쓰, 로쿠온지킨카쿠 을 건립.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하다. 고려 공민왕, 한국 고려왕조의 제 34대왕(1330년 - 1374년, 재위 1351년 - 1374년) 에드워드 3세, 잉글랜드왕(1312년 - 1377년, 재위 1327년 - 1377년) 조반니 보카치오, 소설가(1313년 - 1375년) 주원장(태조 홍무제), 중국 명왕조의 시조(1328년 - 1398년, 재위 1368년 - 1398년) 이성계, 한국 조선왕조의 태조(1335년 - 1408년, 재위 1392년 - 1398년) 제프리 초서-·Chaucer, 시인(1343년 - 1400년) 이븐 바투타, 여행가(1304년 - 136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 일본 무로마치 막부 시작 정화 영락제의 명을 받아 해외 원정 |
15세기 는 1401년부터 1500년까지이다. 영국 -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 프랑스 왕국 동유럽 - 비잔티움 제국 러시아 - 모스크바 공국 중동 - 오스만 제국 시대 중국 - 명나라 시대 일본 - 무로마치 막부 시대 한국 - 조선 시대 *말리(서아프리카)-송가이제국시대 1401년 - 조선 태종즉위, 신문고 설치 1420년 -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설치 1442년 - 조선, 측우기제작 1446년 -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다. 1453년 -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다. 1453년 - 백년 전쟁이 끝나다. 1455년 - 장미전쟁이 일어나다. 1456년 - 조선 사육신사건이 일어나다. 1492년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카를 발견하다. 1498년 - 바스코 다 가마, 인도항로를 발견하다. 1497년 - 1500년 - 무오사화발생 정인지, 조선의 문신, 정치인, 한글학자(1396년 - 1478년) 세종대왕, 조선의 제 4대 임금(1397년 - 1450년, 재위 1418년 - 1450년) 영락제, 명의 제3대 황제(1360년 - 1424년, 재위 1402년 - 1424년) 정화, 명의 무장(1371년 - 1434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건축가(1377년 - 1436년) 콘스탄티누스 11세, 동 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1409년 - 1453년, 재위 1448년 - 1453년) 잔다르크, 오를레앙의 아가씨(1412년 - 1431년) 한명회, 조선의 무신, 정치인(1415년 - 1487년) 김담, 조선의 문신, 수학자, 천문학자(1416년 - 1464년) 신숙주, 조선의 문신, 정치인, 한글학자(1417년 - 1475년) 어우동, 조선의 기생, 시인, 화가(1430년경 - 1480년) 메메드 2세, 오스만 제국의 술탄(1432년 - 1481년, 재위 1451년 - 1481년) 인수대비 한씨, 조선의 제 9대 임금 성종의 모후(1437년 - 1504년) 이반 3세, 모스크바 대공(2018년 - 1505년, 재위 1462년 - 1505년) 에드워드 4세, 잉글랜드왕(1442년 - 1483년, 재위 1461년 - 1483년) 로렌조 데 메디치(일 마니피코), 메디치가 당주, 피렌체의 참주(1449년 - 1492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년 - 1498년 5월 23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크리스트포로·콜롬보), 미국 대륙 발견자(실은 재발견)/크리스트 교도로서는 처음(1451년 - 1506년)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 잉글랜드왕 (1452년 - 1485년, 재위 1483년 - 2018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화가, 조각가, 건축가(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헨리 7세, 잉글랜드왕 (1457년 - 1509년) 엘리자베스 오브 요크, 에드워드 4세의 딸(아가씨)로 헨리 7세의 아내 (1466년 - 150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미코와이 코페르니크), 천문학자(1473년 - 1543년) 미켈란젤로, 화가·조각가(1475년 - 1564년)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베누스의 탄생이 유명한 시기이다. |
16세기 는 1501년부터 1600년까지이다. 영국 -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 부르봉 왕조 독일, 오스트리아 - 신성로마제국 에스파냐 - 합스부르크 왕가 러시아 - 모스크바 공국 인도 - 무굴 제국 중동 - 오스만 제국 시대 중국 - 명나라 시대 일본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한국 - 조선 시대 1504년 - 갑자사화가 일어나다. 1506년 - 중종반정이 일어나다. 1517년 -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가톨릭과 개신교의 라이벌 관계의 시초가 되었다. 1519년 -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1521년 - 페르디난드 마젤란,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으나 본인은 중도에 사망하였다. 1545년 - 을사사화가 일어나다. 1589년 -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다. 1592년 -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쟁은 향후 7년간 지속되었다. 1600년 - 유럽에서 음악과 미술이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다. 카를 5세,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의 황제(1501년 - 1556년, 재위 1519년 - 1556년) 가정제, 명나라의 제 11대 황제(1507년 - 1567년, 재위 1521년 - 1567년) 신사임당, 조선의 유명 화가, 시인(1504년 - 1551년) 윤원형, 조선의 정치인(1509년 - 1565년) 덕흥대원군, 조선의 최초 대원군 (1530년 - 1559년) 하동부대부인 정씨, 조선의 최초 부대부인 (1522년 - 1567년) 권율, 조선의 무장(1537년 - 1599년) 원균, 조선의 무장(1540년 - 1597년) 류성룡, 조선의 무장 (1542년 - 1607년) 이순신, 조선의 무장 (1545년 - 1598년) 선조, 조선의 국왕 (1552년 - 1608년) 황진이, 조선의 기생 출신 시인, 화가(1506년(?) - 1567년(?)) 이황, 조선의 선비, 성리학자 (1501년 - 1570년) 조식, 조선의 선비, 성리학자 (1501년 - 1572년) 이이, 조선의 선비, 성리학자 (1536년 - 1584년) 성혼, 조선의 문신, 정치인(1535년 - 1598년) 정난정, 조선의 외척(? - 1565년) 교황 율리오 2세, 로마 교황(1443년 - 1513년) 아메리고 베스푸치, 탐험가(1451년 - 1512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화가, 조각가, 건축가(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셀림 1세, 오스만 제국 제 9대 술탄(1470년 - 1520년, 재위 1512년 - 1520년) 왕양명, 정치가·양명학자(1472년 - 1528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자(1473년 - 1543년) 미켈란젤로, 화가·조각가(1475년 - 1564년) 교황 레오 10세, 로마 교황(1475년 - 1521년) 토마스 모어, 사상가(1478년 - 1535년) 교황 클레멘스 7세, 로마 교황(1478년 - 1534년) 라파엘로 산치오,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1483년 - 1520년) 바부르, 무굴 제국 건국자(1483년 - 1530년, 재위 1526년 - 1530년)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 지도자(1483년 - 1546년) 에르난 코르테스, 정복자(1485년 - 1547년) 장 칼뱅,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1509년 - 156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무장(1531년 - 1598년) 오다 노부나가, 일본의 무장(1534년 - 1582년) 교황 율리오 3세, 로마 교황(1487년 - 1555년) 헨리 8세, 잉글랜드왕(1491년 - 1547년) 쉴레이만 1세(대제), 오스만 제국 제 10대 술탄(1494년 - 1566년, 재위 1520년 - 1566년) 구스타브 1세 바사, 스웨덴왕(1496년 - 1560년) 메리 1세, 잉글랜드 여왕(1516년 - 1558년) 펠리페 2세, 스페인왕(1527년 - 1598년) 이반 4세(모스크바 대공·뢰제), (1530년 - 1584년)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 여왕(1533년 - 1603년) -> 1600년 동인도 회사 설립 허가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 스코틀랜드 여왕(1542년 - 1587년) 악바르, 무굴 제국 제 3대 술탄(1542년 - 1605년, 재위 1556년 - 1605년) 정여립(1546년 - 1589년) 조르다노 브루노, 철학자(1548년 - 1600년) 이여송, 명나라의 무장(1549년 - 1598년) 허난설헌, 조선의 문인, 시인, 화가(1563년 - 1589년)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가(1564년 - 1616년) 만력제, 명나라의 제 13대 황제(1563년 - 1620년, 재위 1572년 - 1620년) 갈릴레오 갈릴레이, 물리학자·천문학자·철학자(1564년 - 1642년) |
17세기 는 1601년부터 1700년까지이다. 영국 -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 프랑스 왕국 독일, 오스트리아 - 신성로마제국 러시아 - 러시아 제국 인도 - 무굴 제국 중국 - 명나라, 청 제국 몽골 - 청 제국 일본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한국 - 조선 이 시기에 한국은 조선시대(선조 ~ 숙종)였으며, 일본은 임진왜란을 끝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은 명(明)이 청(淸)으로 교체되는 시기였다. 1602년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설립. 1603년 -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으로 임명되면서 에도 막부를 에도에 세움.에도 시대 시작. 1607년 - 조선, 일본에 최초로 통신사를 파견. 1608년 - 광해군 즉위. 1611년 - 영국 제임스 1세의 왕명에 의해서 킹 제임스 왕 역 성경 출간. 1613년 -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시작. 1616년 - 누르하치, 후금 건국. 1618년 - 30년 전쟁 시작. 1620년 - 영국의 종교적 식민 개척 집단 퓨리탄의 선박 메이플라워호가 미국 대륙 도착, 1623년 - 인조반정, 인조 즉위. 1627년 - 정묘호란 발발. 1636년 - 병자호란 발발. 일본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 1543년 - 1616년) 조선의 문신, 철학자 정구( 1543년 - 1620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 1558년 - 1603년)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 1564년 - 1616년) 조선의 문신, 작가 허균( 1569년 - 1618년) 명나라의 문신 서광계(1562년 - 1633년) 청나라 1대 황제 누르하치 ( 1559년 - 1626년) 이탈리아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 1564년 - 1642년) 조선의 문신, 철학자 허목 ( 1595년 - 1682년)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 ( 1596년 - 1650년) 영국 수상 올리버 크롬웰 ( 1599년 - 1658년) 프랑스 왕 루이 13세 (1601년 - 1643년)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 (1606년- 1669년) 조선의 문신, 철학자 송준길 (1606년 - 1672년) 조선의 문신, 철학자 송시열 (1607년 - 1689년) 조선의 문신 허적 (1610년 - 1680년) 조선의 문신, 철학자 윤휴 (1617년 - 1680년) 프랑스 과학자 블레즈 파스칼 (1623년 - 1662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 (1638년 - 1715년 ) 영국 과학자 아이작 뉴턴 (1642년 - 1727년 )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1654년 - 1722년 )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 (1678년 - 1735년 ) 일본 수학자 세키 다카카즈 (1642년 - 1708년 ) 망원경 - 1609년 - 갈릴레오 갈릴레이 과학에 대한 관심과 뉴턴의 미적분 등으로 고전 역학 등의 연구 활발. |
18세기 는 1701년부터 1800년까지이다. 영국 - 하노버 왕조 프랑스 - 부르봉 왕가 러시아 - 러시아 제국 독일권 -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크 왕가), 프로이센 왕국 에스파냐 - 스페인 제국 중동 - 오스만 제국 시대 중국, 몽골 - 청나라(만주족) 시대 일본 - 에도 시대 한국 - 조선 시대 1701년 - 1714년 -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다. 1703년 - 1918년까지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표트르 대제에 의해 건설되다. 1707년 - 연합법으로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쳐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다. 1770년 - 보스턴에서 영국군과 시민 간의 충돌이 벌어지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전쟁의 불씨가 된다. 1776년 - 미국이 13개 주가 중심이 되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다. 1789년 -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다. (유럽의 역사가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죽은 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인 1715년에서 1789년 사이를 18세기라고 줄여 말하기도 한다.) 산업혁명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 1654년 - 1722년)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 ( 1678년 - 1735년)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 (1711년 - 1799년) 프랑스의 장군,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년 - 1821년 )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1684년 - 1751년) 에도 막부 로주 다누마 오키쓰구(1719년 - 1788년) 에도 막부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1759년 - 1829년 ) 러시아 여왕 예카테리나 2세(1729 - 1796) 1781년 - 샤를 메시에가 메시에 천체 목록을 발표하다. 제너의 종두법 린네의 식물 연구 1800년 - 알레산드로 볼타가 왕립 학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최초의 화학 전지인 볼타 전지를 발명. |
후한(後漢) 영평(永平) 12년 후한(後漢) 명제(明帝) 12년 신라(新羅) 탈해 이사금(脫解泥師今) 13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17년 백제(百濟) 다루왕(多婁王) 42년 오토가 갈바를 밀어내고 로마 황제가 되다. 비텔리우스가 오토를 밀어내고 로마 황제가 되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밀어내고 로마 황제가 되다. 플라비우스 왕조시대가 시작되다. 1월 15일 - 로마 제국 6대 황제 갈바 4월 16일 - 로마 제국 7대 황제 오토 12월 20일 - 로마 제국 8대 황제 비텔리우스 |
민남어 ()는 중국어의 방언으로, 주로 푸젠성과 타이완에서 쓰인다. ‘민’(閩)은 푸젠(福建)을 간략히 일컫는 말이다. 전통적으로는 8개, 지역에 따라 7~8개의 성조가 존재한다. 광둥어와 마찬가지로 입성(入聲)이 존재한다. 언어가 사용되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푸젠에서 * 장주어 (漳州語) * 천주어 (泉州語) * 하문어 (廈門語) 푸젠 밖에서 * 타이완어 (臺灣語; ) * 조주어 (潮州語) * 하이난어 (海南語) 하문어는 장주어와 천주어를 기본으로 한 크리올이다. 민어 중국어 분류:중국어의 방언 분류:타이완의 언어 분류:푸젠성 분류:필리핀의 언어 분류:민난어 |
후한(後漢) 건초(建初) 7년 후한(後漢) 장제(章帝) 7년 신라(新羅) 파사 이사금(婆娑泥師今) 3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30년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 6년 음력 1월, 신라의 파사 이사금이 영(令)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 특히 군사들에 대한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가다듬었다는 것은 사로국의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가 정비되어 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사로국의 힘은 경주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
후한(後漢) 건초(建初) 9년 후한(後漢) 원화(元和) 원년 후한(後漢) 장제(章帝) 9년 신라(新羅) 파사 이사금(婆娑泥師今) 5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32년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 8년 음력 2월, 신라, 명선(明宣)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允良)을 파진찬으로 삼았다. 신라의 17관등은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법흥왕에 의하여 완성되었으나 파사 이사금 시기에도 이찬이나 파진찬 등의 관직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음력 5월, 고타군주(古抒郡主)가 신라에게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 남신현(南新縣)에서 보리줄기가 가지를 쳤다. 남신현은 경주 남쪽의 어떤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게 풍년이 들어 여행하는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고타군은 지금의 안동지방을 일컫는데 이 지역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사 이사금 시기에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타군에 있던 반(半)독자적인 권력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한연맹 속의 일원으로서, 맹주국인 사로국에 특이한 생산물이나 조장 등을 바치는 일종의 납을 바침으로써 사로국에 충성을 서약하거나 동맹관계를 지속시켜 나갔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고타군의 군주가 바쳤다고 하는 청우는 크고 튼튼하게 잘 자란 소를 의미한다. 한편, 이 내용을 농업생산력이 곧 국력이던 당시에 우수한 종자를 배포함으로써 그것을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
후한(後漢) 원화(元和) 3년 후한(後漢) 장화(章和) 원년 후한(後漢) 장제(章帝) 12년 신라(新羅) 파사 이사금(婆娑泥師今) 8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35년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 11년 음력 7월, 신라의 파사 이사금이 영(令)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덕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여 있고 남쪽은 가야와 연접해 있다. 나의 덕은 능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쌓았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
후한(後漢) 영원(永元) 2년 후한(後漢) 화제(和帝) 2년 신라(新羅) 파사 이사금(婆娑泥師今) 11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38년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 14년 이탈리아 내의 푀데라티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율리우스 법( Lex Iulia ) 공표. *음력 7월, 신라, 사자(使者) 10명을 나누어 파견하여 주주(州主)와 군주(郡主)를 감찰하여, 공무에 힘쓰지 않거나 밭과 들을 크게 황폐하게 한 자의 관직을 강등시키거나 파면하였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
후한(後漢) 영원(永元) 5년 후한(後漢) 화제(和帝) 5년 신라(新羅) 파사 이사금(婆娑泥師今) 14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41년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 17년 몽골 지방에 선비 일어남 음력 1월, 신라, 윤량(允良)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啓其)를 파진찬으로 삼았다. 음력 2월, 신라의 파사 이사금,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사람을 몸소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 주었다. 음력 10월, 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김부식 (1145), 《삼국사기》 |
로마 황제 는 아우구스투스를 시초로 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들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실제로 로마의 황제들은 여러 다른 칭호로 불렸는데, 주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성을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까지 황제가 세습한 것을 기원으로 해 "황제"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다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본인은 엄밀히 말하면 로마 황제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독일어 카이저, 러시아어 차르의 어원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시기에는 황제를 부를 경우 카이사르라고 했다. 그리고 제위 계승자에게 제일 먼저 붙이는 이름이 바로 카이사르였다. 즉 중국 군주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황태자를 칭하던 말이다. 공화정 체재 복귀를 선언하며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붙인 칭호로, 위엄있는, 존귀한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과 카이사르라는 호칭이 결합해야만 정식으로 인정된 황제였다. 쉽게 말해서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 는 원로원의 정식 동의를 받은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의미이다 원래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을 의미하는 말로 아우구스투스가 B.C.27년 1월 13일 공화정 복귀선언에서 3가지의 권리를 포기하는데 삼두정치권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본국의 주민과 속주의 주민들에게 서약을 해둔 이탈리아 서약과 이를 확대한 세계적 합의라는 3가지 권리를 포기한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은 것 중에서 임페라토르가 있다. 이를 항상 사용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서 계승되면서 군통수권과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권리와 이를 세습할 권리를 얻었다. 이후 황제의 이름에 임페라토르는 로마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자 통수권자라는 의미를 가진 뜻이 되었고, 이후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황제를 칭하는 Emperor의 어원이 바로 임페라토르이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인 재능이 없어 병사들이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로 인해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낼 것을 염려, 원로원에서 제 1 발언권을 지닌 이의 별칭인 프린켑스를 사용했고, 이것이 후에 퍼져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이 황제를 지칭하는 의미가 되었다. 황제의 권력은 호민관 특권 (potestas tribunicia)과 대행 집정관 권한 (imperium proconsulare)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호민관 특권은 황제에게 거부권(veto)를 부여하게 됐고,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까지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으로써, 본래 공화정 시대에는 서로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써 두명의 집정관과 10명의 호민관 모두에게 주어졌던 권한이다. 또한 호민관 특권은 황제의 신체는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그의 의무 수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저주 곧 사형에 처해졌다. 이는 공화정 시대에는 호민관에게 주어졌던 특권으로, 본래 공화정 시대에는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의 특성상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성격이 더 강했던 특권이었다. 대행 집정관 권한(공화정 시대의 총독 역할을 맡던 대행 집정관의 권한)을 통해 황제는 로마군 통수권을 가지게 된다. 황제는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과 민회의 몫이었던 전쟁 선언, 조약 비준, 외교 협상 등의 외교권도 가졌으며, 원로원 의원 임명권 등 과거 감찰관이 맡던 여러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황제는 종교 조직을 통제하였으며, 황제는 늘 최고 사제장(pontifex maximus)이며 네 가지 주요 사제단의 일원이었다. 로마의 황제 목록 분류:로마 분류:군주 칭호 |
동고트 왕국 (Ostrogothic Kingdom)은 493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동고트족의 테오도릭 대왕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의 지원을 받아서, 로마를 점령한 게르만인 오도아케르를 몰아내고 건설하였다. 그 뒤, 테오도릭 대왕은 이탈리아 왕을 자처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제논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552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에 장군 나르세스에 의해 정복되었다. 고트족은 3세기 이전까지는 한 민족이었으나 그 때를 전후해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다. 두 부족은 로마인들이 마르스라 부른 전신을 숭배하는 등 문화적으로 동질했다. 3세기 무렵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다키아 속주로 이주했고, 동고트족은 흑해 연안에 왕국을 건설했다. 370년대 훈족의 대두는 동고트족을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민족으로 바꾸었다. 훈족의 침입에 맞서 당시 동고트 왕 에르마나리크는 몇 차례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한 뒤 110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얼마뒤 그의 후계자도 승산없는 훈족과의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서고트왕 프리티게른(Fritigern)이 도나우 강 너머로 재이주할 것을 권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후 수십 년간 동고트족은 발칸반도에서 훈족과 공존, 451년 샬롱(Chalons)의 전투에서처럼 훈족의 전쟁 도구로 사용되었다. 동고트족은 수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되었다. 훈족과의 교류에서 동고트족이 얻은 것이라고는 훈족의 기마문화를 도입하게 된 정도였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고트어는 크림반도 일대에서 16세기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고트족의 기록된 역사는 아틸라의 죽음과 함께 훈족 지배가 붕괴되며 시작된다. 454년 동고트의 테오디미르(Theodimir) 왕은 아틸라의 아들들이 이끄는 훈족 군대를 네다오(Nedao)의 전투에서 싸워 승리했다. 동고트족인 이후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를 맺고 판노니아 속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5세기 후반동안 동고트족은 비잔틴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테오도릭 대왕은 네다오의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454년 테오데미르(Theodemir)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오도릭은 유년기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인질로 보내며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테오도릭은 로마의 귀족 칭호와 집정관 직위 등 로마식 관직으로 치장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행동했다. 488년, 테오도릭은 제논의 위임을 받고 이탈리아를 오도아케르로부터 수복하러 나서 493년 오도아케르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점령하고 손수 오도아케르를 죽였다. 동고트족의 지배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와 알프스 이남까지 미쳤으며, 기록에 따르면 이 전쟁중에 동-서고트족이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세력의 정점에서 테오도릭이 툴루즈의 서고트 왕국의 섭정이 되며 그의 영향력은 갈리아의 많은 부분과 스페인 거의 전체에 미쳤다. 부이으(Vouille)의 전투에서 테오도릭의 사위인 알라릭 2세(Alaric II)가 전사한 이후 동고트의 왕은 그의 손자 알라마릭(Alamaric)의 보호자로서 스페인과 갈리아의 남은 고트 세력의 지배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테오도릭이 살아있는 동안 서고트족은 그 아래에서 연합해 있었고, 프랑크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게르만 부족들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테오도릭 치세의 동고트족은 헤르마나릭(Hermanaric) 때보다 더 넓은 판도를 펼쳤으나,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테오도릭은 동고트족의 왕으로 있으면서 공식적인 황제 칭호를 받지 못한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행동했다. 고트족과 로마인들은 이탈리아에서 서로 자신들의 법에 따라 다르게 지배받았다. 이 시대의 고트족은 이탈리아 북부에 주로 자리잡았으며, 남부에는 몇몇 진지를 설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실권은 고트 왕에게 주어졌으나 로마에서는 아직도 명예직으로 집정관이 선출되었으며, 모든 로마의 옛 기관들이 계속 작동했다. 이 체제는 테오도릭 사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526년 테오도릭의 죽음과 함께 동-서 고트족은 다시 분열되었다. 알라마릭은 스페인과 셉티마니아(Septimania)의 고트 왕국을 계승했으며, 프로방스는 새로운 동고트 왕 아탈라릭에게 귀속되었다. 이후 동고트 왕국은 암살과 왕위 찬탈이 이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고트 내의 위기를 서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는 기회로 삼아, 535년 벨리사리우스에게 군권을 위임해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빠르게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에 상륙해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점령했다. 이후 계속 북진해 밀라노와 동고트 수도 라벤나를 540년 점령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고트 왕국을 이탈리아 북서부에 존속하게 하는 대신 재정의 절반을 넘기게 하는 것으로 강화를 맺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 조치에 만족하지 않았고, 고트족들조차 그 뒤에 무슨 음모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으나 결국 그대로 교섭이 이루어졌다. 에라릭(Eraric)을 리더로 한 고트족의 귀족들은 패배한 왕 비티게스를 벨리사리우스에게 넘기고 그에게 왕위를 넘겼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에 분노했다. 비잔틴 제국은 그때 동쪽으로부터 사산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유스타시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했다. 이탈리아는 비잔틴 장교인 존(John)에게 맡겨졌다. 545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에라릭은 살해되었고 고트 내의 친로마파는 무너져 있었다. 541년 고트족은 토틸라를 왕으로 뽑아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비잔틴군을 로마에서 몰아낸 상태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토틸라를 맞아 공세로 들어갔으나, 그의 반란을 염려한 유스티니아누스가 지원과 보급을 끊어버려 수세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548년 동고트 전선은 환관 장수 나르세스에게 넘겨졌다. 나르세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552년 타기나이의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했고, 테이아, 알리게른(Aligern), 스키푸아르(Scipuar), 기발(Gibal) 등의 남은 고트 세력은 552년 혹은 553년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에서 전멸했다. 고트 귀족 비딘(Widin)은 550년대에 고트 부흥운동을 펼쳤으나 결국 실패, 561년 혹은 56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비딘의 실패를 끝으로 동고트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갈리아, 스페인, 그리고 롬바르드족이 지배한 이탈리아의 일부에서처럼 게르만과 로마적인 것이 융합한 국가는 태어나지 않았다. 고트어 문학으로 남은 것은 울필라스의 성경과 다른 종교적인 저작 일부 뿐이다. 고트족의 법률로는 500년 테오도릭의 칙령 (라틴어)와 로마인 재상 카시오도로스의 저작이 남아있다. 테오도릭 대왕(Theodoric, 고트어 Thiudareiks), 제위 454년 - 526년 아탈라릭(Athalaric), 제위 516년 - 534년 테오다하드(Theodahad), 제위 534년 - 536년 비티게스(Witiges), 제위 536년 - 540년 일디바드(Ildibad), 제위 540년 - 541년 토틸라(Totila), 제위 541년 - 552년 테이아(Teia), 제위 552년 분류:유럽의 옛 나라 분류:이탈리아반도의 옛 나라 분류:고대 국가 |
