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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997
CC BY
2,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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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 한 해의 첫 명절로 시간적으로는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새 달의 첫날이기 때문이다. 설날을 원일 · 원단 · 원정 · 원신 · 원조 · 정조 · 세수 · 세초 · 연두 · 연두 · 연두 · 연수 · 연시라고도 한다. 신일 혹은 달도라고도 하는데, 이는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설은 양력 1월 1일 신정의 상대적 개념으로 구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설을 폄하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나이를 뜻하는 설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해가 바뀌어 새해를 맞이하는 첫 날인 설을 맞이할 때마다 한 살씩 더 먹는다. 설을 한 번 더 쇠면 1년, 두 번 쇠면 2년이 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나이도 한 살씩 더 많아진다. 결국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하여 오늘날의 살로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설을 설 명절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하루도 설날이 아닌데 아직 낯설어 설다, 낯설다 등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설 이란 용어는 정월 초하룻날, 하루를 가리키지만 실제 명절은 대보름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설을 설 명절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거의 매달 명절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NAME> 것은 설날과 보름 명절이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달의 첫 날인 설날은 농경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중요하고, 보름 명절은 농경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중요하다. 농경국가에서 보름달, 곧 만월은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천지가 개벽하는 그 순간에 비유하면 정월 초하루는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정월 보름과 8월 보름 추석은 보름 명절 중에서도 각별하다. 정월 보름은 첫 보름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대보름 명절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국가에서 여름내 농사가 결실을 맺는 8월 보름 명절은 수확을 앞둔 명절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갖는다. 수서와 당서에 기록된 신라에 대한 기록은 왕권국가다운 설날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매년 정월원단에 서로 축하하며, 왕이<NAME>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하지만 설 명절이 역법 체계인 것을 감안한다면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진수가 저술한 역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월( ), 5월과 10월의 농공시 필기 등과 같은 표현은 당시 역법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은나라의 역법은 현재로 치면 음력 섣달에 해당하는 정월이다. 이처럼 당시 부족국가들이 역법을 사용했다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역법을 통해 달의 수를 계산하고 세수인 설이 존재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나라마다 설을, 정월을 언제 정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 설 명절의 연원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권 1, 기이 사금 갑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신라 21대 비처 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 궁중에서 궁주와 중의 간통 사건이 일어나 궁주를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매년 상해 · 상자 · 상오일에는 만사를 꺼려 근신하였다 하여 달 도라 했다. 설의 이칭이기도 한 달도는 설의 기원일 수도 있다. 또한 정초 십이지 중 상해와 상해의 경우 정초에, 상해의 경우 정초에 해당한다. 일(十二支日)에 해당되는 날로 이때의 금기를 비롯한 풍속은 오늘날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9대 속절(俗節, 명절)로 원단(元旦, 정월 초하루 설날),<NAME>(上元, 정월 대보름), 상사(上巳, 후에 삼짇날이 됨),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중구(重九), 팔관(八關), 동지(冬至)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4대 명절로 원단, 한식, 단오, 추석을 정했지만 다른 명절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전 시대에 비해 민간에서는 세시 명절과 그 무렵에 행하는 세시풍속이 더 다양했다. 그런데 설날 이외에 설 이란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동지는 작은설이라 하는데, 아세라 한다. 동지는 24절기 중 하나로, 설날 떡국 한 그릇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중국 후한시대(22∼220)에 동지를 세수로 삼았던 점을 작은설로 여긴다. 사실상 24절기는 동지를 0으로 하고 첫 기번은 소한, 두 번째 기번은 대한으로 하며 입춘은 3번이 된다. 동지에 역 계산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지 기번을 0으로 했다. 그래서 흔히 열두 띠로 일컬어지는 십이지를 말할 때 첫 달인 자월은 정월이 아니라 음력 동짓달이다. 그 뒤 섣달은 축월, 정월은 인월, 2월은 묘월... ... 등의 순으로 불린다. 설날을 비롯하여 각 세시 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대체로 소망을 기원하는 의례적인 성격을 띤다. 기원의 대상은 신처럼 뚜렷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초월적인 힘이 되기도 한다. 농경의례라고도 하는 세시풍속은 농사를 중심축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풍농의 기원과 예측, 풍흉을 점치는 점세, 농공과 풍농을 감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또한 후대에 이르러 어업과도 관계가 있다. 그렇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농경의례로서의 성격도 퇴색되어 농경의례로서의 의미도 퇴색되었다. 정월, 설 명절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명절을 전후로 집중된다. 정월은 농한기이고 한 해가 시작되는<NAME> 기간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 세시풍속이 집중되어 있다.<NAME> 기간에는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신과의 만남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날은 의례 설날 아침이다. 종손이 중심이 되어 차례를 지내는데 4대조까지 모시고 5대조 이상은 시제 때 산소에서 모신다. 차례를 마친 뒤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하는데 요즘은 설을 전후해 성묘를 한다. 정초에 안택을 하는 이유는 집안의 평안을 위해서이다. 정초에 행하는 신년제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무당 같은 전문 사제를 불러 평소 집에서 하는 고사보다 큰 굿을 하는 안택도 있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홍수 매기[횡수막이]라 하여 주부가 단골무당을 찾아가 비손을 하거나 집에 불러다가 굿을 한다. 특히 홍수 매기는 횡수를 막는 의례로 가족 가운데 그 해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각별한 의의를 갖는다. 홍수 매기를 한 뒤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뱃속에 있는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어 삼거리나 사거리에 버린다. 액운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열양세시기의<NAME>조에는 깨끗한 종이에 흰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슴[어부 시=]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부슴은 대보름날, 즉 대보름날에 그 해의 액을 막기 위해 강물에 조밥을 던져 고기가 먹게 하는 것이다. 용궁맞이는 요즈음까지도 계속되었는데 반드시 조밥이 아니더라도 제물을 장만해 강물에 던져 소지를 올리는 등 용신을 위해 제를 지낸다. 한 해 농사를 기원하는 농점도 다양하다. 보름날 저녁에 달이 뜨는 모습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은 물론 달의 모양과 색깔을 보고 한 해 농사를 점쳐 보기도 한다. 지금도 서해안 지역에서는 정초에 무당을 불러 풍어제를 크게 치른다. 한 해 동안 풍족하고 고기잡이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굿이다. 정월 대보름 무렵에 영남과 호남 등지에서는 마을에서 동제를 올린다. 충남 서산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대보름날 볏가리를 세웠다가 2월 초하루에 걷어낸다. 이는 놀이적인 성격도 있지만 원래 풍농을 위한 의례였다.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다양한 만큼 속신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설은 사실상 섣달그믐부터 시작된다고 할 만큼 그믐날밤과 초하루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끝과 시작은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섣달그믐날 밤에는 잠들지 않는다.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설 음식은<NAME>이라고 한다.<NAME>의 대표 음식인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더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떡국을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다. 또한 설날이나 상묘일(, 첫 토끼날)에는 여인들이 아침 일찍 남의 집에 출입하면 그 집에 재수가 없다는 속신이 있다. 정월 대보름에 키가 작은 사람이 남의 집에 출입하는 것은 그 해에 목화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하기도 한다. 속신이라는 말은 복조리 풍속 중 하나인데, 이는 복을 끌어모은다는 뜻이다. 설날 새벽에 밖에 나가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길조이고, 까치 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한다. 설날 밤에 야광귀라는 귀신이 와서 신발을 물어보고 맞으면 신고 가는데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듬해 재수가 없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이런 세시를 하거나 또는 귀신날이라 하여 이날 밤에 신발을 감추거나 엎어놓기도 한다. 지붕에 체나 키를 매달아놓고 저녁에 고추씨와 목화씨를 태워 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귀신을 쫓기도 한다. 정초에 여자들은 난리를 친다. 널을 뛰면 그 해에는 발에 무좀[무좀]이 안 걸린다고 한다. 섣달그믐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연날리기가 계속된다. 액연이란 연의 몸통이나 꼬리에 송액, 송액영복 등의 글자를 써서 대보름이 되면 멀리 날려 보낸다. 예전에는 대보름이 지나도 연을 날리는 사람이 있으면 욕을 하기도 했다. 액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입춘에는 보리 뿌리를 캐서 세 가닥 이상이면 그 해 보리농사가 풍년, 두 가닥이면 평년작,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점친다. 이는 농점으로 점복이자 속신에 포함될 수도 있다. 정초 십이지 일은 유모 일과 무모 일로 구분된다. 정월 초하루가 털 있는 12지 동물의 날, 즉 유모일이 되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고 무모일이 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유모일 중에서도 소, 토끼, 호랑이가 제일 좋다고 한다. 이는 주술적 사고로 여기 털을 곡식의 성장에 비유했다. 첫 쥐날 인 상자일에 일을 하면 쥐가 곡식을 축낸다고 하여 금한다. 또 쥐가 쏘고 갉아먹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칼질이나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 마소를 먹이려고 여물을 썰면 쥐가 벼 나락이나 짚 등을 쏠아서 못 쓰게 한다고 하며, 길쌈이나 옷을 지으면 쥐가 옷감을 쏠아서 못 쓰게 한다고 금한다. 첫 소날인 상축일에는 쇠붙이 연장을 다루지 않으며, 도살도 하지 않는다. 이날 연장을 다루거나 방아를 찧으면 쟁기의 보습이 깨지고 소가 기침을 한다고 한다. 또 이날 곡식을 밖으로 퍼내는 것은 소에게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여 금지한다. 첫 번째 호랑이 날인 상인일에는 일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 또 짐승에 대한 나쁜 말을 하지 않으며 외출도 삼간다. 이날 여자들이 외출하여 남의 집에서 대변을 보면 그 집 가족이 호랑이에게 잡혀간다는 말도 있다. 첫 토끼날인 상묘일에는 여자가 남의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은 재수가 없다 하여 금한다. 심지어 여자들은 출입을 종일 꺼리기도 한다. 이날 여자들은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NAME>다고 해서 베틀에 한 번씩 올라가 베를 짜본다. 첫 용날인<NAME>일 새벽에는 여자들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온다. 이와 같은 용알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용이 내려와 알을 쓸어놓고 간다 하여 남보다 먼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NAME>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정월 대보름 풍속으로 경북에서는 용물뜨기라 되어 있다. 또한 이날 긴 머리를 감거나 옷을 벗지 않는다. 그러면 뱀이 나온다고 하는데 뱀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뱀처럼 길다고 해서 꺼리는 것이다. 반면 머리카락이 곱고 길게 자랐으면 하는 사람은<NAME>일에 머리를 감아 기원을 한다. 첫 뱀날인 상사일에는 머리를 빗거나 이발을 하면 뱀이 나타난다는 이유로 금한다. 또한 부엌에 나무를 들이지 않고 빨래도 하지 않으며 바느질도 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는 첫 말날인 상오일을 좋은 날로 여겨 장을 담근다. 제주도의 첫 양날인 상미일에는 환자라도 약을 먹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미불복약이다. 이날은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무탈하게 여긴다. 첫 번째 원숭이날인 상신일에는 부엌에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남자가 일찍 일어나 비를 들고 부엌의 네 귀퉁이를 쓴다. 첫 닭 날인 상유일에는 바느질을 하면 손이 닭발처럼 된다고 해서 금한다. 그렇지만 지역에 따라 닭날 장 담그면 달다는 말도 있다. 상술일에는 개를 기르면 텃밭을 해칠 수 있으므로 개를 기르면 안 되고 이날 풀을 베면 평소에 잘 토한다 하여 금한다. 첫 돼지 날인 상해일에는 팥가루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어두워진다고 한다. 잘 사는 집의 부엌 흙을 훔쳐다가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귀밝이술을 마시면 일 년 내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고 대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깨면 부럼이 생기지 않는다. 또 더위를 팔면 그 해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속신도 있다. 타성받이 집이 세 채 이상 되어야 그 해 운수가 좋다고 하는 것이 오곡밥이다. 동제를 전후하여 각종 금기가 있는데 이를 어기면 부정을 저지른다. 이는 속신이라기보다는 민속신앙이라는 큰 범주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제의가 끝난 후 제물을 진설하기 위해 깔았던 백지를 가지고 가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고 아들이 없는 가정에서 불종지(기름을 넣고 종이 심지를 박아서 켜는 불종지)를 가지고 가면 아들을 본다는 속신도 있다. 줄다리기를 하는 중 여성들이 줄을 건너면 상대편 줄이 시합 중 끊어진다는 속신이 있고, 상대방 줄을 넘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또 이긴 쪽의 짚을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행운이 오고 일이 잘 된다는 속신도 있다. 설빔은 경도잡지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 열양세시기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이라 기록되어 있다. 설날에는 특히 여자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다. 지금도 어린이들이 설에 입는 가장 흔한 옷은 노랑이나 녹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이다. 설에 먹는 대표적인 명절 음식은 떡국이다. 쌀로 만든 가래떡이 떡국의 기본 재료이다. 요즘은 집에서 직접 가래떡을 만들어오지만 옛날에는 방앗간에서 직접 해오기도 했다. 한편<NAME>세시기에는 조선시대에도 떡국을 시장에서 팔았다는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끈다. 떡국에는 만두를 빚어 넣기도 한다. 차례상에 오르는<NAME>은 설에 먹는 음식이며 명절에 시식한다. 시루떡과 가래떡을 넣어 끓인 떡국도<NAME>에 포함되어 있다. 고사를 지낼 때는 붉은 팥 시루떡을 사용하지만 차례를 지내는 시루떡은 붉은 팥 시루떡은 금하기 때문에 거피를 한 팥으로 떡을 찐다. 이 밖에 인절미 · 전유어 · 빈대떡 · 강정류 · 식혜 · 수정과 등도<NAME>으로 준비한다. 세주는 맑은 청주이며 차례상에 오르고 산뜻한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가족들이 함께 마신다. 대표적인 명절 음식은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이다. 지역마다 명칭이 찰밥인데, 정월 열 나흗날 지어 보름날이나 그 이후까지 먹는 것을 찰밥이라고 한다. 찹쌀 · 찰수수 · 차조 · 팥 · 콩 등 각종 곡물을 넣어 지은 밥이 오곡밥이다. 대추와 밤 등을 넣어 맛을 내기도 한다. 박나물 · 버섯 등을 말린 것과 콩나물순(, 콩나물순을 말린 것) · 순무 · 무 등을 말린 것이 묵은 나물류다. 이외에 외꼭지 · 가지 고지도 보관하고 무청을 말려 시래기도 만든다. 이들 나물을 정월 대보름에 삶아 무치거나 볶아 나물 반찬을 만든다. 이 나물 반찬을 대보름에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피하게 된다고 한다. 백가반 풍속이 있는데, 세 집 이상의 타성받이 집의 밥은 오곡밥과 묵은 나물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집의 오곡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그만큼 여러 집의 오곡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또 참취 나물, 배춧잎, 김으로 오곡밥을 싸서 먹는 것이 복쌈이다. 풍년을 기원하며 예 축하는 것이 대보름 명절식이다. 부럼을 깨는 날은 대보름날 아침이다. 이른 아침, 새벽에 밤 · 호두 · 은행 · 잣 · 무 등을 깨물면 일 년 열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작절, 혹은 고치 지방은 부럼을 가리킨다. 설날에는 세주를 마시고 대보름에는 청주 한 잔을 마신다. 유롱주란 귀밝이술로 이 술을 가리킨다. 귀밝이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한 해 동안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약밥도 정월대보름의 명절 음식이다. 찹쌀을 쪄서 대추, 밤, 기름, 꿀, 간장 등을 섞어 함께 찌고 잣을 박은 음식이 약밥[약반=, 약식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런데 찰밥과 오곡밥, 약밥에 대하여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요즘에도 찰밥은 경상도 일대의 지역에서, 오곡밥을 찰밥이라고 부르고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등지에서는 오곡밥이라고 부른다. 찹쌀밥은 찹쌀 · 팥 · 밤 · 대추 · 곶감 등을 넣어 짓고 오곡밥은 찹쌀 · 팥 · 수수 · 차조(또는 기장) · 콩 등을 넣어 만든다. 하지만 찰밥과 오곡밥은 실상 다른 것이다. 찰밥에서 분화된 약밥은 다시 발전 변형된 음식이다. 설은 이미 섣달그믐부터 시작해 대보름까지 즐길 수 있는 놀이이다. 섣달그믐부터 대보름까지 연날리기를 즐긴다. 보름날의 연은 멀리 날려보내는 액연이다. 원래 보름날 이후에는 연을 날리지 않는 것이다. 그밖에 설날에는 윷놀이, 널뛰기, 승경도 놀이, 돈치기 등이 열린다. 정초에 가장 보편적인 놀이는 윷놀이인데, 집안에서도 할 수 있고 밖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하는 놀이다. 장작윷과 밤윷은 윷놀이 종류가 다양하고 놀이도 다양하다. 윷놀이를 통해 그 해 운세를 점쳐보는 것도 가능하다. 승경도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승정도 · 종경도 · 종정도 등이다. 주로 양반 가문의 젊은이들과 여자들이 즐기던 실내놀이로 관직이나 학업의 등급을 차례로 기입하고 주사위를 던져 나온 끗수 대로 승진하거나 후퇴하는 방식으로 논다.<NAME>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에 청소년들이 동전이나 동전 모양의 쇠붙이를 가지고 노는 놀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청소년들이 동전이나 동전 모양의 쇠붙이를 가지고 노는 놀이이다. 대보름에는 더욱 많은 놀이가 펼쳐진다. 지신밟기를 비롯하여 줄다리기, 고싸움, 나무쇠싸움, 동채싸움, 석전 · 횃불싸움, 놋다리밟기 · 기와밟기 · 탈놀이 등 다양한 놀이들이 있다. 특히 대보름날에는 불과 관련된 횃불싸움이 절정을 이룬다. 첫 쥐날 인 상자일에도 하지만 쥐불놀이는 대보름날 밤에 주로 한다. 보름달 아래에서 즐기는 불놀이는 보름달과 성장, 풍요를 연관시킨다. 풍요를 기원하고 축원하는 대보름 놀이는 불놀이뿐 아니라 다른 놀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근대국가에 들어서면서 음력설(구정)과 양력설(신정)로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이른바 이중과세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명절로 여겨지는 음력설과 현재 일상력으로 쓰이는 태양력(양력)에 의한 설이 양력설이다. 하지만 전통 명절은 설날이고 구정이란 단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요즘 설날은 추석과 함께 전후 3일 동안 쉴 수 있다. 그렇지만 구정이라 일컬어졌던 설날이 오늘날의 이름으로 바뀌기까지는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진통을 겪었다. 우리의 전통 명절인 설날은 1896년 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 이 기준으로는 고종 32년)에 태양력(양력)이 받아들여지고도 계속되었지만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전통문화 말살정책으로 억눌렀다. 우리 명절이 되면 그들은 떡 방앗간을 폐쇄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먹칠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반면에 일본의 명절과 그 행사의 의식을 한국에 이식하여 강요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일본 명절인 천장절 · 명치절 · 기원절 등의<NAME>에 한국인을 참가시켜 각종 행사에 참가했다. 그런가 하면 단오절에는 고이노보리(리치=)라 하여 헝겊으로 잉어를 만들어 풍선처럼 띄우게 하고 신정에는 시메나와(표승=)라 하여 새끼에 귤을 꿰어 대문에 달게 하고, 단오절에는 고이노보리(리치=)라 하여 잉어를 헝겊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들이 하던 방식으로 양력과세를 강요했고, 이는 광복 후 공화국이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 명절인 설날과 양력 1월 1일인 신정을 명절로 여기는 이중과세 풍속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이중과세의 폐해를 들어 금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낭비성과 더불어 외국과의 무역통상 관계를 들어 신정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국제적으로 신정이 통용되므로 우리도 구정 때는 일하고 외국에서는 모두 일을 하니 우리도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무역 수지에는 그렇지 않을 경우 차질이 생긴다고 했다. 그렇지만 역시 음력 기준의 추석은 휴일로 삼았다는 것은 모순된 논리였다. 오랫동안 공휴일 혹은 비공휴일 문제로 몇 차례 오락가락하던 우리의 설날은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되어 1일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한국인의 생활 자체가 민속인 마당에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실로 어색하고 궁색했다. 그러다가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되자 70∼80년 만에 설날을 되찾았다고 각종 언론매체가 떠들썩했었다. 한때 3일 연휴였던 설날도 1999년 1월 1일부터 하루의 휴일로 축소되어 3일 연휴인 설날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을 전후하여 성묘하는 세시풍속이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하지만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갖가지 세시풍속은 사라지거나 단절되었다. 다행히 근래에는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등 민속과 관련이 있는 기관에서 민속놀이판을 열고 이를 찾는 가족들이 점점 늘고 있다. 떡국을 끓일 가래떡을 기계로 빼거나 상품으로 만든 것을 사는 일이 허다하지만 여전히 명절식 세시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설날과 떡국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지만 밥으로 차례를 지낸다는 가정도 있다. 설은 특히<NAME> 날이라는 신앙적인 의미도 있는데, 한 해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오늘날의 설은 신성하지 않다. 오늘날의 설은 국가 차원의 공휴일이지만 전통사회처럼 대보름까지 설 명절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설날은 초하루로, 차례를 지내는 날이다. 또한 설 전후에 성묘를 한다. 요즘에는 국내외 여행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한편 가족 단위로 민속박물관이나 민속촌 같은 곳을 찾는 문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구정과 신정이라는 신년을 두 번 맞이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다. 설날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오늘날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와 같은 인사말을 연간 두 번 한다. 많은 말이니 많이 하면 좋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태양력을 기준으로 새해에 이미 인사를 하고 다시 설에 똑같은 인사를 한다는 것은 다소 어색하다. 실상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신년 인사말은 전통적인 덕담이 아니라 새로 생긴 덕담이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양력인 양력에는 신식 덕담을 나누고 우리 전통 명절인 설날에는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과세 편안하셨습니까와 같은 전통적인 인사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는 설이라는 전통문화를 소박하게 이해하는 길이다. 설과 추석 무렵이면 민족 대이동이 화두가 되고 있다.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는 인파가 몰려들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어른들이 자녀를 찾는 역류 현상도 나타나고 있지만, 고향을 찾는 인구가 아직 많은 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설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만남을 갖는 절대적인 시간이 된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것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설 ### 내용: 설은 한 해의 첫 명절로 시간적으로는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새 달의 첫날이기 때문이다. 설날을 원일 · 원단 · 원정 · 원신 · 원조 · 정조 · 세수 · 세초 · 연두 · 연두 · 연두 · 연수 · 연시라고도 한다. 신일 혹은 달도라고도 하는데, 이는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설은 양력 1월 1일 신정의 상대적 개념으로 구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설을 폄하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나이를 뜻하는 설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해가 바뀌어 새해를 맞이하는 첫 날인 설을 맞이할 때마다 한 살씩 더 먹는다. 설을 한 번 더 쇠면 1년, 두 번 쇠면 2년이 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나이도 한 살씩 더 많아진다. 결국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하여 오늘날의 살로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설을 설 명절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하루도 설날이 아닌데 아직 낯설어 설다, 낯설다 등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설 이란 용어는 정월 초하룻날, 하루를 가리키지만 실제 명절은 대보름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설을 설 명절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거의 매달 명절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NAME> 것은 설날과 보름 명절이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달의 첫 날인 설날은 농경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중요하고, 보름 명절은 농경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중요하다. 농경국가에서 보름달, 곧 만월은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천지가 개벽하는 그 순간에 비유하면 정월 초하루는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정월 보름과 8월 보름 추석은 보름 명절 중에서도 각별하다. 정월 보름은 첫 보름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대보름 명절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국가에서 여름내 농사가 결실을 맺는 8월 보름 명절은 수확을 앞둔 명절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갖는다. 수서와 당서에 기록된 신라에 대한 기록은 왕권국가다운 설날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매년 정월원단에 서로 축하하며, 왕이<NAME>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하지만 설 명절이 역법 체계인 것을 감안한다면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진수가 저술한 역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월( ), 5월과 10월의 농공시 필기 등과 같은 표현은 당시 역법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은나라의 역법은 현재로 치면 음력 섣달에 해당하는 정월이다. 이처럼 당시 부족국가들이 역법을 사용했다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역법을 통해 달의 수를 계산하고 세수인 설이 존재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나라마다 설을, 정월을 언제 정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 설 명절의 연원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권 1, 기이 사금 갑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신라 21대 비처 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 궁중에서 궁주와 중의 간통 사건이 일어나 궁주를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매년 상해 · 상자 · 상오일에는 만사를 꺼려 근신하였다 하여 달 도라 했다. 설의 이칭이기도 한 달도는 설의 기원일 수도 있다. 또한 정초 십이지 중 상해와 상해의 경우 정초에, 상해의 경우 정초에 해당한다. 일(十二支日)에 해당되는 날로 이때의 금기를 비롯한 풍속은 오늘날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9대 속절(俗節, 명절)로 원단(元旦, 정월 초하루 설날),<NAME>(上元, 정월 대보름), 상사(上巳, 후에 삼짇날이 됨),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중구(重九), 팔관(八關), 동지(冬至)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4대 명절로 원단, 한식, 단오, 추석을 정했지만 다른 명절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전 시대에 비해 민간에서는 세시 명절과 그 무렵에 행하는 세시풍속이 더 다양했다. 그런데 설날 이외에 설 이란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동지는 작은설이라 하는데, 아세라 한다. 동지는 24절기 중 하나로, 설날 떡국 한 그릇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중국 후한시대(22∼220)에 동지를 세수로 삼았던 점을 작은설로 여긴다. 사실상 24절기는 동지를 0으로 하고 첫 기번은 소한, 두 번째 기번은 대한으로 하며 입춘은 3번이 된다. 동지에 역 계산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지 기번을 0으로 했다. 그래서 흔히 열두 띠로 일컬어지는 십이지를 말할 때 첫 달인 자월은 정월이 아니라 음력 동짓달이다. 그 뒤 섣달은 축월, 정월은 인월, 2월은 묘월... ... 등의 순으로 불린다. 설날을 비롯하여 각 세시 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대체로 소망을 기원하는 의례적인 성격을 띤다. 기원의 대상은 신처럼 뚜렷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초월적인 힘이 되기도 한다. 농경의례라고도 하는 세시풍속은 농사를 중심축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풍농의 기원과 예측, 풍흉을 점치는 점세, 농공과 풍농을 감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또한 후대에 이르러 어업과도 관계가 있다. 그렇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농경의례로서의 성격도 퇴색되어 농경의례로서의 의미도 퇴색되었다. 정월, 설 명절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명절을 전후로 집중된다. 정월은 농한기이고 한 해가 시작되는<NAME> 기간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 세시풍속이 집중되어 있다.<NAME> 기간에는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신과의 만남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날은 의례 설날 아침이다. 종손이 중심이 되어 차례를 지내는데 4대조까지 모시고 5대조 이상은 시제 때 산소에서 모신다. 차례를 마친 뒤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하는데 요즘은 설을 전후해 성묘를 한다. 정초에 안택을 하는 이유는 집안의 평안을 위해서이다. 정초에 행하는 신년제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무당 같은 전문 사제를 불러 평소 집에서 하는 고사보다 큰 굿을 하는 안택도 있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홍수 매기[횡수막이]라 하여 주부가 단골무당을 찾아가 비손을 하거나 집에 불러다가 굿을 한다. 특히 홍수 매기는 횡수를 막는 의례로 가족 가운데 그 해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각별한 의의를 갖는다. 홍수 매기를 한 뒤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뱃속에 있는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어 삼거리나 사거리에 버린다. 액운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열양세시기의<NAME>조에는 깨끗한 종이에 흰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슴[어부 시=]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부슴은 대보름날, 즉 대보름날에 그 해의 액을 막기 위해 강물에 조밥을 던져 고기가 먹게 하는 것이다. 용궁맞이는 요즈음까지도 계속되었는데 반드시 조밥이 아니더라도 제물을 장만해 강물에 던져 소지를 올리는 등 용신을 위해 제를 지낸다. 한 해 농사를 기원하는 농점도 다양하다. 보름날 저녁에 달이 뜨는 모습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은 물론 달의 모양과 색깔을 보고 한 해 농사를 점쳐 보기도 한다. 지금도 서해안 지역에서는 정초에 무당을 불러 풍어제를 크게 치른다. 한 해 동안 풍족하고 고기잡이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굿이다. 정월 대보름 무렵에 영남과 호남 등지에서는 마을에서 동제를 올린다. 충남 서산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대보름날 볏가리를 세웠다가 2월 초하루에 걷어낸다. 이는 놀이적인 성격도 있지만 원래 풍농을 위한 의례였다.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다양한 만큼 속신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설은 사실상 섣달그믐부터 시작된다고 할 만큼 그믐날밤과 초하루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끝과 시작은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섣달그믐날 밤에는 잠들지 않는다.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설 음식은<NAME>이라고 한다.<NAME>의 대표 음식인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더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떡국을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다. 또한 설날이나 상묘일(, 첫 토끼날)에는 여인들이 아침 일찍 남의 집에 출입하면 그 집에 재수가 없다는 속신이 있다. 정월 대보름에 키가 작은 사람이 남의 집에 출입하는 것은 그 해에 목화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하기도 한다. 속신이라는 말은 복조리 풍속 중 하나인데, 이는 복을 끌어모은다는 뜻이다. 설날 새벽에 밖에 나가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길조이고, 까치 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한다. 설날 밤에 야광귀라는 귀신이 와서 신발을 물어보고 맞으면 신고 가는데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듬해 재수가 없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이런 세시를 하거나 또는 귀신날이라 하여 이날 밤에 신발을 감추거나 엎어놓기도 한다. 지붕에 체나 키를 매달아놓고 저녁에 고추씨와 목화씨를 태워 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귀신을 쫓기도 한다. 정초에 여자들은 난리를 친다. 널을 뛰면 그 해에는 발에 무좀[무좀]이 안 걸린다고 한다. 섣달그믐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연날리기가 계속된다. 액연이란 연의 몸통이나 꼬리에 송액, 송액영복 등의 글자를 써서 대보름이 되면 멀리 날려 보낸다. 예전에는 대보름이 지나도 연을 날리는 사람이 있으면 욕을 하기도 했다. 액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입춘에는 보리 뿌리를 캐서 세 가닥 이상이면 그 해 보리농사가 풍년, 두 가닥이면 평년작,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점친다. 이는 농점으로 점복이자 속신에 포함될 수도 있다. 정초 십이지 일은 유모 일과 무모 일로 구분된다. 정월 초하루가 털 있는 12지 동물의 날, 즉 유모일이 되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고 무모일이 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유모일 중에서도 소, 토끼, 호랑이가 제일 좋다고 한다. 이는 주술적 사고로 여기 털을 곡식의 성장에 비유했다. 첫 쥐날 인 상자일에 일을 하면 쥐가 곡식을 축낸다고 하여 금한다. 또 쥐가 쏘고 갉아먹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칼질이나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 마소를 먹이려고 여물을 썰면 쥐가 벼 나락이나 짚 등을 쏠아서 못 쓰게 한다고 하며, 길쌈이나 옷을 지으면 쥐가 옷감을 쏠아서 못 쓰게 한다고 금한다. 첫 소날인 상축일에는 쇠붙이 연장을 다루지 않으며, 도살도 하지 않는다. 이날 연장을 다루거나 방아를 찧으면 쟁기의 보습이 깨지고 소가 기침을 한다고 한다. 또 이날 곡식을 밖으로 퍼내는 것은 소에게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여 금지한다. 첫 번째 호랑이 날인 상인일에는 일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 또 짐승에 대한 나쁜 말을 하지 않으며 외출도 삼간다. 이날 여자들이 외출하여 남의 집에서 대변을 보면 그 집 가족이 호랑이에게 잡혀간다는 말도 있다. 첫 토끼날인 상묘일에는 여자가 남의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은 재수가 없다 하여 금한다. 심지어 여자들은 출입을 종일 꺼리기도 한다. 이날 여자들은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NAME>다고 해서 베틀에 한 번씩 올라가 베를 짜본다. 첫 용날인<NAME>일 새벽에는 여자들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온다. 이와 같은 용알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용이 내려와 알을 쓸어놓고 간다 하여 남보다 먼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NAME>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정월 대보름 풍속으로 경북에서는 용물뜨기라 되어 있다. 또한 이날 긴 머리를 감거나 옷을 벗지 않는다. 그러면 뱀이 나온다고 하는데 뱀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뱀처럼 길다고 해서 꺼리는 것이다. 반면 머리카락이 곱고 길게 자랐으면 하는 사람은<NAME>일에 머리를 감아 기원을 한다. 첫 뱀날인 상사일에는 머리를 빗거나 이발을 하면 뱀이 나타난다는 이유로 금한다. 또한 부엌에 나무를 들이지 않고 빨래도 하지 않으며 바느질도 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는 첫 말날인 상오일을 좋은 날로 여겨 장을 담근다. 제주도의 첫 양날인 상미일에는 환자라도 약을 먹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미불복약이다. 이날은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무탈하게 여긴다. 첫 번째 원숭이날인 상신일에는 부엌에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남자가 일찍 일어나 비를 들고 부엌의 네 귀퉁이를 쓴다. 첫 닭 날인 상유일에는 바느질을 하면 손이 닭발처럼 된다고 해서 금한다. 그렇지만 지역에 따라 닭날 장 담그면 달다는 말도 있다. 상술일에는 개를 기르면 텃밭을 해칠 수 있으므로 개를 기르면 안 되고 이날 풀을 베면 평소에 잘 토한다 하여 금한다. 첫 돼지 날인 상해일에는 팥가루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어두워진다고 한다. 잘 사는 집의 부엌 흙을 훔쳐다가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귀밝이술을 마시면 일 년 내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고 대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깨면 부럼이 생기지 않는다. 또 더위를 팔면 그 해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속신도 있다. 타성받이 집이 세 채 이상 되어야 그 해 운수가 좋다고 하는 것이 오곡밥이다. 동제를 전후하여 각종 금기가 있는데 이를 어기면 부정을 저지른다. 이는 속신이라기보다는 민속신앙이라는 큰 범주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제의가 끝난 후 제물을 진설하기 위해 깔았던 백지를 가지고 가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고 아들이 없는 가정에서 불종지(기름을 넣고 종이 심지를 박아서 켜는 불종지)를 가지고 가면 아들을 본다는 속신도 있다. 줄다리기를 하는 중 여성들이 줄을 건너면 상대편 줄이 시합 중 끊어진다는 속신이 있고, 상대방 줄을 넘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또 이긴 쪽의 짚을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행운이 오고 일이 잘 된다는 속신도 있다. 설빔은 경도잡지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 열양세시기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이라 기록되어 있다. 설날에는 특히 여자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다. 지금도 어린이들이 설에 입는 가장 흔한 옷은 노랑이나 녹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이다. 설에 먹는 대표적인 명절 음식은 떡국이다. 쌀로 만든 가래떡이 떡국의 기본 재료이다. 요즘은 집에서 직접 가래떡을 만들어오지만 옛날에는 방앗간에서 직접 해오기도 했다. 한편<NAME>세시기에는 조선시대에도 떡국을 시장에서 팔았다는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끈다. 떡국에는 만두를 빚어 넣기도 한다. 차례상에 오르는<NAME>은 설에 먹는 음식이며 명절에 시식한다. 시루떡과 가래떡을 넣어 끓인 떡국도<NAME>에 포함되어 있다. 고사를 지낼 때는 붉은 팥 시루떡을 사용하지만 차례를 지내는 시루떡은 붉은 팥 시루떡은 금하기 때문에 거피를 한 팥으로 떡을 찐다. 이 밖에 인절미 · 전유어 · 빈대떡 · 강정류 · 식혜 · 수정과 등도<NAME>으로 준비한다. 세주는 맑은 청주이며 차례상에 오르고 산뜻한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가족들이 함께 마신다. 대표적인 명절 음식은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이다. 지역마다 명칭이 찰밥인데, 정월 열 나흗날 지어 보름날이나 그 이후까지 먹는 것을 찰밥이라고 한다. 찹쌀 · 찰수수 · 차조 · 팥 · 콩 등 각종 곡물을 넣어 지은 밥이 오곡밥이다. 대추와 밤 등을 넣어 맛을 내기도 한다. 박나물 · 버섯 등을 말린 것과 콩나물순(, 콩나물순을 말린 것) · 순무 · 무 등을 말린 것이 묵은 나물류다. 이외에 외꼭지 · 가지 고지도 보관하고 무청을 말려 시래기도 만든다. 이들 나물을 정월 대보름에 삶아 무치거나 볶아 나물 반찬을 만든다. 이 나물 반찬을 대보름에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피하게 된다고 한다. 백가반 풍속이 있는데, 세 집 이상의 타성받이 집의 밥은 오곡밥과 묵은 나물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집의 오곡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그만큼 여러 집의 오곡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또 참취 나물, 배춧잎, 김으로 오곡밥을 싸서 먹는 것이 복쌈이다. 풍년을 기원하며 예 축하는 것이 대보름 명절식이다. 부럼을 깨는 날은 대보름날 아침이다. 이른 아침, 새벽에 밤 · 호두 · 은행 · 잣 · 무 등을 깨물면 일 년 열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작절, 혹은 고치 지방은 부럼을 가리킨다. 설날에는 세주를 마시고 대보름에는 청주 한 잔을 마신다. 유롱주란 귀밝이술로 이 술을 가리킨다. 귀밝이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한 해 동안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약밥도 정월대보름의 명절 음식이다. 찹쌀을 쪄서 대추, 밤, 기름, 꿀, 간장 등을 섞어 함께 찌고 잣을 박은 음식이 약밥[약반=, 약식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런데 찰밥과 오곡밥, 약밥에 대하여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요즘에도 찰밥은 경상도 일대의 지역에서, 오곡밥을 찰밥이라고 부르고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등지에서는 오곡밥이라고 부른다. 찹쌀밥은 찹쌀 · 팥 · 밤 · 대추 · 곶감 등을 넣어 짓고 오곡밥은 찹쌀 · 팥 · 수수 · 차조(또는 기장) · 콩 등을 넣어 만든다. 하지만 찰밥과 오곡밥은 실상 다른 것이다. 찰밥에서 분화된 약밥은 다시 발전 변형된 음식이다. 설은 이미 섣달그믐부터 시작해 대보름까지 즐길 수 있는 놀이이다. 섣달그믐부터 대보름까지 연날리기를 즐긴다. 보름날의 연은 멀리 날려보내는 액연이다. 원래 보름날 이후에는 연을 날리지 않는 것이다. 그밖에 설날에는 윷놀이, 널뛰기, 승경도 놀이, 돈치기 등이 열린다. 정초에 가장 보편적인 놀이는 윷놀이인데, 집안에서도 할 수 있고 밖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하는 놀이다. 장작윷과 밤윷은 윷놀이 종류가 다양하고 놀이도 다양하다. 윷놀이를 통해 그 해 운세를 점쳐보는 것도 가능하다. 승경도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승정도 · 종경도 · 종정도 등이다. 주로 양반 가문의 젊은이들과 여자들이 즐기던 실내놀이로 관직이나 학업의 등급을 차례로 기입하고 주사위를 던져 나온 끗수 대로 승진하거나 후퇴하는 방식으로 논다.<NAME>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에 청소년들이 동전이나 동전 모양의 쇠붙이를 가지고 노는 놀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청소년들이 동전이나 동전 모양의 쇠붙이를 가지고 노는 놀이이다. 대보름에는 더욱 많은 놀이가 펼쳐진다. 지신밟기를 비롯하여 줄다리기, 고싸움, 나무쇠싸움, 동채싸움, 석전 · 횃불싸움, 놋다리밟기 · 기와밟기 · 탈놀이 등 다양한 놀이들이 있다. 특히 대보름날에는 불과 관련된 횃불싸움이 절정을 이룬다. 첫 쥐날 인 상자일에도 하지만 쥐불놀이는 대보름날 밤에 주로 한다. 보름달 아래에서 즐기는 불놀이는 보름달과 성장, 풍요를 연관시킨다. 풍요를 기원하고 축원하는 대보름 놀이는 불놀이뿐 아니라 다른 놀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근대국가에 들어서면서 음력설(구정)과 양력설(신정)로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이른바 이중과세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명절로 여겨지는 음력설과 현재 일상력으로 쓰이는 태양력(양력)에 의한 설이 양력설이다. 하지만 전통 명절은 설날이고 구정이란 단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요즘 설날은 추석과 함께 전후 3일 동안 쉴 수 있다. 그렇지만 구정이라 일컬어졌던 설날이 오늘날의 이름으로 바뀌기까지는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진통을 겪었다. 우리의 전통 명절인 설날은 1896년 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 이 기준으로는 고종 32년)에 태양력(양력)이 받아들여지고도 계속되었지만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전통문화 말살정책으로 억눌렀다. 우리 명절이 되면 그들은 떡 방앗간을 폐쇄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먹칠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반면에 일본의 명절과 그 행사의 의식을 한국에 이식하여 강요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일본 명절인 천장절 · 명치절 · 기원절 등의<NAME>에 한국인을 참가시켜 각종 행사에 참가했다. 그런가 하면 단오절에는 고이노보리(리치=)라 하여 헝겊으로 잉어를 만들어 풍선처럼 띄우게 하고 신정에는 시메나와(표승=)라 하여 새끼에 귤을 꿰어 대문에 달게 하고, 단오절에는 고이노보리(리치=)라 하여 잉어를 헝겊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들이 하던 방식으로 양력과세를 강요했고, 이는 광복 후 공화국이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 명절인 설날과 양력 1월 1일인 신정을 명절로 여기는 이중과세 풍속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이중과세의 폐해를 들어 금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낭비성과 더불어 외국과의 무역통상 관계를 들어 신정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국제적으로 신정이 통용되므로 우리도 구정 때는 일하고 외국에서는 모두 일을 하니 우리도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무역 수지에는 그렇지 않을 경우 차질이 생긴다고 했다. 그렇지만 역시 음력 기준의 추석은 휴일로 삼았다는 것은 모순된 논리였다. 오랫동안 공휴일 혹은 비공휴일 문제로 몇 차례 오락가락하던 우리의 설날은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되어 1일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한국인의 생활 자체가 민속인 마당에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실로 어색하고 궁색했다. 그러다가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되자 70∼80년 만에 설날을 되찾았다고 각종 언론매체가 떠들썩했었다. 한때 3일 연휴였던 설날도 1999년 1월 1일부터 하루의 휴일로 축소되어 3일 연휴인 설날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을 전후하여 성묘하는 세시풍속이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하지만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갖가지 세시풍속은 사라지거나 단절되었다. 다행히 근래에는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등 민속과 관련이 있는 기관에서 민속놀이판을 열고 이를 찾는 가족들이 점점 늘고 있다. 떡국을 끓일 가래떡을 기계로 빼거나 상품으로 만든 것을 사는 일이 허다하지만 여전히 명절식 세시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설날과 떡국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지만 밥으로 차례를 지낸다는 가정도 있다. 설은 특히<NAME> 날이라는 신앙적인 의미도 있는데, 한 해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오늘날의 설은 신성하지 않다. 오늘날의 설은 국가 차원의 공휴일이지만 전통사회처럼 대보름까지 설 명절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설날은 초하루로, 차례를 지내는 날이다. 또한 설 전후에 성묘를 한다. 요즘에는 국내외 여행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한편 가족 단위로 민속박물관이나 민속촌 같은 곳을 찾는 문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구정과 신정이라는 신년을 두 번 맞이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다. 설날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오늘날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와 같은 인사말을 연간 두 번 한다. 많은 말이니 많이 하면 좋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태양력을 기준으로 새해에 이미 인사를 하고 다시 설에 똑같은 인사를 한다는 것은 다소 어색하다. 실상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신년 인사말은 전통적인 덕담이 아니라 새로 생긴 덕담이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양력인 양력에는 신식 덕담을 나누고 우리 전통 명절인 설날에는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과세 편안하셨습니까와 같은 전통적인 인사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는 설이라는 전통문화를 소박하게 이해하는 길이다. 설과 추석 무렵이면 민족 대이동이 화두가 되고 있다.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는 인파가 몰려들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어른들이 자녀를 찾는 역류 현상도 나타나고 있지만, 고향을 찾는 인구가 아직 많은 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설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만남을 갖는 절대적인 시간이 된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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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외암마을 건재고택 (牙山 外岩마을 建齋古宅)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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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 BY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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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익(, 1848∼1897, 호는 )이 1800년대 후기에 건립한 반가로서 1998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전라도 영암 군수를 지낸 이상익이 살던 곳으로 택호를 영암댁이라 한다. 마을 전면부의 중심에 서남향으로 가옥이 배치되어 있다. 평지에 가까운 대지에 행랑채를 두고 그 안에 자형 사랑채와 자형 안채, 부속 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자 집을 하고 있다. 사랑채 동쪽 중문을 지나 안마당에 들어선다. 안채 앞에는 중문간에서 바로 보이지 않게 내외 사잇담이 있고, 그 북측에 자 평면의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자로 꺾여 안마당을 감싼 튼자형 배치로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나무 간 채와 나무 간, 측소 등이 있고, 뒤편에 가묘가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1칸 폭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동측에 또 하나의 사랑방(작은 사랑)이 배치되어 있다. 마루와 방이 반복적으로 배치된 평면 구성으로 서측 끝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사랑채 측면의 기둥 간살 잡이를 보면 가운데 1칸을 정하고, 전후열은 반칸씩 퇴칸으로 만들어 결국 측면이 2칸 넓이가 되었다. 정면 퇴칸과 동 측면 퇴칸에는 마루를 설치했다. 덤벙 주초를 막돌 기단 위에 놓고 방주를 세웠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2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안방과 윗방 부엌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동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안방 남쪽의 아래와 윗방, 마루방 한 칸이 모두 사잇 장지로 구분되어 있어 필요할 때 전체를 개방해 넓은 안방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부엌과 가까운 옆 마당가에는 넓은 곳간 채와 장독대를, 건넌방 앞의 누마루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부엌의 다락과 채광, 환기를 위한 사롱 살창이나 광창은 실용적이면서도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충청지방 반가의 특징은 대문 밖의 넓은 작업 및 행랑 마당, 사랑채 전면과 오른쪽에 길게 뻗은 사랑마당과 정원, 안채 후원과 동편 마당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사랑채 앞의 정원은 처음 집을 지을 때는 기본적인 구성을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후손이 일본을 여행한 뒷부분적으로 일본식 정원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적인 수목을 만들고자 넓은 외부 공간을 그대로 두지 않고 침엽수와 활엽수를 대담하게 군식하여 구성하였다. 일본식 정원에서는 주기적으로<NAME>수를 손질하여 인위적으로 정원을 꾸몄다. 내외담 밑으로 만들어진 수구를 따라 흘러 들어온 물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1자 높이의 작은 폭포를 만들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연못에 잠시 머물던 물은 남측의 담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간다. 수로의 양쪽에는 자연스럽게 막돌을 배치했고, 연못의 상류와 하류에는 작은 돌다리를 놓아두었다. 마치 축소된 경관을 보는 것 같다. 정원의 동측과 서측에 각각 하나씩 작은 정자를 배치했다. 정원 중간에는 여러 종류의 석물을 배치했다. 집주인의 자연주의 사상은 이러한 정원의 꾸밈새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아산 외암마을 건재고택 (牙山 外岩마을 建齋古宅) ### 내용: 이상익(, 1848∼1897, 호는 )이 1800년대 후기에 건립한 반가로서 1998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전라도 영암 군수를 지낸 이상익이 살던 곳으로 택호를 영암댁이라 한다. 마을 전면부의 중심에 서남향으로 가옥이 배치되어 있다. 평지에 가까운 대지에 행랑채를 두고 그 안에 자형 사랑채와 자형 안채, 부속 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자 집을 하고 있다. 사랑채 동쪽 중문을 지나 안마당에 들어선다. 안채 앞에는 중문간에서 바로 보이지 않게 내외 사잇담이 있고, 그 북측에 자 평면의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자로 꺾여 안마당을 감싼 튼자형 배치로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나무 간 채와 나무 간, 측소 등이 있고, 뒤편에 가묘가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1칸 폭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동측에 또 하나의 사랑방(작은 사랑)이 배치되어 있다. 마루와 방이 반복적으로 배치된 평면 구성으로 서측 끝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사랑채 측면의 기둥 간살 잡이를 보면 가운데 1칸을 정하고, 전후열은 반칸씩 퇴칸으로 만들어 결국 측면이 2칸 넓이가 되었다. 정면 퇴칸과 동 측면 퇴칸에는 마루를 설치했다. 덤벙 주초를 막돌 기단 위에 놓고 방주를 세웠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2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안방과 윗방 부엌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동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안방 남쪽의 아래와 윗방, 마루방 한 칸이 모두 사잇 장지로 구분되어 있어 필요할 때 전체를 개방해 넓은 안방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부엌과 가까운 옆 마당가에는 넓은 곳간 채와 장독대를, 건넌방 앞의 누마루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부엌의 다락과 채광, 환기를 위한 사롱 살창이나 광창은 실용적이면서도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충청지방 반가의 특징은 대문 밖의 넓은 작업 및 행랑 마당, 사랑채 전면과 오른쪽에 길게 뻗은 사랑마당과 정원, 안채 후원과 동편 마당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사랑채 앞의 정원은 처음 집을 지을 때는 기본적인 구성을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후손이 일본을 여행한 뒷부분적으로 일본식 정원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적인 수목을 만들고자 넓은 외부 공간을 그대로 두지 않고 침엽수와 활엽수를 대담하게 군식하여 구성하였다. 일본식 정원에서는 주기적으로<NAME>수를 손질하여 인위적으로 정원을 꾸몄다. 내외담 밑으로 만들어진 수구를 따라 흘러 들어온 물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1자 높이의 작은 폭포를 만들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연못에 잠시 머물던 물은 남측의 담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간다. 수로의 양쪽에는 자연스럽게 막돌을 배치했고, 연못의 상류와 하류에는 작은 돌다리를 놓아두었다. 마치 축소된 경관을 보는 것 같다. 정원의 동측과 서측에 각각 하나씩 작은 정자를 배치했다. 정원 중간에는 여러 종류의 석물을 배치했다. 집주인의 자연주의 사상은 이러한 정원의 꾸밈새를 통해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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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소송법 (刑事訴訟法)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서일교"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537
CC BY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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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범인에 대하여 형벌권을 행사하는 전 과정을 규정한 법률로, 범죄가 발생한 경우 이를 수사, 심판하고 선고된 형을 집행하는 것이다.<NAME>적으로는 형사소송법 전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형사소송 절차를 규정한 법률체계 전체를 의미한다. 형사소송은 국가의 형벌권 행사라는 뜻에서 공익 유지를<NAME>점으로 하지만, 개인의 존중, 개인의 기본 인권 보장을 무시하고 공익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형사소송법은 공익 유지와 인권 보장이라는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념이기에, 그 운영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또는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영미법의 법언은 양자의 요구가 상반되는 규범의 충돌로 나타날 때 국가의<NAME>적 권위를 주장하기 전에 개인의 기본 인권보장을 보다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절차 면에서도 국가형벌권의 행사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발생할 수 있는데, 특히 수사 절차의 적정성과 관련된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구조는 대륙 법계인 직권주의와 영미 법계인 변론주의의 2대 원리로 나눌 수 있으나, 양자는 언제나 어느 정도 교차하므로 나라 사정에 따라 입법이나 해석·운영에 있어서 그 중점의 차별은 존재한다. 조선시대까지는 형전에 규정되고, 규문주의적인 절차를 위주로 한 우리 형사소송법 제도에서 근대적인 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조선형사령>으로 일본 제도를 변용, 의용함으로써 생겨났다. 또한, 미 군정법령에 의하여 행정 목적으로 인신 구속을 자행하던 행정 검속을 금지하고 법관의 영장제도를 확립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민주적 형사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형사소송법이 1954년 9월 제정·공포되었으며, 그 뒤 1961년 9월 당사자주의를 보다 확립하고 공판 절차에서 피고인에 대한 검사·변호인 등의 교호신문제(交互訊問制)를 정립하는 등의 개정이 있었다. 소송법은 수사 단계를 당사자주의적으로 개혁하여 법관의 영장 발부를 요구하고, 피의자에 대한 변호인 선임권을 인정하는 등 우리나라 형사소송 절차 중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편, <헌법>은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피의자의 진술을 들을 때에 미리 알려 주도록 되어 있다. 또한 형사 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하여 유죄 재판이 있기 전에는 어떠한 피의자·피고인에 대해서도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검사와 사법경찰관리가 수사기관이다. 대륙 법계에서는 사법경찰관리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인정하지만, 영미 법계에서는 사법경찰관리를 독립된 수사기관으로 보고, 검사는 공소 유지를 주된 임무로 하는 데 비해, 대륙 법계에서는 사법경찰관리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인정한다. 우리나라의 검사와 사법경찰관리는 상명하복 관계로, 검사는 범죄수사의 주재자로서 사법경찰관리를 지휘, 감독한다. 즉, 수사관·경무관·총경·경정·경감·경위는 사법경찰관으로서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하고, 경사·순경은 사법경찰관리로서 수사를 보조한다. 또한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할 자와 그 직무 범위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산림·보건·전매·세무·해사·철도 등 종사 공무원을 특별사법경찰관리로서 검사장이 지명할 수 있다. 현행 범인·검시·고소·고발·자수 등 범죄 혐의가 있다고 사려한 때 수사의 단서가 될 수 있지만, 이와는 달리 경찰관의 직무질문은 <경찰관 직무 집행 법>에 따른 것이다. 즉, 범인으로 의심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자를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고, 그 장소에서 질문하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교통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인근 경찰관서에 동행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심검문 내지 동행 요구는 수사 이전의 단계로서 답변 동행을 강요당하지 않는다. 공소는 검사가 제기하여 수행한다. 사인(私人)의 기소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국가기관만이 소추한다는 의미에서, 국가소추주의인 동시에 국가기관 중에서도 검사만을 소추기관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기소독점주의이다. 그리고 수사 결과 기소에 충분한 범죄의 객관적 혐의가 있고, 기타 소송·처벌 조건을 구비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기소해야 하는 기소법정주의를 취하는 입법례가 있으나, 우리나라의 제도는 검사가 형사정책상의 득실을 고려하여 그 임의 재량하에 기소·불기소를 결정하는 기소편의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검사의 수사지휘권·공소권 독점·기소편의주의 및 형 집행 지휘 등으로 형사 절차에서의 검사의 권한·책임은 매우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원이<NAME>소 절차를 통해 기소편의주의로 인한 폐해를 경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재정 신청에 의한 심판 회부의 결정은 그 대상에 제한이 있는데,<NAME>죄 처벌법에 대해서는 경찰서장이 순회판사에게 즉결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이 즉결심판의 심판을 받는 자는 정식재판청구권을 보유하고 있고, 판사도 즉결심판이 부적당하다고 인정하면 관할 검찰청에 송치명령을 할 수 있다. 또한 변론주의·구술주의·직접주의·공개주의가 공판의 기본 원칙인데, 벌금·과료를 선고할 때에는 피고인 출석 없이 선고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1) 변론주의 판결은 법률에 다른 규정이 없으면 구술변론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공판정에는 원칙적으로 당사자의 출석을 요구하며 의견진술권·증거조사 신청권 등의 권한이 보장되어 있다. (2) 구술주의 법원은 구술에 의하여 제공된 소송자료에 기초하여 재판을 진행해야 하며, 서면주의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공개 절차의 기본은 변론주의와 구술주의로 구분된다. (3) 직접주의 직접 심리라고도 하며, 공판정에서 직접 조사한 증거에 한하여 재판 자료로 할 수 있고, 전문증거는 원칙적으로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4) 공개 원칙 일반 국민에게 심리·변론·재판의 선고 등 방청을 허용하는 것으로, 압수·수색·검증 등 특별한 경우에는 일정한 소송관계인에 한하여 당사자 공개주의도 병행하고 있다. 재판의 공개는 사법의 공정을 보장하고 재판의 위신을 보전하기 위하여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제도이며, 헌법도 재판 공개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재판의 집행은 재판의 내용을 국가의 강제력에 의하여 실현하는 것을 말하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형의 집행이다. 영미 법계에서는 재판의 집행 지휘를 법원 스스로 행하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검사가 지휘한다. 교도소 안에서 교수형을 집행하는 것은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른다. 자유형의 집행에서는 징역은 교도소·구치소에 수감하여 정역에 복역하게 하고, 구금·구류는 교도소·구치소에 수감하게 한다. 벌금·과료·몰수·추징 등의 재산형의 집행은 검사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 보호법>에 의한 보호 처분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보호 처분은 사회 복귀가 위험한 누범자, 범죄단체 간부·심신장애자·약물중독자 등에 대하여 행해지는데, 보호감호·치료감호·보호관찰이 있다. 그중 가장 엄한 것은 보호감호로, 7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피보호감호자를 보호감호시설에 수용하여 사회 복귀를 위한 감호·교화·직업훈련 및 근로를 부과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형사소송법 (刑事訴訟法) ### 내용: 국가가 범인에 대하여 형벌권을 행사하는 전 과정을 규정한 법률로, 범죄가 발생한 경우 이를 수사, 심판하고 선고된 형을 집행하는 것이다.<NAME>적으로는 형사소송법 전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형사소송 절차를 규정한 법률체계 전체를 의미한다. 형사소송은 국가의 형벌권 행사라는 뜻에서 공익 유지를<NAME>점으로 하지만, 개인의 존중, 개인의 기본 인권 보장을 무시하고 공익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형사소송법은 공익 유지와 인권 보장이라는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념이기에, 그 운영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또는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영미법의 법언은 양자의 요구가 상반되는 규범의 충돌로 나타날 때 국가의<NAME>적 권위를 주장하기 전에 개인의 기본 인권보장을 보다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절차 면에서도 국가형벌권의 행사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발생할 수 있는데, 특히 수사 절차의 적정성과 관련된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구조는 대륙 법계인 직권주의와 영미 법계인 변론주의의 2대 원리로 나눌 수 있으나, 양자는 언제나 어느 정도 교차하므로 나라 사정에 따라 입법이나 해석·운영에 있어서 그 중점의 차별은 존재한다. 조선시대까지는 형전에 규정되고, 규문주의적인 절차를 위주로 한 우리 형사소송법 제도에서 근대적인 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조선형사령>으로 일본 제도를 변용, 의용함으로써 생겨났다. 또한, 미 군정법령에 의하여 행정 목적으로 인신 구속을 자행하던 행정 검속을 금지하고 법관의 영장제도를 확립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민주적 형사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형사소송법이 1954년 9월 제정·공포되었으며, 그 뒤 1961년 9월 당사자주의를 보다 확립하고 공판 절차에서 피고인에 대한 검사·변호인 등의 교호신문제(交互訊問制)를 정립하는 등의 개정이 있었다. 소송법은 수사 단계를 당사자주의적으로 개혁하여 법관의 영장 발부를 요구하고, 피의자에 대한 변호인 선임권을 인정하는 등 우리나라 형사소송 절차 중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편, <헌법>은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피의자의 진술을 들을 때에 미리 알려 주도록 되어 있다. 또한 형사 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하여 유죄 재판이 있기 전에는 어떠한 피의자·피고인에 대해서도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검사와 사법경찰관리가 수사기관이다. 대륙 법계에서는 사법경찰관리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인정하지만, 영미 법계에서는 사법경찰관리를 독립된 수사기관으로 보고, 검사는 공소 유지를 주된 임무로 하는 데 비해, 대륙 법계에서는 사법경찰관리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인정한다. 우리나라의 검사와 사법경찰관리는 상명하복 관계로, 검사는 범죄수사의 주재자로서 사법경찰관리를 지휘, 감독한다. 즉, 수사관·경무관·총경·경정·경감·경위는 사법경찰관으로서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하고, 경사·순경은 사법경찰관리로서 수사를 보조한다. 또한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할 자와 그 직무 범위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산림·보건·전매·세무·해사·철도 등 종사 공무원을 특별사법경찰관리로서 검사장이 지명할 수 있다. 현행 범인·검시·고소·고발·자수 등 범죄 혐의가 있다고 사려한 때 수사의 단서가 될 수 있지만, 이와는 달리 경찰관의 직무질문은 <경찰관 직무 집행 법>에 따른 것이다. 즉, 범인으로 의심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자를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고, 그 장소에서 질문하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교통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인근 경찰관서에 동행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심검문 내지 동행 요구는 수사 이전의 단계로서 답변 동행을 강요당하지 않는다. 공소는 검사가 제기하여 수행한다. 사인(私人)의 기소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국가기관만이 소추한다는 의미에서, 국가소추주의인 동시에 국가기관 중에서도 검사만을 소추기관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기소독점주의이다. 그리고 수사 결과 기소에 충분한 범죄의 객관적 혐의가 있고, 기타 소송·처벌 조건을 구비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기소해야 하는 기소법정주의를 취하는 입법례가 있으나, 우리나라의 제도는 검사가 형사정책상의 득실을 고려하여 그 임의 재량하에 기소·불기소를 결정하는 기소편의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검사의 수사지휘권·공소권 독점·기소편의주의 및 형 집행 지휘 등으로 형사 절차에서의 검사의 권한·책임은 매우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원이<NAME>소 절차를 통해 기소편의주의로 인한 폐해를 경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재정 신청에 의한 심판 회부의 결정은 그 대상에 제한이 있는데,<NAME>죄 처벌법에 대해서는 경찰서장이 순회판사에게 즉결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이 즉결심판의 심판을 받는 자는 정식재판청구권을 보유하고 있고, 판사도 즉결심판이 부적당하다고 인정하면 관할 검찰청에 송치명령을 할 수 있다. 또한 변론주의·구술주의·직접주의·공개주의가 공판의 기본 원칙인데, 벌금·과료를 선고할 때에는 피고인 출석 없이 선고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1) 변론주의 판결은 법률에 다른 규정이 없으면 구술변론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공판정에는 원칙적으로 당사자의 출석을 요구하며 의견진술권·증거조사 신청권 등의 권한이 보장되어 있다. (2) 구술주의 법원은 구술에 의하여 제공된 소송자료에 기초하여 재판을 진행해야 하며, 서면주의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공개 절차의 기본은 변론주의와 구술주의로 구분된다. (3) 직접주의 직접 심리라고도 하며, 공판정에서 직접 조사한 증거에 한하여 재판 자료로 할 수 있고, 전문증거는 원칙적으로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4) 공개 원칙 일반 국민에게 심리·변론·재판의 선고 등 방청을 허용하는 것으로, 압수·수색·검증 등 특별한 경우에는 일정한 소송관계인에 한하여 당사자 공개주의도 병행하고 있다. 재판의 공개는 사법의 공정을 보장하고 재판의 위신을 보전하기 위하여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제도이며, 헌법도 재판 공개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재판의 집행은 재판의 내용을 국가의 강제력에 의하여 실현하는 것을 말하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형의 집행이다. 영미 법계에서는 재판의 집행 지휘를 법원 스스로 행하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검사가 지휘한다. 교도소 안에서 교수형을 집행하는 것은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른다. 자유형의 집행에서는 징역은 교도소·구치소에 수감하여 정역에 복역하게 하고, 구금·구류는 교도소·구치소에 수감하게 한다. 벌금·과료·몰수·추징 등의 재산형의 집행은 검사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 보호법>에 의한 보호 처분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보호 처분은 사회 복귀가 위험한 누범자, 범죄단체 간부·심신장애자·약물중독자 등에 대하여 행해지는데, 보호감호·치료감호·보호관찰이 있다. 그중 가장 엄한 것은 보호감호로, 7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피보호감호자를 보호감호시설에 수용하여 사회 복귀를 위한 감호·교화·직업훈련 및 근로를 부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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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56273.txt
문전철갈이 (門前철갈이)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7297
CC BY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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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가장 중요한 가신인 문전신을 대우하고, 뱀신인 칠성신을 받들어 평안과 부를 기원하기 위해 행해졌던 의식이다. 제주의 문전 본풀이 무가에 의하면 계모가 통시의 칙시 부인이고, 아들 7형제 중 막내아들이 문전신, 큰아들이 뒷문 전신, 막내아들이 문전신, 막내아들이 뒷문 전신, 다섯 형제는 오 방 토신이라고 한다. 또한, 칠성 본풀이 무가에는 뱀인 어머니가 안칠 성이 되어 곡식을 지키고, 뱀인 딸은 밧칠성이 되어 칠성눌에 앉아 부(: 오복의 하나)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제주에서는 정초나 가을에 심방을 불러 문전철 갈이 굿을 하는데, 이 두 무가의 신격인 문전신과 조왕, 칠성 등의 신격이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문전철갈이는 칠성제나 산신 명감과 같은 날을 받아서 한다. 우선, 심방 주관으로 산에 가서 산신 고사를 치르고, 문전 고사와 조왕 고사를 치르고, 안칠 성과 밧칠성을 위한 칠성 고사를 드린다. 이어서 칠성 눌을 가져와 기와 뚜껑을 열고 그 해 햇곡식으로 갈아 넣은 다음, 기와를 덮고 짚으로 만든 주쟁이를 씌우거나 끈으로 묶는다. 제주시 용담동 남무 안사인의 구송에 의하면 문전철갈이는 조왕비념 문전비념 오방토신비념 칠성비념 주목정살지신·눌굽지신비념의 순서로 진행된다. 제주도 세시 풍속의 현장조사에 의하면 2001년 제주시 영평동 가시나 물 마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 2리 구렁팟마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신풍리 마을, 제주시 우도면, 서귀포시 중문동 하원리 등지에서는 문전철갈이를 실시하였다. 특히 제주시 우도면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문전신을 신으로 삼아 집안의 평안을 빌고 칠성 눌을 단지 위에 덮는 문 전 비들 기를 행한다. 칠성 눌은 기와나 단지에 주쟁이를 덮어 놓은 것이다. 조·콩·팥·수수 등 잡곡과 소라 껍데기가 그 안에 들어있는데, 이를 매년 철갈이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문전철갈이 (門前철갈이) ### 내용: 제주도에서 가장 중요한 가신인 문전신을 대우하고, 뱀신인 칠성신을 받들어 평안과 부를 기원하기 위해 행해졌던 의식이다. 제주의 문전 본풀이 무가에 의하면 계모가 통시의 칙시 부인이고, 아들 7형제 중 막내아들이 문전신, 큰아들이 뒷문 전신, 막내아들이 문전신, 막내아들이 뒷문 전신, 다섯 형제는 오 방 토신이라고 한다. 또한, 칠성 본풀이 무가에는 뱀인 어머니가 안칠 성이 되어 곡식을 지키고, 뱀인 딸은 밧칠성이 되어 칠성눌에 앉아 부(: 오복의 하나)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제주에서는 정초나 가을에 심방을 불러 문전철 갈이 굿을 하는데, 이 두 무가의 신격인 문전신과 조왕, 칠성 등의 신격이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문전철갈이는 칠성제나 산신 명감과 같은 날을 받아서 한다. 우선, 심방 주관으로 산에 가서 산신 고사를 치르고, 문전 고사와 조왕 고사를 치르고, 안칠 성과 밧칠성을 위한 칠성 고사를 드린다. 이어서 칠성 눌을 가져와 기와 뚜껑을 열고 그 해 햇곡식으로 갈아 넣은 다음, 기와를 덮고 짚으로 만든 주쟁이를 씌우거나 끈으로 묶는다. 제주시 용담동 남무 안사인의 구송에 의하면 문전철갈이는 조왕비념 문전비념 오방토신비념 칠성비념 주목정살지신·눌굽지신비념의 순서로 진행된다. 제주도 세시 풍속의 현장조사에 의하면 2001년 제주시 영평동 가시나 물 마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 2리 구렁팟마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신풍리 마을, 제주시 우도면, 서귀포시 중문동 하원리 등지에서는 문전철갈이를 실시하였다. 특히 제주시 우도면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문전신을 신으로 삼아 집안의 평안을 빌고 칠성 눌을 단지 위에 덮는 문 전 비들 기를 행한다. 칠성 눌은 기와나 단지에 주쟁이를 덮어 놓은 것이다. 조·콩·팥·수수 등 잡곡과 소라 껍데기가 그 안에 들어있는데, 이를 매년 철갈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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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ECO34781.txt
임금 (賃金)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황조"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405
CC BY
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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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료·봉급·보수 따위의 명칭이 아니라 노동자가 받는 모든 재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봉건사회 이전까지는 남의 집 일을 해 주면 그 대가로 삯을 받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김에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의 임금은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의 임금은 제도와 체제를 막론하고 노동의 대가로 받는 모든 재화를 화폐로 표현한 것이다. 임금수준은 일정한 범위 내의 노동자들이 받는 평균임금으로 명목임금과 실질임금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임금수준은 분석 목적에 따라 물가지수로 나눈 실질임금, 생계비를 기준으로 본 실질임금, 부가가치 총액에 대한 총임금 비율인 노동분배율 등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실질임금을 명목임금을 소비자 물가지수로 나눈 실질임금을 임금수준의 분석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알아보는 것이 편의적이다. 봉건사회에서는 노예가 존재했기 때문에 임금에 의한 고용보다는 신분적 관계에 의한 고용이 일반적이었으며, 소작인의 경우 일정한 소득을 받기는 했지만 임금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적 초과이윤을 얻기 위한 일제의 차별적 저임금 정책에 의해 우리 노동자들의 임금이 매우 낮았다. 또한 중국인 저임금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입국하고 일제의 저임금 정책 내지 노예적 강제노동으로 인해 실질적인 임금수준은 더욱 낮아졌다. 당시 임금수준은 가족 생계는 물론 노동자 자신의 생계유지조차 힘들 정도였다. 실질임금은 1910년 이후 1947년까지 계속 하락하는 추세였다. 광복 직후에도 산업 생산시설의 불균형과 부족한 임금수준으로 인해 임금수준이 낮았다. 또한 실질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미치지 못하여 노동분배율은 상대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1976년 이후, 중동지역의 건설경기 호황에 따른 노동력의 초과수요와 1979년 제2차 유류파동의 영향으로 노동분배율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실질임금은 여전히 낮은 편이었다. 최저임금제의 시행으로 하층의 정대임금액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나,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상당수 존재했다. 실질임금이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이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둔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80년 중반 이후에는 1987년 이래의 고도성장으로 경영여건이 좋아지고 6.29선언 이후 노사분규가 급증하면서 명목임금과 실질임금의 상승률이 모두 두 자리 숫자로 증가했다. 이러한 추세는 1989년을 정점으로 점차 하향 안정화하면서 1995년에는 가장 높은 임금 상승률을 기록했다. 임금체계란 노동자가 받는 봉급이 어떤 구성요소로 구성되었는가를 의미한다. 임금체계는 크게 기본급과 제수당으로 나뉘며, 특별급여 및 부가적 급부도 포괄적인 임금이기 때문에 임금체계의 한 항목이 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임금이라 하면 협의의 임금을 의미하며, 기준 내 임금과 기준 외 임금으로 나눌 수 있다. 기준 내 임금은 노동자가 통상적인 노동시간과 노동조건에 따라 근무한 경우 기본급과 가족수당 등의 제수당으로 이루어지며, 기준 외 임금은 조근·잔업·휴일근무 등을 했을 때 지급되는 초과근무수당·특수근무수당·시간 외 초과수당 등이 있다. 기본급은 그 결정기준에 따라 속인급, 직무·직능급, 통합급 체계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운영 제도에 따라 기본급 기준과 급여수준을 직접 연결하여 표시하는 임금표에 의한 방법, 초임이나 최저급여수준만을 결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연령 등에 따라 일정 차액을 적산해 가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도 있다. 임금지불 방법은 임금형태라고도 하는데, 이는 임금을 지불하는 방법을 말한다. 임금 계산 방식을 기준으로 할 때 임금형태는 노동투입량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시급(time pay)과 노동의 양적 성과를 측정하여 지불하는 성과급(output pay)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기업의 대부분은 시급의 임금 형태를 취하고 있다. 월급제를 채택하고 있는 기업들은 거의 없으며 시간급제·일급제·주급제·월급제·연봉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당 임금 계산은 대부분 생산직에 적용되고 있으나, 연산 단위당 임금 기준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4년 6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 직종의 월평균 급여 수준은 82만 7600원으로 노동부가 1995년 <임금구조 기본통계조사 보고서>에 나와 있다. 직종별로 월평균 급여수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수준이 낮은 직종은 단순노무직 근로자가 58만 6700원, 전문가 112만 8600원, 기술공 및 준전문가 92만 3000원 순으로 나타났으며, 임금수준이 낮은 직종은 고위 임직원 및 관리자가 156만 1400원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근속연수가 길고, 대졸 이상의 학력 소지자의 비율이 높고, 여성근로자의 비중이 낮을수록 월평균 급여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직종 특성에 따른 인적 구성의 차이가 직종별 임금수준에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의 정도에 따라서 직종별 임금격차는 축소되는 경향이 있으나 각 나라의 사회적 관습, 기업 경영 풍토 등이 그 나라의 직종별 임금격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기업 경영이 노사공동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데 비해 프랑스는 권위주의적 경영방식을 택하고 있어 직종 간 임금격차가 독일보다 크다. 생산기술직과 사무관리직의 남자 근로자를 학력별로 대졸과 고졸로 나누었을 때, 대졸의 경우 생산기술직과 사무관리직의 임금격차가 거의 없는 반면, 고졸 이하의 경우 사무직이 생산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기업의 관행이나 사회 관습이 아닌 인력수급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연도별·직종별 임금격차 추이를 보면, 1977∼1978년 사이에 격차가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다가 그 이후 점차 축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학력별 임금격차는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함께 심해져왔다. 하지만 구미 제국에서 학력별 임금격차는 사실 직종별 임금격차 속에 흡수되어 이해되어왔다. 즉, 구미에서는 어떤 종류의 직무에 종사하는가 혹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을 하였는가에 따라서 임금수준이 결정되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근로자의 학력이나 연령과 같은 속인 적인 특성은 임금 결정과정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졸과 고졸의 격차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고졸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중졸 이하 90.5, 초대(전문대) 졸 108.0, 대졸 이상 148.4로 학력이 높을수록 임금수준도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력별 임금격차는 해마다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어 점차 개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력별 임금격차는 크게 노동시장적 요인과 제도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 구미 선진국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업무수행능력에 관계없이 고학력을 채용 및 승진 기준으로 삼는 고용관행이 일반적이다. 학력 중시 고용관행의 발생 원인은 우선 선별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경제적인 방법과 학력이 근로자의 잠재적 생산성을 나타내는 지표라는 것이다. 인적자본 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동일 업종·동일산업·동일 연령계층이면서도 학력별 임금격차를 보이는 이른바 학력별 순임금 격차의 발생 원인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즉, 교육을 통해 인적자본을 많이 축적하였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높고, 임금도 많이 받는다는 설명이다. 또한 우리나라 개별 기업이 직면한 노동 공급곡선이 우상향 기울기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차별적 수요독점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학력별 임금격차의 원인으로는 선진 공업국에서와 같이 산업 기술과 경영 기법이 노동시장 내부에서 개발, 육성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거의 고등교육기관에 전파되고 있다는 것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학력별 임금격차는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기업들이 생산직 인력의 공급 부족으로 인해 생산직 중심의 임금관리 및 경영관리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노동부의 직종별 임금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남자의 평균임금은 22만 2956원이고 여자의 평균임금은 9만 5692원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약 2.3배의 높은 평균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1995년 노동부의 임금구조 기본통계학 보고서를 살펴보면 남자의 월급여액은 93만 9000원이고 여자의 월급여액은 55만 600원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약 1.7배의 높은 액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 상용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체의 성별 임금수준을 살펴보면, 남성 근로자의 임금은 1994보다 10.7% 상승한 반면 여성 근로자의 임금은 13.0% 상승하여 최근 몇 년간 여성근로자의 임금 상승률이 더 높게 나타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여성 근로자의 임금 상승률이 남성 근로자의 임금 상승률보다 높게 나타난 결과 1987년 이후 남녀 간 임금격차가 축소되고 있다. 남성 근로자의 임금을 100이라고 했을 때 여성근로자의 상대임금 비율은 1987년 50.1에서 1995년 59.6으로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여성근로자들이 저임금 직종에 몰려있고 근속연수나 교육수준이 남성 근로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순수한 임금격차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유휴 여성 노동력의 노동시장 유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노동시장적 요인과 <남녀고용평등법>의 시행으로 인한 차별적 관행이 시정되는 등의 제도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우리나라 산업 간 임금격차를 보면 금융 보험업이나 서비스업 그리고 건설업은 고임금 산업으로, 제조업과 운수·창고 및 통신업은 저임금 산업으로 분류된다. 제조업 내에서도 노동집약적인 업종인 섬유업은 1995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1차 금속산업의 59%, 제조업 전체의 80%에 지나지 않았다. 산업별 임금격차의 상당 부분은 각 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성·연령·학력·경력 등 인적인 속성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으며, 나머지는 생산성과 순이익 등의 산업적인 특성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나라 산업별 임금격차는 1970년 이후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으나, 1995년을 기준으로 보면 금융·보험 및 사업서비스업을 비롯한 서비스 관련 산업의 임금 상승률은 크게 높아졌고, 제조업의 임금 상승률은 크게 낮아졌다. 이는 경기 양극화 현상으로 수익성이 높고 지불 능력이 있는 대기업·중화학공업 부문과 중소기업·경공업 부문 간의 임금격차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기업 규모별 임금격차는 1980년대 중반까지 전체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5년 기준으로 사업체 규모별 임금격차를 살펴보면, 10∼29인 사업체의 임금수준을 100으로 할 때 상대임금지수는 30∼99인 규모가 102.4, 100인∼299인 규모가 108.6, 300∼499인 규모가 123.4, 100인 이상 규모가 139.7을 기록하여 규모 간 임금격차는 전년에 비해서 다소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1981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대규모 기업과 30인 미만의 영세기업 간에는 약 20 정도의 임금격차를 보였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기업 규모 간 임금격차가 확대되기 시작하여 1995년 기준으로 보았을 때 500인 이상 규모 기업과 30인 이하 기업의 임금총액은 약 30 정도의 차이가 났다. 이는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기업별 노동조합체제에서 대기업의 노동조합은 강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높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대기업은 파업으로 인한 더 큰 손실을 우려하여 노동조합의 요구를 쉽게 수용하지만,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불 능력으로 인해 임금을 인상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임금 (賃金) ### 내용: 급료·봉급·보수 따위의 명칭이 아니라 노동자가 받는 모든 재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봉건사회 이전까지는 남의 집 일을 해 주면 그 대가로 삯을 받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김에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의 임금은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의 임금은 제도와 체제를 막론하고 노동의 대가로 받는 모든 재화를 화폐로 표현한 것이다. 임금수준은 일정한 범위 내의 노동자들이 받는 평균임금으로 명목임금과 실질임금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임금수준은 분석 목적에 따라 물가지수로 나눈 실질임금, 생계비를 기준으로 본 실질임금, 부가가치 총액에 대한 총임금 비율인 노동분배율 등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실질임금을 명목임금을 소비자 물가지수로 나눈 실질임금을 임금수준의 분석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알아보는 것이 편의적이다. 봉건사회에서는 노예가 존재했기 때문에 임금에 의한 고용보다는 신분적 관계에 의한 고용이 일반적이었으며, 소작인의 경우 일정한 소득을 받기는 했지만 임금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적 초과이윤을 얻기 위한 일제의 차별적 저임금 정책에 의해 우리 노동자들의 임금이 매우 낮았다. 또한 중국인 저임금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입국하고 일제의 저임금 정책 내지 노예적 강제노동으로 인해 실질적인 임금수준은 더욱 낮아졌다. 당시 임금수준은 가족 생계는 물론 노동자 자신의 생계유지조차 힘들 정도였다. 실질임금은 1910년 이후 1947년까지 계속 하락하는 추세였다. 광복 직후에도 산업 생산시설의 불균형과 부족한 임금수준으로 인해 임금수준이 낮았다. 또한 실질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미치지 못하여 노동분배율은 상대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1976년 이후, 중동지역의 건설경기 호황에 따른 노동력의 초과수요와 1979년 제2차 유류파동의 영향으로 노동분배율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실질임금은 여전히 낮은 편이었다. 최저임금제의 시행으로 하층의 정대임금액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나,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상당수 존재했다. 실질임금이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이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둔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80년 중반 이후에는 1987년 이래의 고도성장으로 경영여건이 좋아지고 6.29선언 이후 노사분규가 급증하면서 명목임금과 실질임금의 상승률이 모두 두 자리 숫자로 증가했다. 이러한 추세는 1989년을 정점으로 점차 하향 안정화하면서 1995년에는 가장 높은 임금 상승률을 기록했다. 임금체계란 노동자가 받는 봉급이 어떤 구성요소로 구성되었는가를 의미한다. 임금체계는 크게 기본급과 제수당으로 나뉘며, 특별급여 및 부가적 급부도 포괄적인 임금이기 때문에 임금체계의 한 항목이 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임금이라 하면 협의의 임금을 의미하며, 기준 내 임금과 기준 외 임금으로 나눌 수 있다. 기준 내 임금은 노동자가 통상적인 노동시간과 노동조건에 따라 근무한 경우 기본급과 가족수당 등의 제수당으로 이루어지며, 기준 외 임금은 조근·잔업·휴일근무 등을 했을 때 지급되는 초과근무수당·특수근무수당·시간 외 초과수당 등이 있다. 기본급은 그 결정기준에 따라 속인급, 직무·직능급, 통합급 체계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운영 제도에 따라 기본급 기준과 급여수준을 직접 연결하여 표시하는 임금표에 의한 방법, 초임이나 최저급여수준만을 결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연령 등에 따라 일정 차액을 적산해 가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도 있다. 임금지불 방법은 임금형태라고도 하는데, 이는 임금을 지불하는 방법을 말한다. 임금 계산 방식을 기준으로 할 때 임금형태는 노동투입량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시급(time pay)과 노동의 양적 성과를 측정하여 지불하는 성과급(output pay)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기업의 대부분은 시급의 임금 형태를 취하고 있다. 월급제를 채택하고 있는 기업들은 거의 없으며 시간급제·일급제·주급제·월급제·연봉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당 임금 계산은 대부분 생산직에 적용되고 있으나, 연산 단위당 임금 기준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4년 6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 직종의 월평균 급여 수준은 82만 7600원으로 노동부가 1995년 <임금구조 기본통계조사 보고서>에 나와 있다. 직종별로 월평균 급여수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수준이 낮은 직종은 단순노무직 근로자가 58만 6700원, 전문가 112만 8600원, 기술공 및 준전문가 92만 3000원 순으로 나타났으며, 임금수준이 낮은 직종은 고위 임직원 및 관리자가 156만 1400원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근속연수가 길고, 대졸 이상의 학력 소지자의 비율이 높고, 여성근로자의 비중이 낮을수록 월평균 급여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직종 특성에 따른 인적 구성의 차이가 직종별 임금수준에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의 정도에 따라서 직종별 임금격차는 축소되는 경향이 있으나 각 나라의 사회적 관습, 기업 경영 풍토 등이 그 나라의 직종별 임금격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기업 경영이 노사공동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데 비해 프랑스는 권위주의적 경영방식을 택하고 있어 직종 간 임금격차가 독일보다 크다. 생산기술직과 사무관리직의 남자 근로자를 학력별로 대졸과 고졸로 나누었을 때, 대졸의 경우 생산기술직과 사무관리직의 임금격차가 거의 없는 반면, 고졸 이하의 경우 사무직이 생산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기업의 관행이나 사회 관습이 아닌 인력수급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연도별·직종별 임금격차 추이를 보면, 1977∼1978년 사이에 격차가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다가 그 이후 점차 축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학력별 임금격차는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함께 심해져왔다. 하지만 구미 제국에서 학력별 임금격차는 사실 직종별 임금격차 속에 흡수되어 이해되어왔다. 즉, 구미에서는 어떤 종류의 직무에 종사하는가 혹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을 하였는가에 따라서 임금수준이 결정되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근로자의 학력이나 연령과 같은 속인 적인 특성은 임금 결정과정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졸과 고졸의 격차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고졸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중졸 이하 90.5, 초대(전문대) 졸 108.0, 대졸 이상 148.4로 학력이 높을수록 임금수준도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력별 임금격차는 해마다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어 점차 개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력별 임금격차는 크게 노동시장적 요인과 제도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 구미 선진국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업무수행능력에 관계없이 고학력을 채용 및 승진 기준으로 삼는 고용관행이 일반적이다. 학력 중시 고용관행의 발생 원인은 우선 선별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경제적인 방법과 학력이 근로자의 잠재적 생산성을 나타내는 지표라는 것이다. 인적자본 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동일 업종·동일산업·동일 연령계층이면서도 학력별 임금격차를 보이는 이른바 학력별 순임금 격차의 발생 원인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즉, 교육을 통해 인적자본을 많이 축적하였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높고, 임금도 많이 받는다는 설명이다. 또한 우리나라 개별 기업이 직면한 노동 공급곡선이 우상향 기울기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차별적 수요독점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학력별 임금격차의 원인으로는 선진 공업국에서와 같이 산업 기술과 경영 기법이 노동시장 내부에서 개발, 육성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거의 고등교육기관에 전파되고 있다는 것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학력별 임금격차는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기업들이 생산직 인력의 공급 부족으로 인해 생산직 중심의 임금관리 및 경영관리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노동부의 직종별 임금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남자의 평균임금은 22만 2956원이고 여자의 평균임금은 9만 5692원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약 2.3배의 높은 평균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1995년 노동부의 임금구조 기본통계학 보고서를 살펴보면 남자의 월급여액은 93만 9000원이고 여자의 월급여액은 55만 600원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약 1.7배의 높은 액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 상용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체의 성별 임금수준을 살펴보면, 남성 근로자의 임금은 1994보다 10.7% 상승한 반면 여성 근로자의 임금은 13.0% 상승하여 최근 몇 년간 여성근로자의 임금 상승률이 더 높게 나타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여성 근로자의 임금 상승률이 남성 근로자의 임금 상승률보다 높게 나타난 결과 1987년 이후 남녀 간 임금격차가 축소되고 있다. 남성 근로자의 임금을 100이라고 했을 때 여성근로자의 상대임금 비율은 1987년 50.1에서 1995년 59.6으로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여성근로자들이 저임금 직종에 몰려있고 근속연수나 교육수준이 남성 근로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순수한 임금격차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유휴 여성 노동력의 노동시장 유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노동시장적 요인과 <남녀고용평등법>의 시행으로 인한 차별적 관행이 시정되는 등의 제도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우리나라 산업 간 임금격차를 보면 금융 보험업이나 서비스업 그리고 건설업은 고임금 산업으로, 제조업과 운수·창고 및 통신업은 저임금 산업으로 분류된다. 제조업 내에서도 노동집약적인 업종인 섬유업은 1995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1차 금속산업의 59%, 제조업 전체의 80%에 지나지 않았다. 산업별 임금격차의 상당 부분은 각 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성·연령·학력·경력 등 인적인 속성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으며, 나머지는 생산성과 순이익 등의 산업적인 특성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나라 산업별 임금격차는 1970년 이후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으나, 1995년을 기준으로 보면 금융·보험 및 사업서비스업을 비롯한 서비스 관련 산업의 임금 상승률은 크게 높아졌고, 제조업의 임금 상승률은 크게 낮아졌다. 이는 경기 양극화 현상으로 수익성이 높고 지불 능력이 있는 대기업·중화학공업 부문과 중소기업·경공업 부문 간의 임금격차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기업 규모별 임금격차는 1980년대 중반까지 전체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5년 기준으로 사업체 규모별 임금격차를 살펴보면, 10∼29인 사업체의 임금수준을 100으로 할 때 상대임금지수는 30∼99인 규모가 102.4, 100인∼299인 규모가 108.6, 300∼499인 규모가 123.4, 100인 이상 규모가 139.7을 기록하여 규모 간 임금격차는 전년에 비해서 다소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1981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대규모 기업과 30인 미만의 영세기업 간에는 약 20 정도의 임금격차를 보였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기업 규모 간 임금격차가 확대되기 시작하여 1995년 기준으로 보았을 때 500인 이상 규모 기업과 30인 이하 기업의 임금총액은 약 30 정도의 차이가 났다. 이는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기업별 노동조합체제에서 대기업의 노동조합은 강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높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대기업은 파업으로 인한 더 큰 손실을 우려하여 노동조합의 요구를 쉽게 수용하지만,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불 능력으로 인해 임금을 인상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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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7891.txt
반촌 (班村)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여중철"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563
CC BY
275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민촌과는 다른 개념이다. 양반은 사조 내에 9품 이상의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 양반층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그렇지 못한 자들도 향반이라 하여 양반으로 통했다. 각 고을의 도성 밖에는 반촌이 형성되었다. 대부분 미작 위주로 농사를 짓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의 평야지대에 많았다. 이는 반촌을 유지하기 위해 토지와 인력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신분제 및 재산상속제도와 반촌의 형성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 고려의 귀족·군벌·사림을 중심으로 지배계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사전을 물적 기반으로 하고, 직접 생산자인 노비를 소유하여 반촌을 형성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의 자녀 균분상속제도는 자녀들이 토지와 노비를 분할, 소유하게 함으로써 양반의 자손이 전국 각지에 분산 거주하여 새로운 반촌을 형성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형성 시기는 중국 친족 제도의 도입에 따라 사족을 중심으로 한 동족마을이 발전하는 17세기 이후로 본다. 조선 말기에는 양반 계층의 수가 급증하면서 반촌도 급증하였다. 일반적으로 반촌은 양반과 소수의 양인, 그리고 천민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지주로서 직접 농업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양인이나 천민들은 양반의 토지를 소작하거나 노비로써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였다. 양반은 거의 다 동족 집단을 형성했기 때문에, 반촌의 경우 1개에서 3개의 동족 집단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큰집·작은 집이 같은 집안이어도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즉 반촌의 사회관계는 신분·혈연·지연을 매개로 형성되었다. 반촌에 거주하는 양인과 천민은 양반에 대해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있으며, 마을 내의 주요 사회집단인 동족 조직에서도 배제되었다. 반촌의 특징은 자형의 기와집과 족보와 문집 등의 고문서이다. 반촌의 구성원들은 신분 내혼제(양반끼리만 혼인)를 채택하며 지체에 따라 혼반을 형성해 갔다. 1801년(순조 1) 국가가 노비안을 폐지함으로써 공노비를 양 인화하였고, 1886년(고종 23)에는 노비의 세습제를 폐지하였다. 또한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해 법적으로 노비제가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반촌의 성격도 달라졌는데, 그것은 과거의 신분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즉, 반촌은 존재하였으나 그 구성원의 변화가 생겼으며, 경제적 기반이 약한 일부 양반은 농업 등 생산활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신분제가 사라진 지금에도 반촌은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 구성이나 사회구조 등은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반촌 (班村) ### 내용: 민촌과는 다른 개념이다. 양반은 사조 내에 9품 이상의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 양반층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그렇지 못한 자들도 향반이라 하여 양반으로 통했다. 각 고을의 도성 밖에는 반촌이 형성되었다. 대부분 미작 위주로 농사를 짓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의 평야지대에 많았다. 이는 반촌을 유지하기 위해 토지와 인력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신분제 및 재산상속제도와 반촌의 형성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 고려의 귀족·군벌·사림을 중심으로 지배계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사전을 물적 기반으로 하고, 직접 생산자인 노비를 소유하여 반촌을 형성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의 자녀 균분상속제도는 자녀들이 토지와 노비를 분할, 소유하게 함으로써 양반의 자손이 전국 각지에 분산 거주하여 새로운 반촌을 형성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형성 시기는 중국 친족 제도의 도입에 따라 사족을 중심으로 한 동족마을이 발전하는 17세기 이후로 본다. 조선 말기에는 양반 계층의 수가 급증하면서 반촌도 급증하였다. 일반적으로 반촌은 양반과 소수의 양인, 그리고 천민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지주로서 직접 농업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양인이나 천민들은 양반의 토지를 소작하거나 노비로써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였다. 양반은 거의 다 동족 집단을 형성했기 때문에, 반촌의 경우 1개에서 3개의 동족 집단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큰집·작은 집이 같은 집안이어도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즉 반촌의 사회관계는 신분·혈연·지연을 매개로 형성되었다. 반촌에 거주하는 양인과 천민은 양반에 대해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있으며, 마을 내의 주요 사회집단인 동족 조직에서도 배제되었다. 반촌의 특징은 자형의 기와집과 족보와 문집 등의 고문서이다. 반촌의 구성원들은 신분 내혼제(양반끼리만 혼인)를 채택하며 지체에 따라 혼반을 형성해 갔다. 1801년(순조 1) 국가가 노비안을 폐지함으로써 공노비를 양 인화하였고, 1886년(고종 23)에는 노비의 세습제를 폐지하였다. 또한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해 법적으로 노비제가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반촌의 성격도 달라졌는데, 그것은 과거의 신분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즉, 반촌은 존재하였으나 그 구성원의 변화가 생겼으며, 경제적 기반이 약한 일부 양반은 농업 등 생산활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신분제가 사라진 지금에도 반촌은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 구성이나 사회구조 등은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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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637.txt
갓일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영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949
CC BY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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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총 모자·갓 조립의 세 부분으로 나눠 진행되는 갓일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대오리 제작·운기 모으기·은각 모으기·대우 모으기·버렁 잡기·갓 모으기·칠하기의 여덟 과정을 거친다. 모자 제작은 세 죽사나 말총으로 은각·운기·대우를 연결하고, 양태는 세 죽사로 버렁 잡이로 만든다. 각 모자와 양태를 접착제로 붙여서 모자 박는다고 칭한다. 이때 대우의 아래쪽 안에 은각새를 붙여 장식한다. 그리고 애삐로 갓의 이음새와 가장자리를 다듬고 먹칠을 검게 칠한다. 다음 옻통 안에 찬물을 붓고 갓에 옻칠을 한 다음 12시간 후에 꺼내면 완성된다. 보통 사장일·곱배기일·갓모으는 일 등으로 분업화되어 4명이 한 번에 50개 정도를 만드는 것이 갓방에서도 이루어진다. 갓일은 세 죽·말총 등 민속공예와 더불어 습득하는 데 10년 이상 걸리는 것으로, 그 기술이 매우 복잡하고 정밀하기 때문에 습득하는 데 10년 이상 걸린다. 갓일의 전통적 계승을 위해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는 입자장 전덕기, 양태장 모만환, 총 모 자장 고재구 등이다. 그 후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은 김봉주·고정생·오송죽·김인·정춘모 등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갓일 ### 내용: 양태·총 모자·갓 조립의 세 부분으로 나눠 진행되는 갓일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대오리 제작·운기 모으기·은각 모으기·대우 모으기·버렁 잡기·갓 모으기·칠하기의 여덟 과정을 거친다. 모자 제작은 세 죽사나 말총으로 은각·운기·대우를 연결하고, 양태는 세 죽사로 버렁 잡이로 만든다. 각 모자와 양태를 접착제로 붙여서 모자 박는다고 칭한다. 이때 대우의 아래쪽 안에 은각새를 붙여 장식한다. 그리고 애삐로 갓의 이음새와 가장자리를 다듬고 먹칠을 검게 칠한다. 다음 옻통 안에 찬물을 붓고 갓에 옻칠을 한 다음 12시간 후에 꺼내면 완성된다. 보통 사장일·곱배기일·갓모으는 일 등으로 분업화되어 4명이 한 번에 50개 정도를 만드는 것이 갓방에서도 이루어진다. 갓일은 세 죽·말총 등 민속공예와 더불어 습득하는 데 10년 이상 걸리는 것으로, 그 기술이 매우 복잡하고 정밀하기 때문에 습득하는 데 10년 이상 걸린다. 갓일의 전통적 계승을 위해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는 입자장 전덕기, 양태장 모만환, 총 모 자장 고재구 등이다. 그 후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은 김봉주·고정생·오송죽·김인·정춘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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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LAW22912.txt
국제사법 (國際私法)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152
CC BY
301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이 법은 첫째, 섭외적 사법관계를 규율하는 법으로, 당사자의 국적·주소·현재지, 목적물의 소재지·행위지·이행지·사실 발생지 등의 일부가 타국과 관련이 있는 사법 관계를 말한다. 둘째, 국제사법은 구법인 섭외사법과 달리 국제재판관할권에 관한 원칙을 정하는 법으로 기능이 추가되었다. 예를 들면, 한국인과 미국인이 결혼하는 경우, 한국인이 독일인으로부터 영국에 있는 부동산을 사는 경우, 일본인이 중국인과 100만 달러의 소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등이다. 섭외적 사법관계에 적용될 사법을 준거법이라 하고, 이 준거법을 정하는 법이 국제사법이다. 준거법은 섭외적 사법관계의 성질에 따라 내국법일 수도, 외국법일 수도 있다. 이 법은 준거법을 지정하는 법이다. 즉, 섭외적 사법관계에 적용될 준거법이 아니라 그 준거법을 정하는 법을 뜻한다. 따라서 이 법을 간접법이라 한다. 국제사법은 2001년 4월 7일 법률 제6465호로 전문이 개정되었으며 1962년 1월 15일 법률 제966호로 섭외사법으로 제정·공포되었다. 이 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일본에서 1898년 이래 시행되고 있던 「법례」를 적용하고 있었다. 「법례」는 「독일 민법 시행령」 초안을 따른 것으로, 1912년 칙령 제21호 「법례를 조선에 시행하는 건」에 의거, 광복되기까지 시행되어 왔다. 「법례」는 군정법령 제21호에 따라, 정부 수립 시까지 시행되어 왔으며, 정부 수립 이후 구 「헌법」 제100조의 규정에 의하여 1962년 이 법이 제정·시행되기 이전까지 그대로 시행되어 왔다. 섭외사법은 전문 3장 47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장은 총칙, 제2장은 민사, 제3장은 상사에 관한 규정이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능력은 본국법으로 정하고, 법률행위의 성립 및 효력에 관해서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적용할 법을 정하고, 행위지법에 의거한다. 동산 및 부동산에 관한 물권, 기타 등기하여야 할 권리는 목적물의 소재지법에 의거하고, 혼인의 효력은 부의 본국법에 의거한다. 개정된 「국제사법」은 2001년 7월 1일 법률 제6465호로 시행되었으며,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와 제2조는 국제재판관할을 규정하였고, 주소지법보다는 상거소지법(常居所地法)을 채택하였으며, 유연한 법 선택 방법론과 선택적·단계적 연결 방법을 도입하고 헌법상 남녀평등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사자 자치 원칙을 확대하고 지적재산권 조항을 신설했다. 구법은 보편주의적 전통 국제사법에 충실하여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급변하는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복잡하게 얽힌 섭외적 법률관계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섭외사법의 개정이 필수적이었다. 분쟁 해결 규범으로서의 국제사법의 역할이 확대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준거법 선택의 전제 문제로서 국제재판관할권을 규정한 것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국제사법 (國際私法) ### 내용: 이 법은 첫째, 섭외적 사법관계를 규율하는 법으로, 당사자의 국적·주소·현재지, 목적물의 소재지·행위지·이행지·사실 발생지 등의 일부가 타국과 관련이 있는 사법 관계를 말한다. 둘째, 국제사법은 구법인 섭외사법과 달리 국제재판관할권에 관한 원칙을 정하는 법으로 기능이 추가되었다. 예를 들면, 한국인과 미국인이 결혼하는 경우, 한국인이 독일인으로부터 영국에 있는 부동산을 사는 경우, 일본인이 중국인과 100만 달러의 소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등이다. 섭외적 사법관계에 적용될 사법을 준거법이라 하고, 이 준거법을 정하는 법이 국제사법이다. 준거법은 섭외적 사법관계의 성질에 따라 내국법일 수도, 외국법일 수도 있다. 이 법은 준거법을 지정하는 법이다. 즉, 섭외적 사법관계에 적용될 준거법이 아니라 그 준거법을 정하는 법을 뜻한다. 따라서 이 법을 간접법이라 한다. 국제사법은 2001년 4월 7일 법률 제6465호로 전문이 개정되었으며 1962년 1월 15일 법률 제966호로 섭외사법으로 제정·공포되었다. 이 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일본에서 1898년 이래 시행되고 있던 「법례」를 적용하고 있었다. 「법례」는 「독일 민법 시행령」 초안을 따른 것으로, 1912년 칙령 제21호 「법례를 조선에 시행하는 건」에 의거, 광복되기까지 시행되어 왔다. 「법례」는 군정법령 제21호에 따라, 정부 수립 시까지 시행되어 왔으며, 정부 수립 이후 구 「헌법」 제100조의 규정에 의하여 1962년 이 법이 제정·시행되기 이전까지 그대로 시행되어 왔다. 섭외사법은 전문 3장 47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장은 총칙, 제2장은 민사, 제3장은 상사에 관한 규정이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능력은 본국법으로 정하고, 법률행위의 성립 및 효력에 관해서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적용할 법을 정하고, 행위지법에 의거한다. 동산 및 부동산에 관한 물권, 기타 등기하여야 할 권리는 목적물의 소재지법에 의거하고, 혼인의 효력은 부의 본국법에 의거한다. 개정된 「국제사법」은 2001년 7월 1일 법률 제6465호로 시행되었으며,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와 제2조는 국제재판관할을 규정하였고, 주소지법보다는 상거소지법(常居所地法)을 채택하였으며, 유연한 법 선택 방법론과 선택적·단계적 연결 방법을 도입하고 헌법상 남녀평등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사자 자치 원칙을 확대하고 지적재산권 조항을 신설했다. 구법은 보편주의적 전통 국제사법에 충실하여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급변하는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복잡하게 얽힌 섭외적 법률관계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섭외사법의 개정이 필수적이었다. 분쟁 해결 규범으로서의 국제사법의 역할이 확대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준거법 선택의 전제 문제로서 국제재판관할권을 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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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2856.txt
돌널무덤 (石棺墓)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120
CC BY
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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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지방, 한반도, 일본 등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은 고인돌, 석 개 토광묘, 독무덤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이다. 돌널무덤의 일반적인 형태는 지하 묘광주1을 파서 판돌이나 깬 돌로 장방형의 돌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1매 이상의 뚜껑돌을 덮는 것이다.<NAME>의 재료와 형태, 축조 방법에 따라 돌널무덤은 두 종류로 세분되기도 하는데, 네 벽과 바닥, 뚜껑돌을 각각 1∼2매의 잘 다듬어진 판돌을 사용하여 상자 모양으로 만든 돌상자[] 형태가 가장 빠르고 전형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깬돌 여러 매를 사용하여 네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은 형태의<NAME>이 존재한다. 돌널무덤은 묘광의 축조 방식과 깊이에 따라 일단과 이단 돌널무덤으로 나누기도 하며, 돌널의 조립 방법에 따라 ‘ㅍ’, ‘II’, ‘ㅁ’자형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ㅍ’자형으로 조립된다. 바닥은 대부분 생토면을 그대로 쓰거나 바닥에 돌을 깐 것이 대부분이지만 금강 유역권에서는 송국리형 토기를 바닥 전면에 깔기도 한다. 금강 유역에서는 이러한 내부 시설의 바닥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는 대부분 금강 유역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돌널무덤의 규모도 매우 다양한데, 이는 매장 법의 차이, 즉 펴 묻기와 굽혀 묻기의 차이 때문이다. 돌널무덤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보이며, 묘제주2와 함께 출토되는 유물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서는 중원 지역과 달리 돌널무덤을 축조하는 전통이 강하고, 요서의 하가점상층문화부터 길림 지역의 서단 산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발견된다. 이들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마성자문화의 동굴 복합 묘와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 복합 묘이며, 토광 묘주 3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요령 일대의 돌널무덤은 한반도처럼 단독으로 축조된 경우가 거의 없고 군집을 이루어 발견된다. 예를 들어 강상과 루상 유적에서는 장방형의 적석 묘 역 안에서 다양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중심에서 판돌로 축조한 전형적인 돌널무덤이다. 또한 앙신장주 4와 더불어 화장이나 이차장 주 5의 장법이 활발하다는 점에서도 다른 지역과 다르다. 무덤 내부에서는 비파형동검을 포함한 다양한 청동기와 함께 미송리형토기, 파수 부장 경 호 등이 발견된다. 두만강 지류의 연길 소영자 유적에서는 돌널무덤이 100여 기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서단 산문화의 돌널무덤과 다른 특이한 구조도 발견되었는데, 2~3기의 돌널이 장 · 단벽이나 뚜껑돌을<NAME>는 식이다. 또한 단인장을 기본으로 하지만 하나의 돌널 안에 2∼4인의 시신을 안치하는 다인장의 관습도 다른 지역과 다르다. 장법은 앙신장이 기본이지만 일부에서는 굴장주6과 화장도 이루어졌다.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들이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부장품으로는 각종 석기와 장식품, 유정동 유형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북한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돌널무덤은 현재까지 네 벽 모두 판석을 이용한 돌상자 모양이 대부분이다. 판석 1매를 사용하지만 바닥 시설은 판석의 위나 아래에 자갈돌을 한 겹 깐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다르다. 우선 압록강 유역 강계 풍룡리 유적에서 발견된 두광족협식의 돌널무덤에서 청동단추[], 검은 긴 목 항아리[]가 북한 지역 돌널무덤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강계시의 공귀리 유적에서는 수매의 판돌을 사용하여 큰 중심 돌널 옆에 작은 돌널을 잇대어 축조한<NAME>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부모와 자식이 합장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황해도 배천 대아리 돌널무덤은 각 벽을 1매의 판돌로 짠<NAME>인데, 돌널 내부에서 후기형의 비파형동검과 청동 화살촉, 대롱옥, 돌 화살촉이 나왔다. 황해도 천곡리 돌널무덤에서는 마지막으로 청동기시대 초기 표지 유물인<NAME>동검이 나왔다. 남한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서기 전 10세기경)부터 돌널무덤이 축조되는데,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강원도와 서부 경남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이단병식석검과 삼각만입촉, 대부 소호가 발견된 곳은 무덤 방이다. 청동기시대 중기(서기 전 9세기경)에 이르면 돌널무덤은 분포와 밀도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금강의 중하류 일대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남부 지방 전역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몇십 기가 한 지점에서 군집으로 발견되고 있는 금강 중하류의 석관묘는 1기 혹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최근에는 서천 오석리, 공주 분강리와 산의리, 부여 송국리, 논산 마전리 유적처럼 1기 혹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 금강 중하류의 석관묘는 한 지점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군집 형태의 석관묘는 분묘 간의 중복이 거의 없고 거의 모든 유적에서 3기 내외의 무덤이 소군집을 이루어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금강 중하류에서는 석 개 토광묘, 독널무덤이 석 개 토광묘, 독널무덤과 함께 발견되고, 이들 묘제가 송국리형 주거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송국리형 묘제로 주장되기도 한다. 대부분 무문토기 편, 돌검, 돌 화살촉, 붉은 간 토기, 옥등이 부장되어 있지만 부여 송국리 유적 석관묘에서는 비파형동검이 함께 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자의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금강 중하류에서는 고인돌과 함께 석 개 토광묘, 독널무덤이 발견되지만 고인돌과 함께 발견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만 서해안 일대와 금강 상류 지역, 전라남도, 경상도 일대에서는 고인돌과 혼재하여 출토되는 돌널무덤의 빈도와 밀도가 금강 중하류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진주 귀곡동 유적의 특징은 고인돌을 중심으로 돌널무덤이 주변에 분포하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후기(서기 전 5세기경)에 접어들면 북방 지역의 점토대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남한 지역의 돌널무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판돌로 네 벽을 짜 맞춘 전형적인 돌널무덤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고성 솔 섬의 돌널무덤이 가장 늦게 만들어진 예이다. 삼한시대에 만들어진 회색 연질의 주머니호가 부장품으로 나왔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돌널무덤 (石棺墓) ### 내용: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지방, 한반도, 일본 등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은 고인돌, 석 개 토광묘, 독무덤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이다. 돌널무덤의 일반적인 형태는 지하 묘광주1을 파서 판돌이나 깬 돌로 장방형의 돌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1매 이상의 뚜껑돌을 덮는 것이다.<NAME>의 재료와 형태, 축조 방법에 따라 돌널무덤은 두 종류로 세분되기도 하는데, 네 벽과 바닥, 뚜껑돌을 각각 1∼2매의 잘 다듬어진 판돌을 사용하여 상자 모양으로 만든 돌상자[] 형태가 가장 빠르고 전형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깬돌 여러 매를 사용하여 네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은 형태의<NAME>이 존재한다. 돌널무덤은 묘광의 축조 방식과 깊이에 따라 일단과 이단 돌널무덤으로 나누기도 하며, 돌널의 조립 방법에 따라 ‘ㅍ’, ‘II’, ‘ㅁ’자형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ㅍ’자형으로 조립된다. 바닥은 대부분 생토면을 그대로 쓰거나 바닥에 돌을 깐 것이 대부분이지만 금강 유역권에서는 송국리형 토기를 바닥 전면에 깔기도 한다. 금강 유역에서는 이러한 내부 시설의 바닥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는 대부분 금강 유역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돌널무덤의 규모도 매우 다양한데, 이는 매장 법의 차이, 즉 펴 묻기와 굽혀 묻기의 차이 때문이다. 돌널무덤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보이며, 묘제주2와 함께 출토되는 유물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서는 중원 지역과 달리 돌널무덤을 축조하는 전통이 강하고, 요서의 하가점상층문화부터 길림 지역의 서단 산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발견된다. 이들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마성자문화의 동굴 복합 묘와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 복합 묘이며, 토광 묘주 3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요령 일대의 돌널무덤은 한반도처럼 단독으로 축조된 경우가 거의 없고 군집을 이루어 발견된다. 예를 들어 강상과 루상 유적에서는 장방형의 적석 묘 역 안에서 다양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중심에서 판돌로 축조한 전형적인 돌널무덤이다. 또한 앙신장주 4와 더불어 화장이나 이차장 주 5의 장법이 활발하다는 점에서도 다른 지역과 다르다. 무덤 내부에서는 비파형동검을 포함한 다양한 청동기와 함께 미송리형토기, 파수 부장 경 호 등이 발견된다. 두만강 지류의 연길 소영자 유적에서는 돌널무덤이 100여 기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서단 산문화의 돌널무덤과 다른 특이한 구조도 발견되었는데, 2~3기의 돌널이 장 · 단벽이나 뚜껑돌을<NAME>는 식이다. 또한 단인장을 기본으로 하지만 하나의 돌널 안에 2∼4인의 시신을 안치하는 다인장의 관습도 다른 지역과 다르다. 장법은 앙신장이 기본이지만 일부에서는 굴장주6과 화장도 이루어졌다.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들이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부장품으로는 각종 석기와 장식품, 유정동 유형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북한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돌널무덤은 현재까지 네 벽 모두 판석을 이용한 돌상자 모양이 대부분이다. 판석 1매를 사용하지만 바닥 시설은 판석의 위나 아래에 자갈돌을 한 겹 깐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다르다. 우선 압록강 유역 강계 풍룡리 유적에서 발견된 두광족협식의 돌널무덤에서 청동단추[], 검은 긴 목 항아리[]가 북한 지역 돌널무덤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강계시의 공귀리 유적에서는 수매의 판돌을 사용하여 큰 중심 돌널 옆에 작은 돌널을 잇대어 축조한<NAME>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부모와 자식이 합장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황해도 배천 대아리 돌널무덤은 각 벽을 1매의 판돌로 짠<NAME>인데, 돌널 내부에서 후기형의 비파형동검과 청동 화살촉, 대롱옥, 돌 화살촉이 나왔다. 황해도 천곡리 돌널무덤에서는 마지막으로 청동기시대 초기 표지 유물인<NAME>동검이 나왔다. 남한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서기 전 10세기경)부터 돌널무덤이 축조되는데,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강원도와 서부 경남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이단병식석검과 삼각만입촉, 대부 소호가 발견된 곳은 무덤 방이다. 청동기시대 중기(서기 전 9세기경)에 이르면 돌널무덤은 분포와 밀도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금강의 중하류 일대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남부 지방 전역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몇십 기가 한 지점에서 군집으로 발견되고 있는 금강 중하류의 석관묘는 1기 혹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최근에는 서천 오석리, 공주 분강리와 산의리, 부여 송국리, 논산 마전리 유적처럼 1기 혹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 금강 중하류의 석관묘는 한 지점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군집 형태의 석관묘는 분묘 간의 중복이 거의 없고 거의 모든 유적에서 3기 내외의 무덤이 소군집을 이루어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금강 중하류에서는 석 개 토광묘, 독널무덤이 석 개 토광묘, 독널무덤과 함께 발견되고, 이들 묘제가 송국리형 주거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송국리형 묘제로 주장되기도 한다. 대부분 무문토기 편, 돌검, 돌 화살촉, 붉은 간 토기, 옥등이 부장되어 있지만 부여 송국리 유적 석관묘에서는 비파형동검이 함께 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자의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금강 중하류에서는 고인돌과 함께 석 개 토광묘, 독널무덤이 발견되지만 고인돌과 함께 발견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만 서해안 일대와 금강 상류 지역, 전라남도, 경상도 일대에서는 고인돌과 혼재하여 출토되는 돌널무덤의 빈도와 밀도가 금강 중하류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진주 귀곡동 유적의 특징은 고인돌을 중심으로 돌널무덤이 주변에 분포하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후기(서기 전 5세기경)에 접어들면 북방 지역의 점토대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남한 지역의 돌널무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판돌로 네 벽을 짜 맞춘 전형적인 돌널무덤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고성 솔 섬의 돌널무덤이 가장 늦게 만들어진 예이다. 삼한시대에 만들어진 회색 연질의 주머니호가 부장품으로 나왔다.
