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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加價値稅)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서명석"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082 | CC BY | 6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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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가가치세는 1954년 프랑스에서 처음 시행된 후 유럽·라틴아메리카 등으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7년 7월부터 특별소비세와 일반소비세인 부가가치세 체제를 시행하였는데, 기존의 영업세·물품세·직물류세·유흥음식세 등 복잡한 세목을 통합한 것이다. 부가가치세의 세입은 1977년 2416억 원, 1980년 1조 4712억 원, 1990년 6조 9644억 원, 1996년 16조 7895억 원으로 내국세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부가가치세의 특징으로는 제조업·도매업·소매업자 등 각 거래단계마다 과세하는 다단계 거래세이며, 특별소비세와는 달리 모든 재화나 용역에 대하여 모든 거래단계에서 과세하므로 일반소비세이고, 조세의 부담은 최종소비자에게 전가되므로 간접세이다.
부가가치세의 계산 방법에는 공제 법과 가산법이 있다. 공제법으로는 거래액 공제법, 즉 매출액에서 매입액을 차감한 금액에 세율을 곱한 매출세액에서 매입액에 세율을 곱한 매입세액을 차감하여 납부세액을 산출하는 방법과 세액공제법 등이 있다. 생산요소 비용인 임금·이자 등에 이윤을 더한 금액에 세율을 곱하여 납부세액을 산출하는 법을 가산법이라고 한다. 즉, 전단계 세액공제법은 매출세액에서 매입세액을 차감하는 것이다. 부가가치세는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는 사업자가 세금계산서를 교부하고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징수당한 매입세액을 공제하여 소관 세무서장에게 납부하는 세금이다. 다만 수입물품에 한해서는 세관장이 외국 사업자를 대신하여 세액을 징수한다. 재화의 공급 및 용역의 공급과 재화의 수입에 대하여 과세한다. 즉, 재화나 용역 그 자체가 아니라 과세거래가 대상이 된다. 재화란 재산적 가치가 있는 기계·제품·상품 등 모든 유체물과 전기·열 및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 등의 무체물을 가리킨다. 또한 부가가치세는 재화 이외의 재산적 가치가 있는 역무(서비스) 및 기타 행위로서, 시설물이나 권리의 사용 행위도 포함하는 것으로 다른 조세와 다르다. 영세율이라 함은 매출세액계산 때 과세표준에 0의 세율을 적용하여 과세표준이 얼마이든 간에 매출세액이 항상 0이 되므로 매입 때에 징수당한 매입세액은 정부로부터 되돌려 받는 제도이다. 영세율의 적용 대상은 ① 수출하는 재화, ② 국외에서 제공하는 용역, ③ 선박·항공기의 외국 항행용 역, ④ 기타 외화를 획득하는 재화나 용역이다. 이러한 영세율 적용은 내국인에게는 제한이 없지만, 외국인일 경우에는 그 나라에서 동일한 제도가 있을 때에만 적용하는 상호 면세 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부가가치세에서 면세라 함은 재화 또는 용역의 공급가액에 대한 매출세액만 면세하고, 징수당한 매입세액은 환급하지 않는 제도이다.
면세 대상은 ① 미가공식품·무연탄 등 기초 생활 필수품 및 용역, ② 의사·한의사 등의 의료보건 용역과 교육용역인 국민 후생 용역, ③ 신문·잡지·도서 등 문화 관련 재화 및 용역, ④ 부가가치의 구성요소인 근로 금융·보험 용역, ⑤ 가수·배우 등 독립된 자격으로 공급하는 인적 용역, ⑥ 국가 지방자치단체·공익단체 등이 공급하는 재화 및 용역 등이다. 영리목적 유무를 불문하고 사업상 독립적으로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는 자와 재화를 수입하는 자로서, 개인은 일반과세자, 간이과세자 및 과세 특례자로 구분하고 법인은 공익법인 및 법인격이 없는 단체도 포함한다. 현행 <부가가치세법>에 따르면 사업자는 사업 개시 20일 이내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등록증을 교부받아야 부가가치세의 효율적인 처리와 납세의무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사업장 소재지 관할 세무서나, 예외적으로 여러 개의 사업장을 소유한 자는 정부의 승인을 얻어 한 사업장에서 부가가치세를 납부할 수 있다. 부가가치세는 1년을 2기로 나누어서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2기는 7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과세한다. 부가가치세의 매출세액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재화 또는 용역의 공급가액, 즉 대금·요금·수수료·기타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대가관계에 있는 모든 금전적 가치를 과세표준이 포함해야 한다. 세율은 단일 비례세율로서 기본 세율은 100분의 13이며, 상하 100분의 3을 가감하는 범위 내에서 대통령령으로 조정하는 탄력세율을 채택하고 있으며 현재 세율은 100분의 10세율이다. 부가가치세에서 사업자가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한 사실을 증명하는 계산서인 세금계산서는 매입세액을 공제받는 데 가장 중요한 증빙서류이다. 부가가치세는 자진신고납부제도라는 자기부과세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납세자의 적극적인 협조와 납세 도의심 고취가 반드시 필요하다. 부가가치세는 각 과세기간 종료 후 25일 내에 신고하는 확정신고납부와 과세기간 중간에, 즉 1월부터 3월까지와 7월부터 9월까지의 기간분에 대하여 신고하는 예정신고납부가 있고, 직전과 세 기간의 공급가액이 7500만 원 미만인 사업자에 대하여는 직전기 과세기간의 납부세액 2분의 1 금액을 예정 고지 세액으로 고지 발부한다. 부가가치세의 시행이 물가 및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다음과 같다. 부가가치세는 모든 재화와 용역에 동일하게 과세함으로써 자원의 배분에 있어서 조세의 중립성 유지와 배분의 합리화에 기여하고, 수출에 0의 세율을 적용하여 매입세액을 환급하여 줌으로써 수출경쟁력을 강화시키고, 또한 투자에 대하여는 투자재에 대한 매입세액 전액을 공제 또는 환급하여 줌으로써 투자의 촉진 효과가 있다. 부가가치세는 단일 비례세율로서 세 부담이 종국적으로 최종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저소득자의 세 부담이 가중되는 역진성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기초 생활 필수품에는 면세하는 반면에, 사치품이나 소비 억제 품목에는 고율의 특별소비세를 과세함으로써 세 부담의 역진성을 완화하고, 또한 탄력세율을 채택하여 경기변동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부가가치세
(附加價値稅)
### 내용:
부가가치세는 1954년 프랑스에서 처음 시행된 후 유럽·라틴아메리카 등으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7년 7월부터 특별소비세와 일반소비세인 부가가치세 체제를 시행하였는데, 기존의 영업세·물품세·직물류세·유흥음식세 등 복잡한 세목을 통합한 것이다. 부가가치세의 세입은 1977년 2416억 원, 1980년 1조 4712억 원, 1990년 6조 9644억 원, 1996년 16조 7895억 원으로 내국세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부가가치세의 특징으로는 제조업·도매업·소매업자 등 각 거래단계마다 과세하는 다단계 거래세이며, 특별소비세와는 달리 모든 재화나 용역에 대하여 모든 거래단계에서 과세하므로 일반소비세이고, 조세의 부담은 최종소비자에게 전가되므로 간접세이다.
부가가치세의 계산 방법에는 공제 법과 가산법이 있다. 공제법으로는 거래액 공제법, 즉 매출액에서 매입액을 차감한 금액에 세율을 곱한 매출세액에서 매입액에 세율을 곱한 매입세액을 차감하여 납부세액을 산출하는 방법과 세액공제법 등이 있다. 생산요소 비용인 임금·이자 등에 이윤을 더한 금액에 세율을 곱하여 납부세액을 산출하는 법을 가산법이라고 한다. 즉, 전단계 세액공제법은 매출세액에서 매입세액을 차감하는 것이다. 부가가치세는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는 사업자가 세금계산서를 교부하고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징수당한 매입세액을 공제하여 소관 세무서장에게 납부하는 세금이다. 다만 수입물품에 한해서는 세관장이 외국 사업자를 대신하여 세액을 징수한다. 재화의 공급 및 용역의 공급과 재화의 수입에 대하여 과세한다. 즉, 재화나 용역 그 자체가 아니라 과세거래가 대상이 된다. 재화란 재산적 가치가 있는 기계·제품·상품 등 모든 유체물과 전기·열 및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 등의 무체물을 가리킨다. 또한 부가가치세는 재화 이외의 재산적 가치가 있는 역무(서비스) 및 기타 행위로서, 시설물이나 권리의 사용 행위도 포함하는 것으로 다른 조세와 다르다. 영세율이라 함은 매출세액계산 때 과세표준에 0의 세율을 적용하여 과세표준이 얼마이든 간에 매출세액이 항상 0이 되므로 매입 때에 징수당한 매입세액은 정부로부터 되돌려 받는 제도이다. 영세율의 적용 대상은 ① 수출하는 재화, ② 국외에서 제공하는 용역, ③ 선박·항공기의 외국 항행용 역, ④ 기타 외화를 획득하는 재화나 용역이다. 이러한 영세율 적용은 내국인에게는 제한이 없지만, 외국인일 경우에는 그 나라에서 동일한 제도가 있을 때에만 적용하는 상호 면세 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부가가치세에서 면세라 함은 재화 또는 용역의 공급가액에 대한 매출세액만 면세하고, 징수당한 매입세액은 환급하지 않는 제도이다.
면세 대상은 ① 미가공식품·무연탄 등 기초 생활 필수품 및 용역, ② 의사·한의사 등의 의료보건 용역과 교육용역인 국민 후생 용역, ③ 신문·잡지·도서 등 문화 관련 재화 및 용역, ④ 부가가치의 구성요소인 근로 금융·보험 용역, ⑤ 가수·배우 등 독립된 자격으로 공급하는 인적 용역, ⑥ 국가 지방자치단체·공익단체 등이 공급하는 재화 및 용역 등이다. 영리목적 유무를 불문하고 사업상 독립적으로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는 자와 재화를 수입하는 자로서, 개인은 일반과세자, 간이과세자 및 과세 특례자로 구분하고 법인은 공익법인 및 법인격이 없는 단체도 포함한다. 현행 <부가가치세법>에 따르면 사업자는 사업 개시 20일 이내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등록증을 교부받아야 부가가치세의 효율적인 처리와 납세의무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사업장 소재지 관할 세무서나, 예외적으로 여러 개의 사업장을 소유한 자는 정부의 승인을 얻어 한 사업장에서 부가가치세를 납부할 수 있다. 부가가치세는 1년을 2기로 나누어서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2기는 7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과세한다. 부가가치세의 매출세액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재화 또는 용역의 공급가액, 즉 대금·요금·수수료·기타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대가관계에 있는 모든 금전적 가치를 과세표준이 포함해야 한다. 세율은 단일 비례세율로서 기본 세율은 100분의 13이며, 상하 100분의 3을 가감하는 범위 내에서 대통령령으로 조정하는 탄력세율을 채택하고 있으며 현재 세율은 100분의 10세율이다. 부가가치세에서 사업자가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한 사실을 증명하는 계산서인 세금계산서는 매입세액을 공제받는 데 가장 중요한 증빙서류이다. 부가가치세는 자진신고납부제도라는 자기부과세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납세자의 적극적인 협조와 납세 도의심 고취가 반드시 필요하다. 부가가치세는 각 과세기간 종료 후 25일 내에 신고하는 확정신고납부와 과세기간 중간에, 즉 1월부터 3월까지와 7월부터 9월까지의 기간분에 대하여 신고하는 예정신고납부가 있고, 직전과 세 기간의 공급가액이 7500만 원 미만인 사업자에 대하여는 직전기 과세기간의 납부세액 2분의 1 금액을 예정 고지 세액으로 고지 발부한다. 부가가치세의 시행이 물가 및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다음과 같다. 부가가치세는 모든 재화와 용역에 동일하게 과세함으로써 자원의 배분에 있어서 조세의 중립성 유지와 배분의 합리화에 기여하고, 수출에 0의 세율을 적용하여 매입세액을 환급하여 줌으로써 수출경쟁력을 강화시키고, 또한 투자에 대하여는 투자재에 대한 매입세액 전액을 공제 또는 환급하여 줌으로써 투자의 촉진 효과가 있다. 부가가치세는 단일 비례세율로서 세 부담이 종국적으로 최종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저소득자의 세 부담이 가중되는 역진성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기초 생활 필수품에는 면세하는 반면에, 사치품이나 소비 억제 품목에는 고율의 특별소비세를 과세함으로써 세 부담의 역진성을 완화하고, 또한 탄력세율을 채택하여 경기변동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
dbaa473c-ce13-4fb2-a0e6-32399a434409 | source05/encykorea/SOC47660.txt | 국제연합 인간환경회의
(國際聯合 人間環境會議)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260 | CC BY | 418 | {
"main": "문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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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오직 하나뿐인 지구를 표어로 세계 환경문제가 종합적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에 스톡홀름회의라고도 한다. 유엔 환경관련 활동 종합조정기관으로 인간 생활환경의 보호와 인간의 문화적 생활영위를 위한 환경조성을 위하여 국제협력을 촉진할 것을 목적으로 ‘오직 하나뿐인 지구’를 캐치프레이즈로 하여, 환경파괴로부터의 지구의 보호와 천연자원 고갈의 방지를 위한 국제연합체제를 구축하려는데 목적을 둔 이 회의에는 모두 114개국에서 1,200 여명의 각국 대표들이 참가했다.스웨덴이 1968년 5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 제안한 유엔인간환경선언은 1970년 유엔 인간환경회의 제1차 준비회의에서 채택되었고, 1972년 유엔 인간환경회의에서 공식 선언되었다. 인간환경을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경제개발문제나 인구문제 등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으로 여기고 인간환경의 보호와 개선에 관한 원칙을 선언함에 따라 사람은 일정한 환경을 향수(享受)할 기본적 권리와 환경을 보호 · 개선할 의무가 있으며, 각국은 자국의 환경정책에 따라 그 자원을 개발할 주관적 권리가 있으나, 그것이 타국이나 국가관할권 이외의 환경에 손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는 책임이 있다고 지적함과 동시에, 환경보호를 위해서 다음 사항이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천연자원의 보호, 유해물질의 배출규칙, 해양오염방지, 경제 · 사회발전의 촉진, 개발 · 도시화 · 인구정책과 환경보호의 조정, 환경보호를 위한 과학기술의 개발 · 이전의 촉진, 오염으로 인한 보상에 관한 국제법의 발전, 환경의 보호 · 개선을 위한 국제협력, 핵무기와 기타의 대량파괴무기의 제거 · 파기를 위한 노력 등이다.행동계획은 인간거주 계획과 관리, 천연자원의 관리, 오염물질의 규제, 개발과 환경 여러 분야에 대한 국제협력을 구체적으로 권고했다. 이 선언은 전문과 26개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문에는 인간환경 보호와 개선은 국민의 생활향상과 전 세계 경제개발에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으며, 국민의 소망이므로 각국 정부가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환경권을 선언하였는데, 인간은 그 생활의 존엄과 복지를 보유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유, 평등, 적절한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진다. 또한 국제적인 공해의 방지와 보다 나은 인간생활의 환경조성을 위해 해양오염의 방지, 유해물질이나 열의 배출금지, 핵무기 등 대량파괴 또는 보복무기의 제거 및 파기, 천연자원이나 야생동물의 국제적 보호촉구, 각국의 인구정책과 환경문제에 관한 교육 등을 통한 환경보전의 국제협력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각국의 권리 · 의무 · 보상에 관한 국제법규화의 요청 등을 명시하고 있다.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산하조직인 환경이사회가 설치되고 환경기금이 설립되었으며, 매년 6월 5일을 세계환경의 날로 제정하였으며, 이는 환경기금이 회의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1972년 이래로 유엔환경프로그램(UNEP)이 설립되면서 각종 환경문제에 관한 개별회의와 협약들이 체결되었다. 그 후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뒤 소련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구했고, 1985년 이래 오존층 파괴물질 규제방법을 연구하여 1987년 9월 오존층 보호를 위한 국제협력체제를 확립했다. 특히 미래 세대의 이익도 고려해야 하지만 동시에 현세대의 자원개발 권리까지 허용한다는 균형조치를 자원보존의 원칙과 관련하여 취했다. 이후의 지구환경보호조약 · 지구온난화 방지조약 3조, 오존층 파괴물질에 관한 몬트리올의정서 5조 · 에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구체화되었다. 지구 환경문제는 단순한 생존논리가 아니라 국제적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 환경보호에 관한 일련의 일반원칙을 포함한 행동계획 선언은 인류가 지구의 관리자(custodian)라는 개념을 부각시키고 이것이 모든 국가의 의무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국제관계학의 새로운 분야로 부상하고 있는<NAME>경문제는 국제사회의 공공재문제와 인간안보 위기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국제연합 인간환경회의
(國際聯合 人間環境會議)
### 내용: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오직 하나뿐인 지구를 표어로 세계 환경문제가 종합적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에 스톡홀름회의라고도 한다. 유엔 환경관련 활동 종합조정기관으로 인간 생활환경의 보호와 인간의 문화적 생활영위를 위한 환경조성을 위하여 국제협력을 촉진할 것을 목적으로 ‘오직 하나뿐인 지구’를 캐치프레이즈로 하여, 환경파괴로부터의 지구의 보호와 천연자원 고갈의 방지를 위한 국제연합체제를 구축하려는데 목적을 둔 이 회의에는 모두 114개국에서 1,200 여명의 각국 대표들이 참가했다.스웨덴이 1968년 5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 제안한 유엔인간환경선언은 1970년 유엔 인간환경회의 제1차 준비회의에서 채택되었고, 1972년 유엔 인간환경회의에서 공식 선언되었다. 인간환경을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경제개발문제나 인구문제 등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으로 여기고 인간환경의 보호와 개선에 관한 원칙을 선언함에 따라 사람은 일정한 환경을 향수(享受)할 기본적 권리와 환경을 보호 · 개선할 의무가 있으며, 각국은 자국의 환경정책에 따라 그 자원을 개발할 주관적 권리가 있으나, 그것이 타국이나 국가관할권 이외의 환경에 손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는 책임이 있다고 지적함과 동시에, 환경보호를 위해서 다음 사항이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천연자원의 보호, 유해물질의 배출규칙, 해양오염방지, 경제 · 사회발전의 촉진, 개발 · 도시화 · 인구정책과 환경보호의 조정, 환경보호를 위한 과학기술의 개발 · 이전의 촉진, 오염으로 인한 보상에 관한 국제법의 발전, 환경의 보호 · 개선을 위한 국제협력, 핵무기와 기타의 대량파괴무기의 제거 · 파기를 위한 노력 등이다.행동계획은 인간거주 계획과 관리, 천연자원의 관리, 오염물질의 규제, 개발과 환경 여러 분야에 대한 국제협력을 구체적으로 권고했다. 이 선언은 전문과 26개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문에는 인간환경 보호와 개선은 국민의 생활향상과 전 세계 경제개발에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으며, 국민의 소망이므로 각국 정부가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환경권을 선언하였는데, 인간은 그 생활의 존엄과 복지를 보유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유, 평등, 적절한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진다. 또한 국제적인 공해의 방지와 보다 나은 인간생활의 환경조성을 위해 해양오염의 방지, 유해물질이나 열의 배출금지, 핵무기 등 대량파괴 또는 보복무기의 제거 및 파기, 천연자원이나 야생동물의 국제적 보호촉구, 각국의 인구정책과 환경문제에 관한 교육 등을 통한 환경보전의 국제협력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각국의 권리 · 의무 · 보상에 관한 국제법규화의 요청 등을 명시하고 있다.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산하조직인 환경이사회가 설치되고 환경기금이 설립되었으며, 매년 6월 5일을 세계환경의 날로 제정하였으며, 이는 환경기금이 회의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1972년 이래로 유엔환경프로그램(UNEP)이 설립되면서 각종 환경문제에 관한 개별회의와 협약들이 체결되었다. 그 후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뒤 소련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구했고, 1985년 이래 오존층 파괴물질 규제방법을 연구하여 1987년 9월 오존층 보호를 위한 국제협력체제를 확립했다. 특히 미래 세대의 이익도 고려해야 하지만 동시에 현세대의 자원개발 권리까지 허용한다는 균형조치를 자원보존의 원칙과 관련하여 취했다. 이후의 지구환경보호조약 · 지구온난화 방지조약 3조, 오존층 파괴물질에 관한 몬트리올의정서 5조 · 에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구체화되었다. 지구 환경문제는 단순한 생존논리가 아니라 국제적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 환경보호에 관한 일련의 일반원칙을 포함한 행동계획 선언은 인류가 지구의 관리자(custodian)라는 개념을 부각시키고 이것이 모든 국가의 의무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국제관계학의 새로운 분야로 부상하고 있는<NAME>경문제는 국제사회의 공공재문제와 인간안보 위기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
c4126586-7e87-45fa-a0b9-4fe4d1e6b05c | source05/encykorea/SOC26104.txt | 여주 보통리 고분군
(驪州 甫通里 古墳群)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권오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496 | CC BY | 217 | {
"main": "문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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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통리는 여주에서 양평으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진입로의 우측(동쪽) 능선에 고분이 자리 잡고 있다. 보통리를 감싸고 있는 해발 100m의 야산이 서쪽으로 내려오면서 이 능선은 V자형으로 갈라져 있다. 이 갈라진 양쪽 능선의 정상부에 고분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분은 모두 14기로, 대형분은 봉토의 지름 15∼20m, 높이 3∼5m, 중형분은 지름 10∼15m, 높이 2∼3m, 소형분은 지름 5∼6m, 높이 1∼2m 정도이다. 이 중 1기가 1970년에 문화재관리국이<NAME>여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묘실의 천장석은 봉토 정상에서 180cm 아래 지점에 있는데 지름 12m, 높이 5.5m이다. 묘실의 평면은 정방형에 가깝고, 남벽 중앙에는 긴 연도가 있다. 묘실의 크기는 동서남북 244cm(남북), 244cm(남북)로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244cm이다. 연도는 길이 310cm, 너비 82cm이다. 묘실 내에는 북벽에 이어 시상을 설치하였다. 하단을 수직으로 수직으로 중간은 내경 시키고, 상단은 거대한 판석으로 모를 죽여서 그 위에 천장을 만들어 말각천장이라고 할 수 있다. 벽석 사이의 틈은 작은 돌과 점토로 메웠다. 이미 도굴이 진행되어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지만 두개골 편·치아·금동제 이식과 도자·원형구·관정·꺾쇠 등의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상면에 목질이 남아 있어 목관의 크기는 길이 207cm, 너비 70cm 정도로 추정된다. 두개골·치아·이식 등의 배치 상태로 미루어 볼 때 베개의 방향은 동침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단장으로 여겨진다. 이 고분의 연대와 성격은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말각천장은 고구려적 요소이므로 여주 지방이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간 시기는 5세기 후반 이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여주 지역의 소유자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보통리 고분을 축조한 집단과 그들의 문화적 기반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여주 보통리 고분군
(驪州 甫通里 古墳群)
### 내용:
보통리는 여주에서 양평으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진입로의 우측(동쪽) 능선에 고분이 자리 잡고 있다. 보통리를 감싸고 있는 해발 100m의 야산이 서쪽으로 내려오면서 이 능선은 V자형으로 갈라져 있다. 이 갈라진 양쪽 능선의 정상부에 고분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분은 모두 14기로, 대형분은 봉토의 지름 15∼20m, 높이 3∼5m, 중형분은 지름 10∼15m, 높이 2∼3m, 소형분은 지름 5∼6m, 높이 1∼2m 정도이다. 이 중 1기가 1970년에 문화재관리국이<NAME>여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묘실의 천장석은 봉토 정상에서 180cm 아래 지점에 있는데 지름 12m, 높이 5.5m이다. 묘실의 평면은 정방형에 가깝고, 남벽 중앙에는 긴 연도가 있다. 묘실의 크기는 동서남북 244cm(남북), 244cm(남북)로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244cm이다. 연도는 길이 310cm, 너비 82cm이다. 묘실 내에는 북벽에 이어 시상을 설치하였다. 하단을 수직으로 수직으로 중간은 내경 시키고, 상단은 거대한 판석으로 모를 죽여서 그 위에 천장을 만들어 말각천장이라고 할 수 있다. 벽석 사이의 틈은 작은 돌과 점토로 메웠다. 이미 도굴이 진행되어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지만 두개골 편·치아·금동제 이식과 도자·원형구·관정·꺾쇠 등의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상면에 목질이 남아 있어 목관의 크기는 길이 207cm, 너비 70cm 정도로 추정된다. 두개골·치아·이식 등의 배치 상태로 미루어 볼 때 베개의 방향은 동침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단장으로 여겨진다. 이 고분의 연대와 성격은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말각천장은 고구려적 요소이므로 여주 지방이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간 시기는 5세기 후반 이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여주 지역의 소유자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보통리 고분을 축조한 집단과 그들의 문화적 기반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다. |
27089f9e-192e-4813-86e9-9942893822a5 | source05/encykorea/ECO11285.txt | DL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유붕노"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333 | CC BY | 1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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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le": "사회",
"sub": ""
} | 설립년 10월 부림상회를 시작으로 경영해오다가 1947년 6월 대림산업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76년 2월 주식을 상장하고 기업을 공개하였다. 1981년 6월 기아 기연을 인수하였고, 1982년 4월 2일 대림 공업과 기아 기연을 합병하여 대림 자동차 공업주식회사로 설립했다. 1986년 7월 (주) 삼호, (주) 삼호 유통, 오라 관광(주)을 인수하고 대림 아메리카 현지법인을 세웠다. 호남 에틸렌(주)을 흡수합병하고, 고려개발(주)을 인수하는 계약을 1987년 12월 22일에 체결하였다. 1991년에는 경기도 용인에 교육연구원을, 대덕에는 연구소를 세웠다. 1993년 1월에는 무기 발포제 마스터 뱃치 대링파인셀을 개발하고, 6월에는 (주) 대한 상호신용금고를 대림 계열사에 흡수, 합병하였다. 1994년 8월에는 ISO9002 품질인증을 획득했고, 1994년 10월에는 종합 무역업인 (주) 대림코퍼레이션(종합 무역업)을 설립했다. 1995년 3월 29일에는 대림 정보통신(주)을, 1996년 5월에는 (재) 대림 문화 재단을 설립하였다. 1996년 12월에는 만월산 터널(주)과 한림 상운(주)을 설립하였다. 주요 사업은 건설공사, 석유화학, 제품 판매, 상품 제조 및 판매업, 해륙 운수업 등이다. 주요 제품과 구성 비율을 보면 플랜트 공사 건설 용역 44%, 석유화학 화합물질 및 제품 15%, 토목 및 건축공사 건설 용역 13% 등이다. 대림요업·대림 콘크리트공업·대림 흥산·대림엔지니어링·대림 자동차 공업·삼호·글래드 호텔 앤리조트·고려개발·서울증권· D. L. A 등이 관계회사이다. 2015년 현재 총자산은 10조 2501억 원, 자본금은 4조 5863억 원, 연간 매출액은 8조 1353억 원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다. 지주회사 체제가 출범하는 2021년 1월에 그룹 명칭을 DL로 변경하였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DL
### 내용:
설립년 10월 부림상회를 시작으로 경영해오다가 1947년 6월 대림산업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76년 2월 주식을 상장하고 기업을 공개하였다. 1981년 6월 기아 기연을 인수하였고, 1982년 4월 2일 대림 공업과 기아 기연을 합병하여 대림 자동차 공업주식회사로 설립했다. 1986년 7월 (주) 삼호, (주) 삼호 유통, 오라 관광(주)을 인수하고 대림 아메리카 현지법인을 세웠다. 호남 에틸렌(주)을 흡수합병하고, 고려개발(주)을 인수하는 계약을 1987년 12월 22일에 체결하였다. 1991년에는 경기도 용인에 교육연구원을, 대덕에는 연구소를 세웠다. 1993년 1월에는 무기 발포제 마스터 뱃치 대링파인셀을 개발하고, 6월에는 (주) 대한 상호신용금고를 대림 계열사에 흡수, 합병하였다. 1994년 8월에는 ISO9002 품질인증을 획득했고, 1994년 10월에는 종합 무역업인 (주) 대림코퍼레이션(종합 무역업)을 설립했다. 1995년 3월 29일에는 대림 정보통신(주)을, 1996년 5월에는 (재) 대림 문화 재단을 설립하였다. 1996년 12월에는 만월산 터널(주)과 한림 상운(주)을 설립하였다. 주요 사업은 건설공사, 석유화학, 제품 판매, 상품 제조 및 판매업, 해륙 운수업 등이다. 주요 제품과 구성 비율을 보면 플랜트 공사 건설 용역 44%, 석유화학 화합물질 및 제품 15%, 토목 및 건축공사 건설 용역 13% 등이다. 대림요업·대림 콘크리트공업·대림 흥산·대림엔지니어링·대림 자동차 공업·삼호·글래드 호텔 앤리조트·고려개발·서울증권· D. L. A 등이 관계회사이다. 2015년 현재 총자산은 10조 2501억 원, 자본금은 4조 5863억 원, 연간 매출액은 8조 1353억 원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다. 지주회사 체제가 출범하는 2021년 1월에 그룹 명칭을 DL로 변경하였다. |
e2e17fb8-f5d0-4961-8718-b16c1467b9e5 | source05/encykorea/LAW3181.txt | 공무원 임용시험
(公務員 任用試驗)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오석홍"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285 | CC BY | 1,3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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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국가는 실적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인사제도를 운용 중인데, 공무원을 임용할 때 시험이라는 선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실적주의와 공개성의 원리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공무원 임용시험이 개발, 시행되고 있다. 현대 인사행정에서 공무원의 임용시험은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현대에 공무원 임용시험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공무원 임용시험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무원 임용시험의 효시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시대(광종 9)부터 본격적으로 조직화된 과거제도가 그 시초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과거제도는 지속적으로 확충, 실시되었다. 민족 항일기는 또한 근대적 시험제도인 고등문관시험·보통문관시험 등이 시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초기에는 고등고시·보통고시 등 민족 항일 기와 성격이 유사한 이른바 자격시험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공무원 임용시험제도를 발전시켜 왔는데, 자격시험이라기보다는 임용 목적에 한정한다는 성격을 뚜렷이 한 제도였다. 임용시험은 공무원을 임용하는 시험이므로 임용의 의미부터 명확히 밝혀야 정확한 임용시험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임용이라는 용어는 정부 조직의 빈자리를 메우는 활동 모두를 포괄한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임용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흔히 신규 채용이라고 말하는 외부로부터의 임용은 물론이고, 조직의 내부에서 공무원을 임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일반 승진과 공개경쟁 승진 및 특별 승진으로 구분되는 것은 조직의 내부에서 결원을 보충하는 것으로 전직·전보·파견근무와 같은 배치전환과 승진·강임·겸임·직무대행 등이 있다. 좁은 의미로 임용이라고 하는 것은 정부 조직의 외부에서 사람을 채용해서 쓰는 신규 채용만을 의미한다. 임용시험의 핵심은 역시 신규채용 시험이며, 승진 및 전직 등 시험이라는 선발 도구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공직 내부에서 사람을 구해 결원을 보충하는 여러 가지 방법도 있다. 임용시험은 우선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외부에서 공무원을 구해서 쓸 때이다. 두 가지 범주란 공개경쟁 채용 시험과 특별 채용시험이다. 자격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원 기회를 주고 공개경쟁시험을 통해 임용 후보자를 결정하는 것이 공개경쟁 채용이다. 평등의 원칙이 지배하는 공개경쟁을 보장하는 것이 공개경쟁 채용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적절한 공고, 지원 기회의 제공, 선발 기준의 현실성, 차별 금지, 능력을 기초로 한 서열 결정, 결과의 공개 등의 원칙이 지켜져야만 임용시험의 공개 경쟁성이 보장될 수 있다. 우리나라 인사행정제도와 같은 실적 체제하에서는 공무원을 신규 채용할 때 공개경쟁 채용 시험을 치르는 것이 원칙이다. 즉, 실적주의에 입각한 채용활동이 실적주의에 입각한 채용활동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정부의 인력 수요는 지극히 복잡하고 그에 대응한 인력 공급의 상태 또한 다양하고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공개경쟁채용 주의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채용제도는 그렇기 때문에 용인된다. 채용 후보자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경쟁성이 제한된 별도의 선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공개경쟁시험이 부적합하거나 불필요하고, 또 그것을 실시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특별 채용은 공개경쟁채용 시험제도를 보완하고 임용 구조에 유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를 남용하게 되면 실적주의를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용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별 채용의 요건과 절차는 엄격하게 규정되어야 하며,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제도의 취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퇴직한 일반직 공무원을 재임용하는 경우, 동종 직무에 관한 자격증 소지자를 임용하는 경우, 국가기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이나 이에<NAME>는 기관에서 임용 예정직과 관련 있는 직무 분야의 당해 직급에 해당되는 근무 또는 연구 경력이 3년 이상인 자를 임용하는 경우, 전문적인 특수 분야의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자를 임용하는 경우, 기능직 공무원을 일반직 공무원으로 임용하는 경우, 외국어에 능통한 자를 임용하는 경우, 임용 예정직에 관련된 과학기술 등의 분야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를 임용하는 경우, 재학 중 공무원 임용 예정의 장학금을 받은 자를 임용하는 경우, 일선 행정기관에 관할 지역 내 거주자를 임용하는 경우 등 법정 사유가 있을 때만 특별 채용을 허용한다. 공무원 임용시험은 공개경쟁을 통해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채용 대상 직역과 직급별로 시험의 종류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사법 및 검찰 업무에 종사할 자에 대한 시험, 입법부의 사무처에 종사할 자에 대한 시험, 행정부에 종사할 자에 대한 시험은 가장 광범위한 직역별로 구분한 임용시험의 종류이다. 사법시험은 검찰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자에 대한 시험이다. 국회 사무관 채용 시험은 입법부 사무처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시험 중 대표적인 것이다. 행정부에 종사하는 자에 대한 시험은 직역별로 일반행정직 채용 시험·기술직 채용 시험·연구직 채용 시험·기능직 채용 시험·외무직 채용 시험·경찰직 채용 시험 등 직역별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임용시험은 채용될 사람들의 계급에 따라서도 구분해 볼 수 있다. 계급별로 크게 5급 공개경쟁채용 시험과 6급 이하 및 기능직 공개경쟁채용 시험의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5급 공개경쟁채용 시험의 명칭은 고등고시인데, 행정고시·외무고시 및 기술고시가 여기에 포함된다. 6급 이하 일반직 공무원에 대한 공개경쟁채용 시험은 원칙적으로 7급과 9급 공무원을 채용할 때 실시한다. 공무원 공개경쟁채용 시험은 계급별로도 구분하고 직급별로도 구분한다. 즉, 공무원을 채용하기 위한 시험은 직급별로 실시하되, 특수한 직렬에 대해서는 직류별로 분리하여 실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직렬 및 직류를 통합하여 시험할 수 있는데, 시험과목이 동일한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개채용 시험의 단계를 필기시험·면접시험·실기시험·서류심사, 신체검사 등으로 구분하고, 1차·2차·3차로 구분한다. 필기시험은 교양 부문과 전문 부문으로 나뉘는데, 교양 부문에서는 일반교양을, 전문 부문에서는 직무 수행에 필요한 능력 및 적격성을 평가한다. 면접은 직무 수행에 필요한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제도 본래의 취지는 1차 시험에서 일반교양을, 2차 시험에서 전문지식을, 3차 시험에서 필기시험으로 알아내기 어려운 특성을 검정하려는 것이다. 공개경쟁채용에서 1차·2차·3차 시험은 따로따로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1차 시험에 합격하면 2차 시험, 3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만 얻을 수 있고, 2차 시험에 합격하면 3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만 얻을 수 있다. 공무원 임용시험에서 사용하는 시험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이런 시험방법은 그<NAME>에 따라, 목적이나 측정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고 있는데, 그 핵심적인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험방법은 그<NAME>에 따라 필기시험·면접시험·실기시험·모의연습식 시험·서류심사·전력 조사 등으로 구분된다. 필기시험은 주관식 시험과 객관식 시험으로 구분된다. 면접은 개인면접·집단면접 등으로 구분된다. 둘째, 임용시험은 그 목적이나 측정 대상에 따라서도 분류할 수 있는데, 신체적성검사·업적검사·지능검사·적성검사·흥미검사·성격검사 등이 이러한 분류 기준에 따라 확인되고 있다. 직무 수행에 필요한 주체적 적격성을 판단하는 신체적성검사는 신체검사라고도 한다. 업적검사는 교육이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나 기술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지능검사는 인간의 일반적인 지능이나 정신적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적성검사는 앞으로 적절한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으면 일정한 직무를 배워 잘 수행할 수 있는 소질이나 잠재적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흥미검사는 사람의 흥미나 관심의 유형을 알아내서 어떤 직무와의 적합성을 확인하는 시험이다. 성격검사는 사람의 성격, 특히 기질적인 또는 정서적인 특성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험방법들이 우리나라에서 고루,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임용시험의 실제를 보면 필기시험은 필기시험이고, 필기시험은 학업 고사를 주요 내용으로 한 업적검사에 치중되어 있다. 적성검사·성격검사·흥미검사는 잘 조직되어 있지 않다. 1970년대 중반부터 공무원 임용시험 응시 자격 요건 가운데 학력 요건을 원칙적으로 폐지하였다. 학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한민국에서는 공무원 공개경쟁 채용에 관한 한 어떤 공무원 임용시험이든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의 경우 채용 시험에서 학적 기록이나 교수 추천서의 평점이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또한 학교교육 단계에 맞추어 각급 공무원 채용 시험 출제 수준을 조정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교육의 요건은 임용시험에서 간접적으로 고려되고 있다. 각종 공무원 채용 시험은 자격시험이 아니라 임용시험이므로 시험에 합격한 자는 일정 기간 공무원으로 채용될 수 있는 후보자임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자격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임용 후보자가 될 수 있는 시험에 합격한 것은 시한부이다. 즉, 시험 합격은 1년 또는 2년 등 일정한 기간 동안 임용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자격시험제도로서 시험 합격의 효력에 대한 시간적 한계를 설정하지 않았던 과거 제도나 1960년대 이전의 공무원 채용 시험들과는 달리 현행 제도는 차별성을 갖는다. 현재의 제도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공무원이 아닌 변호사의 자격도 부여하고 있다. 임용시험은 공직에 취임하는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와 정부 업무의 능률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임용시험은 응시자들의 상대적 적격성을 알아내고, 그들의 장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실시되므로, 그러한 목적에 비추어 지원자들의 우열 순위를 가려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임용시험은 공무원의 임용 절차에 필수적인 선발 도구이지만 그것이 완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반드시 선발 도구로서의 목적을 정확하고 용이하게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효용성이 높은 시험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임용시험은 그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시험이므로 효용성이 높다. 여러 가지 효용성의 기준 또는 요건이 언급되고 있다. 즉, 효용성의 요건으로 타당성·신뢰성·객관성과 적정한 난이도, 실용적 편의 등을 들고 있다. 시험이 무엇을 측정하는가에 대한 기준은 타당성이다. 시험이 측정하는 바를 실제로 측정할 수 있는 정도가 타당성의 기준이다. 기준 타당성·내용 타당성·구성 타당성 등 타당성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시험이 측정 도구로 갖는 일관성을 신뢰성이라고 한다. 객관성은 시험 결과가 채점자의 편견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시험 외적인 요인에 의해 채점 결과가 좌우되지 않는 정도에 관한 기준이다. 시험이 어느 정도로 어려운지에 대한 기준은 난이도에 달려 있다. 임용시험이 효율적으로 진행되려면 난이도가 적당해야 한다. 즉, 지나치게 어렵지 않고 쉬우면 안 되고 응시자들의 득점이 적절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정부에서 시행하는 임용시험은 위에 열거한 여러 기준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며, 실용적인 편의 내지 실용성이라는 기준도 충족시켜야 한다. 실용적인 임용시험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이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시험 실시와 결과 처리의 편의를 고려해야 한다. 둘째, 시험의 비용과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셋째, 노동시장의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시험에 관한 공공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다섯째, 임용시험이 자격을 갖춘 모든 지원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도록 입안,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공무원 임용시험
(公務員 任用試驗)
### 내용:
현대 국가는 실적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인사제도를 운용 중인데, 공무원을 임용할 때 시험이라는 선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실적주의와 공개성의 원리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공무원 임용시험이 개발, 시행되고 있다. 현대 인사행정에서 공무원의 임용시험은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현대에 공무원 임용시험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공무원 임용시험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무원 임용시험의 효시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시대(광종 9)부터 본격적으로 조직화된 과거제도가 그 시초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과거제도는 지속적으로 확충, 실시되었다. 민족 항일기는 또한 근대적 시험제도인 고등문관시험·보통문관시험 등이 시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초기에는 고등고시·보통고시 등 민족 항일 기와 성격이 유사한 이른바 자격시험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공무원 임용시험제도를 발전시켜 왔는데, 자격시험이라기보다는 임용 목적에 한정한다는 성격을 뚜렷이 한 제도였다. 임용시험은 공무원을 임용하는 시험이므로 임용의 의미부터 명확히 밝혀야 정확한 임용시험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임용이라는 용어는 정부 조직의 빈자리를 메우는 활동 모두를 포괄한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임용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흔히 신규 채용이라고 말하는 외부로부터의 임용은 물론이고, 조직의 내부에서 공무원을 임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일반 승진과 공개경쟁 승진 및 특별 승진으로 구분되는 것은 조직의 내부에서 결원을 보충하는 것으로 전직·전보·파견근무와 같은 배치전환과 승진·강임·겸임·직무대행 등이 있다. 좁은 의미로 임용이라고 하는 것은 정부 조직의 외부에서 사람을 채용해서 쓰는 신규 채용만을 의미한다. 임용시험의 핵심은 역시 신규채용 시험이며, 승진 및 전직 등 시험이라는 선발 도구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공직 내부에서 사람을 구해 결원을 보충하는 여러 가지 방법도 있다. 임용시험은 우선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외부에서 공무원을 구해서 쓸 때이다. 두 가지 범주란 공개경쟁 채용 시험과 특별 채용시험이다. 자격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원 기회를 주고 공개경쟁시험을 통해 임용 후보자를 결정하는 것이 공개경쟁 채용이다. 평등의 원칙이 지배하는 공개경쟁을 보장하는 것이 공개경쟁 채용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적절한 공고, 지원 기회의 제공, 선발 기준의 현실성, 차별 금지, 능력을 기초로 한 서열 결정, 결과의 공개 등의 원칙이 지켜져야만 임용시험의 공개 경쟁성이 보장될 수 있다. 우리나라 인사행정제도와 같은 실적 체제하에서는 공무원을 신규 채용할 때 공개경쟁 채용 시험을 치르는 것이 원칙이다. 즉, 실적주의에 입각한 채용활동이 실적주의에 입각한 채용활동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정부의 인력 수요는 지극히 복잡하고 그에 대응한 인력 공급의 상태 또한 다양하고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공개경쟁채용 주의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채용제도는 그렇기 때문에 용인된다. 채용 후보자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경쟁성이 제한된 별도의 선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공개경쟁시험이 부적합하거나 불필요하고, 또 그것을 실시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특별 채용은 공개경쟁채용 시험제도를 보완하고 임용 구조에 유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를 남용하게 되면 실적주의를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용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별 채용의 요건과 절차는 엄격하게 규정되어야 하며,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제도의 취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퇴직한 일반직 공무원을 재임용하는 경우, 동종 직무에 관한 자격증 소지자를 임용하는 경우, 국가기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이나 이에<NAME>는 기관에서 임용 예정직과 관련 있는 직무 분야의 당해 직급에 해당되는 근무 또는 연구 경력이 3년 이상인 자를 임용하는 경우, 전문적인 특수 분야의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자를 임용하는 경우, 기능직 공무원을 일반직 공무원으로 임용하는 경우, 외국어에 능통한 자를 임용하는 경우, 임용 예정직에 관련된 과학기술 등의 분야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를 임용하는 경우, 재학 중 공무원 임용 예정의 장학금을 받은 자를 임용하는 경우, 일선 행정기관에 관할 지역 내 거주자를 임용하는 경우 등 법정 사유가 있을 때만 특별 채용을 허용한다. 공무원 임용시험은 공개경쟁을 통해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채용 대상 직역과 직급별로 시험의 종류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사법 및 검찰 업무에 종사할 자에 대한 시험, 입법부의 사무처에 종사할 자에 대한 시험, 행정부에 종사할 자에 대한 시험은 가장 광범위한 직역별로 구분한 임용시험의 종류이다. 사법시험은 검찰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자에 대한 시험이다. 국회 사무관 채용 시험은 입법부 사무처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시험 중 대표적인 것이다. 행정부에 종사하는 자에 대한 시험은 직역별로 일반행정직 채용 시험·기술직 채용 시험·연구직 채용 시험·기능직 채용 시험·외무직 채용 시험·경찰직 채용 시험 등 직역별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임용시험은 채용될 사람들의 계급에 따라서도 구분해 볼 수 있다. 계급별로 크게 5급 공개경쟁채용 시험과 6급 이하 및 기능직 공개경쟁채용 시험의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5급 공개경쟁채용 시험의 명칭은 고등고시인데, 행정고시·외무고시 및 기술고시가 여기에 포함된다. 6급 이하 일반직 공무원에 대한 공개경쟁채용 시험은 원칙적으로 7급과 9급 공무원을 채용할 때 실시한다. 공무원 공개경쟁채용 시험은 계급별로도 구분하고 직급별로도 구분한다. 즉, 공무원을 채용하기 위한 시험은 직급별로 실시하되, 특수한 직렬에 대해서는 직류별로 분리하여 실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직렬 및 직류를 통합하여 시험할 수 있는데, 시험과목이 동일한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개채용 시험의 단계를 필기시험·면접시험·실기시험·서류심사, 신체검사 등으로 구분하고, 1차·2차·3차로 구분한다. 필기시험은 교양 부문과 전문 부문으로 나뉘는데, 교양 부문에서는 일반교양을, 전문 부문에서는 직무 수행에 필요한 능력 및 적격성을 평가한다. 면접은 직무 수행에 필요한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제도 본래의 취지는 1차 시험에서 일반교양을, 2차 시험에서 전문지식을, 3차 시험에서 필기시험으로 알아내기 어려운 특성을 검정하려는 것이다. 공개경쟁채용에서 1차·2차·3차 시험은 따로따로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1차 시험에 합격하면 2차 시험, 3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만 얻을 수 있고, 2차 시험에 합격하면 3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만 얻을 수 있다. 공무원 임용시험에서 사용하는 시험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이런 시험방법은 그<NAME>에 따라, 목적이나 측정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고 있는데, 그 핵심적인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험방법은 그<NAME>에 따라 필기시험·면접시험·실기시험·모의연습식 시험·서류심사·전력 조사 등으로 구분된다. 필기시험은 주관식 시험과 객관식 시험으로 구분된다. 면접은 개인면접·집단면접 등으로 구분된다. 둘째, 임용시험은 그 목적이나 측정 대상에 따라서도 분류할 수 있는데, 신체적성검사·업적검사·지능검사·적성검사·흥미검사·성격검사 등이 이러한 분류 기준에 따라 확인되고 있다. 직무 수행에 필요한 주체적 적격성을 판단하는 신체적성검사는 신체검사라고도 한다. 업적검사는 교육이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나 기술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지능검사는 인간의 일반적인 지능이나 정신적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적성검사는 앞으로 적절한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으면 일정한 직무를 배워 잘 수행할 수 있는 소질이나 잠재적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흥미검사는 사람의 흥미나 관심의 유형을 알아내서 어떤 직무와의 적합성을 확인하는 시험이다. 성격검사는 사람의 성격, 특히 기질적인 또는 정서적인 특성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험방법들이 우리나라에서 고루,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임용시험의 실제를 보면 필기시험은 필기시험이고, 필기시험은 학업 고사를 주요 내용으로 한 업적검사에 치중되어 있다. 적성검사·성격검사·흥미검사는 잘 조직되어 있지 않다. 1970년대 중반부터 공무원 임용시험 응시 자격 요건 가운데 학력 요건을 원칙적으로 폐지하였다. 학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한민국에서는 공무원 공개경쟁 채용에 관한 한 어떤 공무원 임용시험이든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의 경우 채용 시험에서 학적 기록이나 교수 추천서의 평점이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또한 학교교육 단계에 맞추어 각급 공무원 채용 시험 출제 수준을 조정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교육의 요건은 임용시험에서 간접적으로 고려되고 있다. 각종 공무원 채용 시험은 자격시험이 아니라 임용시험이므로 시험에 합격한 자는 일정 기간 공무원으로 채용될 수 있는 후보자임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자격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임용 후보자가 될 수 있는 시험에 합격한 것은 시한부이다. 즉, 시험 합격은 1년 또는 2년 등 일정한 기간 동안 임용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자격시험제도로서 시험 합격의 효력에 대한 시간적 한계를 설정하지 않았던 과거 제도나 1960년대 이전의 공무원 채용 시험들과는 달리 현행 제도는 차별성을 갖는다. 현재의 제도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공무원이 아닌 변호사의 자격도 부여하고 있다. 임용시험은 공직에 취임하는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와 정부 업무의 능률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임용시험은 응시자들의 상대적 적격성을 알아내고, 그들의 장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실시되므로, 그러한 목적에 비추어 지원자들의 우열 순위를 가려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임용시험은 공무원의 임용 절차에 필수적인 선발 도구이지만 그것이 완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반드시 선발 도구로서의 목적을 정확하고 용이하게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효용성이 높은 시험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임용시험은 그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시험이므로 효용성이 높다. 여러 가지 효용성의 기준 또는 요건이 언급되고 있다. 즉, 효용성의 요건으로 타당성·신뢰성·객관성과 적정한 난이도, 실용적 편의 등을 들고 있다. 시험이 무엇을 측정하는가에 대한 기준은 타당성이다. 시험이 측정하는 바를 실제로 측정할 수 있는 정도가 타당성의 기준이다. 기준 타당성·내용 타당성·구성 타당성 등 타당성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시험이 측정 도구로 갖는 일관성을 신뢰성이라고 한다. 객관성은 시험 결과가 채점자의 편견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시험 외적인 요인에 의해 채점 결과가 좌우되지 않는 정도에 관한 기준이다. 시험이 어느 정도로 어려운지에 대한 기준은 난이도에 달려 있다. 임용시험이 효율적으로 진행되려면 난이도가 적당해야 한다. 즉, 지나치게 어렵지 않고 쉬우면 안 되고 응시자들의 득점이 적절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정부에서 시행하는 임용시험은 위에 열거한 여러 기준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며, 실용적인 편의 내지 실용성이라는 기준도 충족시켜야 한다. 실용적인 임용시험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이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시험 실시와 결과 처리의 편의를 고려해야 한다. 둘째, 시험의 비용과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셋째, 노동시장의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시험에 관한 공공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다섯째, 임용시험이 자격을 갖춘 모든 지원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도록 입안,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
9c6d6030-4479-4a15-a1dd-d131e64f4b43 | source05/encykorea/LAW19733.txt | 비답
(批答)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109 | CC BY | 306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조선시대에 신하가 국왕에게 올린 문서에 대하여 국왕이 직접 답하는 하답은 비답과 판부가 있었다. 상소·차자 및 초기, 계사 등에 대한 답서를 비답이라고 했는데, 이는 답변서의 일종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원과 일반 백성, 중앙과 지방의 아문이 국왕에게 올린 문서에 대한 하답을 비답과 판부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弘齋全書)』에서 ‘비(批)’와 ‘판(判)’을 별도의 권차에 싣고 있고, 19세기 조선 국왕의 정령(政令)을<NAME>에 따라 편찬한 『윤발휘초(綸綍彙鈔)』에서 비답류과 판부류를 별도의 항목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개념상으로도 양자는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 소와 차자가 대표적인 예인데, 국왕이 비답을 통해 답변을 내린 것이다. 차자 역시 작성 주체는 한정되어 있지만 일반 사족에서부터 중외의 고위 관료에 이르기까지 특정 주제에 한정하지 않고 국왕에게 요청·건의할 사항을 적어 올리는 문서인 상소와 유사하다. 판부는 이에 비해 직계 아문(: 담당 업무를 국왕에게 직접 아뢰는 중앙과 지방의 아문)이 담당 업무에 한정하여 국왕에게 보고·건의하기 위해 올리는 계본, 계목, 장계 등 소위 계 또는 계문에 대한 처결문이다. 즉 비답은 작성 주체나 담당 업무에 구애받지 않는 상소나 차자에 대한 국왕의 하답이고, 판부는 소관 업무에 대한 보고에 대한 하답이다. 한편 윤발휘초의 비답류에는 초기, 계사에 대한 하답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초기, 계사 등의 문서에 대한 하답은 종종 판부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어서, 이 부분에서는 용어 구분이 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대기 사료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비답은 별도의 문서를 작성해 내리는 방식과 상소·차자의 빈칸에 계자 도장을 찍고 적는 방식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NAME>으로 작성된 비답은 원문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조선 후기 상소·차자의 원문서는 상달 주체가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상소·차자가 실린 문집이나 국가에서 편찬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류에 함께 등재된 형태로 남아 있다. 전자의<NAME>으로 작성된 비답은 고위 관직을 지낸 조상이 있는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것으로, 소위 불윤 비답(: 신하의 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국왕의 답변)과 같은 교서<NAME>의 비답이다. 조선시대 국왕이 일반 사족에서 고위 관원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해 직접 소통하는 방식은 답이 없었다. 특히 판부는 일상적인 행정 업무에 대해 정형화된 하답인 데 비해, 신하가 올린 상소·차자에 대한 비답의<NAME>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비답
(批答)
### 내용:
조선시대에 신하가 국왕에게 올린 문서에 대하여 국왕이 직접 답하는 하답은 비답과 판부가 있었다. 상소·차자 및 초기, 계사 등에 대한 답서를 비답이라고 했는데, 이는 답변서의 일종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원과 일반 백성, 중앙과 지방의 아문이 국왕에게 올린 문서에 대한 하답을 비답과 판부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弘齋全書)』에서 ‘비(批)’와 ‘판(判)’을 별도의 권차에 싣고 있고, 19세기 조선 국왕의 정령(政令)을<NAME>에 따라 편찬한 『윤발휘초(綸綍彙鈔)』에서 비답류과 판부류를 별도의 항목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개념상으로도 양자는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 소와 차자가 대표적인 예인데, 국왕이 비답을 통해 답변을 내린 것이다. 차자 역시 작성 주체는 한정되어 있지만 일반 사족에서부터 중외의 고위 관료에 이르기까지 특정 주제에 한정하지 않고 국왕에게 요청·건의할 사항을 적어 올리는 문서인 상소와 유사하다. 판부는 이에 비해 직계 아문(: 담당 업무를 국왕에게 직접 아뢰는 중앙과 지방의 아문)이 담당 업무에 한정하여 국왕에게 보고·건의하기 위해 올리는 계본, 계목, 장계 등 소위 계 또는 계문에 대한 처결문이다. 즉 비답은 작성 주체나 담당 업무에 구애받지 않는 상소나 차자에 대한 국왕의 하답이고, 판부는 소관 업무에 대한 보고에 대한 하답이다. 한편 윤발휘초의 비답류에는 초기, 계사에 대한 하답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초기, 계사 등의 문서에 대한 하답은 종종 판부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어서, 이 부분에서는 용어 구분이 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대기 사료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비답은 별도의 문서를 작성해 내리는 방식과 상소·차자의 빈칸에 계자 도장을 찍고 적는 방식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NAME>으로 작성된 비답은 원문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조선 후기 상소·차자의 원문서는 상달 주체가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상소·차자가 실린 문집이나 국가에서 편찬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류에 함께 등재된 형태로 남아 있다. 전자의<NAME>으로 작성된 비답은 고위 관직을 지낸 조상이 있는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것으로, 소위 불윤 비답(: 신하의 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국왕의 답변)과 같은 교서<NAME>의 비답이다. 조선시대 국왕이 일반 사족에서 고위 관원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해 직접 소통하는 방식은 답이 없었다. 특히 판부는 일상적인 행정 업무에 대해 정형화된 하답인 데 비해, 신하가 올린 상소·차자에 대한 비답의<NAME>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
6dab7fcc-820a-4e5b-aad0-b6de581ed8cb | source05/encykorea/POL29657.txt | 유자명
(柳子明)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서동일"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777 | CC BY | 200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본관은 문화이다. 유량의 후손으로 유종근의 아들이다.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유흥식, 호는 우근으로, 이름보다 유자명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 농업학교 교사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되자 망명했다. 이후 김원봉의 의열단에 들어가 김원봉의 비밀 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 활동에 앞장섰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 중국인 목광록,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을 상대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동방 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하여 1927년 조선 혁명자 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 입달학원에서 강의한 데 이어 1930년 상해 강만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 등과 남화 한인 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31년 무정부주의자인<NAME> 등과 함께 불멸 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했다. 1936년 중국군과 함께 전시 공작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어서 무정부주의자 훈련소인 민단 훈련소의 참모 이우관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 부를 조직해 주 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처단을 시도하였다.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의 정원 의원을 지냈으며, 1942년 약헌 개정 기초위원,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의 거물급 인사와도 꾸준히 교류하며 항일독립운동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대학교수로 지냈다.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 벼를 재배하여 농학박사를 받았고,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 학자로 중국인들의 신망이 높았다. 후난 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 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유자명
(柳子明)
### 내용:
본관은 문화이다. 유량의 후손으로 유종근의 아들이다.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유흥식, 호는 우근으로, 이름보다 유자명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 농업학교 교사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되자 망명했다. 이후 김원봉의 의열단에 들어가 김원봉의 비밀 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 활동에 앞장섰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 중국인 목광록,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을 상대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동방 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하여 1927년 조선 혁명자 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 입달학원에서 강의한 데 이어 1930년 상해 강만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 등과 남화 한인 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31년 무정부주의자인<NAME> 등과 함께 불멸 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했다. 1936년 중국군과 함께 전시 공작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어서 무정부주의자 훈련소인 민단 훈련소의 참모 이우관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 부를 조직해 주 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처단을 시도하였다.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의 정원 의원을 지냈으며, 1942년 약헌 개정 기초위원,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의 거물급 인사와도 꾸준히 교류하며 항일독립운동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대학교수로 지냈다.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 벼를 재배하여 농학박사를 받았고,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 학자로 중국인들의 신망이 높았다. 후난 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 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d17e4451-8ae2-476a-b69c-f49767eb1b80 | source05/encykorea/SOC23070.txt | 봉화 설매리 3겹 까치구멍집
(奉化 雪梅里 三겹 까치구멍집)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신영훈"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022 | CC BY | 140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소유자 고조부가 지은 뒤 대물림해서 살아왔다고 하는데 대략 100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집의 구조기법이나 풍화된 정도와 비교해 적절한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대체로 봉화지방의 까치구멍집은 3겹집이 안동지방보다 많다. 안동지방의 중앙에 해당하는 봉화에서는 사랑방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흐름에 비하여 이 집은 매우 보수적이고, 원초적인 집이지만 부엌의 찬장이나 창의 구조는 섬세한 솜씨를 보였다. 주인이 목수 일을 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향좌측 외양간 측벽이 반반칸 돌출되었고 부엌은 앞으로 나갔으며 사랑방 뒷방은 뒷벽이 처마 밑까지 돌출되어 변형을 보였다. 봉당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외양간, 부엌, 신방은 북쪽에 놓였다. 여기서 신발을 벗고 올라서면 마루인데 마루 좌측이 사랑방. 뒷방과 넓은 안방이다. 바라지창은 마루 뒷벽에 있고 뒷방과 접합하는 구석에 부루(세존) 단지가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까치구멍이 마루 위는 물론이고 방에서도 평천장을 해서 막지 않고 벽지로 싸매어 마감하였다. 더그매 설치 방식이 일반적인 평천장에 비해 조금 벗어나 있다. 외양간 앞에 있는 가마솥 아궁이에서 난 불로 사랑방과 뒷방을 난방을 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봉화 설매리 3겹 까치구멍집
(奉化 雪梅里 三겹 까치구멍집)
### 내용:
소유자 고조부가 지은 뒤 대물림해서 살아왔다고 하는데 대략 100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집의 구조기법이나 풍화된 정도와 비교해 적절한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대체로 봉화지방의 까치구멍집은 3겹집이 안동지방보다 많다. 안동지방의 중앙에 해당하는 봉화에서는 사랑방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흐름에 비하여 이 집은 매우 보수적이고, 원초적인 집이지만 부엌의 찬장이나 창의 구조는 섬세한 솜씨를 보였다. 주인이 목수 일을 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향좌측 외양간 측벽이 반반칸 돌출되었고 부엌은 앞으로 나갔으며 사랑방 뒷방은 뒷벽이 처마 밑까지 돌출되어 변형을 보였다. 봉당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외양간, 부엌, 신방은 북쪽에 놓였다. 여기서 신발을 벗고 올라서면 마루인데 마루 좌측이 사랑방. 뒷방과 넓은 안방이다. 바라지창은 마루 뒷벽에 있고 뒷방과 접합하는 구석에 부루(세존) 단지가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까치구멍이 마루 위는 물론이고 방에서도 평천장을 해서 막지 않고 벽지로 싸매어 마감하였다. 더그매 설치 방식이 일반적인 평천장에 비해 조금 벗어나 있다. 외양간 앞에 있는 가마솥 아궁이에서 난 불로 사랑방과 뒷방을 난방을 한다. |
c50fdad5-2146-4af6-bec3-3ad992c2188b | source05/encykorea/SOC56780.txt | 한국패션산업협회
(韓國Fashion産業協會)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금기숙"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724 | CC BY | 20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특별 법인으로, 회원은 패션 디자이너, 패션 브랜드, 패션 기업, 패션 관련 전문가 등이다. 1985년 4월 12일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서 하이패션 대표 33인이 모여 사단법인 한국하이패션협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은<NAME>, 강숙희, 김승자,<NAME>, 김정은, 김창숙, 노라노, 리미원, 문광자,문영희, 박윤정,<NAME>, 박항치, 배용, 손석화, 신도자, 신봉자, 안윤정, 양은배, 윤정길, 윤순모, 이강숙, 이광희,<NAME>, 이병복, 이신우, 이용열,<NAME>, 장명자, 최복호, 최현숙, 한혜수, 허준 등 33인이다. 이 용렬 회장(1985~1990)에 이어 공석붕 회장(1991~2004), 원대연 회장(2004~2018),<NAME>(2019년 현재)이 한국패션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의류 제조업체 등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1994년에 개최한 국내 최대 규모의 대한민국 패션디자인<NAME>대회를 이어받아 대회 명칭을 섬유 패션 대전으로 바꾸고, 올림픽공원 역도 경기장에서 약 1,500명이 참관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했으며, 2015년 현재 33회를 맞이하고 있다. 정부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1997년 제1회 서울패션위크를 개최하여 서울을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발전시켰다. 나아가 2000년 10월에는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대한 복식디자이너 협회(KFDA), 뉴웨이브인 서울(NWS), 개별 디자이너들을 통합한 제1회 서울 컬렉션이 개최되었다. 주요 사업은 한국패션 현황 파악을 위한 한국패션 총람(1999) 발간, 패션 물류 지원을 위한 이천 유통물류 단지 단지 건립(2005), 국제화를 위한 아시아 패션연합회(Asia Fashion Federation) 한국협회 통합(2009), 중국위원회 발족 및 상하이 지사(2009) 설치, 젊은 디자이너들의 마켓 진출 플랫폼 구축을 위한 인디브랜드 페어(2011), 고용노동부 지원 지역 맞춤형 일자리 창출 사업(2012), 글로벌 패션 정보 및 현황 공유를 위한 글로벌 패션포럼(2009), 동대문 수출지원센터(2012), 패션인재 육성을 위한 대한민국 섬유패션대전 등이 있다. 한국패션협회에서 한국패션산업 협회로 협회 명칭을 변경한 것은 2019년 1월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한국패션산업협회
(韓國Fashion産業協會)
### 내용: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특별 법인으로, 회원은 패션 디자이너, 패션 브랜드, 패션 기업, 패션 관련 전문가 등이다. 1985년 4월 12일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서 하이패션 대표 33인이 모여 사단법인 한국하이패션협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은<NAME>, 강숙희, 김승자,<NAME>, 김정은, 김창숙, 노라노, 리미원, 문광자,문영희, 박윤정,<NAME>, 박항치, 배용, 손석화, 신도자, 신봉자, 안윤정, 양은배, 윤정길, 윤순모, 이강숙, 이광희,<NAME>, 이병복, 이신우, 이용열,<NAME>, 장명자, 최복호, 최현숙, 한혜수, 허준 등 33인이다. 이 용렬 회장(1985~1990)에 이어 공석붕 회장(1991~2004), 원대연 회장(2004~2018),<NAME>(2019년 현재)이 한국패션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의류 제조업체 등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1994년에 개최한 국내 최대 규모의 대한민국 패션디자인<NAME>대회를 이어받아 대회 명칭을 섬유 패션 대전으로 바꾸고, 올림픽공원 역도 경기장에서 약 1,500명이 참관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했으며, 2015년 현재 33회를 맞이하고 있다. 정부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1997년 제1회 서울패션위크를 개최하여 서울을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발전시켰다. 나아가 2000년 10월에는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대한 복식디자이너 협회(KFDA), 뉴웨이브인 서울(NWS), 개별 디자이너들을 통합한 제1회 서울 컬렉션이 개최되었다. 주요 사업은 한국패션 현황 파악을 위한 한국패션 총람(1999) 발간, 패션 물류 지원을 위한 이천 유통물류 단지 단지 건립(2005), 국제화를 위한 아시아 패션연합회(Asia Fashion Federation) 한국협회 통합(2009), 중국위원회 발족 및 상하이 지사(2009) 설치, 젊은 디자이너들의 마켓 진출 플랫폼 구축을 위한 인디브랜드 페어(2011), 고용노동부 지원 지역 맞춤형 일자리 창출 사업(2012), 글로벌 패션 정보 및 현황 공유를 위한 글로벌 패션포럼(2009), 동대문 수출지원센터(2012), 패션인재 육성을 위한 대한민국 섬유패션대전 등이 있다. 한국패션협회에서 한국패션산업 협회로 협회 명칭을 변경한 것은 2019년 1월이다. |
f4c2453b-6a43-491e-9381-bb4eff1dc219 | source05/encykorea/SOC33012.txt | 이순신 유물 일괄
(李舜臣 遺物 一括)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강칠"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84 | CC BY | 18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 장검 2자루, 옥로, 요대, 도배와 잔 받침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칼집의 끝에는 은으로 된 장식이 물렸고 칼날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특히 칼에는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는 장인 태귀련과 이 무생이 제작했다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고, 검신에는 1594년(선조 27) 4월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2 옥로: 1개. 옥로는<NAME>임 하얀 옥에다 연꽃잎에 싸여 있는 세 마리의 해오라기를 투각한 입식으로, 융복이나 군복을 입을 때 하던 것이다. 3 요대: 1벌. 띠돈은 보통의 각대로 구름과 호랑이가 투각 된 각 제에 금속으로 테를 둘러 달았다. 또한 띠돈 사이의 띠돈 사이에는 금속으로 만든 육 판화를 걸었다. 명나라 장수 왕원주가 선물한 것이 이 요대이다. 4 도배와 잔 받침: 1쌍. 도배란 술잔의 모양이 복숭아 잎 세 잎이 붙어 있고 손잡이는 둥글게 되어 있는데, 이름의 유래는 복숭아 잎 세 잎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잔 받침은 전을 두른 쟁반 모양인데 특별한 장식이 없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명나라 장군 진파총이 1589년(선조 22) 10월 4일 화주배를 선물로 하사했다고 하는데, 이때 도금한 흔적이 술잔의 잎 부분에만 남아 있다. 이 유물들은 이순신이 난중에 사용하던 것으로 그의 정신이 담겨 있다. 특히 그의 기상이 잘 표현된 것은 칼의 검명이다.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순신 유물 일괄
(李舜臣 遺物 一括)
### 내용:
1 장검 2자루, 옥로, 요대, 도배와 잔 받침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칼집의 끝에는 은으로 된 장식이 물렸고 칼날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특히 칼에는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는 장인 태귀련과 이 무생이 제작했다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고, 검신에는 1594년(선조 27) 4월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2 옥로: 1개. 옥로는<NAME>임 하얀 옥에다 연꽃잎에 싸여 있는 세 마리의 해오라기를 투각한 입식으로, 융복이나 군복을 입을 때 하던 것이다. 3 요대: 1벌. 띠돈은 보통의 각대로 구름과 호랑이가 투각 된 각 제에 금속으로 테를 둘러 달았다. 또한 띠돈 사이의 띠돈 사이에는 금속으로 만든 육 판화를 걸었다. 명나라 장수 왕원주가 선물한 것이 이 요대이다. 4 도배와 잔 받침: 1쌍. 도배란 술잔의 모양이 복숭아 잎 세 잎이 붙어 있고 손잡이는 둥글게 되어 있는데, 이름의 유래는 복숭아 잎 세 잎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잔 받침은 전을 두른 쟁반 모양인데 특별한 장식이 없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명나라 장군 진파총이 1589년(선조 22) 10월 4일 화주배를 선물로 하사했다고 하는데, 이때 도금한 흔적이 술잔의 잎 부분에만 남아 있다. 이 유물들은 이순신이 난중에 사용하던 것으로 그의 정신이 담겨 있다. 특히 그의 기상이 잘 표현된 것은 칼의 검명이다.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
ef82bdd4-016b-4635-a66d-1a082778364a | source05/encykorea/SOC13001.txt | 동답
(洞畓)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최재율"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337 | CC BY | 274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보통 마을공동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흔히 동네논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인이 아닌 경우, 법인격을 부여한 법인 조직만이 재산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마을은 법인격을 갖추지 않고도 농지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을은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촌락공동체란 마을이 생산수단, 특히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생산과 생활의 공동조직을 말한다. 전통적인 촌락공동체의 성격이 남아 있는 경우, 둘째 촌락공동체가 해체된 뒤 마을<NAME>들이 공동 개간으로 다시 동답을 가지는 경우. 셋째 마을<NAME> 중 무거운 죄를 짓고 도망갔을 때 마을이 농토를 환수하여 내려온 경우, 넷째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노부부가 사망한 뒤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 주기를 바라고 농토를 마을에 제공한 경우, 다섯째 마을이 동고사(同告祀) 등 마을의 공동행사를 주관하기 위한 경비 조달의 방법으로 동답을 구입하는 경우 등이 있다. 이러한 동답은 마을의 공유재산을 관리하는 조직인 동계가 있는 경우 동계가 관리하고, 동계가 없으면 마을의 총책임자인 이장과 동장이 관리한다. 대동회에서 선출된 유사가 동계가 관리하는 경우는 책임지고 관리한다. 유사는 마을의 유지나 이·동장과 상의하여 동답을 임대하고, 그 대가로 받은 현물이나 돈은 마을의 공유재산으로 비축된다. 일반 민간의 임대료보다 저렴하여 마을 안의 영세민 구제의 기능도 한다. 대동회는 사전에 마을의 유지와 상의하여 동답의 처분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 동답에서 나오는 이익을 평등하게 가질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 마을을 떠나는 사람은 그러한 이익을 나누어 가질 자격이 없어진다. 보통 동답에서 나오는 이익은 다른 공유재산의 이익과 더불어 마을의 공동행사나 개발 활동의 경비로 사용된다. 예컨대 동제나 별신굿, 농로·수리시설, 혼상구·그릇·차일 등의 구입,<NAME>물의 수리, 대동회 운영 등에 사용되는 경비이다. 민족 항일기의 토지개혁으로 동답이 많이 줄어들었고, 8·15광복 후에는 새마을사업으로 농로와 수리시설·상수도·전기시설·마을회관 등의 건립을 위해 매각 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답을 비롯한 마을의 공유재산은 마을공동체의 공동행사와 개발 활동을 용이하게 하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더 나아가서 마을이 대외적 배타성과 대내적 평등성, 공동체적 규제의 절대성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 속성을 가지게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동계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동답
(洞畓)
### 내용:
보통 마을공동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흔히 동네논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인이 아닌 경우, 법인격을 부여한 법인 조직만이 재산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마을은 법인격을 갖추지 않고도 농지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을은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촌락공동체란 마을이 생산수단, 특히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생산과 생활의 공동조직을 말한다. 전통적인 촌락공동체의 성격이 남아 있는 경우, 둘째 촌락공동체가 해체된 뒤 마을<NAME>들이 공동 개간으로 다시 동답을 가지는 경우. 셋째 마을<NAME> 중 무거운 죄를 짓고 도망갔을 때 마을이 농토를 환수하여 내려온 경우, 넷째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노부부가 사망한 뒤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 주기를 바라고 농토를 마을에 제공한 경우, 다섯째 마을이 동고사(同告祀) 등 마을의 공동행사를 주관하기 위한 경비 조달의 방법으로 동답을 구입하는 경우 등이 있다. 이러한 동답은 마을의 공유재산을 관리하는 조직인 동계가 있는 경우 동계가 관리하고, 동계가 없으면 마을의 총책임자인 이장과 동장이 관리한다. 대동회에서 선출된 유사가 동계가 관리하는 경우는 책임지고 관리한다. 유사는 마을의 유지나 이·동장과 상의하여 동답을 임대하고, 그 대가로 받은 현물이나 돈은 마을의 공유재산으로 비축된다. 일반 민간의 임대료보다 저렴하여 마을 안의 영세민 구제의 기능도 한다. 대동회는 사전에 마을의 유지와 상의하여 동답의 처분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 동답에서 나오는 이익을 평등하게 가질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 마을을 떠나는 사람은 그러한 이익을 나누어 가질 자격이 없어진다. 보통 동답에서 나오는 이익은 다른 공유재산의 이익과 더불어 마을의 공동행사나 개발 활동의 경비로 사용된다. 예컨대 동제나 별신굿, 농로·수리시설, 혼상구·그릇·차일 등의 구입,<NAME>물의 수리, 대동회 운영 등에 사용되는 경비이다. 민족 항일기의 토지개혁으로 동답이 많이 줄어들었고, 8·15광복 후에는 새마을사업으로 농로와 수리시설·상수도·전기시설·마을회관 등의 건립을 위해 매각 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답을 비롯한 마을의 공유재산은 마을공동체의 공동행사와 개발 활동을 용이하게 하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더 나아가서 마을이 대외적 배타성과 대내적 평등성, 공동체적 규제의 절대성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 속성을 가지게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동계 |
cf140286-a177-40c2-9438-7d5b35cbd543 | source05/encykorea/SOC20282.txt | 사대주의
(事大主義)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강신표"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466 | CC BY | 830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사대는 본래 큰 것을 섬긴다는 뜻이었지만, 그 뜻이 바뀌어 대외 의존적 성향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겪었던 어려움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몸부림이 사대주의의 표현이다. 또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질서에서 대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인식하는 한국인의 한 특성을 뜻하는 개념으로 볼 수가 있다. 한국·중국·일본을 포함하는 유교문화권이나 한자문화권에서 사대의 사는 섬긴다[]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어왔다. 춘추좌씨전에는 효는 부모를 섬기는 것이 첫째이고, 임금을 섬기는 것이 둘째이고,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 마지막이다( ). 라고 하였다. 맹자에 의하면 예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고, 작은 것이 작은 것을 사랑하고 키워야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양혜왕 편(梁惠王篇)에는 “어질다는 것은 큰 것이 작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고 ……<NAME>롭다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이다. …… 큰 것이 작은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惟仁者 爲能以大事小 …… 惟智者 爲能以小事大 ……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라고 하였다. 이 말들에서 중국 중심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사대는 사친이나 사 군과 맥을 같이한다. 효 나 충은 유교의 세계관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며, 모두 사대하는 것과 같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효도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면 임금은 신하를 너그럽게 헤아려[] 감싸야 한다. 따라서 사대는 사소(事小)의 짝으로서만 존재한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사대는 작은 것을 사랑하는 자소(字小)의 짝으로 성립하고 있으며 그것이 예(禮)로 되어 있다. 『맹자』에서는 사소를 인(仁)이라 하고 사대를 지(智)라고 하며 아울러 사소는 낙천(樂天)이며 사대는 외천(畏天)이라고 하였다.
언제나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중국의 세계관에서 이처럼 사대는 사소와 짝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라는 섬김은 의례적인 관행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대와 사소의 관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 간의 세계질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중국적 세계질서는 천 조 예치라고 하여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은 하나의 왕조이고 그곳은 의례에 의해 다스려진다. 조선 왕조가 중국에 대한 대우를 이렇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사대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도 예조로서 경국대전 예전 사대조에는 사대의 관련 의례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은 선진시대부터 천하에는 천명을 받은 천자가 있고 그 아래는 군신관계의 상하 위계적 서열로 세계질서가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중국과 그 주변 국가 간의 관계에도 군신의 상하관계가 확대 적용된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는 대국인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중국 황제는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였다. 조선의 사대는 조공으로, 중국의 사소는 책봉으로 의례적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른바 봉조 제도는 대소 국간의 빈번한 의례적 교환을 수반하므로 양자 간에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상호보완적인 교류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유교가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 왕조에서 봉조 제도는 한중관계의 기본 성격이었다. 한중간의 이러한 사대 관계는 중세적 세계질서가 흔들리지 않던 이 시기에 평화적 외교관계였던 것이다. 소국으로서 대국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의례 관행으로서 사대는 적절하고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대가 사대주의라는 단어로 성립되어<NAME> 또는 민족성과 연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조선 왕조 말기의 전통사회에서 오늘날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 상황에서 겪게 되는 우리 민족의 자기 정체성 확인 노력을 두고 일본인 학자들이 자행한 악의적인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서양 제국주의는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의 중원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서양 여러 나라들은 과학기술문명을 앞세워 중국적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중국은 처음에 서양 열강들을 외이로 간주하고 사대(조공)를 요구했다. 하지만 서양적 새로운 세계질서는 개인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국가 간에도 위계서열적인 의례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봉조의 의례 관계를 인정할 수 없었고, 과학기술문명으로 무장한 제국주의는 중국과 일본을 제압하고<NAME>를 개방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의례적인 봉조 관계를 새롭게 검토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수구적인 보수 지배세력이 척양·척왜하며 청국을 사대할 것을 주장했으나, 개화 파인 독립당은 중국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적 질서가 등장하면서 사대라는 개념이 문제시되었음을 알게 된다. 중국적 세계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서양적 세계질서가 등장함에 따라 사대적 세계관은 폐기되고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여러 세기를 살아왔던 한국인들에게 갈등을 야기했다. 이러한 갈등을 반영하여 개화 독립당과 사대 보수당이라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각각 일본과 청국이 대표하는 서양 중심의 세계질서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좇으며 사대적 세계관을 문제 삼았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중국에 대한 역사적 사대 의례 관행을 자율성이 아닌 타율성으로 해석하고, 한국의 역사를 남에게만 의지하는 사대주의적 역사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한중관계의 기본 성격이었던 사대적 의례는 외세의존적 사대주의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이러한 음모를 꾸미는 데<NAME>된 일본학자들은 대륙도 섬나라도 아닌 반도 국가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다는 지리적 결정론까지 내세웠다. 그렇지만 사대는 중국적 세계관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중국적 세계질서 내에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는 것이지,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과는 무관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주권 상실의 이유를 스스로 반성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숙명론적 체념에 빠지게 한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민족적 열등감을 조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또다시 외세에 의해 조국이 분단되면서 한국인은 자기 비하의 관념과 일본학자의 사대주의론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마저 없지 않았다. 사대는 분명히 우리 전통사회에서 대외관계의 한 특성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대외 인식의 한 틀로만 보지 않고 한국인의 의존적인<NAME> 내지 민족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확대시킨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의 결과였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한국의 학자가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경제발전에 바탕을 둔 국가적 기반 확립에 따라 오늘날에는 사대주의에 대한 논쟁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사대주의는 한국인의 대외관계 인식의 한 특성일 뿐이며 결코 한국의<NAME>이나 민족성이 아니다. 그런데 사대주의가 아니라 한국인의 전통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어온 사대가 사대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곧 한국의 가족주의적 문화 전통 속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에서 사대의 개념은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사대주의
(事大主義)
### 내용:
사대는 본래 큰 것을 섬긴다는 뜻이었지만, 그 뜻이 바뀌어 대외 의존적 성향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겪었던 어려움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몸부림이 사대주의의 표현이다. 또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질서에서 대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인식하는 한국인의 한 특성을 뜻하는 개념으로 볼 수가 있다. 한국·중국·일본을 포함하는 유교문화권이나 한자문화권에서 사대의 사는 섬긴다[]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어왔다. 춘추좌씨전에는 효는 부모를 섬기는 것이 첫째이고, 임금을 섬기는 것이 둘째이고,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 마지막이다( ). 라고 하였다. 맹자에 의하면 예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고, 작은 것이 작은 것을 사랑하고 키워야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양혜왕 편(梁惠王篇)에는 “어질다는 것은 큰 것이 작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고 ……<NAME>롭다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이다. …… 큰 것이 작은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惟仁者 爲能以大事小 …… 惟智者 爲能以小事大 ……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라고 하였다. 이 말들에서 중국 중심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사대는 사친이나 사 군과 맥을 같이한다. 효 나 충은 유교의 세계관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며, 모두 사대하는 것과 같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효도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면 임금은 신하를 너그럽게 헤아려[] 감싸야 한다. 따라서 사대는 사소(事小)의 짝으로서만 존재한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사대는 작은 것을 사랑하는 자소(字小)의 짝으로 성립하고 있으며 그것이 예(禮)로 되어 있다. 『맹자』에서는 사소를 인(仁)이라 하고 사대를 지(智)라고 하며 아울러 사소는 낙천(樂天)이며 사대는 외천(畏天)이라고 하였다.
언제나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중국의 세계관에서 이처럼 사대는 사소와 짝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라는 섬김은 의례적인 관행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대와 사소의 관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 간의 세계질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중국적 세계질서는 천 조 예치라고 하여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은 하나의 왕조이고 그곳은 의례에 의해 다스려진다. 조선 왕조가 중국에 대한 대우를 이렇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사대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도 예조로서 경국대전 예전 사대조에는 사대의 관련 의례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은 선진시대부터 천하에는 천명을 받은 천자가 있고 그 아래는 군신관계의 상하 위계적 서열로 세계질서가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중국과 그 주변 국가 간의 관계에도 군신의 상하관계가 확대 적용된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는 대국인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중국 황제는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였다. 조선의 사대는 조공으로, 중국의 사소는 책봉으로 의례적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른바 봉조 제도는 대소 국간의 빈번한 의례적 교환을 수반하므로 양자 간에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상호보완적인 교류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유교가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 왕조에서 봉조 제도는 한중관계의 기본 성격이었다. 한중간의 이러한 사대 관계는 중세적 세계질서가 흔들리지 않던 이 시기에 평화적 외교관계였던 것이다. 소국으로서 대국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의례 관행으로서 사대는 적절하고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대가 사대주의라는 단어로 성립되어<NAME> 또는 민족성과 연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조선 왕조 말기의 전통사회에서 오늘날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 상황에서 겪게 되는 우리 민족의 자기 정체성 확인 노력을 두고 일본인 학자들이 자행한 악의적인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서양 제국주의는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의 중원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서양 여러 나라들은 과학기술문명을 앞세워 중국적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중국은 처음에 서양 열강들을 외이로 간주하고 사대(조공)를 요구했다. 하지만 서양적 새로운 세계질서는 개인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국가 간에도 위계서열적인 의례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봉조의 의례 관계를 인정할 수 없었고, 과학기술문명으로 무장한 제국주의는 중국과 일본을 제압하고<NAME>를 개방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의례적인 봉조 관계를 새롭게 검토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수구적인 보수 지배세력이 척양·척왜하며 청국을 사대할 것을 주장했으나, 개화 파인 독립당은 중국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적 질서가 등장하면서 사대라는 개념이 문제시되었음을 알게 된다. 중국적 세계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서양적 세계질서가 등장함에 따라 사대적 세계관은 폐기되고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여러 세기를 살아왔던 한국인들에게 갈등을 야기했다. 이러한 갈등을 반영하여 개화 독립당과 사대 보수당이라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각각 일본과 청국이 대표하는 서양 중심의 세계질서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좇으며 사대적 세계관을 문제 삼았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중국에 대한 역사적 사대 의례 관행을 자율성이 아닌 타율성으로 해석하고, 한국의 역사를 남에게만 의지하는 사대주의적 역사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한중관계의 기본 성격이었던 사대적 의례는 외세의존적 사대주의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이러한 음모를 꾸미는 데<NAME>된 일본학자들은 대륙도 섬나라도 아닌 반도 국가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다는 지리적 결정론까지 내세웠다. 그렇지만 사대는 중국적 세계관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중국적 세계질서 내에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는 것이지,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과는 무관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주권 상실의 이유를 스스로 반성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숙명론적 체념에 빠지게 한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민족적 열등감을 조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또다시 외세에 의해 조국이 분단되면서 한국인은 자기 비하의 관념과 일본학자의 사대주의론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마저 없지 않았다. 사대는 분명히 우리 전통사회에서 대외관계의 한 특성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대외 인식의 한 틀로만 보지 않고 한국인의 의존적인<NAME> 내지 민족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확대시킨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의 결과였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한국의 학자가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경제발전에 바탕을 둔 국가적 기반 확립에 따라 오늘날에는 사대주의에 대한 논쟁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사대주의는 한국인의 대외관계 인식의 한 특성일 뿐이며 결코 한국의<NAME>이나 민족성이 아니다. 그런데 사대주의가 아니라 한국인의 전통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어온 사대가 사대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곧 한국의 가족주의적 문화 전통 속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에서 사대의 개념은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b654463a-ed16-49e3-9c8a-4919fb20394f | source05/encykorea/MED32487.txt | 이상로
(李尙老)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두종"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583 | CC BY | 6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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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서사인이었던 이중부의 아들이다. 아버지 묘청과 사이가 좋다 하여 청주에 유배를 가게 된 후 장년기에 술꾼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이상한 중에게 의약방을 배워 의업을 시작했다. 그 후 경사에 와서 고위 관리들의 저환을 치료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이후 의종이 발병하였을 때 그를 불러들여 침으로 치료한 공으로 능백을 하사하고 양온령으로 승진시켜 내시에 속하게 하였다. 명종 때 태부<NAME>에 제수되고 이 부상 서로 임명된 그는 학식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상로
(李尙老)
### 내용:
중서사인이었던 이중부의 아들이다. 아버지 묘청과 사이가 좋다 하여 청주에 유배를 가게 된 후 장년기에 술꾼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이상한 중에게 의약방을 배워 의업을 시작했다. 그 후 경사에 와서 고위 관리들의 저환을 치료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이후 의종이 발병하였을 때 그를 불러들여 침으로 치료한 공으로 능백을 하사하고 양온령으로 승진시켜 내시에 속하게 하였다. 명종 때 태부<NAME>에 제수되고 이 부상 서로 임명된 그는 학식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d2f76504-6a0d-4bae-add2-04c04b35f4bd | source05/encykorea/MED30029.txt | 신증후군출혈열
(新症候群出血熱)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평우"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981 | CC BY | 48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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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급 법정 감영병이다. 고열·오한·두통·구토·복통과 출혈성 경향 및 신부전, 그리고 심혈관 장애 등 여러 복합 증세와 일정한 임상 경과를 거쳐 회복되는 것이 특징이나, 일부 환자는 쇼크·신부전 등으로 사망한다.
이 질병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에서 1954년 사이에 중부전선에 주둔하였던 유엔군 병사 가운데에서 3,00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세계 의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시 이 질병을 처음 경험하였던 서방 의학자들은 이를 한국 특유의 새로운 질병으로 보고 병명도 한국형 출혈열로 정하였으나, 유행성출혈열의 발생 역사는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질병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1916년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그 후 194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지방에 주둔하였던 소련 및 일본군들에게서 많은 환자가 발생했다. 또한, 한국형출혈열(한국형출혈열)과 임상적으로 매우 유사하나 증상이 더 가벼운 질병이 동부 유럽 지역과 스칸디나비아지방에서 오래전부터 발생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생한 질병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 질병이 1950년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해 왔던 것인지 6·25전쟁 이후 비로소 발생하기 시작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질병의 역사만큼이나 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질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1976년 우리나라 학자가 경기도 동두천읍 송내리에서 채집한 등줄쥐의 폐조직에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전까지는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체에 대한 연구가 세계 의학계의 숙제로 여겨졌다. 이후 이 병원체는 바이러스이며,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등줄쥐의 주요 채집지였던 한탄강 유역의 이름을 따서 한탄 바이러스로 명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의학계의 큰 숙제였던 유행성출혈열과 유사한 질병들이 한탄바이러스 및 이와 유사한 바이러스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병원 학적·역학적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그간의 모든 의문점을 단번에 해결하게 되었다. 유행성출혈열은 우리나라에서 건기에 해당되는 늦봄과 늦가을의 두 큰 유행 시기에 환자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지역별 및 직업별 환자 발생은 농촌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며, 농부, 전방 주둔 군인 등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직종의 환자에게서 많이 발생한다. 성별 및 연령별 환자 발생은 대체로 활동 기인 청장년층에서 많이 발생하고, 성별은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유행성출혈열과 증상이 비슷한 질병들이 이전부터 지구상에 존재해 왔고, 각 지방마다 다른 병명들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질병의 증상은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동일한 생리학적·병리학적 소견을 보였기 때문에 1982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들을 모두 통합하여 신증후출혈열로 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유행성출혈열 또는 한국형출혈열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신증후출혈열인 것이다. 한탄 바이러스들은 자연계에서 각자 특정 자연계 숙주를 가지고 감염환을 이루며 순환한다. 즉, 야생 들쥐에 감염된 동물의 몸에서 증식한 뒤 타액·분변·요 등을 통해 체외로 배출되어 다른 들쥐에게 감염된다. 이때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은 야생 들쥐나 바이러스에 오염된 야생 들쥐의 서식지에서 직접적·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것은 들쥐의 활동이 많은 농촌지역과 늦봄·늦가을에, 특히 자연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직종의 사람들이다. 들쥐가 없는 도시와 실험실에서도 들쥐가 없는 도시 및 실험실에서도 종종 환자가 발생하는데, 이는 서울 바이러스가 집쥐나 실험실 흰쥐를 자연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인 것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농촌에서는 들쥐 제거 작업과 더불어 들쥐와의 직접적·간접적인 접촉을 피해야 하며, 특히 유행 시기에는 쥐의 서식처 내에서의 활동을 삼가도록 해야 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집쥐가 접근하는 것을 도시에서는 차단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 질병은 다른 바이러스성 질환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치료제가 없다.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며, 저혈압 기와 집뇨기는 주로 사망률이 높으므로 이때 순환 기능의 안전을 지키고 수분 과잉이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한 혈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인공신장이나 복막투석법 등을 통해 요독증을 예방해야 하고, 그 외 다른 치료법은 일반적인 대증요법에 준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신증후군출혈열
(新症候群出血熱)
### 내용:
제3급 법정 감영병이다. 고열·오한·두통·구토·복통과 출혈성 경향 및 신부전, 그리고 심혈관 장애 등 여러 복합 증세와 일정한 임상 경과를 거쳐 회복되는 것이 특징이나, 일부 환자는 쇼크·신부전 등으로 사망한다.