사이온지 긴모치 (, 1849년 12월 7일 ~ 1940년 11월 24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교육자이다. 일본의 공가 출신으로 제12·14대 내각총리대신, 정2위 대훈위 공작을 지냈다. 1924년에 마쓰카타 마사요시 사망 이후 최후의 원로로서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을 보필했다. 그 밖에 교토에 위치한 리쓰메이칸 대학의 전신 리쓰메이칸 사숙 을 설립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사이온지는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간인류(閑院流) 계열의 청화가(清華家) 중 하나인 도쿠다이지가(徳大寺家)의 제28대 당주이자 우대신이었던 도쿠다이지 긴이토(徳大寺公純)의 차남으로 태어나 4세에 사이온지가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했다. 두 가문의 서열 모두 청화가였고, 후지와라노 긴자네(藤原公実)를 시조로 한다. 친형 사네쓰네(実則)는 시종장을 3번 역임하고 내대신으로도 근무한 궁중의 실력자였다. 바로 밑의 동생 스미토모 도모이토(住友友純)는 재벌 스미토모가(住友家)의 데릴사위로 제15대 스미토모 기치자에몬의 이름을 계승해, 장기간 재계에 군림했다. 그리고 막내동생 스에히로 다케마로(末弘威麿)는 외가인 스에히로가(末弘家)를 이어, 후에 사립 교토 법정학교(현재의 리쓰메이칸 대학)의 간사, 이사를 맡았다. 유년기의 거주지가 어소(御所)와 가깝고, 사치노미야 황태자(후의 메이지 천황)과 나이도 비슷하여 종종 그의 놀이 상대로 부름을 받았다. 이와쿠라 도모미나 산조 사네토미와 같은 에도 막부 말기에서의 정치적 공적은 거의 전무하다. 다만 도바-후시미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조정에서는 이를 도쿠가와가와 시마즈가의 사적인 싸움이라고 보는 의견이 나오던 중에 적극적인 관여주전론을 주장해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토막파 공경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이후 보신전쟁에는 산인도 진무총독, 아이즈구 정벌대참모로서 각지를 전전했고 그 후엔 에치고 부지사등을 역임했지만, 그 당시 10대의 젊은 나이로 임관이 가능했던 이유로 가문의 후광 이외의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또, 공경 중에서 처음 양장 차림으로 궁중에 참내해, 상당수의 잔류 양이파 공경의 노여움을 산 에피소드도 자기 저서(陶庵随筆)에서 피력하고 있다. 작가 시바 료타로는 저서인 화신 ()에서 도막파 병학자 오무라 마스지로가 사이온지를 후계자로 보고 있었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마스지로에게 “당신은 군문 쪽으로 나가지 않는 게 좋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공가식의 이름인 긴모치를 싫어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望一郎”로 개명하였다. 1871년 오무라의 추천을 받아 1871년 관비로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자 (후에 감액을 신청한다) 그에 대한 답례 방문을 하기 직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친구와의 대화가 길어진 사이 오무라 마스지로가 습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학 당시의 편지에는 프랑스로 가는 배 안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일을 이해한 일이나, 백인소년에게 이별의 키스를 요청받아 당황했다는 에피소드 등이 실려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파리 코뮌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다. 또한 클레망소(후의 프랑스 수상), 동료 유학생인 나카에 조민, 마쓰다 마사히사 등과 친교를 맺어 귀국 후까지 그 인맥을 이어갔다. 파리 유학에서 자유 사상을 접하고 자유민권운동에 심취하여 나카에 조민, 마쓰다 마사히사 등과 함께 1881년 3월 18일에 동양자유신문을 발행하지만 사이온지가 자유민권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싫어한 정부의 압력에 의해 퇴사를 종용 받아 4월 30일 제34호까지만 발행된 후 폐간의 쓰라림을 맞게 된다. Saionji.jpg|섬네일|왼쪽|200px|1906년 총리 시절의 모습 정치가로서의 경력은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순방한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에서 시작된다. 유럽에서 이토의 지우를 얻은 사이온지는, 1900년 입헌정우회 개양에 참가해 1903년에는 총재가 되었다. 그 후 다이쇼 천황 즉위시에 원로의 반열에 올랐다. 사이온지의 사상은 자유주의(liberal)을 자칭하여 중의원에서의 다수파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헌정의 상도를 관례로 여겼다. 또 프랑스 유학의 영향 탓인지 친유럽적인 면을 보여 군부등에서 국가주의에 반하는 사람으로 세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에게 정치력이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후의 일본에서 사이온지만큼의 정치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궁중 재계와의 인척관계를 배경으로, 그는 원로로서 궁중과 국무, 군부의 조정역을 맡아 일본 정계를 이끌었다. 또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교육칙어를 개정하려 하는 등 쇼와 초기의 국가주의적 정치와는 거리를 둔 언행을 간간히 보이며 군부의 세력 확대에 저항했지만, 전쟁을 막아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한 편액에 사이온지 가문의 본성인 후지와라 성을 살려 후지와라 긴모치(藤原公望) 로 서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천 년 이상 황실과 함께 했던 후지와라씨의 후손이라는 강한 의식이 있었고, 그것이 정치자세가 되었다. 즉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기 때문에 오류가 용서되지 않는 천황의 친정에 계속 반대했다. 이것은 다나카 기이치가 만주모중대사건의 상주의 불일치를 쇼와천황에 질책당해 내각이 총사직했을때, 사이온지가 천황에 누를 끼치는 것을 구실로 천황에 의한 다나카에의 질책에 반대하고 있던 것으로 봐도 분명하다. 또, “입헌군주로서 신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쇼와 천황의 신조는 사이온지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으나 황도파 장교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기반으로 하는 여당 정우회가 중의원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것도 있었기에, 재무행정개혁에 착수했다. 1913년(다이쇼 2년)의 예산책정을 대상으로 세출 1할 삭감을 목표로 했지만, 육군은 2개사단의 증설을 요구하고, 해군도 또한 전함 3척 건조를 예산안에 포함시켰다. 육군은 사이온지 내각을 전복시켜서라도 2개사단 증설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했고, 내각이 끝까지 거부방침을 내타냈기에 우헤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은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육군대신에게는 직접 천황에게 상주하는 유막상주가 제도상 인정되고는 있었지만, 각료가 수상을 통하지 않고 직접 천황에게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 육군이 후임육상을 내지 않는 한 사이온지 내각은 육상을 얻지 못한 채 사임할 수밖에 없어, 당시 육상사임의 영향은 매우 컸다(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사이온지는 이후 다이쇼 천황에게 불려가 천황의 입에서 육상의 사표제출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임의 육상에 대하여 육군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상담했으나, 야마가타가 후임의 육상을 낼 생각이 없는 것을 헤아리자, 기선을 억제해 총사직했다. 정우회를 통하여 내각 총사직의 내막이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갑자기 벌족타파, 헌정옹호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정우회는 입헌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등과 제휴해, 호헌운동의 진두에서 사이온지 내각의 후임내각인 제3차 가쓰라 내각과 대립했다. 다만, 정국제휴나 국민을 향한 연설회등에 사이온지는 직접 터치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이것들은 정우회의 간부로 있던 히라 다카시나, 마쓰다 마사히사등과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가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의회는 원래부터 정우회가 절대다수였으므로, 의회가 개시되자 정우회와 국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 가쓰라 내각은 궁지에 처했다. 거기에, 벌족측에서는 영국의 조지5세가 즉위한 때에, 즉위 직후인 것을 이유로 자유당과 보수당과의 정쟁을 금지하기위한 명령을 실현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를 모방해, 흡사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으므로 칙어를 내는 형태로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했다. 정우회에서는 천황의 의사라면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불신임안을 철회했고, 일단은 가쓰라 내각에 은혜를 배푸려는 의견이 한때 유력하게 되었지만, 이것에 국민당의 오자키 유키오가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이누카이 쓰요시의 조언으로 사이온지는 정우회 총재를 사임해, 정우회 자체는 끝까지 내각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때에 해군의 야마모토 곤베에가 정우회 본부를 격려를 위해서 방문했다. 결국, 호헌운동의 고조로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11일에 총사직해, 동일 후계수상을 결정하기 위한 원로회의가 열렸다. 이때의 회의에는 사이온지도 처음 원로로서 출석했다. 그러나 정우회의 대표로서 출석은 결코 아니었다. 회의에서는 처음엔 사이온지가 후계수상에 추천되었지만, 이것을 받으면 칙어에 반하게 된다고 하여 사이온지는 사양했다. 결국, 후계수상은 야마모토 곤베에로 정해졌다. 1926년(쇼와 원년) 12월 28일, 황위를 계승한 직후의 쇼와 천황은 사이온지에게 특별히 칙어를 내려(대훈위 공작 사이온지긴모치에게 주는 칙어), 이것에 의해 사이온지가 유일한 원로로서 내각총리대신 주천의 직무를 떠맡는 것이 사실상 확립됐다. 그는 1940년,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 탄생 전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내각수반 지명에 계속 관여하게 된다. 1936년의 2·26사건때는, 궐기장교의 일부가 사이온지 습격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습격을 주장하는 사람은 원로 사이온지를 군측의 간사한 수괴로 보고 있었던 것에 비해, 부정파는 천황과의 연결책으로 사이온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표면상 구실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쿄 스루가타이의 본가 외에, 시즈오카현의 고텐바초의 우편선총별장, 같은 시즈오카현 오키쓰의 자교소, 교토의 세이후소우의 각 별장에 은둔생활을 하며, 원로로서 중심을 이루었다. 최후의 만 년이 되면, 피서를 위해서 고텐바에 체재하는 것 이외에는 일 년의 대부분을 겨울의 기온이 온화한 자교소에서 보내었다. 1937년의 고노에 후미마로 1차 내각 성립 이후엔 점차 정치 표면에서 물러나, 계속 반대했던 삼국(독일-이탈리아-일본) 군사동맹 성립 2개월 후에 사망했다. 기대를 걸었던 고노에게도 배반당해 그를 수상으로 추천한 일을 마지막까지 후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도대체 어디로 나라를 끌고가는 것이냐”라고 전해진다. 1941년 고노에 내각의 두뇌를 맡던 손자 기미카즈가 조르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했다. 문부대신 시절의 사이온지는 교양있는 시민의 육성을 중시해, “과학, 영어, 여자 교육을 중시하라“고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1890년에 이노우에 다케시등이 만든 교육칙어에 반대해,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교육칙어 개정허가를 얻은 것과 동시에, 제2차 교육칙어의 작성에 임했다. 이 2차 교육칙어의 초안은, 사이온지가로부터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되어 현존하고 있다. 또, 아래의 교육기관 설립에도 관여하고 있다. 리쓰메이칸 대학 1869년 사숙, ‘리쓰메이칸‘ 창설(교토부청 태정관 류수관의 차출명령에 의해 약 1년 만에 폐쇄되었다), 현재의 리쓰메이칸 대학의 이름은 문부대신 당시의 비서관 나카가와 고주로가 양도받은 것으로 리쓰메이칸 사숙과 직접적 연결은 없다. 그러나 대학의 전신인 교토 법정 학교 설립시에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친아우 스에히로 다케마로가 학원강사로 취임하고 있던 관계 등으로 인해 사이온지 긴모치가 숨을 거둔 1940년 리쓰메이칸 대학의 학조로 결정했다. 1880년 메이지 법률 학교(현재의 메이지 대학) 창설에 협력. 1897년 제2제국대학(현재의 교토 대학)을 교토에 유치. 1901년 일본 여자 대학의 설립 발기인·창립위원. 제1차 사이온지 내각 제2차 사이온지 내각 게이엔 시대 분류:1849년 태어남 분류:1940년 죽음 분류:사이온지가 분류:도쿠다이지가 분류:오가와 지헤 분류:막말의 공가 분류:메이지 유신 원로 분류:일본의 대장대신 분류:일본의 외무대신 분류:일본의 문부대신 분류:일본의 공작 분류:일본의 후작 분류:일본 귀족원 의원 분류:일본의 기업인 분류: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 분류:독일 주재 일본 대사 분류:메이지 대학 교수 분류:벨기에 주재 일본 대사 분류:야마시로국 사람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 분류: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 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 분류: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분류:적수리 훈장 수훈자 분류:성 마우리조·라자로 훈장 수훈자 분류:네덜란드 사자 훈장 수훈자 분류:단네브로그 훈장 수훈자 분류: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수훈자 분류:러시아 제국 백수리 훈장 수훈자 분류: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훈장 수훈자 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훈3등 욱일중수장 수훈자 분류:훈1등 서보장 수훈자 분류:프랑스에 거주한 일본인 분류:교토시 출신 분류:다이쇼 시대의 내각총리대신 분류:메이지 시대의 내각총리대신 |
컴퓨터 바이러스 (computer virus는 스스로를 복제하여 컴퓨터를 감염시키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복제 기능이 없는 다른 종류의 악성 코드, 애드웨어, 스파이웨어와 혼동하여 잘못 쓰이는 경우도 있다. 바이러스는 한 컴퓨터에서 다른 컴퓨터로(일부 형식의 실행 코드로) 확산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용자는 인터넷이나 네트워크를 통하여, 또는 플로피 디스크, CD, DVD, USB 드라이브와 같은 이동식 매체를 통하여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네트워크 파일 시스템이나, 다른 컴퓨터를 통해 접근하는 파일 시스템 상의 파일을 감염시킴으로써 다른 컴퓨터로의 확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 개념이 처음 사용된것은 1972년 SF소설 When Harlie Was One에서 이다. 1970년대에 인터넷의 선구자인 아파넷에서 크리퍼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됐으며 이것이 최초의 바이러스로 기록되어 있다. 크리퍼는 실험적인 자기 복제 프로그램이었으며 1971년에 BBN에서 밥 토머스가 작성한 것이다. 크리퍼는 아파넷을 사용하여 TENEX 운영 체제를 사용하는 DEC PDP-10 컴퓨터들을 감염시켰다. 크리퍼는 아파넷을 통한 접근 권한을 얻었고 스스로를 "I m the creeper, catch me if you can!"(나는 크리퍼다, 잡을 수 있다면 나 잡아봐라!)라는 메시지가 있는 원격 시스템에 복사시켰다. 뒤에 리퍼(Reaper)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크리퍼 바이러스를 지우게 되었다. 개인용 컴퓨터에서 발견된 최초의 바이러스는 (c)브레인이라고 하는 부트 섹터 바이러스였으며 1986년에 파루크 앨비 형제가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에 매크로 바이러스가 일상화되었다. 이 바이러스 대부분이 워드와 액셀과 같은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램을 위한 스크립팅 언어로 기록되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통하여 문서와 스프레드시트를 감염시키며 퍼져나갔다. 워드와 액셀이 OS X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이 대부분이 매킨토시 컴퓨터에도 퍼질 수 있었다. 2002년에 크로스 사이트 스크립팅을 사용하여 확산된 바이러스가 처음 보고되었으며 학술적으로는 2005년에 증명되었다. 마이스페이스와 야후와 같은 웹사이트를 통한 크로스 사이트 스크립팅 바이러스의 여러 사례가 있었다. 스스로를 복제하려면 바이러스는 코드 실행과 메모리로의 기록을 허가받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수많은 바이러스들은 그들 스스로를 정상적인 프로그램들의 일부일 수 있는 실행 파일에 첨부해 들어간다. 사용자가 감염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려고 하면 바이러스 코드가 동시에 실행될 수 있다. 바이러스들은 실행될 때 두 가지 종류로 나뉠 수 있다. 비상주 바이러스들은 즉시 감염될 수 있는 다른 호스트들을 찾아 대상을 감염시키며 끝내 감염된 응용 프로그램에 제어권을 넘긴다. 상주 바이러스들은 이들이 위치한 호스트를 검색하지 않으나 실행을 할 때 스스로를 메모리에 상주시켜 호스트 프로그램에 제어권을 넘긴다. 바이러스는 백그라운드 환경에서 동작하며 이 파일들이 다른 프로그램이나 운영 체제 자체에서 접근하면 새로운 호스트들을 감염시켜 버린다. 비상주 바이러스는 검색자 모듈(finder module)과 복제 모듈(replication module)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검색자 모듈은 감염을 시킬 새로운 파일들을 찾는 데 치중한다. 검색자 모듈이 각 새로운 실행 파일과 마주치면 복제 모듈을 호출하여 해당 파일을 감염시킨다. 상주 바이러스는 비상주 바이러스가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복제 모듈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듈은 검색자 모듈을 통해 호출되지 않는다. 이 바이러스는 일단 실행하게 되면 복제 모듈을 메모리에 상주시키며 운영 체제가 특정한 운영을 수행하기 위해 호출될 때마다 이 모듈이 실행하게끔 한다. 이 복제 모듈은 이를테면 운영 체제가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호출된다. 이 경우 바이러스는 컴퓨터 상에서 실행되는 정상적인 모든 프로그램들을 감염시킨다. 상주 바이러스는 빠른 감염자(fast infector)와 느린 감염자(slow infector)로 나뉘기도 한다. 빠른 감염자는 가능한 많은 파일에 감염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를테면 빠른 감염자는 접근을 하는 모든 잠재적인 호스트 파일을 감염시킬 수 있다.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을 때에는 특별한 문제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시스템 전체 검색시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이 컴퓨터 상의 잠재적인 모든 호스트 파일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이 이러한 바이러스가 메모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면 바이러스는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에 타고 올라가 바이러스 검사를 받는 모든 파일들을 감염시켜버린다. 빠른 검색자는 바이러스가 빨리 퍼지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 방식에서 보이는 단점은 수많은 파일을 감염시킬 때 이를 빨리 감지해낼 수 있다는 점인데 그 까닭은 바이러스가 컴퓨터를 느리게 만들거나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의심스런 동작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한편 느린 감염자는 비정기적으로 호스트를 감염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테면 일부 느린 감염자는 일들이 복사될 때 파일을 감염시키기만 한다. 느린 감염자는 이러한 동작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감지를 피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들은 컴퓨터를 눈에 띄게 느리게 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프로그램에 의한 의심스러운 동작을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이 감지할 때 비정기적으로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이 뜨게 만든다. 그러나 이 느린 감염자 접근은 매우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위치는 아래와 같다. 아래의 내용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이진 실행 파일 (이를테면 MS-DOS의 COM 파일, EXE 파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의 PE 파일, 리눅스의 ELF) 플로피 디스크와 하드 디스크 파티션의 볼륨 부트 레코드 하드 디스크의 마스터 부트 레코드 (MBR) 일반 목적의 스크립트 파일 (이를테면 MS-DOS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의 일괄 파일, VB스크립트 파일,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의 셸 스크립트 파일) 응용 프로그램 특유의 스크립트 파일 (이를테면 텔릭스 스크립트) 시스템 특유의 자동 실행 스크립트 파일 (이를테면 윈도가 자동으로 USB 메모리 등에 저장된 소프트웨어를 실행시키는 Autorun.inf 파일) 매크로를 포함하고 있는 문서 (이를테면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문서, 마이크로소프트 액셀 스프레드시트, 아미프로 문서,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 데이터베이스 파일) 웹 애플리케이션의 크로스 사이트 스크립팅의 취약성 임의의 컴퓨터 파일. 생물의 개체 하나하나가 유전자 다양성을 지니고 있어서 질병으로 인하여 죽어갈 가능성을 줄인 것 같이 네트워크 상의 소프트웨어 시스템의 다양성도 이와 비슷하게 바이러스가 벌이는 잠재적인 파괴를 제한한다.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데스크톱 운영 체제와 오피스 제품군의 시장 우위를 차지하였던 1990년대에 특별한 개념이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같은 네트워킹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특히 바이러스 확산에 취약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는 데스크톱 시장의 주도성으로 바이러스 제작자들이 표적으로 삼았고 바이러스 제작자가 이용하는 허점과 수많은 오류를 비롯하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통합형, 개별형 마이크로소프트 응용 프로그램들(이를테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과 파일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스크립팅 언어로 된 응용 프로그램(이를테면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 및 네트워킹 기능이 있는 응용 프로그램)이 특히 취약하다. 윈도가 이제껏 바이러스 제작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운영 체제가 되었지만 일부 바이러스는 아직도 다른 운영 체제에 존재한다. 서드 파티 프로그램이 실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운영 체제는 이론적으로 바이러스를 실행할 수 있다. 일부 운영 체제는 다른 운영 체제에 비해 덜 안정적이다. 유닉스 기반 운영 체제 (및 윈도 NT 기반 플랫폼의 NTFS 인식 프로그램)는 사용자들이 보호된 메모리 공간 안에서만 실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인터넷 기반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특정한 단추를 눌러 바이러스를 다운로드하는 사례가 있었음을 밝혀내었다. 보안 분석가 디디에 스티븐스(Didier Stevens)는 6개월 동안 구글 애드워즈에 "Is your PC virus-free? Get it infected here!"(여러분의 PC는 바이러스에서 해방되어 있습니까? 이 곳에서 감염되어 보십시오)라며 광고 운동을 벌였다. 결과는 무려 409번 클릭이었다. 소프트웨어가 시스템 리소스의 허가되지 않은 이용을 막기 위한 특별한 기능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수많은 바이러스들은 확산을 위하여 시스템이나 응용 프로그램 안의 소프트웨어 버그를 이용하여야 한다. 수많은 버그를 양산하는 소프트웨어 개발 전략은 일반적으로 잠재적인 악의적 이용을 부추길 수 있다. 수많은 사용자들은 실행 파일을 다운로드 받거나 실행한 뒤에, 알려져 있는 바이러스를 찾아내어 없앨 수 있는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를 설치한다.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가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로는 가장 흔한 바이러스 검사 방식으로, 바이러스 서명 정의 목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 메모리의 내용(램, 시동 섹터), 고정 및 이동식 드라이브(하드 드라이브, 플로피 드라이브)에 저장된 파일을 검사하고 알려진 바이러스의 서명 데이터베이스와 해당 파일을 비교함으로써 수행하게 된다. 이 감지 방식의 단점으로는 사용자가 최신 바이러스 정의 업데이트에 속한 바이러스로부터만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식으로는 발견적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컴퓨터 행위에 따라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방식은 보안 회사가 서명을 작성할 바이러스까지도 검색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일부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은 비슷한 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보낸 편지, 받은 편지뿐 아니라 열려 있는 파일을 검사할 수 있다. 이를 "실시간 검사"(on-access scanning)라고 부른다. 사용자들은 소프트웨어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여 보안 허점을 보완하여야 한다.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는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여 최신 위협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한다.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더럽혀지면 완전히 운영 체제를 다시 설치하지 않고서는 일반적으로 같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계속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렸어도 이에 대비한 복구 옵션이 수없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능은 바이러스의 종류의 심각성에 따라 달라진다. 윈도 Me, 윈도 XP, 윈도 비스타, 윈도 7, 윈도 8에는 시스템 복원이라는 도구가 있어서 레지스트리와 중요한 시스템 파일을 이전 검사 지점으로 돌릴 수 있다. 바이러스가 시스템을 붙잡아 컴퓨터 전원을 강제로 껐다 켜면 그 즉시 시스템 복원을 보여 줄 것이다. 바이러스가 복원 파일을 손상시키지 않았고 이전 복원 지점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이전 날의 복원 지점을 선택해도 무관하다. 그러나 일부 바이러스들은 시스템 복원과 다른 중요한 도구(작업 관리자, 명령 프롬프트)를 사용하지 못 하게 만드니 주의하는 것이 좋다. 운영 체제를 다시 설치하는 것 또한 바이러스 제거의 다른 방안이다. 단순히 운영 체제 파티션을 다시 포맷하고 원본 매체로부터 운영 체제를 설치하거나, 깨끗한 백업 이미지의 파티션의 이미지 복제 과정을 동반한다. 이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별도로 바이러스 검사를 하는 것보다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악성 코드를 모두 제거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스스로 복제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트로이 목마로 불리며, 프로그램 복제가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감염되는 경우는 컴퓨터 웜으로 불린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숙주인 컴퓨터 내부에서만 증식을 하는 악성코드를 바이러스라고 하며, 숙주 컴퓨터가 필요 없이 네트워크상에서 계속 증식이 가능한 악성 코드를 웜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웜과 바이러스의 특징을 결합하여 프로그램에 기생하며 네트워크로도 감염시키는 웜 바이러스들도 많이 생겼다. 시동 바이러스(boot virus)는 컴퓨터를 처음 시동할 때 실행되는 시동 프로그램에 기생하는 컴퓨터 바이러스이다. 시동 바이러스는 일단 감염이 되면 시동 프로그램에 자리잡게 된다. 그렇게 되면 컴퓨터를 처음 시동하고 그 뒤에 디스크 시동을 시작하는 순간 해당 바이러스도 메모리 상주 형식으로 같이 활동을 하면서 시동을 방해하는 등의 작용을 한다. 대표적인 시동 바이러스는 미켈란젤로 바이러스, 브레인 바이러스, LBC 돌 바이러스 등이 있다. 만일 시동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다면 아래와 같은 조치를 취하면 된다. #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시동 디스크를 제작한다. 만일 깨끗한 부팅 디스크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면 이 과정은 생략해도 된다. 주의할 것은, 부팅 디스크로 부팅 후 백신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 있어야 한다. # 컴퓨터를 완전히 종료하고 부팅 디스크를 삽입한 후 재시동한다. # 디스크 부팅 전에 CMOS 설정 화면으로 들어가 부팅 순위를 확인한다. 이때 준비된 부팅 디스크가 가장 먼저 부팅되도록 설정되어 있지 않다면 부팅 순위를 조정한다. # 시동 디스크를 통해 시동이 된다. 시동이 끝나면 백신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시동 바이러스를 치료한다. 컴퓨터에 잠복해 있다가 13일의 금요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바이러스다. EXE, COM 등의 확장자가 있는 실행프로그램을 파괴하는 것이 특징이다.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 원격 지원 *부팅 안철수 연구소 - 바이러스 DB 검색 카스퍼스키랩 Viruslist - 바이러스 DB 검색 에브리존 - 바이러스 정보 찾기 VirusTotal - 다중 안티바이러스 엔진으로 검사 VirSCAN.org - 다중 안티바이러스 엔진으로 검사 |
샤르댕의 자화상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년 11월 2일 - 1779년 12월 6일)은 18세기 프랑스의 화가이다. 샤르댕은 1699년 파리에서 목수인 아버지 장과 어머니 잔 프랑스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 시메옹이며, 간간히 장-바티스트로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그는 일찍부터 그림그리기에 관심과 재주을 보여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술학원 상-뤽 아카데미 ( Saint-Luc Académie )에 보낸다. 시메옹은 여기서 색채를 섞고 칠하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술을 익히게 되며, 이 화법은 후에 샤르댕의 작품에서 역력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미술학원에서 장인 자격증을 취득한 후, 샤르댕은 아직 화가로서의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여러 군데 사설학원의 실습과정에 등록하여 화법을 개선하는 데 노력한다. 1728년 젊은 화가들의 전시회에 샤르댕은 여러 작품을 출품하여 화단의 주목을 받게되며, 이를 계기로 같은 해 9월 25일 프랑스 아카데미(미술분과)에 자신의 작품을 선을 보여 곧바로 분과회원으로 가입된다. 회원가입에서 샤르댕은 동물과 과실의 기교화가 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만, 그의 작품은 실제로 이 지칭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세잔이 말년에 인상주의 화풍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중점적으로 정물화를 (약 200여 점) 그린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세잔은 아직 인상주의 화가 마네와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영향 밑에서 세잔 고유의 정물화 세계를 발견하였지만, 역사적으로 세잔의 정물화는 샤르댕의 정물화 없이는 생겨날 수 없었다. 1860년에 에콜 프랑스 (L Ecole française)에 총 41점의 샤르댕의 정물화와 인물화가 전시됨으로써 처음으로 샤르댕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화가들 프랑스와 보뱅, 필리프 루소, 앙트완 볼롱 등이 적지 않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3년 공꾸르 형제가 예술잡지 가제트에 샤르댕에 관해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샤르댕은 19세기 말에 프랑스 화단에서 재발견 및 평가되었으며,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샤르댕의 작품 구입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었다. 그의 입선작 는 주제는 빈약하나, 강렬한 색채와 미묘한 구성이 그 위대성을 나타낸 작품이다. 그 후 그는 성실과 정적에 가득 찬 프랑스 사람들의 가정 생활을 그렸다. 필치는 면밀하고 무게가 있으며, 화면은 기름지고 풍부하여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풍긴다. 색채도 교묘히 사용하여 명암의 색조를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작품에는 등이 있다. 공꾸르 형제, 가제트 예술잡지 (Gazette des Beaux-Arts), 15 (1863년), p. 514-533; 16 (1864년), p 144-167. 분류:1699년 태어남 분류:1779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화가 분류:18세기 화가 |