081eca7a-e931-4d68-b10e-9dcf93dbb8b5
source05/encykorea/ECO24226.txt
수표 (手標)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62
CC BY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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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라고도 하며, 다짐(, 서약)의 성격을 갖는다. 수표에는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가끔 연호를 쓴 경우가 있고, 모든 문서는 한자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수표 중에는 한글로 작성된 것이 남아 있다. 대차관계의 수표에는 대차 당사자와 증인·필집의 이름을 쓰고 수결을 하며, 언제까지 빌린 돈을 갚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산송과 관련된 수표에는 정해진 기한 내에 이장하겠다는 약속이 기재되어야 한다. 또한 수표·수기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고문서 가운데에서도 많은 수가 있지만, 그 서식은 매우 다양하여 사회사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수표 (手標) ### 내용: 수기라고도 하며, 다짐(, 서약)의 성격을 갖는다. 수표에는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가끔 연호를 쓴 경우가 있고, 모든 문서는 한자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수표 중에는 한글로 작성된 것이 남아 있다. 대차관계의 수표에는 대차 당사자와 증인·필집의 이름을 쓰고 수결을 하며, 언제까지 빌린 돈을 갚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산송과 관련된 수표에는 정해진 기한 내에 이장하겠다는 약속이 기재되어야 한다. 또한 수표·수기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고문서 가운데에서도 많은 수가 있지만, 그 서식은 매우 다양하여 사회사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85dcc18c-76f4-440d-8d7f-31c7fbdb221e
source05/encykorea/SOC14008.txt
만달인 (晩達人)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무장"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560
CC BY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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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NAME>구역 만달리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25∼30세의 남자 인골로 만달인으로 명명되었다. 동굴의 퇴적층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달인은 감탕 흙층에서 석기·골기·다량의 동물 화석 등을 함께 출토하였다. 두개골 1개와 아래턱뼈 2개, 골반뼈 2개, 팔뼈 1개, 넓적다리뼈 1개가 출토되었다. 만달인의 머리뼈는 201mm로 현 한국인(175.2mm)과 고 한국인(176.5mm)보다도 길다. 현 한국인(142.4mm)과 고 한국인(143.6mm)의 머리뼈 너비도 146mm로 넓다. 그렇지만 머리뼈의 너비는 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다. 현대인으로 넘어가면서 장두형의 특징은 짧아지는데, 이는 현생인류 단계의 인류 화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징표이다. 따라서 만달인은 아직 이런 단수 과정이 잘 진행되지 않은 단계이다. 만달인의 머리뼈는 귀 높이가 123mm로 상당히 높다. 이것은 동부 아시아에서 발견된 현생인류 중에서 최고로 높은 것이다. 현생인류만이 볼 수 있는 화살 융기가 만달인의 앞머리뼈에 있다. 이 융기는 앞머리뼈 불루기 사이에서 시작되어 이마의 만 곡 선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가 뒤로 향하여 윗머리 뼈에 접근하면서 사라졌다. 현재 한국인은 눈두덩의 발달이 매우 느리고 눈 턱뚝을 이루는 요소들이 모두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만달인의 눈두덩은 현 한국인과 다르게 눈확의 안쪽 윗가장자리와 눈두덩 사이가 하나로 합쳐져 두꺼워 보인다. 만달인의 턱 블루 기지수는 112.9로 중국 쥬우커우덴의 산정동 인과 근접하며 승리산인보다 약간 크다. 턱 구멍의 위치는 턱 구멍<NAME>에 반영된다.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만달인의 것은 53.6이다. 이상에서 보았을 때, 만달인은 현생인류 단계의 인류 화석이다. 이들은 석기와 골기도 사용하였다. 뼈나 뿔로 만든 골기도 제작되었고 가공한 흔적이 있는 석기 13점도 발견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러한<NAME>이 이러한 연유를 만들었을 것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만달인 (晩達人) ### 내용: 평양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NAME>구역 만달리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25∼30세의 남자 인골로 만달인으로 명명되었다. 동굴의 퇴적층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달인은 감탕 흙층에서 석기·골기·다량의 동물 화석 등을 함께 출토하였다. 두개골 1개와 아래턱뼈 2개, 골반뼈 2개, 팔뼈 1개, 넓적다리뼈 1개가 출토되었다. 만달인의 머리뼈는 201mm로 현 한국인(175.2mm)과 고 한국인(176.5mm)보다도 길다. 현 한국인(142.4mm)과 고 한국인(143.6mm)의 머리뼈 너비도 146mm로 넓다. 그렇지만 머리뼈의 너비는 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다. 현대인으로 넘어가면서 장두형의 특징은 짧아지는데, 이는 현생인류 단계의 인류 화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징표이다. 따라서 만달인은 아직 이런 단수 과정이 잘 진행되지 않은 단계이다. 만달인의 머리뼈는 귀 높이가 123mm로 상당히 높다. 이것은 동부 아시아에서 발견된 현생인류 중에서 최고로 높은 것이다. 현생인류만이 볼 수 있는 화살 융기가 만달인의 앞머리뼈에 있다. 이 융기는 앞머리뼈 불루기 사이에서 시작되어 이마의 만 곡 선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가 뒤로 향하여 윗머리 뼈에 접근하면서 사라졌다. 현재 한국인은 눈두덩의 발달이 매우 느리고 눈 턱뚝을 이루는 요소들이 모두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만달인의 눈두덩은 현 한국인과 다르게 눈확의 안쪽 윗가장자리와 눈두덩 사이가 하나로 합쳐져 두꺼워 보인다. 만달인의 턱 블루 기지수는 112.9로 중국 쥬우커우덴의 산정동 인과 근접하며 승리산인보다 약간 크다. 턱 구멍의 위치는 턱 구멍<NAME>에 반영된다.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만달인의 것은 53.6이다. 이상에서 보았을 때, 만달인은 현생인류 단계의 인류 화석이다. 이들은 석기와 골기도 사용하였다. 뼈나 뿔로 만든 골기도 제작되었고 가공한 흔적이 있는 석기 13점도 발견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러한<NAME>이 이러한 연유를 만들었을 것이다.
bcea9608-50e3-499a-a928-48de2a5387d8
source05/encykorea/SOC4124.txt
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 風納洞 土城)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300
CC BY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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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풍납 1동과 2동에 걸쳐 있는 서울 풍납동 토성(사적 제11호)은 한강에 접해 있는 남북 방향의 장타원형으로, 현재 북벽과 동벽, 남벽 등이 남아 있고 서벽은 서남부를 제외한 대부분 유실된 상태다. 북벽 446m 구간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복원되었으며, 동벽은 북쪽 일부 구간이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 약 2.1km 정도가 남아 있다. 최근 조사에서 유실된 서성 벽의 흔적들이 추가로 발견되고 있어 토성의 전체 길이는 약 3.7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한강변의 충적 대지상에 있는 순수한 평지 토성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을축년(1925) 대홍수로 서벽이 붕괴될 당시 청동제 자루솥을 비롯하여 금으로 만든 귀고리, 동노, 백동 거울, 금으로 만든 허리띠, 짙은 자줏빛을 띤 유리구슬, 4구 획 원문 수막새주1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남 위례성 주 2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6년 고적 제2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사적 제11호로 재지정되었다. 토지를 지속적으로 매입하여 사적지로 추가 편입하고 있는 것은 2001년 서울 풍납동 토성 보존 방침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토성의 외곽에는 서쪽 한강과 동쪽 한강 지류를 이용한 방어용 도랑못 주 3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시굴 조사는 1964년 서울대 김원용 선생이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당시 발굴된 유물은 풍납리식 민무늬토기라 명명된 경질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백제 토기류와 그물추, 기와, 쇳조각 등이었고, 제1주거층, 제2주거층, 을축년 이후의 퇴적층을 확인하였다. 이런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서울 풍납동 토성의 연대를 1세기경부터 백제 한성이 고구려 군에게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떠난 475년까지로 추정했다. 이후 1970~1980년대 강남 개발 과정에서 훼손이 거듭되던 중 1997년 1월 서울 풍납동 토성의 실측 작업을 진행하던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풍납동 231-3번지 아파트 신축 부지에서 백제 토기 다수가 출토된 사실을 신고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주 4는 즉시 현장 점검을 실시하여 공사를 중지시키고 긴급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그동안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 19기와 그보다 이른 시기의 3중 환호 등을 발굴한 결과 수막새 등의 기와 조각을 비롯한 각종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 발굴을 계기로 서울 풍납동 토성 안에 백제시대 문화층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파트 재개발을 허용하는 대신 백제 문화층을 보존하여 계승하자는 원칙이 세워졌으며, 현재 서울 풍납동 토성 내 중요 지역에 대한 토지 보상 및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 조사 결과 초기 백제시대 왕성의 증거물로 볼 수 있는 특수한 건물지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토성 내부 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경당 연립 재건축 부지에서는 동서 너비 16m, 남북 길이 18m 이상의 자 모양의 대형 건물지(44호)가 발견되었다. 북쪽 건물의 외곽은 자 모양의 도랑이 감싸고 있는데 너비 150cm, 깊이 120cm 정도로 일정하며 바닥에 23중의 대형 널돌주5이 깔려 있다. 이 건물은 내부와 외부를 도랑으로 차단하고, 도랑 바닥에 널돌과 정선된 숯을 깐 점, 화재로 폐기된 점, 유물이 거의 없는 점 등으로 보아 공공의 제의와 연관되어 있다. 이 대형 건물지 남쪽에는 9호, 101호 등의 구덩이가 있었다. 길이 13.25m, 폭 550㎝, 깊이 240㎝에 달하는 9호 구덩이에서는 수차례의 퇴적이 이루어지면서 인위적으로 파손시킨 굽다리접시 주 6, 삼족 기주 7, 뚜껑 등의 제기류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제사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大夫’와 ‘井’ 자가 새겨진 곧은 입항 아리와 12마리 분량의 말 머리뼈 등이 발견되었다. 44호 건물지 남쪽의 206호 유구는 신전 앞에 있는 왕실의 우물로 밝혀졌다. 약 10m 정도의 네모반듯한 구덩이를 깊이 3m 정도 파내고 내부를 점토와 사질토를 섞어 다시 메운 후 중앙에 깬돌과 강돌을 채워 넣은 원형의 적석 부를 두었는데, 바닥에는 4단으로 얼개를 만든 네모반듯한 판재 안에 220여 점의 토기를 층층하게 매납주8하였다. 토기는 호와 병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구멍의 어귀를 의도적으로 깨트린 상태였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것들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 토기의 일부를 깨부수는 행위는 고대 제사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이 우물 역시 제사를 지내고 버린 토기를 모아 매납한 용도로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 외의 다른 지방의 토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당시 백제의 영토 안에 있던 지역을 포괄한 것으로 국가적 차원의 중요한 제사를 지냈음을 짐작하게 한다. 왕성의 핵심 요소로는 국가 행정을 담당하기 위한 관청 건물지와 관료 집단의 주거 구역 등이 있다. 풍납동 197번지 일대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했는데, 지름 16m, 깊이 1.2m의 원형 구덩이 안에서 와당주9 30여 점을 비롯한 기와류가 5천 점 이상 매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당과 십각형 주춧돌 장식, 토관주10 등 다량의 건축 부재주11들이 한데 묶여 출토된 것으로 보아 기와를 얹은 건물이 붕괴되었거나 주변의 궁전과 관청 건물 등에서 나온 건축 폐자재를 버린 폐기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입구 부분이 유실되었지만 길이 21m, 너비 16.4m, 잔존 면적 약 344.4m2에 이르는 초대형 건물지도 이 구덩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 주변에서는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워 기와를 얹은 지상식 건물 터도 다수 발굴되어 관청 등 행정 시설이 밀집된 지역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밖에 서울 풍납동 토성의 가장 특징적인 유구로 대형 수혈 주 12 주거지를 꼽을 수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된 평면 6각형의 주거지는 초기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고위 지배 계층이 차지하였던 전형적인 형태의 주거지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는 남북으로 교차하는 도로도 발견되었다. 조사 구역 밖으로도 계속 연장되고 있는 남북 도로의 길이는 110m 정도로,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도로의 너비는 7.58m, 깊이 2030cm 정도로 도로 면의 기초를 굴착한 후 가운데 부분에 너비 4.55m 가량의 아주 작은 자갈을 렌즈 모양(중심부 두께 약 20cm 내외)으로 깔아서 길바닥을 조성하였다. 동서 도로의 윗면에는 22m 정도의 두께로 얇고 편평한 돌을 깔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궁성 내 중요 공간을 나누거나 관청과 같은 중요 시설을 감싸던 핵심 도로이거나 한강변에 인접해 있는 서쪽 성벽을 따라 조성된 물자의 운송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번지 일대의 조사에서는 기존의 동서 도로에 연결되는 구상 유구가 길바닥이 깎여 나가고 양옆의 도랑만 남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구상 유구를 따라 20여 기가 열을 맞춰 조성된 장방형 수혈이 발견되었는데, 궁전 외곽에 창고 구역으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서울 풍납동 토성은 관청 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고위 계층의 집단 거주지, 궁성 내 주요 공간과 시설을 분할한 잘 짜인 도로망 등을 갖추고 있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1997년 이후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궁전 및 제의 관련 건축물, 관청급 대형 건물들, 고위 관료의 주거지와 도로 등을 통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에 더해 1999년과 2011년 동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너비 43m, 높이 11m가 넘는 규모의 판축 토성으로 밝혀짐에 따라 서울 풍납동 토성이 위례성일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최근 토목공학자 등과 융합 연구를 진행한 결과 토성을 쌓는 데만 연인원 138만 명 이상의 노동력이<NAME>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도 제출되었다. 고대국가의 왕권이 확립되지 않고서는 추진할 수 없는 대역사로 당시의 인구 규모와 사회 구조 등을 고려할 때 볼 수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외곽에는 성벽을 방어하기 위한 도랑못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2015~2016년에 2011년에 실시했던 성벽 외곽 발굴 조사에서 외황으로 보이는 도랑이 3개 정도 발견되었다. 토성을 안팎으로 확장하여 여러 차례 증축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외측 성벽에 3개의 인공 도랑못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 서성 벽 구역은 2017년부터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하여 문이 있던 자리를 찾아냈다. 2020년에는 성벽의 평면을 조사하여 성벽을 쌓아 올리기 위해 설치한 나무 기둥 여러 단도 발견했다. 중심인 1토루주13 내에는 나무 기둥을 88~162cm 간격으로 박아 시설하였으며 총 6단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축조 방법과 공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2토루와 3토루 내부, 2토루와 3토루 경계에서도 나무 기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무 기둥들이 포함된 펄층 안에서 1999년 발굴된 부엽층주14은 나무껍질이나 나뭇잎 따위의 식물 유기체를 10cm 내외의 두께마다 흙과 교대로 깐 것으로 백제 성곽 축조에 이용된 대표적인 토목 기술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한강을 끼고 발달한 경제 도시인데, 이곳에서 당시 활발한 대외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이 경당 지구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 30여 점 외에 다량의 백제 큰독이 똑바로 주저앉아 출토된 것을 보면 196호 수혈은 저장용 항아리를 보관한 시설로 추정되는데, 길이 11m, 너비 5.5m 가량의 판재 창고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자는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을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사여 받은 위세품들을 담았던 용기로 보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는<NAME>제 자루솥 등 중국과의 교역을 암시하는 유물뿐만 아니라 왜계, 가야계 토기도 나왔다. 낙랑계 청동 포수, 부여계 은제 귀고리 장식과 점 뼈, 북위 계 연꽃무늬 기와와 월주요 주 15 계통의 청자 완 등 외래계 유물이 197번지 일대 발굴 조사를 통해 속속들이 확인됨으로써 당시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북방과 남방을 넘나드는 활발한 대외 교류 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국내외 유물들의 연대를 살펴봤을 때, 서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한성 멸망 기인 5세기 후반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 등 과학적 절대연대 주 16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백제 한성 도읍기의 첫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인정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왕성 가능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석촌동 · 방이동의 왕릉급 고분군도 있다. 이 밖에 삼국시대 도성의 특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평지에 축조된 왕성을 방어하기 위한 배후 산성의 존재인데, 문헌에 명시된 아단성(아차산성)과 사성(삼성동 토성) 외에 풍납동 토성 동쪽과 남쪽으로도 전략적 요새로서의 이성산성을 쌓거나 남한산에 목책과 같은 방어 시설을 설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백제에서는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알려진 하남 위례성의 축조 이후 지속적인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위해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몽촌 토성을 축조했는데, 이는 고구려와 낙랑, 말갈 등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확대 정비된 도성이 한성으로 이해되며, 이것이 고구려에 함락되는 개로왕 대까지 이어져 북성과 남성의 구조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여기서 말하는 북성이다. 결론적으로 서울 풍납동 토성은 하남 위례성으로 존재했지만 '몽촌 토성'이 추가로 축조되면서 한성 백제시대 도성의 구조는 북성인 서울 풍납동 토성과 남성인 몽촌 토성의 양궁성 체제로 발전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 風納洞 土城) ### 내용: 서울 송파구 풍납 1동과 2동에 걸쳐 있는 서울 풍납동 토성(사적 제11호)은 한강에 접해 있는 남북 방향의 장타원형으로, 현재 북벽과 동벽, 남벽 등이 남아 있고 서벽은 서남부를 제외한 대부분 유실된 상태다. 북벽 446m 구간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복원되었으며, 동벽은 북쪽 일부 구간이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 약 2.1km 정도가 남아 있다. 최근 조사에서 유실된 서성 벽의 흔적들이 추가로 발견되고 있어 토성의 전체 길이는 약 3.7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한강변의 충적 대지상에 있는 순수한 평지 토성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을축년(1925) 대홍수로 서벽이 붕괴될 당시 청동제 자루솥을 비롯하여 금으로 만든 귀고리, 동노, 백동 거울, 금으로 만든 허리띠, 짙은 자줏빛을 띤 유리구슬, 4구 획 원문 수막새주1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남 위례성 주 2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6년 고적 제2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사적 제11호로 재지정되었다. 토지를 지속적으로 매입하여 사적지로 추가 편입하고 있는 것은 2001년 서울 풍납동 토성 보존 방침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토성의 외곽에는 서쪽 한강과 동쪽 한강 지류를 이용한 방어용 도랑못 주 3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시굴 조사는 1964년 서울대 김원용 선생이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당시 발굴된 유물은 풍납리식 민무늬토기라 명명된 경질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백제 토기류와 그물추, 기와, 쇳조각 등이었고, 제1주거층, 제2주거층, 을축년 이후의 퇴적층을 확인하였다. 이런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서울 풍납동 토성의 연대를 1세기경부터 백제 한성이 고구려 군에게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떠난 475년까지로 추정했다. 이후 1970~1980년대 강남 개발 과정에서 훼손이 거듭되던 중 1997년 1월 서울 풍납동 토성의 실측 작업을 진행하던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풍납동 231-3번지 아파트 신축 부지에서 백제 토기 다수가 출토된 사실을 신고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주 4는 즉시 현장 점검을 실시하여 공사를 중지시키고 긴급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그동안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 19기와 그보다 이른 시기의 3중 환호 등을 발굴한 결과 수막새 등의 기와 조각을 비롯한 각종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 발굴을 계기로 서울 풍납동 토성 안에 백제시대 문화층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파트 재개발을 허용하는 대신 백제 문화층을 보존하여 계승하자는 원칙이 세워졌으며, 현재 서울 풍납동 토성 내 중요 지역에 대한 토지 보상 및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 조사 결과 초기 백제시대 왕성의 증거물로 볼 수 있는 특수한 건물지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토성 내부 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경당 연립 재건축 부지에서는 동서 너비 16m, 남북 길이 18m 이상의 자 모양의 대형 건물지(44호)가 발견되었다. 북쪽 건물의 외곽은 자 모양의 도랑이 감싸고 있는데 너비 150cm, 깊이 120cm 정도로 일정하며 바닥에 23중의 대형 널돌주5이 깔려 있다. 이 건물은 내부와 외부를 도랑으로 차단하고, 도랑 바닥에 널돌과 정선된 숯을 깐 점, 화재로 폐기된 점, 유물이 거의 없는 점 등으로 보아 공공의 제의와 연관되어 있다. 이 대형 건물지 남쪽에는 9호, 101호 등의 구덩이가 있었다. 길이 13.25m, 폭 550㎝, 깊이 240㎝에 달하는 9호 구덩이에서는 수차례의 퇴적이 이루어지면서 인위적으로 파손시킨 굽다리접시 주 6, 삼족 기주 7, 뚜껑 등의 제기류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제사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大夫’와 ‘井’ 자가 새겨진 곧은 입항 아리와 12마리 분량의 말 머리뼈 등이 발견되었다. 44호 건물지 남쪽의 206호 유구는 신전 앞에 있는 왕실의 우물로 밝혀졌다. 약 10m 정도의 네모반듯한 구덩이를 깊이 3m 정도 파내고 내부를 점토와 사질토를 섞어 다시 메운 후 중앙에 깬돌과 강돌을 채워 넣은 원형의 적석 부를 두었는데, 바닥에는 4단으로 얼개를 만든 네모반듯한 판재 안에 220여 점의 토기를 층층하게 매납주8하였다. 토기는 호와 병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구멍의 어귀를 의도적으로 깨트린 상태였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것들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 토기의 일부를 깨부수는 행위는 고대 제사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이 우물 역시 제사를 지내고 버린 토기를 모아 매납한 용도로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 외의 다른 지방의 토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당시 백제의 영토 안에 있던 지역을 포괄한 것으로 국가적 차원의 중요한 제사를 지냈음을 짐작하게 한다. 왕성의 핵심 요소로는 국가 행정을 담당하기 위한 관청 건물지와 관료 집단의 주거 구역 등이 있다. 풍납동 197번지 일대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했는데, 지름 16m, 깊이 1.2m의 원형 구덩이 안에서 와당주9 30여 점을 비롯한 기와류가 5천 점 이상 매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당과 십각형 주춧돌 장식, 토관주10 등 다량의 건축 부재주11들이 한데 묶여 출토된 것으로 보아 기와를 얹은 건물이 붕괴되었거나 주변의 궁전과 관청 건물 등에서 나온 건축 폐자재를 버린 폐기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입구 부분이 유실되었지만 길이 21m, 너비 16.4m, 잔존 면적 약 344.4m2에 이르는 초대형 건물지도 이 구덩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 주변에서는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워 기와를 얹은 지상식 건물 터도 다수 발굴되어 관청 등 행정 시설이 밀집된 지역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밖에 서울 풍납동 토성의 가장 특징적인 유구로 대형 수혈 주 12 주거지를 꼽을 수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된 평면 6각형의 주거지는 초기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고위 지배 계층이 차지하였던 전형적인 형태의 주거지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는 남북으로 교차하는 도로도 발견되었다. 조사 구역 밖으로도 계속 연장되고 있는 남북 도로의 길이는 110m 정도로,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도로의 너비는 7.58m, 깊이 2030cm 정도로 도로 면의 기초를 굴착한 후 가운데 부분에 너비 4.55m 가량의 아주 작은 자갈을 렌즈 모양(중심부 두께 약 20cm 내외)으로 깔아서 길바닥을 조성하였다. 동서 도로의 윗면에는 22m 정도의 두께로 얇고 편평한 돌을 깔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궁성 내 중요 공간을 나누거나 관청과 같은 중요 시설을 감싸던 핵심 도로이거나 한강변에 인접해 있는 서쪽 성벽을 따라 조성된 물자의 운송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번지 일대의 조사에서는 기존의 동서 도로에 연결되는 구상 유구가 길바닥이 깎여 나가고 양옆의 도랑만 남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구상 유구를 따라 20여 기가 열을 맞춰 조성된 장방형 수혈이 발견되었는데, 궁전 외곽에 창고 구역으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서울 풍납동 토성은 관청 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고위 계층의 집단 거주지, 궁성 내 주요 공간과 시설을 분할한 잘 짜인 도로망 등을 갖추고 있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1997년 이후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궁전 및 제의 관련 건축물, 관청급 대형 건물들, 고위 관료의 주거지와 도로 등을 통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에 더해 1999년과 2011년 동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너비 43m, 높이 11m가 넘는 규모의 판축 토성으로 밝혀짐에 따라 서울 풍납동 토성이 위례성일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최근 토목공학자 등과 융합 연구를 진행한 결과 토성을 쌓는 데만 연인원 138만 명 이상의 노동력이<NAME>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도 제출되었다. 고대국가의 왕권이 확립되지 않고서는 추진할 수 없는 대역사로 당시의 인구 규모와 사회 구조 등을 고려할 때 볼 수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외곽에는 성벽을 방어하기 위한 도랑못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2015~2016년에 2011년에 실시했던 성벽 외곽 발굴 조사에서 외황으로 보이는 도랑이 3개 정도 발견되었다. 토성을 안팎으로 확장하여 여러 차례 증축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외측 성벽에 3개의 인공 도랑못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 서성 벽 구역은 2017년부터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하여 문이 있던 자리를 찾아냈다. 2020년에는 성벽의 평면을 조사하여 성벽을 쌓아 올리기 위해 설치한 나무 기둥 여러 단도 발견했다. 중심인 1토루주13 내에는 나무 기둥을 88~162cm 간격으로 박아 시설하였으며 총 6단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축조 방법과 공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2토루와 3토루 내부, 2토루와 3토루 경계에서도 나무 기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무 기둥들이 포함된 펄층 안에서 1999년 발굴된 부엽층주14은 나무껍질이나 나뭇잎 따위의 식물 유기체를 10cm 내외의 두께마다 흙과 교대로 깐 것으로 백제 성곽 축조에 이용된 대표적인 토목 기술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한강을 끼고 발달한 경제 도시인데, 이곳에서 당시 활발한 대외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이 경당 지구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 30여 점 외에 다량의 백제 큰독이 똑바로 주저앉아 출토된 것을 보면 196호 수혈은 저장용 항아리를 보관한 시설로 추정되는데, 길이 11m, 너비 5.5m 가량의 판재 창고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자는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을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사여 받은 위세품들을 담았던 용기로 보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는<NAME>제 자루솥 등 중국과의 교역을 암시하는 유물뿐만 아니라 왜계, 가야계 토기도 나왔다. 낙랑계 청동 포수, 부여계 은제 귀고리 장식과 점 뼈, 북위 계 연꽃무늬 기와와 월주요 주 15 계통의 청자 완 등 외래계 유물이 197번지 일대 발굴 조사를 통해 속속들이 확인됨으로써 당시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북방과 남방을 넘나드는 활발한 대외 교류 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국내외 유물들의 연대를 살펴봤을 때, 서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한성 멸망 기인 5세기 후반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 등 과학적 절대연대 주 16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백제 한성 도읍기의 첫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인정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왕성 가능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석촌동 · 방이동의 왕릉급 고분군도 있다. 이 밖에 삼국시대 도성의 특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평지에 축조된 왕성을 방어하기 위한 배후 산성의 존재인데, 문헌에 명시된 아단성(아차산성)과 사성(삼성동 토성) 외에 풍납동 토성 동쪽과 남쪽으로도 전략적 요새로서의 이성산성을 쌓거나 남한산에 목책과 같은 방어 시설을 설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백제에서는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알려진 하남 위례성의 축조 이후 지속적인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위해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몽촌 토성을 축조했는데, 이는 고구려와 낙랑, 말갈 등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확대 정비된 도성이 한성으로 이해되며, 이것이 고구려에 함락되는 개로왕 대까지 이어져 북성과 남성의 구조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여기서 말하는 북성이다. 결론적으로 서울 풍납동 토성은 하남 위례성으로 존재했지만 '몽촌 토성'이 추가로 축조되면서 한성 백제시대 도성의 구조는 북성인 서울 풍납동 토성과 남성인 몽촌 토성의 양궁성 체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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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0382.txt
달성 성하리 고분군 (達城 城下里 古墳群)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윤용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742
CC BY
209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면의 북서쪽과 북쪽·서쪽에 대소 집단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 고분의 분포상태이다. 그중 가장 큰 집단 묘를 형성한 지역은 북동쪽의 쌍계리 뒷산의 고분군이다. 특히, 높이 5m에 달하는 거대한 장방형 구덩식 돌방[]으로 내부를 장식한 고분은 높이가 30m가 넘고 바닥 지름이 30m가 넘는 것으로, 이곳에는 수백 기의 고분이 있다. 정식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러 종류의 토기와 철제 무기류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고 하나 알 수 없다. 또 이 일대에서는 오리형 토기[]와 수레형 잔[] 등 이형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음으로 면의 북서쪽 구릉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집단 묘가 면의 북서쪽 구릉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30여 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0여 기만이 남아 있지만 모두 도굴되어 없어졌다. 또 면의 서쪽인 성하리는 낙동강변에 있는 구릉에 고분군을 형성한 곳이다. 지금은 대구와 마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상의 휴게소로 만들어진 구릉이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3, 4기의 큰 고분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봉토가 유실된 돌널무덤[]만 발견될 뿐이다. 이 고분의 하나는 1917년에 도굴된 것이다. 내부 구조는 널길[]이 있는 돌방이었다. 돌방과 널길은 할석으로 옆벽을 쌓고 천장은 큼직한 판석 3개를 걸쳐 돌방과 널길의 일부를 덮었다. 돌방 옆벽은 아래쪽을 수직으로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어져 좁아지게 만들었다. 바닥면에서 널방[]은 길이 3.2m, 너비 2.3m, 높이 1.7m이고, 널길(길이 1.2m, 너비 0.7m, 높이 1.7m)은 길이 1.2m, 너비 0.7m, 높이 1.7m이다. 조사 당시에 이미 도굴된 고분이라 유물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조사자들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달성 성하리 고분군 (達城 城下里 古墳群) ### 내용: 면의 북서쪽과 북쪽·서쪽에 대소 집단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 고분의 분포상태이다. 그중 가장 큰 집단 묘를 형성한 지역은 북동쪽의 쌍계리 뒷산의 고분군이다. 특히, 높이 5m에 달하는 거대한 장방형 구덩식 돌방[]으로 내부를 장식한 고분은 높이가 30m가 넘고 바닥 지름이 30m가 넘는 것으로, 이곳에는 수백 기의 고분이 있다. 정식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러 종류의 토기와 철제 무기류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고 하나 알 수 없다. 또 이 일대에서는 오리형 토기[]와 수레형 잔[] 등 이형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음으로 면의 북서쪽 구릉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집단 묘가 면의 북서쪽 구릉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30여 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0여 기만이 남아 있지만 모두 도굴되어 없어졌다. 또 면의 서쪽인 성하리는 낙동강변에 있는 구릉에 고분군을 형성한 곳이다. 지금은 대구와 마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상의 휴게소로 만들어진 구릉이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3, 4기의 큰 고분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봉토가 유실된 돌널무덤[]만 발견될 뿐이다. 이 고분의 하나는 1917년에 도굴된 것이다. 내부 구조는 널길[]이 있는 돌방이었다. 돌방과 널길은 할석으로 옆벽을 쌓고 천장은 큼직한 판석 3개를 걸쳐 돌방과 널길의 일부를 덮었다. 돌방 옆벽은 아래쪽을 수직으로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어져 좁아지게 만들었다. 바닥면에서 널방[]은 길이 3.2m, 너비 2.3m, 높이 1.7m이고, 널길(길이 1.2m, 너비 0.7m, 높이 1.7m)은 길이 1.2m, 너비 0.7m, 높이 1.7m이다. 조사 당시에 이미 도굴된 고분이라 유물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조사자들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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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24668.txt
안경창 (安景昌)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쾌정"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4508
CC BY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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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순흥이다. 자흥은 자는 자흥이다. 경기도 여흥에서 출생.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안의 순, 아버지는 안예남, 어머니는 이 천룡의 딸, 처는<NAME>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23세로 정묘 식년 시에 9명을 선발한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 내의로 지냈으며 벼슬은 통정대부였다. 황해도 지방에서 질병이 크게 번지자 효종은 내의원에서 약재를 꺼내어 치료하게 했으나, 많은 사람을 약물로 치료하기 어려우니 치료법과 약물을 널리 알리는 것이 옳다는 진언을 들었다. 옛 벽 온 방들을 연구하여 간략한 책으로 편찬하게 한 이는 안경창 당시 어의였다.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해 한 책이 벽온신방 1책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안경창 (安景昌) ### 내용: 본관은 순흥이다. 자흥은 자는 자흥이다. 경기도 여흥에서 출생.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안의 순, 아버지는 안예남, 어머니는 이 천룡의 딸, 처는<NAME>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23세로 정묘 식년 시에 9명을 선발한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 내의로 지냈으며 벼슬은 통정대부였다. 황해도 지방에서 질병이 크게 번지자 효종은 내의원에서 약재를 꺼내어 치료하게 했으나, 많은 사람을 약물로 치료하기 어려우니 치료법과 약물을 널리 알리는 것이 옳다는 진언을 들었다. 옛 벽 온 방들을 연구하여 간략한 책으로 편찬하게 한 이는 안경창 당시 어의였다.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해 한 책이 벽온신방 1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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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8708.txt
부산 덕천동 고분군 (釜山 德川洞 古墳群)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228
CC BY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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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동안과 가까운 표고 35∼50m 정도의 낮은 구릉상에 형성된 고분군이다. 1980년 이곳에 대규모 주택단지 조성 공사가 진행되면서 소멸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구제발굴조사는 1981년 1월부터 4월까지 부산 시립 박물관이 주관하였다. 발굴조사는 A ∼ E 지구의 5개 구역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C ∼ E의 3지구에서만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가 종료된 후 택지조성이 이루어지면서 이 유적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발굴조사를 한 결과, C 지구에서 29기, D 지구에서 22기, E 지구에서 18기의 분묘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의 특징은 평면 플랜이 장방형인 이른바 수혈계 앞트기식 돌방무덤[] 일색인 것으로 보이는데, D 지구의 구덩식 돌방무덤[] 9기를 제외하고는 전부 앞트기식 돌방무덤[]이었다. 수혈계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묘광을 깊게 파서 양장 벽과 단벽을 할석으로 쌓아 올리고 뚜껑돌을 덮었으며, 반지 상식 돌방무덤은 지표면에 드러나게 축조된 반지 상식 돌방이다. 입구는 바깥에서 할석으로 쌓아 올려 폐쇄하고, 수직으로 축조한 오벽은 수직으로, 양장 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기울게 축조한 돌방 벽이다. 또 이들 중 비교적 큰 돌방무덤에는 원형의 호석을 둔 경우도 있다. 바닥은 점토를 깔아 다진 것도 있지만, 거의 전면에 소형 할석을 깔아 시상을 마련한 것이 많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시상을 추가 설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추가장의 횟수가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C 지구 제20호 분은 3차에 걸쳐 부석 시상이 추가 설치된 것으로 볼 때 적어도 3회 이상 추가장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또한 이 유적의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대부분에 추가장이 적어도 1회 이상은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유적에 추가장이 행해졌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C 지구 제20호 분, E 지구 제10호 분과 제16호 분과같이 묘실의 장 측이 추가로 확장된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있다. 이런 돌방무덤의 주위에서는 제사 유구의 한 형태로 생각되는 유구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C 지구 4·15·16·17호 분 주변과 같이 작은 괴석을 원형으로 둘러쌓은 석조 시설물이 대부분이지만, A 지구 24호 분과같이 항아리를 묻어놓은 석조 시설물도 있었다. 또 C 지구에서는 소형 돌방 2기가 조사되었는데,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배묘로 추정된다. 한편, D 지구에서 발굴된 9기의 구덩식 돌방은 전대의 전형적인 구덩식 돌방무덤의 묘제가 아니라, 이 지구의 앞트기식 돌방무덤과 일정한 연관을 가진 배묘 혹은 부속시설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성에 빈약한 출토유물들이다. 토기와 철기로 구분된다. 토기류는 굽다리접시·대부장경호·유대완·짧은목항아리[]·완·적갈색연질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자·촉·도끼·낫·철모와 같은 철기류도 있다. 그 밖에도 금동제<NAME> 이식과 방추차 같은 장신구가 소수 나왔다. C 지구 21호 분에서는 청동방울[]도 나왔다. 이 유적에서 가장 표식적인 유물은 단 각고배와 부가 구연의 긴 목 항아리이다. 이 유적의 연대는 유물을 볼 때 대체로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가 이 무렵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고분군 중의 하나가 이 유적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부산 덕천동 고분군 (釜山 德川洞 古墳群) ### 내용: 낙동강의 동안과 가까운 표고 35∼50m 정도의 낮은 구릉상에 형성된 고분군이다. 1980년 이곳에 대규모 주택단지 조성 공사가 진행되면서 소멸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구제발굴조사는 1981년 1월부터 4월까지 부산 시립 박물관이 주관하였다. 발굴조사는 A ∼ E 지구의 5개 구역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C ∼ E의 3지구에서만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가 종료된 후 택지조성이 이루어지면서 이 유적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발굴조사를 한 결과, C 지구에서 29기, D 지구에서 22기, E 지구에서 18기의 분묘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의 특징은 평면 플랜이 장방형인 이른바 수혈계 앞트기식 돌방무덤[] 일색인 것으로 보이는데, D 지구의 구덩식 돌방무덤[] 9기를 제외하고는 전부 앞트기식 돌방무덤[]이었다. 수혈계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묘광을 깊게 파서 양장 벽과 단벽을 할석으로 쌓아 올리고 뚜껑돌을 덮었으며, 반지 상식 돌방무덤은 지표면에 드러나게 축조된 반지 상식 돌방이다. 입구는 바깥에서 할석으로 쌓아 올려 폐쇄하고, 수직으로 축조한 오벽은 수직으로, 양장 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기울게 축조한 돌방 벽이다. 또 이들 중 비교적 큰 돌방무덤에는 원형의 호석을 둔 경우도 있다. 바닥은 점토를 깔아 다진 것도 있지만, 거의 전면에 소형 할석을 깔아 시상을 마련한 것이 많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시상을 추가 설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추가장의 횟수가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C 지구 제20호 분은 3차에 걸쳐 부석 시상이 추가 설치된 것으로 볼 때 적어도 3회 이상 추가장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또한 이 유적의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대부분에 추가장이 적어도 1회 이상은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유적에 추가장이 행해졌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C 지구 제20호 분, E 지구 제10호 분과 제16호 분과같이 묘실의 장 측이 추가로 확장된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있다. 이런 돌방무덤의 주위에서는 제사 유구의 한 형태로 생각되는 유구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C 지구 4·15·16·17호 분 주변과 같이 작은 괴석을 원형으로 둘러쌓은 석조 시설물이 대부분이지만, A 지구 24호 분과같이 항아리를 묻어놓은 석조 시설물도 있었다. 또 C 지구에서는 소형 돌방 2기가 조사되었는데,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배묘로 추정된다. 한편, D 지구에서 발굴된 9기의 구덩식 돌방은 전대의 전형적인 구덩식 돌방무덤의 묘제가 아니라, 이 지구의 앞트기식 돌방무덤과 일정한 연관을 가진 배묘 혹은 부속시설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성에 빈약한 출토유물들이다. 토기와 철기로 구분된다. 토기류는 굽다리접시·대부장경호·유대완·짧은목항아리[]·완·적갈색연질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자·촉·도끼·낫·철모와 같은 철기류도 있다. 그 밖에도 금동제<NAME> 이식과 방추차 같은 장신구가 소수 나왔다. C 지구 21호 분에서는 청동방울[]도 나왔다. 이 유적에서 가장 표식적인 유물은 단 각고배와 부가 구연의 긴 목 항아리이다. 이 유적의 연대는 유물을 볼 때 대체로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가 이 무렵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고분군 중의 하나가 이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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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4585.txt
모잠비크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상식"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545
CC BY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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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동남부 인도양 연안에 위치한 모잠비크 공화국은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Mozambique이며, 해안선 길이는 2470km에 이른다. 면적은 79만 9380㎢, 인구는 2530만 3113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마푸토(Maputo)이다. 인구 가운데 약 40가 마쿠알롬웨족(Makualomwe)이며, 기타 통가족(Tonga) · 초피족(Chopi) 등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유럽인도 1% 정도 거주하고 있다. 포르투갈어와 스와힐리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종교는 국민의 30%가 기독교, 10%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나머지 인구는 토착신앙을 믿는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성 기후로 석탄 · 보크사이트 · 다이아몬드 · 금 등의 주요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2014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586달러이고, 국민 총생산은 159억 달러이다. 현재 대통령 중심제 공화제와 단원제(250석) 의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임기가 5년인 대통령 중심제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다. 주요 정당은 모잠비크 해방 전선((FRELIMO), 민족저항운동(RENAMO), 모잠비크 자유민주당(PALMO) 등 21개 정당이다. 모잠비크 연안부는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쿠 다가마의 내항으로 1498년 아랍인과의 접촉이 처음 시작되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505년 이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19세기 말에는 내륙부에도 포르투갈의 특허회사가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때 자치식민지였으나 1911년에는 포르투갈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모잠비크 해방 전선(FRELIMO)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날로 격렬해져 1975년 6월 25일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였다. 1972년 2월 헌법을 제정한 뒤 1990년 11월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과거 집권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했으나, 현재는 다당제적 정치형태를 채택하고 있으며 공산국가와 유산한 정치체제를 갖고 있다. 모잠비크는 1975년 유엔과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여 우경 중립의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나라는 모잠비크와 1993년 8월 11일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2008년 현재 주 짐바브웨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교 이전인 1977년 유엔이 주관한 짐바브웨 및 나미비아 인민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옵서버 자격으로 모잠비크를 방문한 적이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우리나라의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정부의 비동맹 · 제삼 세계에 대한 외교 강화 방침에 힘입어 모잠비크 측에서 1985년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총회에 재무 장관 일행이 참석하였고, 이어서 1986년 아시아 국가올림픽위원회(ANOC) 서울총회에 참석차 모잠비크 대표가 방한한 바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모잠비크 수출액은 6761만 달러이고, 주 종목은 합성수지 · 승용차 · 의류 등이며, 수입액은 1176만 달러로 대부분 유연탄 · 구리 · 잎담배 등이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에는 13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모잠비크에는 49명의 우리 교민과 52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모잠비크가 독립한 1975년 6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상주 공관을 설치하였으나 1995년 공관을 철수하고, 2007년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북한은 1978년 12월 모잠비크와 경제 기술 협정을 맺은 이후 1978년 5월 무역 협정, 1980년 9월 항공운수 협력 협정, 1981년 11월 군사협력 협정, 1984년 5월에는 체신 협조 협정 등을 체결한 바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모잠비크 ### 내용: 아프리카의 동남부 인도양 연안에 위치한 모잠비크 공화국은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Mozambique이며, 해안선 길이는 2470km에 이른다. 면적은 79만 9380㎢, 인구는 2530만 3113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마푸토(Maputo)이다. 인구 가운데 약 40가 마쿠알롬웨족(Makualomwe)이며, 기타 통가족(Tonga) · 초피족(Chopi) 등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유럽인도 1% 정도 거주하고 있다. 포르투갈어와 스와힐리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종교는 국민의 30%가 기독교, 10%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나머지 인구는 토착신앙을 믿는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성 기후로 석탄 · 보크사이트 · 다이아몬드 · 금 등의 주요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2014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586달러이고, 국민 총생산은 159억 달러이다. 현재 대통령 중심제 공화제와 단원제(250석) 의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임기가 5년인 대통령 중심제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다. 주요 정당은 모잠비크 해방 전선((FRELIMO), 민족저항운동(RENAMO), 모잠비크 자유민주당(PALMO) 등 21개 정당이다. 모잠비크 연안부는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쿠 다가마의 내항으로 1498년 아랍인과의 접촉이 처음 시작되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505년 이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19세기 말에는 내륙부에도 포르투갈의 특허회사가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때 자치식민지였으나 1911년에는 포르투갈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모잠비크 해방 전선(FRELIMO)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날로 격렬해져 1975년 6월 25일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였다. 1972년 2월 헌법을 제정한 뒤 1990년 11월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과거 집권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했으나, 현재는 다당제적 정치형태를 채택하고 있으며 공산국가와 유산한 정치체제를 갖고 있다. 모잠비크는 1975년 유엔과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여 우경 중립의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나라는 모잠비크와 1993년 8월 11일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2008년 현재 주 짐바브웨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교 이전인 1977년 유엔이 주관한 짐바브웨 및 나미비아 인민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옵서버 자격으로 모잠비크를 방문한 적이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우리나라의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정부의 비동맹 · 제삼 세계에 대한 외교 강화 방침에 힘입어 모잠비크 측에서 1985년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총회에 재무 장관 일행이 참석하였고, 이어서 1986년 아시아 국가올림픽위원회(ANOC) 서울총회에 참석차 모잠비크 대표가 방한한 바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모잠비크 수출액은 6761만 달러이고, 주 종목은 합성수지 · 승용차 · 의류 등이며, 수입액은 1176만 달러로 대부분 유연탄 · 구리 · 잎담배 등이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에는 13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모잠비크에는 49명의 우리 교민과 52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모잠비크가 독립한 1975년 6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상주 공관을 설치하였으나 1995년 공관을 철수하고, 2007년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북한은 1978년 12월 모잠비크와 경제 기술 협정을 맺은 이후 1978년 5월 무역 협정, 1980년 9월 항공운수 협력 협정, 1981년 11월 군사협력 협정, 1984년 5월에는 체신 협조 협정 등을 체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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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50098.txt
한옥보존지구 (韓屋保存地區)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578
CC BY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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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보존지구는 이러한 한옥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곳으로, 주요 구조부가 한국 고유의 전통 목구조 방식으로 건축된 건축물, 한식 기와 등 자연재료로 마감된 전통적인 외관을 갖춘 건축물 및 그 부속시설을 말한다. 한옥 보존지구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민속마을 등으로 지정된 전통한옥마을 또한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옥 보존지구라는 용어는 역사경관의 관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으나 현재 문화재보호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일상적인 한옥주거지를 지칭한다. 도시의 한옥 보존지구의 한옥은 조선시대와 근대 초기에 지어진 전통한옥과 근대에 지어진 도시한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와 근대 초기에 건축된 전통한옥 중에는 학술적,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한옥도 있다.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와 사당의 영역이 구분되어 있으며, 원형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변경만 허용하고 있다. 한편 192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에 집장 수들은 서울·대구·전주 등의 도시지역에 도시한옥을 건설하였다. 도심의 대형 필지가 중소 규모의 필지로 분할되고, 그 위에 근대적 성격을 갖는 한옥주거지가 조성되었다. 건설회사나 집장사들에 의해 대규모로 건설되기도 했는데, 서울의 보문동이나 전주의 교동 같은 도시 주변의 근대 주거지였다. 전통한옥의 연장선상에서 평면이 개선되고, 유리와 함석 등의 새로운 재료가 사용되었다. 표준화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분양 방식으로 근대도시주택을 공급하였다. 이런 도시한옥의 역사도시 경관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2000년대에는 지방단치단체와 지역주민들이 지역 단위의 한옥 보존에 힘을 모으게 되었다. 한옥 보존지구로는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과 전주 한옥마을이 유명하다. 서울의 북촌은 조선시대부터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였으며, 근대에 형성된 도시 한옥주거지와 더불어 1960년대까지도 한옥주거지로서의 역사경관이 잘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에 강남 개발과 함께 경기고등학교 등 명문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주거지로서의 위상이 격하되기 시작했으며, 휘문고등학교가 이전한 자리에는 15층 규모의 현대사옥이 들어서고 창덕여자고등학교가 이전한 자리에는 대규모의 헌법재판소가 들어서는 등 한옥 경관이 크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한옥 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옥 보존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6년에 민속 경관지역으로 지정된 북촌 지역을 시작으로 1983년에 제4종 집단 미관지구로 지정하면서부터이다. 1985년 북촌 지역의 전체 한옥의 수는 1,518동으로 전체 건물의 55.1%에 달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1991년에는 1층으로 제한하던 주택의 건물 높이를 10미터로, 1994년에는 16미터 5층 이하로 완화하였다. 그 결과 한옥은 빠른 속도로 멸실되었고, 그 자리에 다세대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북촌 전체 건물 중 한옥이 46%에 불과하게 된 것은, 1990년에는 1,242동, 1999년에는 1,056동으로 한옥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1999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을 중심으로 북촌 가꾸기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는데, 1990년대 이후 한옥마을로서의 정체성이 위기를 맞게 되자 주민조직인 (사) 종로 북촌 가꾸기 회의 요구로 이루어졌다. 북촌 가꾸기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1년부터 5년 동안, 12채의 한옥이 처음 5년 동안 멸실되었을 뿐 대부분 보존되었다. 북촌한옥주거지의 역사경관과 한옥을 보존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한옥 등록제를 시행하고, 한옥의 외관을 보존하되 그 내부를 현대적인 생활에 맞도록 고칠 수 있도록 하였고, 한옥 수선비의 일부를 주민들에게 지원하였다. 2010년 현재까지 340여 채의 한옥이 수선비를 지원받아 새롭게 태어났다. 한옥 보존지구로 지정된 곳은 서울의 역사경관을 잘 보존한 한옥 보존지구이다. 가회동 31번지와 33번지와 가회동 11번지 등의 대표적인 한옥밀집 지역은 아름다운 한옥 골목길로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현재 북촌 한옥마을은 1종 지구단위계획이 수립되어, 이 계획과 지침에 따라 한옥 보존지구로서 보존되고 있다. 북촌 지역은 역사 문화미관지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2개의 행정동(가회동·삼청동)과 10개의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복궁과 창덕궁, 율곡로와 삼청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2010년 현재 1,000여 채의 한옥이 보존되어 있다. 한국의 주택은 지난 20세기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960년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한옥에서 양옥으로, 다시 도시로의 인구 집중과 고 밀화로 인해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옥 보존지구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도시의 골목과 삶의 기억이 사라지고 서구식 아파트로 획일화된 것은, 기성주거지가 단지 규모로 재개발되었기 때문이다. 한옥은 주거 다양성의 측면에서 우리 주거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한옥 보존지구는 도시의 일상성과 장소성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박물관과도 같은 문화유산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한옥보존지구 (韓屋保存地區) ### 내용: 한옥 보존지구는 이러한 한옥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곳으로, 주요 구조부가 한국 고유의 전통 목구조 방식으로 건축된 건축물, 한식 기와 등 자연재료로 마감된 전통적인 외관을 갖춘 건축물 및 그 부속시설을 말한다. 한옥 보존지구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민속마을 등으로 지정된 전통한옥마을 또한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옥 보존지구라는 용어는 역사경관의 관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으나 현재 문화재보호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일상적인 한옥주거지를 지칭한다. 도시의 한옥 보존지구의 한옥은 조선시대와 근대 초기에 지어진 전통한옥과 근대에 지어진 도시한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와 근대 초기에 건축된 전통한옥 중에는 학술적,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한옥도 있다.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와 사당의 영역이 구분되어 있으며, 원형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변경만 허용하고 있다. 한편 192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에 집장 수들은 서울·대구·전주 등의 도시지역에 도시한옥을 건설하였다. 도심의 대형 필지가 중소 규모의 필지로 분할되고, 그 위에 근대적 성격을 갖는 한옥주거지가 조성되었다. 건설회사나 집장사들에 의해 대규모로 건설되기도 했는데, 서울의 보문동이나 전주의 교동 같은 도시 주변의 근대 주거지였다. 전통한옥의 연장선상에서 평면이 개선되고, 유리와 함석 등의 새로운 재료가 사용되었다. 표준화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분양 방식으로 근대도시주택을 공급하였다. 이런 도시한옥의 역사도시 경관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2000년대에는 지방단치단체와 지역주민들이 지역 단위의 한옥 보존에 힘을 모으게 되었다. 한옥 보존지구로는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과 전주 한옥마을이 유명하다. 서울의 북촌은 조선시대부터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였으며, 근대에 형성된 도시 한옥주거지와 더불어 1960년대까지도 한옥주거지로서의 역사경관이 잘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에 강남 개발과 함께 경기고등학교 등 명문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주거지로서의 위상이 격하되기 시작했으며, 휘문고등학교가 이전한 자리에는 15층 규모의 현대사옥이 들어서고 창덕여자고등학교가 이전한 자리에는 대규모의 헌법재판소가 들어서는 등 한옥 경관이 크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한옥 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옥 보존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6년에 민속 경관지역으로 지정된 북촌 지역을 시작으로 1983년에 제4종 집단 미관지구로 지정하면서부터이다. 1985년 북촌 지역의 전체 한옥의 수는 1,518동으로 전체 건물의 55.1%에 달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1991년에는 1층으로 제한하던 주택의 건물 높이를 10미터로, 1994년에는 16미터 5층 이하로 완화하였다. 그 결과 한옥은 빠른 속도로 멸실되었고, 그 자리에 다세대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북촌 전체 건물 중 한옥이 46%에 불과하게 된 것은, 1990년에는 1,242동, 1999년에는 1,056동으로 한옥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1999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을 중심으로 북촌 가꾸기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는데, 1990년대 이후 한옥마을로서의 정체성이 위기를 맞게 되자 주민조직인 (사) 종로 북촌 가꾸기 회의 요구로 이루어졌다. 북촌 가꾸기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1년부터 5년 동안, 12채의 한옥이 처음 5년 동안 멸실되었을 뿐 대부분 보존되었다. 북촌한옥주거지의 역사경관과 한옥을 보존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한옥 등록제를 시행하고, 한옥의 외관을 보존하되 그 내부를 현대적인 생활에 맞도록 고칠 수 있도록 하였고, 한옥 수선비의 일부를 주민들에게 지원하였다. 2010년 현재까지 340여 채의 한옥이 수선비를 지원받아 새롭게 태어났다. 한옥 보존지구로 지정된 곳은 서울의 역사경관을 잘 보존한 한옥 보존지구이다. 가회동 31번지와 33번지와 가회동 11번지 등의 대표적인 한옥밀집 지역은 아름다운 한옥 골목길로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현재 북촌 한옥마을은 1종 지구단위계획이 수립되어, 이 계획과 지침에 따라 한옥 보존지구로서 보존되고 있다. 북촌 지역은 역사 문화미관지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2개의 행정동(가회동·삼청동)과 10개의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복궁과 창덕궁, 율곡로와 삼청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2010년 현재 1,000여 채의 한옥이 보존되어 있다. 한국의 주택은 지난 20세기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960년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한옥에서 양옥으로, 다시 도시로의 인구 집중과 고 밀화로 인해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옥 보존지구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도시의 골목과 삶의 기억이 사라지고 서구식 아파트로 획일화된 것은, 기성주거지가 단지 규모로 재개발되었기 때문이다. 한옥은 주거 다양성의 측면에서 우리 주거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한옥 보존지구는 도시의 일상성과 장소성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박물관과도 같은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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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2403.txt
도미찜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창숙"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643
CC BY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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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은 성종 때 오랑캐를 막기 위해 의주 지방으로 가서, 사람들이 잔칫상에 도미 찜을 차려놓은 것을 보고, 도미 찜의 맛이 기와 악보다 낫다고 하여<NAME>악탕이라고도 한다. 이 도미 찜의 제조법은 진찬의 궤·진연의궤·술 만드는 법·조선요리 제법과 같이 일본에 전해져 있다. 일반 가정이나 궁중에서 즐겨 먹던 음식으로 등에 기록되어 있다. 도미를 깨끗이 씻고 내장을 뺀 뒤 토막으로 치거나 통째로 할 때는 소금을 뿌려서 지져낸다. 쇠고기는 양념하고, 미나리는 초대로 부치고, 숙주나물은 데치고, 황백 지단은 채 썬다. 양념한 쇠고기를 냄비 바닥에 깔고, 도미를 얹고 그 위에 준비한 재료들을 색다르게 얹은 다음 간 맞춘 육수를 붓고 끓인다. 옛날에는 천초·계핏가루·생강 등을 썼으며, 녹말을 넣어 걸쭉하게 만들기도 했다. 봄철의 시식으로 많이 만들어지는 것이 도미 찜이며, 등석 절식으로도 먹는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도미찜 ### 내용: 허종은 성종 때 오랑캐를 막기 위해 의주 지방으로 가서, 사람들이 잔칫상에 도미 찜을 차려놓은 것을 보고, 도미 찜의 맛이 기와 악보다 낫다고 하여<NAME>악탕이라고도 한다. 이 도미 찜의 제조법은 진찬의 궤·진연의궤·술 만드는 법·조선요리 제법과 같이 일본에 전해져 있다. 일반 가정이나 궁중에서 즐겨 먹던 음식으로 등에 기록되어 있다. 도미를 깨끗이 씻고 내장을 뺀 뒤 토막으로 치거나 통째로 할 때는 소금을 뿌려서 지져낸다. 쇠고기는 양념하고, 미나리는 초대로 부치고, 숙주나물은 데치고, 황백 지단은 채 썬다. 양념한 쇠고기를 냄비 바닥에 깔고, 도미를 얹고 그 위에 준비한 재료들을 색다르게 얹은 다음 간 맞춘 육수를 붓고 끓인다. 옛날에는 천초·계핏가루·생강 등을 썼으며, 녹말을 넣어 걸쭉하게 만들기도 했다. 봄철의 시식으로 많이 만들어지는 것이 도미 찜이며, 등석 절식으로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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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POL23669.txt
10·26사태 (十二六事態)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4013
CC BY
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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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륙사건·십이륙정변·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 등으로도 불린다. 유신 체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 사건은 이 사건이다.<NAME>는 1961년 5·16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 18년간 1인 집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해 나갔다. 특히 1972년 10월에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등장한 유신 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동안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은 이 부문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목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를 낳았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는데, 1979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한국경제의 고성장 전략 추진 과정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18.3%에 달했다.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상받으려 하였지만 독재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민심은 체제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의한 고도성장 전략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대적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경제 위기의 심화 과정에서 이들 계층의 소외감도 점차 심화됨으로써 그들의 생존권 요구도 거세어졌다. 대외적으로는 1977년 출범한 미국의 카터(Carter, J. ) 행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미군 철수 카드를 내밀었으나<NAME> 대통령이 이를 거절해 한·미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NAME>는 또한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시도하면서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박동선 사건까지 겹치면서 한·미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세력과 야당은 반 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유신 체제가 출범한 1972년 이래로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의 구속과 같은 일이 계속되었지만 민주화의 방향을 거스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특히 1978년과 1979년은 정치·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가 발생한 시기였다. 1978년 동일방직 사건과 함평 고구마 수매 사건 등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급격하게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그 해 12월 12일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32.8%의 득표율로 31.7%의 여당인 공화당을 앞지르게 되었는데, 이는 민심의 이반(: 민심이 떠나서 배반함)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집권 여당은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극단적인 강경 대응 외에 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을 계기로 유신정권과 가톨릭 세력은 정면충돌했다. 이전의 노동 소요가 절정에 달한 사건은 1979년 8월의 YH 사태이다. YH 무역은 소규모 수출 업체인데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YH 노조 소속 여공들은 당시 김영삼 총재하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 투쟁을 전개하던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 안으로 진입했다가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한 여공 김경숙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위원장<NAME>)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YH 사태는 소규모의 비체제적인 노사갈등에 불과했으나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야당을 포함한 전 민주화운동 세력과 유신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유신철폐의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중도통합론을 내세운 이철승을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누르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한 이가 김영삼이다. 김영삼은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NAME>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으며, 통일을 위해 김일성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을 쫓아내려고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했고, 김영삼의 정적 이철승계 인사들이 전당대회 결과를 무효로 하자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하였다. 더 나아가 김영삼은 9월 16일 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4일 국회의원 직까지 잃었다. 정부는 결국 야당마저 제도권 정치의 틀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영삼 출축을 계기로 그동안 쌓여 있던 국민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유신 체제의 종말을 가져온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창원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부산대학교 학생시위가 10월 15일에 시작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주동자들이 연행되면서 확산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시위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부산대 학생들은 16일 교내에서 집회를 열었고, 이에 동아대·고려신대, 고등학생, 전문대생 등의 학생과 일반 시민까지 가세하여 시내로 진출하였다. 시위대 3,000여 명은 게릴라식으로 경찰과 충돌했고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였다. 17일에는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시위 군중은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경찰서·파출소·세무서·동사무소·신문사·방송국 등에 투석하였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 동안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 파출소가 파손 또는 방화되었다. 18일 자정에는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 등의 군 병력이 투입되어 시위 군중을 진압하였다. 18일에는 경남·마산 일대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날 오후 6시경부터 시작된 시위는 2,000명의 시위 군중이 공화 당사를 공격하고 파출소·신문사·방송국·법원·검찰청·동사무소 등에 피해를 입혔다. 19일 밤에도 마산·창원 지역에 이와 같은 사태가 계속되자 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부마항쟁은 강경 진압으로 일단 봉합되었지만 그 대응 방식을 둘러싸고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발생하여 10·26사태를 초래했다. 차지철 대통령<NAME>실장은 부마항쟁에 대한 강경 진압을 주장하였고,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인은 서로 경쟁하는 입장이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만찬 도중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 위기에 몰린 김재규로 차지철의 강경 진압 채택에 반발해<NAME>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김재규는 군 후배인 차지철의 월권과 자신에 대한 무시, 대통령의 편애를 참을 수 없었다.<NAME>는 그날도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를 지적했고 차지철도 중앙정보부의 무능을 지적했다. 10월 말 군부 고위층은 유신헌법을 폐기하기로 결정하였고 10월 말 최규하 과도정부는 10·26사태 직후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신 체제가 무너졌고,<NAME> 정권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10·26사건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유신 체제를 무너뜨린 10·26사태는 김재규가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화를 위한 의거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민주화를 주장했던 김재규가 의거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서둘러 만들어 낸 사후 명분에 불과했다. 또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재규와 그 하수인으로서 조직적으로 가담하기는 했지만 차지철과의 개인적인 감정이 표출된 우발적인 범행으로 볼 수 있다. 김재규는 10·26에 궁정동 안가의 별실에 초대되어 거사 후 연대를 시도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사전 모의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승화는 연대를 거부해 쿠데타가 진행되지는 못하였고, 결국<NAME>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10·26사태로 민주화가 되기는커녕 권위주의 통치가 연장되었던 것이다.<NAME>의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김재규의 명분론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지만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살해되었다는 것도 동양적인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후속 정권도 이런 역사적 선례를 용인할 수만은 없었다. 김재규 일당은 결국 사형당하고 10·26사태에 대한 법적 심판은 종결되었다. 법적 심판은 물론이고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 10·26사태의 마무리 과정에서 12·12사태가 일어나는 등 민주화가 지체되기도 했지만 10·26사태 자체는 민주를 요구하였던 부마항쟁으로 촉발되었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유신 체제의 붕괴와 군부독재의 종식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10·26사태 (十二六事態) ### 내용: 십이륙사건·십이륙정변·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 등으로도 불린다. 유신 체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 사건은 이 사건이다.<NAME>는 1961년 5·16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 18년간 1인 집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해 나갔다. 특히 1972년 10월에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등장한 유신 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동안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은 이 부문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목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를 낳았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는데, 1979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한국경제의 고성장 전략 추진 과정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18.3%에 달했다.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상받으려 하였지만 독재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민심은 체제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의한 고도성장 전략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대적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경제 위기의 심화 과정에서 이들 계층의 소외감도 점차 심화됨으로써 그들의 생존권 요구도 거세어졌다. 대외적으로는 1977년 출범한 미국의 카터(Carter, J. ) 행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미군 철수 카드를 내밀었으나<NAME> 대통령이 이를 거절해 한·미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NAME>는 또한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시도하면서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박동선 사건까지 겹치면서 한·미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세력과 야당은 반 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유신 체제가 출범한 1972년 이래로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의 구속과 같은 일이 계속되었지만 민주화의 방향을 거스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특히 1978년과 1979년은 정치·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가 발생한 시기였다. 1978년 동일방직 사건과 함평 고구마 수매 사건 등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급격하게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그 해 12월 12일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32.8%의 득표율로 31.7%의 여당인 공화당을 앞지르게 되었는데, 이는 민심의 이반(: 민심이 떠나서 배반함)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집권 여당은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극단적인 강경 대응 외에 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을 계기로 유신정권과 가톨릭 세력은 정면충돌했다. 이전의 노동 소요가 절정에 달한 사건은 1979년 8월의 YH 사태이다. YH 무역은 소규모 수출 업체인데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YH 노조 소속 여공들은 당시 김영삼 총재하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 투쟁을 전개하던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 안으로 진입했다가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한 여공 김경숙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위원장<NAME>)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YH 사태는 소규모의 비체제적인 노사갈등에 불과했으나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야당을 포함한 전 민주화운동 세력과 유신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유신철폐의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중도통합론을 내세운 이철승을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누르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한 이가 김영삼이다. 김영삼은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NAME>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으며, 통일을 위해 김일성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을 쫓아내려고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했고, 김영삼의 정적 이철승계 인사들이 전당대회 결과를 무효로 하자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하였다. 더 나아가 김영삼은 9월 16일 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4일 국회의원 직까지 잃었다. 정부는 결국 야당마저 제도권 정치의 틀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영삼 출축을 계기로 그동안 쌓여 있던 국민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유신 체제의 종말을 가져온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창원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부산대학교 학생시위가 10월 15일에 시작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주동자들이 연행되면서 확산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시위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부산대 학생들은 16일 교내에서 집회를 열었고, 이에 동아대·고려신대, 고등학생, 전문대생 등의 학생과 일반 시민까지 가세하여 시내로 진출하였다. 시위대 3,000여 명은 게릴라식으로 경찰과 충돌했고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였다. 17일에는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시위 군중은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경찰서·파출소·세무서·동사무소·신문사·방송국 등에 투석하였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 동안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 파출소가 파손 또는 방화되었다. 18일 자정에는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 등의 군 병력이 투입되어 시위 군중을 진압하였다. 18일에는 경남·마산 일대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날 오후 6시경부터 시작된 시위는 2,000명의 시위 군중이 공화 당사를 공격하고 파출소·신문사·방송국·법원·검찰청·동사무소 등에 피해를 입혔다. 19일 밤에도 마산·창원 지역에 이와 같은 사태가 계속되자 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부마항쟁은 강경 진압으로 일단 봉합되었지만 그 대응 방식을 둘러싸고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발생하여 10·26사태를 초래했다. 차지철 대통령<NAME>실장은 부마항쟁에 대한 강경 진압을 주장하였고,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인은 서로 경쟁하는 입장이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만찬 도중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 위기에 몰린 김재규로 차지철의 강경 진압 채택에 반발해<NAME>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김재규는 군 후배인 차지철의 월권과 자신에 대한 무시, 대통령의 편애를 참을 수 없었다.<NAME>는 그날도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를 지적했고 차지철도 중앙정보부의 무능을 지적했다. 10월 말 군부 고위층은 유신헌법을 폐기하기로 결정하였고 10월 말 최규하 과도정부는 10·26사태 직후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신 체제가 무너졌고,<NAME> 정권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10·26사건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유신 체제를 무너뜨린 10·26사태는 김재규가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화를 위한 의거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민주화를 주장했던 김재규가 의거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서둘러 만들어 낸 사후 명분에 불과했다. 또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재규와 그 하수인으로서 조직적으로 가담하기는 했지만 차지철과의 개인적인 감정이 표출된 우발적인 범행으로 볼 수 있다. 김재규는 10·26에 궁정동 안가의 별실에 초대되어 거사 후 연대를 시도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사전 모의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승화는 연대를 거부해 쿠데타가 진행되지는 못하였고, 결국<NAME>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10·26사태로 민주화가 되기는커녕 권위주의 통치가 연장되었던 것이다.<NAME>의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김재규의 명분론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지만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살해되었다는 것도 동양적인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후속 정권도 이런 역사적 선례를 용인할 수만은 없었다. 김재규 일당은 결국 사형당하고 10·26사태에 대한 법적 심판은 종결되었다. 법적 심판은 물론이고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 10·26사태의 마무리 과정에서 12·12사태가 일어나는 등 민주화가 지체되기도 했지만 10·26사태 자체는 민주를 요구하였던 부마항쟁으로 촉발되었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유신 체제의 붕괴와 군부독재의 종식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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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9092.txt
깃급문기 (깃給文記)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승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204
CC BY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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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의 내용에는, ①<NAME>를 작성한 연월일, ② 깃급 대상자, ③ 깃급 동기, ④ 깃급의 기준·수량, ⑤ 당부의 말, ⑥ 재주(財主 : 父)와 깃을 받는 아들과 딸(사위 포함)의 직역(職役)·성(姓 : 사위의 경우)과 수결(手決), ⑦ 각 자녀별로 깃급 되는 토지와 노비 등이 기재된다. ⑥과 ⑦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모든 자녀에게 균등하게 분재를 하였지만, 중·후기에는 장자를 우대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현재 전하는 깃급문기로는 1429년(세종 11) 김무가 4남 2녀와 손자·손녀들에게 노비를 분깃한 문서가 있는데, 이 문서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32구의 노비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깃급문기 (깃給文記) ### 내용: 문기의 내용에는, ①<NAME>를 작성한 연월일, ② 깃급 대상자, ③ 깃급 동기, ④ 깃급의 기준·수량, ⑤ 당부의 말, ⑥ 재주(財主 : 父)와 깃을 받는 아들과 딸(사위 포함)의 직역(職役)·성(姓 : 사위의 경우)과 수결(手決), ⑦ 각 자녀별로 깃급 되는 토지와 노비 등이 기재된다. ⑥과 ⑦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모든 자녀에게 균등하게 분재를 하였지만, 중·후기에는 장자를 우대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현재 전하는 깃급문기로는 1429년(세종 11) 김무가 4남 2녀와 손자·손녀들에게 노비를 분깃한 문서가 있는데, 이 문서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32구의 노비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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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5102.txt
무명짜기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효숙"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038
CC BY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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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적은 씨앗기, 솜 타기, 고치 마기, 실잦기의 과정을, 방직은 베 뽑기, 베날기, 베 메기, 꾸리 감기, 베 짜기의 과정을 거친다. 목화를 따서 말린 후 씨아를 사용하여 목화씨를 빼고, 솜 활로 태워 남은 씨앗 껍질을 깨끗이 제거하고 솜이 피어오르게 한 후 고치 말기를 한다. 수리할 때까지는 물레질을 해서 실을 뽑고 이를 가락에 올린다. 댕이란 가락옷에 감긴 실뭉치로 한 필에 10개의 댕이가 필요하다. 한 새의 날실 80올을 짜는 것은 보통 7새부터, 고운 것은 9∼10 새도 한다. 날 꼬챙이에 실댕이를 10개 꿰어 놓고 실끝을 철사 고리에 통과시켜 실이 가늘고 매끄럽게 만든다. 무명실의 굵기와 가늘기에 따라 새가 결정되면, 날틀과 걸틀을 5.7m(재래척 열자) 간격으로 고정시켜 베날기를 한다. 날실의 잔털을 없애고 마찰에 견디게 하기 위해 벼 매기를 하는데, 날실을 보디에 꿰어 한쪽 끝은 도투마리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 끝은 끄싱게를 감아 팽팽하게 늘린 다음, 도투마리에 왕겨 잿불을 놓아 잘 말려서 베틀에 옮겨 놓는다. 씨실은 댕이에 실을 잡아 꾸리로 감아서 북에 넣는다. 작업자는 잉아실을 걸고 개톱대를 말코에 매고, 베틀 신을 신고 앞뒤로 당겨 잉아실이 올라가면서 날실이 상하로 갈리게 되면 그 사이로 북을 좌우 번갈아 넣고 보디로 치면서 무명을 짠다. 가끔씩 젖 일개로 날줄의 마른 부분을 적셔 주면 무명을 짜는 데도 적당한 습기가 필요하다. 무명 짜기는 계절에 상관없이 행해진다.<NAME>는 1990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수직기에 의한 전통적인 무명 짜기를 전승하고 있다.<NAME> 씨는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구연당 조옥이로부터 전통 길쌈 기법을 전수받았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무명짜기 ### 내용: 방적은 씨앗기, 솜 타기, 고치 마기, 실잦기의 과정을, 방직은 베 뽑기, 베날기, 베 메기, 꾸리 감기, 베 짜기의 과정을 거친다. 목화를 따서 말린 후 씨아를 사용하여 목화씨를 빼고, 솜 활로 태워 남은 씨앗 껍질을 깨끗이 제거하고 솜이 피어오르게 한 후 고치 말기를 한다. 수리할 때까지는 물레질을 해서 실을 뽑고 이를 가락에 올린다. 댕이란 가락옷에 감긴 실뭉치로 한 필에 10개의 댕이가 필요하다. 한 새의 날실 80올을 짜는 것은 보통 7새부터, 고운 것은 9∼10 새도 한다. 날 꼬챙이에 실댕이를 10개 꿰어 놓고 실끝을 철사 고리에 통과시켜 실이 가늘고 매끄럽게 만든다. 무명실의 굵기와 가늘기에 따라 새가 결정되면, 날틀과 걸틀을 5.7m(재래척 열자) 간격으로 고정시켜 베날기를 한다. 날실의 잔털을 없애고 마찰에 견디게 하기 위해 벼 매기를 하는데, 날실을 보디에 꿰어 한쪽 끝은 도투마리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 끝은 끄싱게를 감아 팽팽하게 늘린 다음, 도투마리에 왕겨 잿불을 놓아 잘 말려서 베틀에 옮겨 놓는다. 씨실은 댕이에 실을 잡아 꾸리로 감아서 북에 넣는다. 작업자는 잉아실을 걸고 개톱대를 말코에 매고, 베틀 신을 신고 앞뒤로 당겨 잉아실이 올라가면서 날실이 상하로 갈리게 되면 그 사이로 북을 좌우 번갈아 넣고 보디로 치면서 무명을 짠다. 가끔씩 젖 일개로 날줄의 마른 부분을 적셔 주면 무명을 짜는 데도 적당한 습기가 필요하다. 무명 짜기는 계절에 상관없이 행해진다.<NAME>는 1990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수직기에 의한 전통적인 무명 짜기를 전승하고 있다.<NAME> 씨는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구연당 조옥이로부터 전통 길쌈 기법을 전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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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POL60227.txt
국민신당 (國民新黨)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611
CC BY
265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 선거가 중요한 이유는 정치인과 정당의 이합집산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국민신당도 1997년 10월 10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급조되었다.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배한 이인제를 중심으로 창당하였다. 이회창 후보는 1997년 7월 21일 열린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1만 1544표를 얻어 40,622표를 얻은 이인제 후보를 제쳤다. 집권 여당의 첫 자유 경선이라는 점에서 신한국당 경선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투표할 수 없고, 당의 대의원에게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이인제 경기도지사는 당시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음에도 경선 결선에서 탈락하였다. 경선에서 승리한 이회창 후보는 아들 병역 문제 의혹으로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자 탈당해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이인제는 30년의 낡고 병든 3김 정치 구조를 세대교체로 교체해 국민 정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소명감을 내세웠다. 신한국당의 민주계와 민정계 일부 정치인들이 같이 탈당하였다. 신한국당 경선 때부터 이인제를 지지했던 지구당 위원장 13명이 9월 26일 탈당하였다. 이인제<NAME>에는 10월 31일 김운환, 한이헌 의원이, 11월 3일에는 이만섭,<NAME>, 이용삼, 김학원, 원유철 의원 등이 합류하였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총재로,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창당했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신당을 창당할 때 청와대가 개입하여 조직과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인제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범여권<NAME>자는 분열되었는데 여권 출신 후보가 두 명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제15대 대선에서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는 492만 5591표[득표율 19.2%]를 얻어 새정치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1032만 6275표[40.3%],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993만 5718[38.7%]에 이어 3위로 낙선하였다. 이인제 후보의 대선 패배로 인해 국민신당은 1998년 9월 28일 새정치 국민 회의와 합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에 국민신당 일부가 개별적으로 입당했다. 제15대 대선은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 교체였다. 쿠데타 세력인 김종필과도 연합한 김대중의 득표 전략이 주효했지만, 여당 표의 분산을 통해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한나라당은 선거 막판에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 국민신당은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당선된다. 결과적으로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가 선전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국민신당 (國民新黨) ### 내용: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 선거가 중요한 이유는 정치인과 정당의 이합집산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국민신당도 1997년 10월 10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급조되었다.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배한 이인제를 중심으로 창당하였다. 이회창 후보는 1997년 7월 21일 열린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1만 1544표를 얻어 40,622표를 얻은 이인제 후보를 제쳤다. 집권 여당의 첫 자유 경선이라는 점에서 신한국당 경선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투표할 수 없고, 당의 대의원에게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이인제 경기도지사는 당시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음에도 경선 결선에서 탈락하였다. 경선에서 승리한 이회창 후보는 아들 병역 문제 의혹으로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자 탈당해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이인제는 30년의 낡고 병든 3김 정치 구조를 세대교체로 교체해 국민 정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소명감을 내세웠다. 신한국당의 민주계와 민정계 일부 정치인들이 같이 탈당하였다. 신한국당 경선 때부터 이인제를 지지했던 지구당 위원장 13명이 9월 26일 탈당하였다. 이인제<NAME>에는 10월 31일 김운환, 한이헌 의원이, 11월 3일에는 이만섭,<NAME>, 이용삼, 김학원, 원유철 의원 등이 합류하였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총재로,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창당했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신당을 창당할 때 청와대가 개입하여 조직과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인제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범여권<NAME>자는 분열되었는데 여권 출신 후보가 두 명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제15대 대선에서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는 492만 5591표[득표율 19.2%]를 얻어 새정치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1032만 6275표[40.3%],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993만 5718[38.7%]에 이어 3위로 낙선하였다. 이인제 후보의 대선 패배로 인해 국민신당은 1998년 9월 28일 새정치 국민 회의와 합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에 국민신당 일부가 개별적으로 입당했다. 제15대 대선은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 교체였다. 쿠데타 세력인 김종필과도 연합한 김대중의 득표 전략이 주효했지만, 여당 표의 분산을 통해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한나라당은 선거 막판에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 국민신당은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당선된다. 결과적으로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가 선전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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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POL56955.txt