이 질병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에서 1954년 사이에 중부전선에 주둔하였던 유엔군 병사 가운데에서 3,00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세계 의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시 이 질병을 처음 경험하였던 서방 의학자들은 이를 한국 특유의 새로운 질병으로 보고 병명도 한국형 출혈열로 정하였으나, 유행성출혈열의 발생 역사는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질병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1916년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그 후 194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지방에 주둔하였던 소련 및 일본군들에게서 많은 환자가 발생했다. 또한, 한국형출혈열(한국형출혈열)과 임상적으로 매우 유사하나 증상이 더 가벼운 질병이 동부 유럽 지역과 스칸디나비아지방에서 오래전부터 발생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생한 질병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 질병이 1950년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해 왔던 것인지 6·25전쟁 이후 비로소 발생하기 시작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질병의 역사만큼이나 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질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1976년 우리나라 학자가 경기도 동두천읍 송내리에서 채집한 등줄쥐의 폐조직에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전까지는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체에 대한 연구가 세계 의학계의 숙제로 여겨졌다. 이후 이 병원체는 바이러스이며,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등줄쥐의 주요 채집지였던 한탄강 유역의 이름을 따서 한탄 바이러스로 명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의학계의 큰 숙제였던 유행성출혈열과 유사한 질병들이 한탄바이러스 및 이와 유사한 바이러스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병원 학적·역학적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그간의 모든 의문점을 단번에 해결하게 되었다. 유행성출혈열은 우리나라에서 건기에 해당되는 늦봄과 늦가을의 두 큰 유행 시기에 환자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지역별 및 직업별 환자 발생은 농촌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며, 농부, 전방 주둔 군인 등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직종의 환자에게서 많이 발생한다. 성별 및 연령별 환자 발생은 대체로 활동 기인 청장년층에서 많이 발생하고, 성별은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유행성출혈열과 증상이 비슷한 질병들이 이전부터 지구상에 존재해 왔고, 각 지방마다 다른 병명들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질병의 증상은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동일한 생리학적·병리학적 소견을 보였기 때문에 1982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들을 모두 통합하여 신증후출혈열로 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유행성출혈열 또는 한국형출혈열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신증후출혈열인 것이다. 한탄 바이러스들은 자연계에서 각자 특정 자연계 숙주를 가지고 감염환을 이루며 순환한다. 즉, 야생 들쥐에 감염된 동물의 몸에서 증식한 뒤 타액·분변·요 등을 통해 체외로 배출되어 다른 들쥐에게 감염된다. 이때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은 야생 들쥐나 바이러스에 오염된 야생 들쥐의 서식지에서 직접적·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것은 들쥐의 활동이 많은 농촌지역과 늦봄·늦가을에, 특히 자연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직종의 사람들이다. 들쥐가 없는 도시와 실험실에서도 들쥐가 없는 도시 및 실험실에서도 종종 환자가 발생하는데, 이는 서울 바이러스가 집쥐나 실험실 흰쥐를 자연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인 것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농촌에서는 들쥐 제거 작업과 더불어 들쥐와의 직접적·간접적인 접촉을 피해야 하며, 특히 유행 시기에는 쥐의 서식처 내에서의 활동을 삼가도록 해야 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집쥐가 접근하는 것을 도시에서는 차단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 질병은 다른 바이러스성 질환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치료제가 없다.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며, 저혈압 기와 집뇨기는 주로 사망률이 높으므로 이때 순환 기능의 안전을 지키고 수분 과잉이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한 혈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인공신장이나 복막투석법 등을 통해 요독증을 예방해야 하고, 그 외 다른 치료법은 일반적인 대증요법에 준한다. |
453bdd3e-64b9-491f-bb80-5159d7ac207d | source05/encykorea/SOC14140.txt | 말토기
(馬形土器)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안승모"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836 | CC BY | 209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마형 토기라고도 한다. 크게는 말 모양 위주로 만들어진 것과 사람이 말 위에 얹혀 있는 말 탄 사람 토기로 구분된다. 이는 다시 소형의 비용 기적인 토우와, 용기적이면서 공헌 용인 토기로 구분된다. 또한 말토기에는 뿔잔 끝에 말머리가 달린 토기와 말의 몸이 뿔잔처럼 생긴 토기들도 포함된다. 이 말토기의 여러 유형 중에서 사람이 타지 않은 용기 있는 성격을 가진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이 토기들은 현재까지 4점이 알려져 있다. 현풍 지방에서 발견된 것이 1점이고 낙동강유역에서 발견된 것이 2점이라고 한다. 현풍에서 나온 말토기는 네 다리를 벌리고 선 말이 납작한 네모난 판위에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자연 유가 두껍게 덮여 있고, 고삐·안장·말띠 드리개·꾸미개·발걸이 등의 말갖춤[]이 갖추어져 있고, 몸통에 비해 다리가 짧고 말을 충실하게 표현하려고 했으나 전체적인 조각 수법이 치졸하다. 또한 말 등의 안장 안에는 사발 모양의 그릇이 올려져 있다. 호암 박물관 소장의 말토기는 굽다리접시 위에 말을 포개놓은 것과 비슷하다. 네 다리를 약간 구부려 천천히 걷는 모습으로 고들개 등의 가죽띠와 아래·앞·뒤가리개가 있는 안장 등이 얹혀 있고, 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굽다리 모양의 그릇받침이다. 현풍 출토의 토기와 비교했을 때 이 토기는 사실적이고 힘차게 조각되어 있다. 전형적인 말토기나 말 탄 사람 토기 등에서도 말갖춤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 말 모양만 조각된 것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말갖춤이 표현되지 않은 것도 있는데, 말 모양 토우와 뿔잔이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말토기들은 중국 육조시대의 동물형 토기가 낙동강유역의 말신앙과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말토기
(馬形土器)
### 내용:
마형 토기라고도 한다. 크게는 말 모양 위주로 만들어진 것과 사람이 말 위에 얹혀 있는 말 탄 사람 토기로 구분된다. 이는 다시 소형의 비용 기적인 토우와, 용기적이면서 공헌 용인 토기로 구분된다. 또한 말토기에는 뿔잔 끝에 말머리가 달린 토기와 말의 몸이 뿔잔처럼 생긴 토기들도 포함된다. 이 말토기의 여러 유형 중에서 사람이 타지 않은 용기 있는 성격을 가진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이 토기들은 현재까지 4점이 알려져 있다. 현풍 지방에서 발견된 것이 1점이고 낙동강유역에서 발견된 것이 2점이라고 한다. 현풍에서 나온 말토기는 네 다리를 벌리고 선 말이 납작한 네모난 판위에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자연 유가 두껍게 덮여 있고, 고삐·안장·말띠 드리개·꾸미개·발걸이 등의 말갖춤[]이 갖추어져 있고, 몸통에 비해 다리가 짧고 말을 충실하게 표현하려고 했으나 전체적인 조각 수법이 치졸하다. 또한 말 등의 안장 안에는 사발 모양의 그릇이 올려져 있다. 호암 박물관 소장의 말토기는 굽다리접시 위에 말을 포개놓은 것과 비슷하다. 네 다리를 약간 구부려 천천히 걷는 모습으로 고들개 등의 가죽띠와 아래·앞·뒤가리개가 있는 안장 등이 얹혀 있고, 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굽다리 모양의 그릇받침이다. 현풍 출토의 토기와 비교했을 때 이 토기는 사실적이고 힘차게 조각되어 있다. 전형적인 말토기나 말 탄 사람 토기 등에서도 말갖춤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 말 모양만 조각된 것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말갖춤이 표현되지 않은 것도 있는데, 말 모양 토우와 뿔잔이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말토기들은 중국 육조시대의 동물형 토기가 낙동강유역의 말신앙과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
fdbadd37-0cbc-4ca4-b6e7-11f705b660ec | source05/encykorea/SOC12938.txt | 동맹휴학
(同盟休學)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418 | CC BY | 1,7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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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적 대중교육의 초기기에는 지적 수준이 일반 국민보다 높고 선구자적 사명감을 가졌으며, 근대 교육 제도하의 학생들은 인간애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학교 당국의 비교육적 처사와 사회 · 국가 · 민족적 불의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이를 통해 일반 대중을 각성시켜 대규모 운동 단계로 확대시키려는 학생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동맹휴학은 시위와 더불어 학생운동 중 가장 급진적인 집단행동으로, 학생 상호 간의 연대를 통한 투쟁이다. 동맹휴학은 학교 밖 사회적 차원까지 학생들의 항의를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에 효과가 클 뿐 아니라 그 제재 조치를 약화 · 무력화할 수 있는 상호 보장적인 안전장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이<NAME>는 신분적, 사회적 성격의 동질성이 집단행동인 학생운동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 조건이다. 가치지향적 태도 외에도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책임의 유예, 신분적, 계급적 출신 등에서 동질성이 강할수록 학생운동은 치열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동질성은 가치의 분화로 인해 상실되었고, 일반인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학생에 대한 인식과 학생들 스스로 갖는 사명감이 약화되고, 학생운동에 대한 정부와 학교 당국의 통제가 가중됨에 따라 상실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해진 1960년대 이후 동맹휴학보다 시위가 전형적인 방식이 되었다. 동맹휴학의 역사는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의 권당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항일 민족운동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동맹휴학이 널리 활용되었다. 1920년대 한국 학생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3 · 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항해서 또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동맹휴학은 학원 내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발단이 되어 일제 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한 규탄, 나아가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 · 발전하고 결국 민족 독립을 부르짖는 민족운동의 성격으로 천착되어 한 학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한국인의 교육문제, 전 민족의 문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 교육의 본질은 식민 지배의 공고화와 합리화에 있었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 인격과 고유문화를 무시하고, 식민 노예적 교육 제도와 교육관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일본인 교사와 학생 가운데는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과 지배 욕에 사로잡혀 교실 안에서 민족 감정을 무시하고 차별 대우하고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은 자들이 많았다. 또한 그로 인하여 말썽이 일어났을 때, 일제 헌병 · 경찰 · 관리는 일본인을 무조건 옹호하고 조선 학생만 처벌하는 일이 예사였기에 조선 학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의 동맹휴학은 본질적으로 항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유와 조국을 찾으려는 민족의식에 기초하여 그 민족적 대항 자세를 확립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집 단체였다. 또한 학생들은 일제 교육을 받더라도 민족적 활로는 물론 개인의 미래 전망마저 불투명하였기에 더욱 거세게 투쟁하였다. 전 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하여 전개하였던 3 · 1운동 이후부터는 동맹휴학이 자주 일어났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21년 33건, 1922년 52건, 1923년 57건 등 점차 증가하여, 1928년 83건, 1929년 78건, 1930년 107건, 1931년 102건으로 최고봉에 달하였다가 1934년 39건, 1935년 36건으로 감소하였다. 일제 측 분류에 의한 동맹휴학의 원인은 ① 학교 시설 · 교규 · 교칙 · 학과 배정 등에 기인하는 맹휴, ② 교사 배척에 관한 맹휴, ③ 지방 문제에 관한 맹휴, ④ 기타의 학교 내부 및 학생 상호 간의 일에 관련된 맹휴, ⑤ 민족의식 및 사회주의 사상의 발현 등에 기인한 맹휴 등으로 나누어진다.
1926년 6 · 10학생 운동 이전의 동맹휴학은 학교 당국 나아가 식민지 교육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하여 일어난 것이 주류였다. 3 · 1운동 이후 학생들이 일제에 과감하게 저항했던 민족운동인 6 · 10학생 운동 이후에 각종 학교들이 일으킨 동맹휴학 때 내건 요구 조건, 진정서, 결의 사항 등을 종합 분석하면 ① 노예교육의 철폐 ② 조선 역사의 교수 ③ 교내에서의 조선어 사용 ④ 학생회의 자치 허용 ⑤ 언론 · 집회의 자유 등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교사 배척이라던가 시설 확장의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도 한 학교, 한 개인 상대의 동맹휴학보다는 식민지 교육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민족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맹휴학의 성격이 변하였다.
동맹휴학의 변화를 좀 더 살펴보면, 초기에는 사립학교에서 동맹휴학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 주된 이유는 학교설비 개선과 교사 배척을 요구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동맹휴학은 학교 내부의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되었지만, 공립학교에는 일본인 교사와 학생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학생에 대한 차별을 쉽게 느낄 수 있었고, 식민지 교육 제도의 시정과 민족 독립의 요구로 발전해 갔던 예가 많았다. 이런 민족문제가 공립학교 동맹휴학의 주된 이유이다. 특히 학생들의 항일 의식도 민족자치나 자결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사상에 고무되어 점차 증가하여 1927년에는 정점에 달하였다. 학생들은 비밀리에 모여서 민족정신과 항일 정신을 익혔고, 기숙사도 좋은 학습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이 동맹휴학을<NAME>는 형국이 되었다. 동맹휴학이 가장 격렬했던 곳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점점 위축되었고 동맹휴학도 감소하였다. 1927년 경성 제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현재의 교육 방법은 조선혼을 양성하지 않고, 일본 압박 하에 일본 신민이 되는 교육’이라는 이유로 11월 11일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2학년과 4학년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조선 역사 · 조선어 등의 교육 철저, 기숙사 수리, 일본인 교사 배척, 학우회 창설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퇴교하였다. 서로 강경하게 맞서던 중 주모자가 경찰에 구속되고 130명이 무기정학에 처해져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학교 측은 무기정학의 부당성과 조선 역사 수업의 필요성을 밝히는 항의서를 학교에 제출했고, 이후 31명을 퇴학시켰다. 이러한 대립과 보복은 교우회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냉각기가 되었다. 학교 당국은 이듬해 1월 개학일이 되어도 동맹휴학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정학 학생 301명에게 등 교통 지서를 발부할 수밖에 없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도 1927년 2월 27일에 일어났다. 사립학교인 이 학교의 운영 주도권을 일본인들이 장악하여 독주하는 것을 배제시키고, 한국인 본위 교육과 이를 위한 새로운 교육 편제를 요구하며 민족의식을 부각시켜 나간 것이다. 학생 400명은 사감 등 수명의 일본인 교사 면직, 학생 대우 개선, 조선인 교원 채용 증가 등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강경한 자세로 이에 대응하여 학생과 학부형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사태를 지켜보던 근우회(槿友會)는 6월 11일 회의를 열고 현덕신(玄德信) 등을 조사 위원으로 선출하여 동맹휴학 문제를 조사하기로 하고,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도 역시 심은숙(恩淑) 등을 조사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처럼 사회단체에서 동맹휴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학생의 휴학이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 재단인 양정 · 진명 · 숙명 3교의 졸업생 대표 약 30명이 6월 27일 3교연합 교우회로서 양명회(養明會)를 발기하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추진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경찰의 금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8월 20일 학교의 통지로 등교한 학생들은 교무 주임 사이토의 사퇴를 관철하기 위하여 교내 항쟁을 하던 중 기숙사 무단 퇴사 등을 이유로 35명의 학생이 정학 처분을 받았고, 전교생들은 다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또한 학생 처벌에 항의하는 뜻으로 한국인 교사들도 사표를 냈고, 숙녀회와 학부형회, 양명회도 항의를 했다. 사이토는 결국 사표를 제출했고, 9월 27일 학교가<NAME>되었다. 1923년 6월에 동맹휴학을 한 바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는 1927년에 보다 대대적인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교장의 전제적 학교 행정을 반대하고 수명의 교사를 배척할 것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으나, 본질적 동기는 항일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1월 5일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학교 고별식을 거행하였고, 11월 14일 개학하고자 하였으나 강경파 학생 100여 명이 개학을 거부하면서 등교 방해 등 실력행사를 하였기 때문에 정 · 사복경찰관이<NAME>되어 134명을 검거하여 종로경찰서에서 취조하였다. 이들이 동맹휴학을 한 것은 교내 문제가 아니라, 일제의 교육 제도와 그것을 그대로 표방하는 교장의 전제를 반대했기 때문에, 조용규 · 손창주 등 5명과 함께 피신 중이던 이들이 출판물 위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또한 당시 동경에 있던 한국인의 사상 단체인 신흥 과학 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에서는 1927년 10월 10일 자로 ‘중앙고보의 맹휴에 대하여 엄정한 사회적 비판을 환기함’이라는 동정 격문을 작성하여 국내에 발송하였다. 그 격문에서는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의 이유로서 식민지 차별교육에 대한 불만, 학교 당국의 전제에 대한 반항, 학생 요구 조건 무시에 대한 불만, 학생 인격 유린에 대한 항쟁 등을 지적하고, 학생 본위의 교육, 학생자치권 등을 주장하였다.
이상의 학교들 외에도 경신학교(儆新學校) ·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 경성여자상업학교 등에서 강경한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서울 지역의 동맹휴학은 전국의 지방 학교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지방 학생들은 서울이라는 중앙의 학생계가 선택하는 행동 노선에 민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 학생운동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지방별로 함경도의 함흥 농업학교 동맹휴학(1927),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7), 전라북도 전주 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6), 경상북도 대구 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6, 1928), 경상남도 부산 제2상업 학교 동맹휴학(1928) 등 주요한 동맹휴학이 일어났었다. 특히 진주 고등보통학교와 진주 농업학교에서는 1928년 7월 6일 오전 8시 동시에 1 조일 공학제 폐지 2 노예적 교육을 철폐 3 조선 역사 및 조선어를 교수 5 교내 언론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는 이제까지 각 단위학교에서 분산적으로 실시했던 동맹휴학의 단계를 넘어 동지역의 학교가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일제 식민지 교육 체제와 민족 차별에 저항하는 동맹휴학은 어린 보통학교 학생까지 확산되었다. 보통학교 동맹휴학은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모두 192건 있었다. 이후 미 군정기에도 동맹휴학은 끊이지 않았다.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종합안, 국대안이 법령으로 공포된 후 전국적으로 57개교, 참가 학생 4만여 명에 이르는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 동맹휴학은 역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학생들이 내세운 주장은 단순한 학원 문제가 아니라 광복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문제였으며, 국대안 철회, 미국인 대학 총장을 한국인으로 교체, 문교부 책임자 인책, 경찰의 학원 간섭 배제 등이었다. 학생들의 국대안 반대 운동에 교수와 언론은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문교부 · 경무부 · 검찰부 · 우익 학생은 주동자와 참가 학생에 대한 비난 · 체포 · 제명 · 퇴학 등으로 대응했다. 결국 1947년 6월 서울대학교 미국인 총장이 사임하고 1∼2개 대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은 미등록 · 제명 학생들을 원칙적으로 복교시키기로 하면서 동맹휴학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복교와 복직이 불가능한 학생은 1,000여 명, 교수 380여 명이었다. 이후에 남한만의 단일 총선거 · 단일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휴학도 일어났지만,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학생운동은 약화되었고 동맹휴학도 사라졌다. 학생운동이 위축되던 1950년대는 암흑기였다. 다만 1957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들이 대통령 양자인 이강석의 입학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하고, 홍익대학교 학생들이 부실한 재단을 성토하는 동맹휴학을 한 것이 전부다. 학생운동은 1960년 이후 시위로 확산되었다. 동맹휴학이 일어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시위에 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학교 당국이나 정부도 휴교와 휴업을 자주 했다. 따라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은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1965년에 일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 학생들의 항일학생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1920년대에 동맹휴학이 제일 많이 일어났다. 일제 측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동맹휴학 건수는 404건이었다. 이를 학교별로 보면 관공립 초등학교 156건, 관공립 중등학교 79건, 관공립 전문학교 7건, 사립 중학교 36건, 사립 중등학교 121건, 사립 전문학교 5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사립 중등학교가 학교수에 비해 동맹휴학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이 시기 동맹휴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404건의 동맹휴학을 도별로 보면 경기도 77건, 충청북도 17건, 충청남도 20건, 전라북도 29건, 전라남도 28건, 경상북도 14건, 경상남도 38건, 황해도 42건, 평안남도 20건, 평안북도 24건, 강원도 29건, 함경남도 51건, 함경북도 15건으로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에서 가장 많이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전국 어느 곳에서나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동맹휴학이 계속되자 일제 당국은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일제 고등경찰은 한국 학생운동의 기본 성격을 일반 사회현상 속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민족적 본능의 발로에서 나온 민족운동의 한 종류로 규정하여 적극적 제지에 나섰다. 일단 동맹휴학을 하게 되면 학생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학교 당국자와 총독부 학무국, 경찰은 1차적으로 정학, 무기정학, 퇴학처분을 내리고 2차적으로 구속, 기소, 형사처벌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시기 한국 학생은 각종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는 것보다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퇴학당하는 수가 많았는데, 이는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동맹휴학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동맹휴학으로 처벌받은 학생이 7,674명으로 1년 평균 959명이나 되었다. 이 중 완전히 학교를 그만두게 된 퇴학자가 1,560명, 정학이 4,758명이나 되었고 재판을 받아 영어의 몸이 된 사람이 172명, 검속이 된 사람이 319명이나 되었다. 동맹휴학의 전개와 결과, 그리고 동맹휴학의 결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학생들이 얼마나 열렬하게 일제에 저항하였는가이다. 동맹휴학은 물론 만세 시위나 폭력적 투쟁보다 학생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방식이었다. 학생들은 민족과 국민의 고난을 철저히 인식하고, 해결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며, 구속 · 퇴학 · 정학 · 체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맹휴학으로 일치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한 것이다. 동맹휴학은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학생 운동이며 민족 · 민주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젊은 세대의 항일독립운동이자 민족 · 민주운동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동맹휴학
(同盟休學)
### 내용:
근대적 대중교육의 초기기에는 지적 수준이 일반 국민보다 높고 선구자적 사명감을 가졌으며, 근대 교육 제도하의 학생들은 인간애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학교 당국의 비교육적 처사와 사회 · 국가 · 민족적 불의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이를 통해 일반 대중을 각성시켜 대규모 운동 단계로 확대시키려는 학생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동맹휴학은 시위와 더불어 학생운동 중 가장 급진적인 집단행동으로, 학생 상호 간의 연대를 통한 투쟁이다. 동맹휴학은 학교 밖 사회적 차원까지 학생들의 항의를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에 효과가 클 뿐 아니라 그 제재 조치를 약화 · 무력화할 수 있는 상호 보장적인 안전장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이<NAME>는 신분적, 사회적 성격의 동질성이 집단행동인 학생운동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 조건이다. 가치지향적 태도 외에도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책임의 유예, 신분적, 계급적 출신 등에서 동질성이 강할수록 학생운동은 치열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동질성은 가치의 분화로 인해 상실되었고, 일반인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학생에 대한 인식과 학생들 스스로 갖는 사명감이 약화되고, 학생운동에 대한 정부와 학교 당국의 통제가 가중됨에 따라 상실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해진 1960년대 이후 동맹휴학보다 시위가 전형적인 방식이 되었다. 동맹휴학의 역사는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의 권당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항일 민족운동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동맹휴학이 널리 활용되었다. 1920년대 한국 학생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3 · 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항해서 또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동맹휴학은 학원 내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발단이 되어 일제 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한 규탄, 나아가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 · 발전하고 결국 민족 독립을 부르짖는 민족운동의 성격으로 천착되어 한 학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한국인의 교육문제, 전 민족의 문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 교육의 본질은 식민 지배의 공고화와 합리화에 있었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 인격과 고유문화를 무시하고, 식민 노예적 교육 제도와 교육관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일본인 교사와 학생 가운데는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과 지배 욕에 사로잡혀 교실 안에서 민족 감정을 무시하고 차별 대우하고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은 자들이 많았다. 또한 그로 인하여 말썽이 일어났을 때, 일제 헌병 · 경찰 · 관리는 일본인을 무조건 옹호하고 조선 학생만 처벌하는 일이 예사였기에 조선 학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의 동맹휴학은 본질적으로 항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유와 조국을 찾으려는 민족의식에 기초하여 그 민족적 대항 자세를 확립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집 단체였다. 또한 학생들은 일제 교육을 받더라도 민족적 활로는 물론 개인의 미래 전망마저 불투명하였기에 더욱 거세게 투쟁하였다. 전 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하여 전개하였던 3 · 1운동 이후부터는 동맹휴학이 자주 일어났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21년 33건, 1922년 52건, 1923년 57건 등 점차 증가하여, 1928년 83건, 1929년 78건, 1930년 107건, 1931년 102건으로 최고봉에 달하였다가 1934년 39건, 1935년 36건으로 감소하였다. 일제 측 분류에 의한 동맹휴학의 원인은 ① 학교 시설 · 교규 · 교칙 · 학과 배정 등에 기인하는 맹휴, ② 교사 배척에 관한 맹휴, ③ 지방 문제에 관한 맹휴, ④ 기타의 학교 내부 및 학생 상호 간의 일에 관련된 맹휴, ⑤ 민족의식 및 사회주의 사상의 발현 등에 기인한 맹휴 등으로 나누어진다.
1926년 6 · 10학생 운동 이전의 동맹휴학은 학교 당국 나아가 식민지 교육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하여 일어난 것이 주류였다. 3 · 1운동 이후 학생들이 일제에 과감하게 저항했던 민족운동인 6 · 10학생 운동 이후에 각종 학교들이 일으킨 동맹휴학 때 내건 요구 조건, 진정서, 결의 사항 등을 종합 분석하면 ① 노예교육의 철폐 ② 조선 역사의 교수 ③ 교내에서의 조선어 사용 ④ 학생회의 자치 허용 ⑤ 언론 · 집회의 자유 등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교사 배척이라던가 시설 확장의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도 한 학교, 한 개인 상대의 동맹휴학보다는 식민지 교육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민족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맹휴학의 성격이 변하였다.
동맹휴학의 변화를 좀 더 살펴보면, 초기에는 사립학교에서 동맹휴학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 주된 이유는 학교설비 개선과 교사 배척을 요구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동맹휴학은 학교 내부의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되었지만, 공립학교에는 일본인 교사와 학생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학생에 대한 차별을 쉽게 느낄 수 있었고, 식민지 교육 제도의 시정과 민족 독립의 요구로 발전해 갔던 예가 많았다. 이런 민족문제가 공립학교 동맹휴학의 주된 이유이다. 특히 학생들의 항일 의식도 민족자치나 자결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사상에 고무되어 점차 증가하여 1927년에는 정점에 달하였다. 학생들은 비밀리에 모여서 민족정신과 항일 정신을 익혔고, 기숙사도 좋은 학습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이 동맹휴학을<NAME>는 형국이 되었다. 동맹휴학이 가장 격렬했던 곳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점점 위축되었고 동맹휴학도 감소하였다. 1927년 경성 제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현재의 교육 방법은 조선혼을 양성하지 않고, 일본 압박 하에 일본 신민이 되는 교육’이라는 이유로 11월 11일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2학년과 4학년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조선 역사 · 조선어 등의 교육 철저, 기숙사 수리, 일본인 교사 배척, 학우회 창설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퇴교하였다. 서로 강경하게 맞서던 중 주모자가 경찰에 구속되고 130명이 무기정학에 처해져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학교 측은 무기정학의 부당성과 조선 역사 수업의 필요성을 밝히는 항의서를 학교에 제출했고, 이후 31명을 퇴학시켰다. 이러한 대립과 보복은 교우회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냉각기가 되었다. 학교 당국은 이듬해 1월 개학일이 되어도 동맹휴학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정학 학생 301명에게 등 교통 지서를 발부할 수밖에 없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도 1927년 2월 27일에 일어났다. 사립학교인 이 학교의 운영 주도권을 일본인들이 장악하여 독주하는 것을 배제시키고, 한국인 본위 교육과 이를 위한 새로운 교육 편제를 요구하며 민족의식을 부각시켜 나간 것이다. 학생 400명은 사감 등 수명의 일본인 교사 면직, 학생 대우 개선, 조선인 교원 채용 증가 등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강경한 자세로 이에 대응하여 학생과 학부형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사태를 지켜보던 근우회(槿友會)는 6월 11일 회의를 열고 현덕신(玄德信) 등을 조사 위원으로 선출하여 동맹휴학 문제를 조사하기로 하고,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도 역시 심은숙(恩淑) 등을 조사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처럼 사회단체에서 동맹휴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학생의 휴학이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 재단인 양정 · 진명 · 숙명 3교의 졸업생 대표 약 30명이 6월 27일 3교연합 교우회로서 양명회(養明會)를 발기하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추진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경찰의 금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8월 20일 학교의 통지로 등교한 학생들은 교무 주임 사이토의 사퇴를 관철하기 위하여 교내 항쟁을 하던 중 기숙사 무단 퇴사 등을 이유로 35명의 학생이 정학 처분을 받았고, 전교생들은 다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또한 학생 처벌에 항의하는 뜻으로 한국인 교사들도 사표를 냈고, 숙녀회와 학부형회, 양명회도 항의를 했다. 사이토는 결국 사표를 제출했고, 9월 27일 학교가<NAME>되었다. 1923년 6월에 동맹휴학을 한 바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는 1927년에 보다 대대적인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교장의 전제적 학교 행정을 반대하고 수명의 교사를 배척할 것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으나, 본질적 동기는 항일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1월 5일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학교 고별식을 거행하였고, 11월 14일 개학하고자 하였으나 강경파 학생 100여 명이 개학을 거부하면서 등교 방해 등 실력행사를 하였기 때문에 정 · 사복경찰관이<NAME>되어 134명을 검거하여 종로경찰서에서 취조하였다. 이들이 동맹휴학을 한 것은 교내 문제가 아니라, 일제의 교육 제도와 그것을 그대로 표방하는 교장의 전제를 반대했기 때문에, 조용규 · 손창주 등 5명과 함께 피신 중이던 이들이 출판물 위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또한 당시 동경에 있던 한국인의 사상 단체인 신흥 과학 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에서는 1927년 10월 10일 자로 ‘중앙고보의 맹휴에 대하여 엄정한 사회적 비판을 환기함’이라는 동정 격문을 작성하여 국내에 발송하였다. 그 격문에서는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의 이유로서 식민지 차별교육에 대한 불만, 학교 당국의 전제에 대한 반항, 학생 요구 조건 무시에 대한 불만, 학생 인격 유린에 대한 항쟁 등을 지적하고, 학생 본위의 교육, 학생자치권 등을 주장하였다.
이상의 학교들 외에도 경신학교(儆新學校) ·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 경성여자상업학교 등에서 강경한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서울 지역의 동맹휴학은 전국의 지방 학교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지방 학생들은 서울이라는 중앙의 학생계가 선택하는 행동 노선에 민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 학생운동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지방별로 함경도의 함흥 농업학교 동맹휴학(1927),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7), 전라북도 전주 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6), 경상북도 대구 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6, 1928), 경상남도 부산 제2상업 학교 동맹휴학(1928) 등 주요한 동맹휴학이 일어났었다. 특히 진주 고등보통학교와 진주 농업학교에서는 1928년 7월 6일 오전 8시 동시에 1 조일 공학제 폐지 2 노예적 교육을 철폐 3 조선 역사 및 조선어를 교수 5 교내 언론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는 이제까지 각 단위학교에서 분산적으로 실시했던 동맹휴학의 단계를 넘어 동지역의 학교가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일제 식민지 교육 체제와 민족 차별에 저항하는 동맹휴학은 어린 보통학교 학생까지 확산되었다. 보통학교 동맹휴학은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모두 192건 있었다. 이후 미 군정기에도 동맹휴학은 끊이지 않았다.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종합안, 국대안이 법령으로 공포된 후 전국적으로 57개교, 참가 학생 4만여 명에 이르는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 동맹휴학은 역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학생들이 내세운 주장은 단순한 학원 문제가 아니라 광복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문제였으며, 국대안 철회, 미국인 대학 총장을 한국인으로 교체, 문교부 책임자 인책, 경찰의 학원 간섭 배제 등이었다. 학생들의 국대안 반대 운동에 교수와 언론은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문교부 · 경무부 · 검찰부 · 우익 학생은 주동자와 참가 학생에 대한 비난 · 체포 · 제명 · 퇴학 등으로 대응했다. 결국 1947년 6월 서울대학교 미국인 총장이 사임하고 1∼2개 대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은 미등록 · 제명 학생들을 원칙적으로 복교시키기로 하면서 동맹휴학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복교와 복직이 불가능한 학생은 1,000여 명, 교수 380여 명이었다. 이후에 남한만의 단일 총선거 · 단일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휴학도 일어났지만,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학생운동은 약화되었고 동맹휴학도 사라졌다. 학생운동이 위축되던 1950년대는 암흑기였다. 다만 1957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들이 대통령 양자인 이강석의 입학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하고, 홍익대학교 학생들이 부실한 재단을 성토하는 동맹휴학을 한 것이 전부다. 학생운동은 1960년 이후 시위로 확산되었다. 동맹휴학이 일어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시위에 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학교 당국이나 정부도 휴교와 휴업을 자주 했다. 따라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은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1965년에 일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 학생들의 항일학생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1920년대에 동맹휴학이 제일 많이 일어났다. 일제 측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동맹휴학 건수는 404건이었다. 이를 학교별로 보면 관공립 초등학교 156건, 관공립 중등학교 79건, 관공립 전문학교 7건, 사립 중학교 36건, 사립 중등학교 121건, 사립 전문학교 5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사립 중등학교가 학교수에 비해 동맹휴학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이 시기 동맹휴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404건의 동맹휴학을 도별로 보면 경기도 77건, 충청북도 17건, 충청남도 20건, 전라북도 29건, 전라남도 28건, 경상북도 14건, 경상남도 38건, 황해도 42건, 평안남도 20건, 평안북도 24건, 강원도 29건, 함경남도 51건, 함경북도 15건으로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에서 가장 많이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전국 어느 곳에서나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동맹휴학이 계속되자 일제 당국은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일제 고등경찰은 한국 학생운동의 기본 성격을 일반 사회현상 속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민족적 본능의 발로에서 나온 민족운동의 한 종류로 규정하여 적극적 제지에 나섰다. 일단 동맹휴학을 하게 되면 학생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학교 당국자와 총독부 학무국, 경찰은 1차적으로 정학, 무기정학, 퇴학처분을 내리고 2차적으로 구속, 기소, 형사처벌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시기 한국 학생은 각종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는 것보다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퇴학당하는 수가 많았는데, 이는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동맹휴학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동맹휴학으로 처벌받은 학생이 7,674명으로 1년 평균 959명이나 되었다. 이 중 완전히 학교를 그만두게 된 퇴학자가 1,560명, 정학이 4,758명이나 되었고 재판을 받아 영어의 몸이 된 사람이 172명, 검속이 된 사람이 319명이나 되었다. 동맹휴학의 전개와 결과, 그리고 동맹휴학의 결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학생들이 얼마나 열렬하게 일제에 저항하였는가이다. 동맹휴학은 물론 만세 시위나 폭력적 투쟁보다 학생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방식이었다. 학생들은 민족과 국민의 고난을 철저히 인식하고, 해결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며, 구속 · 퇴학 · 정학 · 체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맹휴학으로 일치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한 것이다. 동맹휴학은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학생 운동이며 민족 · 민주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젊은 세대의 항일독립운동이자 민족 · 민주운동이다. |
1b97eb5d-354e-491a-b345-862a6ac767c1 | source05/encykorea/SOC46364.txt | 화룡 하남둔고성
(和龍 河南屯古城)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송기호"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604 | CC BY | 1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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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가자토성 또는 허래성이라고도 한다. 화룡<NAME>에서 동북쪽으로 약 25km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해란 강에 임하고 있다. 여기서 해란 강을 따라 약 4km 떨어진 곳에는 발해 중경 현덕 부가 설치되었던 서고성이 있고,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는 발해시대의 고분군인 팔가자고분군이 있다. 성 안에서 1971년 2기의 발해 고분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한 무더기의 금식(飾)이 출토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금제 허리띠가 있다. 이외에도 성내에서는 화문전(花文塼), 지압문(指壓文)의 평기와, 와당과 명문이 찍힌 기와 편, 동불상(銅佛像), 철불상(鐵佛像), 철문추(鐵門樞), 동령(銅玲), 철정(鐵鼎) 등이 수습된 바 있다. 전체 길이는 2,500m로 추정되는데, 원래 성의 평면은 장방형이었으나 해란 강에 의해 북쪽 벽이 파괴되어 현재는 형을 띠고 있다. 현재 규모는 너비 약 10m, 높이 약 2m 정도이고, 서쪽 벽만 전체 길이가 360m 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논으로 둘러싸여 있어 성 안의 구조물을 파악하기 어렵다. 내성은 남쪽 벽에서 18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동서 길이 140m, 남북 길이 120m이다. 내성 안팎에는 몇 개의 토 단 이 보존되어 있고, 주춧돌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화룡 하남둔고성
(和龍 河南屯古城)
### 내용:
팔가자토성 또는 허래성이라고도 한다. 화룡<NAME>에서 동북쪽으로 약 25km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해란 강에 임하고 있다. 여기서 해란 강을 따라 약 4km 떨어진 곳에는 발해 중경 현덕 부가 설치되었던 서고성이 있고,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는 발해시대의 고분군인 팔가자고분군이 있다. 성 안에서 1971년 2기의 발해 고분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한 무더기의 금식(飾)이 출토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금제 허리띠가 있다. 이외에도 성내에서는 화문전(花文塼), 지압문(指壓文)의 평기와, 와당과 명문이 찍힌 기와 편, 동불상(銅佛像), 철불상(鐵佛像), 철문추(鐵門樞), 동령(銅玲), 철정(鐵鼎) 등이 수습된 바 있다. 전체 길이는 2,500m로 추정되는데, 원래 성의 평면은 장방형이었으나 해란 강에 의해 북쪽 벽이 파괴되어 현재는 형을 띠고 있다. 현재 규모는 너비 약 10m, 높이 약 2m 정도이고, 서쪽 벽만 전체 길이가 360m 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논으로 둘러싸여 있어 성 안의 구조물을 파악하기 어렵다. 내성은 남쪽 벽에서 18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동서 길이 140m, 남북 길이 120m이다. 내성 안팎에는 몇 개의 토 단 이 보존되어 있고, 주춧돌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
b1be3d65-dbe8-433f-a268-a7ff95574f3f | source05/encykorea/SOC20514.txt | 삼오주
(三午酒)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성우"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30 | CC BY | 1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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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오 주는 정월 첫 오일에 시작해 오일마다 세 번 빚는다고 해서 규곤시의방·역주방문이라고 한다. 등에 기록되어 있다. 만드는 법은 『규곤시의방』에서는 정월 첫 오일에 정화수 여덟 동이를 항아리에 붓고 누룩가루 다섯 되와 밀가루 세되를 풀고, 깨끗이 씻은 멥쌀 다섯 말을 가루 내어 쪄서 식혀 넣은 다음 둘째 오일에 깨끗이 씻은 멥쌀 다섯 말을 가루 내어 쪄서 식혀 넣고, 셋째 오일에는 멥쌀 다섯 말을 물에 담갔다가 쪄서 식혀 넣었다가 익으면 먹는다고 하였다.
『역주 방문』에서는 『규곤시의방』과 비슷한 방법으로 빚고 있으나, 잘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여기에다 찹쌀 아홉 되와 멥쌀 두 되로 밥을 지어 물누룩水麴에 섞어 넣은 다음 중품 소주를 붓는데, 분량은 절기에 따라 알맞게 하여 차지도 덥지도 않은 곳에 두었다가 20일이 경과한 뒤 사용한다. 이렇게 빚으면 여름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주를 넣어 여름철에도 서울식 과하주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삼오주
(三午酒)
### 내용:
삼오 주는 정월 첫 오일에 시작해 오일마다 세 번 빚는다고 해서 규곤시의방·역주방문이라고 한다. 등에 기록되어 있다. 만드는 법은 『규곤시의방』에서는 정월 첫 오일에 정화수 여덟 동이를 항아리에 붓고 누룩가루 다섯 되와 밀가루 세되를 풀고, 깨끗이 씻은 멥쌀 다섯 말을 가루 내어 쪄서 식혀 넣은 다음 둘째 오일에 깨끗이 씻은 멥쌀 다섯 말을 가루 내어 쪄서 식혀 넣고, 셋째 오일에는 멥쌀 다섯 말을 물에 담갔다가 쪄서 식혀 넣었다가 익으면 먹는다고 하였다.
『역주 방문』에서는 『규곤시의방』과 비슷한 방법으로 빚고 있으나, 잘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여기에다 찹쌀 아홉 되와 멥쌀 두 되로 밥을 지어 물누룩水麴에 섞어 넣은 다음 중품 소주를 붓는데, 분량은 절기에 따라 알맞게 하여 차지도 덥지도 않은 곳에 두었다가 20일이 경과한 뒤 사용한다. 이렇게 빚으면 여름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주를 넣어 여름철에도 서울식 과하주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
9431dad2-1b47-4b37-b32e-3329030fc4af | source05/encykorea/POL55158.txt | 이한창
(李漢昌)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영선"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790 | CC BY | 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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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전의이며, 출생은 1883년 5월 24일이며, 졸업은 1914년 수원 고동 농립 학교를 졸업한 후 신창과 온양의 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근무는 1925년 전라남도 도청 소속 내무부 산업과에서 이루어졌다. 1935년 6월 완도 군수가 되었고, 전라남도 장성군 서무주임을 거쳐 전라남도 장성군 서무주임을 거쳐 구례 군수, 함평 수리조합 이사를 지냈다. 해방 후 전라남도 농림 국장을 지냈고, 전남 어업조합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대동청년단장 출신 이판열 의원의 사망으로 치러진 1952년 구례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4년 5월 30일까지 의원직을 수행한 후 제7·8대 수산회 중앙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0년 6월 20일 사망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한창
(李漢昌)
### 내용:
본관은 전의이며, 출생은 1883년 5월 24일이며, 졸업은 1914년 수원 고동 농립 학교를 졸업한 후 신창과 온양의 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근무는 1925년 전라남도 도청 소속 내무부 산업과에서 이루어졌다. 1935년 6월 완도 군수가 되었고, 전라남도 장성군 서무주임을 거쳐 전라남도 장성군 서무주임을 거쳐 구례 군수, 함평 수리조합 이사를 지냈다. 해방 후 전라남도 농림 국장을 지냈고, 전남 어업조합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대동청년단장 출신 이판열 의원의 사망으로 치러진 1952년 구례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4년 5월 30일까지 의원직을 수행한 후 제7·8대 수산회 중앙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0년 6월 20일 사망했다. |
85f3a678-b8d5-4c6b-9e7f-088e782ed07f | source05/encykorea/SOC13030.txt | 독일
(獨逸)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030 | CC BY | 4,86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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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은 인구 8085만 4408명(2015년 현재)이고, 면적은 35만 7022km2이고 인구는 8085만 4408명이다. 인구밀도는 km2 당 228명이다. 인구의 대부분이 게르만족이고, 유태인·슬라브인·위그노인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 언어 표준은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 중 일반적으로 고지독일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지만, 16세기에 루터의 성서번역으로 신고지 독일어가 확립되면서 방언의 차이가 많이 줄었다. 신교는 주로 북부와 동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51%가 믿고 있으며, 구교는 주로 남부와 서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48%가 믿고 있다. 기후는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가 만나는 형태이다. 우리나라의 대 독일 수출액은 6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1955달러이며, 자동차·무선전화기·선박 등 주요 품목의 수출액은 210억 달러, 자동차·직접회로반도체·자동차부품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수출액은 2015년 현재 3조 4000억 달러, 수입액은 210억 달러이다. 독일이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프랑크족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프랑크왕국이 세워진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 통합의 제반 과정을 완수한 칼 대제가 죽은 뒤 동·서 프랑크로 분열되었으나, 오토 1세에 이르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13세기 전반까지 황제 시대가 지속된다. 그렇지만 제후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공 위 시대를 거쳐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가 제위를 계승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Augsburg)는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독일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뒤, 기사전쟁·농민전쟁·종교전쟁 등을 거쳐 1555년에 완성된다. 독일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적 평화가 실현되었지만, 연방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정치적·경제적으로 분산화·무력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는 독일 통일 운동의 탄생을 가속화시켰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회의를 거쳐 독일의 민족운동은 독일연방으로 성과를 냈으나,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스의 제3제국을 경험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 연합국의 점령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동서 대립의 세계정세 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영국·프랑스 관리지역에는 서독이, 소련 관리지역에는 동독이 성립되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은 1949년 5월 23일 통일까지의 잠정헌법으로서 기본법을 제정, 공포하고, 그 해 9월 21일에 국가를 수립하였다. 동독은 1949년 10월 7일 인민 회의를 열고 정부형태를 내각책임제로 하고, 의회는 양원제를 채택하였다. 의회는 단원제였고 인민 회의가<NAME>상의 국가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1969년 대통령제가 폐지된 후 국가 평의회는 의회 해산·총선거 실시·법령 공포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내각에 해당하는 각료 평의회는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5개 정당의 연립정권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단독정권이었다.
1955년 서독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맹하자, 동독도 같은 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가맹하여 ‘두 개의 독일’을 굳히는 길로 나아갔다.
이어 1961년 9월에는 동·서독의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동독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1969년 서독에 브란트 정권(Brandt, W. 政權)이 등장하여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치 아래 ‘1민족 2국가’라는 현실 정책을 추구하면서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 동·서독은 관계<NAME>를 위한 기본 조약에 조인하여 현 국경선을 상호 승인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동·서독이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독일 민족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 냉전체제의 해빙과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1990년 10월 3일 동독 지역을 흡수 통합하여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 국가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1949년 5월 23일에 제정된 기본법(Grundgesetz)에 기초하여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으로 법치주의에 의한 자유 주위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연방 대통령을 둔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은 연방 대통령 선출 특별위원회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한다. 이 위원회는 연방 위원과 주(州)의 국민대표<NAME>로 구성된다.
연방 수상은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며, 자신의 책임 아래 각 부처 장관을 제청하고 정책을 수행하여 나간다. 사법부는 연방제의 특성에 맞도록 각 주의 법원제도를 갖추어, 5개 연방 차원의 법원, 즉 연방 대법원·연방행정법원·연방 재정 법원·연방 사회 법원·연방노동 법원 등이 있다. 연방헌법재판소(Bundes Verfassungsgericht)는 모든 헌법기관에서 독립적인 최고의 법원으로 헌법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1998년 9월 27일, 이제까지 연립정부를 이루던 기민 당(CDU/CSU)과 자민당(FDP)이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16년간 집권해 온 ‘통일 수상’ 콜(Helmut Kohl)이 물러나고 사민당(SPD)의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새 수상이 되어, 통일 이후의 실업문제와 사회연대, 환경 및 조세정책을 새롭게 실천하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경제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주도적 국가이다.(1) 분단 이전의 독일과 우리나라
독일과 한국의 첫 접촉은 고려 시대의 염제신(廉悌臣)이 1354년 원나라 조정에서 프랑크 제국의 사신과 만난 일에서 시작된다.
문헌상으로 독일이 처음 알려진 것은 1614년(광해군 6)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였는데, 이수광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독일인국(獨逸人國)은 백옥(白玉)으로 성을 쌓는 나라이다”라는 짧은 기록에서였다. 30여 년 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독일인 신부 샬(Schall von Bell, J. A. , )과 교분을 맺었으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별다른 교섭을 하지 않았다. 1832년(순조 32)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에 승선한 독일인 목사 귀츨라프(Gutzlaff, K. F. A.)가 충청도 해안에서 선교를 시도했으나 조선 관리의 완강한 거부로 되돌아갔다. 조선은 기독교 금압정책과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독일의 프로이센 제국은 1860년대에 들어와 극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하고 있던 1866년(고종 3)에 중국·일본을 드나들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 E. J. )는 영국 상선 로 나호에 승선, 내한하여 통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뒤, 그 해 다시 엠페러 호로 재입국하였으며, 1868년에는 차이나 호로 세 번째 입국하여 아산만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을 일으켜, 당시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불을 붙이는 계기만 만들었다. 또한 1870년에는 주일 독일대리공사 브란트(Brandt, M. A. S. von)가 국가적 차원에서 의도적인 입국 교섭을 시도한 적이 있다. 브란트는 1870년 5월 3일 독일 군함 헤르타호에 탑승하여 부산에 입항하여 대한 통상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공포로 위협사격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 정부는 대원군 섭정 아래 위정척사의 일환으로 병인사옥을 일으키고, 병인양요·신미양요 등 프랑스 및 미국과의 척양의 무력항쟁에서 승리하여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일본은 물론, 서구 어느 나라와도<NAME> 개방을 시도하거나 허락하지 않을 형편이었다. 1873년 민씨 척족이 정권을 잡고 민씨 척족이 실권을 잡았으나,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일본과의 개국 통상이 이루어지고, 이어 정부의 개화 의지가 표출되면서, 독일의 대한 교섭도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1882년 5월 청나라의 알선으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약칭 조미조약)을 계기로 한독 관계도 급진전하게 되었다. 독일은 조미 수교가 이루어지기 1개월 전에 공사 브란트를 대한 교섭의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빌헬름 1세(Wilhelm Ⅰ)의 교섭 친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를 검토한 조선 정부는 독일과의 수교 의사를 비추기는 하였으나, 양 당사국 간의 직접 교섭을 보류하고 청나라의 참여하에 협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제물포에 도착한 브란트는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1882년 5월과 6월에 각각 조미조약과 조영 조약이 체결되자 북경에서 외교교섭을 벌여 청나라의 알선을 확약 받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전권대신 조영하와 부관 김홍집을 월미도에 정박 중인 독일 함상에서 파견해 독일 전권공사 브란트를 만나고 교섭에 나섰다. 조영하와 브란트는 3일간 교섭을 거쳐 1882년 6월 30일 14개 조로 된 조독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양국 전권대사가 되었다. 하지만 문구가 모호하고 치외법권이 철폐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독일이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자, 이듬해 재일 요코하마 주재 총영사 차페(Zappe,E. )가 서울에 와서 새 조약을 교섭하였다. 이번에는 조선 측이 중국의 알선을 배제하고 직접 협상에 임하여 1883년 11월 26일 수정, 체결된 조약이 비준, 교환되었다. 이것이 조독 수호조약 13관과 선후 속 약으로 당시 양국 전권대사인<NAME>목과 차페 사이에 조인, 체결된 완전한 조독 수호조약이었다. 조독 조약이 체결된 1883년 이미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조선에서 정치·무역·교육·산업·문화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 묄렌도르프(Mllendorff, P. G. von)는 조선 정부에 고용된 정치인으로,<NAME> 독일인 세력이 크게 신장되고 있었다. 그는 1882년 12월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의 해관 및 외교고문으로 부임하여 조선의 문물 개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조러 밀약설의 책임을 지고 협판교섭통상사무·해관 총 세무 사직을 내던지고, 1885년 12월 5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볼터(Wolter,K. )가 책임자로 있는 세창양행은 1884년 4월 인천에서 설립된 독일 무역상사이다. 이 무역상사는 독일의 물품을 수입하여 조선에 판매하였고, 1885년 11월에는 조선 정부에 은화 10만 냥을 차관해 주었다.<NAME>독일부영사 부 들러(Budler, H. )는 1884년 6월 4일 조독 조약에 따라 한국에 왔으며, 이어 10월 14일 총영사 젬브쉬(Zembsch,O. )는 10월 14일에 도착했다. 그렇지만<NAME> 독일 외교관은 끝까지 판리 공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청·일·러 3대국 사이에서 복잡한 국내외 정세가 펼쳐졌고, 조선은 1880년대 초반에 서양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했지만, 각국 외교관들은 이권 획득을 위해 음모와 술책을 써서 조선 왕실에 접근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이해관계가 없으면서도 경제적 무역통상, 광산 채굴을 통해 조독 관계를 밀착시키고 있던 독일은 우선 세계열강과 인접 강대국들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에서 독일이 조선 정부에 중립국 안을 권고한 것은 역사적으로 흥미롭다. 부 들러는 1885년 3월 16일 외무협판 김윤식에게 조선이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을 막기 위한 방도로 영세중립선언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부 들러는 해외의 외교관들과도 접촉했으나 이 문제에 대해 독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처지는 못 되었다. 조선 정부는 그리하여 이 권고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함부르크에서 명예영사로 지낸 마이어(Meyer, E.)가 조선 정부의 허락을 받고 명예영사로 지내다가 1901년 한국 영사관 개관으로 초대 공사로<NAME>훈이 임명되었다. 조독 조약을 통해 우리나라는 독일 문화권이 상당히 넓어졌다. 묄렌도르프는 1888년 5월 다시 조선을 찾았으나, 일본 측의 악선전과 청나라의 오해로 중국으로 되돌아갔다가 브란트와 1887년부터 1898년까지 총영사를 지낸 크리엔(Krien, F. )의 방해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금성·당현의 광산 채굴권을 1896년 4월 조선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사람은 세창양행의 대표 볼 터로서, 조선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던 독일인들이 계속 활동했기 때문이다. 1898년 9월에는 볼 야안(Bolljahn, J. )이 관립덕어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프로이센 제국 빌헬름 2세(Wilhelm II)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친왕(Prinz Heinrich)이 1898년 7월 조선을 방문하여 이러한 조독 관계의 결속을 확인하였다. 하인리히 친왕은 한말의 외교사 가운데 가장 큰 국빈으로 고종을 예방하고 금성 탄광과 관립덕어학교를 방문했다. 1901년 2월 27일부터는 독일 해군 군악대장 에케르트(Eckert, F. )가 조선 왕실 악대장으로 초빙되어 활동하면서, 같은 해 9월 고종황제 50세 탄신 축연에서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하여 연주하기도 하였다. 또한, 궁내부(宮內府)에서 시중을 들면서 서울 정동에 이른바 ‘손탁호텔’을 경영한 손탁(Sontag, A. )과 고종의 시 의(侍醫)로 근무한 분쉬(Wunsch, R. )도 기억될 만한 인물이며, 1909년부터 조선에 진출하여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 선교사들도 한독 관계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처럼 조독 조약 체결 후 활발했던 한독 관계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1906년 다른 외국 공관과 함께 독일 공사관이 철수함으로써 단절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이 직접 독일과 접촉할 수는 없었으나 비공식적인 관계는 지속되었다. 영친왕은 1927년 유럽 여행길에 원수 힌덴부르크(Hindenburg)를 방문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등 많은 유학생들이 독일에 유학했다. 그중에는 독일에 남아 우리 문화를 알리고, 대표작으로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308}}t>를 남긴 이미륵[]과 같은 지식인도 있다. 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광복과 함께 미·소 냉전 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독일은 패전과 함께 열강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미·영·불·소의 분할 점령 상태에 놓였다. 남북한이 1948년에 차례로 정부를 수립하고, 1949년에는 서독과 동독이 각각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한국과 독일은 전형적인 국제정치형 분단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분단국가의 국제정치적 조건과 제약 속에서 한독 관계도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2) 한반도가 서독과 분단된 상황에서 6·25전쟁을 치르고 난 1953년 이후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어 정상적인 한독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서독은 1955년 파리협정으로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서구연합(WEU)에 가입함으로써 전쟁 없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한국과 독일이 서로 국호를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한 것은 1955년 12월 1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1955년 10월 1일에 독일 레마겐(Remagen)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었으나 독일 정부는 그것을 한국 무역대표부로 인정하였으므로 양국 간 정식 외교관계는 1955년에야 재개되었다. 우리 정부는 1956년 8월 총영사관을 쾰른(Kln)으로 옮기고, 독일 정부는 그해 10월 서울에 독일 총영사관을 열었다. 양국은 1957년 3월 5일 총영사관을 각각 공사관으로 승격시켰고, 9월 당시 독일의 수도였던 본(Bonn)으로 공사관을 옮겼다. 이어 1958년 8월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손원일은 같은 해 8월 22일 대한민국 주독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김일환 상공부 장관은 같은 해 독일을 방문하여 경제관계를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에르하르트(Erhard, L. ) 경제상이 같은 해 10월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경제 재건을 약속하였다. 제2공화국을 거쳐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특사 김용식이 독일을 방문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을 설명하고 계속적인 결속을 다졌다. 정내혁 상공부 장관은 같은 해 12월 독일을 방문하여 한국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서에 조인하여 1억 5,000만 마르크의 장기 재정차관을 받았다. 또한, 1962년 1월 서독 정부는 우리 간호사와 광부를 받아들일 것을 합의하여, 우리나라 광부가 독일에 파견된 바 있다. 1964년 1월 특사 김현철이 독일을 방문하여 한독 관계의 결속을 확인하였고, 같은 해 5월 하원의장 게르스텐마이어(Gerstenmeier,E. )가 한국을 방문했다. 이어 8월에는 상공부 장관 박충훈을 단장으로 하는 한국경제사절단이 독일을 방문하여 한 독경제 회담에 관한 의정서·한 독재정 원조에 관한 협정 등을 체결했다. 이상의 경제협력을 통한 한독 관계는 1964년 서독의 뤼브케(L{{%119}}bke)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NAME>를 초청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른다. 이에 대통령 일행은 12월 7일부터 1주일간 독일에 머물며 정상회담을 하고, 재독 한국 교민을 격려하였다. 양국 간의 교역 및 서독의 대한 투자는<NAME> 대통령의 독일 방문을 계기로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1966년 3월에는 경제성 차관 랑케(Ranke)가 방한하여 상공부 장관 박충훈과 제1차 한 독경제 각료회담을 개최하였다. 제2차 경제각료회담은 같은 해 5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장기영이 독일을 방문하여 경제협력 성장관 쉘(Scheel, W. )과 개최한 것이다. 또한 같은 해 9월 29일에는 한독기술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서독의 대한 투자를 용이하게 하였다. 한편 1967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뤼브케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한독 외교가 맺은 친선을 과시한 바도 있는데, 이는 중앙정보부가 동베를린 거점 북한 대남 공작단 사건으로, 국내외 교수와 학생·예술인 등 315명이 연루된 사건이다. 이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우리나라 정부의 안보 우선주의와 독일 정부의 인권문제 중시의 태도가 대립되어 상당한 긴장을 야기했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대한 인식(對韓認識)이 악화되어 우리의 대 유럽 외교, 특히 대독 경제 외교가 일시적으로 중대한 시련에 봉착하였다.
1969년 1월에는 동베를린 사건을 둘러싼 양국 관계를 협의하기 위해 서독 대통령의 특사로 외무차관 프랑크(Frank, P. )를 단장으로 한 특별사절단이 방한하였다. 하지만 양국의 의견이나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그 후 서독은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정치정세에 냉담하게 대처하게 되었다. 통일원 장관<NAME>이 1970년 2월 독일을 방문하여 동서독 분단상과 통일 노력을 시찰하고, 외무상 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부산직업학교 설립에 관한 약정서와 부산직업학교 설립에 관한 약정서에 서명을 하였다. 1972년 11월에는 한독 비자면제협정과 한 독재정 원조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3500만 마르크를 차관하였다. 양국 간 경제기술협력 현황을 살펴보면, 1959년부터 1982년까지 7억 9,621만 5,000달러의 차관 도입과 2,405만 6,000달러의 합작투자, 10만 7,000달러의 기술도입 건수가 있었다. 현재에 이르고 있는 차관 규모는 1984년 12월 공공차관 2억 7,300만 달러, 상업차관 6억 600만 달러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서독에 섬유류·선박·혁제품·전기부품 등을 수출하였고, 기계류·유기화합물 등을 수입하였다. 대 서독 수출액은 9억 2,400만 달러, 수입액은 7억 9,400만 달러였으며, 1988년에는 각각 23억 6,780만 달러와 20억 7,399만 달러로 증가했다. 재독 교민은 1995년 1월 말 기준으로 1만 7,494명으로 직업별로는 전문직 종사자·기술자·학생·상업 종사자 등의 순이었다. 한독간의 친선단체로는 한독의원협회와 한독협회가 있으며, 그 밖에 한독 민간경제협력위원회, 한 독법률 학회, 한독경상학회 등이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더욱이 1983년은 한독수교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양국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고, 쉘(Scheel, W. )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친선사절단도 교환되었다.
1980년대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한독 관계는 중요한 무역 상대국으로 더욱 긴밀해져 갔다. 1997년 당시 144억 마르크에 이르는 총 교역량은 지난 10년간 2배 이상의 증가를 보여 준다. 독일과 한국의 상대국에 대한 자본 투자도 늘어갔다. 현재 대한 투자 제1위의 유럽 국가인 독일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의 분단선이 개방된 뒤 대통령 노태우가 서독을 방문하였고 폰 바이체커(Von Weizs{{%129}}keR, R.)가 한국을 방문했다. 또 1993년에는 헬무트 콜(Helmut Kohl) 연방 수상이 방한하였고, 1995년 3월에는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이 방독하였다. 1997년 10월에는 킨켈(Kinkel, K. ) 연방 외무장관이, 1998년 2월에는 바이겔(Waigel, T) 연방 재무 장관이 방한하였으며, 1998년 9월에는 헤르초크(Roman Herzog) 연방 대통령이 방한하였다. 한편, 한독간의 개발협력의 차원에서 보면 진행되는 것과 종료하는 것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의 개발사업에 독일은 1962년부터 참여하여 총 13억 마르크를 지원하였다. 한국의 개발 수준과 함께 1982년도에 재정적인 협력관계는 단절되었고, 1990년도 중반에 기술협력은 전부 종료되었다. 한독 협력 사업의 성공사례인 부산 한독경영정보여자고등학교는 1965년 독일의 가톨릭 원조 기관인 미제 레오(MIZEREO)의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현재는 한국 측에서 경영하는 이 학교에서 여학생 3,000명이 양재·디자인·호텔조리·병원급식 등 실업교육을 받아왔다. 한독간의 문화 관계는 1972년에 체결된 한독 문화협정에 기초한다. 학술·영화·음악·문학·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확대되어 왔다. 현재 독일에는 2,3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살고 있고, 5,000명에 이르는 한국 유학생이 독일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각 지역의 재독한인회, 본(Bonn)의 독한 협회(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서울의 한독협회,<NAME> 독일문화원(Goethe-Institut)과 각종 학회 및 친목회, 동창회들이 한독 문화교류를 활성화해 나가고 있다. 서독은 북한과는 공식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정경분리 정책을 적용하여 자유무역<NAME>에 의한 민간 상사의 거래를 허용하고 있었다. 무역은 주로 현금결제의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업차관에 의한 합섬사·마그네사이트·제련공장·통신기재·비료 공장 등 플랜트 수출이 있으며, 재정차관은 해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적극적인 대 서독 접근 책으로 인하여, 1978년에는 북한 무역공사 요원 11명이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197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국제학생연맹 사무국 북한위원인 강현 덕이 독일 사회주의 노동청년회에 참석하였고, 1980년에는 북한 금강은행 총재<NAME>이 대독 부채 상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독일을 방문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의 대 서독 수출입 현황을 살펴보면, 1973년에 수출 1500만 달러, 수입 3천8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으며, 1988년에 와서도 수출 1억 350만 달러, 수입 1억 2330만 달러로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의 주요 수출품은 각종<NAME> 및 토사류·납·아연·모피·구리, 기타 반(半) 제품, 정밀광학제품·철판 등이며, 주요 수입품으로는 전기제품·자동차·기계류·화학제품 등이다.(3) 동독과 우리나라 동독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국제 역학관계 속에서 전형적인 분단국가가 된 뒤 동독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서로가 외교 상대자로서 교섭할 수 있는 여건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비공식적이거나 국가적 차원이 아닌 수준에서만 교류가 행해져 왔을 따름이다.
1979년 9월 10일부터 소포우편물 교환을 개시하였고, 1977년 6월 인도네시아 주재 동독대사관 주최의 건국기념 리셉션에 우리나라 대사가 최초로 초대받아 참석하였다.
동독 당국은 1985년 6월 동베를린의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할 한국 대표단의 편의를 위하여 서베를린 주재 한국총영사관 직원 3명에게 입국사증을 발급하였다.
같은 해 6월 5일에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장 노태우(盧泰愚)가 동독 체육장 관인 에 발트와 만나서 단독회담을 가졌다. 체육교류는 동독 파견이 4회이며, 서울초청이 2회이다.
파견은 국제복싱연맹 총회(1981)·세계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1983)·동독 체육시설 시찰(1983)·동독 비교 체육 연구프로그램 참가(1983)이며, 초청은 국제복싱연맹 부회장(1983)·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입상 우수선수 초청 시범경기(1985) 등이 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경기 대회에는 372명의 동독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현재 동독은 1954년 3월 공관을 설치하였고, 1990년 10월 통독 이전까지 북한과 단독 수교 상태였다. 또한, 1984년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김일성이 동독을 방문한 바 있다. (1) 문화사적 관계
우리 문화가 독일에 알려지고 독일문화 속에 자리한 과정은 그 특징적 성격에 따라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째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예비 시기, 둘째 19세기 후반에서 1910년까지의 소개 시기, 셋째 일제강점기의 준비 시기, 넷째 광복 이후의 정착·발전 시기가 그것이다. 그 전체 흐름을 보면 17세기 후반부터 200년 동안 독일에 한국 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이 전해지다가, 1883년 한독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교역 및 한국 문화를 올바르게 알리려는 노력이 독일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몇몇 학자들에 의해 그러한 노력이 전문화되었다. 분단의 아픔을 겪은 두 나라는 이제 남북한 사이에서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왕성한 문화교류·교역 등을 가져 독일 내 한국 문화는 한층 확대, 정착되어 가고 있다. 독일에 한국 사회와 문화가 단편적으로나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 마르티니(Martini, M. )와 하멜(Hamel, M. )의 글에 의해서이다. 마르티니는 남부 티롤 출신의 예수회 신부로 17세기 중엽 중국에 간 다음, 165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동아시아 지도책을 네덜란드어로 출판하였다. 그 책의 독일어 번역판이 1655년 빈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다녀간 일은 없으나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인과 한국인이 쓴 한국에 관한 글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여 ≪한반도와 그 경치·도시·관습 및 식물에 관한 마르티니의 보고서 Martini Martins Bericht von der Halbinsel Korea, ihren Landschaften, St{{%129}}dten, Sitten und Gew{{%129}}chsen ≫를 남겼다. 그에 이어 1668년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하멜의 표류기가 1672년 독일어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단행본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마르티니의 글 및 동아시아에 관한 다른 보고서와 함께 아르놀트(Arnold, C. )가 편집한 ≪세 강대 왕국 일본·샴·한국에 대한 서술 Beschreibung dreier m{{%129}}chtiger K ӧ nigsreiche, Japan, Siam und Corea ≫에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이 쓴 글은 일본이 독일에 알려지기 20년 전에 우리나라 국적을 독일에 알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선원의 표류기가 다른 하나는 간접 자료에 의한 것이고, 독일인 지볼트(Siebold, K. T. E. von)의 글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의사이자 학자로서 일본에 7년간 머물며 학교를 세워 서양학문을 가르쳤다. 한국에 간 적은 없지만, 일본에 표류해 온 한국인을 직접 만나 한글 자모를 배우는 등 한국에 관한 보다 학술적인 조사를 수행하였다. 네덜란드에 돌아온 그는 1831년 라이덴에서 일본기 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을 독일어로 출판했고, 1887년 뉘른베르크에서 증보판으로 나왔다.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섯 장에는 한국의 관료 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이후 20세기 중엽까지 한국에 관한 단행본을 쓴 저자들은 거의 다 지볼트의 글을 하나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우리나라는 기존의 폐쇄적 태도를 벗어나 여러 분야에 걸쳐 독일과 공식적·공개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에 따라 1910년까지의 소개 시기에는 한국 문화가 독일에 적극적으로 소개되는가 하면 독일인에 의한 본격적인 여행기들이 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중심인물은 마이어(Meyer, E. )와 세창양행이다. 함부르크 출신인 마이어는 1881년 홍콩에 마이어상사(Meyer, 중국명 )를 세우고 1884년에는 제물포에 세창양행을 세워 볼터(Wolter,C. )를 지사장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그는 1886년 3월 주독 조선 총영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마이어는 이제 상업적 관심뿐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세창양행을 통해 수집한 한국 물품을 1889년 함부르크 산업박람회에 전시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의 문화·미술·자연 산물 등이 주요 전시분야로 1894년 겨울 함부르크 미술공예 박물관에서 한국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마이어의 이와 같은 한국 문화 소개 노력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더욱 확대되거나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유럽에서 소장 물품을 통한 최초의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소개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한편, 우리나라와 독일 사이의 외교관계가 맺어짐에 따라 독일인 여행가·기자들의 방문과 함께 그 여행 보고서가 출판되어 한국 사회와 문화가 독일에 널리 알려졌다.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서 1895년 헤세-바르 테크(HessE-Wartegg, E. von. )는 서울에 관한 최초의 상세한 여행기인 코리아 Korea를 출판하였다. 세창양행 지사장인 볼 터는 1901년 <한국의 옛날과 현재 Korea, einst und jetzt>이라는 논문을, 독일 쾰른 신문의 특파원 겐테(Genthe, S.)는 세창양행 소유의 강원도 금성 당고개의 금광을 둘러보았다. 하인리히 친왕이 1899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의<NAME>를 함부르크 코레스폰덴트 Hamburgischer Korrespondent 신문에 두 번에 걸쳐 실었다. 유럽인들은 동아시아에서의 유럽 열강의 이해관계 때문에 1904년 러일전쟁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에 따라 독일어로 두 권의 한국 소개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한국을 방문한 이들이 쓴 것이다. 차벨(Zabel,R. )은 1906년에 펴낸 ≪러일전쟁 동안 한국에서 보낸 나의 신혼여행 Meine Hochzeitsreise durch Korea w{{%129}}hrend des Russisch ― Japanischen Krieges ≫에서 러일전쟁과 그것이 한국에 끼친 영향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폴란드인 지에로스체브스키(Sieroszewski,W. )는 지난해 베를린에서 한국 Korea이라는 여행기를 출판하였다. 이 밖에 크뢰벨(Kroebel,E.)의 1909년 베를린판 나는 어떻게 한국 황실에 왔나 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1909)가 있는데, 이 책은 대한 제국의 궁궐에서 근무하며 궁중생활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들에 의한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소개는 체계적이거나 객관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유럽 중심적 편견에 의한 여행기 성격이 강하지만 그때까지 은둔의 나라로 여겨졌던 한국을 독일인에게 널리 알린 업적이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독일인들에 의해 한국 문화의 소개나 연구는 앞 시기의 관심을 바탕으로 전문화되었다. 한국교회와 한국교회를 아름답게 소개한 이는 분도회의 총 원장이었던 베버(Weber, N. )로 1915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Im Lande Morgenstille라는 책을 저술한 사람이다. 에카르트(Eckardt, A. ) 신부는 1908∼1929년 동안 분도회의 선교사로 한국에서 근무한 후 브라운슈바이크 대학교에서 1931년 <한국의 학교 제도 Das Schulwesen in Korea>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미 1923년에 ≪한국어 문법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 ≫, 1929년에 ≪한국미술사 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 ≫, 1930년에 ≪한국의 음악 Koreanische Musik ≫을 출판하였고, 또한 뮌헨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니, 독일에서의 한국학의 출발이 그로부터 비롯하였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브라운슈바이크 대학교의 라우텐자흐(Lautensach,H. ) 교수는 1933년 한국의 지형을 연구하고 돌아가 한국의 지리 및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1945년에는 한국 Korea이라는 명저를 냈다. 한편, 김중세·이의경(:미륵)·도유호·안호상·김재원 등 수많은 학생들이 유학한 곳은 당시 비자를 취득하지 않아도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독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자연과학·철학·예술 등을 전공하였기에 한국 문화나 역사를 연구하거나 소개하지는 못하였지만, 유학 기간 동안 생활 속에서 한국 문화의 특징적인 면을 독일 사회에 내보였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들 중 이의경의 경우는 특기할 만하다. 그는 1920년 독일로 건너가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곧바로 한국 관련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전후 독일 문단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308}}t>는 1946년에 출판된 것으로, 그 이전에도 <어느 한국 골목의 저녁>·<놀부와 흥부>·<주인과 하인> 등을 쓴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독일에는 <유령·동물·계모 이야기>·<바둑 놀이 및 그 밖의 한국 전설>·<미륵불> 등의 많은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그는 문필 생활 외에도 만년에 뮌헨대학교에서 한학과 한국문학을 강의하며 바우어(Bauer) 등<NAME> 동양학자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한독 관계사의 암울한 시기에 독일에서 그는 문학을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리고 교육면에서는 한국학의 씨앗을 뿌린 귀중한 인물이었다. 광복 이후 1950년대에 들어와 한국과 서독 사이의 외교관계가 재개되면서 한국 문화는 서독 안에 정착되고 발전한다. 이 시기에는 특히 한국인들이 독일로 대거 진출한 것이 특징이다. 광부와 간호사의 취업, 유학생의 급증, 수출상사의 진출 등으로 1981년 말에는 거의 2만 명의 한국인들이 서독에 거주하며 하나의 소수민족문화를 자랑할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다<NAME>미군과 결혼했다가 나중에 남편의 서독 전보로 그곳에 간 한국 여성이 1981년 말 1,200명을 넘었다. 서독에 거주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이들이 심어놓은 서독 안의 한국 문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소수민족문화로서 한국의 생활문화가 서독 사회와 문화에 정착한 것과 소수민족문화로서 서독 사회의 문화에 기여한 것이 그것이다. 후자의 예로는 윤이상(尹伊桑)이 한국의 음악세계를 바탕으로 오페라 나비의 춤을 작곡한 것이라든지, 축구선구 차범근(車範根, 차붐)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함으로써 한국을 크게 알리고 한국인의 자긍심을 올려준 일, 바둑전문 기사 이창세(李昌世)에 의한 한국 바둑문화의 보급, 태권도 사범들에 의한 태권도 보급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직접적이며 활동적이다. 이들은 직장과 연구·사업기관에서 직접 서독 사람과 접촉하면서 생활 속에서 그들에게 한국인과 그 문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한국 문화를 독일 안에 정착, 발전시켜 나갔다. 한국간호사들은 한국 여성의 성실·겸손·지혜·따뜻함 등의 덕목을 발휘하여 병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 광부들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면모도 많이 알려졌다. 한국인들은 또한 일터에서 벗어나 놀 때 한국인·서독인을 가리지 않고 두루 한데 모여 푸짐한 음식을 차리고 번갈아 노래하며 즐겁게 놀아 그 특징적인 놀이문화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곳곳에 차려진 한국 음식점과 식품점을 통해 김치 등 전통 한국 음식을 독일식 생활문화에 뿌리내리기도 하였다. 한편, 정부기관을 통한 홍보와 다양한 문화교류활동에 의한 한국 문화의 소개, 학술적인 연구, 출판에 의한 한국 이해의 심화 등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그 사이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으로 인해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한때 좋지 않았다.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된 뒤 지금의 한국인은 독일의 한 소수민족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 문화를 더욱 정착,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2) 독일 유물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역사적으로 지방분권이 발전해 온 나라이다. 따라서 각 주와 도시·마을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다. 19세기 말 이래로 다양한 관계로 한국에 다녀간 독일인들이 많기에, 이들이 수집한 한국 문화에 관한 유물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구입이나 기증을 통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은 1990년 통독 이후 70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베를린·드레스덴·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 브레멘 해외 박물관,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 함부르크 미술공예 박물관 등이 100년 이상 되었다. 또한, 대도시의 박물관·미술관은 비교적 많은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함부르크는 무역항으로서 외국과의 교역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고, 세창양행의 사장이자 주독 조선 총영사인 마이어의 고향 및 활동지였기에 한국 유물이 가장 많이 수집되었다. 함부르크 민족학(인류학) 박물관은 그 대표적인 곳으로, 이곳 동양학부에 대략 3,000점이 넘는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민족학 박물관은 본래 각 민족의 생활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므로, 한국 유물로는 복식·종교의례품·놀이기구·악기·부엌용구·수공업제품·도자기·종이류·잡화·서화·책·사진·지도 등이 있다. 이 중 기산 풍속도 79점과 허련의 8폭 병풍은 주목할 만하다. 전자는 19세기 말의 풍속화가 김준근이 한국인의 문화와 생활 모습을 묘사한 병풍과 함께 주로 마이어에 의해 수집되어 이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들 그림을 포함하여 이들 그림 외에 표구 처리된 서화는 1980∼1981년 사이에 한국에서 초빙된 표구사 김용복·김남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동아시아의 표구 문화가 한국인에 의해 유럽에 처음 들어온 사례이다.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의 민족학 박물관은 한국 유물 수집의 역사가 꽤 긴데도 1980년대까지는 동독에 위치하여 그 유물의 수나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또 베를린에 있는 미술공예 박물관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비해 서베를린의 여러 박물관에서는 한국 유물이 그 특성에 따라 수집, 전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동아시아 미술 박물관에는 도자기·서화 등의 유물이 있고, 민족학 박물관에는 인쇄와 생활문화를 주로 다룬 유물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미술공예 박물관에도 도자기를 비롯한 한국 유물이 일부 있다. 한편, 함부르크의 미술공예 박물관과 쾰른의 동아시아 미술 박물관은 한국미술공예 관계의 유물 소장으로 꼽힌다. 이 두 박물관은 1984년 한독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미술 5천 년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어 이 분야에서도 이름이 높다. 전자는 특히 19세기 말 마이어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국전시회를 열었던 곳으로, 수량은 많지 않지만 도자기류·서화·공예품을 소장하고 있다. 후자는 1980년대 서독에서 동아시아 미술 관계로 가장 전문적이고 활동적인 박물관이다. 중국·일본에 비하여 한국 유물의 수는 적으나 고서화와 불상 등의 유물이 있고, 무엇보다 한국 국립박물관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여러 차례 한국미술 특별전을 유치, 개최하여 한국 문화의 소개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 밖에 브레멘의 해외 박물관, 프랑크푸르트의 미술 수공품 박물관, 슈투트가르트의 민족학 박물관, 함부르크의 민족학 박물관 등 큰 도시의 박물관에는 한국 유물이 거의 없다. 이 중 뮌헨 민족학 박물관은 기산 풍속도 등 여러 서화류와 민속 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특히 에카르트 신부가 수집한 것이 눈길을 끈다. 독일의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는 이처럼 미술품에 치중하기보다는 19세기 말 이래의 한국의 민속 및 공예품·사진·지도 등이 수집, 소장되어 있어 한국의 생활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 강조된 면을 볼 수 있다. 1990년 통일 독일을 한 뒤 독일은 자국의 정치와 경제 안정에 힘을 쏟고 있으며 1999년 말 현재도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대외관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통독 이후의 우리 문화도 더욱 독일인의 생활과 밀접하게 전개될 것이다.
(3) 한국연구 및 출판
일제강점기에 이의경과 에카르트에 의하여 뿌리내려진 독일의 한국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서독과 동독에서 각기 다른 길로 전개되었다.
서독에서는 1950년대 먼저 베를린대학교·뮌헨대학교·함부르크대학교·본 대학교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학과의 부속 강좌로 존속하였고, 한국학 전공이 아닌 한국 유학생에 의하여 담당되어 한국학으로 성장하는 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에카르트·카로(Karow, O. )·레빈(Lewin, B. ) 등은 서독에서 한국학의 초석을 다진 학자들이다. 에카르트는 1957∼1974년 동안 뮌헨대학교에서 한국학 강좌를 담당하기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계속하여 1955년 ≪한국의 인삼 Die Ginsengwurzel ≫을, 그리고 이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60년 ≪한국의 역사와 문화 KoreaGeschichte und Kultur ≫라는 저서를 내었다. 한국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9년 기념논문집 코레 아니카 Koreanica가 증정되었다. 한독협회는 1956년에 그를 기념하는 에카르트 메달을 제정하여 한독 문화교류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고 있다. 카로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중국학과 한국학을 가르쳤으며, 본 대학에서는 차 헤르트(Zachert)가 한국학 강좌를 맡아오다가 중단하였다. 한국학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 정부와 일반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1964년 동아시아학의 정책대학으로 개편된 보쿰 대학교에는 일본학 교수인 레빈의 지도 아래 아이케마이어(Eikemeier,D. )와 자세(Sasse, W. )가 서독에서 처음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이케마이어는 ≪연암 박지원 사상에서의 정치적 요소 Die Politischen Elemente im Denken Yonam Pak Chiwon ≫를 비롯, ≪장좌리 문서 The Documents from Changjwari ≫라는 저서를 내었고, 1980년 서독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한국학과를 개설한 튀빙겐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여 제자 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보쿰 대학교의 한국학 전공자들은 그 외에도 한국의 언어·문화·역사 등에 걸쳐 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한국의 학자들과도 긴밀한 학문적 교류를 하고 있다. 보쿰의 한국학 학도들이 이기문의 개정 국어 사 개설을 번역하여 1977년 한국어사 Geschichte der Koreanischen Sprache로 출판한 것도 그러한 열의를 보여준 결과이다. 한편으로 독일어권 한국학 협회, 독한 협회 등에서 진행하는 각종 한국연구프로그램에 우리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다(1992∼1999). 함부르크는 서독 한국학의 또 다른 중심지다. 함부르크의 한국학은 다른 도시에 비해 다양하다. 이 학교에는 이미 중국학과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어 있고,<NAME>은 독일 외무성 관계의 아시아학 연구소 소속으로 계간 북한 North Korea Quarterly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다. 민족학 박물관의 동양학 부장인 프루너(Prunner,G.)는 1975∼1976년 한국에서 신흥종교에 관한 현지조사와 자료를 수집한 후,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신흥종교 자료 센터를 동양학부 부설기관으로 개관하였다. 그는 한국 신흥종교와 무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연구원이었던 조흥윤은 한국의 무 Koreanischer Schamanismus를 박물관 총서로 출판하였다. 이곳에서는 1984년 한독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특별 전시회가 개최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 밖에도 서독에는 한국학에 관한 수많은 개별 연구와 논저 및 학문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 몇몇 예를 들면 후베(Huwe,A. )는 1979년 ≪한국의 동화 M{{%129}}rchen aus aller Welt, Korea ≫를, 멘데(MendE, E. von. )는 1982년에 ≪12세기까지의 한반도 안의 국가들과 중국 China und die Staaten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bis zum 12. Jh. ≫을 출판하였다. 본 대학교에서는 한국학을 강의하고 세종문고를 세운 구기성이, 한 Koreanische Studien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서독 한국학 연구의 이러한 열기에 부응하여 1979년에는 보쿰에서 유럽 한국학자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동독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서독과 동독으로 분리된 이후 초기에는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학을 중심으로 점차 정비되어 갔다. 융커(Junker, H. F. )는 원래 이란 학자로, 1958년 묄렌도르프 미망인 소장의 기산 풍속도를 자료로 하여 기산, 옛 한국 그림들 Alte Koreanische Bilder(기산, 옛 한국 그림들 Alte Koreanische Bilder)을 출판하였으며, 베를린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다. 또한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 온 동포가 라이프치히대와 베를린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정도였다. 1960년대에는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아시아·아프리카 등의 이른바 피지배 국가에 대한 연구가 집중되어 1968년 대학 개편 때 큰 대학에 배분되었다. 이에 따라 베를린대학교(현재 훔볼트 대학교)가 아시아연구를 맡아서 아시아학부를 만들었다. 이 학부에는 몽고 학과·일본학과·중국학과·티베트 학과와 함께 한국학과가 개설되고, 중국학·일본학과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중국학·일본학과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한국학이 시작되었다. 한국학과의 교육 연한은 5년으로, 1년간은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2·3학년 차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법을, 4·5년 차에는 북한에 가서 현지에서 2년간 한국학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귀국하면 학사를 취득한다. 헤르만(Herrmann) 강사와 괴텔(Gthel,I. )·렌트 너(Rentner)·피히테(Pichte) 등 3명의 여자 교수가 1980년대 이 학과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 괴텔을 제외한 세 명은 융커의 제자로 렌트 너는 한국문학을, 피히테는 정치와 문법을, 헤르만은 언어와 문법을 가르쳤고, 괴텔은 이 학과의 과장직을 맡으면서 한국 역사를 주로 가르쳤다. 괴텔은 1978년에 한국사 Geschichte Koreas를, 1988년에 남한의 역사 Geschichte S{{%119}}d-Koreas를 출판했다. 한편, 1992년부터 1999년 말 현재 한국 국제 교류재단의 주관하에 한국학 강좌를 운영지원하고 있다. 튀빙겐대, 트리어대, 파사 우대, 프랑크푸르트 괴테대, 훔볼트 대 등이 대표적인 대학이다. 또한 한국학 관련 객원 교수제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 훔볼트 대 등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뮌헨대학교는 한국학 관련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만큼 관련 자료를 체계화하는데 드는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1992∼1999). 이어 1999년에는 한국학 전공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제도를 신설,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한국학 연구 외에, 1986년부터 북한으로부터 수백 명의 유학생들이 동독으로 몰려왔고, 1990년 동서독의 통일로 생활 속에서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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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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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인구 8085만 4408명(2015년 현재)이고, 면적은 35만 7022km2이고 인구는 8085만 4408명이다. 인구밀도는 km2 당 228명이다. 인구의 대부분이 게르만족이고, 유태인·슬라브인·위그노인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 언어 표준은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 중 일반적으로 고지독일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지만, 16세기에 루터의 성서번역으로 신고지 독일어가 확립되면서 방언의 차이가 많이 줄었다. 신교는 주로 북부와 동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51%가 믿고 있으며, 구교는 주로 남부와 서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48%가 믿고 있다. 기후는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가 만나는 형태이다. 우리나라의 대 독일 수출액은 6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1955달러이며, 자동차·무선전화기·선박 등 주요 품목의 수출액은 210억 달러, 자동차·직접회로반도체·자동차부품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수출액은 2015년 현재 3조 4000억 달러, 수입액은 210억 달러이다. 독일이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프랑크족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프랑크왕국이 세워진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 통합의 제반 과정을 완수한 칼 대제가 죽은 뒤 동·서 프랑크로 분열되었으나, 오토 1세에 이르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13세기 전반까지 황제 시대가 지속된다. 그렇지만 제후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공 위 시대를 거쳐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가 제위를 계승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Augsburg)는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독일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뒤, 기사전쟁·농민전쟁·종교전쟁 등을 거쳐 1555년에 완성된다. 독일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적 평화가 실현되었지만, 연방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정치적·경제적으로 분산화·무력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는 독일 통일 운동의 탄생을 가속화시켰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회의를 거쳐 독일의 민족운동은 독일연방으로 성과를 냈으나,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스의 제3제국을 경험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 연합국의 점령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동서 대립의 세계정세 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영국·프랑스 관리지역에는 서독이, 소련 관리지역에는 동독이 성립되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은 1949년 5월 23일 통일까지의 잠정헌법으로서 기본법을 제정, 공포하고, 그 해 9월 21일에 국가를 수립하였다. 동독은 1949년 10월 7일 인민 회의를 열고 정부형태를 내각책임제로 하고, 의회는 양원제를 채택하였다. 의회는 단원제였고 인민 회의가<NAME>상의 국가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1969년 대통령제가 폐지된 후 국가 평의회는 의회 해산·총선거 실시·법령 공포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내각에 해당하는 각료 평의회는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5개 정당의 연립정권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단독정권이었다.
1955년 서독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맹하자, 동독도 같은 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가맹하여 ‘두 개의 독일’을 굳히는 길로 나아갔다.
이어 1961년 9월에는 동·서독의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동독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1969년 서독에 브란트 정권(Brandt, W. 政權)이 등장하여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치 아래 ‘1민족 2국가’라는 현실 정책을 추구하면서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 동·서독은 관계<NAME>를 위한 기본 조약에 조인하여 현 국경선을 상호 승인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동·서독이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독일 민족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 냉전체제의 해빙과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1990년 10월 3일 동독 지역을 흡수 통합하여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 국가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1949년 5월 23일에 제정된 기본법(Grundgesetz)에 기초하여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으로 법치주의에 의한 자유 주위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연방 대통령을 둔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은 연방 대통령 선출 특별위원회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한다. 이 위원회는 연방 위원과 주(州)의 국민대표<NAME>로 구성된다.
연방 수상은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며, 자신의 책임 아래 각 부처 장관을 제청하고 정책을 수행하여 나간다. 사법부는 연방제의 특성에 맞도록 각 주의 법원제도를 갖추어, 5개 연방 차원의 법원, 즉 연방 대법원·연방행정법원·연방 재정 법원·연방 사회 법원·연방노동 법원 등이 있다. 연방헌법재판소(Bundes Verfassungsgericht)는 모든 헌법기관에서 독립적인 최고의 법원으로 헌법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1998년 9월 27일, 이제까지 연립정부를 이루던 기민 당(CDU/CSU)과 자민당(FDP)이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16년간 집권해 온 ‘통일 수상’ 콜(Helmut Kohl)이 물러나고 사민당(SPD)의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새 수상이 되어, 통일 이후의 실업문제와 사회연대, 환경 및 조세정책을 새롭게 실천하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경제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주도적 국가이다.(1) 분단 이전의 독일과 우리나라
독일과 한국의 첫 접촉은 고려 시대의 염제신(廉悌臣)이 1354년 원나라 조정에서 프랑크 제국의 사신과 만난 일에서 시작된다.
문헌상으로 독일이 처음 알려진 것은 1614년(광해군 6)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였는데, 이수광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독일인국(獨逸人國)은 백옥(白玉)으로 성을 쌓는 나라이다”라는 짧은 기록에서였다. 30여 년 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독일인 신부 샬(Schall von Bell, J. A. , )과 교분을 맺었으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별다른 교섭을 하지 않았다. 1832년(순조 32)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에 승선한 독일인 목사 귀츨라프(Gutzlaff, K. F. A.)가 충청도 해안에서 선교를 시도했으나 조선 관리의 완강한 거부로 되돌아갔다. 조선은 기독교 금압정책과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독일의 프로이센 제국은 1860년대에 들어와 극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하고 있던 1866년(고종 3)에 중국·일본을 드나들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 E. J. )는 영국 상선 로 나호에 승선, 내한하여 통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뒤, 그 해 다시 엠페러 호로 재입국하였으며, 1868년에는 차이나 호로 세 번째 입국하여 아산만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을 일으켜, 당시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불을 붙이는 계기만 만들었다. 또한 1870년에는 주일 독일대리공사 브란트(Brandt, M. A. S. von)가 국가적 차원에서 의도적인 입국 교섭을 시도한 적이 있다. 브란트는 1870년 5월 3일 독일 군함 헤르타호에 탑승하여 부산에 입항하여 대한 통상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공포로 위협사격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 정부는 대원군 섭정 아래 위정척사의 일환으로 병인사옥을 일으키고, 병인양요·신미양요 등 프랑스 및 미국과의 척양의 무력항쟁에서 승리하여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일본은 물론, 서구 어느 나라와도<NAME> 개방을 시도하거나 허락하지 않을 형편이었다. 1873년 민씨 척족이 정권을 잡고 민씨 척족이 실권을 잡았으나,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일본과의 개국 통상이 이루어지고, 이어 정부의 개화 의지가 표출되면서, 독일의 대한 교섭도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1882년 5월 청나라의 알선으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약칭 조미조약)을 계기로 한독 관계도 급진전하게 되었다. 독일은 조미 수교가 이루어지기 1개월 전에 공사 브란트를 대한 교섭의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빌헬름 1세(Wilhelm Ⅰ)의 교섭 친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를 검토한 조선 정부는 독일과의 수교 의사를 비추기는 하였으나, 양 당사국 간의 직접 교섭을 보류하고 청나라의 참여하에 협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제물포에 도착한 브란트는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1882년 5월과 6월에 각각 조미조약과 조영 조약이 체결되자 북경에서 외교교섭을 벌여 청나라의 알선을 확약 받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전권대신 조영하와 부관 김홍집을 월미도에 정박 중인 독일 함상에서 파견해 독일 전권공사 브란트를 만나고 교섭에 나섰다. 조영하와 브란트는 3일간 교섭을 거쳐 1882년 6월 30일 14개 조로 된 조독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양국 전권대사가 되었다. 하지만 문구가 모호하고 치외법권이 철폐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독일이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자, 이듬해 재일 요코하마 주재 총영사 차페(Zappe,E. )가 서울에 와서 새 조약을 교섭하였다. 이번에는 조선 측이 중국의 알선을 배제하고 직접 협상에 임하여 1883년 11월 26일 수정, 체결된 조약이 비준, 교환되었다. 이것이 조독 수호조약 13관과 선후 속 약으로 당시 양국 전권대사인<NAME>목과 차페 사이에 조인, 체결된 완전한 조독 수호조약이었다. 조독 조약이 체결된 1883년 이미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조선에서 정치·무역·교육·산업·문화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 묄렌도르프(Mllendorff, P. G. von)는 조선 정부에 고용된 정치인으로,<NAME> 독일인 세력이 크게 신장되고 있었다. 그는 1882년 12월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의 해관 및 외교고문으로 부임하여 조선의 문물 개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조러 밀약설의 책임을 지고 협판교섭통상사무·해관 총 세무 사직을 내던지고, 1885년 12월 5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볼터(Wolter,K. )가 책임자로 있는 세창양행은 1884년 4월 인천에서 설립된 독일 무역상사이다. 이 무역상사는 독일의 물품을 수입하여 조선에 판매하였고, 1885년 11월에는 조선 정부에 은화 10만 냥을 차관해 주었다.<NAME>독일부영사 부 들러(Budler, H. )는 1884년 6월 4일 조독 조약에 따라 한국에 왔으며, 이어 10월 14일 총영사 젬브쉬(Zembsch,O. )는 10월 14일에 도착했다. 그렇지만<NAME> 독일 외교관은 끝까지 판리 공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청·일·러 3대국 사이에서 복잡한 국내외 정세가 펼쳐졌고, 조선은 1880년대 초반에 서양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했지만, 각국 외교관들은 이권 획득을 위해 음모와 술책을 써서 조선 왕실에 접근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이해관계가 없으면서도 경제적 무역통상, 광산 채굴을 통해 조독 관계를 밀착시키고 있던 독일은 우선 세계열강과 인접 강대국들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에서 독일이 조선 정부에 중립국 안을 권고한 것은 역사적으로 흥미롭다. 부 들러는 1885년 3월 16일 외무협판 김윤식에게 조선이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을 막기 위한 방도로 영세중립선언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부 들러는 해외의 외교관들과도 접촉했으나 이 문제에 대해 독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처지는 못 되었다. 조선 정부는 그리하여 이 권고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함부르크에서 명예영사로 지낸 마이어(Meyer, E.)가 조선 정부의 허락을 받고 명예영사로 지내다가 1901년 한국 영사관 개관으로 초대 공사로<NAME>훈이 임명되었다. 조독 조약을 통해 우리나라는 독일 문화권이 상당히 넓어졌다. 묄렌도르프는 1888년 5월 다시 조선을 찾았으나, 일본 측의 악선전과 청나라의 오해로 중국으로 되돌아갔다가 브란트와 1887년부터 1898년까지 총영사를 지낸 크리엔(Krien, F. )의 방해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금성·당현의 광산 채굴권을 1896년 4월 조선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사람은 세창양행의 대표 볼 터로서, 조선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던 독일인들이 계속 활동했기 때문이다. 1898년 9월에는 볼 야안(Bolljahn, J. )이 관립덕어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프로이센 제국 빌헬름 2세(Wilhelm II)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친왕(Prinz Heinrich)이 1898년 7월 조선을 방문하여 이러한 조독 관계의 결속을 확인하였다. 하인리히 친왕은 한말의 외교사 가운데 가장 큰 국빈으로 고종을 예방하고 금성 탄광과 관립덕어학교를 방문했다. 1901년 2월 27일부터는 독일 해군 군악대장 에케르트(Eckert, F. )가 조선 왕실 악대장으로 초빙되어 활동하면서, 같은 해 9월 고종황제 50세 탄신 축연에서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하여 연주하기도 하였다. 또한, 궁내부(宮內府)에서 시중을 들면서 서울 정동에 이른바 ‘손탁호텔’을 경영한 손탁(Sontag, A. )과 고종의 시 의(侍醫)로 근무한 분쉬(Wunsch, R. )도 기억될 만한 인물이며, 1909년부터 조선에 진출하여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 선교사들도 한독 관계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처럼 조독 조약 체결 후 활발했던 한독 관계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1906년 다른 외국 공관과 함께 독일 공사관이 철수함으로써 단절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이 직접 독일과 접촉할 수는 없었으나 비공식적인 관계는 지속되었다. 영친왕은 1927년 유럽 여행길에 원수 힌덴부르크(Hindenburg)를 방문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등 많은 유학생들이 독일에 유학했다. 그중에는 독일에 남아 우리 문화를 알리고, 대표작으로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308}}t>를 남긴 이미륵[]과 같은 지식인도 있다. 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광복과 함께 미·소 냉전 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독일은 패전과 함께 열강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미·영·불·소의 분할 점령 상태에 놓였다. 남북한이 1948년에 차례로 정부를 수립하고, 1949년에는 서독과 동독이 각각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한국과 독일은 전형적인 국제정치형 분단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분단국가의 국제정치적 조건과 제약 속에서 한독 관계도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2) 한반도가 서독과 분단된 상황에서 6·25전쟁을 치르고 난 1953년 이후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어 정상적인 한독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서독은 1955년 파리협정으로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서구연합(WEU)에 가입함으로써 전쟁 없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한국과 독일이 서로 국호를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한 것은 1955년 12월 1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1955년 10월 1일에 독일 레마겐(Remagen)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었으나 독일 정부는 그것을 한국 무역대표부로 인정하였으므로 양국 간 정식 외교관계는 1955년에야 재개되었다. 우리 정부는 1956년 8월 총영사관을 쾰른(Kln)으로 옮기고, 독일 정부는 그해 10월 서울에 독일 총영사관을 열었다. 양국은 1957년 3월 5일 총영사관을 각각 공사관으로 승격시켰고, 9월 당시 독일의 수도였던 본(Bonn)으로 공사관을 옮겼다. 이어 1958년 8월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손원일은 같은 해 8월 22일 대한민국 주독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김일환 상공부 장관은 같은 해 독일을 방문하여 경제관계를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에르하르트(Erhard, L. ) 경제상이 같은 해 10월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경제 재건을 약속하였다. 제2공화국을 거쳐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특사 김용식이 독일을 방문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을 설명하고 계속적인 결속을 다졌다. 정내혁 상공부 장관은 같은 해 12월 독일을 방문하여 한국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서에 조인하여 1억 5,000만 마르크의 장기 재정차관을 받았다. 또한, 1962년 1월 서독 정부는 우리 간호사와 광부를 받아들일 것을 합의하여, 우리나라 광부가 독일에 파견된 바 있다. 1964년 1월 특사 김현철이 독일을 방문하여 한독 관계의 결속을 확인하였고, 같은 해 5월 하원의장 게르스텐마이어(Gerstenmeier,E. )가 한국을 방문했다. 이어 8월에는 상공부 장관 박충훈을 단장으로 하는 한국경제사절단이 독일을 방문하여 한 독경제 회담에 관한 의정서·한 독재정 원조에 관한 협정 등을 체결했다. 이상의 경제협력을 통한 한독 관계는 1964년 서독의 뤼브케(L{{%119}}bke)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NAME>를 초청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른다. 이에 대통령 일행은 12월 7일부터 1주일간 독일에 머물며 정상회담을 하고, 재독 한국 교민을 격려하였다. 양국 간의 교역 및 서독의 대한 투자는<NAME> 대통령의 독일 방문을 계기로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1966년 3월에는 경제성 차관 랑케(Ranke)가 방한하여 상공부 장관 박충훈과 제1차 한 독경제 각료회담을 개최하였다. 제2차 경제각료회담은 같은 해 5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장기영이 독일을 방문하여 경제협력 성장관 쉘(Scheel, W. )과 개최한 것이다. 또한 같은 해 9월 29일에는 한독기술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서독의 대한 투자를 용이하게 하였다. 한편 1967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뤼브케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한독 외교가 맺은 친선을 과시한 바도 있는데, 이는 중앙정보부가 동베를린 거점 북한 대남 공작단 사건으로, 국내외 교수와 학생·예술인 등 315명이 연루된 사건이다. 이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우리나라 정부의 안보 우선주의와 독일 정부의 인권문제 중시의 태도가 대립되어 상당한 긴장을 야기했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대한 인식(對韓認識)이 악화되어 우리의 대 유럽 외교, 특히 대독 경제 외교가 일시적으로 중대한 시련에 봉착하였다.
