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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639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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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景文王代의 政局運營과 災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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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봉(충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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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문왕대의 정국운영은 災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경문왕 3년에 발생한 異變은 경문왕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는 정국운영방식에 불만을 품은 진골귀족들의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응으로 경문왕은 感恩寺에 행차하여 望祭를 지내고, 五廟制 개편과 태자 책봉을 통해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경문왕 6년 이후에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진골귀족들은 이러한 정국운영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경문왕 6년 이후에는 재이가 많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한 피해가 컸다.
그렇지만 경문왕대는 재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재해 피해에 대해서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해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대규모 修造役事를 계속하여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경문왕 8년과 14년의 진골귀족들의 모반은 재해 피해에 미온적인 국가적 대응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여건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이 시기의 재이는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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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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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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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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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토착신앙의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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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s Representative of the Ancient Indigenous Belief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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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애(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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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토착신앙의 중심에는 초자연적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특수한 기술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일정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일정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토착신앙의 담당자이다. 巫·老嫗·日者 등은 『三國史記』‧『三國遺事』에서 토착신앙의 담당자로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같은 시기에 등장하여 이에 주목된다. 이들은 또한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巫의 경우 1~3세기에 기사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占卜을 통한 왕의 자문자적 역할과 함께 治病을 담당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巫는 왕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층을 대상으로 治病과 자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老嫗의 역할은 왕이나 왕비 등 왕실 주요 인물의 養育 능력이 가장 중요시 되고 있으며, 소지마립간 22년 이후에는 老翁과 老人이 등장한다. 이것은 신라 정치체제가 완비되어가고 정복단계에 들어서면서 남성의 지위가 격상되었고, 또 불교의 영향을 받아 남성이 숭배된 까닭에 老嫗가 老翁이나 老人으로 바뀌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日者의 경우 주로 천문에 대한 관측과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그 변화를 해석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日者는 왕에게 존경을 받거나 권위를 인정받았다기보다는 천체를 관측한 결과와 그에 대한 해석을 왕에게 고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으므로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왕에 대한 조언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日者는 마립간기 이후 국가의 관제에 편입되어 日官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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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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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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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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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에 보이는 4~5세기의 加耶와 三國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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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lationship between Gaya and Three Kingdoms during 4th through 5th Centuries, Seen from the 『Samkuk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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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주현(계명대학교)"
] |
대가야는 3세기말에 일어난 가야사회의 변동과 함께 본격적인 성장의 여지가 마련되었다. ‘포상팔국전쟁’이라는 남부제소국들의 분란에 휘말리지 않고 내륙에서 안정적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서남해로를 장악하고, 가야지역으로 진출하였을 때 대가야가 가라7국 중 하나로서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 간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후 加耶의 대외관계는 친백제성향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신라의 고구려에 부용화되는 경향과 함께 한반도내의 세력균형의 일환을 이룬다.
5세기 초에는 고구려·신라연합군에 대항하여 가야제국이 백제, 왜와 연합하여 싸웠는데, 여기에는 任那加羅, 즉 대가야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문헌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는 4~5세기 가야사회의 모습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여성들의 활약이다. 『일본서기』에는 위태해진 가라왕실을 구하기 위해 가라국왕의 누이 기전지가 활약하고 있는데, 그녀는 사제였다고 추정된다, 금관가야의 허황후나 傭女도 같은 성격의 인물들이고. 신라의 내물왕과 실성왕 두 대에 걸쳐 왕비가 되는 미추왕녀 역시 사제로서의 권위를 가진 자로서 그녀는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으로 추정된다.
한편, 제의용으로 사용된 뱀모양토우장식 통형기대가 대가야 중심부로의 집중도가 높다는 점은 대가야의 정치력이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데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다라국은 무력과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대가야에 필적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었으나 대가야의 주술적 종교적 권위 하에 있었으며, 그것은 다시 대가야의 물리적인 힘으로 뒷받침되어 가야제국들의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일조 했다. 6세기 들어서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든 것도 대가야왕의 관념적 주술성과 종교성을 대변하는데, 가야금에 깃들여 있는 사상적 배경은 전성시대였던 5세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야의 대외문화교류상을 보여주는 고고학자료로서 주목되는 것은 세 종류의 청동초두인데, 백제를 경유하여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와 가야의 관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三國史記』가 유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기록 즉, 481년 미질부성에서의 백제·가야 연합군의 신라지원이 이미 서로 간의 정치문화적 교류를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들 초두가 물적인 자료로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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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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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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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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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高句麗本紀 4∼5세기의 기록에 대한 검토 -국내 전승의 원전에서 채록한 기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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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view on Records from the 4th~5th Century Goguryeobogi inn Samguksagi -Focusing on Extracts from Domestic Original Tex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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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섭(한성대학교)"
] |
4∼5세기 고구려본기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관한 기사를 주를 이루고 있다. 4∼5세기의 고구려본기 기록에는 연대의 착종도 몇 군데 보이고, 地名에 관한 일부 오류도 발견되며 史論이 전무한 것도 특징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4∼5세기대의 금석문에서 전하는 내용도 상당수 고구려본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고구려본기 4∼5세기대의 기사를 통해 국내 전승의 원전에서 채록한 것으로 이해되는 기록 가운데 중국왕조와의 대외관계 기사는 기본적으로 중국측 사서에 기초하여 작성된 부분은 많으나, 국내 전승의 원전에서 채록한 기록도 15건 정도 보인다. 중국왕조와의 대외관계 기사가 거의 전적으로 중국측 사서에 의존하였다기보다는 보완 자료의 성격을 갖는 국내 전승의 원전과의 비교 속에서 작성되었다. 한편 국내 전승의 원전만을 이용한 기사의 유형은 왕의 이력에 관한 기록, 자연현상에 관한 기록, 왕의 행적이나 정치행위에 관한 기록 등으로 나타난다. 왕의 이력과 관련한 分註를 통해 보면 異種의 국내 전승 원전의 존재가 확인되며 국내 전승 원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의 본기에 나타난 4∼5세기대의 공유기사를 검토한 결과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의 공유기사, 신라본기와의 공유기사는 대부분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이용된 원전을 저본으로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본기에 정보량이 많거나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는 예외적인 6건 정도의 사례도 있다. 삼국간 본기의 공유기사는 기사마다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인용 원전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은 사례도 확인된다. 또한 고구려 관련 기사 가운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만 기술된 기사가 있고 고구려본기에는 생략되고 있는 점은 국내 전승의 원전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공유기사가 작성된 것은 아마 『삼국사기』 편찬시에 異種의 국내 전승의 원전 자료를 대교하여 각 본기를 저술하면서였다고 판단된다. 즉 각 본기를 작성하는 시점에서 국내 전승의 원전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재정리하고 재구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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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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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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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금강좌의 황금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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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Ratios in the Eight Direction Diamond Thrones of the Seokgat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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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율(인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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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금강좌는 석가탑을 팔방에서 에워싼 8개의 원형좌대로서, 하층기단과 함께 석가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본 연구는 팔방금강좌에서 황금비율의 존재와 활용방식을 논의하였는데, 먼저 평면구조를 검토한 다음 금강좌의 연화문 도안을 검토하였다.
팔방금강좌의 평면구조는 정사각 및 원으로 구성된 일종의 기하학적 도형이다. 본 연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실측자료에서 구한 평균값으로 이 도형을 재구성하고 다시 관련 부분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다음의 결과를 얻었다; 1) 팔방금강좌의 중심을 연결한 정방형(좌심정방형)은 하층기단(면석기준)을 φ배(φ≒1.618)한 것이다. 2) 이 두 정방형의 간격을 φ로 나누면 금강좌의 직경과 같다. 3) 이웃 금강좌를 연결하는 좌간대석의 폭은 금강좌의 반경을 φ로 나눈 것이다. 이 세 가지 정보는 평면구조의 재구성에 필요한 전부인데 모두 황금비율로 결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팔방금강좌의 평면구조는 황금비율로 설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금강좌의 표면에 조각된 8엽 연화문은 중심에서 내자방, 외자방, 내연판, 외연판 및 외곽으로 확대되는 5개의 동심원 구조를 갖고 있다. 본 연구는 석가탑의 입면에서 발견된 황금비율들을 적용하고 확인하는 방법으로 이들의 간격을 추적하여 다음 결과를 얻었다; 1) 이웃한 동심원 간격들은 다양한 황금비율을 이룬다. 2) 8개 금강좌는 동심원 구조에서 동일하다.
팔방금강좌의 연화문은 단예판과 복예판이 각각 4개씩인데, 그들의 배열은 시계방향으로 단예판 2개, 복예판 1개, 단예판 2개, 복예판 3개로 이어진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8=2+1+2+3 인데, 이는 황금비율의 자연수적 표현이고 피보나치수 8의 피보나치수열 구조와 같다.
요컨대, 팔방금강좌는 평면의 구조와 연화문의 도안 및 배열까지 모두 황금비율로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황금비율의 관점에서 팔방금강좌는 석가탑 입면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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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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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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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編籍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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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gration of the Aristocrats of the Silla Capital and their Place of Family Reg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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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일식(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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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말 이후 신라 왕경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주변 小國의 지배층 일부가 왕경으로 이주하고, 전국의 財貨들도 왕경에 집중되었다. 인구와 재화의 분산이 필요했다. 신라는 지방에 小京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삼국통일 이후에 5개 소경을 갖추었다.
6세기 초부터 설치된 소경에는 왕경인의 일부가 집단 이주했고, 다른 지방의 주민들이 徙民되는 경우도 있었다. 왕경 중심부의 공간 부족은 지배층 일부의 거주지를 경주 외곽으로 확산시켰다. 일부 귀족들은 소경을 비롯해서 州·郡으로 이주하였다. 필자는 이렇게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긴 왕경 귀족들의 신분 변화가 있었는지, 編籍地까지 지방으로 바뀌었는지를 검토하였다.
신라 귀족들은 왕경을 떠나 小京이나 州・郡 어디서 살든 여전히 왕경인이었다. 거주지를 옮겨 여러 세대가 지나더라도 왕경에 있는 6部 중 하나에 戶籍을 올려두고 있었다. 編籍地를 왕경으로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骨品과 특권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신라 왕경에 17萬戶가 살았다는 기록에는 이런 수자가 많이 포함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런 양상은 신라의 지배체제를 군현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로만 파악하는 시각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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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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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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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然의 一統三韓 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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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yeon(一然)’s Perception of Iltong-samhan(一統三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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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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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반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고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삼국유사』에도 一統三韓, 一統三國 등의 용어를 여러 차례 쓰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본고에서는 삼국통일에 대한 『삼국유사』의 서술을 검토하여 一然의 일통삼한에 대한 인식을 살려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삼국통일의 주역 金春秋와 金庾信에 대한 『삼국유사』 기록을 검토했다.
『삼국유사』 太宗春秋公條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중복되는 것이 많지만 일연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편집·서술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 항목에서 신라 무열왕의 치적과 백제 의자왕의 실정을 대비하여 서술함으로서 무열왕대가 성대였음에 반해 의자왕대는 패망의 시기로 인식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무열왕에게 太宗이라는 묘호를 사용하게 된 것은 무열왕과 김유신의 공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미추왕 죽엽군, 김유신, 태종춘추공 등의 여러 항목에서 김유신의 삼국통일 관련 공적이 부각되었다. 김유신은 호국신의 보호를 받는 위인으로 강조되기도 했고, 神術의 조화까지 부릴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부각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당나라의 소정방에 비하여 보다 용기 있는 장수로 서술되기도 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젊은 시절 서로 굳게 결합하고 있었던 점도 강조되었다. 특히 김유신의 누이동생 文熙와 김춘추와의 결혼에 얽힌 설화는 재세의 뜻을 품고 있던 두 청년이 의기투합하여 의도적으로 추진한, 즉 정략적인 것임이 강조되고 있다.
신라사회에는 삼국통일을 불교의 공덕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사회에 불교가 융성하게 됨으로서 삼한이 한 나라로 통합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일통삼한을 불교의 신앙 영험으로 강조한 구체적인 사례는 황룡사구층탑의 경우이다. 일연은 일통삼한을 황룡사 구층탑의 영험으로 해석했다. 이에 비해 고구려는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했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삼국유사』 보장봉노 보덕이암조에서는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도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보장왕이 도교에 혹하여 불법을 믿지 않았기에 보덕이 남쪽으로 옮겨갔고, 그 때문에 나라가 곧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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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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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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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경주의 고적 조사·정비와 도시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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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Historic Sites's Survey & Maintenance and City's Change of Gyong-Ju in the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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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신재(동국대학교)"
] |
1920년대 경주에서 이루어진 고적 조사·정비의 실상과 그 의미를 알아보고 경주 읍내의 변모와 관광도시 경주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1920년대는 신라고분 발굴이 가장 활발한 시기이다. 1921년 금관총의 유물이 건물 증축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1926년 서봉총 발굴은 발굴을 원하는 측과 경주역 기관고 부지 매립에 필요한 흙이 필요한 측과의 타협에 의해 이뤄졌다. 고분에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고 고분의 구조가 일반인에게 알려지자 고분 도굴이 빈번해진다.
1920년대에 불국사와 석굴암이 보수되면서 원형이 일부 훼손된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식민 당국이 조선의 전통문화를 현창하고 있다는 증표로서 대내외에 선전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일본 제국의 지방 문화로 간주되었으나 정비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조선인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하는 원천으로도 작용한다.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개관하여 관광 코스가 된다. 분관은 식민 당국자의 시각과 잣대에 따라 유물을 전시했다. 조선총독부의 신라문화 정비·보존 정책은 조선문화의 독자성을 인정치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많았다.
서악역이 1926년 경주역에 통합되면서 경주역 부지가 확장되고 역사도 신축되었다. 1920년대 경주 최고의 번화가인 본정통에는 일본풍의 건물이 들어서고 경주읍성 성벽은 거의 다 무너지고 구 읍성지구 안에는 식민지 통치기관이 밀집함에 경주 중심가는 일본의 지방도시와 같은 경관을 보여주게 된다. 이 때 경주 시내 대다수 점포와 상점 건물은 일인 소유였고 교육에서도 일인과 조선인 간에 불균형이 존재했다.
고적지 정비와 관광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경주를 찾는 관광객은 점차 증가하였다. 경주의 관광지화가 진행되면서 예전의 미풍양속이 사라져 가는 경주 분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대두되었다.