후한(後漢) 영원(永元) 14년 후한(後漢) 화제(和帝) 14년 신라(新羅) 파사 이사금(婆娑泥師今) 23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50년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 26년 *음력 8월,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신라의 파사 이사금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 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抒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抒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곡국과 압독국 두 나라의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반초, 중국 후한 초의 장수. 김부식 (1145), 《삼국사기》 |
of Civil Merit (Korea).jpg|섬네일|국민훈장 무궁화장의 모습 (대통령기록관) 대한민국의 훈장 (大韓民國勳章)은 상훈법 제2조 (서훈의 원칙)에 따르면, "대한민국 훈장 및 포장"의 줄임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나 우방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로를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 화랑무공훈장 건국훈장.jpg|섬네일|200px|몽양 여운형의 건국훈장훈장증 무궁화대훈장(無窮花大勳章, Grand Order of Mugunghwa)은 대통령 및 그 배우자,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 또는 대한민국의 발전과 안전보장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전직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에게 수여하며 등급은 없다. :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한다. : 대한민국장 : 대통령장 : 독립장 : 애국장 : 애족장 국민훈장(國民勳章, Order of Civil Merit)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 무궁화장 : 모란장 : 동백장 : 목련장 : 석류장 무공훈장(武功勳章, Order of Military Merit)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 : 태극장 60px : 을지장 60px : 충무장 60px : 화랑장 60px : 인헌장 60px 근정훈장(勤政勳章, Order of Service Merit)은 공무원(군인 및 군무원을 제외) 및 사립학교의 교직원으로서 직무에 정려하여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 청조장 : 황조장 : 홍조장 : 녹조장 : 옥조장 Navy photo 141103-N-UH865-169 Adm. Harry Harris Jr., commander of U.S. Pacific Fleet, is awarded the Korean Tong-il national defense medal.jpg|섬네일|보국훈장 통일장 서훈식 (미국해군 해리 해리스 대장) 보국훈장(保國勳章, Order of National Security Merit)은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자에게 수여한다. : 통일장 60px : 국선장 : 천수장 : 삼일장 : 광복장 수교훈장(修交勳章, Order of Diplomatic Service Merit)은 국권의 신장 및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수교훈장은 5등급으로 나뉘며며 1등급중 광화대장은 외국의 수상급이상, 광화장은 대사급 이상자에게 수여한다. : 광화대장/광화장 : 흥인장 : 숭례장 : 창의장 : 숙정장 산업훈장(産業勳章, Order of Industrial Service Merit)은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 금탑 : 은탑 : 동탑 : 철탑 : 석탑 새마을훈장(새마을勳章, Order of Saemaeul Service Merit)은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 자립장 : 자조장 : 협동장 : 근면장 : 노력장 문화훈장(文化勳章, Order of Cultural Merit)은 문화·예술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 문화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 금관 : 은관 : 보관 : 옥관 : 화관 체육훈장(體育勳章, Order of Sport Merit)은 체육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체육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 청룡장 : 맹호장 : 거상장 : 백마장 : 기린장 과학기술훈장(科學技術勳章, Order of Science and Technological Merit)은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 수여한다. : 창조장 : 혁신장 : 웅비장 : 도약장 : 진보장 정부 서훈절차는 추천기관에서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행정안전부에 대상자를 추천하면 행정안전부에서 이를 심사하여 차관회의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수상대상자를 확정하고 친수 또는 전수함으로써 완료된다. 훈장 및 포장을 수여하면 수여사실이 수여대장(훈기부)에 기록되며, 이에 의하여 훈장증서 등의 증서를 분실한 경우 신청에 의거 수여증명서를 발급하며 훈장증 등의 증서의 재발급은 하지 않는다. 훈장을 분실한 경우 신청에 의거 신청자의 비용 부담으로 재교부한다. 대수로 된 훈장(모든 1등급훈장, 2등급건국훈장 및 2등급수교훈장)은 대수로 된 정장을 오른편 어깨에서 왼편 가슴 아래로 두르며 부장은 왼편 가슴에 단다. 부장이 있는 중수로 된 훈장(2등급훈장과 건국훈장 3등급)은 정장이 가슴 중앙에 오도록 중수를 목에 걸고, 부장은 왼편 가슴에 단다. 부장이 없는 중수로 된 훈장(3등급훈장)은 정장이 가슴 중앙에 오도록 중수를 목에 건다. 소수로 된 훈장 및 포장(4등급 및 5등급 훈장과 포장)은 소수로 된 정장을 왼편 가슴에 단다. 2개 이상의 대수 또는 부장이 있는 중수로 된 훈장(1등급 및 2등급)은 그 중 하나의 정장 및 부장을 패용하고, 기타는 좌측 가슴에 부장만을 순차로 패용한다. 2개 이상의 부장이 없는 중수로 된 훈장(3등급)은 그중 하나의 정장만을 패용하고 기타는 그 수를 역삼각형(▽)으로 축소하여 좌측 가슴에 순차로 패용한다(수의 축소방법은 수의 폭을 1변으로 하여 정삼각형으로 접되 무늬가 좌로 내려가도록 한다). 소수로 된 훈장을 2개이상 패용할 경우(4등급, 5등급, 6등급훈장 및 포장)에는 그 패용순위에 따라 좌측 가슴에 순차로 패용한다. 금장은 왼편 옷깃에 패용하며, 2개이상의 금장을 받은 경우 그중 하나만 패용한다. : 대수로 된 훈장의 축소부장(정장은 축소하지 못함)은 좌측 가슴에 순차적으로 패용한다. : 소수로 된 훈장 및 포장의 축소훈·포장은 왼편 옷깃에 순차로 활모양으로 열을 지어 패용한다. 약장(ribbon)은 좌측 가슴 호주머니 위에 패용한다. 2개이상의 약장을 패용할 경우에는 그 순위에 따라 패용한다. 동일종류, 동일등급 복수약장과 단수약장을 동시에 패용할 때에는 복수 약장을 선순위로 패용한다. 15개 이상의 약장을 패용할 때에는 축소한 약장을 패용할 수 있다. 훈장은 필요한 경우 그 원형의 1/2비율로 축소할 수 있다. 축소훈장의 교부를 받고자 하는 경우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신청하며 제작비는 본인이 부담하여야 한다. 대수 또는 중수로 된 1등급 및 2등급훈장과 건국훈장 3등급은 정장과 수는 축소할 수 없으나 부장 및 약장은 그 원형의 1/2비율로 축소할 수 있다. 건국훈장 3등급을 제외한 3등급훈장은 정장은 축소할 수 없으나 수만을 삼각형(△)으로 축소하며,약장은 그 원형의 1/2비율로 축소할 수 있다. 수의 축소방법은 수폭의 길이를 1변으로 하여 정삼각형으로 접어 무늬가 우에서 좌로 내려가도록 한다. 4등급 및 5등급 훈장은 정장과 약장을 그 원형의 1/2비율로 축소할 수 있다. 포장은 훈장 다음가는 훈격이다. #건국포장 #국민포장 #무공포장 #근정포장 #보국포장 #예비군포장 #수교포장 #산업포장 #새마을포장 #문화포장 #체육포장 #과학기술포장 근정훈장의 경우 단순히 비리 등으로 처벌받지 않고 근속 연수만 채우면 퇴직할 경우 당연히 수여받게 되어 훈격이 떨어진다는 논란이 있다. 행정안전부는 규정을 강화하고 훈장이 민간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울릉도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수사관이나 검사가 간첩을 체포한 공로 로 보국훈장을 수여받았고, 2010년에 조작으로 판명된 이후에도 서훈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논란이 있다. 이외에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자들에 대해서도 표창이 수여되었고, 형제복지원 원장과 간첩 조작 사건 연루자들에게도 표창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는 부적절한 서훈 취소(안) 을 심의·의결해 훈장 21점, 포장 4점, 대통령 표창 17점, 국무총리 표창 14점 등 총 56점에 대해 서훈을 취소시켰다. 행정안전부는 앞으로도 부적절한 서훈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취소함으로써 정부 포상의 영예를 높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수교 이후 2013년까지 일본인의 수교훈장 수훈자는 326명이었는데 일본의 한국인 수교훈장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남발되었다. 그리고 326명 가운데 일본제국주의와 관련되었거나 야스쿠니 신사참배, 독도망언을 한 12명은 받아서는 안되는 부적격자였다. 국민정서의 고려나 일정한 법적 기준도 없이 수여하는 방식도 정권에 따라, 정무적 판단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었다. 2015년까지 68만건 정도 *메달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
레오니드 레빈 레오니드 아나톨리에비치 레빈 (, , , 1948년 11월 2일 ~ )은 소비에트 연방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현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서 출생한 전산학자, 수학자이다. 안드레이 콜모고로프의 제자였다. 1978년에 미국 국적을 얻어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전산학의 이론적 기반을 연구하면서 계산이론, 정보 이론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스티븐 쿡이 발견한 NP-완전을 1973년에 독자적으로 발견했다. ‘쿡의 정리’ 혹은 ‘쿡-레빈 정리’라고 부르는 이 정리는 전산학 분야의 획기적 발견이며, 계산 복잡도 이론의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책에서 한 장(chapter)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Out of Their Minds The Lives and Discoveries of 15 Great Computer Scientists 한글판 컴퓨터를 만든 15인의 과학자. 데이스 샤사 지음. 세종연구원. 1998년 레오니드 레빈 홈페이지 분류:1948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분류:러시아계 미국인 분류:유대계 미국인 분류: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모스크바 대학교 동문 분류:보스턴 대학교 교수 분류:정보 이론가 분류:러시아의 수학자 분류:소련의 수학자 분류:유대계 러시아인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21세기 수학자 분류:드니프로 출신 분류:커누스상 수상자 |
다윈 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사람 이름 이래즈머스 다윈(1731 ~ 1802) - 영국의 의사.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로버트 다윈(1766 ~ 1848) - 영국의 의사. 이래즈머스 다윈의 아들이자 찰스 다윈의 아버지 찰스 다윈(1809 ~ 1882) - 영국의 생물학자, 진화 생물학자 지명 다윈 (노던 준주) - 오스트레일리아 노던 준주의 주도 컴퓨터 다윈 (운영 체제) 다윈 (프로젝트) 웹사이트 다윈(Dawin) - 대한민국의 동영상 광고 네트워크 플랫폼 기타 다윈상 - 어리석게 죽음으로써 인류의 진화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 |
Prometheus Louvre Ma445.jpg|섬네일|right|275px|찰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와 이것을 보고 있는 아테나 (로마시대 부조, 3세기) 프로메테우스 ()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한 세대 앞서는 티탄족에 속하는 신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 라는 뜻이다. 티탄 족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며, 아틀라스, 에피메테우스, 메노이티오스, 헤스페로스와 형제였다. 헤시오도스 《신통기》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제 1세대 티탄족인 이아페토스와 바다의 요정인 클리메네(혹은 아시아) 사이 탄생하였다. 그는 본디 티탄 신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흥미를 끈 사건이 그와 제우스 사이 벌어진 권력 다툼이다. 이 사건이 인간의 운명과 간접적으로 얽힘으로써 프로메테우스의 존재는 인류 문명사에서 신화적 해석을 하는 데 종종 언급한다. 게다가 아래에서 볼 권력 다툼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철학에서 즐겨 다룬 소재로 손꼽히기도 한다. 대양신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딸인 님프 클리메네 혹은 아시아가 그의 어머니라 하며, 아내는 그의 이모이자 사촌인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딸 헤시오네이다. 일설에는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다른 딸인 아시아가 그의 아내라고도 한다. 아들은 데우칼리온이다. 헤시오도스 《신통기》에 따르면, 인간이 신에게 바칠 제물을 두고서 신과 협정 맺을 때, 소의 뼈를 가지런히 정렬하여 이를 윤기가 흐르는 비계로 감싸고, 살코기와 내장을 가죽으로 감싸 제우스 신에게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 선택하게 하였다. 프로메테우스 계락을 간파한 제우스는 분노하여 인류에게서 불을 빼앗는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이고 꺼지지 않는 불을 회양목 안에 넣어 인간에게 몰래 주었다. 분노한 제우스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만들어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행동한 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에게 보내고, 프로메테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피메테우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 사건이 발생하여 인류에게 재앙이 찾아오게 된다. 또 그는 예언 할 능력을 갖추었는데, 제우스가 자신의 미래를 묻자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제우스의 분노를 사 코카서스 산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게 되었다. 후일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그를 구해 주었다. 헤라클레스가 12과업을 할 때 아틀라스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 게 프로메테우스라고도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신의 불을 광명 으로 보아 인간이 신의 지식을 얻어 각성하게 되었다는 상징으로 유추되기도 한다. 같은 관점에서 구약의 율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지식(복음)을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도 비교해볼 수 있다. 제우스 헤라클레스 에피메테우스 티탄 족 아틀라스 홍사석,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그리스신들 유시주,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푸른나무, 1996) 분류:그리스 신화의 남신 분류:티탄 분류:전령의 신 분류:종족의 신 분류:창조신 분류:창조 신화 분류:트릭스터 |
《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는 프로메테우스 신에 관한 고대 그리스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작품이다. 그리스 비극은 3부작으로 공연되기 때문에, 이야기 줄거리상 첫편에 해당한다.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불을 옮기는 프로메테우스”의 2편이 이어질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2편은 사라져 버렸으며,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아이킬로스 사후에 다른 작가가 완성했거나 썼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상연 연대도 불분명하며, 기원전 478년 이전에 상연되었다는 설과 만년의 기원전 460년설이 있다. 프로메테우스 크라토스와 비아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이오 코러스 - 바다의 요정들(오케아노스의 딸들)로 구성 카우카수스의 외떨어진 돌산 서막 (1-127) 입장곡 (128-192) 제1막 (193-396) 제1합창 (397-435) 제2막 (436-525) 제2합창 (526-561) 독창 (562-608) 제3막 (609-886) 제3합창 (887-906) 제4막 (907-1039) 종막 (1040-1094) 분류:고대 그리스의 연극 분류:정치철학 분류:프로메테우스 분류:아이스킬로스의 희곡 |
atom with three Bohr model orbits and stylised nucleus.svg|right |섬네일|200px|여기서 나타낸 리튬-7 원자는 양성자 3개, 중성자 4개, 전자 3개로 이루어져 있다(전자의 총 질량은 핵의 질량의 ~1/4300에 해당한다). 이 원자의 질량은 7.016 u 이다. 드물게 존재하는 리튬-6 (질량은 6.015 u ) 원자는 오직 3개의 중성자 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리튬의 원자량은 6.941 u 으로 줄어든다. 원자 질량 ( m a,,)은 원자의 질량이다. 단위는 결합이 없는 안정한 상태의 탄소-12 원자 질량의 1/12을 1 u 로 정의한 원자 질량 단위(, , 기호 u , Da )를 사용한다. 원자들의 대부분의 질량은 원자핵의 양성자와 중성자가 차지하고 그 값은 질량수에 근접한다. 원자 질량 을 원자질량단위로 나누어 순수한 수 비율을 만들 때, 원자의 원자 질량은 상대 동위 원소 질량 ()이라고 불리는 무차원수(가 된다. 이와 같이 탄소-12 원자의 원자 질량은 12 u 또는 12 Da 이고 탄소-12 원자의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단순히 12로만 표현한다. 원자 질량 또는 상대 동위원소 질량은 단일 입자의 질량이며 근본적으로 원자량(, 표준 원자량( A r와는 다르다. 둘 다 원소 표본에 대한 자연 상태 원자의 수학적 평균치이며 1 u 로 나누었기 때문에 무차원 수이다. 대부분의 원소들은 하나 이상의 안정된 핵종(,)을 가진다. 원소들의 각 핵종들이 다른 질량을 가지기 때문에 이 원소들에 대한 평균치는 원소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핵종들의 혼합비에 의존한다. 샘플의 공급원에 따라 이 값은 어느 정도 제한(표준 원자량이라고 하는 값을 설정)된다. 대조적으로 원자 질량은 각각의 입자 종과 관계가 있다. 같은 종류의 원자들은 동일하기 때문에 원자 질량 수치는 변화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자 질량 수치는 보통 원자량보다 더 많은 유효숫자(를 포함한다. 표준 원자량은 각 원소의 동위 원소(들의 존재비(에 대한 원자 질량과 관계가 있고, 대개 존재비가 가장 큰 동위 원소의 원자 질량과 거의 같은 값이다. 원자, 이온 또는 원자핵의 원자 질량 은 결합 에너지( 손실에 의해 그들의 구성요소인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전자들의 질량합보다 약간 작다. 상대 동위 원소 질량 은 탄소-12 원자의 질량을 12로 설정하였을때 주어진 동위 원소의 질량에 대한 상대치 이다. 상대 동위 원소 질량 ()는 원자 질량 ()가 원자 질량 단위()으로 표기될 때 같은 수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두 개념의 유일한 차이점은 상대 동위원소 질량은 단위가 없는 순수한 숫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위의 상실은 탄소-12 원자를 표준으로 하여 그 비율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 동위원소 질량"에서 "상대()"의 단어는 위의 ^{12}_{6}C 원자에 대한 상대 척도()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12}_{6}C 원자의 상대 동위 원소 질량 은 정확히 12이다. 이와 비교하여, ^{12}_{6}C 원자의 원자 질량 은 정확히 12 Da 또는 12 u 이며 ^{12}_{6}C 원자의 원자 질량 은 1.998467052 x 10−26 kg 과 같이 다른 단위로도 표현할 수 있다. ^{12}_{6}C 원자 이외의 핵종은 자연수() 값의 상대 동위 원소 질량 을 갖지 않는다. u 또는 Da 로 표현된 핵종도 마찬가지로 ^{12}_{6}C 원자 이외에는 자연수 값을 갖지는 않지만 항상 자연수에 가깝다. 원자 질량 ()과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혼동하기 쉽다. 또한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상대 원자 질량(, 또는 원자량)의 동의어인 표준 원자량(, 표준화 된 원자량이라는 의미에서 특별한 종류의 원자량)과 같이 혼동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원자량()과 표준 원자량은 단일 핵종 원소가 아닌 원소 샘플의 동위 원소 존재도에 대한 평균치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원자량과 표준 원자량은 대개 원자 질량 이나 상대 동위 원소 질량과는 수치적으로 다르며 이 값들이 통일된 원자 질량 단위로 표현되지 않았을 때 원자 질량과는 다른 단위를 가질 수 있다. 원자 질량 은 한번에 하나의 동위원소 또는 핵종의 원자의 질량으로 정의되며 존재도에 대한 가중 평균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화학 원소의 동위 원소나 핵종의 원자 질량 또는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매우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숫자이다. 그러한 핵종의 모든 시료들은 다른 시료들과 정확하게 동일할 것으로 예상되고 같은 에너지 준위의 모든 원자들의 핵종에 대한 모든 시료들 또한 다른 시료들과 정확히 동일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소-16의 모든 원자들은 다른 모든 ^{16}_{8}O의 원자들과 정확히 동일한 원자 질량 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단일 핵종 원소()이거나 하나의 주요 동위 원소를 갖는 많은 원소의 경우, 가장 일반적인 동위 원소의 원자 질량과 (표준) 상대 원자 질량 또는 (표준) 원자량 간의 실제 수치 유사성 또는 그 차이는 작거나 심지어는 없으며 대부분은 계산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단일 핵종()으로 고려하지 않을 때 존재할 수 있으며 중요할 수도 있다. 하나 이상의 동위 원소를 갖는 비(非) 단일 핵종 원소들의 경우에는 상대 동위 원소 질량으로 부터 상대 원자 질량(원자량) 간의 수치적 차이는 질량 단위의 절반 이상일 수 있다(예컨대, 염소 (원소)의 경우에는 원자량과 표준 원자량은 거의 35.45 이다). 드물게 동위 원소의 원자 질량 은 상대 원자 질량, 원자량 또는 표준 원자량과 조금 다를 수 있다. 통일된 원자 질량 단위로 표현된 원자 질량 (즉,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12}_{6}C 원자를 제외하곤 항상 2가지 이유 때문에 그 값이 자연수에 근접해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른 질량을 가지며 핵종마다 그 비율이 다르다. 그들의 결합 에너지 때문에 원자 질량 이 감소한다. 원자 질량 에 대한 질량수(핵자수)의 비율은 1H 는 1.00782505, 56Fe 는 0.99884로 다양하다. 핵자간 결합 에너지로 인한 질량 결함은 실험적으로, 동등한 수의 자유 핵자들의 질량 합 보다 작은 비율(1% 미만)이다. ^{12}_{6}C 원자는 핵자당 평균 질량을 비교해보면 이는 다른 원자들에 비해 상당히 강하게 결합되어있다. 대부분의 원자들의 결합에 대한 질량의 결함은 매우 작은 부분이다. 자유로운 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은 매우 작은 질량 차이가 있다(대략 0.00014 u ). 원자 질량 단위로 주어진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이나 원자 질량 을 가장 가까운 자연수로 반올림하면 항상 핵자 수 또는 질량수가 산출된다. 덧붙여, 중성자의 수는 질량수(핵자 수)에서 양성자 수(원자 번호)를 차감하여 도출 할 수 있다. energy curve - common isotopes.svg|섬네일|320x320픽셀|일반 동위 원소의 핵자당 결합 에너지 곡선. 질량수와 원자 질량 사이의 비율 그래프는 유사할 것이다. Z 개의 양성자와 N 개의 중성자로 원소 X 를 만든다면 결손된 질량은 다음과 같다.이 값은 모든 핵에 대하여 항상 양의 값이다. 또한 핵의 질량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합한 것보다 작다는 것이다. 결손된 질량에 빛의 상수를 제곱한 값을 곱하여 에너지 단위( E = mc 2)를 산출해낸다면, Δ c 2 가 되고 이것이 핵의 결합 에너지이다. 결합 에너지 를 핵자의 수에 대하여 정규화한다면, 아래의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핵자의 수에 대한 결합 에너지의 곡선은 작은 원자 질량에서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40 이상의 질량수를 가지는 핵은 9 MeV 조금 아래 까지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56Fe 원소에서 부터 점차 감소함을 알 수 있다. 결합 에너지 생성에 대해서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두 개의 가벼운 핵이 결합되어 결합 에너지 곡선에서 더 높은 결합 에너지를 가지는 무거운 핵을 만드는 핵융합 반응과 하나의 무거운 핵으로부터 각 핵당 높은 결합 에너지를 가지는 두 개의 가벼운 핵을 만드는 핵분열 반응이다. 질량수에 대한 원자 질량 (단위 Da)의 비율은 탄소-12의 경우 1 로 정의되고, 그 이후로 최저치인 56Fe 까지 감소한다(58Fe 과 62Ni 만 조금 더 큰 값을 가진다.). 그 후, 무거운 동위 원소들은 원자 번호가 증가함과 동시에 그 값 또한 증가한다. 이 결과로부터, 지르코늄보다 무거운 원소의 핵분열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나이오븀보다 가벼운 원소들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스칸듐보다 가벼운 원소 2 개의 핵융합(헬륨은 제외)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칼슘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질량수에 대한 원자 질량의 비율 (원자 질량을 질량수로 나눈 값) 1H 1.00782505 14N 1.0002195718 2H 1.0070508885 16O 0.9996821637 3H 1.0053497592 56Fe 0.9988381696 3He 1.0053431064 210Po 0.9999184462 4He 1.0006508135 232Th 1.0001640315 6Li 1.0025204658 238U 1.0002133958 12C 1 원자들의 질량에 대한 비교와 측정은 질량 분석법(, MS)을 통해 이루어진다. 거시적 수량에서 물질의 양을 정량화하는데 사용되는 국제단위계(SI)는 몰(, 단위 mol)이며 ^{12}_{6}C 12 g에 함유되는 원자의 수로 정의한다. 1 몰에 해당하는 입자의 수를 아보가드로 수()라고 부르며, 대략 6.0221415×1023이다. 1 몰의 물질은 항상 그 물질의 몰 질량 또는 원자량을 거의 정확하게 포함한다. 그러나 자연 발생 원소인가에 따라서 원자 질량 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철의 원자량은 55.847 g/mol 이고, 지구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철 1 몰은 55.847 그램의 질량을 가지고 있다. 56Fe 동위 원소의 원자 질량은 55.935 u 이고 1 몰의 56Fe 원자들은 이론상 55.935 g의 질량을 가지나, 순수한 56Fe의 이러한 수치들은 지구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찾을 수 있는 오직 하나만의 동위 원소를 가지는 22가지의 단일 핵종 원소(일반적으로, 베릴륨, 플루오린, 나트륨과 알루미늄)들과 이 원소들의 원자량과 원자 질량은 같다. 따라서 이러한 원소들은 원자 질량 값의 표준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단일 원자에 대하여 원자 질량 단위와 국제단위계 사이의 환산식은 다음과 같다. 는 몰 질량 상수, 는 아보가드로 수이다. 원자량 질량수 동위 원소 원자 질량의 개념과 측정에 대한 강좌 원자 무게와 국제 위원회 — 역사 되짚어보기 분류:질량 화학적 물성 분류:화학 분류:원자 분류:화학양론 |
(왼쪽과 가운데), 2차원 (오른쪽)으로 나타낸 테르페노이드 분자. 분자 (分子는 두 개 이상의 비금속 원자가 화학결합에 의해 일정한 형태로 결합한 것 또는 독립된 입자로 행동한다고 볼 수 있는 원소 자체(He, Ne, Ar 등)를 의미한다. 보통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는 가장 작은 단위 입자"로 정의한다. NaCl이나 CaCl2 등의 경우 분자 라 하지 않고 화학식 단위(formula unit) 이라 한다. 분자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한 것은 아보가드로로서 그의 분자설은 아보가드로의 법칙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분자는 너무나도 작아서 사람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예외는 있다. 고분자인 DNA는 거시적인 크기이다. 가장 작은 분자는 이원자 분자인 수소 (H2)로 길이는 0.74 옹스트롬이다. 일반적으로 유기 합성을 위하여 쓰이는 분자의 크기는 몇 안 되는 Å부터 수십 Å에 이른다. 단일 분자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빛으로 관찰할 수 없으나 소분자와 각 원자의 윤곽은 원자간력 현미경을 이용하여 일부 환경에서 추적해 낼 수 있다. 가장 큰 분자는 이를테면 고분자나 초분자가 있다. 과학 저널에 따라, 분자를 보자 분자는 두 개 이상의 원자들이 화학결합에 의해 전기적으로 중성을 띠고 있는 그룹이다. 분자들은 이온과 그들의 전하에 의해 구분된다. 그러나, 많은 양자물리학, 유기화학, 그리고 생화학에서는, 분자라는 용어가 다원자성 이온에도 속하면서 덜 엄격하게 주로 사용된다. 기체 분자 운동론에서, 분자라는 용어는 그 구성과 관계없이 어떠한 기체 입자로 종종 사용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비활성기체 원자들은 단원자분자이기 때문에 분자들로 고려된다. 분자는 동종 핵일지도 모른다. 즉, 분자는 산소처럼 하나의 원소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을수도 있고 물처럼 하나 이상의 원소로 구성되어있는 화합물인 이핵 핵일지도 모른다. 수소결합이나 이온결합과 같은 비공유결합에 의해 연결된 원자들과 복합체들은 일반적으로 단일분자로 고려되지 않는다. 물질의 구성요소로서의 분자들은 흔히 유기 물질에 속한다(생화학에서). 그들은 또한 해양과 대기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나 지각, 맨틀, 그리고 지구의 핵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미네랄을 포함하는 지구에 있는 친숙한 고체 물질들의 대다수는 많은 화학 결합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는 분자들로 이루어있지는 않다. 또한, 어떤 전형적인 분자도 이온 결정(염) 과 공유결정(공유결합)으로 정의될 수 없다. 비록 이것들이 종종 일차원으로 (예를들어 그래핀처럼) 또는 삼차원으로(예를 들어 다이아몬드, 석영, 염화나트륨처럼)또는 에서 반복되는 단위세포로 구성되어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 반복되는 단위세포 구조의 주제는 또한 대부분 금속 결합과 응축상을 지지한다. 이 것은 고체 금속이 분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리(유리같은 무질서한 상태에서 존재하는 고체)에서 원자들은 또한 한정할 수 없는 어떤 분자의 존재의 없음 또는 결정을 특성화하는 반복되는 단위의 규칙성이 없음과 함께 화학 결합에 의해 붙어있을지도 모른다. 분자과학 초점이 화학에 있냐 물리에 있냐에 따라 분자의 과학은 분자 화학 또는 분자 물리라 불린다. 분자 화학은 이온결합의 형성과 분해를 초래하는 분자사이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다룬다. 반면에 분자 물리는 그들의 구조와 속성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다룬다. 그러나 사실 이 구분은 모호하다. 분자 과학에서, 분자는 두 개 이상의 원자로 구성된 안정된 상태(속박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 다원자성 이온들은 가끔 전기 전하를 띤 분자로서 유용하게 생각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불안정한 분자라는 용어는 매우 반응적인 종류에서 사용된다. 즉, 전자들과 라디칼, 분자 이온, 리드베르크 분자, 전이 상태, 반데르발스 콤플렉스 또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에서와 같은 충돌하는 원자들의 시스템인 핵들의 오래가지 못하는 집회(공명)이다. 역사와 어원 주요 기사 분자 이론의 역사 Merriam-Webster와 Online Etymology Dictionary에 따르면 “분자”라는 단어는 라틴어 “몰” 또는 덩어리의 작은 단위로부터 유래된다. ·분자(1794)- 프랑스어 molécule(미립자, 원자)(1678)에 유래된 “극도로 작은 입자”, 라틴어의 축소판인 새로운 라틴어 molecula “질량, 장애물” 처음에는 모호한 의미, (18세기 후까지 오직 라틴형식으로 사용된) 단어의 유행은 데카르트의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분자의 정의는 분자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 증가한 것만큼 진화해왔다. 이른 정의는 분자를 그들의 구성과 화학적 성질들을 유지하는 순수한 화학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로서 정의하면서 덜 정확했다. 이 정의는 예를 들어 바위, 소금, 금속 같은 평범한 경험에서의 물질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한 원자나 이온의 큰 결정계로 구성되어 있으나 별개의 분자들로 이루어져있지는 않다는 것 이후로 자주 깨졌다. 결합 분자들은 공유결합이나 이온결합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비금속 원소의 몇몇 종류만이 환경 속에서 오직 분자로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수소는 오직 수고 분자로만 존재한다. 화합물의 분자는 두 개 이상의 원소들로 만들어져 있다. -공유결합 주요 기사 공유 결합 공유 결합은 원자들 사이에 전하쌍을 공유하는 것을 포함한 화학결합니다. 이러한 전하쌍은 공유쌍 또는 결합쌍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전자들 사이의 매력적이고 혐오스러운 힘들 사이의 안정적인 균형이 그들이 전자를 공유할 때 공유 결합이라고 불린다. -이온결합 주요 기사 이온 결합 이온 결합은 상대적인 전하를 띤 이온들 간의 정전기적 인력을 포함한 화학 결합의 한 종류이자 이온결합 화합물에서 발생하는 주요 상호작용이다. 이온들에는 양이온이라 불리는 하나 이상의 전자를 잃은 원자들과 음이온이라 불리는 하나 이상의 전자를 얻은 원자들이 있다. 