1969년 1월에는 동베를린 사건을 둘러싼 양국 관계를 협의하기 위해 서독 대통령의 특사로 외무차관 프랑크(Frank, P. )를 단장으로 한 특별사절단이 방한하였다. 하지만 양국의 의견이나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그 후 서독은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정치정세에 냉담하게 대처하게 되었다. 통일원 장관<NAME>이 1970년 2월 독일을 방문하여 동서독 분단상과 통일 노력을 시찰하고, 외무상 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부산직업학교 설립에 관한 약정서와 부산직업학교 설립에 관한 약정서에 서명을 하였다. 1972년 11월에는 한독 비자면제협정과 한 독재정 원조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3500만 마르크를 차관하였다. 양국 간 경제기술협력 현황을 살펴보면, 1959년부터 1982년까지 7억 9,621만 5,000달러의 차관 도입과 2,405만 6,000달러의 합작투자, 10만 7,000달러의 기술도입 건수가 있었다. 현재에 이르고 있는 차관 규모는 1984년 12월 공공차관 2억 7,300만 달러, 상업차관 6억 600만 달러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서독에 섬유류·선박·혁제품·전기부품 등을 수출하였고, 기계류·유기화합물 등을 수입하였다. 대 서독 수출액은 9억 2,400만 달러, 수입액은 7억 9,400만 달러였으며, 1988년에는 각각 23억 6,780만 달러와 20억 7,399만 달러로 증가했다. 재독 교민은 1995년 1월 말 기준으로 1만 7,494명으로 직업별로는 전문직 종사자·기술자·학생·상업 종사자 등의 순이었다. 한독간의 친선단체로는 한독의원협회와 한독협회가 있으며, 그 밖에 한독 민간경제협력위원회, 한 독법률 학회, 한독경상학회 등이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더욱이 1983년은 한독수교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양국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고, 쉘(Scheel, W. )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친선사절단도 교환되었다.
1980년대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한독 관계는 중요한 무역 상대국으로 더욱 긴밀해져 갔다. 1997년 당시 144억 마르크에 이르는 총 교역량은 지난 10년간 2배 이상의 증가를 보여 준다. 독일과 한국의 상대국에 대한 자본 투자도 늘어갔다. 현재 대한 투자 제1위의 유럽 국가인 독일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의 분단선이 개방된 뒤 대통령 노태우가 서독을 방문하였고 폰 바이체커(Von Weizs{{%129}}keR, R.)가 한국을 방문했다. 또 1993년에는 헬무트 콜(Helmut Kohl) 연방 수상이 방한하였고, 1995년 3월에는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이 방독하였다. 1997년 10월에는 킨켈(Kinkel, K. ) 연방 외무장관이, 1998년 2월에는 바이겔(Waigel, T) 연방 재무 장관이 방한하였으며, 1998년 9월에는 헤르초크(Roman Herzog) 연방 대통령이 방한하였다. 한편, 한독간의 개발협력의 차원에서 보면 진행되는 것과 종료하는 것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의 개발사업에 독일은 1962년부터 참여하여 총 13억 마르크를 지원하였다. 한국의 개발 수준과 함께 1982년도에 재정적인 협력관계는 단절되었고, 1990년도 중반에 기술협력은 전부 종료되었다. 한독 협력 사업의 성공사례인 부산 한독경영정보여자고등학교는 1965년 독일의 가톨릭 원조 기관인 미제 레오(MIZEREO)의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현재는 한국 측에서 경영하는 이 학교에서 여학생 3,000명이 양재·디자인·호텔조리·병원급식 등 실업교육을 받아왔다. 한독간의 문화 관계는 1972년에 체결된 한독 문화협정에 기초한다. 학술·영화·음악·문학·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확대되어 왔다. 현재 독일에는 2,3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살고 있고, 5,000명에 이르는 한국 유학생이 독일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각 지역의 재독한인회, 본(Bonn)의 독한 협회(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서울의 한독협회,<NAME> 독일문화원(Goethe-Institut)과 각종 학회 및 친목회, 동창회들이 한독 문화교류를 활성화해 나가고 있다. 서독은 북한과는 공식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정경분리 정책을 적용하여 자유무역<NAME>에 의한 민간 상사의 거래를 허용하고 있었다. 무역은 주로 현금결제의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업차관에 의한 합섬사·마그네사이트·제련공장·통신기재·비료 공장 등 플랜트 수출이 있으며, 재정차관은 해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적극적인 대 서독 접근 책으로 인하여, 1978년에는 북한 무역공사 요원 11명이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197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국제학생연맹 사무국 북한위원인 강현 덕이 독일 사회주의 노동청년회에 참석하였고, 1980년에는 북한 금강은행 총재<NAME>이 대독 부채 상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독일을 방문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의 대 서독 수출입 현황을 살펴보면, 1973년에 수출 1500만 달러, 수입 3천8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으며, 1988년에 와서도 수출 1억 350만 달러, 수입 1억 2330만 달러로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의 주요 수출품은 각종<NAME> 및 토사류·납·아연·모피·구리, 기타 반(半) 제품, 정밀광학제품·철판 등이며, 주요 수입품으로는 전기제품·자동차·기계류·화학제품 등이다.(3) 동독과 우리나라 동독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국제 역학관계 속에서 전형적인 분단국가가 된 뒤 동독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서로가 외교 상대자로서 교섭할 수 있는 여건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비공식적이거나 국가적 차원이 아닌 수준에서만 교류가 행해져 왔을 따름이다.
1979년 9월 10일부터 소포우편물 교환을 개시하였고, 1977년 6월 인도네시아 주재 동독대사관 주최의 건국기념 리셉션에 우리나라 대사가 최초로 초대받아 참석하였다.
동독 당국은 1985년 6월 동베를린의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할 한국 대표단의 편의를 위하여 서베를린 주재 한국총영사관 직원 3명에게 입국사증을 발급하였다.
같은 해 6월 5일에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장 노태우(盧泰愚)가 동독 체육장 관인 에 발트와 만나서 단독회담을 가졌다. 체육교류는 동독 파견이 4회이며, 서울초청이 2회이다.
파견은 국제복싱연맹 총회(1981)·세계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1983)·동독 체육시설 시찰(1983)·동독 비교 체육 연구프로그램 참가(1983)이며, 초청은 국제복싱연맹 부회장(1983)·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입상 우수선수 초청 시범경기(1985) 등이 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경기 대회에는 372명의 동독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현재 동독은 1954년 3월 공관을 설치하였고, 1990년 10월 통독 이전까지 북한과 단독 수교 상태였다. 또한, 1984년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김일성이 동독을 방문한 바 있다. (1) 문화사적 관계
우리 문화가 독일에 알려지고 독일문화 속에 자리한 과정은 그 특징적 성격에 따라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째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예비 시기, 둘째 19세기 후반에서 1910년까지의 소개 시기, 셋째 일제강점기의 준비 시기, 넷째 광복 이후의 정착·발전 시기가 그것이다. 그 전체 흐름을 보면 17세기 후반부터 200년 동안 독일에 한국 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이 전해지다가, 1883년 한독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교역 및 한국 문화를 올바르게 알리려는 노력이 독일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몇몇 학자들에 의해 그러한 노력이 전문화되었다. 분단의 아픔을 겪은 두 나라는 이제 남북한 사이에서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왕성한 문화교류·교역 등을 가져 독일 내 한국 문화는 한층 확대, 정착되어 가고 있다. 독일에 한국 사회와 문화가 단편적으로나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 마르티니(Martini, M. )와 하멜(Hamel, M. )의 글에 의해서이다. 마르티니는 남부 티롤 출신의 예수회 신부로 17세기 중엽 중국에 간 다음, 165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동아시아 지도책을 네덜란드어로 출판하였다. 그 책의 독일어 번역판이 1655년 빈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다녀간 일은 없으나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인과 한국인이 쓴 한국에 관한 글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여 ≪한반도와 그 경치·도시·관습 및 식물에 관한 마르티니의 보고서 Martini Martins Bericht von der Halbinsel Korea, ihren Landschaften, St{{%129}}dten, Sitten und Gew{{%129}}chsen ≫를 남겼다. 그에 이어 1668년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하멜의 표류기가 1672년 독일어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단행본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마르티니의 글 및 동아시아에 관한 다른 보고서와 함께 아르놀트(Arnold, C. )가 편집한 ≪세 강대 왕국 일본·샴·한국에 대한 서술 Beschreibung dreier m{{%129}}chtiger K ӧ nigsreiche, Japan, Siam und Corea ≫에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이 쓴 글은 일본이 독일에 알려지기 20년 전에 우리나라 국적을 독일에 알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선원의 표류기가 다른 하나는 간접 자료에 의한 것이고, 독일인 지볼트(Siebold, K. T. E. von)의 글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의사이자 학자로서 일본에 7년간 머물며 학교를 세워 서양학문을 가르쳤다. 한국에 간 적은 없지만, 일본에 표류해 온 한국인을 직접 만나 한글 자모를 배우는 등 한국에 관한 보다 학술적인 조사를 수행하였다. 네덜란드에 돌아온 그는 1831년 라이덴에서 일본기 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을 독일어로 출판했고, 1887년 뉘른베르크에서 증보판으로 나왔다.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섯 장에는 한국의 관료 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이후 20세기 중엽까지 한국에 관한 단행본을 쓴 저자들은 거의 다 지볼트의 글을 하나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우리나라는 기존의 폐쇄적 태도를 벗어나 여러 분야에 걸쳐 독일과 공식적·공개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에 따라 1910년까지의 소개 시기에는 한국 문화가 독일에 적극적으로 소개되는가 하면 독일인에 의한 본격적인 여행기들이 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중심인물은 마이어(Meyer, E. )와 세창양행이다. 함부르크 출신인 마이어는 1881년 홍콩에 마이어상사(Meyer, 중국명 )를 세우고 1884년에는 제물포에 세창양행을 세워 볼터(Wolter,C. )를 지사장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그는 1886년 3월 주독 조선 총영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마이어는 이제 상업적 관심뿐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세창양행을 통해 수집한 한국 물품을 1889년 함부르크 산업박람회에 전시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의 문화·미술·자연 산물 등이 주요 전시분야로 1894년 겨울 함부르크 미술공예 박물관에서 한국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마이어의 이와 같은 한국 문화 소개 노력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더욱 확대되거나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유럽에서 소장 물품을 통한 최초의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소개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한편, 우리나라와 독일 사이의 외교관계가 맺어짐에 따라 독일인 여행가·기자들의 방문과 함께 그 여행 보고서가 출판되어 한국 사회와 문화가 독일에 널리 알려졌다.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서 1895년 헤세-바르 테크(HessE-Wartegg, E. von. )는 서울에 관한 최초의 상세한 여행기인 코리아 Korea를 출판하였다. 세창양행 지사장인 볼 터는 1901년 <한국의 옛날과 현재 Korea, einst und jetzt>이라는 논문을, 독일 쾰른 신문의 특파원 겐테(Genthe, S.)는 세창양행 소유의 강원도 금성 당고개의 금광을 둘러보았다. 하인리히 친왕이 1899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의<NAME>를 함부르크 코레스폰덴트 Hamburgischer Korrespondent 신문에 두 번에 걸쳐 실었다. 유럽인들은 동아시아에서의 유럽 열강의 이해관계 때문에 1904년 러일전쟁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에 따라 독일어로 두 권의 한국 소개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한국을 방문한 이들이 쓴 것이다. 차벨(Zabel,R. )은 1906년에 펴낸 ≪러일전쟁 동안 한국에서 보낸 나의 신혼여행 Meine Hochzeitsreise durch Korea w{{%129}}hrend des Russisch ― Japanischen Krieges ≫에서 러일전쟁과 그것이 한국에 끼친 영향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폴란드인 지에로스체브스키(Sieroszewski,W. )는 지난해 베를린에서 한국 Korea이라는 여행기를 출판하였다. 이 밖에 크뢰벨(Kroebel,E.)의 1909년 베를린판 나는 어떻게 한국 황실에 왔나 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1909)가 있는데, 이 책은 대한 제국의 궁궐에서 근무하며 궁중생활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들에 의한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소개는 체계적이거나 객관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유럽 중심적 편견에 의한 여행기 성격이 강하지만 그때까지 은둔의 나라로 여겨졌던 한국을 독일인에게 널리 알린 업적이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독일인들에 의해 한국 문화의 소개나 연구는 앞 시기의 관심을 바탕으로 전문화되었다. 한국교회와 한국교회를 아름답게 소개한 이는 분도회의 총 원장이었던 베버(Weber, N. )로 1915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Im Lande Morgenstille라는 책을 저술한 사람이다. 에카르트(Eckardt, A. ) 신부는 1908∼1929년 동안 분도회의 선교사로 한국에서 근무한 후 브라운슈바이크 대학교에서 1931년 <한국의 학교 제도 Das Schulwesen in Korea>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미 1923년에 ≪한국어 문법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 ≫, 1929년에 ≪한국미술사 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 ≫, 1930년에 ≪한국의 음악 Koreanische Musik ≫을 출판하였고, 또한 뮌헨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니, 독일에서의 한국학의 출발이 그로부터 비롯하였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브라운슈바이크 대학교의 라우텐자흐(Lautensach,H. ) 교수는 1933년 한국의 지형을 연구하고 돌아가 한국의 지리 및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1945년에는 한국 Korea이라는 명저를 냈다. 한편, 김중세·이의경(:미륵)·도유호·안호상·김재원 등 수많은 학생들이 유학한 곳은 당시 비자를 취득하지 않아도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독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자연과학·철학·예술 등을 전공하였기에 한국 문화나 역사를 연구하거나 소개하지는 못하였지만, 유학 기간 동안 생활 속에서 한국 문화의 특징적인 면을 독일 사회에 내보였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들 중 이의경의 경우는 특기할 만하다. 그는 1920년 독일로 건너가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곧바로 한국 관련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전후 독일 문단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308}}t>는 1946년에 출판된 것으로, 그 이전에도 <어느 한국 골목의 저녁>·<놀부와 흥부>·<주인과 하인> 등을 쓴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독일에는 <유령·동물·계모 이야기>·<바둑 놀이 및 그 밖의 한국 전설>·<미륵불> 등의 많은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그는 문필 생활 외에도 만년에 뮌헨대학교에서 한학과 한국문학을 강의하며 바우어(Bauer) 등<NAME> 동양학자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한독 관계사의 암울한 시기에 독일에서 그는 문학을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리고 교육면에서는 한국학의 씨앗을 뿌린 귀중한 인물이었다. 광복 이후 1950년대에 들어와 한국과 서독 사이의 외교관계가 재개되면서 한국 문화는 서독 안에 정착되고 발전한다. 이 시기에는 특히 한국인들이 독일로 대거 진출한 것이 특징이다. 광부와 간호사의 취업, 유학생의 급증, 수출상사의 진출 등으로 1981년 말에는 거의 2만 명의 한국인들이 서독에 거주하며 하나의 소수민족문화를 자랑할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다<NAME>미군과 결혼했다가 나중에 남편의 서독 전보로 그곳에 간 한국 여성이 1981년 말 1,200명을 넘었다. 서독에 거주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이들이 심어놓은 서독 안의 한국 문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소수민족문화로서 한국의 생활문화가 서독 사회와 문화에 정착한 것과 소수민족문화로서 서독 사회의 문화에 기여한 것이 그것이다. 후자의 예로는 윤이상(尹伊桑)이 한국의 음악세계를 바탕으로 오페라 나비의 춤을 작곡한 것이라든지, 축구선구 차범근(車範根, 차붐)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함으로써 한국을 크게 알리고 한국인의 자긍심을 올려준 일, 바둑전문 기사 이창세(李昌世)에 의한 한국 바둑문화의 보급, 태권도 사범들에 의한 태권도 보급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직접적이며 활동적이다. 이들은 직장과 연구·사업기관에서 직접 서독 사람과 접촉하면서 생활 속에서 그들에게 한국인과 그 문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한국 문화를 독일 안에 정착, 발전시켜 나갔다. 한국간호사들은 한국 여성의 성실·겸손·지혜·따뜻함 등의 덕목을 발휘하여 병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 광부들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면모도 많이 알려졌다. 한국인들은 또한 일터에서 벗어나 놀 때 한국인·서독인을 가리지 않고 두루 한데 모여 푸짐한 음식을 차리고 번갈아 노래하며 즐겁게 놀아 그 특징적인 놀이문화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곳곳에 차려진 한국 음식점과 식품점을 통해 김치 등 전통 한국 음식을 독일식 생활문화에 뿌리내리기도 하였다. 한편, 정부기관을 통한 홍보와 다양한 문화교류활동에 의한 한국 문화의 소개, 학술적인 연구, 출판에 의한 한국 이해의 심화 등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그 사이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으로 인해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한때 좋지 않았다.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된 뒤 지금의 한국인은 독일의 한 소수민족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 문화를 더욱 정착,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2) 독일 유물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역사적으로 지방분권이 발전해 온 나라이다. 따라서 각 주와 도시·마을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다. 19세기 말 이래로 다양한 관계로 한국에 다녀간 독일인들이 많기에, 이들이 수집한 한국 문화에 관한 유물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구입이나 기증을 통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은 1990년 통독 이후 70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베를린·드레스덴·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 브레멘 해외 박물관,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 함부르크 미술공예 박물관 등이 100년 이상 되었다. 또한, 대도시의 박물관·미술관은 비교적 많은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함부르크는 무역항으로서 외국과의 교역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고, 세창양행의 사장이자 주독 조선 총영사인 마이어의 고향 및 활동지였기에 한국 유물이 가장 많이 수집되었다. 함부르크 민족학(인류학) 박물관은 그 대표적인 곳으로, 이곳 동양학부에 대략 3,000점이 넘는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민족학 박물관은 본래 각 민족의 생활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므로, 한국 유물로는 복식·종교의례품·놀이기구·악기·부엌용구·수공업제품·도자기·종이류·잡화·서화·책·사진·지도 등이 있다. 이 중 기산 풍속도 79점과 허련의 8폭 병풍은 주목할 만하다. 전자는 19세기 말의 풍속화가 김준근이 한국인의 문화와 생활 모습을 묘사한 병풍과 함께 주로 마이어에 의해 수집되어 이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들 그림을 포함하여 이들 그림 외에 표구 처리된 서화는 1980∼1981년 사이에 한국에서 초빙된 표구사 김용복·김남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동아시아의 표구 문화가 한국인에 의해 유럽에 처음 들어온 사례이다.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의 민족학 박물관은 한국 유물 수집의 역사가 꽤 긴데도 1980년대까지는 동독에 위치하여 그 유물의 수나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또 베를린에 있는 미술공예 박물관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비해 서베를린의 여러 박물관에서는 한국 유물이 그 특성에 따라 수집, 전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동아시아 미술 박물관에는 도자기·서화 등의 유물이 있고, 민족학 박물관에는 인쇄와 생활문화를 주로 다룬 유물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미술공예 박물관에도 도자기를 비롯한 한국 유물이 일부 있다. 한편, 함부르크의 미술공예 박물관과 쾰른의 동아시아 미술 박물관은 한국미술공예 관계의 유물 소장으로 꼽힌다. 이 두 박물관은 1984년 한독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미술 5천 년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어 이 분야에서도 이름이 높다. 전자는 특히 19세기 말 마이어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국전시회를 열었던 곳으로, 수량은 많지 않지만 도자기류·서화·공예품을 소장하고 있다. 후자는 1980년대 서독에서 동아시아 미술 관계로 가장 전문적이고 활동적인 박물관이다. 중국·일본에 비하여 한국 유물의 수는 적으나 고서화와 불상 등의 유물이 있고, 무엇보다 한국 국립박물관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여러 차례 한국미술 특별전을 유치, 개최하여 한국 문화의 소개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 밖에 브레멘의 해외 박물관, 프랑크푸르트의 미술 수공품 박물관, 슈투트가르트의 민족학 박물관, 함부르크의 민족학 박물관 등 큰 도시의 박물관에는 한국 유물이 거의 없다. 이 중 뮌헨 민족학 박물관은 기산 풍속도 등 여러 서화류와 민속 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특히 에카르트 신부가 수집한 것이 눈길을 끈다. 독일의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는 이처럼 미술품에 치중하기보다는 19세기 말 이래의 한국의 민속 및 공예품·사진·지도 등이 수집, 소장되어 있어 한국의 생활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 강조된 면을 볼 수 있다. 1990년 통일 독일을 한 뒤 독일은 자국의 정치와 경제 안정에 힘을 쏟고 있으며 1999년 말 현재도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대외관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통독 이후의 우리 문화도 더욱 독일인의 생활과 밀접하게 전개될 것이다.
(3) 한국연구 및 출판
일제강점기에 이의경과 에카르트에 의하여 뿌리내려진 독일의 한국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서독과 동독에서 각기 다른 길로 전개되었다.
서독에서는 1950년대 먼저 베를린대학교·뮌헨대학교·함부르크대학교·본 대학교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학과의 부속 강좌로 존속하였고, 한국학 전공이 아닌 한국 유학생에 의하여 담당되어 한국학으로 성장하는 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에카르트·카로(Karow, O. )·레빈(Lewin, B. ) 등은 서독에서 한국학의 초석을 다진 학자들이다. 에카르트는 1957∼1974년 동안 뮌헨대학교에서 한국학 강좌를 담당하기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계속하여 1955년 ≪한국의 인삼 Die Ginsengwurzel ≫을, 그리고 이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60년 ≪한국의 역사와 문화 KoreaGeschichte und Kultur ≫라는 저서를 내었다. 한국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9년 기념논문집 코레 아니카 Koreanica가 증정되었다. 한독협회는 1956년에 그를 기념하는 에카르트 메달을 제정하여 한독 문화교류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고 있다. 카로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중국학과 한국학을 가르쳤으며, 본 대학에서는 차 헤르트(Zachert)가 한국학 강좌를 맡아오다가 중단하였다. 한국학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 정부와 일반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1964년 동아시아학의 정책대학으로 개편된 보쿰 대학교에는 일본학 교수인 레빈의 지도 아래 아이케마이어(Eikemeier,D. )와 자세(Sasse, W. )가 서독에서 처음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이케마이어는 ≪연암 박지원 사상에서의 정치적 요소 Die Politischen Elemente im Denken Yonam Pak Chiwon ≫를 비롯, ≪장좌리 문서 The Documents from Changjwari ≫라는 저서를 내었고, 1980년 서독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한국학과를 개설한 튀빙겐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여 제자 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보쿰 대학교의 한국학 전공자들은 그 외에도 한국의 언어·문화·역사 등에 걸쳐 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한국의 학자들과도 긴밀한 학문적 교류를 하고 있다. 보쿰의 한국학 학도들이 이기문의 개정 국어 사 개설을 번역하여 1977년 한국어사 Geschichte der Koreanischen Sprache로 출판한 것도 그러한 열의를 보여준 결과이다. 한편으로 독일어권 한국학 협회, 독한 협회 등에서 진행하는 각종 한국연구프로그램에 우리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다(1992∼1999). 함부르크는 서독 한국학의 또 다른 중심지다. 함부르크의 한국학은 다른 도시에 비해 다양하다. 이 학교에는 이미 중국학과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어 있고,<NAME>은 독일 외무성 관계의 아시아학 연구소 소속으로 계간 북한 North Korea Quarterly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다. 민족학 박물관의 동양학 부장인 프루너(Prunner,G.)는 1975∼1976년 한국에서 신흥종교에 관한 현지조사와 자료를 수집한 후,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신흥종교 자료 센터를 동양학부 부설기관으로 개관하였다. 그는 한국 신흥종교와 무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연구원이었던 조흥윤은 한국의 무 Koreanischer Schamanismus를 박물관 총서로 출판하였다. 이곳에서는 1984년 한독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특별 전시회가 개최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 밖에도 서독에는 한국학에 관한 수많은 개별 연구와 논저 및 학문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 몇몇 예를 들면 후베(Huwe,A. )는 1979년 ≪한국의 동화 M{{%129}}rchen aus aller Welt, Korea ≫를, 멘데(MendE, E. von. )는 1982년에 ≪12세기까지의 한반도 안의 국가들과 중국 China und die Staaten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bis zum 12. Jh. ≫을 출판하였다. 본 대학교에서는 한국학을 강의하고 세종문고를 세운 구기성이, 한 Koreanische Studien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서독 한국학 연구의 이러한 열기에 부응하여 1979년에는 보쿰에서 유럽 한국학자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동독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서독과 동독으로 분리된 이후 초기에는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학을 중심으로 점차 정비되어 갔다. 융커(Junker, H. F. )는 원래 이란 학자로, 1958년 묄렌도르프 미망인 소장의 기산 풍속도를 자료로 하여 기산, 옛 한국 그림들 Alte Koreanische Bilder(기산, 옛 한국 그림들 Alte Koreanische Bilder)을 출판하였으며, 베를린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다. 또한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 온 동포가 라이프치히대와 베를린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정도였다. 1960년대에는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아시아·아프리카 등의 이른바 피지배 국가에 대한 연구가 집중되어 1968년 대학 개편 때 큰 대학에 배분되었다. 이에 따라 베를린대학교(현재 훔볼트 대학교)가 아시아연구를 맡아서 아시아학부를 만들었다. 이 학부에는 몽고 학과·일본학과·중국학과·티베트 학과와 함께 한국학과가 개설되고, 중국학·일본학과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중국학·일본학과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한국학이 시작되었다. 한국학과의 교육 연한은 5년으로, 1년간은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2·3학년 차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법을, 4·5년 차에는 북한에 가서 현지에서 2년간 한국학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귀국하면 학사를 취득한다. 헤르만(Herrmann) 강사와 괴텔(Gthel,I. )·렌트 너(Rentner)·피히테(Pichte) 등 3명의 여자 교수가 1980년대 이 학과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 괴텔을 제외한 세 명은 융커의 제자로 렌트 너는 한국문학을, 피히테는 정치와 문법을, 헤르만은 언어와 문법을 가르쳤고, 괴텔은 이 학과의 과장직을 맡으면서 한국 역사를 주로 가르쳤다. 괴텔은 1978년에 한국사 Geschichte Koreas를, 1988년에 남한의 역사 Geschichte S{{%119}}d-Koreas를 출판했다. 한편, 1992년부터 1999년 말 현재 한국 국제 교류재단의 주관하에 한국학 강좌를 운영지원하고 있다. 튀빙겐대, 트리어대, 파사 우대, 프랑크푸르트 괴테대, 훔볼트 대 등이 대표적인 대학이다. 또한 한국학 관련 객원 교수제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 훔볼트 대 등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뮌헨대학교는 한국학 관련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만큼 관련 자료를 체계화하는데 드는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1992∼1999). 이어 1999년에는 한국학 전공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제도를 신설,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한국학 연구 외에, 1986년부터 북한으로부터 수백 명의 유학생들이 동독으로 몰려왔고, 1990년 동서독의 통일로 생활 속에서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
027c023b-8ff3-4dbb-9690-f7bddc90876d | source05/encykorea/LAW49255.txt | 면접교섭권
(面接交涉權)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023 | CC BY | 1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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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적 상황에서는 미성년 자녀의 친권자나 양육자가 아닌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상대로 면접·교섭할 필요가 있다. 2005년 개정 「민법」 제837조의 2는 자를 직접 양육하지 아니하는 부모 중 일방은 면접교섭권을 가지며, 가정법원은 자녀의 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당사자의 청구 또는 직권으로 면접교섭을 제한하거나 배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2007년의 「민법」에서는 자의 면접교섭권을 규정하고 있다. 면접교섭권은 부모와 자녀에게 주어진 자연권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양육권으로 실현되고 합리적으로 운용되어야 하는 권리이다. 면접교섭이 부모의 협의나 조정 또는 심판으로 인정되면 자와의 면접, 서면 교환, 전화, 선물 교환 등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민법」 개정으로 부모의 면접교섭권이 신설되었으며, 2005년 개정 「민법」 제837조의 2는 자를 직접 양육하지 아니하는 부모 중 일방은 면접교섭권을 가지며, 가정법원은 자의 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당사자의 청구 또는 직권으로 면접교섭을 제한하거나 배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2007년 12월 21일 「민법」 일부개정으로 자녀의 면접교섭권이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자녀의 최대 복리가 가족법의 최대 이념으로 평가되는 21세기 가족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자녀가 면접교섭권의 객체로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공 또는 민간 사회복지 기관, 법원, 행정당국 또는 입법기관 등이 아동에 관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 아동의 최대 이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제3조 제1항에 명시되어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면접교섭권
(面接交涉權)
### 내용: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적 상황에서는 미성년 자녀의 친권자나 양육자가 아닌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상대로 면접·교섭할 필요가 있다. 2005년 개정 「민법」 제837조의 2는 자를 직접 양육하지 아니하는 부모 중 일방은 면접교섭권을 가지며, 가정법원은 자녀의 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당사자의 청구 또는 직권으로 면접교섭을 제한하거나 배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2007년의 「민법」에서는 자의 면접교섭권을 규정하고 있다. 면접교섭권은 부모와 자녀에게 주어진 자연권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양육권으로 실현되고 합리적으로 운용되어야 하는 권리이다. 면접교섭이 부모의 협의나 조정 또는 심판으로 인정되면 자와의 면접, 서면 교환, 전화, 선물 교환 등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민법」 개정으로 부모의 면접교섭권이 신설되었으며, 2005년 개정 「민법」 제837조의 2는 자를 직접 양육하지 아니하는 부모 중 일방은 면접교섭권을 가지며, 가정법원은 자의 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당사자의 청구 또는 직권으로 면접교섭을 제한하거나 배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2007년 12월 21일 「민법」 일부개정으로 자녀의 면접교섭권이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자녀의 최대 복리가 가족법의 최대 이념으로 평가되는 21세기 가족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자녀가 면접교섭권의 객체로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공 또는 민간 사회복지 기관, 법원, 행정당국 또는 입법기관 등이 아동에 관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 아동의 최대 이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제3조 제1항에 명시되어 있다. |
ad297af4-097f-4f58-bb86-662f559bda88 | source05/encykorea/SOC8850.txt | 나주 신촌리 고분군
(羅州 新村里 古墳群)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490 | CC BY | 56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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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le":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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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년 1월 21일 사적 나주 신촌리 고분군은 나주 대안리 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 나주 덕산리 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과 통합되어 2011년 7월 28일 사적 나주 반남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모두 9기가 알려져 있다. 신촌리 산 71-3번지에 있는 1호 분은 도로 개설로 인해 훼손된 분구 남동쪽은 황갈색의 점토층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분구의 형태가 원형인지 방형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1938년도에 작성된 실측도를 보면 방대형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분구의 크기는 장축, 단축, 높이가 12.5810.383.12m이다. 신촌리 전 271-2번지에 2호 분이 위치한다. 이것은 신기 마을의 북쪽 살매기골 서쪽의 낮은 구릉으로 표고 15m의 평탄 지대이다. 비교적 분구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지만 남쪽의 분구 자락에는 2기의 민묘가 자리 잡고 있다. 남북이 각각 20.2m, 높이가 4.15m로 분구된 면적은 모두 4.15m이다. 3호 분은 2호 분과 나란히 축조된 것인데 분구가 완전히 훼손되었다. 일부 남아 있는 분구를 통해 규모를 알 수 있는데 남북이 17.13m, 높이가 1.68m로 일제강점기의 실측도를 보면 원분으로 되어 있다. 내부 주체는 독널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자미산 북쪽 성내 마을 뒤편 구릉에 5호 분이 위치한다. 원분인 5호 분과 6호 분은 각각 동쪽에, 서쪽에 배치되어 분구가 서로 접하고 있는데, 각각 동쪽에 배치된 분구는 원분인 6호 분과 5호 분이다. 5호 분은 도굴로 분구 전체가 도굴당했다. 현재로서는 장축이 20.8m, 높이가 4.04m이다. 6호 분은 1939년에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전방 후원형의 고분으로 알려져 있던 고분이다. 현재 분구된 곳은 장축이 42.15m, 전방부 너비 25.23m, 후원부 너비 21.63m, 높이 7.1m로 일제강점기와 차이가 있다. 발굴 결과 후원부에는 매장 시설이 없었으나 전방부에는 독널 5개가 발견되었다. 신촌리 128-2번지에 7호 분이 위치한다. 조사 역시 1938년에 이루어졌다. 분구는 한 변의 길이가 20m 남짓한 방대형이다. 정상은 평탄했고 깊이 파여 있는 도굴갱이 있었다. 서쪽 귀퉁이에서 1개의 독널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것을 발굴한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독널은 상부는 사라지고 하부만 남았다. 이 독널의 안쪽에서는 중앙으로 치우쳐 소형의 납작 바닥 항아리 1점이 부장되어 있었고, 독널 외부의 남쪽에는 손잡이 잔 1점이 부장되어 있었다. 9호 분은 덕산리 고분군과 같은 구릉상에 있다. 남북이 34.85m, 높이가 5.46m인 방대한 분구이다. 그 결과는 고적조사 보고서라는 대정 6년도에 나온 것이다. 이 무덤은 1917년∼1918년에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옹관 11기와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정비복원을 위한 학술조사의 일환으로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분구는 방대형으로 밑변 30.527.5m, 성토 높이는 4.0m 정도다. 분구 성토는 여러 가지 흙을 이용하여 교대로 다져 쌓았다. 분구 정상에서 상하 중층으로 확인된 옹관 11기를 제외하면 매장 시설은 새로이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구 정상과 분구 중에서 서로 높이가 다른 원통형 토기가 열을 이루며 수립되어 있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이 원통형 토기는 영산강유역 대형 고분에서 확인된 최고의 예이며, 또한 지금까지 순수한 옹관고분에서 발견된 최초의 예이다. 광주 명화동 · 월계동 장고분 등 영산강유역 곳곳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가 분구 중에 열을 지어 확인된 것은 처음이어서 이 토기의 부장 위치 및 기능 해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한 · 일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일본 고분시대의 원통하니 와와 유사한 원통형 토기이다. 하지만 하니와에 관한 아이디어만을 차용하여 현지에서 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기형, 제작 수법, 정면 수법 등이 상이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 가장 좋은 예인 신촌리 9호 분 출토 원통형 토기는 기대에 그릇을 올려놓은 사실적 의기이지만 이후 횡혈식석실과 공반된 원통형 토기는 형태가 추상화되어 있어<NAME>적으로도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분구 사방으로 돌고 있는 주구는 웅덩이처럼 각 변에 2∼4곳씩 파여 있다. 분구의 고대화, 채토처로서의 기능적인 성격이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의 옹관고분의 축조 특징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것은 옹관의 상하 중층 매납과 분구 토층, 원통형 토기의 배치 상태로 확인한 결과 분구는 한 번 이상 수직 확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촌리 9호 분은 기왕에 조사된 금동관 등 중요 유물 외에 1999년 확인된 원통형토기열 및 추가 성토 등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분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나주 신촌리 고분군
(羅州 新村里 古墳群)
### 내용:
1961년 1월 21일 사적 나주 신촌리 고분군은 나주 대안리 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 나주 덕산리 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과 통합되어 2011년 7월 28일 사적 나주 반남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모두 9기가 알려져 있다. 신촌리 산 71-3번지에 있는 1호 분은 도로 개설로 인해 훼손된 분구 남동쪽은 황갈색의 점토층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분구의 형태가 원형인지 방형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1938년도에 작성된 실측도를 보면 방대형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분구의 크기는 장축, 단축, 높이가 12.5810.383.12m이다. 신촌리 전 271-2번지에 2호 분이 위치한다. 이것은 신기 마을의 북쪽 살매기골 서쪽의 낮은 구릉으로 표고 15m의 평탄 지대이다. 비교적 분구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지만 남쪽의 분구 자락에는 2기의 민묘가 자리 잡고 있다. 남북이 각각 20.2m, 높이가 4.15m로 분구된 면적은 모두 4.15m이다. 3호 분은 2호 분과 나란히 축조된 것인데 분구가 완전히 훼손되었다. 일부 남아 있는 분구를 통해 규모를 알 수 있는데 남북이 17.13m, 높이가 1.68m로 일제강점기의 실측도를 보면 원분으로 되어 있다. 내부 주체는 독널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자미산 북쪽 성내 마을 뒤편 구릉에 5호 분이 위치한다. 원분인 5호 분과 6호 분은 각각 동쪽에, 서쪽에 배치되어 분구가 서로 접하고 있는데, 각각 동쪽에 배치된 분구는 원분인 6호 분과 5호 분이다. 5호 분은 도굴로 분구 전체가 도굴당했다. 현재로서는 장축이 20.8m, 높이가 4.04m이다. 6호 분은 1939년에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전방 후원형의 고분으로 알려져 있던 고분이다. 현재 분구된 곳은 장축이 42.15m, 전방부 너비 25.23m, 후원부 너비 21.63m, 높이 7.1m로 일제강점기와 차이가 있다. 발굴 결과 후원부에는 매장 시설이 없었으나 전방부에는 독널 5개가 발견되었다. 신촌리 128-2번지에 7호 분이 위치한다. 조사 역시 1938년에 이루어졌다. 분구는 한 변의 길이가 20m 남짓한 방대형이다. 정상은 평탄했고 깊이 파여 있는 도굴갱이 있었다. 서쪽 귀퉁이에서 1개의 독널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것을 발굴한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독널은 상부는 사라지고 하부만 남았다. 이 독널의 안쪽에서는 중앙으로 치우쳐 소형의 납작 바닥 항아리 1점이 부장되어 있었고, 독널 외부의 남쪽에는 손잡이 잔 1점이 부장되어 있었다. 9호 분은 덕산리 고분군과 같은 구릉상에 있다. 남북이 34.85m, 높이가 5.46m인 방대한 분구이다. 그 결과는 고적조사 보고서라는 대정 6년도에 나온 것이다. 이 무덤은 1917년∼1918년에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옹관 11기와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정비복원을 위한 학술조사의 일환으로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분구는 방대형으로 밑변 30.527.5m, 성토 높이는 4.0m 정도다. 분구 성토는 여러 가지 흙을 이용하여 교대로 다져 쌓았다. 분구 정상에서 상하 중층으로 확인된 옹관 11기를 제외하면 매장 시설은 새로이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구 정상과 분구 중에서 서로 높이가 다른 원통형 토기가 열을 이루며 수립되어 있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이 원통형 토기는 영산강유역 대형 고분에서 확인된 최고의 예이며, 또한 지금까지 순수한 옹관고분에서 발견된 최초의 예이다. 광주 명화동 · 월계동 장고분 등 영산강유역 곳곳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가 분구 중에 열을 지어 확인된 것은 처음이어서 이 토기의 부장 위치 및 기능 해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한 · 일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일본 고분시대의 원통하니 와와 유사한 원통형 토기이다. 하지만 하니와에 관한 아이디어만을 차용하여 현지에서 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기형, 제작 수법, 정면 수법 등이 상이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 가장 좋은 예인 신촌리 9호 분 출토 원통형 토기는 기대에 그릇을 올려놓은 사실적 의기이지만 이후 횡혈식석실과 공반된 원통형 토기는 형태가 추상화되어 있어<NAME>적으로도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분구 사방으로 돌고 있는 주구는 웅덩이처럼 각 변에 2∼4곳씩 파여 있다. 분구의 고대화, 채토처로서의 기능적인 성격이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의 옹관고분의 축조 특징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것은 옹관의 상하 중층 매납과 분구 토층, 원통형 토기의 배치 상태로 확인한 결과 분구는 한 번 이상 수직 확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촌리 9호 분은 기왕에 조사된 금동관 등 중요 유물 외에 1999년 확인된 원통형토기열 및 추가 성토 등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분이다. |
26acc1b6-7e1d-417e-bcaf-f02a2ad754ce | source05/encykorea/SOC20886.txt | 사천 예수리 고분군
(泗川 禮樹里 古墳群)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심봉근"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022 | CC BY | 1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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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le":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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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는데, 야산 기슭에서 1977년 전지 개간을 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이때 발굴된 수혈식 고분 6기는 뚜껑은 덮이지 않았고 바닥에는 점토를 깔았고 총 6기는 파괴된 옹관묘 1기였다. 동서방향에 가까운 장축과 남북방향에 가까운 장축이 석곽의 장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제2호 분은 길이 3m, 너비 0.8m, 벽 높이 0.65m로 비교적 잘 남아 있었고, 제3호 분은 길이 1.45m, 너비 0.55m, 벽 높이 0.43m로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동서 장축 석곽분에서는 서쪽 단벽 쪽에, 남북 장축 석곽분에서는 남쪽 단벽 쪽에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머리 방향으로 유물이 부장되어 있는 서쪽 혹은 남쪽이 추측되었다. 이 고분들에서는 광구원 저장 경 호파 배고 배 등의 토기가 주로 출토되었다. 제2호 분에서는 금동 이식 1점, 토제방추차 1점, 금동<NAME> 이식 1쌍, 관옥 3점, 유리구슬 21점이 나왔다. 제3호 분에서는 금제<NAME> 이식 1점, 금동 이식 1점, 유리구슬 25점, 관옥 4점 및 곡옥 1점이 나왔다. 적갈색 옹형토기 2개를 서로 맞대어 조립한 합구식 옹관은 제5호 석곽의 아래에서 파괴된 채 발견됐다. 이 고분군의 수혈식 석곽분은 선사시대 석관묘의 전통을 남기고 있고, 출토유물 중 토기는 소성 도도 낮고 고식이어서 연대는 가야 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인 3, 4세기경으로 추측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사천 예수리 고분군
(泗川 禮樹里 古墳群)
### 내용:
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는데, 야산 기슭에서 1977년 전지 개간을 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이때 발굴된 수혈식 고분 6기는 뚜껑은 덮이지 않았고 바닥에는 점토를 깔았고 총 6기는 파괴된 옹관묘 1기였다. 동서방향에 가까운 장축과 남북방향에 가까운 장축이 석곽의 장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제2호 분은 길이 3m, 너비 0.8m, 벽 높이 0.65m로 비교적 잘 남아 있었고, 제3호 분은 길이 1.45m, 너비 0.55m, 벽 높이 0.43m로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동서 장축 석곽분에서는 서쪽 단벽 쪽에, 남북 장축 석곽분에서는 남쪽 단벽 쪽에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머리 방향으로 유물이 부장되어 있는 서쪽 혹은 남쪽이 추측되었다. 이 고분들에서는 광구원 저장 경 호파 배고 배 등의 토기가 주로 출토되었다. 제2호 분에서는 금동 이식 1점, 토제방추차 1점, 금동<NAME> 이식 1쌍, 관옥 3점, 유리구슬 21점이 나왔다. 제3호 분에서는 금제<NAME> 이식 1점, 금동 이식 1점, 유리구슬 25점, 관옥 4점 및 곡옥 1점이 나왔다. 적갈색 옹형토기 2개를 서로 맞대어 조립한 합구식 옹관은 제5호 석곽의 아래에서 파괴된 채 발견됐다. 이 고분군의 수혈식 석곽분은 선사시대 석관묘의 전통을 남기고 있고, 출토유물 중 토기는 소성 도도 낮고 고식이어서 연대는 가야 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인 3, 4세기경으로 추측된다. |
ef11f9ae-8df8-455a-8ff8-062b1ad82c96 | source05/encykorea/LAW1563.txt | 건설부
(建設部)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향렬"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995 | CC BY | 22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건설국은 1948년 11월 내무부장관 소속하에 건설국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며 현재 국토교통부의 전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1955년 2월 건설국은 토목국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부흥부가 설치되었으며, 부흥부는 전후복구와 경제기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1961년 5월에 건설부로 개칭되었다. 건설업무는 두 갈래로 갈려 있었는데 1960년 12월에 건설부에 흡수된 국토건설본부를 1961년 6월에 건설부에 흡수시켰다. 이어 1961년 7월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 경제기획원이 신설되고 그 산하에 국토건설청이 신설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내무부의 토목국과 보건사회부의 주택업무를 국토건설청이 흡수하였다. 국토건설청을 건설부로 승격시킨 것은 1962년 6월에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였다. 직제는 장관·차관과 2실 9국 및 5개의 지방국토관리청이 있다. 건설부의 지도감독을 받고 있는 곳으로는 대한주택공사·산업기지개발공사·한국도로공사·한국토지개발공사·한국수자원공사·한국수자원공사 등이 있었고, 재단법인으로는 대한건설협회·대한건축사협회·해외건설협회·대한전문건설협회·건설공제조합·국토개발연구원 등이 있었다. 주요 기능은 기획관리실이 각종 정책의 총괄조정·예산관리·조직정원관리·법무업무를 담당하였고, 기술관리실은 건설기술의 개발관리업무를, 국토계획국은 국토건설종합계획수립과 수도권 및 대도시정비계획·국토이용계획·지역개발과 공원의 지정관리업무를, 토지국은 토지정책·택지개발·산업기지개발 및 보상제도에 관한 사항을, 도시국은 도시계획·도시재개발·토지구획정리사업·개발제한구역 및 도시공원에 관한 사항을, 주택국은 주택정책·주택자금조정·주택관리·건축물 시공 및 주택자재의 개발연구에 관한 사항을, 수자원국은 수자원종합개발계획·하천해안관리·특정다목적댐건설·방재계획 및 재해복구업무를, 상하수도국은 장단기상수도 및 하수도계획업무를, 도로국은 도로종합계획·도로유지보수·도로안전시설에 관한 사항을, 건설진흥국은 건설산업 육성, 건설업면허, 중기정책에 관한 사항을, 해외건설국은 해외건설수주 지원업무를, 그리고 국토지리원은 국토의 기본지도를 제작하고 있었으며, 서울·원주·대전·이리·부산 등 5개 지방국토관리청과 제주개발건설사무소 및 한강홍수통제소 등은 도로·하천·단지조성 등 국토건설사업의 시행, 도로의 유지보수, 접도구역의 관리를 맡고 있었다.1994년 12월 23일 건설교통부로 개칭하면서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투자와 운영의 효율적인 연계체제의 확립을 위해 <정부조직법>을 개정, 교통부를 흡수, 통합하였다. 이후 국토해양부는 2008년 기존의 건설교통부에 해양 업무와 지적 업무를 맡기면서 출범하였으며, 2013년 3월 해양 업무가 신설된 해양수산부로 이관되면서 현재 명칭인 국토교통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건설교통부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건설부
(建設部)
### 내용:
건설국은 1948년 11월 내무부장관 소속하에 건설국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며 현재 국토교통부의 전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1955년 2월 건설국은 토목국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부흥부가 설치되었으며, 부흥부는 전후복구와 경제기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1961년 5월에 건설부로 개칭되었다. 건설업무는 두 갈래로 갈려 있었는데 1960년 12월에 건설부에 흡수된 국토건설본부를 1961년 6월에 건설부에 흡수시켰다. 이어 1961년 7월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 경제기획원이 신설되고 그 산하에 국토건설청이 신설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내무부의 토목국과 보건사회부의 주택업무를 국토건설청이 흡수하였다. 국토건설청을 건설부로 승격시킨 것은 1962년 6월에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였다. 직제는 장관·차관과 2실 9국 및 5개의 지방국토관리청이 있다. 건설부의 지도감독을 받고 있는 곳으로는 대한주택공사·산업기지개발공사·한국도로공사·한국토지개발공사·한국수자원공사·한국수자원공사 등이 있었고, 재단법인으로는 대한건설협회·대한건축사협회·해외건설협회·대한전문건설협회·건설공제조합·국토개발연구원 등이 있었다. 주요 기능은 기획관리실이 각종 정책의 총괄조정·예산관리·조직정원관리·법무업무를 담당하였고, 기술관리실은 건설기술의 개발관리업무를, 국토계획국은 국토건설종합계획수립과 수도권 및 대도시정비계획·국토이용계획·지역개발과 공원의 지정관리업무를, 토지국은 토지정책·택지개발·산업기지개발 및 보상제도에 관한 사항을, 도시국은 도시계획·도시재개발·토지구획정리사업·개발제한구역 및 도시공원에 관한 사항을, 주택국은 주택정책·주택자금조정·주택관리·건축물 시공 및 주택자재의 개발연구에 관한 사항을, 수자원국은 수자원종합개발계획·하천해안관리·특정다목적댐건설·방재계획 및 재해복구업무를, 상하수도국은 장단기상수도 및 하수도계획업무를, 도로국은 도로종합계획·도로유지보수·도로안전시설에 관한 사항을, 건설진흥국은 건설산업 육성, 건설업면허, 중기정책에 관한 사항을, 해외건설국은 해외건설수주 지원업무를, 그리고 국토지리원은 국토의 기본지도를 제작하고 있었으며, 서울·원주·대전·이리·부산 등 5개 지방국토관리청과 제주개발건설사무소 및 한강홍수통제소 등은 도로·하천·단지조성 등 국토건설사업의 시행, 도로의 유지보수, 접도구역의 관리를 맡고 있었다.1994년 12월 23일 건설교통부로 개칭하면서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투자와 운영의 효율적인 연계체제의 확립을 위해 <정부조직법>을 개정, 교통부를 흡수, 통합하였다. 이후 국토해양부는 2008년 기존의 건설교통부에 해양 업무와 지적 업무를 맡기면서 출범하였으며, 2013년 3월 해양 업무가 신설된 해양수산부로 이관되면서 현재 명칭인 국토교통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건설교통부 |
2bd6d505-66b8-47f3-a4b0-3472fd126304 | source05/encykorea/SOC33210.txt | 일산 선사유적
(一山 先史遺蹟)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장호수"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226 | CC BY | 17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한국 선사문화연구소, 충북대학교 조사단, 단국대학교 박물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은 1991년 5월부터 8월까지 일산 신도시 개발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 넓게 발달된 토탄층을 찾아냈다. 지질학·식물학·동물학 분야의 자연과학자들이 함께 발굴에 참여해 유적의 생태환경을 조사함으로써 우리나라 후빙기 환경 변화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토탄층은 갈색층(대화리층)과 검은층(새말층)으로 나뉘어 쌓여있었다. 대화리층에서 볍씨, 과실류 열매, 나무 화석들이 많이 나와 우리 농경문화의 기원문제를 푸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생긴 늪지 환경에서 쌓인 것이 대화리층이다. 이 층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5,300∼5,400 B. P.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후빙기 기후 극상기에 우리나라도 지금보다 3∼5m 정도 바닷물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층에서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석기들이 나왔다. 새말층은 대화리층 최상층으로 2,700∼3,000 B. P. 가 쌓인 층이다. 점토대토기는 우리 초기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점토대토기는 그동안 서기전 3세기 무렵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일산 유적에서 서기전 7세기 전의 연대가 밝혀져 우리 철기시대의 연대 문제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제4기에 쌓인 고 토양층이 일산 일대에 넓게 발달한 것을 확인했다. 고 토양층에서는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만들어 썼던 뗀석기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일산 유적의 발굴을 통해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이 일대에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일산 선사유적
(一山 先史遺蹟)
### 내용:
한국 선사문화연구소, 충북대학교 조사단, 단국대학교 박물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은 1991년 5월부터 8월까지 일산 신도시 개발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 넓게 발달된 토탄층을 찾아냈다. 지질학·식물학·동물학 분야의 자연과학자들이 함께 발굴에 참여해 유적의 생태환경을 조사함으로써 우리나라 후빙기 환경 변화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토탄층은 갈색층(대화리층)과 검은층(새말층)으로 나뉘어 쌓여있었다. 대화리층에서 볍씨, 과실류 열매, 나무 화석들이 많이 나와 우리 농경문화의 기원문제를 푸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생긴 늪지 환경에서 쌓인 것이 대화리층이다. 이 층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5,300∼5,400 B. P.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후빙기 기후 극상기에 우리나라도 지금보다 3∼5m 정도 바닷물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층에서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석기들이 나왔다. 새말층은 대화리층 최상층으로 2,700∼3,000 B. P. 가 쌓인 층이다. 점토대토기는 우리 초기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점토대토기는 그동안 서기전 3세기 무렵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일산 유적에서 서기전 7세기 전의 연대가 밝혀져 우리 철기시대의 연대 문제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제4기에 쌓인 고 토양층이 일산 일대에 넓게 발달한 것을 확인했다. 고 토양층에서는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만들어 썼던 뗀석기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일산 유적의 발굴을 통해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이 일대에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5ad3eb4a-eeb3-48fe-8627-36b4cf773fcd | source05/encykorea/SOC42848.txt | 코스타리카
(Costa Rica)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640 | CC BY | 315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정식 명칭은 코스타리카 공화국(Republic of Costa Rica)으로, 해안선의 길이는 1290km이다. 산호세(San Jose)는 면적 5만 1100km2, 인구는 481만 4144명(2015년 현재)이며, 종족은 스페인계 백인 및 메스티죠족이 94%를 차지하고, 흑인 3% 인디언 1% 중국인 1% 등이다. 스페인어는 공용어이며, 종교는 가톨릭이 76%, 개신교가 16%이다. 산업은 농목축업과 경공업이 주를 이루고, 교육행정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낙원이라고 불릴 만큼 민주주의가 발달해 있고, 교육수준과 국민소득이 높고, 부의 배분이 비교적 평준화되어 있는 곳이 중남미이다. 2015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568달러, 국내총생산은 505억 달러이다. 임기 4년의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이 이 나라의 정체이고, 단원제(57석)가 이 나라의 정체이다. 주요 정당은 국민해방당(PLN), 시민 행동당(PAC) 등이다. 콜럼버스(Columbus, C. )에 의해 1502년 발견되어 1509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821년 9월 15일 다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중앙아메리카연방공화국은 주변 4개국과 함께 1823년 창설되었으나 1838년 탈퇴하고 독자적 행보를 걷고 있다. 1986년 당선된 산체스 대통령은 코스타리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대외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이지만 서방 외교를 추구하며 1945년 유엔에 가입했다. 코스타리카는 1949년 8월 12일 우리나라를 승인하였고, 1962년 8월 15일 양국은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963년 주 멕시코 대사로 임명된 후, 1974년 상주 대사관이 개설될 때까지 겸직하였다. 한편, 코스타리카는 1970년 주일 대사가 겸임 임대사로 임명된 뒤 1978년 10월<NAME> 상주 대사관을 열었다. 양국은 1966년 7월에 문화 협정, 1974년 3월에 무역 협정, 1979년 8월에 과학기술 협정, 1981년 9월에 시증면제 협정, 1985년 9월에 항공 협정, 2005년 9월에 생물자원<NAME>구센터 개설에 합의하였다. 한국의 각종 차량, 농기구 지원 등이 경제협력을 통해 이루어졌고, 미국정부의 카리브 연안국 개발 지원계획을 활용하기 위한 합작투자 진출 등 양국 간 경제협력이 추진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새마을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여 양국 간 새마을 협력 사업이 추진되었다. 우리나라의 대 코스타리카 수출액은 2015년 현재 2억 4000만 달러이고, 주 종목은 승용차, 인쇄회로, 화물자동차, 합성수지, 냉연강판 등이며 수입액은 2억 90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컴퓨터 부품, 반도체, 고철, 의료용 기기, 커피류 등이다. 제24회 서울 올림픽에는 코스타리카 선수 30명이 참가했다. 2015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신영 어업, 홍성 상사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약 450명의 교민과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미얀마의 아웅산 폭발사건 이후 1983년 12월 2일 단교를 당해 2009년 현재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코스타리카
(Costa Rica)
### 내용:
정식 명칭은 코스타리카 공화국(Republic of Costa Rica)으로, 해안선의 길이는 1290km이다. 산호세(San Jose)는 면적 5만 1100km2, 인구는 481만 4144명(2015년 현재)이며, 종족은 스페인계 백인 및 메스티죠족이 94%를 차지하고, 흑인 3% 인디언 1% 중국인 1% 등이다. 스페인어는 공용어이며, 종교는 가톨릭이 76%, 개신교가 16%이다. 산업은 농목축업과 경공업이 주를 이루고, 교육행정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낙원이라고 불릴 만큼 민주주의가 발달해 있고, 교육수준과 국민소득이 높고, 부의 배분이 비교적 평준화되어 있는 곳이 중남미이다. 2015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568달러, 국내총생산은 505억 달러이다. 임기 4년의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이 이 나라의 정체이고, 단원제(57석)가 이 나라의 정체이다. 주요 정당은 국민해방당(PLN), 시민 행동당(PAC) 등이다. 콜럼버스(Columbus, C. )에 의해 1502년 발견되어 1509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821년 9월 15일 다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중앙아메리카연방공화국은 주변 4개국과 함께 1823년 창설되었으나 1838년 탈퇴하고 독자적 행보를 걷고 있다. 1986년 당선된 산체스 대통령은 코스타리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대외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이지만 서방 외교를 추구하며 1945년 유엔에 가입했다. 코스타리카는 1949년 8월 12일 우리나라를 승인하였고, 1962년 8월 15일 양국은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963년 주 멕시코 대사로 임명된 후, 1974년 상주 대사관이 개설될 때까지 겸직하였다. 한편, 코스타리카는 1970년 주일 대사가 겸임 임대사로 임명된 뒤 1978년 10월<NAME> 상주 대사관을 열었다. 양국은 1966년 7월에 문화 협정, 1974년 3월에 무역 협정, 1979년 8월에 과학기술 협정, 1981년 9월에 시증면제 협정, 1985년 9월에 항공 협정, 2005년 9월에 생물자원<NAME>구센터 개설에 합의하였다. 한국의 각종 차량, 농기구 지원 등이 경제협력을 통해 이루어졌고, 미국정부의 카리브 연안국 개발 지원계획을 활용하기 위한 합작투자 진출 등 양국 간 경제협력이 추진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새마을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여 양국 간 새마을 협력 사업이 추진되었다. 우리나라의 대 코스타리카 수출액은 2015년 현재 2억 4000만 달러이고, 주 종목은 승용차, 인쇄회로, 화물자동차, 합성수지, 냉연강판 등이며 수입액은 2억 90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컴퓨터 부품, 반도체, 고철, 의료용 기기, 커피류 등이다. 제24회 서울 올림픽에는 코스타리카 선수 30명이 참가했다. 2015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신영 어업, 홍성 상사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약 450명의 교민과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미얀마의 아웅산 폭발사건 이후 1983년 12월 2일 단교를 당해 2009년 현재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
75e12e44-4622-4d52-b10a-aa6ceb0b8651 | source05/encykorea/SOC25773.txt | 양평 단석리 고분
(楊平 丹石里 古墳)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원룡"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829 | CC BY | 11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모두 2기가 있다. 판석 몇 매로 천장을 도배했고 고분의 4벽은 단석 초등학교 대지 안에서 공사가 진행되었다. 두 고분 모두 남북방향을 장축으로 하고 있으며, 길이는 1.91.50.7m(깊이)이고 벽의 기울기는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봉토의 크기 등은 알 수 없다. 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분군 출토 토기는 뚜껑이 있는 굽다리접시[] 2점, 뚜껑 없는 굽다리접시[] 3점, 굽 달린 단지[] 1점, 키가 낮고 아가리가 큰 뚝배기 5점, 짧은 목단지[] 4점이며 한 개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는 2, 3점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토기들은 신라 말기 양식이지만 뚜껑식 굽다리접시가 있다는 점에서 통일기 이전, 즉 늦어도 7세기 중엽 이전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유적은 신라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고신라 말기 고분 및 토기 자료로서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의 북방 진출을 반영하는 고고학적 자료의 하나라는 데 의의가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양평 단석리 고분
(楊平 丹石里 古墳)
### 내용:
모두 2기가 있다. 판석 몇 매로 천장을 도배했고 고분의 4벽은 단석 초등학교 대지 안에서 공사가 진행되었다. 두 고분 모두 남북방향을 장축으로 하고 있으며, 길이는 1.91.50.7m(깊이)이고 벽의 기울기는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봉토의 크기 등은 알 수 없다. 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분군 출토 토기는 뚜껑이 있는 굽다리접시[] 2점, 뚜껑 없는 굽다리접시[] 3점, 굽 달린 단지[] 1점, 키가 낮고 아가리가 큰 뚝배기 5점, 짧은 목단지[] 4점이며 한 개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는 2, 3점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토기들은 신라 말기 양식이지만 뚜껑식 굽다리접시가 있다는 점에서 통일기 이전, 즉 늦어도 7세기 중엽 이전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유적은 신라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고신라 말기 고분 및 토기 자료로서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의 북방 진출을 반영하는 고고학적 자료의 하나라는 데 의의가 있다. |
0e2faf3f-40ed-4e5b-9466-cfc18079402f | source05/encykorea/SOC22694.txt | 제주 성읍마을
(濟州 城邑마을)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홍식"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486 | CC BY | 58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해안에서 9km, 해발 125m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은 제주도 동남쪽 중산간 지대에 자리한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읍성 가운데 하나로 1423년(세종 5) 현청이 설치된 이후 조선말까지 약 5세기 동안 정의현 소재지였다. 마을에는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는 성곽과<NAME>이었던 일 관헌(日觀軒) 및 명륜당·대성전을 포함한 향교가 있다.
기타 건물로서 객사(客舍)·향청(鄕廳)·무학청(武學廳)·진무청(鎭撫廳)·가솔청(假率廳)·작청(作廳)·현사(縣司)·사창(司倉)·서별창(西別倉)·군기고(軍器庫)·대동고(大同庫)·평역고(平役庫)·형옥(刑獄)·남성루(南城樓)·의두정(倚斗亭)·한동루(漢東樓)·남대문·동서대문 등의 건축물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그 위치 정도만 알려졌을 뿐 규모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주도의 고유한 평면 구성과 구조 기법을 지니고 있는 향교 건물이 현존하고 있다. 이 고을에 대한 풍수지리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의 영봉인 한라산을 조산으로 하고, 고을 북쪽의 수려한 영주산을 진산으로 하고, 남쪽 들판 가운데 남산봉을 안산으로 한다. 형국 안에는 천미천이 반달 모양으로 흐르고, 그 반달의 안쪽에는 읍성이 있고, 남산봉 남쪽으로는 수구가 열린다. 크게 보면 장군 대좌 형이고, 작게 보면 행주형인 것이 고을의 모습이다. 장군 대좌 형은 장군이 마주 앉아 있는 형상으로,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행주형은 우리나라 고을의 터에 주로 쓰이는 지세로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싣고 막 떠나려고 묶어둔 배란 뜻이다. 이런 땅에는 사람과 재화가 풍부하게 모인다고 믿는다. 이곳에는 배에서 가장 중요한 키나 돛대, 닻을 갖추어야 길하다고 믿고, 여기에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난 것과 같이 흉하다고 믿는다. 이 마을의 돛대는 마을의 큰 나무가 담당하고 돛대는 남산봉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마을 안에는 우물을 일절 파지 않았다. 분지의 가운데에 자리한 고을은 지세가 약간 뚜렷한 위치에 위치한다. 객사 대문을 중심으로 지름이 250보 정도 되는 성곽을 가로 60첩, 세로 50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객사 대문이 고을의 중심점이라면 남북으로 선을 그으면 북쪽 성벽의 의 두정과 남대문 위를 지나며, 동서남북으로 선을 그으면 서대문과 동대문을 지나게 된다. 북쪽의 중심인 의 두정에서 서쪽으로 15를 튼 축선 위에<NAME>이 위치한다. 이 축선은 고을의 남쪽 능선인 갑선이오름과 아심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향해 있는데, 그 사이로 남쪽의 표선리 매봉이 등성이 너머로 보인다. 풍수에서는 이것을 규봉이라 하여 매우 흉하게 여긴다. 이를 감추기 위해 등성이에는 큰 성곽 모양의 규봉막이를 하고 남문 앞에는 액막이인 거북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성곽 밖은 평지 마을에서 자주 쓰는 둥근 고리 꼴 길을 기본으로 하고 성곽 안쪽은 고을에서 흔히 쓰는 우자꼴 길을 기본으로 한다. 자의에는 고을에서 가장 중요한 관아를 두고는 동서 길이 되고는 남문로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고을의 도로망을 구성하고 마을 전체에 고르게 집들을 배치한다. 활처럼 휘어진 길들이 모두 있다. 이는 산림경제 복거 조의 똑바로 오는 길은 충파라 일러서 좋지 않으니 반드시 구부리고 굴려야 한다. 모임 장소는 대개 길들이 만나는 곳에 마련되는데, 이곳에는 큰 나무가 있고 걸터앉을 수 있는 평상이 있다. 여기서 이름난 곳은<NAME> 앞의 공문동산·벌원방죽·동문 앞·노다리방죽 등이다. 큰길에서 집 대문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에 대문간을 두고 민가 입구를 처리한다. 길가에 있는 집들은 대문간을 긴 올래로 설치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집들이 밀접하게 붙어 있는 도시형 주거에 긴 올래가 많이 이용되고, 짧은 올래가 비교적 많은 도시형 마을은 짧은 올래가 많다. 기록에는 1826년(순조 26) 성 안에 큰 화재가 일어나 80여 동이 불탔고, 1948년 4·3사건 때는 서문 밖 민가가 거의 불탔다고 한다. 따라서 오래된 주택은 없을 것 같지만 실은 19세기 초의 건물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건물도 꽤 남아 있다. 또한 육지와 다른 독특한 구조기술을 발견할 수 있다. 평면은 자 겹집으로 안거리 2채와 밖거리 2채가 중심이다. 자 모양과 모로 앉은 모양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가 더 유리하다. 안거리의 위치는 동남쪽과 그 사이가 제일 넓으며, 정남 쪽이 제일 넓다. 마을에는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가옥 5채가 있다. 제주 성읍마을 객줏집, 제주 성읍마을<NAME> 고택, 제주 성읍마을 한봉일 고택, 제주 성읍마을 대장간 집은 모두 1979년에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 마을 한가운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있다. 정의향교·일 관헌·녹나무·돌하르방·초가 같은 기타 지방문화재는 지정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이 마을은 유형·무형의 문화재와 고유한 생활풍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1984년 6월 12일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고, 그 후 국가 민속문화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안할망당·산신당·상궁알당 등 무속신앙 처가 여전히 존재하고, 동제에 목동신을 같이 모시는 것도 민간신앙에서도 특이하다. 요즈음에는 특이한 민요도 전승되고 있는데, 걸궁이 대표적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제주 성읍마을
(濟州 城邑마을)
### 내용:
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해안에서 9km, 해발 125m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은 제주도 동남쪽 중산간 지대에 자리한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읍성 가운데 하나로 1423년(세종 5) 현청이 설치된 이후 조선말까지 약 5세기 동안 정의현 소재지였다. 마을에는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는 성곽과<NAME>이었던 일 관헌(日觀軒) 및 명륜당·대성전을 포함한 향교가 있다.
기타 건물로서 객사(客舍)·향청(鄕廳)·무학청(武學廳)·진무청(鎭撫廳)·가솔청(假率廳)·작청(作廳)·현사(縣司)·사창(司倉)·서별창(西別倉)·군기고(軍器庫)·대동고(大同庫)·평역고(平役庫)·형옥(刑獄)·남성루(南城樓)·의두정(倚斗亭)·한동루(漢東樓)·남대문·동서대문 등의 건축물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그 위치 정도만 알려졌을 뿐 규모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주도의 고유한 평면 구성과 구조 기법을 지니고 있는 향교 건물이 현존하고 있다. 이 고을에 대한 풍수지리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의 영봉인 한라산을 조산으로 하고, 고을 북쪽의 수려한 영주산을 진산으로 하고, 남쪽 들판 가운데 남산봉을 안산으로 한다. 형국 안에는 천미천이 반달 모양으로 흐르고, 그 반달의 안쪽에는 읍성이 있고, 남산봉 남쪽으로는 수구가 열린다. 크게 보면 장군 대좌 형이고, 작게 보면 행주형인 것이 고을의 모습이다. 장군 대좌 형은 장군이 마주 앉아 있는 형상으로,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행주형은 우리나라 고을의 터에 주로 쓰이는 지세로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싣고 막 떠나려고 묶어둔 배란 뜻이다. 이런 땅에는 사람과 재화가 풍부하게 모인다고 믿는다. 이곳에는 배에서 가장 중요한 키나 돛대, 닻을 갖추어야 길하다고 믿고, 여기에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난 것과 같이 흉하다고 믿는다. 이 마을의 돛대는 마을의 큰 나무가 담당하고 돛대는 남산봉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마을 안에는 우물을 일절 파지 않았다. 분지의 가운데에 자리한 고을은 지세가 약간 뚜렷한 위치에 위치한다. 객사 대문을 중심으로 지름이 250보 정도 되는 성곽을 가로 60첩, 세로 50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객사 대문이 고을의 중심점이라면 남북으로 선을 그으면 북쪽 성벽의 의 두정과 남대문 위를 지나며, 동서남북으로 선을 그으면 서대문과 동대문을 지나게 된다. 북쪽의 중심인 의 두정에서 서쪽으로 15를 튼 축선 위에<NAME>이 위치한다. 이 축선은 고을의 남쪽 능선인 갑선이오름과 아심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향해 있는데, 그 사이로 남쪽의 표선리 매봉이 등성이 너머로 보인다. 풍수에서는 이것을 규봉이라 하여 매우 흉하게 여긴다. 이를 감추기 위해 등성이에는 큰 성곽 모양의 규봉막이를 하고 남문 앞에는 액막이인 거북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성곽 밖은 평지 마을에서 자주 쓰는 둥근 고리 꼴 길을 기본으로 하고 성곽 안쪽은 고을에서 흔히 쓰는 우자꼴 길을 기본으로 한다. 자의에는 고을에서 가장 중요한 관아를 두고는 동서 길이 되고는 남문로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고을의 도로망을 구성하고 마을 전체에 고르게 집들을 배치한다. 활처럼 휘어진 길들이 모두 있다. 이는 산림경제 복거 조의 똑바로 오는 길은 충파라 일러서 좋지 않으니 반드시 구부리고 굴려야 한다. 모임 장소는 대개 길들이 만나는 곳에 마련되는데, 이곳에는 큰 나무가 있고 걸터앉을 수 있는 평상이 있다. 여기서 이름난 곳은<NAME> 앞의 공문동산·벌원방죽·동문 앞·노다리방죽 등이다. 큰길에서 집 대문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에 대문간을 두고 민가 입구를 처리한다. 길가에 있는 집들은 대문간을 긴 올래로 설치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집들이 밀접하게 붙어 있는 도시형 주거에 긴 올래가 많이 이용되고, 짧은 올래가 비교적 많은 도시형 마을은 짧은 올래가 많다. 기록에는 1826년(순조 26) 성 안에 큰 화재가 일어나 80여 동이 불탔고, 1948년 4·3사건 때는 서문 밖 민가가 거의 불탔다고 한다. 따라서 오래된 주택은 없을 것 같지만 실은 19세기 초의 건물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건물도 꽤 남아 있다. 또한 육지와 다른 독특한 구조기술을 발견할 수 있다. 평면은 자 겹집으로 안거리 2채와 밖거리 2채가 중심이다. 자 모양과 모로 앉은 모양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가 더 유리하다. 안거리의 위치는 동남쪽과 그 사이가 제일 넓으며, 정남 쪽이 제일 넓다. 마을에는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가옥 5채가 있다. 제주 성읍마을 객줏집, 제주 성읍마을<NAME> 고택, 제주 성읍마을 한봉일 고택, 제주 성읍마을 대장간 집은 모두 1979년에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 마을 한가운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있다. 정의향교·일 관헌·녹나무·돌하르방·초가 같은 기타 지방문화재는 지정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이 마을은 유형·무형의 문화재와 고유한 생활풍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1984년 6월 12일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고, 그 후 국가 민속문화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안할망당·산신당·상궁알당 등 무속신앙 처가 여전히 존재하고, 동제에 목동신을 같이 모시는 것도 민간신앙에서도 특이하다. 요즈음에는 특이한 민요도 전승되고 있는데, 걸궁이 대표적이다. |
aa02f4d2-93bd-4a7b-9722-72029dced61d | source05/encykorea/SOC6224.txt | 길림 소달구 유적
(吉林 騷達溝 遺蹟)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정원철"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8528 | CC BY | 37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소달구유적은 1941년 동주신에 의해 처음 발굴되어 당시 2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1948년 9월에는 오풍이 1기의 무덤을 조사하였고, 1949년 7월에는 왕 아주가 20기의 돌널무덤을 구제 발굴하였다. 왕 아주와 동학증 등이 1953년에 4기의 돌널무덤을 다시 발굴조사하였고, 1950년에는 동북 고고 발굴단에서 1기의 돌널무덤을 발굴조사하였다. 돌널무덤은 1941년부터 1953년까지 모두 28기가 발굴조사되었다. 이외에도 1949년과 1953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소달구유적이 발견되었고, 길림성 박물관과 길림시 박물관, 길림대학교에서도 이 유적을 다시 조사하였다. 길림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소달 구촌이 있고, 소달구유적은 소달구 북쪽 평정산 남쪽 기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평정산 동쪽 남사면에 해당하는 대립자 아래로 무덤이 집중되어 있다. 평정산 동쪽 정상에는 대형 돌널무덤이 따로 있다. 이 돌널무덤의 크기는 길이 2.5m, 너비 1.5m, 높이 1.5m이며, 그 위에 덮여 있는 뚜껑돌은 길이 2.7m, 너비 2.33m, 두께 0.45m이다. 이 유적의 돌널무덤은 괴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또한 일부 딸린널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따로 딸린널을 만들었다. 무덤의 크기는 대체로 길이 1.64∼2.2m, 너비 37∼65cm, 높이 31∼65cm이다. 이 중 1949년에 발굴된 무덤 중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M4 호의 돌널은 약 20 경사의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머리 쪽은 지표 아래 140cm, 발 쪽은 지표 아래 85cm에 위치한다. 무덤의 방향은 서쪽으로 약 20 기울어진 남향이고, 머리는 동북쪽이다. 돌널은 비교적 큰 청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뚜껑돌과 네 벽석, 바닥석, 딸린널로 구성되었다. 뚜껑돌은 총 길이 275cm, 너비 103cm, 두께 26cm로 3장의 대형 판석으로 덮었다. 돌널의 네 벽은 남북 양단에 각각 판석으로 2∼3단씩 쌓았으며, 판석은 암벽 위에 직접 설치했다. 돌널의 내부 길이는 190cm이며, 북단 너비는 65cm, 남단 너비는 57cm, 높이는 50∼60cm이다. 청석 3장으로 만든 기둥은 돌널의 끝에 붙여서 만들었다. 뚜껑돌은 돌널로 대체하였는데, 별도로 뚜껑돌을 만들지 않았다. 딸린널의 크기는 너비 62cm, 길이 35cm, 높이 38cm이다. 무덤의 장식은 머리를 약간 옆으로 뉘고, 상체는 하늘을 향해 바로 눕히고, 양팔은 가슴 부위에서 교차하였다. 오른쪽 다리가 약간 구부러져 있는 것이 다리였다. 대체로 머리를 옆으로 뉘고 꼿꼿하게 펴 묻었다. 서단산형의 단지와 바리 등의 토기, 연주식 청동장식 등의 청동기, 옥도끼, 돌칼, 돌 화살촉, 돌자 귀 등의 각종 석기, 가락 바퀴, 돼지뼈 등의 유물이 유적에서 나왔다. 평정산 정상부의 대형 돌널무덤에서는 부채도끼, 청동 손칼, 청동 화살촉, 가락 바퀴, 백석 대롱,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서기전 8세기부터 서기전 6세기까지로 소달구유적의 조성 시기가 편년 되고 있다. 서기전 7세기 정도로 추정되는데, 영길 성성 초유적의 공반 유물이 확인된 시기가 길림 장사 산유적과 후석 산유적의 공반 유물보다 늦고, 전국 시기 연나라 계통의 유물이 출토된 길림 장사 산유적과 후석 산유적의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길림 소달구 유적
(吉林 騷達溝 遺蹟)
### 내용:
소달구유적은 1941년 동주신에 의해 처음 발굴되어 당시 2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1948년 9월에는 오풍이 1기의 무덤을 조사하였고, 1949년 7월에는 왕 아주가 20기의 돌널무덤을 구제 발굴하였다. 왕 아주와 동학증 등이 1953년에 4기의 돌널무덤을 다시 발굴조사하였고, 1950년에는 동북 고고 발굴단에서 1기의 돌널무덤을 발굴조사하였다. 돌널무덤은 1941년부터 1953년까지 모두 28기가 발굴조사되었다. 이외에도 1949년과 1953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소달구유적이 발견되었고, 길림성 박물관과 길림시 박물관, 길림대학교에서도 이 유적을 다시 조사하였다. 길림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소달 구촌이 있고, 소달구유적은 소달구 북쪽 평정산 남쪽 기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평정산 동쪽 남사면에 해당하는 대립자 아래로 무덤이 집중되어 있다. 평정산 동쪽 정상에는 대형 돌널무덤이 따로 있다. 이 돌널무덤의 크기는 길이 2.5m, 너비 1.5m, 높이 1.5m이며, 그 위에 덮여 있는 뚜껑돌은 길이 2.7m, 너비 2.33m, 두께 0.45m이다. 이 유적의 돌널무덤은 괴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또한 일부 딸린널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따로 딸린널을 만들었다. 무덤의 크기는 대체로 길이 1.64∼2.2m, 너비 37∼65cm, 높이 31∼65cm이다. 이 중 1949년에 발굴된 무덤 중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M4 호의 돌널은 약 20 경사의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머리 쪽은 지표 아래 140cm, 발 쪽은 지표 아래 85cm에 위치한다. 무덤의 방향은 서쪽으로 약 20 기울어진 남향이고, 머리는 동북쪽이다. 돌널은 비교적 큰 청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뚜껑돌과 네 벽석, 바닥석, 딸린널로 구성되었다. 뚜껑돌은 총 길이 275cm, 너비 103cm, 두께 26cm로 3장의 대형 판석으로 덮었다. 돌널의 네 벽은 남북 양단에 각각 판석으로 2∼3단씩 쌓았으며, 판석은 암벽 위에 직접 설치했다. 돌널의 내부 길이는 190cm이며, 북단 너비는 65cm, 남단 너비는 57cm, 높이는 50∼60cm이다. 청석 3장으로 만든 기둥은 돌널의 끝에 붙여서 만들었다. 뚜껑돌은 돌널로 대체하였는데, 별도로 뚜껑돌을 만들지 않았다. 딸린널의 크기는 너비 62cm, 길이 35cm, 높이 38cm이다. 무덤의 장식은 머리를 약간 옆으로 뉘고, 상체는 하늘을 향해 바로 눕히고, 양팔은 가슴 부위에서 교차하였다. 오른쪽 다리가 약간 구부러져 있는 것이 다리였다. 대체로 머리를 옆으로 뉘고 꼿꼿하게 펴 묻었다. 서단산형의 단지와 바리 등의 토기, 연주식 청동장식 등의 청동기, 옥도끼, 돌칼, 돌 화살촉, 돌자 귀 등의 각종 석기, 가락 바퀴, 돼지뼈 등의 유물이 유적에서 나왔다. 평정산 정상부의 대형 돌널무덤에서는 부채도끼, 청동 손칼, 청동 화살촉, 가락 바퀴, 백석 대롱,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서기전 8세기부터 서기전 6세기까지로 소달구유적의 조성 시기가 편년 되고 있다. 서기전 7세기 정도로 추정되는데, 영길 성성 초유적의 공반 유물이 확인된 시기가 길림 장사 산유적과 후석 산유적의 공반 유물보다 늦고, 전국 시기 연나라 계통의 유물이 출토된 길림 장사 산유적과 후석 산유적의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f55bf0ff-4ead-4a5e-9fb4-39610a416934 | source05/encykorea/SOC33870.txt | 이화주
(梨花酒)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황병국"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614 | CC BY | 15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이화주란 배꽃이 한창 필 때 담그는 술이다. 희고 흰죽과 같아 물에 타서 마신다.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술로 『동국이상국집』·『한림별곡』·『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요록(要錄)』·『주방문(酒方文)』·『역주방문(曆酒方文)』·『산림경제』·『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임원경제지』·『양주방』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산림경제』에 수록된 만드는 법은 “쌀을 깨끗이 씻어 가루 내어 구무 떡을 만들어 삶아 건져서 차게 식힌 뒤 준비하여둔 누룩가루를 골고루 섞어 항아리에 꼭꼭 눌러서 담는다. 봄에는 7일, 여름에는 21일이면 익는데 여름에는 항아리를 물속에 넣어 익힌다.
술을 달게 하려면 쌀 1말에 누룩가루 7 되를 넣으며, 맑고 독하게 하려면 누룩가루 3, 4 되를 넣고 빚으면 된다. 술을 빚을 때 절대로 날물을 넣어서는 안 된다. ”고 하였다. 이 술을 빚는 데는 누룩이 가장 중요한데, 정월<NAME>에 미리 불려두었던 쌀을 곱게 가루 내어 달걀 만큼씩 뭉쳐 항아리에 솔잎과 함께 켜켜이 담아 윗목에 둔다. 이때 온도가 올라가면 가운데가 썩어 푸른 점이 생긴다고 한다. 껍질을 벗기고 고운 가루를 만들어 사용한다. 7일 뒤에 꺼내서 반나절 말린 뒤 다시 같은 방법으로 두었다가 며칠 뒤 바싹 말려 종이봉지에 넣어둔다. 이렇게 하면 배꽃이 필 때부터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화주
(梨花酒)
### 내용:
이화주란 배꽃이 한창 필 때 담그는 술이다. 희고 흰죽과 같아 물에 타서 마신다.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술로 『동국이상국집』·『한림별곡』·『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요록(要錄)』·『주방문(酒方文)』·『역주방문(曆酒方文)』·『산림경제』·『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임원경제지』·『양주방』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산림경제』에 수록된 만드는 법은 “쌀을 깨끗이 씻어 가루 내어 구무 떡을 만들어 삶아 건져서 차게 식힌 뒤 준비하여둔 누룩가루를 골고루 섞어 항아리에 꼭꼭 눌러서 담는다. 봄에는 7일, 여름에는 21일이면 익는데 여름에는 항아리를 물속에 넣어 익힌다.
술을 달게 하려면 쌀 1말에 누룩가루 7 되를 넣으며, 맑고 독하게 하려면 누룩가루 3, 4 되를 넣고 빚으면 된다. 술을 빚을 때 절대로 날물을 넣어서는 안 된다. ”고 하였다. 이 술을 빚는 데는 누룩이 가장 중요한데, 정월<NAME>에 미리 불려두었던 쌀을 곱게 가루 내어 달걀 만큼씩 뭉쳐 항아리에 솔잎과 함께 켜켜이 담아 윗목에 둔다. 이때 온도가 올라가면 가운데가 썩어 푸른 점이 생긴다고 한다. 껍질을 벗기고 고운 가루를 만들어 사용한다. 7일 뒤에 꺼내서 반나절 말린 뒤 다시 같은 방법으로 두었다가 며칠 뒤 바싹 말려 종이봉지에 넣어둔다. 이렇게 하면 배꽃이 필 때부터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
537a49ca-c2b2-40a8-a6d4-9923cbd3703e | source05/encykorea/SOC47849.txt | 한일어업협정
(韓日漁業協定)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905 | CC BY | 361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965년과 1998년에 두 차례 체결이 이루어졌다.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의 일환으로 1965년 6월 체결된 어업협정은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으로 같은 해 12월 발효되었다. 이후 새로운 국제 어업환경 재정비를 위해 1982년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에 의해 1998년 11월에 체결하여 1999년 1월에 발효되었다. 이 두 협정을 구별하기 위해 구한 일어업협정, 신한일어업협정을 구분한다. 구 어업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국 연안의 기선(基線)으로부터 12해리 이내의 수역을 자국이 어업에 관하여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어업전관 수역으로 설정할 것, ② 한국 측 어업수역의 바깥쪽 주위에 공동수역을 설정하고, 어업자원 보호를 위한 규제 조치를 강구할 것, ③ 어업수역 바깥쪽에서의 단속 및 재판관할권에 대해서는 어선이 속하는 국가만이 행사할 것, ④ 협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국 어업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필요한 임무를 수행할 것, ⑤ 공동자원 조사 수역의 설정, 그리고 ⑥ 분쟁 해결 방법에 관한 여러 규정 등이다. 그러나 일본도 1977년 미국과 소련이 200해리 어업 보존수역을 시행하자, 그해 5월 자국 연안에서 200해리까지의 모든 자원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했다. 이어 일방적으로 ‘트롤 어선 조업금지 라인’을 설정함으로써, 한일간의 어업분쟁은 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1980년 10월 합의를 통해 자율적 규제를 하게 되었고,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이 채택되어 1994년 11월부터 공식적으로 효력이 발생하면서, 1965년 당시의 한일어업협정도 새로운 국제어업환경에 맞게 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이 1996년, 200해리 EEZ 제도를 선포하고 구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종료하면서 새로운 어업협정 체결이 절실해졌다. 이후 1997년 7차례, 1998년 8차례의 공식 협상을 거쳐 그해 10월 9일 신한일어업협정에 가서명하고, 11월 28일 서명하고, 이듬해 1월 6일 국회 비준을 거쳐 1월 22일부터 정식 발효하였다. 주요 내용은 EEZ 설정, 동해 중간수역 설정, 제주도 남부 수역 설정, 전통적 어업 실적 보장 및 불법조업 단속, 어업공동위원 설치 등이다. 그렇지만 신어업 협정이 체결될 때부터 한국 측이 일본 측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는 비난이 계속 제기되었고 정부의 미흡한 대응책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정부는 협정의 발효로 인한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 각종 보상책을 마련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협정의 발효일을 전후하여 국내에선 협정 내용이 일본에 유리하고 한국에 불리하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났다. 비난의 주된 요지는, 첫째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써 앞으로 독도 영유권에 관한 분쟁의 소지를 남겨 두었고, 둘째 중간수역에 포함된 어장의 절반은 일본 수역으로 들어간 나머지 절반에 비하여 경제성이 형편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셋째 경제성이 가장 큰 제주도와 일본 사이의 경계선이 일본에 유리하게 설정됨으로써 한국 어민의 손해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도 손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한일어업협정
(韓日漁業協定)
### 내용:
1965년과 1998년에 두 차례 체결이 이루어졌다.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의 일환으로 1965년 6월 체결된 어업협정은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으로 같은 해 12월 발효되었다. 이후 새로운 국제 어업환경 재정비를 위해 1982년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에 의해 1998년 11월에 체결하여 1999년 1월에 발효되었다. 이 두 협정을 구별하기 위해 구한 일어업협정, 신한일어업협정을 구분한다. 구 어업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국 연안의 기선(基線)으로부터 12해리 이내의 수역을 자국이 어업에 관하여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어업전관 수역으로 설정할 것, ② 한국 측 어업수역의 바깥쪽 주위에 공동수역을 설정하고, 어업자원 보호를 위한 규제 조치를 강구할 것, ③ 어업수역 바깥쪽에서의 단속 및 재판관할권에 대해서는 어선이 속하는 국가만이 행사할 것, ④ 협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국 어업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필요한 임무를 수행할 것, ⑤ 공동자원 조사 수역의 설정, 그리고 ⑥ 분쟁 해결 방법에 관한 여러 규정 등이다. 그러나 일본도 1977년 미국과 소련이 200해리 어업 보존수역을 시행하자, 그해 5월 자국 연안에서 200해리까지의 모든 자원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했다. 이어 일방적으로 ‘트롤 어선 조업금지 라인’을 설정함으로써, 한일간의 어업분쟁은 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1980년 10월 합의를 통해 자율적 규제를 하게 되었고,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이 채택되어 1994년 11월부터 공식적으로 효력이 발생하면서, 1965년 당시의 한일어업협정도 새로운 국제어업환경에 맞게 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이 1996년, 200해리 EEZ 제도를 선포하고 구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종료하면서 새로운 어업협정 체결이 절실해졌다. 이후 1997년 7차례, 1998년 8차례의 공식 협상을 거쳐 그해 10월 9일 신한일어업협정에 가서명하고, 11월 28일 서명하고, 이듬해 1월 6일 국회 비준을 거쳐 1월 22일부터 정식 발효하였다. 주요 내용은 EEZ 설정, 동해 중간수역 설정, 제주도 남부 수역 설정, 전통적 어업 실적 보장 및 불법조업 단속, 어업공동위원 설치 등이다. 그렇지만 신어업 협정이 체결될 때부터 한국 측이 일본 측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는 비난이 계속 제기되었고 정부의 미흡한 대응책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정부는 협정의 발효로 인한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 각종 보상책을 마련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협정의 발효일을 전후하여 국내에선 협정 내용이 일본에 유리하고 한국에 불리하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났다. 비난의 주된 요지는, 첫째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써 앞으로 독도 영유권에 관한 분쟁의 소지를 남겨 두었고, 둘째 중간수역에 포함된 어장의 절반은 일본 수역으로 들어간 나머지 절반에 비하여 경제성이 형편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셋째 경제성이 가장 큰 제주도와 일본 사이의 경계선이 일본에 유리하게 설정됨으로써 한국 어민의 손해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도 손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
4d4d7ac6-3a8a-46d9-ad6c-8da77130c3b5 | source05/encykorea/SOC28977.txt | 연하장
(年賀狀)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소임"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969 | CC BY | 330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5세기 독일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신년을 축복하는 글이 담긴 카드를 동판(銅版)으로 인쇄한 것이 연하장의 시초이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명함이 나돌면서 이에 그림을 넣는 새로운 풍습이 시작되었고,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등지에서는 이를 신년을 맞아 친지들에게 보내는 인사장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연하장이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영국과 영국이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으면서 크리스마스 축하와 신년 인사를 함께 인쇄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상대방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 아랫사람을 시켜 문안의 서찰을 보내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는 세함이라 하는 것이다. 각사의 아전과 군영의 교졸들 은 새해가 되면 자기 이름이 적힌 쪽지(명함)를 관원이나 상관의 집에 보냈다. 또 자신이 직접 가더라도 그 표적으로 이것을 놓고 나오는 것이 관습이었다. 한편, 상대 집에서는 세 함상이라 하여 부재중에 세배 온 사람이 명함을 두고 가는 상자를 마련해 두거나 손님이 자기의 이름을 적도록 벼루, 붓 따위를 구비해 두는 것이 예사였다. 한편 중류 이상 가정의 부인들은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으므로 초사흘이 지나면 자기 집의 여종을 곱게 차려 입혀 일가친척이나 인사드려야 할 어른들을 찾아뵙도록 하였는데 이를 문안비라고 불렀다. 문안객들이 들고 다니는 단자에는 소재(:소동파의 재주를 갖추라는 뜻)·곽복(:곽자의처럼 부자가 되라는 뜻)·희자(:왕희처럼 자녀복을 누리라는 뜻)·팽수(:팽조처럼 3,000년 장수를 누리라는 뜻) 따위의 글 가운데 상대방이 원하리라 생각하는 것을 골라 적었다. 문안비를 받는 집에서는 세뱃돈과 세배상을 주고 자기 집의 종을 답례로 보냈다. 한말 이후 우편제도가 생겨나면서 이러한 풍속이 점차 사라졌고 오늘날과 같은 새해 축하 인사를 위한 연하전보 및 연하우편이 등장했다. 우체국에서 연말에 받아둔 연하장을 이듬해 1월 1일 자의 소인을 찍어서 배달하는 제도가 연하전보이며, 연하우편은 신년을 축하하는 특별 취급 전보의 하나이다. 축하 문구와 그림이 인쇄된 연하엽서도 연하장을 주고받는 풍속이 유행하면서 생겨났다. 인터넷이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오면서 연하장을 주고받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몇 번 클릭만으로 보내는 인터넷 카드는 종이 카드를 고르고 우표를 붙이고 발송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간편함과 많은 사이트에서 무료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무비 용성 등으로 인해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인터넷 연하장이나 사이버 카드는 간편하고 비용이 들지 않으며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보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대통령이 2005년 신년에 40만 여명의 국민에게 경제 회복에 대한 덕담을 담은 플래시 형태의 인터넷 연하장을 보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인터넷 연하장은 그림 카드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카드,<NAME>상 카드, 캐럴송 등 배경음악까지 전하는 음악 카드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연하장
(年賀狀)
### 내용:
15세기 독일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신년을 축복하는 글이 담긴 카드를 동판(銅版)으로 인쇄한 것이 연하장의 시초이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명함이 나돌면서 이에 그림을 넣는 새로운 풍습이 시작되었고,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등지에서는 이를 신년을 맞아 친지들에게 보내는 인사장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연하장이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영국과 영국이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으면서 크리스마스 축하와 신년 인사를 함께 인쇄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상대방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 아랫사람을 시켜 문안의 서찰을 보내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는 세함이라 하는 것이다. 각사의 아전과 군영의 교졸들 은 새해가 되면 자기 이름이 적힌 쪽지(명함)를 관원이나 상관의 집에 보냈다. 또 자신이 직접 가더라도 그 표적으로 이것을 놓고 나오는 것이 관습이었다. 한편, 상대 집에서는 세 함상이라 하여 부재중에 세배 온 사람이 명함을 두고 가는 상자를 마련해 두거나 손님이 자기의 이름을 적도록 벼루, 붓 따위를 구비해 두는 것이 예사였다. 한편 중류 이상 가정의 부인들은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으므로 초사흘이 지나면 자기 집의 여종을 곱게 차려 입혀 일가친척이나 인사드려야 할 어른들을 찾아뵙도록 하였는데 이를 문안비라고 불렀다. 문안객들이 들고 다니는 단자에는 소재(:소동파의 재주를 갖추라는 뜻)·곽복(:곽자의처럼 부자가 되라는 뜻)·희자(:왕희처럼 자녀복을 누리라는 뜻)·팽수(:팽조처럼 3,000년 장수를 누리라는 뜻) 따위의 글 가운데 상대방이 원하리라 생각하는 것을 골라 적었다. 문안비를 받는 집에서는 세뱃돈과 세배상을 주고 자기 집의 종을 답례로 보냈다. 한말 이후 우편제도가 생겨나면서 이러한 풍속이 점차 사라졌고 오늘날과 같은 새해 축하 인사를 위한 연하전보 및 연하우편이 등장했다. 우체국에서 연말에 받아둔 연하장을 이듬해 1월 1일 자의 소인을 찍어서 배달하는 제도가 연하전보이며, 연하우편은 신년을 축하하는 특별 취급 전보의 하나이다. 축하 문구와 그림이 인쇄된 연하엽서도 연하장을 주고받는 풍속이 유행하면서 생겨났다. 인터넷이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오면서 연하장을 주고받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몇 번 클릭만으로 보내는 인터넷 카드는 종이 카드를 고르고 우표를 붙이고 발송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간편함과 많은 사이트에서 무료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무비 용성 등으로 인해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인터넷 연하장이나 사이버 카드는 간편하고 비용이 들지 않으며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보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대통령이 2005년 신년에 40만 여명의 국민에게 경제 회복에 대한 덕담을 담은 플래시 형태의 인터넷 연하장을 보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인터넷 연하장은 그림 카드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카드,<NAME>상 카드, 캐럴송 등 배경음악까지 전하는 음악 카드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
f3b7aa82-fae6-46f2-9145-4db0a7a7fc27 | source05/encykorea/LAW51969.txt | 부부별산제
(夫婦別産制)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097 | CC BY | 195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부부 사이의 재산관계를 규율하는 제도를 부부재산제라고 하는데, 이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남녀가 계약으로 자유롭게 정하는 부부재산계약제이고, 다른 하나는 법정재산제이다. 우리나라 민법은 부부재산계약으로 부부가 혼인 성립 전에 재산관계를 정하고, 부부재산계약이 체결되지 않았을 경우 법정재산제에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부부별산제를 법정 재산 제로 하고, 부부 공유제, 관리 공통제 등을 법정 재산 제로 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이다. 부부의 혼인 생활은 경제생활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부부간의 재산관계를 명확히 정해 두는 것은 부부간의 평화의 유지는 물론 제 3자와의 거래의 안전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부부별산제는 부부의 일방이 혼인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과 혼인 중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을 특유재산으로 인정하고, 특유재산은 부부가 각자 관리 수익한다. 다만 누구의 소유인지 불분명한 재산은 부부의 공유로 추정한다. 우리나라 구 민법에서는 부부가 각자 재산을 취득 보유할 수 있지만 재산의 관리는 남편이 하는 관리 공통제를 취하고 있었으나 개정 민법에서는 부부별산 제로 근본적인 개혁을 하였다. 하지만 개정 민법의 규정은 귀속 불분명한 재산에 대하여 남편 소유로 추정하는 등 불평등한 요소가 있어서 1977년 민법 일부개정 때 부부 공동소유로 추정하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부부별산제는 가제도를 배제하고 개인주의적 법리를 바탕으로 하겠다는 취지로 처의 재산적 지위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성 평등을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부부별산제와 부부 공유제를 잘 조화시키는 것이 부부 공유제의 단점인 처의 경제적 지위를 불리하게 하는 점 때문에 부부 공유제로의 개정운동도 필요하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부부별산제
(夫婦別産制)
### 내용:
부부 사이의 재산관계를 규율하는 제도를 부부재산제라고 하는데, 이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남녀가 계약으로 자유롭게 정하는 부부재산계약제이고, 다른 하나는 법정재산제이다. 우리나라 민법은 부부재산계약으로 부부가 혼인 성립 전에 재산관계를 정하고, 부부재산계약이 체결되지 않았을 경우 법정재산제에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부부별산제를 법정 재산 제로 하고, 부부 공유제, 관리 공통제 등을 법정 재산 제로 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이다. 부부의 혼인 생활은 경제생활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부부간의 재산관계를 명확히 정해 두는 것은 부부간의 평화의 유지는 물론 제 3자와의 거래의 안전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부부별산제는 부부의 일방이 혼인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과 혼인 중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을 특유재산으로 인정하고, 특유재산은 부부가 각자 관리 수익한다. 다만 누구의 소유인지 불분명한 재산은 부부의 공유로 추정한다. 우리나라 구 민법에서는 부부가 각자 재산을 취득 보유할 수 있지만 재산의 관리는 남편이 하는 관리 공통제를 취하고 있었으나 개정 민법에서는 부부별산 제로 근본적인 개혁을 하였다. 하지만 개정 민법의 규정은 귀속 불분명한 재산에 대하여 남편 소유로 추정하는 등 불평등한 요소가 있어서 1977년 민법 일부개정 때 부부 공동소유로 추정하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부부별산제는 가제도를 배제하고 개인주의적 법리를 바탕으로 하겠다는 취지로 처의 재산적 지위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성 평등을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부부별산제와 부부 공유제를 잘 조화시키는 것이 부부 공유제의 단점인 처의 경제적 지위를 불리하게 하는 점 때문에 부부 공유제로의 개정운동도 필요하다. |
47b35883-0515-48d2-a458-f63f71f96032 | source05/encykorea/SOC61139.txt | 성매매
(性賣買)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691 | CC BY | 664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성매매는 성을 사고파는 행위를 말하며, '성매매'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의 성매매 반대 운동과 인식의 변화가 반영된 용어이다. 과거 성매매를 지칭하는 말들, 곧 매춘, 매매춘, 윤락 등은 성 구매 남성을 우상화하고 성판매 여성에게만 도덕적, 윤리적 낙인을 찍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스트들은 성이 '매매' 또는 '거래'되고 있다는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성매매가 범문 화적이고 초역사적인 내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의 조건에서 생성되고 변화될 수 있는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004년 제정된 '성매매 방지법'을 기점으로 '성매매'는 기존의 '윤락'을 대체하는 공식 용어로 자리 잡았다. 성매매를 하는 행위자들, 즉 구매자, 매개자, 판매자를 지칭하는 용어들은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혼용되고 있다. 성 구매<NAME> 대체로 손님, 고객 등 중립적인 용어로 지칭되며 낙인에서도 자유롭다. 구매자, 매개자는 성판매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들을 성 착취자, 성매매 가해자, 인신 매매자 등으로 칭한다. 성판매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직 논쟁 중에 있다. '성매매 방지법'에서 '성매매 피해자'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지만 성판매 여성의 피해자화는 섹슈얼리티의 위계를 전제하고 성판매 여성의 행위성을 무시하며 그 목소리를 침묵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여 성판매 여성에 부착된 사회적 낙인을 탈각하려는 시도가 '성 노동자'라는 개념이지만, 다른 임금노동과 마찬가지로 성판매가 개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압도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역시 비판을 받는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용어는 여성이 거의 성을 사지 않고 팔기만 한다는 현실 사회의 성별 권력관계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성판매 여성 역시 비교적 중립적인 용어로 인식되고 있으나, 이 또한 성판매에 개입하고 있는 매개자를 감춘다는 점에서 한계가 지적되고 있다. 성매매는 분명하지 않고 시대와 성별에 따라 그 종류와 성격이 다르고, 이를 해석하는 사회적 관념 또한 다양하다. 초기 성매매 인식은 남성의 생물학적 본능이나 여성의 '일탈' 문제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부장제에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했다고 여겨진 성판매 여성이 성매매 행위를 하고, 이런 인식은 '매음', '추업', '윤락', '매춘'이라는 호칭으로 귀결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호칭을 '매매춘', '성매매' 등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매매춘'은 성을 봄이라는 자연현상으로 비유하여 성을 사고파는 행위를 만들어진 제도가 아닌 '생물학적 본능'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와 지배의 권리 체제로 가부장제를 정의하고, 성매매를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환이 아니라 성 착취라고 보았다. 또한 여성 억압의 총 제적 문제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판매 여성과 비성 판매 여성 사이에 구분과 위계와 낙인의 체계를 두고 여성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성매매 문제를 둘러싼 여성과 여성의 '차이'가 드러난 것은 2004년 '성매매 방지법' 제정 직후 성판매 여성들이 '성매매 방지법'을 거부하며,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들과 대립했기 때문이다. 성판매 여성 운동은 피해자의 지위를 거부하고 생존권과<NAME>을 주장하며 성매매 비범죄화(decriminalization) 정책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매매를 '성노동'이라고 주장하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이 찍혔다고 비판했다. 이들의 주장은 성매매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성의 성노동을 옹호하는 남성의 시각과는 다르다. 성매매에 대한 가부장제 인식이 지배하던 시기, 국가는 성매매를 여성의 타락으로 규정하고 성을 파는 여성들을 주로 단속, 처벌, 수용해왔다. 19세기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는 일본식 관리 정책인 공창제가 시행되었으며, '풍기'와 '위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성매매 관리 정책(regulation)이 시행되었다. 탈식민 이후 한국 사회에서 관리 정책은 대표적인 식민 잔재로서 폐지 대상이 되었다.<NAME> 정권은 19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제정하여 성매매 행위자 전부를 처벌하는 성매매 금지 정책(prohibition)을 채택했다. 하지만 국가의 성매매 관리는 다양한 행정명령에 의해 공식과 비공식을 넘나들면서 지속되었다.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금지 정책을 표방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성매매를 묵인-관리하는 정책을 시행해왔으며, 정치적 상황이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성판매 여성들을 단속하고 처벌하는 등 성매매를 묵인-관리해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페미니스트들은 한국의 성별 권력구조를 비판하며 국가의 성매매 정책을 비판해왔다. 성매매 반대 운동은 2004년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이로써 성매매와 성매매 피해자 개념을 공식적으로 정립하고 금지 정책의 전면 시행을 이끌었다. 하지만 성판매 여성들은 이에 맞서 성매매 비범죄화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성매매를 하는 여성과 비 성매매를 하는 여성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성매매 방지법' 제정 이후 나타난 성매매를 하는 여성 사이에 나타난 갈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것은 젠더 위계를 넘어선 섹슈얼리티 자체의 위계에 따른 성매매 문제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의 시공간에 주목하고 성매매 현상에 작동하는 권력의 복합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성판매 여성에게 가해진 사회적 낙인을 주목하여 이들이 성매매를 계속하도록 하는 배경과 원인을 성찰하고자 한다. 성매매 피해자'라는 개념은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지배와 성폭력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전히 성판매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성매매 문제 해결의 노력을 진행 중이고, 성매매의 찬반 여부를 넘어 성판매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이라는 관점으로 개념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성매매
(性賣買)
### 내용:
성매매는 성을 사고파는 행위를 말하며, '성매매'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의 성매매 반대 운동과 인식의 변화가 반영된 용어이다. 과거 성매매를 지칭하는 말들, 곧 매춘, 매매춘, 윤락 등은 성 구매 남성을 우상화하고 성판매 여성에게만 도덕적, 윤리적 낙인을 찍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스트들은 성이 '매매' 또는 '거래'되고 있다는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성매매가 범문 화적이고 초역사적인 내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의 조건에서 생성되고 변화될 수 있는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004년 제정된 '성매매 방지법'을 기점으로 '성매매'는 기존의 '윤락'을 대체하는 공식 용어로 자리 잡았다. 성매매를 하는 행위자들, 즉 구매자, 매개자, 판매자를 지칭하는 용어들은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혼용되고 있다. 성 구매<NAME> 대체로 손님, 고객 등 중립적인 용어로 지칭되며 낙인에서도 자유롭다. 구매자, 매개자는 성판매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들을 성 착취자, 성매매 가해자, 인신 매매자 등으로 칭한다. 성판매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직 논쟁 중에 있다. '성매매 방지법'에서 '성매매 피해자'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지만 성판매 여성의 피해자화는 섹슈얼리티의 위계를 전제하고 성판매 여성의 행위성을 무시하며 그 목소리를 침묵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여 성판매 여성에 부착된 사회적 낙인을 탈각하려는 시도가 '성 노동자'라는 개념이지만, 다른 임금노동과 마찬가지로 성판매가 개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압도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역시 비판을 받는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용어는 여성이 거의 성을 사지 않고 팔기만 한다는 현실 사회의 성별 권력관계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성판매 여성 역시 비교적 중립적인 용어로 인식되고 있으나, 이 또한 성판매에 개입하고 있는 매개자를 감춘다는 점에서 한계가 지적되고 있다. 성매매는 분명하지 않고 시대와 성별에 따라 그 종류와 성격이 다르고, 이를 해석하는 사회적 관념 또한 다양하다. 초기 성매매 인식은 남성의 생물학적 본능이나 여성의 '일탈' 문제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부장제에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했다고 여겨진 성판매 여성이 성매매 행위를 하고, 이런 인식은 '매음', '추업', '윤락', '매춘'이라는 호칭으로 귀결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호칭을 '매매춘', '성매매' 등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매매춘'은 성을 봄이라는 자연현상으로 비유하여 성을 사고파는 행위를 만들어진 제도가 아닌 '생물학적 본능'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와 지배의 권리 체제로 가부장제를 정의하고, 성매매를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환이 아니라 성 착취라고 보았다. 또한 여성 억압의 총 제적 문제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판매 여성과 비성 판매 여성 사이에 구분과 위계와 낙인의 체계를 두고 여성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성매매 문제를 둘러싼 여성과 여성의 '차이'가 드러난 것은 2004년 '성매매 방지법' 제정 직후 성판매 여성들이 '성매매 방지법'을 거부하며,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들과 대립했기 때문이다. 성판매 여성 운동은 피해자의 지위를 거부하고 생존권과<NAME>을 주장하며 성매매 비범죄화(decriminalization) 정책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매매를 '성노동'이라고 주장하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이 찍혔다고 비판했다. 이들의 주장은 성매매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성의 성노동을 옹호하는 남성의 시각과는 다르다. 성매매에 대한 가부장제 인식이 지배하던 시기, 국가는 성매매를 여성의 타락으로 규정하고 성을 파는 여성들을 주로 단속, 처벌, 수용해왔다. 19세기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는 일본식 관리 정책인 공창제가 시행되었으며, '풍기'와 '위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성매매 관리 정책(regulation)이 시행되었다. 탈식민 이후 한국 사회에서 관리 정책은 대표적인 식민 잔재로서 폐지 대상이 되었다.<NAME> 정권은 19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제정하여 성매매 행위자 전부를 처벌하는 성매매 금지 정책(prohibition)을 채택했다. 하지만 국가의 성매매 관리는 다양한 행정명령에 의해 공식과 비공식을 넘나들면서 지속되었다.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금지 정책을 표방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성매매를 묵인-관리하는 정책을 시행해왔으며, 정치적 상황이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성판매 여성들을 단속하고 처벌하는 등 성매매를 묵인-관리해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페미니스트들은 한국의 성별 권력구조를 비판하며 국가의 성매매 정책을 비판해왔다. 성매매 반대 운동은 2004년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이로써 성매매와 성매매 피해자 개념을 공식적으로 정립하고 금지 정책의 전면 시행을 이끌었다. 하지만 성판매 여성들은 이에 맞서 성매매 비범죄화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성매매를 하는 여성과 비 성매매를 하는 여성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성매매 방지법' 제정 이후 나타난 성매매를 하는 여성 사이에 나타난 갈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것은 젠더 위계를 넘어선 섹슈얼리티 자체의 위계에 따른 성매매 문제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의 시공간에 주목하고 성매매 현상에 작동하는 권력의 복합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성판매 여성에게 가해진 사회적 낙인을 주목하여 이들이 성매매를 계속하도록 하는 배경과 원인을 성찰하고자 한다. 성매매 피해자'라는 개념은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지배와 성폭력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전히 성판매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성매매 문제 해결의 노력을 진행 중이고, 성매매의 찬반 여부를 넘어 성판매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이라는 관점으로 개념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
dadf6797-1d77-4aab-b00d-0f096577a8fd | source05/encykorea/SOC11768.txt | 대한적십자사
(大韓赤十字社)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176 | CC BY | 97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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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9년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솔페리노 전쟁의 비참상과 그의 체험을 『솔페리노의 회상』으로 엮어 1862년 11월 출판했다.