경주는 일제강점기에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고도로서 정비되었다. 관광의 대중화와 수학여행의 확산으로 1920년을 전후하여 경주는 최고의 고적관광지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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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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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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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단팔각’ 연화대좌의 통일신라 수용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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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ptance and Development of the ‘Octagonal Three-step’ Lotus Pedestal in United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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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애(경주대학교)"
] |
‘삼단팔각’ 연화대좌의 시작은 석굴암 본존상 대좌이다. 석굴암 본존에서 시작된 8세기 중엽 ‘삼단팔각’ 연화대좌의 가장 큰 특징은 중대석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이다. 이 시기 중대석은 각 면의 가로와 세로가 거의 비슷한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이룬다. 유사한 특징을 지닌 8세기 중엽경의 보리사석불좌상, 766년 석남암사 비로자나불좌상 역시 같은 범주에 둘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후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불상의 대좌는 중대의 높이가 확연히 높아지고, 간혹 중대 안상이 새겨지거나, 안상 안에 각종 부조가 등장한다. 이후 9세기 중엽부터는 중대 높이는 큰 변화가 없지만 중대와 하대 사이에 팔각의 고임석이 덧붙여지면서 앞 시기의 대좌와 구분 지워진다. 아울러 하대에서 분리된 하대받침의 높이가 높아지고, 역시 안상 안에 각종 부조가 새겨진다. 동화사, 도피안사, 취서사의 불좌상 등을 대표 예로 꼽을 수 있다. 9세기 중엽에 정형화된 이러한 대좌형식은 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고려 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진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대좌의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높이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높이는 대좌의 절대적인 높이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불상 대비 대좌의 높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데 이는 통일신라 ‘삼단팔각’ 연화대좌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이 때 대좌의 높이를 높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중대의 높이이다. 중대의 높이가 높아짐에 따라 중대 면석은 정사각형에서 점차 위아래가 긴 직사각형으로 변해갔으며, 중대와 하대 사이의 고임석을 둔다든지, 하대석과 그 아래 받침을 별석으로 제작하면서 대좌의 장식성이 강해지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이다.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좌상의 대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식 및 양식이 달라지며, 이러한 변화는 불상양식의 흐름과 대체로 일치한다. 불상의 대좌는 어쩌면 불상보다 더 정확히 시대양식을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은 불상 대좌 변화의 대체적인 윤곽잡기를 통해 향후 필자가 추구하려 하는 통일신라 불교조각 연구의 기초 작업 중 하나로 삼으려 하였으며, 지금까지 연구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광배나 대좌의 중요성을 점검해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려는 의도로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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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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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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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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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門寺 東·西 三層石塔에 관한 고찰
|
A study on Dongseo 3-story Stone Pagoda in Woonmoon temp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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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덕(동국대학교)"
] |
본고는 청도 운문사의 동서 삼층석탑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진행된 논문으로 그 결과를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운문사의 연혁을 간략하게 살펴본 후 동·서 석탑의 시기성 문제를 다른 통일신라시대 석탑 즉, 9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부석사 삼층석탑, 대흥사 응진전 삼층석탑, 홍천 물걸리 삼층석탑, 범어사 삼층석탑, 무장사지 삼층석탑, 청송사지 삼층석탑 등의 석탑과 양식 비교를 통해서 동탑의 경우 조성 시기를 기존보다 빠른 9세기 전반경으로 제시하였다. 즉 동탑이 서탑 보다 조성시기가 앞선 것으로 판단됨에 따라 운문사 동서석탑의 조성 시기는 시기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는 점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숭복사지 쌍탑, 중금리사지 쌍탑, 인용사지 쌍탑 등 신라팔부중 쌍탑과 운문사 석탑의 비교를 통해 운문사 동서탑의 석탑 조성방식의 차이와 팔부중 도상의 모방문제, 동서탑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양식 및 세부기법의 차이를 밝혔다. 이러한 특징은 곧 운문사 석탑이 쌍탑으로 동일시기에 조성된 것이 아니며, 단탑으로서 순차적인 조형 순서를 갖고 서탑은 동탑을 모방하여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2006년 대웅보전 해체수리 과정에서 확인된 1653년의 가람배치도 상에 나타나는 석탑의 위치문제 논의를 통해서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되어 오늘날과 같은 쌍탑 형태로 복원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1919년의 운문사 대웅보전 해체수리시에 함께 복원된 동서 삼층석탑의 복원에 대한 제문제, 즉 동탑의 경우 하층기단 갑석의 1단 몰딩문제와 하층기단 면석의 2중 우주 그리고 서탑의 상층 남쪽 면석인 우주석의 결실문제와 상층기단 갑석이 각각의 다른 개체가 조립되어 단일부재로 분리되어야 하는 점 등을 확인하여 향후 복원상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점을 성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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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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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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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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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Activities of the Silla's Heroes during the 4th~5th Century shown in the Bibliography Part of Samguks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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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종훈(대구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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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4~5세기를 살다간 신라인의 활동상을 『삼국사기』 열전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검토의 대상은 열전 5에 실린 석우로와 박제상, 그리고 열전 8에 실린 물계자와 백결선생 등이었다. 석우로는 당시 왕실의 핵심 인물이었고, 신라의 진한 통합 과정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으나, 왜의 침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희생하여 죽음을 맞이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박제상은 박씨 족단의 주요 인물이었는데, 김씨 왕인 눌지왕의 부탁을 받고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파견된 복호와 미사흔을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왜인들에게 붙잡혀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나, 그의 희생으로 박씨 족단은 김씨 왕실의 정치적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지닐 수 있었다. 물계자와 백결선생은 세상의 재물과 명예에 구애되지 않는 초연한 삶의 자세를 보여준 인물들로서 후대인의 칭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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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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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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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기 『삼국사기』의 승려 및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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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lationship between Gaya and Three Kingdoms during 4th through 5th Centuries, Seen from the 『Samkuk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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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순(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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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삼국사기』 4∼5세기 승려 및 사찰 관련 기록을 살펴보려는 것이 목적이다.
4∼5세기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思潮의 유입을 알리는 기록이 나온다.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에 다른 나라로부터 승려가 와서 불교가 전해지고 사찰이 세워지는 내용이다. 주지하듯이 『삼국사기』에는 「釋老志」도 없을 뿐 아니라 불교기사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논평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국가 내지 국왕과 관련된 내용은, 불교관련 기사일지라도 간략하게나마 전하고 있어 삼국에 불교가 초전된 기록들이 남아 있다.
본고는 우선 고구려·백제·신라의 관련기록을 검토하고, 최치원의 기록과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여타의 자료들과의 비교를 통해 4∼5세기의 삼국의 승려 및 사찰을 고구해 보았다.
그 결과 『삼국사기』의 4∼5세기에 나오는 승려는 거의 대부분이 고구려와 관련된 승려였고, 사찰 역시 거의 고구려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釋加文佛弟子’라는 묵서명이라든가, 불·보살, 내지 연화화생·연화문·비천 등을 그려 불교적 내세관을 보여준 벽화가 많이 남아있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완해 주고 있다. 반면 백제나 신라의 경우 그 내용이 너무나 적게 나오고 있다. 따라서 4∼5세기에는 고구려에 불교가 융성한 시기였음을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사학사적 의의를 보면, 『삼국사기』 4∼5세기 승려와 사찰 관련기록을 놓고 가해진 조선조 유학자들의 비판적 입장과는 달리, 김부식은 새로운 사조 내지 선진문화로서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것을 중시한 측면이 있었다. 이에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초전기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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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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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8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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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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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성동유적으로 본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 사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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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rchaeological Study on ‘Saro’ State from the 1st Century B.C. to the 3rd Century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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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준(경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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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지방 초기철기시대의 분산적 읍락들이 각 지역의 소분지를 단위로 각각 하나의 정치체로 재편된 것이 진·변한 ‘국’이라는 지역 국 가설의 견지에서 황성동유적을 시공간 비교의 축으로 삼아 경주 분지의 목관묘·목곽묘 유적들을 살펴보면 사로국은 서기전 2세기말~1세기 초에 경주 분지의 대부분 지구를 무대로 성립한다. 당시 이를 구성한 읍락(과 그 중심지)은 경주 도심(월성 부근?), 서부(사라리?), 남부(덕천리), 동남부(죽동리)에 각각 소재하였고 북부 안강 지구(안계리), 울산 동천 유역 지구(중산리)도 조만간 이에 합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로국 성립의 주요 계기는 유망인 이입과 철 생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성립기 사로국의 읍락 수장들은 이념, 경제, 무력이라는 세 가지 권력 기반 중 확고한 이념 기반을 갖고 경제 기반은 어느 정도 갖추었으나 무력은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배 同族(lineage) 집단의 長들이었다.
서기 1세기대 사로국의 읍락 수장들은 사라리 130호 목관묘와 최근 발굴된 탑동 목관묘가 가리키는 것처럼 이념, 경제 권력 기반 이외에 무력을 확보하기 시작하였으나 한 묘군에서 이와 비슷한 탁월한 묘가 복수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우세를 점한 지배 동족은 여전히 출현하지 못했다고 보인다. 사로국 주수 혹은 거수는 아직 고정된 한 읍락(취락)에서 배출되지 않았으나 국읍은 지리적 이점 등을 고려하면 일찍 도심 지구로 정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서기 2세기 중엽 목곽묘의 등장에 반영된 변화상을 보건대 이제 무력까지 확보한 수장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특히 국읍 혹은 읍락 수준에서 지배층의 재편이 크게 일어난 듯하며 그것은 기존 목관묘군과 떨어져 조성되는 목곽묘들의 입지가 시사한다. 목곽묘군에서는 탁월한 분묘가 복수 또는 다수인 점으로 보아 이제 우세한 동족 집단들이 등장하였던 것으로 추론된다. 국읍은 늦어도 이 시기에 도심 지구로 정해졌을 것이며 그 이전부터 이 읍락 내 하위 취락 주민의 작업장이었던 황성동에서의 철기 제작은 국읍, 나아가 사로국의 경제 발전에 큰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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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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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3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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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흥성과 신라 시문학에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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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urishing of Tang(唐) Dynasty Poetry and its influence on poetry of Silla(新羅)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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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세(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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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시문학은 중국문학에 있어 가장 성취가 높은 문학 장르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당대의 시문학은 중국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여러 사람들에 의해 吟詠, 연구되고 전 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漢末이래 수백 년간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대제국을 형성하면서 번영을 이루었던 점, 前代의 시가, 서예, 회화, 음악과 같은 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켜 시 창작으로 귀일시킨 점, 唐太宗이래 학문을 장려하고 스스로 시 창작을 하며 이를 선도했던 제왕들이 많았던 점, 과거시험에 작시과목을 넣어 取士하여 시를 적극적으로 창작하는 풍조를 일으켰던 점, 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지리와 풍속이 상이한 변방을 이국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가 확장되면서 여행, 상업의 범위가 확대되고 개방정책을 통해 외국의 문화, 풍속이 유입되어 시의 소재 또한 다양하게 된 점, 아울러 盛唐시기에 최고의 번영을 누리다가 安祿山의 난으로 멸망 직전까지 갔던 파란만장한 시기가 있어 시인들이 창작할 다양한 소재를 제공하게 된 점들을 들 수 있겠다. 또한 인접국으로 교류가 잦았던 신라는 통일 이전의 동맹교섭, 유학, 교류들을 통해 당왕조와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당연히 당시는 漢文으로 쓰여 진 만큼 신라의 지식층들은 당시의 영향을 받고 이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허다한 인물들이 당문화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리라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 발견될 소지는 극히 드물다. 때문에 여기서는 현존하는 문헌에 의거하되 그 중에서도 『全唐詩』에 기재가 된 즉 대부분이 당에 유학 가 직접 당대 시문학을 접한 인물을 위주로 작품을 소개하고 대략적인 특성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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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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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3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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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 전설의 전승과 변이 과정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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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transmission process of the Muyeongtap leg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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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근(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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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불국사 석가탑, 즉 무영탑 전설의 시대적 전승과 변이 과정을 탐색한 논문이다. 무영탑 전설 가운데 최고의 기록은 『동경잡기(東京雜記)』의 ‘영제(影堤)’조이다. 이후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 ‘동도칠괴(東都七怪)’와 경주의 ‘삼기팔괴(三奇八怪)’의 ‘불국 영지’는 ‘영제’와 같이 전설의 부분적 흔적만 전한다. 그러나 불국사의 『화엄불국사 고금역대 제현 계창기(華嚴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創記)』의 「서 석가탑」조는 무영탑 전설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원형 자료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공은 이름이 없는 당 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온 사람은 누이 아사녀(阿斯女)이다. 불국사 남서쪽 10리 지점의 못에 석가탑 그림자가 비치 않아서 무영탑이라 했다는 간단한 기록만이 실려 있다.
다음 시대의 기록은 일제강점기 때 발간된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1921년)와 오사카 로쿠손(大阪六村)의 『경주의 전설』(1927년) 중 영지(影池) 부분이다. 오사카 로쿠손의 <영지>전설은 많이 각색되어졌다. 이 글에서 아사녀는 누이에서 부인으로 바뀌었고, 탑 그림자가 영지에 계속 비치지 아니 하자 아사녀는 투신하고, 석공은 부인을 닮은 부처상을 조각하고, 투신하는 비극적인 스토리로 정착되었고, 석가탑은 무영탑, 다보탑은 유영탑, 못은 영지, 영지 언덕에 있던 절은 ‘영사(影寺)’로 불렸다고 했다.
현진건이 192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경주 기행문 가운데 “무영탑 전설”은 『고금창기』와 오사카 긴타로와 오사카 로쿠손의 기록을 참조하여 다시 정리한 것이다.
현진건 1938년 7월부터 소설 『무영탑』을 동아일보에 연재했고, 1941년 작품집을 간행하였다. 이 소설은 무영탑 전설을 모델로 한 창작 작품이다. 소설에서는 석공과 부인 아사녀는 부여 사람, 석공의 이름은 아사달(阿斯怛)로 묘사된다. 이 작품은 서사구조가 복잡한 장편 소설로서, 귀족의 딸인 구슬아기를 등장시켜 본격적인 갈등과 파국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애정 소설로 거듭난다. 석공 아사달을 부여 사람으로 설정한 것은 현진건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현진건 이후 아사녀와 아사달에 천착한 이는 시인 신동엽이다. 1960년 혁명시 「아사녀」를 발표한 후 그는 아사달과 아사녀에 집중했다. 그에게 아사달은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민중을 상징한다. 석공의 이름인 아사달(阿斯怛)을 아사달(阿斯達)로 개명하고 정착시킨 사람은 신동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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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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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3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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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唐戰爭期 文豆婁 秘法과 海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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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undra Secret Magic and naval battle During Na-Dang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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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훈(경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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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총력전에 있어서는 국민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당전쟁은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초강대국인 당의 세력에 맞선 신라군과 신라민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나당전쟁 개전초기(670~671)에 등장한 것이 바로 명랑법사의 문두루 비법이다.
문두루 비법의 시행과 당 수군의 침몰에 관한 내용은『삼국유사』에만 기록되어 있고 설화적 요소가 강해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삼국유사』의 기록은 당시 실제 발생한 사건을 확대·과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당의 수군은 경기만 북부일대에 정박·활동하고 있었는데, 경기만 일대는 서해에서 조류가 가장 빠르고, 조차가 세계적으로 큰 곳이다. 그리고 여러 물길이 모여들어 수로가 복잡하고, 중국에 비해 섬이 많아 항해가 곤란한 지역이다. 특히 670년과 671년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던 시기여서 좌초의 위험이 상당히 높았다. 신라는 당에 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여 당 수군의 취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대응하여 방어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두루 비법을 시행하였는데, 당의 수군은 실제로 침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라는 나당전쟁 초기에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문두루 비법의 시행과 당 수군의 침몰은 신라 수뇌부에 있어서는 적과 직접 싸우지 않아도 되는 한편,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명랑법사에 있어서는 사천왕사 건립을 추진하고 신인종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즉 문두루 비법의 성공은 신라 수뇌부와 명랑법사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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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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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3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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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물 김대성의 원형과 스토리텔링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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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식(세명대학교); 강석근(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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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신라인물 김대성의 원형과 스토리텔링 창작의 실제 모델을 제시한 논문이다.
불국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문화소통의 장소적 상징물이다. 불국사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야기된 혼란과 반목을 자비와 소통으로 극복하고 이룩한 르네상스의 정신이 담겨 있다. 세계인이 경탄하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지극히 숭고한 불심과 모든 문화를 하나로 아우르는 용광로와 같은 지고한 신라 정신이 낳은 걸작품이다. 이런 문화적 르네상스를 이끈 이가 바로 김대성이다.
본고는 문화인물 김대성을 문화론(文化論)의 시각에서 검증하고, 이를 OSMU(One Source Multi Use)의 문화콘텐츠 창작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진단하였고, 아울러 김대성과 관련된 장소자산(place assets) 곧 석굴암, 불국사를 IT와 학문적으로 융합시키고, 김대성의 신화적 상상력을 “김대성과 불국사․석굴암 이야기”와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에 적용시킨 2편의 시놉시스를 제시하였다.
김대성은 신라인들의 거룩한 종교적 소망을 실현시킨 위대한 문화 기획자이자 진정한 예술가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문화콘텐츠는 주몽, 장보고, 선덕여왕 드라마보다 더욱 강력한 매력과 잠재성을 지닌다. 따라서 김대성의 원형에 대한 연구와 김대성에 대한 뛰어난 스토리텔링 창작과 개발의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된다.