이동환 (李東煥)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은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811
CC BY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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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 5학년이던 1926년 4월 25일, 순종 황제의 서거 소식을 듣고 조선학생과 학 연구회 회원 80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5월 16일 시위 구역과 동지를 규합하고, 5월 23일 일요일 축구 연습을 가장해 모여 선전문을 뿌리고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공동 선전문을 작성하고,<NAME>이 5월 26일 등사판과 용지를 구해 선전문을 인쇄했다.<NAME> 등 조선학생과 학 연구회 회원들은 창덕궁에서 단성사로 순종 황제 인산 행렬이 지나가자 건너편에 있던 중앙고등학교 학생 대열의 선두에 서서 격문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짖다가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926년 11월 18일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출옥한 것은 1927년 9월 20일이었다. 1982년 6월 23일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동환 (李東煥) ### 내용: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 5학년이던 1926년 4월 25일, 순종 황제의 서거 소식을 듣고 조선학생과 학 연구회 회원 80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5월 16일 시위 구역과 동지를 규합하고, 5월 23일 일요일 축구 연습을 가장해 모여 선전문을 뿌리고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공동 선전문을 작성하고,<NAME>이 5월 26일 등사판과 용지를 구해 선전문을 인쇄했다.<NAME> 등 조선학생과 학 연구회 회원들은 창덕궁에서 단성사로 순종 황제 인산 행렬이 지나가자 건너편에 있던 중앙고등학교 학생 대열의 선두에 서서 격문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짖다가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926년 11월 18일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출옥한 것은 1927년 9월 20일이었다. 1982년 6월 23일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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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3611.txt
동포 (銅泡)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청규"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851
CC BY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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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라고도 한다.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었으며, 지름 2∼5cm로 둥근 표면의 가장자리에 빗금을 그은 것이 많다. 이러한 동포는 시베리아 카라 수크(Karasuk) 문화기의 유적이나 내몽고 오르도스(Ordos) 지방, 길림 지방, 랴오닝성의 유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안북도 강계군 풍룡리와 용천군 신암리, 황해도 봉산군 신흥리, 함경북도 나진 초도에서 발견되었다. 신암리에서는 청동 손칼[]도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함경북도 종성군 삼봉리에서는 거푸집이 발견됐다. 랴오닝성 심양 정가와 자무덤 유적의 자료는 동포의 용도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 무덤의 널[] 안에서 발견된 노인 남성의 다리·발 뼈 주변에서 지름 2cm 내외의 동포가 180개 나왔다. 흑색 유기질 부식물이 뼈와 동포 사이에 한 겹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죽 장화의 표면에 붙었던 장식이다. 한편, 경북 영천군 어은동에서는 낙랑고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원형 단추 모양 외에 사각형과 타원형의 단추 모양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외부의 불룩한 부분에 와 선 문 등이 장식되어 있다. 이것도 역시 의복이나 장화 등에 부착하는 장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동포는 사용 분포 지역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사용시기 또한 청동기시대 초기에서 서기 전후에 이르는 긴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동포 (銅泡) ### 내용: 동구라고도 한다.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었으며, 지름 2∼5cm로 둥근 표면의 가장자리에 빗금을 그은 것이 많다. 이러한 동포는 시베리아 카라 수크(Karasuk) 문화기의 유적이나 내몽고 오르도스(Ordos) 지방, 길림 지방, 랴오닝성의 유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안북도 강계군 풍룡리와 용천군 신암리, 황해도 봉산군 신흥리, 함경북도 나진 초도에서 발견되었다. 신암리에서는 청동 손칼[]도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함경북도 종성군 삼봉리에서는 거푸집이 발견됐다. 랴오닝성 심양 정가와 자무덤 유적의 자료는 동포의 용도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 무덤의 널[] 안에서 발견된 노인 남성의 다리·발 뼈 주변에서 지름 2cm 내외의 동포가 180개 나왔다. 흑색 유기질 부식물이 뼈와 동포 사이에 한 겹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죽 장화의 표면에 붙었던 장식이다. 한편, 경북 영천군 어은동에서는 낙랑고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원형 단추 모양 외에 사각형과 타원형의 단추 모양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외부의 불룩한 부분에 와 선 문 등이 장식되어 있다. 이것도 역시 의복이나 장화 등에 부착하는 장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동포는 사용 분포 지역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사용시기 또한 청동기시대 초기에서 서기 전후에 이르는 긴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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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5166.txt
식초 (食醋)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찬조"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582
CC BY
432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식초는 산성 식품으로 3∼5%의 초산과 유기산·아미노산·당·알코올·에스테르 등이 함유되어 있다. 크게는 곡류·알코올성 음료·과실류 등을 원료로 하는 양조식초와 빙초산·초산을<NAME>료로 하는 합성식초로 나뉜다. 식품의 저장뿐만 아니라 의약품으로도 쓸 수 있는데, 강한 산성으로 방부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식초를 사용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술이 변하면 초가 된다는 말이 있고 지봉유설에서도 초를 다른 말로 쓴 술이라 한다. 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초의 기원 및 제조법이 주류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식초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었으므로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시대에는 식초 제조법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초를 이용한 기록들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고려도경 高麗圖經≫에는 “앵두가 초맛 같다. ”고 기술하였다. ≪해동역사 海東繹史≫에도 식품의 조리에 초가 쓰였다고 하였다.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에는 의약품으로 다양하게 초가 사용되어 부스럼이나 중풍 등을 치료하는 데에 이용되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초의 재료 및 제조법을 기록한 문헌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사촬요 攷事撮要≫는 식초 제조법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으로 보리를 재료로 하여 발효시켜 만든 양조 초가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 東醫寶鑑≫에는 “초는 성(性)이 온(溫) 하며 맛이 시고 독이 없어 옹종(擁腫)을 없애고 혈운(血暈)을 부수며, 모든 실혈(失血)의 과다와 심통(心痛)과 인통(咽痛)을 다스린다. 또한 일체의 어육과 채소독을 소멸시킨다. ”고 하여 초의 약성을 기술하고 있다. ≪규곤시의방 閨壼是議方≫에는 밀을 사용한 곡초 이외에 매 자초라는 이름의 과실초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매 자초는 오매(烏梅)를 초에 담갔다가 볕에 말려 가루로 만들어 필요할 때에 사용하는 합성과실초이다. ≪산림경제≫에는 쌀·밀·보리를 재료로 하는 곡초 이외에 감·대추를 재료로 하는 과실초와 창포·도라지를 재료로 하는 채초(菜醋), 또 꿀을 이용하는 식초의 제조법도 기록되어 있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와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경도잡지 京都雜志≫ 등에는 초장을 절식과 함께 시식하는 내용이 있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초는 장(醬)의 다음으로 맛을 돋우어주는 바가 많아서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 번 만들어 두면 오래가고 또 비용을 절약하는 바가 적지 않다. ”라고 하여 초의 중요성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나라 가정에서 초를 널리 만들어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식초의 제조법은 규곤시의방·산림경제·증보산림경제·임원십육지를 비롯해 색경 ·해동농서 ·농정회요·역주방문·규합총서 등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재료에 따라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 ≪규합총서≫에 기록되어 있는 식초 제조법을 보면 “병일(丙日)에 물 한 동이에 누룩가루 4 되를 볶아 섞어서 오지항아리에 넣어 단단히 봉하여 둔다. 정일(丁日)에 찹쌀 한 말을 씻고 또 씻어(百洗) 쪄서 더운 김에 그 항아리에 붓고 복숭아나무 가지로 저어 두껍게 봉하여 볕바른 곳에 두면 초가 된다. ”고 하였다. 식초 제조법은 고문헌들에 공통적으로 길일을 택하고 부정을 멀리하였다. 순결한 초를 만들기 위해 온 정성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주부들이 부뚜막에 술을 두어 붓고 부엌에 드나들 때마다 초야 초야 나와 살자. 하면서 초병을 자주 흔들어주던 풍습이 있었다. 이와 같이 부뚜막에 초병을 두고 자주 흔들어주는 것은 정결하고 한적하면서도 주부가 자주 드나드는 곳이므로 식초 발효를 위한 온도관리에 적당한 장소인 동시에 초병을 흔들어주면서 호기성인 초산균의 발육과 발효에 필요한 산소를 충분히 공급해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현대에는 곡류·알코올성 음료·과실류 등을 원료로 한 양조초와 빙초산 또는 초산을<NAME>료로 한 합성초, 향신료를 첨가하여 만든 가공초 등 다양한 식초가 이용되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식초 (食醋) ### 내용: 식초는 산성 식품으로 3∼5%의 초산과 유기산·아미노산·당·알코올·에스테르 등이 함유되어 있다. 크게는 곡류·알코올성 음료·과실류 등을 원료로 하는 양조식초와 빙초산·초산을<NAME>료로 하는 합성식초로 나뉜다. 식품의 저장뿐만 아니라 의약품으로도 쓸 수 있는데, 강한 산성으로 방부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식초를 사용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술이 변하면 초가 된다는 말이 있고 지봉유설에서도 초를 다른 말로 쓴 술이라 한다. 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초의 기원 및 제조법이 주류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식초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었으므로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시대에는 식초 제조법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초를 이용한 기록들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고려도경 高麗圖經≫에는 “앵두가 초맛 같다. ”고 기술하였다. ≪해동역사 海東繹史≫에도 식품의 조리에 초가 쓰였다고 하였다.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에는 의약품으로 다양하게 초가 사용되어 부스럼이나 중풍 등을 치료하는 데에 이용되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초의 재료 및 제조법을 기록한 문헌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사촬요 攷事撮要≫는 식초 제조법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으로 보리를 재료로 하여 발효시켜 만든 양조 초가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 東醫寶鑑≫에는 “초는 성(性)이 온(溫) 하며 맛이 시고 독이 없어 옹종(擁腫)을 없애고 혈운(血暈)을 부수며, 모든 실혈(失血)의 과다와 심통(心痛)과 인통(咽痛)을 다스린다. 또한 일체의 어육과 채소독을 소멸시킨다. ”고 하여 초의 약성을 기술하고 있다. ≪규곤시의방 閨壼是議方≫에는 밀을 사용한 곡초 이외에 매 자초라는 이름의 과실초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매 자초는 오매(烏梅)를 초에 담갔다가 볕에 말려 가루로 만들어 필요할 때에 사용하는 합성과실초이다. ≪산림경제≫에는 쌀·밀·보리를 재료로 하는 곡초 이외에 감·대추를 재료로 하는 과실초와 창포·도라지를 재료로 하는 채초(菜醋), 또 꿀을 이용하는 식초의 제조법도 기록되어 있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와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경도잡지 京都雜志≫ 등에는 초장을 절식과 함께 시식하는 내용이 있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초는 장(醬)의 다음으로 맛을 돋우어주는 바가 많아서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 번 만들어 두면 오래가고 또 비용을 절약하는 바가 적지 않다. ”라고 하여 초의 중요성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나라 가정에서 초를 널리 만들어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식초의 제조법은 규곤시의방·산림경제·증보산림경제·임원십육지를 비롯해 색경 ·해동농서 ·농정회요·역주방문·규합총서 등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재료에 따라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 ≪규합총서≫에 기록되어 있는 식초 제조법을 보면 “병일(丙日)에 물 한 동이에 누룩가루 4 되를 볶아 섞어서 오지항아리에 넣어 단단히 봉하여 둔다. 정일(丁日)에 찹쌀 한 말을 씻고 또 씻어(百洗) 쪄서 더운 김에 그 항아리에 붓고 복숭아나무 가지로 저어 두껍게 봉하여 볕바른 곳에 두면 초가 된다. ”고 하였다. 식초 제조법은 고문헌들에 공통적으로 길일을 택하고 부정을 멀리하였다. 순결한 초를 만들기 위해 온 정성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주부들이 부뚜막에 술을 두어 붓고 부엌에 드나들 때마다 초야 초야 나와 살자. 하면서 초병을 자주 흔들어주던 풍습이 있었다. 이와 같이 부뚜막에 초병을 두고 자주 흔들어주는 것은 정결하고 한적하면서도 주부가 자주 드나드는 곳이므로 식초 발효를 위한 온도관리에 적당한 장소인 동시에 초병을 흔들어주면서 호기성인 초산균의 발육과 발효에 필요한 산소를 충분히 공급해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현대에는 곡류·알코올성 음료·과실류 등을 원료로 한 양조초와 빙초산 또는 초산을<NAME>료로 한 합성초, 향신료를 첨가하여 만든 가공초 등 다양한 식초가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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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39900.txt
진해현 호적대장 (鎭海縣 戶籍大帳)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영국"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996
CC BY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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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가쿠슈인대학 도서관에 소장 중인 필사본은 13개이며, 그 크기·분량·수록 내용 등은 [표]와 같다. 진해현호적대장현존상황 책수 세로 가로(cm) 매수 1822년(순조 22) 2 47.431.2 56.2 61.430.8 61.4 순조 25년(1825년) 3 4626 94년 4626.3 5555.5 46.226.6 78.7 1831년(순조 31) 2 44.838.3 90 45.528.5 62.5 헌종 9년(1843년) 2 4426 92세. 4326.2 8132.2 헌종 12년(1846년) 1 4327 97 97 헌종 15년(1849년) 1 4427.4 95 철종 3년(1852년) 1 43.527 67 철종 6년(1855년) 1 43.627 63 63 철종 9년(1858년) 1 4327 85 85 철종 12년(1861년) 1 4327.1 100 100 1861년(철종 12년) 1870년(고종 7) 1 41.528.7 84 1873년(고종 10) 1 41.528.3 94.994.9 1876년(고종 13) 1 4028.5 81.5 알려진 바에 따르면 1843년(현종 9)에 일부 부식된 것을 빼고는 모두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은 1825년(순조 25)의 것으로 진해현 전체를 담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진해현 호적대장 (鎭海縣 戶籍大帳) ### 내용: 현재 일본 가쿠슈인대학 도서관에 소장 중인 필사본은 13개이며, 그 크기·분량·수록 내용 등은 [표]와 같다. 진해현호적대장현존상황 책수 세로 가로(cm) 매수 1822년(순조 22) 2 47.431.2 56.2 61.430.8 61.4 순조 25년(1825년) 3 4626 94년 4626.3 5555.5 46.226.6 78.7 1831년(순조 31) 2 44.838.3 90 45.528.5 62.5 헌종 9년(1843년) 2 4426 92세. 4326.2 8132.2 헌종 12년(1846년) 1 4327 97 97 헌종 15년(1849년) 1 4427.4 95 철종 3년(1852년) 1 43.527 67 철종 6년(1855년) 1 43.627 63 63 철종 9년(1858년) 1 4327 85 85 철종 12년(1861년) 1 4327.1 100 100 1861년(철종 12년) 1870년(고종 7) 1 41.528.7 84 1873년(고종 10) 1 41.528.3 94.994.9 1876년(고종 13) 1 4028.5 81.5 알려진 바에 따르면 1843년(현종 9)에 일부 부식된 것을 빼고는 모두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은 1825년(순조 25)의 것으로 진해현 전체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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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LAW41185.txt
첩 (帖)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승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6209
CC BY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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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 임명)·물침(: 허가)·훈령 등에 첩을 내려주고, 물금하는 첩은 물금첩이라고 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령이 향리나 제관을 임명할 때도 차첩을 쓴다. 첩은 매우 다양하게 쓰이는 문서로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가운데에는 1601년(선조 34) 6월 이조에서 새로 급제한 생원 유기문(柳起門)을<NAME>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하는 차첩과 1868년(고종 5) 11월 군수가 향리 변태년(卞泰年)을 이방(吏房)에 임명하는 차첩 등 현재 전해지고 있는 문서는 대단히 많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첩 (帖) ### 내용: 차정(: 임명)·물침(: 허가)·훈령 등에 첩을 내려주고, 물금하는 첩은 물금첩이라고 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령이 향리나 제관을 임명할 때도 차첩을 쓴다. 첩은 매우 다양하게 쓰이는 문서로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가운데에는 1601년(선조 34) 6월 이조에서 새로 급제한 생원 유기문(柳起門)을<NAME>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하는 차첩과 1868년(고종 5) 11월 군수가 향리 변태년(卞泰年)을 이방(吏房)에 임명하는 차첩 등 현재 전해지고 있는 문서는 대단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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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LAW49866.txt
범죄인 인도 (犯罪人 引渡)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병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082
CC BY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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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인인도는 범죄를 저지른 후 외국으로 도망친 자뿐 아니라 형의 확정판결을 받고 집행 중에 외국으로 도망친 자의 인도도 포함한다. 따라서 범죄인인도란 범죄자가 있는 국가가 범죄를 저질렀거나 유죄를 확정한 국가에 그 범죄자를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범죄인은 당해 범죄에 대한 재판관할권이 없는 국가로, 또는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해도 필요한 모든 증거와 증인들이 외국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상 재판이 불가능하거나 법원이 재판을 기피하는 나라로 도피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범죄인의 도피처가 되어 형사사법정의를 실현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범죄인인도 제도이다. 피해자 개인이나 사적 단체가 범죄인 인도를 청구하거나 피청구하는 주체는 국가가 아니다. 범죄행위 지국, 법익 피해 국, 피해자 국적국, 범죄인 국적국 등이 인도를 청구할 수 있다. 피청구국은 해당 범죄인이 거주하는 국가이다. 청구국이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할 때 피청구국이 응해야 할 의무는 없다. 따라서 범죄인 인도를 국제예양 차원에서 벗어나서 국제의무로 하기 위해 오늘날에는 주로 양자조약(bilateral treaty)의 형태로 체결하고 있다. 범죄인인도와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우선 쌍방 가벌성(double criminality)의 원칙이다. 인도 청구 시 청구국과 피청구국 쌍방이 범죄를 구성할 것을 전제로 하여 일정한 기준 이상의 중대한 범죄에만 인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은 범죄 특정의 원칙(principle of speciality)으로, 범죄인을 인도받아 재판할 때, 인도 청구 시의 범죄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범죄인의 인권을 위해서이다. 또 정치범불인도의 원칙이 적용된다. 정치범을 인도 대상에서 제외한 최초의 국내법은 1833년 벨기에의 범죄인인도 법이며, 1834년 벨기에·프랑스의 범죄인인도조약이다. 오늘날 정치범죄는 범죄인인도조약의 인도 대상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다. 또한 법체계상 인도 대상에 자국민도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대륙법계 국가는 자국민불인도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으나 영미법계 국가는 자국민이더라도 인도할 수 있는 입장이다. 범죄인인도 자체는 고대부터 존재해 왔으나 교통 통신의 발달로 범죄인의 해외 도피가 쉬워짐에 따라 국가 간의 형사사법 공조 및 범죄인인도 문제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초기엔 정치범이 인도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일반 형사범이 인도 대상이다. 우리나라는 범죄인인도조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88년 범죄인인도 법(법률 제4015호)을 제정하여, 1990년 호주와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한 이래, 2009년 12월 현재 미국, 일본 등 29개국과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범죄인 인도 (犯罪人 引渡) ### 내용: 범죄인인도는 범죄를 저지른 후 외국으로 도망친 자뿐 아니라 형의 확정판결을 받고 집행 중에 외국으로 도망친 자의 인도도 포함한다. 따라서 범죄인인도란 범죄자가 있는 국가가 범죄를 저질렀거나 유죄를 확정한 국가에 그 범죄자를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범죄인은 당해 범죄에 대한 재판관할권이 없는 국가로, 또는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해도 필요한 모든 증거와 증인들이 외국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상 재판이 불가능하거나 법원이 재판을 기피하는 나라로 도피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범죄인의 도피처가 되어 형사사법정의를 실현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범죄인인도 제도이다. 피해자 개인이나 사적 단체가 범죄인 인도를 청구하거나 피청구하는 주체는 국가가 아니다. 범죄행위 지국, 법익 피해 국, 피해자 국적국, 범죄인 국적국 등이 인도를 청구할 수 있다. 피청구국은 해당 범죄인이 거주하는 국가이다. 청구국이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할 때 피청구국이 응해야 할 의무는 없다. 따라서 범죄인 인도를 국제예양 차원에서 벗어나서 국제의무로 하기 위해 오늘날에는 주로 양자조약(bilateral treaty)의 형태로 체결하고 있다. 범죄인인도와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우선 쌍방 가벌성(double criminality)의 원칙이다. 인도 청구 시 청구국과 피청구국 쌍방이 범죄를 구성할 것을 전제로 하여 일정한 기준 이상의 중대한 범죄에만 인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은 범죄 특정의 원칙(principle of speciality)으로, 범죄인을 인도받아 재판할 때, 인도 청구 시의 범죄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범죄인의 인권을 위해서이다. 또 정치범불인도의 원칙이 적용된다. 정치범을 인도 대상에서 제외한 최초의 국내법은 1833년 벨기에의 범죄인인도 법이며, 1834년 벨기에·프랑스의 범죄인인도조약이다. 오늘날 정치범죄는 범죄인인도조약의 인도 대상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다. 또한 법체계상 인도 대상에 자국민도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대륙법계 국가는 자국민불인도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으나 영미법계 국가는 자국민이더라도 인도할 수 있는 입장이다. 범죄인인도 자체는 고대부터 존재해 왔으나 교통 통신의 발달로 범죄인의 해외 도피가 쉬워짐에 따라 국가 간의 형사사법 공조 및 범죄인인도 문제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초기엔 정치범이 인도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일반 형사범이 인도 대상이다. 우리나라는 범죄인인도조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88년 범죄인인도 법(법률 제4015호)을 제정하여, 1990년 호주와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한 이래, 2009년 12월 현재 미국, 일본 등 29개국과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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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27782.txt
왕유릉타 (王有陵陀)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신근"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9134
CC BY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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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 19에 의하면 의박사 나 솔(, 6품) 왕 유릉 타가 일본의 요청으로 백제 성왕 32년(554)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은 이때부터 약물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왕유릉타 (王有陵陀) ### 내용: 일본서기 권 19에 의하면 의박사 나 솔(, 6품) 왕 유릉 타가 일본의 요청으로 백제 성왕 32년(554)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은 이때부터 약물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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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66.txt
안동 수곡고택 (安東 樹谷古宅)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일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314
CC BY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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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할아버지 보(, 호 )의 덕을 기리기 위해 권조가 1792년(정조 16)에 세운 것으로 50여 호 되는 작은 마을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권 보는 일생을 도학에 심취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본채의 사랑채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소박하게 처리한 것도 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3칸 행랑채의 우협간에 낸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앞마당(사랑마당 포함)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튼자형을 이루며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새 사랑채가 앞마당의 서쪽을 차지하고, 안채의 동쪽 뒤쪽 약간 높은 자리에는 단칸의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형으로 안마당 쪽 정면 4칸 중 오른쪽 2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안방이고 왼쪽 2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안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의 왼쪽에 접해 2칸 반 길이의 부엌과 고방 1칸을 마당 쪽으로 내려 뽑았고, 대청의 오른편에도 고방 · 윗방 · 부엌 · 새댁방 등 모두 3칸 반을 배치하였다. 큰 사랑채는 정면이 8칸으로 이 중 오른쪽 4칸은 큰 사랑채로 꾸며져 있다. 지붕 높이가 큰 사랑채보다 한 단 낮은 왼쪽 4칸은 중문과 작은 사랑방, 마룻방,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형의 고방은 안채 쪽으로 1칸 더 돌출되어 있다. 큰 사랑채의 정면 4칸 중 오른쪽 2칸은 앞이 개방된 대청이고, 왼쪽 2칸은 큰 사랑방으로 앞쪽에 툇마루가 놓여 있다. 큰 사랑방 뒤편으로 온돌방 1칸을 돌출시켜 내정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정면 3칸의 겹집으로 앞줄 오른쪽 2칸은 앞과 오른쪽 면이 열린 마루로 헌함을 돌렸으며, 왼쪽 온돌방 1칸은 외여닫이 문이 달린 들문으로 처리하여 크게 개방할 수 있게 하였다. 뒷줄에는 마룻방을, 좌우에 각각 1칸씩 온돌방을 설치했다. 안채는 대청 앞쪽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지붕 가구는 5량 가로 사다리꼴 판대공을 높이 세워 마루 도리를 받도록 하였고 안채는 대청 앞쪽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안방의 뒤편 벽 상부에 널문을 내어 바람이 통하도록 하였고 부엌 위 누상고에서 안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큰 사랑채의 정면 안쪽 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자연석 초석 위에 세웠으며 대청의 상부 가구는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운 간략한 구조이다. 새 사랑채는 앞쪽 중앙 기둥만 두리기둥을 사용한 5량 가로, 낮은 사다리꼴 판대공 위에 마루 도리를 놓았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안동 수곡고택 (安東 樹谷古宅) ### 내용: 1984년에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할아버지 보(, 호 )의 덕을 기리기 위해 권조가 1792년(정조 16)에 세운 것으로 50여 호 되는 작은 마을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권 보는 일생을 도학에 심취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본채의 사랑채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소박하게 처리한 것도 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3칸 행랑채의 우협간에 낸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앞마당(사랑마당 포함)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튼자형을 이루며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새 사랑채가 앞마당의 서쪽을 차지하고, 안채의 동쪽 뒤쪽 약간 높은 자리에는 단칸의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형으로 안마당 쪽 정면 4칸 중 오른쪽 2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안방이고 왼쪽 2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안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의 왼쪽에 접해 2칸 반 길이의 부엌과 고방 1칸을 마당 쪽으로 내려 뽑았고, 대청의 오른편에도 고방 · 윗방 · 부엌 · 새댁방 등 모두 3칸 반을 배치하였다. 큰 사랑채는 정면이 8칸으로 이 중 오른쪽 4칸은 큰 사랑채로 꾸며져 있다. 지붕 높이가 큰 사랑채보다 한 단 낮은 왼쪽 4칸은 중문과 작은 사랑방, 마룻방,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형의 고방은 안채 쪽으로 1칸 더 돌출되어 있다. 큰 사랑채의 정면 4칸 중 오른쪽 2칸은 앞이 개방된 대청이고, 왼쪽 2칸은 큰 사랑방으로 앞쪽에 툇마루가 놓여 있다. 큰 사랑방 뒤편으로 온돌방 1칸을 돌출시켜 내정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정면 3칸의 겹집으로 앞줄 오른쪽 2칸은 앞과 오른쪽 면이 열린 마루로 헌함을 돌렸으며, 왼쪽 온돌방 1칸은 외여닫이 문이 달린 들문으로 처리하여 크게 개방할 수 있게 하였다. 뒷줄에는 마룻방을, 좌우에 각각 1칸씩 온돌방을 설치했다. 안채는 대청 앞쪽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지붕 가구는 5량 가로 사다리꼴 판대공을 높이 세워 마루 도리를 받도록 하였고 안채는 대청 앞쪽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안방의 뒤편 벽 상부에 널문을 내어 바람이 통하도록 하였고 부엌 위 누상고에서 안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큰 사랑채의 정면 안쪽 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자연석 초석 위에 세웠으며 대청의 상부 가구는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운 간략한 구조이다. 새 사랑채는 앞쪽 중앙 기둥만 두리기둥을 사용한 5량 가로, 낮은 사다리꼴 판대공 위에 마루 도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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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2534.txt
계지탕 (桂枝湯)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육창수"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254
CC BY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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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찬 기운을 싫어하고 열이 나고 두통과 땀이 나는 비교적 약한 체질의 환자에게 사용한다. 중국의 상한론에는 이 처방이 처음 기록되어 있으며, 의학입문에도 이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은 동의보감에 기록되어 있다. 태양병의 맥상, 증후의 식별과 그 치료법 상 12조에 계지탕이 기재되어 있고, 부인임신병맥증병치제이십은 상한론의 태양병의 맥상, 증후의 식별과 그 치료법 상에 인용되어 있다. 비교적 쉬운 처방으로 다섯 가지 생약으로 배합된 계지탕이 있다. 즉, 계피[桂枝, 去皮]·작약·생강 각각 58∼60g, 감초 40g, 대추 12개로 구성된다. 『의학입문』에 기재되어 있는 계지탕의 처방은 계지 11∼12g, 백작약 7.5∼8.0g, 감초 4.0g, 생강 3쪽, 대추 2개로 구성되어 있어, 『상한론』 원방(原方)보다 5분의 1로 줄여 기재되어 있다. ‘도 씨 계지탕’은 본방에 방풍(防風)·천궁·강활·고본(藁本)을 더하여 처방한다고 하였다. 계지탕을 기본으로 하여 황기를 더하면 ‘계지가황기탕’이 되고, 행인·후박을 더하면 ‘계지가후박행자탕(桂枝加厚朴杏子湯)’이 된다. 이 외에도 이 계지탕은 지금도 감기약의 대명사로 그 활용도가 매우 큰데, 계지를 군약으로 하는 처방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계지탕 (桂枝湯) ### 내용: 추위와 찬 기운을 싫어하고 열이 나고 두통과 땀이 나는 비교적 약한 체질의 환자에게 사용한다. 중국의 상한론에는 이 처방이 처음 기록되어 있으며, 의학입문에도 이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은 동의보감에 기록되어 있다. 태양병의 맥상, 증후의 식별과 그 치료법 상 12조에 계지탕이 기재되어 있고, 부인임신병맥증병치제이십은 상한론의 태양병의 맥상, 증후의 식별과 그 치료법 상에 인용되어 있다. 비교적 쉬운 처방으로 다섯 가지 생약으로 배합된 계지탕이 있다. 즉, 계피[桂枝, 去皮]·작약·생강 각각 58∼60g, 감초 40g, 대추 12개로 구성된다. 『의학입문』에 기재되어 있는 계지탕의 처방은 계지 11∼12g, 백작약 7.5∼8.0g, 감초 4.0g, 생강 3쪽, 대추 2개로 구성되어 있어, 『상한론』 원방(原方)보다 5분의 1로 줄여 기재되어 있다. ‘도 씨 계지탕’은 본방에 방풍(防風)·천궁·강활·고본(藁本)을 더하여 처방한다고 하였다. 계지탕을 기본으로 하여 황기를 더하면 ‘계지가황기탕’이 되고, 행인·후박을 더하면 ‘계지가후박행자탕(桂枝加厚朴杏子湯)’이 된다. 이 외에도 이 계지탕은 지금도 감기약의 대명사로 그 활용도가 매우 큰데, 계지를 군약으로 하는 처방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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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0710.txt
농점 (農占)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182
CC BY
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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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점 또는 농가점이라고도 한다. 농경민족이었던 우리 민족은 항상 생활의 안정과 농곡의 풍양주1을 하늘에 기원했는데, 이런 심리에서 연초에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농점이 발달하게 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조에는 우리 민족이 별자리를 보고 점치는 습속이 기록되어 있다. 즉, “새벽에 별자리를 보고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을 미리 알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책 부여조(夫餘條)에는 “군사(軍事)가 있을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쳤다. ”라고 되어 있어 이른 시기에 동물에 의한 점 세법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근대에 열양세시기 ·<NAME>세시기 · 한양 세시기 등 일부 세시기에 농점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농점을 하는 방법은 자연현상, 동식물, 민속놀이, 인위적인 것 등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현상에 의한 점법 천체나 기상의 변화를 관찰하여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 형태로, 달 점〔月占〕 · 좀생이〔昴星, 參星〕보기 주 4 · 우물점 · 용의 밭갈이 · 일기점 등이 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상원 날 달을 보아<NAME>(水旱)을 안다 하니……”라고 한 것처럼<NAME> 날에 달을 보아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 이날 달맞이를 하는데, 서로 먼저 달을 보려는 속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방의 후박주2, 달이 뜰 때의 형체 · 대소 · 용부( : 출렁거림) · 고저 등으로 점을 쳤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이고 희면 장마가 있을 징조이며, 달의 사방이 두터우면 풍년이 들 징조이고 엷으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해석하였다. 별점으로 좀생이보기가 있다. 좀생이를 음력 2월 초엿샛날 주 3 저녁마다 봤다 이것이 달보다 앞서 있으면 풍년이 들고, 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좀생이의 색상으로도 점을 쳤다. 용경, 동네 샘물의 물빛이 약간 뿌옇거나 붉은색이면 흉년이 들고, 색깔이 맑으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곧 태종실록(태종 8년 )과 신증동국여지승람(권 43 ) ·<NAME>세시기 등에는 용의 밭갈이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겨울에 못의 얼음이 갈라지는 형상으로 그해 농작의 풍흉을 짐작하는 점법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즉 세로로 갈라진 얼음이 있으면 풍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로 갈라진 얼음이 있으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용의 밭갈이는 못에 사는 신룡이 밭을 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용의 밭갈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구름 · 안개 · 비 · 우박 · 번개 등 날씨에 따라 장차 수확의 성장, 한발 · 재앙 · 질병 등을 예측하는 점법으로 농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곧 ‘설날 안개가 끼면 악역(惡疫) 주 5가 전염할 징조이다. ’, ‘정월 보름날 구름이 끼면 벼농사에 해롭다. ’, ‘백로 날 전후에 바람이 불면 다 된 농사도 허사가 된다. ’, ‘처서 날 비가 오면 독 안의 곡식도 준다. ’는 말은 오랫동안 농가의 견문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농언(農諺), 곧 농사에 관한 속담이자 점언(占言)인 것이다. 농가에 널리 퍼진 속담 시 십이월 절후풍 염가는 절후에 따른 농사 법과 영농법을 노래한 속담 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농가의 대다수는 날씨와 자연현상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통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슬기롭게 점을 쳤다. 동식물에 의한 점법 동물의 행위나 식물의 성장 등을 관찰하여 풍흉을 점치는 형태로, 소점〔牛占〕 · 새점〔鳥占〕 · 닭 울음점〔鷄鳴占〕 · 용알뜨기〔撈龍卵〕 · 보리 뿌리점〔麥根占〕 등이 있다. ‘소점’은 정월 보름 전후에 소 앞에 곡식이나 음식을 놓고 어느 것을 먼저 먹느냐에 따라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 것으로,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등 삼남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 지방에서는 대보름 전날 소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소가 밥부터 먹으면 풍년, 나물부터 먹으면 흉년이라고 점친다. ‘새점’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의 중남부, 일본 등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점법이거니와, 우리나라의 경우 많지는 않으나 새쫓기를 통하여 풍농을 기원하는 모방 주술적 행위가 보인다. 『동국세시기』상원조에 보면 관동 산간 지방에 있는 풍속에는 여러 아이들이 일제히 온갖 새의 이름을 부르며 쫓는 시늉을 한다. 고되어 있다. 또한 전라도에서는<NAME> 날 이른 아침에 오곡밥을 지어 지붕에 얹어두고 까치가 먼저 먹으면 풍년, 까마귀가 먼저 먹으면 흉년이라고 점치기도 한다. ‘닭 울음 점’은 설날 또는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첫닭이 우는 것을 기다려 그 우는 횟수를 세어 농점을 치는 것으로, 열 번 이상 울면 그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알뜨기’는 정월 첫 용날이나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를 가지고 우물에 가서 서로 다투어 정화수를 떠오는데, 이를 ‘용알 뜬다’ 또는 ‘용알 줍는다’고 한다. 제일 먼저 긷는 사람이 그 해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용을 비와 물을 다루는 영물로 보고 있다. 책력에는 해를 기준으로 삼룡 치수 · 오룡 치수 · 칠룡 치수 · 십일룡치수 등 다양하게 나타나며, 그 해 용의 수를 보고 그 해 비가 얼마나 올지를 점쳐 알 수 있다. 이는 정월 첫 진일주6일 어느 날에 치수를 하느냐에 따라 그 해의 용의 수가 결정되는데, 3마리(4마리)의 용의 수가 적당해야(3, 4마리) 농사가 잘 되고, 용의 수가 아주 적거나 많으면 흉작이 된다고 한다. 이는 용의 수가 아주 적으면 방심하거나 제멋대로 하고, 반대로 너무 많으면 잘 화합할 수가 없고 서로 미루어서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믿는 속신에서 온 것이다. 이런 점법은 소 · 까치 · 닭 · 용 등의 동물을 신성시하고 영물시 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이 밖에 12지 중에서 털이 있는 짐승이 어느 날에 들느냐에 따라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목화가 잘 되는 이유는 세 초에 털 있는 짐승 날이 들기 때문이다. 식물점으로는 보리 뿌리점이 있다. 농가에서는 입춘날에 묵은 보리 뿌리를 캐어 그 해의 풍년을 점치고, 두 가닥이면 평년,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현재도 농가에서 이 보리 뿌리점을 하고 있는데, 겨울 동안 따뜻하여 보리가 잘 자랐으면 뿌리가 많아져 풍년이 들 것이고, 한 해 · 한 발이 심하거나 비료가 부족하면 잘 자라지 않아 흉년이 들 것이므로 현실성이 있는 것이다. 줄다리기, 고싸움놀이, 차전놀이, 석전놀이,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윷놀이 등 민속놀이의 승패에 따라 한 해 풍흉을 점치는 방식이다. 마을과 마을끼리, 또는 한 군이 동서남북으로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는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지는데, 이긴 마을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또 동네마다 암줄과 수줄의 대결, 즉 여자와 남자의 패를 갈라 줄다리기를 하는데, 대개 여자 쪽이 이긴다. 줄다리기는 농경사회에서 널리 퍼진 농경 작업의 한 종류인데, 농경사회에서는 농경 작업 전에 대개 줄다리기를 하여 풍흉을 점쳤다. 정월 대보름을 전후로 하는 전라남도 지방의 고싸움놀이도 줄다리기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놀이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면 칠곡리의 옻돌마을에서는 암인 아랫대 미가 승리하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웃대미를 수로, 아랫대미를 암으로 보아 암인 아랫대 미가 승리하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춘천과 가평 지방에는 차전놀이가 존재하여 그 승패에 따라 풍흉이 결정된다. 외바퀴 수레싸움인 차전놀이는 춘천의 서낭신인 신숭겸을 추모하는 모의전쟁놀이로, 놀이의 승패가 서낭신의 뜻에 달려있다는 점복적 판단이 담겨 있다. 한편 현재 안동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차전놀이(동채싸움)에도 이와 같은 점세 적 기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NAME>세시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변전이라 하여 삼문 밖과 아현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승부를 겨루었는데, 그 승부에 따라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관행이 있었다.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불놀이로 횃불싸움, 쥐불놀이, 달집태우기가 있다. 충청도와 강원도 지방에서는 ‘횃불싸움’의 승패로 풍흉을 점쳤다. ‘쥐불놀이’는 동네 경계의 둑이나 논밭 둑의 마른 풀에 불을 놓아 먼저 끄기를 다투는 놀이인데, 이긴 동네의 쥐가 진 동네로 몰려간다는 속신이 있다. ‘달집태우기(달집사르기)’는 풍년을 기원하고 액을 쫓아버리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화세(火勢)로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동래와 달성 지방은 달집이 타면서 기울어지는 화세로 풍흉을 점친다. 생솔가지와 짚단, 그 밖에 헌 동정, 옷섶, 댕기나 연 등을 쌓아놓은 달집이 잘 타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집이 타서 쓰러지는 쪽의 고장은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횃불싸움,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등<NAME>에서 벌어지는 희화 행사는 우리<NAME>들의 배화 또는 숭화사상을 나타내며,<NAME> 불을 통한 점세 적 관념을 잘 보여준다. 이 밖에 정초나<NAME>에 윷놀이의 승패를 점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수답과 봉답으로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는데, 이긴 쪽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와 같이 민속놀이에 의한 농점은 주로 대보름을 전후로 행해지는데, 이기는 쪽이 풍년이 드는 집단으로 양쪽으로 패를 갈라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이는 민속놀이의 천정적이고 신시적 요소인 동시에 새해의 첫 만월이 상징하는 생명력, 생산력, 풍요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즉, 놀이의 승부는 인간의 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복적 판단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위적 점법 어떤 도구나 기구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자연현상을 조사하거나 실험하여 풍흉을 점치는 형태로, 나무 그림자점〔木影占〕 · 사발재점〔盂灰占〕 · 달불음〔月滋〕 · 집 불음〔戶滋〕 등이 이에 속한다. ‘나무 그림자점’은 대보름날 농가에서 뜰 가운데 한 자가 되는 나무를 세워놓고 자정 때가 되어 달빛이 그 나무에 비치면 그 그림자의 길이를 보아 그 해 풍흉을 점친다. 그림자의 길이가 여덟 치면 대풍이 들고, 세 치면 곡식이 여물지 않는다고 한다. ‘사발재점’은 대보름날 저녁에 농가에서 사발에다 재를 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 씨를 놓은 다음, 그것을 지붕 위에 얹어놓았다가 다음날 새벽에 저절로 떨어진 곡식 종자를 보아 그 해에 그 곡식이 풍년들 것임을 예측하는 농점이다. 키나 절구, 체 등이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이용된다.<NAME> 전날 밤에 미리 씻어둔 키 속에 볏단이나 다른 곡물 다발을 태운 재 가루를 지붕 위에 놓아두는 곳은 함경남도 삼수와 평안북도 영변이다. 다음날 아침 그 재 위에 쌀이 있으면 쌀 풍년, 피가 있으면 피 풍년이라고 한다. 또 전라남도 함평에서는 섣달그믐날 밤에 절구에 멍석을 덮어두었다가 설날 아침에 열어보아 쌀이 있으면 풍년, 조가 있으면 흉년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중국 길림성 연변지역 조선족의 민속조사자료에 의하면, 정월 보름날 체에 곡식을 쳐서 지붕에 올려놓았다가 이튿날 아침에 체를 내려 다시 체질을 하여 좁쌀이 떨어지면 세월이 안 되고, 입쌀(멥쌀)이 떨어지면 세월이 잘 된다고 점치기도 한다. ‘달불음’은 콩을 그 해 달 수대로 표시를 하여 수수깡 속에 넣어 묶어서 우물에 넣었다가 이튿날인 대보름날 새벽에 꺼내어 그 불어난 정도에 따라 그 달의 수해 · 한 해, 평년작을 징험(徵驗) 한다. ‘집 불음’도 방법은 달불음과 마찬가지인데, 다만 콩에 호주(戶主)의 표시를 하여 둔다. 주인이 사는 집은 콩이 많이 불어서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달불음과 유사한 형태인 용경, 즉 용의 밭갈이가 있다. 앞서 언급한 용의 밭갈이는 자연현상을 통한 농점이지만 충청도 용천 지방에서는 인위적인 점법이 성행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정월 14일 밤에 12개월에 해당하는 12개의 그릇에 물을 담아 밖에다 얼린다. 15일 밤에 보면 얼음의 양이 많은 그릇에 해당하는 달은 비가 많이 내리고, 얼음의 양이 적은 달은 비가 적게 내린다고 점친다. 이와 같이 인위적 점법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졌는데, 다른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곡물의 실험에 의한 점법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점법은 어떤 자연현상만을 보고 점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자연현상을 조사하거나 실험하여 과학적인 징후들을 찾아내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농가의 대부분은 나타난 현상의 징후를 선험적 지식만으로 그 결과를 예측하지만, 이와 같이 적극적인 인간 행위로 점쳐보려는 의지도 얼마간 있었다. 월별로 세시에 따른 농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설날은 일 년의 시작이므로 이날의 날씨를 예조 주 7이라고 하여, 설날의 날씨를 보고 일 년을 점쳤다. 곧, ‘1일에 대설(大雪)이면 오곡이 풍작이나 축재(畜災)가 있고 과일이 흉작이다. ’, ‘1일에 비가 와서 질면 농사가 풍년이 든다. ’, ‘1일에 동북풍이 불면 오곡이 풍등하고 서북풍이 불면 대수(大水)가 있다. ’, ‘1일에 폭풍이면 축재가 있고 한발로 채소가 적다. ’, ‘1일부터 5일 사이에 날씨가 흐리면 악역이 전염할 징조이다. ’ 등이다. 일진은 정월 초하루부터 정월 초하루까지 12일 동안을 모일주8과 무모 일주 8로 나눈다. 설날이 모일 때는 오곡이 잘 익어 풍년이 들고, 무모일 때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한 모일 은 털이 있는 짐승 날인데, 모일 이 세수에 들면 목화가 잘 된다고 한다. 전라남도에서는 괭이 할미로 불리는 고양 할미를 괭이 할미라고 하는데, 이 할미는 하늘에서 정월 초하룻날 일찍 내려왔다가 첫 소날에 올라간다고 한다. 이 할미가 지상에 오면 한 말의 곡식을 하루 한 되씩 소비하다가 상천하는데, 곡식을 다 소비하고 상천하면 보리농사가 흉작이 되고 곡식을 소비하지 못하고 상천하면 풍작이 된다고 한다. 한편 경상남도에서는 정월 초 3일 안에 소날이 되어야 보리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날은 보릿고개가 제일 험하다. 고 말 하거니와 보리 뿌리점을 친다. 원단주9의 점세처럼 24절기의 첫 번째인 입춘도 중요시하여 입춘에는 일진의 간을 보아 점복한다. 곧, 산림경제에는 입춘일에 이날이 갑이면 풍숙하고, 병정이면 대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세전에 입춘이 있으면 대풍이라고 했다. 입춘날 아침에 동북풍이 불면 곡식이 대풍하고 서북풍이 불면 홍수가 난다. , 입춘 뒤에 눈이 오면 흉년이 든다. 등이 일기점이다. 충청남도는 이날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 풍년을 점쳤는데, 이때 나오는 곡식이 먼저 풍년이 든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이날 풍농을 기원하는 입춘굿을 하는데, 여염집에서 뽑아온 볏단으로 풍흉을 점친 무당이 있다.<NAME><NAME>은 그 전후를 포함하여 함께 다룬다. 농가에서는 정월 14일부터 대보름인<NAME> 사이에 가장 많은 점세가 발생한다. 달 점, 좀생이 보기, 용의 밭갈기 등은 자연현상에 의한 점법이다. 정월 보름날 안개가 끼면 충해가 많다. , 정월 보름날 아침에 바람이 불면 2월에 영동 바람이 세다. 는 등의 일기점이 전해지고 있다. 소 · 까치 · 닭 · 용 등의 동물 점에는 소점 법이 사용된다. 또한, 줄다리기, 고싸움놀이 · 차전놀이 · 석전 · 횃불싸움 · 쥐불놀이 · 달집태우기 · 윷놀이 등과 같은 민속놀이에 의한 점법과, 나무그림자점 · 사발재점 · 달불음 등과 같은 인위적 방법에 의한 점법도 있다. 이 밖에 농점과 다른 점은 없으나 지역에 따라 금기사항도 전해 온다. 예를 들면, 평안도 지방의 삼농사를 많이 하는 곳에서는 키가 큰 사람이 오는 것을 꺼리고 키가 큰 사람이 오는 것을 환영한다. 키가 작은 사람이 찾아오면 삼이 작아지지만 큰 사람이 찾아오면 삼이 커지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정월 14일 남에게 식수를 주면 김을 매는 날에 폭우가 내려 논두렁이 물에 잠긴다고 하여 농가에서는 식수를 주지 않는다. 이는 정월 13일을 춘절, 14일을 하절, 15일을 추절, 16일을 동절로 본다면 14일은 바로 하절의 전조가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하룻날에는 영동할머니라는 풍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므로 2월 2월은 영동 달 또는 영등 달이라고 부른다. 즉, ‘2월 초하룻날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들고 비가 오면 풍년이 들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 ’, ‘2월 초하룻날이 바람 영동이면 그 해는 바람 부는 날이 많고, 비가 오거나 구름이 끼면 그 해는 비가 흔해서 농사가 잘 된다. ’, ‘2월 12일에 바람이 불고 20일에 비가 오면 그 해 농사가 잘 된다. ’고 하는 등이다. 전라남도에서는 면화를 재배하는 농가에서 2월에 묘일주10이 몇 번 들는지에 따라 면화의 풍작을 점친다. 2월 한 달에 묘일이 세 번 되면 그 해 면화가 잘 된다고 한다. 소말뚝주11 위에 올라가서 자기 모습을 보면 머리나 팔 등이 보이지 않으면 그 해 신수가 좋지 않거나 흉년이 든다고 점치는 곳도 경남지역이다. 이날 콩과 약간의 보리를 섞어 한 되를 볶는데, 한 되가 되면 풍년이 든다고 충청남도, 강원도 등지에서는 이야기한다. 또한 이날 콩을 볶으면 노래기 주 12가 없어진다고 한다. 3월 3월은 복날이 가장 적은 달이다. 이 달의 일기점으로는 ‘삼월 삼짇날 비가 오면 누에치기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 ‘4일에 번개 하면 대풍이다. ’, ‘그믐날 비가 오면 보리가 흉년이다. ’, ‘청명 날 남풍 불면 풍작이다. ’, ‘청명 날 날씨가 약간 어두워야 그 해 농작물에 풍년이 들고, 너무 맑으면<NAME>치 않다. ’는 등이 있다. 4월 4월에 입하가 되면 초여름이 시작되는데 이때의 일기로는 입하일을 쳤다. 초파일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 갑자일에 천둥 치면 해충이 많다. , 1일에 동풍이면 콩에 좋고, 남풍이면 옥수수에 좋다. 5월 5월은 하지의 일기로 점쳤다. 3일에 비가 오면 홍수가 나고, 5월에 망종이 들면 보리농사가 늦고 또 흉년이 든다. , 지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이 밖에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라고 하는데, 이날 비가 오면 풍년이 들 징조라는 뜻이다. 6월 6월은 비교적 점복이 적다. 1일에 비가 오면 쌀이 귀하다. , 6월 아침 천둥 치면 곡가가 오른다. , 6월 20일 해질 때 구름이 한 점 없이 맑으면 그 해 농사는 풍년이다. 또한 유두에는 유두면 주 13 · 수단주 14 · 건단주15 · 연병주16 등을 해먹고 팥죽을 쑤어 먹으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7월 7월은 입추와 칠석 등이 있어 복을 받았다. 농장이 거의 다 지어진 뒤라 농지가 거의 없다. 1일에 비가 오면 쌀이 귀하고 사람에게 재앙이 있다. , 4일에 비가 오면 벼에 쭉정이가 많다. , 백로가 7월 중에 들면 풍년이 든다. 8월 8월에는 추석과 추석이 있다. 농사일이 이미 끝나서 동절기의 일기와 다음 해를 맞이하였다. 곧, 가을에 바람이 없거나 구름이 끼면 명춘에 비가 적고, 1일에 큰 바람이 불면 명년 봄에 비가 적고, 1일에 맑으면 흉년이 든다. , 추석날 맑으면 비가 내리고 흉년이 든다. 9월 9월은 비교적 짧은 점복속을 보인다. 1일에 서리가 내리면 백성들이 손해를 본다. , 초순에 강한 비바람이 불면 금년 여름에 홍수가 난다. 는 등의 일기점이 있다. 산림경제에는 회일주17에 비가 오면 보리농사에 좋고, 15일에 맑으면 겨울에 따뜻하다. 이외에도 경북에서는 시월에 부엉이가 울면 이듬해 풍년이 든다고 한다. 11월 11월 초의 천간 일을 기준으로 다음 해의 한우와 농곡의 성장을 점쳤고, 풍운으로 연사 · 질병 등을 점쳤다. 일기점으로 동짓날 춥면 명년에 호랑이가 많다(해충이 적다), 동짓날 밤에 청명하면 흉년, 동지 전에 결빙하면 대풍, 동지 뒤에 결빙하면 흉년이다. 등이 있다. 또한, 동짓날 일 년 열두 달에 해당하는 팥죽 열두 그릇을 떠놓고, 팥죽에 물기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그 달의 강수량을 점쳐 다음 해 농사의 풍년을 점친다. 달은 가운데가 터져서 갈라지는 그릇으로 가물다고 한다. 이 밖에 용의 밭갈이가 있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인 12월 12월은 송구 영신하는 것과 세밀한 점복속이 전해진다. 동절에 얼음이 두꺼우면 이듬해에 대풍작이다. , 결빙 뒤에 다시 물이 빠지면 이듬해에 가뭄이 든다. , 처마 끝의 고드름이 많고 굵으면 이듬해에 풍년이 든다. 또한 윷놀이로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현상이나 날씨, 동식물의 정령 등이 인간생활과 교섭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여기에서 원시 신앙이 생겨났으며, 미래의 운명과 행복한 삶을 위해 점복 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농경민에게 있어서 풍작에 대한 염원이 가장 큰 것이었고, 이를 점쳐보려 했던 점풍은 세시 풍속으로 정착하여 생활화되기에 이르렀다. 풍수나 점복가가 점치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경험이 많은 노인과 예로부터 전승되는 농가의 지식, 일관과 당년의 책력에 기록된 문자와 간지 등에 의해 이러한 농점이 점쳐졌다. 정초부터<NAME>과 동절에 농점을 주로 했고 파종이 끝난 뒤에는 별로 농점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농경의례는 정월의 기풍 의례, 5월과 7월 사이의 성장 의례, 9월과 10월의 수확 의례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에서 기풍 의례가 가장 큰 비중을<NAME>다. 정월의 농경의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농작물의 풍작을 기원하는 순수한 예축과 그 해의 수확을 미리 점쳐보려는 점풍을 위한 것이 있다. 특히<NAME>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신년의 첫 만월이 상징하는 생명력, 생산력, 풍요성 등과 관련되어 있다. 해 · 달 · 별 이나 비 · 바람 등 자연현상과 동식물, 민속놀이인 줄다리기 · 차전놀이 · 윷놀이 등의 승부로 농 점하였으며, 인공적인 것으로는 나무그림자점 · 달불음 등이 있었다. 풍 · 흉 · 수해 · 곡귀 · 질병 · 두태 · 맥작 · 지마 · 양잠 · 육축 · 화과 · 황화 등이 그 대상이다. 내용은 연초부터 춘하까지, 즉 추수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일 년 일과 질병 · 풍흉 등이 큰 관심사였고, 추수가 끝난 다음 해보다 다음 해의 연사, 특히 춘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농점 (農占) ### 내용: 농사점 또는 농가점이라고도 한다. 농경민족이었던 우리 민족은 항상 생활의 안정과 농곡의 풍양주1을 하늘에 기원했는데, 이런 심리에서 연초에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농점이 발달하게 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조에는 우리 민족이 별자리를 보고 점치는 습속이 기록되어 있다. 즉, “새벽에 별자리를 보고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을 미리 알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책 부여조(夫餘條)에는 “군사(軍事)가 있을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쳤다. ”라고 되어 있어 이른 시기에 동물에 의한 점 세법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근대에 열양세시기 ·<NAME>세시기 · 한양 세시기 등 일부 세시기에 농점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농점을 하는 방법은 자연현상, 동식물, 민속놀이, 인위적인 것 등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현상에 의한 점법 천체나 기상의 변화를 관찰하여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 형태로, 달 점〔月占〕 · 좀생이〔昴星, 參星〕보기 주 4 · 우물점 · 용의 밭갈이 · 일기점 등이 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상원 날 달을 보아<NAME>(水旱)을 안다 하니……”라고 한 것처럼<NAME> 날에 달을 보아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 이날 달맞이를 하는데, 서로 먼저 달을 보려는 속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방의 후박주2, 달이 뜰 때의 형체 · 대소 · 용부( : 출렁거림) · 고저 등으로 점을 쳤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이고 희면 장마가 있을 징조이며, 달의 사방이 두터우면 풍년이 들 징조이고 엷으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해석하였다. 별점으로 좀생이보기가 있다. 좀생이를 음력 2월 초엿샛날 주 3 저녁마다 봤다 이것이 달보다 앞서 있으면 풍년이 들고, 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좀생이의 색상으로도 점을 쳤다. 용경, 동네 샘물의 물빛이 약간 뿌옇거나 붉은색이면 흉년이 들고, 색깔이 맑으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곧 태종실록(태종 8년 )과 신증동국여지승람(권 43 ) ·<NAME>세시기 등에는 용의 밭갈이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겨울에 못의 얼음이 갈라지는 형상으로 그해 농작의 풍흉을 짐작하는 점법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즉 세로로 갈라진 얼음이 있으면 풍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로 갈라진 얼음이 있으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용의 밭갈이는 못에 사는 신룡이 밭을 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용의 밭갈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구름 · 안개 · 비 · 우박 · 번개 등 날씨에 따라 장차 수확의 성장, 한발 · 재앙 · 질병 등을 예측하는 점법으로 농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곧 ‘설날 안개가 끼면 악역(惡疫) 주 5가 전염할 징조이다. ’, ‘정월 보름날 구름이 끼면 벼농사에 해롭다. ’, ‘백로 날 전후에 바람이 불면 다 된 농사도 허사가 된다. ’, ‘처서 날 비가 오면 독 안의 곡식도 준다. ’는 말은 오랫동안 농가의 견문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농언(農諺), 곧 농사에 관한 속담이자 점언(占言)인 것이다. 농가에 널리 퍼진 속담 시 십이월 절후풍 염가는 절후에 따른 농사 법과 영농법을 노래한 속담 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농가의 대다수는 날씨와 자연현상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통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슬기롭게 점을 쳤다. 동식물에 의한 점법 동물의 행위나 식물의 성장 등을 관찰하여 풍흉을 점치는 형태로, 소점〔牛占〕 · 새점〔鳥占〕 · 닭 울음점〔鷄鳴占〕 · 용알뜨기〔撈龍卵〕 · 보리 뿌리점〔麥根占〕 등이 있다. ‘소점’은 정월 보름 전후에 소 앞에 곡식이나 음식을 놓고 어느 것을 먼저 먹느냐에 따라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 것으로,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등 삼남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 지방에서는 대보름 전날 소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소가 밥부터 먹으면 풍년, 나물부터 먹으면 흉년이라고 점친다. ‘새점’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의 중남부, 일본 등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점법이거니와, 우리나라의 경우 많지는 않으나 새쫓기를 통하여 풍농을 기원하는 모방 주술적 행위가 보인다. 『동국세시기』상원조에 보면 관동 산간 지방에 있는 풍속에는 여러 아이들이 일제히 온갖 새의 이름을 부르며 쫓는 시늉을 한다. 고되어 있다. 또한 전라도에서는<NAME> 날 이른 아침에 오곡밥을 지어 지붕에 얹어두고 까치가 먼저 먹으면 풍년, 까마귀가 먼저 먹으면 흉년이라고 점치기도 한다. ‘닭 울음 점’은 설날 또는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첫닭이 우는 것을 기다려 그 우는 횟수를 세어 농점을 치는 것으로, 열 번 이상 울면 그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알뜨기’는 정월 첫 용날이나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를 가지고 우물에 가서 서로 다투어 정화수를 떠오는데, 이를 ‘용알 뜬다’ 또는 ‘용알 줍는다’고 한다. 제일 먼저 긷는 사람이 그 해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용을 비와 물을 다루는 영물로 보고 있다. 책력에는 해를 기준으로 삼룡 치수 · 오룡 치수 · 칠룡 치수 · 십일룡치수 등 다양하게 나타나며, 그 해 용의 수를 보고 그 해 비가 얼마나 올지를 점쳐 알 수 있다. 이는 정월 첫 진일주6일 어느 날에 치수를 하느냐에 따라 그 해의 용의 수가 결정되는데, 3마리(4마리)의 용의 수가 적당해야(3, 4마리) 농사가 잘 되고, 용의 수가 아주 적거나 많으면 흉작이 된다고 한다. 이는 용의 수가 아주 적으면 방심하거나 제멋대로 하고, 반대로 너무 많으면 잘 화합할 수가 없고 서로 미루어서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믿는 속신에서 온 것이다. 이런 점법은 소 · 까치 · 닭 · 용 등의 동물을 신성시하고 영물시 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이 밖에 12지 중에서 털이 있는 짐승이 어느 날에 들느냐에 따라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목화가 잘 되는 이유는 세 초에 털 있는 짐승 날이 들기 때문이다. 식물점으로는 보리 뿌리점이 있다. 농가에서는 입춘날에 묵은 보리 뿌리를 캐어 그 해의 풍년을 점치고, 두 가닥이면 평년,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현재도 농가에서 이 보리 뿌리점을 하고 있는데, 겨울 동안 따뜻하여 보리가 잘 자랐으면 뿌리가 많아져 풍년이 들 것이고, 한 해 · 한 발이 심하거나 비료가 부족하면 잘 자라지 않아 흉년이 들 것이므로 현실성이 있는 것이다. 줄다리기, 고싸움놀이, 차전놀이, 석전놀이,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윷놀이 등 민속놀이의 승패에 따라 한 해 풍흉을 점치는 방식이다. 마을과 마을끼리, 또는 한 군이 동서남북으로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는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지는데, 이긴 마을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또 동네마다 암줄과 수줄의 대결, 즉 여자와 남자의 패를 갈라 줄다리기를 하는데, 대개 여자 쪽이 이긴다. 줄다리기는 농경사회에서 널리 퍼진 농경 작업의 한 종류인데, 농경사회에서는 농경 작업 전에 대개 줄다리기를 하여 풍흉을 점쳤다. 정월 대보름을 전후로 하는 전라남도 지방의 고싸움놀이도 줄다리기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놀이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면 칠곡리의 옻돌마을에서는 암인 아랫대 미가 승리하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웃대미를 수로, 아랫대미를 암으로 보아 암인 아랫대 미가 승리하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춘천과 가평 지방에는 차전놀이가 존재하여 그 승패에 따라 풍흉이 결정된다. 외바퀴 수레싸움인 차전놀이는 춘천의 서낭신인 신숭겸을 추모하는 모의전쟁놀이로, 놀이의 승패가 서낭신의 뜻에 달려있다는 점복적 판단이 담겨 있다. 한편 현재 안동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차전놀이(동채싸움)에도 이와 같은 점세 적 기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NAME>세시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변전이라 하여 삼문 밖과 아현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승부를 겨루었는데, 그 승부에 따라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관행이 있었다.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불놀이로 횃불싸움, 쥐불놀이, 달집태우기가 있다. 충청도와 강원도 지방에서는 ‘횃불싸움’의 승패로 풍흉을 점쳤다. ‘쥐불놀이’는 동네 경계의 둑이나 논밭 둑의 마른 풀에 불을 놓아 먼저 끄기를 다투는 놀이인데, 이긴 동네의 쥐가 진 동네로 몰려간다는 속신이 있다. ‘달집태우기(달집사르기)’는 풍년을 기원하고 액을 쫓아버리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화세(火勢)로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동래와 달성 지방은 달집이 타면서 기울어지는 화세로 풍흉을 점친다. 생솔가지와 짚단, 그 밖에 헌 동정, 옷섶, 댕기나 연 등을 쌓아놓은 달집이 잘 타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집이 타서 쓰러지는 쪽의 고장은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횃불싸움,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등<NAME>에서 벌어지는 희화 행사는 우리<NAME>들의 배화 또는 숭화사상을 나타내며,<NAME> 불을 통한 점세 적 관념을 잘 보여준다. 이 밖에 정초나<NAME>에 윷놀이의 승패를 점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수답과 봉답으로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는데, 이긴 쪽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와 같이 민속놀이에 의한 농점은 주로 대보름을 전후로 행해지는데, 이기는 쪽이 풍년이 드는 집단으로 양쪽으로 패를 갈라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이는 민속놀이의 천정적이고 신시적 요소인 동시에 새해의 첫 만월이 상징하는 생명력, 생산력, 풍요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즉, 놀이의 승부는 인간의 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복적 판단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위적 점법 어떤 도구나 기구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자연현상을 조사하거나 실험하여 풍흉을 점치는 형태로, 나무 그림자점〔木影占〕 · 사발재점〔盂灰占〕 · 달불음〔月滋〕 · 집 불음〔戶滋〕 등이 이에 속한다. ‘나무 그림자점’은 대보름날 농가에서 뜰 가운데 한 자가 되는 나무를 세워놓고 자정 때가 되어 달빛이 그 나무에 비치면 그 그림자의 길이를 보아 그 해 풍흉을 점친다. 그림자의 길이가 여덟 치면 대풍이 들고, 세 치면 곡식이 여물지 않는다고 한다. ‘사발재점’은 대보름날 저녁에 농가에서 사발에다 재를 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 씨를 놓은 다음, 그것을 지붕 위에 얹어놓았다가 다음날 새벽에 저절로 떨어진 곡식 종자를 보아 그 해에 그 곡식이 풍년들 것임을 예측하는 농점이다. 키나 절구, 체 등이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이용된다.<NAME> 전날 밤에 미리 씻어둔 키 속에 볏단이나 다른 곡물 다발을 태운 재 가루를 지붕 위에 놓아두는 곳은 함경남도 삼수와 평안북도 영변이다. 다음날 아침 그 재 위에 쌀이 있으면 쌀 풍년, 피가 있으면 피 풍년이라고 한다. 또 전라남도 함평에서는 섣달그믐날 밤에 절구에 멍석을 덮어두었다가 설날 아침에 열어보아 쌀이 있으면 풍년, 조가 있으면 흉년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중국 길림성 연변지역 조선족의 민속조사자료에 의하면, 정월 보름날 체에 곡식을 쳐서 지붕에 올려놓았다가 이튿날 아침에 체를 내려 다시 체질을 하여 좁쌀이 떨어지면 세월이 안 되고, 입쌀(멥쌀)이 떨어지면 세월이 잘 된다고 점치기도 한다. ‘달불음’은 콩을 그 해 달 수대로 표시를 하여 수수깡 속에 넣어 묶어서 우물에 넣었다가 이튿날인 대보름날 새벽에 꺼내어 그 불어난 정도에 따라 그 달의 수해 · 한 해, 평년작을 징험(徵驗) 한다. ‘집 불음’도 방법은 달불음과 마찬가지인데, 다만 콩에 호주(戶主)의 표시를 하여 둔다. 주인이 사는 집은 콩이 많이 불어서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달불음과 유사한 형태인 용경, 즉 용의 밭갈이가 있다. 앞서 언급한 용의 밭갈이는 자연현상을 통한 농점이지만 충청도 용천 지방에서는 인위적인 점법이 성행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정월 14일 밤에 12개월에 해당하는 12개의 그릇에 물을 담아 밖에다 얼린다. 15일 밤에 보면 얼음의 양이 많은 그릇에 해당하는 달은 비가 많이 내리고, 얼음의 양이 적은 달은 비가 적게 내린다고 점친다. 이와 같이 인위적 점법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졌는데, 다른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곡물의 실험에 의한 점법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점법은 어떤 자연현상만을 보고 점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자연현상을 조사하거나 실험하여 과학적인 징후들을 찾아내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농가의 대부분은 나타난 현상의 징후를 선험적 지식만으로 그 결과를 예측하지만, 이와 같이 적극적인 인간 행위로 점쳐보려는 의지도 얼마간 있었다. 월별로 세시에 따른 농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설날은 일 년의 시작이므로 이날의 날씨를 예조 주 7이라고 하여, 설날의 날씨를 보고 일 년을 점쳤다. 곧, ‘1일에 대설(大雪)이면 오곡이 풍작이나 축재(畜災)가 있고 과일이 흉작이다. ’, ‘1일에 비가 와서 질면 농사가 풍년이 든다. ’, ‘1일에 동북풍이 불면 오곡이 풍등하고 서북풍이 불면 대수(大水)가 있다. ’, ‘1일에 폭풍이면 축재가 있고 한발로 채소가 적다. ’, ‘1일부터 5일 사이에 날씨가 흐리면 악역이 전염할 징조이다. ’ 등이다. 일진은 정월 초하루부터 정월 초하루까지 12일 동안을 모일주8과 무모 일주 8로 나눈다. 설날이 모일 때는 오곡이 잘 익어 풍년이 들고, 무모일 때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한 모일 은 털이 있는 짐승 날인데, 모일 이 세수에 들면 목화가 잘 된다고 한다. 전라남도에서는 괭이 할미로 불리는 고양 할미를 괭이 할미라고 하는데, 이 할미는 하늘에서 정월 초하룻날 일찍 내려왔다가 첫 소날에 올라간다고 한다. 이 할미가 지상에 오면 한 말의 곡식을 하루 한 되씩 소비하다가 상천하는데, 곡식을 다 소비하고 상천하면 보리농사가 흉작이 되고 곡식을 소비하지 못하고 상천하면 풍작이 된다고 한다. 한편 경상남도에서는 정월 초 3일 안에 소날이 되어야 보리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날은 보릿고개가 제일 험하다. 고 말 하거니와 보리 뿌리점을 친다. 원단주9의 점세처럼 24절기의 첫 번째인 입춘도 중요시하여 입춘에는 일진의 간을 보아 점복한다. 곧, 산림경제에는 입춘일에 이날이 갑이면 풍숙하고, 병정이면 대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세전에 입춘이 있으면 대풍이라고 했다. 입춘날 아침에 동북풍이 불면 곡식이 대풍하고 서북풍이 불면 홍수가 난다. , 입춘 뒤에 눈이 오면 흉년이 든다. 등이 일기점이다. 충청남도는 이날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 풍년을 점쳤는데, 이때 나오는 곡식이 먼저 풍년이 든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이날 풍농을 기원하는 입춘굿을 하는데, 여염집에서 뽑아온 볏단으로 풍흉을 점친 무당이 있다.<NAME><NAME>은 그 전후를 포함하여 함께 다룬다. 농가에서는 정월 14일부터 대보름인<NAME> 사이에 가장 많은 점세가 발생한다. 달 점, 좀생이 보기, 용의 밭갈기 등은 자연현상에 의한 점법이다. 정월 보름날 안개가 끼면 충해가 많다. , 정월 보름날 아침에 바람이 불면 2월에 영동 바람이 세다. 는 등의 일기점이 전해지고 있다. 소 · 까치 · 닭 · 용 등의 동물 점에는 소점 법이 사용된다. 또한, 줄다리기, 고싸움놀이 · 차전놀이 · 석전 · 횃불싸움 · 쥐불놀이 · 달집태우기 · 윷놀이 등과 같은 민속놀이에 의한 점법과, 나무그림자점 · 사발재점 · 달불음 등과 같은 인위적 방법에 의한 점법도 있다. 이 밖에 농점과 다른 점은 없으나 지역에 따라 금기사항도 전해 온다. 예를 들면, 평안도 지방의 삼농사를 많이 하는 곳에서는 키가 큰 사람이 오는 것을 꺼리고 키가 큰 사람이 오는 것을 환영한다. 키가 작은 사람이 찾아오면 삼이 작아지지만 큰 사람이 찾아오면 삼이 커지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정월 14일 남에게 식수를 주면 김을 매는 날에 폭우가 내려 논두렁이 물에 잠긴다고 하여 농가에서는 식수를 주지 않는다. 이는 정월 13일을 춘절, 14일을 하절, 15일을 추절, 16일을 동절로 본다면 14일은 바로 하절의 전조가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하룻날에는 영동할머니라는 풍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므로 2월 2월은 영동 달 또는 영등 달이라고 부른다. 즉, ‘2월 초하룻날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들고 비가 오면 풍년이 들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 ’, ‘2월 초하룻날이 바람 영동이면 그 해는 바람 부는 날이 많고, 비가 오거나 구름이 끼면 그 해는 비가 흔해서 농사가 잘 된다. ’, ‘2월 12일에 바람이 불고 20일에 비가 오면 그 해 농사가 잘 된다. ’고 하는 등이다. 전라남도에서는 면화를 재배하는 농가에서 2월에 묘일주10이 몇 번 들는지에 따라 면화의 풍작을 점친다. 2월 한 달에 묘일이 세 번 되면 그 해 면화가 잘 된다고 한다. 소말뚝주11 위에 올라가서 자기 모습을 보면 머리나 팔 등이 보이지 않으면 그 해 신수가 좋지 않거나 흉년이 든다고 점치는 곳도 경남지역이다. 이날 콩과 약간의 보리를 섞어 한 되를 볶는데, 한 되가 되면 풍년이 든다고 충청남도, 강원도 등지에서는 이야기한다. 또한 이날 콩을 볶으면 노래기 주 12가 없어진다고 한다. 3월 3월은 복날이 가장 적은 달이다. 이 달의 일기점으로는 ‘삼월 삼짇날 비가 오면 누에치기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 ‘4일에 번개 하면 대풍이다. ’, ‘그믐날 비가 오면 보리가 흉년이다. ’, ‘청명 날 남풍 불면 풍작이다. ’, ‘청명 날 날씨가 약간 어두워야 그 해 농작물에 풍년이 들고, 너무 맑으면<NAME>치 않다. ’는 등이 있다. 4월 4월에 입하가 되면 초여름이 시작되는데 이때의 일기로는 입하일을 쳤다. 초파일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 갑자일에 천둥 치면 해충이 많다. , 1일에 동풍이면 콩에 좋고, 남풍이면 옥수수에 좋다. 5월 5월은 하지의 일기로 점쳤다. 3일에 비가 오면 홍수가 나고, 5월에 망종이 들면 보리농사가 늦고 또 흉년이 든다. , 지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이 밖에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라고 하는데, 이날 비가 오면 풍년이 들 징조라는 뜻이다. 6월 6월은 비교적 점복이 적다. 1일에 비가 오면 쌀이 귀하다. , 6월 아침 천둥 치면 곡가가 오른다. , 6월 20일 해질 때 구름이 한 점 없이 맑으면 그 해 농사는 풍년이다. 또한 유두에는 유두면 주 13 · 수단주 14 · 건단주15 · 연병주16 등을 해먹고 팥죽을 쑤어 먹으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7월 7월은 입추와 칠석 등이 있어 복을 받았다. 농장이 거의 다 지어진 뒤라 농지가 거의 없다. 1일에 비가 오면 쌀이 귀하고 사람에게 재앙이 있다. , 4일에 비가 오면 벼에 쭉정이가 많다. , 백로가 7월 중에 들면 풍년이 든다. 8월 8월에는 추석과 추석이 있다. 농사일이 이미 끝나서 동절기의 일기와 다음 해를 맞이하였다. 곧, 가을에 바람이 없거나 구름이 끼면 명춘에 비가 적고, 1일에 큰 바람이 불면 명년 봄에 비가 적고, 1일에 맑으면 흉년이 든다. , 추석날 맑으면 비가 내리고 흉년이 든다. 9월 9월은 비교적 짧은 점복속을 보인다. 1일에 서리가 내리면 백성들이 손해를 본다. , 초순에 강한 비바람이 불면 금년 여름에 홍수가 난다. 는 등의 일기점이 있다. 산림경제에는 회일주17에 비가 오면 보리농사에 좋고, 15일에 맑으면 겨울에 따뜻하다. 이외에도 경북에서는 시월에 부엉이가 울면 이듬해 풍년이 든다고 한다. 11월 11월 초의 천간 일을 기준으로 다음 해의 한우와 농곡의 성장을 점쳤고, 풍운으로 연사 · 질병 등을 점쳤다. 일기점으로 동짓날 춥면 명년에 호랑이가 많다(해충이 적다), 동짓날 밤에 청명하면 흉년, 동지 전에 결빙하면 대풍, 동지 뒤에 결빙하면 흉년이다. 등이 있다. 또한, 동짓날 일 년 열두 달에 해당하는 팥죽 열두 그릇을 떠놓고, 팥죽에 물기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그 달의 강수량을 점쳐 다음 해 농사의 풍년을 점친다. 달은 가운데가 터져서 갈라지는 그릇으로 가물다고 한다. 이 밖에 용의 밭갈이가 있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인 12월 12월은 송구 영신하는 것과 세밀한 점복속이 전해진다. 동절에 얼음이 두꺼우면 이듬해에 대풍작이다. , 결빙 뒤에 다시 물이 빠지면 이듬해에 가뭄이 든다. , 처마 끝의 고드름이 많고 굵으면 이듬해에 풍년이 든다. 또한 윷놀이로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현상이나 날씨, 동식물의 정령 등이 인간생활과 교섭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여기에서 원시 신앙이 생겨났으며, 미래의 운명과 행복한 삶을 위해 점복 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농경민에게 있어서 풍작에 대한 염원이 가장 큰 것이었고, 이를 점쳐보려 했던 점풍은 세시 풍속으로 정착하여 생활화되기에 이르렀다. 풍수나 점복가가 점치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경험이 많은 노인과 예로부터 전승되는 농가의 지식, 일관과 당년의 책력에 기록된 문자와 간지 등에 의해 이러한 농점이 점쳐졌다. 정초부터<NAME>과 동절에 농점을 주로 했고 파종이 끝난 뒤에는 별로 농점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농경의례는 정월의 기풍 의례, 5월과 7월 사이의 성장 의례, 9월과 10월의 수확 의례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에서 기풍 의례가 가장 큰 비중을<NAME>다. 정월의 농경의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농작물의 풍작을 기원하는 순수한 예축과 그 해의 수확을 미리 점쳐보려는 점풍을 위한 것이 있다. 특히<NAME>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신년의 첫 만월이 상징하는 생명력, 생산력, 풍요성 등과 관련되어 있다. 해 · 달 · 별 이나 비 · 바람 등 자연현상과 동식물, 민속놀이인 줄다리기 · 차전놀이 · 윷놀이 등의 승부로 농 점하였으며, 인공적인 것으로는 나무그림자점 · 달불음 등이 있었다. 풍 · 흉 · 수해 · 곡귀 · 질병 · 두태 · 맥작 · 지마 · 양잠 · 육축 · 화과 · 황화 등이 그 대상이다. 내용은 연초부터 춘하까지, 즉 추수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일 년 일과 질병 · 풍흉 등이 큰 관심사였고, 추수가 끝난 다음 해보다 다음 해의 연사, 특히 춘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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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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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맹웅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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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의 형태와 규격은 침혈을 자극하는 수단에 따라 다양하다. 침은 석기시대에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폄 석은 돌이나 옥을 갈아서 송곳이나 쐐기 모양으로 작게 만든 것으로, 가장 오래된 침구이다. 이러한 폄 석은 피부를 자극하거나 얕게 찔러 피를 내거나 고름을 짜내는 데 쓰였다. 고대 원시사회에서 여러 가지 풍습통이나 창상으로 고생하였을 것을 야산이나 습기가 많은 곳에 거주하면서 상상할 수 있다. 황제내경 침은 청동기시대로 오면서 가늘어져 미침이 생겼다. 이 법방 의론(異法方宜論)에 의하면, “남방은 날씨가 따뜻하여 만물이 잘 자라며 많은 저습지가 있어 안개와 이슬이 많은 곳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신 과일과 발효시킨 음식을 좋아하여 피부가 곱고 붉으며, 저려오는 병痺病이 많아서 그 치료는 마땅히 미침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9침(九鍼)은 남방에서 전하여 온 것이다. ”라고 하여 미침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9침은 인체의 기능장애인 비병(:몸에 마비가 오는 병)을 치료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기능적 병변을 치료하는 데 이용된다. 병변은 일정한 부위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체의 피부·근육·혈맥·관절·구규(九竅 인체에 있는 아홉 개의 구멍) 등 다양하게 발생하며, 병사(病邪 질병의 요인)의 깊고 얕음의 차이에 따라 침의 형태도 아홉 가지로 나누어졌고 종류에 따라 질병의 특성에 상응하여 각자의 기능 7을 가지게 되었다.참침·원침·시침·봉침·피침·호침·장침·대침·원리침 등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침요 법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외과와 안마에도 9침이 사용되었다. 고대 동양인들이 9라는 숫자를 가장 크고 완벽한 숫자로 여겼기 때문에 9침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천지 간의 만물을 나타내는 삼재는 이 3에 3을 곱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완벽을 의미한다. 대략적인 9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참 침은 피부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9침은 각각 천지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아홉 가지 요소 중 하나에 배속되는데 참 침은 그중에서 하늘天을 상징하고, 하늘은 사람의 오장(五臟)에서 폐(肺)와 상응하고 인체의 피모(皮毛)는 폐와 동류(同類)이기 때문에 이침은 피부를 얕게 찔러서 사혈(瀉血) 하는 데 쓰이며, 머리와 몸에 고열이 있을 때 사용한다. 두건[]을 닮아 침의 상부는 크고 넓으며 끝은 예리하여 깊이 찌르기에는 1촌 6푼의 길이가 적당하다. 또는 전두침이라고도 하는데, 화살촉과 닮아서 생긴 것이다. 이침은 주로 피부의 사기를 빼내어 정기를 안정시키는 데 쓰이는데, 너무 깊이 찌르면 인체의 양기가 상한다. 원침은 기육(:살)에 생긴 기체를 치료하는 데 쓰인다. 땅은 땅[]을 뜻하고 땅은 인체의 기육에 따라 체표를 문지르거나 기육에 생긴 기체를 치료하는 데 쓰인다. 달걀형처럼 둥글고 가늘며 길이는 1촌 6푼이다. 사기가 기육에 있을 때 주로 사용하는 원침은 침 끝이 둥글기 때문에 기육의 정기를 해치지 않는다. 혈맥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시침이 사용된다. 시침은 사람[]을 상징하며, 혈맥에 있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이침이다. 길이는 3촌 5푼으로 기장[]을 닮아 몸체[]가 길고, 침 끝이 약간 둥글고 무디어 혈맥의 사기만 제거하고 인체의 정기를 상하지 않게 만든 침이다. 4) 이침은 보법에 쓰이지만 너무 깊이 찔러 혈맥 내부까지 들어가면 사기는 제거된다 해도 기육이 상하고 정기가 상한다. 봉침은 사혈을 할 때 쓰는 것으로 일명 삼릉침이라고도 한다. 사계절을 상징한 봉침은 사계절에 여러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생긴 혹[]이나 악창(:고치기 힘든 부스럼)에 사용한다. 5촌 6푼으로 3면에 날이 서 있어서 삼릉침이라 불리며, 열병과 외과 질환을 낫게 하고 사혈하기에 가장 적당한 길이다. 피침은 옹종(:종기) 고름을 제거하는 데 쓰인다. 피침은 오음을 상징하며 음·양, 한·열과 같은 상반되는 두 기운이 서로 뒤섞여 생겨난 옹종에 사용한다. 6촌의 길이에 2푼 반의 너비로 옹종 등을 째고 고름을 짜는 데 유용하며, 칼[]을 닮아 검침이라고도 한다. 호침은 비병과 통증 치료에 쓰인다. 호침은 별七星을 상징하고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七竅에 해당하며, 통증과 비병에 유용하다. 길이는 1촌 6푼이나 현재 사용하는 호침은 5푼(약 1.5㎝)에서 4∼5촌(13∼17㎝)까지 여러 종류가 있으며, 지름에 따라 주로 34호(0.22㎜)·32호(0.25㎜)·30호(0.32㎜)·28호(0.38㎜)·26호(0.45㎜) 등이 있다. 정기가 약한 사람의 비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로 호침은 모기나 등에의 입처럼 가늘어 큰 자극 없이 찔러서 오랫동안 놓아 둘 수 있어 좋다. 호침은 9침 가운데 가장 주된 침으로 그 활용 범위 또한 넓어서 현재 사용하는 침 치료(鍼治療)를 대표한다. ≪상한론 傷寒論≫에 기록되어 있는 ‘온침(溫鍼)’이라는 것도 사실은 호침의 꼬리 부분에 쑥을 얹어 태우는 방법으로 침과 뜸을 결합한 것이며, 장침과 대침도 호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길이가 좀 더 길뿐이다. ⑦장침은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구침의 일종으로 큰 관절大關節 속에 있는 비병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장침은 바람風을 상징하고, 사람의 사지에 있는 여덟 개의 큰 관절에 팔방에서 불어오는 좋지 못한 바람에 의하여 발생한 비병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길이는 7촌으로 인체의 깊숙한 곳에 있는 비증(痺症 마비 증세)에 적절하다. 관절질환은 8 대침으로 모두 고친다. 9분야[]를 상징하는 대침은 관절 부위에 머물러 있는 병을 치료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관절 속에 있는 물[]을 빼내는 데 쓰이는 길이는 4촌이다. 황제내경에 나오는 수자라는 것도 호침보다 긴 것으로, 불을 붙여 놓는 화침·번침에도 쓰이고 있다. 화침은 일부 외과 질환과 풍습성 관절염의 치료에 쓰인다. 9 원리침은 비병과 옹저(:종기) 치료에 쓰인다. 인체가 허약한 틈을 타서 경맥에 들어온 사기에 의해 생긴 비병에 사용하는 침은 1촌 6푼으로 가늘고 강하게 만들었다. 주로 옹저와 비병, 그리고 역절풍(뼈마디가 붓고 펴지 못하는 병) 등을 치료한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완성한 9침은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금침·은침·마함철침·합금침 등으로 다양해졌다. 현재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침구는 대부분 단단하고 녹이 슬지 않는다. 예전 폄석(단순한 쐐기 모양)에서부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침구에 이르기까지 형태나 사용방법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1 피내침은 피하에 매몰시켜 놓을 수 있는 작은 침이다. 2 전침은 침자극과 전기 자극을 결합하여 발전된 침이다. 3 수침은 침과 약물 작용을 함께 사용한 침이다. 4 피부 침은 일명 소아침으로 작은 침 5∼8개를 동시에 찌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침이다. 또한 이침·면침·비침·두침·수침·족침 등이 개발되어 그 쓰임이 다양해지고 있다. 한편, 일반적인 침의 구조는 다섯 부분으로 분류된다. 침 끝[, 또는 ]은 침의 대소 장단을 나타내며, 침몸[, 또는 ]은 침끝과 침자루 사이를 나타낸다. 침몸과 침자루를 연결하는 부분인 침뿌리는 침몸과 침자루를 연결하는 부분이고, 침자루는 침자루의 끝으로 온침을 놓을 때 쑥을 붙이는 부분이나, 대부분의 침에서는 이 부위가 없다. 침은 총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침끝·침몸·침뿌리·침자루·침꼬리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침 (鍼) ### 내용: 침의 형태와 규격은 침혈을 자극하는 수단에 따라 다양하다. 침은 석기시대에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폄 석은 돌이나 옥을 갈아서 송곳이나 쐐기 모양으로 작게 만든 것으로, 가장 오래된 침구이다. 이러한 폄 석은 피부를 자극하거나 얕게 찔러 피를 내거나 고름을 짜내는 데 쓰였다. 고대 원시사회에서 여러 가지 풍습통이나 창상으로 고생하였을 것을 야산이나 습기가 많은 곳에 거주하면서 상상할 수 있다. 황제내경 침은 청동기시대로 오면서 가늘어져 미침이 생겼다. 이 법방 의론(異法方宜論)에 의하면, “남방은 날씨가 따뜻하여 만물이 잘 자라며 많은 저습지가 있어 안개와 이슬이 많은 곳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신 과일과 발효시킨 음식을 좋아하여 피부가 곱고 붉으며, 저려오는 병痺病이 많아서 그 치료는 마땅히 미침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9침(九鍼)은 남방에서 전하여 온 것이다. ”라고 하여 미침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9침은 인체의 기능장애인 비병(:몸에 마비가 오는 병)을 치료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기능적 병변을 치료하는 데 이용된다. 병변은 일정한 부위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체의 피부·근육·혈맥·관절·구규(九竅 인체에 있는 아홉 개의 구멍) 등 다양하게 발생하며, 병사(病邪 질병의 요인)의 깊고 얕음의 차이에 따라 침의 형태도 아홉 가지로 나누어졌고 종류에 따라 질병의 특성에 상응하여 각자의 기능 7을 가지게 되었다.참침·원침·시침·봉침·피침·호침·장침·대침·원리침 등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침요 법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외과와 안마에도 9침이 사용되었다. 고대 동양인들이 9라는 숫자를 가장 크고 완벽한 숫자로 여겼기 때문에 9침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천지 간의 만물을 나타내는 삼재는 이 3에 3을 곱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완벽을 의미한다. 대략적인 9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참 침은 피부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9침은 각각 천지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아홉 가지 요소 중 하나에 배속되는데 참 침은 그중에서 하늘天을 상징하고, 하늘은 사람의 오장(五臟)에서 폐(肺)와 상응하고 인체의 피모(皮毛)는 폐와 동류(同類)이기 때문에 이침은 피부를 얕게 찔러서 사혈(瀉血) 하는 데 쓰이며, 머리와 몸에 고열이 있을 때 사용한다. 두건[]을 닮아 침의 상부는 크고 넓으며 끝은 예리하여 깊이 찌르기에는 1촌 6푼의 길이가 적당하다. 또는 전두침이라고도 하는데, 화살촉과 닮아서 생긴 것이다. 이침은 주로 피부의 사기를 빼내어 정기를 안정시키는 데 쓰이는데, 너무 깊이 찌르면 인체의 양기가 상한다. 원침은 기육(:살)에 생긴 기체를 치료하는 데 쓰인다. 땅은 땅[]을 뜻하고 땅은 인체의 기육에 따라 체표를 문지르거나 기육에 생긴 기체를 치료하는 데 쓰인다. 달걀형처럼 둥글고 가늘며 길이는 1촌 6푼이다. 사기가 기육에 있을 때 주로 사용하는 원침은 침 끝이 둥글기 때문에 기육의 정기를 해치지 않는다. 혈맥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시침이 사용된다. 시침은 사람[]을 상징하며, 혈맥에 있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이침이다. 길이는 3촌 5푼으로 기장[]을 닮아 몸체[]가 길고, 침 끝이 약간 둥글고 무디어 혈맥의 사기만 제거하고 인체의 정기를 상하지 않게 만든 침이다. 4) 이침은 보법에 쓰이지만 너무 깊이 찔러 혈맥 내부까지 들어가면 사기는 제거된다 해도 기육이 상하고 정기가 상한다. 봉침은 사혈을 할 때 쓰는 것으로 일명 삼릉침이라고도 한다. 사계절을 상징한 봉침은 사계절에 여러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생긴 혹[]이나 악창(:고치기 힘든 부스럼)에 사용한다. 5촌 6푼으로 3면에 날이 서 있어서 삼릉침이라 불리며, 열병과 외과 질환을 낫게 하고 사혈하기에 가장 적당한 길이다. 피침은 옹종(:종기) 고름을 제거하는 데 쓰인다. 피침은 오음을 상징하며 음·양, 한·열과 같은 상반되는 두 기운이 서로 뒤섞여 생겨난 옹종에 사용한다. 6촌의 길이에 2푼 반의 너비로 옹종 등을 째고 고름을 짜는 데 유용하며, 칼[]을 닮아 검침이라고도 한다. 호침은 비병과 통증 치료에 쓰인다. 호침은 별七星을 상징하고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七竅에 해당하며, 통증과 비병에 유용하다. 길이는 1촌 6푼이나 현재 사용하는 호침은 5푼(약 1.5㎝)에서 4∼5촌(13∼17㎝)까지 여러 종류가 있으며, 지름에 따라 주로 34호(0.22㎜)·32호(0.25㎜)·30호(0.32㎜)·28호(0.38㎜)·26호(0.45㎜) 등이 있다. 정기가 약한 사람의 비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로 호침은 모기나 등에의 입처럼 가늘어 큰 자극 없이 찔러서 오랫동안 놓아 둘 수 있어 좋다. 호침은 9침 가운데 가장 주된 침으로 그 활용 범위 또한 넓어서 현재 사용하는 침 치료(鍼治療)를 대표한다. ≪상한론 傷寒論≫에 기록되어 있는 ‘온침(溫鍼)’이라는 것도 사실은 호침의 꼬리 부분에 쑥을 얹어 태우는 방법으로 침과 뜸을 결합한 것이며, 장침과 대침도 호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길이가 좀 더 길뿐이다. ⑦장침은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구침의 일종으로 큰 관절大關節 속에 있는 비병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장침은 바람風을 상징하고, 사람의 사지에 있는 여덟 개의 큰 관절에 팔방에서 불어오는 좋지 못한 바람에 의하여 발생한 비병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길이는 7촌으로 인체의 깊숙한 곳에 있는 비증(痺症 마비 증세)에 적절하다. 관절질환은 8 대침으로 모두 고친다. 9분야[]를 상징하는 대침은 관절 부위에 머물러 있는 병을 치료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관절 속에 있는 물[]을 빼내는 데 쓰이는 길이는 4촌이다. 황제내경에 나오는 수자라는 것도 호침보다 긴 것으로, 불을 붙여 놓는 화침·번침에도 쓰이고 있다. 화침은 일부 외과 질환과 풍습성 관절염의 치료에 쓰인다. 9 원리침은 비병과 옹저(:종기) 치료에 쓰인다. 인체가 허약한 틈을 타서 경맥에 들어온 사기에 의해 생긴 비병에 사용하는 침은 1촌 6푼으로 가늘고 강하게 만들었다. 주로 옹저와 비병, 그리고 역절풍(뼈마디가 붓고 펴지 못하는 병) 등을 치료한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완성한 9침은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금침·은침·마함철침·합금침 등으로 다양해졌다. 현재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침구는 대부분 단단하고 녹이 슬지 않는다. 예전 폄석(단순한 쐐기 모양)에서부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침구에 이르기까지 형태나 사용방법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1 피내침은 피하에 매몰시켜 놓을 수 있는 작은 침이다. 2 전침은 침자극과 전기 자극을 결합하여 발전된 침이다. 3 수침은 침과 약물 작용을 함께 사용한 침이다. 4 피부 침은 일명 소아침으로 작은 침 5∼8개를 동시에 찌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침이다. 또한 이침·면침·비침·두침·수침·족침 등이 개발되어 그 쓰임이 다양해지고 있다. 한편, 일반적인 침의 구조는 다섯 부분으로 분류된다. 침 끝[, 또는 ]은 침의 대소 장단을 나타내며, 침몸[, 또는 ]은 침끝과 침자루 사이를 나타낸다. 침몸과 침자루를 연결하는 부분인 침뿌리는 침몸과 침자루를 연결하는 부분이고, 침자루는 침자루의 끝으로 온침을 놓을 때 쑥을 붙이는 부분이나, 대부분의 침에서는 이 부위가 없다. 침은 총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침끝·침몸·침뿌리·침자루·침꼬리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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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35394.txt
점필재종택 (佔畢齋宗宅)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영훈"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66
CC BY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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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채 사랑채 중 사랑 곳간 사당 대 문간채로 이루어진 선산 김 씨 문충공파 종택이다. 어린 외아들은 여러 곳에 전전했고 성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은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불행을 당했다. 효종 2년(1651)에 고령군에<NAME> 6세손은 겨우 6세손이었다. 1800년경에 지금의 집을 짓고 신원 받은 문충공을 불 천위 묘에 모셔놓았다. 정면 7칸 반 측면 단칸 통[]의 자형 맞배지붕이다. 자형 좌측부터 부엌, 2칸의 안방, 2칸 대청, 건넌방과 앞퇴, 그리고 반 칸의 골방이 달렸다. 자연석 주초에 모 기둥[]을 세웠으나 대청 가운데 기둥만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어 뒷벽 밖 처마 아래로 수장될 수 있었다. 삼량인 가구의 대들보가 휘어져 있었다. 사랑채는 제청이라고도 불린다. 정면 5칸, 측면 2칸 통, 안채 맞은편에 위치했고 1자형이다. 머릿방, 사랑방, 대청 2칸, 방과 대청 앞에 툇간이 있다. 마룻대에 1812년의 기문이 묵서되어 있는 홑처마 맞배지붕의 삼량집이다. 중사랑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위치하며 안마당과 마주하고 있는 위치로 집의 뒷면이 안마당에 면하였다. 돌아앉은 셈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이다. 단칸방 둘과 대청, 그리고 마루를 깐 대청이다. 현재는 시멘트기와를 잇고 있는<NAME>각지붕이다. 중사랑채 안마당 건너편 맞은편에 곳간 채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단칸통의<NAME>각지붕에 양기와를 이은 집이다. 가운데 두 칸 곳간, 우측에 방앗간, 뒤에 내측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간 반 통의 맞배 기와지붕집이다. 앞퇴가 열린 평범한 구조다. 솟을대문형인 대 문간채는 3칸의 크기이다. 시대에 뒤지지 않는 보편적인 살림집이며 격식을 갖추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점필재종택 (佔畢齋宗宅) ### 내용: 1985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채 사랑채 중 사랑 곳간 사당 대 문간채로 이루어진 선산 김 씨 문충공파 종택이다. 어린 외아들은 여러 곳에 전전했고 성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은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불행을 당했다. 효종 2년(1651)에 고령군에<NAME> 6세손은 겨우 6세손이었다. 1800년경에 지금의 집을 짓고 신원 받은 문충공을 불 천위 묘에 모셔놓았다. 정면 7칸 반 측면 단칸 통[]의 자형 맞배지붕이다. 자형 좌측부터 부엌, 2칸의 안방, 2칸 대청, 건넌방과 앞퇴, 그리고 반 칸의 골방이 달렸다. 자연석 주초에 모 기둥[]을 세웠으나 대청 가운데 기둥만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어 뒷벽 밖 처마 아래로 수장될 수 있었다. 삼량인 가구의 대들보가 휘어져 있었다. 사랑채는 제청이라고도 불린다. 정면 5칸, 측면 2칸 통, 안채 맞은편에 위치했고 1자형이다. 머릿방, 사랑방, 대청 2칸, 방과 대청 앞에 툇간이 있다. 마룻대에 1812년의 기문이 묵서되어 있는 홑처마 맞배지붕의 삼량집이다. 중사랑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위치하며 안마당과 마주하고 있는 위치로 집의 뒷면이 안마당에 면하였다. 돌아앉은 셈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이다. 단칸방 둘과 대청, 그리고 마루를 깐 대청이다. 현재는 시멘트기와를 잇고 있는<NAME>각지붕이다. 중사랑채 안마당 건너편 맞은편에 곳간 채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단칸통의<NAME>각지붕에 양기와를 이은 집이다. 가운데 두 칸 곳간, 우측에 방앗간, 뒤에 내측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간 반 통의 맞배 기와지붕집이다. 앞퇴가 열린 평범한 구조다. 솟을대문형인 대 문간채는 3칸의 크기이다. 시대에 뒤지지 않는 보편적인 살림집이며 격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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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POL36775.txt
정치사상 (政治思想)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031