이 전자의 이동은 공유 결합 원자가의 반대로 이온 결합 원자가라고 불린다. 가장 간단한 경우로, 양이온은 하나의 금속 원자이고 음이온은 하나의 비금속 원자이다. 그러나 이 이온들이 더 복잡하게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 NH4+이나 SO42−같은 분자이온들이 있다. 더 간단히 말해서, 이온 결합은 양 원자들이 모두 완전히 전자가 껍질을 채우기 위한 금속에서 비금속으로의 전하들의 이동이다. 분자 크기 대부분의 분자들은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예외들이 존재한다. 거대분자인 DNA는 많은 고분자들이 그러할 수 있는 것처럼 거시적인 크기에 도달할 수 있다. 유기체 합성을 위한 블록 쌓기로 흔히 사용되는 분자들은 약간의 옹스트롬에서 몇 옹스트롬까지 또는 약 1m의 100배까지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단일 분자들은 보통 빛에 의해서 관찰될 수 없다(위에 나타나있는 것처럼). 하지만 작은 분자들은, 심지어 개개인의 원자들의 윤곽은 원자현미경의 사용에 의한 상황들 속에서 나타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큰 분자들 몇몇은 거대분자(고분자) 또는 초분자이다. 가장 작은 분자는 0.74Å의 결합길이를 가지고 있는 수소(H2)이다. 효과적인 분자 반지름은 분자가 용액 속에서 보여주는 크기이다. 다른 물질들을 위한 선택 투과성 표는 예시들을 포함한다. 분자식 -화학식 종류들 주요 기사 화학식 분자들을 위한 화학식은 원소기호, 번호, 가끔은 괄호, 다시, 그리고 (+)와 (-)기호 같은 다른 기호들의 한 줄이다. 이것들은 기호들의 하나의 인쇄상의 줄에 제한되어 있다. 이것들은 첨자와 어깨번호를 포함할지도 모른다. 한 화합물의 실험식은 화학식의 가장 간단한 종류이다. 이것은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가장 간단한 정수비이다. 예를 들어, 물은 항상 수소와 산소 원자가 2:1의 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에틸 알코올 또는 에탄올은 항상 탄소, 수소, 산소가 2:6:1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자의 종류를 유일하게 결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다이메틸에테르는 에탄올과 같은 정수비를 가지고 있다. 같은 원자들로 다른 배열을 가진 분자들을 이성질체라 부른다. 또한 예를 들어 탄수화물은 분자에서 같은 비율(탄소:수소:산소=1:2:1)(그리고 이와 같이 실험식이 같음)의 비율을 가지고 있지만 분자에서 원자들의 총수가 다르다. 분자식은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들의 정확한 수를 반영한다. 그래서 다른 분자들로부터 특징짓는다. 그러나 다른 이성질체들은 다른 분자들이지만 같은 원자 구성비를 가질 수도 있다. 실험식은 종종 분자식과 같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세틸렌은 분자식C2H2를 갖지만 가장 간단한 원소의 정수비는 CH이다. 분자량은 종종 화학식으로부터 계산될 수 있고 중성 12번 탄소 원자의 질량의 1/12과 동일하게 편리한 원자량 단위로 표현된다. 고체 결합에서, 화학식 단위라는 용어는 화학량적인 계산에서 사용된다. 주요 기사 구조식 3차원의 복잡한 구조의 분자들, 특히 네 개의 다른 치환기와 결합한 원자들을 포함한 것들에서는, 간단한 분자식이나 심지어 준 구조식에서는 그 분자를 완전히 명시하기에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 화학식의 구조식이라 불리는 그래픽적인 종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구조식은 결국 1차원의 화학명으로 대표되지만 그러한 화합물 명명법은 많은 단어들과 화학식의 부분이 아닌 용어들을 필요로 한다. 분자 기하학 주요 기사 분자 기하학 분자들은 진동하고 회전하는 운동을 통해 계속적으로 진동하는 것에 대해서 결합길이와 결합각에 고정된 평형 기하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순수한 물질은 같은 평균 기하학적 구조의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분자의 화학식과 구조는 그 특성, 특히 반응성을 결정하는 두 중요한 요인들이다. 이성질체들은 하나의 화학식을 공유하지만 그들의 다른 구조 때문에 보통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성질체의 특정한 종류인 입체 이성질체는 매우 비슷한 이화학의 특성과 동시에 다른 생화학적 활동들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자 분광학 주요 기사 분자 분광학 분자 분광학은 에너지(혹은 진동수(Planck의 공식에 따르면))라고 알려진 면밀한 신호와 상호작용하는 분자들의 반응(스펙트럼)을 다룬다. 분자들은 흡수나 방출을 통하여 분자의 에너지 교환을 감지함으로써 분석될 수 있는 정량화된 에너지 수준을 가지고 있다. 분자 분광학은 일반적으로 중성자, 전자, 또는 높은 에너지 X-ray와 같은 미립자들이 보통의 분자배열(결정에서처럼)로 상호작용하는 회절연구에 나타나 있지 않다. 마이크로파 분광학은 주로 분자의 회전에서의 변화를 측정하고 외부의 공간에서 분자를 확인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적외선 분광법은 늘어남, 구부림, 비틀림의 운동을 포함한 분자의 진동에서의 변화를 측정한다. 이것은 분자에서의 결합 또는 작용기의 종류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된다. 전자의 배열에서의 변화들은 자외선의, 볼 수 있는 근적외선 빛에서 흡수선 또는 방출선을 생산하고 색을 초래한다. 핵공명분광법은 실제로 분자에서 특정한 핵들의 환경을 측정하고 분자에서 다른 위치에 있는 원자들의 수를 특징짓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이론적 양상 분자물리와 이론 화학에 의한 분자 연구는 크게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하고 화학 결합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분자들 중 가장 간단한 것은 수소 분자 이온 H2+이고 모든 화학 결합들 중 가장 간단 한 것은 일전자 결합이다. H2+은 두 개의 양전하의 양이온과 한 개의 음전하의 음이온으로 구성되어있다. 이것은 계에서 슈레딩거 방정식이 전자와 전자의 반발의 부족 때문에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빠른 디지털 컴퓨터의 발달으로 더 복잡한 분자들을 위한 거의 정확한 해결책이 가능해졌고 컴퓨터 화학의 주요 양상들 중 하나이다. 원자들의 배열이 분자로 고려되기에 충분히 안정적이던지 아니던지 엄격히 정의하려고 할 때, IUPAC은 이것이 “적어도 하나의 진동상태를 제한하기에 충분히 깊은 퍼텐셜 에너지 표면에 있는 저기압에 일치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이 정의는 분자 사이의 상호작용의 본질에 따르지 않고 오직 상호작용의 세기에 따른다. 사실, 이것은 전통적으로 He2와 같은 분자로 고려되지 않는 약한 결합 종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의 진동하는 속박상태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헐겹게 묶여 있어서 매우 낮은 기온에도 관찰될 수 있다. 원자들의 배열이 분자로 고려되기에 충분히 안정한지 안정하지 않은지는 본질적으로 사용가능한 정의이다. 그러므로 철학적으로, 분자는 기본적인 독립체가 아니다(예를 들어 반대로 소립자에 대해) 오히려, 분자의 개념은 우리가 관찰하는 세상에서 원자 크기의 상호작용의 세기에 대한 유용한 상태를 만드는 화학자의 방법이다. 분자기하 분류:물질 분류:분자물리학 분류:화학 결합 |
질량 보존 법칙 (質量保存法則)은 닫힌 계의 질량은 상태 변화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같은 값을 유지한다는 법칙이다. 물질은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그 형태만 변하여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닫힌계에서의 화학 반응에서, (반응물의 질량) = (결과물의 질량) 이란 수식을 만족한다. 질량 보존 법칙은 비상대론적인 법칙이며, 상대성이론을 고려할 경우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상대론을 고려할 경우에도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성립한다. 이 법칙은 근대 화학의 아버지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최초로 정식화하였다. 그러나 이전에도 미하일 로모노소프 (Mikhail Lomonosov) 등이 언급한 바가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질량이 에너지로도 변환될 수 있다. ♣ 질량/물질 보존의 예외 1. 물질은완벽하게 보존되지 않는다. 물질 보존의 법칙은 특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고려하지 않은 고전적 이론에서만 참인 근사적인 물리 법칙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특정 높은 에너지 활용을 제외하고는 거의 참이다. 보존의 개념에 특정한 어려움은, ‘물질’이 과학적으로 잘 정의된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물질들이 ‘물질’이라고 생각될 때, (예를 들어 전자나 양전자) 등은 광자를 생성하기 위해 없어진다. (광자는 종종 물질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면 물질의 보존은 고립계에서도 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물질 보존은 방사능과 핵반응이 포함되지 않는 화학 반응에서 안전하게 추정될 수 있다. 물질이 보존되지 않더라도, 계 안에서의 질량과 에너지의 총 합은 보존된다. 2. 열린계와 열역학적으로 닫힌 계 또한 질량은 열린계에서 일반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계 내부나 외부로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들이 투입될 수 있거나 나갈 수 있는 경우가 그런 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방사능과 핵반응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계에서 도망가는 열, 일, 전자기적 방사선은 계의 질량의 감소로 측정하기에는 사실 너무 작다. 고립계에서의 질량 보존 법칙 (질량과 에너지가 전부 닫힌계) 은 어떤 관성계에서 봐도 게속 현대 물리학에서 참으로 여겨진다. 이것의 이유는, 상대성 방정식이 심지어 ‘질량이 없는’ 입자들, 예를 들어 광자들이 고립계에 질량과 에너지를 더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질량 (물질이 아니지만)이 에너지가 도망가지 않는 계의 과정에서 엄격하게 보존되도록 허락한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다른 관찰자들이 주어진 계에서의 보존된 특정 값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관찰자들은 이 값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계가 모든 것에 대해 고립되어 있다면) 3. 일반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팽창하는 부피의 우주에서 광자의 변치 않는 총 질량은 적색 이동 때문에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질량과 에너지의 보존은 이론에서 에너지로 만들어진 다양한 수정들에 의존한다. 그러한 계들의 변하는 중력 퍼텐셜 에너지 때문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분류:화학 분류:질량 분류:보존 법칙 |
원자론 (原子論)은 모든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물질에 대해서는 들어맞는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플라스마 또는 굉장히 높은 압력을 받는 입자들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과학 분야에서 원자론을 최초로 제기한 이는 18~19 세기의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으로 알려져 있다. 돌턴의 원자설은 질량 보존의 법칙 , 정비례의 법칙 을 설명하기위해 세워진 돌턴의 학설로서 오늘날의 원자론의 바탕이 된다. 돌턴은 각 기체를 구성하는 원자들의 질량비를 찾기 위해 원자론을 기반으로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두 원소가 결합을 할 때, 각 원소의 원자가 1:1로 결합하여 2원자 화합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쉽다고 가정했다. 그러므로 두 원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화합물이 하나밖에 없으면 그것은 1:1로 결합한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의 화합물을 만든다면 하나는 1:1, 다른 하나는 1:2, 그다음은 1:3 등 결합에 있어서 가장 단순한 정수비를 따른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결합 규칙을 설정해 놓음으로써 돌턴은 여러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질량비를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수소를 기준으로 한 원소들의 상대적 질량비, 즉 원자량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돌턴의 원자설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물질은 원자라고 부르는 더 분할할 수 없는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원소의 원자들은 동일하며, 같은 성질들을 갖고 있다. 화합물은 다른 원소들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정한 작은 정수비로 결합되어 있다. 화학 반응은 단순히 원자들이 자리를 옮겨서 다른 조합을 이루는 것이다. 원자는 새로 생기거나 사라지거나 바뀔 수 없다. 이 원자설은 오늘날 물질에 대한 생각으로서 보편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원자는 원소의 성질을 갖고 있는 원소의 가장 작은 기본 입자로 규정할 수 있다. 화학의 기본 개념,LEO J.MALONE,자유아카데미 분류:원자물리학 분류:화학 이론 분류:초기 양자역학 분류:통계역학 분류:물질량 |
일정 성분비 법칙 (一定 成分比法則) 또는 정비례의 법칙 (定比例法則)이란, 한 화합물을 구성하는 각 성분 원소들의 질량 비가 일정하다는 법칙으로, 1799년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약학자인 조제프 루이 프루스트(Joseph Louis Proust)가 발견하였다. 예를 들자면, 물(H2O)에서 수소(H)와 산소(O)의 질량 비는 항상 1:8이다. 만약 물에서 수소가 차지하는 질량이 2.5g라면, 산소 원자가 차지하는 질량은 20g이 된다. 역사 이 관찰은 1798년과 1804년 사이에 실행된 여러 실험들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화학자 Joseph Proust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일정 성분비 법칙은 현대 화학자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일 수 있다. ( 모든 화학적 화합물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 그러나 화학적 화합물의 개념이 완전히 개발되지 않은 18세기 후반까지는, 그 법칙은 소설이었다. 사실 처음 그 법칙을 주장했을 때, 그것은 논란이 많은 발언이었고 다른 화학자들로부터 반대를 많이 받았다. 특히 Claude Louis Berthollet 이라는 프랑스인은 원소들이 어떠한 비율로든지 결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존재로 보아, 그 당시에는 순전한 화학적 화합물과 혼합물의 구별이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정 성분비 법칙은, John Dalton이 세운 원자 이론의 이론적인 기초로서 기여했다. ( 원자이론은 물질이 별개의 원자을 포함하는 것이며, 각각의 원소에 대해 한 종류의 원자가 있다고 했고, 화합물들은 다른 원자들의 고정된 비율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연관된 개념은 영국의 화학자인 William Prout의 Prout s hypothesis가 있다. 그는 수소 원자가 원자의 근본적인 단위라고 주장했다. 이 가정으로부터 정수 숫자의 법칙이 얻어졌다. (원자 질량은 수소 질량의 정수배라는 법칙). 이것은 1820년과 1830년에 원자 질량에 대한 정제된 측정 방식이 개발되면서 거부되었다. 특히 Jöns Jacob Berzelius에 의해 염소의 원자량이 35.45라고 밝혀졌기 때문에, 이것은 가설에 모순이 되었다. 1920년대 이후로, 이 차이들은 동위원소들의 존재로 인해 설명되었다. 여느 동위원소들의 원자량은 정수 숫자의 법칙을 만족시키는데 매우 가깝다. 결합에너지의 차이 때문에 생긴 질량 결함이다. 화학량적이지 않은 화합물들 현대 화학의 기초에 매우 유용했지만, 일정 성분비 법칙은 전우주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다. 샘플에 따라서 원소 구성이 달라질 수 있는 화학량적이지 않은 화합물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배수 비례의 법칙을 따른다. 하나의 예시는 iron oxide wüstite이다. 그것은 0.83에서 0.95의 철 원자들을 각각의 산소 원자로 포함할 수 있다. 그래서 23%에서 25%의 질량비의 산소를 포함하게 된다. 이상적인 식은 FeO이지만, 결정학적으로 빈 공간 때문에 그것은 Fe0.95O로 줄어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Proust의 측정들은 그러한 변화들을 감지하기에는 충분히 정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원소들의 동위원소적인 구성은 그것의 유래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의 순수한 화학량적 화합물의 질량에 대한 기여는 달라질 수 있다. 이 변화는 지질화학적 연대측정에서 사용된다. 왜냐하면 우주적, 대기적, 해양적, 지각적, 그리고 지구 깊은 곳의 과정들은 선호에 따라 더 가볍거나 더 무거운 동위원소들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소와 그것의 동위원소들을 제외하면, 이 효과는 대부분 작다, 그러나 현대 기기로는 측정이 가능하다. 추가로, 많은 자연적 중합체들은 심지어 ‘순수할 때’도 구성에서 차이를 지닌다. (예를 들어 DNA, 단백질, 탄수화물) 중합체들은 분자식이 유일하고 화학량론이 일정해도 일반적으로 ‘순수한 화학적 화합물’로 고려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사례들은, 동위원소적인 다양함으로 법칙을 여전히 위배할 수 있다. 배수 비례의 법칙 분류:화학 분류:화학양론 분류:물질량 |
화합물 (化合物)은 두 종류 이상의 화학 원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순수한 화학 물질이며, 화학 반응을 통하여 더 단순한 물질로 분리해 낼 수 있다. 이를테면 물(H2O)은 하나의 산소 원자마다 두 개의 수소 원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물질이다. 화합물은 고유의 화학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화학 결합으로 하나가 된 일정한 비율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화합물은 공유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된 분자 화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염은 이온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고, 금속 간 화합물은 금속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며, 배위 착염은 배위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는 분자 화합물이다. 한편, 순수한 화학 원소는 이것이 단일 원소(H2, S8 등)로 된 여러 개의 원자만 포함하는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화합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화합물은 오직 두 종류 이상의 원소들로 결합한 형태의 물질들을 이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위의 단일 원소(H2, S8 등)는 홑원소 물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합물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 화합물의 원소는 일정한 비율로 존재한다. (예 2개의 수소 + 1개의 산소는 하나의 화합물 분자인 물이 된다) # 화합물은 일정한 집합의 특성을 갖는다. (화합물의 원소는 원래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 화합물의 원소는 물리적인 방식으로 분리할 수 없다. 화학자들은 화합물을 다양한 형태의 공식을 이용하여 서술한다. 분자로 존재하는 화합물의 경우 분자 단위의 공식이 이용된다. 광물과 수많은 금속 산화물과 같은 중합체의 경우 실험식이 일반적으로 이용된다. 이를테면 염화 나트륨의 경우 NaCl로 표기한다. 화학 공식의 원소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순서로 나열되는데 이를 힐 시스템(Hill system)이라고 한다. 이러한 체계에서 탄소 원자들은 일반적으로 맨 처음에, 수소 원자는 그 다음에, 다른 모든 원소는 알파벳 순으로 그 뒤에 나열된다. 공식이 탄소를 포함하지 않으면 수소를 포함한 모든 원소는 알벳 순으로 나열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법칙에도 예외는 있다. 이온 화합물의 경우 양이온은 거의 언제나 맨 먼저 오고 음이온은 두 번째에 온다. 산화물의 경우 산소가 맨 마지막에 나열된다. 화합물은 몇 가지 가능한 상을 가질 수 있다. 모든 화합물은 적어도 충분히 낮은 온도에 있다면 고체로 존재할 수 있다. 분자 화합물은 액체, 기체, 또 특별한 경우 플라스마로 존재할 수도 있다. 모든 화합물은 열에 의해 분해된다. 이러한 분해가 일어나는 온도는 분해 온도라고 한다. 분해 온도는 열의 속도에 따라 달라지며 가파르게 바뀌지는 않는다. 화합물을 포함하는, 연구를 통해 알려진 모든 화학 물질들은 고유의 수치적 식별자인 CAS 번호가 있다. 산 염기 염 산화물 유기 화합물 무기 화합물 이온 화합물 화학 물질 분류:화학 결합 |
상 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상 (上)은 위, 높다, 이전, 옛날을 뜻하는 말이다. 상 (床)은 물건을 올려놓는 가구의 통칭이다. 상 (商, 殤)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이다. 상 (相, aspect)은 사태의 양상에 관한 문법 범주이다. * 문법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태의 양상에 관한 문법 범주이다. * 어휘상은 동사가 가지는 사태의 양상에 관한 문법 범주이다. 상 (商)은 중국 고대의 왕조이다. 상 (相)은 위만조선의 관직이다. 상 (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 외무성의 장, 즉 외무상(外務相)을 말한다. 상 (尙)은 주나라 이후 강태공의 후손이 상(尙)이라는 지역에 살면서 창성한 성이다. 상 (尙)은 상국진(尙國鎭)을 시조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이다. 상 (象)은 고려 태조가 백제 목천 지역 호족에게 사성한 성이다. 상 (商)은 고대 동양음악에서 쓰이던 음, 궁(宮) 다음 5음음계 및 7음음계의 제2음이다. 상 (狀)은 빙상(氷狀)이라고도 쓰며 명, 청시대에 썰매 같은 것을 이용한 빙상 스포츠이다. 상 (像)은 사람이나 물건을 본딴 입체적 조형물이나 그림을 의미한다. 상 (相)은 북의 일종으로 상고(相鼓)라고도 한다. 상 (裳)은 조선조 문무관리들이 예복에 착용하던 치마 형태의 옷이다. 상 (象)은 장기 기물이다. 상 (狀, 相)은 물리학에서 물질의 상태를 나타낸다. 광학에서 상 (像)은 렌즈나 거울을 통하여 표면에 맺힌 물체의 형상을 말한다. 상 (喪)은 친족이 죽었을 때 그를 추도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활동을 자제하고 몸가짐을 삼가는 일이다. 상 (像, image)은 2차원 평면상에 나타난 화상을 뜻한다. 상 (賞)은 받는 대상이 한 일에 대한 칭찬이다. 높인다는 뜻 상(尙)과 재물을 뜻하는 조개 패(貝) 합성어로, 한 일에 대한 칭찬을 대가로 주며, 칭찬은 말로 하기도 하고, 현물로 주기도 한다. 영어 표현으로는 Award와 Prize가 있는데, Award는 객관적 평가에 의해 받는 상을 의미, Prize는 경쟁에 의한 상을 의미한다. |
acid.jpg|섬네일|아세트산이 들어있는 병. 용매 (溶媒는 용액의 매체가 되어 용질을 녹이는 물질로, 주로 액체나 기체상을 띤다. 예를 들어 액체에 물질을 녹여 용액을 만들 때나 액체에 액체가 녹아들어가는 경우에 그 양이 많은 쪽의 액체를 용매라고 하며, 용액 중에서 용매는 용질에 비해 용액을 구성하는 비율이 높다. 액체상의 용매의 경우 공통적으로 끓는 점이 낮아 휘발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용매는 액체상이 아닌 혼합물에서 특정 물질을 추출할 때에 사용되기도 한다. 용매가 액체 상태에 있는 경우, 용매가 어느 종류의 물질이냐에 따라 무기 용매와 유기 용매로 구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무기 용매는 물이며, 유기 용매로는 에테르나 아세톤, 알코올 등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극성 용매로는 물, 에탄올, 아세톤 등이 있고, 대표적인 무극성 용매로는 사이클로헥세인 사염화탄소, 벤젠 등이 있다. 분류:용액 |
테오도리쿠스 대왕 (Theodoric the Great, 454년 ~ 526년 8월 30일, 재위 488년 ~ 526년)은 동고트 왕국의 초대 국왕이며 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이탈리아의 군주였다. 고트어 이름은 티우다레익스 ()로 "백성들의 왕" 이라는 의미이다. 454년, 동고트족이 훈족들에게 점령된 지 1년째 되던 해에 튜다미르(Thiudamir)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오도리쿠스는 튜다미르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협정의 결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볼모로 유년기를 보냈다. 테오도리쿠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내며 동로마 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레오 1세와 제논의 호의를 얻어 483년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군사 대장)가 되고 1년 뒤에는 집정관이 되었다. 이후 이십대 초반을 다른 동고트족과 보냈으며 488년 왕이 되었다. 이 무렵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 내에 로마의 포이데라티로 거주하고 있었으나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테오데릭이 왕이 된 이후 황제 제논과 협정을 맺어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족이 476년 로마를 점령한 오도아케르를 몰아내는 데 협조를 받기로 하고 오도아케르의 왕국을 침략하게 된다. 테오도리쿠스는 488년 군대를 끌고 이탈리아에 도착, 489년 이손조의 전투와 밀라노의 전투와 489년 아다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493년 테오도리쿠스는 라벤나를 점령하고 오도아케르는 항복하나 테오도리쿠스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도아케르와 같이 테오도리쿠스는 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황제의 총독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테오도리쿠스와 로마 황제의 교섭은 동등한 상황에서 진행되었고, 로마 황제의 간섭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오도아케르와 달리 테오도리쿠스는 왕국 내의 로마 시민들을 로마 법대로 다스린다는 약속을 지켰다. 고트족은 전통적인 법률과 관습으로 다스려졌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Clovis) 1세의 여동생 아우도플레다(Audofleda)를 왕비로 맞아들여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서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왕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클로비스 1세는 506년과 523년 테오도리쿠스와 전쟁을 벌였다. 제위기간 대부분동안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형식적으로는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모두의 왕이었으며 505년경 어린 서고트족 왕의 섭정이 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507년 프랑크족에게 서고트 영토인 아퀴타니아를 빼앗겼으나 그 외에는 대부분의 외침을 격퇴했고, 반달족 왕 트라사문트(Thrasamund)를 격퇴해 약탈을 막았다.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 신자였으며, 이 점 때문에 재위 말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마찰이 생겼다. 양국의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했으나 테오도리쿠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충돌이 없었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라벤나에 매장되었으며, 사후 딸 아말라순타(Amalasuntha)가 손자 아탈라릭(Athalaric)을 대신해 섭정이 되었다. 프랑크의 군주 힐데리히 1세(Childeric I)의 딸이자 클로비스 1세의 누이인 아우도프레다(Audefleda)와 결혼하여 아말라순타 등을 두었다. 왕후 아우도프레다(Audefleda, 프랑크의 군주 힐데리히 1세의 딸) * 딸 아말라순타(Amalasuntha) ** 외손 아탈라릭(Athalaric) 장인 힐데리히 1세(Childeric I, 프랑크의 군주) * 처남 클로비스 1세(Clovis I, 프랑크의 군주) 분류:454년 태어남 분류:526년 죽음 분류:이탈리아왕 분류:동고트의 왕 분류:로마 제국의 집정관 분류:5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아리우스파 기독교인 분류:아말가 분류:5세기 유럽의 군주 분류:6세기 유럽의 군주 분류:독일의 영웅전설 분류:고트인 전사 |
연소 (燃燒)는 열이 발생하는 화학반응이다. 주로 물질이 산소와 화합할 때 다량의 열을 내며 동시에 빛을 발하는 현상을 말한다. 설탕이나 에탄올 등은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연소하지만 소금은 아무리 가열해도 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물질에는 가열하면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이 있다. 1630년에는 페리고르 지방의 의사인 장레가 납과 주석을 불에 태우면 산화되어서 이 금속들의 양이 증가한다는 것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라부아지에보다 한 세기 앞서는 것이었다. 어떤 물질이 산소와 화합되는 현상을 산화작용이라 하며, 쇠가 녹이 난다든지 물질이 부패하는 경우처럼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것도 있지만 급격히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즉 연소란 빛과 열을 수반하는 급격한 산화반응이다. 연소가 일어나려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연료 발화점 이상의 온도 산소 완전연소의 경우, 반응 물질이 산소의 공급이 충분한 상태에서 완전히 타지만 적은 수의 산물을 발생시킨다. 불완전연소는 연료가 완전히 반응할 정도로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은 경우 발생하며 이산화탄소와 물을 만들어낸다. 작열연소에서 연소현상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가연물, 산소, 점화에너지가 필요하며 이를 연소의 3요소라고 한다. 불꽃연소에서는 연소의3요소 이외에 연쇄반응이 4번째 요소로 작용하며 이를 연소의 4요소라 한다. 물질에는 설탕이나 에탄올과 같이 공기 중에서 가열하여 온도를 올리면 연소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철 등 금속은 덩어리인 상태에서 아무리 가열해도 연소하지 않지만, 가는 섬유로 만든 스틸 울은 가열하면 잘 탄다. 마그네슘도 얇은 리본처럼 만들거나 가루로 만들면 가열에 의해 불꽃을 내면서 격렬하게 연소한다. 또, 구리 가루는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빛깔이 검게 변할 뿐이지만, 산소내에서 가열하면 빨갛게 되어 심하게 변화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물질이나 공기 속에서보다 산소 속에서 더 세게 연소한다. 반대로 산소가 없는 곳에서는 에탄올이나 석유 등을 아무리 가열해도 연소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물질이 연소하기 위한 조건들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연소할 물질이 있어야 한다. # 가열하여 물질을 발화점 이상의 온도로 만들어야 한다. # 물질의 주위에 산소가 있어야 한다. 물질을 잘게 부수거나 가루로 만들면 잘 타는 이유는 물질의 온도를 높이기 쉽고, 또 표면적이 증가하여 공기 속의 산소와 접촉하기 쉽게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석유나 에탄올을 석면에 스며들게 하고 병 속에서 태우면 병 안쪽에 물방울이 맺힌다. 또, 이 병 속에 석회수를 넣고 잘 흔들면 석회수는 뿌옇게 흐려진다. 병 안쪽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은 물질이 연소하여 물(수증기)이 생긴 것을 나타내며, 석회수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은 이산화탄소가 생긴 것을 나타내고 있다. 수소를 공기 중에서 연소시키면 물(수증기)이 생긴다. 또, 탄소를 공기(산소) 중에서 연소시키면, 탄소는 전부 없어지고 이산화탄소가 생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석유나 에탄올이 연소하면 물이나 이산화탄소가 생기는 것은 연소하는 물질, 즉 석유나 에탄올에 수소나 탄소가 함유되어 있어, 그것들이 연소하여 물이나 이산화탄소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설탕·판자·밀랍·종이 등과 같이 공기 중에서 연소하여 물이나 이산화탄소를 생성하는 물질에는 수소나 탄소가 성분으로서 함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철 등의 금속이나 황이 연소할 때 물이나 이산화탄소가 생기지 않는 것은 이들에 수소나 탄소가 함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틸 울은 연소하면 검은 고체 물질(산화철)이 되며, 마그네슘은 흰 고체(산화마그네슘)로 변한다. 또, 황은 코를 찌르는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기체(이산화황)를 내면서 연소하는데,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연소하여 생긴 생성물은 원래의 물질에 따라 다르고, 또 연소하는 모양(열이나 빛을 내는 모양)도 물질에 따라 다르다. 양초가 타면 기체인 이산화탄소와 물이 생성되어 공기 속으로 빠져 나가고, 양초의 질량은 줄어든다. 스틸 울이나 마그네슘은 연소하면서 질량이 커진다. 즉, 이들이 타서 생긴 산화철이나 산화마그네슘의 질량은 원래의 스틸 울이나 마그네슘의 질량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틸 울이나 마그네슘이 연소하는 데는 산소가 필요하며, 또한 연소에 의해서 생긴 물질의 질량이 연소하기 전의 물질의 질량보다 커졌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연소로 생긴 물질 속에는 산소가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연소에 의해서 산소와 물질이 결합되었음을 말해 준다. 양초나 에탄올을 공기 속에서 가열하면 열과 빛을 내면서 연소하여 물과 이산화탄소를 생성하는데, 물은 수소와 공기 속의 산소가 결합하여 생긴 물질이고, 이산화탄소는 탄소와 공기 속의 산소가 결합하여 생긴 물질이다. 이와 같이, 물질이 열과 빛을 발생시키면서 산소와 결합하는 것을 연소라고 한다. 스틸 울이나 마그네슘도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빛과 열을 내면서 연소하여 산소와 결합해서 각각 산화철과 산화마그네슘이 된다. 이와 같이, 물질이 연소하면 원래의 물질과 다른 물질이 생긴다. 이러한 변화도 화학적 변화의 하나이다. 불 보일러 한국연소학회 작열연소 분류:화학 반응 |