이런 방법을 통해 김대성 스토리텔링마케팅의 방법을 정립하고, 김대성을 활용한 문화관광사업의 추진, 거리명과 동상건립 등 지속 가능한 사업을 발굴할 필요가 있으며, 김대성 스토리텔링의 시놉시스 전시관과 상영 방안 제시, 김대성 브랜드의 상표 등록 방안, 동리목월문학관의 연계 스토리텔링 마케팅도 필요하다.
이런 제안을 제대로 수용한다면, 경주는 제2 경주문화엑스포를 개발하고, 신라유산의 현대적인 스토리텔링마케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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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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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34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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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對倭外交와 金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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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s diplomatic relations with Wae and Kim Chun-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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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민수(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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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란 한 인물을 통해 신라 삼국통일과정을 외교사적 측면에서 조망해 보았다. 대야성의 함락은 그를 국제무대에 데뷔시킨 사건이었다. 백제군에 의해 딸의 일족이 몰살되고 시신이 유기되는 상황에서 적지 고구려에 뛰어들어 연개소문과 보장왕을 만났다. 그러나 고구려외교의 실패는 왜국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당시 왜왕권의 당면과제는 새로 출범한 개신정권의 정통성을 알리는 일이었고 동아시아 최고의 선진국 당과의 교통을 재개하는 일이었다. 왜왕권은 백제 대신에 친당노선에 있던 신라에 사절을 보냈고 신라는 이에 화답해서 김춘추의 왜국행이 이루어졌다. 왜왕권의 지배층들은 김춘추의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화술에 매료되어 신라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로 나아갔다.
김춘추는 왜왕의 대당 국서를 휴대하여 당태종을 만났다. 당의 고구려침공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던 태종은 신라를 군사파트너로 하여 고구려를 협공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추구하는 목표와 일치하였다. 김춘추의 당의 군사력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여왕의 폐위까지 운운하며 그 여파가 국내 모반사건까지 일으켰지만, 극복해 나가면서 당풍 의관제 도입과 연호의 채용, 당황제에의 자신의 친자를 숙위시키는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신라의 통일외교는 드디어 소정방의 13만 대군의 참전을 이끌어냈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과 협공하여 백제를 패망시켰다.
왜왕권의 백제에 대한 부흥운동의 지원이 단행되었을 때는 이미 사비성은 함락되고 왕실은 와해된 뒤였다. 백제의 패망 3년 뒤 2만 7천여 명의 왜병은 금강하류에서 괴멸되어 왜왕권을 묶어두는 김춘추의 외교력은 빛을 발하였다. 국제정세를 보는 예리한 판단력,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외교술, 국제외교의 인내력의 한계를 극복한 의지력 등 김춘추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신라의 백제패망의 과업은 이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김춘추의 동아시아외교는 드디어 통일외교로 승화되었고 그의 유업은 대당외교에도 활약한 바 있는 태자인 文武王 法敏에 의해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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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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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34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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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출범기의 봉성사와 망덕사 창건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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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poses of Building Bong-Seong-Sa and Mang-Deok-Sa at the Launch of Unified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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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활식(부산대학교)"
] |
신라는 670년부터 676년까지 당과 전쟁을 치룬 끝에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통일신라는 새로운 시대로의 출범에 때맞춰 679년에 사천왕사, 682년에 감은사, 685년 3월에 봉성사, 685년 4월에 망덕사를 연이어 완성했다. 통일신라가 첫걸음을 내딛으면서 대규모의 국찰을 4개씩이나 완성했던 것이다.
사천왕사는 삼국통일을 기념한 호국사찰로 볼 수 있고, 감은사는 호국사찰로 착공되었으나 문무왕의 원찰로 완공된 사찰이다. 봉성사는 신문왕을 괴롭히던 원귀를 위한 사찰이며, 망덕사는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한 사찰이라고 한다. 사천왕사와 감은사가 통일신라 초기에 반드시 건립되어야 했던 사찰이라면, 봉성사와 망덕사는 건립목적이 의심스러운 사찰이다. 성전사원인 봉성사에서 원귀를 奉聖했다고 보기 어렵고,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한 망덕사가 나당전쟁이 종료된 지 약 10년이나 지나서 완성된 점도 의문이다. 또한 이처럼 상호 무관해 보이는 봉성사와 망덕사가 불과 1개월의 차이를 두고 차례로 완성된 것을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본 연구는 봉성사와 망덕사의 본원적 성격을 밝히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봉성사는 김유신의 원찰로 나타났다. 본 연구는 봉성사가 신라의 성전사원이었던 이유, 문헌과 금석문에서 信忠奉聖寺와 奉聖神忠寺로 나타나는 이유, 봉성사가 신라의 위기를 예견했던 이유, 봉성사가 거대한 사찰이 된 이유, 봉성사에 절원당이 세워진 이유를 제시했다. 한편 망덕사의 본원적 성격은 놀랍게도 태종무열왕의 원찰로 나타났다. 그러나 망덕사의 13층 목탑들이 서로 싸우는 현상이 발생했고, 이는 신라 中代 왕실의 안녕이 흔들림으로 해석되어, 결국 원찰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본다. 그리하여 성덕왕 6년(707)에 태종무열왕의 새로운 원찰로 봉덕사가 건립되었다. 망덕사 목탑은 경덕왕 14년(755) 봄에도 흔들렸는데, 그 해 겨울에 당에서는 安祿山의 난이 발생했다. 그 이후로 망덕사는 唐皇室의 안녕을 예견하는 사찰로 부회되었을 것이다. 혜공왕 4년(768)에 신라를 다녀간 歸崇敬을 수행했던 顧愔은 망덕사가 당황실의 안녕을 예견하는 사찰이라는 당시의 인식을 『新羅國記』에 기록했고, 그 내용에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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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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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53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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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출토 흉노시대 금속공예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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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ient Metal Works of Xiongnu in Mongo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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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경미(부경대학교)"
] |
이 논문은 고대 북방 유목민족의 하나인 匈奴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 연구로서, 몽골 지역에서 출토되는 흉노시대의 금속공예품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논문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경까지 북방 유라시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했던 흉노는 금, 은, 동, 철 등 다양한 금속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공예품들을 제작하였으며, 그들의 철기 제작기술은 동아시아 문화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문화 단계에 속한다. 여기에서는 흉노 고분 출토 금속공예품을 ①馬具, ②馬車附屬具, ③武器, ④裝身具, ⑤器皿, ⑥거울, ⑦棺裝飾 및 부속구, ⑧기타 등 8종류로 나누어 고찰한 후, 재질별 제작기법의 특징과 의의를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는 최근 몽골 지역 흉노 고분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의 조사를 통해서, 흉노시대에 이미 고도로 발달한 打出技法 및 鍛造技法, 寶石象嵌技法, 鏤金細工技法 등이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이제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흉노시대의 금속공예품에서 이미 1세기 경부터 魚子文技法이나 물방울정기법, 部分鍍金技法 등이 사용되었음을 밝혀냈다. 흉노시대의 금속공예품은 후대와는 달리 철과 비철금속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사용하여 제작되는 경우가 많으며, 철제 장신구도 상당히 애용되었다. 이것은 발달된 철기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한 금속공예 기술이다. 한편 흉노 금속공예품에서 단조와 타출기법이 애용되는 것은 유목민족 특유의 이동형 생활방식과 관련된 것으로서, 북방 유목문화적 양식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흉노 고분은 고신라시대 積石木槨墳과 비교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단조로 제작된 철제 마구와 금은제 공예품, 북방식 청동기 등이 출토되어, 한반도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일찍부터 주목받아왔다. 그렇지만 고신라와 시공간적 격차가 큰 흉노 고분 출토 금속공예품들은 고신라 자체보다는 그보다 선행 시기인 한반도의 낙랑 문화와 보다 밀접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어서 주목된다. 즉 고신라와 흉노의 문화적 연관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낙랑 문화의 이해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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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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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7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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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백고좌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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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ojwabuphwei of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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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순(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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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백고좌법회는 호국법회의 백미라고 할 만큼 중요한 법회이다. 『仁王經(구마라즙 역의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 「호국품」에 의거하여 행사를 준비하고 경전을 강설하는 법회로 仁王백고좌법회라고도 하며, 국가적으로 7難에 해당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개최하였다. 이 법회는 여러 면에서 신라불교가 호국불교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국가적 규모의 대법회였다. 신라의 황룡사는 호국사찰이라는 題名에 걸맞게 많은 호국법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가운데 백고좌법회는 거의 황룡사에서 개최되었다. 신라의 백고좌법회는 진흥왕대에 처음 개최된 이래 10번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려에서의 200번에 비하면 매우 소략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본고는 먼저 신라의 백고좌법회에 초점을 맞추어 10번의 기록을 검토하고, 법회의 사상적 배경인 『인왕경』의 관련 내용을 살펴보았다. 또한 법회의 실질적인 준비상황과 진행의 내용 구성을 통해 백고좌법회의 면모를 밝혀 보았다. 그런데 황룡사에서 개최된 백고좌법회는 신라시대에만 행해졌으므로, 신라에서의 법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다만 고려에서의 행사 내용은 참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흥왕대에 왕궁을 황룡사로 만들게 되는 배경에 혜량(고구려에서 망명한 승려)의 조언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고, 제일 처음 개최된 백고좌회는 황룡사가 준성되는 진흥왕27년(566)에 낙성을 기념하여 열린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이 법회에서 제일 중요한 100법사의 高座를 일본의 唐招提寺의 고좌와 중국의 돈황석굴 벽화에서 찾아보았다. 또한 법회의 공양물로 『삼국유사』 「만불산」 조에 나오는 薝蔔(치자꽃)과 菴羅(망고열매)에 주목하였다. 이는 신라인들이 불교의 본향인 인도에서 나는 담복인 치자꽃과 암라인 망고열매를 공양물로 썼기 때문에 「만불산」조에 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 법회의 모습을 현재 태국에서의 법회를 백고좌법회와 비슷한 그림으로 제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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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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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7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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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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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上代 王宮의 變化와 宗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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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transition of the Royal palace and the Royal Ancestral Shrine of the Early Period in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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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덕재(경주대학교)"
] |
본 논고는 신라 上古期 宮闕(王宮)의 구조와 소지마립간대 神宮의 건립 이후 그것의 변화에 대하여 검토한 것이다. 尼師今時期에 왕이 巫的 司祭로서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왕의 거처인 王宮은 神殿이자 왕이 政務를 보는 政廳으로서 기능하였다. 神殿은 왕실의 宗廟를 가리키며, 昔氏 왕실은 시조 脫解의 塑像을 제작하여 宗廟에 안치하고, 거기에서 선조들을 祭享하였다. 첨해니사금대에 왕궁 남쪽에 南堂을 건립하면서 왕궁에서 政廳이 분리되었다. 奈勿王代에 김씨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탈해의 塑像은 東岳(토함산)으로 옮겨졌고, 이 무렵에 석씨의 종묘 역시 동악이나 다른 장소로 옮겼다고 보인다. 이후 왕궁의 宗廟는 김씨 왕실의 시조 및 그들의 선조들을 祭享하는 공간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487년 2월에 김씨 왕실의 宗廟로서의 성격을 지닌 神宮을 그 시조가 탄생한 奈乙에 건립하고, 政廳이면서 중요한 국가행사를 거행하는 正殿과 왕 및 왕비 등이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內殿을 중심으로 王宮을 새로 정비하였다. 이후 530년대 또는 6세기 중반 무렵에 중국 王朝의 太極殿 및 東·西堂制를 수용하여 왕궁을 다시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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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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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7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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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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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리 3층석탑의 특이점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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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the Characteristics of Three Storied Stone Pagoda in Namsan-ri,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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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홍국(위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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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아래 서출지 동남쪽의 폐사지에 남아있는 남산리 동·서 3층석탑(보물 제124호)은 형태가 다른데도 ‘쌍탑’으로 간주되어 왔다. 남산리 3층석탑은 동탑이 전탑형석탑이고, 서탑은 일반형석탑인데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이 ‘형태가 다른 쌍탑’의 前例에 힘입은 것으로 이제까지 아무도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 兩塔의 동서 축선이 어긋나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이 글의 작성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 兩塔은 동·서 축선 외에도 형태·규모·지반의 높이·石質 등 여러 면에서 현저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쌍탑’이 될 수 없음을 논증하였다.
이와 더불어 ‘쌍탑’이기 때문에 兩塔이 9세기경에 같이 세워졌을 것이라는 편년관에서 벗어나 동탑은 8세기, 서탑은 9세기에 각각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동탑의 기단 남면 중앙부 등 3개소에 있는 절삭부분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그 용도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궁금하게 생각하여 왔으나, 수리의 흔적에 다름 아님을 밝혀내었다.
앞으로 남산리 3층석탑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필자의 견해가 수용되어 동·서 兩塔이 ‘쌍탑’이 아닌 별개의 탑으로 분리·연구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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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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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7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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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군사적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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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Gyeon-hwon's Military Ba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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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재훈(전남대학교)"
] |
이 연구는 후백제를 건국한 甄萱의 군사적 기반에 대한 검토이다. 그 결과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견훤은 신라의 정규군으로 西南海에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공을 세워 裨將이 되었다. 견훤의 비장직은 신라의 서남해를 방어하는 군조직의 副將으로 군정이 이루어지는 특정 지역의 지방관을 겸하는 동시에 단위 부대를 통솔하는 위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견훤은 비장의 지위를 통해 서남해 지역 군조직의 武將들과 병사, 지역민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
견훤이 防戍한 서남해는 신라의 서남 지역이며, 곧 무진주의 서남에 위치한 연해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를 오늘날의 영암, 해남, 강진 등으로 비정하였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지역은 영암으로 해남과 강진 등은 그 領縣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신라 하대 해상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로 9세기 전반 淸海鎭이 설치된 바 있었고, 이의 廢鎭 이후에도 그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는 軍鎭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하대의 지방 군진들은 중앙에서의 지원과 통제가 끊겨감에 따라 지방과의 연계성이 점차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은 서남해 군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견훤이 서남해 군진의 조직 내에게 얻은 신망은 곧 군진이 입지한 지역민들의 신망이었을 것이고, 이것은 거병 이후 그의 군대가 승승장구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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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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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7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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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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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月城·蚊川 題詠詩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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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poems that sang of Weolseong and Muncheon in Kyu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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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근(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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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月城과 蚊川 題詠詩를 고찰한 것이다. 월성은 신라초기부터 말기까지 정궁이었던 신라의 명소였다. 월성은 반달처럼 생겼다고 반월성이며, 왕이 머무는 곳이라 在城이다. 이곳은 탈해왕이 살던 길지였고, 반월은 그 모습처럼 항상 희망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러나 月城을 노래한 후대의 시인들은 월성을 보고 황량한 폐허와 망국의 아픔을 노래했다. 심지어는 悲歌, 弔歌를 노래했다.
이인로의 「반월성」은 가장 오래된 작품이고, 후대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많은 고사를 활용하여 인생무상과 신라의 망국을 슬퍼하는 시를 썼다. 조위는 경주를 ‘무덤의 땅’과 ‘죽음의 땅’으로 인식하고, 한잔 술과 슬픈 진혼곡으로 신라의 왕조를 弔喪했다. 이러한 슬픔과 애조는 반월성을 노래한 다른 문인들의 시들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기본 특성들이다.
문천은 월성의 해자이면서 가장 가까운 강이다. 신라 때 문천은 형산강을 거쳐 조운선이 출입할 정도로 큰 강이었다. 따라서 문천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주의 중심이었다. 문천에는 월정교, 일정교 등이 있어 외부와 연결되는 곳이다. 또한 문천은 신라 八景의 하나인 ‘蚊川淘沙’의 현장이다. 강물은 흘러가는데, 모래는 위로 쌓이는 곳이다.
김시습의 ‘문천’ 시는 신라 경순왕의 투항을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을 연관시켰고, 김극기의 「祓禊」 시는 문천에서, 매년 6월 15일 물 제사를 지내고 동류수에 머리를 감고, 流頭宴하는 모습과, 월정교가 단순한 다리가 아닌 아름다운 樓橋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문천을 노래한 시는 반월성을 노래한 시에 비해, 내용이 다양하다. 신라의 패망에 대한 애조뿐 아니라, 찬란한 신라문화에 대한 칭송, 계속 이어진 「불계」의 향토성과 계속성, 월정교의 빼어난 예술성과 다리의 일상성을 노래하였다.