CC BY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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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사상은 당초 공동체 조직의 소박한 종교 사상과 혼합된 상태로 나타나 고대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고 실학의 발생에 힘입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어 서구의 문화와 사조가 유입됨에 따라 새로운 가치와 기준에 따른 정치사상의 도입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점으로 한국의 정치사상을 시대별로 살펴본다. 농경생활이 정착되고 최초의 정치사회로서 성읍국가(, 또는 )가 생겨나면서 그 지배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여러 가지 설화가 생겨났다. 그중 단군신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초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시조는 태양신인 환인의 손자로, 자연을 움직이고 모든 인간사를<NAME>는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설화는 많은 과장과 분식이 가미된 것이겠지만, 단군왕검이 신성하고 초인적인 곳에서 출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구성 내용이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태양신과 이어지는 단군왕검은 더할 나위 없는 권위를 갖게 되는 셈이다. 한국 고대에 등장하는 시조의 난생설화주1들은 대체로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단군왕검이 제정일치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 점이 주목된다. 이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NAME> 권위를 지닌 정치적 지배자가 아직 신비한 제사장의 역할을 겸임해야 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고조선의 지배자는 이와 같은 규범이 집행되는 엄연한 정치사회를 통치하는 존재로서 지위를 점차 굳혀갈 수 있었는데, 이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시키고,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3조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읍국가들은 일정한 배경 아래 연맹을 이루어 연맹왕국을 세웠다. 그동안 제정이 분리되고 연맹장은 왕으로 호칭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부여에서는 가뭄이나 홍수, 흉년이 들면 왕을 죽이거나 내쫓자고 하여 책임을 추궁하였다고 한다. 이는 연맹장의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가 자연의 조화와 농업의 풍요로운 결실에까지 책임을 져야 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훗날 천변지이주2가 나타나면 왕이나 고위 관직자가 견책당하는 선례가 된다.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혼합된 상태에서나마 탄생설화를 통해 정치적 지배자의 권위와 능력을 분식하고, 나아가 자연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에서 원초적인 정치사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충군애민사상이 대두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왕의 정치적 권위가 한층 강화되는 시기가 삼국시대이다. 새로운 귀족들이 합의제를 통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지만, 왕의 권한과 지위는 국가를 대표하고 귀족을 통솔하며 정책 집행의 최고 책임자였다. 이처럼 왕의 권위가 높아짐에 따라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나 신라의 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그들의 행적과 공훈을 적은 비를 세워 그 존경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왕에 대한 충성은 당시 국가의 모든 신민에게 강조되고 통용된 덕목이고 사조였다. 신라의 화랑에게 가르친 세속오계는 첫째가 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고, 둘째가 부모를<NAME>으로 섬기는 것이고, 셋째는 전쟁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다섯째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가부장 중심의 가족 제의 발달에 따라 중요성이 강조된 효와 더불어 충이 그 시대의 사회적 필요성에서 제기된 실천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두 화랑도가 장래를 기약하며 맹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충도를 내세웠다. 이와 같은 충성에 대응하여 왕에게는 신민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이 요구되었다. 진흥왕은 스스로 닦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야 하는 도리를 강조하였는데, 고구려의 재상 창조리는 왕이 백성을 근심하고 사랑하지 않음은 인이 아니라 하였고, 신하가 왕에게 간하지 않음은 충이 아니라 하였다. 이는 왕도의 이상에 부합하는 주장으로 국가의 중심이자 권력의 장악자인 왕의 통치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그 안위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정치사상의 핵심은 이상과 같은 충군과 애민의 사상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일찍부터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해져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그 경전과 사서가 전해졌고, 이에 입각한 언설이 대부분 그것의 정치사상을 시사해 준다. 하지만 이것은 성읍국가에서 연맹왕국을 거쳐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를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유교적 표현을 빌려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유교사상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라가 전제주의와 개혁 이념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 백제의 영토와 국민을 흡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부상함에 따라 통치체제의 확대 · 개편이 뒤따랐다.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부자로부터 시작되는 신라 중대의 왕통이 열리고 전제왕권이 성립되었다. 신문왕은 김춘추의 묘호가 자기 나라 태종의 그것과 다를 수 없다는 당의 이의 제기를 무시하는 한편,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직후 발표한 교서에서 왕에 대한 신하의 절대 충성을 강요하고, 이에 어긋날 경우 철저히 숙청했던 것이다. 절대 권력의 소유자가 된 왕은 귀족의 합의기구인 화백이 약화되고 관료적 행정기구인 집사부가 전제정치를 뒷받침하였다. 이때 신라에서는 전제정치를 옹호하고 전제주의를 표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시기에 활약한 유학자는 강수와 설총이다. 그들은 신라 골품 체제에서 진골 아래 육두품 출신으로 불교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유교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찾고, 유교적 도덕률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도덕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는 전제왕권보다는 불교와 밀착된 진골 귀족세력과 골품제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했다. 이렇게 해서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은 전제왕권과 결탁하고, 전제주의를 뒷받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 귀족 사이에 권력투쟁이 빈번해짐에 따라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후삼국이 세워지기까지 지방으로부터 호족세력이 흥 기했다. 이러한 변혁기를 맞아 육두품 세력은 골품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개혁을 주장하였다. 육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당나라에 건너가 과거에 합격하고 문명을 드날린 뒤 귀국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신라 말의 대표적 유학자로 꼽힌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과거제 실시 등을 포함한 과감한 개혁이 주장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호족의 발호를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를 상정하되, 골품제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귀족 국가를 선호했던 것 같다. 그는 당나라에서 견문과 경험, 학문적 권위를 바탕으로 신라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했던 셈이다. 이 요청은 용납되지 않았으나, 신라 중대 이래 뚜렷한 성장을 보인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이 마침내 적극적 개혁 이념을 주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전제주의를 주장하는 것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정치사상의 큰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시대는 사상과 정치적 통일의 시대였는데, 크게 혼란스럽고 전환기였던 시기가 신라 말이었다. 호족세력이 신라의 통치 범위에서 밀려나면서 각 지방에서는 다양한 사상의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후삼국시대는 한국사를 통해 정치적 · 사회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변화가 많았던 시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새로운 종파가 들어오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선종의 경우, 각지에서 대두되는 호족들과 결합하여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선사들의 사상적 특징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 저항하며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호족들에게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기존의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유력했던 화엄종은 남악과 북악으로 갈라져 각각 견훤과 왕건을 지지하면서 극심한 대립과 갈등 속에 있었다. 한편,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며 그의 구세적인 통치도를 강조하려 했다. 풍수지리설주3도 이 시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풍수지리설은 종교적 성격을 띠는 한편,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지형이나 지세를 연관 지어 명당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그들은 지덕을 중시하여 그것을 비보하는 데 힘썼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들의 근거지를 명당으로 확인받아 호족으로서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유교를 비롯해 불교 · 풍수지리설 등이 다양하게 존재하면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 자신이 유력한 지방호족 출신으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풍수지리설에 대한 믿음도 컸다. 유교에 대해서도 그는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호족연합정권 수립과 후삼국 통일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왕건은 이들 여러 분야의 사상과 종교에 대한 배려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불교는 교종과 선종을 모두 숭배했고, 풍수지리설의 존경을 후손들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은 훈요십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왕건은 정치 운영에는 유교의 이념을 적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취민유도를 내세워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고, 예하의 장상들에게도 백성들의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취렴 주 4의 억제를 강하게 요구하여 인정에 힘썼다. 한편, 유교정치의 지향은 희미하나마 드러나는데, 정계와 계백료서를 저술하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왕건은 역사적 전환기에 여러 분야에서 일정한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는 다양한 사상적 분출들을 포용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이라는 큰 과제를 성취하였다. 그런 다음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유교의 이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로의 유교적 정치이념 확립과 당 · 송의 정치제도 도입으로 고려왕조의 정치적 기반이 확립됨에 따라 새로운 통치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유교적 정치이념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신라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을, 유교를 숭상하는 성종이 받아들이는<NAME>으로 이루어졌다. 최승로는 신라가 항복할 때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와서 12세 때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아 학문과 자질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 후 40여 년간 그는 수많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직생활을 계속하였다. 또한 성종이 새로이 왕위에 오르자 정치의 당면 과제에 대한 종합적인 의견을 개진하게 된 것이다. 태조를 비롯한 역대 다섯 왕의 정치적 행적을 5조 치적 평을 통해 비판한 시무 28조의 앞부분과 뒤에 구체적인 정책 건의를 한 시무 28조가 그것이다. 그중 6조목은 사라지고 현재 22조목만이 남아 있다. 그는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국방문제, 중국 문화의 수입에 따르는 문제, 왕으로서의 태도 등 많은 것을 건의했다. 그는 “석교(釋敎 : 불교)를 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원입니다. 수신은 내생(來生)을 위한 것이요, 치국은 오늘의 일인데, 오늘은 매우 가깝고 내생은 매우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여 유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또한 불교의 공덕 신앙과 불교 관계 행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이상적 정치를 중앙집권적인 정치형태에서 찾아, 지방제도의 정비를 통해 일반 백성들에게 왕의 통치가 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하를 예우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고, 귀족 관료층의 권익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는 전제주의적 정치를 한 광종에 대해 격하게 비판한 것도 동일하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그가 건의한 것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건의가 성종에게 받아들여져 시행되었고, 고려의 정치는 유교적 이념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 이로써 통일신라시대의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된 유교적 정치이념의 정립은 일찍이 신라 하대로부터 정치적, 사회적 격동의 끝에 성취된 것이다. 고려 성종은 유교를 숭상하고 공자와 주공의 풍토를 진착시켜 요 · 순의 정치를 이루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교서를 통해 밝혔다. 그는 모든 시책을 예전에 의거하도록 했으며,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효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효는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경친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와 복종의 계서 관계를 강조하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성종이 교서에서 가문에서 능히 효자가 되면, 반드시 나라에서 충신이 될 것이다. 며 효를 강조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 정치는 유교적 왕도정치가 지향되고 예교 질서가 정립됨으로써 유교적 · 문치적 성향을 뚜렷이 하게 되었다. 고려는 중기에 이르러 사학이 발달하고 한문학이 활발해지면서 유교문화의 난숙기를 맞이했다. 그렇지만 정치적 안정이 무너지고 유교적 이념 자체가 도전을 받게 된 것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때문이었다.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서경 천도 운동을 벌였던 묘청은 서경의 승려 출신으로, 지덕이 왕성한 서경에 천도하여 칭제 건원하면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고, 주변 36국이 조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풍수지리설이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그때까지 고려를 지배해온 합리적이면서 사대적인 유교 이념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게 된 것이다. 이는 서경을 근거지로 한 묘청의 반란과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의 진압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고려에는 무신란이 일어났고 문치적 귀족사회는 무너졌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많은 문신들을 죽이고, 왕의 폐립을 일삼았다.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했던 고려의 정치질서가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당초 지방관과 향리의 수탈에 반감을 품었던 농민들이 무신란으로 인한 혼란과 하극상의 풍조에 영향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전국으로 번져 고려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신분적으로 양인 농민과 노비로 구분될 수 있지만, 그 뒤에 신분 해방과 정권 탈취를 주장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개경에서 일어난 일련의 반란인 사노 만적의 난은 그들의 선동적인 연설로도 유명하다. 장상이 원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에게나 할 수 있고, 천적을 불살라 삼한으로 하여금 천인이 없게 하면 공경 · 장상은 우리들이 모두 할 수 있다. 는 대목이다. 이는 중세 노비들의 신분 해방 선언으로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특권 지배층을 부정하고 스스로 노비 신분을 벗어던지고 노비 없는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당시 어떤 사상과도 연관성이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기존의 어떤 사상도 그들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의민은 그 당시 천한 신분으로 출세하여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다. 유교의 정치이념에 기반한 정치질서의 파탄으로 당시의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무신집권기는 그러한 새롭고 혁명적인 선언을 낳게 한 생동하는 변혁기였다. 고려 무신 집권의 후반기는 성리학적 경세론이 등장하면서 대몽항쟁 기와 겹친다. 고려는 무신란의 소용돌이와 참혹한 전란의 상처로 인해 50년 동안 강도(: 강화도의 별칭)를 임시수도로 하여 몽고에 대항하다가 끝내 패하게 되자 기존의 문화적 기반이 무너지고 정치적 장래가 불안정한 상황에 처했다. 그렇지만 고려는 원( : 몽고)의 부마국으로서, 원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질서 속에 편입되어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왕국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전통 유학의 부흥과 문교의 회복에 힘을 쏟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성리학이 원나라에 전해졌다. 중국 남송시대에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은 도덕철학의 범주를 벗어나 있던 유학에 노불의 사상을 가미, 이론적으로 심화시킴으로써 새롭게 체계화된 사상이었다. 이는 이단을 배척하는 데 날카롭고, 철학적 성격이 강했으며, 성경을 주로 하는 수양론을 중시하였다. 이와 같은 성리학은 고려 후기에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이 흥 기하던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그들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고, 그에 입각한 경세적 포부를 피력하였다. 그런 움직임은 대개 정치적 · 경제적 모순의 극치를 이루었던 당시 고려사 회의 여러 폐단을 시정하자는 상소문으로 나타났다. 이것 역시 그 시기 정치사상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NAME>과 이색이 제일 중요한 인물이다.<NAME>은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며, 성리학의 수용에 선구적 역할을 한 유학자였다. 그는 구폐 책을 통해 왕의 수덕, 정방의 혁파, 녹과전 부활 등 11개 조목에 걸쳐 시정하거나 개선해야 할 것들을 지적하였다. 한편, 이색은<NAME>의 제자로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으며 고려 성리학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학자요 정치가였다. 그는 관직에 오르기 전에 복중 상서를 통해 시무를 논하면서 전제 개혁, 무과 설치, 불교의 폐단 등 6개 조목에 걸친 당면 과제를 제시했다. 이들 두 경세론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성리학의 입장에서<NAME>은 왕의 수덕을 위해 사서를 공부하여 격물치지의 도를 익힐 것을 요구했고, 이색은 불교에 대한 비판을 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그들이 내세웠던 것들이 당시 고려사 회의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는 점이다. 또한 두 사람은<NAME>같이 왕의 결단을 촉구하고, 심지어는 개혁을 주저하는 것은 어리석어서 잘 다스릴 자격이 없는 임금의 소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침체에 빠진 고려의 정치에 성리학으로부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왕의 권능을 되살려 왕정의 상궤로 돌아오도록 요청한 것이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정치사상 (政治思想) ### 내용: 한국의 정치사상은 당초 공동체 조직의 소박한 종교 사상과 혼합된 상태로 나타나 고대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고 실학의 발생에 힘입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어 서구의 문화와 사조가 유입됨에 따라 새로운 가치와 기준에 따른 정치사상의 도입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점으로 한국의 정치사상을 시대별로 살펴본다. 농경생활이 정착되고 최초의 정치사회로서 성읍국가(, 또는 )가 생겨나면서 그 지배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여러 가지 설화가 생겨났다. 그중 단군신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초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시조는 태양신인 환인의 손자로, 자연을 움직이고 모든 인간사를<NAME>는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설화는 많은 과장과 분식이 가미된 것이겠지만, 단군왕검이 신성하고 초인적인 곳에서 출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구성 내용이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태양신과 이어지는 단군왕검은 더할 나위 없는 권위를 갖게 되는 셈이다. 한국 고대에 등장하는 시조의 난생설화주1들은 대체로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단군왕검이 제정일치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 점이 주목된다. 이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NAME> 권위를 지닌 정치적 지배자가 아직 신비한 제사장의 역할을 겸임해야 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고조선의 지배자는 이와 같은 규범이 집행되는 엄연한 정치사회를 통치하는 존재로서 지위를 점차 굳혀갈 수 있었는데, 이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시키고,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3조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읍국가들은 일정한 배경 아래 연맹을 이루어 연맹왕국을 세웠다. 그동안 제정이 분리되고 연맹장은 왕으로 호칭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부여에서는 가뭄이나 홍수, 흉년이 들면 왕을 죽이거나 내쫓자고 하여 책임을 추궁하였다고 한다. 이는 연맹장의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가 자연의 조화와 농업의 풍요로운 결실에까지 책임을 져야 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훗날 천변지이주2가 나타나면 왕이나 고위 관직자가 견책당하는 선례가 된다.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혼합된 상태에서나마 탄생설화를 통해 정치적 지배자의 권위와 능력을 분식하고, 나아가 자연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에서 원초적인 정치사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충군애민사상이 대두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왕의 정치적 권위가 한층 강화되는 시기가 삼국시대이다. 새로운 귀족들이 합의제를 통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지만, 왕의 권한과 지위는 국가를 대표하고 귀족을 통솔하며 정책 집행의 최고 책임자였다. 이처럼 왕의 권위가 높아짐에 따라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나 신라의 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그들의 행적과 공훈을 적은 비를 세워 그 존경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왕에 대한 충성은 당시 국가의 모든 신민에게 강조되고 통용된 덕목이고 사조였다. 신라의 화랑에게 가르친 세속오계는 첫째가 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고, 둘째가 부모를<NAME>으로 섬기는 것이고, 셋째는 전쟁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다섯째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가부장 중심의 가족 제의 발달에 따라 중요성이 강조된 효와 더불어 충이 그 시대의 사회적 필요성에서 제기된 실천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두 화랑도가 장래를 기약하며 맹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충도를 내세웠다. 이와 같은 충성에 대응하여 왕에게는 신민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이 요구되었다. 진흥왕은 스스로 닦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야 하는 도리를 강조하였는데, 고구려의 재상 창조리는 왕이 백성을 근심하고 사랑하지 않음은 인이 아니라 하였고, 신하가 왕에게 간하지 않음은 충이 아니라 하였다. 이는 왕도의 이상에 부합하는 주장으로 국가의 중심이자 권력의 장악자인 왕의 통치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그 안위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정치사상의 핵심은 이상과 같은 충군과 애민의 사상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일찍부터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해져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그 경전과 사서가 전해졌고, 이에 입각한 언설이 대부분 그것의 정치사상을 시사해 준다. 하지만 이것은 성읍국가에서 연맹왕국을 거쳐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를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유교적 표현을 빌려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유교사상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라가 전제주의와 개혁 이념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 백제의 영토와 국민을 흡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부상함에 따라 통치체제의 확대 · 개편이 뒤따랐다.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부자로부터 시작되는 신라 중대의 왕통이 열리고 전제왕권이 성립되었다. 신문왕은 김춘추의 묘호가 자기 나라 태종의 그것과 다를 수 없다는 당의 이의 제기를 무시하는 한편,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직후 발표한 교서에서 왕에 대한 신하의 절대 충성을 강요하고, 이에 어긋날 경우 철저히 숙청했던 것이다. 절대 권력의 소유자가 된 왕은 귀족의 합의기구인 화백이 약화되고 관료적 행정기구인 집사부가 전제정치를 뒷받침하였다. 이때 신라에서는 전제정치를 옹호하고 전제주의를 표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시기에 활약한 유학자는 강수와 설총이다. 그들은 신라 골품 체제에서 진골 아래 육두품 출신으로 불교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유교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찾고, 유교적 도덕률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도덕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는 전제왕권보다는 불교와 밀착된 진골 귀족세력과 골품제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했다. 이렇게 해서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은 전제왕권과 결탁하고, 전제주의를 뒷받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 귀족 사이에 권력투쟁이 빈번해짐에 따라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후삼국이 세워지기까지 지방으로부터 호족세력이 흥 기했다. 이러한 변혁기를 맞아 육두품 세력은 골품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개혁을 주장하였다. 육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당나라에 건너가 과거에 합격하고 문명을 드날린 뒤 귀국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신라 말의 대표적 유학자로 꼽힌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과거제 실시 등을 포함한 과감한 개혁이 주장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호족의 발호를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를 상정하되, 골품제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귀족 국가를 선호했던 것 같다. 그는 당나라에서 견문과 경험, 학문적 권위를 바탕으로 신라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했던 셈이다. 이 요청은 용납되지 않았으나, 신라 중대 이래 뚜렷한 성장을 보인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이 마침내 적극적 개혁 이념을 주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전제주의를 주장하는 것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정치사상의 큰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시대는 사상과 정치적 통일의 시대였는데, 크게 혼란스럽고 전환기였던 시기가 신라 말이었다. 호족세력이 신라의 통치 범위에서 밀려나면서 각 지방에서는 다양한 사상의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후삼국시대는 한국사를 통해 정치적 · 사회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변화가 많았던 시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새로운 종파가 들어오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선종의 경우, 각지에서 대두되는 호족들과 결합하여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선사들의 사상적 특징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 저항하며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호족들에게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기존의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유력했던 화엄종은 남악과 북악으로 갈라져 각각 견훤과 왕건을 지지하면서 극심한 대립과 갈등 속에 있었다. 한편,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며 그의 구세적인 통치도를 강조하려 했다. 풍수지리설주3도 이 시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풍수지리설은 종교적 성격을 띠는 한편,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지형이나 지세를 연관 지어 명당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그들은 지덕을 중시하여 그것을 비보하는 데 힘썼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들의 근거지를 명당으로 확인받아 호족으로서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유교를 비롯해 불교 · 풍수지리설 등이 다양하게 존재하면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 자신이 유력한 지방호족 출신으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풍수지리설에 대한 믿음도 컸다. 유교에 대해서도 그는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호족연합정권 수립과 후삼국 통일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왕건은 이들 여러 분야의 사상과 종교에 대한 배려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불교는 교종과 선종을 모두 숭배했고, 풍수지리설의 존경을 후손들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은 훈요십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왕건은 정치 운영에는 유교의 이념을 적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취민유도를 내세워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고, 예하의 장상들에게도 백성들의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취렴 주 4의 억제를 강하게 요구하여 인정에 힘썼다. 한편, 유교정치의 지향은 희미하나마 드러나는데, 정계와 계백료서를 저술하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왕건은 역사적 전환기에 여러 분야에서 일정한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는 다양한 사상적 분출들을 포용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이라는 큰 과제를 성취하였다. 그런 다음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유교의 이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로의 유교적 정치이념 확립과 당 · 송의 정치제도 도입으로 고려왕조의 정치적 기반이 확립됨에 따라 새로운 통치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유교적 정치이념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신라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을, 유교를 숭상하는 성종이 받아들이는<NAME>으로 이루어졌다. 최승로는 신라가 항복할 때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와서 12세 때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아 학문과 자질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 후 40여 년간 그는 수많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직생활을 계속하였다. 또한 성종이 새로이 왕위에 오르자 정치의 당면 과제에 대한 종합적인 의견을 개진하게 된 것이다. 태조를 비롯한 역대 다섯 왕의 정치적 행적을 5조 치적 평을 통해 비판한 시무 28조의 앞부분과 뒤에 구체적인 정책 건의를 한 시무 28조가 그것이다. 그중 6조목은 사라지고 현재 22조목만이 남아 있다. 그는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국방문제, 중국 문화의 수입에 따르는 문제, 왕으로서의 태도 등 많은 것을 건의했다. 그는 “석교(釋敎 : 불교)를 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원입니다. 수신은 내생(來生)을 위한 것이요, 치국은 오늘의 일인데, 오늘은 매우 가깝고 내생은 매우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여 유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또한 불교의 공덕 신앙과 불교 관계 행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이상적 정치를 중앙집권적인 정치형태에서 찾아, 지방제도의 정비를 통해 일반 백성들에게 왕의 통치가 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하를 예우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고, 귀족 관료층의 권익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는 전제주의적 정치를 한 광종에 대해 격하게 비판한 것도 동일하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그가 건의한 것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건의가 성종에게 받아들여져 시행되었고, 고려의 정치는 유교적 이념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 이로써 통일신라시대의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된 유교적 정치이념의 정립은 일찍이 신라 하대로부터 정치적, 사회적 격동의 끝에 성취된 것이다. 고려 성종은 유교를 숭상하고 공자와 주공의 풍토를 진착시켜 요 · 순의 정치를 이루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교서를 통해 밝혔다. 그는 모든 시책을 예전에 의거하도록 했으며,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효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효는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경친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와 복종의 계서 관계를 강조하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성종이 교서에서 가문에서 능히 효자가 되면, 반드시 나라에서 충신이 될 것이다. 며 효를 강조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 정치는 유교적 왕도정치가 지향되고 예교 질서가 정립됨으로써 유교적 · 문치적 성향을 뚜렷이 하게 되었다. 고려는 중기에 이르러 사학이 발달하고 한문학이 활발해지면서 유교문화의 난숙기를 맞이했다. 그렇지만 정치적 안정이 무너지고 유교적 이념 자체가 도전을 받게 된 것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때문이었다.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서경 천도 운동을 벌였던 묘청은 서경의 승려 출신으로, 지덕이 왕성한 서경에 천도하여 칭제 건원하면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고, 주변 36국이 조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풍수지리설이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그때까지 고려를 지배해온 합리적이면서 사대적인 유교 이념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게 된 것이다. 이는 서경을 근거지로 한 묘청의 반란과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의 진압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고려에는 무신란이 일어났고 문치적 귀족사회는 무너졌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많은 문신들을 죽이고, 왕의 폐립을 일삼았다.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했던 고려의 정치질서가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당초 지방관과 향리의 수탈에 반감을 품었던 농민들이 무신란으로 인한 혼란과 하극상의 풍조에 영향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전국으로 번져 고려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신분적으로 양인 농민과 노비로 구분될 수 있지만, 그 뒤에 신분 해방과 정권 탈취를 주장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개경에서 일어난 일련의 반란인 사노 만적의 난은 그들의 선동적인 연설로도 유명하다. 장상이 원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에게나 할 수 있고, 천적을 불살라 삼한으로 하여금 천인이 없게 하면 공경 · 장상은 우리들이 모두 할 수 있다. 는 대목이다. 이는 중세 노비들의 신분 해방 선언으로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특권 지배층을 부정하고 스스로 노비 신분을 벗어던지고 노비 없는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당시 어떤 사상과도 연관성이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기존의 어떤 사상도 그들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의민은 그 당시 천한 신분으로 출세하여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다. 유교의 정치이념에 기반한 정치질서의 파탄으로 당시의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무신집권기는 그러한 새롭고 혁명적인 선언을 낳게 한 생동하는 변혁기였다. 고려 무신 집권의 후반기는 성리학적 경세론이 등장하면서 대몽항쟁 기와 겹친다. 고려는 무신란의 소용돌이와 참혹한 전란의 상처로 인해 50년 동안 강도(: 강화도의 별칭)를 임시수도로 하여 몽고에 대항하다가 끝내 패하게 되자 기존의 문화적 기반이 무너지고 정치적 장래가 불안정한 상황에 처했다. 그렇지만 고려는 원( : 몽고)의 부마국으로서, 원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질서 속에 편입되어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왕국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전통 유학의 부흥과 문교의 회복에 힘을 쏟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성리학이 원나라에 전해졌다. 중국 남송시대에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은 도덕철학의 범주를 벗어나 있던 유학에 노불의 사상을 가미, 이론적으로 심화시킴으로써 새롭게 체계화된 사상이었다. 이는 이단을 배척하는 데 날카롭고, 철학적 성격이 강했으며, 성경을 주로 하는 수양론을 중시하였다. 이와 같은 성리학은 고려 후기에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이 흥 기하던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그들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고, 그에 입각한 경세적 포부를 피력하였다. 그런 움직임은 대개 정치적 · 경제적 모순의 극치를 이루었던 당시 고려사 회의 여러 폐단을 시정하자는 상소문으로 나타났다. 이것 역시 그 시기 정치사상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NAME>과 이색이 제일 중요한 인물이다.<NAME>은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며, 성리학의 수용에 선구적 역할을 한 유학자였다. 그는 구폐 책을 통해 왕의 수덕, 정방의 혁파, 녹과전 부활 등 11개 조목에 걸쳐 시정하거나 개선해야 할 것들을 지적하였다. 한편, 이색은<NAME>의 제자로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으며 고려 성리학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학자요 정치가였다. 그는 관직에 오르기 전에 복중 상서를 통해 시무를 논하면서 전제 개혁, 무과 설치, 불교의 폐단 등 6개 조목에 걸친 당면 과제를 제시했다. 이들 두 경세론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성리학의 입장에서<NAME>은 왕의 수덕을 위해 사서를 공부하여 격물치지의 도를 익힐 것을 요구했고, 이색은 불교에 대한 비판을 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그들이 내세웠던 것들이 당시 고려사 회의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는 점이다. 또한 두 사람은<NAME>같이 왕의 결단을 촉구하고, 심지어는 개혁을 주저하는 것은 어리석어서 잘 다스릴 자격이 없는 임금의 소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침체에 빠진 고려의 정치에 성리학으로부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왕의 권능을 되살려 왕정의 상궤로 돌아오도록 요청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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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광주이씨 고택 (水原 廣州李氏 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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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집은 모두 초가집으로, 튼자형의 살림 채와 바깥마당, 그 앞의 헛간채, 뒤꼍, 기타 광채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고종 연간에 이병원의 부친이 분가하여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장형의 묵서에 광서 십사 년 무자 삼월 십팔일 입주상량이라고 적혀 있어 상량한 집임을 알 수 있다. 건립 당시 초가로 지어진 이 가옥은 공간 활용을 위해 벽체를 바꾸었고,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으로 행랑채와 헛간의 지붕을 개량하기도 하였다. 1993∼1994년에 걸친 보수공사에서 변경된 벽체와 지붕을 고증에 따라 원형으로 복원하였다. 집터는 서남향으로 열렸고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른다. 울의 외곽에 있는 바깥채에 대문이 있다. 칸 반 두 칸 통의 사랑방에 이어 대문간이 열려 있다. 사랑방은 앞퇴가 골목으로 향하고 있는 전형적인 경기도 서해안의 구조이다. 대문간 뒤쪽 헛간에서 자로 꺾이는 평면이 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반듯한 안마당과 자형 안채가 있다. 부엌은 자의 동편 끝칸에 있고 안방은 두 칸 넓이이다. 서남향 한 대청은 네 칸 넓이로 우물 마루이다. 다음 건넌방 두 칸이 있다. 외벌대 위에 낮게 지어서 집은 아주 평온하게 보인다. 평야지대에서 볼 수 있는 특성이 잘 나타나는데, 고온다습한 남부의 집과 달리 같은 평야라도 북방적이다. 안마당과 바깥채는 형으로 배설되어 있다. 이 유형은 경기도 서해안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며, 마을의 거의 모든 집도 여기에 속한다. 집은 안채와 바깥채가 옛날식으로 이엉을 이은 초가지붕이다. 홑처 마에 앙토하여 천장을 구성한 위에 해마다 이엉을 올려 지금은 아주 두툼하게 구조된 형상이다. 새로 지은 지붕은 기스락까지 다듬어서 말끔해 보인다. 수원 부근의 이들 유형의 지붕은 용마름에 대나무를 넣어 빳빳하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해안 지역의 집은 대부분 그렇게 하였는데 지금은 보기 힘들다. 이 구조법은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이어지며 분포하다가<NAME>강을 지나면서 사라진다. 이러한 분포는 어떤 문화의식에 기인하는 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이 집의 용마루에는 대나무가 없다. 현대적 유행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분포권 밖으로 벗어난 지역의 특성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그 점을 찾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뒤뜰에는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 쪽에는 화계 비슷한 시설에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경치를 살렸다.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안채 마룻대의 묵서명으로 건축 연대를 알 수 있어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어 인근 유사 집들 가운데 이 집이 유독 지정된 것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수원 광주이씨 고택 (水原 廣州李氏 古宅) ### 내용: 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집은 모두 초가집으로, 튼자형의 살림 채와 바깥마당, 그 앞의 헛간채, 뒤꼍, 기타 광채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고종 연간에 이병원의 부친이 분가하여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장형의 묵서에 광서 십사 년 무자 삼월 십팔일 입주상량이라고 적혀 있어 상량한 집임을 알 수 있다. 건립 당시 초가로 지어진 이 가옥은 공간 활용을 위해 벽체를 바꾸었고,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으로 행랑채와 헛간의 지붕을 개량하기도 하였다. 1993∼1994년에 걸친 보수공사에서 변경된 벽체와 지붕을 고증에 따라 원형으로 복원하였다. 집터는 서남향으로 열렸고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른다. 울의 외곽에 있는 바깥채에 대문이 있다. 칸 반 두 칸 통의 사랑방에 이어 대문간이 열려 있다. 사랑방은 앞퇴가 골목으로 향하고 있는 전형적인 경기도 서해안의 구조이다. 대문간 뒤쪽 헛간에서 자로 꺾이는 평면이 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반듯한 안마당과 자형 안채가 있다. 부엌은 자의 동편 끝칸에 있고 안방은 두 칸 넓이이다. 서남향 한 대청은 네 칸 넓이로 우물 마루이다. 다음 건넌방 두 칸이 있다. 외벌대 위에 낮게 지어서 집은 아주 평온하게 보인다. 평야지대에서 볼 수 있는 특성이 잘 나타나는데, 고온다습한 남부의 집과 달리 같은 평야라도 북방적이다. 안마당과 바깥채는 형으로 배설되어 있다. 이 유형은 경기도 서해안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며, 마을의 거의 모든 집도 여기에 속한다. 집은 안채와 바깥채가 옛날식으로 이엉을 이은 초가지붕이다. 홑처 마에 앙토하여 천장을 구성한 위에 해마다 이엉을 올려 지금은 아주 두툼하게 구조된 형상이다. 새로 지은 지붕은 기스락까지 다듬어서 말끔해 보인다. 수원 부근의 이들 유형의 지붕은 용마름에 대나무를 넣어 빳빳하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해안 지역의 집은 대부분 그렇게 하였는데 지금은 보기 힘들다. 이 구조법은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이어지며 분포하다가<NAME>강을 지나면서 사라진다. 이러한 분포는 어떤 문화의식에 기인하는 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이 집의 용마루에는 대나무가 없다. 현대적 유행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분포권 밖으로 벗어난 지역의 특성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그 점을 찾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뒤뜰에는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 쪽에는 화계 비슷한 시설에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경치를 살렸다.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안채 마룻대의 묵서명으로 건축 연대를 알 수 있어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어 인근 유사 집들 가운데 이 집이 유독 지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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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야 온정리 굴재덕 유적 (金野 溫井里 굴재덕 遺蹟)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형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7892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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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0m의 야산 줄기의 동쪽 비탈면에 위치하여 온정리에서 서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동굴은 인부들이 채석하는 과정에서 동물 화석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정식 조사는 1986년 6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제1호 동굴과 제2호 동굴이 확인되었으며, 제2호 동굴에서는 포유동물 화석이 확인되었다. 제1호 동굴은 길이 35m, 너비 18m, 높이 5m의 규모를 갖고 있다. 동굴 퇴적의 단면은 표층으로부터 시작하여 맨 위층에 두께 2∼10mm의 얇은 석수층이 있고, 맨 아래쪽에는 80cm 두께의 검붉은 진흙층이 있다. 이 검붉은 진흙층에서 큰쌍코뿔이를 비롯한 수십 점의 화석들이 나왔다. 제일 아래층에는 입자가 매우 부드러운 검붉은 진흙층이 바닥까지 깔렸다. 제2호 동굴은 제1호 동굴보다 7m 정도 높은 위치에 있다. 퇴적층은 길이 10m, 너비 12m, 높이 약 12m로 이루어져 있다. 퇴적층은 위에서부터 표토층으로 채석 과정에서 생긴 석회암 부스러기들이 약 2m 두께로 덮여 있고, 둘째 층은 두께 30cm의 화석층이고, 셋째 층은 두께 30cm의 화석층인데, 퇴적층은 두께 20cm의 붉은 진흙층이다. 넷째 층은 두께 40㎝의 누런빛을 띤 붉은 진흙층이고, 다섯째 층은 두께 60㎝의 화석층으로서 석회질 모난 조약돌이 섞인 매우 굳은 누런빛을 띤 붉은 진흙층이고, 여섯째 층은 두께 50㎝의 누런빛을 띤 붉은 진흙층이고, 맨 마지막 층은 다공질의 검 붉은색의 진흙층과 지하수 퇴적층으로서 밑바닥까지 계속된다. 제2호 동굴에서 나온 포유동물 화석은 승냥이·큰곰·작은곰·오소리·동굴하이에나·호랑이·큰쌍코뿔이·멧돼지·사슴·누렁이·노루·물소·원숭이 등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금야 온정리 굴재덕 유적 (金野 溫井里 굴재덕 遺蹟) ### 내용: 해발 50m의 야산 줄기의 동쪽 비탈면에 위치하여 온정리에서 서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동굴은 인부들이 채석하는 과정에서 동물 화석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정식 조사는 1986년 6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제1호 동굴과 제2호 동굴이 확인되었으며, 제2호 동굴에서는 포유동물 화석이 확인되었다. 제1호 동굴은 길이 35m, 너비 18m, 높이 5m의 규모를 갖고 있다. 동굴 퇴적의 단면은 표층으로부터 시작하여 맨 위층에 두께 2∼10mm의 얇은 석수층이 있고, 맨 아래쪽에는 80cm 두께의 검붉은 진흙층이 있다. 이 검붉은 진흙층에서 큰쌍코뿔이를 비롯한 수십 점의 화석들이 나왔다. 제일 아래층에는 입자가 매우 부드러운 검붉은 진흙층이 바닥까지 깔렸다. 제2호 동굴은 제1호 동굴보다 7m 정도 높은 위치에 있다. 퇴적층은 길이 10m, 너비 12m, 높이 약 12m로 이루어져 있다. 퇴적층은 위에서부터 표토층으로 채석 과정에서 생긴 석회암 부스러기들이 약 2m 두께로 덮여 있고, 둘째 층은 두께 30cm의 화석층이고, 셋째 층은 두께 30cm의 화석층인데, 퇴적층은 두께 20cm의 붉은 진흙층이다. 넷째 층은 두께 40㎝의 누런빛을 띤 붉은 진흙층이고, 다섯째 층은 두께 60㎝의 화석층으로서 석회질 모난 조약돌이 섞인 매우 굳은 누런빛을 띤 붉은 진흙층이고, 여섯째 층은 두께 50㎝의 누런빛을 띤 붉은 진흙층이고, 맨 마지막 층은 다공질의 검 붉은색의 진흙층과 지하수 퇴적층으로서 밑바닥까지 계속된다. 제2호 동굴에서 나온 포유동물 화석은 승냥이·큰곰·작은곰·오소리·동굴하이에나·호랑이·큰쌍코뿔이·멧돼지·사슴·누렁이·노루·물소·원숭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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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7953.txt
보성 이승래 고택 (寶城 李昇來 古宅)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황의수"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25
CC BY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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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자형의 평면을 갖춘 드문 사례로 1800년대 말에 지어졌다. 집의 주위는 대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치가 빼어나다. 문간채가 따로 없고 골목길과 바깥마당이 바로 연결되지만 원래는 대문이 있었을 것이다. 안채는 자형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돌출된 부분이 2칸으로 바깥마당에서 보면 측면은 4칸이다. 자형 가운데 전면으로 돌출된 부분의 양간은 한 칸 반으로 좁다. 서쪽 끝에는 안채에 이어서 부속건물이 3칸 더 붙어 있는데, 측면이 한 칸으로 안채와는 후편 한 칸과 연결되어 있다. 전면으로 돌출된 부분의 맨 끝에는 부엌이 있는데 이 부분은 기둥의 높이가 높게 되어 마치 2층처럼 꾸미고, 상층은 다락으로 만들어 그 안쪽에 있는 사랑방에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부엌 쪽의 기둥이 높아진 것은 지대가 낮아지면서 기단도 낮아졌기 때문이며, 사랑방의 군불을 때면서 부엌 쪽의 기둥이 높아진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집에는 사랑채가 따로 없고 돌출 부분의 방들이 사랑채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랑방은 미닫이 칸막이로 되어 있고, 바깥마당과 통하는 툇마루가 동쪽에 있어 사랑방과 통한다. 일반적인 대청이라면 전면의 한 칸은 대청이고, 후면의 한 칸은 도장방이었다. 사랑방의 북쪽에 대청이 따로 있어 앞쪽의 안대 청과 구별되는 바깥 대청, 즉 사랑채 대청이라고 할 수 있다. 안방은 대청 옆으로 이어지는데 아랫방과 윗방, 고방(마루방)으로 나뉜다. 이 안방의 전면에는 반칸통의 툇마루가, 후면에는 쪽마루가 건물의 동쪽 끝까지 이어져 있다. 안방의 옆으로 부엌(정지)이 있고 그 전면 한 칸 통에 부엌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부엌방은 후면 한 칸 통에 배치되어 있다. 부엌은 옆으로 이어져 있는 부속건물을 통해 출입할 수 있으며, 광으로 된 부속건물은 광으로 되어 있다. 부엌의 후면에도 출입구가 있는데 이 문을 나서면 바로 장독대가 된다. 안마당의 서쪽, 부속건물 왼쪽 끝의 앞면에 있는 곳간이 있다. 이 집은 모두 마루를 깔아놓은 고상식의 창고인데 정면 4칸, 측면 단칸이다. 남쪽 지방의 창고<NAME>으로 마루 밑이 트여 있고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했다. 출입문이 있는 곳은 정면 4칸 중 북쪽 3칸뿐이다. 안채의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고 돌출부는 맞배지붕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곳간 채는 맞배 기와지붕이다. 이 집의 사당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사당은 따로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안채의 동북쪽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이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전면 기둥 3개는 독립기둥이고, 전면 기둥 3개는 독립기둥이다. 맞배 기와집은 가묘로서는 큰 규모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보성 이승래 고택 (寶城 李昇來 古宅) ### 내용: 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자형의 평면을 갖춘 드문 사례로 1800년대 말에 지어졌다. 집의 주위는 대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치가 빼어나다. 문간채가 따로 없고 골목길과 바깥마당이 바로 연결되지만 원래는 대문이 있었을 것이다. 안채는 자형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돌출된 부분이 2칸으로 바깥마당에서 보면 측면은 4칸이다. 자형 가운데 전면으로 돌출된 부분의 양간은 한 칸 반으로 좁다. 서쪽 끝에는 안채에 이어서 부속건물이 3칸 더 붙어 있는데, 측면이 한 칸으로 안채와는 후편 한 칸과 연결되어 있다. 전면으로 돌출된 부분의 맨 끝에는 부엌이 있는데 이 부분은 기둥의 높이가 높게 되어 마치 2층처럼 꾸미고, 상층은 다락으로 만들어 그 안쪽에 있는 사랑방에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부엌 쪽의 기둥이 높아진 것은 지대가 낮아지면서 기단도 낮아졌기 때문이며, 사랑방의 군불을 때면서 부엌 쪽의 기둥이 높아진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집에는 사랑채가 따로 없고 돌출 부분의 방들이 사랑채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랑방은 미닫이 칸막이로 되어 있고, 바깥마당과 통하는 툇마루가 동쪽에 있어 사랑방과 통한다. 일반적인 대청이라면 전면의 한 칸은 대청이고, 후면의 한 칸은 도장방이었다. 사랑방의 북쪽에 대청이 따로 있어 앞쪽의 안대 청과 구별되는 바깥 대청, 즉 사랑채 대청이라고 할 수 있다. 안방은 대청 옆으로 이어지는데 아랫방과 윗방, 고방(마루방)으로 나뉜다. 이 안방의 전면에는 반칸통의 툇마루가, 후면에는 쪽마루가 건물의 동쪽 끝까지 이어져 있다. 안방의 옆으로 부엌(정지)이 있고 그 전면 한 칸 통에 부엌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부엌방은 후면 한 칸 통에 배치되어 있다. 부엌은 옆으로 이어져 있는 부속건물을 통해 출입할 수 있으며, 광으로 된 부속건물은 광으로 되어 있다. 부엌의 후면에도 출입구가 있는데 이 문을 나서면 바로 장독대가 된다. 안마당의 서쪽, 부속건물 왼쪽 끝의 앞면에 있는 곳간이 있다. 이 집은 모두 마루를 깔아놓은 고상식의 창고인데 정면 4칸, 측면 단칸이다. 남쪽 지방의 창고<NAME>으로 마루 밑이 트여 있고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했다. 출입문이 있는 곳은 정면 4칸 중 북쪽 3칸뿐이다. 안채의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고 돌출부는 맞배지붕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곳간 채는 맞배 기와지붕이다. 이 집의 사당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사당은 따로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안채의 동북쪽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이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전면 기둥 3개는 독립기둥이고, 전면 기둥 3개는 독립기둥이다. 맞배 기와집은 가묘로서는 큰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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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ECO44808.txt
현준호 (玄俊鎬)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은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32
CC BY
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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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영암에서 1889년 8월 29일에 태어났다. 무송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다. 본관은 성산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NAME>봉의 2남 3녀 중 막내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남도 도 평의회원, 호남은행 은행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했다. 인민군이 전남 광주에서 1950년 9월 28일 사살했다. 어릴 적 한학을 공부했고 9세 때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사했다. 전남 창평에서 김성수의 장인 고정주가 세운 영학숙에 1906년 6월부터 들어갔다. 여기서 김성수,<NAME>, 김병로와 교유했다. 영학숙을 마치고 1907년 3월 휘문 의숙에 입학했다. 휘문 의숙을 졸업한 뒤 1912년 1월 일본 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14년 메이지대학 법률 학과에 진학했다.<NAME>가 회장으로 있던 호남 다화회에 가입해 김성수, 장덕수, 최남선, 신익희, 조소앙 등과 교유했다. 1917년 4월 메이지대학 법률 학과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19년 7월 호남은행 발기회 총회에서 발기인 겸 총대를, 12월 조선 경제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호남은행은 1920년 2월 자본금 150만 원의 은행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고, 동아일보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광주·목포지점에 이어 1922년 순천지점, 1926년 장성 출장소를 개설해 영업지역을 확대했으며, 8월 호남은행 창립총회에서 취체역 겸 전무취체역을 맡아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면 협의회원으로 1920년 11월 선출되었다. 1921년<NAME>전문학교 감사로 시작해 7월 임시 조선인 산업 대회 지방위원, 9월 (주) 동아일보 감사로 승진했다. 전라남도 육영회를 1921년에 설립하여 이사장을 지냈고, 1922년 광주 번영회 회장에 취임했다.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광주 지방부 회금보관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1923년 5월이었다. 9월 가옥을 신축하며 낙성식에 쓰려던 2,000원을 서선(西鮮) 수재 구제(500원), 동경 진 재 구제(東京震災救濟)(500원), 광주 사립 보통학교(300원), 목포 사립 보통학교(300원), 광주여자야 학교(100원), 광주노동 야학교(100원), 광주 유치원(100원), 광주보육원(100원), 광주소방조(消防組)(300원), 목포소방조(200원) 등에 모두 기부를 했다. 광주면 면 협의회원으로 11월 선출되었고, 12월 소작료를 줄이고 지세를 전부 자 담하였다. 1924년 4월 관선 전라남도 도 평의회원에 임명되었다.<NAME>봉이 7월 사망하자 수확량이 7,000섬에 달하는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NAME>봉의 호를 따서 학파 농장을 건립하고 소유지를 적극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농업경영을 개선했다. 선대로부터 소작인이 농장을 경작한 것으로, 주변 농장에 비해 소작료가 저렴했으며 적극적인 농사지도와 품종개량 등을 통해 수익률을 증가시켰다. 1926년 5월 전남도시 제사(주) 취체역, 조선 생명보험(주) 감사역을 거쳐 10월 학산 공립보통학교 신축비로 1,400원을 기부해 일본 정부에서 주는 포장을 받았다. 1927년<NAME> 전라남도 도 평의회원 선거에 당선되어 5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세웠다.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광주부에서 광주 공설운동장 기부금 모집 때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많은 금액을 부담시키는 것을 반대하여 도 평의회원, 면 협의회원, 광주 번영회장 등 10여 개의 모든 직책을 사임했다. 11월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2월 제출했던 사표 일체를 돌려받았으며, 3월 영암운수창고주식회사 취체역과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호남은행 두취(은행장)로 1930년 1월 취임했다. 매년 600원의 수당을 받던 중 6월 조선 총독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수당이 인상되었는데, 1939년 6월부터 1,200원, 1944년 12월부터 1,800원으로 인상되었다. 1932년 9월<NAME>교회 명리원 의정을 지냈고, 10월 중추원을 조선의 회로 바꿔 자치제를 실시하자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했다. 학파 농장 주도로 영암면 춘동리와 호포리 앞바다 100정보를 매립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6월이다. 호남은행은 1933년 동래은행을 흡수·합병한 뒤 자본금을 200만 원으로 증자하여 경상도까지 영업지역을 확대하고 지점을 신설하여 주요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일본상훈국은 그해 3월 조선나예방협회에 1,000원을 기부해 일본상훈국에서 포장을 수여했다. 5월 남조선철도주식회사 취체역과 전라남도 수산회 부회장,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경제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영암군 춘동리와 호포리 간척 사업을 마무리하고 학파 농장을 합명회사 형태로 법인화한 것은 1934년 5월이다. 조선 생명보험 주식회사의 취체역으로 5월 임명되었고, 그해 국방 의회 전라남도연합회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영암군 미암면 신포리 간척 사업은 1935년 춘동리와 호포리 간척지와 인접한 곳에 착수하여 1936년 5월 완공을 했다. 1935년 10월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과 은배를 받은 것은 광주부 교육회 명예회원, 산업 경제조사회 위원, 9월 광주 번영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4월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위원, 동아일보 취체역, 경성방직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고, 9월 학무국이 주도한 제2회 전조선시국강연반에서 전라남도 담당으로 활동했다. 출정군인 유가족에게 200원, 광주 제일 보통학교 봉안전 건조비에 200원, 광주 제이 보통학교에 100원을 12월 아들 결혼식을 치르고 남은 500원 가운데 기부했다. 같은 달 일본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은 것은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박물관 건립비로 1,000원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그해 전라남도 군사 후원 연맹 부회장과 국민정신 총동원 전라남도연맹 이사장에 임명되었다. 1938년 4월 전남 특별 지원병 후원회 부회장, 5월 응소 군인 위원금으로 1,000원을 광주 헌병대에 헌납했다. 시국 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 광주지부 결성식에서 지부장,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10월 호남 제탄 주식회사 취체역, 11월 전남 산업 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다. 광주·장흥·강진·해남·영암·무안군에 학파 농장 673정보, 밭 40정보 등 총 713정보의 학파 농장을 비롯하여 순자산 110만 원과 개인 명의 자산 62만 원 등이 1938년 6월경 소유한 재산이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에 2,000원에 상당하는 금품을 헌납했고 5월에도 1,000원에 상당하는 금액을 조선군애국부에 헌납했다. 6월 중앙협화회 평의원, 11월 조선 유도 연합회 상임 이사, 경성 축산(주) 취체역, 12월 남 만방적(주) 감사역을 역임했다. 영암군 군서면과 서호면 간척공사는 1940년 3월부터 시작되어 1944년 1기 방조제 공사를 끝냈지만 이후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1940년부터 미곡 증산정책을 시행하면서 학파 농장의 간척 개간 및 토지 경영이 국책에 부응한다고 인정을 받아 같은 해 11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6월 광주 대 화숙 고문, 8월 흥아보국단 상임위원 겸 전라남도 위원,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이사로 위촉되었다. 1941년 9월 화신 상사(주) 취체역, 12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2년 4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호남은행을 동일은행에게 매각하도록 하여 강제 매각당한 후 받은 은행 자산 27만 원을 일본 군용기 헌납(8만 원), 전남 육영회(2만 원), 전남 군인 후원회(1만 원), 충령탑(忠靈塔) 건립기금(3천 원), 광주병사부(1만원), 광주 방공<NAME> 시설비(5천 원), 광주 대 화숙(5천 원), 광주 재향군인회(3천 원),<NAME>전문학교 도서관(5천 원), 호남은행 지점 소재지 공공단체(11만 4천 원) 등에 기부했다. 전남 산업(주) 대표취체역, 1942년 11월 전남 산업(주) 대표취체역, 1943년 5월 조선 농지 개발 영단 평의원, 11월 임시특별 지원병제 실시 취지를 선전하는 전라남도 지역 파견자로 선정되었다. 화신산업(주)의 취체역으로 1944년 7월 발탁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이 화학공업주식회사를 세워 유리를 제조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광주 중학 기성회에 50만 원을 기부한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1949년 5월 반민특위에 조사를 받았으나 8월 반민특위 특별 검찰부에 의해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받았다.<NAME>호의 이와 같은 활동은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5·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 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보고서 IV-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 유서(pp.401∼447)에 관련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현준호 (玄俊鎬) ### 내용: 전라도 영암에서 1889년 8월 29일에 태어났다. 무송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다. 본관은 성산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NAME>봉의 2남 3녀 중 막내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남도 도 평의회원, 호남은행 은행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했다. 인민군이 전남 광주에서 1950년 9월 28일 사살했다. 어릴 적 한학을 공부했고 9세 때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사했다. 전남 창평에서 김성수의 장인 고정주가 세운 영학숙에 1906년 6월부터 들어갔다. 여기서 김성수,<NAME>, 김병로와 교유했다. 영학숙을 마치고 1907년 3월 휘문 의숙에 입학했다. 휘문 의숙을 졸업한 뒤 1912년 1월 일본 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14년 메이지대학 법률 학과에 진학했다.<NAME>가 회장으로 있던 호남 다화회에 가입해 김성수, 장덕수, 최남선, 신익희, 조소앙 등과 교유했다. 1917년 4월 메이지대학 법률 학과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19년 7월 호남은행 발기회 총회에서 발기인 겸 총대를, 12월 조선 경제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호남은행은 1920년 2월 자본금 150만 원의 은행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고, 동아일보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광주·목포지점에 이어 1922년 순천지점, 1926년 장성 출장소를 개설해 영업지역을 확대했으며, 8월 호남은행 창립총회에서 취체역 겸 전무취체역을 맡아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면 협의회원으로 1920년 11월 선출되었다. 1921년<NAME>전문학교 감사로 시작해 7월 임시 조선인 산업 대회 지방위원, 9월 (주) 동아일보 감사로 승진했다. 전라남도 육영회를 1921년에 설립하여 이사장을 지냈고, 1922년 광주 번영회 회장에 취임했다.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광주 지방부 회금보관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1923년 5월이었다. 9월 가옥을 신축하며 낙성식에 쓰려던 2,000원을 서선(西鮮) 수재 구제(500원), 동경 진 재 구제(東京震災救濟)(500원), 광주 사립 보통학교(300원), 목포 사립 보통학교(300원), 광주여자야 학교(100원), 광주노동 야학교(100원), 광주 유치원(100원), 광주보육원(100원), 광주소방조(消防組)(300원), 목포소방조(200원) 등에 모두 기부를 했다. 광주면 면 협의회원으로 11월 선출되었고, 12월 소작료를 줄이고 지세를 전부 자 담하였다. 1924년 4월 관선 전라남도 도 평의회원에 임명되었다.<NAME>봉이 7월 사망하자 수확량이 7,000섬에 달하는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NAME>봉의 호를 따서 학파 농장을 건립하고 소유지를 적극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농업경영을 개선했다. 선대로부터 소작인이 농장을 경작한 것으로, 주변 농장에 비해 소작료가 저렴했으며 적극적인 농사지도와 품종개량 등을 통해 수익률을 증가시켰다. 1926년 5월 전남도시 제사(주) 취체역, 조선 생명보험(주) 감사역을 거쳐 10월 학산 공립보통학교 신축비로 1,400원을 기부해 일본 정부에서 주는 포장을 받았다. 1927년<NAME> 전라남도 도 평의회원 선거에 당선되어 5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세웠다.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광주부에서 광주 공설운동장 기부금 모집 때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많은 금액을 부담시키는 것을 반대하여 도 평의회원, 면 협의회원, 광주 번영회장 등 10여 개의 모든 직책을 사임했다. 11월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2월 제출했던 사표 일체를 돌려받았으며, 3월 영암운수창고주식회사 취체역과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호남은행 두취(은행장)로 1930년 1월 취임했다. 매년 600원의 수당을 받던 중 6월 조선 총독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수당이 인상되었는데, 1939년 6월부터 1,200원, 1944년 12월부터 1,800원으로 인상되었다. 1932년 9월<NAME>교회 명리원 의정을 지냈고, 10월 중추원을 조선의 회로 바꿔 자치제를 실시하자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했다. 학파 농장 주도로 영암면 춘동리와 호포리 앞바다 100정보를 매립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6월이다. 호남은행은 1933년 동래은행을 흡수·합병한 뒤 자본금을 200만 원으로 증자하여 경상도까지 영업지역을 확대하고 지점을 신설하여 주요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일본상훈국은 그해 3월 조선나예방협회에 1,000원을 기부해 일본상훈국에서 포장을 수여했다. 5월 남조선철도주식회사 취체역과 전라남도 수산회 부회장,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경제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영암군 춘동리와 호포리 간척 사업을 마무리하고 학파 농장을 합명회사 형태로 법인화한 것은 1934년 5월이다. 조선 생명보험 주식회사의 취체역으로 5월 임명되었고, 그해 국방 의회 전라남도연합회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영암군 미암면 신포리 간척 사업은 1935년 춘동리와 호포리 간척지와 인접한 곳에 착수하여 1936년 5월 완공을 했다. 1935년 10월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과 은배를 받은 것은 광주부 교육회 명예회원, 산업 경제조사회 위원, 9월 광주 번영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4월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위원, 동아일보 취체역, 경성방직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고, 9월 학무국이 주도한 제2회 전조선시국강연반에서 전라남도 담당으로 활동했다. 출정군인 유가족에게 200원, 광주 제일 보통학교 봉안전 건조비에 200원, 광주 제이 보통학교에 100원을 12월 아들 결혼식을 치르고 남은 500원 가운데 기부했다. 같은 달 일본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은 것은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박물관 건립비로 1,000원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그해 전라남도 군사 후원 연맹 부회장과 국민정신 총동원 전라남도연맹 이사장에 임명되었다. 1938년 4월 전남 특별 지원병 후원회 부회장, 5월 응소 군인 위원금으로 1,000원을 광주 헌병대에 헌납했다. 시국 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 광주지부 결성식에서 지부장,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10월 호남 제탄 주식회사 취체역, 11월 전남 산업 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다. 광주·장흥·강진·해남·영암·무안군에 학파 농장 673정보, 밭 40정보 등 총 713정보의 학파 농장을 비롯하여 순자산 110만 원과 개인 명의 자산 62만 원 등이 1938년 6월경 소유한 재산이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에 2,000원에 상당하는 금품을 헌납했고 5월에도 1,000원에 상당하는 금액을 조선군애국부에 헌납했다. 6월 중앙협화회 평의원, 11월 조선 유도 연합회 상임 이사, 경성 축산(주) 취체역, 12월 남 만방적(주) 감사역을 역임했다. 영암군 군서면과 서호면 간척공사는 1940년 3월부터 시작되어 1944년 1기 방조제 공사를 끝냈지만 이후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1940년부터 미곡 증산정책을 시행하면서 학파 농장의 간척 개간 및 토지 경영이 국책에 부응한다고 인정을 받아 같은 해 11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6월 광주 대 화숙 고문, 8월 흥아보국단 상임위원 겸 전라남도 위원,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이사로 위촉되었다. 1941년 9월 화신 상사(주) 취체역, 12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2년 4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호남은행을 동일은행에게 매각하도록 하여 강제 매각당한 후 받은 은행 자산 27만 원을 일본 군용기 헌납(8만 원), 전남 육영회(2만 원), 전남 군인 후원회(1만 원), 충령탑(忠靈塔) 건립기금(3천 원), 광주병사부(1만원), 광주 방공<NAME> 시설비(5천 원), 광주 대 화숙(5천 원), 광주 재향군인회(3천 원),<NAME>전문학교 도서관(5천 원), 호남은행 지점 소재지 공공단체(11만 4천 원) 등에 기부했다. 전남 산업(주) 대표취체역, 1942년 11월 전남 산업(주) 대표취체역, 1943년 5월 조선 농지 개발 영단 평의원, 11월 임시특별 지원병제 실시 취지를 선전하는 전라남도 지역 파견자로 선정되었다. 화신산업(주)의 취체역으로 1944년 7월 발탁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이 화학공업주식회사를 세워 유리를 제조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광주 중학 기성회에 50만 원을 기부한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1949년 5월 반민특위에 조사를 받았으나 8월 반민특위 특별 검찰부에 의해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받았다.<NAME>호의 이와 같은 활동은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5·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 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보고서 IV-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 유서(pp.401∼447)에 관련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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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조합총연맹 (韓國勞動組合總聯盟)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류제철"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109
CC BY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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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은 1946년 3월 10일 우익 청년 단체 및 정당 관계 인사들에 의해 상층 지도부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 산하 노조들이 9월 총파업으로 와해되자, 대한 독립촉성 노동총연맹(약칭 대한 노총)은 남한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부상했다. 특히 대한 노총은 이승만 총재를 총재로 하여 반공단체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 노총은 1950년대부터 적극적인 친정부 활동을 전개했는데, 노조 해산과 재조직 과정에서 대한 노동조합 총연합회와 자유노동조합 연맹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그 후 대한 노총에 반대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조직 등의 내분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에 협조했던 대한 노총은 1960년 4·19혁명 이후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 노련)을 출범시켰다. 한국 노련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포고령 제6호에 의해 해산되었고, 같은 해 8월 31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재조직되었는데, 한국 노련은 노동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이 기대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해산되었다. 이때 기업별 노동조합 형태가 산업별 노동조합 형태로 바뀌었다. 한국노총은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으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보수적 노동조합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NAME>의 분신 항거 자살 사건으로 노동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면서, 일부 한국노총 산하 노조와 신설 노조들은<NAME>적으로는 한국노총 소속이었지만 지식인, 종교계와 연대하여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보수적 노동운동을 추구하던 한국노총은<NAME>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유신 헌법을 찬성하는 친정부 노선과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였다. 1980년 말의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노동조합의 형태가 산업별에서 기업별로 바뀌고 노동운동에 대한 제약이 더욱 강해지고, 1970년대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으로 인해 한국노총의 조합원 수는 100만 명을 넘던 것이 80만 명 내외로 줄어들었다. 한국노총의 노동운동 주도권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기존 노조의 민주화와 노조의 대규모 신규 설립의 물결로 크게 약화되었다. 한국노총은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고, 그 뒤 민주노총으로 발전하면서 한국 유일의 최정상 노동조합 조직의 위상이 추락하였다. 한국노총은 1987년 이후 조합주의, 경제주의, 반공주의의 노동운동 기조를 반성하고 1991년 2월 전국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운동의 이념을 민주 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노동조합주의로 바꾸었다. 자주적·민주적 노동운동의 전개, 노동자와 일반 국민의 생존권 보호,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개혁 추진,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적극적 참여, 정치활동의 전개, 노동 조직의 통일과 시민운동과의 연대 등이 그 내용이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1996년 5월 발족된 노사관계개혁 위원회와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에 함께 참여하였고, 사안에 따라 공동보조를 취하기도 하였다. 한국노총은 2007년 대선에서 조합원 총 투표를 통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정책연대를 맺고 조직적으로 지지하였으나, 2009년 정부의 복수노조 허용,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의 강행 방침에 맞서 한나라당과의 정책 연대를 파기하였다. 한국노총은 2011년 현재 복수노조 문제, 노조 전임자 근무시간 면제제도 등의 시행으로 인해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국노총에 가입한 산별노조는 27개 산별노조이며 사업장 수는 3,260개, 조합원 수는 884,393명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한국노동조합총연맹 (韓國勞動組合總聯盟) ### 내용: 한국노총은 1946년 3월 10일 우익 청년 단체 및 정당 관계 인사들에 의해 상층 지도부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 산하 노조들이 9월 총파업으로 와해되자, 대한 독립촉성 노동총연맹(약칭 대한 노총)은 남한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부상했다. 특히 대한 노총은 이승만 총재를 총재로 하여 반공단체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 노총은 1950년대부터 적극적인 친정부 활동을 전개했는데, 노조 해산과 재조직 과정에서 대한 노동조합 총연합회와 자유노동조합 연맹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그 후 대한 노총에 반대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조직 등의 내분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에 협조했던 대한 노총은 1960년 4·19혁명 이후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 노련)을 출범시켰다. 한국 노련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포고령 제6호에 의해 해산되었고, 같은 해 8월 31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재조직되었는데, 한국 노련은 노동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이 기대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해산되었다. 이때 기업별 노동조합 형태가 산업별 노동조합 형태로 바뀌었다. 한국노총은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으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보수적 노동조합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NAME>의 분신 항거 자살 사건으로 노동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면서, 일부 한국노총 산하 노조와 신설 노조들은<NAME>적으로는 한국노총 소속이었지만 지식인, 종교계와 연대하여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보수적 노동운동을 추구하던 한국노총은<NAME>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유신 헌법을 찬성하는 친정부 노선과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였다. 1980년 말의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노동조합의 형태가 산업별에서 기업별로 바뀌고 노동운동에 대한 제약이 더욱 강해지고, 1970년대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으로 인해 한국노총의 조합원 수는 100만 명을 넘던 것이 80만 명 내외로 줄어들었다. 한국노총의 노동운동 주도권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기존 노조의 민주화와 노조의 대규모 신규 설립의 물결로 크게 약화되었다. 한국노총은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고, 그 뒤 민주노총으로 발전하면서 한국 유일의 최정상 노동조합 조직의 위상이 추락하였다. 한국노총은 1987년 이후 조합주의, 경제주의, 반공주의의 노동운동 기조를 반성하고 1991년 2월 전국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운동의 이념을 민주 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노동조합주의로 바꾸었다. 자주적·민주적 노동운동의 전개, 노동자와 일반 국민의 생존권 보호,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개혁 추진,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적극적 참여, 정치활동의 전개, 노동 조직의 통일과 시민운동과의 연대 등이 그 내용이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1996년 5월 발족된 노사관계개혁 위원회와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에 함께 참여하였고, 사안에 따라 공동보조를 취하기도 하였다. 한국노총은 2007년 대선에서 조합원 총 투표를 통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정책연대를 맺고 조직적으로 지지하였으나, 2009년 정부의 복수노조 허용,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의 강행 방침에 맞서 한나라당과의 정책 연대를 파기하였다. 한국노총은 2011년 현재 복수노조 문제, 노조 전임자 근무시간 면제제도 등의 시행으로 인해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국노총에 가입한 산별노조는 27개 산별노조이며 사업장 수는 3,260개, 조합원 수는 884,39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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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8624.txt
우살미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택규"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9952
CC BY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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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명천 지방과 경상남도 내륙 지방의 울력과 유사하게 노동의 교환이나 임금에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이 노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살미는 추수가 끝난 뒤 짚이나 억새풀·대마 등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우살미 ### 내용: 함경북도 명천 지방과 경상남도 내륙 지방의 울력과 유사하게 노동의 교환이나 임금에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이 노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살미는 추수가 끝난 뒤 짚이나 억새풀·대마 등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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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1630.txt
상묘일 (上卯日)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임동권"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078
CC BY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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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에 십이지 일의 하나로 첫 토끼날이라고도 한다. 첫 토끼날에는 여자가 먼저 대문이나 사립문을 열면 안 되고 남자가 먼저 열어야 한다. 가장이 열면 더 좋고 가장이 없으면 아이가 있어도 남자가 여는 것이 불문율이다. 방문도 남자가 연 다음에야 비로소 여인을 드나드는 경우도 있다. 남자가 먼저 문을 열어야 가운이 좋으며, 여자가 먼저 문을 열면 1년 동안 불길한 일이 계속된다고 믿고 있다. 이날은 장수를 기원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 새로 뽑은 실을 토사( : 톳실) 또는 명사라 하며, 이 실을 차고 다니거나 옷을 지어 입으면 수명이 길어지거나 재앙을 물리친다고 한다. 명주실을 남녀 모두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걸면 수명이 길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 여인들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기 시작했고, 바느질을 하였다. 실은 길이가 길어 장수를 상징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고, 백일이나 돌 때 떡을 돌리면 답례로 실타래를 보내는 것도 같은 뜻이다. 토끼날은 신중하고 언행을 삼가며 실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토끼날에 파는 사기그릇·놋그릇·옹기그릇은 잘못 들여오면 깨지기 때문에 안 사고, 또 토끼날에 사람을 구해서 두게 되면 경망스럽고 방정맞은 사람을 두게 된다는 이유로 사지 않는다. 토끼는 방정맞게 깡충깡충 뛰어다니므로 전라남도 어촌에서는 어부가 바다에 배를 띄워 고기를 잡는 것을 금지하고, 경상도 지방에서는 상묘일 오전에 손님이 오는 것을 금한다. 한편, 토끼는 털이 많은 동물이라 정초에 목화가 풍년인다고 한다. 이날 오전에는 모든 지역에서 사람이 출입하지 않는 습속이 나타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상묘일 (上卯日) ### 내용: 정초에 십이지 일의 하나로 첫 토끼날이라고도 한다. 첫 토끼날에는 여자가 먼저 대문이나 사립문을 열면 안 되고 남자가 먼저 열어야 한다. 가장이 열면 더 좋고 가장이 없으면 아이가 있어도 남자가 여는 것이 불문율이다. 방문도 남자가 연 다음에야 비로소 여인을 드나드는 경우도 있다. 남자가 먼저 문을 열어야 가운이 좋으며, 여자가 먼저 문을 열면 1년 동안 불길한 일이 계속된다고 믿고 있다. 이날은 장수를 기원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 새로 뽑은 실을 토사( : 톳실) 또는 명사라 하며, 이 실을 차고 다니거나 옷을 지어 입으면 수명이 길어지거나 재앙을 물리친다고 한다. 명주실을 남녀 모두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걸면 수명이 길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 여인들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기 시작했고, 바느질을 하였다. 실은 길이가 길어 장수를 상징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고, 백일이나 돌 때 떡을 돌리면 답례로 실타래를 보내는 것도 같은 뜻이다. 토끼날은 신중하고 언행을 삼가며 실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토끼날에 파는 사기그릇·놋그릇·옹기그릇은 잘못 들여오면 깨지기 때문에 안 사고, 또 토끼날에 사람을 구해서 두게 되면 경망스럽고 방정맞은 사람을 두게 된다는 이유로 사지 않는다. 토끼는 방정맞게 깡충깡충 뛰어다니므로 전라남도 어촌에서는 어부가 바다에 배를 띄워 고기를 잡는 것을 금지하고, 경상도 지방에서는 상묘일 오전에 손님이 오는 것을 금한다. 한편, 토끼는 털이 많은 동물이라 정초에 목화가 풍년인다고 한다. 이날 오전에는 모든 지역에서 사람이 출입하지 않는 습속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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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33857.txt
잔석기 (잔石器)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8161