아르곤 (←은 주기율표의 화학 원소로 기호는 Ar (←)이고 원자 번호는 18이다. 18족에 속하는 비활성 기체로 지구 대기의 약 0.93%를 차지하며, 비활성 기체 중 지구에서 가장 흔하다. 1894년 영국의 레일리에 의해 발견되었다. 상온에서는 무색,무취의 기체이다. 아르곤은 고체, 액체, 기체 상태 모두 무색, 무취인 불연성의 기체이다. 물에 대한 용해도는 산소와 비슷하며, 질소보다는 약 2.5배가량 더 용해된다. 대부분의 경우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하여 화합물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극저온에서는 일부 아르곤 화합물이 관찰된 적이 있다. 2000년 핀란드 헬싱키 대학에서 발견된 아르곤 플루오로하이드라이드(HArF)가 대표적이다. 또한 반응성이 큰 플루오린과 염소와도 결합을 잘 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물 분자들 사이에 들어가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아르곤은 그리스어로 비활성 을 뜻하는 αργον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1785년 헨리 캐번디시는 공기 중에 전류를 흘려 질산을 생성시키는 실험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소량의 기체가 반응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관찰했다. 1882년 두 과학자가 독자적으로 공기 중에 포함된 원소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던 중 새로운 선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나, 어떤 원소에 의한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후 1894년 레일리와 윌리엄 램지는 순수한 질소 기체와 공기 중의 질소 기체 사이에 약 0.5% 정도의 질량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른 원소가 섞여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들은 런던대학교 UCL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공기를 액화시킨 후 이를 분별 증류하여 아르곤을 순수한 상태로 분리하였다. 1957년까지는 원소 기호가 A 였으나 이후 Ar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르곤은 대기 중에 부피 비율로는 약 0.934%, 질량 비율로 약 1.288%가 포함되어 있다. 지각 속에는 1.2ppm, 해수 속에는 0.45ppm 정도 포함되어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르곤의 대부분은 아르곤-40(존재 비율 99.6%)이며, 이외에 아르곤-36, 아르곤-38 등이 미량 존재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칼륨-40이 베타 붕괴하면서 약 11.2%가 아르곤-40으로 변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한 칼륨-아르곤 연대 측정법은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데 사용된다. 또, 아르곤은 태양계 내에서도 행성에 따라 동위 원소의 존재 비율이 다르다. 이는 지구형 행성의 경우에는 암석 속의 칼륨-40이 베타 붕괴하여 생성된 아르곤-40이 대부분인 반면, 목성형 행성에서는 항성의 핵융합으로 생성된 아르곤-36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초저온냉동공학을 이용한 공기분리공장에서 주로 생산된다. 공기분리공장에서는 공기 중에 존재하는 질소와 산소를 액화시켜 끓는점 차를 이용하여 분리하는데 이 중 아르곤은 산소와 끓는점이 유사하여 액체산소의 상위층에 많이 분포하게 되며, 이를 별도의 분별 증류를 이용하여 농축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매년 전 세계에서 70만 톤의 아르곤이 생산된다. 고온에서 2원자 물질인 질소가 불안정한데 반하여, 1원자 물질인 아르곤은 고온에서도 안정하다. 따라서 고온에서의 비활성 기체(inert gas)가 요구되는 곳에 많이 사용된다. 철강 제조시 고급제련강을 제조하는 경우에 주로 쓰이며, 그 외에도 TIG용접, MIG용접시에도 불활성가스로 사용된다. (가운데 I는 Inert를 의미함.) 또한 네온과 함께 PDP (플라즈마 액정 표시장치)의 내부에 플라즈마 형성을 위해 사용되고, 백열등 내부에서 텅스텐 필라멘트가 산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충전가스로도 사용된다. 한편 최근 반도체, LCD 제조의 90nm 이하의 공정에서 ArF(플로오르화 아르곤)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 및 광원제조에 사용되기도 한다. 청록색의 아르곤 레이저는 종양 제거 등의 목적으로 이용되며, 잠수부들이 사용하는 산소통의 혼합기체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감기가 269년인 아르곤-39는 빙하나 지하수의 연대를 측정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고압가스 및 특수고압가스를 제조, 공급하고 있는 에어프로덕츠코리아, 에어코리아, 대성산업가스, BOC 코리아, 프락스에어 코리아 등에서 주로 제조된다. 최근 수요처에 직접 공장을 설립하여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하는 온사이트 방식이 활성화되는 추세이다. 아르곤 자체의 독성은 없지만, 공기보다 무겁고 바닥에 가라앉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아르곤 누출 시 산소 결핍으로 인한 질식을 유발할 수 있다. 아르곤 - WebElements.com 분류:비활성 기체 분류:화학 원소 |
지구 대기의 모습, 아래에 구름이 보인다 화성의 옅은 대기 대기 (大氣, Atmosphere)는 천체의 주위를 대체로 일정하게 둘러싸고 있는 기체층을 말한다. 별다른 조건없이 대기 라고 표현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지구 대기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생명체가 호흡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운석이나 기타 위협적인 요소들로부터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태양계 위성 중에서는 타이탄이 질소 주성분의 대기를 가지고 있다 지구 대기권은 5개의 층으로 나뉜다 지구의 대기권은 기체층으로 지표에서 고도 약 1000 km까지 존재한다. 주로 질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이산화탄소, 헬륨, 아르곤 등의 희소 기체가 포함되어 있다. 수증기를 제외한 공기 성분은 약 80 km까지 거의 일정하다. 지구 대기권은 고도에 따라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 외기권 등으로 구분된다. 기상의 변화는 대류권에서 나타나며 다른 권역에서는 오존층의 생성, 전자기파의 반사와 같은 성질을 보이는 특이층이 존재한다. 지구 대기의 역할은 생명체에 산소 공급, 온실 효과를 통한 지구 보온, 태양(Sun)으로부터 오는 자외선 차단, 저위도의 에너지를 고위도로 운반, 운석으로부터 지구 보호 등 이기. 수성은 대기가 거의 없다. 달보다는 짙은 대기를 가지고 있지만, 우주 공간보다 약간 짙은 정도이다. 수성 대기의 대부분은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금성의 대기는 95% 이상이 이산화탄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구 대기압의 90배에 달하는 두꺼운 대기를 가지고 있다. 금성의 대기는 두껍고 이산화탄소가 많아 온실효과가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 표면 온도가 500℃ 가까이 근접한다. 금성은 탈출 속도가 지구와 거의 비슷하지만, 표면 온도가 높기 때문에 질량이 작은 수소 기체 등은 활발한 분자 운동으로 인해 평균 운동 속도가 증가하여 금성을 벗어나 버리고, 질소와 약간의 아르곤 등이 대기 중에 분포하고 있다. 수증기는 대기 상층부에만 약간 존재하기 때문에 금성의 대기는 전체적으로 건조하다. 화성의 대기는 대부분이 이산화탄소이며 기압은 지구의 1/100 정도이다. 태양에서 비교적 먼 편이라 표면 온도는 영하권이다. 화성은 자기장이 매우 미약해서 대기가 태양풍의 영향으로 쓸려나가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화성의 여름에는 극지방의 드라이아이스가 녹아 이산화탄소가 대기중으로 유입되어 대기가 약간 짙어진다. 목성의 대기는 주로 수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반구에 커다란 소용돌이인 대적반이 관찰된다. 대체로 지구형 행성에 비해 매우 높은 기압을 가지고 있어서 탐사선을 통한 정확한 기압 측정이 불가능하다. 목성을 제외한 나머지 목성형 행성들인 토성,해왕성,천왕성등의 행성도 목성 대기 성분과 비슷하다. 위성은 행성에 비해 중력과 질량이 작기 때문에 대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됐지만,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은 지구 대기압의 1.4배에 달하는 질소 주성분 대기가 있다. 오존층 대기 굴절 대기압 대기 순환 타이탄의 대기 화성의 대기 토성의 대기 분류:지구과학 분류:기상학 |
포인터(적색635 nm, 녹색520 nm, 청색445 nm) 레이저 (는 유도 방출 에 의한 빛의 증폭()의 머릿글자만을 따온 것을 한글화한 것이다. 원자나 분자 내부에 축적된 에너지를 집약적으로 뽑아내는 결맞는 광이다. 전형적인 레이저 광은 단색, 즉, 오직 하나의 파장이나 색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레이저 빔은 가늘고 퍼지지 않는다. 반면, 백열전구와 같은 대부분의 광원은 결이 맞지 않은 수많은 빛을 넓은 파장 범위에서 넓은 면적으로 방출한다. 레이저의 파장은 매질 등의 구성요소에 의해 정확하게 정해진다. 매질에 따라, 아르곤에서는 푸른색, 이산화탄소에서는 무색(적외선), 루비에서는 붉은색의 레이저가 방출된다. 1917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전자기 방사선의 흡수, 자연 방출, 유도 방출을 위해 개념적으로 아인슈타인 계수에 기반을 둔 막스 플랑크의 방사 법칙을 재유도함으로써 방사양자설(Zur Quantentheorie der Strahlung)이라는 논문에 레이저와 메이저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400px 햇빛을 한 점에 집중하면 종이를 태울 정도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레이저의 경우 태양빛에 비하여 단위 면적당 얻어지는 에너지가 훨씬 많은데, 태양빛은 직경 1000분의 1mm 크기에 집광(集光)시키는 것이 어렵지만 레이저 광(光)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1mW 출력의 레이저라도 단위 면적당으로는 태양빛의 100만 배의 에너지 밀도가 된다. 1mW라면 꼬마 전구를 켤 수 있는 전기보다도 더욱 작은 출력이다. 이렇게 되면 종이를 태우는 정도가 아니라 출력 여하에 따라서는 사람을 살상할 능력까지 지니고 있다. 레이저 광이 살인 광선 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을 얻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960년 7월, 미국의 T. H. 메이먼 박사는 여러 과학자들과 보도진 앞에서 레이저 빔으로 풍선을 터뜨려 보였다. 그 때부터 이 빛의 마술은 새로운 도구로서 과학사에 획기적인 한 페이지를 추가하게 되었다. 빛이 파동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자연광이 서로 다른 많은 파장과 위상의 빛이 섞여 있는 데 비하여 레이저 광은 단일 파장 동위상의 빛이다. 파장이란 물결의 봉우리와 봉우리, 혹은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의 길이를 말한다. 빛은 파장마다 일정한 색을 가지고 있으므로 단일 파장인 레이저 광은 단일색이 된다. 레이저의 선명한 색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다만 레이저에는 모두 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시광(可視光) 이외의 파장을 가진 레이저 광이라면 모양도 색깔도 보이지 않는다. 위상이란 물결의 어긋남을 말하는데, 동위상이라는 것은 물결의 봉우리와 봉우리, 골짜기와 골짜기가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꼭 겹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때문에 레이저 광은 자연광에 비하여 매우 잘 다듬어진 깨끗한 물결 의 빛이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레이저 광은 아무리 먼 거리까지 가도 빛이 퍼지지 않는다. 자연광이 사방팔방으로 확산해 버리는 데 비하여, 레이저 광은 똑바로 일직선으로 뻗어 간다.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닌 레이저는 많은 분야의 관심을 끌어 눈 깜짝할 사이에 사용용도가 확대되어 갔다. 빛 본래의 성질에 더하여 그 강력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공업·의료·핵융합·계측·정보 기억·광통신에 이르기까지 탄생 후 불과 35년 동안에 눈부시게 연구 개발되어 용도가 확대되어 왔다. 현재 레이저 산업의 시장규모는 수조 원에 이른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분야는 콤팩트 디스크, DVD, 블루레이 디스크 등의 광디스크 장치이다. 이외에도 바코드 리더와 레이저 포인터에도 주로 사용된다. 산업적으로 레이저는 철이나 금속을 자르거나 표면에 그림, 글씨를 새기는 데 사용된다. 레이저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에서 사용되는데 특히 정확하게 정해지는 단색의 파장 때문에 분광학 분야에 주로 사용된다. 펄스 레이저의 경우 짧은 펄스 폭을 이용하여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 사용된다. 군사적으로 레이저는 공격 대상을 식별하거나 미사일 등의 무기를 유도하는 데 사용되며 전술 고에너지 레이저와 같이 미사일이나 비행체 등을 요격하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의학에서는 안과 수술, 미용 목적의 수술 등에 사용된다. 관성항법장치 내에서 Ring Laser Gyro나 Fiber Optic Gyro의 형태로 이용되며 물리학 분야에서는 레이저 냉각으로 원자를 극저온으로 냉각시키는 용도로 사용한다. 원자시계, 라이다 측량에서도 활용된다. 주요 구성 요소 1. 활성 레이저 매질2. 에너지3. 거울4. 부분적 거울5. 레이저 광 빛을 증폭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빛의 힘을 강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어떤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를 자극하여, 빛 등의 전자파를 에너지로서 꺼내는 것을 말한다. 물질에는 각각의 고유한 에너지 레벨이 있어, 증폭되었을 때에 방출되는 빛의 에너지도 각각 일정한 값을 갖는다. 방출되는 빛의 파장이 물질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분자와 원자는 통상 각각 일정한 에너지 레벨에서 안정되어 있는데, 이것을 바닥 상태라 한다. 그런데 밖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에너지 레벨이 높은 여기 상태가 된다. 이 때의 분자와 원자는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에너지 레벨이 낮은 안정 상태로 돌아가려고 빛을 방출한다. 이 자연 방출로 얻어지는 빛은 무질서한 빛이 혼재하여 파장도 위상도 제각기 다르다. 이와 같은 빛을 인코히런트(Incoherent) 한 빛이라 하는데, 이 빛은 일상 생활에서 체험하는 빛과 똑같은 것이다. 한편 원자와 분자는 자신이 자연 방출하는 빛과 똑같은 파장의 빛에 부딪치면 유도되듯이 빛을 방출하는 성질이 있다. 이 빛은 원래의 빛과 파장·위상·진행 방향도 완전히 똑같은 가간섭적(可干涉的) 빛이다. 레이저 광을 꺼내는 데는 광공진기(光共振器)를 사용한다. 이것은 광축(光軸)이 일치하도록 좌우에 서로 마주보는 거울을 놓고, 그 사이에 레이저 발진(發振)을 시키기 위한 물질 을 놓은 것이다. 매질로서는 결정(結晶)을 비롯한 고체 외에 액체, 기체도 사용되는데 현재까지 수천 종류에 이르는 레이저 광이 확인되고 있다. 이 광공진기의 레이저 매질에 자극을 주어 연속적으로 여기(勵起)를 만들어 내면, 자연 방출과 유도 방출이 일어난다. 자연 방출도 유도 방출도 처음에는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서 일어나지만 좌우의 거울에 수직으로 닿는 빛만은 반사되어 거울 사이를 몇 번이고 왕복하는 동안에 유도 방출을 되풀이하여 레이저 광으로 성장해 간다. 이때 한쪽 거울에 부분 투과성의 것을 사용하면 내부를 왕복하고 있는 빛의 일부분이 광공진기 밖으로 방출된다. 이렇게 해서 레이저 광이 발생되는 것이다. 레이저 가공은 강력한 출력의 레이저를 사용하여 금속, 플라스틱, 나무 그리고 천 등의 절단, 구멍 뚫기와 용접, 담금질 등을 하는 기술이다. 작동 속도가 빠르고 초점을 정확히 맞출 수가 있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 이용되고 있다. IC와 LSI, 정밀 기기의 가공에 레이저는 매우 뛰어나다. 매우 작은 점에 집광(集光)할 수 있고 에너지 밀도가 큰 것이 레이저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비롯하여 보석·내열합금·세라믹스 등도 가공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시계의 베어링으로 쓰이는 직경 1mm의 루비에 직경 0.05mm의 구멍을 1초 동안에 10개 이상이나 뚫는다. 같은 레이저 가공기라도 출력을 달리 하면 갖가지 작업을 할 수 있다. 출력을 높여 연속적으로 빛을 대면 금속을 절단할 수가 있으며, 재료가 녹으면서도 증발하지 않을 정도로 출력을 줄이면 용접기로 변한다. 더욱 줄이면 금속 표면에만 열처리를 한다든지 금속 표면의 흠을 체크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산업용 레이저는 실용화가 뛰어나다. 아직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것만 해결되면 종래의 공작기계의 이미지를 바꾸어 버리게 될 것이며 소형화, 고효율화(高效率化), 자동화, 그리고 작업장의 면적을 줄이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바야흐로 커터라든가 드릴 등이 모습을 감추고 레이저 광선으로 바뀔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료 분야에서도 레이저는 눈부시게 활용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레이저 메스로 이것은 레이저 광을 렌즈로 집광시켜 한 점에 조사(照射)하여, 강력한 에너지로 생체 조직을 순간적으로 증발, 기화시켜서 절개하는 것이다. 절개되는 부분의 조직은 순간적으로 1500℃ 이상이 되어 열에 의하여 증발해 버린다. 출력을 100℃ 이하로 낮추면 조직은 응고되기 때문에, 종래의 메스보다도 출혈이 적어지므로 출혈이 많은 부위의 수술에 적합하다. 의료 분야에서는 레이저 메스로 대표되는 열 효과의 이용이 주였는데, 최근에는 다음 단계로 크게 진전되려 하고 있다. 이것은 광화학 반응을 이용하여 살세포 효과(殺細胞效果)를 얻으려는 것으로, 암 치료에 큰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체내에 HpD 라는 색소를 주입하면 암세포만이 반응한다. 왜 암세포만이 반응하는지 그 얼개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반응이 생겼을 때 이 색소에 흡수되기 쉬운 레이저를 조사(照射)하면 암세포의 발육을 저지하고, 살세포 효과가 있는 물질이 생성되어 암이 치료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레이저를 치아에 조사하는 것만으로 치통을 멎게 한다든지, 이의 치료를 무통(無痛)으로 하는 방법도 고안되었다. 또한 흥미로운 일은 어떤 레이저를 이에 조사하면 치수(齒髓)의 반응성에 2차적인 석회화(石灰化)가 생긴다는 것을 발견한 것인데, 이것은 장차 충치 치료 방법을 크게 바꿀 가능성이 있다. 레이저에 의한 무통 치료의 경우도 왜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레이저라고 하면 이제까지는 열 효과면만이 강조되어 왔지만, 앞으로는 좀 더 다른 면에서의 응용이 적극적으로 연구, 개발되어 갈 것이다. 치료 목적 이외의 검사에도 레이저가 이용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응용이 기대되고 있다. 살인 광선 이기는 커녕 인류를 살리는 빛으로서 크게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고 있는 분야로 레이저 계측(計測)이 있다. 과거에는 미리 알고 있는 두 점 사이를 맺는 선과 측정하고자 하는 지점과의 각도를 바탕으로 거리를 측정하여 지도를 만들었는데, 레이저 계측법은 측정하고자 하는 지점에 반사경을 놓고, 바닥점에서 레이저 광을 발사하여 되돌아오는 시간으로 거리를 구하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정밀을 요하는 지도 작성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이테크 산업이라 하여 각국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오늘날의 최첨단 기술 중에서도 광기술(光技術)에 거는 기대는 매우 크다. 마침내 실용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광통신의 주역도 레이저와 광파이버이다. 전기 신호 대신 빛의 신호를 통해서 먼 곳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보낼 수 있는 정보량은 종래의 방법에 비하여 엄청나게 크며, 또한 빨라졌다. 개발에서부터 불과 35여 년 동안에 레이저는 눈부시게 그 영역을 넓혀 왔고, 바야흐로 새로운 인공 태양 까지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핵융합의 실험이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실용화가 뛰어난 레이저의 연구 개발은 종래의 산업, 의료, 계측, 통신 등의 분야를 일신하고, 과학사에 획기적인 한 페이지를 더해 줄 것이다. 세계레이저학술원 레이저 아트 홀로그래피 반도체 레이저 수직 캐비티 표면 광방출 레이저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지향성에너지 무기 분류:양자광학 |
온실 효과 Loa CO2 monthly mean concentration.svg|thumbnail|right|200px|마우나로아 관측소에서 측정한 대기 이산화탄소 축적량의 키일링 곡선. 온실효과 (溫室效果)는 태양의 열이 지구로 들어 와서 나가지 못하고 순환되는 현상이다. 태양에서 방출된 빛 에너지는 지구의 대기층을 통과하면서 일부분은 대기에 반사되어 우주로 방출되거나 대기에 직접 흡수된다. 그리하여 약 50% 정도의 햇빛만이 지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 지표에 의해 흡수된 빛 에너지는 열에너지나 파장이 긴 적외선으로 바뀌어 다시 바깥으로 방출하게 된다. 이 방출되는 적외선은 반 정도는 대기를 뚫고 우주로 빠져나가지만, 나머지는 구름이나 수증기,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 효과 기체에 의해 흡수되며, 온실 효과 기체들은 이를 다시 지표로 되돌려 보낸다. 이와 같은 작용을 반복하면서 지구를 덥게 하는 것이다. 실제 대기에 의해 일어나는 온실 효과는 지구를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주는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만약 대기가 없어 온실 효과가 없다면 지구는 화성처럼 낮에는 햇빛을 받아 수십도 이상 올라가지만, 반대로 태양이 없는 밤에는 모든 열이 방출되어 영하 100℃ 이하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나쁜 영향으로 많이 거론되는 온실 효과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일부 온실 효과를 일으키는 기체들이 과다하게 대기 중에 방출됨으로써 야기될지 모르는 이상 고온에 따른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온실 기체 중에서 온실효과에 기여하는 정도를 4가지 주요 기체로 분류하였다 수증기 72% 이산화탄소 9% 메테인 4% 오존 3% 지구 온실 효과에 기여하는, 기체가 아닌 주요 물질인 구름은 적외선 복사를 흡수하고 방출하므로 대기의 방사성 특성에 영향을 준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매년 그 양이 늘어나고 있다. 인간이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사용하게 된 화석연료에 의해 그 양은 크게 늘었다. 1750년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31%가 늘어나서 2003년에는 376ppm의 양이 대기 중에 존재했다. 이는 남극 빙하 속의 이산화탄소 양을 통해 측정한 과거 65만년 동안의 어느 시대에서보다 높은 양이다. 온실기체로 봤을 때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를 그다지 유발하지 않는 편에 속하며, 같은 농도의 메테인에 비해 20배 정도 그 효과가 약하다. 현재 연간 2억 5천만 톤이 대기 중으로 배출된다. 메테인은 화석연료를 태울 때에도 발생하지만, 비료나 논, 쓰레기더미에서도 발생하고, 심지어는 초식동물이 풀을 소화시킬 때 호흡에서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고 식량 생산을 늘려 나가는 과정에서 대기 중에 메테인이 늘어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툰드라 지방의 땅이 온난화로 인해 따뜻해지면 메테인을 방출할 것이라는 이론과, 해저에도 메테인가스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론이 있지만 이러한 이론은 아직 명확하게 입증되어 있지 않다. 수증기는 대기 중에 대단히 많은 양이 존재하며, 흡수할 수 있는 열량 역시 이산화탄소나 메테인에 비해서도 대단히 크다. 하지만 수증기는 구름을 이루어서 태양빛을 반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어떻게 수증기가 온실효과에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또한 대기 중의 수증기량을 인위적으로 제어할 방법은 현재로썬 없다. 태양의 열은 지구에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것이다. 그 열은 지구 복사열이라 한다. 그러나 온실가스의 증가로 온실가스가 지구를 둘러싸게 되었다. 그 이유로 지구에 막이 생겼으며 태양의 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온실가스는 지구의 대기 속에 존재하며, 땅에서 복사되는 에너지를 일부 흡수함으로써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기체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증기, 이산화탄소, 메테인이 있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화석연료의 연소로 발생된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많아지게 됨으로써, 대기 중 온실가스가 늘어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구 온난화가 심각한 환경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지구 온난화 온실 가스 금성의 대기 온실 기체 발산량에 따른 나라 목록 분류:기후 변화 분류:환경 분류:대기 분류:지구 온난화 |
몰바이데 투영 도법에서의 월간 지표면 기온을 나타낸 세계 지도. 온도 (溫度, , 는 물질의 뜨겁고 찬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온도는 물리학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물리량 중 하나이다. 온도는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된다.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는 온도의 경험적인 개념과, 독립적인 온도의 존재성을 보장하는 열역학 법칙중 제 0법칙에 기초한다.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는 온도의 기준을 통해 만들어진 온도계로 측정되는 값이다.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19세기 중반 열기관과 열역학에서 이어지는 통계역학이 발전되면서 에너지와 엔트로피간의 이해가 높아지면서 파생되어 나왔다.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에너지를 엔트로피로 편미분한 값으로 나타내지며, 다양한 기초적인 물리법칙과 근본적으로 관련되어있다.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계의 평형이 이뤄지지 않으면 정의할 수 없다. 온도의 국제 단위는 켈빈(K)이다. 켈빈은 물의 삼중점의 열역학적 온도의 1/273.16으로 정의된다. 일반적인 정의에 사용되는 온도 기준에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를 사용함으로써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라도 물리학적인 의미, 다양한 기초적인 물리법칙과의 관련성을 만들 수 있다. 온도의 개념은 우리의 경험에 비롯한 뜨겁고 차가움의 정도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뜨거운 물체와 차가운 물체를 접촉시키게 되면 뜨거운 물체로부터 차가운 물체로 자발적으로 에너지가 열의 형태로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온도의 개념은 "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려고 하는 성질의 정도 " 이며, 편의 상 온도가 높을수록 에너지를 많이 방출하려고 하는 성질이 크다고 정의한다. 겨울철에 기온을 측정하는 셀시우스 온도계. 일반적인 온도의 정의는 정해진 온도 기준에 의하여 만들어진 온도계에서 측정되는 값이다. 열역학 제 0법칙은 " 어떤 계 A와 B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고, B와 C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으면, A와 C도 열평형상태에 있다. "이다. 이는 앞서 말한 온도의 개념을 생각해본다면 온도, 즉 "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려고 하는 성질의 정도 "가 외부에 접촉한 계와 상관없이 독립적인 물리량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준이 되는 계 몇 개를 정하고 다른 계들을 그 계와 접촉시켜 열이 흐르는 방향을 봄으로써 계의 온도의 상대적인 높낮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대적인 높낮음을 절대 온도( K)나 섭씨 온도( °C)와 같이 기준을 만들어 정한다면 어떠한 계의 온도는 그 기준 내에서 이론적으로 정의가 된다. 온도의 기준과 온도에 따른 부가적인 성질들(알코올의 부피증가, 흑체복사 등)을 통해서 온도계를 만들 수 있고, 온도의 일반적인 정의는 "정해진 온도의 기준에 의하여 만들어진 온도계에서 측정되는 값"이라고 할 수 있다. 온도의 일반적인 정의는 그 자체로 다음을 보장한다. 첫째, 온도가 다른 물체를 열 교환이 일어날 수 있도록 접촉시켰을 때 온도가 높은 물체에서 낮은 물체로 자발적으로 열이 흐르게 된다. 둘째, 두 물체가 충분한 열 교환을 통해서 열 평형에 이르렀을 때 두 물체의 온도는 같게 된다. 온도의 일반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은 개념에서 애매모호함이 있다. 첫째, 온도의 일반적 정의는 절대적 물리량으로서의 온도의 존재성을 보장하는 열역학 제 0법칙 " 어떤 계 A와 B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고, B와 C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으면, A와 C도 열평형상태에 있다. "을 근본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즉,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는 열역학 제 0법칙에 기초해야한다. (반면 뒤에 열역학적 정의는 열역학 제 0법칙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열역학적 정의는 오히려 열역학 제 0법칙을 증명할 수 있다) 둘째, 일반적인 온도를 정의함에 있어서 온도의 상대적인 높낮음을 통해서 온도의 기준을 정의하였는데, 그 기준에 물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즉 일반적인 온도의 온도기준은 온도의 상대적인 높낮음에 순서를 나타낼 뿐 물리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내부적으로 열 평형 상태에 이른 물리적 계의 열역학적 온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또는 온도의 열역학적 정의는 일반적인 정의가 보장하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잘 보장한다. 온도가 다른 물체를 열 교환이 일어날 수 있도록 접촉시켰을 때 온도가 높은 물체에서 낮은 물체로 자발적으로 열이 흐르게 된다. 두 물체가 충분한 열 교환을 통해서 열 평형에 이르렀을 때 두 물체의 온도는 같게 된다. 내부적으로 열 평형 상태에 있는 두 계 A,B가 접촉되어있어 열 교환이 자유롭게 일어난다고 하자. 열역학 제 2 법칙에 따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계의 엔트로피의 합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열이 이동하며 열 평형상태에 도달하였을 때 전체 엔트로피는 최댓값에 도달한다. 각 계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Ua , Ub 라고 하자. 계 B로부터 계 A로 미소 에너지 흐름 dQ 이 발생하였다고 할 때 dUa 와 dUb , dStotal 은 다음과 같다. 두 계가 열 평형을 이루고 있을 때 총 엔트로피는 최댓값을 가지므로 미소 dQ에 대하여 dStotal 가 0이어야 한다. , 평형상태에서 따라서, 위 식은 두 계가 열 평형에 있을 때 두 계의 온도는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 온도의 일반적인 정의와 열역학적 정의가 둘 다 필요한 이유 === 정해진 온도 기준에 기반하는 일반적인 온도의 정의는 19세기 중반 열역학이 발전하여 온도와 열, 엔트로피에 대한 이해가 되기 전까지 확립이 되었다. 이때의 온도의 기준은 보통 열용량, 부피팽창, 흑체복사등에 기초하여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하지만 관계가 있는 물리량들에 기초하여 선형적으로 정의를 하였다. 반면 열역학이 발전하면서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일반적인 온도의 정의와 다르게 그 자체로 기초적인 물리법칙과 물리량에 연관이 되어 물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일반적인 온도의 정의와 다르게 그 자체로 물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이론에 기초하여 정의가 되므로 실제로 정확하게 측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일반적인 온도를 정의할 때 사용되는 온도 기준을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에서 따온다면 그렇게 정의된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는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와 같이 물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와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의 상호적인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BC 485년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그의 논문 에서 프리멈 프리지덤(primum frigidum)이라는 가상의 물질을 만들어 이것이 세상의 모든 냉각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의 논문을 온도에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702-1703년 길리암 아몬톤(Guillaume Amontons)은 외삽법을 통해 기압이 0이 될 때는 열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 때의 온도를 0으로 한 아몬톤 온도를 만들어 절대 온도의 개념을 만들고자 한다. 실제로 그가 만든 아몬톤 온도에서의 절대 0도는 지금의 섭씨 온도로 환산하면 -240 °C 정도로 현재의 절대 온도로 쓰이는 -273.15 °C와도 33.15 °C의 차이만을 보인다. 온도를 정의하기 위해서 과거의 과학자들은 고정점(Fixed point)의 필요성을 느꼈다. 고정점(Fixed point)이란 온도의 기준점이 될 수 있도록 항상 같은 온도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을 말한다. 