이 책 속에서 뒤낭은 상병자를 간호하기 위한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구호단체를 평시에 각국 내에 설치할 것과, 군대의 부상자를 돌보는 군의료 요원들과 군목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이런 뒤낭의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전신인 국제부상자구호위원회(일명 5인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이 위원회의 초청으로 16개국 대표가 모인 회의가 1863년 10월 제네바에서 개최되었으며, 10개 조문의 적십자규약을 채택함으로써 국제적십자운동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우리나라 적십자운동의 역사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적십자의 본고장인 유럽과 북미로부터 적십자 정신이 우리나라의 조정과 민간에 전해지기 시작하여 독립신문의 사설에까지 적십자 정신이 여러 차례 반영되었다. 주 프랑스공사는 20세기 초 고종의 훈령으로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적십자 회의에 처음 참석했다. 그리고 1903년 1월 8일 대한제국 정부가, 1864년 유럽 12개국 대표에 의해 서명 조인된 최초의 적십자조약인 「육지전투에 있어서 군대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네바협약」 가입과, 같은 해 2월 7일 「1899년의 헤이그협약」의 서명으로 적십자를 이해하게 된 뒤, 1905년 10월 27일 고종황제 칙령 제47호「대한적십자사 규칙」을 반포함으로써 국가 수준의 기틀을 갖게 되었다.한일합병 1년 전인 1909년 7월 23일, 대한적십자사는 칙령 제67호에 의해 폐지되고,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운영되었다. 그렇지만 그 명맥은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1919년 7월 13일 임정내무부령 제62호에 의해 대한적십자회가 설립인가를 받고 다시 부활하여, 1919년 11월 15일 대한적십자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대한적십자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부활되었는데, 항일 무력투쟁을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45년 8·15광복 후 적십자사 재건운동은 1947년 3월 15일 조선적십자사로 일단 결실을 맺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따라 1949년 4월 30일 공포된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에 의해 같은 해 10월 27일 대한적십자사로 재조직되었다. 양주삼이 초대 총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적십자사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전시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 2월 6일 휴전회담에서 양측 적십자 단체로 구성된 합동기구가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포로송환에 협조하기로 합의했고, 서울 적십자병원에 임시 구호병원을 설치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포로송환에 참여하여 1953년 8월 3일∼9월 7일 동안 공동 UN적십자단원으로 활동했다. 대한적십자사는 1955년 5월 26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국제 승인을 받은 후, 같은 해 9월 28일 국제적십자사 연맹에 가입하여 74번째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당시 적십자소식(당시<NAME>는 적십자월보)을 창간했다. 1956년 5월 적십자의 노래를 제정하고, 1957년 11월 18일 6·25전쟁 당시 납북된 337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은 1958년 2월 15일 국립혈액원을 인수하여 개관했고, 1959년 9월 삼남지방에 불어닥친 태풍 사라호의 피해<NAME>을 도왔다. 청소년적십자는 1964년 5월 26일 스승의 날을 제정하고 JRC(Junior Red Cross) 조직학교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한국은 1965년 12월 1일 헌혈운동을 시작하여 1966년 7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제네바 제협약 가입 비준을 승인함에 따라 1966년 8월 16일 제네바 제협약에 111번째 가입국이 되었다. 대한적십자사는 1971년 8월 12일 남북이산가족찾기 회담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안했다. 그리하여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9월 2일 서울에서 제2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개최된 이후 7차례의 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1973년 7월 11∼13일 제1차 실무회의(1973.11.28) 이후 제25차(1977.12.9)까지 실무회의를 진행했다. 한편 JRC는 1973년에 RCY(Red Cross Youth)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5년 5월 13일∼12월 20일 베트남 난민 1,562명을 집단수용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청소년적십자 지도자회의를 1975년 5월 19∼31일 개최하였다. 전국 혈액사업을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전국에 14개의 적십자 혈액원을 운영하게 된 것은 1981년 7월 1일이다. 또한 1984년 5월 1∼9일 제6차 아시아·태평양지역 적십자혈액사업 회의를 개최하고, 9월 24일∼10월 4일 북한적십자회가 제공한 수재물자를 인수하였다. 1985년 5월 27∼30일 12년 만에 재개된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5.28. ∼29. )을 서울에서 개최하였고, 8월 26∼29일 제9차 남북적십자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한 뒤, 9월 20∼23일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 교환 방문하였으며, 12월 2∼5일 제10차 남북적십자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였다.한편 1987년 12월 4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이 전면 개정되었는데, 이는 법률 제3988호이다. 1989년 9월 25일∼10월 3일 소련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 40명의 첫 단체 모국 방문이 성사되었다. 전국 11개소에 적십자 129응급환자 정보센터를 설치한 것은 1991년 7월 1일이다. 1991년 12월 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1991.12.10. ∼13. )에서 ‘남북이산가족 문제 해결 대책을 강구한다. ’는데 합의(합의서 제18조), 1992년 9월 17일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1991.9.15. ∼19. )에서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협력 부속합의서에 서명하여 발효하게 되었다.사할린에 거주하는 고령 동포 77명을 1992년 9월 29일 영주 귀국시켜, 강원도 춘천에 있는 사랑의 집에 입주시켰다. 부산적십자 난민보호소는 1994년 2월 8일 18년 만에 인도적 임무를 종료하고, 6월 10일 원폭 복지사업소 개소식을 거행했다. 한편 1993년 12월 16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이 개정되었다. 1995년 5월 10∼15일 아·태지역 적십자봉사원 대회를 개최하여, 29개 회원국 적십자사와 2개 국제기구에서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아·태지역 적십자 간의 협력 체계를 구축할 전기를 마련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 연인원 3,000여 명의 직원과 봉사원을 파견하여 인명구조 활동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1월 23일 북한수재민을 돕기 위한 구호물자 담요 5,000매를 연맹을 통해 북한적십자회에 전달하였다(12월 11일 담요 3,000매 추가지원).한편 국제구호요원은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96년 10월 14∼19일 국제적십자 활동현장에 파견할 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으로 처음 실시되었다. 또 10월 14일 원폭 피해자를 위한 종합복지관을 경상남도 합천에 개관하였다. 1997년 4월 18일 대북 구호 식량 및 물품 제공에 따른 절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적십자 대표 접촉을 제의하였고, 5월 26일 중국 북경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에서 「남북적십자 사이의 구호 물자 전달 절차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 7월까지 옥수수 기준 5만t의 식량을 한적 직원이 북한에서 직접 전달키로 합의하였다.조직은「대한적십자사 조직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명예 총재로, 국무총리를 명예 부총재로 추대하며 의결기관으로 전국 대의원총회 중앙위원회, 운영위원회가 있으며 전국 대의원 총회는 대통령이 위촉하는 8인, 국회에서 위촉하는 12인,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가 위촉하는 각 2인, 적십자사 지사에서 선출하는 각 6인으로 구성하고, 중앙위원회는 총재를 포함한 28인으로 구성하며 운영위원회는 총재를 포함한 7인으로 구성하고, 총재는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하여 대통령의 인준을 받아 취임하고 기타 임원은 부총재 2인, 재정감독 1인, 법률고문 1인을 둔다.대한적십자사는 전국 각지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병원, 혈액원, 회관, 봉사관 등 적십자 사업기관을 두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의 사무는 사무총장의 책임하에 기획관리실, 총무부, 사회봉사부, 청소년부, 의료사업부, 국제부, 이산가족사업부, 홍보실, 감사실, 혈액사업 본부에서 집행하며 서울특별시, 부산·대구·인천광역시 및 각도의 13개 지사와 혈액원 16개 소, 병원 7개 소, 기타 교육원, 혈액제제 연구소 등의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청년·부녀·장년·노년층으로 구성된 일반 지역·직장 봉사회와 각 사업부서별 특정 전문 분야의 지식·기술·기능을 보유한 전문 봉사회, 초·중·고·대학의 청소년 적십자(RCY), 각종 사업 후원조직 등이 자원봉사조직이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교육원, 혈액수혈연구원, 사업추진국(재난구호팀), 병원보건안전국(보건안전교육팀)이 2014년 5월 원주 혁신도시(강원도 원주시 혁신로 50)로 이전하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직함은 2019년 혈액관리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에 의해 회장 직함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명예총재는 명예회장으로, 총재와 부총재는 회장과 부회장으로 각각 바뀌었다. 주요 사업으로는 1 구호 사업, 2 사회봉사 사업, 3 청소년 사업, 4 안전 사업, 5 병원 사업, 6 의료정보 사업, 7 지역보건 사업, 8 혈액 사업, 9 국제 사업, 10 국내외 이산가족찾기 사업, 12 원폭복지 사업, 13 인도법 보급 사업 등이 있다. 2000년 3월 현재 적십자 회원은 약 607만 5,000명, 후원회원은 약 4만 200명이다. 본부는 강원도 원주시 혁신로에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대한적십자사
(大韓赤十字社)
### 내용:
1859년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솔페리노 전쟁의 비참상과 그의 체험을 『솔페리노의 회상』으로 엮어 1862년 11월 출판했다.
이 책 속에서 뒤낭은 상병자를 간호하기 위한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구호단체를 평시에 각국 내에 설치할 것과, 군대의 부상자를 돌보는 군의료 요원들과 군목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이런 뒤낭의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전신인 국제부상자구호위원회(일명 5인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이 위원회의 초청으로 16개국 대표가 모인 회의가 1863년 10월 제네바에서 개최되었으며, 10개 조문의 적십자규약을 채택함으로써 국제적십자운동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우리나라 적십자운동의 역사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적십자의 본고장인 유럽과 북미로부터 적십자 정신이 우리나라의 조정과 민간에 전해지기 시작하여 독립신문의 사설에까지 적십자 정신이 여러 차례 반영되었다. 주 프랑스공사는 20세기 초 고종의 훈령으로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적십자 회의에 처음 참석했다. 그리고 1903년 1월 8일 대한제국 정부가, 1864년 유럽 12개국 대표에 의해 서명 조인된 최초의 적십자조약인 「육지전투에 있어서 군대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네바협약」 가입과, 같은 해 2월 7일 「1899년의 헤이그협약」의 서명으로 적십자를 이해하게 된 뒤, 1905년 10월 27일 고종황제 칙령 제47호「대한적십자사 규칙」을 반포함으로써 국가 수준의 기틀을 갖게 되었다.한일합병 1년 전인 1909년 7월 23일, 대한적십자사는 칙령 제67호에 의해 폐지되고,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운영되었다. 그렇지만 그 명맥은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1919년 7월 13일 임정내무부령 제62호에 의해 대한적십자회가 설립인가를 받고 다시 부활하여, 1919년 11월 15일 대한적십자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대한적십자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부활되었는데, 항일 무력투쟁을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45년 8·15광복 후 적십자사 재건운동은 1947년 3월 15일 조선적십자사로 일단 결실을 맺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따라 1949년 4월 30일 공포된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에 의해 같은 해 10월 27일 대한적십자사로 재조직되었다. 양주삼이 초대 총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적십자사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전시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 2월 6일 휴전회담에서 양측 적십자 단체로 구성된 합동기구가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포로송환에 협조하기로 합의했고, 서울 적십자병원에 임시 구호병원을 설치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포로송환에 참여하여 1953년 8월 3일∼9월 7일 동안 공동 UN적십자단원으로 활동했다. 대한적십자사는 1955년 5월 26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국제 승인을 받은 후, 같은 해 9월 28일 국제적십자사 연맹에 가입하여 74번째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당시 적십자소식(당시<NAME>는 적십자월보)을 창간했다. 1956년 5월 적십자의 노래를 제정하고, 1957년 11월 18일 6·25전쟁 당시 납북된 337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은 1958년 2월 15일 국립혈액원을 인수하여 개관했고, 1959년 9월 삼남지방에 불어닥친 태풍 사라호의 피해<NAME>을 도왔다. 청소년적십자는 1964년 5월 26일 스승의 날을 제정하고 JRC(Junior Red Cross) 조직학교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한국은 1965년 12월 1일 헌혈운동을 시작하여 1966년 7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제네바 제협약 가입 비준을 승인함에 따라 1966년 8월 16일 제네바 제협약에 111번째 가입국이 되었다. 대한적십자사는 1971년 8월 12일 남북이산가족찾기 회담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안했다. 그리하여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9월 2일 서울에서 제2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개최된 이후 7차례의 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1973년 7월 11∼13일 제1차 실무회의(1973.11.28) 이후 제25차(1977.12.9)까지 실무회의를 진행했다. 한편 JRC는 1973년에 RCY(Red Cross Youth)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5년 5월 13일∼12월 20일 베트남 난민 1,562명을 집단수용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청소년적십자 지도자회의를 1975년 5월 19∼31일 개최하였다. 전국 혈액사업을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전국에 14개의 적십자 혈액원을 운영하게 된 것은 1981년 7월 1일이다. 또한 1984년 5월 1∼9일 제6차 아시아·태평양지역 적십자혈액사업 회의를 개최하고, 9월 24일∼10월 4일 북한적십자회가 제공한 수재물자를 인수하였다. 1985년 5월 27∼30일 12년 만에 재개된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5.28. ∼29. )을 서울에서 개최하였고, 8월 26∼29일 제9차 남북적십자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한 뒤, 9월 20∼23일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 교환 방문하였으며, 12월 2∼5일 제10차 남북적십자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였다.한편 1987년 12월 4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이 전면 개정되었는데, 이는 법률 제3988호이다. 1989년 9월 25일∼10월 3일 소련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 40명의 첫 단체 모국 방문이 성사되었다. 전국 11개소에 적십자 129응급환자 정보센터를 설치한 것은 1991년 7월 1일이다. 1991년 12월 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1991.12.10. ∼13. )에서 ‘남북이산가족 문제 해결 대책을 강구한다. ’는데 합의(합의서 제18조), 1992년 9월 17일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1991.9.15. ∼19. )에서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협력 부속합의서에 서명하여 발효하게 되었다.사할린에 거주하는 고령 동포 77명을 1992년 9월 29일 영주 귀국시켜, 강원도 춘천에 있는 사랑의 집에 입주시켰다. 부산적십자 난민보호소는 1994년 2월 8일 18년 만에 인도적 임무를 종료하고, 6월 10일 원폭 복지사업소 개소식을 거행했다. 한편 1993년 12월 16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이 개정되었다. 1995년 5월 10∼15일 아·태지역 적십자봉사원 대회를 개최하여, 29개 회원국 적십자사와 2개 국제기구에서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아·태지역 적십자 간의 협력 체계를 구축할 전기를 마련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 연인원 3,000여 명의 직원과 봉사원을 파견하여 인명구조 활동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1월 23일 북한수재민을 돕기 위한 구호물자 담요 5,000매를 연맹을 통해 북한적십자회에 전달하였다(12월 11일 담요 3,000매 추가지원).한편 국제구호요원은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96년 10월 14∼19일 국제적십자 활동현장에 파견할 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으로 처음 실시되었다. 또 10월 14일 원폭 피해자를 위한 종합복지관을 경상남도 합천에 개관하였다. 1997년 4월 18일 대북 구호 식량 및 물품 제공에 따른 절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적십자 대표 접촉을 제의하였고, 5월 26일 중국 북경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에서 「남북적십자 사이의 구호 물자 전달 절차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 7월까지 옥수수 기준 5만t의 식량을 한적 직원이 북한에서 직접 전달키로 합의하였다.조직은「대한적십자사 조직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명예 총재로, 국무총리를 명예 부총재로 추대하며 의결기관으로 전국 대의원총회 중앙위원회, 운영위원회가 있으며 전국 대의원 총회는 대통령이 위촉하는 8인, 국회에서 위촉하는 12인,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가 위촉하는 각 2인, 적십자사 지사에서 선출하는 각 6인으로 구성하고, 중앙위원회는 총재를 포함한 28인으로 구성하며 운영위원회는 총재를 포함한 7인으로 구성하고, 총재는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하여 대통령의 인준을 받아 취임하고 기타 임원은 부총재 2인, 재정감독 1인, 법률고문 1인을 둔다.대한적십자사는 전국 각지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병원, 혈액원, 회관, 봉사관 등 적십자 사업기관을 두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의 사무는 사무총장의 책임하에 기획관리실, 총무부, 사회봉사부, 청소년부, 의료사업부, 국제부, 이산가족사업부, 홍보실, 감사실, 혈액사업 본부에서 집행하며 서울특별시, 부산·대구·인천광역시 및 각도의 13개 지사와 혈액원 16개 소, 병원 7개 소, 기타 교육원, 혈액제제 연구소 등의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청년·부녀·장년·노년층으로 구성된 일반 지역·직장 봉사회와 각 사업부서별 특정 전문 분야의 지식·기술·기능을 보유한 전문 봉사회, 초·중·고·대학의 청소년 적십자(RCY), 각종 사업 후원조직 등이 자원봉사조직이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교육원, 혈액수혈연구원, 사업추진국(재난구호팀), 병원보건안전국(보건안전교육팀)이 2014년 5월 원주 혁신도시(강원도 원주시 혁신로 50)로 이전하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직함은 2019년 혈액관리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에 의해 회장 직함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명예총재는 명예회장으로, 총재와 부총재는 회장과 부회장으로 각각 바뀌었다. 주요 사업으로는 1 구호 사업, 2 사회봉사 사업, 3 청소년 사업, 4 안전 사업, 5 병원 사업, 6 의료정보 사업, 7 지역보건 사업, 8 혈액 사업, 9 국제 사업, 10 국내외 이산가족찾기 사업, 12 원폭복지 사업, 13 인도법 보급 사업 등이 있다. 2000년 3월 현재 적십자 회원은 약 607만 5,000명, 후원회원은 약 4만 200명이다. 본부는 강원도 원주시 혁신로에 있다. |
ffec2f2e-3002-4abb-a5be-6ae6c68a5f3e | source05/encykorea/SOC53192.txt | 신한촌민회
(新韓村民會)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48 | CC BY | 26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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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한촌에 거주하는 한인의 지위를 향상하고 마을 안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개척리(開拓里) 때부터 시행되었던 한민회(韓民會)를 정비하여 운영하였다. 극동 지역에 거주하였던 한인들은 이 지역의 한인사회가 점차 자리를 잡아 나가자, 거주지 안에 행정, 치안, 친목을 위한 단체로 자치기구들을 마련하였다. 색 중청은 여러 한인 자치기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러시아 당국의 허가와 행정 지시를 받았으나, 자율적으로 임원을 뽑아서 한인들 사이의 분쟁과 시비를 가려내고, 본국의 도덕과 풍습을 유지하여 동포애를 발휘할 수 있도록 애썼다. 이처럼 자치기구들은 치안 업무와 간단한 사무 처리를 주로 맡았는데, 점차<NAME>과 같은 신체적 징벌과 더불어 마을 밖으로 추방할 수 있는 특권도 갖고 세금 징수도 담당하기도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개척리는 러시아 당국의 결정에 따라 1911년 신한촌으로 이전되었다. 신한촌 사람들은 개척리 시절부터 있었던 한민회를 정리하여 자치기구인 해삼위 거류민회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이유로 해삼위 거류민회는 1912년 6월에 해산되었고, 뒤이어 신한 촌민회가 설립되었다. 신한 촌민회는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이 때문에 일제의 감시와 방해를 받았다. 1920년 4월에 일제가 수많은 한인을 학살한 경신참변이 일어나면서 해산되었고, 그 뒤 일본 영사관의 감독을 받는 친일적 민회인 조선인회가 생겨났다. 신한 촌민회는 1912년 6월 회장 김병학, 부회장<NAME>을 비롯한 평의원 20명으로 기구를 정비한 뒤 출범하였다. 특히 신한촌 안에 거주하는 한인 300여 가구를 4등급으로 나누고 자치 운영비를 차등 지급하여 자치 활동 경비를 마련하였다. 신한 촌민회는 3월에 권업회와 함께 세운 한민학교 운영과 유지 문제, 신한촌 안에서 한인의 권리 보호, 블라디보스토크 시당국과의 행정 타협 문제 등 다방면의 문제를 다루었다. 자치 행정에 관한 업무를 블라드 보스토크 시당국으로부터 위임받아 소송, 주민 구제 식료품 통제 등 여러 가지 업무를 담당하기도 한 것은 1917년 가을 이후이다. 러시아 극동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염원이던 치안 유지, 동포 권익 신장 고양 등 자치기구 결성 목적에 충실한 단체가 신한 촌민회였다. 특히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하면서 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자치기구로 성장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신한촌민회
(新韓村民會)
### 내용:
신한촌에 거주하는 한인의 지위를 향상하고 마을 안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개척리(開拓里) 때부터 시행되었던 한민회(韓民會)를 정비하여 운영하였다. 극동 지역에 거주하였던 한인들은 이 지역의 한인사회가 점차 자리를 잡아 나가자, 거주지 안에 행정, 치안, 친목을 위한 단체로 자치기구들을 마련하였다. 색 중청은 여러 한인 자치기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러시아 당국의 허가와 행정 지시를 받았으나, 자율적으로 임원을 뽑아서 한인들 사이의 분쟁과 시비를 가려내고, 본국의 도덕과 풍습을 유지하여 동포애를 발휘할 수 있도록 애썼다. 이처럼 자치기구들은 치안 업무와 간단한 사무 처리를 주로 맡았는데, 점차<NAME>과 같은 신체적 징벌과 더불어 마을 밖으로 추방할 수 있는 특권도 갖고 세금 징수도 담당하기도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개척리는 러시아 당국의 결정에 따라 1911년 신한촌으로 이전되었다. 신한촌 사람들은 개척리 시절부터 있었던 한민회를 정리하여 자치기구인 해삼위 거류민회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이유로 해삼위 거류민회는 1912년 6월에 해산되었고, 뒤이어 신한 촌민회가 설립되었다. 신한 촌민회는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이 때문에 일제의 감시와 방해를 받았다. 1920년 4월에 일제가 수많은 한인을 학살한 경신참변이 일어나면서 해산되었고, 그 뒤 일본 영사관의 감독을 받는 친일적 민회인 조선인회가 생겨났다. 신한 촌민회는 1912년 6월 회장 김병학, 부회장<NAME>을 비롯한 평의원 20명으로 기구를 정비한 뒤 출범하였다. 특히 신한촌 안에 거주하는 한인 300여 가구를 4등급으로 나누고 자치 운영비를 차등 지급하여 자치 활동 경비를 마련하였다. 신한 촌민회는 3월에 권업회와 함께 세운 한민학교 운영과 유지 문제, 신한촌 안에서 한인의 권리 보호, 블라디보스토크 시당국과의 행정 타협 문제 등 다방면의 문제를 다루었다. 자치 행정에 관한 업무를 블라드 보스토크 시당국으로부터 위임받아 소송, 주민 구제 식료품 통제 등 여러 가지 업무를 담당하기도 한 것은 1917년 가을 이후이다. 러시아 극동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염원이던 치안 유지, 동포 권익 신장 고양 등 자치기구 결성 목적에 충실한 단체가 신한 촌민회였다. 특히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하면서 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자치기구로 성장했다. |
577095d8-cc82-4249-b9b7-58521783890d | source05/encykorea/SOC37187.txt |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
(長興任氏 墓 出土服飾)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동욱"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8947 | CC BY | 2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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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광역시에서 1965년 7월 김덕령 장군의 의복이 출토되었는데, 그 곁의 묘에서 장군의 어머니인 장흥임 씨의 옷도 수점 출토되어 1980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장흥 임 씨는 장군과 동시대에 살았다. 따라서 김덕령과 같은 1590년대의 임씨 부인의 의복 착용 연대가 존재한다. 임씨 부인의 옷은 저고리 3점, 내 친고( : 속바지) 2점, 목면 철릭 1점, 직물류 및 미투리가 나왔다. 여성의 철릭 착용 사실을(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확인하는 데 목면 철릭이 중요하다. 또한 목판깃과 반달 깃이 저고리에 같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우리가 상대로 갈수록 목판깃을 입었다고 믿어왔던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또, 옛날부터 전해져온 관습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남자 바지와 같은 형태의 여자 바지가 2점 존재하는데, 이런 바지는 최근의 민속 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눅이 곧은 버선 1족도 그 시대의 타지 출토 버선과 같다. 특히 10여 군데의 백무명겹유저고리[]는 입었던 것을 그대로 수의로 넣은 것이다. 특히 당시 저고리의 길이와 소매길이가 긴 것은 등길이 70cm나 되었기 때문이다. 백무명적삼은 저고리와 비슷하게 길이가 62cm이고, 화장은 70cm이다. 양옆에 15cm 길이의 트임이 있다. 백무 명단 철릭은 90cm나 되는 장식을 가지고 있으며, 소매를 벗었다 붙였다 할 수 있다. 속바지와 단속 바지는 솜을 두고 안 두고의 차이는 있지만 남자 바지와 같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을 일습으로 치자면 단속바지(홑)·속바지(솜)·백색적삼·백색겹유저고리·철릭·직령포 순이다. 이 출토 복식은 속바지를 2점이나 출토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국가 민속문화재로 1980년 지정된 속바지(국가 민속문화재, 1980년 지정)와 같이 이형 부인 동래 정씨 묘소에서도 출토된 것이다. 장흥 임 씨가 광주이고, 동래 정씨가 시흥이니, 당시 전국적으로 입던 옷 같다. 현재도 일부 사람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므로 얼마 전 유행하였던 옷 같다. 광주시립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장흥임씨 묘 출토복식
(長興任氏 墓 出土服飾)
### 내용:
광주광역시에서 1965년 7월 김덕령 장군의 의복이 출토되었는데, 그 곁의 묘에서 장군의 어머니인 장흥임 씨의 옷도 수점 출토되어 1980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장흥 임 씨는 장군과 동시대에 살았다. 따라서 김덕령과 같은 1590년대의 임씨 부인의 의복 착용 연대가 존재한다. 임씨 부인의 옷은 저고리 3점, 내 친고( : 속바지) 2점, 목면 철릭 1점, 직물류 및 미투리가 나왔다. 여성의 철릭 착용 사실을(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확인하는 데 목면 철릭이 중요하다. 또한 목판깃과 반달 깃이 저고리에 같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우리가 상대로 갈수록 목판깃을 입었다고 믿어왔던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또, 옛날부터 전해져온 관습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남자 바지와 같은 형태의 여자 바지가 2점 존재하는데, 이런 바지는 최근의 민속 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눅이 곧은 버선 1족도 그 시대의 타지 출토 버선과 같다. 특히 10여 군데의 백무명겹유저고리[]는 입었던 것을 그대로 수의로 넣은 것이다. 특히 당시 저고리의 길이와 소매길이가 긴 것은 등길이 70cm나 되었기 때문이다. 백무명적삼은 저고리와 비슷하게 길이가 62cm이고, 화장은 70cm이다. 양옆에 15cm 길이의 트임이 있다. 백무 명단 철릭은 90cm나 되는 장식을 가지고 있으며, 소매를 벗었다 붙였다 할 수 있다. 속바지와 단속 바지는 솜을 두고 안 두고의 차이는 있지만 남자 바지와 같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을 일습으로 치자면 단속바지(홑)·속바지(솜)·백색적삼·백색겹유저고리·철릭·직령포 순이다. 이 출토 복식은 속바지를 2점이나 출토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국가 민속문화재로 1980년 지정된 속바지(국가 민속문화재, 1980년 지정)와 같이 이형 부인 동래 정씨 묘소에서도 출토된 것이다. 장흥 임 씨가 광주이고, 동래 정씨가 시흥이니, 당시 전국적으로 입던 옷 같다. 현재도 일부 사람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므로 얼마 전 유행하였던 옷 같다. 광주시립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d2931b69-3716-4767-8945-b5e87b7fb40e | source05/encykorea/ECO53666.txt |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國立農産物品質管理院)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090 | CC BY | 4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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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le": "사회",
"sub": ""
} |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농식품 인증 제도, 안전성 관리, 원산지 관리, 품질검사, 농업경영체 등록, 농업용 면세 유류 사후관리, 직접지불제, 농업인 확인서, 농산물 품질관리사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농식품 인증 제도는 친환경농산물 인증 제도, 농산물이력 추적관리제도, 전통식품 품질인증 제도, 우수식품 인증기관 지정 제도, 술품질 인증 제도, 농산물 우수관리 인증 제도, 가공식품산업표준 KS 인증 제도, 유기가공식품 인증제도, 지리적 표시제도, 인증 마크 등을 관리한다. 안전성 관리 업무는 안전성 조사, 국가잔류조사, 사료 검정 및 안전성 검사기관 지정과 같은 것이다. 농식품 원산지 표시, 음식점 원산지 표시, 쇠고기 이력제, GMO 표시 관리, LMO 수입 승인 및 안전 관리, 인삼류 사후관리 등이 원산지 관리 업무의 주요 내용이다. 품질검사는 농산물검사, 양곡표시제, 표준규격화를 관리하고 있다. 친환경 축산을 실천하는 축산 농가에게 초기 소득 감소분 및 생산비의 차이를 보전함으로써 친환경 축산의 확산을 도모하는 것이 친환경 안전축산물 직접 지불 업무이다. 농업경영체 등록 업무는 농가의 인력 정보와 농산물 및 축산물의 생산정보를 관리한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1998년 7월에 농업통계사무소가 국립농산물검사소로 통합되면서 개원하였고, 1999년 7월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농업통계사무소는 1947년 농림부에 설치된 조사 통계과에서 출발한다. 지방행정기관 농업통계조직이 농림부로 이관되면서 도·농업통계사무소 9개소와 시·군 출장소 139개소가 설치되었다. 농산물검사소는 1949년에 농산물검사법 제정과 함께 설립되었다. 1962년에 국립농산물검사소로 이름을 바꾸고, 1963년에 시험소를 설치하였다. 1986년 말에는 서울특별시 종로에서 경기도 안양시로 청사를 이전하였다. 1992년에 농산물 품질인증제, 1993년에 농산물 표준 출하규격 사업 기능, 1994년에 농산물 원산지 관리 업무가 담당하게 되었다. 1998년에는 137개 출장소 중에서 19개소를 폐지하여 118개소로 축소하였다. 농산물검사소와 농업통계사무소가 1998년 7월에 통합되면서 6개 지소와 80개 출장소로 개편되었다. 2014년 기준 9개 지원 109개 사무소로 구성되어 있다. 2013년 12월 경상북도 김천시 율곡동으로 이전하였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생산부터 유통·판매단계까지 안전성이 취약한 품목 위주로 안전성 조사를 실시하므로 조사 시기 및 방법 등에 따라 부적합 비율의 변동이 있지만 농산물의 안전성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잔류조사를 별도로 실시하고 있다. 2013년 상반기 안전성 조사 결과 부적합 처리된 것은 총 297건으로 폐기 부문에서 49건, 출하 연기에서 132건, 기타에서 117건이 이루어졌고 56품목 중 297건이 부적합 처리되었다. 2013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원산지 표시 단속실적에 따르면 조 사장 10만 3986개소에서 원산지 거짓표시를 한 곳이 1,329개소였고 원산지 미표시로 적발된 곳이 899개소여서 총 2억 183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되었다. 2014년 상반기에는 커피 및 양잠산물 원산지 단속, 이유식·유아식 원산지 단속 등이 이루어졌다. 원산지 표시 특별단속을 실시한 결과 총 7만 105개 조 사장 중 1,164개소가 원산지 거짓표시로 적발되었고 794개소가 원산지 미표시로 적발되어 총 1억 7907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되었다. 최근 WTO의 출범과 FTA 체결의 확대 등으로 국가 간 농산물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마다 자국의 농업 보호 및 농산물의 안전성 확보에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해 소비자 보호를 통한 수입 농산물 검역 강화가 첫 번째 임무이다. 이러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안전 관리 기반 구축과 수출 국가별 기준에 맞는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이처럼 급변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수출입 농산물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분석을 통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구해오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國立農産物品質管理院)
### 내용: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농식품 인증 제도, 안전성 관리, 원산지 관리, 품질검사, 농업경영체 등록, 농업용 면세 유류 사후관리, 직접지불제, 농업인 확인서, 농산물 품질관리사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농식품 인증 제도는 친환경농산물 인증 제도, 농산물이력 추적관리제도, 전통식품 품질인증 제도, 우수식품 인증기관 지정 제도, 술품질 인증 제도, 농산물 우수관리 인증 제도, 가공식품산업표준 KS 인증 제도, 유기가공식품 인증제도, 지리적 표시제도, 인증 마크 등을 관리한다. 안전성 관리 업무는 안전성 조사, 국가잔류조사, 사료 검정 및 안전성 검사기관 지정과 같은 것이다. 농식품 원산지 표시, 음식점 원산지 표시, 쇠고기 이력제, GMO 표시 관리, LMO 수입 승인 및 안전 관리, 인삼류 사후관리 등이 원산지 관리 업무의 주요 내용이다. 품질검사는 농산물검사, 양곡표시제, 표준규격화를 관리하고 있다. 친환경 축산을 실천하는 축산 농가에게 초기 소득 감소분 및 생산비의 차이를 보전함으로써 친환경 축산의 확산을 도모하는 것이 친환경 안전축산물 직접 지불 업무이다. 농업경영체 등록 업무는 농가의 인력 정보와 농산물 및 축산물의 생산정보를 관리한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1998년 7월에 농업통계사무소가 국립농산물검사소로 통합되면서 개원하였고, 1999년 7월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농업통계사무소는 1947년 농림부에 설치된 조사 통계과에서 출발한다. 지방행정기관 농업통계조직이 농림부로 이관되면서 도·농업통계사무소 9개소와 시·군 출장소 139개소가 설치되었다. 농산물검사소는 1949년에 농산물검사법 제정과 함께 설립되었다. 1962년에 국립농산물검사소로 이름을 바꾸고, 1963년에 시험소를 설치하였다. 1986년 말에는 서울특별시 종로에서 경기도 안양시로 청사를 이전하였다. 1992년에 농산물 품질인증제, 1993년에 농산물 표준 출하규격 사업 기능, 1994년에 농산물 원산지 관리 업무가 담당하게 되었다. 1998년에는 137개 출장소 중에서 19개소를 폐지하여 118개소로 축소하였다. 농산물검사소와 농업통계사무소가 1998년 7월에 통합되면서 6개 지소와 80개 출장소로 개편되었다. 2014년 기준 9개 지원 109개 사무소로 구성되어 있다. 2013년 12월 경상북도 김천시 율곡동으로 이전하였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생산부터 유통·판매단계까지 안전성이 취약한 품목 위주로 안전성 조사를 실시하므로 조사 시기 및 방법 등에 따라 부적합 비율의 변동이 있지만 농산물의 안전성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잔류조사를 별도로 실시하고 있다. 2013년 상반기 안전성 조사 결과 부적합 처리된 것은 총 297건으로 폐기 부문에서 49건, 출하 연기에서 132건, 기타에서 117건이 이루어졌고 56품목 중 297건이 부적합 처리되었다. 2013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원산지 표시 단속실적에 따르면 조 사장 10만 3986개소에서 원산지 거짓표시를 한 곳이 1,329개소였고 원산지 미표시로 적발된 곳이 899개소여서 총 2억 183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되었다. 2014년 상반기에는 커피 및 양잠산물 원산지 단속, 이유식·유아식 원산지 단속 등이 이루어졌다. 원산지 표시 특별단속을 실시한 결과 총 7만 105개 조 사장 중 1,164개소가 원산지 거짓표시로 적발되었고 794개소가 원산지 미표시로 적발되어 총 1억 7907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되었다. 최근 WTO의 출범과 FTA 체결의 확대 등으로 국가 간 농산물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마다 자국의 농업 보호 및 농산물의 안전성 확보에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해 소비자 보호를 통한 수입 농산물 검역 강화가 첫 번째 임무이다. 이러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안전 관리 기반 구축과 수출 국가별 기준에 맞는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이처럼 급변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수출입 농산물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분석을 통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구해오고 있다. |
a1c0dce7-1b15-44cb-b1e6-87b2fe16e708 | source05/encykorea/POL31715.txt | 윤치영
(尹致暎)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635 | CC BY | 30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서울에서 1898년에 태어났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의 동생이며, 윤웅렬이 백부이다. 1911년 서울 교동 보통학교와 1915년 경성 중앙 기독교청년회 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도쿄 세이소 구영어 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1918년 재일조선인 유학생 학우회의 체육부장과 사교 부장, 1922년 재일조선 기독교청년회 사교부 간사로 활동했다.
1922년 와세다(早稻田)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헤이스팅스대학, 컬럼비아대학, 엘리자베스 시티 주립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32년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 1934년 아메리칸대학에서 국제법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시절인 1928년에는 재미 한인 유학생 총회 사교 부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학업을 하는 동시에 1923년 하와이에서 이승만의 노선을 따라 하와이 한인회,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동아일보 주미 통신원,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주미 통신원, 1924년 10월 하와이 대한 인동지회의 기관지 태평양의 주필, 1928년 뉴욕에서 창간된 삼일 신보의 발기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 귀국한 이후, 1936년 중앙 기독교청년회 부총무, 흥업구락부 간사가 되었고,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9월 3일 신흥우 · 갈홍기 등과 함께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주1 처분으로 석방된 이후 친일 협력의 길을 걸었다. 삼천리사에서 주최한 임 전 대책 협의회의 대 좌담회에 참여했고, 1941년 8월에는 임 전 대책 협의회를 개칭한 임 전 대책 협력 회의 채권 가도 판매대에 참여했으며, 1940년 1월 황 군의 무운장구를 축도함이라는 글을 청년에 발표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같은 달 참여했고 10월부터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매일신보 · 동양 지광 등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글을 싣는 한편, 1944년 9월 국민동원 총 진 회의 중앙 지도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 발기인과 총무부 역원으로 참여해 외무부 부장이 되었고, 10월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는 비서실장이 되었다. 1948년<NAME>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외무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49년 12월에는 대한 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3년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 선임된 뒤 1956년 부통령 선거에 대한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으로 참여해 2월 중앙상임위원, 5월 의장을 역임했다. 1965년 12월 서울특별시장, 1970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을 지냈다. 1996년 2월 9일에 사망했다. 무궁화장(1969)은<NAME>장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윤치영
(尹致暎)
### 내용:
서울에서 1898년에 태어났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의 동생이며, 윤웅렬이 백부이다. 1911년 서울 교동 보통학교와 1915년 경성 중앙 기독교청년회 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도쿄 세이소 구영어 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1918년 재일조선인 유학생 학우회의 체육부장과 사교 부장, 1922년 재일조선 기독교청년회 사교부 간사로 활동했다.
1922년 와세다(早稻田)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헤이스팅스대학, 컬럼비아대학, 엘리자베스 시티 주립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32년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 1934년 아메리칸대학에서 국제법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시절인 1928년에는 재미 한인 유학생 총회 사교 부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학업을 하는 동시에 1923년 하와이에서 이승만의 노선을 따라 하와이 한인회,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동아일보 주미 통신원,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주미 통신원, 1924년 10월 하와이 대한 인동지회의 기관지 태평양의 주필, 1928년 뉴욕에서 창간된 삼일 신보의 발기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 귀국한 이후, 1936년 중앙 기독교청년회 부총무, 흥업구락부 간사가 되었고,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9월 3일 신흥우 · 갈홍기 등과 함께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주1 처분으로 석방된 이후 친일 협력의 길을 걸었다. 삼천리사에서 주최한 임 전 대책 협의회의 대 좌담회에 참여했고, 1941년 8월에는 임 전 대책 협의회를 개칭한 임 전 대책 협력 회의 채권 가도 판매대에 참여했으며, 1940년 1월 황 군의 무운장구를 축도함이라는 글을 청년에 발표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같은 달 참여했고 10월부터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매일신보 · 동양 지광 등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글을 싣는 한편, 1944년 9월 국민동원 총 진 회의 중앙 지도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 발기인과 총무부 역원으로 참여해 외무부 부장이 되었고, 10월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는 비서실장이 되었다. 1948년<NAME>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외무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49년 12월에는 대한 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3년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 선임된 뒤 1956년 부통령 선거에 대한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으로 참여해 2월 중앙상임위원, 5월 의장을 역임했다. 1965년 12월 서울특별시장, 1970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을 지냈다. 1996년 2월 9일에 사망했다. 무궁화장(1969)은<NAME>장이다. |
574e7494-84ee-42ee-9f5b-852512b4b693 | source05/encykorea/SOC14517.txt | 망천동 임당댁
(輞川洞 林塘宅)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신영훈"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901 | CC BY | 167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영조 51년(1775)<NAME><NAME>이 창건하고 누대를 세거하다가 1964년 재천이 사들였다. 안동시 임동면 망천동에 있던 집을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대 문간채와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단칸 통으로 대문·방·부엌·외양간 순서이고 대 문간채는 정면 4칸, 측면 단칸 통으로 외양간 바깥벽에 측간을 부설했다. 대문만이 가진 특색이다. 보통 처마 아래로 가게 마련인데 이 집은 끝간 합각 쪽에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대문이 북향이었다. 특이한 구조이다. 안채는 자형 날개 집으로 정면 6칸으로 중문 우측으로 작은 사랑 방과 마루, 좌측으로 큰 사랑방 2칸과 마루, 큰 사랑방 2칸과 마루가 자리 잡고 있다. 날개 좌우 끝에 각각 마루를 배치한 배치 법도 주목된다. 왼쪽 날개는 사랑방에서 시작해 감실과 고방, 부엌으로 이어진다. 큰 사랑방을 바라다보며 2칸의 안방으로 안채 본당과 이어진다. 이어서 대청이다. 2칸 이어지던 대청이 우측 날개로 꺾이면서 1칸 더 늘어난다. 상방이고 드나드는 공간인 쪽문, 그리고 작은 사랑방이 된다. 이집트의 배치에서 대청을 자로 3칸 계속 시켰기 때문에 건넌방이 생략되고 말았다. 그래서 작은 사랑의 독립을 분명히 한 것인데 이런 유형은 흔하지 않다. 창건 당시 남자아이들이 많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망천동 임당댁
(輞川洞 林塘宅)
### 내용:
영조 51년(1775)<NAME><NAME>이 창건하고 누대를 세거하다가 1964년 재천이 사들였다. 안동시 임동면 망천동에 있던 집을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대 문간채와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단칸 통으로 대문·방·부엌·외양간 순서이고 대 문간채는 정면 4칸, 측면 단칸 통으로 외양간 바깥벽에 측간을 부설했다. 대문만이 가진 특색이다. 보통 처마 아래로 가게 마련인데 이 집은 끝간 합각 쪽에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대문이 북향이었다. 특이한 구조이다. 안채는 자형 날개 집으로 정면 6칸으로 중문 우측으로 작은 사랑 방과 마루, 좌측으로 큰 사랑방 2칸과 마루, 큰 사랑방 2칸과 마루가 자리 잡고 있다. 날개 좌우 끝에 각각 마루를 배치한 배치 법도 주목된다. 왼쪽 날개는 사랑방에서 시작해 감실과 고방, 부엌으로 이어진다. 큰 사랑방을 바라다보며 2칸의 안방으로 안채 본당과 이어진다. 이어서 대청이다. 2칸 이어지던 대청이 우측 날개로 꺾이면서 1칸 더 늘어난다. 상방이고 드나드는 공간인 쪽문, 그리고 작은 사랑방이 된다. 이집트의 배치에서 대청을 자로 3칸 계속 시켰기 때문에 건넌방이 생략되고 말았다. 그래서 작은 사랑의 독립을 분명히 한 것인데 이런 유형은 흔하지 않다. 창건 당시 남자아이들이 많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
7a87334f-26dc-4c92-87b6-d8538a301e65 | source05/encykorea/SOC10688.txt | 담배합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박대순"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784 | CC BY | 7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경도잡지에 나오는 담배합은 목재·석재·금속재 등으로 만들어지며 그 형태와 종류가 다양하다. 연에 조관들은 반드시 연합을 가지고 있는데 매화와 대나무를 은으로 새겼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연합이 사용되었다. 은입사 상감 문양으로는 만수무강·수복강녕·길상문·뇌문·완자문 등이 대부분이다. 이 밖에 만든 것으로는 나무로 만든 옥돌도 있었다. 합의 모양은 타원형·원통형·방형·장방형 등이 있으며, 목재는 자단( : 콩과에 속하는<NAME> 활엽·고목)·느티나무·뽕나무·오리나무 등이 사용되었다. 칠감도 자개로 장식하거나 옻칠한 것이 고급스럽다. 오늘날 궐련이 대중화되면서 살 담배용 담배합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고, 새로운 현대식 담배합이 접대용으로 쓰이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담배합
### 내용:
경도잡지에 나오는 담배합은 목재·석재·금속재 등으로 만들어지며 그 형태와 종류가 다양하다. 연에 조관들은 반드시 연합을 가지고 있는데 매화와 대나무를 은으로 새겼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연합이 사용되었다. 은입사 상감 문양으로는 만수무강·수복강녕·길상문·뇌문·완자문 등이 대부분이다. 이 밖에 만든 것으로는 나무로 만든 옥돌도 있었다. 합의 모양은 타원형·원통형·방형·장방형 등이 있으며, 목재는 자단( : 콩과에 속하는<NAME> 활엽·고목)·느티나무·뽕나무·오리나무 등이 사용되었다. 칠감도 자개로 장식하거나 옻칠한 것이 고급스럽다. 오늘날 궐련이 대중화되면서 살 담배용 담배합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고, 새로운 현대식 담배합이 접대용으로 쓰이고 있다. |
67ae3639-fbd6-4746-a544-b570d7cd2934 | source05/encykorea/SOC45677.txt | 협호
(挾戶)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유승무"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509 | CC BY | 187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한자로 ·· 등으로 표기되어 왔는데, 모두 같은 뜻으로 쓰였으며, 남의 집 협호를 빌려 딴살림을 하는 것을 협호살이라고 불렀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협호는 지주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나, 머슴이나 소작인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협호살림이라는 말에 경제적 빈곤과 더불어 사회적 차별의 의미가 내포된 것도 이 때문이다. 협호에 사는 사람들은 협방인 또는 차호인으로 칭해졌는데, 이들은 무료로 협호를 사용하는 대신 농사일·집안일 등 자잘한 일까지 지주에게 봉사하였다. 협호에서 이들은 주인집 가사노동을 도와주고 수시로 식사를 제공받았으며 지주의 토지를 소작했다. 명절이나 손님이 왔을 때 밥상이나 술상을 운반하기도 하고, 잔치나 제사 때는 주인이 이들을 데리고 가서 물건을 운반하기도 하였다. 주인과 협호인의 사회적 관계는 원채와 협호의 관계처럼 예속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면, 주인은 협호인에게 말을 걸었고, 주인은 협호인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회적 신분 해방이 되면서 협호 인과 주인의 관계는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경제적 의존관계로 변화하였다. 협호인은 지주의 땅을 소작하는 대신 소작료를 지불했고, 협호를 쓰는 대신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렇지만은 예전처럼 신분을 가지고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농촌의 이촌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농업노동력이 부족해짐에 따라 협호인이 주인에게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대가도 점차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지금은 남의 집 협호살림을 하는 것이 불편할뿐더러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협호는 이제 과거의 주인을 잃고 빈 창고 같은 존재가 되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협호
(挾戶)
### 내용:
한자로 ·· 등으로 표기되어 왔는데, 모두 같은 뜻으로 쓰였으며, 남의 집 협호를 빌려 딴살림을 하는 것을 협호살이라고 불렀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협호는 지주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나, 머슴이나 소작인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협호살림이라는 말에 경제적 빈곤과 더불어 사회적 차별의 의미가 내포된 것도 이 때문이다. 협호에 사는 사람들은 협방인 또는 차호인으로 칭해졌는데, 이들은 무료로 협호를 사용하는 대신 농사일·집안일 등 자잘한 일까지 지주에게 봉사하였다. 협호에서 이들은 주인집 가사노동을 도와주고 수시로 식사를 제공받았으며 지주의 토지를 소작했다. 명절이나 손님이 왔을 때 밥상이나 술상을 운반하기도 하고, 잔치나 제사 때는 주인이 이들을 데리고 가서 물건을 운반하기도 하였다. 주인과 협호인의 사회적 관계는 원채와 협호의 관계처럼 예속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면, 주인은 협호인에게 말을 걸었고, 주인은 협호인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회적 신분 해방이 되면서 협호 인과 주인의 관계는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경제적 의존관계로 변화하였다. 협호인은 지주의 땅을 소작하는 대신 소작료를 지불했고, 협호를 쓰는 대신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렇지만은 예전처럼 신분을 가지고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농촌의 이촌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농업노동력이 부족해짐에 따라 협호인이 주인에게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대가도 점차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지금은 남의 집 협호살림을 하는 것이 불편할뿐더러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협호는 이제 과거의 주인을 잃고 빈 창고 같은 존재가 되었다. |
1a5223da-df39-43c6-b565-e9c7c230d800 | source05/encykorea/MED26839.txt | 오령산
(五苓散)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홍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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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한론』에는 열성병(熱性病)에 땀을 내야 할 것을 잘못으로 설사약을 써서 장에 한기가 생겨 열기를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므로, 열기가 가슴으로 몰려 담(痰)을 분비하게 되면 가슴이 몹시 아프고, 명치 밑이 딴딴하며, 손을 대지 못하게 아프고, 조갈(燥渴)이 나서 물을 마시면 넘어가지 않고 도로 토해낸다. 이런 증후를 결흉증(結胸症) 또는 수역증(水逆症)이라 하는데, 이럴 때에 이 처방을 쓴다고 하였다.
처방은 본래 택사(澤瀉) 10g, 적복령(赤茯苓)·백출(白朮)·저령(猪苓) 각 6g, 육계(肉桂) 2g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백출과 육계를 빼고 차전자(車前子)·활석을 가한 것은 백출과 육계는 성분이 더워서 소양인의 약이 아니기 때문이요, 차전자·활석을 가미한 것은 더욱 강력한 이수(利水) 작용을 시키기 위함이다. 택사는 이뇨·소종을, 적복령·저령·차전자는 모두 이 수작용을 하는 대표적인 약이다. 특히 활석은 위장의 열을 내리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소양인에게 좋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오령산
(五苓散)
### 내용:
『상한론』에는 열성병(熱性病)에 땀을 내야 할 것을 잘못으로 설사약을 써서 장에 한기가 생겨 열기를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므로, 열기가 가슴으로 몰려 담(痰)을 분비하게 되면 가슴이 몹시 아프고, 명치 밑이 딴딴하며, 손을 대지 못하게 아프고, 조갈(燥渴)이 나서 물을 마시면 넘어가지 않고 도로 토해낸다. 이런 증후를 결흉증(結胸症) 또는 수역증(水逆症)이라 하는데, 이럴 때에 이 처방을 쓴다고 하였다.
처방은 본래 택사(澤瀉) 10g, 적복령(赤茯苓)·백출(白朮)·저령(猪苓) 각 6g, 육계(肉桂) 2g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백출과 육계를 빼고 차전자(車前子)·활석을 가한 것은 백출과 육계는 성분이 더워서 소양인의 약이 아니기 때문이요, 차전자·활석을 가미한 것은 더욱 강력한 이수(利水) 작용을 시키기 위함이다. 택사는 이뇨·소종을, 적복령·저령·차전자는 모두 이 수작용을 하는 대표적인 약이다. 특히 활석은 위장의 열을 내리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소양인에게 좋다. |
73608488-6073-401e-9a1d-16292651f817 | source05/encykorea/MED25662.txt | 약학
(藥學)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382 | CC BY | 2,6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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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이 보다 안전하고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창제되고 개선되어야 하며 보급이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고도의 기술과 함께 관리 및 사용에 엄격한 규제가 요구되는 것이 특징이다. 약학은 화학 등의 물질과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질병치료나 예방목적으로 사용될 때는 생리학·생화학 등의 생명과학적 특성을 지닌다. 또한 사회성·경제성도 함께 지니고 있는데, 이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상품으로서의 것이다. 이와 같이 약학은 물질과학이면서 동시에 생명과학적인 양면성·경계영역성 자연과학의 특성을 갖는다. 즉 자연과학에서 약학은 생리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다. 따라서 약학은 의약품이라는 물질을 창제, 생산하기 위한 약화학·생약학·분석화학·제조공학·제제학 등의 물질과학적 전문학과 더불어 의약품의 올바른 사용을 통하여 질병 치료와 예방이 가능한 의약학·약제학·생화학·생리학·임상약학·위생화학 등의 생명과학적 전문학을 그 영역으로 하고 있다. 자연과학의 공통점은 이 모든 전문학의 기초로 물리학·화학·생물학·수학 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백제시대에 의사제도에 의학박사와 제약사가 분립되어 있어 의·약이 직업적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과학적인 의약제도 이전에는 의학과 약학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약물학적 지식에 통달한 사람만이 의술을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학사와 약학사는 서로 얽혀 있으며, 약학의 발전만을 따로 분리하여 체계를 잡기가 어렵다.
또 우리나라의 의학이나 약학문화가 주로 중국에서 전래된 의학과 약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유의 의학이나 약학만을 추출하여 체계를 잡는다는 것도 어려움이 많다.그러나 이미 상고시대부터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 등 당시 중국의 약물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약물을 사용하였다든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특산의 약물, 그 중에서도 특히 인삼 등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는 중국의 기록 또는 고구려의 연금(鍊金)의 품질이 우수하여 약용으로 쓸 수 있었다는 중국의 기록 등으로 보아 한국 고유의 약학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특히 근래에 와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향약발전 역사라든지 이제마의 사상의설에 입각한 약물분류 등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색 있는 발전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약학의 연원과 발전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약학의 기원은 원시시대에 사람이 지닌 치료본능에 의해 시행착오적인 경험을 통해 천연물 가운데에서 약물을 찾아내어 그 지식을 축적해 나간 데서 찾을 수 있다. 어느 민족이든 의학의 창시자가 신화적인 고대 통치자였다면 우리나라 의약의 창시자는 개국신화의 환웅이다. 고기(古記)에 “환웅천왕이 태백산정의 신단수하에 내리시어 신시(神市)를 배포하고,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들을 거느리시고 주곡(主穀)·주병(主病)·주형(主刑)·주선악(主善惡) 등을 하시면서 무릇 인간 360여사(餘事)를 다스렸다. ”라는 기록이라든지, 사람으로 전화(轉化)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치성을 드리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서 환웅이 백성들의 병을 주관하는 동시에 쑥·마늘 등을 이미 약으로 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삼국시대에서는 중국문헌에 한국의 특산약재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특히 고구려의 약방문이 당나라에 소개된 사실,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라는 책에 한국의 인삼이 중국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 역시 도홍경의 『증류본초(證類本草)』 가운데 고구려산의 금설(金屑)이 연숙(鍊熟)되어 질이 좋아서 연금선방(鍊金仙方)에서 약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기록 등은 당시의 한국 고유의 약학발전의 구체적인 증좌라고 할 수 있겠다.중국측의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 가운데 삼국시대의 약품류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품목으로 나열하면, 인삼·백부자(白附子)·오미자(五味子)·여여(䕡茹)·세신(細辛)·토사자(菟絲子)·관동화(款冬花)·곤포(昆布)·율(栗)·조(棗)·무이(蕪荑)·황칠(黃漆) 등의 식물성 약재와 계(鷄)·봉(鳳)·맹조(孟鳥)·우(牛)·저(猪)·마(馬)·육축(六畜)·호(虎)·표(豹)·비(羆)·녹(鹿)·장(麞)·초(貂)·호(狐)·우(鰅)·분(魵)·면(鮸)·선(鮮)·사(魦)·노(鱸)·폐(○)·낙(鱳)·국(䱡)·접(鯜)·반어(斑魚)·마륙(馬陸)·혜(鱦)·오공(蜈蚣)·감접(紺蝶) 등의 동물 또는 금설·은설·온탕 등 금석류(金石類)와 온천에 이르기까지 소개되어 있어, 당시 우리나라의 약재물산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약물의 발전이 일본에까지 알려져 백제 혹은 신라의 약학 전문가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약학 수립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에 통일신라시대의 본초도 널리 알려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신라의 골품제 신분계급의 사회생활양식상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제약(制約)이 적혀 있는데, 사용제한 내지는 사용금지를 하는 품목으로 공작·비취·자단(紫檀)·침향(沈香) 등 남국물산이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와 같은 물품이 서역 또는 남양에서 교역, 유입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당나라 때는 대식국·천축·곤륜·남양 각지와 교역이 활발하였는데, 신라는 이와 같은 당나라와의 통교가 빈번하였기에 신라도 남방 각지와 직접 교역을 하였을 것이다. 알렌(Allen,H. N. )의 <외인거래한국연표 >(조선학보, 제5집)에는 당시 신라에 정착한 회교도가 인삼·녹각·노회·장뇌·정·안·도기 등을 교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984년 일본에서 간행된 단바가 찬한 의심방 중 백제의 약방문서인 백제신집방과 신라의 약방문서인 신라법사방이 각각 인용된 것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의 약학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로 백제·신라에도 의술·의서·약물 등의 인도불교의약학이 들어와 전파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의 약학은 개국 초에는 신라약학의 계승이었기 때문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시작되어 송나라 및 원나라의 문화를 섭취하였으나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고려약학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대륙산 수입약재 대신 국산약재를 사용하여 전통성이 강한 향약방과 향약본초를 발전시킨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려 때의 구급의방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비롯하여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 조선 초기에 간행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의 향약방서가 출간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산실되어 직접 검토할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향약구급방』 및 『향약집성방』에 의해서 고려시대의 향약을 추측할 수 있다.고려약과 물산의 상황은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부·군·현의 향관직 중 약점이라는 직제가 있고, 개국 초부터 왕의 약을 관장하는 상약국이 있었으며 지방의 의약도 관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고려에 약국이라는 제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일종의 의육기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의학의 전래, 송의인의 도래, 송제(宋帝)가 하사한 약재, 여원간(麗元間)의 의인의 내왕,<NAME>(明帝)로부터의 약재하사, 또는 아랍의 상선이 송나라를 거쳐 고려에 내항하여 그들의 문물을 들여오고 또 회회학예(回回學藝)의 영향을 받은 원나라 문화가 고려에도 전파되어 천문수학·역법(曆法)과 아울러 의학·약품 등의 신지식이 소개되는 동시에 몰약(沒藥)·유향(乳香)·용연향(龍涎香)·소합향유(蘇合香油)·목향·정향·안식향 등 남방산 약물이 고려에 들어온 사실도 있다.이와 같은 교류를 통해 고려약학이 수용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본초학을 개관하면 본초란 넓은 의미에서의 약물을 말하며, 의방에 관계되는 동물·식물·광물 전체를 가리키는데, 현존하는 고려본초의 의거자료문헌이 적어서 고려사를 중심으로 하고, 중국의 문헌에서 간접적으로 더듬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일한 현존 의약방서인 고종 때의 『향약구급방』 가운데 향약목이 있어 그것을 통하여 당시 각종 약물의 명칭·성미·채취방법 등을 알 수 있고, 특히 이두(吏讀)로 병기되어 있는 향약명은 당시의 동식물명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향약구급방』의 방중향약목(方中鄕藥目)을 통하여 고려 때의 본초학을 살펴보면 고종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간행된 것이지만 현존 간본은 태종 17년(1417)판이며, 그나마 국내에는 없고 일본의 국내성에 보존된 것만이 남아 있다.그것이 고종 때의 원판 내용을 전부 수록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말미에 있는<NAME>의 발문에 중간이라고만 한 것, 향약명이 고려 때의 것인 것을 보면 대체로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권말의 <방중향약목초부>라는 제목 아래 당시의 향약 170여 종이 실려 있고 향약명과 간단한 상태 및 채취법이 설명되어 있어 고려 때의 본초학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약재 180종은 대체로 식물·동물의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채취기·약용부·조제법 등이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으며, 식물은 초·목·곡·채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채취기·약용부·조제법 등은 종에 따라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향약본초는 고려 중기의 의약적 발전을 고찰하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박물학이나 고전어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향약의 사용을 권장하게 된 것은 의약의 자주적 발전을 이룩하는 기초를 마련하여 우리의 과학이나 일반 문화의 전통과 변천을 추구하는 데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 있어 향약장려책을 답습하여 진흥시킨 것은 고려의 후반기경부터 자라오던 의약자립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며, 구체적인 시책으로 향약의 생산 및 당약의 재배 등을 관장하게 하는 종약색(種藥色)이라는 부서(部署), 향약의 수납 및 향약에 의한 구료 또는 『향약제생집성방』을 비롯한 향약문서의 편집 송포를 실시하는 제생원을 설치하였다.하지만 세종 때 이래로 이러한 향약흥용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1450년(세종 32)은 조선문화의 융성기를 대표하는 시기이며 정치·경제의 확충, 문화의 융성을 이룩하였으며, 의·약학도 전무후무한 자주적 발전을 이룩하여 우리나라 의약의 최고봉을 이룬 시기이며, 의약학을 국정에 적합하도록 발전시키기 위하여 의·약학제도의 정비 확충을 비롯하여 의·약학의 장려책을 강구하였다.향약의 자립을 위한 정책을 통해 의료의 자주화를 이루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약재의 명나라 의존을 탈피하고, 자주적 약재공급책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약재수입에 따르는 국비유출을 방지함과 동시에 자국민의 병치료에는 자국민의 체질에 적합한 자국산 약재가 더욱 효과적이라는 의토성(宜土性)을 내세워 향약의 이용을 적극 권장하고, 향약의 재배와 증산 및 자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문학자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향약과 당약의 이동(異同)을 검토하고, 향약으로서 당약에 대치할 수 있는 약재개발에 힘쓰는 동시에 전국에 걸쳐서 약재의 재생 및 재배상황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결집하여 『향약본초』, 향약을 사용하는 의방서인 『향약집성방』, 향약의 분포실태조사서인 『세종실록』 지리지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또 희귀한 수입약재인 용뇌·사향·주사·소합유 등의 사용을 제한하고 남방계 약재인 안식향·영릉향 등을 제주도 등에서 대용품 개발 또는 재배시험 등을 통하여 자급하게 하는 한편 약재 채취의 시기 및 방법에 관한 지침서인 향약채취월령을 간행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시책 중에서 1423년(세종 5)에 세종실록에 62종의 향약을 가지고 명나라에 가서 시험한 결과 8종의 향약은 사용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는 것이 당약과 향약의 비교·검토사실이다. 이와 같은 감정결과를 오늘날의 생약학적 지견과 비교했을 때 앞에서 말한 생약 8종은 지금도 그 기원식물이 일정하지 않아 혼란이 생기는 생약들이다. 이러한 당시의 감정이 오늘날의 과학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정확하였다는 것은 당시 본초학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안식향 기원식물과는 전혀 다른 우리 붉나무(옻나무과의 작은 낙엽 활엽 교목)의 수지로 안식향의 기원식물인 안식향을 수입해야 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약효학적인 관점에서 붉나무의 수지를 안식향의 수지로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구명하는 것이 오늘날 약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안식향뿐 아니라 1425년 7월에 제주도 소산 약재진상법을 제정하고, 1438년 5월에 제주도산 영릉향을 당재 대신 사용할 수 있음을 규정한 사실이 있다. 제주도가 본토에서 멀리 남해상에 위치하여 지미·기후가 다른, 특별한 지역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남방계 약재의 생산지로 특별히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 부기된 지리지는 1424년 11월에 각 도·각 읍의 연혁, 산천의 형세, 풍속, 호구, 토산 등을 조사하게 한 대제학 변계량에 의해 각 도·각 읍의 연혁, 산천의 형세, 풍속, 호구, 토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식물성생약 214종, 동물성생약 46종, 광물성생약 14종 등 총 274종의 생약자원이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생약자원의 분포상태를 목록으로 간행한 것은 약재의 천산 및 재배상황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궐공 및 약초의 조이다. 이와 같은 약재 중에는 곽향·파고지 등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품목도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할 만하다. 연산군 이후 향약장려책이 다시 쇠퇴하기 시작하여 향약을 버리고, 외래약재인 당재를 숭상하는 폐풍이 일어나 향약본초학은 민간의방 내지는 속방으로 겨우 명맥을 잇게 된 사실은 우리의 약사상 일대 오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를 통한 고유 본초서로는 『향약집성방』·『향약채취월령』을 비롯하여 『동의보감』 탕액편, 『제중신편』 약성가, 『의종손익』 약성가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밖에도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의 향약명, 『산림경제』의 치약부,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의 물명(物名), 『급유방(及幼方)』의 본초 발명 및 식치(食治) 발명, 『본초류함(本草類函)』·『본초정화(本草精華)』·『유씨물명고(柳氏物名攷)』·『임원경제지』의 보양지 및 인제지(仁濟志)·『방약합편』 등이 자료가 될 수 있다.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향약본초서와 향약방서가 일본으로 반출되어 일본의 의약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두어로 된 향약명마저 일본의 본초서에 이명(異名)으로 수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두향약명의 올바른 해독 없이 인용한 나머지 산장(酸漿)은 ‘꽈아리(叱科阿里)’라고 이두향약명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 본초서에도 그대로 표기되어 있거나 오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본초학이 일본 본초학에 준 영향을 알 수 있다.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사구시의 과학적인 실학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독자적인 본초학 내지 약학을 수립할 수 있는 시기였으나, 쇠퇴해 가는 국세와 사대사상의 틈바구니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농수산학적 또는 박물학적 본초서가 몇몇 실학자들의 손에 의해 간행된 것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본초학적 기술개발이 얼마나 독창적이며 탁월하였는가를 실증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고려인삼의 개발이다. 인삼이 중국에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전한대 후기부터로, 급취편·춘추위운두추·예위두위의·사기 대창공전 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2000년 전에는 그렇게 되었다. 또 산시성 노안부의 타이항산맥의 상당에서 산출되는 상당삼이 품질이 좋아 고구려삼·백제삼·신라삼보다 낫다는 기록이 도홍경의 명의별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중국도 인삼의 주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나라가 인삼의 종주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것은 중국의 인삼남획과 정책 및 재배기술이 졸렬하여 인삼의 생산이 쇠퇴하였는 데 비하여 한민족은 인삼의 재배·수치(修治) 등의 기술을 고도로 발전시켰기 때문이지 풍토가 인삼의 재배적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의보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5년 만인 1596년(선조 29)에 태의 허준(許浚)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鄭碏), 태의 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들과 함께 국(局)을 설치하고 찬집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을 보기 전에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그 찬집을 완성하게 하였는데, 전후 10년에 걸쳐 1610년(광해군 2)에 완성되어 1613년에 간행된 의약서이다.내경편·외형편·잡병편·탕액편 및 침염편과 함께 25권 25책으로 되어 있으며, 편찬이 실사구시·공리실용적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약물학 본초서에 해당되는 탕액본초를 분석하여보면, 당시는 아직 1590년에 명나라에서 간행된 『본초강목』이 도입되지 않아 『동의보감』에 인용되지 않고, 주로 중국의 『경사증류대관본초』(증류본초)가 기준이 되어 있고 명나라의 의서인 『의학정전』·『의학입문』·『단계심법부여』·『식물본초』 등을 가미하고 있다.만약 동의보감의 탕액본초가 이와 같은 원전만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 허준이나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던 본초학적 견해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나, 90종의 약물이 인용출처를 속방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옳다고 본다. 고금을 막론하고 강대국의 학설에 이와 같은 속설을 첨가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한 학적 소신과 자주성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90종의 약물에 대하여 첨가된 속설은 명칭 및 기원에 관한 것이 14건, 효용에 관한 것이 18건, 성상(性狀)에 관한 것이 45건, 감별법에 관한 것이 6건으로 되어 있으며 산지를 보더라도 『세종실록』 지리지 이후의 새로운 지견을 망라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산지조사와도 잘 부합되는 내용임을 볼 때 그 정확성을 짐작할 수 있다.특히 수입생약의 국산화를 위해 감초·마황·영릉향·안식향 등의 이식시험 혹은 대용약물 개발 등의 결과들이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이 출간되자 당시의 일본 본초학자들이 탕액본초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서적을 출간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탕액본초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체질에 따라 4종의 체형으로 사람을 나누고, 체형별 약성관을 내세워 각 체형에 적합한 요약을 발표한 이제마의 사상약성론은 우리 의·약학사상 가장 독창적인 의설약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마는 경사자집(經史子集) 및 의약·복서(卜筮)에 능통하여 종래 한의학의 용약법이 육경병(六經病: 太陽病·少陽病·陽明病·太陰病·少陰病·厥陰病의 6종)의 병명증목에 따라 투약하는 정설에 의의(疑義)를 품고, 독창적인 사색과<NAME>구를 거듭한 결과 드디어 환자의 체질명목에 따라 약물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약내국리어인(藥乃局理於人)’이라는 전인미발(前人未發)의 용약론을 착상하기에 이르렀다.즉, 사상은 외부상태(용모·기육·체격 등), 내부상태(폐·간·비·신 등의 장기), 심리상태(심정·성정·특징 등) 및 소질 등을 고려하여 4형의 체질로 나누고 적용하는 요약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현대의약학적 지식으로도 수긍이 가는 것이, 음양오행설의 천리적 공론이 아닌 병자의 체질에 중점을 두어 동일한 질병일지라도 병인의 체질에 따라 치법을 달리한다는 원리이다. 이제마는 사상약성론을 1893년(고종 30)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1901년(광무 5)에 출판하였는데, 이는 사상약성론을 저술한 동의수세보원이다. 성명론·사단론·확충론·장부론·의원론·광제설·사상인변증론 등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상의약론이 등장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약리학적으로 과학화되지 못한 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체질별 요약의 성분이나 약리작용의 이동을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사상체형의 정당성 여부가 가려질 것이다. 사상인의 이와 같은 체형분류법이 현대의학적 계측으로 어느 정도 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NAME>상으로는 4혈액형(A·B·AB·O)이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4체액설 등과 일맥상통한다. 그렇지만 서양 체형론은 생리와 병리설에 그치는 반면, 이제마의 사상론은 질병치료에 구체적으로 응용하여 약물 및 식물을 분별하고 있어 설과 용법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태양인은 사상인 중에서 출현수가 제일 적고 적응력도 적기 때문에 요약의 종류가 다른 체질인에 비해 적다고 하였다. 사상유형별로 보면 인구 1만명 가운데 소양인 5,000명, 태음인 2,000명, 태양인 3, 4명 내지 10명 정도가 출현한다고 한다. 사상의약론자는 아니지만 전통 중국 의약학의 금과옥조적 용양법에 대하여 이규준은 대담하게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용약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의감중마·소문절요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중국의 주진형의 설에 반대하여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온혈제에 속하는 인삼·부자 등의 약을 애용하였다. 전통약학의 기반 위에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도입된 개화기의 약학이 1세기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 수준의 현대약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현대의약학을 토착화시키고, 우리의 독창적인 약물개발을 통해 한국약학의 특색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약학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약학강습소가 약학교육기관으로 최초로 설립된 것은 1915년으로, 조선시대 말기에 서양 의약품이 이른바 양약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이다. 이 강습소는 오늘날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이며, 3년 뒤인 1918년 전문자격자를 양성하는 조선약학교가 되었다가 1930년에 전문학교로 승격된 이후 11년 동안 우리나라 근대 약학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광복 이후의 혼란기와 6·25전쟁 이후의 재건기를 거치면서 약학과 약에 대한 사회적·산업적 요구가 커졌고, 이에 따라 약학교육기관도 증가하게 되었다. 즉, 1950년대 2개였던 약학대학이 1987년 현재 20개로 10배나 증가한 것이다. 교육내용도 발전하여 초기에는 약학과 단과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약학과·제약학과 또는 위생제약학과 등으로 분과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발전과정을 거쳐온 현대의 약학방법론은 생리활성을 가진 물질의 창제, 질병치료와 예방 등 생명현상조절에의 용약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물로부터 어떤 성분을 추출, 분리하여 그 화학구조를 구명하고, 그 생리활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약이 탄생했다. 이를 위하여 천연물과학이 생약학·식물화학·분석화학 및 유기화학을 기본으로 하는 약학의 고유 영역으로 발전해 왔다. 한편 천연물을 이용하여 새로운 의약품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과 기존 생리활성물질로부터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새로운 생리활성물질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즉, 화학구조와 생리활성물질의 상관관계를 도출하고 이를 통해 더 바람직한 생리활성물질을 설계하고 합성하여 신약을 개발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약학의 영역에 합성화학·제조공학·발효학·유전공학 등이 도입되었다. 이렇게 해서 어떤 생리활성물질이 만들어지고 인체에의<NAME>과 안전성이 확인되면 이 물질은 의약품으로 분류된다. 근래에 물리화학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물체로서의 약에 대한 이해이다. 이에 따라 각종 물성 측정의 기계화·자동화 등이 가능해지고, 유기화학과 생화학 등의 연구방법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약학의 영역에 제제공학·제제학·약제학이 들어온 것은 약재를 제형이라는 물체로 생산, 가공, 취급하는 이론을 위해서이다. 약의 창제에 필요한 물질과학적 방법론을 소개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다. 따라서 물질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여 새로운 생리활성물질을 창조할 때에도 생명과학의 관점에서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약학의 특징은 물질을 창제할 때에도 생리학·생화학·약효학·독성학·미생물학 등의 생명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약학의 생명과학적 특성은 의약품이 질병치료나 예방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이다. 약리학·독성학·약제학 등의 기초학문이 새로운 사용 목적에 사용되면서 생리학·생화학·미생물학·체내동태학 등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임상약학은 이러한 생명과학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이다. 이 임상약학은 이제까지 약학이 물질과학에 치중해 왔다는 반성, 그리고 환자 지향의 생명과학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자각에서 미국 등지에서 최근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임상약학을 통하여 약학이 본격적으로 의학과 교류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우리나라의 도입 역사가 짧은 만큼 그 개념도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다. 최근 분자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약학에 생물계 학문의 방법론이 눈부시게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이 생명과학으로서의 약학을 설명할 때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약의 작용과 체내움직임을 분자수준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분자생리학·분자약리학의 도입이 더욱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약학의 이론과학화는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위생학은 약학의 생명과학적 측면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야이다. 이는 약학의 고유한 학문 분야로 발전되어 왔는데, 인간의 환경이나 의식주와 생명현상과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분야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미생물학·면역학·독물학·환경위생학·식품위생학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분야는 질병치료보다는 예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상에서 약학의 자연과학적 특성을 물질과학적 특성과 생명과학적 특성으로 나누었다. 약학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약의 사용과 관리에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약사라는<NAME>술인만이 취급하게 되어 있다. 약학의 조제·관리·평가가 주 업무로, 이를 위해 약학에는 조제시험법·약사법·약국관리학·경영학 등의 전문학이 도입되었다. 이 밖에도 약학의 중요한 연구대상으로는 보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식품·향장품과학 등이 있다. 이러한 약학의 특성을 종합하여 보면, 비로소 종합과학이라고 하는 약학이 왜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국내외의 상황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약학은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발전 방향을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물질과학과 생명과학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신약을 만들어 내려는 자연과학의 방향이다. 이 방향은 물질특허시대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과학계가 약학계에 거는 기대이기도 하므로 앞으로 더욱 발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약사교육을 직업인으로 하는 것은 보다 효과적으로 약을 사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환자 지향의 임상약학으로의 전환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질 것이고, 이에 따라 교육내용도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인류의 건강증진을 목표로 하는 약학의 궁극적 목표는 물질의 생리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자연과학적 측면의 발전과 임상에서 약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전문직능의 발전이다. 약학이 한층 심도 있고 균형 잡힌 발전을 거듭하여 2000년대에는 인류건강에 크게 이바지하리라 예상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약학
(藥學)
### 내용:
약이 보다 안전하고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창제되고 개선되어야 하며 보급이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고도의 기술과 함께 관리 및 사용에 엄격한 규제가 요구되는 것이 특징이다. 약학은 화학 등의 물질과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질병치료나 예방목적으로 사용될 때는 생리학·생화학 등의 생명과학적 특성을 지닌다. 또한 사회성·경제성도 함께 지니고 있는데, 이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상품으로서의 것이다. 이와 같이 약학은 물질과학이면서 동시에 생명과학적인 양면성·경계영역성 자연과학의 특성을 갖는다. 즉 자연과학에서 약학은 생리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다. 따라서 약학은 의약품이라는 물질을 창제, 생산하기 위한 약화학·생약학·분석화학·제조공학·제제학 등의 물질과학적 전문학과 더불어 의약품의 올바른 사용을 통하여 질병 치료와 예방이 가능한 의약학·약제학·생화학·생리학·임상약학·위생화학 등의 생명과학적 전문학을 그 영역으로 하고 있다. 자연과학의 공통점은 이 모든 전문학의 기초로 물리학·화학·생물학·수학 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백제시대에 의사제도에 의학박사와 제약사가 분립되어 있어 의·약이 직업적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과학적인 의약제도 이전에는 의학과 약학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약물학적 지식에 통달한 사람만이 의술을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학사와 약학사는 서로 얽혀 있으며, 약학의 발전만을 따로 분리하여 체계를 잡기가 어렵다.