CC BY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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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석기는 유럽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나타났는데, 특히 중석기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도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잔석기가 등장하여 중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고 추측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렇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유럽의 기하학 형태의 잔석기에 대한 기준을 더 엄밀히 적용하여, 한반도에서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말하는 잔석기가 아주 드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잔석기를 단순히 크기만 가지고 분류할 것이냐, 아니면 크기와 더불어 기술-형태적 특성까지도 함께 고려해서 분류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실제로 유럽에서 통용되는 잔석기는 직접 석기를 손에 쥐고 사용하지 않고, 나무나 뼈로 만든 자루나 손잡이에 끼워서 쓰는 기하학적 형태의 석기라는 개념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잔석기라는 용어 자체에서 이미 크기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데, 그 기준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잔석기는 대개 길이가 4cm 미만이고 두께가 0.4cmcm 미만인 석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연구자에 따라 잔석기 길이의 상한선을 5cm 이하로, 또는 4cm 미만으로 규정하고 있다. 잔석기 크기에 대한 기준은 통계적 방법을<NAME>하여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잔석기는 지역적으로 영국 · 프랑스 · 스페인에서부터 서아시아 · 인도 · 동남아시아 · 시베리아 · 중국 · 한국을 거쳐 일본과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한반도와 더 가까운 지역인 중국 산시 성[] 즈위[]와 허난 성[] 샤오 난하이[] 유적, 중석기시대 유적인 산시성 사위안[]과 허난성 링징[]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는 연해주(沿海州)의 우스티노부카(Ustinovka), 캄차카반도의 우스키(Ushki), 아무르(Amur) 강의 오시포브카(Osipovka), 알단(Aldan) 강의 숨나긴(Sumnagin), 벨카치(Belkachi), 안 가라(Angara) 강의 우스트-벨라야(Ust-Belaia) 유적에서, 몽골에서는 동몽골의 도르노트아이막의 탐삭 볼락(Tamsag Basin), 수흐바타르아이막의 제 그스 누르(Jegus Nuur) 유적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일본열도에서는 사할린(Sakhalin)의 임친스키(Imchinskii), 홋카이도[]의 시라다 키[], 규슈[]의 후쿠이[] 동굴 유적 등이 발견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1978년 경상남도 통영시 상노 대도 패총에서 발견된 잔석기 역시 유적의 중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조개더미의 맨 아래층인 10층에서 나왔다. 한편 함경북도 나선 굴포항 유적, 충청남도 공주 석장리 유적, 강원도 양구 상무룡리 유적, 강원도 홍천 하화계리 유적의 작은 솔밭, 사둔지, 도둔 유적 등에서 중석기시대 또는 최말기 구석기 층에서 잔석기가 나왔다.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는 제주 고산리 유적과 강원도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도 있다. 그 밖에도 충청북도 단양 금굴 유적, 전라남도<NAME> 신평리 유적, 경상남도 거창군 임불리 유적, 부산 좌동 · 중동 유적에서도 잔석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하지만 잔석기 판별 기준이 엄밀하게 정의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잔석기 (잔石器) ### 내용: 잔석기는 유럽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나타났는데, 특히 중석기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도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잔석기가 등장하여 중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고 추측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렇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유럽의 기하학 형태의 잔석기에 대한 기준을 더 엄밀히 적용하여, 한반도에서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말하는 잔석기가 아주 드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잔석기를 단순히 크기만 가지고 분류할 것이냐, 아니면 크기와 더불어 기술-형태적 특성까지도 함께 고려해서 분류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실제로 유럽에서 통용되는 잔석기는 직접 석기를 손에 쥐고 사용하지 않고, 나무나 뼈로 만든 자루나 손잡이에 끼워서 쓰는 기하학적 형태의 석기라는 개념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잔석기라는 용어 자체에서 이미 크기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데, 그 기준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잔석기는 대개 길이가 4cm 미만이고 두께가 0.4cmcm 미만인 석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연구자에 따라 잔석기 길이의 상한선을 5cm 이하로, 또는 4cm 미만으로 규정하고 있다. 잔석기 크기에 대한 기준은 통계적 방법을<NAME>하여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잔석기는 지역적으로 영국 · 프랑스 · 스페인에서부터 서아시아 · 인도 · 동남아시아 · 시베리아 · 중국 · 한국을 거쳐 일본과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한반도와 더 가까운 지역인 중국 산시 성[] 즈위[]와 허난 성[] 샤오 난하이[] 유적, 중석기시대 유적인 산시성 사위안[]과 허난성 링징[]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는 연해주(沿海州)의 우스티노부카(Ustinovka), 캄차카반도의 우스키(Ushki), 아무르(Amur) 강의 오시포브카(Osipovka), 알단(Aldan) 강의 숨나긴(Sumnagin), 벨카치(Belkachi), 안 가라(Angara) 강의 우스트-벨라야(Ust-Belaia) 유적에서, 몽골에서는 동몽골의 도르노트아이막의 탐삭 볼락(Tamsag Basin), 수흐바타르아이막의 제 그스 누르(Jegus Nuur) 유적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일본열도에서는 사할린(Sakhalin)의 임친스키(Imchinskii), 홋카이도[]의 시라다 키[], 규슈[]의 후쿠이[] 동굴 유적 등이 발견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1978년 경상남도 통영시 상노 대도 패총에서 발견된 잔석기 역시 유적의 중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조개더미의 맨 아래층인 10층에서 나왔다. 한편 함경북도 나선 굴포항 유적, 충청남도 공주 석장리 유적, 강원도 양구 상무룡리 유적, 강원도 홍천 하화계리 유적의 작은 솔밭, 사둔지, 도둔 유적 등에서 중석기시대 또는 최말기 구석기 층에서 잔석기가 나왔다.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는 제주 고산리 유적과 강원도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도 있다. 그 밖에도 충청북도 단양 금굴 유적, 전라남도<NAME> 신평리 유적, 경상남도 거창군 임불리 유적, 부산 좌동 · 중동 유적에서도 잔석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하지만 잔석기 판별 기준이 엄밀하게 정의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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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618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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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은 정식 명칭이며, Holland ·화란이라고도 한다. 해안선은 약 451km에 달하며, 서쪽과 북쪽은 북해와 접한다. 카리브해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5개 섬으로 구성)와 아루마 섬이 있으며, 인도네시아도 한때 300년간 식민지로 있었다가 1950년 독립하였다. 행정부 소재지는 네덜란드어 Dan Haag,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이며, 12개 주(provincie)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이다. 면적은 4만 1543km2, 인구는 1694만 7904명(2015년 현재)이다. 주요 인종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이다. 공식 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이 쓰인다. 특히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가 왕실의 종교인데,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간척 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고, 국토의 70%가 농목지여서 낙농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창립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화를 추진하여 선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주로 석유화학·금속·철강·수송·조선·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2016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827달러이고 총생산은 7625억 달러이다. 내각책임제의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간에 의회 내의 의석 분포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원칙이다. 의회는 임기 6년의<NAME>(75석) 및 임기 4년의 하원(150석) 양원으로 구성되며, 주요 정당으로는 노동당(PVDA), 기독민주당(CDA), 자유민주당(VVD), 민주 66당(Democrats66), 녹색당, 사회당 등이 있다. 서기전 1세기 중엽 로마의 시저(Caesar, J. )가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현재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거했으며, 그 뒤 400년경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따라 로마인은 물러가고, 남부에는 프랑크족,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다. 6세기에는 대 프랑크 왕국이, 9세기에는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인해 수개의 공국이 생겨났다.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의 필립 선공이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를 전부 지배했고, 1515년부터는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이후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자, 오렌지는 윌리엄공의 지휘 하에 독립투쟁을 전개해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17세기경 해양 및 식민지 경영 국가로서 국세가 융성하여 아시아에 진출하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현재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패망 시까지 점령당했고, 1814년 윌리엄 1세의 통치 하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의 통일왕국이 세워졌다. 1831년 벨기에가 독립한 뒤 네덜란드는 윌리엄 2세의 자유 헌법 제정과 50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대 산업국가로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 정책을 취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의해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룩셈부르크를 독립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마셜(Marshall)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 복원을 했으며, 이후 전통적인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서유럽연합(WEU)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여 서방<NAME>에 가담했으며 1945년 12월 유엔에 가입했다. 전쟁 중이던 1944년에는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창설하고,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EC, 현 EU)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대외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0년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는 유고 내전과 아프리카의 내전, 기근 등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 들어와 반외국인 감정이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은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증폭되었고, 2002년 마침내 네덜란드 사회를 뒤흔드는 폭풍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2002년 의회에서 통과된 난민 추방 중단 결의안은 난민에 대한 대규모 사면 및 영주권 부여의 길을 연 셈이며, 정부의 강경 정책에 의회가 제동을 건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1948년에 왕위를 물려받았고, 현 베아트릭스(Beatrix) 여왕이 1980년 4월에 왕위를 물려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왕은 상징적 존재로서 모든 국사에<NAME>적·의례적 권한을 행사하며, 법령이나 중용 국정 관계 문서에 대한 서명권이 있으나 관계 각료의 부서가 있어야만 효력이 발생하므로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네덜란드는 조선시대에 벨테브레이(Weltevree, J. , 박연, )가 표류, 귀화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뒤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하멜(Hamel, H. )은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하멜표류기를 쓰기도 했다.<NAME> 열사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상설·이위종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다가 분사한 바 있다. 그의 유해가 있던 곳은 1977년 10월 묘비가 세워졌는데, 1963년 그의 유해가 서울로 이장된 곳이다. 네덜란드는 유엔한국 통일부흥위원단(UNCURK) 7개 회원국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지지해 온 주요 우방국이다.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 화란 참전용사비는 6·25전쟁 참전국이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한국을 승인하였고, 1961년 4월 4일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NAME> 상주 공관은 1968년 12월에, 네덜란드 주재 상주 공관은 1969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양국은 1966년 4월에 특허 및 상표 협정, 1970년 4월에 사증 면제 협정, 1970년 6월에 항공 협정, 1974년 10월에 투자보장 협정, 1978년 10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79년 2월에 전대차관 협정, 1982년 12월에 경제기술협력 협정, 1995년 12월에 해운 협정, 2002년 7월에 사회보장 협정, 2003년 7월에 투자보장 협정, 2007년 7월에 세관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40억 24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반도체 제조용 장비·반도체 제조용 장비부품·나프타·고 철 등이며, 수입액은 43억 49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제트유 및 등유·무선전화기·승용차 등이다. 양국은 1975년 한·화 공동위원회, 1976년 한·화 민간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어 상호 협력을 강화해 왔고, 2007년 현재 40여 개의 경제단체가 진출해 있으며, 경제단체로는 KOTRA를 비롯하여 삼성전자· LG전자·한국타이어·외환은행 등 40여 개 상사들이 있다. 또한, 한·화란 친선협회 및 화란 한국전 참전용사회·한국전 참전화란 해군 용사회 등이 조직되어 있으며, 1976년 10월 횡성군과 네덜란드의 가스텔시가 자매결연을 하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07년 현재 네덜란드에는 교민 719명과 체류자 1,032명이 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 때는 네덜란드 선수 271명이 참가했으며, 2002년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 경기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4강에 진출시켜 전 국민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에 수교하였으나 교민이나 체류자는 없다. 북한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2014년 현재 672만 달러이며, 주 종목은 기계 공구류와 비금속제품이며 수입액은 267만 달러로 기계류와 섬유가 주를 이루고 있다. 양측은 2001년 4월 무역 및 경제 협력 회담록, 북한 지역 통과 가스 파이프라인 설치 양해각서 등을 교환하였다. 네덜란드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문화사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플랑드르 출신의 루브 루크(Rubruck, W. van)는 프란치스코 회 신부로서 첫 번째 역할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사신으로 1253∼1255년 몽고제국의 영내를 방문하고 우리나라에 대해 까울레(Caule, )라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까울레는 고려의 중국식 발음이다. 이에 따라 폴로(Polo, M. )도 카울레를 언급했다. 하멜(Hamel, Hendrik)은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나서 그 견문을 직접 책으로 펴냈다. 하멜은 네덜란드 배 데스 페르 베르 호(DeSperwer)가 1653년 제주도 해안에서 파선되자 표류하던 선원들과 제주도에 올라와 동료 7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13년간 살았다. 이후 그는 1668년 로테르담에서 하멜표류기를 출간했으며, 그것은 곧 프랑스어·독일어·영어로 번역되었다. 편집과 번역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발생했지만, 이 책은 한국인과 문화를 최초로 17세기 유럽인에게 소개한 업적이 있다.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중요한 저서는 1692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북부 및 동부 타타르인(Noord en Oost Tartaryen)으로, 비첸(Witsen, N. )이 저술한 것이다. 특히 1705년에 나온 그 재판본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에 관한 유럽인들의 기록과 하멜의 두 동료에게 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한글 어휘와 한국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지볼트(Siebold, K. T. E. von)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이 분야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네덜란드를 위해 1823∼1829년 일본의 데지마(:나가사키)에 거처하며 학교를 세워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한글의 자모를 네덜란드 왕립학술원에 보냈고, 그전에 표류해 그곳에 와 있던 한국인들을 여러 차례 면담하였다. 라이덴에서 1831년 독일어로 일본기(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를 쓴 사람은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 한국의 관료 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을 다룬 일본기(Nippon)를 저술했다. 이 자료집 편집에 조수로서 특히 한국 관계 부분을 주로 담당한 호프만(Hoffmann, J. J. )은 뒷날 라이덴 대학교의 첫 일본어학 교수가 되거니와, 여러 가지의 일본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단군으로부터 1637년까지의 한국사 개관, 일본의 대 한국 및 중국 관계 등을 서술하였다. 그 밖에 1920년 『하멜표류기』를 학문적으로 다룬 회틴크(Hoetink , B. )와 1931∼1946년에 라이덴 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교수로서 비교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어·중세어 및 현대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라데르(Rahder, J. )는 네덜란드에서의 한국학 성립을 위해 기여한 바 크다. 네덜란드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대체로 외교관·상인 등에 의해 수집되었고, 일본 미술품 수집가가 덧붙여 구입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들 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 소장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라이덴에 있는 국립민족학 박물관과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이 가장 두드러지는 소장품이다. 세 사람의 소장품이 국립민족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1,500점에 이른다. 중국 베이징 주재 네덜란드 공사관의 서기관이자 통역관이었던 라인(Rhein, J. )이 36폭의 한국 풍속도 등을 수집하여 1889년 네덜란드 정부에 보냈다. 그중 23점은 기산 풍속도이고, 13폭은 석천이었다. 나중에 그것이 이 박물관에 들어왔다. 다음은 지볼트의 수집품이다. 한말 전환국의 기사로 우리나라에 근무했던 크라우스(Kraus)의 수집품에 대한 설명도 있는데, 대한제국 당상관의 복식과 화폐 등 조선 말의 값비싼 유물이 상당하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50점 남짓이다.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베스텐도르프(Westendorf)가 일본에서 들여온 고려 시대의 경함을 비롯하여 청자와 관음 탱화·칠기 등 귀중한 유물을 재구입한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해양사 박물관도 몇 폭의 풍속도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알란트피어손(Alland Pierson) 박물관 등에는 소수의 한국 유물이 있다. 그 밖에도 아르덴부르그의게멘텔리크 박물관, 막쿱의 데파그도자기 박물관, 로테르담의 지역 및 민족학 박물관 등에 한국 유물이 조금 있다. 한국학을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개설한 사람은 포스(Vos, F. )이다. 라이덴 대학교 일본어학과 강사였던 1946년 이후 그는 1947∼1948년 학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어 및 한국 역사 강좌를 개설하였다. 또한 1958년 일본어 및 한국어학 전임교수로 임명됨으로써 그는 서유럽에서 최초로 한국어학 전임교수가 되었다. 한국학 석사과정은 1961년에 같은 대학교에 공식적으로 개설되었고, 8년 뒤인 1969년에 일본학 및 한국학 센터로 학과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학과에서는 그동안 한국학 전공 학자가 여러 명 배출되었다. 헨토른(Henthorn, W. E. )은 1966년 「한국 몽고의 침공 KoreaThe Mongol Invasio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발라벤(Walraven, B. C. A. )은 1985년에 「무가(巫歌)와 한국고전문학(Shaman Songs and Korean Literatur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스는 유럽 다른 나라의 한국학 전공 박사 및 교수 자격시험 공동 시험관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정년퇴직한 서유럽 최초의 한국학 교수이다. 이후 발라 벤 이 전임으로 한국어·한국문학 입문·한국 문화 등의 강좌를 개설하고 올로프(Olof, A. M. )와 라머스 신(Lamer-hin, S. )이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국학 중에서 고전문학과 사상사 연구에 더욱 공들이는 추세이며, 전공이 5명, 부전공이 10명 정도에 이르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묄렌 호프(Moelenhoff)는 1976년부터 동양 고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동양문고라는 이름으로 내고 있다. 즉, 1978년 포스에 의해 번역, 출판된 『둥근 사랑, 모난 사랑(Liefe road, liefe vierkant)』이라는 제목의 한국 시조 선과 1980년 발라 벤 이 「홍길동전」·「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가」를 번역하여 펴낸 『활빈인活貧人(De redder der armen)』이 그것이다. 또한 암스테르담 열대 연구소 지역연구 시리즈인 남한(Zuid-Korea)(Van den Boorn)도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도 네덜란드·한국협회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한국학 전공의 국내외 학자와 외교관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영화 감상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연구의 일환으로 꼽을 수 있다. 라이덴 대학교에서는 이와 같은 한국 연구의 배경과 노력에 부응하여 1980년 4월에 유럽 한국 학회의 제4차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한편, 전라남도 강진군의 자매결연 도시인 네덜란드 호르 큼 시의 시립 박물관에서 2009년 4월 11일 전시를 시작으로 80여 일간 유럽 8개국, 9개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네덜란드 ### 내용: 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은 정식 명칭이며, Holland ·화란이라고도 한다. 해안선은 약 451km에 달하며, 서쪽과 북쪽은 북해와 접한다. 카리브해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5개 섬으로 구성)와 아루마 섬이 있으며, 인도네시아도 한때 300년간 식민지로 있었다가 1950년 독립하였다. 행정부 소재지는 네덜란드어 Dan Haag,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이며, 12개 주(provincie)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이다. 면적은 4만 1543km2, 인구는 1694만 7904명(2015년 현재)이다. 주요 인종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이다. 공식 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이 쓰인다. 특히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가 왕실의 종교인데,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간척 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고, 국토의 70%가 농목지여서 낙농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창립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화를 추진하여 선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주로 석유화학·금속·철강·수송·조선·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2016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827달러이고 총생산은 7625억 달러이다. 내각책임제의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간에 의회 내의 의석 분포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원칙이다. 의회는 임기 6년의<NAME>(75석) 및 임기 4년의 하원(150석) 양원으로 구성되며, 주요 정당으로는 노동당(PVDA), 기독민주당(CDA), 자유민주당(VVD), 민주 66당(Democrats66), 녹색당, 사회당 등이 있다. 서기전 1세기 중엽 로마의 시저(Caesar, J. )가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현재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거했으며, 그 뒤 400년경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따라 로마인은 물러가고, 남부에는 프랑크족,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다. 6세기에는 대 프랑크 왕국이, 9세기에는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인해 수개의 공국이 생겨났다.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의 필립 선공이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를 전부 지배했고, 1515년부터는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이후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자, 오렌지는 윌리엄공의 지휘 하에 독립투쟁을 전개해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17세기경 해양 및 식민지 경영 국가로서 국세가 융성하여 아시아에 진출하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현재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패망 시까지 점령당했고, 1814년 윌리엄 1세의 통치 하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의 통일왕국이 세워졌다. 1831년 벨기에가 독립한 뒤 네덜란드는 윌리엄 2세의 자유 헌법 제정과 50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대 산업국가로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 정책을 취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의해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룩셈부르크를 독립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마셜(Marshall)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 복원을 했으며, 이후 전통적인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서유럽연합(WEU)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여 서방<NAME>에 가담했으며 1945년 12월 유엔에 가입했다. 전쟁 중이던 1944년에는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창설하고,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EC, 현 EU)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대외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0년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는 유고 내전과 아프리카의 내전, 기근 등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 들어와 반외국인 감정이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은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증폭되었고, 2002년 마침내 네덜란드 사회를 뒤흔드는 폭풍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2002년 의회에서 통과된 난민 추방 중단 결의안은 난민에 대한 대규모 사면 및 영주권 부여의 길을 연 셈이며, 정부의 강경 정책에 의회가 제동을 건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1948년에 왕위를 물려받았고, 현 베아트릭스(Beatrix) 여왕이 1980년 4월에 왕위를 물려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왕은 상징적 존재로서 모든 국사에<NAME>적·의례적 권한을 행사하며, 법령이나 중용 국정 관계 문서에 대한 서명권이 있으나 관계 각료의 부서가 있어야만 효력이 발생하므로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네덜란드는 조선시대에 벨테브레이(Weltevree, J. , 박연, )가 표류, 귀화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뒤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하멜(Hamel, H. )은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하멜표류기를 쓰기도 했다.<NAME> 열사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상설·이위종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다가 분사한 바 있다. 그의 유해가 있던 곳은 1977년 10월 묘비가 세워졌는데, 1963년 그의 유해가 서울로 이장된 곳이다. 네덜란드는 유엔한국 통일부흥위원단(UNCURK) 7개 회원국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지지해 온 주요 우방국이다.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 화란 참전용사비는 6·25전쟁 참전국이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한국을 승인하였고, 1961년 4월 4일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NAME> 상주 공관은 1968년 12월에, 네덜란드 주재 상주 공관은 1969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양국은 1966년 4월에 특허 및 상표 협정, 1970년 4월에 사증 면제 협정, 1970년 6월에 항공 협정, 1974년 10월에 투자보장 협정, 1978년 10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79년 2월에 전대차관 협정, 1982년 12월에 경제기술협력 협정, 1995년 12월에 해운 협정, 2002년 7월에 사회보장 협정, 2003년 7월에 투자보장 협정, 2007년 7월에 세관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40억 24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반도체 제조용 장비·반도체 제조용 장비부품·나프타·고 철 등이며, 수입액은 43억 49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제트유 및 등유·무선전화기·승용차 등이다. 양국은 1975년 한·화 공동위원회, 1976년 한·화 민간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어 상호 협력을 강화해 왔고, 2007년 현재 40여 개의 경제단체가 진출해 있으며, 경제단체로는 KOTRA를 비롯하여 삼성전자· LG전자·한국타이어·외환은행 등 40여 개 상사들이 있다. 또한, 한·화란 친선협회 및 화란 한국전 참전용사회·한국전 참전화란 해군 용사회 등이 조직되어 있으며, 1976년 10월 횡성군과 네덜란드의 가스텔시가 자매결연을 하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07년 현재 네덜란드에는 교민 719명과 체류자 1,032명이 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 때는 네덜란드 선수 271명이 참가했으며, 2002년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 경기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4강에 진출시켜 전 국민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에 수교하였으나 교민이나 체류자는 없다. 북한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2014년 현재 672만 달러이며, 주 종목은 기계 공구류와 비금속제품이며 수입액은 267만 달러로 기계류와 섬유가 주를 이루고 있다. 양측은 2001년 4월 무역 및 경제 협력 회담록, 북한 지역 통과 가스 파이프라인 설치 양해각서 등을 교환하였다. 네덜란드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문화사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플랑드르 출신의 루브 루크(Rubruck, W. van)는 프란치스코 회 신부로서 첫 번째 역할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사신으로 1253∼1255년 몽고제국의 영내를 방문하고 우리나라에 대해 까울레(Caule, )라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까울레는 고려의 중국식 발음이다. 이에 따라 폴로(Polo, M. )도 카울레를 언급했다. 하멜(Hamel, Hendrik)은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나서 그 견문을 직접 책으로 펴냈다. 하멜은 네덜란드 배 데스 페르 베르 호(DeSperwer)가 1653년 제주도 해안에서 파선되자 표류하던 선원들과 제주도에 올라와 동료 7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13년간 살았다. 이후 그는 1668년 로테르담에서 하멜표류기를 출간했으며, 그것은 곧 프랑스어·독일어·영어로 번역되었다. 편집과 번역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발생했지만, 이 책은 한국인과 문화를 최초로 17세기 유럽인에게 소개한 업적이 있다.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중요한 저서는 1692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북부 및 동부 타타르인(Noord en Oost Tartaryen)으로, 비첸(Witsen, N. )이 저술한 것이다. 특히 1705년에 나온 그 재판본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에 관한 유럽인들의 기록과 하멜의 두 동료에게 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한글 어휘와 한국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지볼트(Siebold, K. T. E. von)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이 분야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네덜란드를 위해 1823∼1829년 일본의 데지마(:나가사키)에 거처하며 학교를 세워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한글의 자모를 네덜란드 왕립학술원에 보냈고, 그전에 표류해 그곳에 와 있던 한국인들을 여러 차례 면담하였다. 라이덴에서 1831년 독일어로 일본기(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를 쓴 사람은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 한국의 관료 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을 다룬 일본기(Nippon)를 저술했다. 이 자료집 편집에 조수로서 특히 한국 관계 부분을 주로 담당한 호프만(Hoffmann, J. J. )은 뒷날 라이덴 대학교의 첫 일본어학 교수가 되거니와, 여러 가지의 일본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단군으로부터 1637년까지의 한국사 개관, 일본의 대 한국 및 중국 관계 등을 서술하였다. 그 밖에 1920년 『하멜표류기』를 학문적으로 다룬 회틴크(Hoetink , B. )와 1931∼1946년에 라이덴 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교수로서 비교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어·중세어 및 현대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라데르(Rahder, J. )는 네덜란드에서의 한국학 성립을 위해 기여한 바 크다. 네덜란드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대체로 외교관·상인 등에 의해 수집되었고, 일본 미술품 수집가가 덧붙여 구입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들 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 소장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라이덴에 있는 국립민족학 박물관과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이 가장 두드러지는 소장품이다. 세 사람의 소장품이 국립민족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1,500점에 이른다. 중국 베이징 주재 네덜란드 공사관의 서기관이자 통역관이었던 라인(Rhein, J. )이 36폭의 한국 풍속도 등을 수집하여 1889년 네덜란드 정부에 보냈다. 그중 23점은 기산 풍속도이고, 13폭은 석천이었다. 나중에 그것이 이 박물관에 들어왔다. 다음은 지볼트의 수집품이다. 한말 전환국의 기사로 우리나라에 근무했던 크라우스(Kraus)의 수집품에 대한 설명도 있는데, 대한제국 당상관의 복식과 화폐 등 조선 말의 값비싼 유물이 상당하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50점 남짓이다.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베스텐도르프(Westendorf)가 일본에서 들여온 고려 시대의 경함을 비롯하여 청자와 관음 탱화·칠기 등 귀중한 유물을 재구입한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해양사 박물관도 몇 폭의 풍속도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알란트피어손(Alland Pierson) 박물관 등에는 소수의 한국 유물이 있다. 그 밖에도 아르덴부르그의게멘텔리크 박물관, 막쿱의 데파그도자기 박물관, 로테르담의 지역 및 민족학 박물관 등에 한국 유물이 조금 있다. 한국학을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개설한 사람은 포스(Vos, F. )이다. 라이덴 대학교 일본어학과 강사였던 1946년 이후 그는 1947∼1948년 학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어 및 한국 역사 강좌를 개설하였다. 또한 1958년 일본어 및 한국어학 전임교수로 임명됨으로써 그는 서유럽에서 최초로 한국어학 전임교수가 되었다. 한국학 석사과정은 1961년에 같은 대학교에 공식적으로 개설되었고, 8년 뒤인 1969년에 일본학 및 한국학 센터로 학과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학과에서는 그동안 한국학 전공 학자가 여러 명 배출되었다. 헨토른(Henthorn, W. E. )은 1966년 「한국 몽고의 침공 KoreaThe Mongol Invasio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발라벤(Walraven, B. C. A. )은 1985년에 「무가(巫歌)와 한국고전문학(Shaman Songs and Korean Literatur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스는 유럽 다른 나라의 한국학 전공 박사 및 교수 자격시험 공동 시험관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정년퇴직한 서유럽 최초의 한국학 교수이다. 이후 발라 벤 이 전임으로 한국어·한국문학 입문·한국 문화 등의 강좌를 개설하고 올로프(Olof, A. M. )와 라머스 신(Lamer-hin, S. )이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국학 중에서 고전문학과 사상사 연구에 더욱 공들이는 추세이며, 전공이 5명, 부전공이 10명 정도에 이르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묄렌 호프(Moelenhoff)는 1976년부터 동양 고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동양문고라는 이름으로 내고 있다. 즉, 1978년 포스에 의해 번역, 출판된 『둥근 사랑, 모난 사랑(Liefe road, liefe vierkant)』이라는 제목의 한국 시조 선과 1980년 발라 벤 이 「홍길동전」·「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가」를 번역하여 펴낸 『활빈인活貧人(De redder der armen)』이 그것이다. 또한 암스테르담 열대 연구소 지역연구 시리즈인 남한(Zuid-Korea)(Van den Boorn)도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도 네덜란드·한국협회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한국학 전공의 국내외 학자와 외교관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영화 감상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연구의 일환으로 꼽을 수 있다. 라이덴 대학교에서는 이와 같은 한국 연구의 배경과 노력에 부응하여 1980년 4월에 유럽 한국 학회의 제4차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한편, 전라남도 강진군의 자매결연 도시인 네덜란드 호르 큼 시의 시립 박물관에서 2009년 4월 11일 전시를 시작으로 80여 일간 유럽 8개국, 9개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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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전 (崔思全)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두종"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349
CC BY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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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 진 최 씨의 시조. 처음에는 내였지만 차츰 승진, 소 부소감이 되었다. 한안인·문공미의 처벌 요청에 따라 2년간 귀양살이를 했는데, 예종의 등창을 오진하여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원망하여 척준경을 설득하여 난을 평정하고, 척준경을 설득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병부상서와 추충 위사공신을 상으로 받았고, 수사공 상서 좌복야를 추가로 받았다.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가 되고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올랐으나 치사하였고, 개부의동삼사수태위주국을 받았다.<NAME> 인종 묘정에 안장되었으며<NAME>는 장경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최사전 (崔思全) ### 내용: 탐 진 최 씨의 시조. 처음에는 내였지만 차츰 승진, 소 부소감이 되었다. 한안인·문공미의 처벌 요청에 따라 2년간 귀양살이를 했는데, 예종의 등창을 오진하여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원망하여 척준경을 설득하여 난을 평정하고, 척준경을 설득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병부상서와 추충 위사공신을 상으로 받았고, 수사공 상서 좌복야를 추가로 받았다.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가 되고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올랐으나 치사하였고, 개부의동삼사수태위주국을 받았다.<NAME> 인종 묘정에 안장되었으며<NAME>는 장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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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 풍룡동 유적 (江界 豊龍洞 遺蹟)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990
CC BY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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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로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낮은 언덕 서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근처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1929년 발견했다. 관계 당국의 간단한 조사를 통해 발견된 돌널무덤은 네 장의 긴 판석으로 네 벽을 만들고 바닥은 판석 한 장으로 깔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서 쪽의 좁은 벽이 옆쪽의 긴 벽보다 바깥쪽으로 나가도록 만들고, 뚜껑돌도 원래 있었던 듯하다. 장축이 동서방향이고, 안쪽 길이 약 240cm, 서쪽 너비 60cm, 동쪽 너비 45cm이며, 바닥은 동서 벽보다 약 15cm 정도 높게 되어 있다. 토기 2점, 벽옥제 대롱옥( ) 27점, 홍마노제옥 7점, 청동제 단추형 장식 1점, 돌 화살촉 조각 1점, 구형 석기 1점 등이 출토되었다. 동쪽 벽에서 약 45cm 정도 떨어진 곳에 토기가 놓여 있었고, 너비가 넓은 서쪽에서 옥류와 석기가 나왔다. 검은 간 토기로 몸통 양쪽에 입술형 손잡이 장식이 있고, 납작한 바닥이 있다. 중앙이 불룩하고 주변에 잔금무늬를 돌돌 말아 만든 청동단추형 장식은 동단추, 동구라고도 한다. 요령 지방에서는 요령식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토기가 발견되는데, 이는 심양 정가와 자, 요양 양 갑산의<NAME>자를 비롯한 요동반도·길림성 일대의 돌널무덤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백령도·괴정동·동서리·남성리·조양동 등의 유적에서<NAME>동검과 함께 출토된다. 이와 같은 분포는 요령식 동검에서<NAME>동검으로 발전하는 청동기 문화의 전파경로와 일치한다. 피장자의 머리 부분이 서쪽 돌널에 놓이고 부장 토기가 발 쪽에 놓이는 것도 요령 지방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요령식 동검과 같은 양식이다. 오르도스(Ordos) 지방과 적봉홍산후의 돌널무덤에서 발견된 단추형 장식은 벽옥제 옥제품이고, 시베리아 미누 신스크(Minussinsk) 지방에서 나오는 벽옥제 옥제품 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유적은 서기전 5세기경에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내려오는 요령 청동기 문화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강계 풍룡동 유적 (江界 豊龍洞 遺蹟) ### 내용: 독로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낮은 언덕 서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근처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1929년 발견했다. 관계 당국의 간단한 조사를 통해 발견된 돌널무덤은 네 장의 긴 판석으로 네 벽을 만들고 바닥은 판석 한 장으로 깔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서 쪽의 좁은 벽이 옆쪽의 긴 벽보다 바깥쪽으로 나가도록 만들고, 뚜껑돌도 원래 있었던 듯하다. 장축이 동서방향이고, 안쪽 길이 약 240cm, 서쪽 너비 60cm, 동쪽 너비 45cm이며, 바닥은 동서 벽보다 약 15cm 정도 높게 되어 있다. 토기 2점, 벽옥제 대롱옥( ) 27점, 홍마노제옥 7점, 청동제 단추형 장식 1점, 돌 화살촉 조각 1점, 구형 석기 1점 등이 출토되었다. 동쪽 벽에서 약 45cm 정도 떨어진 곳에 토기가 놓여 있었고, 너비가 넓은 서쪽에서 옥류와 석기가 나왔다. 검은 간 토기로 몸통 양쪽에 입술형 손잡이 장식이 있고, 납작한 바닥이 있다. 중앙이 불룩하고 주변에 잔금무늬를 돌돌 말아 만든 청동단추형 장식은 동단추, 동구라고도 한다. 요령 지방에서는 요령식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토기가 발견되는데, 이는 심양 정가와 자, 요양 양 갑산의<NAME>자를 비롯한 요동반도·길림성 일대의 돌널무덤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백령도·괴정동·동서리·남성리·조양동 등의 유적에서<NAME>동검과 함께 출토된다. 이와 같은 분포는 요령식 동검에서<NAME>동검으로 발전하는 청동기 문화의 전파경로와 일치한다. 피장자의 머리 부분이 서쪽 돌널에 놓이고 부장 토기가 발 쪽에 놓이는 것도 요령 지방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요령식 동검과 같은 양식이다. 오르도스(Ordos) 지방과 적봉홍산후의 돌널무덤에서 발견된 단추형 장식은 벽옥제 옥제품이고, 시베리아 미누 신스크(Minussinsk) 지방에서 나오는 벽옥제 옥제품 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유적은 서기전 5세기경에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내려오는 요령 청동기 문화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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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47791.txt
황기계지부자탕 (黃芪桂枝附子湯)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송일병"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095
CC BY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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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가 1894년 저술한 동의수세보원 소음인신수열표열병론에는 이 처방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땀을 통해 수분이 과다하게 배출되면서 양기가 약해지는 망양증이다. 처방의 구성은 황기·계지 각 11.5g, 백작약 7.5g, 당귀·감초 각 3.75g, 부자포 3.75∼7.5g, 생강 3쪽, 대추 2개로 되어 있다. 장중경의 상한론에 나오는 계지탕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천이 의학입문에서 부자를 넣고 여기에 황기·당귀·부자를 넣어 만든 계지부자탕에 황기·당귀·부자를 첨가한 것이 이 처방이다. 보심·방광경에 풍한사가 침투해 모공에 수렴하는 힘이 부족한 틈을 타서 생기는 증상으로 계지탕은 이 증세도 겸하고 있다. 생혈·산 풍하는 계지로 군약을 삼고, 사간화하고 안비 폐하면서 영기를 도와주는 백작약 등을 사용하여 모공을 수축시킨다. 또한 감초·생강·대추를 추가하여 비위의 기능을 보호하고 진액을 보충하도록 한 것이다. 이천이 망양증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계지부자탕은 계지탕에 부자를 첨가한 것이다. 즉, 발한이 심한 상태에서 계지탕으로는 그 작용이 부족하므로 약해진 양기를 회복시키고, 안으로 부족한 음기를 보충함으로써 음양을 구제할 수 있는 부자를 첨가한 것이다. 여기에서 크게 발전하여 이제마는 소음인의 체질적 결함을 고려하여 보폐기하고 온분육하는 황기와 당귀를 추가하여 양기가 의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치료에 전력을 다한 것이다. 즉, 계지탕은 망양으로 발전할 수 있는 태양증을 치료하는 약이고, 계지부자탕은 망양초증을 치료하는 약이고, 황기계지부자탕은 망양 중증을 치료하는 약이다. 이 밖에도 인삼계지부자탕·승양익기부자탕·인삼관계부자탕 등이 망양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황기계지부자탕 (黃芪桂枝附子湯) ### 내용: 이제마가 1894년 저술한 동의수세보원 소음인신수열표열병론에는 이 처방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땀을 통해 수분이 과다하게 배출되면서 양기가 약해지는 망양증이다. 처방의 구성은 황기·계지 각 11.5g, 백작약 7.5g, 당귀·감초 각 3.75g, 부자포 3.75∼7.5g, 생강 3쪽, 대추 2개로 되어 있다. 장중경의 상한론에 나오는 계지탕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천이 의학입문에서 부자를 넣고 여기에 황기·당귀·부자를 넣어 만든 계지부자탕에 황기·당귀·부자를 첨가한 것이 이 처방이다. 보심·방광경에 풍한사가 침투해 모공에 수렴하는 힘이 부족한 틈을 타서 생기는 증상으로 계지탕은 이 증세도 겸하고 있다. 생혈·산 풍하는 계지로 군약을 삼고, 사간화하고 안비 폐하면서 영기를 도와주는 백작약 등을 사용하여 모공을 수축시킨다. 또한 감초·생강·대추를 추가하여 비위의 기능을 보호하고 진액을 보충하도록 한 것이다. 이천이 망양증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계지부자탕은 계지탕에 부자를 첨가한 것이다. 즉, 발한이 심한 상태에서 계지탕으로는 그 작용이 부족하므로 약해진 양기를 회복시키고, 안으로 부족한 음기를 보충함으로써 음양을 구제할 수 있는 부자를 첨가한 것이다. 여기에서 크게 발전하여 이제마는 소음인의 체질적 결함을 고려하여 보폐기하고 온분육하는 황기와 당귀를 추가하여 양기가 의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치료에 전력을 다한 것이다. 즉, 계지탕은 망양으로 발전할 수 있는 태양증을 치료하는 약이고, 계지부자탕은 망양초증을 치료하는 약이고, 황기계지부자탕은 망양 중증을 치료하는 약이다. 이 밖에도 인삼계지부자탕·승양익기부자탕·인삼관계부자탕 등이 망양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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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POL55046.txt
송장복 (宋章福)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인덕"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550
CC BY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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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조선 노동동맹회는 1922년 12월 결성되었는데, 초대 위원장으로 취임한 그는 조선인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22년 12월 1일 기타구 죠우시민회관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총 동맹이 주최한 각종 행사에 응원 변사로 참여한 것은 1923년 전반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과 관련하여 조선인 구제 활동을 전개했지만,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특히 쵸도 노동동맹회 조직화에 직접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내용도 확인된다. 재일본조선 노동 총동맹이 오사카 연합회를 조직할 때 설립준비 위원으로 활동했는데, 도쿄와 오사카의 조선 노동동맹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인 노동단체를 한데 모아 만든 것이다. 이 조직 이후에도 아 나르코 생디칼리슴, 무정부주의 파인 어파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재일본조선 노동 총동맹 오사카 조선 노동조합 집행위원장을 사임한 것은 1926년 5월이었다. 이듬해 12월 쇼와 천황 즉위식을 맞아 검 속되었다. 대동 소비조합의 운영에도 참여했는데, 1929년 4월에 열린 오사카 조선 노동조합 제3회 대회 때는 서부지부 위원으로 정치부를 담당했다. 신간회 오사카 지회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재일본조선 노동 총동맹이 젠쿄로 합동 해소할 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 없다. 합법무산정당계로부터 오사카 조선 무산 진료소의 주도권을 빼앗은 대회는 1931년 8월에 열렸는데, 여기서 볼셰비키파 조선인이 검사위원이 되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송장복 (宋章福) ### 내용: 오사카 조선 노동동맹회는 1922년 12월 결성되었는데, 초대 위원장으로 취임한 그는 조선인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22년 12월 1일 기타구 죠우시민회관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총 동맹이 주최한 각종 행사에 응원 변사로 참여한 것은 1923년 전반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과 관련하여 조선인 구제 활동을 전개했지만,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특히 쵸도 노동동맹회 조직화에 직접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내용도 확인된다. 재일본조선 노동 총동맹이 오사카 연합회를 조직할 때 설립준비 위원으로 활동했는데, 도쿄와 오사카의 조선 노동동맹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인 노동단체를 한데 모아 만든 것이다. 이 조직 이후에도 아 나르코 생디칼리슴, 무정부주의 파인 어파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재일본조선 노동 총동맹 오사카 조선 노동조합 집행위원장을 사임한 것은 1926년 5월이었다. 이듬해 12월 쇼와 천황 즉위식을 맞아 검 속되었다. 대동 소비조합의 운영에도 참여했는데, 1929년 4월에 열린 오사카 조선 노동조합 제3회 대회 때는 서부지부 위원으로 정치부를 담당했다. 신간회 오사카 지회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재일본조선 노동 총동맹이 젠쿄로 합동 해소할 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 없다. 합법무산정당계로부터 오사카 조선 무산 진료소의 주도권을 빼앗은 대회는 1931년 8월에 열렸는데, 여기서 볼셰비키파 조선인이 검사위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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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5987.txt
근로감독관 (勤勞監督官)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금수"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7403
CC BY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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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기준인 근로조건의 최저 기준은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으므로, 이 정도는 어떠한 사업장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근로조건의 최저 기준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법적 장치가 존재하지만, 보호법의 실효성을 항상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로 감독기관을 설치하여 보호 법규의 준수 여부를 철저히 감독함으로써 위반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위반행위가 발생한 때는 사전 발견에 의해서 시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1923년 제5회 국제노동기구 총회는 근로자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법령 및 규칙의 실시를 확보하기 위한 감독기관 조직에 관한 일반 원칙의 권고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근로감독관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이는 국제노동기구의 노동자 기본생활 보호 정신을 이어받은 근로감독관 제도라 하겠다. 근로감독관이 하는 일은 근로기준법 및 기타 노동관계법령에 의거하여 사업장·기숙사 기타 부속건물을 임검(臨檢) 하고, 장부 및 서류의 검사, 관계자에 대한 심문, 유해물의 측정·분석·수거 등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또한 의사인 근로감독관 또는 근로감독관의 위촉을 받은 의사는 취업을 금지해야 할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근로자를 검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권한을 근로감독관이 행사하려면 신분증명서나 노동부 장관의 검진 지령서를 제시해야 한다. 한편, 근로감독관은 <근로기준법> 및 기타 노동관계법령을 위반한 죄에 대해서는 사법경찰관의 직무를 수행하며, <근로기준법>이 명시한 안전과 보건에 관한 기준을 어겨 근로자에게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근로기준법> 규정에 따라 노동부 장관의 직무를 즉시 수행할 수 있다. 만약 근로감독관이 <근로기준법> 위반 사실을 고의로 묵살할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해진다. 정기감독과 수시감독 및 신고 감독은 근로감독관이 하는 근로 감독이다. 정기감독은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전 예방행정의 하나로, <근로기준법> 적용 사업장에 대한 법정 근로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정기감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 중 재해 및 신고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등 근로조건이 극히 불량한 사업장과 근로조건 확보가 어려운 사업장에 대해 실시되고 있다. 이에 비해 수시감독은 본래 예기치 못한 노사분규 발생이나 산업재해의 다발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해소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근로 감독으로, 문제가 되는 사항만 대상으로 실시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진정·고소·고발의 형태로 근로자가 사용자로부터 부당한 권익 침해를 당하여 관계 기관 또는 근로감독관에게 신고했을 때 그에 따른 감독을 신고 감독이라고 한다. 1 <근로감독관 규정 개정령>은 1998년 12월에 공포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전에는 근로감독관의 자격을 2급 내지 5급 공무원의 경우에는 행정직렬의 공무원으로, 6급 또는 7급 공무원의 경우에는 행정·기계·전기·화공·보건·토목·건축 직렬의 공무원으로 한정하였으나, 앞으로는 근로 감독과 관련 있는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근로감독관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계급에 따른 직렬 구분을 폐지함(현행 제2조 제1항 삭제). ②종전에는 노동부의 근로기준국·산업 안정국·근로 여성국 및 노사협력관 소속의 5급 이상 공무원은 당연직 노동 감독관이 되도록 하였으나, 앞으로는 그 범위를 축소하여 일반직 3급 내지 7급 공무원 중 노사 조정·노동조합·근로 기준 및 산업안전에 관한 업무를 분장하는 과 또는 담당관 소속의 공무원으로 한정함(영 제2조 제1항 제1호). ③종전에는 지방 노동관서의 근로 감독과장·노사협력과장·산업안전과장 및 근로 여성과장은 당연직 근로감독관이 되도록 하였으나, 앞으로는 지방 노동관서의 4급 내지 7급 공무원 중 근로 감독·노사협력·산업안전 및 근로 여성에 관한 업무를 분장하는 과 소속의 공무원이 당연직 근로감독관이 되도록 함(영 제2조 제1항 제2호 및 제3호). ④영 제6조에서는 근로감독관과 근로감독관을 보조하여 사법경찰사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에게 예산의 범위 안에서 활동비를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노동부 소속 근로감독관은 1999년 현재 741명이다. 일반 근로감독관의 경우 1명이 2,786개 업체를 관리해야 하므로 업무가 과중한 편인데, 1997년 말 통계청 기준 117만 181개(1997년 말 통계청 기준)의 업체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근로감독관 (勤勞監督官) ### 내용: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기준인 근로조건의 최저 기준은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으므로, 이 정도는 어떠한 사업장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근로조건의 최저 기준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법적 장치가 존재하지만, 보호법의 실효성을 항상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로 감독기관을 설치하여 보호 법규의 준수 여부를 철저히 감독함으로써 위반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위반행위가 발생한 때는 사전 발견에 의해서 시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1923년 제5회 국제노동기구 총회는 근로자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법령 및 규칙의 실시를 확보하기 위한 감독기관 조직에 관한 일반 원칙의 권고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근로감독관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이는 국제노동기구의 노동자 기본생활 보호 정신을 이어받은 근로감독관 제도라 하겠다. 근로감독관이 하는 일은 근로기준법 및 기타 노동관계법령에 의거하여 사업장·기숙사 기타 부속건물을 임검(臨檢) 하고, 장부 및 서류의 검사, 관계자에 대한 심문, 유해물의 측정·분석·수거 등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또한 의사인 근로감독관 또는 근로감독관의 위촉을 받은 의사는 취업을 금지해야 할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근로자를 검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권한을 근로감독관이 행사하려면 신분증명서나 노동부 장관의 검진 지령서를 제시해야 한다. 한편, 근로감독관은 <근로기준법> 및 기타 노동관계법령을 위반한 죄에 대해서는 사법경찰관의 직무를 수행하며, <근로기준법>이 명시한 안전과 보건에 관한 기준을 어겨 근로자에게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근로기준법> 규정에 따라 노동부 장관의 직무를 즉시 수행할 수 있다. 만약 근로감독관이 <근로기준법> 위반 사실을 고의로 묵살할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해진다. 정기감독과 수시감독 및 신고 감독은 근로감독관이 하는 근로 감독이다. 정기감독은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전 예방행정의 하나로, <근로기준법> 적용 사업장에 대한 법정 근로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정기감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 중 재해 및 신고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등 근로조건이 극히 불량한 사업장과 근로조건 확보가 어려운 사업장에 대해 실시되고 있다. 이에 비해 수시감독은 본래 예기치 못한 노사분규 발생이나 산업재해의 다발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해소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근로 감독으로, 문제가 되는 사항만 대상으로 실시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진정·고소·고발의 형태로 근로자가 사용자로부터 부당한 권익 침해를 당하여 관계 기관 또는 근로감독관에게 신고했을 때 그에 따른 감독을 신고 감독이라고 한다. 1 <근로감독관 규정 개정령>은 1998년 12월에 공포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전에는 근로감독관의 자격을 2급 내지 5급 공무원의 경우에는 행정직렬의 공무원으로, 6급 또는 7급 공무원의 경우에는 행정·기계·전기·화공·보건·토목·건축 직렬의 공무원으로 한정하였으나, 앞으로는 근로 감독과 관련 있는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근로감독관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계급에 따른 직렬 구분을 폐지함(현행 제2조 제1항 삭제). ②종전에는 노동부의 근로기준국·산업 안정국·근로 여성국 및 노사협력관 소속의 5급 이상 공무원은 당연직 노동 감독관이 되도록 하였으나, 앞으로는 그 범위를 축소하여 일반직 3급 내지 7급 공무원 중 노사 조정·노동조합·근로 기준 및 산업안전에 관한 업무를 분장하는 과 또는 담당관 소속의 공무원으로 한정함(영 제2조 제1항 제1호). ③종전에는 지방 노동관서의 근로 감독과장·노사협력과장·산업안전과장 및 근로 여성과장은 당연직 근로감독관이 되도록 하였으나, 앞으로는 지방 노동관서의 4급 내지 7급 공무원 중 근로 감독·노사협력·산업안전 및 근로 여성에 관한 업무를 분장하는 과 소속의 공무원이 당연직 근로감독관이 되도록 함(영 제2조 제1항 제2호 및 제3호). ④영 제6조에서는 근로감독관과 근로감독관을 보조하여 사법경찰사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에게 예산의 범위 안에서 활동비를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노동부 소속 근로감독관은 1999년 현재 741명이다. 일반 근로감독관의 경우 1명이 2,786개 업체를 관리해야 하므로 업무가 과중한 편인데, 1997년 말 통계청 기준 117만 181개(1997년 말 통계청 기준)의 업체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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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56729.txt
해남 용일리 용운 고분 (海南 龍日里 龍雲 古墳)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동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7753
CC BY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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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용일리용운고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평평한 구릉상에 2기의 고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광주 박물관은 2003년에 용운 2호 분 1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앞트기식 돌방[] 1기(용운 3호 분)와 용운 1호 분의 주구 시설이 확인되었다. 1호, 2호 분의 분구 평면은 원형이고 1호에서는 주구가 확인되었다. 1호 분은 직경 19m, 높이 2.5∼4m의 평탄 부가 형성되어 있고, 정상부에는 직경 12m의 평탄 부가 형성되어 있다. 2호 분의 규모는 직경 18m, 높이 3.5m이고, 분정에는 직경 7m의 평탄 부가 형성되어 있다. 용운 2호 분의 매장주체 부는 분구 중앙 상부에 단독으로 위치한 지상식 수혈식 석실이다. 이와 같이 분구 축조 후 상부에 매장주체 시설을 안치하는 것은 전라남도 지방의 옹관묘에서 활용되는 축조법이다. 2호 분의 돌방은 동벽이 넓은 사다리꼴이며 장축 방향은 동-서향이다. 2호 분은 분구의 표토를 돌로 덮은 즙석 분이다. 용운 3호 분은 북쪽에 입구를 둔 앞트기식 돌방인데, 반지하식이다. 장축은 남-북향이다. 3호 분 돌방 내부에서는 토기, 철기, 방추차, 이식, 옥등이 나왔다. 철기는 대도, 철부, 철촉 등이다. 양이 부편 병은 토기 중 가장 주목되는 것으로 광주 · 의령 · 곡성 · 신안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용운 2호 분은 6세기 전반, 3호 분은 6세기 후반 전엽에 축조되었다. 용운 2호 분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즙석 분이라는 사실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즙석 시설은 고분의 분구를 흙으로 쌓은 후 겉 부분을 돌로 덮는 분묘로서 서울 가락동 2호 분과 석촌동 3 · 5호 분, 의령 경산리 1호 분, 해남 신월리 방대형 고분, 나주 복암리 3호 분, 함평 신덕 전방후원분의 석축시설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함평 노적 고분과 화순 백암리 고분 등이 지표조사된 바 있다. 이처럼 한강유역과 전남 서남부 지역의 해남 · 나주 · 함평과 영산강유역 상류에 해당하는 화순, 그리고 경상남도 의령 등 비교적 넓은 분포를 보이는 것이 즙석 분이다. 하지만 전라남도 지역에서 확인된 즙석 시설을 갖춘 유적은 전방후원분과 가까이 있거나 원통형 토기가 출토되는 등 일본의 고분 자료와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고대 한일간 문물 교류를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로 용운 3호 분에서 출토된 양이 부편 병은 형태와 제작 기법이 스에키와 유사해 주목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해남 용일리 용운 고분 (海南 龍日里 龍雲 古墳) ### 내용: 해남용일리용운고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평평한 구릉상에 2기의 고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광주 박물관은 2003년에 용운 2호 분 1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앞트기식 돌방[] 1기(용운 3호 분)와 용운 1호 분의 주구 시설이 확인되었다. 1호, 2호 분의 분구 평면은 원형이고 1호에서는 주구가 확인되었다. 1호 분은 직경 19m, 높이 2.5∼4m의 평탄 부가 형성되어 있고, 정상부에는 직경 12m의 평탄 부가 형성되어 있다. 2호 분의 규모는 직경 18m, 높이 3.5m이고, 분정에는 직경 7m의 평탄 부가 형성되어 있다. 용운 2호 분의 매장주체 부는 분구 중앙 상부에 단독으로 위치한 지상식 수혈식 석실이다. 이와 같이 분구 축조 후 상부에 매장주체 시설을 안치하는 것은 전라남도 지방의 옹관묘에서 활용되는 축조법이다. 2호 분의 돌방은 동벽이 넓은 사다리꼴이며 장축 방향은 동-서향이다. 2호 분은 분구의 표토를 돌로 덮은 즙석 분이다. 용운 3호 분은 북쪽에 입구를 둔 앞트기식 돌방인데, 반지하식이다. 장축은 남-북향이다. 3호 분 돌방 내부에서는 토기, 철기, 방추차, 이식, 옥등이 나왔다. 철기는 대도, 철부, 철촉 등이다. 양이 부편 병은 토기 중 가장 주목되는 것으로 광주 · 의령 · 곡성 · 신안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용운 2호 분은 6세기 전반, 3호 분은 6세기 후반 전엽에 축조되었다. 용운 2호 분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즙석 분이라는 사실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즙석 시설은 고분의 분구를 흙으로 쌓은 후 겉 부분을 돌로 덮는 분묘로서 서울 가락동 2호 분과 석촌동 3 · 5호 분, 의령 경산리 1호 분, 해남 신월리 방대형 고분, 나주 복암리 3호 분, 함평 신덕 전방후원분의 석축시설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함평 노적 고분과 화순 백암리 고분 등이 지표조사된 바 있다. 이처럼 한강유역과 전남 서남부 지역의 해남 · 나주 · 함평과 영산강유역 상류에 해당하는 화순, 그리고 경상남도 의령 등 비교적 넓은 분포를 보이는 것이 즙석 분이다. 하지만 전라남도 지역에서 확인된 즙석 시설을 갖춘 유적은 전방후원분과 가까이 있거나 원통형 토기가 출토되는 등 일본의 고분 자료와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고대 한일간 문물 교류를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로 용운 3호 분에서 출토된 양이 부편 병은 형태와 제작 기법이 스에키와 유사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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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9205.txt
부여 태양리 백제 석실고분 (扶餘 太陽里 百濟 石室古賁)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광섭"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461
CC BY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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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기념물로 1984년에 지정되었다. 부여∼대천 간 국도변의 속칭 동막정 삼거리 부근에 유적이 있다. 동쪽 2km에 위치한 구봉리에는 백제의 테뫼식[] 산성인 논 치산성이 있고, 남쪽 약 800m 지점에 있는 백제의 테뫼식 백제산성도 있다. 인근의 알력 마을에는 백제 때의 폐고분이 여러 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분의 북서쪽에는 낮은 야산이 줄줄이 있고 남쪽은 탁 트인 평야지대이다. 이 평탄지형은 부여 백마강변 농경지와도 이어져 있다. 고분은 낮은 구릉의 남쪽 경사면에 쌓인 오래된 자연암반층을 파내고 무덤구덩이[] 안에 고분의 뚜껑돌[]까지 모두 묻힌 굴식 돌방무덤[]이다. 중심 장축은 남북 자오선상에서 약 3 정도 편 서하였다. 내부 바닥을 기준으로 남북 길이 2.22m, 동서 너비 1.19m, 높이 1.09∼1.19m의 널방이 있다. 화강암 자연 판석을 크기에 맞게 잘라 안쪽과 접촉면을 다듬어서 북벽은 1장, 동벽은 2장, 서벽은 3장을 써서 벽면을 만들었다. 판석을 사용해 고분의 횡단면이 6각형이 되도록 동서 벽면의 윗부분을 안으로 꺾은 이른바 꺾임천장식[], 혹은 귀접이 식이다. 뚜껑돌 4개로 덮었다. 바닥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납작한 잡돌을 정교하게 귀를 맞추어 깔았다. 이 바닥돌의 아래층은 모래층으로, 특별한 배수시설이 없어도 자연배수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널방[] 입구 양쪽에는 석주형 판석을 세우고 너비가 다른 2장의 판석을 세워 막았다. 입구 아래에는 문하 방석을 설치했다. 남벽면 중앙에 설치된 널길은 약 70cm 길이다. 뚜껑돌로는 자연 판석 1장을 사용했고, 입구는 잡석과 흙으로 채워 이중 폐쇄를 하였다. 유물이 훼손되지 않은 완전한 고분임에도 불구하고 널방 바닥에서 겨우 몇 점의 쇠못만 수습되었을 뿐이다. 이 고분은 백제 후기에 축조된 무덤으로, 부여를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가장 많이 발굴되고 있다. 중국의 박장 제의 영향인지 장법상 복장 제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덤에서 껴묻거리[]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부여 태양리 백제 석실고분 (扶餘 太陽里 百濟 石室古賁) ### 내용: 충청남도 기념물로 1984년에 지정되었다. 부여∼대천 간 국도변의 속칭 동막정 삼거리 부근에 유적이 있다. 동쪽 2km에 위치한 구봉리에는 백제의 테뫼식[] 산성인 논 치산성이 있고, 남쪽 약 800m 지점에 있는 백제의 테뫼식 백제산성도 있다. 인근의 알력 마을에는 백제 때의 폐고분이 여러 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분의 북서쪽에는 낮은 야산이 줄줄이 있고 남쪽은 탁 트인 평야지대이다. 이 평탄지형은 부여 백마강변 농경지와도 이어져 있다. 고분은 낮은 구릉의 남쪽 경사면에 쌓인 오래된 자연암반층을 파내고 무덤구덩이[] 안에 고분의 뚜껑돌[]까지 모두 묻힌 굴식 돌방무덤[]이다. 중심 장축은 남북 자오선상에서 약 3 정도 편 서하였다. 내부 바닥을 기준으로 남북 길이 2.22m, 동서 너비 1.19m, 높이 1.09∼1.19m의 널방이 있다. 화강암 자연 판석을 크기에 맞게 잘라 안쪽과 접촉면을 다듬어서 북벽은 1장, 동벽은 2장, 서벽은 3장을 써서 벽면을 만들었다. 판석을 사용해 고분의 횡단면이 6각형이 되도록 동서 벽면의 윗부분을 안으로 꺾은 이른바 꺾임천장식[], 혹은 귀접이 식이다. 뚜껑돌 4개로 덮었다. 바닥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납작한 잡돌을 정교하게 귀를 맞추어 깔았다. 이 바닥돌의 아래층은 모래층으로, 특별한 배수시설이 없어도 자연배수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널방[] 입구 양쪽에는 석주형 판석을 세우고 너비가 다른 2장의 판석을 세워 막았다. 입구 아래에는 문하 방석을 설치했다. 남벽면 중앙에 설치된 널길은 약 70cm 길이다. 뚜껑돌로는 자연 판석 1장을 사용했고, 입구는 잡석과 흙으로 채워 이중 폐쇄를 하였다. 유물이 훼손되지 않은 완전한 고분임에도 불구하고 널방 바닥에서 겨우 몇 점의 쇠못만 수습되었을 뿐이다. 이 고분은 백제 후기에 축조된 무덤으로, 부여를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가장 많이 발굴되고 있다. 중국의 박장 제의 영향인지 장법상 복장 제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덤에서 껴묻거리[]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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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7398.txt
방목감 (放牧監)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영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694
CC BY
192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두레 조직은 보통 역원 6명 정도가 공동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두레의 대표이며 총책임자인 영좌(領座: 지방에 따라서는 좌상·행수·영수·반수라고도 함), 대표를 보좌하는 도감(都監: 공원·집사·소임이라고도 부름), 공동작업장에서 작업 진행을 책임지는 수총각(首總角: 총각 대방이라고도 함), 수총각을 보좌하는 조사 총각(調査總角: 청수·진수 군이라고도 함), 회계와 서기를 맡아보는 유사(有司), 그리고 방목감이 그것이다. 두레 조직에서 소를 기르는 일은 공동작업에서, 두레꾼들이 소를 기르는 일은 공동작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방목감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두레가 조직되어 있는 촌락에서는 해마다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농청에 모여 회의를 열고, 신가 입자를 심사하여 주먹 다듬이를 하고 역원을 뽑고, 영좌의 사회 아래 작업순서를 정한다. 두레 작업에는 촌락 내의 모든 소가<NAME>되어 차례대로 사역하였다. 소는 축력을 사용하는 시간 외에는 방목하여 풀을 뜯어 먹게 되는데, 이 작업은 두레가 공동으로 하는 작업이다. 작업에<NAME>된 소가 아닌 두레꾼들의 소도같이 기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소가 경작지에 들어가서 농작물을 뜯어먹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방목감의 임무였다. 방목감을 뽑기 위해서는 두레에 가입하기 전의 나이인 15, 16세의 소년이나 두레꾼 중 최연장자가 되어야 한다. 방목감이 한 명에서 두 명일 수도 있다. 방목감의 임기도 두레 조직의 다른 임원과 마찬가지로 1년이 원칙이나 두레 조직의 필요에 따라 연임할 수도 있었다. 두레 조직의 중심인물인 대표나 유사·수총각 등 중심인물은 두레꾼 사이에서는 물론 총각 내에서도 높은 위신을 자랑했지만 방목감은 맡은 일이 중책이 아니어서 그렇지 않았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방목감 (放牧監) ### 내용: 두레 조직은 보통 역원 6명 정도가 공동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두레의 대표이며 총책임자인 영좌(領座: 지방에 따라서는 좌상·행수·영수·반수라고도 함), 대표를 보좌하는 도감(都監: 공원·집사·소임이라고도 부름), 공동작업장에서 작업 진행을 책임지는 수총각(首總角: 총각 대방이라고도 함), 수총각을 보좌하는 조사 총각(調査總角: 청수·진수 군이라고도 함), 회계와 서기를 맡아보는 유사(有司), 그리고 방목감이 그것이다. 두레 조직에서 소를 기르는 일은 공동작업에서, 두레꾼들이 소를 기르는 일은 공동작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방목감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두레가 조직되어 있는 촌락에서는 해마다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농청에 모여 회의를 열고, 신가 입자를 심사하여 주먹 다듬이를 하고 역원을 뽑고, 영좌의 사회 아래 작업순서를 정한다. 두레 작업에는 촌락 내의 모든 소가<NAME>되어 차례대로 사역하였다. 소는 축력을 사용하는 시간 외에는 방목하여 풀을 뜯어 먹게 되는데, 이 작업은 두레가 공동으로 하는 작업이다. 작업에<NAME>된 소가 아닌 두레꾼들의 소도같이 기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소가 경작지에 들어가서 농작물을 뜯어먹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방목감의 임무였다. 방목감을 뽑기 위해서는 두레에 가입하기 전의 나이인 15, 16세의 소년이나 두레꾼 중 최연장자가 되어야 한다. 방목감이 한 명에서 두 명일 수도 있다. 방목감의 임기도 두레 조직의 다른 임원과 마찬가지로 1년이 원칙이나 두레 조직의 필요에 따라 연임할 수도 있었다. 두레 조직의 중심인물인 대표나 유사·수총각 등 중심인물은 두레꾼 사이에서는 물론 총각 내에서도 높은 위신을 자랑했지만 방목감은 맡은 일이 중책이 아니어서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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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62.txt
가평 이곡리 집터 (加平 梨谷里 집터)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406
CC BY
520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가평 이곡리 집터는 1976년 주민 복용섭 씨가 토기 조각 출토 내용을 전한 후, 건국대학교 박물관이 1977년과 1978년 답사 과정에서 집터의 화덕자리와 토기 조각들을 채집하면서 알려진 집터 유적이다. 가평 마장리 유적의 집터는 북한강과 합수되는 가평천 최하류에서 물길을 따라 약 9.1km를 거슬러 올라간 75번 국도(가화로)와 가평천 사이에 좁다란 강변 충적 대지상에 위치한다. 당시 행정구역 상 박태순 씨가 소유한 논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 2리 197-2번지인데, 이곳에 있다. 이곳은 과거에 미군의 주차장으로 사용되어 곳곳에서 미군의 생활폐기물이 노출되어 있었다. 현재는 논으로 개간된 상태이며, 주변의 하천 정비 공사로 인해 예전 모습을 찾기 어렵다. 건국대학교 박물관은 1978년 발굴 조사를 하여 유적의 층위를 파악하고 유물 다수를 수습하였다. 동서 방향으로 27개의 시굴갱 주 1을 굴착하고, 남북 방향으로 13개의 그리드를 구획하여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해발 고도가 낮은 가평천 방향의 남쪽부터 조사를 했다. 가평 이곡리 집터는 크게 2개의 층위로 구분된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여 원삼국시대 문화층, 청동기시대 문화층 등 6개 층위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민무늬토기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주로 출토된 곳은 하층인 3층과 4층(깊이 80∼144cm)이다. 원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된 상층의 2층은 두께 50cm(흑색 사질토층)이며, 최상층인 1층은 두께 30cm로 표토층에 해당한다. 집터의 윤곽과 범위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대체로 15.70m2의 원형 집터일 것으로 발굴 조사에서 추정하였다. 또한 시굴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집터 내부의 돌로 된 경계와 바닥면의 일부가 확인되었는데, 외줄구들로 추측되었다. 화덕자리는 집터의 남동쪽에 치우쳐 발견되었는데, 점토를 발라 시설한 것이었다. 화덕자리의 주변에서 많은 고운 점토 덩어리들과 철재,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조리, 토기 생산, 철기 생산 등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납작한 널돌주2와 냇돌 12개가 놓여 있었으며, 점토 바닥에는 7∼8cm 정도의 기둥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약 20∼100cm 간격으로 불에 탄 기둥 14개가 꽂힌 채 발견됐다. 집터에서는 중도식 민무늬토기, 두들긴 무늬 토기, 철기류, 목기류, 동물(멧돼지, 사슴) 치아 등의 유물이 나왔다. 중도식 민무늬토기는 내만 구연 토기, 긴 몸 통독, 손잡이 달린 뚜껑, 손잡이 달린 독, 미니어처, 시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손잡이 폭이 좁은 것과 뚜껑이 넓은 것이 함께 공반 되었다. 여러 조각들이 채집되었는데, 석쇠무늬주3의 시루, 상단을 절제한 쇠뿔 손잡이, 꼰무늬주4와 석쇠무늬를 두들긴 토기 조각들이다. 집터 내부에서 단야주5 작업을 진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살촉 2점, 손칼 2점, 철찌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목기류는 개의 여물통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원삼국시대 집터와는 무관한 빗살무늬토기 조각 3점, 민무늬토기 28점, 각종 석기류 30점이 출토되었다. 가평 이곡리 집터에서는 아가리가 길게 외반된 중도식 민무늬토기인 긴 몸 통독이 다수 출토되었고, 폭이 좁은 손잡이가 달린 뚜껑류가 공반 되었다. 두들긴 무늬 토기는 긴 계란 모양토기의 몸통 부분과 상단을 절제한 쇠뿔 손잡이 조각, 꼰무늬와 석쇠무늬를 두들긴 토기 조각들이 다수 채집되었다. 또한 초기 두들긴 무늬 토기 시루와 구별되는 점은 석쇠무늬 시루도 증기 공이 커진 형태라는 것이다. 가평 이곡리 집터의 연대는 공반된 유물들이 대체로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한성백제 직전 단계에 해당하는 구성을 보이는 점에서 서기 3세기 대에 해당할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 철기시대 혹은 원삼국시대 초기까지를 대표하는 표지적 유적으로 가평 이곡리 집터를 꼽을 수 있다. 특히 김원룡은 가평 이곡리 집터와 시기적으로 같은 가평 마장리 유적 집터의 가속기 질량분석기술(AMS) 연대관을 바탕으로 중부 지역 원삼국시대 초기 유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북한강 유역에서 원삼국시대 마을 유적이 다수 발견되면서 가평 마장리 유적의 집터와 가평 이곡리 유적의 집터는 원삼국시대 초기 유적이 아닌 원삼국시대 최말기 유적이 되었다. 다만 고고학 자료가 많지 않았던 시기에 원삼국시대의 시기를 설정하고, 이를 설명하는 물질 자료 구성을 밝혀낸 것은 학술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민무늬토기와는 굳기와 제작 기법에서 차이가 있는 중도식 민무늬토기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이 유적의 학술적 가치가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가평 이곡리 집터 (加平 梨谷里 집터) ### 내용: 가평 이곡리 집터는 1976년 주민 복용섭 씨가 토기 조각 출토 내용을 전한 후, 건국대학교 박물관이 1977년과 1978년 답사 과정에서 집터의 화덕자리와 토기 조각들을 채집하면서 알려진 집터 유적이다. 가평 마장리 유적의 집터는 북한강과 합수되는 가평천 최하류에서 물길을 따라 약 9.1km를 거슬러 올라간 75번 국도(가화로)와 가평천 사이에 좁다란 강변 충적 대지상에 위치한다. 당시 행정구역 상 박태순 씨가 소유한 논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 2리 197-2번지인데, 이곳에 있다. 이곳은 과거에 미군의 주차장으로 사용되어 곳곳에서 미군의 생활폐기물이 노출되어 있었다. 현재는 논으로 개간된 상태이며, 주변의 하천 정비 공사로 인해 예전 모습을 찾기 어렵다. 건국대학교 박물관은 1978년 발굴 조사를 하여 유적의 층위를 파악하고 유물 다수를 수습하였다. 동서 방향으로 27개의 시굴갱 주 1을 굴착하고, 남북 방향으로 13개의 그리드를 구획하여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해발 고도가 낮은 가평천 방향의 남쪽부터 조사를 했다. 가평 이곡리 집터는 크게 2개의 층위로 구분된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여 원삼국시대 문화층, 청동기시대 문화층 등 6개 층위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민무늬토기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주로 출토된 곳은 하층인 3층과 4층(깊이 80∼144cm)이다. 원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된 상층의 2층은 두께 50cm(흑색 사질토층)이며, 최상층인 1층은 두께 30cm로 표토층에 해당한다. 집터의 윤곽과 범위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대체로 15.70m2의 원형 집터일 것으로 발굴 조사에서 추정하였다. 또한 시굴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집터 내부의 돌로 된 경계와 바닥면의 일부가 확인되었는데, 외줄구들로 추측되었다. 화덕자리는 집터의 남동쪽에 치우쳐 발견되었는데, 점토를 발라 시설한 것이었다. 화덕자리의 주변에서 많은 고운 점토 덩어리들과 철재,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조리, 토기 생산, 철기 생산 등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납작한 널돌주2와 냇돌 12개가 놓여 있었으며, 점토 바닥에는 7∼8cm 정도의 기둥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약 20∼100cm 간격으로 불에 탄 기둥 14개가 꽂힌 채 발견됐다. 집터에서는 중도식 민무늬토기, 두들긴 무늬 토기, 철기류, 목기류, 동물(멧돼지, 사슴) 치아 등의 유물이 나왔다. 중도식 민무늬토기는 내만 구연 토기, 긴 몸 통독, 손잡이 달린 뚜껑, 손잡이 달린 독, 미니어처, 시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손잡이 폭이 좁은 것과 뚜껑이 넓은 것이 함께 공반 되었다. 여러 조각들이 채집되었는데, 석쇠무늬주3의 시루, 상단을 절제한 쇠뿔 손잡이, 꼰무늬주4와 석쇠무늬를 두들긴 토기 조각들이다. 집터 내부에서 단야주5 작업을 진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살촉 2점, 손칼 2점, 철찌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목기류는 개의 여물통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원삼국시대 집터와는 무관한 빗살무늬토기 조각 3점, 민무늬토기 28점, 각종 석기류 30점이 출토되었다. 가평 이곡리 집터에서는 아가리가 길게 외반된 중도식 민무늬토기인 긴 몸 통독이 다수 출토되었고, 폭이 좁은 손잡이가 달린 뚜껑류가 공반 되었다. 두들긴 무늬 토기는 긴 계란 모양토기의 몸통 부분과 상단을 절제한 쇠뿔 손잡이 조각, 꼰무늬와 석쇠무늬를 두들긴 토기 조각들이 다수 채집되었다. 또한 초기 두들긴 무늬 토기 시루와 구별되는 점은 석쇠무늬 시루도 증기 공이 커진 형태라는 것이다. 가평 이곡리 집터의 연대는 공반된 유물들이 대체로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한성백제 직전 단계에 해당하는 구성을 보이는 점에서 서기 3세기 대에 해당할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 철기시대 혹은 원삼국시대 초기까지를 대표하는 표지적 유적으로 가평 이곡리 집터를 꼽을 수 있다. 특히 김원룡은 가평 이곡리 집터와 시기적으로 같은 가평 마장리 유적 집터의 가속기 질량분석기술(AMS) 연대관을 바탕으로 중부 지역 원삼국시대 초기 유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북한강 유역에서 원삼국시대 마을 유적이 다수 발견되면서 가평 마장리 유적의 집터와 가평 이곡리 유적의 집터는 원삼국시대 초기 유적이 아닌 원삼국시대 최말기 유적이 되었다. 다만 고고학 자료가 많지 않았던 시기에 원삼국시대의 시기를 설정하고, 이를 설명하는 물질 자료 구성을 밝혀낸 것은 학술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민무늬토기와는 굳기와 제작 기법에서 차이가 있는 중도식 민무늬토기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이 유적의 학술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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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ECO19855.txt
BYC㈜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유붕노"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207
CC BY
117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한흥 산업 주식회사로 출발한 한흥 산업 주식회사는 1960년 4월 한흥 물산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1975년 5월 메리야스 업계에서 처음으로 기업공개를 하였다. 국세청 산하 대한 메리야스 성실 보고 회원 조합을 1995년 7월 결성한 뒤 1976년 5월 한국은행 우대 적격업체로 지정되었다. 1977년 12월 울 마크를 획득했고, 1979년 2월에는 (주) 백양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90년 6월 대신경제 연구소 선정 1989년도 최우수 상장기업에 선정되었으며, 1992년 1월 우수 공시 법인으로 선정(한국증권거래소) 되었고, 6월에는 최우량 기업으로 선정(한국능률협회) 되었다. 1996년 3월 15일 BYC(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수출입업·건설업·부동산임대업·기계제작 등이 주요 사업 분야이다. 주요 제품 구성은 봉제품 64%, 양품류 20%, 임대 13% 등이다. 관계회사로는 BYC U. S. A INC ·상해 BYC방직품유한공사·바이콤광고 등이 있다. 총자산은 6942억 원, 자본금은 42억 원, 연간 매출액은 1816억 원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BYC㈜ ### 내용: 한흥 산업 주식회사로 출발한 한흥 산업 주식회사는 1960년 4월 한흥 물산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1975년 5월 메리야스 업계에서 처음으로 기업공개를 하였다. 국세청 산하 대한 메리야스 성실 보고 회원 조합을 1995년 7월 결성한 뒤 1976년 5월 한국은행 우대 적격업체로 지정되었다. 1977년 12월 울 마크를 획득했고, 1979년 2월에는 (주) 백양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90년 6월 대신경제 연구소 선정 1989년도 최우수 상장기업에 선정되었으며, 1992년 1월 우수 공시 법인으로 선정(한국증권거래소) 되었고, 6월에는 최우량 기업으로 선정(한국능률협회) 되었다. 1996년 3월 15일 BYC(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수출입업·건설업·부동산임대업·기계제작 등이 주요 사업 분야이다. 주요 제품 구성은 봉제품 64%, 양품류 20%, 임대 13% 등이다. 관계회사로는 BYC U. S. A INC ·상해 BYC방직품유한공사·바이콤광고 등이 있다. 총자산은 6942억 원, 자본금은 42억 원, 연간 매출액은 1816억 원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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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59524.txt
반친영 (半親迎)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장병인"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684
CC BY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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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영혼에서는 성혼 당일 신랑집에서 교배례를 시작으로 동뢰·합근례로 이어지는 당일 상견례를 한 뒤 동거하였다. 이에 반해 남귀여가혼은 상견례 다음날 시부모를 뵙는 현구고례를 행하고 신랑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에야 상견례(삼일 상견례)를 했다. 또한 신부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여 시부모를 만나는 것은 별도의 날을 잡아야 했다. 성리학을 신봉한 사대부 가운데 좀 더 고례를 충실히 지키고자 하는 일부 인사들은 일찍부터 전 통혼 속에서의 신부집 생활방식이 양이 음을 따르는 문제를 야기한다고 보고 주자가례에 따른 친영의 도입을 강하게 주장해왔다. 또한 동침부터 먼저 한 뒤 3일째에야 상견례를 치르는 혼인절차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친영의 시행은 생활양식 및 습속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반발 때문에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리학의 존숭의 절정을 이루는 16세기에 이르면 친영례의 시행을 강요하는 대신 남귀여가혼의 절차 중 외설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삼일 상견례만이라도 당일 상견례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경덕과 조식이<NAME>였다. 당일 상견례는 중종대에 서경덕 아들의 혼인에서 처음 시행된 이후 명종·선조대를 거치며 조식·이황 등의 자녀들이 혼인할 때에도 적용되었다. ‘반친영(半親迎)’은 이렇게 남귀여가혼의 혼인절차 일부를 수정한 ‘당일 상견례’가 어느 정도 사족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하자, 이에 고무된 일부 인사들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혼 다음날 시부모를 뵈러 가는 ‘명일현구고례’까지 채택함으로써 성립한 것이다. 하지만 처방 거주하던 당시에 반친영 절차의 시행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친영혼의 절차를 일부 참고하여 당일 상견례와 명일현구고례를 채택하고, 혼례 장소는 속례인 남귀여가혼과 마찬가지로 신부집으로 하되 혼례 장소는 속례인 남귀여가혼과 마찬가지로 신부집으로 하였다. 친영례의 본래 정신에 어긋나는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을 반친영이라 칭한 것은, 남귀여가혼의 혼인절차를 변개하여 친영혼의 혼인절차 일부를 받아들였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혼례 후 상당 기간 처가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당시에 명일현구고례는 반친영의 두 번째 요건이었기 때문에 시행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친영을 행했다는 기록은 간혹 발견되는 반면 반친영을 명시한 구체적 사례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서울에 사는 집안끼리의 혼인은 거리상의 물리적 장애가 없기 때문에 반친영을 시행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초창기 연구에서는 당일 상견례를 선도한 서화담과 조식을 반친영의 창시자로 잘못 해석하였고, 중기 이후 반친영이 보편화된 것으로 잘못 추정하였다. 반친영에 대한 이러한 오해·착오가 오랫동안 불식되지 못하고 널리 수용되었던 것은 성리학의 확산과 함께 혼인 방식도 전통적인 남귀여가혼에서 친 영혼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예단이 강하게 작용했던 탓으로 보인다. ‘반친영’은 남귀여가혼의 혼인 방식을 친 영혼으로 바꾸는 대신 전통적 혼인 방식 위에 친영혼의 일부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전통혼례와의 타협을 모색한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성혼 다음날 시부모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보편화되지 못했다. 인조대 즈음 친영과 전통혼례와의 또 다른 타협책으로 가관 친영이라는 예법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반친영 (半親迎) ### 내용: 친 영혼에서는 성혼 당일 신랑집에서 교배례를 시작으로 동뢰·합근례로 이어지는 당일 상견례를 한 뒤 동거하였다. 이에 반해 남귀여가혼은 상견례 다음날 시부모를 뵙는 현구고례를 행하고 신랑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에야 상견례(삼일 상견례)를 했다. 또한 신부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여 시부모를 만나는 것은 별도의 날을 잡아야 했다. 성리학을 신봉한 사대부 가운데 좀 더 고례를 충실히 지키고자 하는 일부 인사들은 일찍부터 전 통혼 속에서의 신부집 생활방식이 양이 음을 따르는 문제를 야기한다고 보고 주자가례에 따른 친영의 도입을 강하게 주장해왔다. 또한 동침부터 먼저 한 뒤 3일째에야 상견례를 치르는 혼인절차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친영의 시행은 생활양식 및 습속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반발 때문에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리학의 존숭의 절정을 이루는 16세기에 이르면 친영례의 시행을 강요하는 대신 남귀여가혼의 절차 중 외설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삼일 상견례만이라도 당일 상견례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경덕과 조식이<NAME>였다. 당일 상견례는 중종대에 서경덕 아들의 혼인에서 처음 시행된 이후 명종·선조대를 거치며 조식·이황 등의 자녀들이 혼인할 때에도 적용되었다. ‘반친영(半親迎)’은 이렇게 남귀여가혼의 혼인절차 일부를 수정한 ‘당일 상견례’가 어느 정도 사족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하자, 이에 고무된 일부 인사들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혼 다음날 시부모를 뵈러 가는 ‘명일현구고례’까지 채택함으로써 성립한 것이다. 하지만 처방 거주하던 당시에 반친영 절차의 시행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친영혼의 절차를 일부 참고하여 당일 상견례와 명일현구고례를 채택하고, 혼례 장소는 속례인 남귀여가혼과 마찬가지로 신부집으로 하되 혼례 장소는 속례인 남귀여가혼과 마찬가지로 신부집으로 하였다. 친영례의 본래 정신에 어긋나는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을 반친영이라 칭한 것은, 남귀여가혼의 혼인절차를 변개하여 친영혼의 혼인절차 일부를 받아들였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혼례 후 상당 기간 처가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당시에 명일현구고례는 반친영의 두 번째 요건이었기 때문에 시행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친영을 행했다는 기록은 간혹 발견되는 반면 반친영을 명시한 구체적 사례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서울에 사는 집안끼리의 혼인은 거리상의 물리적 장애가 없기 때문에 반친영을 시행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초창기 연구에서는 당일 상견례를 선도한 서화담과 조식을 반친영의 창시자로 잘못 해석하였고, 중기 이후 반친영이 보편화된 것으로 잘못 추정하였다. 반친영에 대한 이러한 오해·착오가 오랫동안 불식되지 못하고 널리 수용되었던 것은 성리학의 확산과 함께 혼인 방식도 전통적인 남귀여가혼에서 친 영혼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예단이 강하게 작용했던 탓으로 보인다. ‘반친영’은 남귀여가혼의 혼인 방식을 친 영혼으로 바꾸는 대신 전통적 혼인 방식 위에 친영혼의 일부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전통혼례와의 타협을 모색한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성혼 다음날 시부모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보편화되지 못했다. 인조대 즈음 친영과 전통혼례와의 또 다른 타협책으로 가관 친영이라는 예법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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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POL41624.txt
최덕신 (崔德新)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임중빈"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48
CC BY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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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 동오는 독립운동가인데,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다. 1936년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에 들어가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여 1946년 육군사관학교 특별반 과정을 마치고 1949년 미국 포트 릴리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이듬해 미국 포트베닝 보병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제8사단과 제11사단의 사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UN 군 사령관 클라크(Clark, M. W. ) 장군을 보좌하여 휴전협정 조인에 관여하였다. 주베트남 공사는 1956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주베트남 공사는 5·16군사정변 후 1961년 10월부터 1963년 3월까지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1961년과 1962년에는 UN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 주서독대사를 1963년에 역임하고 1967년부터 제7대 천도교 교령을 맡았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 이듬해 새 인간연합회 총재, 1971년 종교협의회 회장과 한중문화친선협회 회장, 3·1국 민회 회장, 1974년 반공연맹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천도 교계에서 실권을 빼앗긴 뒤<NAME> 정부와의 불화로 197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1년 6월 북한 평양을 방문하고, 1986년 9월 아내 유미영과 함께 북한 애 정착하여 같은 해 10월 조국 평화통일 위원회 부위원장, 1989년 3월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 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 지도 위 위원장, 같은 해 5월 조선종교인 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천도교 남북 합작을 내세우며 남한 정부 공박에 앞장섰다. 내가 겪은 판문점·인면 혈전기·제2의 판문점은 어디로 등이 저서로 알려져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최덕신 (崔德新) ### 내용: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 동오는 독립운동가인데,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다. 1936년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에 들어가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여 1946년 육군사관학교 특별반 과정을 마치고 1949년 미국 포트 릴리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이듬해 미국 포트베닝 보병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제8사단과 제11사단의 사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UN 군 사령관 클라크(Clark, M. W. ) 장군을 보좌하여 휴전협정 조인에 관여하였다. 주베트남 공사는 1956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주베트남 공사는 5·16군사정변 후 1961년 10월부터 1963년 3월까지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1961년과 1962년에는 UN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 주서독대사를 1963년에 역임하고 1967년부터 제7대 천도교 교령을 맡았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 이듬해 새 인간연합회 총재, 1971년 종교협의회 회장과 한중문화친선협회 회장, 3·1국 민회 회장, 1974년 반공연맹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천도 교계에서 실권을 빼앗긴 뒤<NAME> 정부와의 불화로 197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1년 6월 북한 평양을 방문하고, 1986년 9월 아내 유미영과 함께 북한 애 정착하여 같은 해 10월 조국 평화통일 위원회 부위원장, 1989년 3월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 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 지도 위 위원장, 같은 해 5월 조선종교인 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천도교 남북 합작을 내세우며 남한 정부 공박에 앞장섰다. 내가 겪은 판문점·인면 혈전기·제2의 판문점은 어디로 등이 저서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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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41793.txt
지주 (地酒)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신호"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393
CC BY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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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노주처럼 몇 년을 묵히는 경우도 있다. 땅속은 지상과 달리 온도의 변화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술이 익는 데 좋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조선 중엽의 산림경제에는 제조법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보통 항아리에 백미 한말, 누룩가루 서되, 솔잎 썬 것 한 되를 넣고 술을 빚는다. 뚜껑을 단단히 봉한 후 땅을 파고 솔가지로 집을 짓는다. 땅속에 항아리를 묻어 흙으로 덮어뒀다가 7달이 지나면 꺼내 먹는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지주 (地酒) ### 내용: 중국의 노주처럼 몇 년을 묵히는 경우도 있다. 땅속은 지상과 달리 온도의 변화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술이 익는 데 좋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조선 중엽의 산림경제에는 제조법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보통 항아리에 백미 한말, 누룩가루 서되, 솔잎 썬 것 한 되를 넣고 술을 빚는다. 뚜껑을 단단히 봉한 후 땅을 파고 솔가지로 집을 짓는다. 땅속에 항아리를 묻어 흙으로 덮어뒀다가 7달이 지나면 꺼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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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8900.txt
우산 (雨傘)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미자"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9940
CC BY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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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리로 만든 살에 기름종이를 바른 종이우산과 비닐을 씌운 비닐우산, 쇠로 만든 살에 방수처리한 헝겊을 씌운 박쥐우산이 있다. 또한, 1911년 배화학당에서 학생들의 쓰개치마 사용을 교칙으로 금지하자, 자퇴하는 학생이 생겨나 검정 우산을 주어 얼굴을 가리게 하였다. 이후 다른 여학생들과 일반 부녀자들에게 크게 유행한 이 검정 우산은 날개를 펼친 모양이 박쥐우산 또는 편복산이라 불렸다. 이 우산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햇볕이 내리쬘 때는 양산으로, 비가 내릴 때는 우산으로 활용되었다. 우산이 우리나라에 들여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의 일본 방문은 1876년부터 1883년까지 여러 차례 있었고, 1882년 4월에는 미국 공사가 부임하였다. 선교사들은 이보다 더 일찍 한국에 왔기 때문에 이때 이미 우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독립신문에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는데 우산을 쓰고 거리에 나가 집단폭행을 당했다는 기사가 자주 보였으며, 미국 선교사들도 우산을 쓰고 다니면 그 반감으로 선교가 힘들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우산은 왕 이하 상류층만이 사용하던 양산을 겸한 의례용이었다. 우산을 쓰는 것은 불경이므로 서민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일산은 시녀가 뒤에서 앞에 오는 상전을 씌워주는 것으로 대가 매우 길다. 벼슬아치만 외출할 때 사용한 장량항우산은 볕을 가리는 양산과 우산을 겸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벼슬아치만 우산을 썼다. 서민들은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 일을 하였으며, 기름종이로 전 모를 크게 만들어 쓰거나 갈모를 쓰기도 하였다. 갈모는 기름종이로 원을 만들어 원추형으로 접어 비가 오면 모자 위에 덮어 비를 피하였다. 조선 후기까지는 갈모가 커서 몸을 모두 가릴 수 있었지만 말기에는 갓이 작아지고 갈모도 좁아져 머리만 가리는 형국이 되었다. 비 내릴 때는 접어서 보관했다가 날이 좋을 때는 펼쳐 썼다. 손으로 우산을 들었지만 이것은 갓 위에 고정시켰기 때문에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기름종이로 만든 쓰개치마이다. 보통의 치마와 비슷한 폭과 길이는 머리에 쓰면 발목까지 올 정도로 길다. 치맛말기는 흰색 무명 헝겊을 달았고 주름을 잡았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우산 (雨傘) ### 내용: 대오리로 만든 살에 기름종이를 바른 종이우산과 비닐을 씌운 비닐우산, 쇠로 만든 살에 방수처리한 헝겊을 씌운 박쥐우산이 있다. 또한, 1911년 배화학당에서 학생들의 쓰개치마 사용을 교칙으로 금지하자, 자퇴하는 학생이 생겨나 검정 우산을 주어 얼굴을 가리게 하였다. 이후 다른 여학생들과 일반 부녀자들에게 크게 유행한 이 검정 우산은 날개를 펼친 모양이 박쥐우산 또는 편복산이라 불렸다. 이 우산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햇볕이 내리쬘 때는 양산으로, 비가 내릴 때는 우산으로 활용되었다. 우산이 우리나라에 들여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의 일본 방문은 1876년부터 1883년까지 여러 차례 있었고, 1882년 4월에는 미국 공사가 부임하였다. 선교사들은 이보다 더 일찍 한국에 왔기 때문에 이때 이미 우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독립신문에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는데 우산을 쓰고 거리에 나가 집단폭행을 당했다는 기사가 자주 보였으며, 미국 선교사들도 우산을 쓰고 다니면 그 반감으로 선교가 힘들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우산은 왕 이하 상류층만이 사용하던 양산을 겸한 의례용이었다. 우산을 쓰는 것은 불경이므로 서민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일산은 시녀가 뒤에서 앞에 오는 상전을 씌워주는 것으로 대가 매우 길다. 벼슬아치만 외출할 때 사용한 장량항우산은 볕을 가리는 양산과 우산을 겸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벼슬아치만 우산을 썼다. 서민들은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 일을 하였으며, 기름종이로 전 모를 크게 만들어 쓰거나 갈모를 쓰기도 하였다. 갈모는 기름종이로 원을 만들어 원추형으로 접어 비가 오면 모자 위에 덮어 비를 피하였다. 조선 후기까지는 갈모가 커서 몸을 모두 가릴 수 있었지만 말기에는 갓이 작아지고 갈모도 좁아져 머리만 가리는 형국이 되었다. 비 내릴 때는 접어서 보관했다가 날이 좋을 때는 펼쳐 썼다. 손으로 우산을 들었지만 이것은 갓 위에 고정시켰기 때문에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기름종이로 만든 쓰개치마이다. 보통의 치마와 비슷한 폭과 길이는 머리에 쓰면 발목까지 올 정도로 길다. 치맛말기는 흰색 무명 헝겊을 달았고 주름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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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38611.txt
주막 (酒幕)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배도식"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227
CC BY