고정점에 따라서 온도의 기준이 달라지므로 고정점에 따라서 온도의 정의도 달라졌다. 각자의 고정점과 방법으로 온도를 정의하려 한 과학자들을 살펴보자. 인물 연도 제시한 고정점 산크토리우스(Sanctorius) 1600 촛불의 불꽃과 눈 아카데미아 델 시멘토(Accademia del Cimento) 1640 가장 추운 겨울의 추위와 가장 더운 여름의 더위 오토 본 게리크(Otto Von Guericke) 1660 첫 서리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63 증류수의 냉각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65 증류수의 냉각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 1665 물의 응고와 기화 호노르 파브리(Honore Fabri) 1669 눈과 최고의 여름 더위 프란세스코 에스치나르디(Francesco Eschinardi) 1680 얼음의 융해와 물의 기화 호아침 달렌스(Joachim Dalence) 1688 물의 응고와 버터의 융해 또는 얼음과 지하고 에드먼드 헬리(Edmond Halley) 1693 깊은 동굴과 끓어오르는 영혼 카를로 레날디니(Carlo Renaldini) 1694 얼음의 융해와 물의 끓음 아이작 뉴턴(Issac Newton) 1701 눈의 융해와 혈액의 열 길라암 아몬톤(Guilaume Amontons) 1702 끓는 물 올레 뢰머 1702 눈과 염의 혼합물과 끓는 물 필리프 데 라 이레(Phillippe de la Hire) 1708 어는 물과 파리 천문대의 지하고 다니엘 파렌하이트 1720 얼음, 물, 염의 혼합물 & 얼음, 물 혼합물 & 건강한 체온 존 파울러(John Fowler) 1727 어는 물과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가장 뜨거운 물 레아무어(R.A.F. de Reamur) 1730 어는 물 조제프 니콜라스 드 이슬레(Joseph-Nicola D l’Isle) 1733 끓는 물 안데르스 셀시우스(Anders Celsius) 1741 얼음의 융해와 끓는 물 J. B. 미켈리 두 크레스트 1741 파리 천문대 지하고와 끓는 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771 어는 물과 밀랍 안드레스 셀시우스(Anders Celsius, 1701년 ~ 1744년) 안데르스 셀시우스(Anders Celsius)는 최초로 국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준 온도 단위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는 그의 논문 에서 물의 어는점은 기압에 무관하지만 끓는점은 기압에 의존한다는 실험 관찰 결과를 밝힌다. 현대의 측정 결과와 비교해봐도 손색없을 정도로 그의 측정은 정확했으며 표준 기압에서 벗어나는 압력에 의한 온도 변화를 보정할 수 있는 방법도 고안하여 온도의 단위를 제시했다. 그는 그의 온도를 스웨덴의 웁슬라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Sciences in Uppsala)에 제안하여 물의 끓는점을 0 °C로, 어는 점을 100 °C로 정의했다. 하지만 이후 1745년에 칼 리네우스(Carolus Linnaeus)에 의해 편의상 물의 어는점이 0 °C로, 끓는 점이 100 °C로 바뀌어 정의된다. 1777년 요한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는 그의 저서 피로메트리에(Pyrometrie)에서 일정한 부피를 가진 기체에서의 압력과 온도의 관계를 이용한 절대 온도계를 만들었다. 이 온도계를 이용해 람베르트는 기체의 압력이 0에 다다랐을 때의 온도를 절대 영도로 정의하고 외삽법을 통해 절대영도를 -270 °C라는 현대의 값과 매우 가까운 값을 얻어낸다.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 (독일어 Daniel Gabriel Fahrenheit, 1686년~1736년) 1724년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는 세 가지 고정점을 이용했다. 가장 먼저 얼음, 물, 염화암모늄으로 이루어진 혼합물이 평형을 이뤘을 때의 온도를 0 °F로 정의했다. 물의 어는 점을 두 번째 고정점, 32 °F로 이용했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고정점, 96 °F는 사람의 체온으로 정의했다. 이후에 파렌하이트는 자신의 온도를 이용하면 600도 부근에서 수은의 끓는점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물은 어는점보다 약 180도 높은 온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파렌하이트가 정의했던 온도에서는 물의 끓는점이 32도보다 약 180도보다 높은, 애매모호한 온도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훗날에는 물의 끓는점이 212 °F가 되도록 화씨 온도가 새롭게 정의됐다. 이렇게 고정점을 기준으로 온도를 정의했기 때문에 기준으로 삼은 자연 현상이나 상태는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1776년 런던 왕립학회에서는 온도를 정의하는데 필요한 고정점들에 대한 제안받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한다. 물이 끓는 현상을 고정점으로 하는 과학자들이 당시에도 많았는데 물의 끓음 현상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먼저, 물의 끓음 현상은 기압에 의존했기 때문에 기압에 대해서는 고정이 되지 안 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왕립학회의 위원회에서 제안된 것은 29.8inHg( 0.996atm)의 기압을 기준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온도계 내부의 열 전달 문제였다. 당시에는 수은온도계가 사용됐었는데 온도계의 구부에 있는 수은의 온도와 온도계의 수은기둥의 수은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측정하고자 하는 온도가 측정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런던 왕립학회는 온도계를 구부는 물론이고 온도계 전체를 물에 담그면 된다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제안 안드레 데루크 (Jean-André Deluc or de Luc,1727년~1817년)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물이 정확히 고정된 온도에서 끓는 것이 아니라 끓으면서 온도변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온도에 따라서 그 끓음의 정도도 다르게 나타났다. 스위스의 지질학자이자 기상학자였던 제안 안드레 데루크(Jean-Andre Deluc)는 “물이 끓기 시작할 때, 물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열을 가지고 끓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전체, 즉 용기의 바닥부터 물의 표면까지 가장 격렬한 상태로 끓어야 한다. 물이 끓기 시작할 때부터 가장 격렬하게 끓는 상태까지 물의 온도는 1도 이상의 열을 흡수한다”고 얘기했다. 데루크(Jean-Andre Deluc)를 비롯하여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 프랑코이 마르셋(Francois Marcet), 프랑코이 마리에 루이(Francois Marie Louis), 루이 듀포어(Louis Dufour), 조지 크렙스(Georg Krebs)가 물의 끓음 현상과 온도의 관계를 탐구했다. 이들 모두 일반적으로 정의된 끓는점은 물이 정확하게 끓게 하는 온도가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실제로 어떤 상태로 물이 끓는지에 관해서는 모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끓음 현상은 이후에도 고정점으로서의 의미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는 끓는 점을 초과하는 온도에서도 완전한 끓음이 시작되면 온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끓는 점을 초과하는 온도에서 끓는 현상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물을 끓임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다. 물의 끓음 현상을 고정점으로 사용하면서 끓음 현상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끓어서 생긴 수증기의 온도를 재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1777년 헨리 캐번디시는 “끓는점을 보정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온도계를 물에 넣는 것이 아니라 닫혀 있는 용기의 수증기에 노출시키는 것이다.”라고 했으나 같은 해에 이에 대해 데루크(Jean-Andre Deluc)은 “이론적인 것을 떠나, 수증기와 물은 수증기가 생성되기 전에 섞여 있기 때문에 서로의 온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수증기의 온도를 측정하는 것이나 물의 온도를 측정하는 것이나 그 문제점은 그대로 드러난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1842년에 프랑코이 마르셋(Francois Marcet)은 물은 105 °C에서도 끓지만 증기의 온도는 이 때 1 °C범위 내에서 초과한다는 실험을 통해 증기의 온도를 재는 방법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이후로 게뤼사크를 비롯하여 프랑코이 마르셋(Francois Marcet), 루이 듀포어(Louis Dufour), 마셸 에밀레 베르뎃(Marchel Emile Verdet), 데시르 게르네즈(Desire Gernez), 샤를 톰린슨(Charles Tomlinson) 등의 사람들의 다양한 방법으로 온도와 물의 끓음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80~1881년에 존 에이켄(John Aitken)은 수증기의 온도는 물의 끓는 온도만큼이나 불안정하게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존 에이켄(John Aitken)에 따르면 증기의 온도가 안정된 고정점처럼 보였던 이유는 공기 중의 먼지 때문이었고 먼지가 걸러지면 물의 끓는점을 측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였다. 이후 데루크(Jean-Andre Deluc)의 제안대로 의해 온도를 수은온도계로 재는 것을 정의로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후에는 온도를 열소론으로 정의하려는 윌리엄 어바인(William Irvine), 레느 저스트 하위(René Just Haüy),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등이 등장했다. 윌리엄 어바인(William Irvine)은 열소(caloric)이라는 물질이 열의 원인 또는 열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열소의 양은 열용량과 절대온도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따라서 열용량은 물체가 열소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으로 정의했고 절대온도는 열소의 정량적인 값으로 정의했다. 잠열은 열용량이 변할 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열로 정의했다. 이후 1808년 존 돌턴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을 때 부피의 합보다 합쳐진 부피가 작기 때문에 열용량이 작아져 열소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온도가 상승하게 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1743~1794) 이후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는 결합 열소(combined caloric)를 물질과 화학적으로 결합된 열소로 온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열소로 분류했고 자유 열소(free caloric)를 물질과 결합되지 않은 열소로 온도에 영향을 주는 열소로 분류했다. 레느 저스트 하위(René Just Haüy)는 1803년 (Elementary Treatise on Natural Philosophy)에서 물체가 열을 받아 팽창할 때 부피 팽창은 결합 열소 때문이고 온도 상승은 자유 열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낮은 온도에서는 분자간 거리가 작아 더 큰 인력이 필요하므로 결합 열소가 더 많이 결합되어야 한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1749~1827) 1821년에는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결합 열소를 분자에 결합된 열소로 척력이 작용하지 않는 열소로 재정의했고 자유 열소는 분자에 결합된 열소로 척력이 작용하는 열소로 정의했다. 공간의 자유 열소는 물질에 결합하지 않은 열소이고 최종적으로 온도는 공간에 존재하는 자유 열소의 밀도로 정의했다. 온도에 대한 역학적 이론들이 등장을 하는데 이 이론들은 열을 입자들의 움직임으로 해석했다. 벤저민 톰프슨(Benjamin Thompson)은 분자들은 고정점들에 대해 진동을 하고 있고 온도는 이 진동의 진동수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진동하는 분자들은 에너지 손실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0°가 되는 온도도 없다고 주장했다. 존 헤라패스(John Herapath)는 온도가 분자의 속도에 비례한다고 주장했지만 존 와터슨(John Waterston)은 온도가 분자의 에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1746~1823) 1802년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은 일정한 압력에서 온도에 따른 기체의 부피 변화를 연구한다. 그는 그의 발견을 출판하지 않았지만 기체의 온도와 부피가 선형적으로 비례한다는 샤를의 법칙을 발견한다.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은 실험 자료를 바탕으로 절대 영도가 -273 °C에 있을 것이라 예측했고 기체 팽창 계수에 대해 처음으로 273이라는 수를 쓰기 시작했다.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Nicolas Léonard Sadi Carnot, 1796 ~ 1832) 카르노 순환의 압력-부피 그래프 1824년에 사디 카르노는 고온에서 저온으로 열이 흐르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열기관을 고안해낸다. 이 열기관은 카르노 순환을 따르는데 카르노 순환이란 과정 1에서 기체가 고온 A에서 열을 받아 등온 과정을 거쳐 팽창하며 과정 2에서는 A를 제거하고 단열 과정을 거쳐 팽창한다. 그 다음 과정 3에서는 저온 B에 열을 내보내며 다시 등온 과정을 거치며 수축한다. 마지막으로 과정 4에서는 B를 제거한 후 단열 과정으로 수축시켜 다시 초기 상태로 되돌리고 이 순환과정을 카르노 순환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카르노 순환을 따르는 열기관의 효율은 고온의 온도와 저온의 온도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보인다.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st Baron Kelvin, 1824년~1907년) 앞선 아몬톤의 시도, 카르노와 클레이페론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1848년에 윌리엄 톰슨은 절대온도를 물질에 관계없이 1도를 카르노 순환에서 단위일을 하는데 필요한 열의 양으로 정의한다. 이 때 제임스 줄은 열과 일이 상호변환 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열기관에서 고온에서 열기관으로 흘러들어온 열은 일부 일로 변환되고 남은 열이 저온으로 흘러나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854년에 톰슨은 이를 받아들여 카르노의 이론을 재정립하고 절대 온도에 대한 두 번째 이론을 만들어낸다. 윌리엄 톰슨은 그의 논문 (On the Thermometric Scale)에서 절대 영도의 정의와 그를 기준으로 한 온도 단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는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과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의 앞선 연구에서 얻어낸 온도에 따른 기체의 팽창 계수 0.00366의 역수에 음의 값을 취한 -273.22 °C를 절대 영도로 정의하고 섭씨 온도의 눈금 크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온도의 단위를 만들고 이를 켈빈이라 정의했다. 윌리엄 랭킨(William John Macquorn Rankine)은 윌리엄 톰슨의 온도 단위와 거의 같은 온도를 정의했으나 그는 섭씨 온도의 눈금 크기를 사용하는 대신 화씨 온도의 눈금 크기를 사용했다. 1930년대에 기체의 온도에 따른 부피 팽창 실험을 정밀하게 한 결과 물의 어는점을 0 °C라 했을 때 절대 영도는 -273.15 °C로 나타났다. 1948년 제 9회 국제 도량형 총회(CGPM Conférence Générale des Poids et Mesures, General Conference on Weights and Measures)의 세 번째 안건에 따르면 물의 삼중점을 정확히 0.1 °C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후 1954년 제 10회 국제 도량형 총회의 세 번째 안건에 따르면 캘빈 온도의 눈금 크기를 확립하기 위해서 물의 삼중점(0.01 °C)을 273.16K으로 약속했다. 즉, 물의 어는점과 삼중점의 온도차를 0.1K으로 약속한 것이다. 1967-1968년 제 13회 국제 도량형 총회의 네 번째 안건에서는 캘빈 온도의 눈금 크기를 물의 삼중점의 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제 도량형 위원회(CIPM Comité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sures, International Committee for Weights and Measures)는 엄밀한 정의를 위해 비엔나의 표준 물(Vienna Standard Mean Ocean Water)과 같은 성분을 가진 물의 삼중점을 273.16K으로 정의했다. 분자의 병진운동 충분히 큰 계(통계역학적으로 충분한 입자 수를 갖추고 있는)의 열역학적 온도는 입자들의 병진운동 속도의 평균 평방근에 비례한다. 입자의 병진운동은 x,y,z 총 세 개의 자유도를 통해 움직인다. 이 특정한 형태의 운동에너지를 역학적 온도라고도 정의한다. 병진운동은 열역학적 온도뿐만 아니라 압력과 부피에도 관계를 가지는데, 특히 이상기체에서 이상기체 상태방정식 를 유도해 낼 수 있다. 병진 운동에너지 뿐만이 아니라 진동운동이나 회전운동과 같이 에너지가 미시상태를 나타내는 변수의 제곱에 비례하는 자유도일 경우 그 자유도가 가지는 한 입자의 평균 에너지는 다음과 같이 온도와 볼츠만 상수의 곱의 절반으로 정해지게 된다. 이는 에너지 등분배법칙 :“이차식 형태 에너지의 한 자유도에 대한 평균 에너지는 이다.” 으로, 고전적 통계역학의 가장 중요한 결과중 하나이다. 이는 온도와 계의 운동에너지의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온도에 따른 플랑크곡선 온도를 가진 물체가 다른 온도를 가진 물체와 열 교환을 하는 방식에는 전도, 대류, 복사 이렇게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전도는 열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두 계의 분자들이 직접 충돌하여 에너지를 교환하는 방식이고, 대류는 온도가 다른 두 계에서 분자들이 직접 움직이며 섞임으로써 에너지를 교환하는 방식이다. 복사는 분자들이 가진 온도에 의해 방출되는 빛을 통해 에너지를 교환하는 방식인데, 이상적인 흑체의 경우에는 진동수 혹은 파장에 따른 빛의 세기는 플랑크 법칙을 따른다. 온도가 T인 흑체에서 방출되는 복사에서 진동수가 ν이고 파장이 λ인 빛의 세기는 다음과 같다. 온도는 물리학 외의 다른 과학 분야에서도 많이 쓰이는 물리량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화학에서의 반응속도, 생물학에서의 효소의 활성온도, 천문학에서의 천체의 표면온도 등이 있다. 아래는 화학에 대한 내용이다. 화학반응의 자발성은 기브스 자유 에너지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식은 아래와 같다. 따라서 온도에 따른 엔탈피 변화량과 엔트로피 변화량이 주어져 있다면 어떤 특정 온도에서 그 반응의 자발성을 예측할 수 있는데, 이면 정반응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이면 역반응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면 반응은 평형 상태에 있게 된다. 위와 같은 화학반응에서 반응속도는 아래와 같다. 여기에서 A는 A의 몰 농도, B는 B의 몰 농도이고, k는 반응속도상수라고 한다. 반응속도상수는 온도에 의존하는 값인데, 아레니우스 식에 의해 결정된다. 은 기체 상수, 는 반응이 일어날 때의 절대온도, 는 반응의 활성화 에너지, 그리고 는 빈도계수 또는 빈도인자라고 한다. 따라서 온도가 증가할수록 반응속도상수가 증가한다. 효소는 생명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단백질 촉매이다. 촉매 작용을 하는 원리는 기질과 결합하여 촉매-기질 복합체를 형성함으로써 화학 반응의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어 반응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효소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온도가 변하면 단백질이 변형되어 기질과 잘 결합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효소의 활성도는 온도에 의존한다. 인체 내부에 있는 아밀라아제는 α-아밀라아제인데, 최적온도는 체온 부근이다. 반면에 β-아밀라아제의 경우에는 박테리아, 곰팡이, 그리고 여러 식물들에 존재하는 효소인데, 최적온도는 약 섭씨 60도 부근이다. 이처럼 같은 효소라 할 지라도 구조가 다르면 최적온도가 다를 수 있다. 천문학에서 온도는 천체를 종류별로 분류하는 데에 쓰이거나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복사의 종류를 나타낼 때 쓰인다. 천체들은 모두 흑체로 가정하며, 천체를 온도별로 분류하는 방법은 Harvard spectral classification이 있다. 주로 쓰이는 온도의 종류에는 아래와 같이 네 가지가 있다. 별에서 방출되는 플럭스를 전 파장에 걸쳐 합친 플럭스, 즉 관측된 전체 플럭스와 동일한 양의 플럭스를 방출하는 흑체의 온도를 유효온도라고 한다. 따라서 유효온도는 아래와 같이 된다. 두 파장 대에서 관측된 복사 세기의 비와 동일한 비의 복사를 방출하는 흑체의 온도를 색온도라 한다. 위의 식은 플랑크 법칙에 따른 것이며 식을 따르는 가 바로 천체의 색온도가 된다. 밝기온도는 관측된 표면 밝기와 동일한 밝기를 가지는 흑체의 온도이다. 위 식을 만족하는 가 바로 천체의 밝기온도이며, 우변은 플랑크 법칙을 통해 계산할 수 있다. 일정한 온도를 가지는 분자들은 열운동을 한다. 그 열운동에 의해 생기는 속도 때문에 분자들 사이에 속도 차이가 생기게 되고, 도플러 효과가 생기는데 이 효과를 열적 도플러 확장이라 한다. 열적 도플러 확장에서 파장 변화는 다음과 같은 식에 의해 계산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계산된 분자들의 열운동에 의한 속도 차이는 분자들의 평균 속력 또는 평균 평방근(root mean square) 속력의 두 배가 된다. 그 속도 차이가 평균 평방근 속력의 두 배라고 가정한다면 기체 분자의 운동에너지 식에 따라 운동온도는 아래와 같이 된다. 온도 흑체복사시 최대의 에너지를 가지는 파장 K °C 절대온도 0 K −273.15 °C 정의될 수 없음 인간이 도달한 최소 온도 100 pK −273.149999999900 °C 29,000 km 가장 차가운 보스 아인슈타인 응축(Bose-Einstein condensation) 450 pK −273.14999999955 °C 6,400 1 mK 0.001 K −273.149 °C 2.89777 m(radio, FM band) 물의 삼중점 273.16 K 0.01 °C 10,608.3 nm(long wavelength I.R.) 물의 끓는점 373.1339 K 99.9839 °C 7,766.03 nm(mid wavelength I.R.) 백열전구 2500 K ≈2,200 °C 1,160 nm(near infrared) 태양의 표면 5,778 K 5,505 °C 501.5 nm(green-blue light) 번개 28 kK 28,000 °C 100 nm(far ultraviolet light) 태양의 핵 16 MK 16 million °C 0.18 nm (X-rays) 열핵폭탄 350 MK 350 million °C 8.3×10−3 nm(gamma rays) 거대한 별의 폭발 전 핵 3 GK 3 billion °C 1×10−3 nm(gamma rays) 대형중이온충돌기 1 TK 1 trillion °C 3×10−6 nm(gamma rays) CERN의 양성자 vs 핵 충돌 10 TK 10 trillion °C 3×10−7 nm(gamma rays) 빅뱅 후 5.391×10−44 s 뒤의 우주 1.417×1032 K(Planck tempearature) 1.417×1032 °C 1.616×10−26 nm(Planck Length) 알코올 온도계 온도를 측정하는 기구를 온도계라고 부른다. 온도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나눠보면 일반적으로 온도를 감지하는 측온부 (온도검출단)와 측온부에서 감지한 온도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표시부(수신계기), 측온부와 표시부를 연결시켜 주는 도선 또는 배관으로 이뤄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액체 글라스 온도계와 같이 측온부와 표시부가 일체형으로 된 것도 있다. 온도계는 측정 방법에 의해 측온부를 피측정 물체에 직접 접촉시켜 온도를 측정하면 접촉법, 그리고 접촉시키지 않고 측정하면 비접촉법으로 분류한다. 바이메탈식 온도계 열은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하고, 온도가 두개 이상의 물체에 접촉시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접촉된 물체들은 온도가 같게 되는 열평형 상태를 이루게 된다. 즉, 열역학 제 0법칙에 의해, 임의 두 물체가 각각 제3의 물체와 열평형을 이룬다면 임의 두 물체도 열평형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온도를 측정하고자 하는 피측정 물체에 측온부를 접촉시켜 피측정 물체와 측온부가 열평형 상태에 이르렀을 때 감온부의 변화량을 측정함으로써 피측정 물체의 온도를 감지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에 의한 온도 계에서는 감온부와 측정대상의 접촉의 정도에 따라 측정정도 크기가 좌우된다. 그래서 측온부를 측정대상에 접촉 할 수 없는 경우는 측정이 불가능하며, 접촉에 의해서 측정대상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경우는 큰 오차가 생긴다. 이와 같이 접촉방식을 이용한 온도계로는 유리제온도계, 압력식온도계, 열전대, 바이메탈식 온도계, 저항식 온도계 등이 있다. 피측정 물체에 감온부를 직접 접촉하지 않는 상태에서 피측정 물체로부터 나오는 빛 또는 열을 감지하여 온도와 빛, 열 에너지와의 일정한 관계를 이용하여 온도를 측정하는 측정방식이다. 측정대상으로부터 방출된 에너지의 강도는 절대온도의 4승에 비례하기 때문에 1000 ℃ 이하의 온도 범위에서는 측정정도가 나쁘나, 장점으로는 움직이는 피측정 대상 및 검출하고자 하는 대상이 보이기만 하면은 쉽게 접촉하지 않고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 비접촉 방식에 의한 온도계측에 사용되는 것으로는 방사온도계,광고온계,색온도계,적외선온도계(열선) 등이 있다. 온도의 단위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현재 국제 표준화 기구(ISO) 에서는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 SI)로 켈빈(K)을 사용하고 있다. 켈빈(K)은 절대 온도를 측정하므로, 0K은 절대 영도(이상 기체의 부피가 0이 되는 온도)이다. 이뿐만 아니라 각자 측정방법에 따라 기준을 다르게 잡아 섭씨(℃), 화씨(°F) 라는 온도 단위도 있다. 섭씨온도는 1742년 스웨덴의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가 처음으로 제안하였으며 이는 1atm 에서의 물의 어는점을 0℃, 끓는점을 100℃로 두고 그 사이를 100등분 하여 정한 것이다. 화씨온도는 독일의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의 이름을 딴 온도 단위이며, 이는 1atm에서 물이 어는 온도를 32 °F, 물이 끓는 온도를 212 °F로 두고 이 사이의 온도를 180등분 하여 정한 것이다. 섭씨→화씨 °F = °C × (9/5) + 32 섭씨→켈빈 K = °C + 273.15 화씨→섭씨 °C = (°F - 32) x (5/9) 화씨→켈빈 K = (°F - 32) / 1.8 + 273.15 화씨→랭킨 °R = °F + 459.2 켈빈→섭씨 °C = K - 273.15 켈빈→화씨 °F = (K - 273.15) × 1.8 + 32 켈빈→랭킨 1 K= 1.8 °R 음의 온도란 절대 영도(0K)보다 낮은 온도를 말한다. 열역학 제3법칙에 따르면 절대 0도보다 낮은 온도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가능한 에너지의 상태가 제한되어 있는 전자와 핵의 스핀을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절대 영도보다 작은 음의 온도를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것은 거시적 관점에서의 온도에는 해당되지 않고, 에너지 등분배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를 서로 교환하거나 하지 않는 고립된 특별한 자유도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이다. 음의 온도는 바닥 상태에 있는 스핀들에 대해서 밀도 반전 (population inversion) 을 일으키는 “Radio Frequency Technique”를 통해서 실험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높은 에너지 준위를 가지는 상태의 수가 많아지면 계 전체의 에너지가 증가하고, 계의 무질서도가 증가하면서 엔트로피 또한 증가하게 된다. 결국 계 전체의 에너지가 일정 값이 되면 높은 에너지 준위를 가지는 상태의 수와 낮은 에너지 준위를 가지는 상태의 수가 같게 되어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고, 높은 에너지 준위를 갖는 상태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계 전체의 에너지가 증가하면 계의 상태가 정돈되고, 엔트로피가 다시 낮아지게 된다. 따라서 계의 총 에너지와 엔트로피에 대한 그래프는 위로 볼록한 함수의 꼴을 띠게 된다. 여기에서 온도의 열역학적 정의에 따라 이고, 극대점에서 그래프의 기울기는 0이므로 극대점에서 온도는 특이점(singularity)이 된다. 또한 극대점 이후에서는 그래프의 기울기는 음이므로 이 부분에서는 음의 온도가 생긴다. 계의 에너지가 계속 커지면 음의 온도는 0에 수렴하게 된다. 밀도 반전 상태에서 생기는 음의 온도는 에너지가 높은 상태이므로 양의 온도보다 오히려 더 뜨거운 상태이며, 음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계와 양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계가 접촉을 하게 된다면 음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계의 에너지가 양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계로 흘러갈 것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주거환경은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한 생활양식과 함께 개선되어왔다. 체온조절의 부담이 가장 적은 온도, 다시 말하면 덥지도 춥지도 않는 최적온도는 18℃ 정도이며, 15.6~20℃ 정도에서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주변환경으로부터 쾌적함을 유지하려면 온도 외에도 습도를 고려해야 하는데, 습도가 30% 미만이거나 80% 이상이면 좋지 않고, 약 40~60% 정도면 대체로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쾌적함을 주는 습도는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15℃에서는 약60%정도, 18~20℃에서는 약50%, 21~23℃에서는 약40%, 24℃ 이상에서는 대략 35%정도에서 적당한 습도로 여겨진다. 사람이 느끼는 춥고 덥다는 감각은 겨울은 추위에 대하여, 여름은 더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또 같은 기온이라 하더라도 봄에는 가을보다 보통 두껍게 옷을 입고 있는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사항들이 복합되어 최적온도는 겨울에는 낮아지고 여름에는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체온조절을 위한 온도만큼이나 습도는 면역력을 유지하고 건강한 신체활동을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할수있다. 한편 겨울철 실내온도에 대한 적정 온도는 18℃~20℃라고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발표한바있는데 이 역시 외부 온도와의 차이 그리고 내복이나 방한용품 착용을 활용한 체온조절 그리고 쾌적한 습도의 유지가 용이함등 현대적으로 개선되어온 과학적인 생활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국립환경과학원은 환경시험기준에서 온도표시에대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사용하고있다. 온도표시 온도 범위 비고 냉수 15 ℃ 이하 상온 15 ℃ ∼ 25 ℃ 온수 60 ℃ ∼ 70 ℃ 열수 약100℃ 끓는물 국제 도량형 총회 기온 기브스 자유 에너지 끓는점 대류 앙투안 라부아지에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 맥스웰의 도깨비 볼츠만 상수 사디 카르노 삼중점 색온도 섭씨 어는점 에너지 등분배법칙 에너지 엔탈피 엔트로피 열 열기관 열역학 열전도 온도계 유효온도 일 자유도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 절대 영도 절대온도 켈빈 통계물리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 흑체복사 An elementary introduction to temperature aimed at a middle school audience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일본제 한자어 분류:연속체역학 분류:상태 함수 |
오존 (, 분자식 O3)은 산소 원자 3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온 대기압에서 푸른빛의 기체이다. 영하 112도 이하에서는 검푸른 액체이며, 영하 193도 이하로 내려가면 고체가 된다. 오존은 불안정하여 이원자의 산소로 분해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온도가 올라갈수록, 압력이 낮아질수록 강하다. 오존이 갖고 있는 강력한 산화력은 하수의 살균, 악취제거 등에 유용하게 이용되기도 하고, 지구 대기중에 오존층을 형성하여 보호막의 역할도 하는 등 좋은 역할을 하지만, 지표면에 생성되는 오존은 인간의 건강에 해로운 대기오염 물질이 된다. 1785년, 네덜란드의 화학자 Martinus van Marum은 물 위에 전기 스파이크를 수반한 실험을 수행하던 도중 이상한 냄새를 맡았는데, 그는 이것을 전기 반응 때문인 것으로 보았고, 그가 오존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반 세기가 지나 크리스티안 쇤바인은 같은 신랄한 냄새를 맡았다. 1839년 그는 기체 물질을 분리해냈고 이를 "오존"(ozone)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냄새가 나는"을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 ozein (ὄζει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쇤바인이 일반적으로 오존을 발견한 것으로 인정된다. 오존의 공식 O3은 1865년 Jacques-Louis Soret가 처음 결정하였고 1867년 쇤바인이 확증하였다. 오존은 살균력이 뛰어난 화학물질로 수돗물을 만드는 데 쓰인다. 차아염소산(HOCl), 차아염소산이온(OCl-), 클로라민보다 살균력이 우수하다. 오존층 사산소 분류:산소 화합물 분류:대기 오염 분류:오염원 분류:산화제 분류:소독제 분류:그리스어계 외래어 |