이러한 시들은 신라문화에 대한 후대인들의 인식과 사상을 살피는데 아주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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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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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7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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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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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寺의 寺名에 관한 동양학적인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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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Review on the Title of Woljeongsa in Viewpoint of Orien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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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중섭(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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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寺의 寺名이 왜 ‘月精’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월정사와 관련된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三國遺事』나 『五臺山事蹟記』 등에 전혀 언급되는 부분이 없다. 다만 월정사의 ‘月’은 背山인 滿月山에서 따온 것이고, ‘精’은 西臺의 水精庵에서 연유하였다는 월정사 승려의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월산과 수정암을 연결시키는 것은 양자의 거리 등을 고려해 볼 때 타당성이 부족하다.
필자는 이의 대안으로서 월정사의 ‘月精’이라는 寺名에 관해 1차적으로 월정사가 위치하고 있는 지형지세를 통한 明堂論에 기초하여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차적으로는 ‘월정’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관한 동양학적인 제 관점들을 정리해 보았다.
1차적인 명당론과 관련해서는, 제Ⅱ장에서 월정사가 위치해 있는 지형지세의 특수성과 달에 내포된 동양학적인 이중적 상징성을 검토하여 이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이는 월정사 터가 『三國遺事』에서도 풍수론에 입각한 명당의 관점에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타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2차적으로는 제Ⅲ장을 통해 ‘월정’이라는 사명의 의미와 상징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월정이라는 사명이 불교적인 관점에서 붓다의 菩薩行을 온축한 도량이 된다는 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월정사가 단순히 명당에 위치한 사찰만이 아닌 붓다의 菩薩思想을 온전히 현시하고 있는 최상의 가람이 됨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Ⅳ장에서는 음양론과 『周易』적인 관점에서 ‘월정’의 의미에 관해 모색해 보았다. 이는 제Ⅲ장에서 진행한 월정의 해석이 제Ⅱ장의 명당론과 유리될 수 있는 부분에 관해 동양학적인 입각점에 근거하여 이를 하나로 연결시키기는 부분이다.
본고를 통해 우리는 월정사의 사명이 불교에서 기원한 것은 아니지만, 불교적인 높은 내포의미와 상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 관해서 알 수가 있게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일반화되어 있는 수정암과 관련된 월정사의 사명 해석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수정할 수 있는 보다 타당한 대안이 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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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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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7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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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唐山과 그 성격 -祭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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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dansan(陶唐山) and its characteristic -focused on rites cere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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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미하(경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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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에 편찬된 경주읍지인 『동경통지』에는 陶唐山이 보이는데, 이것은 일명 墻頭山이라고도 한다. 도당산이라는 명칭은 堯·舜과 같이 신라 왕이 禪讓하였음을 말해주는 데서 연유한 것이고, 장두산은 신라의 멸망과 관련된 전설에서 나온 명칭이다. 기왕의 연구자들은 특히 도당산에 주목하면서 도당산을 南堂, 혹은 神宮과 관련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남당은 후대의 正殿과 같은 곳으로 王宮과 별도의 장소에 설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신궁은 赫居世가 태어난 蘿井 林間에 설치된 점에서 이 역시 무리가 있다고 하였다.
도당산은 남산의 한 봉우리로, 남산에는 왕궁인 월성을 비롯하여 4개의 성터가 있는데, 도당산토성, 남산토성, 그리고 남산신성, 고허성이 그것이다. 이들 토성과 산성의 축조 연대는 월성과 가까울수록 빠르며 土城에서 石城으로 轉移되어 갔다고 한다. 이에 처음에는 도당산토성·남산토성이 왕경 방비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점차 남산신성과 고허성으로 왕경 방어의 역할은 확대되어 갔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도당산토성을 비롯하여 남산에 축조된 토성과 산성은 우선 왕궁인 월성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구축한 방어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남산은 신성구역으로 그 주변에는 제사와 관련된 여러 유적들이 있다. 그리고 고허는 통일 이후 신라의 명산대천제사 중 小祀에 편제되었고 남산신성은 농경제사인 팔자와 중농의 제장이었다. 제사지 신라조의 壓丘祭는 구릉 귀신을 억압하는 제사로, ‘丘’는 무덤, 봉분을 뜻하기도 한다. 이로 볼 때 압구제는 무덤의 邪鬼들을 제압하기 위한 제사로, 제사지 신라조에는 그 祭場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지형상으로는 구릉지대이고 『신라의 전설집』에 봉황대 전설과 도당산 전설이 관련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도당산에서 압구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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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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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7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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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의 황금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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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Ratios of the Sakyamuni Pagoda of the Bulguk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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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율(인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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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황금비율을 찾아내고 그들의 적용방식을 논의하였다. 이런 연구에는 석탑의 각 부분별 규격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제공하는 동입면도를 포토샵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발견된 황금비율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석가탑은 황금분할된 6개 수직부위로 구성되어 있다. 상분:하분의 비율은 1층 탑신이 1:φ, 나머지는 φ:1이다(φ≒1.618). 둘째, 각 수직부위의 하분은 주로 φ2:1 구형(직사각형)인데, 이것은 φ:1 구형과 함께 정사각형을 황금분할하여 얻게 되는 황금구형들이다. 상층기단의 면석도 φ2:1 구형인데 그 속에 있는 우주와 탱주, 그리고, 이들 사이의 면석(간면)들도 황금구형이거나 그 변화형이다. 셋째, 각층 옥개의 윤곽은 우동, 전각, 앙선의 3종 사선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각도는 황금사선 즉 황금구형들의 대각선과 같다.
이상의 발견을 기초로 다음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석가탑은 황금비율의 원리에 따라 건설되었다. 세 가지 황금비율(황금분할, 황금구형, 황금사선)은 석가탑의 각 부분에 두루 존재하며 그 오차는 매우 작다. 둘째, 석가탑의 황금비율은 정사각형 구도와 관련된다. 6개 수직부위의 기본 구도는 정사각형인데 이들은 황금분할된 후 하분은 황금구형으로 남고 상분은 황금사선 등으로 변화하였다. 셋째, 석가탑의 황금비율은 동양적 음양원리와 공존한다. 6개 수직부위는 上下, 철요(凸凹), 變性, 明暗에서 음양설과 잘 부합하는 것이므로 석가탑은 ‘음양의 황금비율’의 좋은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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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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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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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雲寺 창건설화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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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동국대학교)"
] |
현존하는 선운사 관련 기록은 대부분이 18세기에 편찬된 것이다. 문헌적 근거에 의한 기록으로 짐작되는 것은 고려 말의 事跡에 불가하고, 이 절의 창건 관련 기록은 구전설화에 의존해서 서술된 것 같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眞興王(540∼576) 창건설과 백제 고승 黔丹의 창건설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 의하면, 진흥왕이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선운산에 義雲國師를 보내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운사의 진흥왕 창건설은 신빙하기 어렵다. 후자의 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가 연못을 메워 세운 절이 선운사라고 한다. 불교가 크게 융성하던 위덕왕 때에 선운사가 창건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선운사 창건설화에 製鹽과 관련된 설화가 등장하는 것도 지리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의 주변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평기와는 선운사의 창건이 백제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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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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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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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綱十目疏’에 나타나는 李彦迪의 政治思想과 中宗 末葉의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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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종록(성신여자대학교)"
] |
회재 이언적은 의정부 좌찬성의 지위에까지 올랐음에도 주로 성리학자, 조선의 성리학 발전과정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서 인식되고 있다. 이 논문은 이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그가 학자관료로서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가를 밝히고자 준비되었다. 이에 먼저 그의 출자와 관직생활의 특징을 검토하고, 이어서 그가 중종 34년에 올린 ‘일강십목소’를 중심으로 그의 현실인식과 정치개혁 방안을 살피고, 중종 말엽의 기간 동안 그가 학자관료로서 남긴 성과를 추적하여 정리해 보았다.
이언적은 16세기 중엽의 조선사회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국왕의 명령을 관리들이 이행하지 않고, 백성들은 무고하게 형벌에 고통을 받고, 세금에 수탈당하고 있었다. 성리학자로서 관료로 복무하고 있는 이언적에게 삼강오륜을 어기는 일이 왕의 곁에 있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가 멸망 직전에 이른 것으로 비쳐졌다. 백성의 뜻은 관료들이 세력 있는 자에게 아부하는 풍토 때문에 국왕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 하늘은 큰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간흉이 다시 권세를 차지할 수도 있으며, 궁궐의 여성들에 의해 국왕의 권위가 훼손될 수도 있음을 천변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이언적의 현실인식은 군정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이기보다는 원론적이었다. 그는 기묘사화를 교훈 삼아, 구체적인 제도적 법률적 개혁 대안을 요구하는 인식을 회피하고, 원론적이고 원칙적인 차원에서 현실을 진단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모든 중요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국왕에서 찾았으며, 따라서 그 근본적인 해결책도 국왕이 해결하도록 요구하였다.
중종은 자신의 책임을 솔직하게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이언적이 누구보다도 당시의 문제점을 적실하게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중종은 그의 상소를 바탕으로 하여 ‘쫓겨났던 바르지 못한 자들이 복귀하지 않도록 전조가 살피라’는 등의 지시와 방침을 승정원을 통해 홍문관과 대간, 전조에 내렸다. 중종의 강력한 신임 속에 이언적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치의 흐름이 기묘사림의 맥을 잇는 쪽으로 방향이 잡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이언적은 뒷날 본격적인 사림정치가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자 중간 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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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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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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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前期 禪雲寺의 重創과 展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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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경후(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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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에서 조선시대 불교는 조정과 儒者들의 탄압과 소외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조선 건국 이후 주자성리학을 국가 운영의 근간이자 기본이념으로 확립시키면서 불교비판은 체계화되어 이단으로까지 인식되었다. 때문에 조선 건국 이후 불교는 공식적인 입장에서 사회적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전기 선운사의 중창불사는 외적인 탄압과 실질적인 信佛의 경향 속에서 시작되었다. 중창불사는 성종의 작은아버지인 德原君 李曙에게서 비롯되었다. 1472년 선운사의 중창주인 행호 극유 선사의 제자 종심이 선운사 중창을 아뢰었고 덕원군은 중창에 필요한 願文과 祖宗의 魂記를 써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승려 50여 명이 아침저녁으로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 당시 중창주 행호 극유선사는 백제 때 창건되었고, 한때 3,000여 명이 상주하던 대가람이었던 선운사가 그 터와 주춧돌과 섬돌만이 남아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중창불사를 시작하였다.
행호선사는 14년 동안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전개하여 100여 개 이상의 전각을 古制대로 복구하였다. 또한 그는 수륙재를 지속적으로 거행하였으며, 후학들에게 대승경전을 강설하여 수행의 면모 역시 중흥시켰다.
한편 선운사 중창불사의 전모를 수록하고 있는 「형지안」은 선운사 중창에 기여했던 1,300여 명의 인물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수륙재의 설행 당시 축원자와 設齋 당시 참여했던 승려들의 법명과 소임도 밝혀 놓았으며, 각 전각의 건립에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던 희사자 역시 정리하였다. 그런데 「형지안」에 수록된 대부분의 재가자는 덕원군을 중심으로 한 왕실종친과 궁성 4대문의 수호책임을 담당하고 있던 5衛의 관직자들이었다.
요컨대 조선전기 선운사의 중창불사는 왕실종친과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승속의 구분이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불교계 역시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는데, 호남지역의 사찰뿐만 아니라 충청도과 경상도를 포함한 三南地方의 사찰들의 승려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때문에 선운사의 중창불사는 불교가 극심한 탄압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조선전기에 대규모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불교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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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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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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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해외체험과 동아시아적 소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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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순(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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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해외체험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체험은 그의 저술 속에 그대로 녹아있어, 당의 문화를 신라에 이식시킨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동아시아적 소통의 관점에서 재고해 볼 여지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최치원 사상의 특징인 3교 혼융의 경향과 당과의 소통의 관점에서 저술한 점 등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먼저 최치원의 저술에 나타나는 삼교 혼융 내지 삼교 융회의 입장이 신라에 이어 고려 말까지 지식인 사회에 지속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주자학이 유입된 고려말까지 유학자들에게서 나타는 일반현상이었으며, 오히려 이를 위기의식으로 생각한 불교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3교 혼융의 경향을 가진 최치원의 학설을 적극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효선쌍미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최치원의 저술 속에 보이는 동아시아적 소통의 문제는 중국 연호의 사용문제, 친당인물의 부각, 신라의 수·당 교체에 따른 외교문제가 될 수 있는 안함의 두찬 문제 등을 통해 살펴보았고, 고려조에까지 중시된 최치원 저술의 효용성, 중국과의 친연성 강조를 짚어 보았다.
이렇게 최치원은 주로 중국 문물을 신라에 전달하는 입장으로 보이지만, 신라의 문화를 재정리하고 이를 중국에까지 소개한 면은 소통의 문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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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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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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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雲寺의 高僧大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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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렬(조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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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雲寺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 분은 조선 후기 華嚴學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雪坡尙彦(1707∼1791)이다. 설파 이후 그의 맥을 이은 걸출한 인물들로는 禪門의 중흥주로 추앙받은 白坡亘琁(1767∼1852)을 비롯하여, 구한말의 淸淨律師인 幻應坦泳(1847∼1929) 그리고 근대불교의 선구자 映湖鼎鎬(1870∼1948) 등이 당대의 불교를 이끈 고승대덕들로 모두 선운사가 자랑할 만한 인물들이다. 오늘날 선운사가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본사로서의 寺格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분들의 공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운사 홈페이지에는 “講學과 修禪의 도량, 선운사”라는 기치를 걸고 있다. 선운사가 배출한 고승들의 이미지에 걸맞게 僧伽大學을 개설하여 學人들이 經學을 硏鑽하고 있으며, 또 산내암자인 참당암, 그리고 말사인 내소사․월명암의 禪院에는 首座들이 부처님의 慧命을 잇기 위하여 精進에 精進을 거듭하고 있다. 그야말로 “講學과 修禪의 도량 - 선운사”에 부합되는 전통의 계승에 자부심이 느껴지는 듯하다.
선운사는 창건부터 현재까지 도솔산이라는 산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그에 맞게 도솔암이나 마애불이 선운사의 대표 암자요, 상징적 유물로 잘 알려져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선운사가 그런 이미지에 맞게 한국의 대표적 彌勒道場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가? 한마디로 수긍키 어렵다. 왜 그런가? 미륵 대표도량으로서의 선운사만의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해서 선운사가 진정 “도솔천, 그 희망의 나라를 꿈꾸며” 도약하고자 한다면 “선운문화제”를 하나의 기폭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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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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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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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 慶州 刊行의 書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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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권희(경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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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경주지역에서 간행된 문헌에 대한 분석의 일환으로 특히 朝鮮時代를 중심으로 하여 그간 관련된 연구에서 언급되거나 소개되지 않았던 자료와 書誌記錄을 대상으로 慶州의 문헌자료를 살펴보았다.
다른 지방에 비하여 비교적 전존 유물이 많고 기록이 많은 조선시대의 경주지역에서 간행된 文獻資料에 대하여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간 몇 차례의 현장 실물 조사를 통하여 발견된 자료와 기록을 다루어 보고자 하였다.