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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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의미로 보면 술집과 식당, 여관을 겸한 영업집이며, 주사·주가·주포라고도 했다.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시골에는 주막이 많았는데, 도회지에도 주막거리가 많이 있다. 대체로 장터, 큰 고개 밑의 길목, 나루터, 광산촌 등에 주막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부터 인천으로 가는 중간인 소사·오류동에는 주막이 많았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면 점심때쯤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문경새재에 주막촌이 형성되었다. 조령원·동화원 터는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는데, 이는 국가에서 운영하던 것이다. 천안 삼거리는 능수버들의 전설과 함께 주막이 번성했던 곳이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 한지와 죽산 물·곡산 물의 집산지인 전주 등이 주막이 많았던 곳이다. 주막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정확한 고증이 불가능하다. 기록상 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천관 술집이 주막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김유신이 젊었을 적에 술집을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097년(숙종 2)에 주막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방이 수십 개에 달하는 경우 창고와 마구간이 있고, 마소나 당나귀 등 짐승을 길들여 주기도 하는 등 규모가 큰 경우였다. 하지만 시골의 작은 주막은 방 몇 개에 술청이 있는 정도이고, 거리의 간이주막은 허술한 지붕에 가리개로 사방을 막아 놓고 낮에만 장사를 하는 곳도 있었다. 또한, 장대에 용수를 달아 지붕 위로 높이 올리거나, 소머리나 돼지머리를 삶아 좌판에 놓아 주막임을 알리기도 하였다. 주막에는 요즘처럼 간판은 없었지만 이름은 있었다. 주막집 쪽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손님들이 지은 것으로, 오동나무가 있는 집은 오동나무집, 우물이 있는 집은 우물집, 주인의 뒷덜미에 혹이 있으면 혹부리 집 등으로 불렸다. 주막의 구조 중 특이한 것은, 부엌이 주모가 앉아 있는 방이나 마루에 붙어 있어서 방이나 마루에 앉아서도 바로 술이나 국을 뜰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주막에서 일하는 사람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다. 즉, 주모 혹은 주파가 앉아 주막의 모든 일을 맡았다. 주막에서 시중을 드는 남자아이를 중노미라고 했는데 주로 안주를 굽거나 공짜 안주를 먹는 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그 밖에도 허드렛일을 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촌마을의 외딴 주막은 아무래도 길손의 향수를 달래주는 역할을 한 것 같다. 대부분의 주막은 길거리 나그네는 물론이고 장을 따라다니는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주막의 기능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손님에게 술을 파는 것이고, 요기를 할 수 있게 밥을 제공하는 것과 숙박시설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문화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어서 문화의 전달처 역할을 하였으며, 피로가 쌓인 나그네에게는 휴식처 역할을 하였으며, 유흥을 즐기는 오락장 역할도 하였다. 옛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사 먹으면 거의 공짜로 잠을 자게 해 주었다. 잠자는 길손들은 대개 도착순으로 먼저 온 사람이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게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주막에서는 탁주가 주종이었고 소주도 팔았으며 양반 손님을 위해 맛과 향기를 첨가한 방문주를 팔기도 하였다. 옛 주막에서는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는 무료 안주가 한 점씩 붙어 다녔다. 주막의 목판에는 마른안주로는 육포·어포 등이 있었고, 진안주로는 너비아니·빈대떡·떡산적·생선구이·술국 등이 있었다. 해장국(원래는 또는 양골국)은 주막에서 파는 술국이었다. 살코기를 발라낸 뼈를 도끼로 토막 내어 끓이면 허연 국물이 된장맛과 어울려 구수했다. 허기를 달래 주는 음식류는 주로 양지머리로만 국물을 뽑기 때문에 국물이 순한 장국밥이 주를 이루었다. 장국은 간을 맞추기 위해 간장을 타면 연한 국물 빛이 더욱 맛있게 났다. 서울에서 과거라도 있으면 주막에는 과거를 보러 오는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주막에 들어가 돈만 내면 특실에 들거나 상석에 앉을 수 있었다. 지위나 권세가 낮으면 천금을 낸다 해도 구석방이나 마루방으로 밀려나게 마련이었다. 양반들 중에도 권세가 있는 자가 특실에 들어와 구박하는 일이 빈발했던 것이다. 어쩌다 손님과 시비가 붙으면 따라온 하인들끼리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 주인은 돈을 못 받고 그들의 뒤치다꺼리에 골탕만 먹게 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주막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승 맹사성은 고향 온양에서 상경하여 용인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허술한 맹사성을 깔보고 먼저 주막에 들른 시골 양반이 수작을 걸었다. 그는 막힌 쪽에서 술을 한 잔 마시자고 말 끝에 공 자와 당 자를 붙여 질문했다. 맹사성이 먼저 서울에 무슨 일로 가는 공? 하니, 그 양반이 과거 보러 가는다. 하였다. 며칠 뒤 서울의 과거장에서 맹사성이 그 시골 양반을 보고 어떤 공? 하니,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죽어지이다. 하였다. 맹사성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주막은 기방이나 색주가·객줏집·여각과는 달랐다. 기방은 주로 부유한 양반들에게 기악과 함께 술을 팔던 곳이고, 색주가는 접대부들이 술과 색을 팔던 곳이다. 객줏집은 행상인의 숙식과 상품의 중개나 위탁판매를 했던 곳이고, 여각은 행상인들을 위한 숙박업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주막도 변하여, 내외주점, 거리의 주막, 색주가, 선술집 등이 생겨났다. 여염집 아낙네가 살 길이 막막하여 차린 술집으로, 문을 사이에 두고 술꾼과 거래를 하던 주점이었다. 남녀가 엄격히 통제되던 시절이라 마주 대하지 못하고 문 사이로 팔뚝만 내밀어 술상을 건네주었다고 내외주점이라 했다. 모주를 거리에서 파는 주부는 새벽 시간대에 일을 해야 하는 막노동 노동자를 위해 모주를 팔았다. 모주는 술을 걸러 낸 찌꺼기에 다시 물을 붓고 우려낸 술인데, 주도도 낮았고 맛도 없었다. 모주의 안주로는 비지찌개를 끓여 팔았다. 조선 세종 때 처음 생겨난 색 주는 주로 명나라 사신들에게 주색을 베풀던 곳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값이 비싼 기생집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색주가를 이용하였다. 목로라는 나무 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술집이 선술집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에서 선술집이 매우 번성했는데 일본 사람들도 다치노 미라 부르며 애용하였다. 옛 주막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의 여러 군데에서 지금도 술과 해장국을 파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술집인 맥주홀·스탠드바·카페·룸살롱 등은 주막과는 거리가 멀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주막 (酒幕) ### 내용: 현대적 의미로 보면 술집과 식당, 여관을 겸한 영업집이며, 주사·주가·주포라고도 했다.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시골에는 주막이 많았는데, 도회지에도 주막거리가 많이 있다. 대체로 장터, 큰 고개 밑의 길목, 나루터, 광산촌 등에 주막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부터 인천으로 가는 중간인 소사·오류동에는 주막이 많았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면 점심때쯤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문경새재에 주막촌이 형성되었다. 조령원·동화원 터는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는데, 이는 국가에서 운영하던 것이다. 천안 삼거리는 능수버들의 전설과 함께 주막이 번성했던 곳이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 한지와 죽산 물·곡산 물의 집산지인 전주 등이 주막이 많았던 곳이다. 주막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정확한 고증이 불가능하다. 기록상 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천관 술집이 주막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김유신이 젊었을 적에 술집을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097년(숙종 2)에 주막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방이 수십 개에 달하는 경우 창고와 마구간이 있고, 마소나 당나귀 등 짐승을 길들여 주기도 하는 등 규모가 큰 경우였다. 하지만 시골의 작은 주막은 방 몇 개에 술청이 있는 정도이고, 거리의 간이주막은 허술한 지붕에 가리개로 사방을 막아 놓고 낮에만 장사를 하는 곳도 있었다. 또한, 장대에 용수를 달아 지붕 위로 높이 올리거나, 소머리나 돼지머리를 삶아 좌판에 놓아 주막임을 알리기도 하였다. 주막에는 요즘처럼 간판은 없었지만 이름은 있었다. 주막집 쪽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손님들이 지은 것으로, 오동나무가 있는 집은 오동나무집, 우물이 있는 집은 우물집, 주인의 뒷덜미에 혹이 있으면 혹부리 집 등으로 불렸다. 주막의 구조 중 특이한 것은, 부엌이 주모가 앉아 있는 방이나 마루에 붙어 있어서 방이나 마루에 앉아서도 바로 술이나 국을 뜰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주막에서 일하는 사람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다. 즉, 주모 혹은 주파가 앉아 주막의 모든 일을 맡았다. 주막에서 시중을 드는 남자아이를 중노미라고 했는데 주로 안주를 굽거나 공짜 안주를 먹는 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그 밖에도 허드렛일을 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촌마을의 외딴 주막은 아무래도 길손의 향수를 달래주는 역할을 한 것 같다. 대부분의 주막은 길거리 나그네는 물론이고 장을 따라다니는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주막의 기능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손님에게 술을 파는 것이고, 요기를 할 수 있게 밥을 제공하는 것과 숙박시설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문화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어서 문화의 전달처 역할을 하였으며, 피로가 쌓인 나그네에게는 휴식처 역할을 하였으며, 유흥을 즐기는 오락장 역할도 하였다. 옛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사 먹으면 거의 공짜로 잠을 자게 해 주었다. 잠자는 길손들은 대개 도착순으로 먼저 온 사람이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게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주막에서는 탁주가 주종이었고 소주도 팔았으며 양반 손님을 위해 맛과 향기를 첨가한 방문주를 팔기도 하였다. 옛 주막에서는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는 무료 안주가 한 점씩 붙어 다녔다. 주막의 목판에는 마른안주로는 육포·어포 등이 있었고, 진안주로는 너비아니·빈대떡·떡산적·생선구이·술국 등이 있었다. 해장국(원래는 또는 양골국)은 주막에서 파는 술국이었다. 살코기를 발라낸 뼈를 도끼로 토막 내어 끓이면 허연 국물이 된장맛과 어울려 구수했다. 허기를 달래 주는 음식류는 주로 양지머리로만 국물을 뽑기 때문에 국물이 순한 장국밥이 주를 이루었다. 장국은 간을 맞추기 위해 간장을 타면 연한 국물 빛이 더욱 맛있게 났다. 서울에서 과거라도 있으면 주막에는 과거를 보러 오는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주막에 들어가 돈만 내면 특실에 들거나 상석에 앉을 수 있었다. 지위나 권세가 낮으면 천금을 낸다 해도 구석방이나 마루방으로 밀려나게 마련이었다. 양반들 중에도 권세가 있는 자가 특실에 들어와 구박하는 일이 빈발했던 것이다. 어쩌다 손님과 시비가 붙으면 따라온 하인들끼리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 주인은 돈을 못 받고 그들의 뒤치다꺼리에 골탕만 먹게 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주막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승 맹사성은 고향 온양에서 상경하여 용인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허술한 맹사성을 깔보고 먼저 주막에 들른 시골 양반이 수작을 걸었다. 그는 막힌 쪽에서 술을 한 잔 마시자고 말 끝에 공 자와 당 자를 붙여 질문했다. 맹사성이 먼저 서울에 무슨 일로 가는 공? 하니, 그 양반이 과거 보러 가는다. 하였다. 며칠 뒤 서울의 과거장에서 맹사성이 그 시골 양반을 보고 어떤 공? 하니,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죽어지이다. 하였다. 맹사성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주막은 기방이나 색주가·객줏집·여각과는 달랐다. 기방은 주로 부유한 양반들에게 기악과 함께 술을 팔던 곳이고, 색주가는 접대부들이 술과 색을 팔던 곳이다. 객줏집은 행상인의 숙식과 상품의 중개나 위탁판매를 했던 곳이고, 여각은 행상인들을 위한 숙박업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주막도 변하여, 내외주점, 거리의 주막, 색주가, 선술집 등이 생겨났다. 여염집 아낙네가 살 길이 막막하여 차린 술집으로, 문을 사이에 두고 술꾼과 거래를 하던 주점이었다. 남녀가 엄격히 통제되던 시절이라 마주 대하지 못하고 문 사이로 팔뚝만 내밀어 술상을 건네주었다고 내외주점이라 했다. 모주를 거리에서 파는 주부는 새벽 시간대에 일을 해야 하는 막노동 노동자를 위해 모주를 팔았다. 모주는 술을 걸러 낸 찌꺼기에 다시 물을 붓고 우려낸 술인데, 주도도 낮았고 맛도 없었다. 모주의 안주로는 비지찌개를 끓여 팔았다. 조선 세종 때 처음 생겨난 색 주는 주로 명나라 사신들에게 주색을 베풀던 곳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값이 비싼 기생집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색주가를 이용하였다. 목로라는 나무 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술집이 선술집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에서 선술집이 매우 번성했는데 일본 사람들도 다치노 미라 부르며 애용하였다. 옛 주막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의 여러 군데에서 지금도 술과 해장국을 파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술집인 맥주홀·스탠드바·카페·룸살롱 등은 주막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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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LAW47950.txt
환경처 (環境處)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일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966
CC BY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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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 제35조에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라고 규정하여 환경권과 환경보전 의무를 헌법상의 국민의 기본적 권리 의무로 선언하고 있다. 「헌법」에 새로운 권리가 등장함으로써 국가에 의한 적극적인 환경보전 기능이 요청되어, 1980년 1월 환경보전 기능을 수행하는 전담기구로 보건사회부의 외청으로 환경청이 발족하였다. 환경오염 문제는 1960년대부터 선진국에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는 1967년 2월 보건사회부 보건국위생과를 환경위생 과로 개편함과 동시에 공해계를 신설함으로써 공해문제를 공공행정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최초의 단위 조직을 설치하였다. 그 후 공해 관계 담당 부서를 늘려왔다. 그러나 환경문제가 급격히 심각해지고, 오염물질이 다양화되면서 보건사회부 내의 보조 기구에 불과한 1개 국으로는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환경행정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환경행정의 종합화·효율화를 위하여서는 중앙행정기관의 설치가 절실하게 요청되어 1980년 1월 5일 대통령령으로 「환경청 직제」가 제정됨에 따라 보건사회부 장관 소속 하의 중앙행정기관으로 환경청이 발족하게 되었다. 이후 1983년 5월 일부 조직개편을 거쳐 1990년 1월 환경처로 승격되었다. 기획관리실·조정 평가실·대기보전국·수질 보전국·폐기물 관리국·시설기술국 등 2실 4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환경정책의 중요성이 날로 커짐에 따라 1994년 12월 국무총리 소속 환경처에서 대통령 소속 환경부로 변경되었다. 환경부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환경처 (環境處) ### 내용: 우리나라 「헌법」 제35조에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라고 규정하여 환경권과 환경보전 의무를 헌법상의 국민의 기본적 권리 의무로 선언하고 있다. 「헌법」에 새로운 권리가 등장함으로써 국가에 의한 적극적인 환경보전 기능이 요청되어, 1980년 1월 환경보전 기능을 수행하는 전담기구로 보건사회부의 외청으로 환경청이 발족하였다. 환경오염 문제는 1960년대부터 선진국에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는 1967년 2월 보건사회부 보건국위생과를 환경위생 과로 개편함과 동시에 공해계를 신설함으로써 공해문제를 공공행정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최초의 단위 조직을 설치하였다. 그 후 공해 관계 담당 부서를 늘려왔다. 그러나 환경문제가 급격히 심각해지고, 오염물질이 다양화되면서 보건사회부 내의 보조 기구에 불과한 1개 국으로는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환경행정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환경행정의 종합화·효율화를 위하여서는 중앙행정기관의 설치가 절실하게 요청되어 1980년 1월 5일 대통령령으로 「환경청 직제」가 제정됨에 따라 보건사회부 장관 소속 하의 중앙행정기관으로 환경청이 발족하게 되었다. 이후 1983년 5월 일부 조직개편을 거쳐 1990년 1월 환경처로 승격되었다. 기획관리실·조정 평가실·대기보전국·수질 보전국·폐기물 관리국·시설기술국 등 2실 4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환경정책의 중요성이 날로 커짐에 따라 1994년 12월 국무총리 소속 환경처에서 대통령 소속 환경부로 변경되었다. 환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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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9470.txt
널무덤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종규"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614
CC BY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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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 형태는 방형·장방형·원형·타원형이 있다. 일반적으로 널무덤에는 널[]이나 덧널[]과 같이 일차적으로 유해를 보호하는 시설[]이 있는 종류는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무 널[]과 나무덧널[]을 사용했어도 이미 부패해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널무덤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인류 사회에 있어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묘제로서 널무덤이 유행한 것은 중기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약간의 지역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초기 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전기까지 유행한 묘제로 정의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평안남도 평양시<NAME>리, 황해도<NAME>군 운성리,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경상남도 김해시 예안리 널무덤 군(群)이 있다. 태성리 유적은 서기전 1세기 이후의 유적으로서 평안도 재래의 동검 문화(銅劍文化)와 중국 전한 문화(前漢文化)가 복합된 유물상을 보여,<NAME>동검과 철기, 전한계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널·덧널과 같은 장구도 발견되었다. 조양동 유적은 1∼3세기의 유적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목관이 장구로 쓰이게 된 시기는 초기 철기·청동기·와질토기가 함께 출토된 시기이다. 철기·와질토기가 함께 출토되면서 장구로 덧널이 쓰이게 되었다. 덧널이 장구로 쓰였던 4세기 때의 예안리 유적에서는 철기와 도질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널무덤으로 알려진 사례들은 모두 널 또는 덧널을 장구로 사용하고 있어, 이들을 널무덤으로만 명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개념적으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널무덤 ### 내용: 평면 형태는 방형·장방형·원형·타원형이 있다. 일반적으로 널무덤에는 널[]이나 덧널[]과 같이 일차적으로 유해를 보호하는 시설[]이 있는 종류는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무 널[]과 나무덧널[]을 사용했어도 이미 부패해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널무덤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인류 사회에 있어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묘제로서 널무덤이 유행한 것은 중기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약간의 지역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초기 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전기까지 유행한 묘제로 정의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평안남도 평양시<NAME>리, 황해도<NAME>군 운성리,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경상남도 김해시 예안리 널무덤 군(群)이 있다. 태성리 유적은 서기전 1세기 이후의 유적으로서 평안도 재래의 동검 문화(銅劍文化)와 중국 전한 문화(前漢文化)가 복합된 유물상을 보여,<NAME>동검과 철기, 전한계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널·덧널과 같은 장구도 발견되었다. 조양동 유적은 1∼3세기의 유적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목관이 장구로 쓰이게 된 시기는 초기 철기·청동기·와질토기가 함께 출토된 시기이다. 철기·와질토기가 함께 출토되면서 장구로 덧널이 쓰이게 되었다. 덧널이 장구로 쓰였던 4세기 때의 예안리 유적에서는 철기와 도질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널무덤으로 알려진 사례들은 모두 널 또는 덧널을 장구로 사용하고 있어, 이들을 널무덤으로만 명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개념적으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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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49146.txt
진주 사곡리 진양하씨 송정종택 소장 고문서 일괄 (晉州 士谷里 晉陽河氏 松亭宗宅 所藏 古文書 一括)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강병주"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7362
CC BY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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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하수일(, 1553~1612) 종택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108점은 2002년 12월 27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문서는 가정 정미년(嘉靖丁未年, 1547년) 화회문기(和會文記) 1점, 만력 경술년(萬曆庚戌年, 1610년) 화회문기 1점, 천계 갑자년(天啓甲子年, 1624년) 화회문기 1점, 노비소송 관련 입안(奴婢訴訟關聯案) 1점, 호구단자 8매,<NAME>고 1매, 토지매매문기 14매, 소지(所志) · 등장(等) · 품목류(稟目類) 54매, 완문(完文) · 절목(節目) 5매, 전령(傳令) · 제음(題音) 3매, 초사(招辭) · 수기(手記) 4매, 위장(慰章) · 만장(輓章) · 제문(祭文) 11매, 차첩(差帖) 1매, 교지(敎旨) 2매, 계후 입안(繼後案) 1매 등 108점이다. 특히 16세기에서 17세기 초까지의 분재기는 매우 드문 고문서이며, 특히 여러 건이같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분재 기와 관련하여 노비가 어떻게 세전 되고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노비들이 상전들에 대항해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노비소송 입안이다. 호구단자는 특이한 책자의<NAME>을 취하는 것이 있고, 하륜(河崙) 부자의 묘소와 관련된 오방재 (梧坊齋) 문건, 하락 · 하항 · 하수일 등과 효자 하세희와 관련이 있는 산송 문서, 이들 사위토(祀位土)의 면세 · 면역 등과 관련된 소지, 등장 등도 있으며, 이와 관련된 절목 · 완문 · 전령 · 수표 · 토지매매문기 등 다수의 문건으로 19세기의 것이 대부분이지만 17 · 18세기의 것도 적지 않다. 이 외에 좌수나 별감, 향리 등 정식 관원에게 내리는 차첩은 많이 발견되지만, 하수일을 권지 교서관 부정에 임명하는 차첩은 드물다. 이 고문서들은 지방사 연구는 물론 당시 진주지역의 생활사를 포함한 문화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진주 사곡리 진양하씨 송정종택 소장 고문서 일괄 (晉州 士谷里 晉陽河氏 松亭宗宅 所藏 古文書 一括) ### 내용: 송정 하수일(, 1553~1612) 종택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108점은 2002년 12월 27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문서는 가정 정미년(嘉靖丁未年, 1547년) 화회문기(和會文記) 1점, 만력 경술년(萬曆庚戌年, 1610년) 화회문기 1점, 천계 갑자년(天啓甲子年, 1624년) 화회문기 1점, 노비소송 관련 입안(奴婢訴訟關聯案) 1점, 호구단자 8매,<NAME>고 1매, 토지매매문기 14매, 소지(所志) · 등장(等) · 품목류(稟目類) 54매, 완문(完文) · 절목(節目) 5매, 전령(傳令) · 제음(題音) 3매, 초사(招辭) · 수기(手記) 4매, 위장(慰章) · 만장(輓章) · 제문(祭文) 11매, 차첩(差帖) 1매, 교지(敎旨) 2매, 계후 입안(繼後案) 1매 등 108점이다. 특히 16세기에서 17세기 초까지의 분재기는 매우 드문 고문서이며, 특히 여러 건이같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분재 기와 관련하여 노비가 어떻게 세전 되고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노비들이 상전들에 대항해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노비소송 입안이다. 호구단자는 특이한 책자의<NAME>을 취하는 것이 있고, 하륜(河崙) 부자의 묘소와 관련된 오방재 (梧坊齋) 문건, 하락 · 하항 · 하수일 등과 효자 하세희와 관련이 있는 산송 문서, 이들 사위토(祀位土)의 면세 · 면역 등과 관련된 소지, 등장 등도 있으며, 이와 관련된 절목 · 완문 · 전령 · 수표 · 토지매매문기 등 다수의 문건으로 19세기의 것이 대부분이지만 17 · 18세기의 것도 적지 않다. 이 외에 좌수나 별감, 향리 등 정식 관원에게 내리는 차첩은 많이 발견되지만, 하수일을 권지 교서관 부정에 임명하는 차첩은 드물다. 이 고문서들은 지방사 연구는 물론 당시 진주지역의 생활사를 포함한 문화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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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3175.txt
곡우 (穀雨)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135
CC BY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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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황경주 1이 30에 해당할 때 들어 있으며, 청명과 입하 사이에 들어 있다. 본격적인 농경의 시작은 음력 3월, 양력 4월 20일 경이다. 곡우 때는 봄비가 잘 오고 곡식이<NAME>해진다. 그래서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 즉 그해 농사를 망친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곡우 때에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하기 위하여 볍씨를 담갔는데, 이때 볍씨를 담갔던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며 밖에서 부정한 일을 당하였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다음 집안에 들어오고, 볍씨를 보지도 않는다. 만약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친다는 속신이 있다. 곡우에는 나무가 가장 많이 물이 오르기 때문에 전라남도나 경상남북도, 강원도 등지에서는 깊은 산이나 명산으로 곡우물을 먹으러 간다. 곡우 물은 주로 산다래나 자작나무, 박달나무 등에 상처를 내서 거기서 나오는 물로, 마시면 몸에 좋다고 해서 약수로 먹는다. 곡우 하기 전에 상처 낸 나무에 통을 달아두고 며칠 동안 수액을 받아 곡우물을 먹는다. 곡우물을 먹으려면 강진이나 해남 등지에서는 대흥사로 가고, 금산과 가야산에서는 가야산으로 가야 한다. 지리산 아래 구례 등지에서 자라는 거 자수(자작나무 수액)는 곡우 때 약수제까지 지낼 정도로 많이 난다. 특히, 신병이 있는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병을 낫게 하는 데, 그것은 외지인들에게 더 좋다고 한다. 고로쇠 물은 경칩에 나오는 물인데, 거 자수는 남자들이, 고로쇠 물은 여자들이 선호한다. 또한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북상한 뒤 격렬비열도 주 2 부근에 올라온다. 특히 그때 잡는 조기를 곡우살이라고 한다. 곡우살이는 살이 아주 적은 대신 맛이 연해서 서해는 물론 남해의 어선들도 많이 찾는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곡우 (穀雨) ### 내용: 태양의 황경주 1이 30에 해당할 때 들어 있으며, 청명과 입하 사이에 들어 있다. 본격적인 농경의 시작은 음력 3월, 양력 4월 20일 경이다. 곡우 때는 봄비가 잘 오고 곡식이<NAME>해진다. 그래서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 즉 그해 농사를 망친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곡우 때에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하기 위하여 볍씨를 담갔는데, 이때 볍씨를 담갔던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며 밖에서 부정한 일을 당하였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다음 집안에 들어오고, 볍씨를 보지도 않는다. 만약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친다는 속신이 있다. 곡우에는 나무가 가장 많이 물이 오르기 때문에 전라남도나 경상남북도, 강원도 등지에서는 깊은 산이나 명산으로 곡우물을 먹으러 간다. 곡우 물은 주로 산다래나 자작나무, 박달나무 등에 상처를 내서 거기서 나오는 물로, 마시면 몸에 좋다고 해서 약수로 먹는다. 곡우 하기 전에 상처 낸 나무에 통을 달아두고 며칠 동안 수액을 받아 곡우물을 먹는다. 곡우물을 먹으려면 강진이나 해남 등지에서는 대흥사로 가고, 금산과 가야산에서는 가야산으로 가야 한다. 지리산 아래 구례 등지에서 자라는 거 자수(자작나무 수액)는 곡우 때 약수제까지 지낼 정도로 많이 난다. 특히, 신병이 있는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병을 낫게 하는 데, 그것은 외지인들에게 더 좋다고 한다. 고로쇠 물은 경칩에 나오는 물인데, 거 자수는 남자들이, 고로쇠 물은 여자들이 선호한다. 또한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북상한 뒤 격렬비열도 주 2 부근에 올라온다. 특히 그때 잡는 조기를 곡우살이라고 한다. 곡우살이는 살이 아주 적은 대신 맛이 연해서 서해는 물론 남해의 어선들도 많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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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30978.txt
예천 남악 종택 (醴泉 南嶽 宗宅)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영훈"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266
CC BY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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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음<NAME>과 함께 척화신으로 이름난 불구당 김왕과 인연이 있는 조선 중기 건축의 정침과 문간채가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불구당의 증조부가 안동에서 예천으로 옮겨 금당실[]에 기거하였다. 아버지 도사공( , 1576∼1621)이 구계에 정착한 이후 이곳에서 김왕이 태어났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600년대에 창건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후 후손들이 누대로부터 거주하다 전주 이씨에게 팔린 종택을 다시 후손이 매입해서 남악 종택으로 활용하고 있다. 안채는 동남향으로 앉아 있는데 날개 집형이다. 안채 앞에 있는 문간채는 이엉으로 엮은 초가다. 초가는 {{#151}}형으로 한 쪽이 중문칸에 이르고 방, 부엌, 마구간, 중문, 방과 광이 들어 있는 형태이며 {{#151}} 안에는 방, 부엌, 마구간, 방과 광이 들어 있다. 옛날 비복들이 거처하던 부속 건물이기 때문에 사랑채와 내외 담 구실을 겸하기도 했다. 이 집의 특색으로 꼽아도 좋을 것은 현존하는 살림집에서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와집인 안채는 {{#029}}형 날개집과 중문 동편 사랑채인 가학 루가 다른 부분에 비해 대범하게 지어져서 또 다른 특색을 가진다. 가학루 사랑채는 누하주를 앞쪽에 세운 전형적인 다락집형이다. 자연목이 굴곡진 것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멋져 보인다. {{#029}} 평면은 세 줄 겹집 3칸에 방 4칸, 대청 4칸이다. 형 평면의 동익사는 중문칸, 광, 간이부엌, 사랑방 2칸 중 첫 번째 방부터 북주하고, 사랑방 2칸 뒤에 간이 부엌, 다시 방이 두 칸이고, 안채 본 건물은 안채 본 건물이다. 건넌방과 전면의 마루, 그리고 4칸 대청과 앞퇴, 그리고 안방이 자형으로 2칸 반 규모다. 이어 부엌, 방, 부엌, 그리고 마루가 서쪽으로 돌출된 단칸 통[]이 방 1칸과 마루 1칸인 중문간채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오량집이고, 날개는 삼량가 구조다. 대청은 연등천장, 방은 종이 반지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예천 남악 종택 (醴泉 南嶽 宗宅) ### 내용: 병자호란 때 청음<NAME>과 함께 척화신으로 이름난 불구당 김왕과 인연이 있는 조선 중기 건축의 정침과 문간채가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불구당의 증조부가 안동에서 예천으로 옮겨 금당실[]에 기거하였다. 아버지 도사공( , 1576∼1621)이 구계에 정착한 이후 이곳에서 김왕이 태어났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600년대에 창건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후 후손들이 누대로부터 거주하다 전주 이씨에게 팔린 종택을 다시 후손이 매입해서 남악 종택으로 활용하고 있다. 안채는 동남향으로 앉아 있는데 날개 집형이다. 안채 앞에 있는 문간채는 이엉으로 엮은 초가다. 초가는 {{#151}}형으로 한 쪽이 중문칸에 이르고 방, 부엌, 마구간, 중문, 방과 광이 들어 있는 형태이며 {{#151}} 안에는 방, 부엌, 마구간, 방과 광이 들어 있다. 옛날 비복들이 거처하던 부속 건물이기 때문에 사랑채와 내외 담 구실을 겸하기도 했다. 이 집의 특색으로 꼽아도 좋을 것은 현존하는 살림집에서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와집인 안채는 {{#029}}형 날개집과 중문 동편 사랑채인 가학 루가 다른 부분에 비해 대범하게 지어져서 또 다른 특색을 가진다. 가학루 사랑채는 누하주를 앞쪽에 세운 전형적인 다락집형이다. 자연목이 굴곡진 것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멋져 보인다. {{#029}} 평면은 세 줄 겹집 3칸에 방 4칸, 대청 4칸이다. 형 평면의 동익사는 중문칸, 광, 간이부엌, 사랑방 2칸 중 첫 번째 방부터 북주하고, 사랑방 2칸 뒤에 간이 부엌, 다시 방이 두 칸이고, 안채 본 건물은 안채 본 건물이다. 건넌방과 전면의 마루, 그리고 4칸 대청과 앞퇴, 그리고 안방이 자형으로 2칸 반 규모다. 이어 부엌, 방, 부엌, 그리고 마루가 서쪽으로 돌출된 단칸 통[]이 방 1칸과 마루 1칸인 중문간채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오량집이고, 날개는 삼량가 구조다. 대청은 연등천장, 방은 종이 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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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16674.txt
발진열 (發疹熱)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문식"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618
CC BY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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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급 법정감염병이다. 발진티푸스와 비슷한 증상은 발진티푸스와 비슷하나 40C 이상의 발열은 없고 1주일 정도면 해열이 되는 경증의 병이다. 출혈성이 아니고 정신 신경 증상은 흔하지 않으며 발진은 출혈성이 아니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에는 치명률이 2% 전후였지만 지금은 치료만 잘하면 사망하지 않는다. 자연계는 쥐-쥐벼룩-쥐로 순환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건물 안에서는 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발생한다. 쥐벼룩은 사람의 피를 흡혈하지 않으므로 혈액을 직접 흡혈하지는 못하지만, 우연히 리케차(rickettsia)에 오염된 쥐벼룩의 대소변과 분진이 사람의 피부 상처로 들어오거나 흡입함으로써 전염된다. 보통 12일간 잠복해 있다가 한번 앓고 나면 평생 면역이 되는데 잠복기는 6∼15일이다. 최근에는 쥐벼룩을 죽이는 잔류 살충제의 보급이 잘 되어 세계적으로 발생이 감소했다. 발진열이나 발진티푸스 같은 한국의 전통적인 질병을 미생물설이 정립된 이후의 분류체계로 본다면, 오늘날의 분류체계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 발진열과 발진티푸스도 그중의 한 예이나, 발진열이라는 것은 발진티푸스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발반[發斑: 천연두·홍역 등을 앓을 때 피부에 발긋 발긋한 부스럼이 내돋는 일]의 증상을 포함하는 온 역[瘟疫: 봄철에 유행하는 급성 감염병]이나 상한(傷寒)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구전되어 왔던 호남열(湖南熱)·조선티푸스 등의 지방병이 이 발진열에 해당되는 것으로 사료되나 해명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그 역학상(疫學相)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다만, 임상적으로 중증 발진티푸스, 경증 발진티푸스, 유행성 발진티푸스라는 막연한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발진열 (發疹熱) ### 내용: 제3급 법정감염병이다. 발진티푸스와 비슷한 증상은 발진티푸스와 비슷하나 40C 이상의 발열은 없고 1주일 정도면 해열이 되는 경증의 병이다. 출혈성이 아니고 정신 신경 증상은 흔하지 않으며 발진은 출혈성이 아니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에는 치명률이 2% 전후였지만 지금은 치료만 잘하면 사망하지 않는다. 자연계는 쥐-쥐벼룩-쥐로 순환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건물 안에서는 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발생한다. 쥐벼룩은 사람의 피를 흡혈하지 않으므로 혈액을 직접 흡혈하지는 못하지만, 우연히 리케차(rickettsia)에 오염된 쥐벼룩의 대소변과 분진이 사람의 피부 상처로 들어오거나 흡입함으로써 전염된다. 보통 12일간 잠복해 있다가 한번 앓고 나면 평생 면역이 되는데 잠복기는 6∼15일이다. 최근에는 쥐벼룩을 죽이는 잔류 살충제의 보급이 잘 되어 세계적으로 발생이 감소했다. 발진열이나 발진티푸스 같은 한국의 전통적인 질병을 미생물설이 정립된 이후의 분류체계로 본다면, 오늘날의 분류체계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 발진열과 발진티푸스도 그중의 한 예이나, 발진열이라는 것은 발진티푸스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발반[發斑: 천연두·홍역 등을 앓을 때 피부에 발긋 발긋한 부스럼이 내돋는 일]의 증상을 포함하는 온 역[瘟疫: 봄철에 유행하는 급성 감염병]이나 상한(傷寒)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구전되어 왔던 호남열(湖南熱)·조선티푸스 등의 지방병이 이 발진열에 해당되는 것으로 사료되나 해명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그 역학상(疫學相)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다만, 임상적으로 중증 발진티푸스, 경증 발진티푸스, 유행성 발진티푸스라는 막연한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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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59021.txt
가관친영 (假館親迎)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장병인"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685
CC BY
543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정자가 처음 언급한 것은 주자가례에 수록된 친영 절차의 한 유형인 가관 친영이다. 정자는 중국 봉건시대 제후들이 모두 친영한 것으로 본 앞선 유가의 설을 반박하며, 국경 근처에 관소를 설치하고 신부를 맞아왔다고 주장하였다. 주자는 이와 같은 정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서인의 혼례에 적용해 주자가례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였다. 조선에서 왕과 사대부의 혼인은 모두 가관 친영의 혼인절차를 따랐다. 중종의 혼인에 1회, 선조의 혼인에 2회 시행된 뒤 인조대 이후부터 별궁 친영으로 변경되었다. 인조대 이후 약 50여 년간 호서사림을 중심으로 시행되다가 조선 후기엔 간간이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국왕이 직접 왕비를 맞이하는 것이 지존인 국왕이 개인 집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여 시행된 것이 가관 친영이다. 이와는 달리 사대부 혼례는 본래의 절차대로 친영례를 집행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현실적 사정으로 인해 시행 시기와 의미가 전혀 다르니, 국왕의 가관 친영과 사대부의 가관 친영은 그 시행의 시기나 의의를 달리한다. 국왕의 가관 친영례 조선 초기 왕세자․왕자․공주 등의 왕실 혼인은 모두 친영례에 의해 진행되었던 데 반해 국왕의 혼인에는 친영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국왕이 사신을 왕비집에 보내<그림 1-①> 전안례를 치르고 왕비를 궁궐로 맞아들이게 한 후<그림 1-②> 궁궐에서 혼례를 치르는<그림 1-③> 방법인 ‘명사 봉영(命使奉迎)’의 절차에 의해 시행되었던 것이다. 명사 봉영은 국왕의 존엄한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황후를 맞이하는 절차였다. 중종대에는 국왕의 명사봉영례 국왕의 혼인에 친영례를 적용하자는 논의가 처음으로 발의되었다. 중종이 사림의 정책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친영 절차에 의해 왕비를 맞을 의사를 표명한 후, 신료들 사이에 찬반 격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례(古禮)’의 복구를 주장하는 사림은 친영을 시행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해, 임금이 신하의 집에 가서 친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대신들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명사 봉영’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임금이 신하의 집에 가서 친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가관 친영이었다. 가관 친영은 사신이 기러기를 가지고 왕비집에 가서 왕비를 맞아<그림 2-①> 미리 마련해 놓은 관소(태평관)에 머물게 한 후<그림 2-②>, 그곳으로부터 국왕이 왕비를 맞아(친영)<그림 2-③> 궁궐로 돌아와 혼례를 치르는<그림 2-④><NAME>으로서, 국왕이 왕비를 맞으러 직접 왕비집으로 거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 2>국왕의 가관 친영례 사대부의 가관 친영례 조선시대 위정자들은 건국초부터 주자가례에 따라 혼인에 친영례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사회에서는 그대로 시행하기 어려운 혼인 방식이었던 친영례는 중국의 부방 거주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노력이 왕실에서만 친영이 이루어지고 사서인에게는 친영례가 적용되지 못하였다. 17세기 예학의 발달과 함께 거주제를 바꾸지 않고도 친영례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었다. 인조대 이래로 호서사림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던 가관친영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관소를 신부집 가까운 곳에 마련하여 신랑이 신부집에서 가서<그림 3-①> 신부를 맞아(친영)<그림 3-②> 관소(가칭 신랑집)에 와서 혼례식을 치르는<그림 3-③> 제1의 방식이고, 둘째는 신랑집 근처에 관소를 마련하여 신부로 하여금 관소(가칭 신부집)로 옮겨와 있도록 한 후<그림 4-①> 신랑이 관소에 가서<그림 4-②> 신부를 맞아(친영)<그림 4-③> 신랑집에 돌아와 혼례를 치르는<그림 4-④> 제2의 방식이다. 조선에서는 이외에도 신부집을 신랑집으로 임시 가정하여 관소에서 신부를 맞아와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편법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자들이 선호한 제1의 방식은 신부집 근처에 관소를 설치하여 친영례를 행하는 제2의 방식이었다. 즉 기러기를 든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관소로 돌아와 합근 동뢰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절차를 마친 후 신혼부부가 돌아오는 곳도 신부집이 대부분인 것으로 확인된다. 사대부의 가관친영례는 지나치게<NAME>적이고 가식적이라는 이유로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주자 지상주의를 지향하던 조선사회에서 국왕과 사대부의 혼인에는 일시적으로 가관친영례가 시행되기도 했다. 중국 황제에<NAME>는 명사봉영례를 포기하면서 나름대로 국왕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가관친영례를 시행하기는 했으나, 천하동례론의 강화로 인해 국왕의 혼례도 친영례에 좀 더 가까운 별궁친영례로 변모하게 되었다. 사대부의 가관친영례도, 친영례를 시행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남귀여가혼에 친영례 절차 일부를 가미하여 실천성을 높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주자 지상주의가 그 한계를 드러낸 것은 남귀여가혼을 친영혼의 혼례<NAME>으로 치르려 했던 가관친영례의 시도였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가관친영 (假館親迎) ### 내용: 정자가 처음 언급한 것은 주자가례에 수록된 친영 절차의 한 유형인 가관 친영이다. 정자는 중국 봉건시대 제후들이 모두 친영한 것으로 본 앞선 유가의 설을 반박하며, 국경 근처에 관소를 설치하고 신부를 맞아왔다고 주장하였다. 주자는 이와 같은 정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서인의 혼례에 적용해 주자가례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였다. 조선에서 왕과 사대부의 혼인은 모두 가관 친영의 혼인절차를 따랐다. 중종의 혼인에 1회, 선조의 혼인에 2회 시행된 뒤 인조대 이후부터 별궁 친영으로 변경되었다. 인조대 이후 약 50여 년간 호서사림을 중심으로 시행되다가 조선 후기엔 간간이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국왕이 직접 왕비를 맞이하는 것이 지존인 국왕이 개인 집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여 시행된 것이 가관 친영이다. 이와는 달리 사대부 혼례는 본래의 절차대로 친영례를 집행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현실적 사정으로 인해 시행 시기와 의미가 전혀 다르니, 국왕의 가관 친영과 사대부의 가관 친영은 그 시행의 시기나 의의를 달리한다. 국왕의 가관 친영례 조선 초기 왕세자․왕자․공주 등의 왕실 혼인은 모두 친영례에 의해 진행되었던 데 반해 국왕의 혼인에는 친영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국왕이 사신을 왕비집에 보내<그림 1-①> 전안례를 치르고 왕비를 궁궐로 맞아들이게 한 후<그림 1-②> 궁궐에서 혼례를 치르는<그림 1-③> 방법인 ‘명사 봉영(命使奉迎)’의 절차에 의해 시행되었던 것이다. 명사 봉영은 국왕의 존엄한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황후를 맞이하는 절차였다. 중종대에는 국왕의 명사봉영례 국왕의 혼인에 친영례를 적용하자는 논의가 처음으로 발의되었다. 중종이 사림의 정책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친영 절차에 의해 왕비를 맞을 의사를 표명한 후, 신료들 사이에 찬반 격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례(古禮)’의 복구를 주장하는 사림은 친영을 시행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해, 임금이 신하의 집에 가서 친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대신들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명사 봉영’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임금이 신하의 집에 가서 친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가관 친영이었다. 가관 친영은 사신이 기러기를 가지고 왕비집에 가서 왕비를 맞아<그림 2-①> 미리 마련해 놓은 관소(태평관)에 머물게 한 후<그림 2-②>, 그곳으로부터 국왕이 왕비를 맞아(친영)<그림 2-③> 궁궐로 돌아와 혼례를 치르는<그림 2-④><NAME>으로서, 국왕이 왕비를 맞으러 직접 왕비집으로 거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 2>국왕의 가관 친영례 사대부의 가관 친영례 조선시대 위정자들은 건국초부터 주자가례에 따라 혼인에 친영례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사회에서는 그대로 시행하기 어려운 혼인 방식이었던 친영례는 중국의 부방 거주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노력이 왕실에서만 친영이 이루어지고 사서인에게는 친영례가 적용되지 못하였다. 17세기 예학의 발달과 함께 거주제를 바꾸지 않고도 친영례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었다. 인조대 이래로 호서사림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던 가관친영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관소를 신부집 가까운 곳에 마련하여 신랑이 신부집에서 가서<그림 3-①> 신부를 맞아(친영)<그림 3-②> 관소(가칭 신랑집)에 와서 혼례식을 치르는<그림 3-③> 제1의 방식이고, 둘째는 신랑집 근처에 관소를 마련하여 신부로 하여금 관소(가칭 신부집)로 옮겨와 있도록 한 후<그림 4-①> 신랑이 관소에 가서<그림 4-②> 신부를 맞아(친영)<그림 4-③> 신랑집에 돌아와 혼례를 치르는<그림 4-④> 제2의 방식이다. 조선에서는 이외에도 신부집을 신랑집으로 임시 가정하여 관소에서 신부를 맞아와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편법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자들이 선호한 제1의 방식은 신부집 근처에 관소를 설치하여 친영례를 행하는 제2의 방식이었다. 즉 기러기를 든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관소로 돌아와 합근 동뢰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절차를 마친 후 신혼부부가 돌아오는 곳도 신부집이 대부분인 것으로 확인된다. 사대부의 가관친영례는 지나치게<NAME>적이고 가식적이라는 이유로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주자 지상주의를 지향하던 조선사회에서 국왕과 사대부의 혼인에는 일시적으로 가관친영례가 시행되기도 했다. 중국 황제에<NAME>는 명사봉영례를 포기하면서 나름대로 국왕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가관친영례를 시행하기는 했으나, 천하동례론의 강화로 인해 국왕의 혼례도 친영례에 좀 더 가까운 별궁친영례로 변모하게 되었다. 사대부의 가관친영례도, 친영례를 시행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남귀여가혼에 친영례 절차 일부를 가미하여 실천성을 높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주자 지상주의가 그 한계를 드러낸 것은 남귀여가혼을 친영혼의 혼례<NAME>으로 치르려 했던 가관친영례의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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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43130.txt
폄석 (砭石)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신근"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9858
CC BY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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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침이라고도 불리는 고대사회의 의료 기구인데, 물고기를 잡고 수렵할 때 사용되었던 돌조각으로 피부의 표면을 찔러서 치료하였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된 석침은 점점 가늘어지고 치료에도 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환자의 통증을 감소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점점 시대가 변하면서 골침·죽침을 사용하다가 도침이 석침을 대신하였다. 금속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침의 기구도 변화하여 구리침·철침 등으로 발전하고 은침·금침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한나라 때의 한의학 기본서인 소문 권 4 이 법방 의론에는 동방은 병이 전부 옹 양(: 종기)으로 되어 있고 그 치료는 폄석으로 하는데, 폄석 또한 동방으로부터 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동산 경조(東山經條)에 “고씨(高氏)의 산 아래에 잠석(箴石)이 많다. ”고 한 것을 곽박(郭璞)이 주(註) 한 것을 보면 “잠석은 가히 지침(砥針)이 되어 옹 양을 치료한다. ”는 것이다. 『소문』과 『산해경』의 저작 연대를 추정해 볼 때에 이것은 고조선 시대 후기에 해당되므로 이미 고조선에서 실시되었고, 그것이 다시 한나라에 전하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1929년 함경북도 경흥군 운기면 송평동에서 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고, 그 유물 가운데 석촉·석침·골침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물증은 당시 폄석술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피부 속에 생기는 옹저·옹 양이 화농되었을 때 수술하는 외과적 치료기구가 폄석이다. 당시 일반 화농성질환에 이와 같은 방법이 크게 히트하여 널리 활용되었다. 하지만 금속술이 발전하면서 사용하기 불편한 이 기구는 간편하고 효과적인 침 치료기로 대체되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폄석 (砭石) ### 내용: 석침이라고도 불리는 고대사회의 의료 기구인데, 물고기를 잡고 수렵할 때 사용되었던 돌조각으로 피부의 표면을 찔러서 치료하였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된 석침은 점점 가늘어지고 치료에도 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환자의 통증을 감소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점점 시대가 변하면서 골침·죽침을 사용하다가 도침이 석침을 대신하였다. 금속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침의 기구도 변화하여 구리침·철침 등으로 발전하고 은침·금침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한나라 때의 한의학 기본서인 소문 권 4 이 법방 의론에는 동방은 병이 전부 옹 양(: 종기)으로 되어 있고 그 치료는 폄석으로 하는데, 폄석 또한 동방으로부터 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동산 경조(東山經條)에 “고씨(高氏)의 산 아래에 잠석(箴石)이 많다. ”고 한 것을 곽박(郭璞)이 주(註) 한 것을 보면 “잠석은 가히 지침(砥針)이 되어 옹 양을 치료한다. ”는 것이다. 『소문』과 『산해경』의 저작 연대를 추정해 볼 때에 이것은 고조선 시대 후기에 해당되므로 이미 고조선에서 실시되었고, 그것이 다시 한나라에 전하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1929년 함경북도 경흥군 운기면 송평동에서 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고, 그 유물 가운데 석촉·석침·골침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물증은 당시 폄석술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피부 속에 생기는 옹저·옹 양이 화농되었을 때 수술하는 외과적 치료기구가 폄석이다. 당시 일반 화농성질환에 이와 같은 방법이 크게 히트하여 널리 활용되었다. 하지만 금속술이 발전하면서 사용하기 불편한 이 기구는 간편하고 효과적인 침 치료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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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LAW56979.txt
이해익 (李海翼)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희만"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835
CC BY
118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전주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전주이다. 경성 제일 공립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4년 일본 도호쿠 제국 대학[] 법과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이던 193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황해도 신계 군수로 1937년 부임한 그는 중일전쟁과 관련하여 각종 군용물자의 조달 공출, 출정 군인과 유가족에 대한 군사원호, 국방헌금과 애국기 헌납 자금 모금 등의 전시 업무에 힘썼다. 1939년 황주 군수, 1943년 개성부윤 등을 역임했다.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경기도 내무부 내무부장에 임명했고 1946년 2월 해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월 이사관으로 내무부 지방국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3월 선거 법규 기초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구자옥의 뒤를 이어 제2대 경기도지사에 올랐다.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다음 과도정부에서 물러나 자신이 경영하던 염전 사업에 몸을 담았으며, 4·19혁명 직후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염업조합 이사장을 지냈으며, 1984년 9월 24일에 사망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해익 (李海翼) ### 내용: 전주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전주이다. 경성 제일 공립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4년 일본 도호쿠 제국 대학[] 법과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이던 193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황해도 신계 군수로 1937년 부임한 그는 중일전쟁과 관련하여 각종 군용물자의 조달 공출, 출정 군인과 유가족에 대한 군사원호, 국방헌금과 애국기 헌납 자금 모금 등의 전시 업무에 힘썼다. 1939년 황주 군수, 1943년 개성부윤 등을 역임했다.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경기도 내무부 내무부장에 임명했고 1946년 2월 해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월 이사관으로 내무부 지방국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3월 선거 법규 기초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구자옥의 뒤를 이어 제2대 경기도지사에 올랐다.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다음 과도정부에서 물러나 자신이 경영하던 염전 사업에 몸을 담았으며, 4·19혁명 직후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염업조합 이사장을 지냈으며, 1984년 9월 24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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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28564.txt
용부탕 (茸附湯)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홍원식"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9508
CC BY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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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제중신편·방약합편 등에 기록되어 있다. 처방은 녹용·부자 각 10g에 생강 7편을 넣고 달여서 먹는다. 피로·정력 감퇴·빈혈과 수술 후 쇠약 및 치루·탈항증 등의 치료에 사용되며, 정·기·혈이 소모되어 조열(: 열이 조수와 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도한(: 수면 시 흘리는 땀)이 있을 때를 치료한다. 다른 처방에 비해 간단하고 효능도 빠르지만 녹용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많이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용부탕 (茸附湯) ### 내용: 동의보감·제중신편·방약합편 등에 기록되어 있다. 처방은 녹용·부자 각 10g에 생강 7편을 넣고 달여서 먹는다. 피로·정력 감퇴·빈혈과 수술 후 쇠약 및 치루·탈항증 등의 치료에 사용되며, 정·기·혈이 소모되어 조열(: 열이 조수와 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도한(: 수면 시 흘리는 땀)이 있을 때를 치료한다. 다른 처방에 비해 간단하고 효능도 빠르지만 녹용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많이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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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ECO21111.txt
삼미㈜ (三美(株))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유붕노"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583
CC BY
158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삼미그룹의 모회사로 1966년 12월 대한철광개발주식회사를 인수하고, 1969년 7월 삼양특수강주식회사에 합작투자를 하는 등 착실히 발전해 1973년 7월 주식회사 삼미사를 흡수합병하고 주식회사 삼미사로 상호변경하였다. 이듬해 7월 한국특수강공업주식회사를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삼미해운주식회사·주식회사협신볼트·한림통상주식회사·우신건설주식회사 등을 흡수, 합병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1976년 3월 회사를 공개하였고, 1977년 4월에는 삼미금속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9년 4월에는 칠레에 지사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주식회사 삼미로 1982년 6월 상호를 변경하고, 1984년 12월 삼미광업개발(주)를 흡수, 합병하였다. 1986년 8월 한성자동차서비스(주)에, 1987년 6월 삼미정공(주)에, 12월 (유)삼미이튼과 삼미캔하(주)에 출자하였다. 1994년 5월 (유)삼미기공 지분을 팔고, 12월에는 삼미정공(주) 지분을 팔고, 1996년 5월에는 삼미금속(주)가 삼미유통(주)를 흡수, 합병하였다. 1996년 말 당시 주요사업은 특수강판매업, 강재가공 및 판매업, 냉간 압연업, 수출입업, 물품매도확약서 발행업 등이었다. 당시 삼미그룹은 관계회사였다. 총자산은 6,193억원, 자본금 893억원, 연간매출액 5,307억원이었다. 종업원은 383명이었는데, 관리사무직 323명, 생산직 60명 등이 있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있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부도 처리되었고, 2002년 주식시장에서 상장 폐지되었다. 삼미(주)는 2003년 삼림 컨소시엄과 M&A 본계약을 체결하고 회사정리절차를 끝냈다. 현재 삼미(주)는 삼미계열의 지주회사인 삼미 홀딩스(주)의 자회사로 있다. 본사 이전은 2013년 10월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36-13번지 2층으로 이루어졌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삼미㈜ (三美(株)) ### 내용: 삼미그룹의 모회사로 1966년 12월 대한철광개발주식회사를 인수하고, 1969년 7월 삼양특수강주식회사에 합작투자를 하는 등 착실히 발전해 1973년 7월 주식회사 삼미사를 흡수합병하고 주식회사 삼미사로 상호변경하였다. 이듬해 7월 한국특수강공업주식회사를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삼미해운주식회사·주식회사협신볼트·한림통상주식회사·우신건설주식회사 등을 흡수, 합병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1976년 3월 회사를 공개하였고, 1977년 4월에는 삼미금속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9년 4월에는 칠레에 지사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주식회사 삼미로 1982년 6월 상호를 변경하고, 1984년 12월 삼미광업개발(주)를 흡수, 합병하였다. 1986년 8월 한성자동차서비스(주)에, 1987년 6월 삼미정공(주)에, 12월 (유)삼미이튼과 삼미캔하(주)에 출자하였다. 1994년 5월 (유)삼미기공 지분을 팔고, 12월에는 삼미정공(주) 지분을 팔고, 1996년 5월에는 삼미금속(주)가 삼미유통(주)를 흡수, 합병하였다. 1996년 말 당시 주요사업은 특수강판매업, 강재가공 및 판매업, 냉간 압연업, 수출입업, 물품매도확약서 발행업 등이었다. 당시 삼미그룹은 관계회사였다. 총자산은 6,193억원, 자본금 893억원, 연간매출액 5,307억원이었다. 종업원은 383명이었는데, 관리사무직 323명, 생산직 60명 등이 있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있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부도 처리되었고, 2002년 주식시장에서 상장 폐지되었다. 삼미(주)는 2003년 삼림 컨소시엄과 M&A 본계약을 체결하고 회사정리절차를 끝냈다. 현재 삼미(주)는 삼미계열의 지주회사인 삼미 홀딩스(주)의 자회사로 있다. 본사 이전은 2013년 10월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36-13번지 2층으로 이루어졌다.
d73d35fe-06f9-4e99-87b4-f5b2b86a9b89
source05/encykorea/LAW17768.txt
법학 (法學)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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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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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정법의 체계적인 해석을 목적으로 하는 법해 석학, 법의 근본 문제를 탐구하는 법철학, 법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법사학, 법과 사회의 상호 관련성을 탐구하는 법사회학, 여러 법질서들을 상호 비교 연구하는 비교법학, 사회정책·형사정책 등에 따른 법의 정립을 탐구하는 법정책학 등을 포함하는 학문 영역이다. 법해 석학에는 해석의 대상이 되는 실정법의 분야에 따라 헌법학·민법학·상법학·행정법학·형법학·국제법학·사회법학·소송법학·국제사법학 등이 있다. 법학은 실정법의 체계적인 해석을 중심 과제로 삼기 때문에 실정법과 무관하게 발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의 법은 20세기에 전통적인 법체계를 버리고 서구의 근대법체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역사적 연속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로써 법학도 전통적 율학과 근대적 법학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국학에 율령박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시대에 국자감에서 가르치던 육학 중 하나가 율학이었다. 여기에는 율학박사와 율학 조교가 가르쳤으며, 18세부터 25세까지의 학생이 입학했다. 987년(성종 6)에는 명법업 2인, 993년에는 명법과 3인에게 급제를 주어 7품직을 수여하였다. 시험은 율·영 각 10조를 암기하고, 문장을 암기하게 하는 비교적 쉬운 수준이었다. 이런 점에서 고려의 율학은 율령을 암기하고 해석하는 단순한 학문이었다.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따르면, 조선의 율학은 잡학의 하나로 형조에 40인, 6부에 각 16인, 5대 도호부에 각 14인, 20목에 각 14인, 154현에 각 8인 등 모두 3,346인이 뽑혔다. 한편, 율과의 정원은 초시 18인, 복시 9인으로,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은 체제에서 행정관의 보조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율학박사는 종 8품, 율학 조교는 종 9품이었다. 율학은 이와 같이 경학에 비해 뒤떨어졌고, 법률가가 독립된 사회계층을 이루지 못하였다. 율학 서는 중국 서적으로 당률소의 ·율학해이 ·율해 변의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대명률 을 참고하였고,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해설한 대명률직해를 편찬하였다. 또한 행정관과 율사들이 실제로 송사를 담당할 때 증거 채택과 법의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였으므로, 최초의 한글 법학 서인 무원록 언해를 펴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 심리록 ·추관지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법학연구서라기보다는 법전 내지 사건 기록집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까지는 법전과 재판이 있었지만, 법학은 크게 형성되지 못했다. 정약용은 18세기 흠흠신서에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법학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형조 좌랑 강항과 유학자<NAME> 및 그의 아들 이매계가 일본 학자들에게 대명률직해와 경국대전 등을 가르치면서 일본 법학사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한역 서학서는 18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는데, 이 서적을 통해서 서구의 근대적 법학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실학자들의 문집에 수록된 한역 서학서 가운데 알레니(Aleni,J.)의 서학범 과 직방외기에 서양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함으로써 처음으로 법학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서양 법학을 소개하는 데 특히 주목한 학자는 없었고, 서양 종교와 학문 일반을 비판하는 학자들이 호기심으로 읽는 정도에 그쳤다. 이런 이유로 이 시대에 서양 법학을 수용한 것은 초기 수용 내지 반수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1881년(고종 18)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 중 일본 사법성을 시찰하고, 서양 법으로 개화된 일본의 법제를 보고 돌아온 엄세영 일행은 일본 사법성 시찰기와 일본 견문사 건초를 저술하였다. 또한 개항과 더불어 유길준·서재필 등이 미국에서 서구의 문명 제도를 배워 돌아와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서양의 국가·법·권리·자유 등을 소개했고,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법의식을 고취시켰다. 1895년 일본으로 파견된 관비유학생 가운데 이면우(李冕宇)·유문환(劉文煥)·장도(張燾)·홍재기(洪在祺)·석진형(石鎭衡)·박만서(朴晩緖)·신우선(申佑善)·장헌식(張憲植)·유치형(兪致衡)·양대경(梁大卿) 등이 귀국하여 법관양성소와<NAME> 법률전문학교의 교관이 되어 법학을 연구할 수 있는 최초의<NAME>을 이루었다. 또 함태영·이준 등 법관양성소 졸업생과 주정균·이용무·김상연 등<NAME>전문학교 출신들도 법학 교과서와 논문들을 발표하여 국내파 법학자의<NAME>을 구축하였다. 한편, 서양 국제법서가 중국에서 번역되어 전해진 것이 법학의 근대화를 촉발시켰다. 휘턴(Wheaton, H. )의 ≪만국공법 萬國公法,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1864), 울시(Woolsey, T. )의 ≪공법 편람 公法便覽,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Law ≫(1877), 블룬칠리(Bluntschli,J. K. )의 ≪공법회통 公法會通, Das moderne Vo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aten als Rechtsbuch dargestellt ≫(1880) 등이다. 특히 1896년 학부에서 청국판에 편집국장 이경식의 서문을 덧붙여 출판한 공법회 통은 고종과 대신들에게 배포되었으며 1899년 대한제국 국제를 제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 나라의 헌법에 이처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서양의 국제법서 덕분이다. 그것은 국제법에 의거한 독립주권국가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우리의 의지의 표현이며, 한국 법학의 큰 성과라 하겠다. 또한 1882년 묄렌도르프(Mollendorff, P. G. )를 필두로 하여 서양 법률가 출신의 고문관들이 우리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에는 명나라에서 생겨난 야만적 고법을 개화한 새 법으로 고치고, 한문으로 된 새 법은 한글로 엮어야 한다. 고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개혁 Die Reorganisation Koreas에서 말했다. 후임인 미국 판사 출신 데니(Denny, O. N. )는 ≪청한론 淸韓論, China and Korea ≫을 저술하여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독립국임을 주장하였고, 르 장드르(Le Gendre, C. W. )·샌즈(Sands, W. )·그레이트 하우스(Greathouse, C. )·크레 마지(Cremazy, L. )·스티븐스(Stevens, D. W. ) 등이 뒤따랐다. 특히 크레 마지는 한국 학생들에게 프랑스 법학을 개인교수로 가르치면서 5명의 법관양성소 교관을 배출하였고, 형법대전의 입법 작업에도 참여하면서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Le Code Penal de la Coree를 출판하여 세계에 알렸다. 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법률고문이었던 부아소나드(Boissonade,G. E. )가 논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법과 법학은 세계 법학과 서서히 연결되었다. 아직 헌법·형법·민법·상법·소송법 등 실정법률이 제정되지 않은 때였지만, 서양과 일본을 통해 소개된 법학에 대한 요청과 관심이 급증하면서 각종 법학 서적이 출판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근대적 법보다 법학을 먼저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을사조약 이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문화와 교육을 통해 부흥시키려는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법학을 세우는 것이 민족의 자강과 애국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법학 서들 과 논문들을 많이 발표했다. 법학 교과서로 나온 것은 ≪법학통론≫(유성준), ≪법학통론≫(주 정균), ≪헌법≫(유치형), ≪헌법≫(조성구), ≪헌법≫·≪국가학≫(김상연), ≪행정법대의≫(장헌식), ≪지방행정론≫(조성구), ≪민법 총론≫(신우 선), ≪물권법 1·2부≫(유치형), ≪물권법 2부≫(박만서), ≪물권법≫(유동작), ≪채권법 1부≫(석진형), ≪채권법 2부≫(조성구), ≪민사소송법≫(홍재기), ≪상속법≫(박만서), ≪상법 총론≫(주 정균), ≪상법요의≫(김상연), ≪회사법≫(이면우), ≪회사법≫(김상연), ≪상행위 법≫(안국선), ≪해상법≫(유치형), ≪어음법론≫(신우 선), ≪형법총론≫(장도), ≪형법각론≫(이면우), ≪국제공법≫(이용무), ≪만국공법≫(주 정균), ≪평시국제공법≫(석진형), ≪국제사법≫(유문환) 등이었다. 이들 법학 교과서들은 발행처, 발행 연월일이 명기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1907, 1908년을 전후하여<NAME>관에서 나왔다. 이들은 거의 법학 강의에 필요한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의 일본 법학 교과서를 참고하여 번역에 가까운 저술을 한 것이었다. 법학은 처음부터 독창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번역 법학이 되는 것은 동서양 공통의 일이다. 일본의 천황주의 헌법학을 우리 현실에 접목시킨 유치형의 헌법은 스스로 고종 치하의 우리 현실에 적용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일본식 천황주의 헌법학을 우리 현실에 접목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교과서들은 번역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의 법 현실을 지적하고 비교법학적 안목으로 하루속히 한국법의 근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애국적 계몽 법학, 민주법학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법학 논문들은 개화기 각종 학회지에도 거의 다 실려 있었다. 이들 최초의 법학자들은 1908년 법학 협회를 조직하여 회원은 111명이었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법학의 대중화를 위해 법률 계몽 강연회를 주최하고, 법률 무료상담을 하는 한편, 법학 협회 잡지를 매월 발간하여 19호까지 냈다. 하지만 1910년 국권 상실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915년 재조직되어 회지를 법학계로 바꾸어 6호까지 발행했으나 또 중단되고 말았다. 일본은 법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우리 국민들이 법을 잘 알지 못하도록 우민정치를 계획하였다. 그래서 한말에 싹튼 한국 법학을 일본 법학으로 거의 대체했다. 법관양성소는 법학교로 바뀌었다가 경성법학 전수학교로 바뀌었는데, 이곳에서는 김병로·양대 경 등 한국인 교수가 가르쳤다.<NAME>전문학교는 그 이전까지 명맥을 유지하였고, 법정 학계 ·보전 학회 논총 등을 발간하였다. 여기에는<NAME>의 <토라(Torah)에 관한 연구>가 세 회나 연재되었고,<NAME>오의 <중세에 있어서 정의 사상>이 실렸다. 한국 법학은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고 법문학 부가 설립됨에 따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일본에서의 서양 법학을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가르쳤고, 그것이 한국 법학의 주류가 되었다. 그렇지만 교수들은 모두 일본 법학자들이었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논문집에도 그들의 연구 업적만 실렸으며, 한국 법사에 관한 논문들도 있었다.<NAME>오·최용달·서재원·주유순 등의 조수가 한국인으로는 없었다. 한마디로 민족 항일기의 한국 법학은 동결기였다. 광복 직후 한국 법학계는 연구 인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출발했다.<NAME>오를 중심으로 한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는<NAME>오를 중심으로 한 경성대학 법학부가 되었고, 고병국을 교장으로 한 경성법학전문학교는 재출발하였다. 1946년에는 이를 합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되었다.<NAME>전문학교는 1946년 9월 고려대학교로 승격하였고, 1947년부터 1950년 사이에 국민대학·성균관대학·단국대·국제대학·신흥대학(경희대학교의 전신)·연세대학·이화여자대학 등에 법학과가 신설되었다. 또 6·25전쟁이 일어난 1959년까지<NAME> 대학·숭실대학·건국대학·한양대학에도 법학과가 설치되었고, 1960년대에는 경기대학·한국외국어 대학·명지대학 등에도 법학과가 생겨나면서, 모든 대학에 법학과가 설치되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법학과 교과과정을 보면 헌법, 민법 1∼4부, 형법 1·2부, 상법 1∼3부(4부는 선택), 민사소송법 1·2부, 형사소송법, 행정법 1부, 국제공법 1부, 로마법 또는 서양 법제사, 영미법 또는 대륙법, 법철학, 사회법 1·2부, 조선 법제사 등이 필수과목이었고, 헌정사·경제사·국가학·정치사·경제정책·재정학·정치학사·외교사·조선 경제사 등이 선택과목이었다. 이 교과과정은 그 뒤 몇 과목이 추가되었지만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법학은 외견상 양적·질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아직 미흡함을 면할 수 없다. 특히 광복 후 법학의 풍토가 사법시험을 중심으로 한 수험 법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기인하여 법학 잡지도 수 흠잡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학문으로서의 법학 발전에 뜻을 둔 법학자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광복 후 미 군정과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법률가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영미 법학을 공부했으며, 이들은 대륙법 일변도의 한국 법학에 비교법학적 지평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한국 법학의 대종은 역시 대륙 법학, 특히 독일 법학이며, 독일 유학을 다녀온 많은 법학자들이 대학 강단에서 법학 건설을<NAME>고 있다. 현대 법학의 학문 분야는 매우 넓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범주로 나누어 그 연구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광복 후 나온 최초의 헌법 서는 이창수의 대한민국헌법대의(1948)이며, 학술서로는 1949년 1월<NAME>오가 저술한 헌법대의였다. 한국공법 학회(회장<NAME>오)가 1957년 7월 설립되어 공법 연구를 발간하였다. 제2공화국 때 헌법 교과서들이 많이 나왔는데, 주로 독일 학자들의 연구논문이었다. 한국헌법 학회(회장 )는 1969년 창립되어 헌법연구를 발행하였다. 제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헌법학자들은 활발하게 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였고, 김철수·권영성·구병삭·허영 등의 헌법 이론서가 판을 거듭하며 나오고 있다. 헌법학은 정치변동과 직결되면서 그때마다 많은 연구와 교과서가 출간되고 있다. 윤세창·한태연·이종극·황동준 등이 저술한 행정법 교과서는 광복 후 새로운 정부 조직 등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행정법학은 1950년대 말까지 실정 법규를 정리하고 영미 행정법 및 독·불 행정법 이론을 도입하여 이론체계를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행정법 이론체계의 전환기가 1970년대인데, 1960년대에는 상당수의 행정법 학자들이 관계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윤세창·김도창·강문용·이상규·김남진·김이열·박윤흔·서원우·김철용 등의 연구업적이 이 시기부터 많이 나왔다. 광복 이후 민법 학계는 다수의 학자들이 민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1957년 6월 민사법 연구회(회장 )가 창립되어 <민법안의견서>를 제출하였다. 1958년 2월에는 민법 전이 제정·공포되고,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자, 거의 모든 교수와 실무자가 강의서를 펴냈다.<NAME>·방순원·김증한·안이준·안이준·이희봉·김기선·장경학·정범석·김현태·최식 등이 저술한 책이 많이 읽혔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양이 일본 민법학의 체계와 이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독일·프랑스의 민법 이론이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이론적 기초를 다지는 정돈기에 접어들었다.<NAME>종·곽윤직·김용한·김용한·이태재·김주수·이근식·한봉희 등이 저술한 연구서가 나왔다. 정광현이 쓴 한국 가족법 연구(1967)는 민법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63년 한국 가족법 학회가 창립된 것도 그의 영향이다.<NAME>·김주수·한봉희·박병호·이근식·최달곤·배경숙 등의 연구업적이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56년에 창립된 민사법 연구회는 1974년부터 한국민사법학회(회장 김증한)로 이름을 바꾸고 민사 법학을 발간하고 있다. 그 밖에 민사실무연구회(회장 방순원), 민사판례연구회(회장 곽윤직) 등이 활동하고 있다. 광복이 되어도 이전의 상법을 그대로 사용하던 상법학은 1963년에야 상법을 제정하였다. 그렇지만 상법학은 그전부터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여왔다. 한국상사법 연구회(회장<NAME>)는 1957년 9월 창립되었다. 주유순의 상법 총칙 강의(1950), 회사법 강의(1950)가 최초로 나왔고, 이어서<NAME>·차낙훈·박원선·정희철·서돈각·손주찬·서정갑 등이 저술했다. 상법 학계는 1970년대 이후 학문적·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최기원·양승규·이범찬·박길준 등의 연구 성과를 선보였다. 광복 직후의 형법학자로는 유기천·심현상·이건호·엄상섭·남흥우·김기두 등이 있다. 1953년 4월 형법전의 제정과 이듬해 형사소송법의 제정으로 형법학계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형법전 제정 이전에 심현 상의 형법총론(1949)이 교과서였고, 형법학 서들 은 대체로 1955년 이후에 출간되었다. 한국 형사법학회(회장<NAME>)는 1957년 6월에 설립되었다. 유기천·황산덕·정창운·남흥우·서일교·김용진·김종수·염정철·박정근 등의 형법학서가 1960년대에 들어서 많이 나왔다. 1960년대에는<NAME>·정종욱 등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연구 인구가 별로 늘지 않았다. 특히<NAME>은 독일 막스플랑크 외국 및 국제형 법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의 형법을 독일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1970년대에는<NAME>·이수성·강구진·이형국·이재상·김일수 등의 학자들이 연구업적을 남겼다. 최근에는 실무 법조인들이 해외 연수 후 연구업적을 내고 있으며, 형법 이론 못지않게 형사학 및 형사정책의 중요성도 인식되고 있다. 소송 법학에는 광복 이후 최대교·김용식·강서룡 등이 저술했고, 소송 법학은 서일교의 신형사 소송법 등이었다. <민사소송법>에서는 1952년<NAME>의 민사소송 법석의 가 나왔고, 이영섭의 민사소송법 강의(1953)가 나왔고, 염정철·정영석·이용훈·권오병의 형사소송법 연구서들도 나왔다. 이어서 방순원의 신민사 소송법을 비롯하여 이석선·유택형·김홍규·송상현이 저술한 연구서들이 나왔다. 광복 이후 노동법은 비교적 미국식 노동법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출발하였다. 1956년 박덕배의 사회법 서설과 노동법,<NAME>의 노동법이 나왔다. 그리고 1957년 6월에는 한국노동법학회(회장 )가 창립되었다. 김치선의 경제법·사회보장 법이 1960년, 김치선의 신노동법이 1965년에 나왔다. 김진웅의 노동법과 최식의 신노동법이 1962년에 나왔다. 김여수는 노동법(1970)과 한국 노동법(1975)을, 김형배는 노동법(1974), 김유성은 사회보장 법론(1992)·노동법 II(1996)를 출간하였다. 또한 1977년에는 한국경제법 학회(회장 )가 설립되어 경제법 연구를 발간하고 있다. 문화 법학은 아직 연구 인구가 적은 상태인데, <교육법>·<저작권법>·<영화 연극 법>·<언론 법>·<도서관 법>·<문화재보호법>·<종교법> 등에 관한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 종교 법학회(회장 이태재)는 1981년 12월 창립되어 법과 종교를 발간하고 있다. 지적소유권 법학에 대한 관심이 1990년대에 들어 크게 높아졌다. 광복, 6·25전쟁, 휴전, 한일회담, 남북협상 등 계속되는 국제법적 문제들로 인해 국제법학이 매우 활기를 띠고 있다. 대한 국제법학회는 1953년 6월 창립하여 대한 국제법학회 논총을 계속 발간하고 있다.<NAME>오·박관숙·이한기·이건호·박재섭 등이 연구업적을 냈고, 배재식·최재훈·백도광·이병조·박춘호·지정일·유병화 등의 저서도 나왔다. 켈젠(Kelsen, H. )의 순수법학, 법과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법철학은 광복 이후<NAME>오·이항녕·황산덕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국법철학회(회장 황산덕)는 1957년 9월 창립되었다. 황산덕의 법철학이 1950년에, 이항녕의 법철학개론이 1955년에 나왔다. 이어서 박덕배의 법철학개론(1964), 심헌섭의 법철학 I(1982)이 나왔다. 함병춘·양승두 등은 영미법철학을 소개하였고, 파운드(Pound, R. ) · 홈스(Holmes, O. W. ) · 홀(Hall, J. ) 등의 저서를 번역한 장경학·서돈각 등은 영미법철학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차차 독일 법철학이 우세하게 소개되었는데,<NAME>(金智洙)·정종욱·권영백(權寧百) 등이 독일에서 라드브루흐(Radbruch, G. )의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서돈각·최종고(崔鍾庫)·심재우·정종욱·박은정(朴恩正) 등이 라드브루흐·볼프(Wolf, E. )·카우프만(Kauffmann, A. )·마이 호퍼(Maihofer, W. )·벨첼(Welzel,H. ) 등을 번역, 소개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학자들은 한국의 법사상을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1983년에는 한국법철학 및 사회철학회(회장 서돈각)가 새로 설립되었다. 법사학 법 제도사와 법사상사로 나눌 수 있는데, 서양·동양 및 한국 법제사를 포함한다. 서양 법제사에는 김증한의 ≪서양 법제사≫(1953),<NAME>종의 ≪서양 법제사 개설≫(1963), 황적인(黃迪仁)의 ≪로마법·서양 법제사≫(1981), 최종고의 ≪서양 법제사≫(1986) 등이 있고, 최종고·정종휴(鄭鍾休)가 코잉(Coing,H. )의 ≪독일 법제사≫(1982)를 번역, 출간하였다. 동양 법제사에는 교과서가 없다. 한국 법제사에는 전봉덕(田鳳德)의 ≪한국 법제사 연구≫(1968), 박병호의 ≪한국법제 사고 韓國法制史攷≫(1974)·≪한국의 법≫(1974),<NAME>(金容泰)·명형식(明炯植)·나용식(羅用植)이 공동 저술한 ≪한국 법제사 개요≫(1981), 연정열(延正悅)의 ≪한국 법제사≫(1984) 등이 있다. 서양 법사상사에는<NAME>종의 ≪법사상사≫(1957),<NAME>(韓相範)·이종린(李鍾麟) 이 공동 집필한 ≪법사상사 개설≫(1962), 김여수의 ≪법률 사상가≫(1965), 최종고의 ≪법사와 법사상≫(1980)·≪한국의 서양 법 수용사≫(1982)·≪법사상사≫(1983) 등이 있으며, 동양 법사상사에는 아직 단행본 연구서가 없다. 한국 법사상사로는 전봉덕의 한국 근대법사상사(1982)가 있는데,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 사상 대계 III에 법사상사 부분을 몇 명의 학자들이 분담해서 집필한 것이다. 한국 법사학회(회장 전봉덕)는 1973년 창립되어 법사학 연구지를 발간하고 있다. 조규창·최병조의 로마법 연구서들이 나왔고, 카저(Kaser,M)의 로마법 제사(1998)가<NAME>홍에 의해 번역되었다. 한국 법학은 규범과학·개념 과학에 치중하여 사실과학으로서의 법사회학 연구는 부진한 실정이다. 하지만 이항녕·장경학·김여수·고영복·최식·최종고·이영희 등은 법사회학 서인 에를리히(Ehrlich, E. )·베버(Weber, M. )·레빈더(Rehbinder,M. ) 등을 번역하였다. 최대권의 법사회학(1983), 양건의 법사회학(1986)이 있으며, 함병춘·양승두 등의 연구논문이 있다. 아직 학회는 조직되지 않았다. 광복 이후 대륙 법학 외에 영미 법학의 영향으로 비교법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국비교법학회(회장 )는 1957년 5월 창립되었으며, 많은 법학자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대륙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인데, 김진의 불란서 법요론(1961), 곽윤직의 대륙법(1962)이 그것이다. 한 독법률 학회(회장 김증한)는 1976년 6월 결성되어 한독법학을 발간하고 있으며, 독일 학자들을 초청하여 학술행사를 개최하고 있다.<NAME>종의 비교법 입문(1972)은 비교법학의 개설서이다. 한국 법학은 아직까지 외국 법학의 이론을 수입하는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근래 들어 일본어·중국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로 한국 법과 법학을 저술하여 소개하는 논조들도 나오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법학 (法學) ### 내용: 실정법의 체계적인 해석을 목적으로 하는 법해 석학, 법의 근본 문제를 탐구하는 법철학, 법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법사학, 법과 사회의 상호 관련성을 탐구하는 법사회학, 여러 법질서들을 상호 비교 연구하는 비교법학, 사회정책·형사정책 등에 따른 법의 정립을 탐구하는 법정책학 등을 포함하는 학문 영역이다. 법해 석학에는 해석의 대상이 되는 실정법의 분야에 따라 헌법학·민법학·상법학·행정법학·형법학·국제법학·사회법학·소송법학·국제사법학 등이 있다. 법학은 실정법의 체계적인 해석을 중심 과제로 삼기 때문에 실정법과 무관하게 발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의 법은 20세기에 전통적인 법체계를 버리고 서구의 근대법체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역사적 연속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로써 법학도 전통적 율학과 근대적 법학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국학에 율령박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시대에 국자감에서 가르치던 육학 중 하나가 율학이었다. 여기에는 율학박사와 율학 조교가 가르쳤으며, 18세부터 25세까지의 학생이 입학했다. 987년(성종 6)에는 명법업 2인, 993년에는 명법과 3인에게 급제를 주어 7품직을 수여하였다. 시험은 율·영 각 10조를 암기하고, 문장을 암기하게 하는 비교적 쉬운 수준이었다. 이런 점에서 고려의 율학은 율령을 암기하고 해석하는 단순한 학문이었다.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따르면, 조선의 율학은 잡학의 하나로 형조에 40인, 6부에 각 16인, 5대 도호부에 각 14인, 20목에 각 14인, 154현에 각 8인 등 모두 3,346인이 뽑혔다. 한편, 율과의 정원은 초시 18인, 복시 9인으로,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은 체제에서 행정관의 보조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율학박사는 종 8품, 율학 조교는 종 9품이었다. 율학은 이와 같이 경학에 비해 뒤떨어졌고, 법률가가 독립된 사회계층을 이루지 못하였다. 율학 서는 중국 서적으로 당률소의 ·율학해이 ·율해 변의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대명률 을 참고하였고,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해설한 대명률직해를 편찬하였다. 또한 행정관과 율사들이 실제로 송사를 담당할 때 증거 채택과 법의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였으므로, 최초의 한글 법학 서인 무원록 언해를 펴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 심리록 ·추관지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법학연구서라기보다는 법전 내지 사건 기록집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까지는 법전과 재판이 있었지만, 법학은 크게 형성되지 못했다. 정약용은 18세기 흠흠신서에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법학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형조 좌랑 강항과 유학자<NAME> 및 그의 아들 이매계가 일본 학자들에게 대명률직해와 경국대전 등을 가르치면서 일본 법학사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한역 서학서는 18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는데, 이 서적을 통해서 서구의 근대적 법학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실학자들의 문집에 수록된 한역 서학서 가운데 알레니(Aleni,J.)의 서학범 과 직방외기에 서양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함으로써 처음으로 법학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서양 법학을 소개하는 데 특히 주목한 학자는 없었고, 서양 종교와 학문 일반을 비판하는 학자들이 호기심으로 읽는 정도에 그쳤다. 이런 이유로 이 시대에 서양 법학을 수용한 것은 초기 수용 내지 반수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1881년(고종 18)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 중 일본 사법성을 시찰하고, 서양 법으로 개화된 일본의 법제를 보고 돌아온 엄세영 일행은 일본 사법성 시찰기와 일본 견문사 건초를 저술하였다. 또한 개항과 더불어 유길준·서재필 등이 미국에서 서구의 문명 제도를 배워 돌아와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서양의 국가·법·권리·자유 등을 소개했고,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법의식을 고취시켰다. 1895년 일본으로 파견된 관비유학생 가운데 이면우(李冕宇)·유문환(劉文煥)·장도(張燾)·홍재기(洪在祺)·석진형(石鎭衡)·박만서(朴晩緖)·신우선(申佑善)·장헌식(張憲植)·유치형(兪致衡)·양대경(梁大卿) 등이 귀국하여 법관양성소와<NAME> 법률전문학교의 교관이 되어 법학을 연구할 수 있는 최초의<NAME>을 이루었다. 또 함태영·이준 등 법관양성소 졸업생과 주정균·이용무·김상연 등<NAME>전문학교 출신들도 법학 교과서와 논문들을 발표하여 국내파 법학자의<NAME>을 구축하였다. 한편, 서양 국제법서가 중국에서 번역되어 전해진 것이 법학의 근대화를 촉발시켰다. 휘턴(Wheaton, H. )의 ≪만국공법 萬國公法,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1864), 울시(Woolsey, T. )의 ≪공법 편람 公法便覽,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Law ≫(1877), 블룬칠리(Bluntschli,J. K. )의 ≪공법회통 公法會通, Das moderne Vo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aten als Rechtsbuch dargestellt ≫(1880) 등이다. 특히 1896년 학부에서 청국판에 편집국장 이경식의 서문을 덧붙여 출판한 공법회 통은 고종과 대신들에게 배포되었으며 1899년 대한제국 국제를 제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 나라의 헌법에 이처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서양의 국제법서 덕분이다. 그것은 국제법에 의거한 독립주권국가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우리의 의지의 표현이며, 한국 법학의 큰 성과라 하겠다. 또한 1882년 묄렌도르프(Mollendorff, P. G. )를 필두로 하여 서양 법률가 출신의 고문관들이 우리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에는 명나라에서 생겨난 야만적 고법을 개화한 새 법으로 고치고, 한문으로 된 새 법은 한글로 엮어야 한다. 고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개혁 Die Reorganisation Koreas에서 말했다. 후임인 미국 판사 출신 데니(Denny, O. N. )는 ≪청한론 淸韓論, China and Korea ≫을 저술하여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독립국임을 주장하였고, 르 장드르(Le Gendre, C. W. )·샌즈(Sands, W. )·그레이트 하우스(Greathouse, C. )·크레 마지(Cremazy, L. )·스티븐스(Stevens, D. W. ) 등이 뒤따랐다. 특히 크레 마지는 한국 학생들에게 프랑스 법학을 개인교수로 가르치면서 5명의 법관양성소 교관을 배출하였고, 형법대전의 입법 작업에도 참여하면서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Le Code Penal de la Coree를 출판하여 세계에 알렸다. 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법률고문이었던 부아소나드(Boissonade,G. E. )가 논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법과 법학은 세계 법학과 서서히 연결되었다. 아직 헌법·형법·민법·상법·소송법 등 실정법률이 제정되지 않은 때였지만, 서양과 일본을 통해 소개된 법학에 대한 요청과 관심이 급증하면서 각종 법학 서적이 출판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근대적 법보다 법학을 먼저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을사조약 이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문화와 교육을 통해 부흥시키려는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법학을 세우는 것이 민족의 자강과 애국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법학 서들 과 논문들을 많이 발표했다. 법학 교과서로 나온 것은 ≪법학통론≫(유성준), ≪법학통론≫(주 정균), ≪헌법≫(유치형), ≪헌법≫(조성구), ≪헌법≫·≪국가학≫(김상연), ≪행정법대의≫(장헌식), ≪지방행정론≫(조성구), ≪민법 총론≫(신우 선), ≪물권법 1·2부≫(유치형), ≪물권법 2부≫(박만서), ≪물권법≫(유동작), ≪채권법 1부≫(석진형), ≪채권법 2부≫(조성구), ≪민사소송법≫(홍재기), ≪상속법≫(박만서), ≪상법 총론≫(주 정균), ≪상법요의≫(김상연), ≪회사법≫(이면우), ≪회사법≫(김상연), ≪상행위 법≫(안국선), ≪해상법≫(유치형), ≪어음법론≫(신우 선), ≪형법총론≫(장도), ≪형법각론≫(이면우), ≪국제공법≫(이용무), ≪만국공법≫(주 정균), ≪평시국제공법≫(석진형), ≪국제사법≫(유문환) 등이었다. 이들 법학 교과서들은 발행처, 발행 연월일이 명기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1907, 1908년을 전후하여<NAME>관에서 나왔다. 이들은 거의 법학 강의에 필요한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의 일본 법학 교과서를 참고하여 번역에 가까운 저술을 한 것이었다. 법학은 처음부터 독창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번역 법학이 되는 것은 동서양 공통의 일이다. 일본의 천황주의 헌법학을 우리 현실에 접목시킨 유치형의 헌법은 스스로 고종 치하의 우리 현실에 적용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일본식 천황주의 헌법학을 우리 현실에 접목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교과서들은 번역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의 법 현실을 지적하고 비교법학적 안목으로 하루속히 한국법의 근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애국적 계몽 법학, 민주법학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법학 논문들은 개화기 각종 학회지에도 거의 다 실려 있었다. 이들 최초의 법학자들은 1908년 법학 협회를 조직하여 회원은 111명이었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법학의 대중화를 위해 법률 계몽 강연회를 주최하고, 법률 무료상담을 하는 한편, 법학 협회 잡지를 매월 발간하여 19호까지 냈다. 하지만 1910년 국권 상실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915년 재조직되어 회지를 법학계로 바꾸어 6호까지 발행했으나 또 중단되고 말았다. 일본은 법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우리 국민들이 법을 잘 알지 못하도록 우민정치를 계획하였다. 그래서 한말에 싹튼 한국 법학을 일본 법학으로 거의 대체했다. 법관양성소는 법학교로 바뀌었다가 경성법학 전수학교로 바뀌었는데, 이곳에서는 김병로·양대 경 등 한국인 교수가 가르쳤다.<NAME>전문학교는 그 이전까지 명맥을 유지하였고, 법정 학계 ·보전 학회 논총 등을 발간하였다. 여기에는<NAME>의 <토라(Torah)에 관한 연구>가 세 회나 연재되었고,<NAME>오의 <중세에 있어서 정의 사상>이 실렸다. 한국 법학은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고 법문학 부가 설립됨에 따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일본에서의 서양 법학을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가르쳤고, 그것이 한국 법학의 주류가 되었다. 그렇지만 교수들은 모두 일본 법학자들이었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논문집에도 그들의 연구 업적만 실렸으며, 한국 법사에 관한 논문들도 있었다.<NAME>오·최용달·서재원·주유순 등의 조수가 한국인으로는 없었다. 한마디로 민족 항일기의 한국 법학은 동결기였다. 광복 직후 한국 법학계는 연구 인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출발했다.<NAME>오를 중심으로 한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는<NAME>오를 중심으로 한 경성대학 법학부가 되었고, 고병국을 교장으로 한 경성법학전문학교는 재출발하였다. 1946년에는 이를 합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되었다.<NAME>전문학교는 1946년 9월 고려대학교로 승격하였고, 1947년부터 1950년 사이에 국민대학·성균관대학·단국대·국제대학·신흥대학(경희대학교의 전신)·연세대학·이화여자대학 등에 법학과가 신설되었다. 또 6·25전쟁이 일어난 1959년까지<NAME> 대학·숭실대학·건국대학·한양대학에도 법학과가 설치되었고, 1960년대에는 경기대학·한국외국어 대학·명지대학 등에도 법학과가 생겨나면서, 모든 대학에 법학과가 설치되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법학과 교과과정을 보면 헌법, 민법 1∼4부, 형법 1·2부, 상법 1∼3부(4부는 선택), 민사소송법 1·2부, 형사소송법, 행정법 1부, 국제공법 1부, 로마법 또는 서양 법제사, 영미법 또는 대륙법, 법철학, 사회법 1·2부, 조선 법제사 등이 필수과목이었고, 헌정사·경제사·국가학·정치사·경제정책·재정학·정치학사·외교사·조선 경제사 등이 선택과목이었다. 이 교과과정은 그 뒤 몇 과목이 추가되었지만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법학은 외견상 양적·질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아직 미흡함을 면할 수 없다. 특히 광복 후 법학의 풍토가 사법시험을 중심으로 한 수험 법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기인하여 법학 잡지도 수 흠잡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학문으로서의 법학 발전에 뜻을 둔 법학자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광복 후 미 군정과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법률가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영미 법학을 공부했으며, 이들은 대륙법 일변도의 한국 법학에 비교법학적 지평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한국 법학의 대종은 역시 대륙 법학, 특히 독일 법학이며, 독일 유학을 다녀온 많은 법학자들이 대학 강단에서 법학 건설을<NAME>고 있다. 현대 법학의 학문 분야는 매우 넓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범주로 나누어 그 연구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광복 후 나온 최초의 헌법 서는 이창수의 대한민국헌법대의(1948)이며, 학술서로는 1949년 1월<NAME>오가 저술한 헌법대의였다. 한국공법 학회(회장<NAME>오)가 1957년 7월 설립되어 공법 연구를 발간하였다. 제2공화국 때 헌법 교과서들이 많이 나왔는데, 주로 독일 학자들의 연구논문이었다. 한국헌법 학회(회장 )는 1969년 창립되어 헌법연구를 발행하였다. 제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헌법학자들은 활발하게 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였고, 김철수·권영성·구병삭·허영 등의 헌법 이론서가 판을 거듭하며 나오고 있다. 헌법학은 정치변동과 직결되면서 그때마다 많은 연구와 교과서가 출간되고 있다. 윤세창·한태연·이종극·황동준 등이 저술한 행정법 교과서는 광복 후 새로운 정부 조직 등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행정법학은 1950년대 말까지 실정 법규를 정리하고 영미 행정법 및 독·불 행정법 이론을 도입하여 이론체계를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행정법 이론체계의 전환기가 1970년대인데, 1960년대에는 상당수의 행정법 학자들이 관계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윤세창·김도창·강문용·이상규·김남진·김이열·박윤흔·서원우·김철용 등의 연구업적이 이 시기부터 많이 나왔다. 광복 이후 민법 학계는 다수의 학자들이 민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1957년 6월 민사법 연구회(회장 )가 창립되어 <민법안의견서>를 제출하였다. 1958년 2월에는 민법 전이 제정·공포되고,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자, 거의 모든 교수와 실무자가 강의서를 펴냈다.<NAME>·방순원·김증한·안이준·안이준·이희봉·김기선·장경학·정범석·김현태·최식 등이 저술한 책이 많이 읽혔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양이 일본 민법학의 체계와 이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독일·프랑스의 민법 이론이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이론적 기초를 다지는 정돈기에 접어들었다.<NAME>종·곽윤직·김용한·김용한·이태재·김주수·이근식·한봉희 등이 저술한 연구서가 나왔다. 정광현이 쓴 한국 가족법 연구(1967)는 민법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63년 한국 가족법 학회가 창립된 것도 그의 영향이다.<NAME>·김주수·한봉희·박병호·이근식·최달곤·배경숙 등의 연구업적이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56년에 창립된 민사법 연구회는 1974년부터 한국민사법학회(회장 김증한)로 이름을 바꾸고 민사 법학을 발간하고 있다. 그 밖에 민사실무연구회(회장 방순원), 민사판례연구회(회장 곽윤직) 등이 활동하고 있다. 광복이 되어도 이전의 상법을 그대로 사용하던 상법학은 1963년에야 상법을 제정하였다. 그렇지만 상법학은 그전부터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여왔다. 한국상사법 연구회(회장<NAME>)는 1957년 9월 창립되었다. 주유순의 상법 총칙 강의(1950), 회사법 강의(1950)가 최초로 나왔고, 이어서<NAME>·차낙훈·박원선·정희철·서돈각·손주찬·서정갑 등이 저술했다. 상법 학계는 1970년대 이후 학문적·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최기원·양승규·이범찬·박길준 등의 연구 성과를 선보였다. 광복 직후의 형법학자로는 유기천·심현상·이건호·엄상섭·남흥우·김기두 등이 있다. 1953년 4월 형법전의 제정과 이듬해 형사소송법의 제정으로 형법학계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형법전 제정 이전에 심현 상의 형법총론(1949)이 교과서였고, 형법학 서들 은 대체로 1955년 이후에 출간되었다. 한국 형사법학회(회장<NAME>)는 1957년 6월에 설립되었다. 유기천·황산덕·정창운·남흥우·서일교·김용진·김종수·염정철·박정근 등의 형법학서가 1960년대에 들어서 많이 나왔다. 1960년대에는<NAME>·정종욱 등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연구 인구가 별로 늘지 않았다. 특히<NAME>은 독일 막스플랑크 외국 및 국제형 법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의 형법을 독일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1970년대에는<NAME>·이수성·강구진·이형국·이재상·김일수 등의 학자들이 연구업적을 남겼다. 최근에는 실무 법조인들이 해외 연수 후 연구업적을 내고 있으며, 형법 이론 못지않게 형사학 및 형사정책의 중요성도 인식되고 있다. 소송 법학에는 광복 이후 최대교·김용식·강서룡 등이 저술했고, 소송 법학은 서일교의 신형사 소송법 등이었다. <민사소송법>에서는 1952년<NAME>의 민사소송 법석의 가 나왔고, 이영섭의 민사소송법 강의(1953)가 나왔고, 염정철·정영석·이용훈·권오병의 형사소송법 연구서들도 나왔다. 이어서 방순원의 신민사 소송법을 비롯하여 이석선·유택형·김홍규·송상현이 저술한 연구서들이 나왔다. 광복 이후 노동법은 비교적 미국식 노동법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출발하였다. 1956년 박덕배의 사회법 서설과 노동법,<NAME>의 노동법이 나왔다. 그리고 1957년 6월에는 한국노동법학회(회장 )가 창립되었다. 김치선의 경제법·사회보장 법이 1960년, 김치선의 신노동법이 1965년에 나왔다. 김진웅의 노동법과 최식의 신노동법이 1962년에 나왔다. 김여수는 노동법(1970)과 한국 노동법(1975)을, 김형배는 노동법(1974), 김유성은 사회보장 법론(1992)·노동법 II(1996)를 출간하였다. 또한 1977년에는 한국경제법 학회(회장 )가 설립되어 경제법 연구를 발간하고 있다. 문화 법학은 아직 연구 인구가 적은 상태인데, <교육법>·<저작권법>·<영화 연극 법>·<언론 법>·<도서관 법>·<문화재보호법>·<종교법> 등에 관한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 종교 법학회(회장 이태재)는 1981년 12월 창립되어 법과 종교를 발간하고 있다. 지적소유권 법학에 대한 관심이 1990년대에 들어 크게 높아졌다. 광복, 6·25전쟁, 휴전, 한일회담, 남북협상 등 계속되는 국제법적 문제들로 인해 국제법학이 매우 활기를 띠고 있다. 대한 국제법학회는 1953년 6월 창립하여 대한 국제법학회 논총을 계속 발간하고 있다.<NAME>오·박관숙·이한기·이건호·박재섭 등이 연구업적을 냈고, 배재식·최재훈·백도광·이병조·박춘호·지정일·유병화 등의 저서도 나왔다. 켈젠(Kelsen, H. )의 순수법학, 법과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법철학은 광복 이후<NAME>오·이항녕·황산덕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국법철학회(회장 황산덕)는 1957년 9월 창립되었다. 황산덕의 법철학이 1950년에, 이항녕의 법철학개론이 1955년에 나왔다. 이어서 박덕배의 법철학개론(1964), 심헌섭의 법철학 I(1982)이 나왔다. 함병춘·양승두 등은 영미법철학을 소개하였고, 파운드(Pound, R. ) · 홈스(Holmes, O. W. ) · 홀(Hall, J. ) 등의 저서를 번역한 장경학·서돈각 등은 영미법철학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차차 독일 법철학이 우세하게 소개되었는데,<NAME>(金智洙)·정종욱·권영백(權寧百) 등이 독일에서 라드브루흐(Radbruch, G. )의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서돈각·최종고(崔鍾庫)·심재우·정종욱·박은정(朴恩正) 등이 라드브루흐·볼프(Wolf, E. )·카우프만(Kauffmann, A. )·마이 호퍼(Maihofer, W. )·벨첼(Welzel,H. ) 등을 번역, 소개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학자들은 한국의 법사상을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1983년에는 한국법철학 및 사회철학회(회장 서돈각)가 새로 설립되었다. 법사학 법 제도사와 법사상사로 나눌 수 있는데, 서양·동양 및 한국 법제사를 포함한다. 서양 법제사에는 김증한의 ≪서양 법제사≫(1953),<NAME>종의 ≪서양 법제사 개설≫(1963), 황적인(黃迪仁)의 ≪로마법·서양 법제사≫(1981), 최종고의 ≪서양 법제사≫(1986) 등이 있고, 최종고·정종휴(鄭鍾休)가 코잉(Coing,H. )의 ≪독일 법제사≫(1982)를 번역, 출간하였다. 동양 법제사에는 교과서가 없다. 한국 법제사에는 전봉덕(田鳳德)의 ≪한국 법제사 연구≫(1968), 박병호의 ≪한국법제 사고 韓國法制史攷≫(1974)·≪한국의 법≫(1974),<NAME>(金容泰)·명형식(明炯植)·나용식(羅用植)이 공동 저술한 ≪한국 법제사 개요≫(1981), 연정열(延正悅)의 ≪한국 법제사≫(1984) 등이 있다. 서양 법사상사에는<NAME>종의 ≪법사상사≫(1957),<NAME>(韓相範)·이종린(李鍾麟) 이 공동 집필한 ≪법사상사 개설≫(1962), 김여수의 ≪법률 사상가≫(1965), 최종고의 ≪법사와 법사상≫(1980)·≪한국의 서양 법 수용사≫(1982)·≪법사상사≫(1983) 등이 있으며, 동양 법사상사에는 아직 단행본 연구서가 없다. 한국 법사상사로는 전봉덕의 한국 근대법사상사(1982)가 있는데,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 사상 대계 III에 법사상사 부분을 몇 명의 학자들이 분담해서 집필한 것이다. 한국 법사학회(회장 전봉덕)는 1973년 창립되어 법사학 연구지를 발간하고 있다. 조규창·최병조의 로마법 연구서들이 나왔고, 카저(Kaser,M)의 로마법 제사(1998)가<NAME>홍에 의해 번역되었다. 한국 법학은 규범과학·개념 과학에 치중하여 사실과학으로서의 법사회학 연구는 부진한 실정이다. 하지만 이항녕·장경학·김여수·고영복·최식·최종고·이영희 등은 법사회학 서인 에를리히(Ehrlich, E. )·베버(Weber, M. )·레빈더(Rehbinder,M. ) 등을 번역하였다. 최대권의 법사회학(1983), 양건의 법사회학(1986)이 있으며, 함병춘·양승두 등의 연구논문이 있다. 아직 학회는 조직되지 않았다. 광복 이후 대륙 법학 외에 영미 법학의 영향으로 비교법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국비교법학회(회장 )는 1957년 5월 창립되었으며, 많은 법학자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대륙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인데, 김진의 불란서 법요론(1961), 곽윤직의 대륙법(1962)이 그것이다. 한 독법률 학회(회장 김증한)는 1976년 6월 결성되어 한독법학을 발간하고 있으며, 독일 학자들을 초청하여 학술행사를 개최하고 있다.<NAME>종의 비교법 입문(1972)은 비교법학의 개설서이다. 한국 법학은 아직까지 외국 법학의 이론을 수입하는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근래 들어 일본어·중국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로 한국 법과 법학을 저술하여 소개하는 논조들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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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언 (朴奭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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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권건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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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 BY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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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언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1914년생이며, 본가에 동무 이제마의 직계 제자인 한두정을 모셔 10여 년간 수학했다. 함흥에서는 양의와 한의를 겸한 의원이었고 해방 후 서울로 내려왔다고 박영성의 아들이 증언했다. 이후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한의원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박석언은 동무공 사후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명맥이 끊길 뻔했던 사상의학을 유지하면서 대한 사상의학회 창립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사상체질의 학계에도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를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NAME>재 회장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사상의학회가 홍순용을 비롯한 신진 세력과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전환기였던 1965년 무렵부터 박석언은 의림지에 많은 기고를 하면서 사상체질의학의 학술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이제마 선생 탄생 133주년 기념식이 1970년 5월 27일에 거행되고 대한 사상의학회가 창립된다. 홍순용, 윤완중, 박석언, 이건창, 장세홍, 송병기, 송일병 등 준비 위원 7명이 중심이 된 이 창립총회는 박석언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박석언은 체질 감별 법인 사상 두부 촉진법을 1982년에 발표하였는데, 그는 1977년에 동의 사상 대전을 출판하였다. 격치고를 최초로 번역한 것은 1984년이다. 1988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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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회 (多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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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희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500