300px 지구 대기권 (地球大氣圈)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를 일컬으며 고도에 따라서 생기는 중력의 차이와 구성분자의 밀도에 따라서 여러 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각각의 층은 고도에 따라서 기온이 차가 심한 것을 관측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대기권은 비록 미소하지만 전자량에 따라서 전하가 가능한 전리층과 이것이 거의 없는 중성층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지구 대기권은 특성에 따라 지표면에서부터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 외기권의 다섯 층으로 나눌 수 있다. 지구 대기권의 구분 대류권은 지표면에 가장 인접한 대기의 층이다. 대류권은 지표면의 복사열에 의해 가열되므로, 고도가 높아질수록 온도는 낮아진다. 즉 온도가 높은 공기가 아래쪽에 있으며, 이는 열역학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므로 쉽게 난류와 기상현상이 발생한다. 대류권에는 무거운 공기 분자가 모여있으며, 전체 대기 질량의 거의 80%가 모여있다. 대류권은 극지방에서는 지표면으로부터 7–8 km 정도 까지의 영역이며, 적도지방에서는 더 높아 18 km 정도까지의 영역이다. 성층권은 대류권과 반대로 지상에서 올라갈수록 온도가 상승한다. 성층권의 가열 원인은 오존으로, 오존이 태양으로부터의 자외선을 흡수함에따라 가열되며, 따라서 고도가 높아질수록 온도는 상승하게 된다. 온도가 높은 공기가 위에 있으므로 열역학적으로 안정하며, 이러한 이유로 난류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비행기 고도(11–13 km)로 이용되기도 한다. 성층권은 대류권 위쪽에 위치하며, 대략 지표면으로부터 50 km 정도까지의 영역이다. 중간권은 다시 고도가 올라갈수록 온도가 감소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대류현상이 일어나 약간의 구름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기상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상 50 km에서 80 km까지의 높이이며, 야광운이 생기기도 한다. 열권은 중간권 상부의 층으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상승한다. 그 이유로는, 열권의 밀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적은 열로도 온도가 많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태양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큰 영향력을 받지는 않는다. 이곳에서는 강력한 태양풍을 직접 맞아서 원자가 전리화되기 때문에 전리층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한 전리층은 전파를 반사하며, 이러한 반사 현상을 이용하여 원거리 무선통신을 하기도 한다. 지상 80–90 km에서 시작하여 500–1000 km까지의 높이이며, 오로라가 생기기도 한다. 외기권은 지구 대기가 우주 공간과 접하는 최외곽 영역이다. 이 곳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가스는 수소와 헬륨이며, 우주공간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 외기권은 500–1000 km 상공에서 시작하며, 끝나는 지점은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10,000 km 정도까지로 생각하기도 한다. 크게 온도로 구별되는 5개의 층과 함께, 몇몇의 두 번째 층이 다른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오존층은 생명체에게 해로울 수 있는 단파 자외선을 97~99%가량 흡수한다. 지구 대기의 오존 가운데 90% 이상이 여기에 있다 . 전리층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복사에 의해서 대기가 이온화된 영역으로 오로라가 일어나는 층이다. 전리층은 낮 시간동안 50~1,000km(31~621마일; 160,000~3,280,000피트)까지 확장되고, 중간권, 열권, 그리고 외권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밤 시간 동안 중간권에서의 이온화는 멈추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오로라가 오직 열권과 외권의 낮은부분에서 일어난다. 전리층은 자기권의 안쪽 가장자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예를 들어, 라디오파의 지구로의 전달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균질권과 비균질권은 대기의 가스가 잘 섞여 있는지 아닌지에 의해서 정의된다. 균질권의경우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과 열권의 극소량 부분에서는 대기의 화학적 성분은 난류에 의해서 가스가 섞여있기 때문에 분자의 무게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대적인 균질권층은약 해발100km(62마일; 330,000피트) 지점인 난류권계면에서 끝난다. 이보다 높은 고도에는 열권의 대부분과 외권을 포함한 비균질권이 존재한다. 이 층의 화학적 성분은 고도에 따라 다양하다. 이는 섞여있는 상태보다 분자들 간의 충돌이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산소와 질소와 같은 무거운 분자들에게 비균질권의 바닥에만 존재하도록 계층화하기 때문이다. 행성간의 경계는 주로 난류 확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지구의 표면에 가까이에 있는 열권의 일부분이다. 낮 시간동안 행성간의 경계는 일반적으로 잘 섞이지만, 반면에 낮 시간에는 안정적으로 계층화되기 시작한다. 행성간의 경계의 두께는 얇을때는 100m, 잔잔한 밤에는 3,000m 또는 오후의 건조한 영역에서는 더 두껍다. 지구 표면에 있는 대기의 평균 온도는 14도 이다. + 지구 대기권 구성 물질의 부피 비율 종류 부피 질소 (N2) 78.084% 산소 (O2)20.946% 아르곤 (Ar) 0.9340% 이산화탄소 (CO2) 365 ppmv 네온 (Ne) 18.18 ppmv 헬륨 (He) 5.24 ppmv 메탄 (CH4) 1.745 ppmv 크립톤 (Kr) 1.14 ppmv 수소 (H2) 0.55 ppmv 수증기 (H2O) 일반적으로 1% 종류 부피 + 위 표에 언급되지 않은 미미한 분자 일산화질소 (NO) 0.5 ppmv 제논 (Xe) 0.09 ppmv 오존 (O3) 0.0-0.07 ppmv(겨울에는 0.0-0.02 ppmv) 이산화질소 (NO2) 0.02 ppmv 아이오딘 0.01 ppmv 일산화탄소 (CO) 극미량 암모니아 극미량 해수면에서의 평균적인 대기압은 1이다. 대기의 전체 질량은 5.1480×10^18 kg (1.135×1019 lb)는 평균해수면의 압력과 지구의 산악지형의 51007.2 메가 헥타르에 해당하는 양보다 약 2.5%가량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 대기의 기압은 압력이 측정된 어떤 지점 위의 전체 무게이다. 따라서 기압은 지역과 날씨에 따라 다양하다. 만약 해수면으로부터 지구의 전체 대기가 특정한 밀도를 가진다면, 이는 8.5km 지점에서 갑자기 끝날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고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고, 모든 5.6km지점에서는 절반이거나 성분에 의해 7.64km에서 절반이 된다. 그러나, 대기는 각 층마다 온도, 분자 성분, 태양복사, 중력요소에 있어서 일정한 변화량을 가진다. 다시 말해서, 지구 대기의 질량은 다음과 같이 적절히 구별되어 있다. ●50%는 5.6km 이하에 존재한다 . ●90%는 16km 이하에 존재한다. ●99.99997%는 ‘Kármán line’라고 불리는 100km이하에 존재한다. 국제 협약에 따르면 이 곳은 우주 비행사들이 여행할 것으로 여겨지는 우주의 시작점으로 지정되었다.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은 8,848m인데 반해서, 민간 항공기는 연료를 절약할 수 있는 10km와 13km사이를 운항한다. 심지어 Kármán line 위에는 오로라같은 기상학적으로 중요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 구간에서는 유성이 빛나긴 하지만 더 큰 유성의 경우는 더 깊게 진입하지 않는 이상 타지 않는다. 100km에서 500km이상의 지구의 다양한 전리층은 HF 라디오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에 반해, 국제 우주 정거장과 우주 왕복선은 일반적으로 대기 방해물이 존재하여 몇 달마다 재가동 시켜줘야 하는 전리층의 F층이 공존하는 350~400km의 고도에 존재한다. 태양 활동에 따라서 700~800km의 높은 고도에 있는 인공위성 또한 대기 방해물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각 층은 대부분 온도에 의해서 분할될 것이라고 논의된다. 온도는 해발고도가 낮아짐과 동시에 감소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온도가 안정화된 대류권의 나머지부분을 통해 큰 수직거리인 11km이상에서 변화되기 시작한다. 20km이상의 성층권에서는 오존층에 존재하는 산소와 오존가스들이 태양으로부터 오는 상당한 양의 자외선을 흡수하기 때문에 고도가 올라감에 따라서 온도도 증가한다. 또한 열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90km이상의 지역에서도 고도가 올라갈수록 온도가 같이 증가하는 구역이 존재한다. 이상기체에서의 음속은 가스의 압력이나 밀도에 의존하지않고 온도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고도에 따른 대기에서의 음속은 온도와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고도에 따른 밀도와 압력의 변화는 반영하지 않는다. 해수면에서의 공기의 밀도는 약 1.2kg/m³ 이다. 밀도는 직접적으로 측정하지 않고, 온도, 압력, 습도의 측정값을 기체의 상태 방정식에 대입하여 계산한 것이다. 대기의 밀도는 고도가 올라감에 따라 감소한다. 이러한 변화는 기압에 관한 방정식을 사용함에 있어서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더 복잡한 모델은 인공위성의 부식을 예측하는데 사용된다. 대기의 평균 질량은 약 5×10¹⁵톤 또는 지구 질량의 1/1,200,000 이다. 미국의 국립 대기과학 연구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전체 평균 질량인 5.1480×10¹⁸kg은 표면의 압력 또는 수증기의 양에 의존하는 1.2 또는 1.5×10¹⁵kg의 수증기 때문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 수증기의 평균질량은 1.27×10¹⁶kg으로 측정 되었고 건조한 공기의 질량은 (5.1352±0.0003)×10¹⁸kg이다.” 태양복사(또는 햇빛)는 태양으로부터 지구에 도달하는 에너지이다. 지구 또한 복사방출을 일으키긴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장이 길다. 들어오거나 방출되는 복사는 지구 대기에 의해서 흡수되거나 반사된다. 빛이 대기를 통과 할 때, 대기와 광자가 서로 상호작용하여 빛이 산란된다. 만약 빛이 대기와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직접방사선이라 불리고 이는 마치 태양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과 같게 보인다. 간접적방사능은 대기에서 산란된 빛이다. 예를 들어,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린 날에는 전부 산란되기 때문에 직접방사능이 도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레일리 산란 효과에 의해서 짧은 파장의 빛은 긴 파장의 빛보다 더 쉽게 산란되는데, 이는 하늘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이유이다.(우리는 산란된 빛을 보고 있다.) 또한 이것은 어째서 노을이 붉은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태양이 지평선에 가까워지면, 태양의 빛은 평소보다 더 많은 대기를 통과하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의 청색 빛은 산란되어 날아가고, 붉은 빛이 노을에 남아있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분자들은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을 흡수한다. 예를 들자면, O₂와 O₃는 300nm보다 짧은 파장을 대부분 흡수한다. 물은 700nm이상의 대부분의 파장을 흡수한다. 분자가 광자를 흡수할 때, 분자의 에너지가 증가하게 된다. 이는 대기의 온도를 가열하지만, 이전에 언급한 대로 복사를 방출하면서 여전히 냉각된다. 대기중의 가스의 합쳐진 흡수선은 특정된 띠만을 나타나게 하도록 하는 창을 남기게 된다. 광학적 창은 약 300nm에서부터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인 400~700nm는 물론 적외선의 약 1100nm까지를 포함한다. 또한 적외선과 라디오파와 같이 긴 파장을 전달시키는 전파의 창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전파의 창은 약 1cm에서부터 약 11m까지의 파장을 포함한다. 방출은 흡수의 반대로, 이는 물체가 복사를 방출할 때 일어난다. 물체는 흑체복사의 곡선을 따라서 복사를 일으키려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뜨거운 물체는 짧은 파장의 복사를 더 많이 방출한다. 차가운 물체는 긴 파장의 복사를 더 적게 방출한다. 예를 들자면, 태양의 온도는 대략 6,000K이고, 태양의 복사는 500nm의 파장 근처에서 최대치를 이루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보일 수 있다. 반면, 지구의 온도는 대략 290K이고, 지구 복사는 10,000nm의 파장 근처에서 최대치를 이루는데, 이는 인간이 볼 수 있는 파장보다 훨씬 길다. 온도 때문에 대기는 적외선을 복사로 방출한다. 예를 들어, 맑은 날 밤에 지구의 표면은 흐린 날보다 빠르게 식는다. 이는 구름에 포함된 H₂O가 열을 많이 흡수하고 적외선의 형태로 복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는 밤에 고도가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이 더 추운 이유이다. 온실효과는 흡수와 방출효과에 있어서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대기에 있는 일부의 가스들은 적외선을 흡수하고 방출하지만, 햇빛에 있는 가시광선과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예로 CO₂와 H₂O가 있다. 공공엣 의절굴절률은에1이만만1보다는 크다. 굴절률의 체계적인 변화는 긴 광로를깆중을절토괗한 비은 하에을 하게 되는데 일관측인한 현상을평경수평선상에는놓옂이 이는되기때문이다. 공기의 굴었기 하고, 온도의 변화량이 클 때 귤절 효과는 증가하게 된다. 이와 같은 효과에 의한 예로는 신기루가 있다. 대기의 순환은 대류권에서 일어나는 거대한규모의 공기들의 움직임이고, 이는 열을 지구 전역에 배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대기의 대규모 구조의 순환은 매년마다 다르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지구의 자전주기와 적도와 극지방 사이의 태양복사의 차이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거의 일정하다. 처음의 대기는 태양 성운에 존재하는 주로 수소에 의해서 구성 되었다. 거기에 더해, 아마도 현재는 목성이나 토성과 같은 거대한 가스에서 발견되는 주로 수증기나, 메탄과 암모니아와 같은 간단한 형태의 수소화물이 존재했을 것이다. 태양 성운이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가스들은 태양풍에 의해 부분적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의 대기는 많은 양의 질소와 이산화탄소, 비활성 기체가 화산 폭발에 의해 공급되거나 소행성에 의한 거대한 충돌 동안 공급되었다. 이로 인해 방출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는 곧바로 물에 녹아서 탄산염퇴적물을 형성하였다. 물과 관련된 퇴적물들은 38억 년 전부터의 것부터 형성되어 왔다. 약 34억 년 전의 질소는 안정된 상태의 두 번째 대기의 대부분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명체에 대한 영향은 생명체는 대기보다 빠른 시기인 약 35억 년 전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 한다. 원시 태양이 현재보다 30% 적은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그 시대에 어떻게 지구가 액체상태의 물과 생명이 존재 할 수 있도록 기후를 따뜻하게 유지하였는지가 ‘젊을수록 어두운 태양의 역설’ 이라고 불리게 된 문제이다. 하지만 지질학적 기록은 완전한 상태의 지구의 따뜻한 표면과 약 24억 년 전의 빙하시기의 예상과의 지속적인 연관성을 보여준다. 시생대 시대의 말에 27억 년 전의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에서 발견된 남조류에 의한 광합성을 통해서 공급된 산소를 포함한 대기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기본적인 탄소 동위원소는 현재의 것과 매우 유사한 비율을 가지는데, 이는 기본적인 탄소 순환의 특징은 약 40억 년 전부터 이미 안정되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지구의 유동적인 산화의 진행과정은 약 21.5억년~20.8억 년 전의 가봉 공화국으로부터의 오래된 퇴적물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산화의 변동은 Lomagundi carbon isotope excursion에 의한 기반을 뒀을 것이다. 판 구조론에 의한 끊임없는 성분의 재배열과 지각의 탄산염 광맥으로부터의 이산화탄소 이동은 대기의 오랜 기간 동안의 진화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활성산소는 약 24억 년 전 산소 급증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활성산소의 출현은 안정되어 있던 철 광맥의 종말을 나타냈다. 이 시기 이전에는 광합성을 통해 공급된 어떠한 산소도 환원되어 있던 주로 철과 같은 금속광물과 산화반응에 의한 소비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기 속의 활성산소의 분자들은 산소의 생산률이 환원되는 금속광물을 초과하기 전까지 모여들지 않았다. 이는 환원성 대기로부터 산화성 대기로의 흐름을 나타낸다. O₂는 선캄브리아대의 말기까지 15%이상의 O₂분자가 안정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약 5.41억 년 전부터의 기간은 호기성생물의 출현이 시작된 캄브리아기의 초기시대인 현생대이다. 대기 중의 산소의 양은 6억 년 전부터 변동을 거듭하여 2.8억 년 전에는 현재의 수치인 21%보다 상당히 높은 약30%로 최고치에 도달하였다. 두 가지의 주요 과정들이 대기의 변화를 지배하였다. 하나는 식물들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사용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황철석의 붕괴와 화산 폭발로 인해서 대기로 유입된 산화된 황에 의한 대기 중의 막대한 양의 산소의 환원이다. 그러나, 화산 분출은 또한 식물이 산소로 바꿀 수 있는 이산화탄소를 방출시켰다. 대기 중의 막대한 양의 산소변화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대기중에 산소가 많은 기간 동안 동물의 진화를 촉진시켰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대기는 동물의 진화과정을 촉진시키기에 충분한 약 21%의 산소를 함유하고 있다. 최근에, 지구 온난화를 유발시키는 주범인 인류 개변의 온실가스는 대기에 축적되고 있다. 대기오염은 유기체에 해가되거나 불편함을 일으키는 대기중의 화학물질, 미립자, 또는 유기물질에 대한 소개이다. 성층권의 오존량 감소는 대기 오염에 의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대기권 수권 오존층 항공 생물권 NASA 지구정보 IPCC 이산화탄소 및 메탄 정보 분류:지구과학 분류:행성의 대기 분류:지구물리학 |
지구의 대기, 대류권(troposphere)은 가장 아래 부분 대류권 (對流圈, troposphere)은 지구 대기권의 가장 낮은 부분으로 대부분의 기상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 온실 효과 역시 대류권에서 발생한다. 대류권은 지표면(0km)에서 시작하며, 약 11km까지이다. 열대지방의 경우는 고도 16-18 km 까지이고, 극지방에서는 감소해서 10 km 이내이기도 하다. 이 층은 전체 대기 질량의 약 70~80%를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제트기는 대류권의 최상부에서 비행한다. 대류권의 위 층은 성층권이다. 대류권은 셀이라고 불리는 6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이 영역은 대기 순환을 일으키며, 탁월풍을 유발한다. 대류권을 나타내는 영어인 troposphere 는 "돌리다", "섞다"를 나타내는 그리스어인 tropos 로부터 유래하였다. 이 말대로, 대류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대류권에서 중요한 가스로는 질소 및 산소가 있다. 고도에 따른 온도변화는 다른 어떤 대기권보다도 심하다. 중간 위도의 경우 해수면의 온도가 +17°C인 데 반해 대류권계면에서는 -52 °C에 이른다. 대류권계면에서의 온도는 대류권이 얇은 극지방의 경우는 -45 °C정도인 데 반해, 대류권이 두터운 적도지방에서는 -75 °C에 이르기도 한다. 대류권에서의 고도에 따른 온도변화를 살펴보면, 고도가 1 km 상승할수록, 온도는 대략 6.4 °C 내려간다. 대류권에서의 온도변화가 큰 이유는, 온도는 지표면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지표면에서 멀어질수록 열을 전달할 대기 입자가 줄어들며, 대류로 인한 가열 역시 줄어들게 되고 온도는 급격히 하강한다. 대류권계면은 대류권과 성층권의 경계를 나타낸다. 대류권계면 위쪽으로는 고도 50km에 이르도록 온도가 서서히 상승한다. 대류권을 지나는 동안 비행기가 높이 뜨면 뜰수록 안내판의 기온은 섭씨건 화씨건 모두 낮아져서 최상부에 이르면 국내선 비행기는 -17도, 국제선 비행기는 -50°C까지 내려간다. 외기권 열권 중간권 성층권 대기의 구성 - 테네시 대학 물리학부 대기에서의 화학반응 대류권 - 기상 블로그 분류:대기 분류:지구의 대기 분류:대기열역학 |
물리학에서 열 (熱)은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식의 하나 로서 일(work)과 대비된다. 즉 어떤 계(system)에서 에너지가 다른 계로 전달되는 방식에는 일과 열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중 외부의 변수와 관계없는 에너지의 전달을 열이라 한다. 물리학을 배운 사람들도 열을 에너지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표적인 오개념이다. 열은 에너지가 아니라, 에너지의 전달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 계 사이에서 에너지는 일 또는 열의 형태로 전달되는데, 어떤 계가 일을 받으면 그 운동에너지가 늘어나듯이, 열을 받으면 그 내부에너지가 늘어난다. 이때 내부에너지를 열에너지라고도 한다. 즉 열에너지는 에너지이지만, 열은 에너지가 아니다. 한편 열의 이동 방법에는 열전도, 열대류, 열복사의 3가지가 있다. 반면 일상 생활에서는 흔히 "온도가 높음"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열역학 제1법칙은 닫힌계의 에너지는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의 에너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계로부터 다른 계로 또는 다른 계에서 계로 이동되어야 한다. 계의 질량이 일정할 때, 에너지를 이동시킬 수 있는 단 두 개의 메커니즘은 열과 일이다. 열은 온도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에너지의 이동이다. 열에 의해 이동되는 에너지의 양을 나타내는 SI단위로 J(줄)이며, Btu(British Thermal Unit) 또는 cal(칼로리)도 때때로 사용된다. 에너지 이동의 비율을 나타내는 단위는 W(와트)이다. 열의 이동은 경로함수(상태함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열은 서로 평형상태가 아닌 계들 사이에서 흐르며, 자발적으로 온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흐른다. 온도가 다른 두 물체가 열적 접촉을 하면 그들은 서로 온도가 동일해질 때까지, 즉 열적평형상태에 이를 때까지 내부에너지를 교환한다. 뜨겁다 라는 형용사는 물체의 온도를 주위(또는 뜨겁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온도와 비교하여 나타내는 상대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열 이라는 용어는 에너지의 흐름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역학적 상호작용이 없을 때에는, 물체로 이동하는 열은 내부에너지의 형태로 물체에 저장된다. 비열은 물질의 온도를 1도 올리기 위해 계로부터 또는 계로 이동되어야 하는 단위질량당 에너지의 양으로 정의된다. 순수한 물질이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에는 온도의 변화 없이 열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상태변화) 상태변화 하는 동안 열이 이동하는 양은 숨은열 또는 잠열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물질과 그 상태에 따라 다르다. 열에너지 라는 용어는 종종 열이라는 용어와 혼동하여 사용된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열은 에너지의 전달 방식 중의 하나이고, 열에너지는 어떤 계(system)가 가진 내부 에너지를 말한다. 어떤 계가 열을 받으면, 그 계의 열에너지(내부 에너지)는 증가하고, 열이 제거되면 그 계의 열에너지는 감소한다. 뜨거운 물체는 많은 양의 열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많은 양의 열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물체는 에너지 를 가질 수는 있어도, 열 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물리학에서는 열에너지라는 용어보다는 "내부에너지"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선호된다. 열 현상들과 열의 정의는 물에 대한 신화에서부터 열, 연소성 흙(terra pinguis 라틴어로 살찐 흙 이라는 뜻), 플로지스톤, 불공기(fire air, 산소), 열소(caloric), 열의 이론, 열의 일당량, 에너지론, 열역학까지 포함한다. 열의 역사의 대부분은 열역학의 역사의 선구적이 것이다. 1761년에 스코틀랜드 화학자 블랙(Joseph Black, 1728~1799)은 얼음이 녹을 때 온도변화 없이 열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열은 얼음 알갱이와 결합되어 있다가 보이지 않게 된다고 결론지었다. 1759년부터 1763년 사이에 그는 그의 과학적인 명성의 주된 기초가 되는 "숨은 열" 이론으로 발전시켰고, 또한 서로 다른 물질들은 서로 다른 비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와트 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는 블랙의 제자이자 조력자였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열을 전달시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토마스 뉴커먼과 제임스 와트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증기 기관이 발명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더욱이 1797년 대포 제작자인 럼퍼드 백작 벤자민 톰슨이 일을 열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저항을 사용하여 증명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열손실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특별한 모양의 대포 포신을 제작하였다. 그러고 나서 날카로운 보링 도구를 무딘 드릴용 송곳으로 교체하고, 총의 앞부분을 물이 가득 찬 탱크에 담가놓았다. 이러한 장비를 사용하여 그는 차가운 물을 불을 사용하지 않고 2시간 30분 만에 끓게 만들었다. 열의 본성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이 발전하였다. 17세기 베허는 열이, 물질이 탈 때 물질로부터 빠져나오는 플로지스톤이라는 보이지 않는 물질과 연관되어 있다고 제안하였다.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가 주장한 3원리설에 의하면, 물질의 모든 성질은 세 가지 근본원리들 곧 가연성을 나타내는 황, 유동성과 휘발성을 나타내는 수은, 그리고 고체성과 안정성을 나타내는 염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물질이 타는 연소 현상은 다른 원소와 결합된 상태의 가연설원리인 황이 그 물질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열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을 발전시켜 슈탈(George E. Stahl, 1660~1734)에 의해 주장된 이론이 플로지스톤 이론이다. 플로지스톤이론에 따르면 가연성물질들은 모두 플로지스톤을 포함하고 있고, 이러한 물질들이 탈 때 플로지스톤이 빠져나오면서 연소가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금속이 공기중의 산소와 결합하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금속의 하소(calcination)도 금속이 플로지스톤을 내어놓고 재(calx)가 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점점 더 정확하고 정량적인 실험들이 이루어지면서 금속의 하소의 결과로 생성된 금속재가 원래의 금속보다 무겁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로지스톤이 빠져 나갔는데도 무게는 오히려 증가한다는 사실은 이 이론의 중요한 문제점으로 인식되었다. 이를 플로지스톤이 음의 무게를 갖는다는 식의 설명으로 대체하기도 하였지만, 연소의 경우는 무게가 감소하기 때문에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아직 연소의 결과 생성된 기체의 무게를 고려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연소의 경우도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침내 1783년에 연소에서 산소의 중요성을 증명한 라부아지에에의해 논박되었다. 그는 대신에 열소(칼로릭)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무게가 없고 보이지 않는 유체로서 평형상태가 깨졌을 때 움직인다. 이 이론은 1824년에 프랑스의 사디 카르노가 ≪불의 동력에 대한 성찰≫을 출판할 때 사용되었다. 그는 "동력은 실제 열소의 소비로부터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물체로부터 차가운 물체로, 즉 평형상태를 향해 열소가 이동하면서 생성된다."며 열전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 카르노에 따르면 이 원리는 열에 의한 운동에 의해 형성된 모든 기관에 적용된다. 또 다른 이론은 1738년에 스위스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의 유체역학으로부터 나온 기체 분자 운동론이다. 이 연구에서 베르누이는 처음으로 기체가 모든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표면에 대한 그들의 영향이 우리가 느끼는 기체의 압력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 물질의 내부에너지는 각각의 분자와 연관되어 있는 운동에너지의 합이고, 활동적인 분자들로 이루어져서 매우 높은 내부에너지를 가진 지역에서 덜 활동적인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내부에너지도 더 낮은 지역으로 열전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임스 프레스콧 줄과 율리우스 로베르트 폰 마이어의 연구는 열과 일이 교환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이는 1847년 헬름홀츠의 에너지 보존 원리에 대한 진술로 이어졌다. 클라우지우스는 1850년에 물질의 이동보다는 에너지의 보존을 이용하여 열소(칼로릭)이론이 기체분자운동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열역학 제 1법칙을 진술하였다. 1851년 윌리엄 톰슨은 제임스 줄과 같은 사람들의 최근 실험에 기초하여 열의 본질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을 개관하였다. "열은 물질의 이동이 아니라 역학적인 작용의 동역학적인 형태이다."(Heat is not a substance, but a dynamical form of mechanical effect.)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역학적인 일과 열 사이에 반드시 평형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현대의 용어로 열은 일반적으로 온도의 차이로 인해 전달되는 에너지의 형태나 저항에 의해 생성되는 에너지의 형태로 정의된다. 현대적인 용어로 열은 이동하는 에너지로 간결하게 정의된다.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1871년 그의 열의 이론(The theory of heat) 에서 "열"의 현대적인 정의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첫째, 열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서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이동하는 어떤 것이다." 둘째, 열은 "측정할 수 있는 양"이고, 따라서 다른 측정가능한 양들처럼 수학적으로 취급될 수 있다. 셋째, 그것은 "물질로서 취급될 수 없다." 또한 물질이 아닌 어떤 것(예를 들어 역학적 일)으로 변형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열은 "에너지의 형태 중의 하나이다." 현대적인 것과 유사한 간결한 정의들은 다음과 같다. 열역학적인 의미에서, 열은 절대 물체에 저장되는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일과 같이, 열은 단지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이동하는(열역학적 전문용어로, 계와 그 주변 사이에서) 에너지로서 존재한다. 열의 형태의 에너지가 계에 가해지면 그것은 열로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계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과 분자들의 운동에너지와 퍼텐셜에너지로 저장된다. 명사 열은 오로지 전도와 복사에 의한 에너지 전달 과정에서만 정의된다. 열은 물체들 사이의 온도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의 자발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 정의된다. 열은 높은 온도의 물체에서 낮은 온도의 물체로 이동하는 에너지로 정의될 수 있다. 일의 교환이 없는 두 닫힌계 사이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열은 처음에는 고립되어 있고 안정한 평형상태에 있던 두 계가 접촉할 때 발생하는 순수한 열적 상호작용이다. 두 계 사이에서 교환되는 에너지를 열이라고 부른다. 열은 물질이 분자들이나 원자들의 진동 운동에 의해 소유하는 에너지(예를 들어 운동에너지)의 형태이다. 운동에너지와 열은 형식적으로 동등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열은 온도가 다른 물질들 사이의 에너지의 이동이다. 열은 온도가 높은 지역에서 온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열 전달은 전도와 복사의 매커니즘에 의해 일어난다. 공학에서는 전도와 유체 흐름의 복합적인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대류"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대류는 열전달의 세 번째 매커니즘으로 여겨진다. 열전도. 에너지가 열의 형태로 고온 TH의 열저장고에서 저온 TC의 열저장고로, 두께가 L이고 열전도도가 k인 판을 통해 전달된다 전도는 고체에서 열의 전달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형태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도는 뜨겁고, 빠르게 운동하거나 진동하고 있는 원자, 분자들이 인접해있는 원자, 분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들 이웃 원자들에게 그들의 에너지(열)의 일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즉 전도는 물체 속에서 열이 순차적으로 전달되어 가는 현상을 말한다. 전도에 의한 열의 전달속도는 물체 단위길이당 온도차에 비례하며, 물체의 재질에 따라 달라진다. 면적이 A이고 두께가 L인 판의 양면의 온도가, 한 면은 뜨거운 열저장고에 의해 TH로, 나머지 한 면은 차가운 열저장고에 의해 Tc로 일정하게 유지될 때, 단위 시간당 전달되는 에너지양, 즉 전도율Pcond는 이다. 여기서 k는 열전도도로 물질에 따라 달라지는 상수이며 에너지를 빨리 전달하는 좋은 열전도체는 k값이 크다. 대류는 액체와 기체 내에서 일어나는 열 전달의 주된 형태이다. 대류라는 용어는 전도와 유체 흐름의 복합적인 효과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온도가 상승하면 밀도가 감소한다. 따라서 물이 가열될 때 냄비 바닥에 있는 뜨거운 물은 위로 올라가고, 상대적으로 차갑고 밀도가 큰 액체는 아래로 내려간다. 이러한 혼합과 전도의 결과 거의 동일한 밀도와 온도가 된다. 대류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구별된다. 중력과 부력에 의해 유체의 운동이 야기되는 자유대류 와 유체를 움직이기 위해 선풍기나 교반기 등의 도구를 사용하는 강제대류 로 구분된다. 부력 대류는 중력에 의한 현상이므로 중력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빨갛게 달군 뜨거운 철기구의 열이 복사를 통해 주변 환경에 전달되고 있다. 복사는 유일하게 매질이 없는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열전달의 형태이다. 따라서 복사는 진공에서 열전달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열적 복사는 물질 속의 원자들과 분자들의 운동 때문에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러한 원자들과 분자들이 전하를 띠고 있는 입자들(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운동은 전자기 방사선을 방출하고 이것은 표면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동시에, 표면도 끊임없이 표면으로 에너지를 전달하는, 주위로부터의 복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방출되는 복사의 양도 증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온도가 더 높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물체가 전자기 복사로 단위시간당 에너지를 내놓는 비율 Prad는 물체의 표면적이 A이고, 그 면의 절대온도가 T일 때 으로 주어진다. 은 슈테판-볼츠만(Stefan-Boltzmann) 상수이고, 은 물체 표면의 방출률로 0과 1 사이의 값을 갖는다. 열을 측정한 양을 열량이라고 이며, 여기에 쓰이는 일반 단위는 칼로리(cal)이다. 열역학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