또 우리나라의 의학이나 약학문화가 주로 중국에서 전래된 의학과 약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유의 의학이나 약학만을 추출하여 체계를 잡는다는 것도 어려움이 많다.그러나 이미 상고시대부터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 등 당시 중국의 약물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약물을 사용하였다든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특산의 약물, 그 중에서도 특히 인삼 등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는 중국의 기록 또는 고구려의 연금(鍊金)의 품질이 우수하여 약용으로 쓸 수 있었다는 중국의 기록 등으로 보아 한국 고유의 약학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특히 근래에 와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향약발전 역사라든지 이제마의 사상의설에 입각한 약물분류 등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색 있는 발전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약학의 연원과 발전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약학의 기원은 원시시대에 사람이 지닌 치료본능에 의해 시행착오적인 경험을 통해 천연물 가운데에서 약물을 찾아내어 그 지식을 축적해 나간 데서 찾을 수 있다. 어느 민족이든 의학의 창시자가 신화적인 고대 통치자였다면 우리나라 의약의 창시자는 개국신화의 환웅이다. 고기(古記)에 “환웅천왕이 태백산정의 신단수하에 내리시어 신시(神市)를 배포하고,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들을 거느리시고 주곡(主穀)·주병(主病)·주형(主刑)·주선악(主善惡) 등을 하시면서 무릇 인간 360여사(餘事)를 다스렸다. ”라는 기록이라든지, 사람으로 전화(轉化)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치성을 드리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서 환웅이 백성들의 병을 주관하는 동시에 쑥·마늘 등을 이미 약으로 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삼국시대에서는 중국문헌에 한국의 특산약재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특히 고구려의 약방문이 당나라에 소개된 사실,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라는 책에 한국의 인삼이 중국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 역시 도홍경의 『증류본초(證類本草)』 가운데 고구려산의 금설(金屑)이 연숙(鍊熟)되어 질이 좋아서 연금선방(鍊金仙方)에서 약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기록 등은 당시의 한국 고유의 약학발전의 구체적인 증좌라고 할 수 있겠다.중국측의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 가운데 삼국시대의 약품류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품목으로 나열하면, 인삼·백부자(白附子)·오미자(五味子)·여여(䕡茹)·세신(細辛)·토사자(菟絲子)·관동화(款冬花)·곤포(昆布)·율(栗)·조(棗)·무이(蕪荑)·황칠(黃漆) 등의 식물성 약재와 계(鷄)·봉(鳳)·맹조(孟鳥)·우(牛)·저(猪)·마(馬)·육축(六畜)·호(虎)·표(豹)·비(羆)·녹(鹿)·장(麞)·초(貂)·호(狐)·우(鰅)·분(魵)·면(鮸)·선(鮮)·사(魦)·노(鱸)·폐(○)·낙(鱳)·국(䱡)·접(鯜)·반어(斑魚)·마륙(馬陸)·혜(鱦)·오공(蜈蚣)·감접(紺蝶) 등의 동물 또는 금설·은설·온탕 등 금석류(金石類)와 온천에 이르기까지 소개되어 있어, 당시 우리나라의 약재물산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약물의 발전이 일본에까지 알려져 백제 혹은 신라의 약학 전문가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약학 수립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에 통일신라시대의 본초도 널리 알려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신라의 골품제 신분계급의 사회생활양식상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제약(制約)이 적혀 있는데, 사용제한 내지는 사용금지를 하는 품목으로 공작·비취·자단(紫檀)·침향(沈香) 등 남국물산이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와 같은 물품이 서역 또는 남양에서 교역, 유입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당나라 때는 대식국·천축·곤륜·남양 각지와 교역이 활발하였는데, 신라는 이와 같은 당나라와의 통교가 빈번하였기에 신라도 남방 각지와 직접 교역을 하였을 것이다. 알렌(Allen,H. N. )의 <외인거래한국연표 >(조선학보, 제5집)에는 당시 신라에 정착한 회교도가 인삼·녹각·노회·장뇌·정·안·도기 등을 교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984년 일본에서 간행된 단바가 찬한 의심방 중 백제의 약방문서인 백제신집방과 신라의 약방문서인 신라법사방이 각각 인용된 것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의 약학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로 백제·신라에도 의술·의서·약물 등의 인도불교의약학이 들어와 전파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의 약학은 개국 초에는 신라약학의 계승이었기 때문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시작되어 송나라 및 원나라의 문화를 섭취하였으나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고려약학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대륙산 수입약재 대신 국산약재를 사용하여 전통성이 강한 향약방과 향약본초를 발전시킨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려 때의 구급의방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비롯하여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 조선 초기에 간행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의 향약방서가 출간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산실되어 직접 검토할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향약구급방』 및 『향약집성방』에 의해서 고려시대의 향약을 추측할 수 있다.고려약과 물산의 상황은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부·군·현의 향관직 중 약점이라는 직제가 있고, 개국 초부터 왕의 약을 관장하는 상약국이 있었으며 지방의 의약도 관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고려에 약국이라는 제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일종의 의육기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의학의 전래, 송의인의 도래, 송제(宋帝)가 하사한 약재, 여원간(麗元間)의 의인의 내왕,<NAME>(明帝)로부터의 약재하사, 또는 아랍의 상선이 송나라를 거쳐 고려에 내항하여 그들의 문물을 들여오고 또 회회학예(回回學藝)의 영향을 받은 원나라 문화가 고려에도 전파되어 천문수학·역법(曆法)과 아울러 의학·약품 등의 신지식이 소개되는 동시에 몰약(沒藥)·유향(乳香)·용연향(龍涎香)·소합향유(蘇合香油)·목향·정향·안식향 등 남방산 약물이 고려에 들어온 사실도 있다.이와 같은 교류를 통해 고려약학이 수용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본초학을 개관하면 본초란 넓은 의미에서의 약물을 말하며, 의방에 관계되는 동물·식물·광물 전체를 가리키는데, 현존하는 고려본초의 의거자료문헌이 적어서 고려사를 중심으로 하고, 중국의 문헌에서 간접적으로 더듬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일한 현존 의약방서인 고종 때의 『향약구급방』 가운데 향약목이 있어 그것을 통하여 당시 각종 약물의 명칭·성미·채취방법 등을 알 수 있고, 특히 이두(吏讀)로 병기되어 있는 향약명은 당시의 동식물명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향약구급방』의 방중향약목(方中鄕藥目)을 통하여 고려 때의 본초학을 살펴보면 고종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간행된 것이지만 현존 간본은 태종 17년(1417)판이며, 그나마 국내에는 없고 일본의 국내성에 보존된 것만이 남아 있다.그것이 고종 때의 원판 내용을 전부 수록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말미에 있는<NAME>의 발문에 중간이라고만 한 것, 향약명이 고려 때의 것인 것을 보면 대체로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권말의 <방중향약목초부>라는 제목 아래 당시의 향약 170여 종이 실려 있고 향약명과 간단한 상태 및 채취법이 설명되어 있어 고려 때의 본초학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약재 180종은 대체로 식물·동물의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채취기·약용부·조제법 등이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으며, 식물은 초·목·곡·채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채취기·약용부·조제법 등은 종에 따라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향약본초는 고려 중기의 의약적 발전을 고찰하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박물학이나 고전어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향약의 사용을 권장하게 된 것은 의약의 자주적 발전을 이룩하는 기초를 마련하여 우리의 과학이나 일반 문화의 전통과 변천을 추구하는 데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 있어 향약장려책을 답습하여 진흥시킨 것은 고려의 후반기경부터 자라오던 의약자립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며, 구체적인 시책으로 향약의 생산 및 당약의 재배 등을 관장하게 하는 종약색(種藥色)이라는 부서(部署), 향약의 수납 및 향약에 의한 구료 또는 『향약제생집성방』을 비롯한 향약문서의 편집 송포를 실시하는 제생원을 설치하였다.하지만 세종 때 이래로 이러한 향약흥용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1450년(세종 32)은 조선문화의 융성기를 대표하는 시기이며 정치·경제의 확충, 문화의 융성을 이룩하였으며, 의·약학도 전무후무한 자주적 발전을 이룩하여 우리나라 의약의 최고봉을 이룬 시기이며, 의약학을 국정에 적합하도록 발전시키기 위하여 의·약학제도의 정비 확충을 비롯하여 의·약학의 장려책을 강구하였다.향약의 자립을 위한 정책을 통해 의료의 자주화를 이루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약재의 명나라 의존을 탈피하고, 자주적 약재공급책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약재수입에 따르는 국비유출을 방지함과 동시에 자국민의 병치료에는 자국민의 체질에 적합한 자국산 약재가 더욱 효과적이라는 의토성(宜土性)을 내세워 향약의 이용을 적극 권장하고, 향약의 재배와 증산 및 자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문학자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향약과 당약의 이동(異同)을 검토하고, 향약으로서 당약에 대치할 수 있는 약재개발에 힘쓰는 동시에 전국에 걸쳐서 약재의 재생 및 재배상황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결집하여 『향약본초』, 향약을 사용하는 의방서인 『향약집성방』, 향약의 분포실태조사서인 『세종실록』 지리지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또 희귀한 수입약재인 용뇌·사향·주사·소합유 등의 사용을 제한하고 남방계 약재인 안식향·영릉향 등을 제주도 등에서 대용품 개발 또는 재배시험 등을 통하여 자급하게 하는 한편 약재 채취의 시기 및 방법에 관한 지침서인 향약채취월령을 간행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시책 중에서 1423년(세종 5)에 세종실록에 62종의 향약을 가지고 명나라에 가서 시험한 결과 8종의 향약은 사용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는 것이 당약과 향약의 비교·검토사실이다. 이와 같은 감정결과를 오늘날의 생약학적 지견과 비교했을 때 앞에서 말한 생약 8종은 지금도 그 기원식물이 일정하지 않아 혼란이 생기는 생약들이다. 이러한 당시의 감정이 오늘날의 과학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정확하였다는 것은 당시 본초학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안식향 기원식물과는 전혀 다른 우리 붉나무(옻나무과의 작은 낙엽 활엽 교목)의 수지로 안식향의 기원식물인 안식향을 수입해야 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약효학적인 관점에서 붉나무의 수지를 안식향의 수지로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구명하는 것이 오늘날 약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안식향뿐 아니라 1425년 7월에 제주도 소산 약재진상법을 제정하고, 1438년 5월에 제주도산 영릉향을 당재 대신 사용할 수 있음을 규정한 사실이 있다. 제주도가 본토에서 멀리 남해상에 위치하여 지미·기후가 다른, 특별한 지역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남방계 약재의 생산지로 특별히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 부기된 지리지는 1424년 11월에 각 도·각 읍의 연혁, 산천의 형세, 풍속, 호구, 토산 등을 조사하게 한 대제학 변계량에 의해 각 도·각 읍의 연혁, 산천의 형세, 풍속, 호구, 토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식물성생약 214종, 동물성생약 46종, 광물성생약 14종 등 총 274종의 생약자원이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생약자원의 분포상태를 목록으로 간행한 것은 약재의 천산 및 재배상황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궐공 및 약초의 조이다. 이와 같은 약재 중에는 곽향·파고지 등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품목도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할 만하다. 연산군 이후 향약장려책이 다시 쇠퇴하기 시작하여 향약을 버리고, 외래약재인 당재를 숭상하는 폐풍이 일어나 향약본초학은 민간의방 내지는 속방으로 겨우 명맥을 잇게 된 사실은 우리의 약사상 일대 오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를 통한 고유 본초서로는 『향약집성방』·『향약채취월령』을 비롯하여 『동의보감』 탕액편, 『제중신편』 약성가, 『의종손익』 약성가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밖에도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의 향약명, 『산림경제』의 치약부,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의 물명(物名), 『급유방(及幼方)』의 본초 발명 및 식치(食治) 발명, 『본초류함(本草類函)』·『본초정화(本草精華)』·『유씨물명고(柳氏物名攷)』·『임원경제지』의 보양지 및 인제지(仁濟志)·『방약합편』 등이 자료가 될 수 있다.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향약본초서와 향약방서가 일본으로 반출되어 일본의 의약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두어로 된 향약명마저 일본의 본초서에 이명(異名)으로 수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두향약명의 올바른 해독 없이 인용한 나머지 산장(酸漿)은 ‘꽈아리(叱科阿里)’라고 이두향약명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 본초서에도 그대로 표기되어 있거나 오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본초학이 일본 본초학에 준 영향을 알 수 있다.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사구시의 과학적인 실학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독자적인 본초학 내지 약학을 수립할 수 있는 시기였으나, 쇠퇴해 가는 국세와 사대사상의 틈바구니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농수산학적 또는 박물학적 본초서가 몇몇 실학자들의 손에 의해 간행된 것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본초학적 기술개발이 얼마나 독창적이며 탁월하였는가를 실증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고려인삼의 개발이다. 인삼이 중국에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전한대 후기부터로, 급취편·춘추위운두추·예위두위의·사기 대창공전 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2000년 전에는 그렇게 되었다. 또 산시성 노안부의 타이항산맥의 상당에서 산출되는 상당삼이 품질이 좋아 고구려삼·백제삼·신라삼보다 낫다는 기록이 도홍경의 명의별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중국도 인삼의 주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나라가 인삼의 종주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것은 중국의 인삼남획과 정책 및 재배기술이 졸렬하여 인삼의 생산이 쇠퇴하였는 데 비하여 한민족은 인삼의 재배·수치(修治) 등의 기술을 고도로 발전시켰기 때문이지 풍토가 인삼의 재배적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의보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5년 만인 1596년(선조 29)에 태의 허준(許浚)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鄭碏), 태의 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들과 함께 국(局)을 설치하고 찬집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을 보기 전에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그 찬집을 완성하게 하였는데, 전후 10년에 걸쳐 1610년(광해군 2)에 완성되어 1613년에 간행된 의약서이다.내경편·외형편·잡병편·탕액편 및 침염편과 함께 25권 25책으로 되어 있으며, 편찬이 실사구시·공리실용적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약물학 본초서에 해당되는 탕액본초를 분석하여보면, 당시는 아직 1590년에 명나라에서 간행된 『본초강목』이 도입되지 않아 『동의보감』에 인용되지 않고, 주로 중국의 『경사증류대관본초』(증류본초)가 기준이 되어 있고 명나라의 의서인 『의학정전』·『의학입문』·『단계심법부여』·『식물본초』 등을 가미하고 있다.만약 동의보감의 탕액본초가 이와 같은 원전만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 허준이나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던 본초학적 견해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나, 90종의 약물이 인용출처를 속방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옳다고 본다. 고금을 막론하고 강대국의 학설에 이와 같은 속설을 첨가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한 학적 소신과 자주성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90종의 약물에 대하여 첨가된 속설은 명칭 및 기원에 관한 것이 14건, 효용에 관한 것이 18건, 성상(性狀)에 관한 것이 45건, 감별법에 관한 것이 6건으로 되어 있으며 산지를 보더라도 『세종실록』 지리지 이후의 새로운 지견을 망라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산지조사와도 잘 부합되는 내용임을 볼 때 그 정확성을 짐작할 수 있다.특히 수입생약의 국산화를 위해 감초·마황·영릉향·안식향 등의 이식시험 혹은 대용약물 개발 등의 결과들이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이 출간되자 당시의 일본 본초학자들이 탕액본초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서적을 출간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탕액본초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체질에 따라 4종의 체형으로 사람을 나누고, 체형별 약성관을 내세워 각 체형에 적합한 요약을 발표한 이제마의 사상약성론은 우리 의·약학사상 가장 독창적인 의설약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마는 경사자집(經史子集) 및 의약·복서(卜筮)에 능통하여 종래 한의학의 용약법이 육경병(六經病: 太陽病·少陽病·陽明病·太陰病·少陰病·厥陰病의 6종)의 병명증목에 따라 투약하는 정설에 의의(疑義)를 품고, 독창적인 사색과<NAME>구를 거듭한 결과 드디어 환자의 체질명목에 따라 약물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약내국리어인(藥乃局理於人)’이라는 전인미발(前人未發)의 용약론을 착상하기에 이르렀다.즉, 사상은 외부상태(용모·기육·체격 등), 내부상태(폐·간·비·신 등의 장기), 심리상태(심정·성정·특징 등) 및 소질 등을 고려하여 4형의 체질로 나누고 적용하는 요약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현대의약학적 지식으로도 수긍이 가는 것이, 음양오행설의 천리적 공론이 아닌 병자의 체질에 중점을 두어 동일한 질병일지라도 병인의 체질에 따라 치법을 달리한다는 원리이다. 이제마는 사상약성론을 1893년(고종 30)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1901년(광무 5)에 출판하였는데, 이는 사상약성론을 저술한 동의수세보원이다. 성명론·사단론·확충론·장부론·의원론·광제설·사상인변증론 등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상의약론이 등장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약리학적으로 과학화되지 못한 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체질별 요약의 성분이나 약리작용의 이동을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사상체형의 정당성 여부가 가려질 것이다. 사상인의 이와 같은 체형분류법이 현대의학적 계측으로 어느 정도 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NAME>상으로는 4혈액형(A·B·AB·O)이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4체액설 등과 일맥상통한다. 그렇지만 서양 체형론은 생리와 병리설에 그치는 반면, 이제마의 사상론은 질병치료에 구체적으로 응용하여 약물 및 식물을 분별하고 있어 설과 용법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태양인은 사상인 중에서 출현수가 제일 적고 적응력도 적기 때문에 요약의 종류가 다른 체질인에 비해 적다고 하였다. 사상유형별로 보면 인구 1만명 가운데 소양인 5,000명, 태음인 2,000명, 태양인 3, 4명 내지 10명 정도가 출현한다고 한다. 사상의약론자는 아니지만 전통 중국 의약학의 금과옥조적 용양법에 대하여 이규준은 대담하게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용약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의감중마·소문절요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중국의 주진형의 설에 반대하여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온혈제에 속하는 인삼·부자 등의 약을 애용하였다. 전통약학의 기반 위에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도입된 개화기의 약학이 1세기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 수준의 현대약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현대의약학을 토착화시키고, 우리의 독창적인 약물개발을 통해 한국약학의 특색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약학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약학강습소가 약학교육기관으로 최초로 설립된 것은 1915년으로, 조선시대 말기에 서양 의약품이 이른바 양약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이다. 이 강습소는 오늘날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이며, 3년 뒤인 1918년 전문자격자를 양성하는 조선약학교가 되었다가 1930년에 전문학교로 승격된 이후 11년 동안 우리나라 근대 약학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광복 이후의 혼란기와 6·25전쟁 이후의 재건기를 거치면서 약학과 약에 대한 사회적·산업적 요구가 커졌고, 이에 따라 약학교육기관도 증가하게 되었다. 즉, 1950년대 2개였던 약학대학이 1987년 현재 20개로 10배나 증가한 것이다. 교육내용도 발전하여 초기에는 약학과 단과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약학과·제약학과 또는 위생제약학과 등으로 분과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발전과정을 거쳐온 현대의 약학방법론은 생리활성을 가진 물질의 창제, 질병치료와 예방 등 생명현상조절에의 용약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물로부터 어떤 성분을 추출, 분리하여 그 화학구조를 구명하고, 그 생리활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약이 탄생했다. 이를 위하여 천연물과학이 생약학·식물화학·분석화학 및 유기화학을 기본으로 하는 약학의 고유 영역으로 발전해 왔다. 한편 천연물을 이용하여 새로운 의약품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과 기존 생리활성물질로부터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새로운 생리활성물질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즉, 화학구조와 생리활성물질의 상관관계를 도출하고 이를 통해 더 바람직한 생리활성물질을 설계하고 합성하여 신약을 개발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약학의 영역에 합성화학·제조공학·발효학·유전공학 등이 도입되었다. 이렇게 해서 어떤 생리활성물질이 만들어지고 인체에의<NAME>과 안전성이 확인되면 이 물질은 의약품으로 분류된다. 근래에 물리화학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물체로서의 약에 대한 이해이다. 이에 따라 각종 물성 측정의 기계화·자동화 등이 가능해지고, 유기화학과 생화학 등의 연구방법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약학의 영역에 제제공학·제제학·약제학이 들어온 것은 약재를 제형이라는 물체로 생산, 가공, 취급하는 이론을 위해서이다. 약의 창제에 필요한 물질과학적 방법론을 소개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다. 따라서 물질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여 새로운 생리활성물질을 창조할 때에도 생명과학의 관점에서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약학의 특징은 물질을 창제할 때에도 생리학·생화학·약효학·독성학·미생물학 등의 생명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약학의 생명과학적 특성은 의약품이 질병치료나 예방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이다. 약리학·독성학·약제학 등의 기초학문이 새로운 사용 목적에 사용되면서 생리학·생화학·미생물학·체내동태학 등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임상약학은 이러한 생명과학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이다. 이 임상약학은 이제까지 약학이 물질과학에 치중해 왔다는 반성, 그리고 환자 지향의 생명과학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자각에서 미국 등지에서 최근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임상약학을 통하여 약학이 본격적으로 의학과 교류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우리나라의 도입 역사가 짧은 만큼 그 개념도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다. 최근 분자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약학에 생물계 학문의 방법론이 눈부시게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이 생명과학으로서의 약학을 설명할 때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약의 작용과 체내움직임을 분자수준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분자생리학·분자약리학의 도입이 더욱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약학의 이론과학화는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위생학은 약학의 생명과학적 측면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야이다. 이는 약학의 고유한 학문 분야로 발전되어 왔는데, 인간의 환경이나 의식주와 생명현상과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분야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미생물학·면역학·독물학·환경위생학·식품위생학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분야는 질병치료보다는 예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상에서 약학의 자연과학적 특성을 물질과학적 특성과 생명과학적 특성으로 나누었다. 약학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약의 사용과 관리에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약사라는<NAME>술인만이 취급하게 되어 있다. 약학의 조제·관리·평가가 주 업무로, 이를 위해 약학에는 조제시험법·약사법·약국관리학·경영학 등의 전문학이 도입되었다. 이 밖에도 약학의 중요한 연구대상으로는 보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식품·향장품과학 등이 있다. 이러한 약학의 특성을 종합하여 보면, 비로소 종합과학이라고 하는 약학이 왜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국내외의 상황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약학은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발전 방향을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물질과학과 생명과학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신약을 만들어 내려는 자연과학의 방향이다. 이 방향은 물질특허시대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과학계가 약학계에 거는 기대이기도 하므로 앞으로 더욱 발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약사교육을 직업인으로 하는 것은 보다 효과적으로 약을 사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환자 지향의 임상약학으로의 전환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질 것이고, 이에 따라 교육내용도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인류의 건강증진을 목표로 하는 약학의 궁극적 목표는 물질의 생리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자연과학적 측면의 발전과 임상에서 약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전문직능의 발전이다. 약학이 한층 심도 있고 균형 잡힌 발전을 거듭하여 2000년대에는 인류건강에 크게 이바지하리라 예상된다. |
11b0a6fc-9db0-442b-bed9-cca5a0af85bc | source05/encykorea/SOC19438.txt | 부안 김상만 고택
(扶安 金相萬 古宅)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334 | CC BY | 2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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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김성수의 고택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양아버지와 친아버지 사이에서 자랐다. 양아버지는 치재를 잘하여 당대의 거부가 되어 줄포에서 제일가는 터를 골라 집을 지었다. 집은 배산하는 형세를 따라 서향하고 있다. 안채·사랑채·헛간 채가 1895년에 완성되었고, 1903년에는 안 사랑채와 곳간 채가 추가되어 일곽이 완성되었다. 문간채는 1984년에 중건되었다. 안채는 정면 6칸에 앞뒤퇴가 있는 자 집으로 서향하였다. 부엌은 앞퇴까지 포함하여 네 칸이 넘는 넓이로 부엌이 남쪽 두 칸에 있다. 찬모가 거처할 수 있도록 방 한 칸을 만들었다. 다음엔 안방으로 두 칸이 있다. 뒤퇴의 한 칸은 벽장이고 한 칸은 툇마루이다. 안방 다음으로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힌 곳은 대청인데, 뒤퇴까지 포함하면 꽤 넓다. 띠살 무늬의 분합을 앞쪽에 달았다. 방은 대청 다음 칸에 있고 앞퇴가 이어지는 구조이다. 건넌방 북쪽에는 반칸의 퇴가 있는데, 앞쪽은 툇마루, 뒤쪽은 벽장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시설도 갖추었다. 쪽마루를 후문 밖으로 일부 설치했다. 사랑채는 4칸의 겹집인 자형으로 남향하였다. 머리 방과 골방이 뒷방으로 감춰진 독특한 평면이다. 중앙에는 방 두 개가 있고 그다음에도 방이 있다. 방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헛간 채는 사랑채처럼 남향한 일자집인데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통로를 샛문으로 만든 것이 제일 서쪽 한 칸의 단칸통이며 제일 서쪽 한 칸이 샛문이다. 안 사랑채는 역시 일자형 평면으로, 정면 3칸에 앞뒤퇴가 있는 구조이다. 세 칸이 다 방인데, 앞쪽에 툇마루와 벽장 등의 설비가 있고 뒤쪽에 벽장 등이 있다. 곳간 채는 골목에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안채를 향해 있으므로 움직이고 있다. 내측이 있는 5칸짜리 단칸방 집이다. 문간채는 대문 좌우로 두 칸씩 있는 단칸 통 5칸 집이다. 이들은 모두 초가집의 질박한 구조였으나 1982년 보수하면서 지나치게 분식하였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부안 김상만 고택
(扶安 金相萬 古宅)
### 내용:
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김성수의 고택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양아버지와 친아버지 사이에서 자랐다. 양아버지는 치재를 잘하여 당대의 거부가 되어 줄포에서 제일가는 터를 골라 집을 지었다. 집은 배산하는 형세를 따라 서향하고 있다. 안채·사랑채·헛간 채가 1895년에 완성되었고, 1903년에는 안 사랑채와 곳간 채가 추가되어 일곽이 완성되었다. 문간채는 1984년에 중건되었다. 안채는 정면 6칸에 앞뒤퇴가 있는 자 집으로 서향하였다. 부엌은 앞퇴까지 포함하여 네 칸이 넘는 넓이로 부엌이 남쪽 두 칸에 있다. 찬모가 거처할 수 있도록 방 한 칸을 만들었다. 다음엔 안방으로 두 칸이 있다. 뒤퇴의 한 칸은 벽장이고 한 칸은 툇마루이다. 안방 다음으로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힌 곳은 대청인데, 뒤퇴까지 포함하면 꽤 넓다. 띠살 무늬의 분합을 앞쪽에 달았다. 방은 대청 다음 칸에 있고 앞퇴가 이어지는 구조이다. 건넌방 북쪽에는 반칸의 퇴가 있는데, 앞쪽은 툇마루, 뒤쪽은 벽장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시설도 갖추었다. 쪽마루를 후문 밖으로 일부 설치했다. 사랑채는 4칸의 겹집인 자형으로 남향하였다. 머리 방과 골방이 뒷방으로 감춰진 독특한 평면이다. 중앙에는 방 두 개가 있고 그다음에도 방이 있다. 방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헛간 채는 사랑채처럼 남향한 일자집인데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통로를 샛문으로 만든 것이 제일 서쪽 한 칸의 단칸통이며 제일 서쪽 한 칸이 샛문이다. 안 사랑채는 역시 일자형 평면으로, 정면 3칸에 앞뒤퇴가 있는 구조이다. 세 칸이 다 방인데, 앞쪽에 툇마루와 벽장 등의 설비가 있고 뒤쪽에 벽장 등이 있다. 곳간 채는 골목에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안채를 향해 있으므로 움직이고 있다. 내측이 있는 5칸짜리 단칸방 집이다. 문간채는 대문 좌우로 두 칸씩 있는 단칸 통 5칸 집이다. 이들은 모두 초가집의 질박한 구조였으나 1982년 보수하면서 지나치게 분식하였다. |
95085a85-6e4b-47d8-a2ae-a0b195144109 | source05/encykorea/POL37283.txt |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043 | CC BY | 809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조총련·총련·조선총련(조련)으로 약칭한다. 조총련은 민단에 맞서 재일 동포의 거주, 직업, 재산과 언론, 출판 등 권익 옹호와 자유를 옹호한다고 명시하는 자치단체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친북적 성향의 조직이다. 따라서 북한의 전위대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재일 동포라면 누구나 조총련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조총련에 가입할 수 있다. 아사쿠사 공회당에서 1955년 5월 25일 정식으로 결성된 조총련은 재일 동포의 북한 주위로의 결집, 조국의 평화통일, 재일 동포의 민주적·민족적 권리 옹호, 민족교육 실시, 북일 친선과 세계 평화에의 공헌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한덕수 등 6명의 의장단 집단지도체제가 결성되었을 때는 우리들은 모든 재일조선동포를<NAME>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주위에 총결집하여 조국 남북 동포와의 연계와 단결을 긴밀하고 강하게 한다는 8개조 강령이 채택되었다. 이하 7개 조항은 이제1조에 종속하는 조항이었다. 이 강령은 1967년 5월 조총련 제8회 대회까지 실제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 제8회 대회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 회의에서 김일성 절대화의 수령론을 승인한 것에 기초한 대회였다. 재일 동포는 1945년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했으며 1945년 해방과 함께 전국적인 조직을 꾸렸다. 재일본조선인연맹( 이하 조련)이 그것이다. 이 조련이 조총련의 내용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련은 민족주의<NAME>과 공산주의<NAME>의 총결 집으로 결성되었다. 이 조직이 존재한 1945년 이후 재일 동포 사회의 대표기관이었다. 조련은 산하 조직으로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재일조선해방구원회, 재일조선 유학생 동맹 등을 두었다. 조련은 1949년 9월 관련 산하 조직인 민청 등 4개 단체와 함께 폭력 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명령을 받았다. 또한 김천행·윤근·한덕수 등 조직의 핵심 간부들은 공직에서 물러났다. 조련이 해산된 1950년 4월 이후에도 조선인 단체 협의회, 조국 통일전선 실행위원회 등이 계속 조련의 조직이었다. 이들 단체는 1951년 1월 9일 재일조선민주 전선(, 약칭 민전)을 조직했다. 조국방위위원회(, 약칭 조방 위)는 민청의 행동조직이었는데, 이 조직의 후속 조직이다. 조총련이 결성된 직접적인 계기는 북한의 한덕수 지지를 통한 것이었다. 재일 동포를 공화국의 해외 공민으로 한다는 북한의 남일 외무장관의 성명과 이와 연관된 한덕수를 지지하는 성명이 나왔다. 그리고 민전 내의 주류파와 민족파 사이의 갈등이 종식된 것이다. 특히 민전 제19회 중앙위원회에서 한덕수는 재일조선인 운동의 전환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여 공화국 공민의 입장에 선 재일조선인 운동의 방향과 투쟁 방법을 분명히 했다. 5월에는 그런 노선 전환 주장이 대세가 되었고, 24일 임시대회에서 민전의 발전적 해소 결의가 이루어진다. 이후 1955년 5월 25일 민전과 조방 위가 해산되고 한덕수가 중심이 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출범한 것이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민대파의 해산과 조선인 당원의 당적 이탈을 결정했다. 재일 동포 운동은 결국 4반세기 동안 그 기치 아래 투쟁해 온 일본 공산당과 결별했고, 공화국의 해외 공민으로서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의 지도 아래 출발하게 되었다. 한덕수가 1인 의장 체제로 바뀐 1958년 5월 조총련 제4회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후 조총련도 활동가가 3명 이상 있는 각급 기관·직장·지역에 비공식의 중핵적 지도 조직인 학습 조를 조직했다. 이 학습 조는 김일성 혁명사 상의 조총련 내 침투와 민대파의 추락으로 인한 한덕수 지도체제 강화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제4회 전체회의를 통해 전후 북한의 교육 원조 지원 송금과 북한 귀환에 대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3,340명이 북한을 방문했다. 조총련 가와사키 지부 중유분회에 거주하는 재일 동포가 1958년 집회를 열고 일본에서의 고달픈 생활을 청산하고 집단 귀국한다는 것을 결의하면서 재일 동포의 귀환 문제가 표면적으로는 크게 부상하였다. 조총련이 조직 확립기에 접어든 것은 1960년대 초였다. 일본 도도부현에는 거의 모든 조직이 들어섰는데, 지방본부, 조청 등의 참가 단체, 조선신보사 등의 사업체가 그것이다. 또한 민족학교는 유치원에서 조선대학에 이르는 150개에 이른다. 그 결과 1960년대 초의 조총련 산하 재일 동포는 20만 명이 되었다. 재일 동포 사회는 1970년 전후로 급격히 변화한다. 조직적으로는 재일 동포 중 거의 반을 산하에 두고 있다. 또한 유일한 지도 사상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채택한 조직 체제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병식이 급부상하기도 했다. 한덕수와 대립하던 그는 1972년 실각했다. 이른바 김병식 사건의 충격은 일부 간부나 일반 동포의 조직 이탈로 이어졌다. 또한 조총련의 조직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일 동포 성묘단의 한국 방문 사업이 조총련의 구성원을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으로 전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덕수 체제는 1980년대 들어서 다시 힘을 얻었다. 이후에는 김정일의 지도가 조총련 조직 내부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김정일의 지도로 조총련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허종만은 1993년 책임부의장으로 승진했는데, 재정 담당 부의장을 역임했던 사람이다. 이것은 조총련 조직의 일인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과 조총련계 상공인들에 대한 헌금 강요, 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의 개최로 그 세력이 약해졌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조총련은 쇠퇴해 갔다. 북한의 식량 위기와 탈북자 문제, 조긴 파산과 납치 문제 등이 이를 주도했다. 한편 북한의 지배를 절대적으로 받는 조총련은 1995년 강령을 대폭 수정했다. 제1조 애국 애족의 기치 하에 주체의 위업 계승, 완성을 위하여 공헌할 것이 공식적으로 명문화되었다. 또한 정세의 변화에 따라 2004년에 개정되었다. 한덕수는 2001년 사망했는데, 조직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이후 조총련은 서만술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체제로 운영되었다. 조총련의 조직은 2000년대 후반 약 4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조총련은 조선신보를 발행하고 있다. 조선신보사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한 매일 발행되고 있다. 조총련은 중앙기구와 지방본부, 지부, 분회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기구는 최고 의결기관인 전체회의와 전체회의가 열리지 않는 동안의 최고 의결기관인 중앙위원회, 중앙상임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위원회는 의장, 제1부의장, 책임부의장, 부의장 등으로 구성된다. 의장은 모든 일을 주도한다. 재일본조선인 상공인 동맹, 재일본조선인 노동자 동맹, 재일본조선인 민주여성동맹 등을 비롯해 재일본조선인 인권위원회, 재일본조선인 평화통일 위원회 등의 위원회가 조총련의 산하 단체이다. 조총련은 조직의 비대화와 권위의 확립을 통해 관료적인 조직이 되었다. 또한 상공인에 대한 강제모금, 재일 동포들의 환멸, 그리고 상공인에 대한 강제모금 등으로 조직이 극도로 약화되어 가고 있다. 폐쇄성과 독선이 조직을 이탈하는 동포를 결정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 조총련의 구성원은 특별영주권자의 10% 정도인 4만 명이다. 조총련이 해결해야 할 숙제는 북한의 해외 교포 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재일 동포 사회의 새로운 단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
### 내용:
조총련·총련·조선총련(조련)으로 약칭한다. 조총련은 민단에 맞서 재일 동포의 거주, 직업, 재산과 언론, 출판 등 권익 옹호와 자유를 옹호한다고 명시하는 자치단체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친북적 성향의 조직이다. 따라서 북한의 전위대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재일 동포라면 누구나 조총련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조총련에 가입할 수 있다. 아사쿠사 공회당에서 1955년 5월 25일 정식으로 결성된 조총련은 재일 동포의 북한 주위로의 결집, 조국의 평화통일, 재일 동포의 민주적·민족적 권리 옹호, 민족교육 실시, 북일 친선과 세계 평화에의 공헌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한덕수 등 6명의 의장단 집단지도체제가 결성되었을 때는 우리들은 모든 재일조선동포를<NAME>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주위에 총결집하여 조국 남북 동포와의 연계와 단결을 긴밀하고 강하게 한다는 8개조 강령이 채택되었다. 이하 7개 조항은 이제1조에 종속하는 조항이었다. 이 강령은 1967년 5월 조총련 제8회 대회까지 실제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 제8회 대회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 회의에서 김일성 절대화의 수령론을 승인한 것에 기초한 대회였다. 재일 동포는 1945년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했으며 1945년 해방과 함께 전국적인 조직을 꾸렸다. 재일본조선인연맹( 이하 조련)이 그것이다. 이 조련이 조총련의 내용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련은 민족주의<NAME>과 공산주의<NAME>의 총결 집으로 결성되었다. 이 조직이 존재한 1945년 이후 재일 동포 사회의 대표기관이었다. 조련은 산하 조직으로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재일조선해방구원회, 재일조선 유학생 동맹 등을 두었다. 조련은 1949년 9월 관련 산하 조직인 민청 등 4개 단체와 함께 폭력 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명령을 받았다. 또한 김천행·윤근·한덕수 등 조직의 핵심 간부들은 공직에서 물러났다. 조련이 해산된 1950년 4월 이후에도 조선인 단체 협의회, 조국 통일전선 실행위원회 등이 계속 조련의 조직이었다. 이들 단체는 1951년 1월 9일 재일조선민주 전선(, 약칭 민전)을 조직했다. 조국방위위원회(, 약칭 조방 위)는 민청의 행동조직이었는데, 이 조직의 후속 조직이다. 조총련이 결성된 직접적인 계기는 북한의 한덕수 지지를 통한 것이었다. 재일 동포를 공화국의 해외 공민으로 한다는 북한의 남일 외무장관의 성명과 이와 연관된 한덕수를 지지하는 성명이 나왔다. 그리고 민전 내의 주류파와 민족파 사이의 갈등이 종식된 것이다. 특히 민전 제19회 중앙위원회에서 한덕수는 재일조선인 운동의 전환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여 공화국 공민의 입장에 선 재일조선인 운동의 방향과 투쟁 방법을 분명히 했다. 5월에는 그런 노선 전환 주장이 대세가 되었고, 24일 임시대회에서 민전의 발전적 해소 결의가 이루어진다. 이후 1955년 5월 25일 민전과 조방 위가 해산되고 한덕수가 중심이 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출범한 것이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민대파의 해산과 조선인 당원의 당적 이탈을 결정했다. 재일 동포 운동은 결국 4반세기 동안 그 기치 아래 투쟁해 온 일본 공산당과 결별했고, 공화국의 해외 공민으로서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의 지도 아래 출발하게 되었다. 한덕수가 1인 의장 체제로 바뀐 1958년 5월 조총련 제4회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후 조총련도 활동가가 3명 이상 있는 각급 기관·직장·지역에 비공식의 중핵적 지도 조직인 학습 조를 조직했다. 이 학습 조는 김일성 혁명사 상의 조총련 내 침투와 민대파의 추락으로 인한 한덕수 지도체제 강화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제4회 전체회의를 통해 전후 북한의 교육 원조 지원 송금과 북한 귀환에 대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3,340명이 북한을 방문했다. 조총련 가와사키 지부 중유분회에 거주하는 재일 동포가 1958년 집회를 열고 일본에서의 고달픈 생활을 청산하고 집단 귀국한다는 것을 결의하면서 재일 동포의 귀환 문제가 표면적으로는 크게 부상하였다. 조총련이 조직 확립기에 접어든 것은 1960년대 초였다. 일본 도도부현에는 거의 모든 조직이 들어섰는데, 지방본부, 조청 등의 참가 단체, 조선신보사 등의 사업체가 그것이다. 또한 민족학교는 유치원에서 조선대학에 이르는 150개에 이른다. 그 결과 1960년대 초의 조총련 산하 재일 동포는 20만 명이 되었다. 재일 동포 사회는 1970년 전후로 급격히 변화한다. 조직적으로는 재일 동포 중 거의 반을 산하에 두고 있다. 또한 유일한 지도 사상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채택한 조직 체제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병식이 급부상하기도 했다. 한덕수와 대립하던 그는 1972년 실각했다. 이른바 김병식 사건의 충격은 일부 간부나 일반 동포의 조직 이탈로 이어졌다. 또한 조총련의 조직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일 동포 성묘단의 한국 방문 사업이 조총련의 구성원을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으로 전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덕수 체제는 1980년대 들어서 다시 힘을 얻었다. 이후에는 김정일의 지도가 조총련 조직 내부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김정일의 지도로 조총련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허종만은 1993년 책임부의장으로 승진했는데, 재정 담당 부의장을 역임했던 사람이다. 이것은 조총련 조직의 일인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과 조총련계 상공인들에 대한 헌금 강요, 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의 개최로 그 세력이 약해졌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조총련은 쇠퇴해 갔다. 북한의 식량 위기와 탈북자 문제, 조긴 파산과 납치 문제 등이 이를 주도했다. 한편 북한의 지배를 절대적으로 받는 조총련은 1995년 강령을 대폭 수정했다. 제1조 애국 애족의 기치 하에 주체의 위업 계승, 완성을 위하여 공헌할 것이 공식적으로 명문화되었다. 또한 정세의 변화에 따라 2004년에 개정되었다. 한덕수는 2001년 사망했는데, 조직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이후 조총련은 서만술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체제로 운영되었다. 조총련의 조직은 2000년대 후반 약 4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조총련은 조선신보를 발행하고 있다. 조선신보사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한 매일 발행되고 있다. 조총련은 중앙기구와 지방본부, 지부, 분회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기구는 최고 의결기관인 전체회의와 전체회의가 열리지 않는 동안의 최고 의결기관인 중앙위원회, 중앙상임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위원회는 의장, 제1부의장, 책임부의장, 부의장 등으로 구성된다. 의장은 모든 일을 주도한다. 재일본조선인 상공인 동맹, 재일본조선인 노동자 동맹, 재일본조선인 민주여성동맹 등을 비롯해 재일본조선인 인권위원회, 재일본조선인 평화통일 위원회 등의 위원회가 조총련의 산하 단체이다. 조총련은 조직의 비대화와 권위의 확립을 통해 관료적인 조직이 되었다. 또한 상공인에 대한 강제모금, 재일 동포들의 환멸, 그리고 상공인에 대한 강제모금 등으로 조직이 극도로 약화되어 가고 있다. 폐쇄성과 독선이 조직을 이탈하는 동포를 결정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 조총련의 구성원은 특별영주권자의 10% 정도인 4만 명이다. 조총련이 해결해야 할 숙제는 북한의 해외 교포 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재일 동포 사회의 새로운 단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
b089b8d1-6ced-4d80-82e4-92be5023ccc1 | source05/encykorea/MED2863.txt | 고세보
(高世輔)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751 | CC BY | 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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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종은 1506년(중종 1) 폐위 연산군의 비위를 맞춰 양기를 돕는 약물을 바친 일로, 1501년(연산군 7) 4월 내의로 있으면서 원자의 역질을 치료한 공로로 자헌에 오르고 죄를 지어주길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중추부에 승서하여 2품직에 올랐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고세보
(高世輔)
### 내용:
중종은 1506년(중종 1) 폐위 연산군의 비위를 맞춰 양기를 돕는 약물을 바친 일로, 1501년(연산군 7) 4월 내의로 있으면서 원자의 역질을 치료한 공로로 자헌에 오르고 죄를 지어주길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중추부에 승서하여 2품직에 올랐다. |
78cfe904-24ec-485c-895f-eaf74a68c6eb | source05/encykorea/SOC1103.txt | 강서 대묘
(江西 大墓)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199 | CC BY | 2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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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서 삼묘 중 가장 큰 벽화고분이다. 원형인 무덤의 분구는 원형이며, 기저부의 지름은 약 51.6m, 높이는 8.86m이다. 널방 네 벽과 천장은 각각 한 장의 질이 좋고 잘 다듬어진 큰 화강암 판석으로 지어졌다. 모줄임천장은 2단의 평행 굄돌을 안쪽으로 내밀고 그 위에 2단의 삼각 굄돌을 얹고 덮개돌을 덮은 것이다. 사신도와 장식무늬로 회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은 널방 돌벽면에 벽화가 직접 그려졌다. 널찍한 남벽의 입구 주변에는 인동·당초무늬를 그려 장식하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을 한 마리씩,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각각 그렸다. 침수로 인해 깎이고 떨어져 나간 천장의 황룡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천장 벽화는 천장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1단 굄돌 옆면에 인동무늬를 감싸 안은 초롱 무늬가 S자형으로 이어져나간 무늬띠를 돌렸다. 제2단 굄돌 옆면에는 비천·비운·신선·산악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굄돌의 아랫면은 인동 초롱 무늬의 중앙에 연꽃무늬가 가미되어 있고, 좌우에는 연꽃잎을 그린 특이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제2단 굄돌 옆면에는 비천을, 제3단 굄돌 옆면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를 배치하고, 제2단 굄돌 옆면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를 구석에 배치하고, 그 좌우에 마주 보는 봉황을 그렸다. 제4단 굄돌 옆면에는 괴조와 봉황이, 그 아랫면 구석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가 그려져 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의 고분 축조 및 벽화 연대를 추정한다. 벽화는 대개 철선묘 법으로 그려졌다. 사신도는 그 구상이 장대하고 힘차며 필치가 세련되어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강서 삼묘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강서 대묘
(江西 大墓)
### 내용:
강서 삼묘 중 가장 큰 벽화고분이다. 원형인 무덤의 분구는 원형이며, 기저부의 지름은 약 51.6m, 높이는 8.86m이다. 널방 네 벽과 천장은 각각 한 장의 질이 좋고 잘 다듬어진 큰 화강암 판석으로 지어졌다. 모줄임천장은 2단의 평행 굄돌을 안쪽으로 내밀고 그 위에 2단의 삼각 굄돌을 얹고 덮개돌을 덮은 것이다. 사신도와 장식무늬로 회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은 널방 돌벽면에 벽화가 직접 그려졌다. 널찍한 남벽의 입구 주변에는 인동·당초무늬를 그려 장식하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을 한 마리씩,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각각 그렸다. 침수로 인해 깎이고 떨어져 나간 천장의 황룡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천장 벽화는 천장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1단 굄돌 옆면에 인동무늬를 감싸 안은 초롱 무늬가 S자형으로 이어져나간 무늬띠를 돌렸다. 제2단 굄돌 옆면에는 비천·비운·신선·산악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굄돌의 아랫면은 인동 초롱 무늬의 중앙에 연꽃무늬가 가미되어 있고, 좌우에는 연꽃잎을 그린 특이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제2단 굄돌 옆면에는 비천을, 제3단 굄돌 옆면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를 배치하고, 제2단 굄돌 옆면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를 구석에 배치하고, 그 좌우에 마주 보는 봉황을 그렸다. 제4단 굄돌 옆면에는 괴조와 봉황이, 그 아랫면 구석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가 그려져 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의 고분 축조 및 벽화 연대를 추정한다. 벽화는 대개 철선묘 법으로 그려졌다. 사신도는 그 구상이 장대하고 힘차며 필치가 세련되어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강서 삼묘 |
04358ac3-9f0d-4e91-8e71-fd5cd5e037f7 | source05/encykorea/SOC13432.txt | 돼지날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동길"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936 | CC BY | 1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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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위로는 북서방. 해시의 시작 시간은 9∼11시이며 해시의 끝은 흑색이고 시간은 9∼11시다. 음양으로는 음이 되며, 음양으로는 음이 되며 월건은 음력 10월이다. 이아 와 사기에는 각각 대연헌( : 고갑자 십이지의 열두 번째, 곧 )과 추자가 있으며, 숫자로는 선천수는 4이고 후천수는 6이다. 정월 첫 번째 돼지날에는 피부가 검고 곱다고 해서 콩깍지로 문지르면 살결이 곱고 윤기가 난다고 세시풍속은 말한다. 돼지의 살결이 검고 거친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 생긴 속신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날 바느질을 하면 손가락이 아프고, 머리를 빗으면 풍증이 생긴다고 믿는다. 한편 궁중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해낭이라하고, 곡식의 씨를 태워 넣는 주머니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내관들이 돼지주둥이 지진다. 며 돌아다녔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돼지날
### 내용:
방위로는 북서방. 해시의 시작 시간은 9∼11시이며 해시의 끝은 흑색이고 시간은 9∼11시다. 음양으로는 음이 되며, 음양으로는 음이 되며 월건은 음력 10월이다. 이아 와 사기에는 각각 대연헌( : 고갑자 십이지의 열두 번째, 곧 )과 추자가 있으며, 숫자로는 선천수는 4이고 후천수는 6이다. 정월 첫 번째 돼지날에는 피부가 검고 곱다고 해서 콩깍지로 문지르면 살결이 곱고 윤기가 난다고 세시풍속은 말한다. 돼지의 살결이 검고 거친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 생긴 속신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날 바느질을 하면 손가락이 아프고, 머리를 빗으면 풍증이 생긴다고 믿는다. 한편 궁중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해낭이라하고, 곡식의 씨를 태워 넣는 주머니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내관들이 돼지주둥이 지진다. 며 돌아다녔다. |
3dc2c494-4ca6-4193-bb97-7d37bc6b3147 | source05/encykorea/SOC13683.txt | 두렁이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971 | CC BY | 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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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투리로 두렁 치마·두령이라고도 한다.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갓난아이들을 위해 겹으로 하고 솜을 넣어 누벼 만들기도 한다. 위쪽에는 깃을 달지 않은 배냇저고리를 입힌다. 돌전까지 주로 사용했다. 조선 고종이 쓴 궁중 발기에는 왕자의 삼칠 일 날 의대( : 임금의 옷)에 누비 두렁이가 있다. 이로써 두렁이 사용은 궁중이나 사가에서 다 같이 이루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두렁이
### 내용:
사투리로 두렁 치마·두령이라고도 한다.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갓난아이들을 위해 겹으로 하고 솜을 넣어 누벼 만들기도 한다. 위쪽에는 깃을 달지 않은 배냇저고리를 입힌다. 돌전까지 주로 사용했다. 조선 고종이 쓴 궁중 발기에는 왕자의 삼칠 일 날 의대( : 임금의 옷)에 누비 두렁이가 있다. 이로써 두렁이 사용은 궁중이나 사가에서 다 같이 이루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
89b0750c-1c84-4c6f-bbad-08ad1016c0d8 | source05/encykorea/SOC50548.txt | 광주 장지동 유적
(廣州 牆枝洞 遺蹟)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692 | CC BY | 69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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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le":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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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장지동 유적은 2000년 12월 20에서 2001년 4월 30일까지 성남∼장호원 도로 개설공사(2공구)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존재가 보고되었으며, 장지동 유적지에 대해서는 2006년 5월 1일부터 2007년 12월 10일까지 시굴조사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집터[住居址] 8기와 구덩 유구[竪穴遺構] 4기가 조사되었고, 백제시대 초기 유적으로는 집터 16기, 구덩 유구 20기, 도랑 유구[溝狀遺構] 1기 등이 발굴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유적으로 구덩 유구 4기와 도랑 유구 1기가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15기의 유구가 발굴되었는데, 시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발굴조사 보고서 광주 장지동 취락유적은 종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물로 2010년 8월 29일에 발간되었다. 장지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구덩 유구, 백제시대의 초기 집터와 도랑 유구, 조선시대의 구덩 유구와 도랑 유구 등 모두 69기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 집터는 모두 8 기이다. 제1호는 세 장 방형으로 장축 약 1.52cm, 단축 약 240cm, 깊이 28cm이다. 내부에 벽 도랑과 기둥구멍[] 등이 있고, 화덕자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집터 안에서 돌끌, 숫돌, 가락 바퀴, 민무늬토기 조각 등이 나왔다. 제2호는 줄임 네모꼴로, 잔존 길이 430cm, 잔존 너비 376cm, 깊이 14cm이다. 팽이 모양토기 2점이 내부에서 반파되어 나왔다. 제3호는 줄임 네모꼴로 추정되며, 잔존 길이 298cm, 잔존 너비 161cm, 깊이 20cm이다. 민무늬토기 조각과 간 돌도끼[] 1점이 내부에서 나왔다. 제4호는 원형이며, 규모는 430420cm이고, 내부에서 구덩이와 2개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 조각과 갈돌이 나왔다. 제5호는 줄임 네모 모양으로 추정되며, 내부에 기둥구멍 1개가 노출되었고 민무늬토기 조각과 붉은 간 토기[] 조각이 나왔다. 제6호는 못 줄임 네모 모양으로 추정되며, 내부에 구덩이 모양 화덕자리가 확인되었고, 골 아가리 무늬 토기[]·바리 모양토기[]가 수습되었다. 제7호는 결실이 심하여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민무늬토기 조각 등이 소량이나마 출토되었다. 제8호의 평면 형태는 알 수 없지만, 내부에서 깐돌식[] 화덕자리 시설이 조사되었고, 민무늬토기 조각이 소량 출토되었다. 이들 집터 가운데 원형인 제4호는 내부에 구덩이와 2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되어 있다. 특징적인 점은 송국리형 집터 형상의 제2호 집터에서는 겹아가리에 짧은 빗금[]이 시문 되지 않은 팽이 모양토기가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청동기시대 집터의 연대는 253020BP(제3호), 251020BP(제4호), 254520BP(제8호)로 측정되어 대체로 청동기시대 중기로 편년 되고 있다. 하지만 제 2호 집터는 팽이 모양토기가 출토된 연천 삼거리 유적의 제9호 집터에 대한 방사성탄소 연대가 서기전 1130년으로 측정되고 있어 다른 집터들보다 앞설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시대 초기의 집터는 모두 16기이며, 평면은 크게 철자형(제12·13·14·16·17·18호), 육각형(제19·20호), 긴네모모양(제10·11·22호)으로 구분된다. 이 중 육각형은 출입구와 집터 사이에 통로가 있는 여자형, 철자형은 단순한 통로 형태이다. 출입구 반대쪽 벽면이 직선으로 처리된 집터(제12·13·15·18호)와 둔각을 이룬 집터(제14·16·17·20호)로 구분되는 것은 단벽 형태에 따른 것이다. 출입구의 형태는 직선 벽면에서 출입구 부분만 약간 둥글게 처리된 집터(제10호), 철자형이며 출입구의 폭이 좁고 길이가 짧은 집터(제12·13·18호), 일반적인 철자형 집터(제14·15·16호), 여(呂) 자형 집터(제19·20호), 네모 모양으로 출입구가 확인되지 않은 집터(제11·22호)가 있다. 출입구 방향은 대체로 동쪽이나 남쪽 혹은 남동쪽이며, 외부에서 내부 공간으로 경사지면서 단단하게 조성되었다. 집터의 벽체는 도랑과 기둥구멍을 먼저 굴광한 다음 원형의 기둥을 모서리 부분이나 벽에 세우고 그 사이에 판재를 채워 마감하였는데, 이들 판재의 너비는 10∼25cm 내외이며 두께는 5cm 내외이다. 화덕자리 시설은 부뚜막, 깐돌식 화덕자리, 무시설식 화덕자리 등 3가지 형태로 조사되었다. 부뚜막 시설은 모두 6기(제10·11·14·16·20·22호)에서 확인되었다. 출입구 반대편 벽의 우측에 조성되어 있고, 평면 형태는 아궁이 부는 넓고 굴뚝 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이며, 깬 돌로 두 벽을 만든 뒤 점토로 보강한 것(제11·16·22호)과 점토로만<NAME> 것(제10·14·20호)이 있다. 제18호, 22호 집터에는 넓적한 강자갈을 깔아서 만든 깐돌식 화덕자리가 조사되었다. 제18호 집터의 깐돌식 화덕자리는 톱니무늬가 시문 된 토기가 깔려 있고, 제22호 집터의 화덕자리는 한차례 폐기 과정을 거친 뒤, 그 위에 강자갈을 깔고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입구 반대편 약 3/5지점에 이러한 화덕자리가 위치한다. 제22호 집터의 경우 깐돌식 화덕자리와 부뚜막이 동시에 쓰이고 있으며, 두 시설은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12·13·15호 집터에는 화덕자리가 없어 무시설식이었다. 백제 초기 집터는 4단계로 편년 되는데, Ⅰ단계(서기 1세기 중기∼2세기 중기)는 전면의 단벽은 둔각이며, 후면 단벽은 직석으로 처리되어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오각형이고, Ⅱ단계(2세기 중기∼3세기 중기)는 출입구 쪽 단벽이 더욱 벌어지고 있으나 후면 단벽은 직선을<NAME> 오각형이며, Ⅲ단계(3세기 후기∼4세기 초기)는 전면과 후면 단벽이 모두 둔각을 이룬 육각형이다. 마지막으로 IV 단계(4세기 초기∼5세기 초기)는 평면 형태가 긴네모모양과 육각형으로 나뉘는데, 육각형은 여자형 출입구가 있다. 광주 장지동 유적의 청동기시대 집터는 평면 형태나 출토된 유물의 양상으로 두 문화가 한 지점에서 시기 차이를 두고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제4호 집터는 내부에 구덩이와 2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된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집터<NAME>인 송국리형 집터이고, 제2호 집터는 한반도 북서부 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팽이 모양토기이다. 따라서 장지동 청동기시대 집터는 평면 형태나 출토유물 등을 고려했을 때, 한반도 북부와 남부 지방의 문화가 모두 나타나는 보기 드문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 백제의 초기 왕도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백제 한성 시기 주요 거점지역에서 발견되는 집터 형태는 철자형 집터와 여자형 집터이다. 따라서 장지동에서 발굴된 백제 초기의 집터들은 백제 한성 시기 왕도 동남부 지역의 집터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광주 장지동 유적
(廣州 牆枝洞 遺蹟)
### 내용:
광주 장지동 유적은 2000년 12월 20에서 2001년 4월 30일까지 성남∼장호원 도로 개설공사(2공구)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존재가 보고되었으며, 장지동 유적지에 대해서는 2006년 5월 1일부터 2007년 12월 10일까지 시굴조사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집터[住居址] 8기와 구덩 유구[竪穴遺構] 4기가 조사되었고, 백제시대 초기 유적으로는 집터 16기, 구덩 유구 20기, 도랑 유구[溝狀遺構] 1기 등이 발굴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유적으로 구덩 유구 4기와 도랑 유구 1기가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15기의 유구가 발굴되었는데, 시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발굴조사 보고서 광주 장지동 취락유적은 종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물로 2010년 8월 29일에 발간되었다. 장지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구덩 유구, 백제시대의 초기 집터와 도랑 유구, 조선시대의 구덩 유구와 도랑 유구 등 모두 69기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 집터는 모두 8 기이다. 제1호는 세 장 방형으로 장축 약 1.52cm, 단축 약 240cm, 깊이 28cm이다. 내부에 벽 도랑과 기둥구멍[] 등이 있고, 화덕자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집터 안에서 돌끌, 숫돌, 가락 바퀴, 민무늬토기 조각 등이 나왔다. 제2호는 줄임 네모꼴로, 잔존 길이 430cm, 잔존 너비 376cm, 깊이 14cm이다. 팽이 모양토기 2점이 내부에서 반파되어 나왔다. 제3호는 줄임 네모꼴로 추정되며, 잔존 길이 298cm, 잔존 너비 161cm, 깊이 20cm이다. 민무늬토기 조각과 간 돌도끼[] 1점이 내부에서 나왔다. 제4호는 원형이며, 규모는 430420cm이고, 내부에서 구덩이와 2개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 조각과 갈돌이 나왔다. 제5호는 줄임 네모 모양으로 추정되며, 내부에 기둥구멍 1개가 노출되었고 민무늬토기 조각과 붉은 간 토기[] 조각이 나왔다. 제6호는 못 줄임 네모 모양으로 추정되며, 내부에 구덩이 모양 화덕자리가 확인되었고, 골 아가리 무늬 토기[]·바리 모양토기[]가 수습되었다. 제7호는 결실이 심하여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민무늬토기 조각 등이 소량이나마 출토되었다. 제8호의 평면 형태는 알 수 없지만, 내부에서 깐돌식[] 화덕자리 시설이 조사되었고, 민무늬토기 조각이 소량 출토되었다. 이들 집터 가운데 원형인 제4호는 내부에 구덩이와 2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되어 있다. 특징적인 점은 송국리형 집터 형상의 제2호 집터에서는 겹아가리에 짧은 빗금[]이 시문 되지 않은 팽이 모양토기가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청동기시대 집터의 연대는 253020BP(제3호), 251020BP(제4호), 254520BP(제8호)로 측정되어 대체로 청동기시대 중기로 편년 되고 있다. 하지만 제 2호 집터는 팽이 모양토기가 출토된 연천 삼거리 유적의 제9호 집터에 대한 방사성탄소 연대가 서기전 1130년으로 측정되고 있어 다른 집터들보다 앞설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시대 초기의 집터는 모두 16기이며, 평면은 크게 철자형(제12·13·14·16·17·18호), 육각형(제19·20호), 긴네모모양(제10·11·22호)으로 구분된다. 이 중 육각형은 출입구와 집터 사이에 통로가 있는 여자형, 철자형은 단순한 통로 형태이다. 출입구 반대쪽 벽면이 직선으로 처리된 집터(제12·13·15·18호)와 둔각을 이룬 집터(제14·16·17·20호)로 구분되는 것은 단벽 형태에 따른 것이다. 출입구의 형태는 직선 벽면에서 출입구 부분만 약간 둥글게 처리된 집터(제10호), 철자형이며 출입구의 폭이 좁고 길이가 짧은 집터(제12·13·18호), 일반적인 철자형 집터(제14·15·16호), 여(呂) 자형 집터(제19·20호), 네모 모양으로 출입구가 확인되지 않은 집터(제11·22호)가 있다. 출입구 방향은 대체로 동쪽이나 남쪽 혹은 남동쪽이며, 외부에서 내부 공간으로 경사지면서 단단하게 조성되었다. 집터의 벽체는 도랑과 기둥구멍을 먼저 굴광한 다음 원형의 기둥을 모서리 부분이나 벽에 세우고 그 사이에 판재를 채워 마감하였는데, 이들 판재의 너비는 10∼25cm 내외이며 두께는 5cm 내외이다. 화덕자리 시설은 부뚜막, 깐돌식 화덕자리, 무시설식 화덕자리 등 3가지 형태로 조사되었다. 부뚜막 시설은 모두 6기(제10·11·14·16·20·22호)에서 확인되었다. 출입구 반대편 벽의 우측에 조성되어 있고, 평면 형태는 아궁이 부는 넓고 굴뚝 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이며, 깬 돌로 두 벽을 만든 뒤 점토로 보강한 것(제11·16·22호)과 점토로만<NAME> 것(제10·14·20호)이 있다. 제18호, 22호 집터에는 넓적한 강자갈을 깔아서 만든 깐돌식 화덕자리가 조사되었다. 제18호 집터의 깐돌식 화덕자리는 톱니무늬가 시문 된 토기가 깔려 있고, 제22호 집터의 화덕자리는 한차례 폐기 과정을 거친 뒤, 그 위에 강자갈을 깔고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입구 반대편 약 3/5지점에 이러한 화덕자리가 위치한다. 제22호 집터의 경우 깐돌식 화덕자리와 부뚜막이 동시에 쓰이고 있으며, 두 시설은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12·13·15호 집터에는 화덕자리가 없어 무시설식이었다. 백제 초기 집터는 4단계로 편년 되는데, Ⅰ단계(서기 1세기 중기∼2세기 중기)는 전면의 단벽은 둔각이며, 후면 단벽은 직석으로 처리되어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오각형이고, Ⅱ단계(2세기 중기∼3세기 중기)는 출입구 쪽 단벽이 더욱 벌어지고 있으나 후면 단벽은 직선을<NAME> 오각형이며, Ⅲ단계(3세기 후기∼4세기 초기)는 전면과 후면 단벽이 모두 둔각을 이룬 육각형이다. 마지막으로 IV 단계(4세기 초기∼5세기 초기)는 평면 형태가 긴네모모양과 육각형으로 나뉘는데, 육각형은 여자형 출입구가 있다. 광주 장지동 유적의 청동기시대 집터는 평면 형태나 출토된 유물의 양상으로 두 문화가 한 지점에서 시기 차이를 두고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제4호 집터는 내부에 구덩이와 2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된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집터<NAME>인 송국리형 집터이고, 제2호 집터는 한반도 북서부 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팽이 모양토기이다. 따라서 장지동 청동기시대 집터는 평면 형태나 출토유물 등을 고려했을 때, 한반도 북부와 남부 지방의 문화가 모두 나타나는 보기 드문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 백제의 초기 왕도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백제 한성 시기 주요 거점지역에서 발견되는 집터 형태는 철자형 집터와 여자형 집터이다. 따라서 장지동에서 발굴된 백제 초기의 집터들은 백제 한성 시기 왕도 동남부 지역의 집터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
bae78dcc-c093-4ad7-876a-0574712636d6 | source05/encykorea/SOC24839.txt | 시누이
(媤누이)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최승범"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327 | CC BY | 304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누이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시는 시집·시가를 뜻하는 접두사이다. 줄여서 시누·시 뉘라 한다. 남편의 손 윗누이는 큰 시누이, 손아래 누이는 작은 시누이로도 불린다. 한편, 시누이 쪽에서는 오빠나 남동생의 아내를 일컬어 ‘올케’라고 한다. 오빠의 아내이면 ‘큰 올케’, 남동생의 아내이면 ‘작은 올케’라 이른다. 정중하게는 ‘오라범댁’, 낮추어서는 ‘오라빗댁’으로 일컫기도 한다.
‘시누이올케 시 뉘 올케’는 시누이와 올케의 관계를 말한다. 시누이올케는 다정하게 지내야 하는 사이인데도 흔히 옛 노래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청구영언≫의 사설시조, “싀어마님 며느라기 낫바 벽바흘 구루지 마오. 빗에 바든 며ᄂᆞ린가. 갑세 쳐온 며ᄂᆞ린가. 밤 나모 서근 등걸에 휘초리나 ᄀᆞᆺ 치 알살픠선 싀아바님, 볏뵌 ○동ᄀᆞᆺ치 되죠고 신 싀어 마님, 삼 년 겨론 망태에 새 송곳 부리 ᄀᆞᆺ 치 ○족ᄒᆞ신 싀누으님, 당피 가론 밧틔 돌피 나니 ᄂᆞ 치 ᄉᆡ 노란 외곶ᄀᆞᆺ튼 피ᄯᅩᆼ 누ᄂᆞᆫ 아들 ᄒᆞ 나 두고건밧틔 멋곳ᄀᆞᆺ튼 며ᄂᆞ리를 어듸 낫바 ᄒᆞ 시는 고”에서는 시누이를 ‘3년 걸려 결은〔編〕 망태기에 새 송곳 끝같이 뾰족하다. ’는 표현이다. 이 사설시조의 며느리는 시부모·시누이·남편 등 시집 식구들에게 이간질이나 하고, 시집 식구들 사이에 간섭을 하는 게 여간하지 않다. 규방가사(閨房歌辭)의 한 편인 화수가 花樹歌에서도 시댁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불평을 털어놓고 있다.
“범갓탄 시아버님 쳐다보기 슝스럽고, ᄎᆞᆷ새갓탄 시어머님 아무 작죄(作罪) 업근마는 무관(無關)이 한 슘 소ᄅᆡ 머리ᄭᅳᆺ치 절노 ᄉᆡᄂᆡ. ᄎᆡ면(體面)업난 연소 낭군(年少郎君) 눈 마치면 웃자 하고, 원슈(怨讎)갓탄 어린 시누 ᄌᆞᆷ 불이 천(暫不離遷) 무산 일고, 이모저모 ᄯᅥ 더 보고 말 전하기 이력 난ᄂᆡ”가 곧 그것이다. 이곳에서는 어린 시누이를 잠깐도 옆을 떠나지 않고 흉이나 뜯어내고 말이나 물어뜯는 원수라고 했다. 시집살이를 노래한 민요에도 시누이가 자주 등장한다.<NAME>같이 좋은 표현이 아니다. ‘시누이는 종달새의 넋이다. ’, ‘요망하다 이 시누야’, ‘시큼시큼 시누님네’, ‘부엌에 가면 시누이 원수’, ‘졸락 같은 시누이 년’, ‘여우 같은 시누이 잡년’, ‘고추 당추 맵다 한들 시누 아기 성적같이 매울 손가’, ‘미구(尾口) 같은 시누애씨’ 등 모두가 달갑지 않은 비유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시누이올케는 언제까지나 한 집에서 살 수는 없다. 올케를 맞이한 시누이도 언제인가 시집을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누이의 남편은 시매부·시누이남편이라 한다. 시누이올케는 예의 바른 언행과 행동으로, 서로의 흉도 덮어주고, 상냥한 가운데 서로 존대하며 지내야 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시누이
(媤누이)
### 내용:
누이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시는 시집·시가를 뜻하는 접두사이다. 줄여서 시누·시 뉘라 한다. 남편의 손 윗누이는 큰 시누이, 손아래 누이는 작은 시누이로도 불린다. 한편, 시누이 쪽에서는 오빠나 남동생의 아내를 일컬어 ‘올케’라고 한다. 오빠의 아내이면 ‘큰 올케’, 남동생의 아내이면 ‘작은 올케’라 이른다. 정중하게는 ‘오라범댁’, 낮추어서는 ‘오라빗댁’으로 일컫기도 한다.
‘시누이올케 시 뉘 올케’는 시누이와 올케의 관계를 말한다. 시누이올케는 다정하게 지내야 하는 사이인데도 흔히 옛 노래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청구영언≫의 사설시조, “싀어마님 며느라기 낫바 벽바흘 구루지 마오. 빗에 바든 며ᄂᆞ린가. 갑세 쳐온 며ᄂᆞ린가. 밤 나모 서근 등걸에 휘초리나 ᄀᆞᆺ 치 알살픠선 싀아바님, 볏뵌 ○동ᄀᆞᆺ치 되죠고 신 싀어 마님, 삼 년 겨론 망태에 새 송곳 부리 ᄀᆞᆺ 치 ○족ᄒᆞ신 싀누으님, 당피 가론 밧틔 돌피 나니 ᄂᆞ 치 ᄉᆡ 노란 외곶ᄀᆞᆺ튼 피ᄯᅩᆼ 누ᄂᆞᆫ 아들 ᄒᆞ 나 두고건밧틔 멋곳ᄀᆞᆺ튼 며ᄂᆞ리를 어듸 낫바 ᄒᆞ 시는 고”에서는 시누이를 ‘3년 걸려 결은〔編〕 망태기에 새 송곳 끝같이 뾰족하다. ’는 표현이다. 이 사설시조의 며느리는 시부모·시누이·남편 등 시집 식구들에게 이간질이나 하고, 시집 식구들 사이에 간섭을 하는 게 여간하지 않다. 규방가사(閨房歌辭)의 한 편인 화수가 花樹歌에서도 시댁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불평을 털어놓고 있다.
“범갓탄 시아버님 쳐다보기 슝스럽고, ᄎᆞᆷ새갓탄 시어머님 아무 작죄(作罪) 업근마는 무관(無關)이 한 슘 소ᄅᆡ 머리ᄭᅳᆺ치 절노 ᄉᆡᄂᆡ. ᄎᆡ면(體面)업난 연소 낭군(年少郎君) 눈 마치면 웃자 하고, 원슈(怨讎)갓탄 어린 시누 ᄌᆞᆷ 불이 천(暫不離遷) 무산 일고, 이모저모 ᄯᅥ 더 보고 말 전하기 이력 난ᄂᆡ”가 곧 그것이다. 이곳에서는 어린 시누이를 잠깐도 옆을 떠나지 않고 흉이나 뜯어내고 말이나 물어뜯는 원수라고 했다. 시집살이를 노래한 민요에도 시누이가 자주 등장한다.<NAME>같이 좋은 표현이 아니다. ‘시누이는 종달새의 넋이다. ’, ‘요망하다 이 시누야’, ‘시큼시큼 시누님네’, ‘부엌에 가면 시누이 원수’, ‘졸락 같은 시누이 년’, ‘여우 같은 시누이 잡년’, ‘고추 당추 맵다 한들 시누 아기 성적같이 매울 손가’, ‘미구(尾口) 같은 시누애씨’ 등 모두가 달갑지 않은 비유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시누이올케는 언제까지나 한 집에서 살 수는 없다. 올케를 맞이한 시누이도 언제인가 시집을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누이의 남편은 시매부·시누이남편이라 한다. 시누이올케는 예의 바른 언행과 행동으로, 서로의 흉도 덮어주고, 상냥한 가운데 서로 존대하며 지내야 한다. |
4979ae64-42fb-4eda-b4ac-8e3fe623e7c1 | source05/encykorea/MED25624.txt | 양홍적
(楊弘迪)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신근"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872 | CC BY | 39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399년(정종 1) 조사와 같이 벼슬이 허용되었으며, 1408년(태종 8) 어부 의원으로 왕의 침구에 착오가 있다 하여 순금부에 갇혔으나 곧 풀려났다. 1412년(태종 12)에 검교참의로서 공을 세웠다 하여 쌀 10석을 받고, 곧 검교 공조 참의 가 되었고, 원종공신에 녹훈되어 전결을 상으로 받았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양홍적
(楊弘迪)
### 내용:
1399년(정종 1) 조사와 같이 벼슬이 허용되었으며, 1408년(태종 8) 어부 의원으로 왕의 침구에 착오가 있다 하여 순금부에 갇혔으나 곧 풀려났다. 1412년(태종 12)에 검교참의로서 공을 세웠다 하여 쌀 10석을 받고, 곧 검교 공조 참의 가 되었고, 원종공신에 녹훈되어 전결을 상으로 받았다. |
ce660d23-0cf5-4cd7-8540-928b294ba03d | source05/encykorea/SOC4614.txt | 구슬치기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886 | CC BY | 2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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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le": "사회",
"sub": ""
} | 구슬의 지름은 1cm 가량이며 발바닥으로 밀어 차거나 손가락으로 퉁기거나 선 채로 던지기도 한다. 구슬을 사용하기 전에는 돌멩이를 사용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놀이인 것 같다. 인원이 두세 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럿이 무리를 이루어 즐기는 경우도 있다. 놀이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적당한 곳에 구슬을 던져놓으면, 이긴 사람은 가운뎃손가락 손톱과 엄지손가락 바닥으로 자기 구슬을 퉁겨서 상대편 구슬을 맞히거나(장소가 좁을 때), 발로 밀어 차서 한두 뼘 정도 가까운 곳에 이르게 한다(장소가 넓을 때). 이에 성공하면 상대편의 구슬은 자기 것이 되고, 또 이를 계속할 수 있으나 실패하면 차례가 바뀌어 상대편의 공격을 받는다. 둘째, 3∼5m쯤 되는 곳에 세모꼴이나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속에 각자 구슬을 퉁겨 보낸 다음, 중심부에 구슬을 보낸 사람부터 차례로 원래 위치에서 자기 구슬로 남의 구슬을 맞힌다. 이때도 상대편 구슬을 맞히면 자기 것이 된다. 셋째, 일정한 높이의 벽면에서 구슬을 떨어뜨리거나, 정해진 거리에서 구슬을 부딪혀 튀어나오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멀리 나간 구슬이 승리한다. 넷째, 땅바닥에 몇 개의 구멍을 파서 구슬을 차례로 넣는 방법으로, 한 지점에서 구슬을 바로 넣지 못하면 다음 사람의 순서로 바뀐다. 이렇게 해서 구슬을 몇 개의 구멍에 먼저 넣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이 이긴다. 이 경우 상대방 구슬을 맞추면 그 보상으로 한 구멍은 이미 넣은 것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보통 투명한 구슬을 사용하지만, 안에 태극무늬를 넣기도 하고 겉에 구름무늬를 덧칠한 고급 구슬도 있다. 베어링 구슬을 유리구슬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구슬치기
### 내용:
구슬의 지름은 1cm 가량이며 발바닥으로 밀어 차거나 손가락으로 퉁기거나 선 채로 던지기도 한다. 구슬을 사용하기 전에는 돌멩이를 사용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놀이인 것 같다. 인원이 두세 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럿이 무리를 이루어 즐기는 경우도 있다. 놀이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적당한 곳에 구슬을 던져놓으면, 이긴 사람은 가운뎃손가락 손톱과 엄지손가락 바닥으로 자기 구슬을 퉁겨서 상대편 구슬을 맞히거나(장소가 좁을 때), 발로 밀어 차서 한두 뼘 정도 가까운 곳에 이르게 한다(장소가 넓을 때). 이에 성공하면 상대편의 구슬은 자기 것이 되고, 또 이를 계속할 수 있으나 실패하면 차례가 바뀌어 상대편의 공격을 받는다. 둘째, 3∼5m쯤 되는 곳에 세모꼴이나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속에 각자 구슬을 퉁겨 보낸 다음, 중심부에 구슬을 보낸 사람부터 차례로 원래 위치에서 자기 구슬로 남의 구슬을 맞힌다. 이때도 상대편 구슬을 맞히면 자기 것이 된다. 셋째, 일정한 높이의 벽면에서 구슬을 떨어뜨리거나, 정해진 거리에서 구슬을 부딪혀 튀어나오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멀리 나간 구슬이 승리한다. 넷째, 땅바닥에 몇 개의 구멍을 파서 구슬을 차례로 넣는 방법으로, 한 지점에서 구슬을 바로 넣지 못하면 다음 사람의 순서로 바뀐다. 이렇게 해서 구슬을 몇 개의 구멍에 먼저 넣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이 이긴다. 이 경우 상대방 구슬을 맞추면 그 보상으로 한 구멍은 이미 넣은 것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보통 투명한 구슬을 사용하지만, 안에 태극무늬를 넣기도 하고 겉에 구름무늬를 덧칠한 고급 구슬도 있다. 베어링 구슬을 유리구슬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
c9a6fcaf-96af-440e-a3fe-39672478241c | source05/encykorea/SOC30240.txt | 은장도
(銀粧刀)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864 | CC BY | 13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조선시대에는 남녀가 평상복에 장도를 차는 풍습이 널리 퍼졌다. 1498년(연산군 4)의 사치 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지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자 1670년(현종 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처벌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봉건사회에서 금과 은의 사용이 상하·존비·귀천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명나라에 금·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여자에게 있어서 은장도는 장식용뿐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호신용으로도 쓰였다. 즉, 임진왜란 당시<NAME>신속삼강행실도에는 항상 작은 장도를 지니고 있다가 유사시 자결하거나 상대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패도 와 낭도는 부녀자들이 옷고름에 차고 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노리개로 각각 다르다. 패도의 크기는 전장 5촌, 도신(칼날) 3촌 정도이고, 전장 3촌, 도신 1.5촌 정도이며, 보통 낭도는 전장 3촌, 도신 1.5촌 정도였다. 일편단심이라는 글씨를 도신에 새기고, 은장도의 재료는 은이고 도신은 강철이다. 또, 외부에서 식사할 때 젓가락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음식 중의 독을 구별하기 위한 도구로 은 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은장도
(銀粧刀)
### 내용:
조선시대에는 남녀가 평상복에 장도를 차는 풍습이 널리 퍼졌다. 1498년(연산군 4)의 사치 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지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자 1670년(현종 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처벌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봉건사회에서 금과 은의 사용이 상하·존비·귀천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명나라에 금·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여자에게 있어서 은장도는 장식용뿐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호신용으로도 쓰였다. 즉, 임진왜란 당시<NAME>신속삼강행실도에는 항상 작은 장도를 지니고 있다가 유사시 자결하거나 상대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패도 와 낭도는 부녀자들이 옷고름에 차고 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노리개로 각각 다르다. 패도의 크기는 전장 5촌, 도신(칼날) 3촌 정도이고, 전장 3촌, 도신 1.5촌 정도이며, 보통 낭도는 전장 3촌, 도신 1.5촌 정도였다. 일편단심이라는 글씨를 도신에 새기고, 은장도의 재료는 은이고 도신은 강철이다. 또, 외부에서 식사할 때 젓가락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음식 중의 독을 구별하기 위한 도구로 은 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
16d2363d-3ffc-4ac3-a5d7-2ae537d9aad7 | source05/encykorea/SOC51073.txt | 제련로
(製鍊爐)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737 | CC BY | 16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제련로는 광석에서 철이나 구리를 뽑아내는 제련 공정과 금속을 녹여서 금속 제품을 생산하는 용해 작업에 쓰이는 노로서 금속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중국의 한대에서는 제련할 때 흙이나 벽돌을 이용했지만, 우리나라의 노벽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원삼국∼통일신라시대에는 원형 또는 방형의 제련로를 사용했으나 고려 시대 이후에는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바뀌며 조선시대에는 긴 석축형으로 바뀐다. 근대 이후에는 유럽식 고로가 도입되었다. 원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제련로는 노의 위치에 따라 반지하식·수혈식·지상식 등으로 구분되며, 원형·방형의 크기가 지름 90∼190cm의 원형·방형이며 주변에 풀무를 두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까지 주로 원형에서 시작해 고려 시대 이후에는 방형·장방형으로 변화하고 조선시대에는 장방형의 석 축로로 발전하고 경주 황성동 유적, 진천 석장리 유적 등 제철유적에서 발굴된 제련로는 장방형의 석 축로로 발전한다. 제련 노는 금속을 녹여서 소재로 가공하는데 주로 주조철부를 만들었다.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주조철부는 적어도 서기 전전부터 제련로가 사용되었으며, 노 주변에는 거푸집과 안 틀, 도가니 등이 있다. 현재 국내에서 발견된 제련로는 대부분 철 생산 유적에서 확인되며 경기도 화성 발안리·기안리, 충청북도 진천 석장리,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 경상남도 밀양시 사촌리 등 전국 각지에서 확인된다. 제련로 구조와 형태 변화는 원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금속 생산 기술의 발전을 말해준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제련로
(製鍊爐)
### 내용:
제련로는 광석에서 철이나 구리를 뽑아내는 제련 공정과 금속을 녹여서 금속 제품을 생산하는 용해 작업에 쓰이는 노로서 금속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중국의 한대에서는 제련할 때 흙이나 벽돌을 이용했지만, 우리나라의 노벽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원삼국∼통일신라시대에는 원형 또는 방형의 제련로를 사용했으나 고려 시대 이후에는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바뀌며 조선시대에는 긴 석축형으로 바뀐다. 근대 이후에는 유럽식 고로가 도입되었다. 원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제련로는 노의 위치에 따라 반지하식·수혈식·지상식 등으로 구분되며, 원형·방형의 크기가 지름 90∼190cm의 원형·방형이며 주변에 풀무를 두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까지 주로 원형에서 시작해 고려 시대 이후에는 방형·장방형으로 변화하고 조선시대에는 장방형의 석 축로로 발전하고 경주 황성동 유적, 진천 석장리 유적 등 제철유적에서 발굴된 제련로는 장방형의 석 축로로 발전한다. 제련 노는 금속을 녹여서 소재로 가공하는데 주로 주조철부를 만들었다.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주조철부는 적어도 서기 전전부터 제련로가 사용되었으며, 노 주변에는 거푸집과 안 틀, 도가니 등이 있다. 현재 국내에서 발견된 제련로는 대부분 철 생산 유적에서 확인되며 경기도 화성 발안리·기안리, 충청북도 진천 석장리,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 경상남도 밀양시 사촌리 등 전국 각지에서 확인된다. 제련로 구조와 형태 변화는 원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금속 생산 기술의 발전을 말해준다. |
59aed547-27a2-4bd6-995b-d829635cda7e | source05/encykorea/POL46546.txt | 홍성하
(洪性夏)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석근"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186 | CC BY | 83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부산서 출생. 일본 주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39년부터<NAME>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광복 후 1946년 과도입법의원을 지냈고, 1948년<NAME>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소속으로 서울 동대문구에서 당선되어<NAME>의원을 지냈다. 재임 중에 국회 재무경제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대구 을구에서 당선된 것은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국회 재무경제 위원회 위원장과 금융 통화 위원을 역임했다. 1961년 이후 중앙경제 연구소 위원·외자도입심의위원회 위원·대일청구권자금 관리 위원회 위원·국민경제 연구회 회장·세무회계 연구회 회장·양곡 심의위원회 위원 등 경제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70년에 저축 추진 중앙위원회 회장에 취임한 뒤 위원회 고문직을 수행했다. 문화훈장 국민장과 무궁화장도 수여받았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홍성하
(洪性夏)
### 내용:
부산서 출생. 일본 주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39년부터<NAME>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광복 후 1946년 과도입법의원을 지냈고, 1948년<NAME>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소속으로 서울 동대문구에서 당선되어<NAME>의원을 지냈다. 재임 중에 국회 재무경제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대구 을구에서 당선된 것은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국회 재무경제 위원회 위원장과 금융 통화 위원을 역임했다. 1961년 이후 중앙경제 연구소 위원·외자도입심의위원회 위원·대일청구권자금 관리 위원회 위원·국민경제 연구회 회장·세무회계 연구회 회장·양곡 심의위원회 위원 등 경제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70년에 저축 추진 중앙위원회 회장에 취임한 뒤 위원회 고문직을 수행했다. 문화훈장 국민장과 무궁화장도 수여받았다. |
faa0476d-3f97-4c9d-8890-7d52554bbf13 | source05/encykorea/SOC18310.txt | 벽돌방무덤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822 | CC BY | 26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전실분이라고도 한다. 여러 방식과 외방식으로 구분되는 벽돌방 무덤의 양식은 벽돌을 쌓아 네 벽체를 만들고 벽면의 상부를 점차 안으로 기울게 해 궁륭(, dome) 또는 터널 천장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벽돌로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전국시대 이래로 많았으며, 육조·당·송 때에도 많았다. 전한의 벽돌방 무덤들 역시 후기인 3세기경부터 낙랑이 망한 뒤인 4세기 말경까지 대다수가 만들어졌다. 널방의 바닥은 지하에 설치하지만 벽은 거의 절반 이상이 지표 위로 올라와 있고, 그것을 봉토로 덮어씌우고 있다. 내부는 연꽃 등의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벽돌로 마감되며, 벽돌은 문양이 있는 좁은 면이 내부 벽이 된다. 옆으로 3단, 세워서 1단을 반복해서 벽돌을 쌓는다. 부부 묘나 가족묘의 경우 널길 입구를 열어 추가장이 가능하며 널길에는 널이 안치된다. 백제지역은 공주로 수도를 옮긴 뒤 중국 화남지방의 영향을 받은 벽돌방 무덤을 축조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무령왕릉과 송산리 제6호 분이 있다. 이 두 무덤의 천장은 모두 터널식으로 북벽과 동서 양 벽에는 창살문 모양과 등잔을 넣었던 감실을 설치하였다. 특히,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을 벽면에 바르고 호분으로 그 위에 그려 넣어 각각 그 방위를 수호하고 짓무를 하게 한 공주 송산리 제6호 분의 경우 벽면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호분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경우 낙랑군 시대에 벽돌을 사용한 예는 흔하지 않다. 후한대부터 많은 벽돌무덤이 축조되었고 실제로 조사가 이루어진 예도 낙랑 지역에서는 많다. 낙랑토성지에서도 관가 등의 축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을<NAME> 고구려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벽돌을 적극적으로 전수하지 않은 듯하다. 고구려에서 벽돌무덤을 축조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황룡사지의 일부 구간에 벽돌이 사용된 유구가 있지만 무덤에서 발견된 사례는 없다. 반면 백제는 고구려·신라에 비해 중국 남조 계통의 벽돌무덤이 2기 축조되어 있고 그 외 여러 성격의 유적에서도 벽돌이 출토된 바 있다. 따라서 백제의 벽돌방 무덤은 육조시대의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문화교류를 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벽돌방무덤
### 내용:
전실분이라고도 한다. 여러 방식과 외방식으로 구분되는 벽돌방 무덤의 양식은 벽돌을 쌓아 네 벽체를 만들고 벽면의 상부를 점차 안으로 기울게 해 궁륭(, dome) 또는 터널 천장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벽돌로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전국시대 이래로 많았으며, 육조·당·송 때에도 많았다. 전한의 벽돌방 무덤들 역시 후기인 3세기경부터 낙랑이 망한 뒤인 4세기 말경까지 대다수가 만들어졌다. 널방의 바닥은 지하에 설치하지만 벽은 거의 절반 이상이 지표 위로 올라와 있고, 그것을 봉토로 덮어씌우고 있다. 내부는 연꽃 등의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벽돌로 마감되며, 벽돌은 문양이 있는 좁은 면이 내부 벽이 된다. 옆으로 3단, 세워서 1단을 반복해서 벽돌을 쌓는다. 부부 묘나 가족묘의 경우 널길 입구를 열어 추가장이 가능하며 널길에는 널이 안치된다. 백제지역은 공주로 수도를 옮긴 뒤 중국 화남지방의 영향을 받은 벽돌방 무덤을 축조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무령왕릉과 송산리 제6호 분이 있다. 이 두 무덤의 천장은 모두 터널식으로 북벽과 동서 양 벽에는 창살문 모양과 등잔을 넣었던 감실을 설치하였다. 특히,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을 벽면에 바르고 호분으로 그 위에 그려 넣어 각각 그 방위를 수호하고 짓무를 하게 한 공주 송산리 제6호 분의 경우 벽면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호분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경우 낙랑군 시대에 벽돌을 사용한 예는 흔하지 않다. 후한대부터 많은 벽돌무덤이 축조되었고 실제로 조사가 이루어진 예도 낙랑 지역에서는 많다. 낙랑토성지에서도 관가 등의 축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을<NAME> 고구려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벽돌을 적극적으로 전수하지 않은 듯하다. 고구려에서 벽돌무덤을 축조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황룡사지의 일부 구간에 벽돌이 사용된 유구가 있지만 무덤에서 발견된 사례는 없다. 반면 백제는 고구려·신라에 비해 중국 남조 계통의 벽돌무덤이 2기 축조되어 있고 그 외 여러 성격의 유적에서도 벽돌이 출토된 바 있다. 따라서 백제의 벽돌방 무덤은 육조시대의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문화교류를 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
48559fc5-6671-4f91-b5b6-fcd9b6c551c3 | source05/encykorea/SOC48934.txt | 청색 숙고사 장옷
(靑色 熟庫紗 장옷)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118 | CC BY | 6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979년에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장옷은 1979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옥색 명주 장옷과 같이 (희) 자와 운문을 직조한 남색의 숙고사로 제작되었으며 안은 옥색이다. 장옷의 가장자리는 0.3cm 정도의 검은 선을 그렸으며, 깃·고름·회장은 자주색이다. 목판깃에 백색의 숙고 사인 한삼이 달려 있고, 참수는 27cm 길이로 참수가 달려 있다.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사용하던 쓰개의 일종이다.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청색 숙고사 장옷
(靑色 熟庫紗 장옷)
### 내용:
1979년에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장옷은 1979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옥색 명주 장옷과 같이 (희) 자와 운문을 직조한 남색의 숙고사로 제작되었으며 안은 옥색이다. 장옷의 가장자리는 0.3cm 정도의 검은 선을 그렸으며, 깃·고름·회장은 자주색이다. 목판깃에 백색의 숙고 사인 한삼이 달려 있고, 참수는 27cm 길이로 참수가 달려 있다.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사용하던 쓰개의 일종이다.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64a26dd3-f1f5-4bc9-9c9d-9c8a396e3707 | source05/encykorea/SOC4446.txt | 구례 봉서리 지석묘군
(求禮 鳳西里 支石墓群)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718 | CC BY | 64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994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봉서리<NAME>묘군은 12기에 이르는데 구례중학교와 구례군청에서 남동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다. 구릉 일대에는 민묘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주위는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NAME>묘들이 3열을 이루고 분포되어 있다. 제8호<NAME>묘의 덮개돌에는 거북등 모양의 음각선이 새겨져 있어 현지에서는 ‘거북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구례군에는 44개군 342기의<NAME>묘가 분포하고 있어 2만 여기에 달하는<NAME>묘가 산재되어 있는 전라남도 지역에서는<NAME>묘의 밀집도가 매우 낮은 편이지만 봉서리<NAME>묘군은 구례군에서는 대표적인<NAME>묘군에 해당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구례 봉서리 지석묘군
(求禮 鳳西里 支石墓群)
### 내용:
1994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봉서리<NAME>묘군은 12기에 이르는데 구례중학교와 구례군청에서 남동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다. 구릉 일대에는 민묘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주위는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NAME>묘들이 3열을 이루고 분포되어 있다. 제8호<NAME>묘의 덮개돌에는 거북등 모양의 음각선이 새겨져 있어 현지에서는 ‘거북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구례군에는 44개군 342기의<NAME>묘가 분포하고 있어 2만 여기에 달하는<NAME>묘가 산재되어 있는 전라남도 지역에서는<NAME>묘의 밀집도가 매우 낮은 편이지만 봉서리<NAME>묘군은 구례군에서는 대표적인<NAME>묘군에 해당한다. |
4e281d02-a0ce-4518-882f-c192fd8de886 | source05/encykorea/SOC24514.txt | 슬로베니아
(Slovenia)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122 | CC BY | 250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슬로베니아 공화국은 2만 273km2, 인구는 198만 3412명(2015년 현재)이며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Slovenia이다. 주민은 슬로베니아인 83.1%, 크로아티아인 1.8%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교는 가톨릭교 57.8%, 이슬람교 2.4%, 정교 2.3% 정도이다.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지중해성 기후에 1인당 국민소득 21,062달러의 경제력을 가진 구 유고 내에서 가장 선진적인 나라로 2017년 국민 총생산은 435억 원이다. 임기 4년의 인민의회(90석)와 임기 5년의 국가위원회(40석)로 구성된 이 나라의 정체성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공화제이다. 자유민주당, 국민당, 기민 당, 사민당, 민주당, 사회당 등이 주요 정당이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와 함께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운 뒤 1945년 11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슬로베니아에서도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에 따라 1990년 4월 자유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공산당이 패배하고, 그해 12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88.5%가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하고, 12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쿠찬(Kucan, M. )은 1990년 4월 선거에서 임기 5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992년에 유엔에 가입했으며, 중도 우익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 4월 슬로베니아 공화국을 승인하고, 그해 11월 18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2008년 현재 주 오스트리아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양국은 1994년 5월 과학기술협력 협정, 1997년 6월 문화협력 협정, 1999년 1월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 2000년 1월 원자력 안전 협력 협정, 2006년 3월 이중과세방지 협정을 체결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슬로베니아 수출액은 16억 20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자동차 부품·조명기기·아연도 강판 등이고, 수입액은 1억 1000만 달러로 전동기·기타 플라스틱 제품·고철 등이다. 2007년 현재 대우, 현대자동차,<NAME> 전자 등의 업체가 슬로베니아에 진출해 있으며, 한국민 교민 1명과 체류자 10명이 있다. 한편, 북한은 1992년 9월 8일 불가리아와 수교하였으며, 2005년 현재 주 불가리아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북한의 대 슬로베니아 수출액은 2007년 현재 6,000달러이고, 수입액은 85만 2000달러로 철강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슬로베니아
(Slovenia)
### 내용: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슬로베니아 공화국은 2만 273km2, 인구는 198만 3412명(2015년 현재)이며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Slovenia이다. 주민은 슬로베니아인 83.1%, 크로아티아인 1.8%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교는 가톨릭교 57.8%, 이슬람교 2.4%, 정교 2.3% 정도이다.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지중해성 기후에 1인당 국민소득 21,062달러의 경제력을 가진 구 유고 내에서 가장 선진적인 나라로 2017년 국민 총생산은 435억 원이다. 임기 4년의 인민의회(90석)와 임기 5년의 국가위원회(40석)로 구성된 이 나라의 정체성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공화제이다. 자유민주당, 국민당, 기민 당, 사민당, 민주당, 사회당 등이 주요 정당이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와 함께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운 뒤 1945년 11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슬로베니아에서도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에 따라 1990년 4월 자유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공산당이 패배하고, 그해 12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88.5%가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하고, 12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쿠찬(Kucan, M. )은 1990년 4월 선거에서 임기 5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992년에 유엔에 가입했으며, 중도 우익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 4월 슬로베니아 공화국을 승인하고, 그해 11월 18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2008년 현재 주 오스트리아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양국은 1994년 5월 과학기술협력 협정, 1997년 6월 문화협력 협정, 1999년 1월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 2000년 1월 원자력 안전 협력 협정, 2006년 3월 이중과세방지 협정을 체결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슬로베니아 수출액은 16억 20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자동차 부품·조명기기·아연도 강판 등이고, 수입액은 1억 1000만 달러로 전동기·기타 플라스틱 제품·고철 등이다. 2007년 현재 대우, 현대자동차,<NAME> 전자 등의 업체가 슬로베니아에 진출해 있으며, 한국민 교민 1명과 체류자 10명이 있다. 한편, 북한은 1992년 9월 8일 불가리아와 수교하였으며, 2005년 현재 주 불가리아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북한의 대 슬로베니아 수출액은 2007년 현재 6,000달러이고, 수입액은 85만 2000달러로 철강이다. |
9a1b01da-2e9d-46e1-aa4b-f9e8c8e303a5 | source05/encykorea/SOC27900.txt | 완월
(玩月)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장정룡"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988 | CC BY | 201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신라의 국왕은 일월신에게 정초에 배례했고, 팔월 보름이면 여성들이 길쌈을 끝내고 가무백희를 하는 것이 완월장취하는 풍습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예종 2년(1107) 완월이 되면 왕이 문신들을 이끌고 중광의 편전에서 완월하며 영월시를 지었다. 조선 성종 20년(1489) 팔월 보름에 국왕은 완월하면서 어서를 내리길 “옛사람의 달 구경은 반드시 뜻이 있어 나무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본래 이 풍속이 없어서 비록 상례(常例)로 삼을 수 없으나 일시의 군은(軍恩)이고, 마침 가절(佳節)을 만났으니 무슨 방해됨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완월 풍속은 널리 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종은 이듬해 추석완월연(秋夕翫月宴)을 상고하여 아뢰라고 전교(傳敎) 하였으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NAME>(柳濱)이 “옛사람으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달 구경 하며 회포를 푼 적은 있었지만 온 조정이 완월하며 희롱했겠습니까?”라며 완월연의 정지를 건의하자, 성종은 “하루의 즐거움 또한 무방하지 않겠냐"라고 하고, 입직승지 및 도총관·여러 장군과 병조에 명하여 인정전(仁政殿) 아래서 완월하게 하였다. 중종 5년(1510) 팔월 보름에 홍문관에 옥당 완월이란 칠언율시를 짓게 하였다. 중국 청대의 월령수 편 권 13, 8월 15일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때의 절식으로 완월갱을 만들어 먹고 천주봉 완월을 했다고 한다. 완월과 관련하여 완월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의 고소설 <완월회맹연 >이나 신소설 <완월루 > 등에 등장한다. 민간에서는 송편과 박고지, 토란국을 먹으며 달 속의 옥토끼와 계수나무 이야기를 나누는데, 추석 때 남보다 먼저 달마 중을 하면 첫째 아이를 얻는다고 한다. 요즘도 문벌 있는 집안이나 계모임에서는 완월하면서 시를 짓고 서로 평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완월
(玩月)
### 내용:
신라의 국왕은 일월신에게 정초에 배례했고, 팔월 보름이면 여성들이 길쌈을 끝내고 가무백희를 하는 것이 완월장취하는 풍습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예종 2년(1107) 완월이 되면 왕이 문신들을 이끌고 중광의 편전에서 완월하며 영월시를 지었다. 조선 성종 20년(1489) 팔월 보름에 국왕은 완월하면서 어서를 내리길 “옛사람의 달 구경은 반드시 뜻이 있어 나무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본래 이 풍속이 없어서 비록 상례(常例)로 삼을 수 없으나 일시의 군은(軍恩)이고, 마침 가절(佳節)을 만났으니 무슨 방해됨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완월 풍속은 널리 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종은 이듬해 추석완월연(秋夕翫月宴)을 상고하여 아뢰라고 전교(傳敎) 하였으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NAME>(柳濱)이 “옛사람으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달 구경 하며 회포를 푼 적은 있었지만 온 조정이 완월하며 희롱했겠습니까?”라며 완월연의 정지를 건의하자, 성종은 “하루의 즐거움 또한 무방하지 않겠냐"라고 하고, 입직승지 및 도총관·여러 장군과 병조에 명하여 인정전(仁政殿) 아래서 완월하게 하였다. 중종 5년(1510) 팔월 보름에 홍문관에 옥당 완월이란 칠언율시를 짓게 하였다. 중국 청대의 월령수 편 권 13, 8월 15일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때의 절식으로 완월갱을 만들어 먹고 천주봉 완월을 했다고 한다. 완월과 관련하여 완월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의 고소설 <완월회맹연 >이나 신소설 <완월루 > 등에 등장한다. 민간에서는 송편과 박고지, 토란국을 먹으며 달 속의 옥토끼와 계수나무 이야기를 나누는데, 추석 때 남보다 먼저 달마 중을 하면 첫째 아이를 얻는다고 한다. 요즘도 문벌 있는 집안이나 계모임에서는 완월하면서 시를 짓고 서로 평한다. |
04aff7d9-1d6c-4110-a66e-4449f16dd2a3 | source05/encykorea/POL44545.txt | 피선거권
(被選擧權)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봉규"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0481 | CC BY | 347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피선거권은 일반적으로 선거권에 비해 그 요건이 가중되는데, 시민권의 소지 여부, 연령 제한, 일정한 등록 절차 및 준법 의사와 능력의 구비요건 외에 일정한 요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대통령·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및 대통령선거인단의 선거에 피선거권이 부여되었다. 피선거권은 <선거법>에 규정되어 있다. 피선거권은 정치제도와 연관되어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는 5·10총선을 위한 미 군정법령 제175호에 피선거권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이때 국민의 경우, 친일부역 등 결격사유가 없는 한 선거일 현재 만 25세 이상인 자에게 피선거권을 주었다. 이것이 1950년 4월에 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에 규정된 피선거권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선거일 현재 만 25세 이상인 자에게 주어진다. 대통령의 피선거권은 1952년 7월에 개정된 <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부통령 선거법>에 의거하여 국민으로서 만 3년 이상 국내에 주소를 둔 만 30세 이상의 자로서 선거권이 없는 자 및 군인으로서 현역을 면하지 아니한 자를 제외하고는 평등하게 부여되고 있다. 이 요건은 1963년 8월에 개정된 <대통령선거법>에 의해 선거일 현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한 만 40세 이상의 자로 변경되었다. 제1·2공화국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의회 의원의 피선거권은 1949년 7월에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의거하여 25세 이상의 사람이 지방의회 의원의 선거권이 있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대통령 간선 제도에 따라서 등장한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의 피선거권은 동 선거법에서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있는 만 30세 이상의 국민에게 부여하였고, 제5공화국의 대통령선거인단의 피선거권은 국회의원에게 피선거권이 있고, 6개월 이상 해당 선거구에 거주하는 30세에 달한 자에게 부여하였다. 이와 같이 피선거권은 선거권에 비해 연령을 높여 요건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는 공무 담임자로서의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 뒤 1993년 7월 국회에 ‘정치관계법 개정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각종 선거법·지방자치법·안기부법·정치자금 법에 대한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고, 1994년 3월 공직 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일명 통합선거법)이 제정되어 그동안 국회의원선거법·대통령선거법·지방의회 의원 선거법으로 나누어져 있던 피선거권 규정이 하나의 법률로 통합되었다. 2021년 12월 국회의원 총선거와 지방선거의 피선거권 연령 기준을 만 25세에서 만 18세로 낮췄다. 그 결과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한 40세 이상인 자, 국회의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18세 이상인 자, 그리고 선거일 현재 계속하여 60일 이상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 안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주민으로서 18세 이상의 국민은 그 지방의회 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피선거권이 있다. 하지만 금치산 선고를 받은 자, 선거사범으로서 법이 정한 시한이 지나지 않은 자, 법원의 판결에 의해 선거권이 정지 또는 상실된 자,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고 그 형이 실효되지 아니한 자, 법원의 판결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여 피선거권이 정지되거나 상실된 자는 피선거권이 없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피선거권
(被選擧權)
### 내용:
피선거권은 일반적으로 선거권에 비해 그 요건이 가중되는데, 시민권의 소지 여부, 연령 제한, 일정한 등록 절차 및 준법 의사와 능력의 구비요건 외에 일정한 요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대통령·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및 대통령선거인단의 선거에 피선거권이 부여되었다. 피선거권은 <선거법>에 규정되어 있다. 피선거권은 정치제도와 연관되어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는 5·10총선을 위한 미 군정법령 제175호에 피선거권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이때 국민의 경우, 친일부역 등 결격사유가 없는 한 선거일 현재 만 25세 이상인 자에게 피선거권을 주었다. 이것이 1950년 4월에 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에 규정된 피선거권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선거일 현재 만 25세 이상인 자에게 주어진다. 대통령의 피선거권은 1952년 7월에 개정된 <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부통령 선거법>에 의거하여 국민으로서 만 3년 이상 국내에 주소를 둔 만 30세 이상의 자로서 선거권이 없는 자 및 군인으로서 현역을 면하지 아니한 자를 제외하고는 평등하게 부여되고 있다. 이 요건은 1963년 8월에 개정된 <대통령선거법>에 의해 선거일 현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한 만 40세 이상의 자로 변경되었다. 제1·2공화국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의회 의원의 피선거권은 1949년 7월에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의거하여 25세 이상의 사람이 지방의회 의원의 선거권이 있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대통령 간선 제도에 따라서 등장한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의 피선거권은 동 선거법에서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있는 만 30세 이상의 국민에게 부여하였고, 제5공화국의 대통령선거인단의 피선거권은 국회의원에게 피선거권이 있고, 6개월 이상 해당 선거구에 거주하는 30세에 달한 자에게 부여하였다. 이와 같이 피선거권은 선거권에 비해 연령을 높여 요건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는 공무 담임자로서의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 뒤 1993년 7월 국회에 ‘정치관계법 개정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각종 선거법·지방자치법·안기부법·정치자금 법에 대한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고, 1994년 3월 공직 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일명 통합선거법)이 제정되어 그동안 국회의원선거법·대통령선거법·지방의회 의원 선거법으로 나누어져 있던 피선거권 규정이 하나의 법률로 통합되었다. 2021년 12월 국회의원 총선거와 지방선거의 피선거권 연령 기준을 만 25세에서 만 18세로 낮췄다. 그 결과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한 40세 이상인 자, 국회의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18세 이상인 자, 그리고 선거일 현재 계속하여 60일 이상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 안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주민으로서 18세 이상의 국민은 그 지방의회 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피선거권이 있다. 하지만 금치산 선고를 받은 자, 선거사범으로서 법이 정한 시한이 지나지 않은 자, 법원의 판결에 의해 선거권이 정지 또는 상실된 자,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고 그 형이 실효되지 아니한 자, 법원의 판결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여 피선거권이 정지되거나 상실된 자는 피선거권이 없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
612b9533-b763-48d7-97b3-3ad4a084e48e | source05/encykorea/POL16986.txt | 백남운
(白南雲)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026 | CC BY | 537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경제사학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는데, 한국의 원시 · 고대 · 중세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월북한 뒤에는 북한의 고위직을 맡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경제사적 연구서라 할 수 있는 조선사회경제사를 1933년에 발간하였는데, 이는 수원고등농림학교와 동경 상과 대학을 졸업한 뒤, 1925∼1938년에<NAME>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루어졌다. 한편, 1922년부터<NAME> · 한용운 · 조만식 · 허헌 등과 함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1923년 4월에는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결성하고 중앙부에서 활동했다. 또한, 1929년 9월에는 백남훈 · 백관수 ·<NAME> · 홍명희 등과 함께 국내 민족운동에서 민족개량주의 노선이 대두되자 조선 사정 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NAME>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에는 이순탁 ·<NAME> 등 동료 교수 및 학생 10명과 함께 조선 사정 연구회 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9월 8 · 15광복 직후에 조선학술원을 설립하고 원장에 취임하고 민족문화연구소도 설립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경성대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로 미 군정의 임명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1946년 2월에는 김두봉 · 한빈 등이 북한에서 결성한 조선신민당의 경성 특별위원회 위원장, 상임위원 · 경제 대책 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6년 2월에는 좌익세력의 집결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 의장, 상임위원 · 경제 대책 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독립 신보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남조선 노동당이 조선 인민당 · 조선공산당 · 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으로 발족할 때에는 여운형 등과 함께 사회 노동당을 조직하였다. 1947년 5월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나, 곧 월북하였다. 월북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상을 1948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국전선 의장 등을 역임했고, 1952년에는 과학원 원장, 1961년에는 최고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서문에서 “조선의 학문 발전 도는 대개 삼국시대 이래의 한문학 · 불학(佛學) · 노장학(老莊學) · 유학 등을 포함한 방대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으나, 어떠한 것이든지 그 사회경제의 역사적 발전과의 내면적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조선사 상의 <NAME>(柳馨遠) · 이익(李瀷) · 이수광(李睟光) · 정약용(丁若鏞) · 서유구(徐有榘) · 박지원(朴趾源) 등 현실학파(現實學派)라고도 일컫는 우수한 학자가 배출되어 우리들의 경제학적 영역에 대한 선물로 남겨놓은 업적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나의 조선 경제사의 기도(企圖)는 사회의 경제적 구성을 기축으로 하여 제1을 원시 씨족 공산 체의 태양(態樣), 제2는 삼국의 정립 시대의 노예경제, 제3은 삼국시대의 말기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아시아적 봉건사회의 특질 등을 열거하고, 금회(今回)는 우선 제1 · 제2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고 하였다. 또한 자료의 취급상 미숙, 이론 전개의 불충분 등 필자 자신에게도 불만점이 적지 않다. 고 하였다. 이 책은 주로 원시 씨족 공산 체와 삼국시대의 노예경제를 다루었으며, 조선 경제사의 제1권이라고 하며, 앞으로 속간 계획인 조선 경제사의 제1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사연구의 방법론’으로 “조선사의 연구는 바로 과거의 역사적ㆍ사회적 발전의 변동 과정을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규명하는 동시에, 그의 실천적 동향을 이론화함을 임무로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인류사회의 일반적 운동 법칙으로서의 사적 변증법에 의하여 그의 민족생활의 계급적 제관계 그리고 사회체제의 역사적 변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그의 변칙성을 일반적으로 추상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 봉건사회경제 사상은 1933년에 출판된 조선사회경제사의 속편으로서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상이라 불린다. 이 저작의 내용은 “봉건 전사의 전기(前期) 부분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반도 봉건사의 효시이며, 그리고 가장 정력적 · 전형적인 아시아적 봉건국가로서의 고려 사회를 인식의 대상으로 한 점에서 스스로 그 전승 형태인 조선에 관한 부분의 이해에도 적지 않은 편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며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연구에서 이 책의 의의를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우리나라의 원시 · 고대 · 중세에 해당하는 삼한 · 삼국 · 고려조까지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방법론의 성격 여하를 불문하고 큰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상(1937),<NAME>족의 진로(1946) 등이 대표적인 저서이다. 1955년과 1958년에 북한 정부로부터<NAME>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백남운
(白南雲)
### 내용: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경제사학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는데, 한국의 원시 · 고대 · 중세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월북한 뒤에는 북한의 고위직을 맡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경제사적 연구서라 할 수 있는 조선사회경제사를 1933년에 발간하였는데, 이는 수원고등농림학교와 동경 상과 대학을 졸업한 뒤, 1925∼1938년에<NAME>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루어졌다. 한편, 1922년부터<NAME> · 한용운 · 조만식 · 허헌 등과 함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1923년 4월에는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결성하고 중앙부에서 활동했다. 또한, 1929년 9월에는 백남훈 · 백관수 ·<NAME> · 홍명희 등과 함께 국내 민족운동에서 민족개량주의 노선이 대두되자 조선 사정 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NAME>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에는 이순탁 ·<NAME> 등 동료 교수 및 학생 10명과 함께 조선 사정 연구회 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9월 8 · 15광복 직후에 조선학술원을 설립하고 원장에 취임하고 민족문화연구소도 설립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경성대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로 미 군정의 임명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1946년 2월에는 김두봉 · 한빈 등이 북한에서 결성한 조선신민당의 경성 특별위원회 위원장, 상임위원 · 경제 대책 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6년 2월에는 좌익세력의 집결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 의장, 상임위원 · 경제 대책 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독립 신보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남조선 노동당이 조선 인민당 · 조선공산당 · 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으로 발족할 때에는 여운형 등과 함께 사회 노동당을 조직하였다. 1947년 5월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나, 곧 월북하였다. 월북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상을 1948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국전선 의장 등을 역임했고, 1952년에는 과학원 원장, 1961년에는 최고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서문에서 “조선의 학문 발전 도는 대개 삼국시대 이래의 한문학 · 불학(佛學) · 노장학(老莊學) · 유학 등을 포함한 방대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으나, 어떠한 것이든지 그 사회경제의 역사적 발전과의 내면적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조선사 상의 <NAME>(柳馨遠) · 이익(李瀷) · 이수광(李睟光) · 정약용(丁若鏞) · 서유구(徐有榘) · 박지원(朴趾源) 등 현실학파(現實學派)라고도 일컫는 우수한 학자가 배출되어 우리들의 경제학적 영역에 대한 선물로 남겨놓은 업적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나의 조선 경제사의 기도(企圖)는 사회의 경제적 구성을 기축으로 하여 제1을 원시 씨족 공산 체의 태양(態樣), 제2는 삼국의 정립 시대의 노예경제, 제3은 삼국시대의 말기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아시아적 봉건사회의 특질 등을 열거하고, 금회(今回)는 우선 제1 · 제2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고 하였다. 또한 자료의 취급상 미숙, 이론 전개의 불충분 등 필자 자신에게도 불만점이 적지 않다. 고 하였다. 이 책은 주로 원시 씨족 공산 체와 삼국시대의 노예경제를 다루었으며, 조선 경제사의 제1권이라고 하며, 앞으로 속간 계획인 조선 경제사의 제1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사연구의 방법론’으로 “조선사의 연구는 바로 과거의 역사적ㆍ사회적 발전의 변동 과정을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규명하는 동시에, 그의 실천적 동향을 이론화함을 임무로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인류사회의 일반적 운동 법칙으로서의 사적 변증법에 의하여 그의 민족생활의 계급적 제관계 그리고 사회체제의 역사적 변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그의 변칙성을 일반적으로 추상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 봉건사회경제 사상은 1933년에 출판된 조선사회경제사의 속편으로서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상이라 불린다. 이 저작의 내용은 “봉건 전사의 전기(前期) 부분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반도 봉건사의 효시이며, 그리고 가장 정력적 · 전형적인 아시아적 봉건국가로서의 고려 사회를 인식의 대상으로 한 점에서 스스로 그 전승 형태인 조선에 관한 부분의 이해에도 적지 않은 편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며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연구에서 이 책의 의의를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우리나라의 원시 · 고대 · 중세에 해당하는 삼한 · 삼국 · 고려조까지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방법론의 성격 여하를 불문하고 큰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상(1937),<NAME>족의 진로(1946) 등이 대표적인 저서이다. 1955년과 1958년에 북한 정부로부터<NAME>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
9d4291ae-ffea-4453-884a-88cd47196b78 | source05/encykorea/SOC2953.txt | 고지제도
(雇只制度)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택규"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961 | CC BY | 7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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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작(水稻作 벼농사)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 노동 집단인 농사(農社)나 농계(農契) 또는 두레의 공동체적 성격이 약화되어, 임금계약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노동 청부로 변질된 협동 노동관행의 일종이다.