CC BY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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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목이라고도 한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다회는 두 가닥 이상으로 꼬아 쓰던 것으로, 나무껍질이나 짐승 가죽을 찢어 만든 끈을 더 질기고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공전에는 끈을 치는 장인인 다 회장을 본조에 2인, 상의원에 4인, 전설사에 6인을 둔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생사(生絲)에서 시작하여 다회를 칠 수 있기까지의 합사(合絲)·연사(練絲)·염색 등 까다로운 공정을 세분하여 상의원에 합사장 10인, 연사장 75인을 따로 두었고, 염색도 홍염장·청염장 등 기능을 구분하였던 것을 보면, 그 공정의 복잡성과 다 회의 수요가 적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회에는 그 표면이 납작하게 짜이는 평직의 광다회(廣多繪)와 끈목의 둘레가 둥근 동다회圓多繪가 있다. 그리고 다회를 치는 데 소용되는 조직 요소인 가닥수에 따라 4 사(四絲)·8 사·12 사·16 사·24 사·36사로 세분된 명칭이 있다. 이미 고대에 다채로운 광다회가 허리띠로 복식에 사용된 예는 고분벽화나 고화에서 볼 수 있다. 유물자료로는 창덕궁 유물보관실에 있는 분합 끈·대자띠 등을 들 수 있다. 연·여·기·방장·영정·체경·상여 등에 장식된 유소와 여러 종류의 노리개·주머니 끈 등을 맺는 데 사용된 것은 동다회이다. 심을 넣지 않고 짜는 다회틀과 심을 넣고 짜는 다회틀이 있다. 심을 넣지 않고 짜는 다회틀은 사방 25㎝, 두께 4㎝ 정도의 두툼한 목판 중앙에 높이 28㎝, 밑변의 지름 28㎝의 원추형 기둥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사방 10㎝ 정도의 사각(四角) 접시를 얹어 만든다. 접시의 중앙에는 지름 1㎝의 구멍이 뚫려 다 회의 굵기에 따라 가늘고 굵은 바늘을 바꾸어 끼울 수 있도록 두 개의 나무판이 맞물려 끼워져 있다. 원추형 기둥의 둘레에는 솜을 두어 누빈 옷이 입혀져 토 짝을 돌려가며 끈을 짤 때 서로 부딪치며 일어나는 반동을 막게 되어 있다. 토짝은 박달이나 대추나무를 장구 모양으로 깎아 그 속에 납을 넣어 무게를 조절한다. 굵은 끈은 35g, 긴 끈은 25g의 토 짝을 사용한다. 틀의 바른쪽 뒤쪽으로는 짜인 다회가 걸려 넘어갈 수 있는갈 걸이가 있다. 심을 넣고 짜는 다회틀은 심을 박고 짤 수 있도록 응용한 틀이다. 밑바닥에 속실을 감은 실패가 둥글게 여러 개 꽂혀 있는 점이 심을 넣지 않고 짜는 다회틀과 다르다. 여러 겹의 속실이 위로 올라가 합쳐지면 다회틀의 접시 중앙에 끼워 바늘대 구실을 하도록 틀의 뒷면에 감아놓은 실과 잡아맨다. 시 위로 올라온 속실에 준비된 토 짝을 걸어놓고 다회를 짜는데, 다 짜인 끈이 뒤편에 감기도록 손잡이를 뒤로 제치면서 짠다. 이때 토짝의 바른 올과 왼올이 제자리에 맞도록 유의한다. 준비된 재료를 각각의 톳에 따로 감되 오른 올과 위로 꼰 올을 절반씩(8 사는 4가닥, 12 사는 6가닥) 구분하여 묶는다. 한 개의 톳에 한 가닥씩 감아놓은 이 한 단위를 가리라고 부른다. 8사의 경우 편한 자세로 다회틀과 마주 앉아 바늘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오른 올을 각각 두 가리 씩 걸고 접시의 둘레에 간격을 맞추어 늘어뜨린다. 우선, 왼손은 8사틀의 우편에, 오른손은 좌편에 댄 후, 방향은 좌전 좌 후 좌, 왼손은 좌전 좌 좌로 양손을 동시에 움직이며 방향을 잡는다. 이때 오른손의 집게손가락과 왼손의 엄지손가락, 왼손의 집게손가락과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동시에 상대적으로 움직이며 가리를 조정한다. 1 왼손 : 우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톳 2번이 놓이도록 손의 위치를 잡는다. 집게손가락으로 2번을 밀어 올리며, 그 밑으로 3번을 집어 2번과 1번 사이에 놓는다. 왼손에서 넘어온 4번을 집어 3번과 2번 사이에 놓고, 1번을 엄지손가락으로 밀어 올린다. 집게손가락으로 2번을 밀어 올리며 그 밑으로 3번을 집어 4번과 3번 사이에 놓는다. 엄지손가락으로 3번을 밀어 올리며 그 아래로 4번을 집어서 3번과 4사이에 놓는다. 2 왼손 : 왼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4번이 놓이도록 손의 위치를 잡는다. 엄지손가락으로 4를 밀어 올리고 그 아래로 1번을 집어 4번과 3번 사이에 놓는다. 엄지손가락으로 4번을 들어 올린 다음 그 밑으로 1번을 집어 1번과 2번 사이에 놓는다. 집게손가락으로 1번을 밀어 올리며 그 밑으로 2번을 집어 1번과 2번 사이에 놓는다. 이상은 8사의 반회전, 이상은 같은 순서를 반복하면 8개의 가리가 완전히 일 회전하게 된다. 끈을 묶을 때 실의 꼬임이<NAME>같도록 제때에 알맞게 꼬아주어야, 끈의 눈이 살아 생동감 있고 탄력 있게 다회된다. 짜인 눈매로도 8사를 치는 연습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톳끼리 부딪치며 내는 독특한 음향으로 이루어지는 박자만으로도 숙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12사를 짜는 법은 8 사 와 같으나 바른 올로 6 가닥, 왼 올로 6 가닥씩 각각 톳에 감아 접시의 앞뒤로 네 가닥, 양옆으로 두 가닥씩 각각 톳에 감아 접시의 모서리를 넘겨 옮긴다. 손놀림이 바로 옆의 바른 올을 집어 한 오랜만 건너 옮겨놓는 8 사 와 다르다. 광다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12 사는 앞뒤가 납작하고 양모 서리에 각이 진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다회 (多繪) ### 내용: 끈목이라고도 한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다회는 두 가닥 이상으로 꼬아 쓰던 것으로, 나무껍질이나 짐승 가죽을 찢어 만든 끈을 더 질기고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공전에는 끈을 치는 장인인 다 회장을 본조에 2인, 상의원에 4인, 전설사에 6인을 둔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생사(生絲)에서 시작하여 다회를 칠 수 있기까지의 합사(合絲)·연사(練絲)·염색 등 까다로운 공정을 세분하여 상의원에 합사장 10인, 연사장 75인을 따로 두었고, 염색도 홍염장·청염장 등 기능을 구분하였던 것을 보면, 그 공정의 복잡성과 다 회의 수요가 적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회에는 그 표면이 납작하게 짜이는 평직의 광다회(廣多繪)와 끈목의 둘레가 둥근 동다회圓多繪가 있다. 그리고 다회를 치는 데 소용되는 조직 요소인 가닥수에 따라 4 사(四絲)·8 사·12 사·16 사·24 사·36사로 세분된 명칭이 있다. 이미 고대에 다채로운 광다회가 허리띠로 복식에 사용된 예는 고분벽화나 고화에서 볼 수 있다. 유물자료로는 창덕궁 유물보관실에 있는 분합 끈·대자띠 등을 들 수 있다. 연·여·기·방장·영정·체경·상여 등에 장식된 유소와 여러 종류의 노리개·주머니 끈 등을 맺는 데 사용된 것은 동다회이다. 심을 넣지 않고 짜는 다회틀과 심을 넣고 짜는 다회틀이 있다. 심을 넣지 않고 짜는 다회틀은 사방 25㎝, 두께 4㎝ 정도의 두툼한 목판 중앙에 높이 28㎝, 밑변의 지름 28㎝의 원추형 기둥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사방 10㎝ 정도의 사각(四角) 접시를 얹어 만든다. 접시의 중앙에는 지름 1㎝의 구멍이 뚫려 다 회의 굵기에 따라 가늘고 굵은 바늘을 바꾸어 끼울 수 있도록 두 개의 나무판이 맞물려 끼워져 있다. 원추형 기둥의 둘레에는 솜을 두어 누빈 옷이 입혀져 토 짝을 돌려가며 끈을 짤 때 서로 부딪치며 일어나는 반동을 막게 되어 있다. 토짝은 박달이나 대추나무를 장구 모양으로 깎아 그 속에 납을 넣어 무게를 조절한다. 굵은 끈은 35g, 긴 끈은 25g의 토 짝을 사용한다. 틀의 바른쪽 뒤쪽으로는 짜인 다회가 걸려 넘어갈 수 있는갈 걸이가 있다. 심을 넣고 짜는 다회틀은 심을 박고 짤 수 있도록 응용한 틀이다. 밑바닥에 속실을 감은 실패가 둥글게 여러 개 꽂혀 있는 점이 심을 넣지 않고 짜는 다회틀과 다르다. 여러 겹의 속실이 위로 올라가 합쳐지면 다회틀의 접시 중앙에 끼워 바늘대 구실을 하도록 틀의 뒷면에 감아놓은 실과 잡아맨다. 시 위로 올라온 속실에 준비된 토 짝을 걸어놓고 다회를 짜는데, 다 짜인 끈이 뒤편에 감기도록 손잡이를 뒤로 제치면서 짠다. 이때 토짝의 바른 올과 왼올이 제자리에 맞도록 유의한다. 준비된 재료를 각각의 톳에 따로 감되 오른 올과 위로 꼰 올을 절반씩(8 사는 4가닥, 12 사는 6가닥) 구분하여 묶는다. 한 개의 톳에 한 가닥씩 감아놓은 이 한 단위를 가리라고 부른다. 8사의 경우 편한 자세로 다회틀과 마주 앉아 바늘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오른 올을 각각 두 가리 씩 걸고 접시의 둘레에 간격을 맞추어 늘어뜨린다. 우선, 왼손은 8사틀의 우편에, 오른손은 좌편에 댄 후, 방향은 좌전 좌 후 좌, 왼손은 좌전 좌 좌로 양손을 동시에 움직이며 방향을 잡는다. 이때 오른손의 집게손가락과 왼손의 엄지손가락, 왼손의 집게손가락과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동시에 상대적으로 움직이며 가리를 조정한다. 1 왼손 : 우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톳 2번이 놓이도록 손의 위치를 잡는다. 집게손가락으로 2번을 밀어 올리며, 그 밑으로 3번을 집어 2번과 1번 사이에 놓는다. 왼손에서 넘어온 4번을 집어 3번과 2번 사이에 놓고, 1번을 엄지손가락으로 밀어 올린다. 집게손가락으로 2번을 밀어 올리며 그 밑으로 3번을 집어 4번과 3번 사이에 놓는다. 엄지손가락으로 3번을 밀어 올리며 그 아래로 4번을 집어서 3번과 4사이에 놓는다. 2 왼손 : 왼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4번이 놓이도록 손의 위치를 잡는다. 엄지손가락으로 4를 밀어 올리고 그 아래로 1번을 집어 4번과 3번 사이에 놓는다. 엄지손가락으로 4번을 들어 올린 다음 그 밑으로 1번을 집어 1번과 2번 사이에 놓는다. 집게손가락으로 1번을 밀어 올리며 그 밑으로 2번을 집어 1번과 2번 사이에 놓는다. 이상은 8사의 반회전, 이상은 같은 순서를 반복하면 8개의 가리가 완전히 일 회전하게 된다. 끈을 묶을 때 실의 꼬임이<NAME>같도록 제때에 알맞게 꼬아주어야, 끈의 눈이 살아 생동감 있고 탄력 있게 다회된다. 짜인 눈매로도 8사를 치는 연습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톳끼리 부딪치며 내는 독특한 음향으로 이루어지는 박자만으로도 숙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12사를 짜는 법은 8 사 와 같으나 바른 올로 6 가닥, 왼 올로 6 가닥씩 각각 톳에 감아 접시의 앞뒤로 네 가닥, 양옆으로 두 가닥씩 각각 톳에 감아 접시의 모서리를 넘겨 옮긴다. 손놀림이 바로 옆의 바른 올을 집어 한 오랜만 건너 옮겨놓는 8 사 와 다르다. 광다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12 사는 앞뒤가 납작하고 양모 서리에 각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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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9640.txt
비정부기구 (非政府機構)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병식"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232
CC BY
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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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오라는 명칭은 국제연합에서 처음 사용하였으며, 다른 말로 엔지오(NGO, Non Governmental Organization) 또는 NPO(Non Profit Organization)라고도 한다. 국제연합은 정부의 연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다양한 부속 기구와 민간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자 정부가 아닌 민간단체들과 파트너십을 필요로 했는데, 이때 엔지오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국과 일본에서는 비영리단체라는 의미로 엔피오(NPO)를 많이 사용한다. 비정부기구 또는 비영리단체는 기업과 시민단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며, 좁은 의미로는 비정부기구와 비영리 민간단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국제연합이 외교적 지위를 갖는 반면, 엔지오는 외교적 지위를 갖지 않는 단체를 부르는 권위주의적이고 차별화된 개념이며 그들의 주장이 참고용일뿐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또한 비정부기구는 시민단체와 기업 및 이해집단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시민사회운동의 특수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비정부기구의 등장 배경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탈냉전과 전 지구적 이슈의 대두이다. 냉전은 가치의 분리를 전제로 한 반면, 탈냉전은 새로운 가치와 의제가 전 세계 사적 문제로 부상하였음을 의미하며, 국제사회의 상호 협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환경문제와 관련된 국제문제이다. 로마클럽 주 1은 전 지구적 이슈 가운데서도 특히 환경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셋째, 국제연합의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하다. 국제연합의 지구촌 문제를 해결할 주체로서 민간단체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넷째, 신사회 운동주 2의 등장은 구사회 운동과 구별된다. 후기에 산업사회의 주요 사회운동으로 사회주의 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등이 있었다면 후자는 환경운동, 반핵 평화운동, 인권운동 등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공익을 추구하는 후기의 산업사회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신사회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8년 프랑스와 독일의 68학생 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후 프랑스의 사회운동은 여성해방운동 · 반핵평화운동 · 생태환경운동 · 반인종주의 운동 · 인권운동 · 지역운동 · 대안 공동체 건설운동 · 소비자보호운동 · 건강의료개혁 운동 · 학생 청년운동 · 동성연애자 운동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양자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구사회 운동이 쟁점과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정치 운동 · 변혁운동에 집중했다면, 신사회 운동은 문제를 각론화하고 구체화하며 삶의 현장과 문제의 지역을 중시한다. 참여 민주주의의 특징은 또한 의식 있는 시민을 그 주체로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신사회 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이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본격화되었다. 특히 신사회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으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했다. 하지만 기독교 청년 단체(YMCA), 기독교 여성 단체(YWCA), 흥사단 등 오래된 시민단체들이 있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참여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대적 환경이 조성되면서 신사회 운동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민간 사회단체의 신사회 운동이 양적, 질적으로 크게 확대되는 전환점이 되고 있으며, 정부와 기업들이 시민사회단체를 그 파트너로 인정하면서 그 활동 공간이 크게 확대되었다. 한국의 비정부기구는 기간에 따라 광복 전과 광복 후, 규모에 따라 대 중 소로 구분된다. 광복 후에는 YMCA · YWCA · 흥사단 등이 대표 단체이며, 광복 후에는 대한 주부클럽연합회 · 한국부인회 · 한국 여성유권자 연맹 등이 대표 단체이다. 또 YMCA · YWCA · 흥사단 · 경실련 · 환경운동연합 · 여성 단체 연합 · 녹색연합 · 참여연대 · 언론개혁시민 연대 등이 규모 면에서 큰 단체이다. 중규모 단체로는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 연대 · 불교환경교육원 · 녹색교통운동 · 녹색소비자 연대 · 장애인 권익문제 연구소 등이며, 소규모 단체로는 이름부터 독특한 재미난 어린이집 · 돌산 공부방 · 솔샘 아기방 · 숨결 생협 · 도봉 푸른 청년회 · 하늘땅물 벗 생협 · 지역공동체 너울 내 등 수없이 많다. 이들 단체들의 활동 분야는 30여 가지이다. 주민자치 · 정치개혁 · 행정개혁 · 경제개혁 · 부정부패 · 법률 · 인권 · 국제 · 환경 · 언론개혁 · 교육개혁 · 여성운동 · 소비자 · 농업 · 협동조합 · 교통문제 · 보건 의료 · 문화 · 복지 · 노동 · 외국인 노동자 · 청년 · 빈민 · 정보화 · 청소년 · 의식개혁 · 자원봉사 · 학술연구 · 통일 · 종합 등이다. 이처럼 다양한 시민단체가 21세기 중심단체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주체성 있는 자신의 길을 개척할 때 비로소 기존의 시민사회단체와는 다른 제3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비정부기구 (非政府機構) ### 내용: 엔지오라는 명칭은 국제연합에서 처음 사용하였으며, 다른 말로 엔지오(NGO, Non Governmental Organization) 또는 NPO(Non Profit Organization)라고도 한다. 국제연합은 정부의 연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다양한 부속 기구와 민간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자 정부가 아닌 민간단체들과 파트너십을 필요로 했는데, 이때 엔지오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국과 일본에서는 비영리단체라는 의미로 엔피오(NPO)를 많이 사용한다. 비정부기구 또는 비영리단체는 기업과 시민단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며, 좁은 의미로는 비정부기구와 비영리 민간단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국제연합이 외교적 지위를 갖는 반면, 엔지오는 외교적 지위를 갖지 않는 단체를 부르는 권위주의적이고 차별화된 개념이며 그들의 주장이 참고용일뿐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또한 비정부기구는 시민단체와 기업 및 이해집단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시민사회운동의 특수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비정부기구의 등장 배경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탈냉전과 전 지구적 이슈의 대두이다. 냉전은 가치의 분리를 전제로 한 반면, 탈냉전은 새로운 가치와 의제가 전 세계 사적 문제로 부상하였음을 의미하며, 국제사회의 상호 협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환경문제와 관련된 국제문제이다. 로마클럽 주 1은 전 지구적 이슈 가운데서도 특히 환경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셋째, 국제연합의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하다. 국제연합의 지구촌 문제를 해결할 주체로서 민간단체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넷째, 신사회 운동주 2의 등장은 구사회 운동과 구별된다. 후기에 산업사회의 주요 사회운동으로 사회주의 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등이 있었다면 후자는 환경운동, 반핵 평화운동, 인권운동 등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공익을 추구하는 후기의 산업사회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신사회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8년 프랑스와 독일의 68학생 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후 프랑스의 사회운동은 여성해방운동 · 반핵평화운동 · 생태환경운동 · 반인종주의 운동 · 인권운동 · 지역운동 · 대안 공동체 건설운동 · 소비자보호운동 · 건강의료개혁 운동 · 학생 청년운동 · 동성연애자 운동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양자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구사회 운동이 쟁점과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정치 운동 · 변혁운동에 집중했다면, 신사회 운동은 문제를 각론화하고 구체화하며 삶의 현장과 문제의 지역을 중시한다. 참여 민주주의의 특징은 또한 의식 있는 시민을 그 주체로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신사회 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이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본격화되었다. 특히 신사회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으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했다. 하지만 기독교 청년 단체(YMCA), 기독교 여성 단체(YWCA), 흥사단 등 오래된 시민단체들이 있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참여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대적 환경이 조성되면서 신사회 운동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민간 사회단체의 신사회 운동이 양적, 질적으로 크게 확대되는 전환점이 되고 있으며, 정부와 기업들이 시민사회단체를 그 파트너로 인정하면서 그 활동 공간이 크게 확대되었다. 한국의 비정부기구는 기간에 따라 광복 전과 광복 후, 규모에 따라 대 중 소로 구분된다. 광복 후에는 YMCA · YWCA · 흥사단 등이 대표 단체이며, 광복 후에는 대한 주부클럽연합회 · 한국부인회 · 한국 여성유권자 연맹 등이 대표 단체이다. 또 YMCA · YWCA · 흥사단 · 경실련 · 환경운동연합 · 여성 단체 연합 · 녹색연합 · 참여연대 · 언론개혁시민 연대 등이 규모 면에서 큰 단체이다. 중규모 단체로는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 연대 · 불교환경교육원 · 녹색교통운동 · 녹색소비자 연대 · 장애인 권익문제 연구소 등이며, 소규모 단체로는 이름부터 독특한 재미난 어린이집 · 돌산 공부방 · 솔샘 아기방 · 숨결 생협 · 도봉 푸른 청년회 · 하늘땅물 벗 생협 · 지역공동체 너울 내 등 수없이 많다. 이들 단체들의 활동 분야는 30여 가지이다. 주민자치 · 정치개혁 · 행정개혁 · 경제개혁 · 부정부패 · 법률 · 인권 · 국제 · 환경 · 언론개혁 · 교육개혁 · 여성운동 · 소비자 · 농업 · 협동조합 · 교통문제 · 보건 의료 · 문화 · 복지 · 노동 · 외국인 노동자 · 청년 · 빈민 · 정보화 · 청소년 · 의식개혁 · 자원봉사 · 학술연구 · 통일 · 종합 등이다. 이처럼 다양한 시민단체가 21세기 중심단체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주체성 있는 자신의 길을 개척할 때 비로소 기존의 시민사회단체와는 다른 제3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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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白凡逸志)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임중빈"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125
CC BY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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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국사원의 아들 김신이 1947년 12월 15일 초판을 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10여 본이 각 출판사에서 중간 출판되었다. 전기문학의 현대적 고전으로 독립운동의 증언 서이다. 이 책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에 보관되어 있던 친필 원본으로, 상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지내면서 틈틈이 써놓은 것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생사를 알 수 없어 유서 대신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적은 만큼 비장감이 느껴진다. 상·하편으로 나뉘며, 말미에 수록된 나의 소원도 있다. 상편은 김인·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NAME>으로 1929년 5월 3일 상해에서 머리말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실린 저자의 말에는 1947년 개천절로 명기되어 있어 근 20년에 걸쳐 백범 일지가 완성된 것으로 된다. 이 전기에서는 상해 집필의 상편이 우리 집과 내 어린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으로 엮어져 있는데, 과장이나 수식이 없이 사실대로 밝히는 데 주력했다. 하권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 거사, 곧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1·8일 왕(日王) 저격 의거와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4·29상해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중국 각처로 표류하다가 충칭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한 것으로서 칠순을 앞둔 망명가의 회고 기록이 되고 있다. 하권에는 「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 등의 제목 아래 광복군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제연합군의 힘으로 민족 해방을 맞게 되기까지의 투쟁 역정을 엮고 있는데 하권에서 보이는 임시정부의 환국이나 삼남(三南) 순회 대목의 기술은 1945년 말 또는 1946년 초에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완전 독립의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김구 민족 이념의 역사적인 문헌인 나의 소원은 상·하편 뒤에 붙은 민족국가·정치이념·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등 세 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문헌은 엄항섭이 엮은 김구 선생 최근 언론 집(1948)에도 수록되어 있어 민족 통일의 교본으로 널리 보급되어 왔다. 광복 후 국사원에 설치된 출판소에서 김지림·김흥두가 편집 실무와 보급을 맡아 출간한 백범 일지 초판본이 예상 밖으로 반응이 좋자 다음 해 1948년 3월 1일 자로 재판본도 연이어 나왔다. 한 개인의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권두 22면의 화보와 본문 400면 B6판 세로쓰기 국·한문 혼용의 초판본 체재에 담긴 것임에도 계속 읽는 중이다. 이 책이 1989년 초여름 TV 드라마로 방영될 만큼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민족주체성의 교본과도 같기 때문인데, 원본을 토대로 한 미국 컬럼비아대학 소장의 김구가 미주 동포에 보낸 필사본 외에도 내용을 다소 늘여 베껴둔 김구의 친필 아닌 필사본도 나돌고 있어 한국 서지 학사에 있어서 특기할 책이라 하겠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백범일지 (白凡逸志) ### 내용: 도서출판 국사원의 아들 김신이 1947년 12월 15일 초판을 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10여 본이 각 출판사에서 중간 출판되었다. 전기문학의 현대적 고전으로 독립운동의 증언 서이다. 이 책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에 보관되어 있던 친필 원본으로, 상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지내면서 틈틈이 써놓은 것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생사를 알 수 없어 유서 대신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적은 만큼 비장감이 느껴진다. 상·하편으로 나뉘며, 말미에 수록된 나의 소원도 있다. 상편은 김인·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NAME>으로 1929년 5월 3일 상해에서 머리말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실린 저자의 말에는 1947년 개천절로 명기되어 있어 근 20년에 걸쳐 백범 일지가 완성된 것으로 된다. 이 전기에서는 상해 집필의 상편이 우리 집과 내 어린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으로 엮어져 있는데, 과장이나 수식이 없이 사실대로 밝히는 데 주력했다. 하권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 거사, 곧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1·8일 왕(日王) 저격 의거와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4·29상해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중국 각처로 표류하다가 충칭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한 것으로서 칠순을 앞둔 망명가의 회고 기록이 되고 있다. 하권에는 「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 등의 제목 아래 광복군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제연합군의 힘으로 민족 해방을 맞게 되기까지의 투쟁 역정을 엮고 있는데 하권에서 보이는 임시정부의 환국이나 삼남(三南) 순회 대목의 기술은 1945년 말 또는 1946년 초에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완전 독립의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김구 민족 이념의 역사적인 문헌인 나의 소원은 상·하편 뒤에 붙은 민족국가·정치이념·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등 세 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문헌은 엄항섭이 엮은 김구 선생 최근 언론 집(1948)에도 수록되어 있어 민족 통일의 교본으로 널리 보급되어 왔다. 광복 후 국사원에 설치된 출판소에서 김지림·김흥두가 편집 실무와 보급을 맡아 출간한 백범 일지 초판본이 예상 밖으로 반응이 좋자 다음 해 1948년 3월 1일 자로 재판본도 연이어 나왔다. 한 개인의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권두 22면의 화보와 본문 400면 B6판 세로쓰기 국·한문 혼용의 초판본 체재에 담긴 것임에도 계속 읽는 중이다. 이 책이 1989년 초여름 TV 드라마로 방영될 만큼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민족주체성의 교본과도 같기 때문인데, 원본을 토대로 한 미국 컬럼비아대학 소장의 김구가 미주 동포에 보낸 필사본 외에도 내용을 다소 늘여 베껴둔 김구의 친필 아닌 필사본도 나돌고 있어 한국 서지 학사에 있어서 특기할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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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POL15998.txt
박정희 (朴正熙)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상우"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134
CC BY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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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고령이다. 중수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NAME> 다카키 마사오[]이다. 경상북도 구미에서 출생. 빈농인 아버지<NAME>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 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한 뒤,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문에 들어갔다. 당시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으며, 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 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7면)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 생으로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광복 후 1946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를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6·25전쟁 기간 동안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주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1군 참모장, 1960년 육군 군수기지사령관, 제1관 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 제2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1949년, 사상 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이 있다. 여순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육군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운동으로 복역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당했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뒤 현역으로 복적 되었다. 육영수와 1950년 결혼했다.<NAME>의 통치 시대는 3단계로 구분되는데,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18년 5개월 동안 집권하였다.<NAME>와 그를 따르는 일부 장교들은 4·19혁명으로 만들어진 민주당 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가 성공한 뒤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삼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혁명 주체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여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가장 통치권자인<NAME>는 이로부터 2년 7개월간 군정을 실시했는데, 그 목적은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그 해 말까지 3,000여 명의 용공분자와 4,000여 명의 폭력배를 체포하였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군사정부의 엄정한 조사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 발표 이후 시작되었다. 사회기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댄스홀·고급 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닫게 하고, 비밀 댄스홀에서 춤을 추던 남녀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년 6월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1개월도 안 되어 전국적으로 3만 5,000여 건의 보안 관계 범법 혐의자가 검거되었다는 사실은 군정 초기 얼마나 철저한 구악 일소 작업과 강력 정치가 진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군사정부는 국민운동 본부를 설치하여 생활 간소화·가족계획·문맹 퇴치사업을 벌이는 한편, 친선방문 외교·초청외교 등 적극 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군정 초기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져 일련의 반혁명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 파는 완전히 거세지고<NAME> 중심의 주류세력이 실권파로 정권 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군정 후반에는 민정 이양을 둘러싼 공방전으로 전국이 시끌벅적했다.<NAME>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 1월부터 정치활동이 재개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이른바 2·27선언을 통해 원상 복귀를 약속했다. 그러나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4·8조치로 군정 연장을 철회하는 등 번복을 거듭하였다. 그 사이 군정은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을 일으켜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제3공화국의 통치자는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NAME>였다.<NAME>는 취임사에서 정치적 자주 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안정을 목표로 하는 대혁신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 제3공화국의<NAME> 정부는 경제발전과 한·일 국교정상화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NAME>는 이미 1962년 군정 기간 중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 확립을 위한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연평균 7.1%의 성장률을 당시 후진국 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책정하였다. 하지만 제 1차 5개년 계획은 계획 자체의 졸속과 무엇보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부족으로 전체적으로 실적이 좋지 못했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NAME>는 군정 기간인 1961년 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 한·일 회의를 개최하는 등 대일 협상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와 함께 실무교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NAME>는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일문제 타결에 열심이었다. 이 같은 대일 자세는 친일 외교·흑막 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제3공화국 의회 막판에 대통령 국회 출석 결의안 등으로 논란이 될 정도로<NAME> 정부의 대일 저자세 시비는 국민의 대일 감정을 자극하였다. 특히 한국 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 문제와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 memo)로 결정된 6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여론의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한·일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국민 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일으켰으나<NAME> 정부는 반대를 물리치고 일을 성사시켜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정식으로 조인했다.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 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NAME>는 고성장·수출드라이브·산업기지 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자 점차 독재 성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 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NAME>는 권력욕을 강하게 드러냈는데, 그것이 1968년 3선 개헌으로 나타났다.<NAME>는 1972년 10월 헌법 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 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국민투표를 거친 후 이 헌법에 의거하여 제8대 대통령에<NAME>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 체제는 사실상<NAME>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NAME>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준 것은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보장해 준 것이다. 이 체제하에서는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였다. 야당과 재야세력이 유신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제기했으나<NAME>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를 통해 차단하였다. 유신 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당했다.<NAME>는 한국의 강압정치를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여론에도 굴하지 않았다.<NAME> 정부는 이 기간 동안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빈부격차를 심화시켰고, 황금만능 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경제발전을 기반으로 국가 안보를 빈틈없이 구축한 것은<NAME>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NAME>는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원회 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 간 밀사 교환을 시도했으나 결국 대화는 결렬되었다.<NAME>는 1979년 유신 체제에 항거하는 부마민주 항쟁이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 석상에서 측근 중 한 사람인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하였다. 유신 체제도 그와 함께 해체되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박정희 (朴正熙) ### 내용: 본관은 고령이다. 중수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NAME> 다카키 마사오[]이다. 경상북도 구미에서 출생. 빈농인 아버지<NAME>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 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한 뒤,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문에 들어갔다. 당시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으며, 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 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7면)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 생으로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광복 후 1946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를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6·25전쟁 기간 동안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주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1군 참모장, 1960년 육군 군수기지사령관, 제1관 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 제2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1949년, 사상 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이 있다. 여순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육군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운동으로 복역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당했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뒤 현역으로 복적 되었다. 육영수와 1950년 결혼했다.<NAME>의 통치 시대는 3단계로 구분되는데,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18년 5개월 동안 집권하였다.<NAME>와 그를 따르는 일부 장교들은 4·19혁명으로 만들어진 민주당 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가 성공한 뒤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삼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혁명 주체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여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가장 통치권자인<NAME>는 이로부터 2년 7개월간 군정을 실시했는데, 그 목적은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그 해 말까지 3,000여 명의 용공분자와 4,000여 명의 폭력배를 체포하였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군사정부의 엄정한 조사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 발표 이후 시작되었다. 사회기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댄스홀·고급 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닫게 하고, 비밀 댄스홀에서 춤을 추던 남녀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년 6월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1개월도 안 되어 전국적으로 3만 5,000여 건의 보안 관계 범법 혐의자가 검거되었다는 사실은 군정 초기 얼마나 철저한 구악 일소 작업과 강력 정치가 진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군사정부는 국민운동 본부를 설치하여 생활 간소화·가족계획·문맹 퇴치사업을 벌이는 한편, 친선방문 외교·초청외교 등 적극 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군정 초기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져 일련의 반혁명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 파는 완전히 거세지고<NAME> 중심의 주류세력이 실권파로 정권 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군정 후반에는 민정 이양을 둘러싼 공방전으로 전국이 시끌벅적했다.<NAME>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 1월부터 정치활동이 재개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이른바 2·27선언을 통해 원상 복귀를 약속했다. 그러나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4·8조치로 군정 연장을 철회하는 등 번복을 거듭하였다. 그 사이 군정은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을 일으켜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제3공화국의 통치자는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NAME>였다.<NAME>는 취임사에서 정치적 자주 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안정을 목표로 하는 대혁신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 제3공화국의<NAME> 정부는 경제발전과 한·일 국교정상화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NAME>는 이미 1962년 군정 기간 중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 확립을 위한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연평균 7.1%의 성장률을 당시 후진국 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책정하였다. 하지만 제 1차 5개년 계획은 계획 자체의 졸속과 무엇보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부족으로 전체적으로 실적이 좋지 못했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NAME>는 군정 기간인 1961년 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 한·일 회의를 개최하는 등 대일 협상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와 함께 실무교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NAME>는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일문제 타결에 열심이었다. 이 같은 대일 자세는 친일 외교·흑막 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제3공화국 의회 막판에 대통령 국회 출석 결의안 등으로 논란이 될 정도로<NAME> 정부의 대일 저자세 시비는 국민의 대일 감정을 자극하였다. 특히 한국 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 문제와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 memo)로 결정된 6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여론의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한·일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국민 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일으켰으나<NAME> 정부는 반대를 물리치고 일을 성사시켜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정식으로 조인했다.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 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NAME>는 고성장·수출드라이브·산업기지 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자 점차 독재 성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 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NAME>는 권력욕을 강하게 드러냈는데, 그것이 1968년 3선 개헌으로 나타났다.<NAME>는 1972년 10월 헌법 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 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국민투표를 거친 후 이 헌법에 의거하여 제8대 대통령에<NAME>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 체제는 사실상<NAME>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NAME>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준 것은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보장해 준 것이다. 이 체제하에서는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였다. 야당과 재야세력이 유신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제기했으나<NAME>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를 통해 차단하였다. 유신 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당했다.<NAME>는 한국의 강압정치를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여론에도 굴하지 않았다.<NAME> 정부는 이 기간 동안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빈부격차를 심화시켰고, 황금만능 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경제발전을 기반으로 국가 안보를 빈틈없이 구축한 것은<NAME>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NAME>는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원회 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 간 밀사 교환을 시도했으나 결국 대화는 결렬되었다.<NAME>는 1979년 유신 체제에 항거하는 부마민주 항쟁이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 석상에서 측근 중 한 사람인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하였다. 유신 체제도 그와 함께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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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LAW20902.txt
사형 (死刑)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오도기"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110
CC BY
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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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참살·교살·전기살·가스살·독약살·석살·주사살 등 사형의 유형은 다양하다. 사형에 처해질 사람을 사살하는 것은 사형 집행 방법으로 보통 수형자의 명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군인을 총살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이 <군형법>에 명시되어 있다. 사형에 처해질 사람의 두수를 절단하여 생을 빼앗는 것이 참살이다. 조선시대에는 모반 대역 등의 중죄를 저지른 자가 주로 칼을 사용했고, 서양에서는 손도끼를 주로 사용했다. 교살은 수형자를 교수하여 죽이게 하는 것이다. 세계에서는 이 사형 방법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교살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사형에 처해질 사람의 생명을 전류를 이용하여 단 탈하는 것이 미국에서는 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방법은 집행인이 직접 하수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덜하고, 순간적인 고통이 덜하다. 사형수를 가스실에 가두고 가스를 통해 절명시키는 방법이 가스살이다. 이 방법은 전기 살을 개량하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1921년 미국 네바다주에서 처음 사용된 뒤 오늘날의 미국 여러 주에서 시행하고 있다. 사형수에게 독약을 먹여서 자살하게 하는 것이 독약살이다. 조선시대에는 유형에 처한 자를 임금이 사약하여 죽게 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오늘날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간음한 여성을 돌로 쳐서 죽이는 방법이 석 살이다. 사형 집행은 인류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오래되었다. 따라서, 형벌사는 사형의 역사라고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국가의 복수형 시대와 중세 시대부터 근세 초기에 이른 위하 형 시대에는 형벌 중 사형이 으뜸이었다. 한편 그 집행 방법도 잔인하면서 공개주의를 취했지만 근대국가의 박애주의 시대와 현대 국가의 과학적 처우 시대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사형의 적용 범위를 제한하거나 폐지하고 있고, 사형집행 방법도 잔학성을 제거하고 밀행주의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형법>은 법정형으로 사형을 규정하고 있으나, <소년법>은 범죄행위 시 16세 미만인 소년에게는 사형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행 형법상 절대적 법정형으로서 사형을 과할 수 있는 죄는 여적죄(與敵罪 : 적국과 합세하여 국가에 항전하는 죄) 뿐이고 이외에 상대적 법정형으로서 사형을 과할 수 있는 범죄는 내란죄·외환죄·폭발물사용죄·방화치사상죄·일수치사상죄·교통방해치사상죄·음용수혼독치사상죄·살인죄(강도살인치사죄·해상강도살인치사죄)·강간죄 등 9종으로 법관의 재량에 따라 자유형을 선택적으로 과할 수 있다. 또한 여적죄에 대해서도 형량 감경의 여지가 존재하므로 반드시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있다. 기타 특별법으로 사형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특정 경제 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12종, <국가보안법> 5종, <군형법> 40종 등이다. 사형의 목적이 범죄인의 생명을 빼앗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사책임으로서 가장 중하기 때문에 수형자나 사회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고 범죄인을 국가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킴으로써 그 위험성을 국가 사회가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다. 요즈음 형벌 집행 법은 잔인하고 일반예방작용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잔혹함을 공개하여 범죄 예방을 하려고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사형집행 방법은 능지처사·효수·기시 외도 오살·교수·거열·포살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모반·대역 죄 등 중범자가 능지처사에 처해진 다음 신체의 특정 부위를 칼질하여 상처를 내고 목을 베는 것을 능지처사라 하는데, 이 능지처사에 처한 자는 시체의 매장까지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참형과 교형 중 조선시대에 사형을 행했던 방법인 참형에 해당한다. 참수 또는 능지처참은 1900년 폐지될 때까지 조선왕조에서 행해졌던 사형집행의 한 종류로서, 이를 참수 또는 능지처참이라고도 한다. 효수는 참형의 한 종류로 참수한 후 머리를 간두에 매달아 일반 백성에게 보이는 위하 형(위협을 주기 위한 형벌)의 한 형태이다. 이를 효시라 하는데, 군기를 절취하거나 고의로 파선한 자들에게 적용하였다. 일반 백성에게 위하형의 표현인 기시는 참형의 한 종류로 왕지를 위조하는 자 등에게 적용하여 시장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민중과 함께 범인을 버린다는 공중형의 사상이다. 오살은 역적을 사형에 처할 때 사용되는데, 먼저 범인의 머리를 찍어 죽인 다음 팔과 다리를 베어버렸다. 교수에 대한 참형은 하지 않지만 사체에 대한 매장은 허용되었다. 일찍이 능지처사의 한 방법으로 간부 부가 공모하여 본부를 살해했을 때 등에 범인의 지체를 네 개, 다섯 개 수레에 매단 다음 각 방으로 수레를 몰아 찢어 죽이는 것이 있다. 포살은 1894년(고종 31) 육군 법률에 의거하여 사형 집행을 포살만으로 하였는데, 오늘날의 <군형법>에 의한 사형은 총살로 하게 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초기의 사형집행은 한강 연안의 새남터(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3가), 청계천 부근의 무교, 의주로와 서대문을 통하는 교차로 부근인 서대문 밖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는 밀행주의가 아닌 공개주의였다. 사형에 대한 존치론과 사형 폐지론이 대두된 것은 사형이 형벌로서 위하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베카리아(Beccaria, C. )가 저술한 범죄와 형벌에서, 사형은 법률상으로나 형벌의 효과 면에서 실효를 거두기 힘들기 때문에 불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 사형 폐지론이다. 사형은 사실상 순간적이고 일반인에 대한 위하·경계 면에서 큰 효과가 없고, 오히려 장기간 자유 박탈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뒤 영국의 감옥 개량 가인 호워드(Howard,J. )는 베카리아에 동조하여 사형폐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의 캘버트(Calvert,E. R. ), 독일의 리프만(Liepmann, M. ), 미국의 서덜랜드(Sutherland, E. H. ) 등이 사형 폐지론을 주장하고 있다. 사형 폐지의 논거는 사형 폐지의 논거로, 사형 집행은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허용될 수 없으며, 흉악범이나 확신범에 대한 위하적 효과가 없고, 형벌의 개선적·교육적 기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 존치론자들은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이 갖고 있는 법적 확신이며, 법질서유지를 위해서 중대 범죄에 대하여는 사형으로 위하하지 않으면 법익 보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국가 사회의 방위를 위하여 극악한 범인은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 말살해야 하며, 오판의 경우는 사형뿐만 아니라 자유형에서도 완전 회복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며, 특히 사형의 경우 신중을 기하기 때문에 오판의 염려가 없다는 이유로 사형은 존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형 존치 국가보다 사형 폐지 국가가 훨씬 많다는 점이 세계 각국이 형사정책에서 사형을 폐지하고 있는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형 존치 국가에서도 사형제도의 운용방안을 합리적이고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사형 대상 범죄의 범위를 제한하고 사형 적용을 신중히 하는 방안과 사형집행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 등을 강구하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사형 (死刑) ### 내용: 총살·참살·교살·전기살·가스살·독약살·석살·주사살 등 사형의 유형은 다양하다. 사형에 처해질 사람을 사살하는 것은 사형 집행 방법으로 보통 수형자의 명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군인을 총살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이 <군형법>에 명시되어 있다. 사형에 처해질 사람의 두수를 절단하여 생을 빼앗는 것이 참살이다. 조선시대에는 모반 대역 등의 중죄를 저지른 자가 주로 칼을 사용했고, 서양에서는 손도끼를 주로 사용했다. 교살은 수형자를 교수하여 죽이게 하는 것이다. 세계에서는 이 사형 방법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교살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사형에 처해질 사람의 생명을 전류를 이용하여 단 탈하는 것이 미국에서는 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방법은 집행인이 직접 하수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덜하고, 순간적인 고통이 덜하다. 사형수를 가스실에 가두고 가스를 통해 절명시키는 방법이 가스살이다. 이 방법은 전기 살을 개량하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1921년 미국 네바다주에서 처음 사용된 뒤 오늘날의 미국 여러 주에서 시행하고 있다. 사형수에게 독약을 먹여서 자살하게 하는 것이 독약살이다. 조선시대에는 유형에 처한 자를 임금이 사약하여 죽게 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오늘날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간음한 여성을 돌로 쳐서 죽이는 방법이 석 살이다. 사형 집행은 인류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오래되었다. 따라서, 형벌사는 사형의 역사라고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국가의 복수형 시대와 중세 시대부터 근세 초기에 이른 위하 형 시대에는 형벌 중 사형이 으뜸이었다. 한편 그 집행 방법도 잔인하면서 공개주의를 취했지만 근대국가의 박애주의 시대와 현대 국가의 과학적 처우 시대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사형의 적용 범위를 제한하거나 폐지하고 있고, 사형집행 방법도 잔학성을 제거하고 밀행주의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형법>은 법정형으로 사형을 규정하고 있으나, <소년법>은 범죄행위 시 16세 미만인 소년에게는 사형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행 형법상 절대적 법정형으로서 사형을 과할 수 있는 죄는 여적죄(與敵罪 : 적국과 합세하여 국가에 항전하는 죄) 뿐이고 이외에 상대적 법정형으로서 사형을 과할 수 있는 범죄는 내란죄·외환죄·폭발물사용죄·방화치사상죄·일수치사상죄·교통방해치사상죄·음용수혼독치사상죄·살인죄(강도살인치사죄·해상강도살인치사죄)·강간죄 등 9종으로 법관의 재량에 따라 자유형을 선택적으로 과할 수 있다. 또한 여적죄에 대해서도 형량 감경의 여지가 존재하므로 반드시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있다. 기타 특별법으로 사형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특정 경제 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12종, <국가보안법> 5종, <군형법> 40종 등이다. 사형의 목적이 범죄인의 생명을 빼앗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사책임으로서 가장 중하기 때문에 수형자나 사회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고 범죄인을 국가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킴으로써 그 위험성을 국가 사회가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다. 요즈음 형벌 집행 법은 잔인하고 일반예방작용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잔혹함을 공개하여 범죄 예방을 하려고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사형집행 방법은 능지처사·효수·기시 외도 오살·교수·거열·포살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모반·대역 죄 등 중범자가 능지처사에 처해진 다음 신체의 특정 부위를 칼질하여 상처를 내고 목을 베는 것을 능지처사라 하는데, 이 능지처사에 처한 자는 시체의 매장까지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참형과 교형 중 조선시대에 사형을 행했던 방법인 참형에 해당한다. 참수 또는 능지처참은 1900년 폐지될 때까지 조선왕조에서 행해졌던 사형집행의 한 종류로서, 이를 참수 또는 능지처참이라고도 한다. 효수는 참형의 한 종류로 참수한 후 머리를 간두에 매달아 일반 백성에게 보이는 위하 형(위협을 주기 위한 형벌)의 한 형태이다. 이를 효시라 하는데, 군기를 절취하거나 고의로 파선한 자들에게 적용하였다. 일반 백성에게 위하형의 표현인 기시는 참형의 한 종류로 왕지를 위조하는 자 등에게 적용하여 시장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민중과 함께 범인을 버린다는 공중형의 사상이다. 오살은 역적을 사형에 처할 때 사용되는데, 먼저 범인의 머리를 찍어 죽인 다음 팔과 다리를 베어버렸다. 교수에 대한 참형은 하지 않지만 사체에 대한 매장은 허용되었다. 일찍이 능지처사의 한 방법으로 간부 부가 공모하여 본부를 살해했을 때 등에 범인의 지체를 네 개, 다섯 개 수레에 매단 다음 각 방으로 수레를 몰아 찢어 죽이는 것이 있다. 포살은 1894년(고종 31) 육군 법률에 의거하여 사형 집행을 포살만으로 하였는데, 오늘날의 <군형법>에 의한 사형은 총살로 하게 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초기의 사형집행은 한강 연안의 새남터(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3가), 청계천 부근의 무교, 의주로와 서대문을 통하는 교차로 부근인 서대문 밖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는 밀행주의가 아닌 공개주의였다. 사형에 대한 존치론과 사형 폐지론이 대두된 것은 사형이 형벌로서 위하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베카리아(Beccaria, C. )가 저술한 범죄와 형벌에서, 사형은 법률상으로나 형벌의 효과 면에서 실효를 거두기 힘들기 때문에 불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 사형 폐지론이다. 사형은 사실상 순간적이고 일반인에 대한 위하·경계 면에서 큰 효과가 없고, 오히려 장기간 자유 박탈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뒤 영국의 감옥 개량 가인 호워드(Howard,J. )는 베카리아에 동조하여 사형폐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의 캘버트(Calvert,E. R. ), 독일의 리프만(Liepmann, M. ), 미국의 서덜랜드(Sutherland, E. H. ) 등이 사형 폐지론을 주장하고 있다. 사형 폐지의 논거는 사형 폐지의 논거로, 사형 집행은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허용될 수 없으며, 흉악범이나 확신범에 대한 위하적 효과가 없고, 형벌의 개선적·교육적 기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 존치론자들은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이 갖고 있는 법적 확신이며, 법질서유지를 위해서 중대 범죄에 대하여는 사형으로 위하하지 않으면 법익 보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국가 사회의 방위를 위하여 극악한 범인은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 말살해야 하며, 오판의 경우는 사형뿐만 아니라 자유형에서도 완전 회복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며, 특히 사형의 경우 신중을 기하기 때문에 오판의 염려가 없다는 이유로 사형은 존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형 존치 국가보다 사형 폐지 국가가 훨씬 많다는 점이 세계 각국이 형사정책에서 사형을 폐지하고 있는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형 존치 국가에서도 사형제도의 운용방안을 합리적이고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사형 대상 범죄의 범위를 제한하고 사형 적용을 신중히 하는 방안과 사형집행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 등을 강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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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LAW19002.txt
부통령 (副統領)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창규"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594
CC BY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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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부통령제를 두고 있지만 의원내각제의 나라에서는 이를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국무회의에의 출석·발언·표결권은 물론 행정 집행권과도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 원칙이며, 다만 대통령 유고시 그 직무를 대행하지만 양원제 의회를 두고 있는 나라에서는<NAME>의 의장직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부통령이 대통령 유고시에도 대통령 전권을 대행하게 되면 평상시에도 아무런 권한이 없더라도 국무회의의 운영상황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실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발언하는 것이 그 예로 되어 있기도 하다. 제1공화국 헌법에 부통령제를 두고, 국회가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바뀌면서 참의원 의장과 양원 합동회의 의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 1공화국 때에는 참의원을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직을 겸한 일은 없었고, 다만 법률에 규정된 바에 따라 탄핵 재판소의 재판장, 헌법위원회의 위원장 등을 겸직하기도 하였다.<NAME>헌법은 부통령을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선출하도록 했고 국무총리나 국회의원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규정했고, 제1차 개정 헌법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투표로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제2차 개정 헌법에서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잃으면 즉시 후임자를 선출하되, 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재임한다고 규정하였다. 부통령제는 제3차 헌법개정 이후 폐지되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부통령 (副統領) ### 내용: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부통령제를 두고 있지만 의원내각제의 나라에서는 이를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국무회의에의 출석·발언·표결권은 물론 행정 집행권과도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 원칙이며, 다만 대통령 유고시 그 직무를 대행하지만 양원제 의회를 두고 있는 나라에서는<NAME>의 의장직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부통령이 대통령 유고시에도 대통령 전권을 대행하게 되면 평상시에도 아무런 권한이 없더라도 국무회의의 운영상황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실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발언하는 것이 그 예로 되어 있기도 하다. 제1공화국 헌법에 부통령제를 두고, 국회가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바뀌면서 참의원 의장과 양원 합동회의 의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 1공화국 때에는 참의원을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직을 겸한 일은 없었고, 다만 법률에 규정된 바에 따라 탄핵 재판소의 재판장, 헌법위원회의 위원장 등을 겸직하기도 하였다.<NAME>헌법은 부통령을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선출하도록 했고 국무총리나 국회의원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규정했고, 제1차 개정 헌법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투표로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제2차 개정 헌법에서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잃으면 즉시 후임자를 선출하되, 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재임한다고 규정하였다. 부통령제는 제3차 헌법개정 이후 폐지되었다.
7880659f-b784-4169-9de5-321a151be00c
source05/encykorea/SOC15146.txt
무천 (舞天)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274
CC BY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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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음력 10월에 공동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를 즐기던 명절 행사이다. 위지 (3세기)와 후한서에는 예의 무천에 관한 기록이 있다. 후한서에 보면 늘 10월 절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동맹이나 한의 5월 · 10월의 농공시 필기의 제천의식들은 그 뒤의 기록들에도 등장하지만, 무천과 부여의 영고에 관한 기록은 이들 촌락 국가의 소멸에 따라 부여전 · 예전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져서 그 뒤의 기록들에는 없다. 따라서 무천의 기록은 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데, 같은 북쪽인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을 비롯한 남쪽의 제천의식들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중 영고는 경축하는 축제의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한의 제천의식은 농경의례였다는 사실이 확실하다. 따라서, 고구려의 동맹과 무천의 10월 제사는 추수감사의 축제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기록들은 예로부터 농자천하지대본을 표방해 왔던 한국의 강한 농경문화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농경문화가 발달하며 무천의 10월, 동맹의 10월, 한의 10월 제천행사들은 오늘날의 시월상달 관념과 닮아있다. 이런 농민의 집단적인 공동제의를 하는 동제는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이 동제도 정월과 10월에 흔히 행해진다. 특히, 고구려의 동맹은 주서 (7세기) · 북사 (7세기) 등에 의하면 목각 여신상을 제사하는 여신 관념이 나타난다. 이 점에서도 오늘날의 동제들이 남신의 2배가 넘는 강한 여신 관념을 보여주고 있어 유사점이 많다. 이 3세기 무렵의 무천과 같은 제천의식의 기록들은 신석기시대부터 5천 년의 우리 농경문화사의 종교적인 뿌리에 관한 핵심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무천의 끝에는 범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도 동제신에 범 관념을 따르는 지역이 많지만, 특히 영동 지방과 산악지대에 강한 느낌이 있고, 강릉 단오굿의 대관령 서낭신에 얽힌 범 관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영동의 북쪽에 있었던 예의 범 신 또한 무천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고금을 통해 마음이 괴롭고 아픔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무천 (舞天) ### 내용: 해마다 음력 10월에 공동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를 즐기던 명절 행사이다. 위지 (3세기)와 후한서에는 예의 무천에 관한 기록이 있다. 후한서에 보면 늘 10월 절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동맹이나 한의 5월 · 10월의 농공시 필기의 제천의식들은 그 뒤의 기록들에도 등장하지만, 무천과 부여의 영고에 관한 기록은 이들 촌락 국가의 소멸에 따라 부여전 · 예전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져서 그 뒤의 기록들에는 없다. 따라서 무천의 기록은 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데, 같은 북쪽인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을 비롯한 남쪽의 제천의식들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중 영고는 경축하는 축제의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한의 제천의식은 농경의례였다는 사실이 확실하다. 따라서, 고구려의 동맹과 무천의 10월 제사는 추수감사의 축제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기록들은 예로부터 농자천하지대본을 표방해 왔던 한국의 강한 농경문화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농경문화가 발달하며 무천의 10월, 동맹의 10월, 한의 10월 제천행사들은 오늘날의 시월상달 관념과 닮아있다. 이런 농민의 집단적인 공동제의를 하는 동제는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이 동제도 정월과 10월에 흔히 행해진다. 특히, 고구려의 동맹은 주서 (7세기) · 북사 (7세기) 등에 의하면 목각 여신상을 제사하는 여신 관념이 나타난다. 이 점에서도 오늘날의 동제들이 남신의 2배가 넘는 강한 여신 관념을 보여주고 있어 유사점이 많다. 이 3세기 무렵의 무천과 같은 제천의식의 기록들은 신석기시대부터 5천 년의 우리 농경문화사의 종교적인 뿌리에 관한 핵심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무천의 끝에는 범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도 동제신에 범 관념을 따르는 지역이 많지만, 특히 영동 지방과 산악지대에 강한 느낌이 있고, 강릉 단오굿의 대관령 서낭신에 얽힌 범 관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영동의 북쪽에 있었던 예의 범 신 또한 무천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고금을 통해 마음이 괴롭고 아픔이 있음을 알 수 있다.
c0561434-9bcd-4260-b2ae-8d512817d98c
source05/encykorea/POL50721.txt
탈북자 (脫北者)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849
CC BY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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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는 남한으로<NAME> 자 중에서 북한에 주소·직계가족·배우자·직장 등을 두고 있는 자로서 북한을 탈출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아니하고 남한에 머물고 있는 자를 의미한다. 분단 이후 최초로 탈북자를 귀순자로 불렀고, 1997년 1월부터 북한 이탈자로 부르다가, 2005년 1월 9일부터 새터민으로 불렀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11월 21일부터 북한이탈주민으로 호칭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동시에 당사자들이 원하는 자유이주민이라는 용어가 더 맞는 것 같다. 탈북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난, 사회 일탈 현상의 확산, 외부정보 유입 증가가 주요 원인이며 급변사태가 닥칠 경우 이들의 국내 입국 욕구가 지속될 경우 탈북자 문제는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북한의 에너지와 원자재는 중국과 소련에 의존했지만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북한 산업체계의 붕괴가 연쇄적으로 전 산업으로 확산되어 체제에 문제 발생했으며, 더불어 한국 내에서는 동일하고 동질의 사람으로 승인하고 포용하느냐 하는 문제와 경제적 지원과 지원 시스템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해 발생하며 또한 이들이 통일에 장애물이라고 인식하는 등의 사회문제로까지 중첩된다. 탈북자 문제는 법률상 난민의 지위를 가지지만 중국과 기타 국가들의 특수 관계로 인해 이제는 여성, 어린이, 종교의 자유의 문제 등으로 세분화되고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에 체류 중인 여성 탈북자들의 인신매매, 강제노동 등을 방지할 수 있는 법적 제재를 확보해야 한다. 탈북자들의 강제송환을 중지해야 하며, 단기간 머물 수 있도록 합법적 신분을 허용하도록 제도 개선을 촉구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유엔 난민협약과 이주노동자 권리 협약이 해외 탈북자를 보호하는 국제법적 근거로 이용되어왔다. 그렇지만 이것마저도 탈북자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나라와의 국가 간 문제로 승격되어 문제 해결에 난항을 겪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는 국제적으로 보호받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가 인정하는 위임 난민(mandate refugee)의 지위를 탈북자들이 획득하도록 외교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남한에 개방된 경쟁 체제가 정착할 수 있도록 체계화해야 하며 이주자들을 2등 시민이 아닌 동질의 시민으로 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북한이 독립된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현재의 헌법정신에 비추어 보면 탈북자는 분명히 내국인이다. 탈북자가 국내에 정착하는 과정은 일단 한국 정부에 보호 요청 시, 관계 부처 간 협의 후 해외공관 또는 주재국 임시보호시설에 수용된 후 신원확인 후 주재국과 입국 교섭 및 국내 입국이 지원된다. 국내로 입국하면 국정원, 경찰청 등의 관계 기관에서 합동신문을 받아 검증 및 조사가 이뤄지고 조사 종료 후 사회 적응교육 시설인 하나원으로 신병이 이관된다. 그다음 하나원에서는 문화적 이질감 해소, 심리 안정, 진로상담 등 12주의 사회 적응교육이 이뤄지고, 취적, 주거 알선 등 정착 준비를 마친 탈북자가 전국적으로 골고루 배출된다. 이후 사회적 안전망에 편입되어 고용지원금, 무료 직업훈련, 자격 인정 등의 취업지원이 이루어지며, 특례 편입학 및 등록금이 지원되는 교육지원도 받게 된다. 또한 보호 담당관제를 통해 거주지, 취업, 신변보호 담당관제를 운영하며, 정착도우미제, 정주 도우미제를 통해 민간자원봉사자와 연계하고, 북한이탈주민 후원회를 통한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 북한 문제에 대한 특정 집단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을 독점하거나 북한 내부의 폭발(implosion)에 의해 붕괴가 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력을 키워 안정적인 삶의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한반도에 체제 간의 경쟁과 적대감을 해소하는 평화체제의 정착이 더 중요하다. 한국의 평화정책은 탈북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와 민간은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과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교류의 확대를 통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의 증진을 추구하는 한편, 「헬싱키협약」을 토대로 하는 중국과 북한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기 위해 아시아적 인권 레짐을 구상해야 하며, 협력과 대화를 통해 북한의 개혁개방과 국제사회 동참을 유도함으로써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향상을 모색할 수 있다. 탈북자에 대한 규정들은 북한에서 귀순자에서 출발하여 북한이탈주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남한으로 이주하는 사람을 1962년 4월부터 「국가유공자 및 월남 귀순자 특별<NAME> 법」이 제정되어 귀순자에게 국가유공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였고, 1979년에는 1월에는 「월남 귀순용사 특별 보상법」이 제정되어 체계화된 지원 실시하였고, 1993년 6월부터는 「귀순 북한 동포 보호법」을 제정하여 생활능력이 결여된 생활보호 대상자로 전환하며, 정착금 하향 조정 등 지원 규모를 대폭 축소하였다가 1997년 1월부터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2009년 1월 30일에는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북한이탈주민 보호 범위 확대, 탈북청소년 지원 강화, 지역적응교육 실시, 취업 제도 개선 등의 내용을 제정되어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1999년 이후 100명이 넘어서면서 증가폭이 확대되고 있으며 2000년 이후에는 매년 3000여 명이 이주해, 2009년 6월 말에는 16,354명이 남한으로 이주해 있다. 2000년 이전에는 식량난에 따른 ‘생존에 관한 탈북’이지만 그 이후에는 미래를 위한 경제적인 ‘삶의 질’과 연관되어 가족단위의 이탈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식량지원과 인프라 구축을 위한 사업 지원체계의 구축은 한반도 문제의 내부화를 위한 장치를 확보하는 것에 또 다른 지렛대가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1945년 분단과 정치적 분단으로 인해 갈등관계가 삶의 체계를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는 부정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지구상에 냉전이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적 이유로 삶의 터전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는 관계를 종식시키고 긴장관계를 교류와 만남을 통해서 남북한 사회통합을 통해서 공존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 급하다. 이는 곧 북한이탈주민이 없는 평화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탈북자 (脫北者) ### 내용: 탈북자는 남한으로<NAME> 자 중에서 북한에 주소·직계가족·배우자·직장 등을 두고 있는 자로서 북한을 탈출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아니하고 남한에 머물고 있는 자를 의미한다. 분단 이후 최초로 탈북자를 귀순자로 불렀고, 1997년 1월부터 북한 이탈자로 부르다가, 2005년 1월 9일부터 새터민으로 불렀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11월 21일부터 북한이탈주민으로 호칭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동시에 당사자들이 원하는 자유이주민이라는 용어가 더 맞는 것 같다. 탈북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난, 사회 일탈 현상의 확산, 외부정보 유입 증가가 주요 원인이며 급변사태가 닥칠 경우 이들의 국내 입국 욕구가 지속될 경우 탈북자 문제는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북한의 에너지와 원자재는 중국과 소련에 의존했지만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북한 산업체계의 붕괴가 연쇄적으로 전 산업으로 확산되어 체제에 문제 발생했으며, 더불어 한국 내에서는 동일하고 동질의 사람으로 승인하고 포용하느냐 하는 문제와 경제적 지원과 지원 시스템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해 발생하며 또한 이들이 통일에 장애물이라고 인식하는 등의 사회문제로까지 중첩된다. 탈북자 문제는 법률상 난민의 지위를 가지지만 중국과 기타 국가들의 특수 관계로 인해 이제는 여성, 어린이, 종교의 자유의 문제 등으로 세분화되고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에 체류 중인 여성 탈북자들의 인신매매, 강제노동 등을 방지할 수 있는 법적 제재를 확보해야 한다. 탈북자들의 강제송환을 중지해야 하며, 단기간 머물 수 있도록 합법적 신분을 허용하도록 제도 개선을 촉구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유엔 난민협약과 이주노동자 권리 협약이 해외 탈북자를 보호하는 국제법적 근거로 이용되어왔다. 그렇지만 이것마저도 탈북자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나라와의 국가 간 문제로 승격되어 문제 해결에 난항을 겪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는 국제적으로 보호받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가 인정하는 위임 난민(mandate refugee)의 지위를 탈북자들이 획득하도록 외교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남한에 개방된 경쟁 체제가 정착할 수 있도록 체계화해야 하며 이주자들을 2등 시민이 아닌 동질의 시민으로 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북한이 독립된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현재의 헌법정신에 비추어 보면 탈북자는 분명히 내국인이다. 탈북자가 국내에 정착하는 과정은 일단 한국 정부에 보호 요청 시, 관계 부처 간 협의 후 해외공관 또는 주재국 임시보호시설에 수용된 후 신원확인 후 주재국과 입국 교섭 및 국내 입국이 지원된다. 국내로 입국하면 국정원, 경찰청 등의 관계 기관에서 합동신문을 받아 검증 및 조사가 이뤄지고 조사 종료 후 사회 적응교육 시설인 하나원으로 신병이 이관된다. 그다음 하나원에서는 문화적 이질감 해소, 심리 안정, 진로상담 등 12주의 사회 적응교육이 이뤄지고, 취적, 주거 알선 등 정착 준비를 마친 탈북자가 전국적으로 골고루 배출된다. 이후 사회적 안전망에 편입되어 고용지원금, 무료 직업훈련, 자격 인정 등의 취업지원이 이루어지며, 특례 편입학 및 등록금이 지원되는 교육지원도 받게 된다. 또한 보호 담당관제를 통해 거주지, 취업, 신변보호 담당관제를 운영하며, 정착도우미제, 정주 도우미제를 통해 민간자원봉사자와 연계하고, 북한이탈주민 후원회를 통한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 북한 문제에 대한 특정 집단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을 독점하거나 북한 내부의 폭발(implosion)에 의해 붕괴가 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력을 키워 안정적인 삶의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한반도에 체제 간의 경쟁과 적대감을 해소하는 평화체제의 정착이 더 중요하다. 한국의 평화정책은 탈북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와 민간은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과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교류의 확대를 통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의 증진을 추구하는 한편, 「헬싱키협약」을 토대로 하는 중국과 북한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기 위해 아시아적 인권 레짐을 구상해야 하며, 협력과 대화를 통해 북한의 개혁개방과 국제사회 동참을 유도함으로써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향상을 모색할 수 있다. 탈북자에 대한 규정들은 북한에서 귀순자에서 출발하여 북한이탈주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남한으로 이주하는 사람을 1962년 4월부터 「국가유공자 및 월남 귀순자 특별<NAME> 법」이 제정되어 귀순자에게 국가유공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였고, 1979년에는 1월에는 「월남 귀순용사 특별 보상법」이 제정되어 체계화된 지원 실시하였고, 1993년 6월부터는 「귀순 북한 동포 보호법」을 제정하여 생활능력이 결여된 생활보호 대상자로 전환하며, 정착금 하향 조정 등 지원 규모를 대폭 축소하였다가 1997년 1월부터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2009년 1월 30일에는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북한이탈주민 보호 범위 확대, 탈북청소년 지원 강화, 지역적응교육 실시, 취업 제도 개선 등의 내용을 제정되어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1999년 이후 100명이 넘어서면서 증가폭이 확대되고 있으며 2000년 이후에는 매년 3000여 명이 이주해, 2009년 6월 말에는 16,354명이 남한으로 이주해 있다. 2000년 이전에는 식량난에 따른 ‘생존에 관한 탈북’이지만 그 이후에는 미래를 위한 경제적인 ‘삶의 질’과 연관되어 가족단위의 이탈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식량지원과 인프라 구축을 위한 사업 지원체계의 구축은 한반도 문제의 내부화를 위한 장치를 확보하는 것에 또 다른 지렛대가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1945년 분단과 정치적 분단으로 인해 갈등관계가 삶의 체계를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는 부정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지구상에 냉전이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적 이유로 삶의 터전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는 관계를 종식시키고 긴장관계를 교류와 만남을 통해서 남북한 사회통합을 통해서 공존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 급하다. 이는 곧 북한이탈주민이 없는 평화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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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천동 유적 (慶州 東川洞 遺蹟)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868
CC BY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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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분지의 동북 편에 솟아 있는 소금강산 지구에는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소금강산의 남서 하단부에는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된 탈해 왕릉이, 이곳의 남동 편 북천변에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헌덕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2개의 왕릉을 제외한 고분군은 2개의 지구로 나누어지는데, 탈해 왕릉의 뒤편 소금강산의 정상에서부터 남동쪽으로 뻗는 능선상에 분포하는 것을 Ⅰ 군, 그 남동 편의 다 불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분포하는 것을 Ⅱ 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동천동 산 13·16번지 일대의 능선상에 밀집되어 있는 I 군에는 비교적 원형 그대로의 봉토분이 있는 반면, 도굴로 인해 봉토가 파괴되고 내부가 완전히 드러난 봉토분들도 다수 존재한다. 내부 모습이 드러난 고분은 대부분 돌방[]으로 된 고분이다. 경주 박물관은 1994년 화장 무덤[]과 돌방무덤[]이 하나의 봉토에 들어 있는 것을 조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동천동 와총이 이곳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탈해 왕릉 옆 다 불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의 오른편 남서로 뻗는 작은 능선상에 2기의 봉토분이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분은 도굴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주변에 흩어진<NAME>와 파괴 양상을 보아 돌방무덤으로 판단된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와총은 괴석으로 네 벽을 쌓은 장방형의 돌방무덤으로 위쪽은 위로, 아래쪽은 안으로 약간 기울게 쌓았다. 천장은 4매의 판상석으로 덮은 평천장이었다. 널방[]의 크기는 길이, 너비, 높이가 4.031.421.64m이다. 널방 바닥에는 2개의 주검 받침대[]가 배치되었는데, 좌벽은 길이, 너비가 2.160.87m, 후벽은 2.271.42m, 후벽은 2.271.42m, 후벽은 2.271.42m이고 높이는 0.15m였다. 우측에 널길[]이 편재되어 있었고, 널길에도 천장을 가구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암키와와 수키와가 널방 안에서 발견되었고, 토기 뚜껑, 굽다리 항아리, 쇠 손칼[] 등도 나왔다. 경주의 굴식 돌방무덤 중에서 축조 연대는 비교적 빠른 6세기 중후 반경으로 판단된다. 이들 중 산 26-2번지 일대가 경주 시내에 있는 경주 대대의 군부대 이전 예정지로 선정됨에 따라 사업 지구 내에서 다수의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음이 사전 지표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에 1993년 대구대학교 박물관에서 삼국시대 고총고분을 제외한 일부 분묘의 발굴과 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삼국시대 굴식 돌방무덤[] 1기와 돌덧널무덤[] 1기, 고려 말 조선 초의 움무덤 345기가 확인되었는데, 움무덤은 몇 차례의 경작에 의해 봉토가 결실되어 일부 바닥층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들 움무덤 중 47기에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토제병, 청동 수저, 청동합, 자기류 등이 나왔다. 경주 박물관은 1994년에 하나의 봉토 안에 돌방무덤 1기와 화장 무덤 1기를 조영한 고분을 조사했다. 높이 3m 정도의 봉토만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유실되었다. 마사토와 점토를 번갈아 가며 봉토를 쌓았고 둘레돌[]은 20∼40cm 정도의 깬돌[]을 2단으로 축조한 것이다. 조사된 돌방에는 이미 도굴되어 파괴된 돌들이 있었는데, 평면 형태가 장방형인 널방의 한쪽에 치우치게 널길을 낸 것으로 생각되었고, 무덤길[]로 추정되는 흔적도 발견되었다. 장축은 알 수 없지만 2.45m로 널방의 단축이 밝혀졌다. 깬 돌로 된 널방은 네 벽이 올라갈수록 내경과 회를 바른 흔적이 드러났다. 화장 무덤은 돌방의 남동쪽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이미 일부가 유실된 상태였다. 무덤의 위치는 돌덧널을 구축하고 그 내부에 남벽 쪽에 골 장용의 뚜껑합을 배치하고 그 뒤편에 뚜껑 굽다리접시 5점을 안치한 곳이다. 돌덧널[]은 깨진 돌을 5단 정도로 쌓고 위에 깬돌 2매를 붙여 뚜껑을 만들었다. 길이 0.63m, 너비 0.5m의 돌덧널이 있다. 경주에서 제일 먼저 조성된 화장 무덤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축조 연대는 대략 6세기 중엽 이후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이들 상부에서 다수의 삼국시대 토기 편과 청동기시대의 석부, 마제 석촉, 반월형 석도 편들 이 지표 채집되고 있어, 이 일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집단묘역으로서 이용되었다. 이 고분군은 규모가 작지만, 경주의 평지에 축조되던 돌무지덧널무덤과는 달리 주변 산지에 무덤을 축조하는 법흥왕 이후의 고분들로 추정되며, 충효동, 서악동 등에 분포하는 고분들과 견줄 수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경주 동천동 유적 (慶州 東川洞 遺蹟) ### 내용: 경주분지의 동북 편에 솟아 있는 소금강산 지구에는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소금강산의 남서 하단부에는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된 탈해 왕릉이, 이곳의 남동 편 북천변에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헌덕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2개의 왕릉을 제외한 고분군은 2개의 지구로 나누어지는데, 탈해 왕릉의 뒤편 소금강산의 정상에서부터 남동쪽으로 뻗는 능선상에 분포하는 것을 Ⅰ 군, 그 남동 편의 다 불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분포하는 것을 Ⅱ 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동천동 산 13·16번지 일대의 능선상에 밀집되어 있는 I 군에는 비교적 원형 그대로의 봉토분이 있는 반면, 도굴로 인해 봉토가 파괴되고 내부가 완전히 드러난 봉토분들도 다수 존재한다. 내부 모습이 드러난 고분은 대부분 돌방[]으로 된 고분이다. 경주 박물관은 1994년 화장 무덤[]과 돌방무덤[]이 하나의 봉토에 들어 있는 것을 조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동천동 와총이 이곳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탈해 왕릉 옆 다 불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의 오른편 남서로 뻗는 작은 능선상에 2기의 봉토분이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분은 도굴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주변에 흩어진<NAME>와 파괴 양상을 보아 돌방무덤으로 판단된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와총은 괴석으로 네 벽을 쌓은 장방형의 돌방무덤으로 위쪽은 위로, 아래쪽은 안으로 약간 기울게 쌓았다. 천장은 4매의 판상석으로 덮은 평천장이었다. 널방[]의 크기는 길이, 너비, 높이가 4.031.421.64m이다. 널방 바닥에는 2개의 주검 받침대[]가 배치되었는데, 좌벽은 길이, 너비가 2.160.87m, 후벽은 2.271.42m, 후벽은 2.271.42m, 후벽은 2.271.42m이고 높이는 0.15m였다. 우측에 널길[]이 편재되어 있었고, 널길에도 천장을 가구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암키와와 수키와가 널방 안에서 발견되었고, 토기 뚜껑, 굽다리 항아리, 쇠 손칼[] 등도 나왔다. 경주의 굴식 돌방무덤 중에서 축조 연대는 비교적 빠른 6세기 중후 반경으로 판단된다. 이들 중 산 26-2번지 일대가 경주 시내에 있는 경주 대대의 군부대 이전 예정지로 선정됨에 따라 사업 지구 내에서 다수의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음이 사전 지표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에 1993년 대구대학교 박물관에서 삼국시대 고총고분을 제외한 일부 분묘의 발굴과 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삼국시대 굴식 돌방무덤[] 1기와 돌덧널무덤[] 1기, 고려 말 조선 초의 움무덤 345기가 확인되었는데, 움무덤은 몇 차례의 경작에 의해 봉토가 결실되어 일부 바닥층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들 움무덤 중 47기에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토제병, 청동 수저, 청동합, 자기류 등이 나왔다. 경주 박물관은 1994년에 하나의 봉토 안에 돌방무덤 1기와 화장 무덤 1기를 조영한 고분을 조사했다. 높이 3m 정도의 봉토만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유실되었다. 마사토와 점토를 번갈아 가며 봉토를 쌓았고 둘레돌[]은 20∼40cm 정도의 깬돌[]을 2단으로 축조한 것이다. 조사된 돌방에는 이미 도굴되어 파괴된 돌들이 있었는데, 평면 형태가 장방형인 널방의 한쪽에 치우치게 널길을 낸 것으로 생각되었고, 무덤길[]로 추정되는 흔적도 발견되었다. 장축은 알 수 없지만 2.45m로 널방의 단축이 밝혀졌다. 깬 돌로 된 널방은 네 벽이 올라갈수록 내경과 회를 바른 흔적이 드러났다. 화장 무덤은 돌방의 남동쪽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이미 일부가 유실된 상태였다. 무덤의 위치는 돌덧널을 구축하고 그 내부에 남벽 쪽에 골 장용의 뚜껑합을 배치하고 그 뒤편에 뚜껑 굽다리접시 5점을 안치한 곳이다. 돌덧널[]은 깨진 돌을 5단 정도로 쌓고 위에 깬돌 2매를 붙여 뚜껑을 만들었다. 길이 0.63m, 너비 0.5m의 돌덧널이 있다. 경주에서 제일 먼저 조성된 화장 무덤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축조 연대는 대략 6세기 중엽 이후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이들 상부에서 다수의 삼국시대 토기 편과 청동기시대의 석부, 마제 석촉, 반월형 석도 편들 이 지표 채집되고 있어, 이 일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집단묘역으로서 이용되었다. 이 고분군은 규모가 작지만, 경주의 평지에 축조되던 돌무지덧널무덤과는 달리 주변 산지에 무덤을 축조하는 법흥왕 이후의 고분들로 추정되며, 충효동, 서악동 등에 분포하는 고분들과 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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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곡 (卒哭)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권오호"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861
CC BY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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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제를 지낸 뒤 강일(:이 ·····에 당하는 날)에만 졸곡을 지내도록 되어 있고, 초상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뒤에 졸곡을 지내도록 되어 있다. 옛날에는 장사를 지내는 시기가 귀천에 따라 달랐으나 모두 죽은 뒤 3개월이 되어야만 장사를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고, 만약 3개월 전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더라도 졸곡만은 꼭 3개월을 기다려서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장사의 기간이 빨라짐에 따라 졸곡의 시기도 앞당겨져서, 지금은 초상으로부터 10일 내에 지내는 것이 통례이다. 졸곡 하루 전에 상을 설치하고 기구를 준비하고 찬(:밥과 음식)과<NAME>(:제사에 쓰는 냉수)를 진설하고, 소과(:나물과 과일)와 주찬(:술과 안주)를 진설하고,<NAME>병에는 정화수를 채운다. 축관이 들어와서 신주를 내주면 상주의 형제들은 여막에 가서 막대에 기대 곡을 하고, 참제자들은 제청에 들어와서 존비의 서열에 따라 정렬한다. 축관이 곡을 끝낸[] 뒤, 상주가 손을 씻고[] 영좌 앞에 나와 분향하고 재배한다. 이때 집사자가 상주의 좌측에서 잔을 받들면 상주가 술잔에 술을 따라 집사자에게 준다. 집사자가 잔을 받아 상위에 놓으면 주인은 그 잔을 집어서 모사에 붓는다. 그리고 조금 물러나 강신 재배를 한다. 축관이 어육·적·간·면식·미식·반갱 등을 대접한 뒤 진찬을 차린다. 영좌로 다시 돌아오게 된 상주가 초헌을 하면, 축관이 축판을 들고 주인의 오른쪽 옆에 가서 축문을 읽는다. 상주는 일어나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주부가 아헌을 하고 친빈 중 한 사람이<NAME>을 한다. 집사는<NAME>을 드린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는 첨작을 하고 삽시와 정저를 한 뒤, 모두 밖으로 나가 문을 잠가 합문하고 식간을 한다. 축관이 다시 문을 열고 희흠을 하면 상주와 참제관들이 들어가서 곡을 한 뒤 사신 배례를 한다. 그러고 나서 집사자가 철상(:음식상을 거두어 치우는 일)을 하고 혼백을 깨끗한 땅에 묻는다. 다만 신주를 만들지 못한 경우에는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혼백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때부터 곡을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졸곡 (卒哭) ### 내용: 삼우제를 지낸 뒤 강일(:이 ·····에 당하는 날)에만 졸곡을 지내도록 되어 있고, 초상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뒤에 졸곡을 지내도록 되어 있다. 옛날에는 장사를 지내는 시기가 귀천에 따라 달랐으나 모두 죽은 뒤 3개월이 되어야만 장사를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고, 만약 3개월 전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더라도 졸곡만은 꼭 3개월을 기다려서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장사의 기간이 빨라짐에 따라 졸곡의 시기도 앞당겨져서, 지금은 초상으로부터 10일 내에 지내는 것이 통례이다. 졸곡 하루 전에 상을 설치하고 기구를 준비하고 찬(:밥과 음식)과<NAME>(:제사에 쓰는 냉수)를 진설하고, 소과(:나물과 과일)와 주찬(:술과 안주)를 진설하고,<NAME>병에는 정화수를 채운다. 축관이 들어와서 신주를 내주면 상주의 형제들은 여막에 가서 막대에 기대 곡을 하고, 참제자들은 제청에 들어와서 존비의 서열에 따라 정렬한다. 축관이 곡을 끝낸[] 뒤, 상주가 손을 씻고[] 영좌 앞에 나와 분향하고 재배한다. 이때 집사자가 상주의 좌측에서 잔을 받들면 상주가 술잔에 술을 따라 집사자에게 준다. 집사자가 잔을 받아 상위에 놓으면 주인은 그 잔을 집어서 모사에 붓는다. 그리고 조금 물러나 강신 재배를 한다. 축관이 어육·적·간·면식·미식·반갱 등을 대접한 뒤 진찬을 차린다. 영좌로 다시 돌아오게 된 상주가 초헌을 하면, 축관이 축판을 들고 주인의 오른쪽 옆에 가서 축문을 읽는다. 상주는 일어나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주부가 아헌을 하고 친빈 중 한 사람이<NAME>을 한다. 집사는<NAME>을 드린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는 첨작을 하고 삽시와 정저를 한 뒤, 모두 밖으로 나가 문을 잠가 합문하고 식간을 한다. 축관이 다시 문을 열고 희흠을 하면 상주와 참제관들이 들어가서 곡을 한 뒤 사신 배례를 한다. 그러고 나서 집사자가 철상(:음식상을 거두어 치우는 일)을 하고 혼백을 깨끗한 땅에 묻는다. 다만 신주를 만들지 못한 경우에는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혼백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때부터 곡을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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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8924.txt
부여 홍량리 고분군 (扶餘 鴻良里 古墳群)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강인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468
CC BY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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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홍산 동남록 중턱에 수십 기의 괴석조석실분이 있고, 같은 마을 내에 있는 노적봉 남사면 중턱에도 수십 기의 괴석조 석실분이 있다. 또 비홍산 북맥의 중턱 남사면에 할석조·괴석조 석실분이 3, 4기 자리하고 있다. 사신 사상을 묘지에 반영하기 위해 고분을 둘러싼 평야가 발달되어 있고, 전방에는 금천이 흐르고 있어 다른 지역의 백제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묘지를 선정할 때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홍량리고분군의 북쪽에는 백제의 산성인 비홍산성이 위치해 있고, 인접한 조현리와 무정리에는 지봉산과 둥그산의 남사면에 판석조 석실분이 조성되어 있어 양자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형상 비홍산처럼 높이 200m가 넘는 큰 산 가까이에 있는 곳에는 할석조·괴석조석실분이 많으며, 평야지대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나 구릉에는 판석조 석실분이 많은데, 이는 두 양식의 축조시기의 선후뿐 아니라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부력의 차이를 말해준다. 축조시기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6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부여 홍량리 고분군 (扶餘 鴻良里 古墳群) ### 내용: 비홍산 동남록 중턱에 수십 기의 괴석조석실분이 있고, 같은 마을 내에 있는 노적봉 남사면 중턱에도 수십 기의 괴석조 석실분이 있다. 또 비홍산 북맥의 중턱 남사면에 할석조·괴석조 석실분이 3, 4기 자리하고 있다. 사신 사상을 묘지에 반영하기 위해 고분을 둘러싼 평야가 발달되어 있고, 전방에는 금천이 흐르고 있어 다른 지역의 백제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묘지를 선정할 때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홍량리고분군의 북쪽에는 백제의 산성인 비홍산성이 위치해 있고, 인접한 조현리와 무정리에는 지봉산과 둥그산의 남사면에 판석조 석실분이 조성되어 있어 양자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형상 비홍산처럼 높이 200m가 넘는 큰 산 가까이에 있는 곳에는 할석조·괴석조석실분이 많으며, 평야지대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나 구릉에는 판석조 석실분이 많은데, 이는 두 양식의 축조시기의 선후뿐 아니라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부력의 차이를 말해준다. 축조시기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6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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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57205.txt