슈테판-볼츠만 법칙 은 흑체의 단위 면적당 복사 에너지가 절대 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정확한 식은 다음과 같으며, 식에서 j *는 흑체 표면의 단위 면적당 복사하는 에너지, T 는 온도를 나타낸다. 식의 비례상수 σ는 슈테판-볼츠만 상수라고 부르며 값은 다음과 같다. 이 법칙은 1879년 요제프 슈테판에 의해 실험적으로 발견되었으며, 1884년 루트비히 볼츠만이 이에 대한 이론적인 틀을 제공했다. 볼츠만은 당시 가스가 아닌 빛을 사용하는 가상적인 열기관을 가정하여 설명하려 했다. 양자역학의 개념이 만들어진 이후의 현대 물리학에서 슈테판-볼츠만 법칙은 플랑크의 흑체복사 법칙에서 유도할 수 있다. 위 식은 이상적인 흑체에 대해서만 유효하다. 슈테판은 이 법칙을 3월 20일 열 복사와 온도의 관계 ( Über die Beziehung zwischen der Wärmestrahlung und der Temperatur )란 제목으로 빈 과학 아카데미(the Vienna Academy of Sciences)의 Bulletins from the sessions 에 실었다. 분류:온도 방정식 분류:열역학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
제2연평해전 (第二延坪海戰)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대한 북한 해군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어 30분 가량 진행된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손상을 입었다. 북한군의 선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도중 침몰하였고, 정장(참수리급은 150톤급으로 "함"이 아닌"정" 지휘관도 "함장"이 아닌 "정장")을 포함한 승무원 6명이 전사당하고 19명이 부상당하는 인명피해를 겪었다. 조선인민군 해군소속 등산곶 684호도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전투후 상당한 피해를 입고 예인당했다. 제2연평해전으로 조선인민군 해군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시 차단 기동에 대한 논란이 일었으며, 이후 차단기동은 교전수칙에서 삭제되었다.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 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 해상 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은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이남지역에서 북한의 무력 기습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차단기동을 하던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괴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되어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이 된 전투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괴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교전수칙에 따라 차단기동으로 대응하다가 고속정이 침몰됐고, 그 후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집중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소령은 총상으로 한쪽 종아리의 근육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군 당국은 전군에 경계 강화령을 내리고 서산 상공에서 초계비행하던 KF-16 전투기 1개 편대를 NLL 인근 해상으로 긴급 파견해 확전에 대비했다. 청와대 또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는 등 비상태세에 들어갔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NSC에서 "북한 경비정이 선제 기습사격을 가하는 등 무력도발 행위를 자행한 것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는 행위로 묵과할 수 없다"며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군 당국이 더욱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춰 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6월 29일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ㆍ4위전 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으며,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30일 일본을 방문하는 일정도 다시 검토됐으나 일정 취소가 국민 불안감을 높이고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촉발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 그대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김대통령은 공동 개최국 대표로서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경기에 참석하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러 6월 30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2007년 6월 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고속함 1번함이 윤영하함으로 명명되어 진수되었으며, 2009년 6월 2일 실전배치되었다. 2009년 9월 23일 STX조선해양에서 2번함이 한상국함으로, 3번함이 조천형함으로 각각 진수되었다. 2009년 12월 11일 한상국함과 조천형함에 이어 STX조선해양에서 4번함인 황도현함, 5번함인 서후원함이 각각 진수되었다. 2010년 7월 28일 한진중공업에서 6번함인 박동혁함이 진수되었다. 남북한 함정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남한 참수리 고속정 357 :제원 배수량 170톤, 전장 37m, 선폭 6.7m, 흘수 1.7m, 승조원 총원 31명(장교3명, 부사관 및 병 29명), 속력 최대37노트 항속7노트, 항속거리 600해리 :무장 40mm 포 1문(함수), 20mm 발칸 2문(함미), M60 기관총 2정 북한 SO-1급 PCF (등산곶 경비정 684) :제원 배수량 207톤, 전장 42m, 선폭 6.1m, 흘수 1.9m, 승조원 30~40명(자세히는 알려진 바 없음), 속력 최대28노트 항속13노트, 항속거리 1,100해리 :무장 45mm SM-21-ZIF 기관포 1문(북한에서는 85mm ZiS-S-53 전차포로 교체), 25mm 2M-3M 2연장 기관포(북한에서는 37mm M1939(61-K) 기관포로 교체), RBU-1200 400mm 어뢰 발사관 교전 당일인 2002년 6월 29일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06:30 어로보호 지원을 위해 남한의 고속정 3편대 6척 출항. 09:54 북한군 경비정 등산곶 388호(155톤) NLL을 넘어 남하 시작. 대한민국 해군 253 고속정 편대 대응기동 실시. 10:01 북한군 고속정 등산곶 684호(215톤) 추가 남하. 대한민국 해군 232 고속정 편대가 대응기동. 10:25 북한군 등산곶 684호가 탑재된 85mm 함포로 450m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실시하던 참수리 357호에 기습 발사, 남한 232 편대 대응 사격. 이 과정에서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파괴되고 윤영하 정장이 전사. 10:26 후방에 있던 253·256 고속정 편대 전파사격 개시. 10:30 256 편대 공격 개시. 10:33 253 편대 공격 시작. 10:43 제천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개시. 10:47 진해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시작. 10:48 제천함, 북한 스틱스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10:51 화염이 발생한 북한 경비정 다른 경비정에 예인되어 NLL 북쪽으로 퇴각. 10:56 전 전력 사격 중지. 11:25 제천함·진해함, 북한의 실크웜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11:45 357호 사상자 확인·구조. 357호는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 포기. 11:59 참수리 357호 침몰.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57호 교전이후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을 포기, 침몰했으며 침몰 당시에는 탑승한 승무원 30명 중 4명이 전사, 1명이 실종되고 20명이 부상하였으나 이후 치료를 받던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이 국군수도병원에서 전사했으며 실종되었던 한상국 중사(당시 하사)가 침몰 41일째 날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 53일만인 8월 21일, 침몰된 배가 인양되고 수습되어 결과적으로 총 6명전사 19명 부상하였다. 대한민국 군당국은 북한 경비정이 3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하였다. 인양된 참수리 357호는 85mm 대구경 5발, 37mm 중구경 19발, 14.5mm 소구경 234발 등 모두 258발을 맞았으며, 40mm 중구경과 20mm 소구경 680발을 발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교전 중에 한상국 중사가 실종되었으나, 긴장 관계를 고려해 즉각 수색 작업에 나서지 못했다. 태풍으로 연기된 인양 작업은 다시 한 차례 연기된 후 8월 5일 시작되었으나, 기상 악화로 본격적인 작업이 미루어졌다. 8월 9일 조타실에서 한상국 중사의 유해를 수습하였고, 기상 악화와 작업의 난항으로 고속정은 침몰 후 53일만인 8월 21일에야 인양되었다. 고속정은 연평도 서쪽 25.2km 수심 28m의 해저에 가라앉아 있었다. 건져올려진 선체에는 조타실 앞부분의 2곳을 포함, 4군데에 축구공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수백 군데에 포탄과 파편 자국이 있었다. 함교 뒤 돛에는 여전히 태극기가 걸려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한상국 중사는 실종 후 함체 인양 중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박동혁 병장은 부상으로 후송된 후 치료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4명은 전투 중 전사하였다. 윤영하 ,35px 소령(정장,충무무공훈장 추서) 한상국 ,25px 상사(조타장,화랑무공훈장 추서) 조천형 ,25px 중사(병기사,화랑무공훈장 추서) 황도현 ,25px 중사(병기사,화랑무공훈장 추서) 서후원 ,25px 중사(내연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박동혁,25px 병장(의무병, 충무무공훈장 추서) 남한측의 피해가 컸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참수리 고속정에는 20mm 벌컨포, 30mm 기관포, 40mm 기관포와 M60 7.62mm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함정은 85mm 전차포와 14.5mm 기관총을 장착하여 화력에서 월등했다. 85mm 전차포는 사거리와 명중률이 떨어지지만 한 발만 맞아도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데 비해서 참수리 고속정에 탑재된 무장들은 적함을 격침시키기 너무 어려웠고, 제2연평해전에서 등산곶 684호는 6척의 참수리 고속정에게 집중사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몰되지 않았다. 참수리 357호는 조타실에 85mm 포탄을 직격으로 맞고 지휘부가 타격을 입었다. 부정장의 지휘로 전투는 진행되었으나, 너무 약한 방어력으로 인해서 조타실 등 핵심 시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적함이 NLL을 침범하면,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순서로 대응해야 했다. 특히 적함을 밀어내는 차단기동은 기습 받기 쉬웠고, 참수리 357호정도 차단기동 중 공격당했다.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후 무려 18분이 지나서야 초계함들이 76mm 속사포를 발사하며 전투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참수리 357호정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전투 발생 초기, 초계함들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참수리 고속정들이 사거리 안에 없었다. 결국 화력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북한 고속정을 침몰시키지 못했다. 제1연평해전 이후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이 북방한계선을 지키고 선제공격을 하지말것 상대가 먼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할것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것 으로 이루어진 4대 교전수칙을 지시하여 해군이 ‘밀어내기’로 불리는 차단기동 개념을 도입했으며, 이후 제2연평해전에서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김대중의 교전지침, 차단기동 도입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경고방송->차단기동->경고사격->위협사격->격파사격 5단계로 합참의 해상 작전지침이 존재했으며 제1연평해전 에서도 똑같은 교전지침과 차단기동을 사용했지만 대승을 거둔 바 있다. 당시 이준 국방장관은 "김대통령이 99년 연평해전 기간에 4대 지침을 내렸지만, 이는 97년 작성된 합참 작전예규에 이미 포함돼 있었으며 교전규칙의 기본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지, 햇볕정책 때문에 추가되거나 수정된 것은 아니다"고 답변했다. 교전수칙이나 차단기동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당시 참수리호가 전투대형을 갖추지 않은 채로, 6노트라는 굉장히 느린 속도로 북한 경비정에서 불과 150m밖에 안 떨어진 지점까지 가서 차단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것은 늦장 대응이라는 비판이 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고. 김대중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이회창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 황장엽은 탈북자동지회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려, “대포 한 발이 아니라 총 한 방을 쏘는 데도 김정일의 재가가 필요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포 사격을 명령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군부내 강경 세력의 돌출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는 북한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 서울법대 교수 조국은 오연호와 공저한 책《진보집권플랜》에서 연평해전과 관련, "서쪽에서는 해전이 벌어지고,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떠나는 모순적인 상황을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됐다"고 주장했다.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으며,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당시 김대중의 태도에 분노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 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군 장례식은 장례위원장 이하만 참석하는 것이 관례다." , 총리실은 "참석 요청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의전을 고려해 불참했다."라고 해명했다. 이후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식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비판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 제2연평해전 유족은 3천100만~8천100만원의 일시금을 받았고, 38~86만원의 유족연금과 61~62만원의 보훈연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이것을 두고 보수 단체에선 정부와 여성부를 보상금 지급량이 너무 적다는 문제로 비난한 바 있으나, 이당시 정부는 전사자에 대한 법 규정의 문제로 보상할 수 없었다. 2002년 제2 연평해전 당시 군인연금법으로는 순직과 전사가 구분되지 않아 포괄적인 개념의 공무원 사망자로 규정, 전사자로 취급받지 못해서 추가 보상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정부는 우회적인 방안으로 국민성금을 해서 전사한 6명의 장병에게 정부 지원금 포함 해서 도합 3억5천만원의 보상금이 전달되었다. 문제가 된 군인연금법은 박정희 정부 당시 베트남전 전시 전사자가 많아지면서, 국고의 고갈을 걱정한 정부가 교전 중 사망은 공무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고 사망보상금은 사망 직전 받았던 월급의 36배로 못박아 국가로 하여금 그 이상 지급할 수 없도록 한것이다. 추가로 1967년 국가보상법 2조를 제정, 직무수행중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받은 경우, 국가가 잘못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였다.이에 참여정부 시절인 2002년에는 연금법 개정법안이 발의, 2004년에는 법안이 개정되어 전사와 일반 공무에 의한 사망이 구분돼서 전사 처리가 가능해졌으나,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겐 소급 처리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제2연평해전 유가족은 전사자 사망 보상금 2억원을 받지 못하고 3000만~6000만원 규모의 공무 보상금을 지급받는데 그쳤다.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게 전사자 사망 보상금을 소급 지급하려면 특별법을 제정할 수 밖에 없다" 고 밝혔다. 이후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게 전사자 예우를 하는 특별법 제정이 발의되었으나 무산되었다. 10월 14일 국방부 예비역정책발전 TF팀은 공문을 보내,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 전사자 예우를 해줄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해당 공문에서 "각종 대침투작전과 국지전, 북한 도발에 따른 아군 전사자 등의 형평성 침해논란이 예상돼 법적 안정성 등을 위해 소급보상이 불가하다"고 밝혔다.이후 천안함 침몰사건(2010)의 경우에는 이 당시 개정된 군인연금법의 적용을 받아 천안함 용사 유가족들은 사병의 경우 사망보상금으로 일시금 2억 원, 원사는 3억5900만 원을 받았다.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부는 2002년 6월 30일 교전 과정에서 전사 또는 실종된 해군장병 5명에게 일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을 추서했다. 2002년 6월 30일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에는 이한동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군 장병 등이 방문했다. 이 총리 등 국무위원 일행 21명은 이날 합동분향소를 방문, 헌화 및 묵념하고 고(故) 윤영하 소령에게 충무무공훈장, 고(故) 조천형 중사등 사망 및 실종 병사 4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이 총리는 이어 병실을 찾아 부상장병 19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훌륭하게 싸웠소. 용감했소"라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2002년 7월 2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대중은 "만약 북한이 또다시 군사력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려 한다면 그때는 북한도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이어 국군수도병원을 방문, 서해교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위로했다. 교전 발생후 한달뒤인 7월 23일 김대중은 서해교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했다. 참여 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1주기를 앞둔 2003년 6월 25일에 유가족들과 국가유공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고 이어서 2003년 6월 27일 2함대를 방문하여 안보공원에 전시된 참수리357호정을 방문하여 묵념하고 헌화하는 등 추모하고 이후 참수리357호정에서 다리를 잃었지만 복귀한 이희완 중위에게 위로전화, 그 외에도 명절마다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이명박 정부 대한민국 국방부는 처음 서해교전 (西海交戰)이라고 부르던 것을 이명박 정부 집권 후 곧바로 2008년 4월에 제2연평해전 (第二延坪海戰)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제2연평해전 10주년 행사에 참석하였으며 군 통수권자가 제2연평해전 관련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2002년 해전 이후 처음이었다. 대응기동 개정 무려 5단계에 이르던 대응기동 절차는 해군의 손실을 불러왔다. 참수리 357호도 차단기동 중 기습을 당했다. 기존에는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차단기동 이었는데 기습공격을 받기 가장 쉬웠다. 이에 국방부는 2004년 경고방송·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3단계로 개정했다. 이는 후에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의 승리의 바탕이 되었다. 초계활동 제2연평해전에서 초계함의 늦은 대응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교훈으로 삼아, 참수리 고속정들이 초계함의 사정거리 안에서 활동하게 하여 대응을 높였다. 개량사업 국방부는 참수리 357호가 조타실에 85mm 포탄에 명중당하여 파손된 것을 보고 방어력을 향상시키도록 했다. 이에 1함대와 2함대 소속 참수리 고속정 45척이 개량되어 방어력이 향상되었으며, 화력 향상을 위해 M60(7.62mm)기관총을 K6(12.7mm) 기관총으로 교체했다. 또한 30년을 써온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하기 위해서 개발된 PKX-A를 윤영하급 고속함 으로 명명했고, 2007년 진수되었다. 참수리 고속정이 가장 강한 화력이 40mm 기관포에 불과해, 적 함을 격침하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윤영하급 고속함에는 76mm 속사포를 장착, 화력을 증강하고 대함미사일인 해성 미사일을 탑재했다 전시 해군은 인양된 고속정 357호정이 선체 구조물의 비틀림 현상과 장기간 침수로 재사용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평택 2함대사령부 충무동산에 전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영화 제작 2013년 10월에 영화 《NLL-연평해전》 이 개봉될 예정이었다. 김학순 감독이 제작 지휘를 하며 김무열, 진구 등이 출연한다. 특히 제작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조선일보의 보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의 지원과 일반 국민의 모금 활동으로 제작비를 충당하여 제작되고 있다. 출연자와 제작진의 재능 기부로 15억 원만 모이면 3D 전쟁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으나, 1, 2차 크라운드 펀딩, 개인 투자자들의 합류로 2억 5000여 만원이 모여 제작비가 부족해졌다. 결국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2013년 4월 22일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운 상에서 제3차 크라운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충당했다. 해당 영화는《연평해전》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 6월 24일 개봉 하였다. 1999년 6월 15일 - 제1연평해전 발생 * 1999년 6월 7일부터 6월 15일까지 북한 경비정이 NLL을 최대 10 km 계속 넘어옴 * 대한민국 해군은 북한 경비정의 선체를 참수리급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차단 기동"으로 대응함. * 15일,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선제공격하여 제1연평해전 발발. 등산곶 684호는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25호의 반격으로 반파된 채로 달아남. *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소령(당시 대위) 부상. "연평해전 영웅"으로 불림. * 북한 피해 최소30명사망, 70명이상부상 , 한척 침몰, 한척 반파 (당일 CNN보도) * 북한은 교전에서 생존해 돌아온 등산곶 684호의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함. 2000년 6월 15일,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개최. 6·15 남북 공동선언이 선언됨. 2002년 6월 29일 - 제2연평해전 발생. *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 침몰, 전사 6명, 부상 19명 * 당시는 2002년 FIFA 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3,4위전에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과 터키 축구 대표팀이 대결하고 있었다. * 북한은 제1연평해전 당시 생존한 등산곶 684호의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하여 다시 NLL을 불법 남침. * 등산곶 684호의 85mm 고사포의 기습공격에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의 정장 윤영하 대위를 포함 6명이 전사. *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등산곶 684호의 함장 사망. 영웅 칭호를 받음. 2004년 - 대한민국 해군은 연평해전을 계기로 1997년 한미연합사에서 제정된 교전규칙의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 응전 개념으로 수정함. *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대응에서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3단계 대응으로 개정됨. 2004년 1월 - 반파된 등산곶 684호 수리 완료. 김영식 영웅호로 개칭 2004년 7월 - 등산곶 684호가 다시 NLL을 침범, 대한민국 해군의 경고사격을 받고 이북으로 도주. 2009년 11월 - 북한의 경비정이 NLL을 침범, 대한민국 해군의 경고사격에 조준사격으로 대응하여 교전이 일어남. 북측 경비정은 반파되어 다시 북측으로 돌아가고, 남측은 인명피해는 없었음. 대청해전 참고. 2010년 11월 - 북한이 연평도 육상을 공격, 대한민국 해병 2명 사망, 민간인 2명 사망. 연평도 포격 참고.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대한민국 해군 56함 침몰 사건 (1967년) 대한민국 해군 방송선 피랍 사건 (1970년)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년) 제1연평해전 (1999년) 대청해전 (2009년) 천안함 침몰 사건 (2010년) 연평도 포격 (2010년) 북방한계선 (NLL) 참수리급 고속정 윤영하급 고속함 이중배상금지 연평해전 (영화) 2015년 개봉한 대한민국의 영화 제2연평해전 사이버추모관 - 국가보훈처 6·29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6·15 격침작전’이었다, 《신동아》, 2002.8. 분류:2002년 분쟁 분류:2002년 대한민국 분류:200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분류:김대중 정부 분류:2002년 남북 관계 분류:대한민국의 전투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투 분류:해전 분류:연평도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전 분류:대한민국의 해전 분류:2002년 6월 분류:황해 |
칼로리 ()는 에너지의 단위로, 온도가 다른 물체 사이에 전해지는 에너지의 양이다. 즉 물질의 온도를 높이는 데 소요되는 열의 양이다. 라틴어의 "열"을 의미하는 단어인 "calor"에서 유래하였다. 칼로리 단위의 기호는 cal, kcal(1000cal)을 쓴다. 영양학에서는 주로 Cal을 사용한다. 1948년의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칼로리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고 사용할 경우에는 줄(J)을 병기할 것을 결의했다. 에너지, 열량의 국제 단위계(SI)의 표준 단위는 줄이며, 칼로리는 병용 단위로서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의는 "물 1그램을 1°C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나, 물의 비열이 온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히는 "1기압 하에서 14.5℃의 물 1그램을 15.5℃까지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다. 1칼로리(cal)는 4.184J(줄)이다. 1기압 하에서 14.5℃의 물 1그램을 15.5℃까지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은 약 4.1855J(줄) 로 표기되며 화학적 칼로리가 1 칼로리 당 4.186J(줄) 로 표기된다. 이름 기호 변환 열화학적 칼로리 calth ≡ ≈ ≈ ≈ 4 °C 칼로리 cal4 ≈ 4.204 J ≈ ≈ ≈ 15 °C 칼로리 cal15 ≈ 4.1855 J ≈ ≈ ≈ 20 °C 칼로리 cal20 ≈ 4.182 J ≈ ≈ ≈ 평균 칼로리 calmean ≈ 4.190 J ≈ ≈ ≈ 국제 증기표 칼로리 (1929) ≈ 4.1868 J ≈ ≈ ≈ 국제 증기표 칼로리 (1956) calIT ≡ 4.1868 J ≈ ≈ ≈ 일상 생활에서 "칼로리"라는 말을 많이 접하는 것은 음식의 열량 단위를 칼로리로 재기 때문인데, 영양학에서는 생리적 열량의 단위로서 칼로리를 사용한다. 이 때의 칼로리는 cal가 아니라 Cal인데(영양학에서 cal은 너무 작은 단위이므로), cal과 Cal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Cal 역시 칼로리라고 읽기 때문에 오해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칼로리는 사실 킬로칼로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1 kcal은 1 Cal이고, 1,000 cal이다. 즉, 1 kcal 1000 cal. 한국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으나 kJ 병기를 하는 나라도 있다. 생리적 열량을 계산할 때는 보통 간단한 계산을 위해 애트워터 계수(Atwater s coefficient)를 사용하며,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1그램당 4 kcal, 지방이 1그램당 9 kcal, 알콜이 7 kcal의 열량을 가지는 것으로 계산한다. 인체의 지방 조직은 87%가 지질이며, 1kg의 지방 조직은 대충 870g의 순수한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약 7800kcal). 곧, 지방 조직 1kg을 없애려면 7800kcal를 소모해야 한다. (단, 지방이 먼저 연소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운동량은 이것보다 훨씬 크다) 분류:에너지의 단위 분류:영양 |
+ 섭씨 온도 변환 공식 에서 으로 변환 공식 섭씨 화씨 °F = °C × 1.8 + 32 화씨 섭씨 °C = (°F − 32) / 1.8 섭씨 켈빈 K = °C + 273.15 켈빈 섭씨 °C = K − 273.15 섭씨 란씨 °Ra = °C × 1.8 + 32 + 459.67 란씨 섭씨 °C = (°Ra − 32 − 459.67) / 1.8 섭씨 열씨 °Ré = °C × 0.8 열씨 섭씨 °C = °Ré × 1.25 섭씨 온도 (Celsius , 攝氏溫度)는 1 atm에서의 물의 어는점을 0도, 끓는점을 100도로 정한 온도 체계이며, 기호는 °C 이다. 1742년 스웨덴의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가 처음으로 제안하였으며, 영어 등에서는 제안자의 이름을 따 ‘셀시어스’로 부르고 있다. 셀시우스는 물의 어는점을 100도, 끓는점을 0도로 제안하였으나 사용이 불편하여 후에 끓는 점과 어는 점의 기준을 바꾸었다. 하지만 온도 단위는 여전히 같은 100등분 이므로 섭씨 온도라고 부른다. 현재는 위와 같이 정의하지 않고 물의 삼중점을 0.01도로 정의한다. ‘섭씨(攝氏)’라는 이름은 셀시우스의 중국 음역어 ‘섭이수사(攝爾修斯)’에서 유래한다. 화씨 켈빈 온도 NIST, 기본 단위 정의 켈빈 The Uppsala Astronomical Observatory, 섭씨 온도 단위의 역사 London South Bank University, Water, scientific data BIPM, SI brochure, section 2.1.1.5, Unit of thermodynamic temperature TAMPILE, Comparison of temperature scales 분류:SI 유도 단위 분류:온도의 단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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