즉 본 연구에서 아래의 대상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良洞地域의 각 소장처별 문헌자료와 고문서
둘째, 새로운 책판목록 자료 2종에 의한 경주 책판 소개
셋째, 玉山書院의 書冊 傳與記
넷째, 良洞 香壇의 소장 서책목록인 『揷架錄』
다섯째, 경주지역의 門中, 書院 소장의 書冊과 木板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各種 史料 및 冊板目錄에서 경주의 전적 문화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알아보고 또한 새로 발견된 冊板目錄 2종을 소개하였으며 玉山書院 書冊 『傳與記』를 통해 『傳與記』에 수록된 서책의 성격과 내용을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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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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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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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遠願寺址 東·西 三層石塔 風化ㆍ毁損 要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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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현(대구한의대학교); 정민호(공주대학교); 최원준(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손병현(한서대학교); 장혁상(영남대학교)"
] |
본 연구에서는 경주 및 울산 경계지역에 위치한 遠願寺址 東ㆍ西 三層石塔의 풍화 요인을 확인하기 위해 東ㆍ西 三層石塔의 풍화․훼손에 대한 진행과정과 양상을 비교 및 분석하였고, 遠願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주변지역 식생환경도 조사하였다. 또한, 遠願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주변에서 배출되는 인위적인 대기오염물질이 遠願寺址 東ㆍ西 三層石塔의 풍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遠願寺址 주변지역에 위치한 각종 배출원으로부터의 오염물질 확산정도를 AERMOD 모델과 CALPUFF 모델링 기법을 이용하여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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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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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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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경주의 도시변화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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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신재(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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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경주의 도시변화와 문화유적의 상관성을 고찰하였다. 1912년에 경주읍성의 남문이 철거되고 성벽은 극히 일부만 남겨진 채 1930년대에 성벽 공간은 대부분 전용된다. 한국병합 이후 경주읍성 지구의 조선시대 행정기관 건물은 식민지 통치기관의 건물로 전용되다가 그 자리에 식민지 통치기관의 건물이 신축되기 시작하였다. 읍성 지구에 일본불교의 포교소 등 종교기관과 일본인 소학교도 들어선다. 이로써 읍성 지구의 경관이 크게 바뀌게 된다.
현 봉황로 주변이 일제강점기에는 본정통이었다. 당시 여기에는 상업기능이 주로 입지하였다. 도로가 신설·확장되고 1918년 경주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문화유적이 크게 훼손된다.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결성되고 1915년에 경주고적진열관이 개관했다. 1916년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어 문화재 보존에 법적인 기준이 정해졌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조선 문화재의 보존을 주장하고, 일련의 정책 수립을 하였다. 1910년대에 문화유적 조사와 수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경주의 유적 보존사업은 신라문화를 현창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경주가 신라의 천년고도라는 것보다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과 연결되는 일본 본위의 식민지 사관에 의한 역사상을 우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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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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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32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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浙東 平水에서 鷄林鬻詩와 신라상인의 교역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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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규(순천향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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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元稹은 「白氏長慶集序」에서 친우 白居易의 시가가 세상에 널리 유행한 사실을 열거했다. 원진 서문은 長慶 4년(신라 憲德王 16년; 824)에 작성되었다. 여기에 신라상인이 백거이 시편을 구해 본국 재상에게 바치고 재상이 위조된 시편을 변별해낼 수 있는 이른바 鷄林鬻詩 고사가 열거되어있다. 鷄林은 신라를 지칭한다. 계림육시 고사 문구는 앞의 구절인 평수 학동이 백거이 시가를 학습하는 문구와 상관관계가 있다. 신라상인은 평수 저자를 드나들면서 백거이 시편 외에 주변 산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구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매 물품 중에는 평수 지역의 명품이자 兩浙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난 日鑄茶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 상류층과 사찰에는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였고, 차를 소비하는 양도 많았다. 浙東 곳곳에는 신라상인이 드나들면서 활발한 교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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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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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7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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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傳統園林의 造營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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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es on the Building Techniques of Chinese Classical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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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태호(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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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전통을 지닌 中國園林은 자연숭상을 주제로 하는 自然山水園을 형성하여 세계원림 역사상 독특한 유파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전통원림의 공간구성 기법은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 풍조에 따라 한국, 일본의 전통원림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존하는 유적지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을 이해하고 바로 찾기 위해서 중국의 전통원림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 전통원림의 공간구성 주요기법으로, 첫째; 자연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자연을 초월하고 있으며, 둘째; 건축물의 경관구성 요소로서의 작용을 중시하고, 셋째; 풍부하고 다양한 원림공간을 조성하며, 넷째; 詩情畵意가 짙은 경관을 조성하고, 다섯째; 寓意와 象徵性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등 다섯 가지 측면의 특징으로 상술하였다. 이는 바로 중국원림이 세계적으로 독특한 유파를 이루고 있는 원림체계의 주요한 표식이 된다. 현재 중국은 현대적인 원림 건설에 주력하고 있다. 전통적인 전통원림에 어떻게 대처를 하며, 새로운 상황하에서 전통의 정수를 현대원림에 어떻게 융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바로 우리가 현대원림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탐구하여야 할 주요한 과제중의 하나이다.
한국, 일본, 중국은 모두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고, 세 나라 사이의 원림은 이미 대단히 밀접한 혈연관계를 가지고 발전하여 왔다. 따라서 앞으로 서로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협력함으로서 東方園林의 우수성을 세계에 전파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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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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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7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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浦項 中城里新羅碑 書體와 古新羅 문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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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igraphy of Jungseongri Silla Monument at Pohang and Letter Use Life in the Period of Ancient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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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의(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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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2009년 5월 11일, 慶北 浦項에서 새로 발견된 中城里新羅碑에 대한 기초적 검토이다. 먼저 비의 字形 分析을 통해 判讀과 초보적인 解釋을 시도하고, 이어 書體의 특징, 異體字 運用 및 章法 특징, 그리고 編年의 판단을 통해 신라인의 文字 생활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글자의 자형과 筆法은 楷書의 특징이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隸書나 新隸體 그리고 行草書의 筆意가 함께 나타나고 있어, 전체적인 서체는 楷書로 변화되는 과도적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冷水里碑나 鳳坪碑 등의 서체와 유사한 특징을 나타내는 것은 이 비가 6세기 前半期 신라비들의 서체 특징과 맥락을 함께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異體字의 造字는 筆劃을 생략하거나 증가시키는 방법과 원래의 字形 結構를 변형시키는 방법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이체자 사용은 당시 신라인들이 한자를 피동적인 수용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변용하였음을 보여준다. 章法은 종렬은 맞추었으나 횡렬은 맞추지 않았고, 글자 크기가 均齊하지 않으며, 界線이 없는 형식이다. 이러한 장법 특징은 赤城碑 이전의 금석문에서는 보편적인 것으로 비 건립 당시의 書寫文化的 환경을 짐작케 한다.
비의 건립 년대인 ‘辛巳’는 서체, 장법 및 官等名에서 특정 글자의 사용, 그리고 冷水里碑(503년)에도 관여된 ‘斯德智’라는 인물의 존재 등을 통해 일단 501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본 碑는 5세기 중반 이후 신라 사회에서 토착화된 서체의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신라의 문자생활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이른 石碑 자료로서 중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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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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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7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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浙東 연해안에서 新羅人의 수로교통 -수로 유적과 지명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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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portation Places of historic interests for people of Silla(新羅) to broad through Zhedong(浙東) water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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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규(순천향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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浙東 지역은 당송 시대의 행정구획이며 오늘날 절강성 서북쪽을 제외한 전 지역이다. 신라인들은 일찍이 선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절동 지역을 드나들었다. 오늘날 절동 수로 유역에는 신라인이 진출한 관련 유적과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寧波 鄞水에는 재당 신라인 金淸이 교역을 행하고 신라사신들이 드나드는 해상 입구이다. 紹興 平水草市는 신라상인들이 白居易 시편과 日鑄茶, 산림제품을 교역한 장소이다. 普陀山 新羅礁과 주변 사찰은 신라 상인과 선박들이 드나들며 항해 안전을 기원하고 법기를 시주했다. 象山 新羅嶴村과 臨海 新羅嶼은 신라선박들이 정박했던 지역이다. 黃巖 新羅坊은 재당 신라인들이 거주한 강변 지역이다. 이들 유적과 지명은 신라인들이 절동 지역에서 활동한 지역과 수로 교통로, 그리고 해외 경영을 알아보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유적과 지명은 절동 수로 유역과 한반도 신라와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고, 이러한 관계는 훗날 고려 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최근 국내 언론에서 영파 天封塔에서 출토된 阿彌陀佛像이 8세기 신라불상이라는 소식이 있다. 그러나 천봉탑 지궁에서 나온 제반 기록으로 보면, 천봉탑 아미타불상은 남송 紹興 연간에 시주자 趙允에 의해 장인이 제작된 남송 불상으로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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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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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7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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雁鴨池 木簡과 新羅 宮廷의 日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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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en Tablets of Anapji(雁鴨池) and Daily Life at the Palace of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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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충남대학교)"
] |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出土된 목간은 그 어떤 자료보다 신라 宮廷의 모습을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이 목간에 대한 연구는 年代의 추정과 洗宅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목간에 墨書된 문자의 判讀이 여의치 않고 목간에 대한 관심 또한 낮아서 연구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목간 자료들이 계속 출토되면서 안압지 목간에 대한 연구도 새롭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본 목간의 지식을 기반으로 다양한 안압지 목간의 가능성을 언급한 李成市를 시작으로 尹善泰, 李鎔賢 등의 연구가 발표되어 비로소 안압지 목간이 재조명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문자의 판독은 목간을 實見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한계는 존재하였다. 2004년 『한국의 고대목간』이 간행되어 적외선사진 자료가 공개된 후 문자의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기존 연구에 대한 반성과 재조사가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안압지목간이 식품, 열쇠 등에 매달은 꼬리표목간(附札)과 地方에서 內省으로 상납된 貢納物의 꼬리표목간(荷札), 그리고 宮門 警備에 관련된 門 이름과 人名이 기재된 목간, 처방전으로 사용된 듯한 藥物 이름 목간, 官司 사이의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한 文書木簡, 문자 연습 목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사실은 7세기 후반 이후 신라의 궁정에서 다양한 日常업무가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각종의 목간들이 사용되었음을 전한다. 그러나 안압지시대의 목간문화에서 문서행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목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통일 이후 신라에서 본격적인 종이의 문서행정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목간은 나무라는 재료상의 특징 때문에 문서행정 이외의 영역에서는 다양한 용도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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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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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7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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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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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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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mparative Study on Choi Chi Won's "Ji-jung dae-sa bi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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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순(동국대학교)"
] |
최치원의 「지증대사비문」은 그가 쓴 4개의 비문을 통칭하는 “四山碑銘” 가운데 하나로 이들 가운데 가장 늦은 924년 문경 봉암사에 건립되었다. 이 「지증대사비문」은 찬술과 건립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을 뿐 아니라, 비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2009년 보물 138호에서 국보 315호로 승격되는 변화가 있었다. 이 비문은 한국 고대사의 중요 사료로서 많은 이들에게 논문자료로서 활용되어져왔다. 때문에 역주 작업 역시 활발성을 띠고 양산되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최치원이 885~893년에 찬술한 「지증대사비문」의 원문을 탁본과 비교하여 선본을 만들고 해석문을 작성하면서 기존의 여러 본을 비교하게 된 내용이다.
우선, 근래 많이 참고되고 있는 「지증대사비문」의 몇몇 본들을 서로 대조하고 필자가 정리한 내용과 비교해 본 결과 그 특징적인 양상들을 표출시켜 본 것이다.
즉, 『조선금석총람』에 나오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는 탁본 자료로서 활자화된 내용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지표로 삼아왔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조선시대 주석본과의 전체적인 비교는 없었다. 이에 두륜사문 각안이 세주를 달은 「지증대사비명」과 고운선생문집의 「지증화상비명」을 『조선금석총람』의 「지증대사비문」과 대조하였고, 이와 함께 최근 역주된 남동신과 최영성의 본도 함께 비교해 보았다.
이러한 비교 내용 가운데 서로 다른 부분은 표시를 해가면서 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다. 표의 내용을 분석해 본 결과, 첫째 금석문을 새기면서 간략자를 곳곳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둘째, 탁본을 비교적 정확히 활자화시킨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조선금석총람』의 내용이 다음과 같은 의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문제점을 밝혀 볼 수 있었다. 즉 인명을 5곳이나 제대로 밝혀 쓰지 않고 있고, 王土나 鰈水 등 정확해야 하는 부분을 王云, 口水 등 틀리거나 빠진 것으로 기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각안본이나 고운집의 세주는 지금까지도 해석을 하는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확인한 점이라 하겠다.
이렇게 「지증대사비문」을 몇몇 본들을 대조해 가면서 분석해 본 결과, 최치원의 다른 3비문 역시 이러한 방법으로 검토해 본다면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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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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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7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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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上代 太子制의 運營과 東宮의 設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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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Bum-hwan The Crown Prince and the East Palace in the Early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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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범환(서강대학교)"
] |
본고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에 나타난 태자에 대하여 검토한 것이다. 그 결과를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라 상대에 보이는 태자들이 왕의 장자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실제 태자로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태자에 책봉되었다고 알려주지는 않지만 그에 준하는 그러한 행위나 조치를 통하여 태자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자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현재의 왕을 이어 다음에 왕위를 계승할 인물이라고 하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는 신라 상대에 있어 태자제의 운영원리가 지켜졌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태자 가운데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사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신라 초기부터 이어져온 태자제는 진흥왕대 이르러 더욱 확고하게 정립되고 자리잡게 되었다. 진흥왕이 맏아들 동륜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그러하게 된 것이다. 진흥왕은 전대부터 다져온 확고한 왕권을 기반으로 하여 맏아들인 동륜을 태자에 책봉하였으며 그러한 것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 그는 중국을 통해 태자제도에 대하여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였으며 태자의 책봉 의식을 통해 보다 강화된 왕권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태자로 책봉되면 동궁이라는 곳에 거처하면서 왕위를 계승할 수업을 받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에는 문무왕대 비로소 동궁이 설치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도리어 사료를 검토한 결과 법흥왕대에 이미 동궁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면서 태자의 왕위계승 수업을 위한 공간인 동궁을 설치하였다. 이 때의 동궁은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월성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태자가 거처하는 곳을 동궁으로 불렀던 것은 이를 나위가 없다.
그런데 신라 초기부터 태자가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와 더불어 동궁도 함께 존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동궁은 법흥왕대에 이르러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법흥왕대 이후 동궁에는 세택이라는 관부가 두어졌으며 사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태자시서학사라는 관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자의 글씨를 책임지는 관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자의 교육에는 유교와 관련된 것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이것도 법흥왕대 이후부터 가능하였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결국 진흥왕대에 이르러 비로소 태자제도가 확립된 것도 법흥왕대의 이러한 조치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후 신라 중대는 상대의 태자제도를 더욱 확대 발전 시켜 나갔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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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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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7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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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면 주사위를 통해 본 신라 귀족의 놀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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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reation culture of the Silla aristocracy seen through 14-faceted d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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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숙(영남대학교)"
] |
신라귀족들은 어떤 사교모임이 있었으며, 어떻게 친교를 유지했을까? 1975년에 신라왕조 동궁전의 연못인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 주사위는 이런 질문을 또다시 수면위에 떠오르게 했다. 이 주사위는 세간에 많이 회자되어 잘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이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도 없고, 그에 관한 단편적 서술도 연구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14면 주사위은 그 형태와 내용면에 있어서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주사위이다.
본고는 이 유물이 발굴된 이후 지난 35년간 14면 주사위에 관해 언급된 모든 글들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용도를 추적하면서, 지금 혼용되고 있는 ‘주령구’와 ‘주사위’라는 명칭의 타당성을 검토했다. 그리고 이 주사위가 사용되었을 때의 놀이 현장을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신라의 풍습 등을 통하여 고찰해 보았다.
14면 주사위가 언급되어 있는 글은 인문계통에서 14곳, 그리고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계통으로 분류될 수 있는 논문 7편이 확인된다. 이중, 『안압지 발굴조사 보고서』에 게재된 김택규의 글이 주사위에 관해서 첫 번째로 발표된 글임과 동시에, 가장 많은 해석을 시도한 글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이기동이 14면 주사위로 사회발전단계를 진단해 내려고 시도했으며, 고경희 등의 단계에 이르러 酒令具라는 이름이 혼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자연과학계통에서는 이 14면체의 출현확률 조사와, 제작방법 규명작업 및 수학훈련 교재개발 등을 시도했다. 또한 관광분야에서 관광기념품 개발 등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를 다루었다. 그 결과 이 주사위는 각각 다른 모양의 14면을 가지고 있지만, 각면이 나올 확률이 일정하다는 결과를 얻었고, 이를 통하여 이 신라시대의 주사위는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하였다.