고지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 발생 시기가 토지의 사유화가 촉진되고 화폐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는 17, 18세기경까지 소급된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이 있은 뒤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즉, 이 시기에는 대토지 소유자와 영세농과 농업 노동자층으로 토지 소유의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농 이상의 농가가 농번기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영세농이나 농업노동자와 농사 작업시기를 미리 계약하여 금전이나 식량을 선사해 주고, 그 대신 농번기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고지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북도를 중심으로 전라남도·경상남도·황해도 일부 지역에서 고지제도가 성행하였다는 것이 1920년대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 그렇지만 평안도·함경도 등 북한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인 분포로 미루어 볼 때, 고지제도는 벼농사를 주로 하는 지역에서 행해졌던 노동관행이다. 전라북도의 경우 전체 논 면적의 약 19%가 고지제에 의해 경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농업노동력<NAME> 방식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지주·소작 관계가 폐지되고 농민들에게 토지가 유상분배되고 지주·소작 관계가 없어지게 된 것은 1949년 <농지개혁법 >이 공포된 이후부터이다. 이후 농민들 사이의 토지 소유 규모 차이가 점차 확대되면서 법으로 금지된 소작제도가 음성적으로 부활함에 따라 고지제도도 다시 성행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고지는 지방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다. 하지만 청부 노동의 종류에 따라 산고지 또는 단 고지와, 전 고지 또는 장고지로 나눌 수 있다. 산고지 또는 단고지란 논갈이·모내기·김매기·벼 베기와 타작 및 수확물 운반과 같은 작업 중 한 가지 일만 고지를 맡기는 경우를 가리킨다. 전 고지 또는 장고 지란 모내기부터 수확, 수확물 운반에 이르는 모든 농사일을 맡기는 경우를 가리킨다. 전 고지 또는 장고지의 형태가 산고지 혹은 단 고지의 형태보다 임금이 높고 더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한편 고지로 하는 작업 횟수에 따라 일고지·이고지·삼고지·사고지·오고지·육고지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즉, 모내기 혹은 경운작업만을 해주는 것을 일고지, 모내기와 김매기 1회를 해주는 것을 이고지, 모내기와 김매기 2회를 해주는 것을 삼고지, 모내기와 김매기 3회를 해주는 것을 사고지, 모내기와 김매기 3회 및 벼 베기까지 해주는 것을 오고지, 여기에다 타작까지 해주는 것을 육 고지라고 한다. 임금 지급의 방법에 따라 순고지와 식고지로 나눌 수 있다. 임금 이외의 현물급여가 없는 순고 지는 고지꾼이 작업 시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봉장 고지라고 칭한다. 식고 지는 임금 외에 고지 주인이 작업하는 날에 술·음식·담배 따위를 제공하는 것으로 막고지·영고지라고도 한다. 전자는 현물급여의 비용만큼 계약 임금 자체는 낮게 책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고지의 형태는 개인이나 단체가 작업을 청부하는 두 가지가 있으나 후자가 더 일반적이다. 단체의 경우 그 규모가 5∼15명 정도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40∼50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고지 주인 또는 고지 주문인이라고 하면 고지를 주는 사람을 고지 주인 또는 고지 주문인이라고 하고, 고지꾼 또는 고 지청 부인이라고 하면 고지를 맡는 사람을 고지꾼이라고 한다. 고지 주인은 대개 중농층 이상으로 비교적 경지면적이 넓은 사람인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다른 직업을 겸직하여 직접 경작을 하지 못하거나 가족 내에 농업노동력이 없을 경우에 고지를 주기도 한다. 주로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며, 고지꾼은 고 지주로부터 신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영세농이나 농업노동자인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고지꾼에는 성년 남자가 포함되었고 부녀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에는 남성 노동력이 크게 감소하여 고지꾼 중 부녀자가 포함된 경우도 발견된다. 통수 혹은 두목·모가비·대가리 등으로 불리는 고지꾼의 대표자는 대개 고지꾼이다. 이 대표는 고지 주인과 고지 계약을 체결하고, 고지꾼을 지휘하며, 청부 받은 경작지의 작업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진다. 비록 고 지청 부 농가의 가구 주가 사망하더라도 고지꾼은 고지 주인이 원하는 시기에 반드시 노동을 제공해야 하므로, 품앗이 혹은 품팔이 노동을 고용해서라도 고지 계약을 준수해야 한다. 경지면적당 작업 종류를 고려하여 고지 임금을 정하는데, 전형적인 고지의 경우 마지기[]를 계산 단위로 하여 그 면적에 모를 심고 3회의 제초작업을 한 후 주인집까지 운반해 주는 일을 모두 합쳐서 고지 한 개라고 한다. 한 사람이 논 200평의 농지를 경작하는 데 드는 노동일은 모내기 1일, 김매기 3회 3일, 수확 1일, 수확물 운반 1일로 계산되므로 고지 한 개는 보통 6일간의 노동이다. 그런데 고지 노동에 대한 보수는 보통 일반 품삯보다 약간 낮게 책정된다. 하지만 품팔이<NAME>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데 반해 고지<NAME> 확정적이며, 품삯은 보통 선불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고지<NAME> 새해 농사가 시작되기 전인 연말에서 3월 사이의 춘궁기에 식량 선대나 화폐임금 선불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난한 농가에서는 서로 고지를 하려고 한다. 이를 선호하는 이유는 고지 주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번기에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고, 또한 농번기의 임금 상승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대상 지역 가구 중 48.6%가 고지 계약을 맺었고, 전체 논면적의 26.8%가 고지 노동으로 경작된 것으로 1965년도에 전라남도가 3개 마을을 조사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의 벼농사 작업에서 고지제도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지제도는 수도 재배 농업에서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특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농민들 사이에 경작지 규모가 커지면서 빈농층에서는 생계비 보조 수단으로, 부농층에서는 효율적인 노동력<NAME>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전통적인 공동 노동조직인 두레가 해체되면서 고지제도는 임금계약에 기초한 집단 청부 노동 형태로 발전하였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고지제도
(雇只制度)
### 내용:
수도작(水稻作 벼농사)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 노동 집단인 농사(農社)나 농계(農契) 또는 두레의 공동체적 성격이 약화되어, 임금계약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노동 청부로 변질된 협동 노동관행의 일종이다.
고지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 발생 시기가 토지의 사유화가 촉진되고 화폐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는 17, 18세기경까지 소급된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이 있은 뒤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즉, 이 시기에는 대토지 소유자와 영세농과 농업 노동자층으로 토지 소유의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농 이상의 농가가 농번기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영세농이나 농업노동자와 농사 작업시기를 미리 계약하여 금전이나 식량을 선사해 주고, 그 대신 농번기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고지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북도를 중심으로 전라남도·경상남도·황해도 일부 지역에서 고지제도가 성행하였다는 것이 1920년대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 그렇지만 평안도·함경도 등 북한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인 분포로 미루어 볼 때, 고지제도는 벼농사를 주로 하는 지역에서 행해졌던 노동관행이다. 전라북도의 경우 전체 논 면적의 약 19%가 고지제에 의해 경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농업노동력<NAME> 방식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지주·소작 관계가 폐지되고 농민들에게 토지가 유상분배되고 지주·소작 관계가 없어지게 된 것은 1949년 <농지개혁법 >이 공포된 이후부터이다. 이후 농민들 사이의 토지 소유 규모 차이가 점차 확대되면서 법으로 금지된 소작제도가 음성적으로 부활함에 따라 고지제도도 다시 성행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고지는 지방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다. 하지만 청부 노동의 종류에 따라 산고지 또는 단 고지와, 전 고지 또는 장고지로 나눌 수 있다. 산고지 또는 단고지란 논갈이·모내기·김매기·벼 베기와 타작 및 수확물 운반과 같은 작업 중 한 가지 일만 고지를 맡기는 경우를 가리킨다. 전 고지 또는 장고 지란 모내기부터 수확, 수확물 운반에 이르는 모든 농사일을 맡기는 경우를 가리킨다. 전 고지 또는 장고지의 형태가 산고지 혹은 단 고지의 형태보다 임금이 높고 더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한편 고지로 하는 작업 횟수에 따라 일고지·이고지·삼고지·사고지·오고지·육고지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즉, 모내기 혹은 경운작업만을 해주는 것을 일고지, 모내기와 김매기 1회를 해주는 것을 이고지, 모내기와 김매기 2회를 해주는 것을 삼고지, 모내기와 김매기 3회를 해주는 것을 사고지, 모내기와 김매기 3회 및 벼 베기까지 해주는 것을 오고지, 여기에다 타작까지 해주는 것을 육 고지라고 한다. 임금 지급의 방법에 따라 순고지와 식고지로 나눌 수 있다. 임금 이외의 현물급여가 없는 순고 지는 고지꾼이 작업 시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봉장 고지라고 칭한다. 식고 지는 임금 외에 고지 주인이 작업하는 날에 술·음식·담배 따위를 제공하는 것으로 막고지·영고지라고도 한다. 전자는 현물급여의 비용만큼 계약 임금 자체는 낮게 책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고지의 형태는 개인이나 단체가 작업을 청부하는 두 가지가 있으나 후자가 더 일반적이다. 단체의 경우 그 규모가 5∼15명 정도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40∼50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고지 주인 또는 고지 주문인이라고 하면 고지를 주는 사람을 고지 주인 또는 고지 주문인이라고 하고, 고지꾼 또는 고 지청 부인이라고 하면 고지를 맡는 사람을 고지꾼이라고 한다. 고지 주인은 대개 중농층 이상으로 비교적 경지면적이 넓은 사람인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다른 직업을 겸직하여 직접 경작을 하지 못하거나 가족 내에 농업노동력이 없을 경우에 고지를 주기도 한다. 주로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며, 고지꾼은 고 지주로부터 신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영세농이나 농업노동자인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고지꾼에는 성년 남자가 포함되었고 부녀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에는 남성 노동력이 크게 감소하여 고지꾼 중 부녀자가 포함된 경우도 발견된다. 통수 혹은 두목·모가비·대가리 등으로 불리는 고지꾼의 대표자는 대개 고지꾼이다. 이 대표는 고지 주인과 고지 계약을 체결하고, 고지꾼을 지휘하며, 청부 받은 경작지의 작업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진다. 비록 고 지청 부 농가의 가구 주가 사망하더라도 고지꾼은 고지 주인이 원하는 시기에 반드시 노동을 제공해야 하므로, 품앗이 혹은 품팔이 노동을 고용해서라도 고지 계약을 준수해야 한다. 경지면적당 작업 종류를 고려하여 고지 임금을 정하는데, 전형적인 고지의 경우 마지기[]를 계산 단위로 하여 그 면적에 모를 심고 3회의 제초작업을 한 후 주인집까지 운반해 주는 일을 모두 합쳐서 고지 한 개라고 한다. 한 사람이 논 200평의 농지를 경작하는 데 드는 노동일은 모내기 1일, 김매기 3회 3일, 수확 1일, 수확물 운반 1일로 계산되므로 고지 한 개는 보통 6일간의 노동이다. 그런데 고지 노동에 대한 보수는 보통 일반 품삯보다 약간 낮게 책정된다. 하지만 품팔이<NAME>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데 반해 고지<NAME> 확정적이며, 품삯은 보통 선불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고지<NAME> 새해 농사가 시작되기 전인 연말에서 3월 사이의 춘궁기에 식량 선대나 화폐임금 선불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난한 농가에서는 서로 고지를 하려고 한다. 이를 선호하는 이유는 고지 주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번기에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고, 또한 농번기의 임금 상승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대상 지역 가구 중 48.6%가 고지 계약을 맺었고, 전체 논면적의 26.8%가 고지 노동으로 경작된 것으로 1965년도에 전라남도가 3개 마을을 조사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의 벼농사 작업에서 고지제도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지제도는 수도 재배 농업에서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특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농민들 사이에 경작지 규모가 커지면서 빈농층에서는 생계비 보조 수단으로, 부농층에서는 효율적인 노동력<NAME>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전통적인 공동 노동조직인 두레가 해체되면서 고지제도는 임금계약에 기초한 집단 청부 노동 형태로 발전하였다. |
ffe8becd-4dc9-44ce-9f30-1a2caedcb7f8 | source05/encykorea/SOC10755.txt | 놋그릇
(鍮器)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059 | CC BY | 429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청동기시대의 청동도 놋쇠의 일종인데,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니켈을 섞은 합금이다. 서기전 7세기경부터 사용되었던 놋쇠는 청동으로, 거울·동탁·동검 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 청동기시대는 2세기경에 끝이 나고, 7세기경에 페르시아와 이란 등지에서 발달된 유기 제작 기술이 당나라에 유입되면서 신라는 8세기경에 놋그릇을 다루는 상설기구를 설치하였다. 고려 시대의 생활용품은 1010년<NAME> 때 흥천사 범종과, 1223년 고종 때 화병을 만들어 흥복사에 두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놋쇠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고려 시대 평민의 무덤에서도 놋쇠 숟가락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식기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식기 외에 농악기, 각종 불구에 속하는 종·금고·정병·향로·금동탑·사리함·제기 등 제작이 고려 시대의 놋그릇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금속공 예미의 수준이 높다. 고려 시대의 유기는 동체가 얇고 질긴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에서 동을 채굴하여 유기의 생산을 장려하였다. ≪경국대전≫의 공조(工曹) 편을 보면, 유기를 전담하여 놋그릇을 생산하는 유장(鍮匠)이 국가공무원으로서 본조(本曹)와 내수사(內需司)·상의원(尙衣院)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으며, 지방 관아의 공방에도 유기 공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민간인 유기장들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 각종 식기류와 풍물류의 놋그릇을 팔던 유기점은 놋점 또는 놋전이라고 하는 유기점이었다. 6·25 전쟁 이전에는 개성·안성을 비롯하여 김천·남원·운봉·전주·홍성·박천·평양·사리원·정주·서울 등지에서 놋그릇을 많이 만들었으나, 6·25 전쟁 이후 연탄가스에 변질되기 쉬운 놋쇠의 성질 때문에 차츰 없어지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안성에서 만든 주물 제작법, 평안북도 정주 납청 지방에서 만든 방짜 제작법[], 전라남도 순천에서 만들고 있는 반방짜제작법[]이 있다. 주물 제작법이란, 구리에다 주석이나 아연을 7 대 3의 비율로 혼합한 쇳물을 녹여 그릇의 형태를 만든 틀에 부어 넣고 다듬고 광을 내어 놋그릇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주물유기로 가장 유명한 곳은 개성과 안성 지방인데, 안성의 유기는 조형미가 아름다워 ‘안성맞춤’이라는 속담이 나올 만큼 품질이 좋았다.
방짜 제작법이란 일반적으로 쇳물을 녹여 바대기라 불리는 바둑알처럼 둥굴납작한 쇳덩이를 만들어, 11인이 한조가 되어 불에 달구어가면서 두들겨 그릇의 형태를 이루는 방법이다.<NAME>의 방짜는 구리와 주석 이외의 다른 물질이<NAME>을 두들겨 기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깨지기 때문에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납청 지대에서 방짜를 이르는 말로 양대라고 한다. 평야 지방에서는 방짜 유기로 된 징·꽹과리 등이 유행했고, 북한의 산간 지방에서는 놋상·놋동이·놋식기 등이 유행하였다. 또 순천지방에는 옥성기라는 놋그릇이 있는데, 이것은 흔히 궁 구름 옥성 기 또는 옥 바리라고 불리며, 요즈음은 일반적으로 반방짜라고 부른다. 이것은 손쉬운 주물식으로 그릇의 절반 정도를 만들고 끝부분은 집게로 집어가면서 오목하게 두드리거나 짓눌러서 만드는 그릇이다. 북한 산간 지방의 놋그릇은 비교적 그릇이 크고 거칠며, 남한 평야 지방의 놋그릇은 작고 아담하며 섬세하다. 숟가락·젓가락 외에 칠 첩 반상기·구첩 반상기 등 놋그릇의 종류는 크게 식기류·혼사용구·제사용구·불기류·난방용구·등잔류 등으로 구분되는데, 여기에는 숟가락·젓가락이 포함된다. 칠 첩 반상기는 밥상의 식기로 뚜껑까지 32개가 한 벌로 되어 있는 그릇이다. 혼사용 놋그릇으로는 구삼벌·제주발·갱기·수저·제잔·잔대·탕그릇·적틀·편틀·약기·제종지·제접시·모사기·퇴주그릇·주전자, 사랑 요강·안방 요강, 큰 세숫대야(어린애 출산용), 큰 세숫대야(어린애 출산용), 제사용 놋그릇으로는 구삼벌·제주발·갱기·수저·제잔·잔대·탕그릇 대·소 불기, 놋동이·향로·촛대·향합·바라·범종·옥수기 등이 불기의 종류이다. 난방용 구로는 화로·부젓가락·부삽, 등잔류로는 유경 등잔·나비 촛대 등이 있다. 이들 놋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푸른 녹청이 생긴다. 따라서 이를 깨끗하게 닦는 것은 여인들의 일과이자 풍속으로, 암키와를 곱게 빻은 것을 수세미에 묻혀 윤기가 돌 때까지 닦았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놋그릇
(鍮器)
### 내용:
청동기시대의 청동도 놋쇠의 일종인데,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니켈을 섞은 합금이다. 서기전 7세기경부터 사용되었던 놋쇠는 청동으로, 거울·동탁·동검 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 청동기시대는 2세기경에 끝이 나고, 7세기경에 페르시아와 이란 등지에서 발달된 유기 제작 기술이 당나라에 유입되면서 신라는 8세기경에 놋그릇을 다루는 상설기구를 설치하였다. 고려 시대의 생활용품은 1010년<NAME> 때 흥천사 범종과, 1223년 고종 때 화병을 만들어 흥복사에 두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놋쇠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고려 시대 평민의 무덤에서도 놋쇠 숟가락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식기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식기 외에 농악기, 각종 불구에 속하는 종·금고·정병·향로·금동탑·사리함·제기 등 제작이 고려 시대의 놋그릇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금속공 예미의 수준이 높다. 고려 시대의 유기는 동체가 얇고 질긴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에서 동을 채굴하여 유기의 생산을 장려하였다. ≪경국대전≫의 공조(工曹) 편을 보면, 유기를 전담하여 놋그릇을 생산하는 유장(鍮匠)이 국가공무원으로서 본조(本曹)와 내수사(內需司)·상의원(尙衣院)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으며, 지방 관아의 공방에도 유기 공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민간인 유기장들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 각종 식기류와 풍물류의 놋그릇을 팔던 유기점은 놋점 또는 놋전이라고 하는 유기점이었다. 6·25 전쟁 이전에는 개성·안성을 비롯하여 김천·남원·운봉·전주·홍성·박천·평양·사리원·정주·서울 등지에서 놋그릇을 많이 만들었으나, 6·25 전쟁 이후 연탄가스에 변질되기 쉬운 놋쇠의 성질 때문에 차츰 없어지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안성에서 만든 주물 제작법, 평안북도 정주 납청 지방에서 만든 방짜 제작법[], 전라남도 순천에서 만들고 있는 반방짜제작법[]이 있다. 주물 제작법이란, 구리에다 주석이나 아연을 7 대 3의 비율로 혼합한 쇳물을 녹여 그릇의 형태를 만든 틀에 부어 넣고 다듬고 광을 내어 놋그릇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주물유기로 가장 유명한 곳은 개성과 안성 지방인데, 안성의 유기는 조형미가 아름다워 ‘안성맞춤’이라는 속담이 나올 만큼 품질이 좋았다.
방짜 제작법이란 일반적으로 쇳물을 녹여 바대기라 불리는 바둑알처럼 둥굴납작한 쇳덩이를 만들어, 11인이 한조가 되어 불에 달구어가면서 두들겨 그릇의 형태를 이루는 방법이다.<NAME>의 방짜는 구리와 주석 이외의 다른 물질이<NAME>을 두들겨 기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깨지기 때문에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납청 지대에서 방짜를 이르는 말로 양대라고 한다. 평야 지방에서는 방짜 유기로 된 징·꽹과리 등이 유행했고, 북한의 산간 지방에서는 놋상·놋동이·놋식기 등이 유행하였다. 또 순천지방에는 옥성기라는 놋그릇이 있는데, 이것은 흔히 궁 구름 옥성 기 또는 옥 바리라고 불리며, 요즈음은 일반적으로 반방짜라고 부른다. 이것은 손쉬운 주물식으로 그릇의 절반 정도를 만들고 끝부분은 집게로 집어가면서 오목하게 두드리거나 짓눌러서 만드는 그릇이다. 북한 산간 지방의 놋그릇은 비교적 그릇이 크고 거칠며, 남한 평야 지방의 놋그릇은 작고 아담하며 섬세하다. 숟가락·젓가락 외에 칠 첩 반상기·구첩 반상기 등 놋그릇의 종류는 크게 식기류·혼사용구·제사용구·불기류·난방용구·등잔류 등으로 구분되는데, 여기에는 숟가락·젓가락이 포함된다. 칠 첩 반상기는 밥상의 식기로 뚜껑까지 32개가 한 벌로 되어 있는 그릇이다. 혼사용 놋그릇으로는 구삼벌·제주발·갱기·수저·제잔·잔대·탕그릇·적틀·편틀·약기·제종지·제접시·모사기·퇴주그릇·주전자, 사랑 요강·안방 요강, 큰 세숫대야(어린애 출산용), 큰 세숫대야(어린애 출산용), 제사용 놋그릇으로는 구삼벌·제주발·갱기·수저·제잔·잔대·탕그릇 대·소 불기, 놋동이·향로·촛대·향합·바라·범종·옥수기 등이 불기의 종류이다. 난방용 구로는 화로·부젓가락·부삽, 등잔류로는 유경 등잔·나비 촛대 등이 있다. 이들 놋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푸른 녹청이 생긴다. 따라서 이를 깨끗하게 닦는 것은 여인들의 일과이자 풍속으로, 암키와를 곱게 빻은 것을 수세미에 묻혀 윤기가 돌 때까지 닦았다. |
53eb0f17-20d3-4c31-ac1c-b6ec4ecd5f28 | source05/encykorea/SOC18191.txt | 보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183 | CC BY | 376 | {
"main": "문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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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 ""
} | 집의 규모가 커져서 구조가 복잡해지면 도리와 직각으로 보가 만들어진다. 보는 대들보大樑·종보宗樑·충량(衝樑)·퇴보退樑·우미량(牛尾樑)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 밖에 합보·귀보·중종보中宗樑 등도 있다.
보의 단면을 대개 구형(矩形 : 직사각형)이나, 모서리를 깎아서 둥그스름하게 다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들보나 종보 등은 자연목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휜 부분을 위로하고, 양옆을 따서 장방형에 가깝도록 한다.
고려 시대 말기에 지어졌던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등의 보는 속칭 항아리 보라 하여 단면이 항아리의 옆모습처럼 만들고 있다. 항아 리보의 밑면은 그 폭을 장혀의 두께에 맞추어서 다듬어 기둥 위의 공포와 만나게 될 때 첨차 위에 소도로 물리도록 하였다. 1 대들보 : 가장 큰 보로서 평주와 평주, 고주와 고주 사이에 걸린다. 천장이 꾸며져도 대들보 노출이 되고, 평지에서는 보 머리를 내밀어 새김질을 한다. 중간의 고주에서 합보가 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삼량집에서는 마루 대공이 대들보의 중심에 있고, 오량집에서는 동자 주가 대들보의 중심에 서서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2 종보 : 마루 보라고도 하는데 대량 위에 세운 동자기둥 사이 혹은 고주 사이에 건다. 칠량집 이상이 되면 중종보가 하나 더 생기는데, 종보는 오량집에서만 걸리게 된다. 중도리가 종보 양쪽에 앉게 되고 도리 밖으로 보 머리를 내밀게 하여 간략하게 새긴다. 종보 위로는 대공이 세워진다. 3 충량 : 지붕의 구조가 팔작이나<NAME>각일 때 나타나는 보로, 측면 평주와 대들보 사이에 걸린다. 충량이 걸리는 상태는 대들보의 윗면과 평주 사이에 고저차가 존재하므로 상당히 휜 나무를 골라야 한다. 충량의 앞머리는 일반적인 보와 같이 다듬지만 뒤 뿌리는 대들보 위쪽으로 처지면서 일부가 대들보 위로 노출된다. 이 노출된 부분을 그대로 두기도 하고, 감춰주면서 모양을 내기도 한다. 특히 이 충량의 뒤 뿌리에 용머리를 조각하여 꽂아 넣음으로써 장엄한 모양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곳이 사찰이다. 충량의 위에서는 측면으로 지나가는 중도리의 중심을 받쳐주는데, 동자기둥을 세우거나 접시받침 등이 있다. 4 퇴보 : 퇴보는 평주와 고주 사이에 걸리는 보로 홍예 보라고도 한다. 퇴보란 툇간에 걸리기 때문에 툇간에 걸리게 되는 것으로, 단면도 작은 것을 쓴다. 퇴보의 아랫면은 보아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훌치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훌치기는 양쪽에 있는 평주 측 보아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30mm 정도 깎는 것으로, 보아지가 양쪽에 있을 때는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⑤ 우미량 : 우미량은 기둥과 관계없이 도리와 도리 사이에 걸리는 보로서, 도리 사이의 고저차 때문에 상당히 휜 모습이 된다.
우미량의 단면은 장혀와 비슷한 장방형이며, 앞머리는 도리와 결구되면서 보 머리를 만들어주고, 뒤 뿌리는 도리 밑의 장혀 등과 결구되면서 보아지 형태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⑥중층 이상에서는 귀고주[]와 우주 사이에 걸리는 귀보는 대체로 상층 우주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귀보를 생략하는 경우는 아래층 바닥으로부터 상층 우주를 별도로 세우는 경우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보
### 내용:
집의 규모가 커져서 구조가 복잡해지면 도리와 직각으로 보가 만들어진다. 보는 대들보大樑·종보宗樑·충량(衝樑)·퇴보退樑·우미량(牛尾樑)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 밖에 합보·귀보·중종보中宗樑 등도 있다.
보의 단면을 대개 구형(矩形 : 직사각형)이나, 모서리를 깎아서 둥그스름하게 다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들보나 종보 등은 자연목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휜 부분을 위로하고, 양옆을 따서 장방형에 가깝도록 한다.
고려 시대 말기에 지어졌던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등의 보는 속칭 항아리 보라 하여 단면이 항아리의 옆모습처럼 만들고 있다. 항아 리보의 밑면은 그 폭을 장혀의 두께에 맞추어서 다듬어 기둥 위의 공포와 만나게 될 때 첨차 위에 소도로 물리도록 하였다. 1 대들보 : 가장 큰 보로서 평주와 평주, 고주와 고주 사이에 걸린다. 천장이 꾸며져도 대들보 노출이 되고, 평지에서는 보 머리를 내밀어 새김질을 한다. 중간의 고주에서 합보가 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삼량집에서는 마루 대공이 대들보의 중심에 있고, 오량집에서는 동자 주가 대들보의 중심에 서서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2 종보 : 마루 보라고도 하는데 대량 위에 세운 동자기둥 사이 혹은 고주 사이에 건다. 칠량집 이상이 되면 중종보가 하나 더 생기는데, 종보는 오량집에서만 걸리게 된다. 중도리가 종보 양쪽에 앉게 되고 도리 밖으로 보 머리를 내밀게 하여 간략하게 새긴다. 종보 위로는 대공이 세워진다. 3 충량 : 지붕의 구조가 팔작이나<NAME>각일 때 나타나는 보로, 측면 평주와 대들보 사이에 걸린다. 충량이 걸리는 상태는 대들보의 윗면과 평주 사이에 고저차가 존재하므로 상당히 휜 나무를 골라야 한다. 충량의 앞머리는 일반적인 보와 같이 다듬지만 뒤 뿌리는 대들보 위쪽으로 처지면서 일부가 대들보 위로 노출된다. 이 노출된 부분을 그대로 두기도 하고, 감춰주면서 모양을 내기도 한다. 특히 이 충량의 뒤 뿌리에 용머리를 조각하여 꽂아 넣음으로써 장엄한 모양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곳이 사찰이다. 충량의 위에서는 측면으로 지나가는 중도리의 중심을 받쳐주는데, 동자기둥을 세우거나 접시받침 등이 있다. 4 퇴보 : 퇴보는 평주와 고주 사이에 걸리는 보로 홍예 보라고도 한다. 퇴보란 툇간에 걸리기 때문에 툇간에 걸리게 되는 것으로, 단면도 작은 것을 쓴다. 퇴보의 아랫면은 보아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훌치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훌치기는 양쪽에 있는 평주 측 보아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30mm 정도 깎는 것으로, 보아지가 양쪽에 있을 때는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⑤ 우미량 : 우미량은 기둥과 관계없이 도리와 도리 사이에 걸리는 보로서, 도리 사이의 고저차 때문에 상당히 휜 모습이 된다.
우미량의 단면은 장혀와 비슷한 장방형이며, 앞머리는 도리와 결구되면서 보 머리를 만들어주고, 뒤 뿌리는 도리 밑의 장혀 등과 결구되면서 보아지 형태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⑥중층 이상에서는 귀고주[]와 우주 사이에 걸리는 귀보는 대체로 상층 우주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귀보를 생략하는 경우는 아래층 바닥으로부터 상층 우주를 별도로 세우는 경우이다. |
126242d5-06d4-4a21-808d-44181a4a3676 | source05/encykorea/SOC14205.txt | 마부
(馬夫)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349 | CC BY | 223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전통사회에서는 이를 말구종[]이라 일컬었고, 근래에는 말꾼이라 일컬었다. 마부의 위치는 말을 탄 사람의 노소에 따라 달랐다. 젊은 주인은 오른쪽에 서서 왼쪽으로 고삐를 당긴다. 이는 오른손을 쉽게 놀리기 위해서이다. 이와는 반대로 늙은 주인일 때는 타고 내릴 때 도우려고 왼쪽에 선다. 옛날에는, 주인은 말 위에 올라타고 말구종은 걸어서 따라갔기 때문에 속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또 집에 있는 노둣돌은 말을 타고 내릴 때 자주 이용되었다. 하지만, 말구종이 엎드린 등 위에 발을 딛거나 깍지 낀 손을 발판으로 삼기도 하였다. 견마, 말 타고 가는 사람이 혼자 끌고 가는 것을 자견, 마부가 고삐를 쥐고 앞서게 하는 것을 견마, 말 타고 가는 사람이 혼자 끌고 가는 것을 자견이라 하였다. 개화기 무렵까지도 말을 가진 마부가 손님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고 삯을 받는 영업을 하였다. 따라서 고을마다 마부가 있었으며, 주막이나 여인숙에는 이들이 묵는 말꾼방이 따로 마련되었는데, 주인은 말먹이는 물론 말을 위한 잔시중까지 들어주었다. 마부들은 자기 손님을 즐겁게 하려고 이른바 말 광대굿을 하기도 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이 없어지자, 마부들은 달구지나 마차를 마련하여 짐을 나르는 일에 종사하였다. 대도시에서는 주로 곡식 가마니나 나무 따위를, 중소도시에서는 흙·모래·시멘트 따위의 건축자재를 운반하였다. 마부들은 자기 집에서 말을 기르고 자신의 말과 달구지를 제공하고 월급제로 일하는 일도 있었지만, 가끔 시장이나 역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오는 짐을 받아 실어다 주기도 했다. 또한 서울의 경우, 독립문부터 무악재까지 양쪽에 많은 마부들이 모여살았는데,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다. 중소도시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마부를 많이 볼 수 있었으나, 소형 트럭과 경운기 등의 대량 보급으로 인해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마부
(馬夫)
### 내용:
전통사회에서는 이를 말구종[]이라 일컬었고, 근래에는 말꾼이라 일컬었다. 마부의 위치는 말을 탄 사람의 노소에 따라 달랐다. 젊은 주인은 오른쪽에 서서 왼쪽으로 고삐를 당긴다. 이는 오른손을 쉽게 놀리기 위해서이다. 이와는 반대로 늙은 주인일 때는 타고 내릴 때 도우려고 왼쪽에 선다. 옛날에는, 주인은 말 위에 올라타고 말구종은 걸어서 따라갔기 때문에 속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또 집에 있는 노둣돌은 말을 타고 내릴 때 자주 이용되었다. 하지만, 말구종이 엎드린 등 위에 발을 딛거나 깍지 낀 손을 발판으로 삼기도 하였다. 견마, 말 타고 가는 사람이 혼자 끌고 가는 것을 자견, 마부가 고삐를 쥐고 앞서게 하는 것을 견마, 말 타고 가는 사람이 혼자 끌고 가는 것을 자견이라 하였다. 개화기 무렵까지도 말을 가진 마부가 손님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고 삯을 받는 영업을 하였다. 따라서 고을마다 마부가 있었으며, 주막이나 여인숙에는 이들이 묵는 말꾼방이 따로 마련되었는데, 주인은 말먹이는 물론 말을 위한 잔시중까지 들어주었다. 마부들은 자기 손님을 즐겁게 하려고 이른바 말 광대굿을 하기도 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이 없어지자, 마부들은 달구지나 마차를 마련하여 짐을 나르는 일에 종사하였다. 대도시에서는 주로 곡식 가마니나 나무 따위를, 중소도시에서는 흙·모래·시멘트 따위의 건축자재를 운반하였다. 마부들은 자기 집에서 말을 기르고 자신의 말과 달구지를 제공하고 월급제로 일하는 일도 있었지만, 가끔 시장이나 역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오는 짐을 받아 실어다 주기도 했다. 또한 서울의 경우, 독립문부터 무악재까지 양쪽에 많은 마부들이 모여살았는데,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다. 중소도시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마부를 많이 볼 수 있었으나, 소형 트럭과 경운기 등의 대량 보급으로 인해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
2c63b89c-9572-41db-a89a-6c043ec064e9 | source05/encykorea/ECO52161.txt | 외환위기
(外換危機)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13 | CC BY | 1,023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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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환위기는 1990년대 들어와서 각 국가별로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키면서 국제자본이동의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고 단기적 투기성 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으로 시장에서 환율과 수익률이 급격히 변동되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11월에 투기적 외화자본 이동이 급격히 유출되면서 미국 달러 표시 원화의 환율이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국제결제통화인 미국 달러가 품귀해지는 외환위기가 나타났다.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완화는 특히 단기적인 투기적 자본(hot money)의 급격한 유출입으로 환율과 국제수지를 왜곡시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는다. 이런 급격한 환율의 변화는 무역업체나 외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불확실성과 위험을 증가시키고 금융과 자본시장의 기능을 상실하게 만든다. 또한 금융과 자본시장의 마비는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미쳐서 실물경제도 대폭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외환위기가 1997년대 아시아 외환위기와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은행의 도산과 그로 인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확대를 가져오는 금융위기와 함께 나타난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거시경제지표가 매우 건전했으며 경제성장률과 투자수익률도 타 지역에 비해 높아 외환위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 다만, 아시아 국가들이 자본이 축적되지 못한 채 고도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필수적인 원자재와 자본재를 수입하면서 구조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1994년 남미의 외환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는 제1세대 위기 모형으로 외환위기를 가져오는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재정적자로 인한 국내 통화팽창은 국매물가를 상승시키고, 외환시장에서 국내 통화의 환율이 상승하면서 시장환율이 정부가 유지하려는 환율 수준보다 훨씬 높게 형성될 때 투기자들이 이 환율 차이를 이용하여 투기적 이익을 보기 위해 국내 통화를 팔고 미국 달러를 수요하면서 국제 유동성이 부족하게 되고 국내 통화 환율이 급등하면서 나타나는 위기이다. 둘째는 1990년대 초반 유럽의 위기를 설명하는 제2세대 위기 모형이다. 이는 선진국들의 외환위기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투기자들의 정부 정책에 대한 예측으로 향후 국내 통화 환율이 급등할 것이라는 예측만으로 실제 시장에서 국내 통화를 팔고 미국 달러를 가수요(speculative demand) 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국내 통화 환율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자기실현적인 위기 모형이다. 아시아 외환위기를 설명하기 위한 셋째 모형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모형이다. 아시아의 각국 정부는 기업의 파산 가능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지급보증을 서주면서 은행이나 투자자들이 기업들의 위험을 낮게 평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위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기대수익만 높은 기업에 지나치게 중복적으로 투자하면서 기업의 자산 가치는 급격히 상승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서 자산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자 과도한 중복투자를 한 은행과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되면서 은행이 도산하고 자본시장이 부실해졌다. 이런 은행 부실과 자본시장의 취약한 구조로 인해 자본거래가 어려워지면서 실물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는 금융위기가 나타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은행 도산을 막는다. 하지만 이때 국내 유동성 증가는 다시 국내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단기 투기성 자본의 급격한 유출을 초래하고 외환위기가 외환위기와 겹치게 된다. 아시아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또 다른 모형은 금융공황 모형이다. 이는 국제자본시장에서 아시아 국가의 은행들이 자본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제금리보다 비싸고 단기적인 자본을 빌려와서 국내 기업들에게 장기로 빌려주면서 채권과 채무의 만기가 서로 다르게 되고 자본흐름이 이상하게 되는 위기 모형이다. 시장 교란으로 위험이 높아지면 아시아 국가의 은행들이 빌려준 단기 차입자본을 더 이상 빌려주지 못하고 그 자본의 상환을 요구하는 국제자본시장의 요구에 국내 은행은 상환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경우 은행이 도산하고 자본시장이 취약해지면서 자본거래가 불가능해지고 실물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는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또한 외환위기는 단기 투기성 자본의 급격한 유출로 인해 외환위기와 맞물려 발생한다. 자기실현적인 투자행태를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몇 가지 특징적인 투자행태를 보인다. 즉, 외환위기가 각국의 경제 기초(fundamentals)와 무관하게 단기 투자자들이 자본을 회수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자기실현적 비관론이다. 특히, 외환위기가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은 경제 기초에서 보여주는 적정 환율 수준과 시장 환율 수준의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시아 외환시장은 작고 소외된 시장이라 국제 외환시장에서 필요한 정보를<NAME>기 힘들기 때문에 소수 투자자들의 투자행태를 따라 하는 패거리 행태(herding behavior)를 보이게 된다. 외환위기의 마지막 특징은 인접 국가로 빠르게 전염되는 전염효과이다. 이는 인접국들끼리의 무역과 자본시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어느 한 나라의 위기가 인접국의 경제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외환위기를 겪었던 한국·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5개국의 경우 1996년 총 930억 달러에 달하던 민간부분의 자본 유입이 1997년에는 오히려 121억 달러로 바뀌면서 1년 만에 그 변동 폭이 무려 1,051달러에 이르렀다. 특히 상업은행들의 자본<NAME> 555억 달러의 자본 유입에서 213억 달러의 자본유출로 전환되면서 변동 폭이 768억 달러에 달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본 이동이 일어난 것은 이들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기초 여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외신인도 하락과 자기실현적 위기로 설명될 수 있다. 이렇게 대규모 자본 이동이 급격하게 아시아 국가로부터 이탈하면서 외환위기는 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갔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1980년대 이후 자본 이동에 대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해오면서 1990년대 들어서 조심스럽게 시장의 개방 폭을 넓혔다. 1990년대 우리나라 물가는 약 4∼7% 정도 안정되었고 경제성장률도 연평균 7.5%에 달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경상수지는 계속 적자를 냈고 1996년에는 적자폭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자본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국제수지는 흑자 기조를 유지했고 외화보유고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1997년 들어서 한보 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우성과 삼미가 도산하는 등 재벌들이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외환시장에서도 한국경제에 대한 대외 신뢰도(market confidence)가 점차 낮아져 갔다. 따라서 해외 투자자들이 원화를 꺼리고 국제결제통화인 미국 달러를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원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하더니 정부가 환율 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95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을 매도하였다. 하지만 곧 진로, 건영, 대농, 한신공영 등 대기업이 퇴출되고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인접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한국에서도 불안정한 시장 조짐이 나타났다. 외환위기가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된 것은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폭락과 필리핀 페소 폭락 등의 여파로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였으나 외화 유동성 부족으로 결국 국가부도 상황에 직면한 한국이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결국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과 구제금융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195억 달러,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부터 각각 70억 달러와 37억 달러를 지원받아 외환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외환위기가 갖는 경제적 의미는 그 나라의 대외 신인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진국의 경우 국내 통화 환율이 급격히 변동하면 이는 시장 교란이 노출되면서 정상적으로 환율이 반영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후진국의 경우 환율의 급격한 변동은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경제적인 문제가 노출된 것처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단기적 투기적인 자본이 급격히 유출하기 시작하고 곧 외환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국제투자자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환율 변동에 대해 이중적인 기준을 갖고 있으며, 경제 기초와 직접 관련성이 없는 대외 신뢰도의 변화로 단기적인 자본이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이중적 시장 기준은 후진국 시장에 대한 정보가 부정확하고 회계기준이 다르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하고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정보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약속한 긴축재정, 금융 및 은행 부문의 건전성 제고, 자유 변동환율 제도 채택, 산업구조와 기업지배구조의 개혁, 전면적인 자본자유화 조치 등 일련의 정책 시행을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우선 1999년 9월에 조기 상환한 135억 달러의 보완준비금융(SRF)과 60억 달러의 대기성차관자금(SBL) 60억 달러를 2001년 1월부터 상환하기 시작했으며, 1억 4,000만 달러를 2001년 1월부터 상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3년 8개월 만에 국제통화기금 차입금 전액인 195억 달러를 당초 2004년 5월까지 갚도록 예정되어 있던 국가채무를 정리하였다.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기 위해서는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2001년 받은 구제 금융을 모두 갚아야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구조조정과 금융시장의 전면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외환위기
(外換危機)
### 내용:
외환위기는 1990년대 들어와서 각 국가별로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키면서 국제자본이동의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고 단기적 투기성 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으로 시장에서 환율과 수익률이 급격히 변동되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11월에 투기적 외화자본 이동이 급격히 유출되면서 미국 달러 표시 원화의 환율이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국제결제통화인 미국 달러가 품귀해지는 외환위기가 나타났다.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완화는 특히 단기적인 투기적 자본(hot money)의 급격한 유출입으로 환율과 국제수지를 왜곡시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는다. 이런 급격한 환율의 변화는 무역업체나 외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불확실성과 위험을 증가시키고 금융과 자본시장의 기능을 상실하게 만든다. 또한 금융과 자본시장의 마비는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미쳐서 실물경제도 대폭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외환위기가 1997년대 아시아 외환위기와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은행의 도산과 그로 인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확대를 가져오는 금융위기와 함께 나타난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거시경제지표가 매우 건전했으며 경제성장률과 투자수익률도 타 지역에 비해 높아 외환위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 다만, 아시아 국가들이 자본이 축적되지 못한 채 고도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필수적인 원자재와 자본재를 수입하면서 구조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1994년 남미의 외환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는 제1세대 위기 모형으로 외환위기를 가져오는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재정적자로 인한 국내 통화팽창은 국매물가를 상승시키고, 외환시장에서 국내 통화의 환율이 상승하면서 시장환율이 정부가 유지하려는 환율 수준보다 훨씬 높게 형성될 때 투기자들이 이 환율 차이를 이용하여 투기적 이익을 보기 위해 국내 통화를 팔고 미국 달러를 수요하면서 국제 유동성이 부족하게 되고 국내 통화 환율이 급등하면서 나타나는 위기이다. 둘째는 1990년대 초반 유럽의 위기를 설명하는 제2세대 위기 모형이다. 이는 선진국들의 외환위기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투기자들의 정부 정책에 대한 예측으로 향후 국내 통화 환율이 급등할 것이라는 예측만으로 실제 시장에서 국내 통화를 팔고 미국 달러를 가수요(speculative demand) 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국내 통화 환율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자기실현적인 위기 모형이다. 아시아 외환위기를 설명하기 위한 셋째 모형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모형이다. 아시아의 각국 정부는 기업의 파산 가능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지급보증을 서주면서 은행이나 투자자들이 기업들의 위험을 낮게 평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위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기대수익만 높은 기업에 지나치게 중복적으로 투자하면서 기업의 자산 가치는 급격히 상승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서 자산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자 과도한 중복투자를 한 은행과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되면서 은행이 도산하고 자본시장이 부실해졌다. 이런 은행 부실과 자본시장의 취약한 구조로 인해 자본거래가 어려워지면서 실물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는 금융위기가 나타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은행 도산을 막는다. 하지만 이때 국내 유동성 증가는 다시 국내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단기 투기성 자본의 급격한 유출을 초래하고 외환위기가 외환위기와 겹치게 된다. 아시아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또 다른 모형은 금융공황 모형이다. 이는 국제자본시장에서 아시아 국가의 은행들이 자본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제금리보다 비싸고 단기적인 자본을 빌려와서 국내 기업들에게 장기로 빌려주면서 채권과 채무의 만기가 서로 다르게 되고 자본흐름이 이상하게 되는 위기 모형이다. 시장 교란으로 위험이 높아지면 아시아 국가의 은행들이 빌려준 단기 차입자본을 더 이상 빌려주지 못하고 그 자본의 상환을 요구하는 국제자본시장의 요구에 국내 은행은 상환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경우 은행이 도산하고 자본시장이 취약해지면서 자본거래가 불가능해지고 실물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는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또한 외환위기는 단기 투기성 자본의 급격한 유출로 인해 외환위기와 맞물려 발생한다. 자기실현적인 투자행태를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몇 가지 특징적인 투자행태를 보인다. 즉, 외환위기가 각국의 경제 기초(fundamentals)와 무관하게 단기 투자자들이 자본을 회수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자기실현적 비관론이다. 특히, 외환위기가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은 경제 기초에서 보여주는 적정 환율 수준과 시장 환율 수준의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시아 외환시장은 작고 소외된 시장이라 국제 외환시장에서 필요한 정보를<NAME>기 힘들기 때문에 소수 투자자들의 투자행태를 따라 하는 패거리 행태(herding behavior)를 보이게 된다. 외환위기의 마지막 특징은 인접 국가로 빠르게 전염되는 전염효과이다. 이는 인접국들끼리의 무역과 자본시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어느 한 나라의 위기가 인접국의 경제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외환위기를 겪었던 한국·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5개국의 경우 1996년 총 930억 달러에 달하던 민간부분의 자본 유입이 1997년에는 오히려 121억 달러로 바뀌면서 1년 만에 그 변동 폭이 무려 1,051달러에 이르렀다. 특히 상업은행들의 자본<NAME> 555억 달러의 자본 유입에서 213억 달러의 자본유출로 전환되면서 변동 폭이 768억 달러에 달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본 이동이 일어난 것은 이들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기초 여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외신인도 하락과 자기실현적 위기로 설명될 수 있다. 이렇게 대규모 자본 이동이 급격하게 아시아 국가로부터 이탈하면서 외환위기는 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갔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1980년대 이후 자본 이동에 대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해오면서 1990년대 들어서 조심스럽게 시장의 개방 폭을 넓혔다. 1990년대 우리나라 물가는 약 4∼7% 정도 안정되었고 경제성장률도 연평균 7.5%에 달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경상수지는 계속 적자를 냈고 1996년에는 적자폭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자본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국제수지는 흑자 기조를 유지했고 외화보유고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1997년 들어서 한보 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우성과 삼미가 도산하는 등 재벌들이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외환시장에서도 한국경제에 대한 대외 신뢰도(market confidence)가 점차 낮아져 갔다. 따라서 해외 투자자들이 원화를 꺼리고 국제결제통화인 미국 달러를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원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하더니 정부가 환율 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95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을 매도하였다. 하지만 곧 진로, 건영, 대농, 한신공영 등 대기업이 퇴출되고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인접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한국에서도 불안정한 시장 조짐이 나타났다. 외환위기가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된 것은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폭락과 필리핀 페소 폭락 등의 여파로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였으나 외화 유동성 부족으로 결국 국가부도 상황에 직면한 한국이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결국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과 구제금융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195억 달러,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부터 각각 70억 달러와 37억 달러를 지원받아 외환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외환위기가 갖는 경제적 의미는 그 나라의 대외 신인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진국의 경우 국내 통화 환율이 급격히 변동하면 이는 시장 교란이 노출되면서 정상적으로 환율이 반영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후진국의 경우 환율의 급격한 변동은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경제적인 문제가 노출된 것처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단기적 투기적인 자본이 급격히 유출하기 시작하고 곧 외환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국제투자자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환율 변동에 대해 이중적인 기준을 갖고 있으며, 경제 기초와 직접 관련성이 없는 대외 신뢰도의 변화로 단기적인 자본이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이중적 시장 기준은 후진국 시장에 대한 정보가 부정확하고 회계기준이 다르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하고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정보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약속한 긴축재정, 금융 및 은행 부문의 건전성 제고, 자유 변동환율 제도 채택, 산업구조와 기업지배구조의 개혁, 전면적인 자본자유화 조치 등 일련의 정책 시행을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우선 1999년 9월에 조기 상환한 135억 달러의 보완준비금융(SRF)과 60억 달러의 대기성차관자금(SBL) 60억 달러를 2001년 1월부터 상환하기 시작했으며, 1억 4,000만 달러를 2001년 1월부터 상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3년 8개월 만에 국제통화기금 차입금 전액인 195억 달러를 당초 2004년 5월까지 갚도록 예정되어 있던 국가채무를 정리하였다.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기 위해서는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2001년 받은 구제 금융을 모두 갚아야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구조조정과 금융시장의 전면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했다. |
e0bf7794-0d1a-4c40-97b3-d5f242525736 | source05/encykorea/MED32032.txt | 이영춘
(李永春)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08 | CC BY | 2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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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평창이다. 쌍천은 호이다. 평안남도 용강군<NAME>면에서<NAME>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병리학을 연구하여 1935년 일본 교토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바로 전라북도 군산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구마모토 농장[熊本農場] 의무실 진료소장으로 부임하였다.
그의 평생 사업은 의사로서의 진료사업과 사회사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48년 농촌위생연구소를 처음 설립하고, 후에 다른 부설 진료기관과 합병하여 재단법인 한국농촌위생원을 창설하는 등 농촌 사회 및 농민생활 전반에 대한 조사연구를 하여 그동안 47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고, 기관 학술잡지로서 『농촌위생(農村衛生)』을 발행하였다. 진료사업으로는 1945년 개정 중앙병원을 열고 여러 곳에 산하 진료소 및 치과진료소를 두었다. 정읍군에 화호 중앙병원을 1948년에 세웠으며, 1961년에는 개정 뇌 병원을 개설하여 지역 농민들에게 많은 의료혜택을 주었다. 또, 그는 농어촌 지역 주민들의 교육과 보건 요원 확보의 필요성에 따라 1951년에 개정 간호학교, 1952년에 화호 여자중학교, 1961년에 화호 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농촌 보건 요원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보건사회부의 위촉을 받아 보건 간호원·양호교사·결핵 관리요원·가족계획 사업 요원의 단기 수련 사업도 실시하였다. 농촌위생원 구내에 일심 영아원을, 군산에 일맥 영아원을, 1957년 농촌위생원 구내에 일심 영아원을 세워 농어촌에서 버림받고 의지할 곳이 없는 영아들을 양육하였다. 그는 공직으로서 대한적십자사 조직 위원·대한 의학협회 대의원·세브란스 의과대학 재단 이사·전북대학교 평의원·대한 공중보건협회장·대한 기생충학 회장·대한 기생충 박멸 협회장·대한 가족계획 협회 이사·보건사회부 기생충 대책 전문위원·국제로터리클럽 377지구 총재 등을 역임하였고, 제6회 국제 열대의학회에 참석하여 분과 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문화훈장·대한적십자사 봉사장, 1975년 연세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그동안의 공적으로 인해 정부로부터<NAME>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영춘
(李永春)
### 내용:
본관은 평창이다. 쌍천은 호이다. 평안남도 용강군<NAME>면에서<NAME>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병리학을 연구하여 1935년 일본 교토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바로 전라북도 군산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구마모토 농장[熊本農場] 의무실 진료소장으로 부임하였다.
그의 평생 사업은 의사로서의 진료사업과 사회사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48년 농촌위생연구소를 처음 설립하고, 후에 다른 부설 진료기관과 합병하여 재단법인 한국농촌위생원을 창설하는 등 농촌 사회 및 농민생활 전반에 대한 조사연구를 하여 그동안 47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고, 기관 학술잡지로서 『농촌위생(農村衛生)』을 발행하였다. 진료사업으로는 1945년 개정 중앙병원을 열고 여러 곳에 산하 진료소 및 치과진료소를 두었다. 정읍군에 화호 중앙병원을 1948년에 세웠으며, 1961년에는 개정 뇌 병원을 개설하여 지역 농민들에게 많은 의료혜택을 주었다. 또, 그는 농어촌 지역 주민들의 교육과 보건 요원 확보의 필요성에 따라 1951년에 개정 간호학교, 1952년에 화호 여자중학교, 1961년에 화호 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농촌 보건 요원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보건사회부의 위촉을 받아 보건 간호원·양호교사·결핵 관리요원·가족계획 사업 요원의 단기 수련 사업도 실시하였다. 농촌위생원 구내에 일심 영아원을, 군산에 일맥 영아원을, 1957년 농촌위생원 구내에 일심 영아원을 세워 농어촌에서 버림받고 의지할 곳이 없는 영아들을 양육하였다. 그는 공직으로서 대한적십자사 조직 위원·대한 의학협회 대의원·세브란스 의과대학 재단 이사·전북대학교 평의원·대한 공중보건협회장·대한 기생충학 회장·대한 기생충 박멸 협회장·대한 가족계획 협회 이사·보건사회부 기생충 대책 전문위원·국제로터리클럽 377지구 총재 등을 역임하였고, 제6회 국제 열대의학회에 참석하여 분과 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문화훈장·대한적십자사 봉사장, 1975년 연세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그동안의 공적으로 인해 정부로부터<NAME>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 |
7f0dd209-4fec-4bd8-9fb5-4de480825dca | source05/encykorea/SOC1949.txt | 경산 정원용 의대
(經山 鄭元容 衣帶)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501 | CC BY | 280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조복에 해당하는 적초 의(赤綃衣) 3점, 청초 의(靑綃衣: 中單) 1점, 상(裳) 1점, 후수(後綬) 1점, 패옥(佩玉) 1점, 폐슬(蔽膝) 1점, 홀(笏) 2점, 제복 의(祭服衣) 1점, 관복(官服) 1점, 전복(戰服) 3점, 동다리 2점, 구군 복대(具軍服帶) 2점, 광다회(廣多繪) 1점, 서대(犀帶) 1점, 학정대(鶴頂帶) 1점, 술 4점, 장도(粧刀) 1점, 호패(戶牌) 7점 등 복식과 그 부속품을 포함하여 일괄 62점이다. 1968년 12월 12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국립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복의 3점 중 1점은 겉과 안이 모두 홍색 순인으로 만든 겹옷으로 길이 95cm, 화장 94cm, 품 47cm이다. 폐슬이 없는 홍색 항라로 만든 홑옷 1점은 길이 102cm, 화장 102cm, 품 46cm이다. 나머지 1점은 폐슬 없이 겉감은 홍색 순인, 안감은 홍색 노방으로 된 겹옷으로 크기는 길이 94cm, 화장 93cm, 품 48cm이다. 청초의 1점은 남색 은조사로 조복 안에 받침옷으로 길이 118cm, 화장 94cm, 품 46cm이다. 흑색 은조사로 만든 홑옷의 1점은 길이 93cm, 화장 102cm, 품 46cm이며, 폐슬과 방심곡령이 부착된 것이 특징이다. 나머지 상, 후수, 패옥 등은 조복과 제복의 부속품이다. 홍색의 순인으로 만든 상은 길이가 75cm이고, 후수는 74cm이며, 황·청·백·청의 학 4쌍과 구름과 꽃들이 수놓아져 있고 금환 1쌍이 부착되어 있다. 운문사 주머니에 들어 있는 패옥 중 1쌍은 번백옥으로 청색이다. 홀 2점은 상아로 되어 있다. 관복 1점은 소매가 넓은 단령으로 겉감은 연녹색, 안감은 남색 운문사로 제작했고 흉배는 부착되어 있지 않다. 주황색 길에 홍색 소매를 두르고 남색 안을 받쳐 입힌 겹옷이 동다리 1점이다. 흑색 전복에 동다리 소매만 달아 두 벌 옷 효과를 낸 다른 1점은 홑옷으로 된 것이다. 쾌자형 홑전복 1점은 검은색이고 1점은 소색으로 된 쾌자형 홑전복이다. 겹전복 1점은 겉은 검고 안은 붉은색으로 제작했다. 그 외에도 녹색 우단·청색 무명으로 된 광대·녹색광다회·서대·학정대 등의 허리띠와 보상 당초문이 있는 백통장도, 상아·황양목·배나무·흑각 등으로 된 호패 7점, 녹색 우단·청색 무명으로 된 광대·녹색광다회·서대·학정대 등의 허리띠가 있다. 이 유물들은 착용자의 신분과 연대가 확실하고 대례복·소례복·평상복 등이 구비되어 있어 한 시대의 복식 제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경산 정원용 의대
(經山 鄭元容 衣帶)
### 내용:
조복에 해당하는 적초 의(赤綃衣) 3점, 청초 의(靑綃衣: 中單) 1점, 상(裳) 1점, 후수(後綬) 1점, 패옥(佩玉) 1점, 폐슬(蔽膝) 1점, 홀(笏) 2점, 제복 의(祭服衣) 1점, 관복(官服) 1점, 전복(戰服) 3점, 동다리 2점, 구군 복대(具軍服帶) 2점, 광다회(廣多繪) 1점, 서대(犀帶) 1점, 학정대(鶴頂帶) 1점, 술 4점, 장도(粧刀) 1점, 호패(戶牌) 7점 등 복식과 그 부속품을 포함하여 일괄 62점이다. 1968년 12월 12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국립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복의 3점 중 1점은 겉과 안이 모두 홍색 순인으로 만든 겹옷으로 길이 95cm, 화장 94cm, 품 47cm이다. 폐슬이 없는 홍색 항라로 만든 홑옷 1점은 길이 102cm, 화장 102cm, 품 46cm이다. 나머지 1점은 폐슬 없이 겉감은 홍색 순인, 안감은 홍색 노방으로 된 겹옷으로 크기는 길이 94cm, 화장 93cm, 품 48cm이다. 청초의 1점은 남색 은조사로 조복 안에 받침옷으로 길이 118cm, 화장 94cm, 품 46cm이다. 흑색 은조사로 만든 홑옷의 1점은 길이 93cm, 화장 102cm, 품 46cm이며, 폐슬과 방심곡령이 부착된 것이 특징이다. 나머지 상, 후수, 패옥 등은 조복과 제복의 부속품이다. 홍색의 순인으로 만든 상은 길이가 75cm이고, 후수는 74cm이며, 황·청·백·청의 학 4쌍과 구름과 꽃들이 수놓아져 있고 금환 1쌍이 부착되어 있다. 운문사 주머니에 들어 있는 패옥 중 1쌍은 번백옥으로 청색이다. 홀 2점은 상아로 되어 있다. 관복 1점은 소매가 넓은 단령으로 겉감은 연녹색, 안감은 남색 운문사로 제작했고 흉배는 부착되어 있지 않다. 주황색 길에 홍색 소매를 두르고 남색 안을 받쳐 입힌 겹옷이 동다리 1점이다. 흑색 전복에 동다리 소매만 달아 두 벌 옷 효과를 낸 다른 1점은 홑옷으로 된 것이다. 쾌자형 홑전복 1점은 검은색이고 1점은 소색으로 된 쾌자형 홑전복이다. 겹전복 1점은 겉은 검고 안은 붉은색으로 제작했다. 그 외에도 녹색 우단·청색 무명으로 된 광대·녹색광다회·서대·학정대 등의 허리띠와 보상 당초문이 있는 백통장도, 상아·황양목·배나무·흑각 등으로 된 호패 7점, 녹색 우단·청색 무명으로 된 광대·녹색광다회·서대·학정대 등의 허리띠가 있다. 이 유물들은 착용자의 신분과 연대가 확실하고 대례복·소례복·평상복 등이 구비되어 있어 한 시대의 복식 제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이다. |
f38ed579-9b04-49b5-a113-a7946fe88636 | source05/encykorea/SOC9357.txt | 나례
(儺禮)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임동권"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325 | CC BY | 595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구나·대나·나희라고도 한다. 섣달 세밑[] 바쁜 중에도 각 가정에서는 부뚜막의 헌 곳을 새로 바르고, 거름을 치우고, 가축우리를 치워 새로 짚을 넣어 깔아주며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한다. 또한 밤중(자정)에는 마당에 불을 지피고 폭죽을 터뜨린다. 집안에 있는 온갖 잡귀·사귀를 몰아내고 정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궁중에서는 대궐 안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한편 벽사를 위해 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 후한서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궁이 전체 국정을 정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다. 황문(내시) 자제 중에서 10세에서 12세까지의 120명을 뽑아 납일 하루 전에 큰 나례 행사를 거행했다고 예지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정종 6년 무렵에 우리나라 궁중의 나례 의식이 중국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권 64 지 권 18 예 6 군례 조의 계동 대나의는 12월에 대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사람을 진자로 삼아 가면을 씌우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붉은 고습을 입힌다. 24명이 1대가 되며, 대개 2대가 된다. 집사자 12인은 채찍을 잡는데 붉은 모자와 소창옷[]을 입고 있다. 공인 22인 중 한 명인 방상시(:악귀를 쫓던 사람)는 황금색 눈이 4개인 가면을 쓰고 검은 웃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창,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다. 또 한 명의 창수는 할 때 주문을 외우는 사람인데 가면을 쓰고 가죽옷을 입고 몽둥이를 휘두른다. 고각군의 1대는 깃대를 잡은 4인, 퉁소를 부는 4인, 북을 가진 12인으로 구성되는데, 깃대는 4인, 퉁소는 4인, 북은 12인이다. 이렇게 해서 악귀를 궁중에서 쫓아낸다고 한다. 잡귀를 몰아내기 위한 이 의식에서는 가면, 붉은 옷, 방상시, 가무악 등이 모두 민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로부터 가면은 축귀의 기능이 강했고, 붉은 옷도 양색이기 때문에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방상시의 황금사목은 잡귀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도망가게 하려는 비정상의 과대 표현이었다. 진자들은 악공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처용무도 추었다. 처용무는 5인 5색의 옷을 입은 무동이 처용의 탈을 쓰고 오 방으로 벌려 서서 추는 춤으로 벽사에 이용되었다. 또한 나례 때 희생으로 닭 다섯 마리를 잡아 역기를 쫓던 정종은 닭 대신 다른 것을 쓰도록 하여 황토우 네 마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대궐에서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행해진 대나는 인원이<NAME>되는 것과 규모·격식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그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이후에는 그 유습만이 남게 되었다. 정월 원일조(元日條)에 의하면, 대궐 안 궁전 근처에서 각각 총을 놓아 세 번 소리를 내고 지방관청에서는 우인(優人 : 화랑이)들이<NAME>비의 탈을 쓰고 바라를 울리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호령을 하고 무엇을 쫓는 시늉을 하면서 몇 바퀴를 돌다가 나가는데 그것은 나례에서 끼쳐진 법이라고 하였다. 또한<NAME>세시기 12월 제석조에 의하면 제석 전날에 대포를 대궐 안에서 쏜다고 한다. 화전을 쏘고 북과 북을 울리는 것은 곧 대나의 역질 귀신을 쫓는 행사의 풍속이라고 했다. 한편, 민간에서도 이러한 유습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함경도 풍속에 ‘청단(靑壇)’이라 하여, 마치 원주(圓柱) 안에 기름 심지를 박은 것 같은 빙등(氷燈)을 켜놓고 밤을 새워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희를 행한다고 하였고, 평안도에서도 빙등을 설치하며, 의주(義州)에서는 동네에서 지포(紙砲 : 딱총)를 놓는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왕의 행차나 칙사의 위로, 신임 사또를 위한 축하연 등에서 나례는 수시로 놀기도 하였다. 이때 나례에서 하던<NAME>와 함께 광대들의 창과 예능, 기생들의 춤이 공연되었다. 우인·배우·창우·광대·재인·현수재인·수척·승·백정·희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궁중의식에서 벗어나<NAME>화하게 되자, 사회의 천대받던 계층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에 악공들의 반주와 기녀의 춤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나희 또는 잡희라 불렸다. 또한 여악도<NAME>하여 이를 더욱 즐겁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관상감이 나례를 관장하였고, 나례청이 나례를 관장하였다. 나례에 참여하고 잡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관에 소속되어 있다가 양반 대가의<NAME>이나 혼사에도 불려가서<NAME>하였다. 인정전·사정전·명정전 뜰에서 나례를 행하였는데, 얼굴에는 사람과 짐승의 여러 모습이 있었고 표정에는 탈춤 효과를 내었다. 무대는 붕을 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산차 화대라는 큰 수레가 달린 차에 봉각을 짓고 장치도 하고 연주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편, 윤차란 잡상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만든 좌판과 같은 것을 만들어 바퀴 달린 차 위에 놓아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례는 세밑에 가정과 대궐에서 악귀를 쫓는 벽사에서 백희나 잡희로<NAME>됨에 따라 종교성은 희미해지고 점차 놀이로 변해갔다. 현재 대궐에서 행하던 나례 의식은 사라졌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섣달그믐날 대청소를 하고 밤중에 폭죽을 터뜨려 정하고 신성하게 신년을 맞이하려는 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나례
(儺禮)
### 내용:
구나·대나·나희라고도 한다. 섣달 세밑[] 바쁜 중에도 각 가정에서는 부뚜막의 헌 곳을 새로 바르고, 거름을 치우고, 가축우리를 치워 새로 짚을 넣어 깔아주며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한다. 또한 밤중(자정)에는 마당에 불을 지피고 폭죽을 터뜨린다. 집안에 있는 온갖 잡귀·사귀를 몰아내고 정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궁중에서는 대궐 안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한편 벽사를 위해 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 후한서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궁이 전체 국정을 정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다. 황문(내시) 자제 중에서 10세에서 12세까지의 120명을 뽑아 납일 하루 전에 큰 나례 행사를 거행했다고 예지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정종 6년 무렵에 우리나라 궁중의 나례 의식이 중국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권 64 지 권 18 예 6 군례 조의 계동 대나의는 12월에 대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사람을 진자로 삼아 가면을 씌우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붉은 고습을 입힌다. 24명이 1대가 되며, 대개 2대가 된다. 집사자 12인은 채찍을 잡는데 붉은 모자와 소창옷[]을 입고 있다. 공인 22인 중 한 명인 방상시(:악귀를 쫓던 사람)는 황금색 눈이 4개인 가면을 쓰고 검은 웃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창,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다. 또 한 명의 창수는 할 때 주문을 외우는 사람인데 가면을 쓰고 가죽옷을 입고 몽둥이를 휘두른다. 고각군의 1대는 깃대를 잡은 4인, 퉁소를 부는 4인, 북을 가진 12인으로 구성되는데, 깃대는 4인, 퉁소는 4인, 북은 12인이다. 이렇게 해서 악귀를 궁중에서 쫓아낸다고 한다. 잡귀를 몰아내기 위한 이 의식에서는 가면, 붉은 옷, 방상시, 가무악 등이 모두 민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로부터 가면은 축귀의 기능이 강했고, 붉은 옷도 양색이기 때문에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방상시의 황금사목은 잡귀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도망가게 하려는 비정상의 과대 표현이었다. 진자들은 악공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처용무도 추었다. 처용무는 5인 5색의 옷을 입은 무동이 처용의 탈을 쓰고 오 방으로 벌려 서서 추는 춤으로 벽사에 이용되었다. 또한 나례 때 희생으로 닭 다섯 마리를 잡아 역기를 쫓던 정종은 닭 대신 다른 것을 쓰도록 하여 황토우 네 마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대궐에서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행해진 대나는 인원이<NAME>되는 것과 규모·격식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그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이후에는 그 유습만이 남게 되었다. 정월 원일조(元日條)에 의하면, 대궐 안 궁전 근처에서 각각 총을 놓아 세 번 소리를 내고 지방관청에서는 우인(優人 : 화랑이)들이<NAME>비의 탈을 쓰고 바라를 울리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호령을 하고 무엇을 쫓는 시늉을 하면서 몇 바퀴를 돌다가 나가는데 그것은 나례에서 끼쳐진 법이라고 하였다. 또한<NAME>세시기 12월 제석조에 의하면 제석 전날에 대포를 대궐 안에서 쏜다고 한다. 화전을 쏘고 북과 북을 울리는 것은 곧 대나의 역질 귀신을 쫓는 행사의 풍속이라고 했다. 한편, 민간에서도 이러한 유습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함경도 풍속에 ‘청단(靑壇)’이라 하여, 마치 원주(圓柱) 안에 기름 심지를 박은 것 같은 빙등(氷燈)을 켜놓고 밤을 새워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희를 행한다고 하였고, 평안도에서도 빙등을 설치하며, 의주(義州)에서는 동네에서 지포(紙砲 : 딱총)를 놓는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왕의 행차나 칙사의 위로, 신임 사또를 위한 축하연 등에서 나례는 수시로 놀기도 하였다. 이때 나례에서 하던<NAME>와 함께 광대들의 창과 예능, 기생들의 춤이 공연되었다. 우인·배우·창우·광대·재인·현수재인·수척·승·백정·희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궁중의식에서 벗어나<NAME>화하게 되자, 사회의 천대받던 계층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에 악공들의 반주와 기녀의 춤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나희 또는 잡희라 불렸다. 또한 여악도<NAME>하여 이를 더욱 즐겁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관상감이 나례를 관장하였고, 나례청이 나례를 관장하였다. 나례에 참여하고 잡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관에 소속되어 있다가 양반 대가의<NAME>이나 혼사에도 불려가서<NAME>하였다. 인정전·사정전·명정전 뜰에서 나례를 행하였는데, 얼굴에는 사람과 짐승의 여러 모습이 있었고 표정에는 탈춤 효과를 내었다. 무대는 붕을 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산차 화대라는 큰 수레가 달린 차에 봉각을 짓고 장치도 하고 연주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편, 윤차란 잡상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만든 좌판과 같은 것을 만들어 바퀴 달린 차 위에 놓아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례는 세밑에 가정과 대궐에서 악귀를 쫓는 벽사에서 백희나 잡희로<NAME>됨에 따라 종교성은 희미해지고 점차 놀이로 변해갔다. 현재 대궐에서 행하던 나례 의식은 사라졌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섣달그믐날 대청소를 하고 밤중에 폭죽을 터뜨려 정하고 신성하게 신년을 맞이하려는 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
27339f1f-586c-44ff-b5fb-43899ce0074b | source05/encykorea/SOC21700.txt | 새싹회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460 | CC BY | 291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956년 1월 아동문학가<NAME>중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뿌리는 광복 후의 노래 동무회 또는 1933년 창립된 계수나무회이다. 계수나무회는 <봄나들이>·<달 맞이>·<낮에 나온 반달>·<휘파람> 등의 동요를 라디오를 통해 온 세상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는가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 전통이 노래 동무 회로 이어져 <졸업식 노래>·<어린이날 노래>·<기찻길 옆>·<옹달샘>·<고향땅> 등 많은 동요를 방송을 통해 전국에 전파시켰다. 새싹회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어린이의 건전한 정신 함양과 복리를 증진시키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소파상·장한 어머니상·새싹문학상 등의 시상 행사와 글짓기 대회·노래비 세우기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소파상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소파<NAME>을 기리기 위해 1957년부터 해마다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지금까지 동요작곡가 윤극영(尹克榮), 고아원 창설자 오긍선(吳兢善), 6·25전쟁 때 전쟁고아의 은인이었던 미 공군 대령 헤스, 일본에서 ‘한글 펴는데’를 운영하면서 우리말을 지켜온<NAME>(金海成)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장한 어머니상’은 1961년부터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들에게 주었으며, 어머니 뱃사공인 외딴섬의 박승이(朴承伊), 정경화(鄭京和)·정명화(鄭明和) 등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음악가 삼 남매를 키운 이원숙(李元淑), 독신으로 기독교 부녀 사업에 평생을 바친 하와이의 박(朴) 에스터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새싹문학상’은 1973년부터 좋은 아동문학작품을 뽑아서 시상하고 있는데, 서정슬·피천득(皮千得)·이정화·이석현·황영애(黃永愛)·황(黃)베드로·이해인(李海仁) 등이 수상하였다. 새싹회는 1978년 이후 서울·부산·대전·대구·전주·광주·원주에서 일제히 여는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를 개최하여 1999년 현재 24회를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여는 세종 글짓기 대회, 1985년 이후 한국 일보사와 공동으로 여는 해외 새싹 글짓기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우리나라 신시 창작 60돌을 기념하여 1968년부터 벌이고 있는 동요의 고향에 노래비 세우기 운동이 특기할 만하다. 이 사업 결과 마산에 이원수(李元壽)의 고향의 봄, 울산에 서덕출(徐德出)의 봄 편지, 경주에 박목월(朴木月)의 얼룩송아지, 수원에 홍난파(洪蘭坡)의 고향의 봄(악보), 충주에 권태응(權泰應)의 감자꽃, 서울에 윤극영의 반달과<NAME>중의 새 나라의 어린이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졌다. 새싹 회의 정기간행물은 1977년 이후 간행되는 계간 새싹문학이다. 현재 사무실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에 있는 대우빌딩에 있다. 앞으로 새싹의 벗<NAME>중 전집 전 30권을 비롯하여 동요집 그 얼마나 고마우냐·반갑구나 반가워·아흔 살 어린이 등을 출간할 예정이며, 어린이 사업에 큰 업적을 남긴<NAME>중을 위하여 노래의 단비로 새싹을 가꾸며를 출간할 계획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새싹회
### 내용:
1956년 1월 아동문학가<NAME>중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뿌리는 광복 후의 노래 동무회 또는 1933년 창립된 계수나무회이다. 계수나무회는 <봄나들이>·<달 맞이>·<낮에 나온 반달>·<휘파람> 등의 동요를 라디오를 통해 온 세상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는가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 전통이 노래 동무 회로 이어져 <졸업식 노래>·<어린이날 노래>·<기찻길 옆>·<옹달샘>·<고향땅> 등 많은 동요를 방송을 통해 전국에 전파시켰다. 새싹회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어린이의 건전한 정신 함양과 복리를 증진시키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소파상·장한 어머니상·새싹문학상 등의 시상 행사와 글짓기 대회·노래비 세우기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소파상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소파<NAME>을 기리기 위해 1957년부터 해마다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지금까지 동요작곡가 윤극영(尹克榮), 고아원 창설자 오긍선(吳兢善), 6·25전쟁 때 전쟁고아의 은인이었던 미 공군 대령 헤스, 일본에서 ‘한글 펴는데’를 운영하면서 우리말을 지켜온<NAME>(金海成)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장한 어머니상’은 1961년부터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들에게 주었으며, 어머니 뱃사공인 외딴섬의 박승이(朴承伊), 정경화(鄭京和)·정명화(鄭明和) 등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음악가 삼 남매를 키운 이원숙(李元淑), 독신으로 기독교 부녀 사업에 평생을 바친 하와이의 박(朴) 에스터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새싹문학상’은 1973년부터 좋은 아동문학작품을 뽑아서 시상하고 있는데, 서정슬·피천득(皮千得)·이정화·이석현·황영애(黃永愛)·황(黃)베드로·이해인(李海仁) 등이 수상하였다. 새싹회는 1978년 이후 서울·부산·대전·대구·전주·광주·원주에서 일제히 여는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를 개최하여 1999년 현재 24회를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여는 세종 글짓기 대회, 1985년 이후 한국 일보사와 공동으로 여는 해외 새싹 글짓기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우리나라 신시 창작 60돌을 기념하여 1968년부터 벌이고 있는 동요의 고향에 노래비 세우기 운동이 특기할 만하다. 이 사업 결과 마산에 이원수(李元壽)의 고향의 봄, 울산에 서덕출(徐德出)의 봄 편지, 경주에 박목월(朴木月)의 얼룩송아지, 수원에 홍난파(洪蘭坡)의 고향의 봄(악보), 충주에 권태응(權泰應)의 감자꽃, 서울에 윤극영의 반달과<NAME>중의 새 나라의 어린이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졌다. 새싹 회의 정기간행물은 1977년 이후 간행되는 계간 새싹문학이다. 현재 사무실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에 있는 대우빌딩에 있다. 앞으로 새싹의 벗<NAME>중 전집 전 30권을 비롯하여 동요집 그 얼마나 고마우냐·반갑구나 반가워·아흔 살 어린이 등을 출간할 예정이며, 어린이 사업에 큰 업적을 남긴<NAME>중을 위하여 노래의 단비로 새싹을 가꾸며를 출간할 계획이다. |
853cb6bc-01cc-4f6d-9320-15ca53446336 | source05/encykorea/MED12972.txt | 동인도
(銅人圖)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740 | CC BY | 236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한의학에서는 신체의 바깥쪽에 있는 오장 육부의 병이 나타나는 자리를 경락이라 하며, 이를 침이나 뜸으로 자극함으로써 병을 낫게 한다. 그리고 이 오장 육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위치를 그림으로 표시한 인체도를 동인도라 하였다. 침구와 뜸 뜨는 자리를 그린 것이라 하여 침구도, 침 놓을 자리 즉 경혈을 표시한 것이라 하여 경혈도, 경락을 그려놓은 것이라 하여 경락도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린 이 동인도는 침구를 놓는다. 명당 도라는 별칭도 있다. 최초 기록은 고구려 평원왕 3년(561)에 중국 오나라의 지총이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가지고 간 의서 등 164권의 책 가운데 명당도가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고구려 승려 안작득지가 645년 일본에 침술을 전했으며, 선덕여왕 때 일본인이 신라로 건너와 침구술을 배우고 돌아와 침박사가 되었다는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동인도의 보급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려 시대 과거제도 중 의학 분야는 1136년(인종 14)에 의업(醫業)과 주금업(呪禁業 고려 때 시험 중 잡과의 한 과목)으로 더욱 세분되었는데, 둘 다 침구와 관계되는 명당경(明堂經)·침경(鍼經)·맥경(脈經) 등이 시험과목으로 포함되어 있는 점이라든가, 조선시대 왕실에서 구리로 사람 모양을 만들고 여기에 경락과 경혈을 표시해놓은 소위 동인(銅人)을 제작하여 의학 교육 보조재료로 쓰였던 점을 감안해 볼 때 동인도의 발달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동인도는 목판본과 필사본의 두 가지가 전해지며, 필사본 중에는 채색된 것도 있다. 몸의 앞면·뒷면 혹은 앞뒤 측면을 한 조로 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더 자세한 것은 전후, 좌우, 측면의 경락과 경혈을 각각 따로 한 장씩 그린 것도 전한다. 휴대용 동인도는 병풍식이나 딱지식으로 접어서 부피가 작고 쉽게 펴볼 수 있도록 했다. 주로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도록 한 것이 많다. 현재에도 침구 교육용으로 쓰이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동인도
(銅人圖)
### 내용:
한의학에서는 신체의 바깥쪽에 있는 오장 육부의 병이 나타나는 자리를 경락이라 하며, 이를 침이나 뜸으로 자극함으로써 병을 낫게 한다. 그리고 이 오장 육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위치를 그림으로 표시한 인체도를 동인도라 하였다. 침구와 뜸 뜨는 자리를 그린 것이라 하여 침구도, 침 놓을 자리 즉 경혈을 표시한 것이라 하여 경혈도, 경락을 그려놓은 것이라 하여 경락도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린 이 동인도는 침구를 놓는다. 명당 도라는 별칭도 있다. 최초 기록은 고구려 평원왕 3년(561)에 중국 오나라의 지총이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가지고 간 의서 등 164권의 책 가운데 명당도가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고구려 승려 안작득지가 645년 일본에 침술을 전했으며, 선덕여왕 때 일본인이 신라로 건너와 침구술을 배우고 돌아와 침박사가 되었다는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동인도의 보급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려 시대 과거제도 중 의학 분야는 1136년(인종 14)에 의업(醫業)과 주금업(呪禁業 고려 때 시험 중 잡과의 한 과목)으로 더욱 세분되었는데, 둘 다 침구와 관계되는 명당경(明堂經)·침경(鍼經)·맥경(脈經) 등이 시험과목으로 포함되어 있는 점이라든가, 조선시대 왕실에서 구리로 사람 모양을 만들고 여기에 경락과 경혈을 표시해놓은 소위 동인(銅人)을 제작하여 의학 교육 보조재료로 쓰였던 점을 감안해 볼 때 동인도의 발달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동인도는 목판본과 필사본의 두 가지가 전해지며, 필사본 중에는 채색된 것도 있다. 몸의 앞면·뒷면 혹은 앞뒤 측면을 한 조로 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더 자세한 것은 전후, 좌우, 측면의 경락과 경혈을 각각 따로 한 장씩 그린 것도 전한다. 휴대용 동인도는 병풍식이나 딱지식으로 접어서 부피가 작고 쉽게 펴볼 수 있도록 했다. 주로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도록 한 것이 많다. 현재에도 침구 교육용으로 쓰이고 있다. |
289b1326-13ad-4486-810d-7f9051f3c3a5 | source05/encykorea/ECO23275.txt | 신편은행부기학
(新編銀行簿記學)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499 | CC BY | 355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휘문관에서 1908년 유승 겸의 교열을 거쳐서 간행되었다. 서론·총론과 함께 총 1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은행 업무를 다룬 것은 서양의 복식부기 원리에 의해서이다. 제1장과 2장에서는 은행 업무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기본적인 대차 원리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 상업부 기서와는 다르게 거기에서 거래의 8요소는 8질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제3장에서는 자산 계산, 부채 계산, 자산 부채 계산, 자산 부채 계산, 수입 계산, 지출 계산 등을 다루고, 제4장에서는 계산 설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업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5장에서는 상업 부기의 구분(, ), 계산(, )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타점과의 대차를 기록하기 위해 타점 계산을 할 때는 당지과·타지과라는 계정을 사용한다. 제6장에서는 은행의 업무 분담에 대해 설명했다. 제7장에서는 전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하다. 수납전표·지불전표·이획전표(, )는 현금식 분개, 이획전표는 현금식 분개이다. 제8장에서는 주요부와 보조부로 구분하여 장부조직으로 분류하고, 주요부는 일기장과 총 계산 원장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업무가 복잡할 때는 다시 보통일기장·증보일기장·일체장의 세 가지로 일기장을 나눈다. 보통 일기장은 매일의 거래를 거래 발생순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계정에 관한 거래를 분류하여 기록하고 합계액을 총계정원장에 전기하는 것을 말한다. 증보 일기장은 부정기 임금(당좌예금)과 같이 거래가 빈번한 것에 대해 별도로 일기장에 기재하였다가 영업이 종료된 뒤에 합계액을 일기장에 전기하도록 하였다. 일체장은 일체와 지점의 거래로서 본점과 대체관계가 생기는 대차거래를 일기장에 불기입하고 여기에 기입했다가 직접 총계정원장에 일괄 전기하는 특수분 계장이다. 제9장에서는 각과 처무 절차에 대해 설명하였다. 제10장에서는 타점 및 지점 간의 거래에서 위체인 은 타점계정 잔액을, 교환인은 어음교환에서 교환끝을 의미한다는 등의 내용을 서술하였다. 제 보고서의 작성과 수형 교환에 대한 내용은 제11장과 12장에서 각각 다루고 있다. 제13장에서는 결산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은행은 상품의 재고조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재고 표는 작성하지 않는다. 결산 기일 이전에 예금 및 대여금의 이자 계산은 정리하고, 기타 거래급·미수·미경과 분 계상에는 언급이 없다. 결산은 연 2회, 6월과 12월 말에 하고 그 절차는 ① 월계 표(試算表)의 작성, ② 보조기입장의 마감과 총계정원장 해당 과목 잔액과 대조, ③ 보조원장의 마감과 각 계정 잔액의 합계와 총계정원장 해당 과목 잔액의 대조, ④ 총계정원장의 각 계정의 마감은 자산 부채에 관한 계정은 잔액을 금액이 적은 편에 주서(朱書) 하여 마감, ⑤ 차기 계정의 재개는 차기 최초의 일자로서 각 계정의 잔액을 기록, ⑥ 본점의 손익표(損益計算書), 대차대조표 및 재산목록을 작성, ⑦ 각 지점의 결산보고서가 도착하면 본 지점 합병의 손익표·대차대조표·재산목록을 작성한다는 순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부기서를 모범으로 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신편은행부기학
(新編銀行簿記學)
### 내용:
휘문관에서 1908년 유승 겸의 교열을 거쳐서 간행되었다. 서론·총론과 함께 총 1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은행 업무를 다룬 것은 서양의 복식부기 원리에 의해서이다. 제1장과 2장에서는 은행 업무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기본적인 대차 원리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 상업부 기서와는 다르게 거기에서 거래의 8요소는 8질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제3장에서는 자산 계산, 부채 계산, 자산 부채 계산, 자산 부채 계산, 수입 계산, 지출 계산 등을 다루고, 제4장에서는 계산 설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업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5장에서는 상업 부기의 구분(, ), 계산(, )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타점과의 대차를 기록하기 위해 타점 계산을 할 때는 당지과·타지과라는 계정을 사용한다. 제6장에서는 은행의 업무 분담에 대해 설명했다. 제7장에서는 전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하다. 수납전표·지불전표·이획전표(, )는 현금식 분개, 이획전표는 현금식 분개이다. 제8장에서는 주요부와 보조부로 구분하여 장부조직으로 분류하고, 주요부는 일기장과 총 계산 원장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업무가 복잡할 때는 다시 보통일기장·증보일기장·일체장의 세 가지로 일기장을 나눈다. 보통 일기장은 매일의 거래를 거래 발생순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계정에 관한 거래를 분류하여 기록하고 합계액을 총계정원장에 전기하는 것을 말한다. 증보 일기장은 부정기 임금(당좌예금)과 같이 거래가 빈번한 것에 대해 별도로 일기장에 기재하였다가 영업이 종료된 뒤에 합계액을 일기장에 전기하도록 하였다. 일체장은 일체와 지점의 거래로서 본점과 대체관계가 생기는 대차거래를 일기장에 불기입하고 여기에 기입했다가 직접 총계정원장에 일괄 전기하는 특수분 계장이다. 제9장에서는 각과 처무 절차에 대해 설명하였다. 제10장에서는 타점 및 지점 간의 거래에서 위체인 은 타점계정 잔액을, 교환인은 어음교환에서 교환끝을 의미한다는 등의 내용을 서술하였다. 제 보고서의 작성과 수형 교환에 대한 내용은 제11장과 12장에서 각각 다루고 있다. 제13장에서는 결산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은행은 상품의 재고조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재고 표는 작성하지 않는다. 결산 기일 이전에 예금 및 대여금의 이자 계산은 정리하고, 기타 거래급·미수·미경과 분 계상에는 언급이 없다. 결산은 연 2회, 6월과 12월 말에 하고 그 절차는 ① 월계 표(試算表)의 작성, ② 보조기입장의 마감과 총계정원장 해당 과목 잔액과 대조, ③ 보조원장의 마감과 각 계정 잔액의 합계와 총계정원장 해당 과목 잔액의 대조, ④ 총계정원장의 각 계정의 마감은 자산 부채에 관한 계정은 잔액을 금액이 적은 편에 주서(朱書) 하여 마감, ⑤ 차기 계정의 재개는 차기 최초의 일자로서 각 계정의 잔액을 기록, ⑥ 본점의 손익표(損益計算書), 대차대조표 및 재산목록을 작성, ⑦ 각 지점의 결산보고서가 도착하면 본 지점 합병의 손익표·대차대조표·재산목록을 작성한다는 순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부기서를 모범으로 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
321f7fa8-cc7c-42c3-b684-46d1822949b0 | source05/encykorea/LAW49956.txt | 중앙노동위원회
(中央勞動委員會)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60 | CC BY | 297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노동위원회는 노·사·공 3자로 구성된 준 사법적인 합의제 행정기관으로, 중앙노동위원회와 12개의 지방노동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본적으로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의 2심 구조로 운영된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방노동위원회 및 특별노동위원회의 처분에 대한 재심사건, 2 이상의 지방노동위원회의 관할구역에 걸친 노동쟁의의 조정사건, 다른 법률에 의하여 그의 권한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된 사건을 관장한다. 중앙노동위원회는 근로자위원·사용자위원 10~50인 이하, 공익위원 10~70인 이하의 범위 안에서 구성되며, 근로자위원은 노동조합이 추천한 자 중에서 위촉하고, 사용자위원은 사용자단체가 추천한 자 중에서 위촉하되,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의 경우에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위촉한다. 정무직(장관급)으로서 중앙노동위원회 및 지방노동위원회의 예산·인사·교육훈련 기타 행정사무를 총괄하고, 소속 공무원을 지휘·감독하는 직책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이다. 중앙노동위원회 상임위원은 공익위원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의 추천과 고용노동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중앙노동위원회의 공익위원의 경우 당해 노동위원회 위원장·노동조합·사용자단체가 각각 추천한 자 중에서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가 순차적으로 배제하고 남은 자를 위촉대상 공익위원으로 하고, 그 위촉 대상 공익위원 중에서 중앙노동위원회의 공익위원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위촉한다.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은 3년마다 연임할 수 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1953년 3월 8일 노동위원회법 제정·공포(법률 제281호)로 설치되었으며, 이후 개정을 통해 부당노동행위 판정 및 구제명령권을 부여받았다. 1997년 3월 13일 노동위원회 법(법률 제5311호)이 새로 제정(법률 제5311호) 되었다. 이 법을 통해 노동위원회의 구성·운영 및 기능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어 노동위원회의 독립성·전문성·공정성이 강화되었고,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의 직급이 격상(1급→장관급) 되었으며, 공익위원을 심판 담당과 조정담당 위원으로 구분·위촉하여 전문성을 제고하였다(2006년부터는 차별 시정담당 공익위원을 추가·세분함).이후의 법 개정에 따라 2007년에는 기간제·단시간·파견근로자에 대한 차별 시정 업무가, 2008년에는 필수공익사업의 필수유지업무 유지·운영 수준 결정 업무가 노동위원회의 업무로 새로 도입되었으며, 노동위원회의 위원 정원도 근로자위원·사용자위원은 각 10인에서 50인, 공익위원은 10인에서 70인으로 조정되어 업무량에 따라 신축적으로 위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앙노동위원회는 고용노동부에 속하지만 고용노동부 장관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행정위원회로서 업무처리를 독립적으로 한다. 중앙노동위원회는 노사관계<NAME>관으로서의 실질을 부여하기 위해 노·사·공익을 대표하는 3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준 사법적 권한과 조정적 권한이 병존하고 있고, 입법적 권한도 인정되고 있다.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의 권한은 한편으로는 노동위원회 규칙 제정과 업무처리의 기본 방침 지시와 재심의 권한을 통해 사건 처리에 있어서 공정성·신중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효율적인 업무 통합을 위해서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중앙노동위원회
(中央勞動委員會)
### 내용:
노동위원회는 노·사·공 3자로 구성된 준 사법적인 합의제 행정기관으로, 중앙노동위원회와 12개의 지방노동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본적으로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의 2심 구조로 운영된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방노동위원회 및 특별노동위원회의 처분에 대한 재심사건, 2 이상의 지방노동위원회의 관할구역에 걸친 노동쟁의의 조정사건, 다른 법률에 의하여 그의 권한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된 사건을 관장한다. 중앙노동위원회는 근로자위원·사용자위원 10~50인 이하, 공익위원 10~70인 이하의 범위 안에서 구성되며, 근로자위원은 노동조합이 추천한 자 중에서 위촉하고, 사용자위원은 사용자단체가 추천한 자 중에서 위촉하되,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의 경우에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위촉한다. 정무직(장관급)으로서 중앙노동위원회 및 지방노동위원회의 예산·인사·교육훈련 기타 행정사무를 총괄하고, 소속 공무원을 지휘·감독하는 직책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이다. 중앙노동위원회 상임위원은 공익위원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의 추천과 고용노동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중앙노동위원회의 공익위원의 경우 당해 노동위원회 위원장·노동조합·사용자단체가 각각 추천한 자 중에서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가 순차적으로 배제하고 남은 자를 위촉대상 공익위원으로 하고, 그 위촉 대상 공익위원 중에서 중앙노동위원회의 공익위원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위촉한다.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은 3년마다 연임할 수 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1953년 3월 8일 노동위원회법 제정·공포(법률 제281호)로 설치되었으며, 이후 개정을 통해 부당노동행위 판정 및 구제명령권을 부여받았다. 1997년 3월 13일 노동위원회 법(법률 제5311호)이 새로 제정(법률 제5311호) 되었다. 이 법을 통해 노동위원회의 구성·운영 및 기능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어 노동위원회의 독립성·전문성·공정성이 강화되었고,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의 직급이 격상(1급→장관급) 되었으며, 공익위원을 심판 담당과 조정담당 위원으로 구분·위촉하여 전문성을 제고하였다(2006년부터는 차별 시정담당 공익위원을 추가·세분함).이후의 법 개정에 따라 2007년에는 기간제·단시간·파견근로자에 대한 차별 시정 업무가, 2008년에는 필수공익사업의 필수유지업무 유지·운영 수준 결정 업무가 노동위원회의 업무로 새로 도입되었으며, 노동위원회의 위원 정원도 근로자위원·사용자위원은 각 10인에서 50인, 공익위원은 10인에서 70인으로 조정되어 업무량에 따라 신축적으로 위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앙노동위원회는 고용노동부에 속하지만 고용노동부 장관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행정위원회로서 업무처리를 독립적으로 한다. 중앙노동위원회는 노사관계<NAME>관으로서의 실질을 부여하기 위해 노·사·공익을 대표하는 3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준 사법적 권한과 조정적 권한이 병존하고 있고, 입법적 권한도 인정되고 있다.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의 권한은 한편으로는 노동위원회 규칙 제정과 업무처리의 기본 방침 지시와 재심의 권한을 통해 사건 처리에 있어서 공정성·신중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효율적인 업무 통합을 위해서이다. |
1ad8cc8e-4dfb-4ccc-be6d-f562b7a92989 | source05/encykorea/SOC23174.txt | 소문놀이
(所聞놀이)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광언"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062 | CC BY | 70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여러 명의 아이들이 반씩 짝을 이뤄 마주 보며 나란히 앉는다. 그리고 양편에서 대장을 한 명씩 뽑아, 어떤 말을 퍼뜨리기로 약속하고 상대편의 첫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소문을 들은 아이는 옆 아이에게 귓속말로 옮기고 이렇게 해서 끝 아이에게까지 전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여러 아이를 거친 뒤에 바로 소문이 퍼졌는지를 확인하고 바로 전한 패가 승리하게 된다. 소문은 그대로 전해질 것 같으나 간혹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와 웃음을 자아낸다. 이 놀이는 사람이 많을수록 흥미를 얻게 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소문놀이
(所聞놀이)
### 내용:
여러 명의 아이들이 반씩 짝을 이뤄 마주 보며 나란히 앉는다. 그리고 양편에서 대장을 한 명씩 뽑아, 어떤 말을 퍼뜨리기로 약속하고 상대편의 첫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소문을 들은 아이는 옆 아이에게 귓속말로 옮기고 이렇게 해서 끝 아이에게까지 전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여러 아이를 거친 뒤에 바로 소문이 퍼졌는지를 확인하고 바로 전한 패가 승리하게 된다. 소문은 그대로 전해질 것 같으나 간혹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와 웃음을 자아낸다. 이 놀이는 사람이 많을수록 흥미를 얻게 된다. |
c2f1fe37-2a2a-492c-9cbb-c385f863ed82 | source05/encykorea/LAW4687.txt | 국립과학수사연구원
(國立科學搜査硏究院)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199 | CC BY | 2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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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임운영기관은 행정안전부 소속이다. 소속 직원을 지휘, 감독하는 것은 원장의 고유 권한이다. 연구원은 관공서나 공무원의 요청에 따라 범죄수사에 필요한 감식을 할 수 있다. 1948년 11월 내무부 치안국에 감식과를 설치하고 법의 학계·이화 학계 및 지문계를 설치했으며, 1935년 4월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 법의학·이화학(물리학과 화학) 및 형사 사진실이 설치되었다. 치안국 수사지도과 감식계에서 지문 감식 사무는 담당하고, 법의학 및 이화학적 감식 사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관장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직제가 1955년 3월 제정, 공포되었다. 서무과·법의학과·이화학과의 3과가 1962년 1월 직제를 확대 개편하면서 설치되었다. 1987년 5월 직제가 개정되어 서무과·법의학 1과·법의학 2과·이화학 1과·이화학 2과·이화학 3과 등 6과를 두었다.