가야문화축제 (伽倻文化祝祭)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141
CC BY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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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건국한 가야국의 문화를 되새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군 단위 행사이다. 가야 문화축제는 2007년부터 진행되는데, 1962년부터 춘향대제일(: 수로왕의 제례일인 음력 3월 15일)에 열렸던 가락문화제와 2005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적으로 추진했던 가야 세계 문화 축전을 통합한 것이다. 1962∼1966년까지는 욕제(가야 시대 수로왕과 관련한 탄강, 건국, 결혼 등의 행사)를 중심으로 길놀이와 전통문화 예술 관련 행사 등이 있었다. 1982년부터는 가야사 학술발표회나 선발대회, 또는 석전놀이 등이 추가되었고, 1983년 복원 작업을 거쳐 김해 가락오광대와 1990년 제1회 전국가야금 경연 대회가 추가되었다. 1999년 이후 행사 규모가 커지기 시작해 30∼40개 종목으로 늘어났고, 2007년 가야 문화축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52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이 시기에 신설된 종목은 제1회 영남 탈춤 제였고 농악경연 대회 등 주요 행사로 자리 잡았다. 공식행사, 민속행사, 축제 행사, 체험행사, 설치 행사, 연계행사, 부대행사 등 7가지 행사가 있다. 공식행사로는 김수로왕의 탄강 지인 구지봉에서 고유제와 혼불을 채화·봉송·안치하는 의식, 1963년 사적에 지정된 김해 수로왕릉 숭선전에서 올리는 춘향대제, 수로왕 행차와 개폐막제가 있다. 장유화상 추모제(가락국에 불교를 전한 허황옥의 오빠 허보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행사)와 가야 농악경연 대회, 민속윷놀이 대회와 김해 석전놀이 등의 민속행사가 있다. 아시아 공연한 마당, 김해 예술인 축하무대, 가야 복식 패션쇼 등이 축제 행사에 포함되어 있고, 가야 고을 조성, 유물 찾기, 순장 체험, 가야 철기/대장간, 가야 병영체험, 김수로/허 황후 뱃길 체험 등이 체험행사에 포함되어 있다. 설치 행사는 가야 테마유등 설치, 가야문양군점깃발설치, LED 구조물을 설치한 루미나리에 포토존 등이 있고, 연계행사로는 아시아 7개국 의상을 체험하는 다문화 어울림마당, 중소기업의 제품을 알리는 우리 고장 우수 제품 전시/판매전,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춘향대제, 제21회 가야사 국제 학술회의, 가야 차 문화한마당, 제5회 전국 가야 음식 개발 경연 대회, 식품박람회 등이 있다. 전국학생 미술 실기대회, 전국한시백일장, 동화 구연대회, 전국 백일장, 전국학생음악 경연 대회, 전국웅변대회, 전국사진 공모전, 제32회 전국 정가경창대회 등이 부대행사이다. 대성동 고분군, 수릉원, 가야의 거리에서 이천년의 금관가야 세계 속의 빛으로라는 주제로 4월 29일부터 5월 3일까지 5일간 개최된 2015년 제39회 가야 문화축제는 김해시가 주최하고 (사) 가야 문화축제제전위원회가 주관했다. 김수로왕의 가락국 건국과 5백여 년의 찬란했던 철기문화의 유산을 계승하고 세계 각국에 가야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가야문화축제 (伽倻文化祝祭) ### 내용: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건국한 가야국의 문화를 되새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군 단위 행사이다. 가야 문화축제는 2007년부터 진행되는데, 1962년부터 춘향대제일(: 수로왕의 제례일인 음력 3월 15일)에 열렸던 가락문화제와 2005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적으로 추진했던 가야 세계 문화 축전을 통합한 것이다. 1962∼1966년까지는 욕제(가야 시대 수로왕과 관련한 탄강, 건국, 결혼 등의 행사)를 중심으로 길놀이와 전통문화 예술 관련 행사 등이 있었다. 1982년부터는 가야사 학술발표회나 선발대회, 또는 석전놀이 등이 추가되었고, 1983년 복원 작업을 거쳐 김해 가락오광대와 1990년 제1회 전국가야금 경연 대회가 추가되었다. 1999년 이후 행사 규모가 커지기 시작해 30∼40개 종목으로 늘어났고, 2007년 가야 문화축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52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이 시기에 신설된 종목은 제1회 영남 탈춤 제였고 농악경연 대회 등 주요 행사로 자리 잡았다. 공식행사, 민속행사, 축제 행사, 체험행사, 설치 행사, 연계행사, 부대행사 등 7가지 행사가 있다. 공식행사로는 김수로왕의 탄강 지인 구지봉에서 고유제와 혼불을 채화·봉송·안치하는 의식, 1963년 사적에 지정된 김해 수로왕릉 숭선전에서 올리는 춘향대제, 수로왕 행차와 개폐막제가 있다. 장유화상 추모제(가락국에 불교를 전한 허황옥의 오빠 허보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행사)와 가야 농악경연 대회, 민속윷놀이 대회와 김해 석전놀이 등의 민속행사가 있다. 아시아 공연한 마당, 김해 예술인 축하무대, 가야 복식 패션쇼 등이 축제 행사에 포함되어 있고, 가야 고을 조성, 유물 찾기, 순장 체험, 가야 철기/대장간, 가야 병영체험, 김수로/허 황후 뱃길 체험 등이 체험행사에 포함되어 있다. 설치 행사는 가야 테마유등 설치, 가야문양군점깃발설치, LED 구조물을 설치한 루미나리에 포토존 등이 있고, 연계행사로는 아시아 7개국 의상을 체험하는 다문화 어울림마당, 중소기업의 제품을 알리는 우리 고장 우수 제품 전시/판매전,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춘향대제, 제21회 가야사 국제 학술회의, 가야 차 문화한마당, 제5회 전국 가야 음식 개발 경연 대회, 식품박람회 등이 있다. 전국학생 미술 실기대회, 전국한시백일장, 동화 구연대회, 전국 백일장, 전국학생음악 경연 대회, 전국웅변대회, 전국사진 공모전, 제32회 전국 정가경창대회 등이 부대행사이다. 대성동 고분군, 수릉원, 가야의 거리에서 이천년의 금관가야 세계 속의 빛으로라는 주제로 4월 29일부터 5월 3일까지 5일간 개최된 2015년 제39회 가야 문화축제는 김해시가 주최하고 (사) 가야 문화축제제전위원회가 주관했다. 김수로왕의 가락국 건국과 5백여 년의 찬란했던 철기문화의 유산을 계승하고 세계 각국에 가야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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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POL9492.txt
남조선노동당 (南朝鮮勞動黨)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창순"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156
CC BY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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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남로당이라고 한다.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945년 8월 16일영 · 정백 등의 구 서울계와 안기성 ·<NAME> · 조두원 등의 구 화요계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같은 날 최익한 · 이우적 · 하필원 등의 일본 유학생 출신 구 ML 파는 따로 모여 또 하나의 조선공산당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지만 양자는 거의 다 과거 조선공산당 운동 선상에서 일찌감치 탈락하여 청산파적 입장이었거나 전향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극소수만이 해당분자들로서 함께 했다. 따라서, 이들은 두 개의 조선공산당으로 갈라져야 할 원칙적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곧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공산당으로<NAME>을 갖추게 되었다. 1945년 8월 20일에는 박헌영을 옹립하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 위원회가 출범하였고, 박헌영을 비롯하여 김형선 · 김삼룡 · 이관술 ·<NAME>상 · 이주하 ·<NAME> 등은 모두 국내외에서 지조를 지켜 전향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통적 조선공산당이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해체되고 재건 단계에 들어간 이래 그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8 · 15광복의 합법 사회가 도래하였다고 하더라도 몇몇 사람들만의 회합으로 별안간에 조선공산당 결성을 끝낼 것이 아니라, 일정한 당재건준비기간을 두고 국내외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정식으로 당 건설에 착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945년 8월 24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고 당을 해산하기로 결의하였고, 조선공산당 재건과 당 중앙건설에 대한 전권을 박헌영에게 넘겼으며, 박헌영은 1945년 9월 8일 최종적으로 당 중앙건설에 대한 전권을 박헌영에게 넘겼다. 박헌영은 달 11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 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 또는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발족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한편, 1945년 10월 10일∼13일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소련군정은 이 결의에 따라 북한 점령지역의 소련 이익 대변자로 김일성을 내세우고, 북한 지역에 한한 공산당 중앙을 만들어 김일성을 그 정상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로 한 것은, 오기섭 · 정달헌 등 북한 지역의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1국 1당 원칙을 완고하게 내세우며 서울에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서울에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따로 조선공산당 중앙을 설치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1945년 10월 23일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평양의 북조선분국을 승인하였고, 이 분국은 이듬해 12월 17일과 18일에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김일성을 분국의 책임비서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국토 분열을 겪고 있는 박헌영의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은 1국 1당의 전일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조직 체계상 박헌영의 지휘하에 들어간 김일성 일파는 북한 지역만의 조선공산당 중앙을 고집하며 1946년 4월부터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북조선공산당은 같은 해 8월 28일∼30일에 조선신민당과의 합당대회를 개최하여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하고 서울의 조선공산당과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로써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1국 1당적 전일성은 붕괴되었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은 이 당의 북조선분국이 어느새 북조선공산당으로 독립한 뒤 조선신민당과 합당하고 북조선 노동당으로 새로이 발족하게 되자, 남한에서도 좌익세력을 총집결하기 위하여 여운형(呂運亨)이 당수로 있던 조선 인민당(朝鮮人民黨) 및 백남운(白南雲)이 당수로 있던 남조선신민당(南朝鮮新民黨) 과의 3당 합당 공작에 착수하였다. 1946년 9월 4일에는 3당 합동 준비 위원회<NAME>회의가 열렸고, 합당 결정서와 선언 및 강령이 채택되었으며, 남조선 노동당 준비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3당 합당은 급진적 합당 추진파와 합리적 합당 추진파 사이의 대립으로 인해 공산당을 강화, 재편성하는 데 불과하다는 비판에 의해 3당 내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결국,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과 그의 지지파는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하였는데, 남조선 노동당은 1945년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946년의 9월 총파업 사건과 10월 폭동 사건 등 조선공산당 시대의 투쟁을 이어받아, 1947년의 3 · 1절 충돌 사건, 8 · 15폭동, 1948년의 2 · 7총선 방해 투쟁, 4 · 3투쟁(제주도 무장투쟁), 여수 · 순천 반란 사건, 1949년의 국회프락치사건 등 정치 ·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기 위하여 파괴활동을 지속하다가, 대부분의 간부는 검거를 모면하기 위하여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남한지역 인민 대표자 대회 대의원은 1948년 8월 25일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해 북한에서 제1차로 실시한 총선거 때 1,080명이었다. 또한 남한 출신 360명을<NAME>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하였는데, 이는 남북한 인구 5만 명 당 1명의 대의원 선거였기 때문에 북한 지역의 212명보다 많았다. 이 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제1차 김일성 내각에 남로당은 부수상 겸 외상으로 박헌영을 비롯하여 농림에<NAME>(朴文圭), 사법에<NAME>, 노동에<NAME>(許成澤), 보건에 이병남(李炳南) 등의 각료직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 밖에 최고인민회의의 의장에 허헌(許憲)이 됨으로써 수상 김일성의 지도체제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에 도피한 남로당원은 희망에 따라 북조선 노동당(약칭 북로당)에 입당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남로당 세력은 감소되었고, 마침내 1949년 6월 평양에서 남북 노동당의 합당 조처가 취하여짐으로써 조선노동당의 명칭으로 일체화되었는데, 실제로는 북조선 노동당 체제에 남로당이 흡수, 해체되고 말았다. 광복 직후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 시대 때 양인의 상하관계는 완전히 바뀌었는데, 종전에는 북조선 노동당의 부위원장이던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의 위원장이 되고 박헌영이 복수 부위원장 제의 부위원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남로당 세력은 1953년 8월 3일부터 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최고 재판소 특별군사재판 때<NAME> · 이강국(李康國) · 임화(林和) · 조일 명(趙一明) ·<NAME>(朴勝源) · 배철(裵哲) · 설정식(薛貞植) · 맹종호(孟鐘鎬) · 조용복(趙鏞福) · 백형복(白亨福) 등 10명은 사형, 윤순달(尹淳達)과 이원조(李源朝)는 각각 15년과 1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김일성 집단은 남로당계 간부들을 일소했고,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이들과는 격리된 최고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집행하였다.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의 죄명은 대부분 정권 전복 음모와 미 제국 주의를 위한 간첩행위로 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당내에서 가장 강력한 숙적인 박헌영과 그의 추종세력을 이와 같이 소탕함으로써 6 · 25전쟁의 패인을 남로당계의 간첩행위로 돌리는 일거양득의 이득을 노렸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남조선노동당 (南朝鮮勞動黨) ### 내용: 약칭 남로당이라고 한다.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945년 8월 16일영 · 정백 등의 구 서울계와 안기성 ·<NAME> · 조두원 등의 구 화요계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같은 날 최익한 · 이우적 · 하필원 등의 일본 유학생 출신 구 ML 파는 따로 모여 또 하나의 조선공산당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지만 양자는 거의 다 과거 조선공산당 운동 선상에서 일찌감치 탈락하여 청산파적 입장이었거나 전향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극소수만이 해당분자들로서 함께 했다. 따라서, 이들은 두 개의 조선공산당으로 갈라져야 할 원칙적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곧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공산당으로<NAME>을 갖추게 되었다. 1945년 8월 20일에는 박헌영을 옹립하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 위원회가 출범하였고, 박헌영을 비롯하여 김형선 · 김삼룡 · 이관술 ·<NAME>상 · 이주하 ·<NAME> 등은 모두 국내외에서 지조를 지켜 전향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통적 조선공산당이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해체되고 재건 단계에 들어간 이래 그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8 · 15광복의 합법 사회가 도래하였다고 하더라도 몇몇 사람들만의 회합으로 별안간에 조선공산당 결성을 끝낼 것이 아니라, 일정한 당재건준비기간을 두고 국내외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정식으로 당 건설에 착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945년 8월 24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고 당을 해산하기로 결의하였고, 조선공산당 재건과 당 중앙건설에 대한 전권을 박헌영에게 넘겼으며, 박헌영은 1945년 9월 8일 최종적으로 당 중앙건설에 대한 전권을 박헌영에게 넘겼다. 박헌영은 달 11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 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 또는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발족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한편, 1945년 10월 10일∼13일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소련군정은 이 결의에 따라 북한 점령지역의 소련 이익 대변자로 김일성을 내세우고, 북한 지역에 한한 공산당 중앙을 만들어 김일성을 그 정상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로 한 것은, 오기섭 · 정달헌 등 북한 지역의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1국 1당 원칙을 완고하게 내세우며 서울에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서울에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따로 조선공산당 중앙을 설치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1945년 10월 23일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평양의 북조선분국을 승인하였고, 이 분국은 이듬해 12월 17일과 18일에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김일성을 분국의 책임비서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국토 분열을 겪고 있는 박헌영의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은 1국 1당의 전일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조직 체계상 박헌영의 지휘하에 들어간 김일성 일파는 북한 지역만의 조선공산당 중앙을 고집하며 1946년 4월부터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북조선공산당은 같은 해 8월 28일∼30일에 조선신민당과의 합당대회를 개최하여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하고 서울의 조선공산당과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로써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1국 1당적 전일성은 붕괴되었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은 이 당의 북조선분국이 어느새 북조선공산당으로 독립한 뒤 조선신민당과 합당하고 북조선 노동당으로 새로이 발족하게 되자, 남한에서도 좌익세력을 총집결하기 위하여 여운형(呂運亨)이 당수로 있던 조선 인민당(朝鮮人民黨) 및 백남운(白南雲)이 당수로 있던 남조선신민당(南朝鮮新民黨) 과의 3당 합당 공작에 착수하였다. 1946년 9월 4일에는 3당 합동 준비 위원회<NAME>회의가 열렸고, 합당 결정서와 선언 및 강령이 채택되었으며, 남조선 노동당 준비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3당 합당은 급진적 합당 추진파와 합리적 합당 추진파 사이의 대립으로 인해 공산당을 강화, 재편성하는 데 불과하다는 비판에 의해 3당 내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결국,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과 그의 지지파는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하였는데, 남조선 노동당은 1945년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946년의 9월 총파업 사건과 10월 폭동 사건 등 조선공산당 시대의 투쟁을 이어받아, 1947년의 3 · 1절 충돌 사건, 8 · 15폭동, 1948년의 2 · 7총선 방해 투쟁, 4 · 3투쟁(제주도 무장투쟁), 여수 · 순천 반란 사건, 1949년의 국회프락치사건 등 정치 ·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기 위하여 파괴활동을 지속하다가, 대부분의 간부는 검거를 모면하기 위하여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남한지역 인민 대표자 대회 대의원은 1948년 8월 25일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해 북한에서 제1차로 실시한 총선거 때 1,080명이었다. 또한 남한 출신 360명을<NAME>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하였는데, 이는 남북한 인구 5만 명 당 1명의 대의원 선거였기 때문에 북한 지역의 212명보다 많았다. 이 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제1차 김일성 내각에 남로당은 부수상 겸 외상으로 박헌영을 비롯하여 농림에<NAME>(朴文圭), 사법에<NAME>, 노동에<NAME>(許成澤), 보건에 이병남(李炳南) 등의 각료직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 밖에 최고인민회의의 의장에 허헌(許憲)이 됨으로써 수상 김일성의 지도체제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에 도피한 남로당원은 희망에 따라 북조선 노동당(약칭 북로당)에 입당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남로당 세력은 감소되었고, 마침내 1949년 6월 평양에서 남북 노동당의 합당 조처가 취하여짐으로써 조선노동당의 명칭으로 일체화되었는데, 실제로는 북조선 노동당 체제에 남로당이 흡수, 해체되고 말았다. 광복 직후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 시대 때 양인의 상하관계는 완전히 바뀌었는데, 종전에는 북조선 노동당의 부위원장이던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의 위원장이 되고 박헌영이 복수 부위원장 제의 부위원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남로당 세력은 1953년 8월 3일부터 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최고 재판소 특별군사재판 때<NAME> · 이강국(李康國) · 임화(林和) · 조일 명(趙一明) ·<NAME>(朴勝源) · 배철(裵哲) · 설정식(薛貞植) · 맹종호(孟鐘鎬) · 조용복(趙鏞福) · 백형복(白亨福) 등 10명은 사형, 윤순달(尹淳達)과 이원조(李源朝)는 각각 15년과 1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김일성 집단은 남로당계 간부들을 일소했고,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이들과는 격리된 최고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집행하였다.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의 죄명은 대부분 정권 전복 음모와 미 제국 주의를 위한 간첩행위로 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당내에서 가장 강력한 숙적인 박헌영과 그의 추종세력을 이와 같이 소탕함으로써 6 · 25전쟁의 패인을 남로당계의 간첩행위로 돌리는 일거양득의 이득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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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17184.txt
백하수오이중탕 (白何首烏理中湯)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송일병"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440
CC BY
133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소음인의 이한 병은 소음인이 비위(脾胃)의 기운이 부족한 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로 인해 이음(裡陰)이 제대로 하강하지 못하여 생기는 병증이다. 위수한이한병(胃受寒裡寒病)은 크게 태음복통증(太陰腹痛證)과 소음 하리증(少陰下痢證)으로 나뉘는데, 이 처방은 태음복통증에 사용하는 처방으로 태음증은 복통과 설사가 있으면서 구갈(口渴)은 없고 식욕은 정상인 증후군을 말한다.백하수오·백작약·계지·건강[] 각 7.5g, 진피·감초[] 각 3.75g으로 처방의 구성은 짜여 있다. 소음인의 적응증은 태음증·중서·서체·냉채·회충·서설·허설 등이다. 이 처방은 이중탕에 계지·작약·진피를 가하고 인삼을 백하수오로 바꾼 것이다. 인삼과 백하수오는 서로 대용할 수 있는 약물이고 인삼에 비하여 백하수오가 온보(溫補: 성질이 더워 허한증을 보함) 하는 힘이 강하므로 바꾼 것이며, 조화영위(調和營衛: 풍사를 몰아내고 영위를 조화시킴) 할 목적으로 계지를, 통체순기(通滯順氣: 막힌 것을 통하게 하여 기를 순조롭게 함) 할 목적으로 백작약·진피를 각각 첨가한 것이다. 또한 백하수오부자이중탕에서 부자 한 가지 약물을 뺀 처방으로 한증이 심하지 않은 상태에 적용하는 것이 좋다. 이 처방에 대산 7.5g, 산사 3.75g을 첨가하면 소음인의 내상으로 인한 설사를 치료할 수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백하수오이중탕 (白何首烏理中湯) ### 내용: 소음인의 이한 병은 소음인이 비위(脾胃)의 기운이 부족한 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로 인해 이음(裡陰)이 제대로 하강하지 못하여 생기는 병증이다. 위수한이한병(胃受寒裡寒病)은 크게 태음복통증(太陰腹痛證)과 소음 하리증(少陰下痢證)으로 나뉘는데, 이 처방은 태음복통증에 사용하는 처방으로 태음증은 복통과 설사가 있으면서 구갈(口渴)은 없고 식욕은 정상인 증후군을 말한다.백하수오·백작약·계지·건강[] 각 7.5g, 진피·감초[] 각 3.75g으로 처방의 구성은 짜여 있다. 소음인의 적응증은 태음증·중서·서체·냉채·회충·서설·허설 등이다. 이 처방은 이중탕에 계지·작약·진피를 가하고 인삼을 백하수오로 바꾼 것이다. 인삼과 백하수오는 서로 대용할 수 있는 약물이고 인삼에 비하여 백하수오가 온보(溫補: 성질이 더워 허한증을 보함) 하는 힘이 강하므로 바꾼 것이며, 조화영위(調和營衛: 풍사를 몰아내고 영위를 조화시킴) 할 목적으로 계지를, 통체순기(通滯順氣: 막힌 것을 통하게 하여 기를 순조롭게 함) 할 목적으로 백작약·진피를 각각 첨가한 것이다. 또한 백하수오부자이중탕에서 부자 한 가지 약물을 뺀 처방으로 한증이 심하지 않은 상태에 적용하는 것이 좋다. 이 처방에 대산 7.5g, 산사 3.75g을 첨가하면 소음인의 내상으로 인한 설사를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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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37713.txt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민길자"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209
CC BY
166
{ "main": "문어체", "middle": "사회", "sub": "" }
전과 담 등도 전과 같다. 깔개·모자·어련·가마 등의 덮개와 전 등에 전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짐승의 털가죽을 복식자료로 사용하였고, 삼국시대와 그 이후에는 모직물인 계를 많이 사용했다. 신라에서는 오색 구유를 만들어 당나라에 보내는 공예품의 깔개로 사용했고, 백제에서는 낙타와 양을 일본에 보낸 기록이 있어 일찍이 양모와 기타 동물의 모를 이용하였음이 드러난다. 일본의 쇼소원에는 신라와의 교역품인 화전이 다수 수장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량이 신라와의 교역품일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 시대에는 거란에서 양 1000마리를 들여온 기록이 있다. 또 1101년(숙종 6)에는 여진의 전공(氊工)인 고사모(古舍毛) 등 6인이 귀화하자 토지와 집을 주고 호적에 올려주어 전을 제조하게 하였던 기록도 있어 고려 시대의 전 제조의 상태가 나타난다. 『고려사절요』에는 922년(태조 5)에 거란으로부터 전을 가져온 기록도 있어 국내의 제조품 외에 수입품도 사용되었음이 나타난다. 『동국통감』에는 943년 청전 필 석(靑氈必席)의 기록이 있으며, 1231년(고종 18)의 기록에는 전려(氈廬)의 기록도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송상(宋商)이 가마를 금은 금수로 장식하고, 오색 전으로 덮어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전 모(氈帽)의 기록도 있으며, 『연행록 선집』에도 조선시대의 의복제도에 전립(氈笠)의 기록이 있다. 상방 정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전장이 경공장에 존재하여 양모전·홍전·남전·흑전 등 다양한 종류의 전이 제조되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전 ### 내용: 전과 담 등도 전과 같다. 깔개·모자·어련·가마 등의 덮개와 전 등에 전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짐승의 털가죽을 복식자료로 사용하였고, 삼국시대와 그 이후에는 모직물인 계를 많이 사용했다. 신라에서는 오색 구유를 만들어 당나라에 보내는 공예품의 깔개로 사용했고, 백제에서는 낙타와 양을 일본에 보낸 기록이 있어 일찍이 양모와 기타 동물의 모를 이용하였음이 드러난다. 일본의 쇼소원에는 신라와의 교역품인 화전이 다수 수장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량이 신라와의 교역품일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 시대에는 거란에서 양 1000마리를 들여온 기록이 있다. 또 1101년(숙종 6)에는 여진의 전공(氊工)인 고사모(古舍毛) 등 6인이 귀화하자 토지와 집을 주고 호적에 올려주어 전을 제조하게 하였던 기록도 있어 고려 시대의 전 제조의 상태가 나타난다. 『고려사절요』에는 922년(태조 5)에 거란으로부터 전을 가져온 기록도 있어 국내의 제조품 외에 수입품도 사용되었음이 나타난다. 『동국통감』에는 943년 청전 필 석(靑氈必席)의 기록이 있으며, 1231년(고종 18)의 기록에는 전려(氈廬)의 기록도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송상(宋商)이 가마를 금은 금수로 장식하고, 오색 전으로 덮어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전 모(氈帽)의 기록도 있으며, 『연행록 선집』에도 조선시대의 의복제도에 전립(氈笠)의 기록이 있다. 상방 정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전장이 경공장에 존재하여 양모전·홍전·남전·흑전 등 다양한 종류의 전이 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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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6699.txt
박천 덕성리 고분 (博川 德成里 古墳)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현종"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59
CC BY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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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 신의주 역사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유적의 주변에는 이러한 벽돌무덤[] 외에 벽돌과 돌을 섞어 쌓은 무덤, 돌방무덤[] 등의 다양한 고분들이 있다. 흑색 운모와 장석이 많이 섞인 화강암반의 생토를 파고 축조된 이 무덤은 3기의 벽돌무덤 가운데 제1호 무덤이다. 전실과 후실의 두 방과 입구인 연도로 이루어져 있다. 무덤의 방향은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전실은 남북으로 긴 네모꼴이고 후실은 동서로 긴 네모꼴이다. 전실의 서쪽 가운데에 달린 연도는 붉은색의 차진 점토와 섞어서 메웠다. 전실과 후실의 서쪽 모서리에는 약간 높게 대가 설치되었다. 전실과 후실 사이에는 너비 30cm의 벽돌로 쌓은 사이 벽[]이 있다. 사이 벽 중간에는 너비 76cm의 통로가 있는데, 이 통로는 전실과 후실을 연결한다. 천장은 파괴되어 확실하지 않지만 돔식으로 보인다. 특히, 무덤방의 평면은 배부른 긴 네모꼴로 흙의 외압을 막기 위해 벽면을 바깥쪽으로 기울여서 흙의 외압을 막았다. 바닥에는 벽돌을 두 겹으로 깔았다. 바닥 위의 재층[]에서는 오수전, 옥돈 등의 각종 장옥, 청동 대구, 철기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문 양 벽돌·기와·회백색의 도기 조각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평양 부근의 중국계 무덤과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은 청천강 이북 평안북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벽돌무덤으로 우리나라 고분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무덤의 형태도 벽 없이 바로 연장된 전후 2실<NAME>으로 변하여 전실의 측실을 보여준다. 이 무덤은 1∼3세기의 낙랑 시대 무덤으로 추정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박천 덕성리 고분 (博川 德成里 古墳) ### 내용: 1957년에 신의주 역사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유적의 주변에는 이러한 벽돌무덤[] 외에 벽돌과 돌을 섞어 쌓은 무덤, 돌방무덤[] 등의 다양한 고분들이 있다. 흑색 운모와 장석이 많이 섞인 화강암반의 생토를 파고 축조된 이 무덤은 3기의 벽돌무덤 가운데 제1호 무덤이다. 전실과 후실의 두 방과 입구인 연도로 이루어져 있다. 무덤의 방향은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전실은 남북으로 긴 네모꼴이고 후실은 동서로 긴 네모꼴이다. 전실의 서쪽 가운데에 달린 연도는 붉은색의 차진 점토와 섞어서 메웠다. 전실과 후실의 서쪽 모서리에는 약간 높게 대가 설치되었다. 전실과 후실 사이에는 너비 30cm의 벽돌로 쌓은 사이 벽[]이 있다. 사이 벽 중간에는 너비 76cm의 통로가 있는데, 이 통로는 전실과 후실을 연결한다. 천장은 파괴되어 확실하지 않지만 돔식으로 보인다. 특히, 무덤방의 평면은 배부른 긴 네모꼴로 흙의 외압을 막기 위해 벽면을 바깥쪽으로 기울여서 흙의 외압을 막았다. 바닥에는 벽돌을 두 겹으로 깔았다. 바닥 위의 재층[]에서는 오수전, 옥돈 등의 각종 장옥, 청동 대구, 철기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문 양 벽돌·기와·회백색의 도기 조각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평양 부근의 중국계 무덤과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은 청천강 이북 평안북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벽돌무덤으로 우리나라 고분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무덤의 형태도 벽 없이 바로 연장된 전후 2실<NAME>으로 변하여 전실의 측실을 보여준다. 이 무덤은 1∼3세기의 낙랑 시대 무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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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4125.txt
모과차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상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445
CC BY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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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각막 병에 특효가 있어 예로부터 약재로 사용해왔으며 토사·기관지염·폐결핵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과 차는 말린 모과를 끓여서 마시는 방법과, 끓는 물에 모과를 타서 마시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모과를 말려서 보관할 때는 잘 익은 모과를 골라 얇게 썰어 햇볕에 잘 말린다. 마른 모과를 물에 넣고 달여 먹거나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마셔도 좋다. 모과의 즙은 중탕을 해서 만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얇게 저민 모과를 꿀이나 설탕에 재운 뒤 항아리 또는 병에 넣어<NAME>한 그늘에 보관하여 추출해낸다. 항아리에 고인 즙과 모과편 한두 개를 끓인 물에 넣고 꿀이나 설탕을 넣어 마신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모과차 ### 내용: 특히 각막 병에 특효가 있어 예로부터 약재로 사용해왔으며 토사·기관지염·폐결핵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과 차는 말린 모과를 끓여서 마시는 방법과, 끓는 물에 모과를 타서 마시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모과를 말려서 보관할 때는 잘 익은 모과를 골라 얇게 썰어 햇볕에 잘 말린다. 마른 모과를 물에 넣고 달여 먹거나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마셔도 좋다. 모과의 즙은 중탕을 해서 만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얇게 저민 모과를 꿀이나 설탕에 재운 뒤 항아리 또는 병에 넣어<NAME>한 그늘에 보관하여 추출해낸다. 항아리에 고인 즙과 모과편 한두 개를 끓인 물에 넣고 꿀이나 설탕을 넣어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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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8556.txt
김해 부원동 유적 (金海 府院洞 遺蹟)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0980
CC BY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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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패총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은 남산 서쪽 기슭의 패총 지역(A 지구), 동쪽 삼정동과 경계하고 있는 패총 지역(B 지구), 동쪽의 민무늬토기 산포 지역(C 지구)으로 구분하여 1980년 4월 10일부터 약 4개월 동안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A 지구 A 지구 A 지구의 조가비는 능선의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퇴적되어 있었다. 기반층 위에 5층의 퇴적층이 확인되었다. 제 Ⅰ층은 약 50㎝ 두께의 경작층(耕作層)이고, 제 Ⅱ층은 약 20㎝ 두께의 순수 패각층이며, 제 Ⅲ층은 조가비가 약간씩 섞인 흑갈색 부식토층(腐植土層)이고, 제 Ⅳ층은 다시 40∼50㎝ 두께의 순수 조가비층이며, 제 Ⅴ층은 생토층 바로 위로 50㎝ 두께의 흑갈색과 적갈색이 교차로 형성된 부식토층이다.각 층위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은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종류는 대체로 같다. 토기·철기·골각기·석기·탄화곡물 등이 나왔다. 조가비층 아래 바닥층에서는 집터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집터는 3기 모두 패총의 최하층인 제 V 층의 부식토층에 조성되었으며, 원형의 움집터[]·방형의 반움집터[]·주춧돌을 가진 장방형의 누각 집자리[]로 구분된다. 그중 제1호는 집터 옆에 지하 저장고가 있고 중앙에는 부엌이 있었으나, 나머지 제2호와 3호는 없었다. 돌널무덤과 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제 IV 층의 조가비층에서 발견된 돌널무덤과 최하층의 생토층에서 발견된 널무덤이 있다. 회청색의 항아리 토기와 적갈색의 바리 토기·붉은 간 토기가 부장품으로 나왔다. 조가비층에서 가장 많이 나온 유물은 토기이다. 회청색과 적갈색, 소성도에 따라 경질과 연질로 구분되며, 경질이 다수 출토되었다. 항아리·독·바리·굽 그릇·잔 등의 일반적인 토기는 물론이고, 복어·쇠뿔 모양의 이형 토기와 말·성기와 같은 이형 토기와 말·성기 등 다양한 토우도 발견됐다. 평균적으로 적갈색과 회청색 토기의 비율은 2:1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적갈색 토기의 비율이 높다. 또한 신라 토기와 이 단구 연호형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경주와 일본 구주 지방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는 수적으로도 많지 않았지만 손칼·화살촉·창·낚싯바늘·송곳 등 주로 수렵이나 어로용의 생활용구였다. 골각기는 사슴뿔로 만든 칼자루와 뼈로 만든 찌르개·활촉·바늘, 산돼지의 이빨로 만든 장식품, 사슴뿔로 만든 어깨뼈와 사슴뿔로 만든 점 뼈 등이 발견되었다.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에서 발견된 점 뼈는 당시의 풍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중국과 일본의 점 뼈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숫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도끼·반달돌칼 등도 출토되었다. 탄화곡물은 쌀·보리·밀·조·복숭아씨 등에서 나왔다. 쌀은 폭비 1.61의 단립형이고, 보리는 겉보리와 쌀보리 두 종류가 있으며, 복숭아씨는 재래종, 밀은 산 복숭아처럼 낟알이 굵고, 보리는 쌀보리와 겉보리 두 종류가 있었다. 해수산인 굴을 비롯해 백합 등 30여 종의 조가비가 존재했지만 담수산은 한두 종에 불과했다. 또한 조가비와 함께 발견된 짐승 뼈는 말·소·산돼지·사슴 등의 몸 뼈와 이빨·뿔 등이었다. 그중에는 점 뼈·칼 손잡이·장식품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손질한 것들도 있었다. A 지구에서는 움집이나 반움집 가옥에서 생활하면서 인근 해안가에서 조개를 채집해 먹고, 낙랑·일본 등 다른 지역과의 문화교류가 빈번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원삼국시대 후기인 3~4세기 경인 것으로 추측된다. B 지구에서 왔다 남산 동쪽 기슭의 약간 높은 곳에 B 지구가 있다. 퇴적층은 조가비층 위에 논밭과 일반 무덤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교란돼 바닥층 일부만 남아 있었다. 황갈색 생토층 위에는 5층의 퇴적층이 존재했는데 길이 40m, 너비 4m 크기의 조가비층이다. 맨 위의 제 I 층은 부식토층, 제 II 층은 황갈색 사질토층, 제 IV 층은 조가비층, 제 V 층은 흑갈색 부식토층이었다. 하지만 황갈색 사질토층(제III층) 아래 제 IV 층과 제 V 층이 후대에 재퇴적된 교란층이었다. 토기·골각기·석기·탄화미 등 생활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고, 별다른 생활 유구는 없었다. 토기는 주로 제 IV 층과 제 V 층에서 출토되었다. 회청색 계통 토기와 적갈색 계통 토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적갈색 토기도 민무늬토기의 특징을 닮은 모래흙의 연질 토기가 많았고, 회청색 토기도 연질 계통의 토기가 많았다. 토기는 항아리·독·잔·굽 그릇·접시 등 단조로운 것이었다. 그 밖에 가락 바퀴·그물추·토옥 등의 일반 생활용품과 사슴뿔이나 그 뼈·이빨과 산돼지 뼈나 그 이빨로 제작된 칼자루·찌르개·화살촉·장신구, 사슴뿔이나 그 뼈·이빨로 제작된 칼자루·찌르개·화살촉·장신구 등이 있다. 단립형 탄화 미도 나왔는데, 장폭비 1.51이다. B 지구 주민들은 A 지구보다 이른 1~2세기 경의 농경민족으로 추정되며, 문헌상에 보이는 가락국 형성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C 지구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표토 아래 약 1.5m 깊이의 깊이에서 원형의 움집터 3기와 물고랑이 발견된 곳은 C 지구와 인접해 있는 경작지이다. 그 아래 퇴적층에는 토기·철기·골각기·석기·탄화곡물 등이 있었다. 집터 3기는 중앙에 위치한 단면 V자형의 물고랑을 중심으로 그 좌측에는 제1호와 2호의 집터가, 우측에는 제3호의 집터가 각각 위치해 있었다. 집터는 평면이 원형으로 서남쪽에 부엌을 두고 실내에 배수구를 배치한 반움집터이다. 제2호 집터에서는 점 뼈가 나왔다. 이와 같이 C 지구에서 발견된 집터는 모두 원형의 움집이다. 화덕자리는 서남쪽에 위치했으나 홍수로 인해 부서진 것으로 보인다. 화덕자리의 위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변진에서는 집의 서쪽에 화덕을 둔다. 는 기록과 일치해 주목된다. 유물 중 연질 토기와 적갈색 계통의 연질 토기가 주를 이룬다. 항아리·독·바리·굽 그릇·이형 토기 등 B 지구 출토품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C 지구 주민들이 B 지구 퇴적층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 외에 가락 바퀴와 그물 추가 있다. 원판형과 산주형으로 된 가락 바퀴가 있다. 그물 추는 구상과 관상의 두 종류가 있다. 철기는 주조 쇠도끼 1점이, 골각기는 칼자루·점 뼈·골촉이, 석기는 홈 자귀·갈돌·돌도끼·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탄화곡물은 주로 가을에 수확하는 것으로 장폭비 1.73의 단립형 쌀과 팥 껍질·머루 씨앗 등이 발견되었다. C 지구의 주민도 B 지구와 마찬가지로 1~2세기경 이곳에 정착한 농경민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가락국 성립부터 중흥기까지 형성된 생활유적으로, 김해 충적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조개더미와 집터이다. 특히 A 지구는 타날문 토기에서 신라·가야 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부원 동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김해 부원동 유적 (金海 府院洞 遺蹟) ### 내용: 김해 봉황동 패총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은 남산 서쪽 기슭의 패총 지역(A 지구), 동쪽 삼정동과 경계하고 있는 패총 지역(B 지구), 동쪽의 민무늬토기 산포 지역(C 지구)으로 구분하여 1980년 4월 10일부터 약 4개월 동안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A 지구 A 지구 A 지구의 조가비는 능선의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퇴적되어 있었다. 기반층 위에 5층의 퇴적층이 확인되었다. 제 Ⅰ층은 약 50㎝ 두께의 경작층(耕作層)이고, 제 Ⅱ층은 약 20㎝ 두께의 순수 패각층이며, 제 Ⅲ층은 조가비가 약간씩 섞인 흑갈색 부식토층(腐植土層)이고, 제 Ⅳ층은 다시 40∼50㎝ 두께의 순수 조가비층이며, 제 Ⅴ층은 생토층 바로 위로 50㎝ 두께의 흑갈색과 적갈색이 교차로 형성된 부식토층이다.각 층위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은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종류는 대체로 같다. 토기·철기·골각기·석기·탄화곡물 등이 나왔다. 조가비층 아래 바닥층에서는 집터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집터는 3기 모두 패총의 최하층인 제 V 층의 부식토층에 조성되었으며, 원형의 움집터[]·방형의 반움집터[]·주춧돌을 가진 장방형의 누각 집자리[]로 구분된다. 그중 제1호는 집터 옆에 지하 저장고가 있고 중앙에는 부엌이 있었으나, 나머지 제2호와 3호는 없었다. 돌널무덤과 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제 IV 층의 조가비층에서 발견된 돌널무덤과 최하층의 생토층에서 발견된 널무덤이 있다. 회청색의 항아리 토기와 적갈색의 바리 토기·붉은 간 토기가 부장품으로 나왔다. 조가비층에서 가장 많이 나온 유물은 토기이다. 회청색과 적갈색, 소성도에 따라 경질과 연질로 구분되며, 경질이 다수 출토되었다. 항아리·독·바리·굽 그릇·잔 등의 일반적인 토기는 물론이고, 복어·쇠뿔 모양의 이형 토기와 말·성기와 같은 이형 토기와 말·성기 등 다양한 토우도 발견됐다. 평균적으로 적갈색과 회청색 토기의 비율은 2:1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적갈색 토기의 비율이 높다. 또한 신라 토기와 이 단구 연호형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경주와 일본 구주 지방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는 수적으로도 많지 않았지만 손칼·화살촉·창·낚싯바늘·송곳 등 주로 수렵이나 어로용의 생활용구였다. 골각기는 사슴뿔로 만든 칼자루와 뼈로 만든 찌르개·활촉·바늘, 산돼지의 이빨로 만든 장식품, 사슴뿔로 만든 어깨뼈와 사슴뿔로 만든 점 뼈 등이 발견되었다.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에서 발견된 점 뼈는 당시의 풍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중국과 일본의 점 뼈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숫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도끼·반달돌칼 등도 출토되었다. 탄화곡물은 쌀·보리·밀·조·복숭아씨 등에서 나왔다. 쌀은 폭비 1.61의 단립형이고, 보리는 겉보리와 쌀보리 두 종류가 있으며, 복숭아씨는 재래종, 밀은 산 복숭아처럼 낟알이 굵고, 보리는 쌀보리와 겉보리 두 종류가 있었다. 해수산인 굴을 비롯해 백합 등 30여 종의 조가비가 존재했지만 담수산은 한두 종에 불과했다. 또한 조가비와 함께 발견된 짐승 뼈는 말·소·산돼지·사슴 등의 몸 뼈와 이빨·뿔 등이었다. 그중에는 점 뼈·칼 손잡이·장식품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손질한 것들도 있었다. A 지구에서는 움집이나 반움집 가옥에서 생활하면서 인근 해안가에서 조개를 채집해 먹고, 낙랑·일본 등 다른 지역과의 문화교류가 빈번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원삼국시대 후기인 3~4세기 경인 것으로 추측된다. B 지구에서 왔다 남산 동쪽 기슭의 약간 높은 곳에 B 지구가 있다. 퇴적층은 조가비층 위에 논밭과 일반 무덤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교란돼 바닥층 일부만 남아 있었다. 황갈색 생토층 위에는 5층의 퇴적층이 존재했는데 길이 40m, 너비 4m 크기의 조가비층이다. 맨 위의 제 I 층은 부식토층, 제 II 층은 황갈색 사질토층, 제 IV 층은 조가비층, 제 V 층은 흑갈색 부식토층이었다. 하지만 황갈색 사질토층(제III층) 아래 제 IV 층과 제 V 층이 후대에 재퇴적된 교란층이었다. 토기·골각기·석기·탄화미 등 생활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고, 별다른 생활 유구는 없었다. 토기는 주로 제 IV 층과 제 V 층에서 출토되었다. 회청색 계통 토기와 적갈색 계통 토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적갈색 토기도 민무늬토기의 특징을 닮은 모래흙의 연질 토기가 많았고, 회청색 토기도 연질 계통의 토기가 많았다. 토기는 항아리·독·잔·굽 그릇·접시 등 단조로운 것이었다. 그 밖에 가락 바퀴·그물추·토옥 등의 일반 생활용품과 사슴뿔이나 그 뼈·이빨과 산돼지 뼈나 그 이빨로 제작된 칼자루·찌르개·화살촉·장신구, 사슴뿔이나 그 뼈·이빨로 제작된 칼자루·찌르개·화살촉·장신구 등이 있다. 단립형 탄화 미도 나왔는데, 장폭비 1.51이다. B 지구 주민들은 A 지구보다 이른 1~2세기 경의 농경민족으로 추정되며, 문헌상에 보이는 가락국 형성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C 지구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표토 아래 약 1.5m 깊이의 깊이에서 원형의 움집터 3기와 물고랑이 발견된 곳은 C 지구와 인접해 있는 경작지이다. 그 아래 퇴적층에는 토기·철기·골각기·석기·탄화곡물 등이 있었다. 집터 3기는 중앙에 위치한 단면 V자형의 물고랑을 중심으로 그 좌측에는 제1호와 2호의 집터가, 우측에는 제3호의 집터가 각각 위치해 있었다. 집터는 평면이 원형으로 서남쪽에 부엌을 두고 실내에 배수구를 배치한 반움집터이다. 제2호 집터에서는 점 뼈가 나왔다. 이와 같이 C 지구에서 발견된 집터는 모두 원형의 움집이다. 화덕자리는 서남쪽에 위치했으나 홍수로 인해 부서진 것으로 보인다. 화덕자리의 위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변진에서는 집의 서쪽에 화덕을 둔다. 는 기록과 일치해 주목된다. 유물 중 연질 토기와 적갈색 계통의 연질 토기가 주를 이룬다. 항아리·독·바리·굽 그릇·이형 토기 등 B 지구 출토품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C 지구 주민들이 B 지구 퇴적층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 외에 가락 바퀴와 그물 추가 있다. 원판형과 산주형으로 된 가락 바퀴가 있다. 그물 추는 구상과 관상의 두 종류가 있다. 철기는 주조 쇠도끼 1점이, 골각기는 칼자루·점 뼈·골촉이, 석기는 홈 자귀·갈돌·돌도끼·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탄화곡물은 주로 가을에 수확하는 것으로 장폭비 1.73의 단립형 쌀과 팥 껍질·머루 씨앗 등이 발견되었다. C 지구의 주민도 B 지구와 마찬가지로 1~2세기경 이곳에 정착한 농경민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가락국 성립부터 중흥기까지 형성된 생활유적으로, 김해 충적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조개더미와 집터이다. 특히 A 지구는 타날문 토기에서 신라·가야 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부원 동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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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8567.txt
울주 검단리 유적 (蔚州 檢丹里 遺蹟)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495
CC BY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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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컨트리클럽 증설공사 구역에 포함되어 1990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약 3개월간 발굴조사를 한 결과 약 6,000m2(4,000평)에 이르는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사 결과 집자리[], 환호, 고인돌[]과 함께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유구도 확인되었다. 회야강과 곡천천 사이의 산줄기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낮은 구릉(해발 104∼123m)의 정상부와 서남쪽 사면에 해당한다. 집자리는 대체로 등고선에 평행하게 배치되며 방형과 장방형의 비율이 높다. 기둥구멍[]의 배치는 방형은 4주식, 장방형은 6주식의 구조이며, 화덕자리[]는 중앙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 1기가 설치되었다. 집자리는 유구의 중복 관계와 공간 배치를 통해 환호의 설치를 기준으로 3단계로 구분된다. 각 단계는 시기 폭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I 기는 환호 설치 이전의 취락, III 기는 환호가 폐기된 후의 취락이다. 집자리 26기가 확인된 I 기는 14m2를 초과하지 않는 중·소형이 많다. 4호는 길이가 380cm, 잔존 너비 490cm, 깊이 20cm의 장방형이다. 화재로 폐기된 집자리는 환호가 지나가는 곳에 위치해 있어 환호 설치 시 의도적으로 폐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는 일부 빗금무늬[]도 있지만 구멍무늬토기[]가 많고, 깊은 바리 모양토기[] 가운데 손잡이[]가 부착된 것이 몇 점 있다. II 기는 1단계에 비해 규모가 큰 집자리 17기가 확인되었다. 크기가 길이 364cm, 너비 378cm, 깊이 50cm인 방형인 5호와 잔존 길이 555cm, 너비 392cm, 깊이 40cm인 31호가 각각 5호와 31호이다. 집자리 6기와 망루로 추정되는 굴립주 건물지 1기, 주거구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제사용으로 추정되는 2기의 도랑[]이 환호 안의 주거 영역을 이루고 있다. 구멍무늬토기는 소수로 남아있고, 짧은 빗금무늬와 횡선 무늬[]가 증가하며, 손잡이 달린 깊은 바리 모양토기[]와 붉은 간 토기[]와 붉은 간 토기[]가 증가한다. III 기는 집자리 37기가 확인되었는데, 이전보다 집자리의 수도 증가했고 분포 범위도 확대되어 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환호가 폐기된 후 주거 영역은 구릉의 정상부와 경사면의 두 그룹으로 나뉘며 대형과 소형 집자리 간의 격차도 심해진다. 9호는 길이 548cm, 너비 360cm, 깊이 28cm의 장방형이고, 29호는 길이 552cm, 너비 372cm, 깊이 28cm의 장방형이다. 구멍무늬토기는 사라지고 II 기부 터 유행한 짧은 빗금무늬와 횡선 무늬가 지속되면서 손잡이 달린 깊은 바리 모양토기는 더욱 많아진다. 농경문화와 관련된 석기의 종류와 종류가 가장 많은 것은 반달돌칼[], 홈 자귀[], 돌낫[] 등이다. 환호는 총 연장 298m로 남북 각 1개소의 출입구를 기준으로 장경 118m, 단경 70m의 크기로 능선을 따라 타원형 모양으로 둘러져 있다. 환호 안쪽에는 집자리, 굴립주 건물지, 도랑, 구덩 유구[]가 있고, 바깥쪽에는 집자리와 도랑 외에 3기의 무덤이 있다. 고인돌 2기와 돌덧널무덤[] 1기가 무덤에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40cm, 너비 132cm, 깊이 32cm이며 고인돌 1호는 고임돌[]이 있다. 덮개돌이 뚜껑돌[]을 겸한 지상식 고인돌로 추정되는데, 지하 매장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 3호는 덮개돌 주위에 석열을 돌려 묘역을 표시하고, 덮개돌 아래에 깬돌을 설치하여 돌덧널의 역할을 한 유사 석곽 형의 지상식이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무덤 구역을 주거구역과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축조한 것은 영역의 구분이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호의 완전한 모습과 그 관련 마을의 구조가 밝혀진 이 유적은 이후 본격적으로 환호취락 유적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시발점이 되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22호 2830100 B. P. (보정 연대 서기전 880), 59호 288070 B. P. (보정 연대 서기전 930) 101호 2660100 B. P. (보정 연대 서기전 710)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울주 검단리 유적 (蔚州 檢丹里 遺蹟) ### 내용: 울산컨트리클럽 증설공사 구역에 포함되어 1990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약 3개월간 발굴조사를 한 결과 약 6,000m2(4,000평)에 이르는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사 결과 집자리[], 환호, 고인돌[]과 함께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유구도 확인되었다. 회야강과 곡천천 사이의 산줄기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낮은 구릉(해발 104∼123m)의 정상부와 서남쪽 사면에 해당한다. 집자리는 대체로 등고선에 평행하게 배치되며 방형과 장방형의 비율이 높다. 기둥구멍[]의 배치는 방형은 4주식, 장방형은 6주식의 구조이며, 화덕자리[]는 중앙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 1기가 설치되었다. 집자리는 유구의 중복 관계와 공간 배치를 통해 환호의 설치를 기준으로 3단계로 구분된다. 각 단계는 시기 폭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I 기는 환호 설치 이전의 취락, III 기는 환호가 폐기된 후의 취락이다. 집자리 26기가 확인된 I 기는 14m2를 초과하지 않는 중·소형이 많다. 4호는 길이가 380cm, 잔존 너비 490cm, 깊이 20cm의 장방형이다. 화재로 폐기된 집자리는 환호가 지나가는 곳에 위치해 있어 환호 설치 시 의도적으로 폐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는 일부 빗금무늬[]도 있지만 구멍무늬토기[]가 많고, 깊은 바리 모양토기[] 가운데 손잡이[]가 부착된 것이 몇 점 있다. II 기는 1단계에 비해 규모가 큰 집자리 17기가 확인되었다. 크기가 길이 364cm, 너비 378cm, 깊이 50cm인 방형인 5호와 잔존 길이 555cm, 너비 392cm, 깊이 40cm인 31호가 각각 5호와 31호이다. 집자리 6기와 망루로 추정되는 굴립주 건물지 1기, 주거구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제사용으로 추정되는 2기의 도랑[]이 환호 안의 주거 영역을 이루고 있다. 구멍무늬토기는 소수로 남아있고, 짧은 빗금무늬와 횡선 무늬[]가 증가하며, 손잡이 달린 깊은 바리 모양토기[]와 붉은 간 토기[]와 붉은 간 토기[]가 증가한다. III 기는 집자리 37기가 확인되었는데, 이전보다 집자리의 수도 증가했고 분포 범위도 확대되어 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환호가 폐기된 후 주거 영역은 구릉의 정상부와 경사면의 두 그룹으로 나뉘며 대형과 소형 집자리 간의 격차도 심해진다. 9호는 길이 548cm, 너비 360cm, 깊이 28cm의 장방형이고, 29호는 길이 552cm, 너비 372cm, 깊이 28cm의 장방형이다. 구멍무늬토기는 사라지고 II 기부 터 유행한 짧은 빗금무늬와 횡선 무늬가 지속되면서 손잡이 달린 깊은 바리 모양토기는 더욱 많아진다. 농경문화와 관련된 석기의 종류와 종류가 가장 많은 것은 반달돌칼[], 홈 자귀[], 돌낫[] 등이다. 환호는 총 연장 298m로 남북 각 1개소의 출입구를 기준으로 장경 118m, 단경 70m의 크기로 능선을 따라 타원형 모양으로 둘러져 있다. 환호 안쪽에는 집자리, 굴립주 건물지, 도랑, 구덩 유구[]가 있고, 바깥쪽에는 집자리와 도랑 외에 3기의 무덤이 있다. 고인돌 2기와 돌덧널무덤[] 1기가 무덤에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40cm, 너비 132cm, 깊이 32cm이며 고인돌 1호는 고임돌[]이 있다. 덮개돌이 뚜껑돌[]을 겸한 지상식 고인돌로 추정되는데, 지하 매장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 3호는 덮개돌 주위에 석열을 돌려 묘역을 표시하고, 덮개돌 아래에 깬돌을 설치하여 돌덧널의 역할을 한 유사 석곽 형의 지상식이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무덤 구역을 주거구역과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축조한 것은 영역의 구분이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호의 완전한 모습과 그 관련 마을의 구조가 밝혀진 이 유적은 이후 본격적으로 환호취락 유적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시발점이 되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22호 2830100 B. P. (보정 연대 서기전 880), 59호 288070 B. P. (보정 연대 서기전 930) 101호 2660100 B. P. (보정 연대 서기전 71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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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ECO32876.txt
이창렬 (李昌烈)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황명수"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172
CC BY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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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덕수이다.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교수. 경제학박사이며 정책자문 위원으로서 경제계·정계 등에서 활동한 경제학박사이다. 진남포 공립 제일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은 1930년 3월이었다. 일본의 제 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0년 4월이고, 도쿄제국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한 것은 1942년 9월이었다. 하지만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동경제국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귀국한 뒤 1946년 6월 경성대학에서 법학사로 학위를 받았다. 식산은행 조사부에서 1946년 8월∼50년 10월까지,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1951년 11월∼55년 11월까지 근무하였다. 단국대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1954년 4월 이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1957년 10월 교수로 승진하기까지 조교수와 부교수를 역임하였다. 1957년<NAME>제 기초이론, 1962년 한국경제의 구조와 순환, 1966년 한국의 금융과 자본동원과 같은 저서를 낸 뒤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4월 부흥부산업개발위원회 고문을 시작으로 1963년 8월 재정금융위원회 위원, 1967년 7월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 등 각종 정책자문 위원을 지냈다. 한국 금융정책의 전개 과정이라는 기념논문집이 고승제 등의 편찬위원들에 의해 1975년 9월 간행되었는데, 이는 그가 발표해온 금융정책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것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이창렬 (李昌烈) ### 내용: 본관은 덕수이다.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교수. 경제학박사이며 정책자문 위원으로서 경제계·정계 등에서 활동한 경제학박사이다. 진남포 공립 제일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은 1930년 3월이었다. 일본의 제 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0년 4월이고, 도쿄제국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한 것은 1942년 9월이었다. 하지만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동경제국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귀국한 뒤 1946년 6월 경성대학에서 법학사로 학위를 받았다. 식산은행 조사부에서 1946년 8월∼50년 10월까지,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1951년 11월∼55년 11월까지 근무하였다. 단국대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1954년 4월 이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1957년 10월 교수로 승진하기까지 조교수와 부교수를 역임하였다. 1957년<NAME>제 기초이론, 1962년 한국경제의 구조와 순환, 1966년 한국의 금융과 자본동원과 같은 저서를 낸 뒤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4월 부흥부산업개발위원회 고문을 시작으로 1963년 8월 재정금융위원회 위원, 1967년 7월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 등 각종 정책자문 위원을 지냈다. 한국 금융정책의 전개 과정이라는 기념논문집이 고승제 등의 편찬위원들에 의해 1975년 9월 간행되었는데, 이는 그가 발표해온 금융정책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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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4420.txt
매부 (妹夫)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승범"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948
CC BY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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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제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매서·매부로, 일본에서는 매서·매부로 쓰이고 있다. 매부 쪽에서는 처남(妻男·妻甥)이라 일컫고, 처남과 매부·매형 관계를 처남남매간(妻男男妹間)이라 한다. ‘처남의 댁네 병 보듯’이란 속담은 ‘처삼촌 뫼에 벌초하듯’과도 같이 쓰이는 속담으로 무슨 일을 건성건성 마지못해함을 이르는 말이나, 사실상 처남남매간은 그렇듯 데면데면해야 할 사이가 아니다. 매부를 향한 지극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가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최학송의 누이인 분려의 누이인 시인 조운이, 1930년대 손아래 누이 분려의 부고를 받고, 그 누이보다 먼저 죽은 매부인 소설가 최학송을 생각하며 쓴 4수의 시조 시가 그것이다. 제목은 <서해야>이다. 최학송은 필명으로 서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4수 중에서 앞 2수를 옮겨본다. 이 땅에 누이가 죽고 서해 네가 살았으면/주검은 설워도 삶은 설워져/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뭐였더라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는 걸 볼 때/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뭐였더라 안 하려 든/이 설음 저 설음에 어쩔 줄을 몰랐어. 조운이 중매를 선 혼인을 하기도 한 이 처남남매는 같은 문인이었다. 처남이 누이보다 먼저 죽은 매부에 대한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매부 (妹夫) ### 내용: 매제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매서·매부로, 일본에서는 매서·매부로 쓰이고 있다. 매부 쪽에서는 처남(妻男·妻甥)이라 일컫고, 처남과 매부·매형 관계를 처남남매간(妻男男妹間)이라 한다. ‘처남의 댁네 병 보듯’이란 속담은 ‘처삼촌 뫼에 벌초하듯’과도 같이 쓰이는 속담으로 무슨 일을 건성건성 마지못해함을 이르는 말이나, 사실상 처남남매간은 그렇듯 데면데면해야 할 사이가 아니다. 매부를 향한 지극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가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최학송의 누이인 분려의 누이인 시인 조운이, 1930년대 손아래 누이 분려의 부고를 받고, 그 누이보다 먼저 죽은 매부인 소설가 최학송을 생각하며 쓴 4수의 시조 시가 그것이다. 제목은 <서해야>이다. 최학송은 필명으로 서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4수 중에서 앞 2수를 옮겨본다. 이 땅에 누이가 죽고 서해 네가 살았으면/주검은 설워도 삶은 설워져/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뭐였더라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는 걸 볼 때/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뭐였더라 안 하려 든/이 설음 저 설음에 어쩔 줄을 몰랐어. 조운이 중매를 선 혼인을 하기도 한 이 처남남매는 같은 문인이었다. 처남이 누이보다 먼저 죽은 매부에 대한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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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1364.txt
개천 묵방리 고인돌 (价川 墨房里 고인돌)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724
CC BY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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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개천군 묵방리는 은산군과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탄광마을이다. 묘향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려 대동강에 이르는 대동강 제2단구면(段丘面) 들판에 분포하는데 특히 묵방리의 가치산(115.7m) 줄기 남쪽 기슭 평지에 약 40여 기를 비롯하여 돌무지무덤 30여 기, 기단식 돌무지무덤 20여 기 등 역사시대 무덤 유적들이 함께 있다. 지상에 고인돌 40여 기가 있는데 모두 무덤방[]을 만들었다. 고인돌과 함께 후대의 돌무지무덤[], 산성, 가마터[], 야철지 등 여러 시대의 유적이 자리한다. 또한 까치산 서쪽 기슭의 남북으로 뻗은 구릉에는 고인돌의<NAME>를 떼어낸 흔적들도 있다.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는 1960년 이곳 탄광지구의 철도 부설공사가 시작되면서 모두 20여 기의 고인돌을 발굴 정리했다. 또한 1984년에 2차 발굴을 할 때 4기를 발굴하고 무덤 구조가 잘 보존된 2기는 원상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조사된 고인돌의 구조는 대부분 얇은 타원형의 덮개돌 밑에 시신을 묻기 위해 돌로 쌓아 올린 장방형의 돌덧널[]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인돌의 장축은 동서남북으로 나뉘는데, 뚜껑돌[]의 길이가 180∼330cm 내외이고, 뚜껑돌의 길이가 300∼380cm 내외이다. 전자는 보강시설이 있는 무덤으로 바깥을 둘러싼 돌림돌[]이 있고 막음돌[] 시설은 전자에 비해 더 견고하게 쌓는 등 약간 차이가 있다. 무덤방[]은 납작한 판돌[]을 쌓아 세 벽을 만들고 판돌을 쌓지 않은 동쪽이나 남쪽에는 큰 판돌을 세워 문처럼 만들었다. 바닥에는 벽체를 쌓은 것 같은 크기의 판돌들을 1∼2벌 깐 것(24호)과 큰 판돌을 깐 것(20호)이 있다. 무덤방의 크기는 2호는 190105∼10320∼30cm, 20호는 1808030cm, 24호는 1808060cm 정도이다. 무덤방 안쪽에는 막돌을 쌓아 보강하고 그 바깥쪽 네모 서리와 가운데에 큰 돌을 세워 보강했다. 특히 30호 무덤방에는 무덤방의 문 앞에 널길[] 시설이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방 위에는 크고 두꺼운 판돌을 타원형으로 다듬어 올려놓았다. 묵방리형토기[], 물고기 모양[], 반달돌칼[], 간돌검[], 간돌 화살촉[] 등이 발굴되었다. 젖꼭지 모양 손잡이[]가 부착된 토기는 흑갈색의 간 토기[]이다. 북한 학계에서는 뚜껑식(침촌 형) 고인돌에서 발전한 묵방리 형 고인돌로 분류한다. 고인돌의 연대를 짐작하는 잣대가 되는 묵방리형 질그릇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개천 묵방리 고인돌 (价川 墨房里 고인돌) ### 내용: 평안남도 개천군 묵방리는 은산군과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탄광마을이다. 묘향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려 대동강에 이르는 대동강 제2단구면(段丘面) 들판에 분포하는데 특히 묵방리의 가치산(115.7m) 줄기 남쪽 기슭 평지에 약 40여 기를 비롯하여 돌무지무덤 30여 기, 기단식 돌무지무덤 20여 기 등 역사시대 무덤 유적들이 함께 있다. 지상에 고인돌 40여 기가 있는데 모두 무덤방[]을 만들었다. 고인돌과 함께 후대의 돌무지무덤[], 산성, 가마터[], 야철지 등 여러 시대의 유적이 자리한다. 또한 까치산 서쪽 기슭의 남북으로 뻗은 구릉에는 고인돌의<NAME>를 떼어낸 흔적들도 있다.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는 1960년 이곳 탄광지구의 철도 부설공사가 시작되면서 모두 20여 기의 고인돌을 발굴 정리했다. 또한 1984년에 2차 발굴을 할 때 4기를 발굴하고 무덤 구조가 잘 보존된 2기는 원상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조사된 고인돌의 구조는 대부분 얇은 타원형의 덮개돌 밑에 시신을 묻기 위해 돌로 쌓아 올린 장방형의 돌덧널[]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인돌의 장축은 동서남북으로 나뉘는데, 뚜껑돌[]의 길이가 180∼330cm 내외이고, 뚜껑돌의 길이가 300∼380cm 내외이다. 전자는 보강시설이 있는 무덤으로 바깥을 둘러싼 돌림돌[]이 있고 막음돌[] 시설은 전자에 비해 더 견고하게 쌓는 등 약간 차이가 있다. 무덤방[]은 납작한 판돌[]을 쌓아 세 벽을 만들고 판돌을 쌓지 않은 동쪽이나 남쪽에는 큰 판돌을 세워 문처럼 만들었다. 바닥에는 벽체를 쌓은 것 같은 크기의 판돌들을 1∼2벌 깐 것(24호)과 큰 판돌을 깐 것(20호)이 있다. 무덤방의 크기는 2호는 190105∼10320∼30cm, 20호는 1808030cm, 24호는 1808060cm 정도이다. 무덤방 안쪽에는 막돌을 쌓아 보강하고 그 바깥쪽 네모 서리와 가운데에 큰 돌을 세워 보강했다. 특히 30호 무덤방에는 무덤방의 문 앞에 널길[] 시설이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방 위에는 크고 두꺼운 판돌을 타원형으로 다듬어 올려놓았다. 묵방리형토기[], 물고기 모양[], 반달돌칼[], 간돌검[], 간돌 화살촉[] 등이 발굴되었다. 젖꼭지 모양 손잡이[]가 부착된 토기는 흑갈색의 간 토기[]이다. 북한 학계에서는 뚜껑식(침촌 형) 고인돌에서 발전한 묵방리 형 고인돌로 분류한다. 고인돌의 연대를 짐작하는 잣대가 되는 묵방리형 질그릇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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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8940.txt
운곡정사 (雲谷精舍)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영훈"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244
CC BY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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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댐에 1993년 수몰되어 현재는 안채 사당 사랑채 대 문간채가 남아 있는데 경주 김씨 경재운곡김몽로의 생가이다. 운곡 정사는 근처에 있던 낙화정이 폐허가 되자 편액을 옮기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정면 4칸의 간반통 건물인 대 문간채가 있다. 문간은 솟을대문으로 좌우에 방 등이 자리 잡고 있고, 좌측방 바깥에 외측이 있다. 대문에서 바라보면 사랑채가 자형 평면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간반통, 중앙에 1칸의 대청, 좌우 앞퇴가 있는 방이 1칸씩, 좌측방에 부엌 1칸, 약간의 간격을 두고 고방 1칸, 우측방에 반칸의 반침이 있고 중문이 열렸다. 안채의 진입을 이만큼 끝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안채도 자형 평면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쪽마루를 부설하여 퇴칸과 같은 기능을 하게 하려고 했다. 좌측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1칸씩 있다. 사당은 훨씬 멀리 떨어진 동남쪽에 따로 자리 잡고 있는데 정면이 3칸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운곡정사 (雲谷精舍) ### 내용: 운문댐에 1993년 수몰되어 현재는 안채 사당 사랑채 대 문간채가 남아 있는데 경주 김씨 경재운곡김몽로의 생가이다. 운곡 정사는 근처에 있던 낙화정이 폐허가 되자 편액을 옮기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정면 4칸의 간반통 건물인 대 문간채가 있다. 문간은 솟을대문으로 좌우에 방 등이 자리 잡고 있고, 좌측방 바깥에 외측이 있다. 대문에서 바라보면 사랑채가 자형 평면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간반통, 중앙에 1칸의 대청, 좌우 앞퇴가 있는 방이 1칸씩, 좌측방에 부엌 1칸, 약간의 간격을 두고 고방 1칸, 우측방에 반칸의 반침이 있고 중문이 열렸다. 안채의 진입을 이만큼 끝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안채도 자형 평면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쪽마루를 부설하여 퇴칸과 같은 기능을 하게 하려고 했다. 좌측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1칸씩 있다. 사당은 훨씬 멀리 떨어진 동남쪽에 따로 자리 잡고 있는데 정면이 3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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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2887.txt
선주 (船主)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정호"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935
CC BY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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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법」상 해운 관청에 어선을 등록하고 법원에 선박 등기를 마친 개인이나 법인을 말하지만, 법률상의 선주가 아니더라도 배를 빌려 어로활동을 하는 용선자(傭船者)도 선주로 간주되어 선박 등기·어선 등록·보험 가입 등의 의무를 지닌다. 선주는 조선시대 때도 뱃사공인 곁군[格軍, 格人]과 구별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선주와 선원들처럼 자본과 기술의 동업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옛날 배는 군선·조운선·도선·도선 등으로 구분하고, 해선·강선으로 구분할 뿐 특별히 어선이라는 구분이 모호했다. 하지만 이미 고려 때부터 동해안을 중심으로 명태 어가 활발했고,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조기 어가가 발달했던 것을 생각하면 작은 배라도 그 물고기잡이[], 낚시 고기잡이[] 따위가 행해졌을 것이다. 어선 종류와 중선망 어업인 어조세에 대한 기록이 18세기 기록들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선어업이 꽤 발달했던 것으로 짐작되나, 선주와 선원에 대한 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세기에 접어들어 경상남도 근해에서 시작된 줄살[乼矢, 장살杖失]은 일본의 대부망(大敷網)과 비슷한 대규모 정치망으로 청어잡이를 주로 했는데, 조기 중선배를 취항할 경우 800원이 들 때 2,000원에서 5,000원의 자본이 들었으므로 이미 이때부터 선주·망주·격군 따위의 계층분화와 짓나누기[結負制]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업을 하는 것은 원래 원시어로 방법부터가 그 설치에 많은 인원이<NAME>되어야 하는 협업성을 띠어 왔다. 관영의 경우 많은 어민의 부역으로 충당할 수 있었지만 사영의 기업자본이 투입되면서도 숙련된 격군을<NAME>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원시적 공동 경영형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선주와 격군의 관계는 봉건적 주종 관계가 아니라 자본과 기술의 동업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연안 회유 어류는 지선 어민의 자원적 성격을 지녀 어떤 면에서 어민의 참여는 토지[] 및 기술 제공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지 선어류는 어민 자원이라는 사고가 개항 후 일본 어선들이 한국 연해안에 출어하기 시작했을 때, 지선 어민들의 저항이 심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통감부는 1909년 조선 어업법을 제정, 공포하고 어업면허 제도를 도입하면서 토지 사유 제도와 비슷한 어장의 사유화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어선의 동력화와 어구의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어업이 기업화되었다. 하지만 영세어민들이 자본가로 성장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부 지주계급과 항구를 중심으로 한 상업자본이 어로 부분에 투자되었으나, 사업의 특수성과 관행 때문에 짓 나누기 방식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어획 분배는 자본주 50, 격군(승선 어부) 50으로 나누어졌다. 선주와 그물 주인(:어업 투자자) 이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경우에 따라 용선주가 망주인 경우도 있었다. 선박이 있어도 출어비를 댈 수 없을 때나 동해에서 명태잡이를 한 선주가 휴어기 때 서남해안 어민들에게 배를 빌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용선비는 뱃값의 100분의 1을 월세로 냈다. 용선주는 뱃삯 외에 어구, 출어에 필요한 모든 경비와 세금을 부담하되 잡은 고기를 팔아 경비 및 세금을 뺀 나머지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을 승선 어부들이 나눠 가졌다. 한국의 선원법은 어선원에 관한 특례규정을 두고 고정급 외에 비율급을 인정하는 등 이런 관행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어선과 어로 종류에 따라 선주의 배분율이 50%에서 60∼70%로 상승하고 있는데, 어선 건조비 및 출어경비, 재해 부담 등이 과중하기 때문이다. 승선 어부들 역시 그 기술과 직능에 따라 분배 비율이 다르다. 선장의 급여는 일반적으로 출어경비에 포함하여 선주와 선원 분배에 우선하고, 그 비율도 전체 어획 판매량의 12%로 상향 조정되고 있다. 유능한 선원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선주에 따라 최저급의 고정급을 보장해 주고 출어 때는 별도로 비율급을 지급하기도 한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선주 (船主) ### 내용: 「선박법」상 해운 관청에 어선을 등록하고 법원에 선박 등기를 마친 개인이나 법인을 말하지만, 법률상의 선주가 아니더라도 배를 빌려 어로활동을 하는 용선자(傭船者)도 선주로 간주되어 선박 등기·어선 등록·보험 가입 등의 의무를 지닌다. 선주는 조선시대 때도 뱃사공인 곁군[格軍, 格人]과 구별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선주와 선원들처럼 자본과 기술의 동업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옛날 배는 군선·조운선·도선·도선 등으로 구분하고, 해선·강선으로 구분할 뿐 특별히 어선이라는 구분이 모호했다. 하지만 이미 고려 때부터 동해안을 중심으로 명태 어가 활발했고,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조기 어가가 발달했던 것을 생각하면 작은 배라도 그 물고기잡이[], 낚시 고기잡이[] 따위가 행해졌을 것이다. 어선 종류와 중선망 어업인 어조세에 대한 기록이 18세기 기록들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선어업이 꽤 발달했던 것으로 짐작되나, 선주와 선원에 대한 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세기에 접어들어 경상남도 근해에서 시작된 줄살[乼矢, 장살杖失]은 일본의 대부망(大敷網)과 비슷한 대규모 정치망으로 청어잡이를 주로 했는데, 조기 중선배를 취항할 경우 800원이 들 때 2,000원에서 5,000원의 자본이 들었으므로 이미 이때부터 선주·망주·격군 따위의 계층분화와 짓나누기[結負制]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업을 하는 것은 원래 원시어로 방법부터가 그 설치에 많은 인원이<NAME>되어야 하는 협업성을 띠어 왔다. 관영의 경우 많은 어민의 부역으로 충당할 수 있었지만 사영의 기업자본이 투입되면서도 숙련된 격군을<NAME>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원시적 공동 경영형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선주와 격군의 관계는 봉건적 주종 관계가 아니라 자본과 기술의 동업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연안 회유 어류는 지선 어민의 자원적 성격을 지녀 어떤 면에서 어민의 참여는 토지[] 및 기술 제공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지 선어류는 어민 자원이라는 사고가 개항 후 일본 어선들이 한국 연해안에 출어하기 시작했을 때, 지선 어민들의 저항이 심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통감부는 1909년 조선 어업법을 제정, 공포하고 어업면허 제도를 도입하면서 토지 사유 제도와 비슷한 어장의 사유화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어선의 동력화와 어구의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어업이 기업화되었다. 하지만 영세어민들이 자본가로 성장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부 지주계급과 항구를 중심으로 한 상업자본이 어로 부분에 투자되었으나, 사업의 특수성과 관행 때문에 짓 나누기 방식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어획 분배는 자본주 50, 격군(승선 어부) 50으로 나누어졌다. 선주와 그물 주인(:어업 투자자) 이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경우에 따라 용선주가 망주인 경우도 있었다. 선박이 있어도 출어비를 댈 수 없을 때나 동해에서 명태잡이를 한 선주가 휴어기 때 서남해안 어민들에게 배를 빌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용선비는 뱃값의 100분의 1을 월세로 냈다. 용선주는 뱃삯 외에 어구, 출어에 필요한 모든 경비와 세금을 부담하되 잡은 고기를 팔아 경비 및 세금을 뺀 나머지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을 승선 어부들이 나눠 가졌다. 한국의 선원법은 어선원에 관한 특례규정을 두고 고정급 외에 비율급을 인정하는 등 이런 관행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어선과 어로 종류에 따라 선주의 배분율이 50%에서 60∼70%로 상승하고 있는데, 어선 건조비 및 출어경비, 재해 부담 등이 과중하기 때문이다. 승선 어부들 역시 그 기술과 직능에 따라 분배 비율이 다르다. 선장의 급여는 일반적으로 출어경비에 포함하여 선주와 선원 분배에 우선하고, 그 비율도 전체 어획 판매량의 12%로 상향 조정되고 있다. 유능한 선원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선주에 따라 최저급의 고정급을 보장해 주고 출어 때는 별도로 비율급을 지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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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SOC24286.txt
손진태 (孫晋泰)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574
CC BY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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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은 호이다.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현재 부산광역시) 남창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것이 1927년이다. 1932년 송석하·정인섭과 함께<NAME>속 학회를 조직하고 1933년 제2호(1934)와 제3호(1940)를 발간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 학회 지인<NAME>속을 창간하였다. 1930년<NAME>전문학교 강사, 1934년<NAME>전문학교 강사,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과 대학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적 생애는 민족 항쟁기에 민속학자로 활동한 시기와 광복 후 역사학자로 나뉜다. 원래 역사학 연구에 열중했던 그는 일제강점기에 자유로이 역사학을 연구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문헌에만 의존하는 한국사 연구에 대해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손진태 선생전 집 해제). 민속학에서 그의 주요 저작은 조선신가유편 (1930)·조선 민담집 (1930)·조선민족 설화의 연구(1947)·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이다. 민속학계에 남긴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민속학을 독자적인 과학으로 인식하고 이를 학문으로 정립시킨 점이다. 그 이전까지 최남선과 이능화는 민속학을 역사연구의 보조 수단으로 여겼고, 일제에 대항하는 조선 정신을 고양시키는 방편으로 삼았다. 따라서, 앞의 두 사람이 한국민속학의 텃밭을 일군 선구자라면 손진태는 그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매를 맺도록 힘쓴 중흥 자라 하겠다. 비록 3호로 종간되고 말았지만 그가 주도적으로 펴낸<NAME>속은 귀중한 결실이었다. 또한 그가 현지조사를 통해 자신의 학문을 쌓아간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앞사람들이 문헌에만 의존하였던 것에 반해 그는 현지에 나가 일차 자료들을 수집함으로써 민속학이 실증과학임을 인식시켰고 역사학뿐 아니라 인류학·고고학·사회학 등 인접 과학을 폭넓게 활용하여 민속학 연구 방법의 수준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중국·만주·시베리아 일대의 문화와 비교하여 그는 우리 민족문화의 본질을 캐는 데 새로운 방법을 썼다. 특히, 우리 설화의 특질과 발생 과정을 밝히고 우리 설화의 특질을 고찰한 점이 큰 성과라 하겠다. 그가 설화·민간신앙과 무속 연구 외에 온돌이나 살림집과 같은 물질문화에 관심을 쏟은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온돌의 구조·기원·역사·전파경로 따위를 세밀하게 고찰하는 한편, 중국·만주의 그것과 비교, 검토했으며, 민가 연구에서도 움집의 발생과 분포, 유형에 따른 분포까지 언급하였다. 당시는 물론 그 후 상당 기간 동안 이 분야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지녔던 넓은 시야와 학문적 성과는 더욱 돋보인다. 조국 광복과 함께 그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은 되살아났다. 진단학회의 주요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일찍이 신민족 주의 사관에 입각한<NAME>족사 개론과 국사대요 를 저술하였다. 특히, 앞 책은 본격적인 개설서로서 그의 야심적 노작이었으나, 신라 말까지의 상권밖에 내지 못하였는데, 바쁜 생활과 건강 때문이었으리라.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손진태 (孫晋泰) ### 내용: 남창은 호이다.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현재 부산광역시) 남창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것이 1927년이다. 1932년 송석하·정인섭과 함께<NAME>속 학회를 조직하고 1933년 제2호(1934)와 제3호(1940)를 발간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 학회 지인<NAME>속을 창간하였다. 1930년<NAME>전문학교 강사, 1934년<NAME>전문학교 강사,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과 대학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적 생애는 민족 항쟁기에 민속학자로 활동한 시기와 광복 후 역사학자로 나뉜다. 원래 역사학 연구에 열중했던 그는 일제강점기에 자유로이 역사학을 연구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문헌에만 의존하는 한국사 연구에 대해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손진태 선생전 집 해제). 민속학에서 그의 주요 저작은 조선신가유편 (1930)·조선 민담집 (1930)·조선민족 설화의 연구(1947)·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이다. 민속학계에 남긴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민속학을 독자적인 과학으로 인식하고 이를 학문으로 정립시킨 점이다. 그 이전까지 최남선과 이능화는 민속학을 역사연구의 보조 수단으로 여겼고, 일제에 대항하는 조선 정신을 고양시키는 방편으로 삼았다. 따라서, 앞의 두 사람이 한국민속학의 텃밭을 일군 선구자라면 손진태는 그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매를 맺도록 힘쓴 중흥 자라 하겠다. 비록 3호로 종간되고 말았지만 그가 주도적으로 펴낸<NAME>속은 귀중한 결실이었다. 또한 그가 현지조사를 통해 자신의 학문을 쌓아간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앞사람들이 문헌에만 의존하였던 것에 반해 그는 현지에 나가 일차 자료들을 수집함으로써 민속학이 실증과학임을 인식시켰고 역사학뿐 아니라 인류학·고고학·사회학 등 인접 과학을 폭넓게 활용하여 민속학 연구 방법의 수준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중국·만주·시베리아 일대의 문화와 비교하여 그는 우리 민족문화의 본질을 캐는 데 새로운 방법을 썼다. 특히, 우리 설화의 특질과 발생 과정을 밝히고 우리 설화의 특질을 고찰한 점이 큰 성과라 하겠다. 그가 설화·민간신앙과 무속 연구 외에 온돌이나 살림집과 같은 물질문화에 관심을 쏟은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온돌의 구조·기원·역사·전파경로 따위를 세밀하게 고찰하는 한편, 중국·만주의 그것과 비교, 검토했으며, 민가 연구에서도 움집의 발생과 분포, 유형에 따른 분포까지 언급하였다. 당시는 물론 그 후 상당 기간 동안 이 분야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지녔던 넓은 시야와 학문적 성과는 더욱 돋보인다. 조국 광복과 함께 그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은 되살아났다. 진단학회의 주요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일찍이 신민족 주의 사관에 입각한<NAME>족사 개론과 국사대요 를 저술하였다. 특히, 앞 책은 본격적인 개설서로서 그의 야심적 노작이었으나, 신라 말까지의 상권밖에 내지 못하였는데, 바쁜 생활과 건강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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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05/encykorea/MED24076.txt
십전대보탕 (十全大補湯)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덕균"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4036
CC BY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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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복령·백출·인삼·숙지황·감초·황기·육계·당귀·천궁의 열 가지 약물을 같은 비율로 넣고 끓인 물에 복용하며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 과로, 오랜 투병생활, 우수사려 등으로 정신 기혈이 심하게 모손되었을 경우에 사용한다. 약의 성질이 따뜻하면서도 조 열하지 않아 부작용이 적기 때문에 장기 복용이 가능하고, 정기를 도우면서 병사를 구축하는 작용을 해서 기력이 증강되고 정신이 맑아지는 효능이 있다. 이 처방은 인삼·백출·복령·감초로 이루어진 사군자탕과 숙지황·당귀·천궁·백작약으로 이루어진 사물탕, 황기·육계로 구성되어 있다. 사군자탕은 보기의 대표적인 처방으로 얼굴이 붉어지고 수척해지며 식욕이 떨어지고 사지가 무력해지는 증상에 사용한다. 혈이 부족하여 발열·월경부조·복통이 있을 때 사물탕이 보혈·조경의 대표적인 처방으로 사용된다. 결국 이 두 가지 처방은 인체의 기혈을 보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서로 짝이 되며, 인체의 기혈이 모두 약해지면 기와 혈을 함께 보충해야 하므로 합하여 사용하게 되는데, 팔진탕이라고 한다. 십전대보탕은 여기에 피부를 주밀하게 하는 황기와 선천의 원양을 북돋아 한랭한 증상을 치료하는 육계를 더하면 보기와 조양의 기능이 크게 좋아진 처방이 된다. 십전대보탕의 구체적인 적응증은 과로, 오랜 병으로 인한 조열, 척추 부위의 급작스러운 통증, 몽정, 유정, 병후의 기력 감퇴, 우수사려로 인한 해소·천식, 손·발바닥의 번열감이다. 이런 증상은 무엇보다 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원인이며 평소 섭생을 소홀히 하여 점차적으로 인체의 기능이 저하되어 가는 때에 이 처방을 응용하면 좋다. 이 십전대보탕을 보약이라 하면 흔히 떠올리고 어느 환자든지 함부로 이 약을 남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황기나 인삼, 육계 등은 온열성이 강한 약물이긴 하나, 이 방제가 온화한 약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음허화왕한 사람에게 사용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즉 체질적으로 소음인이어야 십전대보탕을 쓸 수 있다. 소음인은 항상 비장의 양기가 부족하여 소화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고 심하면 신체가 한랭해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십전대보탕으로 비장의 양기를 북돋워 주고 손상된 혈을 보충해 줌으로써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음인과 상반되는 생리를 갖고 있는 소양인이나 기타에게는 절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기의 이제마(李濟馬)가 그의 저서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 중에서 이 처방에 대하여 몇 가지 수정을 가하였는데, 이것은 환자의 증상에 따라 처방을 수정, 가감하는 기존의 제방(製方) 정신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인체의 체질에 따라서 약물의 적용을 구분함으로써 십전대보탕 내의 몇 가지 약물을 변경한 것이다. 즉, 숙지황은 약의 성질이 중탁(重濁) 하고 체(滯) 하기 쉬우며, 복령은 소변을 삼설(渗泄) 시켜 양기의 증화(蒸化)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양인 약이므로 그 대신에 보기 시켜 주는 백하수오와 행기(行氣) 시켜 주는 진피를 사용하여 소음인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체질적인 결함을 보충해 주어야 더 높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약물의 성질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복잡한 약물의 운용을<NAME> 단순하게 만들어 주었다. 단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체질에 치우쳐 처방 변통을 거부하고 동의수세보원의 처방만을 고집하는 부류가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마의 주장은 실지에 그 효과가 입증되고 있으며, 다른 처방에 있어서도 매우 신빙성이 높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십전대보탕 (十全大補湯) ### 내용: 백복령·백출·인삼·숙지황·감초·황기·육계·당귀·천궁의 열 가지 약물을 같은 비율로 넣고 끓인 물에 복용하며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 과로, 오랜 투병생활, 우수사려 등으로 정신 기혈이 심하게 모손되었을 경우에 사용한다. 약의 성질이 따뜻하면서도 조 열하지 않아 부작용이 적기 때문에 장기 복용이 가능하고, 정기를 도우면서 병사를 구축하는 작용을 해서 기력이 증강되고 정신이 맑아지는 효능이 있다. 이 처방은 인삼·백출·복령·감초로 이루어진 사군자탕과 숙지황·당귀·천궁·백작약으로 이루어진 사물탕, 황기·육계로 구성되어 있다. 사군자탕은 보기의 대표적인 처방으로 얼굴이 붉어지고 수척해지며 식욕이 떨어지고 사지가 무력해지는 증상에 사용한다. 혈이 부족하여 발열·월경부조·복통이 있을 때 사물탕이 보혈·조경의 대표적인 처방으로 사용된다. 결국 이 두 가지 처방은 인체의 기혈을 보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서로 짝이 되며, 인체의 기혈이 모두 약해지면 기와 혈을 함께 보충해야 하므로 합하여 사용하게 되는데, 팔진탕이라고 한다. 십전대보탕은 여기에 피부를 주밀하게 하는 황기와 선천의 원양을 북돋아 한랭한 증상을 치료하는 육계를 더하면 보기와 조양의 기능이 크게 좋아진 처방이 된다. 십전대보탕의 구체적인 적응증은 과로, 오랜 병으로 인한 조열, 척추 부위의 급작스러운 통증, 몽정, 유정, 병후의 기력 감퇴, 우수사려로 인한 해소·천식, 손·발바닥의 번열감이다. 이런 증상은 무엇보다 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원인이며 평소 섭생을 소홀히 하여 점차적으로 인체의 기능이 저하되어 가는 때에 이 처방을 응용하면 좋다. 이 십전대보탕을 보약이라 하면 흔히 떠올리고 어느 환자든지 함부로 이 약을 남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황기나 인삼, 육계 등은 온열성이 강한 약물이긴 하나, 이 방제가 온화한 약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음허화왕한 사람에게 사용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즉 체질적으로 소음인이어야 십전대보탕을 쓸 수 있다. 소음인은 항상 비장의 양기가 부족하여 소화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고 심하면 신체가 한랭해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십전대보탕으로 비장의 양기를 북돋워 주고 손상된 혈을 보충해 줌으로써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음인과 상반되는 생리를 갖고 있는 소양인이나 기타에게는 절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기의 이제마(李濟馬)가 그의 저서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 중에서 이 처방에 대하여 몇 가지 수정을 가하였는데, 이것은 환자의 증상에 따라 처방을 수정, 가감하는 기존의 제방(製方) 정신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인체의 체질에 따라서 약물의 적용을 구분함으로써 십전대보탕 내의 몇 가지 약물을 변경한 것이다. 즉, 숙지황은 약의 성질이 중탁(重濁) 하고 체(滯) 하기 쉬우며, 복령은 소변을 삼설(渗泄) 시켜 양기의 증화(蒸化)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양인 약이므로 그 대신에 보기 시켜 주는 백하수오와 행기(行氣) 시켜 주는 진피를 사용하여 소음인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체질적인 결함을 보충해 주어야 더 높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약물의 성질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복잡한 약물의 운용을<NAME> 단순하게 만들어 주었다. 단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체질에 치우쳐 처방 변통을 거부하고 동의수세보원의 처방만을 고집하는 부류가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마의 주장은 실지에 그 효과가 입증되고 있으며, 다른 처방에 있어서도 매우 신빙성이 높다.
7fcb9302-f43a-4feb-86ca-58b8fa858371
source05/encykorea/LAW41783.txt
최저임금위원회 (最低賃金委員會)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익식"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23
CC BY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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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30일에 설립되었다. 위원회의 기능은 최저임금에 관한 심의 및 재심의, 최저임금 적용 사업의 종류별 구분에 관한 심의, 최저임금제도의 발전을 위한 연구 및 건의, 기타 최저임금에 관한 중요사항으로서 노동부 장관이 부의하는 사항의 심의 등이다. 위원회는 상기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 관계 노동자와 사용자 기타 관계인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다. 위원회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위원,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 공익위원 각 9인으로 구성되며, 상임위원은 공익위원이 되며, 상임위원은 공익위원이 된다. 심의위원회에는 공익위원 중에서 위원장을 뽑고 부위원장은 공익위원 중에서 뽑는다. 다만, 위원회의 회의에 출석할 수 있는 특별위원은 관계 행정기관의 공무원 중에서 3인 이내로 정해질 수 있다. 노동부 장관이 소집을 요구하는 경우,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이 소집을 요구하는 경우,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의장이 회의를 주재한다. 위원회는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사업의 종류별 또는 특정 사항별로 전문위원회를 둘 수 있는바, 전문위원회는 심의위원회의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심의위원회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며, 전문위원회의 구성은 노동자를 대표하는 위원,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 및 공익을 대표하는 위원 각 5인 이내로 한다. 또한 심의위원회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사무국을 두고 있다. 최저임금 심의위원회는 2000년 11월 24일 최저임금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위원회가 있는 곳은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 대로 422 정부세종청사 11동 고용노동부 4층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최저임금위원회 (最低賃金委員會) ### 내용: 1987년 7월 30일에 설립되었다. 위원회의 기능은 최저임금에 관한 심의 및 재심의, 최저임금 적용 사업의 종류별 구분에 관한 심의, 최저임금제도의 발전을 위한 연구 및 건의, 기타 최저임금에 관한 중요사항으로서 노동부 장관이 부의하는 사항의 심의 등이다. 위원회는 상기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 관계 노동자와 사용자 기타 관계인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다. 위원회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위원,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 공익위원 각 9인으로 구성되며, 상임위원은 공익위원이 되며, 상임위원은 공익위원이 된다. 심의위원회에는 공익위원 중에서 위원장을 뽑고 부위원장은 공익위원 중에서 뽑는다. 다만, 위원회의 회의에 출석할 수 있는 특별위원은 관계 행정기관의 공무원 중에서 3인 이내로 정해질 수 있다. 노동부 장관이 소집을 요구하는 경우,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이 소집을 요구하는 경우,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의장이 회의를 주재한다. 위원회는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사업의 종류별 또는 특정 사항별로 전문위원회를 둘 수 있는바, 전문위원회는 심의위원회의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심의위원회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며, 전문위원회의 구성은 노동자를 대표하는 위원,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 및 공익을 대표하는 위원 각 5인 이내로 한다. 또한 심의위원회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사무국을 두고 있다. 최저임금 심의위원회는 2000년 11월 24일 최저임금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위원회가 있는 곳은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 대로 422 정부세종청사 11동 고용노동부 4층이다.
6ad1ac8b-09e4-4ce4-a1bd-da5d398fa59f
source05/encykorea/LAW24015.txt
심양준호구 (沈洋准戶口)
텍스트
2023
230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저자 미상"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855
CC BY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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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NAME>고는 홍치 2년 경술로 발급 연대가 되어 있는데, 홍치 2년은 경술년이 아닌 기유년이고 홍치 3년은 경술년이므로 홍치 3년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이<NAME>고가 발급된 1490년은 경국대전이 반포된 지 5년 뒤이므로, 현존<NAME>고 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NAME>고의 기두를 보면 홍치2년경술7월일단천군준남면파독지리주호충실위선략장군충좌위전부부사맹심양년사십삼본청송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경국대전의 준 호구식에 대입하면 ......(고모년성적호구장내준남면파독지리주호충실위선략장군충좌위전부부사맹심양년사십삼본청송......)이 된다. 이<NAME>고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쓰던 준 호구식과는 다른 것으로 경국대전의 준 호구식과는 차이가 있다. 또, 경국대전에는 결사가 (준급자)으로 되어 있는데 이<NAME>구에는 군수·감고·창준의 수결이 있고, 발급에 관계된 군수·감고·창준이 있다. 조선 사료 집진에는 (주협개기자무측언무횡서경인)이라 한 규정을 그대로 따라 (주협개무)라 비껴쓰고[] 그 위에 관인을 찍고 있다. 조선 초기의 호적 제도 및<NAME> 구제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다.
문어체 텍스트 ### 제목: 심양준호구 (沈洋准戶口) ### 내용: 이<NAME>고는 홍치 2년 경술로 발급 연대가 되어 있는데, 홍치 2년은 경술년이 아닌 기유년이고 홍치 3년은 경술년이므로 홍치 3년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이<NAME>고가 발급된 1490년은 경국대전이 반포된 지 5년 뒤이므로, 현존<NAME>고 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NAME>고의 기두를 보면 홍치2년경술7월일단천군준남면파독지리주호충실위선략장군충좌위전부부사맹심양년사십삼본청송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경국대전의 준 호구식에 대입하면 ......(고모년성적호구장내준남면파독지리주호충실위선략장군충좌위전부부사맹심양년사십삼본청송......)이 된다. 이<NAME>고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쓰던 준 호구식과는 다른 것으로 경국대전의 준 호구식과는 차이가 있다. 또, 경국대전에는 결사가 (준급자)으로 되어 있는데 이<NAME>구에는 군수·감고·창준의 수결이 있고, 발급에 관계된 군수·감고·창준이 있다. 조선 사료 집진에는 (주협개기자무측언무횡서경인)이라 한 규정을 그대로 따라 (주협개무)라 비껴쓰고[] 그 위에 관인을 찍고 있다. 조선 초기의 호적 제도 및<NAME> 구제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다.