결국, 이 주사위는 그 유물 자체의 중요성과 대중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명칭이나 사용 용도나 내용 등에 대하여 학계의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유물이 보존처리과정에서 불타 버리고 지금은 복제품만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꺼려했던 까닭이었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우선, 일반적으로 사용된 ‘주령구’ 또는 ‘주사위’라는 그 명칭의 타당성을 검토했다. 그 결과 이를 주사위라는 명칭으로 확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주사위가 놀이 자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본격적인 놀이 다음에 벌칙을 위한 도구인지를 검토하여 후자의 것으로 비정했다. 즉, 酒令이란 중국의 酒宴에서 술마시는 규칙 겸 놀이를 만들고 지키는 것인데, 이에는 여러 형식이 있다. 따라서 이 목제 유물을 주령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유물의 정확한 이름이 되기 어렵다. 또한 14면 주사위는 주령구라기 보다는, 특정 놀이에 부수된 벌칙 도구라고 생각된다. 더 정확한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는 이 유물의 명칭을 ‘14면 목제 주사위’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한편, 이 14면 목제 주사위의 각면에 쓰여진 내용과 唐代 성행했던 酒令을 비교할 때, 또 포석정의 流觴曲水나 신라사회의 시짓기 등 귀족들의 생활태도로 미루어 보면, 신라귀족 사회는 文字令을 주로 했던 듯하다. 또, 14개 벌칙을 통해 볼 때, 신라의 주연은 음주가무와 문장 창작이 어우러진 고급 잔치였다. 이곳에는 물론 여성도 참여했다. 그리고 당시 술이 곡주인만큼 술잔도 주발처럼 컸을 것이다. 안압지 연못에서 나온 벼루, 주발, 등잔 등은 바로 이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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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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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7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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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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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寶帳形舍利器 復元再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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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consideration on the restoration of the valuable curtain-shaped Reliqury into the East Three-Story Pagoda at Gamun Temple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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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호(동국대학교)"
] |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보장형사리기는 고대 불전 내부의 사천왕상 배치방식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보장형사리기는 현재 기단 상단에 사리병이 내장된 복발탑형사리기를 중심으로 사방에 사천왕상과 그 사이에 4구의 승상이 배치된 형태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발견 당시 금동사리외함에 들어 있던 보장형사리기는 심하게 파손되고 여러 부재와 조각상들이 원위치에서 이탈된 상태로 수습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이 봉안당시의 원형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사리장엄구 보존처리 보고서 통해 보장형사리기의 부재와 조각상이 수습된 위치를 검토한 결과 현재 복원된 사리기는 원형에서 파손되는 과정에 대한 역추적 또는 가상실험이 생략되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 결과 현재의 복원에는 부재들이 수습된 위치와 원형과의 관련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감은사지 동탑 사리장엄구가 파손되는 과정을 역추적한 결과 사리외함에 연접하여 시설된 철제찰주의 유동이 사리기의 손상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힌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사리기는 북에서 남으로 미는 힘에 의해 출토당시의 모습으로 파손되었고, 결과적으로 각 부재들이 수습된 지점은 그 용도와 원형복원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각 부재들이 수습된 위치를 근거로 고대 불교미술품들과의 비교를 통해 감은사지 동탑 보장형사리기의 원형을 재구성한 결과 승상의 방향은 현재와 반대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위치도 사천왕상과 서로 뒤바뀐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문제가 된 사리병 받침과 뚜껑은 누금장식된 2점의 금제품일 가능성이 높고, 현재 용도미상으로 분류되어 있는 금동사슬은 중앙의 복발탑형사리기의 동체에 접합되었던 것으로 천판에 부착되어 현수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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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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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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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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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지리산권의 불사활동과 신행선사비의 건립 -중대 말 하대 초의 정치변동과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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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승훈(한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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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신라시대 지리산권에서 일어난 佛事活動이 헌덕왕대에 神行禪師碑를 세우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신라 중대 말 하대 초 지리산권에서는 경덕왕의 寵臣인 이순의 斷俗寺 창건, 향가를 잘 지은 승려 永才의 지리산 은거, 화엄사 緣起法師의 『화엄경』 寫經, 두온애랑의 석남사 비로자나불상과 석탑 조성 등이 이루어졌다. 이들 발원자들은 대체로 경덕왕의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하대 전기 신정권에서는 불교계의 지지를 얻고자 고승추모활동을 벌이었다. 흥륜사 금당에 신라 불교의 발전에 공헌을 이룬 열 분의 성인상을 조성 봉안하는 한편, 여러 고승들의 사상을 추모하는 비석들을 세운 것이 그 사례다. 이 가운데 지리산권에는 선종을 대표하여 神行禪師碑가 세워진다.
신정권에서 신행선사비를 세운 것은 신행이 김씨로 진골 왕족인 점, 선종 승려인 점, 그리고 그의 사상적 경향 때문이었다. 그의 선종사상은 여러 경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여러 사상을 융합시키는 측면이 있었고, 또 공존과 화쟁을 강조하는 법화사상에도 밝은 때문이었다. 이는 신정권에서 원효의 법화사상을 바탕으로 불교계의 화쟁을 유도한 것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신행의 사상을 주목하여 추모하는 한편 단속사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단속사를 신정권의 지지세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이후 金憲昌의 난이 일어나 菁州지방 세력이 가담하였으나, 크게 활동하지 못하고 진정되었다. 이는 신정권이 단속사를 후원하면서 회유하여 얻어진 결과로 여겨진다.
신행선사비의 건립은 국가에서 선종을 공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이후 선종은 신라사회에 널리 뿌리내리게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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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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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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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i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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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 韓日의 文字文化 交流와 木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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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섭(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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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 한국에서의 목간 자료가 증대함에 따라 유사한 문자문화의 발전과정을 겪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대 韓日간 목간문화의 비교검토를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먼저 목간이라는 정보전달의 기술을 일본으로 전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移住民집단의 문자문화와 관련된 부분들을 살펴 보았다. 고대 일본으로 이주했던 文筆技術者들은 당시 倭의 王權이나 地方豪族 세력에게는 매우 유력한 통치의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외교상의 문필기술을 담당하거나 왜국 내 지배세력의 정치적·경제적 성장을 위해 文書行政을 도입하여 진전시켰다. 이들의 이같은 활동은 고대 한국에서의 역사적 경험 없이는 불가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들이 구현한 문자생활을 통하여 고대 한국의 문자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들 移住民집단이 구사한 목간문화는 그 형태와 서식, 기재내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검토의 視點을 제공하고 있다. 먼저 고대 일본으로 이주했던 한반도계 이주민집단의 문자문화는 고대 한국에서부터 시도된 漢文 表記法을 적용․발전시키면서 고대 일본어 표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나아가 초기 일본 목간에서도 다면목간 사용의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또한 문서목간에서는 人民과 物資에 대한 파악과 지배를 위한 장부의 제작에 있어 표기상의 공통점에 기반해 그 운용의 시스템이 유사한 점을 지적할 수 있었다. 고대 일본에서의 이러한 문자기술은 초기에 주로 한반도에서 건너왔던 이주민집단에 의해 운용되었음이 목간의 비교를 통해서 보다 분명해 졌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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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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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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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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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덕재(단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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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관산성전투의 전개과정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신라는 6세기 중반에 이전에 소백산맥 서쪽 지역에 쌓은 산성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데, 그것의 중심은 삼년산성(보은군 보은읍)에서 사벌지역(상주시)에 이르는 루트와 관산성(옥천군 옥천읍)에서 감문지역(김천시 개령면)에 이르는 루트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553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자, 백제 성왕이 554년 12월에 가야, 왜와 연합하여 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처음에 新羅의 大幢軍主와 沙伐軍主가 大幢軍團, 沙伐停軍團, 몇몇 外餘甲幢을 이끌고 반격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신라는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징발하여 州를 단위로 行軍軍團을 편성하고, 관산성을 사방에서 포위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러는 와중에 백제 성왕이 부여에서 狗川에 이르자, 三年山郡 高干 都刀의 노비 苦都가 聖王을 사로잡아 죽였다. 성왕의 逝去 소식을 들은 백제군의 사기가 떨어진 틈을 타서 신라군이 관산성을 일거에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관산성전투 이후 백제는 성왕의 복수를 갚기 위하여,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하여 신라를 자주 침략하였다.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관산성전투를 계기로 격화된 삼국 사이의 항쟁은 642년 대야성전투 이후 삼국뿐만 아니라 당과 왜 등이 참여하는 국제전으로 비화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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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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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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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후반~7세기 전반 百濟ㆍ新羅의 전쟁과 大耶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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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석(강원대학교)"
] |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聖王이 敗死한 후 그 설욕을 위해 부심했다. 6세기 중엽까지 성왕을 추모하면서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567년부터 대외적인 외교ㆍ군사 활동을 다시 벌이기 시작했다. 北朝와 교섭하여 高句麗를 견제하면서 신라의 上州 지역을 공격했다.
武王이 즉위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 한다. 下州와 新州를 번갈아 공략하여 신라와의 戰線을 확대했고, 624년에는 드디어 소백산맥을 돌파하여 그 동쪽으로 진격했다. 무왕 말년부터는 下州에 공격을 집중하여, 신라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642년에 大耶城을 점령했다.
대야성이 있는 합천 지역은 하주의 치소가 설치되어 大加耶의 故地를 다스리던 정치ㆍ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군은 城主인 金品釋과 그 부인을 처단하여 관산성 패전의 치욕을 철저히 씻었다. 신라로서는 대야성의 함락으로 王都까지 위험에 처했으며, 이를 수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교 활동을 벌이고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백제의 방어는 견고했으며, 백제 멸망 후인 661년에야 대야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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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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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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衣冠制를 통해 본 중고기 貴族의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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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선(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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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경주 분지를 지역적 기반으로 한 사로국이 모태가 되어 주변 소국들을 복속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왕경인을 대상으로 하는 골품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은 관직 진출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규제의 기준이 되었다. 특히 관직의 여하는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의미하는 동시에 관료조직 속에서 서열의 표시로서 기능하였다. 이것은 정치·사회·경제적 특권에 대한 차등을 의미하며, 전근대 사회에서 이들을 가리켜 소위 귀족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라사회를 흔히 골품귀족제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설계두가 골품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한탄한 것과 『신당서』에서 관료를 세움에 ‘親屬’을 우선시하였다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신라의 귀족은 門地와 같은 가문의 형성과 함께 정치적 위상을 얼마나 오래 유지시켰는가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정치적 위상은 관등에 의한 위계이며, 이것은 부체제 변화에 따른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가 확립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 귀족의 서열화는 법흥왕 7년(520)에 마련된 의관제 규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관인은 자·비·청·황 4色으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 태대각간부터 급찬까지는 笏을 착용하였다. 즉 경위 17관등 가운데 제9관등인 급찬까지는 그 이하의 관등 소지자와는 신분상 다른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향유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다시 冠의 규정을 통해 세분화되고 있다. 태대각간에서 대아찬까지는 紫衣를 착용하도록 하였지만, 冠의 경우 잡찬과 파진찬은 다른 冠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즉 잡찬과 파진찬 사이의 신분상 단절로 볼 수 있다.
귀족은 넓게 지배계층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 귀족은 급찬 이상의 관등을 소유한 자들도 귀족의 범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과 그 이하로 나눌 수 있고, 대아찬 이상의 관등은 다시 제3관등인 잡찬을 기점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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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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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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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景德王代에 再編된 王都 防禦 軍事組織과 城郭의 活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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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기(경북대학교)"
] |
이 글은 경덕왕대의 군제개혁으로 재편된 왕도 방어 군사조직을 밝히고, 그들과 왕도 주위 성곽과의 관련성을 검토한 것이다. 해명된 바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덕왕대에 왕도 방어 군사조직은 왕도 외곽을 방어하는 六畿停 체제와 내부에서 방어를 담당하는 확대된 侍衛府(獅子隊)로 재편되었다.
둘째, 육기정체제는, 虛設化된 大幢의 군사 주둔지로 이름만 남아 있던 6개 停을 통일성과 획일성을 강화하여 재편한 것으로 왕도의 외곽에서 왕도 방어를 주임무로 삼게 되었다.
셋째, 육기정은 大城郡과 商城郡에 領屬된 6개의 縣급의 지역 단위였으며, 그 안에 軍營이 존재하는 특수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王都를 지키는 6개 군사조직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넷째, 원래 국왕과 왕실의 警護와 扈從, 궁궐의 宿衛와 경비를 맡았던 시위부는 병력의 규모가 크게 늘어나고, 임무의 범위도 확장되어 왕도 안에서 최후의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조직으로 변화하였다. 그래서 獅子隊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다섯째, 六畿停은 왕도 주위의 성곽을 거점으로 이용하면서 주변의 일정 영역을 관할하고, 王都로 진입하는 교통로를 통제하여 왕도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곧 東畿停이 關門城, 南畿停이 高墟城, 中畿停이 西兄山城, 西畿停이 富山城, 北畿停이 北兄山城을 거점 성곽으로 활용하였고, 莫耶停은 良洞里山城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섯째, 확대된 시위부는 왕도 안의 시가지에 軍營을 두었지만, 南山新城과 明活城을 주둔지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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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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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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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의 위치 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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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보은숙((재)신라문화유적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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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초기 신라의 왕성이었던 금성의 위치를 비정함에 있어 사서의 기록에는 존재하지만 고고학적 유허가 발견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필자는 금성 직후의 왕성인 월성의 문헌적·고고학적 연구성과와의 비교를 통해 금성을 인식하려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경주분지 내 월성 보다 이른 시기 유적의 조영을 보이는 곳이 황성동 일대가 유일함을 밝혀 황성동 일대에 금성이 입지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금성 당시 경주분지 내의 자연․지리적 환경을 현재까지의 문헌적․고고학적 결과를 토대로 추정, 황성동 및 월성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늪지 및 황무지로 황성동 일대에 금성이 위치할 수밖에 없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경주분지의 고대도시화는 과거의 왕성(금성)과 현재의 왕성(월성)을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자연의 재앙을 극복해 가면서까지 도시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신라 최초의 왕성인 금성이 황성동 일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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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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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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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국가형성과 발전단계에 따른 방어체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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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일(단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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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라 초기부터 통일기까지 신라의 방어체계의 형성과 변화과정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문헌의 전투 기록과 축성 기록 등을 신라 성곽 조사 자료와 종합하여 신라의 방어체계가 시기별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정비되고 또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크게 4시기로 구분되었다.
1기는 5세기 이전으로 신라의 방어체계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진한 소국의 중심부에 토성을 축조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성주가 재지 수장층을 통해서 간접지배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의 각 성곽들 간에는 특별한 연계 관계가 없었다.
2기는 5세기후반∼6세기 전반으로 경주와 교통이 편리한 전략적 요충지에 거점성을 축조하고 이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의 성곽들을 통합하여 지역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이 시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축성사업이 이루어졌고 관도와 우역도 정비되어 성곽간에 유기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3기는 6세기 후반∼7세기 후반으로 신라가 소백산맥 이서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시기였다. 전국적으로 4개의 광역방어체계가 형성이 되었으며 주성-군성-현성 등으로 3단계의 종심방어축도 형성되었다. 소경이 설치되어 중앙의 도움이 없이도 상당기간 독립적인 능력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광역방어체계를 갖추었다.
4기는 신라가 나당전쟁 직후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통합하여 새로운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등의 제도를 일신하는 국가완성기에 해당된다. 백제 지역과 고구려 지역에 각각 2개씩 소경을 설치하여 6주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주성-군성-현성의 3단계가 전국적인 규모로 갖추어져 신라의 전영토를 포함하는 전역방어체계가 완성되었다.