1997년 1월 당시 수석연구관과 법의 학부에 법의학·생물학·범죄 심리·문서 사진 등 4개과, 법과 학부에 약 독물·마약분석·화학분석·물리분석 및 교통 광학 등 5개과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법의학과는 범의·병리·경조직 등을 연구하고 부검을 관리하며, 생물학과는 면역과 혈청을 연구하고 유전자를 분석하며, 문서 사진과는 문서를 감정하고 형사 사진을 분석·관리한다. 약 독물 관리과는 약물과 식품을 연구하고 독물 및 기기를 분석하며, 화학분석과는 고분자·유기학·무기학을 연구하고, 교통 광학과는 차량과 역학을 연구하고, 약 독물 관리과는 약물과 식품을 연구하고 독물 및 기기를 분석한다. 연구원의 직원은 범죄수사를 할 수 없으며 이해관계가 있는 사범에 대해서는 감식을 할 수 없다. 연구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은 개별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연구 실적을 보고해야 한다. 국립 과학수사연구원으로 기관명을 변경한 것은 2010년 8월이다. 2013년 11월 국립 과학수사연구원이 강원도 원주 혁신도시(강원도 원주시 입춘로 10)로 이전하고, 이듬해 12월 대구과학수사연구소를 열었다. 2018년 8월 현재 행정 지원과, 연구기획과, 법 생화학부(법 유전자과, 법독성학과, 법화 학과), 법공 학부(법안 전과, 디지털 분석과, 교통사고분석과, 법 심리과), 중앙법의학센터(법의관) 등과 함께 지방에 과학수사연구소(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를 두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국립과학수사연구원
(國立科學搜査硏究院)
### 내용:
책임운영기관은 행정안전부 소속이다. 소속 직원을 지휘, 감독하는 것은 원장의 고유 권한이다. 연구원은 관공서나 공무원의 요청에 따라 범죄수사에 필요한 감식을 할 수 있다. 1948년 11월 내무부 치안국에 감식과를 설치하고 법의 학계·이화 학계 및 지문계를 설치했으며, 1935년 4월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 법의학·이화학(물리학과 화학) 및 형사 사진실이 설치되었다. 치안국 수사지도과 감식계에서 지문 감식 사무는 담당하고, 법의학 및 이화학적 감식 사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관장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직제가 1955년 3월 제정, 공포되었다. 서무과·법의학과·이화학과의 3과가 1962년 1월 직제를 확대 개편하면서 설치되었다. 1987년 5월 직제가 개정되어 서무과·법의학 1과·법의학 2과·이화학 1과·이화학 2과·이화학 3과 등 6과를 두었다.
1997년 1월 당시 수석연구관과 법의 학부에 법의학·생물학·범죄 심리·문서 사진 등 4개과, 법과 학부에 약 독물·마약분석·화학분석·물리분석 및 교통 광학 등 5개과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법의학과는 범의·병리·경조직 등을 연구하고 부검을 관리하며, 생물학과는 면역과 혈청을 연구하고 유전자를 분석하며, 문서 사진과는 문서를 감정하고 형사 사진을 분석·관리한다. 약 독물 관리과는 약물과 식품을 연구하고 독물 및 기기를 분석하며, 화학분석과는 고분자·유기학·무기학을 연구하고, 교통 광학과는 차량과 역학을 연구하고, 약 독물 관리과는 약물과 식품을 연구하고 독물 및 기기를 분석한다. 연구원의 직원은 범죄수사를 할 수 없으며 이해관계가 있는 사범에 대해서는 감식을 할 수 없다. 연구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은 개별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연구 실적을 보고해야 한다. 국립 과학수사연구원으로 기관명을 변경한 것은 2010년 8월이다. 2013년 11월 국립 과학수사연구원이 강원도 원주 혁신도시(강원도 원주시 입춘로 10)로 이전하고, 이듬해 12월 대구과학수사연구소를 열었다. 2018년 8월 현재 행정 지원과, 연구기획과, 법 생화학부(법 유전자과, 법독성학과, 법화 학과), 법공 학부(법안 전과, 디지털 분석과, 교통사고분석과, 법 심리과), 중앙법의학센터(법의관) 등과 함께 지방에 과학수사연구소(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를 두고 있다. |
4ff04874-1a1b-4a90-978a-f86b16d859ca | source05/encykorea/SOC10492.txt | 노사관계
(勞使關係)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772 | CC BY | 2,263 | {
"main": "문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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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문화권에서는 노사(노동)관계를 인적자원 관리(human resources management)와 함께 산업관계(industrial relations)의 두 핵심 분야로 거론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노사관계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노사(노동)관계는 넓은 뜻에서 생산을 둘러싼 일체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 of product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즉, 고용의 직접 당사자인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와 각종 시민단체(civic society) 등이 고용조건은 물론, 산업 전반에 따른 의사결정을 둘러싸고 조성하는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노사(노동)관계는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산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전개과정에 따라 그 기구와 내용도 함께 변하고 있다.즉, 기업 내 의사결정이 개별 고용계약에 맡겨지던 산업혁명 초기에는 노사(노동)관계가 개별기업 내 사용자와 개별노동자 간의 관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적 고용관행, 즉 사용자의 임의고용원칙(principle of employment at will)에 대항하여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자, 노사(노동)관계도 사용자와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사회관계로 바뀌었다.
그리고 산업화와 함께 정치적 민주의식이 확산되어 노동자의 단결권이 보장되자, 조합도 자주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근대적 노사(노동)관계에서는 노사간의 대등성과 자율성을 기본 요건으로 거론하게 되었다.한편, 공업화의 발전과 함께 피고용인구가 급증하자 노사(노동)관계는 경제질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존립의의를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노·사·정부라는 세 당사자가 행위주체가 되는 3자 구성원칙(principle of tripartism)의 사회적 관계로 자리잡은 것은 노동문제가 노사 양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 발전하면서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 원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행위주체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용이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고용은 노사간의 이해조절과 협조증진이라는 상호보완의 과제를 안고 있다. 즉, 고용은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피고용자에게는 생계유지를 위한 수입의 근거가 되고, 나아가 경제운영의 기반인 유효수요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용은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협력적 측면과 함께 노동조건의 결정에 따른 대립적 측면이 있으며, 노사(노동)관계의 주요 제도 또한 이해조절을 위한 단체교섭과 노사간의 협조를 증진하기 위한 노사협의로 나뉘어진다.그리고 이 같은 노사(노동)관계의 두 기능분야는 합리적 노사(노동)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불가결한 요소인 동시에 상호보완적 기능을 발휘하는 주요 장치가 된다.
한편, 노사(노동)관계는 고용을 근거로 조성되지만 전체 사회의 문화나 정치질서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좌우된다. 예컨대, 하향적인 정치나 사회질서,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용관행, 그리고 계획·통제 또는 일부 독과점기업에 의해 시장질서가 좌우되고 있는 사회환경하에서는 민주적 노사(노동)관계보다 전제적 노동관계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특정 국가의 노사(노동)관계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기반이 되는 역사와 정치구조 등 문화적 배경에 대한 검토가 불가피하게 된다.노사(노동)관계를 임금노동자 개개인과 사용자 간의 관계로 파악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 같은 뜻의 노사(노동)관계가 18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고공(雇工:머슴)과 이들을 고용한 양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관영공업에 임용된 사공(私工)과 관리자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노사(노동)관계를 노동단체와 사용자 간의 관계라기보다 근대적 의미로 정의한다면 구한말 개화기 이후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즉, 1898년 이규순(李奎淳) 등이<NAME>부두에서 47명의 노동자를 조직하여 노동조합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구한말 연해주로<NAME> 한인 광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광부단체와 러시아 광업회사 간의 집단적 관계에서부터 싹텄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노사(노동)관계는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일본 자본이 들어오고, 임금노동자가 등장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일제식민자본이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파행적이나마 공업이 발전하였고, 이와 함께 우리 경제구조도 일본경제에 예속되었다.
일본독점자본에 종속되어 만들어진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식민지 특유의 초과이윤 극대화를 기반으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식민지 초과이윤은 자본축적 초기단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제적 노사(노동)관계가 매개가 되어 실현되었는데, 당시 노사(노동)관계는 개인종업원을 대상으로 체결하는 고용계약이 기반이었다.
이로 인해 사용자가 고용조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종업원은 신분상의 예속마저 강요되는 전제적 노동관계가 조성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예속적이며 파행적인 공업화가 추진되었다.
즉, 일본인 자본가는 아무런 제한 없이 노동자를 혹사하여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었으며, 기업 내 의사결정을 일방적으로 주관하고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노사(노동)관계는 흔히 저임금·고한노동(sweat labor), 그리고 여성 및 연소노동자의 폭넓은 활용, 강권적이며 신분적 노사(노동)관계의 조성 등으로 특징지어진다.한편, 일제에 의한 강압적 노동통제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을 가져왔는데, 당시 국내 공업자본 중 94%가 일본인 소유임을 감안할 때, 이 같은 노동자의 집단행동이나 이 기간 중의 노동쟁의는 일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3·1운동을 비롯해 전국적인 민족저항운동 이후 이어지던 일제의 회유정책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조직화가 가능하였다.
또 조직노동자를 기반으로 그 역량 또한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노조조직의 이 같은 세력화를 규제하기 위해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규제를 마침내 제도화하였다.이 같은 치안유지법 제정으로 합법적 노동조직이나 활동전개가 불가능해지자 노동운동은 폭력을 수반한 저항운동으로 전환되었고, 1931년 일제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면서 군국체제로 식민지의 지배정책이 전환되면서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1930년대 말부터는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한 이른바 산업보국연맹만이 유일한 기업 내 단체로 군림했고,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광복과 함께 맞이하게 된 미군정 기간은 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개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북분단과 점령통치라는 타율적인 정치상황은 식민지경제구조를 청산하기보다 오히려 한국경제를 세계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분업체계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기본 경제구조가 이전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한반도 북부는 공업, 남한은 농업이라는 일제식민정책의 산물이 상호보완적 기능을 상실하자 남북한 모두에게 경제적 파행을 심화시켰고, 이로 인해 예속적인 노동관계도 한층 심화되었다. 이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유지되던 전제적 노사(노동)관계가 오히려 강화되어 일제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 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노동자의 자유로운 조직활동이 보장되고 조합세력이 확대되자 파업 또한 빈번하게 발생했고, 비조직 노동자까지 집단행동에 가담함으로써 노사간의 대립과 충돌은 이 기간 중 노동관계의 대표적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같은 상황에서도 사회주의이념을 기반으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결성(1945.11. )되고, 전평은 이후 정치지향적 활동에 몰두하였는데, 이 같은 전평 활동이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자 보수 노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 1946.3. 결성)만이 유일한 노동조직으로 남게 되었다.이후 한동안 대한노총이 노동운동을<NAME>게 된다. 노총이 노동운동을<NAME>던 1947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노동조합이 투쟁적 성격에서 벗어나 개방된 시장경제질서 내의 하나로 정착되며 그 활동도 경제영역에 국한하도록 개편되었다.
이 같은 재편과정은 노동법 제정을 통해 진행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법 제정 과정은 법이 생활규범이기보다 제도나 관행에 선행하여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정되는 특이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헌법>에 노동기본권(주로 노동삼권)이 명시되었고, 1953년에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삼권이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 그리고 <근로기준법>에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노동입법은 경제실상, 개별기업의 여건, 작업장 내 노사(노동)관계 등을 반영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집권층이 지향하는 정치이념 또는 하나의 당위성을 근거로 법제화된 것이기 때문에 법 내용과 법 운영 간에 큰 거리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더구나 이를 집행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법 내용과 법 집행 간에 그 괴리가 클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인 단체교섭일 경우 헌법과 노조법에는 모두 이를 적극 보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예외적인 것으로 아직도 정착되지 못하고 있으며, 기업에 따라서는 아예 외면되고 있는 실정이다.
단체교섭이 이처럼 정착되지 못한 이유는 교섭 당사자인 노동조합이나 노동관계법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즉, 법은 흔히 현실을 기반으로 하나의 관행이 조성되고 또 이 같은 관행에 사회적 합의와 규범의식이 싹틀 때 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등 개별 또는 집단노동관계법은 그 제정과정과 배경 모두가 이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즉, 노동조합정책이 처음 법제화된 1953년의 <노동조합법>에는 다양한 노동조합육성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같은 조합육성책이 사회적 합의나 노동관행 또는 경제적 실상에 근거를 둔 것이기보다는 오로지 정치적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따라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정법에는 노조육성지원책이 반영되어 있으나 이 같은 정부정책이 종속적 노사(노동)관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으며, 6·25전쟁(1950∼1953) 이후 1950년대의 정치·경제적 위기상황은 이 같은 종속적 노동관계를 오히려 한층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정부수립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의 경제상황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복구한다는 명분하에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한 관료독점자본이 가혹한 노동수탈을 자행하면서 전제적 노사(노동)관계가 한층 심화되었다. 5·16군사정변과 함께 개편된 1963년의 개정노동법도 변화된 고용관행이나 작업장 내 노사(노동)관계 실태와 무관하였다는 점에서는 법 제정 당시와 별로 다를 바 없다. 1963년도의 노동관계법 개정은 노조의 난립을 예방하고, 그 동안 노동단체의 병폐였던 정치세력과의 유착을 방지하며, 교섭이나 노사간의 대립보다는 노사간의 협의·협조를 촉진하여 경제개발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원하려는 또 다른 정치적 요구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1963년 법 개정 이후 1970년에 이르기까지 <노동조합법>에도 법운영이나 정부의 실제정책은<NAME>상 법 규정이나 명분과는 아주 달라 법제정 당시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노사(노동)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나 통제는 오히려 제도와 관행을 통해 한층 강화되었다. 유신정치시대가 시작된 1971년에 제정·공포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유신체제가 끝나고 새로운 군사정권이 수립된 1981년까지 시행되었는데, 정부의 의도는 노사(노동)관계에서 노사협조만을 정통시하려는 것에 보다 잘 드러나 있다. 즉, 이 법의 시행으로 사실상 규제 또는 유보된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유일한 규제수단인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사실상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유일한 규제수단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NAME>상의 노동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현상은 1980년대 초 명백히 드러난다. 1980년 새로운 군사정부가 출범하면서 개정된 <노동조합법>에서는 그간<NAME>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각종 노조육성방안마저 전면 삭제됨으로써, 그동안 이어져 오던 명목상의 조합육성책이 조합활동규제로 선회하는 노동조합정책상의 큰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즉, ① 유니온 숍(union shop) 등 노동조합 강제가입제도의 금지, ② 노동조합의 지역조직 불허, ③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정족수 도입, ④ 노동조합 상부단체의 기업단위교섭 관여 금지 등의 조항이 신설되어 노동조합 결성과 운영이 모두 규제대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 같은 대 조합정책으로 인해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은 모든 임금노동자가 제한 없이 가입하는 근로자의 보편적 단체가 아니라 일부 노동자만의 예외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크게 확대된 경제규모나 공업화와 더불어 급증한 임금노동자 수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에 가입된 조직노동자 수는 전체 인구의 2%를 밑도는 100만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더구나 이 같은 조직노동자 중에도 영향력 발휘가 기대되는 대기업 종사자나 지식층 근로자는 거의 예외 없이 배제되었던 것이 1987년 이전까지 우리 나라 노조의 실상이다.정치 및 사회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1987년 6·29선언을 계기로 정치적 민주화가 신장되고 노동기본권 보호가 강화되자 그동안 쌓인 노동자의 불만이 일시적으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쟁의로 이어졌고, 또 이러한 정치 및 사회환경 변화는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가져왔다. 1987년 개정노동관계법은 1980년의 조합활동규제를 부정하고, 노조를 육성·보호하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어 그 방향이 다시 바뀐다. 최저임금법은 기본권을 강화하기 위해 개별 근로관계에서도 제정되었다. 한편, 1991년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노동기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자 하였다. 1991년 야당이 다수이던 국회에서 시도된 노동조합법 개정안은 민간부문 종사자뿐 아니라 공무원(6급 이하)과 국공립 교원에게도 노동기본권을 적극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991년의 이와 같은 법개정 시도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개혁의 내용인 모든 제도나 보장도 실은 정치세력의 변화를 암시하는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1990년 이후 사회, 경제, 정치환경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노동관계에도 새로운 제도도입과 관행정립을 불러오게 하였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가입과 함께 세계화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 나라도 1992년 그 동안 UN 전문자문기구 중 유일하게 가입할 수 없었던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의 회원이 되었고, 뒤 이어 1996년 국제개발협력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에 참여하게 되었다.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동시에 우리 나라 역시 국제적 경기운영 규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앞두고 국제기구에 의해 국내 노동관계법이 ILO 기본 조약(core conventions)에 어긋나는 것을 개정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정부가 국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에 앞서 ILO의 결사의 자유와 관련되는 기본 조약(조약 제87호, 제98호 및 제151호)에 위배되는 국내 노동관계법 개정을 약속하면서 1996년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파동까지 겪게 되었다. 처음 국제기구와 약속한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 1996년 12월, 여당 단독으로 국회를 소집하여 노동관계법 개정을 처리하였다. 오직 경제적 필요성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한 내용만이 개정법에 반영되어 국내 노동계는 물론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왔고, 마침내 1997년 3월 1997년의 개정 노동법을 무효로 하고 다시 법을 개정하는 노동법개정 파동이 일어났다. 1997년에는 집단노동관계법과 개별노동관계법인 근로기준법도 노동관계법에 포함시켰다. 주요 내용은 1997년 도입된 정리해고제도를 1999년부터 시행하도록 유보한 것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통합하여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으로 바꾸고, 노사협의회법을 보완하여 근로자의 경영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근로자 경영참여촉진법으로 개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렇지만 이 같이 재개정된 법 내용도 경제실정과 동떨어진 노사 양측의 요구를 모두 외면한 것이라는 점에서 개정 이전 법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재개정된 법안은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 다시 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외환 부족으로 1997년 말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법 개정을 약정하면서 노동관계법의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편 정부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뒤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산업개편과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라는 새로운 국론조정기구를 발족시켰다. 현재 노사정위원회에서는 IMF의 요구사항인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 파견제도의 도입과 ILO 및 OECD의 요구사항인 노동기본권 강화, 특히 그 동안 노동3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공무원과 교원의<NAME> 보장을 결의함으로써 노동관계법 개정이 다시 공론화되고 있다. 연공서열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 고용관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ergers and acquisitions, M&A)에 따른 정리해고를 합법화하기 위한 새로운 고용관행의 도입이다. 또한 근로자 파견제도의 법제화는 비상용직 근로자(contingent worker)의 증가를 촉진함으로써 고용관계의 기반부터 변화시켜 앞으로의 노동관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노동정책은 노사간의 대등한 교섭력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노동3권을 바탕으로 교섭과 협의의 합리적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노사협의제의 강행이나 근로자의 일방적 협조를 강요하여 조성하려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정책기조는 1980년 노사협의회의 설치를 의무화한 <노사협의회법>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이 탈기업형태 또는 초기업형태인 산업별 조직으로 결성된 경우 종업원이 중심이 되어 노사간 공동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설치하는 기업 내적 제도이다. 따라서 노사협의회는 개별기업 수준에서는 종업원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이며 기업 내 유일한 종업원조직인 노사협의회도 그 기능은 노사간 공동 이해사항만을 다루도록 제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기능을 규제하는 이유는 노동조합과의 불필요한 마찰이나 근로자조직의 이원화를 방지하고, 단체교섭기능과 노사협의기능 간의 조화를 촉진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노사협의회제도는 그 설치대상이나 기능이 모두 노사협의제도의 본래 목적이나 성격을 외면한 채 설치 운영되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의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이 기업 단위 노조임에도 불구하고 노조가 결성된 사업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노사협의제도가 노동조합법에 의해 규제되던 시기(1963년 노동조합법)부터 <노사협의회법>이 독립법으로 제정된 1980년 이후에도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 결성 유무와 상관없이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일 경우 모두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기능도 노사간의 공동 이해 분야뿐 아니라 갈등해소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다루도록 규정되어 있다. 비록 타율적이지만 협의회가 설치되면서 비조직 사업장에서 노사간 대화를 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노조가 결성된 사업장일 경우 노사협의회로 인해 종업원조직이 이원화되었고, 이로 인해 노동조합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협의회 내의 근로자측 대표는 임금인상과 고용조건 개선 등 노동조합측의 모든 요구사항을 노사협의회에 정규적으로 보고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교섭기능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그나마 노동조합의 역할마저도 협의회의 설치로 인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협의제를 도입함으로써 노사간의 대화를 촉진하여 협력기반을 조성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실현되었으나, 노사협의제도는 긍정적 성과보다는 노사간의 새로운 갈등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노사협의제도는 근대적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인 노사 당사자 간의 자율적인 문제해결원칙은 외면한 채 노사문제에 대한 타율적 규제, 특히 정부 개입이 법제화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 주도형의 노사(노동)관계를 고착시켰고, 나아가 노사 당사자에 의한 자율성과 대등성을 크게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우리 나라의 노사(노동)관계는 단체교섭의 정착, 노사협의제의<NAME>, 분쟁조정 절차의 실용성 회복, 노동자의 합리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 강구, 비상용직 근로자(contingent worker)를 위한 대표기구 조성 등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합리적 노사(노동)관계는 사회정의와 산업민주주의 구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조성되어야 할 시급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특히 인적 자원만이 유일한 부존자원이라는 우리의 경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 없이는 경제안정이나 성장 모두 불가능하다.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은 합리적인 노동관계가 조성될 때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경제주체가 각자의 주장을 부담 없이 개진하고 이로 인한 갈등을 교섭과 타협을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할 때 산업 안정은 물론 경제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세계화와 함께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경쟁력 제고와 경제환경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그리고 안정된 노동관계<NAME>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 나라 노사(노동)관계를 합리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노사가 동반자로서의 대등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정착시켜야 하며, 그 제도적 장치인 교섭과 협의 사이에 합리적인 균형과 조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노사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개방된 시민사회의 안정은 노사간의 갈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표출된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즉, 노사(노동)관계정책의 기반이 단체교섭이나 노동조합 등 법에 보장된 조직과 기능이 갈등을 해소하는 합리적인 방안으로 적극 수용되어 이루어질 때 협조적 노사(노동)관계도 비로소 정착될 수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노사관계
(勞使關係)
### 내용:
영어문화권에서는 노사(노동)관계를 인적자원 관리(human resources management)와 함께 산업관계(industrial relations)의 두 핵심 분야로 거론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노사관계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노사(노동)관계는 넓은 뜻에서 생산을 둘러싼 일체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 of product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즉, 고용의 직접 당사자인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와 각종 시민단체(civic society) 등이 고용조건은 물론, 산업 전반에 따른 의사결정을 둘러싸고 조성하는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노사(노동)관계는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산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전개과정에 따라 그 기구와 내용도 함께 변하고 있다.즉, 기업 내 의사결정이 개별 고용계약에 맡겨지던 산업혁명 초기에는 노사(노동)관계가 개별기업 내 사용자와 개별노동자 간의 관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적 고용관행, 즉 사용자의 임의고용원칙(principle of employment at will)에 대항하여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자, 노사(노동)관계도 사용자와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사회관계로 바뀌었다.
그리고 산업화와 함께 정치적 민주의식이 확산되어 노동자의 단결권이 보장되자, 조합도 자주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근대적 노사(노동)관계에서는 노사간의 대등성과 자율성을 기본 요건으로 거론하게 되었다.한편, 공업화의 발전과 함께 피고용인구가 급증하자 노사(노동)관계는 경제질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존립의의를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노·사·정부라는 세 당사자가 행위주체가 되는 3자 구성원칙(principle of tripartism)의 사회적 관계로 자리잡은 것은 노동문제가 노사 양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 발전하면서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 원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행위주체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용이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고용은 노사간의 이해조절과 협조증진이라는 상호보완의 과제를 안고 있다. 즉, 고용은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피고용자에게는 생계유지를 위한 수입의 근거가 되고, 나아가 경제운영의 기반인 유효수요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용은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협력적 측면과 함께 노동조건의 결정에 따른 대립적 측면이 있으며, 노사(노동)관계의 주요 제도 또한 이해조절을 위한 단체교섭과 노사간의 협조를 증진하기 위한 노사협의로 나뉘어진다.그리고 이 같은 노사(노동)관계의 두 기능분야는 합리적 노사(노동)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불가결한 요소인 동시에 상호보완적 기능을 발휘하는 주요 장치가 된다.
한편, 노사(노동)관계는 고용을 근거로 조성되지만 전체 사회의 문화나 정치질서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좌우된다. 예컨대, 하향적인 정치나 사회질서,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용관행, 그리고 계획·통제 또는 일부 독과점기업에 의해 시장질서가 좌우되고 있는 사회환경하에서는 민주적 노사(노동)관계보다 전제적 노동관계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특정 국가의 노사(노동)관계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기반이 되는 역사와 정치구조 등 문화적 배경에 대한 검토가 불가피하게 된다.노사(노동)관계를 임금노동자 개개인과 사용자 간의 관계로 파악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 같은 뜻의 노사(노동)관계가 18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고공(雇工:머슴)과 이들을 고용한 양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관영공업에 임용된 사공(私工)과 관리자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노사(노동)관계를 노동단체와 사용자 간의 관계라기보다 근대적 의미로 정의한다면 구한말 개화기 이후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즉, 1898년 이규순(李奎淳) 등이<NAME>부두에서 47명의 노동자를 조직하여 노동조합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구한말 연해주로<NAME> 한인 광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광부단체와 러시아 광업회사 간의 집단적 관계에서부터 싹텄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노사(노동)관계는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일본 자본이 들어오고, 임금노동자가 등장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일제식민자본이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파행적이나마 공업이 발전하였고, 이와 함께 우리 경제구조도 일본경제에 예속되었다.
일본독점자본에 종속되어 만들어진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식민지 특유의 초과이윤 극대화를 기반으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식민지 초과이윤은 자본축적 초기단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제적 노사(노동)관계가 매개가 되어 실현되었는데, 당시 노사(노동)관계는 개인종업원을 대상으로 체결하는 고용계약이 기반이었다.
이로 인해 사용자가 고용조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종업원은 신분상의 예속마저 강요되는 전제적 노동관계가 조성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예속적이며 파행적인 공업화가 추진되었다.
즉, 일본인 자본가는 아무런 제한 없이 노동자를 혹사하여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었으며, 기업 내 의사결정을 일방적으로 주관하고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노사(노동)관계는 흔히 저임금·고한노동(sweat labor), 그리고 여성 및 연소노동자의 폭넓은 활용, 강권적이며 신분적 노사(노동)관계의 조성 등으로 특징지어진다.한편, 일제에 의한 강압적 노동통제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을 가져왔는데, 당시 국내 공업자본 중 94%가 일본인 소유임을 감안할 때, 이 같은 노동자의 집단행동이나 이 기간 중의 노동쟁의는 일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3·1운동을 비롯해 전국적인 민족저항운동 이후 이어지던 일제의 회유정책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조직화가 가능하였다.
또 조직노동자를 기반으로 그 역량 또한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노조조직의 이 같은 세력화를 규제하기 위해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규제를 마침내 제도화하였다.이 같은 치안유지법 제정으로 합법적 노동조직이나 활동전개가 불가능해지자 노동운동은 폭력을 수반한 저항운동으로 전환되었고, 1931년 일제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면서 군국체제로 식민지의 지배정책이 전환되면서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1930년대 말부터는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한 이른바 산업보국연맹만이 유일한 기업 내 단체로 군림했고,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광복과 함께 맞이하게 된 미군정 기간은 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개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북분단과 점령통치라는 타율적인 정치상황은 식민지경제구조를 청산하기보다 오히려 한국경제를 세계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분업체계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기본 경제구조가 이전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한반도 북부는 공업, 남한은 농업이라는 일제식민정책의 산물이 상호보완적 기능을 상실하자 남북한 모두에게 경제적 파행을 심화시켰고, 이로 인해 예속적인 노동관계도 한층 심화되었다. 이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유지되던 전제적 노사(노동)관계가 오히려 강화되어 일제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 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노동자의 자유로운 조직활동이 보장되고 조합세력이 확대되자 파업 또한 빈번하게 발생했고, 비조직 노동자까지 집단행동에 가담함으로써 노사간의 대립과 충돌은 이 기간 중 노동관계의 대표적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같은 상황에서도 사회주의이념을 기반으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결성(1945.11. )되고, 전평은 이후 정치지향적 활동에 몰두하였는데, 이 같은 전평 활동이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자 보수 노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 1946.3. 결성)만이 유일한 노동조직으로 남게 되었다.이후 한동안 대한노총이 노동운동을<NAME>게 된다. 노총이 노동운동을<NAME>던 1947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노동조합이 투쟁적 성격에서 벗어나 개방된 시장경제질서 내의 하나로 정착되며 그 활동도 경제영역에 국한하도록 개편되었다.
이 같은 재편과정은 노동법 제정을 통해 진행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법 제정 과정은 법이 생활규범이기보다 제도나 관행에 선행하여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정되는 특이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헌법>에 노동기본권(주로 노동삼권)이 명시되었고, 1953년에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삼권이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 그리고 <근로기준법>에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노동입법은 경제실상, 개별기업의 여건, 작업장 내 노사(노동)관계 등을 반영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집권층이 지향하는 정치이념 또는 하나의 당위성을 근거로 법제화된 것이기 때문에 법 내용과 법 운영 간에 큰 거리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더구나 이를 집행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법 내용과 법 집행 간에 그 괴리가 클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인 단체교섭일 경우 헌법과 노조법에는 모두 이를 적극 보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예외적인 것으로 아직도 정착되지 못하고 있으며, 기업에 따라서는 아예 외면되고 있는 실정이다.
단체교섭이 이처럼 정착되지 못한 이유는 교섭 당사자인 노동조합이나 노동관계법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즉, 법은 흔히 현실을 기반으로 하나의 관행이 조성되고 또 이 같은 관행에 사회적 합의와 규범의식이 싹틀 때 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등 개별 또는 집단노동관계법은 그 제정과정과 배경 모두가 이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즉, 노동조합정책이 처음 법제화된 1953년의 <노동조합법>에는 다양한 노동조합육성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같은 조합육성책이 사회적 합의나 노동관행 또는 경제적 실상에 근거를 둔 것이기보다는 오로지 정치적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따라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정법에는 노조육성지원책이 반영되어 있으나 이 같은 정부정책이 종속적 노사(노동)관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으며, 6·25전쟁(1950∼1953) 이후 1950년대의 정치·경제적 위기상황은 이 같은 종속적 노동관계를 오히려 한층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정부수립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의 경제상황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복구한다는 명분하에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한 관료독점자본이 가혹한 노동수탈을 자행하면서 전제적 노사(노동)관계가 한층 심화되었다. 5·16군사정변과 함께 개편된 1963년의 개정노동법도 변화된 고용관행이나 작업장 내 노사(노동)관계 실태와 무관하였다는 점에서는 법 제정 당시와 별로 다를 바 없다. 1963년도의 노동관계법 개정은 노조의 난립을 예방하고, 그 동안 노동단체의 병폐였던 정치세력과의 유착을 방지하며, 교섭이나 노사간의 대립보다는 노사간의 협의·협조를 촉진하여 경제개발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원하려는 또 다른 정치적 요구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1963년 법 개정 이후 1970년에 이르기까지 <노동조합법>에도 법운영이나 정부의 실제정책은<NAME>상 법 규정이나 명분과는 아주 달라 법제정 당시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노사(노동)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나 통제는 오히려 제도와 관행을 통해 한층 강화되었다. 유신정치시대가 시작된 1971년에 제정·공포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유신체제가 끝나고 새로운 군사정권이 수립된 1981년까지 시행되었는데, 정부의 의도는 노사(노동)관계에서 노사협조만을 정통시하려는 것에 보다 잘 드러나 있다. 즉, 이 법의 시행으로 사실상 규제 또는 유보된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유일한 규제수단인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사실상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유일한 규제수단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NAME>상의 노동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현상은 1980년대 초 명백히 드러난다. 1980년 새로운 군사정부가 출범하면서 개정된 <노동조합법>에서는 그간<NAME>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각종 노조육성방안마저 전면 삭제됨으로써, 그동안 이어져 오던 명목상의 조합육성책이 조합활동규제로 선회하는 노동조합정책상의 큰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즉, ① 유니온 숍(union shop) 등 노동조합 강제가입제도의 금지, ② 노동조합의 지역조직 불허, ③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정족수 도입, ④ 노동조합 상부단체의 기업단위교섭 관여 금지 등의 조항이 신설되어 노동조합 결성과 운영이 모두 규제대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 같은 대 조합정책으로 인해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은 모든 임금노동자가 제한 없이 가입하는 근로자의 보편적 단체가 아니라 일부 노동자만의 예외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크게 확대된 경제규모나 공업화와 더불어 급증한 임금노동자 수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에 가입된 조직노동자 수는 전체 인구의 2%를 밑도는 100만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더구나 이 같은 조직노동자 중에도 영향력 발휘가 기대되는 대기업 종사자나 지식층 근로자는 거의 예외 없이 배제되었던 것이 1987년 이전까지 우리 나라 노조의 실상이다.정치 및 사회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1987년 6·29선언을 계기로 정치적 민주화가 신장되고 노동기본권 보호가 강화되자 그동안 쌓인 노동자의 불만이 일시적으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쟁의로 이어졌고, 또 이러한 정치 및 사회환경 변화는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가져왔다. 1987년 개정노동관계법은 1980년의 조합활동규제를 부정하고, 노조를 육성·보호하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어 그 방향이 다시 바뀐다. 최저임금법은 기본권을 강화하기 위해 개별 근로관계에서도 제정되었다. 한편, 1991년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노동기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자 하였다. 1991년 야당이 다수이던 국회에서 시도된 노동조합법 개정안은 민간부문 종사자뿐 아니라 공무원(6급 이하)과 국공립 교원에게도 노동기본권을 적극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991년의 이와 같은 법개정 시도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개혁의 내용인 모든 제도나 보장도 실은 정치세력의 변화를 암시하는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1990년 이후 사회, 경제, 정치환경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노동관계에도 새로운 제도도입과 관행정립을 불러오게 하였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가입과 함께 세계화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 나라도 1992년 그 동안 UN 전문자문기구 중 유일하게 가입할 수 없었던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의 회원이 되었고, 뒤 이어 1996년 국제개발협력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에 참여하게 되었다.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동시에 우리 나라 역시 국제적 경기운영 규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앞두고 국제기구에 의해 국내 노동관계법이 ILO 기본 조약(core conventions)에 어긋나는 것을 개정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정부가 국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에 앞서 ILO의 결사의 자유와 관련되는 기본 조약(조약 제87호, 제98호 및 제151호)에 위배되는 국내 노동관계법 개정을 약속하면서 1996년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파동까지 겪게 되었다. 처음 국제기구와 약속한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 1996년 12월, 여당 단독으로 국회를 소집하여 노동관계법 개정을 처리하였다. 오직 경제적 필요성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한 내용만이 개정법에 반영되어 국내 노동계는 물론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왔고, 마침내 1997년 3월 1997년의 개정 노동법을 무효로 하고 다시 법을 개정하는 노동법개정 파동이 일어났다. 1997년에는 집단노동관계법과 개별노동관계법인 근로기준법도 노동관계법에 포함시켰다. 주요 내용은 1997년 도입된 정리해고제도를 1999년부터 시행하도록 유보한 것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통합하여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으로 바꾸고, 노사협의회법을 보완하여 근로자의 경영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근로자 경영참여촉진법으로 개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렇지만 이 같이 재개정된 법 내용도 경제실정과 동떨어진 노사 양측의 요구를 모두 외면한 것이라는 점에서 개정 이전 법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재개정된 법안은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 다시 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외환 부족으로 1997년 말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법 개정을 약정하면서 노동관계법의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편 정부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뒤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산업개편과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라는 새로운 국론조정기구를 발족시켰다. 현재 노사정위원회에서는 IMF의 요구사항인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 파견제도의 도입과 ILO 및 OECD의 요구사항인 노동기본권 강화, 특히 그 동안 노동3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공무원과 교원의<NAME> 보장을 결의함으로써 노동관계법 개정이 다시 공론화되고 있다. 연공서열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 고용관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ergers and acquisitions, M&A)에 따른 정리해고를 합법화하기 위한 새로운 고용관행의 도입이다. 또한 근로자 파견제도의 법제화는 비상용직 근로자(contingent worker)의 증가를 촉진함으로써 고용관계의 기반부터 변화시켜 앞으로의 노동관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노동정책은 노사간의 대등한 교섭력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노동3권을 바탕으로 교섭과 협의의 합리적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노사협의제의 강행이나 근로자의 일방적 협조를 강요하여 조성하려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정책기조는 1980년 노사협의회의 설치를 의무화한 <노사협의회법>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이 탈기업형태 또는 초기업형태인 산업별 조직으로 결성된 경우 종업원이 중심이 되어 노사간 공동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설치하는 기업 내적 제도이다. 따라서 노사협의회는 개별기업 수준에서는 종업원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이며 기업 내 유일한 종업원조직인 노사협의회도 그 기능은 노사간 공동 이해사항만을 다루도록 제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기능을 규제하는 이유는 노동조합과의 불필요한 마찰이나 근로자조직의 이원화를 방지하고, 단체교섭기능과 노사협의기능 간의 조화를 촉진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노사협의회제도는 그 설치대상이나 기능이 모두 노사협의제도의 본래 목적이나 성격을 외면한 채 설치 운영되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의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이 기업 단위 노조임에도 불구하고 노조가 결성된 사업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노사협의제도가 노동조합법에 의해 규제되던 시기(1963년 노동조합법)부터 <노사협의회법>이 독립법으로 제정된 1980년 이후에도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 결성 유무와 상관없이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일 경우 모두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기능도 노사간의 공동 이해 분야뿐 아니라 갈등해소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다루도록 규정되어 있다. 비록 타율적이지만 협의회가 설치되면서 비조직 사업장에서 노사간 대화를 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노조가 결성된 사업장일 경우 노사협의회로 인해 종업원조직이 이원화되었고, 이로 인해 노동조합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협의회 내의 근로자측 대표는 임금인상과 고용조건 개선 등 노동조합측의 모든 요구사항을 노사협의회에 정규적으로 보고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교섭기능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그나마 노동조합의 역할마저도 협의회의 설치로 인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협의제를 도입함으로써 노사간의 대화를 촉진하여 협력기반을 조성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실현되었으나, 노사협의제도는 긍정적 성과보다는 노사간의 새로운 갈등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노사협의제도는 근대적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인 노사 당사자 간의 자율적인 문제해결원칙은 외면한 채 노사문제에 대한 타율적 규제, 특히 정부 개입이 법제화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 주도형의 노사(노동)관계를 고착시켰고, 나아가 노사 당사자에 의한 자율성과 대등성을 크게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우리 나라의 노사(노동)관계는 단체교섭의 정착, 노사협의제의<NAME>, 분쟁조정 절차의 실용성 회복, 노동자의 합리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 강구, 비상용직 근로자(contingent worker)를 위한 대표기구 조성 등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합리적 노사(노동)관계는 사회정의와 산업민주주의 구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조성되어야 할 시급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특히 인적 자원만이 유일한 부존자원이라는 우리의 경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 없이는 경제안정이나 성장 모두 불가능하다.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은 합리적인 노동관계가 조성될 때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경제주체가 각자의 주장을 부담 없이 개진하고 이로 인한 갈등을 교섭과 타협을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할 때 산업 안정은 물론 경제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세계화와 함께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경쟁력 제고와 경제환경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그리고 안정된 노동관계<NAME>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 나라 노사(노동)관계를 합리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노사가 동반자로서의 대등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정착시켜야 하며, 그 제도적 장치인 교섭과 협의 사이에 합리적인 균형과 조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노사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개방된 시민사회의 안정은 노사간의 갈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표출된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즉, 노사(노동)관계정책의 기반이 단체교섭이나 노동조합 등 법에 보장된 조직과 기능이 갈등을 해소하는 합리적인 방안으로 적극 수용되어 이루어질 때 협조적 노사(노동)관계도 비로소 정착될 수 있다. |
c3206804-1ff5-4eb4-be01-3485ad42fbc6 | source05/encykorea/SOC48241.txt | 황주 오덕리 지석묘
(黃州 五德里 支石墓)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329 | CC BY | 3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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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방식 고인돌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1971년 10∼11월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이곳에 분포한 많은 고인돌 중 송신동·평촌·석장골 등 3개 지역의 유적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황주천(黃州川)에 흘러드는 지류의 우안(右岸)에서 동쪽으로 뻗은 오덕산의 남쪽 골짜기에는 오덕리 소재 마을인 송신동을 중심으로 해서 수십 기씩 무리를 지어 모두 14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발굴은 고인돌 21기를 비롯하여 집터와 돌림돌유적 각 1개소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북방식이 대부분이지만 석장 골과 평촌에는 남방식이 일부 섞여 있다. 황주천의 지류인 큰 개울의 왼쪽 기슭에 있는 구릉 진 충적평야에 평촌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땅 위에 드러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당수는 이미 파괴되었거나 땅속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총 4개 지점에서 51기가 확인되었으며 그중 제2지점의 5기가 조사되었다. 그중 제10·11호 고인돌은 제2지점의 중심에 위치한다. 타원형의 묘역 안에는 남북 17m, 동서 8m, 높이 1m 가량의 고인돌이 각 2m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3기 중 가운데와 북쪽만이 발굴되었다. 남쪽의 뚜껑돌은 이미 파헤쳐 져 확인 작업에 그쳤다. 제10호의 무덤칸은 85cm(남북) 60cm, 높이 45cm이다. 유물은 돌도끼·돌살촉 각 1점과 팽이 그릇 조각들로 이루어졌다. 제11호의 무덤칸은 남북으로 140cm(남북) 80cm이다. 돌검 1점과 대퇴골 1점이 유물로 나왔다. 석장 골의 고인돌은 냇가의 북쪽 구릉지대에 모두 세 군데에 분포되어 있다. 북방 고인돌이 대부분이지만 남방 고인돌이 주를 이룬다. 제2·3지점에서 각 1기씩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중 제2지점 제2호 고인돌이 가장 상태가 좋았다. 덮개돌과 남쪽의 긴 벽은 넘어져 있었지만 무덤칸의 구조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이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동서 440cm(동서 240cm)이며 두께는 40cm이다. 그 아래 무덤칸의 크기는 1.6m1m, 높이는 1m이다. 여기에 3매의 판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모로 세워 3, 4개의 작은 칸을 만들었다. 무덤칸 안에는 부식토가 가득 쌓여 있었으나 유물은 없고 대퇴골의 중간 토막 1점이 수습되었다. 송신동 고인돌은 마을 북쪽 들판에 분포되어 있다. 총 3개 지점에서 북방식 고인돌 41기가 확인되었다. 제1지점과 제2지점의 고인돌떼 중앙에는 돌림돌 유적이 있었다. 그중 제1지점의 11기와 제3지점의 1기가 발굴되었다. 이 중 제1호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길이(남북) 8.3m, 너비 6.3m, 두께 50cm이다. 무덤칸의 크기도 3m2m, 높이 2.5m에 이르러 우리나라 북방식 고인돌 중에서는 가장 크다. 제20·22·31호 고인돌은 석장 골 고인돌과 같이 무덤칸 안에 3, 4매의 판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칸막이 시설을 하였다. 유물은 살촉·도끼·돌검·톱니날도끼 등의 석기류와 팽이 그릇에 속하는 토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송신동 집터 유적은 송신동 제2호 고인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집터는 동북∼서남 방향으로 긴 축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길이 8m, 너비 4.3m의 장방형이었다. 원지표로부터 45cm 아래에 위치한 집터의 바닥은 불탄 재로 덮여 있고, 남쪽과 북쪽의 중앙에는 지름 40∼50cm의 둥근 화덕자리가 있었다. 집터의 네 모서리에는 지름 20cm 정도의 기둥구멍이 뚫려 있었다. 집터 중심을 향해 넘어진 기둥들은 탄화 탄화되었다. 도끼·돌검·갈판·자귀·돌돈 등의 석기류와 팽이 그릇류 토기들이 발굴되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황주 오덕리 지석묘
(黃州 五德里 支石墓)
### 내용:
북방식 고인돌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1971년 10∼11월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이곳에 분포한 많은 고인돌 중 송신동·평촌·석장골 등 3개 지역의 유적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황주천(黃州川)에 흘러드는 지류의 우안(右岸)에서 동쪽으로 뻗은 오덕산의 남쪽 골짜기에는 오덕리 소재 마을인 송신동을 중심으로 해서 수십 기씩 무리를 지어 모두 14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발굴은 고인돌 21기를 비롯하여 집터와 돌림돌유적 각 1개소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북방식이 대부분이지만 석장 골과 평촌에는 남방식이 일부 섞여 있다. 황주천의 지류인 큰 개울의 왼쪽 기슭에 있는 구릉 진 충적평야에 평촌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땅 위에 드러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당수는 이미 파괴되었거나 땅속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총 4개 지점에서 51기가 확인되었으며 그중 제2지점의 5기가 조사되었다. 그중 제10·11호 고인돌은 제2지점의 중심에 위치한다. 타원형의 묘역 안에는 남북 17m, 동서 8m, 높이 1m 가량의 고인돌이 각 2m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3기 중 가운데와 북쪽만이 발굴되었다. 남쪽의 뚜껑돌은 이미 파헤쳐 져 확인 작업에 그쳤다. 제10호의 무덤칸은 85cm(남북) 60cm, 높이 45cm이다. 유물은 돌도끼·돌살촉 각 1점과 팽이 그릇 조각들로 이루어졌다. 제11호의 무덤칸은 남북으로 140cm(남북) 80cm이다. 돌검 1점과 대퇴골 1점이 유물로 나왔다. 석장 골의 고인돌은 냇가의 북쪽 구릉지대에 모두 세 군데에 분포되어 있다. 북방 고인돌이 대부분이지만 남방 고인돌이 주를 이룬다. 제2·3지점에서 각 1기씩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중 제2지점 제2호 고인돌이 가장 상태가 좋았다. 덮개돌과 남쪽의 긴 벽은 넘어져 있었지만 무덤칸의 구조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이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동서 440cm(동서 240cm)이며 두께는 40cm이다. 그 아래 무덤칸의 크기는 1.6m1m, 높이는 1m이다. 여기에 3매의 판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모로 세워 3, 4개의 작은 칸을 만들었다. 무덤칸 안에는 부식토가 가득 쌓여 있었으나 유물은 없고 대퇴골의 중간 토막 1점이 수습되었다. 송신동 고인돌은 마을 북쪽 들판에 분포되어 있다. 총 3개 지점에서 북방식 고인돌 41기가 확인되었다. 제1지점과 제2지점의 고인돌떼 중앙에는 돌림돌 유적이 있었다. 그중 제1지점의 11기와 제3지점의 1기가 발굴되었다. 이 중 제1호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길이(남북) 8.3m, 너비 6.3m, 두께 50cm이다. 무덤칸의 크기도 3m2m, 높이 2.5m에 이르러 우리나라 북방식 고인돌 중에서는 가장 크다. 제20·22·31호 고인돌은 석장 골 고인돌과 같이 무덤칸 안에 3, 4매의 판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칸막이 시설을 하였다. 유물은 살촉·도끼·돌검·톱니날도끼 등의 석기류와 팽이 그릇에 속하는 토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송신동 집터 유적은 송신동 제2호 고인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집터는 동북∼서남 방향으로 긴 축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길이 8m, 너비 4.3m의 장방형이었다. 원지표로부터 45cm 아래에 위치한 집터의 바닥은 불탄 재로 덮여 있고, 남쪽과 북쪽의 중앙에는 지름 40∼50cm의 둥근 화덕자리가 있었다. 집터의 네 모서리에는 지름 20cm 정도의 기둥구멍이 뚫려 있었다. 집터 중심을 향해 넘어진 기둥들은 탄화 탄화되었다. 도끼·돌검·갈판·자귀·돌돈 등의 석기류와 팽이 그릇류 토기들이 발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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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永貞)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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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678 | CC BY | 8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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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3년(연산군 9) 의학교수를 역임하면서 내의로서 동반 즉 문신을 제수 받았다. 이조·병조에서 상소를 올려서 1507년(중종 2)에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는 의관에게 그와 같은 벼슬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517년에는 대비의 질병에 시약 의원으로 봉직한 공으로 당상관에 승진하는 영예를 안았다. 수많은 대간들의 끈질긴 상소로 이듬해 그의 승진이 또다시 취소되고 대신 쌀·콩으로 상을 내리는 등 승급·승진에 따른 수난을 겪었다. 1524년에는 평안도 일대에 오늘날의 장티푸스·발진티푸스로 불리는 온 역이 크게 유행하여 1년 사이에 수만 명이 죽었다. 긴급히 왕명을 받은 그는 김순몽·박세거와 함께 온 역에 대한 예방 처방법 등을 간추린 언해본인 간이벽온방 1책을 간행하였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유영정
(劉永貞)
### 내용:
1503년(연산군 9) 의학교수를 역임하면서 내의로서 동반 즉 문신을 제수 받았다. 이조·병조에서 상소를 올려서 1507년(중종 2)에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는 의관에게 그와 같은 벼슬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517년에는 대비의 질병에 시약 의원으로 봉직한 공으로 당상관에 승진하는 영예를 안았다. 수많은 대간들의 끈질긴 상소로 이듬해 그의 승진이 또다시 취소되고 대신 쌀·콩으로 상을 내리는 등 승급·승진에 따른 수난을 겪었다. 1524년에는 평안도 일대에 오늘날의 장티푸스·발진티푸스로 불리는 온 역이 크게 유행하여 1년 사이에 수만 명이 죽었다. 긴급히 왕명을 받은 그는 김순몽·박세거와 함께 온 역에 대한 예방 처방법 등을 간추린 언해본인 간이벽온방 1책을 간행하였다. |
7523e73d-0bea-4d2a-b58b-c2885337653d | source05/encykorea/SOC938.txt | 강사포
(絳紗袍)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178 | CC BY | 314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수배신조현지복(受陪臣朝見之服)’이라 하여 삭망(朔望)·조강(朝降)·조강(詔降)·진표(進表)·조현(朝見) 등에 착용하였다. 포(袍)·상(裳)·중단(中單)·폐슬(蔽膝)·대대(大帶)·혁대(革帶)·패옥(佩玉)·수(綬)·말(襪)·석(舃)으로 일습이 구성되며, 좁은 의미로는 강색(絳色)의 포만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머리에 원유관을 쓰므로 원유관포 또는 원유 관복이라고 하였으며, 거기에 규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370년(공민왕 19)에 명나라 태조가 보내옴으로써 처음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서는 강사포·홍상(紅裳)·흑령(黑領)에 청연 수(靑緣袖)를 한 백초중단(白綃中單)·백군유(白裙襦)·강사폐슬·백가대(白假帶)·방심곡령(方心曲領)·금구첩(金鉤䚢)이 달린 홍혁대(紅革帶)·백말(白襪)·흑석(黑舃)으로 일습을 이룬다고 되어 있다. 방심곡령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1438년(세종 20)에 명나라에 원유를 보내어 의심이 많다 하여 명나라에 요청하여 그해 10월 사신 홍여방이 가지고 돌아온 원유관포였다. 국조오례의 서례 가례에 쓰인 관복 도설에 의하면 1 포 : 강색의 나로 지었으며, 강색 깃에 도련과 소매 끝에 강색 선을 두른 것이 그 이유이다. 2 상 : 면복의 상과는 달리 장문이 없었고, 앞 세 폭, 뒤 네 폭의 일곱 폭이었다. 삭폭이라 함은 폭마다 양쪽 끝의 한치를 꿰매어 마물렀다는 뜻이고, 벽적이 허리 쪽에 많았다. 3 중단 : 백색의 나로 지었으며, 양쪽에 각 다섯 개와 뒤에 한 개씩의 불문을 그렸고, 도련과 소매 끝에는 적색 선을 그었다. 4 폐슬 : 위아래에 강색 선이 있어 위를 비, 아래를 준이라 하였고, 그 선 안에 오색으로 된 실띠, 즉 순을 두 개 달아 혁대에 걸 수 있도록 하였다. 5 대대 : 백색의 나를 겉으로 하고, 비색의 나는 안으로 하여 합봉한 것으로, 위는 주색, 아래는 녹색으로 연을 둘렀고, 청조로 엮어서 신과 가지런하게 하였다. 관복 도설에는 그 기록이 없으나, 폐슬·패옥·수 등을 걸어 드리려면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므로 곤룡포의 옥대를 대용하였을 것이다. 7 패옥 : 좌우 양쪽에 차게 되어 있는 것으로, 금구·형·거·우·쌍황·충아·쌍적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민옥으로 하였다. 8줄의 계조에는 약옥주를 꿰었고, 소수로 패옥 받침을 삼았다. 9 : 후수라고도 하며, 두 개의 금환을 간시하였고 밑에는 망사를 드리웠다. 말 : 비색의 단으로 겉을 하고, 비색의 초로 안을 하였다. 한말의 고종 어진을 보면 깃에는 흰 동정을 달고 옷고름은 흰 동정을 달았다고 하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국속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 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1891년 8월, 원유관 대신 통천관을 쓰고 중단의 불문이 열한 개에서 열세 개로 금직하는 등 고종이 중국 황제와 같은 강사포를 착용하였다. 이러한 강사포는 1900년 관복을 구미식으로 바꾼 이후에도 변함없이 착용되어 순종 때까지 이어졌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강사포
(絳紗袍)
### 내용:
‘수배신조현지복(受陪臣朝見之服)’이라 하여 삭망(朔望)·조강(朝降)·조강(詔降)·진표(進表)·조현(朝見) 등에 착용하였다. 포(袍)·상(裳)·중단(中單)·폐슬(蔽膝)·대대(大帶)·혁대(革帶)·패옥(佩玉)·수(綬)·말(襪)·석(舃)으로 일습이 구성되며, 좁은 의미로는 강색(絳色)의 포만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머리에 원유관을 쓰므로 원유관포 또는 원유 관복이라고 하였으며, 거기에 규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370년(공민왕 19)에 명나라 태조가 보내옴으로써 처음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서는 강사포·홍상(紅裳)·흑령(黑領)에 청연 수(靑緣袖)를 한 백초중단(白綃中單)·백군유(白裙襦)·강사폐슬·백가대(白假帶)·방심곡령(方心曲領)·금구첩(金鉤䚢)이 달린 홍혁대(紅革帶)·백말(白襪)·흑석(黑舃)으로 일습을 이룬다고 되어 있다. 방심곡령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1438년(세종 20)에 명나라에 원유를 보내어 의심이 많다 하여 명나라에 요청하여 그해 10월 사신 홍여방이 가지고 돌아온 원유관포였다. 국조오례의 서례 가례에 쓰인 관복 도설에 의하면 1 포 : 강색의 나로 지었으며, 강색 깃에 도련과 소매 끝에 강색 선을 두른 것이 그 이유이다. 2 상 : 면복의 상과는 달리 장문이 없었고, 앞 세 폭, 뒤 네 폭의 일곱 폭이었다. 삭폭이라 함은 폭마다 양쪽 끝의 한치를 꿰매어 마물렀다는 뜻이고, 벽적이 허리 쪽에 많았다. 3 중단 : 백색의 나로 지었으며, 양쪽에 각 다섯 개와 뒤에 한 개씩의 불문을 그렸고, 도련과 소매 끝에는 적색 선을 그었다. 4 폐슬 : 위아래에 강색 선이 있어 위를 비, 아래를 준이라 하였고, 그 선 안에 오색으로 된 실띠, 즉 순을 두 개 달아 혁대에 걸 수 있도록 하였다. 5 대대 : 백색의 나를 겉으로 하고, 비색의 나는 안으로 하여 합봉한 것으로, 위는 주색, 아래는 녹색으로 연을 둘렀고, 청조로 엮어서 신과 가지런하게 하였다. 관복 도설에는 그 기록이 없으나, 폐슬·패옥·수 등을 걸어 드리려면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므로 곤룡포의 옥대를 대용하였을 것이다. 7 패옥 : 좌우 양쪽에 차게 되어 있는 것으로, 금구·형·거·우·쌍황·충아·쌍적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민옥으로 하였다. 8줄의 계조에는 약옥주를 꿰었고, 소수로 패옥 받침을 삼았다. 9 : 후수라고도 하며, 두 개의 금환을 간시하였고 밑에는 망사를 드리웠다. 말 : 비색의 단으로 겉을 하고, 비색의 초로 안을 하였다. 한말의 고종 어진을 보면 깃에는 흰 동정을 달고 옷고름은 흰 동정을 달았다고 하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국속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 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1891년 8월, 원유관 대신 통천관을 쓰고 중단의 불문이 열한 개에서 열세 개로 금직하는 등 고종이 중국 황제와 같은 강사포를 착용하였다. 이러한 강사포는 1900년 관복을 구미식으로 바꾼 이후에도 변함없이 착용되어 순종 때까지 이어졌다. |
773ddeb1-cb1a-40a9-8a29-d05e87e55c74 | source05/encykorea/SOC11796.txt | 덕담
(德談)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324 | CC BY | 22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악담과 반대되는 것은, 새해가 되면 친지가 서로 만나 해가 바뀌는 인사를 주고받고, 이어서 생자주 1 · 득관 · 치부주2 등 서로의 성공을 기원하는 말로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풍속이다. 최남선은 이제 그렇게 돼라. 고 축원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되셨다니 고맙습니다. 라고 단정해서 경하하는 것이 덕담의 특징이다. 이를테면, 금년에는 장가드셨다지요. , 금년에는 부자가 되셨다지요. 서로 사람을 보내서 전갈로 덕담을 나누기도 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는 서신으로 덕담을 나눈다. 요즈음은 흔히 어른들에게는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 하며, 연소한 사람들에게는 “새해에는 소원 성취하게. ”, “새해에는 아들 낳기를 바라네. ” 하는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벌써…… 되셨다지요. ”라고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처럼 서로의 소원을 축하해 주는 세 시인사에는 두 가지의 원시 심리적 근거가 있다. 첫째로 언령관념인데, 우리 선인들은 무엇이 어떻다. 하면 말 자체가 그대로 실현되는 영력이 음성이나 언어에 들어 있다고 믿었기에 덕담은 곧 그러한 언령적 효과를 기대한 데서 생겨난 세시 풍속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점복 관념이다. 청참은 만사에 길흉의 예조 주 3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점복술을 만들었다. 새해 첫날 새벽 거리에 나가서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 짐승 소리, 물건의 소리 등을 처음 듣게 되는 소리로 그 해의 신수를 점치는 것을 청 참이라 하는데, 이는 일종의 청참적 의미를 갖는다. 청참법은 처음 듣는 소리로 일 년의 신수를 점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생겨났고, 사람 대 사람이나 집안 간에는 처음 듣는 소리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습에 따르면 그렇게 기정사실처럼 덕담을 주고받는 경우는 드물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덕담
(德談)
### 내용:
악담과 반대되는 것은, 새해가 되면 친지가 서로 만나 해가 바뀌는 인사를 주고받고, 이어서 생자주 1 · 득관 · 치부주2 등 서로의 성공을 기원하는 말로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풍속이다. 최남선은 이제 그렇게 돼라. 고 축원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되셨다니 고맙습니다. 라고 단정해서 경하하는 것이 덕담의 특징이다. 이를테면, 금년에는 장가드셨다지요. , 금년에는 부자가 되셨다지요. 서로 사람을 보내서 전갈로 덕담을 나누기도 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는 서신으로 덕담을 나눈다. 요즈음은 흔히 어른들에게는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 하며, 연소한 사람들에게는 “새해에는 소원 성취하게. ”, “새해에는 아들 낳기를 바라네. ” 하는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벌써…… 되셨다지요. ”라고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처럼 서로의 소원을 축하해 주는 세 시인사에는 두 가지의 원시 심리적 근거가 있다. 첫째로 언령관념인데, 우리 선인들은 무엇이 어떻다. 하면 말 자체가 그대로 실현되는 영력이 음성이나 언어에 들어 있다고 믿었기에 덕담은 곧 그러한 언령적 효과를 기대한 데서 생겨난 세시 풍속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점복 관념이다. 청참은 만사에 길흉의 예조 주 3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점복술을 만들었다. 새해 첫날 새벽 거리에 나가서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 짐승 소리, 물건의 소리 등을 처음 듣게 되는 소리로 그 해의 신수를 점치는 것을 청 참이라 하는데, 이는 일종의 청참적 의미를 갖는다. 청참법은 처음 듣는 소리로 일 년의 신수를 점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생겨났고, 사람 대 사람이나 집안 간에는 처음 듣는 소리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습에 따르면 그렇게 기정사실처럼 덕담을 주고받는 경우는 드물다. |
c78028a2-06ec-4b85-9558-cb3cbceb673b | source05/encykorea/SOC3188.txt | 공굴
(公屈)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택규"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244 | CC BY | 126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공회라고도 한다. 공굴이라는 명칭에는 매우 다양한 노동형태들이 포괄된다.
호미씻이, 또는 이와 유사한 위로연(慰勞宴)을 행할 때, 그 비용을 모으기 위하여 미처 논매기를 마치지 못한 집의 논매기를 공동으로 해주고 그 대가인 품삯으로 비용을 충당하던 공동 노동도 공굴이라고 하며, 또한 촌락 내에 중환자가 있는 집이나 상가(喪家)를 위하여 무보수로 공동 노동을 해주는 것을 지칭하기도 한다. 광복 전까지 관북지방에서는 부군[]이라는 공동 노동 봉사의 관습이 있었다. 환자가 있어 형편이 어려운 집을 위해 마을의 어른인 존위가 모든 촌락민을 이끌고 논매기 등을 해주는 관습이었다. 부군으로 다스린 것은 10세 미만의 사자가 났을 때나 집 짓는 등 큰일이 있을 때였다. 공굴이나 부군은 촌락공동체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공동노동을 통해 큰일이나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사회 협동의 한 방식이며,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는 봉사라는 데 특징이 있다. 영남 지방에 예로부터 이엉을 이을 때 행해지던 우살미도 공굴의 지역적 변이로 보인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공굴
(公屈)
### 내용:
공회라고도 한다. 공굴이라는 명칭에는 매우 다양한 노동형태들이 포괄된다.
호미씻이, 또는 이와 유사한 위로연(慰勞宴)을 행할 때, 그 비용을 모으기 위하여 미처 논매기를 마치지 못한 집의 논매기를 공동으로 해주고 그 대가인 품삯으로 비용을 충당하던 공동 노동도 공굴이라고 하며, 또한 촌락 내에 중환자가 있는 집이나 상가(喪家)를 위하여 무보수로 공동 노동을 해주는 것을 지칭하기도 한다. 광복 전까지 관북지방에서는 부군[]이라는 공동 노동 봉사의 관습이 있었다. 환자가 있어 형편이 어려운 집을 위해 마을의 어른인 존위가 모든 촌락민을 이끌고 논매기 등을 해주는 관습이었다. 부군으로 다스린 것은 10세 미만의 사자가 났을 때나 집 짓는 등 큰일이 있을 때였다. 공굴이나 부군은 촌락공동체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공동노동을 통해 큰일이나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사회 협동의 한 방식이며,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는 봉사라는 데 특징이 있다. 영남 지방에 예로부터 이엉을 이을 때 행해지던 우살미도 공굴의 지역적 변이로 보인다. |
7e611b72-26da-4c60-8af2-6ea2e625bd75 | source05/encykorea/SOC19485.txt | 부산 영선동 유적
(釜山 瀛仙洞 遺蹟)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261 | CC BY | 234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의 일부는 1930년을 전후해 일본인 요코야마[]·아리 미스[] 등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시굴과 표면 채집이 이루어졌다. 원래는 제법 넓은 범위에 분포되어 있었으나 도로공사 때문에 그 당시에 이미 사라져버린 조개더미가 굴 껍데기다. 시굴 당시 20∼50cm 두께였던 패각층은 북쪽으로 완만한 경사면의 아래쪽에 형성되어 있었고, 원래 조개더미는 더 두꺼웠을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즐문토기, 타제와 마제의 돌도끼, 석립과 장석을 혼합한 태토로 만든 즐문토기 등이 나왔다. 호·발·완 등이 그릇의 종류이며, 바닥은 모두 첨저 또는 원저이다. 발형토기 중에는 특이하게 주둥이가 달린 토기[]와 입술 윗면을 누르거나 그은 각목이 있는 것과 구연 부가 물결처럼 굴곡진 파상구연도 있어 눈길을 끈다. 문양이 없는 토기도 많으나 문양이 전혀 없는 토기도 있다. 문양은 구연부 또는 동체부의 상반부에 한정되어 있고 전면에 시문한 것은 드물다. 횡주어골문·융기문·단사선문·사격자문·점렬문·점렬문 등의 문양이 있다. 횡주어 골문이 압도적으로 많고 다른 문양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 횡주어 골문은 문양이 두껍고 짧으며 일반적인 침선문계 어골문과는 달리 시문 구의 끝으로 눌러찍는[] 독특한 방법으로 시문한 것이다.<NAME>동 즐문토기의 대표적인 문양은 이 문양이다. 이 밖에 주구토기에 시문 된 융기문이 특이한 것이다. 구연에서 몸통 중앙에 점토띠로 만든 융기선을 N자형으로 연속해서 부착하고 띠 윗면과 양측면을 눌러 장식 효과를 낸 것이다.<NAME>동 유적은 압인문계의 횡주어 골문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조개더미로, 남부 지방 즐문토기 전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적갈색 연질 토기와 회청색 도질토기도 이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물과 즐문토기의 층위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신석기시대 유적 위에 철기시대에서 고분기에 사람이 살게 됨으로써 시기가 다른 두 문화기의 유적이 한곳에 겹쳐진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부산 영선동 유적
(釜山 瀛仙洞 遺蹟)
### 내용: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의 일부는 1930년을 전후해 일본인 요코야마[]·아리 미스[] 등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시굴과 표면 채집이 이루어졌다. 원래는 제법 넓은 범위에 분포되어 있었으나 도로공사 때문에 그 당시에 이미 사라져버린 조개더미가 굴 껍데기다. 시굴 당시 20∼50cm 두께였던 패각층은 북쪽으로 완만한 경사면의 아래쪽에 형성되어 있었고, 원래 조개더미는 더 두꺼웠을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즐문토기, 타제와 마제의 돌도끼, 석립과 장석을 혼합한 태토로 만든 즐문토기 등이 나왔다. 호·발·완 등이 그릇의 종류이며, 바닥은 모두 첨저 또는 원저이다. 발형토기 중에는 특이하게 주둥이가 달린 토기[]와 입술 윗면을 누르거나 그은 각목이 있는 것과 구연 부가 물결처럼 굴곡진 파상구연도 있어 눈길을 끈다. 문양이 없는 토기도 많으나 문양이 전혀 없는 토기도 있다. 문양은 구연부 또는 동체부의 상반부에 한정되어 있고 전면에 시문한 것은 드물다. 횡주어골문·융기문·단사선문·사격자문·점렬문·점렬문 등의 문양이 있다. 횡주어 골문이 압도적으로 많고 다른 문양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 횡주어 골문은 문양이 두껍고 짧으며 일반적인 침선문계 어골문과는 달리 시문 구의 끝으로 눌러찍는[] 독특한 방법으로 시문한 것이다.<NAME>동 즐문토기의 대표적인 문양은 이 문양이다. 이 밖에 주구토기에 시문 된 융기문이 특이한 것이다. 구연에서 몸통 중앙에 점토띠로 만든 융기선을 N자형으로 연속해서 부착하고 띠 윗면과 양측면을 눌러 장식 효과를 낸 것이다.<NAME>동 유적은 압인문계의 횡주어 골문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조개더미로, 남부 지방 즐문토기 전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적갈색 연질 토기와 회청색 도질토기도 이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물과 즐문토기의 층위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신석기시대 유적 위에 철기시대에서 고분기에 사람이 살게 됨으로써 시기가 다른 두 문화기의 유적이 한곳에 겹쳐진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
a5d7fc2e-48f1-4e3b-ac4d-93abba282945 | source05/encykorea/ECO51056.txt | 호텔신라㈜
(Hotel新羅(株))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600 | CC BY | 497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973년 삼성그룹 초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의 의지에 따라 1973년 2월 14일 삼성그룹 내 호텔사업부를 창설하여 시작되었다. 이후 1973년 5월 9일 주식회사 임페리얼로 회사를 설립하고 1973년 7월<NAME>관을 인수한 후 같은 해 11월 호텔 기공식을 시작으로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공사를 진행하여 1979년 3월 8일 호텔 전관을 개관하며 천년 역사와 함께 가장 찬란한 문화 예술의 꽃을 피웠던 신라 왕조의 이름을 따라 호텔신라의 명칭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관 당시 호텔신라는 일본의 오쿠라 호텔과 15만 달러, 총매출액의 1%, 영업 이익의 4.5% 선에서 위탁경영계약을 체결하여 호텔사업을 운영하였다. 1979년 개관 이래 품격 높고 차별화된 서비스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수반과 명사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온 서울 신라호텔은 서울 올림픽 본부 호텔, IOC 서울총회, FIFA 공식 VIP 호텔, 다보스 세계 경제 포럼 등 세계적 행사들을 치러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호텔로서 그 위상을 높이고 있으며, 2002년부터 세계 정상의 여행 전문지인 미국의 자갓 지(Zagat 誌), 트래블 앤 레저 지(Travel Leisure 誌)와 콘데 나스 트래블러 지(Conde Nast Traveler 誌), 최고 권위의 금융 전문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 지(Institutional Investor 誌) 등 세계 유수의 매체들로부터 높은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이국적 분위기와 차별화된 시설을 선보이며 품격과 문화가 있는 휴식지이자 최고의 리조트호텔로서 각광받고 있는 제주신라호텔은 2001년 3월 국제축구연맹(FIFA) 선정 월드컵 VIP 투숙 호텔로 2001년 3월 선정되었다. LVMH 그룹의 겔랑(Guerlain) 스파는 2004년 해외지점으로는 최초로 오픈했고, 2006년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문화 행사 한류 엑스포 in Asia의 공식 본부호텔로 지정되어 국제적인 문화 교류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2008년에는 고객에게 차별화된 레저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제안하는 GAO(Guest Activities Organizer), 항공 예약부터 렌터카 예약에 이르기까지 여행 예약 풀·서비스인 TPO(Travel Plan Office)를 시행함으로써 본격적인 체제형 선진 리조트로서의 트렌드를 선보였다. 특히 호텔신라는 서울·제주호텔의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호텔 위탁 경영에도 참여하여 삼성 거제 호텔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 쑤저우에 있는 진지 레이크 신라호텔과 20년간 위탁경영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 호텔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에 국내 호텔로는 유일하게 1991년 3월 12일 상장되었다. 호텔신라는 관광산업을 3개의 호텔사업, 면세사업, 유통레저사업 부문으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2개의 특급호텔인 서울 신라호텔(1973년 개관), 제주신라호텔(1990년 개관)와 1986년 면세유통사업을 시작으로 서울 신라호텔 내에 면세점을 개점하고 이후 제주점, 인천공항점, 인터넷면세점을 통하여 면세사업을 운영하면서 2002년도에 면세업계 최초로 서비스 품질 우수기업 인증을 획득한 데 이어, 2006년 11월에는 역시 업계 최초로 한국유통대상 대통령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04년 호텔 피트니스클럽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피트니스클럽인 반트(VANTT)의 운영을 시작하였으며, 외식산업에 전문화를 위하여 2010년 1월 자회사 ㈜보나비를 설립하여 고품격 레스토랑 탑클라우드와 유러피안 카페 스타일의 아티제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7년에는 삼성 테스코와 함께 합작 회사인 아티제 블랑제리 주식회사(Artisee Boulangerie Co,. Ltd)를 설립하며 베이커리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하였다. 주요 사업은 관광숙박업, 관광기념품 판매업, 스포츠 시설 운영업 등이다. 주요 제품 구성은 상품 89%, 객실, 연회 9%, 레포츠, 식음료 2% 등이다. 총자산은 2조 2135억 원, 자본금은 2000억 원, 연간 매출액은 2조 7822억 원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에 있다. 호텔신라는 최고의 호스피탈리티 기업을 목표로 오랜 세월 품위와 전통을 유지하며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한국 전통이라는 지붕 위에 모더니즘적 디자인 요소를 가미하여 삶의 여유와 품격을 한층 높여주는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변모해 오고 있는 호텔은 세계 최고의 럭셔리 호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LHW(Leading Hotel of the World) 가입을 하였다. 또한 서비스 기업으로서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면세점 사업을 시작, 최고의 글로벌 유통 회사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가 하면 국내외 특일급 호텔과 피트니스 시설의 위탁 운영을 비롯하여 외식 사업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호텔신라㈜
(Hotel新羅(株))
### 내용:
1973년 삼성그룹 초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의 의지에 따라 1973년 2월 14일 삼성그룹 내 호텔사업부를 창설하여 시작되었다. 이후 1973년 5월 9일 주식회사 임페리얼로 회사를 설립하고 1973년 7월<NAME>관을 인수한 후 같은 해 11월 호텔 기공식을 시작으로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공사를 진행하여 1979년 3월 8일 호텔 전관을 개관하며 천년 역사와 함께 가장 찬란한 문화 예술의 꽃을 피웠던 신라 왕조의 이름을 따라 호텔신라의 명칭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관 당시 호텔신라는 일본의 오쿠라 호텔과 15만 달러, 총매출액의 1%, 영업 이익의 4.5% 선에서 위탁경영계약을 체결하여 호텔사업을 운영하였다. 1979년 개관 이래 품격 높고 차별화된 서비스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수반과 명사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온 서울 신라호텔은 서울 올림픽 본부 호텔, IOC 서울총회, FIFA 공식 VIP 호텔, 다보스 세계 경제 포럼 등 세계적 행사들을 치러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호텔로서 그 위상을 높이고 있으며, 2002년부터 세계 정상의 여행 전문지인 미국의 자갓 지(Zagat 誌), 트래블 앤 레저 지(Travel Leisure 誌)와 콘데 나스 트래블러 지(Conde Nast Traveler 誌), 최고 권위의 금융 전문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 지(Institutional Investor 誌) 등 세계 유수의 매체들로부터 높은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이국적 분위기와 차별화된 시설을 선보이며 품격과 문화가 있는 휴식지이자 최고의 리조트호텔로서 각광받고 있는 제주신라호텔은 2001년 3월 국제축구연맹(FIFA) 선정 월드컵 VIP 투숙 호텔로 2001년 3월 선정되었다. LVMH 그룹의 겔랑(Guerlain) 스파는 2004년 해외지점으로는 최초로 오픈했고, 2006년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문화 행사 한류 엑스포 in Asia의 공식 본부호텔로 지정되어 국제적인 문화 교류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2008년에는 고객에게 차별화된 레저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제안하는 GAO(Guest Activities Organizer), 항공 예약부터 렌터카 예약에 이르기까지 여행 예약 풀·서비스인 TPO(Travel Plan Office)를 시행함으로써 본격적인 체제형 선진 리조트로서의 트렌드를 선보였다. 특히 호텔신라는 서울·제주호텔의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호텔 위탁 경영에도 참여하여 삼성 거제 호텔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 쑤저우에 있는 진지 레이크 신라호텔과 20년간 위탁경영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 호텔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에 국내 호텔로는 유일하게 1991년 3월 12일 상장되었다. 호텔신라는 관광산업을 3개의 호텔사업, 면세사업, 유통레저사업 부문으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2개의 특급호텔인 서울 신라호텔(1973년 개관), 제주신라호텔(1990년 개관)와 1986년 면세유통사업을 시작으로 서울 신라호텔 내에 면세점을 개점하고 이후 제주점, 인천공항점, 인터넷면세점을 통하여 면세사업을 운영하면서 2002년도에 면세업계 최초로 서비스 품질 우수기업 인증을 획득한 데 이어, 2006년 11월에는 역시 업계 최초로 한국유통대상 대통령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04년 호텔 피트니스클럽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피트니스클럽인 반트(VANTT)의 운영을 시작하였으며, 외식산업에 전문화를 위하여 2010년 1월 자회사 ㈜보나비를 설립하여 고품격 레스토랑 탑클라우드와 유러피안 카페 스타일의 아티제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7년에는 삼성 테스코와 함께 합작 회사인 아티제 블랑제리 주식회사(Artisee Boulangerie Co,. Ltd)를 설립하며 베이커리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하였다. 주요 사업은 관광숙박업, 관광기념품 판매업, 스포츠 시설 운영업 등이다. 주요 제품 구성은 상품 89%, 객실, 연회 9%, 레포츠, 식음료 2% 등이다. 총자산은 2조 2135억 원, 자본금은 2000억 원, 연간 매출액은 2조 7822억 원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에 있다. 호텔신라는 최고의 호스피탈리티 기업을 목표로 오랜 세월 품위와 전통을 유지하며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한국 전통이라는 지붕 위에 모더니즘적 디자인 요소를 가미하여 삶의 여유와 품격을 한층 높여주는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변모해 오고 있는 호텔은 세계 최고의 럭셔리 호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LHW(Leading Hotel of the World) 가입을 하였다. 또한 서비스 기업으로서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면세점 사업을 시작, 최고의 글로벌 유통 회사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가 하면 국내외 특일급 호텔과 피트니스 시설의 위탁 운영을 비롯하여 외식 사업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
7f5e7ecf-8bf4-4165-87af-700f029ab57a | source05/encykorea/SOC23192.txt | 세자복
(世子服)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유희경"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840 | CC BY | 28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조선시대의 세자복은 대례·제복인 면복과 조복인 원유관·강사포와 공복·상복인 익선관·곤룡포 및 관례 전에 입는 책복으로 구분된다. 명나라에 왕세자 면복을 청한 것은 1445년(세종 27)과 1449년이다. 이에서 세종은 세자는 나라의 저군이 되어 서무를 참살하는데 관복이 제신과 같아 등위가 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비의 구분이 불분명하니 칠 장 관복을 사여해 주기 바란다. 하지만 1450년(문종 즉위 년) 5월에 명나라에서 세자의 면복(팔류면·칠장복)이 사여 되었다. 제복 도설에서는 면은 왕의 것과 같으나, 유마다 주·백·창의 3채 옥 8개를 꿰맨다고 하였다. 왕의 구장복과 동제가 그려진 것은 상·중단( : 9개다. )·폐슬·대대·패옥·수·말·석·규·방심곡령 등이다. 1408년(태종 8)에 세자 시(禔)가 명나라 수도에서의 제천지(祭天地)에 참례 때, 명나라 문무관은 모두 조복으로 행례하는데, 세자는 상복으로 서반 9품 밑에 서서 예를 마치게 되었는 바, 이에 명나라 황제에게 상주하기를 명나라 태조 재위 시 외국과 같이 우리나라도 중국의 의관을 사여 받았다.
그런데 지금 조복이 없어 9품 밖에 서열 하게 되니 성찰을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예부상서를 불러 조복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당시 세종실록에 기록된 제복은 오량관·적라의·백사중단·적라상·폐슬·혁대·패수·백말·흑리·상홀이었다. 판부사 변계량이 1427년에 세자의 오량관과 조신 1품의 오량관이 무변하여 미안하다고 상계함으로써 이듬해 11월 명나라에 육 량 관을 청했다. 하지만 영조 때 편찬된 속오례의 보 서례에는 왕세자의 원유 관복 도설이 보인다. 그러므로, 언제부터인가 원유관·강사포로 조복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원유관은 8량으로 양마다 앞뒤에 3채 옥 각 8개씩, 포·상·중단·폐슬·패옥·수·말·석 등은 국왕의 강사포와 동제였다. 예조와 의례 상정소에서 1426년 명나라에서 사들인 오량관조복을 확정 짓게 했을 때 세자의 공복도 제정하게 하였다. 그것은 조신의 1품 공복처럼 복두·홍포·서대·흑화·상홀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공복 제도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상복인 익선관·곤룡포를 착용하였다. 익선관은 왕의 것과 같았고, 곤룡포를 흑단(, 여름에는 )으로 짓고 포의 전후와 좌우 어깨에 금색의 사조원룡보를 달고 있던 것은 서례 왕세자 서연복제도였다. 여기에 불조 옥대( : 흑단으로 싸고 금색 그림을 그렸다. )를 두르고 여름에는 흑궤자피화를 신었다. 서례에 의하면 곤복 즉 곤복을 입을 때는 쌍동계를 쓰고 그 위에 공정 책( :를 꽂는다. 쌍동계에 공정 책을 펼치기 위해 상복 곤룡포를 착용할 때도 수정대를 착용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세자복
(世子服)
### 내용:
조선시대의 세자복은 대례·제복인 면복과 조복인 원유관·강사포와 공복·상복인 익선관·곤룡포 및 관례 전에 입는 책복으로 구분된다. 명나라에 왕세자 면복을 청한 것은 1445년(세종 27)과 1449년이다. 이에서 세종은 세자는 나라의 저군이 되어 서무를 참살하는데 관복이 제신과 같아 등위가 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비의 구분이 불분명하니 칠 장 관복을 사여해 주기 바란다. 하지만 1450년(문종 즉위 년) 5월에 명나라에서 세자의 면복(팔류면·칠장복)이 사여 되었다. 제복 도설에서는 면은 왕의 것과 같으나, 유마다 주·백·창의 3채 옥 8개를 꿰맨다고 하였다. 왕의 구장복과 동제가 그려진 것은 상·중단( : 9개다. )·폐슬·대대·패옥·수·말·석·규·방심곡령 등이다. 1408년(태종 8)에 세자 시(禔)가 명나라 수도에서의 제천지(祭天地)에 참례 때, 명나라 문무관은 모두 조복으로 행례하는데, 세자는 상복으로 서반 9품 밑에 서서 예를 마치게 되었는 바, 이에 명나라 황제에게 상주하기를 명나라 태조 재위 시 외국과 같이 우리나라도 중국의 의관을 사여 받았다.