신라의 방어체계의 정비는 당연히 접경지역이나 전투가 빈번한 지역을 중심으로 먼저 이루어졌다. 동일한 시기라 할지라도 2시기 이상의 방어체계가 병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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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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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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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下代 道義 禪師의 ‘雪嶽山門’ 開創과 그 向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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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범환(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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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신라 하대 남종선의 초전자인 도의 선사와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개창된 설악산문에 대한 검토이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의 선사는 821년 무렵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지만, 김헌창의 난으로 말미암아 경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왕실이나 진골 귀족을 단월로 삼을 형편이 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김헌창의 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그는 설악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가 설악산을 택한 것은 그곳에 이미 북종선의 영향력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북종선을 밑거름으로 하여 남종선을 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사상적인 공통점을 설악산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김헌창의 난이 미치지 않았던 곳이 바로 설악산이기도 했다.
설악산에 들어간 그는 왕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곳의 배려로 진전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그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후 진전사와 억성사를 중심으로 해서 설악산문을 형성하였으며 많은 선승들이 그곳을 방문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열반에 든 이후에도 설악산문은 왕실의 지원 아래 성장하였다.
그런데 설악산문에 변화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억성사 출신의 체징 선사가 장흥 보림사를 중심으로 가지산문을 개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설악산문은 가지산문에 비하여 그 영향력이 전보다는 낮아졌다. 더구나 명주에서 새로운 굴산문이 탄생·발전하면서 설악산문은 그 그늘에 가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악산문의 위상이 약해졌다고 해서 도의 선사의 위상도 함께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도의 선사는 가지산문의 개산조가 됨으로써 장흥 보림사에서 새롭게 탄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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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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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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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世紀 新羅의 北方經營과 築城事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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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이옥(동양고전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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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대를 거치면서 신라는 내부적으로 왕권의 기틀을 다지고 대외적으로 당의 위협이 소멸됨에 따라 북방영토에 대한 축성사업을 본격적으로 단행하였다. 통일 이래 신라의 축성사업은 크게 지역적 특성에 따라 패강일대와 동북면 방향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패강일대 축성사업은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선상에서 이루어졌다. 패강일대는 일찍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군현제적 지배체제가 어느 정도 관철되고 있었다. 더욱이 평안도 지역은 무주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영토개척을 통한 영역화 작업이 비교적 용이하였던 것이다.
동북면일대의 경우 외적인 말갈의 존재와 관련해 경영이 용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외적인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책으로 축성이 단행되었다. 또한 삭정군, 하슬라일대의 축성을 통하여 신라 영역의 변동을 예상할 수 있으며, 정천군내 탄항관문의 존재는 신라의 동북경이 획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정천군내 탄항관문은 발해와의 국경지대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대 들어 신라의 영토는 다시 위축되었다. 북진에서 올린 표에서 나타나듯이 신라의 지배력은 실직(삼척)이북까지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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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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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428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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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감동에 대한 설화문학의 표현적 고찰 -『삼국유사』 소재 설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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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동(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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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에 대한 설화문학의 표현법을 고찰하기 위해 먼저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불교의 윤회설과 우주론을 약술하고, 부처 변신과 경천동지의 자질과 재능에 초점을 맞추어 『삼국유사』에 수록된 몇 가지 설화를 분석하였다.
붓다는 인생의 ‘苦’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無我’이론을 전개했고, 의식을 만드는 色[육체]에 대한 사색과 우주에 대한 탐색을 거듭했다. 오온, 오취, 12연기, 삼계오도, 사성제, 팔정도 등이 주요한 결과물이다.
부처 변신의 측면에서는 「郁面婢念佛西昇」,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廣德․嚴莊」, 경천동지의 자질과 재능에서는 「蛇福不言」, 「水路夫人」, 「良志使錫」, 「月明師 兜率歌」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부처 변신은 물론, 절에 가 염불하기 위해 방아찧기를 서두르느라 손바닥을 뚫고 그 구멍에 노끈을 꿰어 방아공이 쪽 머리 부분에 매달아 손바닥을 당기며 방아를 찧었다는 용맹정진의 구체적 모습, 絶代佳人인 수로부인이 바다의 해룡에게 피랍되자 그녀를 되찾아오기 위한 강릉주민과 용궁과의 대결, 양지의 신통력을 표현하기 위해 설정한 자동지팡이 개발, 월명사의 재능을 표현하기 위해 달이 운행을 정지했다는 표현 등 최상의 감동에 대한 표현법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가능한 열망과 환상에 대한 원초적 상상력의 발동임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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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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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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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崔致遠 만들기 - 「지증대사비」의 건립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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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순(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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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875년 당에서 귀국하였다. 신라왕의 명으로 4개의 비문인 四山碑銘을 찬술하였다. 그러나 이 비들은 신라 말 고려 초 혼란의 와중에서 제대로 건립되지 못하였다. 특히 「지증대사비」는 진성여왕 7년(893) 경에 찬술된 이후 30년이 지난 신라 경명왕 8년, 고려 태조 7년인 924년의 시점에서 친고려적 성향의 호족들이 간여하여 건립하였다. 이에 비문의 내용과 음기는 최치원의 찬술이 맞지만, 직함이 나오는 제액에 의도적인 가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치원이 찬술한 「지증대사비」에는 분명히 入朝賀正兼 迎奉皇花等使 朝請大夫 前守兵部侍郞 充瑞書院學士 賜紫金魚袋 臣 崔致遠이라고 그의 직함이 쓰여져 있다. 그런데 많은 논문에서 최치원의 직함이 다른 3비와는 달리 이 비에서 변화한 것에만 주목하였을 뿐,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고, 이 직함을 이용하여 논지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비의 건립에는 아자개, 희필과 같은 고려계 인사들이 단월로서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였고, 고려의 寺主 능선의 주도 아래 건립된 사실을 중시하여, 제액에 쓰여진 그의 직함이 변개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 배경으로는 첫째로, 924년 6월에 「지증대사비」의 건립을 주도한 이들이 다음 달인 7월에 귀국하는 봉암사 도헌의 법손 긍양을 봉암사에 초치하려는 의도에서 간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둘째로 이 비에서 최치원의 직함이 변한 것은 중국 유학승 최치원도 고려에 밀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즉 고려로의 人心 歸服을 위해 당시인들의 연민을 받고 있던 최치원을 친고려적 성향의 인물로 만들고자 한 의도로서 「지증대사비」를 건립하면서 그의 직함을 조정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인물은 「지증대사비」가 소재한 봉암사의 원주와 「징효대사비」가 있던 흥녕사의 寺主로 있었던 능선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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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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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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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翰苑』 三韓傳과 『魏略』의 逸文(1) - 『한원』 인용문 분석과 검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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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웅(위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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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翰苑』은 唐 초기 孫楚金의 찬으로 당대인 雍公叡가 주를 붙인 것이며, 여기에 인용된 『魏略』은 3세기 말경 魏의 魚豢의 사찬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은 『삼국지』 동이전의 원전인 『위략』 일문이 『한원』에 보이는 바 『한원』 삼한전에 주석 형태로 달린 그 인용문을 분석 검토해 본 것이다. 이는 그 『위략』 일문의 사료적 가치 평가 문제, 원형 복원 문제에 앞서 예비 작업으로 『한원』 기록의 성격, 인용문의 경향을 다루기 위해서이다. 먼저 『한원』 소인 『후한서』 기사를 그 원문 기록과 대비 분석하였으며, 이어서 기사 형태의 차이나 변화를 유형별로 분류하고 논의하여 보았다. 연구 자료의 절대적 부족과 동시에 해석상 난점을 겪는 우리 입장에서 『한원』에 대한 분석과 문헌 검토는 중요할 것이란 관점으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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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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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4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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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寧 仁陽寺碑文의 塔 關聯記事에 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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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홍국(위덕대학교)"
] |
昌寧에는 정면과 좌·우측면에 銘文이, 후면에 僧立像이 陽刻되어 있는 특이한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 대해서는 금석문을 비롯한 관련 학자들이 일찍부터 주목하여 관련 연구성과를 축적하여 왔다.
이 仁陽寺 塔金堂治成記碑는 771년부터 810년까지 40년간 仁陽寺와 인근 寺院에서 진행되었던 佛事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원의 運營·金石文·吏讀·불교미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이 글은 기왕의 연구성과에 불교고고학적인 고찰을 더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하여 논증·比定할 수 있었다.
첫째, 당시 불사를 이끌었던 主體였던 인물로 추정되어온 僧像의 승려 이름은 碑文 제 1항에 나오는 ‘順表師’이다.
둘째, 碑文에 3차례나 나오지만, 현재 寺址에 남아 있지 않는 仁陽寺塔은 木塔이나 塼塔이었다고 생각된다.
셋째, 碑文에 나오는 大谷寺 石塔은 仁陽寺 인근에 있었다는 전제하에서 볼 때, 현재 창녕 述亭里에 남아있는 동·서3층석탑 중에서 동3층석탑(국보 제34호)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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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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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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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靖宗 4年 「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와 석가탑 사리장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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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호(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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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보존처리를 통해 공개된 불국사 석가탑의 묵서지편은 고려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연구는 물론 불교사와 국문학, 서지학 등 많은 분야에 매우 중요한 연구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석가탑의 묵서지편 가운데 고려 정종 4년(1038)에 작성된 「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는 석가탑의 중수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문서에 언급된 사리장엄구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현존하는 석가탑 사리장엄구와 비교 분석하였다. 그 결과 기존에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편년되던 석가탑 사리장엄구는 통일신라시대에 봉안된 유물과 고려시대에 추가된 유물로 구분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이 되는 은제난형사리합과 은제잔형사리기는 기존에 8세기 중엽의 신라 금속공예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라는 평가와 달리 고려시대에 추가 제작하여 봉안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밖에 금동장방형사리합은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양식분석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하는 한편 그 제작 시기는 8세기 중엽이라는 기존의 견해와 시각을 달리하여 8세기 후반인 혜공왕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거론하였다. 그리고 중수기에 기록된 고려시대의 공양품을 시주자 별로 정리하여 분석한 결과 시주품목에서 승려와 俗人의 차이가 뚜렷하게 구분되며, 현존하는 유물과 비교한 결과 일부 품목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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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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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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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墳 出土 甲冑와 馬具로 본 4, 5세기의 新羅, 伽倻와 高句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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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현숙(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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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서는 4, 5세기대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고분에 부장된 중장기병과 관련된 갑주와 마구류를 통해서 고구려와 신라, 가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고구려는 4세기대에 들어오면서 묘제의 변화와 함께 중장기병과 관련된 문물들이 고분에 부장되기 시작한다. 금속제 중장기병의 부장은 모용선비족의 매장 습속으로, 고구려 고분의 갑주와 마구들은 모용선비와 정권인 전연과의 접촉을 통하여 유입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구려에 유입된 갑주와 마구들은 선택적인 수용과 변용을 겪으면서 고구려화 되었고, 고구려의 갑주와 마구들은 고구려와 신라의 친연관계 속에서 커다란 시차 없이 신라로 유입되었다. 신라로 전해진 갑주와 마구들은 5세기대를 경과하면서 자체적 수용과 변용을 겪으면서 신라화되었고, 신라와 가야의 역학관계 속에서 부산과 합천 등지로 확산되었다.
결국 4, 5세기대 고구려, 신라, 가야 일부 지역에서 공통되는 갑주와 마구는 모용선비로부터 고구려를 통하여 신라와 가야 제 지역으로 확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고대 왕권국가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주요한 동인임을 감안해 볼 때, 중장기병 관련 갑주와 마구의 파급은 신라와 가야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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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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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4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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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금강역사상에 관한 몇 가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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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애(경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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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금강역사상과 관련하여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석굴암 금강역사상처럼 맨손에 웃옷을 벗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금강역사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하는 것이다. 둘째는 금강역사상을 흔히 인왕상이라고도 하는데, 두 개의 명칭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금강역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인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에 관한 것이다. 또 통상적으로 금강역사라고 하면 말 그대로 손에 금강저를 쥔 역사를 일컫는데, 금강저를 쥐지 않고 맨주먹으로 격파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경우에도 금강역사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셋째는 석굴암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또 한 쌍의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남겨지게 되었는지 이다. 아울러 만든 시점은 석굴암 안의 금강역사상과 같은지, 다른지 이다. 이 글은 이러한 몇 가지 궁금증에서 출발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8세기 동아시아 금강역사상의 보편적인 특징을 지녔다. 간다라나 인도 본토의 금강역사상과는 달리 쌍으로 만들어졌고, 손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격파자세를 하고 있다. 또 그 중 1구는 입을 연 아상으로, 나머지 1구는 입을 꾹 다문 훔상이다. 바로 이 세 가지 특징, 즉 아형과 훔형에, 이들이 서로 쌍을 이루며, 맨손인 금강역사상은 중국에서 6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형식이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의 불교조각이 漢化되는 때이기도 해서 그 변화원인은 중국 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며, 이에 관한 좀 더 면밀한 검토는 후일을 기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 형식은 바로 이 漢化된 금강역사를 기본으로 삼았다.
아울러 금강저를 쥔 상은 금강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만, 맨손인 경우도 여전히 금강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5세기경 중국 금강역사상은 본의에 충실하여 금강저를 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6세기 전반 금강역사는 중국화를 거쳐 맨손으로 등장한다. 이 시기 이미 '금강'이라는 개념은 '금강저'라는 제한된 범위를 벗어나 '모든 번뇌와 삿된 것을 깨뜨릴 수 있는 단단한 것'으로 상징되었고, 따라서 맨손의 역사 역시 넓은 의미의 금강역사로 파악하여도 무방한 것으로 보았다. 또 금강역사를 흔히 인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일본의 영향으로 생겨난 결과로 파악하였으며, 금강역사는 인왕으로 바꾸어 부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또 한 쌍의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파편이 있다. 이들 파편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역시 필자의 의문 중 하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부조이지만 입체감을 잃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 조각이다. 금강역사상의 양팔을 몸에서 떼어 부조 밖으로 돌출시킨 것은 조각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는 해주었지만, 한 쌍의 실패작을 낳았다. 금강역사상은 7세기 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8세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금강역사상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조영 이후 금강역사는 사천왕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금강역사가 사천왕에게 유행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원인 역시 앞으로 필자가 기울여야할 과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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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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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3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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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경주민의 항쟁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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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신(한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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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집권기에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가장 특기할 만한 지역이 경상도 지방이다. 특히 경주민의 항쟁은 민란의 총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고려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은 토호나 지방관에 대한 저항, 중앙정부에 대한 항거, 토호들과 제휴하여 중앙에 저항하거나 옛 국가에 대한 향수가 표면화되는 등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경주는 이같은 전형적인 모습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神宗 5年에 발생했던 慶州民의 抗爭에서 보이는 신라부흥 운동은 경주민의 고려정부에 대한 소외감이 폭발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수탈체제에 대한 항거였다. 즉 신라부흥이 경주지역민을 단결시키는 데는 유리한 선언적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농민층보다는 토호 등 지배계층의 절실한 과제였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국가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여러 신들에 제사지내는 것은 고려왕조의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경주민의 항쟁 때 정부는 무려 33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만큼 경주지역민의 반란 규모가 크고 민심의 동요가 심각하여 고려왕조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때 지낸 다양한 신들에게의 제사는 고려사회가 불교 뿐 아니라 도교, 민속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평화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는 불교국가로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사상과 신앙의 다원성이 더욱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같이 고려시대는 부처님 뿐 아니라 개국시조인 太祖眞前, 龍王 · 天神 · 山神 · 城隍神 · 太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이 존재하였고, 국가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같은 다양한 신은 불교 · 도교 민간신앙적 대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신앙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어, 그것이 민란이 일어났을때 난을 일으킨 쪽이나 진압하는 쪽 모두 제사를 지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갈수록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불교의 득세로 세력이 위축되어 갔다. 충숙왕대 경주지방에서 주민들의 돼지 살해사건은 민속신앙의 위상을 약화시켜 국가에 편입시키려는 지방관과 이에 반발하는 주민들의 갈등을 나타내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어서 조선시대에 가서는 성리학의 그늘에 가려 위축되긴 하지만 전통적인 신앙의 명맥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갔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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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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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3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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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으로 본 한자문화의 수용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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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선태(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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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는 둘 다 낙랑ㆍ대방군을 통해 비슷한 시기에 중국문화를 받아들였지만, 漢字의 수용과 변용과정에 큰 차이가 난다. 백제의 경우 6~7세기 백제 말단의 문서행정 자료인 목간을 보면, 인명이나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에 대한 이두표기는 확인되지만, 신라와 달리 한자를 이용해 백제어 자체를 표현하려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백제의 목간에서는 중국식 한문 표현에 근접한 한자사용방식이 주로 확인된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文末에 ‘之’를 의도적으로 기록하는 句讀表記가 5세기 초부터 발전하였고, 이는 신라 차자표기의 발달에도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5세기의 「중원고구려비」나 6세기 중엽의 「장안성 성벽석각」 사이에 한 世紀 이상의 시차가 있지만, 양 자료 사이에는 이두 발달에 커다란 진전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6~7세기 고구려의 문자자료가 현재 얼마 남아있지 않아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후발 신라의 6세기 중반 자료인 「무술오작비」에 ‘在(-겨)’와 같은 선어말어미가 등장하고 있는 것과는 뚜렷이 구별되며, 차자표기가 오히려 퇴조하는 현상이 감지된다.
한편 신라에서는 文末에 「之」를 기록하여 문장의 종결을 표현하는 구두표기에서 한 단계 나아가 終結語尾 뒤에 의도적으로 빈칸을 두어 띄어쓰기한 사례가 자주 확인된다. 이러한 의도적인 빈칸은 신라의 식자층들이 한문과의 언어적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었던 위대한 발명이었다. 신라인들은 빽빽하게 줄지어 늘어선 한문 사이사이에 ‘빈칸’을 상상함으로써, 그 속에 句讀와 釋讀을 위한 차자표기를 창안하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7세기 말 이후 신라에서는 고대일본과 달리, 「解」와 같은 공식령의 문서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고, 또 문서에 ‘白之(아룁니다)’라는 우리식의 차자표기까지 가미하고 있어, 신라 문서 투식의 독특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문서작성 방식이 한자 이해 능력이 진전된 후대 고려와 조선에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중국문화 수용의 초기적인 현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신라말로 정확하게 표현하여, 왕의 의지가 관료에게, 또는 관료 상호 간에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려는, 문서행정의 본질을 지향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인들은 관료층의 낮은 한문 수준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전범이 된 문서행정의 틀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신라의 차자표기는 문서행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식자층 전반의 정확한 의사소통을 지향하게 되었고, 이는 신라의 차자표기가 신라의 언어를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7세기 후반 설총에 이르러 이제 신라인들은 한문을 신라적 언어로 해체하고, 한자를 신라 자신의 문자로 전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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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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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3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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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保皐의 海上勢力과 華嚴神衆信仰 - 天因의 「天冠山記」 분석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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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범환(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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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고려 후기 천인이 쓴 「天冠山記」에 대한 내용을 검토한 것이다. 검토 결과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지적해 보았는데, 첫째로 천인이 「천관산기」를 작성하면서 참고한 초본은 고려 혜종 이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관사의 사세가 변화하면서 그곳에 소장되지 못하고 민가로 유락되었다. 둘째로 천관사 개창에 있어 경제적인 배경은 지방의 유력자보다는 중앙의 진골 귀족의 지원이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셋째로 천관사는 화엄신중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찰임을 밝혀 보았다. 그것은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도피하는 과정에 승려 홍진이 그곳에서 화엄을 밤낮으로 염송한 결과 신중들이 감응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화엄신중신앙은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매우 받들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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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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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3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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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명의 이형태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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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길(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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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1960년대 초 인구 3만의 소읍에서 반세기만에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타 방언화자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그로 인해 지역어도 많이 소멸되었다. 특히 표준어의 교육과 보급으로 지역어의 소멸은 가속화하고 있으며 지명 또한 증거물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지명의 형태·음운론적인 면이나 의미론적인 면 혹은 어원론적인 면 등의 다양한 고찰은 서둘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통시적으로 지명은 다양한 이형태(allomorph)를 생성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그 지명의 생성과정에 적용된 다양한 음운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다.
울산지명의 변이형 생성과정에는 울산지역어의 6단모음체계가 잘 반영되어 있고 움라우트와 고모음화, 구개음화와 비모음화 그리고 모음교체 등의 음운현상들이 중요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음운규칙들은 울산지명의 이형태 연구뿐만 아니라 형태·의미론적인 연구와 어원론적 연구에도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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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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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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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경의 도시적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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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보은숙((재)신라문화유적조사단)"
] |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경주분지 내에서 발굴조사된 신라왕경의 유적, 특히 도로유적을 중심으로 신라왕경의 발달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신라왕경의 발달은 6세기 중엽에서 통일 이전까지의 왕경의 형성기, 7세기 후반, 즉 통일 이후에서 8세기 중반까지의 왕경의 확산기, 마지막으로 8세기 후반 이후를 왕경의 완성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재까지 보고된 경주분지 내 왕경유적을 통해 그 형성기의 도시유적들이 월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파악, 당시의 궁성이 월성이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월성 남쪽의 (전)인용사지 등의 유적을 통해 왕경 형성기 중에서도 이른 시기의 도시유적은 기존의 주거지를 그대로 이용, 최대한 기존의 주거군을 유지하는 식의 소극적 도시화를 진행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왕경의 확산기 및 완성기의 도시유적은 방의 구획을 계획에 두고 축조되었으며, 완성기의 도시유적은 형성기의 소극적 도시화에서 유지되었던 초기의 도시유적에 대한 재개발까지를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금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가장 늦은 시기의 도시유적 축조지역이 현재의 시가지 중심인 성동동 및 서부동 일대로 8세기 중반을 상회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도시유적 이전에 축조된 폐기장적 성격의 수혈유구, 토층 등을 통해 이 일대가 북천의 범람으로부터 8세기 전반까지도 자유롭지 못했으며, 이는 8세기 이전으로 편년되는 그렇다할 건물지 등의 유적이 확인되지 않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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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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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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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弘覺禪師塔碑 원형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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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영(부산외국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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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 설악산 기슭의 禪林院에 세워졌던 홍각선사탑비는 17세기 중엽에 파손되어 원형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현재 남아있는 일부 碑片과 拓本 그리고 碑帖 자료를 활용해 비문을 복원하고 塔碑의 원형을 재현하였다.
그 결과 이 비문은 가로 32행, 세로 48자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홍각선사의 생애를 중심으로 대략 7부분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석의 크기는 가로 94.5cm, 세로 173.5cm, 두께 19.8cm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이 비석은 세로 크기를 10으로 잡을 경우 가로가 5.45가 되는 장방형으로, 신라시대 여타 선사들의 탑비 형태의 정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과 형태를 지닌 홍각선사탑비문은 王羲之의 글자를 가져와 集字했는데, 글자 수는 대략 1,340여자 내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현재 완벽하게 읽을 수 있는 글자는 692자이고, 탁본의 殘劃과 문맥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글자는 16자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글자들을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재생시켜 탑비의 원래의 모습을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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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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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3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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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迦智山門의 法統과 位相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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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호(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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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迦智山門의 개산과 초기 발전과정을 돌이켜 보며 道義와 體澄(804-880)을 중심으로 관련 업적들과 山門의 역사 지리적 가치를 음미해 보려 하였다. 신라 하대에 도의는 중국에 가서 六祖 慧能(638~713)의 法孫인 馬祖 道一(709~788)의 제자 西堂 智藏(735~814) 으로부터 受法하고 頭陀行을 하며 禪院 淸規의 저자 百丈 懷海(749~814)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귀국하여 南宗 祖師禪法을 전승하려고 가지산사에서 禪門을 열었다. 가지산사(보림사)는 전남 해안에 가깝고 산천이 수려하며 안온한 지역에 자리하여 禪修行道場으로 적합한 곳이다. 당시 사정으로 보아 武州(현재 光州)지방의 포구로 귀환하여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장보고 세력의 도움을 받은 것 같다. 경주의 헌덕왕과 맞지 않아 왕도를 떠나 설악산으로 가서 조용히 전법교화하였다. 이는 달마와 양무제의 고사와 유사하다. 염거에게 법을 전하였고 그는 체징에게 전했다. 그들의 활약으로 당시 침체하던 敎學위주의 종교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 선도적 역할을 하여 한국불교사 내지 정신문화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추동하였다. 이후 체징의 가지산사 주석으로 산문은 크게 번창하게 되었고 후예들에 의하여 九山禪門의 으뜸이 되었으며, 후대에 一然과 太古 등에 의해 曹溪宗으로의 통합에도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서, 오늘날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도의를 宗祖로 추존하게 되었다. 가지산문은 보림사를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도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전국적인 교화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도의의 법을 이은 문인들은 선문의 법통에 대한 정체성 내지 주체적 인식이 확고하였고, 이는 개산조 도의가 중국 선종의 初祖 菩提達摩와 비견될 수 있는 자긍심으로 이어졌으며, 한국불교 전통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확정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도의와 같은 인물은 동아시아 내지 세계사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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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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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1273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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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동경의 위상과 행정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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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현(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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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동경유수관, 계림부 등으로 변화했는데, 경주 사람들의 동향, 정치세력과 국가체제의 변화 등이 작용했다. 경주가 오랫동안 동경의 지위를 유지한 원동력은 신라의 역사성과 문화성이었고, 자긍심과 토착성을 지닌 경주인들의 활발한 중앙 진출이었다. 어떤 가문이 중앙에 진출하여 번성하다가 쇠락하더라도 다른 가문이 진출해 번성했다.
동경 내지 계림부는 상층부인 동경유수관 혹은 계림부와 하층부인 慶州司로 이루어졌는데, 전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로, 후자는 경주 지역의 향리들로 구성되었다. 동경유수관은 유수사 혹은 유수, 지유수사, 부유수, 판관, 장서기, 법조, 의사, 문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초기에 유수사 위에 판유수사가 두어진 적도 있었다. 계림부는 부윤, 소윤, 판관, 장서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동경유수관의 판유수사는 재상급이었지만 유수사 내지 유수는 대략 3품 정도였다. 고려말에 계림부로 격하되지만 구성원의 지위는 높아져 부윤에 재상급이 종종 임명되었다.
경주 향리는 호장 · 부호장 · 호정 · 부호정 등의 本司, 군무를 담당하는 병정 · 부병정 등의 司兵, 재무를 담당하는 창정 · 부창정 등의 司倉 등으로 이루어졌다. 고려말 경주에서 상호장 · 호장 · 부호장은 金 · 李 · 崔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상호장은 호장 · 부호장 가문 출신의 호장에서 임명되었다. 향리는 유수관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강한 자율성을 띠었으며, 때로는 유수관의 통제를 벗어나 읍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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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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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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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六村長神話의 모습과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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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진(동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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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연구는 연구의 重要性에도 불구 迷宮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본고는 韓傳 기록과 삼한 문제에 관한 旣往의 연구 成果를 정리하는 동시에, 삼한 연구의 기본 문제에 관한 斷想과 管見을 대략 밝혀 볼 수 있을까 한다.[영문 요약] Hanjeon(韓傳), Samgukgi(三國志) and Hanjeon, Whohanso(後漢書) are the raw materials of the study on history of Samhan(三韓). This thesis aims at the make clean of my viewpoint on the interpretation and the appreciation of the raw material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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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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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초기국가를 보는 눈- ‘100년 통설’인가, ‘새로운 역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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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욱(사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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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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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瓢巖(밝바위)>에 관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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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靑原(瓢巖學術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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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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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韓六村’의 性格과 位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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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毅植(서울産業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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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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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 자료로 본 신라 고대 국가의 성립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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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경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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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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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압력과 전쟁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 신라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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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원(경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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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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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地域 埋藏文化財調査現況(Ⅳ)- 窯業遺蹟 發掘調査를 中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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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孝軾(東國大學校); 金鎬詳(東國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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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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斯盧國을 둘러싼 몇 가지 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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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甫暾(慶北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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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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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國家形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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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泰(忠南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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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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斯盧 6村의 위치에 대한 試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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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洪國(위덕대학교); 鄭尙洙(위덕대학교); 金志勳(위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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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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尼師今時期 新羅의 成長과 6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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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Growth in the Nisaguem(尼師今) Period of Silla and the 6bu(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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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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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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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和白會議에 관한 再檢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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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南守(國史編纂委員會 編史硏究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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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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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 硏究의 現況과 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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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鉉雄(東國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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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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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和白會議의 人的 構成과 運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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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羲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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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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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유사≫의 국어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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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석(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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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is important data to study Korean from the 19th Century to the 20th Century. This paper is to study the properties of language change. We examined the change of language units, that is, organization of consonants and vowels, concised expression.The keynotes in the change of Korean are 'conciseness' and 'shorten expression.' In this paper makes an analysis 'conciseness' and shorten expression of <Yongdamyusa>.'Conciseness' and 'shorten expression' come into being as a result of saving time and trouble.<Yongdamyusa> makes an effort to standardize spelling rules and simplify disorder expression. In the result, complex consonants and vowels were organized, complex vocabularies were concised in <Yongdamy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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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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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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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無染和尙碑의 得難조 해석과 건비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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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경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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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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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料] 慶州地域 埋藏文化財 調査現況(Ⅴ) - 製鐵遺蹟 發掘調査를 中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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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孝軾(東國大學校); 金鎬詳(東國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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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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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料] 高麗時代 新羅 記事 整理-『高麗史』·『高麗史節要』를 中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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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德原(明知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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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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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구국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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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선(대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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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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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王權과 官職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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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羲滿(成和大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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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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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경주 한 壬辰義兵家의 私奴婢조정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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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식(東國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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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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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권과 노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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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法鍾(又石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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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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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統一期 專制王權의 강화와 村落支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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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在弘(국립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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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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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立干時期의 王權과 葛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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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石悅(釜山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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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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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骨品制度 成立期의 思想的 基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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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deological Background on the Establishment of 'Bond-Rank System(骨品制)' of Sh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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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곤(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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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nd-Rank(骨品)' System of Shilla was legally completed with the distribution of the law in the period of King 'Bub-heung(法興王)' While the system gave a privilege to a small number of the ruling class, it considerably restricted the large number of the ruled class. So Ideology was essential to rationalize the system.
Therefore, The group of three surnames(3姓), consisted of royal family, pursued superior status as a supreme ruling class with their ideology of the direct descendants of the 'Son of Heaven(天降子)' and their direct performing of sacrificial rite for the 'the shrine of their ancestor(始祖廟).' The chief of the six villages (六村長) - the aristocratic - also occupied a high position as a direct descendant of the son of Heaven in their pedigree. On the other hand, the System distinguished between 'people of capital(王京民)' and 'people of non-capital(非王京民).' So the former had both 'discrimination of descent(族制的 差別)' and 'discrimination of space(空間的 差別)' from the latter. They rationalized 'discrimination of descent' from the latter, while declaring them as 'the son of Heaven.' Also they rationalized 'discrimination of area' by making Capital(王京地) into the religiously sacred space.
Afterwards, they sought the establishment of royal power of Kim's family and the unification of religious ideology by constructing a divine palace(神宮) in which the 'founder of the family(誕降始祖)' was placed as a main god. Although the divine palace had a limitation in its origin of ideology, it constantly enhanced the religious dignity of royal household which distinguished them from other lower aristocrats in view of practical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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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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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李氏 始祖誕降址의 再檢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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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鎬詳(東國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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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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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王權과 貴族社會-중대 국왕의 혼인 문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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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000918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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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王權 연구의 몇 가지 前提- 中古期 왕권과 신분제, 종교의 相互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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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基東(東國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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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왕실세력의 변천과 왕위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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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겸(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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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王權과 政治構造- 군신회의 구성원의 변화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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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哲(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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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sets and Spl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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