그런데 지금 조복이 없어 9품 밖에 서열 하게 되니 성찰을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예부상서를 불러 조복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당시 세종실록에 기록된 제복은 오량관·적라의·백사중단·적라상·폐슬·혁대·패수·백말·흑리·상홀이었다. 판부사 변계량이 1427년에 세자의 오량관과 조신 1품의 오량관이 무변하여 미안하다고 상계함으로써 이듬해 11월 명나라에 육 량 관을 청했다. 하지만 영조 때 편찬된 속오례의 보 서례에는 왕세자의 원유 관복 도설이 보인다. 그러므로, 언제부터인가 원유관·강사포로 조복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원유관은 8량으로 양마다 앞뒤에 3채 옥 각 8개씩, 포·상·중단·폐슬·패옥·수·말·석 등은 국왕의 강사포와 동제였다. 예조와 의례 상정소에서 1426년 명나라에서 사들인 오량관조복을 확정 짓게 했을 때 세자의 공복도 제정하게 하였다. 그것은 조신의 1품 공복처럼 복두·홍포·서대·흑화·상홀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공복 제도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상복인 익선관·곤룡포를 착용하였다. 익선관은 왕의 것과 같았고, 곤룡포를 흑단(, 여름에는 )으로 짓고 포의 전후와 좌우 어깨에 금색의 사조원룡보를 달고 있던 것은 서례 왕세자 서연복제도였다. 여기에 불조 옥대( : 흑단으로 싸고 금색 그림을 그렸다. )를 두르고 여름에는 흑궤자피화를 신었다. 서례에 의하면 곤복 즉 곤복을 입을 때는 쌍동계를 쓰고 그 위에 공정 책( :를 꽂는다. 쌍동계에 공정 책을 펼치기 위해 상복 곤룡포를 착용할 때도 수정대를 착용했다. |
b385955f-5f86-4f87-869c-0529b346d22a | source05/encykorea/SOC54763.txt | 모던보이
(modern boy)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영선"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5859 | CC BY | 104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식민지 경성의 대중문화와 소비문화 영역이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 사이에 변화했다. 식민지 조선의 인구학적 변화 및 생산성의 증대, 도시의 특정 장소를 매개로 한 소비문화의 확산, 서구적 스타일의 유행과 함께 1920년대 중반 모던 세대가 주로 활동한 곳은 남촌이었다. 이곳에는 1921년 조지아(Georgia) 백화점, 1922년 미나카이[] 백화점, 1926년 히라다[] 백화점 등이 세워지고, 카페와 잡화점들이 1925년 전후로 급격히 증가했다. 식민화된 근대 소비문화의 중심은 경성 남촌이었다. 모던 걸, 모던보이라는 용어는 1927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모던 걸은 퇴폐적인 개인들의 출현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자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라고 재해석되고 있다. 의상과 두발, 장식, 언어, 의식 등)을 통해 젊은 세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던보이는 하위문화로서 새로운 유행에 앞장섰다고 할 수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모던보이
(modern boy)
### 내용:
식민지 경성의 대중문화와 소비문화 영역이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 사이에 변화했다. 식민지 조선의 인구학적 변화 및 생산성의 증대, 도시의 특정 장소를 매개로 한 소비문화의 확산, 서구적 스타일의 유행과 함께 1920년대 중반 모던 세대가 주로 활동한 곳은 남촌이었다. 이곳에는 1921년 조지아(Georgia) 백화점, 1922년 미나카이[] 백화점, 1926년 히라다[] 백화점 등이 세워지고, 카페와 잡화점들이 1925년 전후로 급격히 증가했다. 식민화된 근대 소비문화의 중심은 경성 남촌이었다. 모던 걸, 모던보이라는 용어는 1927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모던 걸은 퇴폐적인 개인들의 출현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자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라고 재해석되고 있다. 의상과 두발, 장식, 언어, 의식 등)을 통해 젊은 세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던보이는 하위문화로서 새로운 유행에 앞장섰다고 할 수 있다. |
5281de23-fb9a-49a9-b014-3c6d06506137 | source05/encykorea/LAW39136.txt | 중앙인사위원회
(中央人事委員會)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용진"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848 | CC BY | 240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거쳐서 전문 개정된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 인사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인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인사행정에 관한 기본계획 수립 등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인사위원회는 내각 사무처장(총무처 장관)의 자문기관으로서 비상설 기관이었기 때문에 공무원 인사행정의 합리성 확립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 유명무실한 위원회는 국가공무원법이 1973년 비상 국무회의에서 개정될 때 폐지되었다. 근데 독임제는 예전과 같지 않고요. 제행 정기 관인 행정자치부 장관(내각 사무처장, 총무처 장관)이 인사행정을 관장하므로 ① 중립성을 보장할 수 없고, ② 다른 업무 때문에 인사행정업무에 전념할 수 없으며, ③ 당해 조직 내에 인사행정 전문가가 양성되는 데 지장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1999년 5월 국가공무원에 대한 인사행정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공무원 인사제도를 효과적으로 개혁하기 위하여 독립된 중앙행정기관으로 중앙인사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한 국가공무원법의 개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중앙인사위원회는 1 국가공무원의 인사정책 및 인사행정 운영의 기본 방침, 2 공무원의 임용 및 보수에 관한 법령의 제정·개폐, 3 1급 내지 3급 공무원의 채용 및 1급 내지 3급 공무원으로의 승진 기준 및 절차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위원장 1인(장관급), 상임위원(1급 상당) 1인 및 3인 이내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된다. 사무처장은 상임위원이 겸직하도록 하고 있고 인사정책심의관(국장급) 1인과 기획총괄과·인사정책과·급여정책과 및 직무분석과를 사무처에 두고 위원회의 사무를 처리한다. 공무원 인사 관련 업무를 대통령 소속 하에 설치된 합의제 행정기관으로 이관한 것은 기존의 문제점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는 바람직한 조치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제도적인 장치보다도 국가공무원 인사의 합리성을 보장하기 위한 우리 사회 전체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 2008년 2월 28일 정부조직법의 개편에 따라 중앙인사위원회의 기능이 행정안전부(안전행정부) 인사 실로 이관되었고, 2014년 11월 국무총리 소속 독임제로 바뀌었다. 인사혁신처는 현재 제 기관으로 존재하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중앙인사위원회
(中央人事委員會)
### 내용: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거쳐서 전문 개정된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 인사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인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인사행정에 관한 기본계획 수립 등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인사위원회는 내각 사무처장(총무처 장관)의 자문기관으로서 비상설 기관이었기 때문에 공무원 인사행정의 합리성 확립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 유명무실한 위원회는 국가공무원법이 1973년 비상 국무회의에서 개정될 때 폐지되었다. 근데 독임제는 예전과 같지 않고요. 제행 정기 관인 행정자치부 장관(내각 사무처장, 총무처 장관)이 인사행정을 관장하므로 ① 중립성을 보장할 수 없고, ② 다른 업무 때문에 인사행정업무에 전념할 수 없으며, ③ 당해 조직 내에 인사행정 전문가가 양성되는 데 지장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1999년 5월 국가공무원에 대한 인사행정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공무원 인사제도를 효과적으로 개혁하기 위하여 독립된 중앙행정기관으로 중앙인사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한 국가공무원법의 개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중앙인사위원회는 1 국가공무원의 인사정책 및 인사행정 운영의 기본 방침, 2 공무원의 임용 및 보수에 관한 법령의 제정·개폐, 3 1급 내지 3급 공무원의 채용 및 1급 내지 3급 공무원으로의 승진 기준 및 절차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위원장 1인(장관급), 상임위원(1급 상당) 1인 및 3인 이내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된다. 사무처장은 상임위원이 겸직하도록 하고 있고 인사정책심의관(국장급) 1인과 기획총괄과·인사정책과·급여정책과 및 직무분석과를 사무처에 두고 위원회의 사무를 처리한다. 공무원 인사 관련 업무를 대통령 소속 하에 설치된 합의제 행정기관으로 이관한 것은 기존의 문제점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는 바람직한 조치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제도적인 장치보다도 국가공무원 인사의 합리성을 보장하기 위한 우리 사회 전체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 2008년 2월 28일 정부조직법의 개편에 따라 중앙인사위원회의 기능이 행정안전부(안전행정부) 인사 실로 이관되었고, 2014년 11월 국무총리 소속 독임제로 바뀌었다. 인사혁신처는 현재 제 기관으로 존재하고 있다. |
7994bcae-c094-424e-982d-7b1eec6bc30b | source05/encykorea/LAW15473.txt | 물가안정위원회
(物價安定委員會)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용진"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817 | CC BY | 125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1975년 3월에 제정된 물가 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설치되었으며, 1995년 <물가 안정에 관한 법률>로 개칭되었다. 위원장 1인을 포함한 17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하였으며, 위원장은 재정경제부 장관이 되었고 위원은 건설교통부 장관·농림부 장관·산업자원부 장관·정보통신부 장관·보건복지부 장관과 경제 또는 법률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 또는 위촉하는 자가 되었다.
1963년 2월 각령으로 물가대책 위원회가 내각수반 소속으로 구성된 바 있고, 1967년 4월 대통령령으로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기관으로 물가 안정 위원회가 구성된 바 있다. 물가 안정을 위한 최고가격의 지정과 폐지, 공공요금의 결정, 긴급 수급조절 조치 및 그 해제, 물가 안정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처분을 받은 자가 하는 이의신청의 처리 등이 그 업무였다. 정부의 중요 업무 중 물가 안정을 위한 업무가 하나였고, 그 업무의 공정성과 능률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구가 바로 이 위원회이다. 물가 안정 위원회는 2009년 8월에 폐지되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물가안정위원회
(物價安定委員會)
### 내용:
1975년 3월에 제정된 물가 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설치되었으며, 1995년 <물가 안정에 관한 법률>로 개칭되었다. 위원장 1인을 포함한 17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하였으며, 위원장은 재정경제부 장관이 되었고 위원은 건설교통부 장관·농림부 장관·산업자원부 장관·정보통신부 장관·보건복지부 장관과 경제 또는 법률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 또는 위촉하는 자가 되었다.
1963년 2월 각령으로 물가대책 위원회가 내각수반 소속으로 구성된 바 있고, 1967년 4월 대통령령으로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기관으로 물가 안정 위원회가 구성된 바 있다. 물가 안정을 위한 최고가격의 지정과 폐지, 공공요금의 결정, 긴급 수급조절 조치 및 그 해제, 물가 안정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처분을 받은 자가 하는 이의신청의 처리 등이 그 업무였다. 정부의 중요 업무 중 물가 안정을 위한 업무가 하나였고, 그 업무의 공정성과 능률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구가 바로 이 위원회이다. 물가 안정 위원회는 2009년 8월에 폐지되었다. |
935c15bd-9575-4d60-a1de-d20622f48aaa | source05/encykorea/SOC25332.txt | 양조공
(釀造工)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48 | CC BY | 153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주로 발효시켜 빚는 술의 제조 과정에서 곡물이나 과일을 혼합, 압착, 배합시키고 엿기름을 만드는 일을 하는데, 발아공·침맥공·맥아 건조공·맥아즙 제조공·맥주 발효공·곡자 제조공·곡자 제조공·배합공·과실주 양조 공 등으로 세분된다. 발아공은 맥아즙 제조에 필요한 각종 분해 효소를 얻기 위해 보리를 발아시키는 회전 드럼이나 발아실의 온도·습도를 조절하는 장비를 조작한다. 침맥공은 발아에 필요한 수분을 공급하고, 효모 저해물질을 추출하기 위해 정선된 보리를 침맥 탱크에 침지한다. 맥아 건조공은 건조실에서 열풍을 이용해 맥아의 색소·향미 물질을 생성하고 풋냄새 방지와 저장성 증대, 맥근 분리 용이성을 향상시킨다. 맥아즙 제조공은 쌀·옥수수 등의 곡물을 엿기름과 혼합하고 물을 첨가하여 제조한다. 맥주 발효공은 맥주 양조 시 냉각된 맥아즙에 효모를 첨가하여 발효시키는 탱크를 조작한다. 곡자 제조공은 전분질 원료의 당화에 필요한 곡자 및 효소를 생산하기 위해 곰팡이를 제조하는데, 고량주·주전·탁주·약주 등을 제조할 때 사용한다. 조합 및 배합공은 알코올음료가 지닌 알코올 증량·방부·풍미 및 균일한 품질을 위해 각종 물질을 첨가, 희석하고 혼합한다. 과실주 양조공은 과실을 눌러 으깨고 발효, 여과하여 저장한다. 또한 양조공은 일정한 온도로 유지하기 위하여 기타 장치를 조작하기도 하는데 교환기로 과실주를 순환시키거나 하는 식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양조공
(釀造工)
### 내용:
주로 발효시켜 빚는 술의 제조 과정에서 곡물이나 과일을 혼합, 압착, 배합시키고 엿기름을 만드는 일을 하는데, 발아공·침맥공·맥아 건조공·맥아즙 제조공·맥주 발효공·곡자 제조공·곡자 제조공·배합공·과실주 양조 공 등으로 세분된다. 발아공은 맥아즙 제조에 필요한 각종 분해 효소를 얻기 위해 보리를 발아시키는 회전 드럼이나 발아실의 온도·습도를 조절하는 장비를 조작한다. 침맥공은 발아에 필요한 수분을 공급하고, 효모 저해물질을 추출하기 위해 정선된 보리를 침맥 탱크에 침지한다. 맥아 건조공은 건조실에서 열풍을 이용해 맥아의 색소·향미 물질을 생성하고 풋냄새 방지와 저장성 증대, 맥근 분리 용이성을 향상시킨다. 맥아즙 제조공은 쌀·옥수수 등의 곡물을 엿기름과 혼합하고 물을 첨가하여 제조한다. 맥주 발효공은 맥주 양조 시 냉각된 맥아즙에 효모를 첨가하여 발효시키는 탱크를 조작한다. 곡자 제조공은 전분질 원료의 당화에 필요한 곡자 및 효소를 생산하기 위해 곰팡이를 제조하는데, 고량주·주전·탁주·약주 등을 제조할 때 사용한다. 조합 및 배합공은 알코올음료가 지닌 알코올 증량·방부·풍미 및 균일한 품질을 위해 각종 물질을 첨가, 희석하고 혼합한다. 과실주 양조공은 과실을 눌러 으깨고 발효, 여과하여 저장한다. 또한 양조공은 일정한 온도로 유지하기 위하여 기타 장치를 조작하기도 하는데 교환기로 과실주를 순환시키거나 하는 식이다. |
a9342707-51a3-4e49-95cc-d2545567fe17 | source05/encykorea/LAW41560.txt | 체문
(帖文)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최승희"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6896 | CC BY | 29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중앙의 관서나 감영으로부터 명령·지시를 받은 수령이, 하의 면·동·향교·서원에 명령·지시를 하는 것이다. 조세의 독촉, 폐습의 교정 등이 그 내용일 수 있다. 지방행정의 방법과 체계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첩식과 같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체문
(帖文)
### 내용:
중앙의 관서나 감영으로부터 명령·지시를 받은 수령이, 하의 면·동·향교·서원에 명령·지시를 하는 것이다. 조세의 독촉, 폐습의 교정 등이 그 내용일 수 있다. 지방행정의 방법과 체계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첩식과 같다. |
953fd49e-ba7a-4704-b9b8-1aeb999a22d6 | source05/encykorea/POL42668.txt | 투표
(投票)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9492 | CC BY | 1,87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투표 제도 도 있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의 절차적 핵심은 선거이며 투표 행위는 선거의 요체로써, 투표자의 구실을 구체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근대 민주국가는 투표의 자유와 비밀을 효과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선거의 공정을 기하고 그 의의를 최대한도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많은 원칙을 확립, 발전시켜 왔으며, 실제로 다양한 투표 제도를 사용하여 왔다.
① 강제투표제와 자유투표제: 선거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재산형 또는 공권의 박탈 · 정지 등을 과하여 기권율을 감소시키려는 것을 강제투표제라 한다. 이에 반해 자유투표제 또는 임의투표제는 선거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투표를 하는 제도이다. 2 비밀투표제와 공개투표제: 선거에 있어서 투표의 내용을 비밀로 하는 것을 비밀투표제, 투표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을 공개투표제라고 한다. 비밀투표제가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다 바람직한 방법이다. 자서 투표제는 선거인이 투표소에 직접 나와 투표용지에 투표할 후보자의 성명을 자필로 기재하는 제도로서 선거인이 투표용지에 투표할 후보자의 이름을 적는 방법이다. 역사적으로는 문맹자를 선거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근래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채택되지 않는다. 4 기명투표제와 무기명투표제는 각각 투표용지에 투표인의 성명을 기재하는 방법이고, 기명투표제는 투표용지에 기재를 하지 않는 방법이다. 선거제도의 초기부터 사용된 기명투표제는 투표의 확실성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5 단기투표제와 연기투표제: 선거인이 후보자 1인만을 지명하는 것을 단기 투표제라고 하고, 2인 이상을 지명하는 것을 연기 투표제라고 한다. 소선거구제하에서는 단기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대선거구제하에서는 단기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⑥ 정당명부제 투표: 총선에서 1인 2표를 전제로 1표는 지지하는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에게, 다른 1표는<NAME>자의 지지 정당에 투표해 권역별로 정당득표율을 집계해 각 정당이 미리 정해 제출한 ‘정당 후보 명부’에서 득표율만큼 당선자(비례대표)를 뽑는 제도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정당이 지역 정서를 토대로 특정 지역을 석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2002년 6월 1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도입됐다.
⑦투표소 투표와 부재투표: 선거인이 투표소에 직접 출석하여 투표하는 것을 투표소 투표라 하고, 선거인이 직접 출두가 불가능하면 부재투료를 실시한다. 한국도 1960년 선거법 이후 이를 채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재자 투표는 대리투표, 우편투표, 선거증 제도의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우편투표가 채택되고 있다. 한국의 투표 제도. 한국의 근대적 투표 제도는 1948년 3월 18일 미 군정장관 명의로 공포된 국회의원 선거법이 최초이다. 보통 · 평등 · 직접 · 비밀의 원칙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투표 방침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때 공포된 선거법의 기본적인 내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해외 부재자 투표제와 정당 명부제 투표 등 몇 가지 변화된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해외 부재자 투표제는 1967년과 1971년의 6대와 7대 대통령 선거와 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실시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19세 이상의 재외 영주권자, 선거기간 중 국외 체류 예정자 또는 일시 체류자도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이다. 하지만 재외 국민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된 것은, 1972년 유신 체제 출범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2009년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2년 국회의원 총선거부터 재외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신 체제가 체제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외 부재자 투표 제도를 없앤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된다. 즉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북미, 유럽, 일본의 해외동포들은 유신 체제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투표권을 아예 박탈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유신 체제가 성립된 이후 해외 교포들의 반대 운동이 활발해지면서<NAME> 정권과는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해외 체류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 200만∼300만 명 규모에 이르자 이들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를 막을 명분과 이유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고 결국 해외 부재자 투표 제도의 시행으로 이어졌다. 정당 명부제 투표 제도는 기존의 전국구 비례대표 제도의 불합리성과 대표 과정의 문제점이 널리 인정되면서 새로 도입된 제도이다. 즉 기존 전국구 비례대표 제도는 지역구 후보와 정당 지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단 1표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정당명부제는 지역구 후보 투표권과 정당 투표권 등 2번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선거인의 의사가 보다 폭넓게 반영될 수 있는 제도이다. 정당 명부 투표는 2002년 지방선거부터 채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당 명부제 투표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과거에는 높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배출이 힘들었던 소수 정당들도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선거인의 정치적 의사가 보다 넓은 차원에서 정치권에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셈이었다. 투표 방법은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선거인의 행위로서 투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도 및 행정이<NAME>되어야 한다. 현행 선거법은 각급 선거관리위원회로 하여금 투표구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소속 공무원 또는 각급 학교의 교직원 중에서 투표 관리관 1인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투표 사무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읍 · 면 · 동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 전일까지 관할 구역 안의 투표구마다 투표소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투표구 안의 학교, 읍 · 면 · 동사무소 등 관공서, 공공기관 · 단체의 사무소, 주민회관 기타 선거인이 투표하기 편한 곳에 설치한다. 다만,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른 투표구 안에 설치할 수 있다. 단 병영 안과 종교시설 안엔 투표소를 설치하지 못하지만 종교시설의 경우 부득이한 경우 설치할 수 있다.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선거일 전날까지 위원의 좌석, 선거인 명부의 대조 장소, 투표용지의 교부 장소, 기표소, 투표함, 투표 참관인석, 기표소 설비 등 필요한 사항을 투표소에 설치해야 한다. 투표소를 설치하려면 선거일전 10일까지 그 명칭과 소재지를 공고해야 한다. 한편 관할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전 6일부터 2일간 부재자 신고인 명부에 올라있는 선거인이 투표할 투표소(부재자 투표소)를 당해 사무소 소재지에 설치 ·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기관 · 시설 및 장애인 거주시설 안에도 관할 선거관리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투표소를 설치 ·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역구 후보자의 기호 · 소속 정당명 및 성명이 인쇄된 투표함과 투표용지는 선거일 전일까지 읍 · 면 · 동 선거관리위원회에 보내져야 한다. 투표용지에는 소속 정당명과 후보자의 성명은 한글과 한자로, 지역구 후보자의 기호는 인쇄할 지역구 후보자의 순위에 따라 1, 2, 3등으로 표시한다. 투표용지에는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의 청인이 날인되어 있으며 우편 투표용지는 선거일 9일 전 오전 9시부터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후보자의 참관 하에 봉투에 넣어 2일 안에 발송한다. 우편투표는 부재자 신고인 명부에 의거하며, 무료 등기우편으로 발송한다. 한 투표 구당 2개의 투표함을 동시에 사용할 수는 없으며, 우편투표용 투표함을 제작하여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소에 보관했다가 우편투표가 접수되었을 때 이에 투입하여야 한다. 선거인명부 확정일로부터 2일까지 구 · 시 · 군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인의 성명 · 선거인 명부 등재번호 · 투표소 위치 · 투표 시간 및 지참물이 기재된 투표 안내문을 매 세대에게 발송하여야 한다. 투표는 선거일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되지만 보궐선거의 경우에는 오후 8시까지 연장된다.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과 투표 참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함에 넣을 투표용지는 주민등록증 등의 신분증을 제시하여 본인 확인을 거친 후 기표소에 들어가서 해당란에 기표를 한 뒤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접어 투표구에 넣어야 한다.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기타 신체의 불구자가 있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정한 사람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할 수 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같은 기표소 안에 2명 이상이 동시에 들어갈 수 없다. 선거인 명부에 기재되지 않은 사람은 투표할 수 없다. 다만, 선거인 명부에 대한 이의나 불복신청에 의하여 선거권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결정서를 지참한 사람은 투표할 수 있다. 한편,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었더라도 공민권 제한 등으로 인해 선거일에 선거권이 없는 사람은 투표할 수 없다. 또한 부재자 신고인 명부에 등재된 선거인은 우편투표로 투표할 수 없다. 단 부재자 투표용지를 받지 못했거나 반송된 사람은 선거일에 해당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다.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사무 종사원으로 당해 관계 행정기관의 공무원 또는 교육 공무원을 위촉하여 투표사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보조할 수 있다. 투표 사무 종사원은 선거일 3일 전까지 위촉되어야 하고 그 성명이 공고되어야 한다. 투표 참관인은 당해 지역구에 후보자를 추천한 정당과 무소속 후보자에 의하여 선정된 사람으로, 투표용지의 교부 상황과 투표 상황을 참관한다.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는 8명의 투표 참관인을 정하되, 정당 후보자로부터 선정 · 신고된 투표 참관인의 수가 정수에 못 미치거나 초과하면 그 수를 조정하게 된다. 투표 참관인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지지 또는 반대를<NAME>거나 기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투표소에는 투표자, 투표 참관인, 투표 관리관, 읍 · 면 · 동 선거관리위원회 및 그 상급 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 및 직원, 투표사무 종사원,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의 요구를 받은 정복 경찰관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투표 종료 시 투표 관리관은 투표소의 입구를 닫고 투표 참관인의 참관 하에 투표함의 투입구와 그 자물쇠를 봉쇄 · 봉인해야 하며, 투표소 안에 있는 선거인의 투표가 끝나면 투표 참관인의 참관 하에 이를 봉쇄 · 봉인해야 한다. 투표 관리관은 투표가 종료된 후 지체 없이 투표함 및 그 열쇠와 투표록 및 잔여 투표용지를 관할 구· 시· 군 선거관리위원회에 송부해야 한다. 송부 과정에는 후보자별 투표 참관인 1인과 정복 착용 경찰공무원 2인이 동반할 수 있다. 개표 진행 상황은? 투표는 선거인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행위이며 이 행위가 끝나면 개표 과정이 뒤따른다. 즉 투표가 행위라면 개표는 그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선거사무 중 핵심적이며 종국적인 사무인 개표사무는 투표사무에 이어서 읍 · 면 · 동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이송된 투표록과 투표함에 의하여 투표를 점검, 계산하는 사무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투표구별 개표 주의와 혼합 개표 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 투표구별 개표 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개표사무는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가 관리한다. 구 · 시 · 군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 5일 전에 개표 장소를 선거인이 알 수 있도록 공고하고, 그 장소는 선거일 5일 전에 공고하여야 한다. 선거일 3일 전까지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사무를 보조할 개표 사무원을 둘 수 있는데, 이는 개표 사무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한 것이다. 개표사무 종사원은 그 사무의 중요성에 비추어 그 구역 내의 관계 행정기관이나 법원에 근무하는 공무원, 교육 공무원, 은행 직원 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자 중에서 위촉한다. 관계 행정기관 소속 공무원은 총 개표 종사원의 3분의 2를 초과할 수 없으며, 법원 공무원과 교육 공무원은 총 개표 종사원의 3분의 2를 초과할 수 없다. 선거일 3일 전까지 개표사무 종사원의 성명을 공고해야 한다. 개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구 · 시 · 군 선거관리위원회와 그 상급 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 · 직원, 개표사무원 · 개표사무 협조 요원 및 개표 참관인 이외에는 없다. 다만, 관람증을 받은 자와 방송 · 신문 · 통신의 취재 · 보도 요원은 일반 관람인석에 들어갈 수 있다. 투표함을 개함하려면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개표 참관인의 참관 하에 투표함의 봉쇄와 봉인을 검사한 후 이를 열어야 한다.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투표함을 개함한 후 투표수를 계산하여 투표록에 기재된 투표용지 교부 수와 대조해야 한다. 그다음에 개표는 투표구별로 구분하여 실시한다. 우편으로 송부된 부재자투표를 접수하면 당해 구 · 시 · 군 선거관리위원회의 정당 추천 위원이 참여하여 이를 즉시 우편 투표함에 투입 · 보관하여야 한다. 우편 투표함은 선거일 오후 6시(보궐선거 등은 오후 8시)에 개표 참관인의 참관 하에 일반 투표함의 투표지와 별도로 개표할 수 있다. 현행 선거법에는 정규의 투표용지를 사용하지 아니한 것, 어느 난에도 표를 하지 아니한 것, 둘 이상의 난에 표를 한 것, 어느 난에 표를 한 것인지 식별할 수 없는 것, ‘人’표를 하지 아니하고 문자 또는 물형(物形)을 기입한 것, ‘人’표 이외의 다른 사항을 기입한 것, 선거관리위원회의 기표용구가 아닌 용구로 표를 한 것, 우편투표에 있어서 봉함되지 아니한 것, 또는 선거인의 본인 여부가 확인되지 아니한 것 등은 무효로 본다. 한편, 선거법에는 대개 유효 · 무효가 문제가 될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로 유효표로 보아야 할 예를 명시하고 있다. 즉, 정상적으로 기표된 것이 아닐지라도 당해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의 기표용구를 사용하여 기표한 것이 명확한 것, 후보자란 외에 추가 기표되었으나 추가 기표된 것이 어느 후보자에게도 기표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 두 후보자란의 구분 선상에 기표된 것으로서 어느 후보자에게 기표한 것인지가 명확한 것, 기표한 것이 전사된 것으로서 어느 후보자에게 기표한 것인지가 명확한 것, 인육으로 오손되거나 훼손되었으나 정규의 투표용지임이 명백하고 어느 후보자에게 기표한 것인지가 명확한 것 등은 유효표로 본다. 개표가 완료되면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는 즉시 개표 결과를 공표하고 개표록을 작성하여 관할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송부해야 한다. 개표록을 송부 받은 관할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는 지체 없이 후보자별 득표수를 계산하고 공표하고 선거록을 작성해야 한다. 시 · 도선 거 관리 위원회가 개표록을 송부 받은 때에는 대통령선거에서는 후보자별 득표수를,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당별 득표수를 계산 · 공표하고 집계록을 작성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여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집계록을 송부 받은 경우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후보자별 득표수를,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서는 정당별 득표수를 계산 · 공표하고, 선거록을 작성하여야 한다. 위원장과 출석 위원 전원은 개표록 · 집계록 및 선거록에 서명 또는 날인해야 한다. 다만, 정당한 사유 없이 서명 또는 날인을 거부하는 위원이 있을 때에는 그 권한을 포기한 것으로 보고, 개표록 · 집계록 및 선거록에 그 사유를 기재한다. 한편 전자개표기는 2002년 6 · 13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각종 선거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자개표기는 기표된 투표지를 후보자별로 분류하고 득표수를 집계하는 과정을 자동화한 시스템으로 통신망을 통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방송국에 전송돼 TV 화면에 실시간으로 나타난다. 전자개표기가 개표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조작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해외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전자 투표 제도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있기도 하고 또 상당한 기술적 성과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우세하고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도 제기되어 시행되지 않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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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투표 제도 도 있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의 절차적 핵심은 선거이며 투표 행위는 선거의 요체로써, 투표자의 구실을 구체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근대 민주국가는 투표의 자유와 비밀을 효과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선거의 공정을 기하고 그 의의를 최대한도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많은 원칙을 확립, 발전시켜 왔으며, 실제로 다양한 투표 제도를 사용하여 왔다.
① 강제투표제와 자유투표제: 선거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재산형 또는 공권의 박탈 · 정지 등을 과하여 기권율을 감소시키려는 것을 강제투표제라 한다. 이에 반해 자유투표제 또는 임의투표제는 선거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투표를 하는 제도이다. 2 비밀투표제와 공개투표제: 선거에 있어서 투표의 내용을 비밀로 하는 것을 비밀투표제, 투표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을 공개투표제라고 한다. 비밀투표제가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다 바람직한 방법이다. 자서 투표제는 선거인이 투표소에 직접 나와 투표용지에 투표할 후보자의 성명을 자필로 기재하는 제도로서 선거인이 투표용지에 투표할 후보자의 이름을 적는 방법이다. 역사적으로는 문맹자를 선거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근래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채택되지 않는다. 4 기명투표제와 무기명투표제는 각각 투표용지에 투표인의 성명을 기재하는 방법이고, 기명투표제는 투표용지에 기재를 하지 않는 방법이다. 선거제도의 초기부터 사용된 기명투표제는 투표의 확실성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5 단기투표제와 연기투표제: 선거인이 후보자 1인만을 지명하는 것을 단기 투표제라고 하고, 2인 이상을 지명하는 것을 연기 투표제라고 한다. 소선거구제하에서는 단기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대선거구제하에서는 단기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⑥ 정당명부제 투표: 총선에서 1인 2표를 전제로 1표는 지지하는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에게, 다른 1표는<NAME>자의 지지 정당에 투표해 권역별로 정당득표율을 집계해 각 정당이 미리 정해 제출한 ‘정당 후보 명부’에서 득표율만큼 당선자(비례대표)를 뽑는 제도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정당이 지역 정서를 토대로 특정 지역을 석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2002년 6월 1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도입됐다.
⑦투표소 투표와 부재투표: 선거인이 투표소에 직접 출석하여 투표하는 것을 투표소 투표라 하고, 선거인이 직접 출두가 불가능하면 부재투료를 실시한다. 한국도 1960년 선거법 이후 이를 채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재자 투표는 대리투표, 우편투표, 선거증 제도의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우편투표가 채택되고 있다. 한국의 투표 제도. 한국의 근대적 투표 제도는 1948년 3월 18일 미 군정장관 명의로 공포된 국회의원 선거법이 최초이다. 보통 · 평등 · 직접 · 비밀의 원칙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투표 방침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때 공포된 선거법의 기본적인 내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해외 부재자 투표제와 정당 명부제 투표 등 몇 가지 변화된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해외 부재자 투표제는 1967년과 1971년의 6대와 7대 대통령 선거와 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실시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19세 이상의 재외 영주권자, 선거기간 중 국외 체류 예정자 또는 일시 체류자도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이다. 하지만 재외 국민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된 것은, 1972년 유신 체제 출범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2009년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2년 국회의원 총선거부터 재외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신 체제가 체제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외 부재자 투표 제도를 없앤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된다. 즉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북미, 유럽, 일본의 해외동포들은 유신 체제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투표권을 아예 박탈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유신 체제가 성립된 이후 해외 교포들의 반대 운동이 활발해지면서<NAME> 정권과는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해외 체류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 200만∼300만 명 규모에 이르자 이들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를 막을 명분과 이유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고 결국 해외 부재자 투표 제도의 시행으로 이어졌다. 정당 명부제 투표 제도는 기존의 전국구 비례대표 제도의 불합리성과 대표 과정의 문제점이 널리 인정되면서 새로 도입된 제도이다. 즉 기존 전국구 비례대표 제도는 지역구 후보와 정당 지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단 1표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정당명부제는 지역구 후보 투표권과 정당 투표권 등 2번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선거인의 의사가 보다 폭넓게 반영될 수 있는 제도이다. 정당 명부 투표는 2002년 지방선거부터 채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당 명부제 투표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과거에는 높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배출이 힘들었던 소수 정당들도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선거인의 정치적 의사가 보다 넓은 차원에서 정치권에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셈이었다. 투표 방법은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선거인의 행위로서 투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도 및 행정이<NAME>되어야 한다. 현행 선거법은 각급 선거관리위원회로 하여금 투표구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소속 공무원 또는 각급 학교의 교직원 중에서 투표 관리관 1인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투표 사무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읍 · 면 · 동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 전일까지 관할 구역 안의 투표구마다 투표소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투표구 안의 학교, 읍 · 면 · 동사무소 등 관공서, 공공기관 · 단체의 사무소, 주민회관 기타 선거인이 투표하기 편한 곳에 설치한다. 다만,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른 투표구 안에 설치할 수 있다. 단 병영 안과 종교시설 안엔 투표소를 설치하지 못하지만 종교시설의 경우 부득이한 경우 설치할 수 있다.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선거일 전날까지 위원의 좌석, 선거인 명부의 대조 장소, 투표용지의 교부 장소, 기표소, 투표함, 투표 참관인석, 기표소 설비 등 필요한 사항을 투표소에 설치해야 한다. 투표소를 설치하려면 선거일전 10일까지 그 명칭과 소재지를 공고해야 한다. 한편 관할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전 6일부터 2일간 부재자 신고인 명부에 올라있는 선거인이 투표할 투표소(부재자 투표소)를 당해 사무소 소재지에 설치 ·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기관 · 시설 및 장애인 거주시설 안에도 관할 선거관리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투표소를 설치 ·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역구 후보자의 기호 · 소속 정당명 및 성명이 인쇄된 투표함과 투표용지는 선거일 전일까지 읍 · 면 · 동 선거관리위원회에 보내져야 한다. 투표용지에는 소속 정당명과 후보자의 성명은 한글과 한자로, 지역구 후보자의 기호는 인쇄할 지역구 후보자의 순위에 따라 1, 2, 3등으로 표시한다. 투표용지에는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의 청인이 날인되어 있으며 우편 투표용지는 선거일 9일 전 오전 9시부터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후보자의 참관 하에 봉투에 넣어 2일 안에 발송한다. 우편투표는 부재자 신고인 명부에 의거하며, 무료 등기우편으로 발송한다. 한 투표 구당 2개의 투표함을 동시에 사용할 수는 없으며, 우편투표용 투표함을 제작하여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소에 보관했다가 우편투표가 접수되었을 때 이에 투입하여야 한다. 선거인명부 확정일로부터 2일까지 구 · 시 · 군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인의 성명 · 선거인 명부 등재번호 · 투표소 위치 · 투표 시간 및 지참물이 기재된 투표 안내문을 매 세대에게 발송하여야 한다. 투표는 선거일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되지만 보궐선거의 경우에는 오후 8시까지 연장된다.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과 투표 참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함에 넣을 투표용지는 주민등록증 등의 신분증을 제시하여 본인 확인을 거친 후 기표소에 들어가서 해당란에 기표를 한 뒤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접어 투표구에 넣어야 한다.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기타 신체의 불구자가 있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정한 사람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할 수 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같은 기표소 안에 2명 이상이 동시에 들어갈 수 없다. 선거인 명부에 기재되지 않은 사람은 투표할 수 없다. 다만, 선거인 명부에 대한 이의나 불복신청에 의하여 선거권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결정서를 지참한 사람은 투표할 수 있다. 한편,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었더라도 공민권 제한 등으로 인해 선거일에 선거권이 없는 사람은 투표할 수 없다. 또한 부재자 신고인 명부에 등재된 선거인은 우편투표로 투표할 수 없다. 단 부재자 투표용지를 받지 못했거나 반송된 사람은 선거일에 해당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다.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사무 종사원으로 당해 관계 행정기관의 공무원 또는 교육 공무원을 위촉하여 투표사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보조할 수 있다. 투표 사무 종사원은 선거일 3일 전까지 위촉되어야 하고 그 성명이 공고되어야 한다. 투표 참관인은 당해 지역구에 후보자를 추천한 정당과 무소속 후보자에 의하여 선정된 사람으로, 투표용지의 교부 상황과 투표 상황을 참관한다.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는 8명의 투표 참관인을 정하되, 정당 후보자로부터 선정 · 신고된 투표 참관인의 수가 정수에 못 미치거나 초과하면 그 수를 조정하게 된다. 투표 참관인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지지 또는 반대를<NAME>거나 기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투표소에는 투표자, 투표 참관인, 투표 관리관, 읍 · 면 · 동 선거관리위원회 및 그 상급 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 및 직원, 투표사무 종사원,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의 요구를 받은 정복 경찰관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투표 종료 시 투표 관리관은 투표소의 입구를 닫고 투표 참관인의 참관 하에 투표함의 투입구와 그 자물쇠를 봉쇄 · 봉인해야 하며, 투표소 안에 있는 선거인의 투표가 끝나면 투표 참관인의 참관 하에 이를 봉쇄 · 봉인해야 한다. 투표 관리관은 투표가 종료된 후 지체 없이 투표함 및 그 열쇠와 투표록 및 잔여 투표용지를 관할 구· 시· 군 선거관리위원회에 송부해야 한다. 송부 과정에는 후보자별 투표 참관인 1인과 정복 착용 경찰공무원 2인이 동반할 수 있다. 개표 진행 상황은? 투표는 선거인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행위이며 이 행위가 끝나면 개표 과정이 뒤따른다. 즉 투표가 행위라면 개표는 그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선거사무 중 핵심적이며 종국적인 사무인 개표사무는 투표사무에 이어서 읍 · 면 · 동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이송된 투표록과 투표함에 의하여 투표를 점검, 계산하는 사무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투표구별 개표 주의와 혼합 개표 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 투표구별 개표 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개표사무는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가 관리한다. 구 · 시 · 군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 5일 전에 개표 장소를 선거인이 알 수 있도록 공고하고, 그 장소는 선거일 5일 전에 공고하여야 한다. 선거일 3일 전까지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사무를 보조할 개표 사무원을 둘 수 있는데, 이는 개표 사무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한 것이다. 개표사무 종사원은 그 사무의 중요성에 비추어 그 구역 내의 관계 행정기관이나 법원에 근무하는 공무원, 교육 공무원, 은행 직원 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자 중에서 위촉한다. 관계 행정기관 소속 공무원은 총 개표 종사원의 3분의 2를 초과할 수 없으며, 법원 공무원과 교육 공무원은 총 개표 종사원의 3분의 2를 초과할 수 없다. 선거일 3일 전까지 개표사무 종사원의 성명을 공고해야 한다. 개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구 · 시 · 군 선거관리위원회와 그 상급 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 · 직원, 개표사무원 · 개표사무 협조 요원 및 개표 참관인 이외에는 없다. 다만, 관람증을 받은 자와 방송 · 신문 · 통신의 취재 · 보도 요원은 일반 관람인석에 들어갈 수 있다. 투표함을 개함하려면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개표 참관인의 참관 하에 투표함의 봉쇄와 봉인을 검사한 후 이를 열어야 한다.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투표함을 개함한 후 투표수를 계산하여 투표록에 기재된 투표용지 교부 수와 대조해야 한다. 그다음에 개표는 투표구별로 구분하여 실시한다. 우편으로 송부된 부재자투표를 접수하면 당해 구 · 시 · 군 선거관리위원회의 정당 추천 위원이 참여하여 이를 즉시 우편 투표함에 투입 · 보관하여야 한다. 우편 투표함은 선거일 오후 6시(보궐선거 등은 오후 8시)에 개표 참관인의 참관 하에 일반 투표함의 투표지와 별도로 개표할 수 있다. 현행 선거법에는 정규의 투표용지를 사용하지 아니한 것, 어느 난에도 표를 하지 아니한 것, 둘 이상의 난에 표를 한 것, 어느 난에 표를 한 것인지 식별할 수 없는 것, ‘人’표를 하지 아니하고 문자 또는 물형(物形)을 기입한 것, ‘人’표 이외의 다른 사항을 기입한 것, 선거관리위원회의 기표용구가 아닌 용구로 표를 한 것, 우편투표에 있어서 봉함되지 아니한 것, 또는 선거인의 본인 여부가 확인되지 아니한 것 등은 무효로 본다. 한편, 선거법에는 대개 유효 · 무효가 문제가 될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로 유효표로 보아야 할 예를 명시하고 있다. 즉, 정상적으로 기표된 것이 아닐지라도 당해 투표구 선거관리위원회의 기표용구를 사용하여 기표한 것이 명확한 것, 후보자란 외에 추가 기표되었으나 추가 기표된 것이 어느 후보자에게도 기표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 두 후보자란의 구분 선상에 기표된 것으로서 어느 후보자에게 기표한 것인지가 명확한 것, 기표한 것이 전사된 것으로서 어느 후보자에게 기표한 것인지가 명확한 것, 인육으로 오손되거나 훼손되었으나 정규의 투표용지임이 명백하고 어느 후보자에게 기표한 것인지가 명확한 것 등은 유효표로 본다. 개표가 완료되면 구 · 시·군 선거관리위원회는 즉시 개표 결과를 공표하고 개표록을 작성하여 관할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송부해야 한다. 개표록을 송부 받은 관할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는 지체 없이 후보자별 득표수를 계산하고 공표하고 선거록을 작성해야 한다. 시 · 도선 거 관리 위원회가 개표록을 송부 받은 때에는 대통령선거에서는 후보자별 득표수를,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당별 득표수를 계산 · 공표하고 집계록을 작성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여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집계록을 송부 받은 경우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후보자별 득표수를,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서는 정당별 득표수를 계산 · 공표하고, 선거록을 작성하여야 한다. 위원장과 출석 위원 전원은 개표록 · 집계록 및 선거록에 서명 또는 날인해야 한다. 다만, 정당한 사유 없이 서명 또는 날인을 거부하는 위원이 있을 때에는 그 권한을 포기한 것으로 보고, 개표록 · 집계록 및 선거록에 그 사유를 기재한다. 한편 전자개표기는 2002년 6 · 13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각종 선거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자개표기는 기표된 투표지를 후보자별로 분류하고 득표수를 집계하는 과정을 자동화한 시스템으로 통신망을 통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방송국에 전송돼 TV 화면에 실시간으로 나타난다. 전자개표기가 개표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조작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해외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전자 투표 제도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있기도 하고 또 상당한 기술적 성과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우세하고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도 제기되어 시행되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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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명성황후 생가
(明成皇后 生家)
### 내용:
197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건평 30여 평의 목조 와즙. 이 건물은 원래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1688년(숙종 13)에 처음 지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는 목조 와가 14칸, 맛배 지붕 1동과 부속건물 1동만이 남아있다. 자형의 대청마루다. 합각지붕에 정면 930cm와 측면 700cm인 후면은 정면 1320cm에 측면 1200cm인 훗 처마 건물이다. 동쪽 측면은 500cm, 남쪽 측면은 390cm로 정확한 건평은 28.3평이다. 큰방 3칸 반, 작은방 1칸 반, 대청마루 3칸, 주방 3칸, 광 1칸 반, 큰방 서쪽 퇴 1칸 반, 작은방 남쪽 퇴 반칸 등 모두 13칸 반의 아담한 건물이다. 정침과 일주문이 있는 등 전형적인 조선 후기 사대부의 가옥구조이다. 일주문은 정면 245cm, 측면 150cm의 박고 건물로 지어진 대문이다. 건물 본체에는 안방과 부엌채,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라 쓴 고종의 어필비가 있지만 명성황후가 공부했다는 방은 없다. 이 비는 1904년(광무 8) 5월에 세워졌는데, 높이는 250cm, 폭은 64cm이다. 경기도 여주의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난 명성황후(1851-1895)는 9세에 부모를 여의고 1866년(고종 3)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파란만장한 한국 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그녀는 일본 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생가 뒤에는 명성황후 6대조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1985년에는 생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구조의 전통을 보여준다. |
8b0902ee-b606-4c19-aea9-21615e0e291a | source05/encykorea/MED47511.txt | 화병
(火病)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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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623 | CC BY | 1,5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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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듯하며, 뛰쳐나가고 싶고, 뜨거운 뭉치가 뱃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증세와 불안, 절망, 우울, 분노가 함께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화병’과 비슷한 맥락의 ‘화증(火症)’이라는 말은 조선 정조의 모친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이던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1735∼1815)가 쓴 『한듕록』에서 사도세자의 병세를 언급할 때 자주 나온 말이다.
“화(火) 곧 나시면 푸실 데 없사오니……”, “화증(火症)을 덜컥 내오셔……”, “그 일로 섧사오시고 울화(鬱火)가 되어시더니……”, “그 6월부터 화증이 더하사 사람 죽이시기를 시작하오시니……”하는 등의 대목을 보면 화 · 화증을 화내는 증, 또는 특별한 병증(病症)의 이름으로 쓴 것이 분명하다.
『한중록 연구』의 저자 김용숙(金用淑)은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하여 “세자에게는 두려워하는 병이 있었고 세자 자신은 화병이라 했으나 영조는 차라리 ‘발광(發狂)한 것’이라 했고, 사관(史官)의 말로는 증(症)이 발하면 역시 본성(本性)을 잃는다. ”고 하면서 세자의 병증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달랐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의학(韓醫學) 연구가들은 ‘화병’이라는 병명은 한의학의 전통문헌에서 독립된 질병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는 듯하다고 하였는데, 화병을 화병(禍病)이라 부르는 이도 있고 한자를 쓰지 말고 순수한 우리말로 홧병이라 부르자는 의견도 있었다.그러나 ‘화’ · ‘화증’ · ‘울화’가 주석자에 의해 모두 ‘火(화)’자로 표현된 점이나 우울 · 분노라는 증상의 특성, 『한중록』과 『조선왕조실록』의 용례(用例)로 미루어 볼 때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사전』(1999)에서도 정했듯이 화병(火病)이라 부르는 것이 옳고, 영어로는 ‘Hwa-byung’이라 하고 필요하면 그 말뜻(‘Fire’ Syndrome)을 설명해도 무방할 것이다.화병이 현대 정신의학의 심인성주2 신체장애와 관련해서 처음 언급되었고, 민간정신병관 중 『한듕록』의 화증과의 관련이 시사된 것은 1969년과 1970년의 일이며, 1975년에 농촌사회의 질병관 조사의 하나로 설문조사가 실시된 뒤 화병만을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77년의 일이다.
1983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 의료원의 한 정신과 의사가 그곳 한국인 교포여성으로 자신이 화병에 걸렸다고 믿는 세 명의 환자를 치료한 결과를 미국 정신의학회지에 발표하면서 ‘화병이 한국의 문화연계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자 국내의 연구도 갑자기 활발해졌다.특히 1986년부터 화병의 개념, 증상, 현대 정신의학적 진단부류와의 관계에 관한 통계적 조사가 현재까지 실시되어 오고 있고, 여기에 가세하여 한의학 분야에서도 화병의 증상에 대하여 통계적 조사 등을 시작하면서 한의학적 입장에서 화병을 정의하고 치료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심리학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위의 통계적 조사들은 주로 일반 인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병의원에 오는 환자군에 국한되어 있고 린(Lin)의 증례 이외에 1994년 민속학의 현지답사 방법에 의한 화병사례조사가 화병에 관해 매우 생생한 정보를 제공한 것 말고는 통계조사를 현실성 있게 보완할 심도 있는 사례분석이 부족하여 화병의 치료반응과 경과 등의 실상은 아직 충분히 밝히지 못한 상태이다.(1) 역학
자기의 병이 화병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화병에 걸린 일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화병을 앓은 일이 없다는 사람들에 비해서 나이가 더 많은 기혼여성이고 교육정도가 더 낮다는 사실에 연구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경제상태에 관해서는 두 군에서 차이가 없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경제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더 많다는 경우도 있어 일정치 않다.화병을 앓은 일반 인구가 전체 일반 인구의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2) 유발요인
사례면담을 통한 경상북도 금릉군 대덕면 덕산리의 민속조사 결과는 ‘화병’을 일으키는 요인이 심리적 갈등과 충격이며, 그 가운데서도 억울함 · 분함 · 상실감 · 한(恨)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반복적이거나 급격한 감정부담으로 ‘신경을 쓰고’, ‘속을 썩일 때’ 화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남편과의 사이에 말못할 사연”, “손자가 말썽을 자꾸 부려서”, “자기 잘못으로 시동생이 죽고, 뒤에 남편이 죽고, 시부모나 자식이 속을 썩여서”, “가족들이 연거푸 사고로 죽었을 때”, “재산을 강제로 털려서 억울하게 손해볼 때”, “남편이 바람피고 돈 없애고 술버릇이 사나워서”, “사업하다 돈을 모두 날린 뒤”, “자식이 죽거나 고치기 어려운 병이 든 뒤에”화병이 났다고들 말한다. 신경을 쓰는 일이 누적되어 만성스트레스로 작용하거나 죽음과 같은 급격한 상실의 경험을 크게 겪은 뒤에 일어난 경우이다. 미국교포 사례에서도 함께 살아 온 딸의 부부가 크게 다툰 뒤, 남편과 싸운 뒤, 남편이 헤어지겠다고 한 뒤에, 미국이민 3개월에 미래가 불확실해서 너무 불안하고 긴장돼 여기저기 아프다가 발병했다고 하였다.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홧병을 앓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심리적인 것이 화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리적인 원인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도 면담을 통해 모두 만성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억제해 왔음이 드러났다. 특히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사업실패, 사기 등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보고되었다. 어쨌든 화낼 일이 있어도 이를 풀지 못한다면 그것이 속으로 들어가 온갖 속병을 일으킨다고 본다. 화병의 심리적인 원인을 알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은 신체적인 이상이므로 외과수술로 몸 속의 뭉치를 제거해 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기도 하고 신체질환으로 보고 약물 등 신체적 치료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민속의료조사에서 보고된 덕산리 사람들의 화병에 대한 개념은 매우 독특하다. 한 제보자는 “신경을 쓰면 마음이 상하여 화가 들어 화병이 난다”고 하여 한의학의 심상증(心傷症)을 연상케 하고, 다른 사람은 “화병은 마음으로 난 것이고 속에서 심장이 놀랬는데 점이나 굿으로 고칠 수 없고 병원 약을 먹고 무엇보다 마음을 안정시켜 속의 화를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고도 하였다.
“염통(심장)에 화가 들어 차올라 발생한다”는 의견에는 한의학에서 말하듯 화기(火氣)가 심(心)을 침범하여 상충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듯하다.화병은 결국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일어나기에 어쩌지 못한다, 심장에 화가 난 병은 낫기 어렵다는 제보자가 많았다. 결국 신체의 핵심부에 손상이 가서 낫기 힘들어진다는 견해가 집약된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화병의 원인이 급격한 상실이나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심리적 스트레스라는 점에 다름이 없다. (3) 나타나는 증상
화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정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화나는 일을 참다가 생기는 여러 가지 정신적, 신체적 이상은 무엇이나 다 화병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연구자들은 여러 조사를 거쳤다.
그 결과 대체로 불안 · 분노 · 우울에 해당되는 정신증상과 ‘가슴이 뛰고 답답하다’, ‘피로하다’, ‘머리가 띵하다’, ‘소화가 안 된다’, ‘기운이 없다’는 등의 불안과 우울에 수반되는 신체증상, ‘얼굴에 열이 오른다’, ‘몸이 화끈거린다’는 등의 자율신경 기능실조의 증후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다시 말해 사람들은 화병의 증상에 대해 대략 일정한 증상을 생각하고 있는데 다만 화병을 앓은 일이 있다는 사람들은 그 증상의 표현이 강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강조됨을 알 수 있다. 즉,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가슴이 답답해 뛰쳐나가고 싶다’, ‘억울하다, 분하다, 몸이 화끈거리고 파괴적인 충동이 일어난다’고 호소한다.
민속조사 사례 중 68세의 한 여성 보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슴이 쇠갈고리로 긁는 것처럼 아팠다. 돌멩이같은 게 아랫배에서 명치로 해서 목 있는 쪽으로 오면 주먹만한 게 버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앞이 깜깜하고 잔뜩 부대껴서 못 견딜 정도라 바로 누웠다가 오만 몸살을 다 한다. ”대부분의 사례가 아랫배에 덩어리가 생겨 그것이 올라오고 또한 가슴이 답답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외치기도 하고 방 안에 있다가 밖으로 뛰쳐나간다는 말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뜨듯한 방에는 못 있고 찬 데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미국 교포의 사례에서도 배에 뭉친 덩어리가 위로 움직여 가슴을 누르고 심장을 눌러 숨이 차고 두근거리며,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가면 비뇨기와 허리를 눌러서 소변을 자주 보고 허리를 아프게 만든다고 호소하거나 덩어리가 가슴을 눌러서 숨차고 두근거리면서 불같은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목에 이르고, 숨이 막혀 죽지 않을까불안을 가졌는데 이 환자는 추위를 타서 옷을 두껍게 입어야 했다.
(4) 현대정신의학의 진단분류와의 관련
정신의학에서 과거에 히스테리증(Hysteria)이라 부르던 신경증은 그리스어로 히스테라(Hystera)주1에서 나왔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병을 자궁이 온 몸을 돌아 다니는 병이라고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다. 목을 꽉 조이는 덩어리는 히스테리 구(球)(Globus hystericus)라고 해서 히스테리증의 특이한 증상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고,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정신과의 외래환자 중 히스테리성 전환장애환자의 진단에 적용되었다.
현재는 국제진단분류(ICD-10) 중 신체화장애, 전환장애의 여러 증상 가운데 하나로 목의 덩어리(lump in throat)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위의 사례들에서도 같은 증상을 볼 수 있다.다만 전형적인(히스테리성) 전환장애에서는 자기의 증상을 과장되게 호소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자기증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화병환자는 이를 강렬한 감정적 신체적 고통과 함께 생생하게 호소하는 점이 다르다.
민간에서 말하는 화병이 비교적 일정한 증상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심리적 요인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화병을 특수한 단일질환으로 볼 수 있을지 분명치 않다. 현대정신의학에서 국제적인 현장조사를 실시한 끝에 정해 놓은 정신장애 진단분류 가운데 어느 것에 해당되는지, 아니면 화병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우리 문화와 관련된 문화연계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연구가 정신의학 분야에서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화병군에서 흔히 진단되는 것은 미국 정신과 분류 중 신체화 장애(Somatization disorder), 큰 우울증(Major depression), 감정부전장애(Dysthymic disorder), 범불안장애(Generalized anxiety disorder), 공황(恐慌)장애(Panic disorder), 강박장애, 적응장애의 순서로 많다는 보고가 있다.
대부분은 한 환자가 두 개 이상의 진단을 받고 있었고 신체화장애와 우울증이 겹쳐 있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화병을 기존의 정신과 진단분류와 구별해 내는 가장 중요한 점은 신체증상 중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머리가 무겁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등의 증상이라는 연구보고가 있고, 화병이라고 하는 것이 현대 정신의학의 진단분류상 한두가지 질환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증상도 있다.
화병은 한의학의 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 민간의료 문화에 바탕을 둔 독특한 문화연계증후군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조심스런 추정을 하는 이도 있으나 그러기에는 그 증후의 특이성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다.(5) 치료와 예후
화병에 걸렸다고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화병이 낫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이 받은 치료는 주로 양 · 한방의 약물치료거나 아예 낫지 않는 병이니 사람의 팔자(八字)주3라고 생각해 치료를 받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교포사례에서 치료에 응한 두 예는 항우울제 투여와 지지적 정신요법, 환경개선 등을 통해서 완전히 치유되었다.환자들이 치료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가 권하는 현대 정신의학적인 치료(약물요법 · 정신치료 · 가족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병의 증세를 이용하여 주위사람의 관심을 모으고 홀로 서지 못하는 환자의 의식적 · 의존적 성향도 때로는 병의 만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화병은 현재 미국 정신장애 진단분류 제4판(1994) 부록에 다른 나라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연계증후군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화병은 억눌린 분노와 한(恨)과 연관되어 나타난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현상에 대하여 우리나라 민간에서 붙인 질환명(labelling), 또는 문화적으로 규정된 민간진단(Culturally determined folk diagnosis)이며, 그 증상이나 경과가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문화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문화연계증후군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있다.이에 대한 횡문화적 고찰도 필요하다. 다만 이런 민간의 질병관의 특성을 알아서 일차 진료를 하는 의사나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서 그 질환이 정서적 갈등과 부담 때문에 생겼고 따라서 감정적 응어리를 푸는 다양한 정신요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환자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즉, 화병에 대한 지식은 의사-환자 간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화병의 특징은 연극성(히스테리성)우울증후군 혹은 신체형우울성 분노 및 불안증후군(Somatoform depressive anxious anger syndrome)급 · 만성스트레스 반응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 안에는 중증우울증이 우세한 유형, 불안 및 자율신경실조증이 우세한 유형, 신체화장애가 우세한 유형 등이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의 진단과 결합된 두 개 이상의 장애의 성질에 따라 치료방법이 달라질 수 있고 경과와 예후도 달라질 수 있다. 화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고 여자의 팔자로 돌리는 식의 민간개념은 의료계몽을 통해 고쳐져야 하고, 화병이라고 하여 일률적으로 일정한 한방약을 투여하는 것도 지양되어야 하며, 개별적인 사례 또는 치료반응과 경과에 대한 보다 면밀한 연구와 한국문화의 밖에 있는 유사한 현상에 대한 횡문화적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화병
(火病)
### 내용:
주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듯하며, 뛰쳐나가고 싶고, 뜨거운 뭉치가 뱃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증세와 불안, 절망, 우울, 분노가 함께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화병’과 비슷한 맥락의 ‘화증(火症)’이라는 말은 조선 정조의 모친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이던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1735∼1815)가 쓴 『한듕록』에서 사도세자의 병세를 언급할 때 자주 나온 말이다.
“화(火) 곧 나시면 푸실 데 없사오니……”, “화증(火症)을 덜컥 내오셔……”, “그 일로 섧사오시고 울화(鬱火)가 되어시더니……”, “그 6월부터 화증이 더하사 사람 죽이시기를 시작하오시니……”하는 등의 대목을 보면 화 · 화증을 화내는 증, 또는 특별한 병증(病症)의 이름으로 쓴 것이 분명하다.
『한중록 연구』의 저자 김용숙(金用淑)은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하여 “세자에게는 두려워하는 병이 있었고 세자 자신은 화병이라 했으나 영조는 차라리 ‘발광(發狂)한 것’이라 했고, 사관(史官)의 말로는 증(症)이 발하면 역시 본성(本性)을 잃는다. ”고 하면서 세자의 병증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달랐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의학(韓醫學) 연구가들은 ‘화병’이라는 병명은 한의학의 전통문헌에서 독립된 질병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는 듯하다고 하였는데, 화병을 화병(禍病)이라 부르는 이도 있고 한자를 쓰지 말고 순수한 우리말로 홧병이라 부르자는 의견도 있었다.그러나 ‘화’ · ‘화증’ · ‘울화’가 주석자에 의해 모두 ‘火(화)’자로 표현된 점이나 우울 · 분노라는 증상의 특성, 『한중록』과 『조선왕조실록』의 용례(用例)로 미루어 볼 때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사전』(1999)에서도 정했듯이 화병(火病)이라 부르는 것이 옳고, 영어로는 ‘Hwa-byung’이라 하고 필요하면 그 말뜻(‘Fire’ Syndrome)을 설명해도 무방할 것이다.화병이 현대 정신의학의 심인성주2 신체장애와 관련해서 처음 언급되었고, 민간정신병관 중 『한듕록』의 화증과의 관련이 시사된 것은 1969년과 1970년의 일이며, 1975년에 농촌사회의 질병관 조사의 하나로 설문조사가 실시된 뒤 화병만을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77년의 일이다.
1983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 의료원의 한 정신과 의사가 그곳 한국인 교포여성으로 자신이 화병에 걸렸다고 믿는 세 명의 환자를 치료한 결과를 미국 정신의학회지에 발표하면서 ‘화병이 한국의 문화연계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자 국내의 연구도 갑자기 활발해졌다.특히 1986년부터 화병의 개념, 증상, 현대 정신의학적 진단부류와의 관계에 관한 통계적 조사가 현재까지 실시되어 오고 있고, 여기에 가세하여 한의학 분야에서도 화병의 증상에 대하여 통계적 조사 등을 시작하면서 한의학적 입장에서 화병을 정의하고 치료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심리학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위의 통계적 조사들은 주로 일반 인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병의원에 오는 환자군에 국한되어 있고 린(Lin)의 증례 이외에 1994년 민속학의 현지답사 방법에 의한 화병사례조사가 화병에 관해 매우 생생한 정보를 제공한 것 말고는 통계조사를 현실성 있게 보완할 심도 있는 사례분석이 부족하여 화병의 치료반응과 경과 등의 실상은 아직 충분히 밝히지 못한 상태이다.(1) 역학
자기의 병이 화병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화병에 걸린 일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화병을 앓은 일이 없다는 사람들에 비해서 나이가 더 많은 기혼여성이고 교육정도가 더 낮다는 사실에 연구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경제상태에 관해서는 두 군에서 차이가 없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경제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더 많다는 경우도 있어 일정치 않다.화병을 앓은 일반 인구가 전체 일반 인구의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2) 유발요인
사례면담을 통한 경상북도 금릉군 대덕면 덕산리의 민속조사 결과는 ‘화병’을 일으키는 요인이 심리적 갈등과 충격이며, 그 가운데서도 억울함 · 분함 · 상실감 · 한(恨)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반복적이거나 급격한 감정부담으로 ‘신경을 쓰고’, ‘속을 썩일 때’ 화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남편과의 사이에 말못할 사연”, “손자가 말썽을 자꾸 부려서”, “자기 잘못으로 시동생이 죽고, 뒤에 남편이 죽고, 시부모나 자식이 속을 썩여서”, “가족들이 연거푸 사고로 죽었을 때”, “재산을 강제로 털려서 억울하게 손해볼 때”, “남편이 바람피고 돈 없애고 술버릇이 사나워서”, “사업하다 돈을 모두 날린 뒤”, “자식이 죽거나 고치기 어려운 병이 든 뒤에”화병이 났다고들 말한다. 신경을 쓰는 일이 누적되어 만성스트레스로 작용하거나 죽음과 같은 급격한 상실의 경험을 크게 겪은 뒤에 일어난 경우이다. 미국교포 사례에서도 함께 살아 온 딸의 부부가 크게 다툰 뒤, 남편과 싸운 뒤, 남편이 헤어지겠다고 한 뒤에, 미국이민 3개월에 미래가 불확실해서 너무 불안하고 긴장돼 여기저기 아프다가 발병했다고 하였다.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홧병을 앓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심리적인 것이 화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리적인 원인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도 면담을 통해 모두 만성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억제해 왔음이 드러났다. 특히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사업실패, 사기 등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보고되었다. 어쨌든 화낼 일이 있어도 이를 풀지 못한다면 그것이 속으로 들어가 온갖 속병을 일으킨다고 본다. 화병의 심리적인 원인을 알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은 신체적인 이상이므로 외과수술로 몸 속의 뭉치를 제거해 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기도 하고 신체질환으로 보고 약물 등 신체적 치료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민속의료조사에서 보고된 덕산리 사람들의 화병에 대한 개념은 매우 독특하다. 한 제보자는 “신경을 쓰면 마음이 상하여 화가 들어 화병이 난다”고 하여 한의학의 심상증(心傷症)을 연상케 하고, 다른 사람은 “화병은 마음으로 난 것이고 속에서 심장이 놀랬는데 점이나 굿으로 고칠 수 없고 병원 약을 먹고 무엇보다 마음을 안정시켜 속의 화를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고도 하였다.
“염통(심장)에 화가 들어 차올라 발생한다”는 의견에는 한의학에서 말하듯 화기(火氣)가 심(心)을 침범하여 상충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듯하다.화병은 결국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일어나기에 어쩌지 못한다, 심장에 화가 난 병은 낫기 어렵다는 제보자가 많았다. 결국 신체의 핵심부에 손상이 가서 낫기 힘들어진다는 견해가 집약된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화병의 원인이 급격한 상실이나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심리적 스트레스라는 점에 다름이 없다. (3) 나타나는 증상
화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정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화나는 일을 참다가 생기는 여러 가지 정신적, 신체적 이상은 무엇이나 다 화병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연구자들은 여러 조사를 거쳤다.
그 결과 대체로 불안 · 분노 · 우울에 해당되는 정신증상과 ‘가슴이 뛰고 답답하다’, ‘피로하다’, ‘머리가 띵하다’, ‘소화가 안 된다’, ‘기운이 없다’는 등의 불안과 우울에 수반되는 신체증상, ‘얼굴에 열이 오른다’, ‘몸이 화끈거린다’는 등의 자율신경 기능실조의 증후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다시 말해 사람들은 화병의 증상에 대해 대략 일정한 증상을 생각하고 있는데 다만 화병을 앓은 일이 있다는 사람들은 그 증상의 표현이 강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강조됨을 알 수 있다. 즉,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가슴이 답답해 뛰쳐나가고 싶다’, ‘억울하다, 분하다, 몸이 화끈거리고 파괴적인 충동이 일어난다’고 호소한다.
민속조사 사례 중 68세의 한 여성 보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슴이 쇠갈고리로 긁는 것처럼 아팠다. 돌멩이같은 게 아랫배에서 명치로 해서 목 있는 쪽으로 오면 주먹만한 게 버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앞이 깜깜하고 잔뜩 부대껴서 못 견딜 정도라 바로 누웠다가 오만 몸살을 다 한다. ”대부분의 사례가 아랫배에 덩어리가 생겨 그것이 올라오고 또한 가슴이 답답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외치기도 하고 방 안에 있다가 밖으로 뛰쳐나간다는 말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뜨듯한 방에는 못 있고 찬 데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미국 교포의 사례에서도 배에 뭉친 덩어리가 위로 움직여 가슴을 누르고 심장을 눌러 숨이 차고 두근거리며,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가면 비뇨기와 허리를 눌러서 소변을 자주 보고 허리를 아프게 만든다고 호소하거나 덩어리가 가슴을 눌러서 숨차고 두근거리면서 불같은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목에 이르고, 숨이 막혀 죽지 않을까불안을 가졌는데 이 환자는 추위를 타서 옷을 두껍게 입어야 했다.
(4) 현대정신의학의 진단분류와의 관련
정신의학에서 과거에 히스테리증(Hysteria)이라 부르던 신경증은 그리스어로 히스테라(Hystera)주1에서 나왔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병을 자궁이 온 몸을 돌아 다니는 병이라고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다. 목을 꽉 조이는 덩어리는 히스테리 구(球)(Globus hystericus)라고 해서 히스테리증의 특이한 증상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고,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정신과의 외래환자 중 히스테리성 전환장애환자의 진단에 적용되었다.
현재는 국제진단분류(ICD-10) 중 신체화장애, 전환장애의 여러 증상 가운데 하나로 목의 덩어리(lump in throat)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위의 사례들에서도 같은 증상을 볼 수 있다.다만 전형적인(히스테리성) 전환장애에서는 자기의 증상을 과장되게 호소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자기증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화병환자는 이를 강렬한 감정적 신체적 고통과 함께 생생하게 호소하는 점이 다르다.
민간에서 말하는 화병이 비교적 일정한 증상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심리적 요인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화병을 특수한 단일질환으로 볼 수 있을지 분명치 않다. 현대정신의학에서 국제적인 현장조사를 실시한 끝에 정해 놓은 정신장애 진단분류 가운데 어느 것에 해당되는지, 아니면 화병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우리 문화와 관련된 문화연계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연구가 정신의학 분야에서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화병군에서 흔히 진단되는 것은 미국 정신과 분류 중 신체화 장애(Somatization disorder), 큰 우울증(Major depression), 감정부전장애(Dysthymic disorder), 범불안장애(Generalized anxiety disorder), 공황(恐慌)장애(Panic disorder), 강박장애, 적응장애의 순서로 많다는 보고가 있다.
대부분은 한 환자가 두 개 이상의 진단을 받고 있었고 신체화장애와 우울증이 겹쳐 있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화병을 기존의 정신과 진단분류와 구별해 내는 가장 중요한 점은 신체증상 중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머리가 무겁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등의 증상이라는 연구보고가 있고, 화병이라고 하는 것이 현대 정신의학의 진단분류상 한두가지 질환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증상도 있다.
화병은 한의학의 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 민간의료 문화에 바탕을 둔 독특한 문화연계증후군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조심스런 추정을 하는 이도 있으나 그러기에는 그 증후의 특이성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다.(5) 치료와 예후
화병에 걸렸다고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화병이 낫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이 받은 치료는 주로 양 · 한방의 약물치료거나 아예 낫지 않는 병이니 사람의 팔자(八字)주3라고 생각해 치료를 받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교포사례에서 치료에 응한 두 예는 항우울제 투여와 지지적 정신요법, 환경개선 등을 통해서 완전히 치유되었다.환자들이 치료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가 권하는 현대 정신의학적인 치료(약물요법 · 정신치료 · 가족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병의 증세를 이용하여 주위사람의 관심을 모으고 홀로 서지 못하는 환자의 의식적 · 의존적 성향도 때로는 병의 만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화병은 현재 미국 정신장애 진단분류 제4판(1994) 부록에 다른 나라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연계증후군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화병은 억눌린 분노와 한(恨)과 연관되어 나타난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현상에 대하여 우리나라 민간에서 붙인 질환명(labelling), 또는 문화적으로 규정된 민간진단(Culturally determined folk diagnosis)이며, 그 증상이나 경과가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문화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문화연계증후군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있다.이에 대한 횡문화적 고찰도 필요하다. 다만 이런 민간의 질병관의 특성을 알아서 일차 진료를 하는 의사나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서 그 질환이 정서적 갈등과 부담 때문에 생겼고 따라서 감정적 응어리를 푸는 다양한 정신요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환자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즉, 화병에 대한 지식은 의사-환자 간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화병의 특징은 연극성(히스테리성)우울증후군 혹은 신체형우울성 분노 및 불안증후군(Somatoform depressive anxious anger syndrome)급 · 만성스트레스 반응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 안에는 중증우울증이 우세한 유형, 불안 및 자율신경실조증이 우세한 유형, 신체화장애가 우세한 유형 등이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의 진단과 결합된 두 개 이상의 장애의 성질에 따라 치료방법이 달라질 수 있고 경과와 예후도 달라질 수 있다. 화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고 여자의 팔자로 돌리는 식의 민간개념은 의료계몽을 통해 고쳐져야 하고, 화병이라고 하여 일률적으로 일정한 한방약을 투여하는 것도 지양되어야 하며, 개별적인 사례 또는 치료반응과 경과에 대한 보다 면밀한 연구와 한국문화의 밖에 있는 유사한 현상에 대한 횡문화적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
ca2f17a3-76ab-4e1d-aca1-fd99dccfe168 | source05/encykorea/SOC43333.txt | 타지키스탄
(Tadzhikistan)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717 | CC BY | 325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독립국가연합(CIS)에 속한 나라로, 면적은 14만 3100km2, 인구는 819만 1958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두샨베(Dushanbe)이다. 타지크인 79.9%, 우즈베크인 15.3%, 러시아인 1.1%, 키르기스인 1.1%로 구성되어 있다. 이슬람교(수니파 85%, 시아파 5%)가 90% 이상이며, 언어는 타지크어와 러시아어가 통용되고 있다. 4,000m 전후의 높은 산이 여러 개 있는 지형에 기후는 산들의 표고차가 심하여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립국가연합 내에서 면화의 생산량이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다음으로 많은 것이 주요 산업이다. 양·산양·야크가 산지에서 방목되며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양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지하자원은 빈약한 편이나 석유·천연가스·납·아연·중석·주석·금·우라늄 등이 매장되어 있다. 최근 직물·화학·알루미늄 공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국민 총생산은 9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099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성은 임기 7년의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으로,<NAME>(33석)과 하원(63석)으로 구성된 양원제이다. 주요 정당은 인민민주당, 공산당, 이슬람 부흥당 등이다. 타지키스탄은 중국과 로마의 교역로로, 7세기에는 터키, 8세기에는 아랍, 12세기에는 호레즘, 13세기에는 몽골, 14세기에는 티무르, 19세기에는 부하라칸국의 지배를 받다가 1868년 러시아령에 편입되었다.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일부가 된 것은 러시아혁명 이후이다. 구 소연방에 1924년 가입했지만 같은 해 10월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고, 1929년 연방공화국으로 구 소연방에 가입했다. 이후 구 소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1990년 8월 주권 선언을 하고, 1991년 9월 9일 독립선언, 12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다. 1991년 11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구공 산당 당수인 나비 예프(Nabiev, R. )가 당선되었지만 민주세력 및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이슬람교도들과의 갈등 속에서 1992년 중반부터 내란이 일어났지만 반정부 세력에 의해 축출되었다. 1993년 1월 라흐마노프(Rakhmanov,I. ) 최고 회의 의장 등 구공 산당 고위 인사가 중심이 된 신정부가 구성되었으며, 1994년 11월 6일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외적으로는 1992년 유엔에 가입하여 중도 우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 4월 27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008년 현재 상주 공관을 두고 있다. 양국은 1995년 7월 투자보장 협정을 맺었다. 이 나라에는 1937년 스탈린 치하에서 극동 및 연해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한인 동포 1세 및 후예들이 거주하고 있으나, 근래 내란이 지속되면서 인접 국가로 이주하는 동포가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대 타지키스탄 수출액은 2015년 현재 4800만 달러로, 대우, 태봉 섬유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고려인 동포 640여 명과 한국 교민 109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92년 2월 5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005년 현재 주 우즈베키스탄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1991년 4월 통상·경제협력 협정, 1992년 2월 무역·경제공동위 창설 협정, 1995년 9월 비자면제 협정이 양측에 의해 체결되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타지키스탄
(Tadzhikistan)
### 내용:
독립국가연합(CIS)에 속한 나라로, 면적은 14만 3100km2, 인구는 819만 1958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두샨베(Dushanbe)이다. 타지크인 79.9%, 우즈베크인 15.3%, 러시아인 1.1%, 키르기스인 1.1%로 구성되어 있다. 이슬람교(수니파 85%, 시아파 5%)가 90% 이상이며, 언어는 타지크어와 러시아어가 통용되고 있다. 4,000m 전후의 높은 산이 여러 개 있는 지형에 기후는 산들의 표고차가 심하여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립국가연합 내에서 면화의 생산량이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다음으로 많은 것이 주요 산업이다. 양·산양·야크가 산지에서 방목되며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양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지하자원은 빈약한 편이나 석유·천연가스·납·아연·중석·주석·금·우라늄 등이 매장되어 있다. 최근 직물·화학·알루미늄 공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국민 총생산은 9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099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성은 임기 7년의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으로,<NAME>(33석)과 하원(63석)으로 구성된 양원제이다. 주요 정당은 인민민주당, 공산당, 이슬람 부흥당 등이다. 타지키스탄은 중국과 로마의 교역로로, 7세기에는 터키, 8세기에는 아랍, 12세기에는 호레즘, 13세기에는 몽골, 14세기에는 티무르, 19세기에는 부하라칸국의 지배를 받다가 1868년 러시아령에 편입되었다.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일부가 된 것은 러시아혁명 이후이다. 구 소연방에 1924년 가입했지만 같은 해 10월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고, 1929년 연방공화국으로 구 소연방에 가입했다. 이후 구 소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1990년 8월 주권 선언을 하고, 1991년 9월 9일 독립선언, 12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다. 1991년 11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구공 산당 당수인 나비 예프(Nabiev, R. )가 당선되었지만 민주세력 및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이슬람교도들과의 갈등 속에서 1992년 중반부터 내란이 일어났지만 반정부 세력에 의해 축출되었다. 1993년 1월 라흐마노프(Rakhmanov,I. ) 최고 회의 의장 등 구공 산당 고위 인사가 중심이 된 신정부가 구성되었으며, 1994년 11월 6일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외적으로는 1992년 유엔에 가입하여 중도 우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 4월 27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008년 현재 상주 공관을 두고 있다. 양국은 1995년 7월 투자보장 협정을 맺었다. 이 나라에는 1937년 스탈린 치하에서 극동 및 연해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한인 동포 1세 및 후예들이 거주하고 있으나, 근래 내란이 지속되면서 인접 국가로 이주하는 동포가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대 타지키스탄 수출액은 2015년 현재 4800만 달러로, 대우, 태봉 섬유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고려인 동포 640여 명과 한국 교민 109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92년 2월 5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005년 현재 주 우즈베키스탄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1991년 4월 통상·경제협력 협정, 1992년 2월 무역·경제공동위 창설 협정, 1995년 9월 비자면제 협정이 양측에 의해 체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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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履)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461 | CC BY | 394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어떤 독특한 형태가 없이 족의로서 신발의 일반적 의미를 가지며, 혜·비·구·극·석·갹답 등 짧은 모든 신을 이르는 말이다. 이의 기원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의복 재봉 변증설(衣服裁縫弁證說)에 의하면 “황제의 신 어 측(於則)이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풀로 만든 것은 비, 마(麻)로 만든 것은 구, 가죽으로 만든 것은이라고 하였다.
진문공(晉文公)은 목극(木屐)을 만들었고 이윤(伊尹)은 마구(麻屨)를 만들어 신었다. ”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죽이나 풀로 만든 신발을 신었는데, 부여의 혁답, 마한의 초갹·초리·초갹답 등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부여·마한에서 초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통전 <변방동이조 >에 기록되어 있다. 황혁리를 신었던 계층은 고구려의 상류층이었다. 무용총의 오벽 벽화는 흑색리를 신은 고구려의 인물화가 그려져 있다. 백제에서는 왕복에 오혁리를 신었다. 황혁리와 초리, 신라의 마리가 신라 최고의 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경주 식리총에 있는 포백·사제의 이가 황혁리와 초리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나주 반남면 옹관분의 금동리, 경주 금관총의 금동식리 중 소식부투조리와 화형 좌식 부전리가 이 유물로 전해진다. 양산 북정동 고분 출토 금동식리, 양산 부부총 출토 금동식리,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식리, 경부 금령총 출토의 금동식리, 공주 부근 출토의 금동투각리, 백제 무령왕릉 출토 금동리 등 많은 유물이 있다. 그런데 이들 금동리들은 전부 금속제인데 동판에 무늬를 입혔다. 신바닥에는 여러 개의 못이 박혀 있어 일상적인 실용성이 없는 신발이 아니라 지배자를 상징하는 의례용 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진골에서 4두품까지는 사·마·나·피제의 신을 신었고 평민은 나를 금지하고 피·마제만 사용한 것이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에 나타나 있다. 고려 시대의 신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고려도경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종 때 명나라 태조로부터 받은 제관복에 흑리가 있었고, 6군이 혁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화가 이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서인들은 초리·구리를 신었고, 국사는 오혁 영리를, 조례는 오혁 구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는 복식이 발달하고 계급에 따른 차별도 심했기 때문에 복식 금령이 많았다. 태종이 관복색을 정할 때 백관 복 1품에서 9품까지 흑리를 신게 하였고, 경국대전에 기록된 백관의 조복·제복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혜로 규정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조선 전기에는 흑피혜와 흑리가 관복에 사용되었다. 태사혜는 조선시대의 백관복에서 볼 수 있다. 승녀는 피혜사용을 금지하고 유생은 마혜를 신도록 한 이 제도는 조선 말기의 흑혜나 운혜로 이어진다. 초리와 마혜·지혜를 착용한 서민복은 조선 중기에는 나막신도 있었다. 운혜는 여자들의 대표적인 신이었다. 운혜와 당혜는 귀족 부인들이 착용했고, 초혜·나막신·징신 등은 일반 부녀자가 착용했다. 혁리·초리·마혜와 사라능단의 혜, 목극,<NAME> 등 신의 재료 또한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특히, 짚신[]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남방 계통의 화와 대응되는 우리 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하와이가 병용되었고, 삼국시대에는 주로 귀족계급이 이를 신었다. 조선시대에는 화를 대표적인 신으로 사용하고, 고려 초에는 이만을 사용하다가 고려 말에는 화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이중 제도는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말까지 우리 신의 기본 구조를 이루면서 발전해 왔으며, 조선 말기까지도 전통을 이어왔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
(履)
### 내용:
어떤 독특한 형태가 없이 족의로서 신발의 일반적 의미를 가지며, 혜·비·구·극·석·갹답 등 짧은 모든 신을 이르는 말이다. 이의 기원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의복 재봉 변증설(衣服裁縫弁證說)에 의하면 “황제의 신 어 측(於則)이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풀로 만든 것은 비, 마(麻)로 만든 것은 구, 가죽으로 만든 것은이라고 하였다.
진문공(晉文公)은 목극(木屐)을 만들었고 이윤(伊尹)은 마구(麻屨)를 만들어 신었다. ”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죽이나 풀로 만든 신발을 신었는데, 부여의 혁답, 마한의 초갹·초리·초갹답 등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부여·마한에서 초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통전 <변방동이조 >에 기록되어 있다. 황혁리를 신었던 계층은 고구려의 상류층이었다. 무용총의 오벽 벽화는 흑색리를 신은 고구려의 인물화가 그려져 있다. 백제에서는 왕복에 오혁리를 신었다. 황혁리와 초리, 신라의 마리가 신라 최고의 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경주 식리총에 있는 포백·사제의 이가 황혁리와 초리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나주 반남면 옹관분의 금동리, 경주 금관총의 금동식리 중 소식부투조리와 화형 좌식 부전리가 이 유물로 전해진다. 양산 북정동 고분 출토 금동식리, 양산 부부총 출토 금동식리,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식리, 경부 금령총 출토의 금동식리, 공주 부근 출토의 금동투각리, 백제 무령왕릉 출토 금동리 등 많은 유물이 있다. 그런데 이들 금동리들은 전부 금속제인데 동판에 무늬를 입혔다. 신바닥에는 여러 개의 못이 박혀 있어 일상적인 실용성이 없는 신발이 아니라 지배자를 상징하는 의례용 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진골에서 4두품까지는 사·마·나·피제의 신을 신었고 평민은 나를 금지하고 피·마제만 사용한 것이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에 나타나 있다. 고려 시대의 신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고려도경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종 때 명나라 태조로부터 받은 제관복에 흑리가 있었고, 6군이 혁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화가 이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서인들은 초리·구리를 신었고, 국사는 오혁 영리를, 조례는 오혁 구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는 복식이 발달하고 계급에 따른 차별도 심했기 때문에 복식 금령이 많았다. 태종이 관복색을 정할 때 백관 복 1품에서 9품까지 흑리를 신게 하였고, 경국대전에 기록된 백관의 조복·제복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혜로 규정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조선 전기에는 흑피혜와 흑리가 관복에 사용되었다. 태사혜는 조선시대의 백관복에서 볼 수 있다. 승녀는 피혜사용을 금지하고 유생은 마혜를 신도록 한 이 제도는 조선 말기의 흑혜나 운혜로 이어진다. 초리와 마혜·지혜를 착용한 서민복은 조선 중기에는 나막신도 있었다. 운혜는 여자들의 대표적인 신이었다. 운혜와 당혜는 귀족 부인들이 착용했고, 초혜·나막신·징신 등은 일반 부녀자가 착용했다. 혁리·초리·마혜와 사라능단의 혜, 목극,<NAME> 등 신의 재료 또한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특히, 짚신[]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남방 계통의 화와 대응되는 우리 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하와이가 병용되었고, 삼국시대에는 주로 귀족계급이 이를 신었다. 조선시대에는 화를 대표적인 신으로 사용하고, 고려 초에는 이만을 사용하다가 고려 말에는 화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이중 제도는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말까지 우리 신의 기본 구조를 이루면서 발전해 왔으며, 조선 말기까지도 전통을 이어왔다. |
355c3bc2-ee5b-4266-a10e-4c930ad5e00c | source05/encykorea/SOC22935.txt | 설빔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031 | CC BY | 82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세장이라고도 한다. 주부는 설날부터 새해를 맞이하기 때문에 묵은 것을 다 떨구고 새 출발을 하는 데 의미가 있고, 설빔을 준비하기 위해 보름쯤이면 모든 준비를 끝마친다.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옷 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내게 된다. 특히 부녀자의 치마저고리는 화려하고 바지는 화사한 색으로 하고, 저고리는 색상이 있는 화사한 것으로 하여 호사를 누린다. 버선·대님도 새것으로 바꾼다. 설빔에 기대고 또 화려한 설빔으로 모양을 내고 화사한 것을 서로 자랑하기도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설날 설빔에 남아 있다. 한복으로 한복을 차려입고 세배하고 나들이하는 풍속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설빔
### 내용:
세장이라고도 한다. 주부는 설날부터 새해를 맞이하기 때문에 묵은 것을 다 떨구고 새 출발을 하는 데 의미가 있고, 설빔을 준비하기 위해 보름쯤이면 모든 준비를 끝마친다.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옷 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내게 된다. 특히 부녀자의 치마저고리는 화려하고 바지는 화사한 색으로 하고, 저고리는 색상이 있는 화사한 것으로 하여 호사를 누린다. 버선·대님도 새것으로 바꾼다. 설빔에 기대고 또 화려한 설빔으로 모양을 내고 화사한 것을 서로 자랑하기도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설날 설빔에 남아 있다. 한복으로 한복을 차려입고 세배하고 나들이하는 풍속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
ca00ec53-508f-49bf-94a5-e88d2f4c33ba | source05/encykorea/LAW29092.txt | 우편법
(郵便法)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팽원순"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156 | CC BY | 278 |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 6장 55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칙, 우편물, 우편에 관한 요금, 우편물의 취급, 손해배상, 벌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에 제정되어 2018년까지 일반 개정과 타법 개정을 포함하여 23차례 개정되었다. 이 법은 우선 정부가 독점적으로 관장하는 우편사업으로서 타인을 위한 서적의 송달 행위를 하는 것은 법률, 대통령령이 정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지되어 있다. 한국이 가입한 국제조약 중 만국우편조약이 대표적인 것으로, 이 법의 적용을 받는 것은 우편에 관한 사항이다. 이 조약은 1874년 스위스의 베른에서 체결된 것으로 1948년 현재의 조약으로 개정되었는데, 여기에는 소포·환 등에 관한 7개의 약정이 부속되어 있다. 이 조약에 따라 만국우편연합(Universal Postal Union)이 설치되었다. 한말인 1884년(고종 21)에 선진 우편제도를 도입한 뒤 1897년에 처음으로 만국우편연합 총회에 참석하고 1900년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일본이 침략하자 만국우편연합의 가입국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8·15광복이 있은 뒤 1949년에 회원국이 되었다. 군사우편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는 군사우편법이 적용되었으나, 이후 폐지되어 1997년 현재는 우편법 16조에 따로 규정을 두고 있다.
우편법은 우편물의 비밀 보장을 규정하고 있는데, 우편업무 종사자는 재직 중이나 그 뒤에 우편에 관하여 취득한 타인의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그 비밀을 침해한 자는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 조항은 헌법이 보장한 통신의 비밀에 관한 규정에 의거하여 우편물을 통상우편과 소포우편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통상우편물은 다시 5종으로 세분된다. 제1종 우편물은 봉인한 신서나 우편물을 말한다. 통상엽서·봉함엽서·왕복엽서·소포 엽서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우편엽서는 제2종이다. 제3종 우편물은 체신부 장관의 인가를 받은 것으로 정치·경제·문화 기타 공공적 성격의 내용을 보도하거나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널리 공중에게 배포되는 것은 체신부 장관의 인가를 받은 것이다. 제4종 우편물에는 서적·인쇄물·상품 견본·모형 등이 포함된다. 제5종 우편물에는 식물종자·묘·구근·뿌리·수피·미곡 표본 등이 포함된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편엽서의 표면이나 제3종 내지 제5종의 우편물에 통신문을 기재하거나 타종을 첨부한 것은 제1종 우편물로 본다. 합장한 우편물은 그 종류 중 최고 요금을 납부할 수 있는 우편물로 취급한다. 신서는 소포우편물로 하지 않고 소포우편물에 합장할 수 없다. 제3종 이하의 우편물은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한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우편법
(郵便法)
### 내용:
6장 55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칙, 우편물, 우편에 관한 요금, 우편물의 취급, 손해배상, 벌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에 제정되어 2018년까지 일반 개정과 타법 개정을 포함하여 23차례 개정되었다. 이 법은 우선 정부가 독점적으로 관장하는 우편사업으로서 타인을 위한 서적의 송달 행위를 하는 것은 법률, 대통령령이 정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지되어 있다. 한국이 가입한 국제조약 중 만국우편조약이 대표적인 것으로, 이 법의 적용을 받는 것은 우편에 관한 사항이다. 이 조약은 1874년 스위스의 베른에서 체결된 것으로 1948년 현재의 조약으로 개정되었는데, 여기에는 소포·환 등에 관한 7개의 약정이 부속되어 있다. 이 조약에 따라 만국우편연합(Universal Postal Union)이 설치되었다. 한말인 1884년(고종 21)에 선진 우편제도를 도입한 뒤 1897년에 처음으로 만국우편연합 총회에 참석하고 1900년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일본이 침략하자 만국우편연합의 가입국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8·15광복이 있은 뒤 1949년에 회원국이 되었다. 군사우편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는 군사우편법이 적용되었으나, 이후 폐지되어 1997년 현재는 우편법 16조에 따로 규정을 두고 있다.
우편법은 우편물의 비밀 보장을 규정하고 있는데, 우편업무 종사자는 재직 중이나 그 뒤에 우편에 관하여 취득한 타인의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그 비밀을 침해한 자는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 조항은 헌법이 보장한 통신의 비밀에 관한 규정에 의거하여 우편물을 통상우편과 소포우편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통상우편물은 다시 5종으로 세분된다. 제1종 우편물은 봉인한 신서나 우편물을 말한다. 통상엽서·봉함엽서·왕복엽서·소포 엽서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우편엽서는 제2종이다. 제3종 우편물은 체신부 장관의 인가를 받은 것으로 정치·경제·문화 기타 공공적 성격의 내용을 보도하거나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널리 공중에게 배포되는 것은 체신부 장관의 인가를 받은 것이다. 제4종 우편물에는 서적·인쇄물·상품 견본·모형 등이 포함된다. 제5종 우편물에는 식물종자·묘·구근·뿌리·수피·미곡 표본 등이 포함된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편엽서의 표면이나 제3종 내지 제5종의 우편물에 통신문을 기재하거나 타종을 첨부한 것은 제1종 우편물로 본다. 합장한 우편물은 그 종류 중 최고 요금을 납부할 수 있는 우편물로 취급한다. 신서는 소포우편물로 하지 않고 소포우편물에 합장할 수 없다. 제3종 이하의 우편물은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한다. |
eb5291b4-fac1-45da-8396-7b6e5dd55553 | source05/encykorea/POL51936.txt | 원호
(元戶) | 텍스트 | 2023 | 23080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저자 미상"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64 | CC BY | 2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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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함경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1860년대에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났다. 조선과 러시아가 1884년에 국교를 수립하자, 러시아 영토 안에 살던 모든 이주 고려인들이 러시아 국적을 자동적으로 취득해 러시아 사람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고려인들은 유럽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러시아 사람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지역 사람들도 이주해와, 이들과 함께 공동의 삶을 꾸려 나갔다. 조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오자, 러시아 당국은 이전과 다르게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서 입국자를 제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조선 이주민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과정은 까다로워 극동 지역의 한인 가운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졌다. 곧 국적을 취득하려면 직업도 러시아 정교로 바꾸고 당국에 일정한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런 정책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러시아로 건너간 조선 이주민에게 수용하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조선 이주민 가운데 러시아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이 많아졌다.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인은 러시아 국적을 가진<NAME>와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여 호로 나뉘었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NAME>보다 여 호의 숫자가 많아졌다. 극동의 연해주 지역만 보더라도 1906년<NAME> 16,965명, 여호 18,014명, 1910년<NAME> 17,080명, 여호 36,885명이었다. 일본이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극동 지역의 이주 한인들은 꾸준히 증가하였지만, 대체로<NAME>보다는 여호가 더 많았다. 다만<NAME>는 러시아 사람들과 동등한 법적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생활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지금의 페르티잔스크(Partizansk)인연해주 수청 지방에 있었던 신영 거우[, , Nikolaevka]와 다우 지미[, Taudimi]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 있었던 대표적인<NAME>인 마을이다. 일찍이 러시아로<NAME><NAME>는 종교를 바꾸고 세금을 내는 등 러시아 사람들과 함께 극동 개발에 힘썼다. 다만 여호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소비에트(soviet)<NAME>에서 활동했지만,<NAME>는 조국 독립을 위해 활약하고 있던 부대에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원호
(元戶)
### 내용:
조선 함경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1860년대에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났다. 조선과 러시아가 1884년에 국교를 수립하자, 러시아 영토 안에 살던 모든 이주 고려인들이 러시아 국적을 자동적으로 취득해 러시아 사람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고려인들은 유럽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러시아 사람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지역 사람들도 이주해와, 이들과 함께 공동의 삶을 꾸려 나갔다. 조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오자, 러시아 당국은 이전과 다르게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서 입국자를 제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조선 이주민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과정은 까다로워 극동 지역의 한인 가운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졌다. 곧 국적을 취득하려면 직업도 러시아 정교로 바꾸고 당국에 일정한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런 정책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러시아로 건너간 조선 이주민에게 수용하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조선 이주민 가운데 러시아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이 많아졌다.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인은 러시아 국적을 가진<NAME>와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여 호로 나뉘었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NAME>보다 여 호의 숫자가 많아졌다. 극동의 연해주 지역만 보더라도 1906년<NAME> 16,965명, 여호 18,014명, 1910년<NAME> 17,080명, 여호 36,885명이었다. 일본이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극동 지역의 이주 한인들은 꾸준히 증가하였지만, 대체로<NAME>보다는 여호가 더 많았다. 다만<NAME>는 러시아 사람들과 동등한 법적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생활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지금의 페르티잔스크(Partizansk)인연해주 수청 지방에 있었던 신영 거우[, , Nikolaevka]와 다우 지미[, Taudimi]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 있었던 대표적인<NAME>인 마을이다. 일찍이 러시아로<NAME><NAME>는 종교를 바꾸고 세금을 내는 등 러시아 사람들과 함께 극동 개발에 힘썼다. 다만 여호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소비에트(soviet)<NAME>에서 활동했지만,<NAME>는 조국 독립을 위해 활약하고 있던 부대에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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